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서 명 : 치우천왕기 3 지 은 이 : 이우혁 펴 낸 이 : 이정원 출 판 사 : 도서출판 들녘 출판년도 : 2003년 9월 30일 <지은이 소개/ 이우혁> 1965년 5월 18일 서울 출생. 상문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대학 때부터 아마추어 연극, 뮤지컬 등에 깊은 관심을 보여 13편 이상의 극에 연출. 출연하였으며, 하이텔 고전음악 동호회에서 한국 최초의 아마추어 오페라 ‘바스티앙과 마스티엔느‘를 각색, 연출하기도 했다. 1994년 <퇴마록>, 1998년 <왜란종결자> 등을 발표하여 수백만 독자들의 사랑 속에서 일약 대중 문학의 대표작가로 떠올랐다. 지금도 그는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좋은 작품을 발표하기 위해 작업실에서 작품구상에 몰두하고 있다. 이우혁 홈페이지 www. youk.co.kr <미디어서평> 한국 판타지 문학의 정점에 우뚝 선 작가 이우혁! 새로운 가능성, ‘영웅 판타지’의 세계가 열린다! 1994년 1월 ‘퇴마록’이 발간되었습니다. 1993년 PC 통신에서 회자되었던 그의 작품이 출간될 당시 그 작품이 그렇듯 오랜 생명력을 발휘하리라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숱한 화제와 800만부라는 어마어마한 판매기록을 세우고 근 8년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2003년 7월, 작가가 계속 관심을 가져왔던 ‘치우천왕기’가 출간되기에 이르렀습니다. 9년 동안의 자료 수집과 세 차례의 중국 방문으로 이 작품에 쏟은 작가의 열정은 정말 남다릅니다. 고작 2백 줄도 안 되는, 그것도 태반이 중복되는 자료 몇 줄을 가지고 한 사람의 일대기와 그 시대를 다시 구성한다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일이라고 작가는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 판타지의 기법으로도 어려운 일이었으며, 어쩌면 그 내용을 쓴다는 것 자체가 판타지라고 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사전에 나와 있는 치우에 대한 소개는 이렇습니다. 치우(蚩尤):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거인족의 우두머리. 염제(炎帝)의 후예이다. 전설에 의하면 81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동(銅)으로 된 머리와 철로 된 이마를 가지고 있었고, 머리 위에는 긴 뿔이 있었으며, 매우 모질고 사나웠다고 한다. 과(戈),모(矛),극(戟),추모(酋矛:자루의 길이가 스무 자인 창),이모(夷矛) 등의 병기를 만들었다. 황제(黃帝)와의 전쟁 중에 과부족인(?父族人)풍백우사(風伯雨師)?이매망량(魅:도깨비)의 도움을 받았다. 치우는 연기를 빨아들이고 안개를 뿜으며, 공중을 날고 험한 곳을 뛰어넘을 수 있다. 후에 치우는 전쟁에서 패해 죽음을 당했으며, 그 피는 도리깨를 물들여 단풍나무 수풀을 이루었다. 고대 제(齊)나라에서는 8존천신(八尊天神)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치우는 그중 3번째로 모셔졌다. 진(秦)나라 말기에 유방(劉邦)이 기병할 때 패정(沛庭)에서 치우와 황제에게 제사를 지냈다. 후대에 와서 치우는 전쟁신으로 받들어졌다. 이 기록은 중국측에 나와 있는 자료를 근거로 한 설명입니다. 동으로 된 머리, 철로 된 이마, 다양한 병기를 사용하는 치우의 묘사를 보건대, 분명 그는 당시 철기문화를 선진적으로 수용했던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주신족의 신시(神市)는 단군조선 이전의 나라요, 1500년간이나 계속된 나라이며, 치우(蚩尤)는 그 14대 황제로 황하유역에서 일어나서 회대(淮垈, 중국 회수와 산동 사이의 땅)를 정복한 왕입니다. 그리고 공손헌원(황제)는 지나족(중국)을 통일한 왕입니다. 치우와 황제는 지금으로부터 4천7백여 년 전 중국 하북성 탁록(啄鹿)에서 10년 동안 70여 차례나 싸웠는데 이것이 고대 동북아시아 최대의 전쟁이라고 전해 내려오는 그 유명한 탁록전쟁입니다. 비록 탁록전쟁에서 공손헌원(황제)에게 패한 치우이지만 훗날 군신으로 받들어진 것만으로 보아도 그의 용맹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작품은 고대 역사의 진위성을 따지는 역사서가 아닌, 그야말로 90퍼센트가 작가의 상상력으로 탄생된 ‘영웅 판타지’입니다. 한국 판타지 제2부(제1부는 1998년에 발표한 ‘왜란종결자’)에 속하는 이 작품은 역사의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고대 역사로의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독서의 즐거움과 고대신화로의 충실한 안내자 역할을 하기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화합이냐, 지배냐? 역사의 운명을 건 영웅들의 대혈전! 8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이우혁의 힘이 되살아난다! ‘퇴마록’ 이후 9년을 고심한 끝에 펼쳐놓은 ‘치우천왕기’! 단군의 고조선 이전, 과연 우리 민족의 시원은 어디였을까? 작가는 채 200줄도 되지 않는 사료를 붙들고 9년의 세월을 고심했다. 단 한 줄의 자료라도 더 찾기 위해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고, 역사의 원형을 찾기 위해 방랑자처럼 중국 각지를 떠돌기도 했다. 이제 2003년 7월, 그는 뛰어난 역사적 상상력으로 5000년 동안이나 잊혀져 왔던 우리의 선조, 치우천왕을 부활시켰다! 역사의 운명을 건 대혈전의 시작과 끝은? B.C. 2716년부터 B.C. 2696년까지, 드넓은 중국 대륙이 바로 ‘치우천왕’기의 무대이다. 신석기 시대의 말기이며 또한 청동기 시대가 마악 시작된 바로 그 지점에서, 주신족의 치우천과 그의 쌍둥이 동생 치우비의 목숨을 건 모험과 사랑이 시작된다. 모든 부족은 제 색깔대로 공존해야 한다는 화합 사상을 가지고 있는 치우천! 힘으로 천하를 통일해 하나의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지나(중국)족의 대족장, 공손헌원! 최고의 전략가이며 전술가인 두 영웅의 운명적인 대결과 엎치락뒤치락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의 힘은 시공을 초월한 상상력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마법과 도술, 선인과 신수들이 등장하는 전설의 시대! ‘치우천왕기’에는 영웅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운명을 시험하는 선인들과 신수, 도깨비 등등 온갖 마법과 도술을 부리는 캐릭터가 쉴새없이 등장한다. 인간의 모습을 한 대선인 자부(紫負)와, 파괴와 무질서의 선인인 혼돈(混沌)이 공존하고, 언어의 시조(始祖)인 발귀리(發貴理)와 전설의 동물인 맥(貊), 곤륜산에 살았다는 대주술사 서왕모(西王母), ‘소녀경’의 주인공 소녀(素女) 등이 바로 그들이다. 마법과 도술을 쓰는 그들은 치우천왕과 공손헌원, 그 두 영웅 뒤에서 그들을 돕거나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거대하고 웅장한 영웅 판타지, ‘치우천왕기’! 이 소설은 역사에 근거하고 있지만 작가가 주창하는 한국 판타지이다.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으며, 그러한 요소 없이는 애당초 구성될 수도 없었다고 본다. 실제 역사에 남은 작은 편린으로 구성하느라 무리도 좀 따를 수 있으나 이 작품은 소설이며, 판타지인 이상 재미있고 흥미로운 구성이 단연 돋보인다. 차 례 붕의 탄생 짐승들과의 사투 죽음의 길로 사막 도깨비의 왕 화산(華山)으로 향하다 형요와 요요 공손발과의 재회 돌아온 지우천 당시의 생활 및 시대적인 설정 주요 등장인물 붕의 탄생 불덩어리 모양의 새 형상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자 치우 형제의 주위를 순식간에 태워버릴 듯 무시무시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무서운 열기로 주변의 공기가 뜨겁게 달구어 오르자 치우 형제뿐만 아니라 그 근방에 있던 사울아비들과 도깨비들마저도 버텨내지 못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번개범과 맥은 그러한 열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맹렬한 기세로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 기세대로라면 맥과 번개범은 치우 형제가 있는 곳에서 곧 부딪칠 것 같았다. 그때 하늘에서 불타오르는 거대한 새 그림자가 두 신수의 사이를 쌕 소리를 내며 무서운 속도로 지나갔다. 깃털처럼 불꽃이 휘날렸고 맥과 번개범마저도 그 열기와 기세 때문에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치우천은 죽을힘을 다해 아우 비의 몸을 자신의 작은 체구로 안아 가리고 있다가 새가 일으킨 거센 바람에 밀려 두 사람은 데굴데굴 굴러갔다. 열기 때문에 머리칼이 오그라들며 온몸이 데인 듯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러나 치우비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맥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굴러가자 그때 맥의 머리 위에 있던 여자가 뭐라고 소리를 치면서 맥의 머리를 두드렸다. 맥은 ‘킁’ 하며 콧김을 한 번 내뿜더니 왼쪽 앞발을 들어 땅에 내딛었다. 순간 쿵 소리 와 함께 땅이 단번에 열 자 깊이만큼이나 파였다. 맥은 땅이 파이자마자 몸을 날려 위로 솟구쳐 다시 번개범을 향해 달려들었다. 긴장한 듯 몸을 납작하게 엎드리고 있던 번개범도 거대한 이빨로 땅을 두어 번 긁더니 사방이 쩌렁쩌렁 울릴 듯이 커다랗게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그러는 와중에 맥은 달려 나가면서 맥의 발치까지 굴러와 있던 치우 형제의 몸을 슬쩍 밀었다. 가볍게 밀었지만 워낙 거대한 동물이 민 것이라 치우천은 허리가 끊어지는 줄로만 알았다. 형제는 데굴데굴 구르고 밀려서 맥이 방금 땅을 뚫은 구멍 속으로 빠져들었다. 바로 그 순간 땅 속에서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솟구쳐 올랐다. 그곳은 지하수가 흐르는 수맥이었다. 치우천과 치우비는 새가 뿜어낸 열기로 온몸에 화기(火氣)가 퍼지려는 순간이었으나 차갑게 솟구치는 지하수에 빠진 탓에 간신히 화기가 좀 가라앉았다. 게다가 기절했던 치우비도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자 정신을 차렸다. 치우비는 눈을 뜨자마자 ‘푸’ 하며 물을 뿜어내고는 형의 몸을 끌어안고 몸을 솟구쳐 물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 “비야! 괜찮으냐!” 치우천은 아우의 안위가 걱정되어 소리쳐 물었으나 치우비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외쳤다 “난 아무렇지 않아! 저놈을 죽여 버릴 거야!” 그러나 치우천은 막 뛰어나가려는 치우비를 급히 잡았다. 언뜻 보기에도 치우비는 절대 아무렇지 않은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서라! 신수들끼리 싸우는 것을 본 뒤에 나가도 늦지 않다!” 그때 뒤쪽에 서 있던 사울아비들과 도깨비들도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루벼락과 쇠돌이는 치우천과 치우비가 살아 있는 것을 보고 환성을 질렀다. “와!” 바로 그 순간, 저만치에서 그 불타는 새의 형상이 다시 하늘을 휘감듯 선회하며 달려들 기세를 보였다. 새가 지날 때마다 하늘에 타오르듯 붉고 긴 궤적이 생기는 것으로 보아 이번에는 더 무서운 열기가 솟아오를 것 같았다. 치우천은 뒤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물러서! 지금밖에 때가 없다! 모두 물러서!” 치우우레 역시 다급하게 외쳤다. “일단 물러나라! 물러나!” 맥과 번개범은 땅을 뒤흔들면서 맹렬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둘 다 부딪치기보다는 무시무시한 주술을 써서 싸우는지라 두 신수의 부근은 돌이며 바람이며 번개며 불까지 마구 휘몰아치고 부딪혀 두 신수가 어떻게 격돌하는지 보이지도 않았으며, 근방까지 지옥처럼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 마리의 신수도 감당할 수 없는 판에 신수들끼리의 싸움에 말려드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지라 사울아비들은 그 틈을 타서 일단 다친 사람들과 뒹구는 시신들을 힘이 닿는 데까지 수습하며 뒤로 물러섰다. 사울아비들은 항상 고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고, 한웅을 모시는 자들은 그중에서도 엄정하게 선발된 정예인지라 물러서는 것도 순식간에 해냈다. 그 틈에 쓰러졌던 붉은 머리 도깨비도 일어나 안타까운 듯 발을 몇 번 구르다가 할 수 없다는 듯 넘어져 있는 울라트를 들쳐 업고 뒤로 물러섰고, 금발머리 도깨비는 온몸이 그슬린 늙은 도깨비를 끌고 뒤로 물러섰다. 치우우레는 연신 물러서라며 소리를 지르면서도 기어이 치우천과 치우비 형제에게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들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를 치우벌이 따랐다. 치우우레가치우 형제가 있는 구덩이 근처에 거의 다다르려 할 즈음, 하늘이 뒤집히는 듯한 굉음이 울리면서 사방에 몰아치던 불과 바람과 냉기 등이 일순간에 폭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맥의 주술력은 주로 땅에 관련된 것들과 물체를 움직이는 능력이었고 번개범의 능력은 바람이나 번개의 힘이었다. 번개의 힘과 땅의 힘이 서로 부딪치고 바람과 그 바람을 조종하려는 힘이 충돌하자 엄청난 굉음과 함께 폭발하여 없어진 탓이었다. 맥과 번개범은 육탄전으로 정면 격돌했다. 번개범이 먼저 왼쪽 앞발을 들어 맥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맥은 머리가 획 돌아갔으나 달려들던 기세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번개범의 가슴팍을 들이받았다. 번개범의 거대한 몸이 붕 떠오르면서 뒤집히는가 싶었지만 번개범은 공 중에서 그 거대한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마치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뒤로 돌아 내려앉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번개범이 내려앉은 곳의 땅은 연못만큼이나 깊숙이 파였고,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려 보고 있던 사람들이 잠시 휘청거렸다. 그때 맥은 하늘로 긴 코를 솟구치며 길고도 맑은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번개범 주위의 땅이 쩍쩍 갈라지면서 땅거죽이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거대한 흙덩이와 바위들이 하늘로 치솟더니 곧바로 번개범을 노리고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번개범은 당황한 듯 이리 뛰 고 저리 쥐며 바위와 흙덩이들을 날렵하게 피했지만 워낙 돌무더기가 무수히 쏟아지는 탓에 세 개 중 한 개는 몸에 맞을 수밖에 없었다. 번개범은 화가 난 듯 또다시 길게 포효하며 바위와 흙덩이가 몸에 와 맞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맥을 불타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자 맥의 머리 바로 위에서 무시무시한 섬광이 번쩍이며 번갯불이 맥에게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맥도 어쩔 수 없이 몸을 날리며 번갯불 들을 피하다가 이내 맑은 눈을 감았다. 혼자라면 그대로 버틸 수 있겠지만 머리 위에 태운 여자 때문에 번개를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눈을 감은 맥의 몸 주위에서 흰빛이 떠오르며 투명한 둥근 광채가 막을 씌우듯 맥의 전신을 감쌌다. 대여섯 줄기나 되는 번개가 맥을 감싼 막에 내리꽂혔으나 그 막에 미끄러지듯 옆으로 비껴나가 땅에 떨어졌다. 대단한 보호막이었다. 그러나 맥이 그 보호막에 모든 힘을 쏟은 듯, 이내 번개범 주변에 솟구쳐 올랐던 바위와 흙덩이들이 일제히 힘없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틈을 노린 번개범은 여유만만하게 포효하며 몸을 솟구쳐 올렸다. 그러면서도 번개는 계속 맥의 막을 찢어버릴 듯 거세게 내리꽂히고 있어 맥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사울아비들은 맥이 불리해지는 것 같자 걱정스러워서 발을 굴렀으나 너무도 거대한 힘들끼리 격돌하는 중이라 사람이 끼어들 틈이 전혀 없었다. 막 물에서 빠져나와 가쁜 숨을 내쉬고 있던 치우천과 치우비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방법이 없었다. 그때 저쪽에서부터 다시 거대한 새가 낮게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맹렬한 기세인지라 새가 날아가는 뒤편으로 거대한 불덩어리가 솟구쳐 올랐다. 태울 것도 없는 황무지인데도 열기를 이기지 못해 땅이 불타올랐다. 치우비는 그 모습을 보자 기겁을 하여 다시 형을 안고 물구덩이로 뛰어들었다. 번개범이 높이 몸을 솟구쳤다가 백 년 묵은 나무만큼이나 커다란 두 개의 어금니로 맥을 공중에서 내리찍으려 하는 찰나였다. 저 거대한 이빨로 맥을 내리찍는다면 제아무리 맥이 영험한 신수이고 또 보호막을 치고 있다 해도 영락없이 몸이 꿰뚫릴 것 같았다. 그때였다. 미친 듯한 속도로 날아든 새의 형상이 허공에 뜬 번개범의 몸을 치고 지나갔다. 엄청나리만치 빠른 속도로 날아든 새가 단지 스치기만 했을 뿐인데도 번개범은 공중에서 방향을 잃고 몸이 팽그르르 돌았다. 그리고 잇달아 휘몰아친 거대한 불바람이 사방을 순식간에 불구덩이로 만들어버렸다. 맥은 보호막을 치고 있어 불의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번개범은 무방비상태였으므로 삽시간에 온몸에 불이 붙어 타오르면서 쿵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져 내렸다. 이어서 불바람이 휘몰아치듯이 지나가고 뜨겁게 달궈진 공기의 간극을 메우려는 듯 매서운 바람이 몰려들었다. “비야! 저걸 봐라 저건 뭔가......!” 지하수 흙물에 두 눈만 내놓고 있던 치우천이 중얼거렸다. 그 불타는 새의 날아가는 모습이 왠지 낯이 익은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뚜렷하게 떠오르진 않았다. 치우비는 형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번개범이 땅에 떨어져 내린 순간 맥이 맑은 눈을 번쩍 떴다. 그와 동시에 맥의 몸 주위에 쳐졌던 보호막은 이내 사라져 버렸고 맥의 등 뒤에서부터 뾰족한 형상의 거대한 바위 세 개가 허공에 떠오르더니 곧이어 맹렬한 기세로 번개범을 향해 날아들었다. 번개범은 몸에 붙은 불을 끄려는 듯 바람을 일으키며 다시 회오리 바람으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세 개의 뾰족하고 거대한 바위가 비수처럼 자신을 향해 날아들자 번개범은 ‘크악’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양 앞발로 바위를 떨쳐냈다. 번개범이 양발로 각각 하나씩의 바위를 후려갈기자 바위들은 이내 공중에서 폭발하듯 박살나 없어졌지만 나머지 한 개의 바위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 바위가 얼굴에 꽂히기 직전 번개범은 얼른 고개를 숙여 피했으나 그 바위는 번개범의 등을 깊게 찢으며 박히는가 싶더니 이내 튕겨져 땅에 떨어져 부서졌다. 뜻하지 않게 심한 상처를 입은 번개범은 길게 포효하면서 몸을 돌렸다. 다시 회오리처럼 몸의 형체가 흐릿해져 갔으나 번개범의 피가 사방으로 튀면서 주변을 붉게 물들였다. 거대한 신수인지라 뿌려지는 피의 양도 어마어마했다. 그때 새가 세 번째로 허공을 선회하여 번개범에게 달려들려 했으나 이미 번개범은 회오리바람으로 모습을 바꾼 뒤였다. 때문에 새는 번개범을 치지 못하고 번개범의 몸을 그냥 통과하여 다시 하늘로 떠오르더니 돌연 방향을 바꾸어 산 저편으로 날아갔다. 그 틈을 타서 번 개범은 무서운 바람을 일으키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맥은 그냥 보낼 수 없다는 듯 다시 눈을 빛냈다. 그러자 여러 개의 바위가 허공에 떠올라 그 회오리바람을 향해 날아갔으나 맞힐 수가 없었다. 맥은 무서운 기세로 번개범의 뒤를 따라갔다. 번개범이 달아나자 사울아비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바위 뒤에 몸을 피했던 치우우레와 치우벌이 구덩이로 달려갔다. 치우우레와 치우벌의 몸은 불새의 열기로 시커멓게 그슬렸고, 머리카락도 타들어가 상투가 없어진 추레한 몰골이었다. 치우우레는 물구덩이 속에 치우비와 치우천이 멀쩡히 있는 것을 보고는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치우우레가 급히 손을 아래로 내뻗자 치우비는 그 손을 덥석 잡은 다음 치우천의 몸을 안고 훌쩍 뛰어올라 밖으로 나왔다. “이 녀석들이 안 죽었구나! 안 죽었어! 안파견 한님! 감사합니다!” 치우우레는 두 아들이 올라오자마자 아들들을 끌어안고 목이 메어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컥컥거리며 울었다. 치우비와 치우천은 콧등이 시큰했지만 치우천은 이내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아버님,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그러나 치우우레는 신수든 뭐든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두 아들을 안은 손을 한참이나 풀지 않았다. 옆에 있던 치우벌이 코를 한 번 쿨쩍거리며 치우우레를 불렀다. “형님!” 그제야 치우우레는 두 아들을 풀어주었다. 어느 틈엔가 그들 뒤로 여러 도깨비들이 와 있었다. 그들 또한 치우비가 걱정되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처 입은 몸을 이끌고 달려온 것이었다. 그 뒤로 부루벼락과 쇠돌이, 마파람 등이 달려왔다. 치우우레는 도깨비들이 치우비를 따른다는 얘기를 이미 들어서 알고는 있었으나, 이렇듯 도깨비들을 가까이 대하자 은근히 두려워 슬그머니 도끼를 쥐며 손에 힘을 주었다. “이놈들은 뭐냐?” “제 벗들입니다, 아버님.” 치우비는 도깨비들이 목숨을 걸고 달려와 준 것이 고마워서 그들을 일일이 껴안아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치우우레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그저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만 했다. “허 참 이걸 대체........ 허 참.......” 다른 사울아비들도 달려와서 치우천에게 괜찮느냐고 물었다.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그들을 둘러보다가, 문득 분명 있어야 할 사람 하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치우천이 급히 외쳤다. “치베! 치베는 어디 있지?” 그러고 보니 치베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저만치 반대쪽에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도와줘!” 바로 치베였다. 치베는 어느 통에 갔는지 골짜기 저쪽에서부터 미친 듯이 말을 타고 달려 나오고 있었다. 곧이어 그의 등 뒤로부터 무서운 형상이 나타났다. 바로 아까의 그 불새가 낮게 날며 치베를 따라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치베가 죽을힘을 다해 말을 달리고 있었지만 불새를 도저히 따돌릴 수가 없었다. 다행히 불새의 몸에서는 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불새가 아까처럼 열기를 뿜었다면 치베는 말과 함께 벌써 타 죽었을 것이다. 그 기이한 광경을 보고 치우 형제나 다른 사람들은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잠시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불새는 분명 맥을 도와 번개범을 물리쳤다. 하지만 지금은 치베를 뒤쫓고 있으니, 불새를 공격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치우천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치베! 말에서 뛰어내려라!” 불새는 날아다니는 새이므로 급히 그 자리에서 멈출 수가 없으니까 말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치베가 그 소리를 듣고 곧장 말에서 뛰어내렸다. 치베가 탔던 말은 공포에 질려 있었으므로 치베가 내리자마자 미친 듯이 저쪽으로 마구 달려갔고 불새는 치베의 몸에 닿을 정도로 낮게 날다가 획 위로 몸을 솟구쳐 올렸다. 그 순간, 불새는 밝은 눈을 들어 치우천을 쳐다보았다. 치우천 역시 분명 불새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눈빛이 마주친 순간, 치우천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느낌을 받았다. 신수인 불새는 눈빛으로 자신의 마음을 말하는 능력이 있는 듯했다. 뭔가 자신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듯했는데, 치우천은 어찌 보면 원망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안타까움 같기도 한, 참으로 복잡한 감정이 실린 눈빛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도대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치우천은 알 수가 없었다. 치우비와 몇몇 사울아비들이 달려가서 치베를 구해냈다. 치베는 치우비의 부축을 받자 거의 숨이 끊어질 듯 헉헉거리며 외쳤다. “저게.......저게 나를 따라왔다! 나를........!” 치베는 아까 번개범과 맞서다가 번개범의 바람에 휘말려 골짜기 너머까지 내동댕이쳐졌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른 것도 아닌 거대한 신수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치베는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다. 치베가 제아무리 잘 달린다 해도 날아다니는 신수를 어떻게 당해내겠는가_ 불새는 느릿느릿 자신의 뒤를 따라왔으나 치베는 숨이 너무 차서 쓰러질 지경이 되었다 그러다가 다행히 길 잃은 말 한 마리를 발견하여 간신히 그 등에 올라타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왜 저 신수가 너를 따라왔지?” 치우비 역시 헐떡거리며 물었다. 치우비도 이미 갈비뼈 몇 대가 부러졌거나 어긋났는지, 고통이 상당히 심했으나 워낙 힘이 대단하여 간신히 참고 있었던 것이다. 치베는 그 말에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늘을 낮게 선회하던 불새가 이번에는 놀랍게도 치우천을 향해 날아들 것처럼 보였다. 치우우레는 대번 안색이 변하더니 힘껏 소리쳤다. “사울아비들이여! 저 새를 노려라!” “안 됩니다! 아버지!” 치우천이 외쳤으나 아무도 듣지 않았다. 사울아비들은 치우우레의 명령을 따르지, 치우천의 명령을 듣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워낙 훈련이 잘되어 있기에 치우우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남아 있는 무기를 있는 대로 들고 새를 노리기 시작했다. 치우천이 다시 한 번 외치며 다급히 막아섰다. “안 됩니다! 저 새는 우리를 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해치려 했으면 벌써 불을 뿜었을 거예요. 무기를 거두라 해주세요.” 그 말을 듣고 치우우레가 멈칫하는 순간, 불새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이미 눈치 챘는지 다시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불새는 ‘부우웅’ 하며 나직하고도 슬픈 듯한 소리로 길게 울었다. 그러다가 별안간 그 불새는 허공에서 균형을 잃더니 쿵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져 내렸다. “이런!” 모두가 깜짝 놀랐다. 이 커다란 불새가 어째서 갑자기 땅에 떨어지게 된 것일까? 번개범에게 당했단 말인가? 아니면? 불새는 땅에 떨어져 한 번 뒤척이다가 힘없이 긴 목을 꺾었다. 불새의 몸은 번개범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다섯 길이 넘었다. 아까는 불을 뿜으며 날았기에 더더욱 커보였던 것 같았다. 불새는 다시 한 번 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굴려 치우천을 보았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나는 광채도 방금 전보다 훨씬 약해진 것 같았다. 불새는 죽어가는 것 같았다. 불새와 눈이 마주치자 치우천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갑자기 불새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눈빛은 확실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뭔가 원망하듯, 슬픈 듯한 빛을 띠고 있었다. 치우천은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걸어가려 했으나 치우우레와 치우비가 치우천을 잡고 놓지 않았다. “다가가선 안 된다.” “위험해, 형.” “아무리 그래도 우릴 도운 신수입니다” 치우천의 말에 치우우레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우리가 무슨 재주로 신수를 돕는단 말이냐? 우선 다친 사람들부터 돌보자.” 치우천은 그 말을 듣고 하는 수 없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 저편에서부터 다시 두두두 하고 거대한 짐승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몸이 다친 사람과 죽은 사람들을 수습하던 사람들은 혹여 번개범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긴장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것은 신수 맥이었다. 그리고 맥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흰옷을 입고 머리를 길게 기른 여인이 앉아 있었다. 맥은 사람들 및 땅에 떨어진 불새와 약간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자 맥의 머리 위에 있던 여인이 사뿐히 맥의 머리에서 내려와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여인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 여인은 분명 선인, 그것도 아주 대단한 선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분명 안파견 한님이 보낸 여인이라 생각했고, 어떤 이는 그 여인이, 모습을 바꾼 자부선인이라고 생각했다. 치우우레나 치우비, 치우천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였다. 모두가 놀랍고 황송하거나 은근히 두려운 마음을 지니고 있는 데 반해 치우천은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허나 그 여인은 수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보자 빙긋 웃더니 아주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천천히 다가와 사람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마주 숙이며 절을 해보였다. 그러자 뭇 사람들은 더더욱 황송하여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여인 역시 다시 고개를 더 숙였고 마침내 사람들 중 절반 정도가 땅에 엎드려 절을 했다. 그러자 여인은 ‘아’ 하고 작은 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단지 한숨을 내쉰 것뿐인데도 무척이나 곱고 우아한 목소리여서 치우천을 비롯한 몇몇 젊은 사울아비들은 그 소리를 듣자 넋 이 나갈 것만 같았다. “어이하여 저에게 절을 하십니까. 어서 다친 사람들부터 돌봐주시지요” 여인의 나직하고도 우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들었다. 여인은 용모도 아름다웠거니와 표정 역시 무척이나 온화하고 기품이 있어서 여인의 얼굴을 마주본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유 없는 부끄러움 같은 것을 느끼고 황급히 눈을 되돌리곤 했다. 치우우레는 정신을 수습하고는 이내 외쳤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치우우레가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다. 한웅이나 삼사 등 높은 사람들은 아까 급히 번개범을 피해 물러섰기 때문이다. “선인의 말씀을 따르거라! 일단 사울아비들과 단군들은 다친 사람을 돌보라! 다른 사람들은 흩어진 말과 소를 잡고 망가진 것들을 챙겨라! 치우벌!” “사울아비 스승 치우벌 여기 있소이다.” 치우벌이 대답하자 치우우레가 지시를 내렸다. “자네는 남은 사울아비들을 헤아려 지휘하라. 그리고 부소다솔!” 그러자 저만치 뒤로 물러나 있던 부소다솔이 아직도 덜덜 떨며 나타났다. 부소다솔은 사울아비 스승이기는 하나 편하게만 살아온 터라 담력이 너무 부족했다 “예.......” 부소다솔이 간신히 대답하자 치우우레는 남모르게 살짝 한숨을 쉬고 말했다. “자네는 셈에 밝으니 죽고 다친 사람과 짐승, 망가진 것들을 헤아리도록 하라. 그리고 양역!” “사울아비 양역 여기 있사옵니다.” 이미 몇 군데를 다친 양역이 절뚝이며 달려왔다. 치우우레는 주신에서도 손꼽히는 사울아비 스승이라 이런 난리판에서도 노련하여 빈틈이 없었다. 치우우레가 물었다. “다쳤느냐?” “이 정도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허나....... 허나........ 벗들이.......” 양역은 죽은 사람들을 돌아보며 울먹이려 했다. 그 모습을 보자 치우우레가 호통을 쳤다. “슬퍼하는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너는 사울아비 스무 명을 데리고 가서 급히 한웅님의 가마가 간 곳을 찾아 우리와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하라.” “예!” “그리고 치우천! 치우비!” “사울아비 치우천 여기 있사옵니다.” “사울아비 치우비 여기 있사옵니다.” 형제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그때 그 정체불명의 여인이 치우 형제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지만 사울아비의 규칙이 엄하여 치우천은 명령을 기다리느라 그 여인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너희 둘은........” 치우우레가 치우천 치우비에게 막 명령을 내리려 하는데 여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두 분께 드릴 부탁이 있사오니 잠시 명을 미루어주시면 어떠하올는지요?” 치우우레는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떴지만 곧 정중히 대답했다. “선인의 청을 어찌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어떤 일이든 시키시옵소서.” 그러자 여인은 살짝 웃었다. “'저 같은 것이 어찌 선인이 되겠습니까! 어르신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쇤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치우우레는 여인의 말투가 퍽 우아하고 조금도 기품을 잃지 않아 더더욱 황송하여 고개를 숙였다. “허나........” 치우우레가 말끝을 흐리자 여인은 따라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저 같은 것에게 고개를 숙이시면 저도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답니다. 이 수많은 사람에게 일일이 답하려면 목이 아플 것이니, 그러지 않으시면 정말 감사하겠사옵니다.” 치우우레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여인이 다시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쇤네는 보통 아낙입니다. 그냥 맥달이라 불러주시옵소서.” 치우천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양을 맥달은 슬쩍 곁눈으로 보고 다시 한 번 웃었다. 맥달이 웃는 모습을 보자 치우천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며 다리에 힘이 쭉 빠져나가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분명 맥달은 무척이나 우아하고 기품이 있는 여인이었다. 물론 미모도 대단히 뛰어났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다. 천 명, 아니 수천 명에서 한 명 볼까말까 한 미모였으나 치우천이 본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아니었다. 분위기는 다르지만 공손발 역시 그녀와 견줄 만했으며, 소녀만큼 사람을 사로잡을 정도도 아니었으며, 부루버들만큼 고운 용모도 아니었다. 다만 기품과 지혜로운 면에서는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었으나, 많은 남자들은 오히려 그런 여자를 존경은 하되 여자로서는 은근히 꺼리는 법이다. 그리고 치우천은 여자에 대해서는 거의 목석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듯 몸에서 힘이 빠질 정도로 넋을 잃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존경심이나 경외감과는 다른 감정임에 틀림없었다. 더구나 맥달이라는, 그저 평범한 이름일 뿐인데도 그 이름 을 듣는 순간 무언가 짜릿한 충격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맥달은 치우천에게 장난스러운 눈길을 슬쩍 보냈다가 바로 치우우레에게 말했다. “저는 그러면 신수에게 가보겠사옵니다. 저 새가 퍽 안 되었습니다. 여기 두 분과 함께 갔으면 합니다.” 신수에게 아들들이 간다는 것이 좀 켕겼지만 치우우레는 얼른 대답했다. “선인........ 아니 맥달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하소서.” “지우천님, 치우비님. 저를 좀 도와주시지요.” “예!” 치우천과 치우비는 서둘러 대답하고는 맥달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내심 이 여자가 자신들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것이 퍽 놀랐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 뒷모습을 보고 치우우레는 다시 소리쳤다. 치우천과 비에게 시킬 일을 대신 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우가람. 치우바람, 있느냐?”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치우가람과 치우바람 형제가 대답하며 나타났다. 아무리 이들이 잘난 척하는 자들이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사울아비 스승의 명령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너희는 사울아비 백 명을 거느리고 주변을 경계하여........” 치우우레가 말을 하려다 멈추었다. 치우바람의 몸은 치우우레 앞에 와 있으되, 그의 눈은 흘린 듯 맥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흘린 것 같아 보였다. 그때, 걸어가던 맥달이 뒤에 눈이 달린 듯 조용히 뒤를 돌아보더니 치우바람에게 한마디 했다. “지우바람님, 몸조심하십시오.” 그 말에 치우바람은 마치 몸이 두둥실 하늘로 떠오르듯, 황홀한 기분이 되어 치우우레의 명령조차 들리지 않았다. 치우가람이 몇 번이나 옆구리를 찌르고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 모습을 보고 치우우레는 속으로 한탄했다. ‘저 선인님이 어찌 이런 못된 녀석들에게 관심을 가지신단 말인가? 허 참.......’ 치우천도 뭐라 말은 하지 않았으나 묘하게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선인이 치우바람을 걱정해준 것이 그리 달가울 리가 없었다. 치우비도 생각은 비슷했으나 본래 선량하고, 표정을 섣불리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치우천의 얼굴에는 은연중 불쾌한 빛이 드러났다.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해도 불쾌한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맥달은 그런 치우천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넌지시 물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닙니다.” “뭐 궁금한 것이 있습니까?” 그 말에 치우천이 솔직하게 물었다. “우리 형제의 이름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리고 치우바람의 이름은 또.......?” 그러자 맥달이 우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의 이름을 다 아신단 말입니까?” “알려면 알 수 있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그러면 뭔가 이유가 있어서 기억하신 겁니까?” “지우천님, 치우비님 같은 경우는 이름을 알아야 도움 받을 수 있으니까요” 치우천은 속으로, 치우바람은 도움 받을 일이 없는데도 그 이름을 안 것은 어찌된 일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옹졸한 속마음을 보이는 것 같아 차마 그렇게 물을 수는 없었다. “그렇습니까......” 치우천이 말끝을 흐리자 맥달은 우아하게 웃으며 천천히 쓰러져 있는 불새 앞으로 나아갔다. 불새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눈까지 감고 있다가 맥달이 다가오자 힘겹게 눈을 떴다. 맥달이 입을 열었다. “불쌍하게........” 맥달은 조금도 두려움 없이 새의 머리를 살짝 쓸어주며 치우천에게 약간 놀리듯 말했다. “당신은 참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군요.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치우천은 난데없이 여자의 질책을 듣자 안색이 변했다. “왜 저에게 그러십니까?” “이 신수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습니까?” 치우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맥달이라는 여자는 정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신수가 뭔가 간절한 눈빛으로 보는 것 같기는 했습니다.” “그런데요?” 치우천은 사실 아버지와 아우가 막지 않았으면 신수에게 다가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치우천도 두려운 마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참으로 기이한 기분이었다. 왠지 좌절감과 모멸감이 치밀어 자신을 비하하는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나는 무서워서 다가갈 수 없었소 난 겁쟁이입니다.” 돌연 맥달이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며 되받았다. “당신들은 절대 겁쟁이가 아닙니다.” “내 아우는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난 겁쟁이입니다. 내가 몹쓸 짓을 했군요.” “어이하여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치우천은 신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너무 황당한 생각을 하는지도 모릅니다만........ 난 이 신수를 처음 보는 것 같지 않습니다.” 잠시 치우천이 말을 끊자, 맥달이 차분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계속하십시오.” “난 남몰래 신수의 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알이 새 신수의 것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이 신수는 우리의 짐이 날아가 부서진 곳에서 튀어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가지고 있던 신수였다는 것이군요.” “감히 그런 마음을 품은 적은 없습니다. 다만 알이 신기하여 가지고 있던 것뿐이며, 쓸 곳을 찾지 못해 간직했던 것뿐입니다. 저는 겁쟁이라 알이 깨어날까 봐 항상 걱정했습니다.” 맥달은 무표정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치우천이 돌연 피식 웃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거지?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계속하시어요.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내가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어찌 중요합니까?” “이 신수를 살리려면 그리 하셔야 합니다.” 도대체 왜, 신수를 살리려면 자기가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맥달의 말을 들으니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치우천은 하는 수 없다는 생각에 말을 더듬었다. “그런데 이 신수가 날아다니는 모습이.......왠지........ 왠지......” “말씀하셔야 합니다.” 맥달이 한 번 더 눈을 빛내며 강조하자 치우천이 말했다. “내 매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요? “예. 저는 몽골족에게 선물 받은 마파람이라는 매가 있었습니다. 아, 지금 그 매는 조롱에 넣어 짐에 두었는데, 바람에 휘말려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좌우간 나는 신수 새의 모습이 그 매와 왠지 흡사해 보였습니다. 치우천은 자기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나 맥달은 그 말을 듣고 비로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더니 맥달은 신수에게 마치 사람에게 얘기하듯 말을 건넸다. “들었니? 기억하고 계신다. 걱정할 것 없단다.” 돌연 새가 눈을 크게 뜨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치우천과 치우비는 놀라 몇 발짝씩 뒤로 물러섰고, 저만치 떨어져 있던 사울아비들도 놀라 하던 일을 멈추고 웅성거렸다. 치우비가 놀라서 외쳤다. “무....... 무슨 일입니까?” 맥달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 신수는 아직 어립니다. 갓 태어난 아기 새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신수라도 그렇듯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도력을 쓸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 신수는 매처럼 날아다니며 당신들을 도우려 했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치우비가 얼결에 물었다. “이...... 신수가 그럼 마파람입니까?” 치우천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릴 리가....... 이 신수는 그 알에서 태어난 것 같은데.......” 맥달이 웃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님 말씀이 반은 맞습니다. 형님 말씀도 반은 맞습니다.” 치우천, 치우비는 놀라서 그 거대한 신수를 몇 번이나 바라보았다. 그렇게 조그만 알에서 태어난 이 신수는 맥이나 번개범보다는 비록 작지만 사람보다는 몇 갑절 큰, 거대한 새로 변해 있었다. 이제 힘을 찾았는지, 눈이 부리부리하게 변했고 깃털에도 다시 반짝이는 빛이 돌기 시작했다 기다란 부리에 작은 이빨이 나 있었으며, 얼굴은 새라기보다는 약간 뱀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아주 크고 검은 눈동자가 맑아 뱀 종류와는 완연히 달랐다. 이 신수가 매인 마파람이었다니? 맥달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형님 말씀대로 이 신수는 알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짐이 날려 부서지면서 알껍질이 깨져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옆에 있던 매, 마파람이 있었습니다. 신수가 태어난 것과 동시에, 마파람은 짐에 눌려 숨을 쉴 수가 없었던 거지요 그러나 마파람은 죽어가면서도 주인인 치우천님, 당신을 생각했고, 그 때문에 막 태어난 신수의 몸에 저도 모르게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수는 갓 태어났음에도 하늘을 날고, 도력을 써서 당신들을 구했는데, 이는 모두 마파람이 당신을 위해 한 것입니다.” 맥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형제는 믿어지지 않아 연신 서로의 얼굴과 맥달의 얼굴, 그리고 신수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신수의 알은 사실 벌써 몇 년 전에 부화되었어야 했는데 약에 의해 계속 잠들어 있어 알을 깨고 나오지 못했을 뿐, 알속에서 어느 정도 성장하고 있었기에 깃털을 제법 갖추고 있었다. 다만 약으로 신수가 잠들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경황을 잃은 마파람의 혼이 그리로 들어가 신수의 심령을 제압하여 솟구쳐 오르게 된 것이다. 원래 도력이 잠재되어 있는 신수이기는 해도 그 힘은 아직 미약했기에 다시 땅으로 떨어졌을 때는 몹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마파람의 혼은 자기 주인에게 눈길을 보냈으나 주인은 자신에게로 오지 않았다. 손을 내밀지도 않았고 쓰다듬어주거나 먹이를 주지도 않았다. 아까 신수가 보낸 그 슬픔과 원망의 눈길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신수의 몸이 너무 지쳤고 마파람의 혼은 슬픔 때문에 신수를 제어할 수 없어서 신수는 죽어갔던 것이다. 치우천은 비로소 그런 사정을 깨닫고는 눈물을 흘렸다. “마파람아, 너는....... 너는 내가 미웠겠구나.” 치우천이 손을 뻗자 신수는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였다 해도 치우천의 손에는 머리가 닿지 않았고 겨우 부리만 닿았다. 치우천은 신수의 부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를 용서하는 거냐. 오히려 사람보다 낫구나.” 치우천은 다른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러자 맥달이 입을 열었다. “이제 어찌하시겠습니까? 택하십시요.” “무슨 말씀입니까?” 맥달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치우천님은 처음으로 신수를 부하로 둔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마파람은 당신의 말에 무엇이든 따를 것입니다..” 그 말에 치우비는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은근히 겁이 나서 물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맥달이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 형님이 기르던 매인데, 무엇을 겁내십니까?” 약간 어두운 낯빛으로 치우천이 물었다. “그런데 무엇을 택하라는 것입니까?” “당신이 마파람을 택하시면 원래 신수의 어린 새는 죽어야겠지요. 신수들은 거만하고 흉포하여, 이대로 두면 모두에게 좋지 않습니다. 신수가 자라면 마파람의 혼이 발붙일 곳이 없게 되니, 그렇게 자라다가 일단 마파람의 혼이 밀려나면 신수는 틀림없이 한을 품고 당신을 해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마파람에게 명하여 신수의 혼을 쫓아버리셔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선택은?” “마파람더러 나가라고 하면 이 신수는 원래의 신수가 되겠지요. 마파람은 하늘로 오를 것이고, 이 신수는 제 갈 길로 갈 것입니다. 무엇을 택하시든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치우천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마파람을 나가도록 해주십시오.” 치우비는 아직 어쩌는 것이 좋은지 멀뚱한 상태였으나 치우천이 그렇듯 빨리 대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맥달도 의외였던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신수의 힘이 부담되어서 그러십니까?” 치우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신수의 힘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신수를 부리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치우천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마파람은 내가 키우던 녀석이오. 나를 위해 애썼고, 목숨도 아끼지 않았으며 죽어서도 내 생각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 녀석을 죽은 후까지 부린다면 어찌 내 속이 편하겠습니까? 편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그것뿐입니까?” “그것뿐입니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치우천은 피식 웃었다. “난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파람 녀석에게 잘해준 것도 없는데, 죽은 뒤까지 녀석을 부려먹는 짓은 너무하다 생각할 뿐입니다. 녀석이 다음번에는 사람으로 태어나 매였을 적만큼 용감한 용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맥달이 밝게 웃었다. “그렇다면 ‘마파람아, 이제 가도 된다’고 세 번 말하십시오.” 치우천은 맥달의 말대로 세 번 말했다. 그러자 신수는 다시 천천히 앉으며 눈을 감았다. 맥달이 여전히 웃음을 머금으며 덧붙였다. “이제 마파람의 혼이 나가고 신수가 다시 제정신을 찾으면 화가 나서 당신을 덮칠지도 모르겠군요.” 그러자 치우비가 나섰다. “형님, 내가 있소.” 맥달이 웃으며 치우비를 쳐다보았다. “치우비님은 강하시지만 지금은 너무 다치지 않았습니까?” 사실 치우비는 이미 갈비뼈 언저리가 몹시 아팠고 온몸에 멍이 드는 등 만신창이였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치우비는 형이 항상 극도의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도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난 아무렇지 않습니다.” “이 녀석아, 형은 나다.” 맥달은 처음으로 소리 내어 ‘호호호’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마치 구슬이 구르는 것처럼 아리따워 치우천, 치우비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맥달이 웃으며, 눈을 감고 멍하니 앉아 있는 신수를 보다가 치우천에게 말했다. “이 신수는 이제 어린 새나 다름없군요. 그러나 어미도 없고, 이름도 없으니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치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쌍합니다, 불쌍하군요.” 그 말을 하는 순간 뭔가 생각이 날 듯 말 듯했는데 그 생각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치우천은 몹시 답답해졌다. ‘뭔가 생각이 날 듯 말 듯하구나. 도대체 뭐지? 뭔가 기억이 나려는 것도 같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그때 맥달이 눈을 빛내며 청했다. “이 갓난것에게 이름을 지어주시지요?” 그 눈빛은 실로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따뜻한 정을 담고 있었다. 치우천은 또다시 무엇인가 기억이 날 것만 같았다 ‘뭘까? 뭔가....... 뭔가 일이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기에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일까?’ 조금만 더 집중한다면 뭔가 생각이 날 듯했으나 별안간 신수의 어린 새가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며 크게 울었다. ‘부웅-’ 하는 울음소리가 사방에 울려 메아리치자 치우천은 깜짝 놀라 생각의 끈을 놓쳐 버렸다. 안타까운 마음에 치우천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맥달은 신수의 울음소리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치우천에게 다시 청했다. “이름을 지어주시지요?” 치우천은 멍한 생각에 입술이 움직이는 대로 대꾸했다. “내가 이름을 짓는다고 어찌 되겠습니까만....... 지어야 한다면 울음소리가 붕- 하니 붕이라 짓지요.” 개 이름을 ‘멍멍이’[라 짓고 고양이 이름을 ‘야옹이’라 짓는 것이나 다름없는, 성의 없는 작명이었으나 맥달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붕, 붕. 이름이 좋습니다.” 그러고 나서 맥달이 뒤를 돌아보자 쿵쿵거리며 맥이 다가왔다. 맥은 맑고도 슬퍼 보이는 눈으로 맥달을 내려다보았다. 맥달은 맥과 잠시 서로 말없이 눈을 마주 보았다 돌연 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알았다는 듯한 시늉을 했다. 그러더니 놀랍게도 맥은 그 맑고 형형한 두 눈에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맥달 역시 눈물을 주르륵 흘리더니 곧바로 맥의 다리를 얼싸안았다. 맥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긴 코로 맥달의 등을 툭툭 다독거리는 듯했다. 치우천과 치우비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분위기에 민감한 치우비가 자신도 모르게 코를 훌쩍거리며 입을 열었다. “정말 맥과 맥달님하고는 정이 깊은가 봐.” “맥달....... 맥달.........맥의 딸이라서 맥달이라는 이름일까?” 치우천은 중얼거렸다. 그 이름이 왠지 낯설지 않았지만 그 잡힐 듯 말 듯한 생각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잡히지 않았다. 잠시 후 맥이 길게 슬피 울면서 맥달을 남겨둔 채 저쪽으로 달려갔고, 붕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르더니 맥의 뒤를 따라 날아가기 시작했다. 사정을 모르는 사울아비들은 남아 있던 두 마리의 신수가 사라지자 한숨을 쉬기도 하고, 몇몇은 이제야 안심을 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두 마리의 신수가 아무런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 해도 역시 신수들은 무서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맥이 사라지자 맥달은 뒤로 돌아 치우 형제에게로 왔다. 맥달의 얼굴이 다소 눈물에 젖어 있었으나 치우천, 치우비를 보더니 이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제 가십시다.” “가다니? 어디로요?” 치우천, 치우비가 묻자 맥달은 생긋 웃었다. “어디긴요? 신시로 가야지요.” “같이 가시는 것입니까?” 치우천이 묻자 맥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몸 부칠 곳 없는 사람이니 가엾이 여겨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치우비는 이유도 없이 마냥 좋았다 “정말입니까? 아, 이것 참! 너무 기뻐서 이거..........하하!” 치우비는 비록 이성은 형을 따를 수 없으되 감각만큼은 날카로웠다. 치우비는 이 여인을 여자로 생각하여 기뻐하는 것이 아니었다. 치우비의 머릿속에는 이미 공손발로 꽉 들어차 있었고 성격도 외골수라서 다른 여자는 여인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현명하고 차분하며 신통력이 대단한 이 여인은 정말 이상하게 반갑고 기뻤다. 마치 헤어졌던 가족을 다시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와는 달리 치우천은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두 형제의 모습을 보며 맥달은 속으로 생각했다. “‘ 우비님도 대단한 분이구나. 힘만 대단한 것이 아니라 느낌이 너무도 빠르니.......아, 나처럼 불행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는 사이 치우우레가 달려왔다. 그를 보고 치우비가 맥달님이 우리를 따라 신시로 가신다며 신이 나서 말했다. 맥달은 자신은 선인이 아니라고 했지만 이제 그 누구도 맥달을 선인이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선인의 행동에는 이유를 붙일 수 없다. 아무리 보통 사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도 선인의 말에는 깊은 뜻이 있다고 여기고 있으므로, 한 사람도 이의 없이 맥달의 뜻을 받들었다. 더구나 이 선인은 신수를 직접 부려서 크나큰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준 은인이 아닌가? 곧 치우우레는 가마를 만들게 했다. “맥달선인........ 아니, 맥달님께서 신시로 와주신다니,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모두들 가마를 만들어 맥달님을 모실 수 있도록 하라!” 맥달이 살풋 웃으며 말했다. “급하지 않습니다. 사람부터 구하소서.” 치우우레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사람들을 구하는 한편, 맥달의 가마도 서둘러 만들도록 지시했다. 천 명의 사울아비 중에서 백여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고 이백 명이 다친 상황이었다. 허나 사울아비들은 체계가 잡혀 있어 척척 질서 있게 사람들을 돌보았지만, 도깨비들에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도깨비들도 누구 못지않게 용감하게 싸워 열 명의 도깨비들 중에 한 명이 죽고 다섯 명이 아주 크게 다쳤으며 성한 자가 없을 정도로 그 몰골이 처참했는데, 사울아비들은 그들이 무서워서인지, 아니 사람이라 생각지 않아서인지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치베 혼자 쩔쩔 맬 뿐이었다. 그것을 보고 치우천과 치우비는 화가 나서 직접 달려 나가 치베와 함께 도깨비들을 돌보아주었다. 다행히 도깨비들은 그동안 온갖 고생을 겪고 험한 일에 단련이 된 탓인지 번개범과 싸우다 즉사한 한 명을 제외하고는 그나마 모두 숨은 붙어 있었다. 울라트도 다쳤지만 그리 심하지 않았고, 번개에 그슬린 늙은 도깨비 역시 충격을 크게 받아 온몸을 덜덜 떨었지만 일어설 수 있었다. 그래도 늙은 도깨비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신묘한 재간으로 도깨비들의 부러진 팔이며 다리를 맞추며 중얼중얼 주문을 외워 도깨비들의 고통을 덜어주기도 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맥달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모두 뒷일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맥달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기웃거리기까지 했다. 특히 치우바람은 완전히 맥달에게 넋을 빼앗긴 듯, 맥달이 조용히 앉아 있는 부근을 지나갈 때마다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그것을 보고 맥달이 웃으며 고 개를 살래살래 젓자, 치우바람은 형인 치우가람에게 다가가 기쁨에 겨워 들뜬 목소리로 속삭이곤 했다. “날 보고 웃었어! 날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치우가람은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다. “희네 나래 녀석들에겐 너보다 열 배는 더 웃었다.” “그깐 녀석들은 상관없어. 죽은 놈들이나 다름없는걸.” “바람아!” 치우가람이 엄하게 목소리를 바꾸자 치우바람은 누가 들을세라 얼른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나 때마침 그들 옆에 질쾌가 있는 것을 그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질쾌는 단군이라 다친 사람들을 돌보려고 이리저리 바삐 다니고 있던 중이었다. 질쾌는 치우비가시합에서 대용사로 뽑혀 잔치를 할 때 가람 바람 형제를 본 적이 있었다. 질쾌는 이미 치우천, 치우비 형제를 아주 좋게 생각하던 터였고, 잔치 자리에서 가람 바람 형제의 행동에 치를 떨었던 터라 다친 이들을 돌보는 척하며 슬쩍 그들 형제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 한웅의 가마를 찾으러 갔던 양역이 미친 듯이 말을 몰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 소리를 듣자 정찰병이 놀라 치우우레 쪽으로 소리쳤다. “치우우레님! 치우우레님!” 이미 흩어졌던 말 중에서 삼분의 일 정도를 끌어 모은 뒤라 치우우레와 치우벌 등은 말에 올라타고 있었다. 치우우레는 곧장 정찰병 쪽으로 말을 몰고 가며 외쳤다. “무슨 일이냐?” “큰일입니다. 한웅님의 가마가.........!” “뭣이라고?” 치우우레는 자기도 모르게 말에서 뛰어내려 정찰병에게 달려가 얼굴을 들이대며 황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냐?” “한웅님의 가마가 습격당했습니다!” “무엇이!” 말을 몰아 곧장 달려오던 양역이 우당탕 말에서 떨어지듯 내리더니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한웅님 가마가! 가마가!” “누구냐! 어떤 놈이 감히!” “사람이 아닙니다!” “뭐?” “뭐라고........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짐승 떼가.......! 수를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어디냐?” “북서쪽으로 이십 리 정도 되는 곳입니다.” 치우우레는 양역에게 더 이상 묻지 않고 외쳤다. 그 정도라면 서둘러 뛰어간다 해도 시간이 제법 걸리는 거리였다. “말을 탄자들은 지금 당장 모여 양역을 따라가라! 나머지 자들은 말을 잡는 대로 무리를 짓고 줄을 맞춰라!” 워낙 일이 다급한 것을 알기에 양역은 숨도 돌리지 못하고 다시 말에 올라타면서 외쳤다. “나를 따르시오! 가면서 무리를 지어 줄을 맞추도록 하겠소!” 양역 또한 노련한 사울아비이며, 힘은 그리 강하지 않아도 젊은이들 중에서는 가장 지휘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양역은 서둘러 말에 올라탄 사울아비들 이백여 명을 몰아 달려가면서도 계속 소리를 지르며 대오를 편성했다. 그때 맥달이 치우비를 불렀다. 도깨비들 치료에 전념한 터라 치우형제는 말을 잡아탈 겨를이 없어 양역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치우비님!” “예?” 치우비가 달려오자 맥달이 서둘러 말했다. “형님과 함께 어서! 어서 가셔야 합니다!” “한웅님께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벗들도 모아서 가세요!” “하지만 아직 명령이........ 더구나 형님은........” 맥달이 심각한 표정으로 치우비의 말을 막았다. “가셔야 삽니다.” 치우비는 맥달의 눈빛이 절실한 것을 보고는 곧 대답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때서야 치우천이 달려왔다. 치우천은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약간 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그 모습에 거의 신경 쓰지 않거나, 아니 신경 쓰더라도 번개범과 싸울 때 다쳤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치우천이 묻자 맥달은 조용히 소리를 낮춰 다짐을 주듯 말했다. “구하든 잡든, 둘을 노리지 말고 하나만 노리세요. 제가 말했단 이야기는 결코 해서는 안 됩니다. 아셨지요? 아무리 총명한 치우천이라 해도 이 말만 듣고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짐작할 재간이 없었다. 다만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나 맥달은 웃지도 않고 눈만 빛내며 한마디 할 뿐이었다. “어서 가십시오.” 치우비는 곧 입에 손가락을 넣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러자 곧 구름과 높은뫼가 달려왔다. 신수들이 있을 때는 이 말 두 마리도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도망쳤지만 신수가 사라지자 곧장 달려온 것이다. 치우비는 펄쩍 구름 위에 올라탔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도깨비들 이 뭐라고 떠들면서 달려왔다.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도깨비들은 넷뿐이었는데 그 넷은 모두 치우비를 따라가기를 원하는 듯했다. 그들 부상이 심해서 어쩔까 하고 치우비가 잠시 망설이는 틈을 타서 울라트가 갑자기 달려오며 커다랗게 외쳤다. “같이 가요!” 울라트는 그리 중상을 입은 것은 아니지만 아직 얼굴에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치우비에게는 아랑곳하지 않고 울라트는 붉은 머리 애꾸 도깨비에게 손짓을 했다. 그 도깨비는 재빨리 울라트를 어깨에 얹었다. 울라트가 제법 의젓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대요. 아까 가까이 있지 않아 오라버니를 위험하게 했 다고 이 도깨비들이 무척 후회하고 있어요.” 그 말에 감격하여 치우비가 커다랗게 외쳤다. “좋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 같이 가자!” 곧이어 치베가 말을 몰고 달려왔다. “비 안다! 천 안다! 치베가 여기 있다!” 쇠돌이와 부루벼락도 먼지를 온통 뒤집어쓴 채 나타났다. “젠장, 사울아비가 도깨비들에게 뒤질 수야 없지!” 그때 달리기를 몹시 잘하는 마파람이 저만치 달려가며 외쳤다. “말이 없어도 이십 리는 금방이다!” 그 뒤를 질세라 날램이가 따랐다. “말보다 내가 빠를 거유!” “잠깐 멋대로 움직이지 말라!” 치우천이 외쳤다. 치우천은 이렇듯 와르르 제멋대로 몰려가는 것이 아무래도 불안한 듯했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본 치우우레가 외쳤다. “너희는 어서 한웅님께 가거라! 무리를 짓지 않아도 좋다!” 치우우레는 이 젊은이들이 하나같이 보통 인물들이 아니어서 굳이 무리를 짓고 할 것 없이 먼저 보내도 충분히 제 몫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명령이 떨어지자 치우천도 이제는 꺼릴 것이 없다는 생각에 높은뫼의 배를 박찼다. “가자! 모두들.......윽.......” 순간 치우천의 몸이 휘청하더니 말 위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려 했다. 치우비는 놀라 다급하게 구름을 몰고 와 치우천의 몸을 받아 다시 말에 앉혔다. “형님! 괜찮아? 왜 그래?” 치우천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유망이 다리를 좀 돌보긴 했으나 제대로 치료해준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동안 거의 쉬지도 못하고 극도로 신경을 썼고 하루 종일 남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고통을 참으며 걸었다. 결국 지나치게 무리한 탓에 절맥이 도지고야 만 것이다. 막 떠나려던 사람들 모두가 은연중에 치우 형제를 따르는 자들이라 중심격인 치우천이 휘청거리자 다들 놀라서 모여들었다. 질쾌가 큰 몸을 쿵쿵거리며 달려왔다. “가만가만, 물러나!” 질쾌는 서둘러 치우천의 다리를 주무르며 얼굴에 물을 뿌렸다. 질쾌는 부상자들을 돌보느라 물을 담은 나무병을 메고 있었던 것이다. 치우천은 물이 뿌려지자 금방 정신을 차렸다. “아.......” “괜찮아? 형님?” “괜찮다. 잠깐 현기증이 난 것뿐이다. 왜들 난리냐? 어서 가자!” 허나 다른 사람은 잘 몰라도 치우비는 형이 왜 이러는지 알고 있었다. 참을성이 대단한 형이 이러는 것은 분명 몸속의 고통이 극에 달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한 치우비는 안 되겠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갈 테니 형님은 여기 있어! 질쾌! 형님을 부탁해!” 그러나 그때 맥달이 외쳤다. “가셔야 합니다!” 어느새 맥달도 치우천이 걱정된 듯 다가와서 사람들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치우비는 물론 맥달의 말이 틀릴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형의 안위가 더 걱정되어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형님이 가야 합니까?” 맥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치우천은 묘한 불쾌감에 사로잡혔다. 치우천은 그릇도 크고 활달하여 이런 미묘한 불쾌감을 느낀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막상 불쾌감이 들자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틀어지는 것 같았다. ‘저 여인은 치우바람에게 관심을 보이더니 나에게 왜 그러는 거지? 더구나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것인데, 꼭 자기 말대로 해야 한다는 것인가? 신수를 부리는 대단한 여자이기는 하지만 나는 나다. 나는 내 마음대로 할 것이다.’ 치우천은 한번 기분이 틀어지면 자부선인에게조차 당당히 대드는 오기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때처럼 자기가 옳다고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도 치졸하기까지 한 자기 감정에 놀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고 인정하기 싫은 기 분이 되어갔다. “나는 못 갈 것 같군. 아우야, 부탁한다.” 치우비는 그 말을 듣자 걱정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여 맥달이 담담한 얼굴로 치우천을 바라보며 물었다. “진심 입니까?” 치우천은 그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치우우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녀석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어물쩡거리느냐, 어서들 가서 한웅님을 지켜드려야 할 것 아니냐?” 치우우레는 경황이 없어 아들이 아픈 것을 미처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치우우레는 소리만 지른 것이 아니라 달려와서 무작정 치우천이 탄 높은뫼의 엉덩이를 철썩 때렸다. 높은뫼가 황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별수 없이 치우비도 구름을 몰고 그 뒤를 따랐고 치베와 쇠돌이, 부루벼락과 도깨비 등등도 그 뒤를 따라갔다 특히 검은 피부의 도깨비는 말을 몹시 두려워하여 덜덜 떨면서도, 놓치지 않으려고 거의 말을 껴안다시피 하여 기를 쓰며 따라가고 있었다. 저만치 멈추어 섰던 마파람과 날램이도 달려갔다. 갑자기 우르르 달려 나간 일행들을 보고 질쾌는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때마침 누군가가 끌어온 말 한 마리를 집어타고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모습을 보다가 맥달은 치우우레를 쳐다보며 맑게 웃었다. 치우우레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참 어려운 일이었는데......... 호호.........정말........ 정말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저도.........호호..........” 맥달은 뭐라고 몇 마디 더 했으나, 우직하고 약간 단순한 치우우레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어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맥달은 치우우레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당신이 당신 아드님들을 살린 거예요.’ 짐승들과의 사투 치우천은 말 한마디 없이 억지로 기를 써서 높은뫼를 타고 달렸다. 치우비는 그 뒤에 바싹 붙어 걱정스러운 듯 형을 지켜보았다. ‘형님은 가지 않으려 했는데, 얼결에 가게 되었구나. 형님이 괜찮을려나.’ 치우비는 근방을 둘러보았다. 따라오는 사람들은 모두 믿을 수 있는 친구들뿐이었다. 치베와 도깨비 네 명, 그리고 붉은 머리 애꾸 도깨비 앞에 앉은 울라트는 당연히 믿을 수 있었다. 말을 타지 않고 달려가는 마파람과 날램이, 뒤를 따르는 쇠돌이와 부루벼락도 좋은 친구들이었다. 게다가 어느 틈엔가 태산 회의 때 한웅을 같이 모시던 열두 사울아비 중 거서기와 삼도 따라오고 있었는데, 아주 친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 역시 과묵하여 믿을 만했다. 치우천이 천천히 달린 탓에 다른 사람들도 속도를 그리 내지는 않았지만 마파람과 날램이의 달리는 재주는 정말 놀라워 맨발로 달리는데도 별로 뒤지지 않았다. 마파람은 성큼성큼 발을 아주 넓게 디디며 달렸고 날램이는 몸을 빙글빙글 옆으로 돌리면서 마치 옆으로 구르듯 달렸는데 둘 다 막상막하였다. 그 둘은 별로 힘이 들지 않는지 쉬지 않고 잡담을 나누었다. “마파람 형. 숲 속 같은 데라면 형이 빠르겠지만 이렇게 평평한 곳에서는 내 걸음이 더 빨라! 배우라니깐!” “우스운 소리 마라. 너같이 돌면 어지러워서 어쩌겠느냐? 내 걸음이 훨씬 낫다. 배울 생각 없다!” 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고 치우비는 형에게 슬쩍 말했다. “천 형님, 괜찮아? 다 벗들만 있으니 나랑 같이 가자구.” 그러나 치우천은 ‘홍’하며 코웃음만 치더니 더욱 오기를 부려 말의 배를 차 속도를 높였다. 그러는 형이 좀 우스워서 치우비가 바싹 따라붙으며 물었다. “왜 토라진 거야? 형답지 않게.” 사실 치우천은 자신의 토라진 모습 때문에 심사가 더 뒤틀린 것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이렇듯 토라지는 자신이 더더욱 미워서 기분이 틀어진 것이라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우에게 신경질을 부리거나 화풀이할 성격도 아닌지라 치우천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난 괜찮으니 가만 두렴.” 대뜸 뒤에서 부루벼락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무렴, 때가 됐지, 됐어.” 쇠돌이도 맞장구를 쳤다. “대용사인 아우님도 단번에 멍청이가 되는데, 형님은 삐침이가 되는구나, 허허.” 부루벼락과 쇠돌이는 생긴 것도 영판 다르고 나이 차이도 많았지만 둘 다 우스갯소리 하는 재간이 뛰어나 죽이 척척 잘 맞았다. 지난번에는 치우비를 한참 놀리더니 이번에는 치우천이었다. “삐치지 마시와요 실망스럽사옵니다.” 쇠돌이가 징글맞게 여자 목소리를 흉내 내자 부루벼락이 한껏 점잖은 척 목소리를 꾸몄다. “허허, 내가 너무 콧대가 높으니 삐칠 도리밖에 없구려. 말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고 그저 답답하여 부글부글 끓을 지경이라오.” “말할 것이 있으면 말하시지 왜 못하시나요?” “그대처럼 선인 같고 선녀 같은 여인에게 어찌 함부로 말을 걸겠소? 안 그래도 당신 같은 사람이면 이미 내 마음을 다 보고 엉큼하다 할 텐데 어찌 말까지 건단 말이오?” “남자가 그리 쩨쩨해서 어디에 쓰겠사와요? 맘에 들면 들고 아니면 아닌 것이지, 그렇게 자신이 없사옵니까? 싫어요! 싫어요! 쇤네는 싫사와요!” 쇠돌이가 정말 여자처럼 앙칼진 목소리로 ‘싫어요’를 몇 번이나 기막히게 흉내 내자 뒤따르던 거서기와 삼은 웃음을 참지 못하여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치우비도 기가 막혀 허허 웃고 말았다. 이윽고 치우천이 뒤를 돌아보더니 ‘허 참’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리 못난 짓을 했나?” 비록 웃음거리로 삼기는 했지만 부루벼락이나 쇠돌이가 절대 자신에게 나쁜 뜻으로 그러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치우천이었다. 오히려 그 말을 듣고 나자 치우천은 마음이 좀 가벼워져 웃으면서 물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자네들이 뭘 안다고 그래?” 부루벼락 역시 웃으며 되받았다. “나는 거칠고 못났으며 아는 것이 없지만, 그런 것 하나는 나면서부터 잘 안다네!” 쇠돌이가 흥흥거리며 끼어들었다. “그러면 뚜쟁이로 나서지, 무엇 하러 사울아비가 되셨수?” “내, 생긴 것이 천 자네 반만 닳았어도 신시의 여자는 전부 내것이었을 걸세.” 부루벼락은 워낙 험상궂고 무서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물론 속은 좋은 사람이었으되, 남자답게 씩씩함이 넘쳐 험상궂은 게 아니라 본디 생김새가 남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주는 인상이었던 것이다. 쇠돌이가 또 깐죽거리며 뒤에서 물었다. “그래서 벼락 형은 지금은 여자가 몇이우?” 그 말에 부루벼락은 얼굴을 붉히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 마누라는 신시에서 가장 무서운 호랑이요, 뱀이라네. 목숨이 여러 개 있다 해도 나는 감히 딴마음을 못 먹는다네.” 쇠돌이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딴마음을 먹었겠지! 먹었겠지! 감히 하지는 못하니 마음만 잔뜩 먹었고, 하도 딴마음만 먹다 보니 도가 트인 것 아니겠수! 우하하!” 쇠돌이는 나이도 그리 많지 않고 겉으로는 둥글둥글 둔해 보여도 눈치가 여간 아니었다. 부루벼락도 할말이 없어 얼굴이 더욱 시뻘개졌지만 덩달아 ‘푸하핫’ 웃고 말았다. 치우천도 우스워서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꼬인 것이 좀 풀리고 마음이 한결 가라앉는 듯했다. 치우천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지금 한웅님을 도우러 가는 길이니 우스갯소리는 나중에 합시다.” 그 말에 부루벼락과 쇠돌이가 입을 다물었다. 치우비는 형의 얼굴이 좀 평안을 되찾은 것 같아 이내 안심이 되었다. 그때 질쾌가 치우천에게 다가갔다. “천 형. 치우바람, 가람 형제가 이상한 말을 하던데?” “무슨 말을 하던가?” “자네 형제는 이제 죽은 목숨이라고....... 그놈들 뭔가 꿍꿍이가 있것 같으니 조심하게나.” 그러나 치우천은 자신이나 치우비가 그들에게 꼬투리를 잡힐 만한 행동을 하지 않은 것 같아 그저 무심코 고개만 끄덕였다. 어느덧 치우천 일행은 이십 리 길을 달려갔다. 갈수록 나무가 빽빽했고 말발굽이 질퍽거리며 빠져들었다. 이십 리 정도 왔을 때 치우천 일행은 아주 습하고 나무들이 우거진 깊숙한 곳에 들어서게 되었다. 돌연 치우비 일행은 우두둑 하며 땅이 나지막하게 흔들리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안색이 어두워진 그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급히 말을 몰았다. 조금 더 나아가자 흔들리는 진동이 점점 커지며 북서쪽 우거진 숲 사이로부터 희미하게 사람들의 외치는 듯한 아우성 소리와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 등이 뒤섞여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서두르자!” 치우비가 급히 앞장서서 달려가다가 말을 멈추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숲 너머는 가파른 비탈이었고, 그 너머는 널따란 평원이었는데 한웅의 가마는 그 평원 저쪽을 계속 달려 달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수십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가마와 함께 도망치고 있었는데, 그들은 사울아비가 아니라 종과 여자들이었다. 백 수십 명 정도의 사울아비들은 그 뒤를 지키면서 안간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는데, 그들이 상대하는 적들은 바로 소 떼와 늑대 떼였다. 소 떼는 천 마리도 넘는 듯했고, 늑대는 그보다도 더 많아서 이천 마리는 되어 보였다. 늑대들은 원래가 사납고 떼를 지어 다니는 짐승들이지만 이렇게 많은 숫자의 늑대 떼는 아무도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소라는 짐승은 보통 때는 온순하지만 일단 화가 나면 무서운 짐승으로 변한다. 언뜻 보니 그 소들은 뿔이 쾌 길고 거친 털이 난 것으로 보아 사람이 기른 것이 아니라 야생에서 자란 소들 같았다. 사울아비들은 무예가 뛰어나고 무장을 하고 있었지만, 수많은 소와 늑대들을 대적하기엔 역부족이어서 계속 밀려나는 형편이었다. 머리를 나란히 하고 거침없이 덤벼드는 소 떼의 뿔에 받히고 짓밟히면 조금의 요행도 바랄 수 없을 터였다. 더구나 그 주위를 비교적 몸집이 작은 늑대들이 맴돌면서 신경을 분산시키고 때로는 뛰어오르고 했기 때문에 더더욱 위험했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소가 비록 몸이 크고 힘은 세지만 그렇게까지 걸음이 빠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뛰는 속도와 비슷했고, 지금 소 떼도 상당히 지친 듯 그리 빠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으면 한웅의 가마는 벌써 결딴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했다. 늑대를 보면 소는 당연히 피하게 마련이고, 늑대 역시 소가 있다면 사람을 쫓지 않는데 두 짐승이 함께 사람들을 공격하다니, 이는 실로 들어본 적조차 없는 일이었다. “소와 늑대가 어떻게 같이 있지?” 치우비가 의아한 듯이 외쳤다. 저편에서 양역이 지휘하는 사울아비들도 열심히 대항하려고는 했다. 몇 명의 사울아비들이 도끼를 던져 소를 맞혔으나 급소는 맞히기 힘들었다. 소들은 워낙 덩치가 크고 힘이 좋아서 도끼로 미간을 정통으로 맞히면 즉사할까, 도끼가 빗나가 자 오히려 더 자극을 받아 미쳐 날뛰었다. 어느 사울아비가 말머리를 돌려 창으로 앞장선 소의 미간을 찔러 죽였으나 그 지체하는 사이에 소들이 우르르 죽은 소의 몸을 밀치면서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사울아비는 말과 함께 소에 받쳐 넘어지고 말았다. 곧이어 그 사울아비는 말과 함께 소 떼들에게 짓밟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온몸이 으깨어져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울아비들은 계속 옆구리에서 치고 달려드는 늑대들에도 맞서야 했다. 늑대들은 달리다가도 날렵하게 뛰어올라 말위에 탄 사울아비들을 공격하려 했고 틈만 나면 사울아비들을 앞질러서 맨발로 달리고 있는 가마와 가마를 따르는 비무장의 사람들을 덮치려고 했다. 그 때문에 사울아비들은 둥글게 퍼져 달릴 수밖에 없었고 함부로 활을 쏠 수도 없었다. 소 떼와 마주한 바로 뒷줄의 사울아비들은 화살을 쏘았으나 빗발 같은 화살을 맞고도 소는 몇 마리밖에 죽지 않았다. 화살도 무한정 있는 것이 아니고 보통 사울아비 한 사람당 스무 대 가량의 화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화살로 소를 다 쏘아죽일 수도 없었다. 그나마 화살도 거의 떨어진 듯했다. 한웅의 가마를 멘 사람들이나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말도 타지 않고 마냥 달리고 있었다. 이미 달린 지도 왜 되었는지 조금만 더 달리면 탈진하여 쓰러질지도 몰랐다. 그나마 소 떼에 따라잡히지 않는 은 사울아비들이 있는 힘을 다하여 소들을 막아내며 소들을 느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쇠약한 노인이나 여자들 몇몇은 사울아비들이 말에 태웠지만 사울아비들이 그런 비전투원을 말에 태울 때마다 그들의 전투력은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에 이대로는 자칫 몰살당할 것 같았다. 사태가 위급한 것을 깨닫자 치우비는 곧 구름의 옆구리를 박차며 달려 내려갔다. 그 뒤를 쇠돌이, 부루벼락, 거서기와 삼 등이 따라가려 하자 치우천이 소리쳤다. “서라!” 치우비는 깜짝 놀라 말을 황급히 돌려세웠다. 모두의 시선이 치우천의 얼굴에 쏠렸다. “우리는 몇 되지 않으니, 무턱대고 덤벼들어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치우천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늑대와 소가 같이 움직일 수는 없어! 분명히 그렇게 만든 녀석이 있을 거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질쾌가 깊은 신음소리를 내며 말을 더듬거렸다. “그러면....... 주술사?” 치우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외쳤다. “그놈을 잡으면 일은 자연히 풀린다. 늑대가 소들은 흩어질 거다!” 그 말에 치우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그놈은 어디 있지?” “분명 숨어 있을 거야.” “그러면 한웅님 가마는 어떻게 해?” 치우천은 그 순간, 치우비와 치베 두 사람에게 주술사를 찾아 없애게 하고 나머지 사람들로 소 떼를 막아볼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맥달의 말이 생각났다. -구하든 잡든, 둘을 노리지 말고 하나만 노리세요. 치우천은 맥달에게 이유 없는 거부감 같은 것을 느끼던 차라, 어쩌면 이런 위급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 말을 따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허나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맥달의 말이 떠오르자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치우천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렇다고 그냥 보고 있으란 말이냐?” 성질 급한 부루벼락이 외쳤다. 마침내 치우천은 결정을 내린 듯 단호하게 말했다. “일단 급한 것은, 한웅님 가마를 보호하는 것이다.” “맞아!” 치우비가 늠름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치자 치우천의 얼굴빛이 약간 흐려졌다. 치우비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있지만, 치우천은 치우비가 큰 상처를 입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치우천은 우선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소 떼다. 소 떼가 밀어붙이면 당할 재간이 없다. 저 소 떼를 일시에 다 죽일 수도 없으니, 방향을 틀어야 한다!” 치우천은 재빨리 상황을 좀더 자세히 살폈다. 그 틈에 소와 말을 몰아본 경험이 많은 거서기가 안타까운 듯이 외쳤다. “말이라면 몰라도 소 떼는 옆으로 잘 틀지 못해! 벌판에서는 무조건 앞으로만 달린다! 그러니 한웅님 가마를 옆으로 돌리면 될 거야!” 그러나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늑대들이 에워싸서 방향을 틀고 싶어도 못 트는 것이다.” “그러면 늑대들부터 모조리 죽이자!” 치베가 활을 들어 보이며 외치자 부루벼락도 나섰다. “비! 쇠돌이! 우리가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그것을 들고 늑대를 쫓아버리자!” “그러고 나면 한웅님 가마를 옆으로 돌릴 수 있을 거다! 우리는 활을 쏴서 자네들을 지켜주겠다!” 마파람의 제안에 모두가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으나 치우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엔 너무 급하다! 늑대를 쫓아낼 때까지 사람들이 버티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소 떼의 방향을 틀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하지?” 쇠돌이가 울상을 짓자 치우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아래 말라 죽은 가시덤불 숲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서 몹시 굵고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있었는데 그 주위를 엄청나게 무성한 가시덤불이 휘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치우천은 이제 되었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외쳤다. “저 가시덤불을 가지고 가자!” 치우천의 난데없는 말에 모두가 의아해했다. “무슨 소리야?” 치우천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간단히 설명했다. “힘으로 소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다만 조금씩 방향을 바꾸게 하면 된다! 우리가 힘써 밀어붙이면 밀리지 않으려 할 테지만, 가시덤불은 피하려 할 것이다!” 그 말을 듣고는 거서기가 손뼉을 쳤다. “그렇다! 소들은 고집이 있어서 화났을 때 밀면 버티고 굽히지 않는다! 그러나 따가운 가시는 알아서 피한다! 잘될지도 모른다!” “비야! 쇠돌이! 덤불로 소 떼를 밀어내라. 부루벼락, 치베, 너희는 앞길을 열어라. 다른 사람들은 늑대를 흩뜨려 비와 쇠돌이가 소 떼를 밀어내게 돕는다!” 치우천의 상황 판단은 몹시 기민하고 적절하여 아무로 그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도깨비 네 마리도 있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치우천의 지시를 들을 수 없었다. 치우천 역시 도깨비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루벼락은 그 와중에도 농담을 했다. “가시투성이 꼴보다는 늑대 밥이 낫다. 고생들 좀 해라! 하하! 이릿” 부루벼락과 치베는 말을 달려가면서 손을 뻗어 마른 잎이 달려 있는 나뭇가지들을 꺾고 말 위에서 부싯돌을 부딪쳐 불을 붙였다. 잠시 연기가 피어오르다가 이내 불꽃을 뿜어내는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두 사람은 용감하게 늑대 무리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치베의 기마술은 몽골족답게 단연 뛰어났지만 부루벼락도 그리 뒤지지는 않았다. 치우천은 마파람과 날램이가 말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외쳤다. “마파람 형! 내 말에 타시오! 날램이는 질쾌와 같은 말을 타라!” 치우천은 지치고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그래도 마파람을 태워 활을 쏘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마파람은 치우천의 뒤에 껑충 올라타더니 웃으며 말했다. “내가 몰 테니 염려 말고 지휘나 잘 해줘.” 마파람은 눈썰미가 날카로워 치우천이 이미 상당히 상처를 입어 말을 타기 어려운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질쾌는 조그마한 날램이를 들어 말에 얹었고 거서기와 삼도 크게 외치며 그 뒤를 따랐다. 그 사이 치우비와 쇠돌이는 말 뒤에 실려 있던 가죽 몇 장을 급히 가슴팍에 대고 손에 감았다. 따가운 가시에 찔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달려 나가다 뒤를 힐끗 보는 치우비와 눈이 마주치자 치우천은 안쓰러워 코끝이 시큰했다. ‘역시 내 아우다. 하지만 가죽으로는 가시를 막기 어려울지도 몰라. 구리로 아우 몸을 싸주면 가시에 찔리지 않을 텐데.......’ 그런데 그 가시덤불은 중간에 굵은 나무가 들어있는데다 한데 엉켜 있어서 서로 떨어지지 않았고 몹시 크고 무거웠다. 중간의 나무를 들어올리니 덤불을 통째로 옮기는 것 같았다. 치우비는 힘은 모자라지 않았으나 가시덤불이 너무 부피가 커서 쉽게 운반할 수가 없었다. 쇠돌이가 냉큼 달려와 가죽으로 손과 몸을 감싼 다음 반대편을 들었다. 가시덤불이 오래 전에 말라죽은 탓에 가시들은 더욱 삐죽삐죽하고 흉악한 무기가 되어 있었다. 큰 가시들이 가죽을 뚫고 손과 가슴에 박혔지만 두 사람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씩씩하게 손발을 맞췄다. 두 사람은 눈짓으로 하나, 둘, 신호를 맞춘 뒤 동시에 덤불을 들고 말에 뛰어올랐다 덤불더미는 상당히 무게가 나갔지만 신력을 지닌 치우비와 쇠돌이에게는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쇠돌이의 말은 구름만큼 크고 좋은 말이 아니라서 조금 힘들어하는 듯했다. 그때까지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도깨비들이 서로 눈짓을 하더니 가시덤불을 한 움큼씩 뜯어내어 치우비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말을 잘 타지 못하는 검은 도깨비만이 남아 애꾸 도깨비에게 울라트를 받아 들었다 어차피 그 도깨비는 말도 잘 타지 못하니 울라트를 보호하려는 것 같았다. 울라트는 자신도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겁도 났고 자기가 가봐야 별 도움도 안 된다고 생각하여 얌전히 뒤에서 천천히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전력을 다해 사람들을 지휘하여 소 떼를 막던 양역은 부루벼락과 치베, 치우천 등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돌리며 목청껏 외쳤다. “조금만 더 참아라! 우리 편이 도우러 왔다!” 이미 사울아비들은 몹시 지쳐 있던 터라, 가마를 들고 뛰는 자들이나 맨발로 달리는 사람들이 죽거나 말거나 그냥 쓰러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양역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모두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힘을 냈다. 치베는 말 타기에 능한 몽골족답게 실로 신기한 기마술을 발휘했다. 두 다리로 말배를 조이며 치베는 몸을 획 옆으로 돌려 머리가 땅에 끌릴 듯 낮추었다. 그러면서 불이 붙은 나뭇가지를 잡은 손을 휘두르며 늑대들을 쫓았다. 늑대들은 불을 피해 저쪽으로 피했다. 그러나 몇몇 흉악한 녀석들은 치베의 머리를 노리며 달려들려고 했다. 치베는 재빨리 불붙은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머리를 늘어뜨린 자세 그대로 화살을 ‘슉슉’ 연달아 쏘았다. 불편한 자세에서 쏜 것임에도 치베의 화살은 늑대를 명중시켰을 뿐만 아니라, 신기에 가까운 힘이 실린 그 화살은 늑대의 몸을 그대로 뚫고 나가 다시 한 마리를 뚫은 다음 세 번째 늑대의 몸에 박혔다. 치베는 두 대의 화살로 여섯 마리의 늑대를 쏴 죽인 것이다. 말 위에서 아래로 화살을 쏘면 안전하기는 해도 화살 한 대로 한 마리의 늑대밖에 잡지 못하기 때문에 치베는 모험을 한 것이다. 늑대들이 겁을 먹고 치베에게서 떨어지자 치베는 기분 좋은 듯 휘파람소리를 내며 불붙은 가지를 마구 흔들었다. “오늘 뭐 좀 되는군!” 치베가 기세등등하게 외치자 부루벼락도 이에 질세라 휘파람을 불며 역시 불붙은 나무를 입에 물고는 길게 땋은 단단한 가죽 끈을 꺼내들었다. “나도 신기한 걸 한 번 보여주마!” 부루벼락은 치베처럼 머리를 낮추고 활을 쏘는 기술은 없었지만 나름대로의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그 가죽 끈 양쪽 끝에는 단단한 구리뭉치가 묶여 있었는데 부루벼락은 그 한쪽에 불붙은 나무를 엮었다. 그리고 그 불붙은 나무를 빙빙 돌리며 ‘이럇’ 하고 말 배를 박차고는 늑대들 무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치베는 부루벼락의 방법이 자신이 쓴 것보다 더 낫다고 여겨 말의 속도를 늦추어 부루벼락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부루벼락은 마치 흥에 겨운 듯 기이한 솜씨로 불붙은 나뭇가지를 빙빙 돌려 불로 만든 원을 사방에 그리며 늑대를 쫓아내기 시작했다. 말들도 있는 힘을 다해 달리고, 늑대들도 미친 듯이 달리는 중이라 불로 만든 원이 다가오자 늑대들이 먼저 피하려고 하다가 먼지를 일으키며 나뒹굴어 뒤에 달려오던 늑대에게 짓밟히곤 했다. 별안간 다른 놈들보다 난폭한 늑대 한 마리가 부루벼락에게 뛰어오르자 부루벼락은 가죽 끈 반대편을 손으로 쥐고 있다가 늑대에게 던졌다. 구리뭉치가 늑대의 몸에 단번에 명중되자 늑대는 ‘캑’ 하고 피를 토하며 땅에 떨어져 짓밟혔다. 단지 구리뭉치만 던져 늑대를 맞힌 것은 대단한 묘기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잠시도 멈추지 않고 불붙은 나뭇가지를 현란하게 돌리면서 동시에 늑대를 맞힌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부루벼락이 막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늑대 두 마리가 한꺼번에 뛰어올랐다. 부루벼락이 다시 다급하게 늑대 한 마리를 구리뭉치로 떨어뜨렸지만, 다른 한 마리는 이빨과 발톱을 있는 대로 드러내며 부루벼락의 얼굴을 물어뜯으려 했다. “어이쿠!” 그 늑대의 발톱이 부루벼락을 할퀴려는 순간, 치베의 화살이 늑대의 몸에 박혔다. 늑대의 몸이 땅에 나뒹굴자 부루벼락은 식은땀을 흘리며 외쳤다 “고맙네!” 그러나 고맙다는 인사를 할 경황이 아니었다. 갑자기 늑대들이 눈에서 붉은 빛을 쏘아내며 흉포한 표정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몇 마리가 이토록 처참하게 당하면 늑대들은 보통 겁을 먹고 슬슬 꽁무니를 빼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 늑대들은 동료들이 죽었음에도 오히려 더욱 흉포해지면서 살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거......보통 일이 아니다!” 치베가 놀란 듯 외치자마자 십여 마리나 되는 늑대가 동시에 부루벼락과 치베에게로 뛰어올랐다. 부루벼락은 하는 수 없이 구리뭉치를 맹렬한 기세로 돌려 두어 마리를 쳐내고, 다시 덤벼드는 늑대 주둥이를 끈으로 감았다. 그렇게 되자 더 이상 불덩이를 돌릴 수가 없었다. 주둥이에서 끈을 빼내려 했으나 그 늑대는 부루벼락의 가죽끈을 문채 땅에 떨어져 부루벼락은 결국 무기를 놓치고 말았다. 마구 뛰어오르는 늑대들을 왼팔로 막으며 부루벼락은 구리칼을 꺼내 들었다. 부루벼락의 칼 솜씨도 만만한 것은 아니어서 부루벼락이 칼을 뽑자 대뜸 두 마리의 늑대가 허공에서 두 토막이 났지만 부루벼락은 이미 왼팔을 물려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치베 역시 무서운 속도로 활을 쏘다가 급기야는 손이 달려 화살을 뽑지 못하고 활을 휘둘러서 뛰어오르는 늑대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활줄이 끊어지고 활이 ‘우지직’ 소리를 내며 부러지려 했지만 달리 어떻게 할 틈이 없었다. 치베는 원래 활을 주로 썼기 때문에 다른 무기 라고는 조그마한 단검 하나밖에는 없었다. 이윽고 늑대 한 마리가 치베의 활을 물고 늘어지자 활이 우지끈 쪼개져 나갔다. 이제 치베는 맨손이라 늑대가 다시 뛰어오르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치베! 받아라!” 바로 치우천의 목소리였다. 다음 순간, 치베에게 뛰어오르던 늑대 두 마리가 동시에 ‘캥’ 하며 날아가 떨어졌다. 한 마리는 거서기의 화살에 맞은 것이고, 한 마리는 날램이의 돌팔매에 맞은 것이다. 그리고 치베에게 치우천이 쓰던 칼 한 자루가 날아와 잡혔다. 그 칼은 카린의 누루마이와 바꾸었던 돌칼이었다. 비록 돌칼이기는 했지만 무척 예리하고 단단하여 구리칼 못지않았다. 치베는 즉시 용기를 내어 칼을 휘둘러 늑대 한 마리를 반으로 쪼개버렸다. 부루벼락은 피를 흘리기는 했지만 구리칼을 휘두르며 어찌어찌 혼자서도 늑대를 잘 막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거서기와 삼, 마파람, 날램이, 질쾌 등이 일제히 가담하자 늑대들은 삽시간에 수십 마리나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늑대들의 숫자는 너무도 많았다. 반대편에서 양역이 지휘하는 사울아비들이 치우천 일행을 도와 이쪽으로 뚫고 나오려는 듯했지만 그 사울아비들은 몸을 뒤로 돌려 소 떼를 막느라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지금대로라면 소 떼의 방향을 바꿨다 해도 양역의 사울아비들은 크게 피해를 입는다. 소 떼를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울아비들이 방향을 틀어 소 떼가 나갈 길을 터주어야 했다. 그런데 이것을 알릴 방법이 없었다. 소들이 달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아무리 소리를 쳐도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 소 떼와 늑대들이 달리는 속도가 그렇게까지 빠르지는 않았지만 앞뒤에 늑대들이 우글거렸기 때문에 말을 타고 늑대들을 가로질러 양역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늑대들은 앞을 막듯, 빽빽하게 몰려 있었기에 말을 타고 지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발 빠른 사람이라면 뚫고 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상황이 너무도 위험했다. 치우천은 잠시 망설였으나 뒤를 돌아보니 치우비와 쇠돌이, 도깨비들이 가시덤불을 들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치우천은 할 수 없이 결단을 내리고 다급하게 날램이를 불렀다. “날램이!” “나 여기 있다!” 날램이가 외치자 치우천이 다시 외쳤다. “양역에게 전할 말이 있는데!” 날램이는 치우천의 의도를 깨닫고 조금 놀란 듯했지만 곧 가슴을 치며 용기 있게 말했다. “젠장! 어차피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마찬가지다! 내 달리기는 제일이다! 반드시 전하겠다!” 그때 치우천과 같은 말을 타고 가던 마파람이 외쳤다. “나도 느리지 않다! 날램이 놈에게 질 수야 없지! 천! 나도 가게 해 달라!” 그러나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날램이는 몸이 작으니 저기를 뚫고 지나갈 수 있다. 그러나 자네는 몸이 너무 커.” 치우천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날램이에게 미안했다. ‘저 수많은 늑대 속을 어찌 헤치고 가겠는가? 날램이는 아무래도 죽을 것 같구나.’ 날램이는 얼굴빛이 질렸지만 이내 미친 듯이 웃으며 말에서 뛰어내려 몸을 굴렸다. 날램이가 있는 힘을 다해 몸을 굴리며 달리자 놀랍게도 말이 달리는 속도만큼의 속력이 났다. 날램이는 몸을 옆으로 무섭게 돌리면서도 어지럽지도 않은 듯, 치우천에게 외쳤다. “무슨 말을 전하면 되는 거냐?” 치우천은 날램이의 용기에 감동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다급하게 말했다. “소 떼를 오른쪽으로 밀 거다!” 급박한 상황이라 더 이상 말할 시간이 없었다. 그때 활을 쏘아 날램이 주변의 늑대를 떨구던 삼이 소리쳤다. “제길! 그대로라면 금방 죽는다!” 삼이 갑자기 활을 등에 돌려 메고 말을 달려 날램이 곁으로 오더니 뭔가를 날램이에게 획 던져주었다. 정신없이 달리던 날램이가 깜짝 놀라 받아들었는데, 그것은 기름을 담은 가죽주머니였다. 삼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이봐! 날램이! 날 믿나?” 날램이는 평소 삼과 가장 친하게 지낸 터였다. “그래!” “아무리 아파도 참을 수 있겠는가!” “까짓거 아픈 게 뭐냐!” “그럼 그걸 등에 부어라!” 날램이가 획 등에 기름을 붓자 삼은 늑대를 쫓으려고 피웠던 불을 날램이에게 갖다댔다. 사람들은 그 모습에 기가 질려 할말을 잊었다. 날램이는 다시 미친 듯이 웃으며 외쳤다. “고맙다! 삼!” 삼은 날램이가 늑대들에게 물어뜯기는 것을 막으려고 아예 날램이의 몸에 불을 붙인 것이다. 실로 무모한 방법이며 자칫하면 날램이가 그대로 타죽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불붙은 자에게는 늑대가 덤벼들지 않으므로 몸이 타기 전에 날램이가 달려갈 수만 있다면 목숨을 건질 확률이 더 많다고 삼은 생각한 것이다. 대단히 무모한 모험이기는 해도 기름은 날램이의 등에 부었으므로 화상을 입어도 그리 위험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날램이는 불이 붙자마자 더욱 속도를 내어 앞으로 달려갔다. 더구나 날램이는 몸을 옆으로 굴리며 달려 불이 등에만 붙어 있다고 해도 불길이 빙빙 무섭게 맴돌아 늑대들은 전혀 다가오지 못했다. 하지만 불꼬리에 스쳐 날램이의 머리와 눈썹이 다 그슬려버렸다. 몇 마리 늑대가 그래도 달려들려 했지만 거서기와 마파람, 질쾌 등이 돌과 화살을 쏘아 일일이 죽여 버렸다. 치우천은 날램이의 몸에 불이 붙자 참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여 몸을 부르르 떨었으나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날램이가 저렇게까지 희생하는데 실패할 수는 없다!’ 마침내 날램이가 불을 붙여 달려가는 바람에 늑대들이 모두 밀려나서 소 떼 옆으로 붙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치우천은 목이 쉬도록 외쳤다. “길을 벌려라! 길을 벌려!” 늑대들은 정말로 사람이 다스리는 것처럼, 일단 날램이가 지나가자 다시 소 떼와의 간격을 좁히려고 우르르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치우천의 재빠른 지시로 모든 사람들이 소 례와 늑대 사이로 파고든 다음이었다. 날램이는 미친 듯 달려서 양역 무리와 마침내 합류했다. 사울아비 중에 힘센 자가 날램이를 재빨리 끌어올려 그의 등에 붙은 불을 껐다. 날램이는 “오른쪽.........”이라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의식을 잃고 말았다. 날램이의 희생에 사울아비들은 모두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분발했다. 노련한 양역이 서둘러 지시를 내렸다. “오른쪽 사울아비는 가운데로, 가운데는 왼쪽으로, 왼쪽은 저들을 도와라! 모두들 움직여!” 사울아비들의 대형이 꿈틀거리며 위치가 변하자 왼쪽을 막고 있던 수십 명의 사울아비들이 소 떼와 늑대 무리 사이로 합류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사울아비들 또한 치우천 일행과 함께 서로 반대편에서 죽을 힘을 다해 달려드는 늑대들과 혈전을 벌였다. 늑대들의 숫자는 끝도 없는 것 같았다. 보통 한 사람당 십여 마리의 늑대와 싸워야 했으며, 이제는 활이나 돌을 던질 겨를도 없이 모두가 칼이나 곤봉, 도끼를 휘두르며 늑대의 이빨과 발톱에 맞서 피를 뿌리고 있었다. 늑대들을 죽여도 곧 다른 늑대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들었기 때문에 싸움은 더욱 처절했다. 견디지 못하여 말에서 떨어진 사울아비들은 그 즉시 더 많은 늑대들의 이빨에 갈가리 찢겨졌고, 피냄새를 맡은 말들조차도 흥분하여 늑대를 밟아죽이고 발로 차버리곤 했다. “비켜어어!” 처절한 싸움이 벌어지는 그 와중에 엄청나게 커다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마침내 치우비와 쇠돌이가 거대한 가시덤불을 통째로 들고 달려온 것이다. 쇠돌이의 말이 구름만큼 좋지 못하여 조금 늦어진 것이다. 그리고 말을 잘 달리는 세 마리의 도깨비가 먼저 가시덤불들을 들고 와서 치열하게 싸우는 사울아비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붉은 머리 애꾸 도깨비와 금발 도깨비 그리고 눈매가 날카로운 갈색 머리 도깨비였다. 그들은 가죽도 두르지 않고 가시덤불을 들고 있어서 온몸이 가시에 찔려 피투성이였다. 그러나 극히 용감하고 굳센 그들은 몸을 전혀 사리지 않고 가시덤불을 소 떼에게 들이대었다. 가시에 찔린 소들은 ‘음매음매’울부짖으며 따가운 가시에서 비켜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치우비는 쇠돌이와 함께 크게 고함을 지르며 말 속도를 조절하고는 애써서 가시덤불을 일단 가로로 펴들었다. “비키라구!” 정신없이 늑대들과 싸우던 사울아비들은 치우비의 고함소리에 급히 말을 수습해 앞으로 달려 나아갔다. 그 뒤를 늑대들이 달려들어 메우려고 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거대한 가시덤불이 밀고 들어왔다. 늑대들은 가시덤불에 걸치고 찔려 피를 흘리며 튀어 올랐다.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 덤불의 가시들은 아주 바싹 말라 단단하고 날카로워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무기가 되어 있었다. 늑대는 사람보다 몸집이 작은 편이라 가시에 찔렸을 때 상처가 사람보다 깊었다. 더구나 세 마리의 늑대가 자기들끼리 밀려 가시에 박혀 피를 줄줄 흘리며 계속 울부짖자 흉악한 늑대들도 섬뜩했는지 저절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치우비와 쇠돌이는 늑대들을 치우고는 곧바로 방향을 돌렸다. 쇠돌이가 안쪽, 치우비가 바깥쪽에 있었는데 치우 비가 구름의 배를 박차서 속도를 올리자 점점 가시덤불이 소 떼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보기엔 간단한 것 같지만, 말을 탄 두 사람이 거대한 가시덤불을 움직이는 것이라 실제로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 지극히 어려웠다. 모든 사울아비들은 늑대와 싸우면서도 이 가시덤불이 모두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생각에 소리 높여 응원하고 격려했다. 치우천은 아예 위험을 무릅쓰고 말 등에서 일어서서 외쳐댔다. 마파람이 치우천의 다리를 꽉 잡고 말을 달렸으나 여차하면 떨어질 수 있는 위험한 자세였다. 그러나 치우천은 그런 것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비야 조금 더! 쇠돌이! 조금 더 앞으로 나와! 소 떼의 앞을 막아 밀어붙여야 한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때 한웅의 가마 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벼랑이다!” 모든 사울아비들이 비명을 질렀다. 달리다가 하필 벼랑가로 몰린 것이다. 이제 한웅의 가마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모두가 너무 당황하고 낙담하여 몇 사람의 사울아비가 멍하니 있다가 늑대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래도 치우천은 전혀 물러서지 않고 침착하게 외쳤다. “양역! 양역! 비를 도와!” 양역은 곧 소리를 쳤다. “가자!” 치우비와 쇠돌이는 그때 막 자리를 잡고 가시덤불을 밀어 소 떼의 방향을 바꾸려 하고 있었으나 힘이 모자랐다. 두 사람의 힘은 엄청났지만 두 사람 모두 말을 타고 있었으므로 힘을 있는 대로 쓸 수 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양역이 지휘하는 사울아비들 수십 명이 달려들자 대번에 형세가 바뀌었다. 사울아비들이 몽둥이와 도끼날 등으로 가시덤불을 밀어서 치우비와 쇠돌이를 도왔다. 소 떼들은 가시에 찔리고 밀려서 비명을 지르면서 방향을 틀었고 일단 밀리기 시작하자 서로 비틀거리며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뒤에서 밀어닥치는 소들은 앞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으므로 밀어붙이는 힘이 엄청났다. 치우비와 쇠돌이가 아무리 힘이 세고 사울아비 수십 명이 합세했다 해도 천 마리의 소가 미는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천천히 밀리면서 조금씩 속도를 늦추려고 했으나 조금 밀리고 나자 이제는 한웅의 가마와 얼마 남지 않은 거리에까지 밀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곳은 바로 벼랑이라 이대로 더 밀린다면 모두가 벼랑으로 떨어져 죽을 판이었다. 치우천이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모두 도와라!” 돌연 한웅의 가마 안에서 한 사람이 뛰쳐나왔다. 바로 풍백 비렴이었다. 비렴은 이미 여기저기 상처를 입어 힘겨워 보였지만 있는 힘껏 커다랗게 외쳤다. “모두 달라붙어라!” 안 그래도 위기일발의 상황인지라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가시덤불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가시덤불이 워낙 날카로워 손으로 직접 밀 수가 없었다. 미처 가죽을 손에 감고 할 겨를도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급한 나머지 치우비와 쇠돌이의 등을 밀었다. 힘이 강한 두 사람은 사람들이 미는 힘을 받고도 눌리지 않고 버텨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가시에 박혀 죽거나 눌려 죽었을 것이다. 치우비의 바로 뒤를 밀던 사람이 힘이 빠져 중간에 끼어 비명을 질렀어도 하도 위급한 상황인지라 사람들은 그냥 열심히 밀어만 대었다. 그때 양쪽에서 힘을 받은 가시덤불이 가운데가 부러지려 하자 비렴이 호통을 쳤다. 몸에 기운을 돋우는지 비렴의 얼굴이 붉게, 푸르게 두어 번 재빨리 변함과 동시에 비렴은 등으로 가시덤불을 밀어냈다. 사람들이 머뭇거리자 비렴이 즉시 외쳤다. “어서 내 몸을 밀어라!” 비렴은 풍백의 술수를 써서 몸을 강철처럼 만든 상태라 가시가 몸을 뚫지 못했다. 세 군데에서 수백 명이 힘을 합해 밀어내자 마침내 소 떼의 방향이 완전히 틀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치우천과 동료들은 어지러이 달려드는 늑대들과 사투를 벌였다. 그들은 이제 말조차 버리고 땅에 내려서 늑대들과 싸웠다. 치우천마저도 칼을 빼들고 미친 듯 휘두르는 판이었고, 도깨비들은 가시덤불을 무기처럼 휘두르며 역시 필사적으로 싸워 늑대들이 가시덤불을 미는 사람들에게로 다가가지 못하도록 했다. 소 떼들의 방향이 일단 틀어지자 다른 소들도 무의식적으로 앞의 소 떼들에 맞춰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 줄줄이 뒤의 소들에게 밀려 절벽으로 떨어져 내렸고 가시덤불에 가해지는 힘도 점점 줄어 들어갔다. 조금 더 버티자 천 마리가 넘던 소 떼는 모두 벼랑으로 떨어져 죽어버렸다. 사람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시덤불더미를 내려놓았으나 사태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수천 마리의 늑대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소 떼가 없어지자 늑대들은 소 떼의 뒤를 이어 한웅 일행을 포위하며 다가들었다. 늑대들은 소보다는 영리하고 날렵하여 가시덤불로 막으려 해도 이를 피하거나 뛰어넘을 터였다. 치우천 등 늑대와 싸우던 이들은 이미 수많은 늑대들과 싸우느라 몸을 뺄 수 없었고, 가시덤불을 밀어대던 사람들은 너무 힘을 써서 맥이 풀렸을 뿐 아니라 무기마저도 땅에 버린 상태라 눈 깜짝할 사이에 몰살당할 것 같았다. “모두 물러서라!” 비렴이 갑자기 몸을 빼어 솟구쳤다. 그러고는 마치 새처럼 허공에서 몇 바퀴를 돌고는 늑대들 앞을 가로막고 내려섰다. 사실 비렴을 비롯한 삼사는 처음 늑대와 소 떼를 만났을 때 있는 힘을 다해 어떻게든 그들의 힘으로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삼사가 능력이 뛰어나도 그토록 많은 짐승의 무리를 당해낼 수 없었다. 더구나 운사 신지울태는 번개범과 싸우다가 너무 무리하여 기운이 빠져 곧 의식을 잃었다. 신지울태가 글자주술만 제대로 썼어도 이런 위기는 없었을 터였다. 병예와 비렴이 있는 힘을 다해 싸워 늑대 백여 마리와 소 수십 마리를 죽였지만 바다에 돌 던지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비렴과 병예는 많은 상처를 입었고 나이 많은 병예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다. 비렴도 더는 버틸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도망치다가 때마침 양역이 이끄는 구원군을 만나 간신히 살아난 것이다. 그 때문에 비렴은 이미 극도로 지쳐 있었다. 그러나 당당한 풍백으로서 이런 짐승들에게 굴복할 수 없다고 여기고 비렴이 몸을 추슬러 혼자 나선 것이다. 아무튼 치우비와 쇠돌이, 양역 등 십여 명이 그 뒤를 막아섰다. 어느새 치우천과 부루벼락 등도 한웅의 가마를 막아서듯 물러섰고 수천 마리의 늑대들이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너희들, 겁나느냐?” 비렴이 목청을 돋워 묻자 치우비가 가장 먼저 당당하게 외쳤다. “저따위 짐승들에게 당할 수 없습니다!” 비렴이 껄껄 웃었다. “그렇다. 말 잘했다.” 어느덧 늑대들은 사람들 주위를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사람들의 숫자는 이미 많이 죽음을 당해 백여 명뿐이었고 늑대는 이천 마리도 넘었다. 치우천은 주위를 둘러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물론 단순하게 생각하면 한 사람이 스무 마리를 상대하는 셈이다. 아우나 몇몇 사람에겐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강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백 명으로 이천 마리 늑대를 상대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 수도 있다. 우리가 무리를 잘 짓고, 어떻게 싸울지 잘 상의한다면 더 많은 늑대도 죽일 수 있지만 지금 우리는 막 죽다 살아난 꼴이라 엉망진창이다. 방법이 없다. 오늘 우리, 이렇게 죽고야 말 것인가.’ 치우천은 암담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대뜸 비렴이 비장하게 외쳤다. “나는 지금부터 미얄중중기를 쓴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로 다가오지 마라!” 그때 한웅의 가마가 열리면서 사와라 한웅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풍백! 안 되오! 풍백!” 그러나 비렴은 굳건히 대답했다. “한웅께옵서는 반드시 무사하시옵소서.” 치우비나 치우천 등은 미얄중중기가 무엇인지 궁금해 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그럴 여유조차 주지 않고 늑대 무리들이 어지러이 달려들었다. 순간, 비렴의 얼굴이 빛을 내는 것처럼 확 밝아지면서 양손에 일렁거리는 빛 무리가 감돌았다 그 순간........ “쏴라!” 뒤에서 커다란 고함소리가 들리면서 갑자기 수백 개의 화살이 무서운 기세로 날아들었다. 그 화살들은 마치 자로 잰 것처럼 비렴의 바로 앞에 우르르 날아와, 달려들던 늑대 수십 마리를 꿰어 죽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올렸다. “치우우레님이다!” 이어서 다시 수백 개의 화살이 날아왔다. 늑대들은 워낙 빽빽하게 모여 있었기 때문에 삽시간에 백 마리도 넘게 죽음을 당했고 뒤에서 화살이 날아오자 안절부절못했다. 그러자 비렴의 빛나는 얼굴과 손의 빛 무리가 삽시간에 사라지며 비렴의 얼굴에 기쁜 미소가 떠올랐다. “모두 무기를 집어라!” 그사이 한 번 더 화살이 날아와 다시 백여 마리의 늑대들이 죽었다. 그리고 곧 ‘와’ 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굳건한 대오를 이룬 사울아비들이 창을 들고 돌격해왔다. 그 맨 앞에는 텁부리 치우우레가 무시무시한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오늘 저녁은 늑대고기다!” 그 사이 이편의 백여 명의 사울아비들도 대부분 무기를 주워들고 줄을 지었다. 일단 무기를 들고 대열이 갖추어지면 늑대 따위는 겁낼 필요가 없다. 사울아비들은 모두 용감하게 소리를 지르며 닥치는 대로 늑대들을 죽였다. 더구나 치우우레가 부하들을 지휘하는 솜씨는 실로 대단하여 질서정연하게 늑대들을 포위했다. 번개범을 만나 죽은 백여 명과 양역이 데리고 간 이백여 명, 그리고 다치거나 말을 잃은 이백여 명을 제외하더라도 치우우레가 몰고 온 사울아비들은 오백 명에 달했다. 사울아비들은 분하고 원통하던 참이라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늑대들을 죽여 이천 마리가 넘던 늑대들은 삽시간에 거의 다 죽음을 당했다. 피가 냇물처럼 흘렀고 역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도망친 늑대는 겨우 서른 마리도 채 안 될 정도였고, 이때 다친 사울아비는 쉰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사울아비들은 죽음에서 살아났고, 비록 상대가 사람이 아닌 늑대들이었지만 크게 이긴 것을 기뻐하여 환호성을 올리고 소리를 질러댔다. 비렴은 극한 상황에서 이렇듯 벗어난 것이 너무 기뻐 치우우레의 손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사와라 한웅도 가마에서 나와 친히 치우우레를 치하했다. 그러나 치우우레는 침통한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못나서 한웅님을 이토록 위험하게 했으니 백 번 죽어도 마땅하옵니다.” 사와라 한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인자하게 말했다. “자네가 나를 구해준 것인데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그때 피투성이가 된 병예가 비틀거리며 가마에서 내려와 한마디 거들었다. “정말...... 정말......오늘은 위험했사옵니다......그 젊은이들이 아니었으면 정말......”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리자 사와라 한웅도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맞섰던 신수는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양역이 사울아비를 몰고 오지 않았다면 사와라 한웅은 소에 짓밟히거나 늑대밥이 되었을 것이다. 그 다음 치우천과 치우비 등의 활약이 아니었으면 역시 소에 밟히거나 벼랑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맞이한 셈이라 사와라 한웅도 침착할 수가 없었다. 싸움터에 나간 것도 아닌데, 이런 흉악한 꼴을 당한 한웅은 역대 한웅 중에서 자기가 처음인 것 같았다. 사와라 한웅이 침울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부족하여 하늘이 벌을 내리시는 것인가 보오. 신수에 짐승들까지 나를 보고 덤비는 것을 보니......” 치우천은 늑대들의 피로 범벅이 되어 아예 땅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누군가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바로 치우비였다. “형님, 괜찮아?” 치우비도 말하기가 무섭게 치우천의 옆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천하장사인 치우비도 극도로 지친 것이다. 치우천이 중얼거렸다. “아우야, 잘했다. 정말 잘했어......” “날램이는 질쾌가 돌보고 있어. 다행히 죽진 않을 거야...... 벗들 중에 죽은 이는 없어. 도깨비들도 그렇고 정말 다행이야.” 치우천은 너무도 지치고 피곤이 몰려와 잠시 날램이에 대해 잊고 있었는데, 인정 많은 치우비는 그 와중에도 날램이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치우천은 좀 부끄럽기도 하고, 아우가 대견스럽기도 했다. 치우비가 피식 웃었다. “형님도 잘하던데?” “뭘 말이냐?” “열세 마리나 죽였잖아.” 늑대들과의 혈전에서 치우천은 칼을 휘둘러 늑대 열세 마리를 죽였다. 비록 그동안 힘이 없다는 핑계로 싸우려 들지 않았지만, 치우천이 배운 사울아비로서의 기예도 그리 약한 것은 아니었다. 보통 사울아비 정도의 물은 해낸 것이다. 사실 제정신이 아니었고 다시 하라면 할 자신이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나름대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던지라 치우천이 씩 웃으며 되받았다. “너 이 녀석....... 그걸 어떻게......” 그러다가 치우천은 눈물이 핑 돌았다. ‘이 녀석은 아까 가시덤불을 들고 싸우는 와중에도 나를 계속 보고 있었구나! 그렇지 않으면 내가 열세 마리를 죽인 것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아우 자신도 그렇게 위급한 처지에 놓였음에도 형을 걱정하여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니 치우천의 감격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나도 아우를 생각하는 마음은 누구 못지않다만 이 녀석이 나보다 더 마음씀씀이가 깊구나. 정말....... 정말.......’ 치우천은 눈을 감고 감정을 감추느라 짐짓 목소리를 높였다. “아우야! 괜찮으면 나와 같이 가자” “어딜?” “분명 그 늑대와 소는 사람이 주술로 부린 것이다. 안 그러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놈을 잡아야......” 그때 차분하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치우천의 귀에 들렸다. “이미 늦었습니다.” 바로 맥달의 목소리였다. 치우천이 몸을 벌떡 일으켰고 치우비도 급히 일어섰다. 맥달은 말을 탄 채 조용히 웃으며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치우천은 맥달이 다가와 말을 건네니 반갑기도 했지만,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 말하는 것을 듣자 이상하게 또 심사가 꼬이는 듯했다. 치우천은 부러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 늦었다는 겁니까?” 맥달이 생긋 웃으며 되받았다. “늑대와 소가 다 죽었는데, 부리던 사람이 무엇 하러 남아 있겠습니까?” 치우천이 대답하지 않자 맥달은 다시 곱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 말을 잊지 않아주셔서 기쁩니다.” 치우천은 맥달이 구하든 잡든, 둘을 쫓지 말고 하나만 노리라고 하던 말을 두고 한 소리란 것을 알았다. 만약 아까 섣불리 우두머리를 쫓았다면 시간이 늦어졌을 것이고, 한웅의 가마는 벼랑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로 아찔했다. 순간치우천은 한줄기 의심이 솟구쳐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늑대와 소를 사람이 부린 것을 어찌 아신 겁니까?” 치우천은 맥달에게 의심이 가자자신도 모르게 말꼬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맥달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천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아는 것을 어찌 천님이 모르시겠습니까?” “맥달님, 그대는 우리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말 마음이 놓이지 않는군요. 한웅께서 위험에 빠진 것을 어찌 아신 것입니까? 정말 당신은 이번 일에 손을 쓴 것이 없단 말입니까? 직접 손댄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 모든 것을 다 안단 말입니까?” 치우천은 단숨에 맥달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치우비는 그러는 형을 보자 당황스러웠다. 이 선녀 같고, 고귀하기 이를 데 없으며 자신들에게 이렇듯 친근하게 대하는 여인에게 치우천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맥달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더욱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치우천은 아무래도 맥달이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안 그러면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지리란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이 여자를 믿을 수 없다. 이 여자는 신수도 타고 다니는데, 그깟 늑대나 소를 못 부리겠는가? 더구나 한웅님이 어찌 쫓길지,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맞다. 그러고 보니 둘 중 하나만 택하라 했지만 그것은 분명 한웅님만 구하고 주술사는 찾지 말라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그게 자기 자신이라 찾지 말라고 한 것 아니겠는가? 정말 수상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떠올랐다. ‘그러나 만약 한웅님을 해치려 했다면 왜 우리를 구한 것인가? 우리를 서둘러 보내지 않고, 나에게 귀띔조차 하지 않았다면 한웅님은 그만 안파견 한님 곁으로 가셨을 것 아닌가? 한웅님을 해치려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맥달에게 향해 있었고, 그 눈에는 경탄과 존경의 빛이 완연했다. 치우천은 다시 생각했다 ‘지금 섣불리 이 여자를 건드릴 수 없겠구나. 그러나 내 반드시 이 여자의 꿍꿍이속을 밝혀내겠다.’ 맥달은 치우천을 잠잠히 쳐다보며 웃었다. 맥달의 시선은 치우천의 목에 머물러 있었다. 치우천이 의아하여 무심코 손을 올려보니, 작은 목걸이가 잡혔다. 치우천은 그것이 어디서 났는지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좌우간 항상 목에 걸고 다녔던 것이다. 치우천은 맥달이 목걸이를 쳐다보자 의아하여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러자 맥달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아....... 아닙니다. 그것은....... 음, 그것은 어디서 나셨습니까?” 치우천은 솔직히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얻은 것을 왜 모르십니까?” “어디서 얻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치우천은 맥달이 왜 이런 작고 값어치도 없는 것에 관심을 보이는지 이해가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맥달에게 줄 마음도 없어 치우천은 목걸이를 보이지 않게 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맥달이 웃으며 물었다. “소중한 것입니까?” “제겐 소중한 것입니다.” “무슨 사연이 있는 물건입니까?” “아뇨 아니, 잘 모릅니다.” “그런데 왜 소중합니까?” 치우천은 평소답지 않게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도 모릅니다.” 기분이 야릇하고 무엇인가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맥달은 다소 초조한 눈빛으로 그런 치우천을 바라보았고 치우비는 맥달과 형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서 번갈아 두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치우천의 아물아물한 기억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듯했다. “이건.......” 그때 비렴의 목소리가 들리자 치우천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치우천! 치우비! 한웅님께서 찾으신다!” 맥달이 치우천, 치우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치우우레가 달려와 맥달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맥달님, 한웅님을 뵈시지요” 처음 보는 사람을 한웅과 인사시키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맥달은 워낙 엄청난 위기에서 자신들을 구해주었고, 또 신수를 타고 온 점 등으로 미루어 분명 선인이거나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그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맥달 역시 사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한웅님을 뵙게 되다니, 정말 영광이옵니다.” 치우우레는 치우천과 치우비, 그리고 맥달과 함께 사와라 한웅을 만나러 갔다. 사와라 한웅은 죽음 직전에 살아나서 희색이 만면했다. 방금 사와라 한웅은 양역을 칭찬하고 양역을 한 계급 올려서 사울아비 작은 스승으로 임명한 바 있다. 양역은 젊은 사울아비들 중에서 통솔력이 뛰어나 서른 명의 사울아비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이제 백 명의 사울아비를 지휘하는 위치가 된 것이다. 한웅 앞에는 함께 공을 세웠던 쇠돌이, 부루벼락, 거서기, 삼, 질쾌, 마파람등이 서 있었다. 날램이는 화상이 심하여 이 자리에 있지 않았고 치베는 주신 사람이 아니라서 뒷줄에 서 있었다. 치베는 나서지 않으려 했으나 사와라 한웅이 서 있으라 직접 명한 것이다. 그러나 세 명의 도깨비들은 인간으로 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산 귀퉁이 그늘에 주저앉아 있었다. 치우천과 치우비가 다가오자 사와라 한웅은 연신 웃으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아, 혼네하고 나리로구나.” 그러자 비렴이 조용히 속삭였다. “희네와 나래이옵니다. 지금은 치우천, 치우비라 부르시는 것이 옳을 것이옵니다.” “아, 그래. 치우천, 치우비 그랬지 너희 공이 몹시 크구나.” 치우천과 치우비가 무릎을 꿇었다. “다 안파견 한님의 덕분이십니다.” 이내 사와라 한웅은 맥달을 바라보며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맥달선인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맥달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저는 선인이 되지 못합니다. 한낱 나이 어린 계집일 뿐이니 한웅께옵서는 말씀을 낮추소서.” 사와라 한웅이 호탕하게 웃었다. “선인이 아니시라면 어떻게 신수를 타고 다니시겠소.” 그 말에 맥달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앞으로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무슨 말씀이시오?” “맥과 저는 헤어졌사옵니다. 저는 이제 신시로 가야 하옵니다.” “허, 맥달님이 신시로 오신다면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소. 그런데 신시로 가시는 까닭은 무엇이오?” “스승님의 명이시옵니다.” “스승님은 뉘시오?” “스승님께서는.......” 맥달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조용히 말했다. “.......자부선인이라 불리십니다.” ‘자부선인’이란 말에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자부선인은 주신이 생길 때부터 안파견 한님에게 도움을 주셨던 대선인 중의 대선인이었다. 그런데 이 아리땁고 젊은 여인이 자부선인의 제자란 말인가?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했다. ‘자부선인의 제자라니, 엄청나구나. 허나 거짓말은 아닐 게야. 이 여자는 신수를 부리며 타고 다녔고, 귀신같이 앞일을 알아서 한웅님을 구해냈으니 그 정도는 되어야 말이 된다. 정말 대단한 여자로다.’ 사와라 한웅은 잠시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듯 웃었다. ‘자부선인이 이렇듯 아랫사람을 친히 보내주시다니. 이제 주신의 앞날은 탁 트일 것이며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경사로구나, 경사!’ 그런 생각을 하며 사와라 한웅이 맥달에게 말했다. “그러하다면 당연히 맥달님을 모시겠소. 우리가 신시에 돌아가는 대로 곧 큰 집을 지을 것이며.......” 그러자 맥달은 살짝 웃으며 사와라 한웅의 말을 막았다. “그러실 필요 없사옵니다. 제가 알아서 있을 곳을 마련하도록 하겠나이다.” “신시에 아는 분이라도 있소?” 그 물음에 맥달은 그저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비렴이 물었다. “맥달님. 이야기를 듣자 하니 치우천과 치우비 등을 맥달님이 가라 이르셨다고 하던데, 맥달님은 어떻게 한웅님이 위험에 빠졌는지 아셨소이까?” 비렴도 빈틈없는 사람이라, 비록 맥달이 선인 같고 우아하기 짝이 없어 경탄할 만하지만, 그것에만 흘리지 않고 치우천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점을 쳐서 앞날을 조금 볼 줄 아오이다.” 그 말에 비렴, 사와라 한웅, 치우천 등은 똑같이 ‘오오’하며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사실 점을 쳐서 미래를 짚어내는 일은 어느 부족이나 행하는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 큰 비나 홍수, 가뭄 같은 큰일을 예견하는 것이며, 그나마도 틀리는 경우가 맞는 경우보다 많았다. 허나 맥달은 한웅의 움직임 같은 세세한 일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맞혔으니 실로 믿기 힘든 일이었다. 치우천은 아무래도 맥달이 의심스러웠다. 비렴은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어서 약간 갈팡질팡했으며, 사와라 한웅과 다른 사람들은 맥달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믿었다. 사와라 한웅이 한동안 수염을 쓰다듬다가 물었다. “그렇게 자세한 것을 내다보실 수 있다니, 자부선인님께 배우신 것이오?” 맥달은 역시 살풋 미소만 지었을 뿐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으나 모든 사람은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치우천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인상을 쓴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렇게 자세히 미래를 알아내는 것은 아무래도 믿을 수 없었다. 맥달은 생각에 잠겨 있는 치우천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한 가지 본보기를 보이겠나이다. 가령 여기 치우천님께서는 내년 이맘때쯤 지금 생각하시는 모든 궁금증이 풀릴 것이옵니다.” 치우천은 그 말을 듣고 ‘허’ 하며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러면 내년까지는 궁금증이 풀리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러자 사와라 한웅이 물었다. “치우천, 넌 무엇이 궁금한 게냐?” 맥달이 살짝 웃으며 끼어들었다. “사람의 속마음이옵니다. 한웅께옵서는 굳이 묻지 마소서.” “한 가지만 더 보여주실 수 있겠소?” 비렴이 청하자 맥달은 다시 빙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한 사람을 가리켰다. 그 사람은 바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맥달을 홀린 듯 바라보는 치우바람이었다. 맥달의 가녀리고 섬세한 손가락이 자신을 향하자 치우바람은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춤이라도 출 것 같은 황홀한 표정이 되었다. 맥달은 살짝 웃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분은 잠시 뒤에 이 자리에서 칼에 맞아 몹시 다칠 것이옵니다.” 비렴과 사와라 한웅은 의아했다. 이제 위험한 일은 다 지나갔는데 치우바람이 왜, 그것도 칼에 맞아 다친단 말인가? 더구나 치우바람은 수습하는 일을 하고 있지도 않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아무 말도 않고 묵묵히 지켜보던 치우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치우바람 녀석은 못되었지만 힘도 세고 재주도 많은데다 요령이 몹시 좋은 녀석이라 누가 그 녀석을 다치게 하려 해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이 자리에서는 누구도 그를 다치게 할 수도 없고 다치게 하지도 않을 텐데....... 한웅님 앞에서 누가 칼을 뽑는단 말이냐? 설마 맥달님이 직접 치우바람을 칼로 쳐서 다치게 만들려는 것은 아니겠지?’ 비렴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면 또 누군가가 우리를 습격한단 말씀이시오?” 맥달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옵니다.” “그러면 어찌.......” 비렴은 더 말하려다가 그렇게 되면 맥달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 되어 실례가 되므로 입을 다물었다. 맥달은 여전히 조용히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쇤네의 재주가 모자라 그리 여러 번 앞일을 보지 못하옵니다. 하루에 세 번, 한 달에 여섯 번을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오늘은 다 하였사오니 한웅님께서는 용서해주시옵소서.” 사와라 한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하루에 세 번이라니? 음, 아까 나를 구하러 간 것과 치우천에게 말한 것, 치우바람이 다친다는 것, 이 세 가지구나. 그런데 한 달에 여섯 번이라 했으니 이제 이번 달에는 세 번밖에 더 물어볼 수가 없구나. 이런 재주를 가진 여인은 세상에 없을 것이니 신중하게 정해 앞날을 열어야겠다.’ 사와라 한웅은 부루버들을 불러 직접 맥달을 대접하라고 일렀다. 부루버들은 비록 한웅의 작은마누라였지만 그래도 한웅의 안사람이니 이는 맥달을 지극히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마음의 표시였다. 원래는 운사 신지울태에게 명하는 것이 맞을 테지만, 신지울태는 엄청난 주술의 후유증으로 기절한 채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부루버들이 사와라 한웅의 명을 받고 나오자 그 뒤를 소녀가 따라 나왔다. 이 두 여인도 한웅의 가마 안에서 몹시 마음고생을 하던 참이라 아직도 안색이 해쓱했다. 부루버들은 고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맥달을 맞이했는데, 평소와는 달리 부루버들의 모질고 거친 성격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꽃과 같이 화사했다. 반면 소녀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치우천을 발견하고는 멍하니 치우천만 쳐다보았다. 소녀의 시선을 느끼자 치우천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여자, 눈치도 없이 왜 저러지? 누가 보고 흉을 보면 어쩌려고 저렇게 티를 낼까.......’ 그때 사와라 한웅은 치우천을 불러 공이 크다며 치하해주었다. 그 다음은 부루벼락, 이어서 사울아비들을 차례대로 치하했고 계급을 올려주었다. 치우천은 소녀의 눈빛이 따가워 급히 뒤로 물러서며 소녀의 눈빛을 피하려고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저만치에서 검은 피부의 도깨비가 울라트를 말에 태운 채 말을 끌고 오는 것이 보였다. 치우천은 핑계거리가 생기자 곧장 그리로 갔다. 그늘에 앉아 있던 도깨비들도 반가운지 슬며시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울라트는 치우천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말했다 “웬 나쁜 놈이 있었어요! 마냥이 창을 던져 쫓아버렸지만요!” “나쁜 놈이라니?” “커다란 나뭇잎으로 얼굴을 가린 놈이에요! 늑대들을 데리고 있었어요! 그놈이 늑대들을 부린 게 틀림없어요!” “좀 자세히 말해주겠니?” 울라트는 흥분하여 두서없이 이야기를 했다 울라트는 말을 못 타는 검은 도깨비와 함께 치우천 등이 늑대들과 싸우는 것을 손에 땀을 쥐며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소 떼와 늑대를 모두 물리치는 것을 보고는 환호성을 지르며 그리로 달려가려 하는데, 웬 수상한 사람이 획 도망치는 것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늑대 두 마리를 앞뒤에 데리고 있었으며, 커다란 나뭇잎으로 얼굴을 가리고 옷에도 온통 풀잎을 꽃아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늑대를 데리고 있는 것이 수상하여 울라트가 소리를 질렀으나 그 자는 들킨 것을 알자 도리어 두 마리의 늑대를 시켜 울라트를 해치려했다. 그런데 검은 도깨비가 끌던 말은 혼란 중에 주운 것이지만 사울아비가 타던 말이라 말에는 두 자루의 긴 창이 꽂혀 있었고 한 자루의 곤봉도 있었다. 검은 도깨비는 즉시 말에서 두 자루의 창을 꺼내 획획 던졌는데, 그 창은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두 마리의 늑대를 꿰뚫고 땅에 박혔다. 그리고 검은 도깨비가 곤봉을 휘두르며 달려들자 그 수상한 자는 급히 숲 속으로 몸을 숨겨 도망쳐 버렸다. 검은 도깨비는 울라트를 놓아둘 수 없어서 뒤를 쫓지 못했다는 것이다. 치우천은 이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맥달이 시킨 것이 아니었구나. 그렇다면 맥달은 정말 놀라운 재주를 지녔구나. 앞일을 모조리 알 수 있다니, 원 참. 그나저나 그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차피 이제는 멀리 갔을 테니 천천히 알아보는 것이 낫겠구나.’ 울라트는 치우천이 부끄러운 표정을 짓자 이상하여 물어보았다. “천 오빠, 왜 그러나요?” “아니다. 그런데 마냥이 누구냐? 이 도깨비 이름이냐?” “맞아요.” “이름을 어떻게 알았니?” 울라트는 으쓱해졌다. 울라트는 여행하던 요 며칠 동안 도깨비들에게 말을 가르쳐서, 이제 도깨비들의 이름 정도는 알게 되었던 것이다. 치우천은 반가워서 검은 도깨비의 어깨를 한 번 치고는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치우천!” 그러자 검은 도깨비, 마냥은 검은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더니 자신을 가리켰다. 사실은 그리 횐 이가 아니었지만 얼굴이 워낙 새까만 탓에 이가 눈부실 정도로 하얘 보였다. “마냥!” 치우천은 이제 도깨비들과 말이 통하게 되자 기뻤다. “그래, 반갑다. 마냥.” “치우천! 치우천!” 마냥은 다른 말은 모르는 듯, 그저 치우천의 이름을 부르며 웃었다. 어느새 붉은 머리의 애꾸 도깨비가 다가와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레이미!” 혀를 굴리는 듯한 억센 발음이라 치우천은 잘 알아듣지 못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리미?” 애꾸 도깨비는 치우천의 발음이 틀렸지만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미! 리미! 하하하!” 애꾸 도깨비는 도끼가 달린 오른손을 뻗어 치우천의 등을 가볍게 치기까지 했다. 그러자 금발머리의 험상궂은 도깨비가 자신을 가리키며 외쳤다. “게르하르트!” 치우천은 이 발음은 제대로 따라할 수가 없었다. ‘르-’자를 발음할 때 절묘하게 혀를 굴렸기 때문에 따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치우천이 그저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갈색머리의 눈매가 날카로운 도깨비가 다가와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폴리비쿠스!” 역시 이 발음도 어려워서 치우천은 따라할 수 없어 그냥 웃음으로 답할 뿐이었다. ‘도깨비들도 이름이 있었구나. 이름들이 괴상하기도 하구나. 더구나 그 개...... 뭐라는 도깨비하고 포...... 뭐라는 도깨비는 이름이 너무 어려워 안 되겠다. 이름을 새로 지어주자. 마냥과 리미는 부를 만하니 그대로 부르면 될 게고.’ 치우천이 도깨비들과 노닥거리는 동안 치우비는 약간 불안한 자세로 사와라 한웅 앞에 서 있었다. 솔직히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리며 아팠고, 아마 못 되어도 열흘은 누워 있어야 나을 것 같았지만 한웅님의 앞이라 아프단 소리도 할 수 없었다. ‘왜 나만 이리 오래 세워두는 것일까?’ 치우비는 은근히 불안했다. 그러나 사와라 한웅의 생각은 따로 있었다. 치우비의 힘이 엄청나서 대용사로 뽑힌데다가, 이번 일에도 활약이 컸으므로 치우비를 맨 마지막으로 치하하고, 높은 자리에 올려서 대장으로 삼아야겠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우선 치우비는 그 힘을 당할 자가 없었고, 태산 회의에서 대용사로 이름을 날렸으니 치우비의 이름만 들어도 적들은 기가 팍 꺾일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치우비의 차례가 오자 사와라 한웅이 소리 높여 말했다. “치우비, 네 공이 퍽 크다. 더구나 너는 이제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대용사요, 대영웅이다. 너는 이제부터 하늘군대의 사울아비 큰 스승을 맡는다.” 그 말에 모든 사람이 놀랐다. 하늘군대는 한웅 직속의, 그야말로 고르고 고른 사울아비들만 속해 있는 최고의 정예부대였다. 더구나 그 중에서도 사울아비 큰 스승은 사울아비 천 명을 지휘하는, 대단히 높은 자리였다. 주신 전체에서도 사울아비 큰 스승은 삼십 명도 채 안 되었던 것이다. 치우비의 아버지 치우우레는 사울아비 큰 스승이었다. 그러나 치우우레는 하늘군대가 아니라 보통의 사울아비들을 다스리는 큰 스승이니 졸지에 치우비는 주신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아버지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된 것이다. 치우가람과 치우바람은 누구보다 출세를 빨리 했다지만 아직 하늘군대의 작은 스승들이었다. 치우비는 너무도 놀라 입을 조금 벌리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비렴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 무엇 하는가? 어서 한웅님께 감사하다는 말씀 올리게!” 얼결에 치우비는 한웅에게 절을 한 번 올리고는 말을 더듬거렸다. “저...... 저는 재주가 없고 나이 어려서 그런 일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러하오니......” 그러자 사와라 한웅이 껄껄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자네가 힘들 것 같다면 형과 함께 하게 비렴, 치우천을 치우비와 함께 큰 스승으로 두게나.” 원래 사울아비 큰 스승은 혼자 모든 군대를 맡는 것이 아니라 직위가 조금 낮거나 비슷한 사람 여럿이서 군대를 맡는 경우도 있었다. 굳이 정하지 않아도 대장들끼리 알아서 서열을 정하곤 했다. 치우우레의 경우도 큰 스승인 치우벌과 부소다솔과 함께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다만 치우우레가 가장 용맹하고 지휘력이 뛰어나 치우벌과 부소다솔이 치우우레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비렴이 기분좋은 듯 크게 웃었고, 치우우레는 몸을 떨 정도로 기뻐했다. 치우천, 치우비가 동시에 사울아비 큰 스승으로 임명된 것이다. 성인식조차 제대로 끝내지 못한 어린 나이에 이렇듯 높은 자리에 임명된 예는 길고 긴 역사를 지닌 주신에서도 겨우 몇 손가락 꼽히는 일이었다. 부루벼락 등의 동료들이 환호성을 올리며 치우천을 거의 끌다시피 사와라 한웅에게로 데리고 왔다. 치우천은 도깨비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치우비와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감격에 겨웠으나 겸손하게 치우우레가 입을 열었다. “한웅께옵서 모자란 저희 자식들을 높이 보아주시는 것은 감사하옵니다만...... 아직 이 녀석들은 성인식도 끝내지 않았으며......” 사와라 한웅이 사람 좋게 껄껄 웃었다. “성인식은 내가 한 것으로 보아준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럴 수는 없사옵니다. 한웅님의 뜻은 잘 아옵니다만 시험 없이 자리를 얻을 수는 없는 법. 저는 아비로서 이놈들에게 성인식을 하도록 명하였나이다.” 비렴은 답답해 안절부절못했다. ‘이 사람은 정말 고집불통이군! 한웅님이 성인식을 한 것으로 치라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다니. 원 참......’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니 웃음도 났다. ‘하긴......그러니 믿음직한 것이지만.......’ 사와라 한웅은 기분이 좋은 터라 웃으며 말했다. “좋다, 좋아. 아비가 치르라는 성인식은 꼭 치러야지. 그러나 나는 한웅이니라. 이미 한 말을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법. 너희들은 성인식을 했건 안 했건 이제 하늘군대의 사울아비 큰 스승이다. 알겠느냐!” 마지막 말에 사와라 한웅이 힘을 주자 치우천 치우비는 더 이상 딴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사와라 한웅이 웃으며 비렴을 쳐다보았다. “비렴, 그럼 계속하게나.” 비렴은 급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자, 이제 이 둘은 하늘군대의 사울아비 큰 스승이 되었느니라. 이 둘은 부끄러움 없는 사울아비로, 다른 사울아비를 이끌어갈 만한 사람들이라 본다.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태산 회의에서 맹활약을 하여 형 치우천은 주신이 지나족을 이기게 하였으며, 아우 치우비는 대용사로 뽑혔다. 또 목숨을 돌보지 않고 용감히 싸워 한웅님과 많은 동료들을 구하였다. 이러한 큰 공은 말로 다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하늘군대의 사울아비 큰 스승에 어울린다고 나, 풍백 비렴은 생각하는 바이다. 혹여 여기 이 두 사람들이 그에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지은 죄가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제 말하라.” 이는 높은 자리에 임명될 때 치러야 하는 의식적인 절차였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사람은 죄가 없고 떳떳한 것을 으뜸으로 했다. 그러므로 허물없음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밝혀 아무도 반대하지 않아야 비로소 한웅의 명령도 효력을 갖는 것이다 물론 이런 자리에서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실 알려진 죄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위치에 뽑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주변의 모든 동료들과 사울아비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축하해 주었다. 치우천, 치우비의 이름은 너무 유명해져서 벗들 외에도 모든 주신 사울아비들의 호감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비렴이 흐뭇하게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 이제......” 그때 누군가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 사람은 죄가 있으니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너무도 뜻밖의 이의인지라 모두들 소리를 지른 사람 쪽으로 돌아보았다. 일순 모두의 안색이 변했다. 놀랍게도 그 사람은 바로 맥달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한웅의 작은마누라, 부루버들이었다. 죽음의 길로 부루버들이 이의를 제기하며 앞으로 다가오는 사이, 사와라 한웅과 비렴 등 모든 사람들은 의혹에 가득 찬 표정을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루버들이 눈짓을 한 번 하자 치우가람과 치우바람 형제가 재빨리 움직이더니 소녀에게 다가갔다. 소녀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듯, 당황해했으나 치우가람과 치우바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녀를 앞뒤로 막아서서 부루버들 옆으로 인도했다. 그때 치우비는 퍼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저 여자를 데리고 오는 것으로 보아 이건...... 이건 필경 내 문제인 것 같구나. 혹시 그날 솟대 아래에서 본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치우비는 당황했다. 슬그머니 옆으로 눈을 돌려보니 비렴과 병예도 당황한 기색으로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비렴이 슬쩍 치우비에게 눈짓을 했다. 그 눈빛이 단호하고 따뜻한 뜻을 담고 있음을 알아챈 치우비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본 사람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떤가? 나는 전혀 잘못된 행동을 한 적이 없다. 나는 형님을 구하려고 소녀와 만난 것뿐이고 그 일은 비렴님과 병예님도 알고 계신다. 있는 대로 솔직히 밝히면 한웅님께서는 어진 분이니 납득하실 것이다.’ 치우비는 당당하게 나가자고 결심했다. 한편으로는 치우바람, 가람에게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치우비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둔한 듯 행동하는 치우비이지만 실은 원래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라 모든 것을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저 나쁜 녀석들이 그때 솟대 부근에서 나와 소녀를 본 게 분명하다. 그래서 부루버들님에게 고자질했겠지. 부루버들님은 시샘이 많으니...... 이 기회에 예쁜 소녀를 한웅님 곁에서 떼어놓으려고 일을 꾸민 것이 틀림없다. 내가 거기에 말려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잘못한 일이 없다! 그러나 저 녀석들은 정말이지, 참을 수 없구나.’ 그때 치우천은 그리 밝지 않은 안색으로 굳게 입을 다문 채 말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한편 사와라 한웅은 조금 어이가 없는 듯, 부루버들과 소녀를 번갈아 보다가 몇 번 헛기침을 한 다음에야 간신히 말을 꺼냈다. “이보아라, 버들아. 너는...... 네가 무엇을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게냐?” 부루버들은 사와라 한웅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다음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쇤네, 부루버들이 말씀드리옵니다. 원래 미리 말씀드려야 할 일이었사오나 때를 얻지 못했사옵니다. 하지만 하늘군대의 사우아비 큰 스승이라 함은 실로 많은 사울아비들을 거느리는 높디높은 자리이고, 그러니만큼 한 치도 떳떳하지 못한 바가 없는 사람이 앉아야 하는 자리인 줄로 생각하옵니다.” 그 말에 사와라 한웅은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그야 당연한 일이지. 그런데?” 부루버들이 계속 말을 이었다. “저기 서 있는 저 사람은 그렇게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옵니다.”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저 두 형제 말이옵니다. “ “왜 저들이 떳떳치 못하다는 것이냐?” 사와라 한웅의 목소리에 다소 불쾌감이 감돌았다. “저기 있는 치우비라는 청년은 감히...... 감히......” 부루버들이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보고 치우비는 자신도 모르게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그 이야기를 하는구나. 하지만 나는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다. 너희들이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지만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부루버들이 말을 머뭇거리자 사와라 한웅이 약간 화를 냈다. “감히 무어라는 게냐! 속 시원하게 말하라!” 부루버들은 약간 망설이는 듯, 조금 더 끌다가 입을 열었다. “말씀드리기조차 송구하옵니다만, 저 소녀라는 계집은 처음 주신으로 온 날부터 저기 있는 치우비라는 자와 눈이 맞아......” 예상했던 그대로의 말이라 치우비는 자신도 모르게 ‘흥’ 하고 코웃음을 쳤으나 다행히 사와라 한웅은 코웃음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무엇이!” 사와라 한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와라 한웅의 얼굴은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사와라 한웅은 퍽 인자한 성격이었다. 더구나 이제는 나이가 워낙 많아서 여자와 밤을 지새는 일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사와라 한웅은 더 자존심이 상했다. 당시 풍속으로는 씩씩하고 힘이 센 남자를 으뜸으로 친 까닭에 아무리 나이가 많다 해도 그런 면에서 열등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사와라 한웅은 인자하지만 젊었을 때부터 지력심이 퍽 강하던 인물이라 그런 사적인 문제에는 저절로 흥분하곤 했다. 또 개인적으로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자신은 대주신의 한웅이었다. 그런 자신에게 속한 여인이 다른 남자와 외도를 한다는 것은 실로 개인적으로나 주신의 체면으로나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까지 붉힌 것이다. 부루버들은 사와라 한웅을 옆에서 모신 지 왜 오래 되었기 때문에 사와라 한웅이 인자하고 아랫사람들에게 벌을 잘 내리지 않으나, 바로 그런 면에 열등감을 지니고 있어 그쪽을 찌르면 화를 쉽게 낸다는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루버들은 불붙기 시작한 한웅의 마음에 기름을 부으려는 듯 기어이 할말을 다하고 말았다. “...... 그날 밤 깊은 시각에 한웅님의 막사 부근의 솟대 부근에서 남몰래 만났고...... ” “그만!” 사와라 한웅이 화난 듯한 음성으로 낮게 소리쳤다. 사와라 한웅이 사람들 앞에서 화를 내는 것은 실로 몇 년 만의 일이었다. 수많은 사울아비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기에 더욱 화가 나고 창피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얼굴이 시뻘겋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사와라 한웅은 그래도 침착한 성격이었으며, 사람됨을 직접 지켜본 바로도 치우비가 그럴 사람 같지는 않았다. 사와라 한웅은 잠시 숨을 가다듬고는 물었다. “부루버들, 그것이 틀림없는 사실인가? 직접 보았는가?” 그러자 부루버들은 단번에 대답했다. “쇤네가 직접 보지 않고 어찌 그런 말씀을 드리오리까.” 치우비는 내심 치를 떨며 생각했다. ‘말도 안 된다. 내 부루버들님 같은 여인네가 숨어 있었다면 그것을 눈치 못 챘을 리가 없다. 분명 치우바람, 가람 녀석들이 보고 이른 것을 부루버들님이 직접 보았다고 하는 거다. 치우가람, 바람 녀석들은 싸움기술이 뛰어나니 녀석들이 숨어 있는 것을 내가 못 보았을 수도 있지만...... ’ 그때 치우비는 뭔가 섬뜩한 생각이 스쳤다. ‘가만, 그날 복면을 하고 소녀를 납치하려던 두 녀석...... 혹시 그 녀석들이 치우바람, 치우가람 녀석들이었던 게 아닐까? 그럴 수도 있다! 그놈들 솜씨가 여간 아니었고 사울아비의 기술을 익힌 놈들이었다. 아니, 그렇다면 이놈들이 한웅님을 해치려고 수작을 부리거나 그 일을 도왔다는 것인가?’ 생각할수록 일이 복잡하고 믿을 수 없어 치우비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때 치우천이 옆에 서 있는 치우비에게만 들리도록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 녀석들 몸에 네가 입힌 상처가 있는지 봐야 한다.” 치우천도 치우비에게서 모든 상황을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치우비와 똑같은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치우천의 얼굴은 이상하게 어두웠고 그리 밝지 못했다. 사와라 한웅은 어쩔 줄 모르는 듯, 몇 번 가쁜 숨을 내쉬다가 치우비에게 물었다. “치우비! 그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냐?”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치우비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사울아비 치우비가 말씀드리옵니다. 그날 밤, 솟대에서 소녀님과 만난 것은 사실이옵니다.” “무엇이?” 사와라 한웅이 곧 화를 내려는 듯 얼굴이 붉어지자 치우비는 급히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남몰래 딴 생각을 품고 만난 것이 아니옵니다. 어찌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겠사옵니까? 다만 그것은 형을 구하기 위해 그리한 것이옵니다. 소녀님이 그때 제 형이 유망에게 잡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옵니다.” 사와라 한웅은 의아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때다 싶어 비렴이 나섰다. “풍백 비렴이 말씀드리옵니다. 치우천은 그때 틀림없이 유망의 진중으로 가 있었사옵니다. 이번에 나타난 신수 번개범은 필경 사람을 잡아먹는 부족인 가리족이 불러낸 것 같사온데,그 가리족이 유망의 막사에 드나드는 것을 보고 저에게 전한 이가 바로 치우천이옵니다. 그리고 지난번 보여드린, 헌원의 손바닥과 지나 부족들의 손바닥이 찍힌 가죽 두루마리를 얻어온 것도 바로 치우천이옵니다.” 사와라 한웅은 비렴이 이야기하자 한결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비렴은 퍽이나 강직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라 절대 거짓을 말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있었던가?” 치우천과 치우비는 비렴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비렴이 계속 말했다. “그때 우리는 유망과 좋지 못한 관계에 있었기에, 치우천을 보낸 것이옵니다. 치우천은 헌원과 잘 아는 관계이므로 저희가 특별히 부탁을 했고 치우천은 목숨을 걸고 유망의 막사로 들어갔사옵니다. 그런데 치우천이 유망에게 잡혀 있었는데, 그것을 알려준 사람이 바로 소녀님이옵니다.” “그랬었는가?” 사와라 한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부루버들과 치우바람의 얼굴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치우가람만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았다. “저희는 유망과의 문제가 복잡하여 직접 손을 쓰지 못하였고 치우천이 감금되어 있는지, 아니면 그냥 숨어 있는지 알도리가 없었사옵니다. 그런데 소녀님이 우리 쪽에 바쳐지면서 치우천이 갇혀 있다는 말을 했던 것이옵니다.” 곁에 있던 병예도상처의 통증 때문에 콜록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저, 우사 병예가 말씀드리옵니다. 소인이 소녀님이 우리 진중으로 올 때 분명 소녀님이 그런 말을 한 것을 들었고, 제가 치우비에게 알려주었사옵니다. 그때 소녀님은 주신의 물정을 몰랐기에 치우천의 아우인 치우비 한 사람에게만 말을 한다고 하였고, 그 때문에 치우비가 소녀님과 만난 것으로 아옵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었사옵니다.” “자네가 소녀와 치우비를 만나게 한 것은 아닌가?” 사와라 한웅이 묻자 병예는 반색하며 대답했다. “우사 병예가 터놓고 말씀드리옵니다. 저는 치우비에게 소녀님을 만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사옵니다. 그러나 치우비는 아마도 형을 구하려는 마음에 방법을 강구하여 소녀님을 만난 것 같사옵니다. 비록 외람되이 한웅님의 여인을 만난 것은 죄가 크오나, 그때 소녀님은 주신에 처음 온 터라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사옵니다. 그것은 비밀이라 할 수 있는 일이 온데, 소녀님의 입장에서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말할 수 없었을 것이옵니다. 만약 만에 하나라도 치우천이 우리가 보낸 사람이었다는 것이 유망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치우천은 당장 죽음을 당했을 것이옵니다. 이러한 점을 한웅님께서 밝으신 마음으로 헤아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사와라 한웅은 즉시 치우비에게 전후의 문제를 물었고, 소녀에게도 지나 말로 상황을 캐물었다. 소녀도 몹시 놀라며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말했다. 사와라 한웅은 바보가 아니었다. 상황을 보니 모든 일이 아귀가 맞았다. 더구나 소녀는 주신 말을 간신히 두어 마디 하는 정도라, 남과 이야기할 정도가 못 되었고, 치우비는 지나 말을 한마디도 못했다. 그러므로 둘이 짜고 입을 맞추었을 확률도 없었고, 둘이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사와라 한웅은 화가 풀리지 않았다. 이런 일이 부하들 앞에서 일어난 것 자체가 망신이었다. 사와라 한웅은 화를 부루버들에게 퍼부으려 했다. “버들! 자네는 직접 보았다 하지 않았는가? 이게 무슨 짓인가?” 부루버들은 기민하게 머리를 굴렸다. 이미 틀렸다고 생각하여 어떻게든 자신은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는 둘이 만나는 것을 보았을 뿐이옵니다. 쇤네는 오로지 한웅님의 덕이 깎이지 않고 못된 사람을 높은 자리에 올리는 것이 그릇되다 여겨서 감히 나섰을 뿐이오며......” 부루버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와라 한웅이 화를 내며 버럭 소리쳤다. “덕이 깎이지 않게 한다고? 이게 내 덕을 깎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리고 함부로 사람에게 죄를 씌우려 했으니......” 그 말을 듣자 치우비는 어깨를 폈다. ‘한웅님은 나를 용서해주실 모양이구나.’ 사와라 한웅은 부루버들을 한참이나 야단쳤다. 부루버들은 자존심이 강한 여자라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야단을 맞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사와라 한웅은 한참 퍼부어대다가 목소리를 삭였다. “부루버들, 자네는 앞으로 좀더 조심해야 할 것이다. 더 할말이 없는가?” 그러자 그때 치우가람이 외쳤다. “사울아비 작은 스승 치우가람이 감히 한웅님께 한 말씀드리옵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옵니다.” “무슨 소리냐?” 사와라 한웅은 이 정도로 망신스러운 일을 끝내고 덮어두려 했는데 치우가람이 또 들고 나오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비렴이나 병예도 의아한 듯 치우가람을 바라보았다. 치우가람은 주위의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말했다. “대단히 외람된 말씀이오나 치우비의 행동은 비록 이유는 있었지만 그리 옳은 것은 아니옵니다. 더구나 제 말씀을 한 번 들어주신다면 더 많은 것이 밝혀질 것이옵니다.”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사와라 한웅이 묻자 치우가람은 치우천과 소녀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저 두 사람과 이야기하게 해주소서.” “이야기해보아라. 다만 헛소리는 듣기 싫도다. 정녕 헛소리는 아니겠지?” 사와라 한웅이 화난 목소리로 다그치자 치우가람이 즉시 대답했다. “제 목을 걸겠사옵니다.” 도무지 안 되겠다는 생각에 치우비는 화가 나서 외쳤다. “치우가람! 치우바람! 네 놈들은 왜 손을 천으로 둘러싸고 있지?” 사와라 한웅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것은 또 무슨 소리냐?” “사울아비 치우비, 감히 함부로 말한 것을 용서해주시옵소서. 그런데 저는 소녀님과 만나던 그날, 두 명의 사울아비가 얼굴을 가리고 소녀님을 잡아가려는 것을 보았사옵니다. 그 둘은 분명 사울아비의 칼솜씨를 지녔고, 잘 다듬은 돌을 던졌으며 채찍에 능했사옵니다. 더구나 그들은...... 그들은......” “무엇이냐?” 사와라 한웅이 재촉하자 치우비는 용기를 내어 외쳤다. “개 백 마리가 어떻고, 한웅님이...... 한웅님이 잘못되면 어떻고 하는 식으로 실로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했사옵니다! 그런데 그날 저와 소녀님을 본 이는 그 둘뿐이옵니다! 저는 저들이 그 두 사람이라 생각하옵니다!” 갑자기 치우바람이 뛰쳐나오면서 으르렁거렸다. “치우비 이놈. 네놈 형제는 이미 한웅님을 업신여긴 흉악한 놈들이면서 감히 우리에게 죄를 씌우려 하다니! 너 같은 놈은......!” 치우비는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어서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는 치우바람의 손을 덥석 잡았다. 치우바람은 그날 이후부터 그 손을 헝겊으로 감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왜 조심을 해왔었다. 그러나 치우비는 눈썰미가 워낙 날카로웠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은은히 핏자국 같은 색이 도는 것을 본 것이다. 치우바람이 깜짝 놀라 외쳤다. “무슨 짓이냐! 감히 한웅님 앞에서......!” “나는 네 놈 손을 보고 싶을 뿐이다! 너는 왜 이 더운 날씨에 손을 천으로 감아 보이지 않게 한 거지?” 치우비가 힐난하면서 치우바람의 손을 싼 헝겊을 풀려고 했다. 치우바람은 손을 빼내려 했으나 치우비의 힘이 너무도 억세어 도저히 손을 뺄 수 없자 재빨리 몸을 틀며 치우비의 얼굴을 향해 네 번이나 발길질을 했다. 치우바람의 걷어차는 기술은 실로 절묘했으나 치우비는 차갑게 웃으며 그 네 번의 발길질을 모두 오른손으로 막아내며 외쳤다. “너야말로 감히 한웅님 앞에서 발길질을 해?” 그러면서 치우비는 치우바람의 오른손을 싼 헝겊을 꽉 쥐며 치우바람의 몸을 저만치로 던져버렸다. 치우바람의 손에 감겼던 헝겊이 주욱 찢어지며 치우바람의 몸은 저만치 정리해놓던 짐 더미에 떨어져 뒹굴었다. 그동안 어릴 적부터 치우가람, 바람 형제에게 수없이 당해왔던 치우비의 감정이, 오늘 이 자리에서 폭발한 것이다. 치우비는 치우바람을 불같이 쏘아보며 외쳤다. “그날, 저는 두 녀석과 겨루면서, 녀석들이 던진 돌을 되받아 던져 한 녀석의 손을 뚫어버렸습니다. 그 상처는 아직 낫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손이 돌로 뚫리는 상처는 보기 드문 것이니 조사해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비렴이 나서서 호통을 쳤다. “너희 둘 다 실로 죄가 크구나! 감히 한웅님 앞에서 손을 써서 싸움박질을 하다니!” 치우비는 자신이 좀 심했다 싶어 이내 고개를 숙였다. “아무튼 치우바람은 어서 이쪽으로 와서 손을 내밀어라!” 치우바람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 놀랍게도 손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놀라서 보니 치우바람의 오른손에 칼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치우비는 깜짝 놀랐다. 치우비가 내던지는 바람에 짐 더미에 쌓였던 칼에 우연히 손이 박힌 것인지, 아니면 치우바람이 내던져지는 틈을 타서 일부러 박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우연히 내던져졌을 때 손에 칼이 박히는 따위의 일이 벌어졌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치우바람이 스스로 칼을 꽃은 것 같았다. 치우비는 속으로 탄식했다. ‘내가 성질을 못 이겨서 일을 그르쳤구나. 그냥 손의 헝겊만 벗겼으면 꼼짝 못했을 텐데! 저놈은 정말 마음이 독하고 무섭구나. 그 와중에 자기 손에 칼을 꽃아 상처를 내다니!’ 치우천도 한숨을 연신 내쉬는 것이 이제 일이 틀어졌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치우바람의 손에 난 상처는 상당히 심각했다. 퍽 두꺼운 칼이 박힌 것이라 이전에 그 자리에 돌이 박혔었는지 아닌지, 이제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치우천이 대뜸 나서서 외쳤다. “내던져졌다고 칼이 손에 박히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칼을 거꾸로 꽂아둔 것도 아닌데 왜 칼이 박힌단 말입니까? 이것은 치우바람이 자기 손에 스스로 칼을 박은 것입니다!” 비렴이나 병예, 사와라 한웅도 은근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연히 칼이 박히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증거가 사라진 셈이라 이 일은 더 따지기가 힘들게 되고 말았다. 치우가람과 바람에 대한 치우비의 말은 실로 중대한 것이라 엄히 조사해야할 것이지만 증거가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부루버들이 그것은 죄를 전가시키려는 치우비의 꾀라고 소리를 지르자 사와라 한웅은 더 듣지 않으려 했다. 사울아비가 한웅을 배신한다는 것은 실로 사와라 한웅으로서는 믿을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치우비는 원통하여 가슴을 쳤지만 별수 없었다. 그때 치우가람이 입을 열었다. “치우천! 자꾸 말재주 피우지 마라!” 그러자 치우천이 아닌, 치우비가 되받아 외쳤다. “치우가람! 너야말로......!” 그때 사와라 한웅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매우 호통을 쳤다. “이게 모두 무슨 짓들이냐! 이제부터 한마디라도 내 허락 없이 떠드는 놈들은 누구라도 모조리 목을 베리라!” 사와라 한웅은자기 앞에서 이런 소란이 일어나자 극도로 기분이 상하고야 말았다. 한웅이 호통을 치자 치우비도 곧 입을 다물고 성질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치우가람이 먼저 말했다. “치우천! 네가 유망의 막사에서 공을 세운 것은 축하한다. 잘한 일이다. 그런데 너는 유망에게 잡혀 감금되었다던데, 맞느냐?” “그렇다.” 치우가람이 ‘흥’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그런데 너는 무슨 재주로 소녀님을 통해 그 일을 전달할 수 있었느냐? 소녀님은 유망이 우리에게 보낸, 고르고 골라 뽑은 여인이시다. 그런 여인을 네가 어찌 만나고, 어찌 부탁을 하여 그런 위험한 일까지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냐!” 실로 날카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었다. 치우비와 비렴, 병예 등도 모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치우천이 실로 걱정하고 또 걱정하던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캐다 보면 소녀와 자신이 동굴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낸 일이 드러날 터였다. 물론 자신은 절대 소녀에게 손을 대지 않았으나 그것을 누가 믿어줄 것인가? 아니, 하물며 아무 일 없었다 해도, 두 남녀가 단둘이서 밤을 보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한웅의 입장에서는 이는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치우천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치우가람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표독스럽게 외쳤다. “치우천! 숨기지 말고 말하겠다고 안파견 한님께 맹세해라! 네가 잘못한 것이 없다면, 왜 맹세를 못하는가!” 치우천은 씁쓸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맹세하지 않는다면 내 말을 믿지 못한다는 말이냐?” “그렇다!” 치우천은 이제 갈 데까지 가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좌우간 나는 깨끗하다. 그리고 우리 둘은 일부러 토굴에 같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유망에게 밀려 그렇게 된 것이다. 한웅님께서도 부끄러운 일일 테니 나도 벌을 받기는 하겠지만, 별수 없는 일이다.’ 치우천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외쳤다. “그러면 너도 맹세해라! 그날 솟대 밑에서 소녀님을 잡아가려 했던 것이 너와 네 아우가 아니었단 말이냐?” 이번엔 치우가람이 즉시 맹세하고 나섰다. “나, 사울아비 작은 스승 치우가람과 치우바람은 결코 그런 짓을 한적 없다. 안파견 한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내가 거짓말을 한다면 좋게 죽지 못할 것이다!” 치우천은 이제 치우가람과 바람이 틀림없이 그날 있었던 자들이라 생각했으나 치우가람이 저렇듯 태연히 맹세할 줄은 몰랐다. ‘저놈들은 안파견 한님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저런 맹세를 함부로 하다니! 정말 사람 같지도 않은 놈들이다. 네놈들, 그 말대로 절대 좋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 속으로는 분했으나 치우천도 맹세할 수밖에 없었다. “나 사울아비 치우천은 그날의 일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말할 것을 안파견 한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내가 거짓말을 한다면 온몸이 썩어 들어가 끔찍하게 죽을 것이다.” 치우천이 맹세하자 치우가람이 물었다. “그러면 대답해보아라. 소녀님과 이전부터 알았느냐?” “이전에, 헌원의 인도로 유망을 처음 만날 때 마주친 적이 있다. 유망에게 소녀님이 처음 바쳐질 때였다.” “그때, 마음이 맞았느냐?”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나는 그때 말 한마디 나눈 적 없다!” 치우가람은 즉시 지나 말로 소녀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러나 소녀의 대답도 치우천과 똑같았다. 치우가람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너는 어째서 유망에게 잡혀 갇혔는가?” “나도 이유를 모른다. 유망은 나를 치료해준다고 했다가 문득 마음이 변해서 나를 가둔 것이다. 유망은 내가 그의 비밀을 들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실 유망의 비밀을 치우천이 들은 것이 맞지만 치우천은 교묘하게 말을 돌렸다. 그러자 비렴이 끼어들었다. 그것은 유망의 체면에 관계되는 문제라 함부로 드러낼 정보가 아니었던 것이다. 유망과 주신은 이제 서로 적이 되었지만, 아직 싸움이 벌어진 것은 아니니 신중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그 일은 실로 큰 비밀이니, 이야기할 수 없다!” 비렴이 막아서자 치우가람도 더 캐물을 수는 없었다. 치우가람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그러면 소녀님은 어떻게 만났고, 부탁을 하게 되었느냐?” “소녀님도 그 유망의 비밀을 들었기에 토굴로 들어온 것 같다. 그러나 나중에 유망은 마음이 변해, 소녀님을 주신으로 보낸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소녀님께 부탁을 한 것이다.” 치우천이 자세히 설명을 하자 치우가람은 돌연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그래. 그러면 치우천, 너와 소녀님은 하룻밤 동안 아무도 없는 토굴에서 있었구나. 그렇지?” 그 말을 듣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긴장된 얼굴로 사와라 한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와라 한웅은 애쓰는 듯했으나 얼굴은 이미 붉으락푸르락해지고 있었다. 치우천은 눈을 감고 조용히 말했다. “나 사울아비 치우천,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날 밤, 소녀님과 같이 있었으나, 나는 절대 소녀님에게 별다른 짓을 한 적 없다.” “정말인가? 소녀님같이 아리따운 분과 단 둘이 밤을 지새는데, 참았단 말인가? 너는 병신이냐?” 치우천은 병신이라는 소리에 귀가 거슬려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입 닥쳐라!” 그러나 치우가람도 지지 않고 맞고함을 쳤다. “나는 믿을 수 없다.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치우천은 사와라 한웅의 표정이 점점 붉으락푸르락하다가 마침내는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치우천은 생각했다. ‘이미 일은 글렀구나. 이제는 내가 소녀를 건드리고 안 건드린 것이 문제가 아니다. 한웅은 내가그녀와 하룻밤을 같이 있었다는 것만도 받아들이시지 못하는 것이다. 일이 틀어졌어. 그런데 이상하다. 이놈들이 어찌하여 우리가 토굴에 있었다는 것을 알까? 이놈들은 절대 유망의 막사로 들어올 수 없었을 텐데? 말하는 것을 보니 함부로 짐작하는 것은 아닌 듯하고,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런 일을 누가 알려주었단 말인가?’ 치우천은 탄식하듯 말했다. “나는 절대 그런 마음을 먹은 바 없다. 소녀님께도 분명히 말했다. 나는 사울아비이고, 한웅님을 모시는 사람이니, 절대 한웅님께 갈 분에게 무례하게 대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결코 딴마음을 먹지 않았으며 절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치우천이 떳떳하게 이야기했으나 사와라 한웅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치우천의 음성이 당당하고 떳떳한 것을 듣고 몹시 감탄하고 있었으며, 치우천이 소녀처럼 아찔할 정도로 고운 여자에도 홀리지 않으니 정말 큰 인물이라 감탄했다. 그러나 사와라 한웅은 입장이 달랐다 치우천의 인물을 좋게 여기던 사와라 한웅이었지만 이제 치우천의 젊고 잘생긴 얼굴을 보니 내심 질투심이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이번엔 치우가람이 지나 말로 소녀에게 물었다. “소녀님. 비록 한웅님을 모시는 분이시니 제가 말할 수 없지만 이번 일만은 반드시 짙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소녀님, 소녀님은 어찌하여 치우천의 부탁을 들어주셨습니까?” 소녀는 슬프게 울면서 대답했다. “저는...... 저는 유망님이 미웠습니다. 저는 지나족이 아니라 카린산 쑤앙마이의 여자입니다. 유망님은 저를 받고도 바로 저를 주신 한웅께 보냈습니다...... 여기저기 밀려다니는 처지이니 유망님을 좋게 생각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소녀는 그들의 대화 내용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눈치는 몹시 빨랐다. 그러므로 소녀도 치우천을 어떻게든 변명해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주신 말을 하지 못해 자세한 자초지종을 다 알 는 없었고, 그저 눈치로 이제는 다 끝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제 이 일이 터져 문체가 되어버렸으니, 이제는 유망도 이 일을 알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자신은 유망이 먹인 독에 중독 되어 해독약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처지였다. 헌데 치우천을 구해준 것부터가 유망을 배신한 것이며 이제는 모든 것이 다 알려져 버렸으니, 유망이 앞으로 자신에게 약을 줄 리 없고 자신은 이제 얼마 후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난 것이다. 그런 사실마저 밝히면 소녀는 자신이 첩자로 온 것을 말하게 되는 셈이라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해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주위의 분위기로 볼 때 이제 자신과 치우천은 틀림없이 죽게 될 것 같았던 것이다. 소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나는 죽는구나. 유망에게 복수도 못하고 죽는구나. 아, 기왕 이렇게 된 것, 무엇을 숨기겠는가?’ 소녀는 치우천을 몹시 연모하는 상태였다. 이제 자신이 곧 죽는다는 생각을 하니, 과거에 치우천과 있었던 일이 자꾸 떠올랐다. 소녀는 쑤앙마이에게서 남자를 황홀하게 만들고 흘리는 재주를 배워 음탕한 성격이 배었지만 한 번도 써먹은 적이 없어서 아직도 순결한 상태였고 애정에 있어서는 치우천 이외에 마음을 준 사람이 없었다. 그날 밤 비록 별일은 없었다지만 어두운 토굴 속에서 치우천이 자신을 달래주려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자신이 치우천에게 꼭 안겨서 꿈같이 밤을 새운 것이 떠올랐다. 소녀는 감상에 젖어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러는 사이 치우가람이 자꾸 질문을 해대자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날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녀는 이제 죽는다고 생각하자 독한 마음을 품었다. ‘기왕 죽는 것, 아름다운 기억을 간직하고 죽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치우천, 같이 죽자. 당신을 다른 여자에게 보낼 수는 없다. 나와 같이 죽자.’ 여기까지 생각한 소녀는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겉으로는 눈물을 흘리고 처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소녀의 마음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저는 치우천님이 좋았습니다.” 결국 소녀는 이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치우천 등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치우가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소녀에게 캐물었고 소녀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그날의 일을 있는 대로 말해버리고 말았다. 치우천도 자신과 같이 죽게 만들어 같이 죽고 싶다는 욕망의 발로였다. “...... 이제 와서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그것은 사실이옵니다. 이 천한 년을 죽여주시옵소서. 치우천님,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저는 숨길 수 없습니다. 치우천님은 비록 결코 한웅님을 배신할 수 없다 하였사옵니다만 저는 한사코 저를 치우천님의 여자로 만들어 달라고 했사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응낙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치우천님, 치우천님. 저는 잊지 않습니다. 치우천님은 그날 내가 고집을 부리자 말씀하시고 맹세하셨습니다. 저를 한웅님에게서 빼내어 당신의 것으로 만들어주신다고요 그러니 기다려 달라고요 치우천님, 우리 같이 죽게 되더라도 저를 버리지는 말아주십시오...... 저를......” 그 말을 듣고 치우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고 치우우레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몸이 휘청거렸다. 치우천은 소녀가 어느 정도 자기 생각을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토록 처절할 정도로 집념을 가졌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일부러 자기와 같이 죽자고 그런 소리를 다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맹세에 대해서는 치우천 자신은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날 그런 맹세를 했지만, 맹세를 하기 전에 분명, 내가 당신을 얻지 못한다 해도 다른 좋은 분께 보내줄 것이오, 라고 말하고 맹세를 했다. 그런데 저 여자는 앞의 말만 기억하는구나. 좌우간 저 여자가모든 게 끝났다고 여기고 저렇게 말을 하니 이제 끝장이구나. 아, 그러나 저 여자도 불쌍한 여자다. 이제 일은 글렀는데, 저 여자를 탓하여 무엇 하겠느냐? 나, 치우천이 여자의 말을 놓고 추하게 싸울 것이 무엇 있는가? 그냥 죽자.’ 치우천은 이제 남자답게 깨끗이 체념하기로 마음먹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치우가람은 득의만만하게 웃으며 외쳤다. “치우천! 네가 비록 소녀님을 건드리지 않았다 치자. 그러나 소녀님을 한웅님에게서 빼내어 네 것으로 만든다고 했다고? 너는...... 너는 어찌 그런 말을......” 그때 분노한 고함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만!” 사와라 한웅의 외침이었다. 사와라 한웅은 분노와 창피함을 이기지 못해 몸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사와라 한웅의 표정을 보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치우천은 눈을 감고 망연히 생각했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아,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그러나 안파견 한님이시여, 저는 정말 아무 죄도 짓지 않았사옵니다......’ 무서운 살기를 떤 사와라 한웅의 눈빛이 치우천과 소녀를 번갈아 오고갔다. 그때 치우우레가 사와라 한웅에게 엎드리며 소리쳤다. “치우우레가 말씀드리옵니다. 저희 자식들이 죽을죄를 졌사오나 아직 실제 범한 죄는 없사오니 저를 대신 죽여주시옵고......” “난 그만하라 했다!” 사와라 한웅이 소리를 쳤다. 이번에는 비렴이 나서서 엎드리며 청했다. “치우천은 당시 할 수 없이 그런 약속을 했던 것으로 생각되옵고, 그러지 않고서는......” 비렴까지 나서자 사와라 한웅은 노기에 가득 찬 음성으로 외쳤다. “비렴! 내가 그대에게까지 벌을 내려야겠는가?” 무서운 말에 비렴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병예가 비렴을 보고 짐짓 근엄하게 외쳤다. “치우우레! 비렴! 자네들이 왜 끼어드는가? 한웅께옵서 결정하실 일이네!” 그러나 그 말에는 한웅에게 감정에 치우치지 말라는 뜻이 깊이 내포되어 있었다. 병예의 말대로 사와라 한웅은 번민하고 있었다. 사와라 한웅은 비록 늙었지만 사리분별은 뚜렷했다. 사와라 한웅의 생각으로도 치우천은 사실 죄가 없었고 충성스러운 인물이었다. 허나 이성은 그리 말해도 감정적으로는 절대 그리 생각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대주신의 한웅이다. 나는 이미 늙었고, 지나족이 바친 카린족 여자 같은 것, 사실 아무 상관없다. 그러나 참을 수 없다. 나에게 온 여자가 다른 녀석에게 정을 품고 있다니. 내, 앞으로 어찌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단 말인가? 이제 늙고 힘이 없어서 지나족이 바친 여자 따위에도 외면당하는 놈이 어찌 대주신의 한웅이라고 고개를 들 수 있는가? 부끄럽다! 부끄럽다!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구나! 치우천! 내 명예를 위해서 너는 죽어줘야겠구나. 미안하지만 별수 없다!' 사와라 한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치우천의 목을 베라는 말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치우천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조용히 눈을 감고 침착하게 앉아 있었다. 그 조용하고 담담한 모습에 모든 사람들은 애석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치우비는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꽉 쥐었다. ‘형님이...... 형님이...... 형님이 무슨 일을 당하게 할 수는 없다! 나는...... 나는......’ 생각 같아서는 한웅을 잡아 협박이라도 해서 형과 같이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치우비도 날 적부터 주신을 사랑했고, 한웅님을 하늘처럼 생각했다. 아무리 일이 잘못되어도 감히 한웅님에게 손을 댈 수는 없었다. ‘형이 벌을 받으면 나도 죽자. 형님 없이 내가 세상에 살아 무엇 한단 말인가? 아아...... 형님! 형님!’ 치우우레도 눈물을 흘리며 치우천이 벌을 받으면 즉시 목을 찔러 죽어버리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렴이나 병예 등은 치우우레와 치우비의 울분에 어린 표정을 보고 치우천이 잘못되면 이 세 부자가 동시에 죽게 된다는 것을 알았으나 어떻게 더는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맥달이 조용히 다가왔다 맥달의 표정은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맥달이 왜 고통스러워하며 눈물을 흘리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맥달은 표정과는 달리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치우바람님, 결국 칼에 다치셨군요.” 그 말에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아까 맥달은 치우바람이 칼에 다친다고 말했었는데, 설마 그런 일이 있으랴, 그리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말 치우바람은 칼에 찔려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맥달의 말을 듣는 순간, 맥달의 예언이 정말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와라 한웅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감정에 휩쓸려 막 치우천을 베라고 말할 참이었는데, 맥달이 다가오자 약간 정신을 수습했다. 맥달이 다시 말했다. “모든 것은 한웅께옵서 정하소서. 은혜와 원수는 한웅님이 정하실 문제이옵니다.” 맥달이 조용한 눈매로 사와라 한웅을 바라보자 사와라 한웅은 생각했다. ‘저 맥달이란 여자는 아무래도 치우천 때문에 온 것 같다. 그리고 저 여자는 자부선인이 보냈다. 그런데 왜 나를 자꾸 바라보는가? 치우바람의 이야기를 보니 정말 저 여자의 신통력은 대단하다. 그런데 설마 치우천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흠, 은혜와 원수를 내가 정하라고? 방금 내가 살아난 데는 치우천의 공로가 크다. 그러니 저 여자도 은근히 은혜를 잊지 말라는 투로 나오는 것 같구나. 저 여자는 신수를 부릴 수도 있고, 자부선인과도 닿아 있다니 저 여자의 말을 거스르면 주신에게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 다른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저 여자가 자부선인이 보냈다 해도 나는 대주신의 한웅이다. 자부선인이 직접 온다 해도 내가 그의 말을 무조건 따를 수는 없는 일. 치우천을 그냥 둘 수 없다.’ 또 이런 생각도 스쳤다. ‘비렴이나 병예나 치우우레나 모든 사람들이 치우천을 아끼는 것 같다. 사실 내가 보기에도 크게 될 녀석이다. 아깝기는 하다 허나 나는 한웅이다. 놈을 용서해주면 한웅의 권위가 떨어질 것이니 용서할 수도 없구나. 그렇다고 당장 죽이면 다른 부하들이 나를 속으로 욕하고 원망할 것이고 살려둘 수도 없는 일이다. 어떻게 해야 이놈을 조용히 없애버릴 수 있을까?’ 문득 사와라 한웅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사울아비 치우천은 듣거라.” 사와라 한웅의 말에 치우천은 차분히 사와라 한웅 앞에 엎드렸다. 이제 분명 죽음을 당할 것 같은데도 너무 차분하고 단정한 태도에 뭇 사람들은 물론, 사와라 한웅마저도 남몰래 감탄했다 그러나 사와라 한웅은 이미 마음을 굳힌 터였다. “너는 계속 죄가 없다고 주장하니, 네 처분은 하늘의 뜻에 맡기기로 한다. 너와 소녀는 둘 다 먼 곳에 있는 사막에 버려질 것이다. 너희 말대로 죄가 없어서 안파견 한님께서 너희를. 돌보아준다면 살아날 것이요, 안 그러면 독수리 밥이 될 것이다.” 죄인을 꽁꽁 묶어서 하루치의 양식만 준 채 사막 한가운데다 버리는 형벌은 주신보다 다른 유목민족들이 자주 내리는 처형법이었다. 사막 부근에 사는 몽골족들이나 타타르족이 그런 방법을 많이 썼는데, 주신은 사막과 퍽 먼 거리에 있어서 실제로 그런 형벌을 자주 내리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사실 사막 가운데다 묶어서 버린다는 것은 목을 베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더 고통스럽고 잔인한 형벌이었다. 굶주림과 목마름, 그리고 고통에 지쳐 처절하게 죽어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치우비가 참지 못하고 외쳤다. “한웅이시여! 어떻게......” 치우비가 나서자 사와라 한웅은 화가 나서 호통을 쳤다. “치우비! 네가 감히 나서는 것이냐!” 치우비는 ‘아’ 하고 크게 탄식한 뒤 울면서 다시 외쳤다. “저도...... 저도 보내주소서. 형님만 죽을 곳에 보낼 수 없습니다! 저도 같이 보내주소서!” “치우비! 이것은 벌이다! 감히 네가......!” “비야! 무슨 소리냐!” 화를 이기지 못한 한웅의 외침에 이어서 치우천과 치우우레가 동시에 소리쳤으나 치우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저도 같이 죽여주소서! 저도 같이 죽여주소서! 죄가 모자라다면 지금이라도 죄를 짓겠습니다. 제발......! 제발 형님 뒤를 따르게 해주소서!” 치우비가 너무도 애통하게 울면서 간절하게 외치자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지었다. 사와라 한웅 역시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사와라 한웅은 곧 모질게 마음을 다잡았다. ‘이 녀석은 나에 대한 충성보다 형에 대한 마음이 더 강하구나! 그냥 두면 원한을 품을 게다. 더구나 힘이 세어 당할 자가 없으니 나중에 나에게 복수하려 한다면 큰일이이 대용사이니 아깝기는 하지만 이런 놈을 살려두면 화근이 된다. 내친김에 같이 없애버리자!’ 기왕 독하게 마음먹기로 한 터라 사와라 한웅은 결단을 내렸다. “치우바람! 치우가람! 너희들이 꺼낸 이야기이니 너희가 수습하라! 이 셋을 모조리 먼 사막에 버리고 오도록 하라! 이들을 돕는 자는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겠다!” 하필이면 일을 처리할 당사자로 치우가람과 치우바람을 지명한 것은 치우천을 절대 살려두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사와라 한웅은 바보가 아니었다. 치우비는 치우가람, 바람을 이번 한웅 습격과 관련 있다고 고발했었다. 비록 증거가 없어 묻어두기는 했지만 사와라 한웅에게는 치우가람 바람 형제도 껄끄러웠다. 그리고 일을 처리하라고 그들을 이렇게 떼어놓아 버린다면 그들은 한참이 지나야 신시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주신으로 돌아가는 도중 그놈들이 일을 꾸미거나 돕지는 못할 것 아니겠는가? 그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생각으로 사와라 한웅은 가람 바람 형제에게 일을 맡긴 것이다. 그때였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치베가 뛰어나오며 외쳤다. “나, 치베! 비록 몽골족이나 이들 형제와 같이 죽고 같이 살기로 마음먹었소! 나도 같이 가겠소!” 그러자 울라트와 도깨비들도 소리를 지르며 와르르 달려 나왔다. 치우비와 치우천은 감격했지만 한편으론 안타깝기도 했다. 사와라 한웅은 도깨비들까지 우르르 몰려나오는 것을 보고 두렵기도 하고 화도 나서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가고 싶다는 놈들을 모조리 싹 버리고 와라! 치우바람! 가린 너희가 알아서 죽고 싶다는 놈들은 모조리 끌고 가라, 지금부터 나서는 놈은 즉시 목을 베고 그 가족 역시 모조리 땅에 파묻어버려라!” 사와라 한웅은 크게 소리치고는 즉시 몸을 돌려 가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치우우레는 그 자리에서 두 아들을 붙잡고 대성통곡했다. 비렴과 병예도 연달아 탄식을 하며 아쉬워했다. 다만 치우바람과 가람만이 음산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때 비렴이 치우가람을 보고 준엄하게 말했다. “한웅님의 명을 그대로 행하라. 중간에 설마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사실 치우가람은 눈엣가시인 이 치우 형제들을 끌고 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다 죽여버릴 생각이었는데 비렴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하자 즉시 얼버무리며 말했다. “한웅님의 뜻을 어찌 어기겠사옵니까?” 병예는 상처 입은 몸을 비틀거리며 달려가서 한웅의 가마로 들어갔다. 그 사이 소녀가 슬피 울면서 치우천에게 다가와 기댔다. “치우천님, 치우천님. 저 때문에 이리 된 것입니까? 저 때문에?” 치우천은 이제 생사를 초월하여 담담한 마음이 되었던 터라 조용히 말했다. “아니오. 오히려 내가 미안하구려.” 소녀는 치우천을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저는...... 저는......!” 울라트는 화가 나서 날카롭게 외쳤다. “다 저 여자 때문이에요!” 치우천이 고개를 저으며 울라트를 쳐다보았다. “그러지 마라, 울라트 이 여자도 불쌍한 사람이다.” 마침내 울라트가 흑흑거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치베가 다가와 나지막이 속삭였다. “천 안다. 너무 실망하지 마라. 보돈차르님꼐 알리기만 하면, 사막을 다 뒤져서라도 구해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때 입가에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치우바람이 외쳤다. “당장 떠나자! 저놈들 일당이 혹 중간에 수작을 부리거나 누구에게 연락을 할지도 모르니, 굵은 줄로 모두 꽁꽁 묶고 눈을 가리고 입을 막아 끌고 간다! 지금 당장 묶어라!”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치우바람과 가람의 부하인 사울아비 수십 명이 달려왔다. 그들이 울라트까지 묶으려 하자 치우비가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아이는 관계없다! 아직 꼬마인데......!” 치우가람이 음산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꼬마라도 안 된다. 한웅께서 이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지 않느냐!” “이 망할 놈들!” 그러나 다음 순간, 사울아비들의 칼과 창이 치우비의 몸에 겨누어졌다. 치우비 등은 이제 더 말할 겨를도 없이 눈이 가려지고 입에 재갈이 물려졌다. 치우비는 천하장사라서, 아주 강한 소 힘줄과 구리사슬로 온몸이 꽁꽁 묶였다. 구리사슬은 가마를 메던 것이라 강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아무리 치우비가 천하장사라지만 이렇게 묶이자 꼼짝할 수 없었다 치우가람은 한 술 더 떠서, 치우비가 거느린 도깨비들마저도 모조리 묶게 했다. 지금 한자리에 있는 네 명뿐만 아니라, 다쳐서 신음하던 다섯 명의 도깨비까지도 똑같이 묶어버린 것이다. 결국 치우천, 소녀, 치우비, 치베, 아흡 명의 도깨비와 울라트, 모두 열네 명이 사막에 버려지게 되는 셈이었다. 치우우레는 그때, 마지막 결심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죽고 패가망신을 하더라도 아들들이 죽는 꼴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죽더라도 구해낸다. 한웅님! 한웅님! 죄송하오이다! 그러나 저는 더 이상......!’ 치우우레는 눈에서 살기를 뿜으며 조용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치우천과 친했던 양역, 부루벼락, 쇠돌이 등등의 젊은 사울아비들은 어느 틈엔가 말없이 눈에 독기를 품은 채 치우우레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치우가람과 바람을 따르는 자들도 슬금슬금 그들 앞을 막아선다. 방금 전까지 다같이 생사를 걸고 싸웠지만 이제 자칫하면 한바탕 피 흘리는 싸움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때, 맥달이 조용히 치우우레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드님과 이야기를 나눠보시지요“ 치우우레는 맥달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막 도끼를 빼들고 치우가람, 바람을 쳐죽이려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맥달이 권하는 것이라 치우우레는 무심코 아들 곁으로 갔다. 꽁꽁 묶이고 눈이 가려지고 재갈이 물린 아들들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비참했다. 치우우레는 다시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고, 한 사울아비들은 치우가람 바람에게 마구 욕을 퍼부었다. “너희 개자식들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나는 한웅님 명을 따를 뿐이다!” 양역은 너무도 화가 나서 미친 듯이 괴성을 질러댔다. “이...... 이...... 빌어먹을 자식들! 나는 결코 오늘 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 “네깟 게 뭘 어쩔 거냐? 한웅님 명을 어길 셈이냐?” 양역은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해 부르르 몸을 떨다가 그만 까무러쳐 버렸다. 부루벼락은 연신 욕을 해댔고 쇠돌이는 엉엉 울기만 했다. 마파람과 거서기, 삼, 부달 등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얼굴빛이 해쓱해져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사울아비였고, 치우천과의 우정도 중요하지만 한웅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울아비들끼리 아웅다웅하는 사이, 맥달은 재빨리 치우천과 치우우레만 들리도록 말했다. “치우천님께 아까 제가 뭐라고 했지요?” 치우천이 입이 막혀 아무 말도 못했으나 치우우레가 무심결에 대답했다. “아까......? 아까 다음해가 되어야 궁금증이 풀린다고......” 그러자 맥달은 살짝 웃으며 속삭였다. 눈물이 계속 그렁그렁 맺혀있으면서도 웃는 모습이 퍽 신비해 보였다. “죽은 사람은 궁금증을 풀 수 없지요 부디 신중히 생각하십시오.” 그 말을 듣자 치우우레는 머릿속이 환하게 트이는 것 같았다. 분명 맥달은 일년 후면 치우천의 궁금증이 풀린다고 했다. 그렇다면 치우천은 최소한 일년 후까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치우우레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내 아들은 죽지 않는다! 선인의 말씀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 그래서 아까 맥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이분은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미리 아셨구나! 그러면 이 녀석들이 죽지 않는 것도 분명 아신 것이다! 내 아들이 죽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건 잘된 일이다! 내가 경솔히 난리를 피워서는 안 되겠구나!’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심쩍은 생각도 들어서 치우우레는 맥달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틀림없습니까?” 맥달은 조용히 하라는 듯 가늘고 고운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대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뜻이리라. 치우우레는 대번 마음이 밝아졌다. 맥달 같은 선인이 틀림없다고 하면 틀림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 내 아들들이 이렇게 죽을 리 없다! 맥달님의 말씀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다만 다른 사람이 알면 좋지 않으니 입을 다물어야지 치우가람, 바람 놈들이 알면 내 아들들을 도중에 죽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것을 막아야겠구나.’ 서둘러 치우우레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 사울아비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마침 병예가 막 한웅의 가마에서 나오고 있었다. 병예가 치우우레에게 말했다. “버릴 사람 수가 많으니 치우가람 바람 형제만으로는 힘들 것이오. 치우우레님이 사울아비를 한 스무 명 정도 뽑아주시오. 같이 호송하라는 허락을 받았소.” 말은 그렇지만 호송할 자들을 아버지인 치우우레에게 뽑으라는 것은 그들을 사막까지 잘 경호하라는 병예의 마지막 호의나 다를 바 없었다. 병예는 치우우레가 아무리 아들들 일이라 해도 한웅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여 감히 한웅님의 말을 어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바로 이러한 점을 한웅에게 알려 치우우레에게 화가 돌아가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도 해준 셈이었다. 치우우레는 즉시 양역과 다른 젊은 사울아비 스무 명을 불렀다. 화가 나서 기절했다가 정신을 차린 양역 등이 달려왔는데, 그들 중에는 부루벼락과 쇠돌이, 부달과 마파람이 끼어 있었다. 이들이 함께 가면 치우가람 바람 형제가 중간에 딴마음을 먹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치우우레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그러자 치우가람은 이건 불공평하다고 외쳤다. 모두 치우천과 친한 사람들만 데리고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그 주장은 맞는 말이라 치우우레도 반박할 수 없었다. 결국 양역, 부루벼락, 쇠돌이, 부달, 마파람의 다섯 사람만 치우가람을 따라가고, 나머지 스무 명은 모두 치우가람이 부리는 사울아비들로 인원이 채워지게 되었다. 치우우레는 착잡했지만 비렴이 다가오며 신중하게 말을 건넸다. “치우우레님의 마음은 압니다만 한웅님의 명은 받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오. 부디 잊지 마시오. 이제 안파견 한님이 저들을 돌보아주기를 바랄 뿐이오.” 비렴의 강직하고 씩씩한 눈에도 눈물이 흥건했다. 그 모습에 치우우레 역시 다시 애통해져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쳤다. “내 자식들이 죽게 되었지만 한웅님의 명은 받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희들도 행여 딴마음을 먹거나 한웅님의 말을 받들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아버지인 치우우레가 그토록 엄하게 말하니 양역 등도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양역 등은 가면서 기회를 보아 다른 부족에게 전갈을 하거나 직접 치우 형제 등을 구해낼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이렇듯 비렴과 치우우레가 단단히 못을 박자 감히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저 원통하고 애달플 뿐이었다. 한편, 맥달은 그 사이 치우천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남몰래 속삭였다. “참아내십시오 참으신다면 나쁜 일이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사실 그 때, 치우천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조용히 죽으리라 마음을 비우던 참이었다. 머릿속이 마치 텅 빈 것 같았다. 그러나 맥달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한 줄기 희망이 머릿속에 비치는 듯했다. 이제 치우천도 맥달의 예언을 믿을 수밖에 없었던지라 어느 정도 안심도 되었다. 더구나 맥달의 목소리는 너무도 따뜻하고 자신에 대해 무척이나 걱정해주는 듯하지 않는가. 눈이 가려지니 목소리의 느낌이 더욱 생생했다. 치우천은 감격에 겨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의구심을 도무지 떨칠 수가 없었다. ‘이상하구나. 이 여자가 왜 나를 이리 걱정해줄까?’ 그러나 맥달이 왜 슬퍼하고 고통을 받는지는 맥달 자신 말고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맥달은 속으로 울면서 외쳤다. ‘치우천님, 치우천님.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당신이 힘들게 되는 줄다 알면서도, 그것을 그냥 두어야 하는 내 마음은 더더욱 슬프답니다...... ’ 맥달은 더 말을 하지 못한 채 어느새 저쪽으로 사라져 버렸고 곧이어 사울아비들이 치우 형제를 거칠게 말등에 태웠다. 이어서 치베와 도깨비 등을 줄줄이 말등에 얹자 치우가람은 즉시 출발했다. 한웅이 갈 동쪽이 아니라, 사막이 있는 서쪽을 향해서였다. 치우가람, 바람 등이 앞장섰고, 양역 등도 한탄하고 탄식하며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치우천 형제 등은 순식간에 영광의 길에서 떨어져 죽음의 길로 향하게 된 것이다. 사막 치우천과 치우비, 소녀, 치베, 울라트의 다섯 사람과 아흡 명의 도깨비는 손이 뒤로 묶인 채 말등에 얹혀져 서쪽으로 향했다. 치우가람은 퍽 조심성이 많아 치우천, 치우비 등 다섯 사람들의 입을 모두 막았을 뿐 아니라 얼굴까지도 완벽하게 가려서 누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양역과 부루벼락, 쇠돌이, 마파람, 부달은 그런 상태로 먼 길을 가는 것은 너무하다고 항의했지만 치우가람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저 녀석들은 아는 부족도 많고 태산 회의 때문에 얼굴이 알려졌는데, 그들과 친한 부족 사람들을 만나면 곤란해진다. 놈들이 습격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것은 한웅님이 직접 내리신 명령이니 지켜야 한다. 너희들도 모르지는 않겠지?” 양역은 얼굴을 붉히며 분노에 떨었지만 치우가람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치우 형제와의 정이 깊어도 한웅님이 직접 내린 명령은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각이 자못 깊은 마파람이 양역을 달랬다. “할 수 없는 일이다. 한웅님의 말씀을 어길 수야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너무 불쌍하고 안 되어서 차마 볼 수가 없다. 내, 저런 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그러자 부달이 작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따라가지 않으면 저놈들이 비와 천을 도중에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 사막에 버려져서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들었지만, 아무리 사막이라도 다 죽으리란 법은 없다. 천, 비는 모두 대단한 형제들이고 하늘이 낸 사람들이니 안파견 한님께옵서 반드시 구해주실 것이다.” 그때 치우가람이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양역 등 다섯 사람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들이 따라오는 것을 나는 간섭하지 않겠다. 하지만 나는 분명 한웅님께서 직접 이번 일을 맡기신 사람이니 내가 대장이다. 그렇지?” 그것은 분명 사실인지라 다섯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치우가람이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너희도 내 명령을 들어야 한다. 사울아비는 반드시 대장의 말에 따라야 하지?” “그래서?” 양역이 괴로운 듯이 되묻자 치우가람이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는 무기를 지니고 갈 필요가 없다. 모든 무기를 다른 자들에게 맡겨라.” “뭐?” 다섯 사람 모두는 울화가 치밀었다. 여전히 치우가람은 거들먹거리며 채찍을 까닥거렸다. “너희는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닌데 무기가 왜 필요하냐? 무기를 놓기 싫다면, 내 잡지 않을 테니 당장 돌아가라!” “굳이 무기를 빼앗으려는 이유가 뭐냐? 가다가 위험한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치우가람이 하하하 웃더니 이내 비아냥거렸다. “너희는 귀하신 몸들이니 이제 싸우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지켜줄 것이다.” “가다가 우리를 해치려고 하는 것이냐?” 부루벼락이 으르렁거리면서 소리치자 치우가람은 혀를 찼다. “밥통들.” “뭐라고?” “밥통들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다.” “뭐가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냐?” “너희는 한웅님의 명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너희가 언제 마음이 약해져 이 죄인들을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 모르지. 그건 큰 죄란 말이다. 그러나 무기가 없으면 감히 그런 마음을 먹지 못할 것이니,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니겠느냐?” “너는...... 너는...... ” 양역이 이를 갈며 말을 잇지 못하자 치우가람이 제법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게, 양역. 너는 지금 내가 너희들을 건드릴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내가 그리 바보 같아 보이나? 절대 그렇지 않아. 나는 너희들을 잘 모실 것이고, 손끝 하나 건드릴 수 없어. 비렴님과 다른 분들이 너희가 따라간 것을 아는데, 너희가 죽어서 돌아가면 내가 곤란해 지지. 너희가 죽으면 다른 사람들은 내가 너희를 죽이고 이 죄인들도 내 맘대로 한 줄 알 거 아닌가? 그러니 나는 너희를 절대 다치지 않고 깍듯이 모실 거야. 너희가 섣불리 나서지만 않으면 나로서도 너희를 손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함께 돌아가야 한단 말이다. 내 말이 맞나, 틀리나?” 양역은 그만 말문이 막혀 대답할 수 없었다. 치우가람이 계속 말을 이었다. “사막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멀다. 위험한 일도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 너희 말고도 많은 사울아비들이 있으니 걱정 마라 무기를 우리에게 줘. 그게 모두를 위해서 좋다. 나도 너희들이 희네 나래 녀석들과 친한 것을 안다. 그 마음, 나도 안다. 당장이라도 구하고 싶을 것아닌가? 하지만 한웅님 말씀은 어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섣불리 나서지 않게, 아니 나설 생각이 아예 들지 않게 무기를 우리에게 주는 것이 좋다. 이봐. 내 말이 맞나, 틀리나?” 양역은 꼼짝할 수 없었다. 부루벼락 등 다른 사울아비들도 할말이 없었다. 마파람과 부달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저 치우가람이라는 녀석, 뺀질거리는 개망나니인 줄로만 알았는데...... 무척 무서운 녀석이로구나......’ 결국 다섯 사울아비는 꼼짝없이 무기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무기가 없어지자 다섯 명은 기가 꺾여서 치우 형제를 구해낼 생각을 그만두게 되었다. 쇠돌이나 부루벼락 등은 힘센 장사였지만 상대방도 만만치 않았으며, 더구나 무장한 사울아비들이고 숫자도 많은데다 자기들은 무기도 없는 상황이라 더더욱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양역은 무기를 맡긴 후에도 괴로운 마음을 금할 길 없어서 줄곧 탄식을 내뱉었다. 간혹 길을 가다가 양역이 천천히 말을 몰아 뒤로 처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양역은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거나 소리 내어 한바탕 울려고 그러는 것이었다. 부루벼락과 쇠돌이는 본디 성격이 좀 급한 편이라 몇 번이나 치우바람, 치우가람에게 시비를 걸고 싸움도 걸려고 했다. 그러나 치우가람과 바람을 따르는 사울아비들의 수가 더 많았기 때문에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치우가람과 바람은 비웃는 듯 그들을 쳐다보며 싸늘하게 웃을 뿐, 철저하게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게다가 그들은 치우천, 치우비를 아는 사람이 나타날까 봐 다른 부족이 있는 마을에는 들어가지도 않았고 묵지도 않았다. 근처에 부락이 있으면 부하들을 보내 음식이나 술을 바꿔오게 했으며, 잠시도 죄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을과 멀리 떨어지고 지나는 사람도 없는 외딴 곳에서만 불을 피우고 야영을 했다. 그때가 되어서야 치우천 치우비 등은 비로소 얼굴을 가린 것과 재갈이 풀렸다. 그러지 않으면 음식조차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우가람은 손발을 묶은 것을 절대로 풀어주지 않았다. 결국 다른 사람이 일일이 음식을 먹여주어야 했는데, 양역 등의 벗들이 그 일을 도맡아 했다. 치우가람은 거기에도 신중을 기하여 식사를 할 때에도 한 사람씩만 얼굴과 입을 가린 것을 풀고 음식을 먹도록 만들었다. 죄인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게 하려는 치밀한 의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양역 등이 음식을 먹이려 할 때에도 반드시 한 사람씩만 나와서 음식을 주어야 하며, 서로 간에 이야기를 나누어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못을 박았다. 다만 선심을 쓰듯 음식이나 물 등은 좋은 것으로 충분히 주었고 다친 상처를 보살펴주는 것도 봐주었다. 가장 가엾은 사람은 꼬마인 울라트였다. 울라트는 답답하고 지치고 힘이 들어 하루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울라트는 자신보다 치우 형제나 도깨비들에게 먹을 것은 주었는지, 물은 주었는지 항상 헤아려보고 물어보곤 했다. 도깨비들은 주인이 죽으러 간다는 것을 이미 깨달은 듯, 전혀 반항하지 않았고 입도 열지 않은 채 얌전히 따라갔다. 치우가람은 도깨비들을 아예 무시한 듯, 손만 뒤로 묶었을 뿐 얼굴은 가리지 않았으니 도깨비들이 주인보다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소녀는 의외로 냉랭했다 그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으며, 싸늘한 표정을 지을 뿐 조금도 표정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얼굴 가려진 것이 풀어지면 소녀는 착잡한 눈초리로 얼굴이 가려진 치우천의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이런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치베만큼은 쾌활하게 사울아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즐겁게 웃고 떠들기도 했다. 전혀 죽으러 끌려가는 사람 같지 않았다. 치우비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과 입이 열릴 때는 언제나 형의 안위를 살피고 그 다음은 배가 고픈 듯 주는 대로 음식을 우적우적 씹으면서도 매서운 눈초리로 치우가람과 치우바람만을 노려보았다. 치우천은 얼굴 가린 것이 풀린 다음에도 눈을 감고 대부분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그의 얼굴은 고요하고도 평화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치우천 치우비 형제는 사람들과 이야기 한마디 나눌 수 없었다. 치우가람과 바람은 다른 사람들이 떠드는 것은 그냥 못들은 척했지만, 치우천과 치우비에게 누가 말을 거는 기미만 보여도 몹시 화를 내며 막아섰다. 그 때문에 양역 측과 치우가람 측은 처음 야영할 때부터 닷새가 되던 날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크고 작은 말다툼을 벌였다. 그러나 항상 이기는 건 치우가람 쪽이었다. 그러다가 닷새째 다시 싸움이 벌어지자 치우가람이 외쳤다 “너희가 자꾸 명령을 어기고 저놈들에게 말을 걸려는 것은 수작을 부리려는 것 아니냐? 그렇다면 너희도 죄인이 되는 것이다! 자꾸 그러면 너희를 아예 죄인들과 멀리 떼어놓겠다!” 그 말에 다섯 사울아비는 더 이상 반항하지 못했다. 다섯 사울아비는 은연중 치우가람을 약간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치우가람이 너무도 빈틈없고 꼼꼼하여 도무지 꼬투리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느 때 같았으면, 언제나 맞수였고 적수였던 치우 형제를 이렇게 잡아 직접 호송하게 되었다면 치우가람 치우바람 형제는 기분이 좋아져 우쭐하게 되어 치우 형제를 학대하고 구박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면 다섯 사울아비는 그것을 빌미로 어떻게든 치우 형제에게 좋은 대접을 해주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기라도 했을 터였다. 그러나 치우가람, 치우바람 형제는 치우 형제를 엄격히 다룰 뿐, 단 한마디도 모욕을 주지 않았을 뿐더러 때리지도 않았다. 음식도 충분히 주고 치료약도 주며 그저 묵묵히 호송하는 일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너무도 엄격히 제 할 일만 하면서 조금도 트집잡힐 행동을 하지 않으니, 다섯 사울아비들은 은연중에 점점 치우가람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벌판과 고원, 숲 등을 지나 한 달 반 동안이나 계속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동안 변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중간에 열흘가량 가다가 울라트와 소녀가 몹시 쇠약해지자, 양역이 치우가람에게 청하여 두 사람의 다리를 풀어주고, 음식을 먹을 때만이라도 손을 풀어주게 한 정도가 변화라면 변화랄까. 양역은 이 상태로 가면 가다가 죄인들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자 치우가람은 그때서야 여자들의 줄을 풀어주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입에 물린 재갈은 풀지 않았다. 울라트와 소녀는 조금이나마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서서히 건강을 되찾아갔다. 소녀는 며칠에 한 번씩 품안에 간직한 약을 꺼내 먹여달라고 울라트에게 부탁했다. 울라트는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소녀는 별것 아니라고 얼버무렸다. 치우천, 치우비와 치베도 눈에 띌 정도로 몸이 약해졌지만 치우가람은 절대 그들의 결박을 풀어주지 않았다. 운동을 전혀 하지 못하니 온몸의 근육이 서서히 굳어지는 것이다. 한 달 반이 지나자 어느덧 한 여름으로 접어들어, 몹시 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그런 더운 날씨에 얼굴까지 가리고 묶인 채 말 등에 얹혀서 가는 것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치우천과 치베는 물론이고, 힘센 치우비마저도 간혹 가다가 어지러워서 말에서 떨어져 내리곤 했다. 그때마다사울아비들이 물을 먹여 구해내곤 했지만, 그런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양역 등 벗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안파견 한님께 빌었다 비가 내리면 더운 것이 가셔지고 정신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비는 몇 번 내리지 않았다. 도중에 도둑 떼를 두 번 정도 만났는데, 양역 등이 낄 것도 없이 치우바람과 나머지 사울아비들이 모조리 물리쳐 버렸다. 양역이나 부루벼락 등은 그 틈을 타서 어떻게 해볼까 생각을 가졌지만, 그 어떤 상황이라도 무기를 놓지 않는 치우가람이 죄인들 옆에 바짝 붙어 있어 손쓸 틈도 없었다. 쇠돌이나 부루벼락 등은 속으로 도둑들에게 이겨라, 힘내라고 응원까지 했으나 주신 사울아비들이 워낙 강하여, 도둑들은 모조리 죽거나 도망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깨비들 중 두 명이 밥을 먹을 때 사울아비들을 밀치고 치우 형제를 구해내려 했다. 그러나 도깨비들은 치우비 근처도 가보지 못하고 사울아비들에게 제압당해 쓰러졌다. 그래도 치우가람은 도깨비들을 해치지 않고 도로 묶어두게 했을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다섯 사울아비들은 더 이상 트집 잡을 수도 없다 생각하여 치우천 형제를 구할 생각을 거의 포기하게 되었다. 며칠 더 길을 가니 드디어 황폐하기 이를 데 없는 벌판이 나타났다. 그 너머에는 사막이 있었다. 부근에는 타타르족들과 몽골족들이 산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치우가람은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호젓한 곳에 자리를 잡은 뒤, 치우바람에게 사울아비 몇 사람과 함께 말에 실은 모든 짐을 내리고 그 말들을 끌고 어딘가를 다녀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말은 파는 것이 아니라 돌아갈 때 다시 찾아가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치우천의 말 높은 뫼와 치우비의 말 구름도 함께 끌려갔다. 며칠이 지난 후 치우바람이 커다란 짐승을 수십 마리 끌고 왔는데, 바로 낙타였다. 주신 사람으로서는 신기한 동물이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태산 회의 때 이미 낙타를 본 적 있는 터라 그리 신기해하지 않았다. “이 짐승을 왜 끌고 왔지? 말은 어디 있어?” 양역이 묻자 치우가람이 대답했다. “이제부터는 물이 나오는 곳이 없으니 이 짐승을 타고 가야 할 것이다. 말은 물을 너무 먹어.” “이놈들은 말보다 덩치가 더 큰데 물을 더 먹지 않을까?” 그 말에 치우가람은 비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제 모두 낙타로 갈아탔다. 다만 낙타는 몸에서 냄새가 많이 났고 성질이 고약해서 타기가 몹시 힘들었다. 그러나 낙타는 말보다 힘이 세서 짐을 더 많이 실을 수 있었다. 치우가람이 낙타는 스무 날 이상이나 아무것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도 끄떡없이 길을 간다고 얘기했는데, 그때는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말에서 낙타로 바뀐 행렬은 어느덧 서서히 사막으로 접어들었다. 유독 부루벼락의 얼굴이 갈수록 침울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치우가람은 밤에 사울아비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이제 조금 더 가면 필은 사막이다 사막에 들어가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사막은 몹시 위험한 곳이지만 내 말만 잘 들으면 문제없을 것이다. 일단 오늘 우리는 술을 마신다. 술이 있는 사람은 모조리 꺼내라. 사막 안으로 가면 절대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사울아비들은 대부분 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술을 여기저기 지니고 있었는데, 치우가람이 근엄하게 말하자 꺼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치우가람은 술을 모두 버리라고 했으나 사울아비들은 아까운 마음에, 버릴 것이라면 차라리 모조리 마시고 가자고 했다. 치우가람은 잠시 망설였지만 앞으로 더 많은 고생을 해야 하는데 그 정도는 봐줄 만하다고 여겼는지 그날 모든 술을 마실 것이며, 그래도 술이 남으면 모조리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날 떠들썩한 잔치가 벌어졌다. 그때 부루벼락이 치우가람에게 치우천 치우비에게도 술을 먹이자고 제안했다. 치우가람은 취했는지 치우 형제에게 술을 먹여도 좋다고 자못 선심을 썼다. 치우가람이 약간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자네들은 나를 나쁜 놈으로 생각하지? 제기랄. 하지만 별수 없잖아. 그래, 난 저 녀석들이 밉다. 어릴 적부터 아버님은 우리 형제가 아무리 윌 잘해도 저 녀석들 이야기만 했어. 희네, 나래만 닳아라. 닳아라. 더구나 저놈들은 있는 힘도 다 쓰지 않았어! 그냥 적당히 얼버무려도 모두들 놀라고 대단하다고 했지! 제길! 열다섯 해 동안 그런 소리만 듣고 살아봐. 너희라면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느냐? 응?” “형, 형.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치우바람이 말렸으나 치우가람은 더 크게 떠들어댔다. “저놈들도 치우 집안사람들이다! 그래! 대영웅이고 좋은 놈들이지! 아주 큰 일을 할 놈들이야! 그러나...... 그러나 이제는 어떻지? 응? 우리 형제는 뭐가 그리 못났지? 우리가 저놈들을 괴롭힌다고 생각하지만, 저놈들이 우리를 괴롭게 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는 생각 못하나? 응? 우리라고 좋아서 같은 집안사람을 해코지하는 줄 알아? 엉?” 치우가람은 길을 떠나면서 언제나 엄숙하고 단정했는데 한번 술이 들어가자 긴장이 풀렸는지 주정을 부리는 듯했다. 사람들은 그제야 치우가람, 치우바람이 왜 치우천, 비 형제를 미워하는지 짐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울아비들은 비록 치우가람과 바람의 마음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너무 속이 좁고 질투심이 강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잘난 사람을 보면 질투심이 일어나는 것도 인지상정인지라 치우가람, 치우바람도 가엾으며, 이유 없이 그러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양역은 분통도 치밀고 하여 그만 폭음을 하다가 쓰러져 잠이 들어버렸다. 그러는 동안 부루벼락과 쇠돌이는 치우천에게로 가서 술을 먹여주었다. 거의 두 달 만에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잡은 것이다. 부루벼락은 치우천의 입에 술과 고기를 넣어주며 누가 들을세라 재빨리 속삭였다. “천 형! 천 형! 우리 같이 도망치자. 이대로 죽을 수는 없잖아!” 그러나 치우천은 조용히 고개만 저었다. “천 형이 억울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아! 도망쳐도 아무도 욕하지 않아! 오늘이 마지막 기회다!” 애가 타는 듯한 쇠돌이의 말에 치우천은 눈을 번쩍 뜨더니 쇠돌이를 쳐다보았다. “자네들은 한웅님 명을 따라야 한다. 나는 결코 그 명을 어길 생각은 없다.” “천 형1 고집 부리지 마! 자네는 사막을 몰라서 그래. 사막에서는 아무리 힘이 세고 머리가 좋아도 살아나갈 수 없어!물이 없고 먹을 게 없고 너무 더워서 온몸이 타들어 가는데 어떻게 산단 말야!” 쇠돌이의 말에 부루벼락이 덧붙였다. “자네...... 자네는 정말 그냥 죽을 셈인가? 응? 죽고 싶은 건가?” 치우천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냥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부루벼락은 설득하듯 사막에 대해 자세히 말했다. “자네는 사막을 모르네. 나는 가본 적이 있어. 거기에 떨어지는 건 죽는 것과 마찬가지야. 사막은 온통 모래밭이라 발이 푹푹 빠지고, 사방이 똑같아서 방향도 찾을 수 없어. 게다가 너무 뜨거워서 온몸이 타들어가고 물도 사람도 동물도 찾을 수 없다고 낮에는 지독하게 뜨겁고 밤에는 한없이 추워서 얼어 죽을 정도이니 사람이 배겨낼 수가 없어. 아무리 강한 사람도 물이나 먹을 것 없이는 사흘을 버티기가 어려워. 더구나 무서운 귀신들이 있어 사람을 흘린다구!” “귀신?” 쇠돌이가 겁나는 듯 묻자 부루벼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막을 가다 보면 물이 가득 찬 호수나 사람 많은 마을이 보이지. 그러면 그리로 달려가는 게 당연하겠지. 그런데 그것들은 다 허깨비야. 흘리는 거라구. 그것을 보고 쫓아가면 방향을 잃고 죽는 거야. 더구나 사막에는 흐르는 모래가 있어서 거기에 한번 휩쓸리면 순식간에 빠져 죽어. 사막은 너무도 무서운 곳이라네.” 부루벼락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하자 치우천보다도 쇠돌이가 더 겁을 먹은 듯했다. “그렇게 무서운 곳이우?” 부루벼락은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 다른 부족 젊은이들 마흔 명과 함께 말 쉰 마리와 낙타 스무 마리를 끌고 사막 너머로 가려 한 적이 있었다네. 다들 용감하고 힘센 사람들이었고 물과 식량도 충분했어. 그런데......” “그런데 뭐유?” 쇠돌이가 재촉하자 부루벼락은 괴로운 듯 말을 이었다. “건너편으로 간 것은 나를 비롯한 열한 명과 낙타 아홉 마리밖에 없었다네. 그것도 우리가 건넌 것이 아니고 사막 부족이 쓰러진 우리를 구해준 것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는 모두 죽었을 거야. 사막은......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곳이야......” 잠시 부루벼락의 말이 끊어지자 치우천이 다시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쇠돌이는 부루벼락의 말에 일말의 희망을 느끼며 물었다. “사막에도 사람이 산단 말유? 그러면......” 그러나 부루벼락은 고개를 저었다. “사막 언저리는 모두 모래로 된 땅은 아니야. 모래로 된 땅을 황무지가 둘러싸고 있어. 그곳은 사막 부족이 지나가기도 하네. 하지만 깊은 사막 한가운데는 누구도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어. 지금 우리도 사막 깊숙한 곳에 있는 게 아니고 그 언저리에 있는 거야.” 쇠돌이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든 방향을 잡아 그 사막 부족이 다니는 곳에 천 형을 버리게 만들면 되지 않겠수?” 그러자 부루벼락은 슬픈 목소리로 되받았다. “내 말하지. 그때 같이 살아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치우가람 놈이네. 그놈은 그땐 어렸지. 그리고 그놈은 그 후로 몇 번인가 사막에 사람 버리는 일을 더 했다고 들었어. 그놈은 사막을 잘 안단 말야.” 그 말에 쇠돌이는 인상을 잔뜩 구기며 큰일 났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루벼락은 한 번 더 강조해서 말했다. “그놈은 나보다 사막을 더 잘 알 거야. 그리고 그놈은 절대 자네를 살려두려 하지 않을 걸세. 그저 사막 언저리 정도에 자네를 버린다면 자네들은 재주가 뛰어나니 나도 이렇게 걱정하진 않을 걸세. 하지만 저놈은 사막을 잘 알기 때문에 자네들이 절대 빠져나을 수 없는 곳에다가 버릴 거란 말일세! 이봐, 천! 이건 정말이야. 자네는 요행을 바라는 모양인데, 저놈은 그리 만만치 않아. 절대 요행을 바랄 수 없다구! 사막 언저리에다가 사람을 버려도 아직까지 살아난 사람이 없어. 그런데 저놈은 아주 깊고 깊은 대사막 한가운데에다 자네를 버릴 거야! 그곳은...... 그곳은 사막 부족도 가지 않는 죽음의 땅일 거야! 절대 살아날 수 없을 거라구!” 그 말을 듣자 치우천의 얼굴에도 암울한 빛이 떠올랐다. 그래도 치우천은 조용히 입을 열 뿐이었다. “한웅님의 명을 어길 수는 없소 그러면 나는 이제 주신 사람이 아니게 됩니다.” 부루벼락과 쇠돌이는 다시 치우천을 설득하려 했으나 그때 치우바람이 칼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와서 그들은 더 이상 치우천과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치우가람이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됐다, 바람아. 너무 그러지 마라.” “하지만 저놈들이 죄인들과 이야기를 했어.” 그러나 치우가람은 의외로 시비도 걸지 않고 나무라지도 않았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치우가람이 되레 그렇게 나오자 부루벼락과 쇠돌이는 더 할말이 없어서 잠자코 돌아갔다. 다음날, 취한 줄 알았던 치우가람이 언제 일어났는지 피곤한 기색도 없이 태연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부루벼락과 쇠돌이는 놀랐다. 치우가람은 실제로는 취하지 않았으며, 감시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만약 부루벼락과 쇠돌이가 치우 형제를 구하려 했어도 분명 실패했을 것이다. 다음날과 그 다음날도 치우가람은 사막으로 들어서지 않고 그곳에 머물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사흘째 기다리자 웬 타타르 사람 몇 명이 치우가람을 찾아왔다. 그 사람들은 키가 작고 차림새가 더러운 노인들로 전사들 같지는 않았다 양역은 이상하게 여겨 그들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치우가람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이 사람들은 길잡이다. 사막 깊숙이 들어갔다 되돌아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니 길잡이가 있어야 한다.” 양역은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물었다. “꼭 그렇게 사막 깊이 들어가야 하는가?” 치우가람이 웃었다. “치우천 치우비는 보통내기가 아니니, 적당히 들어갈 수 없어. 일을 적당히 하는 것은 한웅님의 뜻에 어긋나는 거야.” 양역은 분통이 터졌으나 뭐라고 할말이 없었다. 그때 그 타타르 사람 길잡이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주신 말을 꽤 잘했다. “지금 사울아비께서 가실 길은 몹시 위험한 길입니다요 물과 식량을 서른 날 치 이상 준비해야 합니다요. 그리고 말은 절대 끌고 가서는 안 되지요 그러면 큰일 납니다요.” 치우가람은 양역이 옆에 있어도 상관 않고 물었다. “이미 말은 전부 맡겨두었다. 그런데 왜 말을 끌고 가면 안 되지?” “그 사막 깊숙한 곳에는 도깨비들이 많이 나옵니다요. 이건...... 이건 비밀인데......” 길잡이는 행여 누가 들을세라 주위를 둘러보고는 다시 타타르족 특유의 풍습대로 침을 뱉고 발을 굴러 부정 타지 않게 한 다음 치우가람에게 말했다. “사막의 깊숙한 곳은 도깨비 왕이 있는 곳입니다요. 도깨비들은 말을 아주 싫어하여 말을 보기만 하면 잡아먹습니다. 아주 무섭지요.” “그런 것이 있나?” “아이구, 틀림없이 있습니다요! 도깨비 왕에게 당한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이 근처에서는 도깨비 왕의 이름도 꺼내지 않습니다요. 더구나 왜 하필 이런 위험한 때에 사막에 들어가려 하시는지는......” 그때 치우가람은 양역이 듣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는 길잡이에게 눈짓을 했다. 길잡이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길잡이는 태산 회의에 참석할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대용사 치우비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다음날, 치우가람은 길잡이를 앞장서게 하고 대열을 출발시켰다. 조금씩 나아가니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이 나타났다. 그 풍경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지만 사막을 지나가는 것은 몹시 괴로웠다. 치우가람은 사막에 들어선 다음부터는 무척 긴장하여 부하들에게 무장을 하도록 매번 지시했고, 길잡이와 함께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사막은 너무도 더워서 낙타등에 편히 앉아 가는데도 사울아비들은 계속 물을 마셔대야만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양역과 마파람은 치우가람에게 묻지도 않고 치우천 등에게도 틈나는 대로 자꾸 물을 먹여주었다. 치우가람은 그때마다 비웃기만 할 뿐, 특별히 말리지는 않았다. 사실 치우가람은 이번만은 퍽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여 특별히 치우천 등을 괴롭히거나 억압하지 않았고, 양역 등이 어느 정도 편의를 보아주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때문에 양역과 부루벼락 등은 다른 짓을 할 수 없었다. 다만 깊은 사막으로 하루하루 들어갈 때마다 치우천 등이 살아날 확률이 점차 줄어드는 셈이니, 얼굴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다른 사울아비들도 하루하루 사막으로 들어섬에 따라 불안해졌다. 물을 많이 준비했으나 사막을 처음 겪어본 사울아비들은 예사로 사막을 겪어본 타타르 사람이 마시는 물보다 훨씬 많은 양을 마셨다. 그 때문에 물은 나날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 이대로 가다가는 되돌아가는데 먹을 물이 모자랄 것 같았다. 치우바람이 치우가람에게 그 점을 지적하자 치우가람이 웃으며 말했다. “다 생각하고 있다. 되돌아갈 때는 열네 사람이 줄어드니까 물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릴은 사막에 들어온 지 열흘하고도 나흘이 더 지나서야 치우가람은 대열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그곳에 치우천, 치우비를 비롯해 치베, 소녀, 울라트, 도깨비들을 모조리 내려놓게 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 가린 것을 벗겨준 다음 재갈과 손을 묶은 것은 그대로 두라고 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 다 왔다.” 양역과 부루벼락, 쇠돌이, 마파람, 부달 등 다섯 사람은 이제 때가 왔음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 다른 사울아비들은 비록 그리 슬퍼하지는 않았으나 안쓰럽고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우가람이 그들 다섯 사람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는 이제껏 먼 길을 오면서 한번도 저들을 괴롭히거나 시비 건 적이 없다. 나는 한웅님의 명을 그대로 따라 움직였을 뿐이다. 도리어 너희들이 저들 죄인에게 잘해주려고 자꾸 수를 부렸지만 나는 되도록 못 본 척 봐주었다. 그렇지?” 다섯 사람은 할말이 없었다. 치우가람의 말이 계속되었다. “너희도 이제 작별인사를 해라. 그런 것까지 못하게 할 만큼 나 치우가람, 속이 좁지는 않다. 다만 치우비 등의 녀석들은 대단히 무서우니 입이나 줄을 풀어줄 수는 없다.” 어처구니가 없단 표정으로 양역이 외쳤다. “그럼 묶어둔단 말이냐?”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떠날 때 저만치에 작은 돌칼 한 자루를 꽂아두고 갈 것이다. 그러면 저들이 알아서 줄을 풀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 “줄을 풀어주었다가 치우비 저 녀석이 만약 우리에게 덤비면 어쩔 것이냐? 솔직히 나는 저 녀석을 당해낼 자신이 없다.” 치우가람이 워낙 빈틈이 없는지라 다섯 사람은 그의 입심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섯 사람은 치우 형제 및 치베등과 슬픈 작별의 말을 나누었다. 그러나 치우 형제 등은 여전히 입이 막힌 상태여서 길게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치우바람이 재촉했다. “다 이야기했으면 서둘러 가자. 모래회오리가 불어올지 모른다.” “모래회오리 ?” 마파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부루벼락이 소리쳤다. “이런! 모래회오리라고?” 치우가람은 말에 올라타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모래회오리가 곧 불어올 거다.” 부루벼락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악을 썼다 “그러고 보니...... 네...... 네놈들은 바로 회오리가 불어올 때를 기다렸다가 이들을 버린 것이구나! 정말 지독하구나!” 다른 사람은 몰랐지만 사막을 겪은 부루벼락은 모래회오리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었다. 회오리에 휘말리면 사람이나 낙타든 뭐든 하늘로 떠올라서 갈기갈기 찢어지기 십상이다. 용케 몸을 피해도 모래에 파묻혀 죽는 경우도 많았다. 가장 무서운 것은 회오리가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모래언덕의 위치들이 바뀌기 때문에 절대로 길을 찾을 수가 없다는 데 있었다. 치우가람은 대꾸하지 않고 비웃듯 웃기만 했다 그리고 치우천 등의 옆쪽으로 짐 더미 몇 개를 던졌다. 그것은 치우천과 치우비의 말에 얹혀 있던 짐이었는데 이미 무기나 물통, 식량 등은 모두 빼놓은 상태였다. “너희 것은 돌려준다. 이걸 가지고 잘 해봐라. 잘 버티다 보면 혹 안파견 한님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희를 구해주실지 아느냐?” 치우가람, 치우바람이 함께 껄껄껄 웃었다. 부루벼락은 그들의 하는 양을 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치우가람, 바람은 치우천 형제에게 오래오래 고통을 주어 온갖 고생을 하게 한 다음 죽게 하려는 악의가 너무도 분명했다. 게다가 짐 더미 속의 물건들 중에 실제로 사막에서 살아남는 데 필요한 것들은 하나도 없었다. 치우가람은 작은 물병 두 개를 들어 던졌다. 너무도 적은 양이라 열네 사람이라면 목도 축이기에 턱없이 모자랐고, 혼자 마셔도 사흘을 버티지 못할 적은 양이었다. “물이 너무 적다!” 양역이 이건 아니라는 듯이 커다랗게 외치자 치우가람은 태연하게 말했다. “물론 적다. 원래는 하루치 물을 주어야겠지 그러나 열네 사람이 하루 마실 물을 준다면 누군가가 한 사람이 그 물을 모두 가지고 사막을 빠져나갈 수도 있다. 그러니 많은 물은 줄 수 없지!” 그 말을 듣고 치베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원래 치베 등은 바로 그것을 노리고 어떻게든 치우천이나 치우비만이라도 살려보자고 생각하여 스스로 사막에 뛰어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치우가람은 너무도 음흉하여 그런 것까지 이미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뭐라 할 것도 없이 치우가람은 웃음소리를 길게 남기며 낙타를 몰고 달려갔다. 다른 사울아비들은 떠나지 않으려는 양역과 벗들을 거의 협박하다시피 하며 데리고 갔다. 가면서 양역과 벗들은 목이 쉬어라, 계속 치우천 일행에게 살아나라고 외치기도 하고 용기를 내라고 외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치우바람이 가면서 날카로운 작은 돌칼 하나를 먼발치에 놓고 갑자기 나무로 깎은 물병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 든 것을 치우천, 치우비 형제에게 냅다 뿌리고 도망치듯 떠나갔다. 그때 열네 사람은 모두 눈이 가려져 있어서 치우바람이 무엇을 뿌렸는지 볼 수가 없었다. 다만 그것은 액체였고, 비릿한 내음이 나는 것으로 보아 무슨 피 같았다 그런데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제일 먼저 치베가 몸을 움직여서 돌칼 쪽으로 갔다. 그리고 돌칼을 뒤로 결박진 손으로 힘겹게 잡아 다시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치베는 제일 먼저 치우비의 손을 묶은 가죽 끈을 돌칼로 썰어댔다. 돌칼은 예리했지만 바싹 마른 가죽 끈을 끊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치우비는 하도 단단히 묶여 있어서 시간이 꽤 걸렸다. 약 여덟 개의 가죽 끈을 끊고 나자 치우비가 비키라는 듯한 손짓을 했다. 치우비가 온몸에 힘을 주자 나머지 끈과 구리사슬 등이 모조리 끊어지며 드디어 치우비의 손이 풀렸다. 그러나 치우비는 두 달 동안이나 손이 묶여 있던 터라 팔이 굳어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치베는 묶여 있는 동안에도 항상 손을 쥐었다폈다하며 몸이 굳지 않도록 연습을 했던 터라 나름대로 움직일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결국 모든 사람들과 도깨비들을 묶은 끈을 풀고 나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지경이 되었다. 울라트는 끈을 풀자마자 치우비에게 안겨 하염없이 울기만 했고, 소녀는 창백한 표정으로 멍하니 모래언덕을 쳐다보며 앉아 있는 것이 거의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도깨비들은 행동이 그렇게까지 구속되지 않았던 터라 어느 정도는 움직일 수 있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치우비와 치우천이었는데, 둘은 두 달 동안 한번도 묶인 것을 푼 적이 없어 몸이 거의 돌처럼 굳어 있었다. 다리도 굳어서 걸음조차 걸을 수 없었다. 더구나 몹시 쇠약해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치우천의 모습을 보고 치우비가 울었고, 치우비의 모습을 보고 치우천도 눈물을 흘렸다. “천 안다! 비 안다! 지금 울 때가 아니다. 어떻게든 우리는 사막을 벗어나야 한다. 모두 정신을 차려야 한다.” 치베의 말에 치우천도 즉시 말했다. “그렇다.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 한다. 치베, 나는 사막을 모른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치베는 일단 남은 물을 살피더니 이내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물이 너무 부족하다. 물을 찾을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여기서 빠져나가려면 며칠이나 걸리겠는가?” 치우비의 물음에 치베는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우리는 열나흘 동안 낙타를 타고 왔다. 그런데 지금은 낙타도 없고, 몸에 기운도 없다. 온 길을 되돌아가려면 아무리 서둘러도 스무날은 걸릴 것이다. 물도 없고 낮에는 더우니 어떻게든 그늘을 만들어 잠을 자고 아침과 저녁 무렵에만 걸어야 한다. 안 그러면 순식간에 말라죽는다.” “밤에 길을 가면 안 되는가?” “밤에는 무척 춥지 않은가? 밤에 길을 가면 더 빨리 지친다.” “혹시 비가 오지 않을까?” “비가 온다면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꼭 비가 온다고 볼 수는 없다. 사막에 비가 한번 오면 엄청나게 오지만, 비가 자주 오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비가 와도 물이 전부 모래 속으로 스며들기 때문에 쉽게 모을 수가 없다.” 치베의 말을 듣자 치우비는 침통해졌다. ‘설령 물이 있다 해토 짐승 한 마리 없는 사막인데 무엇을 먹고 스무 날을 버틸까?’ 그때 치우천이 다부지게 말했다. “절대 포기해저는 안 된다. 어떻게든 사막을 빠져나가야 한다.” 치우비가 안타까운 듯 입을 열었다. “아, 형님. 차라리 우리는 도망쳐야 했어.” 치우천이 치우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비야. 나는 주신사람이고, 주신의 그릇에 있어야 한다. 한웅님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치면, 우리는 영원히 주신에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뜻을 펴지 못할 테니, 그렇게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 치우비도 형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치우천이 바라는 것은 아주 크나큰 일이었다. 온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겠다는 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신이라는 틀을 유지하고 그 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주신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치우비는 용기를 다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맥달님도 말씀하셨잖아. 우리는 죽지 않을 거야,” 순간 치우천의 안색이 흐려졌다. “이 자리에선 그 여자 이야기는 하지 말자.” 그때 울라트가 소리쳤다. “이건 피 아니에요? 비 오라버니, 다치셨나요?” 그러고 보니 치우천과 치우비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는데 그 피에서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치우비는 울라트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다친 게 아냐. 아까 어떤 녀석이 뿌린 것 같아.” “썩은 피를 왜 뿌리지,1 무슨 주술을 건 것은 아닐까요?” “글쎄...... 무슨 탈은 없는데......” 도대체 왜 썩은 피를 뿌리고 떠났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도깨비들은 주인을 다시 만나자 눈빛이 밝아졌지만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것을 보고 암담해하는 눈치였다. 사실 도깨비들은 치우비가 사막으로 끌려온다는 것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무작정 온 것이다. 그때 도깨비들 중 온몸이 새까만 도깨비인 마냥이 몸을 일으키더니 사방을 주의 깊게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땅에 엎드려 개처럼 킁킁 냄새를 맡고는 모래를 뒤적이다가 다시 다른 곳을 파고 난 뒤 또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곤 했다. 울라트는 그것을 보고 눈을 반짝이더니 다가가서 도깨비와 손짓발짓을 했다. 그러다가 울라트가 웃으며 말했다. “마냥이 물길을 찾고 있어요!”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 물었다. “물을 찾는다구?” 울라트는 다시 마냥과 손짓발짓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몇 마디의 주신 말을 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은 뭐라고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울라트는 미흡하나마 도깨비들과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것이다. 울라트는 사실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독심술의 재간을 타고난 아이였다. 다만 자유자재로 남의 마음을 정확히 읽는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는 정도였으니, 약간의 손짓발짓을 더하면 거의 틀림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울라트는 마냥<주석 : 마냥은 아프리카사하라사막 남쪽. 누비아지방의 흑인으로 설정되어 있다. 누비아에서 이집트, 다시 이집트에서 메소포타미아, 스키타이를 거쳐 동북아까지 온 기구한 인물이다. 아프리카의 사막 주변에 사는 원주민들은 근래까지도 물을 찾는 데 대단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과 대화를 하다가 활짝 웃으며 외쳤다. “마냥이 살던 곳이 바로 사막이었대요! 여기는 자기가 살던 사막보다 좁고 그리 더운 것도 아니니, 틀림없이 물을 찾을 수 있을 거래요!” 모든 사람은 그 말을 듣고 환호성을 올리며 기뻐했다. 치우천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 새까만 도깨비가 그런 재주를 갖고 있을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냥은 사람들이 기뻐하자 흰 이빨을 드러내며 웃다가 갑자기 머리를 긁적긁적하더니 짐을 뒤졌다. 그리고 짐을 쌌던 바구니에서 조심스럽게 길다란 나뭇가지를 두 개 뽑아내더니 조금씩 구부렸다. 그리고 그렇게 구부러진 막대기를 한 손에 하나씩 들고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울라트가 묻자 마냥은 이것은 물을 찾는 방법이라고 했다.<주석 : 구부러진 막대기를 들고 물을 찾는 것을 다우징(dowsing)이라고 하는데, 고대로부터 수맥을 찾는 방법 중 하나로 알려진 방법이다. 근래 우리나라에서는 건강을 위해 수맥을 찾아 피한다는 것 때문에 알려졌는데, 이것은 원래 물을 찾는 방법이었다. 그 역사는 아주 오래되고 범위도 넓어서 아프리카, 유럽, 중남미 등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그것을 보고 치우천이 일행에게 말했다. “모두 마냥의 뒤를 따르자. 헤어지면 안 된다.” 도깨비들은 두 달 전에는 많이 다쳤지만, 그동안 여행하면서 대부분 상처가 나아 있었다. 도깨비들 가운데 둘은 치우비를 부축하고, 한명은 치우천을 업었으며, 다른 두 사람은 울라트를 업고 호위했다. 소녀도 업어주려 했으나 소녀는 비틀거리면서도 도깨비들에게 업히는 것을 거절했다. 그날은 물을 찾지 못했다. 해가 저물자 마냥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지만 울라트는 내일은 꼭 물을 찾을 수 있을 거라며 용기를 주었다. 치우천은 남은 물을 고루 나눠 마시자고 했다. 치베가 반대했으나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물을 찾으면 모두 사는 것이고, 못 찾으면 모두 죽는 거다. 그까짓 물을 아껴서 무엇 하는가?” 치우천이 모두에게 물을 나눠 마시게 하자 물은 이제 거의 바닥이 났다. 그러다가 저녁때가 되자 모두들 지쳐서 주저앉고 말았다. 사막에서는 체력 소모가 극심하여 몹시 허기가 지고 목이 말랐지만 아무도 내색하지 않았다. 모두가 쉴 때 치베가 몸 안에 감추어 두었던 작은 주머니를 꺼내 치우천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소금이었다. “침이 나오게 조금씩, 천천히 핥아라. 빨리 핥으면 목이 더 마른다.” 치우천은 치베의 지혜에 감탄했다. “소금이 없었으면 모두 죽었을 것이다. 어느 틈에 챙겼나?” 치베가 슬쩍 웃어 보였다. “너희가 사막에 버려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우선 소금주머니부터 몸에 감추었다. 이것밖에는 감출 게 없었다. 물을 백 통 정도 감추고 싶었지만 그럴 재주는 없지 않은가?” 치베는 사람들이 모두 소금을 할고 난 다음 치우천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내일은 사냥을 해봐야겠다. 이대로는 버틸 수 없다.” 치우천이 의아해서 물었다. “어떻게 사냥을 하지? 여기는 짐승 한 마리도 없지 않은가?” “짐승은 없지만, 새는 있다. 독수리가 자주 날아온다. “ “하지만 독수리를 무슨 재주로 잡는가? 우리는 활도 없지 않은가?” “물론 어렵겠지만 해봐야 한다. “ 그날 밤은 모두가 쓰러져 금세 잠이 들었다. 다음날, 몇 시간 길을 가다가 모래바람이 불어 닥쳤다. 치베가 재빨리 옷을 찢어 입을 막으라고 했다. 모래바람이 별안간 거세져서 마치 누군가가 그들을 들어 모래바람 속으로 던져 넣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모래바람은 너무도 거세 입을 막지 않았다면 목구멍으로 모래가 들어가서 숨이 막혀 죽었을지도 몰랐다. 치베와 마냥은 계속 움직이라고 손짓했다.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모래에 파묻혀서 산 채로 죽는다는 것이다. 그 미친바람 속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힘이 들었다. 소녀가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자 치우비가 얼른 들쳐 업었다. 모두 미친 듯한 모래바람을 뚫고 움직이느라 방향을 잃어버려 몇 번이나 흩어질 뻔했다. 다행히 치베와 마냥이 사막에 익숙하여 그 위기를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래바람이 그친 후에 살펴보니 금발머리 도깨비들 중 하나가 없어졌다. 치베는 아마 모래바람 속에서 쓰러져 산 채로 파묻힌 것 같다고 한숨을 쉬었고, 정이 많은 치우비는 눈시울을 붉히며 연신 탄식을 했다. 그날은 모래바람을 뚫느라 너무도 지쳐서 해가 지자마자 모두들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이렇게 지치고 힘들 줄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던 터였다. 그날 저녁, 치베는 지친 몸으로 저만치 걸어가면서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치베는 땅에 드러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자 하늘에서 독수리 몇 마리가 나타나더니 치베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독수리 몇 마리가 내려와 치베를 쪼으려 했다. 치우비 등은 놀라서 치베가 죽은 것은 아닌가 하고 다가가려 했으나, 그 순간 치베가 벼락같이 손을 움직여 독수리 한 마리를 잡아챘다. 독수리는 왜 크고 사나워서 치베를 마구 쪼고 할퀴었으나 치베는 죽어라고 독수리를 잡고 놓지 않았다. 치우비가 얼른 달려가서 독수리를 죽였다. 치베는 껄껄 웃으며 죽은 독수리를 서둘러 끌고 가서 사람들에게 피를 빨아 마시라고 했다. 독수리 피는 냄새도 고약하고 비려서 소녀와 울라트는 구역질을 마시지 못했다. 치우비와 치우천 등은 억지로 참고 독수리 피를 겨우 한 모금 마셨고 도깨비들도 독수리 피를 마셨다. 그리고 독수리를 구울 참으로 털을 뽑았다. 그토록 커다란 독수리도 털을 뽑고 나니 비쩍 말라서 먹을 것이 거의 없었다. 그것을 열세 사람이 나눠 먹으니 먹은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치베는 독수리에 쪼여서 많이 다쳤으니 도리어 잃은 것이 더 많은 듯했다. 그런 식으로 이틀이 더 지났다. 마냥은 아직도 물을 찾지 못했고 길도 얼마 가지 못했다. 치베와 치우비, 다른 도깨비들까지 합제하여 독수리들을 잡으려 했으나 겨우 세 마리의 독수리를 잡았을 뿐이다. 무기도 없고 활을 만들 재료조차 없기에 독수리를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집어던질 돌조차 없었다. 이제는 갈증에 지쳐 소녀와 울라트도 두말없이 독수리 피를 빨아 마셨다. 처음에는 옷이나 잡동사니를 태워 독수리를 구웠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귀찮아서 산 채로 비리고 역겨운 고기를 씹었다. 그래도 턱없이 부족한 독수리 피와 독수리 고기로는 여러 사람이 버틸 수 없는 탓에 모두가 점점 쇠약해져 갔다. 특히 체구가 큰 치우비는 허기를 이기지 못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쇠약해져 갔다. 오히려 참을성이 대단한 치우천이 가장 멀쩡한 편이어서 이제는 동생을 보살폈다. 길을 가다가 또다시 도깨비 한 명이 죽음을 당했다. 유사(流砂)에 휩쓸린 것이다. 다른 이들이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갔을 때 그 도깨비는 이미 팔만 남기고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다른 도깨비와 치우비 등이 놀라서 구하려 했으나 치베가 그들을 결사적으로 막아섰다. 자칫 유사에 한 발만 디디면 누구도 빠져나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그 도깨비는 유사 속으로 파묻혀 사라졌고 모든 이들은 비통하고 무서운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생각보다 사막은 너무도 무섭고 힘든 곳이었다. 낮에는 찌는 듯한 더위가 덮쳤고 밤에는 살을 에일 듯한 추위가 거듭되었다. 그들은 변변히 바람을 막을 것조차 없어서 밤이면 한데 모여앉아 얼싸안고 간신히 추위를 막았다. 다시 이틀이 지나자 이제 소녀와 울라트, 치우비는 거의 움직이기도 힘든 지경이 되어버렸다. 소녀는 몸에 열이 솟아 헛소리까지 했다. 치베는 거의 포기한 듯 텅 빈 물통을 목에 걸고 멍하니 주저앉아 장난처럼 모래를 내던지고 있었다. 치우천마저도 이제 끝인가 생각했다. 엿새나 길을 갔지만 대강 보기에도 낙타를 타고 지나온 사흘 거리 만큼도 가지 못한 것 같았다. 이런 상태라면 앞으로 수십 일을 더 버텨낼 수가 없었다. 모두가 포기하려 할 때, 마냥이 미친 듯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도깨비들이 모두 늘어져 미처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유일하게 그 소리를 들은 치우천과 치베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넘어지고 엎어지며 모래언덕 하나를 기어 올라가 보니, 저만치에서 마냥이 미친 듯 춤을 추며 소리를 지르는 것이 보였다. 마냥은 두 개의 높은 모래언덕 사이에 깊이 파인 골짜기에 있었는데, 그가 서 있는 앞쪽의 모래는 색깔이 달랐다. 물이 있었던 것이다! 치우천과 치베는 갑자기 힘이 솟아오르는지 미친 듯이 그리로 달려갔다. 마냥은 마구 모래를 파헤치고 있었다. 잠시 후 모래 밑에서 ‘꼴꼴’ 소리와 함께 물이 솟구쳤다. 그 물은 모래투성이라 탁했지만 세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달콤했다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고 갑자기 온몸에 활기가 넘치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목을 축인 뒤, 마냥은 계속 그곳을 파고, 치우천과 치베는 물통에 물을 담아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가장 먼저 치우비와 소녀, 울라트에게 물을 먹이며 치베가 말했다. “천 안다! 저 물은 오래 안 간다. 금방 말라버릴 테니 물을 담아야 한다!” 치우비도 물을 조금 마시자 금세 기운을 차렸다. 치우천이 도깨비들에게 물을 먹이는 동안, 치우비와 치베는 얼마 되지 않은 짐을 뒤져 닥치는 대로 물건들을 헤집었다. “가죽은 모조리 꺼내야 한다. 가죽주머니를 만들면 물을 담을 수 있다!” 치베의 말을 듣고 치우비는 열심히 짐을 뒤져 짐 안에서 가루 같은 것이 담긴 소 오줌통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전에 앗수라트 부족장 키타야가 선물로 주었던 것 중 하나였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그저 짐에 넣어둔 채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치우비는 그것을 보고 치베에게 말했다. “이 가루를 버리면 여기도 물을 담을 수 있을 거다!” 순간 치베가 그것을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외쳤다 “아! 이...... 이것은! 이게 어디서 났는가!” 치우비는 치베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어 가루를 쏟아버리려 하다가 멈칫했다. “나는 모른다. 무슨 약 같은데, 지금 약이 있어서 무엇 하느냐?” 그러자 치베는 얼른 그것을 빼앗아 품에 안고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우하핫’큰 소리로 웃었다. 치우비는 치베가 왜 그러는지 몰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치베는 모래에 뒹굴면서 웃다가 울다가 마침내 치우비에게 외쳤다. “우린 살았다!” “루슨 소리냐?” 치우비가 멍한 표정으로 물어보자 치베는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우린 살았단 말이다! 이 바보! 멍청이! 왜 이 보물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랬으면 이 고생은 안 했다! 배고플 일이 없었단 말이다!” 치우비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어 또다시 물었다 “그게 먹을 것이냐?” “맞다! 맞아! 이것은 보르챠<주석 : 보르챠는 몽골족의 건조식량으로 그 건조율은 근래의 우주비행사의 식 량 건조율을 훨씬 능가한다고 한다. 후에 징기스칸이 엄청난 기동력으로 천하를 쟁패한 데에는 이 보르챠의 공이 크다. 소 한 마리를 오줌통 하나에 넣을 수 있기 때문에 작은 주머니 하나가 한 사람의 여섯 달 이상의 식량이 되는데, 이는 보급의 양을 극도로 줄여주어 몽골군의 기동력에 큰 보탬이 되었다. 보르챠는 한번에 그리 많은 양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몽골 사람들은 그것을 보물처럼 아꼈고, 근래에 이르러서는 만병통치약 같은 것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으나, 그것은 아주 발전된 형태의 건조식량일 뿐이다.>라는 것이다! 우리 몽골족만이 아는 물건이니 너는 몰랐던 게 당연하지! 하하핫! 하핫!” 치우비는 치베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것이 먹을 것이라고 해도 기껏해야 소 오줌통 하나에 담긴, 적은 분량이지 않은가. 나누어 먹어도 한 끼도 안 될 것인데 어떻게 살아났다고 하는 것일까? 치베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이리로 와라! 내가 신기한 것을 보여주겠다!” 치베의 말을 듣고 치우천, 치우비와 도깨비들까지 우르르 치베의 뒤를 따랐다. 치베는 계속 웃으며 마냥이 파둔 물구덩이로 갔다. 마냥이 열심히 모래를 파헤쳐서 물구덩이에는 이제 쾌 많은 물이 드러나고 있었다. 치베는 목에 걸고 있던 나무 물병에 그 가루를 조심스럽게 약간 집어넣고 거기에 물을 담았다. 그리고 뚜껑을 닫고 조금 흔들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배불리 먹게 해준다.” 치우비는 물론 치우천마저도 영문을 알 수 없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방금 치베는 기껏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의 가루를 넣었는데 어떻게 배불리 먹게 한다는 것일까? 잠시 후, 치베가 물병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물병에 하나 가득 다져진 고기가 죽처럼 되어 들어 있지 않은가! 그 고기는 신선하고 맛도 좋았다. 사람들은 놀라서 허겁지겁 그 고기죽을 마구 집어먹었다. 치베는 연달아 여섯 번,가루를 조금씩 떠서 물에 타주었는데, 그것을 나누어 먹자 모두가 어느 정도 배가 찼다. 치우비는 너무도 신기하여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너무 신기하다! 치베! 주술을 부린 것이냐?” “그건 아니다 이 보르챠는 우리 몽골족의 보물이다. 다른 부족 사람은 알지도 못하고 상상도 못하지! 하하핫. 이것을 가지고도 굶어죽을 뻔하다니! 이건 소 한 마리가 넘는다!” 그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기껏해야 오줌통 하나에 들어갈 분량인데 소 한 마리라니! 명석한 치우천은 감이 잡히는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것은 말린 고기 같은 것이냐? 그러나...... 믿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고기를 말려도 그렇게 작게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은 몽골족의 비법이다. 여기서 먼 몽골족의 땅에는 텡그리의 힘이 깃든 깊은 동굴이 있다. 그곳에서 신성한 제사를 지내고 우리 몽골 주술사가 고기를 말리면 보르챠가 된다. 세상 어디에서도 보르챠를 만들 수 없고 오직 그 동굴에서만 만들 수 있으며, 우리 주술사만이 만들 수 있다. 이것은 그중에서도 아주 좋은 보르챠라서 이 정도라면 소 한 마리가 넘는다. 다만 미리 물을 부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제 물도 있다! 우리는 더 이상 굶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 말을 듣자 모두가 기뻐 껑충껑충 뛰었다. 방금 열 명 이상이 배불리 먹었는데도 보르챠는 한 줌 정도밖에는 줄어들지 않았다. 정말 소 한 마리 이상의 양이 되는 듯했다. 그렇다면 모두가 먹어도 이 보르챠로 적어도 열닷새, 아껴 먹으면 스무 날 정도는 버틸 것 같았다. 그리고 고기라서 몸에 힘이 났고 영양도 충분했다. 그렇다면 이제 물도 찾았으니 충분히 사막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더구나 치베와 마냥은 사막에 익숙하고 노련하여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으니, 이제는 살아났다고 보아도 좋았다. 치우비는 너무 기쁜 나머지 울라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외쳤다. “네 아버님이 우리를 살려주셨구나! 하하핫!” 치우천도, 소녀도 기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는 도깨비들은 좀 머쓱해 있었는데, 그중 나이가 가장 많고 횐 천을 머리에 두른 현명해 보이는 늙은 도깨비가 도깨비들에게 뭐라고 대신 설명하는 듯했다. 치우천이 언뜻 보니 그 도깨비는 꽤 많은 말을 할 줄 아는 듯했다. 치우천이 다가가자 그 도깨비는 정중히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는데 놀랍게도 서툴지만 주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도깨비 싱카, 주인님의 형님께 절합니다.” “싱카?” 치우천이 되묻자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싱카입니다. 그냥 그렇게 불러주도록 하세요.” 말하는 것이 영 어색하석 아직 자유로운 대화가 되지는 않았으나 그나마 싱카가 그동안 몹시 애를 써서 익힌 것 같았다. 치우천은 웃으며 치우비와 함께 도깨비들의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리미, 마냥, 싱카 등은 이름이 쉬웠으나 게르하르트나 폴리비쿠스 등의 기이한 이름은 외우기도 부르기도 어려웠다. 이제 도깨비들은 사막에서 두 명이 죽어 일곱이 남았을 뿐인데, 나머지 둘의 이름은 주르케닉스와 코탈팔리니우아라는 듣기조차 어려운 복잡한 이름이었다. 치우비는 혀가 뱅뱅 돌 지경이었다. 치우천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 어려운 이름을 어찌 부르겠니? 너 편한 대로 부르렴. 네가 주인 아니냐?” 천의 말에 치우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이름을 간단하게 정해주었다. “앞으로 너희는 개르, 포리, 주루, 코타라고 부르겠다.” 도깨비들은 치우비가 뭐라 부르건 개의치 않은 듯 웃기만 했다. 이름도 부르지 못하고 죽은 도깨비들을 생각하니 치우비는 가슴이 아팠지만 도깨비들이 비로소 이름을 갖게 되자 기분이 좀 풀어졌다. 그때 치베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은 금방 말라버린다. 조금이라도 넉넉하게 받아놔야 한다.” 그러자 모두는 다시 깜짝 놀라 급히 가죽과 가죽옷을 벗어 주머니를 만들고, 한편으로는 계속 물을 퍼 담았다. 물은 처음에는 왜 고여 있었으나 조금씩 퍼 담자 점점 말라가기 시작했다. 물을 또 찾는다는 보장을 할 수 없으므로 최후의 한 방울까지 받아야 했다. 꼬박 하루 동안 물을 받자 여덟 개의 물주머니와 다섯 개의 병에 물을 담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자 모래웅덩이에는 더 이상 물이 고이지 않고 서서히 말라 들어갔다. 울라트가 마냥의 말을 전해주었는데, 사막의 물줄기는 살아 있는 것이라, 항상 움직이기 때문에 이렇게 금방 물이 말라버린다는 것이다. 좌우간 치베가 대강 따져 보니, 아껴 마시면 그럭저럭 스무 날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치베는 물주머니들을 꼼꼼히 점검하여 물이 새지 않나 살펴보았다. 가죽으로 된 물주머니들은 옷까지 벗어가며 급히 만들었어도 제법 잘 만들어져 물이 새는 것은 두 개밖에 되지 않았다. 치베는 그 두 개의 물주머니도 다시 꼼꼼히 고쳤다. 그때 가죽옷을 걸친 자들은 옷을 벗은 채였는데, 치베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며 무엇이라도 몸에 둘러서, 가급적 맨 살갗을 내놓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결국 짐에 들어 있던 천과 주머니, 빈 화살통까지 모조리 꺼내고 싱카의 머리에 둘렀던 흰 천마저도 절반으로 잘라내어 나누어 이은 뒤에야 몸을 가릴 수 있었다. 그러느라 다시 하루가 지났다. 이제 물과 보르챠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하루를 쉬고 나자 대부분 사람들이 기운을 차렸다. 치우천도 다리가 많이 풀려서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소녀도 제대로 걸을 만하게 되었다. 소녀는 원래 험한 카린산에서 나고 자라서 보기보다는 훨씬 강인하고 튼튼했다. 울라트와 도깨비들도 거의 원기를 되찾았고 원래 기운 센 치우비는 완전히 회복이 되었다. 치우비는 배가 고파서 기운을 못 썼던 것이다. 다만 울라트는 아직 어렸으므로 리미(레이미)가 항상 어깨 위에 얹고 다녔다. 리미는 생김새는 흉악했지만 보기와 다르게 아이들을 참 좋아하는 듯, 울라트를 퍽 아껴주었고 울라트가 장난을 쳐도 껄껄 웃으며 싫은 표정 한 번 짓지 않았다. 일단 여유가 생기자 치우천 치우비는 몸에 끼얹어져서 썩은 냄새를 풍기던 피를 모래에 문질러 씻어냈다. 마냥과 치베는 모래로 세수를 하기도 했는데 물보다 오히려 좋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상해서 모래로 세수를 하지 못했다. 일단 식량이 생기자 고생스럽기는 해도 사막을 가는 것은 이제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특히 치베와 마냥은 사막을 가는 법에 밝았다. 한 번 유사에 휩쓸려 동료를 잃은 적이 있으므로 다시 유사를 만날까 봐 치베와 마냥은 언제나 앞장서 달려 나가 길을 확인하곤 했다. 사실 물과 식량이 없었다면 치베나 마냥도 그렇게 기운을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치우천이 치우비에게 말했다. “정말 사막은 대단하다. 치베와 마냥이 따라오지 않았거나, 보르챠가 없었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죽었을 거야.” 치우비가 웃으며 되받았다. “그런데 그 치우가람 놈이 어째서 우리에게 그 귀한 보르챠를 남겨준 걸까?” “그 녀석도 그게 뭔지 몰랐을 거다. 그냥 무슨 가루 같은 것으로 생각했겠지. 솔직히 우리도 그걸 먹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잖니?” “그놈이 왜 우리에게 짐을 남겨줬지? 비록 먹을 거랑 무기는 다 빼냈지 만......” 치우천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우릴 더 괴롭히려고 그런 거지.” “왜 ?” “아무것도 없다면 우리는 그냥 포기하고 죽기만 기다렸을 테고, 벌써 죽었을 거야. 하지만 뭔가 붙잡을 게 있다면 기를 쓰고 살려고 할 것 아니겠니? 사실 우리도 마냥이 물을 찾고, 치베가 보르챠를 가르쳐 주기 전에는 꼭 그런 꼴이었다. 간신히 독수리를 몇 마리 잡아 버티면서 점점 괴로워하고 말라가다가 죽어갔겠지...... 그놈은 아마 그런 우리 꼬락서니를 생각하며 계속 좋아할 거야.” 그 말에 치우비는 다시 울화통이 치밀었다. “그놈들을 다시 만나면 그때는......!” 치우비가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자 몸에서 우두둑우두둑 뼈 부딪는 소리가 났다. 그것을 보고 치우천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빠져나간다 해도 당장은 조심해야 한다. 한참 동안 나가 있다가 기회를 보아 조심스레 돌아가야 해. 잘못하면 치우가람 녀석들의 손아귀에 다시 잡힌다.” “우리가 살아난 건 우리가 그르지 않았다는 걸 안파견 한님이 밝혀준 게 되잖아. 우린 이제 죄인이 아냐.” “그러나 그걸 알리려면 우리가 신시까지 가야 한다. 그 길이 쉽지만은 않을 거야.” “사막만 넘어가면 뭐 문제될 게 있겠어?” 치우천이 씁쓸하게 웃었다. “너는 치우가람 놈이 그리 만만하다고 보니?” “무슨 소리야?” “글쎄. 그놈이 그냥 돌아갔을까? 혹시라도 우리가 다시 살아날까봐 여러 가지 대비를 해왔을 거다.” “그놈이 뭐 하러?” “우리가 살아나는 일은 그놈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거든.” “그놈이 아무리 우리를 미워해도...... 왜 그렇게까지......” “너는 잊었니? 우리 생각이 맞다면 그놈은 번개범을 시켜서 한웅님을 덮치게 한 짓거리에 거들었던 게 틀림없어. 그걸 밝히려 했던 게 우리야. 만약 우리가 살아나면 우리가 옳았던 게 되고, 그놈들은 의심을 받게 돼.” “아......” 치우비는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치우천이 계속 말했다. “그놈들은 맹세까지 했지 그러니 더더욱 겁나는 것이고, 의심을 받아서는 안 되는 거야. 빈틈없이 일을 꾸미는 거겠지. 너는 치우가람 놈이 길을 가면서 왜 우리를 일부러 괴롭히지 않았는지 이상하지 않았니?” “그렇군......” 치우비는 다시 한 번 형의 추리에 탄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치우천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만약 길을 가면서 그놈이 우리를 때리고 굶기고 괴롭혔다면 나는 도리어 지금 걱정이 없었을 거다. 하지만 그놈이 우리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았으니, 나는 되레 걱정이 되는구나. 그놈은 분명 우리가 살아날 것에 대비하여 뭔가 준비를 해놓았을 거야. 거기에 덜컥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비야. 우리는 결코 살아났다는 소문을 내지 말고, 그놈이 안심할 때까지 숨어 지내야 한다. 그놈은 대단한 놈이고 따르는 부하도 많아. 결코 마음을 놓아선 안 돼.” 이야기를 하다가 치우천은 문득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소녀의 눈과 마주쳤다. 소녀는 몹시 고생스러워 보였지만, 치우천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모래먼지로 더러워진 얼굴이지만 소녀의 눈웃음을 받자 치우천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치우천은 생각했다. ‘이제 나는 저 여자에게 한 맹세를 지킨 셈이군. 어찌되었건 한웅님에게서 저 여자가 놓여나지 않았는가?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까? 저 여자는 내게 마음이 있는 것 같다’ 그 생각을 하자 치우천은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치우천은 애써 그런 생각을 몰아내려고 애썼다. ‘아직 사막에서 빠져나가지도 않았는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사막에서 빠져나간 다음에 생각해도 된다.’ 한편으로는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왜 저 여자를 멀리하려는 거지? 사실 저 여자만큼 아름답고 사람을 흘리는 여자는 처음 보았다. 맥달도 아름답고 그 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기품이 있지만 저처럼 사람을 빨려들게 만들지는 못한다. 더구나 그녀는 맥달처럼 말도 걸기 힘들 만큼 고고하지도 않고, 혼자 모든 것을 안다는 듯, 이래라저래라 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런 게 싫단 말야. 더구나 소녀는 죽는 것도 두려워 않고 나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저 여자를 보면 자꾸 두려운 생각이 드는 거지?’ 치우천은 몹시 머리가 좋은 탓에 생각도 그만큼 많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누루마이가 나를 보고 나는 여자를 멀리하는 주술에 걸렸다고 했다. 혹시 소녀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 것도 그 주술 때문이 아닐까? 나, 치우천은 큰 뜻을 품은 남자인데 그깟 주술에 걸려서 내 마음먹은 바를 못하고 허우적거린다면 무엇에 쓰겠는가? 세상에 저렇게 아름답고 나를 좋아해주는 여자를 어디에서 다시 보겠는가? 그런데 그 빌어먹을 주술은 누가 건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니 은근히 화가 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생각할수록 일은 복잡하기만 했다. ‘소녀는 불쌍하게도 유망의 독에 중독 되어 있다. 소녀는 내가 그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할 테니 나도 아는 척해서는 안 되지. 그러나 어디보자...... 아이쿠, 그때부터 벌써 아흔 날 가까이 지났구나. 그때 해독약 열 알을 주었고 한 알이 열흘 정도 간다고 했으니 앞으로 소녀의 목숨은 열흘 정도뿐이겠구나. 아니다. 독이 그때 당장 발작하지 않았으니 열흘마다 한 알씩 열 알을 먹는다면 도합 백 열흘 정도 더 가겠지. 그래 봐야 스무 날 정도 남았다. 사막을 벗어나는 것도 큰일인데 소녀의 독을 어떻게 고쳐준단 말인가?’ 치우천은 머리가 좋아 한 번에 수십 가지의 생각을 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많은 생각을 동시에 하자 치우천의 표정은 밝아졌다 우울해졌다가를 순식간에 반복하여, 다른 사람이 볼 때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치우비는 형이 다시 생각에 잠기자 할 수 없다는 듯 실없이 웃고는 조금 뒤로 물러섰다. 형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날 밤, 치우천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 생각 저 생각에 뒤척이고 있는데 소녀가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은 낮 동안 사막의 강행군 때문에 모두 코를 골고 잠들어 있었다. 소녀는 조용히 생긋 웃으면서 다가와 치우천에게 지나 말로 속삭였다. “잠이 오지 않으시나요?” “좀 생각할 게 있었소.” 치우천이 담담히 대답했다. 그러자 소녀는 슬그머니 치우천 곁에 앉았다. 소녀는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소녀는 카린족 말과 지나 말밖에는 할 줄 몰랐는데, 이 일행 중 지나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치우천 뿐이었다. 그동안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사실 그럴 겨를이 없기도 했지만 소녀 스스로도 남의 눈을 꺼리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오늘 모두가 깊이 잠들고 치우천이 깨어 있자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다가온 것이다 소녀는 치우천 옆에 앉자마자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이 꽃보다 예쁜 소녀가 한숨을 쉬며 눈물을 흘리자 치우천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였다. “왜 우시오?” “치우천님이 이 고생을 하신 것도 다 저 때문이 아닙니까......” 어둠 속에서 치우천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내 운명이 그래서 그렇지, 왜 당신 때문이겠소? 나는 되레 당신에게 미안합니다.” “저에게 미안할 것이 무엇 있나요?” “당신같이 예쁜 여인이 나같이 복 없는 놈을 만나게 되어, 이런 세상 끝 사막에까지 와서 고생을 하게 되었으니 나야말로 미안하지요.” 사실 치우천은 그냥 미안하다는 뜻으로 이야기하려 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상대를 칭찬하는 이야기가 나오자 좀 겸연쩍었다. 치우천이 몇 번 헛기침을 하자 소녀는 어느새 볼이 불그레해져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오히려 저는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소녀의 말에 치우천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게 무엇을 감사한단 것입니까?” 소녀는 부끄러운 듯 간신히 말했다. “천님...... 천님이...... 잊지 않고 맹세를 지켜주셔서......” “나는...... 나는 사실은......” “더는 말씀 마소서.” 소녀는 비록 쑤앙마이 밑에서 남자를 흘리는 법을 배운 여자이기는 했지만, 아직 앳되고 감성이 풍부한 소녀(少女)였으며 연애경험도 없었다. 하물며 유망과 잠시 접해본 것 말고는 남자를 접해본 적도 없었다. 소녀와 같은 미녀가 바로 옆에서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고 있는 모습을 보자 치우천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문득 전에 접했던 소녀의 매끄럽고 옥 같은 살결이 떠올랐고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의 느낌도 되살아나는 듯했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사막의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했고 한줄기 달빛이 환하게 그들을 비춰주고 있었다 치우천은 그 분위기에 취해 정신마저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간신히 정신을 차려 자기 맹세는 사실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려 했다. “소녀님, 그 맹세는......” “쉿!” 소녀는 조용히 치우천의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몸을 치우천 쪽으로 기울였다. “...... 아무 말 마십시오.” 소녀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반짝이는 눈빛으로 치우천의 눈을 바라보았다. 치우천의 머리에 떠돌던 온갖 가지 생각이 모두 없어져 버렸다. 그저 온 세상에 소녀의 눈빛만이 가득 찬 것 같았고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소녀는 조심스럽게 치우천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저는...... 저는......” 수줍은 듯 말을 더듬던 소녀의 입술이 치우천의 입술에 와닿으려는 순간, 갑자기 그 둘의 머리 위에서 목이 쉰 듯한 괴이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우하하핫! 이게 뭐냐! 정말 보기 좋구먼! 보기 좋다!” 놀랍게도 그것은 주신 말이었다. 소녀와 치우천은 깜짝 놀랐다. 소녀는 놀라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치우천에게서 선뜻 떨어져 나오려 했으나 치우천은 되레 소녀의 몸을 잡고 자기 뒤로 돌려 소녀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누구냐!” 도깨비의 왕 치우천은 힘이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으나 목소리는 몹시도 크고 힘있는 울림이 있었다. 치우천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광활한 사막에 그 목소리가 메아리치면서 울렸고 그 소리에 치베와 치우비 등이 벌떡벌떡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 치우천은 무기가 없었지만 주먹을 힘껏 쥐고 용기를 내어 위를 바라보았다. 그 목소리는 바로 그들 위에서부터 들려왔는데, 그렇다면 그 목소리를 낸 자는 그들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치우천의 머리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돌연 왼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쿠! 놀래라. 목소리 한번 요란하구나!” 치우천이 급히 그쪽을 돌아보았으나 그쪽에도 역시 아무도 없었다. 소녀는 겁에 질려 덜덜 떨며 치우천의 옷자락을 잡았다. “귀신인가 봐요! 귀신!” 분명 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온통 모래언덕 뿐, 아무것도 없었고 뭔가가 숨을 장소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언가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 치우천의 오른쪽 귀를 살짝 건드렸다. “냄새가 나는구나! 냄새가 나!” 치우천은 등골이 다 서늘해져서 재빨리 옆을 돌아보았으나 이번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평소에는 대담한 치우천이었지만 이 뜻밖의 상황에 닥치고 보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소녀는 거의 까무러칠 듯했다. “귀신이에요! 귀신!” 치우천은 이를 갈며 소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뭐라 하는지 들었소?” “주신 말이라 몰라요!” 소녀가 무서움을 이기지 못해 엉엉 울자 치우천이 외쳤다. “이런 낯선 땅의 귀신이 어찌 주신 말을 하겠소? 이놈! 썩 나서라!” 그때 치우비와 치베가 달려왔다. 그리고 도깨비들도 우르르 달려왔다. 울라트는 덜덜 떨고 있었는데 여전히 리미의 어깨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도깨비들과 치우비, 치베 등은 소녀와 치우천을 가운데 두고 보호하듯 몸을 에워쌌다. 그들이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다시 뭔가가 치우비 근처에서 소리를 질렀다. “냄새가 나! 이건 분명......!” 그때 치우비는 조용히 힘을 모으고 있다가 소리가 들리는 허공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내뻗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친 것인데 ‘퍽’ 소리가 나며 손에 느낌이 왔다. 치우비의 주먹에 맞은 것이 뭔지는 몰랐으나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다만 저편의 모래 위에 또 다시 ‘퍽’ 소리가 나면서 뭔가가 떨어진 듯 움푹 파여 들어갔다. 모두들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건 분명 사람은 아니었다. “이놈!” 치우비가 담담한 얼굴로 달려들며 주먹을 다시 한 방 날렸다. 치우비는 싸움에 임하여 긴장하면 절대 얼굴을 찡그리거나 인상을 쓰지 않고 담담한 표정이 되는데, 그것은 속으로는 극도로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치우비가 있는 힘을 다해 주먹으로 모래땅을 치려 하자 모래가 조금 획 하고 흩어졌다. 곧이어 치우비의 주먹이 쿵 하면서 모래를 뚫고 거의 팔꿈치까지 박혔으나 뭔가가 맞는 감각은 없었다. 그때 치베가 외쳤다. “오른쪽!” 비록 달이 밝다고는 하나 사막 한가운데라 그들은 불조차 피우지 못하고 있었다. 사방은 상당히 어두웠는데, 치베는 원래 어둠을 뚫고도 볼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이 있었다. 치베의 눈에는 아주 희미하나마 일렁이는 그림자 같은 것이 보였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치우비는 지체 없이 왼손을 갈고리처럼 굽혀 오른쪽의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치우비는 정말 번개같이 빠른 속도로 연달아 아흡 번이나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때마다 손가락은 마치 강철처럼 ‘꽉꽉’ 소리를 냈는데 움켜잡는 속도가 하도 빨라 아흡 번의 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마치 ‘쏴-’ 하는 것처럼 들렸다. 마침내 아홉 번째 움켜잡았을 때 뭔 가가 손에 쥐어지는 느낌이 왔다. 치우비는 혹시라도 그것이 빠져나갈까 봐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쥐었다. “끼이이 익!” 엄청난 비명소리가 들려오면서 치우비의 손에 쥐어진 것이 탁 터졌다. 순간 거무스레한 액체가 치우비의 몸에 튀었다. 치우비는 싸움에 임할 때는 바로 옆에 벼락이 떨어져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는지라 검은 물이 튀건 말건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손에 쥔 것을 냅다 땅에 태질을 쳤다. 퍽 소리가 나면서 모래가 깊숙이 파이면서 먼지가 일자 치우비는 다시 재빨리 발을 뻗어 그것을 짓눌렀다. 그러자 검은 물이 스르르 퍼져나가면서 투명했던 그 물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으아약!” 울라트와 소녀의 비명소리가 사막에 울려 퍼졌다. 모래땅에 박힌 그것은 기이하고 추악하기 짝이 없는 생김새였다. 마치 커다란 눈알 같은 것이 머리처럼 덜렁거리며 달려 있고 가느다란 몸뚱이에 가느다란 두 개의 다리가 달려 있을 뿐, 코도 입도 날개도 손도 없었다. 더구나 그 추악한 물체는 치우비의 손에 잡혀 터지고 땅에 태질이 쳐져서 만신창이로 박살난 고깃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몸에서 흐르는 것은 피 같았는데, 붉은 피가 아닌 시커먼 피였다. 치우비는 그제야 담담했던 표정을 풀고 놀란 모습으로 그 물체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지?” 치베나 마냥도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울라트가 놀라서 엉엉 울면서 외쳤을 뿐이다. “도깨비야! 도깨비!” 그때 허공에서 붕붕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다시 아까의 목쉰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런 흉악한 놈이 있나?” 그러자 치우비가 외쳤다. “아직 죽지 않았느냐?” 그 목소리도 성난 듯이 외쳤다. “너야말로 죽을 것이다!” 갑자기 치우비의 뒤통수를 무엇인가가 철썩 후려쳤다. 아주 센 힘은 아니었으나 상당히 아팠다. 치우비는 화가 나서 손을 뒤로 뻗었으나 이번에는 치우비의 오른쪽 뺨에 무언가가 와서 철썩 때렸다. 그러자 치베가 뛰어나가며 소리쳤다. “비 안다! 여러 마리가 있다!” 안 그래도 치우비는 몇 대를 얻어맞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단번에 담담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다가 치우비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어차피 보이지 않는 적이니 눈을 감는 것이 나았다 눈을 감자 주변에 일렁거리는 뭔가가 느껴졌다. ‘둘...... 셋...... 넷...... 네 마리구나!’ 순간 치우비는 벼락같이 고함을 지르면서 왼발을 축으로 몸을 돌렸다. 치우비의 몸이 팽이처럼 팽그르르 돌아갔다. 돌아가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양손을 휘둘러 허공을 잡아채고 오른발 역시 엄청난 속도로 허공을 쓸어갔다. 순식간에 ‘탁탁’소리와 함께 발에 맞아 허공에서 검은 핏방울 하나가 터졌고 양손에서도 ‘퍽, 퍼퍽’ 소리와 함께 세 번의 검은 핏방울이 터져나왔다. 대강 어디쯤 있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아내자 치우비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서른여섯 번의 주먹질과 열네 번 발길질로 네 마리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모조리 잡아 터뜨려버렸다. 마침내 치우비가 ‘흥’ 하고 코웃음 소리를 내며 몸을 멈추었을 때, 치우비의 양손에는 세 마리의 괴이한 눈알 괴물이 잡혀 있었고 발에 맞은 놈은 이미 두 토막이 난 채 저만치에서 서서히 죽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치우비는 검은 피를 뿌리는 눈알 괴물들을 획 던져버리고 허공에 대고 외쳤다. “사람을 놀라게 하다니! 가만 두지 않겠다!” 그러자 허공에서 다시 그 목쉰 소리가 들렸다. “네 놈이 한가닥하는구나! 하지만 너는 왜 함부로 내 부하들을 죽이는 거냐?” “너희가 먼저......!” 치우비가 외치려 하는데 갑자기 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나는 너희를 손톱만큼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너희가 먼저 내 부하를 죽였어!” 그 소리는 너무도 크고 괴기스러워 소녀와 울라트는 귀를 막고 비명을 질렀다. 치우천과 도깨비들 몇몇도 휘청했지만 치우비는 눈 한번 깜빡거리지 않았다. 그때 치우천이 다급히 외쳤다. “우리는 놀라서 그런 것뿐이다! 너는 누구냐?” 그러자 그 목소리가 일순 음산하게 작아졌다. “네깟 것들이 나를 알 수 있느냐?” “왜 우리를 놀라게 한 거냐?” 이내 그 목소리는 화난 듯이 외쳤다. “왜 너희는 내 땅에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냐!” 치우천은 의아했다. “네 땅이라고? 이 사막이 네 땅이냐?” “그렇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 고약한 냄새를 풍겼단 말이냐?” “빌어먹을 놈들아! 네놈들 때문에 내 부하들이 난리다! 네놈들이 그런 고약한 냄새를 풍겼으니 내 부하들이 화가 날 수밖에!” 치우천은 이해가되지 않았고 저 상대가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상대방이 그렇게까지 적의를 품은 것 같지는 않아 이내 공손하게 말투를 고쳤다. “주신 사울아비 치우천이 말한다. 우리는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여기가 당신 땅인지도 몰랐으며, 무슨 냄새를 풍겼는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당신을 화나게 했다면 모르고 그런 것이니 이해해라.” “사울아비냐?” “그렇다.” “사울아비가 왜 더러운 썩은 말 피 냄새를 풍긴단 말이냐? 도깨비들이 말을 싫어하고, 그중에서도 썩은 말피 냄새를 가장 싫어한다는 것을 모르느냐?” 순간 울라트가 비명을 질렀다. “도깨비 왕이다!” 소리를 지르고 울라트는 그만 리미의 어깨 위에서 쓰러졌다. 치베와 치우비, 리미 등이 깜짝 놀라 울라트를 살펴보았으나 울라트는 이미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까무러쳐 있었다. 그때, 마냥이 질린 얼굴로 치우천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치우천은 물론 치우비마저도 주위를 둘러보고 깜짝 놀랐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들의 사방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뿌연 불빛이 넘실거리며 그들을 완전히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도깨비불이다!” 치우비가 놀란 듯이 외쳤다. 별안간 도깨비불들이 춤을 추듯, 여기저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수가 몇 백,몇 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더니 곧이어 ‘웅웅’ 웅성거리는 소리가 도개비불에서 들려왔다. 급기야 그 소리는 점점 커져서 통곡하고, 웃고 깔깔거리고 비명을 지르는 등,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정신없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도깨비불들의 아래쪽으로부터 서서히 각양각색의 추악하고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생김새의 도깨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꾀 많은 치우천으로서도 이런 상황을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치우천의 뇌리에 도깨비 왕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스쳤다. 도깨비의 왕이 먼 사막 접경에 있다는 앗수라트 부족장의 말을 치우비에게 들었는데, 기이하게도 바로 그 도깨비 왕을 만난 것에 틀림없었다. 도깨비들은 언뜻 보기에도 그 숫자가 끝도 없이 많았으며, 그 도깨비들은 치우비의 손에 검은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아무리 치우비가 천하장사라고 해도 이 수많은 도깨비들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었다. 치우천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급히 외쳤다. “당신이 도깨비 왕이오?” 곧바로 그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렇다 내가 바로 도깨비들의 왕이다.” 문득 치우천은 마냥과 싱카 등의 모습을 보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얼른 외쳤다. “나도 도깨비들을 데리고 있소! 도깨비들에게 잘 대해주었고 결코 그들을 괴롭히지 않았으니 화를 내지 마시오!” 별안간 그 목소리가 마구 웃어댔다. “우하하핫!” “왜 웃소?” 그러나 그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고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가 그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너 정말 웃기는 녀석이구나. 네가 도깨비들을 데리고 있다고? 잘 대해 주었다고? 어디 보여봐라!” “리미! 마냥! 싱카! 전부 내 옆으로 와라!” 그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었으나 싱카만이 떨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치우천이 손짓을 하자 얼른 달려와 옆에 섰다. 그러자 치우천이 말했다. “이들은 내 아우가 타타르족 앙가마이 부족에게서 얻은 도깨비들이오! 내 아우가 사람들에게 잡혀서 고생하는 그들을 풀어주었소! 당신은 도깨비의 왕인데, 도깨비들을 잘 대해준 우리에게 어떻게 이리할 수 있소?” 그 목소리는 다시 한 번 배를 잡고 웃는 듯했다. 그러다가 그 목소리가 말했다 “정말 웃긴다. 정말 웃겨! 이게 정말 얼마 만에 웃어보는 것인가? 이 녀석아! 도깨비? 우하핫!” 목소리는 다시 한참 웃었다. 치우천, 치우비 등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가 하고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 목소리가 이상한 주문 같은 것을 중얼중얼 외우더니 다시 말했다. “이 멍청한 녀석들아 도깨비란 것은 이런 것이다!” 순간 그들 눈앞에 험상궂고 이빨을 드러낸 덩치 큰 괴물 네 마리가 나타났다. 갑자기 땅에서부터 주욱 솟아오른 것이다. 그들은 모두 흉악하고 눈빛이 번쩍거렸으며, 손이 세 개에 발이 네 개 달린 기이한 놈들도 있었다. 치우비가 놀라서 형의 앞을 막아서는데, 갑자기 도깨비들이 획 재주를 넘더니 돌연 아리따운 여자들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이...... 이게 뭐야?” 치우비마저도 놀라 더듬거리는데, 그 여자들은 호호호, 깔깔 웃으면서 사뿐사뿐 그들에게 다가오다가 다시 재주를 넘었다 그 순간, 그들 앞에는 거대한 곰 네 마리가 으르렁거리며 포효했다. 도대체 믿어지지 않는 일이라 리미와 마냥은 더 버티지 못하고 다리에 힘이 빠져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다음 순간, 곰들이 다시 재주를 넘더니 이번에는 한 마리의 거대한 뱀으로 변하여 무시무시한 비명을 지르면서 하늘을 향해 무서운 불길을 내뿜었다. 치우비가 더 견디지 못하고 주먹에 힘을 주며 달려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그 뱀이 ‘펑’ 하고 사라져 버리더니 네 마리의 눈알 괴물이 낄낄거리며 허공에서 깡충거리다가 돌연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치우비는 주먹을 쥔 채 멍하니 흘린 듯 눈앞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마냥이나 리미는 아예 기절한 듯했다. 치우천마저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목쉰 소리가 다시 껄껄 웃으며 외쳤다. “이 녀석아! 이런 것이 도깨비다! 어디서 희한하게 생긴 사람들을 데려다 놓고 도깨비라고? 저놈들보고 재주를 부려보라고 해봐라! 할 수 있냐? 그런데 도깨비도 아닌 저놈들을 도깨비 왕인 나더러 거둬가라고?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이냐? 우하하핫!” 목쉰 소리가 웃어대자 그들의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도깨비들도 각자 생겨먹은 것과 비슷한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크게 웃어대서 잠시 동안 귀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치우천은 그들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외쳤다. “그러면 이들은 도깨비가 아니라 사람이란 말이오? 세상에 이렇게 생긴 사람도 있단 말이오?” “그건 나도 모른다. 좌우간 그놈들은 도깨비가 아냐. 사람에 훨씬 가깝다.” “사람과 가깝다고 해서 도깨비가 아니란 법은 없지 않소?” 그러자 그 목소리는 답답한 듯 외쳤다. 치우비는 아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도깨비 왕인 것을 알자 속으로 그자를 잡아야 빠져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자의 목소리는 사방에서 울리는 듯하여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제길! 좌우간 저놈들은 도깨비는 아냐! 저놈들은 생긴 것이 다를 뿐이지, 사람하고 똑같이 먹고 자고 붉은 피를 흘리지 않느냐? 도깨비는 애초부터 사람과 다르다!” “어떻게 다릅니까?” “모든 게 다르다! 생각하는 것도 먹고사는 것도, 좌우간 도깨비와 사람은 애당초 달라!” “당신은 주신 말을 쓰는데, 혹시 당신은 사람이 아니오?” “흥! 도깨비의 왕이 어찌 사람이겠느냐?” 치우천이 그 목소리의 말을 집요하게 되받았다. “나는 당신 말을 듣고 보니 당신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어째서냐?” 목소리가 화난 듯 물었으나 치우천은 눈도 깜빡 않고 대꾸했다. “도깨비가 당신 말대로 사람과 아예 다른 것이고, 당신도 도깨비라면, 당신은 왜 사람인 우리를 보고 보기 좋다고 놀리고, 우리를 보고 웃었습니까? 나는 당신이 분명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곧바로 대답하지 알아 잠시 잠잠해졌다. 치우천은 이왕 내친김에 다시 말했다. “당신은 사람이며, 분명 대단한 재주를 가졌을 것입니다. 당신의 뜻은 분명 내가 헤아릴 수 없이 높겠지만 굳이 도깨비들을 데리고 다니며 사람을 해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를 이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자 그 목소리는 갑자기 음산하게 변하여 나직하게 ‘흐흐흐’ 웃었다. “내, 너같이 건방진 놈은 처음 보는구나. 거 참, 잡아먹으면 맛이 좋겠군, 그래.” 그 말에 치우비와 소녀가 움찔하고 놀랐으나 치우천은 웃으며 태연하게 되물었다. “잡아먹는다고요?” “웃기냐?” 치우천은 그저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목소리는 다시 사방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외쳤다. “너희는 도깨비 넷을 죽였다!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너희들 모두를 죽여야 한다! 그러나 너희가 모르고 그런 것이라니 나도 똑같이 넷만 죽이도록 하겠다!” 여전히 치우천은 웃음을 거두지 않고 침착하게 되받았다. “고맙군요. 그런데 조금 더 베풀어주셨으면 합니다. 아까 내 덕분에 재미있게 웃지 않았습니까?” 치우비와 치베는 치우천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무래도 지금 치우천은 도깨비 왕을 상대로 장난치는 듯했고, 만약 도깨비 왕이 화가 나면 아무도 살아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치우비와 치베는 치우천에게 연신 눈짓을 했는데도 치우천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목쉰 소리는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외쳤다. “좋다! 나를 웃겨주었으니 셋만 죽이도록 하겠다!” “당신은 아까 아주 보기 좋다, 보기 좋다고 했는데, 보기 좋은 구경을 했으니 조금 더 베푸시죠?” 그 말에 목소리가 화를 냈다. “이놈이 지금 나랑 장난을 치자는 것이냐?” 그래도 치우천은 그냥 웃기만 했다. 치우천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우가 죽인 도깨비는 다섯이지 넷이 아니오. 당신이 정말 화가 났다면 그걸 틀릴 리 없잖소. 당신은 나와 장난을 치려는 거지, 해칠 뜻도 없으면서 왜 그러시오?’ 물론 치우천은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치우비와 치베 등은 모두 안색이 변하여 치우천이 도깨비 왕의 비위를 거스릴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 목소리가 잠시 후 다시 말했다. “좋다 네 놈이 어디까지 억지를 쓰나 보겠다. 나도 아까 도깨비 구경을 시켜뒀으니 비겼다 할 수 있지만, 네놈이 하도 억지를 쓰니 내 특별히 한 번 더 봐준다. 너희 중 둘만 죽이겠다.” “아주 고맙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주신 말로 오랜만에 이야기하는 것 같군요. 그래서 아주 슬거운 것 같은데요 그러니 그것을 보아서 조금만 더 베풀어주십시오.” “이놈이 무슨 헛소리냐!” 그때 대뜸 치우천이 정중히 미아우족의 말로 뭐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지 그 목소리가 호통을 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치우천이 다시 주신 말로 말했다. “이건 미아우 말입니다. 도깨비 왕이신데 미아우 말을 못하시면 당신은 주신 도깨비였나 보군요?” 그 목소리는 잠시 말이 없다가 약간 기운이 빠진 듯 대꾸했다. “으음, 그래. 난 주신에서 태어난 도깨비라 주신 말밖에 모른다.” “도깨비도 어머니 도깨비한테서 태어납니까? 그리고 주신 말을 배우나요?” 치우천이 다시 묻자 목소리는 화가 나서 뭐라고 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치우천은 다시 정중히 말했다. “도깨비의 왕께서는 한번만 더 베푸셔서 저 한사람만 죽여 잡아먹도록 하십시오. 더는 부탁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남도록 할 테니 제발 제 벗들을 풀어 주십시요.” “허? 너무 깎는 것 같은데?” “더는 깎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들 중에 가장 약하고, 제일 쓸모가 없답니다. 내가 잘하는 것이라고는 입 놀리는 것뿐이니,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그 말에 목소리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정말 쓸모없는 놈이로구나. 네 놈은 입 놀리는 재주밖에 없을 줄알았다.” 치우천은 슬쩍 치우비에게 눈짓을 하며 하나밖에 없는 돌칼을 치베에게서 받아들었다. 그러더니 대뜸 돌칼을 목으로 가져갔다. “그러니 도깨비 왕께서는 제발 다른 벗들은 살려주십시오. 저는 스스로 죽어 보이겠습니다.” 그 목소리는 깜짝 놀라는 듯했다 “이봐라! 이봐! 그럴 것까지는...... 그러면 안 된다.” “왜 안 됩니까? 어차피 저를 잡아먹는다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소녀와 치베는 치우천이 자살하는 줄 알고 놀라 달려 나가려 하는 순간 치우비가 얼른 잡았다. 치우비는 치우천이 결코 자살하지 않으리란 것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치우천은 돌칼을 목에 더욱 가까이 가져가며 다시 말했다. “비야, 비야. 어릴 적부터 네게 들려주던 그 이야기는 결국 절반도 들려주지 못하게 되었구나. 하지만 열두 해 동안이나 매일 들었으니 이제 잊거라.” 치우비는 치우천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 말을 들은 목소리가 의아한 듯 물었다. “열두 해나 들었는데도 반도 못 들었다고? 너는 그렇게 긴 이야기를 아느냐?” “내가 아는 것 중 네 번째로 긴 이야기일 뿐입니다. 좌우간 저는 이만......” 순간, 이상하게 그 목소리는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만가만! 네가 스스로 죽으면...... 그 뭐냐...... 그래, 맛이 없어져서 안 된다. 시금털털해지고 써진단 말이다. 반드시 내가 직접 잡아먹어야 맛이 있느니라. 너는 절대, 절대 지금 죽으면 안 된다.” 치우천은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내 아우와 벗들을 보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습니다 사막 밖으로 보내주시오 자기가 한 말도 안 지키는 왕은 맛없고 시금털털하고 쓴 고기를 먹어도 싸지요.” 치우천이 다시 돌칼을 목에 대자 그 목소리가 허둥댔다. “보내주겠다. 보내줄 테니 서두르지 말아라.” 다음 순간, 기이한 주문 같은 것이 사방에 울려 퍼지면서 수를 헤아릴 수 없었던 도깨비불과 도깨비들이 썰물같이 땅으로 꺼져들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서 대뜸 치우천이 말했다. “너희는 먼저 가라.” “형님은!” 치우비가 외치자 치우천은 싱긋 웃었다. “나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라. 음...... 그런데 어디서 만날까? 이거 방법이 없구나. 할 수 없구나. 내가 나중에 헌원님이 있는 곳으로 찾아갈 테니, 먼저 그리로 가서 나를 기다려라.” “형님!” 치우비는 울 듯한 표정이었으나 치우천은 재빨리 치우비의 귀에 대고 말했다. “이 녀석! 나는 아무 일 없다. 오히려 너희가 걱정이다. 비야, 난 절대 안 다치고 그리로 갈 테니 먼저 가서 기다려라 저 도깨비 왕은 절대 사람을 먹지 않을 뿐 아니라, 아주 좋은 것 같단 말야. 난 절대 아무 일 없다! 내가 너에게 거짓말하는 것 보았니?” 그제야 치우비는 조금 표정을 풀었다. “절대...... 무사히 와야 해. 알았지?” “그래, 비야. 네가 할 중요한 일이 있어.” “일...... 이라니......?” 치우천이 다시 치우비에게 속삭였다. “너는 서둘러서 헌원을 찾아가서 상망을 만나라. 소녀님의 몸에는 지독한 독이 있는데, 상망이라면 아마 독을 풀 수 있을 거다. 안 그러면 소녀님은 스무 날 내로 죽는다.” “저......정말이야?” 그러자 치우천은 다시 엄숙하게 귓속말을 했다. “허나 내가 소녀님 몸에 독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말하면 절대 안 된다. 내가 아주 곤란해져. 알았니?” 치우비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좌우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별안간 치우천의 몸이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치우비는 깜짝 놀라 형의 다리를 잡아 끌어내리려 했으나 아까의 목쉰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이 친구는 나와 함께 가야 해. 이건 약속한 일이다. 너희는 내가 사막 밖으로 보내주마......” 그러자 치우천은 아래를 향해 외쳤다. “내 염려 마라! 그리고 서둘러 가야 해! 비야! 비야! 서둘러서 가라!” 치우천은 순식간에 다가온 검은 안개에 휘말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디에서 몰려왔는지 무시무시한 모래소용돌이가 일어나 치우비와 소녀, 치베 등의 몸을 말아 올렸다. 치우비는 천하장사였지만 몸이 허공에 떠오르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치우비, 치베, 소녀, 울라트와 일곱 명의 도깨비들은 모래소용돌이에 휘말려 정신을 잃어버렸다. 화산(華山)으로 향하다 사방 모든 것이 캄캄한 속에서 치우비는 형이 도깨비들에게 희롱 당하는 것을 보았다. 자신은 꽁꽁 묶여 움직일 수 없었다. 형은 도망치려 했으나 계속 도깨비들이 가로막아 도망칠 수가 없었다. 이윽고 무시무시한 얼굴을 지닌 도깨비 왕이 형에게 다가와 형을 산 채로 집어삼켰다. 그러자 도깨비 왕은 점차 형의 모습으로 변해가다가 마침내는 도깨비 왕의 모습은 없어지고 치우천의 모습만이 남았다. 돌연 거대한 치우천의 눈에서 불길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그 거대한 치우천의 손이 자신을 향해 뻗어왔다. 그 손에는 피가 철철 흘러넘쳤고 손 전체에서 시뻘건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치우비는 냅다 비명을 질렀다. “형님! 형님!” 치우비는 비명을 지르다가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 옆에 있던 세 사람의 수염을 기른 노인들이 깜짝 놀라다가 이내 반가워했다. 생긴 것을 보니 주신 사람 같지 않고 타타르 사람들 같았는데, 그중 한 노인이 다른 사람에게 알리려는지 밖으로 달려 나갔다. 치우비가 둘러보니 자신은 커다란 가죽으로 세운 막사 안에 있었다. 옆을 보니 치베가 누워 있었는데 아직 깨어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얼굴빛이나 숨쉬는 것이 고르고 정상적이었다. 그저 깊이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러나 도대체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두 명의 노인은 몹시 기쁜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뭐라고 말하며 껄껄 웃고 있었다. 치우비는 앞의 노인에게 물었다. “어르신께서 우리를 구해주셨습니까?” 노인들은 치우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계속 껄껄 웃기만 했다. 그때 막사의 휘장이 획 젖혀지며 몇 사람이 웃으며 들어왔다. 치우비는 그들을 보고 어, 소리를 내며 놀랐다. 그들은 바로 타타르 앗수라트 부족장 키타야와 앙가마이 부족장 구르, 그리고 그들의 부하인 듯한 몇 사람의 노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틈에 울라트가 끼어 있다가 한달음에 치우비에게로 뛰어왔다. “비 오빠 정신이 드셨나요?” 치우비는 이들이 자신을 구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치우비는 너무도 반가워서 즉시 일어났다. “부족장들께서 저를 구해주셨군요 정말.......” 절을 하려는 치우비를 키타야와 구르가 재빨리 말렸다. “우리가 아닙니다. 아닙니다.” 구르의 말에 이어 키타야도 말했다. “대용사께서 절을 하시다니! 안 되지요! 안 돼!” “말씀을 낮추시기로 하잖았습니까!” 치우비의 말에 키타야와 구르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치우비가 다시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형님은?” 그러자 울라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천 오빠는 도깨비 왕과 함께 갔잖아요.” 치우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한참지난 후에야 치우비가 입을 열었다. “도깨비들은?” 울라트가 생글거리며 쾌활하게 대답했다. “다 아무 일 없어요. 도깨비들은 벌써 일어나 자기들끼리 놀고 있는걸요.” “그럼 소녀님은?” “그분도 아무 일 없어요. 그분은 지금 저희 어머니께서 돌봐주시고 있어요.” 겸연쩍은지 괜스레 치우비는 머리를 긁적였다. “왜 내가 이리 늦게 정신을 차렸지?” 키타야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사이 키타야는 주신 말이 꽤 는 것 같았다. “대용사께서 좀 쉬시라고 푹 잠잘 수 있는 약을 썼다네. 그래야 금방 기운을 차릴 것 같아서......” 키타야는 호탕한 성격이라 연신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구르는 차분한 사람이라 빙긋이 미소만 머금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입니까?” 그 말에 구르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디겠는가? 부족장이 있는 곳이니 당연히 앗수라트 부족이 있는 땅이 아니겠나?” “우리는 사막에 있었는데.......어떻게.........” 무척이나 궁금한 치우비를 위해 구르와 키타야는 번갈아 가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두 사람의 주신 말은 쾌 능숙했지만 모든 이야기를 술술 할 만큼 숙달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번갈아 이야기한 것이다. 키타야와 구르가 이끄는 앗수라트와 앙가마이 부족은 태산 회의를 끝내고 한 달 정도 만에 각각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치우형제가 어떤 위험에 처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태산 회의 이후로 앗수라트와 앙가마이는 몹시 친하게 되어서 결코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지냈다. 다시 한 달 가량이 지난 어느 날, 구르는 지나가던 말 장수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좋은 말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타타르족은 몽골족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을 받아 다른 부족들보다는 말 탈 줄 아는 사람도 많았고, 말을 중요한 가축으로 여겼다. 구르 역시 그중 한 사람이라 세상 제일의 좋은 말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재빨리 달려갔다. 그런데 구르는 그 말들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말들은 바로 치우천, 치우비의 애마인 구름과 높은뫼였기 때문이다. 치우비가 구르에게 물었다. “그런데 우리말을 어떻게 알아보셨나요?” 미소를 지으며 구르가 대답했다. “태산 회의가 끝나고 우리가 형제분들을 마중 나가지 않았는가? 그때 본 거야. 그렇게 좋은 말들은 다시 보기 어렵잖은가.” 구르는 몹시 놀라서 그 말들을 달라는 대로 많은 값을 주고 다시 사들였다. 그러고는 즉시 앗수라트의 키타야에게 달려가 상의했다. 치우천, 치우비는 용감한 사울아비이니 말을 함부로 내돌릴 사람들이 아니었다. 두 부족장은 말들이 이렇게 떠돌이 장사꾼에게 팔렸으니, 치우천 치우비에게도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이라 생각하고 걱정했다. 즉시 두 부족장은 말 장사꾼을 찾아내어 이 말들을 어떻게 얻었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키타야가 말을 이었다. “말 장사꾼은 이 말들을 판 것은 주신 사울아비인데, 말을 마흔 마리 넘게 끌고 와서 다른 말은 맡기고, 이 두 마리만 팔았다고 말했네.” 그러자 구르가 말했다. “그리고 그 사울아비는 수십 마리의 낙타를 바꾸어 갔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분명 사막으로 가려는 것 아니겠는가?” 키타야가 이어서 말했다. “우리는 우리 두 부족의 현명한 노인들과 오래 상의해보았네. 마흔 마리가 넘는 말을 가진 사울아비들이 말을 맡기고 낙타를 사서 사막으로 들어가는데, 그중 말 두 마리만 판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하고 말야. 그건 분명 그 말의 주인이 사막에 버려지는 벌을 받는다는 뜻이라고 판단했네.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네. 그래 우리는 큰일 났다고 생각했지.” 치밀하게 상황을 파헤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는 치우비가 손뼉을 쳤다. “두 분은 정말 현명하십니다.” 구르는 고개를 저으며 치우비의 말을 막았다. “하지만 말 장사꾼은 그 말을 산지 벌써 스무 날 가까이 되었고, 자기는 말을 산 뒤 동쪽으로 계속 왔다고 했네. 우리가 아무리 서둘러서 사막으로 간다 해도, 열흘 정도 더 걸릴 수밖에 없었네. 사실 그때쯤이면 늦을 것 같았지만, 별수 없었지.” 그 뒤를 키타야가 이어나갔다. “우리는 전사들만 아니라 두 부족의 모든 남자들을 풀어서 사막을 뒤지라고 했네. 그런데 우리 두 부족은 고작 몇천 명밖에 안 되고 사막에 나갈 만큼 힘 있는 남자들은 천 명밖에 안 되었네. 하지만 사막은 너무나 넓고 험해서, 아무도 자네들을 찾을 수 없었어.” 치우비가 속으로 생각했다. ‘키타야 부족장은 겸손하게 말하지만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목숨을 걸고 사막을 뒤졌다니! 정말 이분들께도 큰 은혜를 입었구나.’ 구르가 덧붙였다. “다만 그들 중 한 무리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스무 명의 주신 사울아비들을 발견했다네. 그들이 말을 도로 찾으러 왔기에 발견할 수 있었지. 그리고 그들이 타타르족의 길잡이와 헤어지는 것을 보았네. 생각 같아서는 주신 사울아비들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곱게 오갈 것 같지 않고, 그들 무리의 숫자도 사울아비들보다 적고 해서 겁이 났다네. 그래서 그들은 다음날 그 타타르족 길잡이들을 붙잡아 어디를 갔으며, 무슨 짓을 했는지 물어보았네. 하지만 그들은 주신 사울아비와 약속을 해서 결코 말할 수 없다고 했지. 그들은 매를 수없이 맞고 손가락이 다 부러진 다음에야 사실대로 말했다네.” 치우비는 그 죄 없는 타타르족 길잡이가 자신들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키타야가 말했다. “그들을 죽인 것은 아니니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말게. 자네들이 위험에 빠졌는데 그들뿐만 아니라 몇 부족을 몰살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실토를 받아내서 자네를 구했을 거야. 좌우간 우리는 자네들이 사막 어디쯤에 버려졌다는 것을 알고 그 녀석들을 앞세우고 사막으로 들어섰네. 그곳은 도깨비 왕이 사는 곳이라 우리는 백 명 넘게 무리를 지어 무장을 단단히 하고 들어설 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우리가 사막으로 들어간 지 하루만에, 우리는 이상한 것을 만났네.” 치우비는 감을 잡고 물었다. “혹시 도깨비를 만난 것 아닙니까?” 구르가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우리는 도깨비를 만났는데, 그 도깨비는 우리를 따라오도록 해놓고는 어느 순간에 사라져 버렸네.” 그 다음의 말을 잇는 키타야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그런데 그곳에는 바로자네와내 딸,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주욱 쓰러져 있었단 말일세!” “그렇게 우리를 구하셨군요. 정말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천만의 말씀이네.” 치우비는 그밖에도 몇몇 이야기를 나누었다. 울라트가 영리하여 그간의 사정을 아버지에게 다 설명해준 다음이라 키타야와 구르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자네들은 금방 주신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네. 이 주변에는 아직도 사울아비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는데, 아무래도 자네들을 찾는 모양일세.” 구르의 말에 이어 키타야가 말했다. “자네들의 목에는 엄청난 상금이 걸려 있다네. 아마 도둑들이나 강도들은 모두 자네들만 찾아다니고 있을 걸세.” 치우비는 치우가람이 그냥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라던 치우천의 말을 기억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상금까지 걸다니, 얼마나 걸렸죠?” “소 삼천 마리에 구리 솥 다섯 개, 구리칼 백 자루를 준다더군.” 너무도 막대한 상금이라 치우비는 헛웃음을 지었다. 태산 회의 때 대용사가 받은 상보다도 몇 배나 후한 상이었던 것이다. “누가 정말 우리 목을 베어가면 그놈들은 거지가 되겠군. 그놈들은 아깝지도 않은가?” 현명한 구르가 너털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자네들이 사막에서 죽었다면 아무도 상금을 못 타갈 테니, 아무리 높이 걸어도 아까울 것이 없지. 그놈들도 자네들이 사막에서 살아났다고는 믿지 않을 걸세.다만 만에 하나를 생각하여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상금을 건 것이야.” 키타야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놈들이 그렇게 꼼꼼하고 준비성이 많으니, 아무래도 자네들은 주신으로 가지 않는 것이 좋겠네. 소문은 금방 퍼질 것이니, 주신까지 그 먼 길에 온갖 도둑 떼와 흉악한 놈들이 자네들을 노릴 걸세. 자네는 물론 도둑들 따위가 겁나지 않겠지만, 사람일은 모르는 것일세. 더구나 도둑들을 물리쳐도 자네들이 살아 있다는 소문은 날 것 아니겠는가? 자네들이 살아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놈들이 또 무슨 수를 쓸지 모르니, 자네는 잠잠해질 때까지 우리와 같이 있는 것이 좋겠네.” 곧이어 구르가 덧붙였다 “우리 두 부족은 자네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지만, 다른 부족 녀석들은 자네들을 팔아버릴 수도 있다네. 우리는 자네가 있는 동안 다른 부족 누구도 들어오거나 나가지 못하게 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나.” 치우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날짜를 생각해보았다. “사막에 들어선 지 하루 만에 우리를 발견하셨다고요?” “그렇다네.” “우리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도깨비들을 만났는데요.?그때까지 우리는 얼마 길을 가지 못했는데........” 키타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는 울라트에게 이미 들었다네. 틀림없이 도깨비 왕이 도깨비들을 시켜 자네들을 사막 밖으로 옮긴 것 같네. 도깨비 왕의 재주가 대단하니 자네들을 기절시킨 다음 재주를 부려 사막 밖으로 보내려 했을 테지. 자네들은 며칠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지만, 정신을 잃고 있어서 별탈은 없었던 것 같네. 그러다가 거의 사막 바깥까지 도착했을 때 도깨비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우리에게 자네들을 넘겼던 거야. 우리는 자네들을 구해 이리 데리고 온 것인데, 자네들을 구한 것은 사흘 전일세.” 잠시 사이를 두고 구르가 덧붙였다. “자네 형님이 도깨비 왕과 같이 갔다면서? 허나 너무 걱정하지 말게. 도깨비 왕은 사람들을 용서하는 법이 드문데, 도깨비들을 시켜 자네들을 사막 밖으로 보내준 것을 보니 자네들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일세. 도깨비 왕은 퍽 괴팍하여 많은 사람들을 해쳤지만 자기가 한 말은 지킨다네. 더구나 자네 형은 보통 인물이 아니니, 도깨비 왕이라도 그를 어떻게 하진 않을 걸세.” 치우비는 형이 도깨비 왕에게 붙잡혀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치우비의 얼굴에 언뜻 침울한 표정이 스치자 구르가 물었다. “자네들을 데리고 간 놈들이 전에 우리가본 적이 있는 그 건방진 젊은 놈들이 맞는가?” “그렇습니다. 그놈들은 치우가람, 치우바람이라 합니다.” “그놈들은 정말 똑똑하긴 하지만, 제 꾀에 제가 빠졌다네. 그놈들은 필경 도깨비 왕의 소문을 주워듣고, 자네들이 사막에서 더 고통을 받도록 말 피를 뒤집어씌운 것 같네. 도깨비들이 말 피를 제일 싫어한다는 것은 타타르족이라면 다 아는 일이니 말일세. 하지만 도깨비 왕이 나타나고도 자네 형을 모셔갔으니, 그놈들이야말로 꼴좋게 되었지! 하하힛.” “제 형님이 정말 괜찮을까요?” 전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구르가 잘라 말했다. “도깨비 왕은 사람을 먹지 않네. 다만 흘려서 스스로 죽게 하거나, 미치게 만들 뿐일세. 내 울라트에게 이야기를 들었네만, 도깨비 왕은 자네 형을 손님으로 데려간 것 같으니 염려 말게!” “손님이라구요?” “나도 자세한 것은 모르니 나중에 형님을 만나면 물어보도록 하게! 좌우간 도깨비 왕이 자네 형님을 해칠 거였으면 번거롭게 데리고 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네들 역시 사막 밖으로 번거롭게 옮겨놓았을 리 없다네. 우리 타타르족 그 누구도 도깨비 왕이 사람을 순순히 놓아 주었다거나 사막에서 나가게 도와주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네!” 구르가 장담을 하자 치우비는 좀 마음이 놓였다. 그러다가 치우비는 문득 형이 자신에게 당부했던 일을 떠올렸다. 헌원에게 가서 다시 만나자고 한 것과, 소녀의 독을 고쳐주어야 한다는 것을. 더구나 소녀는 스무 날밖에 못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가만가만. 우리가 거기서 정신을 잃은 지 며칠이나 되었습니까?”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마침 때는 달이 뜬 밤이었다. 치우비는 급히 막사의 휘장을 들추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번에 도깨비들을 만난 날, 달은 분명 한쪽이 이지러지는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달이 거의 다 이울어져 있지 않은가? 열흘은 안 지났어도 여드레 정도는 지난 것 같았다. “이거 큰일 났구나!” 치우비가 부르짖자 키타야와 구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는가?” “부족장님. 여기서 헌원이 있는 지나족...... 화산족에게로 가려면 며칠이나 걸릴까요?” 키타야가 잠시 헤아려보더니 이내 말했다. “헌원은 지나족 중에서도 남쪽 부족에 가깝다네. 헌원은 화산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다고 들었네. 아마 태산 회의를 마치고 그리로 갔을 테니....... 어디 보자, 패 멀리 떨어져 있어서 걸어가려면 석 달은 걸릴 걸세.” “말을 타고 가면요?” “말을 타고 가면 훨씬 빠르지. 한 달 정도면 갈 수 있을 걸세.” 치우비는 소녀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열흘 내로 꼭 가야 합니다.” 그러자 구르가 물었다. “꼭 그렇게 급하게 가야 하는 까닭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구르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속으로 뭔가 계산해보더니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아주 좋은 말을 타고 계속 달려서, 산맥 사이로 난 지름길로 간다면 열흘 만에 갈 수도 있을 걸세 하지만 그 길은 도둑들이 많이 나와 아주 위험하다네. 그리고 자네들은 열 명도 넘는데, 그렇게 좋은 말을 많이 구할 수 없어. 길이 험해서 급하게 말을 몰면 말이 지쳐서 죽을 거야.” “구르님은 제 말 구름과 형의 말 높은뫼를 사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들을 빌려주실 수 있습니까?” 구르는 ‘아하’ 하며 무릎을 치며 웃었다. “그렇군! 그 말들이라면 문제없지 그건 내가 샀지만 자네들 것일세. 처음부터 자네들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네. 그러나 일행이 많은데 좋은 말은 두 마리뿐이니 어떻게 하려는가?” “좌우간 지금은 몹시 일이 급합니다. 몇 명만이라도 어서 가야 합니다.” “자네와 저 몽골 청년은 말을 잘 타니 둘이 가면 되겠군. 우리도 자네를 보호하고 싶지만 정말 급하다면 할 수 없겠지.” 돌아보니 치베는 언제 잠에서 깨어났는지 조용히 앉아 있다가 치우비가 바라보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전에 깨어나 이야기도 대부분 다 들은 것 같았다. 치베에게 시선을 거두고 치우비가 말했다. “아닙니다. 소녀님도 같이 가야 합니다.” “소녀님이라면........ 같이 있던 그 아가치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 아가씨는 몸이 약해서 그리 먼 길을 말을 달릴 수 없을 텐데?” “제가 데리고 가면 됩니다. 내 말 구름은 힘이 세서 두 사람을 태워도 끄떡없습니다.” 사실 구름은 치우비가 쇠약한 형을 같이 태우기 위해 특별히 구한 말이다. 그 말을 하다가 치우비는 다시 형 생각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때 키타야 옆에 있던 앗수라트족 노인이 뭐라고 중얼중얼 거렸다. “그 여자의 독을 고치려는 것인가?” 느닷없는 키타야의 물음에 치우비는 흠칫 놀랐다. “아? 예. 어떻게 아셨습니까?” 키타야가 옆에 있는 앗수라트 노인을 가리켰다. “벵구시님은 우리 앗수라트족의 원로이며, 약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계신다네. 그 여자는 이상한 독을 먹은 것 같은데, 정말 무섭기 짝이 없어서 독을 얼른 풀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끔찍한 고통을 당하면서 죽을 것이라 하시더군.” 치우비는 쪼글쪼글한 노인 벵구시를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굉장하십니다.” 키타야가 다시 말을 받았다. “뭐, 알았네 생각 같아서는 몇 달이고, 아니 몇 년이고 우리와 같이 있자고 하고 싶네만, 그런 급한 일이 있다면 할 수 없지. 그런데 그 아가씨는 자네 색시인가?” 치우비가 얼굴을 붉혔다. “무슨 말씀을! 놀리지 마십시오. 저는 그 여자와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키타야가 실없이 히히, 웃었다. “내 농담을 좀 했네.그 여자 덕분에 이 일이 터졌다면서? 하지만 그럴 가치가 있다네. 남자라면 그런 면도 있어야지. 내 생전 그렇듯 대단한 여자는 처음일세. 어흠, 이거 실례했구먼. 아마도 자네 형수님이 되실 분 같은데.” 치우비는 약간 얼굴만 붉힐 뿐, 대답하지 않았다. 구르가 먼저 일어서며 말했다. “음, 그러나 그 지름길로 가는 것은 아주 조심해야 하네. 특히 그 산에는 도둑 떼가 많은데 대부분 아주 지독한 놈들이야. 그중에서도 가장 조심해야 할 놈들은 바로 단 두 명뿐인 도둑 떼인데.......” 구르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치우비가 아무 문제없다는 듯이 말했다. “도둑 떼가 둘뿐이면 무서울 게 없잖습니까?” “아닐세. 그 도둑 떼는 비록 둘이지만, 쉰 명, 백 명도 그들을 이기지 못하네. 그들은 언제나 느닷없이 나타나서 기이한 방법으로 힘을 겨루자고 하는데, 그들에게 지면 모든 물건을 내놓아야 하고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갖은 방법을 써서 모든 사람을 다 죽여 버리는 잔인한......”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치베가 대뜸 물었다. “형요(刑妖)형제 말입니까?” “그렇네. 자네는 그 녀석들을 아는가?” 치베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압니다. 제가 보돈차르님과 함께 놈들과 세 번이나 싸웠지만, 세 번 다 승부를 내지 못했죠. 그 녀석들은 너무 기괴해서.......” 치우비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치베도 대단한 용사였고 보돈차르 역시 대용사인데, 그 형요 형제라는 놈들을 이기지 못했다면 틀림없이 보통놈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치베는 여유 있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이번은 다를 것입니다. 저는 보돈차르님을 제일 존경하지만, 싸움에 있어서만은 치우비 안다가 보돈차르님보다 훨씬 강하죠. 세상 제일 아닙니까? 이번에 형요 형제가 다시 덤빈다면, 이번에야말로 그놈들은 저 세상으로 갈 것입니다!” 키타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대용사 치우비님이 가시는 길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꼬마 울라트가 끼어들었다. “비 오빠, 나도 가는 거죠?” 치우비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눈치를 채고 키타야가 얼른 나섰다. “울라트! 치우비님은 지금 몹시 급해서 빨리 가셔야 한다. 너는 이제 충분히 세상 구경을 했으니, 이제는 치우비님을 따라다니며 귀찮게 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을 듣자 울라트는 갑자기 마구 울어대며 졸랐다. “안 돼요 안 돼! 나도 같이 가야 한다구요!” “아니?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냐?” 화를 내려는 키타야를 치우비가 말렸다. “그러지 마세요. 울라트, 이번은 일이 급하니 같이 갈수 없구나.”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울라트는 계속 떼를 썼다. 울라트는 본래 겁도 많고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는데, 어린 나이에 이번에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성격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 “안 돼요, 안 된다구요! 비 오빠는 나를 동생 삼아준다 해놓고는 이제 떼어놓으려는 건가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나는 아직 주신 신시 구경도 못했단 말이에요. 내가 없으면 도깨비들은 어떻게 할 거죠? 안 돼요! 같이 가야 한다구요!” 치우비는 막막해졌다 마침내 키타야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것! 감히 네가 떼를 써?” “난 떼를 쓸 거예요. 더 떼를 쓸 거라구요!” 키타야가 계속 소리를 질렀다. “네가 감히 떼를 쓰고 매달리다니!” “같이 못 가게 하면 난 죽어버릴 거예요! 날 버리면 난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서 죽어버릴 거라구요.......!” 그 말을 듣자 치우비는 지난날의 악몽(?)이 다시 떠올랐다. 치우비는 당황하여 얼른 울라트에게 타일렀다. “울라트야, 난 널 버리는 게 아냐. 다만 너무 급해서 그래. 그럼 이렇게 하자. 네가 나중에 도깨비들을 데리고 화산족 헌원님을 찾아오렴. 그러면 되잖니? 어이쿠, 네가 혼자 길을 가기는 힘들 텐데.”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키타야가 얼른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데리고 가겠네. 내 딸 아닌가? 더구나 솔직히 말해 도깨비들이 부족에 있으면 부족 사람들이 수군대니까 내가 직접 데리고 헌원을 찾아감세. 나는 그 험한 길을 갈 자신이 없으니 편한 길로 돌아서 느리게 갈 수밖에 없다네. 그러면 우리가 스무 날 이상 늦게 갈 것인데, 괜찮겠나?” “일단 저와 소녀님이 빨리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무 날 정도 기다리는 건 문제없습니다.” 울라트는 그래도 떼를 쓰며 고집을 피웠다. “그럼 아버지가 도깨비를 데리고 가고, 나는 비 오빠를 따라갈래. 또 내가 싫어서, 귀찮아서 그러는 거면 나는 그냥 목을 매달고......” 치우비는 마음이 약해져 울라트를 달래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누가 언제 네가 싫다고, 귀찮다고 했니? 말에 사람을 더 태울 수가 없어서 안 된단 말야. 그리고 도깨비들은 말도 잘 타지 못하고, 더구나 네가 아니면 누가 도깨비들을 돌보겠니? 울라트가 없으면 나는 아주 난처하단 말야. 너는 내게 아주 중요하다구.” 치우비가 땀까지 흘리며 울라트의 비위를 맞추자 울라트는 비로소 눈물을 닦으며 훌쩍거렸다. “정말이죠? 거짓말 아니죠?” “그래그래.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니? 난 네 오라비잖아?” 치우비가 웃으며 사람 좋게 달래자 울라트는 눈물을 닦고 씩 웃었다. 치베는 그저 ‘허허’ 하고 몇 번 웃다가 곧바로 치우비와 함께 떠날 준비를 했다. 구르가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길을 가면서 누가 이름을 물어도 치우비라고 하지 말게나. 상금을 노리는 놈들이 많으니 조심해야 하네.” 키타야 역시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우리 부족은 거짓말을 안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몰라서 그 사실을 부족에 알리지 않았네. 그래서 우리 부족들도 자네를 찾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몇 안 된다네. 혹시라도 소문이 날까 봐 우리는 천 명의 사람들을 남겨두어 계속 자네를 찾도록 했다네. 또 자네 형님도 아직 도깨비 왕에게 풀려나지 않았으니 말야. 아마 우리 부족 사람들은 거의 다 사막부근에 있을 테니 자네가 만날 일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아는 척할 필요도 없네. 좌우간 그래서 잔치를 베풀지 못한 것이니 이해해주게.” 치우비는 구르와 키타야가 생각이 깊고, 하는 일이 치밀한 것에 감탄했으며, 부족 전체가 그토록 힘을 써서 자기를 돕는 것이 고마워서 진심으로 정중하게 고마움을 전했다. “주신 사울아비 치우비가 말합니다. 두 분의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앗수라트, 앙가마이족은 모두 내 형제들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저를 불러주십시오 이 치우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별말을 다 하는군. 우리야말로 이미 자네에게 큰 빛을 졌는걸.”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구르와 키타야의 얼굴이 환해졌다. 부족에 무슨 일이 있을 때 치우비 한사람의 도움만 얻어도 잘 훈련된 전사 천 명보다 나을 것 같았고,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어진 것 같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울라트가 또 찡얼거리기 시작하여 치우비는 얼른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자 울라트도 기어이 따라갔다. 그 뒤를 치베가 껄껄 웃으며 따라 갔다. “비 오빠! 비 오빠! 가기 전에.......!” 구르는 치우비와 울라트가 나가자 키타야에게 웃으며 말했다. “거참, 대단한 따님을 두셨소.” “부끄러울 뿐이오.” 구르가 껄껄 웃으며 약간 놀리듯 말했다. “그런 대용사님을 사위로 둔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죠. 그러나 따님이 너무 어리지 않소?” 키타야는 솔직히 울라트를 계속 치우비 곁에 머물러 있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괜히 울라트를 혼낸 것인데, 구르는 이미 빤히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키타야는 치우비를 너무도 우러러보게 되어, 울라트가 비록 어렸지만 은근히 울라트와 치우비가 정이 들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허나 구르에게 그런 속셈을 들킨 것 같자 키타야는 약간 얼굴을 붉히 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미 용사님은 내 딸의 오라비라오 더 바라지 않소이다.” “그러면 키타야님은 대용사의 아버님이 된 것 아니겠소?” “놀리시는 거요?” 키타야의 얼굴이 더욱 붉어지자 구르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닙니다. 이거 미안하구려. 하지만 치우 형제는 아직 젊고, 세상을 더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일을 겪어야 점점 강해지는 법입니다. 그때까지는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요.” 키타야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용사님의 형도 무사할까요?” “지우천님도 대단한 사람이요 그 무서운 도깨비 왕에게 제 발로 들어갔다니, 반드시 무슨 생각이 있었겠지요.” “도깨비 왕까지 움직일 수 있다면, 정말 세상에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치우 형제가 무슨 일을 하든 우리는 따라야 할 겁니다. 구르님, 제가 떠나 있는 동안 부족들을 부탁합니다.” “염려 마십시오.” 구르와 키타야는 그동안 몹시 친해져 격의 없이 웃으며 함께 막사 밖으로 나갔다. 형요와 요요 치우비는 먼저 소녀를 찾아갔다. 소녀는 울라트의 어머니, 즉 키타야의 부인인 츄이가 돌보아주고 있었는데 이미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츄이는 무척 뚱뚱하고 강건했으며, 매우 똑똑하고 활기찬 여자라서 주신 말과 지나 말, 몽골 말 등 대여섯 가지 부족의 말을 다 할 줄 알았다. 치우비는 울라트의 어머니를 통역 삼아 소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고생스럽겠지만 자신과 함께 급히 헌원에게 가야 한다는 말을 했다. 소녀는 의아한 듯 왜 그래야 하느냐고 물었는데, 치우비는 이미 앗수라트의 노인 의사 벵구시에게서 소녀가 중독 되었다는 것을 들었는지라 태연히 대답했다. “소녀님은 독에 걸리셨다면서요? 그것을 빨리 풀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소녀는 좀 이상하기도 하고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내가 독에 걸린 것을 어떻게 알았나요?” 치우비는 형에게서, 절대 형이 소녀가 독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당부를 들은 터라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여기 타타르족 의사 노인께서 그러시더군요. 하지만 그분도 고칠 수 없다니, 우리는 반드시 헌원님을 찾아가봐야 합니다.” 그래도 소녀는 좀 의아한 듯, 안색이 흐려졌다. 치우비는 소녀의 태도가 약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 힘든 일이 있으면 진작에 말씀하시지 그랬나요? 헌원님 밑의 십육 기인은 다 대단한 사람들인데, 특히 적송자나 상망은 사람을 고치는 솜씨가 대단합니다.” 이상하게도 소녀는 쌀쌀맞게 대꾸했다. “그렇게 애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헌원님이 꼭 고쳐준다고 말하지 않을 수도 있고, 못 고칠 수도 있고요.......” 치우비는 그러는 소녀가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와 형님이 부탁한다면 헌원님은 분명 도와줄 것입니다. 더구나 형님과는 거기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그러자 소녀는 흠칫 놀라며 눈을 빛냈다. “지우천님과 거기서 만나기로 했나요? 허나 치우천님은....... 도깨비 왕에게......” 소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치우비 자신도 사실은 형이 걱정되어 죽을 지경이었지만 일부러 태연히 소녀에게 말했다. 그리고 소녀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치우천을 걱정해서라고 생각한 것이다. “형님이 도깨비 왕에게 잡혀가기 바로 전에 저와 거기서 만나기로 약속했죠. 그리고 너무 걱정 마십시오. 천 형님은 꾀가 많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 말을 듣더니 소녀의 태도가 갑자기 변했다. “정말 그래 주신다면 고맙지요 저로서는 정말......” 치우비는 웃으며 사람 좋게 말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사람을 구하는 일인데 당연히 해야죠. 진작에 말씀하셨으면 비렴님께 말해서 훨씬 쉽게 고쳤을 것이지만.......” 그러자 소녀는 뭔가를 깊이 생각하다가 돌연 눈물을 쏟았다. 치우비는 소녀가 왜 우는지 몰라서 아리송했는데, 이윽고 소녀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삼사께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저는 죄 많은 몸입니다.” “죄 많은 몸이라뇨?” 소녀는 흐느끼면서 말했다. “제 몸의 독은 바로 유망이 쓴 것입니다.” “어? 유망이?” “이제 사실대로 말씀드립니다. 유망은 독을 쓰면서, 저에게 무슨 말이든 들어야 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독을 푸는 약을 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한웅님께 가서 염탐을 시키려고 한 거죠.” 치우비에게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어,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흐느낌을 멈추지 않고 소녀는 계속 말했다. “그러나....... 그러나 저는 조금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저는 천님을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 그런 몹쓸 짓을.......” 흐느끼는 소녀를 보자 치우비는 소녀가 무척 가련하다고 여겼다. 치우비는 연약한 여자에게 그런 흉악한 짓을 한 유망에게 분통이 치밀었다. “유망은 아주 나쁜 놈이군요. 그런 놈이 무슨 염제신농입니까? 나중에 꼭 놈을 혼내주어야겠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허나 저는 조금도 주신의 비밀을 염탐하지 않았고, 주신의 이야기를 유망에게 한 번도 전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차피 지나족도 아니고, 지나족의 유망은 저를 이 꼴로 만든 사람이니 죽으면 죽었지, 유망의 말을 따르지 않으려 했습니다. 정말입니다......” 치우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소녀님은 주신에 죄지은 것이 없습니다. 설령 있어도 별일 없을 것입니다. 하하하, 어차피 우리 모두는 지금 주신의 죄인이 아닙니까? 아무 걱정 마시고 떠날 준비를 어서 서둘러 주세요.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치우비가 떠날 준비를 하러 돌아서는 순간, 소녀의 눈빛에 독기가 떠올랐다. 치우비가 보았으면 깜짝 놀랐을 테지만, 그러나 치우비는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다. 치우비는 치베와 함께 다시 키타야를 만나 지나족의 땅인 화산까지 가는 길을 자세히 알아두었다. 그리고 키타야에게 말했다. “우리는 무기가 없으니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타타르족은 그리 부유한 부족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키타야와 구르는 몇 가지 쓸 만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치우비는 커다란 돌도끼 하나와 구리곤봉 한 자루, 그리고 강한 활과 화살 스무 대를 얻었고 치베는 돌칼 두 자루와 구리날이 달린 창 한 자루, 그리고 강한 활과 작은 활 두 자루와 화살 쉰 대를 챙겼다. 구리칼은 아주 작은 것 하나만 있어서 그것은 소녀에게 주려고 따로 챙겼다. 많은 무장이었지만 먼 길을 가자면 그 정도는 있어야 했다 다른 짐들은 치베가 알아서 싣겠다고 했다. 그 다음 치우비가 말을 매어둔 곳으로 가자 구름은 주인을 알아보고 앞발을 들어올리며 울음소리를 내며 반겼다 치우비도 반가워서 말을 계속 쓰다듬어주었다. “구름아, 구름아. 우리 이제 같이 있게 되었구나. 또 한 번 먼 길을 가자꾸나.” 그때 치베가 몇 가지 물건을 높은뫼 등에 실으며 자못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천 안다의 말을 내가 타게 되다니, 영광이다. 사실 전부터 한 번 타보고 싶었다.” 몽골 사람들이 말을 좋아하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라 치우비는 싱긋 웃었다. 잠시 후 소녀가 나와 말에 올랐다. 키타야와 구르, 츄이와 도캐비 등이 나와서 치우비에게 손을 흔들었다. 치우비는 소녀의 뒤에 껑충 올라탄 다음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출발했고 치베가 그 뒤를 따랐다. 치우비가 출발한 앗수라트 부족이 있는 곳은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 북서쪽쯤이다. 거기에서 지금의 협서성 쪽으로 내려가다가 후대의 만리장성 위치를 지난 뒤 황하의 지류를 따라 남남서쪽으로 내려가 황하를 건너면 바로 화산이다. 화산의 위치는 후대의 장안성의 동쪽으로, 중국의 중앙부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직 교통로가 뚫리기 전의 시대라 상당히 길이 험했으며 그 길을 열흘 만에 간다는 것은 엄청난 강행군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치우비와 치베는 조금도 겁내지 않고 날듯이 달려갔다. 치우비는 주신 말밖에는 몰랐고 치베도 주신 말과 몽골 말, 타타르 말밖에 는 할 줄 몰랐으므로 더 이상 소녀와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소녀는 역시 주신 말을 아주 기본적인 몇 단어밖에 말할 수 없어서 치우비는 더 이상 소녀와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소녀와 같은 미녀를 앞에 앉히고 간다는 것이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장 존경하는 형님의 여자이니 곧 형수님이라고 치우비는 생각했다. 그래서 성실한 치우비는 한순간도 딴마음을 먹지 않았다. 말을 달려 먼 길을 간다고 항상 달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한 시간 정도 말을 빠르게 몰고 나면 한두 시간 정도는 천천히 걸어서 말을 쉬게 했다. 이렇게 해야 말도 단련이 되어 더 잘 달리게 되며 먼 길을 가면서도 말을 상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말을 더 좋게 만든다는 것을 치베는 잘 알고 있었다. 말을 빨리 달릴 때에는 얘기를 나눌 수가 없었으나 천천히 갈 때는 이야기할 시간이 많았다. 치우비는 형요 형제에 대해 치베에게 물어보았다. “그 형요 형제라는 도둑은 어떤 녀석들이지?” 치베가 웃으며 되물었다. “그놈들을 잡아 이름을 떨치고 싶은가?” 치우비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그놈들을 만나고 싶지는 않아. 다른 때라면 일부러라도 찾아가 보겠지만 우리는 길을 가는 게 급하잖아. 제발 그놈들이 귀찮게 굴지 않도록 안파견 한님께 빌고 싶다구.” “우스갯소리였다, 비 안다. 뭐, 미리 알아둔다고 나쁠 건 없지. 형요 형제는 아주 기이한 놈들이다. 놈들은 키가 크고 항상 온갖 가죽과 새털로 화려하게 꾸미고 다니는데, 가면을 쓰기 때문에 그놈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항상 두 놈이 다니는데, 놈들은 꼭 밤에만 나타난다. 형요가 형이고 아우는 요요라고 한다. 길을 가다가 불을 피우고 잠시 쉬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나는 거지. 그래서 꼭 힘겨루기를 하자고 한다.” “힘겨루기?” “뭐, 싸움을 거는 것이지. 그놈들이 둘이니, 제일 힘센 사람 둘이 나오라고 해서 싸우는데, 자신들이 이기지 못하면 순순히 물러나서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자기들이 이기면 모든 값나가는 물건을 빼앗아가지.” “뭐, 날강도군. 그런데 그놈들이 그렇게 무서운가? 만약 내놓지 않으면?” “모두 죽는 거지. 무리가 쉰 명, 백 명이라도 다 죽는다.” “그놈들 둘이 다 죽이는 건가?”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 그놈들이 다 죽이는 모양이야. 많은 사람들이 죽은 채로 발견되곤 하는데, 그게 바로 형요와 요요 짓이라고 하지.” “사람들이 어떻게 죽는데?” “대부분 몸에 상처도 없고, 독을 쓴 흔적도 없어서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잘 모른다. 보통 죽은 사람들은 죽은 후 한참 있다가 발견되기 때문에 썩어 있거든 좌우간 사람들은 다 형요 형제의 짓이라고 믿지. 그들 말고는 그렇게 무서운 도둑 떼는 없거든. 그리고 한번 습격당한 무리는 한 사람도 살아남은 적이 없기 때문에 정말 그들이 그랬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좌우간 그 때문에 장사를 하러 지나가는 몽골족이나 타타르족들은 그놈들이 무서워 이쪽 길로는 잘 다니지 않는다.” “그놈들이 그렇게 무서운가? 치베 안다, 너는 싸워봤댔잖아.” 치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래. 사실 그놈들의 재주는 대단하다. 하지만 놈들은 날쌔고 칼을 잘 쓰지만 그렇게까지 대단한 것은 아니다. 다만 형요는 아주 힘이 세다. 놈들은 비쩍 말라서 장작개비 같은데도 힘은 대단하더군. 예전에 보돈차르님과 내가 함께 길을 간 적이 있는데, 그놈들과 마주쳤다. 우리도 둘이 나서서 겨루기로 했는데 보돈차르님이 혼자 둘과 싸우고 나는 활을 쏘아 놈들을 없애려 했다. 하지만 그놈들은 정말 기이한 재주가 있어.” “무슨 재주?” “싸우다 보면 갑자기 없어졌다가 다시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재주가 있다. 처음 싸울 때, 보돈차르님은 두 놈과 싸우면서도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보돈차르님은 칼도 잘 쓰고 채찍도 아주 잘 쓰시거든. 그때 내가 화살을 세 발 쏘아 형요의 칼을 꺾어버렸는데, 그놈은 무기 가 부러지자 뒤로 물러서서 그늘로 숨어들어 갔다.” “그래서?” “그런데 보돈차르님이 그놈을 쫓아가려는데, 형요 놈이 갑자기 내 뒤에서 나타나 덤벼들었다. 나는 기습을 당해서 활이 부러졌고, 놈의 칼이 나를 겨누었다. 그러나 보돈차르님도 아우 요요를 잡아 목에 칼을 겨누셨지. 보돈차르님은 이렇게 말하셨다. ‘비겼군.’ 그러자 형요가 ‘우리가 이기지 못했으니 그냥 가도 좋다’고 말했지. 보돈차르님도 놈을 풀어주셨고, 놈들이 말없이 사라져서 우리 무리는 놈에게 물건을 빼앗기지 않고 무사했다.” 치우비는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사람이 어떻게 없어졌다가 다른 데서 나타날 수 있지?혹 재빨리 숨어서 움직인 것 아니야?” “나는 그래도 눈이 날카로운 편이다. 그렇게 움직였다면 내가 알아챘을 것이다. 아무래도 형요 형제는 무슨 주술을 부리는 것 같았다.” 치우비는 재미있어서 계속 물었다. “그래서? 세 번 싸워봤다면서?” 치베가 겸연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나는 놈에게 잡힌 것이 분해서, 나중에 보돈차르님을 졸라서 다시 놈들에게 가보자고 했다. 하지만 보돈차르님은 부족장이시라 그렇게 한가하지 않으셨지. 그 다음해, 우리가 말을 팔려고 보돈차르님이 길을 떠날 때, 나는 일부러 같이 데려가 달라고 청했다. 보돈차르 님은 이렇게 말하셨지. ‘그런 도둑들은 안 만나는 게 좋다. 굳이 싸울것 없이 나타나면 바로 잡아버리자.’ 그래서 우리는 길을 가면서 항상 보초를 두고 주변을 잘 살폈다. 그런데 이번에도 어느 날 밤 형요 형제가 다시 나타났다. 보돈차르님과 내가 보초들을 세운 다음 모닥불을 쪼이며 쉬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내 어깨를 살짝 치는 거야. 그래서 돌아보니 바로 형요 요요 형제가 있었다. 나는 너무 놀랐지.” 치우비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거 참 이상하군!” 치베는 쩝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나도 이상했어. 그때 우리는 몽골족만 아니라 다른 부족 사람들도 만나서, 사람 수도 많았고 주변을 아주 잘 지키고 있었는데, 그놈들이 어떻게 그렇듯 별안간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형요가 말하더군. ‘지난번에 승부를 못 냈으니, 다시 겨루자’ 라고 할 수 없이 보돈차르님과 나는 형요 형제와 다시 싸웠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덤벼서 그 둘을 그냥 잡아버리자고 했지만, 보돈차르님은 안 된다고 하셨다. 놈들이 우리를 기습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고 겨루기만 하자고 했는데, 용사로서 어떻게 당당히 겨루지 않을 수 있겠나?” 치우비가 맞장구를 쳤다. “맞다. 그놈들은 나쁜 도둑들이지만, 그래도 용사들이니.” “그건 그랬다. 이번에는 나도 활을 꺼내지 않고 칼을 들고 싸웠는데, 놀랍게도 형요 놈들은 작년보다 훨씬 솜씨가 는 것 같았다. 하지만 보돈차르님도 강해지셨지. 우리들은 한참이나 싸웠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형요의 솜씨는 대단했지만, 요요는 그보다는 약해서 나도 간신히 버텨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싸우자, 우리 넷은 모두 지쳤지. 그러자 형요가 말했다. ‘너횐 우릴 이길 수 없다.’ 그러자 보돈차르님도 말하셨지. ‘너희도 우릴 이기진 못한다.’ 그러자 형요는 요요와 함께 뒤로 쓰윽 물러서며 말했다. ‘오늘은 다 지쳤으니, 다음에 다시 만나자. 나는 꼭 승부를 내고 말겠다.’ 다른 사람들이 형요 형제를 잡으려 했지만 보돈차르님은 그러지 말라 하면서 당당하게 말하셨지. ‘나는 몽골 보돈차르족의 족장 보돈차르고, 이 사람은 우리 부족의 용사 치베다. 언제든 승부를 내고 싶으면 찾아와라! 손님으로 맞이 하겠다.’라고 말야. 형요 형제는 곧 사라져 버렸어.” 치우비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멋지다. 보돈차르님은 정말 멋지군. 그래서?” “그 다음해 봄에, 이번에는 형요 형제가 우리 부족을 찾아왔다. 그놈들이 그리 간 크게 정말 우리 부족을 찾아올 줄은 미처 몰랐지. 보돈차르님이 크게 웃으시며 일단 술을 권했지만, 그놈들은 가면도 벗으려 하지 않고 술도 마시려 하지 않았지. 다만 빨리 승부를 내자고 하는 거야. 그러더니 좀 떨어진 숲에서 싸우자고 하더군. 보돈차르님과 나는 좋다고 하고 그리로 갔지 그때 나는 두 번이나 형요 형제를 이기지 못한 게 화가 나서, 이번에는 꼭 이기겠다고 마음먹었지. 그래서 나는 형요에게 말했어. ‘각자 잘하는 재주로 싸우는데, 꼭 칼을 쓸 필요는 없지 않는가? 나는 활로 너희들과 겨루겠다.’ 그러자 형요는 마음대로 하라고 하더군. 나는 말했어. ‘너희들도 용사들이고 보돈차르님은 너희를 손님으로 맞이한다 했으니 촉 있는 화살은 쓰지 않겠다. 다만 너희가내 화살에 맞으면 너희가 진 것으로 인정해라.’ 그러자 그놈들은 좋다고 하더군. 나는 즉시 숲을 달리면서 계속 화살을 쏘기 시작했어.” 치우비는 치베의 활 솜씨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은근히 흥미가 일었다. “이번에는 그놈들이 분명 졌겠군.” “왜 그렇게 생각하지?” “치베, 너의 활 솜씨가 빗나가겠는가?” 그러자 치베는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그럴 줄 알았지. 나도 달리기는 자신이 있으며 달리거나 몸을 뒹굴더라도 틀림없이 화살을 맞힐 자신이 있었지. 보돈차르님은 요요와 싸웠고 나는 형요를 노렸지. 하지만 형요도 대단했어. 내가 세발의 화살을 날리자 그 녀석은 칼로 화살 하나를 쳐내고 한 손으로 화살 하나를 잡았고, 재빨리 옆 수풀에 뛰어들어 세 번째 화살마저 피하더군.” “형요란 녀석도 대단하군.” 치우비는 한마디 내뱉고는 고개를 저었다. 비록 치베의 활 솜씨가 대단하다지만, 만약 치베가 치우비에게 화살을 쏜다면 치우비는 세 개의 화살을 모두 쳐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형요가 힘들게나마 세 개의 화살을 피한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치베가 쏘는 화살은 강하고 빠르기가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좀 놀랐지만, 놈이 몸을 일으키면 이번에는 다섯 대의 화살을 쏠 생각이었어. 놈은 칼밖에 들고 있지 않으니, 나에게 다가와야만 했다. 그리고 다가오려면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야 했지 아까 화살을 피한 솜씨로 보아 그때 다섯 대의 화살을 쏘면 틀림없이 놈을 맞힐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런데.......” “그런데?” 치우비가 궁금하다는 듯 되묻자 치베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놀라서 돌아보니 바로 형요였어 놈은 분명 내 앞쪽의 숲으로 뛰어들었는데 바로 내 뒤에서 다가오고 있었던 거야. 나는 정말 놀랐고, 급히 몸을 돌려 놈에게 화살 두 대를 쏘았지. 놈은 화살 하나는 쳐냈지만, 두 번째 화살에 얼굴을 맞을 뻔했지. 정말 아깝더군. 내가 놀라지 않았으면 틀림없이 맞혔을 거야. 그런데 그놈도 놀랐는지, 또 숲으로 쑥 들어가 버리더군. 내가 화가 나서 활을 세게 당겨 숨었건 말건 꿰뚫어 맞히려 하는데, 난데없이 뒤에서 또 놈이 나타나는 거야.” 치우비는 기가 막혀서 한마디 끼웠다. “그놈은 정말 괴물이군.” “놈이 자꾸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며 나타나니까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어. 거의 미칠 것 같았지. 보돈차르님은 요요와 한참 싸우고 있었는데, 요요놈은 보돈차르님과 막상막하의 실력이더군. 놀랍게도 그놈들은 실력이 아주 많이 늘어 있었지. 그런 판에 내가 화살이 떨어져 버리면 나는 형요를 칼로 이길 자신이 없었어. 나는 생각다 못해 남은 화살 열다섯 대를 모두 빼들고 사방을 보고 빠르게 화살을 무조건 쏘아댔지 운에 맡긴 거야.” 치베는 운에 맡겼다고 하지만 치우비도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상대가 여기저기 마구 옮겨 다닌다면 주변을 모조리 휩쓸어버리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치우비는 치베의 무서운 활 솜씨를 잘 알고 있었다. 열다섯 대라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쏠 수 있는 실력인 것이다. 치우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정말 잘했군. 형요놈이 아무리 빨라도, 몸을 굽혀 숨어 있었을 테니 피하기 힘들었을 거야.” 치베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꼭 본 것같이 말하는군. 나는 화살을 쏘아대면서 ‘아’ 하는 비명소리를 들었다네. 그러고 나서 조금 있더니, 형요 놈이 또 다른 곳에서 부스럭거리며 일어나 말하더군. ‘내가 화살에 맞았다. 네 솜씨는 정말 대단하다. 치베, 우리가 졌다. 앞으로 너희 부족은 건드리지 않겠다. 하지만 너는 활로 이긴 것이고, 우리는 활 솜씨는 필요 없다.’ 그러더니 형요는 요요를 불러 결국 둘이 같이 가버리더군. 보돈차르님은 나를 칭찬해주어 나는 간신히 명예회복을 한 셈이지. 그러나 나는 놈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비 안다, 너는 알겠는가?” 치베가 묻자 치우비는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네가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어?” “좌우간 형요, 요요를 조심해야 한다. 비 안다, 자네의 실력이라면 그들을 겁내지 않아도 되겠지만, 문제는 그들이 지닌 이상한 재주다. 될 수 있으면 만나지 않는 편이 좋겠지만 만나게 된다면.......” 치우비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치우비와 치베는 서둘러 말을 몰았지만, 그래도 밤에는 쉬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녀가 몹시 피곤해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구름과 높은뫼는 둘 다 아주 좋은 말들이라서, 치우비는 시간 내로 화산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애석하게도 소녀와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소녀는 항상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고 때로는 남몰래 울기도 했으며 때로는 무서운 눈빛을 하기도 했다. 치우비는 소녀가 왜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길을 떠난 지 나흘째 되는 날, 그들은 험준한 산맥을 넘게 되었다. 그 산맥은 아주 가파른 등성이들로 이루어져서,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에워싸인 골짜기가 유일한 통로였는데, 치베는 그곳에 들어서자 곧 치우비에게 다가와 여기가 형요 형제가 자주 나타나는 길이라고 일러주었다. 치우비는 형요 형제를 별로 겁내지 않았고, 오히려 한 번 만나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만 소녀가 같이 있었기 때문에 귀찮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치우비가 치베에게 말했다. “말을 달려서 이 골짜기를 빨리 벗어나자. 그러면 귀찮은 일이 없을 것 아닌가?” 치우비와 치베는 더욱 말을 빠르게 달려 어서 골짜기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들이 골짜기 중간쯤 들어섰을 때, 갑자기 요란하게 무엇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골짜기 저편에서 나무등걸과 돌들이 수없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치우비와 치베는 서둘러 말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쏟아진 나무등걸과 돌들이 작은 산사태를 일으키며 골짜기 길을 막자, 치우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가려고 했는데 보내주지 않을 모양이군.” 별안간 옆에서 누군가가 아주 서툰 주신 말로 말했다. “너 같으면 소 삼천 마리, 구리 솥 다섯 개, 구리칼 백 자루를 그냥 보내주겠느냐?” 그 사람의 목소리는 앙칼졌지만 힘이 넘치는 듯했다. 치우비는 깜짝 놀라 그쪽을 바라보았는데, 거기에는 화려한 새털로 몸을 감싸고 머리부터 새털로 만든 가면을 뒤집어쓴 한 사람이 있었다. 새털은 거의가 다 푸른색과 붉은색이었고 망토처럼 짜여져 있었는데, 영락없이 큰 새가 털을 부풀린 듯한 모습이었다. 갑자기 그런 모습을 한 자가 옆에서 나타나자 치우비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네가 형요냐?” “그렇다. 너는 보아하니 치우비로구나.” 형요 역시 주신 말로 대답했는데, 말은 잘하는 편이었지만 말투가 좀 이상하고 처음 듣는 억센 발음이 많이 섞여 있었다. 어느 부족출신인지 알 수 없었다. “형요! 너희 형제는 지난번 나에게 져놓고, 또 나서는 것이냐?” 치베가 나서자 형요는 ‘흥’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지난번에 내가 진 것은 틀림없지만, 나는 너희 부족을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 덩치는 네 부족이 아니잖느냐?” 치베가 웃으며 약간 위협하는 투로 말했다. “저분을 건드리면 아마 후회하게 될 거다.” 형요는 다시 한 번 ‘흥’ 코웃음을 쳤다. “태산 회의의 대용사 치우비! 얼마나 대단한지 나는 꼭 겨뤄보아야겠다.” “요요는 같이 오지 않았느냐? 요요는 내가 맡겠다.” 치베가 대뜸 말에서 내리려 하자 형요가 막아섰다. “잠깐!” “뭐냐?” “너는 전에 이미 나와 겨뤄보았으니, 또 겨룰 필요 없다. 이번만은 내가 치우비와 혼자 겨뤄보겠다.” “내가 두려우냐?” 치베가 느물거리며 묻자 형요가 얼른 말했다. “네 활 솜씨는 대단하다. 하지만 난 활 재주를 겨루고 싶지는 않다. 네 활 재주는 내가 따를 수 없지만, 다른 실력은 나를 이기지 못할 거다. 그러니 굳이 우리가 겨룰 필요가 있는가?” 치베는 치우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치우비가 담담히 형요에게 물었다. “우리가 겨루어서 너희가 이기면 뭘 가져가려는가? 우리는 값진 물건도 가지고 있지 않다.” “치우비, 네 머리에 소 삼천 마리, 구리 솥 다섯 개, 구리칼 백 자루가 걸렸는데 그게 왜 값지지 않단 말인가?” “만약 우리가 이기면?” “너희는 무사히 지나가도 된다.” 치우비가 껄껄 웃으며 짐짓 여유 있게 물었다. “지면 나는 머리를 내놓아야 하는데 이겨봐야 얻을 게 없다면, 이런 엉터리 내기가 어디 있느냐?” “네 목을 노리는 자들은 많고도 많다. 만약 네가 이긴다면, 나는 너희가 도착할 때까지 어떤 놈들도 너희를 귀찮게 굴지 않도록 만들어 줄 수 있다.” 치우비는 그 말에 약간 솔깃해졌다. 귀찮은 일을 한 번 싸움으로 막을 수 있다면 나쁜 조건은 아닌 것 같았다. 사실 치우비는 형요에게 진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치우비가 부담을 느낄 상대는 단 두 사람, 형천과 끽구뿐이었으니까. “네가 그럴 수 있느냐?” “이 근방에서 내 말을 듣지 않을 놈들은 하나도 없다 뭐, 간단하게 말해서 이 근방 놈들은 무식해서, 대용사 치우비를 자기들이 어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네가 나를 이긴다면, 감히 덤빌 놈이 없을 것이다.” 형요의 말투가 당당하고 제법 멋지다고 치우비는 생각했다. 도둑으로 있기에는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허나 그들이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생각나자 치우비는 약간 화가 났다. “너희는 그동안 사람을 얼마나 죽였는가?” “그걸 꼭 알아야 하나?” “알아야겠다, 형요 아주 중요하다.” “그까짓 것이 왜 중요한가?” 치우비가 굳은 표정으로 형요를 쏘아보며 대꾸했다. “너희가 사람을 많이 죽였다면 너희를 상대할 때 나는 조금도 봐주지 않겠다. 허나 사람을 많이 해치지 않았다면 너희를 받아주겠다.” 형요가 갑자기 킥킥 웃더니 되물었다. “받아줘?” “도둑으로 지내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못되지 않은가? 좋은 곳에 재주를 써야지, 도둑질에 쓰면 안 된다.” 형요가 비웃듯이 말했다. “아주 대단하시군. 너는 네가 반드시 이긴다고 생각하는 건가?” “어서 대답이나 해라. 너희는 사내대장부이니,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테지.” 그러자 형요는 ‘흥’ 하며 이죽거렸다. “너무 많이 죽여서 얼마나 죽였는지도 모르겠는걸?” 말이 끝나자마자 형요가 갑자기 번쩍하고 움직였다. 순식간에 칼을 뽑아 치우비를 찔러 들어온 것인데 하도 빨라서 번쩍하는 것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치우비도 경계하던 터라 급히 소녀를 안은 채 말 등에서 몸을 날렸다. ‘샥샥’ 소리를 내며 형요의 무기는 치우비를 따라 계속 번득였지만 치우비는 교묘하게 몸을 놀려 세 번의 칼질을 피해 치베가 탄 말등에 소녀를 앉혔다. “여기서 좀 기다리시구려.” 미소를 띠며 소녀를 앉힌 후 치우비는 즉시 다시 형요 쪽으로 몸을 날렸다. 형요의 칼이 다시 찔러 들어왔지만 치우비의 겨드랑 밑을 지나갔다. 그런데 그 순간, 형요의 부풀은 털옷 속에서 또 한 자루의 칼이 번득였다. 치우비는 몸을 움직일 겨를이 없어서 재빨리 구름의 등에 얹어 놓았던 커다란 돌도끼를 뽑아 그 칼을 막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형요가 ‘슛’ 소리를 내며 입 안에 물고 있던 뭔가를 쏘아내는 것이 아닌가? 치우비는 급히 목을 뒤로 젖혀서 그것을 피하자 그것이 아슬아슬하게 치우비의 이마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고개를 젖히지 않았으면 치우비의 미간에 박혔을 터였다. 치우비는 형요를 얕보던 마음이 사라져서 다시 구름의 등 위로 몸을 굴리면서 구리곤봉까지 꺼내들었다. 그러는 사이 형요는 다섯 번의 칼질을 했는데 모두가 찔러 들어오는 공격이었다. 치우비는 돌도끼와 구리곤봉으로 그 공격을 막았는데 ‘챙챙’ 소리가 나면서 돌도끼의 귀퉁이가 세 조각이나 떨어져 나갔다. ‘저 녀석의 칼은 아주 좋구나.’ 치우비는 방어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치우비가 돌도끼와 구리곤봉을 몸 주위로 ‘붕붕’ 소리가 나게 돌리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리는 것이라 바람소리가 ‘윙윙’ 울려 퍼질 정도였고 힘도 어마어마해서 형요는 감히 칼을 찔러 들어갈 수가 없었다. 형요는 치우비의 기세가 생각보다 무섭다고 깨닫자 미꾸라지처럼 교묘하게 움직이며 치우비의 공격을 빠져 연신 뒤로 물러섰다. 형요는 골짜기 언저리까지 계속 밀려났지만 치우비는 조금도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이 도끼 쓰는 법은 아버지 치우우레의 장기이기도 했으며 이렇게 도끼와 곤봉을 돌리면 화살까지도 막을 수 있었다. 형요가 칼을 찔러 들어와도 도끼와 곤봉의 힘에 밀려 부러지게 마련이었다. 형요는 계속 물러나서 나무와 바위들이 듬성듬성 있는 곳에 이르자 훌쩍 몸을 돌려 나무 뒤에 숨었다. 그러나 치우비는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그대로 도끼와 곤봉을 돌리며 형요를 밀어붙였다. 그 나무는 상당히 굵었는데 치우비의 무지무지한 도끼와 곤봉에 휘말리자 순식간에 와지끈 소리를 내며 대여섯 조각으로 부러져 넘어졌다. 형요는 급했는지 몇 바퀴 재주를 넘어 치우비를 피하며 욕을 했다. “무작스러운 놈 힘자랑이냐?” 그러더니 형요는 재빨리 커다란 바위 하나를 집어 올렸다. 그 커다란 바위는 거의 이백 근은 되어 보였는데 형요는 마치 공깃돌처럼 그것을 치우비에게 내던졌다. “먹어라!” 이것을 돌도끼로 막으면 도끼가 부서질 것 같아서 치우비는 재빨리 도끼를 버리면서 힘을 주먹에 모아서 바위를 후려갈겼다. 그러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치우비의 주먹은 그 큰 바위를 허공에서 산산조각 내버리고 말았다. 치우비가 덤덤하게 외쳤다. “돌싸움을 하자는 거냐?” 치우비는 곧바로 형요가 던진 것과 비슷한 크기의 바위 하나에 손을 얹었다. 그 바위는 땅에 반쯤 박혀 있었는데 치우비는 바위를 들지 않고 그저 손바닥을 위에 얹었을 뿐이다. 순간 치우비가 힘을 쓰자 바위는 치우비의 손바닥에 달라붙은 듯 쑥 하고 뽑혀버렸다. 형요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던 치베와 소녀도 깜짝 놀랐다. 치우비는 싱글거면서 형요에게 말했다. “너도 먹어봐라!” 치우비가 가볍게 바위를 내던졌는데도 그 날아가는 기세는 형요가 양손으로 바위를 던졌을 때보다 훨씬 세찼다. 형요는 감히 그 바위를 막지 못하고 재빨리 몸을 날려 바위덩이를 피했다. 그러자 바위는 뒤에 있던 더 큰 바위와 부딪혀 폭발하듯 부서지며 돌조각과 먼지를 사방에 날렸다. 형요는 바위는 간신히 피했지만 수없이 날아오는 돌조각과 먼지를 피할 수가 없어서 화려하던 새털 장식들이 엉망이 되었다. 형요는 놀라서 급히 먼지와 돌 조각들을 신경질적으로 털어냈다. 그것을 보고 치우비는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네 힘 정도로는 내 상대가 못돼. 요요라는 놈은 어디 있느냐? 그놈도 나오라고 해서 같이 덤벼라.” 치우비는 형요 형제가 사람을 많이 해쳤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 있었다. 허나 형요와 요요를 같이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형요를 약간 봐주고 있었던 것이다. 화를 돋우어 같이 싸우게 한 다음 둘을 다 잡아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형요는 그에 대꾸하지 않고 날카롭게 외쳤다. “치우비! 과연 대단하구나! 하지만 내 주술을 당할 수 있겠느냐?” 형요는 재빨리 커다란 바위 뒤로 획 몸을 날렸다. 치우비가 형요를 쫓아가려 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치베가 외쳤다. “뒤!” 치우비는 순간 뒤에서 날아오는 뭔가의 기척을 느끼고 손에 들고 있던 구리곤봉을 재빨리 어깨 뒤로 넘겼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구리곤봉이 뭔가와 부딪혔다. 치우비는 재빨리 몸을 빙글 돌렸는데, 정말 놀랍게도 어느새 형요가 자신의 등 뒤에 나타나 있는 것 아닌가? 치우비가 주먹을 내뻗자 형요는 재빨리 주먹 앞에 칼끝을 갖다대려 했다. 이대로 때리면 주먹이 형요의 칼에 찔릴 판이라 치우비는 급히 주먹을 거두면서 몸을 숙여 형요의 발을 걸려고 했다. 그러나 형요는 몸을 훌쩍 날리며 연신 뒤로 재주를 넘어 다시 반대편의 덤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말은 들었지만 형요의 기이한 재주를 직접 겪어보니 치우비의 등에서도 식은땀이 났다. 한번 당하고 나니 덤불 쪽으로 쫓아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 또 다른 바위 뒤편에서 형요가 얼굴을 내밀며 ‘휙휙’ 입으로 가시 같은 것을 내쏘았다. 이번에도 형요는 생각도 못한 곳에서 나타난 것이다. 허나 치우비는 그 가시를 구리곤봉으로 일일이 받아내며 외쳤다. “흥! 그런 수작에 넘어가지 않는다!” 치우비는 숲이건 바위건 형요가 아무데서나 옮겨 나타날 수 있으니,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트인 곳에 있어야 형요에게 당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형요가 이번에는 처음 몸을 숨겼던 바위 뒤에서 다시 나타나 비아냥거렸다. “꼬리를 빼기냐?” 치우비는 ‘퉤’ 침을 뱉으며 말했다. “얼마든지 덤벼봐라.” 치우비가 태산같이 움직이지 않으려 하자 형요가 외쳤다. “좋다! 과연 치우비답군. 그렇다면 있는 밑천을 다 보여야겠군!” “있다면 다 꺼내봐라. 네 아우 요요는 어디 있느냐?” 형요는 코웃음만 칠 뿐 대답하지 않고 딴소리를 했다. “너는 몸을 여러 개로 불리는 주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느냐?” 처음 듣는 말이라 신기한지, 치우비가 물었다. “그런 재주도 있는가?” “한 번 보여주겠다!” 순간 형요는 몸을 날려 솟구치면서 크게 외쳤다. “요리요리 하!” 치우비는 구리곤봉을 쥔 손에 힘을 주었으나 형요는 자신에게 덤빈 것이 아니라 다른 덤불 뒤로 들어간 것이다. 치우비가 그쪽으로 눈을 돌리자 갑자기 다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요리요리 하!” 그러면서 놀랍게도 그곳에서는 두 명의 형요가 일어서며 자신에게 일제히 가시를 불어 쏘아댔다. 치우비는 급히 구리곤봉을 휘둘러서 가시들을 막아냈으나 형요가 갑자기 둘로 불어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두 명의 형요가 다시 몸을 날려 허공에서 뱅글뱅글 두어 바퀴 돌면서 옆의 바위 뒤로 들어갔다. “요리요리 하!” 다시 외치는 소리가 들리며 이번에는 세 명의 형요가 번개처럼 뛰어나와 가시를 쏘아댔다. 치우비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급히 가시들을 모두 쳐내기는 했지만 치우비는 일순 당황하여 손이 상당히 어지러워졌다. 그때 세 명의 형요가 다시 주문을 외치면서 여섯 개의 칼을 일제히 치우비에게 겨눴다. 여섯 개의 칼이 몸의 여섯 부위를 노리고 일제히 찔러 들어오자 치우비도 당장 그것을 막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치우비는 급히 몸을 회전시키며 옆으로 몇 발짝 정도 획 움직여서 칼날들을 모조리 피해버렸다. 바로 무라에게서 배운 재주였다. 세 명의 형요는 치우비를 찌르지 못했지만 방향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다시 반대편 나무등걸 뒤로 몸을 굴려 들어갔다. 그때 치베가 더 참지 못하고 외쳤다. “비 안다! 놈들이 괴상한 술수를 부린다! 내가 돕겠다!” 그러자 치우비가 다급하게 막아섰다. “안 된다! 너는 소녀님을 지켜라!” 그때 다시 ‘요리요리 하’ 하는 주문 소리가 들리면서 네 명의 형요가 일제히 뛰어나왔다. 그리고 칼을 눈부시게 휘두르며 동시에 덤벼들자 치우비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세상에 이런 기막힌 술수가 있다니! 이놈들은 얼마나 더 불어날 것인가?’ 네 명의 형요는 마구 칼을 휘두르며 사방으로 조이고 들어왔는데 칼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한 명이나 두 명이라면 막아내는 게 어렵지 않았을 테지만 네 명의 형요는 확실히 치우비로서도 부담스러웠다. 더구나 형요의 주술이 두렵게 여겨져서 반쯤 기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네 명도 막아내기 힘든데, 이놈들이 몇 명 더 늘어나면 나는 죽는 수밖에 없다!’ 치우비는 다급해졌다. 형요가 ‘요리요리 하’라는 주문을 외우면 숫자가 늘어나니 어떻게 해서든 주문을 외우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형요들 중 한 명이 주문을 외우려 하자 치우비는 급히 그 형요에게 곤봉을 휘둘러댔다. 그러자 그 형요는 치우비의 무서운 기세에 눌려 입을 다물며 뒤로 물러섰으나 나머지 세 형요가 치우비의 양옆과 등 뒤를 찔러 들어왔다. 치우비는 급히 몸을 움츠렸으나 찍 소리가 나며 두 자루의 칼이 치우비의 옷을 찢고 치우비의 몸에 상처를 냈다. 치베와 소녀가 놀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치우비는 불안정한 자세였지만 급히 힘을 주어 몸을 위로 띄우며 빙그르르 돌렸다. 그리고 연달아 양발로 두 명의 형요를 발로 차 물러서게 만들었는데 다시 형요 한 명이 주문을 외우려 했다. “제기랄!” 치우비는 형요가 주문을 외우지 못하게 하려고 무리를 해서 급히 손을 휘둘러 땅에 떨어진 돌 하나를 튕겨냈다. 돌이 ‘핑’ 소리를 내며 날아들자 형요는 간신히 돌을 피했으나 돌이 형요의 얼굴에 씌워진 새 가면을 스치고 지나가 가면이 하마터면 벗겨질 뻔했다. 그러나 치우비는 몸이 허공에 뜬 상태였기 때문에 이내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두 명의 형요가 네 자루의 칼로 치우비의 몸을 내리쳐왔다. 치우비의 입에서도 이번만은 커다랗게 ‘아이쿠’ 하는 소리가 나왔다. 치우비는 급히 구리곤봉을 땅에 꽂으며 그 힘으로 몸을 거꾸로 차올려서 세 명의 형요가 에워싼 곳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저만치에서 가면이 비뚤어진 형요가 칼까지 땅에 놓고 가면을 바로잡는 것이 보였다. 치우치비는 그 모습이 약간 의문스러워졌다. ‘이렇게 급한 마당에 왜 가면 따위를 바로 쓰려고 애쓰는 걸까?’ 그러나 치우비가 다시 땅에 내려서기도 전에 다시 여섯 자루의 칼이 일제히 찔러 들어왔다. 치우비는 급히 곤봉을 휘둘러 두 자루의 칼을 쳐냈고 급한 나머지 한손으로 한 형요의 칼날을 쥐었다. 손이 베어 피가 솟았지만 치우비는 급히 그 칼을 휘둘러서 나머지 세 자루의 칼을 튕겨냈다. 그 틈에 두 명의 형요가 일제히 치우비의 배에 발길질을 했다. 이것만은 막을 방법이 없어서 치우비는 ‘윽’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졌다. 눈앞이 아찔해져서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으나 치우비는 급히 몸을 데구르르 굴렸다. 아니나 다를까 칼 세 자루가 치우비가 방금 몸을 날린 자리에 ‘퍼퍼퍽’ 박혔다. 치우비가 급히 몸을 피하지 않았다면 머리가 잘라져 버렸을 것이다. 치우비는 할 수 없이 몸을 계속 굴렸는데 두 명의 형요가 끈질기게 쫓아오며 계속 칼로 찔러댔다. 간신히 피하기는 했지만 또다시 칼이 두 번이나 치우비의 몸을 스쳐서 치우비는 먼지투성이에다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때 치우비의 몸이 덜컥 멈춰 섰다. 정신없이 굴러가다가 나무등걸에 부딪혀 멈춘 것이다. 순간 세 명의 형요가 달려들며 칼을 내리치려 했는데 이번만큼은 피할 방법이 없었다. 양손을 뻗어 두 자루의 칼 정도는 막을 수 있었지만 나머지 한 자루의 칼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 치우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오늘, 여기서 죽는구나.’ 그때 ‘쉿쉿쉿’ 뭔가가 무서운 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세 명의 형요가 급히 몸을 피했는데 그것들은 화살이었다. 치베가 급한 나머지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한 것이다. 치우비는 즉시 정신을 차려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저만치 물러서 있던 형요가 다시 주문을 외웠다. “요리요리 하! 요리요리 하!” 그러자 저편에서 갑자기 두 명의 형요가 몸을 날려 뛰어올랐다. 바로 치베의 뒤편이었다. 치우비는 너무도 기가 막혀서 급히 외쳤다. “치베! 조심해!” 두 명의 형요가 다시 나타나자 치베도 몹시 놀란 것 같았다. 미처 활을 쏘지도 못해 두 명의 형요는 치베에게 바싹 다가와 있었다. 치베는 속으로, 한 명의 형요도 당해낼 수 없는데 두 명의 형요가 덤비니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치베는 말을 타고 있었다. 몽골족의 기마술은 세상에서 제일 뛰어났고 치베는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사람이었다. 치베는 곧 구리창을 뽑아들고 높은뫼를 몰아 교묘하게 두 명의 형요 사이를 오가며 싸우기 시작했다. 형요의 칼 솜씨는 대단했지만 낮은 곳에서 높은 곳에 있는 치베를 건드리기는 힘들었다. 더구나 치베는 기마술이 대단히 뛰어났고 손에 잡은 것이 긴 창이어서 재빨리 움직이며 창을 휘둘러 두 사람의 형요를 막아냈다. 그러나 치베의 등 뒤에 소녀가 매달려 있어서 치베는 마음껏 기술을 발휘할 수 없었다. 두 형요는 치베가 그렇게 능수능란하게 말과 혼연일체가 되어 공격해오자 다급해했다. 하지만 치베는 창 재간이 그리 뛰어나지 못해 그렇게 유리한 것도 아니었다. 치우비는 치베까지도 위기에 몰리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벌떡 일어섰다. 이제 가면을 고쳐 쓴 다른 형요까지 합세하여 네 명의 형요가 여덟 개의 칼을 번득이며 치우비를 에워싸고 서서히 다가들었다. 그때 치우비는 구리곤봉마저도 놓친 상태라 무기가 없었다 치베가 긴 창으로 형요를 막아내는 것을 보고 치우비는 못내 아쉬워했다. ‘긴 무기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 그때 네 명의 형요가 일제히 덮쳐들자 치우비는 왼손을 나무에 짚고 몸을 나무 뒤로 돌렸다. 그러다가 치우비는 번개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급히 나무를 팔로 안고 힘을 주었다. 그 나무는 아주 굵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둘레가 두 뼘이 넘는 큰 나무였다. 치우비가 무서운 힘으로 나무를 눕히자 순식간에 ‘우지직’ 소리가 나더니 나무가 뒤로 꺾이며 나무뿌리가 뽑혀 흙을 튕기면서 솟구쳐 올라왔다. 네 사람의 형요는 칼을 찔러오다가 난데없이 나무뿌리가 흙과 함께 솟구쳐 올라오자 놀라서 먼지를 털어내며 뒤로 물러섰다. 치우비는 나무를 다 뽑아 올리자 다시 한 번 주먹으로 세 번을 쳐서 나무의 윗부분을 부서뜨려 꺾어버렸다. 나뭇가지가 무성해서 이대로는 휘두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무는 퍽 큰 편이라 가지 부분을 꺾은 후에도 한 길(약 3미터)이 넘었다. 치우비는 아직도 흙이 뭉쳐 있는 거대한 나무뿌리 부분을 창끝처럼 치켜들고 외쳤다. “형요! 재주가 있으면 더 나눠봐라! 백 명이면 백 명! 천 명이면 천명! 모조리 뭉개주마!” 그러면서 치우비는 무서운 기세로 거대한 나무를 창처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네 사람의 형요는 치우비가 그렇게 무지막지한 힘을 발휘할 줄은 미처 몰랐던 듯,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무뿌리는 실로 어마어마하게 큰데다가 휘두를 때마다 흙먼지가 날려서 형요는 치우 비에게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더구나 치우비는 그렇게 큰 나무를 휘두르는데도 마치 가벼운 창을 휘두르는 것처럼 솜씨가 날렵하기 이를 데 없어서, 때로는 찔러오고, 때로는 밀어치고 때로는 빙빙 돌리기까지 했다. 무지막지한 나무뿌리가 달려들 때마다 형요들은 속수무책으로 뒤로 물러서기에 바빴다. 게다가 흙과 잔 돌멩이, 나무뿌리에 붙어살던 벌레들까지도 마구 날아왔으므로 형요는 쩔쩔매기 시작했다. 그러나 치우비도 조마조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치우비가 힘이 좋고 통나무의 위력이 크긴 해도, 이 전법에는 커다란 위험성이 있었다. 만약 뒤에서 공격을 당하면 통나무를 급히 돌려 막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형요가 언제 또 주문을 외워 자신의 뒤에 분신을 만들지 몰랐으므로 치우비는 섣불리 공격해 들어갈 수 없었다. 다만 짐승을 몰듯, 계속 여러 명의 형요를 몰아붙여 자신의 뒤로 돌아가거나 주문을 외울 수 없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싸우다 보니 제아무리 천하장사 치우비라도 점점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았다. 치우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놈들이 주술만 외우지 않으면 당장 이길 수 있을 텐데! 뒤가 두려워서 더 이상 공격할 수가 없구나! 이대로 가면 지쳐서 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치우비는 네 사람의 형요를 한데 몰아붙이고 있었는데, 약간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가만! 왜 하나가 좀 달라 보이지?’ 넷 중 한 사람의 형요는 다른 사람들과 약간 색이 달랐다. 가만 보니 그것은 먼지를 뒤집어써서 그런 것이었다. 맨 처음 형요에게 바위를 던졌을 때, 그때 박살난 바위는 다른 것들과 색깔이 달라서 허연 먼지를 뿜었기 때문에 그 먼지를 뒤집어쓴 형요는 털색이 좀 허옇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이상한 점을 발견한 치우비는 좀더 생각을 가다듬었다. ‘맨 처음 형요가 몸을 나누었다면 다른 형요들도 똑같이 허연색이어야 하는데, 왜 다른 놈들은 멀쩡한 색이지?’ 그때 다른 형요 두 명이 치우비를 에워싸고 포위하려 하자 치우비는 급히 나무를 휘둘러서 놈들의 앞을 막았다. 그런데 한 명의 형요가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서자, 다른 형요가 재빨리 칼을 휘둘러 몇 개의 나무뿌리를 잘라내기까지 했다. 그것은 맨 처음, 허연 먼지를 뒤집어 쓴 형요였다. 그러고 보니 네 명의 형요와 싸울 때, 넷의 실력이 똑같지 않고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던 것을 치우비는 비로소 알아차렸다. ‘주술로 몸을 나누었다면 실력도 똑같아야 하는데, 왜 저 형요의 솜씨가 제일 나은가? 왜 어느 놈은 세고 어느 놈은 약한 거지?’ 생각을 거듭 하다가 치우비는 문득 표정이 밝아졌다. 치우비가 갑자기 ‘하하하’ 소리를 내어 웃었다. 형요는 치우비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리자 소리를 질렀다 “미친 놈!” 돌연 치우비가 나무를 휘둘러 한 사람의 형요를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반대편에 있던 형요가 급히 주문을 외웠다. “요리요리.......” 그러나 치우비는 주문을 외우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처음에 노린 형요에게 계속 나무뿌리를 찔러댔다. 뒤에 있던 세 명의 형요는 놀라서 급히 치우비의 등을 노리려 했지만 치우비는 나무뿌리를 쿵 땅에 찧으며 나무를 잡고 허공을 붕 돌아 처음 노린 형요의 등 뒤로 내려섰다. 형요는 칼을 휘둘렀지만 치우비는 재빨리 몸을 숙이면서 발을 휘둘러서 형요의 다리를 걸었다. “어이쿠!” 형요가 넘어지자 치우비는 즉시 그 형요를 발로 걷어차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옆구리를 차이자 그 형요는 즉시 기절해버렸다. 그러자 두 명의 형요가 다시 치우비에게 덤벼들었고 한 명의 형요는 급히 주문을 외우려 했다. “요리.......” 그 모습을 보고 치우비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제 안 속는다! 얼마든지 주문을 외워보시지?” 치우비가 땅에 넘어진 나무를 퍽 걷어차자 나무는 당장 세 사람의 형요에게로 날아갔다. 거대한 통나무가 날아들자 형요들은 급히 몸을 굽혀 통나무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타서 치우비는 무라에게 배운, 순식간에 몸을 번득이는 기술을 써서 치베와 싸우는 두 사람의 형요에게 달려갔다. 그때 치베는 슬슬 기운이 달려서 헐떡이며 창쓰는 손이 어지러워졌고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치베와 싸우던 형요들은 이제 곧 치베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터라 뒤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치우비가 나타나자 미처 대항할 수가 없었다. 치우비는 두 형요의 뒷덜미를 잡아 땅에 태질을 쳤고 두 형요는 동시에 머리를 땅에 찧어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치베가 헐떡이며 간신히 말했다. “비 안다!” “이제 괜찮다, 치베!” 그때 저쪽 세 명의 형요가 일제히 주문을 외우려 하고 있었다. 치베가 다급하게 치우비에게 말했다. “주문을 외우게 하면 안 된다!” 그러자 치우비는 웃으며 말했다. “얼마든지 더 외워보라고 해. 난 이제 알았다.” “뭘 말인가?” 치베가 놀라서 묻자 치우비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속임수다!” 그러면서 치우비는 땅에 쓰러진 두 명의 형요를 잡아 번쩍 들어 등을 마주 대었다. 그러자 두 명의 형요가 약간 키가 다른 것 아닌가? 치베가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키가........ 다르다?” 고개를 끄덕이며 치우비가 말했다. “그래, 주술은 가짜다. 속임수란 말야!” 그 말을 듣자 세 명의 형요는 모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치우비는 이제 주술을 염려하지 않게 되자 조금도 꺼릴 것이 없어졌다. 더구나 세 명의 형요는 속임수가 탄로난 것을 알자 기운이 빠져서 힘을 내지 못했다. 다시 한참을 싸우기는 했지만, 결국 세 명의 형요도 치우비에게 배를 얻어맞고 기절하여 쓰러져 버렸다. 다만 맨 처음의 먼지를 뒤집어썼던 형요만이 기절하지 않고 얻어맞은 배를 움켜잡고 헐떡였다. 치베와 소녀는 치우비가 마침내 형요를 모두 물리치자 기뻐 박수를 쳤다. “비 안다! 정말 대단하다!” 치우비는 곧 웃으며 여섯 명의 형요를 한데 끌어 모았다. 그리고 형요들이 쓰고 있던 가면을 벗기기 시작했다. 맨 처음 치베와 싸우던 좀 키 작은 형요의 가면을 벗기자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코가 높고 생김새가 좀 기이한 여자의 얼굴이었다. “어? 여자였나?” 치우비가 놀라 말하자 치베도 놀라며 말을 더듬거렸다. “이 여자는 북쪽....... 과보족(주석 : 중국 북방, 즉 지금의 러시아지방에 산다고 믿어지던 거인족. 해를 따라 잡으려고 달리다 죽은 거인 과보의 전설이 유명하다. 본 소설에서는, 러시아 및 시베리아 지방에서 살며 키가 크고 서양인의 특성을 약간 지닌 민적으로 설정되어 있다)이다.” “과보족?” 치베는 급히 다른 형요의 가면을 벗겼다 가면을 벗기자 나타난 얼굴은 다른 여자였는데 역시 코가 높고 눈두덩이 쑥 들어간 얼굴이었다. 다만 눈과 머리색은 다같이 검었다. “과보족이 틀림없다.” 그런데 다음 형요의 가면을 벗기면서 치우비와 치베는 다같이 놀랐다. 치우비와 싸우던 네 명의 형요 역시 모두 여자였는데 모두 얼굴 생김이 똑같았던 것이다. 모두 다 코가 높고 눈두덩이 깊었으며 이목구비가 뚜렷한데다 아주 살빛이 창백할 정도로 횐 여자들이었다. 치베가 놀라움에 겨워 물었다. “이 넷은 정말 주술로 만들어진 것 아닐까?” 그러자 치우비는 고개를 저었다. “네쌍둥이다. 틀림없다.” 치베는 몹시 놀라 부르짖었다. 두 사람은 쌍둥이, 세쌍둥이까지는 이야기로나마 들어보았지만 네쌍둥이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네쌍둥이? 그것 신기하구나!” 정신을 잃지 않고 있던 맨 처음의 형요가 탄식하며 말했다. “치우비, 네가 이겼다.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라.” 이제 형요는 포기했는지 치우비가 묻는 말에 숨기지 않고 대답했고 치우비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형요 형제는 형요와 요요 두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여섯이었으며 남자 형제도 아니고 자매들이었다. 다만 재주를 피우느라 항상 가면과 부풀은 털옷을 입어 얼굴과 몸을 가리고 있었으며, 싸움을 잘했으므로 다들 남자로 생각한 것이다. 그중 형요 네 명은 처음부터 네쌍둥이였고 이름도 같아서 그들 스스로도 다른 자매를 잘 구별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름도 다같이 형요였고, 편의상 첫째 형요, 둘째 형요, 셋째 형요, 넷째 형요라고 불렀다. 나머지 두 자매는 쌍둥이는 아니었는데 다섯째가 미요, 막내가 요요이며 미요와 요요는 한살 차이였지만 키가 비슷했다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면 형요 중 한 명과 보통 요요가 먼저 모습을 나타내고 그때 나머지 세 명의 형요와 미요는 여기저기 숨어 있었다. 그러다가 만약 형요나 요요가 몰리면 주술을 쓰는 척하고 대신 나타나 싸웠던 것이다. 보돈차르와 치베를 기습할 때는 땅을 파고 숨어 있기까지 했다. 형요와 요요는 싸움을 잘하는 편이라 대부분의 상대는 물리칠 수 있었으며, 상대방이 강하면 숨어 있는 다른 형요나 미요가 번갈아 나타나 상대를 혼란시키는 수법을 썼다. 말은 쉽지만 아주 오랫동안 훈련을 하지 않고서는 이제껏 모든 사람을 속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치베가 감탄하며 말했다. “그랬군! 너희들은 죄도 대단하고, 숨는 재주도 대단하다. 나는 스스로 눈과 귀가 밝다고 생각했는데, 너희가 숨은 것은 정말 미처 알아 내지 못했다.” 마치 치베의 말을 이어나가듯 형요가 말했다. “그런데 치우비는 더 대단하더군. 그래서 우리는 주술로 몸을 나눈 척 하고 한번에 덤비기까지 했고 주문을 외워 정신을 헷갈리게 만들기까지 했는데, 그래도 이기지 못했다. 부끄러울 뿐이다.” 사실 치우비도, 우연히 맨 처음 형요가 먼지를 뒤집어쓰지 않았다면 주문에 신경 쓰여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패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오싹해졌지만, 치우비는 약간 이상하게 생긴 이 여자들이 그렇게 죄를 잘 쓰고 재주가 대단하며 싸우는 실력도 웬만한 용사 못지않은 것에 적잖이 감탄했다. 더구나 형요 자매는 스물셋, 스물넷밖에 안 돼 보였고 미요와 요요는 더 어려서 스물도 안 된 듯했다. 그렇게 젊은 나이에 이만한 재주를 가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들이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하니, 용서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치우비가 얼굴을 굳히며 말문을 열었다. “너희는 수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용서해줄 수는 없다. 고통 없이 단칼에 죽여주겠다.” 형요는 그 말을 듣고 태연히 눈을 감았다. 치우비는 비록 여자이지만 형요의 기개가 대단하자 문득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요요가 울면서 외쳤다. “우리는...... 우리는 사람을 많이 죽인 일이 없어요. 겨루다가 죽인 일은 있지만 절대 사람을 마구 죽인 적이 없다구요.” “요요야!” 형요가 요요를 나무랐지만 요요는 계속 외쳤다. “우리는 짐을 뺏고 물건을 뺏었지만 괜히 약한 사람을 죽이지 않아요. 더구나 우리는...... 우리는 원수도 갚아야 하는데......!” 요요가 떠들자 치우비는 칼을 거두며 물었다. “정말이냐?” “형요, 요요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요!” 치우비가 웃으며 되받았다. “요리요리 하! 그건 거짓말이 아니냐?” 의외로 요요는 딱 부러지게 말했다. “싸울 때 쓰는 재주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그건 우리가 오래 연습한 재주라구요! 재주는 부리지만, 거짓말은 안 해요!” 그러자 형요가 한숨을 깊이 쉬더니 끼어들었다. “믿어달라고는 안 하겠지만, 요요의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치우비는 칼을 한 번 바라보고, 또 형요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러면 왜 아까 사람들을 다 죽였다고 말했나?” 형요는 조금도 두려운 기색 없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안 그랬다 해도 누가 믿어주나요?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데 왜 발뺌을 하겠습니까?” “그렇다 해도 어찌 거짓말을......” 형요는 ‘훗’ 하고 웃었다. “겨루는 도중에 몇몇 사람을 죽인 것은 사실이며, 몇 사람을 죽였는지 정확히 세지 못했으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치우비는 형요가 비록 괴이하게 생긴 여자이지만 몹시 당당하고 기개가 대단한 것을 보고 아깝다는 생각이 더 강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칼을 내렸다. 그러자 치베가 나섰다. “비 안다, 전에 보돈차르께서도 말씀하셨다. 형요 형제...... 아니, 자매지 좌우간 형요는 그리 비겁한 사람은 아닐 거라고 했다. 그래서 세 번이나 형요와 겨루시면서도 굳이 그들을 잡으려 하지 않으신 거다. 나도 형요가 죄 없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일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면 여기를 지나가다 죽은 많은 사람들은 누가 죽인 것인가?” 그러자 요요가 외쳤다. “우리도 몰라요 하지만 아마...... 괴물이 그렇게 하는 걸 거예요!” “괴물?” 요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또 소리치듯 말했다. “이 산에는 괴물이 나와요! 우리 부모님도, 마을사람도 전부 괴물에게 죽었다구요!” 치우비는 아직도 마음의 결정을 완전히 내리지 못하고 계속 집요하게 물었다. “그런데 도둑질은 왜 했지?” “그러면 이 깊은 산에서 무엇을 하고 사나요?” “여기를 떠나면 될 것 아니냐?” “그럴 수 없어요! 그럴 수 없어요! 우리는 괴물을 잡아 원수를 갚아야 해요! 그때까지는 떠날 수 없다구요!” 치우비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말했다. “좀더 자세히 이야기해봐라. 치베, 날이 늦었으니 불을 피우자.” 어느덧 해가 떨어지고 있었고 싸움을 하느라 모두가 지쳐 있어 치우비와 치베는 불을 피우고 음식을 꺼냈다. 치우비는 형요 자매가 도망칠까 봐 일단 줄로 묶어 놓았지만, 그들에게도 음식을 나눠주며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형요 자매는 원래 먼 북쪽, 과보족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형요 자매가 네쌍둥이로 태어나자, 과보족의 푸닥 <주석 : 바이칼 호 부근에서 시베리아 전역에 퍼져 살고 있던 러시아의 토착부족은 그들의 주술사를 푸닥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무당의 굿을 일명 '푸닥거리'라고 부르는 것과 일치할 뿐더러, 푸닥의 강신 및 제의 절차 등도 우리의 것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나아가서 이는 바이칼 호 부근 부족과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동북아 북방 부족 전체의 공통적 특성이다. (다른 부족들은 주술사를 우타간, 푸타간 등으로 부른다. ) 이는 우리 민족이 바이칼 호 부근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향하여 중간에 많은 부족들로 갈라지면서 한반도까지 이르렀다는 몇몇 서적(재야에서만 인정하고 정식 사학에서는 아직 인정하지 않는)의 내용을 증명하는 자료이기도 하며, 재야 사학자들과 민속학자 등 사이에서 근래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은 이것은 부족에게 흥한 징조라고 형요 일가를 내쫓았다. 결국 형요의 부모는 몇몇 일가친척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동쪽으로 길을 떠났다. 그러나 과보족은 코가 높고 키가 크며 생김새가 달라서, 동쪽의 몽골족이나 타타르족들은 모두 도깨비라고 부르면서 그들을 배척했다. 결국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산에 숨어 도둑질을 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형요 자매의 아버지는 과보족에서 왜 유명한 용사였는데, 도둑질로 살아가야 하기에 열심히 더 무술을 닦아 실력이 대단해졌다. 나중에는 점차 부하들도 거느리게 되어 형요의 아버지는 대도둑이 되었고 형요 자매도 도둑들 사이에서 공주처럼 떠받들어지며 키워졌다. 그러 는 와중에 미요와 요요가 태어나 네 자매는 여섯 자매로 늘어났다. 형요의 아버지는 비록 도둑 두목이었지만 스스로 용사라고 생각하던 사람이라 괜스레 사람을 죽이거나 하지는 않았고, 유명해지자 함부로 약탈하지도 않았다. 나중에는 길을 지나는 장사꾼들이 으레 주기적으로 물건을 알아서 바쳐왔고, 그 진상품이 점차 늘어나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생활이 가능했기에 굳이 약탈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형요의 아버지는 다른 잔도둑들을 쳐 없애서 사람들이 안심하고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형요 자매와 미요, 요요는 무럭무럭 잘 자랐고 칼을 쓰는 법도 배웠다. 여자들이었지만 나중에 두목이 되어야 했기에 칼 솜씨를 익혀야 했던 것이다. 요요는 이야기하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데......” 요요가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요가 대신 이야기를 했다. 첫째 형요와 미요, 요요는 주신 말을 할 줄 알았지만 다른 세 형요는 주신 말을 몰랐다. 그리고 첫째 형요는 입을 다물고 말하려 하지 않았기에 미요가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네 해 전, 우리는 여느 때와 똑같이 밖에 나가 칼을 연습하고 왔지요. 그때 형요 언니들은 스무 살이 넘었기 때문에 우리를 가르쳐주었지요. 그런데 돌아와 보니...... 모두가...... 모두가 죽어 있었어요.” “어떻게 죽었지?” 치우비가 묻자 미요는 떨면서 대답했다. “아무데도 다친 데가 없었는데도, 모두 죽어 있었어요. 정말 무서운 것은 우리 부모님과 백 명에 가까운 마을사람들이 모두 한 번에 죽은 것 같았다는 거예요.” 치우비는 몹시 놀랐다. 세상에 어떻게 백 명의 사람을 한 번에 죽일 수 있단 말인가? “한 번에?” “그러니 무서웠지요. 어떤 사람들은 칼을 뽑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진 듯했고, 어떤 여자는 놀라서 얼굴을 가리며 비명을 지르다가 그대로 쓰러진 것 같았어요 어떤 사람은 막사를 나서다가 그대로 넘어져 죽었고, 도망치려는 듯하다가 죽은 사람도 있었어요. 모두가 한꺼번에 죽은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모습으로 죽을 수 있겠어요? 더구나 그 누구의 몸에도 아무 상처도 없었어요.” 치우비도 믿을 수 없어서 다시 물었다. “상처가 없었다고?” “없었어요. 그 누구도 다친 상처라곤 전혀 없었어요. 넘어지다가 생긴 것 같은 작은 상처는 몇 사람 있었지만요.” 치베가 치우비에게 말했다. “이 근처를 지나다가 몰살당한 사람들도 그렇게 죽었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형요가 한 짓은 아닌 것 같다.” 치우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요 자매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형요 자매가 사람들을 몰살시키는 재주가 있었다면 치우비도 당해낼 수 없었을 테니까. 치우비는 한참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독을 쓴 것이 아니었나? 독 연기나 뭐 그런 것은?” “독을 쓴 흔적은 전혀 없었어요. 독에 걸려 죽었다면 붓거나 색이 변하거나 피를 쏟거나 했을 거예요 그러나 아무도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구요. 정말......그날을 생각하면 무섭기 그지없어요......” 미요와 요요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듯, 온몸을 덜덜 떨었다. 치우비마저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치우비는 다시 물었다. “그것 외에 이상했던 점은 없었나?” 그러자 첫째 형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있었습니다.” “뭐였지?” “모든 사람들의 몸이 이상하게 흐늘흐늘해져 있었어요. 부러지거나 다친 것은 아닌데...... 뭐랄까, 좀 흐늘거렸죠 우리는 애써서 부모님을 먼저 묻고, 차례대로 사람들을 묻었는데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시체들이 썩기 시작했어요.” 하루만에 시체가 썩었다면 조금 빠르기는 하지만 그렇게 괴이한 일이라고까지 볼 수는 없었다. 다만 몸이 흐늘거렸다는 것만으로는 어떻게 생각해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치우비는 그 끔찍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괴물이라고 했지?” “발자국이 있었어요.” “발자국?” “아주 커다란 발자국이었어요. 그게 우리 마을 어귀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어요.” 그러면서 첫째 형요는 나무 조각 하나를 모닥불에서 빼서 땅에 그 발자국 모양을 비슷하게 그렸다 보니까 무슨 큰 도마뱀 발자국 같았다. 그것을 보자 치베는 안색을 굳히며 치우비를 바라보았다. “신수?” “그럴지도 모르겠군.” 첫째 형요는 둘의 이야기를 듣고 물었다. “당신들은 그 괴물을 아나요?” “아니, 우리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그런 괴물들을 신수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런 괴물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여기를 떠나지 않았지?” 부르르 떨던 요요가 얼굴색을 붉히며 외쳤다. “우린 부모님 원수를 갚아야 해요!” 미요도 외쳤다. “괴물을 죽일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네 해나 살았단 건가?” “그래요!” “살아가기 위해 남의 물건을 빼앗을 수밖에 없었고?” “맞아요.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실력이 늘었나 알아보기 위해 계속 사람들과 겨루었죠.” 요요의 말에 미요도 거들었다. “우리 부모님과 마을사람들이 죽은 것을 본 다음부터는 사람을 죽이는 게 얼마나 다른 사람을 슬프게 하는지 알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물건은 빼앗되, 사람을 해치지 않으려 한 거예요 우리 실력이 자기들보다 센 것을 알면, 사람들은 순순히 물건을 바치곤 했어요.” 미요는 여섯 자매 중에서 가장 온순하고 착한 인상이었는데 그녀의 얘기도 그녀의 모습과 흡사한 듯했다. 치우비는 미요가 결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치우비는 ‘허’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때 치베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런데 그 괴물이 여기를 여전히 돌아다닌다면, 왜 너희를 건드리지 않았을까?” “그건 우리도 몰라요.” 미요가 고개를 젓자 요요가 화를 내며 외쳤다. “우리가 무서운가 보죠!” 치베는 피식 웃었다. “백 명을 단숨에 죽이는 무서운 신수가 너희 여섯을 무서워할 리가 있느냐? 난 아무래도 너희 말을 믿을 수 없다.” 그러자 첫째 형요가 노기를 띠며 대들듯이 물었다. “그럼 뭐죠? 우리가 괴물을 부린단 말인가요? 아니면 우리가 거짓말을 한다는 건가요?” 요요도 외쳤다. “우리가 괴물을 부린다면, 당신들을 그냥 둘 리 없잖아요!” 그러나 치베는 끄떡도 하지 않고 되받았다. “하지만 괴물이 왜 너희는 놓아두고, 사람들 무리를 죽이는 것이지? 더구나 이 골짜기에서 죽은 사람들은 값있는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괴물이 일일이 물건을 챙겨갔단 말인가?” 치우비는 아무래도 형요 자매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도와주려는 마음에 물었다. “너희는 죽은 사람들에게서 물건을 가져간 적이 있니?” 요요가 벌컥 화를 냈다. “우리는 도둑이지만, 죽은 사람 몸을 뒤지는 짓은 하지 않아요! 그런 짓은 하늘을 모독하는 나쁜 짓이라구요!” “그렇다면 너희 말고 다른 도둑 떼가 이 골짜기에 많은가?” “없어요. 우리 아버지가 벌써 오래 전에 다 쫓아 버렸다구요.” “그러면 왜 우리를 다른 도둑 떼들에게서 지켜준다고 했지?” “도둑 떼는 이미 없으니, 우리가 밑질 것이 없어서 그런 것뿐이라구요!” 그때 치베가 갑자기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러면 뭐지? 그럼 죽은 사람들은 전부 너희가 물건을 다 빼앗고 놓아준 사람들이란 말이냐? 그러고 나면, 괴물이 나타나 그 사람들을 다 죽여준다는 말이로군! 더구나 너희는 네 해나 여기에 살면서, 괴물을 만나지도 못했다고? 이게 수상하지 않다면 뭐가 수상한 거지?” 치베의 추궁이 날카로웠기 때문에 요요나 미요 등도 일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치베가 다시 추궁했다. 치베는 몹시 화가 나 있는 듯했다. “여기서 죽은 사람은 우리 몽골족만 해도 수백 명이다! 너희가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어서 털어놓아라! 안 그러면 절대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 별안간 요요가 ‘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도 몰라요! 모른다구요!” 그러자 치우비가 치베를 말렸다. “치베, 그러지 말게. 보돈차르께서도 형요가 그리 못된 자는 아닐 것 같다고 하지 않으셨나?” 치베는 화가 치미는지 씩씩거렸다. “나도 그 말을 믿었네. 그러나 순순히 털어놓지 않고 괴물입네 뭐네 하며 거짓말을 하는 수작을 나는 도저히 볼 수가 없어! 이 계집들이 어떤 수작을 부려 그리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알아내야겠네! 이런 것들을 용사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부끄러워 죽을 지경일세!” 순간 첫째 형요가 벌떡 일어나 무섭게 눈을 흘기며 치베를 보면서 외쳤다. “우리는 이미 너희에게 잡혔다. 살아 도망갈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 우리가 왜 거짓말을 하지?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우릴 죽이려면 어서 죽이라구!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테니까!” 형요가 기세등등하게 나서자 치베는 약간 풀이 죽었으나 여전히 화를 풀지 않았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치우비는 난감해졌다. “자자, 나는 형요가 거짓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화내지 마.” “그렇다면 형요의 말을 믿는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아.” 치우비의 말에 치베는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를 쳤다. “형요의 말은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다! 거짓말이 분명한데, 어떻게 화를 내지 않느냔 말이다!” “하지만 거짓말이라고 만도 생각할 수 없잖냔 말야.” 치베는 한참 생각하더니 ‘에잇’ 하며 칼을 내던졌다. 치우비가 치베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저들을 어떻게 하지? 놓아줄까?” 그러자 치베는 형요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저것들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그대로 두면 여전히 도둑질을 할 것 아닌가?” “그러면 죽인다고? 도둑질을 했긴 해도 항상 겨루어 뺏은 것이지, 마구 빼앗거나 함부로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 잖아. 그러니 죽인다는 건 너무하잖아?” “저것들 말을 어떻게 믿지?” “그렇다고 안 믿을 수도 없지 않나? 형요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밝혀진다면 나라도 당장 목을 치겠지만, 형요의 말이 정말이면 어쩌지? 그러면 우리는 괜한 사람을 죽이는 게 되잖는가? 그러니 그냥 놔두고, 가자. 응?” 치베도 고민하는 듯했다. 사실 형요의 말이 사실이라면, 형요는 죽을죄를 지은 것은 아니며, 오히려 괴물을 잡으려 위험을 무릅쓰고 산에 숨어 살았으니 용기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형요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마침내 치베가 결정을 내렸다. “좋다. 그러면 내, 치우비 안다의 말을 듣겠다. 너희는 내일 당장 여기를 떠나고, 다시는 여기서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알았어?” 전혀 뜻밖에도 형요, 미요, 요요가 일제히 외쳤다. “그럴 수는 없어!” 치베는 놀라서 눈을 부라렸다 “뭐..... 뭐?” “도둑질은 하지 않겠지만, 이 산을 떠날 수는 없다. 우리는 그 괴물을 찾아서 반드시 우리 아버지의 칼로 죽여 원수를 갚아야겠다! 그러지 못할 바엔 죽는 게 낫다!” 형요가 외치자 요요도 외쳤다. “차라리 그럴 바엔 우리를 다 죽여라!” 치베는 형요가 되레 당당하게 나서자 화도 나고 기가 막혀서 얼굴이 붉게 변했지만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치우비는 직감으로 형요 자매를 믿었기 때문에 형요 자매를 놓아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둑질을 이제 안 한다고 하니, 한번 믿자구.” 치우비가 은근하게 말하자 치베가 버럭 소리쳤다. “그걸 어떻게 믿어? 비 안다, 저들이 다시 약속을 어기고 도둑질을 하면 또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우리가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걸 생각해봐!” 치우비도 그 말에는 뭐라 할말이 없었다. 좌우간 형요의 문제는 자기로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괴물이 정말 있나 산을 뒤져보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지만 그럴 여유도 없었단. 그때 형요가 외쳤다. “믿지 못하겠다면 죽여라!” “안 죽이겠다, 안 죽이겠어. 믿지도 못하지만, 안 믿겠다고 한 것도 아니다. 우리도 어떻게 해야 옳은지 모르겠구나.” 그러면서 치우비는 치베에게 말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으니 차라리 그냥 풀어주고 상관하지 말자. 저들이 죄를 지으면 나중에 다시 따져도 된다.” 그 말에 형요가 또다시 외쳤다. “우리도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다! 나 형요, 억울한 것은 도저히 못 참는다! 좋다! 너희가 우릴 못 믿겠다면, 내 스스로 너희가 믿도록 만들어주겠다!” 그때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치베가 형요에게 불쑥 다가가 말없이 묶었던 줄을 툭툭 끊어주고 칼을 땅에 내동댕이쳤다. 형요를 풀어준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치베가 단호한 목소리로 형요에게 말했다. “만약 이 골짜기에서 또 사람들이 죽으면, 그땐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를 찾아 발기발기 찢어버리겠다!” 어이없다는 듯이 형요가 대뜸 소리쳤다. “너 치베! 보기보다 정말 치사한 녀석이구나! 우리를 믿지 못하겠으면 죽여라! 제기랄! 괴물이 사람을 죽이는 것인데 사람이 죽으면 무조건 우리를 찾는다니! 우리는 괴물을 찾고 싶어도 못 찾는데, 괴물이 죽인 사람을 모두 우리 앞으로 달아놓는다고? 이런 억울할 데가 어디 있느냐!” 치우비가 듣고 보니 그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치베는 냉소를 띠며 되받았다. “너희만 사라지면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 말에 형요는 약이 바짝 오른 듯, 발까지 구르면서 화를 냈다. “치베! 이름 우리가 그런 것이 정말 아니란 말이다! 우린 어차피 졌을 때 죽었다고 각오했다! 하지만 사람을 수없이 죽였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죽기는 싫단 말이다!” 그래도 치베는 여전히 냉랭히 말했다. “그건 네 사정이다!” 형요는 너무도 화가 난 듯, 창백한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마구 발을 구르며 성질을 냈다. 치우비는 아무래도 일이 꼬일 것 같아서 치베에게 말했다. “치베, 늦었지만 오늘은 길을 더 가는 게 좋겠다. 소녀님, 힘들겠지만 오늘은 더 길을 갑시다.” 소녀는 그냥 묵묵히 앉아 있다가 치우비가 가자는 것 같자 두말하지 않고 조용히 일어섰다. 치우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뭐 이런 경우가 있나? 우리가 이겨서 잡아놓고도 무서워서 도망치는 셈이 되네? 하지만 어느 말이 옳고 그른지 모르니, 상관하지 말자.” 치우비와 소녀, 치베가 말을 타고 달려 멀어지는 동안, 형요는 계속 억울한 듯 욕을 하고, 소리도 지르고, 울기까지 했다. 그러나 치베는 계속 코웃음만 쳤고 치우비는 행여 치베와 형요가 싸움이라도 할까봐 서둘러 말을 달려서 골짜기를 빠져나갔다. 그날 밤 치우비와 치베는 골짜기를 한참 벗어날 때까지 멀리 길을 간 다음, 해가 뜰 무렵이 되어서야 간신히 외진 곳에 자리를 잡고 불을 피운 다음 잠을 청했다. 형요와 겨루느라 치우비와 치베 모두 지친 상태여서 이내 곯아떨어졌다. 치우비는 잠시 후 말발굽소리와 왠지 부산하게 움직이는 듯한 소리를 희미하게 듣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놀랍게도 형요의 여섯 자매가 모두 옆에 있는 것 아닌가? 치우비는 깜짝 놀랐다. 형요는 치우비가 일어나자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피곤하면 더 주무십시오. 우리는 음식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형요 자매 중 둘은 벌써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고, 둘은 말을 돌보고, 하나는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치우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당신들은 왜......” 그러자 형요가 웃으며 대답했다. “싫다고 해도 우리는 무조건 따라갈 겁니다. 하지만 조금도 치우비님에게 나쁜 마음이 없어요. 음식을 준비했으니......” 그때 치베가 눈을 번쩍 뜨며 형요를 보더니 손을 뻗어 무기를 잡으려 했다. 재빨리 형요가 치베의 무기를 탁 차버렸다. “...... 많이 드십시오. 하지만 치베 임마, 네 건 없어!” 그러더니 형요 자매 여섯은 모두 모여서 소녀를 돌보아주고 치우비에게 정성껏 음식을 권했다. 치베는 그것을 보고 놀라서 소리쳤다. “비 안다! 먹으면 안 된다!” “저 치사한 놈 말은 듣지 마십시오. 치우비님은 우리를 잡고도 죽이지 않고 구해주셨으니, 우리가 치우비님을 따르지 않으면 어찌하겠습니까?” 형요의 말에 치우비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 건가? 아무 일 없이 놓아주었으면 되었지, 또 뭘 바라는 거야?” “달리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치우비님을 호위하고 모시게 해주시기만 하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지?” 요요가 생글생글 웃으며 끼어들었다. “우리가 살길은 이것뿐이거든요.” “무슨 소리야?” “우리가 아무리 말해도 속 좁고 치사한 가짜 용사 치베는 안 믿을 거예요. 골짜기에 괴물이 나와 사람을 죽여도 우리가 한 짓이라고 할거라구요. 우린 너무 억울하게 되잖아요.” 미요가 조심스럽게 나와 수줍은 듯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우리가 내내 치우비님 옆에 있다면 괜찮아지죠. 만약 골짜기에서 누가 죽더라도, 우리가 죽인 게 아니라 괴물이 죽였다는 게 밝혀지잖아요.” 달뜬 목소리로 요요가 덧붙였다 “우리가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도 되구요. 그 다음에 우리는 다시 골짜기로 돌아가 괴물을 잡자고 의논했어요.” 치우비는 좀 얼떨떨해졌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그럴 법도 했다. 사실 형요 자매로서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다. 만약 자신들이 골짜기에 있는 동안 또 사람이 죽으면 치베와 치우비가 다시 찾아와 따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치우비의 힘이 엄청나고, 또 속임수마저 다 들통 났으니 다시 잡히는 것은 뻔했다. 그리 되면 변명도 못하고 억울하게 죽을 것이니 차라리 치우비를 졸졸 따라다니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면 그들이 결코 사람을 해칠 틈이 없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니 치우비나 치베도 딴소리를 못할 것 아니겠는가? 치우비는 말을 듣고는 한숨을 쉬었다. “허, 그것 참.” “속지 마라! 비 안다! 저들은 우리만 해치면 더 이상 겁낼 사람이 없다고 생각할 거다! 속아 넘어가면 안 된다!” 치베가 소리치자 형요도 지지 않고 되받아 소리쳤다. “이 쩨쩨한 치베야! 우리가 그럴 생각이었으면 벌써 그랬을 거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잖은가? 우리가 정말 그런 생각을 품었으면, 치우비님은 몰라도 네놈은 벌써 목이 떨어졌을 거다!” 요요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치사한 치베야! 목덜미를 만져보려무나!” 치베가 놀라 목덜미를 만져보니, 거기에서 검은 것이 묻어났다. 급히 근처의 샘가에 비춰보니, 치베의 목에 누가 숯으로 금을 길게 그어놓은 것이다. 치베는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형요 자매는 치베가 잠든 틈을 타서 치베를 놀리려고 살짝 목에 금을 그어놓았는데 그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만약 숯이 아니라 칼로 그었다면 치베는 죽는 줄도 모르고, 이미 목이 달아났을 터였다. 형요자매는 도둑 출신이라 움직임이 귀신같아서 치베나 치우비조차 그런 줄도 모르고 잠들어 있다가 형요 자매가 음식 준비를 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깨어난 것이다. 치베는 아무 말도 못했다. 형요는 그런 치베를 살짝 쳐다보다가 치우비에게 다시 말했다. “치우비님, 나는 조금도 숨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러는 것은 억울해서 그런 것이지만, 다른 이유도 있지요.” “뭐지 ?” 치우비는 형요 자매가 결코 자신에게 악의를 갖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웃으며 물었다. “첫째, 우리는 이제 위험합니다. 치우비님이 우리를 해치지 않는다 해도 저 쩨쩨한 치베는 분명 우리가 그동안 쓴 속임수를 여기저기 떠들고 다닐 겁니다. 우리도 그리 약한 것은 아니지만 그리 되면 더 이상 골짜기의 대장 노릇은 못하죠. 그러면 원수도 못 갚을 거 아닙니까? 더구나 우리가 속임수를 쓴 것을 알게 되면 우리에게 물건을 빼앗겼던 놈들이나 죽은 사람의 친구들이...... 아, 물론 우리가 죽인 건 아니지만 그놈들은 모를 거 아닙니까? 그놈들이 우르르 몰려와 우리를 찾아오면 우리는 목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차라리 당분간 치우비님을 모시고 가는 게 우리로서도 좋단 말이죠.” 그 얘기에 치우비는 사람 좋게 웃었다. “그 말은 그럴듯한데? 하지만 내 머리는 소 삼천 마리에 구리솥 다섯 개, 구리칼 백 개짜리이니 골치 아픈 일이 더 많이 생기지 않을까?” 형요는 여자이면서도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두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의 억울함을 풀려면 치우비님이 당하면 안 되죠 우린 반드시 치우비님과 저 좀스러운 치베 놈에게 우리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런데 두 분...... 아, 그러니까 치우비님과 저 아름다운 아가씨 두 분입니다. 그 두 분하고 한 마리의 벌레는 너무 세상을 몰라요. 저 쩨쩨한 치베는 활은 좀 쏠 줄 알지만 형편없는 놈이고, 치우비님은 대용사라 떳떳하게 싸운다면 세상 누구도 못 당하겠지만 숨어서 다가오는 도둑들은 막아내지 못할 겁니다. 우리가 오는 것도 몰랐잖습니까? 누가 독을 풀거나 속임수를 쓰거나 밤에 숨어들어서 목을 따 면 어쩔 건가요? 그러니 우리 모두 힘을 합해서 안전한 곳으로 가는 겁니다. 그게 모두에게 좋다구요. 안 그래요?” 듣고 보니 그럴듯해 치우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사울아비로서 힘을 기르고 남과 싸우는 데에는 익숙했지만, 밤에 숨어든다거나 독을 푼다거나 등의 술수를 부리는 데에는 형요 자매만큼 자신이 없었다. 지난밤에 형요 자매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도 전혀 몰랐지 않은가? 형요가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치우비님을 보호하기로 한 것입니다. 아, 저기 아가씨도 보호해야죠. 저 쩨쩨한 벌레에겐 관심도 없어요. 치우비님은 우리를 이기셨으니 그냥 우리를 종처럼 부리셔도 됩니다. 다만 우리를 떼어놓지는 마세요. 안 그러면 골짜기에서 누가 죽었을 때, 우리 탓을 할 거 아닙니까?” 형요는 자신들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치베가 퍽 미웠는지, 말끝마다 꼬아서 시비를 걸고 있었다. 치베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지만, 뭐라고 따지지는 않았다. 치우비는 형요 자매가 퍽 재미있다고 생각하여, 일부러 치베를 약 올리려고 웃으며 물었다. “그러면 치베는 보호해주지 않을 건가?” “쩨쩨하고 좀스러운 치베는 자기가 알아서 하라고 하죠, 뭐.” 드디어 치베가 버럭 화를 냈다. “저희 귀신같은 계집들의 보호는 필요 없다!” 껄껄 웃으며 치우비가 치베를 달랬다. “치베. 형요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굳이 화를 낼 필요는 없지 않나? 응?” 그러나 치베는 화가 단단히 났는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비 안다가 그 귀신들과 사귀고 싶다면 굳이 말리진 않겠다. 하지만 나는 저런 귀신들은 싫다!” 치우비는 좀 난감해졌다. 그러나 가만 주변을 보니 요요와 미요가 곰살궂게 웃으며 소녀를 돌보아주는데, 소녀도 여자들이 자신을 돌보아주자 퍽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 소녀님을 내가 무조건 짐짝처럼 들고 가는 것도 안 된 일이다. 나나 치베는 무뚝뚝한 남자라 길을 가면서도 조금도 소녀님을 위해줄 생각은 못했구나. 우리가 그냥 땅에 굴러서 자니 소녀님도 그냥 땅에 굴리고, 우리가 아무것이나 막 뜯어먹으니 소녀님에게도 아무것이나 던져주고 했구나. 아이구, 비록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분은 아픈 사람이고 연약한 여자인데, 또 형수님이 될지도 모르는데 아무래도 잘못한 거 같다. 고생이 무척 많았겠구나. 만약 형요 자매가 함께 가준다면 같은 여자들이니 소녀님을 잘 모실 수 있겠다.’ 더구나 치우비가 보기에 형요 역시 두말을 할 여자 같지는 않았고, 또 도둑으로 잔뼈가 굵은 여자들이라 몸이 날래고 재주가 있으니 쫓기는 입장인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쫓아내고 싶어도 죽어도 따라간다고까지 하지 않던가? 생각을 거두고 치우비가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형요님 자매는 말을 잘 탈 줄 아시나요?” 치우비는 이제 더 이상 형요에게 반말을 하지 않고 높여 말했다. 이것은 형요 자매를 손님이나 벗으로 대 한다는 뜻이었다. 형요는 눈치가 빨라 그 말을 듣고는 곧 크게 웃었다. 형요는 본래 좀 모질고 독한 성격이라 이렇게 활짝 웃는 일이 드물었다. 형요가 활짝 웃자 치우비는 생각했다. ‘도깨비족인 과보족이라 기이하게 생겼어도 저렇게 웃으니 참 보기 좋고 예쁘구나.’ 형요는 크게 웃고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저에게 말을 높이실 것 없습니다. 저는 치우비님이 잡았으니 종이라 할 수 있고 하물며 도깨비 계집인데 어찌 말을 높이십니까?” 치우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이미 도깨비들과 만난 적이 있소. 하지만 나는 그들을 종으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타타르족의 도깨비 왕이 그들은 도깨비가 아니라 사람이라 말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생김새는 다르지만 말도 통하고 사는 게 똑같은 사람인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업신여기겠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나를 이기지 못했지만 내가 당신을 잡은 것도 아닌데 어찌 종이라 하겠습니까? 정 그렇다면 우리 친구로 지냅시다. 형요님도 말을 높이지 마십시오. 그러면 나도 편하게 말하겠습니다.” 치우비가 선량한 미소를 띠며 말하자 형요는 갑자기 ‘흑’하고 울음을 삼켰다. 형요는 한 줄기 눈물이 흐르자 얼른 닦아내고는 또 방긋 웃으며 말했다. “치우비님, 당신 같은 분을 예전에 만났다면......” “계속 말 높일 겁니까?” 치우비가 부드럽게 나무라자 형요는 다시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씩 웃고는 치우비에게 말했다. “알았어! 치우비! 우리는 과보족 중에 코사크 사람들에게 말타는 법을 배웠지. 코사크족의 말타는 재주는 몽골족에 비해 절대 뒤떨어지지 않아!” 그러고 보니 형요 자매가 끌고 온 말들도 모두 아주 좋은 말들이라 구름이나 높은 뫼에 그리 뒤질 것 같지 않았다. 마침내 치우비는 형요 자매를 불러서 같이 가자고 말했고, 형요 자매는 모두 좋아라 했다. 다만 치베만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혼자 꿍얼거리며, 한동안 치우비에게 조차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하지만 치우비는, 치베는 마음이 넓은 용사라서 곧 풀어지리라 생각하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공손발과의 재회 형요 자매와 함께 길을 가자 모든 것이 편해졌다. 형요 자매는 모두 말을 잘 타서 길을 가는 것이 조금도 늦어지지 않았고, 게다가 형요는 길을 잘 알아 보통 사람들이 잘 모르는 지름길로 일행을 안내하곤 했다. 미요는 음식을 잘 만들고 부지런해서 온갖 뒤치다꺼리를 잘 해냈다. 더구나 온순하고 선량해서 그런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조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요요는 좀 말괄량이에다 까부는 성격이었지만 하는 짓이 귀엽고 익살맞았다. 더구나 요요는 지나 말을 할 줄 알아서 소녀와 항상 떠들며 소녀를 지루하지 않게 해주었다. 그리고 소녀는 여자들과 함께 말을 타게 되자 비로소 긴장을 풀고 몸을 편하게 가질 수 있어 먼길을 가는 데에 불편함이 없었다. 사실 아무리 치우비가 치우천의 동생이라고 해도 같은 말에 안기다시피 타고 가는 일은 소녀로서 퍽 부끄러워 몸을 굳히게 마련이었고, 치우비도 좀 껄끄러워 말을 달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여자들인 형요 자매가 번갈아 소녀를 말에 태우니 안고 가든 업고 가든 소녀로서도 꺼릴 것이 없어 한결 편했던 것이다. 형요 네 자매는 정말 한 사람인 것처럼 모두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었지만 그들은 항상 말을 돌보고, 도둑이나 짐승이 나타나지 않나 빈틈없이 주위를 경계하고 땔나무를 하고 물을 길어오는 등 모든 일을 척척 해냈다. 치베는 이틀 정도 지나자 마음이 풀렸는지 치우비와 다시 말을 주고받았지만 계속 형요 자매를 경계하라고 일렀다. 치우비는 마음이 좋아서 그냥 그러겠다고 말만 했을 뿐 실제로는 형요 자매를 전적으로 믿었다. 간혹 첫째 형요는 치우비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사실 나머지 세 형요는 주신 말을 몰라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힘들었다. 길 가는 도중에 두어 번 도둑들을 만났는데 습격을 받을 것도 없이 형요 자매가 단박에 도둑들이 숨은 곳을 알아보고 도둑들을 기습하여 치우비나 치베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형요 자매는 도둑들 틈에서 자라서 그런지 자못 간사하고 잔인한 면이 있어서 자신들의 실력이 훨씬 위인데도 봐주지 않고 도둑들을 마구 죽이기도 했다. 치우비가 그것을 보고 형요를 꾸짖자 형요는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치베는 아직 감정이 풀리지 않았는지 계속 형요와 아웅다웅하며 하마터면 싸움으로 번질 뻔한 것이 벌써 여러 번이었다. 그럴 때마다 치우비가 중간에 끼어들어 말려 간신히 둘은 다투기를 멈추었다. 하지만 이렇게 여럿이 같이 길을 가니 지루하지 않았고, 형요 자매가 치우비 등을 극진하게 모셔서 그들은 편하게 길을 갈 수가 있었다. 나중에는 치우비도 요요, 미요, 첫째 형요와 퍽 친해졌고 소녀는 요요와 아주 친해졌다. 소녀는 요요에게 치우비와 치우천 등에 대한 이야기를 다 해주었고 요요가 다시 자매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어서 형요자매는 치우 형제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다. 형요는 치우천이 비록 힘은 세지 않아도 아주 잘생기고 그릇이 큰 영웅이란 것을 알고 한 번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고 했고, 치우 형제가 사귄 다른 벗들 이야기를 듣고는 대단한 영웅들이니 전부 사귀어봤으면 좋겠다고 꿈꾸듯 말하기도 했다. 다만 형요는 항상 치베만은 쩨쩨하고 좀스럽다고 욕을 했는데, 치베도 결국에는 지쳤는지 형요가 뭐라고 하든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못 들은 척하게 되었다. 치우비 일행은 원래 예정인 열흘보다 이틀이나 빨리 황하를 건너서 화산 어귀에 도달했다. 말들이 좋았기 때문에 이렇게 앞당겨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화산 어귀에 도달하여 지나족 부락을 찾을 즈음, 지나 말을 잘하는 요요가 길을 물었다. 그러고 나서 하루를 꼬박 더 헤매서야 일행은 헌원이 있는 화산족 부족장의 마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지나족 영토 중에서도 서쪽으로 많이 치우친 곳이라 주신과는 왜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다. 지금의 장안성 약간 동쪽이고 감숙, 청해, 서량 등과 오히려 가까운 지역이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타르 말이나 몽골, 서역의 말은 할 줄 알아도 주신 말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여러 정황을 겪어본 치우비가 생각했다. ‘형요자매에게 감사해야겠구나. 덕분에 이틀을 빨리 와서 다행이다. 나나 치베는 지나 말을 못하니 여기서 헌원님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것도 힘들었을 거다. 주신 말을 하는 사람이 몇 안 되니 그런 사람을 찾는 데만도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다. 그렇게 늦어졌다가는 소녀님을 구하지 못했을지도 몰라.’ 지나족의 부락들은 생각보다 대단히 크고 사람이 많았다. 원래 화산은 황하의 아래에 있고 양자강의 약간 위쪽에 있는데, 그 일대는 모두가 여름이면 물이 넘치기 때문에 대단히 비옥한 땅이며 농사가 잘되었다. 그래서 헌원의 화산 부족은 상당히 인구가 많았고 그 많은 인구를 감당할 만큼 땅이 기름지고 넓어 대부족으로 쉽게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신시와는 비교할 수 없었으나 주신도 신시말고는 그리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 드문데, 지나족의 부락들에는 사람들이 끝도 없이 많았다. ‘정말 지나족은 사람 수가 끝도 없이 많구나. 전에 비렴님은 주신 사울아비가 스무 천(이만)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셨지. 그런데 지나족은 너무나 수가 많아 감히 싸우고 싶지 않다 하셨는데 정말이구나. 이 화산족만 해도 사람 수가 수백 천(수십 만)은 넘겠다. 이런 대부족이 수도 없이 많다니 정말 지나족은 가장 큰 부족이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치우비 일행은 헌원이 살고 있다는 부족장의 성으로 향했다. 지나족의 땅에 들어서자 치우비는 한 사람 생각이 떠올라 밤에도 잠을 잘 이룰 수 없었다. 물론 치우비의 머릿속에 꽉 들어찬 사람은 바로 공손발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치우비는 부끄러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헌원이 살고 있는 성은 흙을 다져서 높이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나무 울타리를 에워싼 뒤 지은 집이었다. 울창한 나무들을 심고 지붕도 모두 짚이 아닌 잘 다듬은 나무로 덮여 있을 뿐 아니라 아주 크고 위엄이 있어 보였다. 문을 지키는 전사에게 치우비가 왔다고 전하자 그 전사는 황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부하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헌원을 존경하면서도 지극히 두려워하는 것 같아 보였다. 치우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비록 집이 좋기는 하나, 이런 좋은 집에서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 이런 집을 지으려면 아주 많은 사람이 고생했을 텐데. 차라리 넓은 막사를 치고 많은 벗들과 어울려 사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그리고 부하들에게도 너무 무섭게 대하는 것 같다. 중요한 일은 엄하게 해야겠지만, 평소 사는 집을 지키는 사람들에게까지 그럴 필요가 있는가? 헌원님은 아주 마음이 넓고 좋은 분이지만 사람을 부하로 생각하지 말고 벗으로 사귀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다.’ 잠시 기다리자 안에서 누군가가 뛰어나왔다 바로 이주와 끽구였다. 이주는 미소를 지으며 어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끽구는 치우비를 보자마자 껄껄거리며 흉악한 얼굴에 가득 웃음을 머금고 다가오더니 치우비의 어깨를 쳤다. “자네가 왔군! 나랑 다시 한 번 겨루려고 온 거냐? 하하핫! 좌우간 반갑구나! 나래! 아니, 치우비!” 끽구는 비록 태산 회의 때의 적수였지만 그 역시 호탕한 호걸이라 매우 반갑게 치우비를 맞이했고, 치우비토 역시 반가워했다. 그런데 헌원의 부하들은 형요 자매의 생김새가 괴상한 것을 보고 안으로 들이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이주가 호통을 쳤다. “치우비님이 어떤 분인데, 너희가 그분과 같이 온 사람을 막는다는 거냐? 당장 물러서라.” 그러자 전사들은 굽실굽실하면서 길을 비켜주었다. 형요 자매는 막 기분이 나빠지려다가 전사들이 굽실거리자 의기양양해서 안으로 들어섰다. 치우비는 좀 기분이 묘했으나 부탁을 하러 온 입장이므로 뭐라 말은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성 안에는 건물도 많았고 아주 넓어서 연못도 있고 보기 좋은 나무들도 많았으며 사슴까지 두어 마리 놀고 있었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화려한 색의 물을 들인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비단은 지나족의 특산물로 아주 귀한 것이었는데, 일하는 종들까지 비단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형요 자매와 치베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시 한참을 걷고 몇 개의 문을 지난 다음에야 치우비는 비로소 헌원을 만날 수 있었다. 이주가 헌원이 있는 방문 앞에서 치우비가 왔다는 말을 길게 소리치자 문 안에서는 한참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와중에 치우비는 생각했다. ‘부족장이니 위엄을 갖추기는 해야 하지만 이건 너무 복잡한 것 같구나. 하지만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안으로 들어서자 비로소 헌원의 모습이 보였다. 헌원은 방 한쪽의 아주 높은 단 위에 화려한 옷을 입고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방안은 그야말로 으리으리해서 눈이 다 부실 지경이었다. 화려한 그림이 사방 벽에 그려져 있고 기둥까지 모두화려하게 칠해져 있었으며 정교한 장식품과 빛나는 구리 무기들, 화려한 가죽들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화려한 옷을 입은 많은 부하들이 헌원의 양옆으로 주욱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치우비는 물론이고 형요 자매나 치베마저도 입을 딱 벌렸다. 그 화려한 모습에 치우비는 또 생각했다. ‘대주신의 한웅님도 이렇게 꾸미고 계시지는 않는다. 사와라 한웅님의 막사는 오히려 아무 장식도 없다. 헌원이 대부족장이지만 좀 지나치구나. 나라면 이렇게 지내지는 않겠다. 이런 값진 물건을 쌓아둬서 뭐 하겠는가? 차라리 그냥 놔둘 것이면 벗들에게 나눠주지.’ “어서 오게나. 반갑군, 그래. 그런데 자네 형은 어디 있는가?” 헌원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인자한 미소를 띠며 치우비를 맞았다. 여전히 헌원은 차분하고 조용하면서도 위엄이 있어, 특히 형요 자매는 저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치우비는 웃지도 않고 그렇다고 찡그리지도 않고 덤덤히 대답했다. “형님과는 헤어져 있습니다.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까?” “그랬는가? 좌우간 어서 오게나. 이렇게 다시 보니 정말 반가우이. 이쪽은 소녀님이 아니신지?” “그렇습니다.” 소녀가 조용히 대답했다 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저쪽은 몽골족의 치베였지? 태산회의 때 자네의 활약은 잘 보았다네.” 치베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살짝 굽혀 답했다. 헌원이 웃으며 이번에는 형요를 보고 물었다. “이분들은 뉘신가? 나는 처음 뵙는군.” 치우비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 사람들은 형요 자매라고 합니다. 이번 길을 떠나다가 새로 사귄 벗들입니다. 넷이 모두 쌍둥이로 첫째 형요, 둘째 형요, 셋째 형요, 넷째 형요라고 부르고 둘은 미요와 요요라고 합니다.” 여섯 자매는 일제히 헌원에게 인사를 했다. 형요 자매는 이제 재주를 피울 일이 없었으므로 깃털 옷과 가면을 벗어버리고 보통 옷을 입고 있었는데, 네 자매는 모두 똑같은 옷이지만 소맷자락의 색깔만 달라 그것으로 서로를 구분했다. 헌원도 특이하게 생긴 네 명의 쌍둥이가 신기한 듯 미소를 지으며 한참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분들은 과보족 출신인가?” 치우비는 헌원의 견문이 아주 넓어 단번에 형요자매의 내력을 알아보는 것을 보고 속으로 감탄하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때 갑자기 우당탕 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하도 발걸음 소리가 커서 모두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문이 천천히 열리고 아가씨 한 명이 거들먹거리며 뒷짐을 쥔 채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바로 공손발이었다. 볼은 살짝 붉어져 있었으나 얼굴은 오만하고 건방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공손발은 치우비를 본척만척하며 말을 걸었다. “어라? 이게 누구더라? 우리 어디서 봤었나요?” 치우비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치우비는 타고난 장사인데다 아흡구비까지 먹어서 모든 맥이 다 트여 있었기 때문에 귀도 아주 밝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그냥 우당탕거리는 발소리만 들을 수 있었으나 치우비는 문 밖에서 어떤 사람이 황급하게 달려오다가 문 앞에서 숨을 가다듬고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힌 후 태연한 척 들어왔다는 것까지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공손발이었다. 그러니 치우비는 속으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말썽꾸러기는 내가 왔다고 하니까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와 놓고 막상 보게 되니까 또 나를 놀리려고 일부러 모른 척하는구나. 나도 한 번 놀려줘야겠다.’ 치우비는 속으로 웃으며 공손발의 물음에 느긋하게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가씨는 누구십니까? 저를 본 적이 있습니까?” 치우비가 태연하게 받아치자 공손발이 갑자기 ‘칫’ 하고 화를 내더니 울 듯한 표정이 되어 치우비의 뺨을 철썩 때렸다. 순간 헌원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아! 무슨 짓이냐?” 헌원이 노한 소리를 내자 헌원의 부하들은 모두 찔끔하며 목을 움츠렸다. 그러나 치우비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그래도 헌원은 자못 엄하게 외쳤다. “저분은 귀한 손님인데 너는 어찌 다짜고짜......이런 망신이 어디 있는가!” 오히려 치우비가 당황스러웠다. “아닙니다. 장난을 한 번 한 것 가지고 그러지 마십시오. 정말 괜찮습니다!” 그러자 발이 코맹맹이 소리로 샐쭉거렸다. “아버지! 이 멍청이가 나를 놀렸으니......”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헌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 말 버르장머리 좀 보게! 멍청이라고? 너야말로 멍청이구나!” 분위기가 영 이상해지자 치우비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발 아가씨에게 제가 직접 말한 적이 있답니다. 언제든 저를 멍청이라 불러도 좋다고요 제가 직접 한 말이니 헌원님은 따님을 탓하지 마십시오!” 헌원의 부하들은 그 말을 듣고 웅성거리며 의아해했다. 치우비는 태산회의 이래로 지나족 뿐만 아니라 세상에 이름이 널리 퍼진 대용사이다. 그런 대용사에게 감히 멍청이라는 소리를 한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런데 치우비는 도리어 발에게 자기를 항상 멍청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니?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 차마 웃지는 못했지만 기이하고도 망신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치우비는 그런 명성 같은 것에 연연해한 적도 없고, 남이 뭐라 하건 개의치 않는 성격이라 그런 말을 하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발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헌원은 그런 모습을 보다가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나가 있거라.” 그러자 헌원의 부하들이 일제히 밖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때 그 틈을 비집고 두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상망과 비휴였다. 상망은 치우비를 보고 낄낄 웃으며 물었다. “자네가 왔군, 그래! 잘 지냈는가?” “상망, 나는 자네를 믿고 내 딸자식 버릇을 잘 가르쳐 달라고 했는데, 저 녀석은 갈수록 못난 짓만 하니 어쩌면 좋겠는가?” 대뜸 헌원이 탄식하듯 말하자 상망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서 눈만 크게 떴다. “네? 왜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치우비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아무 일도 아니었답니다.” 그러나 헌원은 다시 깊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상망, 자네는 저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을 잡아다가 가둬버리게.” “예? 아가씨를요? 아가씨가 또 말썽을 피웠습니까요?” 그러자 발이 성질을 부리며 재빨리 쏘아붙였다. “빨리 가둬요! 내가 무서워할 줄 아나요?” 헌원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작은 동작이었으나 대단히 위엄이 있어 보였다. 그때 요요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빨리 가두지 않으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형요, 요요 등은 치우비의 사람됨이 착하고 선하여 퍽 좋은 사람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발에게 얻어맞고 욕을 먹는 것을 보고는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형요는 자리가 자리인지라 참고 넘어가려 했는데 요요는 참을 수 없어서 결국 화를 내고야 말았다. 헌원의 안색이 변했다. “빨리 하지 않으면 자네를 가두겠네.” 그러자 치우비가 웃으며 막아섰다. “다 제 잘못입니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발 아가씨를 놀려서 발 아가씨가 화를 낸 것입니다. 정 가두시겠다면 저도 함께 가둬주십시오.” 그러고는 되레 발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봐, 발. 미안해. 하도 반가워서 내가 장난을 좀 했으니 너무 탓하지 마.” 발은 치우비가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자 속으로는 고맙기 이를 데 없었지만 성질이 성질인지라 오만하게 말했다. “흥! 그렇게까지 나온다면 한 번 봐줄게. 하지만 또다시 날 놀리기만 해봐라. 그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헌원이 버럭 호통을 쳤다. “발, 이 녀석!” 헌원이 호통을 치는 일은 몇 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일이었다. 발은 자신도 모르게 겁이 나서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치우비는 여전히 히죽 웃으며 헌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치우비를 보며 헌원은 결국 ‘허허’ 웃고 말았다. “자네의 뜻이 정 그렇다니 내 어쩌겠는가? 자네에게 그저 고마울 따름이네.” 그러면서 헌원이 발에게 말했다 “이 녀석! 너는 오늘 목숨을 건진 줄 알아라!” 그러나 발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치우비에게 물었다. “너 왜 온 거야?” “전에 나한테 뭘 보여준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 말에 발은 얼굴을 붉혔다. “정말이야?” 치우비가 웃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꼭 그것만은 아니지만......” “뭐야! 이 멍......” 말하려다가 발은 헌원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음을 깨닫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물러가라.” 헌원이 근엄하게 말하자 발도 더 이상 떼를 쓸 수 없어서 물러섰다. 상망과 비휴는 급히 발의 뒤를 따르려고 했다. 그때 치우비가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상망님! 잠시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뭔데 그러나?” 상망은 곧 헌원의 눈치를 보았다. 헌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상망은 그 자리에 남고 비휴 혼자 발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비휴가 나가자 헌원은 한숨을 쉬며 치우비에게 말했다. “저 버르장머리 없는 것 때문에 내가 죽을 지경일세. 자네 얼굴을 볼 낯이 없군, 그래 내 자식은 열 명이 넘지만 다들 나이가 들어 각자 부족들을 맡아 다스리는데, 저 녀석은 늦게 낳아서 막내인데다 아직 어리기에 항상 데리고 다니며 역성을 들어주었더니 버릇이 너무도 없어졌다네.” 치우비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다만 저는 부탁을 한 가지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무슨 부탁인지 말만 하게나. 내, 되는 일이라면 다 들어주겠네.” 치우비는 소녀가 유망이 쓴 독에 중독되어 이제 얼마 살날이 남지 않았다는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헌원과 놀라면서 얼른 상망에게 독을 풀 수 있나 알아보라 일렀다. 상망은 소녀의 낯빛을 살피고 혀를 내밀어보라고 하는 등 한참을 살펴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쉽지는 않겠습니다만......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치우비는 얼굴이 환해져서 소녀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상망은 딴소리를 했다. “그런데 유망님이 쓰신 독을 제가 푼다는 것은......허 참, 치우비 자네에게는 미안한 일이네만......” 상망의 말을 듣는 순간 치우비는 아차 싶었다. ‘그렇다. 사실 상망이나 헌원 모두 지나족이 아닌가? 그리고 유망은 이제는 지나족 우두머리가 아니라 해도 얼마 전까지 헌원이 섬기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유망이 쓴 독을 마구 풀어주면 유망이 화를 낼지 모른다. 어쨌거나 그들은 같은 지나족이 아닌가? 그러니 주신 사람인 내 부탁을 들어주기가 난감할지도 모르는데......이거 정말 난처하구나.’ 그러자 헌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유망님이 힘없는 여자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졌으면, 설령 유망님이 아니라 누가 했더라도 올바르게 되잡아야 하는 걸세. 유망님이 나중에 아시고 뭐라 해도 내가 다 책임을 지겠으니 자네는 소녀님의 독을 풀어드리게.” 그 말을 듣자 치우비는 감탄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치우비만 아니라 치베나 형요자매까지도, 헌원이 실로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재빨리 요요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헌원님은 정말 훌륭하시군요. 아까 제가 건방지게 떠들었던 것,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제법 의젓한 요요를 쳐다보며 헌원이 조용히 웃었다. “내 딸이 못나서 그런 것인데 왜 나에게 용서를 구하나? 나는 조금도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네.” 그러고는 헌원이 덧붙였다. “요요님은 아직 어린 여자의 몸인데도, 그렇듯 몸가짐이 올바르니 나로서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네.” 그 말에 요요는 감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고 형요 자매도 저절로 미소를 지었다. 헌원이 위엄을 세우고 사치를 하기는 하나, 실로 작은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번에는 헌원이 치우비에게 물었다. “이거 쑥스러운 이야기지만, 하나 묻겠네. 자네는 대영웅인데 왜 그런 조그만 계집에게 놀림을 당하고도 참는 것인가? 내 딸이 한 짓이니 내가 말하는 것조차 부끄럽지만,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일세.” 치우비가 짐짓 태연하게 대답했다. “거는 참은 적이 없습니다. 놀림을 당한 적도 없구요.” 뜻밖의 말에 헌원은 의아한 듯이 다시 물었다. “내 딸이 자네만 보면 멍청이, 멍청이하고 사람들 앞에서 손을 휘둘러 때리기까지 하는데, 대체 자네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그러자 치우비가 껄껄 웃었다. “발 아가씨는 저보고 멍청이라 부르지만, 그건 제가 발 아가씨만 보면 정말 멍청이 같은 짓만 하게 되어 그런 것이니 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를 때렸다 하시지만, 발 아가씨는 저를 해치려고 때린 것도 아니고 망신을 주려고 한 것도 아니란 것을 잘 압니다. 하나도 나쁜 마음 없이 장난으로 때린 것인데, 그게 뭐 어떻습니까? 그런 아가씨가 장난을 친 것 가지고 체면이 어떠니, 따질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정말 아무렇지 않은가? 누가 뭐라 해도? 다른 사람이 놀리면?” “누가 나쁜 마음이나 해코지하는 마음으로 저를 욕하거나 때린다면 저는 결코 그 사람을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없이 장난한 것을 가지고 제가 얼굴을 굳힌다면 오히려 그거야말로 체면 없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놀리라면 놀리라죠. 놀릴 것도 아닌 일로 놀리는 거야말로 그 사람 자신의 체면을 깎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치우비가 전혀 거리낌 없이 말하고 호탕하게 웃자 헌원도 웃었다. “자네는 정말 시원시원하군. 정말 대단하네.” 치베와 형요도 치우비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치우비에게 약간 불만을 느꼈었다. 요요는 여자에게 홀려서 꼼짝도 못하는 바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치우비의 말을 듣고 보니 이해가 갔다. 치우비는 고개를 숙인 것도 아니고 성격이 호탕해서 작은 일에 연연해하지 않았을 뿐, 결코 그런 못난이는 아니라고 생각이 바뀐 것이다. “자자, 이제 소녀님도 걱정할 것 없으니, 나와 술이라도 하면서 이야기나 나눔세.” 치우비는 술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입에 군침이 고였다. “그거 좋죠.” 곧 잔치가 벌어졌고 치우비와 치베, 형요 자매는 모두 헌원과 그 부하들과 마주 앉아 잔을 기울였다. 형요 자매는 여자들이고 나이도 별로 많지 않은데도, 술을 아주 잘 마셔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형요는 자신들이 추운 땅에서 와서 술을 잘 마시는 것이라 말했다. 아주 어릴 때 와서 잘은 모르지만, 자신들이 태어난 땅은 여름에도 한달 이상 해가 지지 않고, 사방은 얼음으로 둘러싸이고 춥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장이라는 것이다. 일단 말문이 터지자 형요 자매는 술술 말도 잘했고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남자들에게 전혀 꿀리지 않았다. 치베도 몽골족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서 분위기가 흥겹게 무르익었다. 시간이 제법 흐르자, 헌원이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지 피곤하다며 물러갔고, 치베나 다른 부하들도 물러나서 치우비와 끽구, 형요 자매만이 떠들썩하게 웃으며 밤새 술을 퍼마시다가 정신없이 잠이 들었다. 그 다음날 치우비는 헌원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과 형 치우천은 소녀 때문에 한웅님의 오해를 사서 사막에 버려지게 되었으며, 치우가람 형제가 악독한 수법으로 그들 형제를 없애려고 한다는 이야기까지 숨김없이 들려주었다. 그리고 유망에게도 죄를 지은 셈이니, 너 무 자신들을 감싸줄 필요가 없으니 떠나라면 언제든지 떠나겠다고 말했다. 헌원이 넉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들은 내 좋은 손님인데, 내 머리에 벼락이 떨어지더라도 나는 손님들을 그리 대할 수 없다내. 염려 말고 얼마든지 있게나.” “하지만......” 치우비는 유망이 아무래도 헌원의 윗사람 노릇을 했으니 껄끄럽지 않을까 걱정했다. “물론 나는 유망님을 잊지 않는다네. 그러나 유망님은 이미 자신을 따르는 지나족들을 이끌고 전쟁을 시작했다네.” “네?” 치우비가 깜짝 놀라자 헌원이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 말게. 주신과 싸우는 것은 아니네. 유망님은 지금 태산 동쪽의 미아우족들과 싸우고 있다네. 사실 걱정스러운 일이지. 금천이 내 편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유망님을 따르는 부족이 아직은 많아. 특히 동쪽 지나족들은 거의가 유망님을 따른다네.” “저는 미아우족과도 친한 사람이 많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큰 전쟁이 벌어진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주신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주신과 지나족의 싸움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인데요.” “나도 그게 걱정일세. 주신으로서도 당장 시비를 걸 수는 없지. 주신은 원래 다른 부족들끼리의 싸움은 가급적 참견하지 않았기 때문일세. 그 때문에 유망님도 북쪽의 미아우족이 아니라 동쪽의 미아우족을 치고 있는 걸세. 내 듣기로는 이미 형천이 이끄는 대인족 전사들이 태산 주변의 미아우족을 모조리 무릎 꿇게 했다고 하네. 그리고 축융은 남쪽의 검은 부족들과 싸우며 그들의 힘을 끌어내려 한다고 들었다네.” “남쪽 검은 부족이오?” “그래. 장강의 남쪽 숲이 우거진 밀림에는 키가 작고 검은 살갗의 부족들이 산다네. 그들을 쳐서 항복을 받아내 힘을 키우려는 것 같다네. 그리고 유망님은 창힐을 시켜서 태산 아래에 새로 신시와 흡사한 도읍을 꾸민다고 들었네.” “창힐은 누구입니까?” “창힐도 유망을 따르는 아주 큰 부족장일세. 그러나 이 사람은 싸움을 싫어하는, 아주 조용하고 생각이 릴은 사람일세. 아마 싸움에 말려들고 싶지 않을 테지만, 이 사람의 부족은 유망님의 부족들 한가운데 있으니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일세.” 그러면서 헌원은 치우비에게 정세를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당시 지나족은 중국의 중부,즉 황하 유역에서부터 양자강 북쪽을 따라가는 긴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지금의 만리장성 부근은 그때 당시에는 지나족이 없었으며, 만리장성보다 아래쪽이 지나족과 다른 부족들과의 접경이었다. 지나족의 동쪽은 태산을 경계로 하여 발해만 일대의 미아우족과 나누어져 있었고 동북쪽은지금의 북경 및 탁록, 판천에서부터 발해만 언저리를 경계로 하여 미아우 및 마갸르와 나누어져 있었다. 지금의 동북삼성은 주신 땅이었고 하북성은 지나족과 미아우, 마갸르 등이 반반 정도로 나누어 지닌 것 같은 정세였다. 그리고 후대의 낙양 북쪽의 장성 너머 지방은 주로 키탄족과 투르크족이 있었고 장성 서쪽, 즉 장안성 북쪽의 서량등지금의 내몽골 지역에는 몽골족과 타타르족들이 많았다. 서쪽의 청해, 즉 지금의 감숙성 지방은 훈족 같은 코가 높은 서방 종족이 많았고, 다시 촉 지방은 지나족과는 다른, 촉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지나족은 어느 쪽으로도 바다를 면하여 살지 못했다 바닷가는 거의 주신의 땅이거나 주신에 속한 부족들이 많이 살았다. 즉 지금의 압록강으로부터 요동반도에 이르기까지의 해안지역은 모두 주신족이나 마갸르족, 미아우족들이 살았고 요동반도 바로 아래에 있는 태산이 바로 그들과의 접경지였다. 거기에서 다시 장강과 후대의 오나라 땅에 이르기까지도 거의 미아우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유망은 동쪽, 헌원은 서쪽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데 유망은 일단 헌원과의 사이가 나빠지자 서쪽 지나족의 도움을 받을 생각을 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주신과 맞서기에는 자신의 세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유망은 일단 형천을 시켜 동쪽의 미아우족을 먼저 치게 했다. 태산을 중심으로 한 유망의 군대는 형천의 무서운 힘에 힘입어 태산 아래의 공상을 점령했다. 이곳은 미아우족의 가장 큰 부족이 있던 곳이며, 사방이 트이고 물이 솟으며 땅이 좋아서 수도로 삼을 만한 곳이었다. 그곳에 창힐의 부족을 이주시켜서 도읍을 건설하게 한 유망은 그 곳을 기반으로, 형천으로 하여금 동쪽을 정벌하고 축융으로 하여금 남쪽 검은 부족들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축융은 불을 다루는 주술과 재주가 기막힌 사람일세. 그러니 남쪽의 미개한 검은 부족은 축융에게 조만간 무릎 꿇고 유망의 군대에 합해질 것 같네. 동쪽으로 밀려나는 미아우족은 아직은 거세게 저항하고 있지만, 형천을 당할 수 없을 걸세. 밀리다가 바다에 닿으면 역시 무릎 꿇을 수밖에 없고, 결국 유망의 군대에 합해질 걸세. 그 사이 창힐이 공상에 도읍을 세우고, 식량을 쌓고 무기를 만들테지. 그러려면 아마 세 해는 걸릴 것일세. 그 다음에 아마도 유망님은 북으로 올라갈 걸세. 주신과의 접경에 있는 미아우족과 마갸르족을 칠 것 같네.” 치우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헌원의 식견은 실로 대단해서, 유망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고, 앞으로 나아갈 길까지도 모두 내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치우비는 어떤 싸움도 자신 있었지만, 이렇게 큰 규모의 전략은 처음 접하는 것이라 온몸에 전율이 돌았다. 그때 헌원이 치우비를 보며 물었다. “유망님이 북으로 올라가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치우비는 탄식하듯 대답했다. “주신은 싸우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동쪽의 미아우족이나 남쪽의 검은 부족은 어떻게 되든 간섭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북쪽의 미아우족과 마갸르족은 모두 주신의 좋은 벗들입니다. 그들이 공격당하면 주신으로서도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헌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그래...... 나로서도 그것이 걱정스러운 일일세. 우리 지나족은 사람이 많지만, 주신은 구리 무기가 있고 말을 잘 타며 용감한 사울아비가 있네. 지나족에도 용사는 쾌 많지만, 주신 사울아비들은 모두 실력이 대단하여 한 사람이 지나 전사 열 명을 당할 수 있네. 더구나 주신도 넓고 따르는 부족이 수도 없이 많네. 미아우, 마갸루 키탄은 물론이고 투르크, 훈, 타타르, 몽골족도 지나보다는 주신족 편일세. 치우비, 나는 유망님의 편을 결코 들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네.” 치우비는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론 놀랍기도 하여 물었다.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 “물론 유망님이 이끄는 지나족도 우리와 같은 족속이네. 하지만 우리는 모험을 할 수가 없네. 만약 우리가 유망님의 편을 들면, 주신과 전쟁이 벌어지는 순간, 몽골족과 타타르족이 우리를 향해 내려올 것이네. 그곳은 바로 나, 헌원의 땅일세. 그뿐만이 아니네. 몽골과 타타르가 내려오면 서쪽의 훈이나 서역 부족들도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걸세. 결국 이렇네. 우리가 유망님 편에 나선다 해도, 우리는 결코 유망님을 도울 기회가 없네. 오히려 더 많은 적을 만들어서 지나족 전체가 위험하게 만드는 것밖에 안 되네. 주신과 유망님이 싸우게 되더라도, 우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당연히 몽골이나 타타르도 움직이지 않을 걸세. 구태여 그들과 전쟁을 해서 무엇 하는가?” 치우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지금 다 그럭저럭 잘살고 있는데 남의 땅을 빼앗아 무엇 하며, 서로 죽고 죽여 무엇 합니까? 정말 옳으신 결정입니다.” “그렇네. 그래서 나는 주신 사람인 자네에게 이런 이야기를 다 해주는 것일세. 우리는 싸우고 싶지 않네. 평화롭게 물건을 바꾸고, 서로 기술을 배워서 잘살고 싶은 것뿐일세. 그래서 나는 이미 내 가장 아끼는 부하 풍후와 상백을 유망님께 보냈네. 우리는 결코 이번 싸움에 끼지 않겠다고 말일세.” 치우비는 헌원에게 거듭 감탄하며 말했다. “정말 잘하신 일입니다. 우리 주신은 싸움을 싫어합니다. 모두가 다같이 사이좋게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l 전쟁은 좋지 않습니다. 지면 말할 것도 없지만 설령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다치고 죽는 사람이 수도 없을 것입니다 멀쩡한 사람들을 죽이고 다치게 만들면서까지 땅을 빼앗고 부족을 망하게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치우비가 너무도 열렬히 반전(反戰)을 주장하자 헌원은 오히려 좀 기이하다는 눈빛으로 치우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헌원은 너털웃음을 쳤다. “나는 지나족이기는 하나 결코 자네와 적이 아니네. 그러니 자네들은 안심하게나.” “저는 헌원님을 적이라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헌원님은 저희를 너무 잘 돌봐주셔서 정말......” 치우비가 감사해하자 헌원이 말을 막았다. “천만의 말씀이네 흠, 어차피 자네들은 지금 갈 곳도 없지 않은가? 주신으로 지금 돌아가서는 안 될 것일세.” “예. 앗수라트 부족장이나 앙가마이 부족장도 다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잠잠해질 때까지는 숨어 지내야 합니다. 그리고 형님도 이리로 찾아오기로 했구요.” “자네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숨어 지내는가? 자네는 여기에 얼마든지 머무르게. 언제까지나 손님으로 대할 것일세. 설령 주신에서 사람을 보내 자네를 찾아도,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네. 옳은 사람을 벌주는 것은 절대 두고 볼 수 없으니 자네는 안심하게나.” 치우비는 헌원의 환대에 감격했다. 특히 자신들을 받아주어 주신에서 따져도 상관없다는 헌원의 태도는 실로 치우비로서 대단히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저로 인해 무슨 문제가 생기면......” 헌원이 껄껄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네 때문에 전쟁까지야 나겠는가? 그런 염려는 하지 말게. 설혹 주신에서 노여워해도 내가 좋은 물건들을 좀 보내서 별 일 생기지 않도록 잘 처리하겠네. 나를 믿어주게나. 이 헌원이 한 말을 지키지 않을 성싶은가?” 한결 치우비의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안심도 되었다. 헌원은 사람됨이 크고 현명했으며 부하들도 하나같이 대단하기 때문에 헌원이 유망에게 붙어 주신과 싸우면 주신이 곤란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헌원이 나서지 않으면 유망의 반쪽 지나족으로는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주신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헌원과 함께 있으면 자신도 안전하고, 숨어 지내는 답답한 처지가 되지 않을 테니 그것으로도 좋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공손발과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도깨비 왕과 함께 떠난 형이 걱정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지만 형은 괜찮을 것이라는 신념이랄까, 예감 같은 것이 치우비에게는 있었다. 그 다음날, 치우비는 발과 우연히 마주쳤다. 발은 또 심술을 부리며 치우비를 발로 차려 했지만 치우비는 여느 때와 똑같이 그저 웃기만할 뿐, 발이 하자는 대로 다 기분 좋게 받아주기만 했다. 발은 자기가 만들었던 뱀을 보러 가자고 했다. 그로부터 시작하여 발은 매일같이 치우비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발 옆에는 항상 비휴와 상망이 있었다. 상망은 소녀를 치료하고 있었는데, 염제신농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소녀의 몸에 들어간 독은 대단히 지독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상망도 일시에 독을 풀 수가 없으며, 약 두 달 이상 약을 써야 독을 풀 수 있고, 다시 석 달은 쉬어야 완전히 낫는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치우비는 놀랐다. ‘유망의 독은 정말 무섭구나. 다섯 달이나 치료해야 낫는다니.’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간혹 유망이 보낸 사람들이 와서 헌원을 꾸짖으며 군대를 보내라고 협박을 했지만, 헌원은 절대 나서지 않고 중립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치우비까지도 그런 소문을 듣고 있던 터였다. 스무 날 정도가 지나자 키타야가 울라트와 도깨비 리미, 싱카, 마냥 등을 데리고 헌원을 찾아왔다. 헌원은 대단히 신기해하면서도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리미와 싱카, 마냥 등은 그동안 울라트에게 열심히 말을 배워서 어느 정도 주신 말로 간단한 의사소통은 할 수 있게끔 되었다. 울라트는 또 다른 도깨비족이라 할 수 있는 형요 자매를 만나보더니 역시 신기해하며 반가워했다. 키타야는 치우비가 무사하고 게다가 형요 자매라는 기이한 사람들과 사귄 것을 보고 연신 대단하다며 자기 부족으로 돌아갔다. 치베는 매일같이 형요와 말다툼을 벌였고, 도깨비들과 사냥을 하고 말을 달리며 지냈다. 도깨비들 중 몇몇, 특히 마냥 같은 녀석은 말을 아주 무서워하여 말 등에 거의 기다시피 붙어서 말을 타곤 했는데, 치베가 열심히 가르쳐서 마냥도 차차 겁을 먹지 않고 말을 타게 되었다. 물론 말을 타고 싸울 재주는 없었고, 그저 말목을 얼싸안고 달릴 수 있게 된 정도였다. 형요 자매는 호탕한 성격이라 항상 자기들끼리 칼싸움을 하고, 말을 달리고 사냥을 하며 놀았다. 원래 그들끼리만 잘 지내던 사이라 다른 사람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간혹 치우비가 같이 사냥을 가기는 했는데, 형요 자매는 치우비의 실력이 대단하다고 칭찬만 해대서 치우비는 부끄러워 그 다음부터는 아예 사냥을 가지 않았다. 키타야가 왔을 때는 여름이 거의 지나갈 무렵이었다. 그리고 한 달 정도 더 지나자 누군가가 찾아왔다. 보니 그 사람은 앙가마이 부족의 한 전사였다. 그는 치우비를 만나게 해달라고 헐떡이며 말한 뒤 치우비가 달려오자 급히 이야기를 전했다. “대용사님, 기뻐하십시오. 용사님의 형님, 치우천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뭐? 형님이?” 치우비는 뛸 듯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그 전사가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분은 같이 오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부족장이신 구르님을 만나보고 바로 떠나셨는데, 급히 가실 곳이 있다고 했다더군요. 구르님이 치우천님께 치우비님이 무사히 도착했다고 전했답니다. 치우천님도 기뻐하시며 일을 처리하고 몇 달 내로 헌원님 계신 곳으로 간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구르님은 급히 저를 보내 치우비님께서 걱정 말고 기다리시라고 전하라 했습니다. 그래서 온 것입니다.” “형은 어떻게 도깨비 왕에게서 빠져나왔지요? 다친 데는 없고요? 그리고 무슨 일을 보고 온다는 거지요?” 치우비는 너무도 궁금하여 마구 물어보았으나 그 전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저는...... 저는 모릅니다. 다만 구르님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치우천님은 아주 건강하시고 다치신 데는 없으니, 걱정 말고 그분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라 하셨습니다.” 치우비는 너무 기뻐 곧 벗들을 불러 그 말을 전했다. 헌원도 기쁜 듯 그 전사에게 많은 상을 내렸다. 큰 횡재를 한 그 전사는 몹시 좋아하며 돌아갔다. 모든 이가치우천이 무사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치우비는 형이 보고 싶어서 당장다시 앙가마이 부족으로 갈까도 했으나 치베가 웃으며 말렸다. “비 안다. 그러면 길이 엇갈린다. 천 안다가 이리 오기로 했으니 여기서 기다리는 게 천 안다를 만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치우비는 속이 탔지만 그래도 형이 무사하다는 소식에 마음이 놓여서 느긋해졌다. 다시 몇 달이 지나자 날씨가 점점 쌀쌀해졌다. 소녀는 이제 독을 다 빼고 몸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요요가 소녀와 자주 놀아주어 소녀도 그리 심심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소녀도 치우천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듯했는데, 치우비는 소녀와는 할 이야기가 별로 없고 말도 잘 안 통해서 간혹 안부만 물을 뿐이었다. 이제 걱정거리가 없어지자 치우비는 매일같이 발과 만나 발의 신경질이나 장난을 몸으로 받아주며 시간을 보냈다. 발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치우비에게 정을 느끼게 되었는지 차츰 장난질이 적어지고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멍청이’라고 부르지 않고 ‘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때리거나 머리칼을 뽑거나 가시로 찌르는 등의 장난이 적어지고 치우비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해질 무렵, 발은 치우비와 함께 연못가를 거닐었다. 사람이 많은 성 안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이상하게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았다. “난 우리 아버지가 싫어. 비는 어때?” 그때는 상망이 소녀를 돌보러 가고, 비휴도 다른 일을 보러가서 발 곁에 없었다. 느닷없는 발의 물음에 치우비가 웃으며 대답했다. “난 너희 아버님을 정말 존경한다. 대단한 분이지.” 그러자 발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다들 그렇게 말하지. 헌원님은 대단한 분, 아주아주 크신 분, 훌륭하신 분......!” 별안간 발이 손에 들고 있던 꽃을 내팽개치고 발로 짓이겼다. 그 모습을 보며 치우비는 고개를 젓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맞는 말이잖아.” “모두가 다 속는 거야. 하지만 난 안 속아.” “뭐가 속고 뭐가 안 속는단 말야?” 치우비가 묻자 발이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나는 결코 잊지 않아. 결코!” “뭘 잊지 않는단 거야?” 발은 뭔가 이야기하려는 듯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엄마 얘기, 내가 해준 적 없지?” “없어 .” 대뜸 발이 또다시 코웃음을 쳤다. “그럼 됐어. 그 이야기는 해줄 수 없는 거니까.” 치우비는 발이 자꾸 아버지를 욕하자 난처하기도 해서 물었다. “발, 왜 그리 아버지를 미워하는 거야? 아버지는 네게 그렇게 잘해 주시잖아. 다른 사람에게는 그리 엄하셔도 네가 아무리 장난을 치고 난리를 피워도 결국 웃으며 용서해주시는데, 그렇게 좋은 아버님이 어디 있겠어?”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발이 갑자기 허공을 보며 멍하니 웃었다. “우리 아버지는 절대 날 못 건드리지, 헤헤.” 그러는 발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치우비는 도대체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빛이 있어. 그래서 나를 못 건드리는 것뿐이야. 내가 딸이라서? 웃기지 마. 우리 아버지한텐 딸 같은 건 아무 상관도, 쓸모도 없어.” “그런 말이 어디 있니?” 치우비가 드물게 질책했지만 발은 못 들은 척 쏘아붙였다. “나는 아버지가 싫어.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지. 그래서 아버지가 착하게 굴라면 나쁘게 굴었고, 이리 가라면 저리 가고 저리 가라면 이리 갔어. 그러다 보니 이젠 습관이 됐어. 내맘대로 안 되고 자꾸 손이 나가고 못된 말만 하게 돼! 아버지가 날 버렸어! 날 버렸다구!” 발이 털썩 주저앉더니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치우비는 급히 발을 부축하여 일으켰다. 별안간 발이 치우비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비야, 너도 날 미워할 거야? 언젠간 날 버릴 거야?” 치우비는 처음으로 발이 안기자 정신이 다 몽롱해졌다. 이제 치우비는 발과 많이 친해졌지만 아직 손 한 번 잡은 적이 없었다. 치우비는 덩치도 크고 키도 커서 조그마한 발의 머리가 자기 가슴팍 아래밖에 오지 않았고, 발의 팔은 치우비의 간신히 등 뒤에 닿을락말락했지만 치우비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치우비는 불현듯, 황홀하다는 생각보다 발이 몹시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작고 아무 힘도 없는 여자가, 아버지를 미워하게 되었다면 세상에 누구를 믿고 살 수 있겠는가? “나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 너만 좋다면 나는 결코 너를 버리지 않을 거야.” “정말?” “물론이야.” “내가 좋아?” “그럼.” “거짓말 아니지?” “거짓말 아니야.” “내가 이렇게 못되고 삐뚤어진 애인데도?” 치우비는 웃으며 용기를 내어 발의 등을 다독거려주었다 “난 항상 있는 그대로 네가 좋은 거야. 네가 착해서 좋은 것도 아니고, 뭐 다른 이유가 있어서 좋은 것도 아냐. 그냥 좋으니 좋은 거야.” 잠시 발이 말을 끊고 조용해졌다가 이내 코맹맹이 소리를 약간 내며 물었다. “내가 예뻐?” “그럼.” “내가 예뻐서 좋은 거야? 내가 못생겨지면 싫어할 거지?” 치우비가 웃으며 솔직하게 말했다. “네가 예뻐서 좋아지기 시작한 건 맞는 것 같아. 그건 맞아. 하지만 네가 좋은 건 네가 예뻐서 그런 것만은 아냐. 그건...... 음, 그건 나도 모르겠어. 솔직히 너같이 멋대로고 건방지고 말썽만 부리는 애를 내가 왜 좋아하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그 말에 발은 벌컥 성질을 부리며 치우비의 품에서 떨어져 나가려했다. 그러나 치우비는 웃으며 발의 등을 살짝 눌러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 다음 말을 이었다. “나는 말재주가 없어서......말하기 힘들지만 한 번 해볼게. 널 처음 볼 때 내가 했던 말 있지? 그건 모두 사실이야. 처음 너를 보자마자 나는 정신이 없었어. 너는 예뻤지만, 그래서 정신이 없었던 건 아냐. 너보다 예쁜 애들도 여러 번 봤지만 한 번도 그런 일은......” 그러자 발이 왈칵 화를 내며 다그쳤다. “그게 어떤 년이야.” 치우비는 말을 잘못한 것을 깨닫고 ‘어이쿠’ 하다가 곧 ‘허허’ 웃으며 말했다. “미안미안, 화낼 것 없다니깐. 내 이야기나 들어.” 발이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며 신경질을 부렸다. “싫어! 그 나보다 예쁘다는 계집애한테나 가 버리라구!” “난 원래 말재주가 없잖아. 그래서 너한테 맞기도 많이 맞고, 욕도 많이 먹었잖니. 발아, 한 번만 용서해줘. 그리고 내 말 좀 들어줘.” 치우비가 사람 좋게 애원하자 발은 멍청이라고 몇 번 욕하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아이구, 이거. 정말 설명하기 힘들군. 좌우간 말야, 이런 거 비슷했어. 널 보자마자 말야,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난 이애 없으면 안 된다고. 왜 그런지는 몰라. 정말 모르겠어. 난 멍청이라서 말야. 하하.” 치우비는 좀 쑥스러워서 헛웃음을 지었지만 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치우비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 계속 말했다. “그리고 네가 아무리 말썽을 부리고 나를 때려도 나는 정말 좋기만 했어. 참은 게 아냐. 우리 형님은 뭐든 잘 참지만, 난 뭐든지 참지 못하거든. 네가 예뻐서 참은 것도 아니고, 다른 걸 생각해서 그런 것도 아니라구. 그냥 네가 뭐를 하든 좋았고......” 치우비는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꿈틀거리며 가슴이 메어질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슬픈 것도 아닌데 가슴이 벅차올라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치우비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그 눈물이 하필 발의 얼굴로 떨어지자, 발이 힐끗 위를 올려다보았다. 치우비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어어어...... 이런, 내가 왜 이러지? 하하. 이런, 이...... 이거 뭐야?” “뭐야? 바보같이.” 발이 다시 궁시렁거렸지만 치우비는 허허 웃었다. “이거 창피해 죽겠네. 하지만 발아, 난 할말은 꼭 해아겠어. 허허, 참. 창피해 죽겠지만 할말은 해야겠다구. 내겐 네가 있어야 해.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네가 있어야 해. 그리고 너도 내가 있어야 한다고 믿어. 정말이야. 안파견 한님에게 맹세를...... ” “멍청아 맹세 같은 건 왜 하려구 해?” 발이 다시 투덜거리듯 쏘아붙였으나 발의 목소리도 어느새 조금 떨리고 있었다. “하려는 게 아니라 속으로 벌써 했어 너한테 말하기 전에.” “뭐?” 발이 놀라 물었지만 치우비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이미 속으로 맹세했어. 나, 치우비는 너, 공손발을 절대 버리지 않아. 절대로 그럴 수가 없거든. 네가 못나지든, 늙어버리든...... ” “그래, 난 지금도 못났고 할망구 같아!” “아이구, 그게 아니야. 좌우간 네가 어떻게 되든 너는 너일 뿐, 나는 네가 좋다. 맹세했어. 그리고 네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줄 거라고 맹세했어.” “내가 널 버리면 어쩔 거야?” 치우비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너는 날 버리지 않아.” “네가 어떻게 알아?” “몰랐다면 나도 맹세하지 않았을 거야. 어떻게 아는지는 몰라도 난 알아. 알 수 있어.” 치우비가 발의 등에서 손을 떼자 발이 갑자기 획 치우비의 품에서 벗어나며 외쳤다. “네가 알긴 윌 알아? 당장 버려야지!” 그래도 치우비는 웃기만 했다. 별안간 발이 울음을 터뜨리며 치우비의 가슴을 주먹으로 마구 두들겨댔다. “이 바보! 이 멍청이! 너 때문에 내가 미쳐!” 그러다가 돌연 발이 치우비를 보고 물었다. “넌 내 말은 다 듣는다고 했지? 만약 내가 너더러 나를 잊어버리고 가버리라면 어쩔 거야?” 느닷없는 질문에 치우비는 말문이 막혔다. 그것을 보고 발이 깔깔 웃었다. “그러게 맹세는 함부로 하는 게 아냐. 알았어, 멍청이?” 그러고는 발이 치우비를 꽉 끌어안고 발돋움을 하더니 입을 맞춘 다음 재빨리 반대쪽으로 달려가 사라져 버렸다. 치우비는 잠시 동안 정신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우하하하’ 웃으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치우비의 웃음소리가 너무도 커서, 헌원의 그 커다란 성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놀라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치우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웃으며 덩실덩실 아무렇게나 춤을 추다가 흥이 겨워 연못 옆에 있던 큰 바위 두 개를 획 집어 올려 두 개를 나란히 붙여 놓고는 다시 호탕하게 웃으면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람들은 치우비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후에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에 나타난 헌원은 그 돌 두 개를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치우비는 그날 밤 앓아누워 버렸다. 어디가 아픈지 상망도 알 수 없었지만 치우비는 열이 펄펄 끓어올랐음에도 계속 ‘하하하’ 웃기만 했다. 누가 물어도 말도 하지 않고 웃기만 하여 치베와 형요 자매, 울라트 마저도 치우비가 미쳤나 보다고 생각하여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러나 다음날이 되자 치우비는 열이 내렸고 미친 듯 웃지도 않았다. 그저 전과 똑같이, 별말 없이 담담할 뿐이었다. 그때 발이 치우비에게 놀러와 부르자, 치우비는 다시 함박웃음을 지으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치베와 형요는 항상 아웅다웅했지만, 그런 치우비의 모습을 보고 서로 마주 보다가 동시에 피식 웃어버렸다. 치우비와 발이 좋아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미 한 명도 없었다. 울라트는 비 오라비가 여우같은 여자한테 흘렸다고 몇 번 투덜거렸으나 치우비가 진심으로 발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는 웃기만 했다. 내심 일이 잘되기를 빌었던 키타야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울라트는 치우비를 좋아하기는 했으되 정말 오빠처럼 좋아한 것뿐이다. 그리고 울라트는 형요 자매를 퍽 좋아해서 언니언니 하며 따랐는데 심심하면 도깨비들을 시켜서 형요 자매와 칼싸움을 하며 놀기까지 했다. 울라트는 태산 회의 때만 해도 겁 많고 수줍음을 타서 누가 말만 걸려 해도 숨어버리는 아이였는데, 어느새 그렇게 활달한 성격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무튼 치우천이 오지 않아 답답하기는 했어도 그렇게 세월은 자꾸만 흘러갔다. 돌아온 치우쳔 어느덧 세월이 지나 다음해가 되었다. 치우비 일행이 헌원의 집에 머문 지도 여섯 달이 넘어섰고 겨울도 거의 다지나 봄이 돌아오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지나자 치우비 일행은 답답해했고, 또 치우천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헌원의 성문 앞이 왁자지껄했다. 그때 치우비는 발과 만나 가위바위보를 하며 노닥거리고 있었는데 상망이 달려왔다. “이봐! 비! 왔네! 왔어!” 상망이 헐떡거리며 외쳤다. 그 말을 듣자마자 치우비는 발을 내버려두고 쏜살같이 몸을 날려 달려 나갔다. 치우비는 누가 왔는지 상망의 표정만으로 금방 알아차린 것이다. “형님! 형님! 형!” 치우비는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갔다. 저만치에서 유독 활짝 웃으며 천천히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바로 치우천이었다. 그 옆에는 헌원과 이주, 끽구 등이 모두 환한 얼굴로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형 !” 치우비가 달려오자 치우천이 활짝 웃었다. “이 녀석! 달려들지 마라. 날 죽일 셈이냐?” 치우비는 껄껄 웃으며 형 앞에 제꺽 멈춰 서서는 형을 끌어안고 빙글빙글 돌리며 마구 울었다. 치우천도 눈물을 흘렸지만 그래도 계속 웃었다. “아이구! 이 녀석! 비야! 나 죽는다. 좀 놓아줘!” 그때 갑자기 처음 보는 노인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저놈이 네 동생이냐?” 치우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내 아우, 치우비요.” 그 노인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힘센 동생 두어서 좋을 것도 없구나. 잘못하면 허리나 부러지지.” 그 말을 듣고 치우비는 형을 내려놓았다. 치우천이 웃으며 노인을 치우비에게 소개했다. “비야, 내 새로 사귄 분이다. 이름은 비울걸이라 하신다.” 비울걸이라 불린 그 노인은 검은 옷을 걸치고 있었고, 몸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으며, 아무렇게나 묶은 허옇게 센 머리가 뒤로 휘날리고 있었다. 안색은 침침하고 눈은 가느다랗고 찍 찢어져 있는데다가 눈자위가 시커매서 마치 눈이 없고 구멍만 두 개 뚫린 것 같아보였다. 게다가 코는 우뚝하고 온 얼굴이 주름투성이인데다가, 입술이 가늘고 푸른색을 띠어 마치 죽은 시체 같았다. 치우비는 이제껏 수많은 사람을 보았지만, 이 노인처럼 무섭고 기분 나쁘게 생긴 사람은 생전 처음이었다. 더구나 그는 양손가락이 길고 독수리 발처럼 우글쭈글했으며, 손가락에는 끔찍한 형상으로 길게 자란 손톱이 비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이 사람에 비하면 치우비를 따르는 도깨비들이 백배는 더 사람 같아 보였으니, 그야말로 귀신보다 더 무서운 생김새의 노인이었다. 달려 나오던 울라트와 공손발, 소녀와 형요 자매들까지도 모두 노인을 보자마자 ‘으윽, 악’하면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벌건 대낮이었고 치우천이 곁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어두운 데서 이 노인을 갑자기 만났다면 여자들은 까무러쳐 버렸을 것이다. 그래도 치우비는 형이 새로 사귄 사람이라 하자 두말없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어르신 안녕하십니까?” 별안간 그 노인이 욕을 해댔다. “제기랄. 이 빌어먹을 놈아, 어르신은 무슨 어르신이냐?” 치우비는 난데없이 욕을 먹자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허허’ 웃었다. “그러면 젊으신가 보군요.” 그 말에 노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무서운 얼굴이었는데 눈살까지 찌푸리자 식은땀이 날 만큼 무서운 얼굴이 되었다. “너, 내가 무서워 보이냐?” 치우비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네, 정말 무서워 보이는군요“ 치우비가 그런 말을 하자 주변 사람들은 아찔했다. “아이구, 이제 저 괴물이 트집을 잡겠구나. 저 괴물이 자기 생김새를 무섭다고 하면 좋아할 리가 있겠냔 말이다.” 일순 주위가 술렁거렸으나 치우비는 당당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저희 형님과 같이 오셨으니 좋은 분이실 겁니다. 생긴 것은 타고난 것이니 어쩌겠습니까?” 노인이 ‘흥’ 하더니 비아냥거렸다. “허, 너 아주 노인을 가르치는구나. 생긴 것은 타고났으니 어쩔 수 없다?” 치우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은 무섭게 생기셨습니다. 저는 거짓말을 못합니다. 하지만 생긴 게 사람됨과 무슨 상관있겠습니까? 어르신을 뵙게 되어 저는 정말 반갑습니다.” 진심으로 치우비가 반가워하는 미소를 지었다. 잠시 노인이 무표정하게 눈만 흘기다가 갑자기 말했다. “덩치야, 너 나랑 술 한 잔 하련?” 사람들은 그 노인이 아무런 표정 없이 다짜고짜 말하자 노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어르신이 주신다면 한잔 받겠습니다.” 갑자기 치우천이 ‘하하’ 웃으며 노인에게 말했다. “비울걸! 내가 이겼다? 그렇지?” 여전히 노인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래, 내가 졌구나. 젠장 기왕 졌으니 술이나 먹어보자.” 곧이어 비울걸이라 불린 그 노인은 거리낌 없이 자기 집처럼 기세등등하게 안으로 걸어갔다. 이주나 끽구 같은 헌원의 부하들도 노인의 방자한 태도에 아연해질 지경이었는데, 헌원은 미소를 머금고 말문을 열었다. “치우천, 반갑군. 안 그래도 자네를 많이 기다렸네. 어서 들어가세. 나도 저 노인과 사귀고 싶구먼. 아주 재미있는 분 같은데?” 치우천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싱긋 웃었다. “정말 아우를 잘 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또 한 번 신세를 져야 할 것 같네요.” “신세랄 것이 뭐 있는가?” 치우천은 저만치에 소녀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반갑게 말을 건넸다. “소녀님, 소녀님도 다 나으셨군요.” “치우천님...... ”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자 치우천은 괜스레 민망하여 그저 피식 웃었다. 형요 자매는 치우천이 피식 웃는 모습을 보고 반쯤 넋이 나간 듯했다. 그들은 그때까지 그토록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였다. 그때 치베와 울라트가 도 깨비들을 주르르 달고 다가왔다 다들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고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즐거워했다. 헌원은 큰 잔치를 열라고 명령을 내렸다. 일행이 들어가 보니 비울걸은 벌써 가장 큰 방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궁시렁거리고 있었다. “술이 왜 없냐? 술! 술!” 비울걸의 태도가 자못 방자했지만 헌원은 호탕하게 웃으며 급히 술만이라도 내오도록 했다. 두 시녀가 술항아리를 안고 오자 비울걸이 소리쳤다. “두 개!” 그쯤 되자 이주와 끽구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화가 나서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헌원은 여전히 웃음을 거두지 않고 그들을 눈짓으로 말리며 말했다. “어서 가져와라.” 그러자 다른 두 시녀가 다시 큰 술항아리 하나를 안고 왔다. 그리고 이내 잔과 안주를 가져오려고 다급하게 자리를 떴다. 비울걸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야, 덩치야. 얼른 와라.” 치우비는 좀 놀라고 당황하기도 해서 주춤거리듯 비울걸 앞으로 갔다. “하나씩 마시자. 난 네놈이 맘에 든다.” 비울걸의 말에 치우비는 씨익 웃으며 술항아리 하나를 들었다. 비울걸도 손을 뻗어 술항아리 하나를 들었는데, 보기보다 힘이 대단한 듯, 전혀 무거워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곧장 한 항아리의 술을 통째로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 모두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고, 울라트는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치우비는 오기가 솟아 술을 마시며 속으로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술 마시는 건 내가 제일이다. 비쩍 마른 노인이 나를 당할 리 없지!’ 그러면서 치우비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무리 치우비가 술고래라 해도 이렇듯 한꺼번에 다 마시는 것은 무척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치우비가 간신히 술을 다 마시고 술항아리를 내려놓는데, 이미 비울걸은 술 한 항아리를 다 비우고 그 항아리를 옆에 거꾸로 엎어놓은 채 태연히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치우비는 깜짝 놀랐다. 정말 이 노인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비울걸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치우천! 이번에는 내가 이겼다!” 곁에 있던 치우천이 웃으며 박수를 짝짝 쳐주었다. 사람들은 도대체 이 무슨 도깨비놀음인지 알 수 없어서 어리둥절했다. 대뜸 비울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헌원을 쳐다보았다. “헌원, 잘 마셨고 대접 잘 받았소이다. 당신도 참 대단하더군. 언젠가 내가 한 번 갚아주지.” 그러고는 냄새나는 옷자락을 한 번 휘젓자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 다음 순간, 비울걸의 모습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은 얼떨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비울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치우비가 놀라서 치우천에게 물었다 “저 사람...... 도대체 뭐지? 선인이야?” 그러자 치우천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럼 뭐야?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지?” 그때 형요가 외쳤다. “저건 진짜다! 세상에! 어떻게 저럴 수기“ 형요 자매도 비울걸처럼 사라지고 나타나는 재주를 부렸다지만 사실 그것은 교묘한 속임수였다. 그런 만큼 형요는 그런 종류의 속임수에는 통달했던 것인데, 방금 비울걸이 사라진 것은 절대 속임수가 아니었고 진짜 사라져 버린 것을 깨달은 것이다. 치우천이 웃으며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 사람은 그럴 수 있답니다.” “어떻게 그렇죠?” 치우천은 여전히 웃었다. “저 사람은 도깨비의 왕이거든요.” 그 말에 모두 기겁을 하고 놀랐다. 모두가 이미 도깨비 왕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그러나 비록 치우천이 도깨비 왕에게 잡혀가기는 했다지만, 그 도깨비 왕이 치우천과 함께 여기까지 같이 올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치우비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치우천이 치우비의 입을 막듯이 말했다. “이야기는 천천히 하자. 오늘 잔치가 끝나면 우리는 내일 떠나야하니, 나중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다.” “떠나? 오자마자 간단 말야?” 치우비가 갑자기 공허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치우비는 언제까지나 여기에 남아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발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치우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치우천이 딱 잘라 말했다. “헌원님께도 죄송한 일이지만, 정말 시간이 없다. 우리는 가야 할 곳이 있어. 내일 떠나야 한다. ” 헌원도 몹시 아쉬운 표정으로 물었다. “도대체 그렇게 급하게 어딜 간다는 건가?” 모든 사람의 시선이 치우천의 얼굴로 향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일말의 감이라도 잡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치우천이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카린산으로 가야 합니다.” *당시의 생활 및 시대적인 설정 ‘치우천왕기’는 기원전 2716년, 태산 회의로부터 시작하여 기원전 2696년, 마지막 3차 탁록전투까지 20년 정도의 동북아시아, 주로 만주지방과 그 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는 보통 신석기 시대라고 알려져 있지만,실제로는 청동기 시대로 들어갔던 것이 거의 확실하며, 아주 부분적으로 철기가 사용된 것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의 사람들의 생활은 결코 가죽 한 장을 걸치고 돌멩이를 든, 원시인의 모습도 아니며, 그렇다고 후대와 다를 바 없는 그런 차림을 한 근대인의 모습도 아닙니다. 이 적절한 중간점에서의 시대 설정은 소설의 내용과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제대로 묘사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 시대적인 설정과 그에 대한 근거를 간략하게 밝히는 바입니다. 모든 근거를 밝히고 자세히 고증하는 것은 책을 따로 한 권 출간해도 모자랄 정도이기 때문에 이해를 도울 정도의 간략한 묘사와 대표적인 증거만 문답형식으로 1, 2권에 이어서 싣습니다. 9)본문에는 많은 미남, 미녀가 등장하는데, 당시의 미의 기준은지금의 것과 다르지 않았겠는가? 물론 지금과 고대는 미의 기준은 달랐을 것입니다. 남자는 생김보다는 아무래도 건강하고 강한 것을 제일로 쳤을 테고, 여자도 늘씬한 몸매보다는 튼튼하고 강인하며 아이를 잘 낳는 그런 여자를 미인으로 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독자들이 그러한 미의식을 다 받아들여서 그런 관점으로 글을 읽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책 자체의 흥미를 북돋우기 위해 그 정도는, 현대의 미인관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독자를 위해서도 나쁠 것이 없다고 봅니다. 가령 고대에 뚱뚱한 여자를 미인으로 쳤다고, 모든 로맨스 장면에 그 엄청난 몸집을 예찬하는 구절을 쓰고 묘사를 한다면 그것을 감미로운 로맨스로 받아들일 독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치우천왕의 나이를 본래 전해지는 자료보다 훨씬 어리게 잡은 것과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10) 분명 아주 오래된 옛날이야기인데도 등장하는 인물들이 너무 똑똑하다. 이것이 현실적이라 보는가? 당연히, 아주 현실적이라 생각합니다. 물질문명에 휩쓸리게 된 현대인은 아주 그릇된 버릇을 하나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성적인 사고 하나로 인간의 현명함을 저울질하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로 진화된 이래 뇌용량도 항상 비슷했고, 아이큐도 비슷했습니다. 분명 인간이 시간을 들여 쌓아올린 이성이나, 과학적인 능력은 없었겠지만, 그에 대치하는 지혜와 임기응변, 꾀 등은 오히려 현대인이 당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고대인은 현대인과 같은 총, 레이더, 자동차, 난방장치, 방한복 같은 것들이 없었으며, 그러면서도 혹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려면 현대인보다 훨씬 뛰어난 생활의 지혜와 임기응변, 상황 대처력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소위) 원시인은 힘이 세고 뭐든 잘 버티고 잘 견뎌서 그랬다’고 인종적인 차이로 몰고 가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그때의 사람이나 지금의 사람이나 신체구조 등은 거의 같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적으로도 고작 수천 년 사이에 인간의 몸이 그리 많이 변할 수는 없겠지요. 또 정신적인 사고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종교와 사상의 모태가 마련된 것은 고대입니다. ‘생각’으로 구분되는 사고가 오히려 가장 활발히 이루어진 것은 계급사회가 완전히 구현되지 않은 고대의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원인은 그때야말로 ‘생각하는 것이 아주 중요했고, 생각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대인은 이후사람들 보다 훨씬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고, 자연의 신비나 죽음의 공포 등을 혼자 맞닥뜨려 싸워야 했습니다. 체계적으로 퍼진 종교도 없었으며, 자신을 지켜줄 국가 같은 조직체도, 궁금증을 해석해줄 사람도 별로 없었습니다. 본인은 인간의 지혜는 첫째, 모여 살면서 한 번 급속도로 발전했고, 두 번째로 말을 만들면서 또 한 번 급속히 늘어났으며 마지막으로 글자를 사용하면서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 상의 시기는 두 번째의 말기, 세 번째의 초기 정도 되는 시대입니다. 성서, 불경, 힌두교 경전 등에 담긴 사상의 깊이가 지금에 이르러서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듯, 그 시기의 사상이나 사고의 능력이 지금보다 뒤떨어진다고 단정 짓는 것은 오만이고 편견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생각하는 사고방식도 우리들과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으며, 지도자급의 몇몇은 더 뛰어났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지식이라는 측면이 아니라 지혜라는 측면에서 말입니다. *주요 등장인물 리미(리매?魅) 치우비를 따르는 붉은 머리의 도깨비. 오른손이 없어 도끼를 손 대신 휘두르는 무서운 싸움꾼이다. 다들 도깨비라고 부르지만 그의 진짜 정체는 북유럽 지방의 거친 전사였으며 . 전투에 지고 노예가 된 후 각지에서 팔려 다니다가 여기까지 흘러온 것이다. 피의 이름이 레이미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리미’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후 전장에서의 활약 덕분에 ‘리매’라는 도깨비의 이름이 되어버린다. 마냥(망량??)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도깨비이다. 이집트 남쪽의 누비아 근처 지방 출신인데 이집트를 거쳐 다시 그리스-시리아-인디아를 거쳐 여기까지 온 특이한 존재이다. 대단한 씨름꾼이며 개미에서 이름을 딴 '마냥'이라는 그의 이름 때문에 도깨비들의 대명사에 ‘망량’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 싱카(요기. 신괴) 인도에서 잡혀온 도깨비. 본디 이름은 싱카이지만 요기(수행자)였기 때문에 자신을 요기라고 이른 까닭으로 나중에는 보통 요기라고 불린다. 인도의 크샤트리아(무사 지배계급)였고 주술을 배워 대단한 능력을 간직하고 있다. 그는 원래 신수를 얻으러 머나먼 동방으로 모험을 떠났다가 붙잡혀 도깨비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툰툰이 치우천에게 준 신수의 알을 처음 얻었던 자는 그와 함께 떠난 다른 요기였음이 후일 밝혀진다. 그의 이름 싱카에서 파생된 ‘신괴’라는 이름은 도깨비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형요(形妖) 과보족의 한 갈래이며 여섯 자매 중 네쌍둥이 네쌍둥이 모두가 이름도 같고 생긴 것도 같기 때문에 서로를 구별하려고 첫째 형요. 둘째 형요. 셋째 형요. 넷째 형요로 불린다. 도둑 출신으로 몸이 날렵하며 숨기를 잘하며 사람의 눈을 속이는 기이한 재주를 지니고 있다. 후에 과보족과의 연합에 큰 공을 세운다. 미요 형요 자매 중 다섯째로, 자매들 중 가장 온순하고 조용하며 차분하여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착한 아가씨이다. 요요 형요 자매 중 막내로. 아주 쾌활하고 장난기 많은 발랄한 아가씨이다. 비울걸 도깨비들의 왕. 주신 비씨 집안의 사람이었으나 괴기한 용모와 도깨비들을 마음대로 불러내는 능력을 타고나서 집에서 쫓겨난 후 사람들과의 인연을 끊고 도깨비들을 벗삼아 지내는 괴짜 중의 괴짜이다. 후에 치우천과의 내기에서 져서 치우천을 따르는데. 항상 치우천을 죽인다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절친한 사이가 된다. 부하도 없이 언제나 혼자 다니지만 한 번 호령에 수많은 도깨비들을 아무 데서나 불러낼 수 있기 때문에 일인군단(一人軍團)이라고도 불리며, 후일 전투에서도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도깨비의 왕이라는 특성 탓에 신도울루와는 완전한 앙숙이 된다. 풍후 헌원이 총애하는 신하로 말수가 적고 조용하며 항상 깊은 생각에 골똘히 빠져 있는 인물 헌원과는 어려서부터 같이 지낸 친구이자 발명가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으로 후에 지남차를 발명한다. 상백 풍후와 함께 헌원이 총애하는 신하로 키가 크고 행동거지가 기이한 괴짜 별다른 능력은 없지만 역시 어려서부터 헌원과 같이 자라가장 가까운 인물이기도 하다. 창힐 중국 최초로 문자를 발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주신의 신시문자를 빌려 지나족에게 가르치기 시작한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다. 사서에는 사황(史皇), 즉 그림을 발명한 사람이라고도 적힌 책이 있으나 사황과 창힐이 동일인은 아니라 보인다. 원래 유망의 부하로 대부족장이었으며, 유망의 새 도읍 공상을 건설하는 등 공을 세우지만 평화를 사랑하며 조용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