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치우천왕기2 지은이: 이우혁 출판사: 들녘 출판년도 : 2003년7월20일 차례 세가지길 소녀 구출 태산 회의 사와라 한웅 울라트와 도깨비들 대 시합 무라의 초청 벗들의 결의 한웅의 위기 당시의 생활 및 시대적인 설정 주요 등장인물 세 가지 길 유망을 만난 뒤 의식을 잃은 희네를 나래가 안고 헌원의 인도하에 지나족의 막사를 나서자, 어느새 소문을 들었는지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지나족 막사와 가까운 곳에 있던 발빠른 마갸르족의 울쿠타가 새로 사귄 친구들에게 알린 것이다. 울쿠타와 야쿠타, 키탄의 야율쿠리, 미아우의 초초룬과 치베가 모여 지나족 막사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희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성질 급한 야율쿠리가 소리쳤다. "누가, 내 벗 희네를 저런 꼴로 만들었단 말이냐? 어떤 놈이든 내, 가만두지 않겠다!" 초초룬도 남자 같은 목소리로 욕을 해댔다. "지나족 놈들이 그런 거라면, 내 당장 이놈들 막사에 독을 뿌려버리겠다!" 치베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극도로 흥분한 듯, 손에 들고 있던 활에 힘을 주었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나래가 모두를 향하여 입을 열었다. "형은 치료를 받다가 이리 된 거야. 섣불리 말썽을 일으키면 안 돼." 야율쿠리가 씩씩거리면서 나래에게 물었다. "무슨 치료를 받는데 사람이 이렇게 된다는 말이냐?" "그럴 일이 있으니 제발 소란 좀 피우지 마." 문득 나래는 이런 소란이 벌어졌으니 아버지 치우우레까지 오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오신다면 무슨 일이냐고 물을 것이며, 그러면 희네가 다리가 아파 치료를 받던 중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큰일이라 나래는 얼른 두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정말 고맙지만 이러면 안 돼. 일단 가자, 가자." 나래는 뒤를 따라오던 헌원에게 얼른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말했다. "소란을 일으켜서 정말 미안합니다. 어떻게 뒷감당을 할지..." 헌원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건 걱정 말게. 염제 신농님은 한 입으로 두 말하시지 않느니. 나야말로 미안하네. 막사 안에서 있었던 일은 자네나 자네 형도 잊어주었으면 좋겠네." 나래는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어서 짧게 대답했다. "예." "내일 사람을 보내겠네." 그 말만 남기고 헌원은 어느새 나타난 자신의 부하들을 시켜 주변에 모여든 자들을 흩어지게 했다. 나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해보았다. 이렇게 큰 소란이 벌어졌는데 아버지 치우우레가 이 소식을 듣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아버지가 이 일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막사로 갔다가는 치우우레의 눈에 띄일 것 같았다. 다급한 목소리로 나래가 친구들에게 말했다. "누가 좀 막사를 빌려주겠는가? 조용하고 멀리 떨어진 곳이면 더 좋다." 그러자 치베가 말했다. "초초룬의 막사가 가장 조용하다. 빌려줄 수 있겠나?" 마치 초초룬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자. 내 막사에는 약도 있다. 어서 가자." 초초룬이 워낙 기이한 행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녀의 막사는 다른 미아우족들과도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사실 왜 이런 큰 회의에 저런 말썽쟁이를 데리고 왔는지 미아우 부족장의 속을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나래는 희네를 안고 달려서 초초룬의 막사에 왔고 친구들도 그 뒤를 우르르 따라왔다. 나래가 막사 안에 희네를 눕히자 초초룬은 검은색의 약과 뭔지 알 수 없는 나뭇잎들을 꺼내 상처 입은 희네의 몸에 약을 발라주고 나뭇잎을 붙인 다음 말했다. "염려 마라, 나래. 괜찮다. 이 약은 네가 준 호랑이 뼈로 만든 것이다. 아주 잘 듣는다. 금방 나을 거다. 조금 있으면 정신을 차릴 것이다. 희네는 지금 그리 고통스럽지 않을 거다." 그때 힘없는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그래. 왜들 법석을 떠는 거야?" "형님!" "난 괜찮아, 괜찮다구. 하하..." 희네가 생각보다 빨리 정신을 차리고 아주 갸날프게나마 웃기까지 하자 다들 놀랐다. 야율쿠리는 초초룬의 약이 정말 신통하다고 생각했으나, 정작 초초룬은 약보다 희네의 정신력이 무척 강해 일찍 깨어난 것을 알고 웃었다. 나래와 치베는 희네가 정신이 든 것만으로도 반가워서 어쩔 줄 몰랐다. 정신을 차린 희네가 입을 열어 다시 말했다. "이봐, 이봐. 이래서는 안 돼..." "희네 안다(벗, 형제라는 몽골어), 힘들 텐데 말하지 마라." 치베가 만류하자 희네는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손을 까닥거렸다. 일으켜 달라는 것 같았다. 나래가 희네를 일으켰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해야 할 일이 있다." "방금까지 정신을 잃고 있던 사람이 무슨 할 일이 있다는 건가?" 야율쿠리가 고개를 저으며 막아서자 희네는 그 와중에도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정신을 잃다니, 정말 창피해. 하지만 지금 할 일이 있어. 다들 내 부탁을 들어주겠어?" "뭔데?" 모두 희네를 바라보자 희네가 차분하게 말했다. "치베는 어서 주신 막사로 달려가서 내 벗인 양역을 데리고 와줘.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데리고 와야 해." "알았다. 희네 안다." "그리고 울쿠타와 야쿠타는 돌아가 있어. 너희 부족장이 너희를 찾을지도 모르는데, 둘 다 나와 있으면 안 돼. 그리고 너희는 돌아가는 길에 사람들에게 소문을 내도록 해." "어떻게?" 울쿠타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지금 소란이 벌어진 게 나 때문인 걸 우리 아버지가 알아서는 안돼. 그러니 일단 지나족 막사에서 있었던 일은 무조건 모른다고 해. 누구 때문에 일어난 일이냐고 사람들이 묻거든 우리 이야기는 빼고, 캬린산 여인족과 지나족끼리 말다툼이 있었던 것이라고 말해. 우리 이야기는 빼고 소문만 내라구. 알았지?" "그런데 지나족들이 많이 봤잖아? 그놈들 입은 누가 막지?" 초초룬이 걱정스러운 듯 묻자 희네는 고개를 저었다. "지나족들도 아마 그렇게 말할 거야." "음? 어째서?" 핏기 없는 희네의 얼굴에 신비한 미소가 맴돌았다. "유망이 그렇게 시킬 거고, 헌원도 그렇게 시킬 거야. 아마 우리 이야기는 하지 않을 거야." 다른 사람들은 희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으나 희네는 계속 말했다. "그리고 초초룬." "응?" "이 막사를 한 사흘만 빌려줄 수 있어?" "그냥 달라고 해도 준다. 나는 다른 막사를 치면 된다." 초초룬이 당당하게 말하자 희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독 같은 걸 자주 만지지? 가끔 독을 만지다가 실수도 하고?" "음? 그렇긴 한데..." "잘됐어. 혹시 독처럼 냄새가 아주 심하면서 사람에게 해는 없는 그런 약초 같은 게 있어?" "있어. 근데 왜?" "그럼 그걸 이 막사 주변에 좀 뿌려. 그리고 독이 퍼졌으니 누구도 이 막사 부근에 오지 말라고 소문을 내는 거야. 내가 좀 조용히 있어야만 하거든." "아...! 알았다!" 초초룬은 얼른 일어나 바구니들을 부스럭거리며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야율쿠리." "왜?" "혹시 나에게 염소 두 마리 정도 줄 수 있어? 나는 나중에 뿔활을 줄게." "활 안 줘도 된다. 그냥 줄 수 있다." "그래, 고마워. 그러면 너는 지금 나래와 씨름을 하도록 해." 뜬금없는 소리에 야율쿠리와 나래는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씨름?" "그래, 씨름. 그것도 오늘 하루종일 하는 거야. 그리고 나중에는 아주 호되게 당해서, 내기로 뭘 좀 잃은 거야. 그걸 우리 아버지에게 전해줘야 해." 야율쿠리는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물었다. "지금 하면 하는 거지, 언제 하루종일 했냐? 그리고 내기로 잃다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내기 물건은 더 좋은 것으로 돌려줄게. 좌우간 그렇게 해야 우리 아버지가 이 일을 모를 거야." 야율쿠리는 한참 더 듣고서야 이해했다. 즉, 나래와 희네가 자신과 하루종일 씨름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미리 아버지에게 전해주어 나중에 혹시라도 희네 나래가 지나족 막사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것을 입막음하자는 것이었다. 그래도 야율쿠리는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면 그냥 그렇게 하면 되지, 왜 지금 씨름을 해야 하는가?" "씨름을 하지 않으면 너는 거짓말을 한 게 돼. 아무리 나를 위해서라지만, 벗들에게 있지도 않았던 새빨간 거짓말을 시키기는 싫어." "어차피 거짓말은 거짓말 아닌가? 벗을 위해 이런 작은 거짓말은 할 수도 있다." 그러자 희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더 큰 까닭이 있어." "그건 뭔가?" "내가 거짓말을 시키기는 하지만, 난 거짓말쟁이가 싫거든." 그 말에 모두들 '와' 웃었다. 초초룬은 아예 허리를 부여잡고 한참 웃다가 입을 열었다. "희네여, 너는 정말 웃기는구나. 하하하." 희네도 따라 웃었다. "난 원래 거짓말을 아주 싫어해. 거짓말은 해선 안 되지만 할 수 밖에 없을 때가 있지. 하지만 할 수 없이 하는 거짓말이라도 지킬 건 지켜야 해. 거짓말도 다 같은 거짓말이 아니야. 좋은 거짓말이란 없고, 안 하면 안 할수록 좋지만, 그래도 할 수 없을 때는 두 가지만 지키면 돼." "어떤 두 가지?" "첫째로 정말 없었던 일을 지어서 만드는 거짓말은 안 돼. 두 번째, 거짓말로 누구에게 손해를 끼쳐도 안 돼. 많이 생각해보고 그럴 수 있을 때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거야. 나는 많이 생각해봤는데, 그 두 가지만 지킨다면 비록 거짓말을 해도 하늘에 그리 부끄럽지 않을 거야. 내 벗들도 그렇게 해주었으면 좋겠어." 희네가 계속 웃으며 차근차근 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울쿠타, 야쿠타. 카린족과 지나족의 싸움은 정말 있었던 거야. 그리고 너흰 우리가 거기 어떻게 끼어드는지 못 봤으니, '우리는 못 봤다'고만 하면 돼. 그러니 거짓말을 한 게 아냐." 울쿠타와 야쿠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초초룬, 너는 약간은 거짓말을 한 셈이지만 아무도 피해가 가지 않는 거구." 초초룬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야율쿠리, 나래. 너희도 어서 멋들어지게 씨름을 한판 하도록 해. 그러면 너희도 큰 거짓말은 하지 않게 되는 거니까." 야율쿠리가 시원하게 대답했다. "좋아, 좋아. 희네 너는 정말 생각이 깊은 벗이다. 그 벗의 말을 어길 수는 없지. 내 나래를 이기려고 특별히 배워둔 기술이 있다. 이번에는 잘 안 될걸, 나래?" 야율쿠리와 나래가 밖으로 나가자 초초룬은 희네가 볼 수 있도록 막사에 쳐진 가죽장막을 거두어주었다. 야율쿠리는 자세를 낮추어 허리를 굽히고 길다란 양팔을 휙휙 내뻗었다. 야율쿠리는 덩치도 컸지만 팔이 아주 길고 특히 팔 힘이 좋았는데 그렇게 팔을 휘두르니 접근할 수가 없었다. 나래와 야율쿠리의 씨름은 상대를 넘어뜨리는 편이 이기는 것이며, 치거나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되었다. 야율쿠리의 힘이 상당해서 섣불리 접근하다가 팔에 잘못 걸리면 아무리 힘이 센 나래라도 곧두박질칠 우려가 있었고, 지금 야율쿠리가 자세를 낮추었기 때문에 팔을 되잡기도 힘들었다. 더구나 허리를 굽혔음에도 아주 안정되어 보이고 빈틈이 없는 자세였다. 나래는 '오호'하며 탄성을 올렸다. "제법인데? 어디서 배웠니?" "타타르족 제일의 씨름꾼 보챠두에게 염소 열네 마리나 주고 배운 기술이다! 자, 덤벼봐라, 나래!" 문득 나래는 아까 무라와 겨룰 때 무라가 아주 빠른 몸놀림으로 자신의 주위를 돌아서 당황하게 했던 것을 떠올렸다. 나래는 발을 한 번 박차고는 야율쿠리의 주위를 빠르게 맴돌았다. 모습이 수십 개로 불어나 보일 정도였던 무라만큼의 속도는 아니었지만, 나래의 속도도 허깨비 같아서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다. 야율쿠리는 깜짝 놀랐다. 자세를 낮추고 팔을 휘두르는 것은 정면의 적을 상대할 때는 효과가 있었으나 이렇게 나래가 맴을 도니 오히려 뒤가 불안했다. 허겁지겁 나래를 좇아 뒤로 돌기는 했으나 엉거주춤하여 몸을 돌리기가 힘들었다. 나래는 계속 더 빨리 돌았다. 그러자 야율쿠리는 어쩔 줄을 모르며 돌다가 오히려 발걸음이 흐트러졌다. 그때 나래가 형천이 했던 것처럼, 야율쿠리를 어깨로 들이받자 야율쿠리는 그만 저만치 날아가 넘어져 버렸다. 물론 나래는 형천만큼 거칠게 몰아붙이지는 않고 아주 작은 힘만 썼을 뿐이다. 넘어진 야율쿠리가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대단하다! 대단해! 그 수법은 어디서 배운 거야?" "맴도는 것은 카린 여부족 전사가 썼던 기술이고, 어깨로 부딪히는 건 형천이 썼던 기술이야." 나래의 말에 야율쿠리는 깜짝 놀랐다. "벗, 나래여. 너 형천과 무슨 일이 있었나?" 나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한 번 부딪혔었다. 아직도 얼얼하구나." 별안간 야율쿠리가 '우하하' 웃으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초초룬이 화를 내며 야율쿠리에게 쏘아붙였다. "너 미쳤냐?" 춤을 멈추고 야율쿠리가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이봐, 이봐. 형천은 당할 자가 없다는 세상 제일의 장사다. 그런데 나래는 그 형천과 부딪히고도 멀쩡하고, 형천도 놀랐으니 나래 역시 세상 제일의 장사가 될 수 있는 장사다!" 그 말에는 초초룬도 흐뭇해했다. 자신의 친구가 천하 제일의 장사에게 인정을 받았으니까. "근데 나는 그런 나래와 씨름하면 아주 가끔이지만 이긴다. 그러면 나도 세상 제일이 될 수 있는 장사 아닌가? 하하..." 야율쿠리의 말에 초초룬은 다시 인상이 험악해졌다. "에라이, 이 멍청아! 나래가 널 봐준 걸 모르냐? 그리고 그런 장난 씨름하고 정말 싸움이 어떻게 같아!" 초초룬이 버럭 화를 내며 야율쿠리를 몰아붙이자 야율쿠리도 좀 멋쩍었는지 머리를 긁적거렸다. 사실 자기가 나래를 아주 가끔 이기긴 했으나 나래의 힘은 자기보다 훨씬 강했다. 자기는 그때 죽을힘을 했지만 나래는 담담히 웃던 것이, 아무래도 그렇게 힘을 쓴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희네가 웃으며 야율쿠리를 바라보았다. "야율쿠리, 그럴 것 없다. 사실 너도 좀더 기술을 배우기만 하면 더 강한 장사가 될 거다." 그러자 나래도 한마디 거들었다. "형천이나 끽구는 물론 세지만, 너도 그들에 못지않을 거야." 그 말에 야율쿠리는 기분이 좋아졌다. "고맙다. 좌우간 난 씨름에서 졌구나. 아주 오랜 승부였다. 하루종일 싸웠지만 이기지 못했구나. 내, 약속대로 너희 아버님께 염소 두 마리를 드리겠다. 반드시 아버님을 찾아서 직접 전해드리겠다. 씨름 이야기도 아주 자세히 해드리겠다." 야율쿠리가 덩치답지 않게 눈치 빠르게 말하자 희네가 한마디 주의를 주었다. "다만 나래가 카린족이나 형천에게 배운 기술을 썼단 말은 절대 하지 마라." 야율쿠리는 이마를 찰싹 치며 웃었다. "아차, 그렇구나. 하마터면 그 말도 지껄일 뻔했다." 야율쿠리는 껄걸 웃으며 돌아갔다. 곧이어 야쿠타와 울쿠타도 그 자리를 떠났고, 초초룬도 약 가루를 막사 주위에 뿌리고 나서 미아우 사람들에게 소문낸다면서 막사를 떠났다. 단 둘만 남게 되자 희네가 나래를 불렀다. "아우야." "왜, 형님?" "이제 다들 갔구나. 조용해졌으니 네가 할 일이 있다." "뭔데?" "나는 아까 잠깐 정신을 잃었지만, 계속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건 아니다. 네가 뛰어들 때 어렴풋이 정신이 들었었어. 그래서 사정을 다 알게 되었다만..." 희네의 얼굴빛이 엄숙해졌다. "아주 중대한 일이다. 내일 유망이 다시 치료받으러 오라 했지?" "응. 근데 갈 거야? 정말?" "가야 한다. 치료가 문제가 아니라 더 중요한 일이 있거든." "그게 뭔데?" 희네는 나래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계속 덧붙였다. "그건 아직 몰라도 된다. 좌우간 유망은... 나를 치료해줄 수 있다던?" "응." "그렇구나... 그럼 너는 지금 비렴님을 찾아가거라. 아직은 내가 유망에게 치료받는다는 건 말하지 말고, 다만 나는 아파서 한웅님 지키는 일을 할 수 없다고만 전해줘." "근데 더 중요한 일은 뭐야?" "잘은 모르겠지만 유망놈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다." "일?" "아주 위험한 일을 꾸미는 것 같아." "어떤 위험한 일?" "아직 분명하지는 않아. 둘 중 하나인데..." 그때 막사 밖에서 낯익은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네 있는가?" 바로 풍백 비렴의 목소리였다. 희네와 나래는 모두 놀랐다. 비렴이 천천히 초초룬의 막사 장막을 거두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더더욱 놀랍게도 우사 병예와 운사 신지울태가 그 뒤를 따라 모두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 큰 스승들께서 어떻게..." 나래와 희네가 놀라 동시에 입을 열자 비렴이 씩 웃어 보이며 검지 손가락을 세워 입에 갖다대었다. 키가 아주 작은 우사 병예가 입을 열었다. "큰 소리 내리 말게. 여기가 외딴 곳이기는 하나, 조용해야 하느니." 신지울태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우리가 너희를 만난 것,아무도 알면 안 되는 것이야." 신지울태는 '것이야, 것이다'로 말을 맺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말투가 때론 신비스럽게 느껴지곤 했다. 나래와 희네는 곧 입을 다물었다. 희네가 작은 목소리로 곧 다시 물었다. "어찌하여 저희를 만나러 오신 것입니까?" "왜 왔겠느냐?" 우사 병예가 주름살투성이의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되묻자 희네가 천천히 말했다. "혹... 저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왜 왔겠느냐?" 우사 병예가 주름살투성이의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되묻자 희네가 천천히 말했다. "혹... 저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그러자 신지울태가 살짝 웃으며 비렴에게 말을 건넸다. "이 아이는 정말 똑똑해요 잘 해낼 수 있을 것이에요." 비렴이 신지울태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희네에게 말했다. "그렇다. 너라면 해낼 수 있겠구나." "무슨 일입니까?" 나래가 물었으나 삼사는 모두 빙그레 웃기만 했다. 마치 희네에게 무엇인지 이야기해보라고 하는 듯했다. 희네는 생각해보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혹... 제가 유망의 막사에서 알아올 것이 있습니까?" 그 말에 병예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찌 알았느냐?" 희네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병들고 아픈 제가 할 수 있는 무엇 있겠습니까? 다만 내가 유망의 막사에서 치료받게 된 것만이 남과 다른 것이니, 그 때문에 오신 것 아니겠습니까?" 신지울태가 그 특유의 조용하고도 사근사근한 말투로 병예에게 말했다. "그것 보아요. 내 말이 맞지 않아요? 저 아이는 알아서 잘할 것이에요." 병예는 그 말을 듣고 탄식하듯 내뱉었다. "참으로 똑똑하구나. 놀랍구나." 삼사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허나 희네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을 뿐이었다. "저희의 일을 손바닥 보듯 아시는 세 분이 더 대단합니다." 신지울태가 희네에게 말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야. 한웅님을 뫼실 너희들에게는 그 때문에 우리가 주술을 가르쳐준 것이야." "그 때문이라고요?" 신지울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 새긴 부적 무늬가 있었지 않아?" "그렇습니다." "그 무늬가 새겨진 사람들이 대강 어디 있는지 무늬를 새긴 사람은 알 수 있는 것이야. 한웅님을 지키기 위해서는 똘똘 뭉쳐야 하기 때문에 그 무늬를 새긴 것이야." 비렴이 덧붙여 이야기했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가 유망의 막사로 가는 것을 알았다. 아픈 네가 유망의 막사로 가서 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 아마도 치료를 받으러 간 것이겠지. 그리고 유망 막사에서 뭔가 소동이 좀 있었던 것도 들었다." 이어서 병예가 덧붙였다. "그래서 내가 좀 걱정이 되어 네 막사로 가보았는데, 마침 네 벗인 치베라는 몽골 아이가 양역을 만나는 것을 보았느니라. 너는 그 아이에게 양역을 데려와 달라고 했었지?" "에..." 이번에는 신지울태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사정을 다 알게 된 것이야. 그러고 나서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우리 모두가 달려온 것이야." "그랬군요..." 희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렴이 물었다. "유망을 만나보았지? 사람됨이 어떤 것 같더냐?" 희네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좀 위태위태한 듯싶었습니다.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았어요." "그래, 잘 보았다. 유망은 본래 용감하고도 선량한 영웅이었는데 요 몇 년 사이에 이상하게 변해버렸어. 우리는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를까봐 몹시 걱정하고 있단다. 하지만 사람의 속마음을 어떻게 알겠느냐..." "그래서 제가 할 일은 유망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내는 것입니까?" 희네의 물음에 비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유망은 요즘 주신 사람들을 무척이나 꺼리고 있어. 그래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가 아주 힘들다. 허나 천만다행으로 네가 유망의 근처에 있게 되었으니, 우리로서는 너에게 부탁을 하지 않을 수 없구나."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나래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몸 아픈 형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합니까?" "큰 일을 해달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망의 부근에서 네게 보이고, 들리는 것만 우리에게 전해주면 된다. 유망의 말을 들을 수 없다면 그가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사람들이 유망을 찾아오는지만 볼 수 있는 대로 보면 되는 것이다. 못 보게 되어도 탓하지는 않을 것이니 무리하지는 말거라. 그 다음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 병예도 한마디 거들었다. "내 꿈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느니. 그리고 몹쓸 짓을 할 녀석은 유망밖에 없어. 그러니 네가 그 일을 하는 것은 한웅님을 옆에서 뫼시고 지키는 것이나 매한가지인 것이니." 희네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래는 걱정이 되어 뭔가 말하려 했으나 희네는 나래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다만 아버지는 모르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비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약속하지." 신지울태도 자상한 표정을 지으며 조금 걱정스러운 듯 희네에게 말했다. "희네, 너무 위험하게 나서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야. 뭔가 더 알아 내겠다고 욕심을 부려서 나서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야. 보이는 것만 보고, 들리는 것만 들으면 되는 것이야." 친할머니처럼 걱정해주는 신지울태가 고마워서 희네는 싱긋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희네는 속으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에요'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버릇없어 보였으므로 그 말은 꿀꺽 삼켰다. "그런데 어떻게 말을 전합니까?" 희네가 묻자 비렴이 그 방법을 말해주었다. "자네는 간간이 아우를 보고 싶다고 말하게. 나래도 형이 보고 싶다고 하며 매일 들르도록 하게. 형제가 만나고 싶어하는 것이야 누가 말리겠는가? 그럴 때마다 말을 전해주면 되네. 나래 자네는 우리와 같이 연습을 하되 매일 한 번씩은 형을 만나러 가보도록 하게. 그래 봐야 며칠밖에 안 남았네만." "만약 못 만나게 하면요?" "그때는 내가 다른 길을 찾아볼 것이니 너무 염려 말게." 비렴이 든든하게 말하자 희네는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삼사는 자신들이 희네와 만난 것을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된다고 하며 이내 자리를 떠나 사라져 버렸다. 밖이 어두워졌다. 희네는 기운 없는 듯 누워서 숨을 고르고 있었고, 나래는 그 옆에 앉아 뭔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형에게 물었다. "그런데 유망이 왜 그런 짓을 하려는 걸까?" 희네는 잠시 생각하다가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유망은 주신과 전쟁을 하려는지도 몰라." 엄청난 말에 나래는 얼굴에 찌푸렸다. "흠..." "너는 보지 못했겠지만, 그들은 주신 사람을 대단히 꺼렸다. 그리고 유망은... 내가 볼 때 정상적인 사람 같지가 않았다. 뭔가 아주 큰 일을 앞두고... 들뜨고 흥분한 것 같았어. 수상해. 그 부하들... 형천이나 헌원은 그래도 낫지만 축융이나 금천 같은 녀석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주신을 적으로 생각하는 눈치였어." "하지만 지나족과 주신족은 원래 사이가 나빴잖아?" "그 정도가 아니야. 축융 같은 녀석은 내가 나중에 주신의 영웅이 될 사람이니 이 자리에서 죽여버려야 한다고까지 했어. 이건 전쟁 중인 부족들 사이에서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비록 전쟁은 시작된 것이 아니지만, 놈들은 전쟁 중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지나족은 주신족과 전쟁할 만큼 강하지도 않을 텐데." "아직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만약 주신이 혼란스러워진다면?" "혼란?" "지금 사와라 한웅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본마누라의 아들이 없다. 그리고 지금이 2대째 사와라 한웅이신, 이제 3대째를 준비해야 하잖아. 아들이 없기 때문에 이번에는 환웅 집안이 아닌 다른 집안에서 나와 아름이 바뀔 때이기도 하지. 만약 이때 한웅님이 돌아가신다면..." 그 말을 듣고 나래는 눈을 크게 떴다. 한웅은 한 집안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었고, 다섯 개의 큰 집안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지금의 사와라 한웅은 고시 집안 출신이었다. 한 집안에서 나온 한웅은 큰아들이 있을 경우 3대까지 그 이름을 그대로 이어간다. 즉, 지금의 사와라 한웅은 2대째 내려오는 고시 집안 출신의 한웅이었다. 그런데 이번 한웅은 본처에게서 아들이 없었고, 3대가 거의 다 차가는 2대째였다. "그러면?" "아마 다음 한웅을 놓고 분란이 일어날 거야. 다른 집안은 아들이 없으니 다른 집안에서 한웅을 세워야 한다고 할 거고, 고시 집안은 자기 집안에서 세 번째 한웅을 다 채워야 한다고 할 거다." "아들이 없으면 다른 집안에 자리를 넘기는 게 당연하잖아." "고시 집안이 순순히 그렇게 할 것 같니? 고시 집안 우두머리가 누구지?" "그건..." 고시 집안의 우두머리는 바로 그들 형제의 외할아버지이자 그들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기도 한, 고시울률이었다. 희네는 외할아버지가 결코 만만히 넘어갈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교시울률의 속 좁음은 헌원까지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희네는 한 번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나래야, 유망은 아주 위험한 사람이다. 무슨 짓이든 태연히 해치울 수 있는 사람이야. 그리고... 만약 그가 주신과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면 그가 노릴 수 있는 방법은 그거 하나뿐일 거야. 그저 맞대들고 싸워서는 힘이 모자라는 것을 그도 알 거다. 지나족은 아직 구리 무기 만드는 법도모르고, 사울아비들처럼 강한 전사도 없어. 하지만... 하지만 한웅님이 돌아가시고 주신 안에서 서로 싸우는 난리가 일어난다면... 그때는 해볼 만하다고 생각할 거야. 내 생각이 틀리기만 바랄 뿐이지만... 그래서 유망은 한웅님을 노리는 거 같아." 나래는 엄청난 이야기를 듣고 잠시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이야기의 내용 때문에도 놀랐지만, 그런 것을 미루어 추측하는 형의 명석함에도 놀랐다. 그러나 환자나 다름없는 형을 혼자 그런 유망의 막사로 다시 보내는 것은 싫었다. "하지만 형님 혼자 보내는 건..." "나래야. 그러고 보니 비렴님이 우리를 찾아와 도움이 되어 달라고 한 것부터 이번에 내가 유망에게 가게 된 것, 다시 세 큰 스승님이 찾아오신 것, 이 모두가 보통 일은 아니었어. 다 안파견 한님께서 우리 형제에게 한웅님을 지키라고 그렇게 되게 한 것 같구나. 지금 유망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고, 우리 형제는 한웅님을 지키기로 맹세까지 하지 않았니?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한단다. 더구나 아직 내 짐작이 그렇다는 것뿐이지, 증거가 없어. 증거를 찾아야잖아." "하지만 너무 위험해. 형님은 내가 지켜줘야..." "아직 확실한 일은 아니니 그럴 것 없다지 않니. 그리고 너는 가서는 안 된다. 아까도 네가 뛰어들어 한바탕 한 모양인데, 그런 너를 데리고 다시 갈 수는 없어." "하지만..." "아니야. 나는 다쳐서 치료를 받으러 가는 거다. 너를 데리고 가면 내가 오히려 위험해진다." "축융이나 그런 놈들이 형님을 보는 눈빛이 아무래도 기분 나빠." 나래는 축융이 희네를 죽이려 했던 것은 모르고 있었으나 느낌만으로도 불안해했다. 그러자 희네가 타이르듯 말했다. "그래서 더 안 되는 거야. 지금은 그냥 경계하는 정도겠지만, 네가 뛰어들거나 내 속셈을 그들이 알게 되면, 그때는 정말로 우린 살아날 도리가 없어. 아무리 우리가 주신 사람이지만, 유망은 지나족의 대족장이다. 그가 우리를 해치려고 한다 해도, 지금 여기서는 아닐 거야. 그러니 일단은 나 하는 대로 맡겨둬라." "그놈들이 앞으로 우릴 해치려 할 거라고?" 나래의 목소리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나자 희네가 눈을 빛냈다. "나래야, 너는 힘을 너무 보였어. 좀 과했다. 호랑이를 잡고, 세상 제일의 장사라는 끽구나 형천과도 너무 맞섰어. 나도 적당히 굽힐 것을 공연히 기를 세웠던 것 같고... 그동안 잘 참아왔는데 이번에 들떠서 너무 지나쳤다. 그 정도만 되어 보여도 위험하다 생각하는 거겠지." "형님이 똑똑하고 내가 힘이 센 게 왜 위험한 거야?" "커다란 고목나무는 베기 힘들지만, 나무가 자라기 전에 한번 밟아만 주면 부러져 죽는 법이잖아." 나래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희네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우린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어린 사울아비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족장들이고 많은 부족들에게 알려진 사람들이야. 우리가 적이 될 것 같으면 우리가 더 자라고 힘을 모으기 전에 처치하는 게 낫다고 여길지도 몰라. 더구나..." 희네는 고시울률의 이야기를 하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이번 태산 회의 때 일은 분명 나중에 고시울률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고시울률은 그들 형제를 그냥 두지 않을 것 같았다. 어머니 미리내의 일이 그들 형제에게는 철천지한이 되었고, 그것을 고시울률도 느끼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들 형제는 외할아버지 고시울률에게 아주 큰 반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것을 고시울률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시울률은 자기 딸이 죽은 것이 그들 형제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들 형제를 공공연하게 미워하게 되었으며, 높은 자리를 이용하여 아버지 치우우레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방해했고, 그들 형제들에게도 감시의 눈초리를 번득였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한 집안이지만,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같이 살고 있지 않으면 그렇게 혈족의식이 강하지 않았기에 그 정도의 혈족관계는 없는 것만도 못했다. 즉, 그들의 아버지 치우우레는 고시울률과 가까운 관계일 수 있지만 그들 형제는 관계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런 원한관계가 생기면 언젠가는 반드시 갚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 관습이었다. 그런 원한이 있다면, 오히려 치우 형제는 고시울률을 없애야 하는 게 당시로서는 옳았고, 고시울률로서는 그럴 낌새가 보인다면 외손자라 해도 밟아버리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다. 희네가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태산 회의 때 우리는 뭔가 해야만 해." "왜 꼭 그래야만 하지?" 나래가 묻자 희네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나래야, 잘 생각해보렴. 너는 왜 생각을 안 하니?" "무슨 생각?" "나래야, 우리 아버님이 왜 치우웃뜸이 못 되셨지?" 치우웃뜸은 치우 집안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호칭이었다. "그야... 외할아버지 땜에..." "그래. 외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싫어해서, 치우괄괄 아저씨를 웃뜸으로 하게 했지." "하지만 치우괄괄 아저씨는 아버지와도 친하고, 나쁜 아저씨가 아니잖아." "그건 그래. 허나 치우괄괄 아저씨는 이미 큰 병이 들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계셔. 그런데 그 아들들이 누구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치우괄괄에게도 아들 형제가 있었는데 그들은 치우가람과 치우바람이라고 했다. 그들은 희네 나래보다 세 살, 두 살씩 나이가 많았는데 이미 성인식을 치러서 성과 이름을 받았다. 그들 형제는 음험하고 시기심이 많은 성격인데다가 치우웃뜸의 아들들이라고 우쭐거리며 희네 나래 형제를 몹시 무시하고 또 질투했다. 희네의 지혜와 나래의 힘이 센 것을 알고, 그들 형제가 행여 두각을 나타낼까 봐 갖은 짓을 다했던 것이다. 나래가 화가 치밀어 몇 번이나 그들과 부딪히려 했지만, 희네는 그것이 모두 계략이란 것을 알고 나래를 잘 제어하여 왔다. 그리고 그들 가람과 바람 형제가 고시울률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이미 신시에서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나래가 대답하지 않자 희네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껏 그들 형제가 우리를 계속 건드린 것은 우리를 싫어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외할아버지가 시켜서 그런 거야. 우리 형제가 정말 위험한지, 아니면 조금 힘이 센 정도의 무시해도 될 만한 아이들인지를 알아보려는 거겠지. 그래서 너에게는 힘을 절대 다 쓰지 말고 있는 힘의 반만 내라고 했고, 나도 자부선생의 가르침이싫다고하면서 일부러 말을 듣지 않구 마구 싸돌아다녔지. 우리 형제를 제발 작게 봐달라고 말야. 하하..." 희네는 잠깐 웃다가 다시 덧붙였다. "하지만 이번 태산 회의 때 너무 많은 일이 터졌어. 호랑이나 끽구 일은 그럭저럭 괜찮지만, 형천과 부딪힌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유망이나 헌원이 입 단속을 한다 해도 그 장면을 본 지나족이 너무 낳고, 카린족들도 다 보았어. 결국은 소문이 돌아 외할아버지 귀에도 들어갈 거고... 그러면..." "다 내 잘못이야..." 나래의 얼굴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런 생각할 필요 없다. 좌우간 이제 우리는 좀더 힘들어질 거야. 유망과 부하들도 우릴 좋게 보지 않고, 외할아버지나 가람 바람 형제 놈들도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침울한 목소리로 나래가 묻자 희네는 웃어 보였다. "너무 걱정 말아라. 언젠가는 오긴 와야 할 일이었어. 좌우간 이미 드러나버린 이상, 우리는 어떻게든 힘을 키워야 해. 외할아버지가 우리를 만만히 건드리지 못하도록 말야. 지금대로라면 우리는 치우바람이나 가람에게도 밟혀버리고 만다. 지금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은 세 가지가 있어." "세 가지?" "하나는 우리가 신시로 돌아가지 않고 그냥 떠나버리는 길이야. 이번 길에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 보돈차르나 카린족도 그렇고 야율쿠리나 울쿠트, 야쿠타,초초룬, 치베. 모두 좋은 친구들이고 큰 도움이 될 친구들이야. 몽골족이나 키탄, 카린족들까지 다니면서 친구들을 만나고 선인들을 부하로 거느렸는데, 우리라고 왜 못하겠어. 그래서 밖에서 힘을 기르고 몇 년 뒤에 신시로 돌아오는 거야." 나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헌원도 좋은 사람 같더군." 나래의 말에 희네는 눈을 한 번 빛내고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희네는 헌원이 실제로 대단히 속이 깊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희네 생각에 헌원은 진심으로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내심 그들을 다른 선인들처럼 부하로 거느리고 싶어하는 듯했다. 그러나 아직 나래에게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나래는 희네의 생각을 짐작하지 못한 듯 다시 물었다. "그런데 다음 길은?" "다음 길은 유망의 속셈을 알아내서 한웅님을 지키는 데 공을 세우는 거야. 이것도 다 안파견 한님이 이렇게 되라고 하셨는지도 모르지. 유망이 나를 치료하자면 자신의 막사로 데려가야 하고,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나를 계속 자기 막사에 둘 수밖에 없어. 그러면 유망의 속셈을 알 수 있을지도 몰라. 그것을 알아내고 공을 세우면 세 큰스승들도 우릴 인정할 거고, 어쩌면 한웅님께도 인정받을지 몰라.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외할아버지가 해치려 해도 그냥 밟힐 약한 싹이 아니야. 유명해지고, 큰사람이 되어서 저쪽에서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는 거지." 나래는 감탄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형의 머리가 좋은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만나는 모든 일을 기회로 삼고 일거수 일투족을 용의주도하게 배려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대단해, 정말..." 나래가 말끝을 흐리자 희네는 씩 웃었다. "그렇다고 다 좋은 건 아냐. 첫 번째 길은 우리가 주신을 떠나 새 부족을 만드는 거나 다름없으니 힘든 일이고, 두 번째 길은 유망이 만만한 자도 아니고, 좋지 않은 일이 생기길 바라는 것 같아서 또 문제가 있지." "그럼 세 번째는 더 좋은 방법이야?" "그럼! 더 좋은 방법이지." "그게 뭔데?" 나래가 채근하자 희네는 맑게 웃으며 말했다. "두 길을 다 가는 거야. 둘 다 버리기 아까우니, 둘 다 하는 거지." 말을 끝내고 희네는 맑게 '하하' 웃었다. 나래도 좀 어이가 없고 걱정도 되고 하여 덩달아 웃었다. "나래야, 네 싸움 기술과 힘은 세상 제일이야. 하지만 나처럼 아픈 사람이 누워서 정신을 잃고도 싸울 수 있다는 걸 보여주마. 난 유망을 이길 거다. 이겨서 그 녀석의 뱃속에 품은 생각을 다 알아내고 돌아올거야. 그러니 염려 말아라..." 희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이제 그만 자자고 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나래는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잠시 후에 치베가 돌아와 나래와 한 자리에 누웠다. 소녀 다음날, 희네는 나래에게 주신 막사로 가라고 말했다. 나래는 걱정을 뒤로하고 비렴에게로 갔다. 치베는 희네 곁에서 잠시도 자리를 뜨지 않고 지켰다. 희네는 아무래도 정신을 잃은 척하는 것이 활동하기 편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내내 눈을 감고 뜨지 않았다. 낮이 되자 헌원의 부하 이주가 양역의 안내를 받아 막사로 들어왔다. 이주는 하루가 지났는데도 희네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을 보고 걱정하며, 희네를 어서 유망의 막사로 다시 옮기자고 했다. 치베가 선뜻 희네를 들쳐업고 이주의 뒤를 따랐다. 희네는 눈을 계속 감고 있어 소리만으로 대강 상황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유망의 막사 앞에 도달하자 헌원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헌원은 유망의 막사 앞에서 희네를 기다린 듯했다. 희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헌원도 걱정스러운 듯 이주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잠시 후 희네는 치베의 등에서 내려 아주 큼지막한 등을 가진 다른 사람에게 업혔다. 치베는 같이 가고 싶었으나 헌원은 그러면 안 된다고 치베를 설득했다. 희네는 속으로 바짝 긴장했다. 유망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몸길까지 자유로이 다룰 줄 아는 의술을 지닌 사람이니 자칫했다가는 탄로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 기회는 너무도 좋았다. 지금 유망이 막사에 기거하고 있으니 모든 부하들의 보고도 막사에서 받을 것이다. 같은 막사에 있기만 한다면 우연히 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희네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고통을 참으며 계속 몸에서 힘을 뺀 채 기절한 척했다. 마침내 유망의 막사에 도달한 듯, 헌원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염제 신농이시여. 주신 사울아비 희네를 데리고 왔습니다." 헌원의 엄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막사 안에서 유망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래? 들어오라고 해." 유망의 목소리와 더불어서 듣기 좋은 물건 소리도 들렸는데 희네는 처음 듣는 희한한 소리였다. 다만 그 가락이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에 불렀던 그 노래와 똑같았다. "그런데 염제 신농이시여, 희네는 아직 기절하여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뭐?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단 거냐?" "듣자 하니 한 번 깨어났다가 다시 기절했다고 합니다." "그래? 알았어. 한번 한 말을 어길 수는 없지. 귀찮지만...들여놔." 유망의 막사 안으로 들어선 듯, 희네에게 훈훈한 공기가 전해져 왔다. 그리고 아까 들리던 물건 소리도 더 분명히 들려왔는데, 무슨 줄을 뜯는 소리 같았다. '딩딩'하고 뜯는 소리가 아주 듣기 좋았다. 나래는 물건 소리와는 담을 쌓았지만 희네는 소리내기를 참 좋아했고 풀피리나 나무피리를 아주 잘 불었는데,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같이 불고 싶을 정도였다. '유망이 뜯는 소리 같지는 않은데 누가 이렇게 고운 소리를 내는걸까?' 희네는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계속 정신을 잃은 척했다. 이윽고 푹신한 털가죽 위에 희네가 눕혀지자 유망의 목소리가 들렸다. "헌원, 나가봐." "예. 그러하오면 언제 치료가 끝날지..." 헌원이 공손하게 말하자 유망이 갑자기 빽 소리를 질렀다.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너 언제부터 내게 말대꾸하게 되었지?" 헌원은 유망이 신경질을 부리자 아무 소리 못하고 물러가는 것 같았다. 물건 소리도 유망의 목소리에 놀랐는지 잠시 멈추었다. 헌원이 물러간 듯하자 유망이 말했다. "왜 그치냐? 계속해" 그러자 잠시 중단되었던 물건 소리가 계속 연주되었다. 역시 희네가 아까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 불렀던 그 노랫가락이었다. 유망은 흥얼흥얼하면서 그 노랫가락을 따라 부르다가 말했다. "소녀!" 곱지만 독특한 목소리가 조용히 대답했다. "예" 희네는 그 소리를 듣고 생각했다. '저 물건 소리를 내던 사람이 어제 봤던 그 소녀라는 여자애였구나.' "다른 걸 뜯어라." "예." 소녀는 다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희네는 언제 치료가 시작되는지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러나 유망은 소녀의 곡을 한참이나 더 듣다가 막사를 지키는 장사들을 불러서 희네를 뒤쪽 막사에 데려다 놓으라고 일렀다. 그새 기분이 변했는지, 치료는 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 희네는 뒤쪽 막사로 옮겨진 다음 한참 동안 가만히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막사 안에 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희네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 이 막사도 분명 유망의 막사일 거다. 뭔가 유망의 속셈을 알아낼 수 있을 만한 물건이 있을지도 모른다.' 희네는 조심스럽게 눈을 뜬 다음 막사 안을 살폈다. 막사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매우 넓은데다 좋은 가죽을 깔아놓고 화려한 물건들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이 유망의 막사인 것이 분명했다. 희네는 조심스럽게 물건들 중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가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것은 없었다. 행여 움직인 티가 날까 봐 물건들을 세세히 뒤져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아주 깊숙이 놓여 있는 맨 마지막 바구니에서 한 가지 물건이 희네의 눈길을 끌었다. 특별한 것은 아니고 한 장의 잘 마무리된 가죽이었는데, 그 위에는 검붉은 얼룩무늬가 있었다. 그것을 펼쳐보니 사람들의 손바닥이 잔뜩 찍혀 있었다. 큰 손바닥도 있고 작은 손바닥도 있었는데, 모든 손바닥이 다 피로 찍은 것 같았다. 그리고 손바닥을 찍은 곳에는 각각 동물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더구나 그 바구니 안에는 구리거울과 날카로운 구리칼이며, 빛나는 조개껍질 등 귀한 물건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 이것도 귀한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손바닥을 찍는 것은 약속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피로 찍었으니 대단히 중요한 약속을 한 것인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림은 아무래도 여러 부족을 뜻하는 것 같은데 무슨 부족들간에 약속을 한 기록인지도 모른다.' 희네는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모험을 하기로 마음먹고 그것을 꺼냈다. 그러나 막상 꺼내고 보니 마땅히 간수할 곳이 없었다. 치료를 받게 되면 옷을 벗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희네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방을 뒤졌다. 다행히 방 안에는 뼈로 날카롭게 갈아 만든 바늘과 머리카락을 꼰 실이 있었다. 희네는 아랫도리를 두른 가죽 속바지를 벗고 그 안쪽에 그 가죽을 겹쳐 꿰맨 후 다시 바지를 입었다. '설마 유망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내 속바지를 들여다보진 않겠지.' 희네는 속으로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할 일이 없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막사의 장막을 약간 들치고 보니 장막 밖에는 두 명의 지나족 전사가 희네 쪽에 등을 보인 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 바로 전에 들어갔던 유망의 막사가 보였다. 희네는 별달리 할 일도 없어서 그 막사에 누가 들어가고 나오는가만 살펴보았다. 형천과 금천이 서너 번 막사를 드나들었고 헌원과 축융도 두 번 정도 막사를 오고갔다. 그리고 부족장으로 보이는 듯한 여덟 무리의 사람들이 유망의 막사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모두 지나족 무리들인 듯했다. 유망의 막사에는 아무나 드나드는 것이 아니라서 드나드는 자들은 적어도 큰 부족의 부족장이거나 제사장은 되는 듯했다. 전부가 제각각 부족의 풍습에 따른 화려한 차림을 하고 있어서 쉽게 알아볼 수가 있었다. 대략의 차림으로 보아서는 뱀족과 곰족, 사슴족과 물고기족 등이었다. 유망은 하루종일 막사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며, 종일토록 음악을 듣는지 소녀가 뜯는 물건 소리가 막사에서 그치지 않았다. 처음에는 긴장하여 살폈으나 오랜 시간 그렇게 살펴보고 있으니 그것도 지루했고 점점 긴장이 풀렸다. 더구나 유망은 희네를 막사에 처넣기만 했을 뿐, 음식도 물도 주지 않아서 몹시 배가 고팠다. 그렇다고 정신을 잃은 척하고 있었으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라 희네는 그냥 쫄쫄 굶을 수밖에 없었다. 배고픔은 참을 수 있었지만 목이 타는 것은 참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물을 마시지 않아 소변도 나오지 않으니 도리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희네는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지루함을 참으며 살피기를 멈추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유망의 막사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특히 금천과 축융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잠자야 하는 밤에 되레 드나드는 사람이 많으니 수상하구나. 뭔가 드러내놓고 하지 못할 일을 꾸미는 게 틀림없어.' 아니나 다를까 특이하게 북쪽 부족인 키탄족과 타타르족으로 보이는 두 무리도 들어가고 나왔다. 북쪽 부족이 유망의 막사를 드나드는 것은 좀 심상치 않은 일이라 희네는 그 무리의 우두머리들의 얼굴과 차림새를 더 자세히 기억해두었다. 키탄족은 늑대 무늬를 몸에 그리는 풍습이 있어서 쉽게 구별할 수 있었고 타타르족의 차림새도 금방 구별할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서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주변에 모닥불이 피워져 있어 간신히 구별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남의 눈에 띄는 것을 꺼리는 것처럼 몹시 조심스럽게 유망의 막사에 드나들었다. 그러고 난 다음 희네가 들어보지도 못한 한 무리의 이상한 사람들 셋이 유망의 막사에 들어갔는데, 그들은 기이한 검은 풀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고 머리를 아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뭔가 이상한 느낌을 주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들어갔다 나온 후에 유망이 비로소 막사에서 나왔다. 그 뒤를 소녀 혼자 따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희네는 얼른 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정신을 잃고 있는 척했다. 부스럭거리면서 장막이 걷히는 소리가 들리고 난 후 유망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뭐야? 저 녀석은 뭐지?" 그러자 막사를 지키던 지나족 전사가 대답하는 말이 들렸다. "아까... 염제님이 옮겨 놓으라고 하신 놈입니다. 일단 여기 눕혀두었습니다만..." "아, 그랬나? 맞아, 그랬지. 그래. 그런데 여기에 두었었느냐?" 유망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이어졌다. "그런데 이 녀석, 일어나지 않았었느냐?" "아무 기척이 없었습니다." "하루종일 있었을 텐데도? 물이나 뭘 달라지도 않았느냐?" "아무 기척이 없어서 그냥 뒀습니다." 그러자 '찰싹'하고 뺨을 때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유망이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놈은 아픈데, 그냥 내버려두면 어떡하느냐? 물이라도 먹였어야지. 죽으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정신을 잃은 것 같아서 미처..." 희네는 유망이 그래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줄 알았는데 유망의 다음 말이 들려왔다. "젠장, 멍청하기는! 죽으면 되레 좋다만 하필 내 막사에서냐? 귀신이 되면 재수없잖느냐. 됐으니 썩 꺼져라." 전사가 물러가는 듯하는 소리가 들리자 이번에는 소녀의 조심스러운 듯한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이라도 먹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유망이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길, 이놈이 걱정되느냐?" "아뇨, 아닙니다... 하지만 죽으면... 무서워서..." 소녀가 변명하자 유망은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럼 네가 물을 먹여. 야! 밖에! 찬물을 떠와라!" 밖에서 누군가가 금방 찬물을 떠오는 것 같았고 다시 유망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먹여라. 걱정스럽지? 응?" "그런 것이 아니고..." 소녀가 머뭇거리자 유망이 다시 빽 소리쳤다. "어서어서 햇!" "예..." 소녀의 겁먹은 듯한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부드럽고 따스한 손이 자신의 머리를 감싸더니 찬물이 입으로 흘러 들어왔다. 순간 희네는 솜 같은 부드러운 것이 온몸을 두르는 듯한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러나 지금 정신을 차린 척하면 모든 게 허사가 되므로 희네는 입을 벌린 채 물을 삼키지 않고 옆으로 주르륵 흘려버렸다. "어맛." 물이 흘렀는지 소녀가 조금 놀라는 듯하자 유망이 다시 지체없이 소리를 질렀다. "그것 하나 제대로 못해? 쓸데없는 넌 갖다버리고 내가 직접 할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소녀의 목소리가 울먹이는 듯했다. 희네는 소녀가 난처해지자 속으로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유망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못 넘기면 안 돼! 재주껏 해!" "어떻게..." "입에 물을 물고 먹여!" 그 소리를 듣자 이번에는 희네가 당황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갑자기 정신이 돌아온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윽고 촉촉하고 부드러우며 약간 차가운 입술이 희네의 입술에 와닿았다. 아무리 자제심이 강한 희네라도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는 것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자신의 입술에 와닿은 소녀의 입술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자 희네는 안간힘을 썼다. '뭐 하는 거냐, 희네! 이제 와서 유망에게 들키면 큰일이다. 정신 차려야 한다.' 그러나 부드럽고도 촉촉한 소녀의 입술 촉감에 눌려 희네는 자신도 모르게 물을 한 모금 꿀꺽 삼켰다. 그러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자신의 입 안으로 밀려드는 물을 삼켜야 했는지, 말아야 했는지는 희네로서도 알 수 없었다. 기절한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물을 먹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유망이 자신이 정말 정신을 잃었는지 확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만약 그렇다면 유망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다. "물을 삼키느냐?" 유망이 묻자 입술이 떨어지고 잠시 후 소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렸다. 여전히 울먹이는 것 같았다. "예..." 그런데 유망은 한 술 더 떴다. "됐다. 놈의 옷을 벗기고 가슴 언저리를 세게 밀어라. 그럼 정신이 들 것이다." '이거 미칠 노릇이군.' 희네는 아무래도 이러다가는 큰일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희네가 자제심이 강하다고 하지만 소녀 같은 미녀가 옆에 바짝 앉아 살이 와닿는 판국이니 본능이 꿈틀거렸다. 또한 정신을 잃은 척한다 해도 저절로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정말 참아내기 어려웠다. 더구나 큰일인 것이, 만약 잘못하면 속바지에 감춘 그 가죽 두루마리가 발각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가 시킨 대로 그 나긋나긋한 손으로 희네의 가슴 언저리를 세게 밀며 주무르자 소녀의 몸이 희네의 몸과 바짝 붙었다. '미치겠구나, 미치겠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정말 미치겠구나. 희네야. 정신차려라, 정신차려! 이런 것마저 참지 못하면 어찌 큰 일을 한단 말이냐! 안파견 한님이시여, 도와주소서!' 희네는 속으로 자신의 여자에게 이런 일까지 시키는 유망을 미친 놈이라고 욕도 하고, 돌아가신 어머니도 생각했으며 그밖에 온갖 가지 생각을 다 떠올리며 필사적으로 버텼다.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면 끝장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지금까지 겪은 고통보다도 더욱 참기 힘든 일이었다. 느닷없이 유망이 빽 소리를 지르자 희네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만! 떨어졋!" 순간 소녀의 손이 희네에게서 떼어졌다.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 잠잠하자 희네는 걱정스러웠다. '내가 잘 참았는지 아닌지도 모르겠구나. 잘 참아낸 것도 같은데...' 이윽고 유망은 특유의 권태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놈, 아무래도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구나." "죄... 죄송..." 울먹이는 소녀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렸다. 그러자 희네는 유망이 일부러 소녀에게 그리 시켰다는 것을 확신했다. '정말 누구라도 이런 것은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정말 지독한 사람이군.' 유망을 생각하자 희네의 마음은 다시 싸늘해져서 쿵쿵거리던 심장도 순식간에 평온해졌다. 그때 유망이 다가오더니 희네의 풀어헤쳐진 가슴 언저리에 손을 대보았다. 그러고는 곧 손을 떼더니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정신이 들만도 한데..." 유망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덧붙였다. "너, 여기서 좀 기다려라. 내, 약을 좀 가져와야겠다." "예..." 유망이 밖으로 나가는 것 같아 희네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잠시 후 놀랍게도 소녀가 희네 곁에 바싹 붙어 앉는 것이 아닌가. '아니, 유망이 또 뭔가 시켰나?' 다시 희네의 심장이 쿵쿵거리려고 했다. 그런데 더더욱 미치겠는 것이, 이번에는 소녀가 희네의 가슴을 부드럽게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그 손끝은 소름이 오싹오싹 돋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이... 이 여자가 뭘 하는 거냐?' 이윽고 소녀의 몸이 자신의 몸 위로 포개어지더니 자신을 꽉 끌어 안고 입맞춤을 하는 것이었다. 아까처럼 물을 먹이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아예 노골적인 행동이었다. 소녀의 부드러운 가슴이 와닿으며 입술이 강하게 밀착하여 숨결을 빨아들이자 희네는 그만 기절해버릴 것 같았다. 모든 정신까지 다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 여자가 미쳤나? 어째서...' 그때 다행히 유망이 돌아오는지 인기척이 들리자 소녀는 얼른 희네에게서 떨어졌다. 순간, 희네의 얼굴 위로 따뜻한 물 한 방울이 떨어졌는데 아마 소녀의 눈물인 듯했다. 희네는 안도했지만 마음 한켠으로는 무척 아쉽기도 했다. 이윽고 유망이 혼잣말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들어왔다. "질긴 놈 같았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어제는 허풍을 떤 것이란 말인가? 그 정도로 약한 놈이 아닌 것 같았는데 대체 뭐가 잘못된 건가? 좌우간 빨리 끝내버려야겠다." 이번에는 소녀 대신 유망이 희네 옆에 와 앉았다. 유망이 비로소 손을 쓰려는 것 같아 희네는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탁탁'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유망이 부싯돌로 불을 붙이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묘한 향기가 코로 흘러들어왔다. '이건 뭐지?' 조금 지나자 몸이 둥실 떠오르는 듯하며 정신이 몽롱해져 갔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고 항상 느껴오던 고통도 거의 느끼지 못할 만큼 기분이 묘해졌다. 유망의 손이 희네의 손목을 잡고 손가락으로 맥을 보는 듯했다. 그러고는 유망이 희네의 왼쪽 다리 여기저기를 세게 손가락으로 눌렀다. 한 번 누를 때마다 흠칫흠칫한 고통이 치밀어 점점 쌓여가듯 심해졌다. 다행히 희네의 옷을 벗기지는 않았지만 나중에는 정말 참기 힘들 정도로 저릿저릿하고 아프다가 이윽고는 욱신거리며 고통이 누적되기 시작했다. 유망이, 치료를 받다가 아파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묘한 향기를 맡아서 고통이 별로 없는 상태인데도 이렇게 심하다니, 그 향기가 없었다면 아마도 어제처럼 정말 까무러치거나 참다 죽을지도 몰랐다. 소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건 무엇인가요... 저는... 저는... 견디기가..." 곧이어 유망이 쏘는 듯한 목소리로 날카롭게 말했다. "좋으냐? 좋지? 아마 꿈속을 헤매는 기분일 거다. 빌어먹을 계집아." "저... 는..." "이 녀석이 기절했다가 못 참고 죽으면 안 되니까 피운 거다. 너도 좀 맡아봐라. 기분 좋지? 좋을 거다." 유망도 좀 들뜬 것같이 계속 중얼거렸다. "나까지 미치면 안 되니까 조금만 피운 거다. 안 그랬으면 네 년은 그 자리에 넘어져서 누가 옷을 다 벗겨도 모를 거다." 희네는 그 와중에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정말 요사스러운 냄새다. 사람을 몽롱하고 미치게 만들다니, 유망은 이런 무서운 약도 가지고 있구나.' 유망이 피운 것은 일종의 태우는 마약으로 아편 비슷한 것이었다. 다행히 유망 본인이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좀 약하게 피웠기 때문에 희네도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그리고 희네는 몹시 고통스러워하던 중이라 그 향기를 그나마 잘 버텨냈다. 그렇지 않았으면 희네도 별수 없이 의식을 잃었을 터였다. 그러나 소녀는 그런 참을성이 없었는지 벌써 좀 몽롱해하는 듯했다. 어느새 유망은 희네의 다리를 찌르던 것을 멈추었다. 다 끝난 듯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소녀와 유망의 거친 숨소리만이 막사 안에 들려왔다. 이윽고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왜... 절 그런 눈으로 보시나요..." "네 년이 미워서 그래." 유망은 쏘는 듯이 말했지만 약기운에 취해서인지 목소리가 한층 뾰족하게 변해 있었다. 사실 희네도 둥실둥실 구름 속을 떠가는 듯, 모든 것이 몽롱하기만 했다. "저를 왜... 미워하시나요..." "네 년이 예뻐서. 너무 지나치게." "그런데 어찌저를... 미워... 하시..." "걸친 걸 다 벗어라." "예? 하지만..." "어서 다 벗으란 말이다. 이 빌어먹을 계집아." 유망이 상스러운 욕을 해대자 잠시 후 소녀가 옷을 벗는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희네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으나 저절로 상상이 되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눈을 뜨고 살짝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상한 약기운 때문에 더더욱 가슴이 뛰었지만 그래도 희네는 이성을 잃지는 않아 눈을 뜨거나 움직이지 않을 수 있었다. 잠시 후 기절초풍할 말이 유망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 녀석을 안아봐라." "옛?" "빨리!" "그... 그것은..." "어서 햇!" 유망의 호통소리와 함께 철썩철썩 소녀를 때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희네는 정말 기절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저런 미친놈이 어디있나 싶어 속으로 온갖 욕을 퍼부었다. 소녀가 불쌍하기도 했지만 가슴은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잠시 후 소녀가 할 수 없는 듯 희네에게 몸을 기대어 왔다. 걸친 것 없는 알몸이 희네의 몸에 와닿자 미칠 지경이었다. 희네는 온힘을 다해 속으로 외쳤다.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해!' 희네는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을 했고 이빨로 혀끝을 질끈 깨물었다. 혀끝이 잘라져 뜨뜻한 피가 입 안에 머금어지도록 자꾸 깨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무지 참아낼 수가 없었다. 소녀는 희네를 끌어안고 '흑흑' 소리를 죽여서 흐느껴 울었다. 만약 소녀가 울지 않았다면 악다구니로 버티는 희네 역시 참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녀의 가련한 울음이 삼분, 어머니의 생각 삼분, 고통이 삼분 정도 역할을 하여 희네는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흥분을 눌러 참을 수 있었다. 별안간 유망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만!" 그러더니 소녀의 몸이 뭣에 당겨리지라도 하듯 휙 희네의 몸에서 나꿔채어졌다. 그리고 우당탕거리며 유망이 소녀를 덮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희네는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한편으로는 조금 아쉽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유망의 미친 짓이 한없이 더럽고 혐오스럽게 여겨졌다. 유망의 거친 숨소리와 소녀의 헐떡거리는 신음 소리가 들려왔으나, 희네는 혐오감이 꽉 차올라 평정을 잃지 않았다. 순간 유망이 벌떡 일어나더니 찰싹찰싹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더불어 소녀의 '아,아' 하는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유망이 소녀의 뺨을 후려갈기는 모양이었다. "이년아! 아무리 예뻐도 별 수 없다. 네 년도 안 되는구나, 안 돼." 그 소리를 듣고 희네는 생각했다. '뭐가 안 된다는 거냐? 미친 놈." 유망은 소녀를 마구 때리는 듯 소녀의 신음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그러다가 유망이 맥이 빠지고 묘하게 처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년도 안 된다, 안 돼. 느낌이 없어. 안될 거 같아." '무슨 느낌이 없다는 건가?' 희네는 속으로 생각하다가 뭔가 집히는 것이 있었다. 이윽고 유망의 힘없는 절규가 들려왔다. "왜 나는... 나는 안 되는 것이냐! 왜..." 이윽고 유망이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고 소녀의 흐느끼는 소리 사이로 놀랍게도 유망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치 빠른 희네는 이제야 유망의 행동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이제 보니 유망 저 사람은 사내 구실을 못하는 자로구나! 그래서 성격이 이상해지고 괴팍해졌구나!' 유망은 신농이 남긴 약초와 의약을 비법을 익히느라 수많은 약초를 맛보아야 했고, 그 와중에 실수로 독초를 삼켜서 이후로는 사내 구실을 할 수 없는 성불구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래 전 최초의 신농씨도 수많은 풀을 맛보며 약을 가려내다가 독초를 수없이 맛보아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온몸이 성한 곳이 없는 추한 몰골이 되어 버렸다고 하는데, 유망도 그만큼은 아니지만 큰 희생을 치렀던 것이다. 본래 유망은 대영웅의 기개를 타고났으며 근골도 늠름한 호남아였다. 그런데 사내 구실을 못하게 되었다는 분노와 수치심, 자격지심이 그를 묘하게 비틀린 지금의 성격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더구나 지금 희네에게 쓴 것 같은 마약을 자주 사용하여 일종의 중독 상태가 되어 있었으므로 평상시의 성격은 더 비뚤어졌다. 그럼에도 대부족장의 자리를 유지하고 형천이나 헌원, 금천 같은 영웅들을 부하로 거느릴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원래 그릇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허나 지금 유망은 약에 취하고 기분이 상해서, 더없는 미치광이처럼 굴고 있었다. 희네는 유망이 좀 불쌍해졌다. 잠시 후 유망은 흐느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네 년... 네 년도 소용없다. 어차피 날 괴롭히기만 하는 년일 뿐이다. 쑤앙마이가 가르친 것도 내게는 소용이 없어." 그러다가 유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년이! 넌 누굴 보고 있는 거냐?" "아... 아닙니다." "거짓말 마라! 저놈을 보고 있었잖느냐! 이 개 같은 년!" 소녀가 문득 희네에게 눈길을 주는 것을 본 유망이 길길이 날뛰며 소녀를 때리고 발로 찼다. 유망은 끊임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이 나쁜 년! 나에게 바쳐졌으면서 한눈을 팔아? 응? 저놈이 젊고 잘생겼다, 이거지? 저런 허여멀겋고 계집애 같은 놈이 좋다 이거냐? 이런 쓰레기 같은 년! 죽어라 죽어!" 유망은 소녀를 잡다시피 두들겨 패고 발로 차는 것 같았다. '악악' 하는 비명이 들리다가 이윽고는 그마저도 기운 없는 '윽윽' 소리로 바뀌어갔다. 희네는 소녀가 너무 가엾어졌다. 자기 때문에 소녀가 저렇게 당한다고 생각하니 당장에라도 박차고 일어나 유망을 말리고 싶었으나 그럴 수도 없었다. 이윽고 유망은 자조적으로 '으흐흑' 흐느끼다가 돌연 또 모진 목소리로 외쳤다. "네 년을 죽이고 싶다만 그것으로는 만족 못하겠다. 그래, 네 년을 괴롭히고 싶어! 네 년을 나보다 더 늙고 못생기고 기운 없는 놈에게 보내주지! 하하핫! 아마 평생 벗어나지 못하고 늙어 죽을 때까지 사내 냄새도 못 맡고 지내야 할 것이다!" 유망은 미친 듯이 낄낄거리며 웃고 울고 하다가 외쳤다. "네 년을 나는 주신 한웅 놈에게 바치겠다! 다 죽어가는 늙은이고 얼마 못 살 거지만 일단 한웅의 마누라이니 다른 남자는 이제 꿈도 못 꿀 거다! 다른 남자에게 손댔다가는 산 채로 땅에 파묻힐 거야! 하하핫! 너 같은 년은 그래야 해! 다른 놈에게 줄 수 없단 말이다!" 그러더니 유망은 돌연 몸을 돌려서 희네를 거칠게 자리에서 끌어내어 땅에 내동댕이쳤다. "이 개 같은 새끼! 너도 필요없다. 너같이 번드르한 새끼들이 싫어! 난 싫단 말이다!" 유망은 무자비하게 희네를 발로 계속 걷어찼다. 물론 그 고통은 다리나 치료 과정의 고통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너 같은 녀석은 치료해주지 않겠다! 치료하지 않겠어! 나는 주신 새끼들이 싫어! 뒈져라! 뒈져! 너 같은 새끼를 고치겠다고 한 내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다!" 욕을 퍼부으면서 자신이 지칠 정도로 희네를 다시 걷어찬 유망은 숨이 차서 씩씩거리면서 소녀에게 외쳤다. "소녀!" "예..." 소녀가 간신히 대답하자 유망이 목소리를 높였다. "너는 이제 주신의 늙다리 한웅에게 가는 거다. 하지만 넌 이미 내거야. 알아?" "예... 예..." 희네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꽉 깨물었다. 만약 유망이 사와라 한웅에게 소녀를 바친다면 한웅에게 소녀를 바친다면 소녀는 그 미모도 미모려니와 지나족 대부족장의 선물이었으니 당연히 한웅의 일곱 번째 마누라가 될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소녀는 꼼짝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내 말을 듣지 않을지도 모르지. 내가 밉지? 그렇지? 그럼 더 미워하게 해주지." 유망은 뭔가를 부스럭거리며 꺼내는 것 같았다. "얼른 삼켜!" "이... 이게 무엇인지요..." 소녀가 되묻자 다시 찰싹 소리가 나며 유망이 소리를 질렀다. "삼켜, 이년아!" 잠시 후 소녀가 그것을 삼켰는지 유망이 다시 음침하게 웃었다. "으흐흐흐... 그건 독이야, 독." "네? 아앗!" "흐흐흐... 열흘마다 내가 주는 약을 먹지 못하면 고통에 겨워 길길이 날뛸뿐더러 온몸이 퍼렇게 변해 썩어 들어가는 독이다. 흐흐... 이제 너는 내 말을 안 들으면 썩어서 죽는 수밖에 없어. 지금 네게 같이 준 약은 스무 알이다. 이백 일이 되면 너는 어떻게든 내게 돌아와 내가 바라는 것을 주고 약을 받아야 해! 내 기분이 상하면 약은 더 없다! 그 잘난 낯짝도 퍼렇게 썩고 코도 뭉개져서 없어져 버릴거다. 눈알도 쑥 빠져나가 땅에 굴러다닐 테지. 흐흐흐..." 다른 사람도 아닌 염제 신농 유망이 준 독이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희네는 생각했으나 그 잔임함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그 말을 듣자 소녀는 미친 듯 소리치며 울었다. "아아악!" "우하핫! 이제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 이년아. 너는 이제 주신 한웅에게 가서, 내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모조리 알아내야 한다. 안그러면 너는 죽는 거야. 썩어 문들어져서 구더기가 네 얼굴을 파먹게 될 것이다. 우하하...! 우하하핫!" 유망의 미친 듯한 웃음소리와 소녀의 흐느끼는 소리가 악몽같이 울려퍼졌다. 희네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더욱 힘주어 감고 싶었고 할 수만 있다면 눈꺼풀로 귀까지 막아버리고 싶었다. 곧이어 유망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형천! 형천! 제기랄!" "옛!" 유망이 부르자 형천은 근처에 있었던 듯, 금방 대답하는 소리가 났다. "내 못 보일 꼴을 보였어. 입을 막아." "옛!" 다음 순간, 장막 앞에 섰던 지나족 전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듯했다. 그러나 퍽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나족 전사들은 끅끅 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희네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유망은 자신이 못난 꼴을 보이자 자기 부하들까지도 죽여버린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커다란 손이 자신을 훌쩍 가볍게 들어올렸다. 형천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녀석은...?" "그놈도 그냥 둘 수 없어!" 이제 희네는 죽었구나 생각했다. 유망의 큰 비밀을 알게 되었지만 이렇게 속절없이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전신의 맥이 풀렸다. 그때 형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아이는 정신을 잃고 있었잖습니까? 그리고 헌원에게 이 아이를 고쳐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여기서 죽이신다면..." 희네는 형천에게 일말의 기대를 했지만 유망은 희네가 몹시 기분 나쁜 듯 외쳤다. "약속 따윈 아무래도 좋아! 그놈은 기분 나빠!" "그러나 이 녀석이 제 손에 죽게 된다면, 헌원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고 할 것입니다. 그건 좋지 않습니다." 그 말에 유망이 뭐라고 투덜거리더니 욕을 하면서 외쳤다. "제기랄, 빌어먹을 헌원놈. 알았어. 그럼 가둬둬!" "알겠습니다." 희네는 죽음 바로 직전에 살아난 것 같았다. 희네는 속으로 생각했다. '형천, 당신이 날 살렸군.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나도 당신을 꼭 도와주겠소' 소녀는 공포에 질려 흐느끼며 울었다. 그 모습을 보며 유망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저년도 가둬둬. 그리고 사와라 한웅 늙다리에게 던져줘. 내가 바치는 거라고 해." "알았습니다. 따라와!" 희네는 형천의 손에 번쩍 들려져 어디론가 향했다. 그 뒤를 흑흑거리며 소녀가 따라왔다. 잠시 후 희네는 어느 곳에 던져졌는데 축축하고 차가운 흙이 잡혀지는 것으로 보아 어두운 토굴 같은 곳에 처박혀 버린 것 같았다. 소녀도 함께 처박힌 듯, 곁에서 흑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눈을 떠보았으나 눈을 감은 것과 마찬가지로 온통 깜깜하기만 했다. 아마 아주 깊숙한 동굴인 듯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소녀의 흐느끼는 소리가 조금씩 메아리지는 것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말고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희네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보았다. 생각할수록 난감했다. 아마 이곳은 죄지은 자를 가둬두는 곳이 분명하다. 지키는 자가 있을 것이니 혼자 힘으로 도망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 헌원 덕분에 당장 자신을 죽이지는 않는다 해도 유망이 언제 마음이 변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죽이지 않는다 해도 태산 회의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 갇혀 있을 수는 없었다. 유망은 분명 일을 저지르고도 남을 자였다. 그것을 알려야 했다.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이 여자를 이용하는 수밖에.' 희네는 소녀에게 말을 걸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가만. 이 여자도 내가 정신ㅇ르 잃은 것으로 아는 게 좋을 거야. 안그러면 부끄러워할 테니... 그리고 내가 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걸 유망이 알면 나는 죽은 목숨이다. 이 여자에게도 알게 할 수 없어.' 희네는 잠시 때를 기다렸다. 이윽고 소녀의 흐느끼는 소리가 그치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희네는 일부러 신음소리를 내며 정신이 드는 척했다. 소녀가 얼른 말했다. 지나족 말이었다. "정신이 드나요?" 소녀는 어두운 토굴에 갇히자 몹시 무서웠던 듯 목소리에 반가운 기색이 돌았다. "여기가... 어디죠? 왜 내가 여기 있죠?" "그건... 말할 수 없어요 좌우간 다행이네요 너무 무서워서... 난 너무 무서워서..." "나는 주신의 사울아비 희네라고 합니다. 아파서 정신을 잃고 있었는데... 여긴 어디죠? 그리고 당신은...?" "나는 소녀예요. 어제 염제님 막사에서 본 적 있지요?" "아... 예... 목소리를 들으니 그런 것 같군요... 그런데 여긴? 지나족 막사인가요?" 희네가 능청스럽게 묻자 소녀는 곧 대답했다. "그래요. 죄지은 자를 가둬두는 토굴이에요."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죠? 병을 고치려고 아마 염제 신농님께 보내진 것 같은데... 내가 왜 여기 있는지...?" 희네는 끝까지 둘러댔다. 소녀는 다시 안도한 듯 흑흑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희네는 모르는 척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소녀는 희네가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워낙 얼굴도 잘생겼고 처음 보았을 때 기개도 대단했으며, 더구나 희네는 모른다고 하지만 자신은 희네에게 입도 맞추었고 알몸으로 안기기도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소녀는 자신이 먹은 독약이 무서워서라도 희네에게 말을 지어낼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자신이 쑤앙마이 부족 출신으로 유망에게 바쳐졌는데, 유망의 잠자리 시중을 들다가 비위를 잘못 맞추어 사와라 한웅에게 보내지게 되었다고 했을 뿐 자신이 독을 먹었다는 것도, 사와라 한웅에게 첩자로 보내진다는 사실은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더구나 희네와 분명 함께 갇혔으면서도 그런 말은 하지 않고, 희네가 먼저 갇혀 있는데 자신이 들어왔다고 둘러대어 희네가 왜 갇혔는지에 대한 물음은 모조리 피해 넘어갔다. 그 말솜씨가 어찌나 교묘하고 태연한지 희네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도 보통이 아니구나. 이런 놀란 와중에도 말을 저렇게 잘지어내다니. 내가 몰랐다면 난 그대로 믿었을 것이다. 이 여자 머리 돌아가는 것도 대단하다.' 희네는 그냥 모른 척하며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며칠 안으로 주신족에게 가겠군요?" "예..." "그러면 내 한 가지 부탁하겠소. 주신 사울아비 중에 내 아우가 있소 나래라는 아이인데, 덩치가 크니 찾기 쉬울 겁니다. 그 아이에게 내가 여기 갇혀 있다고 좀 알려주십시오." "누군지 알 듯 하군요." "어떻게요?" "어제 본 사람인 것 같아요. 막사문을 부수고 들어온 사람 말이죠? 정말 힘센 장사였어요.? 희네는 능청을 떨었다. "그런 일도 있었나요? 난 어제부터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희네가 말끝을 흐리자 소녀는 슬픈 듯 말했다. "만약 당신이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면 염제님께 당장 죽었을 거예요." 그러면서 소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정신을 차리고도 나를 무시한 거라면 내가 죽일 수도 있었어.' 그런 싸늘한 생각을 하다가 소녀는 다시 덧붙였다. "그런데... 그 부탁은 들어주기 어렵군요." 소녀의 뜻밖의 말에 희네는 난처해졌다. "왜요?" "나는 비록 벌을 받고 있지만, 염제님의 사람이에요. 그런 내가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려주는 건, 염제님을 배반하는 게 되잖아요? 카린족은 배반하지 않아요." 희네는 뭐라 할말이 없었다. 갑자기 소녀가 웃었다. "물론 방법은 있어요." "뭐죠?" "나는 염제님의 사람이라 배반할 수 없어요. 그러나 염제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 부탁을 들어줘도 배반하는 건 아니죠." "그 말은...?" "솔직하게 말하죠. 나는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그러니 당신이 나를 당신 사람으로 만드세요. 그러면 돼요." "어떻게 당신 사람으로 만든다는 거죠?" 대뜸 소녀가 대담하게 희네의 목을 팔로 끌어안았다. 희네는 순간 아찔해졌다. 사실 특별한 윤리나 법도가 없던 시절이라 남녀가 좋으면 어디서나 같이 잘 수 있는 것이 당시의 풍습이었다. 희네도 더 참기는 어려웠다. 그때, 갑자기 이상하게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꿈에서 본 얼굴인 듯, 정확하게 생각나는 얼굴이 아니었지만 그 여자얼굴이 떠오르자 다시 정신이 맑아졌다. 이상하게 일렁거리던 마음이 돌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희네가 살그머니 소녀의 팔을 풀어냈다. "가만가만. 지금은 안 됩니다." "무슨 소리죠?" 소녀는 화난 듯이 목소리가 샐쭉해졌다. 소녀는 벌써 숨소리가 높아져 있었다. 그것을 깨닫고 희네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는 조금 전에 그런 일을 겪고도 참지를 못하는구나. 겉보기에는 안 그럴 것 같은데, 정말 밝히는 여자인가 보군.' "당신은 조만간 우리 한웅님께 바쳐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당신과 내가 같이 자면 내가 한웅님을 배반하는 게 됩니다." 소녀가 볼멘소리로 되받았다. "그건 다음 일이고, 오늘은 아니잖아요. 주신 한웅님은 늙으셨다는데... 그리 가면 나는 다시는 남자와 잘 수 없을지 몰라요." "하지만..." 소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남자와 잘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워왔어요. 다른 부족에 바쳐질 여자였기 때문이죠. 그러면서도 정작 남자와는 아직 한 번도 못 잤어요. 바쳐질 여자는 깨끗해야 했기 때문이에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아나요?" '알고 보니 불쌍하구나. 어려서부터 그렇게 키워졌으면 이러는 게 당연할지도 몰라.' 그러나 희네는 속내를 내비치지 않았다. 소녀가 계속 말했다. "그런데... 염제님은 나를 내쳤고 이제는 늙으신 주신 한웅님에게 가요. 오늘이 아니면 나는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요.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사실 희네도 피끓는 남자였다. 당장이라도 소녀를 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아직 소녀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소녀와 자려면 옷을 벗어야 하는데, 두루마리가 발각날 수도 있었다. 그것도 이유였거니와 희네는 생각이 깊었고, 이상하게도 여자와 자는 문제에만 부딪치면 자고 싶은 생각이 달아나곤 했다. 여자가 싫어진다기보다, 자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저절로 생각나곤 하는 것이다. 마치 누가 바로 옆에서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였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희네는 무심결에 내뱉듯이 말했다. "나는 당신이 불쌍해요." "그러면...?" "그러나 당신을 지금 안으면 안 됩니다. 사울아비로서 한웅님을 배반할 수는 없어요." "정말로요?" 그 목소리는 너무도 처량하고도 매혹적이라, 희네는 당장이라도 소녀에게 덤벼들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희네는 억지로 그 충동을 참았다. "그러나 방법이 있어요. 당신이 나를 구해준다면, 나는 반드시 한웅님 곁에서 당신을 얻어오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정말 내 사람으로 만들 겁니다. 그 다음에 같이 지내면 되겠지요." 그 말에 소녀는 반색하며 물었다. "정말로요? 정말 그럴 수 있나요?" "정말입니다. 만약 내 사람으로 못 만들더라도, 좋은 사람에게 갈 수 있도록 해줄 겁니다. 주신 사울아비 희네가 맹세합니다." 희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금 여유를 두어 맹세를 했다. "다른 사람은... 싫어요." 그러면서 소녀는 희네 곁으로 몸을 바싹 붙였다. "정말 맹세를 지킬 거죠?" "맹세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 나를 구해줄 거죠?" "그렇습니다." 그러자 소녀는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당신 말대로 할게요. 카린족은 마음이 굳세요. 저를 버리면 안 돼요. 여자를 배반하면 반드시 복수해요. 알았죠?" 희네는 어쨌거나 지금 희망은 소녀뿐이었으며, 또 마음으로도 소녀가 가련하고 좋았기 때문에 흔쾌히 말했다. "걱정 말아요." "그러면 내가 주신족 쪽으로 가게 되면 어떻게든 수를 써서 당신 아우에게 알려줄게요. 그러면 되는 거죠?" "예" "나도 오늘은 참을게요. 그러나 이렇게 옆에 꼭 있어줘요. 그건 괜찮죠?" "그렇게 해요." 소녀가 좀 떨고 있는 듯하자 희네는 소녀를 달래기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몇 가지 들려주었다. 희네나 소녀 모두 지나 말에 능통해서 우스갯소리도 나눌 수 있었다. 희네는 본디 우스갯소리를 아주 좋아했으므로 소녀의 기분 푸는 일쯤은 쉽게 할 수 있었다. 소녀가 마음이 좀 풀어진 듯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나는 사실 걱정이 있어요. 그건..." "뭐죠?" 희네는 속으로 자신이 유망의 독을 먹은 것을 말하려나 보다 생각했다. "아니에요.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아니, 나 혼자 해야죠." "뭘 말입니까?" 소녀는 '훗'하고 웃으며 짧게 말했다. "앙갚음이죠" 이제까지의 가련하고도 고운 목소리와는 달리, 그 목소리에는 오싹한 한기가 서려 있어서 희네는 갑자기 소름이 쫙 끼쳤다. '이 여자는 보기에 가련하고 예쁘기 그지없지만, 사실 머리도 빠르고 마음이 독할지도 모르겠구나. 좌우간 여자들의 속은 알 수 없어.' 그러는 사이 소녀는 역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생각을 희네나 다른 사람이 알았다면 아마 크게 놀랐을 것이다. '염제 그 녀석은 용서 못해. 나에게 독을 먹인 것도 그렇지만... 나를 보고도 사내 구실을 못하다니... 그런 등신은 반드시 죽이고 말 거야.' 그러는 사이 어느덧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희네는 잠이 들었고, 희네가 잠든 사이 소녀는 밖으로 불려 나가버렸다. 희네가 눈을 뜨자 소녀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구출 "오늘부터는 한웅님을 직접 뫼시게 된다. 모두들 정신 바짝 차리도록 해라." 비렴의 엄숙한 지시로 도 하루가 시작되었다. 이제 하루만 더 지나면 태산 회의다. 나래를 비롯한 열두 명의 젊은 장정들은 비렴의 앞에 어깨를 쭉 펴고 서 있었다. 그들 중 일곱 명은 힘이 세고 건장한 사울아비들이었고, 두 명은 몸이 아주 날쌔고 발이 빠른 사람이었으며, 세 사람은 각각 무당과 단군, 주술사였다. 건장한 일곱 사람 중 가장 힘센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나래였지만 부루벼락이라는 성질 급하고 성인식을 이미 치른 청년과, 쇠돌이라는 아직 아이 티를 벗지 못한 소년도 무척이나 힘이 셌다. 특히 쇠돌이는 자신보다도 어렸지만 그 힘은 은근히 놀라운 데가 있었다. 아홉구비를 먹기 전의 나래보다 강할지도 몰랐다. 발 빠른 두 사람은 마파람과 날램이였는데, 마파람은 희네의 매 이름과 똑같았다. 마파람은 눈 하나가 없는 애꾸였고 비쩍 몸에 마르고 항상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기분 나쁜 청년이었다. 날램이는 키가 작고 얼굴도 동글동글하여 절대 날래 보이지 않았으나 보기와는 다르게 기가 막힐 정도로 달리는 것이 빨랐고 몸이 날쌨다. 무당은 남자무당인 박수였는데 도단이라는 그 아이는 자그마하고 여자아이처럼 귀여운 얼굴이지만 두 눈이 먼 봉사였다. 눈먼 봉사라야 제대로 된 박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작은 단군인 질쾌는 약초와 뼈맞추기 등을 잘해서 단군 중에서도 의원에 가까웠는데, 하는 일에 어울리지 않게 덩치가 커서 거의 나래만 했다. 주술사인 스름이는 열두 명 중 단 하나뿐인 여자였으며, 못난 것은 아니었으나 얼굴빛이 푸르스름하고 분위기가 음침하여 남자들은 전부 그녀를 보면 슬슬 피했다. 그녀는 신지울태의 직계 제자로 표정에 변화가 아예 없었다. 말수도 극히 적었고 남자들이 피하는 것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했다. 열두 사람은 모두 각각 특기가 있어 저마다 삼사에게서 한두 가지 재주를 배웠는데 누가 무슨 재주를 배웠는지 다른 사람은 알 수 없었다. 나래는 아주 특별할 때만 써야 한다는 신신당부와 함께 두 가지의 글자 무늬를 몸에 그려 받게 되었다. 그 글자 무늬는 등에 그려져서 나래 자신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등에 새긴 글자 무늬는 잠시 동안 바위산처럼 몸을 단단하게 만드는 '바위뫼' 글자 주술과 성난 곰처럼 주먹을 강하고 세게 만들어주는 '성난곰' 글자 주술의 두 가지였다. 글자 무늬를 새겨준 운사 신지울태는 두 가지 주술 모두 한번 쓰고 나면 효력이 없어진다고 했으며, 한번 썼을 때 약 한 각(15분)정도 주술이 지속된다고 말해주었다. 글자 주술을 사용하려면 정신을 집중해야 했고 주문을 외워야 했기 때문에 그것을 연습하는 데 하루가 꼬박 걸렸다. 그리고 나머지 반나절은 그동안 익힌 것을 다시 한 번 연습해 보는 데 보냈다. 이 열두 사람은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고된 연습을 했고 또 다 같은 순수 주신족으로만 이루어져 있었기에 음침한 스름이 하나만 빼고는 다들 금방 친해졌다. 다만 나래는 형 생각에 우울해서 그들과 그리 깊게 사귀지 못했다. 그간 몇 번이나 지나족의 막사로 가서 형을 만나겠다고 해보았지만 통 들여보내주지 않았던 것이다. 비렴과 병예에게 상의해보았지만 아직 별일 없으니 조금만 더 두고 보자는 이야기뿐이었다. 나래는 한숨만 쉬었다. 치베는 자신이 지나족 막사로 숨어들어가 보겠다고 했으나 자칫하면 일이 커질 것 같아서 나래가 말렸다. 야율쿠리나 초초룬도 걱정해주었는데 그후 며칠 동안 그들 부족들도 각각 바쁜 일들이 생겨서 나래를 만나지 못했다. 아버지 치우우레는 태산 회의 때 보일 큰 행사를 준비하느라 바빠서 그들 형제를 찾지 못했다. 아주 성대하고 큰 행사라고 했는데 치우우레는 양역을 보내 그 행사 때에는 나래도 끼게 해달라고 삼사에게 부탁했고 비렴은 조금 생각하다가 좋다고 응낙했다. 나래가 무슨 일인데 준비도 없이 할 수 있느냐고 양역에게 묻자 양역은 웃으며 그냥 앞장만 서면 되는 일이니 염려 말라고 했다. "지금부터 한웅님 막사 주위에 서서 지키는 일을 시작한다. 연습한대로 하거라." 비렴의 호통이 떨어지자 나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래도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한웅님의 막사 주변에 서서 지키기를 시작했다. 지키는 것은 사실 단순한 일이었지만 삼사를 포함한 열다섯 명의 사람들은 뭔가가 날아오지 않는지, 위험한 동물이나 독을 지닌 생물이 가까이 오지 않는지, 근처에 수상한 자들이 얼쩡거리거나 먼발치라도 사람들이 이유없이 모여 있는 기척이 보이는지 등을 항상 정신차리고 경계해야 했다. 그리고 한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발빠른 두 사람이 교대로 사울아비 진영에 상황을 알리기로 되어 있었다. 삼사와 단군, 발빠른 두 사람은 한웅 옆을 에워싸듯 지켰고, 다시 두 명의 사울아비와 무당이 한웅 앞을 막아서서 비상시에 대처하며, 다섯 명의 사울아비와 주술사는 그 위험한 것을 맞아 싸워야 했다. 가장 힘이 센 나래는 그 맨 앞 선두에 서는 여섯 명 조의 조장격이었다. 그 때문에 평상시에도 나래가 한웅의 막사 입구를 지키게 되어 있었다. 사실 기대는 많이 했으나 그뿐이었고, 삼사를 제외한 열두 명의 젊은이들은 아직 한웅님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 몇몇 상황을 보고하는 사울아비들과 연락병들이 드나드는 것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다른 부족들도 모두 도착한 후라서 부족장들도 드나들지 않았다. 사실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반나절 가량 경계를 하고 있는데, 저족에서 행차 하나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화려하게 차린, 스무 명 남짓한 행렬이었다. 이미 저쪽에서 다른 사울아비들이 그들이 누구인가 세워서 묻고 있었지만 나래도 연습할 겸 그 사실을 삼사에게 알렸다. 병예가 나와서 말했다. "오늘 유망이 한웅님께 선물을 바친다 하더구나. 그 행렬인 듯하나, 어떤 경우에도 마음을 놓지는 말거라." 잠시 후 그 행차에서 평범한 전사들은 그 자리에서 멈추고, 유망의 부하인 듯한 늙은이 한 사람, 붉은 꽃으로 온몸을 덮어쓴 여자 한 명과 그 뒤를 따르는 자그마한 계집아이 하나, 이렇게 세 명만 통과가 되어 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나래 옆에 서 있던 쇠돌이가 입을 열었다. "선물이란 게 사람인가? 아항, 아주 예쁜 여자인가 보네. 그치, 나래 형?" 쇠돌이는 퍽 성격이 좋아, 사실 자기와 나이도 비슷한 나래가 허락도 안 했는데 나래를 형이라 부르고 있었다. 나래는 희네 생각에 마음이 심란한 터라 별 생각없이 '응'하고 말았다. 그때 병예가 안에 기별을 했는지 한웅의 막사 안에서 한 여인과 세 명의 시중드는 듯한 여자들이 휙 걸어나왔다. 그 여인은 사와라 한웅의 여섯 번째 마누라인 부루버들이었다. 부루버들은 신시 안에서도 예쁘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여인이었는데, 지금 그녀는 몹시 언짢은 듯, 인상을 찌푸리며 빠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야기로만 듣던 한웅님의 마누라를 보자 열두 젊은이들 중 아홉 명의 젊은이들이 눈을 크게 떴다. 여자인 스름이와 장님인 도단이, 그리고 형 생각만 하고 있는 나래만이 미처 보지 못했다. 부루버들의 용모는 그 정도로 뛰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방금 막사를 나선 부루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얼굴만큼 듣기 좋지는 않았다. "또 계집입니까? 저걸 어떻게 못하나요?" 아무리 자신이 한웅의 마누라라고는 하지만, 모든 이에게서 존경받는 삼사 중의 한 명이자 최연장자인 병예에게 할 말투는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병예는 내색하지 않고 정중하게 말했다. "지나족의 유망이 한웅님께 바치는 선물입니다. 선물을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듣기 싫으니 썩 돌려보내요! 죽여 묻어버리거나!" 부루버들의 입에서 독기가 서린 말이 튀어나왔다. 그 말을 들은 열두 젊은이들은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크게 놀랐다. 병예가 다시 간곡히 말했다. "다른 대부족에서 바친 사람을 그리 할 수는 없습니다. 살펴주소서." 그제야 부루버들은 다른 청년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한웅님께서는 이제 나이가 많이 드셔서, 젊은 계집들이 곁에서 꼬리를 치면 몸에 좋지 않단 말이에요..." 부루버들이 변명이라도 하듯 조잘거리자 쇠돌이가 나래에게만 들리도록 아주 작은 소리로 투덜댔다. "흥, 자기는...?" 어느새 부루버들의 외모에 대한 쇠돌이의 좋은 감정이 그녀의 독한 말 때문에 경멸로 바뀌어버린 듯했다. 부루버들은 계속 조잘댔다. "하물며 지나족이 보낸 여자라니. 그것도 카린산 쑤앙마이 밑에 있던 여자라던데요? 그 여우같은 것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때 붉은 꽃을 뒤집어쓴 여자가 다가오자 병예는 약간 당황하여 낮은 소리로 말했다. "들리겠습니다." 부루버들은 다시 한 번 '흥' 코웃음을 치며 입을 다물었다. 병예가 나아가서 유망의 부하를 맞았다. 그 늙은 지나족은 병예를 알아보고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며 주절주절 뭐라고 떠들어댔다. 병예는 습관적인 절차로 대강 응수하고 있었다. 어느새 부루버들은 서 있는 여자 곁으로 와서 명령했다. "머리에 쓴 것, 벗어보아라." 늙은 지나족과 대화를 하던 병예가 놀라서 작은 소리로 얼른 끼어 들었다. "그건 아직 실례입니다. 한웅께서 직접 명하셔야..." 그러나 부루버들은 듣지도 않고 다시 빽 소리쳤다. "나는 한웅님의 안사람이다! 내 눈으로 먼저 확인하는 게 내 일이다. 어서 벗어보라니까!" 상황을 눈치챈 늙은 지나족이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여자의 머리에 씌워진 꽃 덮개를 벗기자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순간 여러 사람들은 할말을 잃었다. 그 여자의 용모는 물론 대단했으나 사실 부루버들의 얼굴만큼 요모조모 곱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여자의 얼굴과 눈, 온몸에서 오싹할만큼 요염한 분위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특별히 한 군데, 한 군데가 완벽하게 뛰어난 것은 아니었으되, 전체적으로 볼 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인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바로 소녀였다. 나래도 무심코 소녀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지난번 언뜻 소녀와 마주 대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청순하고 수수한 모습이었던 데 반해 지금은 온갖 화려한 것으로 몸을 꾸미고 얼굴을 단장하여 화사한 모습이라 못 알아볼 정도였다. 부루버들은 잠시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손을 부르르 떨며 뭐라 막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막사 안에서 굵직한 소리가 들렸다. "밖에 무슨 일이냐?" 바로 사와라 한웅의 목소리였다. 행여 부루버들이 질투심에 무슨 행패라도 부리지 않을까 조마조마하게 생각하던 병예가 얼른 대답했다. "지나족의 유망이 보낸 여자... 선물이 왔사옵니다." 부루버들이 휙 소리가 나게 몸을 돌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웅의 막사 반대편으로 달리듯 걸어갔다. 그 틈에 병예가 늙은 지나족에게 눈짓을 하자 지나족이 소녀를 이끌고 한웅의 막사로 향했다. 소녀가 걸음을 옮기다가 갑자기 나래 쪽을 돌아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래는 소녀의 눈이 분명히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도 뭔가 아주 절실한 듯한 눈빛. 그러면서 소녀의 입이 소리를 내지 않고 벙긋거렸다. 눈이 날카로운 나래는 분명 그 입술이 '희네' 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나래는 자신도 모르게 소녀에게 다가갔다. 아직 바쳐지지는 않았다지만 곧 한웅님에게 바쳐질 여자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은 몹시 불경스러운 일이다. 쇠돌이가 놀라서 나래를 잡으려 했고 병예도 놀라 나래에게 뭐라 말하려 했지만, 나래는 뚜벅뚜벅 소녀 쪽으로 다가갔다. 소녀가 뭔가 지나 말로 말하는 것이 들렸다. 나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말을 듣자 병예가 놀라 나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소녀는 지나족 노인에게 이끌려서 환웅의 장막으로 떠밀리듯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나래는 뒤쫓으려 했으나 병예가 그 앞을 막았다. "들어가서는 안 되느니. 멈추어라." 병예의 말을 듣고 나래는 걸음을 멈추었다. 병예는 마치 나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조용한 눈빛으로 나래를 바라보았다. '병예님이 뭔가 들으신 것 같다. 저 여자는 분명 우리 형님에 대해 말했어.' 나래의 생각을 끊듯이 병예가 짧게 말을 건넸다. "날 따라오너라." 병예에게 이끌려 나래는 한웅의 막사 뒤쪽, 병예의 작은 막사에 들어섰다. 나래는 병예의 막사를 난생처음 들어가보았다. 삼사의 직책에 어울리지 않게 그 막사는 좁고 답답했으며 무엇에 쓰는지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막사로 들어서자 병예가 나래에게 물었다. "너, 들었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너 지나 말을 모르는구나." "예, 모릅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분명... 제 형님에 대해..." "그렇다. 이상하구나." 병예는 한숨을 쉬었다. 나래는 궁금증을 더 참을 수 없어 병예에게 물었다. "그 여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냥 나는 안다...고 했다." "단지 그 말뿐이었나요?" 나래는 분명 그녀가 희네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병예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한 마디 더 했느니라." "무슨 말이었습니까?" 병예는 잠시 주저하는 눈빛을 보이더니 이내 말했다. "갇혔다... 라고 했느니." 순간 나래는 펄쩍 뛰었다. "형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습니다!" "가만가만! 차근차근 생각하자." 나래는 당장이라도 유망의 막사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었지만 병예가 나래를 눌러 멈쳐 세웠다. 병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뭔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로구나. 왜 그 여자가 그런 말을 했는지, 그 여자가 뭘 알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아니, 뭘 꾸미는지도 모르느니라." "그 여자는 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 형을 도우려는 걸 겁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 나래는 병예에게 전에 카린산의 여인족과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병예는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그들이 너희 형제에게 나쁜 생각은 없겠지. 허나 그 여자는 유망이 바친 여자야.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느니라." "그럼 그 여자와 이야기해보면 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그래야 되겠구나. 너는 여기 꼼짝 말고 있거라. 곧 돌아오겠느니라. 네 형이 유망 막사로 간 건 비밀이다. 다른 사람이 알게하면 안 되느니." 그 말을 하고 병예는 막사 밖으로 나갔다. 나래는 형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초조해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다행히 병예가 금방 돌아왔다. "문제가 있구나." 병예는 오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무슨 문제입니까?" "그 여자가 나를 믿지 않는다. 그냥 자기가 갇힌 신세가 되어 한탄하는 거라고 둘러대는구나." "네?" 병예는 뭔가 생각하다 말했다. "그 여자가 분명 너를 보고 '희네'라고 벙긋거리는 것을 나도 보았는데... 아무래도 너에게만 말할 것 같구나." "그럴지도 모르죠. 제가 좀 만나겠습니다." "아서라! 아서!" 병예는 펄쩍 뛰었다. 나래가 의아해서 병예의 얼굴을 바라보자 병예는 한숨을 쉬었다. "너는 만날 수 없느니라." "어찌 그렇습니까?" "그 여자는 이제 한웅님의 여자니라. 한웅님께 바쳐진 여자를 외간 남자가 사사로이 만날 수는 없지 않느냐?" "저는 그냥 말만 물어볼 것인데요?" "하지만 그 말을 누가 들으면 어쩌겠느냐? 결국 아무도 없는 비밀스러운 장소 아니면 그 여자는 입을 열지 않을 것인데?" "하지만 저는 그냥 형에 대한 안부만..."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느니." 병예는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내 짐작이기는 하다만, 아까 부루버들님을 보았지?" "예..." "그분은 지금 무척 화가 계시느니." "그런 것 같습니다만..." "그러니 그 여자의 작은 꼬투리라도 찾으려고 할지 몰라. 거기 네가 말려들면 되겠느냐? 만에 하나 네가 그 여자와 만나는 것을 그분이 아시면..." 자칫하면 여자의 질투 때문에 나래가 누명을 쓸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떳떳합니다. 병예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런 일에는 나도 도울 수 없느니. 남자 여자간의 의심이란 건 걷잡을 수 없는 것이야. 하물며 처음 오자마자 그 여자가 외간 남자를 비밀스레 만났다고 한다면..., 그 사실이 밝혀진다면 한웅님은 화를 내실 것이야. 더구나 그 여자를 정말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잖느냐?" "그래도 만나봐야지요." "혹시 그 여자가 유망의 꿍꿍이대로 움직이는 거라면? 네 형을 잡아두고 너를 이용하려는 거라면? 아니, 정말로 그 여자가 너에 대해 묘한 생각을 품고 형을 미끼로 너를 불러내는 거라면? 그 여자는 천성적으로 남자를 밝힐 위인이다. 안 그런다는 보장이 없느니." 나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사실 소녀를 한 번 보기는 했어도 그녀를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 나래로서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유망의 짓거리에 공연히 놀아날 수는 없는 법. 네 형이 갇혀 있다면 아직은 무사한 것이니라. 내 삼사와 의논해볼 테니 너는 절대 함부로 나서지 말아라." 병예는 그 말을 끝으로 황망히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래는 병예의 막사에 앉아 고민에 빠졌다. 형이 유망의 비밀을 알아내려다 잡힌 것인가? 그래서 유망이 그것을 미끼로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인가? 소녀는 정말 형을 도우려는 것인가?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가능성은 너무도 많았지만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마침내 나래는 중얼거리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딪혀봐야 아는 거지! 고민 따윈 내게 안 어울려!" 그러나 막상 소녀를 만나려니 그것도 문제였다. 무턱대고 한웅님의 막사에 뛰어들 수도 없는 일이며, 조그마한 전갈조차 전할 방법도 없었다. 나래는 머리가 터지도록 생각해보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때 병예가 다시 들어와 원래 자리로 돌아가라고 나래에게 말했다. 병예의 막사를 나서서도 줄곧 고민에 빠져 터벅터벅 다시 망보던 자리로 돌아가던 중 나래는 누군가가 자신의 옷깃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니 조그마한 여자애 하나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래...?" 가만히 보니 그 아이는 옷차림이 독특한 것이 주신족 같지 않았다. 잠시 생각해보니 바로 아까 소녀의 뒤를 따라가던 여자애였다. 나래는 반가워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는 서툰 주신 발음으로 말했다. 아주 작은 소리인데다 발음이 몹시 서툴러서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오늘 밤... 큰 나무... 희네... 빨리..." 그 말만 하고는 그 여자애는 나래의 말도 듣지 않고 뛰어서 저쪽으로 가버렸다. 보니 저쪽에 아까 소녀를 데려왔던 늙은 지나인이 있었다. 지나 노인은 그 아이를 데리고 막사 주변의 울타리를 넘어 사라져 버렸다. 나래는 멍하게 있다가 그 아이가 한 말을 곱씹어 보았다. "오늘 밤... 큰 나무... 희네... 빨리..." 아마도 그 아이는 주신 말을 몰랐을 것이다. 소녀가 시킨 일이 분명했다. 그 아이는 돌아가는 길이었으니 이 기회를 타서 나래에게 전달한 것이다. 그 아이는 주신 말도 모르니 비밀이 샐 염려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단 네 개의 단어만 들었지만 나래는 대강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 밤에 큰 나무 부근에서 만나자는 뜻 같구나. 형님이 뭔가 급한 지경이 되었나 보다. 그러니 빨리 만나야 한다는 것이겠지. 그렇다. 오늘은 첫날이니 한웅님도 소녀를 쉬게 하시겠지. 그러니 오늘말고는 기회가 없다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나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부근에 큰 나무는 단 한 그루도 없었다. 이 근방은 태산 중턱이기는 하지만 회의 준비를 하느라 땅을 파고 나무를 모조리 태우고 벤 바람에 평지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나래는 답답해졌다. '이거야 미칠 노릇이군. 큰 나무가 어디 있다는 거야? 나무라고는 한 그루도 없는데...!" 나래가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둘러보아도 부근에는 큰 나무는 고사하고 잡목 한 그루도 없었다. 눈닿는 곳까지 모조리 막사와 울타리, 그리고 끌고 온 짐승을 먹일 들판과 황토 벌판이 있을 뿐이었다. 반대 편에는 산이 있었고 나무도 많았지만 이제 막 한웅에게 바쳐진 소녀가 그 먼 곳을 밤에 숨어갈 수 있을 리도 없었고 그런 곳을 꼬집어 만날 장소로 삼을 리도 없었다. '아무래도 무슨 수수께끼 같구나...' 나래는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벌써 저녁 무렵이 되어가려고 하는데, 오늘 밤에는 만나야 하는 것이다. 나래는 결국 친구들의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치베는 유망의 막사 부근에 숨어 있었기에 만날 수가 없었고 야율쿠리나 울쿠타 등도 자기 부족 일이 바빠 만날 수 없었다. 결국 남은 것은 초초룬뿐이었다. 생각 끝에 나래는 횡설수설 핑계를 대어 해가 떨어지자마자 쇠돌이에게 떠넘기듯 자리를 대신 좀 지키라고 하고 초초룬을 찾아갔다. 초초룬은 마침 막사 밖을 돌아다니다가 나래를 먼저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벌써 얼굴빛이 붉어진 것이 대낮부터 한잔 한 모양이었다. "어이, 나래. 한잔 어때?" 걸걸한 초초룬의 목소리를 듣자 나래는 맥이 탁 풀렸다. 초초룬이 한잔했다면 주정이나 부릴 터이니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달리 의논할 사람도 없어서 나래는 행여나 하는 심정으로 초초룬에게 말을 건넸다.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라 행여나 다른 사람이 들을까 봐 나래는 꾀를 냈다. "이봐, 초초룬. 수수께끼 내기할래?" "수수께끼? 좋지! 그 대신 틀릴 때마다 한 잔씩 하는 거다. 어때?" 초초룬은 허리에 안고 있는 커다란 항아리를 흔들어 보였다. 나래는 답답했지만 초초룬이 취했을 때 그녀의 말을 거절했다가는 뭔가 일이 생길 거라는 것을 알고 있어 나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초초룬이 의기양양하게 덧붙였다. "못 맞히면 이긴 사람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거다. 내가 이기면 잡소리말고 오늘 코가 비뚤어지게 마시는 거다. 알았지?" 나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초초룬은 아주 기분이 좋은 듯, 그 자리에 털퍼덕 앉았다. "좋아, 좋아. 네가 먼저 할래? 내가 먼저 할까?" "내가 묻고 싶은..." 나래가 말을 하려는데 초초룬이 껄걸 웃으며 버럭 소리 질렀다. "내가 먼저 내겠다!" 나래가 항의할 틈도 없었다. 초초룬은 수수께끼에 지지도 않았는데 벌컥벌컥 술을 먼저 들이켜고는 소리쳤다. "나는 남자 같고 못난데다 성질도 거칠어서, 남자들이 모두 다 슬슬 피한다. 하지만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따라다니는 녀석이 하나 있다. 아무리 떼어놓으려 해도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녀석이다! 그게 누군지 아느냐?"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래는 멍해졌다. 도대체 초초룬에게 그런 남자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모르겠다고 했다가는 완전 술판을 벌이자고 덤빌 테니 나래는 난처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 "그러니 수수께끼지! 그럼 말한 것을 어길 생각이냐?" "아니..., 그건 아니지만... 초초룬, 내가 네게 내고 싶은 수수께끼가..." "그만그만! 일단 대답부터 해! 맞히면 들어준다!" 초초룬의 기세가 너무 등등해서 나래는 기가 찼지만 할 수 없었다. "혹시... 너희 부족사람이냐?" "이런이런! 틀렸어." "나는 답한 게 아니다. 그냥 너무 막연해서..." "그럼 일단 한 잔 마셔라!" "아니, 나는..." "안 마시면 난 안 한다." 할 수 없이 나래는 독한 술을 벌컥 들이켰다. 그러자 초초룬은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우리 부족사람? 절대 아니다." 답답해진 나래는 맨 먼저 떠오르는 이름을 말했다. "그럼 혹시 야율쿠리냐?" "틀렸다! 또 한 잔!" 초초룬이 다시 외쳤다. 나래는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면서도 할 수 없이 다시 한 잔을 마셨다. 초초룬이 투덜거렸다. "그 곰 같은 자식은 싸움밖에 모른다. 마누라보다 너와 씨름하는 걸 더 좋아할 것이다." 나래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혹시... 나냐?" "이 멍청아, 네가 날 따라다니기나 하냐? 틀렸다! 다시 한 잔!" 나래는 다시 술을 마셨다. 그러고 나니 너무 난처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술만 마시다 끝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초초룬을 화나게 해서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던 차에 옆에서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그림자." 나래는 순간 눈을 퍼뜩 떴다. 그러고 보니 초초룬은 자기를 따라다니는 것이 남자라고 한 적이 없지 않았던가? 나래가 황급하게 초초룬에게 말했다. "알았다. 답은 그림자다!" 별안간 초초룬이 무섭게 소리쳤다. "너는 누군데 끼어드느냐?" 그제야 나래는 옆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아주 큰 눈의 작은 여자 아이가 몇 명의 타타르족 남자들과 함께 서 있었다. 그 아이는 전에 눈이 밝아 독수리보다 잘 본다는 신기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던 타타르 앗수라트 부족의 족장 딸 울라트였다. 그러자 옆의 타타르인이 외쳤다. 아마도 감히 부족장 딸인 자기 아가씨에게 소리를 질렀다고 화를 내는 듯했다. 그 사람을 말리며 울라트가 주저주저하며 말했다. "내가 끼어든 건 미안해요. 하지만 재미있는 것 같아서. 나도 수수께끼를 좋아하거든요." "좋아, 좋아. 반갑다. 나는 주신의 나래야. 이쪽은 미아우의 초초룬." "나는 타타르족 앗수라트 부족의 울라트예요. 심부름 왔다가 지나는 길이었는데... 끼어들어서 미안해요. 하지만 수수께끼를 워낙 좋아해서." 아이는 퍽 차분하고도 침착했다. 너무 크다 못해 이상해 보일 정도로 큰 눈을 깜박거리는 것이 몹시 겁이 많아 보였지만. 나래는 이 여자애가 똑똑하기가 자기나 초초룬보다 나을 것 같아서 쾌히 반겼다. 그때 초초룬이 화를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내 일을 망쳐놓고 끼어들려고?" 그러자 나래가 재빨리 말했다. 그럼 내 수수께끼도 이 아이 도움을 받으면 되잖아. 내가 수수께끼를 내겠다. 이 근처에는 나무를 다 베어서 나무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큰 나무 밑에서 보자고 하면 거기가 어디일까?" 초초룬은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술을 담은 토기를 번쩍 들어 꿀꺽꿀꺽 마셨다. 한참을 마시다가 초초룬은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됐냐, 이 자식아. 난 다 마셨다." 그 모습을 보고 울라트는 킥킥 웃었다. 즐겁게 웃는 듯했지만 어딘가 맥이 풀리고 힘이 없는 것 같았다. "초초룬은 너무 급했어요. 내가 맞힐 수 있었는데." "정말?" 초초룬보다 나래가 먼저 급히 물었다. "물론 이 근처에 잎 달리고 가지 달린 나무는 없어요. 하지만 울타리도 나무고, 막사에도 나무 기둥을 세우고, 하다못해 창이나 도끼도 나무자루가 있지요." "그렇구나..." 그러더니 울라트가 웃으며 주신족 막사 쪽을 가리켰다. "저 나무가 이 근처에서 가장 크니 저 나무라고 하겠어요." 나래는 울라트의 손가락 끝을 좋았다. 그곳에는 바로 주신족의 솟대가 우뚝 서 있었다. 새 날개가 조각된 나무 기둥인 솟대는 주신족의 상징이라 가장 높게 세워져야만 했다. 그러나 주신 사람들에게 솟대는 솟대이지 나무가 아니었다. 나래는 솟대가 아예 나무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카린족인 소녀나 울라트는 솟대가 무언지 모르니 그냥 큰 나무라고 보아두었을 것이다. 물론 회의장에서 멀지도 않고 솟대는 신성한 곳이라 사람들도 가까이 가지 않는다. 거기라면 모든 것이 들어맞는다. 그것을 보자 나래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알았... 아니, 맞았다!" 울라트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당신도 답을 몰랐나요?" "아니, 아니. 그건 아냐. 좌우간... 넌, 울라트 넌 정말 똑똑하구나. 정말 똑똑해!" 그때 초초룬이 갑자기 '왁' 소리내어 울면서 그 자리에 쓰러지며 주정을 해댔다. "제길, 나란 놈은... 아니 나란 년은 뭐야... 그림자말고는 따라다니는 사내놈도 없고... 머리도 나쁘고 얼굴도 못나고... 시집가라고 집에서는 아우성인데... 어떻게 하라는 거야... 누가 나 좀 주워가... 제기랄... 여자라도 좋아..." "당신 여자였나요? 난 당신이 족장의 아들인 줄 알았어요!" 울라트가 눈을 크게 뜨며 초초룬에게 말을 걸었으나 나래는 이제 더 이상 그쪽에는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초초룬이 족장의 딸이라는 것은 지금 알게 된 사실이었다. "울라트, 고마워. 정말 고마워! 너는 정말 똑똑하구나." 그러면서 나래는 황급히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야, 임마! 어디 가? 다 마시고 가야지!" 초초룬이 소리를 질렀으나 나래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또 도움이 필요하면 오세요." 울라트의 친절한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나래는 마구 달려갔다. '왜 안오는 걸까?" 초저녁에 솟대 부근에 숨어 밤이 이슥해지도록 기다렸는데도 소녀가 나타나지 않자 나래는 몹시 지루하고 초조했다. 나래는 큰 바위 뒤에 숨어 있었는데 멀리서 사람 지나가는 기척만 나도 흠칫흠칫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솟대는 본래 신성한 구역이라 아무나 들어가서는 안 된다. 죄를 지은 자도 솟대 부근으로 도망쳐 들어가면 잡을 수 없는 것이 신시의 법이었다. 다만 이곳의 솟대는 한웅의 행차에 따라 임시로 세운 것이라 신시와는 달랐다. 신시에는 솟대 단군을 비롯하여 솟대 밑에 솟대 마을이 있지만 여기는 허허벌판, 막사들 한가운데에 솟대를 세운 것 뿐이라 누가 도망쳐 와도 기거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솟대의 신성함 때문에 주변 두어 마장에는 막사가 없었지만 몸을 숨길 만한 바위나 나무 등걸은 많이 있었다. 그리고 솟대 주변에는 사람들도 지나다니지 않아 들킬 염려가 없긴 해도 신성한 솟대 부근에 몸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켕겼다. 하지만 형의 안위에 관련된 일이니 물불 가릴 수가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나래는 소녀가 못 오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다. 그때 저만치서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솟대 밑으로 오는 발걸음 소리였다. 그런데 그 소리는 자못 묵직해서 여자의 발걸음 소리 같지는 않았다. 반대편에서도 또 다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래는 얼른 더 깊숙이 몸을 숨기고 귀를 곤두세웠다. 그 발걸음 소리의 주인공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없겠지? 일은... 틀림없이... 그래." 거리도 멀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소리를 낮추어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말하는 투가 퍽 긴장한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 남자였고, 주신 말을 쓰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그래... 산굽이..." "매우 위험한데... 개 백 마리..." "할 수 없다... 많은 금... 조개껍질..." 금과 고운 조개껍질은 당시 화폐 대신으로 쓰이던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개 백 마리라니? 나래는 아무래도 그들이 수상쩍다고 생각되어 더 귀를 기울였다. "제대로만 되면... 지나 땅으로 가서..." 그 말 한마디를 듣고 나래는 얼굴을 찌푸렸다. '주신 사람 같은데, 지나 땅으로 간다고?' 그러나 다음에 들린 말은 더더욱 놀라웠다. "한웅... 죽으면... 다 잘될 것..." '한웅님이 죽는다고?' 나래는 놀라움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무래도 그 사람들을 직접 잡아서라도 더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그 두사람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쉿!" 다음 순간, 저만치서 누가 뛰어오는 듯한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가벼운 발걸음 소리인 것으로 보아 여자인 듯했다. 순간 '스슥' 소리가 나더니 입이라도 막혔는지 금세 잠잠해졌다. 나래는 놀라서 바위 뒤에서 몸을 날려 밖으로 뛰어나왔다. 저만치에서 두 사람의 검은 가죽옷을 입고 얼굴에 늑대 가면을 쓴 사람들이 한 명의 여자를 잡아 어깨에 걸머쥐고 있었다. 분명 소녀인 것 같았다. 나래는 성큼 몸을 날렸다. 허공에서 두어 바퀴 몸을 돌려 두 사람의 머리 위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쿵' 소리와 함께 나래가 앞에서 내려서자 두 사람은 놀라 '엇' 하며 짧게 소리를 내뱉었다. 여자를 걸머진 한 사람이 재빨리 뒤로 물러서는 사이 다른 한 사람은 허리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잘 만들어진 검은 구리칼이었다. 나래는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손으로 그 칼을 나꿔채려 했다. 그러나 그자의 칼 쓰는 솜씨가 대단해서 순식간에 나래의 손을 피해 연달아 나래의 어깨와 가슴 부위를 휙휙 바람소리를 내면서 찔러 들어왔다. 그자가 나지막이 소리쳤다. "죽여!" 나래는 순간 당황했다. 칼 든 자의 칼솜씨도 제법이긴 했지만 나래를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한 스무 합만 겨루면 칼도 빼앗고 그자를 넘어뜨릴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면 뒤의 남자가 여자를 해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나래는 재빨리 발로 땅을 휙 걷어찼다. 흙을 걷어차는 사이에 여자를 구할 생각이었다. 흙덩이가 칼 든 남자에게 날아가자 남자는 놀랍게도 피하지 않고 칼을 휙휙 돌려서 흙덩이를 다 막아내고 곧바로 나래에게 칼을 찔러 들어왔다. 나래는 막 몸을 날리려던 참이어서 균형을 잃고 간신히 칼을 피하기는 했으나 왼쪽 옆구리가 시큰했다. 칼날이 스친 것이 분명했다. 내친김에 나래는 왼팔을 내려 남자가 거두려던 칼을 옆구리에 딱 붙여서 칼을 붙잡고는 물었다. "넌 사울아비냐?" 방금 그자가 쓴 칼쓰는 법은 보통의 솜씨가 아닌, 사울아비들만 배우고 익히는 칼쓰는 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자는 대답하지 않고 칼을 잡아채 뽑으려 했다. 하지만 나래의 엄청난 힘 때문에 그자의 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자의 힘은 보통은 아니었다. 그자는 칼을 확 뽑는 시늉을 하다가 나래가 힘을 쓰려는 듯하자 재빨리 칼을 놓고 뒤로 물러나면서 어느새 품안에서 돌멩이 몇 개를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한 번에 네 개의 돌멩이를 나래에게 날렸다. 나래는 재빨리 오른손을 한 번 휘둘러 그 돌멩이 중 한 개를 손바닥으로 쳐내고 두 개를 받은 다음 하나는 피해버리고 나서 외쳤다. "사울아비가 이게 무슨 짓이냐?" 방금 돌멩이를 던지는 법도 사울아비들이 배우는 일종의 무예였다. 더구나 그 돌멩이도 보통 돌멩이가 아니라 아주 둥글게 갈고 다듬어서 한번 이마에 정통으로 맞으면 구멍이 나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나래는 워낙 힘이 세서 돌던지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 가지고 다니지 않았지만 많은 사울아비들이 그런 돌멩이를 가지고 다녔으며, 크기나 무게가 사울아비들이 쓰는 것이 분명했다. 나래는 크게 화를 내며 그자에게 돌을 던지려다가 보니 저쪽에서 다른 자가 막 여자를 땅에 내던지고 칼을 빼들고 있었다. 나래는 재빨리 잡았던 돌 두 개를 그자에게 던졌다. 대단한 나래의 힘을 실어 돌멩이는 귀를 찢을 듯 '쌩' 소리를 내며 그자에게 날아갔다. 그자도 솜씨가 있는 듯, 급히 칼로 돌멩이를 막고 왼손바닥으로 다른 돌멩이를 막았으나 나래의 던진 힘이 워낙 엄청나서 돌멩이 하나는 칼을 단박에 부러뜨렸고 다른 돌멩이는 그자의 왼손바닥에 푹 박혀버렸다. "으으윽!" 그자는 부러진 칼을 쥔 오른손으로 피가 솟구쳐 나오는 왼손을 감싸쥐고 어둠 속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래는 급히 왼쪽 옆구리에 낀 칼을 오른손으로 쥐려고 하는데 뭔가가 '휘리릭' 날아오더니 칼을 감아가버렸다. 칼을 놓쳤던 자가 어느새 가죽채찍을 꺼내서 한 번 휘둘러서 귀신같이 칼을 감아간 것이다. 나래도 놀랄 만큼 능숙한 채찍 솜씨였고 임기응변도 대단해서 나래는 속으로 감탄했다. 그 바람에 나래의 옆구리는 더 크게 베어서 왼손으로 옆구리를 누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자는 칼을 손에 쥐더니 칼과 채찍을 동시에 휘두르며 나래에게 달려들었다. 채찍이 윙윙 소리를 내며 방패처럼 앞을 막으며 그 사이사이로 칼날이 번득이며 쑥쑥 찔러 들어왔다. 정말 대단한 솜씨였다. 무기가 없는 나래는 몇 걸음을 뒷걸음질치는데, 어느새 그자는 오른손의 칼을 나래에게 찌르면서 왼손으로는 번개같이 넘어져 있는 여자 쪽으로 채찍을 뻗어냈다. 그 여자의 얼굴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는데 틀림없이 소녀였다. 칼을 피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가 피하면 그자의 귀신같은 채찍 솜씨로 보아 소녀의 목을 감아 단번에 부러뜨릴 수 있을 것이었다. 나래는 하는 수 없이 모험을 하기로 했다. 급하게 싸울수록 더더욱 침착해지는 것이 나래의 특기였다. 나래는 입을 꾹 다물고 담담한 표정으로 주먹을 힘껏 쥐고 오른팔을 크게 휘둘러 팔꿈치로 칼날을 튕겨내면서 연이어 주먹으로 그자의 가슴팍을 밀어쳤다. 제대로 친 것은 아니었으나 그자는 '헉' 하는 비명을 내지르면서 뒤로 밀려나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소녀를 향해 독사처럼 날아들던 채찍이 아슬아슬하게 그 옆을 쳐서 땅이 파이게 되었다. 나래는 다시 성큼 왼발을 내딛으며 그 발을 축으로 몸을 빙글 돌리면서 오른쪽 발꿈치로 넘어진 자의 다리를 내리찍었다. 제대로 찍혔으면 다리가 박살났을 것이지만, 그자의 동작도 무척 빨라 그자는 어느새 다리를 오므렸다가 뒤로 훌쩍훌쩍 몸을 굴리면서 물러섰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네 개의 돌멩이가 날아왔다. 어둠 속이었지만 밤눈이 밝은 나래는 '흥' 코웃음을 치고 눈을 크게 뜨고는 몸을 뒤로 젖혀 세 개의 돌멩이를 피하면서 돌멩이 하나를 오른발로 허공에서 호되게 되걷어찼다. 돌멩이는 다시 날아오던 방향으로 '쌕' 소리를 내며 날아갔고 이어서 '이크'하는 그자의 비명이 들렸다. 나래의 힘으로 보아 어딘가에 맞았으면 분명 몸이 성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나래는 다시 한 번 '흥' 코웃음을 치며 그자를 따라가려는데, 저만치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가오는 기척이 있었다. 솟대 부근이 소란해지니 막사에서 자던 사울아비들이 나와 살펴보려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넘어져 있던 소녀가 울상이 되어 뭐라고 지나 말로 말했다. 아무래도 이런 모습을 보이면 좋지 않을 것 같아 나래는 오른손 하나로 그녀를 번쩍 어깨에 메고 왼손으로 피가 흐르는 옆구리를 감싸쥔 뒤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가다가 보니 아까 여자를 해치려던 자가 부러진 구리칼을 버리고 도망친 모양이라, 나래는 얼른 그것을 주워들고 다시 달려갔다. 나래의 동작이 하도 빨라서 횃불을 든 사람들이 솟대 부근으로 왔을 때는 이미 나래가 반대쪽 벌판 가운데 도랑으로 숨은 다음이었다. 도랑 안으로 뛰어들자 소녀가 간신히 진정하고는 나래에게 지나말로 뭐라고 말했다. 나래는 고개를 저으며 모르겠다는 시늉을 하자 소녀는 아주 서툰 주신 말로 떠듬거리며 말했다. "나래...? 아파...? 많이 아파?" "아니오, 괜찮소." 소녀도 간신히 진정한 듯했는데 몹시 놀란 듯했다. "그... 사람들 누구?" "나도 모르겠소 좌우간 뭔가 나쁜 짓을 꾸미는 것 같은데..." 나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도 잘 모르겠으며, 우연히 만나는 장소가 겹쳐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 같다고 말했지만, 소녀는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했다. "그런데 형님은? 내 형님 희네 이야기를 해주시오." "희네? 아... 희네..."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발짓을 섞어가며 뭔가 말했다. 그러나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몰라서 나래는 한참 뒤에야 소녀의 말을 알아들었다. 희네는 염제의 막사 뒤쪽 토굴에 갖혀 있으며, 이 일을 나래에게 알려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래는 듣고 나자 다시 마음이 급해졌다. 설마설마했는데 형이 갇혀 있다니, 참을 수 없었다. 나래는 다급히 소녀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나는 형님을 구하러 가야 하고, 당신도 밖에 오래 나와 있으면 안 되니, 이만 돌아갑시다." 소녀가 살짝 웃으며 주신 말로 답했다. "잘 부탁해요, 도련님." 이상하게도, 그 말은 누구에게선가 미리 물어보았는지, 꽤 능숙한 편이었다. 평상시 같았으면 소녀가 왜 자기를 도련님이라 부를까 생각해보았을 테지만 형이 갇혀 있다는 말에 마음이 급한지라 나래는 그냥 대충 고개만 숙여 보이고 도랑 밖으로 훌쩍 뛰어나갔다. 옆구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소녀는 그런 나래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가 흐뭇한 표정을 살짝 지으며 천천히 도랑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나래나 소녀, 두 사람 모두 저만치 어두운 곳에서 숨어 있던 두 개의 눈동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래가 급히 유망의 막사가 있는 울타리 부근으로 갔으나 울타리 부근은 많은 지나 전사들이 지키고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성질대로라면 당장 모조리 때려부수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래가 바위 뒤에 숨은 채 숨을 씩씩거리며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나래의 어깨를 슬쩍 건드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바로 치베였다. "나래 안다, 왜 그러는가?" 나래는 급히 치베에게 희네가 저 안에 갇혀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치베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역시 그러한가? 나도 며칠째 희네가 보이지 않아 걱정하던 참이었다. 같이 가자. 준비한 게 있다." 나래는 귀가 솔깃하여 치베가 이끄는 대로 가보았다. 울타리에서 약간 떨어져 있었고 돌밭이라 아무도 막사를 치지 않은 호젓한 곳에 있는 조금 큰 천막에 다다르자 치베가 싱긋 웃었다. "들어가봐라." 나래가 들어가보니 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야율쿠리와 울쿠타, 야쿠타 등이 웃으며 앉아 있었다. 모두 다 흙투성이였다. "어떻게 된 거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래가 묻자 치베가 대답했다. "우리 생각에도 희네가 지나족 막사에 들어가서 분명 뭔가 잘못되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나족 울타리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지키잖는가? 그래서 우리는 밤마다 여기 모여서 지나족 막사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굴을 팠다. 이제 거의 다 되었다." 그러자 야율쿠리가 나섰다. "우리는 사흘 동안 하루도 제대로 잔 날이 없다, 하하." 야쿠타도 한마디 거들었다. "울쿠타가 땅파는 데 재주가 있거든. 여긴 마침 파기 좋고 무너지지도 않는 흙이라 다행이었다." 나래는 그들이 모두 부족의 일 때문에 바빠서 만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벗을 위해 밤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고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래는 눈시울이 시큰해져서 치베의 손을 한 번 꽉 잡고는 말없이 몸을 날려 구멍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치베와 야율쿠리, 울쿠타와 야쿠타 등도 구멍 속으로 나래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토굴은 간신히 한 사람이 빠져나갈 만큼 좁아서 덩치가 큰 나래는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러나 나래의 힘이 워낙 강해서 나래가 밀고 나아가니 오히려 토굴이 벌어져서 조금씩 넓어졌다. 토굴의 반대편은 남에게 드러날까 봐 아직 뚫지 않은 상태였고, 커다란 돌멩이 하나를 나무 기둥으로 받쳐둔 상태였다. 울쿠타는 사람들 발길이 뜸한 호젓한 곳을 고르기는 했지만, 안심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래는 즉시 나무 기둥을 치우고 흙더미를 들어올렸다. 그곳은 지나족들이 변소로 사용하는 곳 바로 뒤편이었는지 냄새가 고약했다. 그러나 이런 깊은 밤에는 사람이 드나들지 않을 장소인 것만은 분명했다. "지나놈들은 냄새도 더러워." 야율쿠리가 얼굴을 찌푸리며 코를 막자 울쿠타가 우물거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발걸음 소리가 안 들리는 곳을 찾았을 뿐이야. 이런 곳인 줄은 몰랐다구." 나래는 웃으며 울쿠타에게 말했다. "괜찮아. 더 잘되었다. 고맙다, 울쿠타." 그러자 야율쿠리가 심술궂은 얼굴을 풀고 히죽 웃었다. "이봐, 이봐. 땅은 내가 더 열심히 팠다구." 울타리 안에는 막사들이 많았지만 나래는 한 번 유망의 막사에 가본 적이 있어서 대강 길을 알 수 있었다. 울타리는 많은 전사들이 지키고 있었으나 막상 울타리 안은 지키는 사람이 전혀 없어서 어렵지 않게 숨어 다닐 수 있었다. 나래는 유망의 막사 뒤로 돌아가다가 나지막한 동산 부근에 두 사람의 지나족 전사들이 불을 피워놓고 땅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옆에 자그마한 나무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저곳이 소녀가 말한 그 장소가 틀림없었다. 산에 난 작은 동굴을 문으로 막아 감옥처럼 사용하는 듯했다. 그 문을 지키고 있는 두 명의 지나 전사들은 졸지도 않고 검은 돌을 갈아 자루에 붙인 창을 꼿꼿이 세운 채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야율쿠리가 툴툴거렸다. "저놈들, 잠도 없나? 저걸 어쩌지? 소란을 피울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러자 치베가 뒤춤에서 줄을 풀어 둥글게 만든 작은 활을 꺼내어 바로 활줄을 매겼다. 전에 희네가 선물했던 그 활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야쿠타가 기겁을 했다. "회의 전날인데 사람을 죽이면 안 돼!" 치베가 슬쩍 웃으며 화살 두 개를 꺼냈다. 두 화살 다 돌촉이 없었고 대신 뭉뚱한 돌멩이를 가죽으로 싼 것이 붙어 있었다. 치베는 다음 순간, 화살 두 개를 한꺼번에 활에 재서 동시에 내쏘았다. 이어서 '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 명의 지나 전사가 앉은 자세 그대로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소리가 두 번 울려야 정상이지만 화살이 하도 빨라서 동시에 명중했기 때문에 소리가 한 번만 난 것이다. 나래는 치베의 화살이 두 녀석의 미간에 정통으로 맞히는 것을 보았다. 두 녀석이 쓰러지자 치베가 씩 웃었다. "저놈들, 며칠 동안 머리가 좀 울릴 거다." "그건 무슨 화살이야?" 울쿠타가 묻자 치베는 짧게 답했다. "짐승을 죽이지 않고 살려 잡는 화살이다. 큰 짐승은 안 되지만." 나래는 재빨리 앞으로 달려나가 굵은 덩굴로 꽁꽁 묶여 있는 나무 문을 통째로 뜯어버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래는 그게 누구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나래는 반가워서 눈물이 왈칵 솟았다. "형님!" "나래냐? 큰 소리내지 마라." 희네는 나래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몹시 태연했다. "형님? 괜찮아? 응?" "별일 없다. 그나저나 어서 나갖. 안에는 어떻게 들어왔지?" "굴을 파고..." "그럼 굴이 발각되기 전에 서둘러야겠다." 희네는 무척 태연하고도 침착하게 말을 했다. 나래는 어둠 속이었지만 무심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곧 희네를 들쳐업고 밖으로 나갔다. 치베와 야율쿠리, 울쿠타와 야쿠타도 곧 나래의 뒤를 따랐다. 막 그곳에서 벗어나려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쳤다. "이봐! 뭐 하는...어?" "전사 둘이 쓰러졌다! 토굴 문이 부서졌다!" 그 소리를 듣고 모두는 가슴이 철렁했다. "들켰다!" 치베가 이를 악물면서 화살 몇 대를 꺼냈다. 야율쿠리도 인상을 썼고 울쿠타와 야쿠타는 대단히 당황했다. 나래나 치베, 야율쿠리가 아무리 싸움을 잘한다 해도 여기는 지나족의 울타리 안이고 또 나래는 희네를 안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희네가 말했다. "땅굴로 들어가면 안 된다! 우리가 나가기 전에 들킬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꼼짝없이 거기 갇혀 죽는다." "그럼?" 그때 여기저기서 불빛이 밝혀지면서 지나족 전사들이 마구 쏟아져나왔다. 그러자 야율쿠리가 다급히 말했다. "하지만 별 수 없다. 땅굴로 들어가자!" 그때 땅굴 쪽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누가 굴을 팠다!" "제기랄!" 치베는 이를 갈았다. 그리고 울타리 안에서 돌아다니는 횃불은 점점 더 많아졌고, 울타리에도 많은 횃불이 밝혀졌다. 이젠 절대 도망칠 수 없었다. 그때 희네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빠져나온 그 동굴로 가자." "뭐?" 야율쿠리와 치베가 의아한 듯 외치자 희네가 말을 이었다. "그 동굴에서 내가 도망갔으니, 그 동굴로 도로 들어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동굴은 제법 넓고, 아주 어두워서 충분히 숨을 수 있다. 하룻밤만 넘기면 된다." "하루만 넘기면 뭐가 되는데?" 야쿠타가 묻자 희네느 말했다. "내일은 태산 회의다. 다들 회의에 나가서 여기는 비어 있을 것이다. 내일은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다." "정말?" 울쿠타가 고개를 갸웃하자 야율쿠리가 손바닥을 탁 쳤다. "그것도 그렇다. 한번 찾은 곳은 여간해서는 다시 안 찾는다." 희네 일행은 다시 재빨리 달려가서 희네가 갇혀 있던 동굴 속에 숨었다. 나무문도 닫지 않았다. 그곳에서 숨을 죽이고 한동안 긴장해 있자 어느덧 주변이 조용해졌다. 아무리 찾아도 없으니 벌써 도망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동굴은 문도 부서지고 갇힌 사람도 도망갔으니 더 이상 지키지도 않고 누가 와서 굳이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나래를 비롯한 모든 젊은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야율쿠리나 울쿠타, 야쿠타는 다음날 족장이 찾을 텐데 나중에 혼날 것 같다고 울상을 지었다. 태산 회의 다음날 아침해가 뜨자마자 태산 회의장에는 그야말로 수를 헤아릴 수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3백여 개에 달하는 동북아시아 각지의 부족들이 모인 것이라 그 수효만도 수만 명에 달했다. 각 부족들의 생김새도 각양각색이었고 모든 부족원들이 자기 부족의 독특한 장식과 치장을 있는 대로 하고 나와서 그 화려함은 극에 달했다. 다른 부족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 기회이기 때문에 솜씨를 있는 대로 발휘한 것이다. 각 부족들은 저마다 축제라도 벌어진 양 신나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회의장으로 향했다. "저건 뭐냐? 저건?" 사람들은 무섭게 생긴 짐승을 보며 흠칫거렸다. 남쪽에서 온 남만 부족 하나는 부족장이 커다란 교룡(악어) 두 마리 위에 타고 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이다. "저것 봐라! 저렇게 큰 짐승도 있다!" 멀리 서역에서 온 부족은 키가 아주 크고 등에 둥그런 혹이 솟은 낙타를 타고 줄을 지어 달려나와서 눈길을 끌었고, 서남쪽에서 왔다는 한 부족은 그야말로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짐승을 타고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그 짐승의 크기는 집채만했고 코가 길고 긴 어금니가 비죽 튀어나와 있는 코끼리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코끼리에 쏠리려는 차에 더 놀라운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을 뒤덮듯, 꺼멓게 날아오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벌떼였다. 네 명의 미아우족이 가마 하나를 높다랗게 메고 있었고 그 위에 바로 초초룬이 눈을 감고 앉아 이상한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 위에 바로 초초룬이 눈을 감고 앉아 이상한 손짓을 하고 있었다. 초초룬은 벌떼를 부릴 줄 알아 머리 위에 거느린 벌떼들이 여기저기 하늘을 뒤덮었다. 동물들을 부리는 것이 아주 중요한 재주였으니만치 동물들을 부리는 것과 처음 보는 신기한 동물들을 보는 것은 모든 이들에게 상당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중 압권은 카린산의 쑤앙마이 족으로 누루마이와 무라를 비롯한 열 명 가량의 여인족 전사들이 놀랍게도 커다란 흰호랑이를 타고 나타났다. 호랑이 중에서도 흰호랑이는 무척이나 귀한 것인데, 열 마리나 나타난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그 호랑이들은 '개명수'라고 불렀는데 모두 다 의젓하고 말처럼 카린족의 말을 잘 들었다. 이처럼 동물을 부리지 않더라도 동물을 숭상하는 부족은 각기 자신들이 숭상하는 동물의 치장을 하고 나왔다. 주신족 갈래 중 곰을 숭상하는 부족은 곰 가죽을 쓰고 곰을 흉내내는 춤을 추며 줄지어 나왔고, 호랑이를 숭상하는 부족은 짚과 나뭇잎, 꽃으로 커다란 호랑이 탈을 만들고 네 사람이 들어가 호랑이를 조종하며 나왔다. 물론 그 뒤를 따르는 자들도 노랑과 검정 물감으로 호랑이 무늬를 얼굴과 몸에 그려넣고 있었다. 지나족 중 뱀을 섬기는 화산족은 덩굴로 커다란 뱀을 만들고 수십개의 길다란 막대기로 그 뱀을 허공에 띄우고 수십 명이 막대기를 조종하여 커다란 뱀이 하늘을 구불구불 날아오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사람들의 놀라움을 샀다. 얼굴이 빨갛게 흥분되어 선두에 서서 그 움직임을 지휘하는 것은 바로 헌원의 딸인 공손발이었다. 공손발은 마술적인 재주가 뛰어났던 것이다. 지나족의 사슴 부족이나 도마뱀 부족들도 각기 나름대로 연구를 하여 직접 동물을 끌고 오지는 않았지만 더더욱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늑대를 숭상하는 키탄족은 수백 명이 모여 한 마리 커다란 늑대의 모양을 만드는 공연을 했는데, 가까이서 보아서는 알 수 없고 근처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보아야 제대로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수백 명이 모여서 만든 늑대가 울부짖고 달음질치며 천천히 걷기도 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몽골족은 많은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오늘만큼은 모두 푸른늑대의 자손이라는 생각으로 한결같이 얼굴에 푸른늑대의 문신을 그려 넣고 놀라운 기마술로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특히 보돈차르가 이끄는 보돈차르족은 얼굴뿐만 아니라 몸과 말 전체에 푸른 칠을 하여 더더욱 눈에 띄었고, 비록 사람수는 적었지만 대단히 기마술이 능란하여 말탈 줄 아는 자들의 부러움을 샀다. 돌연 저쪽에서 괴물같이 거대한 황소의 모습이 나타났다. 진짜로 괴물이나 신수가 나타난 줄 알고 놀라거나 무기를 꺼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염제 신농 유망의 부족에서 만든 커다란 가짜 황소로, 황소 백 필의 가죽을 이어서 황소 모양을 만든 뒤, 무려 육십 명의 사람들이 막대기를 세워 황소처럼 보이도록 들고 오는 것이었다. 키탄족의 늑대춤도 볼 만했지만, 높은 곳에 올라야 그것들의 장관을 제대로 볼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서 이 커다란 황소가 가장 갈채를 받았다. 노랫소리와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고함소리, 탄성과 박수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부족마다 나무통을 두드리고 휘파람과 피리 부는 소리, 동물들이 짖느 소리로 천지가 떠나갈 듯했다. 그렇게 유쾌하게 웃고 놀면서 수백 개의 부족원들은 태산 중턱에 마련된 회의장으로 향했다. 태산 회의장의 울타리는 아주 높았지만 전체가 꽃으로 뒤덮여서 보기만 해도 아찔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리고 울타리로 들어가는 문밖에는 높다란 나무로 연단을 세워 두었는데, 그 위에는 소뿔을 머리에 쓴 유망이 헌원과 형천, 금천과 축융 등 네 명의 대부족장을 거느리고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거대한 황소 가죽이 연단 위에 막대기로 세워져서 연단의 지붕을 덮었다. 마치 커다란 황소가 연단을 감싸고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모두 박수를 치며 이제 회의가 시작되리라 생각했으나 정작 유망은 가만히 팔짱을 끼고 선 채 기다리기만 했다. 그들은 주신 한웅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태산 회의를 주최한 것은 유망이었지만 실질적인 우두머리는 동북부 전체의 맹주라 할 수 있는 주신 한웅이었기 때문에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유망이 아무 말 없이 짜증난다는 듯한 얼굴로 연단 위에 서 있자 다른 부족들도 조금씩 흥이 식으려 했다. 그때 사람들이 외쳤다. "주신 한웅이다! 온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린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하늘에서 거대한 새 한 마리가 유유히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눈부실 정도로 화려한 깃털을 지녔으며, 하늘 높이 떠 있어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 크기가 매우 컸다. "봉황이다!" "신수다!" 주신족이 새(봉황)를 숭상하는 부족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고, 한웅이 그중 가장 높은 자임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으나, 신수가 한웅의 머리 위를 지키듯 날아올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주신을 섬기는 부족사람들은 홀린 듯 하늘을 떠가는 봉황을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 엎드려 절을 했고, 주신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자들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저게 진짜 신술까?" 유망이 투덜거리듯 묻자 헌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봉황을 보다가 대답했다. "아닐 겁니다. 만든 것 같습니다." "정말?" "날갯짓도 하지 않고, 그냥 떠 있기만 합니다. 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털을 이어서 만든 커다란 연이었는데, 헌원은 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챈 것이다. 그러자 유망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하늘을 나느 걸 만들었지? 주신놈들, 재주도 좋군." 그 봉황은 약간 비틀거리며 날다가 다시 뒤로 돌아서 날아갔다. 사실은 날아갔다가기보다는 연을 내렸다고 볼 수 있었다. 너무 커다란 연이어서 다루기가 몹시 어려웠고, 오래 떠 있게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 연을 띄우기 위해 가장 좋은 말 네 마리가 초죽음이 되도록 들판 저쪽에서부터 연을 끌고 달려왔다는 것은 헌원도 몰랐을 테지만. 곧이어 주신 한웅의 상징인 커다란 솟대가 나타났고, 그 주위로 수많은 짐승의 무리가 나타났다. 그 행렬의 맨 앞에 선 사람은 바로 치우우레였으며, 그 주변에는 놀랍게도 각양각색의 짐승들이 모두 있었다. 소, 말, 양, 돼지 등은 물론이고 코끼리나 낙타, 물소, 곰, 늑대, 호랑이까지도 보였다. 모든 동물들 옆에는 눈처럼 흰색을 칠한 가죽옷과 모자를 쓴 사울아비들이 동물들을 부려 대열을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땅을 달리는 동물만이 아니라 하늘에도 새떼가 무리 지어서 날아다녔다. 새를 조종할 수 있는 능력자가 주신 쪽에 몇 사람 있었던 것이다. 모든 동물들은 화려하게 치장이 되어 있었고 서로 대열을 이루면서 퍼졌다 오므라졌다 하면서 다가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각 부족들이 저마다 치장하고 동물을 끌고 뽐낸 것들도 볼 만했지만 수많은 동물들이 한데 모여 행렬을 이룬 것에 비하면 약과였다. 더욱이 온통 하얀색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쓴 수많은 사울아비들이 동물들을 다루는 것도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유망마저도 '흐음'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때 금천이 뚜벅 입을 열었다. "좋지 않군요." "뭐가?" 유망이 떨떠름하게 묻자 금천이 대답했다. "흰옷은 주신족들이 제일 좋아하는 옷이지요. 그리고 특히 우리 지나족은 동물을 섬기는 부족이 많구요." 그 말뜻을 알겠다는 듯이 유망이 인상을 썼다. "그렇군. 흰옷 입는 놈들이 동물들을 모두 다룬다... 주신족이 지나족을 언제까지 저렇게 다룰 것이라는 뜻인가?" 그러자 축융이 가는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 한마디 보탰다. "역시... 안 되겠습니다..." 유망은 화가 난 듯,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망이 축융에게 물었다. "소녀... 그 계집애는 잘 들어갔나?" "사와라 한웅이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 말에 유망이 히죽 웃어 보였다. "그래..., 그렇군." 바로 그때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동물들의 행렬이 유망의 연단으로 향해 오더니, 동물들이 옆으로 갈라지고 훈련이라도 하는 듯, 흰옷의 사울아비들이 연단을 에워쌌다. 그리고 장대한 체구의 치우우레가 말을 탄 채 연단 위를 향해 외쳤다. "한웅님의 말씀을 먼저 전하오!" 그러자 유망은 억지웃음을 얼굴에 가득 지으며 지지 않을 만큼의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올라오시오." 흰옷 차림의 치우우레가 조용하면서도 무게있게 말에서 내려 연단위로 성큼성큼 올라왔다. 치우우레의 키는 형천보다는 작았지만 다른 사람보다는 훨씬 컸고, 티끌 하나 없는 흰옷 차림인데다 이글거리는 눈빛이 왠지 위압감을 주었다. "주신의 사울아비 스승 치우우레요. 감히 한웅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겠소." 치우우레가 유망을 보고 말하자 유망이 웃으며 대답했다. "얼마든지." 그러자 치우우레는 사람들을 향하여 몸을 돌렸다. 연단 주위에 새까맣게 모인 각 부족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다. 얼마나 많은지, 머리들만 보이는데도 바다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치우우레는 한 번 헛기침을 하고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주신의 열세 번째 한웅이신 사와라 한웅님의 말씀을 전하오! 이렇게 온 세상에 사는 수많은 부족들이 모일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오!" '와'하는 함성소리가 태산이 떠나갈 듯이 울려퍼졌다. 치우우레는 환성이 멎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손을 들고 말했다. "이제 많은 부족들의 일을 이야기할 태산 회의에 앞서서, 회의 준비를 하느라 고생이 많으신 분께 먼저 감사를 표하고자 하오. 대부족장이며 모든 지나족을 이끌고 계시는..." 유망이 씩 웃으며 몸을 움직여 앞으로 나서려 했고 형천과 축융이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 공손헌원님께 박수를 보냅시다!" 유망의 눈앞이 잠깐 일그러졌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마치 물 속에라도 들어간 것처럼, 주변의 모든 것이 제대로 서 있지 않고 여기저기 일그러지고 기울어져 가는 것 같았다. 축융이 뭔가 치우우레에게 소리를 지르려 했고, 형천도 앞으로 달려나와 사람들에게 외치려고 했으나 그 소리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폭발하듯 번져 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성에 묻혀서 바로 옆에 있는 유망에게조차 들리지 않았다. 유망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이걸... 이걸 노렸구나...' 축융은 치우우레에게 소리를 질렀다. 뭔가 잘못 말한 게 아니냐고! 지나족의 우두머리는 염제 신농인 유망이며, 헌원이 아니라고! 그리고 형천은 연단 아래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역시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목소리 큰 천하장사 형천이 지르는 소리일지라도 수만 명이 일시에 내쏟는 고함소리에 묻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헌원은 그 와중에도 전혀 몸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처럼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 연단 위로 세 사람이 올라왔다. 바로 풍백, 운사, 우사의 삼사였다. 비렴이 배에 힘을 주어 나직하게 외쳤다. "한웅님의 말씀은 잘못 전달된 것이 아니오." 비렴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의 함성소리를 뚫고 연단 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뚜렷이 들려왔다. 선인들이 쓰는 비결이었던 것이다. 붉으라푸르락 얼굴을 붉힌 형천은 이를 갈면서 비렴에게 외쳤다. "이건...! 이건...!" 흥분한 형천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비렴은 태연히 말했다. "태산 회의 준비를 하느라 애쓴 것은 분명 헌원님으로 알고 있소. 그리고 유망님을 따르는 부족보다 헌원님을 따르는 부족이 더 많은 듯하고 말이오." 축융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아우성 때문에 축융은 자기가 무슨 마을 하는지조차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비렴의 말은 또렷이 들리고 있었다. 이건 말싸움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형천과 축융이 아무리 악을 쓰더라도 비렴은 듣지 못한 듯, 듣지 않은 듯 나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앞으로 한웅님께서는 지나족의 대표로 헌원님이 나서주기를 바라오.아울러 회의도 헌원님이 진행해주시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거요." "아하하... 하하핫!" 갑자기 유망이 미친 듯이 웃어댔다. 고함소리와 환호성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지만, 유망은 분명 웃고 있었다. 웃으면서 유망은 자신도 모르게 마구 지껄여대고 있었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이거였구나! 오히려 지금...! 지금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 갑자기 유망의 안색이 살기로 가득 차면서 유망은 허리의 칼을 뽑아 번개같이 헌원에게 달려들었다. 비렴과 병예는 현천의 큰 체구에 가려서 미처 막을 틈도 없었다. 허나 헌원은 역시 돌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네 놈이...! 네 놈이...!" 막 유망의 칼이 헌원에게 떨어지려는 순간, 역시 번개같이 튀어나와서 그 칼을 튕겨내는 다른 칼이 있었다. 유망은 칼이 튕겨진 순간, 눈을 크게 부릅뜨며 외쳤다. "네... 네가...?" 그것은 바로 그의 옆에 서 있던 금천이었다. 금천은 조용히 칼을 쥔 채 말없이 유망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조소와 경멸, 그리고 자신만이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통쾌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유망은 칼을 떨어뜨리며 다시 미친 듯 웃었다. "그렇구나! 너였구나! 네 놈 금천... 네 놈은 벌써부터 헌원놈에게 붙었었구나! 나를 속이려고 일부러 헌원놈과 아웅다웅한 것이었어..." 그러나 유망의 쉰 목소리에는 허탈함만이 가득했다. 그 순간, 비렴이 훌쩍 날아 유망과 헌원 사이에 섰다. 비렴이 눈을 번쩍이며 준엄하게 말했다. "수많은 부족이 모여 있는 앞에서 칼을 쓸 참이오?" 형천과 축융은 얼굴빛까지 퍼렇게 질린 채, 금방이라도 사새결단을 내려는 듯했다. 그때 유망이 그 자리에 아무렇게나 털썩 앉으며 다시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웃으면서 외쳤다. "그렇구나... 이렇게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어. 칼 한 번, 돌 한 번 던지지 않고 아주 쉽게, 아주 쉽게... 하하핫, 멋지다 멋져! 정말 멋지게 당했구나!" 수백 부족의 수만 명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내력진 공식적인 말이었다. 다시는 주워담을 수 없었다. 이제 유망은 더 이상 지나족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유망의 부족과 그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한 몇몇 부족을 제외하고는 이제 유망보다는 헌원의 말을 더 들을 것이었다. 사실 지나족은 너무도 많고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어서 유망의 지도력은 실질적인 통제력보다는 그의 이름과 명성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서 헌원에게 눌렸다면, 당연히 앞으로는 헌원이 지나족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고, 자신은 묻혀 잊혀져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꾸민 것은... "염제님!" 형천이 울부짖었다. 그러나 유망은 계속 미친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하하하... 관둬라. 관둬. 지금 추한 꼴 보일 기분이 아니다. 하하하... 웃기는구나, 웃겨. 하하하..." "이... 이 일을 어떻게..." 축융이 이를 갈며 외치자 유망이 말했다. "그래. 하고 싶은 대로 둬. 그래. 헌원? 잘났구먼. 정말 잘났어. 자네 맘대로 한번 해봐. 해보라구. 이제 지나족 전체의 대족장이니 말야." 유망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서서히 유망의 눈에 불같은 것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유망이 비렴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난 기르던 개에게 코를 물렸어. 그런데 말야, 그 개는 코 무는 버릇이 있을 거 같다구. 너희도 조심해야 할걸?" 이번에는 형천이 이를 부드득 갈며 외쳤다. "이건 싸우자는 거다. 전쟁이 날 거다! 너희가 시작한 거다!" 비렴이 한 점 흐트러짐없이 되받았다."너희가 시작했다." 그 말에 유망이 다시 미친 듯 웃으며 외쳤다. "누가 먼저 했든, 지금은 관두자. 관둬. 지금 할 이야기가 아니다." 유망은 다시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형천과 축융을 끌고 연단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연단 아래 함성은 가라앉았으나 절반 정도의 지나족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바로 염제 신농인 유망을 따르는 부족들이었다. 그러나 그에 질세라 헌원을 따르는 부족들의 고함소리도 그에 못지 않았다. 연단을 내려가다가 유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못난 꼴이냐! 지나족은 지나족 하나다! 조용히들 햇!" 유망이 소리를 지르자 지나족들은 단번에 조용해졌다. 유망의 목소리도 컸지만, 그 목소리에 처절한 울림 같은 것이 너무도 끔찍하게 들려서였다. 그리고 유망은 바람같이 형천과 축융을 데리고 사라져 버렸다. 유망이 사라지자 금천이 치우우레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제... 계속하십시오." 치우우레는 아까부터 내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뭔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웅님의 명이었다. 자신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 태산 회의를 이끄는 것은 모두 지나족 공손헌원님에게 맡기기로 하겠소. 자세한 것은 헌원님이 말씀하도록 하시오." 그러자 헌원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석상이 피가 돌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무겁게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들뜨거나 기뻐하는 느낌도 없었다. "지나족의 공손헌원입니다. 이런 무거운 일을 맡아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지나족의 우두머리가 될 그릇이 되지 못하며, 어디까지나 유망님을 모시는 몸입니다... 그리고..." 치우우레는 등골이 오싹했다. 갑자기 옆에 서 있는 헌원의 몸이 수십 배로 커 보였다. 마치 자기가 그 몸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오싹함이었다. '무서운 사람이구나... 한웅님께서 잘한 것일까?' 사와라 한웅 한편, 동굴 속에서 밤을 꼬박 새운 희네 일행은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소리에 비로소 태산 회의가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먼저 나래가 조용히 나가 밖을 살펴보았는데 지나족 막사는 텅텅 비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큰 구경거리를 놓아두고 막사에 남아 있는 자가 있을 리 없었다. 숨어서 조금 더 살펴보니 울타리 문 근처에만 두서너 명의 전사가 지킬 뿐, 막사 안은 그야말로 썰렁했다. "됐다. 아무도 없어." 나래가 돌아와 고개를 끄덕이자 희네는 웃으며 말했다. "너희가 들어왔다는 땅굴로 나가자." "도로 메웠을 텐데?" 울쿠타가 묻자 희네는 웃었다. "너희가 며칠 걸려 판 것을 언제 도로 다 메웠겠니? 겉만 살짝 메우고 말았을 거다." "그래. 울타리를 넘는 것보다는 그리로 나가는 게 덜 위험하다. 날이 밝았으니." 야율쿠리는 희네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는 분위기였다. 결국 그들은 희네의 말대로 조심스레 동굴 밖을 나섰다. 그때 누군가가 동굴 위쪽에서 훌쩍 뛰어내려 막 굴을 빠져나오는 그들 앞에 내려섰다. 모든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나래만은 재빨리 주먹을 쥐고 그 사람을 후려갈기려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다급하게 외쳤다. "이놈아! 나야 나!" 나래가 놀라서 흠칫 손을 멈추고 보니 작달만한 키에 땋아올린 머리, 우습기 짝이 없는 얼굴, 바로 헌원의 부하인 상망이었다. 상망은 나래의 큼지막한 주먹이 바로 자기 코앞에서 멈춘 것을 보고는 식은 땀을 흘렸다. "이 무지막지한 놈아, 그걸로 맞으면 이 상망, 대가리가 날아가겠다." "당신이 웬일입니까?" 희네가 묻자 상망은 약간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놈아, 헌원님이 네 걱정 많이 하셨어. 네 놈이 갇힌 것 같아서 말야. 근데 네 놈도 꾀가 제법이던걸? 도로 들어가서 숨을 줄도 알고 염제님이 찾아찾아 못 찾아서 펄펄 뛰셨고, 화가 나서 지키던 부하 두 놈의 목을 날려버렸단다." "어제부터 봤습니까?" 상망이 자기편인 것 같아 희네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상망은 일부러 인상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그래, 제기랄. 너 같은 주신놈 때문에 우리 지나족 동족이 둘이나 죽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다니. 기분 더럽더구먼." "그런데 왜 나타났죠? 그러면 그냥 조용히 우릴 놔둬도 되잖아요?" "헌원님은 네가 무사히 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분이 약속을 어겼다고 생각하게 둘 수는 없지 않느냐?" 그때 상망 뒤에서 또 다른 남자 하나가 걸어나왔다. 그 남자는 머리가 반질반질한 대머리였고 나이가 얼마나 들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쪼글쪼글한 주름투성이였으나 눈만은 이상하게도 소녀 아이의 눈처럼 크고 맑았다. 몸도 비쩍 말라 비틀거리며 걷는 것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목소리만은 젊은 청년의 목소리 같아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희네가 묻자 그 괴인은 흉하게 웃어 보이며 대꾸했다. "나? 난 지라고 한다. 헌원님 밑에 있지." "그렇습니까?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우린 가봐야 해요." 희네의 말을 막으며 상망이 얼른 말했다. "이 녀석아. 네 놈 목이 그냥 붙어 있는 것도 헌원님이 계속 염제님께 청을 드렸기 때문이야. 어제 네 아우가 괜한 짓을 한 거야. 알았느냐?" 지도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회의 중이라지만 염제님 막사 부근이 이토록 비어 있겠느냐?" 희네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약간 숙여 보였다. "그랬군요. 헌원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꼭 찾아뵙도록 하죠." "알았으면 어서 가거라. 기왕 이렇게 된 것, 들키면 안 되잖느냐? 네 녀석 때문에 더 고생하기 싫다." 희네 일행은 굳이 생색을 내는 상망과 지가 좀 수다스럽다고 생각했으나 좌우간 희네 일행을 보고 이르지 않는 것만도 고마워서 얼른 땅굴 쪽으로 갔다. 과연 희네의 추측대로 땅굴은 메우지 않고 그저 무거운 돌로만 덮어둔 상태였다. 꽤 큰 돌이었으나 힘센 나래가 가볍게 돌을 치웠고 희네 일행은 땅굴을 통해 밖으로 무사히 나갔다. 상망과 지가 전사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보냈는지 천막은 쓰러져 있었지만 반대편에도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빠져나왔구나, 허허." 야율쿠리는 좁은 곳에만 있다가 밖으로 나오자 크게 기지개를 폈다. 그러자 울쿠타와 야쿠타가 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이제 가봐야겠어. 밤새 오지 않아서 족장님이 몹시 화내실거야." "그래. 정말 고마웠다. 울쿠타, 야쿠타." 희네가 인사의 말을 전하자 야율쿠리도 말했다. "나도 가야겠다. 늑대춤이 잘되었을지 모르겠네. 나도 혼날 것 같다." "그래. 가봐라, 야율쿠리." 야율쿠리와 울쿠타, 야쿠타는 각각 흩어져 자신들의 부족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치베가 입을 열었다. "희네 안다, 나래 안다. 우리도 주신족 있는 곳으로 어서 가자." "그래. 치베 너도 정말 고생했다. 고맙다." 희네의 말에 치베가 담담히 되받았다. "벗의 일은 내 일이다. 고맙다고 할 필요도 없다." 희네와 나래, 치베는 주신 막사에 도달하자마자 양역을 만났다. 양역은 희네와 나래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말했다. "희네, 나래! 어디 갔었느냐? 아버님과 큰 스승님들이 몹시 찾으셨는데!" "아, 그게..." 나래가 우물쭈물하자 희네가 나섰다. "이야기하자면 길어. 지금 큰 스승님들을 뵈야겠다. 어디 계시지?" "지금 회의장의 연단에 계신다. 아주 난리가 났단다, 난리가." "난리?" 양역은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한웅님께서 유망 대신 헌원에게 회의를 맡으라고 하셨단다. 이제 유망 대신 헌원이 지나족을 맡으라고 하신 것이나 다름없지. 그 때문에 유망은 화가 나서 가버렸고 유망을 따르는 부족 몇몇이 잔뜩 소란을 일으켜서 회의가 느려지고 있단다." "그런 일이 있었어?" 나래가 놀라며 묻자 희네가 다급히 말했다. "어서 스승님을 뵈러 가야겠구나." "가더라도 옷 좀 갈아입고 가라. 뭐 하다 왔기에 옷이 그렇게 흙투성이냐?" 양역의 핀잔에 희네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옷은 갈아입어야 했다. 자신이 가져온 두루마리를 꺼내려면 어차피 그래야 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다." 그때 치베가 말했다. "이제 회의가 끝나면 나는 너희를 따라갈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 부족 사람들을 몇 년이나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 부족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만나고 오면 안 되겠는가?" 희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된다, 치베. 정말 네 도움이 컸다. 이제 회의가 끝날 때까지 보돈차르 부족에 가 있어도 되다. 회의가 끝나는 날에 돌아와라." "고맙다. 회의가 끝나는 날에 꼭 돌아오겠다." 희네와 나래는 치베를 보내고 일단 자신들의 막사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희네가 유망의 막사에서 가져온 두루마리를 뜯어냈다. "그게 뭐야?" "나도 잘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지. 유망이 부족장들과 뭔가 약속한 증거 같아서..." 순간, 희네가 옷을 갈아입는 나래를 보니 나래의 옆구리에 상처가 나 있었다. 희네가 놀라서 물었다. "나래야, 그 상처는?" "아... 이거? 잊고 있었네. 별로 심하진 않아." 나래는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희네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소녀와 만났던 일부터 시작하여 솟대 밑에서 만난 것, 괴한들의 이야기를 엿들은 것, 그리고 그 괴한들이 솜씨를 보니 틀림없이 사울아비로 보이더라는 것까지. 희네는 그 이야기를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흠... 이거 보통 일 같지가 않구나. 한웅님을 누군가가 노리는 것 같아..." 그러고 보니 희네도 막사에 있으면서 기이한 자들이 유망의 막사에 드나드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키탄족과 타타르족이 드나들었고 깊은 밤이 되자 온통 검은 옷차림에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기이한 자들 세 명도 드나들지 않았던가. 그 일과 나래가 겪은 일은 아무래도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훔쳐온, 그 두루마리도 뭔가 쓸모가 있을 지 몰랐다. 두 형제는 아무래도 일이 심상치 않다 생각하고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는 회의장 연단 쪽으로 향했다. 희네는 아직 몸이 편치 않았지만 그제 유망의 치료를 좀 받았기 때문인지, 예전만큼 통증이 심하지는 않았다. 형제는 지나족들이 있는 곳을 피해 저쪽으로 돌아서 회의장 쪽으로 갔다. 하지만 형제는 아직 회의장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주변의 아는 사울아비 한 명에게 물으니 이미 회의가 시작되었기에 비렴, 병예, 신지울태의 삼사는 모두 회의장으로 한웅님을 모시고 들어갔으며, 나래가 보이지 않자 비렴은 화를 내다가 대신 양역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것이다. 아버지 치우우레도 회의장 주변의 경비를 하느라 계속 돌고 있어서 만나기가 힘들었다. 희네는 그 사울아비와 다른 몇 사람을 붙잡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 물아보아서 대강 사태의 전말을 파악할 수 있었다. 회의장 안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든 간에 회의장 밖은 수많은 부족들이 모여 벌이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모든 부족들이 질세라 자기 부족의 꾸밈새와 춤과 노래를 뽐내고 노느라 몹시 시끌벅적했다. 그러나 두 형제는 그것을 구경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별일 없겠지?" 나래가 걱정스레 묻자 희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한웅님이 먼저 한 방 먹이셨구나. 오늘은 유망이 저 안에 없으니 저 안에서는 별일 없을 거야." "그나저나 헌원이 지나족 우두머리가 된 셈인데... 유망보다는 낫지 않을까? 사람됨이 훨씬 낫잖아. 형님 말을 들어보니 유망놈은 거의 미치광이라며?" 나래의 말에 희네는 고개를 한 번 갸웃해 보였다. "그건 모르지." "왜?" "헌원이 유망보다 훨씬 나은 건 맞지만, 그 부족의 부족장이 훌륭하면 옆의 부족은 도리어 고달파질 수도 있단다." "그래도 미치광이 부족장보다는 낫잖아. 미치광이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형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며 저녁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회의장 문이 열리고 한웅 행렬이 나왔다. 희네 나래는 그 뒤를 좀 멀찍이 따라가다가 기회를 보아 비렴에게 갔다. 여전히 사람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 치어서 뒤를 따르기가 힘들었다. 보통의 부족 사람들에게는 이 회의의 내용은 별로 의미 없으며 오로지 모두 모여 노는 것이 제일인 듯이 보였다. 하지만 적어도 지나족과 주신족의 막사 부근만은 그리 시끄럽지 않았다. 지나족과 주신족은 이번 회의에서 중요한 사안들을 정하기 때문이었다. 비렴은 조금 피곤한 기색이었으나 둘을 보자 반가워했다. "오, 너희냐? 나래, 네 녀석은 어딜 갔었느냐? 그리고 희네, 너는 괜찮은가?" "이야기하자면 깁니다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긴 시끄러우니 내 막사로 가자." 비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둘을 데리고 자기 막사로 간 다음 몹시 목이 마른지 물 항아리에서 물을 퍼서 마신 뒤에 물었다. "무슨 이야기냐?" 희네와 나래는 각각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비렴에게 말했다. 비렴은 이야기를 들으며 점점 심각한 표정이 되어갔다. 그리고 희네는 유망의 막사에서 가져온 가죽 두루마리를 꺼내 비렴에게 보여주었다. 비렴이 그것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흠... 이건 맹세의 표시다. 부족장들간에 맺은..." "알아보실 수 있습니까?" "거의 다 알아볼 수 있다. 이 맨 위에 있는 표식은 뱀의 표식이지? 이것은 지나족 중 헌원의 부족이다. 그리고 이 밑의 표식들은 사슴족, 도마뱀족, 물고기족, 구름족, 바람족 등이다. 다 지나족의 큰 부족들이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니로구나." "왜 그렇습니까?" "이들 부족들은 서로 싸우고 다투기를 밥먹듯 해왔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로 뭉친다면 그 힘이 꽤 커질 거야. 아마도 유망이 헌원을 시켜 부족들간에 동맹을 한 모양이다. 더구나 말이다, 이렇게 피로 쓴 서약은 보통의 맹세가 아니다." "그러면 어떤 맹세입니까?" 비렴의 눈이 번뜩였다. "전쟁의 맹세다." 희네와 나래는 찬 기운이 등골을 훑고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전쟁..." 비렴은 뭔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말했다. "물론 이것 하나만 가지고 반드시 전쟁이 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낌새가 좋지 않다. 나래 네가 보았다는 그 사울아비도 그렇고..." "그 검은 옷 입은 괴이한 자들에 대해서는요?" 비렴은 조용히 뭔가 생각하다가 입술을 떼었다. "그런 차림을 한 부족은... 없다. 적어도 지금은." "그럼 전에는 있었습니까?" "네 말만 듣고 꼭 그렇다고는 못하겠다만 비슷한 부족이 있었다. 산에 살던 가리족이라는 부족인데 아주 괴이하고 악독한 부족이었다. 기이한 범을 닮은 신수를 숭배하며 사람을 잡아먹는 끔찍한 부족들이었지." "사람을 잡아먹어요?" 나래가 눈살을 찌푸리자 비렴이 '허허' 웃었다. "그래서 일곱 해 전, 사울아비들과 키탄족 전사들이 함께 그 부족을 없애버렸다. 나도 같이 갔었단다. 설마... 그중 살아남은 자가 있었을까..."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희네의 말에 비렴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아직은 무엇 하나 분명한 게 없잖느냐?"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희네의 말에 비렴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아직은 무엇 하나 분명한 게 없잖느냐?" "두루마리가 있잖습니까? 전쟁을 준비하는 거라면서요?" "이 두루마리가 미아우족과의 전쟁을 준비한 것이라고 누가 말하면 어쩌겠느냐? 허허." 희네는 할말이 없어졌다. 그러자 나래가 말했다. "하지만 그 사울아비들은 한웅님을..." "한웅님이 돌아가시면 어쩐다 했지만 한웅님을 죽이겠다는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무슨 개 백 마리가 어쩌고 횡설수설하지 않았느냐? 그것으로는 누구도 납득시킬 수 없다." "그럼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까?" 희네가 분한 듯이 씩씩거리자 비렴은 웃으며 희네를 보았다. "너는 꼭 전쟁이라도 났으면 좋겠다는 듯이 말하는구나." 그러자 희네는 당당하게 말했다. "물론 전쟁은 싫습니다. 그러나 기왕 벌어질 전쟁이라면 우리 땅에서 싸움이 나는 것은 싫습니다." "너는 지나족과 반드시 전쟁이 난다고 생각하는 게냐?" 희네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지나족은 더 이상 주신 밑에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정도라면 괜찮습니다만..." "주신과 전쟁을 한다는 것이냐?" "그래야만 할 겁니다." "유망이 네가 말한 대로 미치광이여서?" "아닙니다. 유망은 그래도 똑똑한 자입니다. 그리고 헌원은 더 무섭구요. 그런 것말고 반드시 전쟁을 해야 할 이유가 있는 듯합니다." "왜 그런가? 더 말해보아라." "지나족의 땅은 상당히 크고 넓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부족이 있구요. 하지만 그들이 믿는 것은 부족마다 다릅니다. 우리 주신족은 모두가 안파견 한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로 쉽게 뭉칩니다만, 그들은 같은 족속들이면서도 믿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로 뭉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말은...?" "그들 부족이 하나로 뭉치려면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즉, 다른 부족과의 전쟁 같은 것 말입니다." "그래서 주신과의 전쟁을 바란다? 하지만 미아우나 키탄처럼 지나족과 사이가 나쁜 부족은 많이 있지 않느냐?" "그들 부족은 지나족 전체를 모이게 하지 못합니다. 그들과 맞닿아 있는 부족들만 따를 뿐이겠지요. 오직 주신만이 지나족 전체가 들고 일어나야 할 만큼 강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입니다. 그래야만 그들은 하나로 뭉칠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신과 전쟁을 한다? 그들이 이길 것 같은가? 그들은 구리 무기도 없고, 사울아비 같은 용맹한 자들도 적은데?" "하지만 그들은 숫자가 많습니다. 그리고 지나족에도 용맹하거나 힘센 자들이 적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구리 무기는..." 희네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지나족이라고만들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지금은 만들지 못하지 않는가?" "지금은 물론 구리 무기 만드는 법을 비밀에 부치고 있지만 지나족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낼 것입니다. 몇십 년, 몇백 년이 지나도 그 비밀이 지켜지리라 생각하십니까? 구리 무기를 지나족에게 파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법이 없는 것처럼, 구리 무기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꼭 나오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잖습니까?" 비렴은 갈수록 희네의 이야기에 끌려드는 것 같았다. 비렴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너 같은 젊은 아이가 몇십 년, 몇백 년 후까지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다. 당장 유망이 주신과 싸워서 얻는 건 무엇이냐?" "유망은 지나족의 대부족장이지만, 정말로 지나족 전체의 임금이 될 것입니다. 더 큰 힘을 얻는 것이고, 지나족도 하나로 뭉침으로써 더 큰 나라가 되는 것이죠." "주신과 전쟁을 해서 얻는 피해가 클 텐데?" "어차피 모든 부족은 다른 부족과 싸우게 마련입니다. 피할 수 없는 일이죠. 차라리 그 싸움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일 겁니다. 주신은 지나족과 싸워 이겨도 얻을 것이 적습니다만, 지나족은 주신과 싸워 이기면 얻는 것이 많습니다. 나라를 뭉치게 하고, 부족장은 더 큰 부족장이 되며, 주신의 기술과 보물을 많이 빼앗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비렴은 거기까지 듣고 무릎을 쳤다. "똑똑하구나, 똑똑해. 어찌 그렇게 생각했느냐?" 희네는 그냥 웃지도 않고 고개만 한 번 갸웃하고 말았다. "글쎄요... 그냥 생각입니다." "생각만으로 그리 했느냐?" "생각으로는 못하는 일, 못하는 것이 없지요. 다 해보고 미리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리를 못 쓰게 되면서 저는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달려가기 힘든 곳, 가볼 수 없는 곳을 생각으로 가보았고, 하기 힘든 일, 할 수 없는 일들을 생각으로 해보곤 했지요." "지나족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어찌해야 하겠느냐?" "저로서는 좋은 방법은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무엇이냐?" "저쪽에서 쳐들어오기 전에 먼저 쳐들어가는 것입니다." 비렴은 눈을 크게 떴다. "먼저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이냐? 너는 전쟁을 좋아하느냐?" 희네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누가 전쟁을 좋아하겠습니까? 물론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만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게냐?" "지금 지나족을 상대하는 방법은 그것뿐입니다. 그들이 뭉치지 못하게 하고 두렵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가 많은 지나족에게 지금은 몰라도 몇십 년, 몇백 년 후에는 점점 밀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지나족을 이겨내면 그뿐이지 않느냐?" "우리가 지키기만 하면 그들은 계속 쳐들어옵니다. 그들은 이기면 이기는 대로, 지면 지는 대로 남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사울아비 한 명이 지나 전사 열 명을 당해낸다 해도, 그들은 수가 많습니다. 그러면 점점 주신 땅은 짓밟혀가겠지요. 그리고 주신보다 지나를 따르는 부족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주신의 진정한 힘은 주신을 따르는 부족들이 많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을 잃으면 주신은 위험합니다. 먼저 공격하면 그런 위험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먼저 쳐들어가야 합니다." 희네는 자신도 모르게 열변을 토했다. 그러자 비렴은 잠시 침묵했다. 비렴이 입을 다물자 희네에게 눈짓을 했고 희네 역시 입을 다물고 비렴에게 고개를 숙였다. "너무 나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비렴은 반색하며 손을 저었다. "아니다, 아니야. 잘 말했다. 정말 대단한 이야기구나... 하지만 지금 세상일은 그리 쉽지 않느니. 너는 때를 잘못 탔구나. 흠..." 비렴은 잠시 말을 끊다가 이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주신은 싸움을 싫어하고 평화를 지키는 겨레다. 특히 지금 사와라 한웅님은 전쟁을 아주 싫어하신다. 그분은 모든 부족이 조용히 사는 것이야말로 안파견 한님의 뜻을 지키는 일이라 믿는 분이시다. 아주 고귀한 분이시지. 그런 분이 전쟁을 먼저 일으키는 것을 승낙할 리가 없지..." 희네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자 비렴이 계속 말했다. "더구나 지금 주신의 높은 분들은 모두 전쟁을 싫어하고 다른 부족의 일을 점점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사실 주신의 힘은 다른 부족들을 뭉치게 하여 그 가운데 서는 것에 있는데도 말이다. 너희는 주신의 사울아비가 전부 몇이나 되는지 아느냐?" "대단히 많겠지요." "그렇게 많지 않다. 백 명씩 모아서 이백 개가 될까말까 할 것이다." 당시는 아직 만이라는 숫자 개념이 쓰이지 않았기에 비렴은 백의 이백이라 말했다. 즉, 이만 명 정도라는 것이다. "대단합니다." 희네가 말하자 비렴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지나족의 부락 수가 그보다 더 많다." 그 말에 희네와 나래는 깜짝 놀랐다. 희네도 지나족의 사람 수가 많은 것은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많습니까?" "지나족의 부족은 우리의 부족과 다르다. 우리의 부족만한 크기를 그들은 부락이라 하며, 그 부락이 적게는 열 개에서 많이는 쉰 개가 모여야 부족이라 한다. 대부족이 되려면 그런 부족을 열 개에서 쉰 개, 많이는 백 개까지 거느려야 한다." 한 부족이라 함은 보통 눈에 보이고 하루에 걸어갈 수 있는 주위 땅을 가진 작은 집단을 뜻한다. 교통이나 다른 이동수단, 매매나 물자 수송이 없었으므로 하루에 갈 수 있는 범위가 한 집단의 영역 한계였고, 그 안에서 나는 수확물로 부양할 수 있는 사람 수가 자연스레 그 부족의 숫자가 된다. 당시에 가장 생산량이 높은 농업으로 볼 때도 아무리 비옥한 땅에 자리잡은 부락이라 해도 그 숫자는 백 명 미만이 되었으며 보통은 오십 명 내외였다. 만약 수렵이나 목축을 위주로 하면 그 숫자는 더 줄어들어서 이십 명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지나족은 농경을 위주로 했으니 보통 오십 명 정도의 부락원을 갖고 있으며 목축 위주의 부족은 보통 한 부족이 이삼백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 지나족의 대부족은 보통 오만에서 십만 명의 인구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다른 부족의 대부족이 오천에서 많아야 이만을 넘기 힘든 것과 확연히 달랐다. "그런 대부족이 지나족에는, 주신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족속을 합한 것만큼이나 많다. 물론 대부족 숫자만 따져서 말이다. 유망은 그 대부족들을 모조리 헤아려 밑에 두려 하고 있다. 우리도 근래에 이르러서야 겨우 알아낸 것이다. 그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고 크며, 우리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강하거나 많지 않다. 더구나 먼저 공격하려면 우리가 적보다 많아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구리 무기와 사울아비가 있더라도 그건... 쉽지 않다." 비렴은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희네나 나래는 말문이 막혔다. 잠시 후 비렴이 천천히 말했다. "너는 대단하다. 아주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어. 대단한 일이지. 하지만 실제 일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우리 세 큰스승도 몇 번이나 먼저 쳐들어갈 것을 생각해보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어. 적은 숫자의 사울아비들로, 처음 가는 남의 땅에서 몇 배나 많은 적들을 상대할 수는 없는 거야. 너무 무모하고 위험해." 비렴은 뒷짐을 지고 막사 안을 몇 번 빙빙 돌았다. "지나족도 그것을 알기에 한번 해볼 만하다고 여기는 것일 게야. 그래서 유망이 그렇게 거만한 것이지. 그래서... 우리는 사실 이번 회의에 모험을 한 것이다." "무슨 모험입니까?" "이번 회의 때 우리는 꾀를 있는 대로 내어 유망의 힘을 꺾고 지나족을 흩으려 했다. 헌원은 보다 온순한 사람이니 그 뒤를 이으면 나을거라 생각하고 말이다. 사실 헌원이 뒤를 잇겠다고 하면 유망은 화를 낼 것이니, 유망과 헌원이 서로 다투게 만들 수도 있었지. 우리는 헌원을 밀면 되는 것이고 말야. 그러면 지나족의 힘은 많이 약해지겠지." "그런데 회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희네가 묻자 비렴이 대답했다. "헌원은 물론 온순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은 실제로 부족장이 아니니, 유망이 없으면 이야기하기 힘들다고 빼고 있어. 아직까지 유망의 명령을 듣겠다는 것 같아. 우리는 지나족들이 북쪽으로 영토를 넓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려 했으나 쉽지 않구나. 헌원은 자꾸 유망에게 그 일을 미루기만 하고 별다른 답을 주지 않는다." "헌원이 그랬습니까...?" 희네의 눈이 빛났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는 더 온순하고 욕심이 없는 자 같다. 멍청한 것은 아닌데도 말야. 회의는 아마 그냥 별다른 결과없이 끝날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유망과 감정만 더 사나워진 건지도..." 희네는 속으로 헌원은 절대 멍청이가 아니며 깊은 생각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비렴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만, 우리 이럴 것이 아니다. 좌우간 너희는 큰 공을 세운 셈이니 한웅님을 뵙도록 하자." "네?" 희네와 나래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저희는 그리 공을 세운 것이 없는데요?" 비렴이 껄껄 웃었다. "공을 세웠지 않느냐? 허허. 그리고 공보다는 말이다. 너희 형제같이 똑똑하고 올바른 사람들이 한웅님 주변에 있어야 한다. 요즘은 영 이상한 녀석들이 한웅님 주변을 맴돌아서 말이다. 한 명이라도 좋은 사람을 한웅님 곁에 두어야 주신도 좀더 나아질 것 아니겠느냐?" 한웅을 뵙는다는 것은 뭔가 이름을 얻어 임명을 받는다는 뜻이다. 물론 후대의 벼슬자리에 오르는 것과는 다르지만 크나큰 명예요, 영광이기도 했다. 부족장의 자리에 오르지 않는 이상 봉록을 받거나 무엇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명예를 얻은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더 모여들게 되고 저절로 힘이 커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비렴은 살짝 희네에게 눈짓을 해보였다. "너희를 위해 내, 또 준비한 것이 있지." "감사합니다. 한웅님을 뵙는 것만도 몸둘 바를 모르겠는데..." "잔소리말고 따라오너라." "하지만... 아직 준비도..." "잔소리말고 따라오래두. 이런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비렴은 그 즉시 두 형제를 데리고 휙휙 걸어서 한웅의 막사로 갔다. 한웅의 막사 주위는 사울아비들이 철통같이 경계를 서고 있었으나 비렴의 앞은 누구도 막지 않았다. 주신 막사 밖은 여전히 모닥불과 횃불이 너울거리고 춤추고 노는 소리가 떠들썩했지만 주신 막사 안은 그래도 조용한 편이었다. 셋은 거리낌없이 한웅의 막사 앞으로 갔다. 막사 부근으로 갔을 때, 안에서 '딩딩'하는 낯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바로 소녀의 악기 소리였다. '저 여자가 한웅님 마음에 들었나 보군. 온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한웅님 옆에 붙어 있구나.' 희네는 그런 생각을 했고, 나래는 또 다른 생각을 했다. '다행히 전날 빠져나갔던 것이 들키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그때 그놈들은 누군지 몰랐을 거야. 가만, 들키지 않은 않은 건 나로서도 다행이다. 한웅님 마누라와 밤에 만나는 걸 들키면..." 나래가 속으로 부르르 떨고 있을 때 비렴이 굵직한 목소리로 외쳤다. "한웅님. 비렴이옵니다." 그러자 안에서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라." "전에 말씀드린 아이 둘을 함께 데려왔사옵니다." 그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렸다. "같이 들라." 그러자 비렴은 두 형제를 향해 눈짓을 해 보이고는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형제는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한웅의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막사 안은 생각보다 좁고 검소했다. 화려한 장식이 없다기 보다는 아예 장식이 하나도 없이 밋밋했기 때문에, 작은 부족장의 막사라면 모를까 대한웅의 막사라고 생각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다만 바닥에는 아주 좋은 폭신한 털가죽이 몇 겹으로 깔려 있는 것 정도가 달랐다. 대주신의 13대 사와라 한웅이 그 중앙에 앉아 있었다. 그 좌우에는 두 명의 여자가 있었는데, 한 명은 여섯 번째 마누라 부루버들이었고 또 한 명은 바로 소녀였다. 부루버들은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구리 주전자를 들고 한웅에게 술을 따르고 있었으며, 소녀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명의 시중드는 사람들과 사울아비들이 근처에 서 있었다. "한잔 하던 중이네. 같이 하겠는가?" 사와라 한웅은 길쭉한 얼굴에, 날카롭지만 온화한 눈을 가졌으며 흰 수염을 턱밑까지 기른, 몹시 사람 좋아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성격도 무척이나 소탈하고 인간적인 듯, 마시던 잔을 그대로 미소를 지으며 비렴에게 내밀었다. 한웅이라는 높은 존재의 위엄이나 위압감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세상을 떠나 사는 선인에 더 가까운 듯한 풍채였고 행동거지도 시원시원하고 호감이 갔다. 한마디로 아주 좋은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었다. 비렴이 웃으며 잔을 받아들고 마시는 시늉만 살짝 한 다음 도로 공손히 잔을 돌려주었다. 그러자 사와라 한웅이 웃으며 말했다. "한 번이라도 정말 마셔보게. 마시는 시늉만 하지 말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비렴이 조심스레 말했다. "전에 말씀드렸던 두 아이입니다. 형이 희네이고 아우는 나래라 하옵는데, 희네는 아주 똑똑하며 아우는 힘이 장사입니다. 인사 드려라. 한웅님이시다." 비렴이 말하는 즉시 희네와 나래는 깊숙이 땅에 엎드려 절을 올리며 말했다. "사울아비 희네라 하옵니다. 치우 집안의 아들 되옵니다." "사울아비 나래이옵니다. 희네 형의 아우 되옵니다." 사와라 한웅은 빙긋 웃으며 비렴이 도로 내민 술잔을 쭉 들이켜며 말했다. "치우 집안이라... 용감하겠구먼. 아버지가 뉘신고?" 이번에는 비렴이 대답했다. "사울아비 스승인 치우우레입니다." "아, 난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아주 성실한 사람이야. 아들들도 좋군, 그래." 희네와 나래는 둘 다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사와라 한웅이 부루버들에게 빈 잔을 내밀고 웃으며 말했다. "일어나거라. 나같이 늙다 보면, 젊은 사람들 얼굴만 보아도 흐뭇해지는 법이니라. 얼굴 좀 보자." 희네와 나래가 얼굴을 들자 사와라 한웅은 흐뭇하게 둘의 얼굴을 보았다. 곁에 있던 소녀가 순간 희네의 얼굴을 보았지만 희네는 그 눈빛을 느끼면서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사와라 한웅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아주 잘생겼구나, 여자처럼. 아우는 아주 듬직하고 근데 생각보다 어리구나. 몇 살이냐?" "열일곱이옵니다." 희네가 대답하자 사오라 한웅이 나래를 보며 물었다. "너는?" "저... 저도 열일곱이옵니다." 사와라 한웅이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짓자 비렴이 얼른 귀띔했다. "쌍둥이이옵니다. 닮지 않은 쌍둥이죠." "그랬구먼, 허허. 그런데 너무 어리잖는가?" 사와라 한웅이 모를 소리를 하자 비렴은 웃으며 말했다. "전혀 아니옵니다." "정말인가?" "물론이옵니다." 그러자 사와라 한웅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심심하니 장난 하나 하자. 힘세다는 아우... 이름이 뭐랬지?" "나... 나래라 하옵니다." "그래, 나래야. 비렴이 그러는데 네 힘이 정말 세서 당할 자가 없다면서?" "아... 아이구..., 그건 너... 너무..." "듣자 하니 호랑이도 맨손으로 때려잡고 했다는데? 정말이냐?" 나래는 감히 대답할 말을 못 찾고 땀을 흘리며 '아이구아이구' 소리만 냈다. 사와라 한웅은 그 모습을 보고 기분 좋게 껄껄 웃었다. "네 힘이 그리 세면, 저기 있는 구리몽둥이를 한 번 휘어봐라." 사와라 한웅이 가리킨 곳에는 한 명의 힘센 사울아비가 구리몽둥이를 들고 서 있었는데, 거의 팔뚝만큼 굵은 몽둥이였다. 좌우간 한웅님의 말이라 나래가 지체없이 일어나 가려는데, 희네가 당돌하게 나섰다. "세 개 준비해주시옵소서." 비렴이 놀라 얼른 막아섰다. "어허, 어디 감히..." 그러자 사와라 한웅이 재미있다는 듯 비렴을 말렸다. "괜찮다. 그런데 누구더라... 아, 그렇지. 혼네야." "희네이옵니다." 비렴이 귀띔으로 바로잡아주었다. 그러자 사오라 한웅은 웃으며 다시 말했다. "아, 그렇지. 희네야, 네 아우가 그리 세냐?" 희네는 그냥 고개만 조아렸다. 사와라 한웅이 그 장사에게 말했다. "같은 몽둥이 다섯 개를 가져오너라." 희네와 나래, 비렴은 다같이 깜짝 놀랐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사와라 한웅은 '허허' 웃었다. "네가 내 앞에서도 감히 세 개라 했으니 네 아우가 세긴 셀 것이되, 내 앞이라 망신당할까 봐 여유를 두고 말했을 것이니라. 그러니 있는 힘을 다 써보거라." 희네는 더는 말도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나래는 조금 불안한 듯,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곧 구리 몽둥이 다섯 개가 날라져 왔는데, 구리몽둥이 다섯 개를 손에 쥐기에는 너무도 많았다. 다섯 개 모두가 굵어서 힘이 문제가 아니라 일단 쥘 수가 없는 것이다. 나래는 땀만 흘리며 쩔쩔매었다. 나래가 몽둥이 다섯 개를 손에 쥘 수 없어서 곤란한 듯하자 사와라 한웅이 다시 말했다. "곤란하냐? 네 형은 똑똑하다며?" 희네는 속으로 '과연' 했다. 사와라 한웅은 이 작은 시험 하나로 자신의 지혜와 나래의 힘을 다 보려는 것이다. 난감한 문제였지만 희네는 지체없이 나래에게 말했다. "꼭 손에 쥐고 휘라는 말씀은 없으셨다. 품에 안고 가슴으로 휘면된다." 나래는 '아' 하며 짧게 내뱉고는 즉시 다섯 개의 몽둥이를 품에 안듯이 하고 양팔로 몽둥이를 안은 다음 휙 몽둥이를 구부리고 난 뒤 즉시 몽둥이들을 공손히 내려놓고 다시 엎드렸다. 너무도 싱거울 만큼 간단히 휘어버렸고, 나래의 표정이 한 번도 심각하거나 용을 쓰는 기색이 없었다. 오로지 쩔쩔매는 것 같은 표정 그대로 힘을 써버린 것이라 사와라 한웅은 물론이고 비렴마저도 몽둥이가 휘어졌다는 것을 깨닫는데 한참 걸릴 정도였다. 엄청난 힘을 요구하는 일이었음에도 너무도 간단히 행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나중에 행하고 나면 간단한 일이지만, 이렇게 금방 기지를 발휘하여 꾀를 내는 것도 결코 범상한 일은 아니었다. 사와라 한웅이 잠시 멍하지 있다가 중얼거렸다. "너무 싱겁군. 재미없네." "제... 제가 잘못이라도 하였사옵니까..." 나래는 몸둘 바를 몰라 다시 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사와라 한웅은 껄껄껄 크게 웃었다. "저 녀석! 순진하기 그지없구먼! 좋아, 좋아. 형도 꾀가 아주 장하고! 그렇게 쉽게 풀어낼 줄은 몰랐다." 그러면서 사와라 한웅은 나래에게 말했다. "이봐야, 나리야." "나래이옵니다." 비렴이 다시 귀띔하자 사와라 한웅은 고개까지 흔들며 웃었다. "미안하구나. 이보거라, 나래야. 하지만 힘만 세면 모자라거든. 날쌔기도 해야 하지." "네, 네. 그렇습니다." 나래는 계속 긴장이 되어 땀만 흘렸다. "한 가지 더 보여줄 수 있겠느냐?" "네, 네. 분부만 하소서." "저기 있는 사울아비는 아주 날쌘 분이다. 그분의 머리 위에 있는 장식을 한 번 떼어보거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래의 몸이 번쩍하더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한웅이 가리킨 사울아비는 그 말을 듣고 방어태세를 날쌔게 갖추며 손으로 장식을 가리려는 참인데, 그의 손이 올라갔을 때 이미 머리장식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 사울아비가 '어' 하는 소리를 내는 순간 이미 나래는 한웅의 발밑에 머리장식을 놓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번에도 사와라 한웅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너무도 간단해서 마치 홀린 듯 했다. 다만 비렴만이 나래가 극도의 기묘한 동작을 써서 그 사울아비의 머리장식을 채는 것을 보았으며, 보기에는 간단해도 실로 극도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 요술쟁이냐?" 사와라 한웅이 나래에게 묻자 나래는 다시 땀을 죽 흘리며 엎드렸다. "아... 아니 옵니다. 가져오라시기에 다만..." 사와라 한웅이 아주 기분 좋은 듯이 크게 껄껄껄 웃으며 외쳤다. "대단하구나! 대단해!" 비렴은 나래를 보며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말했다. "너, 혹시 카린산의 부족들과 만난 적이 있느냐?" "예? 아, 예. 그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네가 번개같이 움직이는 모습이 어째 카린산 여인들이 쓰는 수 같아서 말이다. 카린산 부족은 가급적이면..." 비렴이 이야기하는 것을 사와라 한웅이 끊었다. "카린산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한가? 좌우간 보기 드문 형제일세. 좋군, 좋아." 사와라 한웅이 웃으며 기뻐하자 아무 말 없이 있던 소녀가 살짝 웃으며 다시 한 번 희네 쪽을 바라보았다. 희네는 역시 못 본 체했으나 부루버들이 불타는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언짢아지며 불편했다. 그러나 사와라 한웅은 그런 것은 신경을 쓰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좋다. 너희는 이제 내 옆에 머물도록 해라. 회의가 끝나고 신시로 돌아가서도 너희는 계속 그리 하도록 하라." 희네와 나래는 그 자리에 엎드려 절을 했다. 이렇듯 한웅님에게 직접 뽑혀 그 옆에 있게 되는 것은 실로 커다란 영광이었다. 그때 비렴이 살짝 옆에서 말했다. "하오나..." "뭔가?" "저 둘은 아직 성인식 전이옵니다. 그래서 성을 쓰지 못하고 아이적 이름으로 그냥 불리고 있으니, 그런 이름으로 한웅님 곁에 있기는 좀 그렇지 않사옵니까?" "뭐 다 자랐는데 어때서 그런가? 그럼 성인식을 한 것으로 하면 그만이지. 내가 오늘 만나보았으니 성인식을 한 것으로 하면 된다." 희네는 너무도 기뻐서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희네는 사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그동안 성인식을 치를 일이 보통 걱정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걱정거리가 사라진 것이다. 그때 희네는, 의미있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비렴과 눈이 마주치면서 일의 전말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구나. 비렴님이 또 준비한 것이 있다는 말은 이것을 뜻하는 거였구나. 내 곤란함을 알고 성인식을 넘기도록 일을 이렇게 꾸미신 거야! 정말 고맙기 짝이 없구나!' 비렴이 웃으며 희네와 나래에게 물었다. "한웅님이 직접 너희 성인식을 치러주신 셈이니 큰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웅님을 잘 받들어 뫼셔야 하느니." 희네와 나래는 감격한 나머지 그 자리에 푹 엎드려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자 비렴이 물었다. "너희 이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버님께 지어달라 할 것인가? 아니면 너희가 생각한 이름이라도 있는가?" 당시 높은 집안, 즉 후대의 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집안의 습관은 성인식을 통과하면 그제야 집안의 성을 쓰고 정식 이름을 붙이게 되는데, 그 이름은 아버지가 붙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짓는 경우도 많았다. 즉시 희네가 대답했다. "생각했던 이름이 있사옵니다." 사와라 한웅이 술을 한 잔 마시며 기분 좋게 물었다. "무엇이냐? 들어보자꾸나." "저는 천이라 하올 것이며 아우는 비라 할 것이옵니다." "천...? 비...? 무슨 뜻이냐?" "저는 성격이 급하여 앞으로는 무엇이든 천천히, 조심스레 생각하고자 그 이름을 지으려 하옵니다. 제 아우는 비가 퍼붓듯 한번 싸움에 나서면 당할 자가 없사오니 비라 짓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비렴과 사와라 한웅이 서로 마주보았다. 멋진 이름일 것이라 기대했는데 어딘가 좀 밋밋하고 재미없는 이름 같았기 때문이다. "허, 미리 생각했던 이름치고는 흥이 덜 나는 군. 좌우간 알았느니라. 그리고 비렴." "예?" "아무리 회의가 잘 안 된다 해도 우리 주신족이 이렇게 축 처져 있어서는 안 될 말이니 모두 즐겁게 놀라고 전하게나." "예." "그리고 내일 일 말인데..."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래, 자네만 믿네. 이만 가보거라." 사와라 한웅이 웃으며 손짓을 하자 비렴은 즉시 고개를 조아리며 두 형제를 데리고 나갔다. 비렴은 밖으로 나서면서 나래에게 물었다. "내 다시 묻겠다. 카린산 부족들과 가까이 지낸 적 있느냐?" "가까이 지낸 적은 없습니다." "그럼 그 번개같이 움직이는 기술은 어디서 배웠느냐?" "배운 것이 아니라 겨루다가 힐끗 보고 알게 된 것입니다." 나래가 대강 이야기를 들려주자 비렴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린산의 쑤앙마이는 아주 신비한 여자다. 그건 그 여자가 만든 기술이라 들었느니라. 쑤앙마이는 대주술사인데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아주 잔혹한 짓을 하는 괴이한 여자라 들었다. 그리 좋은 자들도 아니고 우리보다는 지나족과 가까운 자들이니 그들과는 가까이 않는 것이 좋으니라." "가까울 것도 없습니다." 나래가 웃으며 말하자 비렴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내일은 회의 분위기가 좀 그래서 회의장 안에서 부족끼리 시합을 할 것이다. 나래,네가 꼭 나와주어야겠다. 이름을 떨칠 수 있는 자리이니 힘내거라." 나래는 갑자기 손이 근질거리는 것 같아 비렴에게 물었다. "무슨 시합입니까?" "여러 가지다. 씨름도 있고 활쏘기와 돌던지기도 있다. 네가 할 일이 많구나. 그리고 희네, 너도 같이 가자." "저는 그런 것을 잘하지 못합니다." "아니다. 네가 직접 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부족들 간에 체면을 걸고 하는 시합이니 잘 안 풀릴 때는 네가 꾀를 써주어야 하느니라. 알았느냐? 그래야 한웅님도 역시나, 하지 않으시겠느냐? 허허." 비렴은 일부러 희네와 나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다. 둘이 그런 비렴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으므로 둘은 고마운 마음에 크게 대답했다. "예!" "그래, 되었다. 그럼 돌아가서 오늘은 푹 쉬거라. 내일 할 일이 있으니 취하지 말고." 당부를 남기고 비렴은 배웅을 마치고 돌아갔다. 비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나래가 수다스럽게 말했다. "형님! 잘됐어! 정말!" 희네도 오랜만에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 비렴님이 신경 써 주신 덕이지." "그런데 지금 이렇게 드러내보이면 외할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할까? 괜찮을까?" 두 형제의 큰 걱정거리 중 하나는 주신에서 큰 세력을 잡고 있는 고시울률의 존재였다. 비록 외할아버지였지만 고시울률과 희네 나래 형제 사이에는 아주 깊은 골이 있어서 지금껏 형제는 있는 능력을 보이지 않았었다. 사실 외할아버지 고시울률은 사람됨이 좁은데다가 딸 문제 때문에도 절반, 그리고 장차 있을 한웅의 후계자로 고시 집안을 내세우기 위해 치우 집안을 의식적으로 멀리하고 있었다. 설마 치우 형제를 죽이거나 하지는 않더라도 어디 첩첩산골 같은 곳에 보내버리면 치우 형제는 영영 힘을 써보기도 힘들었다. 나래는 그것이 걱정스러워 물은 것인데 희네는 딱 잘라 말했다.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다. 무슨 일이 생겨도 이겨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성인식도 치렀으니 어른이잖아. 더구나 비렴님도 우리를 도와주시고, 한웅님의 눈에도 들었으니 외할아버지도 수월케는 대하지 못할 거다. 그리고 다른 부족 친구들도 많이 생겼잖니? 이젠 우린 어른이다. 희네와 나래가 아니라 치우천, 치우비란 말야." 희네는 예전에 드물게 열에 들뜬 목소리로 거침없이 말한 뒤 나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치우비. 자네 이름이 썩 좋네, 그려." 그러자 나래도 웃으며 되받았다. "치우천 형님. 형님이 지어준 이름인데 좋지 않을 리 있겠어? 허나 형님 이름이 더 멋지군, 그래." "치우천 형님이 뭐냐? 그냥 천 형님 그러렴. 나는 그냥 비야, 하고 부를 테니까." "그게 더 낫겠군." "그래. 우리부터 얼른 익숙해져야 한다." 나래는 웃다가 약간 얼굴빛을 흐렸다. "그런데... 그 이름..." 나래가 조심스fp 둘러보고 나서 말하자 희네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조마조마했다." "그 이름 뜻이 알려지면... 난 형님이 덜컥 이야기할 때 얼마나 놀랐는지..." 희네가 고른 '천' 이라는 이름은 '천천히 간다'는 뜻이 아니었다. 바로 비밀 중의 비밀로 알려져 있는 글자의 이름이었다. 당시 글자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주술에 사용되는 뜻글자요, 하나는 말하는 것을 그대로 적는 소리글자였다.(우리 글이 아주 옛날부터 뜻글자와 소리글자로 나누어져 전해져 왔다는 설은 일부 재야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일이며, 본 저자도 그 설을 소설의 설정에 사용하였다. 뜻글자는 신지문자, 녹도문 또는 신시문자라고도 불리는데, 한문의 원형이 된 글자이며 소리글자는 가림토로 불리며 후에 한글의 원형이 된 글자이다. 한문의 원형이 동이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설은 실제로 근래 중국학자들 사이에서 활발히 제기되고 있다.) 그중 천은 뜻글자로 '하늘' 이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물론 뜻글자를 아는 자가 극히 적기도 하고 비밀이었기에 들어도 알 사람도 없었고, 설령 안다 해도 단순한 우연으로 생각할 터였다. 나래가 더 말하려 하자 희네는 웃으며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대고 조용히 하라고 일렀다. 나래는 입을 다물었으나 곧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형제가 지금보다는 더 어렸을 때였다. 아우는 아픈 형을 업고 산등성이를 돌아다녔다. 잘 돌아다니지 못하는 형이 바람을 쐬고 싶다고 해서였다. 높은 산등성이에 올라 널찍이, 아득한 지평선만이 맞닿아 보이는 대평원을 내려다보면서 형이 말했다. -아우야, 저 하늘을 보거라. 하늘하고 땅이 닿아 있구나. 그렇지? -응. -저렇게 한님은 땅에 가르침을 내리셨고 거기서 우리 주신이 시작되었겠지. 안파견 한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야. 저것을 보면 알 수 있어. -응.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 저 땅에 닿은 하늘. -응. -높은 데서만 있지 않고, 높으면서도 땅에 닿아 있는 저 하늘 말야. 안파견 한님은 높고도 귀하지만, 나는 그런 하늘이 아니라 저렇게 땅을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그런 하늘이 좋아. 나는 말야, 나중에 성인식을 하면 이름을 천이라 지을 거야. 치우천! -천이 무슨 뜻인데? -아주 우연히 알게 되었어. 천은 말야, 뜻글자로 하늘이란 뜻인래. 어떻게 쓰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좌우간 천은 하늘이란 뜻이래. -아이구! 형! 이름에 다른 건 다 들어가도 하늘은 들어가선 안 돼! 한님이 하늘님인데 그걸 이름에 썼다간 큰일나! -하지만 난 쓸 거야. 난 꼭 그 이름을 쓰고, 반드시 저 하늘같이 될 거야. -아이구... -아우야. 너는 이름을 비라고 지어, 치우비. 날아다닌다는 뜻이래. 지금 네 이름도 나래니깐, 딱 맞는 이름이야. 그래서 말야, 내가 하늘이 될 테니 너는 그 하늘에서 훨훨 날려무나. 마음대로 말야. -그럼 좋겠네. 하하하... -그렇게 될 수 있을 거야. 하하하... 나래, 아니 치우비는 문득 감상에 코끝이 시큰해졌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형의 얼굴을 보았다. 형의 얼굴은 온건하고 살짝 미소만 감도는 그런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형님은 정말 그때 생각 그대로, 하늘이 되고 싶은 것일까? 정말로?' 나래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전에 만난 발귀리 선인은... 음, 꿈이었는지 뭣에 홀린 건지도 모르지만, 좌우간 형님이 그런 큰 인물이 될 것이기에 나타났던 것이 아닐까? 형님이 정말 하늘같이 높아질 수 있을까?' 그러나 앞날은 고사하고 희네, 아니 치우천의 한 치밖에 안되는 마음을 치우비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치우천이 좀 피곤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인식을 막 끝내고 이름을 얻은 터라 아버지를 만나야 했다. 형제는 아버지의 막사에 찾아갔지만 아버지 치우우레는 여전히 바빠서 나가고 없었다. 다만 양역과 아저씨뻘인 치우벌을 만나 대신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했다. 양역과 치우벌은 몹시 기뻐하며, 한웅님께 성인식을 직접 치른 것은 몹시 영광스러운 일이라며 몇 번이나 축하해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둘은 막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치우천은 통증과 피곤 때문에 거의 눈이 감겨 있었다. 치우비는 형이 걱정스러웠다. "유망에게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쩐다지?" "대신 성인식을 잘 치르게 되었지 않니? 그리고 전보다는 그래도 나아졌다." 치우비는 형을 막사에 눕히고 옆에 앉았다. 치우천이 눈을 감은 채 웃으며 말했다. "넌 바깥 구경이나 하거라. 난 좀 일찍 자련다." "그냥 형님 옆에 있을래." "이 녀석아, 이렇게 우리 막사에 있는데 뭔 걱정이냐? 지금 밖에는 구경거리가 아주 많을 텐데 내 옆에 있어서 뭐 하니? 구경하고 와." 사실 안 그래도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다. 치우비는 웃으며 되받았다. "그럴까?" "그래. 난 괜찮으니 걱정마라. 난 어차피 유망 부하들 눈에 띄면 곤란하니 밖으로 나다닐 수도 없단다." 치우천은 이젠 자야겠다는 듯이 더 눈을 꼭 감고 웃으면서 말했다. 치우비는 조금 망설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일어서다가 보니 문득 전에 잡아 말려 두었던 호랑이 가죽이 눈에 들어왔다. 가죽이 잘 말라서 보기 좋게 되어 있었다. 치우비는 그 가죽을 거두어서 둘둘 만 다음 어깨에 걸치고 막사를 나섰다. 전부터 생각하던 것인데, 그 가죽을 발에게 주고 싶었다. 어쩌면 그것을 선물한다는 핑계로 발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울라트와 도깨비들 밖은 그야말로 축제의 분위기로 떠들썩했다. 주신 막사도 아까 사와라 한웅의 명 때문인지 불을 피우고 놀려는 준비를 막 끝내는 것 같았다. 주신 막사를 나서니 그곳은 이미 축제가 한창이고 벌써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사람이 아무 데나 쓰러져 자고 있었다. 눈이 맞은 남자여자가 손을 잡고 숲으로 들어가는 것도 간혹 보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노래하거나 취해서 싸움박질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치우비도 분위기에 들떠 저절로 어깨가 들먹거렸다.그러나 오늘 밤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어 거기에 끼지는 않고 다만 지나족 헌원의 막사 쪽으로 향했다. 유망 쪽과는 문제가 있었으므로 가급적 그쪽으로는 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가다가 치우비는 야율쿠리가 술에 잔뜩 취해서 역시 그만큼이나 취한 초초룬과 어깨동무를 하고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고 웃었다. 또 한참 가다가 보니 야쿠타가 치우비를 먼저 알아보고 나래 형, 나래 형 하면서 따라와 말을 건넸다. 치우비는 야쿠타에게, 자신은 이제 성인식을 치러서 이름이 치우비가 되었으니 꼭 그렇게 부르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전해달라고 일러 주었다. 야쿠타는 자기 일인 것처럼 마냥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부족장의 심부름이라도 받았는지 또 다라쥐처럼 달려갔다. 한참을 걸은 뒤에야 치우비는 헌원의 부족이 있는 곳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헌원의 부족들은 떠들썩하게 놀지도 않았고, 오히려 모두가 긴장된 표정이었다. 주신 막사보다 더 분위기가 음침하고 밖에 나선 사람도 없어서 치우비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다만 먼발치에서 비휴를 발견하고 그를 불렀다. 비휴는 사람 같지 않게 날카로운 눈을 번득이며 다가왔다. "무슨 일?" "저...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 "이걸... 헌원님의 따님인 공손발에게 전해주세요." 그러면서 호랑이 가죽을 내밀자 비휴는 표정 하나 없는 눈으로 치우비를 훑어본 다음 짧게 물었다. 비휴는 워낙이 말수가 적고 분위기가 음산하여 치우비는 저절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왜?" "그냥... 그냥 선물입니다." 비휴는 아무 대답없이 호랑이 가죽을 받은 다음 뒤로 돌아섰다. 치우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뒤로 몸을 돌려서 돌아갔다. 기분이 찜찜하고 약간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치우비는 저만치에서 커다란 씨름판이 벌어진 것을 보고 기분 전환이나 할까 하고 구경하러 갔다. 아마 타타르족의 씨름판인 것 같았는데, 한 사람씩이 나와 아주 격렬하게 치고받고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전에 야율쿠리가 타타르족 씨름꾼에게 기술을 배웠댔지. 한 번 구경하자.' 치우비가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 구경했지만 타타르족의 말을 전혀 모르는지라 사람들이 뭐라고 떠드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아래쪽에서 치우비를 불렀다. "나래님이시네? 저 좀 봐요!" 작은 여자의 힘없는 목소리여서 하마터면 치우비는 못 들을 뻔했다. 간신히 알아듣고 아래쪽을 보니 거기에는 눈이 왕방울만한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바로 전날 치우비를 도와준 타타르족 앗수라트 부족장의 딸 울라트였다. 치우비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울라트로구나. 반갑다. 지난번에는 고마웠어." 울라트는 힘없이 웃으며 되받았다. "수수께끼 일 말인가요? 뭘요. 근데 나래님은 여기 웬일로 왔어요?" "지나가다가 씨름 구경하러 왔어. 그리고 나는 이제 나래가 아냐. 성인식을 해서 이름을 비로 바꾸었어. 이젠 치우비야, 치우비." "아, 그랬나요? 그런데요, 날 좀 도와줄 수 있나요?" 치우비는 작고 힘이 없는 어린 울라트가 제법 또랑또랑 말하는 것이 귀여워서 웃으며 물었다. "뭘 도와주면 되지?" 그러자 울라트가 대답했다. "저 씨름판 뒤쪽의 커다란 도깨비들이 있죠?" "도깨비?" "여기선 안 보여요. 저쪽으로 가요." 울라트가 사람들을 헤치며 나아가자 치우비는 그 뒤를 따라갔다. 씨름판 뒤쪽으로 가니 과연 키가 커다란 자가 몇 명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중 두 사람은 놀랍게도 머리칼이 붉은 색깔이었고 살빛이 백지장처럼 창백했으며 눈이 푸른색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다른 키 큰 사람이 또 있었는데, 이자는 온몸이 먹처럼 새까만 색이었으며 머리가 곱슬곱슬했다. 둘 다 알통이 툭툭 불거진 것이 몹시 힘이 셀 것 같았는데, 그 피부색과 머리색만 보아도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 외에도 피부색과 생김새가 몹시 다른, 사람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너무 달라서 도깨비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자들이 여럿 있었다. 치우비는 그런 자들은 처음 보았기에 놀라면서 물었다. "저것들이 도깨비들이야?" "맞아요. 아주아주 힘센 도깨비들인데, 앙가마이 부족이 스키타이 족에게서 산 도깨비들이에요." "도깨비를 산다고?" "그러니까... 음, 일종의 종(노예)이죠. 스키타이 부족은 아주 사납고 싸움을 좋아해서 도깨비들도 잡아요. 아주 먼 서쪽 부족이에요." "그런가? 그런데 앙가마이 부족은 또 누구야?" 그러자 울라트는 치우비의 손가락만큼이나 가늘고 앙상한 팔에 힘을 주며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앙가마이 부족은 우리 앗수라트의 원수예요! 아주 더럽고 치사하고 나쁜 녀석들이에요! 특히 그 부족장은 아주 못된 놈이에요. 전에는 그 부족과 우리는 사이 좋았는데, 그 더러운 돼지가 부족장이 되면서 완전히 사이가 갈라졌어요. 앙가마이 부족들도 고생 많고요." "그래, 그렇군. 그런데 뭘 부탁한다는 거야?" "앙가마이 부족은 우리 부족과의 씨름을 이기지 못하니까 치사하게 도깨비들을 사와서 씨름을 이기려는 거예요. 부족간의 씨름 시합은 자기 부족사람들로 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치사하잖아요?" "그건 그런 것 같군. 그런데 왜 도깨비가 씨름판에 나온 거지?" "우리 부족에는 아주 유명한 씨름꾼인 보챠두가 있거든요. 그래서 못 이기겠으니까 저 힘센 도깨비들로 보챠두를 쓰러뜨린 거예요." 울라트는 흥분하여 치우비에게 손짓발짓까지 해가며 설명을 했다. 보챠두는 무척 유명한 씨름꾼으로, 야율쿠리가 염소 열네 마리를 주고 기술을 배운 바로 그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보챠두가 워낙 강하여 앙가마이 부족은 이길 수가 없었다. 오늘 태산 회의에 오자마자, 앙가마이 부족장은 울라트의 아버지인 앗수라트 부족장에게 먼저 씨름 시합을 제의했다. 앗수라트 부족장은 코웃음을 치며 당연히 받아들였는데 앙가마이 부족장은 한 술 더 떠서 양 천 마리의 큰 내기를 걸자고 했다. 앗수라트 부족장은 당연히 이길 것이라 생각했기에 다시 코웃음을 치며 양 천마리에 소 백 필을 덤으로 걸었다. 둘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 내기에 건 것은 계속 올라갔는데, 앙가마이 부족이 원래 가축이 많았기 때문에 앗수라트 부족장은 더 걸 것이 없자 딸까지도 내기에 걸었다. 그리고 씨름이 벌어졌는데, 모두 합하여 열 번을 먼저 이기는 편이 이기는 것으로 승부를 건 것이다. 그런데 막상 씨름판이 벌어지자 앙가마이 부족장은 치사하게도 스키타이 부족에게서 사들인 도깨비들을 씨름판에 내보냈다. 그 도깨비들은 덩치가 크고 힘도 어마어마하게 센데다 싸움 기술이 워낙이 특별하고 유별나서, 보챠두는 간신히 도깨비 둘을 쓰러뜨렸지만 세 번째 도깨비에게 당해 쓰러졌다. 그런 다음 역시 씨름꾼으로 유명한 보챠두의 두 아들이 나섰으나 도깨비 하나를 당해냈을 뿐 다른 도깨비에게 당해 쓰러졌다. 다른 앗수라트의 힘센 장사들도 겨우 도깨비 하나를 쓰러뜨렸을 뿐 줄줄이 쓰러졌다. 그래서 지금 앙가마이는 여덟 번을 이기고 앗수라트는 겨우 네 번을 이긴 상태로 절망적이라는 것이다. 울라트는 단숨에 이야기하고는 '흑흑' 소리를 내며 서글프게 울었다. "이 내기에서 지면 나는 구역질나는 앙가마이 부족장에게 노리개로 끌려가요! 우리 아버지는 목매달아 버릴 거예요. 그리고 그것보다도 저 나쁜 앙가마이 부족장에게 지는 게 너무 분해요! 날 좀 구해줄 수 있나요?" 그 말을 듣고 치우비는 이 꼬마 아가씨가 가련해졌다. "그렇군. 그런데 나도 타타르족이 아니라 주신 사람인데 괜찮을까?" "저들이 먼저 도깨비를 끌어냈으니 상관없어요! 나는... 나는 세상 제일의 장사인 형천에게도 사람을 보냈는데, 만날 수가 없었어요. 사실 형천이 아니라면 저 도깨비들을 연거푸 이기는 건 힘들 거예요." 치우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형천은 지금 유망의 일 때문에 씨름하고 있을 형편이 아니지.' 울라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이 씨름은 상대가 다쳐 쓰러지거나 항복할 때까지 계속 되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힘들어서 누구도 연속으로 여섯 번을 이길 수는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지더라도 이렇게 지는 것은 너무 억울해요! 몇이라도 도깨비들을 더 쓰러뜨려 줘요! 이런 부탁하는 것이 정말 미안하지만... 하지만 더 이상 길이 없어요... 아! 방금 또 졌어요! 우린 아홉 번 졌어요! 이제 한 사람밖에 안 남았어요! 난 지게 되면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어버릴 거예요." 치우비는 흑흑거리는 울라트의 어깨를 톡톡 두들겨주고는 말했다. "내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 "정말 이겨준다면 우리 아버지가 뭐든지 들어줄 거예요." "그런 것은 필요 없지만. 한번 해볼게." "정말요?" "그럼!" 사실 아무리 치우비라 해도 꼭 이긴다는 자신은 없었다. 한 명이라면야 간단히 물리치겠지만 지금 상태를 보니 앗수라트가 이기자면 연속으로 여섯을 물리쳐야 하는데, 연달아 여섯 명과 싸우는 것은 대단히 지치고 힘드는 일이었다. 힘이나 기술이 달리지 않아도 지쳐서 패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치우비는 마음이 약해 누가 부탁을 하면 거절하지 못했고 또 유달리 어린애들에게 약했다. 치우비는 울라트를 달랑 들어서 어깨에 얹고는 씨름판으로 나섰다. 막 쓰러진 앗수라트 씨름꾼이 다른 사람들에게 끌려나가고 있었는데, 얼마나 호되게 당했는지 눈이 허옇게 뒤집어져 있었고, 팔 한쪽과 다리 두쪽이 모두 부러진 것 같았다. 참혹한 꼴에 치우비가 눈살을 찌푸리자 울라트가 귓속말을 했다. "불쌍한 쿠베. 쿠베는 지지 않으려고 죽어도 항복하지 않겠다고 하다가 저 꼴이 된 거예요." 씨름판으로 나가니, 몹시 화려한 꾸밈을 하고 개기름이 흐르는 뚱보 하나가 깔깔거리며 좋아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앙가마이 부족장인 것 같았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등뒤의 도깨비들은 아주 굵은 가죽끈으로 묶여 있었고 그들의 눈빛은 불안하고 곱지 않았다. 가만 보니 그의 등 너머 땅에 피가 질펀하게 흐르고 있었고, 도깨비들의 시체 네구가 보였다. 치우비는 놀라 울라트에게 물었다. "저 도깨비들은 왜 죽었지?" "씨름에서 진 도깨비는 앙가마이 부족장이 저렇게 곧 죽여버려요. 그래서 도깨비들은 죽을힘을 다해 싸우는 거예요. 저놈은 저렇게 치사한 놈이에요." 아무리 도깨비들이라도 이건 너무하다고 치우비는 생각했다. 그러자 화가 치밀어올라 치우비는 곧 앙가마이 부족장에게 외쳤다. "내가 그 다음에 앗수라트 편에서 싸울 것이다. 그런데 그 전에 할말이 있다." 앙가마이 부족장은 치우비를 한 번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서툰 주신 말로 물었다. "주신족이냐?" 치우비가 냉랭하게 웃으며 되받았다. "그렇다. 너도 주신 말을 하는군. 잘되었다." 그러자 앙가마이 부족장이 치우비의 우람한 체격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사울아비냐? 네가 왜 앗수라트 편에서 싸우느냐? 왜 남의 부족 일에 끼어드느냐?" 앙가마이 부족장이 말할 때마다 그 부하인 듯 교활하게 쥐처럼 생긴 자가 그 말을 타타르 말로 바꾸어 외쳐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다. "남의 일에 상관 말고 내 말부터 들어라.너는 왜 도깨비들을 죽이는 것이냐? 씨름에 졌다고 죽이다니 너무 하지 않느냐?" "내가 산 도깨비를 내가 죽이는데 네가 웬 참견이냐? 제길. 네 녀석이 도깨비 친구냐? 아니 도깨비 씨인지도 모르겠군. 우하핫." 앙가마이 부족장이 출렁거리는 뱃가죽을 흔들며 보기 흉하게 웃어대자 앙가마이족 전체가 왁자하게 웃었다. 치우비는 얼굴이 붉어졌으나 표정은 도리어 담담해졌다. 정말 화가 난 것이다. "내가 도깨비 씨라면 너는 도깨비만도 못하군. 좌우간 내가 이겨도 도깨비들을 죽이는 짓은 그만둬라!" "내 맘이다. 그리고 너는 낄 자격이 없다." "너도 도깨비들을 씨름판에 끌어 들여놓고 무슨 소리냐?" "이 도깨비들은 내가 산 것이니 내 씨름판에서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너는 뭐냐? 주신 사울아비가 앗수라트 부족의 개가 되었느냐? 우하핫!" 앙가마이 부족이 맞다고 '우' 하고 떠들며 비웃어댔다. 치우비는 눈에서 불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너는 지금 대주신의 사울아비를 모요학는 것이냐? 씨름이고 뭐고 너부터 죽어봐야 알겠느냐?" 치우비가 무서운 눈으로 성큼 걸어나오자 앙가마이 부족장이 약간 켕기는 듯 움찔거렸다. "그런 뜻은 아니다. 그러나 주신 사울아비가 우리 타타르족 씨름판에 끼는 것은 안 된다. 그렇게 다른 부족을 다 불러들인다면 뭐 하러 부족간에 씨름을 하는가? 한쪽은 형천을 부르고 한쪽은 끽구를 불러 씨름을 하면 될 것이니, 씨름을 배울 필요조차 없지 않은가? 안 그런가? 우하핫!" 앙가마이 부족장은 퍽이나 입심이 좋아서 치우비는 그 말에는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러자 치우비는 화가 치밀어서 외쳤다. "그럼 어떻게 해야 겠느냐?" "이렇게 하면 모를까..." "뭔데 그러느냐!" "너는 그 잘나고 명예로운 주신의 사울아비라며? 그러나 오늘만은 앗수라트 부족을 존경하여 그들 편에서 싸워준단 말이지? 맞나?" "그렇다!" "그럼 존경의 뜻으로 부족장의 딸 울라트를 어깨에 올려놓고 싸우면 허락하겠다. 어떤가?" 앗수라트 부족 사람들은 아우성을 쳤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씨름이 장난인 줄 아느냐?" "목숨을 걸고 하는 거다!" 그러나 앙가마이 부족장은 코웃음치며 말했다. "싫으면 관둬라." 치우비가 당당하게 말했다. "겨우 그거냐? 좋다. 그렇게 하지! 겨우 여섯 명만 이기면 되는 것 아니냐?" 그 말에 사방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냥 싸워도 될까말까 한 일이다. 도깨비들은 힘도 세고 죽을힘을 다하기 때문에 대역사로 소문난 형천이나 끽구가 아니라면 연달아 이기기 힘들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나이 어린 소녀를 어깨에 올려놓고 싸운다니? 앙가마이 부족장은 자기가 말을 꺼내놓고도 얼떨떨한지 말을 더듬었다. "정... 정말 하겠다는 게냐?" 치우비가 코웃음을 치며 당당하게 말했다. "당연하다. 겁나는 게냐? 앙가마이 부족은 모두 겁쟁이인가?" 그러자 앙가마이 부족은 '우' 하면서 야유를 퍼부었다. 더불어 그것은 부족장에게 어서 시작하라는 신호도 되었다. 앙가마이 부족장도 화난 듯 외쳤다. "그렇게 죽고 싶으냐? 너만 아니라 그 귀하신 부족장 딸도 죽을지 모른다. 치사하게 여자애를 방패로 쓰겠단 거냐?" 울라트는 치우비가 의외의 제안을 하자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지만 억지로 참으며 당당하게 외쳤다. 저런 개기름 흐르는 뚱보 늙은이에게 끌려가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흥! 그러면 내가 내려주랴? 이분은 나를 얹고도 너희 그 잘난 도깨비만 아니라 앙가마이 부족 전부를 쓸어버릴 수 있는 분이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내리고 이분 혼자 싸우라고 하지, 뭐?" 그러자 앙가마이 부족장은 다시 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여자 아이를 얹고 싸우는 것은 미친 짓이다. 신경이 쓰이는 것은 물론이고 여자아이를 보호하느라 최소 한 팔을 못 쓸뿐더러, 허리를 굽히고 펴고조차 할 수 없다. 치우비가 덩치가 크고 힘이 좋아 보여도 그러고서는 이길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아니 천하 제일의 장사라는 형천도 그러고는 싸우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그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뭐 원하는 바이니 그대로 해라. 이 녀석아, 네가 형천이냐? 끽구냐? 젊은 놈이 명을 재촉하는구나. 네가 정말 여자애를 어깨에 얹고 도깨비 여섯을 모두 이겨보겠다는 거냐? 응?" "그렇다!" "죽더라도 우리는 주신 사울아비를 죽인 게 아니다. 앗수라트 씨름꾼을 죽인 거다. 다들 알았지?" 앙가마이 부족장은 아무래도 상대가 주신 사울아비라는 것이 좀 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치우비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외쳤다. "네가 나와 싸워서 졌다고 도깨비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내가 져서 죽어도 할말이 없다. 그러나 도깨비들을 죽인다면 아마 우리 형님이 용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실 치우천은 별로 힘이 없었지만, 앙가마이 부족장은 저렇게 크고 힘센 용사의 형 또한 용사일 것이라 생각했다. 약간 질린 앙가마이 부족장이 오기를 부리며 되받았다. "씨름 하려고 산 도깨비인데, 씨름도 못하는 것들이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화가 나서 그놈들을 어떻게 보고 있으란 것이냐?" "그럼 죽이지 말고 풀어주어라." "도깨비를 어떻게 함부로 풀어주느냐? 도깨비들은 다 죽여 없애야 하는 것 아니냐?" 사실 그것도 그렇게 생각하면 그럴 수는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치우비는 공포에 질린 채 묶여 서 있는 도깨비들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 서린 공포와 두려움의 눈빛을 보자 치우비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너는 저 도깨비들을 얼마에 샀느냐?" "양 스무 마리씩을 주고 샀다. 덩치 큰 놈은 서른 마리 줬다." "그럼 내가 싸움에 진 놈을 양 스무 마리씩에 되사겠다. 그러니 내가 이기면 나에게 팔아라. 어차피 너에게는 쓸모 없는 놈들 아니냐?" 그 말에 앙가마이 부족장이 한껏 이죽거렸다. "기껏 되사고는 풀어준다고? 흥. 너는 그렇게 해서 도깨비들 환심을 사려는 모양인데, 헛수고다. 저놈들은 우리 말을 한마디도 못 알아듣는다." "그런 생각으로 한 말이 아니다." "흥! 그렇다고 해도 네게 그 많은 양이 어디 있느냐?" "우리 집에 수도 없이 많다." 그러자 앙가마이 부족장은 또 '우하핫' 웃었다. "그래, 그래. 우리 집에는 금으로 쌓은 산도 있고 술이 흐르는 강도 있다. 이 녀석아, 당장 내놓지 않으면 너를 언제 본다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거냐?" 도무지 참지 못하겠는지 울라트가 꽥 소리쳤다. "이분이 이기면 도깨비 값은 우리가 내겠다! 흉악한 욕심쟁이야!" "한 번 이길 때마다 풀어줄 수는 없고, 씨름이 끝나면 풀어준다. 그런데 저놈이나 네가 죽어도 양은 받을 수 있는 거지? 안 그러면 다 죽여버린다." "그래! 내가 약속한다!" "그리고 저 아이를 내려놓고 싸우면 안 되니, 저 아이 몸이 조금이라도 땅에 닿으면 그 즉시 너는 진 것이다. 좋으냐?" "좋다." 이제 앙가마이 부족장도 더 할말이 없는 듯 치우비를 비웃으며 물러섰다. 그러자 앗수라트 부족장이 달려 나왔다. 부족장인 키타야는 퍽 진중한 얼굴의 남자였는데 그는 타타르 말로 울라트와 한참 이야기를 나우었다. 아무래도 딸이 걱정되는 것 같았다. "무섭겠지만 걱정 마라, 울라트. 너는 절대 안 다치게 해줄게." 치우비가 미안해하자 울라트는 야무지 목소리로 치우비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우리 때문에 한 일인데 나도 그 정도는 참아야 앗수라트 부족의 체면이 서죠.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구요." 갸날프기만 한 꼬마 소녀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자 치우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참아주는데 나라고 왜 못하겠니? 우리 같이 힘내서 어떻게든 이겨보자." 그 말에 울라트는 감동하여 당장 죽으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치우비는 걱정스러운 울라트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아버지께 너무 걱정 말라 전해줘. 나는 형천이나 끽구와도 힘을 겨뤄보았다. 내가 그들을 이기지도 못했지만, 그들도 나를 이기지 못했어. 그러니 너무 염려 말라고 말야." 그 말을 들은 울라트는 깜짝 놀라면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키타야도 몹시 놀라며 몇 번이나 정말이냐고 묻는 듯했고 여전히 불안하긴 했으나 약간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러는 사이 앙가마이 부족장이 화난 듯 외쳐댔다. "이제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게냐? 거, 눈물겹구나, 눈물겨워!" "말이 길었다. 시작하자." 치우비는 곧 울라트를 어깨에 얹고 당당하게 천천히 걸어 씨름판 가운데로 나갔다. 울라트는 꼿꼿하게 앉아 있으려 했지만 몸이 달달 떨려왔다. 치우비는 울라트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잡고 있어주마." "아니에요. 내가 알아서 매달려 있을 테니, 이기기나 하세요. 내가 떨어져도 절대 한눈 팔지 말구요!" 울라트는 아예 눈을 감고 목숨을 치우비에게 맡기기로 했다. 치우비는 싸울 때면 으레 그렇듯 담담하고 잡념 하나 없는 조용한 얼굴로 변했다. 형 치우천은 치우비의 힘보다도 이 담담함과 조용함 때문에 치우비를 정말 하늘이 낸, 다시는 볼 수 없을 용사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침착함과 조용함은 아무리 고된 수련을 해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치우비는 아예 그것을 타고난 것이다. 치우비가 조용한 표정으로 서 있기만 하는데도, 앙가마이 부족장을 비롯한 사람들의 눈에는 치우비가 점점 커보였다. 앙가마이 부족장은 고개를 몇 번 흔들고는 악을 썼다. "도깨비를 풀어라!" 첫 번째로 풀려난 도깨비는 바로 아까 앗수라트 씨름꾼의 팔다리를 꺾은 도깨비였는데, 머리카락과 수염이 모두 금색으로 빛났다. 덩치도 크고 눈이 파란색이었으며 살빛은 하얀데다가 코가 크고 눈가가 움푹 들어갔으며 온몸에 불긋불긋한 칠을 하여 보기만 해도 겁날 정도였다. 나이는 좀 들어 보였으나 힘은 대단해 보였고 기세가 만만찮았다. 그는 짐승 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치우비에게 달려들며 주먹을 날렸다. 당시 씨름은 그냥 어떻게든 상대를 쓰러뜨리면 되는 험악한 것이라 씨름이라기보다는 무한 격투기와 더 비슷했다. 무기만 쓰지 않을 뿐이다. 그자의 주먹이 배로 날아드는 순간 치우비는 몸을 번득여 피할까 하다가 울라트 생각에 피하지 못하고 배에 힘을 주어 막았다. '퍽' 소리가 나며 주먹이 명중하자 그 도깨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으나 곧 주먹이 얼얼한 것을 느꼈다. 놀라서 올려다보니 치우비는 표정에 변화가 전혀 없었다. 도깨비는 놀라면서 연달아 주먹으로 치우비의 가슴과 배를 무자비하게 두들겼으나 치우비는 고스란히 맞으면서 틈을 노리다가 오른팔로 번개같이 도깨비의 목을 휘감아 뒤로 던져 버렸다. 도깨비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날아가다가 땅에 처박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울라트는 눈을 감고 있으려 했으나 '퍽퍽' 소리에 놀라서 눈을 떴는데 치우비가 여전히 담담히 서 있고 저만치에서는 도깨비가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소리로 보아 분명 치우비가 맞는 것 같았으므로 울라트가 물었다. "맞은 것 같은데... 괜찮아요?" 치우비는 조용히 웃어 보이며 말했다. 사실 아팠지만 아직은 참을만 해서 치우비는 딴소리를 했다. "도깨비들은 몸 냄새가 지독하군." 모여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있다가 이내 앗수라트 부족 사람들은 '와' 하며 탄성을 질렀고 앙가마이 부족 사람들은 '우' 하고 웅성거렸다. 앗수라트의 씨름꾼을 박살낸 도깨비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당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앙가마이 부족장은 악을 썼다. "뭐 하느냐! 다음!" 다음에 풀려난 도깨비는 온몸이 칠흑처럼 검고 키가 치우비보다도 크며 팔다리가 아주 긴, 이상한 도깨비였다. 그 도깨비는 마치 거미처럼 긴 손발을 쉴새없이 흔들며 치우비에게 다가왔다. 그러다가 도깨비는 순식간에 몸을 숙여 치우비의 발을 걸려고 했다. 그 동작이 상당히 빨랐지만 치우비는 간신히 피했다. 그러자니 울라트가 떨어질 것 같아 치우비는 왼손으로 울라트를 잡았다. 그러는 사이 그 검은 도깨비는 다시 긴 팔과 다리로 연속으로 공격을 해대면서 계속 치우비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려 했다. 그자의 팔과 다리는 옆으로 후리는 것이 전문인 듯, 일단 걸리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녀석의 몸은 몹시 유연하면서도 힘과 탄력이 있었다. 치우비는 무라에게서 배운 동작으로 눈부시게 움직여 계속 그자의 손발을 피하면서 씨름판 주위를 세 번이나 돌았다. 그러나 그 검은 도깨비는 마치 찰거머리처럼 그렇게 빠른 치우비의 동작에도 떨어지지 않고 달라붙으며 공격을 가해왔다. 그 사이 치우비는 다리로 두 번, 팔로 한 번 후림질을 당해 얻어맞았는데 몹시 아팠다. 위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순간 치우비의 머리에는 야율쿠리가 자신과 겨룰 때 썼던, 보챠두의 수법이 떠올랐다. 치우비는 급히 울라트를 받쳤던 왼손으로 울라트를 밀면서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울라트가 밀려서 뒤로 떨어지는 순간, 치우비는 허리를 숙여 등으로 울라트를 받으며 동시에 야율쿠리가 했던 것처럼 낮은 자세에서 양팔을 뻗어 때마침 부딪혀 오는 검은 도깨비의 두손을 각각 거머쥐었다. 거의 묘기에 가까운 터라 양 부족의 사람들 모두 자기 처지를 잊고 탄성을 보냈다. 검은 도깨비는 불편한 상태에서 치우비가 그렇게 금방 자세를 기막히게 바꾸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해 양손을 빼내려 했으나 힘으로는 치우비를 당할 수 없었다. 손가락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자 검은 도깨비는 비명을 지르며 두 발을 풍차처럼 휘둘러 치우비의 발을 걸어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치우비는 팔을 쭉 뻗고 허리까지 굽힌 채 도깨비의 팔을 잡은 것이라 검은 도깨비의 다리가 아무리 길어도 치우비의 다리를 걸지 못했다. 결국 검은 도깨비는 헛되이 먼지만 날리며 헛발길질을 해댈 뿐이었다. 치우비는 녀석의 발이 땅에 떨어진 틈을 타서 팔을 밀면서 그대로 앞으로 돌진했다. 검은 도깨비는 치우비의 엄청난 힘에 팔이 꺾어지면서 뒤로 밀려갔다. 치우비는 인정사정 보지 않고 앙가마이 쪽 나무 울타리로 도깨비를 밀어붙였다. 그 위에서는 앙가마이 부족 사람들이 잔뜩 올라가 구경하고 있었는데 곧이어 '우지끈' '와당탕' 소리가 나면서 나무 울타리가 무너져 버리고 앙가마이 사람들이 우르르 떨어져내렸다. 치우비의 엄청난 힘에 그 도깨비가 밀리면서 나무 울타리까지 박살나 버린 것이다. 박살난 울타리에 끼인 검은 도깨비는 몇 번 끄윽끄윽 소리를 내다가 울컥 무를 토하면서 기절해버렸다. 도깨비를 쓰러뜨리자 치우비는 다시 허리의 힘만으로 울라트를 퉁겨서 공처럼 위로 띄운 다음 곧 허리를 펴서 손도 대지 않고 다시 울라트를 어깨에 받아얹었다. 치우비의 힘도 놀라웠지만 단순한 허리힘만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라, 앗수라트 부족 사람들은 모두가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고 앙가마이 부족 사람들은 욕지거리를 해댔다. 그러자 눈에 핏발이 선 앙가마이 부족장이 외쳤다. "저놈을 보내라!" 앙가마이 부족장은 날이 시퍼렇게 선 돌도끼날을 어디선가 꺼내더니 앞으로 끌려나온 도깨비의 팔을 잡았다. 눈이 하나뿐인데다가 붉은 머리를 어깨까지 드리우고 역시 붉은 수염이 더부룩하며, 온몸이 흉터로 가득 찬 험악한 도깨비였다. 그 도깨비는 오른손이 없고 길다란 나무 막대기가 손 대신 끼워져 있었다. 그런데 그 나무 막대기는 바로 도끼날을 끼우는 자루였던 것이다. 즉, 손 대신 도끼를 달고 사는 기이한 도깨비였다. 앙가마이 부족장은 그 녀석 손에 도끼날을 끼워주면서 외치는 것이 아닌가? "나가 싸웟!" 앗수라트 부족장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외쳤다. "이것은 씨름이다! 무기를 쓰면 안 된다!" 그러자 앙가마이 부족장은 능글맞게 외쳤다. "이놈의 손은 원래가 도끼다! 무기가 아니다!" "그런 억지가 어디 있느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놈이 사람이냐? 이놈은 도깨비다! 이런 도깨비도 있는 것이다!" 앗수라트 부족 사람들이 전부 다 욕지거리를 해대는데, 도깨비는 틈조차 주지 않고 끔찍스러운 고함을 지르면서 도끼를 무섭게 휘두르면서 치우비에게 달려들었다. 치우비가 천하장사라지만 도끼에 맞으면 무사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그 도깨비의 도끼 휘두르는 방법은 주신이나 지나의 방법과는 틀렸고 몹시도 매서웠다. 단순하여 조잡한 것 같으면서도 도끼에 붙는 힘이나 속도는 무시무시했다. 한마디로 방어는 전혀 없고 오로지 적을 일격에 죽이겠다는 살의만이 가득한 솜씨였다. 치우비로서도 이번만은 너무도 놀랐고 자신이 없어졌다. '쉭쉭쉭!' 사방팔방이 도끼로 가득 찬 듯했으며 숨쉴 틈조차 주지 않고 도끼날이 계속 허공을 갈랐다. 급히 몸을 피하느라 치우비는 아예 울라트를 양손으로 잡을 수밖에 없었고 아무리 치우비가 빨리 피하려 해도 몸에는 몇 줄기의 상처가 나며 피가 튀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중이라 피가 흐르지 못하고 사방으로 점점이 튀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는 중에 울라트가 외쳤다. "날 버리고 싸워요! 이러다 죽겠어!" "안 돼!" "제발! 이러단 져요!" 아무리 치우비가 장사여도 양손으로 울라트를 잡은 상태로 무서운 도끼를 감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앗수라트 부족장은 당장 전쟁이 나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호통을 쳐 무기를 가져오게 했다. 그러자 앙가마이 부족장도 눈이 시뻘개져서 무기를 가져오라고 외쳤다. 축제중이라 무기를 가지고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도 도깨비의 도끼는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치우비도 몇 번 발로 도깨비를 걷어차려 했으나 도깨비의 도끼 기술은 대단하여 그럴 틈조차 변변히 잡을 수 없었다. 치우비는 비록 잔상처였지만 온몸이 거의 피투성이가 되어갔다. 그러면서도 치우비는 담담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아픈 것도 느끼지 않았다. 치우비는 끈질기게 도깨비의 도끼질을 피하면서, 도끼질에서 어떤 버릇을 찾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저 정도로 도끼질에 능숙하다면 자기 나름대로 적어도 십 년은 수련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습관이나 버릇이 생기게 마련이라는 것을 치우비는 알고 있었다. 그 틈을 잡는 것 외에는 이길 방법이 없었다. 그 사이에 양 부족에 무기가 날라져 왔다. 치우비는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으나 화살과 창이 도깨비를 겨누는 것을 문득 느끼고 외쳤다. "쏘지 마시오!" 치우비는 진심으로 외쳤다. 치우비는 도깨비의 눈을 보았다. 비록 자신을 죽이려고 핏발이 곤두선 도깨비의 눈이었으나 그 눈은 분명 공포에 질려 있었고 발악적이기는 하되, 감정이 있는 사람의 눈이라 생각했다. 분명 그 눈은 아무것도 모르는 짐승의 눈은 아니었다. 그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날 죽여주시오. 안 그러면 나는 당신을 죽일 수밖에 없소. 분명 도깨비는 두 번 정도 치우비를 죽이거나 결정적 타격을 줄 수 있는 틈이 있었다. 두 손을 놓고는 이길 수 없으리만치 도깨비의 도끼질 실력은 뛰어났다. 그러나 도깨비는 치우비를 죽일 수 있는 틈에도 치우비에게 작은 상처만 내는 것으로 도끼를 살짝 거두어갔다. 머리카락보다도 짧은 틈의 일이라 아무도 알아볼 수 없었지만 치우비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도깨비는 치우비를 죽인다기보다는,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도깨비를 죽게 할 마음은 치우비에게 들지 않았다, 절대로. 그러나 치우비가 외치건 말건 앗수라트의 화살과 창이 도깨비에게 겨누어졌고 앙가마이의 화살과 창은 앗수라트 쪽을 향했다. 치우비는 안 되겠다고 여기고 모험을 하기로 했다. '아직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이 도깨비는 왼쪽으로 도끼를 긋고 그 다음 위로 빗겨올리며 다시 한 번 그은 후에는 도끼를 똑바로 내려찍는 것 같다. 그때만이 기회다!' 도깨비가 왼쪽으로 긋는 도끼를 피하며 치우비는 번개같이 그런 생각을 했다. 다음 순간, 도깨비는 위로 빗겨올렸다. 그때 치우비는 어깨에서 울라트를 가슴으로 끌어내리며 몸을 위로 젖혀 벌렁 드러누웠다. 그리고 머리를 땅에 '쿵' 소리가 나게 박으며 머리를 축으로 하여 오른 발을 박차 허공에 띄우며 왼발에 힘을 주어 안으로 당겼다. 도깨비의 도끼가 아래로 내려찍어지는 순간, 치우비는 허공에 차올렸던 오른발로 도끼자루를 막아 도끼를 멈추게 만들고 힘을 모아 굽혀두었던 왼발로 도깨비의 얼굴을 있는 힘을 다해 걷어찼다. 엄청난 힘으로 얼굴을 맞은 도깨비는 입과 코에 피를 흘리면서 그대로 허공을 뒤로 날아 나무 울타리에 부딪히고 다시 튀어나가서 땅에 앞으로 철퍼덕 쓰러졌다. 아까 치우비가 보여준 기술도 묘기였지만, 이것은 묘기라는 말을 능가하는 묘기였다. 그러나 치우비로서도 이번만큼은 정말 목숨을 건 묘기였다. 도깨비가 도끼를 똑바로 찍지 않고 조금만 비틀었어도 치우비의 오른쪽 다리는 잘라져 없어졌을 것이다. 활과 창을 쥔 앗수라트와 앙가마이 부족들이 얼이 빠진 채 입을 딱 벌리고 움직이지조차 못했다. 성공적으로 일격을 가한 치우비도 털썩 몸을 아무렇게나 땅에 눕힌 채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피투성이가 된 그 가슴팍 위에서는 역시 치우비의 피로 얼룩진 울라트가 '왁'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만해요... 이젠 제발 그만..." 그러자 치우비가 '후' 하고 숨을 몰아쉬며 벌떡 일어나 다시 울라트를 어깨에 올리며 씩 웃어 보였다. "아직 안 끝났어." "당신... 당신 너무 많이 다쳐..." 그 말에 치우비가 조금 더 웃었다. "골이 좀 울릴 뿐이야. 난 원래 돌머리라 괜찮아." 그러면서 치우비는 놀랍게도 쓰러져 있는 도깨비들에게 천천히 걸어가 그들을 똑바로 눕히며 앗수라트 부족장에게 외쳤다. "다 목숨은 붙어 있으니, 물을 먹이고 치료해주시오." "도깨비들인데도?" 앗수라트 부족장이 서툰 주신 말로 묻자 치우비가 대답했다. "그래도 멋진 용사들입니다." 그러자 앗수라트와 앙가마이 부족 모두는 치우비의 훌륭한 행동에 박수를 보냈다. 싸움 잘하고 마음 넓은 용사들을 존경하는 것은 어느 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행동을 보자니 마구잡이로 싸우려 했던 자신들의 행동이 부끄럽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그때 앙가마이 부족장이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며 직접 칼을 들고 세 명의 도깨비의 줄을 잘라냈다. 그리고 셋 모두의 등을 떠밀며 외쳤다. "저놈을 죽여! 모두 나갓!" 그 모습을 보고 앗수라트 부족장이 소리쳤다. "한꺼번에 셋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된다!" 악에 받친 앙가마이 부족장이 되받아 소리쳤다. "내가 봐준 거다! 저놈은 아까 도깨비 여섯과 한꺼번에 싸우겠다고 했다! 분명 그런 말을 했는데 나는 하나씩 내보낸 것이다!" "언제 그랬는가? 그건 도깨비 여섯 명과 순서대로 싸우겠다는 말이었지, 결코 동시에 여럿과 싸우겠다는 말이 아니다!" "너는 그렇게 들었는지 몰라도 나는 그렇게 듣지 않았다!" 그러면서 앙가마이 부족장은 운반된 무기 중에서 창 두 자루와 길다란 구리칼 한 자루를 집어 도깨비들에게 던져주며 외쳤다. "여섯 대신 셋이니까 무기를 준다!" 앗수라트 부족장 키타야가 미칠 듯 화를 냈다. "손도 못 쓰는데 무기를 든 셋과 어찌 싸우느냐? 네가 싸워봐랏!" "싸우겠다고 한 건 저놈이지, 내가 아니다." "저런 빌어먹을 놈! 너 같은 놈과 같은 하늘 아래 사는 것이 부끄럽다!" "욕을 해? 다른 부족놈을 끼어들인 건 네놈이다!" "웃기지 마라! 이런 망할 녀석아! 더는 못 참겠다! 우리 부족이 전부 다 죽어도 저 용사를 그냥 죽게 할 수 없다!" "그럼 뭐냐? 한판 하겠다는 거냐?" 앗수라트 부족은 이제 부족장만이 아니라 전원이 나서서 무기를 들고 막 싸움이라도 벌일 기세였다. 그에 반해 앙가마이 부족은 웅성거리며 혼란상태였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 부족장이 너무 억지를 쓰는 것 같아 창피하다는 분위기였다. 이미 세 명의 도깨비는 무기를 주워들고 치우비를 에워싸고 있었고, 치우비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아까 피를 너무 쏟고 힘을 너무 써서 누가 보아도 치우비는 곧 결단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치우비는 큰 소리로 외쳤다. "싸우지 마시오! 이기면 될 것 아니오!" "이겨? 그래! 이겨봐라! 개 같은 주신 놈!" 앙가마이 부족장이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하던 터라, 처음으로 부족장을 비난하는 야유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앙가마이 부족이라고 해도 용사를 숭배하는 풍습은 있었고, 모든 사람이 다 부족장처럼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자 앙가마이 부족장이 씩씩거리며 외쳤다. "이 놈들! 내 말을 안 들어? 그러면 너희 놈들도 다 죽인다!" 앙가마이 부족장은 원래 힘으로 사람들을 억누르고 공포로 지배하던 자라 하는 수 없이 앙가마이 부족들은 쭈뼛거리며 웅성웅성하기만 했다. 그 사이 분위기 파악을 할 수 없는 도깨비드리 '와' 소리를 지르며 치우비에게 덤벼들었다. 치우비가 울라트에게 속삭였다. "할 수 없구나. 잠시 실례." 그리고 울라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치우비는 울라트를 잡아 하늘로 높이 내던졌다. 얼마나 높이 던졌는지 울라트의 작은 몸은 까마득히 높이 솟구쳐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런 의외의 행동에 도깨비들도 잠시 멈칫하며 자연스레 하늘로 올라가는 울라트에게 한눈을 팔았다. 그 사이 치우비는 앞서 있는 도깨비에게 덤벼들어 우지끈 소리가 나게 얼굴을 한 대 갈기고는 그와 거의 동시에 그가 쥐고 있는 창을 빼앗아 들었다. 치우비의 주먹이 한 번 움직이자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데다가 너무도 위력이 있어서 도깨비는 지금 산이 날아와 자기 얼굴에 꽂히는 것 같은 환상속에 기절했다. 그리고 치우비는 곧이어 발로 그 도깨비를 멀찌감치 걷어찬 다음에 창을 붕붕 돌리며 다음 창을 든 도깨비에게 덤벼들었다. 치우비가 창을 몽둥이처럼 길게 쥐고 도깨비의 머리를 향해 내리치자 도깨비는 창을 가로로 머리위로 눕혀 창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치우비의 무지무지한 힘에 창은 박살이 났고 치우비의 창도 같이 박살나면서 도깨비의 머리를 치고 나갔다. 도깨비는 그 창 조각에 맞은 충격만으로도 빙글 몸을 한 바퀴 돌더니 눈을 까뒤집고 쓰러지고 말았다. 마지막 도깨비는 얼굴이 코가 높고 얼굴이 거무스레했으며 머리에 흰 띠를 둘둘 말아 눌러썼으며 얼굴빛이 온화하고 뭔가 아주 지혜로운 듯한 표정을 한 기이한 도깨비였는데, 그는 칼을 눈부시게 휘두를며 치우비에게 돌진해왔다. 그의 칼솜씨는 대단하여 그가 휘두르는 칼은 거무튀튀한 구리칼이었음에도 마치 무지개가 빛나듯이, 몸을 감싸며 눈부시게 빛났다. 마치 주술력이 있는 것 같았는데 치우비로서도 저런 대단한 칼솜씨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치우비는 휙휙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치우비가 빠르게 물러서자 그 도깨비는 갑자기 치우비를 향해 칼을 허공에 똑바로 겨누고는 손을 놓았다. 그런데 놀랍게 그 칼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누가 붙잡고 있기라도 한 듯 허공에 뜬 상태 그대로였다. 그 도깨비가 양손을 붙이고 눈을 감자 그 칼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며 치우비를 향해 날아갔다. 이건 주술이 틀림없었다. 모든 사람들은 경악하여 이제 치우비가 죽은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치우비는 속으로는 몹시 놀랐으나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급히 양손을 칼같이 펴서 땅에 박았다. 모든 사람은 치우비가 뭘 하는가 하고 의아해하면서도 치우비가 죽는 것을 애석해했는데 별안간 우지직 소리와 함께 땅거죽이 통째로 들려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씨름터 가장자리에는 큰 바위가 묻혀 있었고, 겉에는 고운 흙이 덮여 있었다. 치우비가 물러서다가 발 밑에 바위가 있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고 그 바위를 무서운 힘을 써서 통째로 들어올린 것이다. 거대한 바위 한쪽이 흙을 사방으로 튀면서 땅을 뚫고 일어나 치우비의 앞을 막자 날아들던 칼은 거대한 바위에 탁 박혀 자루께까지 깊숙이 들어갔고, 그러고도 살아 있는 듯 칼자루를 부르르 떨었다. 마지막 도깨비는 너무도 놀란 듯, 입까지 벌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치우비와 바위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목을 길게 빼었다. 졌으니 죽여달라는 뜻 같았다. 그때 하늘에서 다시 울라트가 비명을 지르면서 떨어져 내렸는데 바로 치우비가 서 있던 곳이었다. 치우비는 울라트를 턱 받더니, 흙과 피가 범벅된 얼굴에 맑은 미소를 짓고는 아직 숨이 찬지 헐떡이며 말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 좌우간 여섯 다 이겼다." 그러고는 치우비가 다시 울라트를 어깨에 얹었다. 곧이어 떠나갈 듯한 환호성이 씨름터 전체에서 쏟아져 나왔다. 마지막에 보인 치우비의 솜씨는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마지막 도깨비의 그 마술 같은 칼솜씨는 정말로 무서운 것이어서 사람들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는데, 그것을 당당하게 물리친 치우비는 마치 선인이나 신수처럼 거대한 존재 같아 보였다. 울라트는 치우비의 목을 얼싸안고 기쁨과 놀라움의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치우비의 머리칼이 젖도록 펑펑 울었다. 눈이 큰 만큼 눈물도 엄청나게 많이 흐른다고 치우비는 속으로 생각하며 살짝 웃었다. 치우비는 울라트를 어깨에 태운 채 목을 빼고 있는 도깨비에게 다가가 말했다. "당신은 이제 자유요." 그 도깨비는 치우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조용하고 맑은 눈으로 치우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치우비는 웃으며 그를 일으켜 세워 엄지손가락을 한 번 세워 보인 후 정중히 앗수라트 부족 쪽으로 인도했다. 도깨비는 안색이 변하더니 곧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그 방향으로 갔다. 그리고 치우비는 냉랭한 표정으로, 기가 막혀서 주저 앉아 있는 앙가마이 부족장을 보고 한 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 보이고는 말없이 뒤돌아서 앗수라트 부족 쪽으로 걸어갔다. 앙가마이 부족장은 아래턱을 덜덜 떨며 한동안 두려움과 놀라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급기야 소리쳤다. "저놈을 죽여! 다 죽여! 전쟁이다!" 거의 광기에 사로잡힌 앙가마이 부족장이 발악하자 앙가마이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그의 말을 옮겨주던 쥐새끼처럼 생긴 자마저도 덜덜 떨며 부족장에게 말했다. "부족장님. 저 사람은... 아니, 저분은 세상에 당할 자가 없을 겁니다. 더구나 대주신의 사울아비인데 저 사람을 해치는 건..." "닥쳐랏!" 이미 눈이 뒤집힌 앙가마이 부족장은 번득 허리에서 칼을 뽑아서는 그 자의 머리를 그대로 내리쳐 버렸다. 피와 뇌수가 튀면서 그자가 머리가 두 쪽이 난 채 죽자 부족장이 발악하며 외쳤다. "다 죽여! 다 죽이란 말이다! 사울아비건 앗수라트건 모조리 죽여버렷!" 그러나 앙가마이 부족들은 웅성거릴 뿐 감히 무기를 들지 못했다. 방금 치우비의 엄청난 힘을 본 상태라 그런 자와 싸울 마음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더구나 비록 자기 부족이기는 하나 부족장이 너무도 치사하고 야비하여 이를 갈던 사람들도 많았던 터였다. 앙가마이 부족장이 입에 거품을 물며 외쳤다. "모두 죽이란 말야! 내 말을 안 들으면 너희 다 죽인다!" 그러자 하는 수 없이 몇몇 부족사람들이 활을 쳐들었다. 이에 반해 건너편의 앗수라트 부족은 이미 활과 창을 빈틈없이 세워 들고 여차하면 싸울 기세였다. 숫자는 앙가마이 부족이 많았으나 누가 보아도 앗수라트는 사기가 충천하여 하늘을 뚫을 것 같았고, 반면 앙가마이는 사기가 땅에 떨어져 지리멸렬이었다. 그때 천천히 걸어가던 치우비가 잠시 멈추어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피와 흙으로 얼룩졌지만 치우비의 몸에서 마치 빛나는 광채라도 나는 듯, 앙가마이 사람들은 눈이 부셨다. 앙가마이 부족 사람들 중 몇은 치우비가 그리 힘들고 험악한 격투를 하면서 다 한 번도 기합소리나 용쓰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는 입 한 번 열지 않고 여자아이에게 웃어 보이며 조용히, 씨름이 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엄청난 격전을 치렀고, 여자아이를 어깨에 얹은 채 여섯 명의 엄청난 도깨비들을 물리쳤다. 그와 싸운다는 것은... 지금 당장 죽어버리는 일이 있어도 그와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앙가마이 사람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앙가마이 사람들 수백 명의 시선이 치우비를 향했을 때, 치우비는 서글픈 듯한 표정을 살짝 지으며 손을 약간 들어 저었다. -그러지 마시오. 말 한마디 없었지만 모든 사람들은 그 거대한 전사의 뜻을 알아챘다. 앙가마이 사람들 중 용맹하기로 이름난 나이 많은 전사 한 명이 치우비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어서 그 주변의 사람들도 저마다 모두 고개를 숙여 치우비에게 인사를 했고 이어서 모든 앙가마이 부족원들이 치우비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치우비는 역시 좀 서글픈 듯 한 번 살짝 웃어 보이고는 다시 뒤로 돌아 뚜벅뚜벅 앗수라트 부족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먼저 쓰러졌던 세 명의 도깨비들은 거의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있었는데, 그들도 분위기를 보아 치우비가 자신들을 해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치우비를 향한 그들의 눈은 드높은 존경과 경탄, 그리고 감사의 뜻이 어려 있었다. 치우비는 약간 쑥스러워서 맑게 웃으며 도깨비들에게 하나하나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여주었다. 훌륭한 전사들이었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맨 처음 치우비에게 얻어맞아 쓰러졌던 금발 도깨비가 와락 울음을 터뜨리며 하늘을 보고 길게 목놓아 소리를 질렀다. 사자가 우는 것 같은 거대한 포효를 지른 그 도깨비는 눈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치우비에게 다가오더니 치우비를 와락 껴안았다. 치우비는 도깨비들에게 전혀 악의가 없었기 때문에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등을 몇 번 툭툭 쳐주었다. 말은 전혀 통하지 않는 도깨비들이었지만 피가 튀는 싸움으로써 오히려 더 잘 알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러자 그 도깨비는 '흐흑' 하는 목구멍 소리를 내며 울먹일 듯하다가 다시 억지로 굳은 표정을 지으며 성큼성큼 뒤로 걸어갔다. 이어서 손에 도끼를 세웠던 붉은 머리 도깨비가 다가왔는데 그는 양손으로 치우비의 손을 덥석 잡아 흔들어 악수를 했다. 그는 손이 없어 한쪽 손에는 여전히 도끼날이 끼워져 있었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악수를 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한 번 치우비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옆에서 울라트가 말했다. "이 도깨비들은 당신에게 정말 탄복했어요. 당신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을 거예요." "어떻게 알지?" 치우비가 묻자 울라트는 먼지와 눈물이 엉겨 범벅이된 얼굴에 비로소 함박웃음을 띄우며 대답했다. "난 원래 눈치가 빠르거든요." 나머지 도깨비들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머리에 천을 두른 늙고 지혜로워 보이는 도깨비가 다가오더니 치우비의 앞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그리고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중얼거리는데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흉포하기 그지없던 도깨비들마저도 치우비에게 진심으로 경복하는 것을 보고 앗수라트 부족들은 그때마다 소리 높여 환호를 올리고 박수를 쳤으며, 앙가마이 부족들까지도 진심으로 박수를 쳤다. 단 한 사람, 앙가마이 부족장만이 길길이 꼴사납게 날뛰고 있었다. "이놈들이 내 말을 안 들어? 응? 다 죽인다! 다 죽여!" 그동안 앙가마이 부족장은 부족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감히 그를 거역하는 자가 없었고, 거역하면 그 쥐새끼 닮은 자 같은 꼴이되곤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앙가마이 부족원들의 눈에도 볼썽 사납고 추하고 더러운 뚱보로 보일 뿐이었다. 급기야 야유가 터져나왔다. "네가 뭐냐! 부족장이면 다냐!" "너 같은 부족장은 필요 없다!" "부족장이면 부족장답게 굴어야지! 부족의 망신이다!" "네가 씨름판에서 싸워봐라! 부족장이면 부족장답게!" 오히려 부족원들이 험악하게 나오자 앙가마이 부족장은 당황과 수치, 공포를 한꺼번에 떠올린 복잡한 표정이 되어 쩔쩔매었다. 그러자 앙가마이 부족원들의 머리에 부족장의 평소의 악행이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급기야 원성이 터져나오다가 욕지거리로 변하고, 마침내는 무기를 들고 흉흉한 눈으로 부족장을 노려보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별안간 부족장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칼을 든 채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치우비에게 달려들었다. 치우비는 물론 알고 있었지만 굳이 움직이지도 않았다. 너무 숨이 차고 지쳐서 움직일 기력도 없었던 것이다. 다만 그의 어깨에 있던 울라트가 뒤를 돌아보며 그 큰 눈에 무서운 빛을 떠올리며 부족장에게 그 가늘고 작은 손가락을 내밀며 외쳤다. "넌 끝났어! 돼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언가가 허공을 휙 날아서 앙가마이 부족장의 이마에 꽂혔다. 앙가마이 부족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뜬 채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이어 부족장의 머리가 두 쪽으로 갈라졌고 부족장은 끽 소리도 못하고 털썩 쓰러져 버렸다. 그 부족장을 냉랭한 눈으로 바라보는 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도끼를 팔에 달고 있던 그 붉은 머리의 도깨비였다. 그가 어느 틈에 팔에 끼웠던 도끼날을 빼서 던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뚜벅뚜벅 씨름판의 중앙으로 걸어나가서 앙가마이 부족원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와!" 그러자 앙가마이 부족원들은 덩달아 기쁨의 고함을 질렀다. 분노나 경악의 고함이 아닌, 기쁨의 환성임이 분명했다. "와!" 앙가마이 부족원들에게 그날은 공포의 대상이었던 부족장이 죽은 경사스러운 날로 기억되었다. 그들은 후세 대대손손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었다. -옛날에 아주 나쁜 부족장이 있었다. 그는 도깨비들을 부려서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욕심을 채웠는데, 도깨비들의 힘이 무서워서 누구도 그에게 대항하지 못했지. 도깨비들은 무기에 손도 대지 않고 저절로 싸우게 하는 무서운 재주가 있어 아무도 이길 수 없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여서 나타나셨단다. 그분이 나타나서 힘을 보이자 산이 갈라지고 도깨비들의 무기는 모조리 땅에 떨어져 내렸단다. 그러자 도깨비들은 신이신 그분께 모두 엎드려 절했고 나쁜 부족장을 그들의 손으로 죽였지. 그리고 그분은 도깨비들을 모조리 데리고 앙가마이 부족을 떠나셔서, 우리 부족은 그후로 도깨비 걱정없이 살아가게 되었단다. 너도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분이 다시 와주시기를 빌어라. 누가 아니? 열심히 빌면 그분이 다시 오실지, 아니 벌써 우리 옆에 와 계신지도 모른단다. -그분을 어떻게 알죠? -그분은 조용한 전사이시다.싸울 때 아무 말도 없고 힘쓰는 소리도 없는 전사. 그러면서 모든 것들을 저절로 엎드리게 만드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전사이시란다. 앙가마이가 어려워지면 그분이 돌아오실 것이란다. 언젠가는 반드시... 치우비는 앗수라트와 앙가마이 부족 전체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으나 모두 마다했다. 앙수라트와 앙가마이는 오히려 이번 일을 계기로 두 부족이 화해하고 사이 좋게 되었다. 묵은 감정도 어느 결엔가 사라져 버려서 두 부족은 진심으로 기쁘게 함께 즐겼다. 울라트는 너무 좋은 나머지 계속 울기만 해서 치우비는 약간 당황했다. 앗수라트 부족장은 키타야는 내기에서 이긴 것을 모조리 치우비에게 주겠다고 했다. 가만 듣자 하니 울라트까지 주겠다는 말 같아서 치우비는 얼굴이 붉어져서 사양했으나 키타야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알고보니 발음은 서툴렀지만 주신 말을 꽤 잘했다. "이건 내기였으니 반드시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싸워 이긴게 아니라 당신이 이긴 것이니 반드시 당신이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키타야가 단호하게 말하자 치우비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면 앙가마이 부족의 것만 주십시오. 왜 앗수라트 것까지 받아야 합니까?" "당신이 아니었으면 모조리 빼앗길 것이었으니 당신에게 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일입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리고 제발 존댓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못견디겠습니다." 그러자 키타야가 부족원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대용사께서 존댓말을 하지 말라시니, 앞으로 나이가 많은 자는 절대 존댓말을 하지 마라. 어기면 산 채로 땅에 파묻을 것이다." "예~!" 사람들이 엄숙하게 일제히 대답하자 치우비는 더욱 당황스러웠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용사께서 원하시니 반말로 하겠네. 대용사는 우리 부족의 은인인데, 그 말을 어기면 죽어 마땅한 것 아닌가? 우리 부족은 이런 일에는 엄격하다네. 죽어도 아무도 불평하지 못할 거네." 부족장과 부족원들은 하나같이 엄숙했다. 앗수라트 부족이 앙가마이보다 작았고, 항상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버텨온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치우비는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구아이구, 아닙니다. 편한 대로 하세요. 제발요! 누가 실수로 말 한번 잘못했다가 땅에 묻히면 어떡합니까?" 그러자 키타야가 다시 외쳤다. "대용사께서 마음을 바꾸셨다. 다들 편한 대로 하라." "예~!" "너무 무섭습니다. 제발 친구처럼 편하게, 웃으며 대해주세요." 그제야 키타야가 웃으며 말했다. "대용사께서 편하게, 친구처럼 웃으며 대해달라신다. 모두 그렇게 하라!" "예~!" 치우비는 앗수라트의 엄한 풍습에 적응이 덜 되어 상당히 쩔쩔맸고, 그런 치우비의 순박하고 착한 모습이 오히려 앗수라트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더 사로잡았다. 그들은 친구처럼 편하게 대하라는 명이 있자 재잘재잘 떠들며 모여들었다. 모두가 어떻게든 이 대용사에게 하나라도 더 주려고 안간힘이었다. 나중에는 전 부족이 부하로 들어가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자 치우비는 비명을 질렀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런 과한 선물은 받을 수 없습니다. 아참, 그렇군요. 제가 일단 받고, 제가 다시 여러분들게 선물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선물을 받았으니 여러분도 거절하지 마세요." 그 재치에 키타야가 웃었다. "자네는 우리에게 너무도 값진 것을 주었네. 앙가마이 부족과의 평화를 준 것이네. 세상에 이보다 더 값진 선물은 없네." 그 말에 치우비는 감격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을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에 뭔가 깨닫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여러분께 평화를 주었다면, 여러분은 저에게 영광을 주었습니다. 저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선물은 제가 받았고, 다시 돌려 드리는 것이니 거절하지 말아주세요." 치우비의 현명한 대답에 키타야도 끄덕였다. 그러다가 키타야가 근엄하게 말했다. "그러나 두 가지는 받을 수 없다네." "뭡니까?" "첫째는 도깨비들일세. 도깨비들은 자네 아니면 절대 따르지 않을 사나운 것들이니 자네가 맡아야 하네." "그들을 어떻게 하지요? 사실 그들을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고 싶습니다만 어딘지도 모르거든요." 그 말에 키타야는 뭔가 생각하다가 말했다. "도깨비들이니 도깨비들의 왕에게 데려다 주면 되겠군." "도깨비의 왕이오?" '쉿'하며 키타야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큰 소리로 말하면 안 되네. 그는 무서운 자일세." "사람입니까? 도깨비입니까?" "신기하게도 도깨비의 왕은 사람이라고 하네. 아니, 사람과 도깨비의 반반이라고도 하지. 좌우간 그는 대단히 괴팍하고 무서운 자일세. 언뜻 보면 혼자 사는 것 같지만 그는 수천 수만의 도깨비를 불러내어 부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사람이라네. 사실 그에 대해 입에 올리는 것만도 대단히 위험한 일일세. 타타르족은 선인이나 신수보다도 이 도깨비왕을 두려워한다네." 앗수라트 부족장은 용감한 사람이었으나 이 도깨비 왕만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도깨비 왕을 만나 도깨비들을 거두어가라 하면 되겠군요. 그 도깨비왕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서 동쪽으로 아주 멀리, 몽골족과의 경계 부근에 아주 큰 사막이 있다네. 그 사막의 동쪽에 산다는 소문이 있네. 자네는 대용사이니 도깨비 왕도 어쩌지 못할 것이라 가르쳐주는 것이네만, 거기 갔다가 지금껏 돌아온 자가 없었다네." "그렇군요. 저는 도깨비를 돌려주러 가는 것이니 괜찮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못 돌려주는 물건은 뭐죠?" 그러자 키타야가 씩 웃었다. "그건 내 딸일세. 생각해보게. 자네에게 주더라도 내 딸은 내 딸 그대로일세. 딸을 아비에게 선물로 주는 법이 어디 있는가?" 당황하는 치우비를 보며 키타야가 웃었다. "내 딸은 아직 어리다네. 물론 자네가 마누라로 삼는다면 더 기쁜 일이 없지만, 내 딸은 그럴 정도로 잘난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안다네. 그러니 마누라로 삼지 말고 그냥 데려가만 주게나..." "하지만 어떻게 따님을..." 별안간 키타야는 울상이 되었다. "내 자식이라고는 그애 하날세. 더구나 병이 잦고 몸이 약해 그애를 떼어놓고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네." "그러니 더더욱 제가 데려갈 수 없지요." 키타야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더 데려가야 한다네. 그 아이는 몸이 약해 천막 안에서만 살아왔네. 그런 그 아이의 평생 소원이 뭐였는지 아는가?" "모르죠." 키타야는 자신도 좀 기가 막힌 듯한 얼굴로 말했다. "종살이라도 좋으니 세상 제일의 영웅과 같이 세상을 여행해보는 것이었다네." 치우비도 기가 막혔다. "저는 세상 제일의 영웅이 못 되고, 세상을 여행할 수도 없이 바로 신시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주신을 가보는 것도 대단한 여행일세. 더구나 자네 정도 되는 대영웅이 아니면 내 딸을 맡길 수 없지. 시집 보내는 것이 아닐세. 다만 동생처럼, 딸처럼... 아니, 아니, 내 욕심이 지나쳤군. 그냥 몸종이나 계집종으로 달고 가기만 하면 되는 걸세." "부족장님의 따님을 어찌 종으로 부린단 말입니까? 안 되겠는데요?" 단번에 키타야의 얼굴이 굳어졌다. "정말 자네가 안 데려가겠다면 그 아이는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죽는다고 했네." 치우비는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왜 그런 짓을 하나요?" "세상에 자네 같은 대영웅을 한 번 보았으니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군. 그렇게 평생 소원도 못 이루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는다고 하지 않겠나? 나도 걱정일세." "정말 그 애가 뛰어내릴까요?" 치우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키타야는 엄숙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부족은 뭐든 한다면 하네. 그애가 비록 어리고 약하나 마음은 대단히 굳다네. 아마 자네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뛰어내릴 걸세. 그러나 염려 말게. 그건 그애가 잘못 말한 탓이지, 자네 탓이 아니니까." 치우비는 기겁을 했다. "그래서는 안 되죠. 안 됩니다. 그렇게까지 한다면 내가 데려가죠. 안 그래도 전 여동생이 없어요. 여동생처럼 귀여워해주다가 좀 크면 돌려보내겠습니다." 키타야가 치우비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맙네. 하지만 그렇게 급히 보낼 것 없네. 시집갈 만큼 큰 다음에 보내도 된다네. 아, 또 내가 욕심을 지나치게 부리는군. 자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쫓아버려도 된다네." "쫓아버리다뇨! 쫓아버리다뇨! 저렇게 귀엽고 가여운 아이를 왜 쫓아버립니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울라트는 이제 내 동생입니다. 동생으로 대해주겠습니다!" 사실 울라트는 아까 앙가마이 부족장에게 가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다 했는데, 절벽에서 뛰어내린다는 협박은 그녀가 궁지에 몰릴 때마다 사용하는 주특기라는 것을 치우비가 알 리 없었다. 아버지인 앗수라트 부족장 키타야는 그 말을 수천 번이나 들으며 살아왔기에 그것이 협박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은근히 울라트가 더 자라고 예뻐지면 치우비같이 대단한 영웅을 사위로 맞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흑심도 좀 있었기에 그런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키타야는 꽤가 대단한 사람이라, 치우비가 이렇게 나오면 거절 못할 것을 알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물론 치우비에게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키타야는 진정으로 자기 딸의 능력을 아는, 단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치우비가 응낙하자 키타야가 넌지시 말했다. "그 아이는 자네에게도 큰 쓸모가 있을거라네. 꼭 필요할 걸세." "왜죠?" "그 아이는 눈치가 대단히 빠르다네. 아니, 마음만 먹으면 누구와도 이야기할 수 있다네." 치우비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 그럼 각 부족 말을 다 잘합니까?" "그런 게 아니지만, 어쨌든 내 딸은 누구와도 이야기가 통하고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강 안다네. 아까 도깨비들의 생각도 내 딸이 대강 알아낼 수 있었잖은가?"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러했다. 도깨비들이 치우비에게 감복했다는 말은 울라트가 처음으로 했고, 또한 분명한 사실 아니었던가? 울라트의 큰 눈 뒤에는 뭔가 알지 못할 힘이 있는 것도 같았다. 치우비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이거 난데없이 여자애 동생에다가 도깨비들까지 주르르 달고 돌아가게 된데다가 도깨비 왕인가도 만나게 되었으니, 형님이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 참...' 며칠 밤이라도 새울 것 같은 앗수라트 부족과 앙가마이 부족의 대접을 애써 적당히 사양하고 치우비가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이미 늦은 밤이 된 후였다. 치우비는 앗수라트와 앙가마이 부족에게 가축들은 모두 돌려주었지만 그래도 많은 선물을 받았고, 치우비는 여전히 어깨에 울라트를 얹고 있었다. 뒤에는 열 마리나 되는 도깨비들이 그 선물짐을 짊어진 채 줄줄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 도깨비들은 치우비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왔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 띄일까 봐 치우비는 숨어서 인적이 뜸한 길로 돌아와야 했다. 치우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도깨비들이 용감한 전사이기는 하지만, 자칫 도깨비들을 끌고 다니다가는 사람들의 오해를 산다. 아버지나 형님까지 욕을 먹을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주신 막사 부근은 울타리가 있고 경계를 서는 사울아비들이 있어서 그렇게 지나갈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치우비는 울라트에게 물었다. "어쩌면 좋지?" "뭘요?" "사람들이 지키고 있는데, 도깨비들을 데리고 그냥 지나가기는 힘들 것 같은데. 사람들이 놀라고 무서워할 거야." 그러자 울라트는 큰 눈을 더욱 크게 떴다. "비 오빠는 안 그랬잖아요?" "나도 처음 보았을 때는 놀랐... 가만, 뭐라고? 비 오빠?" "나를 여동생으로 삼는다면서요? 그러니 오빠죠. 오라버니라고 해드릴까요?" 치우비는 씁쓸하게 한숨을 살짝 내쉬고는 말했다. "좌우간 네가 도깨비들에게 어떻게 말을 전할 수 있겠니?" 울라트는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을 전할 수는 없구요, 저 도깨비들 생각은 대강 알 수는 있어요. 눈치죠." "그럼 어떻게 하지? 저들은 외따로 떨어진 곳에 묵어야 할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주신 막사로 데려갈 수는 없어. 그런데 내 뒤만 졸졸 따라오니 걱정이로구나." 그러자 울라트가 웃으며 물었다. "일단 도깨비들이 잘 만한 곳은 있나요?" 치우비는 전에 땅굴을 팠던 곳에 세워두었던 천막을 생각해냈다. 그 천막은 야율쿠리와 치베 등이 치우천을 구하려고 땅굴을 팔 때, 땅굴 파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세운 천막이니 텅 비어 있을 것이었다. 물론 지나족이 땅굴을 수색할 때 무너뜨렸을지도 모르지만, 딱히 생각나는 곳은 그곳뿐이었다. "그래, 있다." "도깨비들은 눈치가 빠르니까 손짓, 발짓을 하면 아마 알아들을 거예요. 그러면 그리로 가요." 그래서 치우비는 다시 어둠에 몸을 맡긴 채 도깨비들을 끌고 사람들을 피하며 그쪽으로 향했다. 다행히 몹시 늦은 밤이라 사람들도 놀다가 거의 곯아떨어져서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지만, 이건 형을 구할 때보다 더 조심스럽고 조마조마한 것 같았다. 다행히 전에 세웠던 천막자리에 도달해보니, 그 천막은 좀 무너지긴 했지만 아직도 그럭저럭 지탱하고 있었다. 그 안의 땅굴도 그대로였다. '어, 지나족이 땅굴을 발견했는데 왜 그대로지? 아, 아마도 형이 이미 도망쳐 버렸고 자기들도 회의 때문에 바쁘니깐 그냥 내버려두었나보다. 좌우간 다행이군.' 아무튼 막사가 그럭저럭 남아 있자 치우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도깨비들에게 무너져 버린 막사를 가리켜 보이자 붉은 머리 도깨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말없이 막사를 고치기 시작했다. 오른팔의 도끼날로 나무를 톡톡 쪼면서 막사를 고치는 솜씨가 흉측한 생김새와는 다르게 퍽 꼼꼼했다. 그 도깨비가 막사를 고치자 다른 도깨비들도 곧 달려들어 함께 거들었다. 두어 명의 도깨비는 아직 치우비에게 얻어맞아 힘을 쓰기 어려웠지만 막사를 고치는 대신 짐을 주섬주섬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의외로 그들이 일을 착착 잘하자 치우비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 도깨비들, 의외로 쓸 만하군. 일을 잘하는데?" 울라트가 웃으며 말했다. "비 오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열심히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뭔가 시키면 죽어도 꼼짝 안 할걸요?" 그러나저러나 눈치를 보니 도깨비들이 퍽 지치고 목이 마른 듯했다. 치우비가 울라트에게 물었다. "저 도깨비들, 배고픈 것 아니야?" "그런 것 같아요." 그러자 치우비는 은근히 화가 났다. "우리는 실컷 잔치를 벌었는데, 도깨비들에게는 먹을 것 하나 안 주었단 말야? 앗수라트 사람들이 인정많은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도깨비들이 뭘 먹는지 우리가 어떻게 아나요? 그리고 사실 다들 도깨비를 무서워하는데 누가 그 옆에 가고 싶겠어요?" 치우비는 더 이야기하지 않고 일단 앗수라트 부족에게서 받은 선물 보따리들을 풀어보았다. 보따리들은 좋은 가죽으로 싸여져 있었는데, 모두 열네 개나 되었다. 그러니 그중에 틀림없이 좋은 음식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첫 번째로 푼 보따리에서는 기이하게도 알록달록한 구슬과 치우비가 처음 보는 아주 고운 흰색의 천, 뼈바늘과 구리거울 같은 여자 물건이 잔뜩 쏟아져 나왔다. 치우비는 좀 의아하여 물었다. "이건 뭐야?" 그러자 울라트가 호들갑스럽게 대꾸했다. "어머머, 저건 비단이네. 우리 부족에 저 귀한 것도 있었나?" "이 천이 비단이야?" "그래요. 벌레가 만드는 천이라는데, 아주 귀하죠. 지나족들 몇 부족만이 그것을 만드는 법을 알아요." 치우비는 농담인 줄 알고 웃었다. "벌레가 천을 만든다고? 그럼 도깨비들은 더 좋은 천을 만들 수 있겠네." "이건 정말이라구요. 정말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이죠." 치우비는 웃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혹시 울라트가 쓰라고 보낸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건 내게 보낸 선물이 아닌가? 거기에 울라트 물건을 보낸 것은 어쩌면...' 치우비는 곧 그런 생각을 떨치고 울라트에게 말했다. "이건 여자들 물건이니 난 소용없다. 너 가져라." 울라트가 생긋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난 필요없어요. 우리 부족 것들이라 나한텐 하나도 귀하게 안 보이네요. 누구 좋은 여자에게 주세요." 그러다 보니 공손발 생각이 났다. 치우비는 어쩔까 생각하다가 일단 비단만 꺼낸 다음 그 보따리를 다시 싸매고, 다음 보따리를 풀었다. 그러자 과연 그 보따리에서는 잘 봉해진 단지와 아주 냄새가 좋은 말린 과일, 잘 구워 말린 양고기, 곡물을 빻은 가루, 양젖을 굳혀 만든 치즈와 소 오줌보에 담긴 보송보송하게 말린 무슨 부스러기 뭉치 등이 잔뜩 나왔다. 그런데 그 소 오줌보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무슨 가루 같았는데 그것은 울라트도 처음 본다고 했다. 먹을 것과 같이 있으니 먹을 것이 아닌가 하고 조금 집어 조심스레 입에 대보니 고기맛 같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뭔가 모르겠어서 치우비는 그것은 그냥 놓아두고 단지를 열었다. 단지는 진흙으로 잘 봉해져 있었는데 열자마자 달콤하고 향기로운 술냄새가 났다. 냄새를 맡아보니 타타르족의 보통 술이나 양젖술이 아니라 미아우족의 향기롭기 그지없는 과일주였다. 치우비가 웃으며 울라트에게 말했다. "정말 대단한 선물이군. 각 부족의 좋은 것이 다 있는 것 같으니, 네 아버님이 오랫동안 모아두신 것 같구나. 아버님이 빈털터리가 되신 게 아닐까?" 울라트는 그냥 웃고 말았다. 치우비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려고 따로 빼둔 그 소 오줌보에 든 정체모를 가루만 빼고 나머지를 도깨비들에게 내놓으며 웃으며 말했다. "배고프지 않아? 먹어라." 도깨비들이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자 치우비는 그것을 집어먹는 시늉을 하며 손을 뻗어 도깨비들에게 먹으라고 권했다. 그러자 도깨비들은 이내 다가와서 허겁지겁 음식들을 마구 집어먹기 시작했다. 몹시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울라트는 그 귀한 음식들을 도깨비들이 다 집어먹는 게 조금 아까운 듯한 표정이었으나 치우비는 흐뭇하기만 했다. 어느 정도 먹고 나자 붉은 머리 도깨비가 슬쩍 술단지 쪽을 곁눈질하는 것이 보였는데, 아무래도 술냄새를 맡으니 마시고 싶은 모양이었다. 치우비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도깨비도 술을 마시나? 이거 미안하다. 몰랐네." 치우비가 술단지를 도깨비에게 내밀자 도깨비는 기뻐서 그 흉터투성이의 얼굴에 입이 찢어질 정도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여 고맙다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그 도깨비는 술을 조금 마신 뒤 옆의 도깨비에게 단지를 권했고, 그들은 사이좋게 한 모금씩 돌아가면서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서 그들은 저마다 '캬! 크윽' 하는 기분 좋아죽겠다는 소리를 냈는데, 치우비는 그 소리가 사람들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울라트가 신기한 듯 말했다. "도깨비들끼리도 의리는 있네요. 혼자 마시거나 싸우지 않고 잘 지내는군요. 모양도 다 다른 도깨비들인데." "다같이 고생한 처지니까 그렇겠지." 도깨비들 중에서 흰 천을 머리에 두른 거무튀튀하고 지혜롭게 생긴 늙은 도깨비만은 정중히 웃으며 술을 사양했고, 나머지는 좋아하며 술을 마셨다. 이윽고 한 바퀴가 돌자 도깨비들은 치우비에게도 술을 권했다. 치우비는 그저 웃으며 조금 입에 대었다 떼고 다시 붉은 머리 도깨비에게 주었다. 그러자 그는 껄껄 웃으면서 다시 술을 받아 마셨고 게속 술을 돌렸다. 그런데 중간 쯤 가니 술이 떨어졌는데, 하필 그때 차례는 금발머리의 도깨비였다.그는 몹시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술단지를 털어 몇 방울의 남은 술까지 핥아 마셨다. 그 모습에 치우비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더 찾아보자." 그러면서 치우비는 다른 보따리드로 풀어헤쳤으나 애석하게도 무기나 옷, 가죽과 장식품 등이 있을 뿐이었고 술은 더 나오지 않았다. 음식은 좀 많은 편이라 반이나 남았지만, 술이 모자라 도깨비들도 아쉬운 듯했다. 치우비는 할 수 없다는 듯 내일 더 갖다주겠다고 했지만, 도깨비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도깨비들이 배가 불러 졸리운 듯하자, 치우비는 쉬라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그런데 치우비가 일어서자 도깨비들도 일제히 일어서려 했다. 치우비는 내일 다시 올 것이니 안심하고 푹 자라는 뜻을 손짓잘짓을 해서 알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건 참 어려운 일이었다. 울라트는 덩치 큰 대용사인 치우비가 땀까지 흘리며 어색한 손짓발짓을 하며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치우비가 땀까지 뻘뻘 흘리며 한참이나 미친 짓을 해댄 후에야 도깨비들은 겨우 알아들었다. 중간에 머리에 천을 두른 늙은 도깨비가 뭔가 먼저 눈치채고 도와주어서 그나마 가능했다. 도깨비들은 치우비가 자신들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하고 껄껄 웃으며 자기들끼리 놀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지혜롭게 생긴 늙은 도깨비는 조금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조용히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 도깨비는 행동거지도 점잖고 칼쓰는 주술도 실로 놀라워서 치우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이 다 제각각이듯 도깨비들도 제각각이구나. 붉은 머리 애꾸 도깨비나 노란 머리 도깨비처럼 용맹하고 남자다운 도깨비도 있고, 또 저 흰 천을 두른 늙은 도깨비처럼 지혜롭고 조용한 도깨비도 있구나. 그런데 도깨비도 여자가 있을까? 있다면 아주 희한하게 생겼을 것 같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치우비는 자신의 막사로 돌아왔다. 형 치우천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둘 다 몹시 피곤하여 눈이 붙을 것 같았다. 울라트는 여자애지만 아직 꼬마였으므로 그냥 옆에서 자라고 하고 치우비도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이라고 할 것도 없이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오랜만에 깊이 잠든 치우천은 뭔가가 목을 누르는 듯한 답답함에 눈을 떴다. 눈을 떠보니 조그마한 발 하나가 자기 목에 얹혀 있는 것이 아닌가? 치우천이 놀라 일어나 보니 웬 자그마한 여자아이 하나가 자신과 치우비 몸에 각각 반쯤 걸친 채 잠들어 있었다. 치우천은 놀라기보다는 웃음이 먼저 나왔다. 이 아이는 갑자기 어디서 떨어진 것일까? '이런 웃기는 일이 있나? 이건 분명 아우 짓일 거야. 이 녀석이 또 뭔 짓을 했나?' 그러고 보니 잠든 치우비의 몸 여기저기에 없었던 상처들이 새로나 있었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곤하게 잠든 것 같아 놔둘까하다가 치우천은 혹시나 하고 치우비를 툭툭 쳐서 깨웠다. 치우비가 눈을 비비며 부스스 일어났다. "아, 희네 형? 왜 깨워?" "이 녀석아, 희네가 아니라 천이다, 천. 지난 밤에 무슨 일이 있었지?" "어... 그러니까... 아구, 졸려." 울라트는 그때까지도 세상 모르게 네 활개를 뻗은 채 자다가 한 번 뒤척였는데 하마터면 발이 치우천의 얼굴을 찰 뻔했다. 꼬마 아가씨 치고는 잠버릇이 무척 고약한 편이었다. 치우천이 웃으며 물었다. "이 잠버릇 고약한 아가씨는 누구냐? 그리고 네 몸에 새로 난 상처는 또 뭐야? 이 조그마한 아가씨가 마음에 들어 업어온 거냐? 싸워서 뺏아온 거냐?" 아직 잠에서 덜 깬 치우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아이구, 무슨 소리야? 이앤 내 동생이라구." 치우천은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거 참, 장하구나. 너에게 여동생이 있는데 쌍둥이 형인 나는 지금껏 몰랐네. 자자, 다 말해봐라, 이 녀석아. 안 그러면 잠 못 자게 간지럽힌다?" 그제야 잠이 다 깬 치우비는 치우천에게 어젯밤 있었던 일을 모두 다 털어놓았다. 앗수라트 부족의 씨름에 끼어 도깨비들과 싸워 이기고, 앙가마이 부족장이 죽게 만들고, 도깨비들을 얻게 되고 울라트를 여동생 삼은 일 등등. 그러면서 치우비는 도깨비들을 걱정하며 도깨비 왕을 만나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러자 치우천은 기분 좋게 웃었다. "큰 골칫거리를 안게 되었구나. 도깨비를 열 마리나 데리고 오다니! 거기다 도깨비 왕? 하하, 어디 나도 구경 좀 해보자꾸나. 날이 밝으면 회의장에 가야 하니 지금 가자." "희네 형, 내가 또 일을 저지른 거 아닐지..." 치우비가 약간 풀이 죽은 듯이 말꼬리를 흐리자 치우천이 말했다. "내 아우가 주신, 지나, 키탄, 미아우에 이어 타타르족에까지 이름을 떨치게 되었는데 무슨 소리냐? 기왕 소문난 것, 그럴 듯하게 나라고 둬라.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무슨 걱정이야? 그리고 희네라고 하지 마. 이제는 천이다. 치우천." "그래, 천 형님. 이애... 데리고 가도 돼? 도깨비도 도깨비 왕에게 데려가기로 했는데... 너무 내가 일을 저질러서..." "네가 한 약속은 내가 한 약속이다. 설령 네가 못할 짓을 하고, 못지킬 약속을 했다해도 내가 어떻게든 대신 지켜줄 거다. 넌 내 아우잖느냐?" 치우비는 벅찬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치우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물었다. "도깨비들은 어디 두었다고 했지?" "전에 땅굴을 팠던 막사에." 얼른 치우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좋지 않다. 누가 없던?" 그러면서 치우천은 급히 치우비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무도 없던데?" "그게 아냐. 너희가 그 땅굴을 며칠 걸려 팠댔지?" "사흘" "그러면 정말 급하다. 빨리 가자!" "대체 왜..." "가면서 이야기하자!" 치우천이 먼저 급히 밖으로 나서자 치우비도 그 뒤를 따랐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이고, 전날 늦게까지 놀았던 터라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가면서 치우비가 물었다. "왜 그리 급한 거지?" "유망이 그 땅굴을 그냥 둘 리가 없다. 자기들 막사 가운데 들락거리는 굴이 생긴 것을 어찌 그냥 두겠느냐? 우리가 그리로 도망갔는데 안 그러면 왜 그냥 두었겠니? 사흘 걸려 판 굴이니 하루면 메울 수 있었을 건데." "그럼 왜 안 메우고 그냥 두었지?" "그러니 말이다. 분명 그건 함정이다. 누가 거길 또 드나드나 사람을 붙여서 지켜본 것이 분명하단 말야." 치우비는 갈수록 의아해졌다. "그럼 왜 그때는 아무 일 없었지?" "도깨비들이 몰려가는 것을 보자마자 덮칠 간 큰 녀석들이 몇이나 되겠니? 분명 놀라서 위에 알리러 갔을 테고, 지금쯤 지나족들이 많이 몰려갔을 거다! 너는 운이 참 좋은거야. 망보던 녀석이 알리러 뛰어간 사이 네가 돌아온 것이 분명하다." 치우비는 울상이 되었다. "그럼 어떻게 하지? 도깨비들이긴 해도 좋은 놈들이야. 죽거나 잡히게 놔둘 수는 없잖아." "일단 아무 일 없으면 다행이고, 탈이 났으면 일이 돌아가는 것을 보아 움직이자." "우리 둘 가지고 될까?" "그렇다고 도깨비들 일인데 누구더러 도와달라겠느냐?" 치우천이 걱정한 대로 일은 이미 터져 있었다. 가까이 갈 것도 없이 근방에 가보니, 이미 그 주위는 활과 돌창, 돌도끼를 든 지나 전사들로 물샐틈없이 포위되어 있었다. 그 숫자는 삼백 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그런데 상대가 도깨비들이라 생각해서인지 지나족들은 쭈뼛거리며 감히 먼저 공격하러 들어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치우비는 울상이 되었다. "이걸 어떻게 하지? 이거 공연히 도깨비들이 날 오해하겠네. 죽기 살기로 한판 붙어볼까?" "가만가만. 이럴 때는 힘으로 부딪힐 수 없다. 비야, 넌 눈이 밝으니, 지나족 대장이 누군지 봐. 우리가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 치우비가 살펴보니, 지나족 대장인 듯한 사람은 처음 보는 텁석부리 남자였다. 그 말을 전해듣고 치우천은 미소를 띠었다. "그럼 됐다. 우리 얼굴을 모르는 자라면 된다. 나와 같이 나가자." "나가? 저놈들 가운데로?" "너는 그냥 조용히 서 있기만 하면 된다. 태연하게, 천천히 걸어라. 그리고 내게 맡겨." 치우천이 슬렁슬렁 여유있는 걸음걸이로 지나족들에게로 걸어갔다. 치우비도 불안했지만 그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여유있게 천천히 걸어 자신들에게 다가오자, 지나족들은 누군가 하고 의아해했다. 몇 명의 지나족이 그들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거기 서라! 너희는 들어갈 수 없다." 그러자 치우천이 지나 말로 말했다. "왜 안 되는 거요?" "좀 있으면 큰 싸움이 날지도 모른단 말이다. 다치기 싫으면 썩 꺼져!" 치우천이 보기에도 지나족들은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치우천은 웃으며 말했다. "거 참, 가라면 가겠소만... 도깨비들과 싸우다가 다 죽을 목숨들이 불쌍하군." 슬쩍 웃으며 흘린 말이 단번에 정곡을 꿰뚫었는지 지나족 전사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 몇몇의 우두머리인 듯한 대머리 남자가 외쳤다. "네놈들 뭐냐? 도깨비들 일을 어떻게 알지?" 그러자 치우천은 '하하하'하고 하늘을 보고 웃었다. "나는 카린산 쑤앙마이와 주신의 자부선생 밑에서 도깨비를 다스리는 법을 배운 천이라 하오. 아직 선인은 못 되었고, 선인의 길을 닦는 사람이지요. 이쪽은 내 부하인 비요." "도깨비를 다스린다고?" "쑤앙마이?" "자부선생?" 지나족들이 저마다 떠들어댔다. 카린의 쑤앙마이는 대주술사로 머나먼 지나에까지 이름이 알려졌고, 주신의 자부선생도 학식이 높기로는 선인 못지않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 두사람을 끌어다댔으니 지나족들의 귀가 솔깃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우두머리는 섣불리 믿지 않고 물었다. "그런데 여긴 왜 왔느냐?" 치우천은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 도깨비들은 냄새가 나서 도깨비를 잡으러 온 것이지. 그런데 당신들이 설치니 이거 어쩐다? 죽는 걸 보고만 있기도 그렇고 해서 말리러 왔소." 그 말에 지나족 우두머리는 호기롭게 말했다. "우리는 삼백 명이나 된다. 도깨비들은 열 마리 밖에 안 되니, 네 도움은 필요없다." 그러나 치우천이 비웃는 듯이 이죽거렸다. "허허, 아깝구나, 아까워. 또 말을 듣지 않고 삼백 명이 죽어 없어지는구나." "재수없는 소리 마랏!" 우두머리가 화난 듯 외치자 치우천이 더욱 이죽거리며 말했다. "당신들, 미안하지만 도깨비들에게는 상대가 안 되오. 도깨비들이 두 마리라면 그럭저럭 이길는지도 모르지만, 열 마리라면 이천 명은 데리고 와야 간신히 이길 거요. 그나마 반은 싸우다 죽어 없어질 거구." "믿을 수 없다. 도깨비들이 그렇게 강한가? 또 그렇게 강하다면 너는 무슨 재주로 도깨비를 이긴다는 건가?" "일단 우리를 들여보내주시오. 우리에게는 도깨비들이 알아서 설설 기게 만드는 재주가 있소. 정 우리를 못 믿더라도 당신들에겐 손해될 게 없잖소?" "네가 뭔데?" 별안간 치우천이 노기를 띠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내 스승인 쑤앙마이와 자부선생의 힘을 못 믿는다는 것인가? 주술의 힘을 못 믿겠다는 말인가?" 치우천은 체구는 보통이고 얼굴도 고왔지만, 힘을 주어 소리치면 그의 목소리는 웅장하고 울림이 있어서 사람들을 저절로 제압하는 기운이 있었다. 지나족들은 그 목소리에 눌려 그야말로 찔끔했다. 우두머리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이윽고 말했다. "선인을 몰라뵈어 죄송하오. 그러나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오. 우리 대장을 만나보시오." 우두머리가 치우천과 치우비를 끌고 대장인 텁석부리에게로 갔다. 텁석부리는 퍽 긴장한 듯했는데, 대장이 있는 곳으로 가니 이미 한 번 싸움이 벌어진 듯, 막사 앞에 세 명의 지나족 시체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치우비는 그것을 보고 걱정했으나 치우천은 태연하게 말했다. "저런저런, 내가 조금 늦어서 세 사람이 죽었구나. 하늘이시여, 용서하소서." 텁석부리는 치우천과 치우비를 번갈아 훑어보다가 대머리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저놈들, 너무 어리잖아?" 목소리를 낮춘다고 했지만 치우천에게는 그 말이 들렸다. 치우천은 다시 한 번 호탕하게 웃었다. "내 손주뻘도 안되는 것이 감히 나보고 어리다는 구나. 하긴 저 녀석만 탓할 일이 아니지." 그 말을 듣고 텁석부리는 화를 내며 호통을 쳤다.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놈이 무슨 헛소리냐?" 그러자 치우천이 되레 더 크게 호통을 쳤다. "썩은 눈깔만 믿고 헛소리! 내 나이 이미 이백 살이 되었느니라. 도를 닦는데 겉모습이 무슨 상관이랴마는, 내 욕심이 있어 젊어 보이게 한 것이 이런 욕을 보게 만드는구나. 허허, 내 탓이구나, 내 탓이야." 그러자 텁석부리는 약간 기가 질렸다. 사실 쑤앙마이만 해도 벌써 천 년을 넘게 살아왔다는 전설이 퍼져 있었다. 그러니 이 녀석이 정말 쑤앙마이의 제자라면 이백 살이 넘고도 젊은 모습을 간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선인이라면 도력을 한번 보여주시오. 안 그러면 조금도 믿지 못하겠소." 텁석부리는 기가 죽어 존댓말을 썼으나 여전히 불신의 눈초리가 강했다. 치우천은 '흥' 하면서 비웃는다기보다는 한심하다는 투로 살짝 웃었다. "나는 도깨비들말고는 도력을 쓰면 스승님께 혼나니, 비야, 약하나마 네가 해라. 내 도력을 조금 줄 것이니 저걸 뽑아라." 치우천이 가리킨 것은 한아름이나 되어 보이는 커다란 나무였다. 그때 치우천은 주신 말로 하지 않고 지나 말로 치우비에게 말했는데, 그것은 주신 사람이란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대신 치우천은 나무를 가리키며 손을 위로 치켜올려서, 나무를 뽑으라는 뜻을 치우비에게 전달했다. 치우비는 곧 알아듣고 그 나무로 갔다. 뭔가 일이 묘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지만 형이 시키는 것이니 그대로 하려는 것이다. 치우비가 나무로 다가간 순간 치우천은 정말 도력을 부리는 듯, 뒤에서 이상한 손동작을 취하며 혼자 용을 썼다. 그러면서 치우천은 속으로 웃었다. '이렇게 하는 게 그럴듯한가? 아니면 저렇게 해볼까? 에라, 모르겠다 이게 제일 멋져 보이겠다.' 아무튼 치우비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만 나무를 잡고 힘을 있는 대로 써서 간신히 나무를 뽑아 버렸다. 치우비에게야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지나족들은 모두 놀랐다. 정말 저 청년이 도력을 조금 넣어주자 부하가 거대한 나무를 혼자 간단히 뽑아버리지 않는가? 특히 텁석부리는 탄복을 금치 못했다. '정말 대단하구나! 저 덩치 큰 놈이 힘이 세보이긴 하지만 제깟 놈이 형천이나 끽구가 아닌 이상, 저런 나무를 저리 간단히 뽑을 순 없다. 분명 도력을 전해준 것이니 그 도력은 정말 무섭구나! 저 젊은 선인이 자기가 도력을 부리면 부하보다 더 무서울 것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선인의 말을 어겨서는 안되겠구나.' 거기까지 생각한 텁석부리는 급히 치우천에게 머리를 숙였다. "선인을 몰라뵈었습니다. 주겨주십시오." 그러자 삼백 명에 달하는 지나족들이 모두 다 고개를 숙이며 절을 했다. 치우천은 속으로 우스워 죽을 지경이었지만 엄숙히 말했다. "그러지들 마시오. 항상 있는 일인데 뭘 그러시오?" 치우비는 멀뚱히 뒤를 돌아보고는 의아해했다. 그냥 나무를 뽑은 것 가지고 왜 저렇게들 절을 하는지, 그것도 왜 형에게 절을 하는지 지나 말을 전혀 모르는 치우비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도 어서 지나 말을 배워야지, 이거 원 답답한 이리 한두 가지가 아니구나.' 그러자 치우천이 근엄하게 말했다. "저 도깨비들은 무서운 것들이라 그냥 두면 사람을 많이 해칠지 모르오. 그렇다고 다 죽여버리자니 그것도 불쌍하지 않소." 텁석부리는 완전히 속고 있었다. "에, 예. 선인님의 마음은 정말 넓으십니다." "그래서 내가 저놈들을 잡아다가 잘 가르쳐서 저놈들 세상으로 돌려보내려 하오. 내가 그리 해도 되겠소?" "저희는 저 도깨비들을 산 채로 잡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잡아서 저희에게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텁석부리의 말에 치우천은 생각했다. '유망이 내 뒤를 캐려고 도깨비들이라도 잡으라는 것이 분명한데 넘겨줄 수는 없지. 더구나 비 아우가 그들을 좋아하는데.' 치우천은 더욱 엄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알아서 하시구려. 내가 도깨비를 잡는 것은 그들을 잡아 가르치기 위한 것이오. 그런데 당신들에게 넘겨주면 당신들이 도깨비들을 다 죽일 텐데, 그럼 도깨비들이 나를 원망하지 않겠소? 그러나 죽이든 살리든 당신들이 알아서 하시오. 난 못 본 걸로 할 테니." 그 말에 텁석부리는 애원했다. "저 도깨비들은 정말 무섭습니다! 세 명이 도깨비들을 살피러 갔는데... 칼이 튀어나와서 살아 있는 것처럼 꿈툴거리며 세 명을 다 쳐죽이고... 도로 천막으로 들어갔습니다! 정말 선인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우가 말한 늙은 도깨비의 수로군. 저 도깨비들은 정말 대단하긴 하다. 반드시 구해야겠다.' 치우천은 결심을 굳히고는 짐짓 웃으며 말했다. "세 명이 갔으니 칼 하나가 나온 것이오. 당신들 삼백 명이 가면 칼이 백 개나 튀어나올 것이오. 도깨비들 하나당 칼을 열 개까지 부릴 수 있다오. 그래서 내가 이천 명 정도 한꺼번에 덮쳐서 반은 죽어야 저들을 잡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오." 텁석부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쯤 되자 치우천은 더 말도 없이 훌훌 천막으로 걸어갔고 치우비가 그 뒤를 따랐다. 텁석부리와 지나족들은 모두 질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치우비가 거어가면서 물었다. "천 형님, 어떻게 한 거지?" 치우천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어떻게 하긴? 속인 거지. 천막은 네가 열거라. 도깨비들이 너라면 알아볼 것 아니냐?" 그러나 그럴 것도 없이 천막은 치우비가 다가오자 안에서부터 활짝 열렸다. 치우비는 천막 안에서 도깨비들이 불안한 빛으로 있다가 치우비가 오자 반가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어제 도깨비들은 모두 추레하고 흉했는데, 오늘은 어쩐 일로 모두가 번쩍번쩍할 정도로 잘 차려입고 무기를 주렁주렁 매달고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가만 보니 어제 앗수라트 부족의 선물 짐에 무기와 옷이 많았는데, 도깨비들이 그것을 다 꺼내 입고 몸에 차서 무장한 것이었다. 앗수라트 부족의 선물 짐에는 각 부족의 희귀한 장신구나 화려한 가죽, 새털, 무기 등이 많았는데, 도깨비들은 그것을 모조리 풀어서 자신들을 꾸며, 대단히 화려하고도 무시무시해 보였다. 치우비는 웃으며 도깨비들에게 괜찮다고 눈짓을 해보였고 도깨비들은 다시 한 번 감격하여 그중 몇몇은 울먹였다. 그들은 난데없이 군대를 만나 모두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싸울 때까지 싸워보자고 생각하여 마침 선물 짐에 든 것들을 꺼내 있는 대로 무장을 하고 몸치장까지 한 것이다. 죽음을 각오한 싸움에서 화려하게 꾸미는 것은 당시에는 어디에나 있는 풍습이었다. 그런데 주인인 치우비가 나타나니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치우천이 들어와 놀라움을 이기지 못해 탄성을 올렸다. "아우야, 너는 대단한 군대를 거느렸구나. 보기만 해도 굉장하군." 도깨비들은 머리칼이나 수염, 피부색이 다른데다가 있는 대로 엄청난 무장을 했기에 보기만 해도 위세가 대단했다. 치우비는 치우천에게 물었다. "정말 괜찮을까? 이대로 나가도?" "괜찮다. 다만 모두 내 말없이는 절대 움직이지 말고, 무기를 들거나 싸우지 말라고 해라. 안 그러면 자칫 싸움이 난다." 치우비는 다시 한참이나 손짓발짓을 하여 나만 믿고 조용히 따라오라고 했고, 한참 지난 다음에야 도깨비들을 겨우 납득시켰다. 역시 덩치 큰 치우비가 땀을 뻘뻘 흘리며 온갖 손짓발짓하는 모습을 보고 치우천도 웃었다. 치우비가 볼멘 소리로 투덜거렸다. "울라트도 웃었는데, 형도 웃네. 나는 지금 고생하는데." "미안하다. 내 안 웃으마." 준비가 되자 치우천은 늠름하게 천막에서 여유있게 걸어나갔다. 그 때까지 지나족들은 숨을 죽인 채 긴장하여 천막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해했는데, 치우천이 걸어나오자 지나족들이 큰 소리로 환호했다. 그리고 치우비와 함께 열 명의 도깨비가 화려하고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얌전히 나오자 모두들 놀라며 환호했다. 지나족들로서는 저런 무서운 도깨비들과 죽기살기로 싸울 일을 피한 것이니 좋을 수 밖에 없었다. 텁석부리도 감격하여 치우천에게 외쳤다. "선인님!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텁석부리는 급히 부하들에게 명령해서 제일 좋은 말 열두 마리를 끌고 오라고 했다. "선인님,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도깨비들 나라까지는 먼 길일 텐데 이것을 타십시오." 치우천은 이렇게 사람 좋은 텁석부리를 속인 게 좀 미안했으나 도깨비들에게도 말이 필요한 터라 고맙다고 하며 받았다. 그래서 덕담으로 치우천은 텁석부리에게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것이며, 싸움터에서 죽을 고비를 만나도 반드시 한 번은 살아나리라는 예언까지 해주었다. '내 말이 효험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믿고 살면 좋을 것이오. 만약 당신과 싸우게 되어도 한 번은 봐주리다.' 끌려온 말들은 별로 좋은 말들은 아니었고, 그냥 얻어다가 막 기른 말이었다. 치우천은 지나족들의 말타는 재주에 분명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말은 원래 항상 달리게 해야 제대로 길이 드는 법인데, 지나족은 말을 탈 수는 있지만 말타고 싸우거나 잘 달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말들도 하나같이 걷기만 하고 달리지를 못한 듯, 살만 잔뜩 찌고 운동부족으로 몸에 생긱가 없었다. 안장이나 등자가 없는 시절이라 말을 타는 것에는 어려운 순서로 세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첫째는 타고 걷는 것, 둘째는 타고 달리는 것, 셋째가 타고 싸우는 것이었다. 말을 타고 걷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었지만 말을 타고 달리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의 목을 얼싸안거나 갈기를 잡고 달려야 하는데 간단히 되는 일이 아니다. 더욱이 말을 타고 싸우는 것은 양손이나 한 손으로 무기를 들어야 하므로 아예 다리 힘만으로 말의 허리를 조이고 타야 하는데, 이것은 태어날 때부터 훈련하고, 다리 안쪽의 근육을 어릴 때부터 기르기 전에는 죽어도 할 수 없는 재주였다. 그 때문에 당시 말이 흔하여 아무 부족이든 여러 마리가 있었지만 기마병을 지닌 부족은 거의 없었던 거시다. 그래서 지나족은 말을 그다지 쓸데없는 가축으로 여기고 몽골족이나 주신족과 바꾸는 용도 외에는 잘 쓰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귀나 소가 훨씬 중요한 가축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좌우간 그런 말이나마 열두 마리를 얻고 나자 치우천은 누가 또 나타날세라 재빨리 빠져나가기로 했다. 지나족은 여전히 선인님, 선인님 하면서 허리를 굽신거리며 배웅했지만 치우천은 서둘렀다. "어서 가자. 이런 거짓말은 꼬리를 끌면 금방 잡힌다. 안파견 한님. 거짓말을 했지만 피차간에 싸움을 막으려고 한 것이니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치우천은 웃으며 앞장서서 치우비와 도깨비들을 인도했다. 그들은 혹시라도 눈에 띄일까 봐 주신 막사 반대편 광야로 갔다가 한참이나 걸려 반대편으로 빙 돌아서 다시 주신 막사로 돌아왔다. 몇몇 도깨비는 말을 잘 탔지만 몇몇은 부들부들 떨며 말등에 간신히 붙어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돌아갈 때 치우천은 도깨비들에게 말고삐를 끌고 모두 따라오라고 했다. 그러자 치우비가 펄쩍 뛰었다. "도깨비들을 그냥 끌고 가면 어떡해? 사람들이 놀라잖아?" "도깨비들이라지만 내가 보기에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 도깨비들을 맡은 이상, 우리가 돌봐줘야 한다. 비야, 너는 사람들이 놀라며 손가락질하는 게 무섭느냐? 도깨비들이라도 이제는 우리 벗이잖느냐?" "물론 그렇기야 하지. 하지만 내 말은 다른 사람들 눈도 좀 생각하자는 거야." "뭐 어떠냐? 도깨비들 우두머리라고 하면 또 그러라지, 뭐. 남들이 뭐라건 내가 옳으면 되는 거다." "그러나 지나족에서 우리가 한 짓인줄 알게 될 텐데?" "그건 어차피 알게 되어 있는 거다. 하지만 우리가 주신 막사에 있는 한, 지나족들은 우릴 건드릴 수 없어. 또 그들이 뭐라 하겠니? 거짓말을 좀 했지만 약속대로 네가 도깨비를 끌고 간 것을 다 안다. 지나족도 어차피 알게 될 일, 아예 소문 내버리는 게 낫다." 치우천은 딱 잘라 말하고는 결국 도깨비들을 그대로 끌고 주신 막사로 돌아왔다. 치우비의 걱정대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쑥덕거렸다. 그러나 치우천은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착한 도깨비들이며 사람과 다를 바 없으니 잘 대해달라고 하며 다녔다. 그러나 이때부터 치우 형제는 도깨비들의 대장이라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치우천은 잠깐이나마 잠이 깨 있던 울라트와도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울라트라고 했지? 전에 본 적이 있었는데 잊어버리고 있었어. 비의 동생이면 내 동생이기도 하다. 잘 지내자. 울라트." 울라트는 잘생긴 오빠를 또 하나 두게 되자 기뻐서 외쳤다. "천 오빠라고 했죠? 저도 기뻐요" "그래, 울라트. 너에게 부탁 하나 하자." "뭐죠?" "너는 도깨비들 마음도 대강 알 수 있다고 했지? 그러니 도깨비들에게 주신 말을 좀 가르쳐다오 조금이라도 좋다. 지금대로라면 영 불편해서 안 되겠다." 울라트는 깜짝 놀랐다. "도깨비들한테 말을 가르치라고요? 도깨비가 사람 말을 배울 수 있을까요?" "난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단다." "저 도깨비들은 앙가마이 부족에서 몇 달이나 있으면서도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대요." "무서워서 아무도 안 가르쳐줬을 테고, 말도 걸어주지 않았겠지. 안그래?" 치우천이 맑은 음성으로 말하자 울라트는 큰 눈을 껌벅이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건... 그렇겠지만..." "이제 도깨비들의 주인은 네 오라비인 비다. 그러니 걱정 말고 도깨비들을 가르쳐보거라." "난 도깨비들이 안 무서워요." "그래, 착하다. 꼭 부탁한다." "알았어요. 그리고 막사가 너무 지저분하네요. 제가 좀 치웠어요. 괜찮죠?" 그러고 보니 울라트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부지런히 치우 형제의 막사를 정돈해 놓고 있었다. 치우천은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회의가 시작될 시간이 넘어선 것 같았다. 치우천은 치우비와 함께 급히 비렴에게 가자 비렴은 늦었다고 야단을 쳤다. "왜 이리 늦은 게냐? 나 혼자 남아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내 낯에 먹칠을 할 생각이냐?"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럴 것이니 용서해주십시오." "됐다. 무슨 도깨비 이야기로 밖이 소란하던데, 또 너희 형제 짓이냐? 그 때문에 늦었지?" 치우천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고, 비렴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가 가는 곳마다 이상한 일들이 터지니 좋다 할지 나쁘다 할지 모르겠구나. 원 참." "죄송합니다." "뭐, 다 안파견 한님의 뜻이겠지. 그런데 오늘은 너희가 꼭 할 일이 있다. 아느냐?" "무엇입니까?" "어제 회의는 좀 늘어져서, 오늘은 회의 전에 기분을 돋우기 위해 각 부족끼리 시합을 하기로 했느니. 주신의 이름이 걸린 일이니 지면 안 되느니라. 너희를 버리고 갈까도 했지만 치우비의 힘이 필요하여 내 기다린 것이니 실망시키지 말라." 치우비는 어제도 격전을 치른데다가 잠조차 잘 못 잔 상태였지만 씩씩하게 대답했다. "있는 힘을 다하겠습니다." 비렴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급히 형제를 데리고 태산 회의장으로 향했다. 온통 꽃으로 장식된 회의장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형제로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안에는 모든 부족장들이 모여 있고, 모든 부족에서 가장 힘세고 머리좋은 자들이 각 부족장을 따라왔을 것이다. 이미 형천이나 끽구와도 겨루어본 바 있지만 또 다른 누가 있을지도 몰랐다. 회의장의 거대한 문앞에 서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오?" 그것은 바로 회의장의 경비를 맡고 있는 치우우레의 목소리였다. 비렴이 곧바로 외쳤다. "주신의 풍백, 비렴이오. 시합할 젊은이 둘과 함께 좀 늦게 오게 되었소." "알았소." 치우비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생각했다. '두 분은 서로 잘 아실 텐데도 법도를 지키느라 저리 말씀하시는구나' 치우우레는 밤낮으로 회의장과 한웅의 안부를 지키느라 아들들도 만나보지 못했으며, 먼발치에서 보았음에도 공식적인 일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막 회의장의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성을 지르는 회의장 안에 들어설 때, 치우천과 치우비의 뒤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이 녀석들! 천아! 비야! 잘해라!" 두 형제는 그 목소리에 애틋한 아버지의 정을 느끼고는 가슴이 뭉클했다. 곧 두 형제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장대한 회의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시합 통나무로 높게 울타리를 친 태산 회의장은 수천 명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높다랗게 나무로 단을 쌓아 놓았는데, 그 단도 수백 명이 올라설 수 있을 만큼 넓었고, 다시 그 단의 한 가운데에는 또 하나의 키만큼 높은 단이 있었는데, 그 단은 오십 명 정도가 올라설 수 있을 정도의 높이였다. 태산 회의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는 것은 동북아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주신족 한웅의 무리와 지나족의 무리였다.그래서 양편에는 각각 주신족의 상징인 솟대와 지나족의 상징이 높은 막대에 새겨진 채 세워져 있었다. 지나족의 우두머리는 원래 유망이었지만 지금은 헌원으로 바뀌어 있었기에 그 상징도 원래는 소머리가 걸려있던 것이 꿈틀거리는 듯한 훌륭한 뱀의 형상으로 바뀌어 세워져 있었다. 그 바로 밑의 단에는 나름대로 큰 무리를 거느리는 대부족 열 개가 각각 족속을 대표하여 뽑혀 올라서게 되어 있었다. 키탄, 몽골, 마갸르, 타타르, 위구르, 투르크, 훈, 미아우, 그리고 치우천도 처음 보는 두 부족이 올라서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부족장들은 모두 단 아래 모여 있었는데, 이 역시 어느 정도는 부족의 힘과 사람 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단에 가깝게 또는 멀리 자리잡고 있었다. 태산 회의와는 직접 상관은 없지만 멀리서 온 손님들이 단 바로 밑에 자리잡고 있었다. 비렴이 조금 늦게 도착하여 두 젊은이를 거느리고 그 사이를 헤치며 단 위로 올라섰기 때문에 모두의 눈길을 받았다. 치우비는 수천 명의 눈길을 받자 약간 부끄러웠으나 치우천은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단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비렴님이 말씀하신 대로 지나족의 숫자는 정말 많기도 하구나.' 단에 가까이 있는 부족들이 큰 부족인 것은 분명한데, 지나족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이다. 치우 형제들이 새로 사귄 친구들도 이 안에 많이 들어와 있었다. 키탄의 야율쿠리는 아버지인 부족장을 따라 단위에 올라서 있었다. 단 위에 올라서 있는 치우 형제의 친구는 그 하나뿐이었다. 그는 형제와 슬쩍 눈길이 마주치자 씩 웃으며 가슴을 두드려 보였다. 카린의 쑤앙마이의 여인족은 멀리서 온 소님이라 단 가까운 곳에 있었다. 무라와 누루마이는 치우 형제를 보고 살짝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단 위에 올라서자 사와라 한웅이 약간 질책하는 듯한 눈길을 보냈는데, 사와라 한웅만은 커다란 의자에 앉은 채였다. 그 옆에는 병예와 신지울태가 서 있었고 그 주위로 치우비와 같이 훈련을 한 열 사람이 서 있었다. 치우비가 잘 아는 쇠돌이, 부루벼락, 도단이, 스름이 등등 이었지만 이번에 치우천을 데리고 오게 되어 그중 힘센 사울아비 한 명이 빠져 있었다. 맞은편에는 헌원이 군중들을 내려다보며 큰 소리로 시합의 규칙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 뒤에 빈 의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헌원도 한웅처럼 의자가 마련된 듯했다. 그 바로 뒤에는 이미 구면인 선인 적송자와 명석한 이주가 서 있었고, 그 뒤로 비휴, 상망, 끽구, 신도, 울루, 지 등의 십육기인들과 금천이 있었고, 몇몇 힘세 보이는 전사들이 서 있었다. 그중 특히 한 명은 뱀문신을 온몸에 새기고 상체가 마치 공처럼 알통으로 단단히 부풀어오른 장사 같은 자가 눈길을 끌었고, 또 한 사람은 보통 키에 보통 체구였으나 눈매가 가늘고 사람을 쏘는 것 같은 기운이 있어서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들 중 마지막에 놀랍게도 헌원의 막내딸인 공손발이 지루한지 다리를 까딱거리며 서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자 치우비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비렴의 뒤를 따라 치우 형제가 한웅 뒤에서 서자, 우사 병예가 작은 소리로 비렴에게 속삭였다. "시합이 곧 시작될 것이오." "알았습니다." 헌원은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다. "...시합은 부족간에 가진 재주를 뽐내어보고 부족의 이름과 용사의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용사와 영웅의 이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세상 끝까지 모든 부족들이 한데 모여 힘을 겨루는 자리는 앞으로 다시 있기 어려울 것이니, 이때 이름을 날리는 용사는 두고두고 모든 부족의 이야깃거리가 될 것입니다..." 헌원이 말하자 단 아래의 모든 부족들은 '와와' 하면서 환호를 보냈다. 헌원은 계속 시합의 규칙을 이야기했다. "...모든 용사들이 다들 겨루어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여기 모인 부족이 워낙 많아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진 재주들도 아주 많으나 그것을 모조리 다 겨루어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겨루는 시합은 돌던지기, 씨름, 활쏘기, 몽둥이쓰기로 정합니다. 칼이나 도끼를 쓰면 사람들이 많이 다치게 되므로 몽둥이 시합만 겨루도록 하겠습니다. 칼이나 도끼를 잘 쓰는 용사는 아쉽겠지만 그런 용사라면 몽둥이도 잘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웃으며 좋다고 외쳤다. 사와라 한웅도 살짝 웃었다. 치우천과 치우비는 그 사이 단 아래를 살펴서 자신의 벗들이 있는가 살펴보았다. 먼저 미아우 부족장의 딸인 초초룬도 단 아래 저만치 미아우족의 부족들 사이에 섞여 있는 것이 보였다. 특이한 재주를 지닌 아이라서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몽골의 보돈차르족이 멀리에 보였는데 아직 작은 부족이라 단 위에 올라오지 못한 듯했다. 그런데 그들 중간에 치베가 있는 것을 치우비가 발견하고는 약간 놀라워했다. 타타르의 앗수라트, 앙가마이족들도 그렇게 크지 않은 부족이라 단 아래 멀찍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저만치 떨어진 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또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특이한 모습을 한 자들이 있었다. 치우비가 치우천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저 사람들, 도깨비들 중 하나와 모습이 비슷한걸? 도깨비들도 회의를 보러온 것인가?" "그러냐? 나중에 틈을 내서 만나보아야겠구나." 그 도깨비들은 몇 명 되지 않고 회의나 시합에는 관심없이 구경만 하는 듯했는데, 도깨비들 중 나이 많고 지헤로운 듯한 도깨비처럼 흰천을 머리에 감고 얼굴빛도 비슷하게 가무잡잡했던 것이다. 헌원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용사들끼리 겨루면 다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합중에 생긴 일이니 혹 다치는 사람이 나와도 앙갚음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시합이라도 상대방을 죽이는 일은 없어야만 할 것입니다. 상대를 죽이면 진 것으로 할 것이니 용사들은 조심하여 시합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모인 자들 중 거친 사내들은 반대의 소리를 질렀다. 싸움하다가 죽고 죽이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렇게 사정봐줘 가면서 어떻게 진짜 힘을 겨룰 수 있느냐, 상대가 항복하지 않으면 어쩌냐는 것등이었다. 그러나 헌원은 단호했다. "죽는 사람이 나오면 앙갚음을 하게 되고, 그러면 싸움이 커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 태산에서 모인 것은 모든 부족들이 사이좋게 지내고 싸움을 멈추고 사귀자고 하는 것이지, 싸우자고 모인 것이 아닙니다. 죽이지 않고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도 용사의 기술입니다. 만나는 상대마다 다 죽이기만 하는 전사는 무서운 사람일지는 몰라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용사는 못 되지 않겠습니까?" 헌원의 말에 사람들은 다시 '옳다, 옳다'하며 박수를 보냈다. 생각깊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순하기 그지없는 시대였다. "그리고 굳이 겨루기가 힘든 재주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재주들은 따로 하나씩 선을 보이며, 박수를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이 이긴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번 시합에 나간 사람은 다른 시합에는 나가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보다 많은 영웅들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는 것입니다." 이 말에 몇몇은 불만이었지만 생각해보니 그럴 법도 했다. 상을 나눠가져야지, 누군가가 독식하는 것은 좋지 않다 여겨 그것도 사람들은 모두 좋다고 했다. 말이 좋아 대시합이지, 실상은 지나족과 주신족의 대결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부족들에도 뛰어난 용사들이 몇몇 있었지만 단연 으뜸되는 것은 지나조과 주신족이었다. 지나족은 이름난 용사가 많았고 주신 사울아비는 엄격한 훈련으로 유명했다. 어차피 다른 부족 용사들은 그 사이에 끼어 몇 번 이김으로써 이름을 약간 날리는 것에 불과했지, 결과적으로 이기는 부족은 주신족 아니면 지나족일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제일의 용사라는 형천이 지나족에 보이지 않자 주신이 덕을 보았고, 아마도 주신이 이기리라 대부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사이 치우비와 친했던 쇠돌이가 다가와 말했다. "나래 형, 어제는 뭘 했수? 나래 형이 안 보여서 양역이란 사람이 대신 왔었는데, 오늘은 또 양역하고 한 사람이 빠지고 사람이 갈리니... 어떻게 되는 거유?" 그러면서 쇠돌이는 치우천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자 치우천이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처음 보네. 나는 사울아비로 치우천이라 한다네. 여기 나래의 형되네." "그러시우? 형이 더 작으시네?" 쇠돌이가 무심코 말하자 치우비가 나섰다. "내 형님이시니 잘 부탁한다. 그리고 난 이제 이름이 생겼어. 치우비라고 한다." "아, 그래요? 축하하우." 그러면서 사울아비들을 돌아보다가 치우비는 뭔가 좀 껄끄러운 것을 느꼈다. 사람들의 눈초리가 그리 곱지 않았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이라지만 그들은 고된 훈련을 했고, 한웅님을 모시는 자리라고 기대도 많이 했다. 그런데 치우비야 힘도 으뜸이고 사람됨도 좋으니 그렇다 해도, 형이라는 자는 얼굴만 곱지 싸움 하나 할 줄 모르게 가늘게 생겼는데 난데없이 같이 고생하던 사람을 밀어내고 두 번째 날부터 끼어들어 온 것이다. 밀려난 자의 낙담은 입장을 바꾸어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갑자기 내일은 가지 말라고 한다면 기분이 어떻까? 더구나 그날은 모든 부족들이 모여 힘과 재주와 용기를 가리어 용사를 뽑는 날이고, 거기서 이름을 날리면 당장 주신만이 아니라 세상의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물론 치우천이 아주 힘세고 용기있어 보인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래 보이지도 않지 않은가? 그렇기에 그들은 치우천을 탐탁하게 여기지않는 것이다. 그중 부루벼락이라는 자는 아예 노골적으로 살짝 치우천을 비꼬았다. "형씨는 얼굴 잘나 좋겠수." 치우천은 여전히 웃으며 되물었다. "무슨 뜻이오?" "얼굴이 잘난 재주가 있어서 들어온 것 아니오? 신시의 마나님이라도 하나 녹이셨나 보지? 여자들을 녹이는 제일의 용사가 되려고 말이오! 하하핫!" 그 말에 치우천은 담담했는데 오히려 치우비가 무섭게 화를 내려했다. 그러나 부루벼락은 코웃음쳤다. "왜 그러는 거여? 힘을 쓰려면 시합에서 써." 치우비는 정말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한웅님과 ant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들끼리 싸움박질을 할 수도 없는 일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도단이가 조용히 부루벼락을 말리며 나섰다. "그러는 게 아니지. 벼락 형, 큰 스승님들이 공연히 데리고 온 사람은 아닐 테지." 그러면서 도단이가 웃으며 치우천에게 인사를 했다. "치우천이라 하셨지? 난 도단이라 합네다." "반갑소." "아마 좋은 재주가 있어서 시합 날 특별히 오신 것으로 압네다. 어느 시합에 나설 생각이신지?" 치우천은 여전히 담담히 서 있다가 웃으며 말했다. "난 나갈 만한 시합이 없구려." 그 말에 부루벼락이 껄껄 비웃었다. "그래, 그래. 얼굴 시합이 없잖아. 그래도 태산 회의에 참가했었다고 마나님에게는 자랑하겠지?" 치우비가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부루벼락, 너 이따 나 좀 보자." "흥! 네 힘이 세다고 형 역성 드는 거냐?" 그러자 치우천이 손사래를 치며 천천히 말했다. "난 괜히 온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 일은 반드시 하겠습니다." 또 다른 사울아비인 에꾸눈 마파람이 빈정댔다. "대체 뭘 믿고 그러느냐? 네가 돌던지기를 잘하느냐? 활쏘기를 잘하느냐?" "못합니다." "그러면 씨름이나 몽둥이를 잘 쓰느냐?" "못합니다." "그럼 그 잘나신 얼굴밖에 없는데, 네가 하긴 뭘 해!" 그때 병예가 그들을 화난 눈으로 노려보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치우비는 화가 나서 주먹을 볓 번이나 쥐었다 폈다 했지만 별 수 없었다. 그러나 치우천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헌원의 말이 끝나가자 누군가가 외쳤다. "이건 부족끼리 겨룸이오? 아니면 사람들 하나하나씩 겨루는 겨룸이오?" "부족끼리도 누가 위이고 아래인지 이 겨룸으로 정하도록 합시다." "그럽시다!" 아무리 평화로운 회의라고 하지만 그 부족들 사이에는 앙숙과 원한, 감정이 수도 없이 많았다. 대놓고 싸울 수가 없어서 그렇지, 얼굴만 마주 대하면 무조건 싸우는 원한 깊은 사이의 부족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대부분 부족들끼리도 누가 위고 아래인지 정하고 싶어했다. 그러자 헌원이 말했다. "겨루기에서 가장 많이 이긴 부족을 가장 용감한 부족으로 뽑도록 합시다. 용사들은 많지만, 한없이 겨룰 수도 없는 것이니 각 부족은 겨루기별로 세 명씩의 용사를 내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 이상 이기면 이기는 것으로 합시다. 모든 부족이 열다섯 명씩만 들어왔으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기는 사람에게는 우리 부족들 모두가 가장 좋은 물건을 모아 상을 주기로 하였습니다만, 용사들을 아끼는 마음에, 그 부족이 설령 지더라도 겨루기에서 이긴 용사들은 모두 다 상을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 상은 대주신의 한웅님과 제가 내놓겠습니다." "상은 얼마나 되오?" 몇몇 사람들이 떠들자 헌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한 번이라도 이긴 용사는 주신 한웅님이 내리신 구리칼과 제가 드리는 소 한 마리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상은 여러 번 이기더라도 이길 때마다 다 받게 되며, 가장 잘 싸운 용사들은 각각 큰 선물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주신의 구리솥과 구리 무기, 거울. 지나족이 만든 좋은 비단, 몽골족의 좋은 말, 조개껍질, 보물구슬, 소와 양, 나귀와 예쁜 여인들까지 있습니다!" 그 이야기에 모두다 '와' 하며 함성을 질렀다. 최고의 보물은 역시 구리솥이었다. 구리는 아주 귀해 구리 무기 하나만 가져도 돌 무기를 든 자는 두렵지 않을 정도였으며, 자신과 모든 것의 모습이 비쳐보이는 구리거울은 귀신을 쫓는 것으로 알려진 귀한 물건이었다. 후대에서처럼 화장을 하는데 쓰였다기보다는 주술적인 의미가 훨씬 강했다. 그러나 구리솥은 구리 무기 수십 개나 구리거울 수백 개를 만들 정도의 구리를 모아야 만들 수 있고, 구리솥은 불을 아무리 때도 토기처럼 갈라지지도 않고 물이 새지도 않으니 당시로서는 정말 귀한 보물이었다. 구리솥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 수백 살 넘게 오래오래 산다는 이야기가 보편화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비단은 당시 지나족이 발견하여 만들기 시작한 옷감으로, 풀이나 나무뿌리를 두들겨 옷을 만들거나 거친 가죽으로 옷을 짓던 당시로서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 부드럽고 고운 감촉은, 한번 만져라도 본 사람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었다. 당시 아직 양잠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자연산 누에가 고운 실을 토해 고치를 트는 것을 본 지나족 사람들이 그 실을 써보았는데 대단히 가늘고 고우며 질겨서 그것을 모아 비단을 만든 것이다. 물론 후대의 비단만큼 곱지는 않았지만 당시로서는 그것만으로도 하늘의 옷감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더구나 벌레를 시켜 만드는 옷감이라 하여 주술로 만드는 옷감이라는 소문도 돌았고, 벌레라 하여 거미를 잡아 실을 뽑아 옷감을 만드는 데 평생을 보낸 자가 나올 정도였다. 보통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거미줄로 만든 것으로 알았다. 누에라는 그 벌레가 단 한 번, 고치를 틀 때 뽑는 실이 그 실이라는 것은 생각도 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 비단은 단연 지나족의 특산품이었고 비단 제조법은 주신의 구리제법 못지않은 비밀이었다.(비단을 만든 시조는 황제, 즉 공손헌원이라고 전해진다.) 그리고 내륙지방의 부족이 대부분이었기에 고운 조개껍질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장신구 재료가 되는 귀중한 것이었다. 물론 강이나 시내에는 민물조개도 있었으니, 아무 조개껍질이나 다 귀한 것은 아니었고, 특히 전복 종류의 아롱아롱한 빛이 도는 조개류의 껍질이 보석만큼이나 귀하게 여겨졌으며 후에 자개의 모태가 되었다. 그런 보물들을 걸고, 더구나 엄청난 명예가 걸렸으니 전사들이 모두 들뜬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헌원은 시합을 곧 시작하기 위해 지나족 주술사가 점을 쳐서 제비를 뽑고 겨룰 순서를 정하겠다고 한뒤 말을 맺었다. 그러자 지나족의 주수사가 나와 불을 피워 제사를 올리면서 춤을 추고 점을 쳤다. 그 사이 헌원은 사와라 한웅에게 다가와 정중히 말했다. "어제의 이야기를 계속하여야겠습니다. 시합도 중요하긴 합니다만..." "좋소이다. 시합도 중요하지만 주신과 지나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급하오." 헌원과 사와라 한웅은 몇 명만 거느리고 아무래도 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았다. 유망과 그를 따르는 지나족은 회의에 모조리 나오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대책과 지나와 주신 간의 영토나 그 주변에 낀 부족들의 문제를 논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 삼사가 한웅 뒤에 모인 열두 젊은이들에게 살짝 손짓을 하여 조금 뒤로 물러서서 그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먼저 최고 연장자인 병예가 입을 열었다. "어제 회의가 한웅님과 헌원 사이에 질질 끌어지자 다른 부족들이 몹시 지루해하기에 오늘 시합을 벌이게 된 것이니라. 우리 삼사는 한웅님을 모시고 지나족과 담판을 지어야 하느니라. 그러나 시합도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느니. 너희는 고르고 골라 뽑힌 주신의 정예이니 져서는 안 된다. 반드시 지나족을 이겨 주신의 명예를 높여야 한다." 그 뒤를 이어 비렴이 말했다. "원래 이런 시합이 벌어지리라 생각했으나 우리 삼사가 나서면 문제없다고 믿어서 젊은 너희를 모은 것인데, 이렇게 헌원이 우리를 시합에 나갈 수 없게 만드는구나. 지나족이 우리를 이기려고 꾀를 쓴 것이 분명하니, 너희는 지지말고 반드시 이기도록 해라." 그러자 그중 도단이가 끼어들었다. "시합이 네 가지인데, 돌던지기, 씨름, 활쏘기, 몽둥이쓰기지요? 활쏘기는 몽골족도 잘하지만 그래도 우리를 이기기 힘들것입니다. 말달리면서 활쏘는 재주는 몽골족이 빼어나지만, 서서 쏘는 활은 주신을 따를 부족이 없습니다. 돌던지기는 그야말로 아무 부족도 우리를 따를 수 없을 것입니다." 도단이의 자신있는 말에 비렴이 근엄하게 말했다. "그러나 씨름과 몽둥이쓰기는 꼭 우리가 이긴다고 볼 수 없다. 어차피 다른 부족은 아무리 잘해봐야 한 명의 용사도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지나족은 씨름과 몽둥이에 아주 강한, 힘센 역사가 많다. 형천이 나오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이리다만 끽구는 형천에도 지지 않을 만큼 대단한 장사이다." 치우비는 끽구의 힘을 전에 본 일이 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끽구를 이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아무래도 그냥 씨름이라면 힘에서는 조금 밀린다고 보는 편이 맞는 듯했다. 비렴이 넌지시 치우비에게 물었다. "비야, 네가 끽구를 이길 수 있겠느냐?" 그 물음에 치우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비렴은 안타까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다. 네가 그렇다면 끽구를 당할 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몽둥이는 지나족의 금천의 기술이 기가 막히다. 그를 당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쇠돌이가 한마디 거들었다. "도끼라면 몰라도 칼이라면 금천이 세상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고, 몽둥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금천이 첫 번째라더군요." "유망의 부하였던 금천 말입니까?" 치우천이 묻자 비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주신 사울아비는 사실 몽둥이를 써서 싸우지 않는다. 급할 때는 마구잡이로 들고 나설 수도 있으나 항상 칼이나 도끼를 들기 때문에 몽둥이 시합은 전적으로 지나족을 위한 것이지." "그런데 왜 몽둥이 시합을 택하도록 그냥 두었습니까?" 난데없이 약간 앙칼진 목소리로 스름이가 묻자 비렴은 한숨을 쉬었다. "돌던지기도 우리가 으뜸 아니겠느냐? 모두 우리 좋은 것만 할 수 있겠느냐? 더구나 헌원이 칼과 도끼에 사람이 상하지 않게 한다는 핑계를 대니 막을 수 없었지." 그러면서 비렴은 치우비에게 말했다. "비야, 네 책임이 막중하다. 우리 주신은 활쏘기와 돌던지기는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설혹 몽골족이 활쏘기를 잘한다 해도 우리가 지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지나족은 일단 몽둥이 시합에서 이긴 것이나 다름없으니, 씨름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그 씨름에서 지나족이 이기면 그들도 두 번, 우리도 두 번 이긴 것이니 지나족이 주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더구나 지나족은 유망이 물러가서 형천이나 축융 같은 무서운 자들이 빠져 있다. 그런데 주신과 비긴다면 모두가 다 지나족이 한 수 위라고 보게 되는 것이야." 모두 다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족은 이제 막 무서운 기세로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 회의 시합에서 지나족이, 이름이 사방에 알려진 주신 사울아비들을 물리치고 같이 올라서기라도 한다면, 지나족의 이름을 크게 떨치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천하 제일 용사로 알려진 형천은 유망 문제로 나오지도 않은 것이다. "그렇군요." "만에 하나 몽골족이 우리와 활쏘기에서 이긴다면 우리가 오히려 지나족에게 지고 만다. 몽골족은 근래 크게 발전했다고 한다." 치우천과 치우비는 둘 다 치베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순수하게 활쏘는 실력으로만 본다면 치우비도 치베를 당할 수 없었다. "그러니 씨름은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이다. 다른 부족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씨름..." 치우천이 중얼거리다가 물었다. "저쪽은 누가 나설 것 같습니까?" "보아하니 끽구와 알유, 이부가 나설 것 같다." "알유와 이부는 누구입니까?" "알유는 저기 보이는 알통이 불거진 남자다. 지나 뱀족의 남자로 기운이 대단하고 용맹하다 소문났지만, 끽구보다는 아랫니다. 쇠돌이가 힘을 다해준다면 누가 이길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쇠돌이도 수천 년 묵은 산삼을 먹은 장사이니 좋은 적수가 될 것이다." 쇠돌이가 수천 년 묵은 산삼을 먹은 장사라는 것은 모두가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 말에 쇠돌이는 멋쩍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누가 알고 먹었나요, 뭐. 헤헤..." 쇠돌이의 말을 뒤로하고 비렴이 계속 말했다. "그리고 이부는 저기 눈이 가는, 기분 나쁘게 생긴 남자다. 힘은 별로지만 기술이 대단하여 타타르족 보챠두와 맞먹는다고 들었다. 부루벼락도 씨름에는 능숙하니, 상대해볼 만할 것이다." 그러자 신지울태가 걱정스레 말했다. "그러고 나면 몽둥이 싸움에는 나갈 사람조차 모자라는 것이야. 그것은 아예 넘겨버리도록 해야 할 것이야." "그래야 할까요?" 비렴이 아쉬운 듯 묻자 신지울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셔야 할 것입니다. 씨름의 세 사람은 정해졌지 않습니까? 그리고 돌던지기는 도단이가 제일이고 날램이와 질쾌가 잘하니 그 셋을 내보내야 할 것인지요?" 장님박수인 도단이가 돌던지기의 명수라는 말에 치우천은 깜짝 놀라며 생각했다. '도단이는 눈이 보이지 않는데도 돌던지기에 능하다니,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역시 주신에 뛰어난 사람들은 많아.' 비렴이 신지울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신지울태가 다시 꼽았다. "그리고 활쏘기는 저 아이, 마파람이 제일이고, 나머지 사울아비도 다 그에 못지 않으니 누굴 뽑아도 될 것이에요. 허나..." 신지울태는 스름이를 가리켰다. "사람은 열둘뿐이고 나가야 할 사람도 열둘인 것이에요. 그런데 저 아이는 여자고 주술사일 뿐인데 어찌 몽둥이 싸움을 시킬 것인가요?" 그 말에 스름이가 외쳤다. "할 수 있습니다! 저 때문에 주신이 시합을 포기하다뇨!" 신지울태는 걱정스러운 듯 쯧쯧거렸다. "네가 어찌 험한 전사들과 몽둥이질을 하겠다는 것이야?" 스름이는 그러나 기세 좋게 말했다. "제가 죽을 힘을 다하겠습니다! 전 죽어도 괜찮습니다! 머리가 깨져도 졌다고 하지 않고 싸울 것입니다!" 그러자 부루벼락이 치우천에게 살짝 빈정거렸다. "이봐. 스름이마저도 저러는데, 네가 이겨줘야지. 그 잘난 얼굴로 금천을 뭉개보라구, 응?" 그때 병예가 스름이를 보며 엄숙하게 말했다. "스름아, 네 뜻은 장하다만 너희는 죽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니라. 시합도 중요하다만 너희는 한웅님을 잘 모시어 신시까지 가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느니라. 몸을 함부로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야. 몽둥이질은 너희가 배운 적도 없는 일, 헛되이 망신을 당하거나 다칠 것이라면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하느니." 스름이는 곧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스름이가 용감하게 이야기하자 모든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놀라며, 음침한 줄만 알았던 스름이를 다시 보게 되었다. 저마다 더 분발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비렴이 당부했다. "그러니 모두들 힘을 내라. 특히 씨름에 나갈 아이들은 힘을 내어 반드시 이기도록 하라. 상대가 만만치 않으니 조심들하고! 지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모든 젊은이들은 자신있게 '네' 하며 응답했다. 그때 치우천이 나섰다. "씨름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이라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새 큰 스승은 모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뿐만 아니라 열한 명의 모든 젊은이들도 크게 놀랐다. 치우비가 비록 당할 자 없는 장사이기는 하나 끽구에게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다. 쇠돌이도 강하지만 알유를 당해낸다는 보장은 없었다. 부루벼락도 마찬가지로 이부를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다. 모두다 비슷비슷한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 "저는 싸움을 못합니다만 제게 맡겨주소서. 그러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자 병예가 엄숙하게 말했다. "이건 중요한 일이다. 감당해낼 수 있느냐?" 단지 신지울태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온화하게 말했다. "저 아이는 비록 몸은 약하나, 능히 그럴 꾀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렴님, 당신이 늦었는데도 굳이 저 아이를 데리고 온 것이 아니십니까?" "일단 들어보자. 어떻게 하려느냐?" 비렴이 묻자 치우천이 차분하게 말했다. "알려지면 아니 되니 말을 낮추겠습니다." "그래. 해보아라." 그러자 치우천이 조용히 말했다. "세 번을 다 이기지 않아도 두 번을 이기면 이기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물론이다." "그럼 한 번을 내주고, 두 번을 이깁니다. 간단한 것입니다." "그게 네 말처럼 되겠느냐?" 병예가 답답해하자 치우천이 확신하듯 말했다. "치우비가 끽구를 반드시 이긴다고는 볼 수 없지만, 알유는 어떻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비렴과 신지울태는 '아' 하는 탄성을 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아직 눈치를 못채자 치우천은 계속 이야기했다. "마찬가지로 쇠돌이는 알유와 비슷비슷합니다. 하지만 이부라면 어떻겠습니까?" 이제는 치우비도 눈치채고 도단이와 병예도 고개를 끄덕였다. 치우천이 계속 이야기했다. "부루벼락 형에게는 미안합니다만 부루벼락 형이 끽구와 겨루는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부루벼락 형은 이기기 힘들겠지요. 허나 치우비와 쇠돌이가 각각 이겨주면 우리가 이기는 것입니다! 거의 틀림없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간단한 꾀였지만 정말 누가 들어도 틀림없을 그런 수였다.(이 방법은 지금 생각하면 간단한 것이라 여길지 모르나, 고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책략이었다. 이 시대로부터 다시 2천여년 후 전국시대 때 '손자병법'의 저자 손빈은 이 방법으로 장군 전기를 마차 경주 시합에 이기게 하여 최초로 인정받고 두각을 나타냈다는 고사가 있다. 기타 치우천의 꾀나 지모도 지금 눈으로 보면 별것 아니라 여길지 몰라도 당시에는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모두가 그저 열심히 적수와 겨루어 이긴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지, 이런 꾀는 내지 못했던 것이다. 질 것이 뻔한 부루벼락까지도 감탄하며 말했다. "이거 미안하네. 내 절을 받게나!" 부루벼락이 갑자기 큰 절을 했다.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특히 치우천은 더 놀라 당황했다. "왜 이러십니까?" "내 잘못했네. 나는 자네를 안 좋게 보고 자네를 비웃은데다가, 자칫 주신 사람들끼리 뭉쳐야 할 때 빈정거리기나 해서 기를 꺽을 뻔했네. 나는 얼마든지 져도 좋으니, 자네가 우리를 잘 다스려서 주신이 이기도록 만들어주게!" 부루벼락의 솔직하고도 곧은 마음씨에 다들 감탄했다. 사실 삼사가 가리고 가려서 뽑은 열두 젊은이들은 모두다 범상한 인물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조심성 많은 병예가 나섰다. "하지만 끽구, 알유, 이부가 어떤 순서로 나올지 모르는 일 아닌가? 꼭 그렇게 맞붙게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제가 순서를 정할 수 있어야 하고, 모두가 따라주어야 합니다. 돌아가는 것을 보아 제가 반드시 그렇게 붙을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끽구는 전에 본 일이 있습니다만 기운이 세지만 꾀가 장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제가 나서서 말 몇 마디만 하면 반드시 마음먹은 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치우천은 활쏘기를 맡을 마파람과 거서기와 삼이라는 두 사울아비에게도 말했다. "몽골족은 누가 나올지 아직 모르지만, 만약 치베라는 활쏘는 이가 나오면 이번과 같은 방법을 써야 합니다. 치베는 제 친구입니다만 이런 승부에서 봐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치베는 활을 무섭도록 잘 쏘는 자이니, 이 방법으로 이겨내야만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삼사는 몹시 기뻐했는데, 그때 한웅이 불러서 삼사는 치우천에게 알아서 하라는 말만 남기고 급히 자리를 떴다. 보니까 헌원은 머리 좋다는 이주와 지, 그리고 적송자를 데리고 저쪽으로 가서 한웅과 이야기할 모양이었고, 신도와 울루가 우뚝 서서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았다. 공손발은 아마 이번에도 떼를 써서 들어온 듯, 까닥까닥 재미있는 듯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데, 상망과 비휴가 그 뒤를 빈틈없이 좇고 있었다. 그리고 지나족은 아예 두 시합만 반드시 이기겠다는 듯 여섯 명만 내려가고 있었다. 물론 끽구와 알유, 이부 및 금천이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보나마나 몽둥이질에 아주 능한 전사들일 것이다. 허나 치우비는 발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거기서 눈을 떼지 못했고, 발은 치우비의 시선을 느낀 것 같았는데도 본척만척하는 것 같았다. 좌우간 삼사드리 자리를 뜨자 애꾸눈인 마파람은 치우천의 어깨를 두드리며 껄껄 웃었다. "잘 알았네! 자네가 좋은 수를 내었으니 반드시 이기도록 하세. 아니, 이런 꾀를 알고도 못 이긴다면 내 사울아비도 아니지!" 스름이도 좋아서 한마디 끼웠다. "치우천님. 나도 좀 나가게 해줄 수 없나요? 아무리 그래도 몽둥이질도 이길 꾀가 없을까요?" 그러자 치우천은 유쾌하게 웃었다. "내 꾀는 그렇게 장하지 못해서, 갑자기 몽둥이질을 잘하게 할 수는 없다오. 그리고 몽둥이겨룸에 우리가 나가면 사람이 모자라 나도 나가야 하는데, 머리를 맞으면 그 안에 든 꾀도 박살이 날 테니 큰일아니겠소? 나는 몽둥이질에 스름이님, 그대의 한 팔조차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오." 치우천은 농담을 잘해 모두가 긴장을 풀고 웃었다. 잠시 후 치우천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제가 꾀를 조금은 냈습니다만 실제 겨루는 분들은 여러분들입니다. 다들 기운내서 잘 싸워주셔야 합니다." 아홉 명의 출전자들은 용기백배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치우천은 스름이와 또 한 명, 빠지게 된 부달이라는 사울아비에게 말했다. "우리도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부족의 겨루기를 살펴서,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지, 미리미리 알아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린 시합에 나가지 못하지만, 이렇게 시합을 도울 수는 있을 것입니다." 스름이는 치우천의 말에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음침한 얼굴에 전에 없이 미소까지 활짝 지었다. 사울아비 부달도 시합에 못 나가 좀 아쉬운 기색이었지만, 그 말에 이내 힘을 내어 부지런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 부달이란 사울아비는 사실 모든 것에 재주가 있었는데, 재주가 많다보니 특별히 뛰어난 것이 없어서 시합에 못 나간 것이다. 그러나 똑똑하고 눈치도 빠른데다 여러 가지를 다 할 줄 알았으므로 다른 시합을 보고 평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가 나갈 순서가 될 때까지 한데 모여 구경을 했다. 치우비는 자꾸 단 위를 곁눈질을 했으나 발은 어느새 단을 내려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지나 주술사가 부족들의 순서를 정했다. 변변한 기록 수단도, 글자도 없는 때에 삼백여 개에 이르는 부족들 이름을 외우고 순서를 정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주술사는 놀라운 기억력으로 하나하나 부족들 이름을 불러서 겨루는 순서를 정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주술사라기보다는 머리좋은 학자에 가까울 것이지만 당시는 모조리 주술사라 불리고 있었다. 겨루는 순서는 역시 많은 사람이 예상했던 대로, 주신족과 지나족은 가장 멀리 떼어놓아서 최후에 가장 큰 두 부족이 붙는 볼거리를 만들도록 짜여져 있었다. 각 시합은 따로따로 진행이 되었는데 제일 먼저 돌던지기 시합이 다 끝난 다음 몽둥이질 시합, 그 다음이 활쏘기, 마지막이 씨름이었다. 사실 돌던지기나 몽둥이질은 주신과 지나의 독무대일 것이므로 처음으로 하고, 승부가 재미있을 시합은 뒤로 돌린 것이다. 돌던지기는 별문제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지나족은 아예 나가지도 않았으며 주신족의 돌던지는 솜씨를 당할 부족은 별로 없었다. 중간에 겨룬 부족들 중에 간혹 가다 한 명씩 잘 던지는 자가 있었지만 주신 솜씨를 이기지 못했다. 그런데 마지막 결승전에 나온 마갸르족에 뛰어난 두 용사가 있어서 재미있는 승부가 되었다. 주신의 날램이가 먼저 한 번을 이겼지만, 마갸르족의 용사가 두 번째 시합에서 아슬아슬하게 주신 질쾌보다 더 돌을 잘 던졌다. 최후로 나선 마갸르 용사는 먼저 나온 용사의 아버지였는데, 마갸르 족에서는 대단히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상대로 나온 도단이는 눈먼 장님 아닌가!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의아해했는데 도단이는 기이할 정도로 놀라운 돌던지는 솜씨를 보여서 아슬아슬하게 그 용사를 이겼다. 마갸르 용사는 실로 놀랐다는 듯 도단이를 치켜세워서 사람들의 박수를 함께 받았다. 주신은 간단히 첫 번째 종목인 돌던지기에서 이겼다. 부자 용사가 나온 마갸르족이 이등을 했고 다른 부족들이 차례대로 상을 받았다. 으뜸가는 돌던지기 용사는 장님이면서 놀라운 솜씨를 보인 도단이가 뽑혔다. 그 다음 몽둥이질에서 금천은 실로 놀라운 실력을 발휘했다. 그가 휘두르는 몽둥이는 눈에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의외로 키탄족의 야율쿠리가 씨름 대신 몽둥이질에 나가서 금천과 붙었는데, 야율쿠리는 잘 막아내기는 했으나 거의 공격은 해보지 못하고 결국은 지쳐서 금천에게 맞아 떨어졌다. 구경하던 치우비가 야율쿠리에게 가서 물었다. "야율쿠리! 너는 왜 잘하는 씨름은 제쳐두고 몽둥이질에 나섰느냐?" 그러자 야율쿠리는 얻어맞아 혹이 난 머리를 문지르며 웃었다. "나래! 네 녀석이 씨름에 나갈 게 뻔한데 내가 씨름에 왜 나가느냐? 그러나저러나 금천 저 녀석, 몽둥이질을 저리도 잘할 줄은 몰랐다. 제기랄! 차라리 씨름에 나갈 걸 그랬나?" 결국 지나족이 몽둥이질에서 우승을 했다. 물론 최고의 용사는 금천이었고 야율쿠리는 세 번째로 뽑혔다. 두 번째 용사는 결승전에서 금천과 맞붙은, 몽둥이라기보다는 거의 통나무에 가까운, 거대한 막대기를 휘두르던 투르크의 알한이라는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전사였는데, 그는 금천과의 대결에도 별로 밀리지 않고 큰 몽둥이를 이용하여 버텼다. 키도 별로 크지 않고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긴 그는 힘과 기술이 모두 대단했다. 몽골족 활기술이 주신에 그리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투르크의 몽둥이 기술도 유명하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금천은 그의 큰 몽둥이 때문에 의외로 고전하다가 그제껏 한 번도 보이지 않은 기술을 썼다. 몽둥이를 휘둘러서 그의 더 큰 몽둥이를 꺾어버린 것인데, 그런 수법으로 알한은 애석하게 금천에게 패했다. 도단이는 그 말을 듣고 놀랐다. "그건 기를 무기에 넣는 것이다. 안 그러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치우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금천이 아주 빠르게 몽둥이를 휘둘렀다면 더 굵은 몽둥이를 꺾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금천은 그럴 정도로 빠르게 몽둥이를 휘두르지 않았고, 오히려 천천히 휘둘렀다. 그럼에도 알한의 몽둥이는 대번 두 동강났고, 알한은 몽둥이가 부러진 것보다도 그런 기술에 놀라 손이 어지러워지다가 패한 것이다. 도단이가 다시 말했다. "난 비렴님이 그런 기술을 쓰는 것을 본 것말고는 아무도 그런 것은 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주신에서도 비밀인 기술을 지나족인 금천이 어떻게..." 그때 단군인 질쾌가 나섰다. "금천의 할아버지는 주신 사람이었어." 그 말에 다들 놀랐다. "정말?" 그러자 질쾌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금천의 집과 우리 집은 원수야. 나는 어릴 적부터 이야기를 들었어. 이제... 나는 단군이 되었으니 싸울 수 없겠지만..." 질쾌는 분한 듯 말끝을 흐렸다. 그때 치우비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멍청이! 너도 시합에 나가니?" 바로 공손발의 목소리였다. 치우비는 즉시 몸을 돌려 발에게 달려갔다. 여느때와 같이 발은 상망과 비휴가 양쪽에서 지키고 있었는데, 장난기 가득한 반짝거리는 눈과 귀여운 용모는 여전했다. 발은 귀한 흰 비단을 망토처럼 둘러쓰고 있어서 무척 환하고 빛나 보이기까지 했다. "멍청이가 세긴 센 모양이네. 시합에도 나가고..." 치우비는 반가워서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잘 있었어?" 그러자 발이 갑자기 셀쭉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솔직히 말해. 그 호랑이 가죽, 왜 보냈어?" 치우비는 그 말에 약간 당황했다. "아... 그거. 그냥... 그냥 선물이야." "너, 자랑하려고 보낸 거지? 그렇지?" 발이 짓궂게 다그쳐도 치우비는 마냥 웃기만 했다. "솔직하게 말해. 상망 아저씨가 그러는데 그건 아주 귀한 거래. 호랑이 가죽이야 흔하지만, 그 호랑이 가죽에는 상처가 하나도 없어서 아주 귀한 거라던데?" 치우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되받았다. "별거 아냐. 자랑하려고 그런 건 아니라구." "솔직히 이야기해. 그거 네가 잡은 거 맞아?" 치우비는 자랑하고 싶지 않아 우물거렸다. "음... 맞아."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말야, 너, 물에 빠져 죽은 호랑일 건진거지? 그치?" 공손발은 일부러 짓궂게 말했다. 사실 상망과 비휴는 이미 그 가죽을 보고는, 이 호랑이는 누군가가 단숨에 목을 꺽어서 죽인 것이 분명하며, 지치거나 늙어 죽어가는 것도 아니고 아주 힘있고 생기있는 상태에서 바로 순식간에 죽사한 것이라는 설명을 해준 바 있었다. 그 때문에 가죽에 생기가 그대로 남아 최고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래가 직접 잡은 것이 분명하니, 나래는 정말 힘과 용기가 대단하다고 상망이 떠든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발은 솔직히 싫은 기분은 아니었으며 속으로는 고마워했다. 그러나 성격이 좀 비틀어져서인지 이상하게 나래만 만나면 좋은 말이 나오지 않고, 비비 꼬기만 하는 것이다. 나래, 즉 치우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호랑이는 물을 싫어해서 물가에 가지도 않아. 그리고 헤엄도 칠 줄 알아. 헤엄치는 건 싫어하지만..." "네가 어떻게 알아? 너 호랑이였어?" 치우비는 '하하' 웃었다. "호랑이 사냥꾼이면 다 아는 이야기야." "그래, 나는 모른다. 멍청이가 그거 하나 가지고 잘난 척은? 너 바느질 할 줄 알아?" "모르지." "그러면 비겼어. 그러면 너 그림 잘 그려?" "그림?" "그래, 그림 말야." "그려본 적 없다." "그래? 그러니 넌 벌써 나보다 못하잖아. 지난번 회의 때 하늘을 나는 뱀 봤지? 그건 내가 사람들 시켜서 만든 거라구!" 발이 한껏 뽐냈으나 치우비는 우물거렸다. "못 봤는데.." 사실 그때 치우비는 형을 구하러 지나 막사에 숨어 들어갔다가 동굴에 숨어있었으니 못 본 것이 사실이었다. 그 말에 발이 버럭 화를 냈다. "흥! 그래! 잘났어! 볼 만한 게 아니었다 이거지? 이 멍청이가!" 치우비는 솔직하게 말한 것이 발의 심사를 건드리자 당황해하며 쩔쩔매었다. "아냐, 난 그때 아주 바쁜 일이 있었다구. 정말 못 봤어." 그러자 상망이 치우비가 안되어 보였던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가씨, 저 녀석은 그때 정말 바빴어요. 회의 시작 때 내가 만난 적 있답니다. 이 할아범도 그때 바빠서 곁에 없었죠? 저놈이 정말 바빠서 못 본 거 맞아요." 그때 상망은 지와 함께 지나 막사 안에서 망보는 전사들을 따돌려주었으니 치우비의 사정을 잘 알던 터였다. 그러자 발이 상망에게 말했다. "나한테 호랑이 가죽을 주면서, 왜 내가 애써 만든 건 보지도 않느냔 말야! 할아범! 화나, 안 나?" "아이구, 물론 화가 나겠지요. 그러나 그게 아니랍니다. 저 녀석은 그냥 사울아비예요. 아가씨처럼 높은 분이 아니라서, 위에서 시키면 그대로 해야만 한다는 말씀입죠. 그러니 그건 저 녀석 탓할 일이 아니라구요." 금세 기분이 풀린 듯 발이 치우비에게 물었다. "정말이야?" 치우비는 상망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낸 뒤 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발은 조금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나중에 꼭 구경하러 와. 내가 그걸 만드느라 사람들하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아직도 있으면 꼭 보러갈게." 순간 발은 자기가 속마음을 내보인 것 같아 갑자기 화가 났다. "꼭 내가 말 안 하면 안 보러 온다는 뜻이야? 흥!" 치우비가 얼른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냐, 아냐. 정말 보러가도 되는거야? 하지만 지나 막사는 들어갈 수가 없다구..." "그것만 보러오는 건데 누가 뭐라겠어? 근데 그것만 보고 나가야 돼! 난 바쁘거든!" 발이 억지를 쓰자 치우비가 사람 좋게 웃었다. "그래? 그러면 그것만 보고 나갈게." 갑자기 발이 치우비의 다리를 힘껏 걷어찼다. 퍽 소리가 나긴 했지만 치우비의 다리는 돌기둥 같아서 별로 아프지 않았다. 아프기는커녕 치우비는 지금 발이 몇 대 더 걷어차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이 멍청아! 멍청이멍청이멍청이!" "내가 차놓고 왜 나를 욕하는 거야?" "그래서 싫다 이거야? 아파?" 얼른 치우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마음대로 해. 그런데 내 이름 좀 불러주면 안 될까?" "너 나래잖아? 나래 멍청이." 그러자치우비가 조금 엄숙하게 말했다. "나는 이제 치우비라고 불러. 이름을 받았다구." 한웅님 앞에서 직접 고한 이름이니 이때는 치우비도 엄숙해졌다. 그러나 발은 '흥' 하고 쌀쌀맞게 비웃을 뿐이었다. "치우비? 내가 보기엔 그냥 멍청이야!" "관두자, 관둬. 그래, 너 좋을 대로 불러." 치우비는 웃음을 거두고 발이 떠들건 말건 조용히 발의 빛나는 듯한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치우비는 이상하게 발에게는 화도 나지 않았다. 굳이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치우비는 원래 예감이 남달랐다. 발이 악의가 있거나 정말 트집을 잡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도 모르게 느끼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것을 곰곰이 생각하기에 치우비는 여자에게만은 너무 부끄럼이 많았고, 무슨 짓을 해도 귀엽게만 보이는 이 아가씨에게 뭐라 이야기할 정도로 주변머리가 갖추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치우비가 잠시 말이 없자 발은 치우비가 화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치우비가 싫은 것은 아닌데 좀 너무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발은 넌지시 물었다. "비야, 화났어?" 별안간 치우비가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 "뭐가?" "이제야 내 이름을 부러주는군. 고마워." "칫! 속으로는 멍청이라고 했어." 발은 치우비가 화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자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딱딱한 아버지와 믿음직하지만 잔소리만 늘어놓는 상망, 죽은 사람처럼 말 한마디 없이 할 일만 하는 비휴하는 또 달랐다. 아무리 투정을 부리고 마음대로 해도 이 덩치 큰 녀석은 피하지 않고 다 받아 주고 '허허' 웃어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발은 여전히 쏘는 듯 말했다. "너 시합에 나가니?" "응" "무슨 시합?" "씨름." "씨름? 그럼 너 끽구 아저씨랑 붙겠네?" "글세..." "네가 제일 세니 당연히 끽구 아저씨랑 할 거 아냐? 그러면..." 말하다가 발은 아차 했다. 말로는 멍청이 멍청이 하면서 속으로는 치우비가 사실 찾아보기 힘든 장사라는 것을 인정한 꼴이 된 것 아닌가? 발은 즉시 말을 돌렸다. "주신 사람들은 다 힘이 없으니 네가 그나마 나가는 걸 테지만." "허허." 치우비가 웃자 발이 다시 쏘아붙였다. "뭐가 허허야! 이번에 끽구 아저씨한테 걸리면 꼴 좋겠다. 아마 다리 몽둥이가 부러질걸? 꼴 좋겠구나." 사실 듣기 따라서는 욕설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치우비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날 걱정해주는구나. 고마워." 그 말에 발이 또 약이 올라 외쳤다. "뭐가 걱정해주는 거야? 이 멍청이가! 다리나 콱 부러져 버려랏!" 발은 이번에도 '휙'하고 뛰어갔다. 뛰어가는 발의 흰 비단 망토자락이 들쳐지며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옷이 힐끔 보였다. 바로 자기가 보낸 호랑이 가죽임이 분명했다. 치우비가 그것을 보며 속으로 흐뭇해하고 있는데 상망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정말 답답하기는! 넌 왜 그리 멍청하냐! 우리 아가씨는..." 상망이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발이 저만치서 찢어지게 소리를 질렀다. "상망!" "아이구, 갑니다요! 가요! 이 상망! 갑니다요!" 상망이 원숭이처럼 뛰어서 달려갔다. 치우비는 이번에도 얼얼한 듯, 황홀한 듯 묘한 기분에 취해 눈부시게 흰 발의 망토자락만 바라보았다. 그때 뒤에서 누가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멍청이멍청이멍청이!" "나는 멍청이라도 좋네요. 뭐라 해도 좋네요. 당신 같이 고운 아가씨라면 멍청이라 불러도 좋사와요!" 그 목소리는 모두 남자였다. 둘 다 닭살이 돋을 만큼 징그럽게 여자 목소리를 흉내내고 있었으며, 웃음을 참지 못해 킥킥거리고 있었다. 치우비가 기가 막혀 돌아보니 쇠돌이와 부루벼락이 서로 얼싸안고 자기를 놀리는 짓거리를 하는 게 아닌가. 그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숨이 막힐 정도 웃고 있었다. "나는 멍청이가 좋사와요... 푸히힛... 그러니 계속 멍청하시와요, 네? 우하핫!" "저도 아가씨가... 키킥... 푸핫... 좋사와요. 계속 점점 더 멍청해질 테니... 푸하핫 아이구 죽겠다... 그러니 이뻐해주시와요!" 치우비는 화도 내지 못하고 너무 우스워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나이 많은 부루벼락이 껄껄대며 치우비에게 다가와 말했다. 여전히 웃다가 재채기까지 해가면서. "이보게, 멍청이. 놀려서 미안하네만, 자네는 여자 맘을 왜 그리 모르는가? 엉? 나이 좀더 들어야 알겠는가?" 이번에는 쇠돌이가 아예 데굴데굴 구르면서 말했다. "더 어린 나도 안다 뭐! 우하핫!" "둘 다 정말 웃기더구먼! 자네 사내가 그게 뭐야? 좀더 밀어붙이라구! 저 여자가 앙탈부리는게 다 자네가 좋아서 그런 거란 거 몰라? 그러면 사내인 자네가 더 나서줘야지! 누군지는 모르지만 정말 이쁘기는 이쁘던데 머리채라도 잡고 덤불 숲으로라도 끌고 가라구! 그러면..." 치우비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도단이가 저쪽에서 엄숙하게 외쳤다.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시합 중입니다!" 부루벼락과 쇠돌이는 미안하다면서도 계속 낄낄거리며 돌아섰다. 그러나 치우비는 얼굴이 빨갛게 되어서도 이제는 잘 보이지도 않는 발의 뒷모습을 계속 좇고 있었다. 한편, 발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다가 상망이 뒤따라오자 톡 쏘아붙였다. "할아범! 왜 쓸데없는 소릴 해!" "저 녀석이 하도 멍청해서요..." 발이 슬쩍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칫! 멍청이가 멍청해야 재미있지! 안 그러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 "그 녀석은 멍청이지만, 그래도 아주 난놈입니다. 주신 사람이라 좀 걸리지만..." 발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치우비는 그때까지도 움직이지 않고서 있다가 자신이 뒤를 돌아보자 얼른 미소를 보냈다. 발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떠오를 것 같아서 급히 휙 고개를 돌리고 나서 상망에게 말했다. "끽구 아저씨한테 좀 봐주라고 할 수 없어? 멍청이가 불쌍하잖아." 그 말에 상망이 웃었다. "글쎄올시다, 아가씨. 하지만 이 시합은 그렇게 봐주고 하면 안 되는 것입죠." 그때 비휴가 오랜만에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끽구가 질지도 모른다." "헛소리!" 상망이 외치자 발도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저녀석도 세지만 멍청이잖아. 끽구 아저씨를 당할 사람은 세상에 형천 아저씨밖에 없어." 그때 발의 눈에 저만치에서 다른 사람들을 헤치며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바로 카린산의 여인족이었다. 표범 가면을 쓴 열 명의 여전사가 뭔가를 잔뜩 짊어지고 다가오며, 발과 마주치자 공손히 한 번 고개를 숙여보인 다음 말없이 계속 갔다. 보아하니 그들은 치우비 쪽으로 가는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발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발은 그 자리에 멈추어서서 상망에게 말했다. "할아범! 저 귀신들을 좀 따라가봐!" "네?" "좌우간 어서!" "예...? 예..." 상망이 여인족의 뒤를 따라가자 발이 비휴에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요. 비휴 아저씨." 비휴는 여전히 말없이 고개만 끄덕하며 그 자리에 섰다. 발은 이상하게 불안했다. 발에게는 그런 예감 같은 것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망은 작은 키로 사람들을 헤치며 간신히 여인족 뒤를 밟아갔는데 그들은 바로 치우비를 찾아가 이야기를 걸고 있었다. 그때 시합은 한참 활쏘기가 진행 중이었다. 사울아비들 중 활 잘 쏘는 이는 발빠른 애꾸 마파람과 사울아비 두 사람이었으며, 두 사람 모두 백발백중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반대편 무리에서는 몽골족이 역시 승승장구를 하며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맨 앞장에 선 것이 바로 치베였다. 치우천은 치베의 솜씨에 혀를 내두르며, 급히 스름이를 통해 치베와는 경솔하게 붙지 말고, 가장 힘이 떨어지는 사람을 내보내라고 전했다. 저쪽 재주를 뽐내는 단산에서는 각 부족사람들이 신기한 재주를 뽐내고 있었는데, 방금 카린산 부족이 영물인 흰호랑이 개명수를 부리는 묘기를 아까 보였고, 미아우족의 초초룬도 벌떼를 부리는 신기한 묘기를 다시 한 번 보이고는 박수갈채를 받으며 내려서는 중이었다. 그러는 사이, 치우비는 깜짝 놀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주신의 사울아비, 나래이십니까?" 여전사는 조심스러운 주신 말로 청중이 치우비에게 말을 꺼냈다. 치우비는 이제 활쏘기 시합이 끝나면 자신의 차례인지라, 발의 일을 애써 잊고 몸을 풀다가 고개를 돌렸다. "맞소. 그러나 이제는 치우비요." "저는 누루마이님의 부하입니다. 누루마이님께서 뵈었으면 하는데요..." "지금 시합 중이라 갈 수 없군요. 누루마이께 죄송하다고 전해주십시오." 사실 치우비는 전날 비렴에게서 카린산 여인족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말도 들었기에 이대로 핑계를 대어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여전사는 고개를 저었다. "누루마이가 부르신 것이 아니라 무라마이가 부르셨습니다." "무라마이? 무라님 말입니까?" "무라마이십니다. 무라마이는 아직 어리시지만 대족장입니다. 나이 때문에 누루마이께 배우고 계시지만 거느린 부족은 누루마이보다도 더 크십니다. 꼭 마이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런가요? 그럼 무라마이께 나중에 보자고 해주십시오." "시합이 끝나면 꼭 가실 것이지요?" "글쎄요..." "저희가 기다리다가 뫼시고 가겠습니다." 여인족이 끈질기게 달라붙자 치우비는 당황스러웠다. 주변 사람들도 여인족들을 처음 보는 사람이 많았기에 수군수군거렸다. 부루벼락이 또 웃으며 끼어들었다. "요즘은 멍청이가 최고야! 여자들이 죄다 멍청이만 찾나 보네!" 그러자 쇠돌이가 맞장구를 쳤다. "그것도 이번에는 열 명이우!" 사실 그 카린산 여전사들은 표범 가면으로 얼굴은 가렸지만 모두 키가 크고 살빛이 희었으며 늘씬늘씬하여 보기 좋은 여자들만 있었다. 개중에 나이 많은 여자도 있는 듯했지만 모두 예쁠 것 같았고 화려한 치장을 하여 더더욱 고와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소리는 치우비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황당하고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아니, 왜 그래야 하는 겁니까?" "정말 중요한 일 때문입니다."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겁니까?" "그건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말도 안 하고 무조건 오라니, 어찌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여전사는 뒤를 향해 눈짓을 했다. 줄을 지어 선 여전사들은 어깨에 여러 가지 물건을 얹고 있었는데, 뒤에 선 사람 수가 아홉 명이었으니 물건 더미는 아홉 개나 되었다. 여전사들이 그것을 일제히 내려 풀었다. 귀한 빛깔의 가죽이며, 옥으로 아주 잘 깍아 만든 화려한 장식품, 보석, 향기로운 술단지며 나무 그릇에 든 향기 좋은 음식까지 온갖 물건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다만 회의장 안이라 무기만 없었다. 아까 말하던 여전사는 치우비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것은 무라마이께서 보내는 선물입니다. 먼길을 나오신 참이고 급히 준비하시느라 아직 반의 반도 못 보낸 것입니다. 더구나 회의장에는 열 다섯 명밖에는 들어올 수 없는지라 더 많이 준비할 수가 없었습니다." 치우비는 황당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아닙니다. 받을 수 없습..." 그때 반대쪽에서 또 다른 여전사 두 명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막 개명수를 부리는 묘기를 끝낸 사람들이었다. 그들 둘 뒤에는 흰호랑이 개명수 두 마리가 소나 양처럼 유순하게 설레설레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놀라면서 모두 길을 비켜섰다. 그 두 사람이 헐떡이며 다가오자 여전사가 말했다. "이것도 무라마이께서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저 범은 카린산 전체의 보물로서, 개명수라고 하는 아주 용감하고, 사람 말을 다 알아듣는 영물입니다. 왼쪽은 '카'하고 부르는 수컷이고 오른쪽은 '슈'라고 부르는 암컷이며, 두 마리 모두 무라마이께서 가장 아끼시는 친구인데, 당신께 보내신다 하셨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개명수라는 범은 정말 놀랄 만했다. 여전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범은 천천히 사뭇 다정한 표정으로 치우비에게 다가섰다. 비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약간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자, 그 개명수들이 다가와서 치우비의 발 옆에 부드럽게 등을 비비며 비 주위를 한바퀴 돌더니, 치우비의 앞뒤에 점잖게 앉는 것이었다. 치우비는 거의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성의를 보여주신 것은 정말로 고맙습니다. 정말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니 됩니다. 이유도 모르고 이런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때마침 개명수를 보고 놀라 달려온 치우천이 다급하게 나섰다. "카린산 쑤앙마이족께 감사드립니다만, 주신 사울아비는 이유없는 선물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갑자기 여전사가 풀썩 치우비의 앞에 엎드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치우비가 깜짝 놀라서 왜 그러냐고 묻자, 여전사는 울먹거렸다. "나래... 아니, 치우비님을 모시지 못하고 가면 저는 명령을 못받든 것이 되니, 스스로 목을 베어 죽어야 합니다." 치우비는 깜짝 놀랐다. "어째서요?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닌데...?"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여전사와 예물을 가지고 왔던 열한 명의 여전사들도 모두 그 자리에 엎드리며 통곡했다. 이런 소란이 벌어지자 활쏘기 시합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눈을 돌렸고, 약간 떨어진 곳의 부족원들도 모두 몰려나와 이 광경을 구경하는 통에 수라장이 되어갔다. 치우비는 너무도 당황하여 그럴 수만 있다면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여자들이 울며 애원하는 소리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고, 여자들의 탄식은 치우비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카린족 말이어서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처음 치우비에게 말을 걸었던 여전사가 외쳤다. "이대로 돌아가면 우리는 혹독한 형벌을 받고 죽을 것입니다. 그러니 실례하더라도 용서해주십시오. 당신을 잡아가겠습니다." 여전사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아주 점잖게 치우비 앞에 앉아 있던 개명수 두 마리가 갑자기 노호를 터뜨리며 치우비의 머리 위로 뛰어오르며 치우비를 찍어누르려 했고, 열두 명에 달하는 여인족들이 '와' 하며 동시에 맨손으로 달려들었다. 물론 개명수도 아주 영리하여 치우비를 다치게 한 것은 아니고, 다만 올라타서 쓰러뜨리려고만 하여 발톱도 내지 않고 힘으로 찍어누르기만 했다. 여전사들도 치우비를 잡아끌되 무기를 꺼내거나 치려고는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개명수가 치우비에게 달려들자 모두 놀라며 '와'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 부루벼락과 쇠돌이 등 사울아비들이 재빨리 나서서 여인들을 떼어내고 개명수를 돌로 치려고 했다. 그러자 치우비가 외쳤다. "그러지 마! 날 해치려는 게 아냐!" 치우비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서 그냥 버티고 서기만 했다. 그 광경을 보고 모든 사람은 깜짝 놀랐다. 치우비의 양쪽 어깨를 커다란 개명수가 찍어 누르고 있고, 열두 명의 여전사가 '와' 하며 달려들어 잡아끄는데도 치우비는 그 자리에 꼿꼿이 버티고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두 명의 여전사들은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 서로의 허리를 안고 늘어서서 치우비를 잡아당겼으나 그야말로 치우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치우천이 다급하게 외쳤다. "함부로 이런 짓을 하면 화를 낼 것이오!" 그러나 치우비는 여인족들이 울먹이며 자신을 끄는 것을 본지라 오히려 형을 말렸다. "화내지 마. 내가 안 가면 그만 아냐?" 치우비는 힘을 돋우어서 두 마리의 개명수를 툭툭 튕겨냈다. 손도 대지 않고 거대한 개명수가 나가떨어지자 사람들은 더욱 놀랐다. 치우비의 힘도 힘이지만 아무리 길이 들었다 해도 거대한 호랑이 두 마리 앞에서 눈썹 하나 까딱 않는 치우비의 담력에 더 놀랐다. 개명수들은 재빨리 내려앉아 다시 달려들려고 했지만, 치우비가 입을 꾹 다물고 무섭게 째려보자 갑자기 기가 죽으면서 꼬리를 말았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저자는 정말 사람이 맞나? 세상에! 그저 사람이 좋아만 보였는데 눈빛 하나로 저 호랑이들을 꼼짝 못하게 하다니!' 그 모습을 본 여전사는 똑같이 놀랐으면서도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 이분밖에는 없을 것이다! 죽어도 모셔가야 한다!' 여전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치우비를 끌었으나 치우비는 그냥 허참, 하는 소리만 낼 뿐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여자들이라 힘을 주어 떼어내는 것도 민망해서 그냥 놔두는 것뿐이었다. 여전사들은 치우비를 잡아끌면서도 계속 엉엉 울면서 곡소리를 냈다. 제발 가달라는 것이다. 정말 해괴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치우천이 보다못해 말했다. "비야, 아무래도 무슨 큰일이 있나 보다. 저렇게 간청하는데 한번 가보려무나." "그럴까..." 치우비도 마음이 움직인 참이라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외쳤다. "멍청잇! 가긴 어딜 가!" 어느새 다시 달려온 발의 목소리였다. 치우비는 발의 목소리가 들리자 곤란한 상황마저도 잠시 잊고 웃어 보였다. "아... 발. 다시 왔구나..." 발이 무서운 표정으로 다가와 여인족에게 뭐라고 외쳤다. 카린족 말인 듯, 다른 사람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아마 떨어지라고 협박을 한 모양이다. 잠시 후 발을 알아보는 여인족들이 지나족의 권위를 인정하는 듯 손을 놓고 일어섰다. 그러자 발이 날카롭게 뭐라고 여전사에게 질문을 했다. 그 여전사는 처음에는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는 것 같았으나 발이 계속 날카롭게 따지자 쩔쩔매다가 급기야는 고개를 끄덕였따. 그러자 발이 차갑게 웃었다. "흥! 그럴 줄 알았어!" "대체 뭐야?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어." 치우비가 묻자 발은 차가운 눈으로 치우비를 노려보았다. "모르긴 뭘 몰라? 아주 잘된 일인걸?" "뭐가 잘되었다는 거야?" "무라는 싸움도 잘하고 유명한 여자니, 잘해봐, 흥! 너 같은 멍청이 누가 신경 쓴대?" 그러고 나서 발은 유유히 콧노래까지 부르며 반대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치우비만이 아니라 치우천도 무슨 영문인지 몰라 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여전사가 울먹이며 말했다. "저희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많아 지금은 말씀드리기 어려우니 시합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여전사를 보며 치우천이 쯧쯧거리며 말했다. "그럼 제발 울지 좀 마시오. 시합을 앞두고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는데 울음소리가 들리니, 이게 뭐요?" 그 말에 여전사들이 입을 가리고 숨을 죽여 울었다. 아무튼 기괴한 수수께끼 같은 일이었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덕분에 혹이 나고 눈가가 시퍼렇게 된 야율쿠리와 초초룬도 구경하러 와 있었다. 그들은 치우천과 비에게 번갈아 물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그러나 치우천이나 치우비도 아무것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과 도단이, 부루벼락들이 여전사에게 캐물었지만, 그들은 울기만 할 뿐 조개껍질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활쏘기 시합이 끝나 있었다. 마지막 시합은 몽골족과 주신의 대결이었는데, 놀랍게도 적수가 없는 치베마저 패해 주신이 세 사람 다 이기고 있었다. 치베는 승패는 안중에도 없이 시합이 끝나자마자 활을 던지고 치우비에게 달려와 물었다. "나래 안다, 희네 안다. 무슨 일이냐? 카린족과 싸움이 붙은 거냐? 내가 있다!" 치베가 막 활을 당길 무렵 여인족이 와서 난리가 벌어졌고, 치베는 치우비가 무슨 일이 있을까 봐 마음이 급하여 활을 아무렇게나 빨리 쏴버리고 달려온 것이다. 항상 치베는 백발백중이었는데 그 와중에 두 개의 화살이 빗나가게 되어 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나머지 두 명의 몽골족 사수도 활을 잘 쏘았지만 치베의 움직임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고, 그에 반해 주신 사울아비들은 항상 침착하라는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라 침착하게 평소만큼 활을 잘 쏘아서 압도적으로 이긴 것이다. 치우천은 오히려 안타까워했다. 승부는 주신이 이길 것이었지만, 최소한 활쏘기의 최고 영웅은 치베가 되어야 공정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베는 도리어 껄껄 웃었다. "다 텡그리의 뜻이시다. 다 내 운수이니 괜찮다. 나보고 자만하지 말고 더 갈고 닦으라는 텡그리의 뜻으로 알겠다. 나래 안다가 아무 일 없다니 그게 다행이다." "하지만 몽골족에게 미안하다. 보돈차르 안다에게도 미안하고..." "보돈차르는 꼭 이름을 날리는 것을 바라는 분이 아니다. 그분도 내가 옳았다 하실 것이다." 좌우간 활쏘기 시합이 끝나자 주신족이 두 번 우승하고 마지막 씨름만이 남았다. 사실 씨름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시합이며, 씨름의 제일 용사야말로 최고의 용사인 셈이었다. 활이나 몽둥이, 돌도 중요하긴 하나, 씨름의 기술이야말로 다양하며 용사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시간이 제법 지나 해가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야율쿠리가 키탄족에게서 몽둥이 시합에 한 번 나갔기에, 야율쿠리는 온 김에 그냥 여기서 치우비를 응원해 주기로 했다. 초초룬도 미아우로 가지 않고 치우비를 격려했다. "꼭 이겨라, 나래. 아니, 치우비. 미아우족도 씨름에 나가지만, 그래도 네가 이기는 것이 맞다. 끽구를 쓰러뜨리고 네가 제일의 용사가 되어라!" 끽구의 힘은 정말 대단해 모든 부족의 용사들이 그의 힘 앞에 추풍낙엽처럼 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알유나 이부도 대단한 장사들이었다. 그러나 끽구는 너무도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어서 그와 싸운 장사들이 세 명이나 온몸이 부서지는 불구의 몸이 되었다. 죽지 않은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그만큼 끽구는 인정사정 없이 상대를 박살내 버렸다. 내로라하는 용사들이 줄줄이 반죽음이 되자 몇몇 부족의 전사들은 아예 끽구와 싸우지 않고 도망쳐 버리기도 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을 비웃는 자는 없었다. 모두가 끽구의 거대한 모습에 몸을 떨었고 형천보다 끽구가 더 셀 것이라는 소리도 나왔다. 반면 치우천은 약한 상대로 용의주도하게 번갈아 순서를 정하게 하여 마치 그저 기분대로 나가는 것처럼 했다. 치우비와 쇠돌이, 부루벼락은 연전연승하며 계속 이겨나갔다. 그렇게 치우천은 남들이 자신드릐 계획을 눈치채지 못하게 꼼꼼히 신경을 썼으므로 초초룬이나 야율쿠리마저도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지나족과 주신족은 결승에서 맞붙게 되었다. 치우천은 가장 힘 센 끽구가 먼저 나와 기세를 떨칠 것이라 예측했는데 과연 그대로였다. 무지무지하게 커다란 거한 끽구는 쿵쿵거리며 나와서 외쳤다. "며칠이나 잠도 못 자고 벌렸는데 드디어 때가 되었구나. 나래, 아니지, 치우비가 되었던가? 좌우간 이 녀석! 썩 나오너라! 회의장 밖까지 내던져 주리라! 우와!" 끽구가 길게 울부짖자 지나족도 덩달아 '우와' 하고 환호성을 올렸다. 눈이 있는 자들이라면 주신족에서 치우비가 가장 세며, 지나족에서 끽구가 제일 세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끽구와 치우비의 대결이야말로 최고의 대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끽구를 응원하는 소리가 치우비를 응원하는 소리보다 훨씬 커서 야율쿠리와 초초룬은 화가 치밀어 있는 힘껏 치우비를 응원했다. 그러자 보돈차르족과 야율쿠리의 키탄 부족, 초초룬의 미아우 부족과 어제 신세를 진 앗수라트, 앙가마이 부족들이 모여들어 함께 응원을 해주었다. 특히 앗수라트와 앙가마이 부족들은 거의 광분하여 '치우비! 치우비!'하고 이름을 외쳐댔다. 급기야는 열광이 지나쳐 싸움하는 자들까지 생기는 난리판이 될 뻔도 했다. 그 엄청난 기대와 열기는 그대로 치우 형제와 사울아입들에게로 전해졌다. 이것은 어쩌면 주신편과 지나편의 보이지 않는 대결일 수도 있었다. 엄청난 환호와 열광 속에서 정신이 다 나갈 정도였다. 특히 지나편에서 '끽구! 끽구!'하며 열광하고 다른 편에서는 '치우비! 치우비!' 하며 난리를 치자 치우비는 난감해졌다. 작전과 달리 자기가 나가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형님, 이거 어쩌지?" 다른 사울아비들도 난처해졌다. 도단이가 말했다. "물론 지금 예정대로 하면 우리가 이긴다. 그러나 치우비가 나서지 않으면 겁쟁이라고 욕을 먹게 되잖아. 비, 네가 꼭 끽구에게 진다고 할 수는 없잖아? 그냥 네가 나가는 게 어때?" 그러나 치우천은 끝까지 냉정했다. "안 된다. 주신이 이기는 것이 먼저다." "하지만 그럼 비는 용사로 못 뽑힐지도 몰라. 그리고 저 사람들 모두가 주신을 욕할지도 모른다. 어쩌지?" 생각 깊은 도단이나 부루벼락, 마파람도 어쩔 줄 몰라하자 치우천이 조용히 치우비에게 물었다. "비야, 어느 게 우선이냐? 최고의 용사가 되고 싶으냐? 주신이 이기게 하고 싶으냐?" 치우비는 단숨에 결단을 내리고 말았다. "주신이 먼저지! 그러나..." 사울아비들 간에도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꼭 시합에 이기더라도 그렇게 이기면 욕을 먹을지도... 그것이 주신을 위해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그 말에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다가 갑자기 웃었다. "잘 말했다. 그러나 내가 누구니?" "내 형님이지!" 그러자 치우천은 묘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넌 내 아우다. 형이 내 아우를 최고의 용사로 만들지 않으면 누가 하겠니? 그리고 내가 주신을 욕먹게 하겠니?" "무슨 소리야, 형님?" 치우천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나도 남자니, 책임질 때는 져야 한다. 알겠니?" 그러다가 치우천은 돌연 엄숙히 말했다. "움직이지 마라." 치우비는 영문을 몰라 눈을 크게 떴다. "뭐야? 형님?" 별안간 치우천이 벌떡 일어나 시합장 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너무도 갑자기 움직인 것이라 그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손 하나 쓰지 못했다. 치우천은 낭랑하고 맑은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끽구! 내가 도전한다! 넌 내 아우도 못 이겼으니, 내가 한 번 겨뤄보고 싶구나!" 사람들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치우천이 나타나자 너무도 놀라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치우천은 씨름을 할 장사라고 보기에는 작았고 너무도 곱게만 생겨서 그 의아함은 더했다. 도대체 저런 여자 같은 젊은이가 어떻게 끽구와 싸우겠다는 것인가? 더구나 치우천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씨름에 나온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저건 웬 미친 놈이냐?" "씨름이 장난이냐? 끽구가 봐주는 법이 있다더냐?" 한편으로는 다른 이야기도 들렸다. "저 사람이 치우비의 형이란다. 치우비의 형이면 뭔가 다를 수도 있다!" "그래. 뭔가 숨은 힘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끽구에게도 도전하는 것이지!" 그때 지나족 한 명이 외쳤다. "저 사람은 신인이다! 쑤앙마이와 자부선인의 제자다! 도깨비 열 마리를 그냥 물리치는 신인이야!" 바로 새벽에 도깨비를 잡으러 왔다가 치우천과 마주친 지나족 전사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우' 하며 웅성거렸다. 사람들이 떠들어대자, 치우천은 사방을 둘러보며 자신있는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나는 치우비의 형이오! 그리고 나는 아직 아무 시합도 참가하지 않았으니, 내가 나서도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 말에 오히려 당사자인 끽구가 의아하여 미간에 깊은 골을 찡그리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너 희네 아니냐? 이 녀석아! 네 놈이 어찌 나와 싸우겠다는 거냐? 날 모욕하는 거냐?" "좌우간 상대는 납니다. 싸워봅시다." 치우천이 너무도 당당히 말하자 끽구는 도리어 의심스러웠다. "너... 정말이냐? 너 혹시 뭔가 감춘 힘이 있던 게냐?" "해보면 알 거 아닙니까?" 치우천이 너무도 당당히 말하자 끽구는 아무래도 찜찜한 듯 손에 침을 퉤퉤 뱉은 뒤 말했다. "난 봐주는 것을 모른다. 죽어도 원망 마라." 끽구가 몸을 풀자 몸 전체에서 우두둑우두둑 무서운 소리가 났다. 그러나 치우천은 태연했다. "나도 봐주지 않겠습니다." 그 사이 치우비는 온몸이 얼어붙어 있었다. 아예 제정신이 아니었다. 형님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지만, 형이 제 발로 저 무서운 끽구를 향해 웃으며 나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잠시 동안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뭣에 홀린 것 같았다. 치우비는 잠시 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다른 사울아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야율쿠리가 더 참지 못하고 외치려 했다. "희네! 안 된다! 넌...!" 그때 누군가가 야율쿠리의 입을 틀어막았다. 바로 초초룬이었다. "이 멍청아! 놔둬!" 초초룬은 눈물을 줄줄 쏟고 있었다. "저건... 저건... 희네의 뜻이다! 그 마음을 왜 몰라! 응?" 굳은 표정의 치베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희네... 그건... 그건 너무...!" 그때 도단이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소리쳤다. "막아야 해!" 쇠돌이와 부루벼락은 우왕좌왕했다. "뭐야? 도대체 뭐야?" 부루벼락은 그러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저놈...! 저놈...! 나 대신 ... 그리고 동생 대신...!" 스름이도 울먹이며 말했다. "그래. 다 걸머지려는 거야. 저... 저 사람은... 죽을지도 모르는데..." 스름이도 울먹이며 말했다. "그래. 다 걸머지려는 거야. 저... 저 사람은... 죽을지도 모르는데..." 치우천은 모든 것을 걸머지고 깨끗이 자신이 책임지려고 한 것이다. 사실 꾀를 낸 것은 자신이지만 그로 인해 피해자가 생긴다. 부루벼락은 상대도 되지 않는 강자에게 알면서 피해야 하고, 치우비는 당당히 천하 제일 용사로 뽑힐 수도 있는데 도리어 피했다고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주신의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는 치우비를 나가 싸우게 할 수도 없었다. 결국 가장 깨끗한 방법은 치우천이 끽구와 겨루는 일이다. 치우천은 치우비의 형이니 그것을 내세우면 나가도 그렇게 이상한 것도 없다. 주신도 이긴다. 치우비도 부끄러울 것 없이 무패의 기록으로 용사가 된다. 부루벼락도 무리하게 싸울 필요 없다. 그러나 힘이 형편없는 치우천이다. 괴력의 역사 끽구의 손아귀에 부스러질지도 모른다. 한 번 내동댕이쳐져 박살나 버릴지도 모른다. 죽을 수도 있거니와 그렇게 형편없는 녀석이 나와서 개죽음을 당했다고 사람들은 비웃고 침을 뱉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치우천은 모조리 웃으며 감수하려는 것이다. 자기가 벌인 일을 자기가 거두기 위해서... -나도 남자니, 책임질 때는 져야 한다. 치우천의 말이 계속 귓가에서 빙빙 돌았다. 치우비는 아직도 덜덜 떨고만 있었다. 그때 애꾸눈 마파람이 다가와 치우비의 손을 덥석 잡았다. "비! 네 형은 힘은 없지만... 진짜 사내다!" "안 돼... 안 돼..." 치우비는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마파람은 치우비의 손을 더욱 굳게 잡으며 치우비의 귀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비! 네 형의 뜻을 더럽히지 마라! 나도... 나도 미칠 지경이다! 하지만 참아! 참아야 한다! 움직이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된다!" 그러나 치우비는 참을 수 없었다. 형에 대해서는 잘 알고, 끽구도 안다. 끽구의 손에 한번 붙잡히면 형은 그 자리에서 결단이 날 것이다. 형이 멀쩡하다면 그래도 사울아비이니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형은 다리가 병들었고 어젯밤까지 극한의 고통을 계속 버텨온 몸이다! 다치는 것으로 끝날 일은 아니다. 형은 분명 죽는다. 치우비의 머리가 빙빙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형이 죽는다... 형이 죽는다...' 갑자기 치우비의 눈에 핏발이 솟았다. 치우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쇠돌이와 야율쿠리, 치베와 부루벼락 등 모든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치우비를 만류하려 했다. 그래도 치우비는 일어섰다.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엄청난 장사들이며 용사들인 그들이 한꺼번에 와스스 떨려나갔다. 치우비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나가려 했다. 주신이 지건, 망하건, 세상이 뒤집어져도, 세상 모든 사람과 싸우게 된다 해도 형이 죽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때 치우천은 조용히 웃으며 서 있다가 치우비 쪽을 돌아보았다. 그 눈빛이 치우비를 향했다. 치우비는 순간, 멈칫했다. 그러자 치우비는 낭랑하게 말했다. "아우야, 미안하다만 내게 맡겨다오." 치우비는 미칠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형의 말을 거역한다는 것은 상상해본 일도 없었다. 그리고 형은 저렇게 유유히, 태연히 서 있지 않은가? 형에게도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자칫 그르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형은... 형님은... 그 순간 조용하고도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끽구, 네가 졌다. 물러서거라." 그 목소리는 바로 헌원의 목소리였다. 끽구는 놀라고도 의아하여 뭐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하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뒤로 한 발 자국 물러서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 높은 단 위에는 헌원이 사와라 한웅과 나란히 서 있었다. 어느덧 회의가 끝나 높은 곳에서 시합을 구경하던 모양이었다. 치우천은 조용히 헌원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헌원도 치우천을 바라보았다. 헌원은 치우천의 모든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조용히 따뜻한 눈빛을 보냈고, 치우천은 그런 헌원에게 아무도 모르게 살짝 인사를 보냈다. 둘은 말 한마디 없었고 같이 있지도 않았지만 서로를 너무도 잘 안다고 느꼈다. 헌원은 눈으로 말했다. -네가 끽구를 이겼다. 네 용기가 이긴 것이다. 치우천 역시 눈으로 말했다. -진정 이긴 것은 나도, 끽구도 아닙니다. 당신이군요. 숨막힐 듯한 승부는 없었다. 그러나 대용사인 끽구가 치우천에게 물러나자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던 사람들은 투덜거렸다. 그러나 여기 모인 이들은 대부분 부족장이나 부족에서 알려진 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헌원의 모습이 너무도 깊이 인상에 남았다. 그 시합에 쏠린 눈과 귀가 많았던 만큼 그 순간 헌원의 모습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듯했다. 사와라 한웅보다도 훨씬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치우천은 그런 모든 것을 너무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텅 빈 것 같은 심정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헌원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놀랄 정도다. 치우천은 조용히 걸어서 시합장을 나왔다. 헌원은 치우천이 시합에 나서는 순간, 치우천이 낸 꾀를 금방 꿰뚫어버린 것이다. 일단 승부에서 끽구와 치우천이 붙게 된 순간, 이미 지나족은 졌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헌원은 노하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 부하인 끽구의 명예를 꺾으면서까지. 무엇 때문일까? 헌원의 생각도 자신만은 읽어낼 수 있다고 자부해왔던 치우천도 이번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더 깊이 생각해야 했다. 그만큼 헌원의 심기는 복잡했다. 그러면서 헌원은 멋지게 승리했다. 시합에는 졌지만 자신의 목숨을 구했고, 추한 꼴을 보이지 않게 했으며 사람들에게 치우비나 자신이나 끽구보다도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다. -정말 이긴 사람은 헌원, 당신입니다. 치우천은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외쳤다. 헌원의 거대함이 자신을 완전히 압도하는 것을 느꼈다. 생전처음 치우천은 항상 크다고 자부하던 자신이 쪼그라들고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형이 무사히 걸어 들어오자 치우비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형의 어깨를 덥석 잡고는 울먹이며 말했다. "형! 다시는... 다시는 그러지...마!" 치우천은 자신을 세상 누구보다도 걱정하는 이 믿음직한 아우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쓰면서 말했다. "네 차례다, 비야." 치우비는 가쁜 숨을 몇 번 몰아쉬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얼굴을 마구 문지르고 뺨을 몇 번 때린 후 밖으로 나갔다.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형은 죽지 않고 멀쩡하다. 치우비는 아주 활기찼고 힘이 더났다. 그곳에는 알유가 서 있었다. 둘의 싸움은 볼 만했지만 결국은 치우비가 몇 번 양보하다가 간단히 알유를 내던져 버렸다. 좀 싱거웠지만 앞에서 치우비를 응원하던 사람들은 모두 그나마 환호성을 올려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쇠돌이가 나서서 의외의 격전 끝에 이부를 물리쳐 주신은 씨름에서도 세 번 모두 이겨 가장 힘센 부족이 되었다. 그리고 치우비가 씨름의 최고 승자가 되었다. 한 번도 지지 않았고 가장 으뜸이었기 때문이다. 상은 그 자리에서 바로 주어졌다. 그러나 치우비는 곧 외쳤다. "나는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뽑힌 것은 할 수 없으나 상은 모두 끽구님께 드리겠습니다." "내가 왜 받겠느냐?" 끽구가 외치자 치우비도 기탄없이 말했다. "이번에는 형에게 제가 밀렸습니다만 다음번에 꼭 다시 겨루어서, 이긴 사람이 받도록 합시다. 그때까지 맡아두십시오. 어떻습니까?" 끽구도 사양하려 했으나 조금 생각하다가 걸어나와 치우비에게 말하며 악수를 청했다. "우리 승부는 다음으로 미루자고? 그렇다면 좋다." 끽구는 흉한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호쾌하게 껄껄 웃었다. 끽구도 성격이 시원시원한 용사이기는 했다. 사람들은 모두 덩달아 기뻐져서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사람들은 끽구와 치우비의 대결을 못 보아서 내심 섭섭했는데, 이렇게 다음을 기약하자 그나마 좋다고 여기고 박수를 친 것이다. 끽구가 머리를 긁적이며 살짝 물었다. "그런데 네 형이 그렇게 세냐? 헌원님이 나중에 웃으시며, '희네와는 너도 안 된다. 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셨는데?" 치우비가 슬쩍 웃어 보였다. "그러셨습니까?" "그래. 그런데 난 그렇게 안 보이거든." 그러자 치우비는 새삼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우리 형은 셉니다. 저는 손가락 하나도 못 당하죠..." 단순한 끽구는 우직하게 그대로 믿고 놀라며 물었다. "그 정도냐?" "물론입니다. 우리 형은 주신 전체에서 제일 가는 용사랍니다!" 그리고 치우비는 걸어나왔다. 그러면서 치우비는 속으로 외쳤다. '그럼, 주신 제일의 용사는 우리 형님이다! 우리 형님이고 말고!' 그리고 그들의 눈이 미치지 않는 먼발치에서 발이 그 광경을 보며 무엇인지 모를 복잡한 심정으로 눈물짓고 있었다. 무라의 초청 시합이 끝나자마자 치우비가 회포를 풀 시간도 없이 진드기같이 카린산 여인족들이 달라붙었다. 그들은 전보다 더 애절하게 달라붙어왔다. 다른 사울아비들의 축하나 친구들이 환호할 겨를도 주지 않고 치우비를 에워싸버린 것이다. 이미 시간이 늦어 회의는 끝나고 울타리 문이 열려서 사람들이 반 정도 빠져나간 후였다. "이제 저희와 같이 가시지요? 치우비님! 치우비님!" 그때 치우천은 헌원의 행동을 깊이 생각하고 있던 참인데 좀 너무하다 싶은 여인족들의 행동에 짜증이 나서 보기 드물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대체 왜들 이러는 거요? 적당히들 좀 해두시오! 일단 이유나 말하란 말요!" 치우비도 역성을 들었다. "그렇소. 형님의 말이 옳소." 그러자 여전사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하도 급해서 그만... 그럼 좀 조용한 곳으로 가십시다." "그럽시다. 우리가 밖으로 가지. 좀 나가 있겠네." 치우 형제가 일어서자 야율쿠리나 치베 등이 껄껄 웃으며 빨리 돌아오라고 말했다. 어쨌거나 일이 잘 풀려 모두는 기분이 좋았다. 치우비가 나갈 때 초초룬이 웃으며 말했다. "이봐 형제들! 나중에 한턱내라, 응?" 그러자 방금 만난 부루벼락이 그새 친해진 듯 초초룬에게 넉살좋게 외쳤다. "한웅께서 이긴 것을 기뻐하셔서 술을 잔뜩 내신다 하니 그리로 갑시다." "나중에 꼭 와라. 응?" 한마디하는 야율쿠리의 말을 뒤로하고 치우 형제는 여인족들과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치우형제는 카린의 부족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고 호젓한 울타리 구석 샘가로 갔다. 여전사가 조심스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저희가 용사님을 모시고자 한 것은..." "바쁘니까 빨리 좀 말합시다. 무슨 부탁이 있는 건가요? 아니면..." 여전사는 약간 망설이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딱 잘라 말했다. "무라마이께서는 치우비님과 혼인하시기를 바랍니다!" "엑?" 치우비는 그때 목이 말라 샘물을 마시다가 그만 물을 '푸학' 토해버렸다. 치우비뿐만 아니라 놀라는 일이 드문 치우천마저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게 무슨 낮도깨비 같은 소리요? 전에 한 번 스치듯 본 것뿐인데 무슨 혼인이오!" 그러자 여전사는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무라마이께서도 시집을 가셔서 후계자를 두셔야 합니다. 아주 귀찮은 일이지만, 부족장의 당연한 의무지요. 그러나 아직 자신의 상대가 되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지 못해서 후계자를 두는 일을 미루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두 가지 조건을 다 만족시키는 치우비님 같은 분을 만났으니, 저희로서도 아주 기쁠 뿐입니다. 더구나 무라님의 선물을 치우비님이 선뜻 받아주셔서 무라님도 아주 기뻐하고 계십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어이없는 소리란 말이냐?" 치우천이 화를 내며 말하자 치우비도 화를 냈다. 그러나 또 울고불고 할까 봐 그렇게 소리를 높이지는 못했다. "무라가 뭔데 자기가 맘대로 다 정하는거요? 나는 그럴 생각 없소! 나는 그럴 뜻도 없고!" "하지만 가셔야 합니다." 아예 여전사가 딱 잘라 말하고 나서 또 울 것 같자 치우비는 타이르듯 말했다. "사람끼리 혼인은 서로가 좋아야 하는 법이오! 그리고 무라마이는 좋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한 번 보았을 뿐이고, 말도 해본 적 없소. 주신에서는 그렇게 혼인을 막 하지 않소." "주신에서 어찌 하는지는 잘은 모르지만, 그대로 맞추겠습니다. 아버님께는 이미 선물이 갔을 것입니다." 그 말에 치우비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누구 맘대로 아버님께 선물을 보내? 형님, 어쩌지? 우린 이제 혼났네, 혼났어." 치우우레는 누구보다 강직해서 그런 것을 딱 질색으로 알았는데 난데없이 혼사가 들어온다면 필경 치우비가 무슨 사고라도 친 것으로 생각할 것 아닌가? 치우천도 이런 일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더구나 아직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치우천은 근엄하게 말했다. "당신들은 모르고 그랬을 테지만, 그건 큰 실례요. 좋은 사람이 있어도 자식이 부모에게 먼저 고하고 허락을 얻고 난 다음 인사를 나누는 것이 주신에서는 올바른 일이오. 당신들은 오히려 일을 잘못한 것이니 얼른 되물리시오." "그리고 나는 아직 장가 못 갑니다. 형보다 먼저는 못 가요!" 치우비가 완강하게 말하자 여전사는 울먹이며 말했다. "정 그렇다면 이렇게 하십시다. 당장 혼사를 하지는 말고 우선 응낙만 해주십시오. 치우비님을 카린족으로 데려가 영원히 살게 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카린족은 여인족이고 치우비님은 영웅이신데, 원하지 않으신다면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요?" "무라마이께서 치우비님처럼 용감한 후계자를 들 수 있도록 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이번을 포함하여 앞으로 두 해에 한 번씩 도합 세 번만 저희를 방문해주시면 되는 겁니다." 형제는 얼굴이 시뻘겋게 붉어졌다. 결국 카린족은 자신의 씨를 받기를 원하는 것이지만, 치우비는 아직 숫총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꼭 안 될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서로 원해서 그렇게도 하고, 결혼하기 이전의 처녀총각이라면 마음에 드는 상대와 하룻밤 정도 보내는 일은 종종 있었으며, 특히 전사들의 경우 밖으로 다니는 일이 많아서 더더욱 그러했다. 허나 치우비는 치우천과의 약속-세상 제일의 용사가 되겠다는-을 지키기 위해 아예 여자쪽은 담을 쌓고 살아왔다. 게다가 치우비는 어린 나이에 사울아비가 되었기 때문에 엄격한 훈련을 받아 여자를 접해본 적이 없었다. 주신에서는 사울아비가 성인식을 치르기 전에 여자와 잠을 자는 것은 큰 죄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 치우비의 마음은 은근히 공손발에게 쏠려 있으니, 들어볼 것도 없이 그것은 안 될 말이었다. 듣다 못한 치우천이 고함을 질러버렸다. "갈수록 더하는구려. 내 아우를 무슨 씨돼지로 생각하는 거요?" "아니... 아닙니다. 어찌..." 치우비도 화가 나서 외쳤다. "쑤앙마이가, 무라마이가 뭐 그리 대단하오? 이건 사람을 사람 취급도 안 하는구려!" "그런 것이 아니라 깊은 사연이 있습니다. 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치우천이 즉시 되받아 쏘아붙였다. "무라가 그런 사람일 줄 몰랐소! 족장을 잘못 모셨으니 그러면 죽는 수밖에 없지. 안 되겠소!" "그게... 그게 아닙니다! 이건... 이건 다 내 잘못입니다. 무라마이가 그러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 부족은... 우리 부족 모두가 망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인족들은 이미 치우비를 납치하려고까지 했고 너무 진드기처럼 붙어서 마음 좋은 치우비도 불쌍한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치우비마저도 냉정하게 말했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요?" 여전사가 길게 탄식했다. "무라마이시여! 용서하십시오! 제가 얕은 수작을 부려 일을 망쳤습니다!" 순간 여전사는 자신의 돌칼을 아주 빠르게 뽑아서 목을 향해 찔러갔다. 그리고 치우비를 잡기 위해 몰려왔던 열두 명의 여전사들 모두가 동시에 그렇게 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치우비나 치우천은 여전사들이 일부러 겁을 주려고 그리 말한 것이려니 생각했으나 그들은 정말 동시에 목을 찔러가지 않는가? 치우비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이 협박을 하려고 거짓으로 그러는 것이라면 칼에 그런 속도가 붙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죽을 결심으로 있는 힘을 다해 목을 찌르고 있었다. 치우비는 깜짝 놀라 번개같이 땅으로 손을 뻗어 양손에 흙을 쥔 다음 흙덩이 두 개를 여전사들에게 던지며 몸을 날렸다. 그리고 양손을 크게 휘젓자 앞쪽에 서 있던 여섯 명의 여전사가 치우비의 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칼을 떨어뜨리며 넘어졌다. 그리고 던져진 두 개의 흙덩이는 각각 줄 앞에 섰던 여전사 두 명을 맞혔고 여전사들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해 뒤로 밀려나며 뒤쪽의 여전사들을 쓰러뜨리며 뒹굴었다. 그러나 두 명의 남은 여전사들에게는 제아무리 치우비라도 손이 미치지 못했다. '악'하는 소리와 함께 그 두 명의 여전사는 자신들의 칼에 목이 반이나 날아가 피를 뿌리며 뒹굴었다. 치우천과 치우비 모두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이 여자들은 진심인 것이다! 그러자 치우천이 노하여 소리쳤다. "무라! 정말 악독하군! 아우야! 그 귀신 같은 여자를 그냥 두면 안되겠다!" 그러자 엎어졌던 여전사가 깜짝 놀라며 외쳤다. "무라마이를 욕하지 마십시오!" "당신들, 명령을 못 지키면 무라가 죽일 것이므로 미리 죽는 것 아니오?" 치우천이 외치자 여전사는 펄쩍 뛰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무라마이는 좋으신 분입니다! 그분이 그러시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들은 하도 거짓말을 하니 못 믿겠소!" 그때 여전사가 다시 엉엉 울며 말했다. "우리 부족이 망합니다. 이것은 정말입니다. 아아..., 이것을 입밖에 내니 나는 이제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무라마이께서 욕을 먹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소? 내 아우가 무라와 자면 부족이 살고 안 그러면 다 죽는단 거요?" "이야기가 복잡합니다... 맹세코 정말입니다. 죽는 마당에 뭐가 무서워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제발 무라마이를... 무라마이를 만나보세요... 제발..." 그 여전사는 행여 치우비가 다시 방해할까 하여 칼을 짧게 쥐고 가슴에 팍 찔러서 자살을 해버렸다. 너무도 참혹한 모습에 치우비와 치우천은 서로를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그러다 치우비가 급히 외쳤다. "당신들 더 이상 죽지 마시오! 하나라도 더 죽으면 나는 절대 안 갈것이오!" 그 말에 여전사들은 엉엉 울면서 고개만 숙였다. 그러자 치우천이 나섰다. "아무리 그래도 당신들은 회의장 안에 무기를 숨겨왔고, 사람이 죽었으니 이것도 큰일이오. 어서 수습해 떠나시오." "언제 오시렵니까?" 하는 수 없이 치우천이 치우비에게 말했다. "비야, 이대로 두면 일이 커지니 내가 다녀오마. 둘 다 빠질 수는 없으니 내가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낫겠다." 치우비는 승리의 영예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여전사들이 약간 난처한 빛을 보이자 치우비가 쐐기를 박았다. "형님이 가시는 건 내가 가는 것과 다름없소. 그것도 싫으면 관두시오." "아닙니다. 감사히 모시겠습니다." "형에게 무슨 수작하면 모두 죽을 줄 아시오!" 여전사들은 염려 말라고 했다. 그들은 죽은 세 사람을 아쉬워하여 슬피 울면서 급히 시체를 업고 치우천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개명수는 이미 시합을 마쳤을 때 돌아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바닥의 핏자국을 보고 치우비는 한숨을 쉬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정말 정신을 못 차리겠네." 순간 치우비는 당황하여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까 발이... 발이 이야기를 들었을까? 만약... 만약 그랬으면..." 아까 '흥' 하며 사라지던 발의 쌀쌀맞은 눈매가 생각나서 치우비는 어쩔 줄 몰랐다. 치우천은 카린족들의 안내를 받으며 카린족의 막사로 거침없이 향했다. 무라나 누루마이를 만나 한번 따져보고, 만약 정 고집을 부리면 호통이라도 치고 나올 생각이었다. 허나 내심으로는 무라나 누루마이가 그 정도로 옹졸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카린 부족의 막사에 도착하자 치우천은 눈을 크게 떴다. 카린 부족의 막사는 여느 막사처럼 가죽이나 나무로 지은 것이 아니라 색색의 새털로 짜여져 아주 화려했기 때문이다. 막사는 열 채 가량 되었는데 모두 커서 한 막사에 백 명 이상도 들어갈 듯싶었다. 그런데 카린족 여전사들이 모두 중앙의 가장 크고 화려한 막사 앞에 줄을 지어 서있다가 치우천이 다가오자 모두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절을 했다. 치우천은 그 모습이 오히려 더 보기 싫어서 눈살을 찌푸렸다. 치우천이 성큼성큼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아까 죽은 사람말고 또 주신 말을 하던 다른 여전사가 부리나케 치우천의 뒤를 따르려 하기에 치우천은 지나 말로 한마디 했다. "필요 없소." 그러나 그 여전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가라 권하고 여전히 따라들어왔다.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누루마이와 무라가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많은 음식과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술이 차려져 있었다. 무라나 누루마이도 가면은 벗지 않았으나 아까와는 달리 화려한 새깃털로 짠 옷을 입고 있었다. 치우천이 들어서자 누루마이가 웃으며 말을 했다. 지나 말이었다. "희네가 오셨군?" "이제는 희네가 아니라 치우천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려 이곳에 왔습니다." "자네라도 와주어서 정말 고맙네. 혹 실례되는 일은 없었는지?" "좀 안된 일이 벌어졌었습니다." "일단 앉게나." 누루마이가 말하자 치우천은 엄숙하게 말했다. "일단 앉기 전에 한 가지 물어봐야겠소. 누루마이, 무라마이." 누루마이와 무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치우천이 말을 이었다. "주신 사울아비, 치우천이 말하오. 난 당신들이 좋은 사람들이라 생각했소. 그런데 두 가지 점이 마음에 안 듭니다. 그에 대해 납득가게 해주어야 앉겠고, 그래야 계속 벗으로 삼을 것이오." 그러자 이번에는 무라가 입을 열었다. "무엇이든 궁금한 점이 있으면 꺼리지 마시고 말하십시오." 조용하지만 온화한, 다소 굵고 나직한 목소리였다. 곧 치우천이 말했다. "첫째로, 당신들은 내 아우에게 묻지도 않고 그를 불러 그... 그... 후게자를 만든다고 했소. 하지만 나는 정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오. 내 아우는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오." 그러나 무라나 누루마이는 태연하게 듣기만 했다. 그녀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치우천은 좀 의아하게 한 번 헛기침을 한 다음 말을 이었다. "두 번째, 그렇다 해도 당신들 부족 습관이 그런 것이라면 그런 청을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부하들이 목숨을 걸게 만들어서 내 아우를 강제로 끌고 오려고 한 겁니까? 나는 정말 기분이 좋지 않소." 그 말을 듣고 무라와 누루마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아까 따라 들어왔던 여전사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건... 그건 저분들 탓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냥 가면 다들 죽는 게 낫다고 하지 않았소?" "부족 전체가 살고 죽는 것이 걸렸기에 그런 것입니다. 무라마이나 누루마이, 누구도 그런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이 부족 전체가 살고 죽는 일이란 말이오?" "아이구, 설명하자면 긴데요?" "아무리 길어도 난 들어야겠소.누루마이, 무라마이, 둘 중 한 분이 이야기해주시오." 그러면서 고개를 돌리자 무라는 어느새 화가 난 안색이 되어 있었다. 무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여전사에게 번개같이 다가와서 따귀를 철썩철썩 갈겼다. 너무도 빠르게 움직여서 치우천도 말릴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그래도 치우천이 말리려 하자 여전사는 안 된다는 듯한 눈빛으로 급히 치우천을 바라보았다. '하긴, 자기 부하를 자기가 치는데 내가 끼어들 일은 아니지.' 그래서 치우천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무리는 이윽고 여전사를 때리기를 멈추고 치우천에게 말했다. "정말 미안한 일입니다. 다만 좋게 청하려 했을 뿐인데... 부하들이 오히려 기분을 상하게 해드렸다고요..." "기분 상했습니다. 하지만 할 수 없죠. 일단 사정이나 들어보리다." 그 여전사의 얼굴이 환해지며 물었다. "사정 이야기를 해드리면 도와주시겠습니까? 저희 무라마이께서는 정말로 좋으신..." 그러자 무라가 다시 그 여전사를 노려보았고, 여전사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무라가 치우천을 쳐다보며 공손하게 말했다. "나도 부끄러웠습니다. 세상에 어느 여자가 뻔뻔스럽게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무라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아우님의 뜻은 어떤지요?" 치우천은 약간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 아우는 전혀 그럴 뜻이 없었소." 그 말을 들려주자 무라는 갑자기 흠칫하더니 조용히 치우천의 뒤로 돌아섰다. 그 순간 무표정한 눈에 눈물이 조금 글썽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무라는 곧 다시 태연한 음성으로 뒤돌아선 채 말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건 당연히 아우님의 뜻이지요. 다만 나래님 같은 영웅을 볼 수 있어서 기뻤답니다. 이름을 떨치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나래가 아니라 치우비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때 뒤에 서 있던 여전사가 갑자기 그 잘에서 엎어지면서 엉엉 소리를 내며 통곡을 했다. 치우천이 깜짝 놀라서 보니 저만치에서 누루마이도 고개를 푹 숙인 채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무라는 치우천에게 등을 보이고 뒤로 돌아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치우천은 이상하다 여겼으나 이것이 속임수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야릇했다. 속임수라 생각하면 다 속임수 같았고, 아니라고 생각하면 정말 절실한 사연이 있는 것도 같았다. 치우천은 곧 생각에 잠겼다. '카린 쑤앙마이족 여전사들은 유명한 전사들 같던데 설마 속임수로 이렇게 우는 꼴을 보일까? 누루마이만 해도 칼을 든 채로 유망을 만나려고 싸움도 마다하지 않으려 했잖은가? 여전사들도 아까 비를 못 데려가게 되니 정말로 자살하려 했었다. 속임수 같지는 않은데...' 그러나 비렴의 당부나 아우 비가 공손발을 생각하는 것이 떠오르자 굳이 간섭해서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더구나 무라에게 호감을 가지기는 했었지만 만난 지 오래된 친구도 아니었다. 치우천은 조금 생각하다가 마침내 그냥 조용히 고개만 숙여 보이고 막사를 나서려 했다. 아무도 그를 잡지 않았다. 그러나 막사의 새깃털 휘장을 막 들치는 순간, 치우천은 그 많은 여인족들이 전부 땅에 주저앉아 울고 통곡하는 모습을 보았다. 치우천은 깜짝 놀랐다. '이 여자들이 전부 왜 이러지? 미쳤나?'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치우천도 몹시 난처해졌다. 대놓고 붙들었으면 아마 어떻게든 헤치고 나와버렸을 테지만, 막상 붙들지도 않고 울고만 있는 것을 보니 너무 측은해졌다. '아무래도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구나... 어떻게 하나?' 치우천은 마음이 약해져서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사울아비다. 남의 어려운 일은 도와주어야 한다. 하물며 이꼴을 어떻게 그냥 보는가? 아무리 이 여자들이 믿을 수는 없다 해도 이런 꼴을 보이는 데에는 분명 곡절이 있을 거이다. 아우를 장가보내지는 않더라도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보는 게 좋겠다' 치우천은 다시 휘장을 내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무라와 누루마이, 그리고 여전사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굳은 듯 그대로 있었다. 누루마이는 몇 년이나 더 늙어 보인 듯했고 여전사는 통곡을 하고 있었으며 무라도 조용히 서 있었지만 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꾸며서 할 수 있는 짓거리는 절대 아니었다. 그것을 보자 치우천은 결심을 했다. '좋은 일을 하는 데 무슨 이유가 있는가? 이들도 사람이고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도와야 하는 것이 안파견 한님의 뜻이 아니던가?' 치우천은 갑자기 활달하게 웃으며 누루마이 앞으로 가서, 잘 차려진 말린 과일 중 하나를 빼어 쏙 입에 넣었다. 그러면서 치우천이 말하기 시작했다. "아주 맛있군요. 맛있어요. 당신들의 부탁은 들어주지 못하지만, 이런 좋은 대접을 받았으니 그냥 갈 수는 없군요. 우리 이야기나 좀더 할까요?" 치우천이 말꼬리를 늘이자 통곡하던 여전사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치우천은 일부러 과일을 우물거리며 계속 말했다. "나도 내 아우도 무라, 당신이 싫은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훌륭한 전사이고 아주 존경할 만한 마음을 가진 것 같습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내가 모든 청을 거절했지만, 나나 내 아우를 아직 벗으로 여깁니까?" 그 물음에 무라는 역시 석상같이 뒤돌아선 채 고개만 단호하게 끄덕였다. 흰머리칼이 어깨 위에서 출렁이며 흔들렸다. 그것을 보고 치우천은 말을 이었다. "나도 당신들을 벗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내가 안 된다고 말한 것말고,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내 아우도 기꺼이 도울 것입니다." 그 말에 누루마이는 잠시 고개를 들고 치우천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다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된다, 안 돼. 자네가 아무리 영리하고, 자네 아우가 아무리 힘이 세도 그냥은 안 돼." "누루마이, 주신 사울아비 치우천이 말합니다. 아직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지만, 당신들은 우릴 도와주었으니 우리도 당신을 돕고 싶습니다. 벗으로서 무슨 일인지 묻지도 못합니까?" 누루마이가 다시 말했다. "이것은 싸움도 아니고, 머리로도 될 일이 아니네." "무슨 일인데 그렇습니까? 꼭 내 아우가 장가를 들어야 되는 이유가 뭡니까?" 그러자 누루마이는 슬픈 표정으로 무라를 돌아보았고, 무라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누루마이가 슬픈 듯 고개를 돌려 지나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해주겠네. 무라는... 무라는 이번에 시집가지 못하면 괴물에게 시집을 가야 하기 때문이야. 무라는... 무라는 내 조카딸일세. 너무 마음이 괴롭네." 치우천은 깜짝 놀랐다. "괴물에게 시집가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누루마이가 깊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우리가 사는 카린산 주변에 괴물이 하나 있다네. 그런데 그 괴물이 무라를 얻고 싶다고 말했단 말일세. 괴물이 다시 오기까지는 여섯달도 안 남았네. 아마 회의를 마치고 우리가 돌아가면 괴물이 바로 찾아올 것일세." "괴물이라니, 믿을 수 없군요." "믿을 수 없어도 정말이네." "정말 괴물이라면 그놈을 잡아버리면 될 것 아닙니까? 왜 꼭 혼인을 해야 하는 겁니까?" "그 괴물은 상대할 수가 없어. 그놈은 원래 선인이었는데, 부정을 타서 타락해 괴물이 되어버렸다네. 그놈은 정말로 힘이 센데다가 마치 안개처럼 흐릿하고 투명해지는 재주가 있어서 어떤 무기로도 해칠 수 없고 불이나 물이나 무엇으로도 상처 입힐 수가 없다네. 단 하나, 특이한 사람의 주먹만이 놈에게 타격을 줄 수 있지." 치우천이 고개를 갸웃하자 누루마이가 다시 말했다. "그 괴물은 무라의 부족 사람들을 많이 해쳤네. 그 때문에 무라는 쑤앙마이께 싸움기술을 배운 후 괴물과 용감하게 대적했지. 무라가 무기를 쓰지 않고 주먹으로만 싸우는 것도 사실 그놈과 싸우기 위해 배운 기술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일세. 더구나 무라는 달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아이라서 무라의 주먹만이 그 괴물에게 상처를 줄 수 있었다네." "달의 정기라... 그런데요?" "그러나 무라는 괴물에게 졌다네. 세 번이나 찾아가서 겨루었으나 이길 수가 없었다네. 그 괴물은 쓰러진 무라를 해치지 않고 희한한 소리를 했지. 그 괴물은 무라가 마음에 들었으니, 무라가 자신에게 자진해서 두 해 내로 시집을 와준다면 더 이상 무라의 부족을 해치지 않겠으며 도리어 무라의 부족을 지켜주겠다고 했다네. 그래서 무라도 하는 수 없이 부족을 위해 그렇게 하기로 맹세를 했다네." 그 말을 듣고 치우천은 고개를 다시 갸웃했다. "그 괴물의 말을 어찌 믿는단 말입니까?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냥 시집가버리면..." "괴물에게 무라를 어찌 보내겠는가? 더구나... 더구나..." 누루마이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울먹거리다가 덧붙였다. "그 괴물은 무라와 같이 살려는 것이 아닐세! 무라의 기운을 빨아 먹으려는 것이야! 무라는 달의 기운을 받아 태어난 아이일세. 그래서 그 괴물은 무라의 기운을 빨아먹고 부정을 씻어서 다시 예전의 선인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네!" 치우천은 놀랐다. 믿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누루마이의 말은 거짓말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누루마이가 다시 울면서 말했다. "그것을 안 것은 그 일이 있는지 한 해 뒤, 어느 지나가던 다른 선인에게서였어. 그러나 그 선인도 그 괴물이 너무 강해서 도와줄 수 없다고 말했다네." "그런데 여전사들은 왜 마구 스스로 죽은 겁니까?" "무라의 부족은 무라를 대단히 존경하지. 그래서 부족사람들은 무라에게 부족이 망하는 한이 있어도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무라는 이미 약속해버린 것이니 할 수 없다고 했다네. 부족을 망하게 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어. 그래서 부족사람들은 모두가 죽더라도 무라만큼은 살리자고 또 맹세를 해버렸네! 그 때문에 방법이 없자 부족 전사들은 죽어서라도 자네 아우를 청하려고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것일세!" 치우천은 고개만 끄덕였고 누루마이는 계속 서글프게 이야기했다. "그래서 우리는 쑤앙마이께 도움을 요청했고 쑤앙마이께서는 좋은 꾀를 일러주셨네. 괴물은 두 해 내로 무라가 시집오면 된다고 했지만, 그 사이에 무라가 아주 힘센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지아비와 함께 괴물을 물리치면 된다는 것일세. 그러나 적합한 남자를 찾기는 지극히 어려웠어. 생각다못해 나는 세상의 모든 부족이 다 모이고 제일 뛰어난 용사들이 모일 이 태산 회의에서 무라를 데리고 온 것이야. 그래서 간신히 한 사람을 찾았는데..." 누루마이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자 치우천이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난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내 아우가 그 괴물을 이길 수 있을 거라면 굳이 무라에게 장가들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닙니까? 그 달의 정기가 없으면 그 괴물을 아무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인가요?" "슬프게도 그렇다네. 그러나 무라에게 장가를 들어서 달의 정기를 나누어 받은 자가 아니면 괴물을 죽일 수 없는 거야. 자네 아우가 아무리 힘이 세도 그 고물을 건드리지 못하네. 그렇지 않으면 무라처럼 달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남자를 찾아야 하는 것인데, 그런 남자를 어떻게 찾겠는가? 무라 같은 아이는 수백 년 만에 한 번 태어날까말까 한 아이란 말일세!" 이쯤 되니 치우천도 당장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누루마이는 계속 말했다. "더군다나 달의 정기를 몸에 받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지. 웬만한 사람은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달의 정기를 받은 후 일곱 날이 지나면 죽기 십상이야. 그러니 자네 아우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무라는 괴물에게 가서 죽는 수밖에..." 그때 장승처럼 가만히 서 있던 무리가 그만두라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누루마이는 입을 다물었으나, 이번에는 주신 말을 하는 카린족 여전사가 나래에게 말했다. "치우비님이 도와주시지 않는다 해도 우리 부족은 무라마이를 위해 모두 목숨걸고 괴물과 싸울 것입니다! 무라마이님을 어떻게..." 치우천은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세상에 그런 괴물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놈은 선인이 된다 해도 흉한 선인이 될 것이니, 살려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누루마이, 무라, 우리가 도와주겠습니다." 그 말에 누루마이가 대뜸 물었다. "그러면 자네 아우를 무라에게 장가보내겠다는 것인가?" "그건 곤란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방법은 있을 것입니다. 달의 정기를 받으면 상처를 입는다 했으니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세 큰 스승께 여쭈어보면 무슨 방법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자 누루마이는 눈을 크게 떴다. "세 큰 스승이라면...? 주신의 풍백 운사 우사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분들이라면 방법이 있겠지만, 세 스승은 결코 주신 밖 사람에게는 술법을 쓰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스승님들을 직접 카린까지 가시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만 어쨌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꼭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루마이는 절망스러운 듯 고개를 저었다. "세 스승은 도와주지 않을 것이야. 만약 자네가 도와준다 해도 자네들이 쓸 수 있을 만한 그런 쉬운 방법으로는 그 괴물을 이기지 못해.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쑤앙마이께서도 벌써 아셨을 것이야. 세 스승을 직접 모시지 못한다면 힘들 것일세." 곤륜의 쑤앙마이(서왕모)는 이미 천 살을 살아 선인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전해지는 대술법가였다. 주신의 삼사도 대단했지만 쑤앙마이는 그들을 능가한다고 전해지는 술법가였다. 그녀는 천년 전 홀몸으로 카린산에 올라 도를 깨우친 후, 그 힘으로 부족을 모아 카린산 전체의 부족을 이끌었고 여인족 제도를 만들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신비의 존재였다. 그런 쑤앙마이도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을 듣자 치우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무어라 딱 이렇다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좌우간 도울 수 있는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말이라도 고맙네만 방법이 없네. 자네는 우리가 전에 유망을 찾아간 것을 기억하는가?" "기억합니다." "우리는 지나족과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닐세. 하지만 그 일 때문에 유망에게 도움을 청하러 간 것이야. 쑤앙마이가 애지중지 가르친 소녀도 내주었고 그 건방진 유망의 비위를 다 맞추어주었네. 그러나..." "유망이 무엇을 해준다고 한 것입니까?" "유망에게는 달의 정기를 받은 보석이 있다고 들었네. 바로 그것과 바꾼 것일세. 그 보석으로 무기를 만들면, 그 놈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한 것이지." "그런데요?" 갑자기 누루마이가 버럭 화를 냈다. "제기랄! 그 보석은 아무 소용이 없네! 색깔만 달빛과 비슷하지 달의 정기를 받은 보석이 아니야! 귀하기는 하지만 우린 헛걸음만 한 것이네. 그 전에는 혹시나 했었지만 이제는 정말 자네 아우말고는 방법이 없어!" "다른 힘센 용사들도 있지 않습니까?" 마침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무라가 입을 열었다. "보통 용사가 괴물을 죽일 수 있다면, 내가 죽였을 겁니다. 나는 괴물과 세 번이나 겨뤄봤어요. 나는 태산 회의장을 다 돌아보았지만, 괴물을 이길 만한 사람은 단 세 명뿐이었습니다. 달의 정기가 힘을 더세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괴물을 칠 수 있게 해주는 것뿐이죠. 그러므로 강한 사람이 받아야 합니다." "그게 누구누구요?" "형천과 끽구, 그리고 나래, 아니 치우비입니다." "미안하지만 형천이나 끽구는 안 됩니까?" "그분들은 너무 늙었어요. 부족을 위해서라면 해골에게도 시집갈 수 있지만 나이 많은 사람은 그 정기를 못 받아요. 스무 살이 안 된 젊은이만 가능하죠." "거 참, 까다롭군요." 치우천은 머리를 긁적였다. 품위없는 행동이지만 치우천이 하면 기이하게 다른 사람 눈에는 대단히 매력적으로 보여 무라도 살짝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치우천이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믿을 수 없습니다. 쑤앙마이가 틀릴 리는 없지만, 또 그 괴물을 상대할 좋은 방법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제가 반드시 알아보겠습니다." 그러자 누루마이가 서글프게 말했다. "다른 방법은 없네. 정말... 정말 자네 아우는 싫다는가? 무라가 정말 뭐가 못해서..." 치우천이 고개를 저었다. "무라마이가 내 아우에게 좋은 느낌은 있지만 아직 진심으로 내 아우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내 아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라마이는 좋은 분이지만 아직 내 아우는 그리 가깝게 느끼지 않습니다. 단순히 그런 이유만으로 그런 짓을 하는 건 짐승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에 누루마이가 버럭 화를 냈다. "부족이 다 죽어도 말인가? 그 많은 부족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인데 그만한 부탁 하나 못 들어준다는 말인가?" 그러자 치우천이 못을 박듯이 말했다. "제가 약속하겠습니다. 반드시 방법을 찾고, 그 괴물을 물리치겠습니다." "만약 안 되면?" "제 목숨을 걸죠." 누루마이가 거의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그러느니 자네 아우에게 부탁하는 것이 낫잖은가? 시집가지 않아도 좋고 모든 것을 영원히 아무도 모르는 비밀로 해줄 수도 있네!" 그러나 치우천은 완강했다. 이상하게 여자 문제에 있어서는 치우천은 대단히 완강했다. "일단 그냥 싸워보겠습니다." 별안간 누루마이가 눈을 빛내며 다가와서 치우천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치우천은 이 여자가 왜 그러나 싶어 당황했는데 갑자기 누루마이가 냉소를 흘렸다. "자네, 홀려 있군. 아, 이제 끝장이다..." "네?" "자네는 분명 누군가의 주술에 걸려 있네. 아주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력한 주술에! 그래서 여자 문제만 나오면 그리 피하고 외면하는 것이야! 자네만 아니라 자네 아우에게까지도 영향을 끼칠 만큼! 그것을 아는가?" 순간 치우천은 섬뜩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자신은 여자와의 관게에서는 항상 청백했고 사심이 없었다. 혈기가 번득이는 젊은 나이인데도 그러했다. 신시에서도 치우천을 좋아하는 여자들은 많았고 유혹도 많았다. 그러나 치우천은 아직 숫총각 그대로였다. 가깝게는 툰툰의 부락에서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고 소녀 같은 절세 미인이 유혹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치우천은 단 한 번도 그런 요구에 응한 적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주술에 걸린 적이 없습니다." "아니, 틀림없네. 아주아주 강하고 흔적도 보기 힘든 그런 주술이야! 나는 쑤앙마이의 사람일세! 그리고 이런 남녀관계의 일은 쑤앙마이가 세상 제일이네! 주신 삼사나 선인도 못 따라와! 나는 알 수 있네. 자네는 주술에 씌어 있어! 그것도 상상도 못할 만큼 무서운 여자의 주술에! 이건 풀 방법도 없네! 쑤앙마이께서도 못 푸실 것이야!" "말도 안 됩니다. 그런 여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왜 저에게 그런 주술을 겁니까? 더구나 저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거짓말! 나는 괜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네. 자네는 분명 숫총각일세! 아직 한 번도 여자와 자본 이리 없지? 아니, 자볼 기분이 들지 않았지? 나는 괜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닐세. 아, 이제 끝장이군. 자네는 결코 우리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것일세..." 치우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누가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이것도 누루마이의 술책일까? 아니면 정말일까? 약간 누루마이가 기가 꺾인 듯이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은 말게나. 그 주술이 자네를 해치는 것은 아닐세. 그리고 그 주술을 건 여자는 반드시 자네 앞에 다시 나타날 것이야. 다시 나타나지 않으려면 뭐 하러 그 주술을 걸었겠는가? 자네는 신경 쓸 것이 없네만... 우리는 그 때문에 망했군, 그래..." 누루마이의 목소리는 무척 서글픈 어조를 띠고 있었다. 치우천이 고개를 저었다. "난 믿을 수 없습니다. 좌우간 당신들 일은 꼭 도와주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치우천은 밖으로 나와버렸다. 만에 하나 누루마이가 정말 주술이라고 말하는 것이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험해본다고 아무 여자나 유혹하는 것은 도저히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아니, 그것도 또 주술 때문일까? '내가 유망의 비밀을 보고 한숨을 쉬었는데 내가 그 꼴이 되었구나! 좌우간 생각하지 말자!' 아무튼 치우천은 그날부터 큰 고민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그 말은 치우비에게조차 하지 않았고, 단지 누루마이와 무라의 이야기만을 들려주었다. 치우비는 지금 발 생각에 빠져서 다른 여자는 눈에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그 부탁을 들어줄 리 없었다. 두 형제는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을까 한번 생각해보자는 이야기만 잠깐 나누었을 뿐이다. 벗들의 결의 치우비와 치우천이 울적하여 느지막이 막사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요란한 환영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사이에 모였는지 사울아비들이 다 모였고, 친구인 양역을 비롯하여 다른 젊은 사울아비들도 잔뜩 모여 있었다. 그리고 다른 부족의 친구들까지 다 모여 있었다. 응원하던 자들이 다 몰려온 듯 했다. 그 앞에는 오랜만에 아들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아버지 치우우레도 있었다. 위엄 있는 치우우레는 묵묵히, 엄숙하게 서 있었으나 아들들이 나타나자 그만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치우우레의 끔찍한 자식 사랑을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남몰래 흐뭇하게 웃었다. "이 녀석들아! 아이구, 이 녀석들아!" 치우우레는 두 아들을 한꺼번에 감싸안고는 마구 흔들어댔다. 실로 치우우레로서는 생애 최고의 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용사였지만 그렇게 큰 자리에서 나래처럼 당당하게 승리자가 된 적은 없었다. 그리고 형인 희네도 용감하게 끽구와 맞서서 전말이야 어찌 되었건 결과적으로는 항복을 받아내지 않았는가? 사실 희네가 끽구와 맞서 나갔을 때 눈이 뒤집히게 놀란 양역이 만사를 제치고 달려가 치우우레에게 알렸고, 치우우레는 충성스럽고 엄격한 사람임에도 모든 것을 잊고 달려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일이 잘풀려 희네는 무사했고, 나중에 비렴 이야기를 슬쩍 들으니 주신이 이기도록 꾀를 내고 지휘한 것이 바로 치우천-희네였다고 하니 치우우레로서는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공보다도 치우우레는 아들들이 그 험한 시합을 겪고도 무사한 것만이 그저 반가웠다. "이 녀석들아! 희네 이놈아! 그런 위험한 일랑 다신 마라. 다신 하지마라!" 치우우레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몇 번이나 이야기했고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에 치우천도 눈물지었다. 그리고 치우비도 웃으며 말했다. "이젠 천, 비입니다. 아버지. 한웅님 앞에서 이름을 받았다구요!" "그래도 내 마음에는 항상 어린 희네, 나래다. 이놈들아, 난 너희 아비잖느냐!" 치우우레는 텁석부리 수염을 아들들의 뺨에다 따갑게 비비다가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이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울아비 치우천, 치우비는 듣거라." 치우천과 치우비도 곧바로 공적인 자세로 돌아가 정중히 말했다. 아버지를 대할 때는 항상 이렇게 해왔던 것이다. "사울아비 치우천 듣고 있사옵니다." "사울아비 치우비 듣고 있사옵니다." "너희는 하룻밤 사이 한웅님께서 이름을 정해주셨다더구나. 그리고 둘 다 한웅님 곁을 모시기로 되었다던데,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그것은 아주 드문 일이니 이름을 소중히 하고 더욱더 한웅님을 잘 모셔야 하느니라. 알았는가?" "예!" "사울아비의 몸가짐을 잊지 말고 잘 지켜야 할 것이다. 그릭고 너희가 이름을 가지게 되기는 했다만 성인식 말인데..." 치우비가 약간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미 이름을 받았으니 성인식은..." 그러자 치우우레가 불호령을 내렸다. "이놈!" 치우비는 얼른 목을 움츠렸다. 치우우레가 곧 호통을 쳤다. "한웅님께서 어여삐 여기셨지만 아비인 나로서는, 또 너희들의 사울아비 스승으로서는 성인식을 치르지 않고 둘 수 없다. 성인식도 없이 이름을 받으면 너희가 욕을 들을 것이다! 사울아비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야! 그러니 성인식은 치르도록 한다! 특히 너희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이름을 날린 용사들이니 성인식도 어려운 일들로 한다!" 치우천과 치우비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워낙 엄한 분이라 그런 특전을 그냥 받을 생각은 하지도 않는 고지식한 사람이기는 했으되, 한웅님이 내린 일조차 그리하리라고는 치우천조차 생각 못한 일이었다. 성인식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보통은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해내는 것이었다. 그 다음 떨어진 치우우레의 말이 의외였다. "우선 치우비, 너는 카린산의 여인족 족장 무라미에게서 도와달라는 청이 있었으니 그 일을 마무리짓거라. 신시로 돌아갔다가 처리하든, 지금 처리하든 알아서 해라. 그게 네 성인식의 일이니라." "네? 무라마이 말입니까? 그 흰 머리의..." "난 모른다. 다만 정중한 요청이 와서 너만이 도울 수 있는 일이며, 부족 전체가 걸린 일이라기에 그러마 한 것이다. 한웅님을 믿고 그 먼 곳의 부족이 왔는데 어찌 모른 척하겠느냐?" "허... 아이구, 그것은..." "그 이름은 한웅께서 내리신 것이니 그냥 써도 좋으나 몇 년이 걸리더라도 성인식은 꼭 해내야 한다. 안 그러면 너를 어른으로 인정해 줄 수 없느니라!" 그러고 보니 여인족 전사들은 아버지 치우우레에게는 혼사 이야기는 하지 않고 그냥 도와달라는 요청만 한 모양이었다. 치우비는 좀 망설이다가 기왕 이렇게 된 것, 굳이 알릴 것 없이 알아서 하자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다. 치우비는 또 고민거리와 부딪히게 되어 아찔했지만 별 수 없었다. 다른 부족들이 도움을 청할 때 사울아비를 보내 돕는 것도 중요한 성인식 방법의 하나이기는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버지인 치우우레가 그렇게 멀고도 먼 땅 쑤앙마이의 일을 아들에게 맡기는 것을 보고 엄한 아버지라고 혀를 내둘렀다. 이번에는 치우천을 보고 치우우레가 말을 건넸다. "그리고 치우천, 네게 마땅한 일은 아직 생각나지 않는구나. 일단은 아우와 같이 가서 아우를 도와라. 그러나 네 성인식은 신시에 도착해서 그때 반드시 치르도록 한다. 알겠느냐?" 형제는 할 수 없이 대답했다. 그렇게 정이 많은 치우우레였지만 공적인 일에는 바늘 끝만큼도 감정을 개입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말이 떨어진 이상 치우우레는 목이 떨어져도 말을 바꾸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치우천과 치우비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동시에 대답했다. "예!" 바로 그때 치우우레의 뒤쪽에서 다시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울려왔다. "그 성인식은 우리가 준비하는 것이 어떨까요? 치우우레 아저씨." 그러면서 나타난 두 사람을 보고 치우천 치우비는 낯빛이 변했다. 그들은 바로 그들과 앙숙이며 사사건건 그들 형제를 남몰래 괴롭혀 오던 치우바람 치우가람 형제였던 것이다. "너희가 여길 어떻게 왔지?" 치우비가 눈을 크게 뜨며 묻자 형인 치우가람이 웃으며 능글맞게 말했다. "나래. 아니지, 아니지, 치우비. 너 아주 대단하더구나. 대용사가 되었어? 주신에 있을 적엔 일부러 감추었던 거냐?" 아무리 좋게 들으려 해도 빈정대는 말투였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치우비는 눈만 부릅뜬 채 그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이어서 치우바람이 뒷짐을 진 채 그들 주위를 빙글 돌며 말했다. "좌우간 우리 집안 사람인 너희가 이리도 유명해졌고 한웅님 눈에도 들었다니 아주 기쁘구나." 전혀 기쁜 기색은 없으면서 치우바람은 공치사를 하듯 넌지시 말을 이었다. "아마 이 소식을 들으면 너희 외할아버지도 많이 기뻐하실 거다." 이것은 분명 고자질하여 고시울률을 이용해 치우 형제를 해코지하겠으니 각오하라는 말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 귀에도 내용은 별것 아니되 심히 거슬리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형제는 그때까지도 꾹 참았으나 치우바람은 가까이서 이죽거리듯 한마디를 더했다. "아주 좋은 칼을 내리실지도 모르지. 그러니 목을 잘 씻어두는 건 어떨까?" 순간 치우천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그 눈빛에 좀 질린 듯 치우바람은 슬슬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을 보며 공연히 거드름을 피웠다. "태산 회의라고 대단한 구경거리가 있을 줄 알았더니 순 더러운 것들투성이구나. 안 그래, 형님?" "흙투성이 싸움질해서 뭐가 좋은지? 나 원 참." 그러고도 치우가람 치우바람 형제는 거드름을 피우며 한참을 떠들어댔다. 그들은 옷도 호사스럽고 번쩍거리는 장식을 수도 없이 달았으며 긴 비단 망토와 손에까지 흰 비단을 걸쳐 눈이 부실 정도였다. 실용성 위주로 땀내와 흙내를 풍기는 뭇 용사들과는 아예 달랐다. 허리의 칼도 흠집 하나 없는 아주 멋진 구리칼이었다. 그러나 많이 싸워본 자들은 전혀 흠이 없는 칼을 찬 남자를 절대 용사라 부르지 않는다. 날은 항상 다듬어 세웠더라도 수많은 흠집과 격전의 자국이 있는 칼을 찬 자가 진정한 용사인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그 칼을 보고 그 안에 있던, 용감하지만 더러운 차림의 진짜 용사들은 저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더구나 그들의 화려한 차림은 싸움을 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장식품 같았다. 사울아비들은 이번 회의 때는 흰옷을 입고 있어 다른 사람들보다 좀 나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들의 화려한 꾸밈은 부족장의 마누라들도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치우천 치우비를 대하는 태도도 영 무례하니 거기에 모인 치우천 치우비의 친구들은 모두 이를 갈기까지 했다. 그 자리에는 양역을 비롯한 젊은 사울아비들과 야율쿠리, 치베, 초초룬에다가 울쿠타 야쿠타 형제와 울라트까지도 소식을 듣고 모여 있었고, 앗수라트 부족장과 보돈차르마저도 특별히 짬을 내어 왔는데 그런 무례한 자들이 설치자 모두 화를 냈다. 치우가람 치우바람 형제는 한참을 거드름을 피운 뒤에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정작 치우우레는 용감한 사울아비 스승답지 않게 아무 말도 못하며 한숨만 쉬다가 나중에 오겠다면서 역시 그 자리를 떠났다.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치우천은 한숨을 지었다. 아버지가 저놈들에게 쩔쩔매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치우우레는 자리가 높았고 부하나 따르는 자들도 많았지만 워낙 소박하게 살아서 땅도 재산도 없었다. 그런 치우우레에게 땅과 집을 내준 것이 바로 그들 형제의 아버지이자 지금 치우 집안의 치우웃뜸인 치우괄괄이었다. 물론 치우괄괄은 좋은 성격이라 호의로 그런 것이지만, 이후 어느 날 갑자기 중풍에 걸려 사람도 못 알아보는 폐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치우가람 치우바람 형제가 아버지를 업고 치우웃뜸 행세를 하고 있었다. 더구나 치우우레에게도 그 땅과 집들을 자신이 내준 것인 양 생색을 내어 되돌려받을 궁리를 하곤 했다. 그러니 치우우레로서도 걱정이 되고 그들에게 굽힐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야 훌훌 살아가면 그만이지만 치우우레를 따르는 사울아비만 백 명이 넘고, 함께 모여 땅을 갈고 사는 부족사람이 천 명이 넘었다. 만약 땅을 빼앗기면 그들은 하루 아침에 유랑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물론 치우우레야 한웅의 신임을 받고 있으므로 괜찮지만, 치우우레는 자신을 믿고 모여든 부족원들이 그런 꼴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굴욕을 버티어 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뜻 때문에 치우천과 비 형제도 그들 형제에게 늘상 눌리기만 했다. 더 무서운 것은 그들이 외할아버지인 고시울률의 개가 되어 치우집안을 팔아먹을 생각마저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을 막을 자가 치우 집안에는 더 이상 없는 것이 서글픈 현실이었다. 치우웃뜸의 권위와 고시울률의 콧김 때문이었다. 그들과 치우우레가 나가자 치베가 가장 먼저 화를 내며 외쳤다. "도대체 저런 자들이 사울아비란 말인가?" 그러자 난데없이 부루벼락이 외쳤다. "흥! 저런 자들이야말로 정말 사울아비라 하지." "당신들같이 용감한 자들이야말로 진정 사울아비 아닌가?" 사실 치우 형제가 매개가 되었지만 시합을 거치며 만난 열두 명의 젊은 주신 사울아비들은 모두 훌륭한 재주가 있었기에 직접 겨루어본 치베도 감탄하고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치우 형제의 벗들도 범상한 자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사울아비들도 그 용사들을 좋아했다. 특히 야율쿠리와 초초룬은 부족장의 아들딸인데도 퍽 소탈하고 인간미가 있어서 금방 다들 호감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치우 형제가 오기전에 그들은 이미 함께 거나하게 한잔 한 연후라 모든 부족을 초월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부루벼락의 말이 좀 뜻밖이라 주신 사정을 모르는 외부 친구들은 의아해했다. 그러자 마파람이 덧붙였다. "난 원래 거짓말을 못한다. 솔직히 주신 사울아비들은 훌륭한 사람도 많지. 하지만 썩은 놈들이 더 많다." 도단이가 굳은 목소리로 나섰다. "그래도 그런 말을 하면 못씁니다, 마파람 형." 그때 단군인 질쾌가 술잔을 탁 내려놓으며 외쳤다. 덩치 큰 질쾌가 토기 술잔을 내리치는 바람에 술잔은 산산이 깨져 버렸다. "우리 사울아비들이 피땀 흘려 밖에서 싸우고 다른 부족을 사귀어 친구로 만들면, 저 개 같은 놈드리 다 망쳐놓지! 그러면서도 우리를 항상 비웃어! 솔직히 못해먹을 노릇이야!" 이미 술에 취한 나이 어린 쇠돌이가 끼어들었다. "어어... 형님들... 신시에는 더 훌륭한 사울아비들이 모이는 것 아닌가요?" 그러자 좀 과묵한 편인 부달이 되물었다. "자네 신시에 가봤나?" "듣기만 했어요. 하지만 굉장히 번화하고 사람도 많고..." "그건 그래. 하지만 신시는 시궁창이지." "네?" "신시의 높은 놈들은 전부 저렇게 번드르르하게 걸치고 세상에 자기들밖에 없다고 믿는 놈들이네! 같은 사울아비인 우리도 저렇게 무시하는 게 보통인데, 다른 부족사람들을 사람 취급이나 하겠는가? 나는 저 꼴이 보기 싫어 아버지 말도 어기고 일부러 신시에서 뛰쳐나와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이라네." 부달의 말에 치우천 치우비 형제마저도 놀랐다. 그들 형제는 몇 번 신시에 놀러 가본 일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신시를 사랑했다. 그런데 신시가 그런 곳이었다니? 치우비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신시가... 정말 그렇습니까?" 부달이 술을 연거푸 들이켜며 목청을 높였다. "흥! 그러냐고? 방금 나간 저놈들 정도는 그래도 나은 편일세. 별놈들이 다 있어. 여기 다른 부족 친구들도 있지만 한번 물어보게. 다들 신시에 가고 싶어하긴 하지. 그러나 정작 신시 깊은 곳에 가본 사람들은 다 도리머리질을 친다네!" 이번에는 부루벼락이 나섰다. "내 처음에 천 자네를 빈정댄 것도 자네가 그런 빌어먹을 놈들의 하나였다고 오해해서일세. 그런 놈들이 좀 많은 게 아니니, 주신도 이제는 다 되었다는 사람이 많아. 유명한 용사들과 이름 높은 스승들이 신시와 주신을 버리고 산으로 들로 들어가버리는 형편 아닌가!" 분위기가 좀 험악해지고 듣기 거북한 소리가 나오자 보돈차르가 조용히 일어서며 치우천 치우비에게 눈짓을 했다. 천과 비는 다른 부족사람들을 배웅하러 온다고 하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야율쿠리나 초초룬, 치베, 울쿠타와 야쿠타, 울라트, 앗수라트 부족장과 앙가마이 부족장 등 모두 그 뒤를 슬그머니 따라나섰다. 아무래도 모두들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사울아비들은 굳이 따라오지는 않았고 다만 어릴 적부터의 친구인 양역만이 걱정이 되는지 따라왔다. 잠시 후 치우천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할 이야기가 있습니까? 그럼 저 뒤로 가죠." 그들이 묵묵히 사람없는 빈 막사를 찾아 자리를 잡자, 먼저 야율쿠리가 입을 열었다. "나는 키탄 울크리 부족의 야율쿠리다. 나는 치우천과 치우비의 벗이다. 그것은 조금도 변함이 없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벗들은 주신 사울아비면서 정작 주신에 대해 모르는 것 같아 내 한마디하겠다." 야율쿠리는 평소와 다르게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난 말재주가 없어서 짧게 말하겠다. 저들 형제를 만나기 전에 나는 주신놈들은 다 지나놈들 같은 돼지들이라고 생각했다. 욕해도 좋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다." 치우비는 놀랐다. "그게 정말이냐, 야율쿠리?" "그렇다... 하지만 너희는 그렇지 않았다. 그후 나는 우리 키탄족에도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있듯, 주신에도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전까지 나는 주신족도 우리가 제일 미워하는 지나족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어떤 키탄 사람은 주신족보다 지나족이 낫다는 사람도 있다..." 초초룬도 말했다. "나도 그렇다. 나는 사실 주신이 지나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미아우족이면 다 지나족을 제일 미워한다. 그러나... 나도 솔직히 말한다. 주신이 그 다음으로 싫었다." 치우천과 치우비에게 친구들의 말은 충격이었다. 머리 좋고 생각 깊은 치우천도 사실 주신의 실상이 그렇다고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치우 형제는 아직 우물안 개구리였던 것이다. 둘은 너무 놀라서 친구들에게 솔직히 말해달라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다들 숨김없이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울쿠타는 간단히 말했다. "간단해요. 주신이 지금 제일 세죠? 그러니 미움 받는거예요. 주신 사울아비들은 좋은 사람도 많죠. 하지만 제일 세니까 그만큼 미움 받을 수밖에 없어요." 이번에 야쿠타였다. "희네 형 나래 형... 아니, 천 형과 비 형을 만나기 전에 우리 부족이 만난 사울아비는 우리를 도와주고는 너무 많은 보답을 빼앗아 갔어요. 보물과 가축, 여자들까지 강제로 빼앗아 갔죠. 나중에 부족장님이, 사울아비를 부르지 않는 것이 더 나았을 거라고까지 하셨어요. 그래서 앞으로 우리 부족장은 어려운 일이 생겨도 주신의 도움은 안 받을 거예요." 울라트의 아버지인 타타르족 앗수라트 부족장 키타야가 조용히 말했다. "자네가 찾아오기 전까지 나는 주신인은 만나지 않고 있었네. 자네는 부족을 초월한 좋은 사람이었지만 말야. 이야기 하나 해주지. 전에 주신의 도움을 청하러 간 이웃의 작은 부족장이 있었네. 그런데 도움을 요청하는 자리에서 그러더라는군. '타타르족은 양하고 같이 산다는데 양처럼 한 번 울어보지, 그래? 그럼 도와주지.' 그 부족장은 너무도 화가 났지만 울분을 참으며 양 울음소리를 냈다고 하네. 부족이 망할 형편이었기 때문이야. 그러나 주신 사울아비들이 도와주고 간 다음 날, 그 부족장은 목을 매어 죽었다네. 너무도 부끄러워서 말야. 모두가 주신 사울아비를 무서워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친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세. 자네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고 어리니 아직 몰랐겠지만, 다른 부족사람들의 웃음에 속지 말게. 그들이 자네들 주신인들을 정말 웃음으로 환대하는 것이 아닐 수가 있으니까." 새로 앙가마이 부족장이 되어 여기까지 찾아온 이는 바로 어제 치우비에게 처음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던 나이 많고 현명한 용사였다. '구르'라는 이름의 그 부족장이 조용히 치우천에게 말했다. "좋은 사울아비도 많다는 것을 아네. 자네들도 그렇고, 여기 있는 젊은이들은 정말 훌륭하네. 그러니 주신이 아직 제일 센 부족인 것이지. 그러나 그보다 나쁜 녀석들이 더 많은 것 같네. 그런 자들은 자네들처럼 올바른 자들을 두려워하고 해치려 하네. 그로 인해 자기들의 더러움이 보이기 때문이지. 자네들도 조심하게. 밖에서 날아오는 화살보다 안에서 살짝 찌르는 칼이 더 무서울 수도 있는 것일세. 주신 사람들은 똑똑하고 끈기 있으며 부지런하네. 아주 좋은 점이지. 그러나 그만큼 건방지고 자기들만 알고 고집이 센 나쁜 점도 있다네. 자네들의 아버님은 처음 뵙지만 훌륭한 분이네. 그러니 자네들은 아버지 덕에 아직 세상의 더러움을 겪지 않고 살아왔을 것이네. 이제는 자네들도 어른이니 알아야 한다네. 내 말을 무례하다 생각만 말고 기억해주기를 바라네." 현명하고 지혜로운 말이었다. 치우천과 치우비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제껏 치우천 치우비는 주신이 최고이며 자랑스러웠고 어디에서나 주신인이라고 하면 다른 부족들이 인정해주고 좋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사실 그들 자신들이 빼어났을 뿐, 실제 주신의 모습은 좀 달랐던 것이다. 치우비가 너무도 실망하여 양역에게 물었다. "역아... 너도... 그렇게... 생각했니?" 그러자 양역이 대답했다. "나는 아직도 주신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그들 말도 맞아. 우리가 있는 마을이나 그 부근은 치우우레님 덕에 아주 좋은 것이다. 치우우레님이 대신 수모를 당하시는 것을 우리도 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치우우레님을 진심으로 따르는 것이지만. 좌우간 나도 이야기하마. 다른 마을에서 온 친구를 한 명 알았는데, 그 마을 사울아비 스승은 매일 여자를 바꾸어 자고, 마을사람들은 굶어서 딸을 팔아서 살아간다고 들었다. 외부 부족이 살려고 오면 부족장이 모조리 잡아다가 죽을때까지 일만 시킨 다음 죽으면 들판에 버린다고 들었어... 나래야, 아니 비야. 난 사울아비가 된 것이 자랑스럽지만, 가끔은 참을 수 업을 정도로 부끄럽기도 하단다." 그때 몽골의 영웅인 보돈차르가 조용히 말했다. "치우천 안다, 치우비 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주신을 세우신 안파견 한님이 얼마나 오래 전 분인지는 모르지만, 무척이나 셀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 분이라고 들었다. 맞는가?" "그렇습니다. 여러 천 년 전입니다." 치우천이 간신히 대답하자 보돈차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신은 오래된 나라다. 그러니 그만큼 썩은 것이다. 내 솔직히 말하겠다. 몽골족도 그러하다. 몽골족도 수가 많고 사람들은 억세며 강하다. 주변의 어느 부족보다 말도 잘 달리고 활도 잘 쏜다. 그러나 몽골은 약하다. 주변의 어느 부족보다 말도 잘 달리고 활도 잘 쏜다. 그러나 몽골은 약하다. 서로 쪼개져서 싸우느라 정신이 없다. 몽골의 푸른 늑대가 후손을 처음 낳아 세운 부족은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새 부족을 세운 것이다." 보돈차르는 정말 대영웅답게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았어도 모두의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다. 보돈차르가 계속 이야기했다. "무엇이든 오래되면 상하고 비뚤어진다. 물도 고여 있으면 썩게 되고, 고기도 내버려두면 벌레가 우글거린다. 주신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아주 크고 힘있고 강한 나라다. 그러나 솔직히 주신은 내가 볼 때 너무 묵었다. 묵으면 오래된 관습이 생기고 그 관습에 기대는 버러지들이 들끓게 된다. 지금 주신이 바로 그런 때다. 치우천 안다, 자네는 유망이 이끄는 지나족이 왜 주신을 거역하려는 것인지 이해하겠는가? 어째서 가장 강한 주신제국을 감히 거스를 용기가 나왔는지 이해하겠는가?" 치우천은 이내 평정을 되찾고 조용히 말했다. "이제 모두 깨닫겠습니다." "그럼 자네에게 묻겠네. 주신은 그래도 아직 누가 뭐래도 가장 강한 부족일세. 어째서 강한 부족인가? 구리 무기를 만들 줄 알아서? 신시가 가장 큰 도읍이라서? 사울아비들이 가장 용감하기 때문에?" "아닙니다. 다른 부족들과 뭉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뭉친 것인가?""안파견 한님의 가르침은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신은 다른 부족을 간섭하지 않고 늘 앞장서서 다른 부족을 돕고 그로 인해 제일 큰 부족이 되었습니다. 다른 부족을 정복하지 않고도 다른 부족을 정복한 것보다 낫게 되었습니다. 모두에게 좋았습니다." "그렇다네. 내가 주신에 감탄하는 것은 바로 그것일세. 안파견 한님을 나는 믿지 않네만 정말 훌륭한 분이었다고 생각하네. 눈앞만 보는 자들은 이리 생각하네. 다른 부족을 도와서 무엇이 남는가? 우리 사람만 죽이고 우리 재물만 축내지 않는가? 하고 말일세.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자네 생각은 어떤가?" "아닙니다. 그런 것보다 더 큰 얻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신을 믿게 되고, 주신과 친구가 되어 싸울 일이 없어집니다. 가진 지식과 재주를 나누고 그것이 모두 주신으로 모입니다. 그래서 주신은 제일 앞서고 잘사는 부족이 되었습니다." "주신이 가장 강해졌지만, 다른 부족이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 "다른 부족은 다른 부족 그대로 남는 것이 바로 주신의 힘입니다. 어느 부족도 재주없는 부족은 없고, 그것은 다른 부족이 결코 생각도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들이 주신을 강하게 하고, 다시 다른 부족을 강하게 합니다. 모두가 강해집니다." "바로 그것일세. 자네는 나와 생각이 같네. 금방 얻는 것만 생각하는 버러지들은 그런 것을 모르네. 그저 나만, 자기 배만 부르고 종을 많이 부리면 그만이지, 다른 것은 생각할 줄 모르네. 그것이 부족을 진정 위하는 것과 부족을 좀 먹는 것의 차이일세..." 보돈차르의 말은 모두를 엄숙하게 만들었다. 결코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이 작은 부족장이 영웅이라 불리는 것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보돈차르가 잠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나는 몽골 사람이네. 우리는 주신 사람과 다르며, 푸른 늑대의 가르침 또한 다르네. 사는 땅이 다르고, 사는 법이 다르며, 사람이 다르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가르침을 만들고 깨달아 가야겠지. 그것은 내 일일세. 하지만 자네들 주신의 안파견 한님의 가르침은 실로 배울 점이 많네. 그러나 몽골에 이런 이야기가 있네. 좋은 말도 달리지 않으면 배가 늘어지고 강한 활도 조이지 않으면 늘어진다고 주신은 너무 오래 그렇게 조용히 지내온 것일세. 그리고 이제 지나족이 주시을 위협하고 있네. 주신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을 것일세. 그러나..." 보돈차르는 조용히 치우천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네 주신처럼 사람이 많아지면, 자연 높은 자와 낮은 자가 생기게 마련이네. 높은 자는 수많은 아랫사람을 책임져야 하므로 그만큼 더 생각하고 더 옳아야 하네. 그러나 너무 오래 묵으면... 못난 자가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네. 그자가 나쁜 짓을 하는 것도 문제지만 높은 자리에서는 못난 것도 죄가 되는 걸세. 그것도 아주 큰 죄가... 자네 생각에 주신은 어떠한가? 못난 자가 높은 자리에 많은가? 좋고 훌륭한 사람이 많은가? 그것이 바로 주신이 지나족을 먹느냐, 지나족에 먹히느냐를 정할 것일세." 보돈차르가 조용하지만 강렬한 말을 토해내자 앗수라트 부족장 키타야가 나섰다. "자네들 형제는 실로 대단한 영웅들일세. 그러나 미안하지만 주신에는 자네들보다 높은 사람들 많고도 많네. 자네 형제가 아무리 용감해도 지나족 천 명을 상대로 자네 둘만 나가 싸우라 한다면 자네들은 어쩔 건가? 좀 심한 이야기지만 아까 나간 자들은 그러고도 남을 자들 같았네." 치우비와 치우천은 섬뜩해졌다. 그러자 앗수라트 부족장 키타야가 덧붙였다. "자네들은 강해져야 하네. 그리고 높아져야 하네.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강해져야 자네들의 뜻을 펼 수 있네." 앙가마이 부족장 구르도 한마디 거들었다. "내 살아온 경험으로 보면 자네들은 위험하네. 자네들은 알고 있는가? 처음 보는 나조차도 알 수 있다네. 아까 두 놈만 봐도 알 수 있어. 앞으로 자네들을 시기하고 이유없이 미워하며 죽이고 싶어하는 자가 들끓을 것일세. 차라리..." 구르는 말끝을 흐리다가 나직이 말했다. "자네들이 부족을 세우게! 자네들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네!" 그러자 앗수라트 부족장 키타야가 외쳤다. "치우비, 치우천이 부족을 세운다면 우리 모든 앗수라트 부족은 거기 들어갈 것이네!" "우리 앙가마이도 함께 할 것이네. 주신 사람이건, 타타르 사람이건 자네들의 부족에서라면 다툼 없이 지낼 수 있을 것이네!" 순간 야율쿠리가 찬물을 끼얹듯이 외쳤다. "우리 아버지는 그러지 않으실 것이다!" 앗수라트 부족장이 노한 눈으로 바라보자 야율쿠리는 씩 웃었다. "그러니 십 년만 기다려라. 내가 족장이 되면 키탄족을 전부 뭉쳐서 데리고 들어간다! 말을 안 들으면 내가 모조리 정복해서 데리고 간다!" 초초룬도지지 않고 외쳤다. "미아우족은 나 혼자라도 들어간다! 아니, 툰툰의 부족도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툰툰의 부족과 모든 벌레들의 어머니인 나 초초룬을 받아주십시오, 족장!" 그러자 울쿠타와 야쿠타 형제도 말했다. "우리도... 끼어도 될까? 부족장 눈치만 보는 건 싫어. 부족장 형이 있으면 좋겠어." 마지막으로 양역이 조용히 말했다. "난 항상 너희와 함께 했어. 앞으로도 그럴 거다. 우리 마을사람들도 모두 따를 거야." "자네는 사울아비 아닌가?" 앗수라트 부족장의 물음에 양역이 웃으며 대답했다. "뭐, 못할 짓 하는 것입니까? 못 살겠으면 나가 사는 거지! 아직 사람 없는 땅은 얼마든지 있다더군요!" 사실 당시 부족을 버리고 나가 사는 것은 범죄나 못할 짓이 아니었다누가 죽어라고 말리거나 들킨다고 벌을 주지도 않았다. 그냥 싫으면 나가 살면 그만인 것이다. 가장 앞선 나라인 주신조차도 그러했다. 그러나 대부분 그런 경우 받아주는 부족이 없거나 발붙이기가 힘들어 외로이 죽어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잘 떠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달랐다. 일단 엄연히 존재하는 두 부족장이 합치겠다고 했으며 모두가 보통 아닌 영웅들이다. 당연히 큰 부족이 될 수 잇으니 오히려 좋은 기회인 것이다. 보돈차르가 '허허' 웃으며 나섰다. "이런이런! 벌써 이거 대부족이 되겠군. 나는 새 부족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물론 일이 그렇게 된다면 뭐든 아끼지 않고 돕겠소. 그러나 모두들 조용하시오. 치우 형제의 말을 먼저 들어야 하지 않소? 우리 맘대로 부족장을 모신단 거요?" 사람들의 시선이 치우 형제를 향했다. 치우비의 눈이 치우천을 향하자 일시에 치우천에게로 모든 시선이 쏠렸다. 사실 치우비가 제일의 용사였지만 부족장은 꼭 용사여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치우천의 그릇과 용기와 지혜는 최고의 부족장이 될 수 있었다. 치우천이 공손히 머리를 숙이다가 이내 말했다. "모두의 뜻 감사합니다. 그러나 주신을 버리고 새 부족을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치우천이 딱 잘라 말하자 사람들은 약간씩 풀이 죽은 듯했다. 그러자 보돈차르가 말했다. "치우천 안다, 자네 아버님의 뜻을 아는가? 왜 그리도 먼 카린산으로 성인식을 보내셨는지 아는가?" "역시 아버님의 뜻도 그렇습니까?" "분명 그럴 것이다. 자네 아버님 또한 보통 분이 아니시다. 우직하고 선량하며 고지식하신 분이지만 자식에게는 그렇지 않으시다." 보돈차르와 치우천이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를 하자 야율쿠리가 초초룬에게 물었다. "이봐, 룬. 뭔 소리들이야?" "돌대가리야! 아버님도 그 형제가 위험하다 생각하고 일부러 먼 곳으로 보내려는 거야! 그대로면 좋지 않다고 생각하구!" "뭐가 좋지 않아? 한웅 눈에도 들고 대용사가 되었는데?" "그래도 뭔가 위험하니 그런 거지. 척 보면 넌 모르냐?" 그래도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은 반드시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부족을 세우지 않습니다. 저는 안파견 한님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믿으며 자라났고, 지금 당장 그 가르침이 잘못 되었다고 새로운 가르침을 만들거나 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러려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치우천의 말에 보돈차르가 놀랐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시간인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보돈차르는 치우천이 그런 가르침을 만들고 사람을 모아 새 부족을, 새 나라를 건설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부족하다는 뜻을 알아들었다. 주신만큼 큰 부족은 치우천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치우천이 살아서는 만들지 못할 것이었다. 그것을 보돈차르는 금방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자네는... 뜻이 내 생각보다 더 컸군." "별 말씀을." "새로 키우기보다 있는 것을 바꾸는 편이 낫다는 말인가? 낡은 그릇도 고치면 쓸 만한가?" 보돈차르가 묻자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그렇게 만듭니다." "자네는 얼마나 오래 바라는가? 자네가 고친 새 그릇은 얼마나 가겠는가?" 보돈차르가 눈을 형형히 빛내며 또다시 묻자 치우천도 그만큼 밝은 눈빛으로 말했다. "그릇이 생각보다 낡은 것 같아 애초에 생각했던 만큼 오래는 못가겠군요." "그래, 얼마라고 생각하냐?" "잘해야... 천 년!" 아직 만이란 단위가 쓰이기도 전의 일이다. 그런 시절에 천 년이란 엄청난 것이었다. 치우천의 그릇 크기에 보돈차르는 또 놀랐다. "정말인가?" "해낼 것입니다." "그 그릇은 하나의 그릇이 아닌, 모두가 섞여 있는 그릇이겠지?" "그렇지 않으면 지나족과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족도 큰 부족이지만, 그 그릇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지나족에게 맡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나족의 그릇은? 헌원의 그릇은 자네 못지않다." "그러나 지나족의 그릇은 지나족 하나만의 그릇입니다." 그 순간, 보돈차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칼을 뽑아 들고 외쳤다. "나는 자네를 믿네! 치우천 안다! 자네는 이전에도 나의 벗이고 보돈차르족의 벗이었지만, 이제 자네는 보돈차르족 모두의 목숨을 맡았네. 자네가 말만 하면 보돈차르의 모든 활과 말은 자네의 말대로 불속이나 구덩이 속이라도 달려 들어가리!" 보돈차르와 치우천의 대화를 모두가 다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꼭 정확히 알아듣지 않아도 느낌이란 것이 있다. 이어서 앗수라트 부족장 키타야와 앙가마이 부족장 구르가 일어서서 외쳤다. "우리 앗수라트도 노인부터 젖먹이까지 모두 그리하겠다." "앙가마이도 모두 죽을 때까지 함께 한다!" 그러자 야율쿠리가 툴툴댔다. "제길! 뭔지 알아야 맹세를 하지! 아무리 친구라도 부족을 전부 거는 건 그렇잖아! 좌우간 나도 간다. 이 야율쿠리의 피와 살, 가족, 친구 모두 건다!" "바로 우리들 부족 각각을 위해 하는 일일세. 말이 많으면 좋지 않은 법. 나는 삼십 년이고 사십 년이고 기다리겠네. 천 년을 위해서일세. 치우천 안다." 말을 끝내자마자 보돈차르는 호쾌하게 웃으며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때까지 아무 말도 않고 아버지 뒤에 있던 울라트가 살짝 말했다. "도깨비들도 비 오빠와 영원히 함께 할 거예요. 그들은 어떻게든 나를 통해 그 말부터 하고 싶어했어요. 오늘 하루 동안 그들은 그 말을 배우고 끝없이 해대고 또 해댔어요. 자기들 이름보다 먼저요." 치우천이 이 자리를 정히하듯 조용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주신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못 믿어 헛소리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주신의 사울아비이고, 앞으로도 주신 사람입니다. 그 마음은 변함 없습니다. 오늘 일을 말하고 싶다면 누구에게든 말해도 됩니다. 허나 나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제길! 오늘 일을 누구에게 말하는 놈은 없겠지? 입만 벙긋하면 그 놈은 벌레들에게 뜯어먹힌 해골이 될 거다! 그건 누구도 피할 수 없어! 날 우습게 보면 안 돼!" 목청껏 외친 초초룬이 비틀거리며 걸어나갔다. 나가면서 그녀는 치우천에게 말했다. "기다릴게. 언제든 불러라." 그 뒤로 앙가마이 부족장과 앗수라트 부족장도 인사하고 조용히 나갔다. 울라트는 막사를 치우고 도깨비들을 돌보겠다고 갔다. 울쿠타와 야쿠타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천 형, 부족을 세우면 좋을 건데..." 그 말에 치우천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울쿠타와 야쿠타는 안타까운 듯 말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말아줘, 응?" 야율쿠리가 벌떡 일어났다. "난 아직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그럴 처지가 아냐. 하지만..." 야율쿠리는 씩 웃으며 이내 덧붙였다. "...약속한다! 너희 놈들은 뭔가 큰 일을 낼 놈들이야! 같이 한판 놀아보자!" 그러자 양역이 나섰다. "아까 한 말, 여전히 그대로다." 모두 약속하고 떠나자 치베만 남았다. 치베는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보돈차르도 떠나고 아무도 없자 치베가 입을 열었다. "부족장님이 계셔서 나는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한마디해도 되겠는가?" "해라, 치베." "어떻게 하든, 너희가 할 일을 하라. 나는 항상 곁에 있겠다." 그러면서 치베는 고개를 숙여 보였고 치우천과 치우비도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치베가 말없이 떠나자 이제 두 형제만이 남았다. 치우비가 조용히 말했다. "형님." "응?" "형님이 너무 멀게 느껴져." "그게 무슨 소리냐?" "형님은 너무 높고, 너무 먼 것 같아. 이상하지? 그런 생각을 한 적 없었는데..." "그런 생각 말아라." "형님은 꼭 뜻을 이룰 거지?" "그래야지..." "알았어. 그러면 되었어." 치우비는 그 뒤로 별로 말이 없었고 밤새 뒤척이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마도 하루 사이 겪은 일이 너무 많아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치우천도 마찬가지였다. 한웅의 위기 다음날, 시합은 끝났으나 회의는 계속 진행되었다. 역시 주신의 사와라 한웅과 지나의 헌원이 담판을 짓는 것뿐, 다른 부족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치우천과 치우비는 이제 한웅을 모시게 되었으므로 회의장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아무리 대용사라도 역시 아직은 미미한 말단 사울아비이며 부족장도 아닌지라 단 아래를 지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므로 사와라 한웅과 헌원의 회의 내용조차 들을 수 없어서 밖에 있으나 안에 있으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대부분의 작은 부족들은 그런 큰 일에는 관심도 없어서 자기들끼리 만나보는 것 외에 모든 관심은 용사를 뽑는 시합에 쏠려 있었는데, 그 시합이 끝나자 이미 할 일을 다했다 여기고 돌아가는 부족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울쿠타 야쿠타의 부족이었는데, 그런 탓에 그 둘은 다시 한 번 치우 형제를 만나보지도 못하고 그냥 헤어지게 되었다. 그 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날 저녁, 다시 회의가 끝나자 치우 형제는 비렴을 찾아가 비렴에게서 헌원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들을 수 있었다. "너희 형제이니 터놓고 이야기하마. 헌원은 주신에 협조적이기는 하다." 비렴은 답답하다는 듯 털어놓았다. "그러나 헌원은 자신이 지나족의 절반 정도밖에는 힘이 미치지 못하며, 유망이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고 계속 이야기한다. 더구나 유망을 따르는 부족들이 대부분 북쪽 부족이며, 헌원의 부족들은 비교적 남쪽에 있으므로 미아우를 쳐들어가거나 주신을 위협하는 것은 유망의 부족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물론 주신을 돕고 싶지만, 어떤 약속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일이 어렵게 되었다." 치우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유망은 이번 일로 주신을 더 미워하게 될 것 아닙니까? 유망이 주신을 쳐들어오는 것은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다. 사와라 한웅께서는 가급적 싸움을 피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헌원으로 하여금 유망이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힘을 빌려달라고 청하시는데, 헌원은 자신은 그럴 힘이 없다고 계속 빼고만 있어. 하긴 헌원도 부족들을 수습해야 하니 당장은 어렵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헌원은 지나족 아니냐. 한웅께서는 많은 보물과 많은 주신의 기술을 그 대가로 주신다고 했지만... 그런데도 일이 쉽게 풀리지 않는 것이야. 사실 헌원과 유망이 서로 싸우게 할 수 있다면 일은 가장 좋은 것이지만 말이다." "헌원이 그리 만만한 사람은 아니지요." 치우천은 그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물었다. "그런데 헌원이 남쪽 부족이었습니까?" "그렇다. 지나족의 근거지는 원래 황하 일대였어. 유망의 근거지이기도 하지. 따지고 보면 유망의 조상인 신농씨도 주신 사람이었다. 그도 새 부족을 세운 것이지. 그리고 헌원의 근거지는 훨씬 아래인 장강(양자강)에까지 이른다던데, 헌원은 사실 그의 아비인 소전 때부터 새로 그 땅을 개척하고 사람들을 모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치우천은 갑자기 한 가지 일을 되돌이켜냈다. 툰툰의 부락을 습격하려 했던 지나족들 일이다. 그들은 분명 남쪽 말씨를 쓰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뭔가 잘 들어맞지 않아. 그러면 그 도둑들은 유망의 부하가 아니라 헌원의 부하들이었단 말인가? 아니다. 그놈들 한 무리로 단정지을 수는 없지. 남쪽에서 올라와 살다가 온 놈들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치우천은 은연중에 헌원을 두려워하고 헌원과 엮이는 일을 마음속에서 피하고 있었다. 속 좁은 질투심인지 두려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럼에도 헌원에 대한 생각은 애써 피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비렴이나 치우비가 이런 치우천의 속마음을 알 리 없었다. 비렴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일은 어찌되든 일단은 사라진 유망이 걱정된다. 유망이 만약 복수심에 한웅님을 습격하기라도 한다면... 나는 솔직히 그 걱정뿐이다. 병예님의 꿈도 있고 너희가 알려준 유망의 사람됨도 두려우며 또 너희도 한웅님을 노리는 무리가 있다는 것 같다 하지 않았느냐?" 그것은 치우천도 동감이었다. 비렴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한웅님은 주신의 기둥이다. 훌륭하신 분이다만, 설령 훌륭하지 않은 분일지라도 한웅님은 주신의 상징이야. 한웅님께 일이 생기면 주신은 위험하다. 너희도 있는 힘을 다해야 하느니라. 너희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있는 힘을 다하겠습니다. 저희말고 다른 이들도 모두 좋은 이드이옵니다." 그러자 비렴이 조금 바깥 동정을 살피다가 물었다. "너희는 치우바람 치우가람 형제를 아느냐?" "아... 압니다..." "친하냐?" "아무리 좋게 말씀드리려 해도 그렇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그렇겠지. 그들은 고시울률의 손발이나 마찬가지니까." 비렴은 다시 한 번 한 숨을 쉬었다. "천아, 비야. 너희 치우 집안과 우리 비 집안은 대대로 풍백을 가장 많이 낸 집안이니라. 그래서 배우는 것도, 집안의 가르침도 비슷하고 사람들도 친하느니라. 그러나 솔직히 치우 집안에서 나신 훌륭한 분들이 우리 비 집안보다 많았지. 우리 비 집안은 치우 집안을 부러워하고 존경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요즘... 치우 집안은 말이 아닌 것 같다. 집안은 다르지만 나로서는 정말 애석하기 그지없단다." 비렴의 말은 퍽 진실했고, 워낙 강직하고 없는 말을 할 위인이 아닌지라 형제는 비렴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비렴은 전에 없이 감상적으로 말했다. "더구나 치우 집안이 기울고 고시 집안이나 부루 집안이 힘을 너무 얻는 것도 꼭 좋은 것은 아니야. 주신은 너무 재물에만 집착하게 되었구나. 물론 그로 인해 사람이 늘어나고 잘사는 이도 많아졌지만, 또 반대로 사람들이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을 우습게 알게 되어 다른 부족과의 사이는 점점 나빠져만 가고 있다. 사울아비들도 줄어들고 칼도 도끼도 녹슬어 가는데 농사를 지어 곡식과 재물이 그득한 사람들은 점점 사울아비를 우습게 알고 주신의 힘은 약해만 가니 참으로 힘든 시절이다..." 치우천 치우비는 말없이 조심스레 듣고만 있었다. "그런 중에도 너희 같은 훌륭한 아이들이 나와 나는 아주 기쁘다. 예부터 힘만 너무 길러도 부족은 사람이 살 만한 데가 못되는 험한 곳이 되고, 재물만 길러도 부족이 약해져서 쉬 무너지게 되는 법이다. 나는 너희가 아주 큰 일을 할 주신의 용사가 되리라 믿는다. 가까이는 너희를 지켜본 선배로서 하는 말이요, 좀 멀리는 너희 집안을 지켜봐 온 다른 집안의 아저씨뻘 되는 입장에서 하는 말이며 나아가서는 주신의 풍백으로서 하는 말이니라. 그러나 너희 재주는 아주 용하지만 너희도 이제 한웅님을 뫼시고 신시로 들어가게 된다. 신시는 지금 너희가 꿈꾸는 것만큼 달콤한 곳만은 아니다. 치우가람, 치우바람을 보아왔다니 더 말은 않겠다만 그러한 자들이 많은 곳도 바로 신시이다. 천아, 비야. 나는 이름이 알려진 풍백이기는 하나 신시로돌아가면 그다지 힘도 없다. 너희 재주는 분명 많은 이들이 꺼려할 수도 있으니, 몸가짐을 신중하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내 말을 알겠느냐?" 간접적이나마 비렴의 말은 어제 보돈차르나 다른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와 맥이 닿아 있었다. 치우천 치우비는 비록 무서운 사람으로 알려지기는 했으나 그런 비렴이 정말 아저씨처럼 가깝게 느껴지고 고마워서 다시 큰절을 올렸다. 다음날, 태산 회의는 공식적으로 끝났다. 헌원과의 협상도 더 진전을 볼 수 없어서 시작과 중간은 성대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좀 허망하게 끝난 회의였다. 이미 반 수 정도의 작은 부족들은 막사를 뽑아 돌아가 버렸지만 남은 부족들은 그래도 제각기 성의껏 사와라 한웅을 환송했다. 치우천과 치우비는 새로 만나 사귄 벗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보돈차르, 야율쿠리, 초초룬, 앗수라트와 앙가마이 부족 등은 모두 아쉬워하며 언제든 다시 불러달라고 말했다. 치베와 울라트, 그리고 도깨비들은 치우 형제와 동행하게 되었는데, 한웅님의 행차에 도깨비들을 보이게 달고 갈 수는 없다고 하여 도깨비들은 먼발치에 거리를 두고 울라트와 함께 마치 잡힌 것처럼 끈으로 묶인 채 따라오게 되었다. 전쟁에서 포로를 잡은 것과 같은 몰골을 하게 된지라 치우천이나 치우비는 그런 그 녀석들이 안타까웠지만 별수 없었다. 그들은 도깨비 왕을 만나 도깨비들을 돌려주기 위해 짬을 내고 싶었지만 한웅을 호위하는 것이 급하다 생각한 비렴이 결코 허락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치우비는 발을 다시 만나지 못하고 가게 되어 몹시 아쉬워 했지만 할 수 없었다. 헌원은 부하들을 이끌고 한웅을 멀리까지 배웅했고, 그때 끽구나 금천 등도 함께였지만 발은 없었다. 다만 헌원이 마지막으로 배웅을 마치고 돌아갈 때, 헌원이 한웅에게 많은 선물을 보냈으며, 치우천 치우비에게도 부하를 시켜 한 가지씩의 물건을 보내왔다. 치우천과 치우비는 그것을 열어보았는데, 치우천에게 보낸 것은 둥글고 고운 옥팔찌였고 치우비에게 보낸 것은 한 필의 비단옷이었다. 둘 다 귀한 것이기는 하지만 용사에게 보낼 만한 선물은 아니어서 사람들은 궁금해했는데, 선물을 받고는 치우비는 싱글벙글했고 치우천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치우비가 받은 비단옷에는 구불구불한 뱀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그것이 발이 보낸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었기에 치우비는 싱글벙글한 것이고, 치우천은 둥근 고리가 의미하는 것을 알았기에 고민한 것이다. '둥근 고리는 결국 따라가다 보면 빙 돌아오게 되어 있다. 그것을 헌원이 보냈으니 이것은 헌원이 나보고 자신에게 오라는 의미이다.' 치우천은 뒤를 돌아보았다. '헌원은 남쪽으로 가서 새 부족을 연 것이라 했지. 그래서 아직 그리 늙지 않았는데도 지나족 전체의 대족장이 되고 수많은 영웅과 기인을 거느렸다. 그는 대단한 사람이다. 허나...' 치우천은 선물을 가져온 지나족 졸개를 불렀다. 그러더니 대뜸 헌원이 보낸 둥근 고리를 쳐서 뚝 반으로 자른 다음, 그 졸개에게 조각난 고리를 둘 다 쥐어주며 말했다. "내가 드리는 대답이다. 헌원님께 전하면 아실 것이다." 졸개는 영문을 알지 못했으나 그것은 자신이 허눤에게 가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헌원은 그 졸개에게서 치우천이 주었다는 부러진 고리를 받고도 그냥 웃기만 했다. 옆에 있던 적송자가 말했다. "그 젊은이는 아깝습니다. 병도 다 고치지 못했고 우리에게 오지도 않는다니..." 그러나 헌원은 미소지었다. "젊은이의 생각은 항상 바뀔 수 있는 법이라오." "그럴까요?" 적송자의 물음에 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한편, 한웅의 행차가 신시로 향한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까지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고 평온하기만 했는데, 해가 저물 무렵이 되었을 때 앞서 나갔던 하나가 급히 말을 달려 치우우레에게 알리러 왔다. "무슨 일이냐?" "앞에... 아주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뭐냐?" "개가 있습니다." "이놈아, 흔하디흔한 개인데 그것을 가지고 웬 소란이냐?" 치우벌이 대신 외치자 그 사울아비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좀 수상합니다. 한 마리가 아닙니다. 백 마리는 되는 것 같습니다." "그까짓 개 백 마리 때문에 한웅님 행차가 멈추어야 한다는 거냐?" "그게 아닙니다. 누군가가 개 백 마리를 일부러 하나씩 하나씩 길게 묶어두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아무도 없는 벌판에 왜 일부러 개를 묶어둔단 말입니까?" 듣고보니 치우우레로서도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이 근방은 사람사는 마을도 하나 없는 황량한 곳인데 누가 개를 그리 많이 묶어둔 것일까? 치우우레는 그 사실을 일단 비렴에게 알렸다. 때마침 비렴이 치우천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치우천은 그 말을 듣고 놀랐다. '개 백 마리? 이것은 전에 아우가 그 정체 모를 사울아비에게 들은 소리 아닌가?' 놀란 치우천은 비렴에게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면서 다급하게 덧붙였다. "비렴님! 이건 뭔가 이상합니다. 한웅님을 노리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개 몇 마리가 어떻게 한웅님을 해친단 말이냐? 너무 과하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 그때 치우천은 주변을 한번 돌아보다가 갑자기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너무도 아파서 일부러 잊고 있었다. 그 주변은 분명... 치우천에게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을 가진 곳이었다. 바로 어머니와 얽힌... '왜? 도대체 왜 여기냐?' 다른 사람은 여기가 그 근방이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자신밖에는 몰랐다. 치우천은 별안간 무섭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날카롭게 외쳤다. "한웅님이 위험합니다! 비야! 비야!" 치우비는 치우천의 목소리를 듣고 놀라서 말을 달려왔다. 비렴조차도 치우천이 왜 갑자기 이렇듯 흥분하는지 알지 못했다. "왜 그러느냐!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것이냐? 한웅님이 놀라서겠다!" 그러나 치우천은 외쳤다. "당장...! 당장 달아나야 합니다! 한시라도 늦으면...!" 비렴이 버럭 화를 냈다. "도대체 뭐냐? 그깟 개 몇 마리 때문에 말이냐!" 치우천은 애가 타는 듯 말을 더듬거렸다. 치우천이 이리 놀라고 흥분하는 것은 치우비로서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저 개는... 분명 그냥 매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서...! 어서 명을 내리소서!" "도대체 개를 가지고 왜 그런단 말이냐? 너 제정신이냐? 여기에는 우리 삼사와 천 명의 사울아비가 있다! 그깟 개가 우리를 위협한다는 게냐?" 그러자 치우천이 큰 소리로 물었다. "개를 가장 좋아하는 짐승이 무엇이지요?" 범 아니냐?" "그리고 지난번 제가 유망에게 드나든 부족을 보았다. 전할 때, 비렴님은 가리족이라는 부족에 대해 말하셨지요?" "그 식인종들말이냐? 그러나 그들은..." "저도 그 식인종이라는 말에 놀라 그것만 생각하고 잊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비렴님! 가리족이 섬긴 선수! 그것이 범 신수 아닙니까? 범 신수를 섬긴다고 분명 말씀하셨지요?" 비렴의 눈이 커졌다. "그렇다... 가리족은 번개범이라는 신수를 섬긴다고... 아니, 그렇다면...!" 치우천은 놀라며 갑자기 무서운 눈빛으로 이를 갈았다. "저의 어미는 그 번개범에게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놈은 이제 우리를 덮칠 것입니다!" 순간 치우비의 눈이 무섭게 부릅떠지며 몸이 빳빳하게 굳었고 비렴은 너무도 놀라며 말했다.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세상에... 세상에 신수를 인간이 부리는 일이..." 그러나 치우천은 외쳤다.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 길게 늘어서 매어져 있다는 개! 그것은 번개범에게 바치는 제물입니다! 그리고 유망은 그 가리족을 시켜 한웅을 해치려는 것입니다! 분명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저 개들이 왜 매어 있겠습니까! 상대는 신수입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수가 많아도, 신수를 당할 수 없습니다! 어서! 어서 행차를 돌려야 합니다! 어서!" 치우천이 소리를 지르는데 갑자기 행차의 앞쪽이 어지러워지면서 사람들이 소리쳤다. "저기! 저기!" "저게 뭐냐!" 갑자기 지평선 저쪽에서부터 거대한 회오리바람 같은 것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주변의 하늘이 갑자기 깜깜해지고 기울어져 가는 햇빛조차 사라져 버렸다. 천 명이 넘는 주신 사울아비들과 한웅의 행차는, 삽시간에 주위가 먹장같이 어두워지자 방향을 잃고 서로 부딪치고 충돌하여 혼잡의 극을 달했다. 사람들도 놀랐지만 말과 소와 동물들이 별안간 미친 듯 날뛰기 시작했다. 사울아비들의 말은 오랫동안 훈련시켜서 무서움을 모르는 데도 미친 듯 날뛰기 시작했다. 말에서 떨어져 다치는 사울아비들이 수도 없었고 온순하던 소와 양, 나귀 등도 미친 듯 날뛰며 수레를 뒤엎고 사람들을 들이받고 발로 찼다. 엄청난 혼란과 어둠 속에서 치우천이 외쳤다. "비! 비! 어디 있느냐! 치베! 치베!" "천 안다! 나 여기 있다!" 치베가 재빠른 동작으로 어느덧 횃불을 켜서 들고 저만치에서부터 말을 달려왔다. 치베의 말도 제정신이 아닌 듯했지만 치베의 기마술이 놀라워서 치베는 이 와중에도 말을 몰 수 있었던 것이다. 일단 자그마하게 불이 밝혀지자 사울아비들도 다투어 횃불을 켜들었다. 치우천이 또다시 외쳤다. "비렴님! 한웅님을!" 그러자 비렴이 외치며 몸을 날렸다. "우사님! 운사님! 적은 신수요! 신수가 오고 있소!" 갑자기 뒤를 따라오던 가마 두 채가 산산이 폭발하면서 병예와 신지울태의 몸이 날아 한웅의 큰 가마 옆에 내려섰다. 상황이 너무 다급하자 그들은 주술을 써서 아예 가마를 부수고 날아온 것이다. 비렴도 거의 동시에 십 장이 되는 거리를 날아 한웅의 가마를 에워쌌다. 한웅의 가마를 메고 있던 서른 두명의 장정들은 힘도 세고 용감한 사울아비들이라 그래도 가마를 메고 있었으나 갑자기 몇 마리의 소가 앞쪽의 몇 사람을 치고 지나가자 가마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그 큰 가마가 무너져서 장정들이 깔려버리고 한웅도 땅에 뒹굴 판이었다. "쇠돌이! 부루벼락! 무엇 하느냐!" 비렴이 외치자 힘센 쇠돌이와 부루벼락이 가마를 떠받쳐 올렸고 치우우레가 고함을 지르자 사울아비들이 있는 힘을 다해 한웅의 가마를 둥글게 원진으로 에워쌌다. 그러나 갑자기 시꺼멓게 변한 마른하늘에서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병예가 외쳤다. "번개다! 놈이 번개를 부린다!" 번개가 한웅의 가마 주변에 내리꽂히자 땅이 파이며 몇 명의 사울아비가 말과 함께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며 여러 명의 사울아비의 몸이 시커멓게 타 들어가며 활활 타올랐다. 무서운 광경이었다. 그것을 본 신지울태는 머리를 산산이 풀어헤친 채 입술을 깨물어 피를 왈칵 허공에 뿜으며 미친 듯이 양손을 저어 자신의 피로 허공 중에 글자를 썼다. 바로 최고의 주술이라는 글자 주술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서 다시 몇 줄기의 푸른 번개가 동시에 아래로 내리꽂혔으나 신지울태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일갈하자 땅에서도 몇 줄기의 붉은 번개가 솟아올라 내리꽂히는 번개를 막았다. 번개끼리 격돌하자 무서운 굉음과 함께 대폭발이 일어났고, 스무 명이 넘는 사울아비들이 그 바람에 밀려 날아가 버렸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힘과 힘의 격돌이었다. 그러나 신지울태는 너무도 무리하여 '왁' 하고 피를 토하며 허리를 꺾었고 병예는 분노에 떨면서 외쳤다. "지킴임검수!" 병예가 양손을 뻗자 한웅의 가마 주변에 흰 무지개 같은 것들이 피어오르며 한웅의 가마를 에워싸는 듯했다. 우사 병예의 가장 강한 방어주술격인 지킴임검수가 펼쳐진 것이다. 그때 대열의 앞부분에서 외침이 있었다. "으악! 저건 범이다!" "신수다!" 미친 듯 달려오는 회오리바람은 메어져 있는 개들을 하나씩 집어 삼키며 미친 듯 달려오고 있었다. 온통 시커먼 회오리바람이었지만 그 중앙에 번뜩이는 두 개의 눈동자가 마치 두 개의 태양인 양 시뻘겋게 빛을 내쏘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짐승의 눈, 신수의 눈이었다. 사울아비가 아닌 자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서 미친 듯 반대편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허나 치우우레는 그 와중에도 계속 명령을 내려 직속의 사울아비 삼백 명을 열 줄로 수습해 놓고 있었다. 사울아비들의 전투대열이었다. 치우우레가 신수의 번뜩이는 눈을 보고 두려움없이 소리쳤다. "첫째 줄! 나갓!" 그러자 사울아비의 첫째 줄 삼십 명이 도끼를 일제히 치켜들고 줄을 지어 달려나갔다. 몇 명이 말에서 떨어지고 죽은 사람도 있지만 순식간에 둘째 줄 사람이 첫째 줄 빈자리를 메웠고 셋째 줄 사람이 또 둘째 줄 자리를 메웠다. 삼십 명이 달려나가며 일제히 회오리바람을 향해 도끼를 내던졌으나 도끼들이 모조리 튕겨나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사울아비들은 굴하지 않고 일제히 구리칼을 빼들고는 용감하게 회오리바람으로 달려들었다. 그들이 회오리바람과 채 부딪치기도 전에 치우우레가 외쳤다. "둘째 줄! 나갓!" 둘째 줄 사울아비들이 다시 달려나가는 순간, 그들의 앞에 다시 무시무시한 푸른 번개가 세 줄기나 연달아 내리꽂혔다. 순간 열한 명의 사울아비와 그 말들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타 재가 되며 폭발하여 가루가 되어버렸고 남은 사울아비들도 폭풍에 밀려 사방으로 날아가 버렸다. 양끝의 단 두 사람의 사울아비만 남았으나 그들도 시커멓게 그슬려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달려나갔다. 그때, 첫째 줄 삼십 명의 사울아비들은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 회오리바람에 부딪히는 순간 회오리바람에 말려 수십 명의 말과 사울아비들은 어지러이 부딪히며 으깨어져서 피바람이 되어 흩어져 버렸다. 단 세 명의 사울아비만이 회오리바람에 비껴서 비틀거리며 물러섰는데 그들 중 말 탄이는 이미 없었다. 그러나 그 세 명과 둘째 줄 두 명의 사울아비들은 동료들이 순식간에 죽자 눈이 뒤집혀 있었다. 치우우레는 너무도 처참한 광경에 눈물을 뿌리며 외쳤다. "셋째 줄! 넷째 줄! 다섯째 줄! 모두 나갓!" 모두 합하여 구십 명이나 되는 사울아비들이 일제히 말을 몰아 무서운 기세로 다시 회오리바람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 순간 치우우레가 외쳤다. "큰 스승님들! 한웅님을 모시고 어서 물러나시오! 여긴 내가 맡겠소!" 그 말을 듣자 비렴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즉시 외쳤다. 아무리 천 명의 사울아비가 있어도 신수를 당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웅의 안위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어서 물러나라!" 순간, 한웅의 가마는 뒤를 향해 달렸고 사울아비들은 신수의 바람에 몸이 찢겨 나가면서도 그 앞을 겹겹이 막아섰다. 그때 첫째 둘째 줄에서 살아남아 달려들던 다섯 명의 사울아비들의 머리 위에 거대한 그림자과 '쾅' 하며 내리꽂혔다. 그것은 거대한 짐승의 앞발이었다. 단 한 번에 다섯 명의 사울아비를 밟아서 납작하게 만들 만큼 그 발은 거대했다. 어느덧 소용돌이는 사라지고 그들 앞에 불타는 듯한 붉은 눈의 거대한 범이 서 있었다. 어깨는 열 사람 높이보다도 높았고 보통 범의 형상이 아니었다. 그의 입에는 무시무시한 이빨이 땅에 닿을 만큼 길게 솟아나 있었는데, 그 이 크기는 아름드리 나무보다도 굵고 컸다.(이 신수 번개범의 모습은 신생대 때의 스미로돈을 모델로 한 것이다. 신수에 대한 설정은 추후 부록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한마디로 어마어마한 신수... 아니, 괴물이었다. 달려가던 구십 명의 사울아비들 중 절반이 신수가 형상을 드러낸 순간 땅에 엎어져 굴렀다. 말들이 놀라서 제풀에 다리를 꺾었던 것이다. 나머지 절반도 말들이 미친 듯 방향을 바꾸어 달려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기마술로 고개를 돌리게 하려 해도 말들은 죽으면 죽을지언정 그 괴물 쪽으로는 다가가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울아비들도 비명을 질렀으나 이내 악을 쓰면서 말에서 일제히 뛰어내려 땅에 뒹굴고는 무기를 들고 신수에게 달려들었다. 순간 신수 번개범은 거대한 입을 벌리면서 포효했다. 그 괴물의 아가리와 목구멍만 해도 큰 동굴보다 컸다. 그 포효하는 바람에 사울아비들의 몸은 마치 낙엽처럼 휘날려서 뒤에 달려오던 다음 사울아비들과 부딪히고 말발굽에 밟히는 등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때 치우비는 미친 듯이 자신의 말, 구름을 달려서 신수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치우천이, 다시 그 뒤를 치베가 따르고 있었다. 치우비가 외쳤다. "형! 저놈이...! 저놈이 어머니를...!" 치우비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으며, 치우천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계속 '앗핫핫'하고 공허한 웃음을 웃고 있었다. "그래! 저놈이다! 어머님이 혼자 사웠던 놈이다! 우리 형제를 당해내는지 보자꾸나! 아핫핫! 결국...! 결국 오늘이 오고야 말았다!" 치우천은 미친 듯이 웃으며 말을 달렸다. 그 뒤를 따르는 치베는 두려움은 없었으나 아연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치베는 곧 외쳤다. "천 안다! 비 안다! 치베는 너희와 함께 한다!" 그러면서 치베는 화살통을 통째로 쥐더니 안에 꽂힌 화살 스무 대를 모조리 몰아쥐고 무서운 힘으로 비명을 지르며 활에 스무 개의 화살을 통째로 당겼다. "죽어랏! 괴물!" 순간 치베의 활이 와지끈 부러지면서 스무 개의 화살이 별과 같이 허공을 솟구치며 신수를 향해 날아갔다. 그것을 보고 치우우레가 외쳤다. "놈에게 다가가지 말고 활을 쏘라!" 다음 순간 사울아비들이 일제히 활을 꺼내들자, 치베가 쏜 화살을 눈치채고 번개범은 '캭' 소리를 지르며 입김을 내뿜었다. 치베의 화살은 실로 무서운 기세로 날아들었으나 대부분은 신수의 무서운 입김을 이겨내지 못하고 허공에서 깨어지며 흩어져 갔다. 그중 두 개가 날아가서 신수의 오른쪽 볼에 꽂혔다. 그러나 워낙 거대한 신수라서 그런 것쯤은 느끼지도 못하는 듯했다. 그때 치우비가 땅이 울릴 정도의 괴성을 지르며 달려가던 말에서 몸을 솟구쳤다. "이노오오옴!" 말의 속도와 솟구친 힘을 합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던 치우비는 신수 앞에서 내려섰고, 순간 신수의 붉고 거대한 눈이 치우비를 향했다. 치우비는 맹수처럼 포효하며 옆에 있던 육중한 바위를 잡았다. 치우비보다도 더 큰 바위였다. 그것을 치우비가 집어던지자 육중한 바위는 마치 조약돌처럼 날아갔다. 아무리 거대한 신수였지만, 신수를 사람으로 치면 그 바위는 팔매질할 돌 정도의 크기가 되는 터라 신수는 고개를 틀어 바위를 피했다. 다음 순간, 신수의 앞발이 갑자기 치우비의 앞에서 들어올려졌다. 마치 조그마한 산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순간 치우천이 뒤에서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비야! 조심!" 그러나 신수의 앞발은 인정사정을 보지 않고 치우비를 향해 덮쳐 내려졌다. '쾅' 하는 소리가 나는 순간 치우천이 '으악' 소리를 내며 옆에 쓰러져 죽어있던 사울아비의 긴 창을 뽑아들었다. 그뒤를 치베가 따랐고 마파람과 날램이 등도 미친 듯 달려들었다. "비야!" 치우우레도 목이 찢어져라 외쳤고 순간 사울아비 수백 명이 뽑아든 화살이 빗살처럼 신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치우천이 신수에게 다가서는 순간, 신수는 갑자기 묘하게 균형을 잃더니 비틀거리며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그리고 신수의 발이 떨어졌던 자리에는 온몸이 먼지투성이가 되고 허벅지까지 땅에 박힌 치우비가 피투성이가 되어 귀신같은 몰골로 서 있었다. 치우비가 무서운 힘으로 신수의 발을 양팔로 막아냈는데, 치우비의 팔이 마치 가시처럼 신수의 발을 뚫고 들어간 것이다. 치우비는 물론 피투성이였지만 그것은 분명 신수의 피였다. 치우비는 미친 듯 악을 쓰고 있었다. "덤벼라! 덤벼!" "비야!" 치우천이 외치면서 말에서 몸을 날려 치우비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어설프게 데굴데굴 굴렀으나 치우천은 곧 일어나 치우비의 앞을 막고 섰다. "비야!" "형! 내 피가 아냐! 저놈 피야!" "신수의... 피?" "형! 저놈도 피를 흘려! 죽일 수도 있어! 아니, 죽일거야!" 신수 번개범이 발에 입은 상처는 물론 하찮은 것이었지만 번개범은 처음으로 아픔을 느꼈다. 무서운 도력을 지닌 번개범이었기에 날아오는 화살이나 창 같은 것은 막아낼 수 있었으나 자기가 밟아버리려던 발 밑에서 찔러올 줄은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힘이 센 인간이 있는 것도 번개범으로서는 다소 의외였던지, 번개범의 눈은 분노로 더더욱 붉어졌다. 치베와 다른 사울아비들이 달려들자 번개범이 갑자기 '캭'하고 입을 벌리더니 입에서 붉은 불덩이를 쏘아냈다. 순간 치우비는 발이 땅에 박혀서 움직여 피할 수가 없었다. 놀란 치우비는 형을 잡고 뒤로 돌리려 하는데 치우천이 치우비의 손을 잡고 치우비의 앞을 도리어 막아섰다. "안 돼, 형!" 그러나 그 순간, 두 사람의 뒤에서 '와장창' 소리와 함께 죽은 말 한 마리가 날아들어 앞을 막았다. 번개범이 토해낸 불길이 그 말을 단숨에 시커멓게 태웠지만, 그 말 그림자에 가려져 치우천과 치우비는 숯덩이가 되는 것을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그 죽은 말을 내던진 사람은 바로 치우비 다음의 장사인 쇠돌이었다. 그때 도단이와 스름이가 나서면서 머리칼을 풀어헤치며 각각 주문을 외우고 글자를 썼다. 그러자 신수의 발 밑 땅이 우적우적 갈라지기 시작했고 스름이의 머리칼로부터는 미친 바람이 불어젖히기 시작했고 스름이의 머리칼로부터는 미친 바람이 불어젖히기 시작했는데, 그 바람에는 주먹만하고 날카로운 얼음덩어리들이 맺혀 칼날처럼 번개범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실로 대단한 주술이었다. 번개범도 그 주술만은 만만히 볼 수 없는 듯, 방향을 바꾸어 스름이의 얼음바람에 불길을 쏘아댔다. 두 주술의 힘이 부딪자 스름이의 몸은 신수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으악' 소리와 함께 뒤로 밀려나 몇 바퀴를 땅에 굴렀다. 그런 와중에도 도단이는 한눈 팔지 않고 주술의 힘을 올렸다. 순간 신수 발 밑의 땅이 갈라지며 번개범의 왼발이 땅에 빠져 버렸다. 그 순간 치우비가 외쳤다. "날 빼줘!" 때마침 미친 듯 달려들던 부루벼락이 치우비의 허리를 잡고 용을 썼다. 그리고 미력하나마 치우천과 치베도 있는 힘을 다해 땅에 박힌 치우비를 꺼내 주었다. 쇠돌이도 달려오자 치우천이 급히 외쳤다. "쇠돌이! 부루벼락! 비를 저놈 머리로 던질 수 있겠어?" 신수의 발이 묶인 지금 신수의 머리로 치우비가 올라간다면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치우천은 판단한 것이다. 치우비와 같은 거한을 저 높은 곳까지 던지는 것은 보통 힘으로 될 일이 아니었지만 부루벼락과 쇠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빙빙 돌려서 던지면 돼!" 쇠돌이가 소리치자 부루벼락도 외쳤다. "너무 높다! 둘이 이어야 된다!" 쇠돌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치우비는 스스로 달려서 부루벼락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쇠돌이는 부루벼락의 팔을 잡고 '으아아' 기합소리를 내며 두 사람을 한꺼번에 돌리기 시작했다. 치우비가 허공을 박차 더 빨리 돌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무시무시한 회전력 사이에서 부루벼락은 있는 힘을 다해 팔을 오므려 버텼다. 치우비의 몸과 부루벼락의 몸이 미친 듯 돌아가자 어느 순간 치우천이 외쳤다. "가!" 순간 쇠돌이가 부루벼락을 떨쳐내고 부루벼락은 다시 치우비를 떨쳐내 치우비의 몸이 허공을 날아서 신수의 머리꼭대기에 부딪혔다. 무엇인가가 머리로 올라가자 신수는 무섭게 화를 냈으나 치우비는 올라가자마자 있는 힘을 다해 신수의 머리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치우비의 힘은 엄청나 신수를 때린 것이 아니라 아예 팔을 신수의 머리에 꽂아넣은 것이다. 치우비의 팔이 어깨짬까지 신수의 머리를 파고들자 이번만은 신수도 고통스러운 듯 '캬악' 하는 소리를 질렀다. 그때 바람과 불길에 당해 이미 큰 상처를 입은 치우우레가 외쳤다. "활은 안 된다! 모두 창을!"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창이건 막대기건 좌우간 긴 것을 모조리 잡아서 신수를 향해 던졌다. 대부분이 힘센 사울아비들이라 창은 어지러이 날다가 신수의 몸에 박히기 시작했다. 그때, 신수의 눈이 무서울 정도로 붉게 타올랐다. 치우비가 피가 철철 넘쳐흐르는 팔을 뽑아 두 번째 주먹을 내리꽂으려는 찰나, 갑자기 신수 주변에 무서운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신수가 다시 회오리 바람으로 변하는 것이다. 치우비의 몸은 어쩔 틈도 없이 튕겨져 날아가 어느 바위에 처박혔다. 치우비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만 정신을 잃지 않고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는데 그때 신수가 다시 치우비를 향해 발을 쳐들었다. 그 순간 열 명의 그림자가 그 신수의 발을 향해 달려들었다. 방금 달려든 자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은 치우비를 따라오던 도깨비들이었다. 대열의 맨 뒤를 따라왔기에 이제야 도착한 것이다. 그들 중 붉은 머리 도깨비의 어깨 위에는 자그마한 울라트가 올라앉아 악을 쓰고 있었다. "비 오빠!" 도깨비들이 목숨을 내놓고 덤벼드는 바람에 번개범은 주춤하며 치우비를 밟으려던 발로 도깨비들을 휘몰아갔다. 도깨비들은 미친 듯 무기를 던지고 그어댔으나 신수의 엄청난 힘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순식간에 도깨비들은 튕겨져 버렸다. 울라트의 작은 몸도 피를 뿜으며 허공을 튀어 날았다. 사울아비들도 미친 듯 달려들었으나 이것은 일방적인 대학살이었다. 흰 천을 머리에 둘러쓴 늙은 도깨비는 분노로 몸을 떨며 죽을힘을 다해 다섯 개의 칼을 동시에 날려서 번개범의 눈을 노렸으나 번개범은 앞발로 눈을 가렸고 그 칼들은 번개범의 발가락을 조금 스쳤을 뿐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늙은 도깨비는 떨어져 내린 벼락에 튕겨져서 시커멓게 그슬린 채 데굴데굴 땅 위를 굴렀다. 실로 번개범은 너무도 무서웠다. 힘과 덩치도 무서웠으려니와 바람과 번개를 부리는데다 불까지 뿜어내니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번개범은 더 화가 났는지 치우비가 쓰러져 있는 바위를 통째로 발로 옆으로 쓸어쳐서 박살내 버렸다. 치우비의 몸은 돌조각들과 함께 엉망이 되어 튀어올랐다가 땅에 걸레처럼 처박혀 버렸다. 그리고 치우비의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치우비가 나가떨어지자 치우천과 다른 모든 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이제는 모두 끝장이라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치베마저도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털썩 꿇으며 중얼거렸다. "치우비도... 역시... 신수는 안 되는 것인가?" "비야! 비야!" 치우천은 미친 듯 눈물을 흘리며 피투성이가 된 채 기어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치우비를 향해 갔다. 신수가 변한 회오리바람은 그것을 보고 미친 듯 무시무시한 기세로 가장 껄끄러운 둘을 뭉개버리려고 달려들었다. 치우천은 간신히 치우비의 몸을 껴안았지만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고 이를 갈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서 죽는 것인가? 어머니의 원수도 갚지 못하고...!' 그때였다. 무시무시한 비명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자신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는 느낌이 있었다. 치우천이 놀라 눈을 떠보니 회오리바람은 어느새 사라지고 번개범은 놀라 비틀거리며 저만치로 물러서 있었다. 번개범의 붉은 눈은 찢어질 듯, 피를 뿜을 듯 무섭게 붉어져 있었으나 살아남은 사울아비들은 모두 다 놀람과 기쁨의 고함을 질렀다. "저걸 봐라!" "다른 신수다!" 그 맞은편에 노랗게 반짝이는 화등잔 같은 눈을 부릅뜬 거대한 짐승이 있었다. 그 크기는 번개범에 못지 않았고 오히려 더 컸다. 길다란 코와 점잖고 아름다운 털을 지닌 그 짐승은 지금 무섭게 몸을 부풀려 털을 곤두세운 채 신수 번개범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또 다른 신수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다른 신수가 나타나 번개범을 밀어낸 것만이 아니었다. 너무도 놀랍게도, 그 신수의 머리 위에 사람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눈이 부실 정도의 흰옷을 걸치고 탐스럽고 검은 긴 머리를 발치에까지 늘어뜨린 그 사람은 놀랍게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젊은 여인이었다. 치우천은 그 여인의 얼굴을 보고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그녀는 어디에선가 본 듯, 너무도 낯이 익었다. 그녀의 큰 눈과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차분하고 고요하기 짝이 없는 그 표정... '나는 저 여인을 처음 본다... 그런데 왜 본 것 같지?' 그 순간 치우천은 번개범의 일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넋이 나간 것 같은 느낌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때 번개범이 미친 듯한 노기를 번개와 불과 함께 뿜어내면서 새로 나타난 신수를 향해 덮쳐갔다. 그 순간, 주신족의 마차며 짐들이 바람에 날려 쌓여 있던 곳에서 갑자기 엄청난 소리와 함께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무서운 열기가 사방으로 퍼져나와 사람들만이 아니라 번개범과 새로 나타난 신수마저도 주춤하게 만들었다. "저건 또 뭐지?" 치우천은 계속 숨쉴 틈 없이 벌어지는 기이한 일들에 아예 넋을 잃고 그 불기둥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불기둥은 하늘로 똑바로 솟구쳐 올라가다가는 이내 하나의 형상을 이루면서 서서히 하나로 뭉쳐져갔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은 한 마리의 거대한 새의 형상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순간 치우천의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알! 툰툰이 준 그 알! 혹시 그것이 깨어진 것은 아닐까?' 그러나 치우천이 더 생각하기도 전에 번개범이 먼저 무섭게 포효하며 아예 치우천과 치우비를 밟아버리려는 듯 달려들었고, 새로 나타난 코가 긴 신수도 무서운 기세로 번개범을 막으려는 듯 달려들었다. 그리고 하늘에 맺힌 거대한 불덩어리 새의 형상도 갑자기 아래로 떨어져 내리듯 무서운 열기를 내뿜으며 치우천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당시의 생활 및 시대적인 설정 '치우천왕기'는 기원전 2716년, 태산 회의로부터 시작하여 기원전 2696년, 마지막 3차 탁록전투까지 20년 정도의 동북아시아, 주로 만주지방과 그 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는 보통 신석기 시대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청동기 시대로 들어갔던 것이 거의 확실하며, 아주 부분적으로 철기가 사용된 것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의 사람들의 생활은 결코 가죽 한 장을 걸치고 돌멩이를 든, 원시인의 모습도 아니며, 그렇다고 후대와 다를 바 없는 그런 차림을 한 근대인의 모습도 아닙니다. 이 적절한 중간점에서의 시대 설정은 소설의 내용과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제대로 묘사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 시대적인 설정과 그에 대한 근거를 간략하게 밝히는 바입니다. 모든 근거를 밝히고 자세히 고증하는 것은 책을 따로 한 권 출간해도 모자랄 정도이기 때문에 이해를 도울 정도의 간략한 묘사와 대표적인 증거만 문답형식으로 1권에 이어서 싣습니다. 5) 당시의 무기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물론 가장 원시적이라 할 수 있는 몽둥이, 돌멩이도 있지만 창, 칼, 도끼, 활 등이 다 있습니다. 돌칼이나 돌창이라 하면 별것 아닌 원시적인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때는 이미 석기 시대 말기입니다. 석기를 몇 개 일람했는데 수준은 상상보다 높습니다. 당시의 돌칼로 지금의 종이를 슥슥 면도날처럼 베어낼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청석, 흑석, 하물며 귀한 옥이나 보석류 등도 사용되었을 것입니다.(후에 헌원의 곤오보검은 통째로 사파이어로 만들어진 것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다만 무기에 강한 힘이 가해지는 전쟁에서는 돌무기는 상당히 잘 부서졌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구리 무기는 아주 강력한 무기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책의 후반부에는 철기도 나옵니다만 철기는 구리 무기보다 더 강합니다. 그러면서도 무게는 절반도 되지 않으며 청동처럼 깨지고 갈라지는 일이 적으므로 그야말로 신병이기였을 것입니다. 철기가 나왔다고 제가 확신하는 것은 치우가 갑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수차에 걸쳐 고서에 강조되는 언급 때문입니다. 구리갑옷은 거의 착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무거우며, 잘 깨어지므로 갑옷으로서는 극히 비효율적인 금속입니다. 그리스의 신화들을 보아도 당시 아주 힘센 영웅들조차 구리투구와 가슴받이 정도를 걸치는 것 외에는 갑옷을 입을 수가 없어서, 대부분의 방어는 나무로 만든 방패로 해내고 아예 거의 벌거벗고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의 군인들의 철모는 철 또는 합성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지극히 발달된 것인데도 군인들은 그것을 대단히 힘겨워합니다. 하물며 구리로 단단한 타격을 막아내는 투구를 쓴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후대에는 비늘갑옷처럼 무게를 줄이고 방호효과를 노린 갑옷이 개발되어왔지만 치우가 사용한 갑옷은 처음 나온 것이므로 그런 다양한 세공을 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가슴의 철판받이와 투구 정도가 전부이며, 그 덕분에 방패를 들지 않아도 되었으니 전투력이 더 올라갔을 것이며 특히 치우천왕이 고안했다는 박치기 전술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전략적인 혁명이었을 것입니다. 6) 당시의 의상생활은 어떠했을까? -우선 옷입니다. 당시는 비단이 처음 발명되었다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비단은 극히 드물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재료로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누구나 아는 가죽이며, 하나는 후대의 베나 모시 등의 기원이 되는 거친 옷감이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시 시대를 생각하려면 거의 다 벗고 지내거나 가죽 하나만을 걸친 반라의 원시인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시 무대가 되는 북만주 일대를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북만주를 방문한 것이 10월 말의 일이었는데, 우리나라의 한겨울을 방불케 하는 추위였습니다. 한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한 대륙성 혹한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적당한 옷 없이 지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물론 가죽으로 온통 둘러썼다고 볼 수도 있지만, 에스키모들처럼 정마로 무서운 혹한만 계속 되지 않고서는 가죽은 결코 효율적인 의상수단이 되지 못합니다. 뻣뻣해지고, 거칠며, 냄새가 나고, 구하기도 그리 쉽지 않습니다. 지금 만주 심양시에 있는 신락 취락지라는 유적지는 기원전 4000, 3000, 2000년경의 마을이 적층되어 거의 원형대로 발굴된 곳인데, 이곳에 재현해놓은 마네킹이나 그림도 모두 반라의 모습입니다. 제가 그 박물관 직원에게 "지금 나는 옷을 이렇게 껴입어도 추운데, 이렇게 입고 어떻게 살았겠느냐?"고 묻자 그 직원은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더 더웠던 것이 아닐까?"라고 하더군요. 지구 기온대가 달라졌다고 하기보다는 단순히, 당시 사람들도 옷을 지어입을 만한 지능과 문화를 갖추었다고 보는 편이 훨씬 쉬운데 말입니다. 박물관을 둘러보니, 그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중 바늘과 베틀의 부품, 특히 '가락바퀴'라는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가락바퀴는 구멍이 뚫린 구슬 같은 모양인데, 베틀 줄을 교차시키는 데 사용되는 물건이라서 이 가락바퀴가 나오면 비록 현물이 출토되지 않아도 섬유가 존재했다고 다르 믿는 유물입니다. 그런데 바늘, 베틀과 가락바퀴, 실 뽑던 기구의 잔해까지 나왔는데, 굳이 섬유로 만든 옷을 입은 모습을 상상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선입관이겠지요. 현재 남미 오지의 원주민들도 야자섬유 등 무엇에서건 섬유를 짜내어서 천을 만들어 입습니다. 가죽은 그만큼 불편하고 거칠기 때문이죠. 화학이 발달하여 무두질하는 방법이 알려지기 전에는, 가죽은 결코 보편적인 의류가 되기 힘듭니다. 당시 의생활은 가죽과 지금보다는 거칠지만 그렇게 큰 차이가 없는, 섬유로 된 옷들로 이루어졌다고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그 옷들에 물을 들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알타미라 동굴벽화가 1만년이 지난 후에도 그 색채를 간직하듯, 자연염료들은 생각보다 다양하고 효과도 좋습니다. 물을 들이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더 이상합니다. 다만 장식하는 방법은 지금과는 달리 퍽 개성적이었을 것입니다. 기원전 50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홍산문화나 하우량 문화 유적을 보면, 지금의 중국 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장신구나 미술방식 유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반지, 귀걸이, 머리띠, 기타 다양한 장식품들도 나옵니다. 더구나 문신, 화장, 몸에 직접 칠하는 것 등도 많이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장신구도 많이 달았겠지요. 상상하기는 좀 어렵겠지만,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되 오히려 아주 현대와 비슷할 수도 있는, 개성적이고 원시적인 생명력이 넘치는, 그런 차림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7)당시의 식생활은? -식생활이 전환기를 맞는 시대라 볼 수 있습니다. 농경이 대단위적으로 행해지는 시기라 볼 수 있는데, 지금처럼 쌀은 없었지만 조, 콩, 보리, 수수, 피, 밀 등이 재배되었을 것입니다. 농경의 발달은 쟁기의 발명에서 생산량 증가가 이루어지는데, 쟁기는 기원전 1만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므로 당연히 이 시대는 보통 생각하는 채집이 아니라 농경이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특히 콩은 만주가 원산지이니 빠질 수 없겠지요. 그러나 당시는 구리로 된 솥 등이 구하여 토기로 음식을 하는데, 물론 이 토기들에는 유약이 없었으므로 본격적인 요리문화는 나오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유약없는 토기는 재료를 흡수하므로 이전에 썼던 재료들이 뒤섞인 맛이 나므로 일반적으로 제대로 된 요리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특수계층이나 상류계층은 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의외로 솥은 요리에서는 빠질 수 없는 물건입니다. 고기는 대부분 굽거나 말렸을 것이며(몽골족의 보르챠처럼 아주 고도로 건조시킨 비상식량도 있었을 것입니다만)곡물은 대부분 그냥 물에 끓이거나 가루를 내어 물에 개어 먹었을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형태의 떡이나 부침 같은 조리물도 있었을 듯합니다. 거기에 과일이나 야채 등을 곁들여 먹었을 것입니다. 소금은 거의가 돌소금이었으며 필수품처럼 곁들여 먹거나, 아예 따로 차고 다니며 주기적으로 따로 섭취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에 아주 드물게 찜솥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아주 초보적인 떡의 존재 정도는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물의 젖에서 나오는 유제품-치즈 등-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두 가지를 다 병행했겠지만 목축을 위주로 육식을 주로 하는 사람들과 농경으로 완전히 눈을 돌려 정착하여 채식을 주로 하는 사람들로 생활 방식도 갈라지는 시기라고 보겠습니다. 당시 농경의 생산 비율은 의외로 낮아서 뿌린 종자의 2배 내지는 4배까지를 거두어들이는 정도라 추산됩니다. 물론 후대의 쌀은 4백 배까지도 생산됩니다만 중세때까지 서양의 밀은 2배 생산에 그쳤었습니다. 조나 수수는 밀보다는 생산성이 높았겠지만, 4배를 넘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농경은 의외로 조마조마하고 위험한 생활 방법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여담인데, 수렵이나 채집만을 하며 사는 종족은 없을 것입니다. 수렵은 결코 안정되지 못하고, 실제로는 수렵의 포획물만으로 살아가기는 극도로 힘이 듭니다. 물가라면 모르지만 내륙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사냥을 잘하는 마사이족도 소를 키워 그 피와 젖을 주식으로 하며, 영농이나 목축을 하지 않는 부시맨들도 수렵이라기보다는 채집을 주로 하는데 의외로 대부분의 시간을 먹거리를 찾아 소비합니다. 결코 한가하지 않으며 먹을 것을 찾는 피마르는 투쟁의 나날이라 합니다. 하물며 그것은 아프리카 같은 풍성한 열대지방이며, '겨울'이라는 변화가 있는 지방은 애당초 채집만으로 살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인구가 극소수일 수밖에 없죠. 술은 분명 있었는데, 후대처럼 증류주는 없었고, 도수가 약한 막걸리 비슷한 곡주나 몽골의 아이락(마유주) 같은 술 정도였을 것입니다. 알코올 도수는 약 4도에서 높아야 8도를 넘지 않는 약한 술입니다. 등장인물들이 술을 큰 통으로 벌컥벌컥 들이켠다고 모두가 다 주정뱅이라 생각할 정도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술이라기보다는 음료수라는 편이 더 맞습니다. 독일인들은 지금도 맥주를 물처러 마시며, 영국도 17-9세기까지 어린 꼬마들에게도 음료수로 맥주를 마시게 했습니다. 간혹 도수 높은 술이 나온다면 그것은 과실주입니다. 과실주는 정제하지 않고도 과일의 당도 때문에 도수가 16도 정도까지 올라가는데, 상당히 조금으로도 취기에 오르게 할 수 있습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미아우족의 과일주가 바로 그런 예인데, 지금으로 보면 그리 독주가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굉장히 독하고 좋은 술이었을 것입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도 포도주는 독하여 물을 타 마시는 것이 보통이고, 물을 안 탄 포도주를 마시는 자는 지독한 주정뱅이 취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후대에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비로소 술이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도수가 높은 증류주였다고 보입니다. 도수 높은 증류주(소주,배갈 등)는 아라비아에서 처음 발견된 증류 원리가 세상에 퍼진 이후에야 나올 수 있었습니다. 8)당시의 주거생활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땅을 반쯤 파고 들어간, 지금의 반지하 비슷한 움집에 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보온. 보냉의 효과 때문입니다. 그러나 땔감을 안정적으로 쓸 수 있는 높은 신분의 사람들은 땅에서 기둥으로 바닥을 띄운 높은 집을 짓고 살았다고 보입니다.(그러한 집들은 움집보다 발굴되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무너지면 자취가 남을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한 건물은 주춧돌 등의 석재를 쓰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모든 것이 자연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신족은 온돌을 사용했는데, 온돌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움집의 반지하 효과가 별로 없고 도리어 환풍이나 채광, 불때기가 나쁘므로 기둥 위에 띄운 집을 지었다고 봅니다. 물론 큰 집이라고 해도 기와 같은 것은 없었고 반은 천막이나 통나무집에 가까운 집입니다. 옮겨 다니는 경우에는 지금의 천막 같은 것을 치고 잠잤을 것입니다. 여름에는 불을 피울 필요가 없겠지만 겨울에는 이 주거문제 때문에라도 겨울의 행동이 많이 위축되었을 것이라 봅니다. 주요 등장인물 -치우가람, 치우바람(치우천, 치우비와 앙숙인 사촌들. 겉으로는 개망나니 같아 보이고 고시울률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추한 녀석들 같아 보이지만 실은 자신의 그릇과 실력을 감춘 무서운 사람들이다. 치우가람이 형이고 치우바람이 동생이며, 쌍둥이는 아니다.) -치우괄괄(치우가람, 치우바람의 아버지이며 치우 집안의 우두머리인 치우웃뜸이다. 좋은 사람이지만 풍병으로 몸을 못쓰게 되어 치우 집안은 실지로는 치우가람, 바람 형제가 장악하고 있다.) -도단이(태산 회의 때 비렴에 의해 뽑힌 열두 명의 젊은 인재 중 한 명으로 이로 인해 치우 형제와 친분을 쌓게 된다. 나서부터 눈먼 봉사이지만 박수가 되어 주술사로서의 능력은 발군이다. 눈이 멀었음에도 돌던지기에는 백발백중의 실력을 보이는 신기한 인물이다.) -질쾌(역시 태산 회의 때 비렴에 의해 뽑힌 열두 젊은이 중 한 명. 덩치는 무척 크지만 의술에 뛰어난 단군이며 대단한 의술을 지녔다. 역시 돌팔매질을 잘하며 기이하게 연기력에 뛰어나 사람을 속이는 재주가 놀랍다. 의원격이지만 후에 여러 면에서 활약하게 되며, 주신족이었다가 지나족의 대족장이 된 금천의 집안과는 대대로 원수지간이기도 하다.) -쇠돌이(태산 회의 때 뽑힌 젊은이들 중 하나. 아직 어리고 둔하며 순박한 성격이지만 수천년 묵은 산삼을 먹어서 힘이 비길 데 없다는 소년. 힘으로는 치우비 다음이다.) -스름이(태산 회의 때 젊은이들 중 하나. 여자 주술사이며 신지울태의 제자이다. 얼굴빛이 음침하고 행동도 너무도 음산하여 남자들이 슬슬 피하는 여자이지만, 의외로 성격은 적극적이며 올곧다.) -부루벼락( 태산 회의 때 뽑힌 젊은이 중 하나로 씨름꾼이다. 젊은이들 중 나이가 많은 편이며 용감하고 사람됨이 바르지만 남을 빈정대는 버릇이 있는 불평불만주의자이기도 하다.) -마파람(역시 태산 회의 때 뽑힌 젊은이들 중 하나. 눈 하나가 없는 애꾸이며 말없는 성격이지만 몸이 날래고 활을 잘 쏜다. 보돈차르가 희네에게 선물한 매 마파람과 이름이 같다.) -날램이(역시 태산 회의 때 뽑힌 젊은이 중 하나. 몸이 작고 아이 같지만 의외로 나이는 많아 애늙은이 같다. 하지만 몸이 날쌔고 돌던지기에 능하다.) -거서기(태산 회의 때 뽑힌 사울아비 중 하나. 활쏘기 외에 특출난 재주는 그리 없어 보이지만 후에 부대장으로 뽑힌 후에 활쏘기를 가르치는 재주에서 진정한 능력을 보인다. 일종의 교관이나 선생 체질의 인물이다.) -삼(역시 처음에는 별로 드러나지 않는 존재이지만 전쟁 때 비로소 능력을 발휘하는 대장감이다. 다양한 전술을 생각해내는, 모사 타입의 인물이라 후에 치우천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부달(역시 태산 회의 때 뽑힌 젊은이들 중 하나. 대단히 좋은 집안에서 났으나 부패한 신시가 싫어 뛰쳐나와 험한 사울아비 생활을 하는 특이한 인물로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성격은 내키지 않으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자유주의자이며 간혹 고집불통이 되기도 한다.) -키타야(치우비가 씨름 시합을 통해 도와준 타타르족 앗수라트 부족의 장이며 울라트의 아버지이다. 후에 치우 형제를 전폭적으로 돕는다.) -구르(앗수라트와 앙숙이었던 타타르족 앙가마이 부족의 용사였으나 포악한 앙가마이 부족장이 자멸한 뒤 새로 부족장이 된 인물. 늙은 용사이며 경험에서 얻은 지혜로운 조언을 많이 해주며 최후까지 치우 형제와 행동을 같이 한다.) -알한(투르크의 전사. 태어난 후 머리를 한 번도 자르지 않고 기른 특이한 성격의 전사로 태산 회의 때 금천에게 진 것을 원통해하여 후일 부족을 떠나 방랑하다가 치우와 합류한다.) -보챠두(타타르족 앗수라트 부족의 명물인 유명한 씨름꾼이다. 씨름으로서의 재주와 명성이 대단히 높다. 후에 초빙되어 치우군의 교관(?) 같은 역할을 맡게 된다.) -알유(지나 뱀족의 전사로 괴력의 전사이며 무서운 용모를 지녔으나 겉보기와는 다르게 선량하고 마음 곧은 전사이다.) -이부(알유와 함께 지나 뱀족의 전사이다. 힘보다는 몸이 날래고 재간이 뛰어나다. 성격이 음험하고 잔혹한 인물이다. 후에 위와 함께 알유를 음모에 빠뜨린다.) -지(십육기인의 한 사람으로 쪼글쪼글하고 바싹 마른 대머리 노인이지만 소녀 같은 눈을 지닌, 어쩌면 기분 나쁜 존재. 그러나 머리회전이 빨라서 꾀를 짜내는 데에는 대단한 능력을 보이는 인물이다.) 신수와 괴물 소개 -붕(봉황. 치우천이 얻은 알에서 우연히 깨어나 그가 키우던 매, 마파람의 영혼이 함께 들어가서 후에 맥달을 따르게 되는 주신의 신수이며, 특이하게 신수이지만 번식을 하여 일족을 지니고 있는 아주 드문 종류이다. 붕의 종족은 각국에 전설로 남은 봉황, 주작, 가루다, 불새(피닉스) 등의 원형이며 원래는 공룡과 새의 중간 정도 되는 존재였으나 아름다움을 깨닫고 추구하여 신수가 되었다. 신수들은 도력을 얻으면 어느 정도는 그 힘을 분출하여 외모나 능력을 바꿀 수 있는데, 거대한 거조가 원류인 붕은 불의 능력을 얻어서 불타는 듯한 신수로 모습을 변화한 것이다. 붕이 속한 거조신수군은 불 외에도 개성에 따라 다른 용모를 지닌 친척도 많다. 붕은 후에 사신 중에 주작의 원형이 된다.) -번개범(오해와 사람들의 음모 때문에 치우 형제와 끝없이 대립하게 되는 신수이다. 거대한 체구와 번개, 바람, 불을 뿜는 능력을 지닌 이 신수는 그 기다란 이빨의 묘사 때문에 눈치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신생대 때의 스미로돈 또는 세이버 캣(검치호)류가 도력을 얻어 남은 신수로 설정되어 있다. 실제로는 의외로 인간을 좋아하고 인간을 도우려 하는 신수이지만, 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하여 악한 신수처럼 소문이 퍼지는 존재이다. 훗날 사신 중 백호의 원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