도 서 명 : 치우천왕기 4 지 은 이 : 이우혁 펴 낸 이 : 이정원 출 판 사 : 도서출판 들녘 출판년도 : 2003년 9월 30일 <지은이 소개/ 이우혁> 1965년 5월 18일 서울 출생. 상문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대학 때부터 아마추어 연극, 뮤지컬 등에 깊은 관심을 보여 13편 이상의 극에 연출. 출연하였으며, 하이텔 고전음악 동호회에서 한국 최초의 아마추어 오페라 ‘바스티앙과 마스티엔느‘를 각색, 연출하기도 했다. 1994년 <퇴마록>, 1998년 <왜란종결자> 등을 발표하여 수백만 독자들의 사랑 속에서 일약 대중 문학의 대표작가로 떠올랐다. 지금도 그는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좋은 작품을 발표하기 위해 작업실에서 작품구상에 몰두하고 있다. 이우혁 홈페이지 www. youk.co.kr <미디어서평> 한국 판타지 문학의 정점에 우뚝 선 작가 이우혁! 새로운 가능성, ‘영웅 판타지’의 세계가 열린다! 1994년 1월 ‘퇴마록’이 발간되었습니다. 1993년 PC 통신에서 회자되었던 그의 작품이 출간될 당시 그 작품이 그렇듯 오랜 생명력을 발휘하리라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숱한 화제와 800만부라는 어마어마한 판매기록을 세우고 근 8년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2003년 7월, 작가가 계속 관심을 가져왔던 ‘치우천왕기’가 출간되기에 이르렀습니다. 9년 동안의 자료 수집과 세 차례의 중국 방문으로 이 작품에 쏟은 작가의 열정은 정말 남다릅니다. 고작 2백 줄도 안 되는, 그것도 태반이 중복되는 자료 몇 줄을 가지고 한 사람의 일대기와 그 시대를 다시 구성한다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일이라고 작가는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 판타지의 기법으로도 어려운 일이었으며, 어쩌면 그 내용을 쓴다는 것 자체가 판타지라고 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사전에 나와 있는 치우에 대한 소개는 이렇습니다. 치우(蚩尤):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거인족의 우두머리. 염제(炎帝)의 후예이다. 전설에 의하면 81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동(銅)으로 된 머리와 철로 된 이마를 가지고 있었고, 머리 위에는 긴 뿔이 있었으며, 매우 모질고 사나웠다고 한다. 과(戈)?모(矛)?극(戟)?추모(酋矛:자루의 길이가 스무 자인 창)?이모(夷矛) 등의 병기를 만들었다. 황제(黃帝)와의 전쟁 중에 과부족인(?父族人)?풍백우사(風伯雨師)?이매망량(魅:도깨비)의 도움을 받았다. 치우는 연기를 빨아들이고 안개를 뿜으며, 공중을 날고 험한 곳을 뛰어넘을 수 있다. 후에 치우는 전쟁에서 패해 죽음을 당했으며, 그 피는 도리깨를 물들여 단풍나무 수풀을 이루었다. 고대 제(齊)나라에서는 8존천신(八尊天神)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치우는 그중 3번째로 모셔졌다. 진(秦)나라 말기에 유방(劉邦)이 기병할 때 패정(沛庭)에서 치우와 황제에게 제사를 지냈다. 후대에 와서 치우는 전쟁신으로 받들어졌다. 이 기록은 중국측에 나와 있는 자료를 근거로 한 설명입니다. 동으로 된 머리, 철로 된 이마, 다양한 병기를 사용하는 치우의 묘사를 보건대, 분명 그는 당시 철기문화를 선진적으로 수용했던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주신족의 신시(神市)는 단군조선 이전의 나라요, 1500년간이나 계속된 나라이며, 치우(蚩尤)는 그 14대 황제로 황하유역에서 일어나서 회대(淮垈, 중국 회수와 산동 사이의 땅)를 정복한 왕입니다. 그리고 공손헌원(황제)는 지나족(중국)을 통일한 왕입니다. 치우와 황제는 지금으로부터 4천7백여 년 전 중국 하북성 탁록(啄鹿)에서 10년 동안 70여 차례나 싸웠는데 이것이 고대 동북아시아 최대의 전쟁이라고 전해 내려오는 그 유명한 탁록전쟁입니다. 비록 탁록전쟁에서 공손헌원(황제)에게 패한 치우이지만 훗날 군신으로 받들어진 것만으로 보아도 그의 용맹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작품은 고대 역사의 진위성을 따지는 역사서가 아닌, 그야말로 90퍼센트가 작가의 상상력으로 탄생된 ‘영웅 판타지’입니다. 한국 판타지 제2부(제1부는 1998년에 발표한 ‘왜란종결자’)에 속하는 이 작품은 역사의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고대 역사로의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독서의 즐거움과 고대신화로의 충실한 안내자 역할을 하기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화합이냐, 지배냐? 역사의 운명을 건 영웅들의 대혈전! 8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이우혁의 힘이 되살아난다! ‘퇴마록’ 이후 9년을 고심한 끝에 펼쳐놓은 ‘치우천왕기’! 단군의 고조선 이전, 과연 우리 민족의 시원은 어디였을까? 작가는 채 200줄도 되지 않는 사료를 붙들고 9년의 세월을 고심했다. 단 한 줄의 자료라도 더 찾기 위해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고, 역사의 원형을 찾기 위해 방랑자처럼 중국 각지를 떠돌기도 했다. 이제 2003년 7월, 그는 뛰어난 역사적 상상력으로 5000년 동안이나 잊혀져 왔던 우리의 선조, 치우천왕을 부활시켰다! 역사의 운명을 건 대혈전의 시작과 끝은? B.C. 2716년부터 B.C. 2696년까지, 드넓은 중국 대륙이 바로 ‘치우천왕’기의 무대이다. 신석기 시대의 말기이며 또한 청동기 시대가 마악 시작된 바로 그 지점에서, 주신족의 치우천과 그의 쌍둥이 동생 치우비의 목숨을 건 모험과 사랑이 시작된다. 모든 부족은 제 색깔대로 공존해야 한다는 화합 사상을 가지고 있는 치우천! 힘으로 천하를 통일해 하나의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지나(중국)족의 대족장, 공손헌원! 최고의 전략가이며 전술가인 두 영웅의 운명적인 대결과 엎치락뒤치락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의 힘은 시공을 초월한 상상력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마법과 도술, 선인과 신수들이 등장하는 전설의 시대! ‘치우천왕기’에는 영웅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운명을 시험하는 선인들과 신수, 도깨비 등등 온갖 마법과 도술을 부리는 캐릭터가 쉴새없이 등장한다. 인간의 모습을 한 대선인 자부(紫負)와, 파괴와 무질서의 선인인 혼돈(混沌)이 공존하고, 언어의 시조(始祖)인 발귀리(發貴理)와 전설의 동물인 맥(貊), 곤륜산에 살았다는 대주술사 서왕모(西王母), ‘소녀경’의 주인공 소녀(素女) 등이 바로 그들이다. 마법과 도술을 쓰는 그들은 치우천왕과 공손헌원, 그 두 영웅 뒤에서 그들을 돕거나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거대하고 웅장한 영웅 판타지, ‘치우천왕기’! 이 소설은 역사에 근거하고 있지만 작가가 주창하는 한국 판타지이다.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으며, 그러한 요소 없이는 애당초 구성될 수도 없었다고 본다. 실제 역사에 남은 작은 편린으로 구성하느라 무리도 좀 따를 수 있으나 이 작품은 소설이며, 판타지인 이상 재미있고 흥미로운 구성이 단연 돋보인다. 차례 갈등 카린으로 가는 길 카린산에서 괴물사냥 천의 얼굴 쑤망마이 새 우주의 탄생 대추격전 처절한 싸움 감격의 만남 두 영웅의 대결(1) 당시 생활 및 시대적인 설정 주요 등장인물 갈등 “카린산?” 치우천의 말을 듣고 치우비가 외쳤다. 그러자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카린산으로 가야 한다. 전에 무라와 약속했던 것이 있어. 그것을 지켜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치우비도 지난번 치우천이 무라와 누루마이를 만나 그들을 도와 괴물을 물리치겠다고 한 약속이 떠올랐다. 그러자 공손발이 갑자기 획 돌아서더니 말도 없이 나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힐끗 본 치우천은 무심한 척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서 카린산까지는 두 달도 더 걸릴 것이니, 곧 출발해야 늦지 않는다. 안 그러면 무라가 곤란해진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헌원이 끼어들었다. “허, 그런 일이 있었던가? 그래도 오자마자 떠나야 한다니, 섭섭하군.” 치우천이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섭섭하기는 합니다. 되는 대로 빨리 오려고 했으나 준비할 것이 많아 이렇게 늦어 졌습니댜.” “무엇을 준비하기에 그랬는가?” “그 괴물을 상대할 방법을 찾느라 오래 걸렸습니다.” “허, 무슨 괴물인가?” “나중에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야기가 깁니다.” 그때 치우비는 형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물론 형이 무사히 온 것은 기쁜 일이지만 이렇게 갑자기 떠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퍽 무거웠다. 물론 발 때문이었다. 치우천이 치우비의 등을 툭 치며 물었다. “왜 그러니?” 치우비는 흠칫 정신을 차리며 이내 어색하게 억지웃음을 지었다. “아....... 아무것도....... ” 총명한 치우천은 치우비가 왜 그러는지 이미 눈치 챘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너는 또 그 사이에 벗들을 사귀었나 보구나. 그런데 저 멋진 아가씨들은?” 치우천이 형요 자매들에게 시선을 두자 형요 자매들은 고개 숙여 인사했고, 요요와 미요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희는 형요 자매라 합니다. 비의 형님이시죠?” 치우천이 미소를 띠며 고개를 숙여 답했다. “주신의 치우천이라 합니다.” 형요 자매들은 성격이 호방하고 거친 편이었는데 막상 치우천이 ‘멋진 아가씨들’이라 칭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굴이 은은하게 붉어졌다. 그중 미요의 얼굴이 가장 붉어졌고 요요는 치우천의 눈을 피해 살짝 ‘휴’ 하며 한숨을 쉬었다. 형요는 약간 안색만 붉혔을 뿐 별다른 내색은 보이지 않았다. 치우천은 울라트와 도깨비들과 다시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헌원의 부하들과도 돌아가며 인사를 나뒀다. 하지만 소녀는 내내 조용히 서있었을 뿐, 치우천에게 뭐라고 말을 걸지는 않았으나 소녀의 눈은 계속 치우천을 향하고 있었다. 치우천이 소녀에게로 몸을 돌렸다. “소녀님, 그동안......” 치우천이 소녀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 치베가 가까이 다가와 치우천의 어깨를 툭툭 쳤다. “천 안다! 돌아왔구나! 돌아왔어!” 치베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바람에 치우천은 소녀에게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헌원이 곧 손뼉을 쳐서 빈 술동이를 치우고 잔치를 준비하라 이르자 즉시 상이 차려지고 자리가 준비되었다. 소녀는 술도 못했고 이런 자리는 끼고 싶지 않았는지 조용히 나갔다. 헌원은 무척 격식을 따지는 성격인지라 상과 의자들을 사람 수대로 마련하여 모두들 앉게 했다. 주신이나 다른 부족은 그냥 바닥에 앉은 채 편한 대로 먹고 마시는 경우가 많았지만, 헌원이 이끄는 지나족은 그런 면에서도 퍽 격식을 차리는 편이었다. 그리고 십육기인들 중 치우천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도 거의 잔치에 참여했다. 상망, 비휴, 이주, 끽구, 신도, 울루 등이 참석했으며, 적송자, 지 등은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 음식이 분주하게 날라지는 동안, 헌원은 치우천에게 많은 것을 물었다. 카린산에 왜 가는지, 누구를 상대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치우천은 전에 태산 회의 때 무라와 누루마이와의 약속에 얽힌 이야기를 헌원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나 자신이 주술에 걸려 있다는 말은 하 지 않았다. 이번에는 치베가 도깨비 왕으로 화제를 돌리자, 헌원이나 다른 사람들도 그에 대해 묻고 왜 도깨비 왕을 따라갔는지 물었다. 치우천이 웃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도깨비 왕 비울걸은 대단한 사람이고 무서워 보이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퍽 쓸쓸한 것 같아 저는 그를 사귀어볼 생각에 따라가기로 한 것입니다.” 상망이 물었다. “왜 도깨비 왕이 사람이라고 생각했느냐?” 치우천은 웃으며 자신 있게 대꾸했다. “여러 가지를 보아 틀림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허나 도깨비 왕은 타타르족에게는 무서운 존재 아닌가? 많은 사람을 해쳤다던데?” 헌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치우천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도깨비를 만나서 죽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도깨비들이 해친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도깨비들을 만나면 무섭고 두려워서 아무 데로나 마구 도망치려 하는데, 그러면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어 죽게 되죠. 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미쳐버리는 사람도 있구요. 그러니 그 와중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없어진 동료들을 모두 도깨비들이 해쳤다고 말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그래서 도깨비들과 도깨비 왕을 무서운 존재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만나 보니 도깨비 왕 비울걸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아주 훌륭한 사람입니다.” “도깨비들을 몰고 다니는 게 좋은 일은 아니지 않는가?” 십육기인 중 신도와 울루가 인상을 찌푸리고 동시에 물었다. 두 사람은 형제도 아닌데 항상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말을 하여 마치 한 사람 같았다. “비울걸은 도깨비들이 사람을 해치거나 놀라게 하는 것을 막으려고 자기 몸을 던져 도깨비 왕이 된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신도 울루가 다시 물었다. “비울걸은 원래 주신 사람이었습니다. 주신의 풍백이신 비씨 집안 출신이죠. 그런데 나면서부터 생김이 괴이하여 사람들이 따돌렸다는군요.” 상망이 촐싹거리듯 나섰다. “정말 괴이하긴 하더구먼.” 치우천은 웃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비울걸이 지금 몇 살인지 짐작하시겠습니까?” 치베가 무심코 대꾸했다. “백 살은 되어 보인다.” 치베의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거렸으나 상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겉보기에는 백 살도 넘어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게 안 된 듯하더군. 그래도 한....... 여든 살은 넘었을 건데?” 그러나 신도 울루는 상망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겉늙어 보인다. 일흔 살 정도밖에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자 치우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겨우 마흔여섯 살이랍니다.” 그 말에 모두는 깜짝 놀랐다. 머리가 백발인데다가 얼굴이 주름살로 가득 찬 비울걸의 나이가 마흔여섯밖에 안 되었다는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상망이나 신도 울루는 각각 특이한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라 비울걸의 나이가 생각보다 젊을 것이라 꿰뚫어보았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젊을 줄은 몰랐던 터라 역시 놀랐다. 조용한 목소리로 치우천이 말을 이었다. “비울걸은 열 살이 되면서부터 이미 주름살이 생기기 시작했답니다. 병인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보기 흥해진 건 사실이죠. 그래서 사람들도 모두 놀리고 피했으며, 부모님도 속을 썩다가 일찍 돌아가셨죠. 그 다음부터는 모든 사람들이 비울걸을 따돌리며 놀리고 흉보았다고 합니다.” “그건 가엾은 일이군.” 헌원이 안되었다는 듯이 탄식하자 형요 자매도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깨비들 같은 용모라고 따돌림을 받았던 형요 자매인지라 그 기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비울걸은 희한한 재주를 타고나서, 도깨비들과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비울걸을 피하니 비울걸은 도깨비들과 놀기 시작했죠. 그러나 그렇게 되자 사람들은 비울걸을 더 두려워하고 싫어하게 되어, 마침내 비울걸은 고향에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신도 울루가 동시에 말했다 “사람은 귀신, 도깨비들과 어울려서는 안 된다. 비울걸이 가엾기는 하지만, 도깨비들과 어울린다면 사람들과 함께 살 수는 없다. 그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말이 치우천은 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신도 울루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어떻게 했어야 한단 겁니까?” 신도 울루가 즉시 대꾸했다. “도깨비들을 다스리고, 물리쳐야지 비울걸이 재주를 타고난 것은 하늘이 그런 일을 하라고 주신 것이다.” 신도 울루의 대꾸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아 치우천은 다시 물었다. “도깨비들을 왜 물리쳐야 합니까?” “도깨비는 사람과 달라. 도깨비와 사람이 같이 살 수는 없는 거야. 도깨비들은 사람들에게 장난을 치고 홀리는 것들이다. 사람이 살려면 그런 것들은 모두 물리쳐야 하는 거야.” 치우천은 뭔가 말하려다가 이윽고 생각을 바꾼 듯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치우천의 표정으로 볼 때 절대 신도 울루의 말에 동의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자 헌원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이 다음의 이야기를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치우천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도깨비들은 그때 비울걸과 아주 가까워졌고, 비울걸은 퍽 똑똑해서 도깨비들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도깨비들은 비울걸을 우두머리로 떠받들었죠. 그러나 사람들은 도깨비들을 무서워하여 쫓아내려고 애썼습니다. 그렇지만 도깨비들은 사람들보다 훨씬 전부터 살아온 자신들의 터전을 떠나지 않으려 했고, 사람들과 자주 부딪혔던 모양입니다. 그것을 본 비울걸은 결심을 했습니다. 비울걸은 사람들에게서 쫓겨났지만, 사람들을 미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도깨비들이 사람들을 위협하는 것도, 사람들이 도깨비를 무서워하는 것도 싫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비울걸은 도깨비들을 모두 몰고, 사람들이 없는 외진 곳으로 들어가 살기로 한 것입니다. 원래 도깨비들은 자기들끼리는 그렇게 많이 모여 다니지 않는데, 비울걸이 도깨비들을 잘 설득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떠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비울걸은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 깊숙한 곳에 도깨비들을 거느리고 혼자 살아가게 된 거죠.” 신도 울루는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나 도깨비들을 그렇게 모았다면, 왜 도깨비 왕 노릇을 하고 타타르 사람들에게 무서움을 주었단 말인가?” 치우천이 약간 화난 투로 대답했다. “비울걸은 사람들과 도깨비들, 둘 다를 위해 그런 것입니다.” “비울걸은 도깨비 편이지, 사람 편 같지는 않은데? 그게 아니면 사람을 왜 놀라게 만들고, 무서운 소문을 퍼뜨리느냔 말야.” 신도 울루가 집요하게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자 치우천은 더욱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도깨비들은 수도 없이 흩어져서 더 많은 부족의 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을 겁니다. 그리고 비울걸이 그 길을 지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았다면, 도리어 사람들이 더 많이 다쳤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외지고 깊숙한 곳이라고는 해도, 근처에 사는 부족 이나 장사하는 사람들은 사막을 자주 넘어 다닙니다. 차라리 도깨비왕의 땅이라고 해놓고 모든 도깨비를 그리로 가두어두면, 사람들이 알아서 피할 것이니 아무도 다치지 않을 것 아닙니까? 비울걸 자신도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도깨비들하고 사는 것이 즐거울 리만은 없었을 겁니다. 더구나 사람인 비울걸이 외진 사막 한가운데 산다는 것은 더 힘들었겠죠. 그러나 비울걸은 서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입니다.” “그러니 도깨비들을 다 없앴어야지! 도깨비를 다스리는 재주가 있으면 도깨비를 다 죽여 없앨 수도 있지 않겠나?” 아예 다그치듯 나서는 신도 울루의 말에 치우천은 마음 한켠에서 뭔가 울컥 치밀었지만 이내 숨을 길게 고르며 되받았다. “도깨비들은 사람도 아니고 사람처럼 생각할줄 모르니 짐승과 더 비슷합니다. 더구나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이상한 것들이죠. 그러나 도깨비들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해치거나 일부러 괴롭히는 일은 잘 하지 않으며, 도리어 사람들과 장난치듯 어울리고 싶어 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생김새가 이상하고 하는 짓이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이 먼저 무서워하고 피하는 것뿐입니다. 더구나 그것들도 살아 있는 것들인데 어찌 그리 함부로 죽인단 말입니까?” “하지만 도깨비에 놀라서 죽는 사람도 많다네!” “그렇게 말하면, 개를 화나게 하여 개에 물려 죽는 사람도 있고, 소를 놀라게 하여 소뿔에 받혀 죽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다면 개도 소도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다 죽여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까?” 치우천과 신도 울루의 언쟁이 아무래도 길어질 것 같자 헌원이 나서서 말렸다. “자자, 그 이야기는 그만 하기로 하세. 내가 보기에 비울걸은 대단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네.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그와 가까워지게 되었나?” 치우천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말했다. “저도 처음에는 비울걸을 보고 놀랐습니다만, 이야기를 좀 해보니 그가 우리를 해칠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해치려 했다면 그런 장난을 하지 않고 그냥 공격했겠죠. 아마도 우리를 겁주어 쫓아내려고 그런 장난을 한 것 같은데,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비울걸이 우리와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비울걸이 도깨비가 아니고 사람이라 생각하니, 그가 퍽 외로울 것 같다고 여겼죠. 비울걸은 주신 사람인데, 타타르족과 몽골족만 가끔 지나가는 사막에서 누구와 말이 통했겠습니까? 사람 사는 세상의 이야기가 많이 궁금했을 법도 한데,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알아들을 수도 없고 말할 상대도 없으니 몹시 답답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를 좀더 알고 싶어서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아주 많이 이는 사람인 척했고, 비울걸은 그 말을 듣고 저를 데려간 것입니다.” 치우천은 차분히 이야기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사실 그런 생각을 했더라도 위기를 모면하면 그만이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도깨비 왕에게 다가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만한 용기는 실로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치우비나 치베 등도 저절로 흥미가 일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동안의 일이 떠오르는지 치우천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처음 열흘 동안, 저는 계속 비울걸에게 온갖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비울걸도 좀 위세를 세우려고, 몸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많은 도깨비들 사이에 저를 던져두어 겁을 주고 그랬죠. 사실 좀 무섭기는 했습니다.” 모두가 그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누가 무섭지 않겠는가? 태연한 듯 이야기하지만 정말 담력이 대단하구나.’ 치우천은 자신이 생각해도 우스운지 피식피식 웃으면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러다 열흘이 지나고 나니....... 하하, 할 이야기가 다 떨어졌습니다. 이야기를 막 지어내려고 해도, 머리가 아프고 더 지어낼 이야기도 없었죠. 저는 솔직히 그 정도 이야기를 하면 비울걸이 지칠 줄 알았는데, 비울걸 그 사람은 열흘 동안 꼬박 이야기를 듣고서도 더! 더! 소리만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안 되겠다 싶어 배짱을 부렸습니다.” “어떻게?” 허리를 곧추세우며 치우비가 묻자 치우천이 웃었다. “‘나는 열흘 동안이나 이야기해서 너무 힘들고, 피곤해서 안 되겠소!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쉬지도 못하니 입이 돌아가겠소? 그냥 나를 죽이시구려. 그러면서 드러누웠단다.” “그랬더니?” 냉정한 이주도 얘기가 재미있는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랬더니 비울걸은 뭐라 다그치기도 하고, 욕도 하더군요. 그러나 결국에는 도깨비들을 시켜서 좋은 음식을 가져오게 하고, 술도 구해주고, 좌우간 극진히 대접하더군요. 도깨비들도 예쁜 여자와 잘생긴 사람으로 모습을 바꾸어 나를 주인처럼 떠받들더군요. 덕분에 아주 잘 쉬었습니다.” “그래서?”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비울걸은 다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습니다. 이제 저는 솔직히 이야기할 만한 것이 더는 없다고 말했죠. 그러자 비울걸은 마구 화를 내며 처음으로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며 말하더군요. ‘너는 거짓말쟁이냐? 네 아우에게 열두 해 동안이나 이야기를 해주었다지 않았느냐? 그 이야기는 왜 안 하느냐?’라고요.” 치우비가 껄껄 웃었다 “형은 그런 이야긴 해준 적이 없잖아. 그건 거짓말이지.” 그러나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그래서 나는 비울걸에게 말했지. ‘그것은 단지 열 두해짜리 이야기가 아니오. 내 평생 계속해야 되는 긴 이야기요.’ 비울걸이 물었지. ‘정말이냐?’ 나는 대답했지. ‘물론이오. 허나 그 이야기는 당신에게는 해줄 수 없소.’ 그러자 비울걸이 화를 내더군. ‘왜 안 되느냐?’ 나는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지. ‘그 이야기는 말로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아우에게 보여준 것이오. 아우와 내가 겪은 모든 일들, 내가 벌인 일, 내가 한 말, 모두가 내 이야기가 되는 것이오. 그 때문에 그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내가 평생 살 동안 계속 해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오.’ 처음에 비울걸은 이러더군. ‘그게 무슨 이야기냐? 그냥 네가 살아가는 동안의 일들 아니냐?’ 그래 나는 말했지. ‘내가 사는 것이 나에게는 다만 살아가는 것뿐이지만, 당신에게는 무엇인가 당신이나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도 그냥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 않겠소? 내가 해준 옛날의 훌륭한 사람들과 선인들의 이야기도 역시 그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일생일 뿐이었지만, 당신에게는 아주 재미있는 하나의 이야기가 되지 않았소?’ 그러자 비울걸은 주춤하며 뭔가 생각하더군. 그래서 내가 말했지. ‘당신도 이야기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소 당신 자신이 이야기를 만들면 되는 것이오. 그게 아니라 내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당신도 나와 같이 다니면서 나를 보면 됩니다. 그러면 내가 살아가는 모든 일들이 당신에게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오.’라고.” 사람들은 저마다 놀라기도 하고 수군대기도 했는데 헌원만은 깊이 생각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치우천은 사람들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그러자 비울걸이 말했습니다. ‘네 이야기가 재미있겠느냐? 재미없고 지루한 이야기는 싫다. 매일매일 똑같은 것은 이제 신물이 난다. 네가 살아가는 것이 그만큼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겠느냐?’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꾸했지요. ‘재미있을 것입니다.’ 못 믿겠다는 듯 비울걸이 으름장을 놓더군요. ‘만약 이야기가 재미없다면 도깨비들을 시켜 당장 너를 죽이겠다.’ 그래서 나는 자신있게 말했어요. ‘내기를 해도 좋소. 당신이 항상 놀랍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아내게 해주겠소. 당신이 일부러 이야기를 끊지만 않는다면 말이요.’ 뭐, 그렇게 해서 그와 좀 가까워진 것이죠.” “대단하군. 치우천! 그래서 자네는 도깨비 왕마저 거느리게 된 것이군!” 헌원이 감탄하며 말하자 치우천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저는 그를 거느린 것이 아닙니다. 다만 벗이 된 것이죠 비울걸이 제가 재미없다 여기면 언제든 저는 죽게 되는 것이니, 뭐 그리 좋아할 것도 없습니다. 저와 같이 길을 가는 중간에도 비울걸은 조금만 지루해지면 ‘재미없어지려고 한다, 재미없어지려고 해, 너 죽고 싶으냐?’ 라면서 저를 겁주었답니다. 하하.” 헌원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울걸도 정말 보통 사람은 아니군.”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그때 형요가 한마디 끼웠다. “그런데 비울걸 그 사람은 어디로 간 거지요?” 치우천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도 모르지요 언제나 제멋대로니까. 하지만 멀리 가진 않았을 겁니다. 항상 나를 바라본다고 했으니 금방 또 불쑥 나타나겠지요. 항상 그래 왔거든요.” “마음대로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그러나요?” “달리 도깨비 왕이겠어요?”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도 비울걸의 하는 짓은 기괴하기 짝이 없으니 그렇게 행동하는 게 오히려 당연한 것 같았다. 헌원은 빛나는 눈동자로 치우천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비울걸에게 열흘 동안 해준 이야기는 자네 이야기였겠지?” 치우천은 헌원의 은근한 눈빛과 물음을 그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생각나는 대로 아무 이야기나 막 했습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치우천은 속이 뜨끔했다. 아직 헌원을 제외하고는 치우천과 비울걸이 나눈 이야기의 필은 뜻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헌원의 지적대로 비울걸과 열흘 동안 나눈 이야기는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옛날이야기로 시작했으나, 마지막 열흘째 되던 날 치우천은 자신의 포부와 꿈과 야망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이야깃거리가 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고, 비울걸의 고독과 슬픔을 느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자 비울걸은 며칠 동안 생각하다가 치우천에게 자신의 실제 모습을 드러내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치우천은 비울걸에게 자신을 따라 같이 나가자는 뜻을 간접적으로 돌려 이야기했고, 비울걸이 마침내 그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비울걸은 총명하고 속마음이 착한 사람이었으나, 오랜 세월 도깨비들만 벗삼아 지내다 보니 겉으로는 퍽 괴팍한 행동만 일삼았다. 그래서 비울걸은 치우천을 따르겠다고 곧바로 말하지 않고 계속 두고 보겠다느니, 재미없어지면 죽인다느니 했지만 그것은 그냥 장난삼아 해보는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비울걸은 괴팍한 사람이라 치우천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정말 가만두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치우천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비울걸을 끌어들인 셈이다. 치우천은 지나족들 앞에서 자신의 포부를 이야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저 우스개처럼 돌려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헌원은 그 말속에서 치우천의 뜻을 읽어낸 듯했다. 치우비는 아직 그런 것까지는 눈치 채지 못한 터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비울걸이....... 도깨비들은 어쩌고?” 치우천은 치우비의 말을 핑계 삼아 헌원의 날카로운 눈을 피하려고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 사막은 어차피 도깨비 왕이 있다는 소문이 떠돌기 때문에, 좀 내버려둬도 별일 없을 거라고 했지.” “그 다음엔 뭘 했지?” “비울걸과 나는 길을 떠나 여행을 하며 더 친해졌지. 사막을 나서서 돌아보니 타타르족들이 살더군. 그래서 나는 일단 앗수라트 부족을 찾아갔고, 네가 화산에 잘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런데 문득 무라와 한 약속이 생각나더군. 하지만 네가 무라와 혼인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뭐, 지금이라도 무라와 혼인한다면 귀찮지 않아 좋은데......” 치우천이 웃으며 슬쩍 한마디 떠보자 치우비는 얼굴을 붉히며 말꼬리를 흐렸다. “놀리지 마. 내가 어떻게 그래......” 치우천은 짐짓 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좌우간 그래서 나는 비울걸을 데리고 무라를 구할 방법을 찾아서 좀 돌아다녔다. 그 괴물을 상대할 방법을 찾아서 말야.” “비울걸하고 둘만?” “그래 .” “그래서 찾았어?” “음....... 뭐, 특별히 찾은 것은 없어 다만 전에 누루마이가 달의 정기가 아니면 그 괴물을 물리칠 수 없다고 하잖았니?” “그랬지.” “그러면서 누루마이는 달의 정기를 받은 보석 이야기를 했었잖아. 그런데 돌아다니다 보니 그런 보석 이야기가 들리더군. 그건 먼 바닷가에 가야 구할 수 있는 거라고 해서 멀리 바닷가까지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지.” “어떤 보석?” “조개가 만드는 보석이야.” “조개가 보석을 만든다구? 그거 원......” 치우비가 믿어지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짓자 치우천이 웃었다. “보여주랴?” 치우천은 품에서 작은 가죽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풀자, 그 안에는 정말 달빛처럼 온화한 광채를 발하는 둥근 구슬들이 들어있었다. 바로 진주였다. 모든 사람들은 놀라운 눈으로 진주를 들여다보았다. 깎은 것 같지도 않은데 둥글둥글한 것도 희한했지만, 특히 진주의 광채는 다른 옥이나 금, 보석과는 달라 몹시 은은하고 아롱거리는 것이 정말 달빛을 닮아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내륙 깊숙한 곳에 살고 있었고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었던지라 진주를 처음 보는 사람이 많았다. 뜻밖에도 헌원이 약간 회의적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흠, 귀한 것이군. 그러나 이것은 먼 바다에서 얻는 것인데, 비록 색깔은 비슷하나 물속에서 나는 것이니 달의 정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는지 .......” 헌원은 견문이 넓어 진주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치우천이 얼버무리듯 말했다. “하지만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는 써봐야 아는 것이지요. 저는 통할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미룰 수도 없구요.” 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치우천에게 말했다. “자네는 먼 바닷가까지 가서 그것을 구해오느라 몇 달이나 걸린 게로군.” “그렇습니다. 이것을 구하느라 아주 힘들었지요.” “어느 쪽으로 갔었던가?” “태산 동쪽으로 갔었습니다. 저는 아직 주신 사람들을 피해야 하므로 북으로는 갈 수 없었죠.” “그럼 전쟁이 벌어지는 곳을 지나갔겠군. 유망님은 자네를 좋지 않게 보고 계시니 위험했을 텐데.” “두 사람뿐이라 얼마든지 숨어 다닐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유망님은 전쟁에 여념이 없는데 어찌 저 같은 것을 찾겠습니까? 오히려 주신은 평온하지만 저를 찾는 사람이 많으니 그쪽이 더 위험했을 겁니다. 저는 미아우족의 바닷가 마을에서 이 보석을 얻었고, 그 다음에 바로 이리로 달려온 것입니다.” 헌원은 다시 눈을 빛내며 뭔가를 물어보려는 순간, 치우비가 무심코 말을 꺼내 헌원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럼 형님은 바다를 보았겠네. 어때?” 치우천은 헌원이 뭔가 자꾸 캐물으려 해서 몹시 부담스러웠는데, 때마침 치우비가 말을건네 헌원의 말문을 막자내심 기뻐하며 곧바로 대답했다. “보았다. 바다에 정말.......그렇게 넓고 많은 물이 있을 줄은 몰랐어. 저 멀리 끝없이 물만 가득 차 있고, 물은 흐르지는 않았지만 넘실거리며 큰 파도가 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광경이더구나. 주신 부근에도 하늘과 땅이 닿은 큰 벌판이 있지만, 하늘과 물이 맞닿은 바다는 그 벌판들보다 훨씬 넓은 것 같았어. 정말 가슴이 탁 트이더군. 더구나 그 많은 물이 전부 짜기가 이를 데 없었어. 그리고 그 짠물에서도고기가 살지 않겠어? 그렇게 많은 소금이 어디서 나왔는지 정말 신기하더군.” 그러자 치베나 형요, 다른 십육기인들도 치우천이 본 바다에 대해 흥미를 보이며 이것저것을 물어보아 헌원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헌원은 점잖은 성격이라 굳이 남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자기의 질문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치우천은 헌원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듯 그들의 질문에 소상하게 대답해주면서 계속 웃고 떠들며 술을 왜 많이 마셨다. 마침내 치우천이 취한 목소리로 헌원에게 말을 건넸다. “아....... 이거, 제가 좀 취한 것 같습니다. 이만 가서 쉬었으면 합니다만......” 그러자 헌원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치우천이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헌원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내, 한 가지 의논할 것이 남아 있다네. 의논은 나중에 해도 되겠지만, 일단 말은 해두어야 할 것 같네.” “무슨 일입니까?” 치우천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고 헌원은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치우비를 향해 힘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내 딸을 어찌 생각하는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치우비는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툭 떨어뜨렸다. 치우비의 얼굴은 붉어졌지만, 눈에는 기쁨의 빛이 가득했다. 치우비는 급히 형을 돌아보았으나, 치우천은 그저 담담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비록 형이 공손발을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치우비의 처지에서 본다면 헌원의 이야기 자체는 정말 기쁘기 한량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칫 경솔하거나 실수라도 하는 게 아닐까 싶어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아....... 물론 발은....... 아니, 발님은 정말....... 제가 뭐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착하고 마음씨 고운.......” 그 말에 헌원이 껄껄 웃었다. “그 아이 얼굴은 괜찮지만 착하고 마음씨 곱다는 말은 아무리 아비인 내 앞이라도 좀 지나친 것 아닌가?” “아닙니다! 사실 좀 장난이 심하지만 발......., 아니 발님의 마음씨는 정말 착하고 곱죠.” 치우비가 얼굴을 붉히며 말하자 모든 사람들이 껄껄 웃었다. “내 딸아이를 그렇게 봐주는 사람은 세상에서 자네 하나뿐일세. 더구나 요즘은 그 녀석 버릇이 많이 좋아졌지. 그 말썽꾸러기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자네밖에 더 있겠는가? 그래서 나도 마음을 굳혔다네. 물론 자네 아버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겠으나 그럴 형편은 못되니, 여기 자네 형님이 있는 앞에서 내 그 이야기를 하고 싶네만.......” 그것은 분명 발을 자신에게 시집보내겠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치우비는 너무도 기뻐서 단박에 웃는 얼굴이 되었다. 그때 치우천이 딱 자르듯 말했다. “제가비록 이 녀석 형이기는 합니다만, 이 일은 아버님께 먼저 아뢰어야 합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치우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치우비도 간청하는 듯한 눈빛으로 치우천을 바라보았으나 치우천은 치우비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약간 눈을 돌린 채 말을 이었다. “저희 아버님은 몹시도 엄하신 분입니다. 한웅님이 성인식을 면하게 해주셨는데도 고집을 부리셔서 카린산까지 갔다 오라고 명하신 분입니다. 저도 물론 기쁩니다. 헌원님의 따님을 제 아우에게 주신다는 것은 정말 뭐라 말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신에서의 혼인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라.......” 물론 옳은 말이었지만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치우 형제는 지금 주신에서 죄를 받아 추방되어 주신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에 어떻게 아버지의 허락을 받을 수 있겠는가? 헌원이 차분한 목소리로 되받았다. “잘 생각해보게. 아버님도 자네 형제가 주신에서 밀려난 것을 탐탁해하시지는 않을 걸세. 그러나 비가 내 사위가 된다면, 나는 당당히 주신에 자네들이 죄가 없음을 밝히고 허물을 풀어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네. 물론 자네들은 하늘의 시험에서 벗어나 그 험한 사막에서 살아난 사람들이지만, 주신에는 자네들의 적이 너무도 많으니 아직도 자네들은 몹시 위험하네.” 치우비나 치베, 형요마저도 헌원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사막에서 빠져나온 지금, 하늘의 심판은 분명 치우 형제가 옳다고 한 셈이니, 그들은 치우가람의 함정만 피하면 주신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돌아간다 해도 치우가람이나 부루버들, 고시울률 등은 호시탐탐 치우 형제를 해코지하려 할 것이며, 사와라 한웅도 내심 그들을 탐탁하지 않게 여기고 있는 판이니 든든한 뒤가 없는 치우 형제는 언제 또 위험에 빠질지도 몰랐다. 헌원이 계속 말했다. “비록 주신의 위세가 크지만 나 헌원도 지나족의 대족장이며, 정말 죄를 지은 사람을 사위 삼지는 않는다는 걸 모두가 알 걸세. 그리고 어느 정도는 내 체면도 세워주어야 할 테니, 비가 내 사위가 되면 자네들은 분명 주신에서 당당하게 처신할 수 있을 걸세.” 사람들은 그 말에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주신과 유망은 태산 회의 이래로 물과 불처럼 갈라진 상태였다. 그러나 주신과 유망 사이에는 헌원이 있으며, 헌원의 행동에 따라 양측의 입장은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지나족의 절반을 차지한 헌원이 어느 편을 드느냐에 따라 세상의 앞날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헌원이 주신 사람인 치우비를 사위로 맞는다는 것은 헌원이 주신 편을 든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신 측에서도 헌원의 큰 힘을 알고 있으니 헌원의 비위를 건드릴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치우 형제가 이전에 주신에서 더 엄청난 죄를 지었어도 헌원의 얼굴을 보아 따지거나 배척하지 못할 것이며 앞으로도 함부로 건드릴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치베나 형요마저도 은근히 치우천에게 빨리 말을 바꾸라는 눈짓을 했다. 허나 치우천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 술이 너무 과했나 봅니다.” 치우천이 딴전을 피우자 치우비는 갑자기 형이 원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치우비와 발이 서로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치베마저 ‘천 안다는 비 안다와 발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헌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치우비를 보며 말했다. “취했다니 가서 쉬어야겠군. 치우비, 자네에게는 미안하네. 자네를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했으니 자네가 부끄럽겠군. 자네는 나가 있어도 좋네.” 치우비는 그렇지 않아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던 차에 그런 말이 나오자 인사를 올리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치우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헌원이 치우천에게 눈길을 돌렸다. “내 하나만 더 말함세. 만약 자네 아우가 내 사위가 된다면, 나는 유망님과의 관계를 영영 끊어버릴 수도 있네. 지금 나는 유망님께 전사들을 보내지는 않지만 먹을 것과 물건들은 아주 많이 보내고 있네. 그것도 끊어버릴 수 있네.” 그 말은 실로 파격적인 것이라 십육기인들마저도 웅성거리며 당황해했다. 치우천도 크게 놀란 빛을 띠었다. 사실 아직 헌원이 드러내놓고 유망의 편을 들고 있지는 않지만, 같은 지나족인 유망과 갈라선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관계를 단절한다면, 유망의 세력은 크게 약해질 것이며 감히 주신과는 대적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치우천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도리어 헌원의 측근인 이주가 입을 열었다 “헌원님,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헌원은 딱 잘라 말했다. “내가 주신 사람 사위를 보면, 결국 나보다도 유망님이 먼저 나를 내치실 것일세.” 그때였다. 언제나 말이 없던 비휴가 냉랭한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그래서 유망님이 우리를 치면?” 짧은 말이었으나 의미심장했다. 더구나 거의 말이 없는 비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더욱 사람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를 이어 상망이 외쳤다. “그렇습니다! 유망님과 관계를 끊는다면 유망님은 당장 우리를 의심하고 쳐들어올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유망님의 군대를 당할 힘이 없습니다!” 상망은 겁이 나 온몸이 떨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최악의 상황이다. 이주도 급히 한마디 끼웠다. “헌원님, 그것만은 지나친 일입니다. 유망님의 심사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정말 유망님과의 관계를 끊는다면, 유망님은 정말 우리부터 쳐서 다시 지나족의 힘을 모으려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헌윈은 오히려 담담히 말했다. “나는 유망님을 오랫동안 모셨네. 허나 유망님은 요 몇 년 사이 너무도 많은 일을 저지르셨네. 자네들도 모두 듣고 보았을 것이네. 그분은 소녀님에게 독을 먹여 협박하는 방법으로 주신 한웅님의 비밀을 캐내려 했고, 신수까지 끌어들여 한웅님을 죽이려고 했네. 더구나 주신과 전쟁이 벌어지기도 전에 말일세. 그것은 실로 아무리 적일지라도 해서는 안 될 짓이며, 용사답지 못한 일일세. 허나....... 허나 나는 그분의 아랫사람이며, 같은 지나족 동포일세. 사실 나로서도 결단을 내릴 수가 없는 일이야.” 실로 그것은 유망으로서는 지탄을 받아도 할말이 없는 짓이었다. 당시는 아직 모략과 술수가 판치는 험악한 세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명분과 떳떳함을 더 중요시했다. 전쟁을 하거나 결투를 한다 해도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윤리관이 있었고, 전쟁의 승패도 중요하지만 명예가 더 중요했다. 아직 법이 없던 시대였지만 사람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그러한 기본적인 윤리관은 오히려 후대보다 더 강했다고 볼 수 있다. 가령 손님을 해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그러한 예인데, 그런 보장이 없으면 누구도 부족 간에 물건을 바꾸거나 혼인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손님으로 온 사람은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해치거나 다투지 않는다는 법칙은 더욱 잘 지켜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바로 생존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윤리 또는 관습으로 굳어져서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것은 실로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의 수치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물며 유망은 대부족장이라는 명예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힘없는 여자에게 독까지 써가면서 한웅 옆에 사람을 심으려 한 것이나, 모든 사람이라면 다 꺼려하는 신수의 힘까지 빌려서 귀빈인 한웅을 죽이려 한 일 등은 실로 대부족장답지 않은 치졸한 짓이었다. 전쟁을 하다가 정말 다른 방법이 없어서 발악적으로 한 일이라 해도 부끄러운 일인데, 하물며 서로 적대국도 아닌 상황에서 그런 짓을 했으니 말이다. 헌원이 차분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나도 충분히 생각하고 하는 일일세. 내 모두 솔직히 말하겠네. 사실 내 딸이 자네 아우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나도 안다네. 내 딸자식을 자네 아우가 거두지 않으면 누가 거두겠는가? 자네 아우가 아니면 억지로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도 내 딸은 아마도 병이 날 것일세. 부모로서 어찌 그런 꼴을 보겠는가 말일세.......” 치우천은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그 말에는 약간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했다. 그러자 헌원은 안쓰러운 듯 한숨을 한 번 쉬고 다시 말했다. “그러나 나는 많은 부족을 책임진 사람이니, 내 딸의 일만 가지고 부족의 앞날을 마음대로 하는 짓 또한 할 수가 없다네. 그러나 내 딸을 자네 아우에게 준다는 것은....... 아무리 상관없는 일이라 말해도 사람들이, 특히 유망님이 믿어줄 리가 없어. 사실 나와 유망님 사이에는 이미 골이 깊어지고 있네. 이대로는 정말 좋지 않아. 그러니 나는.......나는 정말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네. 유망님의 편에 서든, 주신의 편에 서든 말일세. 이해하겠는가?”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이해합니다.” 헌원이 다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유망님을 따르려야 따를 수가 없네. 유망님의 행동은 내 생각과 너무도 다르고, 여러 가지 일들이 계속 유망님과 나를 멀어지게 만들고 있네. 태산 회의 때도 그러했고, 이후에 벌어진 일들도....... 아마 유망님은 이제 나를 예전만큼 믿고 있진 않을 것일세. 지금 비휴, 이주의 말대로 내가자네 아우를 사위로 둔다면 아마 제일 먼저 나를 칠지도 모르겠네. 허나 나는 싸움을 잘 모르네. 내가 지나족의 반을 차지하고 있지만, 유망님이 길러낸 전사들이 일곱이라면 내가 데리고 있는 전사는 셋밖에 안 되네. 나는 전사들을 기르는 데 힘을 쏟지 않았기 때문이지.......” 이주가 다시 간곡하게 말했다. “헌원님, 그렇기에 유망님을 너무 거슬러서는 안 됩니다.” 헌원이 고개를 저으며 되받았다. “나도 생각이 있네. 솔직히 나에게는 끽구가 있고, 금천이 있지만 형천이나 축융의 적수가 되기 힘드네. 십육기인이 있지만 방금 말했듯이 나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전쟁을 하는 재주는 그리 뛰어나지 않아. 더구나 형천의 대인족 전사들을 감당할 전사들이 나에게는 없으며, 축융의 술수를 감당할 힘도 없다네. 그러나 자네 아우 같은 사위를 둔다면, 그리고 자네의 그 꾀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 게다가 자네를 따르고 사귄 많은 용감한 벗들과 부족들을 한편에 둘 수 있다면, 나는 감히 한 번 해볼 생각일세.” 헌원의 말에 모든 사람들은 놀라고 감탄했다. 그러나 이주는 치우천을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 “치우천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너무 고깝게 듣진 말게. 헌원님께 아립니다. 치우 형제가 비록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인들이며, 많은 용사들과 사귀기는 했으나, 아직 너무 젊고, 한 부족의 힘을 전부 지닌 부족장들도 아닙니다. 그건 좀 위험합니다.” 치우천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거들었다. “헌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 높이 보시는 것 같습니다. 제 벗이 몇 사람 있지만, 다 한 사람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앗수라트, 앙가마이 부족이나 억지로 권하면 몽골의 보돈차르족을 끌어들일 수 있겠지만, 셋 다 대부족도 못 되는 작은 부족들일 뿐입니다. 치베, 야율쿠리, 초 초룬 등은 모두 용사들이며 약간의 재주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일에 부족 전체를 끌어들일 수 있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개 한사람일 뿐입니다 더구나 지금의 저로선 주신에 갈 수도 없으니 주신 사울아비 벗들은 한 명도 끌어올 수 없습니다.” 그 말에 헌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네. 그들 부족은 모두 지나족을 싫어하고 피하는 부족들일세. 물론 그들이 각각 한 사람일 뿐이라고 해도, 그들이 시작이 되는 것일세. 치우천, 나는 꿈이 있네. 지나족은 다른 부족들과 힘을 합해야 하네. 그리고 다른 부족 사람들을 받아들여서 더더욱 크고 강한 지나족의 나라를 세워야 하네. 하지만 많은 다른 부족들은 지나족을 미워하고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하네. 아니, 우리와 같이 무엇인가를 해볼 생각조차 없다네. 그러나 나는 처음이 어려울 뿐이라 생각하네. 다른 부족들이 지나족을 믿게 되고, 지나족과 같이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네. 그러면 점차 다른 부족들도 지나족을 따를 것이며, 모두 싸우지 않고 같이 살게 될 것일세. 모든 부족이 싸우지 않고 하나가되어 같이 사는 것일세. 어떤가?” 문득 치베가 멍하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모든 부족이 싸우지 않고 같이 산다.......” 무척 심각한 표정으로 치우천이 입을 열었다. “헌원님의 뜻은 한없이 크십니다. 저로서는 감히 짐작좌 할 수 없군요.” 그러자 헌원이 날카롭게 되받았다. “자네는 다 알고 있을 걸세.”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저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군요. 좀더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너무나....... 너무나 큰일이라 저로서는 감히....... 제 아우 한 사람의 일이 그렇게 큰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힘들.......” 치우천이 말꼬리를 흐리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 했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자네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네.내 이제껏 많은 사람들을 보았네만 자네 형제들만큼 대단한 사람들은 보지 못했네. 자네들은 세상 전부를 흔들 수 있는 사람들란 말일세.” 헌윈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마치 빛을 내쏘는 듯한 형형한 눈빛으로 치우천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비울걸에게, 자네의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했네. 자네는 내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가?” 치우천은 흥분하여 안색이 붉게 변했으나 이내 안정을 되찾고는 말했다. “저는 지금 술이 좀 지나쳤고, 저로서는 너무도 큰 이야기여서 감히 답할 수가 없습니다. 좀더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소서. 단순히 제 아우의 혼사문제라 여겼는데 세상을 아우르는 너무나 큰일이라 오히려 당황스럽습니다. 수많은 부족들의 생사가 걸려 있을지도 모를 일에 제가 어찌 쉽게 답할 수 있겠습니까?” 헌원은 치우천이 간절하게 말하자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치우천은 마무리를 지으려는 듯이 또박또박 말했다. “일단 카린으로 향해야 하니, 카린에 다녀온 다음에 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는 마음을 정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동안 잘 생각해보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치우천은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몹시 흥분한 듯, 술잔을 뒤엎고 몸을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술에 취한 것만이 아니라 몸이 떨리는 것을 보아 극도로 흥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헌원이 물었다. “카린산의 괴물은 대단한 자 같은데, 상대할 자신이 있는가? 그 보석으로 정말 괴물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 “글쎄요.......” 치우천이 말꼬리를 흐리자 헌원이 부하들을 둘러보며 말을 건넸다. “신도, 울루, 상망, 비휴, 끽구! 자네들 다섯은 모두 내일 천과 비가 떠날 때 따라가서 그들을 돕게. 전사, 말, 물건들도 모두 필요한 만큼 데려가게.” 전혀 예기치 않은 헌원의 말에 치우천은 다급히 말했다. “그렇게까지 해주실 것은.......” 그러나 헌원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내 집안사람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험한 곳에 보내는데, 내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는가?” 헌원의 명령은 십육기인으로서도 조금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껏 십육기인 중의 다섯 명이 한꺼번에 파견된 일은 드물었던 것이다. 이주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거렸다. “다섯....... 모두 보내시면 이곳의 일은......” 그러자 헌원이 딱 잘라 말했다. “적송자 스승이 계시고, 자네도 있지 않나! 다섯 모두, 치우 형제를 무사히 모시지 못하면 목을 떼놓을 생각하게.” 헌원은 항상 조용하고 온화했는데, 이 마지막 말만은 엄하고 날카롭기 이를 데 없어서 다섯 사람의 기인은 모두 자신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한번 말이 떨어지자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을 정도의 위엄이었다. 치우천도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나가다가 갑자기 껄껄 웃더니 문가에 웩하고 마신 술을 토했다. 치베와 형요 자매가 당황해하며 달려가서 등을 두들겨주고 부축해 사라지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리를 떴다. 헌원 혼자 일어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 항상 침착하고 온화했던 얼굴에 고민하는 표정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그때 갑자기 등 뒤의 장막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 자리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던 적송자였다. 헌원은 적송자에게 눈을 돌리지 않았으나 적송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을 건넸다. “스승님, 정말 모르겠군요.” 그러자 적송자도 말했다. “나도 모르겠네.” 헌원은 놀랍게도 약간 손을 떨며 스스로 술 한 잔을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고 나서 다시 눈을 감고 뭔가 생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그 녀석은 다 알고 있는 것일까요?” “나도 모르겠네. 내 생각에는 아닌 것 같네.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러나 저는....... 저는 두렵습니다. 정말 두려워요 저는 몇십 년 동안 이 길을 걸었고,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치우천 그 녀석은 내 생각보다도 뛰어난 것 같습니다. 나에게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헌원이 말끝을 흐리자 적송자는 눈을 감고 말했다. “그 형제는 별의 기운을 타고난 아이들이야. 선인의 깨우침이 하늘을 뚫는다 해도, 하늘이 스스로 내려 보낸 사람보다는 못하네. 대선인 일지라도 그들을 거스르기는 쉽지 않다네. 그들이 스스로 그런 길을 택한다면 나도 더는 방법이 없다네.” 헌원은 괴로운 듯 다시 술을 한 잔 따라서 급히 들이켰다. “저 두 사람이 애당초 없었으면 차라리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적송자는 너무도 뜻밖의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네. 하늘의 뜻에 맡겨야 하는 것일세.” 헌원은 대답하지 않고 괴로운 듯 계속 술만 마셨다 적송자는 그런 헌원을 보다가 탄식하며 도로 장막 너머로 들어가 사라졌다. 이윽고 헌원은 갑자기 눈을 무섭게 빛내며 몸에 힘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술 주전자를 낚아채듯 들었다가 돌연 조용히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차분해진 몸가짐으로, 천천히 걸어 문으로 나섰다. 문으로 나설 때까지 헌원의 눈빛은 격렬하게 빛나고 있었으나, 문 밖으로 나서면서 문 앞을 지키는 두 사람의 전사가 인사를 할 때 헌원의 눈은 다시 평온하고 조용한 눈매가 되어 있었다. 헌원은 전사 중 한 명에게 조용히 말했다. “지(知)를 불러라.” 한편 치우비는 취한 치우천을 데리고 숙소로 들어섰다. 치베나 형요 등도 모두 걱정하며 따라왔고, 울라트와 도깨비들은 숙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울라트는 너무 어려서, 도깨비들은 도깨비이기 때문에 헌원의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으므로, 치우천이 인사불성이 되어 돌아오자 몹시 걱정스러워했다. 치우천을 보고 도깨비들 중 싱카가 말문을 열었다. “주인님, 형님은 어떠십니까?” 술에 취한 치우천은 싱카가 주신 말을 유창하게 하자 속으로 깜짝 놀랐다. 싱카는 퍽 영리하여 여섯 달 동안 주신 말을 거의 익숙해질 정도로 배운 것이다. 치우비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눈을 찡긋거렸다. “좀 취한 거야. 괜찮을 거야.” “취했다고? 난 취하지 않았다.” 치우천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울라트, 우리는 내일 떠난다. 도깨비들도 준비하도록 시켜.” 치베의 말에 울라트는 곧바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리미, 내일 길 떠날 준비를 해.” 그러자 애꾸눈의 붉은 머리 도깨비인 리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도깨비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첫째 형요도 자매들에게 떠날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울라트는 치우비와 함께 치우천을 부축하여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치베가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상망이 언제부터인가 문 뒤에서 있는 것이 보였다. “상망님, 무슨 일입니까?” “지우천이 괜찮은가 보러 왔다네.” “천 안다는 술이 그리 세지 못한데, 좀 많이 마신 것뿐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다 토했으니 내일은 멀쩡해질 겁니다.” 치베가 웃으면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상망을 쳐다보자 상망은 헛웃음을 몇 번 웃더니 몸을 돌렸다. “그런가? 알았네.” 상망이 사라지자 치베는 아직 그곳에 남아 있던 형요를 손짓으로 불렀다. 형요는 치베가 부르자 ‘흥’ 하며 코웃음을 쳤지만 치베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이내 가까이 왔다. “누가 숨어 엿듣지 않나 잘 살펴라. 중요한 일이다.” 치베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하자 형요도 비웃는 듯한 장난기를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형요가 양손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나지막이 ‘획’ 휘파람을 불자 사라졌던 나머지 다섯 자매들이 어둠 속에서 귀신같이 나타났다. 잠시 후 여섯 자매는 획 흩어져 모습을 감추고 사방을 감시했다. 치베는 그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방 안으로 들어섰다. 치우천은 코를 골며 누워 있었고, 치우비와 울라트가 그 옆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치베가 목소리를 낮춰 치우천에게 말했다. “천 안다, 밖은 형요가 잘 지키고 있다.” 그러자 누워 있던 치우천이 갑자기 눈을 뜨더니 웃으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것을 보고 치우비와 울라트는 모두 의아해했다. 치우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취한 척했어?” “창피한 일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단다.” “뭣 때문에?” “상의할 게 있어서 그랬다. 치베, 누가 따라왔었지?” “상망이 왔는데, 내가 돌려보냈다. 밖은 형요 자매가 지키고 있으니 틀림없을 것이다.” 치우비와 울라트는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 치베를 바라보자 치베가 짧게 말했다. “천 안다가 아까 토하면서, 나에게 부탁한 대로 한 것뿐이다.” 사실 치우비도 감이 잡히는 것이 있었다. 치우비는 이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나는 사실 잘 모르겠어.” “뭘 말야?” 울라트가 물었지만 치우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치우천은 조용히 치우비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헌원의 말을 잘 끊어준 덕분에 빠져나을 수 있었단다. 고맙다, 아우야.” “고마울 것은 없어. 하지만......” 치우비는 말꼬리를 흐리다가 이내 결심한 듯 덧붙였다. ‘쳔님은 발이 마음에 안 들어?” “내가 마음에 들고 안 드는 건 문제가 아니다. 네가 마음에 드는가가 중요하지.” 치우비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그러면 왜 반대하는....... 거야?” 치우천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난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그 자리에서는 뭐라 말할 수 없었어.” 치우천은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네가 나간 다음 헌원은 더 엄청난 말을 했지. 너를 사위 삼아서 유망과 완전히 갈라서겠 다고 말야.” “정말?” 치우비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치우천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뿐만이 아니지. 만약 유망이 화를 내서 헌원에게 쳐들어오더라도 너와 우리 도움을 받아 싸울 수도 있다고 했어.” “그거 참......” “그뿐인가? 사위가 될지 모르는 사람을 알뜰하게 보살피려고 십육기인 중 다섯 명이나 우리와 함께 카린산으로 보내 도와주겠다고 했어. 전사들도 못 되어도 수백 명은 따라올 거다. 대단하지?” 치베나 치우비도 헌원이 다섯 기인과 많은 부하를 딸려 보내는 것이 꼭 호의로만 그러는 것은 아님을 눈치 채고 있었다. 치우비의 얼굴이 좀 흐려졌다. 치베 역시 눈을 조금 치켜떴다. 다만 어린 울라트만이 상황을 깨닫지 못하고 물었다. “그건 좋은 일이잖아. 오라버니들 왜들 그래?” 그러다가 치베가 약간 화난 듯, 답답한 듯 자신을 바라보자 울라트는 ‘칫’ 하며 일어섰다. “그래그래, 난 어려서 아무것도 몰라. 나중에 나이든 다음에 어디 두고 보자구.” 치우천이 껄껄 웃으며 울라트를 달랬다. “그럴 것 없다, 울라트야. 너도 알아야지. 조용히 듣기만 해라.” “대체 뭔데?” 치우천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헌원님께서는 치우비를 사위로 삼고 싶으신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사위로 삼고 싶은 거지. 내가 카린산에 다녀온 후 대답하겠다고 했어. 그랬더니 우리가 도망치지 못하게, 우리를 감시하고 꼼짝 못하게 다섯 기인을 붙여두기로 했단다.” “어? 왜?” 울라트가 좀 이해가 되지 않는 듯이 묻자 치우천이 다시 말했다. “헌원님은 지나족이거든. 하지만 꿈이 너무나 크다. 헌원님은 세상 제일 대용사 치우비를 사위로 삼고, 몽골, 앗수라트, 앙가마이, 키탄, 미아우, 과보족까지 전부 자기 밑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거야, 허허. 도깨비 왕 비울걸도 끌어들이고 싶은 모양이고.” “만약 거절한다면?” 치베가 눈을 빛내며 치우천에게 물었다. “모르겠어. 그건 그때 가봐야 알겠지.” “언제 가봐야 안다는 거야?” “나는 카린산에서 일을 마치고 헌원의 말에 대답해주겠다고 했어. 그때 우리가 거절하면 그들은 어떻게 할까? 순순히 잘 가라고 보내줄까, 아니면 못 가게 우리를 붙잡아갈까?” 누구도 그에 대해서는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었다. 치우비는 발 때문이라도 헌원이 순전히 호의를 가지고 있으리라 믿고 싶었다. 그러나 불안한 느낌이 은근히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치우천이 웃으며 치우비를 쳐다보았다. “비야, 내가 한 가지 부탁할 테니 들어봐.” “뭐든 말해봐, 형.” “나는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더 생각해봐야 결정을 내릴 수 있겠어. 하지만 너는....... 분명 발과 맺어지고 싶지?” 치우비는 좀 얼굴이 붉어졌으나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치우천이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일단 기다려다오 아직 뭐라고 말하지 말고 나를 믿어줘. 카린산의 일이 끝날 때까지 나도 생각을 정리하마. 그래서 너에게도 모든 것을 또렷하게 이야기해줄게, 결정은 그때까지 미루고, 내 말을 들어다오 그럴 수 있겠니?” “뭣 때문에?” 치우비가 묻자 치우천은 한숨을 쉬었다. “헌원과 나는 생각하는 게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달라. 신도 울루와 내가 한 이야기 들었지?” 치우비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신도 울루는 물론 헌원의 부하이지, 헌원은 아냐. 하지만 신도 울루의 뜻은 헌원의 뜻을 따를 뿐만 아니라 헌원의 뜻에서 배운 것이 분명해. 가령 도깨비들이 있다고 치자. 그러면 지나족은 그것을 물리쳐 없애려 해.다른 부족들도 거의 다 그럴 테지. 자기와 다른 것이 있으면 일단 싸우고, 물리치려고 하겠지. 비야, 그래서 세상은 이렇게 어지러운 거야. 헌원도 말했어. 세상이 어지럽지 않으려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거기까진 내 뜻과 같아. 하지만 헌원이 말하는 것은 지나족만의 세상일지도 몰라. 생각해보렴. 세상에 모든 부족이 없어지고 지나족만 남는 거야.” “모든 부족이 없어진다고?” 흠칫하며 치베가 묻자 치우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 가지 물어보자 지나족은 어떻게 그렇게 수가 불어났을까? 오래 전 신시의 한 스승님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한 백 년, 이백년 전만 해도 지나족은 그렇게 많지 않았대.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많이 늘어난 것일까?” “지나족은 밤만 되면 바쁘게 일하나 보지, 하하.” 치베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좀 우스운지 실없이 웃었다. 그러나 치우천은 웃지 않았다. “한 부족이 아이를 많이 낳으면 물론 수는 늘겠지만, 이렇게 넓은 땅을 차지하는 부족은 못돼, 나는 그동안 지나족의 땅을 오래 지나다녔어. 지나족의 땅은 무척이나 넓어서, 주신보다 더 커. 주신은 여러 천 년 동안 조금씩 땅을 넓혀 나갔지만, 지나족은 단 백 년 만에 이렇게 넓은 땅을 차지했어. 그것도 대부분 강가의 살기 좋은 땅이야. 어떻게 그랬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치우비가 되물었다. “다른 부족들과 싸워 빼앗았나?” “싸워서 빼앗기도 했지. 그러나 그 다음이 중요해. 나는 비울걸과 함께 동쪽으로 가면서, 지나족의 여러 노인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어. 원래 그들도 다른 부족들이었지만, 다들 지나족에 합쳐졌다고 해. 싸워서 진 부족도 있지만, 많은 수는 스스로 지나족이 되었다고 했어. 흉년이 들어 굶어죽게 되었을 때 지나족에 합쳐진 부족이 정말 많았다고 해. 옛날신농씨는 약초와 농사를 깊이 생각하여 농사짓는 법을 아주 크게 발전시켰지. 그것을 배운 지나족은 기름진 땅을 갈고 많은 농사를 지어서 먹을 것을 아주 많이 만들었다. 그 때문에 굶주림에 시달리던 주변의 작은 부족들이 모두 합쳐져서 강하고 큰 부족이 된 것이다. 아이를 낳는 것도, 다른 부족을 합친 것도 모두 먹을 것이 많아야 되는 일이다. 먹을 것이 많지 않으면 사람이 늘지 못한다. 그리고 다른 부족을 모조리 합쳐버리지 않으면 그렇게 넓은 땅으로 퍼져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치베가 되받았다. “그게 뭐가 문제인가? 새 부족이 사람을 늘리고 땅을 넓혀 더 강해진 부족이 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부족들은 모두 지나족이라는 새 부족이 되었다는 것만 생각했지, 자기가 옛날에 어떤 부족이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어. 옛날의 습관을 모두 버리고 지나족이 되면, 아무 문제도 없어. 하지만 만약 옛날의 습관을 그대로 지키려고 하면, 그들은 쫓겨나게 되는 거야. 그래서 지나족이라는 하나의 부족이 점점 커지고, 점점 강해질 수 있었던 것 같아.” 치우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어느 부족이라도 마찬가지 아니겠어?” 그러나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큰 부족이 되려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말야, 모든 부족의 지난 일을 지워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그게 대체 뭐가 다르다는 거야? 우리도 새 부족을 세우자는 생각까지 했었잖아.” “만약 우리가 새 부족을 세웠다고 치자. 그래서 앗수라트나 앙가마이나 보돈차르족까지도 우리 새 부족이 되어 함께 살기로 했다 하자. 그러면 너는 보돈차르 안다와 키타야 부족장, 구르 부족장의 이름까지 새 부족식으로 바꾸고, 그들 모두에게 몽골족이나 타타르족이었던 지난 일을 모두 잊으라고, 새 부족이라고만 생각하라고 말할 수 있겠니? 비, 치베, 울라트 너희 모두 말해봐.” 세 사람은 질문을 받자 나름대로 한참 생각에 잠겼다. 울라트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난 잘 모르겠어요. 새 부족으로 사는 게 더 편하고 좋다면 바꿀 수도 있겠지만, 이름을 바꾸는 것은 좀 너무한데요? 이름은 안 바꾸어도 좋지 않을까요?” 치베도 이윽고 말했다. “나나 보돈차르님은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몽골 사람이고, 푸른 늑대의 자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기에 우리 몽골족은 거친 초원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것을 잊고 사는 것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팔아버리는 것과 마찬가지 짓이다. 네가 말하는 새 부족은 그런 것이 아니잖은가?” 치우비는 잠시 치우천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형, 형이 지난번 보돈차르 안다와 이야기한 그거야? 지나족은 지나족만의 그릇이고, 형이 생각하는 그릇은 모두를 함께 담는 그릇이라는?” 치우천은 치우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맞다, 비야. 그리고 치베, 잘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울라트, 너도 고맙다. 나, 치우천이 말한다. 지나족은 다른 부족들을 모두 빨아들여 지금의 큰 지나족을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옛날의 일은 잊었고, 지나족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다. 결국 헌원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지나족이라는 하나의 큰 그릇에 모두가 들어가게 되는 거야. 주신족도 몽골족도 타타르족도, 나아가서는 키탄족도 마갸르족도 투르크족도 훈족도 다 없어지고 지나족 하나만 남는 거지. 그런데 내 묻겠다. 그것이 과연 좋을까?” 치베는 흘린 듯이 입을 열었다. “모르겠다. 천 안다. 정말 모르겠다. 모두가 같은 부족으로 하나로 뭉치면, 아무도 싸우지 않고 걱정 없이 편하게 지내지 않을까?” “그건 멋지긴 해. 대단해.” 울라트는 그렇다고 맞장구쳤고 치우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치우천이 말을 이었다. “치베, 너나 보돈차르 안다는 푸른 늑대의 자손 아닌가? 그것은 어떻게 하지? 아니, 일단 그렇게 되면 안다라는 말도 쓰지 못하겠군.” “그렇게는 할 수 없지 음, 뭔가 좀 힘들군그래. 분명 그렇게 사는 것은 멋진 일이지만, 걸리는 게 많군.” “걸리는 게 많다. 아주 많아 치베, 울라트 나는 주신 사람이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안파견 한님의 가르침을 듣고, 생각하며 지냈다. 안파견 한님은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라 말씀하셨지 사람을 이롭게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물론 부족들이 합쳐져서 큰 부족을 세우는 것은 멋진 일이다. 한 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근질근질해지는 대단한 일에는 틀림없지. 그러나....... 그러나 그건 실제로는 아주 힘들어 가령 그렇게 된다면, 푸른 늑대의 자손임을 잊지 않으려는 치베 너나 보돈차르 안다는 밀려나게 될 것이다. 이름을 지키려는 울라트 너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 주신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에게 그 새 부족은 이롭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런 사람이 과연 적을까? 아마도 많을 것이다. 그러면 결국, 그 새 부족이 커지면 커질수록, 세상 땅을 더 차지하면 차지할수록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밀려나고 쫓겨나서 점점 살기 어려워질 것이다.” 치우천이 열변을 토하자 치베는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건 그렇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항상 틀린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옳아도 따르지 못할 경우도 많지 않은가?” “그건 맞는 말이다.” “난 모르겠어요 모두가 한 부족이 되면 좋기는 좋겠지만 싸워야 한다는 건 무서워요 더구나 한 번에 싸워서 이기면 좋지만, 못 이기고 질질 끌면 중간에 수없는 사람들만 죽어갈 것 아니겠어요? 난 싸우는 건 싫다구요.” 울라트의 말에 치우천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것도 맞는 말이야.” 치우비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싸우는 게 싫지만, 싸우는 건 두렵지 않아. 만약 그런 큰 뜻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라면 나는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게 정말 옳은 길이라면, 나는 주신 사람이라는 것도 버릴 수 있어. 만약 모두가 하나의 큰 부족이 될 수만 있고, 앞으로 계속 모두가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면 나는 모든 힘을 다해 싸울 수 있어. 어차피 부족들끼리는 싸움도 나고, 죽는 사람도 나을 수 있는 거야. 모든 힘을 다해 설득해봐야지만......” 만약 모두 하나의 부족이 되는 게 옳은 일이라면,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전부 죽어도 할 수 없지 않을까?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큰 싸움에서 다 죽고 새로 태어나는 사람은 모두 새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그게 더 좋을 수도 있지 않나.” 치우비는 늘 착하고 온건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뜻밖에도 좀 과격하여 울라트와 치베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비 오라버니, 그렇게 말하니 무섭네. 그럼 내가 안 따르면 나도 죽일 거야?” “너를 어찌 그러겠니?” “내가 죽어도 오라버니를 따를 수 없다고 하면?” “네가 어찌 그러겠어? 너는 착한 동생이잖아.” 울라트는 눈을 빤히 뜨고 씩 웃는 치우비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그래도 정말 안 된다고 하면?” 치우비는 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럼 내가 포기해야겠네.” “그게 정말 옳은 길이라며?” “그러면 네가 따르지 않을 리 없잖아. 옳은 게 아닐지도 모르지 아휴, 모르겠다.” 치우천이 계속 말꼬리를 이어가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 그만, 둘 다 됐다. 이건 몹시 어려운 문제야. 그게 바로 생각만 하는 것과 직접 움직이는 것의 다른 점이다. 생각만으로는 모든 부족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옳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몹시 문제가 많아. 세상에는 많은 부족들이 있고, 저마다 받드는 것도 다르구 생각도 다르며, 조상도 다 달라. 사는 것도, 말하는 것도, 풍습도 다 다르지. 그러니 하나의 부족이 되는 데에는 너무 문제가 많은 거야.” 치우비가 약간 멋쩍은 듯이 물었다. “헌윈의 뜻이 그렇게 문제가 많다면 그럼 형의 뜻은뭐지? 헌원의 뜻과는 어떻게 다르지? 그리고 헌원의 뜻은 옳은 거야, 그른 거야? 힘들고 안 힘들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정말 그게 옳으냐 그르냐가 중요하잖아.” 짧게 숨을 내쉬며 치우천이 조용히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하면 뭔가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시간을 벌려는 것이다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너도 그때까지 기다려 주었으면 좋겠구나.” 치우비는 조금 괴로웠지만 그때까지 참는 것이야 뭐 어떨까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몹시 궁금하다. 천 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치베의 물음에 치우천이 대답했다. “아주 많은 생각. 아주 복잡한 생각.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꽤 오래 생각해왔는데 아직도 잘 알 수 없어. 좀더 생각해보기 전에는 이야기하기가 좀 그렇다. 카린에 갈 때까지 기다려다오, 치베.” “알았다. 그런데 카린으로 가는 길은 아는가?” “나는 소녀님과 같이 갈 생각이야. 일단 소녀님도 카린 밖에는 갈 곳이 없잖아, 소녀님과 함께 가면서 길을 묻던지 해야지. 우리와 같이 갈 지나족 중에서 길을 아는 사람도 있겠지.” “소녀님을 돌려보내고, 무라의 일을 도와주면 우리는 카린에서 머물 수도 있겠지? 만약 천 안다가 헌원을 택하지 않아도 말야.” 치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런 생각도 있어. 헌원과도 헤어진다면 갈 곳이 없잖아.” “보돈차르님에게 가도 되고, 타타르족이나 키탄족에게 가도 될 것 아닌가?” “북쪽 부족들에게 가면 폐를 끼치게 돼. 주신 쪽에서 해코지할 수가 있잖아. 나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고 싶지는 않아. 카린은 주신의 입김이 안 닿는 곳이니 차라리 거기가 낫지.” 치베가 다시 물었다. “그럼 카린에 가면 어쩔 건가?” “무라와 누루마이와 나는 약속을 했고, 아버님과도 성인식을 치르겠노라고 했으니 그 약속은 지켜야지. 가서 괴물을 물리쳐야 해......” “그 보석이 정말 괴물에게 들을까?” 치베가 묻자 치우천은 피식 맥없이 웃었다. “아닐 거야. 사실 누루마이가 전에 유망에게서 얻은 것이 그 보석이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누루마이 자신이 그 보석은 필요 없다고 했어. 그 보석도 그냥 헌원에게 변명을 하기 위한 것이지, 정말 이것에 기댈 수는 없어.” 그 말을 듣고 치우비와 치베는 의아해했다. 치우비가 물었다. “그렇다면 그런 쓸모도 없는 보석을 얻으려고 거기까지 갔던 거야? 왜 그랬어?” 치우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할 시간이 있어야 했어. 하지만 아직도 생각할 시간이 부족해.......” “천 안다, 그럼 카린산의 괴물을 어떻게 이기려 하는가? 칼도 화살도 통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봐야지.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무라와 이야기를 해봐야 분명해지겠어.” 치우비와 치베는 조금 걱정이 되었으나 치우천이 몹시 피곤해하는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별안간 울라트가 뜬금없이 물었다. “그 무서운 도깨비 왕 할아버지는 어디 갔어? 안 왔으면 좋겠다.” 치우천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비울걸 말이냐? 할아버지라고 하면 안 돼. 그렇게 부르는 걸 알면 화낼 거야. 좌우간 그 사람은 번잡한 곳을 싫어하니 어디선가 또 불쑥 나타날 거야.” “불쑥?” 울라트는 비울걸의 무시무시한 모습이 아무래도 싫은 듯 겁먹은 표정이 되었다. “그 도깨비 왕이 천 오빠를 잡아먹는다고 했잖아. 난 그 할....... 아니, 아저씨 무서워.” “무서워할 것 없단다.” 그때 밖에서 획 하고 새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형요의 휘파람 소리 같았다. 밖에 누가 온 것 같은 눈치를 채고 치우천이 다급하게 말했다. “난 취한 척했으니 끝까지 취한 척해야지. 부탁한다.” 치우천은즉시 자리에 누워 언제 이야기를 했었냐는 듯 코를 골기 시작했고 울라트는 눈치 빠르게 중얼거렸다. “천 오라버니! 천 오라버니! 세상에 무슨 술을 이리 마셨담? 일어나 봐요! 일어나 보라니깐! 나랑 이야기 좀 하자니깐!” 치우비와 치베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울라트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사실 이 두 명의 거친 사나이들은 싸움이라면 몰라도 다른 일은 이렇듯 눈치가 빠르지를 않았다. 치베는 울라트만큼 말을 잘 지어낼 자신이 없어 그냥 누워서 자는 척해버렸다. 그러나 치우비는 발과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치우비의 날카로운 귀로, 문 밖에서 누군가 아주 몸이 날랜 두어 사람이 지나다니는 듯한 기척이 들렸다가 이윽고 안심한 듯 조용해졌다. 아마 형요 자매가 몸을 숨기는 소리 같았다. 그때 문득 누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 밖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야, 비야! 자?” 발의 목소리였다. 치우비는 반가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치우비가 좀 멋쩍은 표정으로 누워 있는 치우천을 바라보자 치우천은 싱긋 웃으며 괜찮다는 듯 눈짓을 했다. 치우비는 조심스레 밖으로 나갔다 나가 보니 문 밖에는 발과 두 명의 여자 종이 서 있었다. 발이 치우비를 보자마자 물었다. “비야! 내일 떠난다는데, 정말이야?” 비록 주변은 어두웠지만 치우비는 발의 눈에 슬픈 빛이 감도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은 안타까운 듯 다시 물었다. “정말 가야 되는 거야?” 치우비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발은 깊이 한숨을 쉬고는 갑자기 여자 종들을 돌아보며 지나 말로 뭐라고 말했다. 아마 자신을 놔두고 가라는 이야기 같았다. 여자 종들은 그럴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발이 좀 화난 듯 소리를 높이자 굽실굽실하며 물러갔다. 느닷없이 발이 치우비의 손을 획 잡아채더니 끌고 가며 말했다. “멍청이! 나랑 이야기 좀 해.” 치우비는 발에게 끌려 저만치 떨어진 연못 옆으로 갔다. 그곳은 처음으로 치우비가 발에게 마음을 고백했던 곳이기도 했다. 치우비가 붙여두었던 두 바위도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발은 그리로 가더니 누가 없는지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자 발은 치우비의 멱살을 덥석 잡고 다그치듯 물었다. “야! 너 정말 갈 거야?” 치우비가 약간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가야 되는 일이야. 전에 약속한 게 있단 말야. 간다고 아주 가는 것도 아니잖아.” “나랑 헤어지지 않겠다고 했잖아. 약속했으면서.......” 치우비는 따지고 드는 발을 어쩌지도 못해 쩔쩔맸다. “누가 너랑 헤어진단 말야? 나는 사울아비고, 약속한 일은 꼭 지켜야만 해.” “나보다 약속이 더 중요하단 거야? 나하곤 맹세까지 했잖아! 발이 떼를 쓰자 치우비는 타이르듯 말했다. “발아, 주신 사울아비는 성인식을 하기 전에는 장가도 갈 수 없어. 내가 카린산에 가서 일을 치르는 게 바로 내 성인식이란 말야. 그러니 그걸 해야만 너랑 혼....... 어흠, 흠....... 혼인도 할 수 있.......” 치우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은 치우비의 멱살을 놓고 획 등을 돌리며 소리쳤다. “멍청이! 누가 너한테 시집간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러나 정작 그런 소리를 하는 발의 얼굴도 새빨갛게 변해 있었고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치우비가 싱글거리며 물었다. “그럼 나한테 시집 안 올 거야?” “멍청이가 뻔뻔스럽기는!” 발은 치우비의 입 언저리를 손으로 때리는 시늉을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만해! 부끄럽지도 않아? 창피해 죽겠단 말야!” “아무도 없는데 뭐.......” “달도 있고 별도 있고 연못도 바위도 있는데 뭐가 아무도 없어! 또 그딴 소리 하기만 해봐. 상대도 안 할 거야!” 그러다가 발이 목소리를 낮춰 치우비에게 넌지시 물었다. “카린산에 가면 무라 만날 거지?” 치우비는 무심코 “응”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발이 갑자기 뽀로통해지며 톡 쏘아붙였다. “쳇! 보고 싶은 모양이지?” 치우비는 우습기도 하고 질투하는 발이 귀엽기도 하여 부드럽게 말했다. “무라의 일을 도와주러 가는데 안 만날 수 없지. 그리고 만나면 반가울 거야. 하지만.......” 발은 반가울 거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치우비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퍽 때렸다. 그래도 치우비는 그냥 맞아주며 계속 말을 이었다. “.......무라는 그냥 친구야. 치베나 야율쿠리나 초초룬 같은 친구일 뿐이라구. 발아, 나에겐 너밖에 없어. 너 말고 다른 여자를 여자로 보거나 생각해본 적조차 없단 말야.” 그러자 발은 다시 한 번 ‘흥’ 코웃음을 치며 분한 듯 발을 구르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잠시 후 발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야, 네가 차라리 아무 힘도 없는 진짜 멍청이였으면 좋겠어. 그럼 여기저기 싸워주러 다니지도 않을 건데.” 치우비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발은 다시 아주 조그맣게 물었다. “비야, 넌 정말 나랑 헤어지지 않을 거지?” “그럼.” “정말이지?” “그래.” “카린산만 갔다가 꼭 돌아올 거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치우비는 마음이 아팠다. “그건.......” 치우비가 얼버무리자 발이 깜짝 놀라며 치우비를 째려보았다. “비야? 그럼 안 오겠단 말야?” “그건 지금 뭐라고 말할 수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치우비가 간곡하게 말했다. “발아, 나는 형님을 따라야 해. 형님의 뜻에 따르고, 항상 같이 일을 해나가기로 나는 수도 없이 맹세해왔어. 카린에 갔다가 만약주신으로 되돌아가게 될 수도 있고, 또 주신에 계신 아버님께도 허락을 받아야 하고 그리고.......” 치우비가 주섬주섬 변명을 늘어놓자 발이 단번에 외쳤다. “듣기 싫어! 만약 형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버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러면 헤어지겠다는 거 아냐? 응1 대답해봐!” “그렇지 않아, 절대.......” “헛소리!” “헛소리가 아냐! 발아. 정말 그 다음에는 널 다시 찾을 거라구. 난 맹세도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 응?” 치우비가 간곡하게 말하며 설득하자 발은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치우비의 말은 구구절절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발은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 좋아.” 마침내 발이 차분하게 말하자 치우비는 발이 자신의 말을 믿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흘린 땀을 닦았다. “나도 너랑 같이 갈래. 같이 다니면서 네가 정말 약속을 지키는지 아닌지 봐야겠어!” 이어지는 발의 말을 듣고는 치우비는 깜짝 놀랐다. “어....... 하지만 난 카린산에 놀러가는 게 아냐. 몹시 길이 험할 건데......” “이봐! 상망 할아범하고 비휴 아저씨가 없으면 나도 불편하단 말야! 집에 혼자 있느니 아저씨들을 따라가는 게 나을 거라구.” “위험할지도 모르고.......” 발이 ‘호호’ 하며 웃었다. “이봐, 너 태산 회의의 대용사 맞아? 거기다가 끽구 아저씨, 상망 할아범, 비휴 아저씨에 머리 잘 도는 너희 형도 있는데 뭐가 위험하겠어?” “너희 아버님이 허락하실지도.......”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발은 화를 벌컥 냈다. “군소리 말고 이것만 대답해! 나랑 같이 가는 게 좋아, 싫어?” 치우비는 멍청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거야....... 좋긴 하지만.......” “그럼 됐어!” 발이 재빠르게 뒤로 돌아서서 치우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쪼르르 달려가 버렸다. 치우비는 멍하니 발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발이 따라올까? 허 이것 참.’ 카린으로 가는 길 다음날 아침 일찍 상망과 함께 칭이라는 지나족의 늙은 전사가 찾아와서 치우 형제와 길을 상의했다. 칭은 서북 방면을 여러 번 오간 적이 있어서 길을 잘 안다는 것이다. 화산에서 카린산까지는 오천 리가량이나 되는 먼 길을 가야 했다. 카린산은 지금의 쿤룬곤륜)산맥 중에 있으며, 쿤룬산맥은 신강성과 티베트와의 접경을 긋는 산맥이다. 그리로 가려면 대강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일단 현재의 난주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곧 바로 서쪽으로 큰 사막을 넘어가는 길과, 약간 북서로 돌아서 지금의 청해성과 내몽골과의 접경을 따라 돈황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약간 남서로 꺾어들어 가는 길이 있었다. 물론 지도 따위는 없는 시대였으므로 칭은 막연하게 이 길은 얼마나 험하고 얼마나 걸리고, 다른 길은 어떻다는 등만 설명했을 뿐이다. 치우 형제는 안 그래도 사막은 지긋지긋한지라 돈황 쪽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치우천은 무라와 약속했던 날짜가 거의 다 되어가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지나족 전사는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부지런히 간다면 늦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치우 형제가 떠날 때 헌원과 다른 신하들은 전송을 해주었지만 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치우비가 궁금해 하는 표정을 짓자 헌원이 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발 녀석은 지금 나에게 혼이 나서 방에 틀어박혀 있다네. 그래서 인사를 못하는 것이니 이해해주기를 바라네.” 아마도 발은 아버지에게 자신도 보내달라고 조르다가 맘대로 안 되자 심사가 틀어져 방에 틀어박힌 모양이었다. 조금 안쓰럽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했지만 치우비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내색하지 않았다. 카린산으로 떠나는 길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저 그랬지만, 소녀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어 몹시 기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망에게서 사와라 한웅에게로, 다시 치우 형제를 따라 사막까지 갔다가 헌원에게 오기까지 수많은 고생을 했으니,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헌원은 다섯 기인들에게 많은 선물을 주어 쑤앙마이애게 주라고 했으며, 치우 형제에게도 지나 땅에서 나는 귀한 선물을 많이 주었다. 특히 당시에 정말로 귀한 비단을 아낌없이 주기도 했다. 치우 일행은 치우 형제에 치베와 소녀, 형요 자매와 울라투 그리고 도깨비들을 합쳐 모두 열여덟 명이었으나 행렬은 몹시 길었다. 십육기인 중 상망, 비휴, 끽구, 신도, 울루 다섯 명과 오백 명은 넘어 보이는 지나족 전사들과 함께 가기 때문이다. 지나족들이 사방을 에워싸 고 가는 것이 좀 떨떠름해서 치베와 형요는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치우천은 가볍게 웃어넘겼다. “같이 안 갈 수도 없는데 굳이 내색해서 무엇 하겠어?” 긴 행렬이라 움직임이 더뎌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길을 떠난 지 이틀이 지나자 치우천은 몸에서 열이 나고 아프기 시작했다. 상망이 응급조치를 계속 취했지만 열은 내리지 않았다. 상망은 치우천의 절맥 증상이 다시 도지는 것 같다고 염려했고, 다른 사람들 역시 걱정이 대단했다. 그날 저녁, 일행이 불을 피우고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미요가 갑자기 달려왔다. 형요 자매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으며, 오늘은 미요와 셋째 형요가 주위를 돌아볼 차례였던 것이다. “저만치서 누가 말을 달려서 우리를 따라오고 있어요.” “누가?” “공손발님인 것 같아요.” 미요의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랐으며, 특히 치우비와 상망의 놀라움은 더 했다. “발이?” “아가씨가?”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저만치에 좀 떨어져 있던 지나족 전사들이 ‘우’ 하고 몰려왔는데 발이 그 가운데 있었다.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치우비와 상망을 번갈아 쳐다보며 발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아, 배고파 죽겠네. 먹을 것 좀 가져와, 할아범.” “아니, 아가씨!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네?” 상망이 기겁을 하며 묻자 발이 태연스레 대답했다. “올 만하니까 왔지.” “아가씨! 아버님이 허락해주셨나요?” “그러니까 왔지!” 그러나 상망은 아무래도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 혼자 오시게 했어요? 누가 모시고 왔어야 하는데.......” 여전히 발이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란란만큼 잘 달리는 말이 없잖아. 그래서 못 따라잡을까 봐 혼자 떠난 거야. 그런데 생각보다 얼마 못 갔네? 하루는 더 달려야 따라잡을 줄 알았는데.” 상망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듯 다시 물었다. “아버님이 정말 허락해주신 거예요?” 그러자 발은 갑자기 획 상망의 수염 몇 터럭을 잡아 뽑으며 빽 소리를 질렀다.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상망은 “앗 따가워라”하며 더는 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때 비휴가 조용히 다가와 발에게 반대쪽을 손가락질 해보이며 말했다. “가라.” 발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딜가라구?” 비휴는 여전히 무뚝뚝하게 말했다. “도로 가라.” 비휴는 원래 말이 없고 냉정했기 때문에 발도 비휴에겐 상망만큼 막 대하지 못했다. 그래서 수염을 뽑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발에게는 비휴에게 써먹는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었다. 바로 무관심이었다. 발은 비휴의 말을 아예 무시해버리고 갑자기 치우비에게 말을 건넸다. “비! 내가 왔는데 넌 말도 없냐?” 치우비는 약간 멍하게 웃으며 말했다. 좌우간 발을 다시 보게 되니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아.......,어서 와.정말 반갑구나. 이틀 만에 보는 건데도 한두 해만에 보는 것 같구나.” 발이 호호거리며 웃었다. “멍청이!” 비휴는 발이 자신을 무시하는데도 다시 소리 없이 다가와서 발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가라.” 발이 웃으며 되받았다. “알았어요, 비휴 아저씨. 배고프니 밥 먹으러 갈래.” 그러면서 발은 다시 슬쩍 치우비 옆으로 와서 말했다. “나 배고파 죽겠단 말야. 맛있는 거 없어?” 치우비가 얼결에 발을 데리고 가려는데 다시 비휴가 귀신처럼 앞을 막아서며 발에게 말했다. 무라처럼 획획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비휴는 무릎을 움직이지도 않는 상태에서 그냥 이동하는 것 같아 마치 귀신처럼 보였다. “가!” 비휴가 끈질기게 달라붙자 발이 화를 내며 발을 굴렀다. “뭐야. 비휴 아저씨! 왜 돌아가야 하는데? 난 허락받고 온 거란 말야!” 그러나 비휴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발의 뒤춤을 잡고 들어올리고는 전사 한 명에게 손짓을 했다. “왜 그러는 거야! 정말 이럴 거야? 날 보내서 어쩌겠단 건데!” 발이 앙칼지게 소리쳤으나 비휴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았다. 그러자 발은 더욱 악을 썼다. “할아범! 상망 할아범!” 상망이 멋쩍은 듯 슬며시 돌아서려 했지만 발이 마구 악을 쓰자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왜요, 아가씨?” “날 좀 놔주라고 해!” “뭐라구요? 아이구, 이 할아범이 요즘 귀가 어두워져서 잘 안 들리네요.” “할아범, 정말 이럴 거야? 응? 내가 허락받지 않고 그냥 나온 것 같아? 응?” “잘 안 들리네요. 하지만 아버님이 절대 아가씨를 이렇게 혼자 보내시지는 않았을 거 같네요. 적어도 말 잘 타는 여자 전사들이라도 몇 명 딸려 보냈겠습죠. 안 그렇습니까요?” “내가 하루를 꼬박 먹지도 자지도 않고 울었더니, 아버지가 화가 나서 보내주신 거야! 내 눈이 부어 있는 거 안 보여?” “아버님은 그렇게 떼쓴다고 들어주실 분이 아니에요 내가 모를 줄 아십니까요?” “그럼 다같이 가보자곤.” “안 그래도 길이 급한데 어떻게 되돌아갔다 다시 온단 말입니까요?” “그러니 무조건 내 말은 안 믿겠다? 만약 내 말이 정말이면 어쩔거야, 응? 그땐 수염이고 머리칼이고 다 뽑아버리겠어!” 상망은 짐짓 겁이 난다는 듯 수염과 머리칼을 만져보았다. 그때 아까 비휴의 손짓을 보고 달려갔던 전사가 온몸이 새하얀 말을 끌고 왔는데, 아마 발의 말 란란인 모양이었다. 비휴가 발을 들어올린 채 서슴없이 뚜벅뚜벅 걸어가서 말에 태우려고 하자 발이 엉엉 울면서 외쳤다. “할아범! 이럴 수가 있어? 내 말은 말 같지도 않다 이거지? 알았어! 할아범한테까지 무시 받으며 이렇게 살아서 뭘 해?가다가 벼랑에나 확 뛰어내려 버려야지!” 상망은 그제야 몹시 놀란 듯 펄쩍 뛰며 발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아가씨를 걱정해서 그러는 것인데 왜 벼랑에 뛰어 내리십니까요?” 어느새 비휴는 발을 말 위에 얹어놓고 있었다. 그러자 발은 성질을 부리며 마구 외쳤다. “날보고 거짓말했다고? 누가 뛰어내리면 혼자 뛰어내릴 줄 알아? 산산이도 같이 안고 뛰어내려야지!” 그러자 상망의 얼굴이 대번 잿빛으로 변했다. “아니, 아가씨! 산산이는 왜요!” “할아범이 날 거짓말쟁이로 만들어서 억울해서 뛰어내리는 건데, 할아범한테도 벌을 줘야지!” “아이고! 죄 없는 산산이를 왜.......” “억울해서 그런다, 왜!” 발이 앙칼지게 소리치자 상망은 정말로 놀라 안절부절못하다가 마침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가씨, 정말 아버님 허락을 받고 온 겁니까요?” “그래!” “정말입니까요?” “아, 정밀 짜증나네! 나 도로 갈 거야. 산산이랑 같이 벼랑에.......” 상망은 또 산산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주저앉을 듯 한숨을 쉬고는 비휴에게 말했다. “비휴, 아가씨 내려드리게나.” 비휴는 눈을 부릅뜨며 상망을 바라보았으나 상망이 다시 눈짓을 하자 할 수 없다는 듯 발을 툭 내려놓고 돌아서서 가버렸다. 말에서 내린 발이 의기양양하게 발을 구르며 말했다. “도대체가 말야, 사람을 뭘로 보고 말야. 그럴 수가 있는 거야, 정말? 위아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는 거냐구? 응?” 상망은 계속 한숨만 쉬며 대꾸했다. “아가씨, 아버지 허락을 받았다면 다행이고, 만약 아니더라도 모든 책임은 아가씨가 지셔야 합니다. 아셨습니까요?” “허락받았다는데 왜 자꾸 딴 소리야.” 발은 소리를 지르면서 다시 상망의 수염을 뽑으려 했지만 이번에는 상망이 슬쩍 피했다. “그리고 자꾸 산산이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자꾸 그러시면 이 할아범도 화납니다요.” 그러자 발이 히죽 웃었다. “알았어, 알았어. 날 거짓말쟁이 취급하니까 그러는 거잖아. 할아범, 내가 심했지? 화내지 마. 앞으로 산산이 이야기는 안 할게. 응?” 발이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생글거리며 애교를 떨자 상망은 연신 한숨만 쉬었다. 소란이 벌어졌지만 끽구와 신도 울루는 아예 이쪽으로는 오지도 않았다. 덩치만 크고 좀 둔한 그 세 명은 입심으로 발을 당할 수도 없고 발만 보면 골치가 아픈지라 아예 얼굴도 내밀지 않은 것이다. 그 가운데 치우비만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발과 상망이 지나 말로 빠르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뭐라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발이 다가오자 치우비가 입을 열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결국 오긴 왔구나.” “난 한다면 한다구. 알았어?” 그때 연신 한숨만 내쉬던 상망이 다시 뭔가 이야기를 하려는데 모닥불에 둘러앉았던 치우천이 약간 절룩거리며 다가오더니 발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공손발님 오셨군요.” “그래요, 왔어요.” “배 고프시다던데, 윌 좀 드시죠? 주신 음식을 하는 중입니다만.” “좋죠.” 발은 때는 이때라는 듯, 재빨리 상망을 따돌리고 치우천이 가리키는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치우비도 그 뒤를 따랐다. 치우천이 넌지시 발에게 지나 말로 물었다. “산산이 누군데 상망님이 쩔쩔매시죠?” 발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상망 할아범의 하나뿐인 손녀딸이죠. 겨우 여섯 살이에요 할아범의 피붙이는 그 애 하나뿐이거든요.” “그런 애를 가지고 뭐라고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발이 깔깔 웃으며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말로만 그런 거예요 내가 그 애를 얼마나 예뻐하는데 정말 그럴 리 있어요? 할아범 닮아서 못생겼지만 하는 짓은 정말 귀여워요.” “뭔데 그래?” 치우비가 묻자 발은 웃기만 했다. “멍청이는 몰라도 돼. 답답하면 너도 지나 말을 배우는 게 어때?” 치우비는 몹시도 답답했던 터라 무심코 말했다. “정말 답답해 못살겠다. 네가 지나 말 좀 가르쳐주면 안 될까?” 그날 밤이 지나자 치우천의 통증이 한결 나아졌다. 발은 치우비와 함께 여행을 하는 것이 퍽 즐거운 듯했고 치우비는 발에게서 지나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발은 성질이 급하고 토라지기를 잘해서 때리기도 하고 구박도 하는 등 결코 좋은 스승은 못 되었지만 치우비는 배우 는 것이 즐겁기만 했다. 길잡이인 칭은 사람이 많아 길이 느려진다면서 서둘러 길을 가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일행은 매일 일찍 일어나 길을 가고 밤에도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는 될 수 있는 대로 길을 더 가느라 애썼다. 소녀는 틈만 나면 치우천과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치우천은 치베와 형요 자매, 그리고 도깨비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자주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여자가 여럿이 되다 보니 밤에는 여자들끼리만 따로 잠을 잤다. 소녀와 발, 형요 자매 등은 모두 저만치에서 한데 잠을 자곤 했다. 지나족들 중 상망과 비휴는 낮에는 항상 발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랐지만 밤에는 지나족들만 모여 자는 곳에서 잤다. 그 두 사람을 빼고는 수많은 지나족들은 한 번도 치우 일행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아 마치 따로 여행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만 조금씩 시간이 지나자 리미, 마냥, 싱카 등 도깨비들은 주신 말에 더욱 익숙해져서 서툴게나마 치우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덜 지루했다. 일곱 명의 도깨비들은 온 곳이 제각각 다 달랐고 사는 법이 다르고 특색이 있어서 이야기만 들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치우 형제는 비울걸이 데리고 있는 도깨비가 진짜 도깨비지, 그들은 도깨비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게 되었다. 그들은 생김새가 좀 다를 뿐 같은 사람이므로 치우 형제는 더 이상 그들을 도깨비라 부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주신 말을 처음 배울 때부터 자신들이 도깨비라고 불리는 것만 들어왔던 터라 다들 스스로를 도깨비라 불렀다. 다들 말할 때마다 ‘도깨비 리미가 말합니다’라거나 ‘도깨비 싱카가 말합니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입에 밴 것이다. 치우천과 치우비는 그것을 안쓰러워했다. 그중 싱카가 가장 머리가 좋고 생각이 깊은 편이라 치우비는 싱카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는 너희가 우리와 생긴 것이 달라 도깨비라고 불렀지만, 너희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니 앞으로는 도깨비라 부르지 말자.” 싱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도깨비 싱카가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그대로 부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왜? 도깨비라고 부르는 게 기분 안 나빠?” “어차피 생긴 모양이 다르니 이곳 사람들은 우리를 도깨비라 부를 겁니다. 주인님과 주인님 일행이 우리를 사람으로 알아주시니 우리는 고마울 뿐입니다. 하지만 마음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래도.......” “아닙니다. 주인님이 만약 우리를 사람이라고 부르면,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설명을 해야 할 것이고,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분 나쁘게 여길 것입니다. 아주 번거롭고 골치 아플 겁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눈만 믿고 싶어 하지, 자기 눈에 어긋나는 것을 보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입니다.” 치우비는 싱카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대답은 하지 않았다. 싱카는 다 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급하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앞으로 세월이 지나면 다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날도 오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서로 모르고,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인님도 도깨비 왕을 만나기 전에는 우리가 도깨비인 것으로 알았잖습니까?” 치우비가 그렇다고 하자 싱카는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도 처음에 잡혀서 이곳까지 팔려오게 되었을 때 도깨비 나라로 잡혀간다고 슬퍼하고 무서워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는 나라에 주인님이 오셨다면, 역시 도깨비 취급을 받았을 겁니다. 주인님, 저희는 어차피 몇 년 동안이나 도깨비로 살아와서 그게 더 낫습니다. 주인님도 도깨비를 부리는 신통한 사람이 되시는 게 낫습니다.” “난 널 부리고 싶지는 않다. 너희는 내 벗이야.” “그 마음, 정말 고맙습니다. 저희도 그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주인님, 주인님께서는 도깨비의 주인인 편이, 도깨비의 벗보다는 나을 겁니다. 사람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도깨비의 벗은 똑같이 도깨비 취급을 받을지 모르지만, 도깨비의 주인은 보통 사람이 아니란 증거가 되잖습니까? 저희는 정말 괜찮으니, 앞으로도 도깨비라 불러주십시오. 저희는 오히려 그 말을 안 들으면 더 어색하고 움직이기가 힘들어진답니다. 모두를 위해서 그래야 합니다. 이 도깨비 싱카의 말을 잊지말아주세요.” 다른 도깨비들도 비슷한 생각이라 치우비는 하는 수 없이 그냥 그대로 부르면서 지내기로 했다. 도깨비들 중 싱카가 가장 나이도 많고 생각이 깊어서 말을 하는 것은 주로 싱카가 했고, 성격은 리미가 가장 시원시원하고 호탕하여 뭔가 행동할 때는 리미가 앞장서게 마련이었다. 일곱 명의 도깨비들 중 그들 둘이 지도자인 셈이었다. 붉은 머리 애꾸눈 도깨비인 리미는 아주 먼 서쪽, 검은색 바다와 눈이 쌓인 험한 산, 울창한 숱이 있는 나라에서 왔다고 했다. 금발의 험악하게 생긴 개르는 바다는 아예 본 적 없으며, 아주 울창하여 낮에도 컴컴하고, 한없이 가도 빠져나갈 수 없는 거대한 숲에서 살았다고 말했다. 리미와 개르가 사는 곳의 남자들은 모두가 험한 전사들이라 했다. 리미와 개르는 싸움에 져서 포로로 잡힌 다음 여기까지 노예로 팔려오는데 약 여덟 개 부족을 거쳤고 각각 사 년과 오 년 정도 걸렸다고 했다. 갈색 머리의 포리는 자신은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따뜻한 바닷가의 섬에서 살았으며, 그곳 사람들은 배를 만들어 바다를 여행하는 것을 마치 몽골족이 말을 타고 길을 가는 것처럼 쉽게 한다고 했다. 그리고 남자들은 전사도 있지만 생각을 많이 하고 뭔가를 만들고 다듬어 깎고 그릇을 굽는 등의 일을 하는 것도 아주 존경받는다고 말했다. 자신은 배를 타고 가다가 도둑의 습격을 받아 잡혔다가 몸값을 못내 노예로 팔렸는데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팔 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고 말했다. 아마 리미와 개르가 살던 곳보다 더 먼 곳에서 온 것 같았다. 주루와 코타는 자신들의 고향도 여기와 비슷하다고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주루는 농사를 짓던 사람이었는데 나쁜 사람에게 땅을 빼앗겨 홧김에 그 사람을 죽인 다음 고향을 버리고 떠돌다가 산적에게 붙들려 팔리게 되었다고 했다. 코타는 부족장을 지키던 전사였는데, 적들이 쳐들어와서 부족장의 목을 베고 부족장의 해골로 술잔을 만들며, 자신은 온몸을 불로 지진 다음 팔아버렸다고 말했다. 그들은 약 육년 동안 여기저기 팔려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마냥은 사막 부근에 살다가 부족장의 명령을 받고 전사로 뽑혀 더 큰 부족장을 위해 싸우러 먼 길을 가게 되었는데, 그 더 큰 부족은 그렇게 얼굴이 검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위해 아주 먼 길을 가서 동쪽으로 나가싸우며 여러 번 이겨서 아주 먼 적의 땅 동쪽 깊숙이 들어갔다. 그러다가 마지막 싸움에서 마냥의 군대는 패했고 마냥과 검은 얼굴의 동료들은 모두 포로로 잡혔다. 잡힌 동료들은 대부분 점치는 도구로 쓰여 산 채로 제물로 바쳐졌는데 마냥은 운 좋게 거기에 끼지 않고 이웃 부족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다시 몇 번인가 팔리기를 거듭하여 십 년이 넘게 노예로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이곳까지 흘러온 것이다. 싱카는 가장 특이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자기 나라에서는 상당히 높은 전사였다고 했다. 그런데 싱카의 나라에서는 현자가 가장 높고 그 다음이 전사인지라 싱카는 현자가 되고 싶어 했다. 현자들은 때로는 요기라고 불렸는데, 싱카는 요기가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전사로 태어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전사의 길을 걸어야 했다. 그래서 싱카는 자신과 아주 친한 벗과 함께 자신의 신을 모시는 신관에게 현자가 되는 방법을 물었고, 신관은 먼 동쪽 땅으로 가서 아무도 해내지 못한 거대한 과업을 해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싱카보다 힘도 세고 용감했던 벗이 먼저 떠났으나 그 벗은 돌아오지 않았다. 싱카는 벗을 찾으러 나갔다가 남쪽의 작은 부족들에게 잡혔고 북쪽의 스키타이 부족에게 선물로 보내졌다. 그 다음 다시 타타르족에게 팔려오게 된 것이다. 싱카는 지금도 요기의 길을 걷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자신은 이미 어느 정도 고행을 해서 요기의 능력을 약간 지니게 되었다고 말했다. 칼을 부리는 재주도 요기가 지닌 주술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동쪽에 와서 도깨비가 된 것도 다 신의 뜻이며, 고행의 일부라고 말했다. 일곱 명의 도깨비는 다들 태어난 곳이 달랐으며, 살아가는 풍습 또한 다양했고 신기한 동물들이 많다고 했다. 특히 마냥은 수많은 기이한 동물들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목이 하늘에 닿을 만큼 길다란 동물이나 코에 뿔이 솟은 거대한 동물도 있다고 말했다. 더구나 몸이 집채보다 더 크고 사람 키만큼 긴 이빨이 비죽 나와 있으며 코가 아주 길어서 코를 손처럼 쓰는 동물도 있다고 했다. 코끼리를 말한 것이다. 그러자 싱카가 웃으면서, 그 동물은 자신의 나라에도 있으며, 거기서는 그 동물을 길들여서 싸움에 타고 나간다고도 했다. 그렇게 도깨비들 사이에도 공통되는 점이 있자 도깨비들은 더욱 친해지는 듯했다. 그리고 매일매일 신기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치우 일행은 지루하지 않아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치우천이 뭔가 생각을 하다 가 뒤로 약간 처지게 되었다. 치우천은 헌원의 괌인, ‘모든 부족이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치우천은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자 문득 생각에서 깨어났다. 바로 소녀였다. “치우천님?” “아, 소녀님이셨습니까?”치우천이 웃으며 말하자 소녀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깊이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방해되지 않았는지요?” “아닙니다.” 소녀는 치우천과 나란히 말머리를 맞추며 물었다. “아픈 것은 좀 어떠신지요?” “좀 나아졌다가 심해졌다가 되풀이됩니다.” “고생이 많으시군요.” 치우천은 피식 웃었다. “뭐, 오래 전부터 앓고 있는 고질병이니 별수 없죠.” 소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말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하니 치우천님과 함께 이야기할 기회도 별로 없네요.” “그러게요 더구나 제가 몸이 안 좋아서.......” 그 말에 소녀는 대꾸하지 않고 미소만 지은 채 조용히 걸었다. 치우천은 좀 머쓱해졌으나 역시 말없이 걸었다. 사실 이제 소녀와 치우천 사이에는 껄끄러운 문제는 없었다. 단 한 가지, 자신에게 걸려 있다는 그 주술만 빼고는 말이다. 그때 소녀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뭡니까?” “제가 독에 걸린 것은 언제부터 아셨나요?” 예기치 못한 질문이라 치우천은 약간 섬뜩해졌지만 이내 태연히 대꾸했다. “제가 무슨 재주로 그것을 알겠습니까? 제 아우가 앗수라트 부족의 벵구시님이라는 노인에게서 들었다고 합니다만.” “천님이 말씀하신 게 아닌가요?” “허허, 제가 그만한 재주가 있다고 보십니까?” 치우천이 얼버무리려 하자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지우천님, 사실대로 말씀해주세요 제가 보기 싫으신가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러면 왜 저를 그토록 피하시죠?” 치우천은 순간 소녀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안색이 조금 변했다. 그러자 소녀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저는 천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천님은 아프신 분이니 그럴 수 있겠지요. 저는 기다릴 수 있어요 허나....... 제가 싫은 것은 아니지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치우천도 전에 유망의 막사에서 소녀와 알몸이 맞닿은 일을 생각하고는 얼굴이 붉어졌다. “저는 이미 다 알게 되었어요.” “소녀님, 무슨 말인지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 치우천이 묻자 소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천님은 치밀하신 분이지만, 아우님은 그렇지 못하셨어요.” “무슨 말이죠?” “아우님이 앗수라트 부족장에게, 화산까지 열흘내로 서둘러 가야한다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 “그런데요?” “만약 아우님이 그때 앗수라트 노인에게서 제 몸에 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남은 날짜가 열흘이라고 정확히 알지는 못했을 거예요. 사실 제 몸의 독은 열흘이 아니라, 당장 도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독이었으니까요 저에게 독을 잠시 늦추는 약이 있었죠. 유망에게서 열 알을 받았어요. 한 알에 열흘이 가는 약이죠 그러니 그때부터 따져서 백하고 열흘이 지나면, 저는 독이 퍼져서 죽게 되었을 거예요. 앗수라트 벵구시님이 아무리 사람을 잘 본다 해도, 독의 증상만 가지고 제게 남은 날짜를 알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결국 그것을 다 알 수 있는 사람은 유망과 그때 같이 있었던 치우천님, 두 사람뿐이죠. 결국 천님이 저를 구하시려고 아우님께 말하신 게 분명해요 도깨비왕과 같이 사라질 때, 저는 천님이 아우님에게 뭐라고 말하시는 것을 보았죠. 그때 말하셨을 테죠?” 치우천은 속으로 소녀가 정말 머리가 뛰어난 것에 감탄했다. 사실 소녀는 그때 의심스러움을 느낀 후에, 밤낮으로 그 생각만 했던 터라 모든 것을 되짚어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소녀에게 그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소녀는 마음이 모질어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것을 도저히 용서하지 못했다. 제아무리 치우천일지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미 소녀는 유망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독한 마음을 품은 바 있었다. 그러나 치우천을 몹시 좋아하게 되었던 터라 가급적 그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최대한 머리를 쓴 것이다. 소녀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 채 계속 말했다. “저는 분명히 알고 싶어요. 그때....... 그때 치우천님은 정신을 잃은 척하셨지만 결코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었어요. 분명히 그때 치우천님은.......” 치우천은 약간 창피한 것을 무릅쓰고 말했다. “나는 그때 죽을 뻔했습니다. 만약 내가 그때 정신을 잃지 않은 낌새를 보였다면 아마 유망에게 들켰을 것이고, 유망은 그런 나를 절대 살려두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 카린산 부족들은 남자 여자가 서로 좋아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요 하지만 역시 내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네요. 그때....... 참기 힘들었나요?” 치우천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의 자존심이 대단하구나. 만약 내가 스스로 참았다고 한다면 속으로 모욕당한 기분이 될 것이다.” 치우천은 짐짓 경쾌한 목소리로 곧 대답했다. “사실 나는 그때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참았습니다. 그러나.......그러나 사실 그때는 몸이 엉망이 되어서 내 몸 같지가 않았습니다. 만약 내 몸이 정상이었다면.......” 치우천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면서 슬쩍 소녀의 눈치를 살폈는데, 소녀의 눈빛에 안심하는 기색이 흐르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자의 마음을 맞추는 것은 정말 까다롭구나.’ “천님의 병은 언제나 나을까요? 유망이 고칠 수 있다면, 아마 쑤앙마이께서도 고치실 수 있을 거예요.” 치우천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사실 거기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솔직히 무라를 도우러 가는 것이 카린에 가는 첫 번째 이유지만, 두 번째 이유는 소녀님을 고향에 보내드리는 것이며, 세 번째로는 제 병을 고쳐볼까 하는 생각도 있답니다.” 소녀는 기뻐하며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쑤앙마이님은 저를 퍽 귀여워하셨어요. 반드시 고쳐주실 거예요. 저는 사실 카린으로 돌아가서 기쁘지만, 꼭 갈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단지 천님과 같이 가고 싶을 뿐이랍니다.......” 치우천은 그 말을 듣자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녀와 같은 여자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주는데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치우천은 얼굴이 붉힌 채 웃으며 말했다. “그래 주신다면 저도 기쁘기 짝이 없겠습니다.” 이제 둘은 서로 장래를 약속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소녀는 마음이 편해졌다. 소녀는 수줍은 듯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애당초 남자를 위해 키워진 몸이지만, 유망 같은 사람에게 가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가도 좋다는 뜻은 아니랍니다.”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람들은 유망을 대족장이며 대영웅이라 했지만, 형편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렇죠.” 그때 치우천은 유망이 여자에게 비열하게 독을 썼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지만, 소녀는 자신을 보고도 남자 구실을 못했던 머저리라는 의미로 말한 것이었다. 소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유망은 나를 건드리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나는 아직 깨끗한.......” “잘 압니다, 소녀님. 나는 그대에게 한 맹세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은 아무 걱정 마시고 어서 낫는 데에만 신경을 쓰세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소녀는 속으로 다부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천, 당신은 아픈 사람이었으니 내가 이해해. 당신은 그런 머저리는 아닐 거야. 반드시 낫게 해줄게. 아니, 나아야만 해.’ 치우천은 기뻤다. 사실 자신은 저주에 걸린 몸이라 했다. 정말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것이 마음에 걸려 견딜 수가 없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든 터놓고 이야기할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만약 소녀가 적극적으로 나온다면 어떻게 하나, 정말 그때가 되어서도 안 되면 어쩌나 하는 근심이 있던 참이다. 만약 정 안되면 소녀에게 그 사실을 털어 놓아야 하나, 어쩌나 근심도 했다. 그러던 차에 소녀가 순순히 기다려주겠다고 하자 기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쑥스러운 화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치우천은 웃으며 이야기를 바꿨다. “그런데 소녀님의 물건소리는 정말 듣기 좋더군요. 한 번 들어볼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정말 듣기 좋은가요?” 치우천도 원래 음악을 좋아했던지라 이내 활달하게 되받았다. “물론입니다. 소녀님같이 훌륭한 솜씨는 처음 들었습니다. 오늘 저녁에 들려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소녀는 기분 좋게 싱긋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소녀님, 저도 솜씨는 형편없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노래가 있답니다.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그리고 치우천은 말을 조금 옆으로 몰고 가서 저만치에 있던 버들잎을 몇 잎 훑어 따가지고 왔다. 그러고는 주신 노래 하나를 풀피리로 불기 시작했는데, 치우천의 풀피리 솜씨는 정말 훌륭했다. 소녀는 취한 듯, 황홀한 기분으로 그 소리를 감상했다. 한 곡을 불고 나자 치우천이 웃으며 물었다. “형편없죠?” “무슨 말씀을! 정말 훌륭해요!” “칭찬해주시니 고맙군요. 그러나 소녀님의 소리가 더 좋답니다. 오늘 저녁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때 앞에서 치베가 ‘여’ 하며 뒤로 말을 돌려 달려왔다. “천 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아주 듣기 좋구나!” 치우천이 웃으며 버들잎을 치베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치베는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잎사귀에서 그런 좋은 소리가 난단 말이냐? 재주도 좋구나!” “가르쳐줄까?” “정말이냐?” 치베가 다가오자 소녀는 조용히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소녀는 치베와 격의 없이 웃으며 이야기하는 치우천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은 내 것이야. 꼭 그렇게 되어야 해.’ 여행 도중에 별다른 일은 없었다. 치우비는 서툴게나마 지나 말을 배워갔고 발과도 점점 더 친해져 갔다. 치우천의 몸은 그리 좋지 않아 통증이 도지고 가라앉기를 반복했지만 치우천은 참을성이 많은지라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소녀도 저녁에 쉴 때면 간혹 악기를 꺼내 연주하곤 했다. 소녀가 연주하는 것은 현을 뜯는 악기였는데, 그 소리를 듣고 모두가 감탄해 마지않았고 요요 같은 경우는 그 소리를 들으면 피곤이 확 풀린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치우천만큼 소리에 대해 릴이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치우천과 소녀는 같이 음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녀는 치우천에게 아직 악기가 손에 맞지 않아 한 번 잘 살펴보아 악기를 고쳐보겠다는 말도 했다. 소녀는 알뜰할 정도로 차분하고 조용하게 치우천을 보살펴주었다. 치베나 형요 자매 등은 치우비가 발과 함께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한 쌍이 된 것처럼, 치우천은 소녀와 한 쌍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만 울라트만이 비 오빠에 이어 천 오빠까지 짝을 찾은 듯하자 알게 모르게 허탈한 생각에 한숨만 될 뿐이었다 한 번은 울라트가 리미에게 살짝 이런 말을 했다. 울라트는, 비록 리미가 험악하게 생겼다고 하나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가장 가깜게, 그리고 마음까지도 터놓고 지냈다. 리미도 울라트를 대장이나 공주처럼 깍듯이 모셨지만 마음으로는 친딸이나 친손녀 이상으로 예뻐했다. “리미, 만약 말야, 내가 천 오빠, 비 오빠와 다섯 해만 늦게 만났으면 좋았을 건데. 그러면 오빠들은 스물세 살이고 나는 열여섯이니 딱 좋지 않아? 그런데 지금은 오빠들은 열여덟이고 나는 열한 살이니.......” 리미는 그 말을 듣고는 껄껄 웃었다. “울라트님, 도깨비 리미가 말합니다. 울라트님은 너무 똑똑해서 탈이군요.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오히려 울라트님은 저렇게 좋은 오라버니를 둘이나 두셨으니, 그걸로 만족해야지요.” “그건 나도 알지만, 그래도 좀 울적해서.” 리미는 울라트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농담을 건넸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답니다. 차라리 울라트님하고 내가 백 년 뒤에 만났다면 나는 백마흔다섯 살이고 울라트님도 백열한 살이니 둘다 어울리는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랬으면 좋았을 거 같습니다만.” 그 말에 울라트는 울적한 기분을 풀고 깔깔 웃어버렸다.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 “그러니 그런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단 거죠.” “알았어, 알았어. 고마워, 리미.” 울라트는 조숙한 편이지만 아직 어렸으므로 리미와 이야기한 후로는 그런 울적한 생각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일행이 가는 길은 순조로웠다. 수백 명이나 되는 전사들이 가는 길이라 도둑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지나는 길목에 사는 부족들에게 미리 가서 많은 전사들이 지나간다고 알려주어야 하는 번잡한 일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을 하러 오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족들을 만나면 선물을 주고 먹을 것을 바꾸는 정도의 일뿐이었다. 대부분이 지나족이고 워낙 수가 많은지라 북방 종족들에게는 그리 환대받지 못해 잔치도 없었다. 그밖에는 별다른 일이 없는, 단조로운 여행이었다. 작은 사막을 하나 건너기는 했지만 사막 중간을 가로지르지 않고 주변으로 조금 돌아갔으므로 힘든 것은 없었다. 다만 그 사막에서 치우 형제는 물이 가득 찬 호수가 저만치에 보이는 것을 발견했는데, 사막에 익숙한 칭이 웃으며, 그것은 허깨비라서 가까이 가면 길을 잃는다고 했다. 바로 신기루였다. 물이 부족하지 않았기에 가지 않았지만, 물이 모자랐다면 반드시 그리 가보고 싶어졌을 것이다. 치우 형제나 발 등은 신기루를 처음 보았던 터라 몹시 신기해했다. 카린산에서 화산을 떠난 지 두 달 남짓 되었을 때, 일행은 마침내 쿤룬산맥이 보이는 곳까지 이르게 되었다. 파란 하늘 밑에, 거대하게 줄을 지어 솟은 봉우리들이 온통 하얗게,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고 서 있었다. 쿤룬산맥은 만주나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아주 높은 산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산들이 높기 때문에 눈이 녹지 않아 만년설로 쌓여 있어서 희게 보이는 것이다. 치베와 형요는 본 적이 있다고 했지만 치우 형제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거대한 산맥을 처음 보기 때문에 한동안 그 장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만 리미와 싱카는 예전에도 그런 눈 덮인 높은 산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치우천은 감탄하며 말했다. “세상은 정말 넓고, 신기한 곳도 많구나. 바다와 같은 큰물도 있는데, 이런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산도 있다니. 정말 보기 좋군.” 소녀가 살짝 미소 지으며 되받았다. “보기는 좋지만, 지나가려면 힘들 거예요 단단히 각오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직도 보름은 더 가야 할 거예요.” 거기서부터는 칭도 길을 그리 잘 알지 못했기에 현시의 주민들에게 길을 물어가야 했다. 소녀는 그동안 조용히 지냈지만 자기가 살던 부근에 오자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린 말을 아는 사람은 소녀뿐이었기에 소녀가 주변의 마을을 찾아가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 누었다. 그곳 부족들은 외부 사람에 대해 상당히 폐쇄적이었지만, 일단 소녀가 말을 건넨 다음에는 한결같이 소녀에게 몹시 존경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굽실굽실하며 협조적이 되곤 했다. 길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많은 식량과 추위를 감쌀 새털 옷 등을 선물로 바쳤으며, 한술 더 떠서 길 안내를 자청하고 나서는 사람이 많아 싸움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치우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녀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저 사람들이 저렇게 잘해주지 못해 안달입니까?” “이 근방에서 쑤앙마이님을 무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더구나 저는 쑤앙마이의 열세 작은 자매 중 하나였거든요.” “열세 작은자매?” “으음....... 지나 말로 하려니 그렇게 밖에 표현을 못하겠지만, 좌우간 그런 뜻이에요 쑤앙마이께서는 열세 명의 작은 자매를 직접 가르치고 길러서 옆에 데리고 계시거든요 저도 그중의 하나였죠. 지금은 저는 지나족에게 갔으니 다른 자매가 열셋을 채웠겠지만 그래도 여기 사람들은 높이 쳐준답니다.” 그때 옆에서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지켜보던 요요가 물었다. “그럼 큰 매도 있나요?” “큰 매는 모두 부족장이며, 쑤앙마이가 직접 기른 자매들은 아니야. 큰 매는 일곱이 있어. 누루마이도 그중 한 분이시지.” 발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럼 무라는요?” “무라도 열세 자매 중 하나예요 거의 다 나이가 비슷하고 하는 일도 다른데, 쑤앙마이께서는 아주 오래 사셨고 아주 많은 것을 아시기에 한 사람에게 자신이 아는 것을 다 가르칠 수 없어서 나누어 가르치신 거예요.” 발은 재미있는 듯 다시 물었다. “무라는 뭘 배웠죠?” “싸움기술하고 몸 놀리는 기술이죠.” “소녀님은요?” “저는 소리하고....... 또 배운 게 있어요.” “뭔데요?” 발이 끈질기게 묻자 소녀는 조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냥 별것 아니에요.” 사실 소녀는 밤자리에서의 기술을 배운 바 있었는데, 카린에서는 그런 것을 별로 꺼리지 않았지만 지나족이나 주신족등은 퍽 예의나 격식을 따지는지라 소녀는 말하기가 껄끄러웠던 것이다. 치우천이 화제를 돌려 말했다. “누루마이를 먼저 만나고 나면 쑤앙마이님도 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소녀님?” “당연히 그래야 할 거예요 하지만 쑤앙마이를 만나 뵈려면 몹시 힘들어요. 누루마이께서 나중에 말해주실 거예요.” 그때 치우비가 치우천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괴물을 상대할 방법은 생각해뒀어?” 치우천은 웃으며 말했다. “일단 생각해둔 바는 있지만, 나중에 무라와 누루마이를 만나면 더 좋은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니 아직 말할 필요는 없겠구나. 너무 걱정 말거라.” 치우비는 형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린산에 이르려면 눈 덮인 높은 산을 몇 굽이 넘어야 했다. 산등성이 옆을 따르거나 거대한 골짜기 사이를 지나가기도 해야 했는데, 점점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했기에 공기가 희박해졌다. 소녀만 제외하고, 모두가 숨쉬는 게 힘들다고 하소연을 했고, 약한 사람들은 몸을 조금이라도 심하게 움직이면 어지러움증을 느끼거나 몹시 헐떡거려 쓰러지기도 했다. 그런 일행을 둘러보며 소녀가 침착하게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천천히, 조심스레 길을 가야 합니다. 높은 산의 기운 때문에 그런 것이니까, 산을 경배하는 마음을 가지고, 천천히 움직여야 해요 더구나 산에서 시끄럽게 굴면 산이 화를 내어 눈사태를 일으키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 공기가 희박한 것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모두 산의 기운이 신령스러워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 길도 쉽지는 않았다. 만년설이 쌓인 길은 미끄럽기 그지없었기 때문에 상망은 행여 공손발 같은 중요한 사람들이 다칠까 봐 먼저 전사들을 시켜 길을 살피 고, 험한 길을 고르면서 나아가도록 했다. 그 선발대들은 눈에 미끄러져 절벽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감쪽같이 눈으로 살짝 덮인 빙하에 빠지기도 했다. 더구나 높은 산에서 한번 바람이 불면 여름인데도 견딜 수 없으리만큼 추웠다. 모든 사람들은 산 아래 부족에게서 얻은 새털 옷 등을 마구 껴입고서야 버틸 수 있었는데, 그나마 수가 많은 지나 전사들에게는 돌아가지 않아 몇몇은 몸살과 동상에 걸리거나 얼어 죽기까지 했다. 한 번은 큰 산비탈을 돌아가는데 눈사태를 만났다 누군가가 거대한 산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눈더미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자 소녀는 안색이 변하더니 다급하게 외쳤다. “서둘러 말을 달려 비탈을 빠져나가야 해요.” “저 멀리서 쏟아지는데 윌 그래요?” 발이 멍하니 말하자 소녀가 다시 외쳤다. “여기까지 금방 와요.” 울라트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 봐야 눈이잖아요?” 그러나 치우천은 위험을 예감하고 급히 외쳤다. “모두 달려야 한다!” 경험 많은 상망도 외쳤다. “짐을 버려도 좋으니 무조건 달려라! 달려!” 처음에는 물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눈더미가 잠시 후 거대한 눈사태가 되어 밀물처럼 다가오자 굉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르르 땅이 울리는 것이 느껴지자 모두가 이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몸이 떨리고 식은땀이 솟아났다. 그때부터 모두는 짐까지 일부 버린 채 죽을힘을 다해 달렸는데, 치우 일행은 앞장서서 길을 갔기에 괜찮았지만 말미에 따라오던 지나 전사들은 달리다가 눈사태에 일부 휩쓸려 버렸다. 거대한 눈더미가 굉음을 내며 급류처럼 떠밀려 내려가는 것은 정말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그 안에 있던 모든 것이 삽시간에 휩쓸려 눈에 파묻혀 사라져 버렸다. 치우 형제나 상망, 비휴 등 다섯 기인들도 눈사태의 무시무시한 위력 앞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울라트와 발은 눈사태를 벗어난 다음에도 엄청난 공포를 이기지 못해 손을 후들후들 떨기까지 했다. 한꺼번에 스무 명 이상이 말과 짐과 함께 눈사태에 휩쓸려가 버렸는데 흔적조차 남지 않아서 그들을 찾을 수도, 찾아볼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마침내 누루마이가 사는 산 너머 비탈에 도달했을 때에는 모두 서른세 명의 지나 전사들이 죽거나 실종되었고 쉰 아흡 명이 심하게 앓고 있었다. 이제 산 하나만 넘으면 누루마이가 사는 마을이라고 소녀가 말하자 상망이 치우천에게 제안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면 마을사람들이 놀랄지도 모르니 몇몇만 먼저 가보 세. 아픈 사람도 많고 하니.”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일단 치우 쪽 일행 중 치베와 형요 자매가 도깨비들과 함께 남아 있기로 했고 지나족은 신도 울루가 전사들과 함께 기다리기로 했다. 전사들 중에서는 쉰 명만을 뽑았다. 그리고 요요와 미요는 소녀와 친해진 터라 가고 싶다고 졸라서 같이 따라가게 되었다. 누루마이의 마을은 건너편 산비탈에 있었는데, 마을사람들 중 밖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거의가 여자들이었다. 남자들은 대부분 집안에 있었다. 무장을 한 여전사들은 태산 회의 때 보았던 여전사들과 똑같은 차림이었으나 자기 마을에 있어서인지 표범 가면은 쓰고 있지 않았다. 마을 여전사들은 소녀를 알아보고 모두 기뻐하며 반겨 맞이했다. 곧이어 누루마이의 부족 사람들 모두가 몰려나와 일행을 환영했다. 이때도 역시 남자들은 집의 문틈이나 창으로 기웃거렸을 뿐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곧 사람들에 둘러싸여 일행은 산비탈 위에 높이 자리 잡은 누루마이의 거처로 향했다. 누군가가 먼저 소식을 전했는지 누루마이는 서둘러 나와 일행을 맞았다. “와주었군! 와주었어! 정말 기쁘네, 기뻐!” 누루마이도 횐 표범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아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풍성한 몸매에 비해 의외로 용모는 수수한 편이었다. 그러나 태산 회의 때보다 더 옷차림이 화려했다. 누루마이는 사람들을 반갑게 맞아 자리에 앉게 하고, 일단 음식과 술을 들도록 해주었다. 그 사이 누루마이는 소녀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처음에는 발을 힐끗 바라보며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가 다시 얼굴이 밝아졌다. 그것을 보고 치우천은 생각했다. ‘아우와 발이 같이 있으니 일이 틀렸구나 싶었나 보군.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온 것을 보고 다시 용기가 생겼나보다. 아차! 누루마이가 혹시 소녀님에게 나에게 걸린 주술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닐까?’ 잠시 후 누루마이는 소녀와 이야기를 마치고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카린의 누루마이가 말하오. 치우천, 치우비 형제분만이 아니라, 지나족의 많은 영웅들까지 우리를 도우러 와주시니, 정말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자 치우천과 상망이 동시에 대답했다. “주신 사울아비 치우천이 말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약속을 지키려고 왔을 뿐입니다.” “지나 화산족의 상망이 말합니다. 도움이 된다면 기쁘겠습니다.” 소녀는 기쁜 듯, 함께 온 사람들을 누루마이에게 일일이 소개해주었다. 특히 누루마이는 치우비와 자웅을 가리기 어려운 역사(力士) 끽구도 함께 온 것을 보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누루마이의 얼굴에는 어느덧 근심하던 빛이 사라져 있었다. 치우 형제와 끽구, 비휴 등등이 다 왔는데 괴물을 이기지 못하면 거짓말이라 여기는 듯했다. “안 그래도 괴물과 약속한 날짜가 며칠 남지 않아서, 내 전사들을 데리고 내일쯤 무라의 마을로 출발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약속한 날짜는 이레 정도 남았고, 무라의 마을은 사흘정도 걸립니다. 그러니 좀 쉬시다가 가셔도 좋을 것입니다.” 치우천이 대답했다. “일단 무라의 마을로 간 다음 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상망이 낄낄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오늘은 쉬고 가자구. 아이구, 이젠 허리가 뻐근해서 말야.” 언제나 말이 없던 비휴가 오랜만에 말문을 열었다. “쑤앙마이님은?” 누루마이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비휴에게 대답했다. “오늘은 일단 쉬십시오. 그런 뒤 무라의 마을로 갔다가, 괴물을 잡고 나서 쑤앙마이님을 만나 뵈러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한 명의 여전사가 달려와 엎드렸다. 누루마이가 조금 인상을 쓰며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시끄러운가?” “누루마이님! 밖에 한 괴이한 사람이 나타나서, 방금 오신 손님들을 만나겠다고 합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썩는 냄새가 나며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짐작할 수도 없이 늙고, 괴물 같아 보이는 사람인데.......” “괴물 같은 사람?” 누루마이가 의아해하자 치우천이 무슨 일인가 물었다. 누루마이가 대답해주자 치우천은 곧 웃으며 되받았다. “비울걸이 왔나 보군요.” “비울걸은 누구인가?” “도깨비 왕이라 불리는 사람입니다. 나를 찾아온 것이니 내가 나가봐야겠습니다.” 비울걸이 나타났다는 소리를 듣자 발과 소녀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일어나지 않았다. 미요는 그저 픽 웃었고 요요는 비울걸이 싫은지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치우천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웃으며 치우비와 함께 일어섰다. 상망과 비휴, 끽구는 마치 그림자처럼 치우 형제 의 뒤를 따랐다. 밖으로 나가자, 누루마이의 여전사 플이 마흔 명 가량이나 모여서한 노인을 포위하듯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비울걸이었다. 비울걸은 여전사들이 에워싸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다는 듯 태연히 서 있다가 치우천이 나타나자 껄껄 웃었다. “요 녀석! 카린으로 오면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듯싶었느냐?” 치우천도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내가 도망친 것이 아니라 비울걸 당신이 내 옆에서 떠나갔던 것 아니겠소?” “그건 그렇지만, 좌우간 날 떼놓을 생각은 버리거라.” 치우천이 웃으며 말했다. “같이 들어갑시다. 그동안 고생깨나 한 모양이구려. 몸 냄새가 더 심해졌으니 말요.” 비울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몸 여기저기를 킁킁거리고는 심드렁하게 물었다. “냄새? 무슨 냄새 말이냐? 나는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치우천이 껄껄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됐습니다, 됐어요. 들어갑시다. 누루마이께서 좋은 음식을 잔뜩 내셨다요.” “암, 그래야지. 먹을 게 없으면 네놈을 잡아먹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럴 줄 알고 두 달 동안 몸을 안 씻었소. 날 먹으려면 비위가 좀 상할 거요.” “바보 같은 놈. 누가 생으로 먹는대냐? 잡아서 잘 씻어 먹으면 아무 일 없느니라.” 치우비와 상망은 치우천과 비울걸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둘의 사이가 어떤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어 의아하기만 했다. 비울걸은 들어오자마자 누루마이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가장 좋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길다랗고 지저분한 손톱으로 음식을 쿡쿡 찔러서 먹기 시작했다. 소녀와 발, 누루마이까지도 안하무인인 비울걸의 모습과 그의 몸에서 풍기는 말할 수 없는 악취 때문에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다. 누루마이는 괴물 같은 늙은이가 들어와 설치는 꼴을 보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간신히 눌러 참고 있었다. 치우 형제의 도움이 절실한 때에 치우천의 친구를 나무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보다 못해 치우비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비울걸님, 나랑 다시 한잔 안 하시겠수?” 비울걸은 통째로 구워진 향기로운 새고기를 손톱에 꽂아들고 하필 새대가리를 덥석 물더니 우걱우걱 통째로 씹으면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술! 좋지!” “그런데 이 술과 음식은 누루마이가 내신 것이니, 누루마이께 한번 인사라도 하고 듭시다. 어떻습니까?” 치우비는 제 딴에는 머리를 굴려 말한 것인데 별안간 비울걸이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입에 있던 고기조각들이 마구 튀어나와 사방에 우박처럼 쏟아졌다. 소녀는 뒤로 물러섰고 공손발은 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야! 괴물같.......” 그때 상망이 재빨리 달려들어 공손발의 입을 틀어막아 더 이상의 험상궂은 욕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비울걸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구먼! 그래! 누루마이란 분, 어디 계시오? 잘 먹겠소이다.” 비울걸은 누루마이를 바라본 것도 아니고 그냥 말로만 떠든 것이다. 누루마이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 뭐라 한마디 하려 했으나 치우천이 살짝 눈짓을 하자 억지로 눌러 참고는 손을 들어 술을 가져오게 했다. 몇 명의 여전사가 커다란 술동이를 여러 개 가져오자 비울걸은 치우비를 보며 말했다. “이 녀석! 덩치야! 술 한 잔 하자더니 뭐 하느냐?” 그러다가 비울걸은 끽구의 모습을 보고는 웃으며 덧붙였다. “어? 더 큰 덩치가 있네그려. 자네도 한잔 하겠는가?” 끽구는 비울걸이 설치는 모습을 보고는 인상을 쓰면서 다가갔다. “좋소. 나도 같이 듭시다!” 그러자 비울걸은 ‘히히’ 웃으며 큰 술동이 하나를 가리켰다. “하나씩 마시자.” 치우비는 전에도 한 번 비울걸과 술을 마셔봤던지라 곧 술동이 하나를 들었고 끽구도 하나를 들어올렸다. 비울걸은 연신 ‘히히히’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커다란 술동이가 저절로 허공에 떠오르더니, 비울걸의 머리 위로 뒤뚱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비울걸은 다시 ‘히히’ 웃었다. “난 요새 더 게을러져서 말야.” 그러고는 비울걸이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딱 벌리자 술동이가 허공에 뜬 채 기울어졌고 곧이어 술이 콸콸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쏟아져 내린 술은 비울걸의 딱 벌린 입 안으로 정확하게 퍼부어졌다. 치우비와 끽구는 너무도 놀라서 술동이를 든 채 입만 딱 벌리고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비울걸은 한 동이의 술을 다 마셔버린 것이다. 술이 다 부어지자 술동이는 허공에서 ‘팍’ 소리를 내며 깨졌고, 술동이의 조각들이 사방에 와르르 흩어졌다. 누루마이와 소녀, 발 등은 놀라서 사방으로 튀는 조각들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비울걸이 더러운 옷소매로 입기를 쓱 닦고 물었다. “너흰 왜 안 마셔?” 누루마이는 그제야 이 기괴하기 짝이 없는 생김새의 노인이 정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신통한 재주를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치밀었던 울화가 어느 틈에 가셔버렸다. 놀란 것은 소녀나 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요요만은 전에 비울걸의 기이한 재주를 본 적이 있는지라 손뼉을 치며 재미있다고 웃어댔다. 어느 틈에 비울걸이 뒤뚱거리며 누루마이에게 가더니, 그 등 뒤에 걸어놓은 표범 가죽을 가리켰다. “이거 좀 써도 되겠소?” 누루마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울걸은 표범가죽의 머리를 쓱 손톱으로 긁었다. 그 손톱은 날카롭기 이를 데 없어서, 한 번 그었는데도 표범의 머리 부분이 툭 떨어졌다. 비울걸은 그것을 얼굴에 붙이며 말했다. “가리고 다녀야 쓰겠구먼.” 비울걸이 표범 가죽을 얼굴에 대자, 그 가죽은 마치 풀로 붙인 것처럼 비울걸의 얼굴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비울걸의 기이한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표범 가면을 쓴 비울걸의 모습은 그야말로 괴물 같았다. 별안간 비울걸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엉엉 울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비울걸이 왜 그러는지 의아하여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오직 한 사람, 치우천만이 웃으며 비울걸에게 물었다. “이봐요, 비울걸. 취했소?” “뭐가 취했다는 거냐? 흐엉엉.......” “안 취했으면 왜 갑자기 울고 그러시오?” “사람은 많은데,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무섭다거나 우습게보고, 잔재주 몇 가지를 부렸다고 또 놀라고, 나중에는 존경하는 시늉을 보이는 잘아터진 사람만 가득하니 어찌 울지 않을 수 있느냐? 흐엉엉......, 이런 좁쌀 같은 사람들을 위해 내가 수천 리 길을 바쁘게 오고 갔으니 억울해서 우는 것이다, 허엉엉 .......” 치우천은 ‘허허’ 웃어버렸으나 누루마이나 다른 사람들은 완전히 비울걸의 그 말 몇 마디에 그야말로 잘아터진 좁쌀 같은 사람이 되어 버린 터라, 이번에는 화가 났다. “세상에, 사람 같은 사람은 다섯 사람도 안 되는구나. 흐엉엉.......” 보다 못한 상망이 툭 내뱉듯 빈정거렸다. “사람 같은 사람은 다섯도 안 될지 모르지만, 사람 같지 않은 사람으로 말하면 당신이 제일이구려.” 비울걸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울음을 =1치고 벌떡 고개를 들더니 가면의 눈구멍으로 오싹한 눈빛을 보내며 상망을 째려보았다. 상망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쥐 수염처럼 난 수염을 배배 꼬며 눈썹을 찡긋거렸다. “말 잘했구려, 말 잘했어 물론 나는 도깨비 왕이니 사람 같지 않소이다. 그러면 댁은 쥐새끼의 왕이시오? 나보다 더 사람 같지 않으니말요.” 비울걸이 이죽거리자 상망은 화내지 않고 커다랗게 외쳤다.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짖는 소리가 들려! 어디서 개새끼가 짖나?” 상망이 욕을 하자 갑자기 비울걸이 상망에게 넙죽 절을 했다. “인사드립니다, 아버님.” 그 말 한마디에 상망은 졸지에 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절을 받은 상망이 대꾸할 말도 잊고 멍하니 있었고, 여러 사람들은 나이도 많은 두 사람이 서로 아웅다웅하자 웃음을 참기 어려워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특히 공손발은 너무도 우스운지 배를 움켜잡고 깔깔 웃었다. 그래도 그중 전혀 웃지 않은 사람은 언제나 냉랭한 비휴뿐이었다. 사람들이 와르르 웃자 비울걸도 ‘히히’ 웃으며 일어섰다. “재미있었소?” 비울걸은 휘적휘적 문을 나서려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길다란 손톱으로 구운 새 몇 마리를 꿰어 들었다. “하나, 둘, 셋....... 아이쿠, 네 번째는 못 꿰겠구나.” 그 말에 치우천이 빙그레 미소를 짓자 비울걸은 치우천을 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 빌어먹을 놈아. 나중에 다시 만나자. 다음번에는 잡아먹기 좋게 꼭 몸을 깨끗이 씻고 있어라.” 그리고 비울걸은 새고기를 들고 다시 문을 나서서 눈 깜짝할 새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비울걸이 도깨비 왕이라지만 사람들은 정말 도깨비에 홀린 듯했다. 공손발이 그때까지도 계속 킥킥거리며 웃자 상망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아니, 아가씨! 그만 좀 웃으십쇼! 이 영감이 당하는 게 그리도 고소합니까요?” “고소하지! 고소해! 전에 나를 돌려보내려고 구박한 게 누구였는데 내가 안 고소하겠어? 호호호!” 공손발이 일부러 더 웃자 상망은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치우천에게 말했다. “도대체 저 미친 녀석은 왜 그러는 건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치우천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나도 모르겠습니다. 저 사람이 하는 일은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는답니다.” “자네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항상 날 잡아먹겠다고 하는 것 정도만 압니다.” “자네가 저놈이 다시 세상에 나을 마음을 먹게 했다면서?” “워낙 변덕이 심한 사람이라 아무도 모릅니다.” 상망은 치우천과 비울걸 사이에 무엇인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치우천이 딱 잡아떼자 더는 추궁하지 못했다. 덕분에 잔치는 흐지부지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모두 좋은 방으로 각자 안내되었다. 누루마이는 사람을 시켜 밖에 진을 치고 있는 지나 전사들에게도 좋은 음식과 술을 보내주도록 했다. 치우천은 치우비와 함께 같은 방에 들기로 했는데, 치우 형제는 누루마이가 직접 안내했다. 누루마이가 치우천에게 나지막이 지나 말로 물었다. “이보게, 자네. 괴물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은 생각해보았나?” 치우천은 곧바로 대답했다. “생각했습니다.” “무슨 방법인지 알아도 되겠나?” “나중에 무라님을 만난 다음 말씀드리겠습니다.” 누루마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치우비의 얼굴을 한 번 보고 다시 물었다. “자네 아우와 무라가 같이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있단 말인가?” 치우천이 웃자 지나 말을 이제 좀 알아듣게 된 치우비도 멋쩍게 웃었다. “제 아우의 입장이 난처해지니 그 이야기는 사람들 앞에서는 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누루마이.” 누루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손발님 때문에라도 그런 소리는 할 수 없겠지. 염려 말게. 자네 ‘형제’에게 조금이라도 누가 될 말은 입에 올리지도 않겠네.” ‘형제’라는 단어에 누루마이는 약간 힘을 주었다. 치우천은 그 말의 뜻을 알아듣고 역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신의 몸에 걸린 주술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겠다는 누루마이의 의도를 눈치 챘기 때문이다. “지나족들은 제가 달의 기운을 지닌 보석으로 괴물을 물리치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는 소용이 없지요. 그렇지요?” 누루마이는 반색하며 대꾸했다. “그렇네. 혹시 아주 큰 물속에 사는 조개가 만든 보석을 말하는 것인가?” “맞습니다.” “그것은 빛깔만 달빛 비슷할 뿐이지 소용이 없다네. 유망에게 소녀를 바치고 얻은 것이 그 보석인데, 우리는 공연히 헛수고만 했다네.” “좌우간 그 이야기도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보석을 저에게 좀 보내주셔서 무기 끝에 바르게 해주십시오. 겉으로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 치우천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웃었다. “그래야 괴물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누루마이는 궁금해 했으나 치우천은 더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누루마이가 돌아간 다음 치우비가 물었다. “형, 무슨 방법을 쓸 것인지 알 수 없을까? 아무래도 궁금해. 그리고 이제 카린에 도착했으니 헌원님께도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생각은 정해졌어?” “하긴, 이제 이야기할 때가 된 것 같구나.” 치우천은 아무도 없는 밖을 보고 외쳤다. “미요! 요요! 혹시 밖에 있니?” 그러자 곧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고, 요요와 미요가 창 밖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치우비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둘이 왜 밖에 있지?” 치우천이 웃으며 미요와 요요에게 말했다. “역시 내 생각대로구나. 네 언니가 우리 주위를 항상 지키라고 했니?” 미요가 부끄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정말 고맙구나. 잘 부탁한다.” “염려 마세요.” 미요는 역시 빈틈없이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치우천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치베나 형요 자매, 울라트 등과는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나이미 생각을 정했단다.” 치우비는 형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가슴이 약간 두근거렸다. 치우천은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딱 잘라 말했다. “나는 우리가 헌원님을 따를 수 없다고 생각해. 아니, 따라서는 안 된다.” 치우비는 갑자기 낙심한 표정이 되었다.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치우천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비야, 발하고의 일은 안됐다만 그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나도 너를 보니 마음이 괴롭구나. 하지만 별수 없어.” 치우비는 한참이나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이윽고 물었다. “왜.......? 대체 왜 그런 거지? 말해봐, 응?” 치우천이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작은 이유부터 이야기해볼까? 헌원은 너무도 위험한사람이다 전에 한웅님 가마가 습격당했던 일 기억나지?” “그렇지. 하지만 그건 유망이 한 짓이잖아.” “물론 유망이 가리족을 시켜 번개범을 끌어냈을 테지. 하지만 신수말고 소 떼가 있었잖아.” “그렇지.” “그 소 떼는 누군가가 늑대를 부려서 한웅님을 습격하게 만든 거다. 그런데 그 늑대를 누가 부렸을까?” “그건 아무도 모르잖아.” “아니다. 세상이 넓고 사람도 많지만 그렇게 많은 늑대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그게 누구지?” 치우천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비휴.” 치우비는 깜짝 놀랐다. 비휴가 늑대 선인이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비휴가 한웅의 가마를 습격한 장본인이라고는 미처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문득 치우비의 뇌리에 헌원을 처음 만나 비휴를 소개받았을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이 눈이 날카로운 이는 비휴라고 하네. 천랑대의 대장일세.’ ‘천랑대란 무엇인가요?’ ‘늑대로 이루어진 군대를 말하는 것이네.’ ‘늑대군대라고요?’ ‘그렇다네. 비휴는 기인이네. 늑대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네. 원래 선인이었지.’ “설마....... 설마.......” 치우비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치우천도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나도 설마 했었다.” “하지만....... 꼭 비휴라는 증거는 없잖아.” “물론 비휴라는 증거는 없다. 그러니 대놓고 따질 수가 없지. 하지만 그렇게 수많은 늑대를 손발처럼 부릴 수 있는 사람도 세상에 다시없을 것이며, 그런 사람이 작정하고 한웅님의 가마를 습격했을 리도 없다. 늑대만이 아니라 천 마리가 넘는 소 떼를 버리면서까지 굳이 한웅님을 습격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믿어지질 않아.” “증거는 또 있다. 한웅님의 가마가 소 떼에게 쫓긴 것은 번개범을 만난 바로 다음의 일이다. 사실 번개범을 만나 무리가 헝클어지지 않았다면 그 정도의 소 떼로는 한웅님을 어찌할 수 없었을 테지. 그렇다면 그 소 몌를 부린 사람은 번개범이 한웅님을 덮칠 것을 미리 알고 있었고, 한웅님의 가마가 따로 빠져나오리란 것까지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번개범은 유망이 불러낸 것이니, 그때 유망의 부하였던 헌원 밖에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을 사람이 없다 그러니 헌원이 별도로 계획을 세워 비휴를 보내 한웅님을 해치려 한 것이 분명하다.” 치우비는 머리가 갑자기 복잡해졌다. “헌원이 왜 한웅님을....... 한웅님을 해치려 했단 말야?” “그건 나도 아직 모르겠어. 하지만 의심스러운 일이 또 있다.” “그게 뭔데?” 치우천은 좀 슬픈 듯이 웃어 보였다. “비야, 우리가 왜 이런 꼴이 되었는지 기억하겠지? 왜 죄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는지?” “그거야 당연히 치우가람 형제 놈 때문에.......” “맞아. 그런데 내가 궁금한 것은 바로 그거였어. 내가 소녀님과 함께 토굴에 갇혀 있을 때, 치우가람 놈은 분명 유망의 막사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치우가람만이 아니라주신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어. 맞지?” “그렇지.” “더구나 유망의 부하들도 그 사실을 전혀 몰라. 나와 소녀님이 토굴에 갇힌 것은 유망과 형천밖에 모른다. 유망은 그 일이 창피한 일이라 해서 막사를 지키던 자기 부하들까지 모조리 죽였으니까. 토굴을 지키던 놈들은 있지만 그놈들도 내가 누군지는 몰랐겠지. 단 한 사람, 형천만 아는 일인데 형천은 유망을 배신할 사람이 아니지. 그런데 치우가람 놈은 나와 소녀님이 토굴에 갇힌 것을 잘 알고 있었어. 그래서 그것을 트집 잡아 우리를 이 꼴로 만들었지. 치우가람 놈이 어떻게 알았을까? 그 사실을 누가 가르쳐주었을까?” 사실 치우비로서도 그 점이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치우비가 어눌한 목소리로 되받았다. “그놈이 넘겨짚은 것은 아닐까? 형님이 소녀님에게 부탁할 방법이 달리 없었다고 보고.......” 치우천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절대 아니지. 소녀님은 카린에서 바쳐진 사람이고, 바로 한웅님께 바쳐졌다. 그런 여자가 토굴에 갇혀서 죄인을 만났다고 누가 넘겨짚을 수 있을까?” “그러면.......?” “따지고 보면 간단해. 내가 갇히고, 소녀님이 갇히는 걸 누군가가 본 거야. 그리고 그 다음에 치우가람 놈에게 그걸 알려준 거지.” “그게 누굴까?” 치우비는 다시 생각하다 보니 울컥 화가 나서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우드득 하고 손마디가 꺾이는 소리가 들리자 치우천이 조용히 말했다. “너도 알고 있을 걸?” “나는 정말 모르겠어.” “내가 무슨 엄청난 재주를 부린 것이 아냐. 우리 모두 그 사람을 보았어.” “누군데?” “토굴에서 빠져나오던 날, 우리는 두 사람을 만났지? 그 사람들 말고는 나와 소녀님의 일을 아는 사람이 없어.” 그 말에 치우비는 다시 깜짝 놀라 안색이 변했다. 확실히, 토굴에서 빠져나을 때 치우 형제와 일행은 두 사람을 만났다. 치우천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상망과 지. 그들이 알려준 거야.” 치우비의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들은 우리가 도망치도록 유망의 부하들 눈을 돌려주었잖아.” 치우천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기억한다. 나는 그때 분명히 들었어. 그들은 내가 갇힐 때부터 이미 숨어서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고 했어. 그러면서 상망은 생색까지 냈지. 헌원님이 나를 무사히 나가게 해준다고 했는데, 어찌 그 약속을 어기겠느냐고 말야.” “믿을 수가....... 믿을 수가 없어.” 치우비가 고개를 젓자 치우천은 못을 박듯이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헌원을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한 말 있지? 헌원이 우리를 작게 보기를 바란다고. 그리고 헌원이 우리를 구하지만, 언젠가는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을 거라고 말야. 예상이 틀리지 않았더군. 헌원은 주신의 사정을 손바닥처럼 잘 알고 있었어. 우리와 가장 사이가 나쁜 치우가람 형제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면 알아서 다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치우비는 이제는 멍해졌다.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지는 것 같았다. 치우천은 조용하지만 똑똑히 들리도록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헌원은 분명 우리를 좋게 보았을 거야. 그러나 네가 태산 회의 시합 때 대용사로 뽑히고 너무 두각을 보이자, 헌원은 이대로라면 좋지 않다고 여겼을 테지. 우리는 그때 너무 유명해졌으니 그대로 주신으로 돌아가면 아마 큰 자리에 올랐겠지. 그러면 헌원과는 영영 이별이나 마찬가지였을 거야. 헌원은 우리에게 욕심을 냈으니 어떻게든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하여 발붙일 곳이 없게 만들어야 했겠지 그래서 술수를 부렸을 거야.” “그건...... 그건 아냐.......” 입 안이 타들어 가는지 치우비는 간신히 말했다. “만약 우리를 죽이려 했다면 왜 나중에 우리가 찾아왔을 때 죽이지 않았겠어? 응?” 여전히 못 믿겠다는 듯이 고개를 마구 젓는 치우비를 보며 치우천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 우리는 이미 주신과는 끊어진 상태였는데 왜 죽이겠니? 태산회의의 대용사 치우비가 주신에 있다면 물론 없애버리고 싶을 정도로 무서운 상대겠지만, 자기 품으로 날아들었는데 얼씨구나 하지 않았을까? 하하하, 게다가 자기 딸까지 준다고 했는데?” 치우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야, 발은 헌원이 아주 귀여워하는 막내딸이고, 지나족들이 몹시 귀히 여기고 받드는 사람이다. 십육기인 같은 사람들도 공주님처럼 받들어 모실 정도로 귀한 사람이야. 더구나 지나족은 원래 여자들을 그렇게 마구 나다니게 하지 않는단다. 그런데 헌원은 그런 막내딸이 다른 부족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는데도 조금도 말리거나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 너는 한웅님의 따님이 허락도 없이 지나족 남자와 좋아하게 되었다면, 한웅님이 가만히 계실 것 같다고 생각하니? 그것과 마찬가지다.” 치우비가 몸만 떨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치우천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비야, 그것만이 아니다. 발은 네가 보고 싶어서 아버지 곁을 도망 나와 지금 여기 있지? 상망과 비휴도 처음에는 발을 돌려보내려 했어. 하지만 나중에는 그러지 않았지. 왜 그랬겠니?” 치우비는 간신히 대답했다. “그건....... 그건 발이 우기고....... 상망을 협박했으니까 그랬지.” 치우천이 다시 살짝 웃었다. “상망은 비록 우스꽝스럽게 굴지만, 재주가 대단한 사람이다. 상망이나 비휴가 어떤 사람인데, 그런 유치한 협박에 넘어가겠느냐? 상망은 헌원이 발을 잡지 않고 놓아준 뜻을 알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 준 것이다.” “놓아줘?” “아마도 헌원은 이런 생각을 했을 거다. 내가 카린에 간 이후에 헌원을 따를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 정한다고 했으니, 자기 딸이 가서 아우와 친한 모습을 보이면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면 되었지, 손해를 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야. 여자가 안 보고는 못 견디겠다고, 아버지에게서 도망쳐서까지 쫓아왔는데,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사내가 어디 있겠니? 그래서 도망치는 것을 그냥 못 본 척 놔둔 것이 분명하다. 상망도 그런 생각을 했기에 그냥 못 이기는 척 놔둔 것이고.” 치우비는 거의 암담한 표정으로 한참 릴은 생각을 하다가 오락가락하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정말 그런 건가?” “물론 내가 결정을 내린 것은 그런 이유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헌원의 뜻이 옳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모든 부족이 하나로 합쳐진다는 것은....... 한마디로 꿈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항상 그 꿈이 이루어진 다음의 달콤한 생각만 하지, 그 과정이 얼마나 쓰고 험난한지는 생각하지 않지. 더구나 그 꿈이 이루어진다 해두 과연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보기 좋고 멋진 모습 그대로일까?” “그만! 그것으로 충분해. 사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모든 부족이 합쳐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래? 좀 들어보고 싶구나.” 치우천은 믿음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실 치우비도 그동안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단 치우천은 모든 일을 꼼꼼히 생각하여 자신들이 당한 일의 시작과 끝을 모두 짚어서 풀어낸 반면, 치우비는 골똘히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부족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옳은가?’라는 것만 생각해왔던 것만이 달랐다. 치우비도 나름대로의 답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치우비는 간단히 말했다. “모든 부족이 평화롭게 지내면 그만이지, 모든 부족이 합쳐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치우천은 아우의 생각이 자신과 일치하자 자신도 모르게 흐뭇해졌지만, 계속 물어보았다. “그러면 부족들끼리 싸움이 계속 날 것 아니냐?” “모든 부족이 하나로 합쳐졌다고 싸움이 안 나나? 더구나 그 많은 부족을 무슨 수로 하나로 합친단 말야? 가령 그대로라면 주신도 망해서 지나족이 되어야 한단건데, 헌원에게 지나족이 망해서 주신이 되어도 그렇게 할 거냐고 물어보면 되지 않겠어?” 치우비의 말은 간단했지만 실로 치우천의 뜻과 똑같았다. 치우천은 활짝 웃으며 치우비의 어깨를 툭툭 쳤다. “비 녀석! 나는 자질구레하게 길게 이야기해야 할 것인데 너는 아주 꼭 찔러 말하는구나. 네 말 그대로다!” 두 사람은 이미 뜻이 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치우비는 갑자기 서글픈 표정이 되어 눈가가 붉어졌다. 아마도 발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보고 치우천이 웃으며 물었다. “비야, 너 발 생각하지? 그렇지?” 치우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치우천은 치우비의 등을 두드리며 웃어보였다. “일이 참 힘들기도 하구나. 그러나 염려 마라. 헌원을 따를 수 없다고 그 딸까지 버릴 수는 없지 않겠니? 내가 그동안 발을 조용히 지켜보았는데, 겉보기에는 좀 사나운 것 같아도 속마음은 몹시 착하고 좋은 사람 같더구나.” 그러면서 치우천은 잠시 심호흡을 하여 숨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할 일이 아주 많기도 해. 지금 지나족의 다섯 기인과 오백 명의 전사들은 우리가 혹시 딴마음을 먹고 헌원을 떠날까 봐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 그건 너도 알지?” 치우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치우천도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계속 말했다. “그 사람들을 따돌려야 한다. 거기다가 우리는 괴물도 물리쳐야 하고, 내 다리도 고쳐야 하며, 발까지 데리고 가야 한다.” “데리고 간다고?” 치우천이 싱긋 웃어 보였다. “애당초 네가 좋아 아버지 곁을 떠나온 여자 아니냐? 그 여자를 어찌 버리고 가겠니? 같이 데리고 가야지, 아니, 잡아서라도 갈 거다, 하하. 발이 만약 원망하거나 헌원이 이를 갈아도 다 내 탓으로 돌리거라. 이 치우천, 여자를 막 다룬 적은 없지만 이번만은 좀 실례 해야겠구나. 나는 내 아우가 시름시름 앓으며 말라가는 꼴을 절대 볼 수 없으니까.” 치우비는 갑자기 마음이 풀리는 것 같았다. 사실 발을 잡아간다는 것은 좀 안된 일이기는 했지만, 헤어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사실 발도 그동안 아버지를 원망하는 소리를 여러 번 해오지 않았던가? 치우비는 형의 마음이 고마워서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구태여 입으로 고맙다는 말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둘 다 말은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치우천은 웃으면서 슬쩍 한마디 보탰다. “거기다가 우리는 헌원을 떠나면 당장 갈 곳이 없으니, 주신으로 돌아갈 방법까지 찾아야겠지?” 돌연 치우비의 눈이 빛났다. “주신으로 돌아갈 수 있겠어?” “생각해둔 게 있다. 뭐, 당장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두 해 안으로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치우비는 속으로 몹시 기뻤으나 사실 너무도 일이 복잡하고 힘들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우선 괴물을 물리치는 것도 큰일이야. 거기다가 다섯 기인도 보통사람이 아닌데다, 그들에겐 오백 명이라는 전사들까지 있어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그들을 이길 수는 없는데....... 그게 되겠어?” 치우천은 그냥 웃고만 있었다. 치우비는 약간 답답한 마음으로 다시 물었다. “거기다 발까지 빼낼 수 있는 방법이라면....... 괴물을 물리친 다음에 발을 빼내서 도망치자는 거야? 아이쿠, 자칫하면 형님 다리를 못 고치잖아. 흠, 그렇다면 괴물을 물리치고 쑤앙마이를 만나 형님 다리를 고친 다음에 발을 빼내 도망치자는 거지? 그렇지?” “상망이 어떤 사람인데 그럴 틈을 주겠니? 괴물을 물리치면, 먼저 확실히 대답하라고 다그칠 거다. 그 다음에 우리가 응낙하지 않으면 꽁꽁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지. 뭐, 발이 보고 있으니 죽이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해? 한꺼번에 두 토끼를 쫓으면 다 놓친다고 했는데 우리는 한 번에 네 토끼를 쫓아야 하잖아.” “주신으로 돌아갈 길을 만드는 것까지 다섯 토끼란다.” 치우천이 씩 웃으며 말하자 치우비는 한숨을 한 번 쉬었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해봐야지. 하나도 버릴 수 없으니 말야.” 다음날 일행은 준비를 갖추어 무라의 마을로 출발했다. 누루마이는 용감한 이백 명의 여전사를 뽑아 앞장세웠다. 치우 형제와 상망 등은 물론, 밖에서 야영을 한 다른 일행도 합류했는데 아픈 지나 전사들은 누루마이의 마을에 머물게 했다. 수십 명의 전사들이 빠졌으나 누루마이의 여전사들 때문에 사람 수는 더 많아졌다. 사흘 정도 산길을 가자 무라의 마을이 나타났다. 무라의 마을에는 이미 누루마이가 보낸 사람이 전갈을 했기 때문에 더 요란한 환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무라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무장을 하고 있었으며,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얼굴색들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누루마이가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는 다들 얼굴에 화색이 돌며 기뻐하는 것 같았다. 치우천은 내심 생각했다. ‘사람들이 우리가 괴물을 물리쳐줄 것으로 생각하고 기뻐하나 보 다. 꼭 성공해야 할 텐데 걱정이다.’ 무라도 진작부터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가면을 벗은 무라의 얼굴은 대단히 희고 아름다웠으나 돌처럼 표정이 없고 냉랭한 것이 흠이었다. 그러나 그런 무라도 기쁜 눈빛만은 감출 수 없었다. 무라는 치우 형제를 맞아 고맙다고 환대를 했으나,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말 한 마디하지 않고 고개만 까닥하고는 돌아서서 안내했을 뿐이다. 그것을 보고 상망은 발의 곁에서 중얼거렸다. “아깝구나, 아까워! 예쁘기는 하되, 너무도 무뚝뚝하구나.” 발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이죽거렸다. “무뚝뚝하고 표정 없기로는 비휴 아저씨 뺨치네. 난 비휴 아저씨가 여자가 된 줄 알았네.” 그 말에 상망은 ‘히히히’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둘이 잘 어울리겠는뎁쇼?” “어울리기는 뭐가! 둘이 앉아 있으면 돌 두 개가 앉아 있는 거랑 뭐가 다르겠어? 둘 다 얼굴 하나 안 변하고 말 한마디 안 할 테니 그야 말로 보는 사람이 답답해 죽을 걸?” 상망과 발뿐만 아니라 끽구와 신도, 울루도 킥킥 웃었으나 곁에 있던 비휴는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여전히 냉랭한 표정인 채 그대로였다. 무라의 집은 누루마이의 것보다는 작고 소박했으나 안은 아늑하고 보기좋게 장식되어 있었다. 집안의 모든 것이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무라의 얼굴을 연상하게 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보기 좋은 꽃들과 가죽과 장식들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어서 살벌한 느낌까지는 들지 않았다. 조촐한 대접을 받은 후에, 비로소 치우천은 괴물을 대적할 방법이 있으니 함께 의논하자고 했다. 모든 사람이 다 싸우러 갈 것은 아니었기에 치우 형제와 치베, 첫째 형요 지나족의 다섯 기인만이 무라, 누루마이와 함께 둘러앉았다. 사람들이 앉자 치우천이 먼저 무라에게 말을 건넸다. “주신 사울아비 치우천이 말합니다. 무라마이, 먼저 내 생각을 듣기 전에 그 괴물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려주십시오.” 무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괴물에 대해 설명했다. 카린의 무라가 말합니다. 그 괴물에 대해서 잘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만, 그놈은 예전에 선인이었다고 합니다. 도를 닦은 선인인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타락하여 사나워졌다고 합니다.” “생김새는 어떻습니까?” 이번에도 치우천이 묻자 무라가 말했다. “이곳 카린산에는 오래 전부터 예티<주석: 쿤룬산맥이나 티베투 히말라야 지방 등에서 존재했다고 믿어지고 있는 설인. 사람보다 키가 크고 온몸이 털로 뒤덮인 원인(猿人) 같은 모습으로 알려져 있으며, 외모와는 달리 신령스러운 힘을 지닌 온화한 성격이라 한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예티의 존재는 논란이 되고 있으며, <산해경>에도 예티라 생각되는 상상 동물 유형들이 여럿 보인다.>라고 불리는 괴물들이 간혹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 괴물은 예티와 비슷한 모습입니다. 긴 털이 온 몸을 뒤덮고 있어서 마치 원숭이 같지만, 아주 몸집이 크고 힘이 셉니다. 예티는 보통 흰색 털이나 회색 털을 지니고 있고, 성격도 보기보다 점잖고 온순하지만, 그 괴물 놈은 아주 사납습니다. 예티는 말을 못하지만, 그놈은 물론사람 말도하고요 키는 아주 커서 저기 끽구님만큼이나 됩니다.” 그 말을 듣고 끽구가 말했다. “지나 화산족 끽구가 말하오. 나 정도라면 그리 큰 놈도 아니군. 나쁜 놈이라니 내가 허리를 분질러 버리겠소.” 무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 괴물은 선인이었기 때문에 주술을 부릴 줄 아는데, 그 주술을 당해낼 방법이 없습니다.” “무슨 주술을 쓰기에 그러오?” “그 괴물은 주술을 외우면 안개같이 희미한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칼이건 도끼건 화살이건 모조리 그냥 지나가 버리지요 잡으려 해도 아예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달의 정기를 받은 자가 아니면 그 괴물을 건드릴 수조차 없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치우천이 물었다. “그렇게 바람 같다면 그놈도 우리 편을 치지 못할 것 아닙니까?”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그놈은 분명 바람처럼 형체도 없는데, 그놈에게 맞으면 똑같이 맞고 상처를 입습니다. 이상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요.” “혹시 때리는 동안에라도 몸이 단단해지는 것은 아닌가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치우천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기자 상망이 물었다. “지나 화산족의 상망이 말하오. 달의 정기라는 것은 무엇이오?” 이번에는 누루마이가 예전 태산회의 때 치우천에게 했던 것 같은 설명을 상망에게 해주었다. 그러면서 누루마이는 덧붙였다. “그 괴물은 몸이 바람 같아지는 힘만 있는 게 아니라, 힘도 대단하고 몸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날쌥니다. 정말 상대하기 어렵습니다. 지난번에도 카린족의 날쌘 전사 열세 명이 손도 못 써보고 모조리 맞아 죽었습니다.” 그때 신도 울루가 동시에 물었다. “불은 어떻소? 불에는 타지 않을까?” 무라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제가 괴물과 두 번째 싸울 때, 기름을 끼얹어 불을 질러보려고 했지만 기름이 몸에 하나도 묻지 않고 그놈의 몸을 지나가 버려서 실패했습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불 위를 다니면서도 조금도 움츠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불도 통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놈이 사는 곳에 불을 지르면 어떻겠소?” “괴물이 사는 곳은 얼음으로 둘러싸인 동굴입니다. 불을 지르려면 많은 나무나 기름을 가지고 가야 하는데, 괴물에게 들킬 것입니다. 더구나 동굴이 좁고 복잡하여, 뚫린 곳도 많습니다. 여러 구멍에다 동시에 불을 지를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신도 울루는 말문이 막혔다. 그때 치우비가 나섰다. “주신 사울아비 치우비가 말합니다. 달의 정기를 받은 보석을 쓰면 되지 않을까요? 형님이 그것을 구해 오셨다던데.” 무라는 얼굴빛을 흐렸다. “일단 써보기는 하겠습니다만, 그것은 물속의 물건이라 정말 달의 정기를 받았다고 하기엔 좀.......” 이번엔 치우천이 말을 받았다. “물론 보석도 사용할 수 있는 데까지는 사용해봐야겠죠 세상에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니 탈이지요.” 누루마이가 한탄하듯 말하자 치우천은 무라를 보며 물었다. “무라마이, 당신은 그 괴물을 때릴 수 있지요?” 무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러나 괴물은 나 혼자 상대하기엔 너무도 빠르고, 힘이 셉니다. 그놈은 바위도 주먹으로 부수고, 나무도 단숨에 꺾어버릴 정도의 힘이 있습니다. 그놈의 손에 잡히기만 하면 나는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것입니다. 치우비님이나 끽구님이라면 당해낼 수 있겠지만, 당신들은 그놈을 건드릴 수조차 없습니다.” 치우천이 다시 물었다. “무라님이 칠 때는 괴물이 주술을 써도 보통 사람이나 다를 바 없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제 손에는 확실히 느낌이 오니까요.” “그놈은 무기를 씁니까?” “아무 무기도 쓰지 않을 뿐더러, 옷도 입지 않습니다. 털로 몸을 가리는 거죠 아마 주술이 옷이나 무기에까지는 안 미치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놈은 혼자 삽니까?” “혼자 지냅니다.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으니까요.” 그때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첫째 형요가 입을 열었다. “과보족의 형요가 말합니다. 그놈도 사람이라면 잠을 잘 텐데, 잠들어서 주술을 쓰기 전에 목을 따버리면 되지 않을까요?” 누루마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미 우리의 많은 전사들이 그래 보려고 떠났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네. 아마도 놈은 잠도 안 자는 모양이야.” 그러자 상망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 대책 없는 놈이로군. 차라리 신수를 상대하는 게 낫겠다.” 그때 치우천이 뭔가 짚이는 게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성질이 포악해졌다니, 화도 잘 내겠군요.” “그렇습니다. 누가 조금만 말을 잘못해도 길길이 날뛰며 그 사람을 죽여 버린답니다.” 그제야 비로소 치우천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그러면 할 수 없군요. 그럼 제가 생각한 방법을 말하겠습니다. 방법이랄 것도 없고, 간단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치우천을 바라보자, 치우천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무라마이께서는 그놈을 때릴 수 있으니, 무라마이께서 잡으면 됩니다.” “그게 말처럼 쉽겠습니까? 괴물이 가만히 맞아달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요.” 그러자 치우천은 별것 아니라는 듯, 이제 되었다는 듯이 씨익 웃어보였다. “될 것 같습니다. 제게 한 가지 생각이 있답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누루마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잘되고 안 되고는 하기 나름이겠지.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곧이어 치우천은 그 무적의 괴물을 잡기 위한, 기발한 계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괴물 사냥 다음날 해가 중천을 넘어갈 무렵에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가파른 산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치우 형제와 끽구, 비휴, 신도, 울루 등 다섯 사람과 지나족 전사 이백 명, 그리고 무라, 누루마이와 카린족 전사 사백 명이었다. 물론 말을 타고 오를 수 없는 험한 길이라 말을 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상망은 공손발과 소녀 등을 지키고 아픈 전사들을 돌본다는 명목으로 지나 전사 이백오십 명과 함께 남기로 했다. 치우 형제 뒤에는 치베와 형요 자매, 울라트와 일곱 명의 도깨비들도 따르고 있었다. 사실 다섯 기인은 잠시도 치우 형제 일행만 따로 두지 않으려 했으며, 발 역시 혼자 두지 않았다. 치우비는 발을 데리고 달아날까 했던 생각을 떠올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상망은 사실 모든 일에 치밀하게 대비하고 있어서 그런 수는 절대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눈에 띄게는 아니었지만 어디서, 어떻게 움직이더라도 지나족들은 여차하면 치우 형제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 수로 함께 무리지어 다녔던 것이다. 치우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형님 생각대로 잘 될는지 모르겠구나.’ 그들이 오르는 산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풀포기, 나무뿌리 하나 보이지 않았다. 사실 무라는 치우천에게, 환한 낮에 눈에 뒤덮인 산을 가면 눈(眼)이 너무 부시고 아파 잘 볼 수 없게 된다고 일러주었다. 허나 치우천은 어두워질 때 싸우면 우리 쪽이 괴물에게 화살을 쏘거나 찾아낼 수 없어 더 곤란하니, 환할 때 싸워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치우천은 지나족들에게는 그런 사실을 말해주지 않고 치우비와 형요 자매, 도깨비 등에게만 일러주었다. 모든 전사들은 카린족에게서 옷을 빌려 입고 무장을 단단히 갖추었다. 도깨비들도 나름대로 가장손에 익은 무기들을 빌려 무장했는데, 몇몇 도깨비는 무장하는 방법이 상당히 독특했다. 예를 들면 지나 전사는 칼이나 도끼 한 자루에 창이나 활 한 개를 갖는 것이 보통인데, 리미는 큰 도끼를 손에 들고 무엇에 쓰려는지 일할 때 쓰는 작은 도끼를 열 자루나 허리에 찼다. 마냥은 다른 무기는 건드리지도 않고 길다란 창을 열두 자루나 짊어졌으며 싱카는 네 자루의 길다란 칼을 허리에 차고 또 활을 든 특이한 무장을 했다. 개르와 다른 도깨비들은 그저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평범한 무장을 했다. 한참을 가다가 눈 덮인 산등성이에 오르자 무라가 조심스럽게 꼭대기에 올라가서 보더니 치우천과 끽구를 손짓해 불렀다. “저기예요.” 무라가 가리킨 곳은 거대한 얼음덩이가 마치 폭포처럼 쏟아져 내릴 듯한 험준한 계곡이었다. 그 얼음계곡의 기이하고 웅장한 모습은 뭐라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장관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아래에는 얼음굴이 하나 뚫려 있었다. 얼음 굴은 그다지 넓지 않아 많은 수의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끽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탄식했다. “사방이 얼음덩어리이니 불을 지를 수도 없겠군. 더구나 굴이 좁고 깊은 것 같으니 밖에서 연기를 피우고 불을 질러봐야 소용도 없겠다.” 신도 울루도 한마디 거들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많은 수가 들어갈 수도 없으니 몇몇만 들어가는 수밖에 치우천의 작전대로 하자.” 치우천이 무라에게 물었다. “일단 굴이 저 하나로만 뚫려 있습니까?” 무라가 적어도 서너 개의 굴이 통해 있을 것이라고 대답하자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제안했다. “그러면 누루마이께서 나머지 굴을 지켜주시는 게 어떨까요?” 치우천이 작전을 짜기는 했으나 지휘권이 있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원래는 상망이 지휘해야 옳았지만, 상망이 공손발 옆을 지키고 있어 함께 오지 못한 터라 지금은 끽구가 대장격이었고 비휴와 신도 울루가 부장격이었다. 물론 카린족은 누루마이와 무라의 지휘 하에 있었다. 치우천의 제안에 누루마이가 대답했다. “나도 전사일세. 먼 곳에서 오신 분들이 싸우는데 내가 어찌 지키고만 있겠는가? 나도 같이 들어가겠네.” 무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일이니, 굴 입구도 함께 지키고 같이 들어가겠습니다.” 사백 명 중에서 누루마이가 데리고 온 여전사들은 이백 명이었다. 누루마이가 부하를 네 무리로 나누어 네 명의 믿음직하고 나이도 지긋한 여전사에게 한 무리씩을 맡겨 각각 굴 입구를 지키라고 명령하자 그들은 각자의 위치로 떠났다. 그리고 끽구는 전사들을 두 무리로 나누었다. 백 명씩 나뉜 두 무리는 동굴 좌우를 지키게 하고, 지휘는 비휴가 하도록 했다. 그리고 가장 잘 싸우는 전사 스무 명을 골라 뒤를 따르게 했다. 무라는 이백 명의 여전사들로 하여금 동굴 정면을 지키게 했다. 치우천은 몸이 빠른 형요 자매들에게 각 무리들 사이에 연락을 하라고 당부했고, 치베는 울라트와 도깨비들과 더불어 정면을 지키도록 했다. 그리고 치우 형제와 끽구, 신도 울루, 비휴와 누루마이, 무라는 스무 명 정도의 전사들과 함께 동굴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여전사들도 동굴로 들어가고 싶어 했으나 끽구가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때 도깨비들 중 싱카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 도깨비 싱카가 말합니다. 저희도 주인님과 같이 가고 싶습니다. 주인님을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치우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치우천을 쳐다보았다. 치우천은 싱카의 재주가 대단한 것을 알았기에 싱카에게 좋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다. 하지만 모두 가기에는 너무 수가 많으니, 리미, 마냥, 싱카이 셋만 따라오고 나머지는 울라트와 함께 치베의 명령을 들어라.” 치우천은 그들 셋이 특이하게 무장을 하는 것이 흥미롭기도 했고, 나아가서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면 괴물을 상대할 때 뭔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여겨서 그들만 따라오게 한 것이다. 비휴가 간단히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저들이 들어가면, 굴을 파라.” 이미 치우천은 괴물을 습격하여 제압할 수 있으면 제압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동굴 입구로 괴물을 유인하여 구덩이에 빠뜨린 후 불을 질러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물론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무기에 진주를 간 가루를 발라두고 있었으며 동굴안에서 싸울 계획도 준비된 상태였다. 무라와 누루마이는 내심 그것만으로 괴물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치우천은 잘될 것이라고 무라를 안심시켜주었다. 무라나 누루마이로서도 끽구와 치우비의 힘과 치우천의 머리를 믿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으며, 계획 역시 더 좋은 수가 생각나지 않으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동굴 안은 스산하고 몹시 깊었으며 온통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기한 것은, 불을 켜지도 않았는데 동굴 전체가 은은한 빛이 감돌고 있어서 그리 어둡지 않다는 것이었다. 모두는 동굴 어귀에서 준비를 갖춘 이후에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긴장하여 발소리도 크게 내지 않았다. 끽구와 치우비가 앞장서고 누루마이, 치우천과 도깨비 셋이 중간에, 그리고 신도 울루가 맨 뒤를 지켰다. 무라의 모습은 어찌된 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조금 들어가자 굴은 덩치가 큰 치우비와 끽구가 나란히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아졌다 그러자 신도 울루는 지나 전사 들에게 손짓을 해 열 명의 전사들은 그곳에 남아 대기하라 했고, 열명의 전사는 신도 울루의 뒤를 따랐다. 굴이 좁고 길어서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 것이 힘들어서였다. 그렇게 구불구불한 얼음동굴을 한참 걸어가다가 갑자기 탁 트인 곳이 나왔다 치우비와 끽구는 긴장하며 뒤를 향해 손짓했다 그때였다. 요란하게 외치는 괴이한 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카린말 같았다. 사람들이 잠시 흠칫하는데 누루마이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놈은 우리가 온 것을 알고 있어! 누구냐고 묻고 있다!” 끽구가 기세를 꺾이지 않으려는 듯 먼저 지나 말로 외쳤다. “이 괴물 놈아! 네놈이 행패를 부린다는 것을 듣고 나, 지나 화산족 끽구님이 오셨다!” 그 말에 화답하듯 안에서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치우비와 끽구는 동시에 고함을 지르며 뛰어나갔다. 치우비는 큰 도끼를 들고 있었고, 끽구는 양손에 커다란 구리 추를 들고 있었다. 둘이 달려 나가자 치우천과 도깨비들도 재빨리 안으로 달려 들어갔고 신도 울루와 열 명의 전사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얼음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모두가 ‘헉’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자신도 모르게 멈칫거렸다. 그 방 역시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좁은 통로와는 달리 상당히 크고 넓었으며 천장도 높았다. 그리고 그 방의 중앙에는 바로 무라가 설명했던 괴물이 서 있었다. 괴물은 덩치도 커서 끽구만 했으며, 얼굴과 온몸이 온통 길다란 털로 뒤덮여 있어서 마치 성성이(오랑우탄) 같아 보였다. 그러나 몸의 비례는 사람과 똑같아서 원숭이 같지는 않았고 다만 기이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물론 온몸이 털로 덮여 있으니 생김새도 알아볼 수 없었는데, 덥수룩한 털 사이로 시뻘건 눈빛이 마치 불을 뿜는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괴물은 이미 몸이 어느 정도 흐릿해진 상태였으니, 누군가가 온다는 낌새를 채고 주술을 부린 것 같았다. 그런데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괴물의 모습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방 안에는 괴물 혼자만 있지 않고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수는 쉰 명도 넘어 보였는데 반 이상이 여자들, 그것도 카린의 여전사들인 듯했다. 그들은 모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데다가 눈이 흐릿하고 초점이 없어서, 마치 얼어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게다가 모두 무장을 하고 꼿꼿이 서 있었으며, 무기가 없는 사람은 길다란 고드름을 들고 있었다. 누루마이가 놀라서 외쳤다. “수냐! 자이냐! 그리다! 너희는 모두 죽었는데!” 그때 뒤따라 들어오던 신도 울루가 격노해서 소리를 질렀다. “저 사람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오, 저놈이.......! 죽은 사람을 조종하는 거요!” 다시 괴물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그와 동시에 치우 일행이 들어왔던 동굴 입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동굴 입구 위쪽에 커다란 얼음덩어리들을 놓고 있다가 떨어뜨린 것이다. “피해!” 치우비가 외치자 리미, 마냥, 싱카는 재빨리 치우천을 몸으로 보호하며 구석으로 비켜섰다. 치우비와 끽구, 누루마이는 이미 안으로 들어서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될 수 있는 대로 빠르게 몸을 피했지만 맨 뒤쪽에 있던 지나족 전사 두 명은 얼음덩어리에 깔렸고, 다섯 명은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지나 전사 세 명만 간신히 들어올 수 있었다. 괴물은 이미 함정을 파두었던 것이다. 미친 듯이 웃던 괴물이 째지는 듯한 고함소리를 지르자 얼어붙은 시체들이 느릿느릿 움직이며 사람들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끽구가 어이없다는 듯이 외쳤다. “제길! 혼자 있는 게 아니잖아!” 사태를 파악한 치우천이 다급하게 외쳤다. “비야! 다른 자들은 놔두고 괴물에게 붙어!” 일단 괴물을 물리쳐야 하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치우비는 급히 몸을 날려 괴물에게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몇 명의 얼음시체들이 고드름을 휘두르며 앞을 막아섰다. 치우비가 도끼를 휘둘러 한 명의 얼음시체를 옆으로 후려쳤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을 친 것이 아니라 단단한 돌이나 얼음덩어리를 내려친 것처럼 도끼날이 조금 박히긴 했어도 날이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치우비가 놀라 잠시 멈칫하는 사이 끽구가 요란한 고함소리와 함께 커다란 구리 추를 내려치자 그 얼음시체의 머리가 얼음덩어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산산이 박살나버렸다. 순간 살인지 피인지 모를, 다만 붉은 색의 얼음조각들이 사방으로 날렸다. 피가 튀는 것은 아니지 만 오히려 그 모습이 더 놀랍고 오싹했다. 그 모습을 보고 끽구가 다급하게 외쳤다. “전부 얼음덩어리들이다! 베지 말고 쳐서 부숴버려!” 치우비는 다시 달려드는 한 명의 여전사 얼음시체를 발길로 힘껏 내지르자 그 여전사는 허리가 우지끈하고 부러져 버리고 말았다.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치우비는 지금 목숨을 걸고 싸우는 중이라 인정사정 봐줄 수 없었다. 치우비는 곧 도끼를 돌려 쥐고 도끼날로 찍는 대신 도끼 등으로 후려갈기는 방법으로 몰려드는 얼음시체들을 마구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끽구도 양손에 든 커다란 구리 추를 미친 듯이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끽구 뒤에 선 치우비 역시 끽구의 뒤를 보호하면서 나아갔다. 죽어서 조종 받는 사람들 중 몇몇은 누루마이도 잘 알고 있던 여전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생전의 기억은 전혀 없는 듯, 인정사정없이 무기를 휘둘러댔다. 그들이 싸우는 모습과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모습을 보자 누루마이는 극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누루마이는 부들부들 몸을 떨다가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너희를 편히 쉬게 해주마! 쑤앙마이시여! 힘을 주소서!” 누루마이는 함성을 지르면서 칼을 뽑아들고 씩씩거리며 뛰어나갔다. 그녀가 지닌 칼은 바로 치우천이 그녀에게 주었던 그 귀한 구리칼이었다. 세 명의 지나 전사도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그때 신도와 울루가 눈을 감고 자리에 주저앉으며 동시에 외쳤다. “죽은 놈들은 우리, 귀신들을 부리는 자, 신도 울루가 맡는다! 잠시만 시간을 벌어 달라!” 그때 치우비와 끽구는 벌써 예닐곱 명의 얼음시체를 때려 부수며 괴물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고, 다른 스무 명 남짓한 얼음시체들이 옆으로 돌아 신도 울루를 향해 다가왔다. 세 명의 지나 전사들이 신도 울루를 지키려고 그들을 막아섰으나 전사들이 지닌 무기는 아쉽게도 칼과 활뿐이었다. 꽁꽁 얼어버린 얼음시체들에게는 칼이나 화살이 잘 들어가지 않아 그들은 이내 위험에 빠졌다. 치우비와 끽구의 뒤를 따르던 누루마이가 그것을 보고 곧 허공을 몇 바퀴 돌며 날아가 지나 전사들을 구했다. 카린 여전사답게 누루마이의 움직임도 날렵하기 그지없었다. 누루마이의 구리칼은 예리하기 짝이 없었지만 얼음시체들의 몸을 베는 데에는 무리가 따랐다. 안 되겠다 싶어 치우천이 급히 외쳤다. “리미! 마냥! 싱카! 저들을 도와라!” 치우천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리미는 왼손으로 작은 도끼를 꺼내쥐고 있는 힘을 다해 도끼를 던졌다. 작은 도끼가 빙글빙글 돌며 매섭게 날아가 누루마이를 위협하던 얼음시체 한 명의 머리를 단번에 박살냈다. 마냥은 매서운 눈빛이 되어 양손으로 긴 창을 연달아 휙휙휙 던졌다. 마냥이 던진 창은 기막히게도 얼음시체들의 다리나 발을 꿰뚫고 땅에 박혀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나족이나 주신 사람들은 창을 찌르거나 휘두르는 데 썼지, 던지면서 싸우지는 않았다. 멀리 떨어진 적과 싸울 때 활을 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마냥은 창을 휘두르기도 잘할 뿐더러 그렇게 휘두르던 창을 던지는 재주도 놀라웠다. 리미의 도끼 던지는 재주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앞선 자들 몇몇의 발이 못 박히자 그들의 전진이 느려져 그 틈에 지나 전사와 누루마이는 뒤로 물러서서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리미는 미친 듯 난폭하게 웃으며 자기 나라 말인 듯한 기이한 소리로 외치면서 도끼를 던져댔다. 마냥이 못박은 자들의 머리는 리미가 던진 도끼에 맞아 속속 부서져 나갔지만, 그들은 발이 못 박혀 있어 쓰러지지도 못하고 계속 길을 막은 채였다. 다른 자들은 이미 죽어 생각을 할 수 없는지 되돌아가지도 못하고 계속 그들의 뒤에서 웅성거렸다. 그때 싱카가 활을 들고는 엄숙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물러서십시오!” 싱카는 소리를 지르자마자 화살을 손에 들었다. 카린족이 사용하는 보통 활과 화살이었던지라 치우천은 의아해서 소리쳤다. “화살은 소용없다! 싱카!” 그러나 싱카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조용히 대꾸했다. “주인님, 도깨비 싱카가 아그니의 아스트라<주석 : 아스트라 (Astra). 고대 인도에서 사용되었다는 전투용 주문. 주로 신들의 이름을 따고 있으며 대개 화살에 신의 힘을 깃들여서 적을 공격했다고 한다. 불의 신 아그니의 힘을 빌린 아스트라는 아그니스트라, 가루다의 힘을 빌리면 가루다스트라, 죽음의 신 야마의 힘을 빌리면 야마스트라가 되는 식이다.>를 씁니다. 산 자들에게는 쓰면 안 되지만, 사악한 힘으로 움직이는 얼음시체들에게는 괜찮습니다.” 말하자마자 싱카는 화살을 겨눈 채 중얼중얼 기이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화살 끝에서부터 붉은 빛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듯 뿜어져 나왔다. 싱카가 힘껏 활을 당겨 화살을 내쏘자 화살은 마치 불덩어리처럼 빛나며 앞이 막혀 우르르 몰려 있던 죽은 자들 가운데로 쏘아져 나갔다. 그 광경에 리미와 마냥, 누루마이는 물론이고 치우천마저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딱 벌렸다 화살이 명중하자 무서운 열기와 함께 화살이 폭발하며 스무 명이 되던 얼음시체들이 삽시간에 불길 같은 환한 빛과 함께 폭발하여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앞쪽에 있던 누루마이와 지나 전사들은 그 밝은 빛과 열기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가렸다. 눈을 다시 떠보니 열두 명의 얼음시체들이 이미 부서지고 녹아서 흥한 모습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리미와 마냥이 네 명의 얼음시체를 박살냈기에 남은 자는 넷 밖에 되지 않았다. 누루마이와 지나족 전사들은 용기를 내어 그들을 하나씩 맡아서 열심히 싸우기 시작했다. 치우천은 싱카의 재주가 놀라워서 싱카에게 격려하려 했는데, 싱카는 아스트라를 쓴 다음 너무도 힘이 빠졌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서있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싱카의 활은 무서운 기운을 이기지 못해 이미 박살이 났으며 싱카의 손도 화상을 입고 있었다. 싱카는 자신이 믿는 불의 신, 아그니를 불러내는 아스트라를 쓴 것인데, 그 힘이 너무 강해서 부작용이 있었던 것이다. 이미 많은 얼음시체들이 부서졌지만 여전히 많은 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자 리미는 마지막 남은 손도끼 두 개를 모두 획획 던져서 두 명의 죽은 자들을 박살냈다. 마냥도 이제는 두 자루의 창밖에 남지 않았다. 마냥은 싱카를 치우천에게 맡기고 두 자루의 창을 양손에 쥐고 무섭게 빙빙 돌렸다. 리미와 마냥은 고함을 지르면서 다가오는 얼음시체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리미는 자신이 믿는 오딘<주석: (Odin) 북구신화의 주신. 북부 게르만족과 아이슬랜두 노르웨이 등에서 믿었던 신으로 게르만 신화에서는 보탄(Wotan)으로도 불린다. 외눈에 창을 든 용감한 전사로 세상 최후의 전쟁(Ragnarok)을 대비하여 용감하게 싸우다 죽은 전사들의 영혼을 발할라에 모은다고 한다.>신을 찾았고, 마냥은 먼 조상신인 우니베케르를 찾았다. 그러나 둘 다 전투의 가호를 비는 마음만은 똑같았다. 치우천도 죽은 자가 쓰던 고드름을 주워들고 있는 힘껏 휘둘러대며 싱카를 지켜주었다. 그 틈에 치우비와 끽구는 맹렬한 기세로 괴물을 향해 똑바로 전진했다. 두 사람의 힘은 정말로 엄청나 둘의 손에만도 벌써 열한 명의 얼음시체들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괴물은 끽구와 치우비의 힘이 대단하고, 또 기이하게 생긴 도깨비들의 재주도 대단한 것을 보고 화난 소리를 지르면서 털북숭이 손을 서로 맞잡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그때 먼저 다가간 끽구가 무서운 기세로 오른손의 구리 추를 획 휘둘렀다. 곧이어 끽구의 구리 추가괴물의 머리를 정확하게 맞혔는데도 맞은 감이 없었다. 맞혀도 소용없다는 것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자신의 공격이 그렇게 허망하게 빗나가자 끽구는 화가 치 밀었다. 대뜸 괴물이 팔을 휘둘러 끽구를 후려쳤다. 끽구는 반사적으로 왼손의 구리 추로 괴물의 팔을 막으려 했으나, 괴물의 손이 쓰윽 끽구의 구리 추를 통과하여 끽구의 어깨를 후려갈기는 것 아닌가! 괴물의 손은 안개처럼 흐릿했는데도 끽구는 돌덩이에라도 맞은 듯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놀라 치우비가 달려들면서 도끼를 휘둘렀다. 그러나 괴물의 어깨를 내려찍은 도끼 역시 허무하게 허공을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다. 치우비도 이 정도로 느낌이 없을 줄은 몰랐던지라 무척 당황했지만 즉시 자세를 틀어서 끽구의 뒤를 노리고 달려들던 얼음시체 하나를 옆으로 후려쳐 부수며 외쳤다. “끽구님! 조심!” “제길! 우라지게 아프군, 정말 괴물이다!” 끽구는 어깨를 맞고 조금 뒤로 물러섰지만 전혀 기세가 꺾이지 않고 오히려 화를 내며 얼음시체들을 때려 부숴 갔다. 괴물은 다시 화를 내며 괴성을 지르면서 끽구를 덮치려 했다. 그 순간 치우비와 끽구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괴물이 양손을 내리뻗어 치우비와 끽구를 동시에 내려치자, 치우비와 끽구는 뒤로 물러서서 피할 수 있는데도 “얍” 하며 소리를 내지르고는 온몸에 힘을 넣어 괴물의 손을 그대로 맞았다. 괴물은 자신의 공격을 그들이 몸으로 그냥 받아 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터라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끽구의 부푼 털옷이 획 젖혀지며 무엇인가가 끽구의 아래쪽에서 획 뛰쳐나오며 괴물의 아랫도리를 공격했다. 바로 무라였다. 끽구는 보통 사람의 세 곱절은 됨직한 체구를 지닌 거한이었다. 그래서 치우천은 끽구의 등 뒤에 무라가 숨어들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끽구는 아주 큰 털옷을 입었으며, 동굴에 들어서면서 무라는 괴물의 눈을 피해 끽구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무라만이 그 괴물에게 타격을 줄 수 있었기에, 그렇게 숨어서 괴물의 허를 노려 일격에 괴물의 급소를 치려고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끽구와 치우비는 동시에 괴물의 공격을 그대로 몸으로 받았고, 그 틈을 기다려 무라는 특유의 날 듯한 몸놀림으로 끽구의 등에서 내려 끽구의 가랑이 사이를 미끄러지듯 지나 괴물을 공격한 것이다. 물론 그리 보기 좋은 공격은 아니라 계획할 때부터 무라나 다른 사람도 쑥스럽게 여겼지만 치우천은 이런저런 방법을 따질 때가 아니라고 주장하여 이 작전을 쓰게 되었다. 치우비와 끽구는 괴물의 공격을 받아 견디기가 힘들었으나 그 틈에 무라의 주먹은 괴물의 아랫도리 급소를 정통으로 후려쳤다. 괴물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면서 일순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무라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괴물의 얼굴을 주먹으로 네 대나 후려갈기고 세 번이나 발길질을 해댔다. 치우비와 끽구는 비록 아프긴 해도 무라가 괴물을 칠 때마다 퍽퍽 소리가 들리면서 제대로 주먹과 발길질이 먹혀 들어가자 통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물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무라를 향해 번개같이 팔을 내뻗었지만 끽구가 다시 기합을 넣으며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끽구는 괴물의 일격을 무라 대신 자기 팔로 막아내면서 비명을 질렀으나 무라는 덕분에 그 공격을 피해 다시 괴물의 뒤통수를 멋진 발길질로 돌려 찼다. 그러자 괴물은 화가 난 듯, 다시 무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끽구가 또다시 괴물을 막으려 했지만 괴물은 획 하고 끽구의 몸을 통과해버렸다. 그러자 치우비가 다급하게 외쳤다. 치우천은 물론 한 번의 공격으로 괴물이 쓰러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다음 단계 작전도 구상해둔 바 있어, 치우비는 다음 단계로 이행하려던 참이었다. “끽구님! 괴물의 눈을 가리세요!” 그러면서 치우비는 곧바로 도끼를 휘둘러서 괴물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괴물의 얼굴을 맞히려는 것이 아니라 괴물의 눈앞을 가려서 앞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끽구도 곧 양손으로 구리추를 번갈아 휘둘러대며 괴물의 눈을 가리는 데 전력을 다했다. 제 아무리 날고뛰는 괴물이라도 눈앞에 뭔가 가려져 있는데 어떻게 앞을 볼 수 있겠는가. 그러니 도저히 무라를 쫓아 맞힐 수가 없었다. 괴물은 몹시 몸이 날래서 미친 듯 방해하는 치우비와 끽구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치우비와 끽구는 보통 사람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아주 뛰어난 싸움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둘은 세 개의 무기로 교묘하게 번갈아가며 피하고 또는 서로를 도와가며 괴물의 얼굴만을 집중적으로 가렸다. 실로 예사로 구경하기 어려운 기이한 싸움이었다. 그 사이에 무라는 맹렬한 기세로 몸을 움직이며 괴물의 몸을 여기저기 후려갈겼다 하지만 괴물은 무척 끈질겼다. 무라에게 수십 대를 얻어맞았으면서도 괴물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댈 뿐, 쓰러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몸놀림이 점점 빨라졌다. 게다가 치우비와 끽구는 괴물의 눈을 가리는 힘겨운 싸움을 하면서 괴물에게 여러 대씩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치우비와 끽구, 무라 모두가 있는 힘을 다 짜내어 싸우는 것이어서, 이대로는 지쳐서 오래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약 치우비와 끽구가 쓰러진다면 무라 혼자서는 절대 괴물을 감당할 수 없었다. 괴물이 먼저 쓰러지느냐, 치우비와 끽구가 먼저 쓰러지느냐의 지구전이면서 한순간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피 말리는 싸움이었다. 그때 신도 울루가 가슴을 탕탕 치면서 입술을 깨물어 피를 내고 마지막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신도 울루의 사방에서부터 부옇게 연기가 일어나는 것처럼 희미한 모습이 몇몇 나타나기 시작했다. 귀신과 같은 흐릿한 형체들이었는데, 희끄무레하고도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어 하나같이 음산하고 섬뜩해 보였다. 그 무렵에는 이미 지나 전사 중 두 명이 얼음시체들에게 맞아 쓰러지고 누루마이와 한 명의 지나 전사, 그리고 리미와 마냥만이 버티고 있었다. 치우천은 버티기 힘들어지자 싱카를 끌고 신도 울루의 곁으로 가 있었으며, 싸우는 네 사람은 신도 울루의 주위를 지키며 보호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네다섯씩의 얼음시체들을 상대해야 했기에 몹시 급박한 상황이었다. 돌연 신도 울루가 불러낸 희미한 형체들이 끼악끼악 하는 비명을 지르면서 얼음시체들의 몸을 에워싸는가 싶더니 이내 빨려 들어가듯 얼음시체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얼음시체들이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몸을 핑그르르 돌리면서 쓰러져 갔다. 신도 울루가 대뜸 외쳤다. “제길! 저놈의 주술이 만만치 않구나! 우리가 얼음시체를 조종하려했는데, 잘 안 되는군!” 신도 울루가 불러낸 것은 바로 악귀들로, 죽어서 방황하고 있는 영혼들이었다. 그런 악귀들을 얼음시체들의 몸에 넣어 그들을 역으로 조종하려 한 것인데, 악귀의 힘과 괴물의 조종하는 주술이 서로 비슷하여 아무도 그들을 조종할 수 없게 되자 얼음시체들은 다시 시체로 돌아가 쓰러져 버린 것이다. 그런 내막을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신도 울루를 격려하듯이 치우천이 소리쳤다. “얼음시체들을 못 움직이게 하는 것만도 대단합니다! 더 불러내십시오!” 신도 울루는 즉시 혀를 깨물어 피를 낸 다음 들고 있던 복숭아나무 몽둥이에 바르고 다시 땅을 향해 가리키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더 많은 숫자의 악귀들이 땅에서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누루마이가 째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치우천이 놀라서 바라보니, 무라가 막 나가떨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치우비와 끽구가 힘이 빠져 조금씩 몸이 둔해지자, 괴물이 마침내 무라에게 혼신의 일격을 가했던 것이다. 어마어마한 일격을 받은 무라는 한참이나 뒤로 미끄러져 나가다가 쓰러져 정신을 잃어버렸다. 치우비와 끽구는 당황하여 즉시 뒤로 물러섰다. 무라가 쓰러졌으니 괴물을 건드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치우비가 재빨리 움직여서 무라를 들어 옆구리에 끼웠고 끽구는 괴물을 향해 위협하듯 구리 추를 휘둘러 보이며 뒤로 물러섰다. 괴물은 비록 쓰러지지는 않았으나, 무라에게 수십 대를 얻어맞은 터라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치우비는 무라를 끼고 형의 옆으로 가고, 리미와 마냥도 그 양옆에 섰다. 끽구도 쓰러진 지나 전사를 잠시 살폈으나 그 둘은 이미 참혹하게 죽어 있었다. 남아 있던 십여 명의 얼음시체들이 그들 주위를 포위하듯 에워쌌다. 신도 울루는 다시 십여 마리의 악귀를 불러내었고, 악귀들과 얼음 시체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돌연 괴물이 다시 미친 듯 주문인지 괴성인지 모를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얼음벽 여기저기에 쩍쩍 금이 가고 갈라지면서 새로운 얼음시체들이 벽을 부수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괴물이 죽인 자들을 얼음벽에 숨겨두었던 것이다. 신도 울루가 많은 얼음시체들을 쓰러뜨리자 괴물은 남아 있던 모든 얼음시체들을 불러낸 것이다. 그 수는 아까보다도 훨씬 더 많았다. 도대체 괴물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여 부려왔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이제는 무라가 힘을 잃었으니 괴물을 당해내기도 어려운데, 그토록 많은 얼음시체들이 더 나타나자사태는 절망적인 것처럼 보였다. 문득 괴물이 손가락을 들어 치우 일행을 가리키며 서툰 지나 말로 말했다. 괴물이 입을 열어 말하자 섬뜩한 기운이 맴돌았다. “지나 놈들, 감히 내 일에 끼어들어? 지나 화산족 놈이 여기까지 왜온 거냐?” 끽구 대신 신도 울루가 외쳤다. “너 같은 더러운 괴물 놈은 어디까지든 쫓아가 없애버릴 것이다!” 그 말에 괴물이 음산하게 웃었다. “괴물? 괴물? 나보고 괴물이라?” 그러다가 괴물은 갑자기 멍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 난 괴물이다. 괴물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이대로.......이대로 괴물로는 살 수 없어!” 치우비는 무라의 숨소리가 가쁘고 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무라가 괴물에게 당해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치우비가 무심코 주신 말로 외쳤다. “그럼 죽어버렷!” 괴물은 그 말을 듣고 의아한 듯 말했다. “너는 주신 놈이구나. 허, 나를 상대하려고 온 세상 영웅들이 다 모인 건가? 하하, 아무리 그래도 누구도 나를 당해내지 못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무라라는 계집을 내게 넘겨라. 아니면 다 죽여 버리겠다.” 치우천도 화가 나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헛소리 마라1 무라는 우리 벗이다! 너 같은 괴물 따위에게 넘겨줄 수 없다!” 누루마이 역시 눈물을 흘리며 독한 목소리로 외쳤다. “너 같은 괴물에게 넘겨주느니 내 손으로 죽이겠다!” 그러면서 누루마이가 칼로 무라의 목을 겨누자 괴물이 다급하게 외쳤다. “안 된다!” 치우천은 그때 재빨리 생각을 굴렸다. ‘저 괴물에게는 약점이 없다. 더구나 무라가 쓰러진 이상 방법이 없어. 저 괴물은 살아 있는 무라가 필요한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약점으로 잡는 수밖에 없다!’ 마음을 다잡은 치우천이 이내 말했다. “우리는 어차피 네 손에 죽을 테니, 다같이 죽겠다 너 같은 사악한 괴물에게 득이 되는 일은 하지 않겠다.” “그런 소리 마라! 나라고 괴물이 되고 싶어 된 줄 아느냐?” “그게 무슨 소리냐?” 괴물이 다가오려 하자 치우천은 재빨리 누루마이에게 눈짓을 했다. 누루마이는 무라의 목을 찌를 듯 칼을 들이댔다. 그러자 괴물이 다시 멈칫하며 말했다. “제길! 나는 선인이었다. 세상을 위해 악한 괴물을 없애려다가 놈에게 당해 되레 괴물이 된 것이다.” “네놈이 악한 괴물이지, 누가 악한 괴물이라는 거냐?” 어이가 없다는 듯이 괴물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너희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흐흐, 모르겠지. 너희도 대단한 놈들이지만, 나는 너희보다 훨씬 더 대단했던 영웅이었다. 그리고 도를 닦은 선인이었다. 나는 괴물을 물리치려 여기 왔고 괴물을 죽였지만 그 괴물의 피를 뒤집어써서 똑같은 괴물이 되어버렸다.......” 그 말에 치우천은 적이 놀랐다. ‘그래서 선인이었던 저놈이 타락하여 괴물이 된 것이구나.’ 그때 끽구가 으르렁거리며 외쳤다. “지금 네 모습을 한 괴물을 네가 죽였단 말이냐? 네가 무슨 수로 괴물을 죽일 수 있었지? 난 믿지 못하겠다!” “하하, 얄팍한 수를 부리는 거냐? 원래 괴물은 나만큼 강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달라. 나는 선인이었기 때문에 많은 주술을 알고 있다. 지금의 주술도 그중 하나일 뿐이야. 괴물을 죽일 때 썼었지. 그러니 너희는 죽어도 나를 당할 수 없다!” 사람들이 아연해지자 괴물이 다시 말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나는 원래 달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사람이었기에 같은 달의 정기를 받은 여자의 기를 모으면 괴물의 더러운 기운을 이겨내고 도로 사람이 될 수 있다 괴물의 모습을 벗을 수 있단 말이다! 그러니 저 여자를 내놓아라. 그러면 내 너희들의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치우천이 냉랭하게 코웃음 치며 외쳤다. “헛소리!” “거짓말이 아니다!” “네가 달의 정기를 받으면 괴물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너는 비록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해도 똑같은 괴물이다. 아니, 더 흉악한 괴물이 될 것이다. 절대 그렇게는 못한다!” 치우천은 외치면서 끽구의 옷자락을 괴물이 보지 못하게 슬쩍 잡아당겼다. 끽구의 눈이 치우천을 향하자 치우천은 손가락으로 얼음 굴의 막힌 곳을 가리키며 밀어내는 시늉을 해보였다. 굴의 막힌 곳을 뚫어 보라는 의미였다. 그러면서도 치우천은 계속 괴물에게 소리쳤다. “네 모습이 괴물이 되어 괴물이라는 것이 아니다! 네 마음이 더더욱 괴물이다! 네 말을 들어보니 너는 아직 정신은 멀쩡하지 않느냐?” “멀쩡하다고? 멀쩡하다고? 네가 한 번 내 모습이 되어보아라! 멀쩡한 정신으로 있을 수 있느냐, 응?” “너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느냐?” “그들이 나에게 먼저 덤빈 것이다.” “무라를 빼앗으려 하지 않았어도 사람들이 너에게 덤볐겠느냐? 너는 사람들을 해쳐서 무라를 협박했고, 그렇게 무라를 얻으려 했다. 더구나 죽인 사람들을 너는 사악한 힘을 써서 저렇게 걸어 다니는 얼음시체로 만들기까지 했어! 네가 한 짓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 치우천이 외치며 손짓으로 끽구를 불렀다. 그러고는 신도 울루에게 고개를 돌렸다. “신도 울루님은 귀신을 다스릴 수 있는 선인 아닙니까? 저놈의 한 짓이 정말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러자 신도 울루가 단호하게 외쳤다.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사람은 죽으면 모두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 너는 선인이라면서 자연의 뜻을 어겼다!” 누루마이도 눈물을 흘리며 이를 갈았다. “죽은 사람들을 우리 손에 다시 죽게 만들다니! 네놈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모두가 다 몰아붙이자 괴물이 절규했다. “나는...... 괴물로 죽고 싶지 않았어! 나는 다시 선인으로 돌아가고 싶다! 얼음시체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무라는 부족장이고 따르는 자가 수도 없으니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 신도 울루가 계속 몰아붙였다. 무리 급하다 하지만 할 짓과 못할 짓이 있는 법! 그런 짓을 하게 되었으니 이제 죽음으로 같을 수밖에 없다!” 사이를 틈타 치우천은 끽구에게 속삭였다. 구님, 제가 발을 구르면 얼음 굴을 무너뜨리십시오. 두 번째 작전을 씁시다.” 끽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마치자마자 치우천은 급히 치우비에게 속삭였다. 신도 울루가 우렁차게 소리 지르는 틈을 탄 것이다. “네가 괴물을 맡아라. 급하니 무라님의 몸을 써라!” 치우비는 곧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괴물은 선인이었을 때 알던 주술을 써서 무적의 몸이 되었다지만, 달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사람이어서 똑같이 달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무라의 몸이라면 정상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바꿔 말하면 무라의 몸을 사용하면 괴물에게 타 격을 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라는 아직 죽지도 않았을 뿐더러, 사람의 몸을 어떻게 무기로 이용한단 말인가? 설마하니 무라의 몸을 휘둘러 괴물을 치란 얘기는 아니겠지? 치우비의 의아해하는 표정을 보고 치우천이 급하게 말했다. “무라님의 팔만 써서 목을 졸라봐라! 네가 괴물을 어떻게든 막지 못하면 빠져나갈 수가 없다!” 치우비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무라의 몸을 무기로 사용할 수는 없지만, 팔만 쓰는 것은 해볼 만했다. 치우천은 치우비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발을 구르며 외쳤다. “리미! 마냥! 공격해라!” 치우천의 말이 떨어지자 리미와 마냥은 다시 도끼와 창을 휘두르며 얼음시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신도 울루가 불러낸 악귀들이 한 무더기의 얼음시체들을 우르르 쓰러뜨렸으며, 신도 울루는 또다시 악귀를 불러내기 시작했다. 누루마이와 홀로 남은 지나 전사도 죽을 힘을 다해 열심히 싸웠다. 그 사이 끽구는 있는 힘을 다해 무너져 내려 출구를 막아버린 거대한 얼음덩어리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빠져나가려 하자 괴물은 다시 화를 내며 급히 몸을 흐릿하게 만들어 다시 달려왔다. 그때 치우비가 무라의 몸을 안고 뛰쳐나가 무라에게서 배운 몸놀림으로 괴물의 뒤로 번개같이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괴물은 몸을 번득이며 치우비에게 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치우천이 용감하게 고함을 지르며 칼을 쥐고 달려들었다. 치우천의 칼은 물론 괴물을 칠 수 없었지만 치우천이 지른 고함소리가 너무도 커서 괴물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며 몸을 굳혔다. 치우비는 그 틈을 타서 괴물의 뒤로 돌아갔지만 괴물은 치우천을 후려치려고 했다. “형!” 치우비는 급한 나머지 무라의 팔을 쥔 채로 괴물의 등줄기를 후려쳤다. 정신을 잃고 있기는 했어도 무라의 몸이 정말 괴물에게 타격을 주었는지 괴물은 ‘헉’ 하며 앞으로 움찔 밀려나갔다. 그러나 오히려 괴물을 치우천에게 몰아붙여준 셈이 되어 괴물의 손이 금방이라도 치우천에게 닿을 것 같았다. 그것을 본 마냥이 마지막으로 손에 들고 있던 창을 휙 던졌다. 창은 정확히 괴물과 치우천 사이에 꽂혔고 놀란 괴물은 일순 치우천을 내려치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그 순간 지쳐 쓰러져 헐떡이던 싱카가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서 허리의 칼을 풀어놓으며 급히 주문을 외우자, 네 자루의 칼이 허공에 떠 올랐다 그러나 기운이 부족한 듯, 두 자루의 칼이 다시 땅에 떨어져 내렸고, 남은 두 자루의 칼은 허공을 날아서 괴물의 머리 위를 춤추듯 노렸다. 비록 칼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위협이 될 수는 없었지만 괴물은 칼이 저 혼자 날아 자신의 얼굴을 노리자 반사적으로 신경을 그리 쏟았다. 치우천은 그 틈에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괴물의 정신이 혼란해지자 치우비는 크게 고함을 지르면서 무라의 팔을 들어 재빨리 괴물의 목을 감았고 곧 자신의 팔로 무라의 팔을 눌러 조였다. “허억!” 괴물은 목이 졸리자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질렀다. 치우비는 팔에 느낌이 오자 더욱 힘을 가했다. 괴물은 고통스러운 듯, 마구 몸부림을 쳤다. 괴물의 키는 치우비보다 약간 큰 편으로 끽구와 비슷했고, 괴물이 이리저리 몸을 휘두르자 치우비와 무라의 몸은 거기에 휘둘려 이리저리 깃발처럼 펄럭이듯 흔들렸다. 괴물의 힘은 정말로 대단했다. 치우비는 더 힘을 주어 괴물의 목을 꺾어버리려 했지만, 무라의 팔에서 심상치 않는 느낌이 왔다. 더 힘을 주면 무라의 팔이 부러지거나 으스러질지도 몰랐다. 더구나 괴물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날뛰는지라 매달려 있기조차 어려운 판국이었다. 치우천이 소리 높이 외쳤다. “비야! 조금만 더! 끽구님! 서둘러요.” 끽구는 온몸의 핏줄이 곤두선 무서운 형상이 되어 죽을힘을 다해 얼음덩어리를 밀어내고 있었다. 우직우직 소리가 날 뿐 얼음덩어리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다시 악귀를 불러낸 신도 울루가 거기에 가세하자 굴 입구를 막고 있던 얼음덩어리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싱카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엎드려 헐떡였다 그러자 두 자루의 칼이 힘을 잃고 땅에 떨어져 버렸다. 누루마이와 리미, 마냥은 이미 죽을 힘을 다해 얼음시체들과 싸우고 있었는데 벌써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괴물은 치우비를 떼어내기 위해 마치 풍차처럼 몸을 휘둘러 돌다가 급기야는 동굴 벽에 치우비의 등을 거세게 부딪쳐 갔다. “어이쿠!” 치우비는 얼음동굴 벽에 부딪히자 눈에서 불이 번쩍 튀는 것 같았다. 돌연 괴물이 방향을 바꾸어 이번에는 뾰족하게 튀어나온 바위가 있는 곳으로 등을 부딪쳐 가는 것이 아닌가? 손을 풀지 않으면 자신과 무라는 바위에 찔려 죽을 것 같았다. 치우비는 급히 손을 풀고 무라의 몸을 안은 채 땅을 몇 바퀴 굴러 괴물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순간 두어 명의 얼음시체들이 앞을 막아서자 치우비는 급히 왼팔과 다리를 휘둘러서 둘을 동시에 부숴버렸다. 치우천은 치우비가 더 버티지 못하는 것을 보자 급히 소리쳤다. “비야, 이쪽으로!” 그때 끽구와 신도 울루에 의해 얼음덩어리는 서서히 밀려나 출구에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음은 서로 들러붙는 성질이 있어서 더 이상은 아무리 힘을 주어도 열리지 않았다. 치우비는 ‘에에잇’ 소리를 지르면서 무라의 몸을 왼편에 끼우고 있는 힘을 다해 오른쪽 어깨로 얼음시체들을 밀어붙였다. 과거 유망의 막사 안에서 형천이 썼던 기술을 흉내 낸 것이다. 세 명이나 되는 얼음시체들은 치우비의 어깨에 맞아 박살이 나면서 길이 뚫렸다. 치우비는 출구를 막았던 얼음덩어리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얼음시체를 박살낸 그 기세 그대로 달려갔다. 달려가면서 치우비는 무라의 몸을 치우천에게 던졌고 치우천은 힘겹게 무라의 몸을 받아 안았다. 그리고 치우비는 고함소리와 함께 얼음덩어리를 그대로 어깨로 밀어붙였다. ‘쾅’소리가 나며 거대했던 얼음덩어리에 일순 금이 가면서 얼음덩어리가 덜컹 소리를 내면서 반 바퀴를 굴러갔다. 아까 얼음덩어리에 깔린 지나족 전사들의 참혹한 시체도 보였지만 그것을 돌아볼 경황조차 없었다. 출구가 열리자 치우천이 다급히 소리쳤다. “모두 빠져나갑시다!” 출구 저편에는 아까 막혀 들어오지 못했던 다섯 명과 중간에서 기다리다가 소리를 듣고 달려온 열 명까지, 모두 열다섯 명의 전사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입구가 열리자 용감하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때 일행을 마구잡이로 쳐 죽이려는 듯 달려들고 있는 괴물을 보자 새로 들어온 전사들은 놀라면서 급히 괴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괴물은 출구가 열리자 놀라기도 하고 화도 나는 듯, 엄청난 힘으로 단숨에 새로 들어온 두 전사의 얼굴을 동시에 후려쳐 목을 부러뜨려 버렸고, 다른 한 명의 전사의 허리를 꺾어버렸다. 허나 그들이 잠시 앞을 막는 사이, 치우천과 무라, 누루마이 등은 모두 동굴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신도 울루와 도깨비들이 그 다음으로 나갔고 마지막으로 끽구와 치우비가 나머지 전사들이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뒤를 막아서서 시간을 벌어주려 했다. 괴물은 다급했는지 땅에 떨어진 구리 몽둥이 한 자루를 집어 들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괴물의 힘이 강해도 맨손으로는 힘이 센 끽구나 치우비를 단숨에 때려죽일 수 없었기에 무기를 쓰려고 한 것이다. 그것을 보고 치우비가 호기 있게 외쳤다. “좋다! 해보자!” 괴물이 무기를 휘두르자 치우비는 도끼로 일일이 괴물의 공격을 막아냈다. 괴물의 몸은 안개 같아서 막을 수 없었으나 무기는 막을 수 있었다. 괴물의 솜씨도 상당했지만 괴물이 익힌 것은 몽둥이 쓰는 법이 아니라 칼 쓰는 법 같아 치우비는 오히려 상대하기가 쉬웠다. 그러는 와중에도 치우비는 궁금증이 일었다. ‘이 녀석은 칼쓰는 법에 익숙한 것 같은데 왜 몽둥이를 집었을까? 칼도 많이 떨어져 있는데?’ 괴물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듯 몇 수 겨루다 몽둥이를 내던져 버렸다. 비록 잠시 동안이지만 그 틈에 다른 사람들은 동굴을 한참이나 빠져나갈 수 있었다. 치우비는 괴물이 몽둥이를 버리자 급히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끽구가 앞을 막아서며 괴물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냈다 괴물의 공격은 지독하여 보통 사람은 한 방만 정통으로 맞아도 죽어버릴 정도로 위력이 강했지만 끽구는 죽을 각오로 몸에 힘을 주면서 버텨냈다. 돌연 끽구가 ‘윽’ 하고 비명을 지르자 치우비가 외쳤다. “괜찮습니까?” “버틸 만하니 어서 가!” 동굴의 통로가 좁아서 끽구와 치우비가 나란히 갈 수 없었다. 결국 뒤에 남은 끽구가 괴물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으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동굴을 빠져나을 때까지 끽구는 괴물의 타격을 네 번이나 받고 다리를 휘청거렸다. 치우비와 끽구가 마침내 동굴을 빠져나오자 치우천이 외쳤다. “빨리 물러서라!” 끽구와 치우비가 물러서는 순간, 수많은 화살이 소나기처럼 동굴 입구를 향해 쏘아졌다. 치베와 형요 자매가 대신 지휘하는 무라족의 여전사들이 화살을 퍼부은 것이다. 그러나 괴물은 화살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동굴 밖으로 뛰쳐나왔다. 화살이 하나도 괴물을 맞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괴물은 이쪽의 수가 많은 것 따위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때 비휴가 때맞춰 신호를 하자, 동굴 양옆에 있던 수십 명의 전사들이 긴 밧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괴물이 서 있던 곳의 땅이 열려 괴물은 그 안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비휴는 구덩이를 파놓고 그 위를 나무판자로 덮어놓은 다음, 덮개에 끈을 달아 양쪽에서 잡아당기면 땅이 열리게 하는 장치를 해 두었던 것이다. 그 위에 눈을 뿌려 보이지 않게 해두었으니 괴물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괴물이 구덩이 안으로 빠져들자 이미 화살에 불을 붙여두고 있던 치베가 재빠르게 불화살을 구덩이 안으로 쏘아 날렸다. 순간 구덩이 안에 뿌려 놓았던 수십 동이의 기름에 불이 붙었고 거대한 불길이 폭발하듯 일어나 사방을 붉게 물들였다. 불구덩이의 열기는 대단해서, 구덩이에 가까이 있던 치우비와 끽구는 손으로 얼굴을 가려야만 했다. 여전사들과 지나 전사들은 성공적으로 괴물을 잡은 줄 알고 활을 내던지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것을 보고 치우천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직 괴물이 정말 죽었는지 모르니 무기를 버리지 말.......” 치우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구덩이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 하나가 훌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 불덩이는 가까이에 있던 끽구를 덮쳤다. 끽구는 깜짝 놀라 구리 추를 휘둘러 불덩이를 막으려 했지만 구리 추는 불덩이를 허무하게 통과해버렸다. 바로 괴물이었다. 괴물은 불이 붙은 채로 끽구의 몸을 얼싸안았고 끽구는 몸에 불이 붙자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보고 곁에 있던 치우비가 급히 주위에 있던 커다란 눈 뭉치를 들어 끽구에게 던졌다. 눈 뭉치가 부서지자 끽구의 몸에 붙은 불은 금세 꺼졌지만 덩달아 괴물의 몸에 붙었던 불도 꺼지고 말았다. 그러자 괴물은 다시 치우비에게 달려들었다. 치우비는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급히 뒤로 물러섰다. 끽구도 비틀거리며 일어나 재빨리 치우비의 반대편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끽구는 이미 괴물에게 많이 맞았던 데다 불에 데이기까지 하여 더는 싸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여전사들이 다시 화살을 쏘려 했지만 치베가 외쳤다. “쏘지 마라! 비 안다가 맞는다!” 비휴도 소리쳐 지나 전사들을 제지했다. “쏴 봐야 소용없다! 쏘지 마라!” 그 사이 괴물은 아까 구덩이의 덮개를 당겼던 지나 전사들을 쳐 죽이고 있었다. 전사들은 무장도 하지 않았던 터라 어지러이 도망치려 했지만 대여섯 명이나 순식간에 괴물에게 맞아죽었다. 치우비는 안타까워 발을 굴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무라가 비틀거리면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바깥의 찬바람을 쐬자 무라는 다시 정신을 차렸고, 아직 고통이 심한데도 안간힘을 쓴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여전사들도 용감하게 돌진해 왔다. “이 괴물! 무라가 여기 있다! 우리 같이 죽자!” 괴물은 무라가 나타나자 전사들을 쳐 죽이던 것을 그만두고 무라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무라는 괴물의 손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 괴물을 주먹으로 한 대 쳤다 그러나 무라는 아무래도 아까만큼 동작이 날렵하지 못했고 힘도 빠져 있었다. 다만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울 뿐이었다. 여전사들은 무라를 돕기는커녕 도리어 거치적거려 방해만 되었다. 무라는 빠른 몸놀림으로 괴물을 상대해야 하는데, 여기저기 여전사들이 끼어들자 오히려 싸우기가 불편해진 것이다. 치우비는 다시 무라를 돕기 위해 괴물 쪽으로 달려들었고 형요 자매 여섯이 일제히 달려 나갔다. 치우비는 형요 자매들이 걱정되어서 외쳤다. “형요! 오지 마 저 괴물의 몸을 맞힐 방법이 없다!” 나 형요 자매 여섯은 말을 듣지 않고 달려와서 괴물에게 칼을 휘둘러댔다. 그러다가 미요가 갑자기 품안에서 흰 가루 같은 것을 꺼내어 괴물에게 뿌렸다. 그 가루가 확 휘날리면서 마치 안개처럼 괴물 주위에 퍼졌다. 괴물이 막 무라를 잡으려는 찰나였는데, 미요가 뿌린 가 루로 앞이 보이지 않게 되자 헛손질을 했다. 사이 첫째 형요와 둘째 형요가 무라를 안고 재빨리 바깥으로 몸을 피했다. 화가 난 괴물은 안개 속에서 나와 다시 치우비에게 달려들었다. 미요가 또다시 가루를 뿌렸지만 이번에는 괴물이 피해버렸다. 그때 리미와 마냥도 다시 무기를 얻어 들고 괴물에게 달려들었고 치베와 비휴도 다른 수많은 전사들과 함께 달려오기 시작했다. 괴물은 아무래도 상대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는지 동굴 쪽을 보고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 소리가 메아리치자 잠시 후 동굴 입구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도 울루가 소리쳤다 “얼음시체들이 나온다!” 신도 울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음시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비휴와 치베는 놀라서 지나 전사들과 함께 얼음시체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얼음시체들은 끝도 없이 몰려나왔다. 괴물이 직접 죽인 사람들만이 아니라 병이나 사고로 죽었던 사람들까지도 얼음시체가 되어 몰려나오고 있었다. 원래 카린족은 죽은 사람의 시체를 산등성이에 늘어놓고 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는 풍장(風葬)의 관습이 있었는데, 괴물은 그 시체들을 훔쳐내어 자신의 부하로 만든 것이다. 그 짓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얼음시체의 수가 점점 늘어나서 이백 명도 넘었으며 아직도 얼마나 더 나올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동굴 부근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수라장이 되었다. 이제는 괴물을 상대하거나 혼란시킬 틈조차 없었다. 좁은 곳에 수백 명의 지나 전사, 여전사들과 수백 구의 얼음시체들이 몰려 싸우기 시작하자 누구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괴물은 그 와중에 마구 움직이면서 사람들을 쳐 죽이며 무라의 뒤를 쫓고 있었다. 첫째 형요와 둘째 형요도 얼음시체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터라 무라는 혼자 있다가 괴물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는 절뚝거리며 달아나려고 했다. 치우비는 무라를 도우라고 외치며 괴물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사람들과 얼음시체들에 가로막혀 쉽지가 않았다. 정신없는 혼전 중이라 누루마이나 끽구조차도 무라 쪽을 돌아볼 틈 조차 없었다. 치우비는 정신없이 얼음시체들을 부수는 와중에 결국 괴물이 무라를 잡는 것을 보고는 안타까워 소리를 질렀다. 그때 치우천이 네 명의 도깨비들과 함께 칼을 빼들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치우비는 형이 걱정되어 오지 말라고 소리쳤지만 치우천은 듣지 않고 달려들면서 대뜸 칼로 자신의 팔을 그었다. 곧이어 개르, 포리, 주루, 코타 네 명의 도깨비도 치우천처림 자신의 팔을 그었다. 그리고 다섯 명은 날뛰는 괴물을 항해 달려들었다. “형! 뭐 하는.......” 치우비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치우천과 네 명의 도깨비는 괴물을 향해 무기를 휘두른 것이 아니라 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혈을 괴물에게 뿌렸다. 괴물은 화살이 날아오거나 칼이 내려쳐도 신경 쓰지 않았었지만, 그 피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몸을 피했다. 다섯 명 중 세 사람의 피는 빗나갔으나 두 사람의 피는 괴물에게 맞았다. 괴물의 몸은 모든 것이 그대로 통과해버렸지만, 피는 통과하지 않고 괴물의 몸에 씌워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많은 양의 피는 아니었지만 손바닥만한 크기의 피 얼룩이 괴물의 등에 새겨진 것이다. 그 틈에 무라는 치우천 뒤쪽으로 몸을 피했다가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버렸다. 치우천은 무라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서며 외쳤다. “비야! 피 묻은 곳을 쳐라! 어서!” 치우천이 외치는 와중에도 괴물은 팔을 휘둘러서 도깨비 중 코타의 아랫배를 올려쳤다. 코타는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 키보다도 높이 떠올랐다가 땅에 거꾸로 처박혀버렸다. 주루와 개르가 치우천의 앞을 막아섰지만 괴물은 신경도 쓰지 않고 두 사람을 차례로 후려갈겨 쓰러뜨렸다. 허나 포리는 침착하게 무기를 휘두르는 대신 다시 팔을 휘둘러 피를 뿌렸다. 그러자 괴물은 놀라며 다시 피를 피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요요가 괴물의 등을 향해 반달 모양의 돌칼을 날렸다. 그 돌칼은 무기도 아니었고, 단지 주머니칼로 가지고 다니는 작은 도구였지만 그 돌칼은 정확하게 괴물의 등에 뿌려진 핏자국을 맞혔다. 순간 돌칼이 괴물의 등에 약간 푹 박히는 것이 아닌가? 괴물은 비명을 올렸지만 더더욱 난폭하게 달려들었다. 피하면 무라가 위험한지라 치우천은 피하지 않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러나 괴물은 치우천의 머리를 내려치지 못하고 갑자기 옆으로 비틀거리며 휘청거렸다. 그 뒤로 입을 굳게 다문 치우비의 모습이 보였다. 치우비는 있는 힘을 다해 앞을 막는 얼음시체들을 쳐부수고 달려와 괴물의 등에 주먹으로 일격을 가했던 것이다. 치우비의 주먹은 보통이 아니라서 괴물은 크게 울부짖으며 휘청거렸다. 치우천은 다시 이를 악물고 팔의 피를 괴물에게 뿌렸다. 괴물은 치우비에게 얻어맞아 비틀거리던 참이라 치우천이 뿌린 피를 피하지 못하고 얼굴에 맞았다. 그러자 치우비는 다시 주먹으로 형의 피로 물든 괴물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죽어라! 괴물!” 무서운 힘으로 얻어맞은 괴물의 목이 옆으로 반 바퀴나 획 돌아감과 동시에 몸이 핑그르르 돌았다. 그러나 괴물은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그때 포리가 소리를 지르며 땅에 넘어진 시체 한 구를 들어 괴물에게 밀어 던졌다. 그 시체는 얼음시체에게 여러 곳을 찔려서 처참하게 죽은 지나 전사였는데, 온몸이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그 시체가 몸을 덮치자 괴물의 몸은 시체에서 튄 피로 피범벅이 되었다. 온몸이 피범벅이 되었으니 이제 괴물의 주술은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급해진 괴물이 도망가려 했으나 괴물의 다리에 퍽 소리가 나며 화살이 박혔다. 치베가 멀리서 쏘아댄 것이다 괴물이 비명을 지르면서 땅에 뒹굴자 지나 전사들이 달려와서 괴물의 몸에 마구 칼과 창을 찔러댔다. 괴물은 발악적으로 다시 팔을 휘둘러 두 명의 지나 전사를 더 해쳤다. 하지만 이제 괴물의 온몸은 피에 젖어 더 이상 보호받지 못했다. 사람들이 흘린 피와 자신의 피가 뒤섞여 있는 듯했다. 전사들은 급히 괴물에게서 물러섰으나 괴물은 이제 확연히 보일 정도로 휘청거리고 있었다. 다시 치베가 화살 세 발을 연달아 쏘아 양어깨와 오른팔을 꿰뚫었고, 치우비가도끼로 양다리를 찍어 베어버렸다. 괴물의 잘라진 발이 하얀 눈 위를 피로 물들이며 뒹구는 가운데, 괴물은 마침내 커다란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거기에 치우비는 최후의 일격으로 괴물의 등짝을 도끼로 힘 있게 내려찍어 버렸다. 도끼가 괴물의 등을 푹 파고들자 치우비는 박힌 도끼를 뽑지 않고 기쁨에 겨워 두 팔을 쳐들며 크게 외쳤다. “잡았다!” 치우천과 괴물과 싸웠던 사람들도 모두 환성을 질렀다. 괴물이 힘을 잃고 쓰러지자, 얼음시체들도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역시 땅에 퍽퍽 소리를 내며 쓰러져 버렸다. 그대로서 있는 얼음시체도 있었지만 모든 얼음시체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괴물의 주술이 풀려 조종이 끊어지자 다시 원래의 시체로 돌아간 것이다. “정말 지독한 놈이었다.” 화상을 입고 온몸이 멍투성이가 된 끽구는 괴물의 지독함을 돌이키며 도리머리를 쳤다. 괴물을 잡기 위해 지나족이 치른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열네 명의 지나 전사가 괴물 또는 얼음시체에게 죽음을 당했고 열아홉 명이 크게 다쳤다. 무라의 부하전사들의 피해는 더 커서 열아홉 명이 죽고 스물일곱 명이 다쳤다. 거기다가 무라도 많이 다쳐 있었다. 목숨은 위험하지 않지만 당분간 상처를 오래 치료해야 할 것 같았다. 누루마이도 작은 상처를 곳곳에 입었지만 그래도 멀쩡했고 부하들은 다친 자가 없었다. 치우 일행도 피해를 입었다. 치우천, 치우비 상태는 괜찮은 편이었지만 넷째 형요가 얼음시체들과의 혼전 중에 큰 부상을 입었고 도깨비들 중 정통으로 괴물에게 당한 코타는 거의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다른 도깨비들도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다. 싱카는 탈진했지만 상처가 없어서 쉬면 회복될 것 같았다. 모두 합해 서른세 명이 희생된 대혈전이었다. 그러나 카린족 여전사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도저히 상대할 수 없었던 괴물을 물리쳤으니 다소의 희생자가 있다 해도 기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누루마이도 기뻤지만 큰 희생을 치른 지나족들에게 먼저 감사를 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카린의 누루마이가 말합니다. 지나족의 영웅들과 전사들이 흘린 피 덕분에 우리의 큰 적을 물리쳤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우리 카린산의 부족들은 이 일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무라도 상태가 좋지 않았으나 다시 정신을 차려서 입을 열었다. “카린와 무라가 말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끽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하게 답했다. “지나, 화산족 끽구가 말합니다. 괴물을 잡게 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도움이 되었으니 기쁘군요 허나 우리는 치우 형제를 도운 것이며, 헌원님의 명령을 따른 것뿐입니다.” “헌원님께도 필은 감사를 드립니다. 나중에 꼭 전해주십시오 헌원님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아끼지 않고 도와드리겠다고요.” 그리고 누루마이와 무라는 치우 형제에게도 깊은 감사의 뜻을 표했다. 치우천 역시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우선 다치거나 죽은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치우비도 걱정스레 한마디 했다. “넷째 형요와 코타가 많이 다쳤습니다. 죽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무라는 원래 말수가 적었으나 지금만큼은 아주 기쁜 듯, 평소와 다르게 말을 많이 했다. “최선을 다해 보살필 것이니 염려 마세요.” 치우비는 좀 멋쩍은 듯 얼마 전에 배운 서툰 지나 말로 무라에게 물었다. “팔은 괜찮으십니까?” 아까 치우비가 괴물의 목을 조르느라 짓눌렀던 무라의 팔이 퉁퉁 부어 있었다. 무라가 웃으며 대답했다. “괴물과 싸우느라 그런 것인데 뭐 어떻습니까? 내 팔이 망가져도 좋으니 괴물의 목을 꺾어버리시지 그랬나요?” 겸연쩍은 표정으로 치우비가 머리를 긁적였다. “괴물이 세서 그럴 수 없었습니다.” 무라는 웃으며 평소에는 결코 하지 않던 농담까지 했다. “아예 내 팔을 하나 잘라서 휘둘러 싸우시지 그랬나요? 그래도 저는 전혀 원망하지 않았을 겁니다.” 치우비가 어떻게 그러느냐는 듯 정색을 하자 치우천이 웃으며 대신 되받았다. “무라님을 도우러 온 것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진작에 하나 내어주시지 그랬어요?” 치우천이 농담을 하자 무라도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내 팔을 자르고 싶었나요? 미리 잘라주지 않아서 원망스럽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다 우스갯소리입니다. 무라님도 웃으시니 정말 보기 좋군요.” 누루마이와 무라는 환하게 웃으며 치우 형제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다. 지나족에게는 정중하게 예의를 표했지만 치우 일행과는 아주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지나족도 고마웠지만 그들 둘은 내심 치우 형제가 더 고마웠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지나족이 따라 왔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비휴와 신도 울루는 다치고 죽은 사람들을 수습하느라 정신 없었으나 끽구는 치우 형제들 사이에 끼어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사실 단순하고 강직한 끽구는 퍽 호탕하여 치우비와도 마음이 잘 맞는 편이었다. 끽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모르겠네. 어떻게 피를 뿌릴 생각을 했는가?” “그래, 정말 어떻게 알았나?” 누루마이도 묻자 치우천이 대답했다. “제 머리가 좋지 않아 그 말을 듣고도 그때는 몰랐다가 나중에야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진작에 생각했다면 사람들이 많이 다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그 말을 들었다니?” 치우천이 씩 웃으며 말했다. “괴물이 직접 가르쳐준 것입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괴물이? 괴물이 언제 가르쳐주었나?” 치우천은 또다시 씩 웃으며 코를 한 번 만지고는 말했다. “괴물은 동굴 안에서, 자신이 주술을 써서 이전 괴물을 쉽게 죽였지만, 괴물의 피를 뒤집어써 자기도 괴물이 되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치우천이 계속 말했다. “사실 그때는 저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다만 나중에 괴물이 마구 설치는 것을 보니, 사람들이 뒤엉켜 싸우는 곳을 피하는 것 같았습니다. 주술 덕분에 아무것도 그를 해치지 못하니, 사람들이 무서울 리 없는데 왜 피해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까, 한참 생각했죠. 가만 보니 전사들이 싸우면서 흘리는 피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동굴 안에서도 괴물은 신도 울루님에게는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신도 울루님이 피를 뿜어 주술을 썼기 때문에, 그게 두려웠을 테죠 더구나 괴물이 무기를 쓰지 않는 이유도 바로 피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칼이나 도끼로 베었다가 피가 뿜어져 나오면 큰일 아니겠습니까?” 치우비가 ‘아하’ 하며 무릎을 쳤다. “그랬구나! 아까 괴물이 잠시 무기를 든 적이 있어. 그런데 괴물은 칼 쓰는 법에 익숙한 것 같은데 하필 몽둥이를 들기에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지.” 끽구는 치우천의 얼굴을 경탄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치우천은 약간 쑥스러워 얼버무리듯 말했다. “좀 늦게 생각해내서 많은 사람들이 더 죽었으니 제 죄가 크군요.” 무라와 누루마이가 반색을 했다. “별 말씀을! 치우천님이 아니었으면 아무도 그런 생각을 못했을 겁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고는 무라가 한마디 더 했다. “지난번 태산 회의 때 치우천님은 우리를 벗으로 여긴다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저, 무라는 쑤앙마이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저는 앞으로 두 분의 영원한 벗이 될 것이며, 두 분을 돕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치우 형제는 무라가 맹세까지 하자 놀라서 급히 말리려 했으나 이미 무라는 말을 끝낸 다음이었다. 무라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가 평상시의 냉랭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치우천이 머리를 긁적이며 뭔가 말하려 하는데 한 명의 여전사가 달려오며 말했다. “무라마이! 누루마이! 괴물이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뭔가 말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죽지 않았나? 정말 질긴 녀석이구나!” 치우 형제는 무라, 누루마이 및 끽구와 함께 괴물이 쓰러진 곳으로 달려갔다. 괴물의 주위를 치베와 미요, 요요가 많은 여전사들과 함께 둥그렇게 에워싸고 있었다. 분명 죽어가고 있었지만 괴물이 아직도 꿈틀거리면서 중얼거리자 두려워서 감히 다가서지는 못하는 듯했다. 치우천의 얼굴을 보자 괴물은 다시 안간힘을 써서 맥 풀린 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카린 말 같아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치우비가 괴물과 치우천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물었다. “뭐라고 하는 거지?” “들을 필요 없다! 그냥 죽여 버리자!” 끽구가 단호하게 말하자 누루마이는 얼른 설명해주었다. “저 녀석은 사람을 찾고 있네. 자기에게 피를 뿌린 사람, 즉 치우천 자네를 찾고 있다네.” “왜 그럴까요?” 치우천도 의아하여 묻자 치우비가 막아섰다. “형, 가까이 가지 마. 저런 놈에게 들을 말이 무엇이 있어?” 누루마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네.” “괴물이 뭐라고 합니까?”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네. 그러나 가지 말게. 곧 죽을 놈에게 물을 것이 무엇 있겠는가?” 치우천도 괴물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치우천이 돌아서려 하자 그때 괴물이 다시 소리를 질렀는데, 말 중에 ‘발귀리’라는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치우천은 깜짝 놀라 우뚝 멈췄다. ‘설마하니 이 괴물이 발귀리 선인에 대해 뭔가 안다는 뜻인가?’ 치우천은 궁금해져서 다른 사람이 말리는데도 괴물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봐, 나는 주신 사람이다. 카린 말은 모르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나 말이나 주신 말로 말해봐라.” 괴물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으나 치우천이 말을 걸자 곧 힘겹게 중얼거렸다. 서툰 주신 말이었다. “너는....... 너는 어떻게 알았는가?” “무엇을 말이냐? 피를 뿌리는 방법 말이냐?” “이대로는 나는 죽는다. 나를 살려 달라.” 괴물이 애원하자 치우천은 냉랭하게 코웃음 쳤다. “너는 졌으니 추하게 버둥거리지 말고 죽어라.” “나에게는 보물이 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보물이다. 나를....... 나를 살려주면 너에게 그것을 주겠다. 내 몸값으로 그 보물을 주겠다.” 상대를 잡았을 때 몸값을 대신 받고 적을 놓아주는 일은 당시로서는 흔한 일이었다. 누루마이는 흥미가 이는지 살짝 미소를 지었다. 허나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너는 너무도 악독한 짓을 저질러 왔다. 어떤 몸값을 치른다 해도 너를 놓아줄 수는 없다.” “그 보물은...... 신수들과 이야기를.......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보물이다! 도력이 얕은 자도 신수와....... 신수와 이야기할 수 있는 귀한.......” 치우천은 더는 듣지도 않고 딱 잘라 말했다. “어떤 보물이라도 소용없어. 너는 내가 죽이는 것이 아니다. 네 모습이 괴물처럼 변했다 해도 사람들을 돕고 좋은 일을 했으면 지금처럼 죽지 않았을 것이며, 너 정도의 재주라면 사람들에게 신처럼 섬겨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는 네 모습에만 집착해서 나쁜 짓을 서슴지 않았어. 너를 죽이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네 자신이 저지른 나쁜 짓이다. 그러니 아무도 너를 구할 수 없다!” 치우천이 냉엄하게 말하자 괴물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정말 죽는 것인가?” “그렇다. 죽기 전에 저지른 죄나 뉘우치도록 해라.” 그러자 괴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힘겹게 말했다. “네가....... 네가 설마 하늘이란 말이냐?” 그 말에 치우천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괴물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기 때문에 치우천은 무의식중에 점점 괴물에게 가까이 귀를 들이밀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괴물의 중얼거림이 들리지도 않았다. “무슨 소리냐?” 괴물은 아주 작게,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발귀리 선인이....... 옛날에....... 옛날 내가선인일 때 나에게 말했었다. 하늘의 이름을 가진 자가 아니면 나를 죽일 수 없다고 .......네 이름....... 네 이름이 정말 하늘이냐?” 그것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일이라 치우천은 딱 잘라 말했다. “무슨 소리냐? 내 이름은 천이다.” 그래도 괴물은 집요하게 말했다. “그럴 리 없다. 나는 하늘이 아니면 죽일 수 없다 나는 죽지 않는다. 죽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괴물이 외치면서 치우천의 얼굴을 향해 누런 입김을 내뿜었다. 순간치우천은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져 왔다. 치우비와 끽구 등이 깜짝 놀라 괴물에게 덤벼들었다. 누루마이와 무라가 칼을 휘둘러서 괴물의 양팔을 찍고, 끽구가 발로 괴물의 등을 짓밟자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괴물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면서도 외쳤다. “나는 죽지 않는다! 나는.......!” 그때 치우비가 괴물의 등에 박혔던 도끼를 빼내어 괴물의 목을 싹둑 베어버렸다. 괴물의 목소리가 아직도 메아리치며 여운이 가시지 않는 가운데, 괴물의 머리는 흉악한 형상으로 데굴데굴 얼음이 덮인 땅바닥에 굴렀다. 치우천은 잠시 비틀거리다가 풀썩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치우비가 놀라 살펴보니, 치우천은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으며 얼굴빛이 녹색으로 변해 있었다. “형!” 치우비가 울부짖자 누루마이가 다급하게 외쳤다. “괴물의 저주다! 저놈은.......! 저놈은 죽으면서까지 악독하구나!” 치베와 형요 자매는 화가 나서 무기를 들어 괴물의 시체를 마구 난도질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치우천이 정신을 차리는 것은 아니었다. 치우천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몹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치우비는 통곡을 했다. 그러자 무라가 치를 떨며 외쳤다. “이 괴물의 저주는 지독합니다! 쑤앙마이 말고는 풀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누루마이도 다급하게 외쳤다. “몹시 급하다! 어서 쑤앙마이께 서둘러 가야 한다! 하루도 버티기 힘들 것 같다!” 안절부절못하며 끽구가 누라마이에게 물었다. “쑤앙마이가 계신 곳까지는 얼마나 걸립니까?” “걸어서 가면 사흘도 더 걸립니다!” 이번엔 치베가 초조한 듯 두 손을 불끈 쥐며 물었다. “말을 타면?” 누루마이는 너무도 안타까워 발을 굴렀다. “길이 험해서 말을 탈 수 없소!” 그 말을 듣고 치우비가 울면서 외쳤다. “내가 가겠소. 내가 형을 업고 달려가겠소!” 누루마이는 고개를 저었다. “길이 아주 복잡하고 험해서 길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내가 가겠습니다! 카와 슈는 길을 잘 압니다!” 무라가 묘안을 내놓았는지 누루마이는 손뼉을 쳤다. “그렇다! 카와 슈라면 하루 만에 달려갈 수도 있겠다!” “그게 누구죠?” 미요와 요요가 걱정스러운 듯 묻자 누루마이가 대답했다. “무라가 기르고 있는 개명수요 개명수 중에서도 가장 크고 영리한 녀석들이오. 태산 회의 때 보지 못했나?” 치우비는 그제야 카와 슈가 사람이 아니라 크고 흰 호랑이인 개명수였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괴물과 싸울 때에는 개명수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데리고 오지 않았지만, 그 개명수들이라면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사람을 업고 달려갈 수 있을 것이었다. 누루마이는 치우비를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 형은 몹시 상태가 안 좋으니, 개명수에 태워 쑤앙마이께 서둘러 보내야 한다네. 그리고 우리는 따로 뒤를 따라가세. 그 수밖에는 없다네.” 치우비는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서 무라를 쳐다보았다. “무라님! 몸은 괜찮겠어요?” 무라도 사실 심한 부상을 당한 상태여서 서 있기조차 힘든 판이었다. 하지만 무라는 굳게 마음을 먹고는 조금도 아픈 티를 내지 않고 씩씩하게 외쳤다. “염려 마세요!” 곧이어 무라가 손가락을 입에 넣어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무라의 휘파람 소리가 카린의 만년설이 쌓인 산 사이를 이리저리 메아리치며 떠돌자, 무라는 곧 치우천을 싸맬 털 담요와 가죽끈 등을 준비하게 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정말 우렁찬 포효소리가 들리면서 두 마리의 횐 개명수가 눈을 뚫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지나 전사들은 흰 호랑이가 나타나자 놀라고 잠시 겁을 먹기도 했으나 개명수들은 곧장 무라에게 달려와서 무라의 발 앞에 엎드렸다. 개명수들은 달리는 것도 말만큼 빠른 것 같았고 유연한 몸놀림이나 힘은 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라는 곧 치우천의 축 늘어진 몸을 수컷인 ‘카’의 등에 묶게 하고 자신은 암컷인 ‘슈’의 등에 올라탔다. 치우비는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형님! 천 형님! 죽어서는 안 돼! 꼭 살아나야 해!” 모두를 안심시키려고 무라가 씩씩하게 외쳤다. “걱정 마세요! 가자 카! 슈!” 그리고 무라는 개명수를 마치 말처럼 몰아서 눈 쌓인 카린의 산맥사이를 달려가기 시작했다. 의식을 잃은 치우천의 몸은 카의 등 위에서 흔들리며 눈물로 가득 찬 치우비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천(千)의 얼굴, 쑤앙마이(西王母) 치우비를 비롯한 사람들은 비록 괴물을 잡았지만, 울적한 기분으로 일단 마을로 돌아갔다. 당장이라도 형의 뒤를 따라 쑤앙마이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다친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을 처리해야 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누루마이는 부하들을 남겨 얼음시체로 변했던 죽은 자들을 치우고 기분 나쁜 괴물의 동굴을 송두리째 무너뜨려 얼음에 파묻어 버리라고 명령했다. 무라의 마을은 괴물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누루마이는 울적한 표정의 치우비를 보고사람들이 너무 떠들지 못하게 하려 했다. “그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형이 아직 어떻게 된 것도 아니구요.”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치우비의 얼굴은 울상이었다. 누루마이는 하는 수 없이 마을에서 좀 떨어진 무라의 거처로 치우비와 일행을 옮겼다. 소녀와 공손발, 상망 등도 달려 나와 싸움 이야기를 묻고 치우천이 다쳤다는 소리에 몹시 놀라며 걱정했다. 특히 소녀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신도 꼭 쑤앙마이에게 가야겠다고 했다. 치우비는 마냥 허탈하기만 해서 공손발의 위로도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나족은 신도 울루가 죽은 자들을 위해 불을 괴우고 주문을 외워 제사를 드렸는데, 끽구나 상망 등도 죽은 자들을 몹시 애통해했다. 카린 마을 사람들도 자신들을 위해 싸우다 죽은 지나 전사들을 위해 나름대로 정중히 예의를 표했다. 그런데 치우비의 마음을 더 울적하게 만드는 일이 또 생겼으니, 도깨비들 중 괴물에게 정통으로 맞았던 코타가 끝내 숨을 거둔 것이다. 코타가 숨을 거둘 때 도깨비들과 치우비는 모두 그 곁에 있었는데, 코타는 숨을 거두면서 마지막으로 치우비의 손을 잡고는 서툰 주신 말로 중얼거렸다. “도깨비.......도깨비 코타가 먼저 갑니다.......주인님께 도움도 되지 못하고....... 용서....... 용서.......” 치우비는 이미 도깨비들과 깊이 정이 들었던 터라 슬픔으로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다. 코타는 그리 신기한 재주도 없었고 도깨비들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존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슬프기는 매한가지였다. “아니다! 네가 내 형님을 구했어. 너는 결코 도깨비가 아니다 너는 훌륭한 용사였다. 그리고 죽지 마라! 기운을 내!” 치우비가 코타의 손을 굳게 잡으며 말하자 코타는 힘겹게 웃어 보였다. “도깨비 취급을 받다....... 사람.......사람으로 죽을 수 있어서 다행....... 주인님 덕에....... 이제....... 이제야 주신 말도 좀 하게 되었는데.......” 말을 끝내 다하지 못하고 코타는 스르르 숨을 거두었다. 사막에서 다른 도깨비들을 잃었을 때도 슬프기는 했다. 허나 이제 말까지 통하게 되어서 친해진 코타가 죽자 더더욱 슬펐고, 불쌍했던 코타의 일생을 생각하니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치우비가 멍하니 눈물만 흘리며 코타의 손을 놓지 않자 리미가 다가와 말했다. “도깨비 리미가 말합니다. 주인님, 코타는 용감하게 싸우다 죽은 것입니다. 누구나 죽는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개르도 한마디 거들었다. “코타는 용감했습니다. 아마 죽었어도 전사들이 사는 발할라<주석: 북구신화의 주신 오딘이 세상 최후의 전쟁 라그나로크를 대비하여 만든 요새 용감하게 싸우다죽은 전사들의 영혼을 이 발할라로 모아마지막 전쟁에 대비하도록 한다. 그 영혼들을 데리고 오는 역할을 맡은 아홉 명의 전쟁의 여신들이 바로 발퀴리(Walkurie)들이다. 리미와 개르는 둘 다 이 지역에서 자란 사람들이라 오딘 신앙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리미는 노르웨이 연안 지방 출신이고, 개르는 북부 독일 지방의 게르만족이다>로 갔을 것입니다.” 그나마 상처가 심한 넷째 형요가 곧 회복되어 가고 있으며 죽을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형요 자매는 서로 간에 정이 깊은지라 다친 자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싱카도 탈진한 것뿐이라 이내 의식을 회복했다. 결국 그런저런 일들 때문에 날이 어두워져 그날은 쑤앙마이에게로 출발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치우비는 괴로워서 가죽주머니째 술을 마시면서 혼자 달빛을 보며 밖에 나와 있었다. 그러자 발이 상망과 함께 슬며시 다가와 입을 열었다. “비야. 바깥이 추운데, 감기 들어.” 치우비는 씁쓸하게 웃으며 가죽주머니를 움켜쥐며 말했다. “춥지 않아.” “술만 자꾸 마시면 어떻게 해?” 치우비는 다시 쓸쓸히 대답했다. “오늘은 마셔도 취하지도 않는걸.” “형 걱정 많이 돼?” 발이 다시 조용히 묻자 치우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치우비는 돌연 가죽주머니를 든 손을 떨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형님이....... 형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나는 어쩌지? 응?” 발은 치우비가 너무도 슬퍼하는 모습을 보자 덩달아 눈물이 핑 고였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발은 딱 잘라 말했다. “그 마음은 알지만, 너는 사내자식이 왜 그러는 거야? 맨날 형님! 형님! 너는 대용사잖아. 계속 멍청이처럼 굴 거야?” 그러나 치우비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 모습에 발은 다시 측은해져서 다독거리듯 말했다. “네 마음 알아. 하지만 비야, 넌 강하잖아. 네 형은 꼭 괜찮아질 거야. 네가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거 아냐? 형이 지금 네가 이렇게 축 처져 있다면 좋아할까, 응?” 치우비는 잠시 묵묵히 생각에 잠기다가 이내 어깨를 힘들여 폈다. 그러고는 발에게 말했다. “고마워 하지만....... 형이 어떻게 되면....... 나는 어떻게 하지, 응?” 그때 상망이 끼어들었다. “나도 술 한 모금 주게나.” 치우비가 상망에게 자신이 마시던 술 주머니를 내밀자 상망은 그것을 받아 호기롭게 벌컥벌컥 술을 마신 다음 ‘커’ 소리를 내며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상망은 옷소매로 입가를 쓱 닦고 난 다음 말했다. “자네 마음은 나도 알겠네. 그러나 어쩌겠는가? 허나 나는 자네 형이 이렇게 헛되이 갈 사람은 아니라 생각한다네. 너무 걱정 말게나.” 치우비가 다시 술 주머니를 받아 한 모금을 들이켜자 상망이 말을 이었다. “ 자네에게 한 가지 솔직히 고백할 것이 있다네.” “뭡니까?” “아가씨는 잠시만.......” “왜?” “잠시만요.” 상망이 눈치를 주자 발은 좀 기분이 상한 듯했지만 곧 분위기를 깨닫고 선선히 물러섰다. “나는 지금 몹시 괴롭다네. 자네는 아는가?” “죽은 사람들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것도 있지만, 실은 자네에게 죄를 지을지도 모를 것 같아서 그렇다네.” “무슨 말씀입니까?” 상망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네 형은 카린에 도달하면 자네 문제를 말해주겠다고 약속했다네. 그런데 말야, 눈치를 보아하니 자네 형이 선선히 응해줄 것 같지 않은 눈치란 말씀이야.” 치우비는 상망이 눈치가 몹시 빠른 것에 놀랐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형님은 단지 천천히 생각해보겠다고만.......” 상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지 않네. 그동안 두 달이 넘도록 여행을 했는데 생각할 시간이 그래도 부족했겠는가? 만약 응낙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동안 우리를 좀더 가깝게 대했을 것이고, 이야기도 나눴을 것 아닌가? 허나 그렇지 않고 항상 우리를 좀 슬슬 피하는 것 같더란 말이지. 그것만 보아도 알 수 있네. 자네들은 그냥 떠나가고 싶은 게지?” 치우비는 한숨을 쉬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형님의 생각을 따를 밖에요.” 상망은 다시 술 주머니를 집어 마시면서 말했다. “이 늙은이, 평생 헛산 것은 아니네. 그만한 눈치는 챌 수 있다네. 그래서 나는 마음이 괴롭다네. 내 솔직히 말할 게 있다 했지?” “네.” “헌원님은 나에게 엄하게 명령을 내리셨다네. 자네 형제가 우리를 따르지 않겠다면, 잡아서라도 오라고 말일세.” 치우비도 이미 짐작했던 일인지라 한숨을 쉬었다. “사실, 짐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우르르 몰려왔는데, 짐작 못하면 바보겠지, 헤헤. 이보게. 나는 자네들이 좋지만, 헌원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서 괴로우이. 그러니 제발 생각을 돌려주었으면 좋겠네. 이 늙은이의 솔직한 바람이라네.” 치우비는 상망이 아예 탁 터놓고 나오자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허나 상망은 치우비의 눈치를 살피지도 않고 계속 말했다. “솔직히 왜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다네. 자네들은 주신에서 쫓겨난 몸이네. 더구나 자네는 발 아가씨와 몹시도 가깝잖은가? 내가 모시는 분이라서가 아니라, 그만한 아가씨가 어디 있는가?” “발은 맨날 나를 구박하는걸요?” 상망이 허허 웃었다. “발 아가씨가 아무나 구박하는 줄 아는가?” 치우비가 멋쩍게 싱긋 웃자 상망이 계속 말했다. “더구나 헌원님은 자네들을 지극히 높게 보아주셔서 무슨 일이든 도움을 아끼시지 않잖는가? 태산 회의 때도 헌원님은 지나족이 지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자네 형이 끽구와 붙는 것을 말려주셨고, 이번만 해도 헌원님은 아무 상관없는 일인데도 우리와 수많은 전사들을 보내 돕기까지 하셨잖은가?” 헌원의 이야기가 나오자 치우비는 갑자기 불쾌해졌다. 사실 상망이야말로 유망의 막사에서 있었던 일을 주신의 치우가람 형제에게 일러바치지 않았냐고 따지고 싶었다. 허나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치우비는 애써 참았다. “헌원님께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허나 우리가 갈 길을 핍박하여 거두시려 하는 것은 그냥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어찌되었든 형님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상망님이 그 앞을 막으신다면....... 저로서도 할 수 없습니다.” 치우비로서는 최대한 자제하석 말한 것이지만 불편한 심사가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상망은 조금도 불쾌하게 여기지 않고 대답했다. “하긴, 남자라면 그래야 하는 법일세. 지금 자네와 함께 술을 마시기는 하지만, 만약 서로 싸우게 되어도 있는 힘을 다해야 할 것일세.” 치우비는 상망의 시원시원함이 마음에 들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상망님도 만약 싸우게 되면 봐주시면 안 됩니다.” 상망은 서글픈 듯 낄낄 웃었다. ‘끽구라면 모를까, 나 같은 영감태기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자네 손가락 하나도 못 당할 것인데.” 그러다가 상망이 목소리를 바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너무 고깝게 듣지는 말게. 만약 말일세.......자네 형이 잘못되면 그때는 어찌 하겠는가? 뭐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을 바라는 건 아니네만, 그냥 묻고 싶은 걸세.” 치우비는 형 이야기가 나오자 단번에 울적해졌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치우비는 형의 얼굴을 떠올리며 늠름한 투로 말을 바꿨다. “만약 형님이 없다 해도, 형님의 뜻을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끝까지 이루어보겠습니다. 제 둔한 머리로는 힘들지 모르지만,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해보겠습니다. 그래야 죽어 안파견 한님 곁으로 갔을 때에도, 형님을 만나 떳떳하지 않겠습니까?” 상망은 탄식하며 되받았다. “정말 자네가 마음에 드네. 하지만 나는 몹시 괴롭네. 생각조차 하기 싫지만, 만약 우리끼리 싸움이 벌어진다면 자네는 이겨낼 자신이 있는가? 자네와 몽골 청년, 과보족 여섯 자매와 도깨비들 몇으로 우리 다섯 기인과 수백 명의 전사를 이길 수 있겠는가?” 치우비는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 없습니다. 조금도 자신 없습니다.” “무라나 누루마이는 자네들에게 큰 은혜를 입었지만, 우리 공도 적다고는 할 수 없다네. 그들은 누구 편도 들지 못할 것일세.” 물론 치우비는 그런 도움에 기댈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지만, 새삼 그 말을 듣자 헌원의 지모가 무섭다고 여겼다. 만약 지나족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파견하여 돕지 않았다면, 지나족과 치우 형제 간에 싸움이 벌어졌을 때 카린족이 치우 형제를 도울 수도 있었다. 허나 헌원은 거기까지 이미 내다보고 많은 전사를 파견한 것 같았다. 치우비 역시 탄식하듯 짧게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래야만 하겠다는 겐가?” “형님이 말한 게 있습니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힘들어도 옳은 것은 옳은 일이니 해야만 하고, 아무리 큰 이유가 있어도 그른 일은 그른 것이니 하지 말아야 한다고요.” “그럼 우리가 그르고 자네들만 옳다는 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자신에게 옳은 일과 그른 일이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헌원님을 따르는 것은 헌원님으로서나 상망님에게는 그른 일이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그른 일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태어난 곳이 다르고, 살아온 길이 다르니 괴롭기만 할 뿐입니다.” “태어난 곳, 살아온 길이 다른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는가? 지나족중에는 주신 사람이 없고, 주신 사람 중에는 지나족의 피가 섞인 사람이 정말 하나도 없었다고 생각하는가?” 상망이 묻자 치우비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아닙니다. 어느 부족사람이건 간에 그것은 문제 되지 않습니다. 다 같은 사람인데 그런 것을 마음에 두겠습니까? 저희는 도깨비들조차 사람이라 생각하고 친하게 지내는데, 하물며 주신이며 지나란 것을 굳이 나누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인가?” “뜻이....... 뜻이 다른 것입니다. 저는 아직 형님만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설명을 드릴 수 없습니다만....... 그 뜻의 차이가 문제입니다.” 상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는 계속 이렇게 사이좋게 지내지는 못할 것 같구먼. 슬프네. 평생 이렇게 슬픈 일은 거의 없었다네.” 치우비도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발 아가씨도 슬퍼하실 걸세 나는 사실 발 아가씨를 도맡아 키우다시피 했다네. 그래서 아가씨가 남이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네. 내 손녀딸보다 더 아끼고 있는데....... 아아, 하필 자네와.......” 치우비는 마음이 괴로워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상망은 남은 술을 마저 비우고는 말했다. “제길! 어쨌거나 일단 자네 형의 이야기는 들어보아야겠네. 자네 형이 말을 들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는 되도록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망이 치우비에게 손을 내밀자 치우비는 상망의 작고 앙상한 손을 굳게 잡았다. “우리가 비록 싸우게 되더라도, 우린 마음이 통한 친구였네. 그것을 잊지 마세나. 그리고 싸움에서는 봐주는 것 없기일세. 알겠나?” 치우비는 비록 상망이 유망 막사의 일을 고자질한 장본인이라고는 생각했으나, 상망의 사람됨을 보았을 때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리라 여겼다. 다만 명령을 받았기에 할 수 없었을 것이라 여기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보겠네. 그 죽은 도깨비 일은 안 되었네. 다친 과보족 아가씨에게는 내가 잘 듣는 약을 보내줌세 그럼 내일 길을 또 가야 하니, 이만 들어가 쉬게나.” “예, 상망님도 편히 쉬십시오.” 상망은 술에 취한 척 일부러 흥얼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치우비는 달을 보며 탄식했다. “아아, 괴롭구나, 괴로워. 안파견 한님! 형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음날 아침 일찍 치우비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쑤앙마이가 있다는 카린산 깊은 곳을 향해 출발했다. 넷째 형요가 아직 아팠지만 지나족과의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두고 갈 수도 없었다. 누루마이도 카린 여전사 서른 명 정도를 거느리고 동행했으며 소녀도 함께 길을 떠났다. 지나족들은 다치거나 아픈 사람들과 그들을 돌봐줄 사람을 합쳐 백 명 남짓한 전사들만 빼고는 모두 다섯 기인을 따라나섰다. 지나 전사들의 숫자는 아직도 삼백 명이 넘었다. 길을 가는 내내 치우비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고 말이 없었다. 치베나 형요, 울라트 등도 치우비의 근심을 아는지라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점점 지대가 높아지는지 날씨도 점점 싸늘해졌다. 사흘 정도 험한 산길을 가자 높은 산들 가운데에서도 그야말로 웅장하게 우뚝 솟은 산 하나가 옅은 구름 사이로 거대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누루마이는 그 산이야말로 쑤앙마이가 있는 카린산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길이 험한데다 날씨까지 좋지 않았던 듯, 며칠 전 새로 눈이 내린 흔적이 역력했다. 치우비가 새로 쌓인 눈을 보고 걱정스런 표정을 짓자 누루마이는 치우비를 안심시켜 주었다. “카와 슈는 아주 날쌔고 영리하니 잘 도착했을 걸세. 염려 말게나.” 그날 저녁 치우비는 마침내 쑤앙마이가 있다는 카린산 중턱의 동굴에 도착했다. 주위는 산중턱답지 않게 상당히 넓었고 집들이 여러 채 있었다. 동굴은 커다랗고 눈과 얼음이 쌓인 여느 동굴과 같았지만 주위에 카린족들이 바친 갖가지 화려한 장식물로 뒤덮여 있었다. 동굴 앞에는 작은 초소가 있고 몇 명의 아주 화려한 복장의 여전사들이 횐 표범 몇 마리와 개명수를 데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누루마이는 기뻐하며 말했다. “카와 슈가 있네! 무라는 잘 도착한 거야.” 흰 호랑이들은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치우비나 다른 사람은 알아볼 수 없었으나 누루마이는 알아볼 수 있었다. 치우비는 비로소 근심이 좀 덜어진 것 같았다. 누루마이는 동굴 입구를 지키는 여전사들에게 다가가서 뭐라고 한참 이야기를 했다 누루마이도 큰 부족장이었으며 나이도 많았지만 그 여전사들에게는 상당히 정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 여전사들 중 대장인 듯한 여자가 다가오더니 서툴고도 건방진 주신 말로 물었다. “치우비라는 자가 왔는가?” 그 여전사는 네 자루의 길다란 창을 등에 꽂고 긴 공작 깃털을 머리에 늘어뜨렸으며, 양쪽에 각각 한 자루씩 칼을 차고 모두가 색깔이 다른 화려한 돌 단검을 열 자루 넘게 앞에 꽃은, 화려하고도 엄청난 무장을 하고 있었다.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간 얼굴은 기세가 몹시 사나워 보였다. 여전사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치베와 형요는 눈살을 찌푸렸으나 부탁하는 입장인지라 꾹 눌러 참았다. 치우비는 다만 형이 걱정될 뿐이라 급히 나서며 대답했다. “주신 사울아비 치우비가 예 있습니다.” “쑤앙마이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치우비는 들어와라.” “다른 사람은.......?” 치우비가 되묻자 여전사는 성질을 벌컥 냈다. “쑤앙마이가 계신 곳에 아무나 들여놓으라는 거냐? 무라마이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너도 결코 들여놓지 않았을 것이다!” 치베와 형요 등은 화난 표정을 지었는데 치우비는 뒤를 돌아보고 고개를 저어 그들을 제지했다 여전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저기 빈집들이 있으니 알아서들 들어가 기다려라.” 그때 상망이 나섰다. “나는 지나 화산족의 상망이오. 우리도 헌원님의 명을 받고 쑤앙마이를 같이 뵈려고 하오.” 여전사는 태도를 고쳐 다소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십니까? 그러나 지금은 쑤앙마이께서 몹시 바쁘시니 잠시만 기다렸다 뵙도록 하십시오.” 상망은 치우비 혼자 들여보내고 싶지 않았으나, 치베와 다른 사람이 모두 남아 있으니 치우비 혼자 어쩌겠는가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게 하죠.” 치베나 형요, 울라트는 여전사가 지나족에게만 정중히 대하고 치우비를 뭐 보듯 대하자화가치밀어 속으로 욕을 해댔다. 그때 소녀가 앞으로 나오더니 웃으며 여전사에게 뭐라고 말을 건넸다. 그 여전사는 소녀를 보자 깜짝 놀라며 몹시 반가워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재잘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한참을 기다리던 치우비를 쳐다보며 소녀가 살짝 웃었다. “미안합니다. 오랜만에 봐서 하도 반가워서 그만.” “아는 분입니까?” “저와 같이 자랐던 자매 중 하나예요 이름은 비냐라고 하죠. 비냐가 무례한 것을 용서하세요. 원래 성격이 좀 그렇고, 지금은 화가 나서 그런답니다.” 치우비로서는 비냐가 성격이 좋고 나쁘고는 알 바 아니었으므로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말했다. “어서 가봅시다.” 치우비는 치베에게 화내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라 당부하고 소녀와 누루마이, 그리고 비냐와 함께 굴 안으로 들어섰다. 동굴 속으로 좀 들어가자 천장에서 바닥까지 기괴한 종유석들이 가득 차 있었다. 동굴 벽에는 횃불이 걸려 있었는데 몇 천, 몇 만 년을 두고 생긴 종유석의 괴이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이 횃불에 일렁거리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동굴 안에는 비냐와 비슷한 여전사들이 많이 지키고 있었으나 비냐가 앞장서자 누구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누루마이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소녀는 비냐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따금씩 치우비에게 말을 건넸다. “무라는 벌써 사흘 전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무라도 너무 무리해서 지금 앓아누워 있다는 군요.” 치우비는 고맙고도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서 말했다. “무라님이 그렇게 무리를 해주셨군요. 정말 죄송한 일입니다.......” “무라는 원래 성격이 곧아서 뭐든 한다고 하면 해요 비님과 천님이 무라에게 베푼 은혜가 더 크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런데 형님은.......?” “지우천님은 지금 쑤앙마이께서 직접 돌보고 계신답니다. 벌써 이틀째라는군요. 그런데 쑤앙마이에서 몹시 힘들어하시는 듯하여 비냐가 저렇게 화가 난 거예요 비냐는 원래 남자들을 아주 싫어하는데다 쑤앙마이님을 진정으로 존경하거든요.” 치우비는 쑤앙마이조차 형을 고치는 데 애를 먹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때 동굴 안이 넓어졌고 밝은 빛이 비춰졌다. 그리고 갑자기 공기가 훈훈해지며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졸졸 물 흐르는 소리도 들렸다. 나가 보니 꽃과 풀, 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이름 모를 새와 동물들까지도 놀고 있었다. 어두운 동굴이 이런 기이하고 아름다운 곳과 연결되어 있을 줄은 미처 생각도 못한 터라 치우비는 입을 딱 벌렸다. 시냇물도 졸졸 흐르고 있었으며 나비까지도 날아다녔다. 화사한 빛깔의 동물과 새들도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멀쩡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저쪽에는 그야말로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집이 있었다. 온갖 보석과 금, 가죽과 깃털으로 장 식되어 보기만 해도 눈이 아찔할 정도의 화려한 집이었다. 소녀가 생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저기가 쑤앙마이께서 계신 곳입니다. 신기하죠?” 치우비는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군요. 쑤앙마이께서 계실만한 곳입니다.” 그때 갑자기 뒤쪽에서 여섯 명의 여자들이 급한 발걸음으로 나타났다. 모두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옷과 모자와 망토를 두른 여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소녀나 치우비는 돌아보지도 않고 급히 지나쳐서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것을 보고 소녀와 누루마이는 안색이 변했다. “저들은 누굽니까? 왜 놀라죠?” 치우비가 묻자 소녀가 말했다. “여섯 무녀까지 올 정도라면, 정말 심각하군요.” “저 사람들이 여섯 무녀입니까?” 누루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쑤앙마이의 여섯 무녀라네. 이름은 마이핑, 마이차, 마이양, 마이리, 마이빈, 마이상이고, 사람을 고치고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재주가 있다고들 한다네.” 소녀도 걱정스럽게 한마디 끼웠다. “물론 쑤앙마이께서 더 재주가 뛰어나시지만....... 쑤앙마이가 저들까지 불렀다면 정말 치우천님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인데.......” 치우비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치우비가 화려한 집 앞까지 가자 다시 두 명의 키 큰 여전사가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은 모두 흰 호랑이 가죽을 몸에 두르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렸으며, 극락조의 깃털로 온몸을 장식하고 활과 큰 칼을 멘 여전사들이었다. 그들은 소녀를 보자 또 반가워하며 뭐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그들 중 하나가 아주 서툰 지나 말로 물었다. “네가 주신에서 온 치우비냐?” “그렇습니다.” “어서 들어와라. 쑤앙마이께서 찾으신다.” 누루마이와 소녀가 함께 들어가려 하자 그 여전사는 미안한 듯 뭐라고 하며, 들어갈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누루마이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자네만 들어 오라시니 자네만 가보게.” 소녀는 그래도 들어가고 싶어 하는 듯했는데, 여전사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치우비는 마음이 급하여 얼른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에는 다시 여러 문이 있었고 각각 여전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문을 지날 때마다 약초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그뿐만 아니라 뭔지 알 수 없는 기이하고 독특한 냄새가 풍겼는데, 상당히 독하고 코를 찌르면서도 정신이 맑아지게 만드는 듯한 냄새였다. 세 군데의 문을 지나자 무척 어둡고 침침한 굴이 나타났는데, 여전사를 따라 다시 그 굴을 지나자 푸른빛이 가득한 신비스러운 공간이 나타났다. 벽과 천장 등 사방이 온통 푸른 수정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런 빛이 감도는 것이었다. 그리고 양쪽으로는 신기하게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더운물이 가득 찬 연못이 있었다. 중앙에는 돌을 깎아 세운 단이 있었는데, 방금 들어간 여섯 무녀는 그 밑에 있었고 단 위에는 다시 한 사람의 여자가 서 있었다. 그 여자를 보고 치우비와 함께 들어간 여전사는 깊숙이 허리를 굽혀 절하며 뭐라고 말했다. 아마 치우비를 데려왔다고 고하는 것 같았다. 치우비는 생각했다. ‘바로 저 여자가 쑤앙마이인 모양이구나.’ 쑤앙마이는 참으로 기이한 생김의 여자였다. 검은 머리는 길게 늘어져서 땅에 끌릴 정도였는데 머리결 사이에 붉은 머리칼과 횐 머리칼이 간간이 무의를 이루듯 섞여 있었다. 몸에는 무슨 동물의 것인지 추측할 수도 없는, 아주 희고 고우며 무릎 위까지 한참 올라오는 짧은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타는 듯한 붉은 가죽신을 신고 새 깃털로 짠 듯한 오색의 긴 망토를 늘어뜨렸으며 금으로 만든 관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그 외에도 화려하고 귀한 보석으로 몸을 덮다시피 하여 움직일 때마다 보석들이 뿜어내는 빛에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키는 왜 컸고 피부는 약간 검은 편이었는데, 눈초리는 마치 번갯불을 내쏘는 듯 빛나서 사람을 압도하는 듯했다. 생김새도 아주 특이하여 어찌 보면 나이가 많고 무섭게 생긴 것 같았고, 또 어찌 보면 나이가 젊으며 온화한 것처럼도 보였다. 마치 잠간 바라보는 동안에도 얼굴이 계속해서 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화려하기는 했지만, 어떻다고 꼭 집어 말하기 힘든 기이한 모습이었다. 허나 치우비는 쑤앙마이에게서 곧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쑤앙마이 밑에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바로 형 치우천이었기 때문이다. 여섯 무녀들이 치우천을 둘러싸고 무엇인가 한참토론을 하는 중인데, 표정들이 매우 심각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무라가 호랑이 가죽 위에 앉아 있었다. 아직 몸이 불편하여 누워 있다가 치우비가 오자 몸을 일으킨 듯했다. 무라는 치우비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치우비도 눈인사를 했다. 쑤앙마이는 치우비를 잠시 바라보다가 같이 온 여전사에게 물러가라는 듯 손짓을 했다. 여전사가 물러가자 쑤앙마이는 무라를 보며 뭔가 물어보았다. 무라가 다시 대답하자 쑤앙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치우비에게 주신 말로 또렷하게 말했다. “건방지구나, 치우비. 뻣뻣이 서서 인사도 올리지 않는 것이냐?” 쑤앙마이의 얼굴은 절대 늙지 않았는데 그녀의 목소리만은 마치 백 살 먹은 할멈의 목소리처럼 늙은 티가 역력했다. 그러나 목소리에는 위엄이 가득했고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서슬이 시퍼랬다. 치우비는 얼결에 멍한 표정으로 되받았다. “쑤앙마이님 이십니까?” “내가 아니면 누구겠느냐?” 치우비는 곧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를 한 뒤 말했다. “주신 사울아비 치우비가 쑤앙마이님께 인사드립니다. 어떻게 인사를 드려야 하는지를 몰라서 .......” 쑤앙마이가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멍청이구나. 멍청이로 태어나지는 않았는데 멍청이가 되었군그래.” 그래도 치우비는 뭐라 대꾸하지 않았다 쑤앙마이가 다시 말했다. “너, 쿠라쟌을 먹은 일이 있느냐?” “그게 무엇입니까?” “그렇군. 주신 말로는....... 그래, 뭐라던가. 그 신수 곁에서 자라는 풀 말이다. 아홉 개의 잎사귀가 달린.......” “아홉구비 말입니까?” “아, 주신에서는 그렇게 부르느냐?” 쑤앙마이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듯, 웃으면서 빠른 걸음걸이로 단을 내려와 치우비의 주위를 빙빙 돌며 치우비의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쑤앙마이의 행동은 절대 늙은 여자 같지 않게 정정했으며 왠지 야성미 같은 것이 넘쳤다. 쑤앙마이의 얼굴은 어떤 순간에는 추악해졌다가, 어떤 순간에는 요염해졌다를 반복했다. 치우비는 자기 눈이 이상해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네가 아수타란을 죽였다면서?” “아수타란이 무엇입니까?” “무라를 괴롭히던 그 예티 같은 구루....... 아니, 주신 말로....... 선인 말이다.” “그 괴물 말입니까?” “그렇다. 그 녀석은 원래 괴물이 아니었지. 아수타란이라는 구루였다. 그러나 자기 재주로 세상을 뒤엎어볼 생각을 가지고 보물을 얻으러 갔다가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지.” 쑤앙마이는 아주 장난스러운 아이 같은 얼굴이 되어 킥킥 웃었다. “죽어 싼 녀석이다. 감히 내 딸이나 다름없는 무라를 괴롭혔으니. 안 그래도 내가 손을 쓸 수도 없고 해서 골치 아팠는데 잘 죽였다. 잘 죽였어. 대신 내 고맙다고 하지.” “제가 죽인 것이 아닙니다. 제 형이 생각해낸 일이었고 지나족 영웅들도 도와주었습니다.” 쑤앙마이는 웃으며 치우천을 코끝으로 가리켰다. “그래, 알아. 다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골치 아픈 산송장을 내가 고쳐주려 했겠느냐?” 치우비는 침울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 형이 많이 안 좋습니까?” 별안간 쑤앙마이는 푸르스름한 표정의, 아픈 병자 같은 얼굴이 되어서는 대답했다. “터놓고 이야기하자. 나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치우비는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휘청거렸다. 쑤앙마이는 미안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네 형이 아수타란의 저주에만 씐 것이라면 내가 쉽게 고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더군. 네 형은 다리를 질질 끌었었지?” 치우비는 간신히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몸이 정상이 아니라서 그런 것이지? 아마 헌원과 같이 있었다니 적송자를 만난 적 있겠지?” “그렇습니다.” “적송자는 그래서....... 음. 그 뭐냐, 그래. 몸의 길(혈도)이 막힌 병이라 말해주었을 테고, 그래서 쿠라쟌을 얻은 것이겠지?” “아홉구비 말입니까?” “그래, 아흡구비. 그것은 신수가 지키고 있을 텐데 어떻게 얻었지?” 치우비는 눈물을 글썽이며 어머니 미리내가 아흡구비를 얻어다준 내용을 간단히 이야기했다. 그러자 쑤앙마이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네 형은 왜 그것을 너에게 먹였지?” “그것은.......” 치우비가 머뭇거리자 쑤앙마이는 다시 다그치듯 물었다. “왜 그랬지?” 치우비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쑤앙마이는 다 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랬구나, 그랬어. 네 형은 어렸는데도 참 욕심이 크기도 했구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그 때문에 네 형은 이제 다 죽게 되었다.” 치우비는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쑤앙마이는 그런 치우비를 못 본 척 계속 말했다. 이때 쑤앙마이의 얼굴은 그야말로 돌처럼 딱딱하고 아무 표정이 없었다. 무라보다도 백배는 더 무심해 보였다. “네 형은 그동안 몹시 아프지 않았느냐? 매일같이 길길이 날뛰고 데굴데굴 구르면서 울며 비명을 질렀을 텐데?” 그 말을 듣고 치우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적 없습니다.” “뭐? 그럼 아프지 않았단 말이냐?” “아프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 형은....... 한 번도 아프다는 내색을 한 적 없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몇 번 그랬지만, 어느 날 더 이상 울지 않겠다고 저와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형은.......형은....... 우는 대신....... 노래를 불렀습니다.......” 치우비의 눈에서 눈물이 솟구쳐 하염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항상 빈정거리는 것 같던 쑤앙마이는 처음으로 놀라는 빛을 보였다. “믿을 수 없다. 그게 정말이냐? 그건 사람이 버텨낼 수 있는 아픔이 아닌데.” “사....... 사실입니다.” “또 그뿐만이 아냐! 아수타란의 저주 말고도 또 다른 주술까지 걸려 있구나! 몸을 해치는 저주는 아니지만, 그 때문에 복잡해서 고치기가 너무도 어려워졌단 말이다.” “주술요?” 치우비도 모르던 일인지라 눈을 크게 떴다. 쑤앙마이는 더 따지지 않고 말했다. “그것만이라면 그래도 낫다. 내가 힘을 다하면 어떻게든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맥을 풀어주다가 말았다. 풀면 풀고 아니면 말 것이지 풀다가 말아버려 더 나쁘게 되었구나. 그동안 고통이 더 심해졌을 것이다.” 치우비는 유망이 형을 고치다가 도중에 기분이 틀어져 그만둔 일을 기억해내고 외쳤다. “유망입니다! 염제신농 유망이....... 형을 고치다가 말았습니다!” 쑤앙마이는 다시 화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뭐 그런 놈이 다 있느냐? 고치면 고치고 말면 말 것이지 하다 말아서 더욱더 나빠졌다. 하지만 좋다고 치자! 내 힘에 여섯 무녀의 힘을 더하면 그것도 어떻게 해볼 수 있었다. 그런데 네 형은 그런 와중에도 몸을 쉬지 않고 몹시 험하게 굴린 것 같더구나! 타는 듯 뜨거운 열기도 쬐고 괴이한 것들과도 어울려 기이한 정기까지 몸에 배었다. 아프면 드러눕기라도 해야지 억지로 참으며 왜 사방을 돌아다니느냐? 여기에 왔으니 카린산의 시린 냉기를 쇤 것은 어찌할 수 없다 해도 왜 이리 몸을 험하게 굴린 것이냐?” “맞습니다! 형은 그 바로 직후에 사막에서 헤매며 고생을 했고.......도깨비 왕 비울걸에게 잡혀가서 그와 함께 여기저기 여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카린산으로 달려왔습니다!” 쑤앙마이는 한숨을 쉬었다. 삽시간에 쑤앙마이의 얼굴은 아주 지치고 늙은 초로의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도대체 너는 사람의 몸이 왜 아픈 것인지 아느냐? 몸이 좋지 않으면, 그것을 얼른 고치라고 고통을 느끼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고통을 겪으며 그렇게 몸을 굴리니, 덧난 것이 점점 더 덧나고, 탈이 나도 점점 크게 나는 것이다. 내 여러 백 년을 살아오며 많은 사람을 보아왔지만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놈은 처음이다! 그러면서도 멀쩡하게 걸어 다니고 아수타란과 싸움까지 했다고? 원 세상에!” 치우비는 가슴에 계속 비수가 꽂히는 것 같았다. 쑤앙마이가 한마디 한마디를 할 때마다, 형의 고통이 얼마나 컸었는지 새삼 느껴지는 것 같았다. 너무도 마음이 아파서 몸을 가눌 수조차 없어 치우비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엉엉 통곡을 했다. 그러나 쑤앙마이는 찌르듯 한마디를 더 했다. “너는 아우라면서, 형이 이 꼴이 되게 놔두었단 말이냐?” 치우비는 대성통곡을 하다가 그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아득해지고, 후회가 물밀듯 밀려와서 갑자기 까무라쳐 뒤로 벌렁 넘어져 버리고 말았다. 무라가 깜짝 놀라 일어서려 하는데, 그보다 앞서 여섯 무녀 중 한 사람이 치우비에게 다가가 치우비의 상태를 살피고는 뭔가 약 을 꺼내 치우비의 코에 들이밀었다. 그러자 치우비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정신이 들었어도 치우비는 다시 고통스러워서 땅을 치며 울었다. “그렇게.......! 그렇게 심한 아픔이었던 것입니까?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런 줄도 모르고.......!” 치우비는 다시 목 놓아 울다가 그만 또 까무라쳐 이번에는 앞으로 푹 쓰러져 버렸다. 치우비의 애통해하는 모습을 보고는 냉정한 무라나, 치우비를 처음 보는 여섯 무녀들조차 눈물을 글썽였다. 쑤앙마이도 표정의 변화는 없었으나 치우비를 안쓰러운 듯 한참이나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무녀가 다시 치우비의 정신을 차리게 만들자 치우비는 울면서 쑤앙마이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형을 구해주십시오! 쑤앙마이! 형을 구해주십시오!” 쑤앙마이는 치우비가 너무도 간절하게 매달리자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과는 달리, 점점 흐뭇하고 따뜻하며 정이 넘치는 듯한 아름다운 부인의 얼굴로 조금씩 변해갔다. “사내자식이 이 무슨 꼴이냐! 태산 회의의 대용사라는 녀석이 남에게 함부로 무릎을 꿇어?” 그러나 치우비는 계속 외쳤다. “대용사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사내자식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형님을 구해주십시오 형님을 그런 고통 속에 빠뜨렸던 제 죄가 너무도 무겁습니다. 저를 죽여도 좋고, 저를 갈가리 찢어서 형에게 먹여도 좋습니다. 제발 형을 고쳐주십시오!” 별안간 쑤앙마이가 버럭 화를 냈다. 그때 쑤앙마이는 마치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처럼 독기 오른, 신경질적인 얼굴이 되어 있었다. “에잇! 귀찮아!” 그러고는 거침없이 치우비를 발로 차버렸다. 그러나 치우비는 쑤앙마이에게 엎드리며 계속 간청했다. 쑤앙마이는 성질이 나는 듯 카린 말로 욕을 하며 치우비를 마구 때렸는데도 치우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무라의 얼굴이 밝아졌다. 쑤앙마이는 성격이 괴팍하여, 그녀가 화를 내고 귀찮다고 한 것은 싫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오히려 좋게 말하고 웃는다면 그것이 바로 거절의 의미였다. 쑤앙마이가 치우비에게 화를 내고 때리는 것은 그녀가 모든 힘을 다해 치우천을 구해볼 생각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려면 고생을 해야 하므로 미리 화풀이를 하는 셈이었다. 쑤앙마이의 그런 기이한 성격을 쑤앙마이 밑에서 자란 무라가 모를 리 없었다. 사실 카린산의 부족들은 쑤앙마이에게 무엇인가를 청할 때, 쑤앙마이가 화를 내면 낼수록 좋아했다. 만약 쑤앙마이가 부탁하는 사람을 두들겨 팬다면, 그 사람은 맞으면서도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기뻐하곤 했고, 집에 가서 잔치를 베풀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만큼 쑤앙마이가 전력을 다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라는 쑤앙마이에게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쑤앙마이는 성격이 괴팍해서 만약 남이 옆에서 끼어들면 하려던 일도 그만두곤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쑤앙마이가 치우비에게 말했다. “알았다, 알았어. 내가 졌다. 너 이 멍청이 같은 놈이 하도 끈질기니 하는 수 없구나. 그러니 그만 좀 그쳐라. 시끄러워 못살겠다.” “예, 예.......‥ 감사합니다, 쑤앙마이.” 그러나 치우비가 금방 울음을 그치지 않자 쑤앙마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썩 그치지 않으면 다시 생각을 바꾸겠다.” 치우비는 눈이 퉁퉁 부어 간신히 울음을 멈추었다. 쑤앙마이는 뒷짐을 진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잠시 왔다 갔다 하더니 이윽고 치우비에게 말했다. 쑤앙마이의 얼굴은 심각하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 되었다. “사실 완전히 낫게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두 가지는 내가 손댈 수 없다.” “그게 무엇인지요?” “하나는 아수타란 것 말고, 다른 주술이다. 그건 뭐 몸을 해치는 것은 아니니 그냥 두어도 상관은 없다만.” “그래도 주술이 걸려 있으면.......” 쑤앙마이가 호통을 치며 치우비의 입을 막아버렸다. “내가 상관없다고 하면, 상관없는 거야.” “예, 예. 쑤앙마이.” 치우비가 다시 공손해지자 쑤앙마이는 계속 말했다. “두 번째! 유망 놈이 건들다 만 것은 그 녀석이 끝내야 한다. 그놈이 쓴 방법은 옛날 신농이 만든 방법이라 나도 모른다. 그러니 다 낫게는 못한다. 네 형은 만약 잘되면 옛날처럼 아프지는 않을 것이지만, 다리는 여전히 절지도 모른다. 다리를 고치는 것은 유망 놈말고는 할 사람이 없다. 그래도 되겠느냐?” ‘유망과는 이제 원수가 되었는데 어떻게 유망에게 다리를 고쳐 달란단 말인가? 허나 할 수 없지. 형이 아프지 않게 되는 것만도 어디니.’ 치우비는 생각을 접고 급히 말했다. “그게 어딥니까? 다만 감사할 따름입니다.” 쑤앙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 네 힘이 필요하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정말이냐?” “물론입니다!” 그러자 쑤앙마이는 다시 눈을 빛내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너는 원래 기운이 센 타고난 용사다. 그러나 지금같이 강해진 것은 쿠라쟌을 먹은 덕이겠지?” “그렇습니다.”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먹어 사라져 버렸지만, 그 기운만은 네 몸속에 아직 남아 있다. 그래서 네 힘이 그리 강해진 것이다. 그렇지?” “그렇습니다.” “그 기운을 버릴 수 있느냐? 네 형을 위해서, 그 기운을 버릴 수 있느냔 말이다.” 치우비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치우비가 너무 간단히 대답하자 쑤앙마이는 웃었다. 쑤앙마이는 아주 날카롭고 빛나는 눈을 한, 기이하고도 무서운 얼굴로 변해 있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네 형은 그 기운을 가져도 전혀 강해지지 않는다. 다만 아픈 것이 나을 뿐이지 자기 아픔을 돌보지 않고 네 형이 그걸 네게 준 것은, 너를 세상 제일의 용사로 만들기 위함이었던 것을 내가 안다. 물론 그 기운이 없어져도 어느 정도는 되겠다만, 네 형이 그걸 바랄지 아닐지 모르잖느냐?” “하지만.......” 치우비가 말끝을 흐리자 쑤앙마이는 웃으며 뒷짐을 지고 치우비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것만이 아니다. 너는 이제 유명해져서, 네 형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네게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런데 네가 하루아침에 약해진다면, 앞으로 그 험난한 길을 어떻게 갈 생각이지1 듣자 하니 너는 형천, 끽구와 맞먹었다는데, 앞으로는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할 거야. 그러면 네 형은 누가 지키지? 네 형의 뜻은 몹시 큰 것 같던데, 그걸 누가 이뤄주지?” 치우비는 고개를 저었다. “형이 없으면, 저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보다 열 배, 백배로 강해진들 형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애쓰겠습니다. 힘이 없으면 기술을 닦으면 됩니다. 사실 저는 힘만 믿고 노력을 게을리 했습니다. 죽을 각오로 더 노력하겠습니다. 더 애쓰겠습니다.” “후회하지 않겠나?” “죽어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치우비가 단호하게 외치자 쑤앙마이는 갑자기 간드러지게 ‘호호’웃더니 곧 무섭게 눈을 빛내며 외쳤다. “눈을 감아라!” 치우비가 눈을 감는 순간, 갑자기 저 높은 낭떠러지에서 한없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되며 정신을 잃어버렸다. 무라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쑤앙마이가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쑤앙마이는 치우비가 정신을 잃자 곧 여섯 무녀들을 시켜 치우비의 몸을 치우천의 옆으로 옮기라고 했다. 그리고 치우천과 치우비의 몸을 마주보게 일으켜 앉힌 다음 치우비의 오른손을 치우천의 왼손에 갖다대게 하고 치우비의 왼손을 치우천의 오른손에 갖다대게 했다. 두 사람은 의식이 없었으므로 무녀들이 대신 손을 받쳐 들고 있어야 했다. 쑤앙마이는 꼼꼼하게 두 사람의 자세를 여기저기 바로잡아 주더니 곧 눈을 감고 주문을 외웠다. 주술이 걸리자 두 사람의 몸은 돌처럼 빳빳하게 굳어져서 잡아주지 않아도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쑤앙마이는 여섯 명의 무녀들을 자신의 뒤로 오게 하여 등 뒤에 손을 갖다대게 하고는 무라에게 말했다. “너는 잘 지켜보고 있다가 만약 내 얼굴에 붉은 기운이 없어지고 푸른 기운이 돌면, 일이 잘못 된 것이니 급히 자매들을 불러 힘을 보태게 해라. 그래도 붉은 기운이 돌지 않는다면 나를 밀어서 저들과 떼어내라. 단 너는 절대 힘을 쓰지 마라. 너는 다쳤으니 잘못 힘을 쓰면 큰일 난다.” 무라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쑤앙마이가 치우비의 등에 손을 대고 힘을 가하기 시작하자 무라는 초조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새 우주의 탄생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둥둥 뜬 것 같은 침묵이 얼마나 계속 되었는지 몰랐다. 그러다가 갑자기 찌르는 듯한 아픔이 전신을 뚫고 지나가는 바람에 치우천은 정신을 차렸다. 허나 정신이 들었다 뿐이지 눈도 뜰 수 없었고,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찌르는 듯 아프고 또는 근질근질한 기운이 몸속을 마구 맴돌면서 곳곳을 훑고 지나갔다. 온몸이 저릿저릿할 뿐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 안에서 뭔가가 확 폭발하는 듯한 느낌에 치우천은 놀라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넘어지며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뜨며 치우천은 헐떡이면서 일단 숨을 골랐다. 조금 정신이 들자 치우천은 천장을 보고 낯선 광경에 의아해했다. 자신은 푸른 수정들이 영롱하게 빛나는 동굴 속에 와 있었던 것이다. 치우천은 의아해했다. ‘나는 괴물과 싸우다가 정신을 잃었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 있는 것일까? 무라나 누루마이가 옮겨놓은 것일까?’ 치우천은 몸을 일으켜 세우다가 깜짝 놀랐다. 치우비가 자신의 앞에 죽은 듯 쓰러져 있는 것 아닌가? “아우야! 아우야!” 치우천은 놀라서 치우비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치우비는 숨은 있었지만 마치 기절한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얼굴색이 몹시 파리하고 초췌했다. 그때 뒤에서 아주 늙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렸군, 치우천.” 치우천은 돌아보고 흠칫거렸다. 자신의 등 뒤에는 아주 기이하게 생긴 여인이 숨을 헐떡이며 앉아 있었고, 그 뒤에는 다시 여섯 명의 횐 옷을 입은 여자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거기다가 다시 다섯 명의 카린산 여전사들이 쓰러져 있고 맨 끝에는 무라가 쓰러져 있었다. 치우천으로서는 사람들이 왜 가지런히 줄을 이어 쓰러져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치우천은 분위기를 보고, 또 자신의 뒤에 있는 여인의 분위기가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것을 보고는 눈치 빠르게 물었다. “쑤앙마이 이십니까?” 쑤앙마이가 웃었다. “그래.” “주신 사울아비 치우천이 쑤앙마이께 인사드립니다. 이렇게 만나 뵈니 영광입니다.” 치우천이 놀랐을 텐데도 침착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는 쑤앙마이가 웃으며 농담을 했다. “나에게 온 지 이미 사흘이 지났는데 인사가 늦군!”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제 아우는 왜 이렇고, 무라님은 왜 쓰러져 있습니까? 저 사람들은 또 누군지요?” 쑤앙마이는 대답하지 않고 치우천을 흥미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몸은 좀 어떠냐?” 치우천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항상 느껴지던 고통이 온데간데없었기 때문이다. 항상 고통을 달고 사는 치우천이라 이제는 아프지 않은 것이 어떤 느낌인지조차 잊어버릴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정신까지도 씻은 듯 상쾌했다. 몸이 날아갈 듯 가벼운 것이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치우천이 놀라서 말을 더듬거렸다. “아....... 아프지 않습니다. 이....... 이....... 이건.......” 말재주 좋은 치우천이 자신도 모르게 말까지 더듬자 쑤앙마이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아직 다리는 불편할 거야. 유망이 섣불리 건드려 놔서 그래. 그러니 그자만이 고칠 수 있어.” 그러나 치우천은 몹시 기뻤다. 다리가 불편한 것은 어찌할 수 없더라도 전신을 쥐어짜는 듯하던 고통이 사라진 것이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치우천이 거듭 감사의 뜻을 표하자 쑤앙마이는 그냥 약간 조롱하는 듯 웃기만 했다. 그러다가 치우천이 문득 물었다. “헌데 왜 다들 쓰러져 있는 것입니까?” “너 때문에 그렇지. 너는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기에 몸을 그리 함부로 굴리느냐? 그래서 고생깨나 했단 말이다.” 쑤앙마이는 일어서서 무라에게 다가가 무라의 맥을 짙어보고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이 바보 같은 것.” 치우천은 아우의 안위도 궁금했지만 큰 은혜를 입은 것을 잊지 않은지라 무라가 걱정되어 물었다. “무라님은 괜찮습니까? 저는 사실 어찌된 일인지 잘 알 수 없군요.” 쑤앙마이는 대답하지 않고 무라의 이마에 손을 갖다대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무라는 신음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무라가 눈을 뜨자마자 쑤앙마이는 화를 냈다. “이 바보야! 아무리 급해도 너만은 다쳤으니 안 된다고, 내가 그렇게 끼어들면 안 된다고 했는데 왜 끼어든 것이냐? 정말 죽을 뻔하지 않았느냐?” 치우천도 미처 깨닫지 못했으나 쑤앙마이는 일부러 치우천이 들으라는 듯 지나 말로 말했다. 무라는 고개를 푹 숙였으나 곧 얼굴을 조금 붉혔다. 그것을 보고 쑤앙마이는 놀라며 무라를 흘겨보았다. “이 바보야. 바보 멍청아! 네 것이 될 수 없단 말이다. 그런데도 그러고 싶으냐?” 무라는 곧 큰마음을 먹은 듯, 애써 조그맣게 대답했다. 무라는 카린말로 하여 치우천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저는 저들을 위해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저들을 친구로 생각할 뿐입니다.” “흥!” 쑤앙마이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안타까운 눈길로 무라를 째려보았다. 무라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는데 무라의 대리석 같던 흰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쑤앙마이는 답답한 듯 가슴까지 치며 카린 말로 다그쳤다. “큰 놈이건 작은 놈이건 이미 다 짝이 정해져 있어! 대체 어느 놈이야? 더구나 우리 카린족은 주신 사람과는 인연이 닿지 않는단 말이다! 생각을 바꿀 수 없는 게냐?” 그러나 무라는 더더욱 고개를 숙이다가 마침내 고개를 돌려버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무라의 얼굴은 더더욱 붉어져 있었다 치우천은 카린 말로 두 사람이 말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없어, 그저 어리둥절해 하다가 나름대로 생각했다. ‘아마 무라가 다친 몸인데도 나를 구하기 위해 무리하게 애를 써서 위험해졌나 보다. 그래서 쑤앙마이가 화를 내는 것 같구나.’ 치우천은 그렇게 생각하고 곧 정중히 말했다. “주신 사울아비 치우천이 말합니다. 무라마이께서 저를 구하느라 애써주신 것, 정말 감사합니다.” 무라는 고개만 끄덕했는데 쑤앙마이는 되레 역정을 냈다. “뭐가 무라마이냐! 내 앞에서 누구에게 마이 자를 붙이겠다는 거냐? 내 앞에선 무라님이라고 불러!”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쑤앙마이.” “너와 네 동생이 무라를 도와 아수타란을 죽여준 것은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은혜는 무라가 죽어가는 너를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카와 슈를 타고 달려와 나에게 데려다주어서 갚은 셈이야! 그런데도 또 너를 구하려고 그 지친 몸으로 무리하게 기운을 써서 죽을 뻔했으니, 너는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단 말야!” 치우천은 쑤앙마이가 생색을 내는데도 전혀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더욱 정중히 말했다. 치우천은 치우비보다 눈치가 빨라서, 자기들이 죽인 괴물의 이릉이 바로 아수타란임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절대 잊지 않습니다. 쑤앙마이, 무라님. 그리고 저기 쓰러져 계신 분들도 저 때문에 애를 쓰셨군요. 제 힘이 닿는 한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쑤앙마이는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보답? 정말이냐?” “물론입니다.” “제까짓 게 무슨 보답을 한단 말이냐? 정말 보답할 생각이 있는 거냐?” “물론입니다.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쑤앙마이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만약 내가 여기서, 네 목숨을 달라고 하면 어쩔 거냐?” 치우천은 좀 놀랐으나 곧 웃으며 말했다. “그러실 생각이라면 거둬 가십시오.” “무섭지 않으냐? 내가 너를 살렸다고 죽이지 못한단 생각 말아라. 나 쑤앙마이는 평생 내 멋대로 살아온 사람이라 나도 바로 다음 순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단 말이다.” 쑤앙마이가 겁을 주는데도 치우천은 조용히 말했다. “저는 비록 보잘것없고 나이도 적지만, 항상 안파견 한님의 뜻을 받들어 옳은 길만 걸으려 애썼습니다. 만약 내가 여기서 죽게 된다면 애석하지만 그것도 안파견 한님의 뜻이겠지요.” 치우천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하자 쑤앙마이는 곧 기분이 좋아졌는지 미소를 지었다. “알았다. 내 너를 죽이지 않으마. 솔직히 죽이고 싶었지만 참는 것이다. 대신 네가 보답할 길이 하나 있다.” “무슨 일인지요?” “만약 나나 카린족이 너에게 죄를 지어도, 너는 오늘 일을 생각하여 그들을 조금도 원망하거나 해치지 말아라. 한 번만 그래 주면되느니라. 그럴 수 있겠느냐?” 치우천은 좀 어리둥절했지만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쑤앙마이는 선인 중에서도 큰 선인이다. 선인의 말은 당장 이해가지 않아도 분명 큰 이유 가 있으니 토를 달 수 없는 것이다.’ 치우천은 그렇게 생각한 다음 진정으로 그러겠다고 말했다. 쑤앙마이가 기분 좋게 웃었다. “좀 다르긴 다른 놈이로구나. 아무렇게나 말하지 않고 어떤 일이건 정말 두 번 생각해본 다음에야 대답하는 것을 보니.” 쑤앙마이가 치우천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듯 이야기하자 치우천은 흠칫 놀랐다. 허나 쑤앙마이는 개의치 않고 연달아 말했다. “좌우간 약속한 것이다?” “주신 사울아비 치우천이 말합니다.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쑤앙마이는 기분이 좋아진 듯, 호호 웃었다 여전히 늙은 목소리였지만 몹시 간드러진 느낌이어서 묘한 기분을 자아냈다. 치우천이 쑤앙마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제 아우는....... 어찌된 일입니까?” “너는 저 녀석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죽자 살자 나를 붙들고 애걸하지 않았으면 너를 구하지 않았을 테니까. 네 아우도 큰 희생을 했다.” 치우천은 치우비가 희생을 했다고 하자 갑자기 슬프고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쑤앙마이는 치우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염려 마라. 별일은 없다. 다만 전에 네가 녀석에게 먹인 쿠라쟌.......아니 아흡구비의 기운을 전부 너에게 되 넣어준 것뿐이니까. 이제 네 아우는 그렇게 강한 장사가 아니다.” 그 말을 듣고 치우천은 길게 한숨을 쉬고는 쓰러져 있는 아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물을 지었다. 치우천은 아우의 뺨을 한 번 쓸어주며 중얼거렸다. “아우야, 내 아우야. 바보 같은 녀석아. 너는 앞으로 어찌하려고 그랬느냐?” “실망했느냐? 네 아우에게 화났느냐?” 쑤앙마이가 묻자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제 아우가 무슨 짓을 해도, 저는 화내지 않습니다.” “말을 듣지 않아도?” 치우천은 미소를 지은 채 아우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알고 대답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듣지 않은 것이겠지요.” “네 아우가 못된 짓을 해도?” 치우천은 멋쩍게 웃었다. “내 아우라서가 아니라, 이놈만큼 순진하고 착한 녀석은 세상에 없습니다. 차라리 내가 못된 짓을 하면 했지, 내 아우는 절대 그러지 않습니다.” “그럼 왜 그러느냐?” 치우천은 조금 슬픈 듯한,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녀석은 이미 대용사로 소문이 났습니다. 겨루자고 하는 놈, 노리는 녀석들이 줄을 이을 것이고 험한 일이 수도 없이 기다릴 겁니다. 하지만 힘이 없어졌다고 피할 녀석은 아니죠. 그것이 안쓰러워서 그렇습니다. 그것뿐입니다.” “제가 지켜주면 되잖느냐?” “물론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녀석은 되레 몸을 돌보지 않고 항상 나를 지키려고만 합니다. 그것만은 제 말을 듣지 않는답니다. 그러니 안쓰러울 밖에요.” 쑤앙마이는 처음으로 만족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 좋군!” 그러다가 쑤앙마이는 갑자기 무라를 보며 말했다. “무라! 아이들을 불러서 쓰러진 애들을 전부 나가 있게 해라.” 시간이 좀 지난 터라 쓰러져 있던 여자들 중 몇몇은 정신을 차리거나 일어나 있었는데 비냐와 쑤앙마이의 집 앞을 지키던 긴 머리의 여전사 중 한 명, 여섯 무녀 중 세 명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무라가 곧 대답하고 사람을 불러 쓰러진 사람들을 업고 지친 사람들을 부축하여 모두 나가게 했다. 치우비는 그냥 놔두었다. 무라가 막 나가려고 할 때 쑤앙마이가 불러 세웠다. “나가거든 누루를 불러라.” 누루마이도 역시 존칭이 붙은 말인지라 쑤앙마이는 그냥 누루라고 불렀다. 무라가 대답하고 나가자 동굴 안은 조용해졌다. 쑤앙마이가 치우천에게 조용히 물었다. “네 이름은 무슨 뜻이지?” 치우천이 말하지 않자 쑤앙마이는 웃으며 다시 물었다. “혹시 하늘이란 뜻이 아니냐?” 치우천은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쑤앙마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쑤앙마이의 얼굴은 치우천의 눈에도 시시각각 마음대로 변하는 것 같아서 신기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 아수타란은 도를 깊이 닦은 선인이었다. 그는 축복을 받아서, 하늘의 이름을 가진 자만이 죽일 수 있는 운명을 받았으니까.” 그 말에 치우천은 놀랐다. “괴물도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런 소리를 했습니다. 혹시 그를 아셨습니까?” “그래. 그러나 염려할 것은 없다. 나도 그놈은 잘 죽었다고 생각한다. 아수타란은 자기가 배운 재주로 사람들을 지배하여 큰 지배자가 되겠다는 욕심 때문에 몸을 망친 것이다. 너는 그놈이 남긴 보물을 얻었느냐?” “괴물이 자기를 살려주면 보물을 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듣지도 않았습니다.” “너는 욕심이 없으니 되레 보물을 가질 만하다. 내 그 보물이 여기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저는 가진 적이 없습니다.” “누가 네가 가졌다고 했느냐? 누루! 들어와라!” 쑤앙마이가 돌아보지도 않고 말하는데 누루마이가 들어와 쑤앙마이에게 절을 했다. 쑤앙마이는 보지도 않고 물었다. “괴물이 남긴 보물은 네가 가지고 있지?” 누루마이는 크게 놀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제 부하가 얼음동굴을 무너트리면서 얻었습니다.” “네가 가질 셈이냐? 그게 뭔지나 아느냐?” 누루마이는 정색을 했다. “제가 가질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와준 사람들이 고마워서 그들에게 주기 위해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보물은 두 개의 구슬이었는데, 이미 하나는 지나족의 상망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쑤앙마이는 한숨을 쉬었다. “구슬이 두 개였느냐? 허, 이것도 하늘의 뜻인가? 지나족에게 하나를 이미 주었다고.......” 쑤앙마이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고는 물었다. “나머지 하나는 누구에게 줄 것이냐?” “쑤앙마이께서 원하는 대로 하소서.” 쑤앙마이의 얼굴이 아주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변했다. “너는 그렇게 나이가 먹을 때까지 나를 섬기고도 아직 이 쑤앙마이를 모르느냐? 네가 얻은 것을 내가 왜 달라겠느냐? 누구에게 줄 생각이었냐고 묻잖느냐?” “하나는 치우 형제에게 주려고 했습니다.” “그럼 줘라“ 쑤앙마이가 간단하게 말하자 누루마이는 약간 몸을 떨며 품에서 계란보다 조금 작은, 타는 듯한 붉은 빛이 감도는 구슬을 꺼내어 치우천에게 주었다 치우천은 얼결에 공손히 그것을 받았다. 누루마이가 구슬을 내주자 쑤앙마이는 말했다. “잘했다. 그럼 나가봐라.” 누루마이가 인사하고 나가자 쑤앙마이가 치우천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치우천이 곧 대답했다. “괴물 아수타란이 말했었습니다. 신수와 이야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구요.” “그래, 맞다. 네 이야기는 네 아우에게 들었다만, 너희 어머니가 쿠라쟌을 구하기 위해 신수에게 돌아가셨다고 했지?” 치우천은 그 말에 번개범이 문득 떠오르자 눈에서 분노의 빛을 뿜어냈다. “그렇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녀석은 주신의 한웅님을 해치려고 했습니다.” 이번에 쑤앙마이의 얼굴은 조용하고 차분하게 바뀌어져 있었다. “그러니 그 구슬은 네게 꼭 필요할 것이다. 그놈과 이야기라도 해보려면 말야.” “감사히 받겠습니다.” “주인이 되었으니 보물의 이름은 알아야겠지. 그 구슬은 ‘우린’이라고 부른다. 아주 오래 전, 발귀리 선인께서 만드신 것이지.” 발귀리 선인의 이름이 나오자 치우천은 놀랐다. “발귀리 선인께서요?” 쑤앙마이는 치우천이 놀라는 것을 짐작했던 듯,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다. 쑤앙마이의 얼굴은 마치 빛을 발하는 것처럼 눈부신 광채에 휩싸였다. “너는 발귀리 선인을 만난 적 있지? 난 사실 그 할머니랑 친하지는 않지만.” “그....... 그렇습니다.” “발귀리 선인은 말(言)의 어머니이시다. 발귀리 선인께서는 벌써 아득할 정도로 옛날에 도를 얻으신 분이지. 나보다도 셀 수도 없이 더 빠르셨다. 너는 주신 사람이니 대선인인 자부님을 알 것이지만, 자부 선인도 도력은 높지만 발귀리 선인의 먼 자손이시지 이 우린 구슬은 발귀리 선인이 말을 만들어 인간들에게 가르치시기 전, 여러 산 것들과 마음을 통하기 위해 만드신 것이다.” 치우천은 신비한 이야기를 들으며 멍하니 고개만 끄덕이다가 이내 말했다. “발귀리 선인께서는 저와 또 만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쑤앙마이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다. 너는 왜 여자들을 멀리하지?” 치우천은 안색을 굳혔다. “그건 저도....... 저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다만 누루마....... 아니, 누루님께 주술 때문이라 들었습니다.” “그래. 그런데 누가 이런 엄청난 주술을 걸었을까? 더구나 그것은 사람을 해치지도 않는 퍽 기묘한 것이다. 그것은 나도 풀어낼 재주가 없어.” 치우천은 애써 그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요.” 쑤앙마이는 피곤하고도 애처로워 보이는 울상으로 변하더니 코웃음을 쳤다. “뭐가 어떻게든 된다는 거냐? 소녀도 내가 키운 귀한 아이다. 그 아이가 너를 좋다고 하여, 내 말까지 듣지 않고 울고불고 별짓을 다했단다. 그냥 여기 들어와서 너를 한 번 보고 싶다고 말이다.” 치우천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감격하기도 해서 말했다. “소녀님은 정말 저에게 잘해주십니다.” “그 애만 잘해주면 뭐 해? 너도 잘해줘야지. 설령 그 애가 너에게 시집을 가도 허구헌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란 말이냐?” 카린족은 풍습이 퍽 개방적이라 남녀간의 일도 서슴없이 이야기했다. 치우천은 멋쩍고 부끄러워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쑤앙마이는 다시 화가 치미는 듯이 말했다. 쑤앙마이의 얼굴이 마치 악귀나 도깨비처럼 무섭게 변해 있었다. “뭐, 그건 네 잘못은 아니니 탓할 수 없지. 소녀는 어릴 때부터 지나족 유망에게 보내지려고 길러졌다. 유망만이 아니라 어떤 남자의 마음도 쏙 빼놓을 수 있게 말야. 사실 그것 때문에 그 애는 다른 자매들보다 훨씬 힘들게 자랐고 나도 그 애가 불쌍하다. 그런데 유망이나 사와라 한웅이나 다 늙은 머저리들이라 그런 귀한 아이를 여기저기 굴렸다니! 내 이 앙갚음을 하지 않으면 쑤앙마이가 아니다!” 화를 내며 떠들어대다가 쑤앙마이는 다시 숨을 몇 번 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웃어 보였다. 어느 새 쑤앙마이의 얼굴은 다시 조용하고 편안한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변해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그 표정에 치우천은 정신이 다 없을 지경이었다. “너는 그 애에게 잘해주어라. 그 애는 겉으로는 순하지만, 마음은 무척 강한 아이라서, 네가 잘못하면 편히 잠들 날이 없을 거다.” 치우천은 고개만 끄덕였다. 쑤앙마이는 한탄하듯이 계속 말했다. “나는 이미 천 년을 넘게 살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이 동굴의 덕이야. 나는 이 동굴을 찾아내어 이곳의 기운을 쐰 덕에 오래 살며 주술을 닦아왔다. 하지만 그 때문에 밖으로는 함부로 나갈 수 없게 되었어. 동굴 밖으로 나가면 모든 힘을 잃어서 주술을 사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수타란이 행패를 부려도 손도 쓰지 못했고, 지나족 유망놈이 더러운 요구를 해도 꾹 참고 들어줄 수밖에 없다. 참으로 안타까워. 이 동굴 안으로 끌고 올 수 있다면 어떤 녀석이든 내 상대가 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치우천은 쑤앙마이의 힘이 그토록 강대하고 주술이 대단하다고 들었는데도 왜 아수타란 같은 괴물을 못 잡았을까 궁금하던 것이 비로소 풀렸다. 아울러 쑤앙마이 같은 대단한 지도자가 있는데도 왜 지나족의 눈치를 보는 것일까 하는 의문도 풀린 셈이었다. 쑤앙마이는 다 시 수심에 잠겨 말했다. 이때 쑤앙마이의 얼굴은 영락없이 백 살은 먹은 할머니처럼 보였고 수심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나는 오랜 세월 살았고 주술력도 많이 쌓았지만, 선인이 되지는 못했다. 절반 선인이라고나 할까? 도를 더 닦아 선인이 되어 세상을 버리고 싶지만, 이 카린 부족은 내가 세운 것이다. 옛날에 처음 사람이 생길 때 남자와 여자는 똑같이 태어났다. 허나 아이를 낳는 고통을 치르기에 여자들은 위대한 존재, 남자들보다 우월한 존재라 칭해졌고, 남편과 자식들이 여자를 받들며 살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세상의 여자들은 모두가 남자들의 물건처럼 되고, 남자들의 눈치나 살펴서 자질구레한 일이나 해야 했어. 그것이 싫어서 나는 여자들을 위해 카린 부족을 세웠다. 카린족은 여자들의 자존심인 거야.......” 치우천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쑤앙마이는 좀 멋쩍었는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너와 같이 있으니 이상하게 내가 말이 많아지는구나. 좌우간 나는 우리 부족을 사랑한다. 우리 부족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닥치는 것은 견딜 수 없어. 하지만 우리는 수도 적고, 여자들이 밖으로 다니기 때문에 수가 잘 늘어나지도 않아. 더구나 우리는 지나족과 가까이 있다. 훈족이나 창족<주석 : 쿤룬산맥 밑, 지금의 티베트 지 방에 사는 종족의 이름. 티베트 지방을 중국인들이 서장이라 불렀으며 미들은 장족, 서장족이라고 불렸다. 원래 당시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지만, 옛 이름을 고증할 길이 없어서 혼돈을 피하기 위해 근래 통용되는 이름으로 썼다.>들은 아직 약하지만, 지나족들은 너무도 많아서 겁이난다. 그래서 우리는 지나족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 그것은 이해할 수 있겠지?”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나족이 나에게 어떤 부탁을 해오면, 나는 웬만해서는 거절하지 못한다. 내가 살아서는 그래도 괜찮지만, 내가 죽으면 카린 부족도 위험할 거야. 지나족은 우리와 정반대라서, 여자들은 모두 남자의 소유물이다. 카린 부족이 그들의 손에 떨어지면.......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야. 그러니 우리는 그들이 싫으면서도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는 거야. 알겠느냐?” 치우천은 쑤앙마이의 고심을 알 것 같았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쑤앙마이께서는 오래오래 사셔서 부디 카린 부족을 지켜주십시오. 주신과 카린은 서로 너무 멀어 많이 오가진 않지만, 저는 카린 부족을 영원히 친구로 생각할 것입니다. 쑤앙마이나 무라님이 도와주신 것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안파견 한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있습니다.” 쑤앙마이의 얼굴에 기뻐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쑤앙마이가 기뻐하자 마치 어린 소녀처럼 밝고도 화사한 얼굴이 되었다. 목소리와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눈부실 정도로 예쁜 얼굴이었다. “그래, 잊지 않으면 된다. 이 쑤앙마이가 오랜만에 너무 입을 놀렸구나. 속마음을 다 털어놓았으니 말야. 다 네가 괜찮은 놈이라 여겨 그런 것이니 좋게 생각해라 발귀리 할망구가 마음에 들어 한 놈이니, 너에게 카린족의 일도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구나.” 쑤앙마이는 아주 기분이 좋은 듯했다. “네 아우는 비록 힘은 떨어졌지만, 이제는 좀 덜 멍청해질 것이다.” “무슨 말씀인지요? 제 아우는 멍청하지 않습니다. 다만 착하고 순진할 뿐이죠.” “그건 그렇지만, 네 아우는 가끔씩 둔하고 멍한 표정을 짓지 않더냐? 그건 착한 게 아니라, 일시적으로 머리가 굳어서 그러는 것이다. 그게 쿠라쟌의 힘이 너무도 강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야. 네 아우는 원래 힘이 아주 셌는데, 거기에 쿠라쟌의 힘이 기세를 북돋우니 오히려 몸길(혈도)이 가끔씩 막혀 머리가 잘 돌다가 멈추고 해서 그런 거야. 아마 이제는 그러지 않을 테니 전보다는 훨씬 눈치 빠른 녀석이 될 것 같구나. 뭐, 사실 그래서 더 착하게 자랐을지도 모르지만.” 치우천은 놀라면서 다시 한 번 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 치우천이 아우의 몸을 추스르느라 힘을 쓰자, 무엇인가가 땅에 툭 떨어졌다. 쑤앙마이는 그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뭐지?” 치우천은 얼결에 그 물건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태산 회의 때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생겨 있던 이상한 목걸이였다. 그다지 정교하거나 귀한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가지고만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고 귀하게만 여겨져서 항상 목에 걸고 다녔던 그 목걸이였다. 하지만 그것이 왜 치우천의 손에 들어 있었는지는 아무리 애써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머릿속이 몹시 어지러워지면서, 뭔가 생각이 날 것 같았다. “뭐가....... 생각날 것 같습니다만....... 대체.......” 쑤앙마이는 치우천의 묘한 표정을 보며 웃으면서 말했다. “너는 이제 온 몸의 길(혈도)이 트였으니, 막힌 기억도 생각이 날 것이다. 전에 어떤 선인인지 그런 장난을 좀 쳐두셨더군그래. 언젠가 풀릴 거였지만 하필 지금 생각나는구나, 하하.”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에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태산 회의 때 맥을 만나고, 신비하기 짝이 없는 작은 여자아이를 만났던 일, 그리고 뒤이어 자부선인을 만나고, 자부선인과 말싸움을 했던 일,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었던 일....... 치우천은 기억이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놀라 부르짖었다. “맥달! 맥달! 아니, 그 맥달이 바로.......!” 쑤앙마이가 웃으며 물었다. “그렇게 놀랄 일이었느냐?” 치우천은 충격을 받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맥의 머리 위에 올라타고 있던, 자신에게 몹시 살갑게 굴던 말도 못하던 더러운 아이, 그 아이의 얼굴이 똑똑히 기억에 떠올랐다. 비록 그때는 어렸고 얼굴도 지저분했으며 행동거지도 점잖지는 않았지만 크고 지혜로운 눈과 곱고 청수한 이목구비는 바로 나중에 나타난 맥달의 얼굴 그대로였다. 유망의 막사에서 소녀의 유혹을 받을 때나, 견디기 어려운 마음 아픈 일이 있을 때 항상 보일 듯 말 듯 떠올라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던 그 얼굴. 그러나 안개처럼 아롱거리고 잡힐 듯 하면서 구체적으로 생각은 나지 않던 얼굴. 그것은 바로 맥달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아냐!’ 치우천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부르짖었다. ‘말도 안 된다! 그 아이는 태산 회의 때 아이에 지나지 않았는데, 며칠 사이에 어떻게 그렇게 다 클 수 있단 말인가? 아니야. 맥달은 이미 맥 같은 신수를 타고 다닐 수 있고, 자부선인과 함께 있었으니 모습을 바꿀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모르는 일투성이였다. ‘그런데 맥달은 왜 나를 찾아왔단 말인가? 왜 이 목걸이를 나에게 주었는가? 그리고 왜 나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단 말인가?’ 순간 치우천의 머리에 번개같이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저주, 그렇다. 내 몸에는 여자를 가까이 할 수 없게 만드는 주술이 걸려 있다고 했다! 그것을 건 사람이 혹시.......혹시 맥달이 아닐까? 쑤앙마이조차 풀 수 없는 주술이라니 아무나 걸었을 리는 없지. 맥달의 재주는 대단하니 그런 주술을 충분히 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왜 그랬을까? 그렇구나! 맥달이 처음부터.......나를 좋아하여 점찍어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안 그러면 어찌 맥을 시켜 나를 찾아왔단 말인가? 아이처럼 모습을 바꾸어 나를 찾아온 것도 그렇다면.......’ 치우천은 왠지 모르게 갑자기 기분이 언짢아졌고 맥달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졌다. 맥달을 처음 보았을 때의 순수하고 기쁜 마음이 왠지 퇴색하는 것 같았다. 치우천은 다시 생각했다. ‘내가 좋더라도 나를 그대로 두고 좋아해야지, 나에게 주술 같은 것을 걸어 꼼짝 못하게 만든다면 맥달은 나를 너무 우습게 본 것이다.’ 맥달은 물론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거기다가 너무 재주가 많고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치우천은 왠지 모를 자격지심 같은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치우천은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이제껏 딱 두 사람에게만은 자신의 왜소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 바로 헌원과 맥달이었다. 그러나 헌원의 경우는 그렇게 밉지도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감탄할 수도 있었는데, 맥달의 경우에는 왜 이리 자신이 편협해지고 속이 좁아만 지는지 불쾌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이리 속이 좁은 놈이었는가 의아할 정도였다. 하지만 언짢은 기분은 머릿속으로 생각한다고 풀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왜 그러나?” 쑤앙마이가 묻자 치우천은 얼버무렸다. “아....... 아닙니다. 갑자기 자부선인님을 만났던 기억이 나서.......” “그래? 그럼 그게 자부선인이 해두신 장난이었구나. 너는 자부선인도 만나본 적이 있느 냐?” 쑤앙마이는 치우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관없이 아주 기분이 좋은 듯, 감히 마주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의 어여쁜 얼굴로 발귀리 선인이나 자부선인에 대해 몇 가지를 더 물었다. 치우천은 쑤앙마이와 이야기하면서 점점 불쾌한 기분을 잊을 수 있었다. 쑤앙마이가 자신은 선인이 못된다 말했지만, 사실 선인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인지라 치우천은 처음으로 숨김없이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쑤앙마이는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를 들으며 말했다. 쑤앙마이의 얼굴은 오싹할 정도의 색기가 넘치는 중년의 여인처럼 변해 있었다. “너는 아주 특이한 녀석이구나. 더구나 복도 많다 자부선인만 해도 몇백 년을 기다려도 한 번 만나기 어려운데 너는 그분에게 대들기까지 하다니! 네가 자부선인을 깨우쳐준 셈이 아니겠느냐? 더구나 발귀리 선인은 이제는 아무도 만날 수 없게 된 분이다 나도 아주 예전에 발귀리 선인이 카린산에 오르셨을 때 딱 한 번 뵈었을 뿐이다. 아수타란도 그때 발귀리 선인을 뵈었지. 너는 아마 아주 특이한, 아주 큰일을 하게 운명지어졌을 것이다.” “저 같은 것이 무슨 큰일을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다. 자부선인이나 발귀리 선인이 어떤 분인데 보통 사람이 만날 수 있었겠느냐? 하물며 나, 쑤앙마이도 아무나 만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목숨을 걸다시피 너를 살리기까지 했잖느냐?” 치우천은 믿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쑤앙마이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혹시, 혼돈선인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처음 듣습니다.” 쑤앙마이는 의미 있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인들의 이야기를 하자 쑤앙마이의 얼굴은 다시 눈부신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원래 열두 명의 대선인이 있었다. 사람 선인은 자부선인이 제일 먼저였고, 다른 세상, 다른 곳에 세 사람의 대선인이 더 있지. 발귀리 선인은 너무나 옛 분이라 세지 않는다. 그리고 자연의 기가 모인 선인도 있고, 동물이나 식물 선인도 있느니라. 혼돈은 그중 으뜸으로, 얼마나 오래 전 선인인지 아무도 짐작하는 이 없을 정도의 선인이니라. 허나 기의 힘은 나이만으로 가늠 지어지는 것이 아니지. 자부선인과 힘은 비슷하다 하더라. 아무튼 자부선인과 혼돈선인은 성격이 정반대지만, 또 둘이 아주 친하다고 알려져 있다.” 치우천은 신기한 이야기에 놀라워하며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놀라울 뿐입니다.” 쑤앙마이가 계속 말을 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대선인은 못 되어도 적어도 늙어 죽지 않을 정도로 도를 닦은 선안쯤은 되어야 그 이름이나마 들어볼 수 있으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마. 너는 자부선인을 만났었지? 내가 듣기로 헌원은 혼돈선인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더라.” “그렇습니까?” “그래. 더구나 헌원을 따르고 있는 적송자나 광성자는 모두 홍균에게서 가르침을 얻은 선인들이다 아직 작은 꼬마들이지만 말야. 그런데 홍균은 바로 혼돈이 가르침을 주어 길러낸 선인이란다. 재미있지 않으냐? 혼돈선인과 자부선인은 둘 다 아주 큰 선인이며 친하지만, 아 웅다웅하며 다투기도 한단다. 자부가 너를 택하고 혼돈이 헌원을 택한 것이라면....... 하하, 재미있을 것이다.” 치우천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자부선인의 뜻을 따를 재주가 없습니다. 눈이 어두워서 선인을 몰라보고 가르침 받을 기회를 차버렸습니다.” 쑤앙마이는 아주 재미있고도 익살맞은 형상으로 변하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과연 그럴까?” 치우천은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너무나 신기한 이야기이니 더 듣게 해주십시오.” 쑤앙마이는 선선히, 그러면서도 몹시 아름답게 웃었다. 그러다가 쑤앙마이의 얼굴이 다시 빛을 발했다. “그러마. 윈래 이 세상에 산 것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도(道)라는 것이 생겨났다 그냥 꿈틀거리며 살아가다가 죽는 것들이 도를 닦아서 우주에 가득한 기를 모아들여 기(氣)라는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치우천은 우주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물었다. “우주가 무엇입니까?” “세상 모든 것을 다 담은 곳이다. 하늘도 땅도 별도 바다, 이 모든 것을 합하여 우주라고 한다. 나아가서는 산 것과 죽은 것, 움직이고 생각하는 이 모든 것으로 이루어진 것을 우주라고도 한다. 공간이기도 하고, 생각이기도 하다.” 치우천은 알 듯 말 듯하여 말꼬리를 흐렸다.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쑤앙마이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그것을 안다면 너도 선인이게? 듣기나 해라. 그렇게 힘을 얻은 생명들이 자라나면서 처음에는 그 힘으로 세상을 좀더 풍요로워지게 하려 했다. 사실 세상이 뒤바뀐 것은 한두 번이 아니지. 우주는 그냥 땅이나 하늘처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생각이 있고 뜻이 있어야 물체도 생겨나는 법이고 변해가는 법이다. 산 것들이 살아서 자라고 변하면서 세상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 가운데 하늘의 섭리가 작용하여 도를 닦은 존재들이 나온 것이다. 지금 이전의 세상이 어떠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아득한 옛적부터 세상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바뀌어가면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람이 나온 것은 그렇게까지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얼마나 오래된 일이기에 그렇습니까?” “기껏 해야 천의 천의 몇열곱 해 전이다 더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얼마 되지 않지.” 치우천이 그때까지 헤아리는 숫자 중 가장 큰 것이 천이었다. 열천, 백 천 정도로 천을 넘겨 세는 것도 상당히 생각이 깊고 똑똑한 축에 속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은 백 단위밖에 세지 못했다. 그런데 천의 천이 다시 넘는 숫자라니! 치우천은 제대로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 전에 사람이 생겼습니까?” “뭐 그렇다고 하더라. 그런데 사람이 나온 것은 하늘의 이치가 극도로 통했기 때문이다. 하늘의 이치는 신으로부터 나오는데, 신의 모습은 누구도 본 적이 없고 만난 적조차 없다 부족들은 각자 신을 섬기고 동물을 섬기고 조상을 섬기지만, 신은 그 모든 것에 다 계신다고 한다. 이거 너에게는 너무 힘든 이야기겠으니 그냥 넘기거라. 다만 대선인들만이 신의 뜻을 알고 그에 따라 세상을 바꾸도록 노력했다고 한다. 아까 말한 열두 대선인이 그 가장 큰 존재들이고, 그들에게서 비롯된 수많은 작은 선인들이나 이상한 존재들이 세상에 널려 있지.” “주신, 지나가 아는 곳 말고도 세상은 끝없이 넓은 것 같습니다. 도깨비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 그런데 요즘 들어 아주 특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단다.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선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지, 하하. 요즘이라고 해봐야 몇백 년은 넘었겠지만.” 몇백 년이라는 과거가 ‘요즘’으로 치부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치우천에게는 놀라웠다. 치우천은 머리가 아팠지만 정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대선인들이 세상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듣기로는 이미 혼돈선인이나 홍균 등도 세상을 떠나갔고, 자부선인만이 아직 인간 세상에 남아 있다고 들었다. 물론 대선인들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데 거의 간섭하지 않는다만.” “왜 다 떠나갔습니까?” “그냥 떠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큰일을 하기 위해 떠났다고 한다. 듣기로는 우주를 다시 세운다고 하더라만.” 그 말에 치우천은 놀랐다. “우주를 다시 세운다고요? 아까 우주에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포함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그런 일이 어떻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너는 아직 대선인들을 잘 모르는구나. 사람들은 대선인들을 말할 때, 단숨에 산을 부수고 강을 말리는 힘을 지녔다고들 떠들지. 그러면서도 그게 부풀린 것이라 생각한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주술이 강하다 해도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쑤앙마이는 ‘하하’ 웃었다. “부풀린 것이 아니라, 너무 대선인들을 작게 본 것이다. 대선인이 마음만 먹으면 산 하나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 전부를 쓸어버려서 먼지 하나 남지 않게 만드는 것도 된단다. 열두 대선인 중에 그러지 못할 존재는 하나도 없다고 들었다. 대선인의 힘이란 우주 자체의 힘이고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이 가득한 힘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하단다.” 치우천은 경악하여 말끝이 떨렸다. “그....... 그게 어떻게....... 그렇다면 왜 대선인들은.......” “그런 힘을 왜 쓰지 않느냐고? 왜 그런 힘을 쓰겠느냐? 대선인들이 미치광이인 줄 아느냐? 자기 힘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들은 그런 경지에 오를 수도 없단다. 대선인들의 힘은 끝이 없지만, 그들은 힘을 보이지 않고,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힘없는 것들의 삶과 뜻도 존중해준단다. 너는 힘자랑을 하는 작은 선인밖에 못 보았나 보구나.” “그들도 작지는 않습니다.” 치우천이 말하자 쑤앙마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자들은 다 그만그만한 경지에서 도를 닦지 못하고 결국 기가 끊어지게 되어 있다. 도는 사는 것 자체에서 얻어지는 것이지, 결코 힘을 얻으려 고생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냐. 산에 들어가서 누가 도를 닦아 기를 얻었다고, 무작정 산에 들어가서 무슨 이상한 짓을 한다고 선인이 될 줄 아느냐? 흥! 무슨 구체적인 힘으로 도나 기를 풀이하는 것은 멍청이 짓일 뿐이다. 힘을 뽐내거나 남에게 권하거나 자랑하는 엉터리 같은 것들은 결코 진정한 경지에 오를 수 없어! 도나 기나 선인이 되는 길은 스스로 깨닫는 것이지, 가르치거나 풀이하거나 배워지는 것도 아니며 남에게 권할 일도 아니란 말야. 그런 자들은 대부분 아수타란처럼 스스로 망하고 말 뿐더러 혹 사람을 놀라게 할 잔재주는 몇 배울 수 있어도 세상을 흔들 재주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도리어 사람을 속이고 못쓰게 만들기 십상이지.” “하지만 대선인들께서 선인들께 가르침을 주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녀석아. 스스로 우주를 깨닫기 시작하여 선인이 된 이후에야 도나 기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거야. 처음부터 멍청한 녀석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면, 세상은 선인들밖에 없게? 더구나 선인이 되는 것은 누구에게 권함을 받아서 되는 것이 절대 아냐! 너는 자부선인이 누구를 이끌어 선인으로 만드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느냐?”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 없습니다. 자부선인께서 안파견 한님을 도우셨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안파견 한님을 선인으로 만드신 것은 아니지요.” “바로 그거야. 자부선인은 하실 일을 하신 것뿐, 누구를 선인으로 만드는 일은 하지 않아. 도를 가르칠 수 있다면 무한하지도 않고 작은 것이니 이미 도가 아니게? 도는 과정일 뿐이야. 기를 얻는 과정. 도가 목적은 아닌 거야. 도를 닦아 기를 얻고, 기를 얻어 자신을 돌아본다. 결코 자신을 버리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버리면서 도를 닦지는 못한단 말야. 모두 헛지랄을 하는 것뿐이지! 잘된다고 쳐봐야 조그마한 잔재주 몇몇 생기는 것을! 만약 네가 도를 닦아 강을 메울 수 있는 힘을 지녔다고 쳐보자. 그게 뭔 쓸모가 있겠니?” 치우천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대답했다. “강을 메울 수 있는 힘이라면 대단하겠죠. 그러나 그런 정도로 힘을 얻으려면 몇십 년, 몇백 년은 걸려야 할 것 같군요. 맞습니까?” “그럴 테지.” “그렇다면 저 같으면, 그냥 흙을 퍼다 조금씩 조금씩 강을 막겠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몇 년이면 되지 않을까요? 그냥 강을 막는다면, 갑자기 변하는 것을 견디지 못해 고기도 다 죽고, 물길도 마구 넘치고 사람들도 놀랄 것입니다.” “그렇지! 그래서 쓸모없는 일이야.” “하지만 그런 힘을 남에게 뽐내고 자랑하면, 아마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지고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도 있겠지요. 남보다 강해지고, 남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니 기분 좋다 여길 자들도 있겠죠.” 쑤앙마이가 웃으며 되받았다. “도의 힘을 그런 데 쓰는 것들은 아주 높은 선인들이나 대선인들이 놔두시지 않지 도를 목적을 가지고 쓰는 것은 못된 짓이야. 도의 길을 틀어지게 만든 것이니 도의 힘으로 벌을 받아 마땅하지. 뭐 지금은 아직 좀 어수선하지만 앞으로는 그런 힘은 없어질 거야. 단 하나, 그런 힘을 얻어 함부로 쓰는 자들을 막기 위한 힘 정도는 남아 있을 수 있다만.” “그러면 그 도의 힘은 쓸 데가 없군요. 스스로를 위한 것일 뿐이잖습니까.” “도의 힘은 원래가 그런 거야. 힘을 얻기 위한 게 아니라, 그런 힘 같은 것은 그냥 중간에 싫어도 거치게 되는 과정일 뿐이지. 하지만 그것도 모르기에, 도라는 이름은 오히려 사람들을 무수히 해칠 거야.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들처럼 도를 얻고 싶네, 도력을 이루고 싶네, 너도 도의 길을 걸어보라는 둥 나는 이렇게 얻었다는 둥 세상을 속이고 스스로를 속이는 부류들이 사람을 망치는 것이 아마 싸움으로 사람을 죽이고 망치는 수만큼 많을걸? 그러니 태초부터 그렇게 많은 존재들이 살고 죽어갔으며 죽지 않고 오래 사는 존재들도 제법 많이 나왔지만, 정말 대선인은 열둘밖에 나오지 않았던 거야. 좌우간 대선인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새 세상을 만든다고 들었다. 오히려 우리가사는 세상을 인간들 손에 맡겨주려고 그러시는 거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요?” “그렇다. 너만 해도 신수를 만나보았다니 말이 쉽겠구나. 지금 세상에는 기를 얻기가 너무도 쉽다. 신수들 중 많은 존재들도 물론 도를 닦아 기를 얻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대선인이 되지 않고, 그냥 영원히 그렇게 사는 것으로 만족한단다. 그런 자들을 선인들은 고립자라고 부른다. 아무와도 연관을 맺지 않고, 외따로 떨어져 존재한다는 뜻이지. 주로 동물 선인들 중에서 그런 고립자가 많이 나왔고, 지금도 세상에 많이 남아 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신수라 말하고 두려워하며 또는 섬기기도 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강한 존재들이지. 너도 보았겠지만, 거의 상대할 수 없을 정도란다.” 치우천은 번개범과 맞닥뜨렸을 때의 일을 생각하며 몸서리를 쳤다. 천 명의 사울아비가 있었음에도 번개범에게 변변한 상처 하나 내지 못하고 모조리 전멸할 뻔하지 않았던가? 같은 신수인 맥과 때마침 알에서 깨어난 붕이 물리쳐 주지 않았다면 당해낼 수 없었을 터였다. “정말 그렇습니다. 신수는 너무도 강합니다.” “그렇지. 고립자들은 사람보다 나은 힘을 지니고 있다. 사람보다 훨씬 오래되었거든. 그럼에도 그들은 더 이상 변하거나 생각하려 들지도 않는다. 아마도 이전까지 세상은 도를 닦아 얻어지는 힘을 위주로 삼았는데, 대선인들은 그걸 바꾸고 싶어 하는 거 같단다. 사실 힘이 강 해지니 죽지 않고 사는 자들도 많아졌고, 삶과 죽음이 모호해지니 도대체 세상에 달라질 것이 없어진 셈이야. 이대로라면 결국은 강한 고립자들만이 남아 세상을 메워갈 거고, 그렇게 된다면 세상은 정지되어 있고,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질 거야. 산 것이 죽는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래야 죽은 자 대신 또 새로운 산 것이 태어나고, 모든 것이 달라지고 변하여 우주 전체가 살아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치우천은 이해가 될 듯 말 듯 했지만 좌우간 마음속으로는 그 말이 옳다고 여겨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세월이 흐르면 죽을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두렵련고, 죽지 않으려 애쓰기는 할 것입니다. 허나 영원히 죽지 않고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세상 전체를 두고 볼 때 좋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아들딸을 낳아 자신의 뒤를 잇는 것이 사람의 길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래. 이해하기 어려웠을 텐데 잘 말해주었어. 그래서 대선인들은 세상을 인간들 손에 넘겨주고, 그렇게 세상이 흘러가고 변하게 하려고 우주를 새로 창조하는 것이지 대선인들이 각각 하나의 우주로 변한다고 하네. 뭐, 나로서도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의 일이지만 그렇게 들었단다.” “엄청나군요. 한 사람이 어떻게 우주가 되는 것입니까? 도대체가.......” “편하게 부르느라 대선인이라 하지만 꼭 사람만은 아니라 했잖아. 더구나 대선인들처럼 진정한 도의 경지에 달하면 모든 것이 마음의 크기와 같아져. 산이 크고 무거워도 마음속에 산을 담을 수 있으면 산을 없애거나 만들 수도 있고, 땅이 넓고 깊어도 마음속에 땅을 담을 수 있다면 땅도 없애거나 만들 수 있는 거야.” “우주의 크기가 얼마나 되기에 도대체가.......” “우주의 크기는 끝이 없지.” “새로 만들어진다는 모든 우주가 다 그렇습니까?” “그렇지.” “어떻게 끝이 없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커도 가고가고 또 가면 끝이 있을 것 아닙니까?” 쑤앙마이가 가볍게 웃으며 되받았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주는 두 발짝밖에 안 될걸? 네가 한 발을 내딛고 다음 발걸음이 있으면 너는 영원히 그렇게 나가야 하겠지? 아까 말했듯, 우주는 생각까지도 담은 곳이야. 크기로 잴 수 없으며, 크기로는 끝이 없어. 끝이 있는 것은 벌써 우주라 할 수 없어. 아, 너는 아직 생각할 수 없을 거야. 좌우간 대선인들의 마음이 우주만큼 크다면, 아니 끝이 없다면 우주로 변하는 것도 안 될 일은 아니야. 더구나 대선인들은 그렇게 떠나면서, 각각 새로 생길 세상에 맞을 힘을 지닌 존재들을 그곳에 옮겨져 살도록 했지. 물론 사람과 비슷한 동물이나 풀, 나무, 그런 산 것들은 모두 그냥 두었지. 이 세상에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기이한 존재들이 네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단다. 그 각각의 존재들을 그곳의 주인들로 만든 거야. 뭐, 도의 힘으로 어지러워진 세상을 아주 큰 도의 힘으로 정리한 셈이지. 도의 힘으로 세상이 잘못되는 일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 되게 준비한 것이지.” 치우천은 너무나 엄청난 이야기에 몸까지 떨렸다. 그 규모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치우천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아직 세상에는 신수나 선인, 도깨비와 귀신같은 것도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생각해봐. 만약 네가 집을 옮긴다 해 보자구. 선인이 만약 주술로 네 집을 허공에 날려서 그냥 옮겨버린다면 너는 당황하겠어, 안 하겠어?” “그야 물론.......” “그래. 그런 것과 마찬가지야. 집을 옮긴다면 네가 짐도 싸야 하고, 새로 살 곳도 미리 둘러봐야 하고, 좌우간 네 힘으로 갖추고 다듬어야 정말로 마음 붙이고 살 수 있겠지? 세상도 그래.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바뀌게 하면 문제가 많을 것 아니냐? 더구나 고립자처럼 산 것도 아닌 존재들이라고 모두 대선인들의 뜻에 따른 것은 아냐. 뜻을 깨우치지 못한 것들도 있고, 변하지 않고 웅크리고 그냥 살기를 바라는 것들도 있어. 그래서 그들이 남아 있는 거야.” “대선인들이 왜 그들은 옮기지 않았을까요?” “이봐, 인간만 중요하고, 다른 것은 모두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거야? 그들도 좀 생각해줘야지 인간 세상으로 만들기로 했다고 그들을 다 죽이거나 억지로 옮긴다면 대선인들이 대선인이 아니게? 그들은 인간들이 스스로 처리해야 하는 거야. 만약 그것도 못한다면 인간은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할 자격이 없지. 하하, 나도 사람으로 나기는 했지만 별수 없잖아?” 쑤앙마이는 잠시 동안 웃다가 이내 표정을 고쳤다. “이봐, 치우천. 잘 들어. 너는 아직 별것 아닌 그냥 사람이지만, 발귀리 선인이나 자부선인이 너를 특별히 본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야. 뭐 선인이 될 인연은 없어 보여. 그러나 하늘이 너를 태어나게 한 이유가 있을 거고, 너는 그것을 하면 되는 거야. 뭐 억지로 만들거나 하지 않아도 네 운명이 그렇게 지워질 거야. 그러니 너 혼자 끙끙대며 고민할 필요가 없어.” 치우천은 깊이 생각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도의 힘이나 주술은 신기하고 강하지만, 정말 이 세상이 사람들의 세상이 되려면 그런 것들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선인들의 뜻이 그렇고, 하늘 뜻이 그렇다면 이 세상은 사람들의 힘으로 땀 흘려 다듬고 세워야 하는 것이지, 그런 힘으로 바꾸고 지배할 것은 아닌 듯하군요.” 쑤앙마이가 호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봤어! 실제로 이 세상은 결코 도의 힘으로 지배되지 않게 될 거야! 앞으로 세상에는 그런 힘이나 주술이 점점 쓰기 어려워지거나 찾기 힘들어지게 될 것 같거든. 나만 해도 그런 것을 느끼고 있어. 새 우주가 생기면서 도의 힘은 모두 그리로 향해지게 된 것 같아. 뭐 이렇게 된 이상 신수나 그런 것들이 상대하기 어렵다 해도, 인간들이 버티기만 하면 기가 끊기고 힘이 말라서 고립자나 다른 존재들은 스스로 망해버릴 거야. 그 전에 깨닫고 대선인들이 세운 다른 세계로 가면 몰라도 말야. 대선인들은 모든 힘 있는 존재들에게 충분히 경고한 바가 있으니, 아직 세상에 남아 있다가 일을 당하는 건 다 그들 책임이지. 그때까지 는 몇백 년은 더 걸릴 테고 인간들은 아직 그들에게 많은 고통을 당해야 할 테지만 말야. 사실 나도 그중 하나지. 하지만 나는 우리 부족을 버릴 수가 없어....... 모든 힘이 말라버리고, 주술력이 사라지는 세상이 되면 주술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도 이 세상과는 이별일 테지.” 쑤앙마이가 쓸쓸하게 말하자 치우천은 뭔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 같았다. 치우천은 쑤앙마이가 왠지 모르게 가엾어졌다. 그 표정을 본 쑤앙마이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요 녀석아 아무리 그래도 나는 너보다는 훨씬 오래 살 거야. 그런 주제에 불쌍하다는 눈길로 보지 말라구.” 치우천은 꾸밈없이 ‘하하’ 웃었다. 하긴 아무리 그래도 쑤앙마이는 도력이 사라질 때까지 몇백 년은 더 존재할 것이고, 치우천은 절대 그렇게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저도 늙어 죽을 때가 되면 더 살고 싶어 할 겁니다. 하지만 사람의 운명이 그렇다면 받아들여야겠죠. 오히려 그때가 되면 쑤앙마이께서 늙어 죽는 저를 불쌍히 여기실지도 모르겠군요.” 쑤앙마이는 치우천을 보고 마치 친구를 대하듯 격의 없이 웃었다. “늙어 죽으면 다행이게? 내 보기에 너는 운명이 복잡하여 참 험한 길을 걸어야 할 것 같아. 남에게 맞아 죽지나 않게 조심하거라.......” “알겠습니다. 정말 엄청난 이야기였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들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쑤앙마이께 다시 한 번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치우천은 아까 들은 복잡하고도 엄청난 말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기억에 새겨둘 수조차 없었다. 다만 고립자라 알려진 신수나 그런 존재들은 인간의 손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의 원수인 번개범을 꼭 잡고 싶었기 때문이다. 쑤앙마이가 다시 온화한 얼굴이 되어서는 말했다. “됐어. 난 선인도 되고 싶지 않고, 다만 영원히 카린족의 부족장으로 남고 싶을 뿐이야. 뭐, 나도 하나의 고립자인 셈이지. 내가 한 말, 이해가 잘 가지 않을 테니 잘 생각해보고, 나중에 발귀리 선인을 다시 만나면 더 물어보든지 해. 나는 무엇보다도 카린의 부족장이라는 걸 잊지 마. 아까 한 약속도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쑤앙마이.” “이제 나가봐. 나도 피곤하다. 네 동생은 이틀 정도 지나면 점신 차릴 거야.” “알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보기 어려울 거야. 하지만 나도 재미있었다. 치우천, 잘 살아라. 꼭 큰 사람이 되거라.” 쑤앙마이는 말을 끝내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는데, 그 마지막 얼굴은 실로 성스럽고 고귀한 여신의 얼굴처럼 변해 있었다. 치우천은 다시 마음속으로부터 깊이 인사하고 치우비의 몸을 애써 부축하여 밖으로 나갔다. 아우의 몸은 무거웠지만 치우천은 이제 몸이 아프지 않고 기운이 솟아서 혼자서도 짊어지고 갈 수 있었다. 아까 들은 엄청난 이야기들은 정말일까? 치우천은 생각했다. ‘어차피 대선인이니, 우주니 하는 이아기는 내가 신경 쓸 것 없다. 네가 할 일은 그런 상상조차 되지 않는 곳의 일이 아니니까. 우주에 비하면 내가 사는 땅은 좁고 한 토막밖에 되지 않겠지만, 그 안에서도 할 일은 많다. 작은 땅이라도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그래. 나는 내 할 일, 사람이 할 일만 정성껏 하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쑤앙마이의 집 밖으로 나온 치우천은 조금 놀랐다.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상망과 끽구, 비휴와 신도 울루의 다섯 기인이 긴장한 듯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치가 결코 곱지는 않았던 것이다. 상망은 치우천을 보자마자 말없이 앞으로 걸어 나왔는데, 길을 갈 때나 힘을 합해 아수타란을 같이 잡을 때와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치우천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거, 내가 정신이 들자마자 헌원을 따르겠느냐고 다그칠 모양이구나. 내가 정신을 잃는 바람에 생각해두었던 것이 다 틀어지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지? 더구나 아우가 이 모양인데다 힘까지 잃었으니, 힘들게 되었구나!’ 아니나 다를까, 상망이 대뜸 다가와서 치우천에게 말했다. “이봐, 천. 이제 나은 것 같구먼그래. 그런데 이렇게 졸라서 미안하지만, 이젠 슬슬 딱 부러지게 말해줘야 하지 않을까? 헌원님을 따를거야? 말 거야?” 그러리라 짐작은 했지만 너무도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망이 정곡을 찔러 물어보았다. 아무리 머리가 잘 돌아가는 치우천이라도, 지금의 상황에서 둘러댈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치우천의 등에 갑자기 식은땀이 솟았다. 대추격진 치우천이 당황해하며 미처 대답을 하지 못하자 상망은 다시 한 번 다그쳤다. “우리는 이미 오래 기다렸네. 더 생각해야 한다는 핑계는 이제 대지 말게나. 좋아, 내 솔직히 말하지. 자네가 헌원님을 따르겠다고 맹세한다면 물론 좋지 우리와 같이 화산으로 돌아가면 된다네.” “만약 아니라 한다면요?” 치우천이 애써 태연한 척 웃으며 묻자 상망은 곧 쏘듯이 말했다. “그래도 화산으로는 가야 한다네. 꽁꽁 묶여 가야겠지만.” “왜 그러시는 겁니까?” 상망은 약간 서글프게 웃어 보였지만 역시 단호하게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지는 않네만, 헌원님의 명령이라 하는 수 없다네.” “지금 저는 대강 나았지만, 아우가 이 모양이 되었는데도요?” 치우비를 슬쩍 쳐다보며 상망이 씩 웃었다. “죽을 것은 아니잖은가? 오히려 잘 되었네. 자네 아우는 너무 힘이 세서 마음을 놓을 수 없지.” “애당초부터 그럴 생각이셨습니까?” “그렇다네.” “나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러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상망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끽구와 비휴에게 손짓을 했을 뿐이다. 거기에 신도 울루까지 합세하여 치우천을 완전히 에워쌌기 때문에 치우천은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치우천은 치우비의 무거운 몸까지 짊어지고 있었기에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치우천은 그 와중에도 피식 웃어 보였다. “도망칠 수도 없겠군요.”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헌원님을 따를 수 없다고 하는 게로군. 그렇지?” 치우천은 당당하게 되받았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자네를 묶어가도 우릴 너무 탓하지 말게나.” 그때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치우천이 어깨 너머로 바라보니 그 사람은 바로 치베였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형요와 요요가 있었다. 모두 활과 무기로 무장한 채였다. 상망은 그다지 놀라지도 않고 조용히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희들이 뭘 어쩌겠다는 거냐?” “누구 마음대로 사람을 잡아가겠다는 거야? 천 안다는 주신 사람이며, 헌원은 지나족이오. 헌원이 주신 사람을 마음대로 잡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치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끽구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럴 수 있다.” “뭘 믿고 그러오?” 끽구는 양손에 든 구리 추를 한 번 휘둘러 보였다. “이걸 믿으면 안 될까?” “우리는 같이 싸우고, 피를 흘렸소. 그런데도 싸워야겠다는 거요?” 치베가 외치자 끽구도 괴로운 듯 목소리를 높였다. “할 수 없다. 누구나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는 없는 것이다 헌원님의 명이니, 설령 내 목을 바치라 해도 드려야 한다.” “그럼 이제 할말은 없구려.” 끽구는 사람됨이 올곧아서 떳떳하게 말했다. “그래, 할 수 없다. 서로 싸우더라도 서로를 원망하지는 말자.” 치베는 조용히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고는 곧 눈부시게 빠른 동작으로 화살을 한 움큼 뽑아 들었다. 치베는 동시에 다섯 대의 화살을 활에 재며 물었다. “끽구, 당신은 이 화살을 막을 자신이 있나?” 끽구 역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되받았다. “날 맞히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 이 화살이 당신에게 날아가지 않는다면? 모두를 노리고 퍼져 나간다면?” 치베의 말에 상망과 신도 울루, 비휴도 상당히 긴장한 눈빛이었다. “당신들 모두 맞붙어 싸우면 누구나 쉽게 나를 이길 수 있을 거요. 하지만 내가 죽을 때면 당신들 중 많아야 셋밖에 남지 않을 거요 보돈차르족의 명예를 걸고 말할 수 있소.” 그때 요요가 외쳤다. “우리 두 자매면 당신들 중 하나는 감당할 수 있지!” 순간 치우천이 만류하려는 듯이 나섰다. “상망님, 끽구님, 비휴님, 신도 울루님. 꼭 이렇게 서로 피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할 수 없는 일이다.” 상망이 한 번 한숨을 쉬고 간단히 대답하자 치우천이 말했다. “나는 헌원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 은혜는 반드시 갚을 것이지만, 억지로 헌원님을 따르라는 것은 안 될 말입니다. 지금 싸움이 붙는다면, 우리를 다 죽인다 해도 당신들도 여럿 다칠 텐데, 꼭 그래야만 합니까?” 그때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비휴가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비휴는 아주 간단하게 말했다. “한 번 해봐라.” 비휴는 잘 나서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한번 나서자 분위기가 무섭게 바뀌었다. 그러자 치베는 조금 불안해졌다. 그때 뒤에서 형요가 쑥 나서면서 웃으며 외쳤다. “당신들, 실수했어. 큰 실수했어.” 상망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무슨 실수냐?” “당신들 다섯 모두 몰려오는 것이 아니었어. 당신들은 치우비님만 무섭게 보고, 우리 자매를 우습게 봤지? 나머지 자매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호호.” 상망의 안색이 대번 변했다. “설마.......” “헌원의 귀하신 따님은 지금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호호홋!” 형요는 자못 사악하게 웃었다 그러자 상망뿐만 아니라 끽구의 안색도 변했다. 그때 신도 울루가 동시에 외쳤다. “헛소리! 발님은 많은 전사들이 지키고 있다!” “그건 맞아. 하지만 누구누구가 발님에게 같이 놀자고 불러냈거든? 호호호.......” 상망은 이를 갈며 발을 굴렀다. “발님의 몸에 손끝 하나라도 대면, 내 산 채로 너희들 껍질을 벗겨 버리겠다!” 형요는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고 외쳤다. “좋은 방법을 가르쳐줘서 고마워. 치우천, 치우비님을 놓아주지 않으면 누구 껍데기가 벗겨질까? 응?” 비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움직여 치우천의 멱살을 잡았다. “이놈이 벗겨지겠지.” 치베는 움찔했지만 형요는 전혀 동요하는 기색 없이 다시 외쳤다. “좋다구, 좋아. 맘대로 해봐. 다만 그 누구더라....... 귀하신 분도 성할 수 없어. 우리가 여기서 무사히 나가지 않으면, 그분도 좋은 꼴은 못 볼 거야. 그렇게 약속되어 있으니 맘대로 해봐 치우천, 치우비님에게 손끝 하나라도 대면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싸울 거다. 너희가 이겨 도 그분은 이제 볼 만한 모습이 될 걸?” “너희도 전사들이면서 어찌 그런 짓을.” 끽구가 발을 구르며 화를 내자 요요는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우린 전사가 아냐. 그냥 도둑들이었거든?” 형요가 맞받았다. “그럼 그것도 아주 못된 도둑들이었지. 우리 손에 걸려 살아난 자가 없었어. 타타르족이나 몽골족들은 우리가 무서워서 가까운 산길을 두고도 다니지 못했었지, 아마?” 요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우리가 원수를 잡으면 어떻게 했더라?” “산 채로 솥에다 넣고 조금씩 불을 땠지, 아마? 그리고 눈, 코, 귀, 손가락들도 조금씩 조금씩 차례차례 잘라내면서 말야. 호호.......” “그건 재미없었어. 셋째 언니와 미요가 그 귀한 분을 데리고 있으니 그런 재미없는 방법은 안 쓸 거야. 아무래도 껍질을 벗기면서 소금을 계속 뿌리지 않을까?” “미요는 요리를 잘하니까, 불에 넣고 조금씩 구울 수도 있어.” “맞아. 전에 어떤 놈에겐, 우리가 그놈의 팔을 자르지도 않고 불에 구워 자기 팔을 다 뜯어먹게 했지? 아마 그렇게 할 것 같은데?” “그 다음은 다리를 구워서 먹였지.” “아주 재미있었어. 셋째 언니와 미요는 참 재미있겠네. 부럽군그래.” 형요와 요요가 몹시 태연하게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소리를 해대자 상망의 얼굴이 조금씩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휴는 상망이 포기할까 싶어 애써 상망을 막아섰다. “헛소리다. 거짓말이다.” 그러나 상망은 아무래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사방에서 우렁찬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짓들이냐! 감히 쑤앙마이의 집 앞에서 칼부림을 하려들어?” 소리를 지르며 나타난 것은 비냐였다. 비냐는 서슬이 퍼런 얼굴로 무섭게 따졌다. “전부 용서하지 않겠다!” 비냐가 손짓을 하자 순식간에 평화롭던 정원 여기저기에서 카린 여전사들이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나타났다. 모두가 큰 활을 들고 창을 메고 있었다. 다섯 기인과 치베, 형요 자매는 서로 대치하던 중이라 어떻게 손을 써볼 사이도 없이 꼼짝없이 포위되고 말았다. 그러자 상망이 나섰다. “우리는 쑤앙마이께 죄를 지으려는 것이 아니오. 다만 서로 간에 좀 해결할 게 있을 뿐이지.” 비냐는 손을 휘휘 저으며 소리쳤다. “듣기 싫다! 할말이 있으면 밖에서 해라. 카린산을 내려가서 싸우든 죽이든 간섭하지 않겠지만, 여기서 싸우는 꼴은 못 본다!” 일단 밖으로 나가게 되면 수많은 전사들이 있는 상망 측이 훨씬 유리한 것은 당연했다. 상망은 이내 웃으며 말했다. “좋소이다, 좋소이다. 우리는 그럼 이대로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상망이 웃으며 나가려고 하자 형요가 악을 썼다. “누구 마음대로? 치우천님을 놔줘! 안 그러면 못 나간다!” “뭐 하는 수작들이냐! 빨리 나가지 못해!” 비냐가 또다시 호통을 치자 상망이 형요를 쳐다보았다. “발님이 무사한가 확인하기 전에는 치우천도 풀어줄 수 없다.” “좋아! 그럼 여기서 다 죽자구!” 형요가 고집을 부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자 상망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너 이 무식한 계집아. 뭐 하는 짓이냐?” “제기랄 뭐 어때? 죽기밖에 더 하겠어?” 비냐가 발을 동동 구르며 다시 한 번 호통을 쳤다. “너희가 무라의 부족을 도와줬다기에 봐주고 있는 거다. 원래대로라면 그냥 다 쳐 죽여도 돼!” 으르렁거리는 비냐를 보며 상망이 다급하게 말했다. “이봐, 이봐 우린 말을 따르려 했는데 어째서 우리까지.......” “듣기 싫다! 내가 다섯만 세겠다. 그 사이에 다 나가지 않으면 모조리 고슴도치로 만들어버리겠다! 하나!” 비냐는 실로 성질이 대단하여, 정말 한다고 하면 뒷일은 어찌되었건 그냥 저지를 사람 같았다. 상망은 곧 한숨을 쉬더니, 치우천에게 말했다. “네 이놈, 내가 널 놓아주마. 하지만 발님을 건드리지 마라. 약속하겠느냐?” 치우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상망님도 그럼 날 다시 잡지 않으시겠습니까?” “헛소리 마라. 지금 널 놓아준다 해도 금방 쫓아가서 다시 잡을 것이다.” “잡힐지 안 잡힐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요. 그렇다면 나도 발님을 다시 잡을 수 있으면 잡겠습니다.” “너는 참 헛소리도 잘하는구나. 네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사이 비냐가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둘! 다 센 다음에는 뭐라 떠들건 다 죽인다. 다섯 다 셀 때까지 여기서 없어져야 한다!” 상망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 이놈, 좋다. 발님을 놓아주면, 너를 풀어주마.” “저를 풀어주면, 반드시 발님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이놈아, 그런 게 어디 있어?” “셋! 전사들아. 이제부터는 내 명령을 더 들을 필요 없다. 내가 쏘지 말라고 해도 다 센 다음에는 무조건 쏘아라!” 비냐가 다시 헤아리자 카린 여전사들은 모두 대답하며 활시위를 바짝 당기기 시작했다. 여전사들을 흘낏 보며 상망이 서둘러 말했다. “좋다! 네놈, 약속은 지키겠지?” “저를 모르십니까?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헛소리는 하지 않습니다.” “좋다! 내가 먼저 믿겠다. 저 여자가 자못 흉악하니, 일단 여기서 나가고 보자!” 상망은 치우천과 치우비를 확 떠밀었다. 그러자 치베와 형요 자매는 재빨리 치우천과 비를 받아들었고 먼저 문 밖으로 사라졌다. 상망은 한 번 헛기침을 한 다음 마치 비냐에게 약을 올리려는 듯이 늑장을 부리다가 아슬아슬하게 다섯을 세기 전에야 문에서 나섰다. 끽구가 상망 옆으로 다가와 다그쳤다. “상망! 서둘러야 저들을 잡지!” “서두를 것 없다. 어차피 우리는 전사들을 다시 모아 쫓아가야 하고, 또 발님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가도 늦지 않는다네. 더구나 쑤앙마이의 집 앞에서 싸움을 벌이는 것도 좋지 않잖은가?” “하지만 괜찮을까? 저들이 재빨리 도망친다면?” 걱정스런 표정으로 신도 울루가 묻자 상망은 씩 웃었다. “저들은 결코 도망치지 못하네. 발님 주변을 전사들에게만 맡긴 건 내가 소홀했지만, 저들을 놓치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 비휴?” 비휴는 곧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저들은 말을 잘 타니 산을 내려가게 두어서는 안 된다.” 끽구의 말에 상망은 여유 있게 고개를 저었다. “어찌되었건, 저놈들은 결코 도망칠 수 없다네.” 치우천과 치우비를 엽은 치베, 형요 자매가 구르듯 산비탈을 내려오자 어느새 그곳에는 나머지 형요 자매와 울라트, 도깨비들이 말을 끌고 기다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소녀도 있었다. 허나 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치우천이 멀쩡해져서 내려오자 기뻐서 눈시울을 붉혔다. 치우천은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소녀님! 소녀님도 와 계셨습니까?” “저는....... 저는 같이 갈 겁니다. 마다하지만 않으신다면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 치우천은 감격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때 형요가 나섰다. “소녀님이 일이 심상치 않다고 알려주셨어. 다섯 명이 우르르 몰려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이야. 안 그러면 우리가 어찌 알았겠어?” 요요도 한마디 덧붙였다. “소녀님이 우리를 안으로 같이 데리고 가지 않았으면 우리가 쑤앙마이의 집 안으로 어떻게 들어갈 수 있었겠어요?” “천 안다, 전에 말하지 않았나? 천 안다는 절대 헌원을 따르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우리도 일이 틀어지겠다 싶어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데 소녀님이 알려주시자 급히 달려온 거다. 나와 두자매가 일단 자네를 구하고, 나머지는 짐을 챙기고 말을 끌고 밑에서 기다리기로 한 거지.” 치베의 말에 이어 울라트도 말했다. “도깨비들이 아주 잘해주었어요 시치미를 뚝 떼고 말을 끌고 오는데 지나족들은 겁나는지 막아서지도 않더라구요.” 치우천은 감동 어린 눈빛으로 모두를 둘러보았다. “소녀님이 우리 형제를 구하셨군요. 그리고 자네들이. 정말 고맙다, 고마워.” 소녀는 얼굴만 붉히며 빙그레 웃었고 치베와 형요, 울라트는 스스럼없이 크게 웃었다. 형요가 웃으며 말했다. “벗 사이에는 고맙다고 할 필요가 없어. 내가 잡히면 안 구해줄 거야?” 형요 자매 중 요요와 미요는 치우 형제에게 깍듯하게 존대했지만 네 명의 형요 자매들은 그냥 스스럼없이 대했다. 다만 주신 말을 할 줄 아는 것은 첫째 형요뿐이었으나, 다른 형요들도 쌍둥이가 아니랄까 봐 그러는 것인지, 하는 태도는 똑같았다. “헌원이 우리를 도와주고 잘 대해준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너와 네 아우를 잡아가려는 건 너무한 일이야. 뭔가 속셈이 있는 것 같은데.” 형요를 쳐다보며 치우천이 말했다. “헌원은 우리가 그를 따를 줄 알았나 봐.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우릴 없애려 하는 거겠지.” “왜 그러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헌원은 나에게 속내를 다 보였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러나 형요와 치베나 울라트 등은 치우천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좌우간 자세한 설명을 듣고 있을 겨를이 없어 치베는 어서 가자고 재촉했다. 그러다가 문득 치베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형요에게 물었다. “그런데 발은 어디 있나?” 형요 대신 치우천이 웃으며 되받았다. “발을 잡은 것 같지는 않던데?” 요요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천님은 아셨군요. 우리가 언제 발을 잡을 틈이 있었겠어요? 지나 전사들을 속여 말을 끌고 넷째 언니를 데리고 오기도 힘들었는데! 그 지나족 영감탱이만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갔지요!” 치우천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상망도 속지 않았다. 다만 상망은 백의 하나, 천의 하나라도 위험한 일을 하지 않으려 한 것뿐이야.” “좌우간 이렇게 잘되었잖아.” 형요가 의기양양해하자 치베는 화난 듯이 외쳤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아!”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아?” 형요는 샐쭉해져서 툭 쏘아붙였다. “아무리 급해도, 당당한 전사는 그런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더구나 힘없는 여자를 인질로 잡아 목숨을 구하는 치사한 짓은 남자가 할 짓이 못돼!” 그러자 형요는 당장 토라지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 치사한 치베가 날보고 치사하다네? 야 임마, 내가 아니었으면 치우천이 무사했을 것 같아? 그리고 내가 전사냐? 남자냐? 난 도둑이야, 여자 도둑 못할 짓이 없단 말야!” 형요가 다시 마구잡이로 우겨대자 치베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 모습에 치우천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너희는 한동안 조용하더니, 왜 또 아웅다웅이냐? 치베. 부득이 할 때 쓴 속임수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천 안다, 너는 용사인데 그런 비겁한 방법도 좋다는 것이냐?” 치베가 의아하다는 듯이 묻자 치우천은 맑게 웃었다. “글쎄. 나는 그런 방법은 못 쓸지도 모르지. 그러나 기왕 형요가 애써주었는데 그걸 나무라는 것도 옳은 건 아니라 생각한다.” “맞아! 누군 좋아서 거짓말한 줄 알아?” 형요가 다시 기세를 올리자 치우천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너무 자주 하지는 말았으면 싶구나, 형요 이제 너는 도둑이 아니잖아.” “히히히.” 형요는 일부러 귀신처럼 웃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쉴 새 없이 말을 달렸다. 카린산의 비탈은 얼음에 덮여 미끄러웠기에 말을 달리기 좋은 곳은 아니었으나 조금 더 내려가자 흙길이 나와 말의 속력을 더 낼 수 있었다. “그런데 비는 어떻게 된 거야? 뭐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형요가 묻자 치우천은 씁쓸하게 대꾸했다. “이제 힘을 반쯤 잃게 되었다.” 치베와 형요 등은 깜짝 놀랐다. 치우천은 설명하려다가 상황을 보고 급히 치베에게 물었다. “가만!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저쪽으로 가야지! 그래야 돌아가지 않겠는가?” 그러자 치우천은 다급하게 말했다. “아니! 안 된다! 동쪽으로 가자!” “뭐? 어째서?” “지나족은 수가 많다. 우리가 도망쳤는데 급히 뒤쫓지 않는 것을 보면, 그들도 뭔가 준비를 해둔 것 같다. 서쪽으로 바로 가면 그 술수에 넘어간다. 조금 더 걸리더라도 동쪽으로 빙 돌아서 가자!” “어디로 가는데?” “누루마이의 마을 부근으로 가자! 그러면 살 길이 생긴다!” 치우천의 말을듣고 치베와 형요등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향을 바꾸었다. 살 길이 어떻게 생기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치우천을 무조건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온 길로 되짚어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남쪽으로 빙 돌아서 대강 길을 잡았다. 일행은 급히 달리고 싶었지만, 치우비가 여전히 의식을 잃고 있었고 넷째 형요도 아직 아픈데다가 마냥이 말을 잘 못 타기 때문에 그리 속력을 낼 수 없었다. 치우천은 안타까운 듯이 입을 열었다. “더 빨리 가야 한다. 안 그러면 늦을지도 몰라.” “뭐가 늦는단 건가?” 치베가 묻자 치우천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지시를 내렸다. “치베! 네 말 말고, 비의 말로 갈아타고 비를 태워라. 마냥! 너는 내 말을 같이 타자! 형요! 너희 자매도 넷째를 번갈아 안아 태우고 달려야 한다. 늦으면 지나족들에게 잡힌다!” 치우천이 말의 힘과 무게에 따라 다시 사람을 바꿔 앉혀 대열을 정비하자, 일행은 더 속력을 낼 수 있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자 말들이 지쳤기 때문에 조금 천천히 말을 걸리며 쉬게 해야만 했다. 그 틈을 타서 일행은 물을 마시고 약간의 음식을 먹었다. 그 사이 치우천은 치우비가 자신을 위해 전에 먹은 아홉구비의 기운을 다 써버려서, 이제는 힘이 예전만 못할 것이라 일러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안쓰러워했지만, 형을 구하기 위해 그런 것이니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린 고기를 씹으며 이야기를 듣던 치베가 의아한 듯이 저만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린산에도 늑대가 있나1 웬 늑대가 서성이지?”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늑대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치베는 눈이 밝아 남이 잘 못 보는 작은 것도 볼 수 있었다.<주석: 몽골 사람들의 시력은 대단히 좋아서, 지금도 보통 시력표 기준으로6~7이 넘는 사람들이 흔하다고 한다.> “너무 멀리 있어 보이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나는 보여 이상하게 아까부터 우리를 슬슬 따라오는 것 같았는데.” 치베의 말에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곳에는 있어도, 카린산 부근에는 쑤앙마이께서 개명수를 많이 키우시기 때문에 늑대가 없어요. 다 죽어버리거나 도망쳤죠. 잘못 본 것 아닌가요?” “아닌데 .......” 갑자기 치우천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이크! 큰일이다!” “왜 그래? 늑대 한두 마리 가지고 뭘?” 형요가 묻자 치우천은 재빨리 대답했다. “비휴다! 비휴가 푼 늑대야! 얼른 도망쳐야 한다!” 비휴는 늑대를 마음대로 부리기 때문에 늑대를 시켜 치우천 일행을 뒤쫓게 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한 일행은 다시 급히 치베가 늑대를 본 반대편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치베는 말을 달리면서도 걱정이 되어서 계속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달리다보니 늑대가 또 나왔다. “저쪽에도 있다!” “반대쪽으로 가자!” 일행은 다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다시 얼마 정도 달렸을 때 치베가 부르짖었다. “제길! 또 있다!” 일행은 자꾸 여기저기 몰려다니자 금세 피곤해졌다. 말도 몹시 지친 듯했다. 형요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러면 다시 피해야 한다. 우리를 따라잡지 못하게 길을 돌려야 해!” “젠장! 잡힐 것 같다!” 치베가 안절부절못하면서 투덜거렸다. 그때 치우천은 뭔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무릎을 탁 쳤다. “잠깐! 그럴 필요 없다!” “무슨 소리인가?” “어차피 늑대는 수도 없이 많은 것 같다. 그러니 늑대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낙심한 치베의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 싸우자는 건가?” “늑대는 피할 수 없으니 아예 늑대는 내버려두고 지나족만 피하면 된다.” “어떻게?” “우리가 한 곳에 머물면 지나족이 금세 뒤쫓아 올 것이다. 그 지나족만 따돌리면 그만이야. 형요 치베! 울라트 우리는 아예 여기서 쉰다!” “쉰다고?” 모두 놀라서 부르짖자 치우천이 웃었다. “이대로 몰려만 다니면 누루마이의 마을까지 갈 수도 없다. 지나족이 쫓아오려면 좀 걸릴 것이니 그때까지 푹 쉬어두자. 지나족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우리도 피할 것 아닌가?” 치우천의 대담한 말에 모두 놀랐다. “지나족이 막 따라오면 어떻게 하는가? 쉬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치베가 볼멘소리로 말하자 치우천이 웃었다. “쉬어야 도망갈 수 있어. 지나족은 말을 우리만큼 잘 타지 못한다. 그리고 지나족은 우리를 잡으려고 죽을 둥 살 둥 달려올 것이고, 올 때쯤이면 몹시 지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편히 쉬었고, 말도 더 잘 타는데 왜 지나족을 겁내야 하지? 지나족이 다가오면 그냥 달아나면 그만이다.” “하지만 포위될 수도 있다.” 치베가 신중하게 말하자 치우천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치베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단 달려와야 포위도 하는 거지 오지 않은 자들이 어떻게 포위를 한다는 거냐? 걱정할 필요 없다. 형요, 너희 자매가 높은 곳에 올라가 살피다가 지나족이 보이면 알려줘 그때 떠나면 된다. 그때까지 모두 푹 쉬어라.” 치베와 형요 등은 그제야 씩 웃으며 편하게 몸을 눕히고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었다. 험한 곳이었지만 드문드문 풀이 나 있기는 해서 말들도 풀을 뜯게 했다. 그렇게 쉬고 있을 때, 도깨비 싱카가 다가와서 말했다. “주인님, 도깨비 싱카가 말합니다. 주인님의 꾀는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주인님은 이 근처의 지리를 잘 아십니까?” “알 리가 없지.” 치우천이 가볍게 되받자 싱카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물론 처음에는 지나족이 모여 따라올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우리가 도망칠 때, 길을 잘 아는 자가 지나족을 몇 갈래로 나누어서 우리를 에워싸 앞길을 막으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치우천은 싱카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이 깊구나, 싱카 하지만 나에게도 생각이 있어.......” “그렇습니까?” 치우천이 소곤거리며 싱카에게 뭐라 말하자 싱카는 감탄의 눈으로 치우천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제가 해보겠습니다.” “싱카, 할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도깨비 싱카,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요기였습니다.” 싱카가 웃으며 혼자 말을 달려갔다. 옆에 있던 치베와 울라트가 의아하여 묻자, 치우천이 웃으며 대답했다. “싱카는 누굴 찾으러 간 것뿐이야......” “누굴?” “비울걸.” 치우천이 간단히 답하자 치베와 울라트는 놀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울라트는 아직도 무서운 듯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비울걸이 이 근처에 있단 말인가요?” “틀림없을 걸? 그도 우리를 찾고 있을 거야. 싱카는 비울걸을 찾을 방법이 있댔어. 꼭 찾아올 거야.” “그 할아범은 오라버니를 잡아먹겠다고 했잖아요? 바로 지난번에도요.” “그 말을 믿니? 비울걸은 지나족들 앞이라서 장난으로 그런 것뿐이야. 사실 비울걸은 전에 내 부탁을 받고.......” 치우천이 설명하려는데 갑자기 마냥이 달려와 말했다. “주인님! 도깨비 마냥이 말해요 멀리서 소리가 들려요.” 그때 형요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지나족들이 어느새 따라온 것이 분명했다. 치베와 울라트는 놀라서 치우천이 말하기도 전에 움찔하며 말부터 찾았다. 치우천은 설명을 하려다가 말고 역시 급하게 말에 올라탔다. 잠시 후 형요가 헐떡이며 달려 내려왔다. “천, 지나족들이 따라와! 벌써 북쪽 산굽이에 들어섰어!” “수는?” “거의 삼사백 명. 모조리 몰려오는 것 같아.” 그 말에 치우천은 가볍게 웃었다. “생각대로다. 그럼 우리는 반대로 달아나자.” “싱카는?” 울라트가 묻자 치우천이 대답했다. “싱카가 비울걸을 찾으면, 비울걸이 데리고 올 거야. 좌우간 어서 가자!” 치우 일행은 다시 말을 달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치우천은 함께 말을 타고 있던 마냥에게 물었다. “마냥, 너는 지나족이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니?” 마냥도 주신 말을 이제는 약간 했지만, 다른 도깨비들과 달리 울라트가 하는 말투를 고스란히 배워서 마치 아이처럼 말했다. “그래요, 들려요“ “너는 귀가 몹시 밝구나.” 치우천의 칭찬에 마냥은 새까만 얼굴에 흰 이빨을 드러내고 입이 찢어지도록 순진하게 웃었다. “무우, 쵸오피, 카라마를 잡으러 다녀서 잘 알아요.” “그게 뭐냐?” “으음....... 무우는 그러니까....... 그래, 소예요, 소머리가 크고 잘 달려요 여기 소랑은 달라요 쵸오피는 으음........ 음......... 그러니까 긴 뿔이 나고....... 아주 날씬하고 풀을 먹는 것......” “사슴?” “맞아요, 사슴. 사슴 비슷해요 하지만 뿔이 아주 날카롭고, 아주 멀리 뛰어요 한 번 뛰면 저만큼. 아주 빨라요 그리고 카라마는....... 음, 말....... 말인데 줄이 그어진 말. 까맣고 하얗고....... 줄이 잔뜩 그려진 말. 마냥은 그것들을 잡았어요. 마냥, 좋은 사냥꾼. 그래서 잘 들어요. 그것들이 몰려다니는 소리를 잘 들을 줄 알았어요. 마냥 살던 곳에서는 사냥꾼들은 다 잘 들어요.” 마냥은 몹시 단순하고도 순박하게 이야기했다. “그래, 지나족들이 가까이 오는 것 같아?” 치우천이 웃으며 묻자 마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가까이 오지 않아요. 지나족이 더 느려요 우리가 빨라.” 마냥의 말을 듣고 치베와 형요 등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역시 그들은 한동안 쉰 다음인데다 기마술이 월등하여 지나족들은 그들을 쉽게 따라잡지 못했다. 한동안 달아나자 마냥은 도리어 지나족들이 멀어진다고 했다. “그러면 잘되었다. 마냔 그들이 가까이 오는지 잘 들어라. 우리는 좀 말을 쉬면서 천천히 가자. 그들을 아주 떼어놔도 좋을 것은 없다.” 그때 소녀가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계속 가면 안 돼요 길이 좋아 보이지만 막다른 골짜기로 들어가게 됩니다. 다음 갈래에서 북쪽이나 남쪽으로 빠져야 합니다.” 치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님이 같이 계셔서 다행이군요. 길을 잘 아시니.” “카린산맥은 너무 복잡하여 다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 근처는 대강 알죠.” “누루마이의 마을 근처까지 가는 길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저기 도망 다니느라 방향을 잃지 않을지.......” “대강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살던 곳인데요.” 소녀의 말에 치우천은 크게 기운이 났다. 치우천은 만약을 대비하여 치베나 형요 등에게도 소녀에게 길을 미리 알아두도록 했다. 소녀는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다가 마냥이 지나족들이 좀 다가온다고 말하자 치우천은 다시 말을 달리게 했다. 한편 상망과 끽구, 비휴 등은 지나 전사들을 몰고 계속 추적하고 있었으나 치우천을 잡을 수 없자 안달이 나고 화도 치밀었다. 끽구가 우렁우렁하게 외쳤다. “비휴! 정말 이쪽이 맞는 거냐? 아무리 달려도 안 보이잖아.” 비휴는 여전히 무뚝뚝하게 짧게 말했다. “앞에 있다.” “그 소리를 들은 지가 언제인데 그래? 하지만 아무리 쫓아도 보이지 않잖아.” 끽구가 다시 소리치자 비휴 역시 내뱉듯 짧게 말했다. “그들이 우리보다 빨라서 그렇다.” “우리말들이 지쳐서 이대로는 따라가기 힘들 것 같네. 아무래도 그놈들 말이 우리보다 좋은 것 같아.” 상망의 말에 신도 울루가 답답한 듯 쏘아붙였다. “그럼 저들을 놓칠 것 아닌가?” 끽구도 화를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놈들은 감히 이 끽구님을 속였어! 발님이 잡혔다고? 흥!” 그때 발은 지나 전사들의 끄트머리에서 말을 달려 따라오고 있었는데, 발은 치우 형제가 달아났다는 말을 듣고 얼굴색이 변했을 뿐, 그때부터 가타부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몹시 화가 난 듯했다. 상망은 일부러 형요가 아가씨를 사로잡았다고 속였다는 사실을 더욱 부풀려 이야기했다. 어차피 치우비와는 멀어지게 된 셈이니 차라리 원망이라도 하라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다. 그러나 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상망은 치우 일행을 따라잡지 못하자 비휴와 신도 울루에게 말했다. “이봐, 비휴, 신도 울루. 이대로는 안 되겠어. 자네들이 힘 좀 써야겠네.” 비휴와 신도 울루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계속 쫓기는 와중에도 치베는 틈날 때마다 주위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느 틈에 자신들의 주변 산등성이와 언덕배기 등에 늑대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까는 사방을 정찰하듯 한두 마리씩 보였지만 이제는 다섯 마리, 열 마리씩 늑대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 같았다. 치베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천 안다, 늑대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치우천은 그 말을 듣고 쯧 하며 혀를 찼다. “비휴가 늑대들을 시켜 앞길을 막을 작정인가 봐. 준비를 해두자.......” “설마 그때처럼 수많은 늑대가 따라온 것은 아니겠지?” 치베는 한웅의 가마를 습격당할 때를 생각하자 좀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이 같이 오지는 못했을 거다. 우리가 떠나을 때 늑대가 같이 오는 건 보지 못했잖아.” 그러는 사이에도 그들의 주변에 늑대는 계속 늘어나 이제는 세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다. “늑대가 많아졌다. 백 마리는 넘는 것 같다!” 치베가 놀라움을 이기지 못해 부르짖자 치우천은 눈을 빛냈다. “늑대들이 덤벼도 일일이 상대할 것 없다. 달려드는 놈들만 잡아 죽이면서 무조건 달려야 한다. 소녀님, 어느 쪽 길인가요?” “북서쪽으로 가는 것이 좋아요.” “좋아. 그럼 모두 북서쪽으로 가기로 한다.” 치우천이 외치고 다시 나아가는 사이, 급기야 눈 덮인 언덕배기에서부터 늑대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치우천은 각오를 단단히 하고 또다시 외쳤다. “일단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이다. 말을 몰면서 무기를 쓰기 힘든 사람은 그냥 달리기만 해라, 치베! 비를 태우고도 활을 쏠 수 있겠느냐?” “문제없다!” 치베와 형요 자매, 그리고 도깨비들 중 포리만이 말을 타면서 동시에 무기를 휘두를 줄 알았다. 리미도 가능했지만 리미는 울라트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싸울 수는 없었다. “마냥, 너는 창끝에 불을 붙여서 늑대들을 쫓아내라. 치베! 너는 활을 쏘아 달라붙는 놈들을 없애고 형요는 뒤를 막아라! 자! 가자!” 치우천의 지시로 그들이 싸울 준비를 하는 사이 늑대들은 드디어 마주 달려오며 앞을 막아서기 시작했다. 치우천은 용감하게 가장 먼저 앞장섰고 마냥은 덜덜 떨면서 불붙인 창을 휘둘러 길을 텄다. 마냥은 늑대가 무서워서 떠는 게 아니라 말을 타면서 한손을 놓는 것이 무서운 듯했다. 늑대들은 거의 백 마리도 넘어 보였지만 치우천이 용감하게 돌입하며 마냥이 불을 휘두르고, 치베가 다시 기막힌 활 솜씨로 몇 마리를 쏴죽이자 저절로 무리가 갈라졌다. 포리도 활을 쏘았는데, 치베만큼 백발백중은 아니었어도 의외로 실력이 좋아 몇 마리의 늑대를 쏴 죽였다. 치우천의 뒤를 따라 치베와 리미, 다른 도깨비들이 쏜살같이 지나갈 때쯤 늑대 무리는 다시 방향을 바꾸며 달려들려 했지만, 뒤를 막은 형요 자매가 칼을 휘둘러서 늑대들을 막아냈다. 몇 사람이 좀 긁히기는 했지만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 이윽고 앞을 막아선 늑대들을 뚫고 지나가는 데 성공하자 치베는 휘파람을 불었고 형요 자매와 도깨비들도 기뻐서 환성을 질렀다. 그러나 치우천만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방심해선 안 된다! 늑대들이 뒤를 쫓지 않으니, 분명 다시 산을 가로질러 또 나타날 거야! 화살을 가진 사람은 모두 치베와 포리에게 주어라!” 그러는 와중에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지나족이 추격을 늦추지 않아 치우 일행도 쉴 수 없었다. 다행히 주변이 모두 눈 덮인 산이라 달빛이 환하게 비추어서 밤이라 해도 그리 어둡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눈앞이 뿌옇게 변하면서 점점 안개가 끼는 것 같더니 갑자기 말들이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앞으로 달려가지 않으려 했다. 안개는 순식간에 짙어지며 몹시 기분 나쁜 느낌을 주었다. 별안간 주변이 추워진 것 같았고 이유 없이 몸에 소름이 돋았다. 치우천도 왜 갑자기 이런 기분 나쁜 안개가 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치베도 약간 섬뜩한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천 안다, 이게 뭐냐? 어쩐지 겁이 난다.” “그러나 어쩌겠어? 무조건 뚫고 가야 한다. 서로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 치우천은 자신의 말 높은뫼를 살살 달래다가 단번에 안개로 뛰어들었다. 일단 치우천이 앞장을 서자 다른 겁먹은 말들도 그럭저럭 달래 뒤를 따르게 할 수 있었다. 한참을 안개 속을 헤집듯이 달리는데 갑자기 치베가 물었다. “천 안다, 방금 네가 소리를 질렀나?” “아니 ?” 우천은 의아하여 대답하자 치베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상하다. 방금 누가 날 부르는 것 같았는데.......” 그때 느닷없이 요요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치우천과 치베는 깜짝 놀라 뒤를 보았는데 요요가 미친 듯 말을 몰고 앞으로 튀어나가려 했다. 기마술에 능한 치베가 놀라서 급히 요요를 따라잡아 외쳤다. “요요! 뭐냐?” 요요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눈물까지 흘리면서 외쳤다. “뭐가 있어요! 안개 속에 뭐가 있어!” “뭐가 있단 말이냐? 아무것도 없다!” 그때 이번에는 소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외쳤다. “누구야! 누가.......!” “소녀님! 무슨 일입니까?” 치우천이 소리치자 소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누가.......! 누가 내 목덜미를 만졌어요. 아주 차가운 손으로.......!” “나뭇가지일 겁니다!” 치우천은 애써 말했지만 이 근처에는 나무 한 그루도 없었다. 첫째 형요는 여자였지만 담력이 대단한지라 염려 말라는 듯이 소리쳤다. “요요! 미요! 소녀님! 정신들 차려요! 있긴 뭐가 있다고.......” 치우천은 형요가 믿음직하여 같이 뭐라고 말하려던 참인데 이번에는 형요의 비명소리가 들리면서 말이 크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는 쿵 하고 형요가 말에서 떨어지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그러나 안개가 짙어져 형요가 어디 있는지 볼 수가 없었다. “형요! 모두 멈춰라! 형요가 밟힌다!” 치우천이 소리 지르자 과보족의 말로 미요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언니인 형요를 찾는 것 같았다. 곧 형요가 대답하며 외쳤다. “아무것도 아냐! 그냥 실수했어! 천! 치베! 어서....... 어서 가자!” 그러나 무서움을 모를 것 같던 형요의 목소리는 겁에 질려 있었다. 치우천마저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억지로 참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형요도 뭔가 이상한 일을 려은 것이 틀림없었다. 치베도 의외로 몸을 떨며 활을 놓고 칼을 뽑아 들었다. “천 안다, 이 안개는 정말 이상하다. 제길, 적이라면 누구도 두렵지 않지만....... 이건....... 이건.......” 치베가 두려움을 모르는 용사인 것은 분명했지만 몸을 떨고 두려워하는 빛을 보이자 치우천도 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치베! 겁먹지 마라! 내가 앞장서겠다!” “아니다! 천 안다! 제기랄 내가 앞장선다!” 치베는 오기를 부리는 듯, 하! 소리를 내며 구름을 몰아 몇 발짝 달려가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고는 미친 듯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돌진해갔다. 치우천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치베! 치베! 왜 그러느냐?” 그러나 치베는 어느덧 안개 속으로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목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치우비가 정신을 잃은 지금 치베는 일행에서 가장 잘 싸우는 대들보 같은 존재였다. 그런 치베가 소리도 없이 사라지자 일행은 더 나아가지도 못하고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다. 치우천은 몇 번이나 치베에게 돌아오라고 소리쳤으나 치베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요요가 울면서 외쳤다. “어떻게 해! 이게 뭐야!” 치우천은 치베가 대답이 없자 이번에는 손가락을 입에 넣어 휘파람을 불었다. 치베가 타고 갔던 말, 구름을 불러본 것이다. 구름과 높은뫼는 둘 다 아주 길이 잘 들어서, 휘파람 소리만 들으면 달려오곤 했으니까. 잠시 후 말발굽 소리가 들리자 치우천은 반색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치우비의 몸을 등에 얹은 구름뿐이었다. 치베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치베의 모습이 사라지고 치우비의 몸만 많은 구름이 나타나자 소녀와 울라트, 요요 등이 비명을 질렀다. 형요도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도대체 저 앞에 무엇이 있기에 치베가....... 치베가.......” 소녀가 몸을 떨며 물었다. “치베는 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요?” 치우천은 입술을 질근 깨물며 말했다. “마냥, 내려라. 내가 나가보겠다.” 마냥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만 죽어라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 그럴 순 없어요! 주인님 혼자 가시면 안 돼요!” 그때 리미와 개르가 나란히 말을 달려왔다. 리미는 울라트를 포리에게 맡겨둔 채였다. “우리가 가보겠습니다! 우리는 겁나지 않습니다!” “아니다, 리미! 나도 가봐야겠다. 같이 가자!” 그러자 소녀가 높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떨어지면 안 돼요! 나도 가겠습니다! 모두 같이 갑시다! 뭉쳐 있는 게 흩어지는 것보다 낫습니다!” 연약해 보이던 소녀가 용기 있게 외치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용기를 북돋우려는 듯 소리를 지르며 말을 몰았다. “모두 치베를 불러라. 치베! 치베!” 치우천이 목소리를 높였다. 리미와 개르는 치우천의 양옆, 치우천보다 조금 앞서서 말을 몰며 용감하게 나아갔다. 안개는 점점 더 깊어졌으나 어디에도 치베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대열의 뒤쪽에서 요요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아악.” 리미와 개르는 곧 뒤로 말을 돌리려 했으나 치우천은 그들을 막으며 외쳤다. “뭐냐! 요요?” “봤어! 누가....... 누가 날 보고 있어!” “무슨 소리야?” 요가 요요를 나무라는 듯 외치자 요요는 과보족의 말로 정신없이 뭐라고 떠들어댔다. 그때 리미가 외쳤다. “제길! 이게!” 리미는 갑자기 오른손의 도끼를 허공중에 크게 휘둘렀다. 치우천은 깜짝 놀라 물었다. “왜 그러나? 리미?” 그러나 리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별안간 안개가 꾸물꾸물 움직이는 듯 하면서 갑자기 퀭한 눈을 한 사람의 얼굴이 수십 개나 물결이 일듯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도 허공중에 얼굴만이 나타났으며 모두가 흉악하고 처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끔찍스러운 모습이 나타나자 울라트는 기절하고 요요와 형요마저도 비명을 질렀다. “귀신! 귀신이다!” 리미와 개르도 비명을 질렀지만 그들은 미친 듯 도끼와 칼을 휘둘러 그 무시무시한 얼굴들을 베려고 했다. 그러나 그 얼굴들은 안개 같아서 벨 수 없었다. 마치 아수타란과 싸울 때 같았다. 이윽고 얼굴만이 아니라 흉악하고 허연 손들이 수백 개나 나타나서 일행에게로 뻗쳐 왔다. 그러나 치우천은 아무것도보이지 않았다. 다만 안개뿐인데 왜 일행들이 겁을 먹는지 알 수 없었다. 치우천은 계속 침착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모든 사람들은 제정신을 잃고 계속 나타나는 얼굴들과 뻗쳐오는 허연 손들에 맞서 미친 듯 무기를 휘둘러댔다. 더구나 이제는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까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다가 급기야는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크게 울려서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저주, 원망, 비명소리가 뒤섞여서 들리는 속에 사람들은 제각각 공포에 질려서 미친 듯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치우천에게는 이상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이상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날뛰는 것을 보고 헛것을 본다는 사실만 짐작할 뿐이었다. 마냥마저도 허우적거리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치우천은 급히 마냥의 어깨를 잡아 흔들어 정신을 차리게 하려 했으나 마냥은 치우천의 손이 닿자마자 비명을 지르면서 날뛰는 바람에 도리어 치우천이 밀려서 땅에 떨어져 버렸다. 치우천은 급히 털고 일어났지만 마냥은 소리를 지르면서 마구 팔을 휘젓다가 높은뫼와 함께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치우천이 몇 번 휘파람을 불었지만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치우천은 몸이 덜덜 떨렸지만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도대체 이건 뭐냐? 침착....... 침착하자. 치우천! 침착해라!’ 치우천은 눈을 감고 숨을 몇 번 깊이 쉬어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때 치우천에게 번개같이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건 귀신의 장난이 분명하다. 가만. 귀신? 귀신? 그래! 신도 울루! 틀림없다!’ 신도 울루는 귀신을 부릴 줄 아는 선인이니 이런 짓을 할만도 했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보이거나 들리지 않지? 허나 모두가 정신을 잃고 날뛰는데 나 혼자 무슨 수로 이것을 막는담! 이제 아우를 보호 할 사람마저 없으니.......’ 치우천이 이것저것 두서없이 생각하며 멍하니 서 있는데 갑자기 저쪽에서 높은 노랫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치우천은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에게도 슬슬 헛것이 들리나?’ 그러나 그 노랫소리는 헛것이 내는 소리 같지는 않고, 몹시 고운음색이 소녀의 목소리 같았다. 치우천은 급히 안개를 헤치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치우천은 아직 다리를 약간 끌었으나 이제 몸의 고통이 없어졌으므로 심하게 절름거리지는 않았다. 조금 달려가자 소녀가 말 에서 내려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 보였다. 치우천은 급히 소녀에게 다가가 외쳤다. “소녀님! 소녀님!” 소녀는 눈을 꼭 감고 못들은 척 계속 노래만 했다. 치우천이 소녀의 어깨를 잡으려 하자 소녀는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치우천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치우천은 놓치지 않고 소녀를 잡아 안아주며 말했다. “소녀님, 납니다. 치우천입니다.” 그러자 소녀는 갑자기 흑 하고 흐느끼면 눈을 떴다. “지우천님? 정말 치우천님인가요?” “틀림없습니다.” “너무 무서웠어요. 귀신들이 나타나서.......!” 소녀는 애처롭게 몸을 떨며 치우천을 더욱더 꽉 안았다. 치우천은 소녀를 달랬다. “신도와 울루의 수작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잡으려 귀신을 부른 것이 틀림없어요. 허나 겁내지 마십시오.” 소녀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노래를 불렀죠?” “쑤앙마이께서 말씀하신 적 있어요. 놀라거나 마음이 흔들릴 때 노래를 부르면 마음이 가라앉는다고요 그래서 노래를 부르니 헛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치우천은 그 말에 뭔가 깨달은 게 있어 즉시 주변을 뒤져 풀잎 몇 개를 따들었다. 그리고 급히 소리 높이 풀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치우천의 풀피리 부는 솜씨는 따를 자가 없을 정도여서 아무렇게나 딴 잎사귀 몇 개만으로도 아주 큰 울림이 되어 퍼져나갔다. 가락은 그리 정확하지 않았지만 치우천은 되도록 크게 부는 데에만 힘을 쓴 것이다. 소녀가 놀라며 소리쳤다. “안개가 옅어지는 것 같아요.” 치우천도 그것을 느끼고는 다급히 소녀에게 말했다. “소녀님도 물건소리를 내세요!” 소녀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 있던 자신의 악기를 꺼내 뜯기 시작했다. 소녀는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치우천과 달리 악기를 연주하며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치우천도 전에 몇 번 들어본 노래여서 치우천은 재주껏 소녀의 노래와 연주에 맞추어 풀피리를 불었다. 듣기 좋은 가락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마치 노래가 안개를 밀어내듯, 두 사람의 주위로부터 안개가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옅어지기 시작하면서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치우천과 소녀는 기뻐서 더욱 힘을 다해 연주를 계속했다. 이윽고 두 사람의 형요가 안개 속에서 말을 달려 나타났다. 둘째와 셋째 형요였는데 둘은 누구와 싸웠는지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미요가 높은뫼를 탄 마냥과 함께 나타났는데 마냥은 말 등 위에서 기절해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냥은 말에서 떨어지는 것만은 무서웠던 듯, 높은뫼의 목을 꽉 끌어안고 있었다. 미요가 오자마자 외쳤다. “신기해요. 노랫소리가 들리자 귀신들이 없어지기 시작했어요. 노랫소리가 들려서 정신이 든 것 같아요!” 치우천과 소녀는 빙긋 웃어 보이고 계속 열심히 연주를 했다. 이제 그들의 주위에는 안개가 거의 사라져 있었다. 곧이어 포리가 울라트를 안고 나타났고 주루와 개르도 나타났다 첫째 형요 역시, 기절해 축 늘어진 요요를 안고 와서 말했다. “이제 살았어! 노랫소리가 이렇게 듣기 좋다니! 귀신들도 물러간 것 같아!” 미요는 둘째 형요와 셋째 형요의 이야기를 듣고 말 했다. “두 언니는 귀신에 홀려서 서로 못 알아보고 싸웠대요. 서로 죽이지 않아 다행이에요.” 모든 사람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떠들어댔다. 치우천과 소녀는 안개가 가시고도 한참을 더 연주했지만 리미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치베도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마냥과 요요, 울라트도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몹시 겁먹은 상태였지만, 치우천과 소녀의 연주를 듣자 마음이 가라앉는 듯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리미와 치베, 그리고 치우비를 실은 구름은 또 어디론가 사라져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왜 돌아오지 않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형요가 몹시 걱정했고 울라트도 걱정이 되어 눈물을 흘렸다. 치우천도 마음이 무거워 이윽고 연주를 마쳤는데 그때 마냥이 다시 수선을 떨며 외쳤다. “아이쿠! 지나족이다! 바싹 다가왔다! 소리를 듣고 따라오나 보다!” 그러고 보니 많은 말들이 달려오는 울림이 치우천에게도 느껴졌다. 치우천은 일단 모두 말에 타라고 했다. 그때 저만치 앞에서 누군가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왔다. 놀라서 보니 바로 리미였다. 리미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고 몸이 피에 물들어 있었는데 치우천을 보고 똑바로 달려와서 외쳤다. “길이 막혔습니다! 치베님이 잡혀 있어요! 그리고 주인님도!” “뭐냐? 리미? 지나족은 뒤에 있는데, 누가 그들을 잡았지?” 치우천이 묻자 리미가 헐떡이며 말했다. “앞에도....... 앞에도 있습니다! 신도 울루가....... 나는 주인님을 데려오려 했지만 너무 수가 많아서.......” 단숨에 말하다가 리미는 숨이 막혀 더 버티지 못하고 쿵 하고 말에서 떨어져 버렸다. 개르와 주루가 놀라서 급히 리미를 다시 말에 얹었다. 너무나 다급한 상황이라 상처를 살필 겨를조차 없었다. 형요는 새파랗게 얼굴이 질려서 물었다. 나족은 뒤에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우천은 침통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너무 지체했다. 신도 울루가 전사들을 몇 명 뽑아 다른 길로 아와서 귀신들을 부려 우릴 세운 다음 앞길을 막은 것이 분명해!”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는 샛길이 있었어요! 아이, 참! 그런데 그런 길을 지나족이 어떻게 알았지?” 소녀가 놀라며 말하자 치우천은 더 듣지 않고 외쳤다. “아우와 치베가 잡혀 있다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야 한다! 모두 가자!” 치우천은 대답도 듣지 않고 마구 말을 몰아 달려갔다. 다른 사람들도 조금 켕겼으나 즉시 치우천의 뒤를 따랐다. 형요는 자매들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신도 울루는 따로 돌아왔으니 수는 몇 안 될 거야! 쉰 명도 안 될 거다! 자매들아, 까짓 지나 전사 쉰 명은 우리들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지 않니?” 형요 자매들은 모두 그렇다고 용기 있게 소리를 질렀다. 방금 전 귀신에 놀라 부끄러운 마음도 있기에 더 화가 나고 기세가 충천했다. 도깨비들도 기세를 돋우며 용기 있게 달렸다 리미는 말을 달리던 중에 다시 깨어났는데, 깨어나자마자 억지로 소리를 질렀다. 전부 쓰던 말이 달라서 도깨비들끼리도 모두 주신 말로 이야기를 했다. “지나 전사들은 일흔 명밖에 안 된다! 개르 나와 함께 그들을 다쳐죽이고 주인님과 치베님을 구하자!” 험악한 개르도 금발을 휘날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좋다!” “나도 있다!” “내 몫도 남겨라!” 포리와 주루도 지지 않고 외쳤다. “쉰 명이면 몰라도....... 일흔 명이면 좀 많지 않나?” 미요가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미요는 자매들 중에 제일 온순하고 착해서 겁도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형요가 무섭게 눈을 흘기자 미요는 목을 움츠리며 입을 다물었다. 조금 달려가자 저만치에 지나족들의 무리가보였다. 지나족이 다시 보이자 치우천이 명령을 내릴 틈도 없이 리미가 무섭게 고함을 지르며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 나갔다. “지나족 놈들이 나랑 다시 싸워보자!” 지나족들은 리미가 다시 달려오자 삽시간에 웅성거리는 모습이 역력했다. 치우천은 그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리미는 정말 용감하구나! 단지 혼자서 저 많은 수를 상대로 싸웠는데, 리미에게 얼마나 혼이 났기에 저들이 저렇게 흔들리는 걸까? 정말 용감하다!’ 곧이어 개르와 주루, 포리가 역시 높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가고, 형요 다섯 자매도 찢어질 듯 소리를 지르며 돌진했다. 꼬마인 울라트마저도 전혀 겁먹지 않고 포리 앞에 앉아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지나족들 중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아이구! 도깨비들이다! 저 도깨비가 다시 살아났다!” “뭐냐! 어느 놈이 떠드냐!” 신도 울루가 마구 야단치며 부하들을 독려했지만, 그 목소리가 다시 부르짖었다. “도깨비들은 칼을 부려서 사람을 마구 죽인다더라!” 지나족은 그 비명소리 한마디에 삽시간에 우르르 대열이 무너지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신도 울루는 선인이었고 재주가 대단했지만 전사들을 다스리는 데에는 그리 뛰어나지 못해서 지나족 무리는 헝클어져 갔다. 그 겁에 질린 목소리가 준 영향이 아주 컸던 것이다. 치우 천은 그 목소리가 왠지 귀에 익숙했다. 이윽고 치우천은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쿡쿡거렸다. ‘전에 내가 놀라게 한 지나 전사들이 저 안에 끼어 있나 보다! 참, 일이 공교롭게 되었구나.’ 사실 지나족들도 용감한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도깨비들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 때문에 치우 일행과 같이 오면서도, 지나족들은 도깨비들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도깨비들이 저렇듯 살기등등하게 나오자 더욱 겁을 먹었다. 더구나 지나 전사들 중에는 지난번치우천이 도깨비들을 구하느라 겁을 주었던 자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도깨비들이 칼을 날려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도깨비들을 더 두려워하게 된 것 같았다. 돌연 치우천은 조금 의아해졌다. ‘가만, 지난번 내가 겁주었던 자들은 모두 유망의 부하들 아닌가? 그런데 헌원의 부하들 속에 어떻게 그 사람이 끼어 있는 거지?’ 허나 그런 생각을 깊이 할 겨를도 없었다. 도깨비들은 치우비를 구하려고 무섭게 돌진하고 있어서 이대로라면 그들과 헤어질 것 같았다. 치우천은 곧 소녀가 떨어지지 않게 배려하면서 그 뒤를 따라 달려갔다. 그러면서 치우천은 다시 높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 소리를 듣고 구름이 달려오기를 바랐지만 구름은 달려오지 않았다. 처절한 싸움 열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치우 일행이 일흔 명이나 되는 지나족들을 뒤쫓는 진풍경은 산굽이 하나를 돌면서 멈추었다. 신도 울루가 애써 전사들을 다시 추스려서 도망치는 것을 멈추게 만든 것이다. 신도 울루는 귀신의 힘으로 거저 줍다시피 치우덴와 치베를 잡게 되자 그들을 인질로 삼으려 했다. 그런데 리미가 혼자 뛰어들어 마구 날뛰는 바람에 그럴 겨를도 없이 싸움에 휘말리게 된 터라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너희들이 정말 전사냐? 화산족과 헌원님의 이름을 더럽힐 작정이냐? 저 얼마 되지 않는 자들에게 쫓겨 달아나다니! 저들이 도깨비들을 부린다지만 우리 신도 울루는 귀신들의 지배자다. 뭘 두려워하는 거냐?” 지나 전사들은 신도 울루의 노한 목소리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지나 전사들은 다시 함성을 지르면서 싸울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그 사이 무섭게 말을 달린 리미와 도깨비들은 지나족을 바싹 추격해왔다. 신도 울루는 다급해져서 외쳤다. “활을 쏴라! 돌을 던져라!” 그러나 지나족들은 말을 다루는 데 능하지 못해서 여전히 대열을 갖추느라 허둥지둥했다. 지나 전사들이 화살을 채 쏘기도 전에 가장 먼저 달려든 리미와 개르가 벼락같이 지나족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리미와 개르는 정말로 맹렬하게 달려왔기 때문에 멈출 수조차 없었다. 와장창 소리가 나며 서너 명의 지나전사들이 리미와 개르와 부딪혀 넘어졌다. 리미와 개르의 말도지나족들의 말과 부딪혀 넘어졌고 그 근처는 수라장이 되었다. 허나 리미와 개르는 말에서 떨어졌지만 금방 벌떡 일어나 무서운 고함소리를 지르면서 흉악하게 무기를 휘둘러댔다. 리미나 개르는 이미 상대의 무기를 피하거나 막을 생각도 없는 듯, 무조건 도끼와 칼을 마구 휘둘러대 순식간에 서너 명이나 되는 지나족들을 베어 넘겼다. 더구나 지나족들은 가까이에서 리미와 개르의 모습을 보자 무서워서 손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단 두 사람이 뛰어든 것만으로 지나족의 대열은 또다시 엉망이 되어버렸다. 신도 울루는 계속 전사들을 어떻게든 수습하려 했지만 신도 울루는 평소 전사들을 거느리지 않았었는지라 통제가 어려웠다. 리미와 개르가 단번에 지나족들을 혼란에 빠뜨리자 포리와 주루는 계속 말을 달리면서 지나족들을 어지럽혔다. 포리는 울라트를 안고 있어서 직접 싸울 수 없었고, 주루도 싸움 재주는 그리 특별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말을 몰고 지나족 부근으로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지나족들이 놀라 서로 부딪혀 좌충우돌이었다. 그때 형요자매 다섯이 앙칼진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들었다. 몇몇은 활을 쏘았고, 셋째 형요 어깨에 화살에 스쳤지만 형요 자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자매들아, 가자!” 다섯 자매는 넓게 퍼져 일렬로 달려오다가 지나족들과 막 부딪힐만한 거리가 되자 갑자기 말 등에서 일제히 뛰어올라 허공을 빙빙 돌면서 지나족들 속으로 뛰어내렸다. 남은 말들은 달려오던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지나족들 사이로 밀려들어갔고 지나족들은 달려드는 말을 피하느라 아우성을 쳤다. 거기에 형요 자매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면서 눈부시게 칼을 휘두르자 삽시간에 다섯 명의 지나 전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형요는 약삭빨라서 방금 리미와 개르가 무작스럽게 말을 타고 뛰어든 전술이 효과가 있다고 여겨 다시 그 방법을 따라 한 것인데, 큰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뛰어든 사람은 일곱뿐이고 지나 전사는 일흔 명이었으니 십대 일의 싸움이었지만, 허를 찔러 지나족들 사이로 파고들었기 때문에 지나족들이 더 큰 혼란에 빠졌다. 더구나 지나족들은 모두 활이나 창 같은 던질 수 있는 무기로 주로 무장하여 말을 타고 있었다. 지나족들은 말을 타고는 싸울 수 없어서 말에서 급히 내려야 했는데, 그러자 말들이 서로 부딪히고 엉켜서 자기들끼리 밀리고 부딪히는 판에 무슨 싸움이 되겠는가? 게다가 일곱명은 하나같이 도깨비 같고 무섭게 생긴 자들이라 가까이에서 보기만 해도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아 손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리미와 개르가 미친 듯이 마구 무기를 휘둘러 지나 전사들은 뒤로 물러서기만 했고, 형요 자매들은 몸놀림이 빠르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칼을 그어대니 많은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보다못한 신도 울루가 외쳤다. “바보들아1 비켜! 비켯!” 도 울루는 우왕좌왕하며 앞을 막는 지나 전사들의 덜미를 잡아 내던지고, 통나무만큼 커다란 복숭아나무 몽둥이를 든 채 달려왔다. 전사들이 우왕좌왕하여 수습할 수 없자 직접 상대하려고 한 것이다. 리미와 개르는 이미 많은지나 전사들을 찍어 넘겼지만 리미는 원래 부상이 심했고, 개르도 몸에 새로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도 울루를 보자마자 눈썹을 곧추세우며 무섭게 달려들려 했다. 그때 어느 틈엔가 달려와 포리와 주루와 함께 지나족과 상대하면서 치우천이 소리쳤다. 치우천의 목소리는 하도 크고 울림이 있어서 그 아수라장 같은 혼란 속에서도 또렷이 들렸다. “형요 자매! 신도 울루를 맡아라! 리미, 개르는 치베를 구해라!” 리미와 개르도 용사들이지만, 신도 울루도 덩치가 크고 힘이 무척 강해서, 힘과 힘으로 부딪히면 좋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오히려 저런 거한들은 몸놀림이 잽싸고 빠른 형요 자매가 나을 것 같았다. 지난번 치우비조차도 형요 자매들의 빠른 몸놀림에 고전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치우천이 몸을 사리지 않고 같이 싸우며 외치자 리미와 개르는 기뻐서 마치 야수처럼 고함을 지르면서 신도 울루에서 벗어나 치우비와 치베 쪽으로 향했다. 치베는 이미 온몸이 묶인 채 말 등에 앉혀 있었고, 치우비는 의식 잃은 그대로 구름의 등에 앉혀 있었는데 열 명도 넘는 전사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첫째 형요가 지나 전사 하나의 목을 그으며 외쳤다. “신도 울루는 우리에게 맡겨라! 자매들이 가자.” 그러면서 첫째 형요는 몸을 날려 빙빙 돌면서 신도 울루의 바로 발 앞에 떨어져 내렸다. 신도가 놀라면서 거대한 몽둥이를 휘둘렀으나 형요는 재빨리 왼쪽 옆으로 재주를 넘어 피하면서 울루를 칼로 그었다. 울루의 오른팔에서 선혈이 튀자 울루는 급히 몽둥이를 내려치려 했으나 뒤에서 요요가 울루의 등을 칼로 베었다. 울루는 다시 등이 선뜻해지자 급히 몸을 돌렸다. 신도는 울루를 구하려 했지만 두 명의 형요가 동시에 앞뒤에 떨어져 내리며 한꺼번에 칼을 찔러갔다. 앞의 형요나 뒤의 형요를 공격하다가는 어느 다른 쪽의 칼에 찔리고 말판이라 신도는 ‘헉’ 하는 소리를 내며 옆으로 몸을 굴렸다. 그런데 미요가 다시 날아오면서 그 힘을 빌어 신도의 허리를 발로 걷어차고 다시 도망쳤다. 신도 울루가 다섯 자매들에게 쩔쩔 매는 사이, 치우천은 자신도 칼을 휘두르며 포리, 주루, 마냥과 함께 신도 울루 주변으로 달려가는 지나 전사들을 맞아 싸웠다. 넷 모두 말에서 내린 상태였다. 소녀도 몸을 사리지 않고 달려와서 그 말들을 챙기고 울라트를 받아 안은 다음 뒤로 물러섰다. 대장이 공격당하자 전사들은 놀라며 신도 울루를 구하려 했지만 치우천과세 도깨비들에게 막혀 다가갈 수가 없었다. 치우천도 실로 오랜만에 칼을 휘둘러 싸우는데, 솜씨가 상당해서 자기 몫은 했다. 몸의 고통이 사라지자 힘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치우천도 사울아비로서 고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지나 전사들 몇 정도는 상대할 수 있었다. 포리나 주루는 비록 칼 솜씨가 대단하지는 않았으나 치우천이 두 사람의 중간에서 재빠르게 번갈아 도와주었기 때문에 셋이 합하자 원래 실력 이상의 힘을 발했다. 특히 마냥은 창밖에 다룰 줄 몰랐지만 창을 빙빙 돌리면서 치우천의 등 뒤를 지키다가지나 전사가 죽거나 하여 땅에 떨어진 창이 있으면 즉시 주워들어 던지곤 했다. 마냥의 창던지는 솜씨는 치베의 활솜씨 못지않게 대단하여 마냥이 창을 던질 때마다 한 사람의 지나 전사가 꼬치가 되어 쓰러져 갔다.<주석 : 마냥은 아프리카의 전사여서 창던지기에 능하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마사이족은 긴 창을 던지는 기술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 5센티도 안 되는 작은 목표물을 창을 던져 가볍게 맞힌다고 한다.> 리미와 개르는 실로 영웅적인 투혼을 발휘하여 수많은 지나 전사들을 밀어붙이면서 치베와 치우비가 잡혀 있는 쪽으로 한 발짝씩 밀고 들어가고 있었다. 리미는 지나 전사들과 싸우다가 널찍한 방패를 하나 주워서 그것을 왼손에 들고 지나 전사들의 공격을 막으며 전진하고 있었다. 보통 방패는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쓰였지만, 리미의 방패 쓰는 법은 몹시 독특하여 오른손으로는 도끼를 휘두르고, 왼손으로는 방패로 적의 공격을 막거나 또는 무기처럼 적을 밀어붙이고, 방패 모서리로 내려치기도 했다.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리미의 오른손의 도끼는 이미 날이 다 빠지고 부서져서 반 토막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개르도 이미 처음 들었던 칼은 부러져 버린 뒤라 닥치는 대로 지나족의 무기를 주워서 싸우고 있었는데, 그것이 몽둥이건, 창이건 활이건 가리지 않고 모조리 양손에 쥐고 긴 칼처럼 휘둘러댔다. 치우천은 두 사람이 악전고투를 하는 것을 보고 포리, 주루에게 외쳤다. “포리! 주루! 형요를 도와라! 마냥! 우리는 저리로 간다! 리미! 조금만 더 버텨라!” 그리고 치우천은 곧 기합성을 지르며 칼을 휘둘러 창을 들고 덤비던 한 명의 지나 전사를 베었고, 마냥은 그 창을 빼앗아 때마침 휘두르던 칼이 부러져서 위기에 빠진 개르에게 덤벼들던 지나 전사에게 급히 던졌다. 그 지나 전사는 가슴이 꿰뚫려 땅에 못박혀버렸고 개르는 곧 그 전사의 방패를 빼앗아들고 방패를 마구 휘둘러서 두 명의 지나 전사를 후려쳐 넘어뜨렸다. 지나 전사들은 이미 많은 수가 죽었지만 아직도 그 수는 훨씬 많았고, 차차 혼란에서 벗 어나 집요하게 덤벼들었기 때문에 싸움은 점점 어려워져 갔다. 신도 울루는 리미와 개르, 거기에다 치우천과 마냥까지 치베와 치우비를 향해 달려드는 것을 보고 외쳤다. “빼앗기면 안 된다! 전사들아, 저들을 지켜라!” 신도 울루는 여기저기를 다쳐 피투성이가 되자 분노했지만, 보기와는 달리 차분했고 냉정을 잃지 않아 형요는 그들에게 잔 상처는 주었을지언정 그들을 해칠 수는 없었다. 이윽고 신도 울루가 서로 등을 맞대고 몽둥이를 휘둘러댔다. 둘이 서로 앞뒤를 지켜주자 형요 자매는 쉽게 신도 울루에게 다가가기 어려워졌다. 그러자 형요는 다시 휘파람을 불었다. 다섯 자매는 다시 하나로 모여서 신도와 울루 주위를 빠르게 맴돌았다. 하지만 신도 울루는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기회만을 엿보았다 그러다가 다섯 자매가 갑자기 덜컥 신도 앞에 멈추어 서서는 한꺼번에 다섯 개의 칼을 찔러 들어왔다. 얼굴, 가슴, 배, 그리고 두 팔을 동시에 노리고 칼이 찔러 들어오자 신도는 몹시 놀랐으나 곧 몽둥이를 번개같이 빙빙 돌려서 막았다. 신도의 힘이 대단하여 미요와 둘째 형요의 칼이 신도의 양어깨를 스쳤을 뿐, 세 자루의 칼은 몽둥이에 밀려나고 말았다. 요요는 신도의 힘에 밀려 칼을 놓치고 말았고, 첫째 형요도 손아귀가 아릿해지면서 칼을 놓칠 뻔했다. 그때 울루가 벼락같이 신도의 어깨 너머로 몽둥이를 휘두르자 셋째 형요가 울루의 몽둥이를 맞고 저만치로 나가 떨어졌다. 그때 첫째 형요가 있는 힘을 다해 신도의 몽둥이를 몸으로 쥐고 매달리자 칼을 놓친 요요가 뛰어오르며 신도의 얼굴을 손으로 긁어버렸다. “아이쿠!” 눈이 찔렸는지 신도가 휘청하자 요요는 급히 몸을 날려 셋째 언니를 구하러 갔다. 미요와 둘째 형요가 동시에 신도의 목을 베려 했지만 울루가 다시 몽둥이를 휘둘러댔다. 그때 첫째 형요가 날렵하게 울루의 턱을 발로 탁 차버렸는데, 울루는 힘이 대단하여 얼굴이 돌아갔음에도 넘어지지 않고 손을 뻗어 첫째 형요의 발목을 잡아버렸다. 미요와 둘째 형요가 놀라며 울루를 칼로 찌르려 했지만 울루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형요의 몸을 마치 몽둥이처럼 휘둘러댔다. 그러자 미요와 둘째 형요는 언니를 해칠까 봐 칼을 찔러 들어갈 수 없었다. 울루는 신도를 힐끔 내려다보다가 얼굴을 감싸 쥔 신도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리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으르렁거리며 외쳤다. “감히 신도를 해치다니! 이년을 찢어 죽이겠다!” 미요와 둘째 형요는 얼굴빛이 파랗게 변했지만 그때 지나 전사들이 뒤에서 공격해오자 그것을 막고 피할 수밖에 없었다. 울루는 형요의 두 팔을 잡고 정말 찢어버리려는 듯 힘을 주자 형요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때 그것을 본 치우천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미친듯이 달려갔다. “으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털리는 치우천에게 몇 명의 전사들이 칼을 휘둘렀지만 치우천은 칼들이 몸을 스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어 몸을 날렸다. “어이쿠!” 치우천이 등에 부딪히자 울루가 비틀하다가 형요를 놓쳤다. 형요는 간신히 빠져나와 몸을 굴렸고, 미요와 둘째 형요가 급히 형요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치우천은울루의 덩치에 밀려 되 튕겨 나가며 땅에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몇 명의 지나 전사가 치우천을 향해 창과 칼을 내리꽂으려 했다. 치우천은 이젠 죽는구나 싶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달려들어 치우천의 몸을 덮었다. 치우천을 노리고 내리꽂으려던 칼과 창이 모두 그 사람의 몸에 꽂혔다. 치우천이 놀라서 보니 그것은 바로 도깨비 주루였다. 주루는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이미 이를 악문 채 숨이 끊어져 있었다. 칼과 창을 내리꽂은 지나 전사들도 잠시 어리둥절해했다. 치우천은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무서운 기세로 주루의 몸을 밀어내며 칼을 집어 들고 사방을 닥치는 대로 후려갈겼다. 평소의 차분하던 치우천이 아니라 거의 짐승과 같았다. 치우천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두 명의 지나 전사를 쳐 죽였는데 그때 돌로 만든 칼이 다시 부러졌다. 한 지나 전사가 몽둥이를 들고 치우천의 등을 내려치자 치우천은 다시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다시 한 명의 전사가 치우천의 목을 찌르려 했는데 때마침 날아온 창이 되레 그 전사의 목을 꿰뚫어 전사는 피를 토하며 벌렁 넘어져 버렸다. 바로 마냥이 던진 것이다. 치우천은 얻어맞은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도끼를 주워서 몽둥이로 자기를 내려쳤던 지나 전사의 머리를 반으로 쪼개버린 다음 다시 치베와 치우비를 향해 달려갔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형요 자매는 벌써 첫째와 셋째가 다쳐서 요요가 부축하여 물러섰고, 미요가 그들을 쫓으려는 지나 전사들을 막아서서 둘째 형요 혼자 울루와 싸우고 있었다. 남은 지나 전사들은 대부분 치베와 치우비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몇 발짝만 더 가면 치베와 치우비를 구할 수 있겠지만 계속 달려드는 지나 전사들 때문에 그 몇 발짝은 천리 길보다 멀었다. 주루는 치우천 대신 죽었고 개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있었으며 리미와 포리, 마냥 셋만이 싸우고 있었는데, 이미 겹겹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느닷없이 치우천이 몸을 굴려 도리어 리미의 반대쪽으로 갔다 지나 전사들은 리미와 마냥, 포리에게만 신경 쓰던 참이 라 뒤편에는 사람 수가 오히려 적었다. 치우천은 무서운 표정으로 악귀처럼 달려들어 도끼로 한지나 전사의 팔을 후려쳐 반쯤 꺾어버린 다음 기세등등하게 고함을 질렀다. 치우천의 고함소리에 질린 듯 지나 전사들 몇이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물러서자 치우천은 다시 달려서 치베가 얹힌 말의 엉덩이께를 도끼로 쳐버렸다 말이 아프고 놀라서 미친 듯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상처를 입어 놀란 것이므로 몇몇 지나 전사가 막아도 말은 기를 쓰고 무조건 달리기만 했다. 전사들은 놀라고 화가 나서 치우천에게 덤벼들었다. 그때 치우천이 휘파람을 불자 구름은 주인이 부르는 것을 알아듣고 크게 앞발을 치켜들며 울었다. 한 지나 전사가 구름의 갈기를 붙잡고 말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구름이 몹시 화가 난 듯, 그 지나 전사를 말발굽으로 짓밟아 버리고 성큼 뛰어서 치우천에게 달려왔다. 치우천 은 즉시 오른발로 뛰어서 구름의 등에 올라탔다. 치베의 말이 풀려나고, 치우비를 빼앗기자 울루는 곧 고함을 질렀다. “놓치면 안 된다! 모두 저놈을 잡아라!” 지나 전사들은 모두 ‘와’ 하고 치우천에게로 몰려들었다 리미와 포리, 마냥은 기운이 빠져서 곧 맞아죽을 판이었는데 치우천이 지나 전사들의 눈을 돌리자 기뻐하며 급히 뒤로 물러섰다. 두어 명의 전사가 남아 저항했으나 다시 리미가 한 명을 발로 차고 마냥이 창자루로 한 명의 머리를 후려갈기자 덤비는 자가 없었다. 포리가 급히 개르를 들쳐 업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지나족들이 버린 말들이 여기저기 있었으므로 그들은 곧바로 말을 주워 타고 달아날 수 있었다. 울루가 한눈을 팔자 둘째 형요도 재빨리 뺑소니를 쳤다. 치우천은 이미 많은 상처를 입어 눈앞이 캄캄하고 어지러웠지만 억지로 참으며 죽어라 말을 달렸다. 치우천은 속으로 외쳤다. ‘치우천! 참아라! 이깟 고통은 옛날에 아프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울루는 치우천이 달아나자 급히 외쳤다. “화살을 쏴라! 화살을 쏴!” 지나 전사들은 난전 중에 이미 서른 명 이상이 죽었지만 아직 마흔 명 이상이 남아 있었다. 무기가 대부분 돌 무기여서 웬만치 맞은 것으로는 죽지 않았으며 잠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난 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나족들이 활을 겨누기 시작하는데 치우천은 아직 화살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치우천은 이제 죽기 아니면 살기다라고생각해 눈을 질끈 감으며 최대한 아우의 몸을 감쌌다. 그때 핑핑 화살 소리가 들렸는데 이상하게 화살은 뒤에서 날아오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뒤로 날아가는 것 같았다. 치우천이 의아하여 눈을 떠보니 저만치에서 치베가 다시 말을 타고 달려 오는 것이 아닌가? 말이 미친 듯 달리자 치베는 스스로 몸을 꿈틀거려 말에서 떨어져 내렸고, 소녀가 달려와 치베를 묶었던 줄을 풀어준 것이다. “천 안다! 이번엔 이 치베가 천 안다를 구하겠다!” 치베는 외치면서도 쉴새없이 화살을 쏘아댔다. 그것도 치우천에게 화살을 겨누는 지나족들만을 틀림없이 한 번에 하나씩 쏘아 맞히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네 사람이 쓰러지자 울루가 노하여 소리쳤다. “방패를 가져와 막아라! 막아.” 지나족들이 치베의 화살을 겁내 방패로 앞을 막느라 허둥지둥하는 사이, 치우천은 어느새 화살이 미칠 만한 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치베의 화살은 백 발짝도 넘게 날아갔지만, 지나족의 활은 그보다 훨씬 못하기 때문에 서른 발짝만 떨어져도 사람을 해치기 힘들었다. 치베는 호탕하게 웃으며 약을 올리듯 계속 울루에게 화살을 쏘아댔고 울루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몽둥이로 화살을 두어 개 막았지만 마침내는 견디지 못하고 방패 뒤로 숨어버리고 말았다. 치베는 껄껄 웃으며 여유 있게 말을 돌려 치우천의 뒤를 따랐다. 소녀와 소녀의 말을 같이 타고 있던 울라트는 치우천을 맞이하러 달려 나왔다. 치우천이 마침내 치우비마저 구해오는 것을 보고 형요자매들과 도깨비들은 환성을 질렀다. 비록 주루가 죽고, 셋째 형요와 개르가 다쳐 의식을 잃었으며, 리미와 포리, 마냥도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지만 열 배도 넘는 전사들을 상대로 완전한 승리를 거둔 셈이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울루가 소리를 질렀다. “너희는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와 때를 맞추어, 뒤쪽에서 ‘우두두’ 하며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듣자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변했다. “아차! 뒤를 쫓던 지나족들이 왔구나! 이제 우리는 포위되었다!” 양옆은 상당히 높은 벼랑이라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치우 일행이 당황해하자 이제 정신을 차린 신도가 외쳤다. 신도는 눈 부근을 요요에게 긁혀 피투성이였고 긴 상처가 났지만 눈을 다치지는 않은 듯했다. “너희는 용감하게 싸웠다. 하지만 너희는 이제 도망칠 곳도 없어!” 치베와 형요 등은 이를 갈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도망칠 곳도 없었다. 곧이어 그들의 뒤에는 수백 명의 지나 전사들이 나타났다. 그 앞에는 상망과 끽구, 비휴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그들은 겨우 으로부터 백 보 정도 떨어진 곳에서 말을 멈추고 가지런히 대열을 정비했다. 그것만 보아도 상망과 끽구는 전사들을 부리는 데 신도 울루보다는 한 수 위였으며 무척 상대하기 힘들 것이었다. 더구나 대역사 끽구는 치우비가 아니면 아무도 감당할 수 없었다. 신도 울루가 거느린 전사들은 이미 길을 완전히 막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마흔 명 가량이 남아 있었으며 그들만도 상대하기 버거웠다. 그런데 수백 명의 새로 나타난 전사들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치베와 형요의 눈이 자연히 치우천을 향했다. 그러나 치우천은 심각하긴 해도 태연한 표정이었다. 치우천은 조용히, 말을 천천히 몰아 상망과 비휴 쪽을 향했다. “자네들은 이제 방법이 없다네. 지금이라도 무기를 버리고 나를 따르게나.” 상망의 말에 치우천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맑은 눈으로 상망을 바라보았다. 피투성이와 먼지투성이가 된 치우천이었지만 그 눈빛이 빛나는 것을 상망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상망은 다시 그 눈빛을 피하며 타이르듯 말했다 “이제 싸움은 충분하네. 자네들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어. 자네들은 우리 전사를 많이 죽였지만, 나는 이해하네. 오히려 자네들이 존경스러워. 자네들은 그 적은 수로 비휴의 늑대, 신도 울루의 귀신들도 뚫었고, 열 배의 전사들과도 싸치 이겼네. 하지만 사람의 힘에도 한계 가 있는 거야.” 상망이 다시 조용하고도 엄숙하게 말했다. 그의 말에는 평소의 까불대던 영감의 모습이 아니라 태산 같은 무게가 있었다. “나는 자네들을 결코 해치거나 나무라지 않겠네.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려서, 헌원님을 따르게나. 나도 마음이 괴로우이. 누가 뭐래도 나는 자네들을 벗이라 여기고 있었다네. 그런데 이렇게 싸워야만 하는가?” 치우천은 여전히 조용히 상망을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상망이 다시 말했다. “자네들이 이렇게 몰린 것도 다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게. 지금 자네들만으로는 우리를 이겨낼 수 없어.” 그때 치우천은 서글프게 웃으며 밝게 말했다 “이길 수 없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돌연 상망이 놀랄 정도로 크고 위엄 있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말 죽고 싶단 말인가? 하늘의 뜻을 어길 참인가?” 치우천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했다. “헌원님은 하늘이 아닙니다.” 상망은 화가 치미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다! 그럼 죽어라!” 상망이 막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갑자기 뭔가 시커먼 것이 획 하고 나타나 상망과 지나족들의 옆을 쏜살같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 빨라 보이지도 않았다. 상망, 끽구는 물론이고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비휴마저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시커먼 그림자는 쏜살같이 치우천의 옆으로 가더니 빙글 한 바퀴 돌고는 똑바로 버티고 서며 외쳤다. “누가 누굴 죽여? 제길! 이놈은 나 말고는 그 누구도 죽일 수 없지!”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보고는 모두가 깜짝 놀랐다. 다만 치우천만은 그 사람을 보자마자 얼굴에 기쁜 미소가 떠올랐다. “비울걸!” 감격의 만남 비울걸이 그야말로 귀신처럼 갑자기 나타나자 상망 등은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치베나 형요, 울라트, 소녀 등도 싱카가 비울걸을 찾으러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비울걸이 지나족의 포위망을 뚫고 나타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비울걸이 도깨비 왕이라고는 하지만, 그 혼자서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설마 도깨비들을 불러내 지나족을 다 죽일 수 있다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비울걸은 치우천을 보자마자 그 무시무시한 얼굴에 흉악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욕지거리를 해댔다. “너 이놈아, 너는 약속을 해놓고 엄한 곳에서 헤매느냐? 하마터면 이 도깨비 왕께서 그동안 헛고생을 한 게 될 뻔했잖느냐?” 치우천은 웃으며 기분 좋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일이 내 생각대로 되지 않고 꼬여서 그리 되었습니다.” “제기랄. 네가 여기서 맞아 죽거나 지나족에게 잡혀가면, 이 어르신께서 어떻게 네 고기 맛을 본단 말이냐? 덕분에 죽을 고생을 해서 여기를 찾아왔느니라.” “싱카를 만나셨습니까?” “그래. 그 가짜 도깨비 놈이 용케도 나를 찾아왔어. 하지만 우리 둘 다 몹시 헤맸지. 네놈들이 말을 타고 미친년처럼 여기저기 날뛰는데 어찌 찾아가겠느냐? 그런데 네놈의 피리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비로소 찾아을 수 있었다. 헤헤, 하마터면 늦을 뻔했지?” 치우천과 비울걸이 자기들은 완전히 무시한 채 떠들어대자 끽구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외쳤다. “도대체 무슨 수작을 하는 거야! 비울걸! 너는 어느 편이냐?” 비울걸이 즉시 외쳤다. “저 자식은 몇 살 먹지도 않은 놈이 어디서 반말이냐? 이 자식아! 덩치만 크면 다냐?” 끽구가 노해서 발을 구르자 상망이 그를 제지하며 나섰다. “이보시오, 비울걸. 우리는 지금 치우천과 막 싸우려던 참이오. 당신은 그럼 치우천 편을 들어 우리와 싸우겠다는 거야?” “제기랄 너 이 늙은 영감아. 안 그러면 이 비울걸 어르신이 네 편을 들어주랴? 헤헤, 너는 내 아버님이니 네 편을 들어줘야 할지도 모르겠네?” 상망은 비울걸이 이 판국에서도지난번 자기를 개라 빗대어 욕한 것을 끄집어내자 성질을 부렸다. “저 개자식은 입이 옆으로 달렸나. 사람이 정중히 말해도 들어먹을 줄 모르는구나! 나이는 헛처먹었느냐?” “나이 나이 하지 마라. 내 아버지면서 나에게 나이를 따지는 거냐?” 비울걸이 계속 낄낄 웃으며 놀리자 상망은 얼굴이 시뻘개졌다. 상망은 비울걸과 무슨 천적관계인 팔자를 타고난 듯, 다른 사람 말은 다 능글능글하게 넘어가는데도 비울걸의 말에는 화를 참지 못했다. 상망이 으르렁거리며 소리쳤다. “이 도깨비 같지도 않고 사람 같지도 않은 놈아 네놈이 도깨비 왕이랍시고, 우리 이 많은 지나 전사를 다 이겨낼 것 같으냐?그 잘난 도깨비들을 불러볼 거냐?” “허허, 내 귀여운 도깨비들에게 너희 더러운 놈들의 피를 묻힐 필요가 있겠느냐? 안 그래도 충분하다!” “뭔 믿고 그렇게 까부는지 한번 두고 보겠다.” 상망이 씩씩거리며 다시 손을 쳐들려 하자 비울걸은 허공에 손짓을 했다. 그러자 전에 치우 형제가 사막에서 보았던 눈알 괴물 몇 마리가 깡충거리며 허공에 나타났다. 끽구가 낄낄 웃었다. “그게 그 잘난 도깨비냐? 그게 다냐?” 그러자 비울걸이 크게 외쳤다 “뭘 믿고 까부는지 한 번 보여 달란다! 얘들아!” 눈알 괴물들은 눈도 없었지만 비울걸의 목소리는 눈알 괴물들에 의해 크게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바로 사막에서 들었던 엄청난 소리와 같았다. 그 커다란 소리가 산골짜기로 구석구석 울려 퍼지자 갑자기 한쪽 벼랑에서 ‘와!’ 하면서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망과 신도 울루 등이 이끄는 지나족 전사들은 모두 깜짝 놀라면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치베와 형요, 소녀와 울라트 등도 놀라서 바라보았는데 치우천만은 기쁨이 넘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와주었구나!” 그와 동시에 걸걸하고 호탕한 웃음소리가 한쪽 골짜기에서 울려 퍼졌다. “하하힛 지나족들 개새끼들이 그동안 잘 지냈느냐? 감히 내 친구를 건드리다니, 나 키탄 울크리족의 야율쿠리가 용서하지 않는다!” “야율쿠리!” 치베가 갑자기 부르짖으며 환호성을 올렸다. 형요나 소녀는 야율쿠리를 잘 몰랐지만 울라트는 너무나 기뻐 펑펑 눈물을 쏟으며 외쳤다. “야율쿠리님이 와주셨어요!” 치우천도 기뻐서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야율쿠리! 고맙다! 와주었구나!” 그때 또 반대편 산등성이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하햇 이봐, 지나족의 쓰레기들아. 모든 벌레들의 어머니, 이 미아우의 초초룬님도 오셨다!” “초초룬!” 치우천이 다시 기쁨을 금치 못해 소리쳤다. 치베나 울라트 역시 뛸 듯이 기뻐했다. 초초룬이 다시 외쳤다. “우천! 비! 치베! 모두 무사하냐? 저 지나 쓰레기들은 내가 치워주마. 너희들을 건드렸다면, 모조리 썩어 문드러진 핏물로 변하게 해 주겠다!” 그와 더불어 다른 목소리도 들려왔다. “희네! 나래! 자네들 무사한가? 나도 왔네! 나 툰툰일세!” “툰툰까지!” 치우천은 기뻐서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마 초초룬이 툰툰을 데리고 온 듯, 툰툰에게 핀잔을 주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이봐! 툰툰! 치우천이라 했잖아 제길, 몇 데리고 오지도 않았으면서 생색내기는.......” 상망과 비휴 등은 크게 당혹한 빛을 띠었다. 자신들은 치우천을 포위했지만, 어느새 야율쿠리나 초초룬 등이 다시 자신들을 포위한 것이다. 치우천 일행은 항상 자신들과 있었는데, 언제 그들에게 연락을 하여 여기 모인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지나족들을 기절할 정도로 놀라게 하는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 소리는 지나족의 뒤편에서부터 들려왔다. “천 안다! 비 안다! 무사한가! 치베도 잘 있느냐?” 그 누구보다도 치베가 될 듯이 기뻐했다. “보돈차르님! 보돈차르님이다! 치베가 여기 있습니다!” 치우 일행은 이제 완전히 분위기를 깨닫고 환호하며 기뻐서 난리를 쳤다. 치우천조차도 이 목소리가 들린 것만은 뜻밖인 듯 몹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보돈차르님께서 직접?” 비울걸은 싱글싱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장난기 많고 항상 기이한 언행만 하는 비울걸도 심히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놀랄 일이 더 있어.” 비울걸이 말하자 이번에는 신도 울루의 뒤편에서 외치는 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울라트! 울라트 잘 있느냐? 무사하냐?” 그와 더불어 다른 목소리도 들렸다. “치우천님! 치우비님! 우리도 있소, 구르와 키타야요! 앗수라트와 앙가마이는 언제나 당신들과 함께요!” “아버지! 아버지!” 울라트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펄쩍 뛰어오르며 펑펑 울었다. 치우천은 감격에 겨워 말문이 막혔다. 마지막으로, 정말로 뜻하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야! 나래야 나도 왔다! 이 자식들아! 나다! 나!” “양역 네가 어떻게!” 이번에는 치우천은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너무 놀랐고, 높은뫼도 놀라 말머리를 치켜들며 한 번 높이 몸을 솟구쳐 올렸다. “ 자식들아! 살아 있었구나! 정말 살아 있었구나!” 양역은 너무도 기쁜지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치우천도 울면서 외쳤다. “모두 다....... 모두 다 고맙다. 나, 치우천....... 내 평생 이렇게 기쁜 날은 처음이다!” 그때 야율쿠리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핫! 당연한 일이다! 제길! 그나저나 저 지나 놈들이나 쳐 죽이고 이야기하자! 손이 근질근질하다! 끽구는 내 거다! 딴 놈은 건드리지 마라!” 그와 동시에 ‘와!’ 하는 함성이 일어나며 수많은 사람들이 벼랑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야율쿠리가 데리고 온 키탄족의 전사들인 것 같았다. 얼핏 보기에도 그 수가 이백 명은 족히 넘어 보였으며 모두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어서 유리했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초초 룬도 외쳤다. “미아우의 전사들이여! 이미 저 쓰레기 같은 지나족 유망놈이 우리 종족을 치기 시작했다. 한 놈도 살려둘 수 없다!” 동시에 그쪽에서는 ‘와와, 우우’ 하는 무슨 주문 같기도 하고 노래 같기도 한 함성이 울리면서 백 명도 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미아우족의 전사들이 분명했다. 그리고 우두두 하는 소리를 내며 지나족의 뒤편에서도 말을 탄 한 무리의 전사들이 나타났는데 적어도 이백 명은 되어 보였다. 그런데 이백 명의 말달리는 소리가 가지런하고 조금도 흐트러지는 것 같지 않아 말 타는 사람들의 기마술이 하나같이 대단함을 알 수 있었다. 몽골족 말고 그렇게 말을 탈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니 그들은 보돈차르가 이끄는 몽골족이 분명했다. 이어서 ‘우’하는 소리와 함께 신도 울루의 뒤편에서 이번에는 오백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앗수라트와 앙가마이의 연합부족 전사들이 분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몇몇 사람이 산비탈을 미친 듯 말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와서 달려왔는데 그들은 양역과 마파람, 쇠돌이, 부루벼락 등 네 사람의 사울아비들이었다. 양역은 내려오자마자 말에서 내려 달려왔고 치우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해 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았다. “양역! 네가 어떻게 왔느냐? 나는 주신의 죄인인데.......” 치우천이 감격에 겨워 말끝을 흐리자 양역은 씩 웃었다. “제길, 이제 나도 죄인이 되었다. 나는 마침 이 친구들과 미아우족에 일이 있어 가게 되었는데, 네 이야기를 듣고 만사 제쳐놓고 달려온 것이다!” 부루벼락도 낄낄 웃으며 끼어들었다. “히히, 이젠 나도 명령을 어기고 이리 왔으니 죄인이 되었다. 치우천, 자네가 우리 책임져, 알았어?” 쇠돌이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걱정스레 물었다. “비 형은 어디 있수? 왜 안 보이지?” “염려 마라. 비는 지금 좀 지쳐 쓰러져 있지만, 다친 것은 아니다.” 마파람만은 싱긋 웃을 뿐, 말이 없었다. 그때 사울아비들의 뒤를 따라 한 무리의 키탄족 전사들과 초초룬의 미아우족 전사들이 벼랑을 미끄러져 내려왔다. 아마도 치우 형제일행을 보호하기 위해 야율쿠리와 초초룬이 내려 보낸 것 같았다. 삽시간에 백여 명의 사람들이 내려와 치우 일행을 에워싸며 보호하자 지나족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대강 따져보아도 치우천을 구하려고 달려온 각 부족의 사람들의 수는 천 명은 되어 지나 전사의 두 배도 넘었다. 더구나 그들은 이미 지나족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상망이나 끽구조차도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없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사실 믿어지지 않는 것은 치베나 형요, 울라트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몹시 궁금해 했지만 치우천은 양역 등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자 비울걸이 낄낄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너희는 모두 나에게 감사해야 해. 다 이 도깨비 왕이 애쓴 덕분이니라.” 사람들은 너무도 기뻐서 비울걸의 흥하고 무서운 모습도 멋져 보일 지경이었다. 비울걸은 흐뭇한 듯 계속 낄낄 웃으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치우천 녀석은 확실히 대단해. 그 녀석은 너희가 헌원에게 가기 전부터 나와 함께 사방을 다니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더군. 그러면서 저 친구들을 만나고 다녔던 거야. 헌원이 분명 뭔가 수작을 부릴지도 모르니 대비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보내 연락할 테니 도와달라고 말야. 저들은 모두 천, 비 두 녀석의 좋은 친구들이라 그런다고 하더군. 그 다음에 우리는 헌원에게 갔지. 역시 저 녀석의 생각대로 헌원 놈이 속을 드러내 보이더군. 그래서 내가 그 참에 부리나케 돌아다니며 알렸지.” 형요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하지만 당신은....... 헌원의 얘기를 듣기 전에 사라져 버렸잖아요?” 비울걸이 낄낄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그건 내가 아니야. 내 부하인 도깨비였어.” 모두는 다시 깜짝 놀랐다. 아무래도 사라지는 재주가 몹시 궁금했던지 요요가 눈을 빛내며 바라보자 비울걸은 킬킬 웃었다. “이거 내 밑천을 털어놓는 것 같지만....... 요 계집아이는 나를 흉하다 타박하지 않고 기분 좋게 박수까지 쳐주었으니 내 특별히 이야기해 주지.” 비울걸은 지난번 카린족의 잔치에 나타나 장난을 쳤는데, 그때 다른 여자들은 모두 눈살을 찌푸렸지만 요요 혼자 좋아하며 기쁘게 웃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울걸이 힐끗 지나족들 쪽을 바라보자, 지나족들은 모두 기가 꺾여서 찍소리도 못하고 있었다. 비울걸은 안심한 듯 계속 이야기했다. “그때 헌원의 집에 갔을 때. 처음에 천 녀석과 같이 간 것은 물론 나야. 하지만 내가 먼저 헌원의 방 안에 혼자 들어갔었지?” “그랬죠.” “나 혼자 무조건 방으로 들어갔으니 아마 다들 날 무례하다고 욕했겠지만 까닭이 있었지. 난 들어가자마자 주술로 몸을 감추고 대신 도깨비 한 마리를 내 모습을 하게 하여 놔두었거든? 그러니 사라지게 하는 것은 일도 아니지. 도깨비니까.” 요요는 ‘아’ 하며 무릎을 쳤다. 비울걸은 낄낄거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계속 몸을 숨긴 채 기다렸어. 히히, 그래서 나도 그 헌원의 말을 다 들었지. 제길, 나중에 보니 적송자란 선인 놈이 있어서 놀라 도망쳤지. 그놈은 재주가 대단해서 그때 같이 나왔으면 나도 들켰을 건데 그때는 끼지 않고 뒤편에서 듣기만 하더군. 다행이지 뭐야.” “그런데 그 이야기만 듣고 벗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었나요?” “히히, 그것만 가지고 내가 어떻게? 너희는 모르겠지만, 너희가 카린산으로 향할 때 나도 따라갔어. 그리고 천 녀석과 한두 번 이야기를 나누었지. 아무래도 지나족 놈들이 우르르 따라가는 것을 보니, 심상치 않아 나도 보이지 않게 뒤를 따라갔지. 저 키탄이나 미아우 녀석들에게는 도깨비들을 내 모습으로 변하게 하여 가도록 했고 말야.” 치우천이 비울걸과 함께 여행하며 만난 사람은 보돈차르와 야율쿠리, 초초룬, 앗수라트와 앙가마이 부족의 키타야, 구르까지 네 부족이었다. 치우천은 헌원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정말 급해지면 도와 달라 하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들의 의심을 살 필요는 없다고 여겨서 그런 내색은 말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키타야 등에 사람을 보낼 때에도 치우비 등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비울걸은 치우천의 부탁을 받자 네 부족의 친구들에게 자기 모습을 한 도깨비들을 보내어 전갈을 하고, 또 그들이 근방에 온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치우천에게 나타났다. 치우천이 누루마이의 마을에 도착했을 때 각 부족 친구들은 이미 카린을 며칠 거리 내로 갈 수 있는 곳에 와 있었다. 누루마이의 잔치에서 비울걸은 괴이한 짓을 했지만, 그것은 지나족에게 눈치를 보이지 않고 그 소식을 치우천에게 알리기 위해 그런 것이었다. 그때 비울걸은 새고기 세 마리를 손톱으로 꿰어 들었는데, 그것이야말로 네 방면 사람들 중 세 방면 사람들이 왔다는 신호였다. 상망은 비울걸에게 뭔가 있다고 여겨 캐내려 했지만, 아무리 상망이라도 그런 것까지 예측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원래 그 누루마인가 하는 늙은 여편네의 마을 근처에서 합해져서, 단숨에 기습을 하여 지나족을 에워싸고 그 누구냐, 헌원의 딸까지 잡아서 빠져나갈 생각이었지, 그 다음에 쑤앙마이를 만나러 간다고 천 녀석이 그랬어. 그런데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천 녀석이 갑자 기 없어져 버렸지 않겠어? 그때는 이미 보돈차르, 야율쿠리, 앗수라트 앙가마이 세 갈래의 전사들이 카린 부근에 도착해 숨어 있었고, 안 올 줄 알았던 미아우 처녀도 왔어. 그 괄괄한 처녀는 뭐라더냐, 툰툰인가 하는 작은 부족장과 주신 사울아비들을 만나게 되어 그들과 함께 오느라 늦었다고 하더군. 좌우간 네 갈래의 전사들이 다 모였는데 정작 천 녀석이 없어졌으니 황당하지 않겠어? 이 비울걸이 그야말로 수천리 길을 오가면서 애썼는데 말야. 그래서 이번에 보면 잡아먹어 버리겠다고 생각했지.” 다른 부족 전사들은 경솔히 카린 부족의 마을로 다가갈 수 없는지라, 비울걸만 카린족 마을에 들어갔다가, 몸이 아파 남아 있는 지나전사들을 발견했다. 비울걸은 쥐도 새도 모르게 그중 하나를 잡아다가 족쳐서, 치우 일행이 쑤앙마이를 만나러 카린산의 가장 높은 산으로 갔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비울걸은 다시 그리로 갔으나, 그때는 이미 치우천이 도망치기 시작한 다음이었다. 비울걸은 초조해져서 산을 헤매다가 싱카를 만났다. 싱카는 주술의 힘을 닦았던 사람이라, 도깨비들을 물리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치우천은 싱카에게 속내를 털어놓다가 비울걸을 만나기 어렴다고 말하자, 싱카는 자기가 비울걸을 부를 수 있다고 말했는데, 둘이 소곤거리며 주고받은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싱카가 도깨비를 물리치는 주술을 쓰자 멀리 떨어졌어도 비울걸은 그 기운을 대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비울걸은 오랜 시간 도깨비들의 기운을 쐬어 사막에서 말 피 냄새를 맡고 따라왔을 정도였던 만큼 이미 반 정도는 도깨비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도깨비들과 관련된 주술에는 더더욱 민감하여 넓은 카린산에서도 결국 싱카를 찾아냈던 것이다. 비울걸이 싱카를 보자마자 족치려고 했으나 싱카는 웃으며 침착하게 치우천이 시켜서 온 것이라 말했다. 그래서 비울걸은 기뻐하며 즉시 싱카와 도깨비들을 다시 보내 각부족의 전사들에게 연락을 하여 급히 모이게 하고 다시 치우천을 찾아 나섰다. 때마침 치우천이 신도 울루의 귀신진을 뚫느라 풀피리를 연주하자 비울걸은 치우천을 찾아냈다. 치우천이 전투를 벌이자 비울걸은 초조했지만 다른 부족 전사들이 그때까지 당도하지 않아 발만 구를 수밖에 없었다. 도깨비들을 시켜 싸움을 돕는 것은 안 될 일은 아니었지만 사실 비울걸로서도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미리 도깨비들을 달래놓고 많은 준비를 해야 하는데, 갑자기 끌어내 무작정 싸우라고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좌우간 치우천 일행이 다행히 일차 승리했고, 곧 상망이 이끄는 지나족의 본대가 당도했으나 그때는 이미 치우천 편의 부족 전사들도 소리 없이 다가온 다음이었다. 그래서 비울걸은 당당히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비울걸이 이야기하는 사이에 치우천은 조용히 상망 앞으로 나섰다. 상망은 이미 팍 풀이 죽어 있었다. 치우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헌원님께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저는 헌원님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뿐, 여러분들이 미운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저를 끌고 가려 했기에 할 수 없이 저항한 것뿐입니다.” 상망 등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치우천이 웃으며 계속 말했다. “이제 제 편이 더 많으며 여러분을 완전히 에워쌌는데, 한번 싸워보시겠습니까?” 상망은 고개를 저었다. 전사의 수도 그럴 뿐더러, 자신들은 포위당한 상태였다. 더구나 저목은 비울걸이나 초초룬 등, 색다른 재주를 지닌 사람들이 많았고 야율쿠리처럼 태산회의 때 이름을 날린 용사들도 끼어 있으니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저도 서로 싸우는 것은 싫습니다. 아까 상망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제는 상망님이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물러가시면, 저도 뒤를 쫓거나 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부족 사람들을 탓할 것도 없습니다. 모두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원망하려면 저를 원망하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헌원님이나 여러 기인님들이 보여주신 호의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의미라 여겨주시고, 이럴 수밖에 없는 제 처지를 어여삐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치우천이 조금도 위협하거나 거들먹거리지 않고 차분히 이야기하자 상망 등은 모두 풀이 죽어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야율쿠리와 초초룬이 벼랑을 타고 내려와 있었고 보돈차르나 키타야, 구르 등도 목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 와 있었다. 치우천이 목소리를 높여 크게 외쳤다. “지나족들이 싸우지 않고 물러나겠다니, 그냥 돌려보내 드리지요.” 치우천이 말하자 야율쿠리만이 좀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초초룬도 약간 화가 난 듯했으나 별말은 없었다. 솔직히 다른 부족들로서도, 굳이 지나족과 전쟁을 벌여야 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치우 형제를 구해내는 것이 목적이었을 뿐이다. 초초룬만은 미아우족이, 유망이 이끄는 지나족과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지나족을 더 미워했지만, 따지고 보면 전쟁 중인 것은 유망의 부족이지, 헌원의 부족은 아니었으므로 굳이 싸우자고 하지는 않았다. 마침내 상망과 끽구, 비휴, 신도 울루 등 다섯 기인은 풀죽은 모습으로 남은 전사들을 수습하여 떠나갔다. 그때 발이 먼발치에서 치우천에게 모습을 드러내며 물었다. “비는 어떤가요? 정신을 잃었다고 들었는데.” 치우천은 발이 애써 태연한 척 외치지만, 그 목소리가 떨리며 고통이 잔뜩 배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치우천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던 남자가 이제는 적이 되어버렸으니 그 비통함을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치우천은 정중히 말했다. “아직 깨어나지 못했지만, 별일은 없을 것입니다.” 발은 입술을 깨물며 뭔가 말하려 했으나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나는‥‥ 나는.......” 그러다가 발은 끝내 말을 더 하지 못하고 뒤로 돌아 날 듯이 말을 달려 사라져 버렸다. 그것을 보고 치우천은 어떻게든 지나족을 협박이라도 해서 발을 빼낼까 하는 생각을 지워버렸다. 발은 치우비를 좋아했지만, 결코 자신의 부족까지 버릴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치우천은 아우가 걱정되어 한숨을 지었다. ‘차라리 비가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이 다행이다. 지금 깨어 있었다면 아우도 얼마나 괴로울까? 앞으로 아우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지나족들이 꼬리를 내리고 사라지자 야율쿠리와 초초룬, 보돈차르, 키타야, 구르 등등 모두가 달려왔다. 작은 부족장이었지만 툰툰도 아들 중 세 명과 함께 몇 명 안 되는 전사들이나마 모두 모아 달려왔다. 치우천은 그들의 모습을 보자 새삼 감격하여 눈물이 솟아 일일이 인사하고 감사해하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다른 부족인데도 이렇게 수천리 길을 마다 않고 부하들을 데리고 달려와 주는 벗들이 있으니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아우야 너도 그렇다! 우리는 이들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절대 잊으면 안 된다!’ 치베와 형요 등은 치우천이 이런 준비를 해두었음에도 자신들에게는 전혀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다고 투덜댔으나 치우천은 웃으며 그들을 달랬다. “우선 지나족이 정말 우리를 죽여서라도 데려갈지 어떨지 몰랐어. 만약 그렇지 않고 우리를 순순히 보내준다면, 굳이 너희 부족들까지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 도망치면서는 이야기할까도 했는데, 하도 급해서 그럴 겨를도 없었고, 또 내가 괴물의 저주에 걸리는 바람 에 비울걸과 약속이 틀어져서 일이 잘될지 안 될지도 알 수 없었지. 그래서 말하지 않았어. 미안하다, 미안해.” 야율쿠리와 초초룬 등은 비록 지나족과 전투를 하지 않았어도 자신들의 위세에 지나족이 꼬리를 말고 도망친 것을 아주 기분 좋아했다. 보돈차르는 다만 과묵하게 조용히 웃고만 있었으며 키타야는 자기 딸이 이제는 아주 용감한 여걸이 되었다며 좋아했다. 싱카는 야율쿠리와 함께 왔는데, 그는 조용한 성격이라 말도 하지 않고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소녀도 기뻐하고 형요 자매도 말로만 듣던 치우천의 훌륭릉한 벗들을 직접 만나게 되자 몹시 기뻐했다. 형요가 치베에게 물었다. “이봐, 쩨쩨한 치베야. 너는 용사라고 하는데 어떻게 신도 울루에게 그리 쉽게 잡혔지?” “제길! 신도 울루 따위가 날 어떻게 잡느냔 말이다. 난 그들에게 잡힌 게 아니라....... 아니라....... 기절했었다.......” 치베는 다른 것은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용사이나 귀신만은 몹시 두려워해서, 마구 칼을 휘두르다가 그만 정신을 잃은 것이다. 치베는 부끄러워 얼굴이 새빨갛게 되었지만 거짓말은 할 줄 몰랐다. 형요는 깔깔 웃으며 치베를 보고 “용사라고 우쭐대더니만 귀신에 쫓겨 기절했다”며 마구 놀려냈다. 모두 오랜만에 만나 할 이야기가 끝도 없었지만 치우천은 그 와중에도 잊지 않고 자신을 위해 대신 죽은 주루를 정중히 묻어주고 눈물을 흘렸다. 오랫동안 정이 들은 도깨비들도 코타에 이어 주루가 다시 죽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울라트는 아주 서럽게 울었다. 야율쿠리나 초초룬은 도깨비들을 그리 썩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키타야, 구르와 보돈차르는 도깨비 주루가 치우천을 몸으로 덮어 대신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크게 감동했다. 보돈차르는 스스로가 부족장임에도 불구하고 도깨비에 지나지 않은 주루의 무덤에 몽골식으로 깊은 예를 올렸다. 일단 뒷수습이 끝나자 울라트는 치우천과 다른 벗들이 모인 자리에서 당돌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제가 여러분들께 말씀드릴 게 있답니다. 어린애의 말이라 여기지 말고 들어주세요.” 울라트가 똘똘하게 말하자 사람들은 모두 웃으며 울라트를 바라보았다. 울라트는 쟁쟁한 부족장들과 영웅들 앞에서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도깨비들과 같이 있어 보았지만, 저들은 진짜 도깨비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해요 나도 처음엔 무서웠지만, 그들도 착한 사람들이며 용감한 전사들이에요 하지만 생긴 게 다르고 무서워서 모두 다 슬슬 피하는 것뿐이에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울라트는 말끝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만약 팔려오거나 잡혀온 도깨비들을 보시면, 제 부탁을 잊지 말고 그들을 너무 구박하거나 못 되게 굴지 말아주세요. 정 안 되면 그냥 우리 아버지나 천 오라버니께 보내주세요 저는 어느 정도 그들을 겪어봐서, 그들이 무섭지도 않고 또한 말을 가르칠 수도 있어요. 천 오라버니, 비 오라버니를 지키려고 죽은 주루나 코타, 다른 불쌍한 도깨비들을 보아서라도, 꼭 그래 주세요. 그러면 죽은 도깨비들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거예요.” 울라트가 차분하고도 또랑또랑하게 말하자 치우천은 눈물이 핑 돈 채 울라트를 번쩍 안아들었다. “훌륭하다! 울라트! 죽은 주루나 코타도 네 이야기를 듣고 편히 쉴 것이다.” 뒤에 서 있던 리미나 정신을 겨우 차린 개르, 포리, 마냥, 싱카 등도 울라트의 마음에 감동한 듯 눈물을 지었다 부족장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는데, 보돈차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장 먼저 말했다. “꼬마 아가씨가 생각이 깊군! 내 반드시 그렇게 해주마. 보돈차르의 이름을 걸고,눈에 띄는 도깨비들은 모두 구해주마 다만 우리는 도깨비들을 가르치거나 할 자신이 없으니 모두 천 안다에게 보내 아가씨에게 맡기겠다. 그러면 되겠지?” 이어서 다른 사람들도, 심지어는 도깨비라면 좀 떨떠름했던 야율쿠리마저도 허허 웃으며 약속하자 울라트는 너무 좋아서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기뻐했다. 과보족인 형요 자매 역시 생김새가 달라 여느 부족 사람들에게 구박을 받았던 터라 울라트의 말이 마음에 쏙 들어 울라트를 안고 빙빙 돌렸다. 보돈차르가 껄껄 웃으며 키타야를 쳐다보았다 “키타야 족장은 좋으시겠습니다. 저렇게 훌륭한 딸을 두셔서. 웬만한 아들보다 낫습니다!” 키타야는 너무도 좋아서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은 원래 겁쟁이에다 누가 와도 말 한마디 못했는데, 불과 한두 해 사이에 저렇게 변하다니! 나도 믿을 수 없습니다! 전부 치우천, 치우비 형제분이 잘 가르쳐준 덕분이니 그들께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몽골족과 타타르족은 원래 사이가 상당히 좋지 않아 보통 서로간에 개니 양이니 하고 욕하는 것이 다반사였는데, 이렇게 공통의 목적을 지니고 만나 보니 의외로 통하는 면도 있고, 마음에 들기도 하는지라 그들은 즉석에서 서로 다투지 말자고 약속을 했다. 그러자 야율쿠리나 초초룬은 자신들은 부족장은 아니지만, 역시 다른 부족 사람들도 좋은 사람들이니, 서로 믿고 살자고 말했다. 치우천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가슴 뿌듯해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깊이 깨닫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 이러면 되는 것이다. 자기 부족만 잘났다고 우기며 잘산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믿고 서로 의지하며 같이 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정말 옳은, 헌원의 뜻보다 옳은 정말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그날 밤은 늦었으므로 아예 그 자리를 정리하고 불을 피워, 각 부족들이 모두 뒤섞여 큰 잔치가 벌어졌다. 천 명 가까이 모인 각 부족 전사들은 처음에는 좀 쑥스러워했으나, 술과 음식을 들게 되자 서로 간에 잘 통하지 않는 말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급기야는 술에 취해 각자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재주를 보이기도 했다. 서로 말도 통하지 않고 풍습도 달랐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더 크고 즐겁게 웃고 왁자지껄 즐거운 분위기가 되었다. 보통 때는 여간해서 보기 힘든, 몽골족과 타타르족이 어깨동무를 하거나 키탄족과 미아우족이 함께 술내기를 하는 등의 모습이 자연스레 보였다. 치우천도 이제는 몸도 그럭저럭 괜찮아졌으며 걱정거리도 없는 터라 벗들과 부족장들과 함께 즐겁게 술을 마시고 흠뻑 취했다. 아파서 누운 형요 자매들와 개르조차 끙끙 앓으면서도 즐겁게 웃고 떠들며 누운 채로 술을 퍼마셨다. 다만 치우비만이 죽은 듯이 쿨쿨 잠들어 깨어나지 않았으나 치우비는 안색도 평온하고 아픈 기운도 없어서 모두들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의 새벽녘이 되어서야 하나둘씩 쓰러져 기분 좋게 곯아떨어졌다. 비울걸은 사람들이 잠들자 어느 사이엔가 다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두 영웅의 첫대결(1) 치우천은 기분 좋게 취해서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다가 누군가가 급히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치우천이 놀라 눈을 떠보니 바로 요요였다. 요요가 작은 목소리로 치우천에게 속삭였다. “이상한 일이에요 일어나세요.” “무슨 일이냐, 요요?” “마냥이 수많은 말발굽 소리가 들린대요. 언니들이 알아보러 나갔는데, 아무래도 좀 이상해서요.” 치우천은 의아하여 급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좀 아팠지만 애써 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만치 마냥이 땅에 귀를 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치우천이 다가가자 마냥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주인님. 마냥에게 들려요, 들려요 아주 많은 말. 이쪽으로 와요. 아주 많아요.” “아주 많다구?” “그래요 우리보다 몇 배나 많아요. 마냥은 헤아릴 수가 없어요.” 치우천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기 모여 있는 전사의 수만도 천 명이 훨씬 넘었다 앗수라트 앙가마이의 전사가 오백 명, 보돈차르의 기마병이 이백 명, 야율쿠리의 키탄 군대가 이백 명, 초초룬의 미아우전사들이 백오십 명 정도이니 전부 합하면 천 명이 좀 넘는 많은 수였다. 그런데 이보다 몇 배나 되는 말발굽이라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치우천은 곧 다른 사람들이 일어났는지 둘러보았다. 야율쿠리와 초초룬 등은 자고 있었으나 멀찍이 보돈차르가 일어나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치우천은 그리로 가서 말을 건넸다.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천 안다?” 치우천이 마냥이 들은 것을 이야기해주자 보돈차르도 의아해하는 표정이 되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 쪽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지나족은 어제 당해서 물러갔는데,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어디서 그런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단 말인가?” “그러게 말입니다.” 보돈차르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고 말하고 곧 모든 사람들을 깨우게 했다. 사람들이 일어나자 보돈차르는 사태가 좀 이상하니, 미리 대비해두자고 말했다. 야율쿠리나 키타야 같은 사람들은 설마 하는 표정이었지만 툰툰이 한마디 끼웠다. “미아우 툰툰 부족의 툰툰이 말합니다. 항상 준비해서 나쁠 일은 없습니다. 보돈차르 부족장과 치우천님의 말을 따릅시다.” 툰툰은 작은 부족장이었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서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사람들을 깨우고 말을 끌어 세우고 하는데 갑자기 미요가 날 듯이 말을 달려왔다 미요는 어지간히 급한 듯 치우천의 앞까지 말을 달려왔고 치우천은 얼굴이 굳어졌다. 뭔가 심각한 일이 생긴 것 같아서였다. 미요는 치우천의 바로 앞까지 말을 달려오다가 획 뛰어내려서 치우천에게 급히 말했다. “큰일이에요! 군대가....... 전사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아니, 어디 군대가?” 구르가 놀라서 묻자 미요는 외치듯 대답했다. “지나족들 같아요!” “지나족? 지나족들은 얼마 되지도 않고, 더구나 어제 쫓겨서 도망간 놈들 아닌가? 그놈들이 어떻게?” 야율쿠리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소리 높여 되받자 보돈차르가 침착하게 말했다. “내가 직접 나가보겠다 천 안다! 같이 가자! 나머지 부족장들께서는 사람들을 세우고 모두 무기를 들라 이르십시오.” 그리고 보돈차르와 치우천은 곧 말을 타고 달려 나갔다. 시키지 않았어도 치베가 그 뒤를 따랐다. 한참 달려가니 약간 높은 언덕배기가 나타났는데, 보돈차르는 그리로 말을 달려 올라갔다. 치우천도 그 뒤를 따랐다. 치우천이 언덕배기에 다다르는 순간, 보돈차르가 멍하니 넋을 잃은 것처럼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치우천은 마음이 급해져 서둘러 올라갔다. 치우천이 꼭대기에 도달하여 건너편에 펼쳐진 광경을 보는 순간, 입을 딱 벌리며 할말을 잃었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수많은 사람과 말들이 빽빽이 대형을 이루고 천천히 진군하고 있었다. 그 수는 그야말로 엄청나서, 일시에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치우천이 할말을 잃자, 보돈차르가 입술을 깨물더니 조용히 말했다. “사람 수가 다섯 천이 넘는다. 여섯 천이 될지도 모르겠다.” 치우천도 기가 막혔다. 허나 치우천은 멀리서 뭉쳐 있는 사람들이 어떤 부족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때 보돈차르가 치우천의 얼굴을 힐끗 보며 말을 이었다. “지나족들 같다.” 치우천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분명 지나족은 합해서 오백 명도 안 되었고, 그나마 어젯밤에 몰아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또 갑자기 어디서 오천, 육천에 이르는 지나 전사들이 생겨났단 말인가? 보돈차르도 긴장되는 듯 몇 번 심호흡을 하더니 치베를 불렀다. “치베! 너는 눈이 밝으니, 자 보아라.” 치베도 얼굴빛이 변하여 손을 눈썹에 대며 자세히 보더니, 이윽고 씹어뱉듯이 말했다. “지나족들입니다. 끽구가....... 끽구가 맨 앞에 섰습니다.” 치우천과 보돈차르의 얼굴빛이 둘 다 변했다. 그때 치베가 갑자기 소리쳤다. “가만! 지나족만이 아닙니다. 양옆에는....... 그렇군! 카린족 여전사들이 있습니다! 그들만도 천 명이 넘어 보입니다.” 치우천은 몹시 놀라며 외쳤다. “카린족이?” “믿어지지 않는군. 천 안다가 그들을 도와주었는데, 카린족이 자네들을 잡으러 온단 말인가? 그들은 은혜도 모르는가?” 보돈차르가 분노의 기색을 띠며 목소리를 높이자 치우천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카린족은 저만 도운 것이 아닙니다. 지나족들도 도왔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느 편도 들지 말아야지! 왜 지나족 편에 붙는단 말인가? 저런 몹쓸 것들! 나중에 내가 몽골 전사들을 몰고 와서 씨를 말려 버리겠다!” 보돈차르는 평소 조용했지만 불같은 성격의 몽골 전사라서 한번 화를 내자 대단히 무서웠다. 치우천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알 것 같습니다. 저들을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무엇을 말인가?” “카린족도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지나족이 수가 많고 위세가 강하니 돕지 않을 수 없는 거죠 쑤앙마이가 저에게 몇 번이고 당부하셨습니다. 자신의 은혜를 안다면, 만약 카린족이 저에게 죄를 짓더라도 적어도 한 번은 봐달라고 말입니다. 그게...... 그게 바로 이런 뜻이었나 봅니다.” 치우천은 속으로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쑤앙마이는 자신은 부족장이며, 카린 부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치우천에게 몇 번이나 말했다. 그리고 무라를 잊지 말라며, 카린족이 혹여 자신에게 실수하더라도 봐달라고 했다. 불과 하루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쑤앙마이는 이미 그때 이렇게 될 것을 알았단 말인가? 저 정도의 전사들을 내보내려면 미리 준비를 하지 않고는 힘든 일이다. 쑤앙마이는 이미 지나족의 편출 들기로 했단 말인가? 그러나 그렇다면 자신을 고쳐주지 않거나, 정신을 잃은 틈에 지나족에게 넘겨도 될 것 아니었겠는가? 사실 보돈차르에게는 알 것 같다고 말했지만, 치우천은 지금 쑤앙마이의 속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때 치베가 외치는 바람에 치우천은 너무도 놀라서 쑤앙마이의 생각을 떨쳐버렸다. “이럴 수가! 헌원입니다! 헌원이 직접.......! 직접 왔습니다!” 보돈차르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공손헌원이 직접 왔단 말인가?” “틀림없습니다! 제게는 보입니다! 헌원 .....! 틀림없습니다!” 치우천은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했다. “이럴 수가! 헌원이 직접 오다니! 헌원은 이렇게 될 것을 알았단 말인가?” 보돈차르도 역시 탄식을 늘어놓았다. “천 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헌원은 우리 부근에 사람들을 풀어두었던 것 같다. 우리가 움직이자, 헌원도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알고 많은 전사들을 보낸 것이다.......” “도대체.......! 도대체 왜 나를 이토록 노리는 것일까요. 저는 아무 힘도 없는데.......!” 보돈차르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이내 용기를 낸 듯, 하늘을 보고 한 번 길게 소리를 쳤다. 그러고 나서 이내 씩씩하게 말했다. “아무튼 어쩔 겐가? 저들에게 무릎을 꿇을 렌가? 아니면 싸울 텐가?” 치우천은 얼굴을 굳혔다. “싸우게 되면 저 많은 수를 당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저 때문에 많은 벗들이 다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보돈차르는 눈을 빛내며 되물었다 “그러나?” 치우천은 이를 악물었다. “벗들에게는 정말 미안합니다. 그러나 저는 죽어도 헌원에게 무릎 꿇을 수 없습니다. 저들이 저렇게 힘으로 누르려 하는 이상, 제가 죽어도, 벗들이 죽고 다치더라도 저는 무릎을 꿇을 수 없습니다!” 보돈차르는 크게 웃으며 외쳤다. “그래! 그래야 남자다! 그래야 보돈차르의 안다이고 우리가 피를 흘려 지킬 만한 영웅인 거야!” 치베도 용기를 북돋우려는 듯 크게 소리쳤다. “저들이 제아무리 수가 많다 해도 어쩔 건가? 지나족들 따위는 두렵지 않다!” 치우천도 용기를 내어 힘껏 말했다. “저들은 우리의 다섯 배, 여섯 배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다섯을 이기는 것은 어렵지만, 천 사람으로 오천 사람을 이기는 것은 꼭 안 될 일만도 아닙니다. 머리로 싸우면 됩니다.” “우리는 여러 부족이 섞여 있어서, 지휘가 힘들 걸세. 자신 있나?” 보돈차르가 묻자 치우천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는 아직 많은 전사를 거느려본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상대가 헌원이라면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허나 있는 힘을 다할 뿐입니다.” 보돈차르는 길게 휘파람을 불며 외쳤다. “좋다! 자네에게 맡기겠다. 다른 부족들도 모두 자네가 지휘해라. 자네를 위해 모인 것이니, 자네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럼 가자! 싸워야 한다!” “좋습니다!” 치우천은 용기를 내며 보돈차르와 함께 언덕을 내달렸다. 치우천은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곧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면서 속으로 외쳤다. ‘헌원! 헌원! 지지 않는다. 이 치우천은지지 않는다! 당신은 나를 무릎 꿇리려 하지만, 나는 지지 않는다! 벗들을 위해서도, 나의 뜻을 위해서도.......!’ 그 사이에도 헌원이 직접 이끄는 육천의 대군은 치우천과 벗들이 있는 골짜기 쪽으로 마치 해일처럼 세찬 기세로 거침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5권에 계속 *당시의 생활 및 시대적인 설정 소설의 내용과 등장인물들의 행동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 시대적인 설정과 그에 대한 근거를 문답형식으로 3권에 이어 싣습니다. 11) 당시의 귀한 물건들은 어떤 것이 있었는가? 화폐는 당연히 없었지만, 귀한 물건들은 물론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금입니다 .금속이 사용되지 않은 시기에 금이 귀금속으로 인정되었다고 보기 힘들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가령 잉카나 마야 문명도 금속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금은 귀금속으로 사용했습니다. 금은 화학적으로 대단히 안정된 금속이라 거의 어떤 상황에서도 변색되거나 빛을 잃지 않습니다. 이 말은, 오랜 침식을 거치더라도 금은 그냥 빛나는 형태로 자연계에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사금이 대표적인 예인데, 사람들의 눈에 이러한 영롱한 빛을 내는 금이 눈에 띄지 않았을 리가 없으며, 그것이 귀하게 생각되지 않을 리 없습니다. 가령 노두광상(광맥이 침식으로 인해 지표면에 그냥 돌출된 것이 있다 할 때, 철이나 구리라면 주변의 암석이나 흙이 깎이면서 같이 심한 부식을 받겠지만, 금은 부식을 받지 않으므로 빛나는 금덩이가 땅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였을 것입니다. 더구나 금은 부식을 받지 않아 변하지 않고, 빛깔도 아름다우며, 연성이 대단히 우수하여 1그램의 금을 몇 킬로미터로 늘여도 끊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쉽게 장식을 새길 수 있거나 아름다운 형상으로 가공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즉, 금은 녹이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자연 상태에서 큰 덩어리를 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장식품 세공이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금은 자연 상태에서도 상당히 큰 덩어리가 순수하게 존재하는 경우가 많으며, 금덩어리를 단순히 두들기는 것만으로도 깨어지지 않고 마음대로 모양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금속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도 금만은 귀한 것으로 당연히 많이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이때는 도자기를 굽는 기술을 알았고, 그 기술을 기반으로 원시적인 구리제품도 주조하기 시작한 때이므로 금도 당연히 중요한 귀금속으로 인정되었으리라 봅니다. 단, 은은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큰데, 은은 금에 비해 덜 안정되어서 검게 변색되는 일이 많습니다. 은도 귀금속이 된 것은 이후 수은으로 금을 채취해내는, 일명 아말감법이 고안되고서부터라 추정되는데, 이 아말감법을 쓰면 금과 은이 동시에 얻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각종의 보석(사파이어, 루비, 에메랄드 등)이나 고운 빛깔의 돌(수정 계열이나 옥) 등인데, 이는 가공이 상당히 어렵지만 그 견고함 때문에 더더욱 주술적인 가치까지도 있다고 믿어졌을 것이며, 역시 귀하게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 외에는 희귀한 짐승가죽, 새의 깃털, 큰 동물의 뼈 등도 귀하게 여겨졌을 것이며, 지역에 따라 돌소금(암염)이나 산호, 소뿔 등의 물건들도 희귀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12) 당시의 전투 시에 특이한 점은 무엇이 있었겠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 문제입니다. 당시의 무기는 대부분 돌이나 기초적인 청동기였으므로, 대단히 약합니다. 석기라 해도 날을 다듬으면 종이도 잘릴 정도이지만, 그렇게 날을 세우면 몹시 약해져서 쉬 부러지게 됩니다. 그 때문에 전투 시 사용되는 무기들은 상당히 두껍고 둔중했으며, 큰 무기가 작은 무기보다 강한 위력을 지녔을 것입니다. 빠른 몸놀림이나 기술보다는 크고 강한 무기를 휘두를 수 있는 힘이 우선시되었을 것입니다. 활이나 창은 관통형 무기이므로 많이 사용되었겠지만, 육박전 무기도 무시될 수 없습니다. 우선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몽둥이나 돌도끼이며. 몽둥이에 무게를 주기 위해 구리를 씌운 망치나 추와 같은 무기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도끼는 견고함과 예리함을 같이 가질 수 있는 좋은 무기였지만, 그 무게가 단점이었을 것입니다. 검(칼)은 베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상처를 주거나 접근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으며, 검으로도 그렇게 쉽게 베어진다거나 절단하는 일은 힘들고 찍는 용도 비슷하게 쓰였다고 보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당시의 싸움(특히 근접전)은 몇 번 적을 치고 나면 무기가 쉬 부서져 나가, 그때부터는 적의 무기를 주워서 싸우는 일의 연속이라는 점이 후대의 싸움에 비해 아주 다른 점이었을 것 같습니다. 일단 들고 있는 무기로 무기를 든 적을 쓰러뜨리고, 그때부터는 그 무기로 싸워야 하는 식이었을 공산이 큽니다. 아울러 후대의 철 무기가 사용될 때처럼, 한번 무기에 적중되면 거의 중상내지는 사망에 이르는 일이 적었을 것입니다. 일단 적중되더라도 충격을 받고 쓰러진 정도여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싸울 수 있는 경우도 많아서, 싸움에서 전사자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적으며, 싸움 자체도 단시간에 끝나지 않고 시간이 많이 걸렀을 것입니다. 이러한 양상하에서는 전사 수의 우위가후대의 싸움에서보다 더 중요했으리라 보입니다. *주요 등장인물 여섯 무녀 후에 카린산의 여섯 무녀는, 헌원의 부탁을 받아 알유를 도와 불사약을 사용했다는 전설로 유명해지며, 이후 헌원을 도와 최초의 의학서라 전해지는 <황제내문경>을 해독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들의 이름은 전설로 내려오다가 <산해경>에 중국의 글자로 무팽(巫彭), 무저(巫抵), 무양(巫陽) . 무리(巫履). 무범(巫凡) . 무상(巫相)으로 기록되게 된다. 광성자 적송자와 함께 중국 최초의 선인으로 받들어지는 인물로 헌원의 십육기인 중 한 명이다. 그러나 세상일에는 그리 관여하지 않았으며 헌원을 적극적으로 돕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