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치우천왕기1 지은이:이우혁 출판사:들녘 출판년도 : 2003년7월20일 목차 작가의말[치우천왕기에부쳐] 서장1:하늘 서장2:땅 서장3:사람 희네와나래 선인발귀리 공손헌원 운명의만남 보돈차르 황하를건너며 맥달 카린산의여인족 염제신농 작가의말[치우천왕기에부쳐] '치우'라는 낯선 이름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내가 아홉 살 때의 일로 기억된다. 아마 초등학교삼학년 때일 듯 한데 나는 당시 [삼국지]를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버님은 내가 그러한 동양의 고전을 읽는 것을 퍽 기꺼워하며 다른 동양고전도 읽을 것을 권하셨는데, 그게 바로 [초한지]였다. 그때 나는 내가 태어난 해인 1965년에 발행된 김팔봉 씨 번역의 '통일천하'라는 제목으로 된[초한지]를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중 이상하게 내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었다. [초한지]의 주인공인 한고조유방이 처음 풍패땅에서 의병을 일으키면서 그가 제사를 지냈던 기이한 이름의 신에 대한 것이었다. '치우'라는 이름의 그 기이한 신은 당시 나에게 '중국의 군신은 치우라는 이름이었구나'라는 느낌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 그 기억이 생생한가 하면, 당시 나는 [삼국지]를 막 읽은 후 라 중국의 군신은 '관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후에 이르러서야 관우는 한고조보다도 몇백 년 후의 사람이니 당연히 당시 섬길 수 없는 사람이란 것을 알았지만, 그 치우라는 이름은 왠지 낯설지 않고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한고조유방은 중국인들에게도 최고의 영웅 중의 한 명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며, 그가 상대한 적은 중국역사상 가장 무섭고 용맹한 인물이었다는 초패왕항우이다. 그런 유방이 제사를 모신군신은 당연히 항우보다도 더 위대한 고대의 전설적 인물이어야 맞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치우'라는 인물이 도대체 누구인지는 당시로서는 찾을 수 있는 길도 없었고, 그럴 정도의 정성도 내게는 없었다. 그러나 몇몇 책을 보다가 나는 '치우'에 대한 기록들을 아주 조금씩 발견하게 되었다. 중국 쪽의 사서를 보다 보니 중국의 시조라고 일컬어지는 황제와 싸운 맞수로서 치우의 모습이 조금은 남아 있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가장 관심을 쓴 것은 그 남아 있는 기록의 모순성이었다. 사서에 의하면, 치우는 황제와 더불어 싸우다가 결국에는 황제에게 잡혀 죽은 인물이며 오랑캐라 했다. 난폭하고 사납고 포악한 인물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었다면, 왜 한고조 유방이 난폭하고 사납기만 했으며 마지막에는 전쟁에 져서 비참하게 죽은 인물에게 정성껏 제사를 지냈을까? [삼국지]의 관우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군신으로 추앙되는 것과 같은 이유일까? 중국인들은 패한 장수를 받들기를 좋아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사실[치우천왕기]를 쓰기 시작한 발단은 이 작은 의문에서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후 그 치우의 이름을 다시 보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우연히 이야기를 듣고 사서 보게된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서였다. 거기에서는 치우의 이름과 함께 연개소문의 활약상 등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지식들이 많았으며, 그때 나는 잊지 못할 문구 하나를 발견했다. 말갈족에서 갈래쳐 나온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의 역사는 대부분의 다른 이민족 국가와는 달리 실전되지 않고 남아 있었는데, 그 청사의 첫머리에 시작되는 문구가 '우리는 주신의 후예이다'라는 것이다. 그 주신이라는 나라는 내가 그때껏 배워온 고조선보다도 훨씬 이전의, 훨씬 규모가 큰 나라였고, 치우는 그 주신의 영웅이거나 왕이었던 것 같았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 어떤 서적에서도 치우가 단군보다도 오래된 인물이고 단군조선 이전의 한웅시대 때의 14대 한웅인 자오지 한웅이었다는 기록을 보고 당시의 나는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책에서 이야기하는 한웅시대란 이미 기원전 2700년경의, 신화로 믿어지던 단군시대보다 400년이나 더 전의 이야기였으며, 그를 반증하는 기록 같은 것도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간신히 찾아낸 권위 있는 책에는 치우를 '묘족의 조상'이라고 간단하게 정의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내가 알기로 묘족은 중국남부에 소수 거주하는 민족에 불과했다. 그래서 나는 잠시 동안 치우를 잊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TV 다큐멘터리를 보다가(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묘족이라는 중국의 소수 민족을 다룬 프로를 보고는 그 묘족의 풍습이나 기타 등등 많은 면이 우리와 상당히 흡사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 나는 치우를 떠올렸다. 묘족은 원래 중국 중북부 지방에 거주하였다가 차차 남으로 밀려내려간 것이지, 원래 남쪽에 있던 부족은 아니라는 말도 있었다. 그리고 중국 내 소수 민족 중에서도 가장 많은 박해를 받은 민족이라는 의견도 보았다. 이 모든 것들이 조금씩섞여서 나에게 커다란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이후 세월이 지나 내가 [퇴마록]으로 글 쓰기를 시작하고 이런저런 자료들을 많이 모으다 보니 차차 치우에 대한 자료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비록 재야사학으로만 치부되어 공식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의 서적들이었지만 [한단고기]나[규원사화], [단군세기같은 책들에서 치우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 책들에서 묘사된 치우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치우야말로 우리 민족사의 제일의 영웅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치우천왕, 자오지 한웅의 기록은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뒤져보아도 그리 많지 않았다. 내가 당시 모은 기록이 150여 구절 정도 되었는데, 이후 치우학회에서 조사한 바를 참고 해봐도 정사, 비공인야사 등을 합해도 2백여 구절이 전부라고 한다. 2백 쪽이나 2백 권도아니고 단순히 2백 줄 정도인 것이다. 짧게는 한문 10자도 안 되는 기록도 많다. 남은 내용도 대부분 '동두철액-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지녔다'라거나 '바람을 일으키는 술법 때문에 황제가 고전하다가 황제가 지남차를 발명하여 이길 수 있었다'는 등등의, 야말로 판타지적인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것만으로는 치우의 진실한 모습을 알아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진실을 전제로 하지 않더라도 구성 자체를 해내는 것조차 힘겨운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 '역사로는 고증할 수 없을지 몰라도 소설, 창작으로는 다시 만들어낼수 있을지 모른다'고 역사의끊긴 고리를 기록에 의존한다는 것은 기록이 소실된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추리는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여 시작한 것이 이 [치우천왕기]이며 처음 소설로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1994년의 일이니, 1ㆍ2권 출간까지만도 9년이걸린 셈이다. 그 중간에 '치우전기'라는 이름으로 극화를 시도해보았는데 대실패로 끝났다. 스토리 구성은 그럭저럭할 수 있었지만 그 시대 설정을 나조차 못하고 있었으니 그림 그리는 분이 이해할 리가 없다. 무협지도 아니고 고대 역사물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의 극화는 누구의 눈길도 끌지 못했고, 나는 다시 한 번 이렇게 얼렁뚱땅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깊이 자책했다. 다시 자료를 모으고 다른 글을 쓰는 중간중간 틈틈이 공부하고 생각하면서 몇 번이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이것은 애당초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고작 2백 줄도 안 되는, 그것도 태반이 중복되는 자료 몇 줄을 가지고 한 사람의 일대기와 그 시대를 다시 구성한다는 것은 내가 말하는 이른바 판타지의 기법으로도 어려운 일이었다. 혹자는 "그 내용을 쓴다는 것 자체가 판타지이다"라고까지 말했다. 후일 중국으로 답사를 가서 알게 된 것인데,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중국에서도 치우에 관련된 창작 출판물은 지금껏 단 한 건도 없었다. 심지어는 황제에 대한 자료도 [황제내문경], 즉 황제가 전했다는 최초의 의학서를 제외하고는 황제를 예찬하는 시집 두 권이 전부인 실정이었다. 직접적으로 얻을 수 있는 자료가 금방 동이 나버렸기 때문에 나는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당시의 시대상을 고증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치우가 활동했던 주신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 필요가 있었다. 신석기말기 - 청동기 초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연대별 검색을 했고, 그 시기는 맞수였던 황제의 시기와 거의 일치할 것이 분명했다. 대략 재야 사서에서 찾아낸, 그대로 믿을 수만은 없지만 "기원전 2707년 재위에 올라 109년간 즉위했다"는 시기와 비슷하다 생각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너무 막연했다. 간단하게는 남아 있는 지명조차도 극소수였고, 그나마 정확히 기록된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거꾸로 시대상으로부터 인물을 유추할 것을 생각했고, 그 당시의 시대상을 되살리고자 노력했다. 신석기-청동기 전환기의 그 시대는 정말로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원시인들이 모여살던 때가 아니다. 그렇다고 제정법제화된 국가가 있던 것도 아니다. 비단이 막 발견된 시기라고는 하나 무엇을 입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모든 것이 막연하기만 한시대였다. 나는 생각할 자료를 얻기 위해 우회적으로 지금 세계에 기록이 남아 있는 오지의 원주민들을 먼저 뒤져 섭렵했다. 최근까지 석기를 사용하는 뉴기니아 원주민이나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시아 등의 원주민 생활을 조사하고 그로부터 환경이나 적응 방법의 차이 등을 감안하여 하나하나 당시의 생활상을 떠올려갔다. 약4년 정도 지난 이후부터 어느 정도 당시의 생활이 감이 잡히기 시작했는데, 그때 나는 조금 더 욕심을 부려 언어상의 고증도 시도해보려고 했다. 어느 정도 공부도 하고 성과도 있었는데, 그렇다고 완전히그 시대의 말을 유추해내는 것은 불가능했고, 제주도 사투리에 남아있는 중세국어의 특성과 함경도 사투리 등에 남은 자취를 되짚어 당시의 말투를 한번 만들어낼 생각을 해본 것이다. 그러나 1년 반을 고생하여 그렇게 만들어낸 말투는 한마리로 '무슨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주위의 반응만 낳았을 뿐이다. 외국어를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옮기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짓이었다. 결국 글은 읽히기 위해 쓰는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다고나 할까. 단지 한자어나 그 당시 없었을 단어들만을 배제하고 대사를 다시 채워 나가는 작업을 하고 나니, 이번에는 지나치게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당시의 시대상 묘사가 너무 많은 것이 덜미를 잡았다. 한마디로 너무지루한 느낌이었다. 결국 그 모든 것을 다시 가지치기하고 생동감 있는 묘사를 위해 1ㆍ2권의 약 세 배에 달하는 파본원고를 삭제하면서 결국은 스토리와 인물, 사건에 주로 치중한 지금의 원고를 확정짓게되었다. 이 소설은 역사에 근거하고 있지만 본인이 주창하는 한국 판타지이다.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으며, 그러한 요소없이는 애당초 구성될수도 없었다고 본다. 실제 역사에 남은 작은 편린으로 구성하느라 무리도 좀 따를 수 있으나 이 작품은 소설이며, 판타지인 이상, 재미있 게 보아주시기를 바란다. 이 소설에서 내가 바라는 점은, 첫째 본인의 재주가 모자라나마 우리가 이제까지 갖지 못한 우리의 '영웅신화'를 가져보자는 데 있다. 치우천왕은, 중국인의 시조이며 위대한 영웅이었던 황제와 한치의 물러남도 없이 맞섰던, 그와는 다른 생각이나 근본을 가진 인물이었다. 아울러 그는 주신의 한웅이었으며, 그렇다면 동북아의 모든 부족의 맹주였다. 고구려나 발해등의 어떤 국가보다도 더 광범위한 세력을 가진 고대의 제왕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본문에서 충분히 언급되겠지만, 본인은 치우천왕이 마지막에 헌원에게 패하여 죽었다는 기록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입장이다. 지난번 중국에 가서 정말 운좋게 모조리 열람할 수 있었던 ㅡ놀랍게도 제반 유적과 유물들이 소문으로만 떠돌다가 비로소 발굴이 되고 있었다ㅡ유적과 유물, 중국 현지에서 시작되는 연구의 제반 상황들이 모두 입을 모아 그런 결과를 부르짖고 있었다. 치우가 쌓았다는 흙으로 된 요새의 자취, 거기서 쏟아져 나온, 영광스럽게도 본인이 직접만지기까지 할 수 있었던 유물들, 싸움터의 자취, 아직 발굴되지 않은 무덤, 고분, 거기에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치우의 묘를 지켜온 지킴이의 증언까지 접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승자라고 하기엔 너무나 의문투성이인 황제의 행적, 승리 이후에 홀연 산 속으로 사라져 버린 황제의 수수께끼, 서안에 있다고 알려졌으나 근래 교산에 묻힌 것이 확인되었다는, 마치 누가 볼세라 사람의 발이 닿지 않는 첩첩산중, 산골짜기 구석에 보이지도 않게 모셔진 황제의 진짜 묘소, 그 이후의 중국의 암흑시대, 중국학자들도 인정하는 동이족들이 세웠다는 은나라..... 그러나 치우의 묘소는 아홉 개나 있었다고 하고, 지금까지도 몇몇개는 당당하게 남아 있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말과 칼을 묻은 것이라 여러 개였다는 거대한 무덤들이 아직까지 실물을 보존하고 있는것이다. 전쟁에 패해 목을 잘린 적의 무덤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당당히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 고분들...... 초라한 황제의 성채에 비해그 규모와 기술을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차이가 나는 치우의 성채..... 본인이 직접 답사한 결과 치우의 식견과 재능에 경외감을 느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한 선조를 영웅으로 인정하고 찬가를 짓지 않는다면 누구를 칭송할 것인가. 두 번째로 바라는 점은 내가 주창해온 한국 판타지 세계의 완성에있다. 이 [치우천왕기]는 한국 판타지의 제1부라 할 수 있는[왜란종결자]와 직접 연관은 없으나 그 2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 판타지 세계 설정에 따르면 [왜란종결자]에서 보여진 우주 8계는 바로이 시대에 건설된 것이기 때문이다. 꼭 직접적인언급이나 묘사가 장황하게 이루어질 것은 아니지만, 이후 [왜란종결자]의 본격적인 후속편이 될 [귀전종결자]의 셰계는 이 [치우천왕기]에서 보여지는 세계관적 설정의 바탕 없이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울러 크게는 한국 판타지의 근간을 이루는 도력이나 윤회, 작게는 신수나 괴물, 선인 등의 기원들도 여기에서 풀이될 것이며 나름대로의 설득력을지니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ㅡ이 점이 가장 중요하지만ㅡ이러한 판타지를 통해 우리의역사 인식을 새롭게 가지는 데 이 작품이 그 일익을 담당한다면 더할나위 없겠다. 중국에서는 지금까지 오랑캐나 묘족이라 홀대했던 치우를 황제ㆍ염제와 더불어 삼조(三祖)라 일컬어 송두리째 자신들의 조상으로 섬기려는운동이 일고 있다. 이는 황제보다 훨씬 앞선 것이 분명한 치우의 유물들이 근래 다량 출토되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우리의 현충사보다도 큰, 커다란 사당이 들어서고, 한가하기 짝이없는 농지에 황제의 이름을 딴 헌원 호텔이 들어서며, 황제가 팠다는황제천의 지하수가 전국으로 상표를 달고 나가며, 그러한 움직임을 뒷받침하려고 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아직 우리의 선조일 수도 있는 치우를 그냥 묘족의 조상이라고 해도 관계없다는 듯이 방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대로라면 다음 세대 정도 되면, 치우는이제 순수 중국인이 될지도 모른다. 모자라는 실력을 90퍼센트가 넘는 상상력으로 이어 맞춘 이 소설을 이제 더 다듬고 싶은 욕심을 뿌리치고 출간하는 것도 이러한 현실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아울러 이 글을 쓰면서 몇 가지 미리 밝혀두어야 할 점을 첨부한다 -모든 지명이나 인명은 일단 한자어를 배제하려고 하였으나,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혼돈을 막기 위하여 주신족이나 다른 부족의 이름은 가급적 음을 따랐고, 지나(중국)인들의 이름은 후세에 전해지는한자어 이름을 따랐으나, 후대의 사서에 등장하는 인물의 경우는 한자어 표기를 원칙으로 했다. 물론 지명도 원어를 유추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한자어 표기가 많으나 몇몇 예외도 있다(예:곤륜산은 '쿤룬'이라 부르는 것이 맞지만, 어감상 좋지 않으므로 방언 중하나인 '카린산'으로 적음). 남아 있는 이름이 한자어와 영어나 라틴어표기로 중복될 때 중국의 경우는 한자어 음을, 기타의 경우 영어나 라틴어 등의 음역 표기를 따르고자 했다(예:거란-키탄).-수많은 부족이 등장하지만, 그 부족들의 이름도 혼돈을 막기 위해 대표적인 부족 이름으로 통칭했다. 가령 마갈족('마갸르'로 표기)은 분명 이 시대 이후에 생긴 이름이며, 당시 '숙신'이라는 이름으로사서에 흔적이 남아 있지만, 이 숙신은 주신과 동일 국가일 가능성이높다. 그러면 혼돈이 빚어지므로 할 수 없이 후일에 불리게 될 '마갸르족'이라 명명했다. 몽골족, 키탄(거란)족, 훈(흉노)족, 투르크(돌궐)족 등등도 고증이 불가능하거나 혼돈을 초래한다는 같은 이유에서 그렇게 적었음을 밝힌다. -언어는 현대어와 극히 비슷하게 썼으며, 다만 당시 아직 사용되지 않은 단어나 숙어 등을 배제하는 선에서 그쳤다. 그러나 이미 필수단어로 굳어져 버린 말들은 한자어이거나 후대에 나온 글자들일지라도 별수 없이 그냥 적었다. 말하는 관습은 조금 다르게 하였으며(존대가 있는 말과 없는 말을 구분하고자 했다.) 말투는 우리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투로 표현했다.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의 성격이나 행동, 아주 큰 사건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건 등은 90퍼센트 이상 본인의 완전한 상상이다. 그러나 절반 이상의 대다수 등장인물은 사서에 최소한 한 번 이상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다만 그들의 관계 등은 거의 전적으로 본인이 상상해낸 것이며, 이것이 정말 역사라고 오해하는 분은 행여 없으시기 바란다. 본인은 '이렇게 상상할 수도 있겠다'는 자세로 글을 쓴 것이지,'당시에 이러했다!'면서 글을 쓴 것이 결코 아니다. 부디 이 졸저가 독자들에게 재미있게 읽히고, 아주 작게나마 우리의 진정한, 멋진 조상이었을지도 모르는 한 인물에 대해 작은 관심이라도 갖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단기전363년, 기원전2716년 서장1:하늘 -맑구나. 오늘은 맑은 날이야. 내일도 맑을 것이고, 모레쯤에는 단 비가 한 번쯤 내리실 것이야. 그러고는 또 맑은 날이지. 열매며 이삭 들이 잘 여물겠구나. 거의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듯한 희고 긴 수염과 눈처럼 흰 머리칼의 노인이 눈을 감고 쭉 뻗어 누운 채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은 소리나 말로 되어 나온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울려 나올 뿐이었다. 그러나 노인 옆의 풀숲에서 뒹굴며 장난치는 작고 통통하며 눈이 큰 조그마한 아기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는지, 아기는 노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옹알거렸다. "우웅?" ㅡ들리느냐? 노인은 잠시 왼쪽 눈을 반쯤 떠서 아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기 는 '까르르' 웃으며 다시 옹알거렸다. "웅.... 응." ㅡ정말로 이녀석은.....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웃고는 눈을 다시 감았다. 노인은 얇은천 하나만 몸에 두르고 있었지만, 노인이 누운 풀밭 위의 나무에서 푸른 나뭇잎이 살랑살랑 떨어져 노인의 몸을 살풋 덮어주고 있었으며, 나비며 벌레들과 새들도 그 주변에 모여들어 기분 좋은 듯 돌아다녔다. 노인의 흰 수염과 백발은 바람에 조금씩 날리기는 했지만 흩어지지 않고 이내 가지런히 제자리로 보기 좋게 돌아왔다. 벌레 한 마리도아무 소리를 내지 않았고, 그 어느 것도 노인이나 아기를 귀찮게 굴지 않았다. 나무도 살짝 나뭇잎을 떨구었고 풀잎조차도 뻣뻣하게 뻗대지 않고 폭신하게 몸을 감쌌으며, 나비며 벌이며 새들은 그들의 머리 위를 즐거운 듯 날아다닐 뿐 아기나 노인을 성가시게 하거나 가을의 따사로운 햇볕을 가리어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았다. 한없이 평화롭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노인의 주위는 그렇듯 평화롭게 시간이 정지해버린 것 같았다. 노인은 한참이나 그렇게 누워 있다가 슬며시 눈을 떴다. 그때 아기는 옆에서 나뭇잎을 가지고 장난치며 놀고 있었다. 아기는 노인과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어 보였다. 계집아이답게 화사한 미소였다. ㅡ나를 원망하지 않는 게냐? 노인은 짐짓 아기에게 미간을 쿡 찡그려 보였다. 귀밑까지 자란 흰눈썹이 찡긋하고 움직이자 노인의 얼굴은 마음좋고 온화한 인상에서조금 무서운 인상이 되었다. 그러나 아기는 다시 배시시 웃으며 노인을 바라보다가 문득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들어 남쪽을 가리켰다. 노인은 다시 인상을 풀고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혼자 생각했다. ㅡ정말로 다 아는구나, 다 알아. 너는 정말로 ..... 어떻게 너와 같은 아이가 있는 게냐? 어째서..... 그때 아기가 다시 뭐라고 웅얼거리면서 노인의 눈썹 끝을 잡아당겼다. 비록 아기가 잡아당겼다지만 눈썹 끝이 예민할 터인데도 노인의 얼굴엔 전혀 미동이 없었다. 단지 노인은 아기에게 다시 마음으로말했다. ㅡ안다, 알아. 맥이 남쪽에서 오고 있어. 너도 아는구나. 그것을 알다니..... 다시 싱그러운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노인은 눈을 감은 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ㅡ아기가 춥겠구나. 순간 노인과 아기의 머리 위를 떠돌던 새들이 아닌, 흰빛을 띤 커다란 새 두 마리가 어디선가 나타나 너울거리며 내려왔다. 학이었다.두 마리의 학은 아기를 날개로 가려 조심스레 바람을 막아주었다. 아기는 학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흰 날개 깃털을 만지면서 까르륵 웃으며 장난을 쳤다. 두 식경 정도가 지나 서쪽 하늘이 조금씩 석양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할 때쯤, 남쪽 들판 저편으로부터 아주 작은 울림이 전해오기 시작했다. 그 미세한 울림이 조금 있다가 무엇인가 흔들리는 소리가, 이윽고는 주변 모두가 덜그럭거리며 흔들리는 커다란 소리가 되어 그 소리는 눈 깜짝할 새에 가까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런 울림에도 노인과 아기의 주변은 물 한 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듯한 고요와 평온이 여전히 감돌고 있었다. 이윽고 소리의 진원지인 듯한 곳에서 무엇인가 달려오는 거대한 소리가 일어나 순식간에 지척으로 가까워지더니 커다란 먼지구름과 함께 거대한 물체가 달려와서 노인의 발치에 딱 섰다. 그 순간 울려대던 사방의 모든 진동이 일시에 멎고 먼지구름만 잠시 하늘로 피어오르다가 스러져 갔다. 그 먼지구름이 일었던 곳에서 커다란 짐승 한 마리가 네 발로 조용히 서 있었다. 덩치는 곰만큼이나 크고, 몸 전체가 신비스럽게 번쩍이는 비늘로 덮였으며, 금색 털로 덮인 네 다리와 보기 좋은 짤막한 꼬리, 그리고 코끼리와 흡사하지만 묘하게 뻗은 우아한 코와 무엇보다도 큰 눈이 아름다운 동물이었다. 바로 신수인 맥이었다. ㅡ맥아, 혼돈을 보았다고? 노인이 편히 누운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조용히 맥에게 마음으로 물었다. 그러자 맥은 다소곳이 고개를 한 번 꾸벅하고는 남쪽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ㅡ혼돈이 이리로 오고 있구나.... 염려하지는 말거라. 그는 그이고 나는 나니까. 맥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해 보이고는 곧 아기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름답고 커다랗게 빛나는 맥의 눈이 더더욱 커지면서 눈동자에서 황금색 동그라미 같은 것이 넘쳐흘렀다. 아기는 맥의 거대한 모습에도 전혀 놀라지 않고 기를 쓰며 맥에게로 기어와 까르륵거리면서 맥을 반겼다. 곧이어 맥은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 아기를 코로 안아올려 목덜미에 태워 어르듯 흔들었다. 아기는 숨이 넘어갈 듯이 꺄르륵 거리며 웃어댔다. 그 사이 노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노인이 몸을 일으키자 마치노인을 부축하듯 나무덩굴이며 풀들이 노인을 받쳐 올리는 듯했다. 노인은 아기와 맥을 두고 천천히 남쪽을 향해 돌아섰다. 한 발을 떼는 순간 노인의 발 밑 땅이 스스로 미끄러져 나가는 것처럼 순식간에 노인의 몸은 몇 리나 남으로 이동했고 다음 발걸음을 옮기자 또다시 몇 리나 앞으로 나아갔다. 노인의 발에는 돌이며 나무뿌리며 어떤 것도 걸리지 않고 마치 얼음판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여 갔을 뿐 아니라 노인이 스쳐 지나간 길에는 금세 풀이며 꽃 등이 싹을 틔우며 솟아났다. 노인은 결코 서두르지 않고 아주 천천히 발을 옮길 뿐이었지만 노인의 몸은 삽시간에 남쪽으로 이십 리 이상을 이동해 있었다. 그러다가 노인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남쪽 하늘에서부터 짙은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소나기와 폭풍의 구름처럼, 번개까지 간간이 섞여 세찬 빗줄기를 떨구며 검은 구름은 뭉클뭉클 밀려서 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밀려오는 속도도 놀랍도록 빨라서, 조금만 있으면 노인도 그 거센 비에 휩쓸릴것 같았다. 노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지막이, 휘파람 소리와 비슷하지만 깊숙한 울림이 있는 맑은 소리가 나왔다. 노인은 서서히 두 팔을 쳐들었다. 먹구름은 돌개바람과 주먹만한 빗방울과 번개를 사정없이 사방에 흩뿌리며 어느새 노인의 눈앞까지 밀려들었다. 거친 바람에 나무가 기울며 가지가날아가고, 벼락맞은 바위가 산산이 흩어지고, 거센 물줄기가 땅 위를 휩쓸고 가는 것이 눈에 보였지만 노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급기야 땅 위를 휩쓸던 물줄기가 일순하나로 모여 거대한 파도가 되어 노인을 덮쳤지만, 노인은 여전히 팔 을 올리 채 조용히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노인을 향해 덮쳤던 물줄기는 바로 노인의 코앞에서 둘로 쪼개지더니 사방으로 갈라져 뒷걸음치듯 물러나 흘러가버리고, 눈을 얼얼하게 하는 번개가 연달아 번쩍였다. 이내 몇 줄기의 무서운 벼락이 노인을 향해 내리치려는 듯하다가 노인의 머리 위에서 방향이 틀어져 역시 노인의 바로 앞에 내리꽂혔다. 그러더니 벼락이 떨어진 자리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둥글둥글한 물체 하나가 떠올랐다. 모양이 둥글둥글한 것이 공과 흡사했고, 털도 가죽도 없으며, 눈도 코도 없는, 글자 그대로 살덩어리와 같은 기이한 생물이었다. 그러나 그 생물 주위에는 묘한 오색구름의 기운이 안개처럼 감싸고 있었다. ㅡ혼돈, 장난이 심하구려. 이제 떠날 때가 되니 아쉬우신가? 노인은 결코 인간의 언어라고는 할 수 없는, 태고 적부터 내려온 마음의 대화로 '혼돈'이라고 부른 살덩어리에게 말을 걸었다. 방금 전 자신을 덮치려 했던 홍수와 벼락이 그 혼돈의 장난이었음에도 노하거나 화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ㅡ자부(紫負), 그대가 장난을 받아주어야 장난할 재미라도 있지. 혼돈이 노인에게 대답했다. 노인의 온화하고도 따사로운 느낌에 비해, 혼돈의 느낌은 거칠고 강인하며, 위압하는 듯한 울림이 있었다. 둘이 대화를 나누자, 그 느낌은 대립한다기보다는 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중화되는 듯했다. ㅡ그대가 휘두르는 장난에 맞았다간 내 몸이 버티질 못한다네. 나는 몸을 끌고 갈 길이 아직 멀으이. 자부가 말하자 혼돈은 한 번 허공에서 빙글 위아래로 반 바퀴 몸을굴렸다. 그래도 혼돈의 모습은 여전히 똑같았다. ㅡ앞으로의 세상을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야 하늘의 뜻이겠지만..... 모두가 가는 마당에 자네만 남는다는 게 속상하다네. 혼돈의 말에 자부는 고개를 한 번 갸웃하며 물었다. ㅡ그렇다면 자네도 사람으로 태어나지 그랬는가? ㅡ도를 얻기 전에야 태어나는 것이 어디 마음대로 되겠는가? ㅡ그렇다면 나도 내가 바라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며, 좋아서 남는 것도 아니란 걸 아시지 않는가? 자부의 말에 혼돈은 낄낄거리듯 주름이 잡히게 몸을 움츠렸다가 폈다. ㅡ솔직히 같이 갔으면 좋겠네. ㅡ나도 그러고 싶었다네. ㅡ자네가 없으면 새로 만들어질 세상은 많이 기울어질 걸세. 혼돈이 이번에는 옆으로 몸을 빙글 굴렸다. 옆으로 굴렀어도 혼돈의 몸은 역시 그대로였다. 혼돈의 말에 자부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혼돈이 다시 말했다. ㅡ나는 산 것에게 고난을 주고, 힘을 주네. 고통을 통해 힘을 만들고, 살아 있는 것들의 죽음을 통해 살아남은 것들에게 힘을 쌍ㅎ게 했네. 강한 것을 살아남게 만들고, 살아남은 것들을 강해지게 만들었네. 자네가 오기 이전부터,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그것을 지켜보았네. 세상에 산 것이 나타나기 시작한 아주 오래 전부터...... 자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혼돈은 노인이 반응을 보이든 말든 계속 말했다. ㅡ세상은 많이 변했네. 나 혼자 한 것은 아니지만, 산 것들은 정말 놀랍게 번성했네. 결국에는 인간까지 나왔으니 말일세. 자네와 같은..... 자부는 다시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눈이 없는 혼돈은 잠시 자부를 바라보는 듯, 몸을 조금 돌렸다가 다시 말했다. ㅡ이제 세상은 인간의 것이 되는구먼.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다 숨어 있지. 그러나..... 그러나 나는 걱정이 된다네. 인간이 과연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을까? 그들에게 주어진 것을 모두 알아내고, 그것을 끌어낼 수 있을까? 주어진 것을 잘 쓸 수 있을까? 자부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ㅡ그들은 잘하고 있네. 잘할 것으로 믿네. 그러자 혼돈이 말했다. ㅡ나는 그렇지 않다고 보네. 그들은 스스로에게 주어진 것을 제대로 찾지도, 쓰지도 못하고 있네. 자부, 그대를 보게. 그대는 불과 수천년의 도행으로 선(仙)의 위치에 올랐네. 그러나 보통 인간들은.... 불과 백 년도 살지 못하고 죽어 없어지네. 주어진 것조차 찾지 못하고, 얻지 못하는 것이 안쓰러워. ㅡ인간은.... 영원히 죽어버리는 존재가 아니네. ㅡ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백 년 동안 살다가죽고, 다시 태어난다 해도 똑같은 바보짓, 기는 법, 걷는 법을 배우느라 백 년의 세월을 소모하고 나서 또 죽어버리고..... 왜 그런 반복을 계속해야 하는가? 그런 무의미한 반복을 기다리느라 우리가 일껏 꾸며온 이 세상을 버리고, 인간의 세상에 맞도록 다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가? 왜 모든 것을 인간에게 맞추어야 하는가? 혼돈의 말은 점차 격해져서 급기야 주변의 언덕들이 지진이라도 난 듯 부르릉거리며 떨었고, 뒤로 잠시 물러나 있던 검은 구름이 뭉쳐져 다시 억수 같은 장대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자부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되받았다. ㅡ자네는..... 떠나기 싫은가 보군..... 갑자기 혼돈이 몸을 두 바퀴나 굴렸다. 그리고 잠시 흥분을 삭이는 듯 움츠러 들었다가 서서히 몸을 폈다. ㅡ내가 억지를 부리는 것은 알고 있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나는 떠나고 싶지 않네. 세상을 다시 첨음부터 만드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야. 더욱이..... 혼돈은 다소 슬픈 듯, 몸에 주름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ㅡ이번에 다시 만들 세상은 여기만큼 아름답지 못할 걸세....... 치우친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이 싫다네.....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자부는 한 번 한숨짓고는 말했다. ㅡ세상 자체는 치우쳐도, 그 세상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그대들의 할 일인 것으로 알고 있네..... ㅡ그래, 그래. 나도 모르지는 않네. 영혼의 순환, 세상의 순환, 앞으로는 우리 같은 선인의 힘이 소용없도록, 미미하지만 수많은 작은 영혼들의 발전에서 우주의 발전을 꾀하고 순환을 꾀한다...... 내가 왜 모르겠는가? 허나...... 혼돈은 깊이 낙담한 듯, 몸빛이 회색으로 칙칙해졌다. ㅡ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완성된 존재, 초월의 존재에 가까워지기 위해 수많은 세월 동안 도를 닦아왔네. 그러나 우리의 길이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우리는 다만, 저 미미한 존재들을 위해 길을 닦고 앞을 마련해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인가? ㅡ그렇지 않네. 자부가 딱 잘라 말했다. ㅡ혼돈, 인간 종족은 그렇게 미미하지 않네. 그들은 이제 모여 살기 시작했고, 장차 우리 같은 외로운 존재들이 할 수 없는 수많은 일을 해낼 것이네. 비록 백 년밖에 못 살지만 백 년이라는 짧은 시간 속에서도 수많은 관계를 이끌고, 수많은 발전을 이룰 것이며, 수많은 창조를 행할 것이네. 하나하나는 미미하고 약할지라도, 모이면 강해질 것이네. 그리고...... 자네는 그리 낙담할 것이 없네. 자네나 다른 모든 선인들의 힘이 없었다면, 인간은 나타나지도 못했을 것이니까. 그러면서 자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ㅡ물과 바람, 하늘과 빛, 땅과 수목, 짐승과 고기, 그 모든 것들이 억만 년의 세월 동안 이루어지고 준비되어졌네. 그리고 힘과 파괴, 불과 벼락, 지혜와 지식 그 모든 것이 깨달음을 얻은 자들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네. 자네를 비롯한 모두의 힘일세. 그리고 자네를 비롯한 모든 힘과 모든 자연과 모든 선인들의 힘일세. 선인들은 세상에서 나와, 자기가 나왔던 세상을 일구고 가꾸었네. 훌륭하게 모든 것을 해냈네. 그러니 이제 때가 된 걸세. 인간들은 이미 번성하고 있고, 그들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것일세. 새로운 우주를 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영혼이 그들 중에서 나타날 것일세...... 자부의 목소리가 힘을 띠자, 혼돈의 등장으로 휩쓸려 거칠어졌던 땅에서 풀과 나무가 돋아나고, 바위가 굴러 자리를 되찾고 흩날리던 흙이 자리를 잡아 평탄해졌다. 탁해졌던 물이 다시 맑아져 유유히 흘러가고 먹구름 사이를 뚫고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내렸다. 잠시 칙칙해져 있던 혼돈이 말했다. ㅡ인간은 교만해질 걸세. 생계(본인의 한국 판타지 세계관에 포함되어 있는, 8개로 나누어져 있는 우주의 한 부분.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를 말하며, 살아 있는 것들이 어울려 영혼의 발전을 꾀하고 있는 세상을 의미한다.)에서 성계(본인의 한국 판타지 세계관에 포함되어 있는, 8개로 나누어져 있는 우주의 한 부분. 생계의 영혼들을 위해 가르침과 깨달음을 주는 존재들이 사는 일종의 극락정토나 엘뤼시온과 흡사한 곳. 아주 깨달음이 큰 영혼들이 승화되어 이곳으로 올라간다. 성계 자체도 수많은 작은 세계로 나누어져 있다.)와 광계(본인의 한국 판타지 세계관에 포함되어 있는, 8개로 나누어져 있는 우주의 한 부분. 성계와 흡사하지만 이곳의 존재들은 순수한 에너지 형태로 존재한다. 자연계의 정령이라거나 에너지 그 자체와 더 흡사한 우주라 볼 수 있다.) 사계에서 마계(본인의 한국 판타지 세계관에 포함되어 있는, 8개로 나누어져있는 우주의 한 부분. 그곳은 8계중 중 어둠을 대표하는 세계로, 성계와는 상극이다. 근본적인 악이나 어둠을 지니고 있는 세계로 알려져 있으나, 악이라기보다는 이기심과 자만심의 세계라고 보는 편이 더 낫다. 마계로는 영혼이 전달되지 않지만 마계는 끝없이 광활하며 마계를 이루는 마수들의 순위까지 정해져 있는바, 마계의 존재 들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는 수수께끼다. 혹자는 신계처럼 마계는 악 의 존재가 끝없이 탄생하는 곳이라고도 하나 누구도 그 진실은 알지 못한다.)와 유계(본인의 한국 판타지 세계관에 포함되어 있는, 8개로 나누어져 있는 우주의 한 부분. 고독과 외로움, 절망으로 가득 찬 세계로 사계지옥의 심판으로도 정화될 수 없는 영혼이 가는 곳이며 그만큼 음습하고 무서운 곳이기도 하다. 보통의 시작으로는 마계보다도 오히려 유계가 악의 세계에 가까울 것이다.)가 만들어지고, 고립자 (자연과 융화되어 도력을 얻었지만, 초월적인 사상이나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이 얻은 힘이나 개인적인 상황만을 중시하여 세상을 위해 사용하거나 큰 일 을 도모하지 않고 그냥 한없이 힘을 키우고만 있는 존재들. 즉 본문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신수들이나 악한 선인들 등이 이러한 고립자에 해당한다. 대부분 영혼의 순환을 거부하고 스스로 무한히 존재하는 것만을 바라며 존재 자체가 세계 구성에 부담을 주는 거북스러운 존재들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들이 환계(본인의 한국 판타지 세계관에 포함되어 있는, 8개로 나누어져 있는 우주의 한 부분. 신성광생 사유환마라고 대별되지만, 신계는 창조계로 아무도 접근할 수도, 거의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 우주이며, 마계의 상극은 실제로는 신계가 아니라 성계이다. 그에 반해 이 환계는 어둠에도 선에도 속하지 않은, 일종의 자유세계이다. 즉, 영혼의 순환을 떨구어낼 정도의 깨우침을 얻었지만, 그러한 순환에 들어가거나 빛이나 어둠의 세계 어느 한쪽을 택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려는영혼들이 모인 세계라 보면 된다. 환계로 새 영혼이 들어가는 일은상당히 드물며 대부분은 우주 8계 건설시에 모인 신수, 선인들이나 고립자들이 대부분이다. 우주 8계는 이 치우천왕 시대에 선인들의 세상을 끝내고 영혼의 순환에 의한 보다 창조적인 세상을 만들기위해 건설되었다.)로 빠져나가게 되면, 힘의 균형이 없어질 걸세.ㅡ이제 생계는 인간과 동물, 식물들의 것일세.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들만의 것이 되겠지. 이미 정해진 섭리인 것을. ㅡ인간들은 자신들이 우주의 주인이 되었다고 교만해질 걸세. 하지만 인간 이상의 존재는 남아 있어야 하네! 혼돈이 고함을 지르듯 외치자 자부는 조용히 말했다. ㅡ자네는 정말 떠나기 싫은가 보군...... 잠시 말을 끊다가 자부가 다시 말을 이었다. ㅡ존재는 필요 없네. 인간은 항상 스스로의 미약함을 알게 될 것이고, 잊게 되면 바로바로 그것을 깨닫게 될 걸세. 그러나 직접적으로 인간 이상의 존재가 훌현할 수는 없다네. ㅡ많은 신수와 요물, 괴물들이 떠나지 않고 남아 있으려 한다네. ㅡ큰 도를 깨달은 자들은 모두 섭리에 따를 걸세.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들은 인간들에게 맡기면 된다네. 자부의 말에 혼돈이 웃으며 대꾸했다. ㅡ인간이 신수들을 이긴다고? 아무리 큰 도를 깨우치지 못한 작은 신수들이라도 인간들이 그것들을 이긴다고? ㅡ자네가 말한 시련이라고 보면 되네. ㅡ자네는 나보다 더 독하군? 그들은 상상외로 많네. 고립자라고큰 도를 따르리란 법은 없어. 그렇다고 그들을 우리가 끌고 갈 수도 없는데! ㅡ그런 짓을 한다면 우리가 그런 것들과 대체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행위로 인해 죄값을 치를 걸세. 혼돈, 이제 생계는 위험한 곳일세. 여기서 죽음을 맞이하면...... 아니, 이제 생계에서는 그 어떤 자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네. 자연스러운 죽음은 무엇으로로도 되돌릴 수 없고, 죽음의 문을 지나면 쌓아왔던 모든 도가 파괴되네. 이제 생계는 선인들에게도 매우 위험한 장소야. ㅡ하지만 그것도 불사하고 남겠다는, 그래서 세상을 뒤엎으려는 고립자들은 누가 막겠는가? 섭리에 따르는 대선들이 모두 옮겨가서 지켜만 보게 되는 판이네. 인간이 막나? ㅡ인간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속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그들은 그리 약하지 않네. ㅡ자네는 약하지 않지. 하지만..... 혼돈은 뭔가 말하려다가 멈칫하더니 다시 말했다. ㅡ나는 믿지 못하겠네. 인간을 위해서라도 인간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네. 아무리 남아 있고 싶어도 나는 남을 수 없겠지. 그렇다고 내가 이루어온 모든 것이 허무하게 망가지는 꼴은 보지 못하겠네. 인간들에게 줄 것이 있다네. 자부는 탄식하듯 고개를 저었다.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던 흰 수염이 일순 바람에 흐트러졌다. ㅡ그건 집착이네..... ㅡ아니네, 애착일세. 나는 인간들에게 나의 힘의 원리를 말해주겠네. 같은 힘을 모아 뭉치고, 강해지라고. ㅡ자네의 힘을 인간들이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 걸세! 적어도 아직은...... 자부가 막아서듯 외쳤지만 혼돈은 듣지 않았다. ㅡ인간이 약하지 않고, 우리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면 못할 리 없을 걸세! 지금의 인간은 너무도 많아. 강한 인간 하나가 세상을 모아 지배하게 해야 하네! ㅡ그것이 아닐세! 인간은 역할이 달라! 수많은 서로 다른 인간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 걸세! ㅡ한 종류의 인간만! 제일 강한 인간 종족만 있어야 하네! 그들에게는 넘어야 할 길이 너무도 많기에! ㅡ여러 종류의 인간이 같이 모여야 하는 걸세! 혼돈, 자네는 섭리에 위배되는 일을 하는 걸세! ㅡ내 자신도 섭리의 일부일세. 우리 선인들이나 고립자들이 스스로의 길을 택하는 것이 곧 섭리를 이루는 길이네. 나는 내 생각이 옳다고 믿네. 그렇게 할 생각이네! ㅡ나도 옳다고 믿는 생각이 있네! ㅡ그럼 자네도 그대로 하게. 자부, 내 생각이 옳을 걸세. 만약 그르다 하면, 그것은 자네가 말한 인간에 대한 시련이 되겠지. 그렇지 않은가? ㅡ혼돈! 그대는 고립자 따위와는 다르네. 그리고 인간은...... 인간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자부가 안타깝게 외쳤으나 어느새 혼돈은 검은 구름을 휘몰아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면서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고 있었다. 다른 차원으로 올라가면서 혼돈이 외치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퍼졌다. ㅡ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은 세상의 필연! 그대보다 헤아릴 수 없이 오래 전부터 내려온 길일세! 나는 그 길을 택할 것이고, 다른 선택이없네! 자네는 여기에 남고, 나는 다른 세계로 가겠지. 애석하네, 마지 막 작별이 이러해서. 그러나 서로간에 모든 것을 다하세. 그것 이야말로 섭리라 여기네.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순식간에 혼돈은 사라졌고 거대한 먹구름도 씻은 듯 사라졌다. 혼돈이 사라지자 자부는 천천히 그 자리에 앉았다. 자부는 눈을 감고 몇 번이나 생각해보고, 또 생각했다. 어느새 아기를 태운 맥이 자부의 등뒤로 슬며시 와 있었다. 아기는 자부를 보더니 다시 꺄르르 웃으며 자부의 머리카락을 잡고 어깨에 매달렸다. 그 모습을 보며 자부는 조용히 생각했다. ㅡ자네가 바로 고립자의 한계일세, 혼돈. 나는 자네보다 헤아릴 수없이 늦게 나왔고 늦게 도를 이루었지만, 자네는 도를 이룬 지 너무 오래 되었네. 너무 오래 되어 이제는 새 생각을 하지 못하지...... 자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밤이 되었는지 별이 총총하게빛나고 있었다. ㅡ이것이 바로 선인들의, 고립자들의 한계로다. 강해지려야 더 강해질 것이 없고, 나아가려야 더 나아갈 것이 없다. 우주는 그래서는 아니 되느니. 더 나아가고 발전해야..... 산 것이 자식을 낳듯, 우주도 그렇지 않으면 무디어지고 낡아져서 공허해지느니.....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미미하고 약한 인간들에게 다시 한 번 맡기어서..... 새로운 창조의 시작을..... 그러다가 자부는 금세 미간을 찌푸렸다. ㅡ허나 힘들 것이다. 생계에는 아직도 섭리를 따르지 않는 존재와 힘이 수없이 남아 있고..... 인간들에게 모든 것이 있는 만큼, 고립자 들의 좋은 점 나쁜 점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모여 있을 것이다. 혼돈 같은 대선조차도 인간들에게 강해지려는 이기심을 불어넣으니..... 그들이 원래 지닌 악한 성품이 두드러진다면.... 더구나 인간에게는 아직도 수많은 적이 있는데, 자기들끼리도 수없이 싸우고 서로를 없애려 혈안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직접 도울 수조차 없다. 자부는 문득 손을 올려 자신의 목덜미에 엉겨붙은 아기를 어루만져 주었다. 아기는 여전히 아무 걱정 없는 듯 까르륵거리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이내 자부의 미간이 펴졌다. ㅡ나도 역시 인간인지라 인간에 대해 너무 애착을 가진 것은 아닌가? 허허...... 할 수 없구나. 인간을 믿어보자. 이 아기만 해도 나조차 가지지 못한 힘이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을 시련이라 두게 하여야할까...... 혼돈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자부는 아기를 다독이면서 한 번 나지막하게 자연의 진동을 사방에 토해냈다. 낮고도 맑은 울림이 사방에 가득 차자, 갑자기 주변의모든 것이 활기를 되찾는 듯했다. 자부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ㅡ혼돈은 분명 황하로 갔을 것이다. 그도 맞을 만한 인간을 찾겠지. 나도 인간에게 맡겨야 한다. 어디, 그가 내린 시련을 이겨낼 만한 인간이 있는지 찾아보자..... 자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서 맥에게로 갔다. 그러자 맥은 몸을 낮추어 자부가 등에 올라타도록 했다. 자부는 맥의 등에 옆으로 편안히 걸터앉아 말했다. ㅡ가보자꾸나, 맥. 맥은 어디로 가느냐는 듯, 잠시 고개를 돌려 아름다운 눈망울로 자부를 바라보았다. 그 눈망울을 보며 자부는 웃으면서 말했다. ㅡ혼돈이 간 곳이 어디인지는 알 만하다. 그는 황하로 갔을 것이니, 그 반대로 가보자꾸나...... 맥의 눈동자에 잠시 녹색의 동그라미가 아롱거렸다. 자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ㅡ그래, 맞다. 내가 태어났던 곳이지. 고향으로 가는 거다. 여기서 북동으로 가면 주신(우리나라의 옛 이름. 숙신, 조선 등의 원래 이름. 본인의 설정상 최초 안파견 한이 세운 나라가 주신인데, 그 이름은 '하늘이 주신'나라라는 데 기인한다. 그후 수천 년간 부흥하면서 이동하였고 결국은 자리를 신시에 잡아 번성한다. 개방적이고 종족간의 이념에 사로잡혀있지 않기에 큰 나라(라기보다는 부족)로 발전하였고, 한인 시대를거쳐 한웅 시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부족의 혼성체인 큰 연방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본문에서는 주신이 단일족이고 그 밑에 많은 부족을 연방의 하나로 거느린 것으로 묘사하였지만, 실제로는 그 연방 구성 부족들도 주신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다. 본문에서 각 부족들이 주신족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은 본문이 주인공인 치우천왕 때 이루어지는 일로 설정되어있다. 극히 초기의 로마시대를 연상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접경이다. 신시(주신의 옛 도읍. 이 도읍의 이름에는 많은 설이 있는데 본인은 선택하기 어려워 어원을 고증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신시'라는 이름을 썼음을 밝혀둔다.) 로 가는 거다! 그 말을 듣자마자 맥은 우두두 지축을 흔들면서 먼지구름을 일으 키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밤하늘에 빛나는 북두성을 조금 비낀 북동쪽, 주신의 도읍인 신시를 향하여....... 서장2 : 땅 멀리 떨어진 서쪽 땅. 거대한 산이 겹을 이루고, 그 사이사이마다 울창하고 장대한 숲이 웅크린 거칠고 험한 땅의 깊은 밤. 아찔할 정도로 불타오르는 광채를 줄기줄기 내뿜으며 거대한 새가 날아올랐다. 그 모습은 마치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것 같았으며, 그 주위에 움집을 짓고 살던 사람들은 모두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 새가 날아오르며 뿜어낸 불꽃 줄기들이 자기들의 조그마한 움집이나 마을을 태우거나 상하게 할까 봐 잔뜩 겁에 질렸다. 그들은 앞 다투어 뛰쳐나와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하늘을 향해, 새를 향해 빌었다. 새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불꽃들은 아직은 뜨겁지 않았다. 날개 끝, 꼬리 끝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그 불덩이, 불의 광채들은 실은 안온하고 따스했으며 허공을 아름답게 수놓아 장식하는 데 필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새는 그런 것엔 아랑곳하지 안았다. 사람들이 고개를 조아리건 말건 관심조차 없었다. 새는 그냥 날고 싶었을 뿐이었다. 무엇인가 답답하고 울적한 느낌이 강해져 왔기 때문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날아올랐다. 하늘로 날아오르자 새는 기분이 좋아졌다. 답답한 느낌도 어느새 가셨다. 너무 오랫동안 둥지에 있었기 때문일까? 새는 하늘 전체를 불꽃으로 수놓듯, 우아하게 날개를 휘저으며 하늘에 반원을 그렸다. 춤을 추듯 옆으로 날아 눕다가 일순 아래로 떨어져 내렸고, 그러다가 다시 매끄럽게 몸을 틀어 하늘로 솟구쳐 오르기도 했다. 새는 행복했다. 자신의 우아함과 아리따움을 느끼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불로 허공을수놓는 것에 스스로 황홀해했다. 새는 더더욱 날개를 활짝 폈다. 그러자 불꽃이 점점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안온하고 따스했던 불꽃들이 서서히 쇠도 녹일 만큼 무시무시한 열기를 뿜어냈다. 새는 흥분하고 있었다. 하늘과 땅과 그밖의 모든 것들에게 자신이 나는 모습, 자신이 검은 밤하늘을 수놓는 아리따운 광채들을 보여주고 싶은 우쭐한 기분이 되었다. 밤하늘은 불로가득 차 아찔할 정도로 눈이 부셨고 휘황찬란했다. 새는 점점 번개처럼 날면서 밤하늘에 원하는 영상을 그리기 시작 했다. 새는 말을 하거나 다른 존재들과 의사를 전달할 줄을 몰랐다. 수천 년을 지내온 지금까지 그러했다. 그러나 지금 새는 보이고 싶었다. 자신의 존재를 보이고 싶었고, 자신이 수많은 세월 동안 생각하고 지키고 누려온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싶었다. 밤하늘이 불꽃으로 가득 찼다. 번개같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날고 있는 새의 동선을 따라 불꽃은 끊임없이 밤하늘을수놓았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하면서도 처절하고 아름다운 문양이 드넓은 하늘에 펼쳐졌다. 그 새도 모르는 사이, 그 문양은 새의 마음을 오롯이 담아냈다. '나는 외롭다' 문양은 점점 처절해졌다. 외로움의 어두움과 깊이에 점점 이끌려 들어간 새는 점점 빠르게, 점점 강한 열기로 문양을 그려냈다. 새는 더욱더 스스로에 몰두하면서 모든 생각의 끈을 놓아버렸다. 나는 것을 좋아하고 나는 것으로 도를 닦은 새는 오랜만에 날면서 스스로의 깊은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의 숲은 불바다가 되었다. 수백 년 넘은 고목들이 빽빽이 들어선 숲은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불에 활활 타 들어가고 있었다. 뛰쳐나와 절하던 사람들의 절반은 그 불길에 삼켜져버렸고, 나머지 사람들도 화상을 입고 그 뜨거운 열기를 이기지 못해 절규하며 뿔뿔이 흩어져 갔다. 그들은 생각했다. 왜 신수가 화가 났을까?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면서 그토록 치성을 다했건만, 바로 이 순간까지 부족함이 없었는데, 왜 이토록 화를 내어 무자비하게 우리를 불태우는 것일까? 남아 있던 사람들은 신수에게 불경하여 죄를 지은 것 같은 마을 사람 수십 명을 자신들의 손으로 처참하게 죽였다. 그들은 큰 돌에맞고 몽둥이에 맞아 무참하게 깨어져 죽어갔다. 그러나 신수는 여전히 불벼락을 내렸다. 마을사람들은 절망의 탄식을 내뱉으며, 이제 마을을 버리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이 죽인 수십 명과 그들을 죽인 마을사람 중 발이 느렸던 절반은 거대한 불에 휩싸여 재가 되어 흩어져 갔다. 땅 전체가 불덩어리가 되어갈 즈음 갑자기 땅 끝 저편에서부터 거대한 무언가가 다가왔다. 땅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그 무언가는 무서운 속도로 땅을 파헤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것이 지나가는 부분의 땅은 거대한 동산처럼 불거지더니 이내 모조리 산산이 부서져 솟구쳐 오르다가 그것이 지나가면 파편이 되어 허물어져 내렸다. 절벽이 무너지고, 산도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나무들은 뿌리째 뽑혀 튀어올랐다가 다시 뒤집혀 가지부터 땅에 박히고 흐르던 강도 제자리를 잃고 옆으로 터져나가 방향을 바꾸며 근방을 흙탕 범벅으로 만들었다. 새가 하늘을 날며 불꽃으로 허공에 수놓을 때, 그것은 땅을 파며 지나간 자취로 땅에 수를 놓았다. 불에 쫓겨 달아나던 사람들은 땅이 흔들리며 뒤집히는 바람에 또 한 번 흙에 파묻혀 소리 한 번 지를 틈도 없이 죽어갔다. 마침내 불바다가 된 숲어귀에 도달하자 그것이 땅에서 머리를 쳐들었다. 발이 여덟 개 달린 거대한 짐승이었다. 오소리와 흡사했지만 몸은 뱀처럼 길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뿔이 달린 사람과 흡사했다. 그 짐승이 하늘을 보고 길게 울부짖었다. 상당히 먼 곳에서 땅을 파고 살던 거대한 짐승이었다. 새와 마찬가지로, 땅 속에서 꼼짝 않고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은 지 몇 백 년, 몇천 년이 지났는지 몰랐다. 오랜 세월, 자연의 기와 동화되어 거대하게 자랐고, 모습이 변했다. 꼼짝도 않고 앉아 있으니 커져가기만 했다. 그러던 중 새가 날아올라 흩뿌리는 불꽃을 느꼈다. 다른 존재, 그것도 자신만큼이나 거대한 존재에 대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 느낌을 따라 달려왔다. 하지만 땅 밖으로 몇백 년, 몇천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고 보니, 너무 뜨거웠다. 그 정도의 열기에 죽거나 다치지는 않겠지만 기분이 나빠졌다. 비록 도를 닦은 신수였으나 짐승의 본능은 아직 도 남아 있었다. 짐승은 하늘을 향해 위협하듯 울부짖듯 외쳤다. '썩 꺼져라!' 새는 놀라서 허공에 그리던 문양을 흐트러뜨렸다. 외롭다는 생각이 일순 씻은 듯 사라지고 자신의 영역이라 생각했던 곳을 침입한 자에 대한 경계심이 솟아올랐다. 더군다나 소리치는 저 짐승은 결코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새는 위협하듯 강한 불꽃을 떨구며 짐승의 주변을 날았다. 짐승은 더 거세진 불꽃의 의미를 느끼고 화를 내며 입을 크게 열어 돌덩이들을 내쏘았다. 새는 날개를 틀어피했지만 역시 화가 나서 격렬하게 날갯짓을 하며 불꽃을 퍼뜨렸다.짐승이 내쏘는 흙먼지와 돌은 새가 날갯짓하여 쳐내는 불덩어리와 맞부딪쳐 허공에서 폭발하여 우박 같은 돌비가 사방으로 솓아져 내렸다. 사방 수십 리가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먼지와, 숨을 쉬면 목구멍까지 태워버릴 듯한 열기로 가득 찼다. 불에 달구어진 돌비는 그나마 남아 있던 잿더미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짐승과 새는 계속 치열하게 싸웠다. 화가 난 짐승은 땅거죽을 송두리째 들어내어 집어 던졌으나 수십 채의 집만한 그 거대한 흙과 돌뭉치는 새에게로 날아가지도 못하고 주변의 숲을 송두리째 뭉개버렸다. 새가 뿜어내는 불과 열기는 그 주변뿐만 아니라 사방으로 번져 그 일대가 거대한 산불로 휩싸였다. 그 둘에게는 싸움이었으나 작고 힘없는 존재들에게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두 거대한 신수들의 싸움은 날이 샐 때까지 계속되었다. 어느 쪽도 다른 쪽을 이기지 못했고 어느 쪽도 서로를 용납하지 못했다. 짐승은 날이 샌 것을 알자 습관처럼 땅 속 깊은 곳으로 숨어 들어갔고, 새는 불꽃의 둥지 속으로 몸을 숨겼다. 자기와는 너무도 다른, 그러나 자기만큼 거대한 존재가 바로 근처에 있었기에 그들은 둘 다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그들의 작은 다툼에 수백 명의 사람들과 수천, 수만 마리가 넘는, 과거의 그들과 마찬가지였던 작은 짐승들이 죽어가고, 숲이 타고 땅이 뒤집혀서 폐허가 되어버린 것을 그들은 깨닫지도 못했다. 그 근처에서 살아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은 산이 불을 뿜고 땅이 흔들린 것인지, 신수가 화를 내어 움직인 것인지 몰라 망연해했다. 거대한 힘을 가지게 되어 오만해져 자신의 존재와 과거를 잊고 그 어떤 존재에도 눈을 돌리지 않는 신수들. 그래서 대선들은 그들을 고립자라 불렀다. 그 고립자들 중 하나인 새와 짐승은 이제 혼자가 아니라 자기와 비슷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혼자일 때보다 더더욱 못했다. 그들은 이제 서로 적이 된 것이다. 서장3 : 사람 광활한 벌판에 수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이어 지나가고 있었다. 쉽게 볼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리였다. 말등에 앉아 갈기를 손에 잡은 사람들이 수백 명이나 앞장서 있었다. 한결같이 탄력 있는 근육질의 억센 양다리로 말의 허리를 단단히 조인 것으로 보아 말을 타는데 퍽 익숙한 사람들이 분명했다. 게다가 그들 모두는 번들거리는 검은 구리로 만든 도끼며 창을 뒤에 메고 있었으며, 그들 중 많은 수가 길게 자란 머리를 위로 틀어올린, 상투 올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걷고 있었는데, 그중 화려한 차림의 스무 명 가량은 상당히 신분이 높은듯, 주변을 에워싼 사람들 사이에서 당당히 걷고 있었다. 그 뒤에는 여러 채의 가마가 뒤따랐다. 그중 가장 앞장선 큰 가마는알통이 불룩불룩 튀어나온 힘이 세고 우람한 남자들이 메고 있었다. 가마의 네 자루를 여덟 명씩, 모두 서른두 명이나 되는 힘센 장사가 멜 정도로 컸다. 나무로 만든 그 가마는 마치 아주 좋은 집을 가마 위에 지은 것처럼, 솜씨가 몹시 정교하여 매우 위엄 있고도 아름다웠고, 금과 빛나는 여러 색의 돌과 옥으로 덮였으며, 또 꽃과 새의 깃털 등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대단히 신분이 높고 귀한 사람이 그 안에 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 뒤로 각각 네 사람이 멘 네 채의 가마가 따라오고 있었는데, 그 가마도 호사스러웠지만 사람이 하나 앉는 정도로 아담했다. 네 채의 가마 중 두 채에는 남자가 타고 있었는데, 한 명은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른 늙은이였고, 한 명은 체구가 당당하고 몹시 사나워 보이는 인상의 검은 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그 뒤를 따르는 두 채의 가마에는 여자들이 탔는데, 한 명은 늙은 여인이었고 한 명은 젊고 몹시도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앞장선 가장 큰 가마 앞에는 보기에도 늠름한 텁석부리 수염을 기른 남자가 높은 기둥 하나를 꼿꼿이 세우고 말을 타고 있었는데, 그 끝에는 새 모양의 조각이 되어 있었다. 바로 솟대(우리나라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새 모양의 형상을 높은 기둥에 새겨 세운 상징 조형물. 주신이 형상화된 토템이나 동물 등을 섬기지 않고 처음부터 어느정도 형이상학적인 '하늘' 사상을 믿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이 솟대는 그 자체로 새를 숭배하는 숭배물은 아니며 하늘을 날 수 있는 새를 매개로 '하늘과 통하는 길'로 상징하여 받든 것이다. 물론 새를 제일 영험한 동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새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며 신성한 새ㅡ봉황 등ㅡ는 하늘이 내린 사자나 주신을 돕는 신수 정도로 여길 뿐이다.)였다. 다시 그 뒤로 수백 명의 장정들이 구리창을 높이 세우고 따라오고 있었으며, 그 뒤로는 활을 메고 화살주머니를 허리에 찬 수백 명의 장정들이 따랐다. 그 뒤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온갖 물건을 짊어지거나 온갖 물건을 실은 소며 조랑말, 나귀 따위를 끌고 뒤따랐고, 맨 마지막으로는 수십 명의 무장한 장정들이 말을 타고 뒤를 경계하며 오고 있었다. 그들 주위로는 말에 올라탄 백여 명의 장정들이 주변에 위험한 것은 없는가 살피면서 부지런히 앞뒤로 달리고 있었으며, 오십 명가량의 말 탄 장정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 조금 먼 곳으로 나가 꼼꼼하게 확인하면서 말을 몰았다. 모두 합해 천 명이 넘는 장대한 행렬이었다. 그 경계가 빈틈없고, 쉽게 볼 수 없는 화려한 가마이며, 사람들 대부분이 호위하는 남자들인 것으로 보아 아주 높은 신분의 사람이 어딘가로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가장 앞장선 말 탄 장정들 중에 가장 우두머리 격인 듯한 남자가 솟대를 옆의 사람에게 맡기고는 돌연 앞으로 말을 몰고 나갔다. 그 남자는 텁석부리 수염을 잔뜩 길러 호탕한 성격으로 보였고, 마흔 살 가량인 듯했지만 아주 체구가 우람하고 힘이 센 것 같았다. 그는 말갈기를 손으로 쥐지 않고 말을 달려도 자세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한 손에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큰, 번들거리는 검은 구리도끼가 들려 있었고, 등에는 커다란 활이 메어져 있었다. 앞장선 무리의 조금 앞으로 달려 나온 그는 왼손을 펴서 눈 밑에 대고 먼 곳을 보았다. 그가 바라보는 지평선 저 너머로 말 먼지 같은 것이 뿌옇게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 먼지를 자세히 보다가 돌연 함박같이 입을 벌리며 껄껄 웃었다. "왔구나!" 곧 그 남자 뒤를 따라온, 체격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표정이 몹시도 야무져 보이는 사내가 그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아들?" "그래!" 텁석부리 남자는 간단히 대답하고는 '이럇!' 하는 소리와 함께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나갔다. 야무진 표정의 남자도 '이럇' 하면서 그 뒤를 따라 달려갔다. 맞은편에 역시 말을 탄 한 무리의 남자들이 오고 있었다. 숫자는 삼십 명 가량이었는데, 그들 모두 이쪽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베와 가죽으로 만든 거친 옷을 입고, 구리도끼와 활을 메고 있었다. 머리는 상투를 튼 사람도 있었지만, 머리를 틀지 않고 길게 늘어뜨리거나 가죽 끈으로 묶는 등 조금 달랐으며, 전반적으로 젊어 보였다. 오히려 풋내 나는 것처럼 보이는, 막 아이 티에서 벗어난 듯한 소년들도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의기양양하고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이 점점 다가오자 텁석부리 남자의 얼굴빛이 점점 어두워지고 일그러졌다. 그때 젊은이들 가운데 덩치가 크고 상투를 높이 튼, 눈꼬리가 높이 솟아 다소 험악한 인상의 청년이 말을 달려나와 텁석부리남자 앞에 섰다. "주신 사울아비 양역이 사울아비 스승 치우우레님께 말씀드립니다." 양역이라고 자신을 밝힌 청년은 씩씩하고도 약간 거친 말투로 텁석부리 치우우레에게 말했다. 치우우레는 별말 없이 '음'하는 소리만 냈을 뿐, 얼굴빛은 여전히 심각했다. 치우우레의 뒤를 따라온 야무진 표정의 남자도 말을 멈추었다. 치우우레가 단순히 '음' 하는 소리만 냈을 뿐, 별다른 말이 없자 양역은 당황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들은 사울아비였고, 사울아비들 사이에는 법도가 엄해서 상급자의 기분을 건드려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양역은 이제 막 성인식을 치러 사울아비가 된 풋내기였고 임기 응변에 능하지 못하여 이만한 일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치우우레의 뒤를 따라온 야무진 표정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주신 사울아비 치우벌이 사울아비 양역에게 말한다. 어서 말해라. 치우우레님은 다 듣고 계신다." 양역은 "네" 하면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날씨가 덥긴 했어도 땀이 날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의 목 언저리에 땀 한 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울아비 스승인 치우우레는 그만큼 엄하고도 두려운 존재였다. 적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저희 무리는 이 길을 어지럽히던 못된 도둑들을 모두 쫓아버렸습니다! 어젯밤 도둑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밤새워 길을 앞서서, 새벽동이 틀 때쯤 놈들을 덮쳤습니다. 저희는 합하여 열아홉 놈을 해치웠습니다. 두 놈은 도망쳤는데, 활과 돌에 맞았으니 아마 살지 못했을것입니다. 그리고 그놈들이 데리고 있던 여자 넷은 그냥 놓아주었습니다." 그 말에 치우우레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냥 놓아주었나?" 잔뜩 긴장한 양역은 그 질문에 더욱 당황하여 말을 더듬거렸다. "당..... 당연히....." "그 여자들은 도둑들의 마누라들이었나? 아니면 잡혀온 여자들이었나?" "잡..... 잡혀온 여자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러니 놓아준 것이지요." 그 말에 치우우레의 목소리가 더욱 근엄해졌다. "도둑들을 쫓아낸 것은 좋다. 그러나 여자들을 그냥 놓아준 것은 잘못되었다. 도둑에게 잡혀온 가엾은 여자들인데, 그냥 보내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느냐? 하다못해 안 되면 네 말이라도 내주고 와야 할 것 아니냐?" 양역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물론 도둑들이 빼앗았던 물건들을 그 여자들에게도 주었습니다. 어떻게 가엾은 여자들을 그냥 보냈겠습니까?" 치우우레의 인상이 조금 펴졌다. "그러냐?" "예!" 치우우레는 다시 정색을 하며 근엄하게 말했다. "사울아비 스승 치우우레가 양역에게 말한다. 사울아비는 항상 용감해야 하고, 또 항상 올바르게 움직여야 한다. 불쌍한 자는 돕고, 나쁜 자는 목을 쳐야 하는 것이다. 괴물이나 귀신이나 신수와도 싸워야하면 용감히 싸워야 되는 게 사울아비이되, 힘없는 자는 무조건 도와주고 불쌍한 남의 처지를 못 본 척해서는 안 되는 게 사울아비란 말이다. 더구나 한웅님께서 지나시는 길을 따르는 몸이니 더더욱 잘 해야한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잘 해주는 것이 한웅님께 잘 해드리는 것이다. 알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이미 요 며칠 새 수백 번도 넘게 들어 꿈에 나타날 정도가 된 말이고 가르침이었지만, 양역이 다시 한 번 알겠다면서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러면 도둑에게서 빼앗은 남은 물건들은 어찌했느냐?" "여자들에게 물어보니 도둑들은 산 너머 마을에서 도둑질을 많이 했다고 했습니다. 미아우족의 마을인데 그 마을사람에게 나누어주어야죠. 결국 도둑들의 물건은 그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물건들 아니겠습니까?" "그래, 잘했구나!" 치우우레는 근엄한 표정을 풀더니, 돌연 서글픈 표정으로 변했다. 그토록 기세 등등하고 두려운 사울아비 스승의 표정이 갑자기 슬퍼지고 눈빛이 붉어지는 것을 보자 양역은 의아하여 눈을 크게 떴다. "저....." 양역이 말을 꺼내려는 순간 치우우레가 말했다. 처음과는 달리 의외로 거의 울먹이기 직전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 그런데 내 아들들은 왜..... 보..... 보이지 않느냐? 혹....혹시....." 그 말에 양역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러나 그 얼굴은 놀라거나 당황한 것이 아니라, 웃음이 막 터져나올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다만 치우우레의 앞에서 웃음을 터뜨려서는 안 되기 때문에 억지로 참느라 얼굴이 붉어진 것이다. 양역은 억지로 웃음을 삼키며 말문을 열었다. 그 말투는 웃음을 참느라 조금 뒤틀려져 있었고 기침까지도 나왔다. "주신 사..... 사울아비 양역이.... 쿨룩.....쿡..... 죄송합니다. 주신 사울아비 양역이 사울아비 스승이신 치우우레님께 말씀드립니다. 희네와 나래는 지금 다른 곳에 있습니다." 치우우레는 양역의 그런 표정 변화를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다급히 물었다. "다..... 다른 곳이라니?" "아까 말씀드린 도둑들의 물건을 그 마을사람들에게 나눠주러 간것입니다. 아마도 이삼일 내로 우리를 따라올 것입니다. 우리들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 피해가 전혀 없었던 것도 희네 나래 덕분입니다. 희네가 꾀를 내고 나래가 앞장서서 용감히 싸워....비록 제가 대장이었지만 두 사람의 공이 으뜸이고....." 양역이 씩씩하게 대답하자 순간 치우우레의 몸이 약간 휘청거렸다. 허탈하기도 했고 안심이 되기도 했다. 양역이 이어서 말하는 소리는 이제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치우벌이 '헛헛'하고 웃으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데 양역!" "네!" "너는 왜 웃었나?" 뜻하지 않은 질문에 양역은 '헤헤' 하면서 얼굴 생김과는 딴판으로 사람 좋게 웃으며 씩씩하게 말했다. "희네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다친 사람이 없다는 말씀을 맨 마지막에 들려드리면 치우우레님의 놀라신 얼굴을 구경할 수 있을 거라구요! 헤헤....." 양역의 말은 헤헤거리는 소리로 끝났다. 치우벌은 웃을 수도 없고 그냥 놔둘 수도 없어서 "허참!" 하고 몇 번 헛웃음을 짓다가 말했다. "그랬다고 정말로 그렇게 한단 말이냐? 스승님을 놀려?" 치우벌의 말을 막아서며 치우우레가 말했다. "놔두게, 놔둬. 동생, 그놈이야 워낙 장난이 심하니 그 정도야 예삿일이지. 안 다쳤고 다 잘되었으니 다행 아닌가? 허허....!" 치우우레는 이제 다른 일은 어찌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조금은 허탈하게 말머리를 돌리자 치우벌이 말했다. "희네 그 녀석, 너무 똑똑합니다. 다 좋은데 버릇이 너무 없어요. 아니, 자기가 죽은 줄로 착각하게 해서 아비를 놀래키는 버릇없는 놈이 어디 있습니까? 한 번 호되게 때려주는 게 어떤가요?" 치우벌의 말에 치우우레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놈 때릴 데가 어디 있나?" "그러면 나래라도....." "나래는 어차피 제 형 하자는 대로만 하는 놈인걸? 됐어, 됐어. 이제 그놈들도 조금 있으면 성인식을 치를 것이네. 쌍둥이니까 같이 성인식을 하겠구먼. 곧 어른이 될 놈들이니 놔두자구, 놔둬...... 허허......" 치우우레는 허탈하게 웃다가 그래도 좋은 듯 싱글벙글하며 말을돌려 무리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치우벌이 혼자 중얼거렸다. "형님은 다 좋은데 자식한테 너무 약하단 말야....." 양역이 치우벌에게 살짝 다가갔다. 보고가 끝난 이상 이제부터는 평소 지내는 대로 아저씨나, 이름을 막 부르는 동네 아이 관계로 돌아와도 되는 것이다. 공적인 일을 할 때는 엄격했지만, 얼굴을 맞대고 사는 같은 부족사람들이기도 했으니까. 양역이 아까 실실 웃은 것은 여느 때 같으면 뺨이라도 맞을 일이었지만 말이다. "희네가 그런 이야기도 했어요." "무슨 이야기?" "제가 그렇게 해도 치우우레 스승님은 화 내지 않으실 거라구요. 하하, 그래서 그만....." "떼끼!" 치우벌은 한 번 양역에게 반 건성으로 호통을 치고는 중얼거렸다. "그런데 너는 그게 뭐가 그리 우습단 말이냐?" "솔직히 우습지요. 도둑 열아홉 명을 어떻게 잡은 줄 아세요? 나래 혼자 아홉 명을 때려 잡았다구요! 우린 서른 명인데도 겨우 열 명을 잡았고요. 사실은 우리 모두가 도망가는 두 놈에게 활질을 했는데도 겨우 한 놈 맞혔을 뿐인데 나래가 나머지 한 놈을, 그것도 화살이 아닌 돌로 맞혔다구요!" "뭐? 돌로?" "돌로 뒤통수를 맞혀 한 방에 죽여버리더라구요. 그것도 화살도 날아갈까말까 한 데까지 도망간 놈을요! 헤헤. 더구나 희네가 귀신같이 꾀를 내어 도둑들은 싸워보지도 못했구요. 그런 괴물 같은 두 녀석을 겨우 도둑들 상대하게 보내놓고, 그것도 서른 명이나 붙여서 보내놓고 저렇게 걱정하는 치우우레님이 우습지, 안 우스운가요?" 치우벌이 생각해보더니 픽 웃었다. 아마 지금보다 열 배 많은 도둑떼를 희네 나래 둘이서만 상대하라고 보냈더라도 그놈들은 유유히 다 처리하고 올 놈들이었다. 부모가 자식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지만, 치우우레는 그 정도가 지나치기는 지나치다고 치우벌도 속으로 웃었다. "그런데 두 녀석이 왜 마을에 물건 나눠주는 허드렛일을 하러 갔지? 나도 짐작 가는 데가 있으니 숨기지 말고 말해봐라." "말 안 하려 했는데..... 하는 수 없죠. 스승님께는 말하지 않겠다고 해주세요." "그래, 알았으니 말해봐라." 양역이 '쩝'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 마을 산 너머에 신기한 선인이 산다는 말을 듣고 그리로 간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치우벌은 인상을 찌푸렸다. "또 선인을 찾아간 거냐? 그놈들은 대체 뭘 하려고 선인들 꽁무니만 찾아다니는 거지? 더구나 한웅님 행차에 따라나선 놈들이!" "솔직히.....그래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 녀석들이 간다는데 누가 잡을 수 있겠어요?" 치우벌도 '쩝'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늦거나 일이 잘못되어 한웅님 행차에 못따라오지는 않겠지? 그만한 녀석들이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양역이 씩 웃었다. "올 거예요. 희네 나래가 하는 건데 틀림이 있겠어요?" 무심결에 치우벌이 중얼거렸다. "그건 그래....." 문득 치우벌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다시 표정을 바로잡아 크게 외쳤다. "주신 사울아비 치우벌이 말한다! 우리는 한웅님을 따라 계속 간다! 태산(태산은 요동반도의 시작부, 황하를 막 지나 있는 산이다. 실제로 그다지 높지 않으나 예로부터 중국에서도 제일 크고 높은 산이자 영험한 산으로 알려져 있다. 역대의 제왕들은 이 태산에서의 봉선(일종의 제사)의식을 거치지 않으면 중국 황제로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태산은 그리 높지 않으며, 오히려 부근의 산들보다 훨씬 낮다. 이러한 태산 숭배사상은 이때 최초로 중국전체의 제왕이자 시조인 황제가 처음으로 태산회의를 통해 중국최초의 지배자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라 그렇게 설정했다.)까지는 아직도 길이 멀다! 그러니 한웅님의 길에 거슬리는 나쁜 것들은 도둑이건 짐승이건 괴물이건 간에 모두 치워야 한다. 알겠느냐?" 그러자 양역을 위시한 젊은 사울아비들 모두가 '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 그들은 무리를 다시 정비하여 큰 무리와 합쳐졌다. 동북아 일대에서 가장 큰 나라를 이루고, 모두가 승복하는 최강의 세력을 지닌 국가, 주신의 13대 사와라 한웅의 행차는 다시 서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바로 태산에서 있을 부족들간의 대 회의를 위하여..... 희네와 나래 사방 모두가 하늘과 땅이 서로 맞닿아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지평선으로 이어진 메마른 초원 위에 한창 황사바람이 불어대고 있었다. 봄이 되면 기승을 부리는 이 황사는 아주 미세한 진흙먼지가 센바람에 섞여 불어오는 것으로, 황사바람이 불 때에는 하늘이 온통 누렇게 변하고 바람도 드셀 뿐더러 먼지 때문에 앞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먼지가 목에 쌓여 숨이 턱턱 막히고 눈이 상하기도 했기에 이런 날에는 사람이고 짐승이고 여간해서는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지 않는다. 이 대평원의 남쪽 언저리, 조금만 더 남쪽으로 가면 거대한 돌로 된 산맥이 이어지는 부근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이 있었다. 마을이래 봤자 땅을 파고 가운데에 나무로 기둥을 세워 잔가지를 덮은 뒤 나뭇잎과 가죽 등을 덮어씌운 움집이었다. 집집마다 가운데 뚫린 구멍으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불을 피우는 것 같았다. 이미 날씨가 따뜻해진 봄이니 추워서라기보다는 음식을 하기 위해 불을 피우는 듯했다. 움집들 앞의 거친 밭은 이제 막 개간을 끝낸 듯했고, 씨를 뿌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수수며 좁쌀 등 곡식의 파란 싹들이 곳곳에 돋아나고 있었다. 집 뒤편 짐승우리에서는 돼지와 개, 나귀며 양들이 가끔씩 울어대는 소리만 들릴 뿐, 누구도 황사바람을 맞으며 집 밖으로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을에서 꽤 떨어진 저편에는 황사바람을 맞으면서도 열심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한 떼의 사람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더럽고 조잡한 차림을 하고 덩치가 큰 서른 명의 남자들이었다. 가죽을 대충 기워 몸에 두른 옷은 보온용이라기보다는 갑옷 같았고 그나마 팔다리는 그대로 햇빛에 노출되어 있었다. 발에는 역시 가죽을 칭칭 감아 가죽끈으로 대충 동여맨 발싸개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머리는 봉두난발이었고 수염이 덥수룩하며 몸 여기저기에 흉터가 많았다. 그중 열 명은 나무를 불에 그슬려 굽혀서 만든 활을 들고 있었고 열 명은 기다란 몽둥이, 나머지 열 명은 돌도끼와 나무판으로 만든 방패를 들고 있었다. 맨 앞에 선 사람은 키가 크고 텁석부리 수염이 유난히 짙어 인상이 거칠어 보이고, 눈빛이 잔혹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였다. 가죽주머니를 등에 메고 도끼를 손에 든 우두머리 격인 남자는 눈앞조차 잘 알아볼 수 없는 황사바람 속에서는 전혀 주저함이 없이 방향을 잡아 마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흙을 쌓아올린 마을 언저리에 이르자 그 남자는 잠시 일행을 멈추게 하고는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보인다. 마을이 보이면 바로 달려가서 모조리 뒤엎고 빼앗아버린다! 하하하!" 그러자 뒤를 따르던 부하들이 말했다. "망할 놈의 미아우족(묘족. 지금은 중국 남방 오지로 밀려났으나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는 요하와 난하 사이 정도, 즉 주신과 지나(중국)부족들과의 접경 부근에 널리퍼져 살고 있었다고 설정되는 민족이다. 후에 황제시대 이래로 지나족에게 수많은 박해를 받아 수천 년간 점점 땅을 빼앗기고 말살되어 현재의 상태로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원래 동북아에서 고구려의 소속원이기도 했던 투르크족이 지금은 밀려나 멀리 유럽과의 접경인 터키를 이룬 것을 생각할 때 무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현재까지도 중국인들을 많이 증오하여 통합되지 않을 정도로 중국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감정이 각인 되듯 남아 있다고 한다. 묘족이 처음부터 남쪽에 살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우리와 많은 면에서 흡사한 문화와 생활습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태국의 치앙마이 부족또한 이러한 길을 걸은 당시 묘족의 한 갈래가 아닐까 의심해 본다. 치우천왕에게 큰 은혜를 입었기에 그들의 왕이자 신을 치우로 생각하여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어 많은 학자들은 치우는 단지 묘족의 왕이라 믿고 있으나 본인은 그렇게 보지 않고 있다. 치우는 묘족을 포함한 구려(아홉 갈래 부족)의 왕이었다고 보는 편이 정세에 더 맞다.) 들은 우리가 이 바람을 뚫고 올 줄은 모를것이다. 우리가 이긴 거나 다름없다!" "놈들의 독은 무섭지만, 독을 쓸 겨를을 주지 않으면 된다." 여기저기에서 한마디씩 거들자 우두머리인 텁석부리는 기이하게 웃으며 말했다. "멍청한 미아우 놈들, 그중에서도 가장 멍청한 툰툰족 놈들은 종살이도 시킬 가치도 없다. 여자만 빼고, 남자와 아이는 모조리 죽인다. 집은 모조리 불지르고 태워버린다!" 부하들은 모두 좋다는 듯 소리내어 웃어댔다. 한결같이 거칠고 잔혹해 보이는 자들이었으며 싸움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미아우족의 마을엔 모두 사십여 채의 움집이 있으니 남자도 사십 명이 넘을 것이다. 하지만 미아우족은 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을 게 뻔하니, 그들이 보기엔 이미 마을을 점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침내 마을에서 이백 보 정도 떨어진 곳에 다다르자, 활을 들고 있던 열 명의 남자들이 화살통에 따로 담아두었던, 잘게 썬 나뭇가지를 묶은 화살 다섯 개씩을 꺼냈다. 그리고 몽둥이를 든 열 명의 남자들은 허리춤에 찼던 소나무 막대기를 꺼내들었다. 텁석부리가 등에 진 가죽주머니를 풀자 남자들은 화살과 막대기를 그 안에 박아 휘저었다. 그 주머니에는 굳은 돼지기름이 들어 있었다. 그러고 나자 남자 들 중 하나가 부싯돌을 꺼냈다. 방패를 든 남자들은 그 남자 주변을 둥글게 에워싸 방패로 바람을 막아주었다. 말 한마디 없이 싸울 준비를 착착 갖추는 모양새가 한두 번 해본솜씨가 아니었다. 그러나 바람이 워낙 강해서 불이 잘 붙지 않았고, 기껏 붙였던 불도 몇 번 꺼지기도 하여 시간이 좀 걸렸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자 텁석부리는 초조한 듯 횃불과 불화살이 준비되기를 기다리며 마을 쪽을 살폈다. 하지만 마을에 사람들이 오가는 기척이 전혀 보이지 않아 텁석부리의 눈에는 일순 잔인한 웃음이 흘렀다. "가자!" 마침내 텁석부리의 명령이 떨어지자 남자들은 일제히 짐승 같은 고함소리를 지르면서 미친 듯 달리기 시작했다. 도끼와 방패를 든 열명의 남자가 앞장서고, 몽둥이와 횃불을 든 열 명의 남자가 그 뒤를 따랐다. 활을 든 남자들은 마을에서 오십 보 정도 떨어진 곳에 이르자 멈추어 서서 일제히 마을을 향해 불화살을 쏘았다. 열 명의 남자들이 각각 다서 개씩의 불화살을 쏘는 동안 스무 명의 남자들은 이제 막 마을로 들이닥치려 하고 있었다.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마을로 앞장서서 달려가던 텁석부리의 눈에 의혹의 빛이 서렸다. 불화살들이 마른풀과 잔가지로 된 움집 지붕에 박혔는데도 이상하게 불이 옮겨 붙지 않고 힘없이 꺼져가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고함을 지르고 화살이 날아오는데도 마을은 너무나 조용했다. 그때 갑자기 마을 안쪽에서 커다란 검은 물체가 휙 하고 뛰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무엇인가가 바람을 가르며 텁석부리에게 날아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겨를도 없이, 텁석부리는 눈앞이 일순 번쩍이는가 싶더니 캄캄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텁석부리에게 날아든 것은 바로 엄청나게 커다란 도끼였다. 그 도끼는 돌이 아니라 검고 푸른색의 번들거리는 금속으로 되어 있었다. 도끼는 크고 예리하기 이를 데 없어 텁석부리의 몸을 어깨부터 두 동강이를 내고도 아직 힘이 남아 있는지 땅에 깊숙이 덜컥 꽂혔다. 텁석부리의 몸이 좌우로 갈려 피를 뿌리면서 털퍼덕 쓰러졌다. "으아악!"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동강이로 갈라진 텁석부리보다도 그 뒤를 따라오던 부하가 그 광경을 보고 질겁하여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지르자마자 마을 안쪽에서 뛰어나온 거대한 물체가 옆을 스쳐 지나갔고, 순간 그자의 머리는 수박처럼 으깨져 버리고 말았다. 마을에서 뛰어나온 검은 물체는 바로 윤기 흐르는 검은 말을 탄 남자였다. 말도 예사로 볼 수 있는 작은 조랑말이 아니라, 우람하고 거칠어 보이는 말이었고, 남자 역시 보통 체구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인이었다. 그 거인은 머리를 가죽 끈으로 한번 동여매었지만 산발이었고 덩치가 그렇게 큰데 놀랍게도 앳된 소년의 얼굴이었다. 혼자서 수십 명의 도둑들과 맞서면서도 표정 변화가 전혀 없이 침착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뒷줄에 섰던 활 쏘는 자들은 급히 화살을 꺼내 말을 탄 거인 소년을 향해 쏘아댔다. 그러나 말을 따고 미친 듯 여지저기 종횡무진 번개 같이 번득이는 소년을 도저히 겨냥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 소년은 오른손에 묵직한 구리뭉치를 끝에 단 몽둥이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길다란 가죽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사울아비다!" "주신의 사울아비다!" 공포에 가득 찬 비명 같은 외침소리가 남자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말을 탄 것이 신기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자유롭게 말을 타고 싸움을 할 수 있는 전사는 거의 없었다. 아직 안장도 등자도 없던 시절이라 말을 타고 싸우려면 다리 힘만으로 말의 허리를 조여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는 태어날 적부터 고된 수련을 해야 가능한 일이지, 배운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말을 타고 싸움을 하는 전사는 주신의 사울아비와 몽골족의 용사 등 몇몇 뿐이었고, 게다가 금속으로 만든 무기를 사용하는 전사는 오로지 주신의 사울아비뿐이었다. 더구나 사울아비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 모든 시간을 싸움 기술을 익히고 배우는 데 보내기에 더더욱 무서웠다. 그들의 용맹과 싸움 기술, 그리고 돌로 만든 무기로는 상대로 되지 않는 구리 무기를 사용하여 사울아비 한 명이 하루 해 안에 마을 세 군데를 혼자 짓밟을 수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한꺼번에 덤벼라!"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말을 타고 있는 사울아비는 말 다루는 기술이 귀신과 같으니 도망도 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외침에 사내들은 죽기살기로 우르르 몰려 소년 사울아비를 에워싸려고 했다. 소년이 담담한 표정으로 왼손을 한번 휘두르자 앞장선 사내의 목에 채찍이 철썩 감겼다. 안색이 변한 남자가 무기를 떨구고 채찍을 빼려는 듯 목을 감싸는 순간, 소년이 다시 한 번 팔을 휘두르자 사내의 몸이 허공을 날아 다른 남자들에게로 부딪혔다. 날아오르는 사내의 힘에 못 이겨 우르르 소리를 내면서 세 명의 남자가 동시에 쓰러졌다. 이미 채찍에 감겼던 자는 목이 부러진 시체가 되어 있었다. 여전히 소년이 무섭도록 담담한 표정으로 넘어진 남자들에게로 주저 없이 말을 몰자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널브러진 세 남자들은 모조리 말굽에 짓밟혀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 그 사이에도 소년은 오른손의 구리몽둥이를 휘둘러 두 사람의 머리를 박살내 버렸다. 소년은 몽둥이를 마구 휘두르지 않았다. 정확하게 공기를 가르듯 한 번 휘두르면 여지없이 한 사람의 머리가 박살나 버리는 것이다. 도끼를 든 네 명의 사내가 일제히 소년에게 돌도끼를 던졌다. 두 개의 도끼는 빗나가고, 한 개의 도끼가 소년의 구리몽둥이에 맞아 떨어졌지만 한 개의 돌도끼는 그의 어깨를 맞히고 떨어졌다. 그러나 거대한 소년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화가 난 듯, 섬뜩할 정도로 바람을 가르듯 몽둥이와 채찍을 휘두르며 도끼를 던졌던 자들에게로 말을 몰아갔다. 순식간에 한 명이 말에 짓밟혀 으스러져 버렸고, 두 명은 채찍에 다리가 휘감겨 저만치로 나가 떨어졌다. 마지막 한 사람은 소년이 앞으로 덮치자 자신도 모르게 방패를 양손으로 잡아 머리 위로 올려 소년의 구리몽둥이를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쉭'소리를 내며 떨어진 구리몽둥이는 나무방패와 남자의 머리를 동시에 박살내어 버렸다. 나뭇조각과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튀어 보는 사람들이 다 아찔할 정도였다. 소년은 구리몽둥이를 허리에 꽂고 날렵한 동작으로 말의 배에 몸을 붙이더니 말을 몰아 두 동강이 나서 죽은 텁석부리 옆 땅에 박힌 도끼를 휙 낚아채 빼들었다. 다리 힘만으로 말 위에서 빙글 돌아 떨어지지 않고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는 기술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그 거한의 소년은 다시 한 번 기합소리와 함께 무거운 도끼를 위로 휘두르며 그 기세를 몰아 다시 그림같이 말등에 똑바로 몸을 세웠다. 이제 사울아비의 오른손에 번득이는 구리도끼가 들려 있었다. 그 위세는 정말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더구나 앳된 소년이 그토록 무서운 솜씨를 보이면서도 얼굴 표정하나도 변하지 않아 사내들은 더더욱 공포스러웠다. 겁을 먹은 사내 하나가 활을 떨어트리며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지만, 소년은 어느새 쏜살같이 말을 몰아가 그 앞을 막아서며 채찍으로 다리를 휘감아 당겼다. 엄청난 소년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사내의 몸이 확 뒤집어지며 지푸라기 인형처럼 허공으로 떠오르자 소년은 사내를 정확하게 도끼로 쳐서 반쯤 쪼개버렸다. 피가 사방으로 꽃처럼 튀어오르는 모습에 남아 있던 사내들은 얼이 빠지고 넋이 나가서, 자신도 모르게 무기를 떨어뜨리며 땅에 주저앉았다. 싸움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두목인 텁석부리를 포함해 열두 명이나 처참하게 죽어버리자 더 이상 싸워보아야 헛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사내들은 털썩 주저앉아, 죽이려면 죽이라는 듯 눈을 부릅떴다. "어디서 온 놈들이야?" 어느새 소년은 그들 앞으로 말을 몰고 와서는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작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주신 말 몰라?" 다시 한 번 소년이 물었다. 조용한 말이었지만 사내들에게는 천둥벼락보다 더 무섭게 들렸다. 그러자 사내들 중 하나가 서툰 주신 말로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내가....할 수 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주신족의 사울아비, 치우 집안의 나래다. 너희들은 이 근방 놈들이 아닌데, 왜 이 마을을 습격하는 거야?" 그 사내는 겁에 잔뜩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지나족의 전사, 아삼이다. 우리는 미아우 놈들을.... 쳐부수러.... 온 것이다. 주신의 사울아비와는 ... 싸우고....싸우고 싶지 않다....." "지나족의 땅은 훨씬 남쪽인데, 어째서 여기까지 올라온 거야?" "우리는....미아우족을 싫어한다......그래서 ......용감하게 싸워서 전사가 되려고.....온것이다....주신의 사울아비는 무기를 들지 않은 남자는 죽이지 않는다고....들....들었다....그러니....." 그 말에 나래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약간의 비웃는 듯한 냉소를 지었을 뿐이다. 그때 저만치에서 한 명의 남자가 천천히 말을 타고 오면서 소리쳤다. 놀라게도 아주 유창한 지나족 말이었다. "흥! 남자? 너희 따위가 무슨 남자냐? 너희는 늑대나 뱀 같은 놈들이다!" 새로 등장한 남자가 힐난 투로 말하자 아삼은 조금 눈을 크게 뜨고 뭐라고 저항하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남자는 호통을 쳤다. "용감하게 싸워서 전사가 되려 했다면, 왜 모래바람이 부는 틈을 타서 마을을 덮쳤는가? 왜 당당하게 싸움을 청하지 않고 마을에 불부터 지르려 했는가? 무기를 들지 않은 남자는 죽이지 말라고 하면서, 왜 너희는 미아우 남자들이 무기를 들기도 전에 먼저 덮쳐 죽이려고 했는가?" 그 남자 역시 아직 애 티를 벗지 못한 소년이었는데, 몸집이 크지 않은, 오히려 바싹 마른 편이었고 키만 훤칠해 보였다. 나이는 한 열여섯, 일곱쯤 되었을까? 얼굴이 백옥같이 희고, 붉은 입술에 눈이 크고 날카로웠지만 눈동자가 곱기 이를 데 없어, 마치 여자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말을 탄 모양새도 여느 남자처럼 두 다리에 힘을 실어 말의 허리를 조인 것이 아니고, 말 위에 그냥 걸터앉아 다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외모와는 달리, 목소리는 덩치 큰 거한 소년보다도 훨씬 컸고, 주변을 다 울리게 할 만큼 힘이 있었다. 그 두 번째 소년이 말을 가볍게 몰며 사내들 주위를 빙빙 돌았다. 이번에는 아삼이 아닌 다른 자가 나섰다. "너는 누구냐?" "주신의 사울아비, 치우집안의 희네가 말한다. 너희 지나족과 미아우족이 지금 정식으로 부족들 간에 전쟁을 하는 것이라면 오늘처럼 꾀를 쓸 수도 있다. 하지만 미아우족과 지나족은 아직 전쟁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평화롭게 조용히 살고 있는 미아우족을 왜 건드리는 것인가?" 지나 족들은 미아우족들을 몹시 싫어했고, 미아우족도 지나 족을 싫어했다. 게다가 주신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어느 편을 들며 나서지도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하지도 않고 마을에 불을 질러 기습을 가하려고 한 것은 부당한 일이었다. 만약 이들이 성공했다면 미아우족의 전사들만이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 힘없는 노인들 까지도 모두 죽었을 것이다. 희네는 그런 비겁한 싸움은 몹시 싫어했다. 희네는 비록 막강한 전투력을 가졌다는 사울아비 중 한 명이었지만 몹시 싸움을 싫어했으며, 특히 싸울 줄 모르는 자들을 다치게 만드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다. "나와 내 아우 나래는 오늘 새벽 친구들과 함께 도둑들과 싸워 그들을 다 죽였다. 도둑은 죽어야 마땅하지. 그런데 너희가 한 짓은 도둑 같은 짓인가? 아닌가?" 그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이 한 짓은 도둑 떼나 다를 바가 없었으니 그들로서도 사실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감쪽같이 습격하여 미아우족을 몰살했다면 아무도 모를 일이었지만 말이다. 지나족들이 대답하지 않자 희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염제신농, 아니 유망이 그렇게 하라더냐?" 염제신농의 이름이 나오자 잔뜩 기가 꺽인 지나족 남자들이 더욱 움찔하는 듯 했다. 염제신농은 지나족의 우두머리로, 신격화된 존재였다.이름 그대로 불꽃의 임금이며, 모든 풀과 씨앗을 맛보아 지나족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과 약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어 지나족 전체의 우두머리가 된 이가 바로 신농이었다. 그후로 지나족의 우두머리는 스스로 염제라고 칭했다. 비록 원래의 신농은 오래전에 죽었고, 지금의 염제는 유망이라는 사람이었지만 지나족의 우두머리는 모두 염제신농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염제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우리를 어.....어떻게 할 것인가? 주신의 사울아비는....무기를 들지 않은 자를 죽이지는 않는다고..." 아삼이 다시 떨리는 목소리로 말꼬리를 흐리자 희네는 한 번 코웃음을 치고는 대답했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너희를 용서할 수 없다. 그러니 어서 무기를 들어라." 단호한 말에 아삼은 깜짝 놀라 외쳤다. "우리는 이미 항복했다. 우리를 죽이겠다는 것인가?" 희네는 아삼을 잠시 쳐다보다가 나래를 보며 눈짓을 건네더니 그들의 말을 전했다. 그 말을 듣고 난 나래는 아직까지 피가 묻어있는 도끼를 한 번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작고 조용한, 어딘가 모르게 소심해 보이는 말투였다. "이곳의 족장 툰툰은 내 벗이야. 그리고 ......우리는 중요한 길을 가는 중인데...." 희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래 대신 말하듯 지나족들에게 전했다. "여기 미아우족들 모두가 내 벗들이다. 내가 마침 여기를 지나다가 너희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내 벗들은 전부 죽었을 것이다. 너희를 살려보내면 너희는 다시 올 것이니 아예 다시 못 오도록 만들어 주겠다." 더욱 당황한 모습으로 아삼이 말했다. "안된다, 안된다. 우리는 다시 오지 않겠다. 다시는 미아우족을 건드리지 않겠다." 간곡한 표정을 짓는 아삼을 보면서도 나래는 희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재촉하듯 도끼를 흔들어 보였다. 그 동작의 의미를 눈치챈 아삼이 울부짖었다. "나는 무기를 잡지 않겠다. 너는 나를 죽일 수 없다!" 희네는 잠시 아삼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다가 나래를 바라보았다. 나래도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희네는 '쯧' 하고 혀를 한 번 차더니 말의 머리를 천천히 돌렸다. 나래도 도끼를 거두며 그 뒤를 따랐다. "바보 같은 것들. 차라리 나래 손에 죽는 것이 나을 텐데....." 희네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마을쪽으로 달각거리며천천히 말을 몰았다. 아삼과 남은 일당들은 이제 살아났다고 생각하고는 안도의 숨을 쉬며 일어서려다가 흠칫거렸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미아우족의 남자들이 분노에 가득찬 표정으로 창을 겨눈 채 그들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 앞장 선 미아우족 남자 두 명의 손에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 쳐지는 것들이 각각 들려 있었다. 바로 화려한 색깔의 독사와 거미였다. 미아우족은 싸움솜씨가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 독을 지닌 생물들을 다루는 데에는 대단한 재주가 있었던 것이다. 미아우족들은 다짜고짜 마을을 기습하여 모든 사람을 몰살시키려고한 지나족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노예로 부리거나 몸값을 받을 생각도 없을 것이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처치할 것이 분명했다. 지나족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울려퍼지자 마을로 돌아가던 희네와 나래는 귀에 거슬리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희네와 나래가 마을 어귀에 이르자 한 때의 미아우족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나래의 충고대로 마을 뒤편으로 숨어 있다가 이제 돌아온 것이다. 그중 체구가 작고 얼굴에 주름이 많은 미아족 노인이 앞장서서 달려 나왔다. 그를 보자 희네와 나래는 씨익 웃어 보였다. 그는 바로 이 마을의 족장인 툰툰이었으며, 이번 일로 희네 나래를 벗 으로 삼기로 한 노인이었다. "희네! 나래! 고맙다!고맙다! 당신들 덕분에 우리 모두가 살아났다!" 툰툰이 두 사람이 말에서 채 내리기도 전에 고개를 숙이며 연신 절을 하자, 뒤의 미아우족들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며 마을을 구한 영웅인 두 소년들을 열렬히 맞아들였다. 그 환호성에 지나족들의 비명소리가 묻혀버리고 말았다. 희네는 약간 부끄러운 듯, 괜찮다며 연신 손을 내저었지만,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나래의 얼굴은 아주 약간의 웃음기만 떠올라 있을뿐, 여전히 차분했다. 그러나 남자들 뿐만 아니라 여자와 노인, 아이들까지도 희네와 나래를 떠들썩하게 맞이하니 속으로는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툰툰이 권하는 대로 말에서 내렸다. 툰툰은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에 싱글벙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고맙다, 사울아비들. 당신들이 와주지 않았더라면..." 툰툰이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자 희네는 미소를 지으며 답례했고 그제야 덤덤한 표정을 풀고 나래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나래는 어른인 툰툰보다도 머리 하나 이상 더 컸으며, 소년이면서도 어깨가 떠 벌어진 거한이었지만 그기 미소를 짓자 아주 소박하고 정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 되었다. 희네는 지나족 말도 잘할 뿐더러 미아우족 말은 약간 서툴지만 그럭저럭 하던 터라 웃으며 말했다. "너무 그럴 것 없다. 현명한 툰툰 같은 벗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신들이 없었으면 우리 모두는 큰일났을 것이다." "모두가 안파견 한님(최초의 한인며 주신 민족의 시조. 한웅 시대보다 수천 년 전 자부선인과 신수 맥의 도움을 받아 깨우침을 얻고 주신을 세운 인물로 전해지는 존재이다. 하늘의 자손이며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의 사상을 처음 낸 것도 단군이라기보다는 안파견이라 전해진다. '안파견'은 후에 이름을 이두식으로 적은 이름이며 원래의 이름을 추정하면 '아바이' , 또는 '아버지'가 된다. 그러나 '아바이'라는 이름은 현재 이 글을 읽을 우리들에게 그리 좋지 않거나 우스운 선입관을 줄수 있는 이름으로 변질되어 버렸으므로 본인은 할 수없이 사서에 나오는 이름 그대로 '안파견'이라고 썼다.)의 덕이고, 주신의 한웅님의 덕이시다. 마침 지나다가 어젯밤 저들 무리가 불을 피우는 것을 보지 않았더라면 돕지 못했을 것이다." 희네는 자신이 온 쪽을 가리켜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웅님께서 저 산 너머 도둑들을 물리치게 하셨다. 그동안 그 도둑들 때문에 아마도 너희가 고생을 했을 것이다. 도둑들에게 빼앗긴 물건들을 조금 되찾아왔다. 저쪽으로 가면 짐을 실은 나귀 여섯 마리가 있을 것이다." 그 말에 툰툰은 고개를 저었다. "주신의 한웅님께 감사드린다. 마을을 구해주었는데, 또 물건까지 받을 수는 없다. 그 물건들은 한웅님께 바치겠다." 희네 역시 고개를 저으며 되받았다. "한웅님께서 돌려주라고 하신 것이니 우리가 도로 가지고 가면 벌을 받을 것이다. 아무 염려 말고 도로 받아라." 어쩔 수 없이 툰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을사람들에게 외쳤다. "오늘은 잔치다! 우리의 벗에게 감사를 표하자! 있는 힘을 다해 대접해야 한다.!" 미아우족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다. 준비를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잔치가 시작되었다. 남자들은 마을에서 가장 큰 족장 툰툰의 움집으로 두 소년들을 받들다시피 해서 안내했다. 노인들은 자리를 치우고 젊은이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해댔으며 여자들은 음식이며 술을 있는대로 날랐다. 꼬마아이들까지도 황사바람을 맞으며 나무그릇이며 토기잔들을 날라왔다. 그리고 툰툰이 직접 물을 떠와 나래의 손을 씻겨주고, 자신의 아들들을 시켜 나래의 피묻은 무기들을 닦고 손질하게 했다. 희네는 싸움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만 나래와 똑같은 대접을 받았다. 사실 희네는 무기를 들고 있지도 않았다.전사들인 툰툰의 아들들은 나래의 거대한 구리도끼를 보고 연신 좋은 무기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다가 몸집 좋은 아들하나가 그 도끼를 들려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제법 힘깨나 쓰는 아들인데 도끼를 들어올릴 수 없다니, 어안이 벙벙했다.두 아들이 힘을 합해서야 간신히 들어올리는 순간 탄성을 쏟아냈다. "이런 구리 무기는 이야기만 들었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정말 무겁고 날카롭다. 나래는 정말 천하장사다!" 툰툰의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귀엽게 생긴 막내아들 유쌍이 외치자 희네는 기분 좋게 껄걸 웃었다. 나래는 미아우 말도 몰라 그저 분위기만 보고는 미소만 지었다. 희네가 나래를 보며 찡긋했다. "나래야 미아우족은 존댓말이라는게 없어. 그래도 너보고 천하장사래. 좌우간 다 좋은 얘기야. 알지?" 나래는 미소만 지어 보였다. 어차피 미아우 말을 모르기에 꼬맹이가 반말을 하든 욕을 하든 전혀 기분 상할 것도 없었다. 존댓말을 쓰는 부분은 주신족과 약간의 지나족을 제외하고는 그리 많지 않았다. 툰툰의 스무살 먹은 넷째아들이 희네에게 물었다. "주신의 신시에는 이런 무기가 많이 있는가? 내 마누라와 바꾸어서라도 구리 무기를 가지고 싶다!" 희네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구리 무기는 아주 귀하다.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울아비 중에서도 구리 무기를 쓰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그리고 당신, 옆에서 마누라가 보고있는데 그런 말을 해도 괜찮은가?" 그 말에 젊은이는 깜짝 놀라서 마누라가 있는지 보려고 목을 길게 뺐다. 아까의 말과는 달리 마누라에게 꽉 쥐여사는 것 같아 희네는 큰소리로 웃었다. 툰툰이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자식놈들이 버릇이 없다. 나중에 한 번 몽둥이로 두들켜 패줘야겠다. 벗이여, 기분 상하지 마라." "전혀 기분 상하지 않다. 다들 좋은 아이들이다. 좋은 전사가 되고 좋은 사냥꾼이 될 것 같다." 그러고도 희네는 아직도 얼굴이 좀 질려 있는 넷째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좋은 남편도 되기를 바란다. 나는 아직 성인식을 안 치러서 장가드는 게 어떤지 잘 모르지만, 다시 잘 생각해봐야겠다. 하하." 모두가 왁자지껄하게 웃는 사이, 움집 마당 한가운데 커다란 모닥불이 피워짐과 동시에 잔치가 시작되었다. 툰툰의 움집은 족장의 집인데다가 회의장으로 쓰이는 터라 몹시 넓었지만 미아우족사람들 중 절반은 들어왔는지 몸 부대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음식도 아낌없이 운반되어 왔다. 아직 봄이라 음식이 한창 모자라기 쉬운 때이지만 미아우족 사람들은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들이라 식량이 풍족했다. 희네는 술도 잘 못하고 음식도 그리 많이 들지 않았지만 나래는 덩치답게 먹성도 대단했다. 더구나오랫동안 길을 떠나와서 잘 먹지 못했던 터라 호기 있게 배를 채웠다. 그런 까닭으로 희네가 툰툰과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다. 툰툰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느냐고 묻자 희네는 겸손하게 정황을 설명했다. 그들이 툰툰족을 구하게 된 것은 사실 우연한 일이었다. 전날 밤 그들 두 형제와 사울아비들은 혹여 한웅님이 지나는 길에 나타나 한웅님을 놀라게 할지도 모르는 도둑들 소굴을 찾아 해치우러 나갔다. 그때 희네가 꾀를 내어 밤이 아닌 새벽 동이 틀 때쯤에 들이닥치면, 한창 잠에 곯아떨어진 도둑들이 아무 저항도 못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의 말대로 사울아비들은 어젯밤 황사바람을 맞으며 골짜기에 숨어서 밤을 지샜다. 그 와중에 밤눈이 밝은 나래가 도둑들 소굴말고 또 다른 곳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불빛을 보고 혼자 조용히 다가가 보았다. 모두 무장하고 살기 등등해 보이는 서른 명 가량의 지나족 남자들이었다. 분명 어디로 싸우러 가는 것이었으니, 그렇다면 가장 가까운 마을을 택할 터였다. 이 근방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은 미아족인 툰툰의 부락이었다.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나래는 그 상황을 희네에게 이야기했다. 희네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일단 새벽에 도둑들을 처리하고 나서 둘이서만 미아우족을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왜 둘만 오려고 했는가?" 툰툰이 묻자 희네는 그냥 조용히 미소만 짓고 대답하지 않았다. 치우우레가 이끄는 희네와 나래일행은 태산의 대부족회의에 참석하는 한웅을 수행하는 길이었다. 그 회의에는 지나족의 수장인 염제 신농(유망)도 참석한다. 그런 차에 주신의 사울아비가 미아우족을 도와 지나족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들리게 되면 좋을 것이 없었고, 또 툰툰에게 이곳에 주신 한웅이 지나간다고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었다. 희네는 말꼬리를 돌려 이야기를 계속했다. 희네 나래는 그날새벽, 벗들과 함께 도둑들을 물리친 후 도둑들이 약탈한 물건을 마을에 나눠준다는 핑계로 빠져나와, 조용히 행군하는 지나족을 지켜보다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들의 뒤를 따랐다. 무슨 이야기든 들으면 모조리 기억하는 희네는, 미아우족들은 원래 독물을 다루는 재주가 뛰어나며 족장인 툰툰이 몹시 현명한 노인이라 그들을 크게 경계하지 않아도 되겠다 생각했지만, 황사바람을 뚫고 기어이 전진하는 지나족을 보고는 아무래도 그들이 비겁하게 기습을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희네는 사울아비로서 정당하지 못한 싸움을 보고 그저 넘어갈 수 없어서 그랬노라고 대답했다. 툰툰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맙다, 고마워...." 툰툰에게 전한 희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지만 일의 전말은 이러했다. 희네는 지나족이 정말 기습을 하는지 안 하는지 살피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나래에게 다른길로 돌아 먼저 마을로 들어가라고 했다. 나래는 희네가 시킨 대로 마을로 들어가자마자 주신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 툰툰에게 불이 붙지 않도록 집 지붕을 모두 물에 적시고 모두 뒤로 피해 있도록 손을 썼다. 그리고 희네는 말을 타고 천천히 온 것이다. 희네는 말을 잘 타지 못했고, 싸움에는 자기가 있어봐야 나래의 손가락 하나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나족 서른 명 정도는 나래의 팔 하나도 당해낼 수 없었다. 게다가 희네는 이 근처에 선인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근처에 사는 부족의 도움을 받아야 선인을 찾기가 쉬울 것이라는 생각도 내심하고 있었다. 툰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나래를 쳐다보았다. "나는 나래가 혼자 앞장서서 그들 모두를 상대하리라고 생각조차 못했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뒤에서, 앞서 나가는 당신 모습을 죽 지켜보았다. 그런데 순식간 혼자서 열세 명이나 죽이다니! 정말 대단하다!" 희네가 나래에게 그 말을 전해주자 나래는 음식을 입에 가득 문 채 조금 부끄러운 듯 웅얼거렸다. "열둘인데....." 나래의 말을 희네가 웃으며 툰툰에게 전해주자 툰툰도 '허허'웃었다. "열둘이나 열셋이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말을 타고 양손으로 무기를 다 쓰는 것을 보곤 너무나 놀랐다. 그것도 그렇게 무거운 무기들을! 말이 버텨내는 게 용하다. 정말 대단하다." 역시 희네는 그 말을 나래에게 전하면서 물었다. "그렇게 무거운 무기를 양손으로 휘두르는 건 처음봤대. 말이 버티는 게 용하다는데, 생각나는 거 없어?" 그 말을 듣자 나래는 자신의 말인 '구름'생각이 났다. "아! 구름! 그 녀석, 지쳤을 텐데?" 나래가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 희네가 싱긋 웃으며 말리면서 툰툰에게 말했다. "아참, 나래의 말, 구름과 내 말인 '높은뫼'에게도 좋은 풀을 주기 바란다. 그 녀석들은 말이지만 내 벗이고 형제나 다를 바 없다."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툰툰이 대꾸했다. "이미 풀과 좋은 물을 주었고 내 딸들이 씻겨주고 있다. 이름이 구름, 높은뫼인가? 정말 좋은 말이다." 그때 툰툰의 막내 아들 유쌍이 불쑥 끼어들었다. "나에게도 말 타는 법을 가르쳐달라." 당돌한 꼬마의 말에 희네는 귀찮아 하지 않고 선선히 말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다리로 말의 허리를 조이고 타면 된다. 많이 타봐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익숙해진다." "얼마나 타야 하나?" 유쌍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희네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밤낮없이 연습해도 세 해는 타야 달려도 안 떨어질 정도가 될것이고, 말위에서 무기를 쓰는데 익숙해지려면 다섯해가 걸려도 모자란다." "그렇게 힘든가?" 유쌍이 실망한 듯이 샐쭉거리자 툰툰이 나섰다. "버릇없는 녀석아. 말타고 싸우느게 그렇게 쉽겠는가? 더구나 말타는 연습을 하면 수도 없이 떨어져 다치고 멍이 들 것이고, 잘못하면 말밥굽에 밟혀 죽거나 몸이 상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너는 농사도 지어야 하고 뱀이며 독벌레 다루는 법도 익혀야 하는데, 언제 말을 탄다는 것이냐? 너는 막내라서 네가 내 모든 것을 물려닫아야 하는데 아직도 이렇게 버릇없이 굴 테냐?" 미아우족은 큰아들이 아버지의 모든 것을 물려받지 않고 막내가 모든 것을 물려받는 관습이 있었다. 막내가 시무룩해진 것을 희네가 달래주려고 하자 툰툰이 말렸다. "희네 나래여, 당신들은 세상에서 첫째가는 용감무쌍한 용사들일 것이다 그런데 너무 마음씨가 좋다. 하지만 요런 버릇없는 녀석을 자꾸 달래주기만 하면 머리꼭대기에 올라 앉으려고 할 것이다. 한번 올라앉으면 떨어내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을테니, 그만 하고 내가 녀석버릇 고치는 것을 보라." 그러면서 툰툰이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막대기를 움켜쥐자 막내는 쏜살같이 도망쳐 형들의 등에 숨어서 눈만 빼꼼 내밀었다. 나래는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연신 웃다가 뜯던 고기가 목에 걸려 쿨룩쿨룩 기침을 해댔다. 희네 역시 웃었고, 툰툰도 자신이 가장 귀여워하는 막내를 정말로 두들겨 팰 생각은 없었던지라 더 참지 못하고 막대기를 내려놓으며 크게 웃었다. 그때 향기로운 내음이 움집 안에 퍼졌다. 나래는 그 냄새를 맡고는 뜯던 고기 뼈를 내려놓고 외쳤다. "기가 막힌 냄새군! 술이로구나! 술!" 술이 가득 담긴 토기항아리를 두 명의 여자가 들고 종종걸음으로 걸어와 나래 앞에 내려놓았다. 두 여자들은 젊고 예뻤으며 미소를 살짝 머금었지만 나래는 여자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술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희네는 웃으며 나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나래는 황홀한 듯하여, 코로 술항아리가 빨려 들어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툰툰이 살짝 눈짓을 하자 두 여자들은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났고, 또다른 여자가 소뿔로 만든 잔 세 개를 가지고 와서 공손히 나래와 희네, 툰툰앞에 놓았다. 이 여자는 앞의 두 여자만큼 예쁜얼굴에 몸매는 더욱 풍성했다. 나래는 이번에도 그 여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덥썩 잔을 들어 술을 떠서 툰툰에게 건네며 외쳤다. "좋은 술이오! 미아우족의 술 담그는 솜씨는 최고요!" 툰툰은 나래가 내민 잔을 받으면서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나래는 마냥 술에만 정신이 팔린 것 같아 보였다. 희네는 미소지으며 나래의 말을 툰툰에게 전했을 뿐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툰툰은 잠깐 실망한 듯했으나 재빨리 표정을 고치고 말했다. "큰 잔치에 쓰려고 오래 묵혀두었던 가장 좋은 술이다. 마음껏 마셔라." 말이 끝나자마자 툰툰은 여자에게 눈짓을 했다. 여자는 나래의 잔을 들고 술을 떠서 나래에게 다소곳이 내밀었는데 그 자태가 그렇게 얌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래는 단지 고개만 끄덕이며 잔을 받아들었을 뿐이었다. 도리어 분위기를 짐작한 희네가 끼어들어 말했다. "좋다. 우리 둘은 오늘 마음껏 취해보겠다. 취했다고 흉보지 않기만을 바란다. 하하." 희네는 단숨에 잔을 비웠고 나래는 아예 술을 항아리째로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희네와 나래는 여자에게는 관심도 없는 듯 했다. 툰툰이 다시 여자에게 눈짓을 하자 여자는 종종걸음으로 미끄러지듯 물러났다. "그러면 이제부터 춤을 보도록 하자." 툰툰이 커다랗게 외치자 희네가 툰툰에게 말했다. "춤은 나중에 보아도 된다. 내동생 나래가 술을 좋아하니 우선 술을 마셨으면 좋겠다." 툰툰은 잠시 주위 눈치를 보다가 희네에게 속삭였다. "당신들은 우리의 가장 벗이다. 원하기만 하면 내 딸이라도 내주겠다. 그런데 내 딸들은 솔직히 좀 못났다. 더구나 마을에 얼굴 예쁜여자가 별로 없다. 그러니 마음에 안 들더라도 사양 말고..." 툰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희네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의아해하는 툰툰의 얼굴을 보며 희네는 씁쓸하게 말했다. "미아우족 여자들은 몹시 예쁘다. 너무 예뻐서 탈이다. 제발 여자들은 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정말 부탁이다." "왜 그러는가? 우리가 이렇게 큰 은혜를 입은 이상, 우리는 당신이 원하는 여자는 누구든 데리고 갈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물론 큰마누라가 아니어도 좋다. 당신들 같은 천하장사라면 몇째 마누라라고 해도 누구든..." 희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수는 없다. 우리는 성인식도 치르지 않았다. 상투도 올리지 않았잖은가? 우리는 아직 여자와 잠을 잘 수 없다. 사울아비의 법도다." 툰툰은 의아해 했다. 당시는 인간이 자연이나 다른 인간들과 한없는 투쟁을 하던 시기였다. 싸움을 하는 남자들은 언제 죽을지 몰랐기에 많은 후손을 두어 부족을 번창하게 만드는 것이 임무 중의 하나였다. 자연히 남자들은 능력만 된다면 많은 여자를 거느리며 많은 자식을 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큰마누라와 작은마누라의 차별도 거의 없었고, 있다면 큰마누라는 항상 남편과 같은 집에서 살고, 작은마누라는 이웃에 집을 지어 산다는 것 정도였다. "나는 사울아비를 본적이 있다. 그런데 여자와 잘만 자고, 여자를 좋아했다. 당신들은 소년들이지만 그래도....뭐, 아직 성인식 전이라면 마누라로 삼지 않아도 된다. 여기서 며칠이건 묵으면서... 이미 남의 마누라가 된 여자만 아니라면 누구든지...." 툰툰의 말을 희네가 다시 막았다. "정말 미안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맹세를 했다. 내 마누라말고는 어떤 여자와도 자지 않겠다고 말이다." 툰툰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맹세를 했다고? 그렇다면 할 수없다..... 그러나 왜 그런 맹세를 했냐? 동생도 했나?" 희네가 멋쩍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지금 말할 수가 없다. 좌우간 여자들은 없는편이 더 좋다. 동생도 맹세했다. 예쁜여자들이 너무 많으니 이대로라면 나도 모르게 맹세를 깨고 말겠다. 동생도 걱정된다. 여자들이 있으니 좋기는 하지만 참아야 하니 나는 괴롭다. 툰툰은 설마하니 내가 맹세를 깨서 말아래 떨어져 죽는 것이 좋은가? 하하..." 툰툰은 정색을 했다. 당시만 해도 말은 대단히 중요한 주술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믿어졌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큰 악덕이이었으며, 하늘을 모독하고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더구나 하늘에 맹세를 했다면,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만 하고, 맹세를 깨면 반드시 그 맹세한 대로의 결과가 돌아온다는 것이 모든 인간들의 굳은 신념이었다. 툰툰은 그 말을 듣고는 여자들을 모두 물러가게 하려고 다급하게 손뼉을 치려 했다. 그 모습을 보며 희네는 마을사람들이 실망해할까봐 얼른 덧붙였다. "잔치를 벌여놓고 다 물러가게 하면 마을사람들이 실망하지 않는가? 다만 여자들이 내게 가까이 오지만 않게 해달라. 나는 술만 마셔도 좋다. 동생도 그럴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즐겁게 놀라고 하자." 그 말을 듣고 툰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은 정말 대단하다. 나이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토록 용감하고 이렇게 마음씀씀이가 올바르니, 정말 나는 당신 같은 벗을 두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나이 많은 내가 당신에게 배워야 한다." 툰툰은 큰 소리로 잔치를 시작하라고 외치면서, 자신은 손님들과 누가 먼저 취해 쓰러질 것인지 내기를 했으니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고 말했다. 물론 희네는 걱정하지 않았다. 나래는 아직 어렸지만, 드넓은 주신신시 전체에서도 나래를 이길 술장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아우족 사람들은 원래ㅜ춤추고 노래하기를 좋아했고 여자들은 화려한 색으로 단장하기를 좋아했으므로 큰 잔치가 시작된다는 이야기에 여자들은 모두 달려가서 옷을 바꿔 입고 왔다. 즉시 노래하고 춤추는 흥겨운 잔치가 벌어졌지만, 정작 주인공인 나래는 약간 김빠진 듯이 허허거리며 억지웃음을 가끔 흘리면서 술만 퍼 마셔댔고, 희네는 뭔지 모르게 분위기가 엄숙하여 건드릴 수 조차 없었다. 그저 툰툰은 나래와 잔을 권하고 받을 뿐이었으나 도무지 나래를 당해낼 수 없었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었을때 결국 툰툰은 술에 취해 얼근해졌다. 희네는 때가 적당하다 생각하고 툰툰에게 살짝 말했다. "우리는 내일 또 먼길을 떠나야 한다. 이제 사람들은 놀도록 놔두고, 밖에서 잠시 이야기를 해도 좋겠는가?" "바란다면 뭐든지 좋다." 그렇게 하여 희네와 툰툰은 아직도 황소처럼 술을 들이켜는 나래를 사람들 사이에 놓아두고 밖으로 나왔다. 낮에 벌인 잔치에 시간가는 줄을 몰라 어느새 하늘엔 별이 총총 빛나고 있었다. 희네가 적당한 곳에 털썩 주저앉자 툰툰도 옆에 앉았다. 희네가 말을 꺼내기 전에 툰툰이 먼저 입을 열었다. "희네, 나래. 당신들은 형제인가?" "그렇다. 쌍둥이 형제다." "쌍둥이? 하나도 닮지 않았는데,닮지 않은 쌍둥이인가?" "그렇다." "그렇군. 그런데 당신은 사울아비 집안 사람인가?" "그렇다." "당신 집안도 대단히 용감한 집안이겠군." 그 말에 대꾸는 하지 않고 희네는 씩 웃었다. 툰툰이 물엇다. "희네와 나래는 아잇적 이름인가? 주신사람들은 성인식을 해야 성과 진짜 이름을 받는다고 들었는데?" "맞다 우리는 아직 성인식 전이다. 조금 늦은편이다. 그런데...." 희네는 툰툰의 질문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자 얼른 말꼬리를 돌려 본론을 꺼냈다. "부탁할 것이 하나 있다." "무엇이든지 말해라!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 툰툰이 술기운 때문인지 다소 과장된 표정으로 가슴을 치며 말하자 희네는 정색을 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무엇을 달라는 게 아니다. 한 가지만 말해주면 된다. 이 근처에 선인이 산다고 하는데....선인에 대해 아는 게 있는가?" 잠시 툰툰은 눈을 껌벅이다가 희네를 바라보았다. "선인? 선인을 왜 찾는가?" 희네는 미소를 띠면서도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말할 수 없다." "나는 늙었다. 그래서 잘 싸우지는 못하지만 나이를 헛먹은 것은 아니다. 아마도 당신은 선인에게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은것일테지. 그렇지 않은가? 젊을 때는 뭐든 배우고 싶은것일테지. 그렇지 않은가? 젊을 때는 뭐든 배우고 싶어하는 법이니까." 툰툰은 자못 예리했다. 그러나 희네는 곡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 눈치도 보통은 아니다만 내 뜻을 당신이 어찌 알겠는가?' 그래도 희네는 그냥 그렇다고 툰툰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툰툰이 자신 있게 말했다. "나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어떤 선인을 찾는가? 큰선인을 찾는것인가, 아니면 그냥 선인을 찾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기이한 능력을 가진 선인을 찾는 것인가?" 희네는 기쁜표정을 지었다. 툰툰이 선인들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선인들에 대해 잘 아는가?" 취기가 오른 툰툰의 얼굴이 더욱 벌개진 같았다. "좀 안다." "큰선인은 어떤 사람인지 말해보라." 희네의 요청에 툰툰이 즉각 대답했다. "큰선인은 하늘과 통하고 신과 통한다. 그래서 세상에 몇 없고, 찾기도 어렵다. 큰선인이 하지 못할 일은 없다. 그러나 큰선인은 몸을 숨기고 여간해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큰선인은 이미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기 때문에..." 희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툰툰이란 이 미아우 족장은 정말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부족사람들이 툰툰을 '모르는게 없는 너구리'라는 별명으로 부르는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면 그냥 선인은 어떤 사람이지?" "우리처럼 모여 살지 않고, 나름대로 혼자 도를 닦으며 사는 사람들이 그냥 선인이다. 대개가 큰선인이 되기위해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꼭 도를 닦지 않더라도 보통사람과는 전혀 다른, 아주 많이 다른 사람도 있다. 그들도 선인이라고 부른다." 그 말에 희네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맞다 내가 찾는 것이 바로 그런 선인들이다. 큰선인을 만나면 좋겠지만, 만나기 힘든다는 것을 안다. 죽기전에 한 번이라도 다행이다. 하지만 그냥 선인도 좋다. 뭔가 특별하고 신기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면 더 좋다. 아는 것이 있는가?" 툰툰은 말했다. "희네, 나래. 내 진정으로 이야기하겠다. 이 근방 여기서 한 사흘 정도 걸어가면 벌판 가운데 솟아오른 산이 하나 있는데 둥그렇게 보기 좋게 솟아 있으니 찾기 쉬울 것이다. 항상 안개가 끼어 있는 작은 산이다. 그곳에 선인이 있다고 한다. 지금도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선인을 찾아 뭔가 배움을 얻는 것은 좋은 일이다." 희네는 찾던 선인이 있다는 말에 얼굴빛이 환해졌다. 그 모습을 보며 툰툰이 '허허' 웃었다. "그러나 그렇게 도움을 받을 만한 선인은 아닐지도 모른다. 특히 당신 같은 사울아비에게는." "상관없다. 알려만 달라." "사흘이나 돌아가야 하는데도?" "말을 타고 달려가면 하루면 갔다 올 수 있다." 고개를 끄덕이며 툰툰은 그 근방에 있다고 소문이 나 잇는 선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벌써 기울어져 가는 보름달 아래, 희네는 눈을 크게 뜨고 행여 한마디라도 놏칠세라 툰툰의 이야기에 귀를 바짝 기울였다. 한웅을 모시고 가는 길이라 지금 당장 선인을 찾아갈 수는 없었지만, 잘 기억해두어야 했다. 저만치에서는 미아우 사람들이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나래가 취하여 큰소리로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날, 나래는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옆에서 자고 있는 툰툰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나래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낯선 환경에 놀라서였다. 잠시 둘러보니 자신이 잠든곳은 잔치가 벌어졌던 툰툰의 움집이 아니라 작은 천막이었다. 아마도 툰툰의 침실 천막인 듯했다. 나래가 몸을 일으켜 천막의 가죽을 들추며 내다보자, 희네가 천막 앞까지 말을 끌고 오는 것이 보였다. "형님, 어제 내가 많이 취했어? 내가 실수하지는 않았어?" 희네가 웃으며 피곤한 얼굴로 대꾸했다. "너 어제 너무 빨리, 너무 많이 마시더라." 나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흠, 미아우족의 술은 너무 맛이 좋거든.....향기도 좋고....." "네가 성인식도 올리기 전에 이렇게 술꾼이 되다니. 아버지가 아시면 뭐라고 하실까?" 희네가 놀리듯 묻자 나래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래는 항상 담담한 표정이었고, 감정의 기복을 밖으로 보일 때가 상당히 드물었다. "내가 뭐 꼭 마시고 싶어서 그랬나? 잔치가 벌어졌는데 형이 족장하고 이야기하려면 내가 대신 마셔야 하잖아. 족장과 이야기는 잘되었어?" 희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래는 덩치가 크고 행동이 우직해서 보통 사람들은 나래가 좀 둔하다고 생각하기 쉬웠다. 그러나 보기와는 달리 둔하지 않았고 매우 현명했다. 희네의 깊은 생각에는 미치지 못한다 해도, 보통 사람보다는 생각하는 것이 훨씬 위였다. 하지만 나래는 말수가 적고 덩치에 걸맞지 않게 수줍음을 많이 탔기에 그런 깊은 생각을 남에게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버지 치우우레만 해도 나래의 그런 면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다만 나래는 쌍둥이 형인 희네에게만은 속내를 항상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었다. "여기서 남동쪽으로 사흘을 걸어서 가면 선인이 사는 벌판이란다." "이번엔 어떤 선인이래?" "아주 기이한 사람이란다. 만나본 사람이 없으니 더 기이하지." "그러면 기이한 사람인지, 아니 진짜 선인인지 안닌지 어떻게 알아?" "나중에 이야기하자" 희네가 슬쩍 나래에게 눈짓을 하는데 툰툰이 깨어나 부스스한 얼굴로 천막을 들추고 나왔다. 희네가 먼저 툰툰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잤는가? 툰툰?" 툰툰이 웃으며 말했다. "잘 잘 수가 있는가? 당신들 옆에서 밤새 지켰으니 말이다." "지키다니?" 희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당신들이야 물론 점잖지만, 우리 부족의 철없는 아가씨가 당신이나 당신 동생을 마음에 들어 해서 숨어 들어오면 안 되지 않는가? 우리 미아우족 아가씨들은 용감해서, 당신들이 여기서 잔다는 사실을 알면 용감한 남자가 그리워 밤에 쳐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맹세를 깨게 해서 벗을 말 아래 떨어져 죽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말 아래 떨어져 죽더라도 그런 용감한 아가씨 얼굴이라도 보게 놔두지 그랬는가?" 희네가 농담을 하며 맑은소리로 '하하'웃었다. 희네는 항상 농담하는 것을 좋아했다. 희네에게 그 말을 전해듣고 나래도 말했다. "형님, 나도 좌우간 고마다고 전해줘. 나도 정말 진탕 취했고, 정말 대접을 잘 받았다고." 희네가 툰툰에게 인사하자 툰툰은 손을 내저었다. "그런 정도로 우리가 보답했다고 볼 수는 없다. 당신 아우는 술은 마셨지만, 잔치에서 제대로 놀지도 못했고 당신도 술을 얼마 안 마셨지 않은가?" "아니다, 충분하다. 우리는 이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원래 도둑들의 물건을 돌려주러 온 것이다. 기다리는 우리 무리가 있다." "그런가? 그러면 선인은?" "길을 달려 찾아보고 돌아갈 것이다." "그렇구나.....그런데.....흠...." 툰툰이 함참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우리 마을을 구했고 우리 마을사람 모두의 목숨을 구했다. 더구나 지나족도 물리쳐 주었고, 도둑들이 빼앗은 물건마저도 돌려주었다. 그 물건을 답례로 주겠다고 해도 받지도 않는다. 우리 미아우족은 원수를 반드시 갚고, 은혜도 반드시 보답한다. 당신들에게 보답을 못하고 그냥 보내게 되면 우리에게는 큰 수치이다." "당신은 선인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지 않았는가?" "그런정도로는 보답이 되지 않는다. 그 선인에 대해서는 우리 부족 중 절반은 대강 알고 있다. 비밀도 아니다. 그러니 내게 다른 뭔가를 원하는게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라." 희네는 툰툰이 정색을 하며 말하자 놀라 손을 저었다. "아니다. 원하는 것은 없다. 도움을 주고 보답을 바라는 것은 사울아비가 할 행동이 아니다." "당신이 보답을 원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 것이다." 툰툰이 완강하게 나오자 희네는 당황했다. "그러면 어제 술을 가죽주머니에 가득 담아달라. 아주 좋은 술이었다." "그건 안된다." "왜 안 되는가?" "어제 내가 몰랐을 때는 얼마든지 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줄 수 없다." "왜 줄 수 없다는 것인가?" "당신은 몰라도 당신 동생은 그 술을 가지고 가면 분명 어제처럼 취해 쓰러질 때까지 마실 것이다.술에 취하면 맹세를 깨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그러면 그 술은 선물이 아니라 당신들을 해치는 독이 된다." 희네는 툰툰의 현명함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난감했다. 사실 나래는 그렇게 술을 퍼마실 성격이 아니었고 어제는 일부러 그렇게 행동한 것이지만 굳이 그것을 밝힐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달리 무엇하나 요구할 만한 것이 없었다. 희네와 나래는 가장 문물이 앞선 주신에서 왔으며 존경받는 사울아비였기 때문에 몸에 지닌 것이나 말에 실은 것 어느 하나도 미아우족보다 못한 것이 없었다. 자기가 지닌것보다도 못한 물건을 달라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대를 무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커다란 실례였다. 희네가 대답하지 않자 툰툰은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는 당신들에게 큰 선물을 하고 싶다. 그렇다. 원래 이것은 다른 부족사람에게는 절대 주어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당신들에게라면 줄수 있다. 어쩌면..... 당신들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툰툰은 혼자 중얼중얼하다가 갑자기 천막으로 들어가더니 잠시후 희네와 나래에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희네와 나래가 천막안으로 들어가자 툰툰은 지나가던 미아우 청년 둘을 불러 문 앞에 서서 누구도 들어오거나 엿보지 못하게 하라고 엄하게 일렀다. 그리고 툰툰은 다시 천막을 닫고 희네와 나래를 향해 말했다. "나는 당신들에게 줄 것이 있다. 아주 귀한 것이다. 그러나 먼저 이것을 받기 전에, 나에게서 이것을 얻었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기 바란다." 약간 어리둥절해하면서 희네가 말했다. "약속이 아니라, 맹세라도 하라면 하겠다." 툰툰이 고개를 저었다. "맹세는 안된다. 나는 당신을 믿는다. 그러니 당신이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리라 믿는다. 당신이 혹 실수로라도 말을 흘리게 된다면,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을 당신에게 준 것은 나 툰툰이니, 당신이 어쩔수 없거나 실수로 말하는 것이라면 내가 책임을 지겠다. 그것은 당연히 내몫이며, 선물을 주면서 그런 책임까지 지게 해서는 안된다. 나는 다만 당신이 말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희네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가슴을 치면서 말했다. 약속을 할 때는 가슴을 주먹으로 치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나, 주신의 사울아비 희네는 이 선물을 누구에게 받았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나래도 희네에게 그 말을 전해듣고 약속을 했다. 나래는 힘이세고 몸이 단단해서 주먹으로 가슴을 치는데도 '펑펑'소리가 났다. 툰툰은 엄숙한 눈빛으로 품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아주 연한 향기가 도는 누런 가루를 자신과 희네, 나래 이렇게 세 사람의 몸에 뿌렸다. 향기가 은은한 것이 무슨 꽃내음 같았는데, 냄새는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러고 나자 툰툰이 천막 깊숙한 곳에 세워두었던 큰 항아리 속에서 뭔가를 끄집어내었다. 나무로 만든 약간 큰 손바닥크기만한 상자였는데, 툰툰은 그상자와 작은 주머니를 희네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받아라." "이게뭔가?" "열어보라" 희네는 나무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붉고 푸른반점이 박힌 알 하나가 들어 있었다. 알은 여자의 주먹정도로 아담했지만 그 위에 아롱진 무늬들은 몹시 화려했다. 희네나 나래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게 무엇인가?" 희네가 묻자 툰툰이 엄숙히 말했다. "신수의 알이다" 침착한 희네였지만 그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상자를 손에서 떨어트릴 뻔했다. 나래도 다른 것은 몰라도 '신수'라는 말만은 알아듣고 깜짝 놀랐다. 신수라는 이름은, 하늘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을 듯한 이 두사람이 놀랄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다. "신...신수라고?" "그렇다. 어떤 신수인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새 모양의 신수의 알일 것이다." 말하는 툰툰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신수는 정말로 무서운 존재들이었다. 아니, 반은 신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보통사람은 신수라는 호칭을 이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불경이다. 인간들중에서 자연의 도를 깨우쳐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큰선인이 있는것처럼, 동물 중에서도 도를 깨우친 신령한 동물이 있었으니 그것이 신수들이었다. 그러나 신수들의 힘은 큰선인들이나 비교할 수 있는것이지 보통의 선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신수는 도를 깨우침에 따라 모습이 변하여 간다. 처음 알을 깨고 나올때는 여느 짐승과 같지만, 일단 깨고 나오자마자 어미의 도력을 이어 급속도로 성장하여 어마어마한 존재로 변한다고 했다. 더욱이 신수들은 잘 번식하지 않으니만큼, 신수의 새끼나 알을 본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신수들은 인간을 잘 건드리지 않고 유유자적 살아가지만, 간혹 인간과 맞서게 될 때에는 그야말로 공포의 존재로 둔갑하곤 했다. 어느부족이건 신수의 노여움을 사서 마을에 불덩어리가 쏟아져 몰살당했다거나, 백 명의 전사들이 순식간에 갈갈기 찢어져서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렸다거나, 수무길이 넘는 몽뚱이에 집이 무너지고 한 입에 사람이 셋씩이나 삼켜졌다는 등의 소문이 있었다. 호랑이나 늑대 같은 짐승들에 대한 공포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공표였기에 우는 아이에게 호랑이나 늑대이야기를 해서 겁을 주는 경우는 있을지언정 신수라는 이름은 아예 입에 올리지 않았다. 간혹 신수와 싸워 이기는 아주 대단한 사람의 이야기도 있었지만 대부분 전설이었을 뿐이고, 삼천명의 장정과 백명의 주술사가 가서 결국 세 명만 남고 모두 죽는 싸움끝에 신수를 죽이지도 못하고 만신창이가 되어 간신히 도망쳤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뿐이었다. 삼천명의 장정과 백 명의 주술사를 동원할 만한 부족은 주신족뿐이었는데, 주신에서는 그런 허무맹랑한 일이 벌어진 적이 없다는 것을 희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신수에 대해서라면 희네 나래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아픈 기억이 있었고... 잠시 뜸을 들인뒤 툰툰이 입을 열었다. "아주 우연히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직접 얻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세 해전에 나는 남쪽 깊숙이 여행할 일이 있었다. 가는데만 한 해가 넘게 걸렸다. 남쪽의 아주 덥고 울창한 숲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미아우족은 동물을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어 툰툰 역시 독을 지닌것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강한 독을 지닌 생물들을 찾으러 여행을 떠난 것이다. 남쪽의 숲까지는 부족사람들과 무리를 지어갔지만, 숲에는 툰툰 혼자 들어갔다. 미아우족 출신인 툰툰은 혼자 그늘진 곳만 찾아서 여행하는데 능숙했다. 사람들은 아예 그림자도 볼 수없었고, 독을 잔뜩지닌 터라 짐승들도 툰툰을 피했기 때문에 툰툰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혼자 여행하는 것이 오히려 편했다. 미아우족의 독을 다루는 습관도 사실은 짐승에게서 습격받지 않으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제아무리 은밀하게 독을 지녔다 해도 독을 지닌 느낌이 강하게 풍기기 때문에 모든 짐승이 미아우족을 오히려 피했고, 그중에서도 툰툰은 독을 잘 다루어서 혼자 험한 밀림을 헤매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언덕 위에서 밀림을 내려다보던 툰툰은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빽빽하여 하늘조차 보이지 않는 원시림의 어느 한 부분이 기이하게도 구멍이 뻥 뚫려 있었던 것이다. 조심스레 살펴보니 그 구멍주위로만 나무들이 불에 타 없어진 것처럼 보였다. '이상한 일이다. 산불도 아니고, 어떻게 한 부분만 저렇듯 타서 뚫어질 수가 있을까?' 툰툰은 이상하여 그리로 내려가 보았다. 도착해보니, 정말 놀랍게도 위에서 본 대로 그 근처의 나무들은 모조리 타서 재가 되어 있었다. 대단히 뜨거운 무언가가 나무들은 순식간에 태워버렸는데, 때마침 비가내려 불이 번지지 않은 듯했다. 아니, 비가 내리는 중에 나무들이 홀랑 타버린 것도 같았다. 비가 내리는 중에에도 거대한 나무들을 잿더리로 만들어 버리는 불이라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툰툰은 순간, 이것은 자연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신수의 짓 같았다. 툰툰은 다리가 떨려오는 것을 느끼고 그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대뜸 자신의 다리를 붙드는 것이 아닌가. 툰툰은 나이도 들어 현명하고 침착했지만, 그순간에는 너무도 놀라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희네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러나 상자를 받쳐든 손은 흔들림이 없었고 얼굴도 다시 평온해졌다. 툰툰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너무 놀랐다. 그것은 사람의 손이었다. 그 자리에 놀랍게도 사람하나가 타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었던 것이다. 손은 흙을 뚫고 위로 나와 있었는데, 이미 심하게 데여서 보기 흉할 정도였다...." 그는 아마도 불벼락이 떨어질 것을 알고는 미리 흙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몸을 숨긴 흙구덩이는 그 강렬한 열에 구워져 토기조각같이 딱딱하게 변해버려, 툰툰은 몽둥이로 흙을 일일이 부숴야 했다. 한참을 애쓴끝에 그 사람을 끄집어 냈는데, 다행히 숨구멍이 막히지는 않아 살아있었지만 이미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고 죽어가는 중이었다. 옷은 물론이요, 머리칼이며 눈썹도 없었으며 온몸이 물집으로 부풀어올라 누구인지, 어느 부족사람인지 알아볼 수 조차 없었다. 한참동안 툰툰이 보살폈지만 살리기는커녕 말 한마디하게 할 수 없었다. 그사람이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면서 툰툰에게 부들부들 떨며 뭔가를 내밀었느데, 그것이 바로 이 알과 가죽주머니였다... 희네는 놀라움에 고개를 끄덕이며다시 한 번 화사한 빛의 알을 쳐다보았다. 툰툰이 한숨을 한 번 쉬더니 말했다. "결국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사람은 누구인지 몰라도, 신수의 알을 얻기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 같다. 어떻게든 신수의 알을 훔치는데에는 성공했지만, 신수에게 들켜 불벼락을 맞아버린 것이다. 좌우간 대단한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없다. 마지막 불벼락을 맞는 순간에도 흙구덩이로 뛰어들어 그때까지 죽지 않았으니 말이다. 더구나 그렇게 다친 몸으로 굳어버린 흙 속에서 하루 이상을 갇혀 있으면서도 버티어냈으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대단한 사람이다." 희네가 맞장구를 치자 툰툰이 말을 이었다. "불벼락은 하늘에서부터 떨어진 것 같았으니, 그 신수는 분명 하늘은 나는 새일 것이다. 아마도 불벼락을 내린 다음 알도 부서졌을 거라 여기고 신수가 돌아간 것 같다. 나는 덜덜 떨며 그 알을 가지고 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면 이것을 왜 나에게 주는 것인가?" "그 대단한 사람이 목숨을 걸고 가지고 온 것이다. 그만큼 귀중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나더러 신수를 키워보라는 것인가?" 그말에 툰툰이 놀란 듯, 희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누가 신수를 키울 수 있겠는가? 아무도 그런마음은 갖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 툰툰이 사울아비 희네에게 묻겠다. 이것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희귀하고 귀한 물건인가, 아닌가?" "물론 귀한 물건이다. 이것보다 희귀한 물건을 나는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것을 당신에게 주는 이유는 간단하다. 만약 당신이 선인을 만나게 된다면, 아마 선인에게 바칠 귀중한 물건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선인들은 몹시 성격이 괴상하니 좋은 선물을 한다고 해도 나쁠 것은 없다. 아마도 보통사람에게는 이것이 쓸모가 없을테지만, 선인들은 좋은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은가?" "그럴 수도 있겠군." 그 말에 희네도 동의했다. 세상에 신수의 알이라니! 어쩌면 선인들에게 뭔가 부탁을 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좋은 물건이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세 해나 지났다면 이미 알이 썩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저으며 툰툰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알은 적대 죽지 않았다. 가만히 놓아두면 달각거리며 흔들린다. 안에서 깨고 나오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가?" "나도 처음에는 알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이 주머니를 받은 것을 생각해냈다. 그안에 든 가루를 뿌리자, 알이 다시 조용해졌다. 아마도 깨어날 준비는 되어 있는데 그 안에서 잠이 들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도 가루를 뿌린건가?" "그렇다. 이가루가 무엇으로 만든것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일단 가루를 약간 뿌려주면 알은 두 달 정도 잠이 든다. 나는 지금까지 열여덟 번 가루를 뿌렸다. 두어 번 깜박 잊고 뿌리지 않은적이 있었는데, 그때 알이 막 깨어날 것 같이 요동쳐서 무서웠다. 두달에 한 번씩 잊지 말고 뿌려라." 희네는 고개를 돌려 나래에게 툰툰의 이야기를 대강 들려주었다. 나래의 표정은 여전히 덤덤했지만 슬쩍 몸서리를 쳤다. 나래도 알에서 무엇인가가 깨고 나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두려운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새끼라고 할지라도 신수가 아닌가! "보물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렇게 까다롭고 무서운 보물을 받아야겠어?" 나래가 묻자 희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가 있을 것 같다." "좌우간 조심해. 신수라니...." 조심스레 희네가 툰툰에게 물었다. "혹시 이 신수의 어미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는 없다. 그 알을 얻은 곳에서 여기는 만 리나 떨여져 있다. 그리고 신수가 올것이었으면 진작에 왔을 것이다. 세 해나 지났으니 어미도 모를 것이다.만약 선인을 찾지 못한다면 신시로 가지고 가서 다른 사람의 좋은 물건과 바꾸거나 한웅께 바쳐도 좋을 것이다.좌우간 이것은 희귀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니까." "이런 귀한 것을 왜 진작 다른 좋은 물건들과 바꾸지 않았는가?" 그러자 툰툰이 웃었다. "당신들은 누구도 겁낼 필요 없는 사울아비들이고, 모든 부족이 받들고 있는 주신의 사람이다. 더구나 용감무쌍하여 당할 자가 없는 형제다. 당연히 당신들은 귀한 물건을 남과 바꾸더라도 겁낼 것이 없다. 그러나 나 같은 작은 마을의 족장에게는, 이런 보물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기만 해도 위험해진다. 지나족이나 키탄(거란)족이나 타타르족이나 욕심을 내는자가 생긴다면 나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가 망할지도 모른다. 어제만 해도 당신들이 구해주지 않았으면 우리마을은 망할뻔하지 않았는가?" 그 말에 희네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라면 이것을 요긴하게 사용할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까다로운 보물은 강한 힘이 있는 자에게나 보물이지, 툰툰같은 작은 부족장 정도에게는 분에 넘치는 물건이기도 했다. 희네는 툰툰의 지혜로움을 다시 깨달으면서, 이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양측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툰툰은 이 물건에 대한 짐을 덜고, 자신은 이것을 잘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희네는 툰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상자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툰툰은 다시 두 사람에게 말했다. "가지고 있을 때는 좋으면서도 마음이 여간 무겁지 않았는데, 주고나니 아쉽지만 마음이 다 홀가분해진다. 희네 나래여, 그것을 잘 사용하기 바란다." "주신의 희네와 나래가 다시 한번 고맙다고 말한다. 나의벗 툰툰이여." "나, 미아우족의 툰툰이야말로 벗 희네 나래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한다." 세 사람은 다시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희네는 충분히 잘 쉬었고 시간이 없으니 즉시 떠나겠다고 말했다. 툰툰은 아쉬워했지만 바쁘다는 사람의 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헤어지는 것이 아쉽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이 먹을 식량과 물, 좋은 가죽은 이미 당신의 말에 실어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신 무리는 어디로 가는가? 길은 아는가?" 희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길은 안다. 우리 무리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으니, 말을 타고 달리면 하루면 따라잡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무리는 지금 남서쪽으로 가고 있다." "남서쪽으로 간다면, 신수가 사는곳이 몇 곳 있다. 당신들은 도둑떼나 사나운 부족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지만, 당신의 무리라 할지라도 신수가 사는 곳만은 멀찌감치 피해야 할 것이다." 희네는 툰툰의 걱정스러운 당부에 씩 웃으며 어깨를 폈다. "잘 알고 있다. 신수가 사는 곳은 우리도 알고 있으니 반드시 피해서 갈 것이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먼길에 나와 바라는 바를 다 이루기를 빈다. 나의 벗 희네여, 나의벗 나래여. 돌아가는 길에 반드시 다시 들러주기를 바란다. 이 마을의 모든 사람은 당신들은 영원히 형제로 기억할 것이다." 희네와 나래가 떠난다는 소리를 듣고 미아우족 사람들이 전부 몰려 나왔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는 환대였다. 몇몇 아가씨들은 말 한마디 나누어본 적이 없는데도 아쉬워서 저만치에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고, 툰툰의 막내아들 녀석도 흑흑거리며 흐느꼈다. 나래는 여전히 덤덤한 표정으로 툰툰의 막내아들 유쌍에게 다가갔다. 거대한 나래가 꼬마앞에 웅크리고 앉아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자 꼬마는 입을 삐죽거렸다. 나래가 희네에게 물었다. "이 녀석 이름이 뭐유? 형님?" "유쌍이라고 한다." "아, 그렇군. 유쌍에게 말 좀 전해줘." 나래는 미소를 지으며 유싸의 고사리 손을 잡아주었다.나래의 손은 솥뚜껑처럼 커서 유쌍의 손만 아니라 팔까지 다 파묻힐 지경이었다. 유쌍은 나래의 손이 의외로 부드럽고 따뜻할 뿐만 아니라 나래의 미소 역시 온화하여 자신도 모르게 울음을 그쳤다. "울지 마라. 착하지? 언제 지나가게 되면 다시 오마. 그리고 네가 크면 주신으로 나를 찾아와도 된다. 알았니?" 나래는 허리춤에 꽂고 다니던 작은 구리칼을 꺼내 유쌍에게 주었다. 희네는 나래의 말을 미아우 말로 바꾸어 들려주었다. 구리 물건은 말로만 듣고 먼발치에서 구경만 했지, 직접 만져보지 못한 미아우 꼬마는 무척 좋아했다. 나래는 유쌍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씨익 웃었다. 유쌍이 너무 좋아 저만치로 '와' 하고 달려가자 다른 꼬마들이 유쌍의 뒤를 우르르 따라갔다. 미아우 사람들은 저렇듯 덩치 크고 싸움 잘하는 용사가 무척이나 사람 좋게 웃는 얼굴을 보고는 모두들 멍해졌다. 나래는 문득 그 많은 시선을 의식한 듯 다시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자 두 볼이 약간 붉어졌다. 나래는 말없이 자신의 말인 구름의 등위에 훌쩍 뛰어올랐다. 희네도 웃으며 높은뫼 등에 천천히 올랐다. 두 사람은 미아우족이 모두 모여 손을 흔드는 것을 뒤로 한 채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황사바람이 벌판을 거세게 휩쓸어 가고 있었다. 말을 몰아 마을에서 막 벗어날 즈음, 어제 나래가 처치했던 지나족들 시체가 저만치 널려 있는 것이 보였다. 시체들은 모두 시커멓게 변해 있어서, 멀리서 보아도 미아우족의 독에 의해 처참하게 즉음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래는 한 번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때 희네가 말했다. "신경 쓰지 말아라. 어차피 죽고 죽이는 것이 세상일이다. 그들은 죽을 짓을 했으니 죽은 것 뿐이야." 나래는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 어디로 갈 거야? 선인 만나러 갈 거야, 바로 한웅님 행차 따라갈거야?" "하루만 더 걸리면 될 것 같으니 선인부터 찾아보고 가자." "어떤 선인이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기이한 선인이란다. 어때, 재미있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면서 왜 만나?" 희네는 약간 근엄하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큰 쓸모가 있는 것이야말로 아무 쓸모 없어 보이기 쉽단다." 그 말을 하다가 희네는 안색을 흐리며 나직이 말했다. "이제....좀 천천히 가자...." 나래의 얼굴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다리?" 희네가 툰툰의 마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나래는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리 와, 형님. 내말을 같이 타자구." "그래야 할 것 같구나...." 희네는 말을 세우고, 다리가 몹시 아픈 듯 제대로 내리지도 못했다. 나래가 희네를 한손으로 가볍게 들어올려 여자처럼 두 다리를 모아 옆으로 자신의 말등에 올리고는 희네의 허리를 잡았다. 나래는 워낙 힘이 세어 다리 힘만으로도 두사람을 떠받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고, 나래의 말 구름도 워낙 크고 힘이세, 두 사람을 태우고 달려도 문제가 없었다. 덩치 큰 나래와 희네가 함께 타도 지치지 않도록 애써 구한 힘센 말이 바로 구름이었다. 희네는 지금껏 아픈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연기를 한 것이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한웅의 행렬 뒤를 따라가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그냥 다리를 늘어트리고 가면 되니까. 그러나 말을 달리는 경우 희네는 제대로 탈 수가 없었다. 왼쪽다리에 힘을 줄 수 없는 것이다. 툰툰의 부락에서도 보통 사람처럼 걸으려고 희네는 밤새도록 얼마나 무리했는지 모른다. 그 때문에 지금 다리가 너무 아팠고, 이제 한웅의 행렬을 따라 잡으려면 말을 몰아 달려야 하는데, 희네의 다리상태로는 대단한 무리였다. 이것은 희네 나래 형제와 그밖에 양역 등의 친한 사울아비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아버지 치우울도 몰랐다. "디리도 못 쓰는 사울아비라니....누가 보면 뭐라고들 할 텐데... 허, 뭔가 다른 수를 내야겠는걸?" 희네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남의 일처럼 웃으며 말했다. 나래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모두가...모두가 나 때문이야." "너 때문이라니, 무슨말을 하는거야? 이건 병이야, 하하." 희네가 고통에 겨워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대꾸하자 나래는 더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형님!형님! 형님은 나를 위해서...나 때문에 ...이렇게 되었어! 대신 내가 형님의 다리가 될게.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형님 대신 뛰고 싸우고 말을 달려줄게!" 나래가 엉엉 울면서 외치자 희네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했으나 뺨이 붉어지면서 눈물이 솟았다. "넌.... 내 아우야. 이 녀석, 그런 소리 할 거 없어. 넌 내 아우란 말야." 두 형제는 짙은 눈물을 뿌리면서 넓은 벌판을 달려갔다. 구름도 형제의 기분에 감염되었는지 더욱 네 발굽에 힘을 주며 더욱 빠르게 달렸다. 선인 발귀리 희네와 나래가 툰툰이 말했던 둥그렇게 솟아오른 산을 찾아낸 것은 아직 해가 한참이나 남은 오후였다. 나래의 말 구름이 워낙 잘 달러 두 사람을 태우고도 이렇듯 빨리 도착한 것이다. 그 산은 정말 일부러 깎아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평평한 들판 한가운데 둥글고 봉긋하게 솟아 있어서 금방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근처 들판은 다 멀쩡한데, 그다지 높지 않은 그 산에만 기이하게 안개가 끼어 있었다. 모든 것이 툰툰의 말 그대로였다. "저 산이야?" 나래가 묻자 희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는 어때?" "참을 만해. 말을 탈 만하니까 잠시만." 희네는 자신의 말 높은뫼를 타고 천천히 산을 향했다. 나래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동안 많은 선인을 찾아 다녔지만 한 번도 제대로 된 선인을 만난적이 없었잖아. 이번엔 정말일까?" "정말이면 좋고 아니어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이번 선인은 뭐 하는 선인이래?" "아까 말했잖아. 딱히 하는 일이 없는 선인이라던데." "그럼 어떻게 선인이야?" "꼭 뭘 해야만 선인인 것은 아니잖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산비탈로 접어든 희네는 산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거 이상한걸?" "왜?" "이렇게 밋밋한 산이 있을 수가 있나? 올라갈 길이 하나도 없어." 그 산은 마치 누가 일부러 곱게 다듬어 놓기라도 한 듯 매끄럽고 높은 경사가 둥글게 이루고 있어 그리 높지 않음에도 올라갈 방법이 없어 보였다. 희네와 나래는 한참 동안 말을 타고 산 주위를 한 번 빙돌아 보았음에도 올라갈 만한 길은 전혀 없었다. 더구나 산 아래쪽은 깎은 듯 미끄러운 흙으로만 덮여 있어 기어 올라갈 수도 없었고, 잡을만한 나무 뿌리조차 하나도 없었다. 높은 곳에는 나무가 무성히 자랐지만 아랫부분은 그야말로 맨들맨들할 정도였다. "이런 산 위에 누가 있겠어? 올라갈 수도 없을 것 같은데?" "그러니 더 올라가봐야겠다." "어째서?" "누가 올라오지 못하게 일부러 깎은 것 같아 보이잖아. 나는 그럴수록 더 가보고 싶더라." 희네가 말에서 내리자 나래도 한번 시험삼아 올라가려고 펄쩍 몸을 날려 산비탈에 올라섰다. 힘이 워낙 센지라 단번에 몸을 날리자 세 길 만큼이나 높이 떠서 산비탈에 매달렸다. 그러나 나래의 몸은 곧 흙먼지와 함께 주르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갓다. 나래는 다시 용을써서 발과 손으로 흙을 박차며 위로 올라가려 했지만 힘이 없는 흙이라 나래의 몸을 조금도 위로 받쳐주지 못했다. 나래는 별수 없이 주르르 미끄러지다가 이내 펄쩍 뛰어 희네 옆에 사뿐히 내려섰다. "여길 어떻게 올라가지? 너무 미끄러워." 희네는 두리번거리며 근방을 살피다가 저만치에 대나무 숲이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나래야, 저 대나무를 베어 와라. 잔가지는 쳐내고 굵직한 것으로 서른 개 정도만." "뭐 하게? 저렇게 높은 데까지 사다리를 놓을 거야?" "어서 베어 오기나 해." 희네가 웃으면서 말하고는 근처의 덩굴을 뜯어 잘라다가 끈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래는 군말하지 않고 대나무 숲에 갔다. 장사인 나래가 구리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서너 자루씩의 굵은 대나무들이 단번에 부러져 나갔다. 대나무는 원래 꺽기 힘들지만 구리도끼가 아주 예리했고 나래의 힘이 강해 별로 힘이 들지 않았다. 나래가 금방 긴 대나무 서른 개를 열 개씩 나누어 세 번에 끌고 올 동안 희네는 덩굴을 길게 이어놓고 있었다. 희네가 나래에게 일렀다. "그 대나무를 비스듬히 잘라봐라. 네 팔길이정도로." 나래가 구리도끼로 대나무를 툭 자르자 희네는 그 대나무를 들고 살피다가 말했다. "됐을 것 같다. 이걸 네 힘으로 깊이 박을 수 있지?" 나래는 형의 뜻을 눈치채고 미소를 지었다. 그냥 올라가기 힘드니까 대나무를 박으며 올라가자는 것이다. 나래가 두말없이 대나무를 흙바닥에 찔러넣자 대나무는 두두둑 소리를 내며 흙에 깊숙이 박혔다. 흙 속에 돌이 있는지 반쯤 들어가고는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지만 시험삼아 힘을 주어보니 그 정도면 두 사람의 몸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저 위까지 올라가려면 대나무를 백 개는 넘게 박아야 될 건데? 그 많은 대나무를 어떻게 지고 가지? 계속 들고 왔다갔다 하기도 힘들고." "지고 갈 것 없다. 내 말대로만 해." 희네가 웃으며 나래에게 말했다. 구리도끼는 무거워서 들고 올라가지 않았지만 나래는 조심성 많은 성격이라 허리칼과 툰툰이 싸준 식량과 횃불을 붙일 돼지기름덩어리까지 싼 보퉁이를 등에 지고서 대나무를 박으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대략 키의 절반 정도 높이 마다 대나무를 하나를 박고 올라서서 또 하나를 박고 또 올라가는 식이었다. 스무 개 가량의 대나무를 박아 나래가 올라갔을 즈음, 밑에서 대나무를 자르던 희네는 자른 대나무를 스무 개 정도씩 덩굴로 엮고 있었다. 한데 뭉뚱그린 게 아니라 대나무를 하나씩 빼서 쓸 수 있도록 엮은 것이다. 그 엮은 것을 희네는 다시 눈대중을 해본 후 덩굴로 길게 서로 이었다. 그런 다음 희네는 그 덩굴의 끝을 나래에게 던져 올렸다. 나래는 계속 올라가면서 그 덩굴을 잡아당겼고 스무 개의 대나무가 끌려 올라왔다. 그렇게 끌고 올라온 대나무를 다시 간격을 두고 박기를 수 차례. 대략 백사십 개의 대나무 막대를 박고 난 후 나래는 드디어 디딜 곳을 잦아 올라설 수 있었다. 사실 희네가 머리를 쓰지 않았거나 나래가 대나무를 푹푹 쉽게 박아넣을 정도로 힘이 세지 않았다면 이 산을 오를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나래는 산 위에 올라서자 혹여 짐승이라도 나올까 봐 손칼을 빼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 사이 희네가 땀을 뻘뻘 흘리며 기어올라왔다. 산 위는 그리 넓지는 않았으나 나무가 빽빽했다. 어느새 시간이 꽤 지나 이미 하늘은 어두워지고 별이 떠오르고 있었다. 희네는 그 많은 나무를 밟고 기어오르는 것이 힘에 겨운지 옷이 땀에 흠뻑 젖었고, 올라서자마자 그 자리에 드러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나래는 그런 형이 안쓰러워 물었다. "내가 끌어올려 줄 걸 그랬나?" "그럴 줄이 어디 있니?" "덩굴이 있잖아." "그러다가 끊어지면 어쩌려고? 하하, 난 괜찮다. 조금만 쉬자." 밑에는 구름과 높은뫼, 말 두 마리만 있을 테지만 둘 다 아주 훈련을 잘 받은 영리한 말들이라 멀리 가지 않고 주인을 기다릴 것이었다. 희네와 나래는 잠시 쉬었다가 일어섰다. 그 사이 날은 더 어두워져 사방이 캄캄해졌다. 나래가 나뭇가지로 횃불을 붙이자 희네는 그 뒤를 따라 산 위의 기묘한 숲을 헤치며 들어갔다. 숲은 몹시도 빽빽하여 지나가기가 무척 힘이 들었는데다 안개가 잔뜩 끼어서 더더욱 방향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산비탈에는 없던 안개가 이 숲에서 피어오르는 듯, 숲안은 유독 안개가 자욱해서 지척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이런 산 위 숲에 새나 있지 뭐가 있겠어? 짐승도 이 산은 못 오르겠는데 사람이 있을까?" 나래가 투덜거리는데 희네가 갑자기 웃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나래가 보니 무성한 숲 저편에 작은 불빛 하나가 어른거리는 듯했다. 희네와 나래는 말없이 그족으로 숲을 헤치며 다가섰다. 가보니 숲 가장자리에 작은 초막 같은 것이 있었고, 불빛은 거기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희네는 목청을 돋우어 그리 크지않게 소리를 쳤다. "뉘 있소?" 저편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여자의 것으로 맑았으며, 젊지도 늙지오 않은 기묘한 울림이 있었다. 게다가 익숙한 주신말이었다. "들어오너라. 기다렸다." 희네와 나래는 깜짝 놀랐다. '기다렸다니?' 희네와 나래가 조심스레 초막에 드리워진 나뭇잎들을을 헤치며 들어서자 그 안에 여자가 혼자 앉아 있었다. 그 여자의 분위기는 참으로 기묘했다. 얼굴은 주름 하나 없이 고왔지만, 왠지 나이가 들어 보였고 머리는 코를 중심으로 반은 희고 반은 검었으며, 검은 머리는 풀어 늘어트리고 흰 머리는 둥글게 말아 올렸다. 홋도 반은 검은색 가죽이고 반은 무슨 천인지 모르지만 고운 흰 천이었다. 몸은 그렇게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았다. 얼굴도 곱상이나 밉상은 아니었고, 다만 눈은 아주 맑은 빛을 내쏘는 듯했다. 여자의 키는 상당히 커서 앉아 있는데도 서 있는 희네의 어깨높이에 시선이 닿는 것 같았다. 희네와 나래는 여자의 기묘한 차림에 조금 놀랐으나 이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면서 물었다. "뉘십니까?" "너희가 찾아와 놓고 내가 누구냐니. 너희는 그럼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온거냐?" 뜻밖에 여자의 말은 몹시 빨랐고, 말투에 웃음기가 서린 것 같았지만 또 어떻게 들으면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게...." 희네가 채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여자는 또 다시 빠르게 내쏘았다. "나는 너희가 누군지도 알고, 너희가 잔머리를 굴려서 산을 올라온것도 아는데 너희는 왜 나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느냐? 내가 누군지 모르면 왜 그 고생을 하며 비탈을 올라왔지?" "그건..." 희네가 막 말을 하려는데 여자는 또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벌을 받아야 해, 벌을. 머리를 잘 굴린 것은 좋지만 그렇게 올라오라고 만든 언덕배기가 아니야. 왜 죄없는 대나무를 서른그루나 잘라댔느냐? 더군다나 이제 저 대나무 때문에 앞을로 후레자식들이 쉽게 올라올 것 아니냐?" "그 대나무는 저희가 내려가면서..." 희네가 애써 다시 대답하려는데 여자는 또 말을 가로챘다. "당연하지! 그것도 안 하면 안되지. 하지만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왜 그런 고생을 하면서 올라온 거지? 왜 나를 만나려고 한 거지? 그건 아니, 응?" "아...아니...그건 말입니다." 이쯤되니 희네도 식은땀이 났다. 이 여자는 정말 모르는 게 없었지만 성질도 몹시 급한 것 같았다. 여자의 말이 점점 빨라져서 알아듣기 조차 어려울 정도로 되어갔다. "너흰 내가 누군지도 모르지? 그럼 너희가 누군지나 아니? 너희가 뭘 하려고 하는지, 너희가 뭘 해야 하는지는 알아? 아무것도 몰라. 바보들아. 너희는 그중에서 좀 나은편이지만, 그래도 세상에 널리고 널린 바보들과 다를 게 하나 없단 말야. 재미없군, 재미없어! 오랜만에 저 비탈을 기어올라온 녀석들인데 이렇게 멍청해서 말 한마디를 제대로 못하다니! 재미없구나, 재미없어! 멍청하고도 재미가 없는 녀석들이니 너희는 벌을 받아야 한다!" 희네도 이제는 화가 나서 여자가 떠들건 말건 마구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말을 안 하려고 안 한 게 아니라 우리가 말할 틈이 없으니 그런 것 아닙니까? 우리에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우리가 말을 안 했다고 뭐라고 하니 이거야말로..." 희네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말재주는 대단했다. 어렸을 때부터 말로 장난치는 것을 좋아했던 것이다. 특히 같은 단어를 여러 번 나오게 하는 방법에는 일가견이 있어서, 일단 희네가 말을 쏟아 내기 시작하니 여자의 말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빨랐다. 희네는 보통 때는 항상 좋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나름대로 오기가 있어서, 자신이 무시당할 경우에는 항상 격렬하게 반응하곤 했는데, 이번에도 그러했다. 그런데 희네가 떠들어도 여자는 전혀 말을 멈추지 않고 계속 자기 할말만 해댔다. 희네도지지 않고 여자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땀까지 흘리며 쏘아댔다. 나래는 둘의 이야기를 한꺼번에 들으니 정신이 없어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그런 와중에도 서로 질문하고 대답하고 있었다. 둘의 이야기는 이제 질문과 대답이 동시에 나오는 기이한 대화로 이어지고 있었다. "너희는 내가 누군지도 모른다면서 묻고 싶지도 않느나? 아마 너희는 선인을 찾고 있는 모양인데 잘못 골랐다. 잘못 골랐어. 잘못 골라도 이만저만 잘못 고른 게 아니라 아주 크게 헛짚었지..." 여자가 비아냥거리는 사이 희네는 이런 말을 쏟아냈다. "우리에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못한다 하니 우리가 말을 하는지 못하는지 보시구려. 우리는 선인을 찾고 있는 것은 맞소만(여기서여자는 '잘못골랐다'는 말을 했다.) 당신처럼 입으로만 도를 닦을 수 있는지는 믿기 어렵군요. 그러니...(이 부분에서 여자는 '헛짚었다'는 말을 했다.)우리가 헛짚었다는 말도 틀린 건 아니지만 그것도 재주는 재주이니 한번 놀아볼 때까지 놀아봅시다..." 이런 식으로 말이 진행되니 나래가 정신이 하나도 없는 지경이 된건 당연했다. 사실 희네조차도 말을듣고 대다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알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한참 말이 오가면서 나래가 겨우 알아들은 것은 그 여자의 이름이 '발귀리'라는 것 하나뿐이었으며, 희네도 그 여자가 어디에도 끼고 싶지 않아 반은 검고 반은 희며 뭐든지 중간으로 지내고자 한다는 것 정도를 알아낼 수 있었다. 희네는 그 여자의 기에 눌려서 간신히 말을 하는 정도였으므로 그저 억지로 트집을 잡은 것밖에는 한 말이 없었다. 다만 내용이 없는 말로 희네는 악착같이 말을 끊지 않고 이어나가기는 했다. 그러나 점점 정신이 혼란해지고 입이 둔해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에 비해 여자는 조금도 표정이나 안색을 바꾸지 않으면서 더더욱 거침없이 희네를 몰아붙였다. 마침내 희네는 입을 딱 다물고 그 자리에 털썩 앉아 고개를 숙였다. "졌소!" 여자는 씩 웃었지만 여전히 입은 쉬지 않았다. "그럼 졌지, 네가 이길줄 알았느냐? 너는 내심 당당하게 졌다고 해서 남자답다는 소리라도 듣고 싶은 모양인데, 미안하게도 그런 말을 해줄 생각은 없어. 다만 덜된 놈중에서 눈곱만큼, 아주 눈곱만큼, 덜된게 조금 덜한 덜된 녀석일 뿐이지. 그래도 존경하기는커녕 웬 수다쟁이 할망구의 말싸움에 놀아났다는 생각은 조금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조금만 더 했어도 내가 혼내주었을 것이다. 네가 부끄러워 그런 것이니 참아주마. 아무튼 부끄러워 말거나. 나하고 이야기해서 이만큼이나 악다구니를 쓰면서 버틴 놈도 몇 안된다. 너는 내가 만난 녀석들 중 말재주로는 아홉 번째 정도는 되겠구나. 겉으로는 순하지만 속으로는지지 않으려는 억센 마음인 것은 다섯 번째는 된다. 그 정도면 못난이들 중에 그중 낫긴 하다. 하지만 나한테 이길 생각은 아예 말거라. 나는 질 생각이 없단 말이다." 졌다는 희네의 말이 채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발귀리는 이렇게 많은 말을 쏟아냈다. 정말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말이 빨랐다. 나래의 귀에는 거의 '쉬-' 하는 소리로 들렸는데, 기이하게도 희네는 발귀리의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희네가 입을 다물자 마침내 발귀리도 입을 다물었다. 이상한 일이엇따. 둘사이에 한참 침묵이 흐른 뒤 희네는 눈을 굴리다가 의아해서 입을 열었다. "발귀리님, 어째서..." 순간 발귀리는 또다시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흥! 입으로만 도를 닦는 것은 당연히 안 되지만 도를 남에게 전하려면 입을 빌려야 하는 법이니, 입을 놀리고 못 놀리는 것은 중요하다 하징 낳을 수 없어. 더구나 입도 못 놀리고 자기가 무슨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말을 하고 듣는 것은 그야말로 장난에 불과한 것인데 자기가 그런 장난밖에 치지 못하면서 남까지도 장난꾸러기로 몰아붙인데다가 잘 이야기하다가 덜컥 말을 멈추니 이런 버르장머리없는 녀석은 내 수천 년 만에 처음 보는구나. 얼른 엎드려서 잘못했으니 죽여주십시오라고 해도 될까말까 한데 말이야...." 희네가 어안이 벙벙하여 무심코 다시 입을 다물자 발귀리도 또 입을 다물었다. 문득 희네는 이런 생각이 스쳤다. '혹시 이사람은 내가 말할동안만 말할 수 있는게 아닐까? 그래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인가?' "혹시 제가 말하는 동안만 말을 하실 수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오냐, 눈치 하나는 빠르구나. 나는 너무 많이 살고 너무 많은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나에게 누가 말하는 동안이 아니면 말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느니라. 그것이 섭리니라. 하지만 나는 사실 너희를 모두 어여삐 여기고 도와주려는 생각뿐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고 많은데 시간이 없으니 별수 있느냐? 나는 빨리 이야기하고 그것을 듣든 잊어보리고 못 듣든 그건 모두 너희 책임이니 알아들을 만큼 알아듣고, 들을수 있는 만큼 들으면 될것이니라. 나는 네가 무슨말을 할지도 알고, 무엇을 듣고 싶은지 다 아느리나." 지금 나래는 발귀리의 말은 말이 아니라 입을 조금 연채 숨을 내쉬는 것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 정도로 빨라진 것이다. 그러나 희네는 그녀의 말 가운데 반 정도는 알아들을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위의 내용이었다. 희네가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러하냐고 말을 꺼내자 발귀리는 또다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말을 만든 어머니니라. 이전에는 나와 다른 것이 서로 이야기를 하려면 도를 닦아야 했느니라. 도를 닦지않고는 자신을 알 수 없었고자신을 모르기에 남의 속도 몰랐기 때문이야. 나는 도를 이루어서 말을 생각하고, 그것이 퍼져나가 모든 것들이 쓰도록 도를 썼느니라. 그러나 말은 너무 모자란 것들에게는 몹시 어려웠고 그래서 모자란 사람들에게는 좋은 것만도 아니었느니라. 다른 것들을 알게 된 대신 말이 아닌 생각은 점점 하기 힘들어졌고 나중에는 생각도 말로 하고 꿈도 말로 꾸게 되어 말이 도를 앞서 가리게 되었느니라. 그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도에서 멀어지게 되었느니라. 말에도 도가 있었으나 쓰는이가 많아질수록 그 도는 엷어지고 얕아져서, 모든사람이 말을 하게되니 결국 말에 도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느니라. 과거에는 모든 것이 도였는데 이렇게 도와도 아닌 것으로 갈라졌느니라. 그리고 말로 인해 사람들은 서로 통하고 즐거워졌으되 말로 인해 사람들은 서로 맞서고 다투고 갈라지게 되었느니라. 세상 모든 것의 이치가 그러한 것을 어찌하겠느냐. 결국 사람을 위해 만들어준 말이 사람들을 이리 되게 하였으니, 실로 반은 좋은 일이고 반은 못된 일을 한 것이 되었느니라. 그리하여 나는 모든 이치가 그렇다 여기게 되어 청하지 않은 말은 해주지 않게 되었으며, 남이 묻는 동안만 말하리라 맹세하였느니라.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똑같이 하도록 하여 반은 검고 반은 희게 두었으며, 반은 착하고 반은 악하게 살도록 맹세하였느니라. 이 모든 것을 똑같이 하여 어느쪽으로도 기울지 않게 하기로 하였느니라." 희네가 입을 떼려는 그 짧은 순간 사이에 이렇게 많은 말이 쏟아져 들어오니 희네는 더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겨우 희네가 알아들은 것이 이 정도이며, 실제로는 이보다 세배는 많은, 알아듣기 힘든 말이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앞뒤가 맞게 연결하여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총명하기 짝이 없는 희네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희네는 발귀리의 말이 끊어진 것을 깨닫고 서둘러 다시 입술을 떼었다. "선인께옵서는 모든말의 어머니라고 하셨..." "그렇다. 내가 말의 어미다. 그리고 너희 모두의 어미일지도 모르느니. 나는 사람 가운데서 가장 먼저 깨우친 세 사람 가운데 하나이니라. 자부도 나의 자식의 자식의 멋 훗자식이고, 홍균도 나의자식의 자식의 먼 훗자식이니라. 자식들이 나고 죽고 나보다 먼저 나타나고 사라지는 속에서 나는 혼자 모든 것을 보며 혼자 떠들어댔느니라. 그들도 나의 자식이지만 나의 가장 큰 자식은 바로 말이니, 끝까지 남아주는 자식을 버리고 내가 무엇과 같이 살겠느냐? 나는 말과 같이 살고, 말과 같이 흐트러져 가느니. 말이 퍼지고 말이 쓰이는 곳에는 항상 내가 있으며, 말에서 도가 완전히 없어지면 나도 완전히 없어지는것이니라. 사람이 쓰는말이 더러워지면 내가 더러워지는 것이며 사람이 쓰는 말이 못돼지면 나도 못돼지는 것이다. 모든 것을 말에 걸었으니 새 세상이 이루어지는것도 말에서 비롯된 것이니라. 도로 이루어지고 도로 가득찬 세상은 나로 인하여 없어지고 변하고 있느니라. 두 개였던 세상이 여덟 개로 늘어나고(이것은 소설적인 설정으로, 당시는 세상이 단지 신계와 현재의 생-사계가 혼재된 두 개뿐이었다. 그러므로 죽음은 단순히 종말이었고, 영혼은 바로 세상을 떠돌다가 도로 기회를 얻어 탄생되는 식이었으며, 죽음과 삶도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 죽은자가 나돌아다니거나 상상할 수 없는 힘을 지닌 괴물들이 같이 세상에 존재하기도 하는 혼돈의 세상이었다. 치우천왕 시대에 선인들이나 도력을 쌓은 자들이 모여 더 창조적인 세상을 이루기 위해 이러한 세상의 요소를 나누거나 또는 새로운 우주를 건설하여 여덟 개의 세상으로 된다.)서로간에 말을 나눔과 같이 서로간에 돌고 돌게 된것도 따지자면 나로서 비롯된 일이니라. 모든 것이 나에서 비롯되었으되 나는 내가 만든자식이 말과 같이 될 것이니라. 말 자체가 도는 아닐지라도 내가 만든 자식을 밉다 해서 어찌 버리겠느냐..." 희네는 이번에는 사분의 일 정도 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그것이 바로 위의 내용이었다. 희네는 아무래도 지금 만난 발귀리 선인이 대단한 존재인 것 같아 등에서 땀이 솟아났다. 발귀리가 또다시 말을 멈추자 희네는 다시 억지로 말을 건넸다. "세상이 여덟 개로 늘어나다니요? 그건 대체..." "죽는 것은 끝이었으며 한 편이 기운 것이니라. 하나가 죽을때 그것은 그것으로 끝이므로 다른 세상이 필요치 않았으니, 허나 말로 다른 것의 죽음을 알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으니. 산 것에서 죽는 것과 죽지 않는 것이 나뉘게 되고, 그것을 알게 되니 죽지 않는 것을 다루는 세상이 그만큼 필요해졌느니. 너희가 사는 세상은 예전과 같다 여길지 모르나 그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이어졌으며, 하나는 모두와 통한다. 수없는 세상이 하나의 세상과 맞물리며, 그 세상이 돌고 돌아 전날의 것은 내일의 것이 되고, 내일의 것이 전날의 것이 된다. 그 세상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것은 도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도는 지금 이 세상을 거의 다 떠났으며, 이 세상은 도와는 떨어진 세상이 될 것이다. 젖먹이가 걸음마를 배우는 것처럼, 도에 이르는 길이 그만큼 멀어지고 그만큼 힘들어질 것이나 도에 이르러 얻는 것은 전보다 많아지리. 그리고 너. 사람 중에 너야말로 이 세상을 이루는 커다란 둥근 고리에 하나의 점을 더할 사람이니. 그렇게 때문에 내가 너와 만난 것이 합하여 세 번을 만날 것이리니." 희네는 이번에도 알아듣기가 무척 힘들어 제대로 연결하여 기억하지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끝에 발귀리가 특별히 강조한 말, '너야말로....'는 뇌리에 깊이 파고들었다. "제...제가 어떤 일을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희네가 다시 주춤거리며 말하자 발귀리는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숨쉬는 듯이 '쉬-'하는 소리도 아닌, 아예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희네의 귀에는 울렸다. 희네는 이미 극도로 긴장하여 숨조차 쉬지 않고 온몸의 기운을 모조리 귀에 쏟고 있어, 옆에 있던 나래가 잔뜩 겁에 질려 바라보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주는 여덟 개로...죽지 않는 것이 돌고 돌아서...전날의 일은 앞날의 일을 만들고, 앞날의 일은 전날의 일을...세상은 겹치고 겹쳐 돌아서 ...모든 것은 이 산 것의 세상에서 죽은 것의 세상의 고리에서 시작되고...거기서...모든 도는 그 우주를 만드는데... 아닌 것들만이 남아서 너와 맞서거나 너에게 들어갈 것이며..." 희네는 그만 정신적인 충격으로 휘청하여 그 자리에 쓰러질 뻔했다. 나래가 얼른 희네를 손으로 잡아 부축하자 발귀리 선인도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손으로 희네를 잡아 세웠다. 희네는 극심한 정신적 충격 때문에 기절하기 직전이었는데 발귀리의 손과 아우의 손이 와닿자 다시 정신이 들었다. 발귀리는 웃으며 아까보다는 훨씬 느린, 나래가 알아들을까말까 한 속도로 희네에게 말했다. "진실은 이런 것이니라. 듣기는 쉽지만 얻기는 어려운 법. 그래도 그만하면 잘했느니라. 충분할 것이다. 귀여운 녀석아. 내 수많은 자식중에 너만큼이나 알아듣는 녀석을 만나는 것은 이번에 네 번째이며, 만나본 녀석들 중 다섯 번째로 마음에 드는 녀석이구나. 그러나 그 때문에 너는 더 고생을 하리라. 내 마음에 드는 녀석이기에 많은 아픔이 있었을 것이며, 그보다 더 많은 아픔이 앞으로도 있을 것이리니. 그러나 아픔은 아픔일뿐,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아마도 이루어 지리라. 그 아픔들을 딛고 견뎌낸다면 말이다. 그리고 네가 할 일은 묻지 말거라. 아무것도 묻지말고 기대지도 말아라. 네가 할 일은 네가 해야만 하고, 네가 할 일은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느니. 다만 잘 생각할지니.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이루어진다만,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겉보기가 아닌 마음으로, 도의 눈으로, 네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 기쁨인지 슬픔인지 삶인지 죽음인지, 그것도 아니면 무엇인지를 말이다. 아아, 시간이 없구나. 너와 나는 만날 기회가 또 있지만 너는 나를 몰라볼 것이다. 애석하구나, 애석해." 불현듯 발귀리가 입을 닫고 희네를 마치 덥석 안아서 할머니처럼 등을 툭툭 다독거려주었다. 그러고는 나래도 알아들을 수 있는, 조용한 소리로 희네에게 당부하듯 말했다. "너의 앞에는 한 사람이 나타날 것이야. 모든 것을 뚫는 사람이. 나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은 누군가가. 그애를 믿거라. 알았니? 이 할미의 말이니 잘새겨듣거라." 그 말에 희네는 미소를 지으며 스르르 잠이 들 듯 정신을 잃었다. 발귀리의 품은 너무도 따듯하고 포근했다. 희네가 평화로운 표정으로 누워 있어서 나래는 전혀 염려가 되지 않았다. 발귀리는 나래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이번 발귀리의 말은 아주 느려서 보통 사람의 말투와 꼭 같았다. "너는 조만간 그 바보 흉내를 한 번 끝까지 한 다음에, 바보흉내를 그만둘 것이다. 그전에 실컷 해두거라. 이 녀석아, 너에게 제일 중요한 건 네 형이냐?" 나래가 무식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누구건, 너에게 제일 중요한 사람을 따르거라. 몇 사람이건." "제일 중요한 사람은 한 사람뿐입니다. 한 사람이 아니면 제일 중요한 사람이 아니죠" 그러자 발귀리가 씽긋 웃었다. "그 말이 맞다만, 그리고 나는 말의 어머니이지만, 말이 항상 옳은 것 은 아니란다." 그러더니 별안간 발귀리가 나래에게 버럭 소리를 쳤다. "달이 두 번 차고 기울 때 무언가가 찾아올 것이다.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거나. 잊어버리면 안된다.!" 뭔가 대꾸를 하려는 순간, 나래는 문득 자신이 형의 몸을 안다든채 벌판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너무도 갑작스레 주변이 바뀌자 나래는 잠시 휘청하며 균형을 잃을 뻔했다. 형을 안고 있는 터라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들의 말인 구름과 높은뫼가 보였다. 자신은 분명 아까 산을 올르려 했던 곳으로 도로 내려와 있었다. 놀라운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까 두 형제가 올랐던 산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땅에는 대나무 가지들과 덩굴 부스러기들이 생생히 남아 있었는데 그 커다랗던 산은 온데간데없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이 꿈 같은 현실에 나래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움직임에 희네가 눈을 떴고, 역시 똑같이 놀랐다. 오로지 넓디넓은 평원의 땅바닥에 아까 나래가 박고 올라갔던 대나무 기둥 백사십 개 만이 여기저기 옹기종기 모여 박혀 있었다. 형제는 놀라 꿈인지 생시인지 서로 뺨을 꼬집어 보기까지 했으나 정말 산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형제는 그 충격에 헤어나오지 못해 앉은채 밤을새우고는 동이 터서야 주춤거리며 일어섰다. 희네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이번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자. 아니, 말해도 믿을 사람도 없겠지만." 얼떨떨한 느낌이 채 가시지 않은 나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래는 몸을 움직여 자신이 꽂았던 대나무들을 하나하나 뽑았다. 희네는 그 일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성실한 나래는 그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뽑은 대나무를 한 곳에 쌓아놓고 다시 길을 떠났다. 조금 그곳을 벗어난 후 뒤를 돌아보니 그 평평하던 평야가 난데없이 대나무 숲으로 변해 있었다. 그 땅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 것 같았다. 형제는 또다시 크게 놀라 잠시 그 기이한 대나무 숲을 바라보다가 말을 몰아 달렸다. 그 대나무 숲에 이는 바람소리가 마치 발귀리선인의 맑은 목소리인 양 평원에 메아리치며 웃는 듯했다. 형제는 자신들이 귀신에 홀린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한웅의 행차로 합류해갔다. 후일의 일이지만 더더욱 놀랄 일이 있었다. 후에 희네가 툰툰을 다시 만나 그 산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툰툰은 이상하다는 듯이 그곳은 원래 대나무 밭이었으며 산 같은 것은 없었다고 정색을 하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근방 미아우족 전부가 그러했다. 툰툰은 희네 나래가 자신들을 도와 지나족 도둑을 물리치고, 거기서 밤을 새고 갔던 일은 아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희네 나래를 제외하고 선인이나, 선인이 사는 곳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은 마아우족 부락 전체에서 아무도 없었다. 사람을의 모든 기억마저도 산과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제야 희네와 나래는 자신들이 정말로 비교할 자가 없는 대선인을 만났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게 되었고, 그때의 일은 평생 그 누구에게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공손헌원 한편, 사와라 한웅의 행렬은 천천히 남으로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전날 젊은 사울아비들이 길가에 있는 도둑들을 처치하였으나 당분간 불미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날이 되어도 희네와 나래가 돌아오지 않자 치우우레는 약간 걱정된 얼굴이었다. 치우우레의 동생 치우벌은 그런 사촌형에게 둘이 다 똑똑하니 염려 말라고 위로해주었는데도 근심스런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행진하던 중, 이십 리 정도 앞서 길을 살피러 나갔던 사울아비가 급히 말을 달려 되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정찰병의 보고인지라 치우우레는 직접 치우벌과, 부관 격이자 참모라 할 수 있는 부소다솔과 함께 그 보고를 들었다. "저편에 한 백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냐?" "지나족들입니다. 싸우려는 것이 아니고, 한웅을 맞으러 나온 사람들 같습니다." "맞으러 왔군. 당연히 그럴 때가 되었지." 부소다솔이 턱에만 매끈하게 자란 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부소다솔은 부소(옛부터 내려오는 주신가문의 이름.부싯돌(부소돌)의 원류가 된 것처럼 그 시조인 부소씨는 불을 다스려서 사람들에게 불의 기능과 힘을 알려준 프로메테우스와 흡사했던 사람이라 전해진다. 그 부소씨로부터 내려온 집안사람들을 일컫는 성씨이다.)집안 출신이었고, 싸움을 잘해서라기보다는 부소집안의 대표로 사울아비가 된 사람이었다. 부소집안은 원래 불을 밭아보았는데 부소씨의 먼 할아버지는 돌을 쳐서 불을 일으키는 것을 알아낸 사람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주신에서 가장 유명한 세 집안, 즉 고시(옛부터 내려오는 주신 가문의 이름. 농부들이 식사 전 밥한 술을 떠서 버리며 '고시레=고시에, 즉 고시에게 감사한다.'는 풍습을 낳게 한 것처럼, 농경을 알게 해준 최초의 고시씨부터 내려온 집안사람들을 일컫는 성씨이다.) 신지(옛부터 내려오는 주신 가문의 이름. 신지씨는 안파견 한, 또는 그 이후 어느 때인가 글씨를 창안하여 만든 인물인 신지혁덕에서부터 내려오는 성씨라 전해진다.) 치우(옛부터 내려오는 주신 가문의 이름. 치우씨는 바람을 맡았다고 전해지므로 아마도 풍백의 원류일 것으로 추정되며, 무기를 다루고 군사를 이끄는 일종의 무신 역할을 했던 가문의 성씨였을것 으로 추정된다.)집안만큼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부소도 유명한 집안이었다. "머나먼 지나족의 땅에 한웅께서 몸소 오셨는데 나와 맞아야 하고말고" 치우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치우우레가 정찰 나갔던 사울아비에게 물었다. "이끄는 자가 누구였느냐?" 정찰병 사울아비가 대답했다. "공손헌원이라는 자였습니다." 그 이름을 듣자 부소다솔이 반색을 했다. "오! 헌원이로군." 치우우레가 부소다솔을 돌아보았다. "아는 사람이오?" "그렇소 공손헌원은 십오 년인가...전에 신시에 와 있던 사람이오. 유망하고 같이와서 자부선생에게 배웠던 일도 있고..." 치우우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자부선생에게 배우러 왔었나?" 자부선생은 신시에서 제일가는 스승을 일컫는 말이었다. 아주 오래전 안파견 한님 때에 자부선인이라는 큰 선인이 안파견 한님에게서 오셔서 주신을 세우기 위한 여러 가지를 가르쳐주었는데 후에 안파견 한님은 그것을 감사히 여겨 자부선인을 모든 사람의 스승으로 영원히 받들 것이라고 맹세했다. 이후 주신에서 가장 뛰어난 스승을'자부선생'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자부선인은 안파견 한님 시절의 전설로만 전해지는 이름이었으나, 자부선생은 신시가 세워진 이후로 항상 있었다. 가장 문물이 앞선 주신이고 그중에서도 도읍이 신시이니만큼, 주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부족의 젊은이들이 배우러 오게 되었다. 주신과 동맹관계에 있는 부족들이 이후 지도자가 될 만한 똑똑한 젊은이를 보내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공손헌원도 그중 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부소다솔이 수염을 연신 쓰다듬으며 웃으며 이야기했다. 다른 사람처럼 텁석부리가 아니라 한 줄기로 길게 난 수염을 쓰다듬는 것은 그의 버릇이었다. "헌원은 아주 똑똑한 젊은이였네. 아주 생각이 깊고 말수가 적고, 어떤 일에도 얼굴이 변하지 않는 젊은이였지. 자부선생도 헌원은 하나를 가르쳐주면 둘을 안다고 했었네. 어이쿠, 십오 년이나 지났으니 이제는 어른이겠지만." 그 말에 치우우레는 조금 심사가 뒤틀렸다. 왜냐하면 희네의 일 때문이었다. 나래는 몸집이 크고 힘이 장사여서 싸움을 잘했지만 희네는 나래처럼 몸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잘 배워보라고 나름대로는 일껏 신경 써서 희네를 자부선생에게 보냈는데, 희네는 사흘 만에 도로 돌아왔던 것이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치우우레는 아마 희네가 자부선생에게 쫓겨난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부끄러워도 하고, 화도 나 있었다. 그런데 자부선생에게 배웠다는 헌원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 심사가 꼬인 것이다. 다른 일에는 한없이 대범한 치우우레였지만 자식 일에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똑똑하면 뭐 해? 제가 잘나야 뭐 하겠어. 지나족 촌놈인걸." 치우우레가 비아냥거리자 부소다솔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주 대단한 젊은이라고 생각하네. 들어보게나. 알다시피 큰 부족의 젊은이들이 배우러 오면 한웅님께서 대개 선물을 내리시지 않는가? 고시 집안 사람을 시켜서 말야." "그렇지." "그런데 지나족도 큰 부족이니, 유망과 헌원 둘이 신시에 왔을때 한웅님이 고시울률님을 시켜서 구리칼과 구리거울을 내리셨다네. 아주 좋은 물건이었어. 지나족에게 구리 물건을 주신다는건 대단한 일이지." 고시울률의 이야기가 나오자 치우우레는 조금 눈살을 찌푸렸다. 고시울률은 고시 집안의 대표 격 인물이며, 치우우레의 장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시울률과 치우우레의 사이는 극히 좋지 않았다. 고시울률이 딸 미리내가 치우 집안과 맺어지는 것을 싫어했는데도 미리내가 고집을 부려 치우우레에게 시집을 가자, 화를 내며 부녀관계를 끊어버리고 미리내의 고시성을 빼앗아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미리내는 쌍둥이 다을이 사울아비가 되어 다 클 때까지도 집안의 천한 아낙네들처럼 그냥 '미리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장인 사위관계라고는 하나 치우우레와 사이가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 미리내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 배후에는.... 허나 치우우레는 마음이 아파 더 생각하지 않고 그냥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렇구먼. 그런데?" "유망이 구리칼을 받아들자 고시울률이 마음에 드느냐고 물으니까 이러더래. '이런 칼을 많이 주신다면 주신 대신 싸워 주신의 적들을 모조리 물리치겠습니다.'라고 그래, 고시우률님이 그저 웃으시며 헌원에게도 묻자 헌원이 이러더라는 거야. '이 구리거울도 좋습니다만 구리거울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시면 이후로 지나족이 만든 모든 구리거울의 반을 주신에 바치겠습니다.' 라고 말야." "허허, 하지만 구리 물건 만드는 법은 비밀 아닌가?" "물론 그야 그렇지. 지나족에게 구리칼을 많이 주거나 구리물건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안 될 말이지. 그러나 헌원이 생각하는게 더 크지 않은가 말야. 유망은 지금 자기가 염제신농이라고 하면서 우쭐대고 있지만, 아마 사람됨은 헌원만 못할거야. 헌원은 사람됨도 진솔하고, 그 대답으로 봐도 주신을 더 생각하는 착한 녀석 아니냐, 이 말이야." 부소다솔이 마치 헌원이 자기 아들이라도 되는 양 칭찬하자 치우우레는 괜히 심사가 꼬였다. "그게 뭐가 주신을 더 생각하는 건가?" "생각해보게. 유망 녀석은 칼을 달라고 하잖았는가? 그 녀석, 지나족은 수가 많으니 칼을 많이 가지면 주신이라도 쳐들어 오려고 할녀석이란 거야. 그러나 헌원은 그냥 거울만드는 법을 생각하고 있잖아? 더구나 지나족이 만든 물건의 반을 주신에게 바치겠다고 말하니, 주신 생각을 아주많이 하는 녀석 아니냐, 이 말이야." 그러나 치우우레는 그 말을 들을수록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부소다솔의 말은 그럴듯했고, 그것을 말로 이길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평생을 싸움터에서 앞장서서 도끼를 휘드르며 살아온 치우우레에게는 뭔가 예감 같은 것이 있었다. 지금의 기분이 그 예감 때문인지, 아니면 자식 때문에 기분이 언짢아서인지는 잘 구별할 수 없었지만, 헌원이라는 존재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르는 거야. 모르는거..." 치우우레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말을 조금 빨리 몰아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정찰병이 앞장섰고 치우벌과 부소다솔도 드 뒤를 따랐다. 한웅의 행렬과 조금 떨어질 때쯤 부하들 수십 명이 대영ㄹ에서 빠져나와 그 뒤를 따르는 모습을 보고 치우우레는 조금 더 말을 달려 속력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지나, 화산족의 공손헌원입니다." 헌원은 몹시 정중하게 말하며 허리를 굽혀 보였다. 그가 허리를 굽히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고 다시 펴는데에는 더 오래 걸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움직임에는 흐트러짐이 전혀 없었다. 헌원은 약간 통통한 몸에 뺨이 약간 늘어져 후덕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세 갈래의 수염을 옅게 기르고 있었고, 눈이 조금 가늘었지만 마음씨가 좋아 보였다. 동작은 아주 느릿느릿했지만 우아했고, 나이는 자세히 보면 사십을 좀 넘은 듯했으나 나이에 비해 피부가 희고, 느리면서도 활기차 보였다. 그를 따르는 백여 명 중 아흔 명 정도는 평범한 전사들이었고, 열 명 정도는 옷차림부터 용모, 크기나 나이에 이르기까지 아주 특이한 사람들 같아 보였다. 전사들은 모두 창을 들고 있었는데 창은 번들거리는 곱돌(옥)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지나족은 아직 구리무기를 만들줄 몰랐다. 치우우레가 말에서 내려 화답했다. 아무리 한웅님을 모신다 해도 치우우레는 일개 사울아비 스승일 뿐이니, 말에서 내리는 것이 예의에 맞았다. "주신의 사울아비 스승 치우우레요." 치우우레가 인사를 하자 헌원이 말했다. "화산족의 공손헌원이 말씀드립니다. 염제 신농께서는 태산에서 한웅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부족하나마 제가 한웅님을 모시고 길을 안내하기 위해 왔으니 무엇이든지 명을 내려주십시오." "주신의 사울아비 스승 치우우레가 말하오. 고맙소. 염제 신농에게도 고맙다고 전해주시오. 당신은 한웅님을 뵙기를 바라오?" "화산족의 공손헌원이 말씀드립니다.감히 한웅님을 뵈올 수 있습니까? 그저 길 안내나 할 따름입니다. 길을 지체하지 마시고 제 뒤를 따르소서. 태산까지는 아직 멉니다." 공손헌원이 영원히 걸릴 것 같은 느린 동작으로 고개를 숙인후 앞장섰다. 공손헌원은 가마에 타고 있었고 지나족들은 말을 탄 자들이 하나도 없고 모두 걷고 있었다. 치우우레는 치우벌에게 공손헌원과 함께 앞장서라고 말한 다음 따라온 부하 사울아비 중 반을 치우벌에게 붙여두고, 부소다솔과 함께 나머지 반을 이끌고 다시 말을 돌려 한웅의 행렬로 향했다. 행렬로 되돌아가면서 치우우레와 부소다솔은 잠시 헌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부소다솔이 입을 열었다. "헌원 말인데, 살이 좀 쪘구려. 하지만 아주 보기 좋던데? 전사 같지는 않지만 아주 높은 사람처럼 보이더군." "좋은 사람 같더군." "같더군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네. 항상 사람들에게도 먼저 인사하고 또..." 치우우레가 웅얼거리듯 말을 막았다. "좋은 사람이 딴 맘을 먹으면 더 무서운 법이라고 안 그러길 바라야지." 두 사람은 속력을 내어 말을 몰았다. 치우우레가 돌아오니,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치우우레가 한웅의 행차에 막 도달할 때쯤, 희네와 나래가 무사히 돌아와서 합류했던 것이다. 치우우레는 그 소리를 듣고 말을 달려 행렬의 뒷부분으로 향했다. 한웅의 행차는 조금도 늦어져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행렬의 뒷부분에는 항상 먹을것과 간단히 얼굴을 씻을 물을 실은 소와 나귀 등이 뒤따랐다. 희네와 나래도 막 도착했기 때문에 거기 있다는 것이다. 대열의 끝에 그런 것이 있는 이유는 이동하면서 누구라도 허기지거나 지치고 조금 피로를 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계속 움직이면서 먹고, 씻고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걸어가며 먹고 씻어야 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수레가 있었다면 번갈아 앉아서 쉬기도 했을 테지만 아직 수레는 없었다. 바퀴가 발명되어 일부 사용되었지만 먼길을 가자면 나무로 만든 바퀴 축이 닳아 없어지기 때문에 수레가 많이 사용되지 않았고, 길이 포장되지도 않았으니 수레는 제대로 만들수도, 쓸 수도 없었다. "이 녀석들!" 치우우레는 희네와 나래를 발견하자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짐짓 호통을 쳤다. 희네는 한참 토기의 물을 따라서 얼굴을 축이고 있었고 나래는 먼지투성이인 채로 구워서 말린 고기를 뜯고 있었다. 치우우레의 호통소리에 희네에게 물을 따라주던 계집아이가 깜짝놀라 물을 흘렸으나 희네는 태연히 얼굴과 손의 물을 털어내고 웃으며 치우우레 앞으로 왔다. 나래도 고기를 잔뜩 문 입을 우물거리며치우우레 앞으로 달려왔다. "아버지!" "이 녀석들 어딜 쏘다니다가 이제 오느냐? 아비를 놀려먹고 말야. 혼 좀 나봐라." 치우우레는 말채찍을 들어 보였으나 얼굴은 웃고 있었다. 희네가 웃으며 피하는 시늉을 해보이다가 말했다. "잘한 것도 있는데 야단만 치십니까?" "요녀석들! 사울아비면 당연히 해야 하는일이지, 뭐 잘한 게 있어? 더 혼나야겠다.!" 그러다가 나래가 입에 고기를 문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만 크게 뜨고 중간에 서있는 것을 보고는 희네와 치우우레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됐다, 됐어. 지금은 길을 가는 중이니 나중에 따지자. 아무튼 하던대로 씻고, 먹어라." 나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고기를 입에 넣었다. 그 와중에도 한웅의 행차는 전혀 멈추지 않았으니 분주하게 걸어가야 했다. 치우우레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말을 걸려 그 옆을 따라갔다. 그러 치우우레에게 희네가 물었다. "무슨 일 있었냐고 묻지 않으시나요?" "별일 없으니 무사히 왔겠지. 안 그러냐?" 그 말에 희네가 싱긋 웃자 치우우레가 말했다. "이번 한웅님 행차에서 돌아가면 성인식을 해야 할 것 같구나." "벌써요?" "벌써라니! 이미 늦었다! 이번 태산 회의만 아니었어도 벌써 성인식을 치렀을 거다. 그러니 딴 말 말아라. 성인식을 해야 성도 쓸 수 있고, 어른 이름도 갖게되고, 장가도 갈 수 있게 되 않느냐?" "장...가는 좀..." "군소리 말아! 나도 손자를 안아보고 싶단 말이다! 좌우간 더 도망갈 생각 마라." "도망가는 게 아니라..." "네 이 녀석, 여자가 그리 무섭느냐? 마을 처녀들이 모두 너 좋다고 하는데 너는 왜 그러느 게냐?" "몸이 부실한 게냐?" 그 말에 희네는 몸을 움찍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치우우레는 막 나오는 대로 한 말이라 희네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네 녀석이 여기 따라오겠다고 기를 쓴 것도 내 다 알아! 장가가기 부끄러워 그런 거지?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안 된다. 이번에 돌아가면, 무슨 일이 있어도 성인식을 치르도록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집에서 쫓겨날 줄 알아! 알았냐?" 갑자기 치우우레는 기분이 상한 듯 말을 몰고 앞으로 달려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보는 희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래가 다가왔다. "형님, 어쩌지?" "그러게 말이다. 내가 장가가기 싫어 이러는 줄로만 아시니...허헛." 희네는 힘없이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래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형님, 그러지 말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그래봤자 도움될 것 없다. 아버지 마음만 더 상할 뿐이야. 내가 못된 자식이 되는 편이 낫지, 아버지 마음 쓰리게는 못한다." 희네는 딱 잘라 말했다. 사실 희네와 나래가 걱정하는 것은 희네의 다리였다. 희네의 다리는 점점 아파 오고 있어서, 전에는 억지로라도 말을 달리고 싸움 연습하는 흉내라도 낼 수 있었으나 이제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다리가 계속 아프다는 것이 발각될 우려가 있어, 그것을 숨기려고 희네는 그리 말을 달리지 않고 몇 달 동안 천천히 움직일 한웅님 행차에 따라나서겠다고 한 것이다. 치우우레를 졸라 간신히 허락을 얻어냈으나 이제 치우우레의 말이 떨어졌으니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 다리로 성인식을 어떻게 한담? 아버지께 말씀드리자구. 내가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나래가 다시 조르자 희네는 매섭게 잘랐다. "안 된다니까!" 나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주신의 성인식, 특히 사울아비의 성인식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 사울아비가 될 수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하는, 혹독하고도 힘든 시험을 치르는 의식이다. 지금 말달리고 싸움연습조차 힘겨워하는 희네가 그런 성인식을 무사히 넘길 리가 없다. 나래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방법이 없다고 여겼다. "그래도..." "만에 하나 성인식을 참아 넘긴다 치자. 그러면 아버지는 당장 장가들라고 하실 건데. 생각해보렴. 마누라를 얻으면 세상 다른 사람은 다 속인다 해도 마누라를 어찌 속이겠니? 그러면...그러면..." 희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래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가슴을 쳤다. "그러면 어쩔거야! 형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 아, 정말 답답하구나! 정말 답답해!" 희네는 냉정을 찾으며 애쓰며 말했다. "아직 길은 있다." "뭔데?" "이번 길에서 병을 고치거나,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 "신시의 솟대 단군도 못한 일을 누가 한다는 거야?" "나래야, 이번 행차에 내가 그냥 말타기를 피하려고 따라나선 건 아니다. 이번에 한웅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는 너도 알지?" "태산으로 가시는거지. 부족들하고 회의하시러." "그래. 그러면 그곳에는 수많은 부족들이 모두 모인다. 그리고...특히 누가 오지? 반드시 와야 하는 사람 말야." 그제야 깨달은 듯 나래가 '짝' 손뼉을 쳤다. "지나족의 염제 신농이 오겠지!" "그래. 염제 신농 유망도 온다. 이번 회의는 한웅님께서 지나족과 담판을 지으시는 자리니깐, 염제 신농 유망은 반드시 와 염제 신농은 아주 옛날 신농씨 때부터 약초와 의술에 으뜸이다. 염제 신농을 만나면 아홉구비를 대신할 약초를 알 수도 있을거야. 그러면 모든게 풀린다." "염제 신농을 만나는 건 쉽지 않을 건데...?" "물론 나도 그게 걱정이야. 특히 회의가 끝나면 거의 만날 수 없을거다 만나려면 회의 전에 만나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없어." "근데 회의전에 만나야 하는건 또 왜?" "가보면 너도 알거야. 너도 머리가 잘 돌아가면서 왜 나에게 묻기만 하니? 너도 생각해서 스스로 깨우쳐라." 희네가 따끔하게 이르자 나래는 몇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희네의 눈을 보며 물었다. "염제 신농을 만나도...세상에 아홉구비보다 나은 약초가 있을까? 만약 염제 신농도 모른다면?" "그렇다면..." 희네가 말꼬리를 흐렸다. "형님, 형님은 항상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생각하고 대비하잖아. 이번에는 그런 생각도 없는 거야?" 그러자 희네는 결심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원래 말 안 하려 했지만, 말해줄게. 염제 신농도 모른다면 그땐 카린산(곤륜, 히말라야)의 쑤앙마이(서왕모)를 만나러 간다. 염제 신농이 모른다 해도 쑤앙마이는 알 거다." "카...카린? 형님, 거기가 얼마나 먼데..." "방법이 있다. 이번 태산 회의 때 카린에서 쑤앙마이가 오지 않아도 누군가는 올 거다. 그들을 따라가면 된다." "하...하지만 카린에 갔다오려면 몇 달..., 아니 일 년은 걸릴건데..." 나래가 질린 듯한 표정을 짓자 희네는 짧게 말했다. "그것도 생각해 두었다." "무...무슨...?" 갑자기 희네가 눈을 번득이며 아주 나지막한 소리로 나래에게 속삭였다. "만약 그렇다면...주신을 떠난다! 그때가 되면 내가 어떻게 할건지 말해줄게." "뭐라구?" 나래는 깜짝 놀랐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나래였지만 이때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물론 돌아오지 않는다는건 아니다.하지만...그것밖에 방법이 없어. 그래야 아버지도 무사하실지 모른다." "자...잠깐. 갑자기 아버지 말은 왜 하는 거야?" 희네는 나래 말은 듣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이건 아무도 모른다. 물론 나도 장담은 못해. 하지만...내가 이 모양 그대로면 아버지도 위험하시다. 너도 그렇고...그렇구나 떠나는 것이 방법일지도..." "무슨 소리인지 나는 전혀 모르겠어! 도대체 무슨 말이야?" 희네는 더욱 빠르게 중얼거렸다. "나도 지금에야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 맞아 그렇다면...할 수 없다....그렇게 해야지..." 희네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희네의 눈은 알수 없는 먼 곳, 하늘 저 너머의, 나래에겐 보이지 않는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나래는너무도 놀라고 궁금했지만 참고 입을 다물었다. 저렇듯 자신은 알 수 없는 먼 곳을 볼 때의 희네는, 누가 귀에 대고 소리를 질러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었기에. 희네는 끝내 나래에게 그 이상의 말은 해주지 않았다. 나래도 그 이상은 물어볼 수 없었다. 계속 길을 가고 날이 저물어 천막을 치고 양역 등과 합류하자마자, 양역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를 두 형제가 들었기 때문이다. "공손헌원이라는 사람이 왔다네. 염제 신농이 보낸 사람이라는데 앞장서서 길을 열리고 있어." 다른 말은 필요없고 들리지도 않았다. 염제 신농이 보낸 사람이라면 미리 만나두어야 했다. 희네는 나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속삭였다. "서둘러야겠어. 사실 태산에 가서 염제 신농을 만나기는 무척 어려울 것 같았거든. 그런데 이건 안파견 한님이 도우시는 거다. 미리 헌원이라는 사람과 알아놓으면,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염제 신농인 유망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같이 가자." 희네와 나래의 천막은 한웅님의 큰 천막 부근이었고, 헌원이 있는 지나족들의 천막은 한참 남쪽에 있었다. 이미 어두워져 모두저녁을 준비할 시간이었으니 만나기에도 좋았다. 당시는 해가 져서 완전히 깜깜해진 후에야 저녁을 준비해서 먹고 곧바로 잠을 자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해가 뜨기 전에 아침을 먹고 해가 밝자마자 움직였다. 그밖에는 되는대로 먹고 쉬기도 했지만, 대개 두 끼만 먹었다. 불을 밝힐 수단이 없으니 밝을 때는 힘껏 일을 하고 완전히 어두워진 후에나 쉬는 것이다. 일단 헌원에게 줄 선물로 희네는 툰툰에게 얻은 신수의 알을 쓸까 생각해보았으나 아직 좀 이르다 싶었다. 희네는 선물로 자신의 구리몽둥이와 잘 만든 뿔활을 꺼내 들었다. 지나족이 가장 좋하하는 것이 구리무기이며, 주신의 뿔활도 대단히 유명했다. 지나족이나 다른 부족은 아직 나무로밖에 활을 만들줄 몰랐는데, 뿔로 만든 활은 작지만 강하고 화살이 멀리 나가서 대단히 귀한 선물이 될 수 있었다. 희네와 나래는 준비를 마치고 지나족의 천막 쪽으로 불빛을 따라 조금 걸어가다가 나래가 희네를 들쳐 안았다. 가급적 희네의 다리를 피곤하게 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주위에 보는 사람만 없으면 항상 하던 일이라 희네는 부담없이 나래에게 안겼다. 나래가 하도 덩치가 커서 마치 애를 안은 듯했다. 나래가 희네에게 물었다. "그런데 말야, 염제 신농을 왜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만나야 하는거지? 난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겟어." 희네는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나래에게 말했다. "나래야, 네 머리도 나와 못지 않아. 그런데 너는 너무 나에게만 의지하고 물어보려고 해. 너도 좀 생각하면 알 수 있을텐데...!" "형님이 나보다 훨씬 머리가 잘 돌아가잖아. 주신 전체에서 형님만큼 생각이 깊은 사람은 없을 거야." 또다시 희네가 한숨을 쉬었다. "말도 안돼. 아무튼 말해줄게. 잘 들어둬. 이번에 한웅님께서 큰 부족회의를 여신 건 무슨 이유지?" "자꾸 나한테 물어보지 말구 그냥 다 이야기해주면 편하잖아." 나래가 항의하자 희네는 눈을 흘겼다. "떠 넣어줘야만 받아먹니? 대답해봐." "그건...지나족들이 자꾸 미아우족들을 건드리고 못살게 구니까 그렇지. 그걸 화해시키려고 하는거구." "물론 맞다. 하지만 그건 겉에 드러난 것 뿐이야." "왜?" "물론 지나족은 미아우족을 싫어하고, 미아우도 지나를 싫어한다. 하지만 지나족과 미아우족과의 싸움이 이렇게 많은 것은 왜일까?" "잘 모르겠어." "또 그런다. 나래야, 키탄족과 몽골족도, 훈족과 마갸르족도 사이가 나쁘다. 하지만 지나족과 미아우족만큼 자주 싸우지는 않아. 너는 몽골족이 초원을 떠나 산을 넘어서 키탄족의 남쪽 마을을 습격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니?" "몽골족이 미쳤다고 그 먼길을 오겠어? 약탈해도 돌아갈 수도 없을 건데." "그런데 지나족은 미아우족을 그렇게 습격하고 있어. 너도 전날 보았겠지만 툰툰의 미아우 마을을 습격한 것도 지나족들이었지?" "응" "그들은 남쪽 말씨를 쓰고 있었어. 그들은 아주 남쪽에서 올라온 지나족들이야." "그놈들이 왜 그 먼길을 올라온 거지?" "그것도 이상하지? 더구나 그 지나족들은 자신들이 도둑들이 아니라 전사들이라고 했어." "그게 어쨌단 거야?" "도둑들이 아니라면, 그 전사들은 아주 먼길을 걸어와서 미아우 마을을 습격한 게 돼. 그렇다면 그건 염제 신농이 시킨 거야. 안 그러면 그리 먼 길을 올 까닭이 없잖아." "그건 그래." "그렇다면 염제 신농은 지금 미아우족 전체를 치려는 것이 분명해. 지나족의 어느부족이 미아우 어느 부족과 싸우는 게 아니라는 뜻이야." "지나족 전부가 똘똘 뭉쳤다는 거야?" "그런 셈이지. 그것도 싸움을 하기 위해. 지나족은 구리무기를 만들 줄 모르지만 수가 무척 많아. 어느 부족보다도 많고, 몽골이나 마갸르나 키탄이나 훈이나 미아우나 하다못해 주신 전체를 다 합쳐도 지나족보다는 적다고 들었어." "에이....설마!" "안 믿는 사람이 많아. 하지만 나는 그럴수 있다고 생각해. 지나족은 말을 타지 않고 농사만 지어. 너 고시 할아버니제 마을이 얼마나 금방 사람수가 불어났는지 알지?" "으음..." "먹을 게 많으면 사람은 불어나. 그것도 금방 불어나. 태어나서 크는 아이들도 많아지지만, 무엇보다도 먹을 것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때문이야. 너 칭과 쑨 봤지?" "칭? 쑨? 아, 우리 집에 있는 지나족 종 말야?" "그래. 그 사람들이 다른 종들과 뭔가 다른 거 모르겠어?" "뭐...똑같이 착하기만 하던데..." "그거 말구! 저번에 우리가 아버지 무기를 바꾸려고 신시에 칭과 쑨을 데리고 갔을 때 말야." "뭐 별다른 거 없던데. 많이 놀라고..." "뭘보고 놀랬지?" "음... 잘 기억이...음 그래. 물건이 아주 좋고 신기하다고 놀랬어." "그게 문제야. 칭과쑨은 지나족 시골출신이랬어. 근데도 신시에 가서는 물건이 좋은 것만 보고 놀랐어. 근데 눙카는 어땠는지 알아?" "몽골 사람 눙카 말야? 오이랏트 부족 출신이라던?" "그래 그 눙카는 처음 신시에 갔을 때 신시 문이 열리자마자 입까지 딱 벌리면서 나에게 말했어.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건 처음 본다'고..." 나래도 어렴풋이 뭔가가 잡힐 것 같았다. 희네가 더욱 자세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몽골족은 원래 그리 많이 모여 살지 않지만, 눙카는 그래도 오리랏트의 큰 부족 출신이야. 근데 신시의 사람수를 보고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어. 그렇다면 지나족의 시골마을이라 해도, 이미 신시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이야기야! 지나족이 그 정도로 많다는 거라구!" 그제야 나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미아우족이 지겠네. 사람 수를 어떻게 당해내?" 희네가 씁쓸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미아우족만의 문제일까? 지금 사와라 한웅님은 주변부족들의 일은 스스로 해결하라고 항상 말해오셨는데, 왜 굳이 직접 태산까지 가시는 걸까? 염제 신농을 부르지 않고? 왜 다른 많은 부족들까지 소집하신 걸까?" "그럼 또 뭐야? 그러고 보니 그렇네. 염제 신농을 왜 안 부르셨지?" "간단해. 불러도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야." 울컥 화가 치밀어 나래가 부르짖었다. "감히!" "물론 무엄하지. 염제 신농의 시조는 주신에서 보낸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있어. 바로 신농씨고, 그들에게 농사짓는 법이며 약초찾는법을 알려준 분이지. 그런데 지나족은 이제 와서 한웅께서 불러도 오지 않아. 그리고 미아우족을 자꾸 쳐들어가지. 미아우족을 치고 나면 이제 주신과 지나 사이에는 아무 부족이 없어. 서쪽에 키탄족이 있을뿐이야. 여기까지 말하면, 염제 신농의 속셈이 뭔지는 너도 알 건데?" "그러면....뭘 바라는 거야? 염제 신농이 주신을 친다고?" 나래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묻자 희네는 웃으며 말했다. "주신으로 쳐들어올 생각은 물론 아니겠지. 염제 신농이 미치지 않고서는. 그러나 그들은....나라를 세우려고 하는거야." "나라를?" "그래. 지나족의 나라를 세우려는 거야. 주신처럼 말야. 부족이 아니라 나라가 되려고 하는 거지."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뭐 나라를 세운다면 세워도 되지. 아마 그들은 그렇게 해서 주신들과 더 교류를 하고, 자신들의 물건들을 더 좋게 만들고, 다른 많은 것 들을 배우려고 하는걸 거야." "그렇다면 내버려두면 되잖아."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행동에 달렸어. 지나족은 미아우족과 사이가 나빠. 또 키탄족들과도 사이가 나빠. 몽골이나 마갸르나 훈족이나 모조리 그들은 야만스럽다고 하고, 못된 놈들이라고 해. 지나족이 나라를 세우는 것은 자기들 맘이지만, 그 지나족의 나라는 주변의 모든 부족을 적으로 삼을 것 같다는 거야." "주신한텐 그러지 않잖아." "그거야 주신이 강하니까 그렇지. 아직은 이길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주신보다 강해진다고 생각하면 지나족들은 분명 주신도 흉보고 멸시하고 쳐들어오려고 할 거야." "도대체 왜 그러지?" "나도 몰라. 그래서 한웅님께서는 고민이 많으신 거야. 지나족이 한데 뭉쳐 더 좋게 잘살겠다고 나라를 만든다는 거야 물론 좋은 일이지. 그런데 그 나라가 자기들이 잘살겠다고 힘을 뭉친 거면 좋지만, 그 힘을 뭉쳐서 다른 부족을 짓밟고 쳐들어가려는 거라면 주신으로서도 그렇게 하라고 할 수는 없잖아. 염제 신농도 당연히 한웅께서 좋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란 걸 알기에 오지 않는거야. 그러니 별수 없잖아. 한웅께서 직접 그들 땅으로 가셔야 하는거지. 그리고 다른 부족들도 전부 모으고, 회의로 이야기 하시려는 거지." "그렇군...형님은 대단해. 그걸 어떻게 생각했지?" "어른들도 다 이런 생각에서 움직이는 거야. 내가 생각한 게 아니고. 너도 눈을 크게 뜨고 조금만 생각하면 다 알 수 있잖아." "그런데 회의가 끝나면 염제 신농을 왜 못 만난다는 거야?" 희네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주변을 살핀 다음 목소리를 낮췄다. "이 회의는 분명 좋지 않게 끝날 것이기 때문에." "엥? 한웅님께서 직접여시는 회의가 왜 안 좋게 끝나?" "그러니 누구에게도 말을 못하지. 그러나 분명해. 내가 보기에 회의는 분명 좋지 않게 끝나. 가장 나쁘면 회의가 끝나자마자 전쟁이 날거고, 잘 풀려도 몇 년 안으로 전쟁이 일어나. 틀림없어." "회의하기도 전에 그런 것을 어떻게 알아?" 나래는 물론 형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반쯤 탄복한 듯이 묻는 나래를 보며 희네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그것까지 설명해주긴 힘들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해. 그러나 회의가 끝나면 주신과 염제 신농의 사이가 틀어질 테니, 당연히 우리 같은 주신 사울아비를 염제 신농이 만나줄 이유가 없지." "그럼 회의 전에는?" "염제 신농도 기대는 그리 크게 안 하겠지만, 그래도 회의에서 자기가 바라는 대로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바랄 것 아니겠어? 그러니 회의 전에는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서도 주신 사람을 잘 만나줄 거 아니겠니?" 나래는 "과연"하고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희네는 나래보다 힘도 약하고 싸움도 못하지만, 머리 쓰는 것이나 생각의 깊음은 나래가 감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나래는 희네를 지극히 존경하고 따라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아홉구비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정말 좋은 형을 두었다. 정말 잘난형이다.' 속으로 나래가 생각하는데, 희네가 말했다. "다 온 것 같다." 나래는 희네를 내려놓았다. 희네가 앞장서서 지나족의 천막쪽으로 갔다. 지나족은 약 백여 명정도 되어 보였는데, 가죽으로 만든 천막이 스무 개 가량 있었다. 그중 커다란 천막 주변에 작은 천막이 에워싸듯이 있었고 몇 사람이 꼼짝도 않고 앞을 지키는 것으로 보아 커다란 천막이 우두머리인 헌원의 천막 같아 보였다. 주신의 젊은이 두 명이 들어오자 지나족들은 주신인이라는 걸 알고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훈련을 잘 받은 자들 같았다. 그중 희네는 범상치 않은 사람을 한 명 발견했다. 그 사람은 어마어마하게 덩치가 컸는데, 불가에 앉아 돼지다리 하나를 들고 통째로 뜯고 있었다. 희네는 나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치면서 농담을 건냈다. "지금 너도 크지만, 네가 어른이 되어 더 커도 저 사람만큼 크지는 못할 거 같구나." 나래는 슬쩍 웃었을뿐, 덤덤한 표정이었다. 희네는 슬그머니 그 사람 곁으로 가서 앉았다. 그 사람은 여자처럼 곱게 생긴, 낯선 소년이 옆에 앉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안녕하시오?" 희네가 능숙한 지나 말로 이야기하자 남자는 뜯던 돼지다리를 입에서 떼며 희네를 훑어보았다. "그래. 너도 안녕하냐?" "여기가 공손헌원님이 계신 곳이죠?" "너는 누구냐?"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사내를 보며 희네가 대답했다. "저는 주신의 사울아비 희네라고 합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못 정중하지만 떳떳한 태도로 말했다. "나는 지나족, 화산부족의 끽구다. 헌원님은 왜 찾느냐?" "헌원님에 대해서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누어서 그분께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어서 온 겁니다. 지금 아니면 뵐틈이 없을 것 같아서요." 끽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돼지다리를 뜯었다. "헌원님보다 현명한 분은 드물지. 주신에도 그만한 분은 드물게다." 그러는데 옆에서, 눈빛이 무섭지만 작달만한 사내하나가 끼어들며 말했다. 잘생긴 얼굴에 멋진 수염을 길렀는데, 얼굴빛이 마치 무엇을 칠한 것처럼 붉은, 특이하게 생긴 남자였다. "나는 지나족 화산부족의 이주다. 그런데 헌원님은 만나기 어렵다."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꼭 뵈어야 합니다." 희네가 구리몽둥이와 뿔활을 내밀었으나 이주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너는 주신을 대표하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냐? 개인적인 일을 이야기하러 온 것이냐?" "물론 저 따위가 주신을 대표할 수는 없지요. 개인적인 일입니다." 그러자 이주는 딱 잘라 말했다. 아주 말솜씨가 능란한 사람처럼 보였다. "헌원님은 지금지나족을 대표하여 나오신 분이니, 개인적인 일로 만나뵐 수는 없는 노릇이구나. 선물도 도로 가져가거라." "꼭 뵙고 싶어서 찾아온 것인데 말 한 마디 나눌 수도 없단 말입니까?" "헌원님께서는 다른 일도 많으시다." "주신에서는 배움을 청하는 사람을 사람을 마다하는 법이 없습니다만..." 희네가 간곡하게 고개까지 숙이며 말하자 끽구가 갑자기 돼지다리를 내팽개치며 자못 험악하게 소리쳤다. "이 녀석, 안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라. 주신 사울아비라고 고집을 피울거냐?" 그때 나래가 재빨리 희네 앞을 막아서며 끽구를 째려보았다. 나래가 여느소년보다도 훨씬 덩치가 큰데도 끽구와 비교하니 가슴팍밖에오지 않을 정도로 끽구는 거인이었다. 나래의 눈초리가 자못 험악해 보이자 끽구가 픽 웃었다. "이 녀석들아. 어린것들이 왜 이리 나서는 거냐? 성인식이나 올렸느냐?" 나래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끽구의 눈을 째려보았다. 그러자 끽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 녀석아 나를 화나게 하지 말아라. 네 녀석도 제법 힘깨나 써보인다만, 내 팔 한쪽도 못 당할 거다. 혼나지 말고, 그 째리는 눈 치워라." 그러자 희네가 말했다.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호통을 치는 거요? 우린 잘못이 없단 말이오." 이주가 뭐라고 말리려 했지만, 끽구가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건방진 놈들, 너희 놈들 둘 다 덤벼보아라. 내 팔 하나라도 당해내면 헌원님께 내 직접 청해보마. 하지만 봐주지 않겠다." 지지않겠다는 듯이 희네가 외쳤다. "나말고 내 동생만 나서도 됩니다. 정 그렇게 말한다면, 내동생을 씨름으로 이겨보시오. 팔하나만 써서 이긴다면 우리가 잘못했다 빌고 불러나겠소." 이주가 끼어들어 희네에게 말했다. "이봐, 자네. 뭘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끽구는 아무도 당할 자 없는 장사야. 승부를 하려면 더 큰 다음 어른이 되어 하라구. 지금은 자네들이 당해내지 못해." 그러념서 이주는 끽구를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또 자네 멋대로 일을 벌리는가? 주신 한웅을 모시는 길에 꼭 주신 아이들을 때려야 하는가?" 이주는 다시 희네를 보며 말했다. "일단 자네들 오늘 은 돌아가게. 내가 내일 헌원님께 청하여 한번 만나보십사 전할 것이니 오늘은 소란 피우지 말고 돌아가 주게나." 이주의 말이 정연하여 희네는 그럴까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나래는 여전히 끽구를 불타는 듯한 눈으로 노려보며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나래야, 내일 다시 오자꾸나." "싫어." "나래야, 왜 그래?" "내일이면 늦을지도 몰라. 형님의 일인데 오늘 만나야지. 감히 내 형님이 고개를 숙였는데도 이렇게 나와? 헌원이 안 나온다면 내가 여기를 다 두들겨 엎어놓을 거야." "나래야, 일을 크게 벌려 무엇 하니?" 그러나 나래는 대답않고 끽구만 째려보았다. 희네는 속으로 할 수 없구나 생각했다. 사실 법 같은 것도 없는 옛날이다. 누군가를 째려본다는 것은 이미 그것으로도 도전의 의미를 충분히 지니고 있었으며, 일단 취한 행동은 되돌릴수 없었다. 희네가 윽박지르면 나래도 결국은 말을 듣겠지만 동생의 기분도 생각해주고 싶었다. 이미 끽구도 새파랗게 젊다못해 어린 녀석이 한참이나 째려보는 것을 알았으니, 자기 자존심에서라도 그냥 곱게 보낼 수는 없는 판이었다. "내 어린놈을 죽일 수도 없으니. 이리와라! 내 왼팔을 꺽으면 네가 이긴 것으로 해준마. 온몸으로 매달려도 내 팔만 꺾을수 있으면 내기 진 것으로 하겠다!" 끽구가 시커먼 털로 뒤덮인 엄청나게 굵은 팔을 내밀어 보였다. 희네가 끽구의 말을 나래에게 전해주자 나래는 픽 웃었다. "저 녀석이 왼팔만 쓴다면 나도 왼팔만 쓸 거야!" 그러자 희네는 나래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힘의 반만 쓰라는 걸 잊었니?" "지금도 반만 써야 하는 거야? 저 덩치를 상대로?" "목숨이 걸린 일이 아니니까, 내 말 들어라. 겨뤄보겠다는 걸 말리는 건 아니지만. 그런데도 해보겠니?" 나래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평소 희네는 나래의 엄청난 힘을 알고는 항상 절반의 힘만 사용하고, 절대 온 힘을 다하지는 말라고 일러왔다. 나래는 형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항상 그 말을 따랐다. 사실 나래는 천하장사여서 반의 힘만으로도 무엇이든 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저 거인을 보니, 나래도 은근히 불안해져서 이번에는 온힘을 써야겠다 생각하는데, 희네가 재빨리 가로막은 것이다. 희네가 다시 잘라 말했다. "반의 힘을 써서 진다면, 져도 할 수 없다." 나래는 오기가 생겨 성큼성큼 끽구 앞으로 나갔다. 끽구는 제아무리 덩치도 크고 늠름한 나래라도 자기 가슴팍의 키에 솜털도 아직 가시지 않은 소년인 것을 보고 비웃으며 왼팔을 내밀어 보였다. 나래는 서두르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는 신중하게 왼팔만 쓰겟다는 것이엇다. 나래의 손이 끽구의 왼팔을 잡았다. 그 순간, 끽구의 얼굴에서 비웃는 듯한 표정이 사라지고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가 다시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나래도 얼굴이 긴장되고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듯 보였다. 둘 다 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끽구의 왼팔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래가 갑자기 땀을 뻘뻘 흘리자 끽구의 왼팔이 조금 내려갔다. 허나 끽구가 이를 악물자 왼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나래가 장사라고 해도 무리 같았다. 하지만 끽구의 얼굴을 보고 이주는 깜짝 놀랐다. 끽구는 지나족의 제일가는 장사이고, 나래는 아직 어린데도 끽구의 얼굴이 굳어지게 할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다면 이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마찬기지로 희네도 놀랐다. 아무리 나래가 절반의 힘만 쓴다 해도, 끽구가 저 정도로 강할줄은 몰랐던 것이다. 더구나 나래의 표정을 보니, 나래가 혹여 자신의 말을 어기고 전력을 쓰고도 당해내지 못하는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끽구의 손이 조금씩 아래로 떨구어졌다. 자세는 아무렇게나 팔을 내민 끽구가 훨씬 불리했다. 그때 나래가 숨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것을 보고 끼구는 이 꼬마가 또 용을 쓰려나 보다 생각하여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그 순간, 나래는 놀랄 만큼 빠르게 오른쪽 다리로 끽구의 왼다리를 걸었다. 끽구는 왼팔을 내민 상태에서 왼다리가 걸리자 중심을 잃고 옆으로 기우뚱했다.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끽구는 당황하여 팔의 힘을 풀었고, 그 사이 나래는 재빨리 끽구의 왼팔을 꺾었다. "이런 꼬마녀석이 속임수를 써?" 끽구가 노하여 외치는 순간, 희네가 재빨리 외쳤다. "분명 당신은 내 동생이 온몸을 다 써도 된다고 했고, 왼팔만 꺽으면 된다고 했어요. 내 동생은 당신 말대로 다리도 썼고 결국 왼팔을 꺾었어요. 뭐가 잘못됐지요?" 희네가 낭랑하게 외치자 끽구는 일순 할말이 없어졌다. 그러자 이주가 나서며 말했다. "끽구, 자네가 졌네! 이 소년들은 정말 대단하군. 주신 사울아비는 정말 대단하네." 끽구도 뭐라고 더 불평을 하지 못했다. 나래가 끽구의 팔을 풀어주자 끽구는 '흥' 하면서 팔을 뿌리치며 외쳤다. "좋다. 내 말한 것은 지키겠다. 지금 헌원님께 아뢰마!" "당신은 말을 잘 지키시는군요. 그러나 괜찮습니다. 저희도 무례했지요. 찾아오는 입장에서 소란을 피웠으니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희네가 낭랑한 소리로 말하자 누군가가 희네 뒤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 것 없네!" 희네가 뒤를 돌아보니 적당한 키에 아주 후덕하게 생긴, 마음씨 좋아 보이는 조금 뚱뚱한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 가느다란 눈이 조금 아래로 처지고, 뺨이 복스럽게 생긴 그 남자가 말을 이었다.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무슨 일로 나를 만나려는 건가?" "그러면 당신이....?" 희네가 말끝을 흐리자 그가 대답했다. "그래. 내가 지나, 화산족의 공손헌원이네." 운명의 만남 공손헌원은 매우 침착하고 행동거지가 조용하면서도 위엄이 있었다. 특별히 몸이 날래거나 힘이 센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이끌 수 있는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희네는 헌원의 그런 모습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헌원은 희네와 나래를 자신의 천막으로 정중히 안내한 다음 앉으라고 했다. 희네와 나래는 고운 여우 가죽을 깔아놓은 바닥에 앉았으나 헌원은 가죽에 앉지 않고 그 옆에 있는 나무등걸 위에 앉았다. 지나인들은 근래 들어 바닥에 앉지 않고 의자에 앉았으며 잠도 침대에서 자는 풍습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온돌을 사용하는 주신인들은 안에 들어가면 바닥에 앉고, 바닥에 눕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희네와 나래는 자신들도 의자에 앉을까 생각하다가 그냥 그대로 앉았다. 그러나 헌원이 의자에 앉자 자신들은 헌원을 올려다보는 입장이 된지라 조금 기분이 묘했다. "자네들의 이름은?" 헌원이 능숙한 주신 말로 둘에게 물었다. 나래는 평소처럼 담담히 입을 다물었고 희네가 대답했다. "저는 희네, 얘는 제 동생인 나래입니다. 쌍둥이지만 다르게 생긴 쌍둥이죠." "그런가. 아까 말했지만 나는 공손헌원이라 하네. 자네 동생은 정말 대단한 장사더군." "그냥 그렇습니다." "아니야. 끽구는 내 부하들 중에서도 가장 힘이 세고, 지나족 중에 서도 으뜸가는 장사일세. 그런 끽구를 쓰러뜨리다니 대단해. 그것도 그런 어린 나이에." "힘으로 이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얕은꾀를 쓴것이고, 나래가 어리니 끽구님도 마음을 놓았다가 당한 것입니다. 사실로 치자면 나래가 이길 리가 없지요." 희네는 일부러 겸손을 떨었다. 그러자 헌원이 미소를 지으며 감탄하듯 말했다. "그래도 대단하네. 나래가 크면 끽구 못지않은 장사가 될 걸세. 이런 훌륭한 젊은이들이 나에게 왔으니 기쁘네. 내 무슨 부탁이든 힘닿는 대로 들어줌세." 희네는 가지고 온 구리칼과 뿔활을 헌원에게 공손히 건넸다. 헌원은 그것을 받아들고 보더니 말했다. "정말 좋은 물건이군. 신시에서 만든 것 인가?" "그렇습니다." 그러자 헌원은 구리칼과 활을 이리저리 자세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신시의 기술은 더 발전했군. 정말 세상에서 제일이군. 나도 신시에 몇 년 있었다네. 좋은 시절이었지. 그런데 그때보다 기술이 더 좋아진 것 같군." 헌원은 구리칼과 뿔활을 도로 희네에게 내주었다. 희네가 받지 않으려 하자 헌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네. 나는 무기를 쓸일이 없다네. 솔직히 무기는 만지기도 싫다네. 이런 좋은 무기는 자네가 계속 사용하게. 나는 이미 받은 셈 칠 테니." "그래도..." "그렇다면 내가 받고, 다시 자네에게 선물하는 걸로 생각하게." 할 수 없이 희네는 구리칼과 뿔활을 다시 받았다. 헌원은 미소를 띠면서 그런 희네와 나래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나를 보자고 한 까닭은 무엇인가? 뭔가 부탁할 것이 있는 듯한데." 헌원이 묻자 희네가 대답했다. "고치기 힘든 병을 얻은 사람이 있습니다. 신시의 솟대 단군도 고치지 못하죠. 그래서 염제 신농님을 뵈옵고 고침을 받거나 고칠수 있는 길을 알고자 합니다." 단군은 제사장이라 점복이나 굿, 푸닥거리도 했지만 의술이나 기타기술 등에도 능한 사람이 많았다. 그중 으뜸되는 단군을 솟대 단군이라 불렀는데, 이는 그 단군들의 거처가 신시의 중심, 솟대 바로 밑에 있었기 때문이다. "허, 솟대 단군도 못 고친다? 무슨 병인데?" "다리가 아픈 병입니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힘을 주면 굉장히 아파집니다. 아픈 것이 몇 년을 두고 점점 심해지고, 급기야는 다리의 느낌이 없어지고 돌처럼 굳어서 다시는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는 병이죠" "다리가 부어오르거나 썩어 들어가는가?" 헌원은 다리가 붓고 썩는 병(각기병)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러나 희네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앓아서 다리를 절게 되는 그 병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것처럼 일시에 다리를 못 쓰는 것도 아니고, 계속 조금씩 아파지며 고통이 정말로 대단합니다." "희한한 병이군." "예..." 헌원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흠...어차피 우리 행렬이 태산에 도달하면 염제 신농님과도 만날 수는 있을 걸세. 그러나 일단은 내 부하 중에서도 병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있으니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세. 그런데 아픈 이를 직접 데리고 오면 좋았을 텐데..." 희네는 조금 주저하다가 결심하고 말했다. "아픈 이는 여기 있습니다." "뭐? 밖에 있는가? 그러면 어서 들라고 하게." "아닙니다. 제가 바로 아픈 사람입니다." 그 말에 헌원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희네는 담담히 말했다. "이 일은 절대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해주소서. 감히 부탁드립니다." 헌원은 이해한다는 듯이 급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자네, 지금도 아픈가?" "솔직히...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걸어왔고, 태연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가? 고통이 대단하다면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일세." "아픈 것이 하도 오래되다 보니 어느정도 익숙해졌습니다.저도 사내인데 그런 것은 참을 줄 알아야지요." "자네, 아픈 것을 숨겨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겐가?" 그때 옆에 있던 나래가 갑자기 '흑'하더니 눈물을 떨구었다. 희네는 그것을 못 본 척했으나 얼굴빛이 이내 어두워졌다. 헌원은 궁금했으나 희네가 얼른 짧게 말했다. "깊은 사정이 있습니다. 모쪼록 이 일을 다른 이에게는 절대 알리지 말아주소서." 헌원은 '흠'하면서 깊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알았네. 내 절대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않으리. 그러나 병을 보아주는 내 부하에게는 말해야 할 걸세. 그 사람도 내가 입을 다물도록 할 테니 아무 걱정말게." 헌원이 밖에 소리를 쳤다. 지나말이었으나 희네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누가 상망을 좀 들라해라!" "십육기인의 상망 말이옵니까?" "그렇다." 희네는 그 짧은 대화를 듣고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지나족의 지도자는 유망인데 헌원이 부하를 부리는 소리를 들으니,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는 말투로구나. 물론 지나 말이기는 하나 헌원은 마치 한웅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엄하게 말하고, 부하들은 한웅님께 대하듯 공손하게 말하지 않는가? 자기가 지도자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까지 하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다가 희네는 문득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희네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아주 키가 작고 얼굴이 새카만데다가 머리를 꼭지처럼 위로 묶은 남자가 들어왔다. 광대뼈가 튀어나온 얼굴에 뻐드렁니, 게다가 눈은 부리부리한데 잔뜩 충혈되어 있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수염이 뽑히다 만 것처럼 입술 양끝에만 조금 뭐가 묻은 듯 자라 있어서, 보기만 해도 우스운 볼품없는 남자였다. 거기에다 난쟁이만한 키에 허리까지 구부정했고 다리마저도 둥글게 휘어있어서 사람이라기 보다는 원숭이 같았다. 나래는 그 모습을 보고 소리내어 웃지는 않았으나 몹시 우스워하는 눈치였다. "상망, 부르셔서 달려왔습니다." 상망이 말하자 헌원은 희네의 이야기를 간단히 들려주고,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말했다. 상망이 희네에게 와서 주신말로 물었다. 헌원의 부하들은 모두 주신 말을 한 줄 알았다. "주신 사람이냐?" "그렇습니다." 상망은 다시 희네의 옷과 몸에 걸친 무기들을 보고 물었다. "사울아비냐? 근데 상투가 보이지 않는구나. 총각이냐?" "예. 아직 성인식 전입니다." "저런저런, 장가도 안 갔는데 다리가 아프면 안 된다. 다리가 아프면 허리도 쓰기 힘들거든. 장가가서 마누라에게 매일 혼난다구." 상망은 중얼중얼하면서 희네의 다리를 살펴보더니 희네의 손목을 잡아보았다. "이런이런, 계집아이처럼 피부가 곱구나. 사울아비이면서 말야. 원래 그을지 않는 살갗을 가졌구먼. 사내자식이 참 곱기도 하구나." 상망은 뻐드렁니가 튀어나온 입으로 쓸데없는 소리를 연방 지껄이고 있었으나 눈과 손끝만은 틀림없이 희네의 손목 맥을 짚어보고 있었다. 희네는 적잖게 놀랐다. 맥이 뛰는 것만으로 아픈 데를 알아내는 기인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상망같이 보잘것없이 생긴사람이 그것을 아는 기인일 줄은 몰랐다. 그것은 솟대 단군중에서도 제일 나이든 한 사람밖에 알지 못하는 기술이었다. 그러다가 상망이 갑자기 탄식하듯 외쳤다. "제기랄! 안 된다! 안돼! 고치려면 방법이 한 가지뿐인데, 안 하는게 낫다." "왜 안 하는게 낫습니까?" "그냥 그렇게 사는 게 죽어 썩어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냐?" "그렇게 어렵습니까?" "어렵다마다. 네 다리는 말야, 병이 아니다." "그러면요?" "나도 잘 모르겠다. 병은 아냐. 혈이 뭉치고 맥이 끊긴거란 말이다. 좌우간 들어나 두어라. 내가 알기론 고치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그 방법이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영험한 풀이 있다. 보통 삼이나 불로초를 최고라 하지만 사실 더 영험한 약이 있다. 아홉구비라는 것인데, 아홉 개의 입사귀가 돋아나 있는 풀이다. 사실 이 풀은 그렇게 귀하진 않다. 그러나 이 풀이 정말 약이 되려면 아주 특별한 데서 자라야 하는 거다. 그렇게 자란 풀에 달린 작은 열매는 맥을 틔어주는 데에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신기한 약이다. 그런데..." 상망이 정신없이 떠들고 있었는데도 희네와 나래는 침울한 표정을 지을 뿐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별안간 상망이 '캥'하며 여우 같은 소리를 질렀다. "가르침을 주는데 듣지 않는 게냐? 들으라니깐! 그 아홉구비는 말이다, 아주 특별한 데서 자라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러자 나래가 무심코 슬픈 듯 말했다. "신수 옆에서 자라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 말에 상망은 깜짝 놀랐다. "네...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누구에게 들었느냐?" 재빨리 희네가 나래의 말을 가로챘다. 나래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희가 아직 어릴 때였지요. 그러나 신수 옆에 있는 것을 무슨 재주로 얻는단 말입니까? 다른 방법을 일러주소서." "물론 아홉구비를 얻는 것은 쉬운일은 아니다. 하지만...이것외에는 방법을 모르겠구나." 희네는 조심스레 물었다. "염제 신농께옵서도 모르실는지요?" 상망은 조금 생각해보더니입을 열었다. "염제 신농께옵서? 음..." 상망이 말에 여운을 남기자 희네의 눈빛이 빛났다. "어떠하옵니까?" "옛날 신농씨께서는 세상의 모든 풀을 맛보고 사람에게 이롭고 해로운 풀과 열매, 뿌리를 모두 가려내어 약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때 신농씨의 가르침은 계속 이어졌느니라. 그러면서 대대로 염제 신농께서는 얻은 풀과 열매와 뿌리와 잎사귀들을 종류별로 모두 갈무리해 두시곤 했다." "그 말씀은...?" "그러니 염제 신농께서 혹여 아홉구비를 가지고 계실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를 대신할 방법을 아실는지도 모르지."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헌원이 입을 열었다. "이보게, 희네. 만일 염제 신농께옵서 방법을 아시거나 약을 지니고만 계신다면, 내 얻어주도록 애써보겠네." 그 말에 희네보다도 나래가 반가워하며 다급히 말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헌원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네들과 같은 영웅 형제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내 다행이라 생각하네. 나중에 큰 일을 할 소년들인데 내 힘이 닿는 대로 도와야지. 그러니 우리 친하게 지내도록 하세." 헌원의 친절에 나래는 감격하여 헌원에게 급히 인사를 드렸다. 희네도 헌원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헌원은 나래와 희네에게 웃으며 그럴 것 없다고 했다. "우리 서로 나이는 차이가 있으나 자네들과는 이제 벗이 된 것이니 나를 형 정도로만 생각해두게나. 이렇게 만났는데 한잔 술이 없을 수 있겠는가. 우리 같이 한잔 드세." 그러자 상망이 말했다. "하지만 희네는 아플텐데요." 희네가 웃으며 말했다. "지금껏 잘 견뎌왔습니다. 하물며 큰 은혜를 입는 마당에 조금 아픈 것이 문제도겠습니까. 저도 한잔 하지요." 헌원이 기분좋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우리도 한웅님을 맞이하러 가는 길이라, 기분 같아선 밤새 마시고 싶으나 그럴수는 없군, 그래. 대신 내 부하들과 같이 한잔 하도록 하세나. 그들을 소개해줄 테니 알고 있으면, 나중에 염제 신농님을 만나러 갈 때에 도와줄 것일세." 희네와 나래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헌원이 십육기인을 들라 일렀다. 헌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몇 명의 말단부하들이 토기에 담긴 술을 내왔다. 그 사이 헌원이 말했다. "내 부하 중 가장 뛰어난 자들일세. 모두 열여섯이지만 지금 나와 함께 온 이들은 일곱 명뿐일세. 상망과 끽구, 이주는 이미 만나보았을테지만 상망은 병을 보는데 능하고, 끽구는 힘이 천하장사이며, 이주는 머리가 좋고 이치를 따지는 데 아주 밝다네." 그리고 다시 세 사람이 들어왔다. 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섬뜩할 정도로 눈매가 매서운 사람이었고 두 사람은 아주 덩치가 크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이었는데 쌍둥이처럼 서로 닮았다. 헌원이 계속 소개했다. "이 눈이 날카로운 이는 비휴라고 하네. 천랑대의 대장일세." "천랑대란 무엇인가요?" "늑대로 이루어진 군대를 말하는 것이네." 희네가 놀라서 되물었다. "늑대군대라고요?" 대뜸 상망이 나서서 떠들어댔다. "그렇다네 비휴는 기인이네. 늑대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네. 원래 선인이었지." 희네는 놀라움에 고개를 끄덕였다. 헌원이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이 두사람은 신도와 울루라고 하네. 둘이 생각하는것도, 행동하는 것도 똑같은 한 쌍일세. 형제가 아닌데도 꼭 닮았지. 힘도 세고, 무엇보다도 귀신을 잡고 억누르는 재주를 지녔다네. 이 둘도 선인일세." 나래도 적이 놀랐으나 희네의 놀라움도 컸다. 상망이나 끽구, 이주 등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지만, 비휴나 신도, 울루 등을 소개하는 말을 듣고보니 그 재주 한 가지만으로도 선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십육기인이라 일컫는 이들은 모두 선인이거나 선인 급인 듯했다. 그런데 헌원이 수하에 선인들이라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자들을 이리 많이 모아두었을지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맨 나중에 들어온 사람을 보고 희네와 나래는 더욱 깜짝 놀랐다. 선인처럼 보이지도 않는, 아주 앳되고 귀엽게 생긴 소녀였던 것이다. 희네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저런 조그만 계집아이도 기인이란 말인가?' 나래는 그보다도 그 소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마치 심장이 멎어 버리는 것 같았다. 발랄하고 활기차고 그늘이라곤 전혀 없는 소녀의 눈동자를 보자, 왜 그런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마치 숨이 멎어버리고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는 것 같았다. 이제껏 많은 여자아이들을 보아왔고, 예쁜 아이도 많이 보았지만 이런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나래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자 소녀는 '풋'하고 버릇없이 웃으며 하늘하늘한 허리를 굽혀 일부러 나래를 마주 보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나래는 멍하니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때 헌원이 외쳤다. "아니, 발아! 너는 손님들이 계시는데 왜 허락도 없이 불쑥 들어오는 것이냐?" 발이란 소녀가 헌원 옆으로 깡총 뛰어갔다. "아버님, 끼구를 넘어뜨렸다는 장사가 이 아이들인가요?" 헌원은 '허' 하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한숨을 한 번 쉬고는 희네와 나래에게 말했다. "이거 미안하네. 이 아이는 내 막내딸인 공손발이라고 하네. 그런데 오냐오냐 해줬더니 너무 버릇없이 자라서....이거 아주 미안하네." "하하, 아닙니다." 희네가 웃으며 괜찮다고 하면서 슬쩍 나래의 옆구리를 찔렀다. 나래는 그때까지 공손발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어 희네가 옆구리를 찌르는데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발은 나래가 계속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이 나래를 놀렸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자 조금 화가 난 듯했다. "이봐! 자꾸 왜 쳐다보는 거야?" 보다못한 헌원이 발을 나무랐다. "이 버릇없는 녀석아! 너는 아무 말썽 피우지 않고 조용히 따라와 한웅님 행차를 구경만 하겠다고 하지않았느냐? 그런데 왜 아무 데서나 끼어들어서 법석을 떠는 거이냐?" "제가 무슨 법석을 떨었나요? 아저씨들을 모두 부르시기에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을까 하여 와본 거죠. 근데 저 덩치 큰 아이가 끽구를 넘어뜨린 게 맞아요? 멍청해 보이는데." 발은 그야말로 맺힌 것이 하나도 없는, 시원시원한 여자아이 같았다. 허나 워낙 곱게만 자라서 그런지 안하무인격이라 희네는 겉으로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헌원도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약간 창피했는지 발에게 다시 말했다. "멍청한 것은 너다! 이 소년들은 주신의 사울아비들로, 아주 대단한 소년 영웅들이란 말이다. 너야말로 감히 끼어들어서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혼이 나야겠느냐?" 헌원은 그래도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았다. 다만 타이르듯 차분하게 이야기할 뿐이었는데 혼이 나야겠냐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발은 금세 얼굴빛이 변하더니 다소곳이 헌원옆에 앉았다. 별것 아닌 한마디였는데도 풀이 팍 죽은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희네는 움찔했다. '이 사람, 헌원은 정말 보통사람이 아니구나.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거나 화를 내는 것 같지 않은데 모든 이들이 받들고 따른다. 십육기인 모두가 대단한 선인들 같은데도 마치 주신 사람이 한웅님을 따르듯 받들고, 저렇듯 철없는 계집아이마저도 아버지의 한마디를 무섭게 생각하는구나.' 주변을 둘러보자 상망, 비휴, 이주, 끽구, 신도 울루 모두가 아무 말없이 잠자코 있었다. 웃지조 않고 그렇다고 화를 내는것도 아니었다. 희네는 이유 없이 등골마저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헌원은 조용하고 말이 없으며 친절하다. 하지만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주변 사람을 따르게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철없는 여자아이가 저렇듯 고분고분 말을 듣게 만드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다. 저 정도로 나이 먹은 자식이 부모 말을 잘 듣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말이다. 더구나 저 계집애는 아버지의 부하들에게도 멋대로 까불며성질을 부려왔을 것이다. 저들이 저렇게 태연한 것을 보면 안다. 하지만 저들은 헌원의 집안일에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입만 다물고만 있구나. 평소에 저 사람이 말 한마디 한마디를 얼마나 무겁게 지켰는지 알 수 있겠구나. 그리고 저 사람은 선인들인 부하들을 정말로 꽉 틀어쥐고 있구나.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희네가 생각하는 사이, 나래는 여전히 공손발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발의 표정이 침울해지자 나래가 입을 열었다. "헌원님, 따님을 너무 야단치지 마십시오. 따님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아이가 버릇없이 어른들의 일에 끼어들었고, 손님에게 멋대로 입을 놀려서 창피를 주었으니 나중에 벌을 받을 것이네." 나래는 급히 두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실례했습니다.제가 너무 빤히 바라보니 따님도 화나서 그런거죠. 멍청한 저를보고 멍청하다 했으니 잘못한 게 아닙니다." 헌원이 '허허'하며 웃었다. "자네가 왜 멍청한가? 좌우간 내 딸은 잘못한 것이니 벌을 받아야 하네." 나래가 다시 고집을 부리며 말했다. "저희는 손님으로 왔습니다. 손님으로 왔고, 헌원님께 귀한 대접을 받은 이상 저희도 헌원님께 뭔가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해드릴 일도 마땅치 않아 답답한데 집안에 울음소리가 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잡안일에 간섭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제발 따님을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얼굴을 못 들겠습니다." 나래는 또박또박 조리 있게 말했다. 사실 나래의 큰 덩치와 변하지 않는 담담한 표정, 그리고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나래가 좀 멍청하다고 생각하기 쉬웠다. 허나 나래는 말하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그렇지, 머리도 좋은편이었고 말도 잘했다. 수줍음을 타서 보통 일에는 말수가 적었지만 필요한 말은 물러서지 않고 하는 배짱도 있었다. 나래의 태도를 보고 헌원이 '오호'하며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내가 할말이 없군, 그래. 허허, 그래. 자네 말대로 하겠네." 그러면서 헌원이 발에게 말했다. "발아, 너는 이 손님 덕분에 벌을 면하는 거다. 자, 고맙다고 말씀드려라." 발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헌원은 자신이 한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다. 이제 벌을 안 준다고 한 이상, 절대 벌은 없을 것이었다. 발이 나래에게 주신 말로 말했다. "고마워. 이름이 뭐야?" 그러면서 나래에게 다가갔다. 발은 여전히 자신을 빤히 쳐다본 이 덩치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습관이 조금 있어서 말끝에 나래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그맣게 덧붙였다. "...멍청이?" 나래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주신의 사울아비, 나래라고 한다." "사울아비? 몇 살인데?" "열일곱 살이다." "벌써 사울아비라니, 빠르네..." 발은 웃으며 이야기했으나 역시 말꼬리에 나래만 들릴정도로 조그맣게 덧붙였다. "...멍청이가?" 여전히 나래는 사람 좋게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네 이름은 뭐지?" 공손발이 짐짓 환하게 웃었다. "방금 아버님이 말하셨는데 못 들었어...?" 하면서 발은 또 말꼬리를 붙였다. "...멍청하기는." 나래는 그런 발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바라보며 말했다. "직접 듣고 싶어서 그래." 그사이, 헌원은 이제 골칫덩이 딸에게서 관심을 접고 희네와 더불어 한참 잔을 나누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십육기인 중의 다른 이들도 역시 담소를 나누었다. 공손발은 슬슬 나래의 뒤로 돌아갔다. 나래는 마치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 고개를 돌리듯 발을 따라 몸을 조금씩 돌렸고 이윽고 나래가 헌원을 완전히 등지게 되자 발은 그 앞에 아무렇게나 털썩 앉으면 말했다. 그러나 나래의 눈에는 그런 그녀가 우아하게만 보였다. "그럼 말해줄게. 나는 공손발이라고 해. 저기 아버님의 막내딸이야. 멍청이 너는?" 이제 발은 헌원을 등지고 앉아 아예 막 나왔다. 나래는 조금도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나래야. 아직 성인식을 하지 않아서 성을 쓰지 못하고, 진짜 이름도 없지만 나는 치우 집안 사람이야." "치우 집안? 멍청이가?" 발은 놀란 듯 보였다. 치우 집안이라면 싸움에 능하고, 용감하기로 주신만 아니라 세상곳곳에서 대단히 유명한 집안이었다. 치우 집안 사울아비들이 세상 각 부족들을 도와 세운 영웅적인 업적들이 어디에나 전해지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나래는 눈부신 듯 웃으며 대답했다. 멍청이가 아니라 더한 말을 들어도, 이 계집애가 더 버릇없게 굴어도 전혀 싫지 않은 듯했다. "사실 나는 좀 멍청해. 멍청이라고 부르려면 네 맘대로 해라." 나래가 한 술 더 뜨며 나오자 공손발은 의오라는 듯 긴 속눈썹을 몇 번 깜박거렸다. "그래도 끽구 아저씨를 멍청이 네가 정말 이긴 게 맞아? 끽구 아저씨는 당할자 자가 없는 장사인데?" "끽구님은 정말 대단하더군. 감히 내가 당할 수 있겠어? 그래서 꾀를 썼어." 그말에 발이 '호호' 웃었다. "멍청이가 꾀를 쓰다니, 그것 참..." 문득 발은 나래의 눈매를 새삼스레 살펴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나래의 눈은 기분 나쁘거나 욕심에 가득 찬 눈이 아니라 몹시 해맑은 눈매였다. 안하무인격이고 버릇없는 발이었지만 조금 부끄러워졌다. "왜 그렇게 빤히 보는거야, 멍청이?" "보기 좋아서 그래." 발이 피식 웃었다. "내가 예뻐서 그래?" 나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도 꺼림이 없는 당당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말을 꺼내게 한 발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날 보고 예쁘다는 사람은 많아. 하지만 내가 어떤지 알아? 어떤 사람도 반나절도 안 되어서 나에게 고개를 흔들면서 도망간다구. 너도 나한테 혼이 나봐야 알겠어?" "지금도 혼나고 있잖아." "내가 언제 널 혼냈어?" 나래가 해맑게 웃었다. "멍청이가 되었는걸?" 발도 덩달아 피식 웃었다. "멍청이보고 멍청이라고 하는데 뭐가 혼낸 거야?" 그러자 나래가 말했다. "만약 너말고 누가 나보고 멍청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녀석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러나..." "그러나 뭐지?" "너는 그럴 수 없어." 발이 코웃음을 쳤다. "왜? 내가 예뻐서?" "예뻐서가 아니라, 네 앞에서는 이상하게 내가 정말 멍청해지기 때문이야. 정말 멍청해지는데, 네가 나를 멍청이라 불러야지 다른수가 있겠어?" "앞으로도 계속 멍청이라고 부를건데? 네가 멍청이 짓을 안 해도 멍청이라 부르면 그땐 날 혼내줄 거야?" 그 말에 나래는 웃으며 말했다. "앞날의 일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어." 공손발은 조금 샐쭉해져서 대꾸했다. "그럼 혼내줄 거란 말야?" "아마도 그렇게 못하겠지만, 앞날의 일은 누구도 함부로 이야기하는 게 아냐." 공손발은 화를 낼 듯하다가 이윽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발은 이 녀석을 멍청한 녀석이라 여기고 있었다. 다만 이 덩치 큰 멍청이와 이야기하니 이상하게 평소에 몹시 답답했던 마음이 좀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고 발은 일부러 심술궂게 말했다. "좌우간 난 네가 싫어. 잘난 척 떠들고 말야, 멍청아." 나래는 미동도 하지 않고 되받았다. "나는 네가 좋은데." "누가 네 맘데로 좋아하라고 그러랬어? 눈을 빼버린다?" 평소에 입이 대단히 거친발은 이번만은 그런 말을 쓰지 않으리라 했는데도 불쑥 말이 나와버리고 말았다. 발은 당황했으나 당황한 만큼 오히려 오기로 더 심한 말을 퍼부어댔다. "혀도 잘라버릴 거야. 멍청이가 쓸데없이 혓바닥만 나불거리고 말이야." 그 말에 나래는 조금 눈살을 찌푸려 보였다. "그렇게 험한 말을 하는 게 아냐." "너도 그럴 거야? 여자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여자라서가 아니라, 누구도 그런 험한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야." "네가 뭔데 나를 가르치려 들어? 네가 내 스승이야?"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옳은 이야기는 항상 해야만 해..." 매일 듣던 고리타분한 이야기 비슷한 것이 나래의 입에서 나오자 발은 확 성깔이 치솟았다. 안 그래도 그런 이야기, 온갖 제약에 마음이 답답하던 터였다. "네까짓 게 뭐길래...!" "그건..." "너, 한번 혼나볼래? 네가 내 상대가 될 것 같아?" 느닷없이 발이 손을 휙 뻗어서 나래의 눈썹을 확 잡아 뽑았다. 발은 말문이 막힐 때면 어른의 수염을 뽑는 것을 장기로 삼고 있었다.말도 안 될 정도로 버릇없는 짓이었지만, 발은 이런 짓에 재미를 느꼈다. 아무리 근엄하게 말을 하는 스승이라도 자기가 느닷없이 수염을 잡아 뽑으면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거나 하다못해 얼굴을 굳히며 이야기하기를 포기하고 물러나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큰 스승을 제외하고는 모든사람이 발에게 수염을 뽑혀본 경험이 있었다. 근엄하고 깐깐한 이주나 거한인 신도 울루마저도 뽑힌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발이 사람들을 도리머리치게 만드는 첫 번째 재주였다. 수염이 없으면 상대의 머리카락이라도 뽑았다. 그런데 나래의 경우는 이상하게 울화가 더 치밀어서 머리카락보다 더 아프고 치명적인 눈썹을 뽑은 것이다. 이러고도 화를 안 낼 장사는 없다 싶었다. '찌직'소리가 났으나 나래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몹시 아픈 듯, 눈을 잠시 꽉 감았고 눈물까지 핑 도는 듯했으나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발은 되레 자기가 놀라 손에 쥔 뽑힌 눈썹을 보았다. 나래의 짙은 눈썹이 한 무더기 뽑혀 있었고, 조금 겨냥이 빗나갔는지 손톱에 나래의 살점이 박혀있었다. 얼른 나래의 얼굴을 보니 눈썹 한 귀퉁이가 비어있었고 거기에서 피가 조금 솟아나는 것이 보였다. 발은 몹시 당황했다. 수염이나 머리칼을 뽑아도 별로 표가 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증거가 없다. 그런데 지금은 실수로 눈썹 주위에 상처와 피까지 내버렸으니 아버지에게 경을 칠 것 같았다. 그때 나래가 갑자기 입을 열자 발은 깜짝 놀랐다. "아이쿠! 이거 웬 벌레가!" 나래는 자신의 뽑힌 눈썹 주변을 손바닥으로 '철썩' 쳤다. 철썩 소리가 커서 헌원과 희네도 잠시 그쪽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이야기로 돌아갔다. 발은 깜짝 놀라 나래에게 바싹 다가가서 속삭였다. "왜 그러는 거야?" "그래야 나중에 어른들이 보아도 변명거리가 되잖아." 나래가 담담히 말하며 미소를 짓자 발은 '휴'하며 한숨을 쉬었다. 나래는 발의 행동을 덮어주려고 일부러 자기 얼굴을 친 것이다. 나중에 왜 피가 나느냐고 물으면 아까 벌레를 쫓다가 자기 손가락에 찔렸다고 둘러댈수 있으니까. 발은 조금 부끄러워져 물었다. "아프지 않아?" "왜 안 아프겠어? 아프지." "화 안 나?" "이상하게 화가 안 나는군. 나도 모르겠어. 그냥 화가 안 나. 하하." "왜 웃어? 정말 화 안 나?" "피장파장이잖아. 너는 나를 멍청이라 했고 나는 너를 벌레라고 했고 너는 벌레라도 나비같이 예쁜 벌레지만." 그러자 발은 아까 나래가 소리를 지르면서 자신을 벌레라고 빗대어 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발이 샐쭉해지며 외쳤다. "날 놀려? 이 멍청이가! 꼴도 보기 싫어!" 그러면서 발은 획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나 그때도 헌원과 희네는 한참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고, 십육기인들도 발의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래는 한동안 멍하니 발이 앉아 있던 자리의 허공을 바라보다가 눈썹을 문지르며 웃었다. 욕을 먹고 눈썹까지 뜯겼지만 아까의 시간이 달콤한 꿈속의 일처럼만 느껴졌다. 멍하니 있던 나래의 귀에 헌원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래, 자네도 이리 오지 그러나?" "아...아? 아...예, 예." 나래는 허둥거리며 헌원에게 가서 잔을 받아 들었다. 헌원이 이주에게 말을 거넸다. "적송자님은 왜 안 오시는가?" "적송자님이 술을 하시던가요?" "그래도 말이나 여쭈어보게. 이 젊은이들은 만나보고 싶어하실 것이니." 그때 천막이 열리면서 검은 머리가 치렁치렁하게 길고, 온몸에 나무껍질로 신기하게 엮은 옷을 두른 초로의 남자가 들어섰다. "대단한 영웅들이 찾아왔다는데, 내가 늦었소이다, 그려." 그 남자를 헌원이 희네에게 소개했다. "우리 십육기인들의 스승이신 적송자님이시네. 선인이시지." 적송자가 고개를 들어 희네를 보는 순간, 두 사람은 모두 다 '앗' 하면서 노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자네가 여기 왔는가?" "서...선인님이 여기 계셨습니까?" 적송자와 희네의 입에서 동시에 나온 말이었다.헌원은 크게 놀라 두 사람에게 물었다. "둘이 어인 영문이오? 아는 사이인가요?" 적송자가 '허허' 하고 웃으며 희네에게 말했다. "벌써 다섯 해가 지났구먼. 그래, 다리는 나았는가?" 희네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적송자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홉구비를 얻지 못했는가?" "그게 사정이 깁니다." 적송자가 나래를 보며 희네에게 물었다. "이쪽은...동생인가?" "예." "동생은 다 나았군." "예." 그 말에 나래는 눈물이 글썽해졌다. 헌원은 아무래도 그간에 아주 복잡한 사연이 있었던 것이 틀림 없다 여겼고 또 궁금했다. "아무래도 깊은 사연이 있는 듯한데, 이야기해줄 수는 없겠는가?" 희네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이윽고 마음을 정하고 아홉구비에 얽힌 일들을 모든사람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넘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라서 나래도 일의 첫 부분은 알지 못했다. 벌써 오 년 전의 일이었지만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벌써 다섯 해나 지난 일입니다... 그때 저는 지금처럼 다리가 아팠는데, 나래도 병이 났습니다. 부모님은 걱정하시다 못해 사방으로 수소문하셨지요. 하지만 저의 다리는 물론이고 나래의 병도 몹시 중하여 솟대 단군도 제대로 고칠 방도를 찾지 못했지요. 그래서 아버님은 용한 단군이나 약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찾아 멀리까지 나가시고, 어머님 혼자 계실 때에 바로 여기, 적송자 선인님께서 저희 집을 찾아오셨답니다..." 조리있고도 자세한 희네의 이야기는 지나말로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희네의 목소리는 슬픈어조를 띠고 있었다. "적송자 선인께서는 저희 둘을 보시더니, 병에 대해 어머님께 설명하셨습니다. 내 병은 목숨이 위험한 것은 아니지만 맥이 끊겨 생긴 병이니, 아주 강한 약초를 써야 나을 수 있는데, 그것이 아홉구비라고 하셨습니다. 아홉구비는 신수 옆에서 자란 것이어야만 하는데 이는 세상에 둘도 없는 귀한 약으로 끊어진 맥을 이어주는 것은 물론, 사람의 힘을 두 배로 만들어주는 아주 구하기 힘든 약이라고 하셨죠. 바로 상망님이 이야기해주신 것과 같은 처방이었습니다." 그러자 상망이 체신없이 고개를 까딱까딱거렸다. "그랬군. 적송자 스승께서야 물론 아셨겠지. 나도 스승께 배운 것이 많으니 말야." "그리고 적송자 스승께서는 나래도 보셨습니다. 그때 나래는 온몸이 부풀어오르는 기이한 병에 걸려 눈도 뜨지 못했고 움직이지도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나래가 괴물이 되어간다고 수군거렸죠. 적송자 스승께선 나래의 병은 아주 위중하여 목숨이 위태로우나 별반 특별한 약은 없고, 나래 스스로 병을 이겨내야 하는데, 한 달 내로 병을 이겨내면 살 것이고 아니면 힘들거라고 하셨습니다. 일단 몸을 보해주는 약초를 많이 구해 먹이라고 하셨지요." 적송자는 나래를 보며 주신말로 말했다. "그래, 좌우간 다 나은 것 같으니 다행이군. 자네는 워낙 체질이 강건한 아이였으니 이겨낸 것일 게야." 그 말에 나래는 또 눈물을 글썽거렸다. "제가 강해서 이겨낸 것이 아닙니다. 형이...형이 나를 살려주었습니다." "희네가?" 적송자가 희네를 바라보자, 나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흑'하고 눈물을 쏟으며 외치듯 말했다. "희네 형이...! 아홉구비를 저에게 먹였습니다!" 그 말에 희네를 제외한 주신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항상 침착하기 그지없는 헌원은 겉으로는 놀란 표정을 짓지 않고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었으나, 희네에게 물었을 때는 그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깃들어 있었다. "아홉구비를 어떻게 얻었는가? 그리고 그것을 왜 동생에게...?" 희네는 조용히 이야기를 계속했다. "부모님은 적송자 선인님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알단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우연히 저는 옆에서 다 들었지요. 어머님은 나래의 병이 위중하니 그 약부터 찾아보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은 나래의 병을 고치는 약은 몸을 보하는 약이면 될 것이니 솟대 단군에게 구해 달라고 하고, 일단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를 아는, 아홉구비를 찾아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두 분은 결국 아버님의 뜻대로 하시기로 했죠." 그러자 적송자가 다시 물었다. "아홉구비가 있는 곳을 아버님이 아셨던가?" 희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시 먼 아래, 미아우족 부락 근처에 구름골이라는 산이 있고, 그곳에 신수가 산다고 했습니다. 번개범이라는 신수인데, 그 산에는 수없이 기이한 풀들이 자라고 있어 미아우족들이 가고 싶어하나, 신수가 두려워 가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었답니다." 여태껏 듣기만 하던 이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끼어들었다. "미아우족들은 원레 독이나 벌레나 약초를 좋아하니, 그런 것을 잘 알만도 하겠군." "아버님은 그 구름골에 반드시 아홉구비도 있을것이라 생각하신것이죠." 신도 울루도 한마디 했다. "그래도 신수가 있는 곳에 갈 생각을 하다니, 아버님도 대단히용기 있는 분이시군." 희네는 자세히 말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희네의 아버지 치우우레는 사울아비 스승으로 주신에서도 손꼽히는 용사지만, 굳이 그런 것을 지나인들만 있는 이 자리에서 밝힐 필요는 없다고 여긴 것이다. "아버님은 그래서 같이 갈 용사들과 부하들을 모으셨는데, 그만 주신의 높은 분께서 아버님을 못 나가게 명을 내려버렸습니다. 다른곳에 일을 처리하러 먼길을 떠나게 해버린 것이지요. 더구나 아버님과 친한 분들은 모두 그 길에 같이 나서게 명을 내려 누구하나 갈 수 없게 만들어버렸구요." 이 말에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했다. 특히 신도울루나 상망은 어리둥절해했다. "음? 아니, 그건 또 무슨 까닭인가?" 헌원이 넌지시 희네에게 물었다. "혹여 신수를 건드리면 신수가 나중에 주신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할까 봐 그런 것인가?" 희네는 놀란 듯 헌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마치 보신 것처럼 잘 아시는군요." 짐작대로라며 헌원이 말했다. "나는 전에, 나래가 태어날 때쯤 신시에서 꽤 오래 지낸적이 있다네. 신시의 상황은 대강 짐작이 가네. 어느분이 그런 명을 내렸는지도 알 것 같구먼." "어느 분이 그러셨을 것 같습니까?" "고시울률님이 그랬을 듯싶네." "어떻게 그분이라 생각하십니까?" 헌원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첫째, 그런 명령을 내리려면 높은 직위에 있어야 하네. 고시울률님의 직위는 주신에서는 한웅님 다음이네. 둘째, 그런 명령은 사실 옳다고 볼 수 없네. 주신 백성이 병에 시달리면 당연히 신수가 아니라 어떤 위험이 있어도 구해보려 애쓰거나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신수가 두려워서 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속이 좁고 자신만 아는 사람이란 뜻일세. 그런 속좁은 사람도 사실 고시울률님이 제일 아니겠는가?" 지나 사람들은 우습다는 듯 얼굴에 웃음기를 띄었다. 희네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듯했다. 한편으로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 지나인들은 주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구나. 이건... 이건 보통일이 아니다.' 헌원은 흥이 났는지 계속 이야기했다. "셋째, 자네 형제는 어린나이인데도 사울아비이며, 특히 자네는 다리가 아픈 것을 숨기고 있지만, 좌우간 몸이 불편한데도 사울아비이네. 그렇다면 자네 아버님도 높은 사울아비여야 말이 되네. 그런데 고시울률님이 사울아비들을 몹시 싫어한다는 것은 지나사람인 나도 아는 일이네. 그런 연유로 그런 명을 내릴 사람은 고시울률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일세." "그렇습니다. 틀림없으시군요. 정말 놀랐습니다." 희네는 헌원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고, 상황을 보는눈이 예리한 데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런일에는 관심없다는 듯 적송자가 희네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찌되었는가?" 희네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버님이 가실수 없게되고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도 없게 되자...어머님이...어머님이 혼자 가셨습니다...." 그 말에 모두들 놀랐다. 헌원과 적송자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주가 되물었다. "신수에게 어머님 혼자 가셨다고?" 희네는 슬픈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주는 처연한 표저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정말 대단한 분이군." 희네는 숙연하게 대답했다. "저희 어머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여인네의 몸이셨지만 남자도 당해내기 힘들정도로 용기 있는 분이셨습니다...." 이윽고 희네의 눈에서도 눈물이 방울지어 흘러내리기 시작했으나 희네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말을 계속했다. "어머님은 밤에 혼자 떠나셨기 때문에 저나 집안의 누구도 어머님이 가신 것을 몰랐다가 다음날 아침, 어머니의 말과 무기가 없어진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와 집안 종들, 그리고 가까운 아저씨들과 함께 어머님을 만류하러 구름골을 향해 떠났습니다. 저는 말을 못탔기 때문에 아저씨께서 안고 가주셨습니다. 그런데...밤에도 제대로 자지 않고 사흘을 달려 구름골 어귀에 다다랐을때...어머님을 만났습니다....그런데...어머님은...어머님은...." 모두 숨을 죽인 채 희네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침착한 희네도 이때만은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물을 줄줄 쏟으며 말을 잘 잇지 못했다. "어머님이...어떻게 신수와 싸웠는지, 혹은...어떤 방법을 쓰셨는지는...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다만...어머님은... 왼...왼팔이 이미 잘라져 없어졌으며...다리도 둘 다 부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몸에 큰 구멍이 한개도 아니고...아아..., 차마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그러나 어머님은 오른...오른손에...아홉구비 열매를...꼭...꼭 쥐고 계셨습니다. 제...제가 달려...갔을때 어머님은...말도 하실 수 없었지만...마지막으로 한 번 웃...웃으시며...아홉구비 열매를 제 손에 쥐어...쥐어주시고...숨을 거두셨습니다....," 울먹이며 간신히 말을 마친 희네는 끝내 참지 못하고 목을 놓아 크게 울었다. 나래도 덩달아 울었다. 십육기인과 헌원도 모두 숙연한 표정이었고 신도 울루는 감정에 솔직한 사람들인지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듯 외쳤다. "정말 대단한 어머님이다! 정말 대단한 분이다.!" 끽구도 중얼거렸다. "정말 어느 영웅보다도 장한 분일세. 어머니는 그토록 강한 것인가... 여자의 몸으로 자신을 돌보지 않고 혼자 신수를 상대하다니..." 그러자 헌원이 희네에게 엄하게 말했다. "그만 울라! 그토록 장한 어머님을 두었으니, 그 뜻을 받들어 더 장한 영웅이 되어야지!" 희네는 간신히 눈물을 씻으며 몸을 추슬렀다. 그리고 몇 번 심호흡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 "못난 꼴을 보였습니다." "사내라도 울 때는 당당하게 울어야 하는 법. 자네는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네. 다만 슬픔은 간직하는 것이지, 너무 내놓아도 안되는 것이야. 자, 그런데 자네는 그것을 왜 동생에게 주었는가?" 헌원이 묻자 희네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때 아버님은 명을 받아 먼 곳에 가 계셨고, 어머님마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동생은 몸이 아파 눈도 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아홉구비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약이라 했으니, 동생의 병도 고칠 것이라 믿었습니다." 적송자가 그 말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아홉구비가 동생의 병을 고친다는 말은 없었잖은가? 사실 아홉구비는 동생의 병을 고치는 데 정말 좋게 듣는다는 보장이 없었다네. 그것은 맥을 풀어주는 약이고 사람의 힘을 두 배로 만들어줄 수 있네마, 자네 동생의 병은 몸이 부어오르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희네는 딱 자르듯 말했다. "좌우간 저는 당시 아픈 동생을 두고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희네의 생각이 옳았다거나, 틀렸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머리를 잘 굴리는 사람들은 희네가 틀린 것이라 여겼다. 자신이 먼저 완쾌되어 동생의 병을 고쳐야 했으며, 요행히 동생이 나았지만 그것은 결코 아홉구비 때문만은 아니니, 결국 자신은 병을 떠안고 동생에게 영약을 낭비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감정적이고 솔직한 사람들은 희네가 한 일은 일단 자신보다 동생을 먼저 생각한 것이니, 꼭 옳은 결과를 낳지는 않았다 해도 남자답고 사람다운 일을 한 것이라 틀리지 않는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저마다 생각하는 사이, 헌원이 말했다. "그래서 자네는 아직까지도 아픈것이군."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아픈 것을 숨기는가?" "나중에 돌아오신 아버님께는... 제가 아홉구비를 먹어 나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그런 말을 했는가? 자네 아버님도 자네를 결코 잘못했다고 탓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다른 사람들도 듣고 보니 의아했다. 희네의 아버지도 그런 여걸을 부인으로 두었으니 결코 범상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희네는 자신이 나았다고 말하면서 아버지를 속여온 것일까? 그러나 희네는 그말에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여러 사정이 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거기에는 깊은 속사정이 있었다. 희네와 나래 둘만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면 어머님의 이름은 무엇이셨는가?" 갑자기 신도와 울루가 동시에 물었다. 희네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둘은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런 휼륭한 어머니의 이름이라도 알고싶어서 그러네." "아버님의 이름을 말씀드리기 곤란한 것처럼, 어머님의 이름도 말씀드리기가 힘듭니다. 죄송합니다." 전혀 예기치 않은 말을 신도 울루가 했다. "어머님을 만나게 해줄 수도 있네." 희네와 나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미 돌아가신 분을 어떻게 만나게 해준단 말인가? 그러자 끽구가 말했다. "신도 울루는 저승과 영이 통하는 선인들일세. 죽은 사람이라도 다시 만나게 해줄 방도가 있을걸세. 물론 이야기는 나누지 못할 것이네만, 모습은 다시 한 번 뵐 수 있을 걸세."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희네는 간신히 참고 고개를 저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을 다시 뵈어서 무엇하겠습니까. 아직은 은혜를 갚지도 못한 죄 많은 몸이니 미루어 두었다가 나중에 훌륭히 된 후 만나뵜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헌원이 말했다. "뜻이 장하군. 좌우간 자네들은 훌륭한 청년들이니 하늘도 보살피셔서 자네의 병도 반드시 나으리라 믿네. 내 태산에 도착하는 대로 염제 신농님을 꼭 만나뵐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줌세." 나래는 지나 말을 몰라 잘 알아들을 수 없어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은 것은 늑대선인이라는 비휴뿐이었다. 헌원은 십육기인과 희네 형제에게 말했다. "아무튼 이미 밤이 늦었고, 내일 또 길을 떠나야 하니 오늘은 이만 헤어지기로 합시다. 희네 나래여, 자네들은 태산에 도달하는대로 급히 나에게 달려오게나. 내 태산에 도달하는 대로 염제 신농님께 데리고 갈 것이네." 희네와 나래는 헌원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표시를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희네와 나래가 헌원과 십육기인의 마중을 받으며 천막을 나서는데, 천막 한편에서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래가 언뜻 보니 바로 공손발이었다. 나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방금 전까지 울었는지 얼굴을 가리면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며 희네는 생각했다. '저 아이도 전부 엿들었구나.' 희네와 나래는 이미 모든 것을 털어놓았으므로 굳이 숨길 필요가 없어 나래가 희네를 안고 말에 올랐다. 헌원과 십육기인이 따뜻하게 두 사람을 전송해주었다. 그때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비휴가 헌원에게 말했다. "헌원님. 저 둘. 범." "범이라니? 호랑이?" 비휴는 날카로운 눈매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소년들이기는 하지. 그렇다고 자네보다 나을까?" 비휴는 고개를 저었다. 원래 비휴는 늑대무리에서 자란지라 말을 잘하지 못했으나 본능적인 감각만은 누구보다 예리했다. "나, 늑대. 저 둘. 범. 아주 큰 범." 헌원은 놀랐다. 비휴는 항상 자신을 늑대로 비유했으나 자존심이 높아, 다른사람보다 자신을 낮추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가령 싸움 잘하는 자를 보고도 비휴는 자신을 늑대, 저 사람은 다람쥐나 도마뱀등으로 말하곤 했다. 그런데 비휴가 저들을 호랑이라고 하는 것은 의외였다. 허나 헌원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랑이라도 새끼호랑이 아닌가? 더구나 장하고, 훌륭한 아이들이지 않은가? 아무리 주신 사람이라고 해도..." 잠시 말을 끊다가 헌원이 다시 말을 이었다. "썩어가는 주신일지라도, 그 큰나라에 저런 영웅쯤 없겠는가? 또 저 아이들이 우리편이 되지 않는다는 법도 없지 않은가?" 그 말에는 모두 놀랐다. 적송자가 조용히 말했다. "저 아이들은 자신의 출신을밝히지 않으려 했지만, 치우 집안 아이들일세. 나는 이미 알고 있다네. 아버지는 치우우레, 사울아비 스승이고, 어머니는 미리내, 고시울률님의 막내딸일세. 주신에서 으뜸은 아니라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집안 아이들일세. 어찌 지나족인 우리편이 된다 하는가?" 그러자 헌원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 어머니를 죽게 만든 것이 외할아버지 고시울률님입니다. 우리편이 안 된다고 볼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헌원이 천천히 덧붙였다. "저들이 영웅이고 대단한 집안 아이들이지만, 조금 있으면 보금자리가 없어질 것입니다. 집 잃고 위험에 빠진새를 받아들이면 되는것이겠지요" "어찌 그러한가?" "고시울률님의 위인됨을 아시지 않습니까? 결국 딸을 죽게했으면서도, 그 원망을 오히려 아이들이나 사위에게 돌릴 사람입니다." "하지만 치우우레는 여전히 사울아비 스승이잖습니까?" 끽구의 말에 헌원은 고개를 저었다. "희네 어머니의 죽음에 원망을 사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사위를 우대하고, 아이들도 사울아비로 만드는 것을 반대하지 않은 것뿐일세. 아직 고시울률은 아이들이 저런 영웅인 것을 모르고 있어. 끽구 자네, 아까 나래가 자네와 겨룰 때 힘을 다 쓰지 않은 것을 로르겠나?" "조금... 그런 느낌은 받았습니다만..." "내 생각이 맞다면 저 아이들은 지금 남에게 제 능력을 다 보이지 않고 있어. 지나치게 이름이 날 것을 겁내 하는 것이야." 그 말에 적송자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정말 그럴까?" "닥친 자가 가장 잘 알겁니다. 고시울률이 아이들이 영웅으로 자라는 것을 알아보십시오. 아이들이 나중에 복수하지 않을까 무서워서 미리 싹을 잘라내려 할 겁니다. 그래서 아이들도 눈치채고 가급적 틈을 보이거나 구실을 주려 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럼 왜 아픈 것을 숨기는 것이지?" "희네가 아프면, 그것도 구실이 됩니다. 신수 때문에 저주를 받았네 어쩌네 소문을 퍼뜨리면, 결국 그 집안은 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 아이들이 딱하지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겁니다." 그 말에 적송자는 한숨을 쉬었다. 야비한 일이었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내 인간들 세상으로 다시 나오는 것이 아니었어. 못 볼 꼴을 너무 많이 보는 것 같네." "그래도 할 수 없지요. 이런 더러운 세상이니 힘으로라도 깨끗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헌원과 십육기인은 각자 헤어져 잠자리에 들어갔다. 헌원의 막사 곁에 있는 공손발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 형제나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던 나래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천하만 생각하고 모든 것을, 그 가엾은 형제마저도 이용하려 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점점 깊어져 갔기 때문이었다. 한편, 희네와 나래는 막사로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래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님, 너무 이야기를 많이 한 것 아니야?" " 넌 헌원을 모르겠니? 내가 말을 안 하고 숨기려 해도 그는 이미 다 안다." "그러면서 왜 숨기려 했지?" 그러자 희네가 가볍게 대답했다. "그래야 헌원이 우리를 작게 보거든." "그게 무슨 뜻이야?" "너도 생각해보려무나. 헌원은 틀림없이 우릴 도와줄거다. 우릴 맞아들이려고." "우릴 맞아들이다니?" 희네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보렴." 그러다가 희네는 다짐하듯 말했다. "나래야, 우리의 맹세를 잊지 말자. 절대 잊지 말자. 우리는 반드시... 반드시 해내야 한단다..." 나래는 희네가 자신에게 아홉구비를 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자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가슴이 후끈 달아올랐다. 희네는 결코 감정적으로 나래에게 아호구비를 준 것이 아니엇다. 그때 희네가 나래에게 다짐한 맹세가 다시 가슴을 울렸다. -나래야. 이 아홉구비는 내 다리를 낫게도 하지만, 사람의 기운을 두 배로 만들어준다고 한다. 우리는 할 일이 많아. 우리 이야기했지? 세상에서 가장 잘 싸우는 사울아비가 되고 세상을 모두 편안하게 만들자고! 나는 머리로 싸우는 사람이니 힘이 더 세져도 별것 아니다. 너는 원래가 장사니까, 힘이 두 배가 되면 정말 세상 제일이 될 거다! 희네는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나래에게 이야기했다. 그렇다. 그때 나래도 눈물을 흘렸다. -나래야, 우리는 형제다. 힘을 합해야 해. 어머니의 목숨과 바꾼 이 아홉구비! 이것을 내 다리 따위를 낫게 하는 데 쓸 수는 없구나. 이것은... 하늘이 내리신 것이다! 나는 여기 모든 것을 걸겠다. 너는 네 힘으로 나아라! 어머님의 목숨을 걸고 나아라!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가는 용사가 되어라! 나래는 형의 큰 뜻을 느꼈고, 비몽사몽 중이었지만 스스로 손을 뻗어 아홉구비를 받았다. 그리고 그때, 나래는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형님! 나...난...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형의 다리가 되겠어... 형 대신 달리고... 싸우겠어... 형의 큰 뜻을 내가 싸워서 열겠어... 형제는 완전하게 마음이 하나로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것은...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만큼 크고 넓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때, 보통의 사울아비에서 아주 큰 뜻을 지닌 사람으로 변했다. 나래는 희네가 부르는 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나래야, 무슨 생각하니?" "어..., 아냐. 그냥 옛날 그때의..." 희네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생각을 했다." "응..." "나래야, 이제 우리는 고생을 많이 해야 할 것 같구나." "왜?" "아무리 생각해봐도 헌원은 대단한 사람이야. 내 생각보다 몇 배나 더..." "대단한 사람인 것은 틀림없어." "대단할 뿐만 아니라, 무서운 사람이야." 그러면서 희네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래가 뚜벅 물었다. "그 사람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 건 아닐까?" "아니야. 절대로 도와줄 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염제 신농을 만나게 해줄 거고, 안 된다면 카린의 쑹앙마이와도 만나게 해줄 거야. 허나..." 그러면서 희네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난 다음 그가 우리를 위험에 빠뜨릴 거야. 몸조심하자." "무슨 소리야?" 나래가 의아해하며 묻는데 희네는 눈을 찡긋했다. "나래야, 너도 잘 생각해보렴. 너는 결코 둔하지 않아. 남들이 다 너를 둔하다 생각하니 너도 스스로 그렇다고 속고 있어. 하지만 아니야. 너도 나 못지 않아. 그 길을 스스로 찾으렴." 나래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희네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다 왔다. 날 내려놔." "아..., 응." 나래가 희네를 내려놓자마자 두 사람은 자신들의 자그마하고 서둘러 친 천막으로 들어왔다. 자리에 나란히 눕자 희네가 웃으며 나래에게 인사를 건넸다. "늦었구나. 잘 자라, 내 아우." 나래도 담담하던 표정을 거두고 보기 좋게 웃으며 말했다. 항상 같이 붙어다니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항상 느껴지는 흐뭇한 순간이었다. "잘 자. 형님." 보돈차르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한웅의 행렬은 남쪽으로 나아갔다. 이미 지나 족의 땅에 들어온 지도 한참 되었지만 헌원이 앞장서서 길을 잘 열어서인지 별다른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나가는 길에 있는 지나 족 부락들은 언제나 한웅의 행차를 환대하며 꽃을 뿌리고 노래를 불렀으며 맑은 물과 과일이나 농사지은 것, 사냥한 고기 등을 바쳤다. 어떤 곳에서는 술을 바쳐 희네와 나래도 한 모금 얻어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지나족의 술맛은 형편없었다. 미아우족의 술에 비하면 그야말로 맹물 같았으며 주신 술에 비해서도 맛이 떨어졌다. "이게 무슨 맛이지? 어떻게 만든 거야?" 나래가 투덜거리자 희네가 웃으며 말했다. "아마 수수로 만들었나 보다. 어떤 곳에서는 여자들이 수수를 잘근잘근 씹어 뱉어서 술을 담근다는 말을 들었는데, 여자들이 씻어 만든 술 같은걸." 나래는 그 말을 듣고 언짢은 듯 술을 담은 토기잔을 내려놓았다. "으음..." 그것을 보고 희네가 덧붙였다. "여자 중에서도 팍삭 늙은 할망구들이 만든 술 같다. 참 맛없구나. 너도 그러냐?" 그 말에 나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맛없어." 희네가 깔깔 웃으면서 나래를 놀렸다. "전에 누구냐, 그 공손발이 씹어서 만든 술이라면 아마 네가 모조리 다 마시겠지? 술이 말 오줌 같아 아무도 안 마셔도 너는 혼자 신나서 다 마셨을 거다. 안 그래?" 나래는 그 말에 뺨을 붉히면서 피식 웃었으나 대꾸는 하지 않았다. "원 녀석이. 놀리면 받아치기라도 해야지. 네가 그러면 놀려먹는 재미도 없잖느냐. 그러지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봐. 심심하다." "내가 뭘." "지루해서 그래. 이 길이 언제나 끝나나?" 사실 지루하다고는 하나, 지나인의 땅으로 들어서면서 한웅을 경호하는 사울아비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아무리 지나족이 주신의 영역하에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말을 잘 듣지 않는 부족이다. 한웅님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며, 만에 하나의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을 잘 막아내는 것이 사울아비들의 임무인 것이다. 덕분에 치우우레도 몹시 바빠서, 희네와 나래를 만날 틈조차 없었다. 태산 회의에 참석하는 부족들은 매우 많았으며, 태산이 가까워질수록 한웅의 행렬은 많은 부족장들이 내려오는 행렬과 만나게 되었다. 대부분의 북쪽 부족은 주신을 받들어 으뜸으로 삼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레 한웅의 행렬 뒤를 따라 태산으로 향했다. 때문에 한웅의 행렬은 점점 규모가 커지고 길어졌다. 그러므로 사울아비 스승이자 한웅의 경호를 책임지고 있는 치우우레는 하루에도 서넛씩이나 되는 부족장들과 만나야 했으며, 그들의 행렬도 돌아보아야 했다. 믿을 수 있는 부족이라도 통솔해서 대열을 맞추어야 했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리는 부족은 따라오더라도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중간중간에 사울아비들을 박아 놓아야 했으므로 치우우레는 밤에도 잠을 자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미 따라오는 부족의 집단은 사십 개에 이르렀다. 스무 명 정도의 작은 인원이 온 부족에서부터 키탄족 같은 큰 부족의 경우는 사백 명이 넘는 인원인데 주신의 행렬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희네는 결심한 듯 말했다. "그래, 나래야. 오늘밤부터는 다른 부족 막사에 놀러가자." "왜?" "다른 부족들 사는 모습을 구경해두는게 좋을 것 같아." "하지만 아버님이 다른 부족과 말썽 일으키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 회의 때까지는 항상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한다구." 치우우레는 사울아비들에게 다른 부족들과 아예 어울리지도 말라고 엄명을 내린 바 있었다. 사실 아무리 사이가 나쁘지 않다 해도 다른 부족들과 섞이다 보면 이런저런 말썽이 일어날 소지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술에 취해서건 여자 때문이건 입을 잘못 놀려서건 말이다. 그래서 아예 치우우레는 다른 부족들의 막사에는 가지도 말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아울러 주신 사울아비뿐만 아니라 각 부족들끼리도 서로 만나지 말라고 일러둔 바 있었다. "여러 사람을 알아 두는게 뭐 나쁘겠어? 더구나 이렇게 모였을 때 구경하지 않으면 언제 구경하느냔 말야." "하지만 아버님께 혼나..." 나래가 주저하는데도 희네는 고집을 피웠다. "그럼, 나 혼자라도 간다." 그러자 나래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아이구, 안 돼. 형님. 으음..., 알았어. 같이 가자구." "하하, 그래야지. 그런데 어느 부족부터 만나본다?" 한웅의 행렬을 따르는 종족은 수도 없었으나 대강 다섯 부류였다. 늑대같이 사납고 거칠지만 또 우직하고 정이 많은 키탄(거란)족, 하나같이 날렵하고 말을 잘 타며 눈이 밝은 몽골족, 양만 치면서 검소하고 세상을 편하게 사는 타타르족, 반은 농사짓고 반은 양을 치며 주신과 가까운 마갸르(말갈)족, 그리고 미아우족이었다. 각각의 족속도 많은 부족으로 나누어 있어 부족장이 여러 명이었다. 키탄 족의 경우 여섯 명의 부족장이 왔고 몽골족은 다섯 부족장, 사람 수가 많은 타타르족은 여덟 부족장이 참여했다. 마갸르족은 아홉 명의 부족장, 미아우족은 다섯 명의 부족장이 왔다. 물론 이들은 각 부족장들 중에서 비교적 가까운 부족장들 중 대표로 뽑혀서 온 사람들이었으니 부족의 수효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다. 키탄족만 해도 대강 서른 개가 넘는 부족들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는 그 서른 개의 부족이 각각 열 개에서 많으면 백 개 이상의 작은 부족 무리를 거느린 큰 부족을 말한다. 이외에도 한웅의 행렬과 만나지는 않았지만 투르크족도 올 것이었다. 서쪽과 남쪽의 족속들은 길이 달라 아직 마주치지 않았으나 동쪽과 북쪽의 대표적인 족속들만 해도 이토록 많았다. 각 족속들은, 가령 몽골족들이라 해도 옹구트니 타이추트니 자다라트니 하는 이름을 가진 부족들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그 자체 내에서도 서로 싸우고 다투며 투쟁했다. 키탄족이나 마갸르족도 마찬가지로 그 안의 수많은 부족이 때로는 서로 돕고 때로는 서로 싸웠다. 그리고 서로 다른 부족들끼리도 물론 싸우고 다투었다. 키탄족은 타타르족과 항상 싸워왔고 타타르족은 몽골족과 싸워왔다. 물론 키탄족과 몽골족도 많이 싸웠다. 마갸르도 미아우와 싸워왔고, 키탄과도 싸워왔다. 미아우도 키탄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주신은 이들 족속들간의 싸움에는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주신의 힘ㅇ르 알고 있었기에, 간혹 주신이 중재하는 일은 항상 받아들였으며 주신이 가장 힘이 강성한 것을 알았기에 주신을 으뜸으로 쳤다. 특히 마갸르족이나 미아우족, 키탄족 등은 주신과 상당히 친한편이었다. 원래 지나족도 주신의 연방이나 다를 바 없었으나 지금은... "미아우족은 지난번에 툰툰을 만나보았으니 이번엔 몽골족을 만나러 가보자. 알아볼 것도 있고..." 희네가 결정을 내리자 나래가 물었다. "뭘 알아보아?" "말 타는 법에 대해 물어보려구." 희네는 말등에 실어두었던 짐보퉁이를 툭 쳤다. 희네는 꼼꼼하여 이미 많은 부족을 만날 작정을 하고 선물로 줄 물건들을 많이 가지고 왓다. 대부분은 활이나 구리 물건이었따. 원래 구리 물건은 주신에서도 얻기가 그리 쉽지가 않았으나 희네는 신시 제일의 대장장이인 불쇠 할아범과 퍽 친했기에 구리 물건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그래도 아주 좋은 물건만을 얻은 건 아니었다. 지난번 헌원에게 바치려고 한 뿔활과 구리 불건들은 자신이 쓰던 가장 좋은 물건이었지만, 짐보퉁이에있는 것은 보통의 구리 물건과 무기들이었다. 희네와 나래는 희네의 말 한 필만 끌고 몽골족들의 막사로 향했다. 몽골족의 막사는 구별하기가 훨씬 쉬웠다. 수많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이 있는 부족이 있긴 했지만 몽골족의 말수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한눈에 어느 부족의 막사인지 알아 볼 수 있었다. 가령 양이 가장 많은 부족은 타타르족이었다. 그들은 야외에서 모든 것을 얻었기 때문에 항상 양과 염소를 끌고 다녔다. 각 부족들도 동물에게 풀을 먹이고 해야 했기에 상당히 넓은 지역에 걸쳐 막사를 쳤다. 그래서 희네와 나래는 하룻밤에 여러 부족을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하나만 골라서 방문해도 잠잘 시간이 빠듯했다. 희네와 나래는 그중 가장 커 보이는 몽골족의 막사로 들어서면서 지나가는 몽골인에게 물었다. 희네는 몽골어를 집의 종인 눙카에게 배워 아주 약간 했기에 좀 힘들기는 했어도 그 사람과 말이 통했다. "나, 주신의 사울아비 희네다. 여기는 몽골의 어느 부족 막사인가?" 젊고 다부져 보이는 몽골인의 희네를 보며 태연히 대답했다. "보돈차르족의 막사다." "보돈차르족? 처음 듣는다." 그러자 젊은 몽골인이 대답했다. "새 부족이다. 하지만 우리는 가장 강한 부족이 될 것이다." 희네는 흥미가 당겨 몽골인에게 물었다. "부족장을 만날 수 있는가?" 젊은 몽골인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보돈차르님은 누구든 만나신다. 저 안쪽으로 가라." 희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래와 함께 막사 안쪽으로 갔다. 모든 몽골인들이 말을 돌보고나 또는 고기를 굽고 있었다. 다시 몇 번 보돈차르를 물어보다가 희네는 드디어 보돈차르를 발견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기를 굽고 있던 보돈차르는 희네는 언뜻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보돈차르다. 너는 누구냐?" 희네는 보돈차르를 보고 흠칫했다. 보돈차르는 부족장인데도 기껏해야 서른 살이 될까말까 한, 젊고 키도 그리 크지 않은 남자였다. 더구나 부족장인데도 옷차림도 수수하여 일반 몽골인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고직접 고기를 굽고 있다니, 아무래도 아무래도 부족장 같지 않았다. "나는 주신의 사울아비 희네다. 당신이 이 부족의 족장인가?" 희네가 묻자 보돈차르는 고기를 계속 구우며 대꾸했다. "주신? 그렇다. 왜 나를 찾는 것인가? 좀 들겠는가?" 희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몽골인 같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태연한 분위기가 남다른 것 같아서였다. 희네가 보돈차르곁에 앉자 저만치 있던 나래가 다가와서 희네 옆에 앉았다. 보돈차르는 놀랍게도 주신 말로 말했다. 다소 서툴지만 주신 말을 하는 몽골족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저 친구는?" "내 아우인 나래다." 나래가 보돈차르에게 인사를 건넸다. "주신의 사울아비 나래다. 만나서 반갑다." "나는 보돈차르다. 보돈차르족의 족장이다." "족장? 아 미안합니다. 반말을 해서..." 나래는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보돈차르는 웃지도 않고 구운 고기를 자르며 말했다. "족장이기는 하나, 형제들과 다를 것이 없다. 주신은 그런 것을 따지는 모양이지만, 몽골인은, 특히 나는 따지지 않는다. 나도 젊으니 편하게 이야기해라. 너희는 내 부하가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서 보돈차르는 잘라낸 구운 양고기를 희네와 나래에게 내밀었다. 가장 좋고, 잘 익은 부위였다. 희네와 나래가 아무 말 없이 고기를 들고 먹자 보돈차르는 자신의 고기도 잘라냈다. 거칠고 힘줄이 많은 부위였다. 그러고 나서 보돈차르는 다른 젊은이들을 불러서 나머지 고기를 나누어 먹도록 했다. 젊은이들 중 하나가 양젖이 담긴 가죽주머니를 내밀었다. 희네도 말없이 양젖을 마시고 나래에게 건넸다. 나래는 누린내 나는 양젖을 좋아하지 않아서 한 모금만 마시고 도로 돌려주었다. 보돈차르는 힘주어 자신의 질긴 고기를 먹으며 희네에게 물었다. "아이락, 하겠는가?" 몽골인들은 말젖을 발효시켜 술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아이락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다른 부족들은 그것을 마실 수가 없었다. 특유의 기이한 맛 때문이었다. 그러나 희네는 쾌히 말했다. "좋다!" 보돈차르는 다시 부하에게 마유주가 담긴 주머니를 가져오게 했다. 희네는 자신의 짐에서 구리로 만든 잔 두개를 가지고 와서보돈차르 앞에 하나를 놓고 하나는 자기 앞에 놓았다. 보돈차르는 씩 웃으며 희네의 잔에 마유주를 따랐고 자신의 잔에도 따랐다. 희네가 잔을 들며 말했다. "내 동생은 많이 마시니, 주머니째 주어라." 보돈차르가 웃으며 가죽주머니를 나래에게 건네주었다. 순간 마유주의 냄새에 놀란 나래가 희네에게 물었다. "왜...?" 희네가 나래에게 술쩍 말했다. "다 마셔." 나래도 분위기를 눈치챘다. 형은 이 보돈차르라는 남자가 마음에 든 것이다. 그리고 나래도 이상하게 이 사람이 싫지 않았다. 나래는 눈을 딱 감고 마유주 주머니를 통째로 들이켜 단숨에 비워버렸다. 여러 모금으로 마시면 역한 냄새가 더할 것 같아 단숨에 마신 것이다. 그것을 보고 주변의 몽골인들은 놀라면서 박수를 쳤다. 나래는 입가를 쓱 닦으며 호기 있게 말했다. "좋구나!" 사실 속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나래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몽골인들은 스스럼없이 웃으며다시 박수를 쳤다. 그리고 뭐라고 떠들어댔는데, 대단히 호탕한 남자라고 하는 듯 했다. 보돈차르가 감탄한 듯 말했다. "대단하군, 대단해. 당신들은 좋은 손님들이군." 나래가 희네에게 슬쩍 물었다. "이렇게 퍼마셔야 좋은 손님인 거유?" 그러자 희네도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몽골사람들은 호탕하거든. 그리고 술을 마셔야 진짜 손님이라 여기는 풍습이 있지." "다음부턴 형님이 마셔." 나래가 조금 불만스럽게 말했지만 희네는 웃으면서 보돈차르를 쳐다보았다. "여기 온 것은 첫째로 좋은 벗을 사귀고 싶어서이고, 둘째는 몽골사람들의 훌륭한 말 타는 기술을 배우고 싶어서이다." 보돈차르는 희네와 나래가 좋은 손님이라 믿어서인지 내내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주신 사울아비들도 말을 잘 타지 않는가?" "솔직히 몽골 사람보다는 못하다. 그리고 나는 조금 특별한 것을 배우고 싶다." 희네는 나래에게 말에 얹혀 있던 등짐 중 하나를 통째로 가져오게 하여 보돈차르가 보는 앞에서 풀도록 했다. 그 안에는 열 개의 뿔활과 열 묶음의 화살이 들어 있었는데 뿔활은 희네가 직접 쓰는 것만은 못해도 상당히 좋은 물건이었다. 희네가 그것을 가리키며 주변의 몽골인들에게 선물이니 나누어 가지라고 하자 몽골인들은 그제야 좋아서 함성을 질렀다. 주신의 뿔활은 작지만 세상에서 가장 좋은 활이었다. 감격에 겨운지 보돈차르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 훌륭한 선물이다. 주신 사울아비 희네여, 말 타는 법 하나를 배우려고 주는 선물치고는 너무 값진 것이다." 몽골인들은 활을 들어 당겨보면서 활의 힘과 탄력이 대단한 것을 알고는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감탄했다. 그중 한 사람이 보돈차르에게 활 한 개를 바치자 보돈차르가 웃으며 말했다. "난 괜찮다. 네가 가져라." 그러자 희네가 나섰다. "말 타는법을 배우려고 준 선물이 아니다. 당신에게 준 선물이다." 보돈차르는 의아한 듯했다. "나에게?" 보돈차르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다시 물었다. "나에게는 준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왜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건가?" "당신은 부족장이면서도 몸을 꾸미지 않고, 부하들과 같이 고기를 굽고 식사를 준비한다. 그리고 좋은 부분을 떼어 남에게 주고, 가장 질긴 것은 자신이 먹는다. 세상에 그런 부족장은 그리 많지 않다. 내가 당신에게 선물을 주는 것보다, 당신 부하들에게 선물을 주는 것을 당신은 더 좋아할 것이다. 그러니 당신에게 준 선물이다." 갑자기 보돈차르가 호탕하게 껄걸 웃었다. 그러고 나서 희네에게 다가와 어깨를 탁 쳤다. "희네라고 했나? 당신은 대단하군. 남의 마음을 그토록 잘 알기는 쉽지 않지." 희네는 보돈차르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처음 보지만,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다.당신은 아마 몽골 제일의 부족장이 될 것이다." 보돈차르는 갑자기 엄숙한 얼굴로 희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몽골 제일의 부족장이 될 것이다. 나는 맹세했다." 그러면서 보돈차르는 조금도 꺼림이 없이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내 어머니, 알란고아에게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도분멜겐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돌아가신 후에 태양으로 변해서 나를 낳았다. 그 때문에 나는 형제들에게 의심을 받았으며, 유산도 받지 못했다. 열다섯 살에 가진 것 없이 벌판을 홀몸으로 떠돌면서도 나는 살아남았고, 부족을 세웠다. 희네여, 나는 푸른늑대의 직계자손이다." 희네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몽골족은 자신들이 푸른늑대의 자손이라 믿었다. 푸른늑대의 직계자손이라는 것은 스스로를 영웅이라 여긴다는 뜻이었다. 희네가 진지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보돈차르는 영웅이다. 나는 보돈차르 당신을 믿으며, 당신의 벗이 되고 싶다." 나래도 한마디 거들었다. "나도 당신이 대단하다 믿는다." 그러자 보돈차르 옆에 서 있던 눈빛이 형형한 젊은이가 주신 말로 외쳤다. "당신들은 몽골 사람이 아닌 손님이니, 족자의 안다가 될 수 없다." 몽골인들은 벗을 '안다'라고 불렀는데, 안다는 벗을 넘어서 결의형제가 된다는 의미가 있었다. 순간 나래는 그 젊은이의 눈빛에서 은근한 도전의 의미를 보았다. 말로 대화하기는 희네가 제일이지만 말없는 눈빛을 알아보는 것은 나래가 아주 빨랐다. 나래 역시 호기가 대단한지라 즉시 되받았다. "나는 족장의 안다가 될 것이다. 만약 내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나를 시험해도 좋다." 그 말에 젊은이가 눈짓을 하자 주변의 몽골인들이 재빨리 주변을 치웠다. 그 젊은이가 장황하게 말했다. "족장의 안다가 되려면 우리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존경을 받으려면 세 가지 시험을 받아야 한다. 용사로서 말타기, 활쏘기, 씨름 세가지에서 우리를 이기거나, 우리고개가 저절로 끄덕이도록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이미 늦은 밤이고 당신들은 우리에게 좋은 선물을 주었으니 말타기 시험은 넘어간 것으로 하겠다. 그럼 활 실력을 나와 겨루자." 나래는 고개를 끄덕이며 호기있게 되받았다. "좋다. 내 활이 좋다고 할지도 모르니, 당신들의 활을 가지고 똑같이 겨루겠다." "당신 입으로 한 말이니 후회하지 마라." "걱정 말고 가져와라." 젊은이는 '흥'하고 웃으며 활을 가져오게 했다. 몽골인 두 명이 두 개의 활을 가져왔다. 몽골 활은 작고 둥근 것이 보통인데, 이 활은 엄청나게 커서 사람의 키만 했고 잘 말린 물푸레나무로 만든 것이라 탄력이 상당했다. 젊은이는 그 활을 잡더니 서슴없이 화살을 겨누어 휙휙휙,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르기로 어둠 속으로 세 발을 내쏘았다. 희네가 나래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저 사람, 어디로 활을 쏜 거냐?" 나래는 화살이 날아간 어둠 속을 뚫어지게 보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저 사람은 저 앞 막사 꼭대기의 나뭇가지를 쐈어. 막사 위에 나뭇가지가 세 개 삐져나와 있었는데 그걸 모두 맞혀 잘랐어." 그 말을 듣고 젊은이는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나래에게 물었다. "그걸 보았는가?" "쏘아 맞힌 당신도 있는데 보기만 한 내가 뭐 대단한가?" 젊은이는 그래도 믿어지지 않는 표정이었고, 보돈차르마저도 놀라는 얼굴이었다. 사실 이 젊은이는 아주 드물게, 태어날때부터야안을 지니고 있어서, 어둠 속을 밝은 곳처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더구나 활에 있어서는 보돈차르족만이 아니라 활 잘 쏘는 몽골족 전체에서도 손꼽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러니 나래가 단번에 그 사람이 노린 곳을 알아내자 놀랄 수밖에. 이런 일은 이제껏 수많은 사람을 만난 보돈차르나 그 젊은이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내게도 활을 달라." 나래가 말하자 다른 몽골족이 활을 내주었다. 나래는 화살 하나를 빼들었다. "나는 저 사람 같은 재주는 없으니 그냥 저 앞의 나무를 맞히겠다." 나래가 말한 나무는 나래가 선 곳에서 백 보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물론 먼 거리였고 그것을 맞히기만 해도 상당한 명궁이겠지만, 이 젊은이가 보여준 기술에 비하면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기술이었다. 희네와 보돈차르는 나래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몰라 의아해했다. 그러나 희네는 나래를 믿었다. 자신의 생각을 나래가 믿듯, 희네는 나래의 실력이나 이런 겨룸에서의 임기응변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다. 나래는 큰 활과 화살 다섯 개를 들고 그 나무까지의 거리를 재는 듯 무척 뜸을 들였다. 그때 몽골족 젊은이가 빈정거렸다. "어서 쏘게나. 빨리 쏘는것도 중요한 거야. 싸움에서 언제 거리를 재겠는가?" "어, 그렇군. 충고 고맙네." 그러면서 나래는 고개를 몽골족 젊은이에게 돌린 채로 무심코 그러는 것처럼 활을 잡아당겼다. 그 순간, 그 크고 강하던 활이 나래가 별로 힘을 주지 않은 것 같은데도 시위가 끊어지며 뚝 부러지고 말았다. 그것을 보고 젊은이와 몽골족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 활은 무척 크고 강한 것이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시위나 활이 둘 다 끊어졌다는데 있었다. 강한 힘으로 당기면 시위가 끊어지거나 활이 부러지는 일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둘 다 끊어지는 일은 이제껏 없었다. 그것을 보니 나래의 힘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알 수 있었다. "어, 미안하군. 이게 부러졌네." 나래는 부러진 활 조각을 허공으로 휙 집어던지며 말했다. "빨리 쏘는게 중요하다 했지?" 나래는 번개같이 화살을 쥐었던 손을 세 번에 걸쳐 떨쳐냈다. 놀랍게도 활에 매기지도 않은 화살 한 대가 쏜살같이 허공을 날아 아까 나래가 말했던 나무에 '탁'박혔다. 그리고 허공에 던졌던 둘로 부러진 활조각이 저만치에 툭툭 떨어졌는데, 기가막히게도 각각의 활조각에 화살이 두 대씩 박혀 있었다. 나래는 활의 힘을 빌릴 것도 없이, 화살을 표창처럼 던져, 동시에 나무와 허공에 던진 활의 가느다란 조각에 화살을 박은 것이다. 엄청난 나래의 능력 앞에 몽골족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입조차 열지 못했다. 기세 등등했던 몽골족 젊은이도 기가 막힌 듯 입을 딱 벌리고 얼이 빠져 있었다. 보돈차르 역시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사실 희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듯이 희네가 다급하게 말했다. "너무 그럴 것 없다. 나래, 너는 활을 쏘라고 했지, 누가 던지라고 했니?" 나래가 머리를 긁적이며 싱긋 웃으며 뭐라 말하려 하는데, 갑자기 몽골인들이 우레같은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희네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갈채를 보내는 것이다. 기세 당당하던 젊은이도 나래에게 다가와 고개를 깊이 숙였다. "당신은 정말 대단하다. 정말 처음보는 영웅이다. 당신에게 건방지게 굴었던 것 사과한다." 나래는 젊은이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나야말로 건방지게 굴어서 미안하다. 당신의 솜씨도 대단하다. 솔직히, 나보고 당신처럼 활을 쏘라고 한다면 나는 어둠 속에서 뭘 맞힐 자신이 없다. 그래서 잔재주를 조금 부린 것이다." 그 말에 젊은이가 정색을 했다. "그게 잔재주라고?" 나래는 뭐라 대꾸하기가 뭣해서 우물쭈물하다가 그만 호탕하게 크게 웃어버렸다. 젊은이도 따라 웃었다. "나는 보돈차르족의 치베(철별)다. 활에는 자신 있었는데..." 나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다. 충분히 자신 있을만한 실력이다. 당신도 대단한 용사다." 보돈차르가 웃으며 나섰다. "이렇게 훌륭한 영웅들을 만나게 되다니 정말 영광이다. 나, 보돈차르가 감히 당신들 형제와 안다의 의식을 하고 싶다." "우리로서도 영광이다. 몽골제일이 될 젊은 부족장 보돈차르와 안다가 된다니." 희네의 말에 보돈차르가 웃으며 되받았다. "아직 몽골제일이 된 것은 아니다." 희네는 그 말에 딱 잘라 말했다. "당신이 아니면 누가 되겠는가?" 그때 나래가 약간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세 번째 시험은? 나와 씨름을 할 사람은 누구인가?" 그 말에 몽골인들은 모두 '와'하고 웃었다. 치베도 한참을 웃다가 나래에게 말했다. "나래여 당신의 그 텡그리(몽골인들이 믿는 천신)같은 힘을 보았는데 누가 당신과 겨루고 싶겠는가? 목뼈가 부러질 것이 뻔한데 누가 나서겠는가? 더구나 이미 족장이 당신들을 인정하지 않았는가? 충분하다! 충분해!" 그때서야 나래도 '하하'웃었다. 희네와 나래, 보돈차르는 셋이 벗이 되는 안다 의식을 치렀다. 결의형제가 된 셈이지만 위아래를 정하지는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족장이자 나이도 좀 많은 보돈차르가 위가 되어야 했지만 부족이 다르기에 정하지 않는 것이 낫다 생각한 것이다. 셋은 짐승을 잡아 불에 던져 서로의 피를 내어 나누어 마신 후 하늘에 맹세했다. 안다 의식에 정해진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각자 엄숙하게, 하늘에 이제 서로가 벗이 되었음을 고하는 맹세의 말을 했다. 원래 맹세의 선물도 교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이미 보돈차르는 선물을 받았으니 되었다고 말했다. "자네들은 안파견 한님을 믿고, 우리는 텡그리를 섬기자만 각자의 신에게 맹세했다. 이제 앞으로 우리는 영원히 안다이니, 자네의 벗은 나의 벗이고 자네의 원수는 나의 원수이다. 비록 부족은 다를지라도 서로 영원히 벗으로 지내게 되기를 바란다." 희네와 나래는 그러마 하고 약속했다. 보돈차르의 말이 계속되었다. "광야를 홀로 헤매며 나는 굶주림에 지쳤다. 그때 나는 우연히 다친 매를 잡았는데, 그 매를 잡아먹지 않고 길들였다. 그러자 그 매는 끝없이 나를 위해 사냥을 해주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매를 잡아먹으면 한끼 배가 부를 뿐이지만, 매를 길들이면 영원히 배가 부르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이 매 길들이기를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비로소 사람들을 모을 수 있었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여 족장이 되었다..." 희네는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돈차르는 실로 배울점이 많은 훌륭한 사람이었다. 특별히 힘이 세지 않아도, 그의 마음씀씀이나 생각의 깊음은 보통사람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지금 보돈차르가 희네에게 해주는 조언도 대단히 뜻깊었다. 보돈차르는 부하가 가져온 두꺼운 가죽장갑을 손에끼고 자신의 매를 얹었다. "희네, 나의 안다에게 내 매를 선물한다. 내말을 꼭 기억하라. 자네도 대단한 영웅이니, 반드시 사람들을 길들일 때가 올 것이다." 보돈차르는 희네의 손에 가죽장갑을 끼어주고 매를 넘겨주었다. 그러자 희네는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화답했다. "보돈차르여, 당신의 가르침에 감사한다. 나도 뜻이 있다. 사람들을 많이 모아야 하고 많은 벗을 모아야 한다. 사람을 길들이라는 충고, 정말 깊이 새겨두겠다." "자네도 뜻이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말타기를 배우려고 굳이 우리 막사로 올 필요가 어디있겠는가? 분명 사람을 만나러 온 것이지." 보돈차르가 웃으며 말하자 희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영웅이 영웅을 알아본다고, 희네나 보돈차르를 알아보는 것처럼 보돈차르도 희네를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이미 자네와 안다이니, 자네가 힘이 필요할 때는 언제나 도울 것이다. 보돈차르족은 아직 작은 부족이지만, 이제 자네의 부족이나 마찬가지이다." 잠시 보돈차르는 치베와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 난 후 보돈차르는 나래에게 말했다. "나래, 자네는 이미 힘으로도 누구도 당할 자 없는 영웅이다. 내 부탁이 하나 있다. 치베가 자네와 함께 가게 해달라." "음?" "치베는 우리 보돈차르족에서 활쏘기와 말타기에는 음뜸가는 용사이다. 더구나 주신말도 할 줄 안다. 앞으로 치베는 자네들이 큰 뜻을 이룰 때까지 나를 돕듯 자네들을 도울 것이다. 자네들은 치베에게 몽골족의 기술을 배우고, 자네들의 기술을 치베에게 가르쳐라. 그리고 때가 되었다 생각되면 그때 돌려보내 달라." 나래가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희네가 대신 나섰다. "치베도 안다로 맞아 같이 다니도록 하겠다." 그 말에 치베가 뛸 듯이 기뻐했다. 보돈차르와의 만남은 이것으로 일단 끝났고 희네와 나래는 치베를 데리고 막사로 돌아왔다. 먼 훗날의 일이지만 치베(철별)는 몽골족의 영웅이 된다. 그로부터 몽골인들은 활 잘 쏘는 이를 가리켜 '치베'라고 말하거나 그 이름을 붙이게 된다. 그리고 보돈차르는 자신의 부족을 몽골족 제일의 부족으로 만들고 몽골제일의 영웅이자 시조로서 영원히 몽골인들의 마음에 새겨지는 업적을 쌓게 된다. 삼천구백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후 보돈차르의 후손 중 천하를 제패하는 자가 나오게 되는데, 그가 바로 징기스칸이다. 그리고 징기스칸이 평생 마음속으로 가장 존경하고 숭배했던 이가 바로 시조인 보돈차르였다. 황하를 건너며 그후에도 희네와 나래는 다른 부족들의 막사를 찾아가 부족장들을 만났지만, 보돈차르 같은 영웅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대부분의 부족장들은 거만하게 굴었고, 조금이라도 기분이 틀어질 경우에는 무리하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했다. 허풍쟁이들이 대부분이었고 형편없이 식견이 낮은 자들뿐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희네는 몇몇 부족의 젊은이들을 눈여겨 보아 두었다. 키탄족 울크리 부족의 야율크리라는 젊은이는 키가 크고 대단히 힘이 세면서도 생각이 깊어 키탄족 젊은이들의 우두머리로 꼽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울크리 부족장의 세 번째 마누라에게서 난 아들이라 부족장 자리를 물려 받지는 못할 것이라 했다. 야율크리는 그 때문에 비관하여 매일같이 술을 퍼마셨는데 그러다가 희네와 나래를 만나게 되었다. 희네는 야율크리의 용감한 얼굴을 기억에 잘 담아두었다. 또 마갸르족 친두 부족에는 울쿠타와 야쿠타라는 쌍둥이 형제가 있었는데, 이들은 특별히 힘센 쳥년들은 아니었지만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 속을 빨리 달리기에는 그들과 비할 자가 없었다. 눈이 밝고 몸 빠른 나래마저도 이 쌍둥이에게 숲 속 달리기에서 져서 곰 가죽 한 필을 빼앗겼다. 이 젊은이들도그리 좋은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친두 부족장이 데리고 있는 노예의 아들들이었다. 친두 부족장은 이들을 전령으로 부리려고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리고 타타르족인 앗수라트 부족의 막사에서도 희네와 나래는 기이한 사람 한 명을 보았다. 울라트라는 이름의 열 살도 안 된 어린 소녀였는데, 그 소녀는 아주 야리야리하게 비쩍 마른데다가 걸을 때에도 어디가 아픈것처럼 휘청거리며 걷는, 가련해 보이는 소녀였다. 울라트는 눈이 몹시 커 얼굴의 절반을 차지한 듯했고, 실제로 눈이 아주 좋아 독수리보다 더 잘 볼 수 있다고들 했다. 그러나 울라트는 앗수라트족 부족장의 딸인데다가 몹시 수줍음을 타서 누가 말을 걸기만 하면 천막으로 도망쳐 숨어버렸기 때문에 이야기를 건넬 수가 없었다. 미아우족의 막사에 갔을 때 희네와 나래는 툰툰을 안다고 이야기를 하자 미아우 사람들은 희네와 나래를 환대했다. 그중 키가 훤칠하고 사납게 생긴 청년이 특히 툰툰을 잘 안다고 하여 희네 나래와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나중에 이름을 듣고 보니 여자이름이었다. 나래가 의아해하자 그 청년이 껄걸 웃으면서 자신은 사실 여자라고 말했다. 희네와 나래는 몹시 놀랐다. 그녀의 이름은 초초룬이었는데, 어디를 보아도 여자 같은 구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조금 마른 남자 같았고 남자치고는 거친 남자로 보였다. 물론 수염은 없었지만. 희네와 나래가 반신반의하자 초초룬은 못 믿겠으면 벗어보겠다고 화를 내어 희네와 나래는 잘못했다며 그녀를 말리느라 진땀을 흘렸다. 기분이 좋아지자 초초룬은 휘파람을 불었다. 그녀의 휘파람 소리는 맑고 듣기 좋았는데, 그녀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휘파람에는 모든 벌레들의 제왕인 '타티츄이트'의 기운이 깃들어 있어 어떤 벌레든지 휘파람으로 불러낼 수 있으며 도망치게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티츄이가 뭐냐고 희네가 묻자 초초룬은 그건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초초룬은 나래와 함께 미아우족의 향기 짙은 과일 술을 마구 퍼마셨다.커다란 토기단지를 두 개 비울 때까지 취하지 않은 듯 하다가 별안간 취해서는 울면서 주정을 부렸다. 나래는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다른 미아우족의 말을 들어보니 초초룬의 주정은 아주 유명해서, 초초룬의 움집에 술냄새가 나기만 하면 마을사람들도 모두 저만치 피해버린다는 것이다. 나래는 초초룬이 뻗어버리자 도리머리를 치며 희네와 함께 막사로 돌아갔다. 그 주정 때문에 하도 혼이나서 이후 나래는 미아우족 막사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희네는 낮에 그 미아우 부족의 행렬에 몇 번 더 갔다 오는 듯했다. 밤에는 나래와 항상 같이 다녔지만 낮에는 각각의 일을 맡을 때가 많았기에 나래도 희네가 어디를 돌아다니는지 다 알 수 없었다. 헌원의 무리가 앞길을 열고 가니 사울아비들도 한가해졌고 서서히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끝없는 벌판을 터벅터벅 말을 타고 걸어가는 지루한 여행이었지만, 밤마다 이렇게 각 부족들의 막사를 돌아다니느라 희네와 나래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어느덧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 주변의 경치가 끝없는 벌판에서 산비탈과 등성이가 맞닿아 있는 풍경으로 바뀌었고 커다란 강도 만났다. 그 강은 멀리서 보기에는 물이 온통 누런빛이었는데 건널 때 보니 아주 가는 먼지가 가득 들어있어서 그런 빛을 띠는 듯했다. 아버지 치우우레는 강을 건너 때 두 아들에게 그 강이 황사바람 먼지를 담고 흐르는 강이라 해서 누런 강, 지나인들은 황하라 부른다고 말해주었다. 나무를 베어 덩굴로 엮은 뗏목으로 강을 건너야 했는데, 헌원은 이미 뗏목을 만들어 두고 있었다. 뗏목 한 개는 아주 큰 것이고, 작은 뗏목은 세 개 있었는데 가장 큰 뗏목은 한웅 가마를 생각해서 만든 것 같았다. 번갈아 강을 건너는 데에만 꼬박 이틀이 걸렸다. 먼저 사울아비들 절반이 건너가 강 건너편을 지키고 한웅의 가마와 다른 높은 분들의 가마가 건넜다. 그 다음 뒤를 따르던 종과 말을 제외한 짐승, 짐 등의 행렬이 강을 건넜고 마지막으로 남은 사울아비 절반이 강을 건넜느데 희네와 나래는 뒤에 강을 건너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다른 부족들은 주신 사람이 강을 다 건넌 후에 강을 건너도록 되어 있었기에 건너편에서 그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틀을 강 건너편에서 기다리기가 심심해진 나래는 근처의 산으로 혼자 사냥을 나서다 우연히 호랑이를 만났다. 아주 큰 호랑이는 아니었지만 나래가 그놈을 잡아 짊어지고 돌아오자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특히 치베가 호랑이를 살펴보고 가죽에 흠이 없는 것을 알고는 놀라 물었다. "이 범은 화살에 맞은 상처가 없다. 어떻게 잡았는가?" 나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는데 갑자기 덤벼서... 주먹으로 치고 목을 졸라 잡았지." 치베의 놀라움이 찬사로 바뀌었다. "무기를 써서 범을 잡는것도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그런데 나래 너는 맨손으로 범을 잡았구나. 정말 대단하다." 희네는 조용히 나래와 범을 보다가 물었다. "다친 데는 없어?" "다치기는." 그러자 희네는 나래에게 슬쩍 핀잔을 주었다. "이런 건 왜 잡아오니? 사람들 앞에서 티내고 싶어?" 나래는 좀 어이가 없는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럼 범이 덤비는데 어떡해. 그리고 잡았는데 굳이 버리고 올 건 또 뭐야?" 희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할 수 없구나. 좌우간 너, 이 때문에 나중에 고생 좀 할 거다." 나래는 뿌루퉁해져서 그 호랑이 가죽을 벗기고 그것을 어떻게 할까 하고 희네에게 물어보았다. "호랑이 가죽이야 가죽 중에서 가장 귀한 물건이잖아. 더구나 흠집없는 가죽이라 귀한 물건일 거다. 네가 주고싶은 사람에게 주려무나. 참, 그리고 범의 뼈는 미아우 사람에게 주어라. 미아우 사람들은 그 뼈를 특별한 데 쓴다더라." 나래는 그 가죽을 헌원이나 보돈차르에게 줄까 생각하다가 공손발을 떠올리고 나중에 그녀에게 주어야겠다 생각하며 잘 펴서 말려두었다. 치베도 호랑이 가죽을 말리는데 거들어주었다. 그리고 호랑이 뼈는 술주정꾼인 미아우 여자 초초룬에게 주었다. 초초룬은 몹시 기뻐하면서 고맙다고 했다. 그녀는 호랑이 뼈로 신통한 약을 만들 수 있으니 나중에 약을 만들면 나래에게도 주겠다고 약속했다. 치베가 호랑이의 발톱과 이빨을 원하는 것 같아서 주자 치베는 그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었다. 나래는 치베의 모습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이번에 잡은 것은 좀 작은 놈이야. 이빨이 그렇게 크지 않으니 멋이 덜 하군. 다음에 큰 놈을 잡으면 꼭 치베, 너 줄게." 고개를 저으며 치베가 말했다. "우리 부족이 사는 곳에는 범이 없다. 그래서 늑대나 표범 이빨 목걱이밖에 할 수 없지. 이것만으로도 우리에겐 아주 귀중한 선물이다. 고맙다, 나래." 나래가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잡아왔다는 소문은 금세 퍼져 나래는 모든 부족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안 그래도 치베가 활을 잘 쏘면서 매사냥의 명수라는 이야기와 함께 희네 역시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던 차였다. 보돈차르가 희네에게 선물한 매를 희네가 아직 잘 다루지 못해 치베가 대신 써서 사냥을 했던 것이다. 그 매를 희네는 '마파람'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마파람은 사냥을 잘해 한번 나갔다 하면 끊임없이 토끼나 꿩이나 산비둘기를 물어왔다. 여행길에서도 풀어만 놓으면 마파람은 사라졌다가 어김없이 날아와서 사냥감을 떨구었다. 치베는 반드시 그 사냥감 중 일부를 잘라 마파람에게 주어야 매가 길이 든다고 알려주어서 희네는 그때마다 사냥감에 칼질을 해야 했고, 그 짓이 귀찮아질 정도로 마파람은 많은 짐승을 잡아왔다. 너무 많이 잡는 것 아니냐고 치베에게 말하자 치베는 웃으며 그래야 매가 빨리 길이 드니, 쉬지 말라고 일러주었다. 희네는 마파람이 물고온 수많은 짐승을 새로 사귄 친구들, 즉 보돈차르나 야율구리, 울쿠타 야쿠타 형제, 초초룬 등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다만 울트라는 어린 소녀인데다 부족장의 딸이라서 자칫 잘못 선물하면 청혼하는 것으로 비칠수도 있었으므로 제대로 선물할 수 없었다. 그래서 희네도 꽤 유명해졌다. 그런 중에 나래가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잡았다니, 사람들이 더 왁자하게 떠들어댈 수밖에 없었다. 전에는 호의적이지 않던 부족사람들도 희네와 나래를 보면 먼저 인사했고, 이전에 알았던 친구들도 더 자주 찾아오게 되었다. 이틀 동안 황하 어귀에 머물면서 희네와 나래는 새로 알게 된 다른 부족 친구들과 깊이 사귈수 있었다. 야율큐리는 나래에게 틈만나면 찾아와 씨름을 하자고 했다. 당시의 씨름은 자칫하면 상대를 다치게 하거나 죽게 만들수도 있는 위험하고도 거친 경기였으나 야율쿠리는 순수하게 씨름 연습을 하고 싶어 나래를 찾은 것이다. 결국 땅에 넘어지면 지는 것으로 하고 겨루는데, 야율쿠리의 힘과 기술도 대단하여 나래와 열 번을 겨루면 한두 번은 나래가 넘어지기도 했다. 그럴때면 야율쿠리는 자신도 꽤 강하다는 것을 알고는 은근히 기뻐하는 듯 했고 사람좋은 나래는 야율쿠리를 아낌없이 칭찬해주었다. 나래 역시 야율큐리에게서 많은 기술을 배웠다. 희네는 울쿠타 야쿠타 형제와 숲 속을 쏘다니며 풀과 나무의 이름과 작은 동물과 벌레들의 이름을 맞히면서 더욱 친해졌다. 초초룬이 그들과 어울리는 때도 있었고, 울쿠타 야쿠타 형제는 치베와 달리기 시합을 하기도 했다. 치베도 달리기는 잘하는 편이었는데 열 번에 여덟 번은 울쿠타와 야쿠타가 이겼다. 치베는 근성이 있어 달리기에서 진 것을 무척 원통해하며 계속 달리기 연습을 하겠다고 별렀다. 보돈차르는 부족사람들이 강을 건널 준비를 하느라 바빠서 만나기 힘들었다. 호랑이를 잡은 그날 저녁, 느닷없는 방문객이 찾아왔다. 그 사람은 주신에서 으뜸으로 치는 세 큰스승 중의 한 명인 풍백 비렴 이엇는데, 바로 행렬에서 가마를 타고 한웅의 뒤를 따르던 기다란 검은 수염의 체구가 당당한 중년 남자였다. 한웅의 뒤를 따르던 네 채의 가마에는 바로 풍백, 운사, 우사의 삼사와 사와라 한웅의 여섯 번째 작은 마누라가 각각 타고 있었다. 지금의 한웅은 사와라 한웅이고 풍백은 비렴, 우사는 병예라는 아주 나이 많은 노인이었다. 운사는 신지울태라는 할머니였고, 한웅의 마누라는 부루 집안의 버들이라고 했다. 좌우간 세 큰스승들 중에서 으뜸이자 주신 안에서도 훌륭한 풍백이라고 명성이 자자했던 비렴이 직접 찾아오자 희네와 나래는 깜짝 놀라 서둘러 맞이했다. 치우우레도 사울아비 스승이었지만 이 세 큰스승과는 격이 달랐다. 치우우레는 이 풍백 비렴보다 두 단계 정도 아래에 있다고 볼 수 있었으니까. "큰스승 풍백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희네와 나래는 손을 모으고 머리를 깊이 숙여 큰절을 했다. 그러자 비렴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비렴은 검은색으로 물들인 옷을 걸치고 있었다. 당시 물들인 옷은 귀한 것이라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다. 비렴은 두 사람의 사울아비만을 데리고 가마도 타지 않고 걸어서 희네 나래의 막사로 온 것이다. "자네들이 희네 나래인가? 치우우레의 아들들이지?" "그렇습니다." "이야기 많이 들었네. 아주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라 들었어." "별 말씀을...." 비렴은 사울아비들을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막사 안에 깔아놓은 노루 가죽에 앉았다. 그러면서 저만치에 널어놓은 호랑이 가죽을 유심히 보았다. 원래는 밖에 널어야 했지만 사람들이 하도 구경하러 오는 바람에 냄새가 나지만 막사 안에 널어 두었던 것이다. 비렴은 호랑이 가죽에 전혀 상처가 없으며, 털이 윤이 나고 가죽이 탄력 있는 것을 보았다. "정말 손으로 잡았군. 다친데도 없이 건강한 범이었고." 비렴이 혼자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래는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냄새가 심하지 않습니까?" "괜찮네. 자네가 범을 잡은 나래겠군. 정말 대단한 젊은이일세." "원하신다면 별것 아닌 물건이지만 바치겠나이다." 나래가 말하자 비렴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니야. 그래서 온 게 아닐세. 가죽을 얻으려고 살펴본 것도 아니고 자네가 정말 범을 맨손으로 잡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온 것 뿐일세." 그러자 희네가 겸손하게 말했다. "운이 좋았겠지요." "자네들 쌍둥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올해로 몇 살이 되는가?" "열일곱이 되었습니다." 비렴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대단하군, 대단해. 아직 상투를 안 틀었으니, 성인식 전인가?" "아직 치르지 못했습니다." "듣자하니 나래의 힘도 대단하지만 희네 자네도 머리가 대단히 좋다면서?" "부끄럽습니다." "부끄럽기는. 이렇게 훌륭한 젊은이들을 보니 나로서는 기쁠 따름일세. 내 여기 온 것은 자네들에게 할말이 있어서야." "무슨 가르침이 계신지요?" 희네와 나래가 공손히 물었다. "자네들이 아직 성인식 전이기는 하나, 힘과 용기가 대단하다고 들었네, 알다시피 지금 한웅님께서는 회의에 참석하시러 지나 땅으로 가시는 길인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수상하네. 한웅님의 주변을 좀 더 잘 지켜야 할 필요가 있어." "지금도 용감한 사울아비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네. 그러나 무엇이든 미리미리 단단히 해두는 것이 좋지 않은가? 더구나 태산 회의장에는 아무도 무기를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네. 행여 있을지 모르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지. 물론 나나 병예님이나 신지울태님 등도 있고 다른 사울아비들도 있지만, 무기를 들지않고도 힘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많을 수록 좋은거야." 그러자 희네가 조심스레 말했다. "신지울태님의 주술은 세상에 겁낼 것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병예님도 그러하시고.... 비렴님은 주신 제일의 힘을 지니셨구요." 사실 큰스승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다. 물려받거나 배우는 것도 아니었고, 가진 능력이 최고이어야만 될 수 있었다. 풍백 비렴은 그리 장사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기이한 힘이 있었다. 즉, 내공을 익힌 달인이어서 주먹에서 바람을 내쏠 수도 있었고 공력을 모아 천근을 들 수도 있는 기인이었다. 우사 병예는 어떤 저주나 주술도 막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며 운사 신지울태는 글자의 힘을 이용한 주술을 썼는데, 그들의 능력을 본 사람은 극히 드물지만 정말 대단하다고들 했다. 이 세큰스승의 힘은 안파견 한님 때부터 내려왔는데, 자부선인에게서 받은 가르침이며 힘이라 했다. 세 큰스승은 나이를 먹고 합당한 후계자가 나타나면 수 많은 시험을 거친 후 그에게 그 지식과 주술 능력을 전수했다. 희네의 말에 비렴이 말했다. "우리 셋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네. 한웅님을 지키는 것은 만에 하나라도 실수가 있으면 안 되는일. 더구나 항상 싸움에는 감추고 보이지 않는 수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 법. 나는 자네들이 일을 맡아 주었으면 한다네." 희네는 비렴의 뜻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렴은 대단한 인물이었고 웬만한 선인들보다 강했다. 하물며 힘뿐만 아니라, 생각의 깊이도 남들과 다르다고 여겼다. 희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래가 감히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비렴이 웃으며 희네에게 말했다. "나래도 할 일이 있지만, 자네도 할 일이 있다네." "나래야 힘이 세지만 제가 어찌...." 희네가 손을 젓자 비렴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희네를 쳐다보았다. "들어보게. 주술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닐세.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만이 세상에 떠도는 거대한 힘을 느끼고, 그것과 합하여 주술을 사용하는 것이라네. 듣자 하니 자네는 자부선생에게 배우다가 그만두었다면서?" "제가 너무 철이 없고... 아는 것이 없는 탓입니다." "이미 나는 알고 있네. 다른 사람은 모두 자부선생의 가르침을 받지 못해 안달인데 자네는 뛰쳐나갔다더군. 그렇지?" "그런 것을 어찌.... 알고 계셨습니까?" 그 말에 비렴은 짐짓 피곤한 듯 씨익 웃어 보였다. "풍백의 자리에 있는건 쉬운 일이 아니라네." 희네가 뭐라 할말을 찾지 못하자 비렴이 말을 이었다. "자네는 아마 나름대로의 뜻이 있는게 분명해. 자부선생의 가르침도 물론 좋지만, 자네가 생각하고 나아기고자 하는 길과는 맞지 않는다고 느낀거야. 그래서 그만둔 것이고 그렇지 않은가?" 이번에도 희네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비렴이 계속 말했다. "자네 아버지도 아직 모르고 있는 듯 하네. 그러나 나는 알았다네. 주술이나 능력은 총명하고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강하고 심지가 깊은 사람이 배워야 하는 것일세." 비렴의 뜻밖의 말에 나래가 놀라며 끼어들었다. "말씀 중에 죄..... 죄송합니다만.... 그러면 희네 형에게 주술을 가르쳐주실 건가요?" "일단 내일부터 시작하고자 하네. 태산까지 멀지 않으니 많은 것을 가르칠 시간은 없어. 허나 몇 가지 중요한 것부터 가르치기로 하지. 나래 자네는 나에게 오고, 희네 자네는 병예 어르신과 신지울태님을 찾아가 보게나. 내가 미리 말해두었네." 세 큰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을 실로 대단한 일이었고 영예였다. 하물며 그런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세 큰스승이 되는 후계자의 대열에 들어간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희네는 다소 침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래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일을 감당할 힘이 없습니다." "허허, 희네. 주술은 다리로 쓰는 것이 아닐세." 그 말에 희네와 나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버지도 모르는 일을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솟대 단군과도 잘 아는 사이일세." 희네는 다리 때문에 몇 번 비밀스레 솟대 단군을 만난적이 있으니, 비렴은 아마 단군에게서 희네의 몸이 성치 않다는 것을 알아낸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들 형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비렴은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다. 모든 일에 있어 빈틈이 없었다. 비렴이 타이르듯 말했다. "자네는 치우 집안 사람이니 나중에 풍백이 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우사나 운사가 되지 못하란 법은 없다네. 이미 자네들이 해온것만 보아도 충분히 후에 큰스승 자리를 노려볼 만하네. 물론 많은 사람들 중 가려 뽑을 것이니 자네들도 열심히 훈련을 해야겠지만 말일세." "감히 바라지도 못하는 일입니다." "좌우간 이번 일은 대단히 중요하니, 틀림없도록 하게나. 일단 자네들은 절데 티를 내어서는 아니 되네. 우리만 아는 비밀로 해야 하는 것일세. 아무 일 없는 것이 가장 좋지만,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기면 자네들이 나서서 한웅님을 지켜야 하는 것일세. 한웅님을 만에 하나 누가 노린다면 그 누군가가 우리에 대해 미리 경계를 하겠지만, 자네들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고 있을것이니 말야." 그러더니 비렴이 웃으며 나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시험해보겠네. 팔을 내밀게." 비렴이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손을 내밀었다. 나래와 팔씨름을 해보자는 뜻이었다. 나래는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비렴의 손을 잡았다. 비렴이 순간 눈을 감았는데, 그의 얼굴이 하얗게, 다시 파랗게, 붉게 변하다가 다시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나래는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하여 힘을 줄 생각도 못했다. 그러자 비렴이 말했다. "힘을 끌어내는 선인들의 가름침대로 한 것이니 당황할 것 없네. 자, 힘을 주어보게. 범을 잡은 그 힘 말이야." 나래가 힘을 주었으나 비렴의 팔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끽구와 겨룰 때에도 끽구의 힘은 대단했지만 그래도 힘을 주면 반응이 있었다. 그러나 비렴의 팔은 그것과 전혀 달랐다. 마치 움직일 수 없는 것을 움직이려 하는 것처럼, 반응도 없고 아예 땅과 한데 붙어 굳어버린 것 같았다. 물론 아무리 힘을 주어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나래가 땀을 쏟자 비렴이 고개를 끄덕였다. "되었네." 나래가 손을 거두고 고개를 숙여 절을 하자 비렴은 옷소매를 내리며 말했다. "충분한 힘일세. 세상에서 감당할 자가 몇 안 될 걸세. 정말 대단하군. 자네들이 꼭 도와야 하겠네." 그러자 희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럴 정도로 일이 안 좋게 흘러걸 것 같습니까?" "먼저 맹세해야 말해줄 수 있네. 내말대로 따르겠는가, 아니하겠는가?" 희네와 나래는 결국 비렴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안파견 한님의 이름으로 맹세했다. 그제야 비렴은 형제에게 말해주었다. "사실 누가 감히 주신의 한웅님을 건드리겠냐마는, 병예님이 아무래도 꿈이 좋지 않다고 하시네. 솔직히 어떻게 될지는 병예님도 모르시니 아무도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만, 무엇인가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게야. 안 벌어지는 것이 가장 좋지만 말일세." 병예는 우사였고, 우사는 미래를 점치는 주술사이기도 했다. 그런 병예의 꿈에 심상치 않은 것이 보였다면 당연히 대비해야 한다. 당시에는 주술사의 말은 절대적인 권위가 있어서, 아무도 그 일을 의심하거나 거스르지 않았다. 희네와 나래는 그말을 듣도근 고개를 끄덕였다. 비렴은 내일부터 대열을 옮겨 세 큰스승의 가마 뒤를 따라올 것을 당부하고, 그렇게 되도록 다른 일은 자신이 조치하겠노라고 했다. 막사에서 나가기 전에 비렴은 희네와 나래에게 다시 한 번 당부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게 하게. 아버님께도 말씀드리면 아니 되네." 희네와 나래는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렴이 나가는 것을 배웅하고 다시 막사로 들어오자마자 나래는 커다랗게 웃으며 좋아서 펄쩍 뛰었다. "형님! 형님! 잘되었네! 정말 잘 되었어!" "잘된 일이기는 하다. 너도 풍백 어른신께 배우는 것이 좋겠지." "그뿐이야? 잘 배우면 우리가 나중에 큰스승이 될지도 모른다구." 그 말에 희네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도 나쁠 것은 없지." "더구나 형님은 신지울태님께 배운다며? 글자도 배우겠네? 글자 주술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던데?" 당시는 글자가 막 등장한 시대였다. 그리고 그때 글자의 힘은 주술로 풀이되었고 그 힘은 막강했다. 글자는 신지씨 집안에서, 최초에 신지현덕이 창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그 글자는 이름을 가진 사물을 고정시키는 주술과 연관이 되었다. 신지현덕이 했는지 다른 선인이나 주술사가 부여한 힘인지는 모르지만, 글자 주술은 실로 대단했다. 당시 사람들은 모든 것에 대한 이미지를 자연 그대로 지니고 있었기에 압축돠어 만들어진 글자에는 그 사물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가령 호랑이의 글자를 손에 써서 주술을 걸면 호랑이의 앞발과 같은 힘이 생겨났고, 눈꺼풀에 매의 글자를 손가락으로 쓰면 매처럼 눈이 밝아졌다. 이는 단순한 주술에 속했으며, 운사 신지울태와 같은 대주술사는 땅에 냇물의 글자를 쓰면 냇불이 생기게 할 수도 있었고 사막에 나무글자를 써서 사막을 숲으로 바꿔버릴 수도 있었다. 물론 정말로 숲이 생기거나 냇물이 생긴 것은 아니어서 글자가 지워지면 모든 것도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그 냇물을 마시거나 숲의 나무에 부딪힐 수도 있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이름을 조종하는 힘이었다. 이름이 있고 그 이름을 자각하는 생물은 무엇이든 글자 주술로 조종할 수가 있었다. 사람은 물론이며 동물도 특별한 자신의 이름으로 길들여진 경우는 조종이 가능했다. 물론 아주 믿음이 강한 사람은 완전히 조종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 사람의 행동을 제약할 수는 있었다. 다만 이런 글자 주술은 엄격하게 비밀에 부쳐져 주신 전체에서도 아는 사람이 열 손가락을 넘지 않는다고 했다. 신지씨 집안 사람에서도 아주 적은 사람에게만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그런 주술을 형이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자 나래는 몹시 기뻤다. 희네가 나래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래야, 너 아까 비렴님께 힘을 다 썼니?" 나래는 '쩝'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다 쓴 것은 아니지만, 반은 좀 넘게 썼어. 비련님을 어찌 속인단 말야." 희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나래야, 그건 속이는 것이 아니란다. 나중을 생각해서 그러는 거지." "좌우간 셋 중 둘 정도의 힘은 냈어. 반 넘게 힘을 내서 미안해. 형님이 말한 걸 어겨서." "아냐, 괜찮아. 그나마 내 생각을 했으니 다행이구나." 잠시 희네는 생각에 잠겼다. "좌우간 앞으로 큰일이 닥칠 것 같구나..." "설마? 한웅님을 감히 누가 노린단 말야?" "그러나 병예님의 꿈이 아무것도 아닐 리가 없잖아?" 나래가 씨익 웃으며 되받았다. "아무리 그래도 풍백, 운사, 우사 세큰스승이 옆에 계시고 천 명의 사울아비가 있는걸? 지나족이 그런 짓을 할 것 같아? 모조리 몰려와도 한웅님을 어쩌진 못할 거야. 그리고 한웅님을 덮쳤다가 잡지못하면 그 뒤감당을 어찌하려고?" 나래가 제법 세밀하게 분석하자 희네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너도 이제 일의 앞뒤를 조금 생각하게 되었구나. 그래야 한다." "그야 뭐... 좌우간 간단해. 그냥 비렴님은 한웅님을 잘 지키고 싶으신거야. 더구나 우리를 뽑을 생각도 진작부터 있으셨던 거구. 그래서 오신 거지, 뭐." 그 말에 희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희네는 아직 마음속에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간단한 일일까? 그렇게 간단한 일 같은 느낌은 아닌데... 무슨 일이 생기려는 걸까?' 희네는 그날 밤 잠을 잘 이룰 수 없었다. 맥달 그로부터 열흘이 더 지났다. 이 열흘 동안 나래는 풍백 비렴에게서 숨쉬기를 이용해 세상 만물의 기운을 담아 저장했다가 자용하는 선술의 기본인 호흡법을 익혔으며, 희네는 우사 병예에게서 주술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역시 기본적인 것을 배웠다. 두 사람의 재능이나 지식을 배우는 속도는 비렴이나 병예가 깜짝 놀랄 정도로 뛰어났으나 열흘이라는 기간 동안 많은 것을 배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앞으로도 계속 수행해 나가야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련법과 함께 신지울태가 만든 부적 무늬를 이용하여 두어 가지 주술을 사용하는 방법 정도만을 익힐 수 있었다. 그 주술들을 사용하기 위해 몸에 부적 무늬를 새길 때 신지울태가 직접 왔다. 몹시 늙긴 했어도 아주 곱게 늙은 할머니였다. 젊었을 때는 상당한 미녀였을 듯했다. 신지울태는 희네 나래 두 사람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공을 들여서 부적 무늬를 몸에 그려주고 가버렸을 뿐이었지만, 희네와 나래는 신지울태의 모습이 이유도 모르게 강한 인상으로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다. 희네는 등과 왼쪽 팔뚝, 그리고 목 아랫부분에 무늬를 그려받았으며 나래는 오른쪽 어깨와 등에 무늬를 그려받았다. 그리고 비렴과 병예는 나래와 희네에게 주슬을 불러내는 주문을 가르쳐주었다. 주문은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는 뜻 없는 글자들의 나열 같았지만 묘하게 가락이 붙어서 마치 노래 같기도 했다. 삼사는 그 가락을 익혀 익숙해질수록 주술이 강해지며, 사람마다 붙이는 가락이 다르기 때문에 주술의 특색도 그 사람에 맞추어 조금씩 달라진다고 덧붙여 설명해주었다. "주문의 특별한 점은 보통 두 번에서 많으면 세 번, 네 번 똑같이 반복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여러 번 외울 때 주문이 똑같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소리나 길이, 높이, 강하기 등이 똑같아야 하니 많은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을 같게 할 정도가 되어야 주문에 통달하지. 아마 며칠 내로는 되기 힘들 것이나 열심히 연습하라." 당시는 문자를 상용하던 시대가 아니라서 주문을 직접 들려주어서 전달해주었는데, 단순한 발음이 아니라 그 음색이나 높이, 길이, 떨림, 강하고 약함 등이 똑같아야 했다. 즉, 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이미지까지 전부 전달하는 셈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주문을 외워도 주술이 발휘되는 것이 아니니 되도록 주문을 많이 연습하여 잊어버리거나 더듬거리지 않게 연습하라고 일러주었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문보다는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주술을 함부로 연습할 수 없으니 정신을 집중하는 연습과 주문 연습을 나누어서 익숙해지게 하라고 당부했다. 마침내 사와라 한웅의 행렬이 회의가 준비된 태산 어귀에 들어섰다. 경치 좋고 높은 산이 멀찌감치 보이기 시작하자 희네와 나래를 비롯한 모든 이들은 마침내 긴 여행이 끝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헌원도 이주를 보내어 희네와 나래에게 이제 내일이면 태산 회의장에 들어갈 것이니 유망을 만날 준비를 해두라는 말을 전했다. 그날 밤의 일이었다. 희네가 곤히 잠들어 있는데 나래가 갑자기 희네를 깨웠다. "형님, 일어나." "왜 그러니?" 희네가 졸린 눈을 비비며 묻자 나래가 말했다. "밖이 심상치 않아." "뭔데?" 희네는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기척도 없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그래서 더 이상한 거야." 희네는 곧 나래의 말뜻을 깨달았다.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고 지키는 사람도 있으니 조금은 인기척이 들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마치 두 형제만 외딴 곳에 따로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가보자." 희네가 귀하게 여겨 평소 잘 꺼내지 않는 구리칼을 손에 잡으며 말했다. 나래는 이미 양손에 구리도끼와 구리몽둥이를 들고 있었는데, 희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번개같이 나래가 먼저 막사의 가죽문을 젖히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때 나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침착한 나래가 놀라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어엇!" 희네도 깜짝 놀라 밖으로 나갔는데 희네 또한 나래와 마찬가지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밖에는 수백 개의 막사들이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도 여기저기 서있었다. 짙은 안개가 끼어 먼 곳이 잘 보이지 않는 것말고는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몸이 굳어져 있었다. 눈도 초점이 없었고, 움직이지도 못했다. 마치 돌처럼 몸이 굳어져 버린 것이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희네와 나래 두 사람뿐인 것 같았다. "이게...어찌된 일이지?" 두려움을 모르는 나래였으나 이때만큼은 목소리가 떨렸다. 희네도 등골이 오싹했다. 희뿌연 안개는 기분 나쁘게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저쪽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바로 저편에 서서 하품을 하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두 형제의 친구인 양역이었다. 양역이 오늘 밤 불침번 대장이었다. 그런데 양역은 하품하는 입을 그대로 벌리고 왼손으로 입을 반쯤 가린 채 순간적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젊은 사울아비 한 명이 큰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오른발은 땅에 붙어 있었지만 왼발을 땅에서 떼어 막 걸음을 내딛으려는 찰나, 그 자세 그대로 돌처럼 굳자 몸이 기울어져 왼발 끝이 땅에 닿았다. 몸이 돌처럼 굳어져서 기울어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래가 중얼거리자 희네가 칼을 빼며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나래도 덩달아 긴장하며 도끼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 두 형제의 뒤쪽에서 뭔가가 '휙' 지나가는 느낌이 있었다. 나래는 순간, 등줄기에 차가운 것이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신수!" 뒤에서 지나간 것이라 볼 수는 없었지만 나래는 그것의 덩치가 보통 사람의 열 배 이상, 소름끼치도록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재빨리 몸을 돌렸으나 이미 사라져 버린 후였다.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날쌔었으니 신수라고밖에는 할 수 없었다. 희네도 그 기척을 느꼈는지 입술을 깨물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더욱 안개가 짙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양역이나 다른 사울아비들, 막사들의 모습이 삼켜지듯 갑자기 짙어지는 안개 속으로 모습이 사라져 갔다. 바로 코앞에 서 있는 나래조차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희네는 나래의 등에 자신의 등을 댔다. 서로 등을 맞대면 사방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문득 희네는 안개 저편에서 화등잔처럼 빛나는 것 두 개를 발견했다. 무언가의 눈 같았는데, 커다란 호랑이라 해도 저토록 밝은 빛을 쏘아낼 수는 없었다. 희네가 외쳤다. "저기!" 희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래가 번개같이 몸을 돌리며 희네가 가리킨 쪽을 향해 구리몽둥이를 던졌다. 나래의 무서운 힘을 담은 구리몽둥이가 빙빙 돌면서 돌진하듯 날아가는데 갑자기 저편의 화등잔처럼 빛나는 것이 확 밝아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구리몽둥이가 허공에 딱 멈춰 공중에 뜬 채 움직이지 않다가 이내 아래로 힘없이 털썩 떨어졌다. 희네가 몹시 긴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주술이다!" 나래는 온 힘을 모아 던진 무기가 그토록 맥없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놀랐으나, 이윽고 화가 치밀었다. "에에이~!" 나래는 구리도끼를 양손으로 거머쥐고 이판사판으로 달려나가려 했으나 희네가 막아섰다. "나래야! 신중해. 저것이 주술을 쓰는 이상, 아무리 너라도 힘들다." 그때 안개 저편에서 빛나는 두 개의 눈이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더불어 그것의 발걸음 소리인 양, 땅이 울리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희네와 나래는 겁이 났지만, 조금도 물러서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때 희네가 나래의 손에 자신의 칼을 쥐어주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 지경에서도 희네는 머리를 썼다. "나래야, 저것이 스무 발 앞으로 다가오면 도끼를 던져라. 아마 저것이 막아내겠지만, 그 틈을 타서 밑으로 몸을 날려라. 파고들어 칼로 찔러." 나래는 대답할 겨를도 없이 칼부터 받아 손에 쥐었다. 그 사이에도 화등잔처럼 빛나는 두 개의 눈은 안개 속에서 점차 다가왔고 그것의 발소리도 쿵쿵거리며 더욱 가깝게 다가왔다. 희네는 긴장하며 짧은 돌칼을 손에 쥐고 작은 소리로 헤아렸다. "셋...!" 나래는 오른손에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번만은 나래도 있는 힘을 다했고 거기에 배운 지 얼마 되지는 않았으나 비렴에게서 배운 풍백의 기 모으는 법까지 곁들였다. 손에 쥔 나래의 구리도끼가 저절로 우르르 떨리면서 '웅웅'하는 소리를 냈다. "둘...!"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희네와 나래 앞의 안개가 확 걷히면서 거대한 짐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별안간 안개가 없어지자 희네와 나래는 당황했다. 그 앞의 짐승은 신수임에 틀림없었다. 네 발 달린 짐승이었는데 어깨까지의 길이가 키가 큰 나래의 세 배는 넘어 보였고 덩치는 서른두 명이 메는 한웅의 가마보다도 더 커다랬다. 튼튼하지만 날렵한 네 다리와 부드러운 털로 덮인 강철같이 단단해 보이는 몸집, 그리고 길쭉한 코와 둥글고 크게 빛나는 눈동자를 지닌 짐승이었다. 눈에서 뿜어내던 빛이 어느 결엔가 사라져, 그 짐승은 큰 눈동자를 굴려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맥!" 희네는 탄성을 올렸다. 바로 이야기에서나 들었던 전설의 신수 맥이었다. 맥은 좋은 신수로, 주신족이 받드는 신수였다. 맥을 직접 본다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으며, 맥은 아주 훌륭하게 될 영웅에게만 모습을 보인다는 전설도 있었다. 최초 주신족의 시조인 안파견 한님을 동쪽으로 인도한 것도 바로 신수 맥이었다는 전설도 있었다. 희네가 다급하게 말했다. "나래야, 도끼를 던지면 안 돼! 맥은..." 그러자 나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우리를 해치지 않아." 희네는 지식으로 맥이 좋은 신수라는 것을 알았지만 나래는 그 눈빛을 보고 대번에 맥이 자신들을 해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나래가 다시 도끼를 내려놓으려는데 이미 도끼에 힘을 너무 많이 준 상태라 단단한 나무로 만든 도끼자루가 썩은 나무가 바스러지듯 '푸석!' 소리를 내며 부서져 버리고 도끼날이 땅에 떨어져버렸다. 하지만 나래와 희네는 거기에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맥은 위엄 있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마치 두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레 다가왔다. 거대한 짐승이, 어찌 보면 긴 코가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었으나 동작은 크면서도 우아했다. 그리고 커다란 눈동자에서 무지개처럼 맴돌아 나오는 오색영롱한 눈빛은 아찔할 정도로 곱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희네와 나래는 이미 긴장이 풀린 지 오래였다. 다만 취한 듯, 흘린 듯 맥의 커다란 눈에서 솟구쳐 나오는 영롱한 눈빛을 바라보며 말할 수 없이 따사로운 기운을 느낄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와 나래와 희네는 후닥닥 정신을 차렸다. 갓난아기의 목소리 같았는데, 어디서 들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희네와 나래는 놀라 두리번거렸으나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희네와 나래는 놀라 두리번거렸으나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안개가 벽을 만들어 맥과 두 사람을 감싼 듯했다. 순간 희네가 고개를 들어보니, 놀랍게도 맥의 머리 위에 하나의 얼굴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갓난 티를 아직 벗지 못한 아이의 얼굴이었다. 비록 머리가 잔뜩 헝클어지고 마구 늘어뜨려져 있었으나, 눈빛만은 아주 맑은 아이였다. 다만 너무 너저분해서 얼굴을 자세히 알아볼 수 없었고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었으나, 아무튼 몹시 추해 보였다. 분명 소리내어 웃는 것은 그 아이인 듯했다. 희네는 맥 같은 전설의 신수의 머리 위에 저런 지저분한 아이가 타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터라 몹시 놀랐다. 하도 놀라서 기가 막힌 나머지 아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풋'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던 아이도 역시 까르르 웃으며 눈을 깜박거렸다. 나래도 그제야 아이를 발견하고 놀라 말꼬리를 흐렸다. "형님! 어떻게 꼬마애가 맥의 머리에..." 그러나 아무리 박식한 희네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나래나 똑같이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희네가 웃으며 말했다. "나래야, 난들 알겠니?" 나래는 의아한 듯 소곤거렸다. "형님! 아무리 그래도 ...웃다니?" "웃음이 나오는 걸 어쩌겠니?" 희네는 아이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이번에는 약간 의도적으로 '하하하' 웃었다. 아주 맑은 소리였다. 그러자 아이도 다시 까르륵거리며 웃었다. 큰 아이인데도 웃는 소리는 마치 갓난아기 같았다. 아이는 희네를 좀더 자세히 보려는 듯, 고개를 아래로 뻗었다. 그러다가 떨어질 뻔하여 몇 번 버둥거리더니 이윽고 맥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놀랍게도 맥이 발을 땅에 꿇으며 고개를 슬며시 낮추어 아이가 희네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맥은 몇 번 기듯이 몸을 움직여서 희네의 바로 옆에까지 다가섰다. 아이와 희네와의 거리는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을 보고 나래가 놀라서 다시 희네에게 속삭였다. "형님...! 신수를... 사람이 부릴 수도 있수?" 그러나 희네는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아이가 휙 손을 뻗어 희네를 잡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이 아무리 기를 쓰고 무릎을 꿇었어도 워낙 덩치가 커서, 아이의 손은 희네에게 와닿지 않았다. 아이는 계속 갓난아기처럼 끙끙 기를 쓰며 희네에게 손을 잡으라는 듯 희네를 바라보며 눈빛을 보냈다. 그것을 보고 나래가 당황스런 투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가지마, 형님! 너무..." 갑자기 희네가 '하하' 웃었다. "이럴 때 신수 등에 타보지, 언제 타보겠니?" 희네는 선뜻 손을 뻗어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별안간 맥이 '휙' 하고 희네를 길다란 코로 밀어내버렸다. 그리고 희네가 다가오지 못하게 하려는 듯, 코로 희네 앞을 막았다. 나래는 깜짝 놀라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으나 희네가 맥에게 밀려나면서 나래의 앞을 막아섰다. "아서, 아서!" "맥이 형님을 싫어하는 것 같아!" "해치는 것도 아니잖아." 순간 맥 머리에 올라탄 아이가 맥이 희네를 밀쳐내자 갑자기 '으앙'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보아도 목소리나 행동거지가 갓난아기와 똑같았다. 갑자기 맥의 맑은 눈동자에 수심이 어렸다. 그러나 맥은 여전히 코로 희네 앞을 막고 있었다. 아이는 더 크게 울면서 맥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어리광부리듯 마구 툭툭 쳤다. 별안간 맥은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한 방울 흘리더니 희네를 막아섰던 코를 거두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대뜸 아이가 맥의 머리를 껴안 듯 하고는 얼굴을 몇 번 비볐다. 아마 고맙다는 뜻인 것 같았다. 아이는 다시 희네에게 손을 뻗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모르지만, 희네는 낙천적이고도 대담한 기질이 있어서 다시 웃으며 아이의 손을 잡았다. 비록 때묻고 더러운 손이었지만 몹시 곱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혹시 이 아이가 여자아이는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는 애써 희네를 위로 끌어올리려 했으나 힘이 약해 무리였다. 그것을 보고 나래가 왼손 검지손가락 하나로 희네의 뒤춤을 휙 밀어 희네를 맥의 머리로 올려주었다. 희네가 맥의 머리로 올라서자마자 아이는 까르르 웃으면서 희네를 와락 껴안았다. 아무리 대범한 희네라도 아이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라 희네는 대번 얼굴이 붉어졌다. 처음에는 알 수 없었는데, 몸에 감촉이 느껴지자 이제 희네는 그 아이가 여자아이였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아이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이어서 더더욱 얼굴이 붉어진 것이다. 여자아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씻지 않은 듯, 머리도 엉키고 얼굴이며 손에도 때 범벅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몸에서 흉한 냄새가 나지 않고 오히려 아주 맑고 향기로운 내음이 났다. 초롱꽃 냄새 같았다. 더운 철에 옷을 벗는 것도 흉이 되지는 않던 시절이라 희네가 그렇게까지 심하게 낯을 붉힐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기에 희네는 일단 달라붙는 여자아이를 벌개진 얼굴에 헛웃음을 지으며 떼어냈다. 아이는 희네에게서 떨어지면서 묘하게 몸을 움츠려 못 보일 곳이 보이지 않게 앉았다가 다시 희네 앞에 아무렇게나 엎드리더니 희네의 두 손을 자신의 손으로 모아 잡아 간절한 눈빛으로 희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좀 더럽긴 해도 몹시 고운 몸이었다. 희네는 무슨 욕망이 들기보다는 아이가 한없이 가련하고 불쌍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신수와 있다고 하지만 이 아이는 아무래도 사람과 살아보지 못한 게 아닐까?' 가까이서 보니 여자아이는 조금 마른 편이었고 지저분해서 그렇지, 얼굴이 몹시도 고왔다. 그리고 둥글고 맑은 눈은 마치 맥의 눈을 보는 것처럼, 순진하고도 무한한 지혜가 담겨 있는 것 같아 보였다. 희네는 처음 보는 여자아이, 그것도 신비하기 이를 데 없이 맥의 머리에 타고 다니는 여자아이가 왜 자기를 보고 이렇게 친밀한 태도를 보이는지 의아해했지만 아무런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희네는 비록 세상 모든 것을 머릿속으로 꿰뚫어보려는 치밀함도 있었지만 통 큰 대범함도 있었다. 자신이 알 수 없는 것은 솔직히 받아들이고, 되도록 자신이 모르는 것이라도 좋게, 유쾌하게 받아들이려는 좋은 성격을 가졌다. 희네는 여자아이를 보고 시원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너, 말할 수 있니?" 그러자 여자아이는 뭔가 생각하듯 골똘히 눈을 빛내다가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말을 아는 것은 같은데 벙어리인가보다 하고 희네는 생각했다. 그 대답을 하는데 왜 이리 시간이 걸릴까 좀 의아하기도 했지만. 희네가 다시 물었다. "너, 사람을 오랜만에 보니?" 여자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희네는 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좋아하면 말을 듣자마자 기뻐해야 할 텐데, 왜 한참씩 걸리는 거지? 머리가 둔한 것 같지도 않은데...' 다시 눈을 돌려보니, 여자아이의 눈이 몹시 빛나면서 자신을 주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대범한 희네로서도 오히려 좀 부끄러워질 정도로 강한 눈빛이었다. 희네는 평생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야박하게 대한 적이 없었다. 다만 자신이 앞으로 해나가려는 길이 너무나 험난한 것이었기에 여자들에게는 한 번도 마음을 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벙어리 아이에게는 이상하게도 호감이 갔다. 맥을 타고 있는 신기한 아이라서도 아니었고, 이렇게 자신을 좋아해서만도 아니었다. 이윽고 희네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나도 네가 좋구나." 여자아이는 또 한참 생각하더니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웃는 얼굴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순간 그 눈빛에 무척 슬픈 빛이 깃들어 있어서 희네는 아리송했다. 희네가 다시 물었다. "이름이 뭐지? 아..., 말할 수가 없구나. 미안하다." 그러자 아이는 눈물을 거두고 다시 활짝 웃었다. 눈물이 얼굴을 좀 씻어주어서 얼굴에 얼룩이 지기는 했지만 더 고와 보였다. "이름은 있니?" 여자아이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이...신수와 같이 지내지? 너는 마을이나 부족에 살지 않니?" 그 말을 여자아이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희네는 속으로 생각했다. '불쌍하구나. 아마도 이 아이는 부족에서 홀로 떨어져 나와서 맥이 주워 키운 아이인가 보다. 늑대가 사람을 키우기도 하고, 곰이 아기를 기르는 일도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대로보다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종족도 다른 신수와 살면서, 게다가 신수는 무리도 짓지 않고 혼자 사니, 말도 통하지 않는 신수와 단 둘이서 무슨 낙으로 세상을 살 것인가? 차라리 늑대나 곰과 산다면 무리도 있고 나름대로 형제자매도 있겠지만 혼자 사는 신수와 함께라니..., 너무 불쌍하구나.' 생각을 거두고 희네가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그러면...이, 신수는... 맥이지?" 여자아이는 다시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그럼 이 맥이 키워주었니? 이 맥이 네 아버지나 어머니니?" 여자아이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엎드려서 맥의 머리를 안고 흐뭇한 표정으로 얼굴을 비벼 보였다. 그 행동거지가 아기 같으면서도 곱고 우아하여 희네가 웃었다. "그럼 너는 맥의 딸이로구나." 여자아이는 맥의 털에 얼굴을 묻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는 희네다, 희네." 여자아이는 웃으면서 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데 너도 이름이 있어야겠구나. 너를 뭐라고 부르지?" 여자아이는 웃으면서 마치 희네에게 무슨 말이든 하라는 듯, 자꾸 손을 저어 보였다. "내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라고?" 여자아이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에 대해 아는게 뭐 있다고...근데 너는 참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초롱꽃 향기 같으니 초롱꽃이라고 할까?" 여자아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희네는 속으로 생각했다. '조금 느리기는 하지만 말을 이렇게 잘 알아듣는데 누가 가르쳐준걸까? 맥이 신수라지만 말할 줄은 모르는데 말을 어떻케 가르친 걸까?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그러면서 희네는 몇 가지 예쁜 이름을 댔는데, 그때마다 여자아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완강하게 머리를 젓는 것이었다. 희네도 좀 지쳐서 투덜거렸다. "이봐, 내가 너에 대해 아는 거라곤 네가 맥의 딸이라는 것뿐인데...내가 어떻게 이름을 지을 수...." 그 순간 희네가 '맥의 딸'이라는 말을 입에 담자 여자아이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희네는 좀 이상해서 하던 말을 끊고 물었다. "맥의 딸? 맥딸? 그걸로 불러달라는 거야?" 여자아이는 눈을 빛내며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희네는 좀 이상한 이름 같다고 여겨서 말했다. "맥딸...아, 그냥 맥달이라고 하자. 그 이름이 정말 마음에 드는 거야?" 그러자 여자아이는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희네는 영문을 몰랐지만 그냥 웃으며 말했다. "네 이름이니 네가 좋으면 되지. 더 예쁜 이름도 많은데... 맥달, 맥달...그리 나쁜 것도 아니구나. 너는 맥이 키워주었으니 그 은덕을 잊으면 안 되겠지. 그래, 맥달. 만나서 정말 반갑구나." 희네의 말에 여자아이는 정말 기쁜 듯, 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희네의 두 손을 곱고 가느다란 손으로 꽉 쥐었다. "신수도 좋지만, 사람은 사람들과 같이 사는 게 좋지 않겠니? 너, 사람들과 같이 살고 싶으면..." 희네의 말을 듣다가 여자아이가 갑자기 맥의 털 속에 손을 넣어 뼈로 조각한 작은 물건을 희네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때, 별안간 맥이 번쩍 고개를 쳐드는 바람에 희네는 균형을 잃고 '어이'하며 맥의 머리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맥의 머리에 거의 엎드려 있었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았다. 맥의 아래에서 불안하게 서 있던 나래는 갑자기 맥이 고개를 쳐들고 형이 그 위에서 굴러 떨어지자 놀라서 얼른 희네를 받아안았다. 소중한 형을 떨어뜨린 맥에게 뭐라고 욕을 하려는데 맥이 몹시 놀라 당황한 눈빛을 하며 급히 몸을 일으켰다. 순간, 하늘 위에서 노한 듯한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로 들리거나 특별한 부족의 말은 아니었는데도 확실하게 그 뜻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녀석! 내 눈을 속이고 어딜 갔나 했더니만!" 그러자 거대한 신수 맥이 갑자기 쩔쩔매매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희네와 나래도 몹시 놀라 그 자리에 굳은 듯이 서 있는데, 맥과 희네 나래 사이에 갑자기 흰옷을 걸친 노인이 나타났다. 흰 머리와 흰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눈부실 정도로 밝은 흰옷을 입은 노인이었는데, 날아온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자리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놀랍게도 노인은 허공에 떠 있었다. 노인은 몹시 화난 듯, 맥을 꾸짖었다. "저 아이를 사람과 만나게 하며 어쩌겠다는 게냐? 아무리 저 아이가 떼를 쓰고 저 아이의 힘이..." 노인은 말을 하다가 별안간 말을 끊은 듯,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희네 나래에게만 들리지 않을 뿐, 맥이 쩔쩔매는 것으로 보아 노인에게 혼이 나는 것 같았다. 희네와 나래는 너무 얼떨떨하여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맥을 타고 다니는 아이는 맥이 키워서 그런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노인은 아예 맥을 부리는 것 같았다. 더구나 홀연히 나타나고 허공에 뜨고 하는 것이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 희네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이분이야말로 선인 중에서도 대선인일 것이다! 아무리 선인이 기이한 능력이 있다 해도 신수를 강아지처럼 부리는 선인은 대선인일 수밖에 없다.' 몇십 년을 살아도 선인 하나를 만날까말까라는데 하물며 대선인을 만난다는 것은 지극히 운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더구나 희네는 선인에게서 다리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하지 않았던가? 나래도 그 눈치를 챈 듯, 자꾸 희네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그러나 희네는 돌연 화가 치밀어올랐다. '이 대선인이 맥을 강아지처럼 부리는 것을 보니, 저 아이도 이 대선인이 주워온 것이 분명하구나. 아이가 말을 알아듣는 것도 그 때문이었나 보다. 그런데 자기가 돌보지 않고, 아무리 신수라지만 맥 같은 짐승에게 맡겨 키우게 하다니. 그게 도대체 대선인이 할 짓인가? 저 아이의 꼴도 그렇고, 불쌍하지 않은가 말이다. 차라리 자기가 못 키울 것이면 다른 부족에게 맡기면 될 것을, 왜 저렇듯 짐승처럼 키우느냔 말이다.' 그러다가 희네는 문득 괴이한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저 아이는 몹시도 고운데, 혹시 잡아두었다가 나중에 못된 짓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아니, 지금도 그러고 있는 중은 아닐까? 틀림없다! 자기는 옷을 입으면서 아이에게는 제대로 된 옷조차 안 입혔으니! 그건 분명...' 그런 생각에 이르자 이상하게도 머리로 피가 몰리며 걷잡을수 없이 분노가 치밀었다. 평소 그런 호색한을 보기도 했었고 그런 짓을 하는 자들은 간혹 있다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화가 난 적은 없었다. 희네는 이상하게 냉정을 잃고 말았다. '아무리 대선인이라 해도 이런 짓을 하는 것을 보면 좋은 사람은 아니다! 만에 하나 그런 짓을 안 했어도 이건 사람으로서 할 짓이 못 된다! 왜 아이를 혼자, 짐승에게 맡겨 키우게 한단 말이냐?' 이윽고 노인은 맥을 다 꾸짖었는지 희네와 나래에게 몸을 돌렸다. 아주 자상하고도 엄숙한 미소를 지었는데 대선인의 풍채가 완연했다. "놀랐겠구나. 안 그래도 너희 형제를 만날 인연이 있었는데, 조금 일렀..." 노인이 희네와 나래를 보고 막 입을 여는 순간, 희네가 갑자기 소리를 쳤다. "저 여자아이는 노인이 키웠습니까?" 노인이 약간 당황스러운 듯했다. 감히 이 어린 소년이 자신을 보고 놀라기는커녕 대뜸 하는 소리가 곱지 않으니, 아무리 대선인이라도 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나래가 놀라 형의 옷깃을 자꾸 잡아당겼는데도 희네는 멈추지 않고 화를 터뜨렸다. 옳지 못한 일에 대한 분노가 점점 끓어올랐기 때문이다. 그것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 대선인이 옳지 않은 일을 했기 때문에 더더욱 화가 나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몽매하기에 한때 악한 짓을 할 수도 있고 잘못된 행동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선인이라면 깨우침을 얻은 사람인데도 옳지 못한 일을 했다는 것 때문에 분노가 더더욱 커지는 것이었다. 대선인 한 명의 죄는 보통 사람 천만 명이 죄를 짓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라 여겼기에 희네는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이상한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울리게 할 정도로 이상하게 친근했고 불쌍하기도 해서, 치미는 화를 걷잡을 수가 없었다. "저 여자아이를 돌려보내 주시오!" 노인은 좀 어이가 없는지 웃으며 물었다. "왜 그런 소리부터 하는 것이냐? 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을 텐데..." 아주 드문 일이었지만 나래가 형을 제치고 나섰다. "대선인이십니까? 정말로 반갑습니다. 저희 형제는 오랫동안 대선인님을 찾아다녔습니다. 부디 저희 형님을 구할 수 있는..." 나래가 말을 하고 있는데 희네가 갑자기 빽 소리를 질렀다. "그만!" 나래는 깜짝 놀랐다. 희네가 화를 내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항상 평정을 잃지 않고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지 않는 희네였다. 그런데 왜 대선인을 만나자마자 이렇게 화를 내는지 나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래는 아이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고 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니 모르는게 당연했다. 노인도 의아한 듯 다시 물었다. "희네여, 왜 그러는가? 나래의 말까지 못하게 할 것은 무엇인가? 그는 너의 다리에 대해..." 노인이 이미 희네 나래의 이름부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하여 나래는 기가 죽었다. 그러나 희네는 점점 화가 치밀어올랐다. 희네는 화를 거의 내지 않기 때문에 한번 화를 내면 무섭게 끓어오르는 성격이었다. "당신이 아무리 대선인이라 해도, 아무리 능력이 크다고 해도,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겠소!" 그러자 노인은 놀라면서 뭔가 타이르려는 듯 말을 하려 했고, 나래도 놀라서 희네에게 뭐라 하려 했는데 너무도 기가 막혀 말조차 잘 나오지 않았다. 희네가 큰 소리로 하늘에 외쳤다. "나, 주신의 희네는 안파견 한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니, 우리 형제는 저 대선인에게는 아무 도움도 받지 않을 것이며 도움을 받을 경우 혀를 깨물고 죽어버릴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노인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고, 나래는 그만 눈앞이 캄캄해져서 기절해버릴 지경이었다. 왜 그러느냐고 묻고 싶어도 너무도 놀란 나머지 말이 목에 걸려서 나오지를 않았다. 대선인인 노인이 말없이 희네를 바라보다가 탄식했다. "도대체...왜...? 왜 그러는 것이냐? 왜 너의 앞길을 망치려는 것이냐?" 계속 희네는 목소리를 돋우었다. "듣고 싶지 않습니다. 맥달을 되돌려보내주시오 안 그러면 목숨을 걸고 당신과 싸우겠소!" 순간 노인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아아..., 이럴 수가... 이것도 하늘의 뜻인가? 저들이 모든 것을 짊어져야만 하는가?" 비록 힘없고 항상 웃기만 하는 희네였지만 화를 내자 그 기세가 너무도 무섭고 거세어 두려운 것이 없던 나래조차 그 기세에 눌려 꼼짝을 못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는 알 수 없는 힘과 기백이 희네에게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돌려보내 줄 거요? 말 거요?" 희네가 다시 외치자 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다. 저 아이는 아니 된다." "그럼 나와 싸웁시다." 희네는 나래의 손에 쥐어주었던 구리칼을 빼앗아 들고는 앞으로 나섰으나 그 순간, 온몸이 굳어져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래도 놀라서 주먹을 쥐고 나가려 했으나 나래도 역시 몸이 굳어져 버렸다. 노인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는데 천하장사인 나래마저도 몸이 굳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희네는 입은 마비되지 않은 듯 커다랗게 외쳤다. "정말 대선인답구려! 하지만 옳지 못한 대선인은 두렵지 않소! 죽이려면 죽이시오! 다만 저 아이는 풀어주시오!" 그때 희네의 목소리를 듣고 맥의 머리 위에 있던 여자아이가 갑자기 '흐흑'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노인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희네여,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는가? 너는 하늘을 우러러 맹세를 했고, 그것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 "상관없소!" "너의 마음은 이제 알겠으니. 그러나 너는...너무도 성급했다. 저 아이는 아니 된다. 세상에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부를 수 있는 아이니라..." "저 아이가 무슨 화를 불러일으킨단 말이오? 당신이 더 큰 파일 것이오!" 희네가 그 지경이 되어서도 조금도 굽히지 않자 갑자기 노인이 껄걸 웃었다. "수천 년 도를 닦아온 나, 자부가 오늘 대단한 망신을 당하는구나! 하하..." 몸이 굳어 있던 나래는 깜짝 놀랐다. 저 대선인이 정말 자부선인이란 말인가? 안파견 한님을 도와 주신을 세우게 하고 인간의 도리를 일러주었던 대선인. 그 은덕을 잊지 못하여 대대로 신시에 자부선생이라는 이름을 남기게 만든 그 자부선인? 그 말을 믿지 않겠다는 듯이 희네는 계속 외쳤다. "그런 분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당신이 자부선인일 리가 없소! 그냥 우리를 죽이려면 죽이시오!" 그러고는 나래를 쳐다보았다. "아우야! 아우야! 정말 미안하구나! 우리 뜻도 이루지 못하고, 우리는 여기서 저 요망한 선인에게 죽겠구나. 그러나 아우야, 나를 이해하거라!" 희네가 외치면서 눈물을 흘리자 나래도 문득 마음이 감동되어 눈물을 주르륵 쏟으며 외쳤다. "저 노인이 자부선인이건 아니건 상관없어! 형님이 가는 길은 어떤 길이건 나도 가! 형님! 형님! 안파견 한님 곁에서 다시 만나자구!" 두 형제가 눈물을 흘리며 당당하게 외치자 노인, 자부선인은 공허한 음성으로 껄걸 웃었다. "그렇구나, 그래. 그것이 진정한 길이었더냐? 그래, 그래야 한다. 그래야 하고말고!" 돌연 희네와 나래의 몸이 자유롭게 풀어졌다. 희네와 나래는 놀랐으나 여전히 희네는 자부선인을 노려보았다. 자부선인이 혼잣말처럼 신비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너희 형제는 하늘이 낸 사람들이다. 나는 너희 형제를 도와 너희의 뜻을 일으키려 했으니. 그러나 내가 잘못한 것이구나. 선인들을 세상에서 몰아내어 신을 세우고 인간의 세상을 만드는데, 나 같은 선인이 어찌 힘을 쓴단 말인고. 인간의 세상을 만든다면서 어찌 내 힘을 빌려주려 했단 말인고. 아직 멀고 먼 것이구나..." 그러다가 자부선인은 희네와 나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 이제 모든 것을 인간에게 맡기고자 한다. 너희 형제에게 맡기고자 한다. 그러나 묻겠다. 너희의 길을 막는 것은 인간만이 아닐 것이니라. 신수도 있고 고립자도 있고 서인도 있으며, 나아가서는 나를 능가하는 대선인의 힘이 너희를 막으려 할지도 모르느니. 그런데 너희는, 정말 너희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해나갈 수 있는가? 그럴 자신이 있는가?" 희네는 이미 노인의 말에 깊은 깨달음이 담겨 있음을 알고 진짜 자부선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해는 했지만 그래도 저 아이는 분명 불쌍한 처지였고 저 아이가 불행해진 것은 자부선인 탓이라고 믿었다. 자부선인에게 희네가 당당하게 외쳤다. "당신이 정말 자부선인이건, 아니건 나는 말하겠습니다. 저는 선인도 아니며, 하늘의 도리를 깨달은 잘난 사람도 아니지만, 아무리 작아도 옳은 것은 옳은 것이니 옳게 해야 하고, 아무리 큰 까닭이 있어도 그른 것은 그른 것이니 그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저 아이가 세상의 재앙이 된다 하지만, 세상의 재앙이 될 인간이 왜 태어나겠습니까? 하늘이 그런 인간을 낸다면, 그 아이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세상을 망하게 할 것 아니겠습니까? 저 아이가 사람들에게 내린 하늘의 시험이라면 왜 그것을 하늘의 시험대로 맡기지 않고 선인인 당신이 감추어두려는 것입니까? 사람을 진정으로 생각하고 사람을 위한다면 왜 사람을 믿지 않습니까?" "그러면 사람에게 주어진 힘든 일도 사람의 힘으로 해나가야 하는 것이냐?" "물론입니다." "그 힘든 일을 너희가 해야 한다 해도?" 그러자 희네는 늠름하게 말했다. "바라던 바입니다." "네 다리는? 네 목숨은? 네 아우의 운명은?" "주어지는 대로 해나가겠습니다." "너희는 내 손가락 하나도 당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하겠다고?" "내가 죽어도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뜻이 중요한 것입니다. 목숨이 다해도 뜻이 남으면 사람은 무엇보다 강합니다. 사람 하나는 약하더라도 사람들은 선인이나 신수보다도 강합니다!" 희네가 낭랑하게 외치자 자부선인은 웃으면서 손뼉을 짝짝 쳤다. "훌륭하구나. 내 너에게 배웠느니라. 그래, 사람의 일은 사람에게 맡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하게 가치 있는 일이니라. 그것이 진정한 하늘의 뜻인지도 모르지..." 잠시 말을 끊다가 자부선인이 다시 말했다. "여자아이는..." 희네가 단호한 목소리로 자부선인의 말을 막았다. "맥달입니다. 이름을 지었으니 그리 불러주소서." "아, 맥달이라 이름 지었느냐? 그래..., 허허. 맥달은 내 돌려보낼 것이니라.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중에 만나게 될 것이니라." "왜 그렇습니까?" "네가 바라는 대로 사람답게 만들어 보내야 할 것 아니겠느냐? 그 때문에 네가 화를 낸 것 아니더냐? 하하하..." 자부선인은 웃음을 멈추고 덧붙였다. "그리고 저 아이를 다시 만나게 되면, 너는 앞으로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니라. 모든 것을...아마도 저 아이를 거두는 것이 하늘이 네게 내린 두 번째 시험이 될 것이다." "두번째라고요?" 옆에 있던 나래가 의아한 듯 물었으나 자부서인은 대답하지 않고 크게 양팔을 쳐들며 외쳤다. 아직 희네는 자부가 말한 '모든것'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었으나 자부는 이미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짐작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너희가 알아서 한다 하지 않았는가? 자, 이제 돌아가자. 지금 겪은 모든 일은 때가 되면 기억이 날 것이다. 모자라는 것이 남는 것보다 낫느니." 순간 희네와 나래는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까마득히 정신을 잃어버렸다. 자부선인은 다시 한번 웃었다. 자부선인이 망연하게 허공에대고 탄식하는 듯한 소리가 희네의 귓가에 마지막으로 울려퍼졌다. "맥달...맥달이라. 그래, 저 깜찍한 녀석은 이미 다 알고 있었을게야! 다 알고 벌인 일일 거야! 맥달아, 맥달아. 너는 모든 것을 알 테지? 너의 운명도, 저 아이들의 운명도, 그리고 모든 사람의 운명도...! 그래서 한 일이지? 그러나 그 때문에 너는 웃고, 또한 울 것이다. 영원히...영원히.." 두 형제가 깨어난건 다음날 막사 안에서였다. 양역이 형제가 늦잠을 잔다고 깨우러 왔던 것이다. 희네와 나래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런데 희네는 손에 작은 뼈를 조각한 부적인지 목걸인지를 꼭 쥐고 있었다. "그게 뭐야?" 양역이 묻자 희네는 자신도 의아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게. 이게 왜 내 손에 있지?" "예쁜데?" 양역이 무심코 그것을 잡으려고 손을 뻗치자 희네는 반사적으로 손을 꽉 쥐었다. 희네는 평소 어떤 물건이든 친구에게 아끼는 법이 없었는지라 양역은 기이하게 여겨 물었다. "소중한거야?" 그러자 희네가 즉시 대답했다. "응." "왜?" "나도 몰라." 평소의 희네답지 않게 좀 얼떨떨하게 대답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 뼈 목걸이를 품속 깊숙이 집어넣었다. 희네는 뭔가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무슨 사람의 얼굴 같았는데, 마치 꿈에서 본 것처럼 얼굴이 뚜렷하게 생각나지는 않았고 누구인지, 왜 그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래도 희네처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전날 밤 잠자리가 몹시 뒤숭숭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카린산의 여인족 어느덧 사와라 한웅의 행렬은 회의가 열릴 태산에 들어섰다. 이미 많은 숫자의 부족들이 태산에 도착해 있었고 사와라 한웅의 행렬과 만나서 그 뒤를 따라온 부족의 행렬도 더 늘어나 있었다. 사와라 한웅이 도달하자 지나족의 염제 신농인 유망이 직접 나와 한웅을 맞이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형식상의 만남이었을 뿐이라 사와라 한웅은 가마에서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다만 우사 병예를 시켜서 길일인 날에 회의를 시작할 것이니 준비하라고 일렀을 뿐이었다. 유망은 곧 돌아갔는데, 그때 희네와 나래는 직접 유망을 볼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했다. 가마 뒤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유망의 태도는 상당히 거만했으며, 의식적으로 한웅님보다 호화스럽게 꾸미고 나온 것 같다고 했다. 아무래도 회의 결과가 좋지 않을까 봐 걱정된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좌우간 사와라 한웅의 행차가 태산에 도달하고 자리를 잡자 비렴이 희네와 나래를 불러 일렀다. "드디어 태산에 왔구나. 이제 회의가 시작되면 너희가 할 일이 생기느니라. 한웅님의 경호는 회의하는 낮에만 하게 되므로 밤에는 돌아다녀도 되며 주술이나 호흡연습을 하라." "밤에는 괜찮습니까?" "한웅님은 사람들에게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며, 우리 셋중 한 사람은 항상 한웅님을 뫼신다. 그리고 치우우레님이 사울아비들과 함께 철통같이 지키므로 염려할 것이 없다. 그러니 회의 시작 때 말고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회의가 시작되면 한웅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셔야 하느니, 그때 너희는 바로 옆에서 한웅님을 모시게 된다. 너희 말고도 열 사람이 있는데, 각 부족의 수행원이 열 다섯 명씩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둘을 포함한 열두 사람과 우리 풍백, 운사, 우사가 한웅님을 뫼시고 회의장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니라." 그 말을 듣고 희네와 나래는 왜 삼사가 그토록 경호에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있었다. 천하의 주신 한웅을 모시는 사람이 열다섯 명이라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회의가 시작되면, 회의장 문이 닫혀 밖의 사람들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된다. 나머지 사람들은 밖에 진을 치고 기다린다. 그런데 주신 한웅이 열다섯 명밖에 데리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의외였다. "어이하여 열다섯밖에 아니 됩니까?" 나래가 묻자 비렴이 웃으며 말했다. "태산 회의장에는 모두 삼백여 부족이 와 있다. 열다섯씩만 들어가도 오천 명이 된다. 더 많은 숫자가 모이면 회의도 아니 될 것이다." "그러나 한웅님은 특수하시지 않사옵니까? 대주신의 한웅께옵서..." 이번에도 희네는 입을 다물고 있었고, 나래가 묻자 비렴이 그 말에 대답했다. "그것은 한웅님께옵서 직접 명하신 것이다. 한웅님만 많은 부하를 끌고 가지 않는 것으로 해서 다른 부족장들을 존중하는 뜻을 보이시려는 것이니라. 우리 주신은 가장 강한 나라이나, 힘만으로 강하게 군림하는 나라는 아니다. 모든 사람을 편하게 하라는 안파견 한님의 가르침을 한웅님으로부터 모두가 실천함으로써 강한 나라로 인정받는 것이니라." 비렴의 말에 나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깊숙이 절을 했다. "제가 잘 몰랐습니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다. 아무튼 너희들은 주신에서 뽑힌 열두 명의 젊은이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그러니 잘 부탁한다." "나머지 열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나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따로 만났느니라. 회의는 며칠 뒤이니 내일 다른 사람들과 만나게 해주마. 그리고 그때부터는 따로 행동할 수 없고, 열두 명이 같이 훈련을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하는 것이니 바깥사람들은 절대로 알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야. 알았느냐?" "예!" "그럼 오늘은 이만 가서 쉬거라. 볼일이 있으면 미리 처리하고." 비렴은 두 사람을 내보냈다. 희네와 나래는 나오자마자 헌원의 막사를 찾아갔다. 내일부터는 한데 모여서 훈련해야 하니 오늘밖에는 유망을 만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헌원은 며칠 뒤에 열릴 회의장 건설 때문에 밖에 나가 있었다. 회의 준비는 잘되어가고 있었다. 태산의 중턱쯤 되는 전망 좋은 등성이에 아주 넓은 터를 닦고 나무와 풀을 베어 평평하게 만든 장소가 회의장이었다. 수천 명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상당히 넓은 장소였다. 그 주변에는 나무 울타리를 쳤고, 회의를 하는 장소는 커다란 가죽을 이어 기둥으로 세워 혹여 비가 내려도 회의를 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 천막은 몹시 커서 수백 명이 들어갈 수 있을 듯했는데, 이미 완성된 것을 지나족들 중 손재주 좋은 일들이 알록달록하게 꽃을 으깨어 만든 물감으로 칠을 하여 장식하고 있었다. 거의 오백 명도 넘는 인원이 회의장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그 총감독의 공손헌원인지라 희네 나래는 헌원이 혹시 바쁘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뜻밖에 헌원은 희네와 나래를 보더니 쾌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왔군. 희네, 나래. 그럼 염제님을 뵈러 가보세나. 이보게, 이주, 신도, 울루! 막사 짓는 일은 자네들에게 맡기겠네." "예." 이주는 성격이 꼼꼼했고 신도 울루는 일꾼들을 잘 부렸기 때문에 헌원이 없어도 일은 척척 잘되어갈 듯했다. 헌원은 그 길로 분주하게 희네와 나래를 달고 염제 신농인 유망을 만나러 나섰다. 부하는 아무도 딸리지 않았다. 이미 태산 아래는 사방에서 모인 부족들로 와글와글 들끓고 있었다. 멀리 남쪽에서 온 피부빛이 가무잡잡한 사람도 있었고, 먼 북쪽에서 온 흰 피부와 키가 큰 사람들도 있었다. 서쪽에서 온 사람들은 코가 높고 눈이 움푹 들어갔으며, 머리색이 검지 않고 갈색인 사람도 간혹 있었다. 길을 가면서 희네는 헌원에게 말을 건넸다. "세상은 정말 넓군요. 이렇게 많은 부족들이 모이다니요" "세상이야 끝이 없지. 이런 부족말고도 저 사방 너머에는 더 이상하고 더 신기한 부족들도 많다고 하네. 괴물이나 도깨비들도 많고." 그 말에 나래가 물었다. "도깨비라고요?" "그렇다네. 먼 서쪽으로 가면 겨울이 춥고 음습하여 사람이 살기 힘든 고장이 있다는데, 머리에 누렇고 붉은 털이 난 도깨비들이 산다더군. 그 도깨비들은 아주 사납고 난폭할뿐더러, 덩치가 크고 힘이 세다던걸." "호오..." 나래는 신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희네가 그런 나래를 쳐다보고 물었다. "그건 왜 묻니? 나중에 한 번 구경 가볼래?" "도깨비들 사는 곳에 뭐 하러 가? 더구나 아주 멀 텐데." 희네와 나래의 이야기를 듣고 헌원이 웃으며 말했다. "북쪽으로 아주 멀리 가면 몹시 추운 땅인데, 너무 추워서 온통 땅도 산도 얼음으로 되어 있다고 하네. 그 도깨비들보다 더 키가 크고 사나운 족속이 사는데, 그들을 과보족이라고 하지. 과보족은 도깨비는 아니지만 도깨비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하더군. 서쪽 도깨비들 땅으로는 몇 년을 가도 모자라지만, 북쪽은 일이 년이면 갈 수 있을 걸세. 언제 한번 가보겠나?" "허, 그런 추운 땅에 왜 가겠어여? 난 추운 건 질색이라서..." 나래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나래는 헌원과 이번에 두 번째로 만나는 것이지만, 이미 헌원을 퍽 좋게 여겨 마치 마을 아저씨 대하듯 하고 있었다. 희네는 그런 나래에게 뭐라고 하려다가 헌원이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닌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헌원은 도리어 나래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북에만 기이한 사람이 사는 것은 아닐세. 남쪽 지방에도 키가 작고 눈이 크고 얼굴이 검은 사람들이 산다네. 그들은 울창한 숲 속을 제집처럼 여기고 온갖 동물들과 뒤섞여 산다고 하네." "동쪽은 끝이 있다던데요 아주 큰 물이 꽉 차 있고 거기가 세상의 끝이라 하더군요" "나도 그렇게 들었네. 그리고 서남쪽의 사람들은 몹시 특이한 사람들이 많다네. 북쪽 야만인들 같지 않고 무척 점잖고도 용감한 사람들인데, 얼굴빛이 그을고 눈이 맑고 크며 코가 아주 높은 사람들이 많지. 서남쪽 저 먼 곳에 사는 부족들도 회의를 구경하러 조금은 올 것 같네." "서남쪽 먼 곳 사람들이오?" "그렇다네. 이번 회의에는 카린산의 쑤앙마이도 사람을 보냈는데, 카린산 부족들은 서남쪽 아주 먼 곳이 있기 때문에 우리보다 오히려 그 사람들과 더 자주 만난다고 하네." 그 말을 듣고 희네의 눈이 빛난다. 만에 하나 유망도 방법이 없거나 치료를 거절하면 카린의 쑤앙마이를 만나러 갈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나래도 둔하지 않아 희네의 생각을 재빨리 눈치를 채고 헌원에게 물었다. "카린산 부족들도 아주 신비하다던데요? 한 번 만나보고 싶군요" "허허...카린산 부근에서 가장 큰 쑤앙마이 부족은 바로 여인족이라네." 뜻밖의 말에 나래는 놀랐다. "여인족요? 그럼 여자들만 있는 부족이란 말인가요? 여자들만 있으면 애를 못 낳아 대가 끊길 건데?" 그 말을 하며 나래는 약간 얼굴을 붉혔다. 헌원은 그런 순진한 나레의 표정이 재미있는 듯 싱글거리며 말했다. "물론 쑤앙마이족도 남자가 있네. 그러나 남자들은 집안일만 하고 그 수도 무척 적지. 여자들이 사냥을 하고 전쟁을 하며 부족을 다스리는 족속들이라 남자들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네." "그거 이상하군요 남자가 집안일 하는 거야 그럴 수 있지만, 왜 힘센 남자 대신 힘없는 여자들이 사냥을 하고 전쟁을 할까요?" "모든 부족마다 나름대로 까닭이 있는 것이니 우리가 뭐라 할 수 있는가? 더구나 쑤앙마이의 밑에 있는 여자 전사들은 무섭기로 유명하다네. 무슨 방법인지 모르지만 쑤앙마이가 주술을 쓰기 때문에 그 부족의 여전사들은 남자에 비해 힘도 용기도 기술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거야. 카린산 부근에서는 쑤앙마이족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족이 없다네." 사나운 여자라는 말에 나래는 불현듯 공손발을 떠올렸다. 그러나 나래는 곧 그 생각을 지우고 헌원을 바라보았다. "한번 꼭 만나보고 싶네요. 염제 신농님은 쑤앙마이님과도 자주 사람을 보내 물건을 바꾼다고 하던데요?" "그렇다네. 쑤앙마이족은 일년 내내 눈이 녹지 않는 아주 높은 카린산에 살기 때문에 물건이 많지 않아 우리 지나족과 많은 물건을 바꾸어 가지. 전부 여자들이지만 상당히 용감하고 똑똑하다네." "전부 여자들이라니...꼭 한 번 보고싶네요." 나래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흥!'하고 냉랭하게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래 생각에 공손발의 목소리 같았다. 하지만 사방을 둘러보아도 공손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희네와 헌원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어서 나래는 희네와 함께 계속 헌원을 따라갔다. 한참 가자 커다란 나무 울타리가 나오고, 지나족들이 무리지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다 울타리를 장식하고 고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울타리는 사람의 키보다 높았고, 꽃이며 새깃털이며 물감등으로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었는데,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얼굴빛이 좋지 않았으며 커다란 몽둥이와 채찍을 들고 감시하는 전사들이 여럿 보였다. 희네는 그 모습을 보고 기분이 조금 언짢아졌다. '회의장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며칠 동안 잠만 자면 되는 자기 막사주위에 저토록 높은 울타리를 치고 저렇게까지 치장을 하다니, 자기 위신을 세우려는 것일까? 허나 아무리 위신을 세운다 하지만 한웅님도 저런 쓸데없는 일은 시키시지 않는다. 그것도 부족사람들이 스스로 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매를 때려가면서 일을 시키다니. 유망의 사람됨을 알 만하군.' 화려한 장식이 된 막사를 가리키며 헌원이 희네에게 말했다. "저 울타리 안에 염제 신농님이 계신다네." 나래 역시 울타리가 언짢은 듯 툭 던지듯 물었다. "저 울타리요?" "그렇타네." 그 말을 하는 헌원의 얼굴에는 일종의 자부심이나 자랑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나래는 이상하여 물었다. "저 울타리가 좋아 보이시나요?" "큰 부족의 족장이 되려면 저렇게는 해야지. 사실 더 크고 높아야 하는 것이네만..." 그 말을 듣고 나래는 더더욱 언짢아져서 다시 뭐라고 하려는데 희네가 살짝 나래의 옆구리를 찌르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울타리 입구에는 수십명의 전사들이 서 있었다. 구리 무기는 아니지만 번쩍거리는 푸르스름한 옥돌과 검은 광택이 나는 검은 돌 무기를 들고 역시 화려한 치장을 한 전사들이었다. 그들은 헌원을 보는 순간 약간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허나 감히 헌원의 앞을 막아서지는 못하고 길을 비켰다. 그것을 보고 나래는 다시 헌원에게 물었다. "눈치리들이 고약한데, 왜들 그런가요?" 헌원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저들은 형천과 금천의 부하 전사들이네." "형천과 금천요?" "그렇다네. 그들 둘은 염제 신농 밑의 아주 강한 부족장들인데 나와는 사이가 좀 좋지 않다네. 그래서 저러는 것이지." 그러다가 헌원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왜그러십니까?" 희네가 묻자 헌원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형천과 금천의 전사들이 있는 걸 보니 그들이 와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금 염제님을 만나지 않는 편이 좋겠네." "왜 만나지 않는 편이 좋습니까?" "아까도 말했듯 형천과 금천은 나와 사이가 좋지 않으니, 그들 둘이 염제님 곁에 있다면 내 일에 무조건 훼방을 놓으려 할 걸세. 그러면 낭패가 아닌가?" 희네와 나래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지금 염제를 만나지 않으면 만날 시간이 없었으니 난처했던 것이다. 생각 끝에 희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별수 없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 있겠습니까? 염제 신농님을 뵙게 해주십시오." "내일 정도에 다시 오는 것이 나을 듯한데..." "내일 다시 오기가 어렵습니다." 그러자 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울타리를 넘어 안쪽에 있는 가장 큰 막사로 향했다. 그 안에는 많은 전사들이 있었으며 또 기이한 차림을 한 많은 부족사람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화려한 차림인 것으로 보아 부족장들 같았다. 그중에서도 사슴뿔을 머리에 쓴 부족과 온몸에 물감으로 뱀을 그려 넣은 부족, 나뭇잎과 잔가지로 만든 도마뱀 같은 탈을 쓰고 있는 부족 등이 눈에 띄었다. "저게 다 웬 사람들인가요?" 나래가 묻자 헌원이 말했다. "지나족 부근의 부족장들일세. 염제님께서 거느리시는 부족들이라 할 수 있지." "동물을 섬기는 부족들인가요?" "그렇다네." 세 사람이 가장 크고 좀 난잡할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진 중앙의 큰 막사에 도달했을 때, 그 막사 앞에는 이미 수십 명의 사람들이 정렬을 하고 서 있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여자들이었다. 여자들이라지만, 긴 창을 손에 들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렸으며 이마에 가죽띠를 두르고 보기 힘든 크고 화려한 빛깔의 새털을 꽂았으며, 어깨와 다리를 드러낸 짧고 단단해 보이는 가죽옷 차림의 키 크고 늘씬한 전사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표범 모양의 가면을 얼굴에 쓰고 있어 생김새를 알 수 없었다. 가면은 정말 표범의 얼굴을 벗겨 만든 듯했는데 얼굴을 다 가리지 않고 눈과 귀, 코 위까지만 덮여 있었다. 좌우간 대단히 화려한 모습의 여전사들이었다. 그것을 보고 헌원은 나래에게 말했다. "먼저 온 손님이 있군. 아까 말했던 카린산의 여인족인 모양일세." 나래와 희네는 처음 보는 여인족들의 모습에 흥미가 일어 자세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들의 맨 앞쪽에서 화난 듯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고 헌원은 안색이 변했고 희네와 나래에게 말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그리로 향했다. 희네와 나래도 의아하여 그 뒤를 따랐다. 여인들의 대열 앞에서 소리를 치는 여인은 다른 여자와는 달리 흰표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다른 여인들처럼 키가 크고 화려한 치장을 했는데, 아주 특이하게도 머리카락이 검은색이 아니라 은색이었다. 그렇다고 할머니는 아니었고, 오히려 상당히 원숙한 몸매의 여인이었다. 그 옆에는 두 명의 소녀가 있었는데, 그들도 흰표범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한 소녀는 무척 키가 크고 늘씬하여 마치 마른 남자 같았으며 그 소녀의 머리도 눈처럼 희었다. 다른 소녀는 검은 머리칼이었지만 피부가 투명할 정도로 희고 맑았다. 두 소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아직 조금은 덜 성숙한 몸과 입 언저리를 보아 희네 나래 정도 나이또래인 듯했다. 헌원과 그 뒤를 따른 희네와 나래가 다가오자, 소리를 지르던 여인이 헌원을 보고 지나 말로 외쳤다. "헌원님! 잘 오셨소 지나족이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는 겁니까?" "무슨 말입니까? 누루마이?" 그때 나래는 피부가 흰 소녀를 힐끗 보고는 슬쩍 웃으며 희네에게 말했다. 둘 다 이제 막 사춘기로 들어서는 소년들인지라 여자들이 많이 모여 있자 괜히 쑥스럽기도 하고 기분도 묘해졌다. 희네는 묵묵히 표내지 않았지만 나래는 기분이 묘해져서 장난기가 들었던 것이다. "형님, 저 아이 이름도 희네 아닐까?" "무슨 소리냐?" "형님보다 얼굴이 더 하얗잖아? 하하." 나래가 실없이 농담을 걸자 희네는 풋 웃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실없는 소리!" 희네는 나래의 말을 듣고 웃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헌원과 카린산 여인족의 우두머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 누루마이라 불린 원숙한 몸매의 우두머리 여인이 헌원에게 말했다. "나, 카린의 누루마이가 말하오. 지나족과 우리는 항상 좋은관계로 지내왔소. 그런데 염제 신농이 우리를 본체만체하고 만나지도 않겠다는 건 무슨 뜻인지 모르겠구려." 그때 막사 안쪽 그늘진 곳에서 세 사람이 걸어나왔다. 한 사람은 끽구만큼이나 덩치가 크고 덥석부리 수염을 길렀으며 어깨가 늠름하게 벌어진 거인이었고, 한 사람은 다부진 얼굴에 강인한 눈매를 지닌 중년의 남자였으며 다른 한 명은 거의 난쟁이라 할 만큼 키가 작고 더 살이 찌려야 찔 곳이 없을 정도로 뚱뚱한 실눈의 남자였다. 그중 중년 남자가 누루마이에게 말했다. "지나, 금처놎ㄱ의 금천이 말하오. 염제신농께서 당신을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오. 당신의 부하들을 데리고, 무기를 들고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오." "카린의 누루마이가 말하오. 부하들을 데리고 가지는 않더라도 무기를 버리라니! 우린 카린족의 전사들은 절대 무기를 손에서 놓지 않소!" 이번에는 그 옆의 난쟁이 뚱보가 나섰다. "지나, 축융족의 축융이 말하오. 염제님을 뵈옵는데 굳이 무기를 손에 들고 뵙겠다는 건 무슨 이유요? 염제님을 뵈올때는 우리도 무기를 들지 않소!" "카린의 누루마이가 말하오. 카린족의 전사는 절대 무기를 손에 놓지 않소 염제 신농님을 어쩌겠다는 것이 아니잖소. 지나족의 관습도 존중하지만, 우리 관습도 존중받아야 하오." 그러자 우람한 거인이 호통을 쳤다. 우렁우렁하여 귀가 울릴 정도의 목소리였다. "지나, 대인족의 형천이 말하오! 여기는 지나 땅이니, 지나 습관을 따르시오! 그렇지 않으면 염제 신농님을 뵈울 수 없소!" 세 사람의 이름을 듣고 희네는 그들이 염제 주변의 가장 강한 부족장이며 염제의 측근인 형천과 금천이란 것을 알았다. 그러나 축융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었다. 누루마이도지지 않고 외쳤다. 무척이나 고집이 센 듯했다. "카린의 누루마이가 말하오! 그렇다면 만나지 않겠소! 나중에 쑤앙마이께 이 일을 그대로 전하겠소!" 쑤앙마이 이야기가 나오자 희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린산 여인족이라더니, 정말로 쑤앙마이의 밑에 있는 족장인 것 같군." 그때 헌원이 나서서 누루마이에게 달래듯 말했다. "지나, 화산족의 공손헌원이 말하오. 누루마이, 당신들의 관습은 알겠지만 할 수 없는 일이오. 당신들을 못 믿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당신들이 무기를 들고 들어가도록 허락한다면 다른 부족장들도 무기를 들고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 또한 막을 수 없게 되오. 그러다 보면 좋지 못한 부족사람이 무기를 들고 염제 신농님을 만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잖소?"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누루마이가 외쳤다. "카린의 누루마이가 말하오. 무기를 놓으라는 건 굴복하라는 의미 밖에는 안되오! 염제 신농도 전사라면, 그런 겁쟁이 짓은 하지 말아야 하오! 전사라면 무기를 들건 안들었건 당당히 사람을 맞아야 하는 것이오! 그리고 전사가 아니라면 족장이 될 수 없소!" 그 말은 크게 염제를 모욕하는 말이라 형천이 씩씩거리며 등뒤에 짊어졌던 도끼를 꺼냈다. 그 도끼는 정말 무시무시하게 커서 희네 나래의 아버지 치우우레의 도끼보다도 더 큰 것 같았으며, 놀랍게도 구리 무리였다. 형천이 도끼를 꺼내자마자 누루마이의 등뒤에 서 있던 흰 머리의 키 큰 소녀가 재빨리 두 주먹을 쥐고는 누루마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여자답지 않게 상당히 걸걸하고도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카린족의 무라다. 당신, 싸울 건가?" 형천은 나이 어린 소녀가, 그것도 맨손으로 자기 앞에 나서자 어이가 없는 듯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막사 주변의 지나 전사들이 카린의 여인족 주변에 우르르 둘러섰다. 그러나 여인족들은 꼿꼿이 선 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때 희네가 헌원을 보니 헌원은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희네는 그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거 일이 곤란해진 모양이구나. 여기서 난리가 벌어지면 우리는 상관없지만 염제를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더구나 쑤앙마이와도 알아두면 나쁘지 않으니, 좀 건방져 보이더라도 내가 나서 보아야겠구나.' 희네가 앞으로 나서면서 무라와 형천사이를 가로막았다. 나래도 슬쩍 형의 뒤를 따라 섰다. 희네가 낭랑하고 아주 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주신의 사울아비, 희네라고 합니다. 나는 지나족도 아니고 카린산의 부족도 아니지만, 말할 게 있습니다." 헌원은 희네가 나설 줄은 몰랐던 듯, 눈을 크게 떴다. 속으로는 놀란 듯했지만 헌원은 얼굴 표정의 변화가 없는 사람이라 그저 미소를 띠며 바라보았다. 반면 금천은 눈살을 찌푸렸고, 축융은 노골적으로 비웃는 얼굴을 했으며, 형천은 화를 내며 외쳤다. "네가 뭔데 끼어드는 거냐?" 그러나 누루마이는 희네를 힐끗 보더니 형천에게 비아냥 거렸다. "끼어들면 또 좀 어떠한가? 자신이 있는 것 같으니 싸울 때 싸우더라도 말을 들어보는게 뭐 어떻겠는가?" 사실 누루마이도 희네가 끼어든 것이 탐탁지 않았지만, 형천에게 화가 잔뜩 나 있던 참이라 형천이 희네를 욕하자 자신은 반대로 희네를 두둔한 것이다. "주신 사울아비 희네가 말씀드립니다. 감히 끼어든 것은 죄송합니다. 허나 지나족과 카린족이 다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감히 나선 겁니다." 그때 금천이 느릿하게 말했다. 무척 냉정한 목소리였다. "나, 금천이 말한다. 왜 다툴 이유가 없다는 거냐?" 이야기를 할 때 자기 자신의 부족과 이름을 먼저 밝히고 말하는 것은 예의를 갖춘다는 의미이며, 그 말이 공식적인 의미를 지녔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밝히지 않으면 사적인 이야기거나, 상대를 무시한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당시 말이나 습관은 달라도 그 근방의 모든 부족들간에 통용되는 일종의 국제 의례였다. 이로 볼 때, 방금 금천은 절반 정도 예의를 갖추면서 절반 정도는 건방지게 희네에게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금천은 금천씨였고 이름은 사우였지만 금천 부족의 족장이었으므로 모두 그냥 금천이라 불렀다. 희네는 아무런 내색하지 않고 맑은 표정으로 예의를 갖췄다. "주신 사울아비 희네가 말합니다. 지나족은 염제 신농님을 뵈려면 무기를 들지 말아야 한다고 하고, 카린족은 전사라면 무기를 손에서 놓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다." "그렇지." 형천과 누루마이가 동시에 대답했다. 흰 머리의 전사 소녀, 무라는 여전히 누루마이의 앞에 주먹을 쥐고 선 채, 아무 말 없이 희네의 얼굴을 표정없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누루마이의 뒤에 서 있는 맑은 피부의 소녀도 의아한 듯 날카로운 눈길로 희네를 바라보았다. 그 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 조롱이나 비난이나 의아함이 가득한 눈길로 희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희네는 모든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말했다. "주신 사울아비 희네가 카린의 누루마이께 묻습니다. 카린족의 전사가 무기를 손에서 놓을 때는 언제입니까?" 누루마이는 '흥' 코웃음을 치며 거만하게 말했다. "너도 어리고 건방지지만 그래도 사울아비라니 대답해주겠다. 카린의 전사가 무기를 놓을 때는 더 좋은 무기를 손에 쥘 때뿐이다!" 상당히 오만하면서도 빈틈없는 대답이었다. 헌원은 희네가 무슨 수를 쓰려고 그러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 항상 무기를 들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설득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누루마이도 보통은 아니어서 그런 말꼬리를 잡히지 않는 대답을 한 것이다. 헌원도, 다른 사람들도 이제는 희네가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금해졌다. 그러나 희네는 눈 하나 까딱 않고 실망한 표정없이 말했다. 표정이 태연한 사람은 오로지 희네와 형의 지혜를 철석같이 믿는 나래둘 뿐이었다. "그렇습니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작 그것을 알려고 말을 했단 거냐?" 누루마이가 이번에는 희네에게 부아를 냈다. 희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되받았다. "아닙니다. 주신 사울아비의 희네가 말씀드립니다. 지나족과 카린족은 더 다툴 이유가 없습니다." 이번에는 형천이 우렁차게 외쳤다. "왜 다툴 이유가 없단 거냐? 카린족은 무기를 못 놓겠다고 하고, 우리는 놓으라 하는데?" "주신 사울아비 희네가 카린의 누루마이께 청합니다. 무기를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누루마이는 거드름을 피우며 등뒤에 꽂은 기이하게 휘어진 칼을 꺼내 보였다. 가장 단단하다는 푸른 돌로 만든 칼이었는데, 희한한 광택이 감돌 정도로 아주 잘 만들어졌다. 희네는 자신이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보였다. 그 칼은 구리로 만들었으며, 놀랍게도 칼몸은 검은 구리였짐나 칼날 주변은 금색으로 빛나는(이것은 여담이지만 청동기 시대의 최고의 유물 중 하나로 평가하는 것 중 근래 발굴된 월왕구천 '와신상담'의 주인공 중 한 명)의 동검이었다. 이 동검이 바로 이러한 구조인데, 몸체는 단단한 청동, 즉 검푸른빛이며, 쉽게 깨어지면 안 되는 날 부분은 금색 황동 또는 다른 화합물을 입힌 구조로 되어 있다. 이 검은 글자 그대로 청동기로 만드는 칼의 최고봉이라 분석되는바, 소설에 등장하는 희네의 칼은 물론 이보다 훨씬 이전의 물건이지만 그러한 구조를 참조하여 설정했다. 당연히 그 기술이 그 시대에 있었다는 것은 아니며 비슷한 구조를 지녔다는 가상의 설정이다.) 아주 귀하고도 화려한 물건이었다. 바로 신시 제일의 대장장이 불쇠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칼이었다. 지금껏 희네는 그 칼을 뽑은 적이 없었으며 희네가 무척 아끼는 것이어서 나래도 지금 희네가 그 칼을 지니고 왔을 줄은 몰랐다. 사실 전날 밤에 맥을 만나러 갈 때 들고 나간 칼이었으나 그 일은 희네 나래 둘 다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을 보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찬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전사들의 세상이니만큼 좋은 무기는 그야말로 경외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누루마이마저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주신 사울아비 희네가 카린의 누루마이께 묻습니다. 뽐내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 칼이 좋습니까? 누루마이의 칼이 좋습니까?" 누루마이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 칼이 더 좋군." 그러자 희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린의 누루마이시여, 그러면 당신의 칼과 이 칼을 바꾸시겠습니까?" 누루마이는 곧 말했다. "카린의 누루마이가 말한다. 그 칼이라면 바꾸고 말고!" 누루마이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주신 외에는 구리 기술을 가진 부족이 거의 없어서 구리 무기 하나만도 귀하디귀한 판국인데, 그토록 훌륭한 구리 무기는 지금 당장 죽어가는 판국일지라도 얻고 싶은 것은 당연했다. 희네는 웃으며 자신의 칼을 들어 땅에 꽂았다. "그럼 바꿉시다. 주신 사울아비 희네는 카린 누루마이와 칼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누루마이님, 당신의 칼을 주십시오." 누루마이는 급히 자신의 칼을 희네에게 넘겨주었다. 사실 탐욕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만에 하나 지금 지나족과 싸움이 벌어지더라도 이런 좋은 칼을 든 것과 아닌 것은 큰 차이가 있고, 또한 목숨이 달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누루마이가 희네의 칼을 집으려는데 희네가 웃으며 막아섰다. "누루마이시여, 당신은 더 좋은 무기를 얻기 위해 자신의 무기를 놓았습니다. 그러니 너무 급히 무기를 들지 마시고, 염제 신농님을 만나뵌 후 다시 무기를 드십시오. 이제는 지나족도 문제삼을 것이 없고, 카린족도 자존심이 상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제야 몇몇 사람들은 '아'하며 찬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헌원도 희네의 꾀와 임기응변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지나족이나 카린족으로서도 굳이 싸울 필요는 없었다. 단순한 자존심 싸움이라 보아도 좋았다. 누루마이가 무기를 들고서 염제를 만나겠다고 고집을 피울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자신에게 득될 것도 없었다. 희네가 나타나서 이렇게 자신의 좋은 무기를 희생하면서 양측의 자존심을 살려 화해를 시켜주는 터에야 쓸데없는 고집을 피워 어쩌겠는가? 누루마이는 마음속으로 이 소년에게 호감이 갔지만, 일부러 냉랭하게 고집을 부리며 말했다. "상루아비 희네여, 내가 무기를 잡지 않은 사이에 무슨 일을 당하면 책임지겠는가?" 그 말을 듣고 형천이 노해서 외쳤다. "우리 염제 신농의 막사에서 왜 이유없이 사람을 해치겠는가? 다만 버릇없는 자가 아니라면 말야!" 그러나 희네는 형천의 외침을 가로막듯, 누루마이에게 말했다. "누루마이시여, 당신의 칼은 제가 받았지만, 당신이 제 무기를 들지 않았으니 아직 이 칼은 당신 칼입니다." 그러면서 희네는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 칼은 당신 손에 있을 때처럼, 여전히 당신을 지킬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 꽂힌 칼은 여기 이 나래가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 말에 나래는 웃으며 누루마이의 칼을 손에 힘있게 쥐었다. 그것을 보고 헌원은 웃으며 끼어들었다. "누루마이여, 이제 다같이 들어 봅시다. 희네가 자신의 귀한 칼까지 주었는데 아직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오?" 그때서야 누루마이는 희네에게 웃어 보이며 정중하게 말했다. "카린 누루마이가 주신 사울아비 희네에게 말한다. 그대는 왜 그런 보물을 주면서 나를 도왔는가?" "첫째, 이유없는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 안타까웠고, 둘째, 저는 지나족과는 이미 벗이며 카린족과도 벗이 되고 싶어서며, 셋째, 저도 염제님을 뵈러 왔는데 일이 길어지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이유를 대고 희네가 '하하' 맑게 웃자 누루마이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희네의 맑은 솔직함에 자신도 모르게 호감이 가서였다. 평생 표정 변화가 없을 것 같던 무라마저도 싱긋 아주 잠깐, 가볍게 웃었다. 누루마이가 입가에 미소를 담고 말했다. "자네 말솜씨는 정말 반할 정도군. 더구나 솔직하기까지 하니 밉지가 않아. 그러나 자네 부하는..." "제 아우입니다. 나래라고 하죠." "...그래. 자네 아우는 들어갈 수 없게 되지 않았는가?" "괜찮습니다. 염제 신농님을 뵐 일이 있는 사람은 저 하나뿐이니까요." "이런 좋은 칼이 땅에 꽂혀 있으니 누가 욕심내지 않겠는가? 우리가 없는 사이 혹여 결투라도 걸어서 칼을 가지려 한다면 자네 아우가 칼을 지킬 능력이 있을까? 자네 같은 젊은이가 믿고 맡기는 것이니 그만하리라 생각하지만... 너무 어리지 않은가?" 결투를 걸어서 물건을 빼앗는 일은 당시로서는 당연하고도 합법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그런 귀한 물건을 보이는데 놓고 지키니 아무리 염제의 막사 안이라도 누가 집적거릴지 모르는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누루마이는 칼보다는 그 당당하게 나서는 소년들의 능력이 궁금해져서 일부러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그러자 헌원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데리고 온 저 소녀도 어리지만 형천님 같은 천하장사에게도 덤비려 하지 않았습니까? 하물며 이 아이들은 장차 주신의 영웅이 될 만한 아이들입니다. 나래의 힘은 내가 보장하겠소." 그에 덧붙여 희네가 간단하면서도 명쾌하게 답했다. "나래가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누구에게서든 이 칼을 지킬 만은 할 겁니다." "그런가?" 순간 누루마이가 눈짓을 하자 무라가 번개같이 땅에 꽂은 칼로 몸을 이동시켰다. 몸을 날리거나 던진 것도 아닌데 하도 동작이 빨라, 그저 무리가 그 자리에서 없어지고 칼 옆에 나타난 것 같았다. 무라가 막 손을 뻗어 땅에 꽂힌 칼을 잡으려는 순간, 나래는 재빨리 칼을 거꾸로 쥐고 손잡이로 무라의 손을 막았다. 무라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나래의 대응도 신속했다. 누루마이나 무라는 이 소년들을 다치게 하지 않고 시험해보려는 것뿐이었다. 그 의도를 눈치챈 나래 역시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는 선에서 대응했다. 무라는 다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세 번이나 양손을 번갈아 뻗으며 칼을 쥐려고 했지만, 나래는 칼 손잡이로 무라의 오른손을 막고 다시 손목을 돌려 칼등으로 무라의 왼손을 막았다. 그리고 다시 날아오는 무라의 오른손을 왼팔꿈치로 막았다. 비록 피를 보거나 상대를 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부시게 빠른 공방전이 벌어지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탄성을 올렸다. 무라의 동작은 정말로 귀신에 흘린 것처럼 빨라서 보이지도 않았다. 나래가 번번이 아슬아슬하게 무라의 손을 막아내자 무라는 방법을 바꾸어서 빙빙 나래의 주변을 돌았다. 너무 빨리 돌아 나래는 무라의 그림자를 제대로 좇지 못해 눈을 크게 떴따. 나중에는 무라의 몸이 수십 개로 불어나 나래를 포위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환영 같은 모습이 비춰지자 사람들은 놀라서 웅성거렸고 형천이나 금천조차도 '억'하며 놀라는 소리를 냈다. 이윽고 나래가 당황하는 표정이 보이자 희네도 긴장했다. 다음 순간, 나래의 '이얍'하고 고함을 내지르더니 난데없이 땅에 두 손을 꽂았다. 그리고 나래가 사방이 울릴 정도의 기합소리를 내며 용을 쓰는 순간, 땅이 우지직 갈라지고 통째로 파여서 들려졌다. 나래가 칼이 꽂힌 땅을 거의 막사 크기만하게 통째로 파내어서 위로 휙 들어올릴 것이다. 정말로 무시무시한 괴력이었다. 나래의 발이 무게에 눌려 땅을 움푹 파고 들어갔지만 나래는 굳건하게 양손으로 거대한 흙덩어리를 붙잡고 똑바로 섰다. 그러자 무라의 얼굴색이 변했다. 무라가 아무리 동작이 빨라도, 이렇게 되면 칼을 뽑기 위해서는 위로 뛰어올라야 하는데, 위로 뛰어오르면 몸이 허공에 뜨는 것이라 아무래도 나래에게 잡힐 것 같았다. 더구나 나래가 들고 있는 흙덩이는 나래가 집어던지거나 움직일 수도 있으며, 자칫 흙더미에 깔려버릴 수도 있었다. 이때 누루마이가 박수를 치며 외쳤다. "무라! 네가 이길 수 없구나! 나래라고 했나? 정말 대단하구냐! 대단해!" 누루마이나 카린의 여인족뿐들만 아니라 지나족 사람들마저도 열심히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형천도 방금 전까지 다툰 것은 잊은 듯,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대단하군! 대단해! 나도 저렇게 하는 건 쉽지 않을 거야! 그 어린 나이에, 정말 대단들하군!" 나래가 흙덩이를 '쿵'하고 원래 구멍에 던져 넣었다. 약간 삐딱하게 들어가기는 했으나, 다시 칼은 원래 자리에 꽂힌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나래는 남의 물건인 칼을 건드리지 않고 칼을 지켜낸 것이다. 그러나 나래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런 용을 쓰면서도 한 번도 인상을 쓰거나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누루마이나 무라, 헌원 등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사실 나래의 힘보다도 그런 나래의 심기에 더 감탄하고 있었다. 무라가 조금은 감탄과 아쉬움이 섞인, 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래라고 했나? 아직 내가 진 건 아니다. 조금만 더 했으면..." 그러나 나래는 그저 보기 좋게 웃어 보였다.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희네가 나서고 나래가 신력을 보여 놀라운 구경거리가 벌어지고 누구 하나 칼에 손을 대지 않게끔 되자, 분위기는 다시 좋아졌다. 이제 누루마이나 형천도 희네와 나래가 건방지게 나선 것이 아니라 그만한 대접을 받을 대단한 소년들이란 점을 알았으니 순순히 그의 말에 따르게 된 것이다. 다만 축융과 금천은 그리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결국 누루마이와 희네는 헌원과 함께 염제를 만나러 가고, 무기를 지키기로 한 나래는 밖에서 기다리게 되었다. 누루마이는 희네에게 몹시 감탄한 듯, 갑자기 희네에게 친근한 태도를 취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무라와 얼굴이 흰 소녀도 누루마이를 따라 들어갔다. 얼굴 흰 소녀의 눈빛은 희네를 좇고 있었고 무라는 들어서기 전 나래를 한 번 힐끗 보았다. 무라는 원래 주먹만 쓰는 듯 애초에 풀어낼 무기도 없었고, 피부가 흰 소녀는 신기하게도 물처럼 투명한 작은 단검을 풀어 나래의 앞에 놓아두고 그 뒤를 따랐다. 그녀 또한 지체높은 소녀인 듯했다. 형천과 금천, 축융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는데, 형천은 들어서면서 나래에게 웃어 보이며 엄지손가락을 한 번 세워 보여주었다. 사나워보이긴 해도 형천이 시원시원하고 유쾌하며 솔직한 성격인 것 같아 나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염제신농 염제 신농, 유망의 막사는 겉뿐만 아니라 안도 화려하고 또 넓었다. 그 중앙에 붉은 물을 들인 몹시 화려한 가죽옷을 입고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염제 신농인 유망인 듯했다. 유망은 특이하게 머리에 커다란 소뿔을 달고 있어 마치 머리에 뿔이 난 것처럼 보였다. 최초의 염제인 신농씨는 머리에 뿔이 돋아 있었다고 전해졌는데, 그 때문에 이후 염제 신농은 모두 머리에 뿔을 달았던 것이다. 희네는 그것을 보고 주신족은 소를 아주 귀하게 여기므로 신농씨도 주신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금의 지나족은 소보다는 돼지를 많이 키웠기 때문이다. 유망은 아주 잘생긴 얼굴의 중년 남자였는데 뭔가 대단히 기분 나쁜 듯,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유망의 주위에는 전사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장식을 하고 머리를 곱게 늘어뜨린 예쁜 여인들이 많이 서 있었으며, 그들은 작은 소리로 재잘거리면서 유망의 비위를 맞추어 달래려는 듯했다. 그리고 네 명의 덩치 크고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전사들이 문가를 지키고 있었다. 헌원과 누루마이가 희네를 데리고 먼저 들어서자 헌원은 유망에게 머리를 깊숙이 숙이며 절을 했다. 그 뒤에 누루마이를 따라온 무라와 얼굴 흰 소녀가 섰고, 그리고 형천과 금천, 축융이 다시 그 뒤에 나란히 섰다. "화산족의 공손헌원이 염제님을 뵙습니다." 유망은 대수롭지 않게 헌원에게 툭 한마디 던졌을 뿐이었다. "왜 왔나?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고?" "카린산의 쑤앙마이족 누루마이께서 염제님을 뵙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 쑤앙마이의 부하인가?" 누루마이가 앞으로 나서면서 유망에게 예를 차리려고 하자 유망은 손을 까딱거리며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아무리 지나족의 우두머리라고 하지만 그 행동이 너무 건방져 보여서 희네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누루마이는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은 듯 희네를 앞으로 조금 이끌어내며 말했다. "카린의 누루마이가 인사드립니다. 그리고 이쪽은 주신의 사울아비 희네라고 합니다. 저에게 좋은 일을 한 아이이니 이 아이의 청부터 감히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말을 듣고 유망은 벌레 씹은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주신?" 아차 싶었는지 누루마이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쑤앙마이께서 보내신 아이는 이쪽입니다." 누루마이는 여태껏 말 한마디 없었던, 얼굴 흰 소녀를 손짓해 불렀다. 그러자 그 소녀는 나긋나긋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서서 살짝 몸을 숙여 유망에게 절을 했다. 유망은 벌레 씹은 듯한 표정을 거두고 눈을 크게 떴다. "너냐? 이름이 뭐냐?" 그 여자아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마치 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고운 목소리였는데 무척 교태스러웠다. "소녀라고 불러주십시오." 희네 생각에는 저 아이도 자신처럼 얼굴이 희기 때문에 아마도 소녀라고 이름을 붙인 것 같았다. 저 아이는 분명 카린산의 여인 부족의 일원일 텐데, 아예 지나족의 말로 이름이 지어진 것 같았다. 태어날 때부터 지나족에게 오기로 되어서 그런 것인지, 나중에 이름을 바꾼 것인지는 알 수는 없었다. 유망은 소녀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웃으며 말했다. "얼굴 가린 것을 벗어보아라." 그러자 소녀는 주저하며 말끝을 흐렸다. "지금은..." "괜찮다." 소녀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흰표범 가면을 벗어 내렸다. 희네는 소녀의 뒤편에 있어서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흡족하게 변하는 유망의 표정을 보아서는 아주 예쁜 얼굴인 듯 했다. "재주가 있다면서?" 유망이 묻자 소녀는 살짝 몸을 숙이면서 대답했다. "소리를 낼 줄 압니다." "무슨 소리냐? 목소리냐? 물건 소리냐?" "물건 소리입니다." 아직 체계적으로 발달된 형태의 악기가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물건 소리를 한다는 것은 곧 악기를 연주할 줄 안다는 의미였다. 순간, 유망이 악기까지 연주하라고 할 기세여서 누루마이가 재빨리 말했다.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하온데..." 유망은 계속 소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두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 그래. 그래." "...일단 쑤앙마이께 보낼 물건은 준비되셨는지요?" "아, 물론입니다. 마음에 드는 아이이니, 물건도 더 보내도록 하겠다." 희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아마도 카린족이 유망에게 바치는 예쁜 여자인가 보군. 그 대신 무엇인가 지나족에게 값진 물건을 얻으려는가 보다. 사람을 바꾸다니 그리 떳떳한 일은 아니지만 부족간의 일이니 하는 수 없지.' 그때 헌원이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아마 쑤앙마이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두 부족 모두에게 아주 기쁜 일이지요. 오늘은 기쁜 날입니다." 유망은 역시 건성으로 대답했는데 소녀가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눈은 소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 그래." "이렇게 기쁜 날에 이 주신 아이가 염제 신농님께 청을 드리러 왔습니다. 이것도 아마 경사스러운 징조라 생각되옵니다." 희네는 그 말을 듣고 의아해했다. '누가 청을 드리러 온 것이 무슨 경사스러운 일이라고 하는 걸까?" "흠, 그런가? 난 주신 아이는 보고 싶지 않은데?" 유망이 관심없다는 듯이 건성으로 말하자 헌원이 웃으며 되받았다. "이런 중요한 때에 다른 곳도 아닌 주신 사람이 제 발로 염제님께 청을 드리러 왔으니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좋은 징조라 할 수 있지요." 그때 갑자기 뒤에서 금천이 외쳤다. "헌원! 말 조심하게!" 그러자 유망이 손을 까딱하며 막아섰다. "금천, 시끄럽다." 얼른 금천이 입을 다물었지만 희네는 뒤쪽의 분위기가 좀 살벌하게 느껴졌다. 뒤통수의 시선이 따가웠다. "헌원의 말도 일리는 있어. 하지만 금천은 싫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누루마이가 나섰다. 누루마이는 금천이나 형천 같은 이들과 싸울 뻔했지만, 희네에게는 덕을 입은 터이고, 또 희네가 당당하고 남자다우며 아주 잘생겨서 마음에 들어하던 참이어서 역성을 들었다. "누가 좋고 싫고가 어디 있습니까? 다 염제 신농님이 결정하실 일이지요." 유망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난 그래도 부하들 말을 무시하진 않아. 난 무능하지만 귀까기 막을 정도로 바보는 아냐." 그 말을 듣고 희네는 유망이 비록 욕심이 많고 변덕스러우며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인 듯하지만, 겉보기만큼 둔하거나 멍청한 바보는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역시 우두머리다운 데가 있었다. 형천이 나서서 한마디 거들었다. "이 아이는 제가 밖에서 보았는데, 씩씩하고 늠름한 아이입니다. 주신족이기는 해도 이런 좋은 아이의 부탁이라면 들어주시는 것이 염제님답다고 생각됩니다." 형천이 의외로 편을 들어주자 희네는 고마웠다. 형천은 힘만 센 게 아니라 아주 배포가 크고 남자다운 것 같았다. 헌원의 부하 끽구도 비슷하게 덩치 크고 힘이 세고 남자다웠지만, 끽구보다는 그릇이 더 큰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주 뒤틀린 듯한,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축융이 입을 열었다. "이 아이는 장차 주신의 영웅이 될 아이 같습니다..." 그 말에 축융도 희네 편을 들려나 보다 생각하며 누루마이와 헌원은 슬며시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축융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여기서 죽여버리십시오!" 희네와 누루마이, 헌원은 모두 깜짝 놀랐다. 석상 같은 무라도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일순 긴장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말에 놀랐는지 소녀가 뒤를 휙 돌아보았는데, 순간 희네는 소녀의 얼굴을 보았다. 소녀는 얼굴이 무척 특이했다. 상당히 예쁘고 고운 얼굴이기도 했지만 눈가와 얼굴 전체에 기이한 기운이 흘러넘쳤다. 희네는 평소 여자 보기를 돌같이 했고, 지금 놀라운 이야기가 나와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였는데도 소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잠시 울렁거렸다.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여자로서의 기이한 매력이 흘러넘치는 것이었다. 요사스럽다면 요사스럽다고도 할 수있고, 청순하다면 청순할 수도 있으며, 색기가 넘친다고 할 수도, 가련하여 동정심이 생긴다고도 할 수 있는 여자였다. 갑자기 희네의 머릿속에서 아까처럼 모습이 생각나지 않은 어떤 사람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맥달의 얼굴이었지만 희네는 그게 누구였는지는 기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생각이 들자 울렁거리던 가슴이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진정이 되고 나자 희네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는 정말 귀신도 흘릴 여자구나! 주신의 그 많은 예쁜 여자들을 보아도 눈 한 번 깜빡거린 일이 없는 내가 잠시나마 마음이 흔들리다니! 그것도 이런 순간에!' 순간 소녀의 얼굴을 보아서인지 형천이나 금천, 축융도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유망이 갑자기 기분 나쁜 듯 빽 소리를 질렀다. "소녀! 가면을 써라!" "예? 아..." 소녀는 즉시 다시 흰표범 가면을 썼다. "처음이니 봐준다. 다시 나말고 누구에게든 얼굴을 보이면, 네 얼굴을 칼로 깎아버리겠다!" 무시무시한 말에 모든 사람이 긴장했다. 다만 표정의 변화가 없는 사람은 헌원과 무라 뿐이었으나, 헌원도 심히 눈가가 떨리는 것이 몹시 긴장한 듯 보였다. 유망은 근래 들어 성격이 몹시 거칠어지고 변덕스러워져서, 기분이 맞지 않으면 아무나 잡아죽이거나 벌을 내리는 가혹한 짓을 서슴치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아끼는 부하들을 마구 다룰 만큼 제정신이 나간 것은 아니지만, 모든 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럴 때 유망은 얼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그 순간만 지나면 다시 냉정하고 빈틈없는 성격이 되었다. 다만 모든 것에 권태스럽고 지친 듯한 모습은 항상 떠나지 않았다. 어느새 유망은 다시 지친 듯한 보통 말투로 변해 있었다. "내 가장 가까운 네 명의 부족장 중 두 명은 들어주라고 하고, 두명은 들어주지 말라는군. 나는 내 부하들을 똑같이..." 말을 잠시 끊고 유망은 불타는 듯한 눈으로 헌원을 쏘아보았다. 희네는 언뜻 그 눈에서 적의의 불타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뭔가 심상치 않구나. 헌원이 유망의 미움을 사고 있을 줄이야!' "...아끼니 누구 말을 듣고 누구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군. 누루마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지?" 누루마이는 이제 감히 자신의 뜻을 고집할 수가 없었다. "염제 신농의 일이시니 뜻대로 하소서." 누루마이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해도 사실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함정에 빠질 것 같아 누루마이는 마음을 졸였다. 형천이나 금천 같은 자들 앞에서는 위신을 세울 수 있었지만, 기이하게 유망이라는 자 앞에서는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자칫하면 자기 부족과의 관계가 위태로워질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유망은 그 상황을 즐기는 듯,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훑듯이 보다가, 희네의 얼굴에 눈길을 멈추었다. 희네는 조금도 떨고 있지 않았다. 유망이 희네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뭐냐?" "주신의 사울아비, 희네라고 합니다." "나에게 부탁할 것이 무엇이냐?" 희네는 조금도 겁내지 않는 태도로 당당하게 말했다. "남에게 말하지 않는다 약속하셔야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네가 지금 누구에게 말하는지 알고 있느냐? 나는 염제 신농이다. 전 지나족의 우두머리이다. 하찮은 부족장 따위가 아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히...? 내가 눈만 찡긋해도 너는 목이 달아난다." 그래도 희네는 당당함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제가 부탁하는 처지인 것은 압니다. 그러나 저는 잘못 말한 것이 없습니다. 한웅님 앞에서도 똑바로 말할 수 있습니다." "방금 축융이 한 말을 못 들었느냐? 너를 죽여 없애라는데? 너를 안죽이면 축융과 너는 원수가 될 것 아니냐? 축융도 그걸 무릅쓰고 나에게 말한거야. 너는 필경 죽을 듯하다만?" "저는 청을 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들어주시든, 들어주시지 않든 신농님의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를 죽이거나 살리거나 그것도 신농님의 뜻이겠지요." 유망은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이 자인한 눈빛으로 희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 태연하냐?" "신농님이 그러실 리 없다 생각됩니다." "왜냐?" "형천님이나 금천님, 축융님 같은 영웅들을 부하로 거느리시는 분이 그리 그릇이 작겠습니까?" 희네는 일부러 헌원은 빼고 이야기했다. 일종의 아부 같기도 하고 건방져 보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아주 당당하고도 상대와 자신을 둘 다 모욕하지 않는 훌륭한 답이었다. 헌원이나 기타 사람들은 다시 한번 희네에게 탄복했다. 더구나 이 소년의 기개는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욱 대단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신 사람이라해도, 대부족장 중의 대부족장 염제 신농 앞에서, 그것도 자신의 목을 놓고 이토록 당당히 이야기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갑자기 유망이 '하하핫'하고 소리 높여 웃었다. "그래, 알았다. 너,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아주 똑똑하고 훌륭한 아이로군!" 유망이 크게 웃자 누루마이와 헌원은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누루마이는 속으로 역시 유망이 하는 짓은 좀 기괴해도 그릇이 큰 인물같다는 생각을 했다. 유망은 다시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내, 네 부탁을 듣고 남에게 말하지 않으마. 네 부탁이 무엇이냐?" 그러자 헌원이 대신 대답했다. "이 아이는 다리가 아픈데, 무엇으로도 낫지 않습니다." "뭐야? 겨우 그런 거였냐?" 유망은 시원스레 되받으면서 다시 웃었다. "너 정도 되는 녀석이 올때에는 더 그럴듯한까닭이 있을 줄 알았는데. 난 또 땅을 한 천 리 달라거나 전사를 한 천 명 내달라고 할 줄 알았잖느냐?" 유망의 목소리가 더욱 시원시원해졌다. "붓거나 곪았느냐?" "아닙니다." 유망은 눈을 조금 치켜뜨더니 말했다. "그래? 좌우간 됐다. 네 부하 상망에게 보이거라." 헌원은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항상 정중하고 공손하여 절도를 잃지 않는 헌원이었지만 이때만은 좀 빠르게 말했다. "이미 보였습니다만..." 그 말에 유망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뭐? 상망도 못 고쳐? 상망도 무슨 병인지 모르느냐?" "아홉구비라는 약초가 있어야 낫는다고..." 유망이 쯧쯧거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흠, 그럼 맥이 끊긴 거로군! 날 찾아온 그만한 이유가 있었군, 그래. 그래, 좋다. 기왕 말한 것, 나 염제 신농이 누구냐?" 그러면서 유망이 형천을 불렀다. "형천!" "예!" 형천이 씩씩하게 답하자 유망이 말했다. "이애가 필요한 건 보통 아홉구비가 아니다. 신수 옆에서 자라는 아홉구비만이 쓸모 있을 것이다. 태산 북쪽, 주신 접경 부근에 미아우족 부락 근처에 가면 구름골이라는 산이 있다. 신수가 있는 산인데, 그 산에서 아홉구비가 자란다. 좀 위험하긴 해도 너라면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괜히 신수랑 붙지는 말고 훔쳐와! 아무리 너라도 신수랑은..." 유망이 떠들어대자 헌원이 대단히 송구스러운 듯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그 아홉구비는 이미 세상에 없습니다." 유망은 이번에야말로 깜짝 놀랐다. "뭐? 그걸 어떻게 아느냐? 누가 감히 신수에게서 그 약을 얻었단 말이냐? 그 약은 나도 오래 전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던 것인데..." "사정이 깁니다만... 좌우간 그 아홉구비는 이미 없다고 들었습니다." 별안간 유망이 앉아 있던 의자를 '쾅' 주먹으로 쳤다. 별로 힘을 준 것 같지 않게 보였으나 실은 유망의 기운도 대단하여 아무렇게나 친 주먹 한방에 유망이 앉아 있던 의자가 박살나 버리고 의자를 장식했던 꽃이며 새깃털들이 와르르 땅에 떨어져 버렸다. 유망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기랄! 그럼 방법이 없다!" 헌원은 그 와중에도 간곡하게 유망에게 말했다. "혹시 다른 방법을 모르시겠사옵니까? 염제 신농님이시라면 반드시..." 그러자 유망은 다시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려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 되어 뒷짐을 지고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유망이 의자를 부수자 근처에 있던 여자들까지 모두 긴장해 있었는데, 유망은 여자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 머저리들아! 앉을 곳이 없잖느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여자들이 허둥지둥 다른 의자를 가지고 와서 유망이 선 자리에 바로 갖다댔다. 유망이 그 의자에 털썩 앉아 뭔가 한참 생각하더니 이윽고 희네에게 말했다. "너, 이리 와봐라." 희네는 이미 반쯤 포기했지만 유망이 부르자 그리고 다가갔다. 유망은 희네를 한 번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시 말했다. "손목을 내밀어봐라." 희네가 손목을 내밀자 유망은 가만히 희네의 손목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희네의 아픈 왼다리를 발로 툭 걸었다. "여기가 아프냐?" 희네는 언제나 그렇듯이 아픔을 꾹 참고 있었는데 유망이 느닷없이 발로 차자 놀라기도 했고 아프기도 해서 그만 그 자리에 넘어져버렸다. 유망이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너 이 녀석, 생각보다 더 무서운 녀석이구나! 너 이제 보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항상 아팠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멀쩡한 얼굴로 돌아다니는 거지?" 유망이 걷어찬 것은 겉으로 보기에 그냥 툭 걷어찬 것 같았지만 정말 놀랄 정도로 아팠다. 심지어는 무슨 주술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희네는 안간힘을 다해 참으면서도 겉으로는 여전히 태연한 듯이 말했다. "작은 아픔조차 참지 못하면 어찌 남자라 하겠습니까?" "작은 아픔? 이 녀석 보게나?" 유망은 큰 소리로 말하더니 쓰러져 있는 희네의 어깨에 손끝을 툭 쳤다. 그러자 희네의 온몸에 미칠 듯한 고통이 해일처럼 몰려들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번에 건드린 것은 아픈 부위도 아니었고 세게 건드린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토록 엄청난 고통이 밀려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고통은 자기의 왼다리가 가장 심하게 아플 때보다 더더욱 지독했다. 희네의 얼굴이 삽시간에 빨갛게 터져나갈 듯이 질렸다가 다시 혈색하나 없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리고 희네의 온몸은 지독한 고통을 이기지 못해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의학의 시조라는 신농씨가 전수하여 내려오는 '몸길찌르기'라는 수단으로, 인간의 고통을 극대시키거나 몸을 마비시킬 수도 있는 무서운 수단이었다. 여간해서는 그런 것을 보이지 않는 유망이 왜 저런 지독한 수단을 쓰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내용을 조금 알고 있는 헌원이나 형천, 금천 등은 놀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 고통이 얼마나 지독한지는 들어보았던 것이다. 축융마저도 가는 눈을 더 가늘게 하며 옆의 금천에게 속삭였다. "나도 전에 한번 겪어보았네. 저 아이가 스물 셀 동안 버텨내는 놈이라면 당장 죽여야 하네. 내가 당장이라도 화염술로 죽여 뼈도 안 남게 만들어 버리겠네." "왜 그런가?" "지독하다는 나도 열셋을 못 넘겼네. 불구덩이에서도 쉰을 넘겨 세는 나인데도 말야. 그러니 스물을 넘게 버티는 놈이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을걸세. 더구나...주신 놈 아닌가?" 아주 작은 소리로 둘만 들리도록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무라였다. 그 말을 듣고 무라는 둥근 눈을 더욱 크게 떴다. 희네는 악착같이 버텨내고 있었다. 그러자 유망이 외쳤다. "작은 아픔? 흥! 작은 아픔이면 어디 한 번 일어나봐라!" 희네는 그 와중에도 오기가 솟았다. 어려서부터 수없는 고통을 참아 고통이 만성화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작은 이유에 지나지 않았다. 희네는 비록 몸은 별반 강하지 않고 평상시에는 사람 좋고 쾌활했지만 타고난 근성과 오기가 한번 나오면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희네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자부선인 같은 대선인 앞에서도 정말 옳다고 생각하면 할말은 꼭 하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희네는 계속 이를 악물면서 고통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이 순식간에 터져서 피가 줄줄 흘렀다. 희네는 양손으로 허벅지를 꽉 쥐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손가락이 살을 파고 드어가 피가 흘렀다. 머리카락은 모조리 꼿곳이 곤두서고 눈이 거의 뒤집어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그런데도 희네는 억지로 움찍거리며 일어서려 했다. 그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어지간한 누루마이도 너무도 참혹한 모습에 눈을 감고 얼굴까지 돌려버렸고 소녀는 가면 쓴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너무도 끔찍해서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석상 같던 무라마저도 참다못해 고개를 돌려버렸고 형천은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라는 축융의 이야기를 듣고 축융이 손을 쓰면 자신이 일단 막아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왜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의아해하고 있었다. 축융은 속으로 열을 세면서 동시에 정말 지독한 놈이라고 놀라고 있었다. 갑자기 희네가 폭발하듯 '하하하' 맑은 소리로 웃었다. 그러더니 높은 목소리로 어울리지 않게 꼬맹이들이나 부르는 그런 노래를 불렀다. 주신 말의 노래여서 헌원을 제외한 사람들은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곡조는 아주 곱고 아름다웠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하얗네. 저 멀리에 흰 구름이 둥실둥실 떠가네. 아우야, 우리 같이 달려가자꾸나 저기 떠가는 구름 잡으러... 그 노래는 희네가 어렸을 적에 나래와 함께 지어 불렀던 노래였다. 아픔을 참기 어려웠을 때... 그러면서 희네는 나래를 생각했다. 듬직한 아우, 믿음직한 아우. 나래는 항상 희네를 따라다녔고 희네의 말을 잘 들고 자신을 의지했지만 정작 희네가 의지했던 것은 바로 나래였던 것이다. 희네는 너무도 고통이 심하여 머릿속이 빙빙 도는 것 같고 이제는 자신이 누군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생각할 수 없었지만 사력을 다해 속으로 외쳤다. '아우야! 나를 봐다오!' 그러면서 희네는 비명소리와 함께 벌떡 몸을 일으켰다. 모든 사람은 깜짝 놀랐다. 축융이 막 열아홉을 세었을 때였다. 축융이 막 손을 쓰려고 했고, 무라는 이를 악물고 이유도 모르면서 그 중간에 뛰어들어 주먹을 휘두를 결심을 했으며, 헌원도 더 이상 보지 못하여 제발 그만두어달라고 엎드리려는 찰나였으며,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울음을 터드리려는 순간이었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희네는 정신을 잃고 꼿꼿하게 선 자세 그대로 뒤로 벌렁 넘어져 버렸다. "물!" 순간 번개같이 희네를 받아 안은 것은 놀랍게도 유망이었다. 그러면서 유망은 큰 소리로 물을 외쳤다. 그리고 유망은 '허허, 하하' 하면서 바보같이 자꾸 실없이 웃으면서 희네의 몸을 눈부신 손놀림으로 타다닥 찍어나갔다. 유망은 웃음을 거두지 않고 기분 좋은 듯 외쳤다. "하하하, 할 수 있다! 하하하! 고칠 수 있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화염술을 쓰려다가 막 남몰래 거두어들인 축융이 제일 먼저 안 된다는 듯이 외쳤다. "그 녀석을 고쳐주실 겁니까?" 유망은 웃으며 손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외쳤다. "그래! 고친다! 하하! 하하! 드디어! 드디어 고쳐보게 되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려주옵소서." 헌원이 한 발 앞으로 나가며 간곡하게 말하자 유망이 말했다. "이놈의 절맥은 원래는 고칠 수 없다. 아홉구비말고는 말이다. 치료 과정이 너무 아파서 누구도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린다. 그런데 이놈은 버티어낼 것이다. 분명 버티어내서, 내가 물려받고 한 번도 써보지 못한 비법을 써보게 해줄 것이다!" 그 순간, 갑자기 유망의 막사 문이 '펑'하고 뚫려 나가면서 누군가가 휙 날아 들어왔다. 굵은 나무로 만들고 가죽을 덧댄 막사문이 마치 먼지처럼 바스라져 업어졌다. 문 앞을 지키던 네 명의 장사가 급히 그 앞을 막았으나 어느 순간 네 명의 장한들의 몸은 허공을 날아 각각 막사 지붕의 다른 부분을 뚫고 펑펑 날아가버렸다. 그자의 빠름은 눈 빠른 무라마저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날아간 지나족 전사들은 어디까지 날아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다만 막사에 구멍 네 개만 난 것 같았다. 더불어 막사가 와르르 흔들리며 먼지가 우스스 떨어져 내렸다. 순간, 거대한 역사 형천이 '왁' 소리를 지름녀서 눈부신 속도로 몸을 날렸다. 도끼를 가져오지도 못했고 다른 것을 손에 쥘 겨를도 없어 어깨로 막사 안을 뚫고 들어온 자를 밀어붙인 것이다. 형천은 끽구와 막상막하일 정도로 장사인데다가 기술에 있어서는 몇 수 위에 있는, 대인족의 당할 자 없는 영웅이었다. 형천과 막 들어온 자는 정면으로 '쾅' 하는 소리가 나며 몸과 몸이 부딪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형천이 뒤로 세 발짝을 튕겨나는데 반해 그자는 뒤로 네다섯 발짝만 튕겨났을 뿐이었다. 보통 사람이 형천의 어깨에 부딪혔다면 아마 그 순간 온몸의 뼈가 박살나면서 막사를 부수고 튀어나가 버렸을 것이다. 다음 순간, 축융이 손을 뻗자 놀랍게도 손에서 무서운 불덩이가 꼬리를 길게 끌면서 그자에게 날아갔다. 바로 축융이 희네에게 쓰려 했던 화염술이었다. 그 불덩이가 그자에게 맞으려는 순간, 그자는 '야압'하며 무시무시한 고함을 질렀다. 막사 전체가 그 고함소리에 흔들림녀서 모든 사람의 귀가 얻어맞은 듯 멍해졌고 축융의 불덩어리는 그자의 바로 앞에서 기합소리에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여 작은 불똥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이 모든 것은 불과 숨 한 번 쉴 정도의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헌원이나 누루마이, 소녀 등은 뭐가 뭔지조차 모를 정도로 빨리 끝나버렸다. 그때 금천이 외쳤다. "네 녀석이 감히!" 그 다음 순간, 헌원도 비로소 외쳤다. "나래!" 그 자리에 들어서서 씩씩거리며 무서운 눈으로 서 있는 것은 바로 나래였다. 나래는 맨주먹이었는데 전신의 힘을 다한 듯 온몸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고 있었다. 유망도 그제야 놀란 눈으로 희네를 반쯤 안은 채 나래를 돌아보았는데 나래는 쓰러져 있는 희네를 보고는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형님! 네 놈들이 내...내 형님을! 으아아악!" 다시 한번 나래가 고함을 치자 유망 주변의 여인들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고함을 지르며 와르르 기절했고 소녀마저도 균형을 잃고 빙글 몸을 돌리며 쓰러져 버렸다. 축융과 금천도 견딜 수 없어 두 걸음씩 물러섰는데 나래의 눈꼬리에 피눈물이 우르르 솟아나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기가 질려버렸다. 아무도 막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허나 나래가 막 몸을 날리려는데 그 앞을 가로막은 사람이 둘이 있었으니 바로 형천과 무라였다. 그 둘 말고는 누구도 그만큼 빠르지 못했다. 그 뒤를 이어 금천이 휙 몸을 날려 나래의 옆을 노릴 듯 섰다. 금천도 대단히 몸이 날렵했고 어느새 어디서 잡았는지 옥으로 만든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무슨 짓이냐!" 형천이 나래에게 외쳤다. "그러면 안 돼!" 무라도 외쳤다. 그러나 불행히도 형천은 지나 말로 외쳤고 무라도 급한 나머지 카린 부족의 말로 외친 것이라 나래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때 헌원이 상황을 파악하고 급히 주신 말로 외쳤다. "나래! 안 되네! 희네는 죽는 게 아냐! 치료를 받는 중이야!" 그 말을 들은 나래는 몸을 우르르 떨다가 외쳤다. "그... 그 노래는 다시는 부르지 않겠다고 한 것인데...!" 헌원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외쳤다. "무슨 노래 말인가?" 그러나 나래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 노래는 어릴적 희네가 고통을 이기기 힘들 때마다 우는 대신 불렀던 노래였다. 그때마다 나래는 옆에서 희네 대신 울었다. 희네는 커서 고통을 견딜 수 있게 되자 그 노래를 다시는 부르지 않겠다고 했는데, 희네가 부르는 노랫소리를 듣고 나래는 형이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으며, 생명이 위험해졌을 것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그럼... 형... 형님은? 나는 비명소리를 들었어요. 그리고... 그리고 그 노랫소리..." "자네 형은 치료받는 걸세. 오해가 있었던 걸세!" 그러자 나래는 즉시 상황을 깨달았다. 나래도 결코 덩치만 크고 힘만 센 무식쟁이는 아니었다. 보통 사람보다도 훨씬 영민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상황을 깨달은 나래는 그 자리에 푹 엎드리며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그러나 형님만은 고쳐주십시오." 그제야 사람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형천이나 축융 등은 얼굴까지 질린 상태였다. 나래의 무시무시한 기세는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형천 같은 경우 세상에 힘으로 싸워서는 자신의 적수가 없다고 스스로 자부했지만 나래가 아까처럼 죽기살기로 나온다면 혼자서는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다. 실로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형천은 속으로 탄식했다. '형제가 하나같이 저렇게 대단하니 정말... 하늘은 불공평하구나! 왜 저런 젊은이들이 주신에서 태어난 것인가?' 그러나 유망은 어느새 다시 희네를 돌보고 있었다. 아까 한 번 나래를 보았을 뿐, 유망의 손놀림은 쉰 적이 없었다. 마치 나래가 뛰어든 것을 보지 못했다는 듯한 태도였다. 헌원이 다가가 말하려고 하자 유망이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이거다. 사람을 고치는 자는 이래야하는 거야. 이게 위에서 부터의 가르침이었지... 오랫동안 잊고 있었어..." 유망은 진심으로 희네를 돌보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무도 말을 할 수 없었다. 부서진 막사 지붕에서는 먼지가 가끔 떨어져 내리고 밖에는 지나족 전사들이 벌떼같이 모여들었지만 형천은 문앞에 뻣뻣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감히 누구도 안으로 뛰어들지는 않았다. 기절했던 여인들도 소리를 내지 않도록 서로 조심하며 몸을 일으켰고 소녀도 조용히 일어섰다. 그러다가 유망은 대강 끝났는지 '휴'하고 이마의 땀을 닦고서야 던지듯 주신 말로 말했다. 유망도 주신 말을 할 줄 알았다. "나래라고 했나? 희네 동생이냐?" 나래는 다만 고개만 더 깊이 숙였다. 실로 자신이 저지른 일은 대단한 것이었다. 오해를 해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나족의 대족장, 염제신농의 막사를 무너지게 하고 사람을 해치려 했으니 당장 죽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유망이 조용히 말했다. "너는 좋은 형을 두었다." 이내 유망은 지친 듯하기도 하고 권태로운 것 같기도 한 목소리로 헌원에게 말했다. "이봐, 헌원." "예!" "이애는 오늘 밤에야 정신 차릴 테니, 자네가 데려다주고 내일 다시 오라 이르게. 그리고..." 유망은 한 번 헛기침을 하더니 형천을 불렀다. "이봐 형천!" "옛!" 형천이 다시 씩씩하게 대답하자 유망은 화가 난 듯이 꾸민 목소리로 외쳤다. "왜들 모여 있는 거냐? 내가 화가 나서 몇 놈 집어던진게 그렇게 신기하냐?" "아, 그러게 말입니다." 형천은 그 말뜻에 이 일을 덮어두고 유망이 전사들을 집어던진 것으로 얼버무리려는 의도가 있음을 얼른 깨닫고 웃으며 말했다. 사실 나래가 버릇없이 뛰어들었다 해도 형천은 이 대단한 형제가 아주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유망이 벌을 내리려 하면 막아보리라 잠시 생각햇을 정도였다. 그런데 유망이 일을 덮어주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형천이 대답하고는 곧 밖에 소리쳐 알리자 유망이 다시 외쳤다. "뭣들 꾸물거리는 거야? 막사나 다시 지어! 또 집어던지기 전에!" 그러자 지나족들이 웅성거리며 흩어졌고 그제야 유망은 피식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뽐내려는 게 아니라, 이래야 모두 좋은 거 아니겠어?" 누루마이는 유망의 짓거리를 보고 처음에는 정이 많이 떨어졌는데 이제는 유망이 대단할뿐더러 심기도 깊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다만 제멋대로고 좀 경박한 것 같기는 했지만. 누루마이는 마주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만은 어느 정도 진정이었다. 그러자 유망은 소녀의 얼굴을 다시 보고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다 물러가. 인제 난 피곤하다. 다 가버려라. 주신족이건 카린족이건 다 가. 볼일 끝났다." 헌원은 기다렸다는 듯 나래에게 희네를 안게 하고는 급히 뒷걸음질쳐 나갔다. 나래도 나가면서 여러 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유망은 일부러 비꼬듯 웃으며 되받았다. "네깟 게 잊지 않으면 뭘 하겠느냐? 어서 사라져라." 누루마이도 무라와함께 헌원의 뒤를 쫓아나갔고, 형천도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맨 마지막으로 축융과 금천이 나가려 하자 유망은 갑자기 얼굴을 굳히며 둘을 손짓해 불렀다. 둘이 다가오자, 유망이 말했다. "저 두 놈, 아주 마음에 들어. 대단한 놈들이야. 그렇지? 더구나 치료하는 재미도 있고 말야..." 유망은 아까 나래가 자신의 장사들을 집어던져 뚫어놓은 구멍을 바라보았다. 구멍 너머로 아까 희네가 노래 부른 푸른 하늘과 흰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유망은 아까 들은 그 노래 곡조를 흥얼거리며 되뇌어보았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하얗네..." 그러다가 구석에 서 있는 소녀를 불렀다. "소녀!" "예...?" 소녀가 다가오자 유망은 힘없이 피식 웃어 보이고 말했다. "그 노래 너도 들었지?" "예..." "그 노래를 물건 소리로 다시 들려줘. 오늘 밤." 소녀는 고개만 한 번 까닥했다. 별안간 유망이 역정을 냈다. "그 가면 벗어! 내 앞이잖아!" 소녀가 가면을 급히 벗자 유망이 버럭 외쳤다. "가만. 너 이제 가봐. 물건 소리 연습해야잖아." 소녀는 어쩔 줄 몰라 돌아서려는데 유망이 빽 소리를 질렀다. "얼굴 깎이고 싶어?" 소녀는 다시 울 듯한 표정으로 가면을 쓰고는 막사 밖으로 흐느끼며 달려나갔다. 유망이 다시 힐끗 눈짓을 하자 옆에 서 있던 여인들도 소녀를 도와주러 와르르 몰려나갔다. 유망은 지치고 권태로운 듯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서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막사에 뚫린 구멍을 바라보다가 금천과 축융에게 말했다. "아까 이야긴데 말야..." "예." "그 두 녀석, 정말 좋은 놈들이지?" 둘은 이번에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망은 무표정하게 툭 내뱉었다. "그러니 더더욱 살아선 안 돼. 그렇지?" 그 말에 축융이 목소리를 깔면서 대답했다. "주신 놈들이니 할 수 없습니다." "그래, 그렇지. 재미없군. 아까워. 하지만 뭐 별수 없어. 회의가 끝나면 돌아가는 길에... 알지? 아무도 모르게 말야." 금천과 축융은 표정없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순간 축융은 밝은 표정으로 살짝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잔인해 보였다. "헌원놈과 형천은 모르게 해." 과묵해 보이는 금천이 짧게 물었다. "주신 한웅과 같이 없앱니까?" 유망은 장난처럼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유망의 무표정하고 지치고 권태로운 듯한 눈은 막사 위에 뚫린 구멍을 다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다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늙은 놈, 젊은 놈. 다 없애야지." 금천과 축융은 또다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유망은 여전히 손가락 장난을 놀며 두 사람이 절하는 것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다만 그 순간, 유망의 눈에는 전보다도 훨씬 짙은 권태와 피곤이 엿보였다. 당시의 생활 및 시대적인 설정 "치우천왕기"는 기원전 2716년, 태산 회의로부터 시작하여 기원전 2696년, 마지막 3차 탁록전투까지 20년 정도의 동북아시아, 주로 만주지방 그 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는 보통 신석기 시대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청동기 시대로 들어갔던 것이 거의 확실하며, 아주 부분적으로 철기가 사용된 것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의 사람들의 생활은 결코 가죽 한 장을 걸치고 돌멩이를 든, 원시인의 모습도 아니며, 그렇다고 후대와 다를 바 없는 그런 차림을 한 근대인의 모습도 아닙니다. 이 적절한 중간점에서의 시대 설정은 소설의 내용과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제대로 묘사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 시대적인 설정과 그에 대한 근거를 간략하게 밝히는 바입니다. 모든 근거를 밝히고 자세히 고증하는 것은 책을 따로 한 권 출간해도 모자랄 정도이기 때문에 이해를 도울 정도의 간략한 묘사와 대표적인 증거만 문답형식으로 1 2권에 나누어 싣습니다. 1) 그 시대는 과연 청동기 시대였는가? 저는 틀림없이 청동기가 사용되던 시대라고 믿고 그렇게 설정하였습니다. 다만 아직 구리를 다룰 수 있는 부족은 극히 드물고, 동북아 일대에서는 주신 한 부족만이 구리를 다룰 줄 압니다. 구리는 융점이 높아 보통의 불로는 용융되지 않으며, 최소한 밀폐된 고온 방식에서 숯과 같은 고탄소연소물로 열을 가해야 용융됩니다. 구리는 비교적 부식이 심하지 않고 자연상태에서도 고순도의 구리가 노두광상과 같은 경우 그대로 덩어리째 발견되는 일도 많기 때문에 구리의 사용은 당시에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입니다. 북미 인디언도 천연의 구리 광석을 귀한 물건으로 간직하여 교환하곤 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현재 발굴이 막 진행되고 있는 치우채(치우가 쌓았던 성채) 발굴현장에서 다량의 청동제품이 나왔다는 것을 발굴 진행자에게 직접 들은 바 있습니다. 청동기의 기원은 현재는 동남아시아에서 기원전 70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는 학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바, 기원전 2700년경에 동북아로 전파되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오히려 무리일 것입니다. 철기도 사용되었는데, 철은 구리와는 달리 녹 같은 형대로 주로 존재하므로 탄소를 제거하는 탈탄과정(이 과정에서 용광로, 제련소가 필요합니다)이 요구되는 바 철기를 제련해내는 수준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철기가 어떻게 그 시대에 등장하였는가 하는 의문이 존재하는데, 인도네시아에서는 기원전 7000년경부터 '크리스'라고 불리는 철제 단검이 있었습니다. 이는 운철(운석 중에 철로 이루어진 운석)을 두들겨 만든 것인데, 운석은 실제로 철 성분을 띤 것이 70퍼센트에 달하며 그 철의 품질도 거의 최고급입니다. 운석 전시회를 돌아보면서 고증해본바 철제 운석은 의외로 많았고 그 품질도 대단히 우수했습니다. (합금류 운석이 많습니다. 스테인레스 계열이나 궁극의 합금이라는 티타늄 합금 계열까지도 발견됩니다.) 이러한 운철을 주워서 당시에 무기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후대 무협 등에서 항상 등장하는 신명이기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한 운철이 바로 치우가 사용한 철기였다고 저는 설정했습니다. 북한에서는 단군릉을 발굴하면서 기원전 2300년경의 철기가 발견되었다고 공식 선언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그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철기의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철기는 부식도기 쉽기 때문에 오래 전일수록 청동기나 구리보다 오히려 보존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쓰는 쇠깡통을 자연상태에 버리면 약 10년 정도 후면 자연히 소멸되는데, 구리라면 200년, 알미늅 캔이라 알려진 듀랄루민 캔은 1,000년까지도 보존되는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2) 주신은 어떤 국가였는가? 정말 주신이 최강국이었는가? 주신이 최강국이었던 것은 제 생각으로는 틀림없다고 보고 설정한 것입니다. 가장 사람 수가 많았던 지나족과 겨루었던 국가가 주신이니만 치 주신은 동북아 전체를 아우르는 강한 집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잊으면 안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주신은 지금의 한민족으로만 이루어진 민족적 순수 단일 집단은 아니었다고 보입니다. 오리려 합중국적인 성격이 비슷하여 제정 이전의 초기 로마나 근대의 미국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국가였다고 봅니다. 거란(키탄)이나 말갈(마갸르), 투르크, 묘족(미아우), 흉노(훈), 몰골 등을 한꺼번에 아우르기는 하되, 각 부족의 생활과 통치를 그대로 존중해준 방식의 국가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고구려나 발해를 생각해보면 그 유풍이 남아있던 것을 집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신은 가장 큰 나라이기는 하지만, 직접 다스리는 영토는 그렇게까지 넓지 않아 과거 고조선과 고구려의 땅보다 조금 넓은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밖의 영토들은 많은 부족들이 다만 '주신 연방'의 통치권만을 존중하는 상태였다고 봅니다. 당시의 그러한 양상이 중국을 직접 지배했다, 아니다는 재야와 강단의 논쟁으로 이어지곤 하는데, 제 견해는 중국은 은나라 시절까지 어느 정도 주신, 또는 고조선의 영향권하에 복속되어 있었고 그 최초의 대규모적인 저항이 헌원에 의해 일어난 것이며, 이에 헌원이 패배하였기 때문에 이후 조금 서쪽에서 일어난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킬 때까지 이런 상태는 계속되었다고 봅니다. 헌원 이후 보통 성인으로 인정하는 우 요 순등이 대부족장이나 임금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검소하게 살았던 것과 전욱고양, 제곡고신, 공공 등 헌원보다 후대의 투쟁사가 이상하게 역사적인 기록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신화-분명 집단이나 국가간의 투쟁이 아니라 개인 영웅의 대결구도밖에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로 남은 것 등은 분명 중국 위주의 권력이 상당히 약했던 증거라고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중국이 지극히 후대(수 당 정도)에 이르기전에는 북방으로의 진출을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점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주신은 여러 부족들을 복속하거나 병합하려 하지 않고 부족들 나름의 자치성을 끝까지 살려주었다고 봅니다. 거란이나 말갈, 후에 말갈에서 갈라지는 여진, 몽골 등이 모두 나름대로의 생활 방식을 잘 살려 때로는 서로 싸우면서도 저력을 발휘하여 최소 한번 이상은 중국을 정복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의 장점에 선 인물을 치우천왕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동북아 고대 역사에는 그보다 강하거나 위대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치우천왕은 한웅이셨고, 한웅인 이상 주신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결굴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인물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 부분은 학술적으로 접근하면 많은 논란이 있을 것이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다만 소설의 설정으로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 당시는 어떤 사회였는가? 일종의 제정일치의 부족국가 사회였다고 보입니다. 아직 왕이나 임금과 같은 단어나 개념은 사용되지 않았고, 한 칸 등의 우두머리를 상징하는 단어가 부족장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을 것입니다. 부족마다 다를지도 모르지만 동북아 전반 부족들은 거의가 한 칸 등과 비슷한 단어를 쓴 것으로 보아 문화적 교류나 지배적 구조가 일원화되어 있을 것이라 보았습니다. 동북아만이 아니라 멀리 바이칼 호 연안 및 지금의 동구 지역까지 폭넓은 문화적인 공통적인 잔재가 남아 있는데, 가령 가장 원류 보존이 쉬운 무속 부분에서 대부분의 부족과 인종들이 푸타간, 우타간, 우다간 등의 공통 어휘를 지니고 있으며(이는 무당과도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푸닥->푸닥+우두머리인 칸 한 등이 결합되어 푸타간, 우타간이 되었고[마립간, 거서간 등도 이 갈래라 봅니다.], 우리는 그냥 '푸닥'에 후대에 비슷한 한자음을 끼워 맞추어 무당이 된 것이라 여깁니다.) 많은 수의 부족들이 새 중심의 고대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우리의 솟대와 비슷한 것을 세우며, 장승과 너무도 닮은 고조 형물이 무수하고, 언어의 형태가 비슷하며 우리의 발상지라고 전해지는 바이칼 호 연안의 시베리아 토속부족들은 지금까지도 무당을 '푸닥'이라 부릅니다(우리는 무당이 하는 일을 '푸닥거리'라고 부르죠). 이 모든 것이 만약 우연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면, 이러한 폭넓은 교류 또는 통일성을 지니고 있던 시대는 이 치우천왕의 시대말고는 없었다고 봅니다. 4) 너무나 먼 지역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등장할 수 있는가? [치우천왕기]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온 사람들까지도 소수 등장합니다. 당시 찬란한 문명을 건설하던 이집트나, 수메르, 인도는 물론이고 아프리카 남부 흑인이나 북유럽의 바이킹의 선조뻘 되는 사람들, 그리스인마저도 등장합니다. 이것은 가상적입니다만 오히려 중세보다는 고대가 사람의 출입이 자유로웠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여행의 길을 막은 것은 국가라는 엄한 체제가 발생하고 영토의 개념이 굳어진 다음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외국인'이라기보다는 단순히 '먼데서 온 손님'이라는 개념이라 도리어 여행이 쉬웠을 것입니다. 물론 길이 정비되지 않고 동물이나 자연현상의 위험은 있었겠지만, 가장 걸림돌이 되는 국가의 통제라는 것이 없었으므로 일정 규모 이상의 자위력을 지닌 집단은 오히려 후대보다 쉽게 여행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한 번 여행은 몇 년이나 걸렸을 것이며, 사상자도 났겠지만, 여행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이익은 후대보다 더 컸을 것입니다. 삼장(현장)법사가 불경을 얻으러 중국에서 인도까지는 가는 길이 [서유기]에서는 한없이 험하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실지로 현장법사는 불과 몇 년 만에 동행자를 몇 명 잃지 않고 인도에 도달하였으며, 그 난관도 대부분 그 중간에 난립하여 폐쇄적으로 살아가는 작은 국가들 때문에 생긴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큰 사건에 여러 나라 사람들이 말려들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편이 더 이상하다고 생각됩니다. 주요 등장인물 치우천(희네) 이야기의 주인공. 성인이 되기 전의 이름은 희네인데 얼굴이 희고 여자보다 잘생긴 용모를 지녔기에 그런 이름을 얻었다. 치우비의 쌍둥이 형이지만 이란성 쌍둥이라 둘이 닮지는 않았다. 주신의 사울아비로 이야기의 장을 여는 인물이다. 힘은 세지 않으며 절맥으로 인해 다리를 절어서 말조차 잘 타지 못하는, 사울아비로서는 크나큰 단점을 지녔지만 뛰어난 지략과 올곧은 마음, 큰 그릇을 가진 청년이다. 후에 주신 14대 자오지 한웅으로 등극하는 치우천왕이 바로 그이다. 치우비(나래) 치우천의 동생이며 치우천과 함께 이야기의 주인공. 비길 데 없는 힘과 침착함. 성실함을 타고난 장사이며 대용사이다. 치우천의 쌍둥이 동생이며 언뜻 둔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형 치우천을 거의 숭배하여 형의 말은 무엇이든 따르며, 형을 누구보다 좋아하고 형을 가장 잘 알고 감탄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따를 자가 없을 정도의 힘과 용맹을 지녀 대영웅으로 알려지지만 의외로 수줍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따뜻한 성격이다. 공손헌원 후에 황제로 알려지게 되는 지나족의 대족장. 우두머리. 핏줄은 주신족 갈래였던 소전의 아들이지만 스스로는 지나족이라 굳게 생각하고 있다. 역시 비길 데 없는 큰 그릇과 지략, 큰 뜻을 품은 영웅으로 흩어져 있는 지나족을 모아 하나로 뭉치게 하고 결국에는 주신을 정복하여 모든 부족을 통일하려는 야망을 지닌 인물이다. 중국(지나인)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맥달 선인 발귀리의 자손이며 미래를 손바닥처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천하의 재녀. 미래를 보는 무서운 능력 때문에 아기 적에 버림받고 자부선인에게 구원받아 신수인 맥에 의해 키워졌다. 그 때문에 치우천에게 맥달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미래를 내다보는 힘에 대해 끝없는 부담을 느끼지만 치우천에 대한 애정 때문에 모든 것을 견디어낸다. 후에 후사의 지위에 오르며 [해동감결]을 쓰게 되는, 최고의 대예언가이다. 공손발 헌원의 막내딸로 버릇없이 자라 망나니처럼 보이는 유쾌한 아가씨이다. 치우비와 만난 것 때문에 인생이 바뀌게 되고 후일 엄청난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천하를 통일하려는 생각뿐인 아버지를 따르기 싫어하고 반항하여 성격마저 제멋대로인 말썽꾼처럼 보이지만, 속마음은 곱고 따뜻하다. 뛰어난 용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멋대로인 성격 때문에 남자들은 그녀를 슬슬 피한다. 소녀 카린(곤륜)산 쑤앙마이(서왕모)에게 키워져 유망에게 다시 사와라 한웅에게 치우천에게 마지막으로 헌원에게 보내지는 여자로, 모든 남자들의 넋을 잃게 할 만큼 요기에 가까운 매력을 지닌 여인. 치우천을 마음속으로 흠모하나 이루어지지 않자 복수에 불타기도 한다. 겉으로는 단지 매력적인 여인 같지만 속으로는 매서울 정도의 강단과 독한 마음도 품고 있는 여자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방중술의 표본인 책 [소녀경]을 낳게 되는 주인공이기도 하다. 치우우레 치우천 치우비의 아버지. 주신의 사울아비 스승이며 성실하고 완고하면서도 몹시 따뜻한 마음의 사울아비이다. 어머니 없이 자란 두 형제를 누구보다도 아끼면서도 완고할 정도로 공과 사를 수행하는 무인이다. 사와라 한웅 주신의 제13대 한웅. 소탈하고 좋은 성격이며 평화를 사랑하는 인물이다. 재위기간 내내 주신을 평화롭게 만든 좋은 한웅이지만 단점도 있다. 비렴 주신의 세 큰스승(풍백, 우사, 운사) 중 한 명인 풍백의 지위를 맡은 강직한 중년의 남자. 젊은 치우천 치우비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뒤를 밀어주는 은인이기도 하며 풍백으로서의 기량도 뛰어난 인물이다. 병예 삼사 중의 우사. 나이 많은 노인이지만 주술력이 대단하며 사람됨도 올곧다. 후에 맥달과 함께 우사일을 수행한다. 신지울태 삼사 중의 운사. 꼿꼿한 성격의 곱게 늙은 할머니처럼 묘사되나 그녀의 마음 속은 아무도 모른다. 훌륭한 운사이지만 늘 잘 드러내지 않고 베일에 가려져 있다. 글자 주술을 사용하는 대단한 주술사이기도 하다. 자부 자부선인. 8계 건설에 모든 큰선인들이 떠난 후에 혼자 남아 인간의 흥망을 지켜보게 된 대선인. 수천 년 전 주신이 건국될 때 초대의 한(환인으로 후에 알려진)인 안파견을 도와 주신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 은덕 때문에 주신의 수도에는 항상 자부선생이라는 직위가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자부선생과 자부선인은 다른 존재이다. 인간 선인이며 치우천의 이상에 공감하는 인물이다. 경천동지할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인간들의 일에 직접 끼어들지는 않고 조용히 관찰할 뿐이다. 그러나 맥달과 맥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크게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도 있다. 발귀리 최초의 인간 선인으로 자부의 조상이며 지나 쪽의 맨 처음 선인인 홍균의 조상이며 막고야선인의 조상이 되기도 한다. 언어로 대표되는 인간 의식의 시조로 설정되어 있다. 맥달의 신비한 능력도 발귀리 선인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언어를 만들어 인간에게 퍼뜨린 대선인이지만 스스로 힘을 봉인하고 어떤 일에도 끼어들지 않으며 언어와 함께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어 조용히 세상으로 녹아 들어가 사라져 가는 선인이다. 유망(염제신농) 헌원 이전에 지나족을 지배했던 대부족장. 염제라는 직함과 신농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데 최초에 농사와 약을 알아내 가르쳤다는 신농씨의 후손이다. 대영웅의 그릇을 가졌으나 독과 마약 때문에 서서히 몸과 마음을 잠식당하여 파멸해가는 비운의 영웅이기도 하다. 형천 유망을 진심으로 따르는 충성스러운 용사. 천하 제일의 장사로 알려질 만큼 힘과 용기. 무예에 당할 자가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사람보다도 큰 도끼를 휘두르며 치우비를 능가할 정도의 힘을 가졌으며 유망의 쇠락을 지켜보면서도 끝까지 마음을 바꾸지 않는 올곧은 무인이다. 후에 진나라 때의 대시인 도연명이 [독산해경시]에서 그의 변하지 않는 충성을 찬양하여 후일에까지 알려졌다. 축융 불을 다스리는 축융씨의 시조이다. 주신 부소씨의 후예이나 그보다 더 나아가서 모든 불을 다스리는 능력을 지녔다. 의심 많고 음험한 성격이지만 유망을 충심으로 받드는 충신이다. 금천 칼과 몽둥이에 천하 제일의 재주를 지녔고 전쟁에서 놀라운 지휘력을 보여 후에 '소호-작은하늘'이라고 칭송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유망을 배신하고 헌원을 따르는 다소 복잡한 성격의 인물이다. 적송자 최초로 이름이 알려진 중국의 유명한 선인이기도 하다. 헌원 시대로부터 계속 세상에 나타나 영향을 주었으며 후에 한나라 건국 때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신비의 인물이자 선인이다. 붉은 소나무 껍질로 옷을 삼아 다녔기에 적송자란 이름이 붙었다. 혼돈의 제자이자 홍균도인의 후예이기도 하다. 헌원의 수하. 십육기인의 우두머리 격이다. 상망 쥐와 같이 작은 용모에 처신없는 늙은 영감처럼 보이지만 놀라운 능력을 수없이 간직한 기인이다. 의술도 뛰어나지만 그의 진짜 능력은 그것이 아니다. 다만 헌원으로부터 막내딸인 발을 돌보라는 일을 맡았기에 항상 발과 같이 다니며 발을 친딸처럼 생각하고 할아범처럼 행동할 뿐이다. 역시 십육기인의 한 사람. 비휴 사람이기보다는 늑대와 같은 인상을 주며 말수가 극히 적은, 그리고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용맹한 무인이다. 어려서부터 늑대굴에서 늑대들과 자랐다가 헌원에 의해 십육기인의 하나가 되었다. 늑대들을 자유로이 부릴 수 있는 기이한 능력을 지녀서 싸움터에 늑대들을 몰고 나타나는 기인다. 역시 십육기인의 한 사람. 신도 거대한 체구에 귀신을 물리치는 주술을 타고난 선인. 울루와는 쌍둥이처럼 항상 붙어 다니며 생각마저도 똑같이 한다. 힘보다는 귀신을 다스리는 재주 때문에 훗날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귀신을 쫓는 신의 대명사처럼 된 인물. 복숭아나무 몽둥이를 들고 다니기에 후에 복숭아나무 자쳉도 귀신을 쫓는 기운이 있다고 믿어지게 되었다. 울루 신도와 함께 귀신을 쫓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거한. 울루 역시 신도와 함께 십육기인의 한 사람이다. 끽구 십육기인 중의 하나로 천하 제일의 괴력을 지닌 인물. 장수로서의 기량이나 능력등은 형천에 미치지 못하나 힘에 있어서는 형천. 치우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이다. 역시 십육기인의 한 사람. 이주 십육기인의 하나이며 머리가 뛰어난 인물이다. 지가 꾀나 계략에 능하다면 이주는 논리적인 두뇌와 실행력을 지닌, 말하자면 치안이나 내정 담당 같은 인물이다. 훗날로 따지자면 청렴한 관리의 표본 같은 성격을 지닌 인물. 전투보다는 민심과 내정에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 쑤앙마이(서왕모) 지나에서도 먼 카린산에 여인족을 세우고 천 년 이상이나 그곳을 지배해왔다는 전설이 있는 여자, 비견될 자가 없는 대주술사이고 마녀, 또는 요귀라는 소문까지 있는 여걸이다.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녀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름 뒤의 마이는 '어머니'라는 뜻으로, 여인족 내에서는 부족장 같은 의미를 지닌다. 누루마이 쑤앙마이의 부하이자 여인족의 한 부족장. 무리를 데리고 태산 회의에 참가하는 역할을 맡았다. 대단하지는 않지만 맡은 일을 잘해내는 비교적 올곧은 중년의 여인이며, 무라의 이모뻘 된다. 치우비에게 큰 호감을 지니고 있다. 무라 쑤앙마이가 극히 아끼는 카린산 여인족의 젊은 여자 영웅으로, 무기 대신 주먹을 잘 쓰고 몸놀림이 극히 빠른 여전사이다. 대단한 미모를 지녔지만 길게 늘어뜨린 흰 머리와 돌과 같이 표정없는 얼굴과 성격 때문에 남자들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여걸이다. 치우비에게 남모를 감정을 지니지만 끝까지 마음을 숨기고 그를 친구로 대한다. '개명수'라고 하는 영물. 흰호랑이를 타고 다닌다. 보돈차르 몽골족의 시조로 알려진 영웅. 아직 작은 부족을 건설할 무렵이지만 치우천과 태산 회의에서 만나 서로의 기량에 감탄하여 영원한 동지가 된다. 몽골족에게는 우리의 단군왕검 같은 존재로 후일에까지 숭앙된다. 치베 보돈차르의 부하이며, 보돈차르가 치우 형제에게 보낸 몽골의 영웅. 천하제일의 명궁이며 말타기에도 뛰어나다. 후에 치베(철별)는 몽골족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일컫는 단어가 되었다. 야율쿠리 키탄(거란)족의 대부족인 울크리 부족장의 아들. 대단한 힘과 불 같은 성격을 지녔으며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의외로 중요한 일에는 사려깊고 강한 결단력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태산 회의에서 만나서 치우천 치우비의 친구가 된다. 초초룬 미아우족(묘족) 대부족장의 딸. 여자이지만 생김새나 행동. 말까지도 남자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어 여자라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인 털털한 아가씨이다. 그러나 벌레들을 부릴 수 있는 신기한 힘을 타고난 기이한 여자이다. 역시 태산 회의에서 만나 치우천 치우비의 친구가 된다. 울라트 타타르족 앗수라트 부족장의 딸인 어린 소녀. 열 살이 된, 눈만 크고 병약한 소녀이지만 용기나 기개는 남자를 능가하는 면도 있는 활달한 꼬마이다. 남의 마음을 눈치로 알아내는 독심술 비슷한 능력이 있어서 후일 어울리지도 않게 도깨비들을 이끄는 역할을 맡는다. 울쿠타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발이 몹시 빨라 동생 야쿠타와 함께 포악한 부족장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고 있는 소년. 그리 쓸모는 없지만 숲을 해치고 달려가는 재주만은 제일이라 연락병 역할을 주로 한다. 치우천 치우비를 친형처럼 따른다. 야쿠타 울쿠타의 동생으로 울쿠타와 같은 재주를 지녔다. 역시 치우천 치우비를 아주 좋아하여 따른다. 치우벌 치우우레의 사촌동생으로 평범하나 강직한 무인. 치우우레의 부하이기도 하다. 양역 어려서부터 치우천 치우비와 함께 자란 친구이며 사울아비이다. 그리 드러나는 재주를 지니지는 않았지만 항상 치우천 치우비를 도우며 그들과 끝까지 행동을 함께 하는 좋은 친구이다. 부소다솔 명문인 부소씨의 사울아비로 이름만 사울아비이지 고문관에 가까운 좀 용렬한 사람이다. 부루버들 사와라 한웅의 여섯 번째 마누라로, 신시 최고의 미녀로 이름이 높지만 악독하고 음흉한 성격을 지닌 여인다. 고시울률 치우천 치웁의 외할아버지이자 주신에서 한웅 다음 가는 실력자이다. 주신이 다른 부족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주신만 부강하게 만들면 된다고 믿는 완고한 인물이며, 속이 좁고 겁이 많은 옹졸한 인물이다. 가장 아끼던 딸 미리내가 아들들인 치우 형제를 위해 목숨을 바치자 그것을 미워하여 치우 형제를 증오하여 번번이 위험에 몰아넣는다. 당시 친부모 자식이 아니라면 그다지 혈족관계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인지해야 이 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시울률은 사위인 치우우레는 가족이기에 그냥 놓아두지만 외손주인 치우 형제는 얼마든지 미워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미리내 치우천과 치우비의 죽은 어머니. 희네를 구하기 위해 아홉구비를 얻어 목숨을 걸고 혼자 신수와 대결했던 용감한 어머니이다. 남자를 능가하는 담력과 용기를 지닌 여장부로 그녀는 직접 등장은 하지 않지만 치우천 치우비 형제에게 큰 영향을 준다. 툰툰 미아우족의 작은 부족의 늙은 부족장. 치우천에게 신수의 알을 선물한 사람으로 독의 명수이다. 유쌍 툰툰의 막내아들로 치우비를 숭배하여 후에 홀로 치우비를 찾아온다. 신수와 괴물 소개 혼돈 생물로서 최초로 도를 닦아 지금에 이른 존재. 환계와 유계의 건설자가 된다. 그는 이야기 처음 부분에 환계와 유계로 떠나지만 그의 사상-가장 강한 부족 하나가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는-은 헌원의 사상의 모태가 된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생물은 진화와 멸종을 거듭했지만 아주 드물게 자연계의 힘. 즉 도력을 얻게 된 존재들이 선인이나 신수가 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기에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생명은 선인 또는 신수로 발전할 수 있다. 혼돈은 최초의 대선인-신수이자 실제 원류는 태초의 원생생물에 기인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둥근 공 모양이며 눈 코 입도보이지 않는 기이한 형상을 지닌 대선인이다. 혼돈은 파괴와 무질서의 선인이지만 그와 반대에 서는 인간 선인인 자부를 퍽 좋아하고 친하기도 하다. 맥 주신이 신수로 섬기는 영특하고도 선량한 신수. 거대한 체구에 긴 코를 지녔으나 코끼리는 아니다. 사람 대신 맥달을 키우기까지 한 근본부터 온화한 신수이다. 맥은 신생대 때 번성했던 거대 초식동물 베히모스류가 도력을 얻어 변한 신수로 설정되어 있다. 사신중에는 들어가지 않으나 중앙을 차지하는 기린의 원형이 된다. 초능력이라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이한 힘을 지닌 신수이며 유일하게 인간과 직접 대화를 할 수 있지만 싸움은 싫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