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anyeo.net/ 치료사 렌 [1] 광동성에서 홍콩까지 (1) -------------------------------------------------------- 상하의 찌는 듯한 기후 속에 끝없는 수해가 펼쳐지는 곳. 독을 품은 기화요초들이 만발하고 신기한 새들과 곤충들이 하늘을 뒤덮는 곳. 인간이 주인이 아닌 손님에 불과한 곳. 렌이 태어난 광동성 내륙 서쪽 경계의 작은 마을은 그런 곳이었다. 그런 곳에도 중국 정부당국의 손길은 미쳤다. 그래서 렌의 탄생은 저주받았다. 렌은 위로 언니를 둔 둘째 딸이었다.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둘째 딸. 중국 정부가 인권탄압에 가까운 한 자녀 갖기 정책을 편 이후로 둘째 아이를 가진 산모들은 산모의 건강이나 안전을 불문하고 강제로 낙태를 당하고 불임시술을 받아야 했다. 당국의 눈길을 피해 출산한 부모는 엄하게 처벌받았다. 그래도 아들을 낳아 대를 잇고자 하는 부모들은 끊임없이 방법을 강구했고, 지나친 탄압에 대한 인민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결국 정부당국은 산아제한 기준을 완화해서 맏아이가 딸인 경우에 한해 한 명을 더 낳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덕분에 큰딸을 낳고 상심하던 렌의 부모도 다시 출산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딸이었던 것이다. "이것도 사람이라고, 이것도 자식이라고 태어나서..." 남편은 꼬물거리는 핏덩이를 보며 한탄했다. 출산을 마치고 녹초가 되어 있던 아내는 남편의 푸념에 죄책감과 비참함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여보, 죄송해요. 으흐흑. 다 저의 죄예요." 흐느끼는 아내를 보면서도 남편은 위로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울다 지친 아내는 다시 말을 꺼냈다. "아이 이름은 뭐라고 짓죠?" 남편은 그 말에 화를 버럭 냈다. "딸자식 주제에 이름은 무슨 이름! 이제 이년 때문에 대가 끊기게 생겼는데! 이름따위 가질 자격도 없어!" 방을 박차고 나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아내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한숨을 쉬었다. 산파가 건성으로 씻겨 놓아 아직 핏자국이 여기저기 남아있는 아기는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너도 사람인데. 너도 내 자식인데. 흑흑. 미안하구나, 아가야. 네가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젖은 눈으로 아이의 배를 조용히 쓰다듬던 그녀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너를 렌이라고 부면 되겠구나! 사람이란 뜻의 렌. 이제부터 네 이름은 렌이야. 알았지, 내 귀여운 렌?" 지친 그녀의 얼굴에 비로소 웃음이 떠올랐다. 세월은 빨리 흘렀고 렌도 비 온 후 야자나무가 자라듯 무럭무럭 자랐다. 이제 일곱 살이 된 렌은 같은 또래의 아이들 중에서 눈에 띠게 예뻤다. 슬픈 듯한 커다란 눈, 뽀얀 피부, 어린 나뭇가지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팔다리, 누군가 말을 걸 때마다 저절로 떠오르는 미소. 그야말로 여러 세대에 걸친 한족과 이족과의 혼혈의 가장 긍정적인 결정체라 할 만했다. 렌은 깜찍하고 똑똑하고 착하다고 온 마을에 칭찬이 자자했다. 그러나 렌의 아버지는 렌을 눈의 가시로 여겼다. 렌이 태어나기 전에도 술을 좋아했던 렌의 아버지는 렌이 태어나자 매일매일 신세한탄을 하며 술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따금씩 아버지는 술에 잔뜩 취해 어머니와 렌을 때리곤 했는데, 그 이유는 대개 마누라가 재수 없어서 재수 없는 딸년만 낳는다는 것이었다. 그 때마다 렌과 어머니는 공포에 질려 집안 구석에서 바들바들 떨곤 했다. 렌의 아버지는 언제라도 정부당국에 렌의 존재가 알려지면 거액의 벌금형이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렌을 집안의 우환으로 여겼다. 렌이 아버지로부터 가장 많이 들어 본 말은 "재수 없는 년"이었다. 렌을 바라볼 때의 아버지의 눈빛은 너무 차디찼다. 가능한 한 아버지 눈에 띄지 않도록 피해 있을 것, 집에 있어도 없는 것처럼 굴 것, 그것이 렌이 집안에서 지켜야 할 제일 중요한 규칙이었다. 렌의 또다른 슬픔은 학교에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출생신고가 되어 있지 않은 아이는 취학연령이 되어도 입학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마을에는 렌과 비슷한 처지의 여자아이가 여남은 명 있었지만, 이 마을에서 계집아이란 그저 잡일을 돕다가 시집가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출생신고가 된 여자아이들 중에서도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가 많았고 특별히 배움에 목말라하는 아이도 없었다. 오 직 렌만이 예외였다. 영리한 렌은 벌써 한자도 천여 자 외우고 마을에 세 대밖에 없는 라디오를 들으며 만다린어도 조금 할 줄 알았고 언니가 가지고 있는 3학년 과정 산수 교과서도 혼자 힘으로 풀 줄 알았다. 글을 배우고 만다린어를 조금씩 깨치면서 렌은 이 마을 밖에도 넓은 세상이 끝없이 펼쳐져 있음을 알았다. 마을에 몇 권 없는 어린이용 책을 빌려 보며 렌은 다른 세계를 상상했다. 여자아이라고 천대받지 않는 세상. 배우고 싶은 것을 맘껏 배울 수 있는 세상. 아버지로부터 사랑받는 세상. 학교에 가서 학문? ?배우면 그런 세상을 느껴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한다는 것은 그 새로운 세상이 영영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렌은 책보퉁이를 끼고 마을에 유일하게 하나 있는 학교로 등교하는 아이들을 쳐다보며 몇날 며칠을 서럽게 울었다. 날마다 몰래 흐느껴 우는 렌의 모습을 보다 못한 렌의 어머니는 남편에게 하소연했다. "우리 이제 렌 출생신고를 해 줍시다." "뭔 소리야? 임자 지금 제정신이야? 그랬다가 혹시 아들이 태어나면 그 애를 헤이하이즈로 만들란 말이야?" 남편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렌 낳은 지 7년인데 이제 단념할 때도 되지 않았어요?" 렌의 어머니는 안타깝게 말했다. "이런 집구석! 으이그!" 렌의 아버지는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가 돌아온 것은 사흘 후였다. 마을 사람들이 전해준 바에 따르면 그는 지난 사흘 동안 근처의 창녀촌에 가 있었다고 했다. 사회주의 중국에도 당국의 눈길을 피한 창녀촌은 존재했다. 그는 머리꼭지까지 취해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에미나 자식이나 재수없는 년들이 모여서 뭣들 하고 있어?" 가장의 목소리에 아내와 두 딸은 머뭇거리며 나왔다. 아버지는 렌을 노려보았다. "네 년이 태어나면서 일이 꼬이기만 했지. 꺼억." 렌은 파들파들 떨며 달아나려 했으나 아버지는 렌의 두 팔을 억세게 잡아당겼다. "남들은 딸을 팔아 한 재산 마련한다는데 나도 그래 볼까?" 아버지의 입에서는 역한 술냄새가 확 풍겼다. "어디 팔아도 될 만큼 다 컸나 보자." 아버지는 한 손으로는 자기 바지 허리띠를 풀고 다른 한 손으로는 렌의 치마를 걷어올려 속옷을 내리려 했다. 렌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라 계속 떨고 있었으나 어머니는 남편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여보! 안돼요! 무슨 짓이야! 이 양반아!" 가녀린 여자가 무슨 힘이 있는지 어머니는 아버지를 있는 힘껏 잡아당겼고 결국 아버지는 벽에 머리를 부딪힌 채 코를 골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엉엉 울면서 렌을 으스러지게 안았다. "렌아, 이 엄마가 너를 지켜줄게. 절대 아무 일 안 생기게 해 줄게." 다음날 남편이 아직 술에서 깨기 전에 렌의 어머니는 어렵사리 모아 두었던 푼돈을 챙겨 들고 렌과 함께 마을학교의 유일한 교사인 첸선생에게 찾아갔다. 소문에 따르면 첸선생은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에게 논어, 맹자, 장자같은 반동 금서를 숨겨두고 있는 것을 들켜 죽을 뻔하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변방 중의 변방인 이곳으로 하방당한 것이라고 했다. 문화혁명이 끝난 지도 어언 십 수년이건만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그 스스로 도시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인지 첸선생은 마을에 그냥 남아 있었다. 마을의 유일한 지식인인 그는 초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 외에도 제사를 지낼 때 축문도 써 주고 글 모르는 사람의 편지도 대서해 주고 아픈 사람이 있으면 침도 놓아 주며 그럭저럭 마을 사람들의 신임을 얻고 있었으나, 대체로 괴퍅하고 낯을 가리며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안 한다는 것이 중평이었다. 렌의 어머니는 렌의 손을 잡고 학교 옆에 붙어 있는 관사로 향했다. 관사는 마을의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허름했다. 조금 열려 있는 문틈으로 렌은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작은 방에는 탁자 하나, 의자 두 개, 침대 하나가 놓여 있고, 바닥이며 탁자 위며 여기저기에 책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빨간 표지의 모주석 어록은 남들 보라는 듯이 탁자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는데, 반듯하게 놓여 있는 모양새가 오히려 방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등을 돌리고 침대 위에 모로 누워 있던 첸선생은 인기척을 느끼고 귀찮은 듯 몸을 일으켰다. 평소 길에서 두세 번 마주쳤던 일은 있지만 이렇게 가깝게 첸선생을 본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렌은 눈을 크게 뜨고 첸선생을 자세히 관찰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주름투성이의 얼굴은 새까맣게 탔고, 일어나 의자에 앉는 움직임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절도가 있었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던 렌은 첸선생이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흠칫했다. 첸선생은 렌을 잠깐 보다가 렌의 어머니에게로 눈을 돌려 차갑게 물었다. "옌화 어머니 아니시오? 무슨 일이시오?" 옌화는 렌의 언니였다. 마을사람들은 렌의 어머니를 모두 옌화 어머니, 혹은 옌화모라고 불렀다.어머니는 렌을 끌어당겨 자기 앞에 세우고 단호히 말했다. "이 애를 맡아 주세요. 자기 한 몫은 할 애예요. 식모나 사환으로 쓰시면서 틈틈이 공부나 가르쳐 주시면 됩니다. 혹시 부담되시면 애 밥값은 제가 벌어서 다달이 드리겠어요." 황당하게 렌 어머니를 바라보던 첸선생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사정이오?" 렌 어머니는 렌을 향해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렌, 너는 잠깐 나가 있으렴." 렌은 어머니의 말대로 순순히 나갔다. 지금 진행되는 일이 어젯밤 아버지의 행동과 관계 있다는 것을 렌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렌은 초조하게 관사 뜨락을 왔다갔다하며 기다렸다. 한참만에 문이 열렸다. 어머니의 손짓에 렌은 다시 관사로 들어갔다. 첸선생은 렌을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너는 학문을 배울 생각이 있느냐?" "네, 배우고 싶어요." 렌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워서 어디다 쓰려고?" 첸선생의 질문에 렌은 말문이 막혔다. "네가 배워봤자 초등학교 과정 끝내고 나면 다른 계집애들처럼 뼈빠지게 집안일을 도와야 할 테고, 나이가 차면 이웃마을에 시집가서 애 낳고 애 키우고 남편 수발 들고 그렇게 한 세상 살게 될 텐데, 학문은 배워서 뭐하려고 그러느냐?" 렌은 빈정거리는 듯한 첸선생의 말투에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격한 투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무엇에 쓰려고 배우는 게 아녜요! 그냥 배우고 싶은 거라고요! 세상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새는 왜 울고 해는 왜 뜨고 사람은 어떻게 숨쉬고 사는 건지 궁금해 미치겠단 말예요! 온 세상에 모르는 것 천지인데 배우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단 말예요! 사람으로 태어나 배우지 못하면 짐승이나 다름없단 말예요!" 말을 마친 렌은 분해서 눈물까지 글썽였다. 눈물을 훔치면서도 이제 첸선생에게서 글을 배우기는 다 틀렸구나 싶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첸선생은 입가를 뒤틀며 얼핏 고소처럼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런 마음이면 됐다. 제법 강단이 있는 녀석이구나. 너는 내게 배울 자격이 있다." 첸선생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렌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첸선생을 올려다보았다.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렌의 어머니가 그제서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이 애 숙식비는...." "사환 겸 가정부로 두는 셈이니 숙식비는 필요없소이다. 나중에 이 애 아버지가 들이닥쳐 난리치는 일이나 없게 해주시오. 공부는 아이의 재능을 보아 그에 맞게 가르치겠소. 그리고 애가 까탈스럽거나 게으르면 언제라도 돌려보낼 터이니 그리 아시오." "네. 열심히 할게요!" 렌은 기뻐 어쩔 줄 몰라 첸선생의 말라비틀어진 손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아버지에게서 해방된다는 기쁨과 공부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는 환희로 렌은 펄쩍펄쩍 뛰었다. 첸선생은 귀찮은 듯 렌의 손길을 뿌리쳤지만 렌을 바라보는 첸선생의 얼굴에는 좀전보다 더 미소에 가까운 웃음이 떠올랐다. 렌의 어머니는 남편에게 임신했다고 거짓말함으로써 사태를 해결했다. 남편은 다시 아들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무척 기뻐하면서 술도 한동안 끊고 다시 밤마다 아내를 찾았다. 결국 렌의 어머니는 정말로 임신하게 되었고, 달 수는 조금 틀렸지만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 이 아이는 물론 태어나자마자 바로 출생신고가 되었다. 그리고 렌의 아버지는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렌이 집에 없는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게 되었다. 덕분에 렌은 첸선생의 관사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렌이 관사로 옮긴 것은 첸선생의 허락을 받은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렌은 동네 계집아이들처럼 일찍부터 집안일을 배워서 간단한 요리와 청소는 대강 할 줄 알았다. 렌이 관사에 딸린 손바닥만한 방을 오랜 시간을 들여 깨끗이 청소하고 짐을 푼 후 저녁준비를 하려고 하자 첸선생이 말렸다. "피곤할 테니 식사준비는 내일부터 하거라." 렌은 무뚝뚝하고 무서워만 보이는 첸선생이 저녁으로 죽을 끓여 렌 앞에 놓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목이 메어 제대로 죽을 삼킬 수 없었다. "저 정말로 열심히 할게요." "그래." 둘은 더 이상 말없이 죽을 삼켰다. 그 다음날 오후부터 렌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수업 첫날 렌은 첸선생으로부터 이름을 받았다. "네 이름이 무어라 했느냐?" "성은 매화 메이(梅)이고, 이름은 사람 렌(人)이요." "사람 렌이라, 흔한 글자는 아니구나. 너무 뜻이 커서 오히려 네게는 안 좋을 듯하다. 앞으로는 어질다는 렌(仁)자를 쓰도록 해라." "어질다는 것이 무엇이죠?"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 하셨다(仁者樂山, 智者樂水). 또 어진 사람은 인을 편안히 여기고 지혜로운 사람은 인을 이롭게 여긴다고도 하셨다(仁者安仁, 智者利仁). 그리고 오직 어진 사람만이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다고 하셨다(惟仁者 能好人 能惡人)." "알 듯 말 듯 합니다. 인이란 참으로 높고도 어려운 것이군요?" "그렇다. 유학이란 인을 알고 실천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작게는 자기 스스로 그리하고, 크게는 온 천하를 인으로 다스리는 것이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공부한다면 언젠가는 인에 도달하여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이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겠어요." "그래, 그 마음가짐이면 되었다." 첸선생은 어린 제자를 대견한 눈으? ?바라보았다. 이렇게 시작된 교육은 렌이 마을을 떠날 때까지 꼬박 6년간 계속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지만 사실 첸선생은 대단한 학자였다. 정규교육과정을 가르칠 자격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유학과 한문학, 노장사상에도 통달했으며, 한의학에도 조예가 깊어 맥을 짚고 약재를 짓고 침을 놓는 것에도 능했다. 처음 첸선생은 렌에게 초등과정 한문과 산수를 가르쳤지만 일 년만에 렌이 초등과정을 다 떼자 중등과정과 함께 사서삼경, 시사(詩詞)를 가르쳤다. 렌이 다시 일 년만에 중등과정을 떼고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게 되자, 그 때부터 첸선생은 렌에게 한의학의 원리와 침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렌은 좁은 관사를 치우고 요리를 하고 난 후 남는 시간은 전부 공부에 쏟았고, 그러고도 모자라 밤잠을 줄여 가며 그날 배운 것을 복습하곤 했다. 렌을 가르치는 매일매일이 첸선생에게는 기쁨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렌은 한 번 배운 것은 잊지 않았고,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다. 더구나 렌은 첸선생을 냉랭한 친아버지를 대신할 마음의 지주로 생각하고 첸선생을 수발하는 데 정성을 다했기 때문에 가족이 없는 첸선생은 수십 년만에 처음으로 인생의 온기를 느끼는 기분이었다. 첸선생은 이 마을에 온 후로 무뚝뚝하고 과묵하다고 소문이 나 있었으나 렌을 가르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점 말문이 트이게 되었다. 어쩌다 기분이 좋은 날이면 첸선생은 과실주를 마시며 얼근히 취해 "천하의 영재를 얻어 그를 가르치니 군자의 가장 큰 기쁨이로다!"라고 외치곤 하였다. 첸선생은 술을 좋아했는데, 아주 많이 취한 날에는 때때로 북경에서 살던 시절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단편적인 얘기를 종합해 보면 그의 인생은 짧은 행복 후에 찾아온 고통과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에게도 중국이 마침내 외세로부터 독립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는 역사의 순간에 다른 인민들과 함께 가슴 벅찬 환성을 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중국문화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유학과 노장사상을 공부하여 중화인민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림으로써 당에도 인정받고 학문적인 영광도 누리리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만발한 도화나무 아래에서 오래 전부터 사모해 오던 스승의 딸에게 청혼하고,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에 세상을 얻은 듯 기뻐했던 시절이 있었다. 자신은 북경 시내의 유서 깊은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아내는 한의사로서 작은 병원을 열고, 마흔이 다 되어 뒤늦게 낳은 딸을 부부가 함께 금지옥엽같이 애지중지 키우던 시절이 있었다. 아내와 딸을 생각하면 아직도 그리움과 함께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 느껴졌다. 설마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들이 원수로 돌변할 줄이야! 그 착하던 학생들이 어느날 갑자기 자신과 아내를 손가락질하며 온 집안의 책들을 불태우고 자신들에게 돌을 던질 줄이야! 문화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첸선생 일가는 가장 먼저 반동으로 지목되었다. 청소년기의 맹목적인 광신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당과 모택동주석을 향한 충성의 열정에 떨며 첸선생이 평소에 반동적인 유학서적을 읽고 논어며 맹자의 구절을 인용하며 학생들에게 봉건사상을 가르쳤다고 차례로 고발했다. 홍위병들은 첸선생의 집에 몰려와 첸선생과 아내를 끌어냈다. 펑펑 쏟아지는 눈 속에서 조리돌림당하고 구타당하고 돌팔매질당하기를 몇며칠, 첸선생의 아내는 결국 출혈과 추위로 쇼크사했고, 그제서야 학생들은 첸선생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빳빳하게 굳은 아내의 시체를 끌고 집으로 갔을 때 그가 발견한 것은 다 뜯겨진 문틈에 웅크리고 앉아 얼어죽은 네 살박이 딸아이의 몸뚱아리였다. 그는 거의 일주일간을 그곳에서 넋 놓고 앉아 있었다. 홍위병들에게 당할까 싶어 감히 집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이웃집 여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에게 와 울면서 제발 정신 차리라고 그를 흔들었을 때 그는 비로소 정신이 들었고, 그제서야 갑자기 밀려오는 슬픔과 고통에 하루 밤낮을 처절하게 울었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아내와 아이를 묻고 나니 광동성 변경의 오지로 하방당했다는 명령서가 와 있었다. 그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북경에 그를 묶어놓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홍위병들이 휩쓸고 지나간 집안에서 옷가지 몇 벌, 불타지 않고 남아 있던 아내의 한의학서적과 다른 무해한 서적들 몇 권을 챙겨 길을 떠났다. 기차를 타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 중국의 남쪽 끝에 도달하여, 그곳에서 다시 강과 숲과 산을 지나 마침내 렌의 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제 어디도 가지 않고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고 이곳에서 그림자처럼 살다가 조용히 죽으리라고 결심했다. 그는 마을에 한 명밖에 없던 선생이 풍토병으로 죽고 나서 비어 있던 교사 자리를 자신이 채우겠다고 자청하였고, 렌이 오기 전까지 낮에는 마을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자신이 들고 온 몇 권의 책을 되풀이해 읽으며 타버린 고목같은 마음을 술로 달래 왔다. "그래도 사람이란 참 강하고 잔인한 존재란다. 그런 끔찍한 고통을 딛고 다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니." 자신의 슬픈 과거를 조금씩 털어놓은 밤이면 첸선생은 한탄조로 말하곤 했다. 그럴 때면 렌은 너무도 안타까워 자기도 모르게 첸선생을 꼭 껴안곤 했다. 자신이 그를 껴안고 뺨을 부빌 때 고독한 첸선생이 크나큰 위안을 받는다는 것을 렌은 알았다. 입밖으로 내어 말한 적은 없었지만 렌은 첸선생이 자신을 죽은 딸 대신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렌 또한 첸선생을 무정한 친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할 참된 아버지로 여겼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거예요, 사부님." 첸선생이 자신이 누리는 한 조각 행복을 자책할 때마다 렌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그렇게 다정하게 첸선생을 위로하였다. 첸선생이 렌에게 한의학을 가르친 데에는 깊은 뜻이 있었다. 그는 본래 유학자로서 황제내경같은 고의학서적에 통달했던 데다가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지도받는 재미에 정식 한의사인 아내의 지식과 솜씨를 거의 전수받았기 때문에 어지간한 한의사는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한의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리고 유학이 높고 깊은 학문이기는 하나 사실 공산화된 현대 중국에서 유학공부를 한다고 해도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렌을 보면 자신이 아는 모든 유학지식을 가르치고 싶은 욕심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나, 여러 모로 불우한 렌의 처지를 생각해볼 때 의학을 아는 것은 장차 렌에게 큰 힘이 될 터였다. 또 따뜻하고 남을 돕기 좋아하는 렌의 성격에 의학은 딱 맞았다. 첸선생은 열심히 가르쳤고, 렌은 첸선생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빨리 배웠다. 황제내경, 난경, 상한잡병론, 경악전서, 동원십서, 본초강목 등에 더하여 북조선을 통해 구했던 동의보감과 동의수세보원까지 모두 뗀 후에는 침을 놓는 방법, 맥을 짚는 방법, 약을 짓는 방법 등의 실기까지 익혔다. 그 결과 삼 년만에 렌은 한의학의 기본적인 내용을 모두 터득할 수 있었다. ===================================================================치료사 렌 [1] 광동성에서 홍콩까지 (2) -------------------------------------------------------- 렌이 첸선생으로부터 한의학의 기본소양을 다 익혔다고 인정받은 날, 첸선생은 북경에서 가져왔던 얇은 책자 한 권을 꺼내 렌 앞에 놓았다. "이게 뭐지요, 사부님?" 렌은 호기심에 차 물었다. 책자는 낡디낡은 고서인데 신기하게도 표지에는 아무런 제목도 달려 있지 않았다. 첸선생은 렌의 질문에도 한동안 입을 열지 않다가 렌의 채근에 비로소 침중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죽은 아내가 나와 결혼해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얼마 되지 않을 무렵, 우리 둘은 고서 구경도 할 겸 유리창에 놀러갔었다." 첸선생의 목소리는 아련한 추억에 떨리기 시작했다. 따뜻한 봄날이었다. 버들꽃이 사방에 날리고 햇살은 눈부셨다. 첸선생의 사랑스런 아내 리란은 하얀 원피스를 입고 첸선생이 운전하는 자전거 뒷좌석에 앉아 첸선생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노총각 신세를 벗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첸선생은 그녀의 체온이 전해져올 때마다 순진한 청년처럼 얼굴을 붉혔고, 짓궂은 그녀는 그때마다 첸선생을 놀려 붉어진 첸선생의 얼굴을 더욱 새빨갛게 만들었다. 둘은 행복에 겨웠고, 그때는 그들 누구도 자신들의 인생에 장차 끔찍한 불행이 찾아오리라는 상상은 하지 못했었다. 첸선생이나 리란이나 모두 서치, 혹은 서귀 소리를 듣는 애서가였기 때문에, 유리창의 고서점 순례는 둘 모두에게 참으로 즐거운 나들이였다. 늘 가는 단골 고서점에 들러 서가를 둘러보고 송대 문장가의 시가집 두어 권을 골라 계산하려는 순간, 서점 주인이 리란을 불렀다. "의사선생, 이건 좀 터무니없는 내용이긴 해도 어쨌든 의학서적인 것 같은데 한 번 보시겠습니까?" 리란이 서점 주인의 지병을 고쳐준 이후로 서점 주인은 리란에게 극진했다. 그래서 신기한 책이 들어오면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전에 꼭 리란에게 먼저 보였고, 그 덕에 첸선생도 희귀본을 많이 구할 수 있었다. 리란은 의학서적이란 말에 당장 관심을 보이며 책을 받아 보았다. 낡은 책이었다. 갈색 표지에 누렇게 변색된 종이로 보아 제본된 지 족히 수백 년은 지난 것 같았다. 표지에는 제목도 써 있지 않았고, 첫장은 다짜고짜 "활인치상치병대법 서장"이라고 시작하고 있었다. "아하하하, 활인치상치병대법이라고요? 이거 무슨 무협소설 아닌가요?" 제목을 보자마자 리란은 배를 잡고 웃었다. 옆에서 함께 책을 들여다보던 첸선생도 웃음을 금치 못했다. 도무지 무슨 대법이니 하는 것치고 제대로 된 것이 없다는 건 상식이었다. 소리내어 웃는 부부를 보며 서점 주인은 울상을 지었다. "그러길래 터무니없는 내용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쨌든 의학에 관련된 서적인 것은 맞쟎아요?" 리란은 여전히 웃으며 휘리릭 책장을 넘겼다. "음, 몸에 맑은 기를 쌓아 사람을 구하고, ... 죽은 사람이 아니면 고칠 수 있고, ...기를 방출할 때에는 장심에 기를 모은 후 치료부위에 대고, ... 이거 정말 무협소설에서 많이 보던 얘긴데요. 어쨌든 참 재미있네요. 여보, 나 이거 사고 싶어요!" 밝게 웃으며 눈을 빛내는 리란의 모습에 첸선생은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하랴! "주인장, 저 책 얼마면 되겠습니까?" "제목도 없는 책인데 비싸게 받을 수도 없고, 적당히 알아서 주십시오." 서점 주인은 능란하게 대답했다가, 첸선생이 인민폐 몇 장을 건내자 금방 화색이 돌았다. 부부는 서점 주인이 구입한 가격보다 상당히 비싼 값을 지불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아주 큰 돈도 아니기에 기분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서 며칠 후 저녁때 리란은 심각한 얼굴로 첸선생을 불렀다. "여보, 이 책 진짠 거 같아요." "진짜라니요?" 첸선생은 언제나 아내에게 존대말을 썼다. "자세히 읽어봤는데 얼핏 황당해 보이지만 하나하나가 내가 알고 있는 의학의 이치에 들어맞아요." "내용이 무언데요?" "음...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이 책을 익히는 사람은 먼저 정명운기법이라는 수련을 통해 몸에 맑고 깨끗한 기운-정명기라는 것-을 쌓아야 하고,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정명기를 방출할 수 있게 되는데, 아픈 사람에게 정명기를 불어넣으면 상처는 빨리 아물고 질병은 순식간에 물러가 심지어 죽기 직전의 사람까지도 고칠 수 있다는 거예요." "하하하, 당신 지금 장난치는 겁니까?" "아녜요. 내용은 황당한데, 축기하는 방법, 나중에 질병과 상해의 종류에 따라 기를 방출하는 방법이 전부 한의학의 원리에 부합하도록 되어 있어서, 장난이나 거짓말 같지가 않아요." "그렇다면 당신이 직접 한 번 익혀보지 그래요?" 그 말에 리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그러고 싶은데, 나중에는 상관없어도 맨 처음 기를 쌓을 때에는 처녀지신이여야 한다네요. 남자는 아예 안 되고요. 안 그러면 치료에 필요한 맑은 정명기를 쌓을 수가 없다고 하네요." "그럼 결국 그림 속의 떡이군요." 첸선생은 빙긋 웃었다. "그러게요. 이게 다 누구 탓인지 알아요? 못된 사람 같으니라구!" 장난스럽게 첸선생의 가슴을 때리는 리란을 첸선생은 꼭 보듬어 안았다. "어쨌든 이 책은 잘 보관해 두었다가 아이를 낳거나 제자를 두게 되면 전해 줘야겠네요." 둘은 꼭 껴안은 채로 미래를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그래서 그 때부터 리란은 이 책을 소중히 보관했단다. 하지만 결국 제자를 두기도 전에..." 첸선생은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침울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렌은 일부러 밝게 말했다. "그럼 결국 제가 사모님의 제자가 되는 거네요?" "그래, 그래, 그렇게 되는구나. 리란도 기뻐할 게다." 슬픈 듯 기쁜 듯 첸선생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설명들은 바로는 정명기를 익힌다 해도 남을 치료하는 데에만 쓸 수 있고, 자기 몸을 고치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는데 그래도 좋으냐?" "예, 물론이예요." "그리고 아무나 익힐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순결지신의 소녀 중에서도 체질이 맞아야만 익힐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정명기를 익힐 수 있는지 없는지는 한 달 정도 수련을 해야 알 수 있다고 하는구나." "열심히 해 보고 안 되면 말죠, 뭐." "하하, 그래." 렌의 낙천적인 말투에 첸선생은 밝게 웃었다. 정명기를 수련하는 것은 상당한 인내심을 요했다. 먼저 몸 안의 더러움을 다 밖으로 배출하기 위해 공기 맑고 고요한 곳에서 들숨은 거의 쉬지 않고 날숨은 참을 수 있는 데까지 길게 쉬기를 반복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몸의 기운이 깨끗해지면 다시 오랜 시간 동안 들숨은 길게 쉬고 날숨은 짧게 쉬어 주위의 맑은 기를 받아들여야 했고, 그 다음에는 다시 들숨을 짧게 쉬고 날숨을 길게 쉬어 새로 받아들인 기 중에서 탁한 기운을 도로 뱉아내야 했다. 결국 쌓은 기를 대부분 토해내는 셈이 되니, 태극권이나 단전호흡에 비해 축기의 속도가 비교할 수 없이 느렸다. 게다가 정명기를 쌓아도 다른 기공처럼 장풍을 쏜다거나 지풍을 날린다거나 하는 것은 할 수 없고, 오로지 자신의 몸을 맑게 하고 다른 사람을 치료하는 것만 할 수 있었다. 결국 정명운기법은 기공 중에서 치료의 목적만을 극대화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명기가 일단 일정 수준 이상으로 축적된 후에는 침을 놓을 때나 혈도를 짚어 사람을 치료할 때 기를 불어넣어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고, 정명기를 환자의 몸속에서 주천시켜 아픈 부위를 직접적으로 기로 씻어내어 낫게 할 수도 있었다. 또 최후의 수단이기는 하나 정명기만으로 환자가 낫지 않을 경우 시전자 본인의 생기를 정명기에 실어 환자에게 전할 수도 있다고도 했다. 렌은 그 또래답지 않게 참을성이 강했기 때문에 지겨워하지 않고 착실히 수련하였다. 한 달 된 후 정명기가 축기된 것을 확인하고 렌과 첸선생은 함께 기뻐하였다. 렌이 수련을 시작한지 1년쯤 된 후에는 정명기를 치료에 사용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정명운기법의 요체는 매일 조금씩 정명기를 담는 그릇을 키우는 것과 비슷했다. 축기할 수 있는 정명기의 양이 커질수록 치료의 효과는 높아지고, 일단 축기된 정명기를 치료에 다 써도 다시 다음날 아침 운기를 하여 기를 채워넣으면 되는 것이었다. 렌의 연습을 위해 첸선생은 본의 아니게 환자노릇을 해 주어야 했는데, 정명기가 정말로 효과가 있는지 오랫동안 첸선생을 괴롭혔던 허파의 통증도 서서히 사라지고 몸도 한결 가벼워져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렌을 기쁘게 했다. 렌은 지금처럼 첸선생 밑에서 일과 공부를 함께 하는 평온한 나날이 언제까지나 계속되리라 믿었고, 현재의 행복에 힘입어 전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소망도 품게 되었다. 언젠가는 대학을 졸업하여 정식으로 한의사가 되고, 양의학도 함께 공부해서 의사자격을 따리라. 빈부를 가리지 않고 아픈 사람들을 고치리라. 또 돈을 모아 어머니와 사부님을 호강시켜 드리리라. 그래. 언젠가는. 그러나 어느 날인가부터 불행이 연달아 닥쳐왔다. 첫번째 불행은 렌의 어머니가 과일을 따러 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미끄러져 갑작스럽게 죽은 것이었다. 즉사였다. 렌이 그간 배운 의학지식으로 어떻게 해 볼 시간조차 없었다. 가족 중에 렌을 가장 사랑해 주었던 어머니의 죽음은 렌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극도의 슬픔으로 렌은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나름대로 아내를 사랑하였던 렌의 아버지는 아내의 시신 앞에서 발작하듯 울부짖다가, 멍하니 앉아 있는 렌을 보자 독한 년이라고 욕하며 죽기 일보직전까지 마구 때리고 머리채를 잡아 흔들었다. 언니와 남동생이 울면서 사력을 다해 말렸기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렌은 정말로 맞아 죽었을 것이다. 두번째 불행은 언니가 시집가 버리고 살림을 돌볼 여자의 손길이 없어지자 렌이 어쩔 수 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었다. 첸선생은 반대했지만 명분이 없었다. 렌은 자신을 증오하는 아버지와 이제 겨우 여섯 살인 남동생을 돌보아야 했다. 지난 6년간 잊고 있었던 아버지의 매질은 렌이 돌아오자마자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렌에게서 찾는 듯 술에 만취한 날이면 자꾸 렌에게 음탕한 눈길을 보내곤 했다. 남동생이 유일한 렌의 방패였다. 렌은 밤에 일부러 남동생을 불러 한 이불 속에서 잤고, 그러면서도 밤마다 불안에 떨었다. 아버지는 도박에도 손을 대기 시작해서 마을에서 하룻길인 읍내의 비밀도박장에서 살다시피 하며 집에도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끊임없이 집안 세간을 도박빚과 술값으로 날렸기 때문에 당연히 집안형편은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렌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꿔 놓은 것은 최후의 불행이었다. 어느 날 도박장에서 며칠만에 초췌한 모습으로 돌아온 렌의 아버지는 렌을 불렀다. 그는 말하면서 자꾸만 렌의 눈길을 피했다. "얘야, 내가 읍내에서 들었는데 얼마 후면 정부당국에서 사람이 파견되어 애를 둘 이상 낳고 출생신고를 안 한 사람을 파악해서 거액의 벌금을 물린다고 하더구나." 렌도 그런 일이 종종 있다는 건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너를 얼마동안 이 마을에서 피신시키기로 했다. 읍내에서 알아보니 안전하게 아이를 빼돌렸다가 정부당국이 조사를 마치고 나면 돌려보내 주는 일을 해 주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서둘러 우리 마을로 와서 너를 데려가라고 했다." "그 사람은 언제 오나요?" "내일 온다고 했다." "저는 어디에 가 있게 되나요?" "그 사람이 다 알아서 한다고 했다. 너는 아무 걱정도 할 것 없다." 아버지는 무언가 숨기는 듯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렌은 알 수 없었다. 다음날 얼마 안 되는 짐을 싸 놓고 아침을 챙겨 먹고 나니 아버지가 말하던 그 사람이 왔다. 유들유들해 보이는 미소를 띠고 옷을 잘 차려입은 그를 아버지는 방 동지라고 불렀고, 렌더러는 방 어르신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렌을 보자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오오, 이 마을에 천하절색이 있다더니 그 말이 허언이 아니로구나. 조금만 더 크면 온 세상 남자들이 줄줄 따르겠는 걸?" 렌은 능란한 그의 칭찬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저울로 달아보는 듯한 그의 눈길이 불편했다. 그래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보통때 같으면 렌의 무례한 태도를 꾸짖었을 렌의 아버지는 렌에게 아무 말도 않고 초조한 듯 손바닥을 비비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서두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방씨는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뭐든지 빨리빨리 하 는 것이 좋지요. 렌이라고 했지? 짐은 쌌느냐?"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이제 가자꾸나." 렌의 남동생은 옆에서 렌을 쳐다보고 있었다. 렌은 남동생을 꼭 껴안았다. 남동생은 영문을 모르겠는 듯 렌의 포옹을 받았다. "누나는 한 달 후에 올 테니 말썽 피우지 말고 잘 있어." "응, 그럴게. 걱정 마." 방긋 웃는 남동생을 보며 렌도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별이 길어지자 방씨는 좀전까지의 여유로운 태도를 버리고 렌의 팔을 잡아 끌었다. 렌은 그에게 끌려 나가며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쳐다보았으나 아버지는 렌의 눈길을 피하며 외면했다. 집 밖에는 오토바이가 서 있었다. 방씨는 렌을 뒷좌석에 태우고 시동을 걸었다. "오토바이는 처음 타 보지? 잘못 하면 떨어지니 꽉 잡아야 한다." 렌은 그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 너무 싫었으나 하는 수 없이 방씨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물컹한 감촉이 혐오스러웠다. 방씨는 능숙하게 오토바이를 몰아 마을을 벗어났다. 마을 여기저기에서 렌의 친구들이나 동네 어른들이 렌을 보고 손을 흔들며 뭐라고 했으나, 렌이 채 대답하기도 전에 오토바이는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오토바이는 숲을 가로질러 나 있는 오솔길에 가까운 비포장도로를 따라 끝없이 달렸다. 때때로 방씨가 뭐라고 말을 걸었으나 잘 들리지도 않고 별로 대답하고 싶지도 않아 렌은 가만히 있었다. 한 시간 반 정도 달렸을까, 숲이 끝나고 비포장도로가 2차선의 포장도로와 이어지는 곳이 나왔다. 방씨는 거기에서 오토바이를 멈췄다. 도로 반대편 숲속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그가 손짓하자 방씨는 씩 웃으며 렌을 잡아 끌어 오토바이에서 내리게 한 후 길을 건너 반대편 사람에게로 갔다. 렌은 영문을 모르고 옷가지를 싼 보퉁이를 끌어안은 채 따라갔다. "황형, 어때, 그 무지렁이가 자기 딸이 천하절색이라고 자랑할 만하지?" 방씨는 만다린어로 말했다. 아마도 렌이 광동어만 알고 만다린은 모를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황형이라고 불리운 새로운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키가 크고 비쩍 마른 그 사람은 날카로운 눈으로 렌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흝어보았다. 렌은 섬찟한 느낌에 몸을 떨었다. "그래, 정말 괜찮군. 수고했네. 꾸며 놓으면 노예시장에서도 상당한 값을 받겠는걸. 처녀인 건 확실하지?" "아직 초경도 안 한 어린아이인데 당연하지. 의심스러우면 나중에 검사해 보게." "자, 여기 약속한 3000위안. 애 아버지한테는 벌써 돈이 간 거지?" "그렇지. 도박빚 2000위안을 탕감해 줬으니, 후하게 쳐 준 거지." 렌은 파랗게 질렸다. 아버지가 나를 팔다니! 노예시장이라니! 자신의 팔을 잡고 있던 방씨의 손을 뿌리치고 렌은 숲속으로 정신없이 도망쳤다. 그러나 멀리 가지 못해 붙잡혔다. 렌은 마구 몸부림쳤으나 허사였다. "너 만다린어를 아냐? 우리 말을 알아들은 거냐?" 렌은 아무 대답도 안 했으나 황씨는 씩 웃었다. "만다린어를 알면 값이 더 올라가겠군. 의외로 계집애랑 말이 통하는 걸 좋아하는 놈들도 많거든. 북경 부자한테 팔아도 좋겠지. 어이, 방형, 얘 좀 붙잡고 있어." 황씨는 주머니에서 물병같은 것을 꺼내더니 그 안의 액체를 수건에 적셨다. 방씨가 렌을 단단히 잡고 있는 동안 황씨는 수건을 렌의 코와 입에 덮었다. 역한 화학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렌은 숨을 참으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얼마 안 되어 렌은 의식을 잃었다. -------------------------------------------------------- 치료사 렌 [1] 광동성에서 홍콩까지 (3) -------------------------------------------------------- 무언가 덜컹하면서 렌은 잠에서 깨어났다. 실내는 컴컴했고, 바닥에 누워 있던 온몸은 쑤시고 결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주위 풍경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계속 덜컹거리는 것이 아마도 트럭 뒷칸인 것 같았고, 자세히 보니 렌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트럭에 탄 사람들은 모두 여자였다. 20세 정도 된 아가씨에서부터 렌보다도 조금 어려 보이는 아이까지, 대강 열댓 명 정도가 눕거나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가늘게 흐느껴 우는 소녀도 있었다. 렌은 깔깔한 목을 가다듬으며 힘을 짜내어 물었다. "저... 여기가 어디죠??" 렌의 질문에 제일 나이 많은 아가씨가 차갑게 대답했다. "너 바보 아니니? 인신매매범의 트럭 짐칸이쟎아?" 그제서야 정신을 잃기 전의 마지막 광경이 생각났다. 자신인 아버지의 도박빚에 팔려왔다는 사실이 비로소 떠올랐다. 아버지가 언젠가는 자신을 버릴 것을 예감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저,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죠?" "항구로 가겠지. 그리고 거기서 아마도 홍콩 가는 밀항선으로 옮겨질 테고, 홍콩에 도착하면 지하 노예시장에 넘겨져 팔려가겠지." 그 아가씨는 계속 냉소적으로 말했다. 렌은 아직도 마취약 기운에 어지러웠다. 맑은 공기? ?쐬고 싶었으나 트럭 짐칸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목이 말랐다. "저, 물은 없나요?" "다 떨어졌어. 기다리다 보면 인신매매범들이 알아서 챙겨줄 테지. 우리는 소중한 상품인데 죽이기야 하겠니?" 냉소적인 그 아가씨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듯 거침이 없었다. 렌은 말없이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트럭은 쉼없이 어디론가 계속 달려갔다. 한참 후에 짐칸과 운전석 사이의 작은 창이 열리고 물병 두 개가 들어왔다. 다른 소녀들도 목이 말랐던지 모두 물병을 빼앗다시피 하며 돌아가며 물을 마셨다. 렌은 맨 마지막으로 겨우 서너 모금을 얻어 마실 수 있었다. 물은 미지근하고 이상한 냄새가 났지만 렌에게는 꿀맛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물을 마시고 나서 얼마 안 되자 소녀들은 차례로 잠이 들기 시작했다. 렌 역시 잠이 쏟아졌다. 수면제가 섞인 물이었나 봐. 그것이 잠들기 전 렌이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렌이 다시 눈을 뜨니 천천히 흔들리는 느낌이 잠든 사이에 배로 옮겨진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닫혀 있는 실내는 한 점 빛도 없었고 다른 소녀들은 모두 아직 잠들어 있는 듯했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한참을 누워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키려는데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고 눈부신 빛이 새어들어왔다. "자, 빨리빨리 옮기자. 얘네들 깨어나면 귀찮아." 누군가의 말소리와 함께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렌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지금이 아니면 도망갈 틈이 없을 것 같았다. 렌은 힘없는 팔다리를 억지로 끌며 벽을 잡고 문 쪽으로 발을 떼었다. "어, 깨어난 애가 있네." 놀라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렌은 온 힘을 다해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러나 건장한 남자의 몸에 부딪혀 뒤로 넘어졌다. "마취약이 모자랐나? 어이, 마취약 좀 더 가져오라고 해." 렌과 부딪힌 남자는 렌을 바닥에 누르고 렌의 팔을 잡은 채 누군가에게 명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마취제를 적신 수건을 가져왔다. 인신매매범 황씨가 덮어씌웠던 것과 같은 냄새가 났다. 렌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저항했으나 렌을 잡고 있던 남자는 렌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렌의 코에다 수건을 댔다. 렌은 다시 의식을 잃었다. 렌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목적지로 옮겨진 후였다. 렌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렌이 잠들어 있던 곳은 침대 하나만 놓여 있는 작은 방이었다. 이미 누군가가 렌을 씻겨 놓은 듯 몸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났고, 입고 있던 옷도 반쯤 비치는 하늘하늘한 짧은 드레스로 바뀌어 있었다. 다리에는 쉽게 도망치지 못하게끔 가벼운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드레스 안에는 아무런 속옷도 입혀져 있지 않아 렌은 얼굴을 붉혔다. 몸을 움직거려 방문을 열려고 했으나 문은 밖에서 잠겨 있었다. 렌은 힘이 빠져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한참을 그렇게 있으려니 문이 열리고 빨간 차이니즈 드레스를 입은 화려한 미인과 단단한 몸집의 사내가 들어왔다. 홍의미인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흐응, 귀여운 아이야, 오래 기다렸지? 광동 출신이니 광동어는 알아 듣지? 이번 경매 물건 중에서는 네가 최상품이어서 맨 마지막에 내놓는 거란다. 후후훗, 얼마나 높은 값에 팔릴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는구나." "저, 언니, 제 몸값은 벌어서 갚을 테니 제발 저를 풀어 주세요!" 렌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미인의 옷자락을 잡고 애원했다. 언니라는 호칭에 눈살을 잠깐 찌푸렸던 홍의미인은 곧 렌의 손을 뿌리쳤다. "네가 갚는다고? 너 네 몸값이 얼만지나 아니? 넌 워낙 상등품이라 아마도 낙찰가가 오만 불, 위안화로 치면 대략 오십만 위안은 될 텐데, 네가 무슨 수로 그 돈을 갚겠어?" 오십만 위안이라니, 렌의 마을의 보통 남자 어른이 버는 돈이 한 달에 200위안이었다. 렌은 절망하여 주저앉았다. 홍의미인이 눈짓을 하자 사내는 곧 렌을 번쩍 들어 어깨에 둘러멨다. "얘야, 경매장에서는 얌전히 있어야 해. 그렇지 않아도 얌전히 굴게끔 주사 한 대는 놨지만, 네가 사납게 굴수록 헐값에 이상한 사람한테 팔리게 돼. 너도 그건 싫지?" 렌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반항하려 해도 점점 힘이 빠지고 머리가 흐릿해지는 것이 그 주사 때문인 듯했다. "어디 보자. 화장을 좀 더 해야겠다. 보는 눈이 있으면 네가 얼마나 굉장한 상품인지 금방 알아볼 테지만, 그래도 포장은 근사하게 하는 게 상인의 도리지. 안 그러니?" 홍의미인은 몹시 유쾌한 듯 소리높여 웃었다. 렌이 옮겨진 곳은 무슨 대기실같은 곳이었다. 렌은 커다란 화장대 앞에 앉혀졌고 비로소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미 화장이 되어 있는 렌의 얼굴은 평소의 전혀 꾸미지 않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물기를 머금은 듯 가지런히 빛나며 허리까지 드리워진 삼단같은 검은 머리, 눈화장을 해서 더 커 보이고 주사 때문인지 몽롱해서 더 신비해 보이는 까만 ? ? 인종을 종잡기 힘든 투명한 하얀 피부, 아직 앳되어 보이는 앵두같은 발간 입술, 채 피지 않은 꽃봉오리같은 느낌이 애처로움과 보호본능마저 불러 일으키는 자태. 누구라도 보면 숨을 멈추고 황홀해할 정도의 미모였다. 렌은 점점 아련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마치 남의 얼굴을 보듯 자기 얼굴을 쳐다보며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홍의미인은 렌 옆에서 부산하게 뺨에 연지를 더 발라 발그레하게 하고, 입술에 윤기를 더 주고, 머리를 한 번 더 빗겨 주었다. 전문적이고 꼼꼼한 손놀림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발짝 물러서 렌의 모습을 점검한 그녀는 흡족한 듯 미소를 띄우며 렌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렌은 인형처럼 멍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끌려갔다. "자, 여기에 서렴." 홍의미인은 대기실 한가운데의 둥그런 원 속에 렌을 세웠다. 그녀가 신호하자 바닥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부신 빛이 머리 위에서 쏟아져내려 렌은 눈을 깜박였다. 렌은 유리로 된 원통 속에 들어가 있었고, 눈앞에는 무척 부유해 보이는 남녀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렌의 모습이 나타나자 일제히 탄성을 올렸다. 렌이 서 있는 발판이 서서히 돌기 시작하자 모두들 렌의 모습을 자세히 보려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데 경매 진행자가 경매를 막 개시하려는 순간, 경매장 뒤쪽에서 검은 선글래스를 쓴 키가 크고 약간 마른 남자가 그를 향해 손짓했다. 손짓을 본 진행자는 흠칫 놀랐다. "신사 숙녀 여러분, 아쉽지만 이 아름다운 소녀는 경매물품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아쉬움 가득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렌은 멍한 머리로 '이제 그럼 팔리지 않게 된다는 건가?'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아래층으로 도로 내려간 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좀전의 검은 양복이었다. 유리원통 속에서 나온 렌이 비틀거리자 그는 렌이 넘어지지 않도록 재빨리 렌의 팔을 잡았다. 홍의미녀는 약간 유감이라는 투로 검은 양복에게 말했다. "수 대형, 이 아이라면 최고의 값을 받을 수 있을 텐데요." "노야를 위한 아이는 내가 고른다. 일단 고른 이상 번복은 없다. 홍의낭랑, 너는 노야께 최고의 아이를 바치는 것이 아깝단 말이냐?" 검은 양복은 어조의 변화 없이 담담하게 말했지만 여자는 금방 사색이 되어 사죄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노야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검은 양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홍의미인은 그들을 지하주차장으로 인도하며 렌의 귀에 속삭였다. "너는 이제 밤의 제황에게로 가게 된단다. 너같은 처지의 아이에게는 최고의 영광이지. 부디 최선을 다해 노야를 모셔라. 후후후." 검은 양복은 거의 쓰러지려는 렌의 팔을 끌어 검은 리무진에 태우고 자신도 그 옆에 탔다. 기사는 곧 차를 출발시켰고 렌은 잠이 들었다. -------------------------------------------------------- 치료사 렌 [1] 광동성에서 홍콩까지 (4) -------------------------------------------------------- 렌은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옷이 또다시 갈아입혀져 있음을 알았다. 붉은 비단으로 된 옆으로 여미는 중국풍 저고리와 바지였다. 상체를 일으켜 자신이 있는 곳을 둘러 보니 방은 엄청나게 컸고, 렌이 누워 있던 침상은 열 명이 자도 넉넉할 정도로 넓었다. 실내는 정갈하면서도 품위있게 꾸며져 있었지만, 가구며 장식이며 하나하나가 모두 어마어마하게 유서깊은 물건으로 보였다. 잠시 후 렌은 방안에 창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취약 기운이 모두 사라졌는지 머리는 맑았다. 팔려온 후 4, 5일 동안-얼마나 지났는지 렌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절망에 빠져 한 번도 정명기를 운기하지 않았음을 깨닫자 렌은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고 몸 안의 정명기를 서서히 일주천시키기 시작했다. 덕분에 아직 미약하게 남아있는 약의 독기가 깨끗하게 씻겨나갔다. 다시 일주천시키자 마음이 명경지수처럼 차분히 가라앉았다. 렌은 진기운용을 마치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들었던 얘기를 종합해 보면 렌은 이제 그 "노야"라는 사람의 노예였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바라는 것은 렌의 몸이리라. 지금 상황에서 렌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 없었다. 첫째는 순순히 몸을 맡기는 것, 둘째는 저항하다 죽는 것, 셋째는 도망치는 것(아마도 도망치다 죽는 것). 렌은 지금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지, 그 노야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 그러니 선택을 하기 전에 그걸 아는 것이 급선무이고, 정보를 수집한 후에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상황이 불리해 보이지만 렌에게는 한 가지 믿을 구석이 있었다. 침을 배우면서 렌은 온몸의 급소가 어디어디에 있는지도 아울러 배웠으므로, 기회를 보아 머리핀이나 연필같은 뾰족한 물건을 입수했다가 일순간에 자신을 덮치려는 자의 사혈을 노리며 위협하면 그를 인질삼아 탈출할 수 ? 聆뼉層?모른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렌은 조금 기운이 났다. 그래,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 있어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아날 구멍이 있을 거야. 그 때 방문이 열리며 자신을 데려온 검은 양복과 하녀 한 명이 들어왔다. 하녀는 죽과 반찬이 놓인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고 바로 방을 나갔지만, 검은 양복은 나가지 않고 렌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검은 양복은 경매장에서와는 달리 선글래스를 벗고 있었지만 렌은 전체적인 분위기로 같은 사람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굉장한 미남이었으나 그의 몸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얼어붙을 듯 차가웠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인다면 바로 저런 눈빛일 것이다. 렌은 그의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에 잠시 떨었으나 눈을 피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색다른 렌의 반응에 잠시 이채를 띠다가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이 뭐지?" "렌이예요. 어질다는 뜻의 렌이요. 성은 매화 메이이고요." "좋은 이름이군."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지요?" 그는 신기하다는 듯이 다시 렌을 쳐다보다가 반문했다. "네 처지는 알면서 그런 태평한 질문을 하나?" 렌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저는 인신매매장을 운영하는 엄청난 부자의 노예가 된 거지요?" "의외로 침착하군." 그는 감탄했다는 투로 말했다. "흥분하거나 운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으니까요."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제 이름을 알려드렸으니 당신의 이름도 알려 주시는 게 예의가 아니겠어요?" 그는 렌의 당돌함이 오히려 맘에 드는 것처럼 보였다. "내 이름은 수 자오(徐候)다. 너 편할 대로 부르렴." "수 선생님, 궁금한 게 있어요." 렌은 조바심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조용히 말했다. "뭐지?" "이 곳은 어디고 저의 주인은 누구지요?" "비밀도 아니고 어차피 너는 죽을 때까지 이 방을 나갈 수도 없을 테니 가르쳐 주지. 여기는 홍콩 주위의 개인 소유 섬이고, 너의 주인은 삼합회의 회장이신 왕노야이시다." 삼합회에 관해서는 렌도 단파 라디오 뉴스에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트리아드라고도 불리는 삼합회는 홍콩의 중국 반환이 얼마 남지 않은 이 때 더욱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홍콩 최대의 갱단으로서 중국 대륙과 동남아, 일본에까지도 손을 뻗고 있는 밤의 지배자였다. 렌은 자신을 산 사람의 지위가 생각보다 훨씬 엄청난 데에 놀랐다. "당신은 삼합회 내에서 무엇이지요?" "그의 개인 비서라고 해도 되고, 이인자라고 해도 될 거다." 렌은 자오의 지위 또한 상상을 뛰어넘자 다시 한 번 놀랐다. "저는 무엇을 해야 되나요?" "사실은 그것을 설명해 주려고 여기 들른 거다. 왕노야께서는 얼마 전부터 건강이 악화되셨다. 예로부터 노인이 너같이 순백지신의 어린 여자아이를 안고 있으면 회춘한다고 하기 때문에, 너의 젊고 힘찬 기운이 그분께 전해져서 그분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라고 너를 데려온 거다. 그러니 너는 매일 밤 노야께서 이리 오시면 옷을 모두 벗은 채 노야의 알몸에 네 몸을 대고 네 기운을 노야께 전해 드려야 한다. 만약 노야께서 건강을 되찾으셔서 네 몸을 원하시면 기쁘게 내어 드려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20세기에 아직도 그런 구닥다리 미신을 믿는 사람이 있다니! 렌은 비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질문을 계속했다. "그 경매장은 삼합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지요? 홍의낭랑이란 여자와 삼합회의 이익은 서로 별개인 것 같던데, 그렇다면 경매장은 홍의낭랑이 운영하되 삼합회의 세력으로 중국 본토나 동남아에서 어린아이를 납치하거나 사오는 데 도움을 받고, 그 대신에 일정한 상납금을 삼합회에 바치는 것이겠군요?" 자오는 감탄했다. "정확히 알아맞췄다. 너는 정말 총명하군. 하지만 조직 안에서 지나치게 영리한 티를 내면 목숨이 위험할 테니, 매사에 알아도 모른 척 해야 한다." '그는 나를 걱정해 주는 것 같아.'하고 렌은 생각했다. 렌은 다시 물었다. "저 이전에도 같은 역할을 한 여자아이가 있었나요?"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수 자오는 의외로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아이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겼나 본데, 울지도 소리지르지도 않을 테니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그저 제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알고 싶은 뿐이니까요." 렌은 간절한 눈빛으로 자오를 바라보았다. 렌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는지 자오는 마침내 대답했다. "노야께서 건강이 악화되신 것은 일 년 전이었다. 그 때 네 또래의 여자아이를 구해서 노야의 침대에 들여보냈는데, 그녀는 반 년 정도 지나고부터 점점 약해지다가 한 달 정도 전에 죽었다." 렌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납득할 수 없었다. 다른 원인 없이 여자아이가 노인과 동침했다는 것만으로 일 년만에 죽는다는 것은 렌의 의학지식에 비추어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자? 셜?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렌은 생각했다. "그런데 네 몸가짐이나 말씨를 보면 아무리 보아도 광동성 오지에서 굴러다니던 촌아이같지는 않은데, 대체 너의 내력은 어떻게 되느냐?" "제 고향은 광동성 오지가 맞고요, 홍의낭랑에게서 들으셨겠지만 저는 출생신고조차 되어 있지 않은 둘째딸이랍니다. 다만 제가 살던 마을에 훌륭한 선생님이 계셔서 다행히 그분으로부터 학문을 배울 수 있었는데, 그 덕분에 제가 다소라도 무식을 면한 것이지요." 첸선생을 생각하니 안타깝고 아련한 미소가 떠오름과 동시에 눈물이 핑 돌았다. 렌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흐음... 그래. 아무튼 힘내거라. 혹시 노야의 총애를 받게 되면 밤의 동침은 다른 아이에게 넘기고 너는 말벗이나 직속하녀같은 훨씬 편한 위치로 옮겨갈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자신을 여기로 데려온 사람이었지만, 자오가 자신을 염려하고 있음을 확실히 눈치챈 렌은 다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고향에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은 자오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렌은 눈을 깜박이며 눈물을 삼키고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자오에게 지어 보였다. "여러가지로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를 염려해 주신 은혜는 언젠가 꼭 갚겠어요." 아직 촉촉히 젖은 눈망울에 꽃봉오리가 갑자기 활짝 피어오르는 듯 렌이 미소짓자 자오는 아찔했다. 자오는 평소 자신의 성품과는 어울리지 않게 렌에게 끌리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먼저 번의 아이도 미모로는 렌에게 뒤지지 않았지만 렌은 뭔가 특별했다. 렌이 이토록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흔들림없이 앞을 직시하는 지혜로운 맑은 눈빛 때문이리라. 렌이 조금만 더 크면 세상을 흔들 미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던 자오는, 렌 또한 저번 아이처럼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침통한 기분이 들었다. 자오가 아무 말도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렌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수 선생님, 오랫동안 굶어 무척 배가 고픈데, 옆에 누가 있으면 잘 먹지를 못하거든요." 자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식기 전에 맛있게 먹어라. 다 먹으면 다른 하녀가 와서 다시 몸단장을 시켜 줄 거다." 자오는 방문을 닫고 나갔다. 렌은 자오가 나가자마자 죽이 놓여 있는 탁자로 가 서둘러 죽을 먹었다. 네닷새만에 먹는 음식이어서 그런지 무척 맛있었다. 다 먹고 나자 렌은 쟁반에 놓여 있는 젓가락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칠보로 장식되어 있는 무척 비싸 보이는 젓가락이었다. "젓가락아, 네가 무기로 쓰일 줄은 너 자신도 몰랐겠구나." 렌은 빙긋이 웃으며 젓가락 한 짝을 집어 침대에 깔려 있는 요 아래에 숨겼다. 방에서 기다리고 있자 얼마 후 젊은 하녀 한 명과 나이든 하녀 두 명이 들어왔다. 젊은 하녀는 쟁반을 내가고 나이든 하녀 두 명은 렌을 일으켜 방에 딸린 욕실로 데려갔다. 욕실은 무척 호화로웠다. 대리석으로 된 욕조는 수영장만했고, 수도꼭지나 수건걸이는 모두 금으로 되어 있는 듯했다. 하녀들은 능숙한 솜씨로 렌의 옷을 벗기고 구석구석 씻겼다. 렌이 스스로 씻겠다고 해도 못 들은 척 하녀들은 묵묵히 손을 놀렸다. 하녀들의 손에 머리감기와 양치질까지 마친 후 렌은 하늘하늘하게 비치는 얇은 가운으로 갈아입혀졌다. 옷고름만 풀면 바로 알몸이 되는 옷이었다. 하녀들은 렌의 몸단장을 마치자 렌을 큰 방으로 다시 데려가 침대에 앉히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었던 렌은 기다림에 지쳐 다시 가부좌를 틀고 정명기를 운용하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인기척이 들리자 렌은 수련을 마치고 일어섰다. 문이 열리고 자오가 키 작고 마른 노인을 부축하여 모시고 들어왔다. 렌은 노인의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그가 왕노야임을 짐작했다. "저 아이가 렌입니다." 자오의 소개에 렌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깊이 절했다. 지금부터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메이 렌입니다. 왕노야를 뵙습니다." 절을 마친 렌은 왕노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왕노야는 처음에는 렌의 어리고 순결한 아름다움에, 그 다음에는 두려움 없이 침착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렌의 태도에 놀랐다. "괜찮은 아이를 구했군. 수고했다, 자오. 물러가 보거라." 자오가 방을 나가자 왕노야는 주름투성이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렌에게 다가왔다. "렌이라고 했느냐? 피곤하니 우리 눕자꾸나." 렌은 혐오감을 참으며 침대로 올라갔다. 왕노야는 자기 먼저 훌훌 옷을 벗고 알몸이 되더니 꼬챙이같은 손을 뻗어 렌의 옷고름을 풀었다. 렌은 온몸의 떨림을 억누르며 그가 옷을 벗기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왕노야는 렌의 아름다운 몸을 보고 감탄하며 렌의 어깨를 쓸었다. "참으로 아름답구나. 2, 3년만 지나면 너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미인이 되겠구나." "과찬이십니다." 렌은 그의 손길 에 몸서리쳐지는 것을 참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너는 내가 무섭지 않느냐?" "무섭지 않습니다. 제가 진심을 다하면 노야께서도 아시겠지요." "허허허. 그래. 근래 들은 말 중에 제일 맘에 드는 말이구나." 왕노야는 약간 지친 듯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렌은 왕노야의 옆 조금 떨어진 곳에 나란히 누워 눈치채이지 않게끔 오른손으로 조심스럽게 침대 아래를 더듬었다. -------------------------------------------------------- 치료사 렌 [1] 광동성에서 홍콩까지 (5) -------------------------------------------------------- "렌아, 이리 가까이 오너라." "예." 마침내 젓가락을 잡은 렌은 왕노야 쪽으로 기대는 척 하다가 번개같이 몸을 일으켜 왼손으로 는 왕노야의 목을 감싸안고 오른손에 든 젓가락으로는 왕노야의 쇄골 한가운데를 겨눴다. 왕노야는 불시의 기습에 놀라 "윽" 하는 외마디 신음소리를 냈다. 자오는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는지 왕노야의 신음을 듣자마자 방문을 박차고 들어왔다가 눈 앞의 풍경에 굳어버렸다. "왕노야, 제가 지금 겨누고 있는 곳은 사혈입니다. 이 아래에는 혈관과 신경이 지나고 있어서 살짝 찌르기만 해도 사람이 죽을 수 있지요. 두분께서 저를 제압하려 하셔도 여차하면 이 젓가락이 왕노야의 사혈을 찌르게 될 거예요. 그런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으시겠죠?" 렌은 떨림을 억누르며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렌은 왕노야의 목을 뒷쪽에서 조르고 있었기 때문에 왕노야가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자오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자오는 엄하게 말했다. "렌, 무례한 짓은 그만 하고 왕노야를 놓아드려라." "저를 자유롭게 풀어주신다고 약속하신다면 놓아 드리지요." "어서 놓으래두!" 자오가 언성을 높였으나 렌은 오히려 왕노야의 목을 조른 왼손에 힘을 주었다. 주름투성이인 왕노야의 목으로부터 맥박이 느껴졌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렌은 왕노야의 목을 감은 손을 조금 움직여 그의 경동맥을 짚고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사혈을 겨눈 오른손의 힘이 조금 빠졌다. 그것을 눈치챈 자오는 비호같이 몸을 날려 렌의 가슴에 일격을 가했다. 렌은 죽 밀려 벽에 부딪히며 주저앉았고, 자오는 다시 렌에게로 다가와 렌의 두 손을 뒤로 돌려 잡았다. 왕노야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가운을 걸치고 자오에게 렌을 데리고 가까이 오도록 손짓했다. "총명한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무모한 아이였구나." 렌은 가슴의 고통에 두어 번 기침을 한 후 고개를 들고 왕노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항도 해 보지 않고 노예가 될 수는 없지요." "기개가 있구나. 사혈이니 하는 건 어디서 배웠느냐?" "스승님으로부터 한의학을 배웠어요." "위협을 하려면 제대로 할 것이지 왜 마지막에 손에 힘을 뺐느냐? 무서웠느냐?" 왕노야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모처럼 재미있는 장난감이 생겼다는 태도였다. 조금 전 왕노야의 경동맥에서 느꼈던 이상한 기운을 생각한 렌은 밑져야 본전이라고 마음을 다잡으며 용기를 냈다. "왕노야, 그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제가 왕노야의 맥을 짚어 봐도 될까요?" "안됩니다!" 자오는 외치며 등 뒤로 돌려진 렌의 두 손을 더 힘주어 잡았다. "제가 또다시 기습을 할 게 걱정되신다면 수 선생님으로 하여금 제 목에 칼을 대고 있게 해도 좋아요. 제가 맥을 짚어보고자 하는 건 의사로서 환자를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렌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호오, 네가 의사이고 내가 환자라고?" "네. 노야께서는 지병이 있으시죠?" "자오에게서 들었느냐?" 왕노야는 날카로운 눈을 번득이며 자오와 렌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렌이 왕노야를 본 이래 처음으로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누구한테서도 듣지 않았어요. 조금 전에 왕노야의 목을 조를 때 경동맥에서 느껴지던 맥박이 너무 이상해서 아무래도 지병이 있으신 게 아닌가 싶어 다시 정확히 맥을 짚었으면 좋겠다는 것뿐이예요." 왕노야는 계속 렌을 노려보다가 피식 웃으며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노야, 안됩니다!" 자오가 외쳤으나 왕노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풀어 줘라." 자오에게서 풀려난 렌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가운을 입고 잠시 서서 정명기를 일으킨 후 왕노야에게로 다가가 그의 왼쪽 손목을 잡았다. 렌은 눈을 감고 맥을 짚은 채 손끝을 통해 정명기를 왕노야의 몸 안으로 흘려넣었다. 손목을 통해 들어오는 청량한 기운에 왕노야는 움찔했지만 손을 빼려고 하지는 않았다. 5분 정도 지난 후 렌은 눈을 떴다. "매일 밤 명치 부근이 뻐근하게 아프시죠?" "그렇다." "아침에는 가슴이 답답하여 밭은 기침이 나지만, 기침을 하고 나서도 계속 답답하고요?" "맞다." "하루가 다르게 다리에 기운이 없어지고 이따금씩 눈앞이 노래질 때도 있죠?" "그렇다." "남자로서의 능력도 사라지 고요?" 왕노야는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렌은 그의 침묵이 긍정임을 알았다. "그런 현상이 일어난 지 이 년 정도 되었지 않나요?" "어, 어떻게 그걸 아느냐?" 왕노야는 정말로 놀랐다. 자신의 부하들은 모두 그런 증상이 생긴 게 일 년 반 정도 전부터라고 알고 있었으나, 실은 증상이 생긴 건 이 년 전부터였고 처음 반 년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숨겨왔던 것이다. "그리고 저 이전에 침실 수발을 들었던 아이가 죽을 때 마치 늙은이처럼 살갗이 노랗고 퍼석하지 않았습니까?" 그 질문에 자오마저도 놀랐다. 이번에는 왕노야 대신 자오가 대답했다. "그랬었다. 우리들은 모두 왕노야께서 그 아이의 젊음을 빨이들이셔서 그 아이는 그 대신에 빨리 늙은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대체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 렌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의 정황만 종합해도 거의 확실하지만,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노야께서 꾸준히 복용하시는 약 중에서 장명환이라는 것이 있지 않나요?" 왕노야는 격동하여 벌떡 일어났다. "그래, 그런 약이 있다. 하지만 그 약은 유명한 보약이고, 그걸 복용한지는 오 년이 넘었는데?" 렌은 한숨을 쉬었다. "노야께서는 독에 중독되신 거예요. 그것도 각각은 독이 아닌 두 가지가 합쳐져서 비로소 독이 되는 교묘한 수법에 당하신 거예요." 렌은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고 왕노야와 자오는 심각하게 렌의 말을 경청했다. 장명환은 엄청난 고가의 보약으로 정력과 활력을 증진시켜 주면서도 부작용이 없기로 유명하여 부자 노인들이 안심하고 장복하는 약이었다. 비슷한 종류인 유명한 홍연환같은 약은 약기운의 배설이 제대로 되지 않아 몸에 쌓이다가 결국은 복용자를 미치거나 죽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었으나, 장명환은 약기운이 몸에 쌓이지 않고 바로바로 배설되어 몸에 부담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장명환을 복용하는 사람이 구엽초라는 약초로 만든 차를 마시거나 향을 맡으면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구엽초는 장명환의 약기운이 배설되지 않도록 하는 작용을 하는데, 배설되지 않은 장명환은 결국 폐와 신장에 쌓여 복용자의 기운을 서서히 뺏아가고, 3년 정도 지나면 결국 사망에 이르게 했다. "그 소녀는 아마도 왕노야의 몸에서 땀구멍을 통해 새어나온 독기에 못이겨 그렇게 죽었을 거예요." 이야기를 마친 렌은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쉬었다. 왕노야는 자오와 눈길을 교환했다. 렌의 말을 믿는다는 것을 서로 확인하자 왕노야는 다시 렌에게 물었다. "구엽초란 무엇이고 어디에서 나느냐?" "구엽초는 한정된 곳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구엽초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적어요. 구엽초는 천산 기슭 눈 속에서 자라나는데, 구엽초라는 이름 때문에 풀 종류로 오해받지만 사실은 키가 작은 나무로, 가지 끝에 잎사귀가 아홉 장 달린다고 해서 그런 이름으로 불리지요. 천산 기슭에서도 구엽초가 자라는 곳은 두세 군데밖에 안 되고, 거기 말고는 자생지가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향기가 좋아 어린 잎을 따서 차로 마시기도 하고, 잎을 말려 베갯속에 넣으면 숙면을 취한다고 해요. 또 줄기가 쪼개지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무르고 향기가 나기 때문에, 좀 굵게 자란 줄기로 목각을 만들어 실내에 장식하기도 하고요." 그 말에 왕노야와 자오는 동시에 외쳤다. "회장실의 호랑이 조각!" 왕노야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왕노야는 다시 물었다. "일단 구엽초를 치우면 괜찮아지느냐?" 렌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쌓인 독기는 어쩌질 못해요. 마치 독주머니를 몸 속에 차고 있는 형국이라, 수명이 일 년 정도 연장될 뿐 죽기는 마찬가지이지요. 다만..." "다만 뭐지?" "그 전에 묻겠습니다. 만약 제가 왕노야의 병을 고쳐 드린다면 제게 무엇을 해 주시겠어요?"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줄 수 있다!" 왕노야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준다는 말씀은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당장 자결하라거나 삼합회를 넘기라고 하면 어쩌시겠어요?" 렌은 날카롭게 대꾸했다. 그러다 렌은 한숨을 쉬며 다시 말했다. "저는 자유를 원해요. 덤으로 지낼 곳과 생활비까지 있으면 좋고요." "그정도쯤이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왕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답할게요. 아마도 세상에서 저만이 왕노야의 독기를 해소할 수 있을 거예요." 왕노야와 자오는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에 크게 안도했다. "저는 치료에만 사용되는 특별한 기를 연성했는데, 오랜 기간 동안 그 기를 왕노야의 몸에 불어넣으면 독기를 해소할 수 있어요. 제 예상으로는 오 일에 한 번씩 삼 년 정도면 독기를 완전히 뺄 수 있을 거예요. 그보다 더 자주도 안 좋고, 더 드문드문 치료하는 것도 안 좋아요." "그 기라는 건 혹시 좀전에 내 손목에 불어넣은 거 아니냐?" "예, 맞아요. 정명기라고 하지요. 제 스승님께서 우연히 발견하신 고서를 읽으시고서 전수해? 笭?거예요." "네가 그 기치료를 하기 전에 너를 내 주치의에게 보여야겠다. 네 말은 믿음이 가지만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 왕노야가 말하자 렌이 다시 눈살을 찌뿌리며 말했다. "그 주치의라는 분은 한의학을 전공한 분이신가요?" "물론이다. 삼대째 한의사를 한 집안 출신인데다가 명의로 이름이 높지." "오래 전부터 노야를 치료해 오셨나요?" "그렇다. 왜 그러느냐?" "장명환과 구엽초의 상승작용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는 하지만 초일류 한의사라면 모를 리가 없는 내용이예요. 특히 노야께 생긴 부작용을 돌아보면 한 번쯤 독이 아닌가 의심해볼 만한 거죠. 얼핏 보기에는 노환과 구별이 잘 되지는 않지만요. 그런데도 그 의사가 이 년 동안이나 아무 눈치도 못 챘다면 뭔가 이상한데요." 왕노야는 렌의 말을 되씹어보았다.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 아무튼 내일 너를 다른 한의사에게 보일 테니 그리 알아라." "네. 그 다른 한의사로부터 제 실력과 정명기의 효능을 인정받으면 되는 거지요?" "그렇다." 렌은 왕노야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제 되었구나 싶어 갑자기 그동안의 극도의 긴장이 풀리며 온몸이 축 늘어졌다. 자오가 급히 렌의 몸을 받아 안았다. 렌은 마지막 남은 기운을 짜내어 말했다. "저 여기 말고 다른 방에서 잘래요." 왕노야의 웃음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자오는 잠든 렌의 몸을 안아들었다. "다른 방에 데려가 재우겠습니다." "그 아이가 맘에 드느냐?" "예, 맘에 듭니다." 의외로 정직한 자오의 대답에 왕노야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하긴 나도 그 아이가 맘에 든다. 잘 보살펴 주려무나." 자오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자오의 팔에 안긴 렌은 참으로 가벼웠다. 홍의낭랑의 말에 따르면 이제 겨우 열 세 살이라는데, 렌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믿을 수 없이 당당하고 총명했다. 자오는 자기도 모르게 렌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렌은 잠결에 기분이 좋았는지 살짝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자오는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오는 결심했다. 렌이 어른이 될 때까지 곱게 지켜주겠다고, 그리고 어른이 되면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고. -------------------------------------------------------- 치료사 렌 [1] 광동성에서 홍콩까지 (6) -------------------------------------------------------- 다음날은 바쁘게 돌아갔다. 이번에 렌이 잠든 방에는 창문이 있어 렌은 얼굴에 떨어지는 햇빛에 눈을 떴다. 렌이 창을 보고 흥분하여 달려가 바깥을 내다보니 눈앞에 파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렌은 자기 몸에 아직도 걸쳐져 있는 야시시한 투명가운을 보고 난감해 했으나 곧 하녀가 새옷을 가지고 들어왔다. 비단으로 된 푸른 색 경장이었다. 렌은 아무래도 왕노야의 취향은 전통의상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몸단장을 해 주고 옷을 입혀 주려는 하녀를 만류하여 스스로 세수를 하고 옷을 차려 입은 렌은 하녀를 따라 식당으로 가 왕노야와 자오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왕노야의 서재로 따라갔다. 서재에는 중국 전통의상을 입은 점잖게 생긴 중년남자가 앉아 있었다. "시험해 보시오, 싱선생." 싱선생이라는 사람은 왕노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렌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그는 렌과 왕노야의 관계를 몰라서인지 조심스럽게 존대말로 물었으나 질문내용은 날카로웠다. 혈도와 약재와 침술 등 모든 방면에 걸친 질문이었다. 렌이 한 시간에 걸쳐 막힘없이 질문에 대답하자 싱선생의 눈이 점점 휘둥그레졌다. "아가씨, 이런 걸 물어서 미안하지만, 지금 몇 살인가요?" "이제 열 세 살입니다." "한의학은 언제부터 배웠지요?" "사 년 전부터요." 싱선생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희한한 일을 많이 봤지만 이 아가씨는 정말로 놀랍군요. 이 아가씨의 한의학 지식은 저에 버금가는 것 같습니다." 싱선생은 다시 감탄하는 눈길로 렌을 쳐다보았다. 은근히 그녀를 제자로 욕심내는 것 같기도 했다. 왕노야는 유쾌하게 웃었다. "이 소녀는 치료에 쓰이는 특별한 기를 익혔다는데, 한 번 시험해 봤으면 좋겠소." 렌은 싱선생에게 다가갔다. 싱선생은 정체불명의 기를 주입당하는 두려움보다는 학자적인 호기심이 더 큰 듯 선뜻 손을 렌에게 내맡겼다. 렌은 정명기를 싱선생에게 주입시켜 서서히 일주천시켰다. 싱선생은 경악과 불신과 감탄이 뒤섞인 얼굴로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겨우 입을 떼었다. "대체 이 기운이 무엇입니까?" "정명기라고 하는데, 제 스승님께서 우연히 발견하신 고서에 수록되어 있던 것입니다." "아아, 이 기운이라면 어지간한 내과성 난치병은 다 치료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기운이 사람 몸 속에 존재할 수 있다니! 아가씨, 내 전 재산을 줄 테니 이 기운의 연성법을 알려주면 안 되겠소이까?" 싱선생은 체통도 잊고 렌의 손을 잡아 흔들며 간절히 물었다. 렌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 기운은 여자, 그것도 처녀만이 익힐 수 있는 거랍니다. 또 스승님의 허락 없이 함부로 전할 수도 없고요." 싱선생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다 렌의 손을 놓고 왕노야에게 말했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이 정명기라는 기운이 참으로 몸에 좋은 기운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수고하셨소." 싱선생이 나간 후 왕노야, 자오, 렌은 서재에 다시 앉았다. 렌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제 시험은 끝났으니 제 조건을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저는 앞으로 삼 년간 닷새에 한 번씩 왕노야를 찾아와 노야를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정명기를 비롯해 제가 가진 의학지식을 모두 동원해서 최선을 다해 치료해 드리겠어요. 만약 노야께서 닷새 이상 걸리는 여행을 하시면 제가 동반해서 치료해 드리고요. 그 나머지 시간은 제가 어떻게 쓰든 제 자유이니 관여하지 마십시오." 왕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야를 정기적으로 치료하기 위해서는 제가 홍콩에 머물러야 할 테니, 홍콩에 집을 구해 주세요. 넓거나 화려할 필요는 없고 그저 제 한 몸 누일 수 있으면 충분해요. 저는 홍콩 사정을 잘 모르니 그 부분은 노야께서 알아서 해 주세요." 왕노야는 다시 수락했다. "하지만 너의 자유는 어느 정도 제약해야겠다. 내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많으니 덩달아 너까지 위험해질 수 있을 게다." "알겠습니다. 그 정도는 납득하겠어요. 그리고 제게 주실 치료비는 더도 덜도 말고 홍콩 주민 1인의 평균소득 정도면 됩니다. 치료비는 치료가 끝날 때까지 매달 한 번씩 받겠어요. 그리고 집은 치료가 끝나면 다시 돌려 드리겠어요." 왕노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웃으며 반문했다. "너무 욕심이 없는 것 아니냐? 삼합회 회장은 엄청난 부자이니, 네가 부르는 대로 거액을 줄 수도 있단다." 렌은 고개를 저었다. "어린 나이에 돈을 너무 많이 가지면 인생의 목표나 판단력을 잃게 되지 쉽지요. 저는 스스로를 그런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돈이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요." "네 아버지가 도박빚에 너를 팔았다고 들었는데, 집에 돈을 보낼 필요는 없느냐?" 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마도 아버지께 돈을 드려도 다시 탕진하실 거예요. 또 제 고향 마을은 가난해도 굶지는 않으니 아버지께서 마음만 잡으시면 어려움은 없으실 거예요. 언니는 이웃마을에 벌써 시집갔으니 큰 문제가 없고요. 남동생이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지만, 그 애에게 돈을 준다 해도 아버지가 가져가실 테니, 차라리 그 애가 어느 정도 큰 후에 제가 직접 도와주는 게 나아요." 렌의 사리 밝고 단호한 말에 왕노야는 감탄하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렌은 끝으로 덧붙였다. "제 스승은 광동성 오지의 제 고향마을에 계신데, 세상에 저를 가장 걱정해주실 분은 그 분이시니, 제 편지를 스승님께 전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렌의 마지막 조건도 왕노야는 흔쾌히 수락했다. "좋다. 본토와의 편지왕래가 쉽지는 않지만, 내 수하들을 보내 편지를 전하도록 하지." "그럼 치료는 오 일 후부터 시작할 테니 그때까지 모든 준비를 마쳐 주세요." "그래, 자오를 시켜 준비하도록 하마." 자오는 렌을 바라보며 모든 것이 잘 풀려 다행이라는 듯이 밝게 웃었다. 렌도 마주 웃으며 마음속에 희망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렌은 베란다에 앉아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숲속에서만 자란 렌은 아무리 바라보아도 바다가 질리지 않았다. 렌의 집은 홍콩섬 언덕 중턱에 있는 고급 아파트였다. 이 아파트에 입주한 지도 어언 3년이 되었다. 경비가 철저하고 거주자의 사생활이 보장되는 것이 자오가 처음 그 집을 선택한 주된 이유였다. 렌은 집이 너무 고급이라며 불만을 표했지만, 닷새에 한 번씩 왕노야를 방문하는 렌의 존재를 그럴듯하게 설명하려면 렌이 왕노야의 정부, 혹은 비밀스런 취미를 만족시키는 애인이라고 하는 게 제일 좋고, 그러려면 최소한 고급 아파트 정도는 선물로 받아야 한다는 자오의 설명에 렌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적응력이란 놀라워서 렌은 이제 이 고급스런 아파트가 완전히 자신의 집이고 광동성 내륙에서 살던 시절은 아득한 과거의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과거와의 유일한 끈은 삼합회 사람들을 통한 첸선생과의 편지 왕래였다. 첸선생은 이 곳에서 부자를 후견인으로 만나 의학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렌의 편지에 안심했고(보안상 렌이 왕노야를 치료한다는 부분은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도 어렵사리 6개월에 한 번 정도는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홍콩은 참으로 이상한 도시였다. 홍콩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거대한 혼돈이었다. 세상의 돈이 홍콩으로 모임과 동시에 가장 비참한 사람들도 홍콩으로 모여들었다. 중국이면서 영국인 곳, 동양이면서 서양인 곳. 이제 중국 반환을 일 년 앞둔 지금, 홍콩은 이상한 불안으로 술렁거렸다. 렌의 아파트 주민들 상당수는 벌써 영국 여권을 받아 놓고 여차하면 뜰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으나, 그럴 능력이 안 되는 중산층과 빈민들은 그저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긴 채 담담히 하루하루를 살았고, 불법이민자들은 중국 통치 하에서는 단속이 더 강화되리라고 예상해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홍콩으로 온 후 삼 년 가까이 된 지금, 렌에게는 홍콩의 영광과 함께 짙어지는 그늘이 똑똑히 보였다. 렌은 빈민가의 사람들을 치료하게 된 계기를 떠올렸다. 렌이 왕노야의 섬을 나온 첫날 자오의 안내를 받아 리무진을 타고 시내를 돌며 보았던 홍콩은 광휘에 쌓여 있었다. 고층건물, 지하철, 끝없이 이어지는 쇼핑가, 궁전같은 식당과 호텔, 에어컨에서 아낌없이 쏟아지는 시원한 공기, 고급스런 옷을 입고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 렌은 문명의 이기로 가득한 거대도시의 정경에 압도당했다. 그리고 렌이 거처인 고급 아파트와 왕노야의 섬 사이만 왕복했던 한동안, 홍콩에 어두운 구석따위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렌은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잊지 않았다. 홍콩의 지하에서는 지금도 노예매매가 자행되고 비참한 사람들이 신음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 중 일부는 삼합회로 인한 것이리라. 렌은 자신이 누구를 치료하는 것인지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홍콩의 가장 어둡고 비참한 모습을 보리라고 결심했다. 그래서 렌은 자오에게 일부러 하루쯤 리무진은 놔두고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여 도시를 구경시켜 달라고 부탁하였다(그때까지 렌은 안전을 이유로 자오의 허락 없이는 혼자 시내를 다니지 못했다). 조직 내에서는 '핏빛의 수'라고 불리는 수 자오였지만, 그는 오직 렌에게만는 이상할 정도로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렌이 거처할 집을 사고 꾸미는 일, 옷가지며 생활용품을 사는 일, 렌을 왕노야에게 데려갔다 데려오는 일 등, 시간이 허락하는 한 렌에 관련된 모든 일을 자신이 도맡아했고, 렌이 부탁하는 일은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처음에는 위험하다며 난색을 표하다가 렌이 계속 조르자 결국 웃으며 승낙하였다. 도보와 대중교통을 이용한 관광의 처음은 유쾌하였다. 렌이 이것저것 물을 때마다 자오는 즐겁게 웃으며 차근차근 대답해 주었고, 배가 고프면 길거리 노점상에서 음식을 사먹기도 하고, 귀여운 가게가 보이면 들어가 머리핀을 사기도 하고, 모든 평범한 관광객이 하듯 피크 트램을 타고 빅토리아스 피크로 올라가 보기도 했다. 자오는 돌아다니면서 마치 놓칠까봐 염려된다는 듯 렌의 손을 꼭 잡았고, 그 손에서 퍼져나오는 온기가 마음에 와닿아 렌도 뿌리치지 않았다. 빅토리아스 피크의 까페에 앉아 함께 배스킨 라빈스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자오는 갑자기 말을 꺼냈다. "왜 나를 자꾸 수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응... 맨 처음 저한테 편한 대로 부르라고 하셨쟎아요. 수 선생님이면 평범한 존칭 아닌가요?" 렌은 무심히 대답했다. 자오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듣기에 거슬리니 앞으로는 자, 자오 오라버니라고 부르렴." "자, 자오 오라버니요?" 렌은 일부러 놀렸다. 자오의 얼굴이 더 새빨개졌다. "후후후, 알겠어요. 자오 오라버니. 그렇게 부를 테니 염려 마세요." 붉게 물든 그의 얼굴을 보면 아무도 그가 "핏빛의 수"인 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며 렌은 웃었다. 즐거운 한때를 보낸 후 자오가 이제 어디로 갈지 묻자 렌은 홍콩에서 가장 비참한 곳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자오는 얼굴을 굳히며 거절했으나, 렌이 계속 부탁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오가 데려간 곳은 구룡반도의 불법이민자 및 빈민거주구역이었다. 지은 지 수십 년 되어 쓰러지기 일보직전인 벌집같은 고층아파트가 한 뼘의 간격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사람이 살고 있는 곳. 아파트의 그늘에는 다시 판자집과 무허가건물이 이어지고, 그곳에는 더 비참한 사람들이 죽지 못해 살고 있었다. 중국대륙에서 넘어온 사람, 동남아에서 흘러들어온 사람, 대부분 홍콩에 가면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믿어 밀입국중개업자에게 거액을 주고 넘어왔다가 결국 노예만도 못한 신세로 전락한 사람들이었다. 짙게 화장을 한 지친 기색의 창녀들도 있었다.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삼합회에서는 밀입국중개와 매춘도 하지요?" 렌의 물음에 자오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긍정의 뜻이었다. 너무 비참한 눈앞의 모습에 렌은 망연자실했다. 소위 절대빈곤이라는 것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렌의 마을은 가난한 오지라고는 해도 누구도 지나치게 일하지 않았고 배를 곯지도 않았다.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하고 나무열매를 따면 먹고도 남을 정도의 식량이 생겼고, 도박이나 마약같은 도시의 악덕에 물들지 않는 한 남에게 손을 벌릴 ? 却莪?없었다. 그런데 여기는, 자본주의의 꽃인 홍콩의 뒷골목은, 착취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 신음하는 가련한 인간들로 가득차 있었다. 렌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 치료사 렌 [1] 광동성에서 홍콩까지 (7) -------------------------------------------------------- 그 때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돌조각을 만지며 놀던 어린아이가 렌을 보고 다가와, 더러운 손으로 렌의 옷자락을 잡으며 위로했다. "언니, 울지 마. 울지 마." 렌은 오히려 더 넘쳐나는 눈물을 닦으며 아이를 쳐다보았다. 눈에 다정함을 하나 가득 담고 있었지만, 온몸에 발진이 나고 기침까지 하는 아이의 몸은 누가 보아도 정상이 아니었다. 렌은 아이의 맥을 짚어 보았다. '고칠 수 있는 병이야!' 렌은 확신이 생겼다. "너 집이 어디니?" "몰라. 여기서 놀고 있으면 엄마가 데리러 와." 아마도 아이 엄마는 일하러 간 것 같았다. 렌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길 한 쪽에 쓰러져가는 술집같은 것이 보였다. "우리 저리로 가자." 렌은 아이를 잡아 끌었다. "뭐 하려고 그래?" 자오가 불만스럽게 물었다. "고쳐 줘야지요." 렌은 단호히 말하며 술집으로 들어갔다. 아직 일러서인지 술집에 손님은 없고, 반백이 된 주인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주인 아저씨, 죄송하지만 여기 탁자 좀 쓸게요." 렌은 거두절미하고 말하며 아이를 탁자에 눕히고 팬티만 남기고 옷을 벗겼다. 주인은 뭐라고 항의하려다 자오의 심상치 않은 눈초리에 쑥 들어갔다. "조금 아프겠지만 참아야 해. 언니가 너 기침나는 거랑 가려운 거랑 다 고쳐줄게." 렌은 부드럽게 달래며 아이의 몸을 먼저 독주로 씻기고 홍콩에 온 후로 장만한 침통을 꺼냈다. 정신을 집중하고 침 하나 하나를 꽂는 렌의 엄숙한 모습에 자오와 술집 주인은 숨을 죽였다. 침을 꽂기 시작한지 어언 한 시간, 렌은 다시 차례로 침을 뽑은 후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았다. 아이는 렌이 자기에게 좋은 일을 해 준다는 것을 알았는지 얌전하게 누워 있다가 다 끝나자 일어나서 말했다. "이제 다 나은 거야?" "아니, 바로 다 낫지는 않고, 사흘 후에 다시 봐야 해. 언니가 또 올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맘 때 이 술집 앞으로 와야 해. 알았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렌은 몸을 일으켜 술집 밖으로 나갔다. 뭐라고 외치는 술집 주인을 뒤로 하고 자오도 따라나왔다. 침술 시전에 힘을 쏟아서인지 몸에 힘이 없어, 결국 자오가 렌을 안아들었다. 빈민가를 걸어나오자 다시 휘황한 홍콩의 밤거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자오가 연락을 했는지 곧 리무진이 도착했다. 조심스레 리무진으로 옮겨진 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이 답답했는지 자오가 물었다. "왜 자책하지?" "저 비참한 상황을 만드는 데 일조한 삼합회를 제가 돕고 있으니까요." "그 아이를 치료해서 어쩌려고 그래?"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모든 사람을 치료할 순 없지 않아?" 안타까운 목소리였다. "제가 남을 고쳐 목숨과 자유와 돈을 얻기로 한 이상 저는 의사예요. 의사가 되어 환자가 눈앞에 있는데 외면할 수는 없어요. 그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수밖에요." 말을 마치고 렌은 다시 눈물을 흘렸다. 자오는 흐느끼는 렌을 품에 안아 다독여 주었다. "자오 오라버니, 언젠가 비참하고 괴로운 사람 없이 모두 행복하게 사는 세상이 올까요?" 자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힘들 때마다 오라버니를 의지해도 되나요?" 렌은 다시 울면서 물었다. 이번에는 자오가 대답했다. "물론이야.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나를 의지하렴. 내가 너를 지켜 주겠어." 자오는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에 젖은 렌의 뺨을 쓸었다. 사흘 후 저녁때 렌은 다시 자오와 함께 그 빈민가의 술집 앞으로 갔다. 그런데 술집 앞에서 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 아이만이 아니었다. 아이는 발진이 많이 없어져 훨씬 건강해 보이는 모습으로 렌에게 달려왔고, 그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십여 명의 아파 보이는 사람들은 간절한 눈길로 렌을 쳐다보았다. "언니, 나 이제 기침도 안 나!" 활짝 웃는 아이를 안아주고 맥을 짚어본 렌은 치료가 주효했음을 확인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이 아이의 보호자가 여기 계시나요?" 화장을 짙게 하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앞으로 나왔다. "제가 그 아이의 엄마예요." 여자는 20살 정도 되어 보였지만 나이에 비해 무척이나 지치고 세상을 다 산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렌이 어린데도 불구하고 존대말을 쓰는 걸로 보아 경우가 있는 사람인 듯했다. "앞으로 이 아이한테 달걀이나 우유는 주지 마시고, 바닷바람을 2, 3일에 한 번, 그게 힘들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쐬어 주도록 하세요.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여기, 여기 부분을 손으로 꾹꾹 짚어 주시고요." ? 뼈?아이의 몸 중 기침에 관련되는 혈도를 가르쳐 주었다. 여자는 듣고 있다가 주저하며 말했다. "저, 치료비는... 얼마나 드려야 하죠?" 렌은 맨 처음 의학을 배울 때 첸선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의 당부는, 환자가 정말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닌 한 절대 공짜로 치료하지 말고, 하다 못해 쌀 한 줌, 동전 한 개라도 받으라는 것이었다. 왜 그래야 하느냐고 의아해하는 렌에게 그는 설명했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을 사람들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부자에게는 부자에 걸맞는, 가난한 자에게는 가난한 자에게 걸맞는 치료비를 받으라고. 렌은 여자를 쳐다보았다. "저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공짜 치료는 하지 않아요. 저한테 무얼 주실 수 있으신가요?" 여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포주에게 상납을 마친 끝이라... 가진 건 이 몸뚱아리에 걸친 것밖에 없어요." 렌은 빙긋 웃었다. "그럼 지금 매고 계신 벨트를 주세요. 아주 예뻐 보이네요." 여자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건 아주 싸구려 벨트인데요?" "괜찮아요, 이리 주세요." 여자는 벨트를 끌러 렌에게 주면서도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곧 렌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렌은 진료받을 순서를 정해 주고 환자들을 치료한 후, 앞으로 이틀에 한 번씩은 이곳에 올 거라고 말했다. 렌은 모든 시간을 다 이들의 치료에 쏟아붓고 싶었으나, 자신의 의학지식에는 한계가 있고,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가는 서양의학을 추가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이상 많은 시간을 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감격해했다. 특히 불법이민자들은 돈이 있어도 공공 의료기관에 가 치료받을 수 없던 처지여서 더욱 기뻐했다. 그 후 문제의 술집은 어느새 진료소로 변했고, 렌은 이제 그 지역 사람들로부터 명의로 떠받들여졌다. 그리하여 홍콩에서의 렌의 일과가 정해졌다. 렌은 닷새에 한 번씩 왕노야를 치료하러 갔고 그 날을 빼고는 매일 아침부터 오후 서너 시까지 도서관에서 살았다. 거기에서 렌은 의학서적을 비롯하여 온갖 종류의 책을 읽었다. 렌은 한의학뿐만 아니라 양의학도 열심히 공부했다. 한의학이 내과에 강하다면 양의학은 외과에 강해, 두 가지를 모두 알아야만 진정한 의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의사자격을 얻으려면 나중에 정식으로 의대를 졸업해야 하겠지만, 당장 치료할 환자들이 있기에 양의학 공부를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왕노야의 주선으로 서양의학지식을 전수하여 주는 의사를 만나 양의학의 기초적인 내용은 그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 또 렌은 이틀마다 한 번씩 저녁때에 구룡반도 뒷골목의 불법이민자 거주지로 가서 사람들을 치료했다. 환자가 많았기 때문에 모두를 치료할 수는 없어, 결국 렌은 어린 아이 위주, 더 가난한 사람, 범죄와 관련 없는 사람 위주로 치료했다. 다만 그 일과에는 때때로 변화가 있었는데, 그건 대개 자오 때문이었다. 자오는 틈이 날 때마다 렌을 데리고 명품이 즐비한 백화점으로 가서 렌이 듣도보도 못한 옷이며 가방이며 구두를 잔뜩 사 주었고, 공연장이나 전시회장에도 데려가 좋은 음악을 듣게 하고 좋은 그림을 보게 하였다. 렌은 숙녀는 남자에게서 값비싼 선물을 받으면 안된다는 말로 부드럽게 거절하려 하였으나, 렌의 사소한 거절에도 몹시 상처받는 듯한 그의 모습에 차마 안 된다고 할 수 없었다. 사실 왕노야로부터, 또 자오로부터 받아서는 안 될 호의를 받는 것 같은 죄책감은 늘 렌을 따라다녔다. 홍콩의 어둠을 지배하는 삼합회는 중국반환을 앞둔 혼란기에 더욱 세력을 키웠다. 렌의 치료로 하루하루 눈에 띠게 건강을 회복한 왕노야는 더욱 정력적으로 군소갱단의 병합에 나섰고, 반환 이후를 생각해 중국, 대만, 일본 진출에도 적극적이었다. 자오 또한 왕노야의 심복으로서 피비린내나는 도시전쟁의 선두에 섰다. 일부러 안 보고 안 들으려 해도 렌이 그 모든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또 왕노야의 중독에 관련된 자들을 숙청하는 피바람이 한바탕 불었다는 것을 렌은 뒤늦게 전해 들었다. 그들의 죽음도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렌은 불법이민자와 빈민들을 치료함으로써 자신이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고 피에 젖은 돈으로 호의호식한다는 죄책감을 지우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머리속이 복잡해질 때마다 렌은 '나는 아직 어린아이야. 나는 그저 살아남으려고 할 뿐이야. 이 거친 도시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곤 왕노야와 자오 오라버니뿐인 걸.' 하고 스스로를 달랠 따름이었다. 렌의 16세 생일인 오늘도 자오와 저녁약속이 있었다. 둘이 함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홍콩 방문 라트라비아타 공연을 보기로 한 것이다. 렌은 오늘을 위해 자오가 선물해 준 J. 로즈로코 뉴욕의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그동안 더 길 게 자라 거의 엉덩이까지 닿는 검은 머리를 다시 한 번 빗질하고, 머리 양쪽에 미키모토의 진주핀을 꼽았다. 화장을 싫어하는 렌은 마지막으로 립스틱만 엷게 발랐다. 그 때 초인종이 울렸다. 문이 열리자 자오가 들어왔다. 흠잡을 데 없는 턱시도 차림이었다. 그는 현관에 멈춰서서 지난 삼 년간 훌쩍 커서 어느새 여인으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렌의 자태를 감탄과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것처럼 렌은 눈부시게 아름다워졌고, 그동안 많은 것을 듣고 보고 공부해서인지 본래 맑았던 눈빛은 더 깊고 지혜로워졌다. 그가 정신없이 렌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렌은 웃으며 자오의 손을 잡아 끌었다. "자오 오라버니, 이러다 늦겠어요! 우리 어서 가요!" -------------------------------------------------------- 치료사 렌 [1] 광동성에서 홍콩까지 (8) -------------------------------------------------------- 공연장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자오를 알아봤다. 그가 겉으로는 홍콩 유력 기업의 부회장 직함을 달고 있으나 실제로는 삼합회의 이인자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 그러나 더욱 사람들의 시선을 끈 것은 렌의 존재였다. 렌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직 어려서 자세히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까지 눈에 띠지 않았었지만 이제는 하루가 다르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렌은 공연장 안에 바글거리는 얼굴뿐인 미녀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저 여자들이 모조 보석이라면 나의 렌은 진짜 다이아몬드라고 자오는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홍콩의 명사들이 둘의 주위에 몰려들어 렌을 소개해 달라고 졸랐고, 자오는 왕노야와 렌과의 사이에 미리 정해둔 대로 렌을 적당한 명문가의 영애로 소개했다. 엄청난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 주눅들지 않고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 렌의 모습에 자오는 흐뭇해했다. 그녀와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나눠 본 사람이라면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그녀를 어느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자오는 렌의 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다짐했다. 황홀한 공연이 끝나고 자오는 렌을 페닌슐라 호텔로 데려갔다. 공연 후의 늦은 저녁을 먹고 디저트까지 모두 나오자, 자오는 주머니에서 하얀 리본으로 묶인 작은 하늘색 보석함을 꺼냈다. "렌, 너에게 할 말이 있어." 렌은 포도주의 기운과 즐거움에 취해 계속 부드러운 웃음을 짓고 있다가 보석함을 보자 심각해졌다. 자오는 보석함의 뚜껑을 열었다. 티파니의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나와 결혼해 줘." 렌은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러다 렌은 겨우 대답했다. "자오 오라버니, 저는 이제 겨우 열 여섯이에요. 영국법에 의하더라도 어른이 되려면 아직 2년이나 남았다고요. 결혼이라뇨." 렌의 말에 자오는 인내심을 잃고 말았다. "넌 그동안 내 마음을 몰랐나? 내가 어떠한 기분으로 너의 성장을 지켜보았는지 전혀 눈치 못 챘어? 그동안 참을 만큼 참아 왔는데 앞으로 더 어떻게 기다리라는 거지? 내가 너무 나이가 많아서 싫은 거야? 그러면 왜 내게 그동안 그토록 다정하게 대해 줬지? 왜 나로 하여금 네가 날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착각하게 한 거지?" 자오의 애타는 질문에 렌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다가 대답했다. "제가 오라버니를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는 오라버니도 잘 아실 거예요. 하지만 저는 아직 사랑이 뭔지 알기에는 너무 어려요. 누군가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하기에는 너무 경험도 없고 철부지예요. 그리고 저는 오라버니가 삼합회에 몸담고 있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려요. 오라버니가 지금처럼 혈해 속에서 사시는 건 스스로를 상처입힐 뿐이예요. 우리 둘이 결혼한다 해도, 왕노야께서 위험한 명령을 내리시면 오라버니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 거고, 결국 손에 남의 피를 묻히거나 자신의 피를 흘리게 될 거예요. 저도 이제 삼합회나 다른 갱단의 사정을 대강 알아요. 삼합회는 강하고 그 일인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인자인 오라버니까지 안전한 것은 아녜요. 아마도 노야께서 더 연로해지실수록 이인자인 오라버니에 대한 도전은 점점 심해질 걸요. 오라버니의 지위가 확고부동해질 때까지 얼마만큼의 피를 흘려야 할지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하단 말예요. 그동안 저는 하루도 편히 잘 수 없을 거고요. 또 다른 사람들이, 비록 갱단이라 해도, 오라버니의 손에 쓰러지는 것도 너무나 싫어요. 삼합회의 온갖 더러운 범죄에 오라버니가 계속 개입하는 것도 싫고요." 렌은 울먹이며 말했고 자오는 렌의 말을 조용히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물었다. "렌, 너는 나를 사랑해? 아니, 지금 당장은 모르겠더라도 나중에라도 나를 사랑하게 될 것 같아?" 렌은 정면으로 질문을 받자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자오와 함께 보낸 수많은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와 함께 있으면 기쁘고 든든 하고 안심이 되었다. 지난 3년간 자오는 자신에게 아버지, 오빠, 친구, 그리고 그밖의 모든 것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이 홍콩에서 어떻게 살았을지. 렌은 그가 해 준 것들과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애타는 눈길을 생각했다. 렌은 마침내 쥐꼬리만하게 대답했다. "예, 사랑하게 될 것 같아요." 그제서야 자오는 안심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거면 됐어. 다른 아무것도 필요없어. 내가 성급했던 것은 미안하지만, 이 반지는 약혼반지로 받아 줘. 네가 말한 삼합회의 문제들은 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 결혼은 그 문제들이 다 해결된 후에 네가 스스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면 하자." 자오는 렌의 대답도 듣기 전에 렌의 손을 잡아 넷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미리 치수를 재었던 듯 반지는 손가락에 꼭 맞았다. "이제 약혼의 키스를 해야겠지?" 렌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는 첫키스니까 부드럽게 해 주세요." 렌은 얼굴에 홍조를 띠며 눈을 감았다. 자오의 숨결이 얼굴에 닿고, 그가 팔을 렌의 등뒤로 두르고 꼭 끌어안는 것이 느껴졌다. 뜨겁고 부드러운 입술이 렌의 입술에 닿았다. 자오는 렌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꼭 누른 후 망설이듯 잠시 뗐으나 곧 굶주린 듯 다시 렌의 아랫입술을 머금고 혀로 렌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핥았다. 다시 윗입술, 그리고 다시 아랫입술, 그리고 렌의 혀와 자오의 혀끝이 서로 닿았다. 렌이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전율이 온몸을 스쳤다. 자오의 키스는 열정적이면서도 능란했으며 영원같은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렌은 온몸의 힘이 빠지는 것 같았으나 자오가 으스러지게 그녀를 껴안고 있는 덕분에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너는 이제 내 거야.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겠어." 자오는 렌의 귓가에 속삭였다. 조직 내에서 공식적으로는 렌은 왕노야의 애인 비슷한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두 달여간 남아있는 왕노야의 치료를 마치기까지 약혼사실은 비밀에 붙이기로 했지만, 약혼 이후 자오는 단 둘이 있을 때마다 틈만 나면 렌의 입술을 탐하고 렌의 몸을 애무했다. 렌은 미약하게 저항했으나 모든 비밀스런 방법을 다 알고 있는 듯한 그의 능숙함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자오는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게 다루며 렌을 사로잡았고, 자신의 애무에 정신을 잃는 렌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물론 그는 언제나 애무에서 멈췄다.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는 순결을 빼앗지 말아 달라고 렌이 부탁했고 그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렌이 자신의 손길 아래에서 무력해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충분했다. 한편으로 약혼 이후 그의 선물 공세는 더 심해졌다. 렌으로부터 아예 백화점을 통째로 들고 오는 게 어떻겠냐고 놀림받을 정도였다. 그는 렌의 몸과 마음을 전부 사로잡아 렌이 자신 말고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려는 듯 행동했고, 렌은 그런 그에게 자신을 송두리째 맡겨 버렸다. 그가 독재자처럼 굴기는 해도, 누군가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가족 없이 그동안 혼자서 살아온 렌에게 형언할 수 없는 안도감과 편안함을 주었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의지하기만 하면 안 되는데 하고 때때로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자오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렌은 보통때라면 당연히 느꼈을 삼합회 내의 이상한 기류를 느끼지 못했다. 왕노야의 치료가 끝난 날, 왕노야와 렌과 자오는 함께 모여 축배를 들었다. "렌, 이제 뭘 하고 싶나? 자오 말고 더 괜찮은 총각을 구해보는 건 어때?" 왕노야의 농담에 자오가 불만어린 눈초리로 왕노야를 쏘아보자 렌은 즐겁게 웃었다. "사실은 대학에도 진학하고 싶고 고향에도 가 보고 싶지만, 자오 오라버니가 권해서 한달간 유럽여행부터 하기로 했어요." 왕노야는 그 말에 좋은 생각이라는 듯 끄덕이며 웃었으나, 그의 눈은 웃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자오를 바라보고 있던 렌은 왕노야의 눈초리를 보지 못했다. "흐음... 젊을 때의 유럽여행이라, 참 좋은 일이지. 언제 출국하나?" "3일 후에요." "물론 자오가 예약이며 일정이며 다 챙겨 줬겠지?" "그럼요. 얼마나 꼼꼼하게 하는데요. 오히려 갑갑할 지경이예요." 왕노야는 연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둘을 배웅하는 왕노야의 눈은 차갑게 번득였다. -------------------------------------------------------- 치료사 렌 [1] 광동성에서 홍콩까지 (9) -------------------------------------------------------- 3일 후 렌의 출국날, 일이 있어 공항에 나가지 못한다는 자오의 급작스런 전갈에 렌은 의아했으나 요즘 자오가 몹시 바빠 그런가보다 스스로 납득하며 자오가 보내준 리무진을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경호원 겸 운전기사는 렌이 공항에 도착하여 첵랍콕 공항의 캐세이 퍼시픽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마치고 보안검사대 쪽으로 갈 때까지 계속 렌 옆에 있다가 렌이 검사대 안쪽을 통과하는 것을 보자 돌아갔다. 그런데 렌이 보안검사를 마치고 출입국심사를 받으러 가려는 순간, 검사대 저쪽에서 낯익은 사람이 급히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삼합회에서 가끔 본 적 있던 왕노야의 심복 중 한 명인 밍씨였다. "렌 아가씨, 잠깐만 나와 보세요!" 렌은 보안요원에게 도로 건너가도 되냐고 물었다. "되긴 하는데 보안검사는 다시 받으셔야 합니다." 렌은 웃으며 그러마고 대답하고 다시 반대쪽으로 건너갔다. "렌 아가씨, 잠깐 이리 오시죠." 밍씨는 렌을 잡아 끌었다. "이 사진 한 번 보시겠어요?" "무슨 사진이예요?" 렌은 궁금해하며 그가 건네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받아 들여다 보았다. 사진을 보는 순간 렌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사진 속에는 한 노인이 창고같은 곳에 손이 뒤로 묶인 채 의자에 앉혀져 있었는데, 그 노인은 바로 첸선생이었던 것이다! "왕노야의 분부입니다. 따라오시죠. 소란을 피우시면 이분의 생명이 위태로워집니다." 밍씨는 낮게 말했고, 렌은 밍씨가 끄는 대로 끌려가 차에 탔다. "사부님께선 무사하신가요?" 렌이 다급하게 물었다. "렌 아가씨가 왕노야의 분부에 따르는 이상 무사하실 겁니다." 밍씨가 대답했다. "대체 무슨 일인 거예요?" "수 대형-삼합회 조직원들은 자오를 그렇게 불렀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렌은 그 말에 멍해졌다. 렌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어지러워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었다. 침착해야 해. 그래, 침착해야 해. 렌은 자신이 그동안 흘려버렸던 이런저런 일들을 되새겼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자신이 약혼하던 날 이인자로서 자오의 지위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지적했을 때 자오의 반응이 어땠던가. 마치 조만간 일인자가 될 수 있다는 듯 묘하게 자신감을 보였었지 않은가. 요즘 들어 자오가 갑자기 바빠진 것도 수상했다. 그리고 한시라도 자신을 떼어놓기 싫어하는 그가 먼저 나서서 렌의 유럽여행을 주선한 것도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여행 얘기를 들은 왕노야의 태도도 뭔가 어색하지 않았었나? 돌이켜 보니, 그 때 그는 입은 웃어도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렌은 모든 정보를 종합해 보았다. 자오는 오래 전부터, 적어도 약혼 전부터 반란을 준비해 왔을 것이다. 그리고 왕노야는 자오가 반란을 일으키리라는 건 몰았어도 렌의 여행 얘기를 듣고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챘을 것이다. 자오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 렌은 자오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고 있으니, 혹시나 해서 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인 첸선생을 인질로 잡았을 것이다. 렌의 추측은 정확했다. 그 무렵 자오와 그를 따르는 조직원들은 반항하는 왕노야의 심복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회장실까지 쳐들어갔다. 이제 왕노야의 세력은 회장실에 있는 다섯 명이 전부였다. 자오와 왕노야는 서로 노려보았다. 왕노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놀랍군. 네가 나를 배반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노야는 그동안 너무 오래 군림하셨소." "중독 사건도 네 짓이었나?" "그렇소. 만약 들키지 않았다면 노야께선 편안히 병사하실 수 있었을 거요." 왕노야는 힘없이 웃었다. "네가 젊다고 얕본 것이 실수였다. 최근에는 렌에게 정신을 빼앗긴 것 같아 더 한층 방심했었지." "이제 무기를 내려놓으시오." 그 말에 왕노야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렌 말이야, 참으로 아름답지 않나?" 자오는 얼굴이 굳어졌다. "렌은 유럽행 비행기에 타지 못했지. 대신에 홍콩 부두의 창고에 감금당한 자신의 스승을 구하고 그 대신 인질이 되려고 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혹시나 해서 보험에 드는 심정으로 안배한 것인데, 지금 그게 내 유일한 카드가 되었군." 왕노야는 다시 웃었다. "렌이 목숨보다 소중하지 않나?" 자오는 부르르 떨다가 평정을 되찾았다. "어쨌든 지금 렌이 왕노야의 수중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소?" "렌은 내 심복 밍의 차에 타고 있으니 지금 내 수중에 있는 셈이지. 창고에 도착하면 정식으로 인질이 되는 것이고. 곧 연락이 올 거다. 그때까지 우리 차라도 마실까?" 렌이 밍의 차에 타고 있다는 말에 자오는 긴장을 풀었다. 자오는 부하 중 한 명에게 뭔가를 물었고, 대답을 듣고 난 후 왕노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왕노야, 안됐지만 밍은 죽었소. 이제 렌은 우리 수중에 있소." 차 안에서 필사적으로 생각을 가다듬던 렌은 귀를 찢는 총성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밍의 미간에는 한 방 총알이 박혀 있었고 뇌수에서 터진 피가 렌의 온몸에 뿌려졌다.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앞좌석의 운전기사의 손에는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렌 아가씨, 지저분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저는 진작부터 수 대형의 편이었습니다. 이제 안심하십시오. 대형께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렌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손으로 훔치며 말했다. "원래대로 창고로 가요! 사부님을 제 눈으로 확인해야겠어요!" 운전기사는 ? 餞蔥?표정을 지었다. 그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운전기사는 짧게 몇 차례 대답한 후 전화를 끊고 다시 렌을 보았다. "좋습니다. 그럼 창고로 가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가 주세요!" 렌은 입술을 깨물며 초조하게 말했다. 왕노야는 평정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다시 말했다. "그렇다 해도 첸선생은 내 수중에 있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렌은 제발로 걸어들어갈 것이다. 만약 자네가 렌을 막아서 첸선생이 죽는다면 렌은 평생 자네를 원망할 걸." "그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오." 자오는 오만하게 대답했다. 그는 부하가 넘겨준 휴대전화를 받아 상대방이 말하는 내용을 들은 후 말했다. "수고했다. 첸선생을 포함해 모두 쓸어버려라." 전화를 끊은 자오는 왕노야를 보고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내 각본은 이렇소. 왕노야의 죽음을 전해들은 노야의 잔당들은 절망하여 인질을 죽이고 자신들도 자결하지. 뒤늦게 도착하여 스승의 죽음을 확인한 렌은 슬퍼하겠지만, 내가 따뜻하게 위로해 주면 슬픔을 잊을 것이고, 렌은 당신을 원망할지언정 나를 원망하지는 않을 거요." "너는 렌을 사랑하지 않느냐? 렌의 소중한 사람을 죽이는 데 가책도 없느냐?" "당신 입에서 가책이니 사랑이니 하는 말이 나오다니 정말 가증스럽군. 렌에게 나 이외에 소중한 사람은 필요없소. 왕노야, 잘 가시오." 기관단총이 불을 뿜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8번 부두의 창고에 도착한 렌은 비를 맞으며 고개를 숙인 채 창고 옆에 서 있는 자오의 부하들을 보자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어떻게 된 거죠?" "왕노야의 사망소식을 들은 잔당들이 인질을 죽이고 자기들도 서로 총질하여 자결한 것 같습니다. 저희들이 왔을 때에는 이미 손쓸 도리가 없었습니다." 렌과 안면이 있었던 사람이 침통하게 대답했다. 렌은 비틀거리며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 안은 피바다였다. 네 명이 바닥에 쓰러져 있고, 한 명은 벽에 기댄 채 죽어 있고, 의자에 묶여 있는 사람은 고개를 꺾은 채 미동이 없었다. 렌은 의자로 다가가 죽은 사람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 치켜올렸다. 첸선생이었다. "사부님!" 피구덩이 속에서 렌은 무릎을 끓고 한없이 오열했다. 얼마나 울었을까, 조직원들이 들어와 렌을 일으켰다. 렌은 힘없이 일어났다. 그들에게 이끌려 나가기 전 렌은 다시 한 번 뿌연 눈으로 창고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렌은 흠칫했다. 렌은 조직원들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한 번 시체들과 창고 내의 총알자국을 둘러보았다. 침착해야 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렌은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한참 동안 창고 안에서 그렇게 있던 렌은 터덜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창고 밖에는 자오가 도착해 있었다. 자오는 피투성이린 렌의 몸을 꼭 끌어안고 간절하게 속삭였다. "미안해. 너의 스승을 지키지 못했어. 그들이 인질을 죽이고 자결하리라고는 예상 못했어. 모두 내 잘못이야. 평생 보상해줄게." 렌은 멍하니 그의 품에 안겨 있다가 갑자기 그를 밀쳤다. "자오 오라버니, 제가 얼마나 총명한지 잊으셨나요?" "무슨 얘기야?" "저는 의학을 공부했고, 그동안 스스로 의사라고 자처해 왔어요. 제가 모를 줄 알았어요?" 렌은 다시 창고로 걸어들어갔다. 자오는 묵묵히 따라왔다. "저기, 그리고 저기, 그리고 시체들의 자세, 조금이라도 법의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 시체들이 서로 총질하여 자결했다고는 추호도 생각 않을 거예요." 렌은 다시 벽의 총흔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 총흔들, 아무리 봐도 저 총흔들은 문 쪽으로부터 날아온 거예요." 렌은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오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가 시키신 거죠? 인질을 포함해 사살하라고 명령하신 거죠? 제가 오라버니에게 넋이 나가 있다고 해서 그런 것도 모를 줄 알았나요?" 자오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버둥거리는 렌을 품에 끌어안고 창고 밖으로 끌어냈다. "미안하다. 달리 방법이 없었어. 너를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어." 렌은 그 말에 다시 흥분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고요? 당장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방법만도 수십 가지인데?" 렌은 자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오의 눈을 바라보며 렌은 마침내 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신은, 당신은 그렇게 사랑하는 방법밖에 몰랐군요. 나를 새장 속에 가둬놓고 당신만 바라보게 하고 싶었군요. 내 사랑을 어느 누구와도 나눠갖지 않으려고 했군요." 렌은 울부짖었다. 자오는 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계속 사과를 거듭했다.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야. 제발 용서해 줘. 내가 이번 거사를 감행한 것도 모두 너를 위해서였어. 삼합회를 내가 모두 장악한 후 모든 불법적인 일에서 손을 떼게 하고 조직 전체를 합법화하려고 했어. 그러고 나서 네게 청혼하려고 했어." 렌은 혼이 나간 듯 그의 손길에 한동안 자신을 맡기고 있다가 갑자기 자오의 권총집? 【?재빠르게 권총을 빼내며 자오를 밀쳤다. 자오가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잡으려는 동안 렌은 떨리는 두 손으로 자오를 향해 총을 겨눴다. 조직원들이 놀라 일제히 렌을 겨냥했으나 렌은 주위를 보지 않고 자오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처절하게 말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저를 제대로 사랑한 게 아녜요. 소유욕과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한 것뿐이죠. 제가 조금만 현명했더라면 알았을 텐데.. 오라버니의 사랑을 무턱대고 받아들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오라버니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오라버니의 것인 양 굴지 않았다면 오라버니도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스승님께서도 돌아가시지 않았을 텐데..." 피로 뒤덮인 렌의 얼굴에 붉은 눈물이 줄줄 흘렀다. 렌은 총을 잡은 채로 왼손 약지의 약혼 반지를 빼어 던졌다. 부들부들 떨며 렌은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자오는 계속 얼어붙은 듯 꼼짝도 못한 채 슬픈 눈으로 렌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보니 렌은 차마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자오의 등 뒤에 서 있던 조직원의 총이 불을 뿜었다. 렌의 배와 가슴 중간에서 피가 튀었다. 발사의 반동으로 렌의 몸은 부둣가 아래 바닷물 속으로 떨어졌다. 이상해. 마치 정지화면을 보는 것 같아. 왜 이리 천천히 떨어지지? 자오 오라버니는 왜 저리 천천히 다가오는 거지? 자오 오라버니가 손을 뻗네. 안 닿을 텐데. 아, 바닷물이다. 짭짤하군. 폐에 물이 차오르는구나. 배에서 피가 퐁퐁 솟네. 아아, 피 색이 저렇게 예쁘다니. 그것이 렌이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 한 생각이었다. -------------------------------------------------------- 치료사 렌 [2] 막간 -------------------------------------------------------- 어디에서 새어나오는지 모를 은은한 빛이 대기를 가득 채우고, 청량한 물소리가 광대한 돔을 울렸다. 돔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검은 대리석 연못의 가장자리에는 얼굴을 찡그린 흑발, 흑안의 젊은 남자가 연못 속으로 현묘한 검은 기운을 끝없이 쏟아붓고 있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자수가 수놓아진 검은 비단옷은 그에게 무척 잘 어울렸고 조각같은 그의 얼굴은 극한의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 조각같은 얼굴에는 지금 극도의 집중으로 인해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그는 이곳의 주인인 수룡, 물의 드래곤인 데이그랜이었다. 그의 뒤에는 타는 듯한 적발 미청년의 모습을 한 화룡 가이레스와 암록색의 길게 끌리는 드레스를 입은 눈부신 녹발의 미녀로 현신한 청룡 안티니아, 시린 백색의 의상에 은발을 드리운 백룡 네린이 숨을 죽인 채 데이그랜을 쳐다보고 있었다. 얼마 후 연못의 물이 부글부글 끓으며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자리의 모든 용들은 입안이 바작바작 타는 긴장감을 억지로 달래며 그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그런데 뭐가 나타나기는커녕 연못 물은 거짓말처럼 도로 잔잔해졌다. 침묵을 깬 것은 가이레스였다. "이봐, 데이, 여자는 어디 있는 거야?" 데이그랜은 멍하니 연못을 쳐다보았다. "여자는 어디 있느냐구!" 가이레스가 데이그랜의 양쪽 팔을 잡아 마구 흔들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이 세계까지 그녀를 끌어 왔는데... 이 연못에 나타나지는 않았어도 우리 세계 어딘가의 물가로 떨어졌을 거야." 가이레스는 데이그랜의 말에 화가 치밀었는지 손에 더욱 힘을 주어 한층 세게 그를 흔들어댔다. "야, 이제 어쩔 거야! 어쩔 거냐구!" 데이그랜은 죄스런 표정으로 가이레스를 쳐다보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찾아낼게." "네가 드래곤이라고 무슨 전지전능도 아니고, 이 넓은 세상에서 무슨 수로 그녀를 찾아? 그렇게 장담하고서는 이게 무슨 꼴이야?" 가이레스는 소리치다 말고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안티니아는 차분한 목소리로 가이레스에게 말했다. "가이레스, 슬퍼하지 말아요. 모든 존재는 필멸합니다. 드래곤에게도 그 때가 온 것뿐이예요." 네린은 안티니아의 말에 침중하게 반박했다. "필멸의 존재라 해도 그 필멸의 순간을 뒤로 늦출 권리는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봐야 합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이어온 드래곤의 영화를 어찌 우리 대에서 끊기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데이그랜은 그들의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일단 그녀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저뿐이니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찾겠습니다." 안티니아는 한숨을 쉬며 데이그랜에게 말했다. "그대가 얼마나 애썼는지, 이 일을 위해 얼마나 많은 힘을 쏟아부었는지 잘 압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으로 느껴지는군요." 그 말에 가이레스는 버럭 화를 냈다. "안티니아, 한 마디만 더 하면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남의 일처럼 얘기할 수 있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안티니아는 슬픈 얼굴로 가이? 뭣봇“?사과했다. 그들을 뒤덮은 깊은 절망의 분위기에 데이그랜은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우리의 시간은 빠르지만 인간의 시간은 느립니다. 서두른다면 늦지 않게 그녀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 실망하기에는 이릅니다." 그 말에 그 자리의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실내는 밝았지만 밤보다도 짙은 어두움이 그들 모두에게 드리웠다. -------------------------------------------------------- 치료사 렌 [3] 흑성 (1) -------------------------------------------------------- 파이브룬 제국 동북쪽 끝에는 "땅끝마을"이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곳은 제국의 최북단도 최동단도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곳을 "땅끝마을"이라 불렀다. 그곳 사람들은 북해의 거친 바다와 혹한을 견디며 물개잡이로 그럭저럭 부족함 없이 살아 왔다. 땅끝마을은 한 가지 점만 빼면 여러 모로 평범한 북해의 어촌마을이었다. 땅끝마을을 다른 마을과 구분하는 것은 마을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튁 튀어나온 절벽 위에 자리잡은 "흑성"이었다. 사실 그것은 성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작았고 외관도 거무튀튀하니 보잘 것이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절벽 위의 건물을 흑성이라 불렀다. 조금이라도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흑성이 외부의 적을 막기보다 내부의 사람을 나가지 못하게 할 용도로 지어졌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창마다 박혀 있는 철창, 사방에서 훤히 보이는 성문, 흑성이 서 있는 절벽과 마을을 잇는 좁은 회랑 양쪽에 자리잡고 있는 초소, 그리고 마을 어귀에 배치된 200여명의 군대, 그 모든 것이 흑성을 거꾸로 된 의미에서의 난공불락으로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군대가 호송하는 검은 마차가 때때로 흑성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오랜 세월 동안 지켜봐 왔다. 흑성에 갇히는 사람은 어떨 때에는 왕족, 어떨 때에는 귀족, 어떨 때에는 고위 관료였다. 그들은 흑성에서 늙어 죽기도 하고 처형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복권되어서 다시 권력을 잡기도 했다. 지금 흑성의 거주자인 둘째 황자 테룬 또한 거기서 늙어죽든지 도로 황자 지위를 찾든지 처형당하든지 할 것이고 그러고 나면 또다른 사람이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보내질 것이다. 이제 흑성의 존재는 마을 사람들에게 일상에 지나지 않았다. 귀양 올 사람은 차고 넘쳤고, 누가 오든 마을 사람들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흑성은 마을 사람들이 길고 지루한 겨울에 안주거리로 삼을 만한 적당한 화제를 제공할 따름이었다. 누가 무슨 죄목으로 귀양당했는가는 공식적으로는 비밀이었으나, 본래 그런 류의 일에 비밀은 없는 법이었다. 사람이 바뀔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한동안 누가 왜 귀양 왔나, 그 사람은 죄가 있나 없나, 그의 최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등을 놓고 신나게 토론을 벌이고 때때로 내기까지 하곤 했다. 테룬 황자가 귀양올 때에도 사람들은 독주를 앞에 놓고 밤을 지새워가며 서로의 주장을 떠들어댔다. 그러다 대강 결론이 난 바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테룬 황자는 제1황후 암살 및 반란음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여기에 왔지만 제2황후가 음모를 주도했을지언정 테룬 황자는 절대 암살이나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었다. 제2황후가 나라를 뒤흔드는 요화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어떻게 제2황후에게서 테룬 황자처럼 강직한 자식이 태어났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러니 제2황후가 주도하여 제1황후를 암살하였음이 틀림없고, 또 반란음모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테룬 황자가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억울해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미의 죄를 자식이 갚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누구 때문에 제2황후가 그런 짓을 했겠는가? 끝으로, 테룬 황자가 흑성에서 풀려날 가망은 죄를 자백하고 처형당하는 것 말고는 없다는 것이었다. 테룬황자는 본래 제국 최고의 검사였고 심지어 소드마스터라는 소문도 있었으나 반란죄로 심문받으면서 손의 힘줄 가닥가닥을 끊기고 발뒤꿈치의 아킬레스건도 잘려 검을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달리지도 못하게 되어 버렸다. 또 그의 세력이 얼마나 컸든지간에 이곳에 귀양당한 지난 1년간 그들은 모두 흩어졌을 터였다. 몸은 망가지고 세력도 없는 테룬 황자가 수백 명의 경비병을 뚫고 도망간다 해도 어디로 가겠으며, 황태자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테룬 황자가 저절로 혐의를 벗게 될 리도 없지 않은가. 마을 사람들의 결론은, 결국 테룬 황자는 건강이 좋지 않은 현 황제가 죽자마자 사형당하리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서너 달 안에 말이다. 테룬 황자는 흑성에서 그나마 가장 호화롭게 꾸며진 자신의 방 창문 앞에 서서 성 바로 아래 깎아지른 절벽에 사납게 부딪쳐왔다가 포말을 일으키며 산산이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 ?후로 그의 마음에 유일한 위안이 된 것은 끝없이 황망한 북해의 바다였다.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갑자기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흑성 아래의 절벽 틈새, 두세 길도 안 되는 모래톱에 있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얼핏 봐서는 사람 같았다. "샤이트! 샤이트! 밖에 나가 봐야겠다!" 시종이라기보다는 군인으로 보이는 샤이트는 곧 방으로 들어와 황자를 부축했다. 샤이트를 보는 황자의 눈에 경멸이 스쳐갔다. 충실히 시종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샤이트가 황태자의 심복이라는 걸 황자는 잘 알고 있었고, 샤이트 또한 그 사실을 황자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너도 딱하군. 여기까지 와서 나같은 놈의 감시나 하고 있으니.' 황자는 생각했다. "샤이트, 절벽 아래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병사 한 명쯤 더 데리고 가야 할 것 같다." "예, 황자님." 샤이트는 벽 쪽에 붙어서 있는 병사 한 명을 손짓해 불렀다. 세 명은 함께 성문을 빙 돌아 절벽 아래쪽으로 닿는 바위틈의 소로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몸이 망가진 지 일 년이 다 되었건만 언힐링 마법이 걸린 몸은 좋아질 줄을 몰랐다. 황자는 내려가는 동안 몇 번이나 비틀거렸고, 그때마다 샤이트는 힘주어 부축해야 했다. 마침내 다 내려왔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모래톱 위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소녀, 허리 아래까지 닿는 검은 머리가 온몸을 어지러이 휘감고 있고 물에 흠뻑 젖어 창백한 나신이 조각상같이 빛나는 신비롭고 이국적이고도 숨막히게 아름다운 소녀였다. 장작의 불씨가 튀는 소리에 렌은 눈을 떴다. 아주 긴 꿈을 꾸다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벽난로의 이글거리는 불꽃을 가리고 있는 남자의 등은 렌에게 아주 익숙했다. "자오 오라버니!" 렌은 반가운 마음에 나직하게 그를 불렀다. 피범벅 속에서 죽어 있던 첸사부님, 자신을 바라보던 자오의 슬픈 눈동자, 뱃가죽을 뚫던 총알의 뜨겁고도 생생한 감촉은 역시 모두 꿈이었나 보다. 그는 휙 몸을 돌려 렌을 쳐다보았다. "나를 뭐라고 불렀지?" 렌은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하고 엄청나게 잘생긴 그는 자오와 몹시 닮았으면서도 다르게 보였다. 그래, 그는 자오보다 더 병약하고 더 상처받은 것처럼 보여. 그의 몸은 자오보다 더 야위었어. 그러다가 렌은 둘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발견했다. 남자는 백인이었다! 그렇다면 그건 꿈이 아니란 말인가? 나는 정말로 배에 총을 맞고 물 속으로 가라앉았었나? "너는 누구지? 왜 절벽 아래 쓰러져 있었던 거지?" 남자는 이글거리는 눈초리로 물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죠? 여기는 대체 어디예요?" 렌이 오히려 반문했다. 그러다 렌은 새로운 깨달음에 다시 몸을 떨었다. 그가 하는 말은, 그리고 렌이 좀전에 무심코 했던 말은, 렌이 한 번도 배워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던 말이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렌은 울부짖다가 다시 정신을 잃었다. 사흘 밤낮을 혼수상태에서 고열에 시달리던 렌은 몽롱한 가운데 꿈을 꾸었다. 묘하게 생생한 꿈이었다. 꿈에서 렌은 다시 고향마을의 첸선생 관사에 있었다. 어스름이 깔리는 저녁때, 첸선생과 렌은 툇마루에 앉아 어두워지는 보랏빛 하늘가를 바라보았다. 첸선생은 갑자기 물었다. "렌아, 가슴이 아프냐?" "네. 너무 아파요." "내 죽음이 네 탓이라고 생각하느냐?" "네." 갑자기 눈물이 넘쳐 흘렀다. "렌아, 살아있는 모든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살아갈 이유가 있는 거란다." 첸선생은 조용히 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하지만, 저때문에 사부님께서..." 렌은 다시 흐느꼈다. "네 잘못이 아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너도 더 크면 알게 되겠지만, 사람이 사람을 만나 인연을 쌓는 것은 참으로 무섭고도 소중한 것이란다. 한 번 맺은 인연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아내와 딸이 죽던 그 해 겨울 내 인생이 끝나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네 덕분에 다시 살아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으니, 너를 만난 후의 삶은 네게서 선물로 받은 거나 다름없단다. 나는 그저 너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저는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왜 죽지 않은 거죠?" "너는 기연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얻은 것이다. 아마도 네가 다시 살게 된 이 세계는 너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듯하구나. 그러니 너는 이곳에서 한 점의 후회도 남지 않게끔 열심히 살면 된다. 그것으로 나는 족하다." "사부님, 사부님께서는 정말로 돌아가신 건가요?" "그래. 하지만 이 세상에서 나고 죽기를 되풀이하다 보면 언젠가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잊지 말아라, 렌아. 우리는 죽더라도 죽는 것이 아니고, 윤회를 거듭하면서 영혼을 갈고 닦아 더 나은 존재가 된다는 것을. 세상에 의? ?없는 고통은 없고, 행복이나 불행에 취하지 말고 그 이면을 봐야 한다는 것을." "사부님!" 렌이 첸선생을 부둥켜안으며 울자 첸선생은 렌을 다독거렸다. "착한 아이야, 이제 떠날 때가 되었구나." "가지 마세요!" 렌은 절박하게 외쳤으나, 첸선생을 포함하여 주위가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주위는 안개에 휩싸인 듯 불투명해졌다. 렌은 갈 곳을 몰라 두리번거렸다. 그 때 두꺼운 안개 저편 어딘가에서 희미한 말소리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나... 데이그랜... 여기로... 황금의... " "뭐라고요? 안 들려요!" "늦지 않게..." 그것을 마지막으로 주위의 안개는 점점 걸쭉해져서 렌을 휘감았다. 숨이 막히는 느낌에 렌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렌이 다시 깨어났을 때는 방에 난 작은 창으로 늦가을의 아침 햇살이 렌의 침상까지 쏟아져들고 있었다. 렌은 몸을 일으켜 창으로 다가갔다. 거칠던 북해는 기적처럼 잔잔해져서 하늘과 물이 함께 붉게 물든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일찍이 렌이 보지 못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사부님께선 나를 용서해주신 건가. 나는 살아도 되는 건가. 그 때 렌 또래의 시녀가 렌의 머리에 얹을 젖은 수건을 들고 들어왔다. "어머, 아가씨, 일어나신 거예요?" 그녀는 렌이 깨어났음을 보고 호들갑스럽게 기뻐하며 렌에게로 다가왔다. "이제 괜찮으세요?' "네, 고마워요." "그럼 먹을 걸 갖다 드릴 테니 다시 누워 계세요." 렌은 샤나(하녀의 이름이었다)가 가져다준 죽을 다 먹고 나서 궁금한 것들을 그녀에게 물었다. 샤나는 무척 말하기를 좋아하는지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먼저, 렌은 완전한 알몸으로 절벽 아래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황자 전하께서 발견하시는 게 조금만 늦었다면 아가씨는 얼어 죽었을 거예요. 이맘때 바닷바람은 정말 얼음장 같거든요." 샤나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가 발견될 때 여기에 상처는 없던가요?" 렌은 가슴과 배 사이를 가리켰다. "상처요? 아뇨. 전혀요! 아가씨의 나신은 그야말로 완벽하던데요." 나신이라는 말에 렌이 얼굴을 붉히자 샤나는 기다렸다는 듯 덧붙였다. "안 볼래도 어쩔 수 없었다고요. 아가씨 몸 닦고 옷 입히는 건 전부 제가 했는 걸요." 렌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명기라는 것은 남을 치료할 때에나 효과가 있었지 정명기로 자신의 몸을 고치는 것은 제자리뛰기나 마찬가지로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물론 평소 건강을 좋게 해 준다든지 잡병의 침범을 막는다든지 하는 효능은 있었지만 말이다. 그 런데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였던 배의 총알구멍이 어떻게 저절로 나았는지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렌은 다시 물었다. "여기는 어디고, 이 세상은 어떤 곳인가요? 저는 아주아주 먼 곳에서 왔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몰라요." "여기가 어디냐면...." 샤나는 신이 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샤나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대체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렌이 깨어난 세계는 20세기 지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새로운 세계였다. 이 세계는 서대륙, 동대륙과 남대륙으로 되어 있고, 서대륙에는 테라미즈넨 제국, 동대륙에는 파이브룬 제국이 자리잡고 있으며, 남대륙은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과 엘프와 드워프의 영토이고, 서대륙, 남대륙, 동대륙이 만나는 '드래곤의 회랑'은 특정 국가의 영토가 아니라 자유지대였다. 물론 서대륙과 동대륙에도 엘프와 드워프들이 상당수 살고 있고 동서대륙의 북쪽에 있는 얼음의 대지에도 드래곤이 한 마리 살고 있었지만, 인간이 늘어나면서 서대륙과 동대륙에서 유사종족의 세력은 옛날보다 많이 약해졌다. 이따금씩 드래곤이 사람으로 변신하여 인간계를 유람하는 일도 있고, 드워프와 어느 정도 교역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 테라미즈넨 제국은 현재의 황제인 카에닌 테라미즈넨이 347년 전에 건국하여 아직까지 통치하고 있었다. 테라미즈넨 제국의 황제는 일찍이 없었던 천재적인 마법사로서 채 나이가 들기도 전에 9써클에 도달하여 영원히 젊은 모습을 유지하게 되었고, 그 놀라운 마법력으로 자신의 출생지인 테람 공국부터 시작하여 주위의 공국들을 모두 병탄하다가 동대륙과 서대륙의 경계에 이르자 마치 시들해진 듯 정복전쟁을 멈췄다. 그 후 서제국의 영토는 300여년간 그대로였다. 한편 동대륙은 서제국의 확장전쟁으로부터 소외된 채로 소국들간의 항쟁이 끊이지 않았으나, 120여 년 전 영웅 파이브룬 대공이 뜻을 세우고 세력을 키워 동대륙의 5분의 1을 병합하였고, 그 아들인 하라스 대제가 동대륙의 3분의 2 가까이 병합한 후 스스로 황제의 칭호를 쓰기 시작했으며, 지금의 하라스 4세 전전대의 치세에 이르러서는 동대륙의 대부분이 제국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 치료사 렌 [3] 흑성 (2) --------------------------- ----------------------------- 여기까지 말하고 샤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사실은 하라스 4세 폐하께서는 여기 귀양와 계신 테룬 황자 전하께 제위를 물려주실 생각도 있으셨대요. 황태자 전하와 황자 전하는 배다른 형제신데, 폐하께선 황자 전하의 어머니를 훨씬 더 총애하셨거든요." 그녀의 말에 따르면 테룬 황자의 어머니는 검은 눈에 검은 머리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고혹적인 미인으로, 그 미색으로 황제를 사로잡아 평범한 상인의 딸이면서도 제2황후 자리를 획득하였다고 한다. 강성한 공국의 공녀 출신인 제1황후는 시집오자마자 바로 아들을 낳고 황태자로 책봉시켜 이미 탄탄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총애받는 제2황후 때문에 위치가 흔들리게 되었다. 제1황후와 제2황후 간의 알력이 극에 달할 무렵인 1년 전, 제2황후는 제1황후와 황태자를 모두 독살하려고 했는데, 일이 꼬여 제1황후만이 죽고 황태자는 무사하였고, 모든 음모가 밝혀지자 결국 제2황후는 사형당하였으나, 그 아들인 테룬 황자는 모진 고문을 받고도 죄를 자백하지 않아 여기까지 귀양온 것이다. "그래도요, 황제 폐하께서는 아직도 테룬 황자님을 사랑하시는 것 같아요. 그러지 않고서야 반란죄에 사형도 아닌 귀양이 가당키나 한가요? 이것도 역시 소문으로 들은 건데요, 황태자 전하를 비롯한 신하들이 사형을 청하자 폐하께선, 내 눈앞에서 테룬이 죄를 자백하는 걸 듣기 전에는 사형을 명할 수 없다고 하셨대요." 샤나는 렌의 또래였으나 구김살 한 점 없는 모습이 렌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그녀의 모습에 렌은 빙긋 웃었다. "샤나, 그런 얘기 나한테 다 해 줘도 괜찮은 거예요?" "뭐 어때요, 마을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걸요." 샤나는 빙긋 웃었다. "그나저나 황자 전하께서 아가씨가 깨어나시면 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렌은 그가 부르리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 처음 깨어났을 때 렌을 바라보던 그의 눈초리는 정말 심상치 않았었다. 그 때 그는 무척 아파 보였는데, 그것이 고문의 후유증 때문이었다니. "뭔가 입을 것이 있나요? 제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잠옷 같은데." 샤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는 궁벽한 시골이라 아가씨같이 눈부신 미인에게 어울릴 만한 옷은 없고요, 저희 하녀들이 입는 옷뿐이네요." 렌은 웃었다. "눈부신 미인이라니 황송한데요. 샤나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무척 예쁘고 샤나에게 잘 어울리는데, 그런 옷으로 한 벌 빌릴 수 있을까요?" 샤나는 렌의 칭찬에 기분좋은 듯 웃었다. "그럼 제가 금방 한 벌 가져다 드릴게요." 렌은 샤나가 옷을 가져올 때까지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나는 정말로 실재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사람은 죽기 직전에 아주 긴 환상을 보기도 한다는데, 나는 지금 홍콩의 바다에서 물 속으로 깊이깊이 가라앉아 죽음을 기다리며 헛된 환상을 보고 있는 건가. 제국과 엘프와 드래곤이라니, 환상치고는 정말로 제대로 된 환상이었다. 렌은 한숨을 토했다. 어차피 꿈 속의 꿈이 꿈이라면 꿈 밖의 꿈도 역시 꿈, 꿈이 미망이라면 삶도 미망. 눈을 뜨고 미망을 살아가는 것이나 꿈 속에서 미망을 살아가는 것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이 세계가 진실이고 저 세계가 꿈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고, 모두가 다 꿈일 수도 있다. 그래도 이것이 꿈이라면 이전의 삶도 마찬가지. 꿈에서 깨어나기 전까지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모를 수밖에 없는 어리석은 피조물로서는 그저 다시 지금이 진짜 삶인 것처럼 열심히 살아갈 수밖에 없다. 렌은 꿈이든 아니든간에 이렇게 서서 햇살을 받으며 맑은 대기를 호흡하며 자신의 존재, 세포 하나하나를 절감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살아있다는 벅찬 축복에 감격했다. 렌은 샤나가 가져온 옷을 거울을 보며 꼼꼼히 갖춰 입었다. 흰 블라우스와 발목 조금 위까지 오는 회색 치마에 회색 겉옷을 걸치고, 그 위에 검은 색 허리띠를 둘러 허리를 잘록하게 보이게 하는 옷이었다(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이 옷은 '소즈릴'이라고 불렸다). 머리를 가지런히 빗고 몸단장을 마친 렌은 샤나의 안내를 받아 황자의 방으로 갔다. 방문 옆에는 잘생겼으나 날카로운 눈빛에 갈색머리를 짧게 깎은 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감시하는 듯한 눈초리로 렌을 샅샅이 흝어보았다. 렌은 불쾌감을 참으며 방문을 두드렸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들라." 처음 렌이 눈을 떴을 때 보았던 그 방에는, 자오를 닮은 그 남자가 마치 의자에 고정된 듯 축 늘어져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앉아 있었다. "저는 렌이라고 합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렌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는 황자를 쳐다보았다. 다시 보아도 그는 정말로 자오와 닮았다. 오만함과 냉혹함, 묘한 슬픔이 함께 느껴지는 표정까지도 자오와 흡사했다. 다만 그는 백인이어서 피부가 더 하? 欲?눈매가 더 진하고 코가 더 오똑했다. 전체적으로 황자는 굉장한 미남이었던 자오보다도 더 미남이었다. 렌이 들어오자 황자는 처음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의 이글거리는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 치료사 렌 [3] 흑성 (3) -------------------------------------------------------- 황자는 취기를 떨치려 애쓰며 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허리 아래까지 닿는 삼단같은 검은 머리, 촉촉한 검은 눈동자, 평범한 하녀의 옷으로 감싸고 있지만 이미 보아 알고 있는 눈부신 몸, 다시 보아도 역시 그녀, 펠리시티와 닮았다. 그녀와 다른 점은 요염함과 관능 대신 슬픔과 지혜를 담은 눈빛뿐이었다. 하지만 저 눈빛 뒤에 무엇을 숨기고 있을지 모르지. 그녀도 처음엔 순진한 눈매로 사람을 홀렸었다. 여자란 요물이니까. 그는 악몽을 다시 꾸는 기분이었다. "너는 정말로 그녀와 닮았군." "그녀라뇨?" "죽은 내 어머니." "전하께서도 누군가와 닮았어요." "누구?" "제 첫사랑." 저 아름다운 얼굴로 벌써 사랑해보지 않았을 리 없었다. 아마도 많은 남자를 홀렸겠지. 독기를 드러내지 않는 꽃이니 더했을 걸. 황자는 비웃음을 흘렸다. "재미있군. 너는 어떻게 이 외진 곳까지 흘러들게 된 거지?" 렌은 무어라 대답할지 잠시 난감했다. 20세기 지구 얘기 따위는 헛소리로밖에 안 들릴 터였다. "저는 여기에서 아주 먼 곳, 무덥고 습하고 늘 여름이 계속되는 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잘못하여 물에 빠졌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여기였어요. 아마도 이해하기 어려운 마법 같은 게 작용한 듯 해요." "첫사랑의 남자한테 배신이라도 당한 건가?" 황자가 의외로 진실과 비슷하게 집어내자 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비슷한 거였어요." "옷은 왜 홀딱 벗고 있었나? 너를 배신한 남자가 네 옷을 몽땅 벗겨서 물속에 던졌나?" "물에 빠질 때에는 입고 있었는데, 발견 당시 알몸이었다는 건 저도 샤나에게서 듣고 비로소 알았어요."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구해주신 은혜를 갚고 나면 떠나야지요." "은혜를? 네가 어떻게?" "손과 발의 상처를 제가 치료해드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너는 치유마법사인가? 소용없다. 내 손과 발에는 8써클 마법사의 언힐링 마법이 걸려 있어서 세상 누가 와도 고칠 수 없다." 황자는 그 순간을 떠올리고 부르르 떨었다. 분노에 떨며 예리한 미스릴 칼로 가닥가닥 그의 손의 힘줄을 잘라내고 발 근육을 절단한 것은 바로 형님인 황태자였다. 복수심과 광기에 가득한 황태자는 그 때 정상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황태자에 대한 원망은 들지 않았다. 나쁜 건 내 어머니였어. 그녀는 마녀였어. 주위 사람들을 모두 미치게 만드는 마녀. "치유마법이란 것도 있나요? 저는 치료사입니다." 렌은 의사라고 말하려 했는데, 그 대신에 나온 말은 '치료사(베리스)'였다. 아마도 이곳의 어휘에는 의사라는 말이 없는 듯했다. 베리스라는 말을 듣자 황자는 다시 비웃음을 지었다. 치료사를 자처하며 남자들의 몸을 주무르고 유혹했었겠군. "치료사라고?" 렌은 그의 말투 속에 깃든 혐오감을 금새 알아차렸다. "예. 여기서 말하는 치료사랑은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일을 하는 사람 말이예요. 여기에는 치료사가 없나요?" "마력이 없어서 손으로만 치료하는 자들이라면 여기도 있지. 제정신이라면 아무도 그들에게서 치료를 받지는 않겠지만." 렌은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이곳에서는 마법사가 아닌 치료사는 중세의 이발사-외과의사나 안마사, 돌팔이 약장수와 비슷한 취급을 받는 듯했다. 하기는 마법사가 황제가 되기도 하는 세상이었다. "그러면 마법으로 고칠 수 있는 병은 도대체 어떤 건가요?" 렌은 조금 자존심이 상해서 자기도 모르게 약간 따지는 투로 물었다. "온갖 외상은 다 마법으로 고칠 수 있고, 통증이나 열도 마법으로 없앨 수 있다." 황자의 말을 들어 보면, 마법은 주로 외과적인 치료와 대증요법의 효능만이 있는 듯했다. "그렇군요. 제가 사는 곳에서는 아무도 마법을 모른답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람의 몸을 더 자세히 연구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약이나 침, 수술을 이용하여 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이 발달하게 된 거죠. 제가 배운 것도 그런 거고요." 황자는 제법 진지하게 말하는 렌을 놀려주고 싶어졌다. "호오, 그래? 그런 걸 하기에는 네 미모가 아깝지 않느냐? 차라리 내가 사형당하기 전까지 네 몸으로 이승에서의 마지막 열락을 주는 게 어떻겠느냐?" 렌은 어두움으로 가득찬 황자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황자 전하께서는 이미 죽을 운명을 선택하셨군요. 하지만 생명이 있는 존재는 모두 살아갈 자격이 있습니다." 황자는 모든 것을 아는 듯한 그녀의 말에 갑자기 참을 수 없이 기분이 나빠졌다. "물러가라!" ? 꼭渼?외쳤고 렌은 조용히 방을 나왔다. 렌은 그 날 오후 자신이 있는 곳의 사정을 알아보면서 보냈다. 이곳의 대강의 형편은 샤나가 말해준 것과 거의 일치했다. 흑성에는 황자와 감시군 지휘관격인 샤이트 외에도 병사들이 10여 명 주둔하고 있었고, 기거하는 하녀가 3명, 출퇴근하는 하녀가 5명이었다. 황자의 거처치고는 참으로 초라한 숫자였다. 다만 장서는 참으로 훌륭했는데, 그것은 이곳에 귀양온 왕족이나 귀족들이 긴 겨울밤을 보낼 소일거리라고는 독서밖에는 없었고, 사형당하거나 다시 귀향하게 된 귀양객들이 책을 그대로 놔두고 간 덕분이었다.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걸로 보아 책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 그랬다. 경비병의 양해를 얻어 렌은 바깥 산책도 조금 해 보았다. 깎아지른 절벽가에 서서 머나먼 대양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보는 바다 풍경은 황량하면서도 아름다웠으나 렌이 알던 아열대의 홍콩 바다와는 몹시도 달랐다. 렌은 갑자기 와락 그리움이 밀려드는 걸 느꼈다. 무사히 유럽 여행을 갔더라면 보았을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바다는 이곳과 같았겠지. 그리고 이 세계에도 홍콩처럼 습하고 무덥고 진한 바다가 어디엔가 있겠지. 그런 곳에 가게 되면 위안을 얻을까, 아니면 오히려 더 그리움이 들까. 렌은 아무도 보지 않고 듣지 않는 이곳에서 마음놓고 눈물을 흘렸다. 배신감, 죄책감, 원망, 그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렌은 그저 두고 온 세계와 그곳에 살던 사람을 그리워하며 한없이 울었다. 그도 나를 그리워하며 울고 있겠지. 렌은 이 낯선 곳에 와서야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았다. 실제로는 어린 아이이면서 어른처럼 굴고 누군가와 사랑하고 약혼하고 결혼하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도 엄숙한 일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오의 사랑과 보호에 안주하여 그의 고통, 슬픔, 과거를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었다. 자신의 마음과 상대의 마음을 모두 모른 채 자신을 위해 뭐든지 해주는 그에게 그저 그가 바라는 것에 응해줌으로써 보답하겠다는 마음이 있었음을 렌은 비로소 발견했다. 렌은 자오를 정말로 사랑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이성간의 사랑이 아니라 부모나 보호자에 대한 사랑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말하고 결과를 직면했어야 했다. 렌은 다시 눈물을 흘렸다. 나는 정말로 사부님께나 자오에게나 잘못했어. 앞으로 나는 한 치 속임도 숨김도 없이 내 마음에 정직할 거야.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는 모두 내가 감수하겠어. 렌은 폐부를 찌르는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눈물을 닦았다. 밤에 잠자리에 누워 렌은 자신이 이 세계에서 정신을 차린 첫날부터 어느새 이 세계에서 살아갈 결심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놀랐다. 물 속에 가라앉기 직전에 느꼈던 몸과 마음의 고통은 아직 생생했지만, 이 세계의 비현실성이 오히려 괴로움을 덜어주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잠들기 직전 렌은 황자를 사로잡고 있는 깊은 어두움에 관해 생각했다. 그는 몸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큰 것 같았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그날 밤 테룬은 밤새 여러 병의 술을 비웠으나 끝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렌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머니 펠리시티 황후와 흡사한 모습을 하고 나타난 그녀는 누군가가 펼친 함정일까? 아니면 그녀 말대로 마법 같은 것이 작용한 우연일까? 그녀는 정말로 내 손발을 고칠 수 있을까? 의혹과 함께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나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는 이미 이곳에서 조용히 죽기로 결심했었는데 그녀가 그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렌을 만난 이후로 그는 어리석게도 그녀를 갖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다. 다시 살아나고 싶어졌다. 그녀는 혹시 다르지 않을까 하는 바보같은 희망이 싹텄다. 기껏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마음이 들었었는데. 그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다음날 오후 황자는 다시 렌을 불렀다. "어떻게 나를 치료하겠다는 거지?" 렌은 숙취로 흐린 황자의 눈을 다시 지긋이 바라보았다. "제가 배운 치료술로요." "내가 너를 어떻게 믿지? 누군가가 보낸 자객일지도 모르는데?" "훗, 이미 죽음을 택한 분께서 자객이 두려우신가요?" 렌은 일부러 비웃었다. "그래, 두려울 건 없지." 황자는 자조했다. "네 말이 맞다. 나는 죽기로 결심하고 모든 것을 체념했었다. 하지만 네가 내게 살아갈 이유를 알려준다면 네 치료를 받겠다." 렌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살아갈 이유는 스스로 찾는 거예요. 하지만 정히 이유를 찾고 싶으시면 제가 보여드릴 수는 있어요." "어떻게?" 황자는 흐릿한 눈에 호기심을 띄웠다. 렌은 황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다 갑자기 책상에서 문진을 집어들고 황자에게 힘껏 던졌다. 황자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숙이며 문진을 피했다. 무거운 문진은 쿵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쳤다가 다시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에 패인 자국이 났다. "무슨 짓이냐?" 황자는 버럭 화를 냈다. "왜 피하셨죠?" 렌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침착하게 물었다. "저걸 그대로 맞았다면 머리가 터졌을 거다." 황자는 노하여 대답했다. 렌은 다시 물었다. "왜 피하셨죠?" 황자는 같은 답을 되풀이하려다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래, 왜 피한 거지? 그대로 저것에 맞아 죽었으면 되었을 텐데. "제가 대신 대답하죠. 황자 전하께서는 살아 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피하신 겁니다. 살기 위해서요. 살아가는 데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하나요?" 황자는 멍하니 바닥에 떨어진 문진을 바라보았다. 그런 건가. 렌은 황자를 보며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 다음날 황자는 다시 렌을 불렀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인 사람이라도 살아갈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나?" "예를 들자면요?" "그 사람이 살아있음으로 해서 다른 수많은 사람이 죽는다든지, 엄청난 죄를 지어 죄값을 치러야 하는 경우라든지 말이다." "그건 그 사람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겠죠.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법으로 그를 처벌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사람의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절대 비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치료사로서 저는 살인자든 반역자든 어떤 사람이라도 치료가 필요한 경우라면 반드시 치료할 것입니다. 그 치료로 그 사람이 단 하루를 더 살게 된다 하더라도요." 렌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나가 보라." 신념에 찬 렌의 눈빛을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운 듯 황자는 외면하며 손을 저었다. 그 다음날 저녁 무렵 렌이 촛불에 의지하여 도서실에서 독서에 열중하고 있을 때 황자는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며 렌에게 다가왔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는 도서실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황자는 도서실 앞까지 그를 부축해 온 샤이트를 물러가게 하고 숨을 고른 후 렌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책을 읽고 있지?" "지리서, 역사서, 그리고 마법에 관한 책이요. 제가 살던 곳에는 마법이라는 게 없었기 때문에 몹시 신기하네요. 아, 그리고 의학서도요. 대부분 치유마법에 관한 거지만 가끔 약초학같은 것도 있네요." 렌은 독서의 즐거움에 상기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맨 처음 발견되었을 때의 창백한 모습, 그리고 자신에게 대답할 때의 단호한 모습만을 보았던 황자는 뺨을 발그레 물들이고 살짝 미소를 짓는 렌의 모습에 심장을 뒤흔드는 충격을 받았다. 황자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너라면 내 의문에 해답을 줄 수도 있겠지. 내 얘기를 듣고 난 후 질문에 대답해 줘." 황자는 힘겹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어머니 펠리시티 황후는 요녀였다. 그녀를 아는 모든 남자들은 그녀에게 매혹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매력을 잘 알고 마구 휘둘렀지." 펠리시티 황후는 달콤한 악마같은 존재였다. 그녀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머리도 좋은데다가, 이 세상의 어떤 남자라도 정신을 잃게 하는 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원해서 갖지 못하는 것은 없었다. 어린 시절 황자는 늘 애정에 굶주렸었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뭔가를 주지 않는 존재는 무시했는데 어린 황자는 그녀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만 다정한 어머니 노릇을 했고 그는 그런 겉치레 애정이라도 목말라했다. 그러나 황자가 눈부신 미남으로 성장하고 검법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이자 어머니는 비로소 그의 존재가치를 발견한 듯했다. 황자는 오 년 전, 열 다섯 살 되던 해의 어느 여름밤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평소 자신에게 엄격하고 차가운 모습만을 보였던 제2황후가 그의 곁에 와 "내 사랑하는 아들"하고 속삭이며 그를 어루만질 때까지만 해도 테룬은 그저 기쁘기만 했다. 그리고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에는 혈기에 넘치는 청소년인 그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황후의 마력은 모든 금기를 뛰어넘고 그를 사로잡은 것이다. 그렇게 일 년을 그는 황후에게 사로잡혀 보냈다. 그 후 그녀는 새로운 목표를 발견하였는지 그에 대한 속박을 조금 풀어주었고 그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수련함으로써 이 더러운 열망을 잊으려고 했다.당시에는 몰랐지만 그녀가 발견한 새로운 목표는 자신의 의붓아들, 당시 24세를 갓 넘은 황태자였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가 느낀 심정은 한편으로는 혐오감과 질투, 한편으로는 황태자에 대한 연민이었다. 평범하고 무난한 청년이었던 황태자는 그녀의 독기로 뒤틀려갔다. 황태자는 이제 그녀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애정만을 갈구하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테룬은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때때로 그녀가 잊었던 소유물을 확인하듯 아들인 테룬을 찾을 때마다 테룬은 거미에 홀린 작은 벌레처럼 그녀에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펠리시티 황후가 왜 황태자와 제1황후를 독살하려 했는지 황자는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제1황후가 살아있는 한 자신이 이 나라 최고의 여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고 제1황후를 죽이려면 황태자도 함께 죽여야 함을 깨달았을 수도 있다. 병석에 누운 황제가 죽기 전에 반드시 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초조감에 사로잡혔을 수도 있다. 가엾은 황태자. 그가 모든 걸 다 던질 각오로 사랑했던 그녀가 아들을 황위에 올리고 자신은 황태후가 되기 위해 제1황후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격심한 배신감에 떨었고 참을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황태자가 더더욱 치떨려한 것은 자신이 제1황후 독살의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것이었다. 황태자가 그 일그러진 마음을 고스란히 테룬에게 투사했어도 테룬은 황태자를 비난할 수 없었다. 그래서 테룬은 어머니의 죄값음을 위해 여기서 조용히 죽기로 결심했었다. 아름답던 그의 어머니 펠리시티, 자신이 어릴 적 그녀를 볼 때마다 얼마나 설레고 얼마나 그녀의 사랑을 갈구했는지, 그래서 그녀의 유혹에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졌는지, 그녀가 아버지와 형을 망치고 제1황후를 죽이는 걸 어떻게 수수방관했는지, 그 모든 것을 황자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 속의 미미한 떨림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나는 죄인이지? 나는 내 죄와 어머니의 죄를 짊어지고 죽어야겠지?" 황자는 물었다. 비통한 목소리였다. 렌은 눈물을 글썽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황자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감싸안고 쓰다듬었다. "당신은 아무런 죄가 없어요. 당신 잘못이 아녜요. 당신은 살아가도 돼요." 황자는 렌의 말에 그를 괴롭혀 온 어머니의 사악한 주술이 조금씩 풀려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황자는 얼굴을 렌의 가슴에 묻고 평생 품어두었던 눈물을 다 쏟아내듯 울었다. 한참 후 겨우 진정한 그는 부끄러운 듯 눈물을 닦으며 다시 물었다. "네가 죄가 없다고 해 준다고 해서 내 죄가 사해질까?" 렌은 조용히 대답했다. "제 첫사랑이자 약혼자인 사람은 제 아버지나 다름없는 스승님을 죽였지요. 그리고 그렇게 된 데에는 제 잘못도 있었고요. 그 자책감에 저는 그를 죽이려고 했어요. 그러다 그의 부하에게 공격당해 물 속으로 떨어졌지요. 원래대로라면 저는 물 속에서 죽었어야 했어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저는 살아났어요. 그리고 혼수상태일 때 스승님께서 제 꿈에 나타나 제게, 그분의 죽음은 제 잘못이 아니라고, 저는 살아있을 자격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모르겠어요. 정말 스승님께서 저승으로 떠나시기 전에 제게 들러 그 말씀을 하셨을 수도 있고, 용서와 삶을 갈구하는 제 마음이 그런 환영을 지어낸 것일 수도 있지요. 어쨌건간에 분명한 것은, 저는 스스로 용서받았다고 생각하고,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 황자 전하께서도 그렇게 느끼고 계시고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테룬은 뚫어지게 렌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고맙다." 그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도서실 밖으로 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샤이트가 재빨리 다가와 테룬을 부축했다. 그 다음날, 테룬은 마침내 렌에게 치료를 부탁했다. =================================================================== 치료사 렌 [3] 흑성 (4) -------------------------------------------------------- 렌은 테룬의 손발을 꼼꼼히 만져보기도 하고 맥을 짚어 보기도 한 후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잘려진 신경이 그 상태로 이미 아물어서 일반적인 방법, 즉 정명기를 불어넣고 침을 놓는 방법으로는 완치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테룬에게 펼쳐진 언힐링 마법이라는 금제는 테룬의 몸의 자연치유력을 없애는 것은 물론 원래 타고난 생명력까지도 갉아먹어 이대로 놔두면 1, 2년 후엔 생명력의 고갈로 죽게 될 것이었다. 정명기와 침술로 치료하는 경우 한동안 지금보다 조금 더 자유롭게 움직이게 할 수는 있지만 다시 빠르게 뛰거나 검을 휘두르거나 할 수는 없을 것이고, 생명력이 다하여 죽게 되는 걸 막을 수도 없었다. "완치를 원하시나요?" "물론이다." "왜 완치를 원하시는 건지 여쭤보아도 될까요?" "그것이 내가 의미있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렌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황자의 손발과 생명력을 회복시키려면 활인치상치병대법 책의 마지막 부분에 서술된, 자신의 생명력을 정명기에 실어 환자에게 쏟아붓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황자의 현재 상태가 죽을 병에 걸린 것은 아니었기에 전생명을 쏟아부을 필요는 없었지만, 적어도 렌의 생명력의 5분의 1 정도는 희생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렌의 남은 수명 중 5분의 1이 줄어든다는 말이었다. 활인치상치병대법 책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적고 있었다. "...대저 사람의 진원지기라 함은 그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받아 가지고 온 명줄이요 정해진 수명? 甄? 진원지기를 손상당하면 회복할 수 없고 그만큼 명은 짧아지나 한편으로 진원지기에 담긴 무한한 힘을 정명기로 이용하면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닌 한 낫게 할 수 있다. 무당파의 태극기공이나 소림사의 소림기공과 같은 무공 또한 그 무공을 익힌 사람의 진원지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수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나 이는 내공의 증진에 목적이 있지 치료에 목적이 있지 아니하다. 활인치상치병대법은 이와는 달리 진원지기를 정명기로 바꾸어 최대한의 치료효과를 보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진정코 사람을 치료하고자 하는 자는 헛되이 내공을 전수할 것이 아니라 정명기를 익힌 자를 찾아봄이 빠를 것이다. 다만 진원지기를 정명기로 바꾸어 환자에게 전수하고 나면 시술자는 당장은 이상이 없더라도 그만큼 명줄이 줄어들어 때가 되면 일찍 기운이 허하여져 죽게 되며, 만약 진원지기 모두를 정명기로 바꾸어 치료에 사용하면 그 즉시 죽게 된다. 그러니 이 방법은 절대 함부로 사용하지 말지어다. 그리고 이 책을 읽게 된 연자는 진원지기로 사람을 고칠 수 있음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지어다. 악인에게 이용될까 우려함이다..." 이 사람을 고치기 위해 내 목숨 중 그만큼을 희생하는 것이 맞을까? 내 목숨을 깎아서까지 남을 치료해야 하나? 이 사람은 어차피 사형당할 텐데? 렌은 고민했다. 그래도 테룬 황자는 렌에게 생명의 은인이었다. 테룬이 아니었다면 렌은 차가운 북해의 바닷가에서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얼어죽었을 것이다. 생명의 은인에게조차 치료를 주저한다면 내게는 의사, 아니 치료사의 자격이 없다, 그리고 내가 설득하여 살아갈 의지를 가지게 된 이상 나는 그를 살릴 책임이 있다고 렌은 생각했다. 또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렌은 자오와 닮은 이 사람을 구함으로써 자오에게 졌던 마음의 빚을 갚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아직 어린 렌에게, 먼 훗날 남은 수명의 5분의 1이 사라지고 그만큼 일찍 죽게 된다는 것은 그렇게까지 엄청난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렌은 마침내 결심하고 테룬에게 말했다. "제 치료술로 황자전하의 손발을 완치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닷새간 제게 사전치료를 받으셔야 하고, 엿새째 되는 날에는 본격적인 치료를 할 겁니다. 치료를 마치면 제가 의식을 잃을 가능성이 큰데, 그런 경우 당황하지 마시고 침대에 누인 후 제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시면 됩니다." "의식을 잃는다니, 치유마법을 과도하게 행했을 때 마법사가 쓰러지는 것과 비슷한 현상인가?" "아아,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군요." 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는 언제부터 시작하지?" "치료에 필요한 도구가 있어야 하는데, 그걸 갖추는 대로 시작하겠습니다." 황자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다 렌에게 말했다. "내 손발을 치료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라. 혹시 질문을 받거든 몸에 기운이 나게끔 하는 치료술이라고 대답하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렌은 황자에게 묵례하고 방을 나왔다. 그날 밤 렌은 깨끗하게 목욕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밝은 달빛이 렌의 방의 작은 창으로 비쳐들었다. 렌은 아무도 보지 않는 가운데 홀로 엄숙하게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읊었다.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음에,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나의 환자가 알려준 모든 내정의 비밀을 지키겠노라. 나는 의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노라. 나는 동업자를 형제처럼 여기겠노라. 나는 인류, 종교, 국적, 정당, 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나는 인간의 생명을 그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至上)의 것으로 존중히 여기겠노라.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이상의 서약을 나의 자유의사로 나의 명예를 받들어 하노라. 홍콩 도서관에서 처음 읽은 순간 벅찬 감동에 떨며 외워 두었던 히포크라테스 선서였다. 언젠가 의대에 입학하여 무사히 졸업하는 날 이 선서를 하게 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의대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계에 왔으니 정식으로 하얀 가운을 입고 사람들 앞에서 선서할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렸다. 그렇더라도 렌은 이 세계에서 치료사로 살게 된 이상 테룬의 치료를 시작하기에 앞서 아무도 보지 않는 이 방에서라도 스스로에 대한 다짐으로 이 선서를 하고 싶었다. 선서를 하면서 렌의 눈에서는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하는 대목에서는 목이 메었다. 이제 이 세계에서 렌은 의사가 아닌 치료사였다. 치료사. 치료사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겸손함이 정겹게 렌의 마음에 와닿았다. 이제 치료사 로서 몸을 낮추어 사람들을 도우리라. 그 다음 닷새 동안 렌은 침을 만드느라 바빴다. 본래 침의 재료로는 금, 은, 백금, 철, 스테인레스 스틸이 쓰이나 샤나에게 넌지시 물어본 바로는 땅끝마을에는 금은세공사나 대장간이 아예 없었다. 그 다음으로 좋은 재료는 대나무였지만 이 북국에 대나무가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렌은 잘 드는 조각칼과 잘 휘어지면서도 갈라지지 않는 나무를 구해 그걸로 가느다랗게 나무침을 만들기 시작했다. 손재주 좋은 렌이었으나 나무를 깎아 침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아, 백여 개의 침을 만드는 데 꼬박 닷새가 걸렸다. 그동안 황자는 때때로 렌을 찾아 침 만드는 모습을 흥미있게 지켜보기도 하고 그다지 내용 없는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흑성 내의 사람들은 모두 황자의 변한 태도에 놀람을 금치 못했지만, 생전의 제2황후의 모습을 알고 있던 샤이트는 모후를 닮은 렌에게서 황자가 위안을 얻고 있는 것이라고 나름대로 추측했다. 치료를 시작하는 날 흑성 주위에는 철이른 눈이 하얗게 내렸다. 죽음처럼 조용하게 내리는 눈이었다.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가운데 렌은 테룬의 방에 찾아가 방문을 걸어잠갔다. "치부를 가린 부분을 제외하고 옷을 모두 벗어 주십시오." 테룬은 약간 당황하다가 잘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순순히 옷을 벗었다. 두꺼운 모피와 모직 옷을 다 벗고 난 후 드러난 황자의 몸은 지난 1년간의 고초로 깡말라 있었다. "이제 침대에 누우세요." 테룬은 렌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누웠다. 렌은 약한 정명기를 일으키고서 테룬의 손발, 가슴, 다리, 얼굴에 100여 개의 침을 차례로 꽂기 시작했다. 침을 다 꽂는 데는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그 후 렌은 일정한 순서로 돌아가며 침마다 조금씩 정명기를 주입하기를 반복하였다. 그러기를 한 시간, 이 곳 시간 단위로는 대략 반 파잔(1일=12파잔임) 정도 지나 렌은 신속하게 침을 모두 뽑았다. 추운 날씨임에도 렌의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렌은 마지막으로 깨끗한 수건으로 황자의 몸을 꼼꼼히 닦았다. 수건에 시커먼 노폐물과 독기가 묻어나왔다. "이제 일어나셔서 옷을 입으셔도 됩니다." 테룬은 몸이 좀전보다 훨씬 가벼워지고 손의 움직임도 한결 부드러워진 것을 느꼈다. "정말 놀랍군. 그대의 치료법은 언힐링 마법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건가?" "언힐링 마법이 뭔지는 모르지만 제 치료는 마법을 이용한 게 아니니까 영향을 받지 않는 거겠죠." 황자는 신기한 듯 자신의 손을 다시 움직여 보았다. "고맙다." "감사의 인사는 치료가 모두 끝난 다음에 하십시오." "그래." 렌은 침과 수건을 챙겨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 때 황자가 렌의 팔을 잡았다. "지금 보니 너는 내 어머니와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 같다." 황자의 눈에는 진실함이 담겨 있었다. 무어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렌은 그냥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왔다. 렌은 똑같은 치료를 나흘 더 했다. 이 치료는 굳어져 있던 손발의 근육을 자극하고 환자 체내의 노폐물과 독기를 빼내어 나중에 불어넣을 생명력을 환자가 최대한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첫날 수건을 시커멓게 물들였던 독기는 마지막 날에는 미미할 정도가 되었고, 렌은 사전조치가 일단 성공했음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치료의 마지막 날, 렌은 새벽부터 일어나 황자의 방으로 가 황자로 하여금 종전처럼 옷을 벗고 누워 있게 한 채로 정명기를 운기하였다. 그리고 활인치상치병대법에 적혀 있는 대로 자신의 생명력을 조금씩 정명기에 싣기 시작했다. 읽기만 했지 실제로 시전해 보는 것은 처음이어서 렌은 긴장했다. 그것은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심장의 살을 조금씩 뜯어 피에 섞는 느낌이랄까. 정명기는 한 순간 생명력을 자신에게 싣기를 거부했다. 렌은 애가 탔다. 스스로 생명력을 포기하는 것을 자신의 몸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렌은 테룬을 생각하고 자오를 생각했다. 렌에게는 저기 누워 있는 황자가 자오처럼 느껴졌다. 지금 여기에서 그를 구하는 것으로 자오에게 못 다한 나의 사랑을 다할 수 있을까. 그에게서 받기만 하고 되갚지 못한 수많은 것들을 갚을 수 있을까. 나의 아버지, 보호자, 오빠, 연인이 되어 주었던 자오에 대한 나의 마음을 이렇게 전할 수 있을까. 그 순간 렌의 마음은 사랑으로 충만했다. 그리고 정명기는 마침내 렌의 생명력을 받아들였다. 원래 목표한 대로 대략 생명력의 5분의 1 정도를 정명기에 싣자 렌의 몸을 끊임없이 주천하는 정명기는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같이 되었다. 준비가 되었음을 느끼자 렌은 황자에게로 다가가 그의 가슴에 손을 대고 정명기를 흘려넣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흘러나가던 기운은 순식간에 봇물 터지듯 황자의 몸으로 흘러들어가 구석구석을 돌다가 양쪽 손발로 모여 그곳에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황자는 손발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렸 으나 용케 꾹 참았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기가 주입되는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렌은 마지막으로 힘을 내 운기하여 최후의 정명기까지 모두 황자의 몸에 쏟아부었다. 렌은 온몸의 힘이 빠지고 정신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테룬은 렌이 휘청거리는 것을 보고 놀라서 벌떡 일어나 쓰러지는 렌의 몸을 받아 안았다. 이미 정신을 잃은 렌은 처음 절벽 아래에서 보았을 때처럼 하얗게 질린 모습이었다. 작은 몸집의 렌은 테룬의 품에 쏙 들어왔다. 너무도 가녀리고 애처로워 테룬은 렌을 꼭 끌어안았다. 그러다 테룬은 갑자기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벌떡 일어났을 때, 그리고 렌을 붙잡았을 때 자신의 움직임에는 아무 불편이 없었던 것이다. 신기할 정도로 온몸에 힘이 넘쳐 흘렀다. 테룬은 렌을 침대에 눕히고 나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 보았다. 그리고 걸어 보았다. 발길질도 해 보았다. 근력이 다소 부족하기는 해도 힘줄이 잘리기 전의 과거와 똑같은 느낌이었다. 잃었던 희망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테룬은 벽난로 옆에 기대어져 있는 부지깽이를 집고 정신을 집중했다. 파르스름하게 부지깽이에 검기가 실리기 시작했다. 테룬은 더욱 힘을 주었다. 검기가 실체화되어 검강으로 화했다. 파랗게 뻗어가는 검강을 회수하고 테룬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렌에게 치료를 부탁하기로 결심할 때 머릿속에 세워두었던 구상이 실현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기쁨에 가득찼던 테룬은 렌이 사흘이 지나도 깨어나지 않자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치료를 비밀로 했었기 때문에 테룬은 아직도 자신의 손발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가장했고 렌이 쓰러진 이유도 채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활동하다 다시 쓰러진 것으로 둘러댔다. 원래대로라면 렌이 쓰던 방으로 돌려보내야 했으나 테룬은 렌을 자기 곁에서 떼놓기 싫었다. 결국 간이침대를 들여오게 해 테룬은 그곳에서 자고 렌은 황자의 침대에 그대로 눕혀졌다. -------------------------------------------------------- 치료사 렌 [3] 흑성 (5) -------------------------------------------------------- 조용하고 사려깊은 렌을 무척 좋아했던 샤나는 렌이 다시 쓰러지자 상심해서 열심히 렌을 간호했다. 샤나는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세 시간에 한 번씩 렌의 몸을 돌려 주고 따뜻한 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는 등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다만 밤에는 황자의 방에 들어올 수가 없어 난감해 했는데, 황자가 스스로 한밤중에는 자신이 돌볼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건네자 샤나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렌에 대한 걱정과 관심에 가득찬 황자의 태도는 그야말로 연인을 대하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결국 샤나는 마을 사람들의 질문공세에 못이겨, 신비로운 흑발미녀 렌에게 한눈에 사로잡힌 테룬 황자가 아직 채 회복되지도 않은 렌의 몸을 가지려다 그녀의 병세를 악화시켰으나 뉘우치고 밤낮으로 간호중이라는 최신뉴스를 전했다. 렌이 깨어난 것은 치료일로부터 열흘 후였다. 렌은 낯선 캐노피를 쳐다보다가 자신이 황자의 침대에 누워있음을 알았다. 간이침대에서 선잠을 자던 황자는 렌의 기척에 바로 잠을 깨어 달려왔다. "네가 죽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황자는 렌을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렌은 힘없이 미소지었다. "치료는 성공했군요." "말해 봐. 네가 한 치료는 네 몸에 굉장히 안 좋은 거였지?" "궁금하신가요?" "그래, 솔직히 대답해." "제 남은 수명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생명력을 쏟아부은 치료였어요." 렌은 조용히 말했다. "그럼 너는 그만큼 일찍 죽게 되었다는 말인가? 왜 미리 얘기해주지 않았지?" 황자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황자 전하께서 겨우 살아갈 마음을 가지게 되셨는데, 그런 사정을 말씀드렸다간 치료를 포기하실 것 같아서였죠." 렌은 담담히 웃었다. "이, 이, 바보같으니라구!" 황자는 어쩔 줄 몰라 렌을 더욱 세게 껴안다가 잠시 렌을 품에서 떼었다. "렌, 나는 널 내 것으로 만들겠다." 황자의 눈은 결의에 차 있었다. "나는 누구의 것도 아니예요." "네가 뭐라든 너는 내 것이 될 것이다. 너를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앉히고 최고의 부귀와 영화를 주겠다. 네가 생명의 일부를 포기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도록 해 주겠다." 렌은 문득 황자의 말이 자오가 하던 말과 몹시도 흡사하다고 느꼈다. 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귀며 영화는 제게 필요없어요. 제 행복은 제가 스스로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를 치료한 것은 저 자신을 위한 것이었어요. 제 마음 속에 남아 있던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어요. 이제 치료가 끝났으니 몸이 조금 회복되는 대로 떠나겠어요." 황자는 안된다고 외치려다가 생각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자신이 이대로 순순히 죽지는 않겠다고 결심한 이상 동제국은 내란에 휩싸일 것이다. 자기 곁에 둘 것 을 고집하다가 렌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황자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동제국은 한동안 위험할 테니 잠시 떠나 있는 것도 좋겠지." 황자는 벽에 걸쳐진 태피스트리를 제치고 그 뒤의 벽돌조각 하나를 빼어 그 안에 들어 있던 금화와 보석과 돌돌 말린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금화와 보석은 치료비로 생각하고 받아 두어라. 스크롤에는 서제국의 수도인 테라미즈 교외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는 마법이 담겨 있다. 찢기만 하면 된다. 그 스크롤은 서제국 황제 카에닌이 아직 즉위하기 전 직접 만든 것이라고 하지. 나를 따르던 어느 신하가 자기 집안의 가보라면서 사형당하기 직전에 도망칠 생각이 들거든 쓰라고 준 것이다. 그걸 이용해 서제국으로 망명하라는 것이었지. 하지만 이제 내게는 필요가 없게 되었다." 렌은 황자가 건네주는 물건들을 받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잘 들어라. 여자 혼자 몸은 위험할 테니 반드시 테라미즈로 이동하기 전에 남장을 하고, 테라미즈에 도착하면 적당한 집을 구해 그 곳에서 조용히 기거하다가, 파이브룬 제국의 내전이 끝나고 새 황제 테룬 1세가 즉위했다는 소문이 들리면 즉시 파이브룬 제국의 수도 브림으로 오도록 해라. 네가 오면 나는 너를 최고의 지위에 앉히고 행복하게 해 주겠다." 렌은 황자의 말에 창백해졌다. "내전을 일으킬 생각이군요?" 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대로 죽을 수는 없으니까." "황자 전하께서는 소드마스터이셨다는데, 그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몰라도 그 무술실력을 이용해 도망쳐서 조용히 사실 수는 없나요? 전쟁을 일으키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을 텐데요." 렌의 간절한 부탁에 황자는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이미 결심했다. 형님이신 황태자 전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분께 이 나라를 맡길 수는 없다. 한 명의 목숨도 소중히 하는 네게는 납득하기 어렵겠지만, 내전으로 인해 다소의 인명피해가 생기더라도 형님께서 즉위할 경우 수십 년에 걸쳐 이 나라 백성들이 당할 고통을 방지하는 것이 더 급선무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자신의 슬픔에 사로잡혀 그 모든 것에 개의치 않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내 나라의 내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나로 인해 흘리는 피의 값은 내가 치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어머니의 자식으로서 희생양을 자처하였지만 이제 더이상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이제 떨치고 일어나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 황자의 말에 렌은 뭐라고 할 바를 몰랐다. "그것이 당신의 선택이라면 하는 수 없지요. 저를 보아서라도 한 명의 목숨이라도 덜 해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주신 것은 치료비로 받겠어요. 하지만 황자 전하께서 동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시더라도 제가 전하를 찾아갈지 말지는 제 마음입니다. 저는 더 이상 황자 전하께 빚이 없으니까요." 황자는 안타깝게 말했다. "내게는 네가 필요해. 네가 내게 오지 않아도 나는 너를 찾아내 내 곁에 두겠다." "전하의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겁니다." 렌은 단호히 말하고 일어났다. "잠깐." 황자는 렌의 몸을 끌어당겨 자신의 입술을 렌의 입술에 대었다. 거칠고 강한 키스였다. 렌은 숨이 막혔다. 황자의 입술의 맛은 자오와 흡사했다. 늘 자신을 사로잡았던 현기증나는 그 키스였다. "입술이 참으로 달콤하군." 렌은 황자를 노려보다 방을 나섰다. 렌의 몸이 완전히 회복된 사흘 후, 렌은 황자로부터 받은 남자옷-정확히는 소년의 옷인 토즈릴-을 껴입고 그 위에 스커트를 두르고 다시 망토를 걸친 후 금붙이와 스크롤을 품에 지닌 채 흑성을 나섰다. 평소의 산책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경비병들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몹시 아쉬워하는 황자와는 이미 그 날 새벽에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렌은 황자와 나눈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처음 눈떴을 때처럼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오르는 가운데 둘은 장작불빛에 의지하여 나직하게 이야기했다. "너는 정말로 다시는 내게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가?" 황자는 몹시 안타까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마도요." 렌은 조용히 대답했다. 황자는 다시 애타게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병들었었다. 내 몸의 병은 네 덕분에 나았지만 내 마음의 병은 아직도 그대로이다. 네가 내 곁에 돌아와 준다면 나는 나을 수 있다." 렌은 황자의 말에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렌 또한 황자가 말한 것처럼 그의 마음 속에 병이 있음을 보았다. 부모의 무관심, 그리고 부모에 의한 성적 학대 혹은 추행으로 인한 상처는 그냥 두면 평생 동안 낫지 않는 법이었다. 제대로 된 정신과 의사가 수 년을 걸쳐 상담치료를 해도 나을까 말까 했다. 테룬 황자가 그의 결심처럼 황제가 된다면 그의 마음 속의 병은 동제국의 온 국민에게 영향을 미칠 터였다. 잠시 고민하던 렌은 결국 단호히 말했다. "저는 몸의 병을 고치는 치료사이지 마음의 병을 고치는 치료사가 아닙니다. 전하의 마음의 병을 고칠 사람은 다른 곳에서 찾으십시오. 제가 배워야 할 이 세계의 학문도 너무 많고, 제 치료를 기다리는 사람도 온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테룬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당장 너를 붙잡기에는 내가 가진 것이 너무도 없구나. 지금 나는 아무 힘도 없는 귀양 온 반역자에 지나지 않으니 네게 떼를 써서 더 이상의 희생을 강요할 자격도 없고. 그러나 6개월, 앞으로 6개월만 기다려 줘. 여신의 달이 되기 전에 나는 동제국을 손에 넣겠다. 그리고 네게 모든 것을 다 주겠다." 렌은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는 더 이상 저와 얽히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제가 돌아가신 모친과 똑같이 닮았다면서요? 사실 전하도 제 첫사랑과 외모며 성품이며 너무 닮았습니다. 어떤 불가사의한 힘이 작용했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볼수록 우리는 서로의 가슴에 남은 옛 상처를 헤집을 뿐입니다." 테룬은 렌을 멍하니 쳐다보다 마침내 말했다. "네가 떠나는가 돌아오는가는 네 자유라고 했지? 내가 황제가 된 후 너를 찾아다 내 곁에 두는가 아닌가는 내 자유이다. 너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나는 너를 내 곁에 두겠다. 지금은 공허하게 들리겠지만, 언젠가는 너를 동제국 최고의 여인, 동제국의 황후로 만들어 주겠다. 그 희망에 의지하지 않으면 나는 살아갈 수 없다." 렌은 연민에 가득차 테룬을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전하의 마음을 채울 다른 인연, 다른 희망을 만나시게 될 것입니다. 운이 좋으면 우연히 한 번쯤 전하와 만날 날도 있겠지요. 그때까지 건강하시고, 바라는 바 모두 이루시기를." 아아, 황자가 자신에게 보이는 집착과 열정은 정말로 자오를 연상케 했다. 황자는 너무나도 자오와 흡사해서 렌은 자꾸만 황자에게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렌은 이번에야말로 상대방에게 기대거나 끌려가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연민과 동정은 사랑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 아닌가. 애타는 사랑을 보이는 자오에 대해 수동적으로 응했다가 그 비극을 낳은 것이 아닌가. 렌의 생각에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치유마법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테라미즈가 이 세계의 최고 문명 도시라고 하니까 거기에서 치유마법을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치유마법에 관해서는 흑성에 비치된 책 몇 권을 읽은 게 전부였지만 지금까지 읽은 내용만 합쳐 보아도 자신의 치료술과 치유마법을 결합하면 치료의 효과가 배가될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을 더 쉽게 고칠 수 있고 더 훌륭한 치료사가 될 수 있으리라. 그 생각만 해도 렌은 가슴이 뛰었다. 그 기대감에 렌은 테룬에 대한 안타까움을 떨칠 수 있었다. 렌은 경비병들 눈에 쉽게 띄지 않는 절벽 틈새로 내려가 겉에 둘렀던 스커트를 벗어 놓고 망토를 다시 걸쳤다. 그리고 준비한 단검으로 어깨 조금 위에서 머리채를 잘라냈다. 소중히 길러왔던 머리카락이었기 때문에 섭섭했으나 한편으로는 몹시 가볍고 개운하기도 했다. 렌은 스커트 속에 머리카락을 뭉쳐넣고 다시 주위의 돌멩이들을 긁어모아 스커트 양쪽 끝으로 묶은 뒤 스커트를 바다에 던졌다. 스커트는 곧 가라앉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여기서 정신없이 황자를 치료한 덕분에 마음의 상처가 조금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테룬이 문득 다시 보고 싶어졌지만 렌은 애써 그 생각을 지웠다. 렌은 스크롤을 꺼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말로 이걸 찢으면 수천 아반(1아반=대략 1마일) 떨어진 테라미즈로 바로 이동할 수 있을까? 마법이라는 게 정말로 있나? 숨을 가다듬으며 렌은 과감히 종이를 찢었다. 그러자 렌 주위로 무지개빛의 서광이 확 피어올라 렌을 감싸기 시작했다. 렌은 마치 급속도로 떨어지는 롤러코스터에 탄 기분으로 휘청거리다가, 그 롤러코스터가 급정지한 것 같은 느낌에 바닥에 쓰러졌다. "휴우, 어지러워." 렌은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의 풍광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북해의 바다는 사라지고 활엽수와 침엽수가 섞인 온대의 숲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렌이 이동한 곳은 숲 속의 작은 공터였다. 나무 둥치 사이로 하얗게 빛나는 도시의 윤곽이 멀리 보였다. 여기도 늦가을일 텐데 대기는 훈훈하고 향긋했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렌을 휩쌌다. 그래, 저기가 내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곳이구나. -------------------------------------------------------- 치료사 렌 [4] 테라미즈에서 나와림 되기 (1) -------------------------------------------------------- 렌이 테라미즈에서 기거할 곳을 구하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상업과 학문이 성한 미의 도시 테라미즈는 유동인구 또한 많아 숙박업이 잘 발달해 있었고, 사람들은 외지인들이 어리숙한 얼굴로 길을 걸으며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는 데에도 익숙해서, 렌이 멍하니 거리를 걸으 며 정신없이 도시를 구경하는 것도 그렇게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처음 렌은 낯선 도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데 다소 어려움을 겪었으나 사실 사람 사는 것은 어디나 비슷하기 마련이었다. 렌이 테라미즈 풍습을 몰라 여러 가지 실수를 해도 그때마다 사과하며 미소지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즐거이 용서를 받아 주었다. 물론 쉽게 적응한 데에는 빼어난 미소년인 렌의 외관도 한 몫 했다. 렌은 여장을 했을 때에도 사람들의 숨을 멎게 하는 미녀였지만, 남장을 하자 거기에 묘하게 중성적인 매력이 더해져서 지나가는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깨에 닿을 듯 찰랑거리는 흑발, 투명한 피부, 오똑한 콧날과 사려깊은 눈매는 어느 소녀라도 한 눈에 반할 만한 모습이었다. 홍콩에 있을 때부터 이미 사람들의 눈길에는 익숙해진 렌이었으나, 이곳에서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자 어색해진 렌은 결국 망토의 후드를 깊숙이 눌러쓰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렌 스스로는 자신이 하루가 다르게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의 지나친 태도가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나마 테라미즈의 치안상태가 좋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렌이 홍콩 시절 무협소설이나 판타지소설에서 읽었던 것 같은 껄떡거리는 불량배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책에서는 보통 렌같은 미소년이 지나가면 어디에선가 불량배들이 나타나 "어이, 예쁘장한 계집애야, 나랑 놀지 않을래?" 등등의 대사를 하다가 정의의 사자에게 곤죽이 되곤 했었는데. 처음 며칠간은 여관에 묵을 수밖에 없었으나 여러 군데 돌아다닌 끝에 렌은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였다. 렌이 구한 숙소는 장기 투숙자들이 주로 묵는 '달의 쉼터'라는 곳(시적인 이름이었지만 사실은 한 달 이상 투숙객만 받는다는 뜻이었다)이었는데, 도시의 중심인 중앙대로에서 겨우 한 블록 들어간 편리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고 한 달 숙박료가 30실버로 비교적 저렴한 편인데다가 실내는 깨끗하고 개인 욕실이 딸려 있으며 양질의 아침저녁까지 제공되어 무엇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다. 황자로부터 받은 돈은 대략 100골드(1골드는 100실버)였는데 렌은 그게 엄청난 금액이라는 걸 뒤늦게 알고서 비로소 안심하고 돈을 쓸 수 있었다. 일단 이곳에 터를 잡은 후 렌은 한동안 가벼운 마음으로 관광도 하고 이 세계의 실정도 알아보느라 한두 달 정도 바쁜 나날을 보냈다. 테라미즈는 정말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도시였다. 시민들은 테라미즈에 대해 세계 최고의 도시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최초에 카에닌 황제가 이 도시를 세울 때 그는 도시에 남아 있던 좁은 골목, 비위생적인 하수구, 낡은 집들 같은 중세의 잔재를 전부 밀어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도시계획에 따라 새 도시를 건립했다. 중앙의 황궁을 중심으로 하여 열두 줄기의 방사상 도로가 놓이고 도시 외곽을 동서로 흐르는 이다 강에는 어떠한 오물도 버릴 수 없도록 칙령이 선포되었다. 엄청난 규모의 지하 하수도 시설 및 수압을 이용한 상수도 시설이 설치되었고 도로를 따라서는 오로지 흰색 자재만을 사용하여 새로 집들이 지어졌다. 이 엄청난 역사를 카에닌은 그를 따르는 마법사들과 병사들, 그리고 그를 신 혹은 악마처럼 숭배하는 백성들의 힘으로 이루었다. 이 도시는 제국 곳곳을 관통하는 관도와 함께 제국의 상징이 되었다. 그렇게 건립된 도시는 350년간의 치세 동안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엄격한 규칙 하에 완벽하게 가꾸어져 왔다. 한 명의 황제가 제국 전체를 300년이 넘게 다스림으로 인해 제국 전체의 중앙집권화는 일찍이 상상할 수 없던 정도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서대륙의 모든 것이 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여관의 여주인은 "메니나"라는 이름의 중년의 과부였다. 평소 그녀는 손님을 받는데 상당히 까다로웠으나 렌의 모습을 보자마자 감탄의 한숨을 쉬며 방을 보여 주었다. 약간 뚱뚱하고 늘 인자한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서 렌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연상했다. 메니나에게는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었으나 딸은 시집가고 아들은 군대에 들어가서 외롭던 차라, 그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렌을 그녀는 아주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렌, 사내자식이 곱상하게 생겨서 그렇게 새 모이만큼만 먹으면 어떡해? 이 아줌마의 요리솜씨가 맘에 안 드냐?" 렌은 빙긋 웃었다. 음식을 적게 먹을 때마다 걱정하시던 어머니가 생각난 것이다. "아주머니, 늘 고맙습니다. 이 닭요리는 정말 맛있군요." 렌이 자신의 음식을 칭찬하자 메니나는 금방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오늘 나갔던 일은 잘 됐니?" 렌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렌은 이곳에서 적당한 학교를 찾아 치유마법과 기타 학문을 배우려 했으나 일이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평민을 위한 학교들은 글자와 산수, 단순 기술 정도를 가르치는 데 불과했고, 귀족들이 다니는 테라미즈 황립 아카데? 甄?적어도 자작 이상의 작위가 있는 귀족의 자제만이 입학할 수 있었다. 현역 마법사에게 찾아가 마법을 배우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이 극도의 비밀주의인데다가 어디 사는지 알아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리고 뛰어난 마법사들은 모두 황제 직속의 공공기관인 마법원에 모여 있어서 일반인인 렌은 어떻게 해 볼 방도가 없었다. 이곳의 책을 읽으며 독학해볼 생각도 했지만, 책값이 지구와 비교했을 때 어마어마했고 쉽게 구할 수도 없는데다가, 황립 도서관도 귀족이나 특별허가를 받은 평민만이 출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렌은 서제국이 당면한 가장 심각한 모순을 경험한 것이었다. 테라미즈넨 제국은 지난 350년간의 평화로 일찍이 없었던 빠른 속도로 문명이 발전하고 시민사회의 맹아가 싹트게 되었으나, 황제라는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권력에 호가호위하는 귀족들의 세력은 평민들이 참정권을 가지고 신분상승을 꾀하는 것을 차단했다. 아름다운 도시와 완벽한 중앙집권 행정체계 뒤에는 평민들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으나 황제가 직접 나서서 개혁하지 않는 한 평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처음 서제국 건국의 추진력이 된 엄청난 마력을 가진 황제라는 존재는 이제 문명의 다음 단계로의 발달에 걸림돌이 되었다. 렌은 이미 이 아름다운 테라미즈를 사랑하게 되어가던 차에 서제국의 문제점을 발견하자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초조해하는 렌을 바라보다 메니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렌, 너 혹시 나와림이라는 거에 관해 들어본 일 있니?" 고개를 저으며 궁금해하는 렌의 얼굴을 보며 메니나는 자세히 설명했다. "너 황제 폐하께서 대마법사이시고 수명이 끝이 없는 분이신 건 알지?" "네." "황제 폐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읽으실 수 있다는 것도 알지?" "아뇨, 그건 몰랐는데요." 렌은 놀랐다. "이상하구나. 황국 신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인데. 암튼 소문에 따르면 황제 폐하께서는 인간들 마음 속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 들여다볼 수 있으시단다." 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분은 무척 힘든 삶을 살아오셨겠군요. 남의 마음을 읽는다는 건 괴로운 일일 텐데." "호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너는 참 독특하구나. 착한 아이 같으니라구. 대부분은 마음을 읽힌다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를 치곤 하지." 메니나는 감탄했다. "아무튼 그래서 그 분은 주위에 가능한 한 세파에 시달리지 않고 깨끗한 마음을 가진 어린 아이들을 두길 좋아하셔서, 황궁에서 황제의 곁에 머무르며 잔심부름을 하는 건 대부분 18세 성년이 되기 전인 어린 나와림들이란다. 뭐, 중요한 일은 나이 든 궁내관과 시녀장들이 맡지만." "그런데 그게 치유마법 배우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죠?" "나와림들은 3교대로 일하는데, 황제 폐하께서는 무식한 걸 싫어하셔서 나와림들도 반드시 교육을 받도록 하셨거든. 그래서 나와림으로 뽑히면 테라미즈 황립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어." 렌은 눈을 반짝였다. 황립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다고? 귀가 솔깃했다. "나와림으로 뽑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실은 그게 쉽지가 않단다. 황제 폐하께서는 아름다운 걸 좋아하시니까 빼어난 미모를 갖춰야 하고, 총명해야 하고, 집안 배경도 좋아야 한단다. 지난 세월 동안 황제 폐하께 총애받았던 나와림이 재상이 되거나 출세한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권력가에서 자식을 나와림으로 들여보내는 일이 많거든. 아들을 셋 낳으면 큰 아들은 기사로, 둘째 아들은 마법사로, 셋째 아들은 나와림으로 만들라는 말까지 있지." "저, 총애받는다는 건..." 메니나는 한숨을 쉬었다. "뭐 그렇고 그런 거지. 물론 폐하께서는 아름다운 여인들을 좋아하시지만 소년들도 가리지 않고 좋아하신다는 소문도 있어. 다만 요즘에는 폐하께서 영 나와림을 취하지 않는다고 하시더라. 너 정도의 미색이라면 대번에 눈에 들었을 텐데." 렌은 얼굴을 붉혔다. 요컨대 황제는 바이섹슈얼에 페도필리아라는 것이다. 오오, 설마 트랜스섹슈얼은 아니겠지? "집안 배경이 좋아야 한다면 저는 안 되쟎아요?" "나와림은 원래 신분에 상관없이 미모와 총명함만을 기준으로 뽑는 거거든. 실제로는 다 뒷배경과 뇌물이 작용하지만, 내 말은, 아무리 배경이며 뇌물이 중요해도 워낙에 빼어난 아이라면 안 뽑을 수가 없다는 거지." "나와림은 언제 뽑나요?" "일 년에 한 번씩 동지제 무렵에 뽑는데, 동지제가 얼마 안 남았으니 곧 뽑겠구나." 렌은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시무룩해졌다. 황제가 마음을 읽는다면 자신이 여자인 것 정도는 순식간에 눈치챌 게 아닌가? "나와림들은 다 황제폐하 주변에서 일하나요?" "아니. 원래는 황제폐하의 주변에서 3년차 나와림들이 일하고, 신입과 2년차 나와림들은 내각이나 다른 곳에서 일하도록 되어 있지만, 근 30여년 간은 폐하께? ?나와림들을 곁에 두지 않으셨다고 그러더라."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황제의 눈에 띠지 않게 조심하다가 배울 만큼 배운 후에 적당한 때 도망가면 될 것이다. "아주머니는 어떻게 그런 걸 다 잘 아세요?" "호호호, 여관업 20년이면 모르는 게 없게 된단다." 렌이 감사의 표시로 메니나의 뺨에 키스하자 메니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메니나의 말대로 나와림 선발은 동지제 무렵에 있었다. 원칙적으로는 신분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지원서를 작성하여 제출하고 1, 2, 3차 면접을 보면 그것으로 끝이었지만, 보통 나와림 15명을 뽑는 데 1000명 정도가 몰린다고 하니 나와림으로 뽑히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리고 뽑히는 15명 중 귀족이 아닌 아이는 대개 두세 명, 그것도 대부분 대상인의 자제라고 했다. 면접장소는 중앙대로 동쪽에 자리잡은 황립아카데미 사무국이고 원서 교부 및 접수도 그곳이었다. 원서 교부일에 렌은 일찌감치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중앙대로를 따라 황립아카데미 사무국까지 걸어갔다. 여관에서는 약 30분 정도 걸렸다. 맑고 차가운 겨울 공기가 기분좋게 폐부에 스며들었다. 사무국으로 다가갈수록 사람들이 많아졌다. 대부분 렌 또래, 혹은 렌보다 좀 더 어린 소년들과 그들의 부모였다. 부모 손을 꼭 잡고 즐겁게 웃고 있는 소년들을 보니 렌은 자신만이 이 세상에 혼자인 것 같은 기분에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벌써 이런 나약한 기분이 들면 안 되는데. 렌은 마음을 다잡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핏 보아도 귀족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평민들이었다.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힘든 일이겠지만 모두들 희박한 확률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리라. 렌은 모르고 있었지만, 매번 선발될 나와림들 중 열 두셋 정도는 이미 정해져 있고, 심사를 거친다는 모양새를 형식적으로 갖추기 위해 나머지 두세 명 정도만이 진짜로 선발과정을 통해 선발되었다. 그나마 그정도라도 함으로써 평민들에게 신분상승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귀족사회도 새로운 피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사무국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사실 그러한 실상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평민이 출세하는 길은 마법사가 되는 것, 대상인이 되는 것, 그리고 나와림이 되는 것 세 가지밖에 없었다.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힘든 확률이지만 만에 하나라도 자기 자식이 100년 전의 나와림 출신 평민 대재상 비세츠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염원이 이들을 이곳에서 이렇게 추위를 견디며 서있게 하는 것이었다. 렌이 사람들에게 다가가자 지원자들과 부모들은 렌의 눈부신 모습을 감탄과 경계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어느 정도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에 익숙해진 렌은 시린 손을 비비기도 하고 가끔 눈이 마주치는 아이들에게는 눈웃음을 보내기도 하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 치료사 렌 [4] 테라미즈에서 나와림 되기 (2) -------------------------------------------------------- 얼마나 기다렸을까, 사무국 정문이 열리고 회색 토즈-테라미즈넨의 남자정장인 토즈는 흰 셔츠와 약간 여유가 있는 바지 위에 허리띠를 두르고 그 겉에 다시 거의 복사뼈 조금 위까지 내려오는 '토'라고 불리는 코트 비슷한 겉옷을 걸치는 것이었다. 토를 얼마나 여미느냐, 그리고 허리띠의 색상을 어떤 것으로 하느냐가 멋쟁이의 포인트였다. 소년들의 옷인 토즈릴은 거의 비슷한 형태에 바지와 토만이 무릎 길이 정도로 짧았다.-를 입은 30대의 남자가 손에 든 구슬에 대고 지시사항을 말하기 시작했다. 소리가 광장 전체에 울려퍼지는 걸로 보아 확성마법이 걸린 구슬인 듯했다. 이곳에 와서 여러가지 마법을 보았지만 렌은 아직도 마법을 볼 때마다 마냥 신기했다. "지원자 여러분, 저는 황립아카데미 교육국장 다남입니다. 지금부터 직원 열 명이 백 장씩 지원서를 들고 광장으로 내려와 여러분께 한 장씩 나눠 드리겠습니다. 절대 밀거나 앞으로 나서지 마십시오. 만약 그런 사람이 있을 경우 제가 기억해 두었다가 면접에서 반드시 탈락시키겠습니다." 남자가 단호하게 말하자 군중 속에서 대답하는 웅성거림이 일다가 곧 잠잠해졌다. 남자가 손을 들어 신호하자 남자와 똑같이 회색 토즈를 입은 남자들이 광장으로 내려와 가까운 곳에 있는 아이들부터 한 장씩 지원서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좀전의 경고 덕분인지 먼저 달라고 손을 흔들거나 밀치는 사람은 없었다. 렌은 군중들의 뒷쪽에 서 있다가 거의 마지막으로 지원서를 받았다. 지원서를 건네준 직원에게 렌이 감사의 미소를 짓자 그는 갑자기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황급히 다른 쪽으로 갔다. 대강 원서가 다 교부되었을 무렵, 다시 종전의 그 남자가 확성 구슬에 대고 말했다. "원서는 사실대로 작성하여 사흘 후 해지기 전까지 사무국 접수창구에 접수하십시오. 그 이후에 접수된 원서는 받지 않습니다. 원서가 접수되면 가슴에 달 번호패를 하나씩 줄 텐데, 나흘 후 동지제 날 번호패를 달고 사무국에 오셔야 합니다. 번호패를 지참하지 않고 오는 경우 바로 실격입니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렌도 다시 여관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지원서를 보니 고민이 생겼다. 당장 "출생지"와 "출생일"부터 막혔다. "중화인민공화국 광동성"에다 "1980년 10월 3일"이라고 적었다간 당장 탈락일 것이었다. "가족관계"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였고, "작위", "마법써클" 등등 모두 무어라 써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제일 막막한 것은 "보증인" 및 "보증인과의 관계" 란이었다. 이 낯선 곳에서 누가 자신의 보증인이 되어 준단 말인가. 렌은 힘없이 걸어 '달의 쉼터'로 돌아왔다. 메니나는 렌을 보자 반가이 맞았다. "지원서는 받았니, 렌?" "예, 아주머니. 하지만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네요." 렌의 풀죽은 모습에 메니나는 일손을 멈추고 렌에게 다가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여기 신원보증인을 쓰라고 되어 있는데 보증을 서 줄 사람이 하나도 없거든요." 메니나는 렌으로부터 원서를 받아 흝어보았다. "뭐 그런 걸 가지고 고민하고 그러니? 내가 서 줄 테니 걱정마라." 메니나는 호탕하게 웃으며 렌의 등을 토닥였다. 렌은 놀라서 메니나를 쳐다보았다. "아주머니, 여기서 보증인이 뭔지는 잘 몰라도 제가 뭔가 잘못하면 그걸 책임지겠다는 거 아녜요?" "그야 그렇지." "그런데 일이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내가 지금까지 20년 동안 한 게 뭔지 아니? 여관이야, 여관. 여관 하면서 느는 건 말솜씨하고 사람 보는 눈밖에 없단다. 너는 일이 잘못될래야 잘못될 수 없는 애야. 혹시 뭐가 잘못되면 내 눈을 탓하지, 뭐." 다시 호탕하게 웃는 메니나를 보며 렌은 고마움과 따뜻함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주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어요." 메니나는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렌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결국 메니나의 도움을 받아 렌은 다음과 같이 원서를 작성했다. 성명 : 렌 파즈(파즈는 메니나의 처녀적 성이었다.) 출생지 : 테라미즈넨 제국 남프리아공작령 파즈 마을 출생일 : 건국 332년 수확의 달 3일(아무래도 남장을 하면 어려 보이기 때문에 한 살 줄여 열 다섯 살인 것으로 했다.) 주거지 : 테라미즈넨 제국 테라미즈시 중구 사린 거리 304 달의 쉼터 가족관계 : 메니나 파즈 케라자(오촌 고모) 그 외 가족 없음 보증인 : 메니나 파즈 케라자 작위 : 없음 마법써클 : 없음 기타 특기 : 치료술 무사히 원서를 접수하고 서제국의 상징인 불사조가 새겨진 478번 번호패를 받은 렌은 면접날 새로 산 토즈릴(소년용 정장)을 갖춰 입고 아카데미 사무국으로 갔다. "자, 1번부터 100번은 여기에, 101번부터 200번은 여기에...." 직원들이 확성구슬에 대고 외치며 여기저기서 장내를 정리하고 있었다. 지원자들은 100명씩 열 줄로 맞춰 섰다. 총 지원자는 980명이 조금 넘는 듯했다. 소년들은 대부분 상당히 잘 생겼고 때때로 빼어난 미남들도 있었으나 가끔은 저런 얼굴로 여기 나오다니 참 용감하다 싶게 생긴 소년들도 있었다. 대부분 이 날을 위해 따로 장만한 새옷을 입고 나온 듯했다. 직원의 인도로 1번부터 100번까지의 소년들이 사무국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10분도 안 되어 그 중 대부분이 다시 나왔다. 꼼꼼히 세어본 결과 여덟 명만이 안에 남았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모두 다른 소년들보다 한결 더 잘생긴 아이들이었다. 1차 면접은 순전히 얼굴만 보는 건가? 렌은 묘하게 재미있어졌다. 101번부터 200번까지는 일곱 명, 201번부터 300번까지는 열 명, 301번부터 400번까지는 열 한 명이 남았다. 그리고 이제 렌이 들어갈 차례가 되었다. 렌은 소년들을 따라 사무국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국 한가운데에는 넓고 둥근 홀이 있고, 홀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2층의 회랑에는 대략 열 명 정도의 심사위원(렌은 그들의 정확한 직함을 알지 못했지만 그들은 꼭 미스 홍콩 대회의 심사위원처럼 보였기에 렌은 그들을 그냥 마음속으로 심사위원이라 불렀다)이 앉아 있었다. 소년들은 그들을 향해 반원형으로 섰다. 심사위원들은 소년들의 얼굴을 확대경으로 자세히 보기도 하고 원서를 뒤적거리기도 하며 서로 상의하다가 결과를 발표하였다. "412번, 435번, 438번, 461번, 478번, 489번, 491번, 500번은 남고 나머지 지원자들은 나가십시오." 자신을 포함한 꽃미남들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실망하여 밖으로 나가자 렌은 점점 우스워졌다. '뭐야, 이건 정말로 미스 홍콩 심사 같쟎아? 설마 2차 심사가 수영복 테스트는 아니겠지?' 남은 소년들은 모두 다른 직원을 따라 홀과 이어진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일종의 대기실인 듯했다. 앞서 뽑힌 꽃미남들도 모두 거기에서 기다리 고 있었다. 우글거리는 꽃미남들을 한자리에서 보니 장관이었다. 홍콩의 사천왕이니 아이돌 스타들은 저리 가라였다. 뒷번호 꽃미남들도 차례로 들어와 대략 1차에서 선발된 소년의 수는 90명 정도 되었다. 1차심사가 끝나자 얼마 전 원서교부 때 안내방송을 했던 교육국장이 소년들 앞으로 나왔다. "여러분들은 이제 차례로 다섯 명씩 시험장으로 들어가 면접을 보게 됩니다. 그 중 두 명씩만이 3차 면접에 남습니다. 순서는 공정성을 위해 무작위로 정합니다." 번호가 불리자 다섯 명의 소년들이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30여분 정도 지났을까, 다시 다섯 명의 소년이 불려졌다. 렌도 포함이었다. 면접장에는 다섯 명의 시험관이 앉아 있었다. 소년들은 중앙에 나란히 놓여 있는 의자에 앉혀졌다. 먼저 일상적인 질문들이 있었다. "음, 페람 군, 아버지께서 페람 공작각하이시죠?" 페람이라는 소년은 스트레이트 파마를 한 듯(이곳에 그런 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웃던 렌은 나중에 정말로 그 비슷한 마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찰랑거리는 붉은 머리와 날카로운 눈빛, 침착한 표정이 인상적인 미소년이었다. 그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다른 소년들은 일제히 경계의 눈길을 던졌다. 저 애는 틀림없이 이미 내정되었을 것이다. 페람 공작가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명문가였고 페람 공작은 현재 수상이었다. "차바크 군은 마법을 2써클까지 사용한다고 적어 놓았는데 맞습니까?" 차바크 군이라고 불린 귀여운 인상의 소년은 애교있게 웃으며 맞다고 대답했다. 누구에게서 배웠냐는 질문에 대해 아버지께서 마법을 가르칠 가정교사를 초빙해다 주셨다고 대답하는 것을 들은 다른 소년들은 차바크 군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다. 마법사를 가정교사로 둘 집안이라면 평민이라도 엄청난 거상일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거기에 마법같은 특기가 있으면 훨씬 유리했다. "파즈 군, 특기에 치료술이라고 썼는데, 설마 치료사들이 하는 치료술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요?" 치료사라는 말에 소년들은 경멸 섞인 호기심을 렌에게 던졌다. 렌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치료사들이 하는 치료술이 맞습니다. 마법이 아니라 손과 약으로 사람을 고치는 것 말입니다." "누구에게서 치료술을 배웠습니까?" "지혜 깊으신 노 치료사님에게서 배웠습니다." 그 말에 웃음을 터뜨리는 소년조차 있었다. "지혜 깊으신"과 "치료사님"은 상호 모순관계에 있기 때문에 렌의 말이 무척 재미있게 느껴졌던 것이다. 렌도 자기 말이 "지혜 깊으신 돌팔이 의사"처럼 들리리라는 것을 알고 쓴웃음을 지었다. 렌의 출중한 미모에 은근히 렌을 의식하던 소년들은 렌이 아무 뒷배경 없는 아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느긋해졌다. 대강 인적사항에 관한 질문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가운데 앉아 있는 면접관이 물었다. "한 조각의 케이크가 있고 사람은 두 명이 있습니다. 이 케이크를 둘에게 나눠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 치료사 렌 [4] 테라미즈에서 나와림 되기 (3) -------------------------------------------------------- '조금 전까지는 미스 홍콩 대회 같더니 이제는 홍콩대학교 면접시험 같군.' 렌은 속으로 웃었다. 고민하던 소년들 중 제일 왼쪽의 소년이 순서를 뺏길까봐 두려운 듯 제일 먼저 손을 들고 대답했다. "두 명 중 힘 센 자가 케이크를 차지하는 것이 맞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굴복시키는 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결국은 힘 센 자가 모든 것을 갖는 법입니다." 다른 소년이 질세라 대답했다. "공평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어른을 불러 케이크의 무게를 정확히 달아 이등분하게 한 후 두 사람에게 나눠 주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두 사람이 스스로 나눠가지다 보면 반드시 싸울 것입니다." 차바크 군이라는 소년이 대답했다. "케이크를 그냥 무게를 달면 크림 부분, 빵 부분이 불균등하게 나뉘어져 불공평해질 우려가 있으니 빵은 빵대로, 크림은 크림대로 무게를 달아 똑같이 나눠줘야 합니다." 페람 군이라는 소년이 대답했다. "어차피 똑같이 나눠줄 수는 없으니 케이크를 팔아 돈으로 분배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렌이 대답했다. "두 명이 제비를 뽑아 순서를 정하게 한 다음, 한 명으로 하여금 케이크를 자르게 하고, 다른 한 명으로 하여금 잘린 케이크 중 자기 것을 고르게 하면 됩니다." 시험관들은 다섯 소년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서로 의논하기도 하다가 추가로 질문했다. "238번 페람 군, 왜 돈으로 분배하는 게 가장 좋다고 대답했지요?" "케이크를 똑같이 자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잘라서 어떻게 나누든간에 약간의 차이는 생길 테니, 불만을 아예 방지하려면 돈으로 나눠주는 게 최선입니다. 케이크를 현금화하면 똑같이 나눌 수 있으니까요. 그것만이 결과적으로 공평? 蠻?수 있는 방법입니다." "478번 파즈 군은 대답의 의미를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다른 시험관이 물었다. 페람 군의 대답을 경청하느라 파즈가 자신의 가명이라는 걸 깜박 잊고 있던 렌은 잠시 멍하니 있다 페람 군이 쿡 찌르자 얼굴을 붉히며 멋적게 웃었다. 렌의 얼굴에 홍조와 미소가 돌자 시험관들과 소년들은 순간적으로 넋을 잃었다. "절차에 있어 정의로운 건 결과에 있어서도 정의롭기 때문입니다. 케이크를 자르는 사람은 자신이 불공평하게 자를 경우 다른 사람이 당연히 큰 걸 골라가고 자신은 작은 조각을 고르게 될 것을 알기 때문에 최대한 공평하게 자르려고 할 것이고, 고르는 사람 또한 케이크가 불공평하게 잘라져도 자신이 큰 조각을 선택할 기회를 가지기 때문에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완벽하게 똑같이 나눌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그게 불가능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갖는 절차를 세우고 그 결과에 승복하게 하는 것이 최선인 것입니다. 케이크를 팔아 돈으로 똑같이 나누는 것도 결과적으로 평등해지는 방법이긴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경우 애초에 케이크를 먹고자 했던 본뜻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번에는 모두들 렌의 지혜로운 대답에 감탄하였다. 짧은 상의 끝에 시험관들은 합격자를 불렀다. "페람 군과 파즈 군은 남고, 다른 지원자들은 오른쪽 문으로 나가십시오." 둘은 서로 기쁨의 눈빛을 교환했다. 2차면접에서 추려진 36명의 소년들은 호명에 따라 작은 방으로 한 명씩 들어갔다. 렌의 이름이 불려지자 렌은 약간 긴장해서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교육국장 자신이 앉아 단 하나의 질문만을 던졌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속속들이 읽힌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습니까? 두렵거나 혐오감이 들지 않습니까?" '아, 황제가 마음을 읽는다더니 정말 그렇나 보네. 마음을 읽히는 데 거부감이 큰 아이라면 나와림으로 일하기가 쉽지 않겠지.' 렌은 납득하고 맹자의 귀절을 인용하여 차분하게 대답했다.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내려보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데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혐오스럽겠습니까? 설혹 제 맘 속에 남에게 보이기 싫은 더러움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런 더러움을 가진 제가 스스로 책임져야 할 부분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이죠." 나와림이 명실상부한 황제의 시동으로 역할하던 시절에는 이 질문을 할 때 어딘가 안 보이는 곳에서 황제가 지켜보며 직접 그 나와림의 마음을 읽었다고 하나, 황제가 나와림에 대한 관심을 끊은 지금에 와서는 지켜보는 황제도 없고 질문 자체도 의미를 잃었다. 그래도 관습은 남아 교육국장은 매년 수많은 소년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다만 심한 거부감을 보이는 소년이 간혹 나타날 때 그런 응시자를 골라내는 기능은 했으니, 아주 무의미한 절차라고까지 할 수는 없었다. 교육국장은 렌의 대답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면접은 끝났습니다. 밖의 방에서 기다리십시오." 한참 후 36명의 소년들이 초조하게 기다리는 가운데 교육국장이 방으로 들어와 빠른 속도로 번호를 불러 내려갔다. "... 그리고 965번. 이상이 합격자입니다. 합격자들은 내일 아침 4파잔(대략 아침 9시)까지 다시 여기로 오셔야 합니다. 내일 바로 황궁으로 가면 다음 번 휴가 때까지는 외부에 나올 수 없으니 가족들과의 작별인사는 오늘 다 하시고 필요한 소지품도 챙겨 오십시오." 최종적으로 뽑힌 열 다섯 명에는 렌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처음부터 떨어지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그래도 렌은 무척 기뻤다. 그런데 렌이 둘러보니 렌처럼 대놓고 기뻐하는 소년은 한 명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소년을 제외한 나머지 소년들은 모두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다는 듯 담담했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렌과 그 한 명 말고는 다 내정자들이었다. 내정자라고는 해도 귀족가문들에서 얼토당토 않은 아이들을 미는 것은 아니어서 모두들 상당히 잘생기고 총명해 보였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우울해하는 소년도 있어, 렌은 나와림이 된다는 것이 모두에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다. 렌은 자신이 택한 길이 현명한 것인지 갑자기 확신이 흔들렸다. 홍콩에 있을 때에도 왕노야의 치료 때문에 정규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렌은 그동안 학교에 대한 갈망을 계속 품고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말에 복잡한 고민 없이 바로 응시한 것이었다. 혹시 예상하지 않았던 복잡한 문제들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이 선택으로 인해 내 인생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렌은 고민을 털어버렸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렌과 함께 면접을 보았던 아까의 페람 군은 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밝아졌? ?하는 것을 쳐다보다가 렌과 눈이 마주치자 상쾌한 미소를 던졌다. 렌은 힘이 났다. 마주 웃어주며 렌은 의욕을 다졌다. =================================================================== 치료사 렌 [4] 테라미즈에서 나와림 되기 (4) -------------------------------------------------------- 렌은 여관으로 돌아와 메니나를 찾았다. 메니나는 렌을 보자마자 물었다. "합격이니? 응?" "네." 렌은 빙긋 웃었다. "잘됐구나, 잘됐어! 나는 틀림없이 네가 붙을 줄 알았단다!" 메니나는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 모습을 보던 렌은 조용히 말했다. "저, 아주머니,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 "저, 혹시나 해서, 이걸 아주머니께 드리려고 해서요." 렌이 건넨 것은 테룬 황자로부터 받은 보석 중 중간 정도 크기인 진주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이었다. "어머나, 이 귀한 걸!" 메니나도 여자인지라 보석을 보니 눈을 빛냈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그걸 받니? 받을 수 없다. 그 비싼 걸." "전 이게 얼만지도 모르는 걸요. 저는 그저, 혹시 저로 인해 신원보증책임을 지셔야 할 일이 생기면 이 보석으로 해결하시라는 뜻에서 드리는 거예요." 메니나는 렌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렌의 어깨를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렌, 네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모르겠다만, 고아인 걸로 보아서는 그동안 혼자 힘으로 이를 악물고 살아왔겠지. 하지만 사람은 본래 혼자서 살 수 없는 존재란다. 아무리 네가 혼자 힘으로 살아온 것 같아도 사실은 중요한 고비고비마다 남의 도움을 받았을 거야. 또 너도 남에게 도움을 주었을 테고. 그러니 사람들에게서 대가 없이 도움을 받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된단다. 남에게서 도움받는 걸 못 하는 사람은 도와주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 법이야. 알겠니? 그리고 세상은 돌고 도는 거니까 네가 꼭 내게 갚지 않아도 다른 사람한테 갚으면 되는 거란다." 뜻밖의 지혜로 가득찬 메니나의 말에 렌은 뭉클했다. 첸사부로부터 마지막 가르침을 받은 이후로 삼 년이 넘게 렌에게 이토록 진심 어리고 따뜻한 가르침을 준 어른은 없었다. 결국 렌은 울음을 터뜨리며 메니나의 푸근한 품에 뛰어들었다. "와아앙, 아주머니!" 훌쩍거리는 렌을 메니나는 흐뭇하게 끌어안으며 등을 쓸어 주었다. "이제 너는 힘들고 살벌한 황궁에 들어갈 테니 그런 패물들이 더더욱 필요할 테지. 정히 내게 뭔가 해주고 싶으면 나중에 출세해서 해 주면 돼. 바보같으니라구." 메니나의 품 속에서 렌은 모처럼 따뜻한 위안을 느꼈다. "아주머니, 언제고 힘들 때 아주머니를 찾아와도 되죠?" "그럼, 당연하지." "아주머니도 어디 편찮으시거나 주위 사람들 중에서 치유마법으로도 안 낫는 사람이 있으면 꼭 저를 찾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치료해 드릴게요." "치료사 주제에 장담은... 아무튼 고맙구나." 메니나는 렌을 그저 보통의 돌팔이 치료사, 혹은 그런 치료사를 따라다니며 어깨 너머로 몇 가지 배운 아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렌의 호언장담에 미소지었다. "장난이 아니라 정말이예요! 아셨죠?" 렌은 간절하게 말했다. 그 진지함에 메니나는 감동받았다. "그래, 명심하마. 너도 황궁에서 몸조심해야 한다." "네." 렌은 다시 아쉬움의 눈물을 떨구었다. 렌은 가지고 있는 짐 전부인 옷가지 몇 벌과 책 몇 권을 보퉁이에 싸서 들고 사무국에 도착했다. 간밤에 내린 눈이 하얗게 쌓여 있는 황도는 대로의 마차 바퀴 자국과 발자국을 빼면 마치 흰색 구름으로 싸 놓은 듯했다. 하늘이 맑아지며 아침햇살이 황도에 붉은 빛과 푸른 그림자를 던졌다. 뽀득거리며 발길을 옮기는 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렌은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누군가? 렌이 아닌가? 스승으로부터 이름을 받고 학문을 배워 여기까지 온 내가 아닌가? 머리를 꼿꼿이 들고 언제나 당당할 것, 사람들을 이해할 것,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할 것, 그렇게만 하면 더 이상 두려움은 없을 것이다. 사무국 앞의 풍경은 원서 교부 때와는 사뭇 달랐다. 최종 합격한 열 다섯 명 중 대부분은 화려한 마차에 황궁으로 가져갈 짐을 바리바리 싣고 왔다. 가장 화려한 마차에 눈길을 주던 렌은 거기서 페람 군이 내리며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자 반갑게 웃었다. 페람 군은 렌을 보자 바로 달려왔다. "에... 파즈 군, 말을 놓고 이름을 불러도 돼? 내 이름은 파니안이야. 파니안 크리에스넨 데 페람." 다짜고짜로 허락을 생략하고 말을 놓는 그의 모습에 렌은 웃음을 터뜨렸다. 종달새 웃음소리같은 아름다운 소리에 주위의 사람들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멍하니 렌을 바라보았다. 파니안도 마찬가지였다. "고마워. 먼저 그렇게 말해 줘서. 내 이름은 렌이야. 렌 파즈. 렌이라고 불러 줘." 렌이 손을 내밀자 잠시 넋을 잃고 있던 파니안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렌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휴우, 너는 아무리 봐도 정말로 아름답구나. 남자애한테 이런 말을 해서 뭣하지만, 너 정도 미모라면 황립 아카데미의 학생들 모두 남녀를 불문하고 홀딱 반할 거야." "그래서 그 미모에 반해 대 페람 공작가의 자제분도 평민에게 꼬리치고 있는 건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을 건넨 것은 남색 머리에 날카로운 푸른 눈의 미소년이었다. "여어, 수딘, 그러는 대 지페리스 후작가의 자제분은 왜 이 쪽으로 왔는데?" 렌은 험악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겸 수딘이라는 소년을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렌 파즈라고 합니다. 수딘 데 지페리스님." 인사를 마치고 렌이 살짝 미소짓자 수딘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아, 저, ... 그러니까 그냥 말 놓고 수딘이라 불러도 돼. 나도 렌이라 불러도 되지?" "물론이야." 렌이 밝게 웃자 수딘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푸하하핫, 수딘 너도 별 수 없구나. 으하하하!" 파니안은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수딘은 파니안을 째려보다가 다시 렌을 보고는 얼굴을 붉혔다. 수딘과 파니안은 아웅다웅하면서도 사실은 서로를 끔찍이 아껴주는 죽마고우인 듯했다. 렌은 그 둘을 보며 약간 부러웠다. 나도 저런 친한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주위에는 렌에게 인사를 하려는 소년들이 다소 있었으나 대귀족 두 명이 렌 주위에서 떠나지 않자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 잠시 후 교육국장이 나타났다. "자, 나와림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황제 폐하의 나와림으로서 황궁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모두들 지원할 때부터 나와림이 어떤 것인가는 대강 알고 있었겠지만 밖에서 들었던 것과 안에서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으니 모든 것을 새로 배운다는 심정으로 가르침에 잘 따라 주기 바랍니다. 다섯 명씩 마차에 나눠 타십시오. 짐이 많은 사람은 나중에 따로 황궁으로 짐을 보내십시오." 곧 불사조 문장이 아로새겨진 사두마차 세 대가 광장에 멈춰섰다. 교육국장의 지시에 따라 소년들은 다섯 명씩 나누어 마차에 올랐다. 렌은 수딘, 파니안, 그리고 다른 두 명의 소년과 함께 첫번째 마차에 탔다. 낯선 소년 중 한 명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지벤 크로스고, 성 앞에 '데' 같은 건 붙어 있지 않은 평민이야. 그리고 미리 말해두겠지만 난 누구에게도 말을 높일 생각은 없어. 아마 이 중 뒷배경 없이 뽑힌 건 저기 저 애하고 나밖에 없을 거야. 저 애는 엄청난 미모로 뽑힌 거겠지만, 그저 준수한 정도인 내가 뽑혔다는 건 그만큼 내가 실력이 있다는 거지. 그러니 너희 귀족나리들 모두 나를 평민이라고 깔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지벤이라는 소년은 '저 애'라고 하면서 렌을 가리켰다. 당장 수딘이 흥분하여 벌떡 일어나다가 마차 천정에 머리를 부딪혔다. "무례한 놈 같으니라고! 나와림이라면 다 같은 나와림인 줄 알아? 천한 것이 어디서 눈을 부라려?" 수딘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또다른 낯선 소년이 차분하게 말했다. "내 이름은 보크넬 데 사브와야. 사브와 백작가의 둘째 아들이지. 너희들 중 귀족인 파니안, 수딘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일단 황궁에 들어가면 나와림들은 종전의 신분과 관계없이 같은 기 안에서는 평등하게 취급되고, 나와림들 사이의 관례도, 같은 기끼리는 서로 이름만을 부르고 말도 놓는다고 하더군. 아마 선배 나와림들이 자세하게 가르쳐 주겠지만 거기서 편히 지내려면 선배들 하는 대로 따라해야 할 걸. 그러니 지벤, 너도 평민이라고 굳이 자격지심을 드러낼 필요가 없고, 수딘, 너도 천하다느니 어쩌니 흥분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보크넬이 조용한 어조로 할 말을 마치자 수딘이나 지벤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렌이 서둘러 말을 꺼냈다. "내 이름은 렌 파즈야. 렌이라고 불러 줘. 모두들 반가워. 보크넬, 너는 나와림이 어떤 건지에 관해서 여러가지 아는 게 많은 것 같은데, 나랑 지벤을 위해서라도 가르쳐줄 수 있겠어?" 렌이 부드럽게 묻자 보크넬은 주저 않고 대답했다. "너희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들은 기본적으로 장식품이라는 거야. 황궁을 빛내는 장식품 말이야. 물론 지시를 받고 여러가지 일을 하게 되겠지. 예를 들어 수상 각하, 장관 각하들의 집무실에 배치되어 잔심부름을 한다든지,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 걸맞는 의상을 입고 행렬에 참여한다든지, 뭐 그런 일들 말이야. 하지만 그런 일들은 사실 꼭 필요한 일도 아니고 그저 이제는 거의 의미 없어진 나와림 제도를 차마 없앨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나와림들이 황궁에 머무를 핑계를 만들기 위해 억지로 배당한 일일 뿐이야. 원래 나와림은 인질을 겸해서 황제 폐하의 즐거운 밤을 위해 귀족들로부터 바쳐진 미소년들이었다는 사실은 너희들도 모두 알고 있겠지? 내가 알기로는 폐하께서 마지막으로 나와림을 취하시고 나와림 안딘의 칭호를 내리신 것은 벌써 30여 년 전 일이지만, 그래도 ? 痢??모두 언제라도 그렇게 될 가능성은 있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귀족가문에서도 대부분 장자는 제쳐놓고 둘째나 막내만 나와림으로 들여보내는 거고." 보크넬은 거기서부터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그 30년 전의 나와림 안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황제 폐하 대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폐하께 들켰다고 해. 폐하께서는 그 나와림의 기억을 지우고 나와림의 애인을 데려다 눈앞에서 죽인 후에 다시 그 나와림의 기억을 돌려 놓으셨대. 너무 충격적인 장면을 본 그 나와림은 그 자리에서 백치가 되었고. 물론 가족들에게는 부와 명예가 주어졌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었겠어? 황제 폐하의 곁에서 시중드는 나와림이 전부 다른 데로 가고 모든 나와림이 내각이나 그밖의 기관에 배치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래." 보크넬은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일이 생길 가능성은 희박해졌고, 나와림으로 일하면서 국가대사가 행해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다는 건 어마어마한 기회이기도 해. 나와림 출신 중에서 높은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 많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귀족들도 그러니까 자식들을 나와림으로 들여보낼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고. 결국 나와림의 경험에서 무엇을 얻느냐 하는 것은 개개인의 역량에 달린 일이겠지." 보크넬의 말에 모두들 엄숙해졌다. 보크넬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나도 신입생이긴 하지만, 황립 아카데미 학생들은 나와림을 '황제의 장난감'이라고 부른다고 하더군. 걔네들은 한편으로는 우리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경멸하기도 하니까 아카데미에서도 처신을 조심해야 할 거야." 렌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보크넬, 정말 고마워. 너는 참 아는 것이 많구나." "아냐, 이 정도쯤이야." 보크넬은 렌이 정색을 하고 감사를 표하자 수줍어했다. 지벤도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너무 다짜고짜로 말을 꺼내서. 우리 모두 잘 해 보자." 렌은 수딘을 보고 생긋 웃으며 말했다. "수딘, 너도 사과할 거지? 지벤도 벌써 사과했쟎아. 사과할 때 해야 진정한 사내 대장부이지." 렌의 웃음에 다시 얼굴이 빨개진 수딘은 지벤을 곁눈질하며 작은 목소리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미안해." 파니안은 서로 사과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 말했다. "너희들 모두 혹시 누가 너희들을 나와림이라는 이유로 따돌린다거나 하면 바로 내게 얘기해. 이래봬도 나는 작년에 1학년의 리더였거든. 내 힘 닿는 대로 너희들을 보호해 줄 테니까 안심해." 수딘이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으르렁거리며 파니안을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파니안, 너같은 약골의 보호를 받으라고? 너 많이 컸다. 왕년에 내 주먹에 맞아 울던 때가 엊그제같은데." 그 말에 모두들 와르르 웃었다. 렌은 갑자기 유쾌해졌다. 렌이 또래와 어울리는 일은 아주 어릴 때 마을 친구들과 놀던 걸 제외하면 이번이 거의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소년다운 치기와 열정과 희망에 가득찬 이들과 어울리고 있자니 렌은 비로소 원래의 나이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고향 마을에서도 아버지의 구박 때문에 렌은 속 편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홍콩에 있을 때는 싫든 좋든 어른 노릇을 해야 했다. 왕노야 앞에서는 한 치의 빈틈도 보일 수가 없었고, 자오 앞에서도 무의식적으로 그가 바라는 대로 다 자란 여인처럼 굴 수밖에 없었다. 지금에서야 렌은 그동안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짐이 얼마나 무거웠던가를 깨달았다. 이제 미성년과 학생에게만 허락되는 시행착오의 자유가 눈앞에 있었다. 이제는 지나치게 어른스럽게 굴지 않아도 돼. 아니지, 열 다섯이라고 적어 냈었으니 실제 나이보다 한 살 더 어리게 행동해도 되겠군. 거기에다 소년 노릇을 하고 있으니 렌은 훨씬 더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렌은 나와림 시험을 보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 치료사 렌 [4] 테라미즈에서 나와림 되기 (5) -------------------------------------------------------- 30분쯤 지나자 마침내 마차는 황궁에 도착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소년들은 마차가 멈추자 조용해졌다. 교육국장의 지시로 모두들 마차에서 내렸을 때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눈부시게 아름다운 황궁의 모습이었다. 파니안과 수딘은 전에 황궁에 와 본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담담했지만 나머지 소년들은 입을 쩍 벌리고 눈앞의 광경에 감탄하였다. 렌도 역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전체적인 황궁의 모습은 무굴 제국 풍 인도 이슬람 양식과 흡사했고, 황궁 벽을 장식한 덩굴과 꽃잎 무늬는 로코코풍과 아라베스크 장식을 뒤섞어 놓은 것 같았다. 차례로 도착한 다른 두 마차에서 내린 소년들도 역시 앞의 소년들처럼 감탄했다. 교육국장은 소년들이 모두 내리자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은 황궁의 후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외부에 출입할 때 항상 후문으로만 다녀야 합니다. 여러분들 중 대귀족 출신으로서 국가행사 때 부모를 따라 정문을 이용했던 사람도 있겠지만, 나와림의 신분이 된 이상 출신에 상관없이 나와림의 법도를 지켜야만 합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대답했다. "그리고 후원 저쪽에 있는 것이 바로 황립 아카데미입니다. 여기에서 황립 아카데미 정문까지 후원을 통과하여 걸어가면 30분 정도 걸리지만 후문 바로 바깥에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으니 등교할 때는 그걸 이용하면 됩니다." 간단한 설명을 마친 교육국장이 손짓하자 모두들 그를 따라 황궁으로 들어갔다. 황궁 안쪽은 사치스러움과 품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거대한 예술작품이었다. 황제가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더니 정말 그런 듯했다. 어느 한 군데 세심한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고, 고도의 기술과 드높은 예술의 결합 아닌 것이 없었다. 처음 궁전을 지을 때 남대륙에서 드워프 장인들을 초빙해 왔다는 소문이 있었을 정도로 황궁 내 조각과 세공의 정교함은 인간의 솜씨가 아니었다. 황궁 내부는 돔 바로 아래의 중앙홀을 제외하면 5층으로 되어 있는데 한 층 한 층의 천정은 어지간한 2층 주택이 통째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높았다. 나와림들의 숙소는 바로 5층에 마련되어 있었다. 1인 1실에 각각 욕실이 딸려 있다는 말에 렌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5층의 나와림 거주 구역에 도착하니 하얀 토즈릴을 입은 열 여덟 정도 되어 보이는 키크고 빼어나게 잘생긴 청년-도대체 여기는 꽃미남 아니면 취급을 안한다고 생각하며 렌은 속으로 웃었다-이 나와 교육국장으로부터 서류를 인수인계받았다. 교육국장이 떠나자 청년은 열 다섯 명의 소년들을 쳐다보며 말을 시작했다. "여러분, 환영한다. 나는 나와림의 책임자인 올라브이다. 나와림은 황제폐하께 바쳐진 존재라는 것, 성은 없고 이름만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황립 아카데미에 가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자신을 소개할 때 성까지 붙이지 않도록 주의해라. 앞으로 열흘 간은 황궁 내에서의 예절과 행동수칙, 해야 할 일에 대한 교육을 받고 열흘 후에는 황립 아카데미에 입학함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아, 그리고 나와림들의 옷은 모두 황궁에서 지급된다. 따로 옷을 준비할 필요도 없고 밖에서 가져온 옷을 입어서도 안 된다. 여러분들이 입을 토즈릴은 기별로 소매 끝의 색상이 다르다. 여러분은 붉은 색, 한 기 위는 은색, 가장 윗 기는 금색이니 얼굴을 잘 모르는 선배라도 정중하게 인사하도록 해라. 토즈릴의 칫수를 재러 황궁 전속 재단사가 올 테니 각자 방에서 짐을 정리하다가 재단사가 들어오면 방문을 열어주도록 해라. 점심식사 시각은 6파잔(대략 12시)이고 그 때 종소리가 들릴 테니 시간 맞춰 5층 동쪽 끝에 있는 식당으로 오면 된다. 오늘은 그 외의 일과는 없다." 말을 마친 올라브는 곧 소년들 각자에게 배정된 방을 알려 주었다. 소년들은 31번 방부터 45번 방까지로 차례로 배정되었는데 렌은 35번 방이었다. 방은 홍콩의 렌의 아파트에 비하면 작았지만 혼자 지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크기였고 황궁 전체의 인테리어 스타일에 맞추어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넉넉한 사이즈의 침대에는 깃털이불이 덮여 있었고, 하얀 책상과 의자, 적당한 사이즈의 옷장은 모두 치펀데일 풍이었으며, 방에 붙어 있는 작은 욕실에는 수건이며 비누며 필요한 것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도대체 수세식 화장실이며 상수도며 어떤 원리로 작동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수도꼭지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니 그저 반갑기만 했다. 손을 씻은 렌은 보퉁이에 들어 있던 몇 벌의 옷을 옷장에 가지런히 걸고 책을 책상 위에 놓은 후 잠시 침대에 드러누워 한숨을 돌렸다. 렌은 여기가 마음에 들었다. 이제부터 이곳에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깜박 잠이 들었던 렌은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재단사였다. 렌은 졸라맨 가슴이 들킬까 약간 걱정했지만 재단사는 굳이 지금 입고 있는 토즈릴을 벗으라고도 하지 않고 솜씨있게 치수를 쟀다. 잠시 더 쉬던 렌은 여섯 번의 종소리가 들리자 몸을 일으켜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는 올라브가 벌써 와 있었고 그 주위에 신입들이 서너 명 앉아 있었다. 그는 아침보다 한결 편안한 모습이었다. "렌이지? 이리 와 앉으렴." "네, 올라브 선배님." 식당은 대략 5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고 음식은 한결같이 맛있었다. 나와림이 대부분 귀족출신인 덕분에 별도로 나와림을 시중드는 급사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그들이 나와림이 들어올 때마다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 은식기와 도자기로 된 접시를 보며 렌은 은근히 감탄했다. 음식을 먹으면서 올라브는 허물 없는 말투로 소년들에게 필요한 여러가지 정보? ?추가로 가르쳐 주었다. "너희들은 스스로의 일에 자부심을 가져도 돼. 나와림으로서 얻는 건 정말 많거든. 나만 해도 평민 출신이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18세 성년이 되면 바로 외무부의 초급 관료로 일하게 될 거야. 나와림이 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지. 귀족 출신이라도 자기 영지 관리나 하며 지방귀족으로 끝나도 좋은 게 아니라면 여기 중앙 정계가 굴러가는 상황을 잘 봐 두는 게 장차 큰 힘이 될 거야. 어느 부서에서 일하는가는 처음에는 다 위에서 정해 주지만 나중에는 어느 정도 선택의 여지가 있어. 그러니 자신이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잘 생각해 보고 정하도록 해. 아, 그리고 학교 공부는 절대 게을리하면 안 돼. 관료들도 어느 나와림이 아카데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는지 정도는 다 파악하고서 중요한 심부름은 성적이 좋은 애한테 시키려고 하거든. 그리고 황제의 장난감이니 어쩌니 하는 건 다 밖에서 하는 소리들이니 신경쓰지 말고. 도대체 황제 폐하를 뵐 수조차 없으니 말야." 소년들은 모두 놀랐다. "폐하를 뵐 수 없다고요?" "그래. 폐하께선 벌써 백 수십 년간 보통 사람들에게 맨얼굴을 드러내지 않으셨고 요즘에는 회의 때에도 잘 나타나질 않으셔. 폐하의 침전에서 폐하를 수발하는 직속 시녀들은 모두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라 폐하의 용안을 뵐 수가 없어. 폐하께서 나와림 안딘의 칭호를 내리신 지도 벌써 30년이나 됐고, 여자에게 타림 안딘의 칭호를 내리신 것도 40여년 전 일이야. 물론 중요 회의 때에는 폐하께서 마법영상을 쏘아보내 지시하시고 가끔은 폐하 특유의 은보랏빛 광휘를 두르시고 친히 왕림하시기도 하지. 그리고 폐하께서 나타나시든 아니든간에 모든 신료들의 폐하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으니 아무 문제가 없고 말이야." 마지막 말은 의례적 문구였다. 올라브도 스스로 그것을 알고 쑥스럽게 웃었다. "어떤 사람은, 폐하께서 맨얼굴로 다니셔도 이제는 알아볼 사람이 없어져 버렸다고 하더군. 또 어떤 사람은, 폐하께서는 우연히라도 다른 사람에게 얼굴을 보이신 경우에는 그 사람의 기억을 지워 버리신다고 하고. 더 옛날에는 용안을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사형당한 자도 있었다고 해.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황궁에 있는 한 무조건 생각과 행동을 조심하라는 취지야. 모두들 알겠지? 그럼 이만." 올라브가 일어나 나가자 소년들은 돌아가며 자기 소개를 했다. 이미 내정되어 있던 귀족의 자제가 12명, 거상의 자제가 1명이었다. 파니안은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수상의 아들이었고, 수딘은 국방장관의 아들이었다. 그들 모두 둘째 아들이었다. 보크넬의 경우 그 가문인 사브와 백작가는 사브와 기사단을 거느리고 있는 강맹한 무가였으나, 보크넬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계속 아버지에게 실망만 안겨주었기 때문에 나와림이 되어 외교 쪽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드리고 싶어 큰아들인데도 불구하고 졸라 나와림이 된 거라고 했다. 지벤은 알고 보니 기연으로 나이에 비해 상당한 마법력(3써클이라고 했는데 렌은 잘 몰랐지만 아무튼 나이에 비해 대단한 거라고 했다)을 지니게 된데다가 정령마법을 선천적으로 사용할 줄 알아서 그 덕분에 뽑힌 듯했다. 정령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드물어지고 있는 이 때 정령마법사란 정말 귀중한 인재였다. 체이스 멜둔은 '데'가 들어가지 않는 평민이었지만 그의 아버지 멜둔은 서대륙 최고, 아니 동서대륙 통틀어 최고의 거상이었다. 렌도 테라미즈 시내 곳곳에서 '멜둔 상회'의 간판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새삼 체이스를 다시 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만이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군." 렌은 약간 자조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파니안이 황급히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보기엔 이 중에서 가장 제대로 뽑힌 건 너같은데?" 렌은 파니안의 말에 감사의 미소를 던졌고, 그러자 좌중은 렌의 눈부신 모습에 다시 조용해졌다. "휴우, 아무래도 너야말로 맨얼굴을 드러내면 안 될 것 같애. 나는 지극히 정상이고 여자애랑 놀아본 경험도 있지만 널 보면 뭐랄까, 어쩔 줄을 모르겠거든." 수딘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모두들 수딘의 말에 긍정했다. "그래 맞아, 렌은 위험인물이라구. 네가 아직까지 무사한 게 이상해." "아카데미 놈들도 렌을 가만 두지 않을 텐데 우리가 지켜줘야지." 렌은 얘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자 당황했다. "왜들 그래? 나도 여자애랑 놀아본 경험 정도는 있다구." 그 얘기에 모두들 눈을 빛내며 실토하라고 조르는 바람에 렌은 자신의 외모에 반한 소녀들이 쫓아다녀서 고생하던 이야기를 지어내야 했다. 다른 소년들도 차례로 연애담을 털어놓은 덕분에-꽃미남들로 모인 집단이니 연애담은 풍성할 수밖에 없었다-식당은 한동안 웃음으로 가득찼다. 그 다음날부터는 바쁜 일과가 계속되었다. 올라브는 소년들에게 황궁에서의 예절, 의상에 달린 장식과 수실로 신분을 알아보는 법, 일하는 요령 등을 가르쳤고, 새로 맞춘 토즈릴이 도착한 후에는 모두들 그것을 갖춰 입게 하고서 황궁 전체를 한 바퀴 돌았다. 황궁은 중앙부의 돔을 중심으로 그 양쪽으로 정문을 향해 중앙정원을 둘러싸고 디귿자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는 형태였는데, 동쪽 날개(동관)는 황제의 개인공간이고 서쪽 날개(서관)는 내각 집무실이었다. 나와림은 황제에 속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나와림들의 숙소는 동쪽 날개에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동관은 고요하고 인적이 드물었다. 황제가 사람이 많은 걸 싫어한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어서, 동관에서 일하는 시녀의 수는 최소한으로 유지되고 부족한 일손은 마법사들의 마법에 의해 보충되었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동관에 배치되는 나와림은 황제 전용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서 보조 정도였다. 그에 비해 서관은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려 활기가 넘쳤다. 제국의 중요한 일들은 모두 여기에서 결정되었다. 내무부, 재무부, 국방부, 외무부, 법무부 등의 집무실을 차례로 돌며 소년들은 제각기 일하고 싶은 곳을 마음 속으로 꼽았다. 새로운 나와림들이 부서를 돌며 인사할 때마다 사람들은 반갑게 맞았고 이미 배치되어 일하던 나와림들도 신입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열흘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연수기간의 마지막 날에 소년들은 올라브로부터 각자 일할 곳을 배정받았다. 소년들은 먼저 차례로 희망하는 곳을 말했는데 역시 재무부, 국방부, 외무부 쪽을 희망하는 소년들이 많았다. 파니안은 재무부, 수딘은 국방부, 보크넬은 외무부, 지벤은 마법원을 희망했고 모두 희망대로 되었다. 그러나 렌이 황궁도서관을 지망했을 때는 모두 의아한 표정이었다. "이봐, 그 재미없는 절간에서 뭘 어쩌려고 그래?" 수딘이 먼저 물었다. 렌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사실 내가 나와림이 되려고 한 이유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거든. 물론 황립 아카데미에 다니지만 일할 때에도 책을 볼 수 있으면 금상첨화니까." 파니안이 맞장구쳤다. "그래. 렌이 서관에서 일했다간 아마 사람들이 렌의 얼굴만 쳐다보느라 업무가 마비되고 말 거야."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웃음이 멈추기를 기다려 올라브가 말했다. "지금 황궁도서관 자리는 비어 있어. 원래대로라면 거기도 기별로 3교대해가며 근무해야겠지만, 워낙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고 거기 사서인 마법사도 사람이 필요없다고 해서 아무도 배치하지 않았거든.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거기로 배치해줄게." "고마워요, 올라브 선배님." 이미 렌의 팬이 된 올라브는 렌으로부터 감사인사를 듣자 행복하다는 듯 미소짓다가 신입들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헛기침을 했다. 다음날 신입 나와림들은 새벽에 일어나 황금실로 수놓인 불사조 문장을 제외하면 한 점 티없는 하얀 토즈릴을 갖춰 입고 선배 나와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황궁 홀에서 나와림의 맹세를 했다. 의식은 의외로 간단했다. 신입들의 대표인 파니안이 맹세를 선창하면 다른 소년들이 따라 하고 충성의 표식인 황금 불사조 조각을 나와림 대표(올라브)로부터 받아 소년들이 거기에 한 번씩 입맞춘 후 다시 올라브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그런 후 소년들은 황궁 후문 밖의 마법진으로 가 황립 아카데미로 이동했다. -------------------------------------------------------- 치료사 렌 [4] 테라미즈에서 나와림 되기 (6) -------------------------------------------------------- 황립 아카데미는 역시 인도 이슬람 풍으로 지어져 있었다. 중앙건물의 규모는 황궁보다 작았지만 중앙건물을 포함해 몇 개의 건물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어 전체적인 규모는 황궁보다 더 커 보였다. 정부 기관 중에서 마법원만은 아카데미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지벤은 주로 여기서 일하게 될 것이었다. 전부터 아카데미에 다녔던 파니안 등 10여 명 또한 나와림이 되면서 다시 자퇴하고 재입학하는 형식을 취해야 했기 때문에 신입 나와림들은 모두가 입학식 참석 대상자였다. 또 이 날은 나와림들뿐만 아니라 일반 학생들도 함께 입학하는 날이어서 아카데미는 학생과 학부모들로 무척 붐볐다. 남학생들은 다양한 색의 화려한 토즈릴을 입고 여학생들은 역시 화려한 색상의 발목 조금 위까지 오는 소즈릴이란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금색의 불사조 문장이 수놓아진 하얀 색 토즈릴을 입은 꽃미남 열 다섯 명은 단연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나와림들을 보고 수근거리기도 하고 선망과 질시의 눈길을 던지기도 했다. 가장 시선을 많이 받는 것은 파니안과 렌이었다. 파니안은 전 해의 1학년 리더가 이례적으로 자퇴하고 나와림이 되어 재입학했다는 것 때문이었고, 렌은 당연히 그 눈부신 미모 때문이었다. 렌은 쏟아지는 눈길에 어쩔 줄 모르다가 결국 눈을 들지 못하고 입학식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만 했다. 입 학식은 짧고도 감동적이었다. 렌은 어릴 적 그토록 학교에 가고 싶어했는데 결국 다른 세계에 와서 비로소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것이 감격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8써클 마법사인 교장의 축사-여러분은 이 나라의 동량이니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폐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등등-가 끝나자 마법 교수들의 환상마법으로 만들어진 불사조가 학생들 머리 위를 날아다녔고, 테라미즈넨 제국의 국가인 듯한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퍼졌다. 오후에는 수강신청이 있었다. 1학년으로 입학한 렌은 대부분 필수과목을 들어야 했고 1년차 나와림들의 근무시간인 오후 네 시부터 여덟 시(여기 시간으로 하면 8파잔부터 10파잔까지이지만 아직도 렌은 지구 시간으로 환산하는 게 편했다)를 피해서 과목을 골라야 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결국 렌이 신청한 것은 역사학, 문학, 마법의 기초, 기초체육, 수학, 음악이었다(학생들은 누구나 예술 한 가지는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아카데미 창립 당시부터의 황제의 칙명이었다고 한다). 2학년이 되면 귀족들의 제국 통치에 필요한 정치학, 경제학, 군사학, 외교학 등의 고급 과목을 배우게 되고 마법학도 더 세분하여 가르친다고 했다. 여학생들을 위한 영지 관리, 사교술, 궁중예절 등의 강의도 있었다. 커리큘럼만 보아도 렌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렌이 수강신청서를 내고 잠시 한숨을 돌리며 동기 나와림들을 찾고 있는데, 다갈색 머리에 깜찍하게 생긴 미소녀가 종종거리며 렌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선발된 나와림이시죠? 저는 엔샤 데 트레스테스라고 해요. 트레스테스 백작가의 둘째딸이죠. 저도 신입생이랍니다. 나와림님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다른 나와림은 한 분 빼고는 모두 아는 분인데 그대는 어느 귀족가의 자제이신가요?" 야릇한 미소를 띄우며 말을 거는 소녀에게 렌은 조용히 대답했다. "저는 평민이고 제 이름은 렌입니다. 성은 있지만 나와림은 성을 밝히면 안 된다는군요." 소녀는 렌의 말에 미소를 지웠다. "평민이라고요? 그럼 대상인이나 유명한 마법사의 자제분이신가요?" 매우 실망했다는 말투였다. 하지만 렌은 그 소녀가 자신의 신분에 관해 이미 알고 물어본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아뇨. 저는 고아입니다." "그럼 마법을 놀랍게 잘 하시거나 다른 특기가 있으신가 보죠?" "제 특기는 치료술입니다." "치료술이라고요?" 소녀는 이제 경멸하는 투를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렌이라고 했죠? 고생이 심하겠군요. 여기 학생들은 일부 나와림 말고는 모두 귀족들인데 특기도 없이 어떻게 버텨나갈 생각인가요?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하면 나와림 자리도 잃게 되니 잘 해 보는 게 좋을 거예요. 얼굴만으로는 안 된다고요." 소녀는 휙 돌아서서 기다리는 다른 소녀들에게로 가버렸다. 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깜박 잊고 있다가도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신분이라는 게 이곳에서는 참으로 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깨닫곤 했다. 그 때 렌을 발견하고 지벤이 다가왔다. "렌, 너도 벌써 당했냐? 나도 그렇다. 여기 학생들은 귀족이 아니면 아예 취급도 안 하나 봐. 내가 3써클 마법사건 정령사건 뭐건 상관없다는 투야. 신입 나와림 중 대상인의 아들인 체이스 있지? 그 녀석도 벌써 상당히 멸시를 당했다는군. 그 녀석은 내정으로 뽑혔고 그 아버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 나라 최고의 거상인데도 말야." 렌은 조용히 말했다. "신분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지극히 잘못된 일이지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의 생각을 다 뜯어고칠 수는 없겠지. 이 사회 전체가 그렇게 형성되어 있으니까. 그러니 결국 우리는 실력으로 그들의 경멸을 이겨나갈 수밖에 없어. 그렇다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학생들을 적대시하거나 마주 경멸하거나 하지는 마. 그들은 지금까지 받아온 교육에 충실하게 따르는 것뿐이니까. 우리 스스로가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신분이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도 있을 거야. 너무 우울해하지 마." 렌이 밝게 웃자 지벤도 따라 웃었다. "뭐야, 나는 너를 위로하려고 온 건데, 네가 오히려 날 위로하는 거야? 좋은 녀석." 그들이 서 있는 걸 보고 파니안도 다가왔다. 지벤은 간단하게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고 파니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너희들도 알겠지만 나는 대귀족 출신으로서 작년까지 거의 1학년 그룹의 리더였는데, 아버지께서 형이 가문을 이을 테니 나는 나와림이 되어 경험을 쌓은 후 형님을 보좌하라고 하시는 바람에 이번에 나와림이 될 수밖에 없었거든. 그런데 오늘 나와 보니 나와림에 지원하지 않은 주란트 공작가의 크리프가 벌써 내 지지자를 상당히 뺏아갔더군. 나와림은 보통 학생들과는 다른 존재이니 일반 학생의 리더는 일반 학생이 해야 한다는 걸 내세워서 말이야. 매년 있는 일이지만 씁쓸하더라. 아까 렌, 너에게 왔던 그 엔샤 드 크리스테스라는 소녀는 크리프의 약혼녀야. 두 집안 모두 유명한 귀족파이지. 그래서 황제파가 될 수밖에 없는 나와림을 적대시하고 있고. 아마 너희들은 앞으로 나와림이자 평민이라는 이유로 상당히 집단 괴롭힘이나 집단 따돌림을 당하게 될 거야.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해. 그런 고생도 견딜 가치가 있으니까." 그의 충고에 렌과 지벤은 심각해졌다. TV의 청춘드라마에 나오는 것 같은 장밋빛 학교생활을 꿈꾸던 렌은 생각만큼 학교생활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 같아 조금 걱정이 되었다. 다음날 첫 수업은 문학이었다. 렌은 황궁에서 지급된 불사조 문장이 찍힌 공책과 깃털붓, 잉크통을 챙겨 늦지 않게 교실로 찾아갔다. 수업을 듣는 학생 수는 30여명 정도였는데 3분의 2 정도가 남학생, 3분의 1 정도가 여학생이었다. 어제 렌에게 말을 걸었던 엔샤라는 소녀와 지벤, 보크넬(신입 나와림 중 후작 자제) 말고는 모두 모르는 얼굴이었다. 검은 색 토즈를 입은 30대 후반의 교수는 문학의 중요성에 관해 잠시 설명하고 난 후 학생들에게 차례로 일어나 알고 있는 시를 한 편씩 읊어 보라고 시켰다. 대부분 학교에 오기 전 가정교사에게서 충분히 배웠던지 비교적 능숙하게 시를 외었다. 시는 소박한 사랑 노래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기교적으로 뛰어나지는 않지만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 것이 당시나 송시보다는 시경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지벤의 순서가 되자 지벤은 벌떡 일어나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는 시가 없습니다." 교수는 지벤의 옷차림을 쳐다보고 다시 지벤의 얼굴을 뜯어보다 지벤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고는 경멸하는 투로 말했다. "황제폐하를 모시려면 시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민으로서 마법에 재능이 있어 나와림이 된 건 훌륭하지만, 이 학교의 설립취지는 귀족들에게 전 분야에 걸친 폭넓은 교양을 갖추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취지에 따라오지 못한다면 이 학교에 다닐 자격이 없습니다." 지벤은 부끄러움과 분노로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 앉았다. 교수는 다시 약간의 경멸을 섞어 말했다. "이 방에는 지금 평민 출신 나와림이 한 명 더 있는 걸로 아는데, 렌 군이 맞지요?" 렌은 교수의 호명에 일어났다. "어디 알고 있는 시가 있으면 읊어 보도록 해요." 렌이 잠시 멍하게 서 있는 동안 학생들은 노골적으로 비웃기도 하고 킥킥거리며 소근거리기도 했다. 렌은 이 세계의 시 중에는 아는 것이 없어 잠시 난감해하다가 가장 좋아하는 두보의 '강촌(羌村)' 중 첫 수를 읊기로 했다. 서쪽 하늘에 드높은 노을 구름 햇살 한 줄기 평지를 비추네 사립문에 새들이 지저귀더니 천리 밖에서 손님이 돌아왔네 처자식은 내가 온 것 괴이하게 여기다 놀라움 가시자 눈물을 훔치네 세상 난리에 떠돌다가 우연히 살아 돌아오니 이웃사람들 담 너머로 모여들어 감탄도 하고 한숨도 짓네 밤이 깊도록 촛불을 밝히니 마주 앉은 사실이 꿈만 같구나. 렌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풍부한 감정을 넣어 시를 읊자 교실은 조용해졌다. 교수는 감동하여 눈물까지 글썽였다. "처음 듣는 시인데 설명을 해 줄 수 있습니까?" "세상이 어지러웠던 시절, 이 시를 지은 시인은 전란에 휩싸여 평생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으로 알았고, 고향의 가족들은 모두 이 시인이 죽은 줄로만 알았답니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집에 돌아오니, 가족들은 처음엔 믿을 수 없어 하다가 놀라움이 가시자 한없이 울게 됩니다. 시인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웃 사람들도 소식을 듣고 집 밖에 몰려와 잘 돌아왔다고 감탄하기도 하고 돌아오지 못하는 자기들의 가족들 때문에 한숨을 짓기도 하지요. 마을 사람들 떠나고 아내와 밤늦게 마주 앉으니 지금 이렇게 살아서 다시 보는 것이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현실인 것 같기도 하고 꿈 같기도 하다는 시입니다. 우연히 발견한 시집에서 읽고 외어 두었는데, 시인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렌은 시를 알게 된 경위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교수는 다시 감탄했다. "정말 훌륭한 시로군요! 처음에는 평이하고 잔잔하게 풍경을 묘사하고 주인공이 돌아왔음을 담담하게 알리다가, 그 다음엔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끝으로 부부간에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아 밤늦게 앉아있는 모습으로 맺으니, 마치 실제 그 장면을 보는 듯 애끊는 심정이 손에 잡힐 듯하고, 또 개인의 슬픈 경험을 서술함으로써 세상이 어지러우면 안 된다는 시인의 염원까지 드러내고 있군요! 아아, 이 정도 수준의 시를 내가 아직까지 몰랐다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렌은 교수의 시를 보는 안목이 생각보다 훌륭한 데에 감탄했다. 좀전의 지벤에 대한 태도를 보고 잠시 실망했었지만, 저 정도면 황립아카데미의 교수 자리는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과목도 저 선생님 같으면 수업을 들을 보람이 있겠다고 생각하며 렌은 기뻐했다. 교수는 수업할 생각은 완전히 집어치웠는지 아예 렌을 교탁 앞으로 불러 그 시집은 언제 어디서 발견했는지, 아직도 가지고 있는지, 지금 가지고 있지 않다면 외우고 있는 시가 있는지 꼬치꼬치 물었고 렌은 적당히 둘러대며 대답하다가 결국 외우고 있는 시를 정리해서 교수에게 주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그렇게 첫 문학 수업은 끝나버렸다. 수업이 끝나자 지벤과 보크넬이 렌 주위로 달려왔다. "와아, 굉장한데! 진짜 근사한 시였어!" 지벤이 먼저 감탄했다. 보크넬도 맞장구쳤다. "그래, 특히 네가 그 감수성 풍부한 목소리로 미모를 빛내며 읊으니까 더 감동적이더라!" 렌은 이들의 칭찬에 수줍어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아직 주저하며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학생들의 지벤과 렌을 보는 눈도 한결 호의적이 된 듯했다. -------------------------------------------------------- 치료사 렌 [4] 테라미즈에서 나와림 되기 (7) -------------------------------------------------------- 둘째 시간은 체육이었다. 귀족들의 교양체육답게 종목은 승마였다. 그것도 모두 어느 정도 승마를 터득했다는 전제 하에 기초는 건너뛰고 장애물 넘기부터 시작이었다. 첫째 시간의 학생들이 거의 그대로 같은 수업을 듣게 되어 렌과 지벤, 보크넬은 또 한 반이었다. 보크넬은 귀족이면서도 몸이 약해 승마를 잘 못한다며 난감해 했지만 렌과 지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둘 다 말을 타기는커녕 말을 만져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차례로 한 명씩 말을 골라 탔다. 보크넬은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그럭저럭 큰 사고 없이 장애물을 무사히 넘었다. 그리고 지벤의 차례가 되자, 지벤은 궁리 끝에 일단 말에 탄 후 바람의 정령을 불러 아예 장애물 앞에서 말을 통째로 들어 옮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지벤의 말은 코스가 끝날 때까지 둥둥 떠다니며 한 번도 땅을 밟지 않았다. 엄청나고 기상천외한 광경에 학생들은 입을 쩍 벌렸고 승마 교수는 망연자실했으나 어쨌든 장애물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코스를 돌았으니 목적은 달성한 것이었다. 지벤은 보란 듯이 말에서 내렸고-아니, 말과 함께 공중에서 내렸다는 표현이 맞았다. 말에서 내릴 때에도 역시 정령의 힘으로 둥실 떠서 내렸다-자신만만한 미소를 주위에 던졌다. 학생들은 비로소 지벤이 아무 이유 없이 나와림이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 그에게 경외의 시선을 던졌다. 이제 마지막으로 렌이 남았다. 렌 앞으로 배정된 말은 유난히 크고 신경질적이고 사나워 보이는 검은 말이었다. 엔샤가 얄밉게 웃는 것으로 보아 심상치 않았다(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엔샤가 마굿간 하인에게 돈을 집어 주고 그 말을 일부러 렌에게 배정되도록 조작했다고 했다). 아무튼 렌이 망설이며 말 곁으로 다가가려는데 지벤이 렌에게로 왔다. "이봐, 네 말도 띄워줄까?" 렌은 좀전의 광경을 떠올리자 참을 수 없이 재미있어져서 아름다운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렌의 살인미소는 아카데미의 학생들에게도 효과가 있어 모두들 렌을 바라보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지벤도 마찬가지였다. "아냐, 괜찮아. 어쨌든 고마워. 근래에 본 중 제일 재미있는 광경이었어." 렌은 계속 웃으며 그 사나워 보이는 말에게로 다가갔다. 렌은 태평한 심정이었다. 말 타기 힘들면 안 타면 된다는 기분이었다. 학생들 앞에서 체면 상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렌이 접근하자 말은 신경질적으로 투레질을 하며 뒷걸음질쳤다. 어지럽고 불안한 말의 태도는 아무래도 단순히 성격이 나빠서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렌은 조용히 정명기를 일으켜 손에 모았다. 그리고 말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말은 무척 기분이 좋은지 가만히 있었다. 문득 렌은 기가 뭉쳐 있는 곳을 발견하고 털을 더듬었다. 반 치 정도 되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렌은 조심스레 가시를 빼고 그곳에 정명기를 조금 더 주입해 주었다. 말은 가시가 빠지자 고마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렌의 얼굴에 자신의 머리를 비볐다. 렌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에 올라탔다. "너는 절대 나를 떨어뜨리지 않겠지?" 말은 그렇다는 듯 히히힝 울며 힘차게 달렸다. 정말 명마였다. 말은 장애물 코스 정도는 장난이라는 듯 순식간에 한바퀴를 돌더니 그것으로는 부족한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다시 히힝거리며 승마장 건너의 평원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렌은 고삐를 꼭 잡고 말에게 몸을 맡겼다. 말과 하나가 되어 대지를 달리는 기분을 렌은 처음으로 만끽했다. 바람을 가르며 평원을 자유롭게 질주한 말은 겨우 직성이 풀렸다는 듯 여유 있게 렌을 승마장까지 다시 태우고 왔다. 렌은 약간 비틀거리며 말에서 내려 땅을 디뎠다. 처음으로 말에 타 떨어지지 않으려고 정신없이 고삐를 잡고 있던 통에 손바닥이 까지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허벅지가 쓰렸으나 렌은 정말 즐거웠다. 렌은 승마가 이렇게 재미있는 건 줄 알았다면 진작 배울 것을 하고 후회했다. 자오가 승마를 배우라고 권한 적도 있었던 것이다. 보크넬과 지벤이 렌에게로 달려왔다. "굉장해, 어떻게 한 거야?" "후훗, 너만큼 굉장하지는 않아, 지벤. 내가 치료사라는 건 알고 있지? 말 옆구리에 가시가 박혀 있어서 빼 줬더니 무척 고마워하면서 신나게 태워 주더라." 승마교수도 렌 곁으로 왔다가 그 말을 들었다. "놀랍군요. 검은돌이가 며칠 전부터 몹시 신경질적이 되고 말을 안 들어서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가시가 박혀 있었다니. 앞으로 우리 말들이 이상한 증세를 보이면 봐 줄 수 있겠어요?" 렌은 흔쾌히 응낙했다. "대신에 앞으로 승마시간엔 검은돌이를 타게 해 주세요. 너무 착한 아이라서 헤어지기 싫으네요." 승마교수도 기쁘게 응낙했다. 결국 그날 수업 중 잘 풀리지 않은 것은 마법수업뿐이었다. 마법에 경험이 있는 학생들은 다들 더 수준높은 과정을 선택하여 마법기초반에 들어온 학생들은 진짜 초보들뿐이어서 (지벤은 마법의 기초는 들을 필요가 없다면서 3학년 과정을 선택했다) 수업은 마나를 느끼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렌은 교수의 설명에 따라 아무리 노력해도 단 한 점의 마나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렌처럼 전혀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학생들도 반 정도 되었지만, 그런 학생도 교수가 마나를 주입해 주면 그걸 통해서 느끼기라도 했는데, 렌의 경우는 교수가 아무리 마나를 주입해도 그게 계속 튕겨나가면서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교수는 이런 경우는 처음 보겠다며 의아해하면서 거듭 시도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렌은 원래 치유마법을 배우겠다고 여기 들어온 건데 정작 마법을 배우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싶어 난감했다. 그래도 렌은 아카데미에 온 후로 묘하게 태평스러운 기분-나는 학생에 불과하니까 할 만큼 해서 잘 되면 좋고 안 되면 그만이라는-이 들어 속상해하지는 않았다. 배울 것은 태산 같았고 학생 신분으로 있는 것 자체가 즐거웠던 것이다. 살기 위해 당장 뭔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유쾌하고 무책임한 기분을 얼마만에 느껴보는 것인지. 다른 학생들은 대부분 오후 수업을 하나 더 들었지만 렌은 나와림으로서의 근무를 위해 다시 황궁으로 돌아와 설명 들었던 대로 황궁도서관을 찾아갔다. 황궁 도서관은 동관의 끝 2층과 3층에 걸쳐 있었다. 역시 동관은 사람이 없었고, 가끔 눈에 띄는 시녀들도 고개를 숙인 채 발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지나가곤 했다. 도서관 문 앞에 도달한 렌은 조심스럽게 거대한 문을 열었다. 끼익 하는 소리가 울려퍼져 렌은 약간 긴장했다. 도서관 안에는 엄청난 수의 서가가 자리잡고 있었고 얼핏 보아도 대략 10여만 권은 될 듯한 책이 꽂혀 있었다. 높이 뚫린 창에서 햇살이 한 줄기 쏟아져 내려 실내를 비추고 오래된 책의 향기가 코를 찔렀다. 그립고 정다운 향기였다. 아아, 이 서권기와 문자향. 이 세계에 온 후 줄곧 책이 고팠던 렌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책들을 쓰다듬었다. 고향에 온 느낌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름답지만 감정이 섞이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에 렌은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은보라빛의 긴 머리를 드리운 키 크고 조각같이 아름다운 청년이 목소리만큼이나 차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입은 연한 푸른 색 토즈는 마법사를 상징했고 토즈 소맷자락에 수놓아진 다섯 개의 지팡이는 그가 5써클 마법사인 것을 뜻했으므로, 그는 아마도 이곳의 사서인 5써클 마법사인 듯했다. 렌은 놀람을 진정시키고 정중히 인사했다. "저는 신입 나와림인 렌입니다. 이곳에 배정받았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시켜 주십시오." 렌은 마법사가 자신을 소개하기를 기다렸으나 그는 아무 말이 없이 렌을 냉랭하게 내려다볼 뿐이었다. 렌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보라빛과 은빛이 섞인 아름다운 눈이었다. 그의 눈을 쳐다볼수록 묘하게 눈이 시리고 눈물이 났으나 렌은 소매로 눈물을 찍어내며 눈을 피하지 않고 계속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정신이 아득해져도 렌은 계속 눈을 깜박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렌은 빛이 어른거리는 마법사의 눈 속에서 언뜻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슬픔과 고독을 본 듯했다. 마법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어찔하던 이상한 느낌은 사라지고 렌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렌은 마법사가 자신에게 무언가 마법을 걸려다가 중단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렌은 다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마법사님, 마법사님의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마법사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내 이름은 카엔입니다. 여기는 나와림이 필요없으니 다른 곳으로 보내 달라고 하십시오." 렌은 약간 애가 타 마법사에게 말했다. "그럼 절대 방해가 되지는 않을 테니 여기서 책을 읽을 수 있게 해 주시겠어요? 제발 부탁입니다." 렌의 간절한 눈빛에 마법사는 약간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큰 소리를 내거나 내 주위로 오지 마십시오. 알겠습니까?" "물론이예요! 쥐죽은 듯이 조용히 앉아 책만 읽을게요." 렌은 기뻐서 활짝 웃었다. 렌의 아름다운 미소에 카엔의 냉랭한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카엔님, 감사합니다! 저는 그냥 렌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리고 심부름 시키실 일 있으시면 뭐든지 시키시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렌은 카엔이 귀찮다는 듯 손을 젓자 곧 웃음을 멈추고 까치발로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며 서가로 걸어가 책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카엔이 조용히 렌의 뒷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을 렌은 알지 못했다. 아아, 이 수많은 책의 바다에 빠져 그냥 여기서 죽어도 여한이 없겠어 하고 생각하며 렌은 정신없이 책의 제목을 구경했다. '마법의 생물', '동서제국 비교연구', '기사 오스트렌과 공녀 라비아의 이야기', '귀족의 예의범절', '지리지' 등 모든 책이 새롭고 흥미로웠다. 원래는 의술에 관한 책을 먼저 골라 읽으려 했지만, 자신이 몸담게 된 세계가 어떤 곳인지 아는 것이 급선무인 것 같아 렌은 결국 '지리지'를 먼저 뽑아들었다. '지리지'는 약 200년 전의 어느 귀족 출신 여행가가 동대륙, 서대륙은 물론 남대륙의 북단까지 여행한 이야기를 적어 놓은 여행기였다. 그 무렵은 아직 동대륙이 통일되기 전이어서 저자는 동대륙 여행 중 툭하면 산적들에게 쫓기기도 하고 미녀를 구하기도 하다가 마침내 '드래곤의 회랑'이라는 지협을 타고 남대륙까지 건너가 엘프를 만나고 온다는 내용이었다. 상당한 과장이 섞여 있는 듯한 문투에 렌은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순식간에 책을 읽어내려갔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짧은 겨울해는 벌써 지고 도서관 안은 간간이 빛나는 야광주 주위를 제외하고는 캄캄해졌다. 거의 세 시간을 꼼짝 않고 책을 읽어서인지 렌은 목이 깔깔하고 입술이 말랐다. 어둠 건너편에 카엔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열중해서 책을 읽고 있는 듯했다. 아까 그의 눈 속에서 본 것은 착각이었나, 정말이었나? 그의 슬픔과 고독은 렌이 몸을 떨 정도로 깊고 끝이 보이지 않았었다. 렌은 문득 그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지금 잠시 성별과 과거를 숨긴 채 즐기고는 있지만 자신은 결국 이 세계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외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또한 렌 자신만큼이나 외로운 존재인 듯했다. 갑자기 카엔이 고개를 들어 렌을 바라보았다. 아까와는 다른 강렬한 눈빛이었다. 렌은 피하지 않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을 담아 미소지었다. '나는 당신이 고독하고 슬픈 사람이란 걸 알아. 나도 외로우니까. 나로 인해 당신의 고독과 슬픔이 덜어질 수 있으면 좋겠어.' 하고 렌은 생각했다. 그는 왠지 흠칫 놀라다가 벌떡 일어섰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돌아가십시오." 렌은 다시 인사했다. "오늘은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카엔님.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렌은 본능적으로 카엔이 오늘 그동안 쌓아온 고독의 성역을 조금이지만 포기하고 렌에게 내어주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감사의 인사는 그에 대한 것이었다. 카엔은 렌에게 뭔가 말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고 몸을 돌렸다. 오후 네 시부터 여덟 시까지의 근무를 마친 1년차 나와림들은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에 모였다. 소년들은 모두들 흥분해서 정신없이 그 날 근무 얘기를 했다. 특히 국방부에 근무하게 된 수딘은 유명한 장군들과 기사단장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자신에게 말을 걸어 주었다고 자랑하다가 그래서 도대체 네가 한 일은 뭐냐는 질문에 군사기밀이라 대답할 수 없다고 뻐기며 대답함으로써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렌도 질문을 받았으나, 왠지 카엔에 대해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저 책이 무척 많았고 사서가 잘 해 주었다고만 대답했다. 렌은 잠자리에서 그날 하루를 돌아보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세계에 온 후로 렌은 사람들의 몸의 상처뿐만 아니라 마음의 고통까지도 잘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테룬 황자의 경우도 그랬고 카엔도 그랬다. 죽음에 이를 정도의 고통을 당했었기 때문인가. 나 자신의 고통을 통해 다른 사람의 고통도 볼 수 있게 된 것인가. 몸의 치료사뿐만 아니라 마음의 치료사까지 할 생각은 없는데. -------------------------------------------------------- 치료사 렌 [4] 테라미즈에서 나와림 되기 (8) -------------------------------------------------------- 다음날은 역사학, 수학, 음악의 첫 수업이 있었다. 역사학 수업은 수업 자체로는 지금까지 중 가장 재미있었다. 역사학 교수는 기초를 중시하는 사람이어서 다른 학생들은 모두 익히 배워 알고 있는 내용까지도 자세히 설명해 주었고 그 덕분에 렌은 이 세계의 창세신화부터 착실히 배울 수 있었다. 이 세계의 창세신화에 따르면, 태초에 세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위대한 의지'가 눈을 떴다. 위대한 의지는 자신을 빛과 어둠의 둘로 나누었고, 빛과 어둠은 곧 충돌하며 세계를 만들어냈다. 하늘과 땅과 물이 생겼고, 빛과 어둠은 자신의 신성을 하늘과 땅과 물에 나누어 주고 이제 신의 속성을 잃었다. 그리하여 하늘의 신, 대지의 신, 물의 신이 생겨났다. 여자인 하늘의 여신, 남자인 대지의 신, 중성인 물의 신은 서로 교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사계절의 여신이 태어났다. 봄의 여신과 가을의 여신은 하늘의 신과 대지의 신의 교합으로, 여름의 여신은 하늘의 신과 물의 신의 교합으로, 겨울의 여신은 대지의 신과 물의 신의 교합으로 생겨났다. 또 이들은 다시 동서남북 네 방위의 남신을 낳았다. 사계절의 여신들과 동서남북의 남신들은 다시 서로 교합하여 온 세상에 생명을 채우고, 다양한 권능을 지닌 수많은 신과 여신들을 낳았다. 지성 있는 존재 중에는 가장 위대한 생물인 드래곤이 가장 먼저 생겨났고, 그 다음 엘프와 드워프가 생겨났다. 한동안 그들만으로도 세상은 좋았다. 그러나 신들과 여신들은 드래곤, 엘프, 드워프 모두 자신들을 찬양하거나 숭배하지 않자 우울해하며, 신들의 위대함을 알고 섬길 새로운 종족을 만들자고 결의했다. 그리하여 인간이 만들어졌다. 계절의 여신들은 힘을 모아 여자를 만들고, 동서남북의 남신들은 남자를 만들었다. 이들은 끝없이 번성하여 온 세상을 채워 나갔다. 여기까지가 신화의 세계이고, 그 다음은 역사였다. 교과서의 목차를 대강 흝어본 렌은, 서대륙의 '검푸른 내해' 유역의 두 줄기 강(토인 강과 아인 강) 사이 '축복의 평야'에서 최초의 문명이 발생하여 문명이 동서 대륙으로 두루 퍼져 나가 수많은 소국들이 생겨나고, 대략 천 삼백 년 전쯤에 동서 대륙을 아우르는 통일제국이 건립되어 육백 년간 지속되다가 멸망하였으며, 그 후 다시 크고 작은 나라들이 동서 대륙의 패권을 다투다가, 마침내 삼백 오십 년 전에 서제국에서 테라미즈넨 제국이 세워졌음을 알았다. 렌은 이 곳의 역사에 몹시 흥미가 생겨 반드시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수학 수업은 솔직히 실망이었다. 이곳의 최고 수준은 대략 2차방정식을 인수분해로 푸는 정도였고 고차방정식이나 미적분은 아예 언급조차 없었다. 그 정도는 첸사부로부터 열 살 무렵 다 배워 끝낸 렌은 결국 수강신청을 취소하고 고급반으로 옮기기로 했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수강신청을 취소하러 간 렌은 기분나빠하는 수학 교수로부터 실력을 테스트받아야 했는데, 그 교수는 점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나중에는 렌을 앉혀 놓고 자신이 평소에 풀지 못했던 문제들을 늘어놓으며 풀어 보라고 하여 결국 렌은 점심시간을 거의 까먹을 수밖에 없었다. 수학 교수는 바로 렌을 자신의 스승인 고급 수학 담당 교수에게로 데리고 갔다. 결국 렌은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해당 시간에 고급 수학 교수로부터 연구과제를 받아 혼자 연구하고 고급 수학 교수와 토론하는 일종의 연구생이 되었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는 아직도 나와림들끼리만 모였다. 일반 학생들은 나와림들 근처에서 한 발 떨어져 꽃미남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선망 또는 질시의 눈길로 쳐다보며 수근거렸다. 보크넬의 말로는 매년 있는 일이라고 했다. 한동안 이렇게 탐색전이 계속되다가 나와림에게 접근하는 학생들과 나와림을 멀리하는 학생들로 나뉜다고 했다. 보크넬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다만 금년의 판도는 조금 복잡해. 전년도의 리더가 나와림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거든. 파니안이 이번에 나와림이 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금년에는 나와림에 친화적인 학생이 훨씬 많아질지도 몰라. 내 생각으로는 수상 각하께서 그런 점을 고려하여 당신의 아들을 나와림으로 들여보내신 것 같아." 지벤, 보크넬, 체이스는 보크넬의 말에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황제파와 귀족파의 알력이 그렇게 심하단 말이야?" 체이스가 물었다. 평민인 그에게 귀족 내의 갈등은 피부에 와닿지 않았다. "최근 들어 귀족파의 세력이 조금씩 커지고 있거든. 황제 폐하의 무서움을 깨닫지 못하는 가소로운 자들이지. 지금 귀족파들은 황제 폐하의 권력을 느껴본 적이 없는 애송이들이라고 할 수 있어. 자기들은 사실 황제 폐하의 은덕 하나에 의지해서 권력을 유지하는 하루살이같은 존재인 주제에, 감히 귀족에게 더 많은 권한을 달라는 둥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는 한심한 자들이야." 철저한 황제파의 자식답게 보크넬은 냉정하게 말했다. "그럼 우리들은 황제파인 건가?" 지벤이 물었다. "그럼, 당연하지. 나와림과 제국 관료들은 무조건 황제파라고 할 수 있어. 황제 폐하에 의해 임명된 사람들이니까, 그 지위와 권력의 기반은 폐하에게서 나오는 거거든. 아무 것도 차지하지 못한 자들이 귀족파 운운하는 거지." 렌은 약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우리는 그냥 공부만 열심히 하면 안 돼 ? 나는 그저 공부를 하려고 여기 들어온 건데." 보크넬은 렌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공부만 해도 돼. 어차피 그런 문제들은 우리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성년을 맞아 제갈길을 가게 될 때 생기는 거니까. 멍청한 자식들이 굳이 그런 걸 아카데미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발버둥치는 거지." 외교관을 꿈꾸는 소년답게 보크넬의 분석은 냉철했다. 렌은 약간 걱정이 되었다. 아카데미 내에서 귀족파의 기반이 더 약해진다면 그들이 오히려 더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을까? 렌은 어깨를 으쓱했다. 복잡한 고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았다. 오후의 음악 수업 또한 렌의 마음에 들었다. 맘씨 좋은 노부인처럼 보이는 음악 교수는 황실 전속 악단의 악장이기도 했는데, 학생들에게 샤티(류트 비슷하게 생긴 현악기)를 하나씩 나눠 주고 조율하는 법, 악보 보는 법, 현을 짚고 뜯는 법을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다. 렌은 흥미가 생겨 열심히 음계를 짚으며 연습했다. 그런데 갑자기 렌 옆에 앉아 있던 금발머리의 귀엽고 앳되어 보이는 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샤티의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손가락을 다쳤는지 오른손 검지손가락이 약간 찢겨 피가 나고 있었다. 렌은 정명기를 일으켜 소녀의 손에 살짝 주입시켰다. 곧 피가 멎었다. "나와림님, 치유마법을 펼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소녀는 얼굴 전체를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말했다. 치유마법을 쓴 것이라면 피가 멎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베인 자국 자체가 아물었겠지만 정명기는 주위의 기의 흐름을 바꾸어 피가 계속 나는 것을 막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렌은 굳이 소녀의 착각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뭘 이런 걸 가지고요, 귀여운 아가씨." 소녀는 얼굴을 한층 더 붉히며 말했다. "저는 사이라예요. 사이라 데 주란트랍니다. 저도 신입생이예요. 나와림님의 성함은 어찌 되시나요?" "렌이예요. 그냥 렌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주란트라는 성을 어딘가에서 들어본 듯하다고 생각하던 렌은 주란트가 파니안 데 페람 및 나와림들과 적대하는 공작가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나 소녀의 귀여운 얼굴에는 아무 사심이 없었다. "그럼 렌도 그냥 절 사이라라고만 불러 주세요." 렌은 친구가 생긴 것 같아 기뻤다. 소녀는 렌보다 두어 살 어려 보였지만 어쨌든 철들고 나서 렌이 자기 또래의 여자친구를 가지게 된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무척 수줍어하던 사이라는 렌이 계속 부드럽게 대해 주자 긴장을 풀고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렌과 사이라는 곧 말도 놓기로 했고 함께 듣는 수업 얘기(사이라와는 문학과 음악을 같이 듣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책 얘기 등을 하며 즐겁게 얘기를 나누었다. "렌, 참 이상해. 나는 원래 남학생 앞에서는 입도 못 떼거든. 그런데 렌은 황홀하게 잘생긴 미소년인데도 긴장되지 않고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어. 꼭 여자친구랑 얘기하는 것 같아." 렌은 소녀의 예리한 직감에 뜨끔했지만 곧 웃으며 대답했다. "후훗, 실은 사람들은 다들 나더러 여자같다고 해. 여자애랑 얘기하는 게 더 편하기도 하고. 그래서 사이라를 알게 되어서 참 기뻐." 렌은 사이라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고, 사이라는 더 이상 빨개질 수 없을 정도로 빨개졌다 (참고로 뺨에 입을 맞추는 것은 이 세계의 일반적인 인사법이었다). 다시 도서관으로 갈 시간이 되었다. 전날 책을 읽다 목이 말랐던 렌은 이번에는 나와림 전용 식당에 들러 과자와 티 세트, 찻잎 약간을 얻어 쟁반에 받쳐 도서관으로 들고 갔다. 손에 쟁반을 든 채 무거운 문을 열려다 렌은 약간 비틀거려 하마터면 쟁반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런데 묘한 힘이 밀려와 떨어지려는 쟁반을 받았다. 렌은 고개를 들었다. 카엔이 어느새 무표정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다. "고맙습니다, 카엔님." 렌은 카엔이 마법을 쓴 걸로 짐작하고 생긋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카엔은 얼굴을 찡그리며 쟁반을 가리켰다. "이건 도대체 뭡니까?" "아, 티 세트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렌은 쟁반을 들고 근처의 책상으로 가 쟁반을 놓고 부싯돌로 포트 아래 램프에 불을 붙이고 찻잔을 배열하는 등 부지런히 움직였다. 물이 끓기 시작하자 렌은 램프를 끄고 물이 약간 식을 때까지 한 숨 기다렸다가 적당한 분량의 찻잎을 넣고 차가 우려나자 찻잔 두 개에 세 번 정도 나누어 차를 따랐다. 카엔은 약간 황당하다는 얼굴로 렌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자, 차 드세요. 나와림 식당에서 가져온 거라 최상등품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맛있어요." 렌은 찻잔 하나를 카엔 앞으로 밀어놓았다. 카엔은 약간 주저하면서 렌 앞에 마주앉았다. 기분 좋은 차향이 도서관 안에 은은히 퍼졌다. 차는 맛있었다. 차의 고장이라 할 수 있는 홍콩에 살면서 차 끓이는 데는 일가견이 있게 된 렌이었다. 카엔도 차가 의외로 맛있다고 생각했던 듯 전과 똑같이 무표정하지만 왠지 냉랭함이 가신 듯한 얼굴로 차를 홀짝였다. 렌은 그의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후후후, 내 차가 맛없다고 하지는 못하겠지? 이봐요, 아저씨, 맛있으면 맛있다고 해요!' 카엔이 갑자기 렌을 쳐다봤다. "내일부터는 내가 가져온 찻잎으로 차를 끓여 주십시오." "물론이예요. 하하하." 렌은 카엔이 차가 맛있다고 생각한다는 걸 알고 유쾌하게 웃었다. 렌은 문득 카엔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생각났다. "저,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어제 마법수업 때 저는 교수님께서 아무리 마나를 주입해 주셔도 전혀 마나를 느낄 수 없었는데, 이런 저도 마법을 익힐 수가 있는 건가요?" 카엔은 렌의 몸을 뚫어지게 관찰하다가 말했다. "지금 살펴보니 그대의 몸에는 이 세계와는 다른 전혀 이질적인 기가 자리잡고 있는데, 그 기 때문에 마나가 전혀 자리잡을 수 없는 체질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런 체질로는 절대 마법을 익힐 수 없습니다. 대체 그 기가 뭔지 알려줄 수 있습니까?" 이질적인 기란 아마도 정명기를 말하는 듯했다. 렌은 절대 마법을 익힐 수 없다는 말에 실망하여 힘없이 대답했다. "저는 이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치료술을 배웠는데, 그 기는 사람을 치료하는 데에만 쓰이는 특수한 기입니다." 렌의 말에 카엔은 모처럼 무표정한 얼굴에 호기심을 띄우며 물었다. "처음 듣는 얘기인데, 그 기가 뭔지 보여줄 수 있나요?" 그의 말에 렌은 깊이 심호흡을 하며 정명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카엔의 손목을 짚으려 했다. 카엔은 흠칫하며 렌의 손을 뿌리쳤다. "만지지 마십시오!" 카엔의 신경질적인 태도에 렌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렌은 상처 입은 야생동물을 다루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해치지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마음을 놓으셔도 돼요." 카엔은 약간 머뭇거리며 손을 책상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렌은 카엔의 손목을 다시 가볍게 잡고 눈을 감으며 정명기를 카엔의 몸으로 흘려넣었다. "카엔님, 밤에 때때로 아주 괴로운 악몽을 꾸시죠? 숙면을 취하지 못하시고요. 아침에 일어나면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어 있을 때도 있고요." "어떻게 그런 걸 아는 거죠?" 카엔은 경계하며 렌을 쳐다보았다. "악몽을 꾸는 사람들은 그게 자기 마음에 병이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하곤 하죠. 하지만 사실은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거예요. 맨 처음 원인은 마음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람의 몸과 마음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마음의 병이 몸에 영향을 주고 그게 다시 마음에 영향을 주곤 하거든요. 몸이 건강해지면 마음도 건강해지고, 마음이 건강해지면 몸도 건강해진답니다. 카엔님은 지금 심장이 별로 좋지 않아요.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기운-그게 마법인가요?-으로 용케 지탱하고 있지만, 그 기운은 현상유지를 할 뿐이고 상태를 개선해 주지는 못하는 것 같네요. 그런 경우에야말로 제 치료술이 주효하지요." 렌은 자랑스럽게 설명하며 카엔이 입고 있는 토(겉옷)의 단추를 풀고 셔츠 단추까지도 풀었다. 카엔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옷을 거침없이 풀어헤치는 렌을 쳐다보았다. 렌은 열린 옷깃 사이로 오른손을 집어넣어 카엔의 왼쪽 가슴 부분을 짚었다. 카엔이 다시 흠칫하며 렌의 손을 빼려 하자 렌은 왼손으로 카엔의 오른팔을 꽉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 눈을 지긋이 감고 기를 불어넣었다. 그의 몸 안의 어두움은 생각보다 깊었기 때문에 렌은 무아지경으로 정명기를 한없이 흘려보냈다. 몸 안에 축적된 정명기를 다 흘려넣은 후 렌은 창백해져서 손을 뗐다. 다시 정명기를 가득 채우려면 내일 새벽 내내 운기주천해야 할 것이다. 약간 현기증이 나 휘청하는 렌을 카엔이 잡아주었다. "휴우, 쉽게 고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병의 뿌리가 깊어서 좀 무리를 했네요. 벌써 몸이 훨씬 개운해지셨죠? 앞으로 열흘 정도는 꾸준히 치료를 받으셔야 해요." 렌은 힘없이 덧붙였다. "저 피곤해서 좀 자야겠어요. 근무시간이 끝나는 10파잔(밤 8시)이 되면 깨워주세요. 치료비는 나중에 받을게요." 렌은 말을 마치자마자 책상 위에 엎드려 그대로 잠이 들었다. ===================================================================치료사 렌 [4] 테라미즈에서 나와림 되기 (9) -------------------------------------------------------- 카엔은 자신의 눈앞에서 태평하게 잠자는 소녀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카엔은 어제 렌을 처음 볼 때부터 렌이 소녀라는 걸, 그것도 보는 이의 혼백을 뺏아갈 만큼 아름다운 소녀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렌이 자신의 평온한 생활을 뒤흔들 것임을 알았다. 이 도서관에서의 평화는 아주 어렵게 얻어 소중하게 지켜온 것이었기에 카엔은 렌을 다른 나와림들처럼 다른 곳으로 보내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일부러 눈에 마력을 실어 그녀를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그의 안광을 받은 나와림들은 영문을 모르고 누굴 만났는지도 잊어버린 채 다른 곳으로 가곤 했었다. 그런데 그녀는 조 금도 눈을 피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게다가 그녀는 그의 눈 속에서 슬픔과 고독을 보았다. 그것도 자기 자신조차 찾기 어려울 만큼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것을. 순간적으로 그는 그녀가 자신처럼 마음을 읽는 사람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계속 렌의 마음을 들여다 보았다. 그녀의 마음은 놀라울 만큼 선의로 가득차 있었다. 자신과 대화할 때마다 내비치는 다정함과 기쁨, 책을 대할 때의 지식에 대한 순수한 경외감, 그가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영혼이었다. 그리고 어제 떠나기 전 그녀가 했던 생각들. '나는 당신이 고독하고 슬픈 사람이란 걸 알아. 나도 외로우니까. 나로 인해 당신의 고독과 슬픔이 덜어질 수 있으면 좋겠어.' 마치 그녀가 직접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늘 렌이 오기 전, 카엔은 렌에게 마음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른 나와림들에게 했던 것처럼 그녀를 다른 곳으로 보내 버리고 자신의 얼굴에 대한 기억을 지워 버리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는 두려웠다. 견고하게 쌓은 성 속에서 모처럼 얻은 평온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믿었다가 다시 배신당하기 싫었다. 인간 마음의 추잡함을 또다시 스스로 상처받아가며 확인하기 싫었다. 그런데도 렌이 쟁반을 들고 비틀거리는 순간 그는 그녀를 도와줄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차 대접을 받고-그녀가 끓여준 차는 정말로 맛있었다- '후후후, 내 차가 맛없다고 하지는 못하겠지?이봐요, 아저씨, 맛있으면 맛있다고 해요!'라고 맘속으로 외치는 그녀의 생각에 떠오르는 미소를 억지로 참아야만 했으며, 그녀가 그 이상한 기를 불어넣어 줄 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슴에 따뜻함과 다정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마력으로 가득찬 그의 심장에 온기를 전해 줄 수 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치료가 끝나자 그녀의 말대로 그동안 무언가 누르고 있는 듯 답답했던 가슴이 훨씬 가벼워졌다. 이 소녀는 어떻게 그런 걸 할 수 있었던 걸까? 도대체 누구이길래? 그녀가 '다른 세계'라고 할 때 언뜻 비쳤던 이미지는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이상한 건물들, 무성한 숲, 열대의 바다, 피와 죽음. 그의 것만큼이나 처절한 슬픔과 고독. 그런데도 그녀의 영혼은 맑고 밝게 났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의 말과 그녀의 생각은 서로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이 소녀를 믿어도 되는 걸까? 카엔은 깊이 잠이 든 렌의 뺨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좀전의 치료는 그녀에게 상당히 힘든 일인 듯했다. 그녀를 깨우지 말고 방에 데려다 눕혀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카엔은 낭패감을 느꼈다. 그녀에게 방 번호를 묻지도 않고 그녀의 생각을 읽지도 못했었기 때문에 그녀가 몇호실에 머무는지 몰랐던 것이다. "할 수 없지." 카엔은 잠시 순간이동하여 당직근무하는 궁내관 앞에 나타났다. 꾸벅꾸벅 졸며 동관을 지키던 궁내관은 갑자기 자기 앞에 나타난 현란한 은보라색 빛무리를 보자마자 황급히 바닥에 이마를 대며 절했다. "화, 황제 폐하."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두려움에 질려 더듬거리는 궁내관을 차갑게 바라보며 카엔은 명령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나와림들의 명단과 숙소배정명세서를 달라." "예, 폐하. 즉시 대령하겠나이다." 궁내관은 다시 황급히 몸을 일으켜 감히 빛무리 쪽은 바라보지도 못한 채 서류철을 뒤적이다 곧 서류를 찾아내 두 손에 받들고 황제에게 바쳤다. 카엔은 서류를 흝어본 후 두 손을 높이 든 채 아직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궁내관의 손 위에 얹어놓고 다시 순간이동했다. 궁내관은 십년감수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온 카엔은 아직도 잠에 취해 있는 렌을 살며시 안아들었다. 그녀의 몸은 가볍고 부드러웠다. 카엔은 다시 조용히 순간이동해 5층 35호실에 내려섰다. 방은 깔끔한 렌의 성품에 걸맞게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으나 카엔의 눈에는 너무 협소하고 초라해 보여 조금 불만스러운 심정이 들었다. 카엔은 렌을 안은 채 마법으로 이불을 제치고 렌의 신발과 토를 벗긴 후 조심스레 렌을 침대 위에 눕혔다. "네가 내게 어떤 존재가 될지... 만약 조금이라도 네가 내 기대에 어긋난다면 나는 나에 관한 네 기억을 전부 지워버릴지도, 아니 아예 너를 죽여버릴지도 모르겠다." 카엔은 하얗고 긴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렌의 얼굴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떼어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다시 순간이동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빠르게 지났다. 렌은 오후의 도서관 근무에 조금씩 익숙해졌고 카엔과 함께 하는 오후도 일상이 되었다. 카엔은 어느새 무뚝뚝한 태도를 조금씩 버리고 렌이 묻는 말에 선선히 대답해 주기도 하고 먼저 렌에게 이것저것 묻기도 하며 매일매일 렌이 끓여주는 차를 즐겼다. 그의 냉랭한 표 정은 그대로였지만 렌은 똑같아 보이는 그의 표정에서 예민하게 감정의 변화를 읽어냈다. 열흘간 카엔을 치료해준 렌은 카엔으로부터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는다는 확인을 받자 치료비를 청구했다. 치료비는 다름아닌 마법 과외였다. "카엔님, 제게 마법을 가르쳐 주세요." 눈을 반짝이며 요구하는 렌에게 카엔은 난색을 표했다. "마나를 축적할 수 없는 사람은 마법을 배울 수 없어요." 렌은 단박에 말했다. "그럼 제가 치료한 거 무를래요. 도로 악몽 꾸게 해드릴게요." 태연하게 말하는 렌의 마음에 잔뜩 들어있는 장난기를 읽고 카엔은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럴 수야 없지요." "마나 없이도 시전할 수 있는 마법이 있지 않나요?" 렌의 질문에 카엔은 곰곰히 생각하다 대답했다. "마법진이라는 게 있죠. 물체를 배치하거나 바닥에 그림을 그려 그 힘으로 사람들에게 환상을 보여주기도 하고 물체를 숨기기도 하는 작용을 해요. 그리고 정신마법이라는 게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현혹하여 마음 속의 생각을 털어놓게 하거나 그 사람이 원치 않는 일을 하게 하는 작용을 해요. 아주 예외적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읽거나 기억을 조작할 수도 있고요." 렌은 한숨을 쉬었다. 둘 다 치료와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그건 아무나 배울 수 있는 건가요?" "마법진은 많은 것을 외어야 하고 배우는 데 오래 걸리는 대신 특별한 마법적 재능 없이도 배울 수 있어요. 하지만 정신마법은 마나와는 별도의 타고난 재능이 필요해요. 그걸 시전할 수 있는 사람도 극히 한정되어 있고요." "황제 폐하의 힘도 그 정신마법이란 건가요?" 카엔은 흠칫했으나 곧 태연하게 대답했다. "황제 폐하의 힘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그 근원을 감히 알 수 없죠. 하지만 정신계 마법이란 건 맞아요." "저도 정신마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카엔은 잠시 생각하다가 옆에 놓인 메모지 두 장에 펜으로 뭔가를 적어 엎어놓고 렌에게 물었다. "자, 이 두 장의 메모지 아래에 그려진 도형이 무언지 알 수 있겠어요?" 렌은 뚫어져라 메모지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알 수 없었다. 결국 렌은 떠오르는 대로 찍었다. "음... 왼쪽이 삼각형, 오른쪽이 원이요." 카엔이 종이를 뒤집어본 결과 오른쪽은 사각형, 왼쪽은 별 모양이었다. 다시 시도해도 렌은 전혀 맞추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렌은 정신마법에 재능이 없는 것 같네요." 렌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마법진을 가르쳐 주세요." "마법진은 보통 어렵고 힘든 게 아녜요. 섣불리 시작했다가 시간낭비만 하지 않겠어요?" 렌은 카엔의 말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저는 뭔가 배우는 데에는 확실히 재능이 있으니 안심하고 가르쳐 주세요." 카엔은 서가로 가서 엄청나게 두꺼운 책 다섯 권을 뽑아가지고 왔다. "이걸 열흘 내에 다 읽고 내용을 이해하게 되면 마법진을 가르쳐 주겠어요." 카엔은 그 무시무시한 책들을 보면 렌이 포기할 줄 알았으나, 렌은 오히려 두꺼운 책을 보자 눈을 빛냈다. "와, 정말 근사해 보이는 책들이네요. 이거 방으로 가져가서 읽어도 되나요?" "그래요." 카엔은 무슨 보물이나 되는 듯 책을 쓰다듬는 렌을 보며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렌은 '마법진의 기초원리'라는 책을 읽으며 거의 밤을 새우고 다시 다음날 오후 카엔에게 왔다. 카엔은 수면부족으로 눈이 퉁퉁 부은 렌의 얼굴을 쳐다보며 약간 심술궂게 물어봤다. "책은 다 읽었나요? 저 책이 제일 쉬운 책인데요." "거의 다 읽었어요. 정말로 태어나서 제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지겨운 책이네요." 렌이 진저리치는 모습을 보자 카엔은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렌이 온 후로 카엔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지으려는 순간을 몇 번 맞았다. 마지막으로 웃어본 게 너무 먼 옛날이어서 웃음은 나오지 않았지만 웃고 싶다는 기분이 든 것만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 순간 렌은 마치 카엔의 마음을 읽은 듯이 물었다. "카엔님, 카엔님은 마치 웃는 법을 잊어버린 분 같아요." 카엔은 걱정과 연민으로 가득한 렌의 마음을 읽었다. "글쎄요, 마지막으로 웃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카엔은 일부러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카엔을 가엾이 여기는 렌의 마음이 강하게 전해져왔다.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걱정해주는 게 얼마만인가 하고 생각하며 카엔은 렌의 따뜻한 마음을 즐겼다. 그러다 갑자기 렌은 장난기어린 얼굴로 말했다. "카엔님, 제가 카엔님을 웃게 해 드릴 테니 대신에 제 소원을 하나 들어 주세요." 카엔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렌은 사팔눈을 하기도 하고 자기 얼굴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원숭이 흉내를 내기도 하며 카엔을 웃기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정작 카엔을 웃긴 것은 렌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들이었다. '후훗, 카엔님이 웃으시면 무슨 소원을 들어 달라고 할까나? 음... 먼저 여장을 시켜 봐야지. 남자치고는 너무 예쁘쟎아? 뭐, 나도 남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야. 여장을 시키고 나서 귀에 장미꽃을 꽂고 입술에 루즈를 바르고 뺨에는 연지를 발라야지. 그리고 가짜 가슴을 넣고 요염하게 걸어 보라고 해야지. 으흐흐흐.' 그 생각 끝에 렌은 여장한 카엔이 요염한 모습으로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가는 영상을 떠올렸고, 그것을 읽은 카엔은 마침내 참을 수 없어 폭소를 터뜨리고야 말았다. 카엔이 웃는 걸 본 렌은 의기양양해하다가 자신도 폭소를 터뜨렸고, 그러자 카엔은 다시 웃음이 터져나와 배가 당기고 아플 때까지 한없이 웃었다.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나왔다. 이 웃음이라는 감각은 그에게 너무도 생소했다. 허파와 복부, 그리고 몸 전체를 생명으로 채우는 느낌이었다. 그는 계속 웃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눈물은 웃음이 멎은 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렌은 카엔 곁으로 다가와 소맷자락으로 카엔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카엔님, 이제 제 앞에서는 웃어도 되고 울어도 돼요." 그날 이후 카엔은 얼음장 같던 무표정을 버리고 렌 앞에서 자주 웃게 되었다. 웃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인 줄 카엔은 미처 몰랐다. 렌은 카엔이 웃는 걸 무척 좋아해서 틈만 나면 별별 수단을 다 써서 카엔을 웃겼고, 카엔은 렌이 자신을 웃기려고 애쓰는 것 자체로 좋아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웃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한결 밝아졌다. ===================================================================치료사 렌 [4] 테라미즈에서 나와림 되기 (10) -------------------------------------------------------- 놀랍게도 렌은 카엔이 시킨 대로 그 다섯 권의 책들을 다 읽었기 때문에 카엔은 이제 렌에게 마법진을 가르쳤다. 렌은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빠른 속도로 배웠고, 카엔은 총명한 제자에게 가르치는 기쁨을 만끽했다. 그렇게 지내면서 둘은 점점 가까워졌고, 서로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렌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보면 렌이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게 점점 확실해졌다. 그녀의 학식은 특히 과학과 의학 분야에서는 테라미즈넨 최고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렌은 굳이 카엔에게 자신의 지식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일부러 숨기려 하지 않았다. 카엔은 렌에게 대놓고 물어보면 렌이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다 말해줄 것임을 알았다. 그래도 카엔은 렌이 직접 이야기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렌은 한편으로는 이 세계의 역사와 마법지식에 관해 몹시 목말라해서, 둘의 대화는 서로 아는 것을 상대에게 가르쳐 주고 질문하며 흥미진진하게 진행되었다. 평소 차분한 렌은 좀 현학적인 데가 있어서 학문에 관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쉽게 흥분하기도 하고 얼굴을 붉혀 가며 자기 주장을 펴기도 했는데 카엔에게는 그런 모습도 몹시 귀엽게 보였다. 이런 식이었다. "그러니까 우주는 한 번의 대폭발로 시작되어 점점 팽창해 갔고 그 때 비로소 시간과 공간이 생긴 거라니까요!" "시간이 없었다면 그 전엔 뭐가 있었고, 팽창해 간다면 우주 밖에는 뭐가 있다는 거지요?" "어휴, 시공 자체가 시작해서 팽창해 가는 건데 그 전이니 우주 밖이니 하는 게 있을 턱이 있나요? 아이, 답답해." 혹은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드래곤이라는 게 지상 최고의 생물로 마나를 자유자재로 운용한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그럼 드래곤은 파충류예요, 양서류예요? 아니면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이예요? 아무리 들어 봐도 공룡형 파충류인데 어떻게 아직까지 공룡류가 남아있는 거죠? 난생인가요, 태생인가요? 잡식성인가요, 초식성인가요, 육식성인가요? 용반목인가요, 조반목인가요? 아, 그리고 제일 중요한 질문요. 온혈동물인가요, 냉혈동물인가요?" 그런 질문공세에 부딪힐 때마다 카엔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렌은 흥분이 가라앉고 나면 곧 사과했지만 다시 학문을 주제로 대화하다 보면 어느새 열을 올렸다. 그런 대화는 둘 모두에게 유익했다. 아주 다른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두 개의 시각이 합쳐질 때마다 새로운 생각의 지평이 열리는 것 같았다. 렌과 카엔은 모두 오후의 근무를 간절히 기다리게 되었다. 렌은 학교생활에도 차분히 적응해 나갔다. 뭐든지 다 그렇듯이 학교생활에도 기쁜 일도 있고 힘든 일도 있기 마련이지만, 렌은 그토록 꿈꿔오던 학교에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서 모든 것이 마냥 좋았다. 렌은 실전마법과 체육을 제외한 나머지 수업에서 빼어나게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마법 교수 또한 실전에는 약해도 이론에는 강한 렌을 아껴 주어서(단순히 렌의 외모에 반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렌은 그의 소개로 3학년 과정을 가르치는 치유마법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치유마법 교수는 과목의 성격에 어울리는 조용한 성품의 교수였는데, 그는 오래 전부터 치유마법의 한계-외상과 대증요법만 가능하고 근본치료를 할 수 없다는 것-를 인식하고 그것을 타개할 방안으로 약초학을 독학으로 연구해 왔다. 치유마법 교수는 렌이 치료사라는 것을 알고서도 경멸의 눈빛을 던지지 않고 자신의 약초학 지식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었으며, 렌이 그 의학지식의 일면을 내비치자 크게 흥분하여 렌을 졸라 여러가지 의학지식을 배우기도 했다. 교수가 저술 중인 약초학 책은 지금까지 그 분야의 지식을 총망라한 것이었다. 렌은 책을 빌려 며칠 밤을 꼬박 세우며 거의 외울 정도로 다 읽었고 교수가 가꾸는 약초밭에서 직접 실물을 확인하기도 했다. 상당수의 식물들은 이름만 다를 뿐 지구에도 있던 것이었다. 지구에서 모르던 식물들은 자세히 보고 그 효능과 생김새를 잊지 않도록 외웠다. 그리고 렌은 치유마법 교수에게서 치유마법의 원리에 여러가지로 시사하는 점이 많음을 배웠다. 비록 치유마법을 직접 시전할 수는 없어도 렌은 정명기를 마나 대신 운용하여 외상을 쉽게 아물게 하는 방법, 치유마법에서와 마찬가지로 정명기를 이용하여 염증을 막는 방법 등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조금씩이지만 성과를 거 두게 되었다. 렌은 가능한 한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공부만 하면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지내려고 했다. 그러나 나와림이고 평민인데다 눈부신 미모를 지닌 렌을 모르는 학생은 없었다. 많은 학생들은 렌을 질시했다. 사실 렌이 아무리 뛰어나도 귀족과 평민은 다른 종류의 생물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 중에도 이따금씩 렌에게 다가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렌이 보이는 차분한 태도와 강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눈동자가 그들을 끌어당겼다. 렌에게 찾아오는 것은 주로 마음에 상처입은 어린 영혼들이었다. 왠지 렌이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들은 용기를 냈다. 렌은 맨 처음 어느 소녀가(백작가의 딸이라고 했다) 자신에게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을 때 무척 당황했었다. "렌님, 렌님은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면서요?" "그런 얘기 누구한테서 들었어요?" "사이라가 말하던데요. 렌에게 얘기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저절로 문제가 해결된다고요." 얼마 전 사이라가 털어놓는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 주었던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렌은 간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를 차마 물리칠 수 없었다. 그래서 렌은 소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떻게 보면 흔한 이야기였다. 소녀의 친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재혼을 했는데, 의붓아버지는 백작의 작위가 자신의 아들에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소녀를 못살게 굴고 어머니와 이간질시키려 하여 그 결과 어머니도 이제는 자신을 미워하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렌은 소녀가 이야기하는 동안 온 정신을 소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옛날에 첸사부는 렌에게, 진심으로 누군가의 얘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많은 마음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고 한 적이 있었다. 렌이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기 때문에 문화혁명 시절의 아픈 과거를 이제는 덤덤하게 돌이켜볼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왠지 이 소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면 이 소녀 또한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녀는 렌이 온 마음을 기울여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자 처음에 하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많은 이야기들을 차례로 털어놓았다.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하는지, 그러면서도 때로 의붓아버지만 좋아하는 어머니가 얼마나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지, 의붓아버지를 향한 증오심이 어떨 때는 왜 연민으로 바뀌는지, 소녀는 마치 뭔가에 사로잡힌 듯 쉬지 않고 얘기하며 눈물을 쏟아냈다. 얘기를 마친 소녀는 무척 개운한 얼굴이었다. "이제 저는 어떻게 하면 좋죠?" 렌은 소녀의 손을 가만히 잡아 주었다. "실은 작위같은 건 별로 갖고 싶지도 않은 거죠? 그보다는 부모님의 사랑이 더 그리운 거죠?" 소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렌은 소녀가 한 얘기 중에 답이 다 들어 있었다고 하려다 그냥 부드럽게 웃기만 했다. "저 부모님께 제 마음을 말씀드릴래요.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그 다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할래요." 소녀는 렌의 뺨에 감사의 키스를 하고 일어났다. 처음 왔을 때보다 훨씬 밝아진 소녀의 모습에 렌은 보람을 느꼈다. 렌이 이야기를 들어주면 고민을 해결할 수 있다는 소문은 서서히 1학년 사이에 퍼져나갔다. 부족함 없는 귀족가의 자제들이었으나 그들도 저마다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다. 체면과 명예와 형식을 중시하는 귀족의 허세 때문에 상처받고 사춘기의 타는 듯한 열정과 불균형 때문에 괴로워하는 학생들은 하나씩 둘씩 렌을 찾아왔다. 상처받은 소년소녀들은 왜 이리 많고 세상의 고통은 왜 이리 다양한지. 가장 안락하고 행복해야 할 이들마저 이렇게 많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면, 더 힘들고 처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괴로울지. 렌은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면서 때 로 지치고 피곤했다. 렌은 왜 정신과 의사의 자살율이 보통 사람들의 열 배를 넘는지 이해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정명기를 쏟아붓는 것만큼이나 많은 기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렌은 카엔과의 오후에서 힘을 얻었다. 카엔의 마음 속에 담긴 이야기는 어느 누구의 것보다도 더 아프고 슬플 것 같았지만 카엔은 렌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새로 얻은 미소를 부드럽게 지으며 슬픈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듯 서 있는 카엔의 모습을 보면 렌은 가슴이 아리기도 하고 포근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친구들. 렌이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도 그저 렌이 렌인 것만으로 좋아해 주는 친구들을 보면 렌은 절로 힘이 났다. 어쨌든 렌은 학생들 사이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신망을 얻어 갔다. 2학년 그룹의 리더가 파니안이라면 1학년 그룹의 리더는 렌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간에 사실상 렌으로 정해진 듯했다. 그러나 나와림을 적대하는 세력-크리프 데 주란트와 그 무리들-들에게는 렌이 눈의 가시였다. 크리프는 파니안과 2학년 그룹의 세력을 다투어 왔는데 학기초의 공작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파니안의 세력이 더 커지는 듯하고 1학년 그룹에서도 렌이 두각을 나타내자 부쩍 렌을 비롯한 나와림들에게 시비를 걸어 왔다. 보크넬이 말했던 것처럼 황제파와 귀족파의 알력은 상당히 뿌리깊은 것이었다. 절대적인 마법력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까지 읽는다는 황제에게 대적한다는 것은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래서 모든 귀족은 사실상 황제파라고 해야 맞겠지만, 황제는 수십 년 전부터 정무에서 손을 떼고 거의 대부분의 일을 관료들에게 맡겨 놓았기 때문에 그 관료들 사이에 자연히 알력이 생기게 되었다. 관료들은 대부분 귀족 출신이지만 나와림 출신 평민들도 있었고 작위의 고하가 관직의 고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높은 작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맘에 드는 관직을 차지하지 못한 귀족들-주로 지방 영주들-의 불만은 커져 갔다. 그들은 황제가 정무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 때를 틈타 상황을 뒤집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어른들의 분위기는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결국 학교 전체가 술렁거리게 된 것이다. 나와림을 비하하는 낙서를 칠판에 적어 놓는다든지 잉크통을 엎어 놓는다든지 하는 사소하고 악의적인 장난이 이어지다가 결국은 사건이 터졌다. -------------------------------------------------------- 공지사항-약간의 스토리 변경 -------------------------------------------------------- 렌을 사랑해 주시는 마녀홈 회원 여러분, 늘 감사합니다. 리플들 읽고 있으면 저마저 스크롤의 압박을 느낀답니다. ^^ 여러분들의 리플을 읽으면서 스토리에 고쳐야 할 점들이 많이 발견되어, 지금까지의 스토리에 다소 수정을 가하려고 합니다. 1. 렌을 광동성 거주 소수민족이 아니라 한족으로(다만 소수민족 혼혈이 조금 섞여 있는 것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한인들이 한 자녀 이상을 낳아 출생신고를 못 한 경우 그 아이들은 헤이하이즈(黑孩子)라 불리는데, 지금 그런 애들이 중국 전역에 대략 4000만명 정도 된답니다(역시 규모가 다르죠? -_-;;;;;) 농촌 거주자인 경우 첫째가 딸이면 한 명까지는 더 낳을 수 있지만, 소수민족의 경우 그러한 제한이 없다고 합니다(없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한족으로 바꿨습니다. 아, 그리고 출생신고 안 한 것이 들통나면 징역형은 없고 벌금형만 있다고 해서 그 부분도 바꿨습니다. 2. 렌이 죽는 장면에서 자살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렌의 성품에 자살은 어울리지 않아서, 자오의 조직원 중 한 명의 총에 맞는 것으로 바꿨습니다. 3. 드래곤들 나오는 장면과 렌이 이세계로 오는 장면에서 약간 설명이 부족한 것 같은데, 그 부분은 시간나는 대로 보충해서 다시 올릴게요. 4. 테룬을 치료하면서 생명력의 5분의 1을 쏟아붓는데, 어느 분이 만약 렌의 수명이 20살인데 5분의 1 쏟아붓고 나면 당장 죽는 것 아니냐고 지적하셨습니다. 너무나 적절한 지적입니다. 그래서 "남은" 생명의 5분의 1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5. 테룬을 치료하는 동기도 조금 손질했습니다. 자오에 대한 사랑을 투영했다고나 할까, 뭐 그렇게요. 전체 스토리에는 영향이 없는 부분들이니, 그냥 앞으로 나오는 부분들만 계속 읽으셔도 됩니다. ^^ 남은 일요일 오후 즐겁게 보내세요. 추신. 지벤은 3써클, 카엔은 5써클(가짜신분 얘깁니다. 황제로서의 진짜 실력이 아니라요)로 마법써클을 수정했습니다. 나중에 스토리전개상 카엔의 마법이 너무 높은 걸로 나오면 안 되기 때문에요. 추추신. 아마 다시 읽어보셔도 어디가 달라졌는지 잘 모르실 거예요. -_-;;;;;;;;;; -------------------------------------------------------- 치료사 렌 [4] 테라미즈에서 나와림 되기 (11) --------------------------- ----------------------------- 사건의 발단은 엉뚱했다. 그날 점심 때 렌은 치유마법 교수의 약초밭에서 약초를 가꾸고 있었다. 치유마법 교수의 이름은 무난 하차크였다. 그는 평민이었지만 마법에 재능이 있어 어릴 때 운좋게 마법원 소속 마법사에게 발탁되었다. 착실히 마법을 연마한 그는 일반적인 마법사들이 걷는 길을 그대로 걸어 왔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마법원에 들어가 견습마법사로 수 년간 일하다가 능력을 인정받으면 제국 각지에 파견되어 지방에서 제국을 위해 몇 년간 일하고, 그러다가 다시 마법원으로 돌아와 그 재능과 성품에 따라 진로를 정하게 되는데(나와림이 된 지벤은 예외라 할 수 있는데, 지벤의 경우는 정치적인 야심도 있어서 아카데미에 들어오고 싶어했기 때문에 마법원이 아니라 나와림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 또한 그렇게 지방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 치유마법에 재능을 인정받아 마법원에서 그대로 일하게 되었고, 마법사로서 영예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 교수로까지 임명되었다. 8써클에 이른 그의 마력이라면 황궁에서 대신들과 국정을 논해도 손색이 없겠지만 그는 이 곳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약초밭을 가꾸는 것을 더 좋아했다. 약초밭 옆의 관사는 아담했지만 잘 손질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그는 지방근무 때 만난 아내와 평생 오손도손 살아 왔다. 은발의 노교수는 첸선생을 연상케 했기에 렌은 그를 무척 따랐고 그가 약초밭을 가꾸어 보지 않겠냐고 했을 때 흔쾌히 승낙했다. 늦겨울과 초봄에 미리 씨를 뿌려 두어야 하는 것들, 지난 겨우내 땅에 묻었다가 이제 싹을 내기 시작한 것들, 추위에 강해 잎이 지지 않고 씩씩하게 파란 것들 모두 사랑스러운 생명들이었다. 렌은 차가운 대기를 뚫고 따스하게 내리쬐는 겨울볕을 즐기며 열심히 하차크 교수와 함께 밭을 매었다. "저, 교수님, 얘는 뭐예요? 교수님께서 쓰신 책에서는 못 본 것 같은데요." "아, 판니니 말이군. 그건 내가 지난 겨울 여행하다가 미즈넨 산맥 기슭에서 발견해서 채집해온 거란다. 거기 주민들 얘기로는 감기에 특효라고 하더구나." 본래 교수와 학생은 서로 존댓말을 쓰도록 되어 있었으나(이것은 교수는 평민이고 학생은 귀족인 경우가 때때로 있어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마련된 규정이었다) 하차크 교수와 렌은 처음 보는 순간 마음이 통해 곧 친숙해졌고 하차크 교수는 렌을 손자처럼 자상히 대해 주었다. "이거는요?" "아, 지금은 싹만 나서 잘 모르겠지만 그게 자라면 볼라니트가 되지. 약초학 책에서 보지 않았느냐?" "아, 그렇군요." 렌은 즐겁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기운차게 호미질을 했다. 그 때 밭 가장자리에 얼굴을 붉히며 서 있는 사이라가 눈에 들어왔다. 렌은 의아해하며 일어났다. "사이라, 무슨 일이야?" "렌에게 할 얘기가 있어." 사이라는 렌을 밭 한 쪽으로 끌고 갔다. "렌, 렌은 내가 싫지는 않지?" 렌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야 물론 사이라가 좋지." "나는 렌을 사랑해."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사이라는 몽롱한 눈빛으로 고백했다. 렌은 말을 잃었다. 어안이 벙벙한 렌을 앞에 두고 사이라는 계속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렌, 나는 지금까지 아버지고 오빠고 너무너무 무서워서 이 세상의 남자들은 보기도 싫었어. 하지만 렌은 하나도 무섭지 않고 너무 잘생기고 너무 자상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너무 좋아.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렌처럼 좋아해본 사람은 없어. 사실 나는 고백 안 하려고 했어. 그치만, 그치만 렌이 인기가 너무 높아져서 가만 있으면 나를 떠나 버릴 것 같단 말야." 렌은 기가 막혀서 이 철없는 소녀를 쳐다보았다. "사이라, 너 사랑이 뭔지나 알아? 너 내가 어떤 사람인지나 알아?" 렌의 말에 사이라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렌이 너무 좋은 사람이란 건 알아. 그리구, 사랑이 뭔진 몰라도 나는 무조건 렌이 좋단 말야." 렌은 철부지같은 사이라가 갑자기 귀여워져서 사이라를 끌어당겨 품에 안아 주었다. "사이라, 너는 지금 우정이나 호의를 사랑과 혼동하고 있는 거야. 우리가 알게 된 지는 아직 두 달도 채 안 됐쟎아? 언젠가 너한테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때 알게 될 거야. 귀여운 사이라. 미안하지만 나는 너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어. 우리 그냥 지금까지처럼 사이좋은 친구로 지내자." 사이라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렌을 쳐다보았다. "렌, 미워! 나는 렌을 진짜루 사랑한단 말이야!" 그 때 하필이면 엔샤가 나타났다. 엔샤는 크리프 데 주란트의 여동생인 사이라를 벌써부터 시누이 대하듯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사이라를 찾아다니던 엔샤는 사이라가 외치는 마지막 말을 듣고 놀라서 우뚝 멈춰 섰다가 곧 이런 철딱서니가 다 있나 하는 화난 얼굴로 사이라의 팔을 잡아채 끌고 갔다. 렌은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렌 군, 인기 좋구만." 옆에서 입을 벌리고 사랑고백을 지켜보던 하차크 교수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했고, 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한테서까지 사랑고백을 받다니. 그 날 오후 도서관 근무 때 카엔은 렌에게 일어났던 일을 눈치챘다. 오후 내내 렌이 그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읽지 않을래야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카엔은 치밀어오르는 웃음을 참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긴 렌은 누가 보아도 빼어난 미소년이니 여자아이들이 꼬인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카엔도 왕년에 미소년들을 데리고 논 적이 있었지만 렌이 동성의 소녀와 그렇고 그렇게 노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한 일이었다. 렌은 차마 카엔에게 의논할 수도 없고 소녀의 마음을 다치기도 싫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리를 싸매었다. 그 다음날 하교할 무렵 일은 터졌다. 크리프 및 그의 똘마니들은 렌이 마법진으로 가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렌을 불렀다. 크리프는 렌을 보자마자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너, 더러운 평민, 이리 와 봐." 렌은 크리프를 보고 놀랐지만 곧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물었다. "크리프님, 무슨 일입니까?" 그 침착함이 오히려 화를 더 돋군 듯 크리프는 렌에게 달려와 다짜고짜 멱살을 잡았다. "너같이 천한 평민은 내 동생과 어울릴 자격이 없다. 황제의 장난감이면 본분에나 충실해야지." 크리프는 아무 예고도 없이 다짜고짜 렌의 복부에 주먹을 날렸다. 렌은 컥 하며 신음을 토해냈다. 크리프를 따라온 두 명의 소년들은 약속이나 한 듯 렌의 팔 한 쪽씩을 붙들어 렌의 몸을 일으켰다. "흥, 계집애같은 놈. 그 정도도 못 참나? 이건 어때?" 크리프는 이번에는 렌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입술이 찢어지고 피가 흘렀다. 렌은 입술의 피를 닦으며 다시 차분한 눈으로 크리프를 바라보았다. "크리프님, 대체 무슨 일이신지요? 맞는 이유라도 가르쳐 주시지요." 크리프는 분노에 차 소리질렀다. "너, 앞으로 사이라한테 한 마디라도 했다가는 내 손에 죽는다!" 아마도 엔샤가 달려가 고자질한 듯했다. "사이라와 저는 좋은 친구입니다. 크리프님이 이래라 저래라 하실 권리는 없습니다." 렌은 왠지 오기가 나서 크리프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크리프는 똘마니들에게 명령했다. "저 놈을 저 나무에다 묶어라." 두 소년들은 렌의 팔을 나무에 두르고 반대쪽에서 양손을 묶었다. 렌은 마치 나무둥치를 끌어안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크리프는 미리 준비해 온 채찍으로 렌의 등을 마구 갈기기 시작했다. "건방진 놈! 감히 누굴 똑바로 쳐다봐! 네가 감히 주란트 가문의 딸을 노려? 죽고 싶은가 보지?" 크리프가 어찌나 세게 내리쳤는지 두꺼운 겨울용 토가 찢어지고 셔츠마저도 찢겨나갔다. 곱디고운 렌의 등에는 어느새 굵은 채찍자국이 생겨났다. 등이 타는 듯한 고통에 렌은 이를 악물었다. 어느 정도 성에 찰 만큼 채찍질을 한 크리프는 손을 묶은 끈을 풀게 하고 렌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제 크리프는 땅에 누운 렌에게 마구 발길질을 했다. 렌의 정신이 아득해지기 직전, 때마침 파니안과 수딘, 그리고 다른 2학년들이 달려왔다. 사이라가 어떻게 알고서 살짝 달려가 알린 것 같았다. 파니안과 수딘은 모두 렌이라면 어쩔 줄 몰라했기 때문에 마구 얻어터진 렌의 모습을 보자 분노를 터뜨렸다. "비겁한 놈! 자기보다 약한 아이라고 그렇게 이유 없이 때려도 되는 거야?" "야비한 자식! 너같은 놈에게는 내 주먹도 아깝다!" 파니안과 수딘은 만신창이가 된 렌의 몸을 일으키며 고함을 질렀다. 파니안은 차마 피투성이인 렌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듯 외면하면서 크리프를 노려보았다. "결투다. 나와 가문의 명예를 걸고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크리프는 파니안의 심각한 얼굴을 보며 코웃음쳤다. "너의 남자애인이 다친 걸 보니 가슴아픈가? 나와림들은 황제 폐하의 손길을 받지 못하면 자기들끼리라도 서로 밤마다 외로움을 달래 준다며? 그 결투 받아주지. 너한테 걸 명예 따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옆에서 씩씩거리고 있다가 고함지르며 크리프에게 달려들려는 수딘을 제지하며 파니안은 냉정하게 말했다. "모든 것은 실력이 말해줄 것이다. 결투 시간과 장소는 모레 새벽 황궁 후원 좌원(左園)의 공터로 한다." 렌은 어지러운 정신을 가다듬으며 제발 결투같은 건 하지 말라고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크리프가 사라지고 친구들이 렌을 정원 의자에 앉힌 후에야 렌은 겨우 말했다. "결투하지 마. 나는 괜찮아." "무슨 소리야? 이건 너 혼자의 문제가 아냐. 우리 나와림들 전체의 문제라구. 이제 더이상 저 놈들의 비웃음을 들으며 참을 이유가 없어." 수딘이 격하게 말했다. 렌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결투하다 들키면 퇴학인데 그래도 괜찮아? 나와림 직도 박탈당하게 될 거라고." "들키지 않게 할 테니 염려마. 양호실로 데려다 줄게." 렌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양호실로 가서 상처를 들키면 너희들 결투도 들키게 될 거야. 그냥 내 방에 데려다 줘. 죽을 만큼 다친 건 아니니까 내가 스스로 치료할게. 그리고 너희들 근무장소로 가야 되쟎아. 늦겠다." 소년들은 렌의 말대로 렌을 부축하여 방에 데려다 주었다. 정명기로 자기 자신을 치료할 수는 없었기에, 렌은 소년들이 나가자마자 출혈 부위에 침을 꽂아 지혈시키고 얼룩진 피를 닦아내는 정도로 응급처치를 마쳤다. 여기저기 멍이 들고 피가 터져 보기 흉한데다가 아까 배를 맞은 것 때문에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원래대로라면 황궁 도서관에 가야 할 시간이었지만 렌은 이런 모습을 카엔에게 보이기도 싫었고 거기까지 갈 힘도 없었다. 결국 렌은 옷을 입은 채 침대 위에 비스듬이 쓰러져 잠이 들었다. 카엔은 렌이 늘 오던 시간에 오지 않자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이제 카엔은 렌 없는 하루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렌을 만나기 전까지 카엔의 하루하루는 조용하고 변화 없는 가라앉은 물 같았다. 아주,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카엔은 그러한 생활을 계속해 왔다. 아무와도 감정적으로 엮이지 않고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는 생활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보고 다 겪어 버린 상태, 그럼에도 아직 직접 목숨을 끊을 정도의 열정은 없는 상태. 카엔은 젊은 시절의 모든 뼈아픈 추억과 상처를 가슴 깊이 묻어 버리고 인생에서 아무 것도 더 바라지 않고 구하지 않았다. 그런 인생을 보내기에 도서관은 최적이었다. 모든 흥미가 사라져도 지식에 대한 흥미는 희미하게 남아 그를 자극하였고, 제국의 재력으로 귀한 책들을 구해 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는 그럴싸한 자리를 만들어 5써클 마법사의 신분으로 가장하고, 권력과 마력을 교묘하게 번갈아 사용하여 아무도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그는 이곳 황궁 도서관에서 맨얼굴로 책 사이를 누비며 세월을 보낼 수 있었다. 제국 전체가 이 안식처의 평온함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그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도로만 정치에 관여했고 적당한 수상을 가려 뽑는 것으로 황제의 소임을 다했다. 스스로 만들어 침잠한 그 고독 속에서 견디기 힘들어질 때 그는 때때로 수면 위로 떠올라 인간의 손길을 갈구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가 얻은 것은 실망뿐이었다. 인간의 저열함은 수백 년이 흘러도 변함 없었고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게 이기적이거나 어리석었다. 결국 그는 사람을 느껴보는 일을 30년 전 그 일 이후로 모두 포기했다. 그런데 렌은 그 평온을 깨어버리고 시리지만 맑은 바깥 공기를 몰고 온 것이다. 이제 렌이 끓여 주는 맛있는 차를 마시며 렌 몰래 렌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것은 카엔의 큰 기쁨이 되었다. 렌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은 참으로 다채롭고 아름다웠다. 카엔을 더욱 감동시키는 것은 렌의 마음의 아름다움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의 아름다움과는 달리 고통과 슬픔을 겪고 난 후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이었다. 마법을 쓰지 않고 마음을 읽는 것만으로 모든 맥락을 훤히 꿸 수는 없었지만, 카엔은 렌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참기 힘든 정도의 격심한 고통과 슬픔을 겪은 일이 있음을 읽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아직까지 렌은 한 번도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카엔은 렌을 보면서 오랫동안 포기했던 희망, 진심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상대를 만나리라는 작은 소망이 이루어질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날이 갈수록 카엔은 렌에게 의지했다. 그런데 오늘 렌은 와야 할 시간을 반 파잔이나 넘기고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카엔은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카엔은 황궁과 아카데미 전체를 아우르는 탐색마법을 써서 렌의 행방을 더듬었다. 렌이 황궁의 자기 방에 있음이 느껴졌다. 카엔은 순간이동으로 렌의 방으로 이동했다. 렌은 멍들고 아픈 모습으로 옷도 벗지 않은 채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내며 모로 누워 자고 있었다. 아니, 의식을 잃고 있다는 게 더 적당한 표현이었다. 카엔은 렌을 보자마자 렌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자들에 대한 맹렬한 분노가 치밀었다. 렌이 다시 신음소리를 내자 카엔은 걱정에 가득차 렌의 몸을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온몸을 구타당한 듯했다. 카엔은 곧 렌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피가 군데군데 묻은 찢어진 토즈릴을 마법으로 조심스럽게 벗기고 가슴을 동여맨 붕대와 몸에 달라붙는 얇은 속옷까지 벗기고 나자 드러난 렌의 몸은 상처투성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카엔은 아찔해지는 정신을 용케 다잡고 가슴과 치부 위만 살짝 덮어준 후 은보랏빛을 일으켜 멍들고 찢어진 부위에 차례로 치유마법을 시전하였다. 렌의 몸을 돌려 등쪽을 본 카엔은 치를 떨었다. 얼기설기 얽힌 채찍자국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상처를 잠시 외면하던 카엔은 다시 더 큰 빛무리를 일? 맣?렌의 등줄기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 치료사 렌 [4] 테라미즈에서 나와림 되기 (12) -------------------------------------------------------- 렌은 이질적인 기운이 상처부위를 파고드는 듯한 기분에 눈을 떴다. 카엔이 상처부위에 치유마법을 쏟아붓고 있었다. 말을 걸려던 렌은 자신이 거의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카엔은 잠시 손길을 늦추고 렌에게 말했다. "이제 거의 끝났습니다. 얼굴만 치료하면 되니 잠깐만 기다려요." 카엔은 양손으로 렌의 얼굴 여기저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몹시 관능적이어서 렌은 묘하게 부끄러웠다. 마지막으로 카엔은 엄지손가락으로 렌의 터진 입술을 어루만졌다. 카엔의 손에서 나오는 빛이 애무하듯 렌의 입술에 감돌고 상처가 완전히 아물었다. 그러다 카엔은 홀린 듯이 몸을 기울여 렌의 입술에 키스했다. 가벼운 키스였다. 스스로의 행동에 당황한 카엔은 황급히 떨어져 렌의 생각을 읽었다. 렌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복잡하게 스쳐지나갔지만 그 중에 혐오감은 없는 것 같아 카엔은 겨우 안심했다. "저, 옷가지 아무거나 주시겠어요?" 렌은 담담하게 말했고 카엔은 급히 아까 벗겨 놓았던 너덜거리고 피묻은 토를 집어 렌의 몸을 덮어 주었다. "보시다시피 저는 여자예요." 렌은 간절한 눈으로 카엔을 쳐다보았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카엔은 부드럽게 말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다친 거죠?" 카엔은 다시 물었다. 그리고 카엔은 렌이 대답하기도 전에 오후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읽었다. 다시금 분노가 치밀었다. 감히 렌을, 나의 렌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카엔은 그 크리프라는 놈을 어떻게 혼내줄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크리프라는 학생과 싸움이 있었어요. 카엔님, 부탁이 있어요. 크리프랑 파니안이 결투를 한대요. 말려야 해요. 도와 주세요. 파니안은 검술의 대가라서 잘못하면 크리프가 죽을 지도 몰라요." 렌은 약간 숨이 차서 헐떡이며 말했다. "그 파니안이란 학생 손에 그냥 크리프가 죽게 내버려 둬요." 카엔은 오히려 렌보다 더 화를 내며 말했다. 렌은 힘없이 말했다. "안 돼요. 아무리 그래도 사람 목숨인데 죽게 할 수는 없어요. 파니안도 잘못하면 퇴학당할 거예요." "렌, 복수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를 혼내주고 싶지 않아요?" 카엔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위험스럽고 유혹적이었으며 그의 눈에서는 맨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마력적인 은보랏빛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마치 마음 속에 가라앉은 모든 생각을 끌어내는 듯 은보랏빛 보석같은 두 개의 눈이 반짝거렸다. 렌은 카엔의 눈빛에 이끌려 멍하니 크리프에게 채찍질당할 때 느꼈던 분노를 떠올렸다. 온몸에 남아 있는 고통을 생각했다. 렌은 크리프가 싫었고 그가 했던 행동을 증오했다. 그를 혼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때를 보여주고,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울면서 사과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에게도 똑같이 채찍질을 가하고 자신이 당했던 고통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순간 사이라에게서 들었던 그 집안의 사정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나서 크리프는 독재적인 아버지 밑에서 끊임없이 파니안과 비교당하며 자라야 했고,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일이 생기면 살이 너덜거릴 때까지 채찍질당해야 했다는 이야기. 어느새 분노는 사라지고 연민만이 남았다. 렌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아뇨. 복수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그저 이번 일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기를 바래요." 카엔은 눈에 서린 빛을 지웠다. 이 소녀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상 그가 나서서 복수해주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리라. 카엔은 안타깝게 물었다. "렌, 렌은 왜 그렇게 착한 척하는 건가요? 왜 분노하지 않죠? 그냥 당하기만 할 건가요?" 렌은 조용히 대답했다. "저는 더 심한 일도 당했었고 더 큰 아픔도 겪었어요. 이 정도 일은 별것 아니예요. 모르죠. 언젠가는 저도 참지 못할 만큼 괴로운 일을 당해 복수하게 될지. 그러나 아직까지는 아니예요." 그 말을 입밖에 낸 순간 렌은 섬찟함을 느꼈다. 언젠가 정말로 분노에 차 복수하는 일이 생기게 될까? 불길한 예언같은 스스로의 말에 렌은 몸을 떨었다. 옆에서 렌의 마음을 읽던 카엔은 하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좋아요, 도와주겠어요. 뭘 어떻게 도와줘야 합니까?" "결투는 모레니까 내일 밤에 결투장소에 마법진을 설치해서 결투를 아예 못 하게 막으려고 해요. 저는 마법진 초보니까 카엔님이 봐주셔야 해요. 그리고 몸이 이 지경이니 카엔님이 결투장소까지 순간이동으로 데려다 주셔야 될 것 같고요. 저번에 잠든 저를 옮겨주신 거라든지 이번에 제 방에 들어오신 거라든지 다 순간이동해서 오셨던 거 맞죠? 문이 잠겨져 있어 그냥은 못 들어오셨을 텐데요." 카엔은 ? 恣낯?끄덕였다. "그래요, 맞아요. 도와 줄 테니 내일 보죠. 아, 그리고 치유마법으로 고칠 수 있는 건 외상만이라 몸에 가해진 충격은 그대로이니 렌은 좀 더 쉬어야 합니다. 내일은 학교도 가지 말고 오후에도 도서관에 오지 말고 방에서 쉬어요. 알았죠?" "네, 카엔님, 정말 고마워요." 카엔은 피묻은 토를 다시 치우고 이불을 제친 후 렌의 몸을 들어 제대로 침대에 눕혀 주었다. 렌의 알몸을 다시 보자 카엔은 또 정신이 아득해졌다. '훗, 산전수전 다 겪은 내가 열 일곱살짜리 숫총각처럼 굴다니, 이게 무슨 꼴이야?'하고 카엔은 자조했다. 렌은 부끄러워하다가 카엔이 이불을 목까지 덮어 주자 안심하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일어난 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처를 보고 마법이라는 것에 대해 새삼 신기해했다. 정명기가 흐르는 피를 멎게 하고 주위의 흐트러진 기를 바로잡아 사람의 몸이 스스로 상처를 낫게끔 하는 거라면, 치유마법은 마나라는 이질적인 기운을 강제로 상처부위에 집어넣음으로써 상처를 자극하여 신속하게 외상을 치료하는 것인 듯했다. 하지만 정명기를 운기해 보니 몸 안 여기저기에 기가 흩어진 채인 것이 느껴졌다. 또 치유마법은 외상만 치료하는 것인 만큼 카엔의 말대로 몸 속의 불편함과 충격은 여전했다. 렌은 역시 하루종일 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등교시간 전에는 파니안과 수딘이 식당에 부탁해 둔 죽을 들고 병문안 왔다. 둘은 상처가 사라진 것을 보고 놀랐다. 렌은 아는 치유마법사의 도움을 받았다고 둘러댔고, 렌이 하차크 교수와 친한 것을 아는 둘은 그러려니 했다. 파니안이 입을 열었다. "사이라가 엉엉 울면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라더군. 자기가 했던 얘기는 없었던 걸로 해 달래. 앞으로 다시는 너한테 폐 끼치지 않겠대." 수딘은 약간 입가를 뒤틀며 덧붙였다. "역시 인기인은 달라. 그래도 하필이면 크리프 놈의 동생한테서 사랑고백을 받다니." 렌은 둘의 얘기를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제발 결투는 관둬. 잘못하다가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파니안은 냉정하게 말했다. "잘 하면 크리프 놈의 목숨도 끊어놓을 수 있겠지." 어릴 때부터 검을 수련해 온 그의 몸에서는 은근히 살기마저 뿜어져 나왔다. 수딘도 덧붙였다. "파니안 이 녀석이 못 하면 내가 할 거야. 차라리 잘 됐어. 이제 귀족파 녀석들의 기를 꺾어놓을 때가 됐어." 렌은 자신이 아무리 설득해도 이들을 말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소년들이란. 그들이 가고 나자 렌은 심야의 약속시간이 되기 전까지 계속 누워 있었다. 간간이 열이 나고 온몸이 쑤셔서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래도 카엔이 찾아온 11파잔(밤 10시) 무렵에는 그럭저럭 활동할 만한 정도로 몸이 좋아졌다. 카엔은 렌의 몸이 상당히 좋아진 것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하루종일 시킨 대로 푹 쉬었군요?" "넷, 명령대로 거행하였나이다." 렌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렌이 기운을 차린 것을 본 카엔은 미소지었다. "그래도 아직 걸어다니는 건 무리일 거예요. 자, 어디로 모실까요?" 카엔은 가볍게 렌을 안아들었다. 렌은 두 팔로 카엔의 목을 감았다. "좌원(左園) 입구의 공터로요. 거기가 결투장소예요." 카엔은 순간이동하여 그곳에 내려섰다. "이제 내려주세요." 카엔은 렌이 아직 자유롭지 않은 몸을 천천히 움직여 가며 주위의 돌멩이와 나뭇가지를 이용해 솜씨있게 마법진을 설치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카엔은 총명한 제자를 키운 스승의 뿌듯함을 느꼈다. "자신이 상대방과 실제로 결투한 듯한 환상을 보게 하려는 거군요? 얼마 전에 내게서 배운 내용을 응용한 것입니까?" "그래요. 결투의 결과는 아마도 스스로 생각하는 자기 자신과 상대방의 실력을 그대로 반영하게 될 거예요. 끝나고 나면 다시 싸우기 힘들 정도로 지치겠죠." 카엔은 렌이 설치한 진식의 위치를 검토하고 나서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음, 잘 설치하기는 했는데, 지금 이대로라면 두 결투자가 서로 상대방과 사랑을 나누는 환상을 보게 될 거예요. 소녀들 중에는 잘생긴 소년들이 서로 좋아하는 러브스토리에 열광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렌도 그런 겁니까? 그 렇게 해서 두 명을 화해시키려는 건가요?" 렌은 새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맙소사, 아녜요! 카엔님, 빨리 고쳐 주세요." 카엔은 렌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하며 돌멩이 몇 개를 고쳐 배치했다. 렌도 카엔 옆을 따라다니며 그를 지켜보았다. 설치가 끝나자 렌은 약간 숨차하며 벤치에 앉았다. 몸 안의 뒤흔들린 기는 아직도 회복되지 않아 약간 어지러웠다. 카엔도 렌 옆에 앉았다. 달이 휘영청 밝았다. "제가 여자라서 놀라셨죠?" 카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첫날부터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 언젠가 모든 걸 얘기해 드릴게요." 카엔은 렌의 마음 속에서 어지러운 이미지들을 보았다. 렌이 과거를 생각할 때면 ? ?떠오르는 기쁨과 슬픔, 사랑과 배신의 회오리들. 렌이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카엔은 이미 대강 렌의 과거를 짐작하고 있었다. "렌이 좋을 대로. 언제고 마음 내킬 때 얘기해주면 돼요." "고마워요, 카엔님."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던 렌은 조금 힘들어져 머리를 카엔의 어깨에 기댔다. 달은 아까보다 더 높이 떠 밤인데도 불구하고 천지가 환했다. "옛날 제가 배웠던 싯귀 중에 이런 게 있었어요. 지금 사람은 옛 달을 볼 수 없지만 오늘 이 달은 옛사람들을 비추었지. 옛사람과 지금 사람이 흐르는 강물처럼 이렇게 함께 달을 보고 있네." "참 아름답군요." "그 시를 지은 시인은 술에 취한 채 배를 띄우고 강에서 즐기고 있었는데 강물에 떠 있는 달이 너무 아름다워서 달을 잡으려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결국 빠져 죽었답니다. 그러자 신들이 그를 달로 보내 그곳에서 옥토끼와 함께 살게 했답니다." 달빛을 받아 빛나며 조용히 시를 읊는 렌의 모습은 이 세상 사람같지 않게 아름다웠다. 카엔은 다시 충동에 휩싸여 렌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이번엔 어제 했던 것보다 훨씬 진한 키스였다. '아,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이야. 혀끝에 닿는 이 아득한 기분. 숨이 막힐 것 같아. 사랑 때문에 죽을 뻔했던 주제에 벌써 흔들리면 안 되는데. 그래도 생각보다는 서투른 키스군. 음... 내가 했던 키스 중에서는 3등이야. 자오가 1등, 테룬이 2등.' 렌의 마음을 읽던 카엔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입술을 뗐다. 그리고 스스로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대놓고 물어봤다. "내 키스가 마음에 들기는 하나요?" 렌은 뜻밖의 질문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에 들었어요. 서투르지만 열정적인 맛이 있어요. 제가 그동안 했던 키스 중에는 3등이예요." 렌이 황당할 정도로 정직하게 대답하자 카엔은 할 말을 잃었다. "레이디가 그런 걸 그렇게 곧이곧대로 털어놓아도 되는 거예요? 그리고 도대체 몇 사람하고 키스해본 거예요?" "전부 세 명이요. 카엔님까지 포함해서요." "맙소사, 그럼 내가 꼴찌란 말입니까?" "후훗, 카엔님, 키스를 잘한다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쟎아요. 그리고 뭐든지 배우고 익히면 나아질 수 있어요." 렌이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카엔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결국 피식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카엔님, 이제 들어가요. 춥네요." 렌은 몸을 떨었다. 카엔은 다시 렌을 품에 안고 순간이동해 방까지 렌을 데려다 주었다. 카엔은 렌이 황궁 내에서의 자유로운 순간이동은 황제의 특권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데 대해 속으로 감사했다. 렌의 밤인사를 받으며 그는 황제의 침실로 돌아왔다. ===================================================================치료사 렌 [4] 테라미즈에서 나와림 되기 (13) -------------------------------------------------------- 호화로움과 아름다움이 극에 달한 침실은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그의 취향에 맞추어 최고급 레드와인과 먼 남해안에서 가져온 열대과일과 주방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과자가 남대륙 드워프제 은식기에 담긴 채 놓여 있었다. 카엔은 가짜 신분용 마법사 로브를 벗어 아무렇게나 던지고 황제의 가운으로 갈아입은 후 호화로운 침상에 기대어 포도주를 들이켰다. 눈먼 시녀가 조용히 들어와 카엔이 벗어놓은 로브를 가져갔다. 전에는 이곳의 적막이 늘 편안했으나, 이제는 렌의 웃음소리 없는 휑함이 참을 수 없었다. 카엔이 읽은 바로는 렌은 아직까지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렌이 자신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렌은 적어도 나와림 동료들이나 아카데미 친구들만큼은 카엔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듯했다. 당장은 그걸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렌으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겠다고 카엔은 다짐했다. 문득 카엔은 어느새 렌이 자신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데 놀랐다.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되어도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배신하지 않는 한 나는 그녀를 소중하게 대하고 아껴 주겠지만 사랑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가 배신해도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니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배신하는 존재였다. 적어도 그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은 그를 배신했다. 그로 인한 상처는 아직도 그의 가슴에 남아 보이지 않는 피를 흐르게 했다. 만약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녀가 배신한다면, 그로 인한 상처는 무엇으로도 낫지 않을 것이라는 걸 카엔은 알았다. 그렇게 될 수는 없었다. 다음날 새벽 카엔은 렌을 데리러 다시 렌의 방으로 갔다. 렌은 이미 나와림의 토즈릴을 갖춰 입고 카엔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밤과 마찬가지로 카엔에게 안겨 결투장소로 이동한 렌은 아직 양쪽 모두 도착하지 않은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 우리 나무그늘 뒤로 숨어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투명마법을 쓰면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아요." 카엔은 입 속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더니 렌을 끌어당겨 안았다. "아무 변화도 없어 보이지만 지금부터는 아무도 우리 모습을 볼 수 없어요." 렌은 아직도 끊임없이 마법이란 것에 대해 신기해했다. 카엔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왠지 자랑스러워지고 흐뭇해져서 유치찬란하긴 해도 자꾸 렌 앞에서 이런저런 마법을 시전하게 되는 것이었다. 잠시 후 파니안과 크리프가 각기 두 명의 입회인(파니안이 데려온 것은 수딘과 보크넬이었고, 크리프가 데려온 것은 렌이 잘 모르는 학생들이었다)을 대동하고 결투장소로 다가왔다. 공터 양쪽 끝에서 쌍방의 입회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파니안과 크리프는 칼을 뽑아 들고 공터 한가운데로 걸어들어갔다. 그런데 그들은 중앙지점에 서자마자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상대방에게 채 다가가기도 전에 둘은 마치 유령과 싸우는 것처럼 미친 듯이 칼을 휘둘러댔다. 입회인들이 그들에게 다가가려고 했으나 마치 벽에 부딪힌 듯 더 나아갈 수 없었고, 파니안과 크리프는 각자 허공에 대고 칼질하기를 계속했다. "일단은 성공인 것 같네요." 렌이 카엔에게 속삭였다. "계속 지켜보도록 하죠." 카엔 역시 속삭였다. 거의 반 파잔(한 시간)이 지났다. 파니안과 크리프는 점점 힘이 빠지는지 동작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 파니안은 마지막으로 강한 찌르기를 하고서는 안심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조금 지나 크리프 또한 허공을 향해 칼을 휘둘렀는데, 그는 파니안과는 달리 옆구리를 감싸안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무슨 일이죠?" 렌은 깜짝 놀라 카엔에게 물었다. "렌이 말했듯이 마음과 몸은 연결되어 있어서, 환상으로 받은 충격은 신체에도 영향을 미친답니다. 아마도 크리프는 환상 속에서 파니안에게 옆구리를 찔린 것 같습니다. 피가 나지 않아도 몸이 받는 충격은 비슷하죠." 카엔은 나직이 말했다. "그럼 가 봐야겠어요!" 렌은 카엔이 말릴 새도 없이 달려나갔다. 카엔의 품을 벗어나자 투명마법이 풀려 렌은 마치 허공에서 나타난 것처럼 보였지만 파니안과 크리프에게만 신경을 쓰던 입회인들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원래 설정해 둔 대로 두 명이 모두 쓰러지자 마법진은 어느새 해소되었다. 렌은 서둘러 크리프에게로 다가갔다. "뭐 하려는 거야?" 수딘이 렌의 팔을 잡으며 불만에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크리프가 다쳤을 지도 모르쟎아. 살펴봐야지." 렌은 급히 대답했다. "저런 녀석을 봐 줘서 뭘 어쩌려고?" "난 치료사야. 아픈 사람을 그냥 놔둘 수는 없어!" 렌은 수딘의 손을 뿌리치고 크리프에게로 몸을 숙였다. 크리프의 입회인들은 렌이 크리프를 치료한다는 말에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렌 은 아랑곳하지 않고 쓰러진 크리프의 몸을 뒤집어 맥을 짚고 상태를 살펴보았다. 피부는 차고 습했으며 맥박은 약하고 빨랐다. 쇼크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 외엔 이상이 없었으나 쇼크 증세도 그대로 놔두면 생명이 위험해지고 심지어 쇼크사에 이를 수도 있었다. 렌은 즉시 정명기를 일으켰다. 몸이 상하여 운기가 쉽지 않은 상태에서 가까스로 기를 모은 렌은 가슴에 크리프의 얼굴을 감싸안고 오른손으로 크리프의 이마에 기를 불어넣었다. 잠시 후 크리프의 신체의 경직이 풀리고 크리프는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자마자 렌의 얼굴이 보이고, 게다가 렌의 가슴에 안겨 있음을 깨닫자 크리프는 당황하며 일어나려 버둥거렸다. "가만 있어요. 아직 안 끝났습니다." 렌은 남은 기를 불어넣었다. 크리프는 이마를 통해 전해져 오는 안온하고 따뜻한 기운에 묘하게 편안해지고 안심이 되자 버둥거리는 것을 멈추고 얌전히 안겨 있었다. 기를 모두 불어넣은 렌은 맥을 짚었다. 이제는 심박수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자, 됐어요. 이제 아무 이상 없습니다." 렌이 손을 풀어주자 크리프는 그제서야 얼굴을 붉힌 채 허둥대며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두 선배님이 싸우는 걸 막으려고 마법진을 설치했습니다. 두 분 모두 마법진을 눈치채지 못하고 진 안으로 들어가셨으니 승자도 패자도 없습니다. 아니, 두 분 다 패자라고 할 수 있겠군요. 결투는 무효입니다." 렌은 냉정하게 말했다. 마법진의 충격에서 비교적 빨리 벗어나 정신을 차리고 렌이 크리프를 치료하는 과정을 지켜보던 파니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결투는 없었던 걸로 하지. 마법진에 걸린 것은 우리 둘 모두의 불찰이니까." 크리프는 뭐라고 더 말하려다 렌과 파니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다. 결투는 이걸로 끝이다. 나도 할 말이 없으니." 크리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회인들을 끌고 가 버렸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자 파니안은 걱정스런 얼굴로 렌에게 물었다. "몸은 괜찮아? 어제 아침보다는 한결 좋아 보이는데." "응. 이제 많이 괜찮아졌어. 다만 좀전에 크리프를 치료하느라 힘을 써서 조금 어지럽네." 렌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카엔 생각이 나서 조급해졌다. "파니안, 미안하지만 잠깐만 기다려 줄래?" 렌은 힘겹게 발걸음을 떼어 좀전까지 카엔이 서 있던 곳으로 갔다. "카엔님, 카엔님, 어디 계세요?" 렌은 나직이 카엔을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렌은 몇 번 더 불러 보다 대답이 없자 하는 수 없이 돌아섰다. 파니안과 수딘이 렌을 부축했다. "렌, 창백해 보여. 다시 쉬어야겠어." "그래, 저런 녀석을 치료하느라 힘을 쓰다니." 렌은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모두들 걱정해줘서 고마워. 아무도 다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카엔은 렌이 친구들과 사라질 때까지 투명마법으로 몸을 숨긴 채 렌을 바라보았다. 렌이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는 것에 토라진 그는 렌이 애타게 부르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보니 렌의 친구라는 나와림들은 하나같이 렌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애틋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자기네들끼리 그렇고 그렇게 지내라고 나와림 제도를 둔 것도 아닌데! 황제에 대한 봉사라는 본래의 취지는 대체 어디 갔단 말인가! 그리고 렌을 증오해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는 크리프라는 놈은 렌의 품에 안겨 치료받으면서 어느새 렌에 대해 증오 대신 연정에 가까운 호감을 갖게 된 듯했다(도대체 렌은 외관상 동성이 아닌가. 지극히 스트레이트로 보이는 놈마저 저렇다면 대체 어쩌란 말인가). 흥, 그렇게 다른 놈들과 시시덕거리는 게 좋으면 그러라지. 카엔은 전날 렌이 자기 키스를 3등짜리로 품평했던 것까지 포함해서 총체적으로 속이 상했다. 카엔은 렌을 아예 보지 말까, 아니면 옛날에 몇몇 소녀와 소년들에게 했던 대로 정신조작을 해서 자신의 인형으로 만들어 버릴까 고민했다. 카엔은 그러다 한숨을 쉬었다. 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정신조작을 한다는 것은 모처럼 얻은 찬란한 보석을 스스로 부숴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당분간은 렌을 만나지 않겠어. 그리고 그녀가 내게 먼저 키스하지 않는 한 내가 스스로 키스하지는 않을 거야." 카엔은 약간 처량한 심정으로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렌이 나를 특별한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게 되는 날이 오기나 할까. 렌은 며칠간 도서관에 카엔이 나타나지 않자 몹시 걱정했다. 서가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카엔을 부르기도 하고, 도서관을 담당하는 직원에게 카엔의 행방을 묻기도 했다. 담당직원의 얘기는 한심했다. 도서관 사서는 워낙 한직이라 굳이 공식 연가나 병가를 내지 않아도 쉴 수 있도록 되어 있고, 그래서 휴가와 관련한 아무 서류도 접수된 바 없다는 것이었다. 카엔의 주소나 숙소를 알 수 없냐고 물었으나 서류를 분실했다는 대답만을 들었다. 렌은 자신이 카엔에 대해 너무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렌도 카엔에게 별로 많은 얘기를 해 주지 않았지만, 카엔은 자신에 대해 거의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은 것이다. 렌은 그저, 다시 만나면 많은 것을 얘기해주고 많은 얘기를 들어야지 하고 다짐하며 그가 무사하기만 바랄 뿐이었다. 카엔이 곁에 없으니 너무 쓸쓸했다. 카엔은 투명마법을 시전한 채 렌이 자신을 찾아 돌아다니고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심술궂은 기쁨을 느끼며 지켜보았다. 적어도 렌이 열심히 자신을 찾는 동안은 자신이 렌의 마음 속에서 확실히 영순위였다. 렌 옆에 붙어 렌의 일과를 지켜보고 마음 속 생각을 읽는 데 재미를 붙인 카엔은 며칠간 수업시간에마저 렌을 따라다니며 렌을 관찰했다. 카엔은 몇 가지 재미있는 렌의 습관을 발견했는데, 예를 들자면 잠자리에 들 때 반드시 오른쪽에서 침대로 들어간다든지, 수업시간에 교수가 질문하면 기운차게 손을 들려다가 주저하며 내린다든지(렌의 마음속에 나 혼자만 맨날 대답하면 다른 학생들이 실 망할 거야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카엔은 흐뭇해했다), 이를 닦은 컵은 항상 뒤집어 놓는다든지, 절대 속옷 빨래를 시녀들에게 맡기지 않고 밤에 빨아 창가에 널어 놓았다가 새벽에 잘 개어 서랍에 넣는다든지 하는 것이었다. 카엔이 렌을 지켜보면서 놀란 것은 사람들을 대할 때 언제나 진심이라는 것이었다. 사이라가 찾아와 울면서 모든 것이 자기 탓이라고 사과했을 때 괜찮다, 앞으로도 계속 사이좋은 친구로 지내자고 하는 렌의 마음에는 한 점 원망도 없었다. 동급생이 렌에게 달려와 카엔이 보기에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시덥쟎은 고민을 털어놓으면 렌은 늘 진지하게 듣고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그러다가도 렌은 카엔을 걱정하곤 했다. '카엔님께 별 일이 없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무심했어.' '카엔님이 보고 싶어.' 렌이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카엔은 뿌듯했다. 스토커같은 자신 의 행동에 한심할 때도 있었지만, 이 비밀스런 기쁨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카엔은 렌이 사람들을 향해 밝게 웃지 않을 때의 모습도 보았다. 늦은 밤이면 렌은 홀로 슬퍼했다. 안타까운 죽음을 당한 스승과 그런 죄를 저지름으로써 결국 더 큰 고통을 자초한 자오를 생각하며 눈물지었고, 이 세계 어느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은 외로운 자기 존재에 대해 괴로워하고, 이 모든 것이 꿈이나 환상은 아닌지, 지금 누리는 짧은 행복이 잠에서 깨어나면 모두 흩어져 버리지나 않을지 걱정하였다. 그럴 때의 렌의 고독과 슬픔의 빛깔은 무척이나 카엔의 것을 닮았다. 카엔은 그때마다 렌에게 다가가 눈물을 닦아 주고 품에 안아 위로해주고 싶었다. 카엔은 렌이 자신의 존재에 의지하고 있음을 알았다. 의지라고 말하기는 이상하지만, 렌은 자신이 카엔에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카엔을 웃게 만들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살아가는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착한 렌. 렌은 카엔을 보지 못한 지 열흘이 넘어가자 이제 걱정이 커지기 시작했다. 렌은 음악수업 시간 중에도 수업은 듣지 않고 카엔이 대체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지 걱정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교실문이 벌컥 열리고 소년 한 명이 외쳤다. "동제국에 내전이 일어났대! 황태자군과 이황자군이 붙었는데 황태자군이 6,00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해서, 결국 황태자는 처형당하고 이황자가 황위에 올랐대!" 학생들은 남의 나라의 전쟁 소식에 흥분하며 소년을 둘러쌌다. 수업은 엉망이 되고, 학생들은 그 소년을 둘러싸고 질문공세를 펼쳤다. 학생들은 모두 그 소년을 따라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갔지만 렌만은 멍하니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미 예감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동제국에서 일어난 전쟁과 죽음의 소식은 렌을 뒤흔들었다. 렌은 그 죽음의 인과가 자신에게 닿아 있음을 알았다. 렌은 그 수많은 병사들의 죽음이 괴로웠지만, 더 괴로운 것은 자신이 얼굴도 모르는 병사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보다 테룬의 무사함을 기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렌은 한 줄기 자책의 눈물을 흘렸다. 렌의 마음을 읽은 카엔은 자기도 모르게 투명마법을 풀고 렌에게 다가갔다. 카엔을 본 렌은 울면서 말했다. "카엔님, 제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이 세상에 제 이야기를 들어주실 분은 카엔님밖에 없어요." =================================================================== 치료사 렌 [5] 동제국의 격랑 (1) -------------------------------------------------------- 처음 테룬의 계획은, 자신이 반란죄를 자백하고 수도 브림으로 압송될 경우 압송행렬이 브림의 인근에 위치한 도란 성을 들르게 되므로, 그곳의 성주인 동대륙 제일의 무인 팔라르 데 매긴에게 비무를 제의하여 꺾음으로써 그를 포섭한 후, 반란죄 자백을 위해 황제와 황태자 앞에 서는 순간 황궁 밖에서 매긴은 친위병들을 제압하고 테룬 자신은 무공을 드러내어 황제와 황태자를 사로잡는다는 것이었다.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이황자에 대한 군부의 신임은 원래부터 두터웠었다. 직접적인 그의 세력, 정확히는 제2황후의 세력이었던 몇몇 귀족들은 반란죄로 처벌받으면서 이미 흩어졌으나, 이황후가 포섭하지 못했었던 강직한 무가들은 다행히 반란죄에 연루되지 않고 그대로 세력을 보전하였다. 그 무가들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팔라르 데 매긴은 매우 호승심이 강한 자였고 강자들과 승부를 겨루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테룬이 그에게 승부를 제의하여 정당한 대결에서 그를 꺾기만 한다면 팔라르 데 매긴은 순순히 그의 힘이 되어 줄 것이었다. 테룬은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샤이트의 눈을 피해 병자 노릇을 계속해 가며 적당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황자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샤이트가 심각한 얼굴로 테룬을 찾았다. "무슨 일인가?" 테룬은 술잔을 흔들며 일부러 게슴츠레한 눈으로 샤이트를 힐끗 보았다. "먼저 저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테룬은 놀람을 감추려고 애썼다. "무슨 소리냐?"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이 끝날 때까지 저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내가 너를 죽일 힘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테룬은 시치미를 떼었다. 그러자 샤이트는 강렬한 눈빛으로 테룬을 바라보았다. "펠리시티 황후 마마를 닮은 그 소녀가 나타났다 사라진 이후 황자 전하께서 건강을 회복하셨음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테룬은 흠칫하며 살기를 일으켰다. "어떻게 알았는가?" "황자 전하께서는 오히려 전보다 더 무겁게 발을 끄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눈치 못 채겠지만 저는 그 부자연스러움을 눈치챘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움도 알고 있겠구나." 테룬의 양손이 파랗게 물들었다. 그의 무공은 이제 검이 없이도 손에 검기를 모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고 있? 駭? "그러나 저는 황태자 전하께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왜지?" 테룬은 손에서 힘을 뺐다. "전하, 모후께서, 펠리시티 황후 마마께서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샤이트는 반문했고, 테룬은 경악했다. "뭣이라고? 어머니께서 살아 계시다고?" "그렇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사형 집행 전에 이황후 마마를 빼돌리셨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우연히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지?" "사형집행 당시 이황후 마마의 부탁으로 얼굴이 보이지 않게 머리에 두건을 씌웠다고 했는데, 아마 그걸 이용해서 다른 사람으로 바꿔친 것 같습니다." "아버님, 황제 폐하께서도 그 사실을 알고 계시나?" "제가 아는 바로는 모르고 계십니다." "형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녀를 빼돌리신 거지?" 샤이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굳이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었다. 테룬은 엄청난 사실에 할 말을 잃었다가 한참만에 다시 물었다. "그것과 내 완치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과는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는가?" "황태자 전하께서는 이황후 마마께 사로잡혀 제정신이 아니십니다. 제가 여기 흑성으로 쫓겨나다시피 온 것도 사형 집행 전에 이황후 마마를 만나러 가지 마시라고 직언을 한 결과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이황후 마마의 꾀임에 다시 빠지실 것을 우려해서입니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께서는 저의 간언을 뿌리치시고 사형 집행 전에 이황후 마마를 만나러 가셨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이황후 마마의 사형집행 후 곧바로 저를 내치셨습니다. 저는 이황후 마마께서 이미 처형되신 이상 황태자 전하께서 저를 내치실 이유가 전혀 없는데 그리 하신 것에 대해 내내 의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따르는 수도의 몇몇 동료에게 연락하여 알아본 결과 이황후 마마의 생존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저는 이제 더 이상 황태자 전하께는 희망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도 너는 형님의 심복이지 않느냐?" "그렇기 때문에 황태자 전하를 위해서라도 광기의 고리를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저는 황자 전하를 계속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황자 전하의 가슴에 꺼졌던 삶에 대한 열망이 다시 지펴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황자 전하께서 그동안 팔라르 데 매긴에게 연락하려고 애써 오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황자 전하께서 세우셨던 계획보다 훨씬 더 승산이 높은 계획을 세워 드리겠습니다. 대신에 두 가지를 약속해 주십시오." "두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 이황후 마마와 황태자 전하의 목숨을 반드시 끊으시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테룬은 한참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믿고 그런 것을 약속하지?" "지금 황자 전하께서 저를 죽이시는 경우 당장 그 소식은 황태자 전하께 들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황태자 전하께서는 즉시 황자 전하를 경계하여 대책을 세우실 것이고 황자 전하께서 승리하실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심지를 잃으셨다고는 하나 아직 황자 전하의 반란을 막을 힘은 갖고 계십니다. 아무리 황자 전하께서 소드마스터라 하셔도 황태자 전하께서 국력을 기울여 황자 전하를 치신다면 황자 전하께서 살아나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제가 살아서 황자 전하를 배신할 경우 역시 황자 전하의 계획은 황태자 전하께 들어갈 것이고 똑같은 결과가 초래될 것입니다. 저를 살리시나 죽이시나 반란이 실패할 거라면 저를 살려두신다고 해서 황자 전하께서 잃으실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머님과 형님을 죽이라고?" 테룬은 침통하게 다시 물었다. 샤이트는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어차피 반란입니다. 이황후 마마를 처단하지 않으시는 한 황자 전하께서는 이황후 마마의 오명을 뒤집어쓰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황태자 전하를 생각하시는 마음이 각별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반란은 죽느냐 죽이느냐입니다. 황태자 전하를 살려두실 수는 없습니다." "귀양으로도 안 되겠느냐?" "안 됩니다." 테룬은 샤이트를 노려보았다. "네가 바라는 나머지 한 가지는 무엇이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원합니다. 전하께서 황제로 즉위하시면 저를 재상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형님 밑에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나?" "충분히 가능했겠지만 지금의 황태자 전하는 주군으로 모시기에는 너무 정도에서 벗어나셨습니다." "나는 어떤가? 너라면 나와 어머니의 관계를 알고 있을 텐데?" 샤이트는 망설이다 대답했다. "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황자 전하께서는 황태자 전하처럼 펠리시티 황후 마마께 온 정신을 사로잡히지는 않으셨습니다. 저는 황자 전하를 주군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제 충성을 받아 주십시오." 테룬은 다시 물었다. "너는 야심가로 보이는데, 언제라도 상황이 바뀌면 나를 배신할 수 있지 않나? 지금 네가 형님을 배신하는 것처럼 말이다." "제가 아무리 야심가라 해도 황제가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황자 전하께서 황제가 되실 확신이 있으시다면 저를 신하로 삼는데 주저하실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한참동안 말이 없던 테룬은 마침내 대답했다. "좋다. 너를 내 신하로 삼겠다." "전하께서 세우신 계획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라 하더라도 황궁의 방위시스템을 뚫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지금 전하께서는 단순히 황태자 전하를 처단하실 뿐만 아니라 제국 전체에 황자 전하께서 정당하게 스스로의 힘으로 황위를 차지하신 것임을 보이셔야 합니다. 암습으로 황위를 얻으시게 된다면 전하의 정통성에 스스로 흠집을 내실 뿐입니다." 샤이트는 테룬과 반란계획을 세우며 원래 계획의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너의 계획은 무엇인가?" "전하의 계획 중 팔라르 데 매긴을 포섭한다는 것과 반란죄를 자백한다고 하고서 이곳을 벗어나 수도로 가신다는 부분은 그대로 살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다만..." "다만 무엇이지?" "중간에, 아마도 매긴이 지키는 도란 성에서 정식으로 거병하여 반란의 기치를 드시되,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명분이 없는 반란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내 모후가 대역죄를 범한것은 온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무엇으로 명분을 삼는단 말이냐?" "황태자 전하를 저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데 공감하는 세력이 황태자궁 내에 상당히 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황태자궁 지하에 숨겨져 있는 펠리시티 황후 마마를 빼내오도록 하겠습니다." "그 다음엔?" "이황후 마마와 황자 전하께서 공모하여 제1황후 마마를 독살하신 것이 아니라 황태자 전하와 이황후 마마께서 황제 폐하와 제1황후 마마의 눈을 피해 사통하다가 제1황후 마마께 들켜 제1황후를 독살하였고, 그 누명을 황자전하께 뒤집어 씌운 거라는 소문을 퍼뜨린 후, 죽었던 것으로 알려진 이황후 마마를 사람들 앞에 내보임으로써 소문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럼 민심은 한순간에 황자 전하에게로 돌아설 것입니다." 황자는 샤이트의 빈틈없는 계획에 혀를 내둘렀다. "그건 진실이 아니지 않은가?" "반란을 일으킨다는 결심을 하시는 순간 무엇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테룬은 한동안 숙고했다. 그러다 대답했다. "좋다. 네 말대로 하마." ===================================================================치료사 렌 [5] 동제국의 격랑 (2) -------------------------------------------------------- 다행히도 수도 브림은 그동안의 문치의 영향으로 주둔군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황태자의 직접적인 세력은 장인인 폴코 공작의 지휘 하에 있는 16,000명 정도의 수도방위군이 전부였고, 황궁 내의 황궁 친위대 1,000명과 황성 외곽에 배치된 황제 직할 친위병단 20,000명은 황제의 칙명이 없는 한 폴코 공작이나 황태자가 임의로 움직일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황자와 샤이트는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황제가 친위병단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데 걸었다. 만약 친위병단이 황태자군과 합류하는 경우 전력이 부족한 그들은 도란 성에서 농성하면서 다른 세력을 끌어들이는 방법을 택하면 되었다. 황성 주변 200아반 내에 위치한 주요 성들에 주둔한 50,000명의 병력들은 테룬 황자가 팔라르 데 매긴과 도란 성에 주둔한 그의 세력을 포섭하는 경우 황자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매우 크니 농성이 계속되더라도 테룬 황자가 승리할 가능성은 상당히 있었고, 그들이 황자 쪽으로 기울지 않더라도 공격하지만 않으면 일단 대치국면을 지속시킬 수는 있을 것이었다. 변방 공국들은 중대한 변수이긴 하나, 그들이 황태자에게 원병을 보낸다 해도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테룬 황자가 즉위한다면 그들은 병사를 돌릴 것이고, 현재 힘을 키우고 있는 공국들은 중앙의 싸움을 환영할지언정 자신의 전력을 파병하여 허비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결국 팔라르 데 매긴을 포섭하는 걸 전제로 할 때 테룬 황자의 세력과 황태자군의 세력은 거의 비슷하다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승리를 위해서는 팔라르 데 매긴을 포섭하는 게 절대적이었다. 또 그를 포섭하고 나면 대륙 3대 무가 중 나머지 2대 무가도 따라올 가능성이 큰데, 대륙의 3대 무가가 모두 테룬 황자를 따른다는 것은 엄청난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반란죄를 자백하겠다는 테룬의 의사가 통신구를 통해 황제와 황태자에게로 전해진 것은 동지제 무렵의 일이었다. 황제는 즉시 테룬을 직접 심문할 테니 수도로 압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병석에 누운 지 오래인 황제는 죽기 전에 자기 손으로 테룬의 운명을 결정짓고 싶어했다. 그것이 사랑하는 둘째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흑성과 인근 초소의 경비병 중 200명은 그대로 샤이트의 지휘하에 호송군이 되어 테룬을 수도로 압송했다. 여정은 순조로웠다. 흑성에서 관도까지 나오는 데에는 보름 정도가 걸렸으나 일단 관도로 접어들자 일행은 속도를 내어 신속하게 수도로 향했다. 거의 하루에 60아반 정도의 속도였다. 파이브룬 제국이 건국되었을 때 초대 황제 하라스 대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서제국 테라미즈넨의 예를 따라 자신의 지배권 내의 영토에 관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후대 황제도 그 정책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관도망은 제국 곳곳에 잘 뻗어 있었고 역참시설도 수백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덕분에 황자 일행은 관도를 다니는 동안에는 노숙을 할 필요가 없었다. 황자 일행이 수도 브림에서 80아반(80마일) 정도 떨어진 도란 성 인근까지 왔을 때 샤이트는 행렬을 세우고 성이 바라다 보이는 역참마을에서 숙박할 것을 명했다. 다음 날 도란 성에 들러 그곳에서 병사 200명을 더 충원하여 수도 브림으로 입성할 예정이었다. 경비병들은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목적지에 거의 도달했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어져서 즐거운 얼굴로 서로 떠들어대며 역의 숙박시설에 들었다. 샤이트는 언제나처럼 황자와 같은 방을 잡아 황자를 부축하여 방까지 갔다. 황자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다는 것이 모두에게 알려져 있었기에 경계는 느슨했다. "전하, 오늘밤 팔라르 데 매긴이 이 근처 숲까지 오기로 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전하와 자웅을 겨루고 싶어합니다." "좋다. 소문은 얼마나 퍼졌고, 이황후의 신병 확보는 어떻게 되었지?" "이황후 마마를 빼내기 전까지 수도에 소문이 퍼지면 곤란하기에 아직 소문을 퍼뜨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밤 매긴과 전하의 담판이 끝나고 내일 도란 성에 입성하시는 것과 맞추어 이황후 마마를 빼내어 도란 성으로 모시고, 여기저기 심어둔 끄나풀들을 이용하여 일제히 소문을 퍼뜨린 후, 적당한 시점에서 이황후 마마를 군중에게 내보여 소문을 확인시키고 그 즉시 공개처형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글쎄, 내 생각에는 어머니를 처형하는 것은 수도 입성 이후로 미루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수도의 주민들에게 직접 황후를 눈으로 확인시키면 민심을 잡는 데 더 도움이 될 테고. 나는 사정만 허락한다면 아버지, 황제 폐하의 눈앞에서 그녀를 처단하고 싶다." 냉정하게 친어머니의 죽음을 논하는 테룬에게서는 종전의 주저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전하의 말씀도 맞습니다. 전란에는 항상 변수가 있게 마련이니 이황후 마마를 최후의 카드로 남겨 두는 것도 좋겠지요." "그래. 그럼 대강 정해진 것 같군." "전하의 검은 황태자 전하께 뺏겼으니 제 검을 쓰십시오. 전하의 단수검만큼 명검은 아니지만 제 검도 꽤 좋은 검입니다." "고맙다." 테룬이 본래 가지고 있던 단수검(斷水劍)은 물을 벨 수 있는 명검으로 이름높았다. 테룬이 열 여섯 때 테룬은 황제를 통해 동제국의 여러 검의 명인들에게 검을 만들어 바칠 것을 명했고 그렇게 얻은 열 다섯 자루의 검으로 일일이 물을 베어 보았다. 놀랍게도 열 네 자루의 검은 물을 베는 순간 모두 부러지고 오로지 한 자루의 검만이 남았다. 테룬은 그 검을 단수검이라 이름붙여 애검으로 삼았고, 그 검을 만든 장인은 그 즉시 제국 최고의 명인으로 떠올랐다. 테룬은 한 순간도 단수검을 몸에서 뗀 적이 없었으나, 대역죄로 체포될 때 황태자는 "네게 소중한 것은 모두 빼앗겠다"고 말하며 그 검을 가져갔었다. 테룬은 샤이트로부터 건네받은 검을 검집에서 뽑아 살펴보았다. 검날이 파랗게 살아 있었다. "네 말대로군. 명검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장인의 솜씨가 담겨 있는 좋은 검이야. 이 정도라면 내 검강을 펼치기에 손색이 없겠다." 테룬은 검을 허리에 차고 창문을 디뎠다. "다녀오겠다." 테룬은 소리없이 창틀을 차고 날아올랐다. 경비병들 중 누구도 그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가볍게 땅을 스치며 속력을 내어 테룬이 도착한 곳은 도란 성 성벽 뒤에서부터 이어서 있는 '조용한 숲' 기슭이었다.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테룬은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팔라르 데 매긴은 백마를 타고 단신으로 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테룬을 보고도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무엄하구나, 매긴." "전하는 아직 대역죄인일 뿐이오." 팔라르는 오만하게 대답했다. "진실을 전해 듣지 않았느냐?" "독살이 이황후 마마와 황태자 전하의 음모였고 황자 전하는 희생양에 불과하다는 소문 말이오? 증거가 없는 한 아무것도 믿을 수 없소." "그렇다면 왜 여기 나왔느냐?" "훗, 정치는 나와는 관련 없소. 우리 매긴 가는 평생을 검에 바쳐온 가문, 오직 강자를 따를 뿐이오. 전하께서 진짜로 내가 평생 꿈꿔온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르셨다면 보여주시오. 직접 나를 꺾어 보시오. 물론 나는 약관의 청년이 소드마 스터가 되었다는 소문을 믿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끓어오르는 이 호승심을 누를 수는 없구려." "내가 너를 꺾는다면 너는 무엇을 약속하겠느냐?" "내 충성을 드리겠소." "좋다. 바라는 바다. 말에서 내려라." 팔라르는 말에서 내렸다. 둘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세를 잡았다. 서로의 기세에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은 각자 챙 하며 검을 뽑았다. 팔라르의 검은 암현검이라고 불리는 동제국 3대 명검 중의 하나였다. "암현검이로군." "전하의 검은 평범해 보이는데, 내 검을 상대하기에 부족하지 않겠소?" "나는 이미 검의 예리함을 의지하는 단계를 벗어났다." "훗, 좋소. 그럼..." 팔라르는 테룬을 노려보며 빈틈을 찾았다. 그러나 테룬의 자세에는 단 한 군데 헛점도 없었다. '소드마스터라니 적어도 완전히 뜬소문은 아니로군.' 하고 생각하며 팔라르는 일단 검기를 일으켰다. 암현검이 파랗게 물들었다. 팔라르의 기세를 본 테룬도 서서히 검에 기를 모았다. 검에 검강이 모이고 주욱 1장까지 뻗어나갔다. 팔라르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검기도 검사(劍絲)도 아닌 검강이라니! 그것도 1장이라니! 저 정도면 제국 초대 황제 하라스 1세의 무위마저도 능가할 듯 싶었다. '무슨 기연을 얻었는지 몰라도 검강만으로 훌륭한 검사가 되는 것은 아니야.' 팔라르는 두려움을 애써 잠재우며 선제공격에 나섰다. 테룬은 여유있게 받아쳤다. 암현검에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검강에 칼날이 상한 것 같았다. 팔라르는 다시 이를 악물고 반격에 나섰다. 테룬은 전혀 서두르지 않고 팔라르의 공격을 일일이 무산시켰다. "왜 공격하지 않으시오?" 자존심이 상한 팔라르는 마침내 외쳤다. "내 장래의 신하를 다치게 하기 싫어서 그렇다." "아직 속단은 이르오!" 팔라르는 분노에 떨며 다시 공격에 나섰다. 마지막 일합에 모든 것을 건 팔라르는 모든 기를 검에 모아 테룬을 향해 찔러들어갔다. 테룬은 가볍게 피하며 자신의 검면으로 팔라르의 검을 쳐냈다. 암현검은 공중에 날려 빙글 돌다가 땅에 꽂혔다. 팔라르는 털썩 주저앉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땅에 꽂혀 부르르 떠는 자신의 검을 쳐다보았다. "10년 전부터 나를 이길 자는 아무도 없었는데..." "영원한 강자는 없다. 언제나 새로운 고수가 등장하는 법이다." "전하께서는 어떻게 그토록 젊은 나이에 그런 경지에 도달하시게 되셨습니까?" 팔라르의 말투는 이제 깍듯한 존대로 바뀌어 있었다. "열 다섯 살 이후로 내가 의지할 것은 오로지 검밖에 없었다. 검만이 나를 지탱해 주었지. 원한다면 모든 것이 베풀어지는 황궁이라는 환경에서 나는 내 목숨을 검에 실어가며 검을 수련했었다." 팔라르는 몸을 일으켜 테룬 앞으로 가 다시 정중하게 부복했다. "전하의 검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검은 곧 사람, 저는 전하가 제 주군으로 손색이 없으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를 전하의 신하로 삼아 주십시오. 매긴 가는 전하를 따를 것입니다." 테룬은 팔라르를 일으켰다. "이제부터 그대는 나의 신하이자 전우이다. 형님과의 승부는 순식간에 결정될 것이다. 그대가 나를 주군으로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해 주겠다." 테룬은 팔라르를 끌어안았다. "전하!" 팔라르는 이제 겨우 20세를 갓 넘은 황자가 보이는 제왕의 기운에 압도당했다. "팔라르, 나는 황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내가 황제가 되는 날, 내 왼쪽에는 샤이트 데 위든경이, 오른쪽에는 그대, 팔라르 데 매긴 경이 설 것이다." 팔라르는 감격했다. -------------------------------------------------------- 치료사 렌 [5] 동제국의 격랑 (3) -------------------------------------------------------- 다음날 샤이트는 행렬을 도란 성으로 이끌었다. 도란 성은 관도에서 이어진 소로를 따라 10아반 정도 거리에 있었고, 역참마을에서 성까지는 속보로 반나절이 조금 덜 걸렸다. 아침 일찍 서두른 덕분에 점심때가 조금 지나자 일행은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샤이트 일행은 무사히 성문을 통과하여 성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병들 또한 아무 의심 없이 따라 들어갔다. 그들이 성문을 통과하자 도란 성의 성주인 팔라르 데 매긴이 일행을 맞았다. "황자 전하." 황자는 마차에서 내리며 일부러 병약한 척 비틀거렸다. "죄인에게 전하라니 당치 않소." 팔라르는 황급히 황자를 부축하였다. "안으로 드시지요." 경비병들은 흐느적거리는 황자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성주의 집무실에 들어간 팔라르와 샤이트, 황자는 모든 시종과 경비병을 물리고 방문을 닫았다. "이황후는 어찌 되었는가?" 테룬 황자는 일부러 펠리시티 황후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일체의 존칭도 생략했다. "조금 전에 그녀의 신병을 확보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마법으로 순차 이동 중이니 오늘 오후 늦게쯤이면 여기 도란 성에 도착할 것입니다." "수고했다. 도란 성에도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하라. 내일 아침 반란을 선언하고 이황후를 내보이는 것이 좋겠다. 샤이트,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예, 제 생각에도 그것이 좋을 듯합니다." "팔라르, 이 성에는 황태자파가 얼마나 있지?" "장교 상당수는 어느 파라고 분류하기 어려운 직업장교입니다. 전체 장교 300명 중 매긴 가에 속한 100여명을 제외하면 나머지 200명 중 황태자파는 대략 50명 정도 될 것입니다. 그들은 황태자비의 아버지, 즉 황태자의 장인인 폴코 공작이 친히 육성하여 도란 성에 배치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저번의 반란 사건 이후 지금으로부터 10개월쯤 전에 새로이 배치된 자들이라 사병들과의 관계도 소원하고 다른 장교들과의 사이도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내에 배치된 총 6,000명의 사병들은 특별히 황족들의 세력다툼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적당한 명분이 있으면 대부분 위에서 하라는 대로 따를 것입니다." "황태자파 장교 50명을 처리할 적당한 방법을 강구해야겠군." 황자가 말하자 샤이트가 대답했다. "오늘 밤 황자 전하의 처형이 확정되고 황태자의 지위가 공고해짐을 축하하는 연회를 저의 주최로 열고 그 자리에 황태자파 장교들을 초대한 후, 적당한 시점에 몽혼약을 푼 요리나 술을 돌려 그들을 잠재우는 것이 가장 무난한 방법일 듯합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팔라르도 흔쾌히 말했다. "좋다. 그러면 그들은 그렇게 처리하기로 하지. 나는 그동안 이황후를 잘 구슬러서 적어도 내일까지는 얌전히 있도록 만들겠다." "전하,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황후의 매력, 아니 마력을 얕보지 마십시오." "훗, 그녀의 마력에 대해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녀가 펼칠 술수는 모두 훤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테룬은 이제 더이상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에서 반란, 아니 황권 회복을 선언하면 바로 황태자군이 몰려들 테니 그들을 물리칠 대책도 세워야 한다." 셋은 머리를 맞대고 전략을 짰다. 해가 거의 서산에 걸릴 무렵, 테룬과 샤이트와 팔라르가 지켜보는 가운데 성주의 집무실 중앙에서 여러 줄기 빛이 뻗어나왔다. 빛줄기가 잦아들자 그 가운데 서 있는 검은 복면의 사내 세 명, 회색 마법사복을 입은 노인 한 명과 눈부시게 아름다운 삼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여인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여인은 멍하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테룬을 보자마자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와 안겼다. "테룬, 나의 아들아! 네가 나를 구해줄 줄 알았단다." 눈물 흘리는 여인의 모습은 한없이 사랑스러우면서도 애처로웠고 몸에 달라붙는 반투명한 소(여인은 얇은 소 안에 속옷 외에는 블라우스도 스커트도 입고 있지 않았다)를 뚫고 보이는 새하얀 살결은 깎아놓은 대리석처럼 유혹적이었다. 그곳에 서 있는 남자들은 모두 가슴이 진탕되었다. "여러분 모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펠리시티는 눈물에 젖어 촉촉한 눈가에 꿀같은 웃음을 띄우며 감사를 표했다. 남자들은 모두 그녀로부터 감사를 들을 수만 있다면 불 속에라도 뛰어들고 싶다는 기분을 느꼈다. 펠리시티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테룬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그곳의 다른 남자들은 모두 자신이 테룬이 되어 그녀를 품에 안는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테룬 또한 다시 그녀를 보자 그간의 악몽이 한꺼번에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녀를 냉정하게 처단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지만, 부드러운 비단같은 그녀 몸의 감촉,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향긋한 체취에 테룬은 다시금 넋을 잃었다. 그녀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갈망과도 같은 존재였다. 테룬은 심호흡을 하고 검기를 일으켜 겨우 마음을 진정했다. 테룬은 어머니를 품에서 뗀 후 먼저 마법사를 보고 인사했다. "쿠드, 오랜만이군." 쿠드는 깊이 머리숙여 절했다. "황자 전하, 그 때의 일은 참으로 죄송했습니다." 쿠드는 언힐링 마법을 걸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괜찮네. 내 스스로 벌을 받기로 결심했었던 것이니 그대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그대가 여기로 온 것은 형님 대신 나를 따르기로 마음먹었다는 거겠지?" "예, 그렇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지금 정상이 아니십니다. 도저히 신하들이 안심하고 충성을 바칠 대상이 아니십니다. 그나저나 황자 전하의 상처는 완치되신 듯합니다만..." 쿠드는 어떻게 자신이 시전한 언힐링 마법이 풀릴 수 있었는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궁금해했다. "저... 손을 잠깐만 살펴보아도 되겠습니까?" 테룬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아아, 놀랍군요. 언힐링 마법은 그대로인데도 상처는 전부 완벽하게 아물었군요. 이 세상의 어떤 치유마법을 쓰더라도 이렇게 나을 수는 없는데... 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쿠드는 노인답지 않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나중에 설명해 주겠네. 지? 鳧?모자상봉을 해야겠으니 모두 잠시만 비켜주게." 사람들은 조용히 집무실을 나갔다. "오오, 테룬! 나의 사랑스런 테룬! 이 엄마가 얼마나 너를 그리워했는지!" 펠리시티는 사람들이 나가자마자 테룬에게 매달려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테룬은 그녀를 밀쳤다. "어머니, 아직까지 저를 유혹하실 생각이십니까?" 테룬은 애써 냉정하게 말했다. 펠리시티는 그 커다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테룬을 쳐다보았다. "사랑하는 내 아들, 내가 황태자에게 몸을 준 것때문에 마음 상한 거니? 미안하다, 그런 굴욕을 당하기 전에 자결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그래도 이 엄마 맘 속에는 오직 너뿐이었어. 너를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죽을 수가 없었단다." 펠리시티는 곱디 고운 손가락으로 테룬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다시 눈을 지긋이 감고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꽃잎이 피어나는 듯한 입술을 살짝 벌렸다. 넋을 잃을 정도로 유혹적인 광경이었다. 테룬은 펠리시티에 사로잡혔던 과거의 그 모든 욕망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피가 끓었다. 테룬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테룬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어머니가 진실이라고는 단 한 조각도 없는 요녀임을 너무도 잘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입을 맞추기 직전 테룬은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으며 다시 외쳤다. "어머니, 이제 제발 그만하십시오! 저를 그렇게 농락하셨으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펠리시티는 테룬의 말에 테룬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그 마력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너를 농락하다니, 그럴 리가. 너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내 자식인데.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남자인데. 네가 태어난 그 때부터 하루하루 멋있게 자라나는 너의 모습을 내가 얼마나 기쁘게 지켜봤는지 알아? 너는 나한테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야. 그리고 이 세상 최고의 남자야. 너를 가진 것은 내 진심이었어." 테룬은 다시 이성을 찾으려 애쓰며 샤이트와 세웠던 계획을 무뚝뚝하게 설명했다. "어머니, 저는 여기 도란 성에서 거병할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제1황후를 독살한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황태자 또한 어머니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어머니를 자신의 궁에 가두었으니 그것도 매우 수상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이용해야 합니다. 일단 어머니께서 죄를 시인하시고 황태자를 공범자로 고발하시면 누구라도 믿을 수밖에 없으니 황태자를 따르는 민심은 일시에 제게로 돌아설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죄인이 되어 주셔야 일이 쉽게 풀립니다. 그 다음 제가 황제가 되고 나면 어머니께 씌워진 혐의를 모두 벗겨 드리겠습니다." 펠리시티는 테룬의 말에 요기로 가득찬 눈동자를 무섭도록 총명하게 빛냈다. 그녀는 버들가지같은 하얀 두 팔을 테룬의 목에 감고 테룬의 귀에 속삭였다. "그 계획은 네가 만든 게 아니지? 네 부하, 틀림없이 저 샤이트라는 자가 만든 거겠지? 나는 알아. 그는 틀림없이 내 목숨을 요구했겠지. 일이 무사히 끝나자마자 나를 죽이라고 했겠지. 그래, 좋아. 그 계획대로 다 해 줄게. 이제 우리는 한 배를 탔으니까. 그리고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줄게. 나는 너를 믿으니까. 너는 절대로 나를 죽일 수 없을 테니까." 펠리시티는 은방울을 흔들듯이 아름다운 소리로 웃었다. 테룬은 정말로 그녀를 죽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다. 펠리시티의 독기가 점점 자신을 침범하는 것 같았다. 몽롱해지는 그의 정신은 구원을 찾아 헤맸다. 렌의 도움으로 펠리시티의 독기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정신은 이렇게 나약한 것이었던가? 그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듯 렌을 떠올렸다. 슬픔과 결의에 찬 그녀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어머니, 피곤하실 테니 쉬십시오." 그는 간신히 펠리시티를 밀어냈다. 테룬의 반응에 잠시 놀랐던 펠리시티는 곧 자신감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은 '너는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어. 너는 영원히 내 수중에 있어.'하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래, 오늘은 내가 풀려난 첫날이니 이 정도로 해 두자. 밤은 많고 우리 앞에 남은 세월은 길고 기니까." 펠리시티는 스치듯 테룬의 뺨에 키스했다. 그리고 옷자락을 끌어당겨 얼굴을 가리고 방을 나갔다. 방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 중 두 명이 그녀를 숙소로 안내했다. 펠리시티가 나가고 난 후에야 테룬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입술이 닿았던 곳은 불에 덴 듯 뜨거웠고, 그의 온 몸은 마치 여러 시간 무술 대련을 한 듯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샤이트와 팔라르, 쿠드는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샤이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이황후를 본 것은 먼 발치에서뿐이라 그녀의 매력을 과소평가했었나 봅니다. 그녀가 맘만 먹으면 황태자뿐만 아니라 서제국 황제도 유혹할 수 있겠던데요." ? 횃窄5?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엄청난 여인입니다. 저도 무가의 수장으로서 철혈심을 자랑했는데 그녀 앞에서는 한순간에 녹아 내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들이라고 어쩔 수는 없었을 것이다. 테룬은 자신이 과연 그녀의 마수에서 벗어난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그를 묶고 있는 끈을 잠시 느슨하게 풀어준 것에 불과한지 알 수가 없었다. 최대한 그녀를 보지 않는 것이 상책일 듯했다. 테룬은 냉정한 표정을 가까스로 유지하며 말했다. "그녀는 일단 우리에게 협력하기로 했으니, 이제 그녀를 내보일 그럴 듯한 무대장치를 만드는 일만 남았다." 황자의 말에 모두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쿠드는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황태자의 경거망동으로부터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곧 다시 수도로 돌아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로 분주해졌다. 그 날 저녁 샤이트는 약속했던 대로 황태자파 장교들을 초대하여 만찬을 베풀었다. 그동안 황태자파의 우환이었던 테룬 황자가 이 성 안에 무력하게 잡혀 있고 며칠 후면 반란을 자백하고 처형당할 거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황태자파 장교들은 이제 자기네들 세상이 온 듯 희희낙락하여 연회를 즐겼다. 황태자파 장교들에게 알려진 바로는 샤이트는 아직도 황태자를 충실히 섬기는 황태자의 심복이었고, 이제 테룬 황자의 자백을 유도한 공을 세웠으니 샤이트는 종전의 지위인 황태자궁 수석 보좌관 직보다 더 높은 지위, 어쩌면 대신이나 부재상의 직위를 받게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장교들은 샤이트가 친히 권하는 술을 황공해하며 즐거이 받아 마셨다. 약효는 좋았다. 장교들은 10여분이 지나자 차례로 곯아떨어졌다. 곧 팔라르 데 매긴이 매긴가의 장교들을 데리고 연회장에 들이닥쳤다. 매긴가의 장교들은 솜씨있게 황태자파 장교들을 포박하여 그들을 모두 지하 감옥에 처넣었다. 테룬 황자는 샤이트와 팔라르를 치하하고 다음 날의 거사를 그들과 추가로 상의했다. 세울 계획이 산더미같아 긴 겨울밤조차도 짧았다. 다음날 오전 팔라르 데 매긴은 성내의 전군-감옥에 갇힌 황태자파 장교들을 제외한-을 성 중앙 광장에 소집했다. 영문을 모르는 병사들과 아무 파에도 속하지 않은 장교들은 웅성거리며 궁금해하며 성주를 쳐다보았다. 팔라르는 한 손을 들어 그들을 조용히 시키고 정중히 뒤로 물러섰다. 테룬 황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팔라르가 준비해 둔 확성구슬을 들고 연설을 시작했다. "충성스런 파이브룬의 제군들이여!" 테룬 황자의 목소리는 광장에 메아리쳤다. 대역죄로 처벌받아 폐인이 되었다고 알려졌던 황자가 늠름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자신들 앞에 선 것을 본 병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가 반역죄로 귀양당했을 때 제군들은 모두 의아했을 것이다. 나를 조금이라도 알았던 사람이라면 내가 반역 따위를 꾀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테룬 황자의 말에 상당수의 장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교들에게 테룬 황자는 영원한 선망의 대상이었다. 유약하기 짝이 없는 하라스 4세와 황태자에 실망한 무인들은 테룬 황자가 성장함에 따라 그가 무인의 세상을 만들리라는 은근한 기대를 품어 왔었다. "사실 내게 씌워진 죄목은 모두 누명이었다. 간악한 황태자가 그 죄를 모두 내게 뒤집어씌운 것이었다." 병사들의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벌써 그런 소문을 들은 일부 병사들은 옆의 병사들에게 소문의 내용을 전해 주기도 하고 그럼 그렇지 하고 맞장구치기도 하였다. 황자는 손을 들어 다시 군중을 진정시켰다. "참으로 밝히기 부끄러운 일이지만, 패륜아인 황태자는 자신의 의붓어머니라 할 수 있는 제2황후, 내 어머니 펠리시티와 수년 동안 사통해 왔다." 경악 어린 탄성이 퍼졌다. "그렇다. 참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패륜이었다. 1년 전 황태자는 펠리시티 황후와 사통하던 현장을 자신의 어머니인 제1황후 마마께 들켰고, 그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펠리시티 황후와 공모하여 자신의 친어머니를 독살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것뿐이었다. 모두들 기억할 것이다. 제1황후 마마께 독이 든 과자를 전달한 것이 바로 황태자 자신이었다는 것을. 황태자는 그 때 자신은 아무런 사정도 모른 채 펠리시티 황후로부터 과자를 건네받은 것이라고 밝혔고, 아무도 황태자가 자기 친어머니를 독살한 것이라는 의심을 하지 않았기에 그의 변명은 그대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제 군중은 완전히 황자의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결국 황태자는 자신의 혐의를 내게 그대로 뒤집어씌웠고, 나는 아무런 증거 없이도 단지 펠리시티 황후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반역자가 되어 버렸다. 황태자는 내 손발의 근육을 가닥가닥 잘랐고 나는 폐인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기 어머니를 죽이고 의붓어머니와 사통한 패륜아인 황태자에게 이 나라를 넘길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기연을 만나 ? 扁〈酉? 소드마스터의 무공을 회복하였다." 황자는 팔라르로부터 빌린 암현검을 뽑아 검강을 일으켰다. 암현검의 본래 기운에 힘입어 검강은 한 장 반 가까이 뻗어올랐다. 일찍이 보지 못했던 엄청난 무위에 군인들은 성이 떠나가라 함성을 올렸다. 모두들 무인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가 눈앞에서 시현되는 데 감격했다. 황자는 다시 손을 들어 군중을 조용히 시켰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모두 기억할 것이다. 황태자는 제1황후의 아들로서 펠리시티 황후의 처형을 친히 책임지기로 했었다. 그런데 참으로 간악하게도, 황태자는 펠리시티 황후를 처형하기는커녕, 황태자궁 지하에 환락의 침실을 꾸며 놓고 지난 1년 간 그녀와 마음껏 놀아났던 것이다!" 군중은 이번에는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 누군가가 외쳤다. "증거가 있습니까?" "잘 물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있다. 황태자의 심복, 그의 수석 보좌관이었던 샤이트 데 위든은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자 차마 이 엄청난 불충을 좌시하지 못하고 그의 동료들을 동원하여 황태자궁 지하에 유폐되어 있는 펠리시티 황후를 빼내왔다. 모두들 보라." 황자의 손짓에 샤이트가 등뒤로 손이 결박된 펠리시티 황후를 끌고 앞으로 나왔다. 펠리시티 황후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으나 타고난 미모를 가리지는 못했다. 병사들은 입을 쩍 벌리고 황후를 쳐다보았다. "흑흑. 모두 제 죄입니다. 저는 황태자와 사통하였고, 황태자가 그 모친을 독살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그 후에는 황태자궁에 유폐되어 제 몸을 황태자에게 바쳐야만 했고요." 병사들은 황후의 마력적인 얼굴과 농염한 몸매와 애처로운 눈물에 어느새 멍해져 갔다. 몽롱한 병사들의 눈을 본 황자는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샤이트에게 손짓했다. 샤이트는 서둘러 펠리시티 황후를 다시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병사들은 그제서야 마법에서 풀린 듯 정신을 차렸다. "이제 황태자의 죄상이 백일하에 드러난 이상 각지에서 황태자의 처단을 요구하는 정의군이 기치를 들 것이다. 그리고 여기 도란 성은 그들의 구심점이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황태자는 편찮으신 황제 폐하를 보호라는 미명 하에 그 수중에 넣고 있다.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수도 브림을 해방하고 황제 폐하를 구출함과 동시에 악적 아제룬 황태자를 응징해야 한다. 내가 황제가 되는 날 오늘 이 자리에서 나를 따르기로 맹세한 자들은 나와 함께 영광의 자리에 설 것이다. 나를 따르겠는가?" 병사들과 장교들은 목청 높여 황자 전하 만세를 외치고 발을 굴렀다. 귀가 멍멍해질 정도의 엄청난 환성이었다. "나의 병사들, 나의 장교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정의군의 핵심이다. 우리 앞에 패배란 없다. 파이브룬 제국의 영광을 위해!" "파이브룬 제국의 영광을 위해!" 군인들은 한목소리로 외쳤다. 테룬 황자는 단상에서 내려와 장교 및 병사들과 일일이 인사하고 악수하였다. 모두들 감동하였다. 샤이트와 팔라르는 그 모습을 단상 한 쪽에 비켜선 채 내려다 보았다. 팔라르가 먼저 말했다. "전하께서는 정말 대단한 분이시군. 순식간에 전군의 마음을 저렇게 휘어잡으시고, 거기에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방법까지 이미 알고 계신 듯하니." "내가 주군으로 선택한 분 아닌가. 아마 자네는 앞으로도 계속 놀랄 거야." 샤이트가 대답했다. 둘은 다섯 살 차이가 났지만 이번 거사에 동참하면서 서로 말을 트기로 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소문이 퍼지면 조금이라도 중립인 자들은 절대 우리에게 적대하지 않을 거야. 이쪽에 정당성과 명분이 있으니까. 어쩌면 황제 폐하마저도 황태자에게 친위군을 내주지 않으실 걸. 황제 또한 남자인데, 자기 총희를 범한 아들이 고울 리 있겠는가? 그런 문제에서는 부자지간이란 의미가 없지. 결국 브림 성 수비에 꼭 필요한 군대를 제외하면 황태자가 동원할 수 있는 군대란 그 직속 사병과 장인인 국방대신 폴코 공작 지휘하의 수도방위군을 합쳐 12,000명 정도가 전부인데, 공성전에서는 12,000 대 6,000의 숫자면 성 안에 있는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법이지. 다만 황자 전하께서 농성전이 아닌 속전속결을 택하시는 건 말리고 싶네. 시간이 갈수록 소문도 퍼지고 우리 쪽으로 기우는 세력도 많아질 테니 시간을 끌면 끌수록 우리에게 더 유리하거든." 샤이트의 차분한 분석에 팔라르는 약간의 비웃음을 띄웠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자네는 역시 문관이군. 내가 볼 때 황자 전하께서는 타고난 무인이시다. 그러니 아마도 황자 전하께서는 성 밖에서 속전속결하시는 걸 택하실 걸세. 나도 무인인 이상 황자 전하께서 그 화려한 검강을 뿌리시며 평원을 누비시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고." 샤이트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나로서는 황자 전하께서 조금이라도 안전한 길을 택하시길 바라지만, 황자 전하의 뜻에 따를 수밖에." 둘? ?묘한 기대감을 품은 채 아직도 병사들과 인사를 계속하는 황자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 치료사 렌 [5] 동제국의 격랑 (4) -------------------------------------------------------- 소문은 마른 들판에 불이 번지듯 사방으로 번졌다. 동제국의 3대 무가 중 다른 두 가문인 호키텐 가와 뉴아른 가의 수장은 어떻게 알았는지 팔라르가 채 연락하기도 전에 먼저 통신구를 통해 팔라르에게 연락해 왔다. 양 가문의 가주는 얼굴과 음성이 함께 전해지는 최고위용 통신구로 황자의 신위와 펠리시티 황후의 실물을 보자 그 즉시 테룬 황자를 지지하기로 약속했다. 팔라르의 설득도 그들의 마음을 잡는 데 큰 몫을 하였지만, 역시 두 수장을 사로잡은 것은 황자가 소드마스터라는 점이었다. 모두 문관에 휘둘린 지난 30여 년간의 세월에 신물이 나던 참이었던 것이다. 호키텐 가와 뉴아른 가의 주된 세력은 변방에 있었기에 실제적으로 큰 힘이 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3개 무가가 모두 테룬 황자를 지지한다는 것은 다른 세력들이 차례로 테룬 황자의 편으로 돌아서는 계기를 만들었다. 평소 테룬 황자를 선망해 왔던 자유무사들이 차례로 도란 성을 찾았고 수도 인근의 영주들도 하나둘씩 충성을 맹세해 왔다. 사태의 위급함을 깨달은 황태자측-정확히는 황태자의 장인인 폴코 공작-은 동원 가능한 군대를 전부 긁어모아 토벌군을 편성하여 도란 성으로 파병하였다. 샤이트의 예측대로 황제는 친위군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황제의 병세는 중했지만 아직 소문을 듣고 판단할 정도의 정신은 남아 있었기에 황제는 친위군을 파병하여 달라는 폴코 공작의 청원을 단호히 거절했다. 결국 폴코 공작이 모은 군대는 11,000명에 약간 못 미쳤다. 그들이 도란 성 앞에 도착한 것은 테룬 황자가 도란 성에서 세력을 일으킨 지 보름만의 일이었다. "지금 성 안에 있는 군사는 총 8,000명 정도 됩니다. 원래 있던 병사 6,000명, 나머지는 인근에서 모여든 자유무사들과 병사들 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50아반 정도 떨어진 자리브 성의 성주가 2,000명 정도의 군대를 끌고 오기로 했습니다. 아마 내일 오후쯤이면 도착할 것입니다. 황태자군은 대략 11,000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적군." "선전전략이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황태자와 생사를 같이하는 자들이 아니면 참전을 꺼려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면 역시 농성전보다는 직접 전투가 낫지 않을까?" 팔라르는 황자가 예상대로 속전속결을 제의하자 미소지었다. 샤이트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농성전으로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이상 굳이 위험을 자초할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황자는 고개를 저었다. "샤이트, 그것은 그대가 모르는 바다. 지금 병사들의 사기는 최고조이다. 군대란 생물과 같아서 한 번 기세가 올랐을 때 그대로 밀어붙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래 끌게 되면 아바마 마께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되면 황태자가 황제로 즉위할 것이고 황태자는 다시 명분을 얻게 되니 그 전에 수도로 입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샤이트와 팔라르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테룬 황자의 사태 파악은 놀랍도록 정확했다. "알겠습니다, 황자 전하." "그럼 내일 공격은..." 세 명은 다시 밤늦도록 전략을 세웠다. 테룬은 이 순간이 좋았다. 열심히 전략을 세우고 전투를 생각하는 동안에는 그의 몸을 달리는 불길한 욕망을 잊을 수 있었다. 결전의 날, 화살의 사정거리 밖에 황태자군이 호를 그리며 길게 포진한 가운데 양군은 팽팽하게 대치하였다. 정오가 넘어갈 때까지 지루한 대치국면은 계속되었다. 아침부터 잔뜩 흐렸던 하늘에서는 마침내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황태자군은 물에 푹 젖어 처량한 모습으로 변했다. 그 때 성문이 열리며 팔라르 데 매긴이 이끄는 약 1,000여명의 기병들이 달려나왔다. 황태자군의 지휘관은 폴코 공작의 수석보좌관인 아핀이었다. 그는 비상하게 잘 돌아가는 머리 덕분에 폴코 공작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으나 사실 문관 출신이어서 병서는 읽어본 적이 있어도 군사를 움직여 본 경험은 없는 자였다. 아핀은 지루한 대치국면이 깨짐을 안도하며 오른편에 배치된 기병 2,000여명에게 신호하여 성에서 나온 기병들을 쫓도록 했다. 기병들이 빠져나가자 훈련이 잘 된 황태자군의 병사들은 곧 진의 두께를 줄여가며 종전과 같은 모양의 호를 형성했다. 한참 시간이 흘렀다. 기병을 쫓아간 황태자군이 아직 돌아오고 있지 않은 가운데 다시 성문이 열리며 테룬 황자가 4,000명 정도의 군대를 친히 이끌고 성밖으로 나왔다. 아핀은 뛸 듯이 기뻐했다. 여러 가지 전투의 유형 중 공격하는 측에서는 공성전이 가장 불리하고, 반대로 수비하는 쪽에서는 수성전이 가장 유리하다는 것을 여러 병서에서 읽어 익히 알고 걱정하던 터였다. 그런데 저 철없는 황자는 공성전에서 성이라는 엄청나게 유리한 조건을 스스로 포기한 채 군대를 끌고 직접 밖으로 나왔으니 이 얼마나 멍청한 놈인가. 아핀은 희희낙락해하며 전군에게 테룬 황자를 공격할 것을 명했다. "누구든지 황자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는 귀족의 작위를 내리겠다!" 황태자군 병사들은 함성을 올리며 테룬 황자를 향해 몰려갔다. 대열이 흩어졌다. 황자군은 최대 속도로 질주하며 황태자군 병사들을 용케 피했다. 그런데 황태자군 병사들이 황자군을 거의 따라잡을 무렵 반대편에서 다시 엄청난 함성이 들렸다. 아까 빠져나갔던 황자군 기병 1,000기와 자리브 성에서 새로 도착한 기병 2,000기가 후방에서 황태자군을 공격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황자군을 따라갔던 황태자군 기병 2,000기는 대체 어찌되었는지 흔적도 없었다. 아마도 황자군과 자리브 성군의 협공으로 이미 궤멸된 듯했다. 그들은 테룬 황자가 이끄는 본진의 양쪽에서 황태자군을 협공하기 시작하였다. 크게 당황한 황태자군은 대열을 흐트리며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성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머지 황자군들도 모두 달려나왔고 황자군들은 도살하듯 황태자군을 닥치는 대로 베어 나갔다. 테룬 황자는 검에 검강을 일으킨 채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그 눈부신 무위를 사방에 과시했다. 사람을 베고 피바람을 일으키는 이 순간만은 펠리시티를 본 이후로 몸 속에서 스물스물 일어나던 불길하고 사악한 욕정의 찌꺼기를 모두 쏟아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시체가 즐비했다. 황자의 무위와 피에 취한 황자군들은 한층 더 열을 내 가며 황태군을 도륙했다. 저녁 무렵 마침내 전투가 끝났다.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히면서 한 줄기 붉은 저녁햇살이 피로 물든 전장의 참상을 더 붉게 비추었다. 황태자군들은 모두 쓰러졌거나 진작에 도망치고 움직이는 것은 황자군들뿐이었다. 대강의 집계 결과, 황자군은 사망 457명, 부상 589명, 황태자군은 사망 4,300여명, 부상 3,000여명이었다. 나머지 황태자군은 모두 도주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엄청난 승리였다. 즐비한 시체들을 보며 테룬은 문득 렌을 생각했다. 자기를 생각해서라도 한 명이라도 덜 해쳤으면 좋겠다고 부탁했었지. 그러나 이것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싸움이었다. 손속에 인정을 남기는 것은 사치일 뿐이었다. "모두 경들의 덕분이다." 황자는 샤이트, 팔라르, 그리고 군대를 이끌고 제때 도착하여 큰 공을 세운 자리브 성의 성주 느펜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모두들 예상을 뛰어넘는 대승에 흥분했다. 느펜은 특히 제2황자를 믿고 전군을 이끌고 온 자신의 도박이 성공한 데 대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수도 브림을 공략할 일만 남았다." 황자의 말에 모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 브림에 남아 있는 황태자 직속 수도방위군은 5,000여 명, 만약에 황제 친위군이 합세한다면 합쳐서 25,000여 명이 되겠으나 이번 전투에서도 그들이 움직이지 않은 것을 보면 황제 친위군은 끝까지 가만히 있을 거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모두들 긍정했다. "결국 폴코 공작이 이끄는 황태자 직속군은 브림의 성문수비에 진력할 테니, 우리는 브림에서는 여기와는 정반대로 공성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본래 공성전에서는 성내 병력보다 열 배가 필요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현재 우리 측의 병력은 자리브 성에서 온 병력까지 합쳐 보아도 9,000명, 그 중 도란 성을 수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하면 실제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수는 8,000명이다. 그러니 우리는 브림 성 공략에서는 상당히 병력이 모자라는 셈이 된다. 그대들도 브림의 성벽이 얼마나 난공불락인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황자의 말에 모두 침중한 표정이 되었다. 샤이트가 입을 열었다. "전하, 역시 내부에서부터 공격해 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부에서부터라니?" "수도 내에서 내통자를 포섭하여 안에서부터 문을 열게 하는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수도의 인심은 땅에 떨어진지 오래입니다. 황제는 병들어 무력하고, 황태자는 제정신이 아니고, 그나마 국정을 돌보는 폴코 공작은 어리석은 주제에 야심만 커서 하는 일마다 그르치기 일쑤여서, 수도의 주민들은 황자 전하께서 거병하셨다는 말을 듣자 모두 하루빨리 황자 전하께서 수도에 입성하시기만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내통자를 찾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특히 펠리시티 황후를 내보이며 황태자의 패륜적인 행태를 고발하고 나면 아마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릴 것입니다." "수도의 군인들과 연통할 만한 우리 측 사람들이 수도 안에 있는가?" "쿠드 님이 계시지만 그 분은 최후까지 황제 폐하 곁에 머무르며 황태자의 섣부른 행동을 저지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밖에는 현재 수도 내에 있는 사람들 중 몇몇과 계속 연락을 취하고 있으니, 그들로 하여금 적당한 내통자를 찾도록 하겠습니다." "좋다. 만약에 그 방법이 실패하는 경우 공성전으로 들어가도록 한다." 회의를 마친 후 샤이트는 테룬에게 말했다. "전하께서 명하신 대로 펠리시티 마마를 두 명의 호위로 하여금 감시하게 하고 있습니다만, 그녀가 오늘밤 전하를 뵙지 못하면 앞으로는 우리의 계획에 협력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동안 애써 어머니를 피해왔던 테룬은 샤이트의 말에 흠칫했다. "그녀가 계획에 협력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샤이트는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황성의 사람들은 우리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원래 사람들은 자기 눈과 귀로 본 것만 믿게 되어 있고, 황태자측이라고 두 손 놓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 전하와 펠리시티 황후가 원래부터 결탁했던 거라고 역선전을 하겠죠. 우리의 승기는 민심을 잡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으니 그녀가 순순히 협력하지 않는다면 일이 여러 모로 복잡해지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테룬은 무거운 마음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녀에게 가 보겠다." 샤이트는 걱정스럽게 테룬을 쳐다보았다. "전하,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 마라. 나는 소드마스터이다." 부질없는 동문서답이었으나 테룬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테룬은 문득 샤이트에게 물었다. "그대는 별로 그녀에게 흔들리지 않아 보이는군." 샤이트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저는 원래 여자에게는 끌리지 않습니다." 테룬은 그 말에 놀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그녀가 나를 포함해 주위의 모든 남자를 홀리더라도 그대가 제정신을 차리게 해 주면 되겠지. 부탁한다." 샤이트는 그 말에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펠리시티는 도란 성 북탑의 꼭대기 방에 머물고 있었다. 일단 죄인인 그녀를 유폐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테룬은 그곳에 도착하자 호위들을 물리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얼굴은 자기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었다. "어머니." "오오, 테룬. 이리 오렴." 펠리시티는 침대에 비스듬이 누워 테룬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는 모처럼 정숙한 디자인의 소즈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자애로움과 걱정이 가득했다. "자, 이리 와서 좀 쉬렴. 이제 곧 전투일 텐데, 제대로 잠은 잤니? 엄마는 네 얼굴도 그동안 제대로 못 봤구나." 펠리시티의 말에 테룬은 갑자기 울컥하는 뭔가가 치밀어올랐다. "어머니, 어머니는 왜 저를 유혹하셨죠? 제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죠? 왜 다른 어머니들처럼 그렇게 평범하게 저를 사랑해주지 못하시는 겁니까?" 테룬은 자기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펠리시티는 복잡한 눈길로 테룬을 바라보다가 곧 다시 형언할 수 없이 자애로운 어머니다운 표정을 지었다. "엄마가 너를 미워할 리 있니? 너는 내 하나뿐인 사랑스런 아들인데? 어머니의 마음은 모두 다 같단다. 자기 자식이 온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지. 자, 이리 오렴." 그 어머니다움에 끌려 테룬은 펠리시티에게 다가갔다. 펠리시티는 테룬을 안고 다독여 주었다. 테룬은 그녀의 지금 몸짓과 말이 모두 거짓임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몸을 맡겼다. 얼마만에 느끼는 따뜻한 어머니의 손길인가. 그러나 곧 그녀의 손길은 위험하게 그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테룬은 몸을 빼려 했으나 꼼짝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마수에, 그녀의 거미줄에 다시 걸렸음을 알았다. 렌, 렌, 도와 줘. 그는 마음 속으로 외쳤다. 테룬이 탑을 나선 것은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아직도 펠리시티의 달콤한 체취는 그의 온몸에 남아 있었다. 그는 자기 방에 도착하자마자 의자에 털썩 기대 앉았다. 자괴감과 비참함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는 포도주 한 잔을 따라 급히 들이켰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있던 그는 마침내 하염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유혹한 어머니와 욕망에 굴복한 자기 자신이 모두 혐 오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무 슬펐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이렇게 애타게 바라고 있었던가. 그래서 그녀가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유혹하자 그토록 쉽게 무너졌던 것인가. 남들은 모두 당연히 넘칠 만큼 가지는 어머니의 사랑인데 왜 나는 그녀의 손길 하나마저도 구걸해야 하는가. 그는 다시 렌이 그리웠다. 그녀가 그 차분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자신을 야단쳐 주면 그는 펠리시티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렌. 너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아무리 네가 위험에 빠지더라도 너를 내 곁에 두었어야 했어. 그랬다면 다시 이 오욕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았을 텐데. 너를 위해서라도 앞으로 다시는 펠리시티에게 흔들리지 않겠어.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 렌, 네가 보고 싶어. 그는 다시 흐느꼈다. ===================================================================치료사 렌 [5] 동제국의 격랑 (5) -------------------------------------------------------- 폴코 공작군의 백인대 장 중 한 명인 드브론은 강직하면서도 호탕한 성격으로 부하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다. 그는 동제국 중남부에 있는 폴코 공작령 출신었다. 그는 명검사가 되어 제국에 이름을 떨치는 것이 어릴 때부터의 소원이었다. 다행히 검에 자질이 있던 그는 10여년 전 폴코 공작의 탄생일 기념으로 고향에서 열린 검술대회에서 우승했고, 그 때 폴코 공작의 차석무관에게 발탁되어 한동안 고향에서 근무하다가 5년 전 수도로 올라와 수도에서 황태자군-사실상은 폴코 공작군-의 백인대장으로 근무해 왔다. 그 무렵부터 테룬 황자는 그 엄청난 검술실력으로 동제국에 이름이 높았다. 드브론은 우연한 기회에 테룬 황자가 황궁에서 검술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고 나이답지 않게 엄청난 실력과 검술에 대한 열정에 넋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 때부터 테룬 황자는 드브론의 우상이 되었다. 테룬 황자에 비하면 문약하기 짝이 없는 황태자는 그저 실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상당수의 무인들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특히 하라스 4세 치하에서 어언 30여년 간 테라미즈넨 제국의 흉내를 내는 문관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유지되자 문관의 세력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황태자에 대한 불만은 서서히 깊어져 갔다.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았어도 대부분의 무관들은 유난히 이황후와 이황자를 총애하는 황제가 혹시라도 이황자에게 보위를 물려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황자가 소드마스터라는 소문이 거의 틀림없는 것으로 확인된 후 모두의 기대는 한층 커져 갔다. 그런데 작년에 모든 무관의 희망을 꺾는 문제의 반란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상당수는 반신반의하고 상당수는 황태자파의 음모가 아 닌가 의심했다. 그래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동제국 건국 이후로 세 번째, 50년만에 처음으로 나온 소드마스터인 황자가 손발 힘줄이 잘린 채 귀양보내졌을 때에는 모두들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드브론은 그무렵 매일같이 술에 절어 살았다. 그 후 황태자가 정신이 나가자-황태자가 미쳤다는 것은 공식적으로는 비밀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태자 대신 폴코 공작이 황태자군의 지휘까지 맡게 되었는데, 실제로 군대를 지휘하는 공작의 수석보좌관 "재수 없는 아핀" 때문에 드브론의 삶은 더욱 우울해졌다. 마음에 맞는 부하와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것만이 드브론의 낙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테룬 황자가 무공을 회복하고 황태자의 패륜에 맞서 거병하였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사실은 황태자가 제2황후와 사통하였다가 그 사실을 자기 어머니에게 들켜 친어머니를 독살하였고 테룬 황자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웠으며 그 후에도 사형집행당해야 할 제2황후를 자기 궁 지하에 데려다 놓고 즐겼다는 소문이 수도 전체를, 아니 제국 전체를 뒤흔들었다. 드브론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억지로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그러면 그렇지, 나의 황자 전하께서 반란죄를 저지르실 리가 있나. 그 분은 정정당당하게 결투를 하시면 하셨지 독살같은 치사한 수는 절대 안 쓰실 분이야. 드브론은 혼자서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추가로 들려오는 소문들은 더 가슴 뛰는 것이었다. 테룬 황자가 제국 최고 무가의 수장인 팔라르 데 매긴과의 일대일 비무에서 승리하여 그를 부하로 삼고 도란 성을 접수했다든가 황태자군을 전멸시키고 도란 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드브론은 당장이라도 달려나가 황자군에 합류하고 싶은 자신을 억눌러야 했다. 대체 여기 성벽에 붙어서 뭐하는 건가 싶어 스스로 한심해질 따름이었다. 이러다가 황자 전하께서 승리하시면 나는 폴코 공작의 잔당으로 몰려 그냥 처형당하는 거 아닌가. 동료들도 똑같이 불안감을 느꼈다. 그런 씁쓸한 기분은 술로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뭐냔 말이야! 정정당당하게 황태자 전하랑 황자 전하랑 한 판 붙으라 이거야! 그래서 이기는 사람이 황제가 되면 될 거 아냐!" 드브론은 만취하여 동료 백인대장 한 명, 부하 두 명의 앞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렇지! 그래야 황제 자격이 있지! 근데 미친 황태자는 칼 잡을 줄이나 아나?" "미친 놈 개잡듯 휘두를 줄은 알겠지!" "암튼 내 심정 같아서는 성문을 활짝 열고 황자 전하를 맞아도 부족하다 이거야!" "황자 전하라면 우리들 무관들의 심정을 알아 주실 텐데!" 그나마 덜 취한 부하 한 명은 나머지 세 명이 혀꼬부라진 소리로 주정하는 걸 들으며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다행히도 술집 안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고 두어 명 남아있는 손님도 만취해서 식탁에 엎드려 있는 것이 아무도 그들의 주정에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드브론 일행들은 만취하여 엎드려 있는 손님 중 한 명이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안광을 번쩍 빛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다음 날 오후 숙취로 아픈 머리를 움켜잡고 성벽에서 근무병들을 지휘하던 드브론은 저녁 무렵이 되자 간밤의 술친구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인 근처의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는 길에 누군가가 그에게 툭 부딪히고는 사과도 하지 않은 채 지나갔다. 드브론은 버릇없는 놈이라고 투덜거리며 계속 가다가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지갑이 없어졌던 것이다! 드브론은 정신없이 그 놈을 쫓아 달려갔다. 다행히 소매치기는 멀리 가지 않았기 때문에 발이 빠른 드브론은 곧 그 놈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정신없이 달려오다 보니 어느새 인적이 드문 골목길까지 오게 되었다. 드브론이 따라온 것을 확인한 소매치기는 제자리에 멈춰섰다. 드브론은 그 놈에게 달려들려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주저했다. "백인대장 드브론님이시죠?" 사내는 정중하게 물었다. "그렇다. 네놈은 누구냐?" 사내는 드브론에게 다가와 지갑을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드브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드브론님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테룬 황자 전하께 충성할 마음이 있습니까?" 드브론은 소스라치게 놀라 칼을 빼어 들었다. "너, 너는 대체 누구냐? 바른 대로 고해라!" "저는 지금의 황태자 전하가 아닌 테룬 황자 전하야말로 진정한 황제감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드브론은 사내의 목에 칼을 댄 채 더듬거리며 말했다. "자세히 말해 보라." 둘은 근처의 허름한 집으로 들어갔다. 일종의 안가인 듯했다. 사내의 요구는 며칠 후 황자군이 브림 성의 성벽 앞에 도착할 터인데 때를 보아 적당한 시점에 성문을 열어달라는 것이었다. 드브론이 사내의 말에 반신반의하자 사내는 통신구를 꺼내 "엘트리 엘트리안"이라고 읊은 후 드브론에게 건넸다. 동제국에 스무 개밖에 없는 통신구를 가지고 다닐 정도면 이 사내가 장난하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통신구는 한동안 지직거리다가 곧 목소리를 전송하기 시작했다. "나는 샤이트 데 위든이다. 그대는 누구인가?" 샤이트의 목소리에 드브론은 감격했다. "샤이트님,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드브론입니다. 한동안 저를 지휘하셨는데요." "재수 없는 아핀" 직전의 황태자군 지휘관은 샤이트였다. 그는 같은 문관이라도 훌륭하고 공정한 지휘관이어서 신망이 두터웠지만 황태자에게 직언을 했다는 이유로 흑성으로 사실상 쫓겨나게 되어 모두들 안타까워 했었다. 드브론은 그 무렵 소대장에 불과해 샤이트와 얘기를 많이 해 볼 기회는 없었지만 그래도 두세 번 정도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아, 술 좋아하는 드브론이군." "예, 맞습니다. 여전히 술을 좋아합니다." 드브론은 씩 웃었다. "대강 얘기는 들었겠지? 도와줄 수 있겠나? 사나이는 모실 주군을 잘 택해야 하는 법이다. 테룬 황자 전하를 주군으로 모신다면 후회할 일은 없을 것이다." "제게 기회만 주십시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통신구는 잠시 지직거리다가 다시 다른 목소리를 전송했다. "드브론이라고 했나? 나는 파이브룬 제국의 제2황자 테룬이다." "황자 전하!" 드브론은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잊고 흙투성이 땅에 무릎을 끓었다. "나는 이 나라의 평화를 위해 누명을 쓴 채로 조용히 죽으려 했으나 황태자 형님께서 점점 광증이 심해지시자 더 이상 이 나라를 위해 두고 볼 수 없게 되었다. 나를 도와준다면 그대의 공은 잊지 않겠다." "전하, 제 목숨은 전하의 것입니다!" 드브론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기회가 찾아왔다! 테룬 황자의 군세는 도란 성의 전투 이후 열흘 정도 재정비를 거친 후 수도 브림으로 출발했다. 8,000명의 병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하늘을 찌를 듯했다. 황태자군은 모든 것을 수성에 걸었는지 중간에 진군을 막는 적군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 적당한 속도로 나아갔는데도 도란 성에서 브림까지 도착하는 데는 사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황자군을 맞은 것은 굳게 닫힌 성문과 촘촘히 배치된 병사들이었다. 성문 위의 망루에는 폴코 공작이 노구를 이끌고 친히 나와 황자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폴코 공작이 먼저 확성구슬을 통해 말했다. "황제 폐하의 은혜를 잊은 짐승만도 못한 무리들아, 어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즉시 항복하면 산 채로 사지를 찢어죽이는 형벌만은 면하게 해 주겠다!" 테룬 황자는 분노하는 장병들의 함성을 제지하고 역시 확성구슬을 통해 말했다. "폴코 공작, 그대의 사위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는가? 그대의 딸인 황태자비는 제쳐놓고 황태자와 제2황후 펠리시티가 수 년 동안이나 사통하였으며 그걸 자기 어머니에게 들키자 황태자가 직접 제1황후를 독살했다는 것은 아는가? 황태자가 모든 누명은 내게 돌린 채 정작 제2황후는 처형하지 않고 빼돌려 자기 궁 지하에 숨겨 놓고 지난 1년간 황음을 멈추지 않았음은 아는가?" 황태자군과 황자군은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황태자군 또한 장안에 자자한 소문을 이미 들었기에 테룬 황자의 고발에 폴코 공작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해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저 놈의 말은 믿지 말아라!" 폴코 공작은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의 변명을 하지는 못했다. 테룬 황자는 차갑게 웃으며 손짓했다. "기둥을 세워라!" 펠리시티 황후가 묶여진 나무기둥이 병사들에 의해 서서히 세워졌다. 펠리시티 황후는 눈물젖은 얼굴로 양쪽의 군사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황홀한 미색은 이런 상황에서도 빛을 발하였다. 모두들 입을 벌리고 펠리시티 황후를 바라보았다. 황태자군은 물론, 이미 그녀를 한 번 본 일이 있었던 황자군까지도 다시 넋을 잃었다. 펠리시티는 보석같은 눈물을 흘리며 목에 걸린 확성구슬에 대고 모두를 홀리게 하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떨리는 고백을 했다. "저는 4년 전부터 황태자의 강압에 못이겨 그와 사통해 왔습니다. 1년 전 저는 그와 함께 밤을 보내다 제1황후에게 그 장면을 들켰고, 황태자와 의논하여 그녀를 독살하기로 했습니다. 황태자는 독이 든 꿀과자를 손수 가져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먹였고, 그 다음 자신은 쏙 빠지고 모든 죄는 저와 아무것도 모르는 테룬 황자에게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 처형을 담당하고서도 저를 죽이지 않고 빼돌려 자신의 궁 지하에 유폐하고 제 아들 테룬이 구해줄 때까지 매일밤 제 몸을 탐했습니다. 연약한 아녀자의 몸으로 저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군은 이제 모두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에 심취하였다.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은 진실로 들렸고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학대한 황태자에 대한 분노가 들끓었다. "이제 기둥을 내려라!" 펠리시티 황후를 묶은 기둥이 다시 지상으로 내려지자 양군은 너나 할 것 없이 길게 아쉬운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미색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래도 내 말이 거짓이라고 하겠느냐?" 폴코 공작은 할 말을 잃고 망연자실했다. 자신도 그 소문을 들었지만 설마 황태자가 진짜로 제2황후를 자기 궁 지하에 가둬 놓고 있었다고 믿을 수는 없었는데, 자기 눈으로 직접 제2황후를 보고 나니 이제 어떻게 부인할래야 부인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10년은 더 늙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치열한 궁중의 암투 속에서 용케 딸을 황태자비로 들여보내고 늘그막에 이제서야 권력을 잡아보나 했는데 결국 이렇게 끝나는구나 싶어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멍하니 있던 그를 옆에 서 있던 차석보좌관이 흔들었다. "공작 각하, 공격 명령을 내리십시오!" "으, 응, 그래. 모두들 저 악적들에게 화살세례를 퍼부어라!" 폴코 공작은 간신히 힘을 짜내어 쇳소리로 외쳤다. 황태자군 병사들이 성의없이 화살을 날렸다. 어차피 황자군은 화살의 사정거리 밖에 있어 아무리 화살을 쏴 봤자 닿지도 않고 화살낭비일 뿐이었다. "진정한 반역자는 황태자이다! 감히 황제 폐하의 부인이자 자신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제2황후와 사통하다니, 이런 패륜을 어찌 용서하겠는가! 물론 나도 펠리시티 황후의 자식으로서 죄를 통감한다! 그래서 나는 황후를 내 아버지인 황제 폐하의 어전에 끌고 가 폐하로 하여금 그녀의 목을 치게끔 함으로써 죄값음을 하려 한다! 황태자군 병사들이여,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명령을 수행해온 것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모든 사실을 알고 난 이상 이제부터 내게 대적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한다! 내 군대에 저항하는 것은 황제 폐하께 저항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언제라도 투항하라! 모두 받아주겠다!" 황태자군은 눈에 띄게 동요하였다. 대부분 직접 황태자의 패륜의 증거를 본 이상 황음무도한 황태자보다는 오히려 테룬 황자가 더 정당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황제가 친위군의 파병을 승인하지 않은 것도 이들의 불안을 부채질했다. 황제가 만약에 제2황자의 편을 들려는 것이라면 자신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군대의 동요를 깨달은 폴코 공작은 다시 화살을 날릴 것을 독려했지만 무익한 시도였다. 효과적인 공격을 하려면 성문을 열고 일부 군대를 내보내야 했지만 폴코 공작은 기세등등한 황자군에게 감히 군대를 내보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병사들의 동요가 커져 가는 가운데 황자군은 아직 직접적인 공성에 나서지 않고 있었다. 다만 황자군이 여기저기에서 목재로 망루를 짓고 투석기를 준비하는 것으로 보아 하루 이틀 내에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깔렸으나 성벽 주위만은 수많은 횃불로 대낮같이 밝았다. 성문 좌측의 수비군을 지휘하는 드브론은 심장의 두근거림을 가까스로 진정시켜 가며 성문 중앙 수비군을 지휘하는 동료 백인대장 첸트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펠리시티 황후를 봤지?" "그래, 정말 놀랍더군." 첸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드브론은 일부러 우울하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황제 폐하께서는 대체 두 아들 중 누구의 편이신 거지?" 드브론의 말에 첸트는 ? 麗?한숨을 쉬었다. 그도 하루종일 고민하고 있었다. 첸트 또한 드브론과 마찬가지로 강직한 무인이었다. 본래부터 테룬 황자에게 칼을 겨누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는데 하물며 테룬 황자가 황태자의 모함으로 누명을 쓴 것이 거의 확실해진 이상 그는 도저히 테룬 황자와 적대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글쎄 말이야. 나도 고민이 많아. 심지어는 살짝 빠져나가 황자군에 투신할 생각마저 든다네." 둘은 이런 얘기를 거리낌없이 나눌 만큼 절친한 친구였기에 첸트는 자신의 심정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자네가 그런 생각이라면 차라리 우리 성문을 열고 황자군을 맞아들여 공을 세우는 것이 어떻겠나?" 드브론은 첸트의 귀에 속삭였다. 첸트는 흠칫 놀랐으나 곧 진정했다. 아마도 똑같은 생각을 혼자서도 해 봤던 모양이었다. "우리가 무작정 성문을 연다고 해도 황자군은 성문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데 그들이 여기까지 오기 전에 다른 황태자군들이 눈치채고 도로 성문을 닫지 않겠어?" "사실은 내게 황자군과 연락할 방법이 있어. 자네가 맘만 먹으면 내가 연락하겠네." 첸트는 경악했다가 곧 사태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만 믿겠네." "전하, 드브론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중앙성문을 수비하는 백인대장 첸트를 포섭했다고 합니다. 1파잔(새벽 두 시) 무렵 성문을 열 테니 그때에 맞추어 군대를 전진시키라고 합니다." 샤이트는 즉시 테룬 황자에게 보고했고, 황자군의 수뇌부는 병력배치상황을 재점검하면서 1파잔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참으로 느릿느릿하게 시간이 흘렀다. 황자군은 현재 포진한 위치 중앙에 서서히 기병을 배치시키기 시작했다. 건너편 성벽 위에서도 적의 군대에 뭔가 변화가 있음을 눈치챘으나 달 없는 칠흑같은 밤이어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눈치빠른 전략가가 있었다면 알 수도 있으련만 지금 황태자군 진영에는 쓸 만한 병법가가 없었다.1파잔이 되자 성벽에서 어느 군사가 마치 실수인 듯 횃불 하나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것을 신호로 황자군의 기병들은 성문으로 질주했고, 거대한 성문은 끼익 소리를 내며 서서히 열렸다. 황태자군은 그제서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깨닫고 성벽 위에서 미친 듯이 화살을 쏘았으나, 정작 성문 주위의 병사들은 황자군에 대해 아무런 공격을 하지 않았다. 몇 명의 황자군이 쓰러졌으나 대부분은 무사히 성문 안으로 진입했다.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황자군과 합류한 드브론과 첸트 및 그의 부하들은 함께 성문을 점거하였고 나머지 황자군도 신속히 성문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거의 무혈입성이라 할 만했다. 성벽에 배치된 다른 황태자군 중 투항하지 않은 자를 차례로 처단해가다 보니 어느새 검던 하늘에 푸른 빛이 돌았다. 상당수가 투항했고 도망간 자들도 많아 처단된 자는 1,000여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사로잡힌 폴코 공작을 누군가가 끌고 왔다. 테룬 황자는 경멸과 측은함이 섞인 눈으로 폴코 공작을 쳐다보았다. "공작, 그동안 고생이 심했구료." "황자 전하, 제가 선택할 길은 이 길뿐이었습니다." 폴코 공작의 말투는 어느새 공손해져 있었다. 테룬 황자는 폴코 공작에게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미 황태자와 혼인을 통해 운명공동체가 된 폴코 공작으로서는 자신과 대적하는 것 말고는 달리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었다. "염치 없는 말씀을 드리는 줄은 아나, 모든 죄는 제가 질 터이니 제 식솔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하지 않으시기만 바랄 뿐입니다." "걱정 마시오. 황태자를 제외한 다른 폴코 가의 인원들에 대해서는 적어도 목숨은 보장하겠소." 폴코 공작은 눈물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치료사 렌 [5] 동제국의 격랑 (6) -------------------------------------------------------- 다음날 새벽 테룬 황자와 샤이트는 설전을 벌였다. "전하, 이제 펠리시티 황후를 처형하실 때입니다. 성벽 앞에 그녀를 세우고 모두 보는 앞에서 그녀의 목을 베십시오. 더 이상 그녀를 살려둘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그녀를 아바마마의 앞에서 처단하고 싶다." "지금 그 말씀은 혹시 조금이라도 그녀를 더 오래 살려 놓고 싶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십니까? 그 날 밤 결국 그녀에게 굴복하셨던 것입니까?" 샤이트는 예리하게 지적했다. 황자는 한숨을 쉬었다. 그날 밤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그 날 어머니의 유혹에 무너진 후로 어머니는 더이상 그를 부르지 않았다. 거미가 먹이감을 기다리듯 펠리시티는 테룬이 스스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날 이후 그는 매일 밤 기도하듯 렌을 떠올렸다. 그녀가 다시 한 번 그를 구해주기를 바랐다. 렌만 나타나면 그는 어머니의 마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사막에서 만나는 생명수같이 그의 어? 恝?갈증을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을 찾았던 것처럼 욕망에서 벗어나 밝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수십 차례 되뇌이고 난 후에야 그는 겨우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그녀의 유혹에 넘어갔지만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맨 처음 계획 세웠던 것처럼 그녀는 내 아버지의 아내이고 형님을 망친 원흉이니 그들 앞에서 그녀를 처단하는 것이 맞지 않겠나?" 테룬의 말에는 자신감이 부족했다. 샤이트는 흔들리는 황자의 마음을 알고 그의 눈을 들여다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전하, 최후의 순간까지 제가 동행하겠으니 안심하십시오." 완전히 해가 뜨자 테룬 황자는 일부 보병들을 성벽에 배치하고 난 후 나머지 군대를 이끈 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황궁으로 향했다. 수도의 주민들은 꽃을 뿌리며 테룬 황자의 행렬을 열렬히 환영했다. "영웅 테룬 황자 전하!" "파이브룬의 희망!" "대륙 최고의 검사!" 주민들의 환호성은 진심어린 것이었다. 그만큼 테룬 황자의 인기가 높기도 했지만, 수도의 주민들이 그동안 황태자가 보인 기행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 황태자의 명성이 땅에 떨어진 탓도 있었다. 테룬 황자는 여유있게 손을 흔들며 마치 개선장군처럼 황궁으로 계속 전진했다. 황궁 내에는 약 1,000여명의 황궁 친위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나 친위대는 전혀 적대의사를 표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서며 성문을 열어 주었다. 황제가 친위대로 하여금 미리 명령을 내려 둔 듯했다. 나머지 친위대는 본래 브림 성 외곽에 배치되어 있었기에 현재 상황에서는 위협요인이 아니었다. 황자는 펠리시티 황후를 데려오게 했다. 그녀는 두 팔이 뒤로 묶이고 입에는 재갈이 물리고 눈까지 가려린 채 말에 태워져 있었다. 펠리시티의 얼굴을 보고 황자의 마음이 흔들릴 것에 대비하여 샤이트가 만전을 기해 놓은 것이었다. 황자는 어머니가 탄 말의 고삐를 자신의 손에 옮겨 잡고 계속 말을 달려 황궁 내로 들어섰다. 테라미즈넨 제국의 양식을 본떠 만든 파이브룬 제국의 황궁은 서제국의 것만큼 크지는 않았어도 좀 더 남성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동제국의 특산품인 검은 대리석으로 된 황궁은 보는 이에게 엄청난 위압감을 주도록 설계되어 있었고, 특히 황궁을 둘러싼 항마석 결계는 어떤 마법도 뚫지 못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결계는 초대 황제인 하라스 대제가 서제국 황제 카에닌을 염두에 두고 국력을 기울여 설치한 것이었고, 심지어 드래곤과 거래하여 항마석을 손에 넣었다는 소문마저 있었다. 테룬 황자는 1년만에 자신이 나고 자란 황궁을 대하자 참으로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곧 머리를 흔들며 상념을 털어버리고 말에서 내렸다. 테룬 황자는 군대를 황궁 중정에 대기하게 하고 기사급 이상인 50여명의 부하만을 끌고서 궁 내부로 걸어들어갔다. 펠리시티 황후 또한 말에서 내려져 황자에게 한 팔을 잡힌 채 끌려갔다. 옥좌가 있는 중앙홀에는 아무도 없었다. 황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피신한 것 같았다. "폐하의 침전으로 가자." 모두들 신중한 걸음을 떼었다. 마침내 침전에 도착했다. 침전 앞에는 아직 시녀 몇 명이 도망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팔라르는 칼을 빼어 들고 시녀 한 명에게 물었다. "안에는 몇 명이나 있나?" 시녀는 파들거리며 대답했다. "저, 화,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 그리고 궁정마법사 쿠드님만이 계십니다." 황태자가 진작에 황태자궁으로 피신했으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모두 의아했으나 한 번에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게 되어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다. "팔라르, 샤이트, 나를 따르라." 일행 중 나머지는 침전 문 밖에 남고 테룬 황자, 팔라르, 샤이트, 그리고 여전히 입에 재갈이 물리고 손이 뒤로 묶인 채인 펠리시티 황후만이 침전 안으로 들어갔다. 침전 안쪽의 거대한 침대 위에는 황제 하라스 4세가 누워 있었다. 그리고 침대 옆쪽에는 황태자가 등을 기대고 앉아 술병을 잡고 병째로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황제의 침상을 지키고 있던 쿠드는 테룬 황자를 보자 정중히 인사했다. "테룬, 나의 아들아..." 황제는 몸을 일으킬 힘이 없는지 손만을 조금 들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테룬 황자를 불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직접 그녀와 형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테룬은 펠리시티의 입을 막고 있던 재갈과 팔을 묶은 밧줄을 풀고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어머니, 저는 여기서 어머니를 처형할 것입니다." 그는 펠리시티를 힘껏 황제에게로 밀어붙였다. 펠리시티는 네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야릇한 눈길로 테룬을 한 번 쳐다본 후 휘청거리며 황제에게로 다가갔다. "여보, 하라스, 내 사랑, 정말로 미안해요." 펠리시티는 애처롭게 흐느꼈다. "미안하다니, 무슨 말이오?" 황제는 맥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황태자가 4년 전부터 내 몸을 탐하기 시작했 을 때 저는 힘이 없어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어요. 으흐흑. 어느 날 황태자가 저를 찾아와 전부터 저를 가지고 싶었다면서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제 옷을 찢고 저를 강간하자 저는 어쩔 방도가 없었고, 그 다음에는 황태자가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당신에게 얘기하겠다고 위협해서 순순히 몸을 바칠 수밖에 없었어요. 모두 제 불찰이고 제 잘못이예요." 그 말에 황태자는 술병을 내던지고 벌떡 일어나 펠리시티의 몸을 잡고 흔들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나? 네 목숨과 몸과 마음은 전부 내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영원히 나랑 함께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 "어떻게 너는 내게 이럴 수 있지?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는데!" "아제룬, 네 어머니뻘인 내게 그토록 가증스러운 거짓말을 해도 되느냐? 무엄하다!" 펠리시티는 독기를 가득 품고 황태자에게 대들었다. 황태자는 애증으로 불타는 눈으로 펠리시티를 노려보다 갑자기 말했다. "아버지, 전부 털어놓겠습니다. 오직 진실만을요. 펠리시티는 4년 전 어느날 제게 다가왔습니다. 황궁의 연회가 끝나고 나서였죠. 사실 저는 그녀의 황홀한 미모에 반해 말못할 감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녀가 아버지의 후궁이었다 하더라도요. 이해하실 겁니다. 그녀를 본 사내들 중 그녀에게 그런 감정을 품지 않은 자는 한 명도 없다는 걸 아시고 계실 테니까요. 아버지께서는 오히려 그걸 은근히 자랑스러워하기도 하셨죠. 하지만 아버지, 애시당초 그녀와 같은 화근덩어리를 이 궁중에 들이셔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아무튼 그녀는 제게 다가와서 갑자기 비틀거렸습니다. 가슴이 답답하다면서요. 보라는 듯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한없 이 사랑스럽고 애처로운 눈길을 보내더군요. 그러면서 절더러 침전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저는 뭔가에 홀린 듯 그녀를 침전까지 데려다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침전에는 미리 약속한 듯 시녀 한 명 없었지만 그 때 저는 그런 것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가슴이 답답하다고 옷을 좀 벗겨 달라고 할 때도 저는 뭐에 홀린 듯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 일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너무 아름답고 요염하고 매력적이고 진심인 듯이 보였습니다. 그녀는 제게, 아버지가 힘으로 자신을 데려왔지만 한 번도 아버지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고, 자신에게는 제가 첫사랑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믿었습니다. 그녀의 말 모두를 전부 믿었습니다. 저는 정말로, 평생 단 한 번밖에 못 할 희망 없는 강렬한 사랑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아버지의 것이라는 게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도 남들의 눈을 피해 가며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게 제 유일한 희망이었고요. 황태자비나 아버지, 다른 사람들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그녀와 만나고 그녀를 품을 수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삼 년, 그녀가 어느 날 자신이 손수 만들었으니 저와 어머니가 나누어 먹었으면 좋겠다면서 상냥한 미소를 띠고 꿀과자를 주었을 때 저는 영문도 모르고 그녀의 다정함에 감동할 뿐이었습니다. 그 꿀과자가 독에 물든 것인 줄도 모르고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저는 비로소 그녀가 저와 어머니를 한 번에 죽이려고 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엄청난 배신감에 몸을 떨었습니다. 그녀와 테룬이 잡혔을 때, 그 지경이 되어서도 차마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는 바보같은 저는 배신감을 모조리 테룬에게 쏟아부었습니다. 미안하다, 테룬. 네 잘못이 아닌데, 나는 어리석게도 그녀를 탓하는 대신 그녀가 그런 짓을 한 게 모두 네 탓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었다. 그리고 아버지, 저로서는 정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그녀가 사람을 보내 저를 만나자고 했을 때 제가 어떻게 그녀를 보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정말로 마지막으로 그녀의 변명을 듣고 싶었을 뿐입니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그녀가 사과하고 저를 사랑한다고 하는 얘기를 듣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꽃같은 입술에서 정말로 그런 얘기가 나왔을 때, 제1황후가 우리의 관계를 알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끝내려는 마음에서 독이 든 꿀과자를 건넸지만 제가 죽는 순간 따라 죽으려고 했다, 제가 살아 있어서 너무 기쁘다, 저를 목숨을 다해 사랑한다는 그녀의 얘기를 들었을 때, 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해져서 그녀를 어떻게든 살리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된 것입니다. 지난 일 년간 그녀는 오로지 제 것이었고 그녀는 제 귀에 제가 듣고 싶었던 온갖 달콤한 이야기만을 속삭여 주었습니다. 그 동안은 제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미쳐서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떠나기 싫어서 황태자궁 지하를 거의 나가지 않았죠. 제가 정신이 나갔? 募?소문이 돌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상관 없었습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아까웠죠. 한 달 전 그녀가 사라졌을 때 저는 정말로 그녀가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습니다. 악적들이 연약한 그녀를 훔쳐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자기 발로 따라간 거라고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소문이 들리더군요. 그녀 스스로 병사들 앞에서 저를 고발했다고요. 그리고 그녀는 다시 제 눈앞에서 저 꽃같은 입술을 열어 저를 모함하는군요. 저는 정말로 어리석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아직까지 그녀를 사랑합니다. 정말로 바보같지요?" 황제는 숨이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펠리시티, 황태자의 말이 사실이오?" 펠리시티는 가장 고혹적이고 그윽한 눈길로 테룬을 쳐다보았다. '너만이 내 편이야.'라고 호소하는 듯했다. 펠리시티는 다시 안타까운 눈빛을 던졌다. '나를 위해 황제와 황태자를 죽여 줘.' 테룬은 필사적으로 펠리시티의 얼굴에 렌의 모습을 겹쳐 펠리시티의 마력을 지웠다. 마침내 그는 모든 의지력을 끌어내어 고개를 저었다. 테룬이 거절하자 펠리시티는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듯 매몰차게 말했다. "그래요, 사실이예요! 내가 황태자를 유혹했어요! 왜냐고요? 당신과 이 세상의 모든 남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지요! 그리고 지배당하기 전에 지배하기 위해서지요! 당신은 내 아버지에게 거액의 돈을 주고 나를 사들였지만, 그 내 아버지란 작자는 친아버지도 아니었어요. 흥, 당신은 그자를 장인으로 생각하여 작위까지 주었었죠? 바보같은 황제 폐하, 그는 노예 소유주였을 뿐이예요. 그는 어린 나를 시골에서 사들여 아직 채 자라기도 전에 농락했지요. 내가 황후가 된 후 쥐도 새도 모르게 독살당하기는 했지만요. 당신의 후궁이 되었을 때 나는 그저 주인이 바뀐 것뿐이었어요. 그리고 당신은 어땠는지 알아요? 당신도 마찬가지였어요! 그저 내 몸에만 관심이 있었지요. 흥, 내가 바라지도 않는 선물 따위나 갖다 안기고, 내가 내 편 하나 없는 궁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지요. 내가 노예가 아니란 것을 증명하는 길은 내 스스로 사내들을 찾아 정복하고, 그래서 내 편을 늘려가는 것뿐이었어요. 내가 맘만 먹으면 유혹 못 할 사내가 없더군요. 오호호호. 어리석은 사내들. 한 번 나랑 잠자리를 같이 한 사내들은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았지요. 순진한 황태자를 유혹해서 내게 홀딱 빠지게 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어요! 아제룬, 내가 너를 정말로 사랑한다고 생각했다니, 정말 바보같구나. 그리고 테룬, 아무리 어렸다고는 해도 친어머니의 유혹에 동정까지 바치다니, 너도 역시 음탕한 사내 중 한 명일 뿐이야!" 그녀가 말을 마치자 장내는 침묵에 휩싸였다. 테룬과 펠리시티의 관계를 몰랐던 황제와 황태자, 팔라르, 쿠드는 새로이 드러난 엄청난 사실에 할 말을 잃었다. 침묵을 깨고 테룬이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저를 사랑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까?" 그의 말에 펠리시티는 흔들렸다. 그러다 구슬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미안하다, 테룬. 사실은 내가 세상에서 사랑한 건 오로지 너 하나뿐이었어. 나는 너를 품는 것 말고는 달리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어. 내가 너를 너무나 고통스럽게 했었지? 그러나 엄마가 이 세상에서 의지할 사람은 너밖에 없어. 너만이 내 삶의 의미야." 펠리시티는 슬픔에 가득찬 모습으로 테룬에게 다가왔다. 테룬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안으려 했다. 그 순간 샤이트가 테룬을 잡아당겼다. "저것 또한 그녀의 술책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테룬은 펠리시티와 샤이트의 말에 혼란스러워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결국 펠리시티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 중에서 지금까지 진실이라곤 한 마디도 없었으니 저 말 또한 거짓일 것이다. 그러자 펠리시티는 독기에 차 악에 바친 말들을 쏟아냈다. "내가 너를 사랑했다고? 너는 단 한 순간이라도 그 말을 믿었느냐? 흥! 너 또한 저 더러운 하라스의 핏줄일 뿐이야! 내가 너를 사랑했다면 친아들인 너를 유혹해서 가질 리가 있었겠니? 어리석은 아이야,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못했느냐? 나는 이 세상 누구도 사랑해본 적 없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네가 이제 나를 죽이는 이상 너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을 거야! 너는 영원히 저주받을 거야! 네 아비의 피로만 저주받은 줄 아느냐? 너는 내 피로도 저주받았어!" 펠리시티는 처절하게 악을 썼다. 테룬은 어지러웠다. 몸 안의 더러운 피가 모조리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이제 그녀에게 가지고 있던 마지막 연민과 애착을 버려야 할 때가 왔음을 알았다. "형님, 형님께서 차고 계신 그 단수검으로 그녀의 목을 베어 주시겠습니까? 본래 아버지께서 하셔야 할 일이나 지금 아버지께서 편찮으시니 형님께서 대신해 주셔야겠습니다." 황태자는 모? 낮?맑아진 눈으로 테룬을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다음엔 네가 내 목을 베겠지? 고맙다, 그녀를 내 손으로 처단할 기회를 주어서." 그 말을 들은 펠리시티는 갑자기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처연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죽음을 앞두자 그녀에게 남아 있던 모든 독기와 힘이 빠져나간 듯 보였다. "아제룬, 테룬, 이제 내가 죽는 건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내 남편인 황제 폐하께 마지막 하직인사를 할 기회를 주지 않겠어?" 테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펠리시티는 회한이 가득한 얼굴로 황제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이 세상 사람같지 않게 아름다웠다. 펠리시티는 아름다운 구슬 같은 눈물을 방울방울 흘렸다. 순식간에 그녀는 순결한 성녀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는 흠없는 하얀 손으로 남편의 주름투성이 얼굴을 부드럽고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주위의 남자들은 넋을 잃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황태자의 허리춤에 꽂혀 있던 단검을 빼어 크게 휘둘렀다. 황제와 황태자에게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테룬 황자는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황급히 암현검을 뽑아 펠리시티의 등을 베었다. 펠리시티는 힘없이 황제의 몸 위로 쓰러졌다. 테룬은 황제의 상세를 살펴보았다. 경동맥이 끊어진 황제는 침대 위에 선혈을 콸콸 쏟아내고 있었다. 이미 숨이 끊어졌다. 테룬은 어머니를 살펴보았다. 자신의 칼에 몸이 거의 양단된 펠리시티의 시체를 뒤집어 보니 그녀 또한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새하얀 대리석 조각같이 된 얼굴에 희미하게 불길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모습이 마치 최후까지 혼자 죽지 않고 길동무를 데려가는 것을 흐뭇해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 모습은 무섭게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했다. 테룬은 다시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피가 나기는 해도 자상이 깊지는 않아 황태자의 상세는 그렇게 중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태자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황태자는 침착하게 말했다. "나도 내 손으로 내 어머니를 독살한 셈이었는데, 너 또한 결국 네 손으로 너의 친어머니를 죽이게 되었구나. 마침내 우리 황실의 얽히고설킨 악연은 이렇게 마감하는군. 여기서 너의 손으로 내 목을 쳐 주면 고맙겠다." 테룬은 황태자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테룬은 암현검을 침대 옆에 세워 놓고 황태자의 허리춤에 아직 꽂혀 있는 장검, 당초 자신의 검이었던 단수검을 빼들었다. "형님, 죄송합니다." 검강을 주입한 단수검은 소리 없이 황태자의 목을 잘랐다. 미끈하게 잘린 목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테룬 황자는 침통한 표정으로 한동안 서 있었다. 팔라르와 샤이트 또한 얼어붙은 듯 꼼짝도 않고 서 있다가 동시에 부복하며 외쳤다. "테룬 황제 폐하!" "황제 폐하!" 테룬은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말했다. "이 방에서 일어난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 "예!" 테룬은 암현검을 집어 본래의 주인인 팔라르에게 건네준 후 샤이트와 팔라르를 끌고 방을 나섰다. 온몸에 어머니와 형의 피가 튀어 그의 토즈는 붉게 물들어 있었고, 쇳가루 냄새같은 피비린내는 그의 신경을 몹시 거슬렸다. 지금 그는 누군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어깨에 기대고 눈물이 다 말라버릴 때까지 울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눈물을 받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온 동제국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주문처럼 되뇌었다. 언젠가 렌이 나타나면 그 때 그녀의 어깨에 기대 한없이 울 거야. 그녀가 나타나면 내 병든 마음은 정상으로 돌아오고 이 고통은 사라져 버릴 거야. 밖에서 기다리던 기사들은 황자 일행이 나오자 대강의 상황을 파악하고 흥분하여 새 황제에 대한 만세를 외쳤다. 만세 소리는 차츰 황궁 곳곳과 황궁 밖으로 퍼져나갔고, 마침내 온 브림 시내 전체가 만세 소리로 들끓었다. 새로운 황제의 등극, 새 시대의 시작이었다. =================================================================== 치료사 렌 [6] 봄의 폭풍 (1) -------------------------------------------------------- 렌은 카엔과 함께 황궁도서관으로 왔다. 그곳은 둘 모두에게 가장 마음 편한 곳이었다. 렌은 차를 끓이며 마음을 진정하고 카엔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이곳과 전혀 다른 이계에서 태어난 일, 출생신고도 못하고 둘째딸로 천대받으며 배움에 대한 열망을 키우던 일, 첸선생을 만나 학문을 배우고 의술을 익히게 된 일, 아버지에 의해 노예로 팔리게 된 일, 왕노야와 자오를 만난 일, 자오와 약혼한 일, 자오의 반란, 첸선생의 죽음, 그리고 자신이 총에 맞고 물에 빠진 일, 이 세계에서 깨어나 테룬 황자를 치료한 일, 테라미즈까지 오게 된 일, 그리고 나와림이 된 일. 그 모든 슬프고 기쁘고 안타깝고 그리운 기억들을 렌은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카엔은 렌이 이야기할 때마다 렌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온갖 상념과 이미지를 함께 읽으면서 렌이 어떤 일을 겪어 왔었는지 손에 잡힐 듯 알 수 있었다. 이미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보통 사람이면 상상하기 어려운 렌의 과거에 카엔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제 말을 믿으시나요?" 렌은 카엔에게 물었다. "물론 믿어요." 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렌이 지금까지 한 이야기 중에는 한 점 거짓도 없었다.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제가 이계에서 왔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카엔님이라면 믿어주실 줄 알았어요." 렌은 카엔에게 감사의 눈길을 보냈다. 그리고 애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지금도 저는 때때로 제 고향과 홍콩의 꿈을 꾸곤 해요. 슬픔이 빗물처럼 씻겨내리고 나면 그저 따뜻한 추억만이 남는답니다. 그곳에서 제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첸사부님과 자오 오라버니였어요. 첸사부님은 제게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 제가 받아보지 못한 아버지의 정을 주셨지요. 그리고 제게 자오 오라버니는 열 세 살부터 열 여섯 살까지 삼 년간 유일하게 의지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제게 맹목적으로 애정을 쏟아 부었고 저는 그저 당연한 듯 그의 애정을 받아들였어요. 제가 나이에 비해 아는 게 많고 총명하다고 해도 저는 어린아이였어요. 누군가 저를 사랑해주고 돌보아주기를 갈구했고, 그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정말로 제게 모든 걸 다 해 주었지요. 그래서 저는 그의 안에 있는 어두움을 보지 못했어요. 그가 제게 그렇게 집착했다는 건 그만큼 그의 마음속의 공허함과 상처가 컸다는 건데, 그 젊은 나이에 삼합회라는 거대 조직의 이인자로 올라서려면 수많은 힘든 일을 겪어야 했을 텐데, 저는 그의 어두움을 알게 되면 거기에 의지하는 저 자신까지 죄인이 될까봐 그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는 속으로 점점 상처를 키웠고, 그의 저에 대한 사랑은 비뚤어져갔던 거겠죠. 그것이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둘이 죽고 죽이게 된 최후의 비극을 초래한 거고요." 렌은 잠시 숨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그리고 이 세계에 왔을 때 제가 처음 만난 건 자오 오라버니와 너무 닮은 테룬 황자였어요. 그는 아팠어요. 죽어가고 있었죠. 그의 마음 또한 병들어 있었고요. 그를 보면서 저는, 자오 오라버니의 어두움을 외면했던 실수를 테룬 황자를 통해 보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곳에 와서 눈을 뜬 후에야 저는 비로소 깨달았어요. 제가 자오 오라버니를 얼마나 이기적인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었는지. 그에게 제가 해 줄 수 있는데도 하지 않았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 모든 후회와 사랑을 담아 저는 테룬 황자를 치료했어요." 카엔은 타는 듯한 질투심을 억눌러가며 렌의 말을 경청했다. "제 생명력의 5분의 1을 그에게 준 것도 그래서였어요. 제게는 그가 꼭 자오 오라버니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그가 반란을 일으킴으로 인해 죽어갔다는 6,000명의 병사보다는 테룬 황자 한 명의 목숨이 더 신경쓰였어요." 렌은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카엔을 쳐다보았다. "사람을 치료한다는 건 뭘까죠? 생명이란 뭘까요? 귀한 생명이 있고 귀하지 않은 생명이 있는 걸까요?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보다, 소중한 사람이 덜 소중한 사람보다 중요하다는 건 인지상정이라지만, 만약에 제가 모르는 수많은 생명과 제게 소중한 한 생명을 저울질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저는 어떻게 하죠? 그 때에도 수많은 생명 대신에 한 생명을 선택해 놓고서는 인지상정이라고 자위할 수 있을까요?" 카엔은 렌이 대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가만히 있었다. "그런 일은 그 때 가서 걱정하면 돼요." 카엔은 조용히 말했다. "그래요. 그런 선택을 할 상황이 되지 않기를 바라요. 하지만 사람을 치료하다 보면 언제나 선택의 순간에 부딪치죠. 누구를 먼저 치료할 것인가, 약이 모자랄 때 누구에게 줄 것인가, 심지어는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포기할 것인가. 제가 과연 그런 순간에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렌은 몸을 떨었다. "렌, 생명을 다루는 사람이라고 해서 성자가 될 필요는 없어요. 아무도 렌에게 완벽할 것을 요구하지 않아요." 카엔의 말보다도 그의 따뜻한 눈빛이 렌의 가슴에 와닿았다. "언젠가 모든 걸 카엔님께 말씀드리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생각보다 그 시기가 빨리 왔네요." 렌은 모든 걸 다 털어놓고 난 후의 후련한 기분에 잠겼다. 카엔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공감에 가득찬 눈으로 렌을 바라보며 렌의 말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전부 알고 싶다는 듯 그렇게 이야기를 경청했다. 누군가가 이렇게 렌의 이야기를 들어준 것은 첸선생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카엔님, 늘 카엔님은 저를 도와주기만 하셨죠. 제가 카엔님께 해 드린 건 아무 것도 없는데도요. 제가 카엔님께 해 드릴 일이 있으면 뭐든지 말씀하세요. 다 들어드릴 테니까요." 카엔은 렌의 말에 어이없어했다. 자신이 내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 駭쩝?모른단 말인가? 카엔은 미소지었다. "렌이야말로 저번에 나를 웃게 하는 걸 조건으로 한 가지 소원을 들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렌은 아무 소원도 말하지 않았어요." "음.. 그건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겠어요. 아껴 두었다가 쓸래요." 렌이 살짝 웃자 카엔은 안도했다. 이제 렌의 마음은 맑아졌다. 카엔은 그러다 다시 렌이 테룬 황자에 관해 말할 때의 애틋한 감정이 떠올랐다. 렌의 마음에서 일차적으로 떠오르는 그때그때의 단상만으로는 어디까지가 자오에 대한 감정이고 어디까지가 테룬 황자에 대한 감정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렌이 테룬 황자에 대해 품고 있는 진정한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마력으로 렌의 마음속을 좀 더 파헤쳐야 했으나 그는 렌에게 어떠한 마법도 쓰기 싫었다. "렌이 그렇게 치료해 줬는데 황자가 무슨 보답을 하지는 않았나요?" 카엔은 넌지시 물어보았다. "자신이 황제로 등극했다는 소문을 듣게 되면 동제국 수도 브림으로 오라고 했어요. 저를 황후로 만들어 주겠다고요." 그 말을 듣자 카엔은 테룬에게 살의마저 느꼈다. "렌은 그리로 가고 싶어요?" 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가 자오와 닮았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그런 건 이미 흘러간 추억의 조각을 잡으려는 부질없는 짓이예요. 그리고 저는 여기 테라미즈에서 공부도 배우고 카엔님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훨씬 좋아요." 렌은 밝게 웃었다. 렌이 지금 하는 말이 진심임을 읽은 카엔은 비로소 안도감이 들며 불타는 질투심이 조금 사그라드는 걸 느꼈다. "렌에게 나는 어떤 존재죠?" 카엔은 질문을 하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 어떤 말을 할지 갑자기 두려웠다.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존재요." 렌은 조용히 대답했다. 렌의 대답은 진실이었고 카엔은 감동했다. 비록 정확히 그가 원한 답은 아니었지만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나저나 지난 열흘 동안 어디 가셨었어요? 많이 찾아다녔는데요." 예상치 않았던 렌의 질문에 카엔은 당황하며 이런저런 변명을 주워섬겨야만 했다. 다행히도 렌은 그다지 의심하지 않았다. "카엔님이 안 계시니까 아카데미에 가도 도서관에 와도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고 너무 쓸쓸했어요. 앞으로는 아무 얘기 없이 그렇게 사라지시면 안 돼요. 정말로 걱정했다고요." 카엔은 렌에게서 자신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간절한 마음을 읽었다. 카엔은 속으로 흐뭇해 어쩔 줄 몰랐다. "나도 렌을 보지 못해서 무척 쓸쓸했어요. 앞으로는 아무 말 없이 사라지지 않을 테니 염려 말아요." 카엔은 따뜻하게 말했다. 흑룡 데이그랜이 인간 청년의 모습으로 땅끝마을에 나타난 것은 렌이 이 세계에 온 지 대략 석 달 정도 지난 후였다. 대체 뭐가 잘못되었는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데이그랜은 마침내 이계의 소녀가 자신의 연못으로 이동되지 않고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내었다. 그 소녀와 강하게 얽힌 사람, 서로의 과거 인연과 아주 비슷한 파장과 외모를 지닌 사람이 이 세계에 존재하여, 자신의 마법보다 더 강하게 그녀를 끌어당겼던 것이다. 그런 일은 아주 드물지만 없는 일은 아니었다. 중첩된 여러 겹 우주의 수 조, 수 경의 생명들 사이에서는 언제나 비슷한 운명의 사람이 한둘씩 태어나고 스러지기 마련이었다. 데이그렌은 여러 날 밤을 세운 끝에 그 사람이 다름아닌 동제국의 제2황자 테룬이라는 것과 이계의 소녀가 나타난 곳이 동제국의 땅끝마을이라는 것까지 알아냈다. 데이그랜은 즉시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다른 용들에게도 알려주고 나서 땅끝마을로 이동했다. 데이그랜은 여러 차례 인간세상에 나와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어색하지 않게 땅끝마을 유일의 여관 겸 술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데이그랜의 적당히 만들어낸 호감있는 외모에 주모는 추파를 던지며 시키지도 않았는데 데이그랜의 맞은편에 슬그머니 앉았다. 데이그랜은 속으로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주모에게 말을 붙였다. "혹시 얼마 전, 그러니까 대략 석 달 전쯤에 이 근방에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의 소녀가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주모는 그의 말에 씩 웃으며 대답했다. "손님도 그 소문을 들었군요. 호호호. 그 아가씨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 참 많아서 최근 한동안은 우리 마을의 주된 화제거리였답니다. 암튼 제대로 물으시는 거예요. 나만큼 그 아가씨 소식을 많이 아는 사람은 이 마을에 달리 없으니 말이우." 데이그랜이 비싼 요리와 술을 시키고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자 주모는 신이 나서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댔다. 자기만큼 많이 아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주모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렌의 시중을 들었던 샤나는 주모의 외조카여서 사실 샤나를 통해 주모만큼 자세한 얘기를 들은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주모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어느 날 절벽 아래에 '렌'? 繭遮?이름의 이국적인 절세미인이 알몸으로 파도에 밀려왔는데 그녀를 테룬 황자가 발견하여 구해주었고, 황자는 렌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애지중지하여 한 달 정도 끼고 잤으나 렌은 어느날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데이그랜은 소리쳤다. "그럼 그 렌이란 소녀가 지금 여기에는 없단 말입니까?" "그렇죠. 한 달쯤 전에 사라졌어요. 그 때 내 조카인 샤나가 얼마나 섭섭해 했었는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요?" "아무도 몰라요. 경비병들 말로는 산책 나간다고 하고서는 안 들어왔다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 아가씨가 물 속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는 생각 안 해요. 아마도 황자 전하가 자꾸 강제로 자기를 가지려고 하니까 견디기 힘들어 슬쩍 도망간 거겠죠." 데이그랜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테룬 황자는 어디 갔습니까?" "바로 한 달 전쯤 반란죄를 자백한다고 해서 수도 브림으로 압송되었는데, 수도 거의 다 가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더군요. 뭐, 어찌 되었든간에 여기 촌구석 사람들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죠." 아직 황자가 승리하여 황제로 등극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외딴 이 마을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데이그랜은 주모에게 감사를 표하고 다시 흑성 부근으로 이동했다. 그는 그녀가 처음으로 나타났다는 흑성 아래 절벽을 거닐며 혹시 이질적인 마나의 흐름이 있는지 샅샅이 살폈다. 마침내 그는 한 번 마나가 분출되었다 사라진 흔적을 발견했다. 초장거리 공간이동을 할 때 나타나는 마나였다. 그녀가 이동했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어서 데이그랜은 고민했다. 이 정도 마나의 양이라면 동서남대륙 어디로 가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였다. 데이그랜은 이 위기의 순간에 자신이 흑룡 중의 흑룡, 지혜의 흑룡인 데 대해 한탄했다. 정의의 백룡이나 번영의 청룡, 정열의 적룡은 스스로 할 일이 없으니 그저 흑룡 탓만 하면 되지만 그는 용족의 운명을 혼자 몸으로 책임져야 했다. 이계의 정보와 에너지를 취합하는 능력은 그에게만 있었고, 렌의 행적 또한 그 아니면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렌의 생기가 은은하게 느껴지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그리고 렌이 이곳에 나타날 때 '백옥같은 나신'이었다는 점과 자유자재로 말을 했다는 점으로 보아 그가 그녀를 이 세계로 끌어오면서 걸어 놓은 치유마법과 통역마법은 제대로 효과를 나타낸 듯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약간의 자부심을 느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차원이동마법을 시전하면서 그와 동시에 두 가지 다른 마법을 함께 펼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그렇게 여러 겹 마법을 펼치는 바람에 정작 그녀를 자신의 레어로 끌고 오지 못하게 된 게 아닌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 생각을 하자 식은땀이 흘렀다. 다른 용들에게 그 점은 극비로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렌을 찾을 유일한 단서는 테룬 황자였다. 이계의 소녀와 그의 인연이 얽혀 있는 만큼 언제고 그 소녀는 테룬 황자와 다시 만날 날이 올 것이다. 앞으로의 행보에 관하여 결심이 선 데이그랜은 동제국의 수도 브림으로 순간이동했다. ===================================================================치료사 렌 [6] 봄의 폭풍 (2) -------------------------------------------------------- 추운 겨울은 어느새 가고 마침내 봄이 왔다. 아열대 지방에서만 자라 추위에 약한 렌은 정말로 간절히 봄을 기다렸고, 봄이 왔을 때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설렌 기분으로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새 봄을 맞았다. 눈이 녹고 가지에 물이 오르고 굳었던 땅에서 어린 연두빛 새싹들이 돋아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감동 그 자체였다. "카엔님, 매화가 피었어요!" 렌은 아카데미 정원 한 켠에서 몰래 꺾은 백매화 한 아름을 안아 들고 빙글빙글 돌며 황궁 도서관으로 뛰어들었다. 렌의 머리카락과 어깨 위에도 매화 꽃잎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고, 매화를 안고 있는 렌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카엔은 렌의 모습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렌, 그대는 정말로 아름답군요!" "제가 아름답다 해도 카엔님은 더 아름다워요." 렌은 방긋 웃으며 들고 있던 매화 가지 하나를 카엔의 귀에 꽂아 주었다. 졸지에 꽃으로 머리를 장식하게 된 카엔은 어안이 벙벙해서 꽃을 꽂은 채 멍청하게 서 있었다. "도서관 안에 꽃병이 없나요? 음, 여기다 꽂으면 되겠군요." 렌은 매화가지를 티포트에 꽂고 여기저기를 매만져 근사한 모양으로 만들었다. "아아, 봄이 오니 너무 설레서 도저히 도서관에 있을 수가 없어요. 카엔님, 지금 꼭 도서관을 지키셔야 하나요? 우리 황궁 후원에서 놀면 안 돼요?" 렌은 한껏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카엔을 졸랐다. 카엔은 미소지었다. "나와림이 당직근무를 땡땡이쳐도 됩니까? 그러다 짤리면 어쩌려고요." "카엔님은 고자질같은 건 안 하시는 분이라는 걸 잘 알아요. 그리고 여기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걸요. 우리 둘 다 땡땡이쳐도 아무도 모를 거예요." 렌은 혀를 낼름 내밀었다. 카엔은 졌다는 듯이 웃었다. "좋아요. 렌, 이리로 와요." 렌이 다가오자 카엔은 렌을 감싸안고 순간이동했다. 그들이 내려선 곳에는 이 세상 같지 않은 선경이 펼쳐져 있었다. 매화나무는 물론이고, 진달래, 개나리, 그리고 렌이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보는 이름 모를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렌은 주위의 풍경에 취해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다가 화들짝 놀랐다. "카엔님, 여기 혹시 황제 폐하 전용의 우원(右園) 아닌가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로 봐서 우원이 맞는 것 같은데요." "그래요, 맞아요." "여기 있는 걸 들키면 큰일날 텐데요." "걱정 말아요. 누군가 다가오면 마법으로 알 수 있으니 안심해도 돼요." 렌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매화나무 그늘 아래 잔디 위에 주저앉았다. "자, 카엔님, 제 무릎을 베고 누우세요." 카엔은 어색하게 렌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누군가의 무릎을 베고 누워 본 것이 얼마만인가. 그녀의 몸에서 나는 매화 향기가 감미로웠다. 몸과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해진 그는 깜박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흠칫 하고 눈을 떴다. 눈 앞에는 여전히 렌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잤나요?" "응... 3난(30분) 정도요." "별 일 없었죠?" "제 왼쪽 다리가 이제 괴사를 일으키고 있어요. 의외로 머리통이 무겁네요." 렌이 심각하게 말하자 카엔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미, 미안합니다." 렌이 생긋 웃는 것을 보고서야 카엔은 렌이 장난친 것임을 알았다. 카엔은 어처구니 없어져서 따라 웃었다. "매화향기가 너무 좋지요?" "그렇군요." 카엔은 수백년만에 처음으로 맡아보는 향기인 듯 매화 향기를 들이마셨다. "제가 전에 살던 곳에서는 추위를 뚫고 제일 먼저 피는 꽃이라 해서 매화를 사군자 중의 하나로 삼아 그 절개를 숭상했답니다. 수많은 시인들이 매화를 노래하고 많은 문인들이 매화 그림을 남겼지요. 하지만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너무 더워서 매화가 자라지를 못했어요. 나중에 화분에 심겨진 매화를 보기는 했지만 그 흥취는 자연적으로 자란 매화에 미치지 못했고요. 그래서 저는 늘 제대로 자연 속에서 자란 매화나무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시공을 뛰어넘어 여기서 매화를 보게 되는군요." 렌은 매화 줄기를 쓰다듬으며 아련하게 이야기했다. 카엔은 렌의 마음에 가득찬 그리움과 회한과 애틋함을 읽었다. 렌이 카엔을 두고 다른 세계로 빠져드는 모습을 보자 카엔은 다시 외로워졌다. 카엔이 한동안 말이 없자 렌은 그것을 눈치채고 가만히 카엔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카엔님, 매화는 외로운 꽃이예요. 다른 꽃이 피기 전에 눈 속에서 먼저 피고 먼저 지지요. 제게는 카엔님이 마치 이 매화처럼 느껴져요. 카엔님이 추위 속에서 떨며 홀로 꽃을 피우고 있는 것 같아요. 카엔님, 영원히 이렇게 홀로 피어 있을 것만 같아 불안하시죠? 그래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른 봄 홀로 피었다 해도 조금만 기다리면 봄이 오고 나비가 찾아오고 언젠가는 매실도 영글게 되니까요. 저는 카엔님의 외로움이 어디에서 온 건지 알지 못해요. 하지만 카엔님, 안심하세요. 카엔님을 외로움 속에 남겨두지는 않을 테니까요. 오히려 카엔님이 귀찮아하며 비명을 지를 때까지 졸졸 따라다니며 괴롭힐 거라고요!" 렌은 엄숙하게 말하다 말고 갑자기 카엔을 간질였다. 렌의 기습공격에 카엔은 속수무책으로 항복을 외치며 끊임없이 웃었다. 그러다가 카엔도 반격에 나섰다. 렌은 카엔보다도 더 간지럼을 잘 타서 웃느라 어쩔 줄을 몰랐다. 한바탕 웃은 둘은 다시 옷매무새를 고치고 잔디 위에 앉았다. 카엔은 문득 의아해하며 물었다. "렌, 렌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잘 아는 거죠?" 렌은 대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아마도 사람이란 원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 같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부러 남의 마음을 보지 않으려고 외면하지만,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그의 행동과 말과 눈빛을 관찰하다 보면 결국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거든요. 충분할 정도로 진심을 기울여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뿐이죠. 저는 온 마음을 기울여 카엔님을 이해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카엔님 마음 속의 외로움이 보이는 거예요." 렌은 조용히 카엔의 뺨에 입술을 대었다. 향긋한 숨결이 렌에게서 퍼져나왔다. 카엔은 전율했다. "아, 그리고 저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다고 했죠?" 렌은 방긋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뭐든지 얘기만 해요." "조금 있으면 봄의 여신의 축제라죠? 그 때 저랑 함께 황궁 밖으로 나가서 축제 구경을 시켜 주세요." 카 엔은 참으로 욕심 없는 렌의 소원을 듣자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좋아요. 대신에 조건이 있어요." 렌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궁금해했다. "조건이라뇨?" "축제 때 내가 가져오는 소즈릴(소녀용 드레스)을 입어야 돼요. 나는 렌이 여장한 모습을 보고 싶다고요." "후훗, 알았어요. 하긴 우리 둘이 남장하고 거리를 다니면 완전히 호모 커플로 오해받을 거예요. 뭐 그것도 근사하긴 할 텐데. 테라미즈 시민들에게 눈요기도 될 테고. 모두들 즐거워하지 않겠어요?" "이 장난꾸러기!" 렌은 카엔이 꿀밤을 먹이려 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갔다. "렌은 원래 이렇게 장난꾸러기였나요?" 카엔이 웃으면서 한 질문에 렌은 의외로 심각해졌다. "사실 저는 장난을 쳐 본 기억이 없어요. 어릴 적에는 집에서 눈치보고 구박받으며 커서 장난칠 상황이 아니었고, 그 다음에는 공부하느라 놀 틈이 없었지요. 스승님을 상대로 장난을 칠 수도 없었고요. 노예로 팔려 홍콩에 온 뒤로는 하루하루가 칼날을 딛는 듯 조심스러워서 장난은 꿈도 못 꿨었고요. 여기 와서 친구들이 생기고 카엔을 만나고 나서야 장난기를 맘놓고 발휘하게 된 거예요. 저는 억지로 어른 노릇을 하다가 비로소 나이에 맞게 아이로 돌아간 느낌이예요." 카엔은 렌이 애처롭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했다. 순간이동을 위해 렌이 다가왔을 때 카엔은 필요 이상으로 렌을 힘주어 안고 아직도 짧은 렌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렌도 두 팔로 카엔의 넓은 품을 힘껏 안았다. 바람이 불어 매화꽃잎은 다시 눈처럼 날리고 늦은 오후의 햇살은 둘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황제의 침전으로 돌아온 카엔은 거울을 보다가 자기 머리 윗쪽이 여러 가닥으로 복잡하게 땋아져 있고 사이사이 매화꽃이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무도회에 참석하는 귀족 영양의 헤어스타일 같았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우면서도 우스워 그는 거울을 붙잡고 한참을 부들부들 떨며 눈물까지 흘려가며 웃었다. 렌이 자신을 보며 '아, 아름다워.' 혹은 '너무 잘 어울려.' 하고 끊임없이 싱글싱글 웃었던 게 이것 때문이었던가. 카엔은 이제 머리장식을 풀어야 했으나 렌이 그 가녀린 손가락으로 한 가닥 한 가닥 땋아 주었다는 생각을 하니 풀기가 너무 아쉬웠다. 뭐, 보는 사람도 없는데 어때 하고 생각하며 결국 그는 그 헤어스타일을 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 -------------------------------------------------------- 치료사 렌 [6] 봄의 폭풍 (3) -------------------------------------------------------- 테룬 황제의 즉위식은 검소하게 열렸다. 본래대로라면 두어 달 정도의 시간을 두고 동제국 내의 귀족들뿐만 아니라 테라미즈넨 제국과 중립공국, 왕국들의 사절을 두루 초대하여 거국적으로 열려야 할 즉위식이었으나, 황제, 황태자, 제2황후의 죽음이라는 끔찍한 비극이 모두의 기억 속에 생생했기에 황급히 간소한 장례식을 치른 데 이어 서둘러 즉위식이 행해졌다. 테룬 황제의 통치가 문치보다는 무치로 흐르리라는 것은 명백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지금까지 주로 문관으로 채워졌던 각 군단의 군단장을 무관으로 교체하였고 유명무실해져가던 징병제도도 재편할 것을 명했다. 문관들은 반발했으나 무인들은 이제야 자신들의 세상이 왔다며 환호했다. 파이브룬 제국의 초대 황제 하라스 대제는 테룬 황제와 마찬가지로 소드마스터였다. 애초에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다면 서제국의 황제 카에닌이 무서워서라도 거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까지 동제국이 통일되지 않고 수많은 소국으로 나뉘어 있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아무리 카에닌이 동제국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누군가 나서서 동제국의 통일을 이룩하려 한다면 바로 카에닌의 공전절후한 마력으로 즉시 처단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황제를 꿈꾸는 수많은 소국 군주들을 주저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물불을 가리지 않고 천하에 무서워하는 것이 없던 하라스 대제는 아버지 파이브룬 대공이 세워놓은 파이브룬 대공국을 발판으로 하여 질풍노도와 같은 속도로 서제국의 국경에 이르기까지 소국들을 정복해 나갔다. 다만 그도 정면으로 서제국과 적대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국경에 이르자 정복의 행로를 멈추었다. 건국의 상황이 이와 같았으니 당연히 동제국을 지배하는 것은 숭무의 전통이었다. 건국 초기에는 무공만이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장교들은 강했고 병사들은 충성스러웠다. 그러나 어느 정도 정복전쟁이 끝나고 더 이상 뻗어나갈 곳이 없게 되자 어느새 문관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서제국과 전쟁을 할 것도 아닌데 군대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차라리 내치에 힘쓰며 서제국처럼 문화를 융성케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아무런 위협도 자극도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동제국보다 훨씬 앞선 문명을 지닌 서제국을 동경하기 시작했고, 서제국의 말투를 쓰고 서제국풍 의상을 갖춰 입는 것이 세련된 귀족의 상징이 되었다. 렌은 처음 동제국에서 서제국으로 왔을 때 엄청나게 떨어진 거리에도 불구하고 옷이나 말투가 너무 비슷해서 의아해 했었는데, 사실 동제국 황실에서는 서제국의 문물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제국화의 속도를 높인 것은 전 황제인 하라스 4세였다. 하라스 4세는 모두 인정하다시피 약골이었다. 그는 검을 잡을 줄도 몰랐고 말도 제대로 타지 못하였으며, 젊을 적부터 수줍음을 타는 전형적인 샌님일 따름이었다. 그가 전전대 황제의 유일한 아들로서 황위에 올랐을 때, 그는 자신의 문약함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서제국화에 박차를 가했다. 서제국은 전 국토의 3분의 2가 황제직할지였고 직할지에는 황제의 신하인 관료들이 파견되어 나라를 다스렸는데 그 관료들은 대부분 문관들이어서 서제국풍을 따르다 보면 저절로 문치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봉건제에 가까운 파이브룬 제국에서 중앙집권제인 서제국의 제도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참으로 바보같은 일이었지만, 이미 평화에 취한 황제와 신하들은 별다른 문제의식을 갖지 않은 채 서제국의 것이라면 뭐든지 맹목적으로 따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라스 4세가 서제국을 따라하겠다고 고집했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한 것은 나와림 제도 정도였다. 그 때는 서제국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귀족들도 일치단결하여 결사항전했다. 문치로 흐르기 시작한 지 50여년이었다. 테룬 앞에는 이미 기백을 잃고 흐물거리는 중앙귀족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난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현 상황을 바로잡지 못하면 아직 강건감을 간직하고 있는 변방의 공국들이 언제라도 중앙을 넘볼 것이었다. 그리고 동제국의 존립을 카에닌 황제의 자비 하나에 의지한다는 것은 주권국가로서 참으로 어리석고 한심한 일이었다. 카에닌 황제가 그동안은 동제국에 관심이 없었다고 해도 언제 마음을 바꿀지 모르는 것 아닌가? 지금 그의 마력을 막을 수 있는 것은 항마석을 이용해 브림의 황궁에 설치해 둔 마법결계뿐이었다. 게다가 동제국은 원래 마법의 전통이 약해 8써클 마법사는 쿠드 한 명밖에 없었지만, 서제국에는 8써클 마법사가 일곱 명, 7써클 마법사가 20명, 6써클 이하로는 일일이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결국 동제국이 내세울 것은 무력밖에 없으니 한시바삐 군제를 재정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행히도 샤이트와 팔라르는 문무 양쪽에서 테룬을 완벽하게 보좌해 주었다. 할 일은 많았지만 테룬은 노력하면 동제국을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테룬은 간편한 검은 색 토즈에 황제의 목걸이만을 걸친 채 황제 집무실의 창턱에 앉아 중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샤이트가 들어왔다. 샤이트는 이제 은빛으로 빛나는 수상의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폐하, 저를 찾으셨습니까?" "그렇다, 위든 경. 이리 가까이 오라." 샤이트는 테룬 황제의 곁에 와 시립하였다. "여기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흑성에서 아무 할 일 없이 매일매일 창밖의 풍경만 바라보던 일이 문득 생각나는군. 그녀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대로 거기서 죽으려 했었다." 샤이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테룬은 고개를 돌려 샤이트를 쳐다보았다. "렌이라는 소녀를 물론 기억하겠지?" "예, 기억합니다. 놀랍도록 펠리시티 전 황후 마마를 닮은 소녀였죠." 테룬은 샤이트가 굳이 렌과 펠리시티의 유사함을 지적하자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내 손발을 고쳐주고 소드마스터의 무공을 되찾아 주었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그녀는 알려지지 않은 치료술로 자신의 생명의 5분의 1을 희생해서 나를 고친 것이었다. 그대도 알겠지만 그 때 나는 궁정마법사 쿠드의 언힐링 마법에 걸려 있었고, 쿠드의 마법은 쿠드 자신도 깨뜨릴 수 없도록 되어 있어서 내가 나으려면 쿠드보다 한 써클 높은 9써클 마법사의 힘이 필요했지. 그런데 동서제국을 통틀어 9써클 마법사는 오로지 서제국의 카에닌 황제 한 명뿐이니,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죽을 결심을 했든 안 했든 그대로 죽었을 거야." 샤이트는 침묵으로 긍정의 뜻을 표했다. "그녀가 완곡하게 거절하기는 했지만 나는 렌에게 제국 최고의 부귀영화를 약속했다. 나는 렌을 데려와 내 곁에 두고 싶다." 샤이트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안 됩니다, 폐하!" "왜 안 된다는 거지?" 테룬은 차갑게 물었다. "그녀는 지나치게 펠리시티 전 황후 마마와 닮았습니다. 펠리시티 마마께서 이 동제국에 얼마나 많은 분란을 가져왔는지 너무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모든 끔찍한 참극이 아직도 모두의 기억에 생생한데, 폐하께서 펠리시티 마마와 놀랍도록 닮은 소녀를 곁에 두신다면 폐하와 펠리시티 마마의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들의 의혹을 부추길 뿐입니다." 샤이트는 조목조목 지적 하였다. "나는 파이브룬 제국의 황제이다. 내가 어느 여자를 가까이 하는가도 귀족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가?" "아직 폐하의 위치는 확고하지 못하십니다. 언제라도 반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 폐하는 손톱만한 약점이라도 내보이셔서는 안 됩니다." "그녀가 아니라면 내가 황제 노릇을 하기 싫다고 해도 말인가?" 샤이트는 할 말을 잃었다. "폐하께서 그런 마음이시라면 신하인 저로서는 따를 수밖에요." 샤이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테룬은 갑자기 입가를 뒤틀며 말했다. "자네 혹시 나를 사랑하나? 렌을 질투하는 건가?" 샤이트는 평소의 포커페이스를 무너뜨리고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대답했다. "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게도 취향이라는 게 있습니다!" "취향이 뭔데?" "말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폐하같은 무인 타입은 전혀 아닙니다."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웃던 테룬은 그에게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렌은 남장을 하고 테라미즈로 갔다. 내 즉위 소식을 들으면 브림으로 오라고 했지만 거절했으니 아마 끌고 오기 전에는 안 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테라미즈에 있는 우리 첩자들을 통해 그녀의 행방을 알아보고 찾는 대로 이리로 데려오도록 하라. 워낙 빼어난 미모를 갖추었으니 아마도 그녀의 소재를 찾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칙명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샤이트는 정중하게 인사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샤이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황제는 렌을 데려다 황후로 삼으려는 의향인 듯했으나 현 시점에서 어디에서 굴러왔는지도 모르는데다 펠리시티 전 황후와 똑같이 생긴 소녀를 황후로 삼는다는 건 말도 안 되었다. 아예 발견을 못 하면 제일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어떻게든 그녀를 찾는 것을 늦춰야 했다. 그리고 그녀를 찾기 전에 적절한 황후후보감을 찾아 제1황후로 만들어 놓아야 했다. 거듭 검토해 본 결과 역시 남동쪽의 프린다인 공국의 공녀가 가장 적합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모와 당찬 성격으로 벌써 제국 내에 이름이 드높았다. 그녀라면 다른 공국을 견제함과 동시에 황제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샤이트가 나가고 난 뒤 테룬은 다시 렌을 생각했다. 정신없이 바쁘게 지나간 나날이었지만 마음 속의 묵은 상처와 아버지와 형, 어머니가 죽을 때 생긴 새로운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이따금씩 한가해질 때면 상처는 그의 가슴을 헤집고 쿡쿡 쑤시게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그와 피를 나눈 사람들 모두를 죽여버린 셈이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미친 피가 아직도 그의 안에 흐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에게 반감을 가진 일부 귀족들이 그를 부모살인자라고 부른다는 소문을 그는 들어 알고 있었다. 가엾은 아버지와 형에게는 그저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느끼는 격렬한 애증은 그 스스로도 다스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녀가 죽기 직전에 자신에게 퍼부었던 저주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 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왜 일이 그렇게까지 되어야 했던 걸까. 그리고 그날 그녀가 했던 이야기들, 그녀가 숨겨 두었던 아픈 과거들은 때때로 되살아나 테룬의 꿈을 어지럽혔다. 꿈 속에서 테룬은 펠리시티를 팔아 버리는 친아버지 또는 펠리시티를 학대하는 노예 소유주가 되었고, 그녀는 언제나 자신에게 학대당하고 고통당하다 몸이 양단되어 피를 쏟으며 죽었다. 그런 꿈에서 깨어나면 전신은 흥건히 땀으로 젖고 온몸은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이 불길한 욕망. 자신에게 베어진 채 야릇한 미소를 띠고 있던 펠리시티의 마력적인 모습. 그 때 그녀의 주검에서 튄 피가 그의 몸 속에 스며들어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느낌이었다. 그런 꿈을 꾸고 난 후면 그는 무언가 부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모든 힘이 다 빠져 버릴 때까지 극한으로 검강을 일으켜 베고 또 베었다. 연습장은 덕분에 엉망이 되어 버렸다. 가족 모두를 바치고 얻은 황위이지만 그는 지금 행복하지 않았다. 렌이 없는 한은 앞으로도 어머니의 저주처럼 영원히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 치료사 렌 [6] 봄의 폭풍 (4) -------------------------------------------------------- 렌은 행복했다. 저번에 한동안 없어졌다 돌아온 후로 카엔은 렌에게 더할 나위 없이 다정했고 그의 마음 속의 그늘도 날이 갈수록 옅어져 가는 것 같았다. 치유마법의 기법을 정명기와 결합하는 연구도 상당히 진척되었고 크리프나 그 무리들도 더이상 렌을 괴롭히지 않았다. 카엔이 지나치게 자신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렌은 언젠가 그가 모든 얘기를 해 줄 날이 올 거라고 믿었다. 여신의 달(5월)이 되자 이제 온 세상이 봄빛으로 물들고 온갖 봄 꽃들이 차례로 피어났다. 학생들이며 나와림들이며 어른들이며 모두 봄 의 여신의 축제를 준비하며 마음 설레했다. 봄의 여신의 축제는 서제국 최대의 축제였다. 렌이 와서 알게 된 바로는 동제국과 서제국의 종교는 모두 다신교였다. 동제국의 문화는 대부분 서제국으로부터 전파되고 얼마 남지 않은 토착문화도 모두 서제국의 문화에 흡수, 변형되어 사실상 동서제국의 종교와 문화는 상당히 유사했다. 다만 여성적인 기풍이 강한 서제국이 봄의 여신을 주신으로 하여 사계절의 여신들을 숭상하는 데 반해 남성적인 동제국은 사계절의 여신들 대신 남신인 대지의 신을 숭상하였고, 봄의 여신의 축제 대신 대지의 축제라는 가을 축제를 연다고 했다. 일신교는 인간이 생명을 걸고 자연과 일대일로 대면할 수밖에 없는 사막지대에서 탄생하고 다신교는 온대지방의 풍요로운 자연을 즐기는 가운데 탄생한다고 했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정말로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꽃과 나무와 물을 머금은 대지는 무엇 하나 신비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고, 특히 겨울을 지내고 새로 싹트는 만물을 보면 저절로 세상 모든 것에 신이 깃들여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남대륙의 사막에서 일신교가 탄생할 법도 했지만, 남대륙은 본래 인간의 땅이 아니었기에 그곳에서 인간들을 위한 종교가 발원할 여지는 없었던 것이다. 엘프와 드워프에게도 종교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인간과 나누지 않고 인간들도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봄의 여신의 축제는 크게 전야제와 축제 당일로 나뉘는데, 전야제 때에는 마을별, 직장별로 노래와 춤으로 봄의 여신에게 경배하고 무르익은 봄과 생명의 되살아남을 축하하였다. 이 때는 평소에 들어갈 수 없었던 황궁, 아카데미, 관공서가 모두 개방되었고 일반 시민들은 마음에 드는 곳으로 몰려가 노래와 춤을 마음껏 즐겼다. 축제일 당일에는 시내 곳곳에서 방사형으로 뻗은 열 두 개의 거리별로 각각 가장 아름다운 처녀를 뽑아 봄의 여신의 신전에서 축복을 받게 한 후 여신으로 분장시켜 시 외곽에서부터 황궁까지 전진하며 시민들에게 꽃을 뿌리며 축복을 내리는 '여신의 퍼레이드'를 벌였다. 여신으로 분장한 처녀가 뿌리는 꽃을 맞으면 연인들의 사랑은 이루어지고 결혼한 부부는 아이를 갖게 된다는 전설이 있어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길가에 나와 퍼레이드를 구경하였다. 이 날 도시 곳곳에는 꽃시장과 연인들을 위한 온갖 기념품 장터, 음식 장터가 열렸다. 특히 여신의 퍼레이드 중에는 사람들이 가장 아름다운 처녀가 있는 거리로 이동하는 관습이 있어 열 두 개 거리는 인파를 두고 은근히 자 존심 싸움을 하기도 했다. 렌은 황립 아카데미 3학년의 리더 도리안 데 페람(파니안의 형이었다)이 찾아와 봄의 여신의 전야제에서 샤티 연주와 노래를 맡아달라고 했을 때 무척 놀랐다. 전야제에서 연주하고 노래하는 것은 굉장한 영광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렌 스스로는 자신을 공부는 열심히 하지만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는 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혹시 파니안이 일부러 절 추천한 거 아닌가요?" 렌이 의아해하며 묻자 도리안은 고개를 흔들며 부인했다. 도리안은 파니안과 여러 모로 닮았고, 전체적으로 파니안만큼 미남은 아니었으나 사람 좋고 씩씩해 보이는 미소가 아주 좋은 인상을 주는 소년이었다. 수상을 아버지로 두고 아카데미의 리더인 그는 장애물 없는 빛나는 미래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너는 1학년 중에서 가장 유명인인 걸. 축제 후에 있을 리더 선출에서 네가 1학년의 리더가 되리라는 소문도 파다해. 이번 연주와 노래도 대부분의 1학년들에게서 추천받은 거고." "아무래도 자신 없는데요." 렌은 곤란해했다. "괜히 겸손해하지 마. 너의 명성은 익히 들었으니까. 외부인들도 많이 구경 오니까 잘 해야 해." 도리안이 부담을 팍팍 주자 렌은 한숨을 쉬었다. "안 하면 안 되나요?" 도리안은 눈을 부릅떴다. "누구 맘대로? 내가 페람 공작가의 장자인 것을 잊었어? 너 학교 생활 쉽게 하려면 순순히 내 말 듣는 게 좋을 걸?" 도리안은 장난기 섞인 말투로 말했지만 파니안에게서 도리안의 행동력을 들어 아는 렌은 다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예, 선배님께서 하라시면 해야지요." 도리안은 씩 웃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열심히 해." 렌은 그날 오후 카엔에게 찾아갔을 때 자신이 졸지에 전야제에서 샤티 연주와 노래를 맡게 되었음을 알렸다. 카엔은 렌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재미있어하며 반드시 전야제에 참석하여 렌의 연주를 지켜보겠다고 약속했다. 렌의 연습장소는 카엔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우습게도 황궁 도서관으로 정해졌다. 조용한 독서환경을 위한 완벽한 방음장치는 역으로 도서관 내 소음을 외부로 새나가지 않게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 것이다. 카엔은 악보 몇 권을 찾아 들고 와 자기 취향의 노래를 이것저것 시켰고, 렌은 카엔의 속셈을 알면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그가 시키는 노래들을 차례로 불렀다. 마침내 렌은 카엔과 상의하여 남쪽 지방에서 전해졌다는 옛 사랑 노래 한 곡을 고르고 거기에다 렌이 홍콩 시절에 읽고 깊이 감동했던 파블로 네루다의 시('스무 편의 사랑 노래' 중 열 네 번째 노래)를 가사로 붙였다. 봄의 여신이 사랑의 여신이기 때문에 전야제에서는 사랑노래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카엔은 음악에 상당히 조예가 깊어서 렌이 거듭 연습할 때마다 고칠 부분, 조심해야 할 부분을 자상하게 지적해 주었다. 친구들도 렌이 연주하게 된 걸 기뻐하며 렌의 연습 상황에 대해 궁금해했다. 가만히 보니 가장 열광적으로 기뻐하는 건 사이라인 것 같았다. 저번 사건 이후로 사랑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얘기를 더이상 하지 않아 철이 좀 들었는 줄 알았는데 사이라는 어느새 렌의 팬클럽 회장쯤이 되기를 자처하고 여학생들을 규합하여 전야제 날 렌을 위해 여러가지 응원장치를 준비한다고 했다. 맙소사. 팬클럽이라니. 거기에 응원장치라니. 마침내 전야제 날이 되었다. 렌은 오후부터 출연자 분장실에 모여 다른 소년소녀들과 함께 화장에 들어갔다. 홍콩에 있을 때도 안 하던 화장을 남장을 한 이곳에서 하게 된 것에 렌은 그야말로 운명의 기구함을 느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그토록 꿈꿨던 학교생활의 꽃인 축제에 자신이 직접 참여하게 된 사실이 감개무량하기도 했다. 전야제에 출연하는 소년소녀들은 모두 20명 정도였다. 학년별로 한 명씩 독주, 학년을 통합한 중창단의 혼성 중창, 여학생들의 춤 공연이 순서대로 진행된 후 행사의 마지막에는 음악 교수의 독주가 예정되어 있었다. 렌의 순서는 앞에서 세 번째였다. 렌은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휴우, 이건 중환자를 치료하는 것보다도 더 떨리쟎아.' 다른 소년소녀들도 떨리기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수딘과 크리프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게도 중창단에 포함되어 둘 다 잔뜩 부은 얼굴로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둘 다 "강하고 남자답게"를 좌우명으로 하는 소년들인데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앙숙인 놈과 한 팀이 되어 노래한다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렌은 미소지으며 그 둘 쪽으로 다가갔다. "수딘, 왜 화장 안 하고 있어? 화장하는 방법을 모르면 내가 해 줄게." 렌은 웃으며 화장솔을 들어 수딘의 얼굴에 분을 발라 주고 뺨에 볼연지를 살짝 발라 주었다. 수딘은 기분 좋은지 실실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다가 결국 렌에게서 입술 화장을 해야 하니 제발 입술 좀 가만 두라는 야단을 들어야 했다. 크리프는 수딘이 렌의 손길 아래에서 단장되는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다가 렌이 화장을 마치고 자기 쪽을 바라보자 황급히 고개를 돌려 거울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크리프 선배님, 선배님도 제가 화장해 드릴게요." 렌은 이번에는 크리프 쪽으로 옮겨 역시 분과 볼연지와 입술연지를 발라 주었다. 볼연지를 바를 필요도 없을 정도로 크리프의 뺨은 붉게 달아올랐다. "저번에는 미안했다." 크리프는 누가 들을세라 다 기어들어가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사과했다. "사과 받아들일게요. 이제는 다 나았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크리프의 사과에 따뜻한 기분을 느끼며 렌은 즐거이 대답했다. 화장을 해 주면서 렌의 긴장은 저절로 풀렸다. 자기 자리로 돌아온 렌은 얼굴 피부 위에 백분을 바르고 여분의 가루를 털어내고 뺨에 볼연지를 바르고 눈썹을 약간 진하게 그리고 쌍꺼풀 사이에 은보랏빛 아이섀도우를 발랐다. 마지막으로 입술연지를 바르고 고개를 든 렌은 학생들이 모두 손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자 당황했다. "에, 저, 왜들 저만 쳐다보세요?" 렌의 물음에 대답 대신 일제히 감탄의 한숨이 터져나왔다. 렌은 더더욱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분장실을 나왔다. 아직 날이 저물려면 두어 시간 남았으니 황궁도서관에 다녀와도 될 것 같았다. 렌은 일부러 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서관으로 갔다. 카엔은 렌이 문을 열고 뛰어들어오자 반가이 웃으며 맞으려 했으나 렌의 얼굴을 보자 숨을 멈췄다가 "오, 맙소사!"하고 탄식했다. 렌은 울상을 했다. "제 얼굴 화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카엔은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 "그럼 뭐예요?" 카엔은 심호흡을 하고 나서 비로소 말했다. "렌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래요." 그제서야 렌은 안심하고 활짝 웃었다. "아름답다고요?" "그래요, 정말로 아름다워요." "화장발인 걸요." "화장발이라니요. 지금 렌이 한 건 화장도 아녜요. 평소에 워낙 꾸미지를 않으니 약간만 다듬어도 감추어진 미모가 돋보이는 거죠." 렌은 카엔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져서 카엔에게 달려가 두 팔로 카엔을 안았다. "오늘 밤 저 연주하는 거 꼭 보셔야 해요. 그리고 저 공연 끝나면 함께 만나서 전야제 구경해요." 온몸에 흐르는 전율로 목소리가 안 나와 고개만 끄덕이는 카엔을 보고 웃으며 렌은 다시 기운차게 분장실로 향했다. =================================================================== 치료사 렌 [6] 봄의 폭풍 (5) -------------------------------------------------------- 아카데미 중정에 설치된 공연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공연장 앞에 마련된 천여 석의 좌석은 당연히 귀족들 차지였지만, 오늘만은 평민들도 아카데미 안에 들어올 수 있는 날이라 평민들은 저마다 일찍부터 와서 공연 보기 좋은 곳을 맡아 놓았다. 렌은 용케 사람들을 헤치고 늦지 않게 분장실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학생들은 모두 공연 직전의 긴장감에 휩싸여 아까처럼 야릇한 눈초리로 렌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날은 이제 완전히 저물었고 공연장은 마법사들이 밝히는 신비로운 빛으로 눈부시게 빛났다. 맨 처음 무대로 나간 것은 '아카데미의 음유시인'으로 유명한 3학년의 엘핀이었다. 엘핀 또한 나와림이었다. 평민인 그는 빼어난 노래실력으로 어릴 때부터 테라미즈 시내에서 이름이 높았고, 결국 주위의 추천으로 나와림이 되어 아카데미에서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상당수의 팬클럽을 거느리고 있어서 엘핀이 무대로 나가자마자 여기저기에서 "꺄악!", "선배님!", "오빠!" 하는 환성이 들려왔다. 그는 무대에 서는 것이 무척 익숙한 듯 여유있는 미소를 지으며 샤티를 품에 안고 무대 중앙에 마련된 높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평민들도 그의 명성을 익히 들어보았는지 기대 섞인 속삭임이 청중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엘핀이 부른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봄의 여신의 찬가'였다. 그의 목소리는 맑은 테너였고 샤티 소리는 가슴 떨리게 멋있었다. 숨죽이며 그의 노래를 듣던 청중들은 2절에 이르러 엘핀이 손짓하자 모두 소리높여 따라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우뢰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 엘핀은 유유히 머리카락을 넘기고 청중들을 향해 키스를 날린 후-이 대목에서는 소녀들뿐만 아니라 중년 부인들까지도 귀족, 평민을 가리지 않고 모두 자지러졌다-무대 뒤로 사라졌다. 뒤에서 지켜보던 렌은 그의 완벽한 무대 매너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야말로 타고난 연예인이었다. 그 다음엔 2학년인 프리델 차례였다. 음악 교수의 총애를 받는 수제자인 그녀는 음악 교수가 은퇴하면 그의 자리를 잇기로 되어 있었다. 프리델은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엘핀을 째려보면서 코웃음을 치고는 샤티를 들고 무대로 나섰다. 엘핀은 빙글빙글 웃으며 프리델에게 다시 키스를 날렸다. 프리델은 다시 더 크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일단 무대에 선 프리델은 놀랍도록 진지한 태도로 샤티를 고르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분홍빛 소즈릴이 잘 어울리는 그녀는 꿀같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사랑의 봄'을 불렀다. 역시 축제 때의 애창곡인 이 노래는 처음 사랑을 하게 된 소녀가 순결한 사랑의 기쁨을 털어놓는 내용이었다. 노래의 가락과 가사는 프리델의 청아한 목소리에 잘 어울렸다. 청중들은 고요하게 그녀의 노래를 경청했고, 음악 교수는 흐뭇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노래가 끝나자 다시 엄청난 박수가 공연장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남학생들의 환성이 울려퍼졌다. 그녀는 상당수의 남자팬들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렌의 차례였다. 긴장한 렌이 숨을 몰아쉬자 렌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엘핀은 힘내라는 듯 렌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렌은 고마움을 담은 미소를 엘핀에게 던진 후 힘을 내어 무대로 나섰다. 눈부신 빛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조금 지나서야 엄청난 수의 관중이 눈에 들어왔다. 렌은 다리가 후들거려 쓰러질 것 같았다. 그 순간 어디에선가 부드러운 기운이 몰려와 렌을 받쳐 주었다. 카엔이었다. 카엔이 저 속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렌은 힘이 났다. 렌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공연장 앞쪽에 앉아 있던 사이라는 렌의 등장에 맞추어 팬클럽 소녀들에게 신호했고, 곧 마법을 쓰는 소녀들의 손에서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렌의 이름이 허공에 떠올랐다. 소녀들은 반짝반짝 하트 눈을 하고 "렌!" "렌!" "렌!" 하고 외쳤고, 이들의 사랑스럽고 귀여운 행동에 렌의 긴장은 완전히 풀렸다. 관중은 천상에서 내려온 듯한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에 숨을 죽였다. 대체 저 소년이 누구인지 묻는 속삭임이 잠시 일었으나 주위 사람들이 쉬쉬하며 제지하였다. 렌은 부드럽게 샤티를 뜯으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맑디맑은 소프라노였다. 매일 너는 우주의 빛과 장난을 한다. 예민한 방문객이여, 너는 꽃 속과 물 속으로 도착한다. 매일 그렇듯 내 손 사이의 포도송이처럼 내가 괴롭히는 이 티없는 작은 머리보다 더한 존재가 바로 너다. 내 너를 사랑하는 순간부터 너는 그 누구도 닮지 않은 존재. 노란 화관들 사이에서 내가 너를 가질 수 있게 하여 다오. 그 누가 저 남쪽 별들 사이에 연기 글씨로 네 이름을 쓰겠는가? 아, 아직까지 네가 존재하지 않던 그 때, 진정 네 모습은 어땠는지 기억하게 해다오. 별안간 바람이 울부짖으며 나의 닫힌 창문을 때린다. 하늘은 우울한 물고기들로 엉켜 있는 그물. 여기엔 모두가 저마다 온갖 바람을 일으키러 온다, 모든 바람들을. 비는 옷을 벗는다. 새들은 도망치듯 날아간다. 바람이다. 바람이다. 나는 사람들의 힘에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폭풍우는 어두운 잎새들을 소용돌이로 휘몰아 가고 엊저녁 하늘에 매어 둔 배들을 모조리 풀어 놓는다. 너는 여기 있구나. 아 너는 도망가지 않는구나. 너는 마지막 비명까지도 내게 응답하리니. 잔뜩 겁먹은 듯이, 내 곁에 조그맣게 웅크리고 있으라. 그래도 네 눈동자엔 낯선 그늘이 가끔씩 스쳐 갔다. 지금도, 지금까지 여전히, 작은 여인아, 너는 내게 인동 덩굴을 가져오면서, 향기 가득한 젖가슴까지 간직하고 있구나. 슬픔 바람이 나비를 죽여 가며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사이 나는 너를 사랑하고, 나의 희열은 네 살구 입술을 깨문다. 나에게, 내 외롭고 거친 영혼에, 모두가 멀리하는 나의 이름에 친숙해졌다는 것으로 너는 엄청난 고통을 겪으리라. 우린 보았다 우리의 눈이 입맞출 때 자꾸만 끓어 오르던 샛별과 우리 머리 위를 맴도는 부채 속에서 꼬인 몸이 풀려 가는 황혼을 너를 사랑으로 만질 때면 나의 노래는 네 위에 비로 내린다. 나는 네 몸이 볕에 잘 말려진 진주 조개이던 시절부터 사랑했다. 지금은 네가 우주의 여주인이라는 것까지도 믿는다. 내 너에게, 즐거운 꽃들과, 물메꽃, 짙은 색 개암나무 열매와 거친 입맞춤을 광주리째 저 산에서 가져다 주마. 정말로 나는 봄이 벚나무와 하는 행위를 너와 함께 하고 싶다. 눈을 지긋이 감고 샤티를 뜯으며 노래부르는 렌의 모습은 음악의 신이 소년으로 화한 것 같았고 렌의 목소리는 천상의 음률 같았다. 사실 렌의 목소리는 맑고 깨끗하기는 해도 완벽하지는 않았으나, 그 목소리에 서린 서투름과 떨림이 사람들에게 더 큰 감동을 주었다. 렌은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불렀다. 시와 음악과 사랑이 없다면 세상은 의미가 없고 삶은 그 순간 끝나리. 그 옛날 우연히 홍콩의 도서관에서 이 시를 읽었을 때보다 더 절절하게 지금 이 순간 시의 한 구절 한 구절이 뼈에 저리고 살에 배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대체 왜일까. 다른 세계의 봄이 내 영혼을 들어올려 아득한 천상으로 인도해 주는 것일까. 렌의 노래에 담긴 간절함과 시의 아름다움은 청중 모두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노래가 끝난 후에도 청중은 한동안 조용했다. 마침내 사이라의 주도로 팬클럽 소녀들이 환호하자 그제서야 청중은 마법에서 깨어난 듯 엄청난 박수와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렌은 부끄러워하다가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무대 뒤로 돌아왔다. 정보수집을 위해 본래부터 테라미즈에 파견되어 있던 첩보원들의 책임자인 6써클 마법사 바르민은 샤이트의 지령을 받자 자신의 부하 다섯 명과 함께 지난 한 달간 테라미즈를 샅샅이 뒤졌다. 그는 샤이트의 말에 따라 테라미즈 교외의 숲속에서부터 착실히 렌의 행적을 밟아나갔다. 한동안 추적은 쉬웠다. 교외의 공터에서 테라미즈 시내로 갈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고, 그 길을 따라가 테라미즈 시내로 접어들었을 때 마주치게 되는 여관과 상점 주인들에게 검은 머리 검은 눈의 눈부신 미소년을 본 적이 있냐는 질문을 던지자 여기저기에서 대답이 튀어나왔다. 렌을 본 사람은 누구나 렌을 기억했던 것이다. 그렇게 탐문한 결과 바르민은 렌이 '달의 쉼터'에 묵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바르민은 지나가는 말처럼 여관 주인 메니나에게 그곳에 한동안 머물렀던 눈부신 미소년이 어디 갔느냐고 물었고, 메니나는 자랑스럽게 렌이 나와림으로 선발되어 황궁으로 갔다고 대답해 주었다. 바르민의 수색은 여기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황궁에는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어 허가받지 않은 사람은 절대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 결계는 황도 건립시에 카에닌 황제가 직접 친 것이어서 6써클 마법사인 자기 힘으로는 절대 깨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카데미에도 황궁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어서 거기 들어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답답해진 바르민은 그때까지의 상황을 요약해서 샤이트에게 보고했다. 샤이트는 그다지 초조해하지 않고 기회를 보며 기다려라,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만 대답했다. 그러나 아무리 샤이트가 초조해하지 말라 해도 바르민은 한시바삐 렌을 발견하여 큰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정보국의 동료와 부하들을 통해 이미 확인한 바에 의하면 렌이라는 소녀는 자기 목숨의 5분의 1을 희생하여 귀양 중이던 황제의 목숨을 구하였으며, 테룬 황제는 렌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고 아마도 황후로 삼으려는 것 같다고 했다. 바르민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렌이라는 소녀가 테룬 황제를 구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일부라도 버릴 정도라면 렌이 테룬 황제에게 가지는 감정은 보통 강한 것이 아니었다. 생명에 대한 집착이란 게 얼마나 강한 것인데 사랑 없이 자신의 수명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아마 처음에 테룬 황제 곁에 남기를 거절했다는 것도 소녀다운 주저함이나 수줍음 이상은 아닐 것이다. 그녀와 접촉하여 테룬 황제가 그녀를 찾고 있음을 전하기만 하면 그녀는 반색을 하며 자신을 따라 나서리라. 그리고 황후로 책봉된 후에는 그녀를 찾아 데려온 자신의 공을 잊지 않으리라. 바르민은 지금 동제국이 점점 무인들을 중용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마법사, 그것도 그렇게 강하지 않은 마법사인 자신이 출세하려면 이번 기회를 잡아야만 했다. 바르민이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렌이 이번 봄의 여신의 전야제에 출연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 봄의 여신의 전야제 때에는 결계는 해제되고 아무나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므로, 공연을 틈타 아카데미로 들어가기만 하면 전야제 공연이 끝난 후에는 충분히 렌에게 접근하여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 길로 바로 렌을 데리고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바르민은 일찌감치 들어가 공연장 가까이에 자리를 잡았다.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토즈를 입은 그는 누구의 시선도 끌지 않았다. 그의 그러한 특징은 첩자 노릇을 하는 데 크나큰 강점이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마침내 렌이 무대에 섰을 때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남장을 하고 있기는 해도 렌은 정말로 펠리시티 황후와 똑같았던 것이다. 렌이 그녀와 다른 것은 표정뿐이었다. 펠리시티 황후가 농밀한 도화같이 유혹적인 표정을 지녔다면 렌의 표정은 결연하고 순수한 한 떨기 백련같았다. 렌이 노래를 시작하자 그는 자신의 목적도 잊고 렌의 노래에 푹 빠졌다. 그녀는 정말로 꽃 중의 꽃, 보석 중의 보석이었다. 주위의 청중들도 모두 렌에게 사로잡혀 정신을 잃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왜 테룬 황제가 그토록 렌을 갈구하는지, 그리고 샤이트가 왜 렌이 황후가 되는 걸 은근히 꺼리는지 절감했다. 그녀는 너무 매력적이었고 그래서 위험했다. 샤이트는 아마도 황제가 한 사람에게 사로잡혀 나라를 말아먹는 것은 전대 황제로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황제를 강하게 사로잡을수록 자신의 출세는 더욱 빨라질 것이었다.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며 공연을 보던 그는 렌의 노래가 끝나자 손바닥이 화끈거릴 정도로 박수를 쳐댔다. 그러다가 렌이 황급히 무대 뒤로 사라지자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출연자 대기실 출입문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덕에 빽빽하게 앉아 공연을 보던 평민들의 불평을 뒤로 하고 바르민은 공연장 쪽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예상대로 렌은 무대에서 내려간 후 얼마 되지 않아 공연장 뒷쪽으로 나 있는 출연자 대기실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바르민은 렌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가려 했으나 어디에나 사람들이 빈틈 없이 서거나 앉아 있어 렌에게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겨우 사람들을 헤치고 외치면 들릴 정도의 거리로 렌에게 다가섰을 때 그가 본 것은 렌의 곁에 소리없이 은보랏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나타나 렌을 안고 다시 소리없이 사라지는 광경이었다. 바르민은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심정으로 렌이 사라진 곳까지 갔다. 쉽게 성사될 줄 알았던 일이 의외로 꼬이는 것 같아 그는 힘이 빠졌다. 아카데미와 황궁에서는 순간이동마법을 쓸 수 없게 되어 있는데 그런 규칙을 무시하고 겁도 없이 마법을 쓴 저 자는 누구인가. 그러다가 그는 깜짝 놀랐다. 순간이동 후에 남아있어야 할 마나의 유동이 흔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의 마법지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나 없이 가능한 순간이동이라니, 이해할 수 없었다. 바르민은 렌을 만나는 일이 점점 어려워져가고, 동시에 그의 출세길도 점점 막혀가는 것을 느꼈다.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래도 렌의 얼굴을 확인하였으니 목표까지 반은 성취한 셈이었다. 황궁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카데미의 결계는 약했다. 위험부담은 있지만 아카데미는 그의 마법력으로 한 번 뚫어볼 만한 곳이었다. 바르민은 최후의 수단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치료사 렌 [6] 봄의 폭풍 (6) -------------------------------------------------------- 카엔의 품에 안겨 우원(右園)으로 옮겨간 렌은 꽃나무 사이를 즐겁게 뛰어다니며 웃다가 멈추어 카엔에게 물었다. "저 노래 어땠어요?" "너무 훌륭했어요." 카엔은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요?" "그럼요." "우후후후후, 정말 이? 贊?기분이었어요. 떨리고 설레고 흥분되고, 저 의외로 무대 체질인지도 몰라요." "청중들은 모두 렌과 사랑에 빠졌어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요. 질투심마저 생기던데요." 카엔은 농담처럼 자기 마음 속의 진실을 내비쳤다. 왠지 렌의 부드러운 살결을 직접 느껴보고 싶어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조용히 하얗고 긴 둘째 손가락으로 렌의 뺨을 어루만졌다. 렌은 온몸에 퍼지는 열기가 공연의 흥분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카엔님..." 렌은 약간 주저하며 무어라 말하려 하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렌의 마음은 무지개빛으로 어지러웠다. 내 마음 나도 모르겠어. 카엔님께 뭔가 말하고 싶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 웃고 싶기도 하고 울고 싶기도 해.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카엔은 부드럽게 물었다. 그는 아무런 마법도 일으키지 않았다. 소중한 이 순간을 마법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몰라요. 그냥 괜히 한 번 불러 봤어요. 내일은 약속대로 함께 축제 구경을 하는 거지요?" 렌은 조금 어색하게 화제를 돌렸다. "물론이죠. 자, 렌도 약속대로 이 옷을 입어야 해요. 장신구까지 다 넣어 놓았으니까 다 착용해야 하고요." 카엔 또한 화제가 바뀐 걸 기뻐하듯 맞장구치며 싸가지고 온 보퉁이를 렌에게 건넸다. 평민 소녀의 소즈릴과 그에 걸맞는 장신구, 잡화 일체였다. 난데없이 평민용 소즈릴을 준비하여 대령하라는 황제의 명령에 가장 속 썩은 사람은 다름아닌 수석 궁내관이었다. 사실 카엔이 궁내관에게 그 명령을 내렸을 때 수석 궁내관은 멍해서 아무 것도 확인하지 못했지만, 막상 의상을 준비하려 하니 답답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옷을 입을 소녀의 신장, 가슴둘레, 허리둘레, 엉덩이둘레, 팔 길이, 어깨 넓이도 모르는 상태이고, 평민이라 해도 중하층이 있고 중상층이 있는데 어느 쪽에 맞추어야 하며, 기타 잡화는 어디까지 준비해야 한단 말인가. 전대 궁내관들은 황제의 용안 한 번 못 보고 임기를 마쳤다는데 황제가 유독 자신만은 자주 찾으니 그저 가문의 영광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고민하던 수석 궁내관은 타고난 실용주의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했다. 첫째, 옷을 입을 아가씨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황제가 신경쓸 정도면 날씬한 미인일 테니 싸이즈는 거기에 맞추고, 둘째, 싸구려 옷을 싫어하는 사람은 있어도 좋은 옷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 중상층에 맞추고, 끝으로 기타 잡화는 제한이 없으니 가능한 한 다양하게 목걸이, 귀걸이, 머리 장식, 구두, 핸드백, 팔찌까지 두루 준비했다. 준비한 의상과 장신구를 비단 보자기에 잘 싸서 침전 전속 시녀로 하여금 침전 내 탁자에 놓도록 하는 조치까지 모두 마친 수석 궁내관은 자신의 유능함과 깔끔한 일처리에 보람과 자부심을 느꼈다. 물론 카엔은 의상이 어떤 경위로 침전에 도착하게 되었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한 사정을 모르는 렌은 카엔이 직접 여자옷을 사러 시장을 다니는 모습을 상상하고 미소지었다. "감사히 입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 제 방으로 데리러 오세요." 렌은 보퉁이를 소중히 안고 미소지었다. "그럴게요. 우리 함께 전야제를 더 보지 않겠습니까? 투명마법을 쓰면 아무도 못 볼 테니 팬클럽이 달려드는 일도 없을 거예요." "와, 그래 주시는 거예요? 고맙습니다, 카엔님." 카엔은 렌을 품에 안고 다시 공연장으로 갔다. 중창단의 중창, 소녀들의 무용 모두 참으로 근사했다. 특히 파니안과 수딘이 중창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손을 잡고 빙글 도는 장면에서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카엔의 투명마법과 방음마법 덕분에 둘은 마음껏 박수치고 품평하고 얘기하며 공연을 즐겼다. 정말로 즐거운 밤이었다. 다음날 새벽 렌은 카엔으로부터 건네받은 핑크색 소즈릴(소녀용 정장-소즈릴의 기본 구조는 토즈릴과 거의 비슷하게 치마와 블라우스, 겉옷인 '소'가 한 벌이고, 토즈릴이 넉넉하고 몸매를 덜 드러내는데 비해 소즈릴은 몸선에 따라 꼭 맞게 재단되어 좀 더 몸매를 드러내고 블라우스와 소의 옷깃도 목까지 올라오는 게 아니라 쇄골이 약간 드러날 정도로 파여 있었고, 토즈릴은 허리띠를 안에 매는데 비해 소즈릴은 '소' 밖에 매도록 되어 있음)을 갖춰 입고 보퉁이 안에 함께 들어 있는 머리 장식과 목걸이 등 장신구를 걸치고(귀걸이는 뚫은 귀용이었는데 렌은 귀를 뚫지 않았기 때문에 귀걸이는 착용할 수 없었다) 소녀용 구두까지 신은 후 카엔을 기다렸다. 옷은 딱 맞았지만 구두는 조금 컸다. 그래도 걷기에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유흥비로 1골드짜리 금화 몇 개와 1실버, 10실버짜리 은화, 동전 등을 챙겨 품에 넣고 나갈 준비를 마칠 무렵 카엔이 순간이동해 왔다. 핑크빛에 휩싸인 렌의 모습을 본 카엔은 감탄을 거듭했다. "토즈릴을 입었을 때에는 천하의 미소년이더니, 소즈릴을 입은 지금은 봄의 여신? ?무색하게 하는 미녀이군요." "과찬이십니다. 그대야말로 절세미남이 아니십니까?" 렌은 능청스럽게 답하고서는 스스로 우스워져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본 카엔은 덧붙여 말했다. "렌의 옷은 중상층의 평민 소녀가 입는 옷이예요. 미안해요, 귀족 소녀들의 소즈릴을 가져다주고 싶었지만 축제 구경을 하려면 평민옷이 나을 것 같아서요." "옷이 너무 맘에 들어요. 깨끗이 입고 잘 손질해서 돌려드릴게요." 렌이 감사를 표하자 카엔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돌려주다뇨, 그건 선물이예요." 렌은 얼굴을 찌푸렸다. "옷도 그렇지만 장신구까지, 너무 과한 선물이예요." "장신구도 보석은 아니고 그냥 코스튬 쥬얼리예요. 렌이 나를 맨 처음 치료해준 데 대한 치료비라고 생각해 줘요. 사실 마법진 수업만으로는 너무 약소한 듯했습니다." 그제서야 렌은 활짝 웃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고맙게 받겠어요. 잘 입을게요." 카엔은 미소지으며 렌을 보다가 뭔가 부족함을 깨달았다. "아름다운 소녀의 머리카락이 너무 짧군요." 그는 손에서 은보랏빛을 일으켜 렌의 머리카락 끝에 대었다. 순식간에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닿을 정도로 길게 자랐다. "어머, 신기해라. 어떻게 이렇게 되는 거죠? 발모마법이라니 정말 놀랍네요." 카엔은 렌이 자신의 마법에 감탄하자 늘 그렇듯 우쭐해하고 흐뭇해했다. "하하하, 뭐든지 필요하면 말만 해요, 렌." 언제나처럼 카엔의 품에 안겨 순간이동한 렌은 곧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에 말을 잃었다. 둘이 이동한 거리는 열 두 개 거리 중 매년 가장 아름답게 거리를 단장하고 가장 아름다운 처녀가 봄의 여신 역을 맡는 것으로 정평이 있는 코렐 거리였다. 누가 뿌리는 건지는 몰라도 하늘에서는 계속해서 하늘하늘 온갖 빛깔 꽃잎이 떨어져 내리고, 포장된 도로변에는 꽃과 리본으로 장식된 하얀 천막이 줄지어 서 있었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샤티 오중주의 선율이 거리에 흐르는 가운데 사람들은 저마다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고 길로 쏟아져 나왔다. 렌과 카엔은 평범한 커플처럼 거리를 걸으며 축제의 분위기를 만끽했다. 렌은 축제 구경에 열중하여 카엔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고 카엔은 열심히 끌려다녔다. 곧 둘은 작은 기념품점 앞에 도달했다. 나무와 금, 비취, 산호 등으로 깎은 조각품을 파는 가게였다. 렌은 산호를 깎아 만든 작은 불사조 목걸이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목걸이에는 마치 금방이라도 불 속에서 튀어나오려는 듯 날개짓하는 불사조의 자태가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렌이 그것을 몹시 갖고 싶어한다는 것을 눈치챈 카엔은 가게 주인에게 물건값을 지불하려다 곧 낭패스러운 심정이 들었다. 돈을 챙겨가지고 나오는 것을 잊은 것이다. 하긴 그가 마지막으로 돈을 내고 쇼핑을 해 본 것이 어언 50여 년 전이었다. 렌은 카엔이 토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도로 빼며 곤란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자 사태를 짐작하고 빙긋이 웃었다. "저, 아저씨, 이 산호 목걸이 얼마예요?" 가게 주인은 반색을 하며 값을 말했다. "3골드입니다." 렌이 '달의 쉼터'에서 묵을 때 월 숙박료가 30실버였으니, 3골드라면 상당한 거액이었다. "아저씨, 너무 비싸요. 1골드면 될 것 같은데요." "아이구, 눈부시게 예쁜 아가씨, 1골드면 이 가게 때려치워야 합니다. 내 아가씨 얼굴을 봐서 2골드 50실버로 딱 50실버 깎아드릴게요." "1골드 50실버요." "에이, 모르겠다, 2골드만 내십시오." "좋아요." 렌은 생긋 웃으며 주머니에서 2골드를 꺼내 가게 주인에게 주었다. "카엔님, 이리 오세요." 렌은 발돋움하여 목걸이를 카엔의 목에 걸어 주었다. 카엔이 당황하자 렌은 다시 웃으며 덧붙였다. "그거 카엔님 드리는 선물이예요. 왠지 카엔님한테는 불사조가 어울릴 것 같아서요." 카엔은 감동으로 말문이 막혔다. 누군가에게서 조공이나 상납이나 진상이 아닌 진짜 선물을 받아본 게 얼마만인가.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심정이 되어 카엔은 눈을 깜박였다. "렌이 무슨 돈이 있다고 그래요?" "테룬 황자에게서 받은 치료비가 아직 많이 남아 있어요." 카엔은 테룬 황자의 이름이 나오자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것을 본 렌은 카엔의 등을 툭 치며 말했다. "카엔님, 제가 받은 건 정당한 노동의 댓가예요. 생명을 판 값 따위는 아니라고요. 그러니 얼굴 펴세요." 렌은 카엔의 안색이 안 좋아진 게 자신의 생명 일부를 바친 치료의 댓가를 선물을 사는데 써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나름대로 추측했다. 하지만 렌의 추측은 틀렸다. 카엔은 테룬 황자 얘기가 나올 때마다 강렬한 질투심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카엔은 렌이 자기의 마음을 읽을 수 없음을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사정을 모르는 렌은 계속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카엔님, 돈 없으시죠? 저 옷 사주시느라고 돈 다 쓰신 거죠? 다 알아요. 카엔님같은 총각들은 대체로 돈 씀씀이가 헤프기 마련이죠 . 오늘은 제가 다 낼 테니 안심하세요. 하지만 앞으로는 월급 받으신 거 규모 있게 쓰시고 저축도 제대로 하셔야 해요." 렌이 성큼성큼 앞서가자 카엔은 쓴웃음을 지으며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 치료사 렌 [6] 봄의 폭풍 (7) -------------------------------------------------------- 사람들이 더 많은 중심가로 걸어들어가자 둘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흑공단같은 긴 머리를 출렁이는 아름다운 소녀와 은보랏빛 긴 머리를 바람에 날리는 미청년 커플은 흔히 볼 수 있는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황궁과 아카데미에서 미소년들과 함께 지낸 덕분에 그다지 자신의 미모를 의식하지 않았던 렌은 새삼 사람들의 이목을 받자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렌은 결국 카엔을 끌고 옆의 모자 가게로 가서 4실버를 주고 얇은 얼굴가리개가 달려 있는 핑크색 여성용 모자와 진보라색 남성용 모자를 샀다. 모자를 써도 둘의 미색이 완전히 가려지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다. 축제는 오후로 접어들면서 점점 무르익었다. 길가 천막 아래의 간이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은 둘은(물론 점심값은 렌이 냈다) 이제 적당히 자리잡고 서서 봄의 여신의 퍼레이드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겨울의 여신, 가을의 여신, 여름의 여신을 태운 마차가 차례로 다가왔다. 길가의 시민들은 마차가 지날 때마다 거리가 떠나가라 환호하며 미리 준비해 둔 꽃잎을 여신들에게 뿌렸다. 여신으로 분장한 처녀들도 웃으며 다시 시민들에게 꽃잎을 뿌렸다. 렌과 카엔 또한 길가 노점상에게서 꽃잎 두 바구니를 50푼에 사서 들고 있다가(꽃바구니 값도 역시 렌이 냈다) 사람들과 함께 환호하며 꽃잎을 뿌렸다. 마침내 봄의 여신의 마차가 다가왔다. 예년처럼 금년에도 코렐 거리의 봄의 여신이 최고라는 소문이 벌써 퍼졌는지 인파는 점점 많아졌다. 렌은 인파에 가려 마차가 잘 보이지 않자 힘껏 발돋움했으나 역시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카엔은 렌이 애쓰는 걸 눈치채자 렌의 다리를 잡고 렌을 번쩍 들어올렸다. 주위 사람들은 다정한 두 연인을 보고 휘파람을 불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했다. 렌은 발그레해져서 잠시 어쩔 줄을 모르다가 곧 마차를 보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봄의 여신을 맡은 처녀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자신이 맡은 역을 즐기는 그 처녀는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사방으로 꽃잎을 날렸다. 봄의 여신 역의 처녀 옆에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봄의 여신의 여사제가 위엄 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봄의 여신의 축복을 전하는 손짓을 내려 주고 있었다. 여사제는 카엔에게 들린 채 퍼레이드 구경을 하는 렌의 모습을 보고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소녀들의 미모를 수십년간 감정해 온 그녀의 눈썰미는 렌의 얼굴에 드리운 얇은 가리개 너머에 있는 렌의 눈부신 진면목을 바로 알아보았다. 여사제는 팔을 뻗어 렌의 손을 잡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눈치챈 주위 사람들은 웃으며 렌의 몸을 들어 마차로 옮겼다. 렌은 카엔과 떨어지기 직전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투명마법을 펼치시고 제 곁에 서 주셔야 해요." 카엔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사제는 퍼레이드 마차 위에 어리둥절하여 서 있는 렌을 마차 뒤쪽에 펼쳐진 장막 안으로 잡아끌었다.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은 여사제는 렌에게 말했다. "아름다운 아가씨, 그대라면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인 봄의 여신 올리나의 상징으로 손색이 없을 것 같군요." 렌은 약간 당황하여 물었다. "지금 다른 아가씨가 열심히 하고 계시쟎아요?" 그 말에 여사제는 다시 웃었다. "훗, 여기 풍습을 잘 모르는 걸 보니 테라미즈 토박이가 아닌가 봐요. 원래 봄의 여신 역할을 하는 아가씨는 퍼레이드가 지나가면서 로운 아름다운 아가씨가 나타날 때마다 바뀌게 되어 있답니다." "저, 그치만 신전에서 축복을 받아야 봄의 여신 역할을 할 수 있지 않나요?" "그건 옛날 풍습이고, 지금은 마차에 타고 있는 여사제가 약식으로 축복을 내려도 돼요." 여사제는 건성으로 손을 두어번 휘저으며 "그대에게 영원한 봄, 영원한 사랑, 영원한 아름다움이 있기를"이라고 말하여 순식간에 무성의한 축복을 마쳤다. 여사제는 축복보다는 렌을 꾸미는 데 더 관심이 있는지, 장막 안에 준비되어 있는 몇 벌의 여신 복장을 이것저것 대어 보고 고심하다가 결국 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연두빛 의상을 집어 렌에게 주었다. "자, 빨리 저기서 갈아입고 나오세요." 렌은 얼떨결에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카엔이 준 소즈릴은 조심스레 싸서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여신의 복장은 전형적인 그리스풍이었고 팔과 가슴이 깊이 파여 조금 부끄러웠다. 렌의 모습을 본 여사제는 다시 감탄하며 렌의 머리 손질을 다시 해 주고 화장도 조금 더 해 주고 나서 마지막으로 렌의 머리에 화관을 씌운 후 렌을 장막 밖으로 내보냈다. 저 여사제는 신성한 사제라기보다는 미용실 원장님 같다고 생각하며 렌은 킥킥 웃었다. 장막을 나가자 왼쪽에서 부드러운 속삭임이 들려왔다. "렌, 나 여기 있어요." 카엔이 옆에 있음을 알아챈 렌은 허공을 향해 밝게 웃으며 마주 속삭였다. "카엔님, 고마워요." 열심히 꽃을 던지던 여신 역의 소녀는 렌이 나오자 반갑게 웃으며 렌에게 꽃바구니를 넘기고 관례에 따라 렌의 뺨에 세 번 키스했다. 렌도 들은 대로 그녀의 뺨에 세 번 키스했다. 소녀가 장막 안으로 들어가자 렌은 꽃바구니에 있는 꽃을 사방으로 뿌리며 조금 전에 배운 대로 축복의 말을 외쳤다. "여러분들께 영원한 봄, 영원한 사랑, 영원한 아름다움이 있기를!" 카엔은 여신 복장을 한 렌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어쩔 줄을 모르다가 렌이 꽃을 뿌리자 그제서야 제정신을 차렸다. 카엔은 약간의 마법을 써서 렌이 뿌리는 꽃잎들이 바람에 날려 멀리멀리 뿌려지도록 했다. 사람들은 새로 나타난 봄의 여신의 아름다움에 취해 함께 외쳤다. "영원한 봄과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 올리나께 영광을!" 렌은 즐거움에 취해 계속 꽃을 뿌렸고 인파는 점점 많아졌다. 코렐 거리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금새 사방에 퍼진 듯했다. 열심히 꽃을 뿌리던 렌은 문득 길가에 크리프 데 주란트와 엔샤 데 트레스테스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엔샤는 크리프의 팔짱을 낀 채 마치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그의 팔을 꼭 잡고 있었고, 크리프는 엔샤가 달라붙는 것이 다소 귀찮은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크리프가 렌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눈을 휘둥그레 뜨며 표정이 변하는 것이 여신 복장에도 불구하고 렌인 줄 알아본 모양이었다. 렌은 웃으며 조용히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고개를 좌우로 살살 저었다. 크리프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렌의 신호를 알아들었는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카엔도 크리프 일행을 발견하였다. 뚫어져라 렌을 바라보는 크리프를 노려보며 카엔은 순간적으로 크리프의 마음을 읽었다. 크리프의 마음은 다음과 같았다. '아아, 렌이 여자라니, 봄의 여신이여, 감사합니다!' 카엔은 다시 화가 치밀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렌에게 화풀이할 수도 없었다. 카엔은 한숨을 쉬며 렌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저쪽에서 눈치챈 것 같으니 우리 몸을 피하도록 하죠." 렌은 허공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님, 저 이제 가봐야 해요." 여사제는 렌의 말에 무척 아쉬워하면서도 하는 수 없다는 듯 길가에 서 있는 아주 귀여운 소녀를 지목했다. 지목된 소녀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며 마차에 올라 단장을 마치고 나왔다. 렌은 그녀와 키스를 나눈 후 옷을 갈아입고 마차에서 내렸다. 인파에 섞인 렌과 카엔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적당한 곳에 이르러 황궁으로 순간이동했다. 즐거운 축제일은 어느덧 저물고 있었다. 카엔은 대체 이렇게 즐거운 하루를 보낸 게 얼마만인지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렌 또한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른다는 것을 읽고 카엔은 더더욱 기뻤다. "고마워요, 카엔님." "미안해요, 오늘 하루종일 렌이 돈 쓰게 해서." "후훗, 능력 있는 사람이 내는 거죠." 행복에 겨운 렌은 아련한 미소를 띠고 카엔을 올려다보다 갑자기 발돋움해서 카엔의 입술에 살짝 자기 입술을 댔다. 렌은 자신의 행동에 수줍어하며 어린 종달새가 날아가듯 황궁으로 달아났다. 카엔은 얼떨떨해서 자신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었다. 독한 포도주에 취한 듯 어지럽고 황홀했다. 입술에 하는 두 달 만의 키스였다. 가슴 속에 차오르는 이 벅차고 낯선 감정은 대체 무엇일까. 카엔은 문득 크리프가 아까 보인 태도와 생각을 떠올렸다. 크리프의 렌을 향한 감정도 자신만큼이나 강렬했었다. 카엔은 적어도 앞으로 며칠간은 그 놈이 렌에게 접근하는지 어쩌는지 감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렌이 혹시라도 눈치챌까봐 크리프의 기억을 지울 수는 없었다. 기억이나 강한 감정을 조작하는 것은 항상 위험했다. 그렇지만 않다면 그 놈의 기억을 몽땅 지워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건데. 황궁의 방으로 돌아온 렌은 얼굴의 화끈거림을 가라앉히느라 혼났다. 누군가의 입술에 먼저 키스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키스의 순간을 다시 떠올리자 단순한 관능의 쾌감이 아닌 짜릿한 설레임이 렌의 온몸으로 번졌다. 그러다 렌은 후회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자가 먼저 나서서 키스하는 걸 싫어한다고들 하는데, 순진한 카엔님이 나를 경박한 애로 생각하면 어떻게 하지? 그래도 카엔님의 입술은 너무 빨갛고 예뻤어. 무슨 남자 입술이 그렇게 예쁘담. 자오 오라버니나 테룬 황자의 자주빛 입술하고는 차원이 다르쟎아. 렌은 그동안 절도 있던 자신이 막가기 시작하는 것 같아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카엔의 발모마법으로 길게 자란 머리는 다시 정리해야 했다. 렌은 가위를 들고 화장실로 갔다. 허리 아래까지 머리를 길게 기르고 여자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니 문득 홍콩 시절과 흑성에 있던 때의 일이 생각났다. 자오 오라버니와 테룬 황자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내 모습은 지금 이 모습이겠지. 그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자오 오라버니는 지금쯤이면 슬픔은 그럭저럭 묻고 삼합회의 1인자로 맹활약하고 있겠지? 그리고 테룬은 황제가 되었다고 하니 정신없이 바쁘겠지? 그가 나를 찾고 있을까? 아니면 나에 관해서는 잊어버렸을까? 그의 상처입고 불안한 정신을 치료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겉으로는 강하지만 속으로는 무척 약한 사람으로 보였는데 별 일이 없었을까? 렌은 어지러운 생각을 털어내듯 머리카락을 잘라 나갔다. 축제의 뒤끝은 어수선했다. 학생들은 모두 축제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수업시간에도 정신을 놓고 있었고 교수들은 그런 학생들을 매년 봐 왔었기에 야단치지 않고 웃으면서 봐주었다. 그러나 렌에게는 축제 다음날이 고역이었다. "꺄아아악! 렌님! 이쪽을 봐주세요!" "렌군! 싸인 좀 해 줘요!" "렌님, 사랑해요!"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소년소녀들이 렌에게 다가와 싸인을 해 달라고 조르고 그게 안 되면 옷자락이라도 잡아 보려 했다. 사이라가 지휘하는 팬클럽 소녀들이 방패가 되어 준 덕분에 렌은 겨우 화장실로 달려가 문을 잠그고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평민과 귀족의 신분차가 엄하다고들 하더니 저 열광적인 소년소녀들을 보면 전부 거짓말 같았다. 렌은 진땀을 뺐지만 몰래 렌을 지켜보던 카엔은 팬들 덕분에 크리프가 렌에게 접근하지 못하자 한숨 돌리는 기분이었다. 카엔은 크리프가 두 번이나 렌에게 접근하려다 학생들에게 둘러싸인 렌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힘없이 돌아서는 모습을 모두 목격하였고, 그 때 크리프가 했던 생각도 다 읽었다. 크리프라는 놈은 감히 렌에게 사랑을 고백하려 하고 있었다. 약혼녀도 있는 주제에, 나의 소중한 렌을 두들겨 팬 주제에 사랑 고백이라니! 카엔은 당장 9써클 마법사만이 시전할 수 있는 '지옥의 업화'로 크리프를 태워죽이려는 충동을 억지로 참아야만 했다. 아니, 차라리 아예 주란트 공작가를 멸문시켜 버리고 싶었다. 렌의 마음에서 크리프에 대한 호의를 읽을 수 있었기에 카엔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카엔은 렌이 눈치챌지 모른다는 걱정때문에 겨우 크리프를 절단내는 걸 자제할 수 있었다. 카엔은 렌의 자신에 대한 생각이 어떤지 읽으려고 애써 봤지만, 다양한 색채의 다정함과 친밀함은 읽을 수 있어도 전체적인 감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렌의 감정과 생각 하나하나에 심신이 뒤흔들릴 정도로 일희일비해서 충분한 정신집중이 되지를 않는 것이다. 그리고 렌의 깊은 마음속을 읽으려고 하다가도 만에 하나 두려워하는 결과가 나올까봐 카엔은 스스로 주저했다. 카엔은 가장 마음을 읽는 것이 필요한 순간에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날 카엔은 다시 렌의 스토킹에 나섰다. 전날보다는 인파가 다소 줄어 렌도 훨씬 덜 힘들어 했다. 크리프는 렌에게 다시 다가가려고 했으나 하필이면 엔샤에게 붙잡혀 실랑이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카엔은 렌의 교실까지 따라갔다가 이제 더 걱정할 일이 없을 것 같아 스토킹을 마치고 황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는 그러다가 갑자기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갈색머리에 귀여운 얼굴을 하고 렌에게 다가가는 어린 남학생에게서 상당 정도의 마력이 감지되고 수상한 생각이 읽혀졌다. 어설픈 차단마법으로 본래의 마법력을 가려 놓았으나 9써클인 자신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카엔은 즉시 그 남학생을 잡아 우원으로 순간이동했다. -------------------------------------------------------- 치료사 렌 [6] 봄의 폭풍 (8) -------------------------------------------------------- 바르민은 그날 아침 마차를 타고 등교하는 아카데미의 1학년 학생 하나를 따라잡았다. 소년은 트로제 백작가의 막내아들 칸딜이었다. 트로제 백작가는 그다지 부유한 가문이 아니어서 칸딜의 마차에는 마부 외에 호위병이 딸려 있지 않았고 따라서 바르민의 목적에는 제격이었다. 바르민은 마차 안으로 공간이동해 들어갔다. 갑자기 나타난 낯선 자를 보고 칸딜은 크게 놀랐다. "당신은 누구..." 칸딜이 채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바르민은 칸딜에게 수면마법을 걸었다. 마차에는 가벼운 항마법이 걸려 있었으나 6써클인 바르민에게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소년은 곧 잠에 취해 쓰러졌다. 바르민은 칸딜의 얼굴에 손을 대고 변환마법의 주문을 외었다. 곧 바르민의 얼굴과 몸이 칸딜과 똑같이 생긴 금발머리에 푸른 눈의 앳된 소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변환마법은 바르민의 특기였다. 특히 그의 변환마법은 단순히 외모만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독특한 기운까지도 함께 복사하기 때문에 8써클 이상의 마법사가 신경써서 보지 않으면 발각되지 않았다. 그가 이곳의 첩보책임자로 파견된 것도 상당 정도 변환마법의 덕분이었다. 황궁의 결계라면 변환마법이 당장 발각되겠지만 다행히도 아카데미의 경우 그렇게 엄중한 경비가 펼쳐져 있지는 않았다. 바르민은 칸딜과 옷을 바꿔 입고 가슴에 달려 있는 불사조 브로치-학생증임과 동시에 결계로의 통행증이며, 착용자의 원래 외모와 기운에 반응하도록 되어 있었다-를 확인한 후 칸딜을 미리 정해놓은 안가로 이동시켰다. 그 동안 마부는 마차 안의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카데미 앞에서 내려 교문을 통과하는 순간 바르민은 온몸에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칸딜의 기운을 그대로 복사하려고 했으나 약간의 불일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바르민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 기절하기 직전에 고통은 끝났고 그는 무사히 교문을 통과했다. 안도의 한숨을 쉰 바르민은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교실로 들어갔다. 칸딜의 첫수업은 지리학이었고, 렌과 같이 듣는 수업은 2교시 문학 수업이었다. "야, 칸딜, 숙제 했어?" 무척 허물 없는 어조로 어느 학생이 말을 걸자 바르민은 당황했으나 곧 적당히 둘러댔다. "어제부터 머리가 좀 아파서 못 했어." 바르민은 책상 위에 엎드렸고, 그 학생은 걱정스러워 하다가 바르민이 귀찮아하자 "쳇, 기껏 걱정해 줬더니."하고 투덜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첫째 시간 수업을 건성으로 들은 그는 쉬는 시간이 되자 바로 문학 수업이 있는 반으로 갔다. 교실을 둘러보자 금방 렌이 눈에 들어왔다. 축제날과 달리 화장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렌은 눈부시게 예뻤다. 바르민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켜 가며 렌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황후 마마, 제가 갑니다! 그런데 그 순간 평생 처음으로 느껴보는 오싹한 기운이 그를 사로잡았다. 잠시 아찔했다가 정신이 들어 보니 그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정원의 그늘 아래 엎어져 있고 그의 앞에는 인간같지 않은 미모의 청년(바로 축제 전야제 때 렌을 데려갔던 그 은보랏빛 머리의 청년이었다)이 팔짱을 끼고 서서 얼음보다도 차디찬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그 청년을 멍청히 쳐다보다가 자신의 변환마법이 이미 풀려 있음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 당신은 누구요?" 바르민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훗, 너는 내게 아무것도 물을 자격이 없다. 오히려 네가 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카엔은 비웃었다. 바르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 나는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소." 카엔은 다시 조소했다.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지. 나는 이미 너의 생각을 다 읽었으니까. 너는 동제국의 끄나풀이지? 그리고 렌을 찾으러 왔고?" 눈앞의 청년이 자신의 생각을 읽었다는 것을 알자 바르민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다, 다, 당신은 서제국의 황제 폐하?" 카엔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오른손을 올렸다. "너의 마음을 읽어도 되지만 귀찮군. 내가 묻는 대로 전부 털어놓아라." 바르민은 은보랏빛 빛줄기가 자신에게 쏘아지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광채는 바르민의 머리에 서렸다가 서서히 흡수되었다. "누가 너를 보냈지?" 바르민은 몽롱한 눈빛으로 순순히 털어놓았다. "동제국 테룬 황제 폐하의 명령으로 수상 각하인 샤이트 데 위든 경께서 지령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려고 했지?" "테룬 황제 폐하께서 렌이라는 소녀를 사랑하셔서 황후로 삼으려 하시므로, 그녀를 찾아 동제국으로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녀가 너를 따라가리라고 생각했나?" "예, 제가 황제 폐하의 마음을 전하기만 하면 그녀는 틀림없이 저를 따라가리라고 확신했습니다." "왜 그렇게 확신했지?" "모든 정황으로 볼 때 렌이라는 소녀는 틀림없이 테룬 황제 폐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카엔은 숨이 멎는 듯했다. 이 자가 이토록 망설임 없이 대답할 정도로 렌의 마음이 확고하단 말인가? 렌은 정말로 테룬을 사랑한단 말인가? 그는 바르민의 마음을 양파 껍질을 벗겨내듯 차례로 벗겨내었다. 바르민은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아무리 그의 마음을 파헤쳐 보아도 렌이 테룬 황제를 사랑하고 있으며 테룬 황제가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기만 하면 기쁘게 달려가 황후가 될 것이라는 첩자의 확신은 공고하였다. 카엔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만약 네가 렌을 데려가지 못하고 여기서 죽으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지?" 카엔은 침착함을 잃고 물었다. "테룬 황제 폐하의 마음이 워낙 확고하시기 때문에 아마도 다른 사람들을 보내실 것입니다." "알았다." 카엔은 다시 오른손을 슬쩍 저었다. 바르민은 둥근 막에 쌓여 허공으로 떠올랐다. 먼저 바르민의 몸이 두동강났다. 그 다음 팔다리가 잘려지고, 다시 목이, 그리고 온몸이 조각조각났다. 카엔은 신경질적으로 바르민의 잔해를 잘라 나갔다. 둥근 막 속에서 바르민의 신체가 거의 곤죽으로 변하자 카엔은 푸른 불길을 일으켰다. 잔해는 활활 타올라서 곧 재로 변했다. 카엔은 심장을 움켜잡고 활짝 핀 복숭아나무 둥치에 몸을 기댔다. 가슴은 너무 빠르게 뛰어 타버릴 듯하고 머리는 한없이 어지러웠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카엔은 그동안 부정해 오던 자신의 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동안 렌을 보며 느꼈던 온갖 감정들, 그것은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바로 사랑이었다. 가슴이 터질 것같은 기쁨, 온몸이 불타오르는 질투. 술에 취한 것같은 황홀함과 현란함, 절망의 나락에 빠진 것같은 괴로움. 온 세상은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에 따라 무지갯빛으로 빛나기도 하고 암흑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녀를 위해 뭐든지 해주고 싶기도 하고, 그녀를 가둬 놓고 자신만의 것으로 하고 싶기도 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진짜로' 살아있음을 느 꼈다. 핏줄을 따라 온몸 구석구석을 흐르는 이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은 바로 사랑이었다. 전세계에 대고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외치고 싶고, 미친 사람처럼 마구 뛰어다니고 싶은 이 기분.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자신을 위해 눈물 흘리는 그녀의 얼굴을 바 라보며 한없이 뿌듯해하고 싶은 이 기분. 그녀의 부드러운 속살 구석구석에 입술을 대고 그녀의 전존재를 통째로 들이마시고 싶은 이 기분. 수백년만에 느끼는 진짜 사랑. 카엔은 스스로의 깨달음에 당황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렌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고 나 자신은 결코 렌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오히려 내가 먼저 사랑에 빠져 버리다니. 카엔은 잠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카엔은 다시 그동안 일을 돌이켜 보았다. 사실은 그는 한참 전부터 이미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저 그걸 인정하기 주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곧 온갖 걱정이 밀려왔다. 그녀가 정말로 테룬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하지? 나에 대해 렌이 늘 품고 있던 따뜻한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나? 다른 첩자가 와서 그녀가 싫어하건 좋아하건 간에 그녀를 데려가 버리면 어쩌지? 혹시 내가 그녀에게 지나치게 빠져버려 그녀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한 건가? 그녀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자 카엔은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에 떨었다. 그것은 온갖 힘든 일을 모두 겪은 그에게도 떠올리고 싶지조차 않은 섬뜩한 공포였다. 어지러이 생각을 거듭하던 카엔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유일한 결론에 도달했다. ===================================================================치료사 렌 [6] 봄의 폭풍 (9) -------------------------------------------------------- 카엔은 공식석상에 등장할 때에는 늘 그랬듯이 은보랏빛을 뿌리며 수상 집무실에 나타났다. 비서 두 명을 대동하고 열심히 업무를 보던 수상 페람 공작은 방안을 채우는 은보랏빛에 질겁하며 비서들과 함께 급히 부복하였다. 황제가 친히 수상 집무실에 왕림하는 것은 거의 8년만이었다. 카엔은 공명하는 청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페람, 그대에게 지시할 게 있다." "예, 폐하." 페람은 이마를 바닥에 대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나와림 중에 렌이라는 소년이 있다. 그를 나와림 안딘으로 삼겠다. 필요한 절차는 그대가 모두 알아서 하라." 말을 마친 카엔은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아, 그리고 그 렌이라는 소년은 사실은 남장한 소녀이니, 예복은 토즈릴이 아닌 소즈릴로 준비하도록 하라." 카엔은 그대로 사라졌다. 페람 공작은 몸을 일으키고 나서 경악하여 비서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비서들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30년만의 나와림 안딘이라니, 게다가 알고 보니 여자였다니, 온 세상이 깜짝 놀라겠군." 비서 한 명이 주저하다 물었다. "저, 소녀라면 타림 안딘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페람 공작은 그 비서를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맙소사, 정말 그렇군. 참으로 적절한 지적일세. 그래도 폐하께서 나와림 안딘이라고 하신 이상은 나와림 안딘이다. 그대, 림드 군은 어서 나와림 안딘과 타림 안딘 관련 의전서를 찾아서 어떻게 적당히 절충할 방법이 있나 알아보고, 그대, 루트 군은 렌이라는 소년, 아니 소녀의 시간표와 입학전형서류와 신체 싸이즈 등등 필요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도록." 비서들은 지시를 받자마자 서둘러 움직였다. 렌은 점심식사 후의 3교시 문학 수업 중간에 페람 공작, 8써클 마법사의 표징을 단 중년 남자와 페람 공작의 비서가 교실로 들어오자 다른 학생들과 대체 무슨 일일까 수군거리다가 그들이 점점 자기에게 다가오자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렌님, 축하드립니다. 이제 렌님은 영광스럽게도 나와림 안딘이 되셨습니다." 페람 공작은 깊이 고개숙여 렌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교실 안의 모든 사람들은 전부 다 입을 쩍 벌렸다. 물론 렌 자신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늘 오후에는 당직근무에 나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 플로인이 렌님을 '기다림의 방'으로 인도하여 예복과 준비를 갖추시도록 할 것이고, 오늘 오후 8파잔 경에는 황제 폐하의 침전에서 폐하를 알현하시게 될 것입니다." 페람 공작은 정중하게 말했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여 렌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폐하께서는 이미 렌님이 소녀라는 것을 알고 계시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렌은 꼼짝 않고 멍하니 서있었다.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공작 옆에 서 있는 8써클 마법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플로인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놓으십시오. 제가 모든 것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플로인도 황급히 어딘가에 묻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나와림 안딘과 타림 안딘 관련 의전서를 벼락치기로 공부했을 뿐이었다. 렌이 플로인이라는 마법사를 따라 나가고 페람 공작과 그의 비서 또한 교실을 나가고 나자 교실은 학생들이 일제히 떠드는 소리로 떠나갈 듯했다. 사이라의 울음소리는 그 중에서도 유난히 크게 들렸다. 렌이 나와림 안딘으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은 그 즉시로 나와림들은 물론 아카데미와 내각, 귀족가들을 전부 발칵 뒤집어 놓았다. 나와림 제도를 전근대적이지만 무해한 제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귀족들은 경악했다. 일부 귀족들은 언제라도 자기들의 자식이 황제의 장난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분개하거나 절망하기도 했고, 일부 귀족들(특히 자식을 현재 나와림으로 들여보낸 귀족들 중 세력이 약한 축들)은 나와림 안딘의 가족들에게 예로부터 베풀어졌던 특전들을 생각하며 자기 자식이 간택되었으면 하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또 어떤 귀족들은 이번 일로 그동안 군림하되 거의 통치하지 않았던 황제의 존재가 다시 부각되고 황제파가 득세할 것을 예상하여 바쁜 움직임을 보였다. 같은 이유에서 내각은 나와림 안딘의 지명을 은근히 환영했다. 내각은 황제에 의해 임명되어 황제의 권력을 대신 행사하는 기관인 만큼 황제의 권력이 재확인되는 것을 계기로 그동안 은근히 세력을 키워 온 귀족파의 싹을 잘라버릴 수 있다는 기대에 들떴다. 한편 아카데미는 그야말로 충격의 도가니였다. 3일 전 전야제에서 감동적인 연주를 해서 아카데미 학생 모두의 우상으로 떠오른 렌이 이제 나와림 안딘이 되어 자신들의 곁을 떠나 자칫하면 평생 다시 볼 수 없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은 학생들, 특히 렌과 친했던 학생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학생들은 지금까지 잊혀져 있던 30년 전의 사건을 새삼 떠올리며 화제로 삼았다. 그 때 미쳐 버린 나와림은 아직도 자기 성의 탑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 쪽으로 관심이 많은 학생 한 명은 나와림의 역사를 줄줄 읊으며, 건국 초기에는 황제의 비위를 거슬려 죽어나가거나 바보가 된 나와림이 수두룩했다는 둥 100년 전의 평민 명재상 비세츠조차도 죽기 직전에 황제의 곁에 있었던 열흘간이 자신의 일생 중 가장 무서운 시간이었다고 고백했었다는 둥 여러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아 다른 학생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렌의 친구들 모두는 발을 동동 굴렀다. 파니안은 오후 당직을 빼먹고 아버지 페람 공작에게 항의하러 갔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로부터 가문 전체를 망치려 하느냐는 엄한 꾸지람을 들었을 뿐이었다. 크리프는 소식을 듣자 교실에서 뛰쳐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사이라는 너무 울어 퉁퉁 부은 눈으로 팬클럽 소녀들과 대책을 의논했으나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지벤은 자신의 마법으로 렌을 탈출시키는 방법을 궁리했으나 황궁의 결계는 그의 능력 밖의 일이어서 그는 자신의 무력함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렌이 사실은 소녀였다는 소문도 저녁이 가까워지면서 어느새 아카데미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파니안이며 수딘이며 지벤이며 올라브며 모두들 더욱 안타까운 심정에 사로잡혔다. 그 소년들 모두 렌에 대해 동성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애틋한 마음을 많건 적건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은 렌이 소녀임을 비로소 알게 되자 왜 진작에 그 사실을 몰랐던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기 전에 알아차렸다면 렌에게 고백하든지 무슨 방법이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로 가득찼다. 렌은 플로인을 따라 아카데미 밖으로 걸어나가면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왜 갑자기 황제가 날 지목한 거지? 어딘가에서 황제의 눈에 띄었나? 지금 생각해 보면 황제의 눈에 띌 만한 경우라고는 3일 전의 전야제밖에 없었다. 렌은 후회를 거듭했다.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생활했어야 했는데, 그토록 고대하던 학교생활이라고 너무 들떠서 아카데미에 들어왔던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즐기기만 했었다. 이제 나와림 안딘이 되어 황제의 곁으로 가면 황제의 허락이 없이는 다시는 바깥세상으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황제는 마음을 읽는다고 하니 어쩌면 이미 내가 여자인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성별을 속인 것을 알고 분노하여 나를 그 자리에서 처형하려고 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절대절명의 이 순간에 렌이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카엔이었다. 그에 대한 그리움이 렌을 가득 채웠다. 렌은 신경질적이고 섬세하고 예민하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카엔을 놔두고 이대로 그를 떠날 경우 카엔이 얼마나 슬퍼할지 상상했다. 그에게는 내가 없으면 안 되는데. 내가 없으면 앞으로 그는 평생 웃지 못할지도 몰라. 그리고 그를 다시 못 보게 되면 나는 죽어버릴 것 같아. 아아, 바로 지금 이때까지 이 마음을 나도 몰랐었는데. 렌은 심장을 칼로 베인 듯 아픈 느낌에 몸을 떨었다. 그러다 렌은 문득 황제 앞에 서는 순간 자신의 마음을 황제에게 들켜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안 돼! 렌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지금까지 들은 황제의 소문을 종합하면 그는 괴팍하고 음습하고 신경질적이고 배신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비위를 거슬러서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한 인형이 된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면 소름이 끼쳤지만, 더 무서운 것은 카엔의 신변이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카엔마저도 황제의 노여움을 사 생명이 위태로워질지도 몰랐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했다. 이제 기회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저, 플로인님, 부탁이 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렌님?" "제가 배속되어 근무하던 황궁도서관의 사서님께 작별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렌이 간절하게 플로인을 쳐다보자 플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먼저 목욕재계하시고 예복을 갖추셔야 합니다. 예복을 갖추시면서 의전에 관한 설명을 들으시고 나면, 그 다음 폐하의 침전으로 이동하시는 길에 잠시 도서관에 들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둘은 아카데미 앞의 마법진을 이용하여 황궁으로 이동했다. 지금까지는 몰랐었는데, 황궁 5층에는 나와림 안딘을 위한 '기다림의 방'이라는 명칭의 치장실과 목욕실이 따로 있었다. 30년 동안 사람이 들지 않았던 그곳은 이미 급히 소집된 마법사들과 시녀들의 손길로 다시 청소되고 단장되었다. 시녀들을 거부하고 혼자 목욕을 마친 렌은 젊고 호리호리한 5써클 마법사의 열풍 마법으로 머리를 말리고(5써클 마법사가 헤어드라이어 역할이나 하다니 이 황궁에서 마법사가 얼마나 흔하디 흔한 존재인지 렌은 새삼 깨닫고, 같은 5써클 마법사인데다가 재산도 없는 카엔에 대한 안타까움을 또다시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마법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피부관리 마법까지 받은 후 시녀들의 손길에 단장되었다. 얇디 얇은 하얀 실크 속옷 위에 다시 손 대면 바스라질 것 같은 오색 광택 나는 흰 블라우스와 똑같이 오색 광택이 나지만 조금 더 두꺼운 스커트가 입혀지고, 그 위에 다시 금빛, 연두빛, 분홍빛, 하늘빛, 마지막으로 은보랏빛 다섯 겹 '소'(겉옷)가 걸쳐졌다. 각각의 소는 너무 얇아 다섯 겹을 겹쳐 입었는데도 전혀 갑갑하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걸치는 은보랏빛 소는 소즈릴임에도 발목에서 끝나지 않고 뒤쪽이 길게 끌렸다. 남대륙 엘프의 손에서 직조된 것이라고 했다. 그 위에 황금띠가 두 겹으로 매어지고, 머리에 진주로 만든 꽃가지 모양 머리 장식이 꽂혀지고, 손가락마다 오색 보석반지가 끼워지고, 발에 6센티미터 정도 굽의 보석으로 장식된 신발이 신겨졌다. 시녀들은 다시 렌의 얼굴에 화장을 시작했다. 얼굴의 솜털과 눈썹을 정리하고 연지와 아이섀도우, 입술연지를 바르고 얼굴에 은가루를 살짝 뿌리고 머리카락에도 역시 은가루를 뿌리고 나니 비로소 단장이 끝났다. 단장을 마친 렌의 모습은 황홀하게 아름다웠다. 단장하는 중 플로인은 계속 의전에 관해 설명했다. 이 모습으로 황제의 침전에 들면 가슴에 손을 모으고 두 무릎을 꿇은 후 다시 상체 전체를 굽혀 이마를 땅에 대고 "테라미즈넨 제국의 모든 것은 폐하의 것, 보잘 것 없는 나와림 안딘인 저 또한 몸과 마음 모두 폐하의 것이오니, 폐하의 즐거움을 위하여 마음대로 쓰소서"라고 말해야 했다. 아마도 무릎을 꿇고 있는 동안 황제는 마법을 시전하여 눈이 보이지 않게 할 거라고 했다. 황제가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일이었다. 그 다음은 황제의 명령대로 따라하면 되었다. 플로인은 설명을 계속하면서도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의 미래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꼈다. 또 한편으로는 이 넓은 황궁과 학원에서 그녀같은 보석을 찾아낸 황제의 안목에 감탄하기도 했다. 렌은 다시 플로인에게 부탁했다. "이제 도서관에 가서 제 상관에게 작별인사를 해도 되겠죠?" 플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략 2난(1파잔은 두 시간, 12난은 1파잔이므로, 1난은 10분 정도였다)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플로인, 시녀 두 명, 마법사 두 명은 렌과 동행하여 도서관까지 갔다. 문앞에 이르자 렌은 다시 부탁했다. "저, 사적인 작별인사이니 혼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플로인은 순순히 허락하였다. 렌은 떨리는 심정으로 도서관에 들어갔다. ===================================================================치료사 렌 [6] 봄의 폭풍 (10) -------------------------------------------------------- 도서관 안에서는 카엔이 서가 앞에 멍하니 서서 책 표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는 충동적인 자신의 결정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는지 고민 중이었다. 렌이 테룬을 사랑한다는 그 첩자놈의 말을 들었을 때 그는 타는 듯한 질투에 휩싸여 렌을 독점하는 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머리속에 떠오르는 유일한 해결책은 렌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녀의 자유를 구속해서라도 그녀를 테룬 황제로부터 보호하는 것, 렌을 나와림 안딘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신분을 밝히고 렌에게 청혼할 수는 없었다. 마음을 읽는 황제가 눈앞에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사람들이 보이는 혐오감과 두려움을 렌에게서마저 느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렌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나서 청혼을 거절하고 가짜 신분인 도서관 사서 카엔에 대해 가지고 있는 따뜻한 애정마저도 모두 버리게 될 가능성을 상상만 해도 온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래, 일단 내 정체를 숨기고 그녀를 내 울타리 안에 두는 거야. 그 다음 일은 그 다음에 생각해야지.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지금 평생 처음으로 겪는 사랑에 정신이 나가 아주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그는 렌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흠칫 놀랐다. 렌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의연하게 말했다. "카엔님, 황제 폐하께서 저를 나와림 안딘으로 지명하셨어요." 카엔은 눈부시게 아름답게 단장되어 자기 앞에 나타난 렌을 떨리는 눈빛으로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렌은 물기 어린 눈으로 카엔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차가웠던 저 은보랏빛 눈동자가 이제는 참 다정해 보이는구나. "카엔님, 부탁이 있어요. 저를 탈출시켜 주세요. 카엔님은 평소에도 늘 순간이동을 해 오셨으니 저를 빼내주실 수 있으시죠?" 카엔은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렌은 마지막 희망마저 모두 사라졌음을 알았다.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그러나 렌은 카엔을 이해했다. 지금 자신을 도와주면 카엔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황궁에서 나간다 해도 황제는 계속 추적해올 것이고, 5써클에 불과한 그가 렌까지 데리고 그 추적을 뿌리칠 길은 없을 것이다. 나와림 안딘을 데리고 나간 그에게 황제는 엄청난 벌을 내릴 것이다. 카엔도 역시 약하디 약한 책상물림인데 그에게 그런 모든 고통을 무릅쓰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런 건 목숨 걸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에게 더 조르면 탈출을 도와줄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잘못으로 그의 미래를 망칠 수는 없었다. 그래도 황제로부터 카엔을 보호할 방법은 남아 있었다.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은 후 렌은 슬프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카엔님, 절대로 카엔님께는 폐가 가지 않게 하겠어요. 카엔님이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도 절대 잊지 않을 거고요. 카엔님과 함께 보낸 시간 동안 저는 정말로 행복했어요. 제가 가더라도 늘 웃음을 잃지 마시고 배와 가슴을 따뜻하게 하세요. 밤에 다시 악몽을 꾸시게 되면 손의 여기, 여기를 꾹꾹 눌러 주시고요. 저는 강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안녕." 렌은 담담하게 말했다. 렌은 발돋움하여 카엔의 뺨에 자신의 입술을 대었다. 그리고 카엔을 한 번 꼭 끌어안고 난 후 뒤돌아 나갔다. '안녕, 그대는 내게 참 많은 기쁨을 주었죠. 내가 그대를 지켜 드리겠어요.' 뭐가 어떻게 되어 내 미래를 망친다는 거지? 그녀가 왜 목숨을 걸고 나를 보호하겠다는 거지? 카엔은 조금 전 읽은 렌의 생각을 되새기며 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황제의 침전으로 황급히 순간이동했다. 플로인과 시녀 두 명, 마법사 두 명과 함께 황제의 침전으로 걸어가며 렌은 마음을 다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로 하여금 내 마음 속의 카엔님에 대한 생각을 읽지 못하게 할 것이다. 내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조작당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의 주인은 나이다. 이 세상 누구도 내 마음을 건드릴 수 없다. 빼앗기기 전에 스스로 버릴 것이다. 그래, 그 방법을 써야겠어. 렌은 정명기의 수련법에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불행 중의 다행으로 여겼다. 렌이 침전 앞에 도달했을 때 그곳에는 페람 공작과 그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페람 공작은 동정심 가득한 눈으로 렌을 내려다 보았다. "렌님, 렌님의 이야기는 제 아들녀석에게서 많이 들었습니다. 렌님이 그 녀석 말처럼 깨끗하고 강직한 성품을 가지고 계시는 한 폐하께서도 렌님을 소중하게 여겨 주실 것입니다." 공작의 위로는 무척이나 공허하게 들렸다. 렌은 힘없이 웃었다. "제가 여자인 것을 알게 되어서 파니안은 무척 놀랐을 거예요. 파니안이랑 다른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속일 생각은 없었다고,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은 정말로 즐거웠다고 전해 주세요."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허공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나와림 안딘이 당도하였습니다." 이 곳과 침전 사이에는 겹겹의 중문이 가로막고 있었으나, 황제는 아마도 침대 위에서 마법경으로 모든 상황을 보고 있을 것이다. 크리스탈 잔을 두드리는 듯 청아하게 공명하는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퍼졌다. "그녀를 들게 하라." 페람 공작은 렌에게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십시오." 렌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침전 문에 손을 댔다. 렌이 밀기도 전에 문은 스르르 열리고, 렌이 들어가자 다시 닫혔다. 그 앞에는 다시 문이 하나 더 있었고 그 문도 렌이 손대기 전에 저절로 열렸다. 이제 침전까지는 하나의 문만이 남아 있었다. 문과 문 사이는 렌의 침실보다도 넓었다. 그곳에는 알현을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서인 듯 스툴과 거울이 놓여 있었다. 온갖 상상 속의 동물들이 거울테에 아로새겨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렌은 거울테를 쓰다듬으며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 아름다움은 부질없는 것이었어. 렌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슬픔이 차올라 자꾸 생각이 흩어졌지만 오랜 세월 동안 정명기를 수련해 온 것이 도움이 되었다. 렌은 끝없이 새하얀 공간에 홀로 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다섯, 넷, 셋, 둘, 하나 하고 세며 자신의 모습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마침내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렌의 눈은 총기를 잃었다. 눈 앞의 마지막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으나 렌은 이제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카엔은 렌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다가 빛나는 광채 같던 렌의 마음이 갑자기 사라지자 놀라 황급히 마법으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마력을 일으켜 렌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렌의 눈은 텅 비고 몸에는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아 렌은 마치 줄 끊어진 공주님 역의 마리오네트 같았다. "렌! 렌!" 카엔은 렌을 으스러지게 끌어안고 애타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으나 렌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대체 그녀가 뭘 어떻게 한 거지? 그녀의 마음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단 한 점 생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카엔은 하는 수 없이 마력을 일으켜 렌의 마음을 탐색했다. 그는 렌이 스스로 의식을 놓아 버렸음을 알았다. 아아, 나는 어리석었다. 그녀가 얼마나 긍지 높고 자부심이 강한 줄 알면서도 마음을 농락하기로 유명한 황제에게 순순히 오리라 기대하다니. 그녀라면 자유를 잃고 새장 속의 새로 사느니 죽는 것을 택하리라는 것을 왜 몰랐던가. 그녀를 사랑한다면서 그녀의 마음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내 욕심 채우기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그녀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게 된 것이다. 긴긴 세월 동안 인간의 욕심과 어리석음을 비웃었건만 나도 똑같은 우를 범함으로써 그녀를 잃게 되다니. 카엔은 렌을 끌어안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렌의 숨이 조금씩 가늘어지는 것을 느낀 카엔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음과 몸은 본래 뗄 수 없는 것, 렌의 마음이 모든 것에서 떠났으니 몸이 약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카엔은 렌을 조심스레 자신의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그 옆에 걸터앉아 렌의 손을 잡고 렌의 얼굴을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그의 눈물방울은 끊임없이 렌의 얼굴에 떨어졌다. "렌, 사랑하는 나의 렌, 그대가 깨어나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걸 다 버려도 좋아요. 렌, 앞으로 절대 렌의 뜻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든, 나를 미워하든, 나는 무조건 그대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대를 위해 모든 일을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눈만 떠 줘요. 그대의 그 빛나는 눈으로 나를 봐 줘요. 눈을 뜨고 내 어리석음을 비웃어 줘요. 렌, 그대가 없으면 이 세상 어느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대가 죽으면 나도 죽어요. 렌, 나를 가엾이 여겨 다시 눈을 떠 줘요. 렌은 내 첫사랑이예요. 다른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나는 너무 서툴렀어요. 그대를 생각할 때마다 타오르는 질투에 스스로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그대가 떠난다거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 두려웠어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 동안 다른 사람을 구속했듯이 그대를 가둬 놓고 나만의 것으로 하려고 한 거예요. 앞으로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게요. 잘못했어요." 카엔은 한없이 애원을 계속했다. 너무 울어 눈이 흐려지고 목이 쉬었지만, 말을 멈추는 순간 렌이 떠나갈 것 같아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치유마법사를 불러야 하나? 무슨 방법이 없나? 어떻게 하면 렌을 깨울 수 있지 ? 온 세계를 통틀어 마음의 조작에 관한 한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렌을 깨울 아무 방법도 찾지 못했다. 렌이 침전으로 온 후 꼬박 사흘이 지났다. 그 동안 카엔은 먹지도 자지도 않고 렌의 곁을 지켰다. 렌의 눈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으나 반사작용인 듯 이따금 눈물이 솟아 흘러내렸다. 그 때마다 카엔은 정성껏 눈물을 닦아 주고 따뜻한 렌의 뺨에 자신의 뺨을 대었다. 둘째 날 아침에는 눈 먼 시녀 한 명이 언제나처럼 식사를 가지고 들어왔지만 카엔은 돌아보지도 않고 마력을 날려 그녀를 쫓아버렸다. 침전 밖에서 요란하게 쟁반 엎어지는 소리와 시녀의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카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가 렌과 있는 이 순간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 다음부터는 누구도 침전에 들어오지 않았다. 렌을 꼭 끌어안고 있던 카엔은 렌의 뺨에 남아 있던 핏기가 조금씩 사라지고 숨결이 점점 가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카엔은 다급해졌다. "렌, 생명이 소중하지 않아요? 살아있는 게 즐겁지 않습니까? 렌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나요? 그게 내가 아니어도 좋으니, 제발 렌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살아나 줘요! 제발 돌아와 줘요!"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제가 태어나서 하는 첫 번째 기도를 들어주소서. 그녀의 마음을 다치지 않고 제 마음을 전하게 해 주소서. 그녀가 제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녀가 알도록 해 주소서. 그녀의 눈에 생기가 돌아오고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맺히도록 해 주소서. 그녀가 깨어나게 해 주소서. 그녀에게 마음과 생명을 돌려주소서. 애절한 기도를 계속하는 동안 카엔의 몸은 은보랏빛 광휘에 휩싸였다. 그녀의 마음을 깨뜨리지 않고 그녀에게 내 마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여기 그녀를 사랑하는 바보가 있다는 걸 그녀가 알 수만 있다면. 카엔은 눈을 감은 채 렌의 마음을 더듬었다. 하얗고 텅 빈 그 공간 속에는 단 한 점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는 더듬고 또 더듬기를 계속했다. 문득 그는 하얀 배경 속에 묻혀 있는 아주 작은 하얀 구슬 하나를 발견했다. 어쩌면 그 작고 하얀 구슬은 단단하게 뭉쳐진 렌의 마음일지도 몰랐다. 카엔은 자신의 마력으로 그 구슬을 어루만졌다. 평소 사람들의 기억을 파헤치고 조작할 때 쓰던 싸늘하고 매서운 빛이 아닌 따뜻하고 다정한 빛으로 구슬을 감쌌다. 그러나 구슬은 단단해서 그의 마력에도 불구하고 아무 변화가 없었다. 참을 수 없는 안타까움에 떨며 카엔은 렌의 입술에 입맞추었다. 길고 긴 키스였다. 그는 다시 렌의 뺨에, 이마에, 눈꺼풀에, 귓불에 입맞추었다. 그 순간 렌의 텅 빈 의식 속에 남은 작고 하얀 구슬은 영롱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렌이 몸을 살짝 떨었다. 아주 미약한 움직임이었지만 카엔은 놓치지 않았다. 카엔은 흥분해서 렌을 끌어안았다. "렌, 눈을 떠 봐요!" 그러다 카엔은 지금 이 곳에서 렌이 정신을 차린다면 자신의 정체가 밝혀질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카엔은 렌을 안은 채로 황급히 우원으로 순간이동했다. 하늘에는 휘영청 보름달이 떠 있고 만개한 복숭아꽃은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렌, 정신 차려요! 사랑하는 렌! 제발!" 렌의 백지 같은 하얀 마음은 멀리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부르는 소리 때문에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스스로 만들어낸 완벽한 무(無)의 상태에 하나씩 둘씩 금이 가고 있었다. 도저히 두고 갈 수 없는 무엇인가가 나를 끌어당기고 있어. 내 마음의 평정을 깨는 것이 대체 무엇이지? 영원히 계속되는 안온한 꿈에서 깨듯 렌은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텅 비었던 눈의 촛점을 맞추려 애썼다. 눈 앞에는 카엔이 온통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또다른 행복한 꿈인가? 렌은 힘겹게 오른손을 들어 카엔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사랑하는 카엔님. 다시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대의 얼굴이 이렇게 눈앞에 있다니 이건 자비로운 무의식의 장난이겠군요. 렌을 안고 있던 카엔은 렌의 눈에 빛이 돌아오고 렌의 마음에 생각이 돌아오자 숨을 죽였다. 그리고 렌이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순간 카엔은 렌의 생각을 읽었다. 한순간 그는 멍해졌다. 그러다 그는 곧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엄청난 환희에 휩싸였다. 마법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반불사의 몸이 되었을 때, 제국을 얻었을 때, 그 어느 때도 느끼지 못하였던 진정한 기쁨이었다. 온 세상에 폭죽이 터지는 것 같고 우주가 폭발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니. 카엔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렌! 렌!" 그 울부짖는 소리에 렌은 꿈이 아님을 알았다. 렌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카엔님이 황제에게서 저를 구하셨나요?" 카엔은 잠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5써클로 되어 있는 그의 마력으로 렌을 구했다고 하면 말도 되지 않을 것이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카엔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 고 렌은 다시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카엔님이 구하신 게 아닌가 보죠?" 그제야 카엔은 적당한 시나리오가 생각났다. "우원에 산책 나왔다가 렌이 여기 누워 있는 걸 발견했어요." 렌은 그 말에 나름대로 수긍했다. "제가 마음을 끊고 죽어가는 걸 본 황제가 저를 쓸모없다고 여겨서 이곳에다 버렸나 봐요." 렌이 스스로 설명을 붙이며 납득하자 카엔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제 닫혀 있는 마음을 뚫고 저를 부르신 건 카엔님이었죠?" 렌이 전보다도 더욱 깊고 빛나는 눈으로 카엔을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렌은 부드럽게 말했다. "고마워요, 카엔님. 무엇으로도 깨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단단하게 마음을 닫아 놓았었기 때문에 카엔님이 부르지 않으셨다면 저는 그대로 마음이 몸에서 떠났을지도 몰라요." "왜 그렇게 한 거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살아있는 게 더 좋은 건데." 카엔이 안타깝게 묻자 렌은 담담하게 웃었다. "황제에게 절대로 읽혀서는 안 되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내가 그대를 사랑한다는 걸 황제가 알게 되었다면 그대의 목숨은 위태로워졌겠죠. 카엔님, 그대를 위해 나는 죽을 수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죽는다는 것은 모든 죽음 중에서 가장 즐거운 거였어요. 렌의 생각을 읽은 카엔은 갑자기 목이 메었다. 결국 그녀를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은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탓이었어. 나는 그녀를 사랑할 자격이 없어. 아아, 나는 진실을 털어놓고 렌의 용서를 구할 용기조차 없어. 눈물을 쏟는 카엔을 렌은 영문을 모른 채 올려다보았다. 렌은 그저 자신이 살아난 데 감격해서 카엔이 우는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여기 무한정 있을 수는 없어요. 물론 제가 죽을 줄 알고 여기다 버린 거라면 아마 황궁 밖으로 나가도 쫓는 사람은 없겠죠. 하지만 여기에서 다른 사람 눈에 띄면 다시 황제에게 끌려가야 할지도 몰라요." 카엔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황궁과 아카데미를 다시는 볼 수 없겠군요. 정말로 정들었었는데. 이 아름다운 정원도 이제 작별이네요. 지난 6개월간은 제 인생에서의 휴식 같은 거였어요. 참 행복했지요. 원래 저는 치유마법에 대해 배우려고 들어온 거였지만 마나를 쓸 수 없는 이상 치유마법을 배우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그밖에 배울 것은 거의 다 배웠는데도 학교가 너무 좋아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던 거였어요. 저는 이미 예전에 어른이 되었는데도 어린 아이 흉내를 내고 있었던 거예요. 웃자란 벼가 다시 작아지지 않듯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버린 제가 다시 어린 아이로 돌아갈 수는 없는데도 저는 행복에 취해서 어른 노릇 하기를 미루고 있었어요. 그래서 일이 이렇게 된 거고요. 이제 떠나야 할 때예요." 렌은 아련하게 주위의 선경을 둘러보았다. "밖으로 데려다 줄 테니 렌은 조금 쉬어요. 지쳤을 텐데." 카엔은 아주 가벼운 수면마법을 렌에게 걸었고 렌은 곧 달콤한 잠의 축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치료사 렌 [7] 치료행의 시작 (1) -------------------------------------------------------- 렌이 눈을 떴을 때 카엔은 침대 가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렌의 손을 붙잡은 채 침대에 머리를 대고 자고 있었다. 방안은 작지만 깨끗했고 창밖으로는 사람들과 마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햇살이 비껴 들어오는 걸로 보아 이른 아침인 것 같았다. 렌은 조심스럽게 카엔에게 잡힌 손을 빼었다. 불편한 자세로 곤히 자는 카엔을 보자 왠지 귀여워져서 렌은 그의 머리카락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렌은 생각에 잠겼다. 언제부터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가 내 차를 맛있게 마셔 주었을 때, 내 앞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다시 눈물을 흘렸을 때, 마법진을 가르쳐 주었을 때, 다친 내 몸을 치료해 주고 내게 키스했을 때, 내 이야기를 들어 주고 내 선물에 감격해 주었을 때, 그 모든 순간순간마다 나는 그를 조금씩 사랑하게 되었어. 그리고 그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음을 안 그 순간 그 사랑을 깨닫게 되었지. 하지만 어쩌면 나는 그저 그가 은보랏빛 머리카락과 은보랏빛 눈동자를 지닌 눈부신 꽃미남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건지도 몰라. 아니면 그의 붉은 입술과 형언할 수 없는 체취 때문에 사랑하는 건지도 몰라. 사랑에 이유 따위는 필요 없으니까. 훗, 나는 너무 쉽게 사람을 사랑하는 건가. 그가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는지 하나도 모르면서 그를 사랑하다니. 그렇지만 그가 길 잃은 어린아이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볼 때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렌은 다시 미소지었지만 그 웃음에는 쓰라림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지만 그는 나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지 못했어. 결국 나는 그가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한 존재는 아니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꼭 나를 사? 浩灸?법은 없지만 다시 생각하니 가슴이 정말로 아파. 하지만 언젠가는 그가 날 사랑하게 될 날이 올 거야. 그 때까지 나는 그에게 사랑을 구걸하지는 않겠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후에 꿋꿋하게 기다릴 거야. 렌은 부드럽게 카엔을 흔들었다. "카엔님, 일어나세요." 카엔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어깨와 목이 뻣뻣했는지 근육을 풀던 카엔은 눈앞에서 방글거리는 렌을 감격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 "잘 잤어요?" "네." 렌이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카엔은 가슴이 뛰었다. "그런 자세로 주무시면 어떻게 해요? 어깨랑 목에 근육통이 생긴다고요." 애정어린 렌의 잔소리를 듣자 카엔은 이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에 즐겁게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여기는 어디예요?" "코렐 거리의 작은 여관입니다." 코렐 거리라는 말에 렌은 며칠 전의 축제가 생각나 미소지었다. 짧은 시간 동안에 참 많은 일이 일어났구나.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최소한 카엔을 그대로 황궁에 둘 수는 없었다. 자신에게나 카엔에게나 그것은 너무 위험했다. 결국은 그를 말려들게 한 것 같아 렌은 카엔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카엔님, 황제는 신출귀몰해서 언제 어디에서 사람들 마음을 읽고 있는지 모른다는데, 카엔님이 저를 황궁 밖으로 데리고 나오신 걸 들키면 카엔님 신변도 위험해질 거예요. 예를 들어 어느 날 갑자기 황제가 황궁 도서관에 들렸을 때 카엔님은 저를 데리고 나온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으세요?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 생각나겠죠. 그 순간 카엔님은 죽은 목숨이예요. 그러니 정말 죄송한 일이지만 카엔님은 이제 황궁으로 돌아가시면 안 돼요. 저와 마찬가지로 카엔님도 피신하셔야만 해요." 렌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까 생각했던 대로 카엔이 따라 줄까나? 조금 뜸을 들이다 렌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 카엔님을 고용하겠어요. 카엔님의 의향은 어떠세요?" 의외의 말에 카엔은 정말로 놀랐다. "나를 고용한다고요?" "그래요. 이제부터 저는 치료사 노릇을 하며 작은 마을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려고 해요. 그렇게 한동안 다니다 보면 황제도 저를 완전히 잊을 테죠. 어쩌면 벌써 제가 죽은 줄 알고 잊어버렸는지도 모르지만요. 원래 황제는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생각한다니까 저의 죽음 따위는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만전을 기하는 게 좋겠죠. 또 바깥 세상은 험하고 제 또래 여자가 혼자 돌아다니는 건 위험한 일이예요. 그리고 사실은 치료술로 고칠 수 있는 병과 치유마법으로 고칠 수 있는 병이 있으니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더 많은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을 테고요. 카엔님은 황궁에 계시면서 재산도 별로 못 모으시고 별로 중요한 일도 안 하셨던 것 같은데, 저랑 함께 여행 다니면서 세상 구경 하시면 좋지 않겠어요? 월급은 잘 쳐드릴게요." 렌은 진지한 눈으로 카엔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카엔은 얼굴 전체에 떠오르는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사실 그는 렌이 자기와 헤어져 혼자 가겠다고 하면 이미 여러 번 해 봐서 몸에 밴 스토킹 수법으로 렌을 따라다니며 그녀를 보호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렌이 스스로 동행을 요청하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좋아요." 카엔의 흔쾌한 대답에 렌은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럼 계약서를 써야죠." 카엔은 예상치 않았던 렌의 말에 놀랐다. "계약서라고요?" "그래요. 고용계약서요. 뭐든지 중요한 계약은 문서로 남겨야 하는 거라고요." 렌은 미소지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약간 휘청거리며 여관방 한 쪽에 놓인 허름한 책상으로 다가갔다. 다행히도 책상 위에는 잉크통과 종이가 갖춰져 있었다. 렌은 고심해 가며 계약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 됐어요. 한 번 보세요." =================================================================== 고용계약서 사용자 렌(이하 갑이라 한다)과 피용자 카엔(이하 을이라 한다)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고용계약을 체결한다. 다 음 1. 갑과 을이 치료행을 하는 과정에서 을은 갑을 위해 경호 업무 및 치유마법 시전 업무, 기타 갑이 지시하는 업무를 성실히 수행한다. 2. 갑은 을에게 임금으로 월 1골드를 매월 마지막 날 지급하며, 치료비 중 10분의 1을 성과급으로 별도 지급한다. 3. 매월 치료비 수입이 월 3골드에 미치지 못할 경우 갑은 을의 임금을 월 50실버까지 감액할 수 있다. 4. 을의 숙식은 갑이 제공한다. 5. 여행의 여정은 갑이 정한다. 6. 을은 1개월에 3일간 휴무할 수 있고, 1년에 열흘간 별도의 연가를 가질 수 있다. 7. 위 고용계약의 기한은 없는 것으로 하되, 일방이 고용계약을 해지하고자 하는 ? 嚥?타방에게 열흘 전에 사전 통지하여야 하며, 갑이 그 사정으로 고용계약을 해지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1개월 분 임금을 을에게 퇴직위로금으로 지급한다. 8. 일방이 위 고용계약상의 의무를 해태하는 경우 타방은 즉시 고용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쌍방은 위 계약내용에 동의하며 아래와 같이 서명한다. 사용자 갑 _________________ 피용자 을 ___________________ =================================================================== 카엔이 황당한 얼굴로 계약서의 문구를 살펴보는 동안, 렌은 약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카엔을 쳐다보았다. "월급이 너무 적나요? 월 1골드 30실버 정도까지 올려 드릴 수도 있지만, 일단 이 정도로 운영을 해 보고 나중에 상황을 보아 결정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카엔은 자신이 아직 세상에서 돌아다니던 350여년 전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 무렵 고위급 마법사의 월급이 월 50실버 정도였으니 월 1골드면 적은 돈은 아니리라. 물론 지금 카엔은 인플레이션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 렌의 얼굴을 보고 카엔은 피식 웃었다. "계약에 동의할게요." "와아, 정말이죠? 이제부터 카엔님은 제 피용자예요. 그러니 제 명령을 들으셔야 해요. 알았죠?" 렌은 활짝 웃었다. 카엔도 마주 웃었다. 역시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 좋은 일이었다. "렌의 말을 듣겠어요. 렌은 자비로운 고용주가 되어 주겠지요?" "물론이예요. 카엔님. 그럼 여기 서명하세요." 카엔이 서명하고 난 후 렌도 서명했다. 렌은 카엔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카엔은 의아해했다. "오른손을 내미는 건 무슨 뜻인가요?" "아, 그렇군요. 악수는 여기에는 없는 풍습이죠. 원래 악수는 제가 있던 세계에서 기사들이 만났을 때 오른손에 무기를 숨기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서로 오른손을 맞잡은 데에서 시작했어요. 그것이 점차 뜻이 변해 가면서 지금은 서로 만나 인사할 때나 중요한 합의를 했을 때 오른손을 잡고 흔들게 되었어요. 요컨대 당신은 내 친구다, 당신을 해치지 않겠다는 뜻이예요." 렌의 말에 카엔은 오른손을 내밀어 렌의 손을 꼭 잡았다. 둘은 꼭 잡은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치료사 렌 [7] 치료행의 시작 (2) -------------------------------------------------------- 악수를 마치고 나자 렌은 몸에 걸치고 있는 장신구들을 하나씩 빼어 책상 위에 놓았다. 반지 열 개, 목걸이, 허리에 두른 두 줄의 황금띠, 머리에 꽂혀 있는 진주장식까지 다 쌓아 놓으니 눈이 부셨다. 그 중에서 렌은 가장 평범해 보이는 새끼손가락용 반지 한 개를 집어 들었다. "카엔님, 혹시 마력으로 이 반지에서 보석을 빼낼 수 있으세요?" "네, 물론입니다." 카엔은 마력을 일으켜 보석 주위에 열을 가했다. 금이 살짝 녹자 보석은 쉽게 빠졌다. "제 방에 테룬 황자에게서 받은 치료비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걸 가지고 나오는 건 위험하니 이걸 팔아서 여행자금을 마련해야 할 것 같아요. 다른 보석들은 너무 눈에 띄니 황궁에서 나온 물건이라는 걸 금방 눈치채일 거예요." 렌의 말에 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렌은 세상 물정 모르는 카엔이 못 미더운 듯 덧붙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보석상에 가시되 들어가시면 물건을 팔러 온 게 아니라 사러 온 것처럼 보이는 태도로 이 보석을 꺼내시고, 이것과 짝을 이뤄 귀걸이 한 쌍을 만드는 데 적당한 보석이 있냐고 물어보세요. 있다고 하면 얼마냐고 물어보시고요. 보석상이 가격을 말하면 그 때 비로소 보석을 사러 온 게 아니라 팔러 온 거라고 말씀하시고, 보석상이 부른 가격에서 30% 정도 깎인 가격으로 파시면 돼요." 렌의 구체적인 설명에 카엔은 감탄했다. "그렇게 하면 정말 속아넘어갈 걱정은 없겠네요!" 렌은 씩 웃었다. "다 생활의 지혜예요." 그러다 렌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아, 제 얼굴은 사람들 눈에 띄는데, 카엔님의 마법으로 어떻게 가릴 방법이 없을까요?" 그 말에 카엔은 책상 위에 쌓인 아홉 개의 반지 중 하나를 골랐다. 얼핏 보아 오팔처럼 보이는 새끼손톱 반만한 크기의 보석이 끼워져 있는 금반지였다. 그는 거기에 은보랏빛을 한참동안 쏘았다. 빛이 흡수되고 나자 금반지에 끼워져 있는 보석의 색은 탁하고 초라해졌다. 카엔은 반지를 들어 이리저리 살 펴본 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반지에 부여한 마법은 사람의 기운을 가려주는 마법입니다. 이걸 끼고 있으면 얼굴이 특별히 바뀌지 않더라도 사람들 시선을 끌지 않게 됩니다.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소녀처럼 보이게 되는 거죠. 시동어는 '나는 너무 예뻐'입니다. 마법을 해제하고 싶으면 '나는 원래 예뻐'라고 하면 됩니다." 카엔은 렌의 왼손을 잡아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러다 손을 잡은 채 카엔은 머리를 숙여 렌의 손등에 ? 纛?맞추었다. 렌은 카엔이 자신을 만질 때마다 온몸을 흐르는 전류 같은 감각에 당황했다. 렌은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손을 빼었다. 그러다 다시 렌은 생각했다. 비록 그가 내 탈출을 돕는 건 거절했었지만 그의 행동이며 말이며 전부 생각해 보면 그는 확실히 나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아. 전에 키스도 몇 번 했고 내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서 걱정해 주잖아. 내가 마음을 버린 후에도 나를 애타게 이 세상으로 불러 주었고.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해서 잘 꼬시면 그는 내게 넘어올지도 몰라. 모든 연인들이 반드시 서로 동시에 사랑에 빠지는 건 아니니까. 카엔은 렌이 열심히 머리 굴리는 걸 읽으며 행복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렌은 빙글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카엔님, 제 얼굴은 그렇다 치고 사실은 카엔님이 더 문제예요. 카엔님이 얼마나 미남인지 스스로 알기는 아세요? 카엔님만 보면 가는 마을마다 여자애들이 꺅꺅거릴 텐데, 지금 그 눈부신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다니실 생각이세요? 제가 질투에 찬 여자들 손에 린치당하는 거 보고 싶으세요?" 카엔은 렌이 대놓고 자신의 미모를 칭찬하자 부끄러워져서 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알았어요. 나도 렌의 반지에 걸어둔 것과 같은 마법을 스스로에게 걸어 두도록 하죠. 대신에 렌은 내 아름다운 얼굴을 감상하는 기쁨은 포기해야만 합니다." 카엔은 렌 덕분에 자신도 이제는 별 뻔뻔스러운 소리를 자유자재로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마법을 시전했다. 이목구비는 변함없었지만 이제 카엔은 그저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보통 청년으로 보였다. 렌은 약간 아쉬워하며 카엔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신기해요. 얼굴은 그대로인데 느낌은 전혀 다르니... 그래도 제 눈에는 여전히 미남으로 보여요." 렌의 말에 카엔은 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을 보고 웃음지은 채 렌은 반지를 어루만지며 "나는 너무 예뻐."라는 낯뜨거운 말을 외었다. 그러자 렌의 모습도 카엔처럼 빛이 바랜 듯 평범해졌다. "이제 우리 가명도 정해야 해요." 렌의 말에 카엔은 무심코 대답했다. "테라미즈넨 동부 지방에는 아명 뒤에 '인'을 붙여 성인명으로 쓰는 풍습이 있는데, 렌도 렌 뒤에 인을 붙여 레닌이라고 하는 게 어때요?" 렌은 카엔의 말에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레, 레닌이라고요? 푸, 푸하, 아하하하하! 차라리 마르크스라고 하죠!" 카엔은 렌이 왜 웃는지 몰라 당황했다. "아하하하!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레닌이라니!" 눈물이 날 정도로 웃은 렌은 겨우 웃음이 멎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카엔'이라는 이름 뒤에 '인'을 붙이면 카에닌이 되는군요. 훗, 황제의 이름이랑 똑같네요." 카엔은 황급히 변명했다. "카엔과 카에닌은 모두 제국 동부 지방에는 비교적 흔한 이름이예요." "그렇군요." 렌이 별달리 신경쓰는 것 같지 않아 카엔은 겨우 마음을 놓았다. 결국 둘은 상의해서 렌의 가명은 레이, 카엔의 가명은 칼란이라고 정했다. 카엔이 여관 아래층에서 가져온 간단한 아침을 나눠 먹은 후 카엔은 렌에게 자신이 보석을 팔아올 동안 좀 더 자라고 신신당부하고 여관을 나섰다. 그러나 카엔이 간 곳은 보석상이 아니라 황궁이었다. 동관에 있는 황제의 집무실은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지만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한때 그가 이곳에서 직접 대신들과 함께 제국의 일을 관장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수십 년, 어느 날 모든 것이 지겨워져 대부분의 책임을 수상에게 떠넘긴 후로는 황제의 집무실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잊혀진 공간이 되었다. 카엔은 침전에서 황제의 옷으로 갈아입고 황제 집무실로 이동한 후 수상 집무실에 있는 페람 공작을 불렀다. "페람, 지금 바로 황제 집무실로 오라." 부지런히 일하던 페람 공작은 허공에서 들려오는 황제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던 일을 전부 집어치우고 그는 뛰다시피 동관으로 달려갔다. 황궁이 워낙 커서 서관에서 동관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10분 이상 걸리지만 10분씩 기다리는 것은 황제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었다. 헐레벌떡 뛰는 그의 모습을 다른 관료들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운동부족이야, 운동부족.' 그는 숨이 턱에까지 차 달리면서 그는 황제의 호출이 며칠 전 침전에 들어간 후로 나오지 않고 있는 나와림 안딘의 일과 관련된 것이라고 추측했다. 마침내 그는 5분만에 황제의 집무실 앞에 도달했다. 땀을 닦고 옷매무새를 다듬은 후 페람 공작은 목청을 높여 고했다. "폐하, 소신 페람이옵니다." 페람은 들어가자마자 늘 하듯이 엎드려 이마를 땅에 대고 절했다. "페람, 그대에게 지시할 일이 있다." "예, 폐하." "이 곳 테라미즈에 동제국의 첩자들이 있다. 그들을 잡아 오라. 모두 마법사들이니 다른 마법사들을 데려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 적어도 한 명은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 페람은 백옥같이 하? ?손이 눈앞에 나타나자 눈길을 올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 손에 잡힌 메모를 공손히 두 손으로 받아 내용을 읽어 보았다. 종이에는 첩자들의 이름과 첩자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안가의 위치, 첩자들의 위장 신분 등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렌, 그러니까 나흘 전 내가 지명했던 나와림 안딘이 내게 저항하다가 결국 내 손에 죽었다는 소문을 테라미즈와 인근 다른 도시들에 퍼뜨리도록 하라." 페람은 황제의 지시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렌이 죽었다는 소문을 굳이 퍼뜨려야 한다는 것은 그녀가 살아있다는 뜻이 아닌가? 대체 폐하는 무슨 생각이신 거지? "그대는 역시 영리하군, 페람." 차가운 황제의 말에 페람은 몸을 떨었다. 비록 얼굴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가 수상으로 임명된 지난 20여 년간 한결같이 젊은 황제의 목소리는 비인간적인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을 그에게 주었다. "그대만큼 유능한 수상을 찾기는 쉽지 않으니 그대의 기억을 지우거나 조작하지는 않겠다. 그대가 비밀을 발설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믿겠다." "폐하, 망극하옵니다!" 페람은 등줄기를 흐르는 오싹한 공포를 달래며 다시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었다. "첩자들을 잡아들이고 난 후에는 내게 연락하라. 나는 당분간 황궁을 비울 것이니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이 생기면 바로 통신구로 연락하면 된다." 페람은 황제가 자신을 어쩌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고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 그리고 그대에게 물을 것이 있다. 이 정도 보석이면 값이 얼마나 나가지?" 페람은 하얗고 아름다운 황제의 손바닥에 놓인 작은 보석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내가 보석상도 아닌데 왜 나한테 물으시는 거야? 갈수록 태산이군.' 페람의 생각을 읽은 카엔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훗, 당연히 당장은 모르겠지. 바로 알아보고 3난(30분) 정도 후에 그 보석 값을 골드와 실버로 골고루 섞어 준비해 놓으라. 내 그때쯤 그대의 집무실로 가겠다. 나가 보라." 페람은 조심스럽게 뒷걸음쳐 황제의 집무실을 나왔다. 어느 정도 집무실에서 멀어지자 그는 비로소 몸서리쳤다. 황제에게 고스란히 자신의 마음을 읽히는 동안 그는 완전히 벌거벗은 기분이 들었다. 황제가 자신의 생각을 속속들이 읽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황제가 젊은이의 탈을 쓰고 있는 죽지도 늙지도 않는 괴물 같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아마도 황제를 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황제 또한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에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자신의 불경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벌을 내리지 않으시는 거겠지. 아무튼 그가 수상으로 있었던 지난 20년 동안 황제가 자신에게 이렇게 구체적으로 뭔가를 지시한 적은 없었다. 페람은 이제 고요하게 멈춰 있던 테라미즈넨의 황궁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닥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치료사 렌 [7] 치료행의 시작 (3) -------------------------------------------------------- 카엔이 보석값에 해당하는 돈을 페람으로부터 받아들고 그밖에 이것저것 처리할 일들을 마무리지은 후 여관으로 돌아온 것은 8파잔(오후 네 시) 조금 전이었다. 렌은 가볍게 잠이 들었다가 깨어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며 누워 있었다. 씩씩하게 들어온 카엔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렌이 말한 대로 팔아서 32골드나 받았어요! 나 잘했죠?" "네, 참 잘했어요." 렌은 생글거리며 카엔을 칭찬했다. 카엔은 뿌듯했다. 잠시 후 카엔이 부탁한 늦은 점심식사를 가지고 여종업원이 들어왔다. 20대 초반의 건강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여종업원은 상냥하게 인사말을 건네고는 책상 위에 쟁반을 놓았다. 카엔은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황궁과 관련해서 무슨 소문이 돌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여종업원은 신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돌고말고요! 엿새 전에 그 뭣이더라, 린인지 렌인지 하는 나와림이 나와림 안딘으로 지명됐었잖아요? 근데 알고 보니 여자였고요. 거기까지는 다들 아시죠?" 렌과 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종업원은 목소리를 낮추어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그 소녀가 침전에서 황제 폐하께 저항하다가 죽었대요! 듣자니까 황제 폐하께서 전처럼 그 아가씨에게 마법을 걸어서 정신을 잃게 하셨다가 나중에는 그냥 죽이셨대요. 30년 전에도 그 비슷한 일이 있었다지만, 아무튼 지금 시내는 그 얘기로 떠들썩해요. 뭐 우리들 같은 서민들이야 그런 얘깃거리라도 있어야 사는 재미가 있지 않겠어요? 윗분들이야 뭐 정신 없겠지만요. 그러길래 미인박명이라니까요! 그 아가씨가 바로 전야제날 세 번째로 노래 부른 그 소년 맞죠? 저도 전야제날 아카데미에서 그 아가씨-뭐 그때는 소년인 줄 알았지만-가 노래 부르는 걸 봤는데, 진짜 이쁘기는 이쁘더라고요. 후, 저도 반했? 駭쨉?사실은 여자였다니, 아쉽지 뭐예요. 아무튼 꽃미남들은 전부 황궁에 모여 있다니까요!" 숨쉴 틈도 없이 쏟아붓는 여종업원의 말에 렌과 카엔은 약간 질려서 아무 대꾸도 못하고 조용히 듣기만 했다. 그녀가 한 숨 돌리자마자 렌은 웃으면서 서둘러 말했다. "재미있는 소문이네요. 가져오신 식사는 잘 먹을게요." 렌의 태도에 이제 얘기를 더 들을 의사가 없음을 알아차린 여종업원은 "제가 좀 수다스럽죠?"하고 씩 웃으며 나갔다. 카엔은 페람의 유능함에 새삼 감탄했다. 오전에 지시했는데 오후에 벌써 소문이 퍼지다니. 한편 렌은 자신이 완전히 죽은 걸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친구들이 슬퍼할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카엔님, 죄송하지만 황궁의 제 방에 갔다 와 주실 수 있으세요? 돈과 보석은 상관 없지만 하차크 교수님의 약초밭에서 채취해 말려 놓은 약초는 두고 가기가 너무 아까워서요. 아마 지금 살짝 갔다 오시면 오히려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을 거예요. 아, 그리고 책상 안에 있는 제 침통도요. 테라미즈에 오자마자 은세공사에게 부탁해서 만든 은침인데 다시 구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요." "렌이 부탁하는 건 뭐든지 해 줄게요." 렌은 카엔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간절함과 미안함을 읽고 부드럽게 웃었다. "혹시 제가 구해달라고 했을 때 거절하신 것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카엔님이 절 위해 목숨을 거실 이유는 없었으니까요." 렌에게서 용서와 이해와 안타까움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을 읽은 카엔은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카엔은 다시 황궁으로 갔다. 렌의 방은 렌이 떠나기 직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 몇 벌의 옷, 단정하게 정리된 침대. 책상서랍을 열어 보니 렌이 말했던 대로 약초주머니들과 침통이 있었다. 카엔은 그것들을 잘 챙겨넣고 서랍 한구석에 놓여 있는 돈과 보석을 노려보았다. 테룬, 그 놈이 준 것들이었다. 이 모든 소동은 결국 그 놈 때문이 아닌가. 카엔은 자기 잘못은 생각지도 않고 테룬을 원망했다. 그는 은보랏빛을 일으켜 돈과 보석을 모두 한 줌 연기로 만들었다. 금속이나 보석을 아예 기화시키는 것은 보통 마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으나 카엔은 평소보다 조금 더 힘을 쓴다는 기분으로 수월하게 해냈다. 여행을 위해 챙겨갈 게 있나 싶어 다시 침전에 들른 순간 통신구에서 페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첩자들을 모두 잡았습니다만 모두 자결하고 한 명만 겨우 생포했습니다." "잘 했다. 첩자를 창 없는 방으로 데려가라." 첩자는 고문에 주로 쓰이는 '창 없는 방'이라는 밀실에 끌려와 단단히 묶여 있었다. 8써클 마법사 플로인이 시전한 동결마법에 걸려 그는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페람 공작과 그의 비서 한 명이 부복하고 있었다. 카엔은 동결마법을 푸는 것과 동시에 정신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그는 첩자의 눈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첩자의 눈은 은보랏빛이 어른거리는 카엔의 눈동자에 못박힌 듯 고정되었다. 별로 의지력이 없는 자인 듯 정신마법이 참으로 쉽게 걸렸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투벤입니다." 첩자는 몽롱하게 대답했다. "너의 임무는 무엇이지?" "저는 4써클 마법사로, 바르민님이 유고시에 그 분의 일을 대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가 죽었으니 동제국 황실과의 연락은 네 담당이겠구나." "예." 그의 대답을 듣자 카엔은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투벤의 기억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뇌수 껍질이 한 장씩 벗겨져 나가는 것 같은 처절한 고통에 투벤은 몸을 떨었다. 간단한 조작이어서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 투벤은 마치 홀린 듯 호주머니에서 통신구를 꺼냈다. 주위 사람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듯 그는 통신구에 대고 엘트리 엘트리안이라고 읊은 후 교신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투벤은 지금 자신이 안가에 피신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은보랏빛 광휘에 휩싸인 황제가 친히 렌을 죽이는 것을 직접 보았다. 황제는 자신을 포함한 첩자 다섯 명을 잡아 놓고 그 앞에서 렌을 죽이면서 "감히 내 것을 넘보다니 너희 황제는 참으로 겁도 없구나!"하고 외치며 크게 웃었다. 그 맑고 청명한 웃음소리는 피비린내 나는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아름다웠다. 황제는 동제국 황제에게 경고하라면서 오로지 첩자들 중 자신만을 죽이지 않고 풀어주었다. 어떻게 여기 안가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한시바삐 수상 각하이신 샤이트 데 위든 경께 알려야 했다. 마침내 샤이트가 반대편에서 응답하자 투벤은 자기 기억 속의 일들을 충실하게 샤이트에게 보고했다. 그의 몸에는 별로 상처가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황제에게 잡혀 고문당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그 상처의 통증이 너무 심해 그는 자꾸 더듬거렸다. 그래도 임무를 다했다는 생각에 그? ?뿌듯했다. 투벤의 손에서 통신구가 떨어졌다. 투벤은 총기가 사라진 멍한 눈을 한 채 입가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온 몸을 덜덜 떨었다. 조금 지나자 그는 온몸을 뒤틀며 신음하기 시작했다. 카엔은 흉한 모습이 거슬리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페람, 저 놈은 알아서 처리하라." 말을 마치자 카엔은 사라졌다. 페람 공작과 그 비서는 그 동안 계속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 있었지만 황제가 어떻게 첩자의 기억과 의지를 조작해서 동제국에 가짜 목격담을 보고하게 했는지 생생히 들었다. 황제가 떠난 후에도 한참 동안 그 자세로 있다가 마침내 몸을 일으킨 페람 공작과 비서는 눈앞에서 몸을 비튼 채 계속 신음을 발하는 첩자의 모습을 보며 약속이나 한 듯 길게 한숨을 토해 내었다. "누구한테라도 얘기하면 큰일 난다는 건 알고 있겠지, 림드 군?" "예, 수상 각하." "저 자는 고통 없이 보내야겠구나. 나는 무인이 아니라서 손에 피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플로인을 시켜 마법으로 없애야겠다. 그대가 연락하라." "예." "행여나 이 일로 황제 폐하께 불경스런 마음을 갖게 되면 안 된다. 그런 마음까지도 전부 읽으시는 분이니까." "예." "늙은이의 어리석은 노파심에서 하는 소리이니 이해해라." "물론입니다." 그들은 조금 전의 일에 몸서리치며 황제가 정말 인간인지를 다시 한 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 치료사 렌 [7] 치료행의 시작 (4) -------------------------------------------------------- 샤이트가 기거하는 수상 관저는 황궁보다 규모는 작지만 그 곳과 마찬가지로 검은 대리석으로 지어진 웅장한 건물이었다. 평소처럼 황궁에 출근하여 황제에게 보고하고 내각에서 일하다 그가 관저로 돌아온 것은 10아반(오후 여덟 시) 정도였다. 집사가 문을 열어줄 거라고 예상했던 그는 반짝이는 금발머리의 꿀같이 부드러운 외모를 지닌 미청년이 문 앞에서 그를 맞이하자 금방 무뚝뚝한 표정을 풀고 활짝 웃었다. 미청년은 '브림의 목소리'라고 불리는 유명한 음유시인 미로닌이었다. 그의 근사한 외모와 아름다운 목소리는 황성 브림 내에 명성이 자자했다. 샤이트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삼 년 전이었다. 그 무렵 그는 아직 황태자의 차석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정확하고 유능하지만 차가운 사람으로 소문나 있던 그는 친한 친구도 없고 별다른 취미도 없어 그나마 '가시 없는 장미'라는 술집에 가서 맘에 드는 청년을 만나 뒤끝 없는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서제국의 난숙하고 향락적인 문화에 물든 동제국에서 동성애는 그렇게까지 금기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공공연한 것도 아니었기에, 신분이 확실한 사람만 받고 비밀이 보장되는 그 술집은 어느 정도 이상의 신분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낙원 같은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미로닌의 공연을 보았다. 황태자의 장인 폴코 공작이 선심 쓰면서 소개해 준 어느 자작 영애와 함께였다. 그는 시골의 가난한 남작 자제였으나 젊은 나이에 황태자의 차석 보좌관이 될 정도의 능력 덕분에 괜찮은 집안의 아가씨들을 많이 소개받았던 것이다. 미로닌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목소리는 드넓은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천국의 미성이었다. 미로닌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샤이트는 출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온 지난 세월의 고단함이 모두 씻겨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일제히 깨어나 그를 감싸는 것 같았다. 옆의 아가씨가 지적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는 몸이 안 좋다고 변명하고 그녀와 헤어졌다. 간절히 술 생각이 났다. '가시 없는 장미'에 들렀을 때 그는 거기에서 미로닌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가 자신과 같은 성향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샤이트는 어떤 운명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미로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미로닌은 그의 시선을 느끼자 가볍게 목례하고 바텐더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후 샤이트의 자리로 종업원이 포도주 한 잔을 들고 왔다. "미로닌님께서 사시는 술입니다." 샤이트의 차가운 외모는 의외로 인기가 좋았다. 그래서 그동안 그는 파트너를 고르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도 저 이름 높은 가객이 먼저 나서서 접근해올 줄 몰랐던 샤이트는 뜻밖의 전개에 놀라 잔을 들고 미로닌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로닌님, 대체 어떻게 그렇게 영혼을 담은 노래를 부르실 수 있습니까?" 샤이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미로닌은 당황하여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제 노래에서 영혼을 느끼셨습니까?" 미로닌의 목소리는 낮았다. "음악이 영혼을 치유해 준다는 것을 저는 그대의 노래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솔직한 샤이트의 말에 미로닌도 감동했다. "저는 그저 가객, 사람들을 잠시 즐겁게 해 주고 돈을 받는 종달새 ? 걋?존재일 따름입니다." 미로닌이 겸손하게 말하자 샤이트는 격한 감정에 그의 손을 붙잡고 외쳤다. "국가며 권력이며 돈이며 모두 그대의 노래에 비하면 부질없는 허상입니다! 그대가 얼마나 위대한지 스스로 모르십니까?" 샤이트의 열렬한 태도에 미로닌은 부드럽게 웃었다. "바텐더의 말로는 그대가 잡을 수 없는 얼음새 같은 존재라고 하던데, 지금 보니 무척 정열적인 분이시군요." 고혹적인 미로닌의 목소리에 샤이트는 가슴이 설렜다. "그대 앞에서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혼의 벗이 될 수 있겠군요." 미로닌의 나직한 말에 샤이트는 숨을 죽이고 역시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렇습니다." 결국, 둘은 그날 밤을 샤이트의 하숙집에서 함께 보냈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었으나 둘은 영혼이 통하는 것을 느꼈고, 수시로 만나면서 점점 사랑을 키워갔다. 그 무렵 미로닌은 여러 대귀족들로부터 자기 밑의 가객으로 등록하라는 제의를 받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는 그 귀족의 저택에서 기거하여야 하고 활동도 부자유스러워지게 되지만, 그게 싫다고 해서 자유가객으로 남게 되면 공연을 위해 극장을 잡기도 힘들고 높은 보수가 보장되지도 않고 그밖에도 여러 모로 어려운 점이 많아 그것도 쉬운 길은 아니었다. 샤이트가 여자였다면 아마도 미로닌과 결혼하여 그 귀족의 저택에서 함께 살 수 있었겠지만 샤이트가 남자인 이상 그는 자기 밑에 미로닌을 두는 방법말고는 달리 미로닌과 함께 지낼 길이 없었다. 그래서 샤이트는 미로닌을 위해 적어도 백작 작위를 받아 그 산하에 가객을 둘 수 있는 지위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폴코 공작으로부터 인정받아 황태자의 수석보좌관이 되자 그는 목표 달성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펠리시티 황후의 일로 멀고 먼 흑성으로 쫓겨나다시피 전출되자 그의 계획에는 중대한 차질이 생겼다. 샤이트가 떠난 후 미로닌은 그를 탐내는 여러 귀족들로부터 시달림을 받게 되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샤이트는 몸이 달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시바삐 수도로 복귀해야 했지만, 사표를 내고 무작정 수도로 달려간다고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미로닌으로 하여금 평생 노래를 하지 말고 그냥 자기와 살자고 하거나 자유가객으로 고생하라고 할 수도 없었다. 미로닌은 노래 없이는 살 수 없는 타고난 예술가였다. 고민하던 샤이트는 테룬 황자가 무공을 회복한 것을 알고서 그토록 바라던 절호의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 그가 수상이 되면 그 어떤 귀족도 미로닌을 넘볼 수 없을 것이고 그의 지위를 이용해 미로닌이 원하는 공연을 마음껏 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기다려준 미로닌의 마음에 보답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일은 잘 풀렸다. 이제 미로닌은 공식적으로 수상 소속 가객으로 등록되어 다른 귀족들의 요구에서 자유로워졌고, 언제까지나 자신의 것이 되었다. "무슨 생각을 해?" 미로닌은 웃으며 샤이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네가 내 거라는 생각." 샤이트가 대답하자 미로닌은 빙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너 또한 내 거야. 너는 내게 속해 있어." 미로닌이 달콤하게 웃자 샤이트 또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멀리 떨어져 있었던 1년간 미로닌이 자신을 기다리고 지조를 지키며 온갖 고생을 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샤이트는 눈앞에 미로닌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다. "우리 양자를 들일까?" 미로닌의 말에 샤이트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아직은 일러. 황제 폐하께서 지금 그다지 상태가 좋지 않으시고, 어쩌면 변경의 공국들과 전쟁을 해야 할지도 몰라. 황후 책봉까지도 갈 길이 멀고. 아마도 그 일들이 일단락되어야 겨우 나라가 좀 안정될 거야." "그래, 급한 일은 아니니 천천히 생각해 보자. 피곤할 텐데 쉬어." 미로닌의 다정한 키스를 받으며 샤이트는 침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씻으려던 그는 통신구가 반짝이는 것을 보고 다시 가운을 걸치고 서재로 갔다. 통신구의 상대방은 테라미즈에 파견된 비마법사 첩보원인 투벤이라는 자였다. 그는 숨이 끊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지난 며칠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보고했다. "수상 각하, 헉헉… 저는 투벤, 4써클 마법사 첩보원입니다. 흐흑..." "차분히 얘기해 보라." "바르민님께서… 닷새 전 아카데미에 들어간다면서 나가신 후로...... 소식이 끊어졌고, 어제 여기서 활동 중인 저를 포함한 나머지 첩보원도... 으읔... 모두 황궁으로 붙잡혀 갔습니다." "그대는 지금 몸이 성치 않은가?" "예... 안가가 급습을 받아... 넷은 서제국 황제가 보는 앞에서 모두 죽고 저만 목숨을 구했습니다. 서제국 황제는 제가 본 장면을 보고하고 동제국에 경고하라면서 저를 놓아 주었습니다." "렌이라는 소녀의 소식은 들었는가?" "예... 바르민님께서 사라지신 그날 오후 나와림 안딘으로 지명되어... 황제의 침전? 막?들어갔다가... 붙잡혀온 저희 첩보원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어제 황제의 손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황제는... 그녀를 죽이면서 저희에게 '감히 내 것을 넘보다니 너희 황제는 참으로 겁도 없구나!'하고 외쳤고, 그 말을 절더러 동제국에 전하라고 했습니다. 아흑... 이제 더 이상 말이.... 각하...." "투벤, 투벤, 대답하라!" 그것을 마지막으로 통신은 끊겼다. 샤이트는 보고를 듣고 나서 생각에 잠겼다. 바르민이 아카데미로 들어간 그날 즉시 소식이 완전히 끊어졌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바르민에게 렌을 찾으라고 지시했을 때부터 바르민은 이상하게 성급하고 초조한 태도를 보였었다. 아마도 그는 공을 세울 욕심에 성급히 황궁에 들어갔다가 그 곳에서 처형당했을 것이다. 어리석은 놈이었다. 테라미즈의 황궁은 6써클 마법사 따위가 활보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 놈 때문에 다른 첩보원들도 모두 발각되었을 것이다. 마법사가 귀한 동제국에서 바르민이나 그 수하들 만한 써클의 마법사를 다시 구하고 첩보조직을 재구축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 생각을 하니 골치가 아팠다. 샤이트는 카에닌 황제가 직접 렌을 죽였다는 보고에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자기 것인 나와림을 동제국에서 데려가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홧김에 죽인 것이리라. 나와림 중 생사가 불분명한 채로 사라진 자들이 몇 명 있었기에 이번에 카에닌 황제가 렌을 죽인 것도 예외적인 것은 아니었다. 샤이트는 긍지 높고 아름다웠던 그녀가 이렇게 허무하게 스러진 데 대해 아쉬움을 느꼈다. 그녀 덕분에 동제국 전체가 은혜를 입은 셈이었는데. 그래도 다행히 펠리시티 황후와 똑같은 얼굴이 다시 나타나 동제국 황실을 어지럽힐 일은 이제 없어졌다. 샤이트는 이 소식을 전했을 경우 테룬 황제가 얼마나 상심할지에 생각이 미치자 심란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 미로닌이 들어왔다. "무슨 걱정이 있어?" "황궁의 일이야." 현명한 미로닌은 샤이트의 기밀업무에 관해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피곤해 보여." "응."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잊어버려." "그래, 고마워." 미로닌이 샤이트를 따뜻하게 안아 주자 샤이트는 몸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테룬 황제 또한 자기처럼 하루빨리 진정한 사랑을 만나 마음의 안정을 얻으면 좋으련만. ===================================================================치료사 렌 [7] 치료행의 시작 (5) -------------------------------------------------------- 황궁의 항마석 결계 때문에 브림의 황궁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데이그랜은-동제국 건국 당시 하라스 대제에게 항마석을 제공하고 결계 설치하는 법까지 가르쳐준 것은 바로 자신이었지만, 인간들이 결계에 관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자신이 남겨 놓은 드래곤용 백도어를 발견하여 막아놓을 줄은 정말 몰랐다-차선책으로 수상인 샤이트 데 위든의 저택에 탐지마법을 펼쳐 놓았다. 물론 수상의 관저에도 항마법 결계가 펼쳐져 있기는 했지만 항마석을 사용하지 않은 평범한 결계여서 드래곤의 마법으로 그 정도는 얼마든지 깰 수 있었다. 이제 샤이트가 수상관저에서 나누는 대화는 모두 데이그랜이 탐지할 수 있었다. 데이그랜이 투숙하고 있는 곳은 브림에서 가장 호화로운 여관의 스위트룸이었다. 인간세계에 나올 때마다 가능한 한 최고의 것을 즐긴다는 것은 데이그랜의 모토였다.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사치품과 기호품들은 데이그랜과 다른 용들에게 늘 새로운 기쁨을 주었다. 지금 그가 걸치고 있는 검은 색 빌로드 토즈도 가장자리가 검은 밍크털과 흑수정으로 장식되어 있는 최고급품이었고, 마시고 있는 포도주는 동서제국을 통틀어 가장 향기롭다고 이름이 놓은 것이었다. 인간들은 정말 재미있는 존재였다. 들판에 널려 있는 포도로 이렇게 오묘한 향이 서린 포도주를 만들어 내다니. 데이그랜은 포도주잔을 돌려 향기를 코로 들이마시고 다시 한 모금을 입에 머금어 입 안에서 굴렸다. 풍부한 바디가 짜릿하도록 근사했다. 그는 푹신한 안락의자에 편안히 자리잡고 앉아 포도주를 홀짝이며 탐지마법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대화를 엿들었다. "투벤, 투벤, 대답해라!"까지 엿듣기를 마친 데이그랜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희미하게 느껴지던 렌의 기운은 며칠 전부터 끊겼었다. 그래서 한동안 그는 정말로 렌이 죽은 게 아닌가 생각하고 절망했다. 그러나 어젯밤부터 그는 다시 렌의 기운을 느꼈다. 역시 용족의 운명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리는 없었다. 그리고 오늘 오후 렌의 기운은 다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였지만 이제 그는 대강의 사정을 추리할 수 있었다. 렌은 아마도 기운을 숨기는 마법을 쓰거나 그런 류의 마법아이템을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더욱 의아한 점이 있었다. 렌이 분명히 살아 있는데도 저 첩자는 렌이 자기가 보는 앞에서 죽었다고 보고했다. 그렇다면 저 첩자가 거짓말했거나 아니면 자신이 한 얘기를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까 들은 어조로는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서제국의 황제가 첩자의 정신을 조작했다는 말이었다. 카에닌 황제가 개입했다면 일은 복잡해질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든간에 카에닌이 렌을 감추려는 거라면 렌을 찾기도 힘들고 그의 손에서 렌을 데려오는 것 또한 쉽지 않을 것이다. 데이그랜도 다른 용들과 마찬가지로 카에닌 황제를 경계했다. 그가 카에닌과 일대 일로 붙을 경우 그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카에닌 황제의 마력은 강대했다. 데이그랜은 잠시 고민했다. 사람을 찾기 위해서는 결국 인해전술로 나갈 수밖에 없는데 용들이 부릴 수 있는 엘프와 드워프의 수는 너무 적었고 또 너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만약 카에닌 황제가 렌의 주위에 있다면 서제국 영토 내에서 렌을 찾아나서는 것은 위험했다. 인간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용들이 만능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저런 사정을 고려해 보면 직접 서제국으로 가 렌을 찾는 방법과 동제국에 머무르면서 동제국 황제로 하여금 렌을 찾게 하는 방법 중 가능성이 더 큰 것은 후자였다. 처음 파이브룬 대공이 동제국 건립의 꿈을 키울 때부터 드래곤들, 특히 자신이 많은 도움을 주었으니 동제국과 드래곤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이라 할 수 있었다. 항마석 결계뿐만 아니라 파이브룬 대공의 가계에 소드마스터의 피를 넣어 준 것도 드래곤들이었기에, 동제국의 깃발에는 아직도 용들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현재의 테룬 황제가 렌에게 저렇게 집착하는 한 그가 드래곤으로서의 정체를 밝히고 렌을 찾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역시 신분을 숨기고 황궁 안으로 침투하여 렌을 찾는 데 조력한 후 렌이 발견되는 순간 낚아채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물론 그것과 병행하여 서제국 내에 흩어져 있는 엘프와 드워프들로 하여금 은밀히 렌을 찾게 해야 할 것이다. "후훗, 모처럼 마법사 노릇을 해 볼까?" 마법사가 부족한 동제국 황궁에서 써클이 높은 고위마법사를 환영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으니, 적당히 7써클, 아니면 아예 최고위 마법사 쿠드와 마찬가지로 8써클로 설정한 후에 황궁 내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일 것이다. 신원조회가 제일 문제였으나, 엘프로 폴리모프하고 남대륙 엘프들로 하여금 신분증명을 하게 한다면 손쉽게 해결될 것이다. 데이그랜은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엘프 풍으로 바꿔 나갔다.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물결치는 푸른 빛, 피부는 엘프답게 투명하리만큼 하얀 색, 눈은 머리카락 색에 맞추어 검푸른 내해보다도 더 짙고 파란 색, 콧날은 섬세하고 오똑하게, 그리고 입술은 핏빛처럼 붉게. 자신의 작품을 보고 데이그랜은 스스로 뿌듯해 했다. 이 정도면 남녀 불문하고 넘어오지 않고는 못 배길 걸? 거울에 이리저리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던 데이그랜은 뭔가 부족한 것 같아 잠시 궁리하다가 손뼉을 쳤다. "그래, 아무래도 몸이 좀 더 호리호리해야겠어!" 데이그랜은 몸에 붙은 근육의 양을 조금 줄이고 약간 여윈 듯한 모습으로 바꿔나갔다. 입고 있던 의상이 조금 헐렁해졌다. "이제 완벽해!" 거울 앞에 서 있는 것은 만지면 부서질 듯 섬세한 미모를 지닌 약간 병약해 보이는 미청년 엘프였다. 흐뭇해진 데이그랜은 자랑할 겸 황룡 헤츨링 시오카의 상태도 살펴볼 겸 남대륙에 있는 청룡 안티니아의 레어로 이동했다. "안티니아, 시오카는 어떻습니까?" 데이그랜이 온 줄 이미 알고 있던 안티니아는 등 뒤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놀라지 않고 서서히 몸을 돌렸다.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상태인 그녀는 언제나처럼 푸른 빛으로 온몸을 휘감은 채 지극히 우아하고 생동감 넘치는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훗, 데이그랜, 당신이 푸른 바람의 마을 엘프로 폴리모프한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군요. 평소의 인간 모습보다도 더 아름답습니다. 역시 검은 색보다는 푸른 색이 훨씬 더 좋아 보이네요." 안티니아의 말에 데이그랜은 싱긋 웃으며 안티니아의 푸른 머리카락 몇 가닥을 집어 거기에 키스하였다. "푸른 색이 짙어지면 검은 색이 되고, 검은 색이 옅어지면 푸른 색이 되지요. 그대가 푸른 색 다음으로 좋아하는 색은 검은 색이 아닙니까?" 데이그랜의 말에 잠시 미소짓던 안티니아의 얼굴은 곧 어두워졌다. "저는 당신 덕분에 지금 이렇게 힘을 유지하고 있지만, 제 힘은 지금 시오카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전부 소모하고 있고, 그 때문에 가이레스 또한 조금씩 약해지고 있습니다. 네린은 말할 것도 없고요." 안티니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시오카는 변함 없어 보이는군요." 데이그랜의 말에 안티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함께 허공에 떠 있는 구체 속에서 아기처럼 웅크린 채 자고 있는 열 두 살 정도의 금발머리 여자아이를 응시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였지만 창백하고 마른 모습을 보면 소녀의 건강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걸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이제 얼마나 남았죠?" 데이그랜의 말에 안티니아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글쎄요, 길어야 삼년? 사년? 제가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사 년까지는 어떻게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이레스는 가끔 찾아옵니까?" "어제도 왔다 갔어요. 그는 무척 초조해하고 있습니다. 현재 자신이 무력하기 때문에 더 그렇겠죠." "당장은 그를 볼 낯이 없군요. 그가 또 오거든 제가 최선을 다하고 있노라고, 그리고 늦기 전에 그녀를 찾겠노라고 전해 주십시오. 이제 저는 엘프의 모습을 하고 동제국에 마법사로 취직하려고 합니다. 저번에도 알렸지만 저는 그 소녀가 반드시 동제국의 테룬 황제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발로 뛰어 찾는 것은 서제국 엘프와 드워프들에게 부탁하고 저는 동제국 황궁에서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서제국 카에닌 황제가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신중한 행보를 해야겠지요." "데이그랜, 당신은 용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니 당신이 선택한 방법이 가장 적절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다만 최선을 다하시되 억지로 하지는 마세요.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순리에 따라 나고 자라고 죽는 것이니. 그녀를 찾는다고 해서 시오카의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리라는 보장도 없지 않나요?" "번영과 생장의 청룡인 그대의 입에서 요즘은 죽는 얘기말고는 나오는 게 없군요." 데이그랜은 우울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안티니아, 인간 모습으로 있기보다는 본체로 돌아가는 것이 마법을 펼치기에 편하지 않습니까? 평소에도 늘 지금 모습으로 계시는 겁니까?" "가여운 시오카가 언제나 저 모습으로 있으니 저도 인간의 모습으로 함께 있어 주고 싶어서요." "다정하신 분." 데이그랜은 안티니아의 손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안티니아는 빙긋 웃었다. "긴긴 세월 속에서 가끔은 미물인 인간을 흉내내는 것도 나쁘지 않군요." -------------------------------------------------------- 치료사 렌 [7] 치료행의 시작 (6) -------------------------------------------------------- 다음날 렌과 카엔은 아직 해 뜨기 전인 새벽녘에 일찍 일어나 여행 준비에 나섰다. 테라미즈에서 오래 서성거려서 좋을 일은 없었기 때문에 둘은 인파가 많아지기 전에 서둘러 필요한 것을 사고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그들이 간 곳은 중앙시장이었다. 황궁에서 5아반(5마일) 정도 떨어진 이곳은 양탄자, 보석, 그림과 조각, 은식기 등 사치품을 주로 거래하는 제국시장과는 달리 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상품을 거래하는 곳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시장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교외에서 실어온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짐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 그날 쓸 생선을 고르는 요리사들, 꽃 경매에 참가하는 사람들, 모두가 생동감에 넘쳐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카엔과 렌은 각자 챙겨온 약간의 짐을 짊어진 채 시장 입구에 멍하니 섰다. "렌, 도대체 뭘 사야 하는 겁니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카엔이었다. 카엔은 동서남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했던 350여년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 때 그는 대부분 순간이동으로 옮겨다니고 숙소며 식사는 전부 가벼운 정신조작으로 해결했었기에 여행준비 따위를 어떻게 하는지 알 리가 없었다. 지금 렌의 눈치를 보는 그가 그런 수법을 쓸 수는 없었다. 렌 또한 제대로 된 여행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참으로 난감했다. 홍콩에서 유럽여행을 준비하면서 여행가방을 싸 본 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 때 가방 속에 챙겨 넣었던 셀린느의 썬드레스, 베르사체 선글래스, 수영복, 샌들, 스니커즈, 야회복, 청바지와 티셔츠, 속옷, 오페라글래스, 론리 플래니트 여행안내서, 챙 넓은 모자, 자외선 차단제, PDA, 키엘의 입욕제 등등은 이 곳에서는 구할 수도 없고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들이었다. 고민하던 렌은 문득 도서관에서 읽었던 삼류소설 생각이 났다. 제목이 "허풍선이 치료사의 모험"이었는데, 입만 살아있는 넉살좋은 치료사가 여기저기에서 돌팔이 치료행각을 벌이면서 행운과 말발로 위기를 해결하고 미녀와 결혼한다는 내용이었다. 치료사가 주인공인 소설이 흔치는 않았기 때문에 렌은 상당히 흥미진진하게 읽었었다. 으음, 그 때 그 치료사가 어떻게 하고 다녔었더라? "카엔님, 먼저 말을 사야 해요!" "말이라니, 순간이동으로 다니면 될 것을 왜 말이 필요합니까?" 카엔은 약간 찌푸리며 물었다. 렌은 책의 내용을 되새기며 대답했다. "원래 치료사라는 건 발길 닿는 대로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사람들도 치료하고 소식도 전해주는 그런 일을 하는 건데, 순간이동을 해 가면서 중간생략하고 무조건 목적지로만 다니면 치료사답지 않다고요. 또 순간이동하다가 잘 못해서 누군가의 눈에 띄면 우리의 정체가 드러날지도 모르니 위험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여행의 진정한 묘미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 있답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열심히 설명하는 렌의 모습에 카엔은 웃음을 지었다. "좋습니다, 그럼 우리 말부터 사러 가요." 마시장에 간 둘은 수많은 말들을 보고 무얼 어찌 해야 할지 다시 한 번 난감해했다. "제일 좋은 말로 사죠." 카엔이 말하자 렌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사야 할 것은 천리마가 아니라 백리마예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음... 제가 살던 세상의 옛날 옛적에 천리마를 볼 줄 아는 백락이라고 하는 천하의 명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자식에게 천리마 보는 법은 안 가르치고 백리마 보는 법만 가르쳤어요.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고 묻자, 그 명인이 한 대답이, 천리마는 평생 한두 번 볼까말까 하지만 백리마는 자주 볼 수 있으니, 천리마 한 번 감정하는 걸로는 먹고 살 수 없지만 백리마 보는 법을 가르치면 자식이 굶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대요." "그거랑 백리마 사는 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으음...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요컨대 천리마라고 다 좋은 건 아니고, 다 필요와 목적에 적합한 게 따로 있다는 거죠. 뭐든지 가격 대비 성능이라고요. 전쟁터에 가는 것도 아닌데 천리마 타고 질주할 일이 있겠어요? 튼튼하고 속보에 능한 짐말이면 충분해요. 그리고 예산도 한정되어 있는데 여행의 초장부터 왕창 쓰는 건 바보같은 일이라고요." 어느새 다가와 렌이 얘기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던 중년의 마시장 주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 어린 아가씨가 식견이 똑바르구먼. 그 백락이라는 사람은 진짜 현명한 사람인가보네 그려." "칭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 얘기한 것에 딱 맞는 말 두 필이 있나요?" "이쪽으로 와 보게나." 결국 렌은 그 마시장 주인과 적당히 흥정을 벌인 끝에 대단한 준마는 아니었으나 피곤에 잘 견디고 지구력이 강한 밤색 말 두 마리를 한 마리당 3골드씩에 샀다. 일단 말을 사고 나자 갑자기 사야 할 물건들이 마구 떠올랐다. 둘은 시장의 여러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건량, 침낭, 휴대용 냄비, 겸자와 핀셋 대용으로 쓸 큰 집게와 작은 집게 등등 필요한 것들을 사들여 말 등에 쌓았다. 마지막으로 렌은 메스로 쓸 칼을 사기 위해 무기점에 들렀다. 무기점 주인은 렌의 설명을 듣자 작고 얇은 칼날이 달린 칼 하나를 추천했다. 그다지 품질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기성품으로는 그것 말고는 없었기에 렌은 아쉬운 대로 10실버를 주고 그 칼을 샀다. 무기점 주인은 원하는 칼을 손에 넣으려면 마이리아 시로 가야 한다고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마이리아 시에는 드워프 상관(商館)이 있는데, 그 바로 옆에 드워프들이 운영하는 대장간과 금속세공소가 있어 인간의 힘으로는 만들 수 없는 놀라운 품질의 금속제품을 주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렌은 가게 주인에게 감사를 표하고 밖으로 나왔다. 쇼핑을 마치고 나니 한낮이 되었다. "카엔님, 이제 어디로 갈까요?" 둘은 시장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의 잔디밭에 앉아 동서남대륙 지도를 땅에 펼쳐 놓고 고민했다. 모든 길은 그들 앞에 열리고 가능성은 끝이 없었다. 렌은 누구의 간섭도 없이 마음대로 자신의 행로를 결정할 수 있었다. 한 점 얽매인 데 없이 무한히 자유로운 느낌에 렌은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젊음과 기쁨으로 가득찬 렌의 웃음에 카엔 또한 한없이 기뻤다. "렌이 고용주인데 렌이 정해야죠." "그렇다면 우리 동쪽으로 가요. 이다 강을 따라서 계속 상류 쪽으로 가다 보면 아까 들은 마이리아 시에도 갈 수 있을 거고, 미넨 산맥을 넘으면 여기 검푸른 내해랑 문명의 탄생지라는 축복의 평야도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동대륙도, 남대륙도 모두 다녀 보도록 해요. 우리 함께 온 세상을 보자고요!" 렌은 카엔의 손을 잡고 일어나 유쾌하게 웃으며 춤췄다. 인생은 이렇듯 즐거운 것이었다. 카엔도 역시 새로운 인생을 다시 사는 기분이었다. 무수한 사람들의 시끄러운 생각들도 렌 곁에 있으니 아무렇지도 않았고, 사방에서 번져 오는 인간의 악의들도 렌의 맑고 선한 마음으로 희석되어 더 이상 그를 어지럽히지 않았다. 렌의 눈으로 본 세상은 그가 보던 세상과는 너무 달랐다. 렌의 사랑과 선의가 조금씩 그를 구원하고 있었다. 샤이트는 조심스럽게 황제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집무실 양쪽에 서 있는 호위무사들은 소드엑스퍼트 정도 수준에 든 무인들로서 황제가 친히 가려 뽑은 정예였다. 샤이트는 '저들이 황제의 진노로부터 나를 지켜주면 좋으련만.' 하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샤이트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떼었다. "폐하. 간밤엔 푹 쉬셨습니까?" "그다지 푹 쉬지 못했다." 대답하는 테룬 황제의 눈가엔 검은 그늘이 져 있었다. 샤이트는 황제가 요즘 거의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명하신 대로 렌이라는 소녀의 행방을 찾아 보았습니다." 테룬의 눈은 갑자기 빛났다. "말해 보라!" "원래 테라미즈에는 6써클 마법사 바르민을 첩보책임자로 하여 다섯 명의 마법사 첩보원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바르민에게 렌을 찾아 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바르민은 렌이 카에닌 황제의 나와림이 되어 황궁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렌을 찾 으러 아카데미에 잠입했다가 행방불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섯 명의 마법사 첩보원들도 그로 부터 2, 3일 후에 모두 행방불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젯밤 그 마법사 첩보원 중 한 명인 투벤이라는 자가 연락을 취해 왔습니다." 테룬의 얼굴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렌의 소식은 대체 어떻게 되었는가?" "투벤이 전해 온 소식에 따르면, 렌이라는 소녀는 바르민이 사라진 그 날 나와림 안딘으로 봉해졌고, 나머지 첩보원들이 색출된 바로 그날 첩보원들이 보는 앞에서 카에닌 황제에게 처형당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테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나와림 안딘이란 서제국 황제 카에닌이 특별히 총애하는 소년에게 내리는 칭호입니다. 카에닌 황제의 잔인함과 변덕은 여기 동제국에서도 유명하고, 그가 총애하는 나와림을 죽이거나 바보로 만들었다는 일화는 셀 수도 없을 지경입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보면, 아마도 바르민이 나와림인 렌을 찾아 동제국으로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카에닌 황제가 알게 되자 렌을 일부러 나와림 안딘으로 지명하고 첩보원들을 모두 색출한 후 그들 앞에서 보란 듯이 렌을 죽인 것으로 보입니다." "렌이 죽다니, 그럴 리 없다!" 테룬은 부들부들 떨며 샤이트의 말을 부정했다. "투벤이 직접 한 이야기입니다." 샤이트는 냉정하게 말했다. 테룬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그녀를 찾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녀가 죽었단 말인가?" 그 말에 샤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테룬은 으아아아 하고 고함을 지르며 황제의 책상 위에 얹혀진 서류며 옥새며 기물을 뒤엎고 칼을 뽑아 책상마저도 두동강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격렬한 반응에 샤이트는 당황했다. 테룬은 그러다 털쩍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대도 펠리시티 황후가 내게 저주를 퍼붓던 걸 기억하고 있지? 그녀의 저주가 맞아들어가고 있다고 생각지 않나?" 물론 샤이트는 그 때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차마 대답하지는 못했다. "나가 보라." 황제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샤이트는 걱정스런 눈길로 황제를 쳐다보다가 깊이 허리 숙여 절하고 나왔다. 아무래도 렌이라는 소녀는 자신의 생각보다도 황제에게 훨씬 더 중요한 존재였던 듯했다. 대책을 시급히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여자로 인한 상처는 여자로 낫게 하는 게 최고였다. 프린다인 공국의 공녀 티르안을 한시바삐 황후로 책봉하고 황제에게 여자의 손길과 가정의 따뜻함을 느끼게 하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다. 샤이트는 스스로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과연 그리 쉽게 일이 풀릴지 의심스러웠다. 샤이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또 한 가지 의심이 떠올랐다. 왜 카에닌 황제는 굳이 첩자 중 한 명을 살려두어 소식을 전해야만 했을까?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났지만 그는 테룬 황제가 렌을 단념하기 바라는 마음에서 그 의심을 자신의 가슴 속에만 묻어 두었다. 테룬은 샤이트가 나가고 난 후에도 계속 망연자실한 채로 앉아 있었다. 한 번 벗어났던 늪에 다시 빠질 때는 더 빨리 가라앉듯 그는 지금 전보다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뭔가 잘못되기 시작한 것일까? 렌이 말한 대로 모든 권력투쟁에서 떠나 조용히 숨어 지내는 것이 맞지 않았을까? 형님도 살리고 어머니도 살리는 길이 있지 않았을까? 그들을 죽임으로써 그의 마음 속 어둠을 정화할 열쇠까지 함께 부숴버린 것은 아닐까? 테룬은 황위에 오른 그 순간부터 괴로워했고, 자신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저주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어느 순간 렌이 나타나 그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주리라. 그 순간 그는 렌이 살아도 된다고 말했던 그 때처럼 이 고통에서 벗어나리라. 그런데 그녀가 사실상 자신 때문에 죽었다니! 그의 피 속을 달리는 자살과 파괴의 충동을 달래 줄 사람은 이제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정말로 어머니의 저주가 들어맞는 것인가. 그는 절망했다. ===================================================================치료사 렌 [7] 치료행의 시작 (7) -------------------------------------------------------- 테라미즈를 벗어나자 녹음이 한층 짙어져 가는 숲과 노랗게 익어가는 밀밭이 번갈아 나타났다. 이다 강 북쪽은 강수량이 적은 편이어서 밀농사를 주로 짓고, 이다 강 남쪽은 북쪽보다 훨씬 강수량이 풍부하여 쌀농사를 많이 짓는다고 했는데, 렌과 카? @?따라가는 관도는 이다 강에서 북쪽으로 5아반 정도 떨어져 이어지는 길이어서 그들은 줄곧 밀밭을 지났다. 렌은 익어가는 밀밭에 여름 바람이 불어 황금 물결이 치는 광경을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착한 밀들은 잘 여물어 귀엽게 고개를 숙이고, 뿌린 만큼 거두는 이치를 아는 농부들은 겸손하게 밭을 가꾸고 있었다. 생활력 강한 아낙네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남정네들을 불러내 준비해온 점심을 함께 나눠 먹고, 그 곁에서 아이들은 모두 볼에 살이 올라 통통한 모습으로 즐겁게 뛰어다녔다. "아가씨, 총각, 어디 가나?" 어느 아낙네가 묻자 그 옆의 다른 아낙네가 당장 말을 고쳤다. "척 보니 신혼부분데 뭔 소리야? 맞지?" 그 말에 사람들은 와르르 웃었다. 렌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저희들은 그냥 동료에요. 저는 치료사고요." "어머, 어린 아가씨가 대단하네. 저 총각은 그럼 뭐야?" "제 조수에요." 렌의 말에 사람들은 뭐가 우스운지 다시 까르르 웃었다. "저 총각은 벙어리야? 왜 아무 말도 안 해?" 그 말에 렌은 다시 웃으며 대답했다. "저 총각은 워낙 마음이 여리고 수줍어서 낯선 사람들에게는 말을 잘 못해요. 귀엽지 않나요?" 렌의 설명에 카엔은 새빨개졌고 그걸 본 사람들은 박장대소했다. "아가씨, 가면서 이거 먹어!" 맨 처음 말을 건넸던 아낙네는 갓 구운 빵 한 덩이를 렌에게 던져 주었다. "고마워요!" 렌은 유쾌한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앞으로 말을 몰아 나갔다. "뭐라고 한 말씀 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카엔님?" 렌이 웃으며 말을 걸자 카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저렇게 유쾌하고 악의 없어 보이는 사람들조차도 한 꺼풀 벗기면 온갖 더러운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까 맨 처음 말을 건 아낙네는 '흥, 팔자 좋네. 남자 끼고 유람이라니. 얼굴도 못 생긴 게 남자 후리는 재주는 있나 보네?'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옆의 아낙네는 '저 계집애가 저 총각이랑 잤을까, 안 잤을까? 얌전해 보이지만 틀림없이 잤겠지? 남자랑 여행하는 계집애들은 다 걸레지. 그런 애들에 비하면 힘들어도 농부의 아내가 백 번 낫고말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여행을 시작하면서 자신에 대한 악의는 그냥 넘기리라고 결심했었지만 렌에 대한 악의는 참고 넘어가기 힘들었다. 렌이 아무것도 모른 채 저들에게 감사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카엔은 저들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카엔이 아무 말도 없자 렌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을 멈추었다. 카엔도 따라서 멈췄다. 렌은 카엔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럴 리 없는데도 렌이 그렇게 자신의 눈을 들여다볼 때마다 카엔은 마치 렌에게 마음을 읽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 기분이 별로 안 좋으시죠?" "아닙니다." 카엔은 대답하며 렌의 눈길을 피했다. 렌은 고개를 쭉 빼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카엔의 눈길을 따라갔다. '저 사람들의 뭔가가 카엔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 거야. 내가 눈치채지 못한 무언가를 눈치챘을 수도 있고. 카엔님은 현명하면서도 섬세하니까 나보다 많은 것을 보았겠지.' 렌은 카엔의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카엔님, 혹시 저 사람들이 신혼부부 어쩌고 해서 기분 상하신 거에요?" 카엔은 화들짝 놀라 부인했다. "아닙니다! 절대 그건 아니에요!" 렌은 다시 웃었다. "카엔님, 혹시 사람들이 저나 카엔님을 두고 무슨 말을 하더라도 기분 상해하지 마세요. 우리 둘이 함께 다니는 한 그런 이야기들은 꼭 나올 거에요. 애인이냐는 둥, 부부냐는 둥, 별별 얘기들을 다 하겠죠. 하지만 그냥 흘려버리세요. 마음에 담으면 독이 되는 이야기도 흘려버리면 그냥 물처럼 무해하답니다. 그리고 저는 강해요. 제가 카엔님을 지켜드리겠어요. 그러니 아무 걱정 마세요." 카엔은 정말로 렌이 마음을 읽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마음 속이 뜨거워졌다. 카엔은 감동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렌을 따라 천천히 말을 몰았다. 카엔의 표정이 풀어지는 것을 본 렌은 안심하고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하늘은 파랗고 뭉게구름은 높이 떠 하얗고 밀밭은 무한히 노랗게 펼쳐져 있었다. 아득한 평야 끝의 소실점을 보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기분이 든 렌은 갑자기 외쳤다. "카엔님, 노래 불러 주세요!" 카엔은 황당한 표정으로 렌을 쳐다보았다. "노래라고요? 이 길거리에서요?" 다행히도 관도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그래도 길거리는 길거리였다. 렌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계약서를 잘 읽어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카엔님은 고용주인 제가 지시하는 기타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의무가 있어요. 그러니 노래 불러 주세요!" 카엔은 투덜거리며 계약서를 꺼내 보았다. 무심코 넘어갔던 조항이었는데 정말로 제1조에 그런 구절이 있었다. "렌, 이건 불공정한 계약이고 독소조항이예요. 이건 마치, 렌이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해야 된다는 것처럼 되어 있잖아요." 렌은 씨익 웃었다. "그러길래 잘 읽어 보고 서명하셨어야죠. 계약 체결할 때의 첫번째 수칙은 조목조목 잘 읽어보고 서명하는 것이랍니다. 후훗. 자, 이제 노래 불러 주세요!" 카엔은 주위를 둘러본 후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자 얼굴을 붉히고 나직하게 노래부르기 시작했다. 아주 어린 시절, 모든 고통이 시작되기 전 어머니가 자장가 대신으로 불러 주던 노래였다. 그의 기억 속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행복한 부분이었다. 길에서 길로 마을에서 마을로 사랑 찾아 여행을 떠났네 슬픔과 기쁨 고통과 환희 모든 것을 겪었네 다 잃고 돌아와 초라하게 섰을 때 내 곁에는 그녀가 있었네 꽃 같고 별 같고 보석 같고 꿀 같은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네 온 세상 다 돌아 모든 것 잃었지만 결국 나는 모든 것을 얻었네.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렌은 예상치 않았던 멋진 노래에 감동하여 말을 멈췄다. "정말 근사해요. 카엔님, 혹시 환자가 없거나 장사가 안 되면 우리 음유시인으로 나가도록 해요. 제가 매니저 해드릴게요." 렌의 찬사에 카엔은 몸둘 바 몰라 했다. "과찬입니다. 그런데 매니저가 뭐예요?" "후훗, 그런 게 있어요. 답례로 저도 한 곡 불러 드릴게요." 렌은 짐꾸러미에 달려 있던 샤티를 풀어 품에 안고 한나라 시절에 전해 오던 악부에 이 세계의 곡을 붙여 노래불렀다. 자신의 마음을 담아 부르는 노래인데, 그가 알까? 하늘이여! 그대 사랑하는 마음 긴 목숨 다하도록 변함 없으리 산에 구릉 없어지고 강물 말라 버리고 겨울에 천둥이 치고 여름에 눈 오고 하늘과 땅이 합쳐지면 비로소 그대와 헤어지리 上邪! 我欲與君相知 長命無絶衰 山無陵 江水爲渴 冬雷震震 夏雨雪 天地合 乃敢與君絶 카엔은 이 간절한 노래가 렌의 마음을 그대로 담은 것임을 알았다. 뭉클했다. 이토록 절절한 사랑을 받다니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카엔은 당장이라도 렌에게 사랑고백을 하고 싶었다. 그는 그 동안 수도 없이 그 생각을 했다. 특히 렌이 때때로 카엔의 마음을 몰라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때 그는 자기 마음을 그 자리에서 밝히고 싶었다. 그러나 렌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황제임을 알리고 자신의 과거도 모두 드러내야 할 것이다. 그런 후 렌의 마음이 변치 않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사랑 고백을 할 자격이 생길 것이다. 지금 상태에서 가짜 신분으로 하는 사랑 고백이란 거짓 위에 거짓을 쌓아올리는 것일 뿐이었다. 손버릇 안 좋았던 그가 타는 듯한 욕망을 애써 자제하고 렌에게 적극적으로 애정표시를 하지 않는 것도 그런 주저함 때문이었다. 카엔은 마음이 답답해져서 말에 박차를 가했다. 렌은 의아해하다가 곧 그를 따라갔다. =================================================================== 치료사 렌 [7] 치료행의 시작 (8) -------------------------------------------------------- 테라미즈를 지나 나오는 첫번째 소읍은 니암이라고 불리는 인구 1,000명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테라미즈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목에는 도시가 두 개 있었지만, 일단 도시는 건너뛰고 당분간 치료술을 소읍에서만 펼치기로 정했기 때문에(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한다는 것이었고, 또다른 이유는 기존의 치유마법사들과의 영업권 분쟁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에 렌이 읽은 치료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에서도 큰 도시의 치료는 모두 치유마법사가 담당하고 치료사는 마법사가 배치되어 있지 않은 소읍만 다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렌과 카엔은 도시에서는 하룻밤 잠만 자고 식량만 보충하여 바로 나왔다. 이왕 치료사 노릇을 하는 바에는 완벽하게 이 동네 식으로 할 것. 둘이, 아니 렌이 세운 원칙은 그것이었다. 그동안 순순히 렌의 말을 따라 온 카엔이었지만 마을 어귀에서 렌이 천을 펼쳐 커다랗게 "치료사-각종 질병 치료"라고 써서 장대에 묶고 손에 들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렌, 뭐하는 겁니까?" "뭐하는 거냐니요. 카엔님은 이 세계 사람이니까 저보다 잘 아실 거 아녜요. 원래 치료사들은 이렇게 깃발을 들고 다니며 마을 광장에 터잡고 앉아 환자를 받는 거라고요." 렌은 문제의 그 소설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리며 설명했고, 카엔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렌의 뒤를 따라갔다. 마을은 평온하고 고요했다. 사람 없는 마을 광장에는 분수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만 재잘거렸고 정오의 햇살은 광장을 둘러싼 오밀조밀한 집들을 정지화면처럼 비추었다. 그늘에 의자를 놓고 꾸벅꾸벅 졸던 몇몇 노인들은 렌과 카엔이 광장으로 접어들자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들을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렌은 긴장했다. 진짜로 생계를 걸고 치료술을 펼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렌은 홍콩에서 자신이 빈민들을 위해 펼쳤던 치료가 우쭐한 마음에서 철없이 한 자선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제서야 렌은 왜 첸사부가 치료를 할 때 반드시 치료비를 받으라고 했는지를 이해했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굶게 될지도 모른다, 카엔의 생계까지도 책임져야 한다는 절박함이 렌을 더욱 엄숙하게 했다. 아, 그래도 자기 손으로 자기 먹을 것을 번다는 것은 얼마나 신성하고 즐거운 일인가! 렌은 마침내 마음을 가다듬고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 분수 옆에 자리잡았다. 카엔의 도움으로 테라미즈넨의 시장에서 샀던 접었다 폈다 하는 천으로 된 탁자와 의자, 우산처럼 생긴 차양을 분수 앞에 설치한 렌은 확성구슬을 꺼냈다. "자아, 치료사가 왔습니다. 평소 여기저기 쑤시고 결리던 분들, 피부에 이것저것 나서 미모를 가리던 분들, 툭하면 기침 나고 불편하셨던 분들, 집안에 마님 모셔두고 독수공방 시키시던 분들, 모두 나와 주세요! 치료사가 왔습니다! 치료비도 싸요!" 전부 황궁도서관의 그 소설책에서 배운 대사였다. 카엔은 너무나 창피하여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저 확성구슬이 저런 데 쓰일 줄 알았다면 미리 마력을 모두 해제해 놓는 건데. 사람들은 호기심에 하나 둘 얼굴을 내밀었으나, 평범하게 생긴 젊은 남녀 두 명이 분수대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도로 들어갔다. "휴우, 역시 뱀쇼나 불쇼를 해야 관객들이 모이려나 봐요." 렌은 한숨을 쉬었다. 환자가 와야 치료를 하는데 이 상황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그러다 렌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눈을 빛냈다. 렌의 마음을 읽은 카엔은 렌이 입을 열기도 전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저, 카엔님, 환상마법 같은 거 쓸 줄 아시죠?" 렌은 카엔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술쇼 좀 해 주실래요?" 카엔은 렌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마술쇼의 이미지-어릿광대같은 옷을 입고 장미꽃을 비둘기로 바꾼다든지 사람을 장난감 칼로 찌르고 사라지게 했다가 나타나게 한다든가 하는 것-를 읽고 망연자실했다. 황제에다 9써클 마법사인 자신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너무너무 창피해서 앞으로 다시는 마법사들 사이에서 얼굴을 들지 못할 것이다. "난 못합니다." 카엔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계약서 1조를 잊지 마세요." 위협하듯 속삭이는 렌의 말에 카엔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어쩌자고 그 계약서에 무심코 서명했지? 카엔은 마지못해 손에서 빛을 일으켰다. 어쨌든 시선만 끌면 되는 거겠지? 빨주노초파남보의 불꽃 일곱 개가 피어올랐다. 불꽃은 모이기도 하고 뻗어나가기도 하고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렌은 흡족하게 웃었다. "자, 나와서 마술쇼도 보시고 치료도 받으세요!" 그제서야 사람들은 광장으로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감탄을 한몸에 받으며 카엔은 계속 불꽃을 돌렸다. 어느 정도 사람이 모이자 렌은 카엔에게 신호했고, 카엔은 안도하며 뒷쪽으로 물러나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혔다. "자, 무슨 병이시죠?" 첫번째 환자는 40대 아주머니였다. 렌은 맥을 짚어 보고 그 아주머니가 대답하기도 전에 바로 말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신 거죠?" "아이구 그걸 어떻게 아는 건가요? 아가씨 마법사예요?" 그 아주머니의 지병을 아는 주위 사람들도 모두 감탄했다. "저는 아주 용한 치료사거든요." 렌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자화자찬하며 아주머니의 손을 끌어다 무릎 위에 놓고 침을 하나씩 놓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눕혀 놓고 직접 허리에 침술을 시전하는 것이 좋겠지만 일단 즉효를 보여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그 다음에 복잡한 치료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신기한 치료에 사람들은 둥글게 둘러싸고 치료과정을 구경했다. 손에 빽빽하게 꽂힌 침에 정명기를 약간 불어넣고 조금 있다가 다시 침을 뺀 렌은 아주머니에게 일어나 보라고 했다. "어이구머니나, 허리가 하나도 안 아프네!" 아주머니는 신기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허리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감탄했다. "내일 한 번 더 치료받으셔야 해요. 저희가 묵을 여관으로 아침 무렵 찾아오세요. 지금 치료비는 1실버이고요." 1실버는 보통 한 사람의 두 끼 식비 정도였다. 깨끗하고 기운 자국 없는 소즈를 입고 있는 아주머니의 행색을 볼 때 1실버 정도는 충분히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나다를까, 아주머니는 아까운 기색 없이 1실버를 꺼내 렌 앞의 깡통 안에 넣고 날아갈 듯한 걸음으로 물러났다. 침을 놓는 장면을 처음 보는 카엔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렌이 침술을 시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대체 어떻게 바늘을 찔러 사람을 낫게 하는 겁니까?" "후, 간단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 몸에는 기운이 흐르는 길, 경락이라는 게 있고, 그 경락에는 기운이 군데군데 맺히는 혈이라는 것이 있는데, 혈을 적절하게 자극하면 그 경락에 관련된 질병을 치료할 수 있어요. 나중에 자세히 설명 드릴게요." 카엔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환자가 몰려와 더 이상 질문을 할 수 없었다. 다음 환자는 40대의 남자였다. 환자는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아까 독수공방 어쩌고 했지 않수?" 렌 또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발기가 잘 안 되시죠? 이쁜 여자를 보아도 거시기가 흐물거리고요." 옆에 있던 카엔은 얼굴을 확 붉히고 렌을 째려보았으나 렌은 빙글거리며 모른 척 했다. 맥을 짚은 렌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무척 센 분 아니셨어요?" 중년 남자는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에 술을 너무 많이 드셔서 그런 거예요. 술은 일 주일에 한 번, 한 병 이상은 드시지 마시고요, 쪼그리고 앉았다 벌떡 일어났다 하는 운동을 하루에 백 번씩 하세요. 그리고 숨을 들이쉬며 항문에 힘을 빼고 5초 정도 있다가 숨을 내쉬며 하복부와 항문을 5초 정도 조이는 괄약근 수축운동을 하루에 200번씩 반복하시고요. 그러면 정력에 즉효예요." 그는 더욱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저기... 정력제 같은 건 없소?" 렌은 이해심 깊은 미소를 지으며 가방을 부스럭거리다 약초 꾸러미 하나를 꺼냈다. "이건 정력에도 좋고 몸에도 좋은 약초인데, 하루에 한 줌씩 뜨거운 물에 넣어 드세요. 몸에 좋다고 한꺼번에 먹으면 영영 발기가 안 되는 수가 있으니 조심하시고요. 값은 2실버예요." 남자는 크게 기뻐하며 사라졌다. "정말로 효험이 있나요?" 카엔이 귓속말로 묻자 렌도 귓속말로 대답했다. "발기부전은 혈액순환이 잘 안 되어서 생기기도 하고 심리적인 이유에서 생기기도 하는 건데, 저 약초에는 혈액순환을 촉진하는 성분이 들어 있고 저걸 먹으면서 스스로 잘 될 거라는 확신도 들 테니 일석이조지요." "레이디가 발기부전이니 거시기가 흐물거리느니 하는 말을 써도 되는 거예요?" 카엔은 다시 약간 분개한 어조로 물었다. "사람을 치료하는데 레이디가 어딨어요. 저한테는 다 환자이지 남자도 여자도 없어요." 렌은 태연하게 말하고 다음 환자에게로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창백하고 깡마른 30대 남자 환자였다. "음... 통 잠을 못 주무시는군요." 이번 환자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 "이상하게 잠이 안 와서 벌써 사흘간이나 뜬 눈으로 샜어요. 이제는 미치겠어요." "틀림없이 낫는 즉효약이 있기는 한데 좀 위험한 약이예요." 렌은 목소리를 깔고 분위기를 잡아 가며 말했다. "뭐가 어떻게 위험한데요?" 환자는 약간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한 번 먹으면 확실히 잠이 오기는 하는데, 자칫하면 잠이 너무 깊이 들어 영영 깨어나질 못해요." 카엔은 렌의 말과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읽고 황당하게 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환자는 간절히 애원했다. "차라리 못 일어나더라도 잠 좀 자 보고 싶어요." "그럼 이 약을 가져가세요. 절대 다른 사람 주지 마시고, 정말 잠 자고 싶어 죽겠다 싶을 때만 드세요. 아셨죠?" 렌은 짐에서 환약병을 꺼내 그 중 20여알을 종이에 싸서 남자에게 주었다. "저, 그거 다 주시면 안 되나요?" 남자가 주저하자 렌은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요. 다른 사람은 뭘로 치료하라고요? 약값은 3실버예요." 남자는 3실버를 꺼내 렌에게 주고 소중하게 약을 품에 넣고 갔다. "렌, 저 약 무슨 약이예요?" "밀가루랑 검은깨 반죽을 동그랗게 빚은 거예요." 카엔과 렌은 다시 속삭였다. "그런 약을 천하의 명약인 것처럼 팔다니 사기 아녜요?" "사기가 아니라 플라시보 효과라는 거에요." "플라시보 효과요?" "예. 상당수의 사람들이 약이 아닌 걸 약이라고 믿고 먹으면 실제로 진짜 약을 먹은 것처럼 효과를 보는데 그걸 플라시보 효과라고 해요. 불면증이나 신경성 위염같이 정신상태와 관계 있는 질환에 특효예요." 렌은 웃으며 설명했다. "그런데 3실버나 받는 거에요?" "약값이 비싸야 좋은 약인 줄 알고 철석같이 믿죠. 카엔님 같으면 동전 몇 푼 받으면서 천하의 영약이라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카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치료사 렌 [7] 치료행의 시작 (9) =================================================================== 용한 치료사가 찾아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차례로 사람들이 찾아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리가 아프거나 소화가 안 되거나 피부병이었는데 모두 렌이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질환이었다. 가끔 찢어지거나 깨진 상처가 있는 사람이 오면 그런 사람들은 카엔이 치유마법으로 치료해 주었다. 찾아오는 사람 중에는 그렇게 중한 환자는 없었다. 아마도 광장까지 걸어나올 힘이 없거나 중병을 고치는데 치료사 따위는 믿지 않는 것이리라. 한참 치료하고 나니 슬슬 해가 지기 시작했다. 치료비를 담은 깡통은 제법 묵직했다. 렌과 카엔은 보람찬 하루를 보내고 난 후의 기분 좋은 노곤함에 젖어 광장 옆에 있는 마을 유일의 술집 겸 여관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여관 주인은 렌에게서 맨 처음 치료받은 바로 그 허리병이 있는 아주머니였다. 그 아주머니는 렌과 카엔을 무척 환? 되杉? 아들인 듯한 꼬마로 하여금 말을 마굿간에 넣어 새 꼴을 먹이게 하고, 렌과 카엔을 제일 좋은 탁자(그래 봤자 탁자가 전부 다섯 개밖에 안 됐지만)에 앉힌 후,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것저것 부지런히 음식을 날라 왔다. 음식을 다 나른 아주머니는 슬그머니 렌의 테이블에 끼어 앉았다. "치료사 아가씨, 뭐 재미있는 소식 들은 거 없수? 거 황제 폐하께서 뭐시라드라, 그 나와림 안딘인가 하는 걸 지명하셨다가 죽여 버리셨다는데, 그 소식 아는 거 있으면 얘기 좀 해 봐요." 아주머니의 이야기에 렌과 카엔은 서로 쳐다봤다. 렌이 둘러댔다. "저희도 자세히는 몰라요." "에이, 시시해라." 아주머니는 김 샜다는 듯 일어섰다. "저, 아주머니, 방 두 개만 준비해 주시겠어요?" 렌이 말하자 아주머니는 당장 난색을 표했다. "어쩌나, 치료사 아가씨, 우리 집은 손님방이 하나밖에 없는데. 침대는 두 개 있으니 괜찮지 않우? 저 총각이랑 좋은 사이 아니우?" 렌은 난처한 표정으로 카엔을 쳐다보다가 하는 수 없이 말했다. "그럼 그거라도 주세요." 카엔은 렌이 자신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데 다시 감사했다. 난처한 표정을 따라 짓기는 했어도 카엔은 지금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일을 어쩌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욕망이 되살아나 렌을 볼 때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한 방을 쓰면서 과연 렌에게 손을 대지 않고 자제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의 몸을 이렇게 강렬하게 갖고 싶어하게 될 줄이야! 꺼진 불과 같던 심신이 렌으로 인해 활활 타오르면서 카엔은 매일매일 한계를 넘나드는 기분이었다. 식사를 다 하고 나서 둘은 방으로 올라갔다.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났네요." 렌이 한숨을 쉬자 카엔이 대답했다. "소문이란 빨리 퍼지는 만큼 빨리 사라질 거에요." "그렇겠죠. 자, 이제 우리 돈 계산을 해요." 렌은 즐겁게 웃으며 그날 번 돈을 침대 위에 쏟아부었다. 실버와 동전을 차례로 세어 보니 놀랍게도 하루 수입이 80실버가 조금 넘었다. "공치는 날도 있겠지만, 이 속도면 우리 금방 부자가 될 거에요." 렌은 기뻐하며 8실버를 골랐다. "자, 이거 오늘 하루치 성과급이예요. 수고하셨어요." 카엔은 렌이 내미는 1실버 은화 여덟 개를 손에 얹고 신기한 듯 들여다 보았다. "고마워요, 렌. 그나저나 렌은 어떻게 그렇게 능숙하게 치료사 노릇을 하는 거죠? 나는 하루종일 렌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느낌입니다." "우후후후훗, 오늘 저 꽤 괜찮았죠? 놀라셨을지 모르겠지만 돈 버는 건 장난이 아니랍니다. 체면치레 할 것도 아니고요. 이 세계의 치료사가 원래 그렇게 영업하는 건데, 제가 처음부터 목에 힘 주고 고상한 척하면 환자들이 오겠어요? 치료사가 존경받는 직업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사람들이 치유마법뿐만 아니라 치료술도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될 거에요. 그리고 카엔님을 굶기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아무렴 굶기야 하겠습니까. 아니, 굶어도 좋으니 그 불꽃쇼는 안 하면 안 되나요?" 카엔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간청하자 렌은 킥킥 웃었다. "잘 어울리시던데요. 오늘 환자들이 많이 온 데는 카엔님 공이 참 컸어요. 그나저나 사람들이 아파하며 와서 나아 가지고 돌아가는 걸 보는 건 참 보람 있는 일이죠?" 카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렌이 사람을 치료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에게도 크나큰 기쁨이었지만 렌의 손에 고쳐지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마음도 일지 않았다. 사람들의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한지 수백 년, 렌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이 그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렌이 이 사실을 알면 슬퍼하겠지. "렌, 렌 같은 사람을 처음부터 만났더라면 나도 훨씬 행복해졌을지도 몰라요." 카엔은 조용하게 말했으나 렌은 그의 말투 속의 비통함을 느꼈다. "카엔님은 아직 젊으시잖아요? 앞으로 행복해질 시간은 얼마든지 남아 있어요." 렌은 일부러 기운차게 대답했다. "그나저나 카엔님, 여기는 다 좋은데 방이 부족한 거랑 목욕물이 마땅치 않은 게 흠이네요." 카엔은 그 말에 담담히 미소지으며 마법을 일으켰다. 안개같은 물방울들이 렌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흝고 지나갔다. 렌은 깨끗하고 뽀송뽀송한 상태가 되어 어안이 벙벙한 채 서 있었다. "와아, 정말 굉장해요! 샤워 마법이라니! 거기에 세탁 마법과 건조 마법까지! 전자동 드럼세탁기 같아요! 아무래도 카엔님 월급을 올려드려야겠어요." 렌은 마냥 신기해하며 말했다. 렌의 말에 이해 안 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카엔은 또다시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그녀를 위해 이런 사소한 것을 해 주는 것마저 왜 이리 행복한 건지 몰랐다. "카엔님, 이제 절대로 돌아보시면 안 돼요." 렌은 단단히 주의 주고서는 먼지투성이였다가 조금 전 마법에 의해 깔끔해진 소즈릴을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이제 카엔님도 잠옷으로 갈아입 으셔야죠." 카엔이 옷 갈아 입는 자태를 볼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며 렌이 속으로 음후후후 하고 웃는 걸 읽고 카엔은 한숨을 쉬었다. 이 아가씨는 가끔 가다가 이렇게 엉뚱하단 말이야. "나는 뭐 좀 할 게 있어서 나중에 갈아입을 겁니다." 카엔이 황급히 둘러대자 렌은 졸음이 쏟아지는 걸 겨우 참으며 말을 이었다. "내일은 거동할 수 없는 중환자들이랑 돈이 없어 못 나온 환자들을 보러 가요." 말을 마치자마자 렌은 침대에 쓰러져 쌔근쌔근 자기 시작했다. 카엔은 자신의 옷 갈아입는 모습과 자는 모습을 보겠다며 좋아하더니만 그대로 먼저 잠이 든 렌을 보자 귀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카엔은 잠든 렌을 애틋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나날이 더 커져갈 수도 있는 걸까? 렌과 함께 보내는 하루하루는 모든 것이 다 새로웠다. 그는 렌과 더불어 새로운 삶을 다시 처음부터 다시 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테라미즈에서 여기까지 지난 보름 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 그녀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전부 가지고 싶어. 그녀와 모든 것을 나누고 싶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욕정이 끓어올랐지만 카엔은 애써 진정시켰다. 카엔은 그곳에 앉아 잠든 렌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싶은 아쉬운 마음을 누르고 순간이동했다. 그가 지시한 대로 페람 공작은 11파잔 무렵까지 퇴근하지 않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페람은 황급히 무릎을 끓고 땅에 머리를 대었다. "그 동안 별일은 없었는가? 정무에 관해서 따로 보고할 내용은 없는가? 특히 동제국 쪽의 움직임은 어떠한가?" "예, 특별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그 쪽의 첩보조직이 와해되어 아마 섣부른 행동은 하기 힘들 것입니다." 페람은 문득, 정신조작의 결과로 완전히 신지를 상실하고 입에서 침을 흘리며 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그 투벤이라는 첩자를 떠올리고 몸을 떨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니 정말로 황제는 인간이 아닌 것인가. "네가 감히 내가 인간이 아닌지 의심하느냐?" 싸늘한 황제의 말에 페람은 소스라치게 놀라 다시 머리를 땅에 박았다. "폐하, 신하의 불충한 마음을 용서하소서.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겁에 질린 페람의 모습을 보며 카엔은 약간 불쾌해졌다. "내가 그렇게 무서운가?" "저희 제국민 모두에게 폐하는 외경과 숭배의 대상이십니다." 그게 아니라 공포의 대상이고 처치곤란인 애물단지겠지. 카엔은 조소했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대체 무엇 때문에 이 거대한 제국을 지금까지 끌고 왔었는지 의아해했다. 처음 제국을 건국할 무렵의 그 끓어오르는 분노와 열정이 사라지고 난 지금, 제국은 그에게 그저 거대한 짐일 뿐이었다. "그대의 능력을 발휘해서 내가 없는 동안에도 나의 부재를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라." 카엔은 약간 누그러진 투로 말했다. 페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친 김에 페람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 아가씨는 무사합니까?" 페람의 무례에 화를 내려던 카엔은 페람의 마음속에서 렌을 염려하는 마음을 읽자 화가 사라졌다. 카엔은 생각에 잠겨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입을 열었다. "그대가 왜 그것을 걱정하는가?" "그 아가씨와 그리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저는 잠깐의 대화로도 그 아가씨가 비범하면서도 따뜻한 소녀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카엔은 페람의 마음이 진심임을 읽었다. 사심 없는 순수한 염려였다. 카엔은 마치 페람이 카엔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처럼 기뻤다. "그녀는 지금 행복하니 걱정 마라." 카엔은 들릴 듯 말 듯한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페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기 전에 황급히 황제 전용의 욕실로 순간이동했다. 렌과 함께 하는 치료행은 무척 행복했지만 오랜 세월의 사치에 길든 그에게 거친 음식과 불편한 숙박은 옥의 티였다. 물론 샤워마법(사실 좀전의 그 마법에는 '이슬의 춤'이라는 근사한 이름이 붙어 있었지만 카엔은 어느새 렌이 만든 웃기는 이름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으로 씻는 방법도 있었지만 욕조 목욕에는 비할 바 아니었다. 대리석 해룡의 입에서 뜨거운 물이 뿜어져 나오는 수영장만한 거대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욕탕의 온기에 몸을 맡기며 그는 욕조 옆에 놓인 꿀과자와 와인을 집어들었다. 황궁의 꿀과자는 그가 황궁을 떠난 후 가장 아쉬웠던 것이었다. 꿀과자를 베어먹고 와인을 들이키자 하루의 피로가 모두 풀리는 기분이었다. 페람 공작이 불꽃쇼를 하는 내 모습을 보았더라면 기절초풍했겠지. 카엔은 그 생각을 하자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어느 정도 피로가 풀리자 카엔은 다시 렌 곁으로 갈 준비를 했다. 꿀과자를 렌에게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5써클 마법사의 순간이동은 보통 사람이 걸어서 5일 정도 가는 거리가 한계였으므로 황궁의 꿀과자를 가져간다면 설명할 방법이 막막했다. 자기만 사치를 누리는 것 같아 카엔은 조 금 미안해졌지만 오랫동안 밴 습관의 힘이란 어쩔 수 없었다. 여관방에 돌아와 보니 렌은 곤히 자고 있었다. 오후 내내 사람들을 치료했으니 피곤하지 않을 리 없었다. 카엔은 자고 있는 렌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자기 침대로 가서 누웠다. 침대에 깔려 있는 낡고 허름한 매트리스는 카엔의 성에 차지 않았다. 렌도 불편한 듯 몸을 뒤척였다. 카엔은 조용히 마법을 걸어 매트리스에 공기를 불어넣었다. 한결 푹신한 감촉에 렌은 자면서도 미소지었다. 카엔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기분좋게 자리에 누웠다. 렌의 모습을 눈앞에 보며 잠잘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축복이었다. ===================================================================치료사 렌 [7] 치료행의 시작 (10) =================================================================== 다음날 일찍 일어난 렌과 카엔은 서둘러 아침식사를 했다. 음식은 간소하지만 정갈하고 맛있었다. 여관 주인 아주머니의 허리에 침을 놓아 준 렌은 그녀에게 부탁하여 치료가 필요하지만 거동이 불편하고 돈이 없어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곳의 약도를 받아들었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 마을 외곽의 북쪽에 모여 살고 있었다.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에 렌과 카엔은 말을 놔두고 걸어서 그리로 갔다. 마을 광장 주변의 잘 손질된 집들에 비해 낡고 초라한 집들이 곧 나타났다. 렌은 아주머니가 표시해 준 한 집 한 집을 차례로 방문하며 치료했다. 첫째 집 환자는 혼자 사는 할머니였다. "할머니, 저는 치료사인데요, 어디 편찮으신 데 있나 봐드리려고 왔어요." 쿨룩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이어지다가 퉁명스러운 대답이 들려왔다. "돈 없어. 죽을 때 되면 죽는 거지." "치료비가 아주 싸요. 한 번 치료받아 보세요." 렌은 다정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걸었다. 한동안 대답이 없다가 마침내 할머니가 문을 열었다. 할머니는 허리가 구부러지고 빼짝 말랐지만 강단 있게 생겼다. 초라한 집안이 먼지 하나 없이 청소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할머니의 성품이 어떤지 알 만했다. 렌은 할머니의 걸음걸이를 보고 당장 왼쪽 무릎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자, 의자에 앉아 보세요." 렌은 할머니의 치마를 걷고 무릎과 다른 곳에 꼼꼼하게 침을 놓은 후 정명기를 불어넣었다. 할머니는 시원해 어쩔 줄 모르겠는 표정으로 시술을 받고 나서 렌이 침을 뽑자 고맙다는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퉁명했다. "치료비는 얼마야? 비싼가?" 렌은 웃음을 지었다. 집안 형편이나 깨끗하지만 여러 번 기운 낡은 소즈를 보면 사정이 어떤지 알 만했다. "2푼만 주세요." 할머니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래가지고서 장사가 되나?" 렌은 명랑하게 대답했다. "돈 있는 사람들한테 뒤집어 씌우면 돼요." "그래, 그렇다면야 나야 좋지." 할머니는 부스럭거리며 부엌 쪽으로 가더니 어느 단지 안에 숨겨 놓았던 2푼을 들고 나왔다. 렌은 가방에서 차봉지 하나를 꺼내 할머니에게 건넸다. "이건 기침을 줄여 주는 차인데, 아침저녁으로 식후에 드세요." "참말로 고마우이." 렌은 즐거운 마음으로 그 집을 나왔다. 다른 환자들의 치료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마을 북쪽에 거주하는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렌을 돌팔이로 취급하며 아예 문을 어주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선선히 문을 열어 주고 치료를 받았다. 사람들은 퇴행성 관절염, 신장염, 만성 위염, 그밖에 여러 가지 질병을 앓고 있었다. 의약의 혜택을 입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 약간의 치료, 한 번의 침술로도 렌이 놀랄 만큼 차도가 있었다. 당장 고칠 수 없는 만성 질환의 경우 렌은 통증을 가볍게 해 주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몸이 좋아질 수 있는지 설명해 주는 것으로 치료를 마칠 수밖에 없었다. 치료사와 마법사를 감당하기에 이 마을은 너무 작았기 때문에 이 곳에 머무르며 만성 질환자들을 치료해 주기는 곤란했던 것이다. 렌은 이 날 치료한 사람들에게서는 일인당 1푼에서 10푼(1실버는 100푼임), 그마저도 없는 집에서는 감자나 양파, 달걀 같은 걸 치료비로 받았다. 카엔은 째진 부위에 치유마법을 시전해 주거나 렌이 환자를 뒤집을 때 도와 주거나 하며 충실히 조수 노릇을 했다. 대강 한 바퀴 돌고 여관으로 돌아가려던 둘은 여관 앞에 전날 치료했던 환자 중 대여섯 명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 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벌써 읽은 카엔은 혐오감으로 얼굴을 찌푸렸으나 렌은 아직 아무 영문을 모른 채 그들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들은 렌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으며 말을 꺼냈다. "에, 치료사 아가씨, 말 할이 있는데..." "예, 무슨 일이신데요?" 렌이 생글거리며 묻자 그들은 잠시 주저했다. 제일 몸집 크고 씩씩해 보이는 남자(전날 정력제를 사간 사람이었다)가 말을 시작했다. "듣자 하니 오늘 치료한 사람들한테서는 치료비로 10푼만 받고, 어떤 사람들한테서 는 아예 그것도 안 받았다는데, 우리한테서는 어제 너무 많이 받은 거 아닌가?" 사내의 말투는 이제 완전히 반말로 변했다. 그 옆에 서 있던 사내도 덩달아 말했다. "치료사 노릇 잘 하려면 작은 마을에서 그렇게 사람 차별하면 안 되지. 어제 준 돈 중에서 10푼만 남기고 돌려주면 고맙겠어." 완전히 위협이었다. 렌은 화가 치밀었다. 카엔 또한 렌이 첫 치료부터 이런 식으로 인간의 저열한 탐욕에 부닥치게 되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카엔은 렌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렌, 내가 처리할까요?" 렌은 고개를 저었다. 카엔은 렌이 안간힘을 써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저 여러분, 여러분들은 모두 이 마을에서 지도층의 입장에 있는 분들 아니세요? 척 보니까 알겠는데요." 사내들은 서로 쳐다보다 어쨌거나 기분좋다는 듯이 웃었다. "거 아가씨가 보는 눈은 있구만." "여러분들께서는 힘들게 사는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자 하는 대인의 풍모를 가지고 계시지 않으세요? 자애로운 눈빛이며 넓으신 이마하며 자비심으로 넘치는 분들로 보이는 데요." 그들은 다시 서로 멋적게 웃었다. "그러니 여러분들께서 어제 주신 치료비 덕분에 오늘 제가 가난한 사람들을 헐값에 치료해 주었다면 여러분들은 물론 기쁘시겠지요?" 그 말에 사내들은 대꾸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도 석연치 않은 얼굴로 사내들은 미적거렸다. 렌은 다시 억지로 웃는 낯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여러분들의 훌륭하신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제가 특별히 좋은 약초를 드릴 테니, 다른 분들한테는 소문내지 마시고 여러분들끼리만 드셔야 해요." 렌은 가방을 부스럭거리다가 약초 주머니 한 개를 꺼냈다. 렌은 목소리를 낮췄다. "아주 특별한 밤을 보내고 싶으실 때 사용하세요. 즉효일 거예요. 한 줌 정도 차에 넣어 우려내어 드세요." "어허허허, 고마워. 뭐, 꼭 이런 거 안 줘도 되는데..." 사내들은 그제서야 만족하며 돌아갔다. 사내들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렌은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입을 열었다. "제가 준 저 약초는 정력제이긴 한데 먹고 나면 머리털이 다 빠져버리는 부작용이 있어서 버리려던 거였어요. 어디 한 번 두고 보라죠!" 보통 같으면 웃음을 터뜨렸겠지만 카엔은 렌의 마음 속에 아직도 분노가 남아 있음을 읽었기에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렌은 분노를 삭이며 긴 한숨을 쉬었다. "카엔님, 저는 이 세계에 오기 전에도 치료사 노릇을 했었어요. 그 때는 그게 본업이 아니긴 했지만요. 그 곳에서 제가 치료한 사람들은 대부분 극한에 이른 빈민이었어요. 그래서 이런 문제는 없었죠. 모두 서로 얼마나 어려운지 아니까 누가 치료비를 많이 냈느냐 적게 냈느냐 하는 시비는 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런데 저 사람들은 당장 먹고 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으면서도 남보다 돈을 더 내는 것은 못 참는군요. 그래요, 항상 그게 문제죠. 생존에 필요한 이상으로 갖게 되면 항상 탐욕이 생기죠.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첫 번째 마을에서부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요. 작은 마을이라 서로서로 사이 좋게 걱정해줄 줄 알았는데..." 렌은 말꼬리를 흐렸다. 카엔은 렌의 실망감을 읽고 우울해졌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놈들 정신을 조작해서 렌에게 사과하게 만드는 것말고는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렌은 한동안 침묵했다. 렌의 어지러운 마음을 카엔은 어쩔 줄 모르고 지켜보았다. "죄송해요, 카엔님! 처음부터 이런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카엔님은 세상 물정을 잘 모르시니까 놀라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죠. 제가 살던 세계에 아주 위대한 경제학자가 있었어요. 그는 인간들이 모두 이기적으로 오 로지 자기만을 위해 행동할 때 세상이 가장 효율적으로 돌아간다고 봤어요. 그로부터 한참 후에 또다른 위대한 사상가가 나왔는데, 그는 인간의 선의에 바탕해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했어요. 결과는 어땠는지 아세요? 그 사상가의 이론에 바탕해서 만든 나라는 결국 형편없이 무너졌지요. 열심히 일하지 않더라도 남들과 똑같이 벌 수 있다는 것을 알자 아무도 열심히 일하지 않은 거에요. 다른 사람과 사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자는 슬로건은 처음 십여 년 정도나 통했을까, 나중에는 씨도 먹히지 않았어요. 그리고 세계는 그 경제학자의 이론에 따라 굴러간다는 것이 밝혀졌고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사람들이 이기적인 행동을 할 때 그건 당연한 거라는 거에요. 우리 종족이란 원래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이타적으로 행동하리라고 가정하고 일을 도모하면 언제나 일을 망치게 되고 말죠. 그러니까 인간의 이기적인 행태를 보아도 실망하면 안 돼요. 그냥 그러려니 해야 해요." 렌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 렌이 말한 내용은 그가 오랜 세월 살아 오면서 끝없이 느꼈던 것이었다. 렌의 말에 담겨 있는 서글? ?지혜에 카엔은 공감했다. 그러나 카엔은 왠지 안타까웠다. "그럼 인간에게 희망은 없나요?" 카엔은 나직이 물었다. 내 인생의 수십분의 1도 채 살지 않은 이 어린 소녀에게서 나는 무슨 답을 기대하는 걸까. 카엔은 스스로를 조소하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희망은 나날의 작은 기적에 있어요." 렌은 한참 생각하다가 마침내 대답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마침 여관 문이 열리고 주인 아주머니가 나왔다. 그녀는 사람들이 다 간 것을 확인하자 렌에게 다가왔다. "치료사 아가씨, 그 작자들이 괴롭히지 않았수?" 렌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 없었어요." 아주머니는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냈다. 10실버 은화 두 개였다. "아가씨, 오늘 오전에 착한 일 한 거 다 알아요. 실은 얼마 전에 내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다 돌아가셨는데 그 때는 정말 치유마법사, 안 되면 치료사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우. 그래서 그 후로는 그 또래 병든 할머니를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아요. 아가씨가 이걸 어디다 쓸지는 모르겠지만, 내 아가씨를 믿으니까, 혹시 앞으로 앓고 있는 가난한 할머니들을 보거든 이 돈만큼 공짜로 치료해 줘요. 내 부탁할게요." 뜻밖의 말에 렌은 감동해서 눈물이 고였다. 렌은 눈물 고인 채로 카엔을 쳐다보며 활짝 웃었다. "바로 이런 게 나날의 작은 기적이예요. 생각지도 않았을 때 접하게 되는 인간의 작은 선의 말이예요." 렌의 말에 어리둥절해 하던 아주머니는 영문을 모른 채 웃으며 덧붙였다. "그나저나 그 잠 못 드는 필랍에게 처방한 그 약은 진짜 용한 건가 봐요. 그 집 여편네가 좀 전에 다녀갔는데, 필랍이 간밤부터 시작해서 아직까지 열 네 시간째 자고 있다지 않수? 대체 무슨 약이길래 그렇게 용하우?" 아주머니의 말에 카엔과 렌은 서로 쳐다보고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썼다. ===================================================================치료사 렌 [7] 치료행의 시작 (11) =================================================================== 렌과 카엔이 짐을 챙겨 다음 번 마을로 출발한 것은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서 7파잔(오후 두 시)이 넘어서였다. 그들의 다음 목적지는 촐린이라고 불리는 인구 800여명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인데, 여기 니암에서 아침에 출발하면 저녁 무렵 닿는다고 했으니 서둘러도 아슬아슬하게 그날 안에 도착할까 말까 했다. 카엔은 슬쩍 렌에게 제의했다. "웬만하면 이동마법으로 한 번에 가는 게 어때요?" 그 말에 렌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카엔님 어제랑 오늘 힘드셨잖아요. 그냥 노숙해도 되니까 무리하지 마세요. 진짜로 이동마법이 필요할 때를 위해서 아껴 두세요. 저랑 노숙하는 게 싫으세요?" 렌이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눈으로 생글거리며 묻자 카엔은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그래, 촐린의 여관에서 각방을 쓰느니 함께 노숙하는 게 낫고말고. 카엔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싫다니, 그럴 리가요." 예상대로 대략 전체 거리의 3분의 2 정도 가자 날이 완전히 저물어 버렸다. 관도 한가운데에서 잘 수는 없었으므로 둘은 말을 끌고 길 옆의 숲으로 들어갔다. 초여름 숲은 아직 벌레도 많이 없고 밤날씨는 서늘하고 맑아서 노숙하기 그리 나쁘지 않았다. 렌이 늘 느끼는 거지만, 광동성의 습하고 무더운 공기나 홍콩의 매캐하고 오염된 공기에 비해 여기의 공기는 참으로 향긋하고 부드러웠다. 아름드리 나무 한 그루를 찾아 잡초 없는 나무그늘 아래 짐을 풀고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붙이고 나니(렌이 잘 들지 않는 부싯돌을 치고 있자 카엔이 한 번 손을 저어 불을 일으켰다. 렌은 그것을 속으로 '라이터마법'이라 이름지었다.) 그런 대로 아늑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렌은 카엔을 쳐다보며 말했다. "카엔님, 계약서 1조 아직도 기억하시죠?" "네." 카엔은 이 아가씨가 또 무슨 일을 시키려나 조마조마하다가 렌의 마음이 읽혀지자 렌이 말하기도 전에 입을 쩍 벌렸다. "그럼 지금부터 저녁 준비 해 주세요." 렌은 빙긋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는데요." 카엔이 머리를 긁적이며 그렇게 말하자 렌은 한심하다는 눈길로 카엔을 쳐다보았다. 그가 읽은 렌의 마음속 또한 카엔에 대한 한심함으로 차 있었기 때문에 카엔은 정말로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요리해 본 것이 370여 년 전이니 어쩌란 말인가. "그럼 오늘 저녁은 제가 차려드릴 테니까, 저 하는 거 잘 보고 배우셔서 다음부터는 노숙할 때마다 매 끼니 번갈아 당번을 정하기로 해요. 어른이라면 최소한 자기 입에다 넣을 음식 정도는 만들어 먹을 줄 알아야 한다고요. 아셨죠?" 카엔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렌은 짐 속의 냄비와 칼을 꺼내고 니암 마을에서 가져온 빵, 치즈, 밀가루, 버터를 준비하고 숲에 나 있는 몇 가지 종류의 풀을 뜯어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카엔?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뚫어지게 쳐다보았으나 혼자서 한다면 도저히 렌처럼 할 수 있을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얼마 후 무척 맛있는 향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밀가루와 버터를 볶아 갈색을 낸 후에 물을 부어 젓다가 치즈와 허브를 넣고 마지막으로 빵을 넣은 스튜였다. 간단한 요리였지만 카엔에게는 황궁에서 먹었던 어떤 음식보다도 더 맛있게 느껴졌다. 그저 다 사랑의 힘이었다. 카엔이 연신 감탄하며 먹는 모습을 렌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다 먹고 나서 근처를 흐르는 시냇물에 그릇까지 다 씻고 나자 별은 총총하고 초승달은 져가고 있었다. 본래 둘이서 번갈아 가며 불침번을 서는 것이 노숙의 원칙이지만, 카엔이 다른 사람들이나 짐승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마법진을 펼쳐 두었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둘은 침낭을 꺼내 마법진 속에 적당히 펴고 나란히 누웠다.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어딘가에서 소쩍새가 울었다. 왠지 렌은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카엔님, 주무세요?" "아니오." 기다렸다는 듯 카엔은 대답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힘든 여행을 하시게 해서요. 제가 너무 많은 폐를 끼치고 있지요?" "폐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오히려 정말로 즐겁습니다." "훗, 카엔님은 노숙이나 요리 같은 건 익숙하지 않으시죠?" "나보다 어린 렌도 꿋꿋하게 하는데 나도 분발해야지요." "그래요." 렌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카엔님, 저와 함께 다녀 주셔서 정말로 고마워요. 언젠가는 이 은혜를 갚을 날이 오겠지요."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느새 렌의 숨소리는 고르고 깊어졌다. 카엔은 한숨을 쉬었다. 은혜라니, 그녀는 내 마음을 모르는구나. 렌이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하자 카엔은 다시 황궁으로 순간이동했다. 이번에는 페람 공작의 집무실이 아니라 황궁도서관이 목적지였다. 렌이 혹시 중간에 깼다가 자신이 없는 것을 발견할까봐 카엔은 서둘러 마법을 일으켜 서가에서 수십 권의 책을 뽑아 허공에 띄웠다. 모두 요리책이었다. "어디 보자, '궁중요리의 진수', 이건 아닌 것 같고, '파티요리, 하나부터 백까지', 이것도 아닌 것 같고, '신혼 3개월 요리 마스터, 당신도 사랑받는 아내가 될 수 있다', 음 이게 좀 쉬워 보이는군." 책을 챙기고 다시 침실에 들러 꿀과자 몇 개를 집어먹은 카엔은 서둘러 렌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렌은 불편한 잠자리에도 불구하고 곤히 잘 자고 있었다. 카엔은 그녀 곁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 총총한 별들이 쏟아질 듯 빛나고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버려지던 날 광야에서 바라보았던 그 하늘과 같았다. 수백 년 전 일이었지만 아직도 그 때의 기억, 부모에게서 버려졌다는 슬픔과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는 몸을 떨었다. 행복은 늘 물거품처럼 쉽게 사라지는데 슬픔과 고통은 왜 끝까지 남아 그를 괴롭히는 걸까. 카엔은 렌 바로 옆으로 침낭을 끌어당기고 렌 쪽으로 모로 누워 렌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마음이 편해졌다. 렌과 그의 주변에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듯한 기분에 그는 마침내 편안히 잠이 들었다. ===================================================================치료사 렌 [7] 치료행의 시작 (12) =================================================================== 일찍 일어난 둘은 전날 만든 스튜 남은 것을 데워 먹고 촐린으로 향했다. 전날 많이 전진한 덕분에 별로 속도를 내지 않았는데도 점심 나절이 되자 촐린에 도착했다. 촐린은 저번의 니암 마을보다 인구는 적었지만 조금 더 유복해 보였고, 마을의 분위기는 니암 마을보다 더 따뜻하고 친밀했다. 두 마을은 비슷한 환경, 비슷한 생활수준인데도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 느낌이 달랐다. 이 마을의 주민들은 모두 비슷비슷하게 잘 살았고 니암 마을처럼 못 사는 사람들이 따로 모여 살지도 않았다. 이 마을에도 역시 치유마법사는 없어서 큰 병이 생긴 사람들은 모두 여기에서 말 타고 이틀 거리에 있는 고도(古都) 마이리아 시로 간다고 했다. 촐린 마을 주민은 평범한 일상을 깨 주고 잔병을 고쳐주는 존재로 치료사를 환영했다. 이제는 체념하고 열심히 불꽃쇼를 하는 카엔을 보자 주민들은 모두 환호했다. 카엔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나름대로 새로운 레퍼토리를 연구하여 불꽃을 허공에서 폭발하게 한다든지 불꽃을 모아 글자를 만든다든지 하는 재주를 부렸고, 그 때마다 나 잘했죠 하는 눈길로 렌을 쳐다보아 렌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마을에도 역시 보통 사람, 나쁜 사람, 착한 사람이 있었고, 가벼운 환자, 중환자, 고칠 수 없는 환자들이 있었다. 고칠 수 없는 환자들은 대부분 노환이거나 아니면 현대적인 장비가 없어 수술이 불가능하고 동양의학적인 수단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경우였다. 그리고 렌에게서 치료받은 사람들은 대개 고마워하면서 치료비를 흔쾌히 냈다. 치료비를 가지고 시비하는 사람들 도 있긴 했지만 저번 마을처럼 강압적으로 굴지는 않았다. 또 렌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서 놀라거나 화내지 않고 잘 대처했다. 이 마을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환자는 두 명이었다. 오후 세 시(7파잔과 8파잔의 중간) 정도쯤에 찾아온 30대 후반의 털이 숭숭한 남자 환자는 렌 앞으로 오자마자 다짜고짜로 입을 쩍 벌렸다. "치료사 아가씨, 여기 썩은 이 좀 뽑아 주슈." 그 남자 환자의 입에서 나오는 악취에 렌은 기절할 것 같았다. 사내는 자기 입 속의 어금니 한 개를 가리켰다. 완전히 썩어 있었다. 사내의 입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 남자는 다시 트림을 했고 렌은 휘청하며 뒤로 쓰러졌다. 카엔이 용케 늦지 않게 받쳐 주어 렌은 바닥에 뒤통수를 찧는 것만은 겨우 모면했다. "저는 이를 뽑아 본 적이 없는데요." 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홍콩의 뒷골목에는 렌 말고 별도로 야매 치과의사가 영업을 하고 있어서 이가 아픈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갔었다. "거 치료사라고 하고서는 이도 못 뽑으면 되나? 어디 한 번 힘 좀 써 봐." 사람들은 이 아가씨가 어떻게 할까 하는 호기심에 렌을 둘러쌌다. 비웃는 듯한 사내의 모습과 어디 두고 보자 하는 주위 사람들의 표정을 보자 렌은 오기가 생겼다. "좋아요. 그럼 뽑아드리겠어요. 혹시 뽑다가 뿌리가 부러져서 빼도 박도 못 해도 딴 소리 하기 없기에요." 렌은 호기 있게 말하고 난 후 카엔에게 귓속말했다. "혹시 치아 한 개만 순간이동시킬 수는 없나요?" "자기 자신이 아닌 물체의 순간이동은 그 물체의 형태와 속성을 정확히 알아야만 가능한데, 저 치아의 뿌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니 순간이동은 안 됩니다." 렌은 한숨을 쉬고 침을 꺼냈다. "자, 뺨을 이리 대 보세요." 렌은 여기저기에 침을 꽂아 입 주위를 마취했다. 그러고 나서 마취가 잘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사내의 뺨을 꼬집었다. 얄미운 마음을 담아서 일부러 자국이 날 정도로 세게 꼬집었는데도 사내는 전혀 감각이 없는 듯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거 참 신기하구만." 감탄하는 사내를 째려보며 렌은 짐꾸러미에서 집게를 꺼냈다. 혹시나 해서 철물점에서 의료기구 비슷하게 생긴 건 전부 사 둔 게 다행이었다. "자, 입 좀 크게 벌려 보세요." 사내가 입을 쩍 벌리자 다시금 제9지옥에서 퍼져나오는 듯한 암흑의 입냄새가 코를 찔렀다. 렌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유자왈 기위인야효제 이호범상자선의 불호범상 이호작란자미지유야" 하고 논어를 외며 혼미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가다듬었다. 마침내 집게로 치아를 꽉 붙잡은 렌은 그 사내의 머리를 왼쪽 옆구리에 끼고 치아를 흔들기 시작했다. 굳게 박힌 어금니는 여간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렌의 머리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고, 카엔과 구경꾼들은 손에 땀을 쥐고 렌이 악전고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거의 한 시간쯤 지났을까, 이가 흔들거리며 나오려는 조짐이 보였다. 렌은 마지막 남은 필사의 힘을 전부 쏟아부었다. 마침내 이가 빠졌다. 렌은 괴물을 죽인 영웅이 칼을 쳐들듯이 집게를 쳐들었다. 오후의 햇살을 받아 집게와 썩은 이는 찬연히 빛났다. 렌을 둘러싼 카엔과 마을사람들은 모두 입을 벌리고 짝짝짝짝 박수를 쳤다. 집게를 치켜든 채 의기양양하게 박수를 받던 렌은 갑자기 멋적어져서 황급히 집게를 내렸다. 렌은 솜을 뭉쳐 사내의 어금니 뽑힌 자리에 넣어 주었다. "한 시간 정도 꽉 물고 계셔야 해요." 렌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그 사내에게 말했다. 사내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거 약해보이는 아가씨가 팔힘 하나는 쓸 만하구만. 이담에 애기 안고 살림하는데 딱 좋겠어." 렌은 째려보며 대답했다. "치료비나 많이 내놓으세요." 사내는 껄껄껄 웃으며 흔쾌히 3실버를 놓고 갔다. 바쁘게 치료를 하던 두 사람이 저녁 무렵 막 탁자를 접으려는 순간 젊은 부부가 사내아이를 안고 렌 앞으로 왔다. 유복해 보이는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부부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고 아이는 하얗고 창백하고 마른 모습으로 아버지의 품에 안겨 축 늘어져 있었다. "치료사님, 이 아이 좀 봐주세요. 마이리아 시의 치유마법사님도 가망이 없다고 하셨지만 혹시나 해서요." 렌은 치료사 아가씨라든지 어이 치료사라든지 하지 않고 치료사님이라고 공손히 말하는 아이의 어머니가 마음에 들었다. "이리 앉히세요." 렌은 아이의 몸을 꼼꼼히 살피고 맥을 짚었다. 한참을 진맥하고 난 렌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멍이 들어 있고 뼈만 남아 창백하고 기운 없는 아이의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백혈병 말기였다. 백혈병 초기라면 정명기와 약초를 이용해서 장기적으로 면역력을 증진시켜 치료하는 것이 가능했겠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골수이식을 하는 것말고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아니, 마지막으로 렌만이 쓸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더 있기는 했다. 렌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본 아이 어머니는 남편의 어깨에 기대 울음을 터뜨렸다. "누나, 나 살고 싶어요." 아이는 힘없는 눈을 치뜨며 안간힘을 써서 렌에게 말했다. 렌의 가슴은 미어지고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이 어린 아이가 무슨 죄가 있어 이 나이에 죽을 병이 걸리다니. 아이의 생기가 거의 남지 않았기에 얼마만큼의 생명력이 소요될지 몰랐지만, 렌은 자기도 모르게 정명기를 일으켜 생명력을 정명기에 실으려고 했다. 그러나 렌은 아무리 애써도 테룬을 치료할 때처럼 심장의 기운을 정명기에 실을 수가 없었다. 안간힘을 쓰던 렌은 결국 왜 안 되는지 깨달았다. 목숨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만큼의 사랑과 진정이 있어야만 생명력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저 아이에 대해 가엾음과 연민을 느끼고 있지만, 또 치료사로서의 사명감까지도 느끼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생명을 포기하기에 부족한 것이다. 그리고 생명력을 실을 수 없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음을 렌은 알았다. 이제 렌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그를 위해서 이기적이 된 것이다. 죽어가는 환자들보다 카엔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됨으로써 다른 사람들은 덜 사랑하게 된 것이다. 렌은 비참하고 괴로웠다. 그래도 렌은 다시 이를 악물고 덜덜 떨며 생명을 정명기에 실으려고 했다. 잘 되지 않았다. 사람이 자기 살을 벨 때 주저흔이 생기듯 정명기는 렌의 생기를 싣기를 거부했다. 여러 차례 시도하던 렌은 결국 포기하고 울음을 참으며 면역력을 강하게 하는 약초 몇 종류를 섞어 조제해 주고 축적해 놓은 정명기를 바닥날 때까지 쏟아 부어 주었다. 아이의 뺨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본 부모는 렌에게 거듭 감사하며 준비해 온 5실버 은화를 놓고 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비로소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렌은 카엔의 가슴에 기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렌의 비통함과 죄책감이 그대로 카엔에게 전해져 왔다. "우리 들어가서 쉬어요." 부드럽게 말하며 카엔은 탁자와 의자와 차양을 접어들었다. 렌은 모든 기운이 빠졌는지 길바닥에 멍하니 주저앉았다. 카엔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날은 어둡고 주위에는 사람이 없어 마법을 써도 눈에 띄지 않을 듯했다. "렌, 우리 오늘 밤은 아예 마이리아 시까지 이동해서 좀 더 편한 데서 쉬도록 하죠. 여기서 마이리아 시까지는 마을도 없고, 이 시간엔 우리가 이동한다고 해서 누구 볼 사람도 없을 겁니다." 렌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카엔의 품에 안겼다. 카엔은 안타까운 마음에 렌을 꼭 끌어안고 말과 짐과 렌을 한꺼번에 마이리아 시로 옮겼다. ===================================================================치료사 렌 [8] 마이리아 시 (1) =================================================================== 흑룡 데이그랜은 엘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채 푸른 바람의 엘프덤의 수장관(首長館) 부근으로 순간이동했다. 푸른 바람의 엘프덤, 맑은 달의 엘프덤, 깊은 숲의 엘프덤 가운데 그는 이곳 푸른 바람의 엘프덤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다른 두 곳의 엘프덤에 거주하는 엘프들은 정말로 전형적인 엘프-무심하고 조용하고 게으른-의 특성을 지녔으나 푸른 바람의 엘프덤에서는 이따금씩 엘프의 틀을 깨는 이단아들이 나타나 데이그랜에게 뜻밖의 유쾌함을 안겨 주었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겁도 없이 드래곤에게서 마법을 배우겠다며 자신을 찾아온 천 년 전의 어느 엘프였다. 지금은 이미 죽었지만 그 엘프는 대담함과 분방한 지성을 지니고 있어 그의 대화상대로 부족함이 없었다. 현재 이 엘프덤의 수장인 티우사도 어릴 적에는 엘프답지 않게 샤티를 메고 인간 세계를 떠돌며 음유시인 노릇을 했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인간 세계에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고, 동제국 황실에 데이그랜을 소개해 줄 사람으로는 딱 적격이었다. 수장관은 명색만 근사하지 사실은 기둥과 지붕, 그리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우아하게 드리워진 천이 전부였다. 다른 엘프들의 집과 다른 점이 있다면 기둥에 좀 더 조각이 많이 들어가고 드리워진 천에 한층 눈부신 자수가 수놓아져 있는 정도였다. 데이그랜은 천을 들치며 안으로 접어들었다. 실내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방석 겸 침대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티우사가 비스듬히 누워 샤티의 줄을 손보고 있었다. 데이그랜은 그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이제 붕괴일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갈라지기 시작한 살갗과 눈에 띄게 숱이 적어진 머리카락을 보고 안타까워진 데이그랜은 일부러 기운찬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티우사, 잘 있었는가?” 데이그랜의 인사에 티우사는 상체를 조금 일으켜 그를 올려다보았다. 처음 보는 낯선 엘프가 친한 듯 인사하자 의아해하던 티우사는 일단 엘프 예절에 따른 정식 인사를 건넸다. “푸른 바람의 청량함이 그대와 늘 함께 하기를.” “푸른 바람의 상냥함이 그대와 늘 함께 하기를.” 데이그랜도 역시 엘프의 예법에 맞추어 대답했다. 티우사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데이그랜은 자신의 폴리모프에 자부심을 느끼며 몸 안의 수기(水氣)를 약간 개방했다. 엘프는 엄청난 물의 기운이 밀려오자 현기증을 느끼며 샤티를 떨어뜨렸다. 그러다 그는 곧 자기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황급히 왼쪽 무릎을 굽히고 오른손을 가슴에 대는 엘프 최고의 예를 갖추었다. “위대하신 지혜의 흑룡이시여, 영광스럽게도 미천한 엘프의 모습을 입으시고 이 누추한 곳에 어인 일로 친히 왕림하셨습니까?” “편히 앉으라. 그대는 지금 그 자세로 오래 있지 못할 듯하니.” 데이그랜은 수기를 갈무리하며 방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방석 하나를 끌어당겨 그 위에 주저앉았다. 엘프도 조금 전까지 누워 있던 자신의 방석 위에 단정한 자세로 앉았다. “붕괴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진작에 떠났어야 했는데 이것저것 정리하다 보니 생각보다 늦어졌습니다.” “벌써 그대가 태어난 지 천 년이 되었는가?” “921년입니다. 저는 다른 엘프보다 붕괴가 좀 더 빨리 온 편입니다. 그래서 다른 엘프처럼 미리 붕괴에 대비하여 엘프의 낙원에 가 있지는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이런 추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티우사는 엘프 특유의 느릿한 어조로 담담하게 말했다. 데이그랜은 티우사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한숨을 쉬었다. “인간의 시간이 짧은 것을 한탄했건만, 그보다 열 배나 긴 엘프의 시간 또한 내게는 짧기 그지없구나.” “때가 되어 붕괴하는 것이 무슨 한탄할 일이겠습니까.” “그대는 엘프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엘프였는데, 그 눈부심이 이렇게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리다니.” “아름다움도 역시 부질없지요.” 남의 일인 듯 무심하게 말하는 엘프의 태도에 데이그랜은 전부터 늘 품고 있던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엘프의 긴 수명이란(가장 특별한 존재인 드래곤은 예외로 하고) 그저 한정된 수명을 의미 없이 길게 잡아 늘인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생명에 대한 집착 없는 저 모습은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그대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왔는데 지금 상태로는 힘들 듯하구나.” “부탁이라니, 당치 않으십니다. 무엇이든 명하십시오.” “그래, 다름이 아니라 나는 지금 이 모습으로 엘프 마법사로서 동제국의 황실에 잠입하려고 한다. 원래는 그대가 나와 동행하여 그 쪽에 내 신분을 증명해 주기를 바랐는데, 붕괴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먼 길을 가는 것은 그대에게 지나친 부담이 될 듯하니 걱정이구나.” “걱정 마십시오. 신분 증명만을 위해서라면 더 적당한 엘프가 있습니다.” “그게 누군가?” “’치유하는 손’이라는 별호로 유명한 라빌이라는 엘프입니다. 역시 우리 푸른 바람의 엘프덤 출신입니다.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조금 이상하더니 성인이 되자마자 인간과 사랑에 빠졌고, 나중에는 온 인간세계에 치유마법을 펼치고 다녀서 그런 별호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참 엘프답지 않은 아이지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설명하는 티우사의 목소리에는 라빌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배어 있었다. “그 라빌이라는 엘프가 그렇게 유명한가?” “예, 그녀는 동서대륙을 통틀어 아마도 가장 유명한 엘프입니다. 그러니 저보다는 그 아이를 데리고 가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는가?” “매년 이맘때면 서제국의 중부지방 어딘가에서 사람들을 치료하고 다니는데, 제가 서제국의 엘프 상관(商館)들에 연락하여 라빌을 찾아보라고 하겠습니다.” “얼마나 걸리겠는가?” “각 상관에 엘프를 보내 소식을 전하는 데 열흘, 그녀를 찾아 여기까지 불러오는 데 닷새 정도면 충분합니다.” “더 빨리 할 수는 없나?” “제가 직접 하는 일이라면 더 서두르겠지만, 아시다시피 엘프들이 워낙 게을러서요. 인간세계에서는 일을 시켰는데 마냥 일을 미루고 꿈쩍도 않는 걸 가리켜서 ‘엘프에게 일 시키기’라고 한다면서요?” 티우사는 빙긋 웃었고 데이그랜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엘프의 게으름은 워낙 유명해서 '엘프에게 일 시키기'라는 속담 말고도 '엘프놀이'라는 것도 있었다. 푹신한 쿠션 위에 누워 바닥에 쩍 붙은 채 하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놀이였다. 역시 엘프의 게으름을 빗댄 말이었다. “그대들은 통신구 따위도 없나?” “통신구로 연락해서 며칠 정도 단축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연락할 일이 있으면 직접 가서 전해야 엘프끼리 서로 얼굴도 보고 마음도 나눌 수 있지요.” “차라리 내가 직접 찾겠다.” 데이그랜이 진저리치자 티우사는 웃었다. “어차피 엘프들에게 수소문하여 찾으셔야 할 텐데, 정체를 드러내실 생각이 아니시면 차라리 엘프들에게 맡기시는 편이 빠를 것입니다. 엘프덤의 수장인 제가 명령해도 미적거리는데, 낯선 엘프가 와서 누굴 찾아달라고 부탁하면 얼마나 더 미적거리겠습니까? 열흘이? ?것도 전령 노릇을 할 엘프들을 고르는 데 하루, 그들이 친구들에게 작별인사하고 여행 준비하는 데 이틀, 마법진으로 호핑(목적지까지 가는 경로 중간중간에 설치되어 있는 몇 개의 마법진을 차례로 이용하여 이동하는 것. 엘프들은 서제국과 동제국까지 쉽게 갈 수 있도록 ‘드래곤의 회랑’과 양 제국의 주요 거점 도시에 마법진을 설치해 놓았다)하는 데 이틀, 그들이 목적지인 각지의 엘프 상관에 도착하여 그곳 엘프들과 인사하고 환영의 조찬, 오찬, 만찬 등을 하는 데 또 이틀이니, 열흘이면 짧게 잡은 것입니다. 흑룡께서 정체를 드러내시면 조금 서두르긴 하겠지만 기밀을 유지하시려면 그건 적절하지 않겠지요. 그래도 일단 각지의 상관에 도착하기만 하면 라빌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워낙 유명인이니까요.” 핑핑 돌아가는 인간세상에 잠시 있다 와서 그곳의 속도에 익숙해진 데이그랜은 이 엘프 특유의 느림과 태평함이 참을 수 없었으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러다 그는 문득 티우사의 붕괴를 지켜보아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는 언제 붕괴하는가?”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정도면 완전히 붕괴할 것 같습니다.” “엘프의 낙원에는 언제쯤 들어가는가?” “보름 후 정도입니다.” 붕괴가 시작된 엘프들은 엘프의 낙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계곡으로 가 온 몸의 살갗이 한 점 한 점 바스러져 떨어져 내리고 숨이 끊길 때까지 몸을 숨기고 기다리곤 했다. 그곳은 엘프의 낙원이 아니라 엘프의 무덤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그 라빌이라는 엘프를 불러올 때까지 그대 곁에서 노닥거리고 있으면 되겠군.” “저희들을 창조하신 드래곤의 일족께서 붕괴하는 미천한 엘프 곁에 머무시다니, 당치 않으십니다.” 티우사가 황공해하며 머리를 숙이자 데이그랜은 일부러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붕괴하는 엘프를 자세히 관찰하여 내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이니 황공해하지 말라.” 그의 냉정함에 속지 않았다는 듯 티우사는 데이그랜에게 감사의 미소를 던졌다. “아, 그리고 젊은 청년과 함께 다니는 열 여섯 내지 열 일곱 정도 되는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소녀를 찾는다는 전언도 각지의 엘프 상관에 전하도록 하라. 내가 찾는다는 건 숨기고.” “그럼 제 다음 대 수장인 에돈이 찾는 것으로 해서 연락을 보내겠습니다. 다른 특징은 없습니까?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소녀라면 너무 애매한데요.” “글쎄, 원래는 눈부신 미인인데, 아마 그 모습으로 다니지는 않을 테고, 사실은 머리색과 눈색도 바꿨을지 모르겠다.” 데이그랜은 말하면서 렌을 찾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서제국 황제가 그녀 곁에 붙어 있다면 온갖 마법으로 그녀를 보호하고 있을 테니 엘프들이 그냥 미적미적 둘러보는 것만으로는 렌을 찾아낼 리 만무했다. “찾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연락은 하겠습니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다.” 데이그랜은 한 겹씩 살갗이 부서져 내리고 있는 엘프를 보며 그가 눈부신 푸른 비단실 같은 머리채를 출렁이면서 이 엘프덤의 가장 아름다운 나무 아래 앉아 샤티를 뜯고 노래하던 시절을 회상했다. 아아, 무상하고 무상하다. =================================================================== 치료사 렌 [8] 마이리아 시 (2) =================================================================== 침전에서 두문불출하던 테룬 황제가 밖으로 나온 것은 렌의 죽음을 안 지 닷새 가 지나서였다. 어쩔 줄 모르고 걱정하던 샤이트는 황제가 나오자 비로소 안도했다. 테룬 황제는 수척해졌지만 크게 어디가 아픈 것 같지도 않고 정신도 멀쩡해 보였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 “그래도 치유마법을 시전받아 보심이 좋지 않겠습니까? 쿠드를 부르겠습니다.” “쿠드는 마법사일 뿐이다. 그가 뭘 안다고.”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치유해 주었던 렌의 생각이 나 뭉클해지자 테룬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샤이트가 거듭 권하자 테룬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내 몸은 내가 안다. 짐이 소드마스터인 것을 잊었느냐?” 샤이트는 황제가 평소 자기에게는 쓰지 않던 ‘짐’이라는 말을 쓰자 더 말해 보아도 소용없다는 걸 알고 물러났다. “부디 옥체를 보중하십시오.” “걱정 마라.” 샤이트를 보내고 난 테룬은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닷새간 미뤄 둔 일거리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지난 닷새간 그는 혼자 틀어박혀 자책과 고민을 거듭했다. 상처투성이인 자기 마음에 결정적인 하나의 상처가 더해진 지금, 그는 누가 와도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의 병을 고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렌을 떠나보내지 않았다면. 어머니의 유혹에 다시 빠지지 않았다면. 렌을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았다면. 그의 잘못은 너무 많았고 비통은 끝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가 했던 자책과 고민의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 ? 서제국 황제를 패배시키고 그에게 죄를 묻기 위해서는 동제국이 더 강대국이 되어야 했다. 지금 상태에서 서제국과 전쟁을 하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어리석게 거병했다가 패배하는 것은 병사들과 신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자기만족일 뿐이었다. 어떻게든 이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어 살아 생전에 카에닌에게 복수하리라. 그러기 위해 그는 잠도 아끼고 모든 인간적인 즐거움도 포기하고 오로지 국정에만 전념하리라. 그것이 렌에 대한 속죄도 되리라. 동제국이 서제국에 비해 얼마나 낙후했는지 잘 아는 테룬의 마음은 조급했다. 그가 황제로 즉위한 후 지난 두 달 간 개혁의 첫발을 떼긴 했지만 봉건제와 농노제로 고착화된 동제국의 정치경제체제를 바꾸는 것은 황제 한 명이 마음먹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니었다. 서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정도의 국력을 키우기 전에 자신이 늙어 죽어버리면 모두 다 허사였다. 테룬은 업무에 박차를 가했다. 샤이트를 불러 봉건제와 농노제를 폐지하는 방향을 연구하고 다른 군제, 세제의 개혁 방안을 검토하다 보면 어느새 12파잔(자정)을 훌쩍 넘겼다. 샤이트는 피곤에 지쳐 퇴근했지만 황제는 샤이트를 보내고 나서도 더 일했다. 1파잔(새벽 두 시) 정도까지 일하고 나면 그는 침대에 들었지만 그래도 잠은 오지 않았다. 잠 오지 않는 밤에 테룬은 렌을 생각했다. 겨우 한 달을 같이 지냈을 뿐인데 왜 이렇게 그리운 걸까. 처음 보았을 때의 그녀의 눈부신 나신, 눈을 떴을 때 눈동자에 가득했던 다정함과 슬픔, 그리고 도서관에서 자신을 향해 던졌던 그 꽃 같은 화사한 웃음. 렌이 보여준 헌신과 선량함을 거듭 되새기는 것만이 지금 그의 마음에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녀를 생각하는 동안에는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원망, 나약한 자신에 대한 자책은 잠시 사그러들었다. 그리고 그는 렌이 자신을 치료하고 나서 쓰러져 일어나지 않던 열흘간 그녀의 곁에 붙어앉아 지켜보았던 렌의 얼굴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꿈에서 그리는 착하고 사랑에 가득한 구원의 여신의 얼굴이었다. 이렇게 그녀와의 추억에 잠기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위안인지 테룬은 잘 알았다. 그래도 그나마 없으면 그는 견딜 수 없었다. 렌의 생각에 뒤척거리다가 그가 잠이 드는 건 대개 2파잔(새벽 네 시), 겨우 한두 파잔 정도 자고 나면 다시 바쁜 일과의 시작이었다. 샤이트는 황제가 침식을 잊고 일에 몰두하는 것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황제의 개혁방향-농노제와 봉건제의 폐지-은 그도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던 바였지만 일조일석에 될 일은 절대 아니었다. 특히 변경공국의 힘이 중앙의 황실보다 강대한 현재에는 더더욱 위험했다. 그는 모든 것을 일거에 해결하려는 황제를 설득하여 개혁의 속도를 조절하는 데 안간힘을 썼다. 샤이트가 걱정하는 것은 또한 황제의 건강이었다. 아무리 황제가 소드마스터라 하더라도 저렇게 무리했다가는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또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과연 황제의 마음이 온전한 것인지 그는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테룬은 쓰러졌다. 언제나처럼 샤이트와 함께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테룬은 무언가 샤이트에게 말하려다가 갑자기 눈앞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눈을 깜박이며 정신을 차리려던 테룬은 발 아래마저도 일렁거리자 결국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샤이트가 뭐라고 외치는 것 같았으나 곧 테룬의 의식은 끊겼다. 샤이트는 황제가 쓰러지자 당황하여 즉시 쿠드를 불렀다. 다른 집무를 보고 있던 쿠드는 연락을 받자 순간이동으로 바로 도착했다. “수상 각하, 대체 어쩐 일입니까?” 침전으로 옮겨진 황제는 아직까지도 의식이 없었다. “조금 전에 집무실에서 쓰러지셨습니다.” 샤이트는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쓰러지기시 전에 특별한 증상은 없었습니까?” “예, 멀쩡하게 일하시다가 갑자기… 요 며칠간 과로하시긴 했지만 멀쩡해 보이셨는데…” 황제의 몸에 걸린 언힐링 마법은 아직 풀리지 않아서 치유마법을 쏟아도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쿠드는 하는 수 없이 마법이 아닌 다른 민간요법을 사용해 황제를 진단했다. “제가 보기에는 그냥 과로이신 것 같습니다. 긴장한 신경을 이완시키는 차를 드시게 하고 좋은 음악을 들려드리고 당분간 일은 하지 마시라고 충고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소드마스터가 몸의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징조입니다.” 쿠드의 말에 샤이트는 한숨을 쉬었다. “저도 몇 차례 제발 쉬시라고 진언 드렸지만 통 말씀을 듣지 않으십니다.” “폐하께서 원래 성실하신 분이기는 하지만 지난 열흘 간은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일하셨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럴 일이 좀 있었습니다.” “사람을 치유하는 게 제 전문은 아니지만 폐하께는 마음의 병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하긴 그런 비극이 있었으니 오죽하시겠습니까만, 최근 들어 갑자기 그러신 걸 보면 다른 원? 括?있었던 게지요. 마음의 병 또한 몸의 병과 마찬가지로 그냥 놔두면 큰일이 납니다. 수상 각하께서 굳이 말씀하지 않으시려 하니 더 묻지는 않겠습니다만 폐하께서 마음의 병을 갖게 된 원인을 찾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충고 감사합니다.” 샤이트는 노인의 지혜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마치 산들바람이 귀에 속삭이는 듯한 미성에 테룬은 정신이 들었다.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시선을 옮기던 그는 침전 한 쪽의 의자에 앉아 샤티를 뜯는 금발의 미청년을 발견했다. “그대는 누군가?” “저는 미로닌이라고 합니다.” “아, 그대가 바로 ‘브림의 목소리’라고 불리는 그 미로닌인가?” “예, 맞습니다. 폐하께서 저를 아신다니 영광스럽습니다.” “그대는 지금 수상 관저에 등록되어 있지?” “맞습니다.” “샤이트가 자네를 이리로 보냈나?” “예, 외람된 말씀이지만 제 노래에는 사람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고들 합니다. 저 스스로는 그렇게까지 제 노래에 힘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폐하께 도움이 될까 해서요.” “그럼 부드러운 사랑 노래를 한 곡 불러 보라.” 황제의 명에 따라 미로닌은 곧 샤티를 뜯으며 나직하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길에서 길로 마을에서 마을로 사랑 찾아 여행을 떠났네 슬픔과 기쁨 고통과 환희 모든 것을 겪었네 다 잃고 돌아와 초라하게 섰을 때 내 곁에는 그녀가 있었네 꽃 같고 별 같고 보석 같고 꿀 같은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네 온 세상 다 돌아 모든 것 잃었지만 결국 나는 모든 것을 얻었네. 미로닌의 노래를 들으며 테룬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 듣는 노래인데 어느 지방의 노래인가?” “제가 태어난 고장의 노래인데, 사랑 노래이기도 하고 자장가이기도 합니다.” “어디에서 태어났는데?” “검푸른 내해 부근의 평야 지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다가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결국 브림까지 오게 되었지요.” “네 노래는 정말로 위안이 되는구나. 고맙다.” 그 때 샤이트가 들어왔다. “미로닌, 폐하께 노래는 불러 드렸어?” “예, 수상 각하.” “폐하와 우리끼리만이니 평소 말하던 대로 해도 돼.” 샤이트의 말에 미로닌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샤이트는 다시 정식으로 황제에게 미로닌을 소개했다. “폐하, 미로닌 디란을 소개드립니다. 제 반려입니다.” 테룬은 잠시 놀랐으나 사랑에 넘치는 눈길을 교환하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곧 모든 것을 이해했다. 테룬은 웃으며 물었다. “그래, 그대가 말하던 취향이 바로 미로닌이란 말이지?” 샤이트는 어울리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미로닌처럼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폐하께서 마음이 어지러우실 때 미로닌의 노래를 들으면 위로가 되실 겁니다.” “샤이트, 그만 해. 팔불출 같잖아.” “왜, 나는 진실만을 말하는 거야.”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테룬은 문득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몹시 부러워졌다. 저렇게 사랑받고 있기에 샤이트는 그토록 흔들림 없고 안정되어 있구나. 소드마스터 주제에 깨질 것 같은 허약한 신경을 지닌 자기 자신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며 테룬은 스스로를 조소했다. 황제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지는 것을 본 샤이트는 미로닌에게 눈짓했다. 미로닌은 조용히 방을 나가고 침전에는 황제와 샤이트 두 명만이 남았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언가?” “죄송합니다. 더 일찍 말씀드려야 했는데,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를 성급하게 꺼내는 것도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서 이제서야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냐는데도.” “그 렌이라는 소녀 말입니다, 어쩌면 살아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샤이트의 말에 테룬은 온 몸의 피가 머리로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그녀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갑자기 생기를 띄는 황제의 눈빛을 보며 샤이트는 진작에 말씀드릴 걸 하고 후회했다. “예, 테라미즈의 첩자로부터 그녀가 죽는 걸 자기 눈으로 직접 봤다는 전언을 듣기는 했지만 사실 몇 가지 수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샤이트는 그 동안 떠올랐던 의혹들을 조목조목 짚어 나갔다. 굳이 서제국 황제가 첩자 한 명을 살려두어 렌을 죽였다는 소식을 동제국에 전할 필요가 있었는지, 과연 그 첩자가 그 장면을 진짜로 본 것인지 아니면 서제국 황제에 의해 조작된 기억을 진술한 것인지, 이런저런 사정을 종합해 보면 서제국 황제는 렌을 살려두고서도 렌이 죽은 것처럼 꾸미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 아닌지 하는 의혹들이었다. 차분한 샤이트의 설명에 테룬은 희망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왜 진작에 얘기하지 않았지?” 황제가 싸늘한 어조로 묻자 샤이트는 예상했다는 듯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는 처음부터 그 소녀를 동제국 황실? ?데려오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그 소녀가 폐하께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도 알지 못했었고요. 그러나 지난 며칠간 폐하의 모습을 지켜보니 그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테룬은 솔직하게 말하는 샤이트에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대의 말대로라면 렌은 아직도 서제국 황제 곁에 있겠군.” “예, 그러니 그 소녀를 찾아 데리고 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당장 그녀가 황궁 내에 있는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겼는지부터 확인해야 하고, 만에 하나 그녀의 행방을 추적할 끈이 발견되면 서제국 황제에게 눈치채이지 않도록 조심스럼게 그 끈을 잡고 쫓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법력이 높은 마법사가 필요합니다.” “쿠드는 어떤가?” “쿠드 님은 이제 너무 연로하신데다가 지금 국정의 한 부분을 맡고 계시니 자리를 비울 수가 없습니다.” “마법력 높은 마법사라는 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높은 대우와 지위를 약속하면 언젠가는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지금 상황에서 서제국 황제가 렌이라는 소녀의 목숨을 바로 거둘 것 같지는 않으니 우리에게 시간은 있습니다.” 테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렌이 살아있는 것을 알게 되자 이제는 서제국 황제에게 유린당하는 렌의 모습이 떠올라 견딜 수 없어졌지만, 그래도 질투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사라진 회색빛 황야 같은 상태보다는 훨씬 좋았다. 적어도 이제 그는 렌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자책하지 않아도 되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긴 테룬은 샤이트에게 농담을 던졌다. “그대는 혹시 미로닌 때문에 수상이 되겠다고 한 것 아닌가?” 언제나 침착한 포커페이스의 샤이트가 당황하며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는 건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었다. “폐, 폐하,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후훗, 그냥 짐작했다. 그대는 이 동제국이나 황제나 황태자보다는 자신의 사랑이 더 중요한가 보군.” 황제의 말에 샤이트는 정색을 했다. “폐하, 이제 약관이신 폐하께서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상 무엇도 사랑보다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뜻밖의 샤이트의 말에 테룬은 할 말을 잃었다. “폐하께서는 지금 찾으시는 그 소녀를 사랑하십니까?” 테룬은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보았다.어머니에 대한 마음과 렌에 대한 마음이 어지러이 섞여 테룬은 자기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이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과연 사랑인 것일까. “모르겠다. 나는 아직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못했어.” “언젠가는 아시게 되겠지요. 그녀에게 건강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힘 내십시오.” 뻔한 위로의 말이었으나 테룬은 샤이트의 말이 와 닿았다. “고맙다.” ===================================================================치료사 렌 [8] 마이리아 시 (3) =================================================================== 렌은 푹신한 이불에서 퍼져 나오는 향긋한 냄새에 눈을 떴다. 잠시 렌은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방안은 널찍하고 우아했으며 창문에서는 새소리가 들려왔다. 비단으로 바른 벽에는 꽃무늬가 가득하고 탁자며 의자며 침대는 황궁의 것에는 미치지 못해도 전부 최고급이었다. 렌은 전날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이 치료하지 못했던 그 어린 아이의 일이 가슴을 후볐다. 차라리 생명력을 전하는 방법을 몰랐다면 이렇게 죄책감이 들지는 않았을 텐데. 이렇게 슬프지는 않을 텐데. 그래도 푹 자고 일어나 맞는 밝은 아침 속에서 슬픔은 희미해지고 의욕은 새로웠다.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렌은 아직 어렸고 언제나 새로운 태양은 떴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힘차게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 이 기분을 느끼며 흐뭇해 한다고 해서 아무도 자신을 비난할 수는 없다고 렌은 생각했다. 잠시 후 방 한 쪽의 문이 열리고 카엔이 들어왔다. "일어났군요? 여기는 마이리아 시 중심가의 여관이에요." 카엔은 빙긋 웃으며 침대 한쪽에 앉았다. "카엔님, 여기 엄청나게 비싼 데 아녜요? 어쩌자고 이런 데 들어오셨어요?" 렌은 카엔에게 외쳤다. 카엔은 난처한 듯 렌을 바라보다 말했다. "숙박비는 내가 냈으니 걱정 말아요." 그러자 렌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동안 저한테서 받으신 돈을 다 탕진하신 거 아니세요? 제가 저축하시라고 얼마나 신신당부했는데, 하루아침에 다 써버리시면 어떻게 해요?" 렌이 진심으로 자기를 걱정해서 화낸다는 것을 아는 카엔은 가슴 따뜻한 기분을 느끼며 부드럽게 웃었다.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그리고 나 그렇게 가난뱅이 아닙니다. 렌에게 하룻밤 편안한 잠자리 제공할 능력 정도는 있어요." 실실 웃는 카엔을 보니 렌은 자기도 모르게 화가 풀렸다. 렌은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지었다. "카엔님,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카엔님은 지금 딸린 식구가 없어서 돈을 헤프게 쓰셔도 무서운 줄을 모르시는데 그러 시면 안 돼요. 돈이 모이면 테라미즈에다 작은 집이라도 한 채 사세요. 테라미즈는 계속 발전할 테니까 거기다 집 사두면 떨어지지는 않을 거예요. 종잣돈을 모으고 난 후에는 부동산이라고요." 카엔은 심각하게 부동산 투자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렌을 보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작은 집에서 우리 함께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렌의 생각에 카엔은 넋이 나갔다. 그녀에게 뭐든지 다 해 주고 싶었다. 백 채의 작고 예쁜 집을 그녀에게 사 주고 싶고 커다랗고 화려한 왕궁과 여름 별장, 가을 별장, 겨울 별장을 지어 주고 싶었다. 카엔은 황궁에 쌓여있는 엄청난 재물들과 자신이 이번 여행을 위해 몸에 지니고 온 온갖 금은보석을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가 그녀가 나를 가난뱅이로 생각하게 되었지? 이건 전부 그 봄의 여신의 축제가 원흉이었다. 둘이서 함께 하는 첫 번째 외출에서 돈 챙겨가는 걸 잊어버렸더니 어느새 가난뱅이로 낙인찍혔고, 그 후에도 렌이 이것저것 챙겨주는 게 좋아 돈이 없는 척 했더니 이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금은보화를 보여 주면 렌은 당장 의혹을 가질 것이다. 고민하며 머리를 굴리던 카엔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렌, 사실은 제 먼 친척이 돌아가셔서 유산을 상속받았답니다. 그래서 이제는 돈이 많아요." "가까운 분이셨나요? 몇 촌이나 되시는 분이세요? 연세는 얼마나 되셨는데요? 언제 돌아가셨죠? 다른 상속인은 없었나요?" 렌이 걱정스런 눈길로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자 카엔은 당황하며 황급히 주워섬겼다. "얼굴도 잘 모르고 보지도 못했던 친척이지만 어쨌든 부자여서 재산은 많더라고요. 그러니 우리 마이리아 시에서는 안심하고 돈 써도 돼요." 카엔이 간곡히 말하자 렌도 구미가 당겼다. 어제의 힘든 일도 잊을 겸해서 잠시 쉬는 것도 좋을 듯했다. "좋아요. 그럼 우리 일단 드워프가 한다는 금속세공소랑 대장간부터 들러요. 거기에서 메스랑 겸자랑 핀셋 등등을 주문하고, 완성될 동안은 마이리아 시에서 관광도 하고 공연도 보면서 놀아요. 저 이제 운기를 해야 하는데 좀 기다려 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지켜봐도 되나요?" "네. 대신 조용히 하셔야 돼요." 렌은 침대 위에 가부좌하고 앉았다. 렌은 정명기를 운기하면서 전날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죽기 싫다던 어린 사내아이가 생각나자 렌의 얼굴은 흐려졌다. 마음이 어지러워지자 운기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카엔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렌의 마음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읽었다. 렌은 그래도 호흡을 고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세상에는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지금 마음을 가라앉혀 정명기를 축기해야만 또다시 다른 사람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렌이 마침내 정명기를 운기하자 렌의 마음은 명경지수처럼 맑아졌다. 카엔은 깊은 산속에 흐르는 시냇물같은 렌의 마음을 황홀하게 맛보았다. 마침내 운기를 마친 렌은 창에 테라스가 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방에 테라스까지 달려 있다니 방값이 얼마일까 하고 걱정하던 렌은 그래도 볼 건 다 봐야지 하는 심정에 테라스로 나갔다. 카엔도 따라 나갔다. 렌은 나오자마자 탄성을 올렸다. 테라스에서는 적갈색 테라코타 빛 어도비 양식 유사의 건물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 도시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 근처에 적토의 산지가 있어 이 도시의 집들은 모두 그 적토를 이용해서 만드는데, 붉은 흙벽돌로 집을 지으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여 대륙성 기후인 마이리아에 딱 맞다고들 했다. 완벽하게 계획된 테라미즈나 그걸 그대로 축소한 그 전의 도시들과는 달리 마이리아 시는 제멋대로 여기저기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길도 꼬불거리는 골목으로 이어져 있었으나, 그 무질서함이 오히려 이 도시에 독특한 매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1,2 권은 돈 아까서 책을 보지 못한 관계로 분량과 목차를 표시할수 없었으니 양해 부탁드려여. 그리고 3권에 중간까지 되었던 있었더 부분 전까지 -흔하디 흔한 그 주사라도 있었더라면!- 이후부터 타이핑하긴 했지만 3권의 분량중 책과 조금 다른 부분은 책 대로 수정했으나 빼먹은 곳이 있을지도 모르오니 양해부탁드려여. 오타도 좀 있겠지만 이해해 주시고 알아서 수정하시구여.. 팔 아파서 오타가 많은지두.... ^^; - Alice 치료사 렌 3 권 - 죽음에서 생명이 태어나리라 - 1 장 첫수술 2 장 푸른죽음 3 장 낫는 사람, 죽는 사람 4 장 죽음 속에 생명은 있다 5 장 흑룡의 추적 부록 꿀과자 만드는 방법 1 장 첫 수술 마이리아 시는 1200년 전 누리디안 대제국이 서경으로 삼으면서 발전하게 된 도시로, 대제국 멸망 후의 대혼란기에도 용케 원형을 유지해서 아직까지 그 명성을 이어?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시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대단하여 생긴 지 350년밖에 안 된 테라미즈 따위는 아직 애송이로 여겼고 뭐든지 마이리아 것을 최고로 쳐, '마이리아에서는 마이리아 식으로'라는 속담까지 생길 정도였다. 이들이 이렇게 도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마이리아에 서제국 유일의 드워프 상관과 엘프 상관이 있다는 것이었다. 드래곤의 회랑을 따라 남대륙에서 서대륙으로 올라오는 드워프와 엘프들은 이다 강 중류까지 내려와 이곳 마이리아 시까지 이르면 더 이상 하류로 내려가지 않고 여기 머물며 필요한 거래를 했다. 테라미즈넨 제국의 황제가 엘프와 드워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테라미즈 시내에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 덕분에 마이리아 시는 상당한 반사적 이익을 입은 셈이었다. 드워프와 엘프는 원래 인간들과 섞이는 것을 싫어하였지만, 그들도 인간들에게 얻을 것이 있고(주로 서적과 도자기와 포도주) 인간들 중에서도 드워프제 금속세공품과 무기, 엘프제 고급 직물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이곳 상관에서는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곳이 엘프와 드워프의 집결지가 된 데에는 역사적인 이유도 있었다. 누리디안 대제국의 8대 황제인 코드헤인은 엘프인 마이리아를 사랑하여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서경을 세우고 도시 이름을 마이리아라 칭했다. 마이리아는 코드헤인을 사랑하지 않았기에 도시를 받지 않으려 했지만 서대륙에 거점이 필요하다는 다른 엘프들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꿨고 도시를 준 데 대한 보답으로 그 도시에서 거주하면서 때때로 코드헤인이 찾아오면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면서 결국 사랑이 싹텄고, 코드헤인의 딸을 낳은 마이리아는 아이가 성년이 되자 다시 엘프의 땅으로 돌아갔다. 딸은 마이리아의 2대 시장이 되어 200년간 마이리아를 다스렸고 그녀 덕분에 마이리아는 제국 멸망의 대혼란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녀도 인간과의 사이에 딸을 낳았고 그 딸이 크자 시장의 자리를 물려 주었다. 이 때부터는 이미 마이리아 가문에 흐르는 엘프의 피가 희석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마이리아 가문은 대대로 장수하는 가문으로 유명했다. 마이리아 가문의 여자가 시장이 되는 전통은 1200년간 확고하게 자리잡아 지금도 이곳의 시장은 여자였다. 카엔이 마이리아 시의 역사를 대강 설명하며 마이리아 시 관광지도를 보여 주자 렌은 눈을 빛내며 관광계획을 세웠다. 여관에 딸린 고급스런 식당에서 버섯 오믈렛과 오렌지로 간단히 아침을 먹은 둘은 먼저 엘프 마이리아가 코드헤인 황제로부터 구혼을 받은 장소라는 '구혼의 언덕'을 구경하고 그 근처에서 점심을 먹은 후 아름답고 장대하기로 소문난 봄의 여신의 신전을 보고 거기서 조금 떨어진 드워프 대장간에 들러 메스 제작을 주문하기로 했다. 여관을 나오자마자 렌은 슬그머니 카엔의 팔짱을 꼈다. 카엔이 놀라자 렌은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제가 살던 곳에서는 남녀가 걸을 때에는 항상 여자가 남자의 팔짱을 끼도록 되어 있답니다. 안 그러면 결례예요." 렌의 생각을 다 읽은 카엔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구혼의 언덕은 언덕이었다. 그저 언덕이었다. 언덕일 뿐이었다. 잔뜩 기대를 품고 그곳에 오른 렌은 언덕 위에 달랑 "이곳에서 초대 시장 엘프 마이리아가 누리디안 대제국 8대 황제 코드헤인으로부터 구혼받다"라고 써 있는 기념비 하나와 쥬스장수의 포장마차만이 있자 그저 허탈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게 뭐에요? 여기에 뭐 볼 게 있다는 거에요?" 렌이 묻자 카엔은 당황해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글쎄요. 일단 여기 안내지도에는 볼 만한 곳이라고 되어 있던데..." 둘이 실망하고 있는 모습을 본 쥬스장수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 안내지도를 따라 여기까지 온 사람이 한둘이 아니랍니다. 볼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하루에 수십 명씩은 올라왔다 내려가죠. 아마 시장님 가문의 입김 덕분에 여기가 안내지도에 실린 것 같아요. 오죽하면 이 동네에 '마이리아에서 구혼의 언덕 구경하기'라는 속담까지 있겠습니까? 남의 말만 믿고 쓸데없는 짓 하는 걸 가리키는 말이죠. 하하하. 어쨌든 더운데 언덕 올라왔던 사람들이 허탈해하며 쥬스 한 잔씩은 마시고 간답니다. 그래서 장사는 쏠쏠합니다." 카엔은 쓴웃음을 지으며 60푼을 주고 쥬스 두 잔을 사서 렌과 함께 마셨다. "맛있네요." 렌은 생긋 웃으며 시원한 오렌지 쥬스를 달게 마셨다. "설마 봄의 여신의 신전도 이런 건 아니겠죠?" 렌의 물음에 카엔이 대답하기 전에 쥬스장수가 먼저 말했다. "봄의 여신의 신전은 꼭 가보십시오. 거기야말로 진짜 알짜배기에요. 절대 후회 안하실 겁니다." "고마워요." 렌은 웃으며 쥬스장수에게 감사를 표했다. 평범한 소녀인데도 웃음은 순간적으로 몹시 아름다워서 쥬스장수는 잠시 넋을 잃었다. 쥬스장수가 안 보이는 곳까지 가서 순간이동한 렌과 카엔은 봄의 여신의 신전 부근 골목에 내려섰다. 신전은 적토로 만들어진 아치와 구의 연속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봄의 여신에게 참배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죠?" 렌의 물음에 카엔은 아는 대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제일 중요한 건 역시 사랑과 결혼이죠. 사랑의 여신이니까요. 서제국의 결혼식 주례는 일반적으로 봄의 여신의 사제들이 맡는답니다. 당연히 사제들은 모두 여자들이고요. 결혼식은 언제나 있으니까 수입이 짭짤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지 요즘엔 건강이라든지 사업의 성공같은 것도 봄의 여신에게 기원하면 된다고 선전한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그런 건 번성을 상징하는 여름의 여신에게 부탁하는 게 맞을 텐데요." 이야기를 나누며 둘은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 한쪽에는 부적이며 호신부를 파는 기념품 가게 비슷한 것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약혼식, 결혼식, 태어난 아이의 성명식 등 주요 예식을 접수하는 창구가 있었다. 친절하게도 "1급 사제-10골드, 2급 사제-5골드, 3급 사제-3골드"라고 가격까지 안내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단단히 상업주의에 물들어 있는 듯했다. "원래 저렇게 돈을 받는 거예요?" 렌이 귓속말로 묻자 카엔은 조용히 대답했다. "사실 이제 봄의 여신의 신전은 종교라기보다는 각종 의식을 집전하는 의례담당기관 비슷하게 되어 버렸어요. 봄의 여신의 여사제들은 돈을 밝히는 걸로 유명해요. 네 여신들 중에서는 겨울의 여신 쪽이 제일 검박하지만, 또 그만큼 세력이 약하답니다. 이 웅장한 신전과 근사한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은 돈이 많이 들더라도 봄의 여신의 신전으로 옵니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자신이 낸 돈만큼 여신이 축복을 내려 주리라고 믿는 거지요." 그러고 보니 봄의 여신상-역시 적토로 만든 정교하고 아름다운 여신상이었다-앞에는 여러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열심히 기도드리고 있었다. 연애의 성공을 기원하는 듯한 젊은 처녀들이 제일 많았지만, 그 외에도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참배중이었다. 중년 남자들은 사업의 성공을 기원하는 것일 테고, 노인들은 자식이 잘 되기를 기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병색이 완연한 사람들 몇 명도 들것에 누워서 기도 중이었다. 렌은 그 중 몹시 아파 보이는 여자를 안고 기도를 드리고 있는 젊은 남자에게 시선이 쏠렸다. "아픈 사람도 여기 와서 기원하나요?" "보통은 치유마법사한테 가지만, 치유마법사가 가망이 없다고 하는 경우에는 여기 아니면 겨울의 여신에게밖에 갈 데가 없으니까요. 우스운 일이지만 봄의 여신의 사제들은 아주 수완이 좋아서, 신도들이 줄었다 싶으면 봄의 여신의 기적으로 병을 고친 사람을 한두 명씩 만들어내곤 하죠. 그러면 또 사람들은 기적을 믿고 다시 신전으로 몰려들고요. 다른 신전들에서도 흉내내려고 해 봤지만, 봄의 여신의 사제들의 노하우를 따라갈 수는 없었습니다." 카엔은 냉소적으로 말했지만, 렌은 환자를 정신없이 쳐다보느라 카엔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 여자는 배가 아픈지 계속 몸을 뒤틀고 있다가 마침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비명소리를 듣고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봄의 여신의 사제 한 명이 다가가 신전 내에서 소란스럽게 굴지 말라는 주의를 주었으나, 여자의 안색이 점점 안 좋아지고 비명 소리가 높아지자 사제는 당황하여 견습사제를 불러 치유마법사를 데려오게 했다. 렌은 신전 내에서 함부로 사람을 치료해도 좋을지 잘 모르겠는데다 치유마법사가 올 거라고 하자 나서서 치료하지 않고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잠시 후 나타난 치유마법사는 놀랍게도 여자 엘프였다. 대강 돌아가는 판을 보니 신전과 바로 접한 엘프 상관에 엘프 치유마법사가 머물고 있어 견습사제가 그녀를 데려온 것 같았다. 렌은 처음 보는 이종족의 모습을 뚫어져라 관찰했다. 그녀는 정말 꿈처럼 아름다웠다. 훤칠한 큰 키와 거의 엉덩이까지 닿는 푸른 색 머리카락, 머리 색에 맞춘 푸른 의상-소즈릴이 아니고 히마티온 비슷한 그리스풍 의상이었다-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마치 동화책의 삽화에서 금방 빠져나온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녀의 슬픔 어린 푸른 눈은 깊은 호수 같았고, 환자를 향해 뻗는 하얀 손은 백옥으로 깎아 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무척 어려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나이 들어 보였다. 우아하게 느릿느릿 움직이는 그녀의 자태를 보고 있노라면 그녀의 주위에만 시간이 잠시 멈춰 있는 듯했다. 그 엘프는 몸을 굽혀 환자를 살펴보더니 잠시 후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떨어져 있어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고칠 방법이 없다는 것 같았다. 환자의 남편은 목청이 떠나가라 울부짖었다. 사제는 신전 안에서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게 못마땅한지 환자가 익숙한 곳에서 죽을 수 있도록 어서 환자를 집으로 데? 졀《箚?환자의 남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렌은 이제 자신이 나서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저, 제가 그 환자를 좀 봐도 되겠습니까?" 렌이 말하자 환자를 둘러싸고 있던 사제와 견습사제, 환자의 남편, 그리고 엘프 마법사가 모두 렌을 돌아보았다. 사제가 대표로 물었다. "당신이 뭔데요?" 렌의 평범한 의상과 마법반지로 가려진 평범한 외모가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 듯 사제의 말투는 퉁명스러웠다. "저는 치료사입니다." 렌의 대답에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이 얼굴을 찡그렸다. "치유마법사도 못 고친 병을 치료사가 고친다니, 지금 제정신입니까? 더구나 그대같이 어리디 어린 사람이...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니니 어서 저 쪽 안 보이는 데로 가요!" 사제는 경멸 가득한 어조로 쏘아붙였다. 렌은 화가 났다. "지금 사람이 죽어가는데 제가 치료사인지 마법사인지 그렇게 중요한가요? 어차피 치유마법사님도 못 고친다고 하셨으니 제가 진찰해도 밑져야 본전이 아닌가요?" 렌의 소리치자 엘프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소녀의 말도 맞군요. 어차피 제 힘으로는 이 환자를 고칠 수 없으니까요." 엘프의 목소리는 환자를 고칠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서늘한 시냇물 같았다. 엘프 마법사의 말에 남자는 다시 절망적으로 울부짖었다. 그는 그러다가 렌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네가 과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느냐는 눈빛이었다. 환자의 남편이 주저하는 것을 본 여사제는 혹시라도 그가 치료를 부탁할까봐 겁났는지 렌의 코앞으로 와 삿대질을 시작했다. "이봐요, 어린 아가씨, 잘못해서 저 환자가 죽으면 아가씨가 책임질 거예요? 이 신전이 무슨 부정이라도 타면 아가씨가 책임질 거냐고요! 사람 목숨 가지고 섣부른 소리 하는 거 아녜요! 치료사 주제에 어디 감히!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지! 어디서 뭘 훔쳐 배웠는지는 몰라도 썩 나가요!" 매몰차게 말하는 여사제의 태도에 렌은 눈물이 나올 정도로 화가 났다. "사제님, 사제님의 신은 사람들에게 옳은 일을 하라고 가르치지 않나요? 아픈 사람이 있으면 구하고,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먹을 것을 주라고 하지 않나요? 하긴 지금 이 신전에서 행하는 것을 보니 이곳에 신의 가르침 따위는 없는 것 같군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 신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까지 막지는 마셔야죠!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전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니 막지 마세요!" 렌은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황궁에서 가지고 나온 보석반지 하나를 꺼내어 여사제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여사제는 보석을 보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렌의 손에서 빼앗듯이 보석을 잡아채 불빛에 비춰 보았다. 탐욕이 그녀의 눈에서 타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모르긴 몰라도 저 여사제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제하는 것보다는 보석을 감정하는 데 더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여사제는 마지못해 보석을 렌에게 건네더니 겸연쩍게 말했다. "그대가 이 신전에서 사람을 구해 보겠다니 내 막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대가 책임져야 합니다." 렌은 이 탐욕스런 사제에게 아무 말도 더 하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 환자에게 다가갔다. 환자의 남편은 렌의 확신에 찬 모습에 희망을 걸었는지 순순히 환자를 내어 주었다. 렌은 정명기를 일으켜 바닥에 눕혀진 환자의 손목을 짚었다. 정명기는 환자 체내 구석구석을 돌았다. 이상부위를 감지한 렌은 눈살을 찌푸리며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의미에서 환자의 오른쪽 복부를 살짝 건드렸다. 환자는 "으아아악!"하는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틀림없었다. 이 환자는 맹장염이었다. 그것도 맹장염이 생긴 지 상당히 된 것 같았다. 이미 침과 정명기와 약초로 염증을 가라앉힐 단계는 지나 버렸고, 지금으로서는 복막염으로 진행하기 전에 빨리 수술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여기 침대가 갖추어진 조용한 방이 있나요? 그리고 독한 알코올이랑 깨끗한 솜도 필요한데요." 렌이 다급하게 말하자 견습사제-렌 또래의 소녀였다-가 대답했다. "네, 이 건물 안쪽에 딱 맞는 방이 있고요, 증류주로 만든 알코올도 넉넉히 있어요. 솜은 찾아볼게요." 어느새 렌이 보이는 위엄 있는 분위기에 휩쓸린 사람들은 견습사제가 이끄는 대로 환자를 신전의 안쪽 방으로 옮겨 침대에 눕혔다. 견습사제는 어딘가로 뛰어가 알코올과 솜 덩어리를 가져왔다. 솜은 과연 깨끗한 것인지 의심스러웠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렌은 먼저 환자의 배 부위를 알코올을 묻힌 솜으로 깨끗하게 닦았다. 지금 환자의 체온이 약간 높은 상태이니 알코올로 닦는 것은 소독뿐만 아니라 발열저하의 효과도 있었다. 그 다음 늘 몸에서 떼어놓지 않고 지니고 다니는 침통에서 은침을 꺼내 환자의 몸 여기저기에 찔러넣었다. 환자의 남편이 소리를 지르며 제지하려 했지만 엘프 마법사가 말렸다. "해치려는 건 아닌 듯하니 지켜보도록 하죠." 렌은 가볍게 ? 廚角臼?엘프 마법사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침 하나 하나를 신중하게 찔러 넣었기 때문에 침술 시전을 하는 데 대략 20분 정도 걸렸다. 환자의 살을 톡톡 쳐 마취가 되었음을 확인한 렌은 테라미즈의 중앙시장에서 메스 대용으로 사 두었던 칼에 알코올을 붓고 거기에 불을 붙여 소독했다. 작은 칼이어서 침통에 함께 넣어 가지고 다녔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다행히도 침을 이용한 마취가 효과가 있었는지 환자의 비명소리는 조금 잦아들었다. "제가 지금부터 하려는 일에 절대로 놀라지 마세요." 렌은 주위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카에, 아니 칼란님, 손 좀 내밀어 보세요." 렌은 하마터면 카엔을 본명으로 부를 뻔했다. 카엔이 손을 내밀자 렌은 알코올을 잔뜩 부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도 알코올에 푹 담갔다. 어설프나마 어느 정도 소독이 될 것이다. 알콜이 날아가 손이 차갑게 마르자 대강의 준비를 마쳤음을 확인하고 렌은 심호흡을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 보는 외과수술이었다.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칼을 쥔 렌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렌은 결국 칼을 잡았던 손에서 힘을 빼고 손바닥에 난 식은땀을 닦았다. 생살에 칼을 찔러 넣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양의학은 의과대학에 입학한 후에 배워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서 의학서적만 읽어두고 실습은 전혀 안 해 보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후회막급이었다. 렌은 이를 악물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때로는 사람을 상하게 해야 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겪는 엄청난 긴장감이 집중력을 불러왔다. 예전에 보았던 일반외과학 책의 맹장염 페이지가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렌은 다시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쉰 후 과감하게 칼을 환자의 오른쪽 복부에 찔러넣었다. 칼끝은 소위 맥버니 점(McBumey's Point)으로 정확하게 들어갔다. 살 속으로 칼날이 푹 들어가는 느낌이 섬뜩하고 소름끼쳤다. 카엔을 제외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어머나!!!" "꺄아아악!!!!" "아이구야!!!!" "여보오오오!!!" "엄마야!!!!" 특히 환자의 남편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렌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렌이 뭔가 제대로 하려 한다는 것을 간파한 엘프 마법사는 용케 환자의 남편을 막아 주었다. 렌은 그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칼을 움직여 복부의 피부를 절개해 나갔다. 피부, 피하조직,외사근경, 내사근경, 전복막지방층,복막까지 모두 절개하지 침착함이 돌아왔다. 다행히 침에 지혈 효과도 있어 출혈은 많지 않았다. "칼란님, 피 나오는 건 솜으로 닦아 주세요." 렌이 냉정하고 침착하게 말하자 카엔은 재빨리 솜을 들어 절개부위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았다. "칼란님, 절개부위 양쪽을 붙잡아 주세요." 카엔은 다시 피부 양쪽을 손으로 붙잡아 벌렸다. 벌어진 피부 사이로 외과학 책에서 보았던 대로 뭉클뭉클한 대장이 보였다. 렌은 맹장이 한눈에 보이지 않자 조금더 내장을 헤집었다. 식은 땀이 흘렀다. 사람들은 환자 뱃속에 순대처럼 가득 차 있는 내장을 구경하며 입을 벌렸다. 한참의 시간을 들인후에 렌은 마침내 창자를 조금 잡아 빼어 맹장을 찾았다. 렌은 멩장의 옆에 꼬리처럼 잔뜩 붙어 있는 충수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충수는 잔뜩 염증이 생겨 터지기 직전이었다. 자칫하면 복막염이 될 뻔했다. 정말로 환자가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렌은 등골이 오싹했다. "실을 좀 가져다 주세요." 견습사제는 황급히 어딘가로 뛰어갔다가 면실을 들고 돌아왔다. 렌은 실을 알코올에 푹 적셨다. 그리고 부어오른 충수의 아래쪽을 묶었다. 혈관겸자를 대신하는 임기응변이었다. 랜은 왼손으로 충수의 끝을 잡고 오른손에 잡은 칼로 묶은 부위 바로 위쪽을 잘라냈다. 고름과 피가 튀었다. 칼은 아주 잘들는 것이 다행이었다. 잘린 부위에 정명기를 약간 불어넣은 렌은 다시 말했다. "여기에 치유마법을 좀 시전해 주세요." 카엔이 뱃가죽을 잡고 있던 손을 채 놓기도 전에 엘프 마법사가 나섰다. 새하얀 빛을 양손에 일으킨 엘프 마법사는 잘려나간 충수 부위에 빛을 쏟아부었고, 상처는 곧 아물었다. 렌은 이제 가장 힘든 부분이 지나갔음을 알았다. 렌은 꺼냈던 내장을 다시 잘 구겨 뱃속에 집어넣었다. 처음이라 제대로 집어넣지를 못해 배가 전보다 많이 빵빵해졌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렌의 지식에 따르면 대강 집어넣어도 내장은 나중에 저절로 제자리를 찾아간다고 했다. 렌은 아직도 조금씩 피가 나는 양쪽 뱃가죽을 비슷하게 맞추었다. "여기에도 치유마법이 필요합니다." 엘프 마법사는 기다렸다는 듯 다시 절개부위에 하얀 빛을 쏟아부었다. 절개부위는 서서히 맞붙기 시작했다. 렌은 이제 한시름 놓은 기분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마법의 힘으로 상처가 나아가는 걸 보는 것은 언제나 감동적이었다. 렌은 환자의 목과 가슴과 배 주위 여기저기에 꽂아 놓았던 침을 뺐다. 환자는 침이 빠지자 일시적으 로 고통을 느껴 신음했지만 곧 조금 전보다는 훨씬 편안한 표정으로 잠이 들었다. "휴, 이제 끝났어요." 이제 환자가 무사하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렸다. 렌은 피와 고름이 튄 얼굴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다 렌은 싱긋 웃었다. 치유마법이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이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수술을 했으니 치유마법으로 순식간에 상처를 낫게 하지 않았다면 아마 수술부위에 틀림없이 염증이 생겼을 것이고, 항생제가 없는 이 세계에서는 환자의 목숨마저도 위태로워졌을 것이다. "모든 게 잘 됐어요. 이제 저 분은 무사하실 거예요." 환자의 얼굴이 편안해지고 혈색이 돌아오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환자의 남편은 금방 엉엉 울면서 렌에게 감사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나는 이 사람 없으면 못 살아요. 치료사라고 하더니 이제 보니 치유마법사보다 백 배, 천 배 훌륭하신 분이었군요.” 렌은 흐뭇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 치유마법사님께서 수술부위를 아물게 해 주시지 않았다면 제가 아무리 수술을 잘 했다 하더라도 환자의 회복이 훨씬 더뎌졌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치유마법사보다 백 배, 천 배 훌륭하다는 말씀은 거둬 주세요.” 렌의 말에 환자의 남편은 다시 엘프 마법사를 향해 거듭 감사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렌은 수술 후에 감염을 막을 수 있는 항생제 성분을 담은 약초를 찾는 것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차크 교수님과 함께 재배했던 약초 중에 치치라는 것이 있었는데 미약하지만 염증을 가라앉히는 효능을 보였었다. 나중에 다시 시험해 봐야지. 치유마법사가 귀하고 부족한 상황에서 치료사 옆에 항시 치유마법사가 붙어 수술시마다 치유마법을 시전해 주길 기대할 수는 없었다. 엘프 마법사에게 인사를 마친 환자의 남편은 다시 렌에게 몸을 돌려 감사를 표하며 어떻게 이 은혜를 갚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렌은 씩 웃었다. “저기요, 은혜를 갚으실 필요는 없고요, 적당히 치료비나 주시면 돼요.” 렌의 말에 카엔을 포함하여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구원의 사자처럼 나타나 기적처럼 환자를 치료하더니 치료비라니. 모두 할 말을 잃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 얼마를 드려야 합니까?” 환자의 남편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렌은 그의 행색 등등을 재빨리 검토한 후 적당한 금액을 말했다. “음... 첫 수술이고 하니까 깎아서 20실버만 받을게요.” 생각보다 금액이 적었는지 환자의 남편은 반색하며 1실버 은화 20개를 허리춤에서 꺼내 렌에게 주었다. “고맙습니다. 환자는 깨우지 마시고 당분간 편안히 푹 자게 놔두시고요, 깨어나면 하루 정도는 음식을 먹이지 마시다가, 환자가 방귀를 뀐 것을 확인하면 미음 같은 부드러운 음식을 주세요.” 렌은 은화를 받아 세어본 후 엘프 마법사에게로 몸을 돌렸다. “손을 내밀어 보시겠어요?” 엘프 마법사가 무심코 손을 내밀자 렌은 받은 돈 중 3할에 해당하는 6실버를 엘프 마법사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아까 도와주셨으니 이건 그 답례입니다.” 엘프 마법사는 생각지도 않았던 은화를 받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고 나서 렌은 다시 몸을 돌려 정색을 하고 여사제를 쳐다보았다. 여사제는 움찔했다. 그녀를 향해 렌은 웃으며 말했다. “신전에서 장소를 제공해 주셨으니 그 대가도 드려야겠죠? 치료비 중 2할인 4실버입니다. 덕분에 무사히 수술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여사제는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은화를 받았다. 여사제의 눈에 기쁨과 탐욕이 번득였다. 나중에 렌이 견습사제에게서 들어 알게 된 바로는, 헌금통에 넣는 헌금이나 정식으로 접수되는 헌금은 내부규정에 따라 사용처가 나누어지지만 이런 식으로 직접 건네받는 돈은 그대로 받는 사람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이 관행이라고 했다. 4실버가 큰돈은 아니었지만 원래 공돈은 아무리 적어도 흐뭇한 법이었다. 여사제는 완전히 기분이 풀어졌는지 정말로 감탄할 만한 뻔뻔함으로 렌에게 치하의 말을 했다. “오오, 치료사님, 놀라운 치료실력에 겸하여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런 사리분별까지 갖추었다니 정말로 놀랍습니다. 그대는 정녕코 봄의 여신께서 이 가련한 환자를 구하기 위해 친히 보내신 사자인 듯하군요. 나로 하여금 그대에 대해 의심을 품고 시련을 주게 함으로써 그대의 이 기적 같은 치료를 더욱 돋보이게 하였으니, 진정 봄의 여신의 깊은 뜻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혜량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내 그대의 이 기적을 널리 알려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더 정성으로 봄의 여신을 칭송케 하고 그대의 명성도 드높이겠습니다.” 렌은 혀에 참기름을 바른 듯이 유창하게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여사제를 기가 막혀 쳐다보다 겨우 할 말을 찾았다. “치료사라는 게 그다지 존경받는 업종은 아니니 치료사가 이곳 신전에서 신기한 방법으로 치료술을 펼쳤다는 것을 소? ?뺨?건 이곳 신전에 그다지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나이도 어리고 하니 오히려 사제님의 말씀의 진위가 의심받을 수도 있겠고요. 그러니 제 치료에 관해서는 비밀을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보호자분께서도 마찬가지고요.” 그 말에 여사제는 입을 다물고 눈을 굴렸다. 열심히 손익을 따져보는 듯했다. “알았어요. 그러면 내 그대의 겸손함을 높이 사 은밀한 선행을 하고자 하는 그대의 뜻을 존중하기로 하지요.” 여사제의 말은 여전히 청산유수 같았다. 렌은 이제 그녀에게 완전히 질려 버렸다. 저 말발만으로도 저 여사제는 절대 굶지는 않을 것이다. 저 정도니 그렇게 돈을 밝히는데도 신도들이 계속 몰리는 거겠지. 그 옆에서 은화를 만지작거리던 엘프 마법사는 대강 돈의 분배가 끝난 틈을 타 급히 물었다. "대체 그대는 뭘 한 거죠?" 렌은 수술을 만족스럽게 끝내고 난 후의 뿌듯함에 잠겨 대답했다. "사람의 배 오른쪽 여기쯤에는 맹장이라는 창자가 있고, 그 맹장이라는 것 끝에는 충수라는 작은 꼬리 비슷한 것이 달려 있는데, 음식을 먹고 소화하다 보면 가끔 충수에 찌꺼기가 고여 썩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렇게 썩게 되면 충수 자체에도 염증이 생겨 오른쪽 아랫배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파 오고, 만약에 충수가 터져 버리면 뱃속 전체가 더러운 균으로 가득 차게 되어 버리죠. 그걸 고칠 방법은 충수가 터지기 전에 아예 잘라버리는 방법밖에 없어요." 얘기하면서도 렌은 계속 짜릿한 기분에 어쩔 줄 몰랐다. 이 맛에 의사들이 "위대한 외과의사"가 되기를 꿈꾸는가 보다. 내과의사들은 외과의사를 ‘칼잡이’라고 놀린다지만 직접 손을 써서 환부를 도려내어 환자를 즉각적으로 낫게 하는 희열은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었다. 엘프 마법사는 금방 들은 얘기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배를 갈라 사람 몸속에 있는 창자를 잘라낸단 얘기인가요?" "금방 보셨잖아요." 렌은 환하게 웃었다. 피 묻고 얼룩진 렌의 얼굴은 반지의 마법으로 평범하게 가장되어 있기는 했지만 기쁨과 생명에 차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보였다. 카엔은 솜을 들어 렌의 얼굴에 튀어 있는 피와 고름을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수술 후 느끼는 카엔의 부드러운 손길은 너무도 좋았다. 렌은 이 기쁜 순간에 카엔에게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 키스한다면 순진한 카엔이 얼마나 놀라겠는가. 초창기에 스스로 두어 번 키스한 후로는 카엔은 먼저 키스하는 일이 없었고, 자신이 키스할 때마다 카엔이 깜짝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까지 했다. 엘프는 마침내 선망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렌에게 말했다. "제 이름은 라빌입니다. 남대륙 서북쪽의 푸른 바람의 엘프덤에서 왔죠. 그대의 이름을 여쭤보아도 될까요? 그대와 일행분을 엘프 상관으로 모셔 차를 대접하고 싶은데요." 그 말에 봄의 여신의 사제는 탄성을 올렸다. "라빌님이시라고요? 이런 영광이! 치유하는 손 라빌님 맞으시죠? 오오, 라빌님을 직접 이 두 눈으로 보게 되다니 믿어지지가 않네요!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제가 뭐 편의 봐 드릴 건 없나요?" 라빌이라는 엘프는 사제가 수선 떠는 것을 담담한 눈으로 보다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예, 제가 라빌이 맞습니다. ‘치유하는 손’이란 별칭은 인간들이 제게 붙여 준 것이기는 하나, 제 능력에 비해 과한 호칭일 따름입니다." 렌은 라빌이 치유마법으로 유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금방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제 이름은 레이라고 합니다. 라빌님을 뵙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렌은 피가 군데군데 말라붙은 손으로 덥석 라빌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금방 손을 놓았다. 라빌은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렌의 손을 잡았다. 그 동작 하나만으로도 렌은 이 엘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카엔은 옆에서 약간 불안하게 라빌을 바라보았다. 원래 그는 이종족을 좋아하지 않았다. 인간들의 생각이 마법 없이도 저절로 읽혀지는 데 반해 엘프나 드워프의 경우에는 그저 감정의 색채만이 느껴질 뿐 생각은 그냥 읽혀지지 않아 마법을 일으켜 억지로 끄집어내야 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에 너무 익숙해진 그는 마음을 읽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마음을 읽기 쉽지 않은 존재가 곁에 있는 것 또한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엘프와 드워프들이 수도 테라미즈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기까지 했었다. 지금 저 엘프는 렌에게 무척 호의를 품고 있는 것이 확실하긴 했지만 그래도 카엔은 그녀가 껄끄러웠다. 그나마 남자 엘프가 아닌 것이 다행이랄까. "아, 그리고 이 분은 칼란님이시고요, 제게 고용된 치유마법사님이세요." 치유마법사가 치료사에게 고용되다니 하고 의아해하던 라빌은 아마도 저 치유마법사가 이 소녀의 독특한 치료술에 감탄해 스스로 고용되기를 자처한 것이리라고 나름대로 납득했다. 반면에 카엔은 연인이라든지 뭐 좀 더 친숙한 관계? ?소개되지 않은 것이 못내 섭섭했다. "제 초대는 받아들이시는 거죠? 두 분께서 마이리아 시에 얼마나 머무실 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계시는 동안만이라도 자주 뵈었으면 좋겠군요." "물론이에요! 괜찮으시죠, 칼란님?"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렌의 모습을 보며 카엔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 상관은 봄의 여신의 신전 바로 옆에 있었다. 가장 인기 있고 중요한 신전 옆에 엘프 상관이 있는 것만 보아도 마이리아 시에서 엘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엘프 상관은 어도비 양식과 비슷한 도시의 다른 건물과는 달리 아르누보 양식에 유사한 형태로서 덩굴진 나무조각으로 곳곳이 장식되고 건물 전체도 나무로 지어져 있었는데, 전혀 다른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나무색과 주위의 흙색이 아주 잘 어울렸다. 렌과 카엔은 라빌을 따라 엘프 상관으로 들어갔다. 상관의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었고 역시 소박하면서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레이님, 칼란님, 이리 오시죠." 1층은 회의실과 식당 등 공적인 장소이고 2층부터는 사실(私室)들이 있었는데, 라빌이 쓰고 있는 방은 상관의 2층에 있었다. 응접실이 딸린 넓은 방이었다. 응접실에는 두툼하고 고급스런 카페트가 깔려 있고 거기에 푹신푹신한 원형 방석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전형적인 엘프 풍 인테리어라고 했다. 워낙 아늑하게 꾸며져 있어 응접실에 한 번 누워 뒹굴기 시작하면 다시 일어나기 싫을 것 같았다. "조금 쉬시고 나면 두 분과 치료술에 관해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습니다. 레이님과 칼란님은 몸과 손을 씻고 싶으실 테니 저 쪽의 욕실을 이용하시지요. 저는 반 파잔 정도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렌은 라빌의 상냥함과 사려깊음에 감탄했다. "감사합니다. 저도 라빌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많아요." 라빌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빌이 가고 난 후 렌은 씻기 전에 먼저 카엔에게 물었다. "라빌님과 이야기를 나누려면 엘프에 대해 좀 알아야 할 텐데, 저는 엘프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거든요. 좀 가르쳐 주시겠어요?" 카엔은 고개를 끄덕이고, 곧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말하기 시작했다. "엘프는 참 아름답고 이상한 종족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남대륙에 살면서 인간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변화 없는 긴긴 세월을 보내는 것을 낙으로 삼죠. 아주 게으르고요. 이 엘프 상관에 와 있는 엘프들은 아주 예외적으로 현실참여적인 엘프라고 보면 됩니다. 엘프의 역사는 인간보다 훨씬 오래 되었다고들 하고, 심지어 인간의 문명은 전부 엘프에게서 전해진 거라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인간 세상이 시시각각으로 급변하는 데 반해 엘프의 사회는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은 보통 900년 내지 천 년을 살고, 긴 삶의 대부분을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지내다가 마지막 순간에 급격히 노화해서 살과 뼈가 부스러지면서 최후를 맞이하죠. 대부분이 마법에 재능이 있어 어지간한 엘프들은 최소한 2, 3서클 정도 마법은 쓸 줄 알고, 조금이라도 마법에 관심이 있는 엘프들은 6, 7서클까지도 쉽게 올라갑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열심히 수련하는 엘프는 별로 없어요. 의욕이 없다고나 할까요." "굉장히 욕심이 없는 종족인 것 같네요." "맞습니다. 그것이 엘프의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해요. 대부분의 엘프 커플들은 한두 명 이상의 아이를 낳지 않아서 인구는 언제나 그대로이고, 뭔가를 악착같이 가지고 싶어 하거나 발전시키려는 생각도 없어 보여요. 그나마 엘프들은 자연물을 얽어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엘프 비단은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생산되고 있고, 그것이 엘프 무역의 대상이 되고 있답니다."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의 엘프들은 옛날에 홍콩 시절에 "반지의 제왕"이라는 소설에서 읽었던 것과 같이 무한생명은 아닌 듯했다. 그래도 천 년이라니 얼마나 놀라운가.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라니! 인간이 아닌 다른 지성 있는 종족을 처음 만나는 렌은 조금 후 있을 라빌과의 대화를 무척 기대했다. 렌과 카엔이 피얼룩을 간단히 씻고 방석 위에 앉아 있는데 라빌이 들어왔다. 라빌은 들어오자마자 푹신해 보이는 방석 하나를 골라 그 위에 비스듬히 기대고 누웠다. 뭐 하나 급할 것도 바쁠 것도 없어 보이는 그 모습을 보니 렌의 머릿속에 그리던 고고하고 우아한 엘프의 이미지는 깨지고 그 대신에 뒹굴거리며 게으름 피우는 해달이나 듀우공의 이미지가 자리잡았다. 어쨌든 렌과 카엔도 라빌을 따라 흩어져 있는 방석에 드러누워 시원한 나무의 수액 같은 달콤한 음료를 마시며 라빌과 얘기를 나누었다. 주로 얘기한 것은 렌과 라빌이었고, 카엔은 옆에서 조용히 듣기만 했다. "레이님이 아까 수술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저는 정말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걸 느꼈답니다." 라빌이 감탄하며 말을 꺼내자 렌은 발그레해졌다. "사실? ?저도 처음 해 본 거예요." 좀 전 수술 때의 긴장감을 생각하니 렌은 아직도 마음이 떨렸다. "어디에서 그런 방법을 알게 되셨나요?" "어느 책에서 읽었지만, 자세한 사정은 말씀드리기가 곤란하네요." "그렇군요. 그래도 대강 설명해줄 수는 있으신가요?" 렌은 한숨을 쉬었다. "물론 전부 설명해드릴 수 있기는 한데요, 어설프게 말씀드려봤자 소용없고요, 최소한 몇 년에 걸쳐 꾸준히 배우셔야만 해요." 엘프는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레이님은 마이리아 시에 얼마나 머무실 건가요? 여기 계시는 동안이라도 배울 수 있는 데까지 배우고 싶은데요. 레이님의 치료에 관한 지식은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을 훌쩍 뛰어넘는 것 같습니다." 엘프의 말은 간절했다. 그 때까지 가만히 있던 카엔이 약간은 날카롭게 들리는 질문을 했다. "엘프들은 삶과 죽음에 집착이 없어서 치유마법이나 치료술에도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대가 특별히 치유마법사가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라빌은 카엔의 말에 길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건 아주 긴 이야기랍니다. 하긴 제가 엘프도 아닌 인간을 치료하려고 애쓰는 게 이상해 보이기도 하겠군요. 더더구나 엘프답지 않게 여기저기 다니면서 말이에요. 두 분은 제 얘기를 들어 주실 시간이 있으신지요?" 렌과 카엔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푸른 바람의 엘프덤에서 500년 전쯤에 태어났습니다. 그곳에서 부모님과 다른 엘프들과 함께 한없이 평화로운 세월을 보내다가, 100살 정도 되었을 때 바깥세상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른 엘프들과는 달리 호기심이 많고 부지런한 편이어서 장로님과 부모님을 졸라 마이리아 시로 가는 일행들 틈에 끼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제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곳 마이리아 시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화가였습니다. 사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저는 저렇게 못생긴 사람이 어떻게 화가 노릇을 하나 싶어 의아했었답니 다.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거든요. 키도 별로 크지 않고 얼굴에는 여드름이 잔뜩 나고 허리도 구부정해서, 꼭 무슨 서기나 상점 점원처럼 보였지요." 라빌의 목소리는 그리움에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저를 처음 보고 몇 날 밤을 새워 제 초상화를 그린 후에 선물로 주었답니다. 그 그림을 받는 순간 저는 숨이 멎는 것 같았어요. 그것은 제 모습이었지만 동시에 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요소들이 더 한층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아, 인간이란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 엘프의 손으로는 절대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거에요. 엘프들은 항상 그 최후의 한 발짝을 더 내딛지 못하고 멈춰 버리곤 하죠. 그 그림을 보고 저는 그의 영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깨달았지요. 엘프들은 물처럼 사랑하는데 비해 그의 사랑은 뜨거운 불과도 같았고 결국 저를 활활 태워 정신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시민들의 축복을 받으며 우리들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엘프식도 인간식도 아닌 소박한 결혼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의 아이도 낳았습니다. 딸이었고 참으로 예쁜 아이였어요. 하프엘프는 엘프보다도 더 아름답다고들 하지요? 그 애도 그랬습니다. 내 사랑하는 라빌리안." 라빌은 눈에 고인 눈물을 서둘러 닦았다. "제 이름과 그이의 이름을 합친 거였어요. 그렇게 우리는 행복하게 한참을 살았습니다. 엘프의 기준으로 보면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순간을 수만 번 되풀이해서 회상하다 보니 이제는 그 행복했던 시간이 오히려 길게 느껴지곤 합니다. 그런데 그이가 40세쯤 되고, 내 라빌리안이 15세쯤 되었을 때, 귀여운 우리 아기-아기라기엔 많이 컸지만 내 눈엔 언제나 그 아이는 아기였어요-는 병에 걸렸습니다. 원래 엘프는 병에 걸리는 일이 거의 없지만 하프엘프는 다르죠. 수명은 엘프의 반 정도로 인간보다 훨씬 길지만 인간이 걸리는 병에 똑같이 걸리고 똑같이 아프죠. 그 애가 아팠을 때 저는 너무 당황하여 인간 치유마법사를 불러다가 한없이 치유마법을 쏟아붓게 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 아기가 걸린 병이 뭔지도 저는 몰랐어요. 아이가 아플 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부모의 찢어지는 심정을 아시나요? 그렇게 결국 그 아이는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라빌은 숨이 막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저는 엘프로서는 참으로 드물게 자식을 저 자신보다 먼저 보내는 슬픔을 맛보았죠. 아아, 그것은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이 세상의 어떤 고통보다도 더 아프고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너무 괴로워서 눈물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괴롭고, 심장을 손톱으로 후벼 파는 것보다도 더 아팠습니다. 원래 별로 건강하지 못했던 리안-제 남편입니다-은 딸아이를 잃은 충격을 견디지 못해 얼마 되지 않아 따라서 죽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제게, 엘프인 저는 오래오래 살 아 인간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축적할 수 있으니 다른 인간들이 우리처럼 고통스러워하지 않도록 사람들을 고치는 것을 제 인생의 지표로 삼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아기와 남편을 모두 잃은 제가 절망 속에서 홀로 있을까봐 걱정한 거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세상에 혼자 남았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치유마법을 익힌 후 인간세계를 돌아다니며 치유마법을 써서 사람들을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라빌은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눈물을 철철 흘렸다. "차라리 제게는 엘프 마을을 떠나 인간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게 편했습니다. 격렬한 감정이란 건 엘프에게는 드문 일이죠. 제 친족들은 제가 지나치게 사랑하고 지나치게 슬퍼한다고 걱정했습니다. 인간의 나쁜 버릇을 배웠다고, 지나치게 인간답다고 나무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강하고 절절한 감정을 알아버린 저는 다시 이전의 무심하고 부드럽게 흘러가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엘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라빌은 몸을 굴려 엎드린 자세로 한동안 흐느꼈다. 렌은 이 엘프의 슬픔에 동화되어 눈물을 글썽였다. "치유하는 손이라는 호칭은 어떻게 얻게 되셨는지요?"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전, 제가 치유행을 시작한 지 30년 정도 되었을 때, 서대륙에서 다시 드래곤의 회랑을 따라 고향마을에 잠시 들르려던 저는 검푸른 내해 옆의 축복의 평야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황제의 저주'를 목격하게 되었죠." 엘프의 입에서 나온 말에 카엔은 온몸이 굳었다. 그러나 렌은 눈치채지 못하고 물었다. "황제의 저주라니요?" "인간들이 모두 쉬쉬하며 말하지 않아 저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저주가 펼쳐진 검푸른 내해 유역의 아름다운 도시 말틴은 본래 테라미즈넨 제국의 황제 카에닌의 출생지였다고 합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황제는 그 도시를 중심으로 인근 100아반 전부에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끔찍한 마법을 펼쳐 한 순간에 5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마법이 펼쳐진 곳은 지금도 죽음의 땅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때 황제는 절대 그 곳의 사람들을 구호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습니다. 그의 마법이 워낙 사악하고 무서웠기에 어차피 중심지에는 살아있는 생명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법이 펼쳐진 가장자리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헤매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인간들은 황제의 노여움이 두려워 그들을 죽게 내버려 두었지만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독기에 잠시 노출된 사람들의 경우 치유마법으로 씻겨 주자 차도가 있었습니다. 제 마법력은 그렇게 세지 않아서 황제가 펼친 마법의 독기를 다 해소시킬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독기의 영향을 적게 받은 수백 명 정도는 구할 수 있었습니다. 목숨을 구한 사람들은 저를 '치유하는 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 큰 지진이나 재난이 일어난 곳에 제가 나타나 사람들을 치료하자 그 별명이 조금씩 퍼지게 된 것 같습니다." 렌은 다시 물었다. "그 저주받은 땅은 아직도 그대로인가요?" 렌의 마음속에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황제에 대한 분노와 그 곳 사람들에 대한 염려가 솟아오르는 걸 읽은 카엔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러나 이야기에 집중한 렌은 카엔의 태도를 여전히 눈치채지 못했다. "예, 황제의 마법은 너무 강해서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곳의 독기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마법에 적응해 가, 이제는 마법의 가장자리에서 생존하는 사람도 조금은 있는 것 같습니다." 렌은 다시 물었다. "라빌님이 제 치료술을 배우시려는 이유는 뭔가요? 치유마법만이 우대받고 치료술은 천대받는데요." "사람을 치료하기 시작한지 380년, 저는 치유마법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온갖 질병들이 있고, 치유마법으로 겉에 드러난 상처를 낫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았습니다. 엘프 마을에는 원래 사람을 낫게 하는 방법 따위는 전해 내려오지 않았고, 인간들은 치유마법이 있다는 이유로 다른 치료술은 천시해서 발전이 없더군요. 약초술도 같은 이유에서인지 발전이 더디었고요. 그런데 레이님이 아까 하신 방법은 마법과는 전혀 상관없는 치료술이면서도 너무나 효과적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인체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정말로 잘 알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솜씨였습니다. 싫지 않으시다면 제게도 그 비밀을 전수해 주셨으면 합니다." 라빌의 이야기에 감동한 렌은 카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칼란님, 저는 메스가 완성되는 동안만이라도 이 분께 제가 알고 있는 치료술을 가르쳐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사정이 허락하면 이 분으로부터 그간 쌓으신 경험도 배우고 싶고요. 칼란님의 의향은 어떠세요?" 저 엘프가 맘에 들지 않고 특히 '황제의 저주'가 언급되었다는 것 자체 가 섬뜩했지만 카엔은 이미 렌이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하기로 결심한 터였다.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건 레이의 뜻대로입니다." "고마워요, 칼란님." "고맙습니다." 렌과 라빌은 각자 카엔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럼 저희들이 이곳에 있는 동안 7파잔(오후 두 시경)부터 저녁식사 때까지 제가 아는 것을 가르쳐 드리겠어요. 라빌님께서도 아는 것을 제게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업 장소는 저희들이 묵는 여관으로 하죠." 라빌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렌과 라빌은 함께 손을 맞잡았다. 카엔은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착잡한 심정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렌이 저번의 나와림 안딘 사건 때부터 황제에 대해 그다지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은 카엔도 거듭 읽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하여 황제의 또다른 악행까지 전해듣게 되자 렌은 이제 황제를 무슨 괴물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렌의 머릿속에 떠오른 ‘히틀러’라는 자가 누군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렌은 황제를 히틀러와 동급의 악마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혐오감과 경멸감에 카엔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만약 렌이 언젠가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면 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언제까지 진실을 숨길 수 있을까? 말틴 시민들의 울부짖음과 경악과 고통을 아주 한참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카엔은 문득 그들의 참상을 다시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엘프 상관을 나온 것은 거의 저녁 무렵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쏟아져 나와 거리는 무척 혼잡했다. 마이리아 시는 대륙성 기후라 여름에 무척 덥기 때문에 낮에는 쉬고 저녁부터 밤늦게까지 노는 것이 이 곳 풍습이라고 했다. 떠돌이 음유시인들이 목 좋은 곳에 자리잡고 서서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면 연인들은 발길을 멈추고 음악에 맞춰 '타라'라는 마이리아 전래의 춤을 추었다. 풍만한 술집 여종업원들은 길가로 끌어낸 탁자에 빽빽이 앉아 있는 손님들에게 마이리아 특산 흑주를 부지런히 날랐다. 목소리가 크고 생기가 넘치고 다혈질인 마이리아 사람들은 어딘지 홍콩 사람들과 비슷해서 렌은 고향에 돌아온 듯한 편안함을 느꼈다. 렌은 갑자기 침울해진 카엔에게 별별 우스갯소리를 하고 장난을 걸었다. 그러자 카엔은 겨우 웃었고 렌은 안심했다. 둘이 함께 별로 대단치도 않은 이야기를 도란도란 하며 길을 걷는 것은 몹시 즐거워서 드워프의 상관과 대장간에 다다르자 렌은 즐겁고 짧은 산책이 끝난 것을 아쉬워했다. 드워프 상관과 대장간들은 마이리아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동산 지하에 자리잡고 있었다. 원래 드워프들의 거주지는 남대륙 중부에 있는 코발 산맥 속의 동굴들이라는데, 드워프들은 이곳 마이리아 시에서도 고향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동산 아래에 굴을 뚫고 상당한 규모의 인공동굴을 조성한 후 그곳에 드워프 상관과 대장간, 금속세공소를 마련해 놓았다. "드워프는 어떤 종족인가요?" 렌의 질문에 카엔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드워프는 엘프에게서 수명과 아름다움을 빼고 집념과 성실함을 더한 존재라고 보면 됩니다. 성인 드워프의 키는 4피트 정도밖에 안 되는데 몸통 두께는 그대로이니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땅딸막하고 못생겼습니다. 그들의 수명도 200년에서 250년 정도밖에 안 되어 엘프보다 훨씬 단명하고요. 또 엘프들이 맑은 공기와 햇빛을 사랑하는데 비해 드워프들은 어둠과 땅속을 좋아해, 인간들에게서 음침하다거나 늘 뭔가 음모를 꾸민다거나 하는 오해를 받곤 하지요. 사실 그들에 관해서 알려진 것이라고는 그들이 어둠과 동굴을 좋아하고 온갖 유용한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엘프가 만들어내는 것 중에서 쓸모 있는 거라고는 엘프비단밖에 없지만-사실 그것도 사치품일 뿐이니 쓸모 있다고 하기는 어렵죠-드워프는 온갖 종류의 금속세공품, 무기, 그리고 각종 독특한 기계들을 만들어냅니다. 남대륙 무역에서도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요. 그들은 엘프보다 욕심이 많아서 만들어낸 것은 꼭 제값을 받지만 또 받은 만큼 훌륭하게 만들어 주지요."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돈을 많이 내야 좋은 칼을 얻을 수 있는 거군요." "그래요." "대장장이들이 여러 명이라는데 누구한테 가지요?" "여관 주인 말로는 '츄'라는 드워프가 가장 훌륭한 칼을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그는 칼 외에 다른 것은 절대 만들지 않고, 그가 만드는 칼은 어마어마한 살기를 품고 있어서 뽑기만 해도 상대방을 공포에 질리게 하고, 또 살을 베면 사람의 피를 빨아들여 칼날에는 피 한 점 묻지 않는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주문은 절대 받지 않는다고도 해요." "후, 그럼 핀셋이나 겸자 같은 건 다른 대장장이에게 주문해야겠네요. 하지만 왠지 메스는 그 츄라는 드워프에게 주문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요." 동산에 붙은 문-드워프식으로 낮게 만들어져 있어 둘은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했다-을 열자 생각보다 넓은 실내가 나타났다. 여기저기에서 작은 등불들이 타고 있고, 효과적으로 환기구를 만들어 놓았는지 실내 공기는 신선하였다. 중앙에는 흑발의 수염을 길게 기른 드워프 한 명이 책상에 앉아 두꺼운 접수장부를 펼쳐 놓고 열심히 뭔가를 적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드워프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게 물었다. "주문을 하러 왔습니다." 카엔이 말했다. "뭘 주문할 겁니까?" 렌은 미리 준비해 가져온 핀셋과 겸자, 가위, 바늘 등의 도면을 그 드워프에게 내밀었다. "이것들을 만들어 주세요." "재질은 무얼로 할까요?" "녹이 잘 슬지 않고 어느 정도 강도가 있는 거면 됩니다." 드워프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장부에 뭔가를 열심히 적어 넣었다. "전부 3골드, 선수금은 1골드입니다." 렌은 비싼 값에 놀랐다. "3골드라고요?" "더 싸게도 할 수 있지만 그러면 재료가 나빠집니다." 드워프는 어떠한 흥정도 거절할 태도였다. 렌은 하는 수 없이 1골드를 꺼내 드워프에게 건넸고, 드워프는 영수증을 써서 렌에게 주었다. "닷새 후에 찾으러 오십시오." 렌은 다시 그 드워프에게 물었다. "드워프 츄라는 분께 칼의 제작을 부탁하려고 하는데, 그것도 역시 여기에서 주문하나요?" "츄님께 주문을 한다고요?" 드워프는 놀랐다. "예. 그분이 제일 훌륭한 대장장이라면서요." 드워프는 렌을 뜯어보며 물었다. "누가 쓸 칼인데요?" "제가요." "그대는 설마 소드엑스퍼트는 아니겠지요?" "물론 그런 건 아닙니다." "소드엑스퍼트급 이상이라야만 츄님이 만든 검의 살기를 이길 수 있습니다. 실력이 없는 자들이 츄님의 검에 욕심을 냈다가 미쳐버렸다는 얘기 못 들었습니까?" 그의 말에 렌은 실망했으나 그래도 다시 욕심이 났다. "그분이 만든 칼이 훌륭하기는 한 거지요?" 렌의 질문에 드워프는 선망의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아, 츄님이야말로 대장장이 중의 대장장이, 장인 중의 장인이시죠. 나 같은 젊은 드워프는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츄님께서 서명도 안 새기고 대강 만들어 던져두는 보통 검이라도 한 번 만들어 보는 게 꿈입니다." 그 말을 듣자 렌은 츄 아닌 다른 대장장이에게 가기 싫어졌다. "그냥 그분께 부탁할래요." "충분히 설명했으니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십시오. 저기 계단으로 해서 지하로 내려가십시오. 251계단 내려가서 오른쪽에 있는 구멍으로 들어가면 츄님의 대장간입니다." 드워프는 실내 한 쪽에 있는 계단을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자기 할 일로 돌아갔다. 렌과 카엔은 계단을 밟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면서 조심스럽게 계단 수를 세었다. 벽에는 횃불이 간간이 달려 있어 발을 헛디딜 염려는 없었지만 일렁이는 불빛이 계단 벽에 긴 그림자를 남기며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251계단을 내려오자 접수창구의 드워프가 말한 것처럼 오른쪽에 구멍이 하나 있고 거기에는 렌이 모르는 문자로 뭐라 써 있었다. "저건 무슨 글자지요?" "누리디안 문자입니다. 누리디안 대제국이 멸망하고 난 후에도 한참동안 저 문자가 쓰였지만, 대략 500년 전부터는 학자들 말고는 저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누리디안 어도 거의 잊혀지고요. 하지만 드워프나 엘프들은 아직도 저 문자를 더 좋아해서 공용어 표기를 이따금씩 누리디안 문자로 한답니다. 저기 써 있는 글자의 뜻은 '검을 모르는 자 들어오지 말라'입니다." 이 세계로 오자마자 말과 글을 저절로 할 수 있게 되어 은근히 이 세계의 모든 언어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렌은 읽지 못하는 문자가 있다는 데에조금 실망하는 한편, 그걸 자유자재로 읽는 카엔에게 크게 감탄했다. "카엔님은 모르는 게 없으시군요." 렌이 칭찬하자 카엔은 언제나 그렇듯이 수줍어했다. 둘은 구멍에 달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츄의 대장간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화덕에서 나온 불빛이 어두운 실내를 붉게 비추고 있고, 실내 한가운데에는 드워프 한 명이 서서 모루 위에 놓인 검을 내리치고 있었다. 드워프는 기껏해야 렌의 가슴 정도 오는 키에 단단한 몸집을 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상당히 나이 들어 보였으나 인간으로 치면 몇 살일지 가늠할 수는 없었다. 둘이 들어오자 드워프는 고개를 들어 무뚝뚝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다짜고짜 반말부터 하는 드워프의 태도는 무뚝뚝하면서도 묘하게 진솔한 데가 있어 렌은 웃음지었다. "주문할 게 있어서요." 렌은 허리춤에 매고 있는 침통에서 칼을 꺼내 그에게 보였다. 칼에는 아직도 낮의 수술 때 묻은 약간의 피얼룩이 남아 있었다. "이 칼보다 칼날이 얇아야 하고, 날 길이는 조금 더 짧아야 하고, 갈지 않아도 잘 베이고 절대로 녹슬지 않아야 해요. 물에 끓이거나 불에 그슬려도 날이 상하지 않아야 하고요." 스테인레스 스틸이 없는 세계인만큼 녹이 슬지 않는 칼이란 쉽지 않을 테지만 녹슨 칼날로 수술을 했다가 패혈증이 ? 逅?가능성을 생각하면 그 부분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또 자외선 소독이 불가능하므로 칼을 소독하기 위해서는 끓이거나 불로 그을려야 할 텐데 그렇게 하면서 날이 상하면 안 될 터였다. 드워프는 렌의 주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대체 그런 칼을 만들어서 어디다 쓰려느냐? 그렇게 작아서는 실제 사람을 공격할 때에는 별로 쓸모가 없다. 암기로 던지기에도 적당하지 않고 고기 써는 칼 같지도 않은데." 렌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죽이는 칼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칼이에요. 사람의 피부를 베어 수술할 때 쓰려고 해요." 드워프는 생소한 말에 놀라 고개를 들어 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 세상에 사람을 살리는 칼 같은 건 없다." "있어요. 모든 도구는 쓰기 나름이에요. 보습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듯 칼로도 사람을 살릴 수 있어요." 드워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가 만들 수 있는 건 살기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칼뿐인데, 그래도 좋으냐?" "살기 없이는 만들 수 없나요?" 그 말에 드워프 츄는 코웃음쳤다. "살기 없는 칼 따위야 인간 대장장이한테 부탁해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게다. 그러나 살기 없는 칼 가지고 뭘 베겠느냐? 무 썰다가 자기 손가락이나 자르면 모를까. 나는 그런 칼은 안 만든다." 렌은 잠시 고민했다. "잘 죽이는 칼이라면 잘 살릴 수도 있겠죠. 만들어 주세요." "네가 내 칼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내 칼의 살기는 함부로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미쳐 버리는 사람도 있다." 드워프 츄는 구석에 세워 둔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 않는 검 하나를 집어 렌에게 던졌다. 렌은 용케 검을 받았지만 상당한 무게에 휘청거렸다. "그 검을 검집에서 뽑아 보아라." 드워프의 말에 렌은 힘을 주어 검을 검집에서 10센티미터 정도 뽑았다. 그 순간 오싹하고도 유혹적인 기운이 '쉬익' 소리를 내며 렌의 손을 타고 넘실거렸다. 렌은 놀라서 검을 떨어뜨렸다. "이래도 주문할 테냐?" 렌은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이번에는 정명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손에 정명기를 모은 채 다시 검날에 손을 댔다. 정명기를 검날에 주입하자 검의 살기는 정명기와 섞이는 듯 마는 듯 하다가 사그라졌다. 렌은 그 상태에서 칼날을 손가락에 살짝 대 보았다. 그저 가볍게 대기만 했는데도 칼날은 손가락 살을 부드럽게 파고들어갔다. 베어진 살에서는 한동안 피가 나지 않다가 렌이 손가락 끝을 누르자 비로소 피가 샘솟기 시작했다. 렌은 너무 훌륭한 칼의 성능에 감탄의 한숨을 쉬었다. 드워프 츄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너라면 쉽게 검의 살기에 말려들지는 않을 것 같으니 네 주문대로 만들어 주마. 녹이 슬지 않는 재료는 오리하르콘밖에 없는데 재료비가 워낙 비싸서 값은 50골드다." 드워프의 말에 렌은 입을 딱 벌렸다. "50골드라고요?" "그래, 50골드." "당연히 깎아주시겠죠? 10골드 정도면 어때요?" "10골드짜리 칼을 원한다면 옆집의 푼에게 가거라. 아마 잡철을 써서 모양만 그럴싸하게 만들어 줄 게다." 츄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저, 그럼 할부로 되나요? 할부이자 상당은 더 쳐서 드릴게요. 48개월 할부로 하고 할부이자 10%를 더 붙이죠. 소유권유보부 매매로 하고요." "일 없다." 렌은 무척 안타까웠다. 츄라면 틀림없이 정말로 훌륭한 칼을 만들어 줄 것 같았다. 별로 욕심이 없는 렌이었지만 책 욕심과 치료도구 욕심만은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었다. 이 일을 어쩌나 하고 난처해하던 렌을 보자 카엔은 렌의 귀에 속삭였다. "렌, 내가 사서 선물로 줄게요." 렌은 곰곰 생각하다가 귓속말로 대답했다. "그럼 앞으로 2년에 걸쳐 매달 2골드씩 카엔님께 갚을게요. 황제가 우리를 쫓지 않는다는 게 확실해지면 황궁에서 가져온 보석을 팔아 바로 갚고요. 이자는 쳐 드릴게요." "선물로 준다는데도요." "저렇게 비싼 걸 선물로 받을 수는 없어요. 카엔님, 제가 이 세계에 오기 전에 저는 누군가의 절실한 사랑을 받았어요. 전에 말씀드렸던 것 기억하시죠? 그 사람은 제게 모든 것을 해 주고 싶어 했고, 제가 가지고 있던 온갖 사치품들은 전부 그 사람이 사 준 것이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그렇게 받기만 해서는 안 되었어요. 아아, 나중에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그가 처음 선물을 해 주기 시작하고 제가 그것을 받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일방이 주고 일방이 받는 관계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어요. 저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해요." 렌은 완강했다. 그나마 자신이 돈 쓰는 걸 허락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카엔은 돈주머니에서 10골드짜리 금화 다섯 개를 꺼내 츄에게 주려고 했다. "카엔님, 원래 계약금만 먼저 내고 나머지 돈은 물건 찾을 때 내는 거예요." 렌이 부드럽게 웃으며 지적하자 카엔은 부끄러웠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 덕분에 렌의 마음속에 자신에 대한 보호본능이 불끈불끈 용솟음치는 것을 읽은 카엔은 다시 즐거워졌다. 렌은 카엔의 손에서 10골드 금화를 집어 드워프 츄에게 주었고, 츄는 금화를 불빛에 비추어 보기도 하고 씹어 보기도 한 후 고개를 끄덕이고 금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영수증이요." 렌이 말하자 츄는 잊어버릴 뻔 했다는 듯 10골드에 대한 영수증을 적어 렌에게 주었다. "혹시 칼의 살기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무를 수는 없다."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그 칼을 넣었던 통을 이리 좀 줘 보거라." 렌은 침통을 허리에서 끌러 츄에게 건넸다. "이 가느다란 침은 어디에다 쓰는 것이냐? 암기냐? 여기에다 독을 발라 적에게 던지는 거냐?" "아뇨. 그것 또한 사람을 살리는 데 쓰는 거예요." 츄는 신기한 듯 은침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덤으로 여기 들어 있는 수대로 그 침도 새것으로 만들어 주마. 오리하르콘으로 만들면 괜찮을 게다. 굵기나 길이는 이 정도면 되느냐?" 츄의 말에 렌은 무척 기뻐했다. "굵기는 그것보다 4분의 1 정도 더 가늘면 좋고요, 길이는 딱 그 정도면 적당해요." 메스는 보름 후에 완성된다고 했다. 렌은 오리하르콘 메스와 오리하르콘 침에 대한 기대감을 마음 가득 품고 카엔과 함께 여관으로 돌아왔다. 전 세계 의사들 중에 오리하르콘 메스와 침을 쓰는 건 자신뿐일 거라고 생각하니 렌은 흐뭇한 미소를 감추기 어려웠다. 메스가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는 한동안 마이리아 시에서의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다. 둘이 함께 묵는 여관은 어느 모로 보나 훌륭해서 렌은 물론이고 입맛과 취향이 까다로운 카엔마저도 만족스러워했다. 둘 모두 수도에서 마이리아 시까지의 보름간의 치료행에 약간 지쳐 있었기에 한 곳에 머물러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을 반가워했다. 사실 카엔은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말을 타고 하는 여행이란 걸 해 본 것이었고 렌 또한 황궁과 아카데미만 왔다 갔다 하는 생활을 수개월 동안 해서 물러질 대로 물러졌던 터였다. 렌은 카엔의 돈으로 비싼 여관에서 묵는 것이 마음에 걸렸었지만 다행히도 렌을 방문한 엘프 라빌을 본 여관 주인이 '치유하는 손 라빌'을 직접 만나게 된 데 황송해 하며 특별반액할인을 해 주겠다고 한 덕분에 부담이 덜어졌다. (물론 여관 주인은 라빌을 붙잡고 라빌의 얼굴을 보아 특별히 라빌의 '친구분들'에게 반액할인혜택을 준 거라는 점을 강조했다.) 일찍 일어나는 렌은 정명기 수련을 마치고 나면 카엔을 깨워 함께 식사를 하러 갔다. 초호화여관답게 식사는 매일매일 신선한 재료로 메뉴를 바꿔 가며 나왔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면 둘은 그날의 관광일정을 짜고 일찌감치 출발해서 관광지를 둘러본 후 여관이나 그 근처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그 다음에는 라빌과의 약속에 따라 여관으로 찾아온 라빌에게 치료술 수업을 했다. 렌의 설명은 무척 흥미롭고 자세해서 카엔도 라빌과 함께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사람의 몸에는 몇 가지의 거대한 흐름이 흐르고 있어요. 먼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흐름이 있어요." 렌은 기운차게 강의를 시작했다. "첫 번째는 순환계예요. 혈관에 피가 흘러 몸의 구석구석에 산소와 양분을 공급하고 노폐물을 받아들여 밖으로 배출하는 흐름을 말해요. 심장은 피를 펌프질해서 동맥을 통해 몸 구석구석으로 보내고 신체 각 부분은 그 피에 에너지를 소모하고 남은 노폐물을 실어 다시 심장으로 보내는데, 그렇게 심장으로 피가 가는 길에 신장에서 피가 걸러져서 더러운 성분은 모두 오줌을 통해 몸 밖으로 빠져 나가게 되고, 노폐물이 빠져나간 상태의 피는 심장에서 폐로 가 산소를 받아들인 후에 다시 심장을 거쳐 온몸으로 퍼져나가지요." 렌은 종이에다 간략하게 사람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다 심장과 폐와 신장을 덧붙인 후 각각을 혈관으로 연결했다. 알아보기 쉽게 동맥은 붉은 잉크로, 정맥은 푸른 잉크로 그렸다. 카엔과 라빌은 모두 신기한 듯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다음으로는 호흡계라고 해서 숨을 들이쉬어 산소를 받아들이고 숨을 내쉬어 몸에서 쌓인 이산화탄소를 밖으로 내보내는 흐름이 있어요. 산소는 우리 몸이 섭취한 음식을 태워 에너지를 얻는 것을 도와주는데, 그렇게 태우고 나면 이산화탄소라는 부산물이 생기거든요. 이산화탄 소가 몸에 쌓이면 호흡이 곤란해지고 결국 죽기도 하기 때문에 반드시 배출해 줘야 하고, 또 산소를 호흡하지 않으면 3, 4분 내에 죽어버리기 때문에 호흡은 정말로 생존에 필수적인 거예요." 렌은 허파꽈리에서 산소와 이산화탄소가 상호 교환되는 모습을 간략하게 그렸다. "끝으로 소화계가 있지요. 입으로 음식을 먹으면 식도로 넘어가 위에서 일차로 분쇄가 되고, 다시 소장에서 추가적으로 연동운동을 통해 음식물이 더 잘게 부서지면서 소장의 융모를 통해 음식물에서 양분을 흡수하고, 마지막으로 대장에서 수분을 흡수한 후 남은 찌꺼기는 직장을 통해 대변으로 나오게 되는 거예요." 렌은 사람 입, 위, 소장, 대장, 직장, 항문까지 이어지는 인체도를 하나 더 그려 짚어가며 설명했다. 렌의 설명 중 이미 알고 있는 부분도 있었지만 상당 부분은 낯설었기에 라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산소가 뭔가요? 그리고 이산화탄소는요?" 라빌의 질문에 렌은 망연자실했다. 그렇다, 이들은 아직 산소나 이산화탄소가 뭔지도 몰랐다. 렌은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공기를 아세요?" "공기란 이 허공을 말하는 건가요?" "이 허공은 그냥 허공이 아니에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작은 입자가 떠다니고 있죠. 제각기 다른 성질을 가진 몇 가지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가 섞여서 공기를 이루는데, 그 중 질소라고 불리는 입자가 80%, 산소라고 불리는 입자가 20% 정도에요." "이 허공이 입자로 가득 차 있다고요?" 라빌의 목소리에는 불신이 서려 있었다. "라빌님, 예를 들어 먼지가 떠다니고 있다고 쳐요. 큰 먼지는 잘 보이죠. 작은 먼지는 잘 안 보이고요. 그런데 아주 작은 먼지가 떠다니는 경우 그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할 수 있겠어요?" 렌의 비유에 라빌은 석연치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공기의 흐름이 막혀 있는 광산의 갱도 같은 곳에 들어가면 불꽃이 깜박거리다가 꺼져 버리죠. 그게 바로 산소가 부족하기 때문이에요. 음식을 태워 에너지를 얻는 것, 기름이나 나무를 태워 불꽃을 만드는 것, 전부 다 산소가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렇게 산소를 태우고 나면 이산화탄소라는 다른 종류의 공기가 생기는데, 그건 말하자면 음식을 소화시키고 난 다 음의 찌꺼기 같은 거예요. 이산화탄소가 몸 안에 쌓이면 굉장히 몸에 나쁘기 때문에, 바로바로 이산화탄소를 몸 밖으로 배출해 줘야만 해요. 마치 배설을 안 하면 큰일나는 것과 같은 이치예요. 살아 있는 생물의 대부분은 호흡을 하면서 산소를 들이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뿜죠." 렌은 열심히 설명해 나갔다. "눈에 보이는 흐름 다음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흐름이 있어요. 땅의 음기(陰氣), 하늘의 양기(陽氣)가 있고, 거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오운육기(五運六氣)란 것이 있지요. 목기(木氣), 화기(火氣), 토기(土氣), 금기(金氣), 수기(水氣)는 상생상극(相生相極)하는 땅의 기운인데, 그 기운은 우리 몸의 오장(五臟)에 연결되어 있고, 풍한서습조화(風寒暑濕燥火)의 육기(六氣)는 순환하는 하늘의 기운인데 이 기운은 우리 몸의 육부에 대응합니다. 오운육기가 서로 순환하는 길이 바로 경락이고, 기운이 모이는 곳이 경혈입니다. 오운육기가 얼마나 잘 조화롭게 순환하는가에 따라 건강해지기도 하고 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보지요. 심장발작이 일어난 사람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라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서너 명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쓰러지기 전에 새끼손가락이 저렸다고 하지 않던가요?" "그래요. 나중에 정신이 들었던 두 명이 그런 말을 했었어요." "심장과 새끼손가락은 아무 상관이 없는데 왜 그런 현상이 생기는지 이상하지 않으셨어요?" "그러고 보니 정말 이상하네요." 라빌은 비로소 깨달았다는 듯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건 바로, 새끼손가락의 경락이 심장까지 연결되어 있어 심장에 문제가 생겼을 때 새끼손가락도 함께 아프기 때문이랍니다." 그 경락은 수소음 심경(手小陰 心經)이라 불리는 것으로, 배꼽에서 일어나 가슴뼈를 따라 겨드랑이 아래로 향했다가 가슴을 횡단하고 다시 손가락 굽히는 근육을 따라 새끼손가락에서 끝나는 경락이었다. 심장과 새끼손가락의 연결은 동양의학을 믿지 않는 서양 의사들에게 경락의 존재를 설명하는 데 흔히 드는 예였다. 라빌은 탄성을 발했다. "정말 놀랍군요!" "그리고 민간요법 중에 체했을 때 엄지와 검지 사이의 살이 깊은 곳을 눌러 주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아시나요?" 렌은 며칠간의 치료행에서 이 세계의 민간요법 중 동양의학의 원리와 상통하는 게 몇 가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무척 기뻤는데, 지금 말하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시골 아낙네들 몇몇이 그러는 걸 본 적은 있어요." "효과가 있었지요?" "그 때는 나을 때가 되어 저절로 나은 걸로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대개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아요." 라빌은 곰곰 생각해 보며 대답했다. 렌은 다시 자세히 설명했다. "체했다는 건 명치 부분을 지나는 기가 막혀 있다는 것을 뜻하거든요. 그 부분을 지나는 경락은 엄지와 검지 사이까지 이어지는데, 기가 막혀서 체했을 때 이 부분을 자극하면 막힌 기가 풀리고 체증은 내려가게 되는 거예요." 라빌은 다시금 탄복했다. 그러다 라빌은 다시 질문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요. 하늘의 신은 여자이고 땅의 신은 남자인데, 하늘이 양이고 땅이 음이라면 음양이 거꾸로 된 게 아닌가요?" 라빌의 질문에 렌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저도 의아하게 생각했다가 마침내 깨닫고 감탄한 것입니다. 하늘에 양의 신이, 땅에 음의 신이 자리잡고 있으면 기운은 더 이상 순환하지 않고 그 상태로 정체되어 막혀 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하늘에 음의 신이, 땅에 양의 신이 있다면 음기는 아래로 내려오려 하고 양기는 위로 올라가려 하기 때문에 음양의 기운은 순환하게 되고 천지는 조화로워지지요. 대체로 신이라면 기 그 자체라기보다는 기의 작용을 뜻하므로, 그렇게 보는 것이 이치에 맞지요.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아래에 있고 땅이 위에 있으며 소(小)가 물러가고 대(大)가 와서 모든 것이 형통하는 태괘(泰卦)의 이치이고, 태극의 원리입니다. 한마디로, 고인 것은 좋지 않고 순환하는 것은 좋다는 뜻입니다." 렌의 말에는 알아듣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으나 그 근본원리는 참으로 명백하여 라빌뿐만 아니라 카엔도 연신 감탄했다. 그 모습을 보며 렌은 덧붙였다. "음기를 위에, 양기를 아래에 두어야 하는 이치는 사람을 치료하면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발과 하체를 따뜻하게, 머리를 차게 두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많은 병이 생기지요. 대부분의 질병은 음양의 균형이 흐트러져 생기는 것입니다. 음기의 많고 적음, 양기의 많고 적음을 알 수 있어야 하고, 그에 따라 적절하게 음양의 균형을 찾아 주는 치료를 하는 것이죠." 렌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던 라빌은 다시 물었다. "어떻게 음양을 구별할 수 있나요?" "양(陽)은 동(動)이고 음(陰)은 정(靜)입니다. 양은 적극적이며 음은 소극적입니다. 더운 것은 양이고 추운 것은 음입니다. 어떤 사람이 체온이 높고 깡마르고 맥박이 지나치게 빠르다면 그 사람은 몸에 음기가 적고 양기가 많은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뚱뚱하고 체온이 낮고 맥박이 약하며 혼자 조용히 있기를 좋아하면 음기가 많고 양기가 적은 것입니다. 그렇게 환자를 관찰하여 체질을 알게 되면 이제 그 환자에게 어떤 음식을 먹이고 어떤 치료를 할 것인지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죠. 음기가 많고 양기가 적은 환자에게는 음기를 약하게 하고 양기를 북돋을 수 있는 음식과 약을 먹이고, 음기가 적고 양기가 많은 환자에게는 그 반대로 하고요."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흐름과 눈에 보이지 않는 흐름에 따라 치료방법도 다른 건가요?" 라빌이 던진 질문은 말하자면 서양의학과 한의학의 차이를 묻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고치는 것은 빠르고 즉각적입니다. 제가 수술하는 걸 보셨겠지만 그렇게 아픈 부위를 아예 잘라내 버리면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요. 환자의 상황이 급박할 때에는 그런 식으로 환자의 몸에 상처를 내서라도 당장 해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왜 수많은 사람이 있는데 그 환자만 거기에 병이 생겼을까요? 또 감기가 유행할 때 왜 어떤 사람은 감기에 걸리고 어떤 사람은 안 걸리는 걸까요?" 렌의 물음에 라빌은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렌이 지적했다는 듯 크게 맞장구쳤다. "맞아요! 저도 늘 그 점을 느꼈습니다!" "병세가 생겨 달리 방법이 없을 때 수술하는 것은 미리 몸의 균형을 바로잡아 아예 처음부터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또 독한 약을 써서 병균을 죽이는 것은 환자의 몸 자체를 튼튼하게 하여 환자의 몸이 스스로 알아서 병을 물리치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니 사람을 잘 치료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보아 두 가지 방법을 적절히 섞어 써야 합니다." "아까 오행의 이치에 관하여 언급하신 것 같은데, 그러면 청룡, 적룡, 황룡, 백룡, 흑룡의 다섯 용족이 있는 것도 그런 이치인가요?" 라빌의 질문에 렌은 한동안 생각하다 대답했다. "사실 그것 또한 용에 관해 설명한 책에서 읽고 무척 놀랐던 부분입니다. 원래 오행의 이치는 검은 물의 기운이 푸른 나무의 기운을 낳고, 푸른 나무의 기운이 붉은 불의 기운을 낳고, 붉은 불의 기운이 누런 흙의 기운을, 누런 흙의 기운이 하얀 금속의 기운을, 하얀 금속의 기운이 다시 검은 물의 기운을 낳는 것이며, 또 수기는 화기를 극(極)하고, 화기는 금기를, 금기는 목기를, 목기는 토기를, 토기는 수기를 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책에서 읽으니 적룡족 가운데에서 황룡이 태어나고, 황룡족 가운데에서 백룡이 태어나는 등 드래곤의 생태는 정확히 오행의 이치와 일치하더군요." 라빌은 그동안 궁금했던 것이 한꺼번에 풀리자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레이님의 가르침은 정말 유익하고 흥미롭네요." "라빌님이 이 분야에 지식과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덕분에 유효적절하게 질문을 해 주신 거고, 그래서 강의가 재미있어진 거예요. 자, 오늘은 이 정도로 하죠. 숙제를 내 드릴 테니 내일까지 이걸 외어 오세요." 렌은 미리 준비해 둔 음양오행표-오행에 대응하는 감정, 맛, 색, 신체부위, 곡물, 가축, 소리 등을 정리한 표-를 라빌에게 건네주었다. 라빌은 감사하며 표를 받았다. 다음날 라빌이 얼마나 외웠는지 시험해 본 렌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다 외워 올 걸로 기대했는데 겨우 위에서 두 번째 칸까지밖에 못 외운 것이다. "가뜩이나 시간이 없는데 이 정도는 다 외우셔야지요." 렌이 야단치자 라빌은 움츠러들었다. "어제 오랫동안 강의를 들었더니 피곤해서 그만 늦잠을 자는 바람에..." 네 시간 들은 것 가지고 오랫동안이라니? 렌은 한심해하며 물었다. "몇 파잔까지 주무셨는데요?" "6파잔(정오)까지..." "잠자리에는 몇 시에 드셨는데요?" "10파잔(오후 8시)에요." 렌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옆에서는 카엔이 킥킥 웃었다. 옆구리를 쿡 찔러 카엔의 웃음을 멈춘 렌은 어처구니없어 하며 라빌에게 물었다. "그렇게 주무시고도 허리나 머리가 아프지 않으세요?" 그 말에 라빌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천만에요. 겨우 열 네 시간 자는 것 가지고는 아무 이상도 없어요. 제가 살던 엘프덤에는 사나흘 정도 꼼짝 않고 자는 엘프들도 많답니다. 저는 잠이 적은 편이라서 어린 시절 푸른 바람의 엘프덤에서 지낼 적에도 모두들 절더러 인간을 닮아 부지런 떠는 이상한 아이라고 했지요." 렌은 다시 할 말을 잃었다. "치유마법은 용케 배우셨네요." "남편의 유언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어지간히 배우는 데 10년이 걸렸답니다. 오로지 그이와 아이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노력한 덕분입니다. 원래 마법력이 5서클이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거예요." 렌은 카엔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5서클 인간 마법사가 치유마법을 배우려면 얼마나 걸리나요?" "이미 5서클에 도달했고 보통 정도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면 1년이면 됩니다." 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차근차근 양의학과 한의학의 원리를 가르치겠다는 계획은 포기하는 게 상책이었다. 하긴 어차피 의역동원(醫易同原: 의학과 역학은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뜻. 필자주)이라, 지금 역학을 생략하고 어설프게 의학을 가르쳐 봤자 큰 효과는 없을 것이었다. "그럼 제가 그때그때 써먹을 만한 의학상식 위주로 가르쳐 드릴 테니 그건 다 외우셔야 해요." "예, 물론이지요." 그나마 엘프의 머리가 좋아 한 번 들은 건 잊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 다음날부터 렌은 아주 기본적이고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내용들을 가르쳤다. 양의학 중에서는 소독은 어떻게 하는지, 위장병, 소화불량, 심장병 등등의 진단은 어떻게 하는지, 치료의 원리는 어떠한지, 그리고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기본적인 위생원칙은 어떠한지 등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한의학 중에서는 몸의 주요 경혈에 보통 침보다 조금 굵은 봉침(鋒針)을 찔러넣어 피를 냄으로써 위급상황을 타개하는 방법(점자출혈법)만을 가르쳤다. 예를 들어 갑자기 협심증이 왔을 때 수십이정혈(壽十二井血, 손톱 모퉁이에서 약 2, 3밀리미터 떨어진 여섯 점)이나 중충(中衝, 중지 손톱의 뒤 안쪽 모퉁이에서 약 2, 3밀리미터 떨어진 점) 등 몇 군데 경혈점을 찔러 피를 내면 당장 심장발작으로 즉사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등 점자출혈법은 응급조치로 훌륭할 뿐만 아니라 위험이나 부작용도 심하지 않아 라빌 같은 초심자에게 가르쳐도 무방했다. 렌은 거기에 덧붙여 사람들을 관찰하여 체질을 보는 방법도 아울러 가르쳤다. 라빌이 경락, 기미(氣味), 음양오행의 이치를 당장 익힐 수는 없겠지만, 오랜 세월 환자들을 보다 보면 언젠가는 체득하게 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렌이 설명하는 동안 라빌은 열심히 듣고 잘 기억했으나 절대로 예습, 복습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렌은 마치 머리는 좋은데 공부는 안 하는 학생을 보는 선생 같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라빌은 오랜 기간의 치유행으로 쌓은 경험을 지니고 있어서 이 정도만 가르쳤는데도 라빌은 상당한 깨달음을 얻었다. 렌 또한 라빌에게서 그녀가 수백 년간 치유행을 하면서 터득한 약초요법을 배웠다. 경험이란 무서운 것이라 라빌이 약초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은 렌의 생각보다 훨씬 방대했고 그 중에는 하차크 교수님의 약초학 책에 없는 내용도 많아 렌은 무척 흐뭇해했다. 렌이 라빌에 대한 수업을 시작한 지 닷새 정도 지나고 나서 라빌은 우울한 얼굴로 렌을 찾아왔다. "레이님, 이제 저는 더 이상 수업을 들을 수 없게 되었어요." "무슨 일이신데요?" "제 고향 엘프덤에서 저를 찾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급히 가 봐야 해요." "언제 출발하시는데요?" "여기 마이리아 시의 엘프들이 내일 환송연을 열어 준다고 하니 거기 참석해야 하고 그 답례로 제가 모레 감사연을 열기로 했으니까 출발은 글피 정도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모두들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니냐고 만류하긴 하지만, 저희 엘프덤의 수장이신 티우사님께서 붕괴중이시라는 소문도 있고 해서 아무래도 급히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렇게 미적거리면서 대체 뭐가 어떻게 '급히' 간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렌은 이 사람 좋고 동정심 많고 눈물 많고 게으른 치유마법사 엘프가 좋아졌던 터라 그녀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렌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라빌은 당황하다 자기도 렌을 끌어안았다. "저도 계속 치료행을 다닐 테니 우리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거예요." 렌이 아쉬워하며 눈물을 글썽이자 라빌도 따라 눈물을 글썽였다. "레이님의 가르침은 잊지 않을게요." "아, 그리고 라빌님, 저와 칼란님의 이름은 본명이 아니고, 저희들은 누군가에게서 도망다니고 있는 처지랍니다. 혹시 누군가 저희들 비슷한 사람에 관해 물어도 절대로 대답하시면 안 돼요." "목숨을 걸고 비밀을 지킬 테니 걱정 마세요." 라빌이 결연하게 말하자 렌은 이 태평한 엘프가 목숨을 거는 장면을 상상할 수 없어 웃음지었 다. 둘의 이별 장면을 지켜보던 카엔은 라빌에게 가볍게 목례만을 했다. 이제 그는 겨우 한시름을 놓았다. 렌과 단 둘만의 다정한 한 때를 방해하던 장애물은 사라졌다. 라빌이 다시 '황제의 저주'를 상기시키는 일은 없겠지. 카엔은 라빌을 아예 없애버리는 것도 생각해 보았으나, 이제 그는 렌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해침으로써 렌을 슬프게 만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2장 푸른 죽음 라빌이 가고 난 다음날부터 마이리아 시에는 때아닌 비가 내렸다. 본래 마이리아 시의 여름은 건기였으나 한 번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칠 줄 몰랐다. 마치 홍콩의 여름에 찾아오는 몬순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여름에 이런 비가 온 건 수십 년 만에 처음이라면서 무슨 불길한 징조가 아니냐고 수근거렸다. 당장 적벽돌 생산이 중단된 것도 많은 사람들에게 큰 타격이었다. 마이리아 시의 적벽돌 생산은 도시 전체의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비로 벽돌 생산이 중단되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특히 적벽돌을 나르고 쌓는 단순노동에 종사하던 일용 노동자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던 처지에 일감이 끊기자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다. 여름이면 하루가 멀다 하고 연이어 열리던 온갖 축제들도 모두 취소되거나 연기되어 도시는 우울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비가 와서 관광이 어려워진 둘은 메스와 침이 완성되기까지 주로 방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렌은 봄의 여신의 신전에서 했던 치료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테라미즈에까지 소문이 퍼지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황궁에서 렌을 쫓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카엔은 여사제나 환자가 소문을 퍼뜨리지는 않을 것이고 엘프들은 소문을 퍼뜨리기에는 너무 게으르다고 타이르며 렌의 불안감을 진정시켜 주었다. 카엔은 렌에게 이 세계의 체스 비슷한 놀이를 가르쳐 주었고 렌은 바둑을 가르쳐 주었다. 방 안에서는 둘은 변신마법을 풀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서로가 서로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걸 즐겼기 때문에 특별히 누가 말을 꺼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리 되었다. 놀다 지치면 렌은 여관 베란다에 서서 비에 젖어 흑갈색으로 변한 도시의 을씨년스러운 풍광을 내려다보곤 했다. 끝없이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노라면 자기도 모르게 애잔한 기분에 잠겨들었다. 감상에 젖은 렌은 이따금씩 아주 조심스럽게 카엔의 과거 이야기를 물었고 그러면 카엔은 주저하다 한 조각씩 과거를 내비쳤다. "내가 태어나던 날에도 비가 왔다고 해요." "그래요?" 렌이 호기심에 눈을 빛내자 카엔은 조금 망설이다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는 조용히 말하면서 아득한 과거를 더듬었다. "내가 태어나던 날은 무척 비가 많이 와서 산파가 오지 못했다고 해요. 그래서 산파 없이 어머니 혼자 힘으로 나를 낳으셔야 했다는군요. 아버지는 옆에 계셨지만 아이 받는 데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셔서 그냥 쩔쩔매며 구경만 하시다가 마침내 내가 태어나자 탯줄도 끊지 않은 채로 나를 안고 펄쩍펄쩍 뛰셨다고 해요. 그러다가 하마터면 나를 떨어뜨릴 뻔 하셨다고 합니다." 렌은 그 정경을 떠올리자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부모님께선 지금 어디 계신가요?" "돌아가셨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요." 카엔의 목소리에 가득한 회한에 렌은 더 묻지 못했다. 카엔이 '아주 오래 전'이라고 말하자 정말로 아주 아득한 먼 옛날을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렌은 다른 데로 화제를 돌렸다. "마법은 어떻게 배우게 되셨어요?" "아주 고통스럽게요." 카엔의 안색은 깊은 밤처럼 어두웠고 그의 무거운 어조는 방안에 재처럼 내려앉았다. 카엔의 말에 렌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죄송해요, 괜한 걸 여쭤본 것 같네요." 카엔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나야말로 렌에게 아무 것도 이야기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카엔의 목소리는 다정했으나 슬펐고 렌은 카엔의 상처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버림받은 아이 같은 카엔의 모습에 애처로워진 렌은 자기도 모르게 소파에서 일어나 카엔에게로 다가갔다. 빗소리는 창 너머로 은은히 들려오고 향차의 향기는 방 안에 잔잔하게 감돌았다. "카엔님, 제가 있으니 아무 걱정 마세요." 렌은 부드럽게 카엔의 뺨에 키스했다. 카엔은 렌의 입술이 뺨에 닿는 순간 감전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다가, 곧 온몸을 휘 몰아치는 욕정에 이성을 잃었다. 그는 렌의 두 뺨을 감싸쥐고 수백 년간 목말랐던 사람이 물을 들이키듯 렌의 입술을 마셨다. 그러면서 그는 렌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눈처럼 하얀 목, 버드나무 가지처럼 유연한 팔, 샤티의 몸체처럼 부드러운 허리선을 안타깝게 더듬었다. 옷 아래로 느껴지는 그녀의 몸과 그의 가슴에 맞닿은 작지만 아름다운 가슴의 감촉, 그리고 무엇보다도 탐스럽고 촉촉한 입술의 맛에 그는 숨이 멎었다. 렌도 카엔의 키스와 애무에 정신없이 몸을 맡겼다. 그는 마치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를 애무해. 그래, 그는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아. 그래, 틀림없어. 아아, 내 몸 속에서 솟아오르는 이 달콤하고 이상한 열기. 그의 뜨겁고 가쁜 숨결. 전보다 훨씬 능란한 그의 키스. 몸에서 힘이 빠져. 어쩔 줄을 모르겠어. 렌은 그러다가 카엔의 한 손이 자신의 가슴에 닿고 다른 한 손이 자신의 엉덩이를 움켜잡으려는 순간 정신을 차렸다. "카엔님, 이러시면 안 돼요!" 카엔은 당황해서 황급히 몸을 떼었다. "미안해요." 카엔은 눈길을 피하며 사과했다. 렌은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온몸이 화끈거려 도무지 진정할 수 없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하며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렌은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는 기쁨의 미소를 억누르려고 애쓰며 카엔을 쳐다보았다. 그는 틀림없이 나를 사랑해. 렌은 확신을 가지고 카엔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렌이 그렇게 자기를 응시할 때면 카엔은 언제나 자신의 모든 생각이 렌에게 읽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카엔님, 왜 제게 키스하셨어요? 왜 저를 그런 손길로 만지셨어요?" 렌은 부드럽게 물었다. 렌의 마음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카엔님, 저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세요. 제발. 부디 다른 대답은 하지 마세요. 카엔은 렌의 마음을 받아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에게 키스한 거라고. 하지만 카엔은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어 말할 수 없었다. 신분을 숨긴 채 거짓 위에서 고백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는가. 더욱이 렌은 지금 황제를 악마 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대답하기 싫으세요?" 카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렌의 마음이 실망으로 가득 차는 것을 안타깝게 읽었다. 렌의 생각은 복잡했다. 그는 분명히 나를 사랑하는 것 같은데 왜 말을 하지 않는 거지? 그가 나를 사랑해 주길 바라는 내 마음이 그의 마음을 잘못 이해한 건가? 그는 단순한 욕망으로 나를 탐한 건가? 그는 영영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건가? 남녀가 둘이서 여행하면 원래 정분이 나게 마련인데 왜 그는 나와 사랑에 빠지지 않지? 그걸 노리고 월급까지 줘 가면서 데리고 다니는데 날 사랑한다는 말도 못 해 주는 거야? 아아,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짝사랑이란 게 이렇게 힘든 거라니. 내가 먼저 고백해야 하나? 그러다가 그가 거절하면?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같이 다니지 못하게 될 거야. 그가 날 떠날 거야. 렌은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다그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무어라 할 수 없이 복잡한 마음을 겨우 가라앉힌 렌은 의연하게 말했다. 씩씩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렌의 속마음은 쓰라렸다. "카엔님, 카엔님의 키스는 저번보다 굉장히 많이 좋아졌어요. 어디서 어떻게 연습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래서 정말 대견해요. 하지만 그래도 우리 그 이상은 하지 말기로 해요. 우리 둘은 고용주와 피용자 관계일 뿐 장래를 약속한 사이는 아니잖아요." 렌은 사실 자신의 말에 카엔이 부인해 주기를 바랐다. 이 정도 얘기하면 카엔님도 장래를 약속하겠다든가 청혼을 한다든가 뭔가 행동에 옮기지 않을까. 그러나 카엔은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 렌은 소파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이 미지근한 반응에 렌은 괴로웠다. "저 잠깐 세수 좀 하고 올게요." 렌은 애써 미소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렌과 카엔이 머무는 여관방은 두 개의 침실과 한 개의 거실과 한 개의 욕실로 되어 있었다. 렌은 욕실로 들어가 물을 틀어 놓고 조용히 울었다. 물소리에 울음소리가 지워져 렌은 마음을 놓았다. 누가 뭐래도 렌은 아직 어린 소녀였고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하는 고통은 견디기 힘들었다. 카엔은 방 밖에서 렌의 마음을 읽었다. 말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에서는 언제나 저절로 마음이 읽혔다.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욕실 문을 넘어 전해져 오는 렌의 마음은 물소리로도 지워지지 않았다. 렌의 고통을 읽은 카엔은 찢어질 듯 마음이 아팠다. 그는 언젠가 그녀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리라고 결심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고백의 결과가 그는 너무 두려웠다. 울 만큼 운 렌은 거울을 보며 다짐했다. 나는 렌이야.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여기까지 와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것만으로도 행운이야. 평생 살며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 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지금 내 사랑이 사랑으로 보답받지 못하더라도 나는 지금 이 순간 자체로 행복해. 그래. 내 마음을 그에게 강요하지 않겠어. 렌은 퉁퉁 붓고 붉게 충혈된 눈을 꼼꼼히 살펴본 후 눈 주위의 경혈점을 차례로 지압했다. 눈의 충혈이 가라앉고 운 흔적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다시 심호흡을 한 렌은 머리를 치켜들고 거울을 향해 일부러 미소지었다. 이 정도면 내가 운 줄 모르겠지. 렌은 욕실을 나오며 기운찬 목소리로 카엔에게 말했다. "카엔님, 우리 메스와 침을 찾으러 가요." 카엔은 렌의 생각 하나 하나를 읽으며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렌의 말에 반색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렌의 강함에 다시 감탄했다. 그가 렌처럼 강했더라면 그의 인생도 달라졌을까. 거리는 음침했다. 행인은 거의 없었고 비구름은 짙게 내려앉았다. 빗줄기는 더 굵어졌고 포장된 도로 옆으로 흐르는 하수 도랑에는 물이 넘칠 듯 세차게 흘렀다. 이 세계에는 우산이 없었기 때문에 렌과 카엔은 방수가 되는 두건 달린 로브를 뒤집어쓰고 빗속을 걸어갔다. 렌과 카엔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렌은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고 카엔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어느 정도 걷다가 렌은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문득 말했다. "그나저나 카엔님, 걱정이에요." "뭐가요?" "이 비요." "비가 왜요?" "제가 라빌님께 설명하던 내용 기억하시죠?" "네." "수, 목, 화, 토, 금의 기운이 모두 조화로워야 병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하세요?" "기억합니다." "이 마이리아 시는 본래 여름에 건조하고 겨울에 물이 많은 곳이라는데 이렇게 여름에 비가 많이 오는 건 정말로 안 좋은 거예요." "어떻게 안 좋은 건데요?" "건조하고 더워야 할 때 수기(水氣)가 많고 축축하면 결국 질병이 생기죠. 그것도 수인성 전염병이요. 온 천지에 수기가 충만한 걸 느낄 수 있으시죠? 정말로 이상해요. 아무 일도 없어야 하는데..." 카엔이 이틀 전 페람 공작에게 들렀을 때 그는 마이리아 시 외에도 서제국 곳곳에서 홍수가 나 사람들이 죽고 이재민이 발생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의 기억으로는 그의 지난 350년 치세 동안 이렇게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수재가 난 일은 거의 없었다. 카엔도 렌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기상이변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렌의 생각이 자신으로 인한 고통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지자 그는 조금 안심했다. “너무 미리 앞서서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카엔의 말에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그래도 렌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길에 워낙 사람이 없어 적당한 지점에 이르자 둘은 순간이동을 했다. 드워프 상관 근처 인적이 없는 곳에 내려선 둘은 조금 걸어 상관으로 들어섰다. 251계단을 내려가 츄의 대장간으로 들어서니 츄는 작은 칼을 여기저기 불빛에 비춰 보며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었다. “왔느냐?” “예.” 렌과 카엔은 물에 흠뻑 젖은 로브를 벗고 적당히 앉았다. 츄는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마른 수건으로 잘 닦아 칼집에 넣고 그 옆에 있던 침통과 함께 렌에게로 가져왔다. “여기 칼과 침이다.” 렌은 칼을 받아 칼집부터 살펴보았다. 깔끔하게 무지갯빛 도는 은빛 금속-아마 칼집도 오리하르콘이라는 그 금속인 것 같았다-으로 만들어진 칼집에는 아름다운 나무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고 누리디안 문자로 뭔가가 씌어 있었다. “이 문양과 글자는 무슨 뜻인가요?” “그 나무는 생명의 나무이고, 그 글자는 ‘죽음에서 생명이 태어나리라’라는 뜻이다.” 렌은 드워프의 자상한 마음씀에 고마워하면서 이제 조심스럽게 칼을 칼집에서 뽑았다. 은빛 칼날이 몸을 드러내자 저번처럼 살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저번에 만져본 그 칼보다 훨씬 살기가 강했다. 보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은 살기였다. 살기는 칼을 잡은 렌의 손을 타고 올라가 렌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마치 ‘죽이고 싶지? 베고 싶지? 너를 위해 이 세상 모든 것을 죽여 줄게. 내게 피를 먹여 줘.’ 하고 속삭이는 듯했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그 순수한 살기는 너무도 아름다워서 렌은 넋을 잃었다. 이 칼을 잡고 뭔가를 찔러 선혈이 흐르는 것을 보고 싶었다. 렌은 자기도 모르게 칼을 자신의 팔로 가져갔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카엔이 렌의 팔을 붙잡았다. 렌은 화들짝 놀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심호흡을 하여 마음을 가다듬은 렌은 저번처럼 정명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렌은 축기해 놓은 정명기를 거의 다 쏟아부으면서 칼의 살기를 달랬다. ‘너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태어났지만 내 손에서 사람을 살리는 칼로 다시 태어날 거야. 너의 살기도 옳은 방향으로 향해 죽음 대신 삶을 부르게 될 거야. 나는 네가 마음에 들었어. 아름다운 칼아. 나를 위해 네 살기로 사람을 살려 줘.’ 칼이 렌의 호소에 응답하기라도 한 듯이 정명기와 칼의 살기는 융합되기 시작했다. 칼의 차가운 빛은 정명기로 인해 신비롭고 따뜻한 색으로 변했고, 어느새 칼날 전체가 부드러운 무지갯빛을 발산했다. 카엔과 드워프 츄는 듣도 보도 못했던 현상을 입을 벌리고 쳐다보았다. 더 이상 칼의 살기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게 되자 렌은 서서히 정명기를 거둬들였다. 칼날의 빛은 조금씩 갈무리되었고, 칼은 이제 그저 보통의 오리하르콘 빛깔이 되었다. 이제 안심한 렌은 꼼꼼히 칼을 살펴보았다. 렌은 옆에 있던 카엔의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던 카엔은 “아우!”하고 비명을 질렀다) 칼날 위에 슬쩍 떨어뜨렸다. 칙칙한 은색을 띠고 있던 머리카락은 뽑히자마자 제 색깔인 은보랏빛으로 돌아왔다. 머리카락이 칼날 위에 내려앉는 순간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잘려 땅에 떨어졌다. 렌은 감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말 훌륭한 칼이네요.” 드워프 츄는 렌의 말에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네 말을 듣고 나도 살기를 죽여 보려고 해 봤다. 사람을 살리는 데 쓰는 칼이라니, 살기가 강하면 안 되지 않겠느냐? 그런데 살기를 죽이려고 할수록 살기는 더 강해지고, 칼은 점점 더 예리해지더구나. 결국 그 칼은 근 20년래 내 최고의 걸작이 되었다. 제대로 받으면 500골드는 받아야 하겠지만, 뭐, 흠흠, 이미 계약을 했으니 그냥 40골드만 더 내면 된다. 아, 그리고 침통도 여기 있다.” 렌은 츄가 건네준 침통을 받아 살펴보았다. 침은 덤이어서 침통은 오리하르콘이 아닌 그냥 은으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역시 생명의 나무가 새겨져 있고 누리디안 문자가 장식되어 있었다. “이건 무슨 뜻이에요?” “그건 드워프의 속담이다. 이 도구가 어디에 쓰이는지 몰라서 그냥 맘에 드는 구절을 적은 것이다. ‘어둠에서 빛이 태어나리라’는 뜻이다. 우리 드워프들은 어둠 속에서 살지만 스스로 빛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지. 우리 드워프들만큼 빛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종족도 없을 것이다. 엘프들은 빛 속에 살면서도 빛의 소중함을 몰라.” 침을 꺼내 살펴본 렌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정확히 렌이 말한 대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유연하고도 강해서 침술 시전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다. 이 오리하르콘이란 금속은 정말로 놀라웠다. 렌이 물건을 보고 마냥 기뻐하는 걸 본 카엔은 흐뭇한 기분으로 40골드를 꺼내어 츄에게 주며 약간 주저하다 말했다. “좋은 물건을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가 누군가에게 고맙다고 하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지만, 렌의 기쁨은 그의 기쁨이었고 그는 이 드워프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자네는 쌀쌀맞게 생겨 가지고 감사 인사 따위는 안 할 줄 알았는데, 이 아가씨한테 꽉 잡혀 사나 보구먼. 감사를 다 하고. 내 아까 머리카락 뽑힐 때부터 알아봤어. 허허허.” 드워프는 호쾌하게 웃으며 카엔의 등을 두드렸다. 카엔은 드워프의 손이 자신의 몸에 닿아도 이제 전처럼 싫지 않았다. 드워프의 생각은 읽을 수 없었지만 그의 감정은 읽을 수 있었고, 드워프의 마음은 카엔과 렌에 대한 호의로 가득 차 있었다. 렌과 지내는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그가 세상과 쌓아놓은 벽, 자기 자신과 쌓아놓은 벽은 점점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웠다. 그 벽이 모두 허물어졌을 때 과연 그는 온전하게 남을 수 있을까. 다시 빗속을 뚫고 여관에 돌아오니 봄의 여신의 견습사제(렌이 수술하던 날 함께 있었던 소녀)가 렌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님, 이제 오셨군요!” 견습사제는 렌을 보자 여관 로비(호화여관답게 고급 소파가 놓여 있는 로비가 따로 있었다)에 있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반색을 했다. 렌은 대체 그녀가 왜 여기에 왔는지 의아해했다. 수술한 날 이후로는 신전에서 아무 연락이 없었는데. 견습사제는 렌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저, 혹시 라빌님께서 언제 오신다거나 어디로 가셨다거나 하는 말씀을 남기지 않으셨나요? 엘프 상관에 물어보아도 잘 모른다고 하던데요. 라빌님께서 레이님과 친교를 쌓으셨다니까 혹시 레이님이라면 아실지도 몰라서요. 그리고 염치없지만 레이님께서도 혹시 도와주실 수 있을지 몰라서요.” “무슨 일인데 그러신가요?” 견습사제는 어두운 안색으로 대답했다. “마이리아 시 빈민구역에 전염병이 퍼지고 있어요. 2, 3년에 한 번씩은 그런 일이 있지만 이번에는 심상치가 않아요. 제 어머니와 오빠도...” 소녀는 말하다 말고 눈물을 쏟았다. 방으로 안내된 소녀는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견습사제의 이름은 밀라였다. 그녀는 마이리아 시 빈민구역에서 나고 자라다가, 열두 살 무렵 예쁜 얼굴이 봄의 여신의 사제의 눈에 띄어 견습사제로 뽑히게 되었다. 렌은 견습사제를 미모로 뽑는다는 부분을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웠으나, 봄의 여신은 사랑의 여신이고 그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구현되기 때문에 여사제들은 어느 정도 미모를 갖춰야만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돌이켜 보니 테 라미즈에서의 축제 때나 이곳의 신전에서 만난 여사제들은 다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음에도 미모를 잃지 않고 있었다. 아무튼 밀라는 덕분에 빈민구역의 고단하고 배고픈 삶에서 벗어나 신전으로 가게 되었다. 배를 곯지 않게 되었다고 해도 층층시하 여러 단계 사제들 밑에서 눈치 보는 견습사제 노릇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도 밀라는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빈민구역의 가족들과 틈틈이 연락해 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적벽돌을 옮기는 막노동에 종사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마이리아의 어느 상인 집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었지만, 밀라의 오빠가 적벽돌 기술자 도제로 들어가 있어 언젠가는 그가 정식 벽돌공이 되리라는 희망에 나날의 힘겨움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빈민구역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힘없이 물처럼 묽은 설사를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토하기 시작하고, 그렇게 온 몸의 수분이란 수분을 다 쏟아내고 나서 빠르면 몇 시간, 길어야 7일이 지나면 피부가 푸르스름하게 말라붙은 채로 죽어 버렸다. 그런 전염병이 이번에 처음 생긴 것은 아니었다. ‘푸른 죽음’이라고 불리는 이 전염병은 2, 3년에 한 번 정도씩 빈민구역 일부에서 몇 십 명 정도 환자를 발생시켰다. 그 중 반수 이상이 죽고 나면 병은 수그러들었고 빈민구역 사람들은 전염병을 그저 숙명으로 받아들여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빈민구역 북쪽에서 시작한 ‘푸른 죽음’은 50여 명의 사망자를 내더니 2, 3일 만에 남쪽으로 퍼져 이제 수백 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그 중에는 밀라의 오빠와 어머니도 있었다. 마이리아 시 당국에서는 치유마법사 한 명을 보내 사태를 파악하게 했지만 치유마법사는 자기 힘으로는 고칠 수 없다며 발병지역에 들어가기조차 거부했다. 그는 그저 목책 뒤에서 향기를 태워 풍계 마법으로 향기를 빈민구역 내로 실어 보내기를 계속했지만(향기요법은 이 ‘푸른 죽음’이라는 전염병에 대해 그나마 유일한 치료법으로 알려져 있었다), 비가 계속 쏟아져 향기는 멀리까지 가지 못하고 금방 흩어져 버렸다. 밀라는 다급한 마음에 봄의 여신의 사제들에게 환자들을 도와 달라고 간청했지만 그들은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밀라의 오빠와 어머니가 병에 걸린 것은 그저께이니 이제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고 밀라는 속이 탔다. 그 때 생각난 것이 라빌님과 레이님이었다. 그분들이라면 빈민구역의 전염병 환자들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생각이 들자 마음이 급해져서 급히 엘프 상관에 가 보았으나 라빌님은 이미 어디론가 떠나고 없었고, 그곳에서 레이님이 이 여관에 묵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 밀라의 설명을 듣는 렌의 안색은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카엔도 렌의 걱정이 현실로 나타난 데 대해 한편으로는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했다. “증상을 구체적으로 말해 보세요.” 렌은 밀라에게 물었다. “환자는 갑자기 설사를 시작하는데, 물처럼 묽은 변이 주룩주룩 쏟아진대요. 별로 아프지도 않게요. 그리고 나면 또 갑자기 토하기 시작하고, 피부는 푸르죽죽하고 퍼석해지고, 팔다리가 경련하고, 나중에는 정신을 잃고 혼수상태가 되다가 건강한 사람은 다시 깨어나기도 하지만 상당수는 죽어버려요.” “환자의 처치는 어떻게 한다고 하나요?” 밀라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처치랄 것도 없어요. 치유마법사들이 빈민구역 안으로는 들어가지도 않는 걸요. 처음에 빈민구역 사람들은 병에 걸린 집 가족들이 아예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문에 못을 박았다는데, 환자가 너무 늘어나니까 지금은 그것도 관둔 상태랍니다. 그 사람들도 나와 봤자 갈 데도 없고요. 향기요법을 쓰려고 해도 빈민구역에 무슨 향료가 있겠어요? 또 다들 향기요법이 좋다고들 하지만 향기를 쐬어서 나았다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봤어요.” “달리 도와줄 만한 사람들은 없나요?” “누가 빈민구역에 들어와 전염병 환자를 도와주겠어요? 그러다 자기도 전염병에 걸리라고요? 그리고 시 당국은 빈민구역에서 일어나는 일은 상관 안 해요. 귀족들이 병에 걸렸다면 모를까요. 하지만 지금까지 항상 ‘푸른 죽음’은 빈민구역에서만 생겼어요. 그러니까 그들은 개의치 않아요. 이대로 가면 엄마와 오빠도......” 밀라는 말하다 말고 감정이 북받쳐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을 닦고 겨우 진정한 밀라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어쩌면 겨울의 여신의 여사제님들은 와 주실지도 몰라요. 그들은 장례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꼭 찾아가 주시거든요. 전에도 전염병이 돌았을 때 다른 사람들은 빈민구역에 들어오기를 거절했지만 겨울의 여신의 사제들은 빈민구역까지 들어와서 장례식을 집전해 주셨어요. 지금도 몇 분은 먼저 죽은 환자들의 장례식을 위해서 폐쇄된 빈민구역 안에 계시고요. 그분들은 전염병이 끝날 때까지 못 나오시죠.” 대강의 이야기를 듣고 상황을 파악한 렌은 벌떡 일어나 방안을 돌기 시작했다. 직접 환자를 봐야겠지만 지금까지 들은 증상을 종합하면 그 ‘푸른 죽음’이라는 전염병은 콜레라였다. 설사와 구토를 하는 환자들의 증상이라든지 빈민구역에서만 발생한다든지 하는 모든 점이 콜레라의 징후였다. 아마도 빈민구역의 상하수도 시설은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을 테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콜레라균으로 오염된 물을 마시고 병에 걸렸을 것이다. 2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문명사회에서 콜레라로 대량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일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병의 원인과 치료방법을 모르던 19세기까지만 해도 콜레라는 치명적이고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또 치료약과 처치법이 알려져 있는 현대에 와서도 상하수도 설비와 방역체계가 미비한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콜레라로 죽어가고 있었다. 생리식염수(normal saline)나 유산나트륨액(sodium lactate)과 같이 전해질을 공급해주는 방법을 몰랐던 고대 한의학에서도 콜레라는 곽난, 사증, 이질, 혹은 장벽과 같은 증상으로 분류되어 난치로 여겨졌었다. 현대의학의 지식을 가진 렌은 어떻게 콜레라를 고치는지 잘 알았다. 그리고 단 한 명을 고치라면 쉽게 고칠 수 있었다. 그러나 환자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문제는 시간이었다. 그들이 수분과 기력을 잃고 죽기 전에 모든 환자들에게 적절한 처치를 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렌 혼자 힘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카엔님, 우리 빈민구역으로 가요!” 결심이 선 렌은 방수로브를 집어들고 외쳤다. 비교적 근거리여서 순간이동마법을 써도 특별히 의심을 받지는 않을 것 같았기에 카엔은 마법으로 일행을 빈민구역 앞까지 이동시켰다. 마이리아 시는 강과 면한 남쪽인 틔어 있고 북쪽은 그다지 높지 않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상류층은 대부분 경관이 좋은 남쪽의 이다 강변에 거주하고 있고 중류층은 각종 관광명소와 상업지구가 자리잡은 시 중심부에 모여 살고 있었으나, 빈민구역은 그런 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적벽돌 산지와 가까운 성벽 쪽에 위치해 있었다. 렌이 가서 보니 빈민구역의 입구는 목책으로 막혀 있고 그 옆에 병사 여남은 명이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었다. 밀라의 말에 따르면 빈민구역으로 통하는 길은 몇 군데가 더 있지만 전염병이 돌면 저렇게 길을 모두 폐쇄하고 사람들의 통행을 막아 병이 퍼지지 못하도록 한다고 했다. 하지만 환자들의 배설물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고 오염된 수원이 파악되지 않는 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짓이었다. 목책 옆에서는 중년의 치유마법사 하나가 무성의한 태도로 목책 옆에서 피어오르는 향로에 바람을 뿜어 향기를 빈민구역 쪽으로 날려 보내고 있었다. 전염병을 막기 위해 시 당국에서도 뭔가 하고 있다는 생색을 내려는 거겠지만, 그것 역시 정말 한심한 짓이어서 렌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사람들의 생각이란 참 비슷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위대한 의사인 존 스노우에 의해서 콜레라의 원인이 밝혀지기 전인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냄새가 콜레라를 발생시킨다고 믿었다. 콜레라에 걸린 사람들이 대체로 지저분한 곳에 많이 살고 온갖 악취를 뿜으며 죽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콜레라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향기를 쬐어 주어야 한다고들 생각했지만, 향기와 콜레라의 치유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 저 마법사는 그야말로 무익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 목책 너머에서 서성거렸다. 평소와 달리 전염병의 전파 속도가 빨라 잘못하면 빈민구역 사람들 전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모두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리고 저 치유마법사가 보내주는 향기를 조금이라도 들이마시면 살아날 가능성이 높아질 거라는 미신에 사로잡혀 사람들은 서로 밀고 밀리며 조금이라도 목책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몇몇 사람들은 “치유마법사를 보내 줘!”하고 고래고래 소리치고, 대담한 자들은 이곳의 시장인 딜루나 데 마이리아의 욕을 하기도 했다. 욕설을 들은 경비병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주의를 주었지만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들도 목책 너머 사람들의 다급한 심정을 잘 알았고, 또 무엇보다도 섣불리 저들에게 손댔다가 전염병이 옮을지 몰랐다. 사람들은 목책 너머에 새로운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혹시 시 당국에서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치유마법사를 더 보낸 것이 아닌가 하고 목을 빼며 쳐다보았고, 그게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다시 절망하며 주저앉곤 했다. 렌은 밀라에게 물었다. “저 안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나요?” 밀라는 고개를 저었다. “들어갈 수는 있지만, 한 번 들어가면 전염병이 끝날 때까지 나올 수 없어요. 그래서 저도 들어가지는 못하고 경비병들에게 돈을 집어 주고 가족들 소식만 전해 들었습니다.” “저 안에는 지금 몇 명 정도가 있죠?” “8,00 0명 정도요.” “전염병이 시작된 후 저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있나요?” “저 목책이 세워진 건 사흘 전인데, 그 사이에 안에 가족을 남겨 놓고 잠깐 볼 일을 보러 나왔던 사람들 몇몇이 자기만 살 수 없다며 들어갔고, 아까도 말했지만 겨울의 여신의 사제님들 몇 분이 장례식 집전 때문에 들어가셔서 계속 머물고 계세요.” 렌은 잠시 생각하다 카엔에게 말했다. “저기 한 번 들어갔다 다시 나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들어갈 때 경비병 모르게 순간이동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렌의 머릿속에서 핑핑 돌아가는 생각을 읽으며 카엔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렌은 저 전염병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도 잘 알았다. 렌이 살던 이계의 의학지식이란 정말 카엔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렌은 밀라에게 물어 보았다. “같이 들어가시겠어요?” 밀라는 한참 주저했다. 카엔은 그녀의 마음을 읽었다. 그곳에 가서 전염병에 옮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 가족들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할 일도 없는데 적당한 핑계를 대고 그냥 여기 남으면 안 되나 하는 생각,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 대한 창피함과 부끄러움, 그러면서도 창피함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냥 안전한 데 있고 싶다는 욕구. 밀라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핑계거리가 떠오르는 것을 카엔은 경멸감을 느끼며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카엔은 렌의 마음을 읽고 흠칫 놀랐다. ‘밀라, 그대는 무서워하는군요. 자기 목숨이 가족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군요. 그것은 당연한 거예요. 목숨을 지닌 생명은 원래 그러니까요. 하지만 나는 그대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함께 가 주리라 믿어요.’ 렌은 마치 밀라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 그녀의 마음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렌은 경멸감 대신 측은함에 가득 차 밀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렌은 부드럽게 물었다. “밀라님, 어머니께서 언제 발병하셨다고 했죠?” 밀라는 다른 질문을 받자 살았다는 듯 황급히 대답했다. “이틀 전이요.” “원래 몸이 약한 분이셨나요?” “처음에는 튼튼하셨는데, 얼마 전부터 무리하게 일하시느라 몸이 좀 망가지셨어요. 오빠를 벽돌공 길드에 집어넣는 데 입회비가 만만치 않게 들어갔고, 봄의 여신의 신전에서 제가 윗분들한테 귀여움 받을 수 있도록 철따라 이런저런 선물을 마련하시느라 늘 돈이 모자랐거든요. 그래서 낮에 하녀일을 하시는 걸로도 모자라 밤에 어두운 불빛에 의지해 삯바느질도 하셨고, 그러다가 많이 쇠약해 지셨어요.” “어머니께서 정말 자녀들을 사랑하셨군요.” 렌은 나직하게 말했다. 헌신적인 밀라의 어머니 얘기를 들으니 4년 전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 생각이 나서 렌의 목소리는 떨렸다. 밀라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그래서 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고위사제가 되어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겠다고 다짐했었어요. 지금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 안 돼요. 아직까지 아무것도 못 해 드렸는데! 저를 꼭 데리고 들어가 주세요! 얼마나 편찮으신지 제 눈으로 확인해야겠어요! 그리고 손이라도 잡아 드려야겠어요!” “들어가면 감염될지도 모르는데도요?”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저는 젊고 튼튼하니 충분히 힘이 되어 드릴 수 있을 거예요!” 이제 밀라의 마음속에 좀 전의 주저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에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렌은 밀라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힘있게 말했다. “밀라님이 감염되지 않도록 해 드릴게요. 그리고 어머님과 오라버님도 최선을 다해 고쳐드릴게요.” 카엔은 렌이 가벼운 질문 하나로 소녀의 마음을 바꾸는 것을 경외감을 담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후회가 찾아왔다. 나는 그동안 사람의 마음을 읽기만 했을 뿐 이해하지는 못한 것이 아닌가? 셋은 순간이동으로 밀라가 설명해 준 빈민구역의 작은 공터로 내려섰다. 쓰레기장 비슷한 곳이었다. 그 옆으로는 허름한 집들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이곳에 내려서자마자 렌은 전염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중류층 거주지만 해도 따로 길 오른쪽에 하수도가 파여 있어 오폐수가 먹는 물과 섞이지 않도록 되어 있고, 상류층 거주지의 경우에는 아예 하수도를 복개하고 그 위에 깔끔하게 보도블록을 깔아 더러운 모습과 냄새가 일체 눈에 띄지 않도록 해 놓았었다. 그런데 빈민구역에는 따로 아무런 하수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집집마다 나오는 오폐수는 모두 그냥 길 위를 흘렀고 길은 냄새나는 구정물로 질척거렸다. 그래도 평소에는 이 오폐수가 나름대로 갈 길을 따라 흘렀겠지만 비가 많이 오면서 오폐수는 어딘가의 우물 쪽으로 넘쳐흘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오염된 물을 마신 사람들이 감염되었을 것이고, 그들이 배설물과 토사물을 쏟아내면서 전염병은 더욱 확산되었을 것이다. 거리에는 간 간이 짐수레에 시체를 실어 나르는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쓰레기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시체를 던져넣는 구덩이가 깊게 파여 있었다. 길 옆에도 스스로 쏟아낸 배설물 속에 쓰러져 죽은 시체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시체는 한결같이 뺨이 푹 꺼진 채 시퍼런 색을 띠고 있었고, 몸 안의 수분이란 수분은 다 빠져나간 듯 비쩍 말라 있었다. 아이, 노인, 가끔 성인들도 보였다. 가족 중에 환자가 생겼을 때 저렇게 환자를 바깥에 버림으로써 집 안의 다른 가족들은 무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시체를, 혹은 중환자를 저렇게 집 밖에 버리는 것 같았다. 시체 나르는 사람들은 길가에 버려진 시체를 보고도 눈길만 한 번 준 채 그냥 지나갔다. 아마도 돈을 받고 시체를 처리하는 사람들이어서 공짜로 시체를 치워주지는 않으려는 듯 했다. 렌은 몸을 떨었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렌은 문득 장 자크 아노가 쓴 ‘지붕 위의 기병’이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그 소설에서는 콜레라와 광기와 죽음에 관한 묘사가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빈민구역 안에서도 그렇게 광기가 휩쓸고 지나가는 중일까? 모두가 죽음에 대한 공포로 떨며 어리석은 짓들을 하고 있을까? 렌은 갑자기 가슴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미는 것을 느꼈다. 차라리 흑사병 같은 것은 부자와 가난한 자, 건강한 자와 약한 자를 가리지 않고 덮치지만, 이 콜레라라는 놈은 깨끗하고 청결하게 살 능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을 주로 희생자로 삼았다. 모르긴 몰라도 이 세계의 배부른 자들도 내가 살던 세계의 중세처럼 콜레라가 빈민들의 나태함과 어리석음에 대한 징벌이라고 떠들고 있겠지. 또 부자들이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은 그들이 신의 가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바보들이 있겠지. “저 시체들은 그냥 저렇게 놔두나요?” “저도 잘 몰라요. 보통 때 같으면 전염병 환자의 시체는 무조건 태우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비가 많이 오니까 그럴 수도 없고, 아마 당분간은 저렇게 쌓아두거나 방치해 놓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렌은 다시 물었다.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은 다 자기 집에 있나요?” “예,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어요.” 그들이 계속 배설을 하고 그 배설물이 닫힌 문틈을 지나 길 위로 흐르는 이상, 환자를 그저 격리해 두기만 하는 건 어리석은 방법이었다. 렌은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여기 빈민구역에 지도자격인 분이 계시나요?” 밀라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프 아저씨라는 분이신데, 벽돌공 길드의 조합장이시고, 이곳을 많이 걱정하시는 훌륭한 분이세요.” “그분의 댁은 어디에요?” “저 쪽이지만, 아마 지금은 벽돌공 길드회관에 계실 거예요. 사실 시 중심부에 있던 길드회관을 이곳으로 옮긴 것도 그분이 하신 일이에요. 대부분의 벽돌공들이 빈민구역에 살고 있는데 길드회관만 중류구역에 있으면 불편하다고 하시면서, 다른 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곳으로 회관을 이전하셨죠.” 밀라의 설명을 들은 렌은 그 보프라는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신뢰감이 생겼다. 렌과 카엔은 일단 밀라의 집으로 갔다. 평소에 튼튼했던 밀라의 오빠는 아직 조금 생기가 남아 있었지만 밀라의 어머니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벌써 뺨은 푹 꺼지고 피부는 푸르스름해지기 시작했다. 밀라의 어머니는 부끄러워할 겨를도 없이 남편의 도움을 받아가며 침대 옆에 놓여 있는 양동이에다가 마구 토사물을 쏟아냈다. 그녀는 이제 혼수상태로 접어들기 직전이었다. 이들의 증상이나 아까 시체의 형상을 검토해 보면 역시 이들의 병은 콜레라였다. 그것도 엘 토르 콜레라가 아니라 위험성이 훨씬 더 큰 고전 콜레라인 것 같았다. 나중에 렌이 기초적인 역학조사를 실시한 결과에 따르면, 처음 콜레라에 걸린 것은 빈민구역 북구역에 살고 있는 마이리아 내항 하역인부 콜이었다. 콜은 강가에서 일하면서 어느 날 민물고기를 잡아 그 자리에서 날로 먹은 후 며칠 지나 갑자기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어쩔 줄 모르고 간호하다가 차례로 병에 걸렸다. 정작 콜은 용케 살아났지만 그의 아내와 아들, 딸은 모두 병으로 죽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배설물은 빗물에 섞여 길 위를 흘러 집 주위의 공동우물을 오염시켰다. 그 무렵부터 비가 더 쏟아지기 시작하자 오염물은 더욱 멀리까지 흘러갔다. 그 결과 북구역의 이웃들뿐만 아니라 중구역의 사람들도 차례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배설물 또한 다시 아래로 흘러들어가 마침내 남구역에까지 전염병이 퍼지게 된 것이다. 렌이 콜레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은 렌의 고향마을 인근이 콜레라 상습발발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초반에 마카오 및 홍콩지역에서 시작된 콜레라는 광둥성 일대뿐만 아니라 전세계로 확산되어 수많은 사망자가 생겼고, 그 잠복균은 잊을 만하면 렌의 고향마을 주변에 나타나 다수의 환자들을 발생시켰다. 렌은 마을 사람들이 얘기해 주던 30년 전 콜레라 대유행 때의 참상을 생생히 들어 기억하고 있었다. 그 무렵 렌의 마을은 렌이 태어날 때보다도 더 낙후했기 때문에 제대로 구호조치를 받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했다. 마을 어른들 중에는 그 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많았다. 렌이 고향마을에 살 때에도 두어 번 콜레라의 발병이 있었지만, 그 때는 이미 보건당국이 콜레라에 대처하는 방법을 충분히 강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환자가 발생했다는 연락을 받으면 보건당국에서 급히 의사와 간호사를 보내 환자들을 치료했다. 덕분에 사망자는 거의 없었다. 그들의 치료를 렌은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았고 홍콩에 거주하게 되었을 때에는 흥미를 느껴 일부러 도서관에서 콜레라 치료에 관한 부분을 자세히 찾아보았다. 그래서 렌은 다른 전염병보다 콜레라에 대해 더 잘 알았다.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렌은 이들의 병이 콜레라임을 거듭 확인하고 난 후 밀라의 어머니와 오빠에게 정명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정명기는 임시방편이었고 잃어버린 수분을 보충하는 것이 시급했지만 당장 수분 보충을 위한 경구수액을 만들 시간과 재료가 없었고 여기서 지체하는 동안 다른 환자들의 병세는 시시각각 악화되어가고 있을 터였다. 다행히 정명기가 생기를 보충해 주는데 도움이 되었는지 둘의 얼굴에는 약간 화색이 돌아왔다. “물을 끓여서 식힌 후 1피타(=1리터)당 소금 네 차스푼을 넣어서 천천히 먹이세요. 만드는 과정에서 손을 깨끗이 하셔야 하고요.” 렌은 죽어가는 가족들을 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밀라의 아버지에게 지시했고, 그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을 돌볼 수 있을 때까지 제발 의식을 잃지 말아야 할 텐데. 렌은 조급한 마음에 밀라를 재촉해 카엔과 함께 길드회관으로 이동했다. 빈민구역의 다른 집과는 달리 번듯하게 3층 건물로 지어진 커다란 회관은 대번에 벽돌공 길드회관인 것을 알 수 있도록 벽돌공이 벽돌을 빚는 모습을 부조로 구워 벽을 장식해 놓았다. 회관 앞에는 남자들이 들락날락하며 긴박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렌은 아마도 전염병에 관련된 일이리라고 짐작했다. 밀라는 그 남자들 중 한 명을 소리쳐 불렀다. “데릭 아저씨, 병을 고쳐주실 분을 데려왔어요! 들어가게 해 주세요!” 사람들의 시선은 대번에 렌과 카엔에게로 쏠렸다. 그들은 카엔이 치유마법사 정도 되리라고 생각한 듯 카엔에게 몰려와 감사의 인사를 퍼붓기 시작했다. “마법사님, 고맙습니다! 다른 마법사들은 다 거절하던데 이곳까지 이렇게 친히 와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제발 좀 잘 고쳐주십쇼!” 그들의 말을 들으며 눈살을 찌푸리던 카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피고용인일 뿐이고, 병은 제가 아니라 이 소녀가 고칠 겁니다.” 그들의 시선은 렌에게로 쏠렸다. 그들은 렌의 어린 나이와 평범한 외모에 실망했으나 곧 다시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무슨 기연으로 마법을 익히셨나요?” “이렇게 어린 나이에 치유마법사가 되셨다니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그 옆에서 초조하게 서 있던 밀라는 황급히 정정했다. “레이님은 치유마법사가 아니라 치료사님이세요.” 그러자 사람들의 얼굴은 곧 분노로 일그러졌다. “치료사라고? 치료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거야?” “지금 장난하는 거냐?” “밀라야, 네가 제발로 이 안까지 돌아온 건 고맙지만 제대로 도움이 될 사람을 데려와야지, 치료사 나부랭이나 데려오면 어쩌자는 거냐?” 사람들은 기대가 배신당한 데 따른 실망감으로 화를 내기도 하고 혹은 울기도 했다. “치료사라 해도 이분은 달라요.” 밀라는 열심히 설명하려고 했으나 뭘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몰랐다. 자기도 자기가 본 수술 광경을 납득하기 어려운데 실제로 보지 못한 사람들한테 몇 마디 말로 이해시킬 수는 없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렌이 나섰다. “제가 치료사에 지나지 않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을 돌보는 일을 해 왔으니 보통사람들보다는 환자들 간호하는 데 더 익숙합니다. 지금 시시각각 환자들이 늘고 있으니 일손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랑 함께 오신 이 분은 5서클 마법사이시고 치유마법도 어느 정도 쓸 줄 아시니 여러분들께 도움이 될 거예요.” 렌의 조리 있는 설명에 사람들의 흥분은 다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들은 카엔이 치유마법을 쓸 줄 안다는 말에 크게 안심했다. 지금까지 렌이 알게 된 바에 따르면 치유마법이라고 해서 전염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모두가 인정하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 지금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는 크나큰 위안이 되는 것이리라. 조금 진정한 사람들은 렌과 카엔과 밀라를 길드회관으로 들여보냈다. “길드장님, 도움이 되어 주실 분을 모셔왔어요!” 밀라는 소리치며 길드장 집무실로 뛰어들어갔다. 집무실에는 중앙에 커다란 탁자가 있고 그 주위에 사람들이 서? ?뭔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렌은 누가 조합장인지 바로 알아봤다. 오랫동안 햇볕 아래서 노동하여 피부는 갈색으로 그을고 얼굴에는 잔뜩 주름이 졌지만 눈빛은 형형하고 맑은 사람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50대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훨씬 젊을 것이다. 대략 40대 초반 정도 되었을까? 초라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가 뿜어내는 위엄은 렌이 황궁에서 보았던 어느 대신들에도 뒤지지 않았다. 렌은 저 사람이라면 믿고 의논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보프 아저씨!” 밀라는 길드장을 잘 알고 있었던 듯 그의 품에 안겨 눈물을 터뜨렸다. 보프는 밀라를 두세 번 토닥이고 나서는 곧 엄하게 야단쳤다. “이런 때 여기 돌아와서 어쩌자는 거냐? 네 한 목숨이라도 구해야지!” 그러면서도 그는 밀라가 무척 기특한지 곧 밀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밀라는 곧 정신을 차리고 보프에게 렌과 카엔을 소개했다. 그는 렌이 치료사라는 얘기를 듣고 조금 실망했으나 예의바르게도 눈에 드러날 정도로 내색하지는 않았고, 카엔이 치유마법을 쓸 줄 안다는 말에는 크게 반색했다. 그는 카엔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으나 대신 렌이 나섰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해 오셨습니까?” 어린 렌이 말을 끊고 나서자 그는 눈살을 찌푸렸으나 그래도 예의를 잃지 않고 대답했다. “어느 집에 환자가 있는지 파악하고, 그 집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고, 먹을 빵과 물은 넣어 줬소.” 아마도 그게 이 세계의 상식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환자가 어디 있는지 파악했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렌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 푸른 죽음이라는 병이 왜 생기는 건지, 그리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압니다.” 회관 내의 사내들은 렌의 말에 크게 놀랐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렌을 쳐다보았다. 사내들 중 조금 젊어 보이는 사람이 외쳤다. “네 말을 어떻게 믿느냐? 너처럼 어린 치료사가 어느 치유마법사님도 못 고친 이 병을 고친다고?” 렌이 화내기도 전에 보프가 그를 제지했다. “우리를 도와주러 오신 분들께 무슨 소리야! 너 같으면 전염병이 창궐한 이곳에 감염될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올 수 있겠느냐? 이분들이 여기 이렇게 들어오셨다는 건 전염병에 걸리지 않을 확신이 있었다든지 아니면 전염병에 걸리더라도 우리를 위해 뭔가 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든지 둘 중 하나인데, 어느 쪽이든 간에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니냐?” 청년은 곧 사과했고, 렌은 보프의 현명함에 감탄했다. “믿거나 말거나 저는 정말로 방법을 알아요. 제가 자세히 설명을 해 드릴 테니 한 번 들어 보세요.” 보프는 고개를 끄덕였고 렌은 빠른 말투로 설명을 시작했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병균이라는 게 있어요. 무지무지 작은 이나 벼룩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먼지보다도 작은 이 병균은 여러 종류가 있어서 어떤 것은 떠다니기도 하고 어떤 것은 물에 섞여 흘러다니기도 합니다. 병균이 사람 몸속에 들어가면 병을 일으키는데, 지금 퍼지고 있는 이 전염병도 그 병균 때문입니다.” 이 균의 이름은 정확히는 비브리오 콜레라균이었지만 어차피 다른 세상에서 붙인 이름이니 그것까지 설명해줄 필요는 없었다. 렌은 설명을 계속했다. “주로 무더운 여름에 발생하는 이 균은 오염된 해산물, 채소나 사람의 배설물에 사는데, 사람들이 마시는 음식이나 식수에 섞여 사람 몸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병에 걸린 사람은 오염물을 섭취한 지 2, 3일 지난 뒤부터 우선 뱃속에서 소리가 나며 방귀가 잦아지고 설사와 구토를 합니다. 설사는 복통이 전혀 없으며 쌀뜨물 같은 빛깔이고, 마치 수도꼭지나 주전자에서 물을 쏟듯이 합니다. 환자는 이런 설사를 하루에 십 회에서 이십 회 정도, 수 피타(=리터)에서 수십 피타까지 하게 됩니다. 심한 탈수증으로 인하여 눈은 움푹 들어가고, 갈증이 점점 심해지고, 피부는 탄력성을 잃고 차가워지며, 혈압이 떨어져 쇼크상태에 빠지고, 설사로 염기성 체액이 배설되므로 산-염기 평형장애를 야기해 산혈증을 일으킵니다. 보통 설사 발생 후 네 시간 내지 열두 시간 만에 쇼크상태에 들어가고, 열여덟 시간 내지 수일 내에 사망하게 됩니다. 사망률은 보통 50% 이상이고요.” 너무 다급해서 렌은 이런저런 전문용어를 이 세계의 쉬운 말로 바꿔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그녀가 말한 내용은 일부 모르는 말을 빼고는 병의 진행상황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환자들이 죽는 원인은 단 하나, 몸 안에서 너무 많은 물이 빠져나가기 때문입니다. 이 균은 뜨거운 열을 가하면 죽고 공기나 다른 방법으로 전파되지는 않기 때문에 아직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은 물을 끓이고 음식을 익혀 먹기만 하면 절대로 더 이상 이 병에 걸릴 염려가 없습니다. 아, 그리고 음식을 먹기 전이나 외출하고 돌아오면 손을 깨끗이 ? 컁杵?하고요. 그리고 환자들의 배설물에서 균이 나오니 환자들의 배설물이 식수에 섞이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렌의 말에 사람들은 긴가민가했다. “이미 병에 걸린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보프가 물었다. “아직 의식이 있어 물을 삼킬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경구수액요법을 쓰면 됩니다.” 경구수액요법(Oral Rehydration Solution; ORS)은 콜레라, 특히 제3세계에서 다수의 사람들에게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콜레라를 고치는 획기적인 요법이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경구수액(포도당-전해질 용액)은 세계의 수백만 생명을 구하여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의학적 성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힐 정도였다. 물에 글루코오스(포도당)와 염분을 일정량 섞어 빠져나간 체액과 비슷한 수액을 만든 후 입을 통해 이를 공급함으로써 수분을 보충해 주는 이 요법은 환자가 물을 들이킬 정도의 의식이 있는 한 탈수증상을 막고 병이 나을 때까지 버틸 체력을 주는 최선의 요법이었다. 그러나 만약 환자가 의식을 잃었다면 경정맥주사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물을 팔팔 끓이고 물 1피타(대략 1리터)당 소금 한 차스푼, 설탕 네 차스푼을 넣은 후 식혀 환자에게 조금씩 계속 먹여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몸에서 빠져나간 물과 염분과 염기를 보충해서 환자의 몸이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경구수액의 성분과 농도는 과학적인 연구결과에 의해 만들어졌다. 따라서 이 경구수액의 농도를 제대로 맞추지 않으면 삼투압이 올라가 설사 증세가 더 심하게 될 수도 있었다. 렌의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지나치게 방법이 간단하다는 데 수긍하지 못하고 계속 질문했다. “그렇게 소금과 설탕 섞은 물을 먹이기만 하면 설사나 구토가 멎는단 말입니까? 다리 경련은 또 어쩌고요?” “근육 경련은 몸에서 지나치게 수분이 빠져나갔기 때문에 부수적으로 생기는 현상이고, 설사와 구토는 병균이 작은창자를 감염시켰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니까 물을 보충해 주면 근경련은 멎게 되고, 또 설사와 구토는 사람의 몸에서 병균을 이기는 저항력이 생기 게 되면 저절로 사라집니다. 그 전에 수분이 다 빠져나가면 죽는 거지만, 수분이 빠져나가기 전에 계속 수분을 보충해 주다 보면 스스로 저항력을 일으켜 병균을 물리치게 되고, 무사히 낫는 거지요. 환자들 중에 평소 체력이 튼튼했던 사람들은 이 병에 걸려도 며칠 앓다가 다시 일어났지요? 그게 바로 그런 이치입니다.” 보프는 렌의 설명을 들으며 점점 렌에 대한 신뢰감을 키웠다. 그는 궁금한 것을 하나 더 물었다. “환자가 의식이 없어 그 수액을 삼킬 수 없다면 어떻게 하는 거요? 억지로 들이붓는 거요?” 렌은 고개를 저었다. “핏줄 속에다가 수액을 직접 넣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도구를 갖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경정맥주사라는 것은 사실 렌이 살던 세계에서도 발명된 지 몇 십 년 안 되는 물건이었다. 주사바늘, 유리병, 투명비닐로 된 도관, 그 모두가 이 세계에서는 쉽게 만들거나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또 수액(링거액) 또한 핏속에 들어가는 용액이니만큼 훨씬 더 순도가 높아야 했고 만드는 방법도 입으로 삼키는 수액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아무리 궁리해 봐도 이 세계의 기술로 링거 주사를 만들어낼 방도는 없었다. 그저 의식불명 상태의 환자가 많지 않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상당수의 환자가 발생한 이상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들 수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 그 사람들은 경정맥주사 없이는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렌은 아득했다. 그래도 당장 해야 할 일부터 해야 했다. “당장 환자들을 한 곳으로 모아 주세요. 그리고 그들의 배설물과 토사물을 처리할 수 있도록 변소용 구덩이도 환자들이 있게 될 곳 근처에 파 주시고요. 환자들을 돌볼 사람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모두 필요합니다. 또 생석회가 아주 많이 필요하고, 아까 말씀드렸듯이 물을 끓여 소독한 후 경구수액을 만들 수 있도록 화덕과 솥단지, 소금, 설탕 등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반드시 물을 끓여 먹고 음식은 익혀 먹고 손을 깨끗하게 씻으라고 전해 주십시오.” 상당히 나이 많아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렌의 말을 끊고 격한 어조로 물었다. “아가씨 말은 그럴 듯하지만 아가씨 말대로 했다가 만에 하나 환자들 병이 더 악화되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나마 지금 환자들을 각자의 집에 머물러 있도록 한 덕분에 병이 덜 퍼지는 것일수도 있지 않나?설탕, 소금, 땔감 모두 하나같이 귀하고 비싼 것들인데 아가씨 말만 믿고 그것들을 허비했다가 아무 효과도 없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건 다 어쩔텐가? 지금까지 치료사 따위가 제대로 병을 고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전부 다 사기꾼, 돌팔이 아니었는가!” 밀라는 렌의 귀에 저 분이 바로 직전의 길드장이라고 속삭여 주었다. 사리에 맞는 노인의 말에 길드 원들은 웅성거리며 맞장구쳤다. 노인은 그 모습을 보고 힘을 얻었는지 다시 외쳤다. “그리고 보프, 자네가 길드회관을 여기 빈민구역으로 옮긴 탓에 지금 우리들이 이곳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 길드원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길드원과 길드임원은 엄연히 다른 것일세! 자네가 길드회관을 옮김으로써 평길드원의 호감을 샀을지는 몰라도 이제 더 이상 평길드원들은 우리 길드임원들을 존경하지 않고 맞먹으려고만 들고 있어!” 길드장을 비난하던 노인의 말은 어느새 점점 공포와 비탄에 젖어갔다. “그리고 자네 때문에 우리들은 이렇게 이 안에서 전염병에 걸려 다 죽게 생겼으니, 우리가 다 죽고 나면 면면히 이어져 온 벽돌공 길드의 전통은 어떻게 되겠는가! 보프 자네는 이 모든 일에 책임져야 할 걸세! 이렇게 전염병에 걸려 죽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건 아닌데! 이제 나는 여기서 죽게 될 거야! 우리 길드원 모두가 이 빈민구역에 갇혀서 죽게 될 거라고! 똥구덩이 속에서 시퍼렇게 말라비틀어져 죽게 될 거란 말이야!” 노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갑자기 엄습하는 두려움에 떨었다. 절망과 공포가 사람들을 휩쌌다. 그래, 우리는 모두 여기서 죽을 거야. 이미 내 친구, 이웃, 동료가 죽었어. 우리도 따라 죽을 거야. “보프님, 우리 목숨을 어쩔 거요!” “난 죽기 싫어!” “우리 마누라는 벌써 설사를 시작했단 말야!” “길드원 프랜도 어제 죽었어!” 어느새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사람들은 저마다 목청이 터져라 외치기도 하고 울부짖기도 했다. 카엔은 방안 전체에 일렁이는 공포와 절망이 서서히 광기로 변해가는 걸 느꼈다. 인간들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죽음을 앞두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목숨을 구하기 위해 노력해도 모자랄 판인데, 이런 상황에서 인간들은 대부분 서로를 비난하고 희생양을 찾고 미쳐 돌아가다가 허무하게 죽어버리곤 했다. 그런 광경을 그는 너무 많이 보아 왔다. 냉담하게 사람들을 지켜보던 카엔은 길드장의 마음을 읽고 놀랐다. 길드장 보프만은 이 소란 속에서도 아직 평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카엔은 은근히 감탄했다. 그러나 길드장 혼자의 힘만으로는 이미 휘몰아치기 시작한 광기를 진정시키기 역부족일 것이다. 두 손을 꼭 쥔 채 사람들을 안타깝게 쳐다보고 있는 렌의 모습을 본 카엔은 그녀를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조작하기로 결심했다. 부작용이 없이 마음을 조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들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이번의 경우 그 생각은 살고자 하는 욕구였다. 사람들의 절망 대신에 생명욕을 더욱더 크게 불러일으키고, 그 다음에 그 생명욕을 희망으로 연결시키고, 그 희망의 끝점에 렌을 놓는 것. 수백 명의 마음을 한꺼번에 조작한 적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렌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마음을 바꾸는 것이라 아주, 아주 조심해야 했다. 다수 인간들의 마음을 한꺼번에 조작한 건 무척 오랜만이었지만 그의 마법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카엔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능숙한 솜씨로 베를 짜듯 사람들의 마음을 조작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에서 은보랏빛이 일렁이기 시작했지만 카엔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기에 아무도 그가 무슨 일을 하는 건지 눈치채지 못했다. 다행히 그가 조작을 시작할 무렵 보프가 단호하게 말했다. “타자그님, 저는 지금 길드장이고 당신은 고문에 불과합니다. 고문이 길드장에게 반말을 하는 법은 없습니다. 지금 평길드원이 길드임원에 맞먹는 것을 걱정하시는 당신이 길드장인 제게 맞먹으시려는 겁니까? 그리고 만약 이 상황에서 길드회관이 빈민구역 밖에 있고 우리 임원들도 모두 바깥에 있었다면 우리의 소중한 평길드원들은 아무 대책 없이 이 안에서 다 죽게 되지 않있겠습니까? 설마 그걸 바라시는 겁니까? 저는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길드회관을 옮긴 것입니다. 길드원 다수가 찬성했고요. 이 시점에서 제 권위에 도전하신다면 저로서도 강력하게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침착해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가 믿고 의지할 사람은 저 소녀밖에 없습니다. 시 당국이 우리에게 뭘 해줬습니까? 자기들 저택에는 몇 명씩 그 잘난 치유마법사를 두었으면서, 그 중 한 명이라도 우리에게 보내 줬습니까? 저들이 한 거라고는 목책으로 우리를 가둔 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 소녀는 제발로 걸어들어와 주었습니다. 저 소녀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이 안까지 들어온 이상, 우리는 저 치료사를 믿어봐도 좋을 것입니다!” 보프의 말이 끝나자마자 조합원들은 지지의 함성을 질렀다. “맞소!” “조합장을 따릅시다!” “치료사의 말을 따릅시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언뜻 보기에는 보프의 말에 설득되어 분위기가 바뀐 것처럼 보였다. 렌의 얼굴에는 안도의 기색이 역력했다. 카엔은 정신조작이 성공한데다가 아무에게도 눈치채이지 않은 걸 확인하고 흡족 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사람들의 원래 마음에 호소하는 정신조작은 정신조작 중에서도 제일 수월한 편에 속하는 것이었고 부작용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또다시 전 조합장 타자그가 반론을 제기했다. 그의 마음까지 조작하면 너무 티가 날 것 같아 카엔은 일부러 타자그만 남겨놓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 그는 승복하지 않은 것이다. “저런 감언이설에 태도를 바꾼단 말인가! 치료사 따위를 어떻게 믿고 우리 목숨을 맡겨! 다들 지금 제정신인가! 뭘 어쩌자는 건가! 그냥 돌팔이 치료사 하나를 믿고 다 함께 죽자는 건가!” 보프와 타자그 사이에 살벌하게 진행되어 가는 논쟁을 바라보던 밀라는 다급하게 외쳤다. “이 아가씨는 치유하는 손 라빌님도 고치지 못한 급살병 환자도 고치셨어요!” 그 말에 잠시 침묵이 흐르다 질문이 터져나왔다. “그게 정말이냐?” “급살병을 고쳤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렌이 수술 사실을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하긴 했지만 지금 밀라는 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밀라는 자신이 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했다. “...그래서 이 치료사님이 그 환자의 배를 가르고 병 난 곳을 잘라낸 덕분에 환자는 멀쩡해졌어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다 까무러칠 만큼 놀라고 감탄했고요. 고, 라빌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치료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시고 도우시다가 나중에는 이분께 치료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까지 하셨어요. 실제로 이분께 치료술을 닷새간 배우기도 하셨고요. 제 말이 의심스러우시면 저희 신전의 사제이신 모니아님께 확인해 보세요. 그리고 지금 제 어머니와 오빠도 병에 걸린 거 알고 계시죠? 설마 제가 가족들을 걸고 거짓말을 하겠어요?” 밀라는 상당히 말솜씨가 있어서 렌이 수술하던 장면을 생생히 재현했다. 사람들은 밀라의 이야기를 들으며 손에 땀을 쥐었다. 카엔은 사람들의 마음이 이제 렌을 믿는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가는 것을 읽으며 한시름 놓았다. 이제 더 이상 마음을 추가로 조작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가씨, 밀라의 말이 정말이오?” 전 길드장 타자그의 말투는 좀 전의 하대에서 어느새 반 존대로 바뀌었다.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한시라도 빨리 제 말씀대로 하셔야 한 명의 목숨이라도 더 구할 수 있습니다. 일손을 모아 주세요. 치료하는 방법을 제가 다시 자세히 알려 드릴게요.” 보프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는지 책상을 탕탕 쳐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자, 길드원들 모두 들으십시오. 내가 길드장으로 선출된 지 3년, 그 동안 내가 실수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대체로 여러분들이 만족할 만큼은 일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엄청난 위기가 찾아왔지만 나는 이 아가씨를 믿습니다. 이 아가씨가 하는 얘기는 그냥 머릿속에서 지어낸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 아가씨 말을 믿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 이 아가씨가 말한 대로 합시다. 반대하는 사람은 손 드십시오.” 두어 명이 손을 들려다가 눈치를 보며 내렸다. 한 명이 조금 주저하다가 물었다. “그럼 길드원들만 구하는 겁니까? 아니면 빈민구역 사람들 전부 구해야 하는 겁니까?” 그 질문에 사람들은 다시 웅성거렸다. 설탕이며 소금 같은 비싼 것은 어차피 길드기금으로 구입해야 할 텐데 길드원들 아닌 사람까지 구호해야 한다면 그들이 뙤약볕 아래에서 땀 흘리며 벽돌을 구워 조성한 길드기금은 금방 바닥나 버릴 것이다. 웅성거림은 커졌다. 길드장 보프조차도 길드원이 아닌 자들을 구호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렌이 나섰다. “어차피 지금 빈민구역은 폐쇄되어 있으니 환자들이 전부 나을 때까지 이 안에서 안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길드원만 구한다면 다시 다른 곳에서 병이 발생해서 길드원들이 또 옮을 것이고 병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렌의 말은 약간 과장된 것이었다. 사실 손을 깨끗이 하고 음식과 먹는 물을 조심한다면 다른 환자들이 계속 발생한다 해도 전염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진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저렇게 겁을 주지 않으면 비길드원 환자들은 그냥 죽게 될 것이다. 다행히도 렌의 말이 그럴 듯했는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다른 사람들까지 구호한다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손 드십시오!” 이번에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렌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보프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지도를 벽에 못박고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지시를 시작했다. “이 아가씨 말을 들어 보면 지금 제일 시급한 것은 먼저 환자들을 모을 건물을 확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길드회관, 그리고 빈민구역 남쪽의 향락의 집 이 두 군데가 빈민구역 내에서 가장 큰 건물인데, 두 군데 모두를 합치면 대략 5, 6백명의 환자는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길드회관은 우리가 그냥 양보하면 되지만, 향락의 집은 사 유재산이라 순순히 안 내 주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거기 소유주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총관은 이 구역이 폐쇄되기 전에 도망갔기 때문에 지금 거기에는 부총관과 창녀들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길드원들이 가서 거기 사람들을 내쫓고 향락의 집을 접수해야 합니다.“ 길드장은 말을 마친 후 한 쪽에 서 있는 청년에게 말했다. “토리, 네가 길드 도제 청년들 열 명을 이끌고 가서 그쪽을 정리해라.” 토리라고 불린 20대 후반의 청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집무실 안에 있던 청년 서너명과 함께 집무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환자들을 이곳과 그곳으로 옮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닐 테니 환자들 가족들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가족이 모두 병에 걸린 경우는 옮기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보프는 무거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가족이 아닌 한 아무도 선뜻 전염병 환자의 몸을 만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렌은 애타는 눈으로 카엔을 쳐다보았다. “제가 순간이동마법을 조금 쓸 줄 압니다. 아무도 옮기려고 하지 않는 환자는 제가 옮기겠습니다.” 카엔은 말하면서 열심히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5서클 마법사의 순간이동력이 어느 정도 되었더라? 근거리 이동을 하는 경우 하루에 사오십 명 옮기는 정도로는 의심받지 않을 것이다. 카엔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 보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를 짚었다. “자, 빈민구역 중앙구역의 이 길드회관 부근에 현재까지 알려진 환자가 300여 명, 그리고 여기 북구역에 아직 살아있는 환자가 80여 명, 어제부터 발생하기 시작한 남구역의 환자가 200여 명이고, 앞으로 얼마나 더 환자가 늘지는 겨울 여신께서도 모르시겠지요.” 이미 북쪽 구역에서는 200여 명의 환자가 발생하여 그 중 120명의 환자가 벌써 사망했고, 중앙구역에서도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북구역 쪽 지도는 벌써 사망을 의미하는 검은 가위표시로 뒤덮여 있었고, 먹물이 번져가듯 검은 가위표시는 중구역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일단 발생한 환자들 중 중앙구역과 북구역의 환자들은 이곳 길드회관으로 옮기고 남구역의 환자들은 향락의 집으로 옮기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근처에 변소용 구덩이를 파고 방수천을 깔아 놓지요. 그건 배비, 자네가 좀 감독하게. 방수천은 있나?” 배비라고 불린 중년남자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벽돌이 비 맞지 않도록 준비해 놓은 게 아직 남아 있네. 그거면 그럭저럭 될 것 같아.” “그럼 길드청년 스무 명을 데려가서 양쪽으로 나눠 작업을 시작해 주게. 그리고 콜디, 지금 이 빈민구역에서 긁어모을 설탕과 소금이 어느 정도 되지? 길드회비는 얼마나 남아 있고, 생석회는 있나?” 아마도 길드의 회계인 듯한 콜디라고 불린 30대 후반의 남자는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길드장님도 아시다시피 이 빈민구역에서 설탕과 소금을 쌓아 놓고 먹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소금은 그럭저럭 집집마다 조금씩은 있겠지만 설탕 같은 귀한 재료는 온 빈민구역을 아 무리 뒤져도 없을 걸요. 밖에 나가서 사 와야 해요. 길드회비는 지금 10골드 정도 남아 있지만 간당간당합니다. 생석회도 모자랍니다. 그리고 아까 저 아가씨가 말하는 걸 들어보니 땔감도 필요하다는 것 같은데, 이 계절에 이 구역에서 땔감을 어떻게 구할지도 난감합니다. 그동안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나무들도 다 젖어 버렸습니다. 또 집집마다 주워다 놓았던 땔감들도 빈민구역이 폐쇄된 지난 사흘간 거의 다 떨어졌을 겁니다. 그러니 땔감도 밖에서 들여와야 해요.” 설탕이 없으면 밀가루로 풀죽을 쑤어 섞는 방법도 있기는 했지만 정확한 분량을 맞추기가 어려워 자칫 잘못하면 인체의 전해질 균형을 깨게 될 우려가 있었다. 렌은 한숨을 쉬었다. 약국에서 파는 흔하디흔한 수액제제가 몇 상자만 있더라도 아무 걱정이 없을 텐데. “그래도 집집마다 남은 땔감이 얼마라도 있을 테니 그걸 긁어모아 보게.” 그 말에 화들짝 놀란 렌은 외쳤다. “안 돼요! 아직 병에 걸리지 않은 집들이라도 물이랑 음식은 꼭 끓이고 익혀 먹어야 한단 말이에요! 각각의 집마다 땔감을 남겨놓지 않으면 그 집들에서 다시 전염병이 생길 거예요!” 렌의 말에 보프는 골치가 아픈지 미간을 짚으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경비병들을 설득하든지 뇌물을 주든지 해서 어떻게든지 바깥에서 물건들을 구해 와야겠군.” 보프는 기운 없이 말했다. 렌은 다시 나섰다. “저와 이분, 칼란님은 순간이동마법으로 들어왔으니 다시 나가도 아무도 모를 거예요. 저희들이 나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구해 보겠습니다. 1파잔(두 시간) 이내로 돌아오겠습니다.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는 것과 물과 음식을 끓이고 익혀 먹어야 한다는 것은 빈민구역 전체에 빠짐없이 알려 주셔야 합니다.” “길드원이 총 300명이고 그 가족까지 합치면 1700명 정도 되니, 각기 다섯 집씩 맡아서 이웃들에 알리면 곧 전체에 알릴 수 있을 것? 結? 걱정 마시오.” 보프가 대답했다. “그리고 글을 아는 분이 계신가요?” 렌의 질문에 모두들 얼굴만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콜디가 입을 열었다. “저는 숫자는 읽을 줄 알지만 글은 잘 모르는데, 그 정도면 안 됩니까?” “그 정도도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제대로 글을 아시는 분은 없으세요?” “제가 글을 알고요, 지금 장례식을 위해 북구역에 계신 겨울 여신의 사제님 네 분도 아마 도움이 되어 주실 거예요.” 밀라가 대답했다. “그럼 밀라님은 그분들께 가서 도움을 청해 주세요.” 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끝으로 렌은 덧붙였다. “지난 2, 3년 동안에 ‘푸른 죽음’ 병에 걸렸다가 나으신 분들이 있나요? 있다면 몇 명이나 되나요? 그분들은 다시 환자들을 접해도 병이 옮지 않습니다. 그분들이 오염원을 만지면 그분들이나 다른 분들이나 모두 안전할 거예요.” “글쎄...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몇 명 있긴 한데, 그들이 이곳에 와 줄 지는 잘 모르겠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분들이 필요해요!” “알겠소. 내 힘써 보리다.” 보프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콜디에게 말했다. “콜디, 조합비를 가져오게.” 보프의 말에 콜디는 방을 나갔다가 상자 하나를 가지고 들어왔다. 보프는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1실버짜리 은화들과 동전들이 가득 차 있었다. “전부 얼마지?” “10골드 23실버 49푼입니다.” 보프는 엄숙하게 말했다. “아가씨, 이게 우리 길드의 전재산이요. 우리가 아가씨의 무엇을 믿고 이걸 맡길 수 있을지 모르겠소.” 렌은 조금 전 받아 온 칼을 침통에서 꺼냈다. “이것은 드워프가 만든 오리하르콘제 칼입니다. 이걸 담보로 맡기겠어요.” 보프는 견문이 넓은 듯 오리하르콘을 곧 알아보았다. “이런 귀한 것을... 좋소. 이건 아가씨가 물건을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내가 맡아두겠소.” 렌은 고개를 끄덕인 후 카엔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귀에 속삭였다. “이 사람들 보는 앞에서 순간이동해 주세요. 그래야 다들 마법사의 존재를 믿고 안심할 거예요.” 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말씀드린 대로 준비해 주세요.” 길드장에게 할 말을 마친 렌은 언제나처럼 카엔의 품에 안겼다. 둘이 사라지는 것을 길드원들은 입을 벌리고 쳐다보았다. “저 남자가 치유마법사라더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군.” 보프가 한숨을 쉬었다. “글쎄 말입니다. 살다 보니 마법사가 순간이동하는 것도 다 보네요.” 옆에 있던 칼디가 한마디 했다. 그는 돈을 내준 것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 “그 칼은 얼마쯤 될까요? 가짜는 아닙니까? 설마 저 소녀가 돈을 들고 튀는 건 아니겠죠?” 그 말에 밀라는 흥분했다. “무슨 소리예요, 칼디 아저씨? 레이님이 얼마나 셈이 정확한데요! 틀림없이 필요한 걸 다 구해 가지고 돌아올 거예요!” “자, 이럴 때가 아니다! 모두 빨리빨리 움직이자!” 보프는 힘차게 외쳤다. 사람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차례로 목적지로 떠났다. 렌과 카엔은 다시 봄의 여신의 신전 부근에 내려섰다. 여전히 비는 쏟아지고 있었고 날은 어느새 많이 어두워졌다. 일단 설탕, 소금, 땔감, 생석회, 그리고 비누도 사야 했다. 신전 앞 원형 광장에는 각종 관공서와 상회의 지점, 본점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렌은 그 중 ‘멜둔 상회’라고 써 있는 간판을 발견하였다. “저기 멜둔 상회요, 제 친구 체이스 멜둔네 집안 거예요!” 렌은 반가운 마음에 외쳤다. “체이스라고요?” 카엔은 슬쩍 물었고 렌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갈색머리 갈색 눈을 한 미소년의 이미지를 읽었다. 렌은 잠시 체이스 생각에 잠겼다. 그리운 체이스. 평민의 권리에 관해 늘 열변을 토하곤 했는데 잘 있을까. 카엔은 렌이 다른 남자아이를 그리워하자 불쾌해졌지만 용케 잘 참았다. “예, 저랑 같이 나와림을 했던 친구인데, 아주 영리하고 사려 깊은 녀석이었어요.” “회상은 나중에 하고 서둘러 물건을 사도록 하죠.” 카엔은 렌의 말을 끊고 앞장서서 멜둔 상회로 걸어갔다. 렌도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멜둔 상회의 내부는 검소했다. 각종 잡화가 진열되어 있을 걸로 예상했던 렌은 창구 하나만 달랑 있는 상회의 구조에 어리둥절해졌다. 창구 뒤쪽에는 평범하게 생긴 중년 남자가 앉아 있다가 렌과 카엔이 들어오자 벌떡 일어나서 반갑게 맞았다. 슬쩍 들여다보니 그 뒤에는 열 명 정도의 청년들이 산처럼 서류를 쌓아 놓은 채 열심히 뭔가를 적고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뭐든지 파는 멜둔 상회입니다!” 중년 남자는 매끄럽게 인사말을 했다. 렌과 카엔은 방수로브를 벗어 물기를 털고 창구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여기 물건이 없는데 어떻게 파신다는 거예요?” 렌은 당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이곳은 접수처입니다. 손님께서 돈만 갖고 계시다면 저희는 당장 물건을 구해 즉시 보내 드립니다.” “ 진짜로 즉시 보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다만 얼마나 지불하시는가에 따라 언제 받으실 수 있느냐가 달라집니다.” 중년 남자는 작은 글씨가 빽빽하게 적혀 있는 표 하나를 꺼내 렌에게 보여주었다. 그 표는 다름아닌 운송료 조견표였다. 운송방식은 ‘표준운송’, ‘신속운송’, ‘급행운송’, ‘순간운송’의 네 단계로 나뉘어 있었는데, 각각의 단계별로 운송료는 거의 두세 배씩 뛰다가 마지막의 순간운송에 이르러서는 급행운송보다 열 배 내지 스무 배가 비싸졌다.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의 금액이었다. “이 운송방식은 어떤 의미인가요?” “표준운송은 대상이나 역마차를 이용해서 운송하는 것입니다. 운송편이 마련되고 화물이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른 물건들과 함께 운송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가장 저렴한 반면 시간이 다소 걸립니다. 신속운송은 다른 물건들이 모이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별도의 운송편을 마련해서 그 물건만 운송하는 것입니다. 급행운송은 그 물건만 운송하면서 파발마 방식에 의하여 역참마다 말을 바꿔 가며 쉬지 않고 이동하여 최대한 시간을 단축시키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에 의하면 서제국 끝에서 끝까지 이동하는 데 겨우 보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럼 순간운송은요?” “순간운송은 우리 상회가 고용한 6서클 마법사의 팀이 릴레이식으로 순간이동 마법에 의해 화물을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이 방식으로 하면 서제국 끝에서 끝까지 운송하는 데에 겨우 반나절 정도가 걸립니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6서클 마법사의 힘으로 100kg 정도의 화물을 이동시킬 수 있는 한계는 500아반(500마일) 정도라고 했다. 멜둔 상회는 서제국 전체에 지점이 67개가 있었는데, 순간운송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 각각의 지점간 거리는 절대로 500아반을 넘지 않았다. 멜둔 상회의 성공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순간운송도 그 중 하나였다. 특히 돈을 아끼지 않는 변덕스러운 귀족들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운송방식이었다. 화물운송방식을 혁신함으로써 성공한 멜둔상회의 사례는 그야말로 DHL이나 FedEx의 성공사례를 방불케 했다. 렌은 카엔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카엔님, 카엔님 같은 5서클 마법사는 200로벤(약 100kg)의 화물을 어디까지 옮길 수 있나요?” “200아반 정도요.” 고개를 끄덕인 렌은 몸을 돌려 상인에게 말했다. “제가 사려는 물건은 소금 20로벤(1로벤은 대략 1파운드), 설탕 10로벤, 석탄 3티로벤(1티로벤은 1000로벤), 생석회 10티로벤, 그리고 비누 600덩이예요.” 상인은 바로 뒤의 직원 한 명에게 외쳤다. “소금 20로벤, 설탕 10로벤, 석탄 3티로벤, 생석회 10티로벤, 비누 600덩이!” 창구 뒤쪽의 그 직원은 뭔가에 대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열심히 말을 주고받았다. “카엔님, 저 사람은 뭐하는 거예요?” “통신구슬로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겁니다.” “통신구슬이라는 것도 있어요?” “아주 귀한 것이죠. 통신구슬 하나를 만들려면 8서클 마법사가 1년치 마법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그리고 보통 15년 사용하면 더 이상 쓸 수 없고요. 하지만 멜둔 상회에서는 돈을 아끼지 않고 마법사들로부터 통신구슬을 얻어내, 지금은 지점마다 통신구슬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군요.”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속한 운송의 전제는 신속한 통신이었다. 직원은 열심히 뭔가를 적더니 그것을 상인에게 가지고 왔다. 상인은 종이에 적힌 것을 읽고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소금은 이곳 마이리아 시에 충분히 있습니다. 그래서 상품 가격에 포함된 외에 별도 운송비는 받지 않습니다. 소금 20로벤은 50실버입니다.” 그는 그 다음 부분을 짚었다. “설탕은 현재 이곳 마이리아 시에 5로벤 정도가 있고, 다른 5로벤은 테라미즈에 있는데, 설탕은 아시다시피 사치품이라 소금보다 훨씬 비싸서 설탕 10로벤은 2골드입니다. 그리고 테라미즈에 있는 5로벤의 설탕을 옮기는 운송비는 손님께서 선택하시는 대로입니다. 테라미즈에서 이곳 마이리아 시까지의 거리는 대략 500아반 정도이니, 표준운송을 선택하시면 보름 정도 걸리고 운송비는 50실버, 신속운송으로 옮기실 경우에는 운송기간 닷새에 운송비 1골드 50실버, 급행운송으로 옮기실 경우 운송기간 이틀, 운송비 3골드, 순간운송으로 옮기실 경우 운송비 21골드입니다.” 다른 운송방법을 택할 경우 운송기간이 너무 길었다. 순간운송의 경우 운송비가 엄청나게 비쌌으나 렌은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순간운송으로 해 주세요!” 상인은 놀란 듯 렌을 한 번 쳐다보았다. “알겠습니다. 그 다음 석탄은 양이 상당히 많은데, 석탄 자체의 값은 1골드 20실버이지만, 하필이면 지금이 여름이라 마이리아 시 내에 있는 석탄은 1티로벤 정도이고 나머지는 이곳 북쪽에 있는 카이펙 석탄광산에 비축되어 있는 것을 가져와야 합니다. 그곳까지의 거리는 300아반입니다. 어떤 운송방법을 택하시겠습? 歐?” “순간운송이요.” 이번에도 렌은 주저하지 않았다. “분량이 많아 운송비가 무척 비쌉니다. 운송비는 86골드입니다.” “상관없어요.” 상인은 렌의 대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계속 말했다. “생석회는 이곳에 2티로벤이 비축되어 있고 나머지 7티로벤은 이곳 동쪽의 코스티라 시에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순간이동으로 하시겠습니까?” 상인은 렌을 떠보듯 물었다. “물론이에요!” “생석회 자체 가격은 2골드, 운송비는 152골드입니다.” “비누는요?” “비누는 다행히도 이곳 마이리아 시에 600덩이가 전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치품이라 개당 10실버, 합계 60골드입니다.” “그럼 전부 얼마지요?” 상인은 주판을 두드리더니 곧 답을 냈다. “324골드 70실버입니다.” 렌은 길드에서 받은 상자를 내놓았다. “여기 10골드 23실버가 있습니다.” 그리고 렌은 카엔이 미처 말리기 전에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황궁에서 가지고 나온 반지들을 쏟아냈다. 저번에 제일 작은 반지 값으로 32골드를 받았으니 이 큰 것들은 훨씬 비쌀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314골드 47실버는 이걸로 안 될까요?” 상인은 보석들을 보자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그는 반지들을 하나하나 들어 자세히 감정했다. 애써 태연하려 했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연신 감탄성을 발했다. “오오, 이런 물건이...... 이것도 정말...... 혹시 장물은 아니겠지요?” 렌은 머리를 굴렸다. “절대 비밀을 지켜 주시겠지요?” 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잠깐 와 보세요.” 렌은 상인을 한쪽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원래 예뻐.” 상인은 렌이 자기를 멀뚱하게 바라보며 뜬금없이 말하자 속으로 ‘하나도 안 예쁜 애가 자기더러 원래 예쁘다니, 뭔 소리야?’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희미한 빛이 렌을 쓸고 지나가자 그는 눈앞에 드러난 소녀의 엄청난 미모에 입을 쩍 벌렸다. 상인이 한동안 말을 잃자 렌이 말했다. “정신 차리세요.” 상인은 눈을 껌벅이며 지금 자기 앞에 펼쳐진 광경이 꿈인지 생시인지 의심했다.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며 렌은 다시 말했다. “나는 너무 예뻐.” 렌의 미모는 다시 가려졌고 상인은 그제야 제정신을 차렸다. “대,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렌은 다시 그럴싸한 태도로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실 저는 테라미즈에서 어느 귀족의 애첩이었는데 본부인께서 저를 질투하시는 바람에 도망나왔답니다. 저 분은 마법사이신데 저 혼자 도망다니는데 위험할까봐 그이가 붙여 준 거예요.그이도 질투심이 만만치 않아 일부러 평범하게 생긴 마법사로 고른 거랍니다.그리고 이 마법도 제 미모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 것을 두려워한 그이가 마법아이템을 구해다 준거고, 저 반지들은 그이가 제게 선물로 준 것입니다. 반지들은 전부 진품이고 장물도 아니에요.” 카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렌이 천연덕스럽게 방금 생각해 낸 시나리오를 주워섬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는 렌에게 도저히 못 당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한편 상인은 반지들을 놓고 잠시 고심했다. 만에 하나 반지가 장물이라 하더라도 물건만 진짜라면 멜둔 상회 내에서 세탁해 되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반지는 전부 진짜였다. 말단 점원에서 시작해 마이리아 지점장까지 된 그의 감식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또 조금 전 드러난 소녀의 미모를 보니 자기라도 돈만 있다면 이 소녀에게 뭐든지 다 퍼주고 싶은 기분이 드는데 귀족이라면 오죽할까 싶기도 했다. 상인은 렌의 설명에 수긍했다. 다만 그는 그 미모를 다시 보고 싶어 마냥 아쉬웠다. “주문하신 물건은 어디다 쓰실 겁니까?” “적절한 값을 지급하고 물건을 구입하는데 사용처까지 밝혀야 합니까? 여기는 비밀유지의 원칙 같은 것도 없습니까?” 렌이 날카롭게 되묻자 상인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급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정신이 없어서... 아, 아무튼 보여주신 반지는 멜둔 상회의 일반 구입 시세에 의할 때 저기 제일 큰 반지가 200골드, 두 번째로 큰 반지가 180골드 정도 됩니다. 그러니 저 반지 두 개면 물건 값으로 충분합니다. 오히려 거슬러 드려야죠.” “그럼 지금 즉시 물건을 갖다 주세요. 여기로 배달해 주시면 됩니다.” “이곳에서 목적지까지는 어떻게 운송하시려고요?” “제 마법사가 알아서 할 거예요.” 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침착함을 되찾은 상인은 전문가다운 태도로 직원에게 재빠르게 여러 가지를 지시했고, 직원은 다시 통신구슬을 향해 빠른 속도로 말을 쏟아냈다. 잠시 후 상회 한 쪽이 빛나면서 마법사 한 명이 나타났다 “지점장님, 무슨 일입니까?” 마법사는 늙수그레했다.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얼굴에 엘프비단으로 만들어진 토즈를 입은 모양새가 척 보기에도 부유함을 과시하는 듯했다. 렌이 들은 바로는 마법사 중에 제국 관원으 로서의 월급에 만족하지 못하여 상회에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들이 가끔 생긴다고 했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마법 자체를 배우기 위해서 제국 관원으로 남고자 했으나(아무래도 관직에 있는 경우 고급마법을 더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한 경우, 혹은 관직에 남아 있어도 출세할 가망이 별로 없는 경우에는 사표를 던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이 마법사는 언뜻 보기에 순전히 돈 욕심 때문에 멜둔 상회의 고용인이 된 것처럼 보였다. “데리온님, 이곳으로 몇 가지 화물을 인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곳 마이리아 시에 있는 화물이 소금 20로벤, 설탕 5로벤, 석탄 1티로벤, 생석회 3티로벤, 비누 600덩이이고, 테라미즈 본점에서 설탕 5로벤, 카이펙 지점에서 석탄 2티로벤, 코스티라 지점에서 생석회 7티로벤이 순간이동으로 올 겁니다.” 데리온이라고 불린 마법사는 지점장의 말을 듣자 황당해하며 외쳤다. “아니, 설탕은 그렇다 치고, 세상에 석탄이며 생석회 따위를 순간이동으로 옮기는 바보도 있단 말입니까?” 렌이 뭐라고 쏘아붙이려는 순간 상인이 먼저 나섰다. 상인은 냉정하고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데리온님, 고객이 상품을 구매하시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이상 고객을 모독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하신 말씀은 당장 취소하시고 손님께 사과하십시오. 아니면 하반기 인사평정시에 반영하겠습니다.” 데리온은 발끈해서 뭐라고 말하려다가 곧 포기하고 렌에게 사과했다. “불손한 언행을 해서 죄송합니다.” 렌은 사과를 받아들이면서, 멜둔 상회가 어떻게 이토록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 때 창구 뒤의 직원 한 명이 외쳤다. “카이펙 지점에서 1난(20분) 뒤에, 테라미즈 본점에서 2난 뒤에, 코스티라 지점에서 3난 뒤에 물건을 보낸다고 합니다!” 데리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뒷문을 열고 나갔다. 렌과 카엔도 따라나갔다. “뭘 어떻게 하는 거죠?” 렌이 묻자 카엔은 자세히 대답해 주었다. “멜둔 상회의 지점에서 지점으로 물건을 보낼 때에는 마법진의 힘에 의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사실 멜둔 상회의 마법진이라는 건 이정표에 불과합니다. 렌이 배운 건 정신계 마법진이고 저건 마나계 마법진인데, 마나계 마법진이라고 해도 마법진 자체에 힘이 있는 건 아니고 대부분은 그저 이정표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순간이동이라는 건 사실 생각보다 복잡한 마법이어서 많은 양의 물건이나 많은 수의 사람을 이동시킬 때 이정표가 없으면 일부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버릴 위험이 상존하지요. 그래서 그런 위험을 막기 위해 마법진을 설치해 놓고, 발송인이 마법을 사용하는 때에 맞추어 수신인 쪽에서도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어 물건을 끌어오는 것입니다. 양쪽의 상호작용 덕분에 순간이동할 수 있는 거리도 멀어지고, 운송도 더 정확해지지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순간이동하는 물건이 다른 마법사의 마력이나 사념에 의해 진로를 바꾸는 일도 생깁니다. 다만 황궁과 아카데미를 잇는 마법진이라든지 그밖에 몇 군데의 마법진은 9써클 마법사의 마력이나 마법아이템에 의해 그 자체 마력을 지니고 있죠. 그 경우에는 마법사가 아닌 일반인들도 이동할 수 있는 겁니다.” 멜둔 상회 뒷문은 거대한 창고와 연결되어 있고, 창고 한가운데에는 카엔의 설명처럼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데리온은 그 한쪽 옆에 서서 양손에 마나를 일으켜 마법진 정중앙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법진은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상당한 양의 크고 작은 자루들이 나타났다. 데리온은 마법을 이용하여 자루를 창고 한 쪽으로 옮겼다. “저것은 이곳 마이리아 시의 멜둔 상회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소금, 설탕, 석탄, 생석회, 비누입니다.” 데리온은 땀을 닦고 나서 다시 마법진에 마나를 부었다. 아까 직원이 얘기했던 시간에서 일각의 어김도 없이 화물들이 석탄, 설탕, 생석회의 순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데리온은 물건이 도착하면 옆으로 옮겨 놓고 다시 마나를 붓기를 반복했다. 결국 운송이 모두 끝난 것은 렌이 상회에 온 때로부터 반 파잔(한 시간) 후였다. 놀라울 정도의 신속함이었다. “자, 이제 이것들을 어디로 보내 드릴까요?” 데리온이 물었다. “옮기는 것은 제 마법사가 할 거예요.” 렌은 데리온에게 대답하고 카엔의 귀에 속삭였다. “죄송하지만 카엔님께서 옮겨 주셔야겠어요. 물건들이 빈민구역에 간다는 게 알려지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아요.” 카엔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건들에 마나를 쏘았다. 마법을 잘 아는 6서클 마법사의 눈앞에서 5서클 마법사인 것처럼 연기하는 건 생각보다 힘들었다. 더구나 카엔은 평소에 마나를 거의 쓰지 않고도 순간이동을 했었기 때문에 마나를 왕창 써가면서 짧은 거리를 힘겹게 순간이동시키는 방법을 따로 기억 속에서 더듬어야 했다. 다행히도 그의 연기는 그럴듯해서 데리온은 별로 의심을 품지 않았고, 물건들은 무사히 벽돌공 길드회관으로 옮겨졌다. 다시 상점 안으로 들어오자 상인은 반지에 대한 거스름돈을 들고 서 있었다. “반지 두 개에서 물건 값과 운송비, 거래수수료를 뗀 나머지 금액입니다. 혹시 다른 반지도 팔고 싶으시다면 언제라도 저희 상회를 이용해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렌은 돈을 세어 보았다. 65골드 54실버였다. 380골드짜리 반지 값으로 이것밖에 남지 않았다니 허무했다. “렌은 항상 돈 문제에 민감했으면서 왜 이렇게 펑펑 쓰는 겁니까?” 카엔이 보다 못해 물어보았다. “돈이라는 건 쓸 때 쓰라고 모으는 거예요. 지금 저 물건들이 1파잔 늦게 도착한다면 열 명은 더 죽을 거예요. 사람 목숨을 돈으로 구할 수 있다는 건 행복한 거예요. 아무리 돈을 써도 구할 수 없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렌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오리하르콘 칼을 살 때에는 정체가 드러날까봐 반지를 팔지 않았잖아요?” “제 정체가 드러나는 걸 걱정하는 것보다 사람들 목숨 구하는 게 더 급해요. 카엔님께 부탁드릴까도 생각해 봤지만, 칼 값을 대신 내주신 것만도 죄송스러운 걸요. 그리고 아까 칼 값을 내실 때 슬쩍 주머니를 들여다보았었는데, 더 이상 남아 있는 돈도 없는 것 같던데요.” 카엔은 차마 그거 말고 보석으로 가득 찬 주머니가 몇 개 더 있다는 얘기는 하지 못했다. 그는 렌을 안고 다시 벽돌공길드로 이동했다. 렌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사람들을 치료할 일만 남았다. 3 장 낫는 사람, 죽는 사람 다량의 화물이 나타나고 연이어 렌과 카엔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환성을 올렸다. 길드장 보프가 재빨리 일을 처리한 덕분에 길드회관 내의 탁자며 집기들은 밖으로 옮겨지고 환자들은 벌써 도착하여 안으로 수송되고 있었다. 걸을 수 있는 환자들은 가족들의 부축을 받아, 걸을 수 없는 환자들은 들것에 실려 차례로 길드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옮겨지면서도 구토와 배설을 멈추지 않아 길드회관 안팎에는 역겨운 냄새가 진동했다. 렌을 보자 보프는 반색을 하며 달려왔다. 보프는 화물의 양과 내용을 눈으로 가늠해 보고 곧 물건 값과 운송비가 자신이 준 돈보다 훨씬 많이 들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저 많은 걸 무슨 돈으로...” “지금은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렌은 단호하게 말했다. 보프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사의 눈길을 렌에게 보내며 오리하르콘 칼을 품에서 꺼내 정중히 렌에게 돌려주었다. “치료사 아가씨, 그리고 마법사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지금은 그런 말 할 시간조차도 없습니다.” 렌은 딱 잘랐다. “치료사 아가씨가 시킨 대로 환자들을 옮기기 시작했지만, 다 옮기려면 아마 오늘 밤 내내, 그리고 내일 새벽까지 계속해야 할 것 같소이다.”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만도 훌륭했다. 렌은 먼저 생석회 자루를 가리켰다. “저것은 생석회인데 저걸 뿌리면 나쁜 병균이 대부분 죽습니다. 이 길드회관 주위에 생석회를 뿌리고 배설물이 흐르는 주요 도로 위에다가도 아낌없이 뿌려 주세요. 이미 죽은 사람들 시체 위에도 반드시 뿌리셔야 합니다. 그리고 변소로 파 놓은 구덩이에다가도 뿌려야 하고요. 향락의 집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다음 렌은 석탄 자루와 비누를 가리켰다. “석탄 중 반은 남겨 놓으시고 반은 빈민구역 내의 땔감이 떨어진 빈민들에게 나눠 주세요. 나눠 주시면서, 살고 싶으면 무조건 물은 끓여 먹고 음식은 익혀 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하셔야 합니다. 남겨 놓은 석탄은 화덕이 있는 곳으로 옮겨 주세요. 비누는 전부 600덩이인데, 50덩이는 이곳에, 50덩이는 향락의 집에 보내시고, 남은 500덩이는 여러 토막을 내어서 길드원과 이웃에게 두루 나눠 주세요.” 마지막으로 렌은 설탕과 소금 부대를 가리켰다. “저건 길드회관 내로 옮겨야 합니다. 길드회관에 부엌이나 화덕이 있나요?” 보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궁이가 세 개 있소.” “여자 일손이 필요합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 그리고 환자들 배설물을 받을 양동이도 많이 필요하고요. 글을 아는 분들은 오셨어요?” “밀라가 부르러 갔으니 곧 올 게요.” 렌은 침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속으로 렌은 죽도록 걱정이 되었다. 전염병은 렌의 전공도 아니고 꼼꼼히 공부해본 분야도 아니었다. 그저 잠시 책을 읽어본 것이 전부였다. 그 기억을 되살려 로빈슨 크루소처럼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만 가지고 사람을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 겁났다. 그래도 지금 흔들리는 표정을 지으면 아무도 렌을 믿고 따르지 않을 것이다. 보프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밀라가 검은 옷을 입은 여자 네 명과 함께 달려왔다. “레이님, 무사히 와 주셨군요!” 밀라는 손을 흔들며 펄쩍펄쩍 뛰었다. “이분들은 겨울 여신의 사제님들이십니다. 북구역에서 장례를 집전하다 말고 오셨어요.” 겨울 여신의 사제들은 서른 내지 마흔 ? ㅅ?되어 보이는 여자들로 하나같이 화장기 없이 창백하고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봄 여신의 사제들보다 훨씬 초라하고 볼품없어 보였다. 가장 나이 많아 보이는 사제가 대표로 말했다. “그대가 우리를 불렀다는데, 장례를 집전하고 불쌍한 영혼들을 안식의 들판으로 인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까? 죽은 영혼들에게 겨울의 여신의 축복을 내려 주지 않으면 그들은 영원히 망혼의 계곡에서 헤매게 될지도 모릅니다.” 여사제는 엄숙하고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난 닷새간 끝없이 실려오는 푸른 시체들을 염하고 애도하느라 그녀는 기진맥진했다. “제 말대로만 하면 상당수를 살릴 수 있습니다. 사제님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렌은 간절히 말했다. 렌은 이들이 도와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덕지덕지 화장하여 늘 아름답게 보이는 봄 여신의 사제들에 비해 이들은 소박하고 초라했지만 이들의 눈빛만은 강렬하고 맑았다. “내가 시체를 염하고 장례를 집전한 지 20년, 지금까지 푸른 죽음을 고쳤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여사제는 여전히 지치고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고칠 수 있다니까요!” 렌은 답답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렌의 눈은 활활 불타올랐다. “제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합니다! 저는 저들을 고치는 방법을 알아요! 몇 명은 잃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살 것입니다! 산 자를 구하는 것이 죽은 자를 구하는 것보다 더 급합니다!” 신념으로 가득한 렌의 모습에 사제들은 압도당했다. 조금 전 말했던 가장 나이 많은 여사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의 말이 정말이라면, 아니 그대의 말이 반만이라도 맞는다면, 나는 망자를 애도하는 것을 미루고 그대를 위해 일하겠습니다. 이제 죽어가는 사람들을 무력하게 보기만 하는 것도 지쳤습니다.” 조금 젊은 여사제 한 명이 외쳤다. “비안님! 어찌 사제로서의 본분을 잊으시고 망자를 애도하는 일을 제쳐놓으시면서까지 다른 일을 하려 하십니까?” 비안이라고 불린 여사제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우리의 본분은 죽음을 생명으로 이어 주는 것. 죽은 자를 염하는 것이나 산 자를 죽지 않도록 돌보는 것이나 모두 겨울 여신 케이아나의 뜻. 문자에 얽혀 참뜻을 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겨울 여신을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오린, 그대는 내 말을 믿지요? 이해하지요?” 오린이라 불린 그 여사제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예, 비안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모든 것을 믿고 이해합니다.” “그럼 우리 이 어린 소녀의 말을 한 번 믿어 보지요. 내가 다른 재주는 없어도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하는데, 이 소녀는 정말로 저 환자들을 고칠 수 있다고 믿고 있고, 때로 믿음은 어떤 마법이나 치료약보다도 더한 힘을 발휘한답니다. 저 소녀의 말을 따라 단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말을 마친 비안은 몸을 돌려 렌에게 말했다. “우리 겨울 여신의 사제들은 시체를 염하는 데 익숙해서 환자들을 돌보는 데에도 익숙합니다. 다소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렌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먼저 네 분 다 저를 따라오셔서 경구수액 만드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 다 음 두 분은 저와 함께 남으시고 다른 두 분은 향락의 집으로 가셔서 그 쪽 환자들을 돌봐 주세요. 환자 돌보는 요령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렌은 앞장서 걷기 시작했고, 여사제들, 밀라, 그리고 카엔은 렌의 뒤를 따라갔다. 지하의 부엌에는 아궁이가 세 개 갖춰져 있고 그 위에 큰 솥이 세 개 걸려 있었다. 길드원들이 석탄자루를 들고 차례로 들어와 부엌 한 쪽에 차곡차곡 쌓았다. “카엔님, 저 솥 하나에 물을 가득 채워 가져다 주세요!” 카엔은 무거운 무쇠솥 하나를 두 손으로 낑낑대며 겨우 들었다. 그는 재빨리 경량화 마법을 건 후 밖으로 뛰어나갔다. 어디로 물을 뜨러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그는 솥을 황궁 우원의 연못으로 이동시켰다가 다시 가져왔다. 연못의 맑디맑은 물이 솥 가득 찰랑거렸다. 카엔은 물이 넘치지 않도록 고정마법을 쓴 후 다시 솥을 들고 부엌으로 뛰어들었다. “고마워요, 카엔님!” 렌은 황급히 외치고 석탄자루 하나를 뜯어 석탄덩이를 아궁이 밑으로 던져넣었다. 카엔은 발화마법을 써 석탄 전부에 한꺼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렌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열화마법을 직접 물에 가했다. 물은 얼마 안 되어 끓기 시작했다. 렌은 부엌 주위의 양철냄비, 국자, 컵 등을 전부 끓는 물 속에 집어넣고 소독했다. “이제부터 잘 들으세요.” 렌은 금방 물에 넣었다 꺼낸 1피타짜리 양철물병을 흔들며 말했다. “이 물병 하나만큼의 끓는 물에 설탕 한 차스푼, 소금 네 차스푼을 넣어야 합니다. 절대로 더 넣어서도 안 되고, 덜 넣어서도 안 됩니다. 다 녹으면 체온 이하로 식혀서 환자들에게 먹이면 됩니다. 이곳에 계실 분은 제 감독을 받으시면 되지만, 향락의 집 쪽으로 가실 분들은 지금 제가 한 것처럼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다만 무턱대고 먹여서는 안 되고 환자가 쏟아낸 배설물과 구토물의 양만큼 먹여야 하는데, 여러분들께서 환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환자 가족들한테 물어 배설물과 구토물이 얼마나 나왔는지 환자마다 표시를 해 놓아야 하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환자가 얼마나 정상적으로 소변을 보는가, 얼마나 갈증을 호소하는가에 따라 먹일 양을 가늠해야 합니다.” 숨가쁘게 말한 렌은 다시 다른 쪽 아궁이를 가리켰다. “그리고 다른 아궁이 하나에는 환자가족과 일하는 사람들이 먹을 물을 끓여야 합니다. 절대로 끓이지 않은 물은 드시지 마세요. 음식도 익히지 않고 드시면 절대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병에 걸려 버리면 더 큰일입니다. 남은 하나의 솥에다가는 허드렛물, 그러니까 손 씻거나 할 때 쓰는 물을 계속 끓여 주세요. 그 물은 끓으면 퍼서 한 쪽에서 식히고, 다 식으면 위층으로 올려보내 사람들이 손을 씻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테트라싸이클린 같은 약도 없으니 무조건 환자와 사람들의 입에 들어가는 세균의 양을 줄이는 게 상책이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오염된 수원이 어디인지 파악하는 것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아마도 빈민가 전체의 우물과 수원이 다 오염되었을 것이다. 비안 사제가 말했다. “그대가 한 말은 전부 이해했습니다. 내가 향락의 집 쪽을 맡지요. 오린 사제, 나와 함께 가지요.” 오린 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렌은 카엔에게 부탁했다. “비안 사제님과 오린 사제님, 그리고 석탄, 생석회 남은 것, 설탕, 소금, 비누를 향락의 집으로 이동시켜 주시겠어요?” 카엔은 렌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들을 이동시켰다.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일손으로 불려온 여자들이 부엌으로 들이닥쳤다. “자, 여러분, 여러분 중에 환자 가족이 있으신가요?” 대부분이 손을 들었다. 하긴 환자 가족이 아니고서는 전염병 환자가 우글거리는 이곳에 자원하여 올 리가 없을 것이다. “제 말대로만 하면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습니다. 경구수액은 제가 만들 테니, 이 중 세 분은 계속 아궁이를 지키며 물을 길어와 물을 끓여 주세요. 그리고 다섯 분은 저와 함께 다니면서 경구수액을 나르고 환자들에게 먹이는 일을 해 주시고, 여사제님 두 분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환자들이 잃은 체액의 양을 체크해서 표시해 주세요. 밀라님도 도와 주시고요. 세 분이 한 층씩을 맡아 책임져 주세요.” 렌은 말하면서도 바삐 손을 움직여 좀 전에 끓여 소독한 물통에다 끓인 물을 담고 정량의 설탕, 소금을 만들어 휘젓기 시작했다. “아아, 빨리 식어야 하는데...” 렌이 조급해 하자 카엔이 냉각마법을 일으켜 물에 쏘았다. 렌은 카엔이 마법을 쓴 것을 눈치채고 카엔에게 감사의 눈길을 보냈다. 수액을 대략 50피타(50리터) 정도 만든 렌은 물통 네 개에 수액을 나누어 담아 여사제들과 카엔에게 물통을 하나씩 나눠 주고 자신도 하나를 든 후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낙네 중 한 명에게는 소독을 마친 컵과 숟가락을 대야에 담아 들고 오게 했다. 1층, 2층, 3층을 두루 둘러본 렌은 말문을 잃었다. 가구를 치워 훨씬 넓어진 방마다 빈 구석 하나 없이 환자가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매 층마다 오십여 명, 전부 합치면 300여 명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향락의 집도 사정은 비슷할 테니, 환자 수가 전부 600명은 된다는 얘기였다. 환자들은 얇디얇은 자리 하나씩을 깔고 누워 신음하거나 경련하거나 아예 의식불명이었다. 그들에게서 나는 배설물과 구토물의 냄새에 렌은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렌은 이를 악물고 정신을 수습했다. 보프는 사려깊게도 배설용 양동이를 벽에 붙여 한 줄로 놓고 그 앞에 차양을 친 후 양동이 사이사이에 칸막이를 세워 놓았다. 남자환자와 여자환자가 섞여 있는 상황에서 그런 장치가 없었다면 양동이에다 볼일을 볼 때나 구토를 할 때 서로 심히 불편했을 것이다. 렌은 보프의 현명함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벌써 양동이 쪽으로 달려가 거기에 대고 설사하거나 구토하는 환자들이 보였다. 렌이 올라왔다는 얘기를 들은 보프가 달려왔다. “3층 방 하나를 빼고는 벌써 방이 다 찼소. 더 빽빽하게 배치해야 할 것 같소이다.” “환자가 전부 몇 명인가요?” “이곳에 315명, 향락의 집에 257명이요.” “전부인가요?” 보프의 표정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너무 약해져서 당장 죽게 생긴 환자는 데려오지 못했소.” 렌은 뭐라 말하려고 하다가 말을 멈췄다. 당장 그들을 구할 방법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구할 방법이 있다 해도 지금 쉽게 구할 수 있는 수많은 환자들이 먼저였다. 눈물이 치밀어오르려 했다. 렌은 눈꺼풀을 깜박여 눈물을 참았다. “인력에 여유가 있다면 다 죽어가는 환자라도 일단 데려와 주세요. 살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렌의 말에 보프는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렌은 손? 좇?쳤다. “자, 일단 환자별로 반 피타씩 수액을 먹이세요! 한꺼번에 먹이지 마시고 숟가락으로 떠먹이세요! 물통에서 바로 먹이면 물통의 수액이 감염될 우려가 있으니, 환자별로 컵 하나, 숟가락 하나씩을 마련해서 컵에 수액을 따라 주시고, 보호자가 있는 경우 보호자로 하여금 먹이게 하시고, 보호자가 없으면 여러분들이 돌아가며 먹여 주세요! 그리고 사제님들과 밀라님은 환자들 사이를 돌아다니시면서 구토를 얼마나 했는지, 배설을 얼마나 했는지 일일이 물어서 표시 해 주세요! 구토가 심하거나 정신을 잃어 수액을 먹을 수 없는 환자는 이마에 붉은 표시를 해 놔 주세요. 제가 다니면서 살펴볼게요. 제가 한 명에게 시범을 보일 테니 다들 보고 따라하세요!” 렌은 말을 마치고 보프를 쳐다보았다. “컵과 숟가락은 얼마나 있죠? 아까 부엌에 있던 건 다 가져왔는데 40명분 정도밖에 안 되더군요.” 보프는 곧 대답했다. “인근을 뒤져서 환자 수만큼 갖춰 놓겠소.” “갖춰지면 부엌의 끓는 물에 소독한 후 역시 소독한 대야에 담아 위로 올려보내 달라고 해 주세요. 향락의 집에도 똑같이 하라고 연락 주시고요.” 보프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합원들에게 지시하기 위해 달려나갔다. 렌이 일행들과 함께 환자들에게 다가가자 환자들과 가족들은 애타는 눈으로 렌을 바라보았다. “제발, 제발 우리 엄마를 구해 주세요!” “이이 좀 살려 주세요!” “나 좀 살려 줘요!” 절망과 애원으로 가득한 환자들의 눈초리에 렌은 어지러웠다. 마음을 다잡고 렌은 물통을 기울여 컵 하나에 수액을 따랐다. 문가 제일 가까이에 있는 환자는 40대 여자였다. 그 옆에는 딸로 보이는 20대 여자가 눈물을 쏟으며 환자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환자는 아직 의식은 있었지만 탈수가 진행된 지 상당히 됐는지 눈이 움푹 꺼져 있고 다리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 환자를 일으켜 주세요.” 젊은 여자는 렌을 도와 환자를 일으켰다. 렌은 컵의 수액을 숟가락으로 퍼 환자에게 흘려넣었다. 환자는 힘없이 수액을 들이켰다. 렌은 다시 한 숟가락을 퍼서 환자에게 먹였다. “자, 이런 식으로 일단 이 컵의 수액을 먹이시고, 다 먹은 후에도 환자가 갈증을 호소하고 설사만 할 뿐 소변은 잘 보지 못한다면 다시 와서 수액을 더 달라고 하세요. 아마 하루에 스무 컵은 먹여야 할 거예요.” “이걸 먹이면 낫는 건가요? 무슨 신기한 약인가 보죠?” 젊은 여자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렌을 올려다보았다. 렌은 그녀에게 신뢰감을 줄 필요성을 느꼈다. “물에 설탕과 소금을 타고 다시 마법재료를 섞은 약이에요. 제가 시킨 대로 먹이기만 하면 반드시 나을 거예요.” 환자와 그 가족들은 마법의 약이 왔다는 얘기에 갑자기 찾아온 희망으로 웅성거렸다. “마법약이래.” “저 아가씨는 어려 보여도 치유하는 손 라빌님의 스승이시래.” “그럼 이제 우리는 살아나는 건가?” 사람들의 속삭임을 들은 렌은 노파심에 다시 덧붙였다. “절대 무작정 많이 먹는다고 효과가 있는 게 아니니 갈증이 나는지, 소변이 잘 나오는지 솔직하게 대답해 주셔야 합니다! 많이 먹으면 오히려 몸에 해롭습니다!” 사실 많이 먹어도 그냥 오줌으로 배출될 뿐이지만 그렇지 않아도 모든 게 모자라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욕심을 낼까봐 렌은 약간 거짓말을 섞어 외쳤다. 그리고 따라온 사람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자, 제가 지금 한 것처럼 환자들에게 수액을 먹여 주세요. 사제님들과 밀라님이 각각 한 층씩을 맡아 책임져 주시고, 수액이 떨어지면 바로 지하 부엌으로 오세요.” 그리고 렌은 다시 카엔을 쳐다보았다. “길드장님께 물어 아직 옮겨지지 않은 환자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시고, 그들을 이곳, 혹시 자리가 모자라면 향락의 집으로 순간이동시켜 주세요.” 카엔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사제들과 밀라가 여자들 몇 명을 데리고 다른 방으로 옮겨가자 렌은 남은 여자들을 지휘하여 환자들에게 수액을 먹이기 시작했다. 환자별로 반 피타(반 리터)씩만 먹이는데도 환자가 워낙 많아 수액이 모자라기 시작했다. 그리고 컵과 숟가락도 모자랐다. 렌이 애가 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남자 두 명이 컵과 숟가락을 대야에 잔뜩 담아가지고 뛰어올라왔다. 별로 합법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긁어모은 것 같았지만 렌은 개의치 않았다. 렌은 컵과 숟가락이 끓는 물에 소독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한 후 그것을 방별로 나눠주게 하고 다시 수액을 만들러 지하 부엌으로 내려갔다. 아까 거의 비워졌던 솥에는 다시 물이 채워져 끓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두 개의 솥에서도 서서히 물이 끓고 있었다. 여자들은 긴장한 얼굴로 렌이 시킨 대로 열심히 일했다. 렌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끓는 물을 다른 통에 분량을 재 가며 옮기고 다시 설탕과 소금을 섞어 수액을 만들기 시작했다. 얼마 후 수액이 떨어진 방에서 수액을 가지러 사람들이 내려왔다. 처음 수액을 먹 이고 나서 대략 1파잔(두 시간) 정도 지났으니 이제 약간의 상태 변화가 있을 때였다. 렌은 만들어 놓은 수액을 나눠 주며 물었다. “사람들 상태는 어떤가요? 수액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많나요?” 여사제 한 명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수액을 마신 사람들은 벌써 훨씬 편안해 보여요! 정말 놀랍습니다! 죽은 사람을 애도하기에도 지쳤는데, 제 손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니 너무 감격스러워요!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힘이 나고 희망에 차 있어요! 다만 열 명 중 한 명 정도는 의식이 없거나 구토가 심해서 수액을 삼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액을 마신 사람들의 상태가 좋아졌다는 말에 지하부엌에서 일하던 아낙네들 얼굴에는 일제히 화색이 돌았다. 모두 위층의 병실에 있는 자기 가족들에게 마음이 쏠려 있었는데, 기쁜 소식을 듣자 다들 펄펄 뛰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벌써 몇몇은 렌에게 감사를 표하며 좋아 어쩔 줄 몰라 했다. “제가 올라가 봐야겠군요.” 렌은 벌써 많이 지쳤지만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병실로 들어가려던 렌은 복도에서 보프와 마주쳤다. “환자들 이동은 다 되고 있나요?” “마법사님이 도와 주셔서 거의 끝나가오.” “물을 끓여 마시라든지 음식을 익혀 먹으라는 주의사항도 두루 전하셨고요?” “길드원 수십 명이 뛰어다니며 알리고 있으니 내일 아침이면 거의 끝날 거요.” “그럼 전에 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들을 모아 각 방마다 놓여 있는 배설물 양동이를 운반해서 배설물을 구덩이에 쏟아부은 다음 그 위에 생석회를 뿌리라고 해 주세요.” 배설물을 다루는 것은 가장 오염원에 가까이 가는 일이었기 때문에 콜레라균에 저항력이 있는 사람들이 해야만 했다. 한 번 콜레라에 걸렸다가 나으면 그 면역력이 적어도 5, 6년 정도는 지속되니까 최근에 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들이라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길드원 중에 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들 10여 명을 불러 오기는 했소. 거의 우격다짐으로 잡아온 거요. 심지어 안 오면 길드에서 제명하겠다고 위협까지 했으니...... 그들은 지금 복도에 모여 있소. 다만...” “다만 뭔가요?” “배설물 처리는 원래 일반평민이 하는 일이 아니지 않소. 배설물은 두림(시체를 옮기고 배설물을 치우는 최하층 계급)이나 만지는 걸로 되어 있어서... 길드원들은 더더욱 보통 평민보다는 조금이라도 지위가 높으니 배설물을 만지기조차 싫어할 것이오. 그런데 지금 빈민구역의 두림들은 대부분 이미 병에 걸려 죽었거나 더 이상 배설물을 만지기를 거부하고 있으니...” 렌은 그 말에 이성을 잃었다. 불처럼 화가 치밀어올랐다. “지금 사람이 죽느냐 마느냐 하는 순간에 천하고 어쩌고가 문제인가요? 두림이나 하는 일이라고요? 정말 기가 막히는군요!” 마구 소리친 렌은 다시 카엔을 외쳐 불렀다. “카엔님! 카엔님!” 환자 수송을 마치고 막 돌아온 카엔은 렌의 외침에 황급히 뛰어왔다. “무슨 일인가요?” 렌은 차양으로 가려진 양동이들을 가리켰다. “카엔님, 저 양동이들을 구덩이쪽으로 순간이동시켜 주세요.” 렌의 말에 카엔의 얼굴은 굳어졌다. 가장 천한 두림이나 하는 일을 내게 시키다니. 순간적으로 카엔의 마음 깊은 곳에서 혐오감이 치솟았다. 렌은 카엔의 표정을 보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더한층 화가 치밀었다. “됐어요! 제가 옮기겠어요!” 렌은 양동이를 한 손에 하나씩 들어 옮기기 시작했다. 토사물과 배설물이 섞여 떠다니는 양동이는 힐끗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렌은 구역질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발걸음을 떼었다. 그 모습을 본 보프는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도 양동이 두 개를 집어들었다.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길드원들은 그 모습을 보고 경악해서 저마다 소리질렀다. “길드장님! 길드장님이 그런 천한 일을 하시다니요!” “제발 그만 두십시오!” “길드의 명예를 땅에 추락시킬 생각이십니까!” 보프는 그 말에 멈춰서서 외쳤다. “나는 길드원, 그리고 빈민구역의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이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내 명예는 땅에 떨어져도 좋다! 길드장 자리에서 쫓겨나도 좋다! 하지만 너희들이 진정한 사내라면 진짜 명예가 뭔지 알 것이다! 명예를 아는 진짜 사내라면 나와 함께 이 똥구정물을 나르자!” 보프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 감동했다. 특히 렌은 벅찬 감동으로 온몸이 떨렸다. 몇몇 길드원들이 양동이를 들고 나왔다. 렌은 보프와 함께 맨 앞에 서서 힘차게 구덩이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카엔은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어쩔 줄 몰랐다. “렌, 잘못했어요! 내가 마법으로 옮기겠어요!” 카엔은 외쳤다. “그렇다면 제 것과 길드장님 것을 제외한 나머지만 옮겨 주세요.” 렌은 결연하게 말했다. 렌의 다짐을 읽은 카엔은 한숨을 쉬며 손을 저었다. 양동이들은 사람들의 손을 떠나 허공에 떠서 ? ?150미터 정도 떨어진 구덩이 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렌은 화났던 마음이 풀렸다. 렌은 사람들에게 외쳤다. “지금 한 번은 마법사님께서 해 주셨지만 앞으로 마법사님의 마법은 정말 꼭 필요한 데 사용하도록 아껴 둬야 합니다! 마법사님의 마법서클은 5서클이니 마법력이 무한정 많은 게 절대 아니에요! 그러니 다음부터는 여러분께서 배설물 양동이를 옮겨 주세요! 모두 여러분의 형제자매, 가족들이 쏟아낸 것이니 여러분께서 수고해 주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한 번 병에 걸렸다 나으신 분들이니 당분간, 적어도 2, 3년간은 푸른 죽음에 걸릴 염려가 없습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제 목숨을 걸어도 좋습니다! 그리고 혹시 불안하신 분들은 양동이를 옮기고 난 후에 비누를 사용해 손을 깨끗이 씻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안심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안전하다는 본보기로 저와 조합장님이 든 이 양동이는 우리가 직접 갖다 붓겠습니다!” 보프는 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덧붙여 외쳤다. “다들 들었겠지? 만약에 이 일로 내가 길드장 자리에서 쫓겨나면 나는 아예 전문적으로 똥 푸는 쪽으로 나갈까 한다! 으하하하!” 남자들은 모두들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렌은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 힘겹게 양동이를 옮겼다. “아가씨, 아니 치료사님, 몸도 가녀린데 양동이 두 개는 무리 같군요. 내가 하나를 더 들어 드리겠소. 이래봬도 벽돌 수백 개를 한 번에 옮길 정도니 양동이 하나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오.” 보프는 렌이 양손에 든 양동이 중 하나를 빼앗아들려 했다. 그러자 카엔이 달려왔다. “그건 제가 들어야 할 것 같군요.” 렌은 기쁨에 차 카엔을 쳐다보았다. 역시 그는 렌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셋은 배설물 양동이를 든 채 묵묵히 구덩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카엔은 끔찍한 냄새에 기절할 것 같았다. 만약 토사물과 배설물을 자세히 보면 더 이상 참지 못할 것 같아 그는 아예 그 쪽은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마법으로 냄새를 지우거나 하지는 않았다. 렌 또한 이 지독한 냄새를 꿋꿋하게 참고 있지 않은가. 렌이 자신과 나란히 걷는 카엔의 모습을 때때로 쳐다보며 한없이 사랑스러워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읽은 카엔은 모든 불쾌감을 다 잊을 수 있었다. 구덩이에 배설물을 들이붓고 나자 옆에서 지키고 있던 청년 한 명이 생석회를 그 위에 부었다. 렌은 비워진 양동이에도 생석회를 조금 뿌리게 한 후 카엔과 보프를 끌고 길드회관 뜰에 임시로 마련된 세면대로 와 비누로 손을 씻게 했다. 그리고 렌은 서둘러 다시 병실로 뛰어갔다. “카엔님이 필요할지도 몰라요! 저를 따라오세요!” 렌이 소리치자 카엔도 따라갔다. 렌이 병실로 들어가자마자 여기저기에서 감사가 터져나왔다. “치료사님, 이제 아까처럼 괴롭지 않아요!” “우리 아기 다리 떨림도 멎었어요!” “이제 한결 살 것 같아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죠?” “실은 치유마법사님 아니세요?” 특히 어린아이 환자의 어머니들은 눈물을 흘려가며 렌에게 감사했다. 렌은 잠시 뿌듯한 기분에 젖었다. 그러나 넋놓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자, 수액을 못 들이키는 환자들은 어느 분이죠?” 1층 병실을 감독하는 겨울의 여신의 사제(돌로스라는 이름이었다)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이마에 붉은 물감을 칠해 놓은 열다섯 명이 그들입니다. 구토가 심해서 들이키지 못하는 사람이 열 명, 의식불명인 사람이 다섯 명입니다.” 렌은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구토가 심한 사람의 경우 정명기와 침으로 다스리면 일시적으로 구토를 멈출 수 있고, 그걸 틈타 수액을 마시게 하면 정상으로 회복될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데 힘이 별로 많이 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의식불명인 사람에게 정명기를 불어넣어 다시 정신을 차리게 하려면 한 명을 깨우기 위해 지금 축기해 둔 정명기를 거의 다 써 버려야 했다. 의식불명인 사람을 치료하는 게 더 시급했지만 만약 그렇게 했다가는 구토 환자는 한 명도 치료를 못 하게 될 수도 있었다. 아아, 링거 주사만 있었더라면! 아무 병원, 아무 약국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그 주사만 있었더라면! 렌은 이를 악물었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렌은 고통스러운 결단을 내렸다. "구토하는 환자들이 어디어디에 있죠?" "저기, 저기, 그리고 저기요." 돌로스는 재빨리 몇 명을 가리켰다. 렌은 그중 가장 가까이에 있는 환자에게로 다가갔다. 환자는 5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탈수가 심해서 벌써 눈이 푹 들어간 것이 상태가 무척 좋지 않아 보였다. 그녀는 렌이 맥을 짚는 동안에도 옆에 놓인 작은 대야에 구토를 계속하고 있었다. 토할 것을 다 토해버렸는지 지금 나오는 것은 물밖에 없었다. 환자가 구토하는 것을 본 렌은 다시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지만꾹 참았다. 렌은 침통에서 오리하르콘 침 몇 개를 꺼냇? ? 오리하르콘 침은 유연하면서도 강해 손에 착착 감기는 느낌이었다. 하루치 정명기를 잘 나누어 가능한 많은 환자를 치료해야 하니 환자 한명에게 너무 많은 기운을 써버릴 수는 없었지만, 침이 워낙 좋은 것이라 의외로 정명기를 아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렌은 정명기를 일으켜 재빨리 중요 혈도 몇 군데에 침을 찔러 넣은 후 살짝 돌려가며 정명기를 불어넣었다. 물기가 빠진 퍼석한 살결이 가슴 아팠다. 정명기를 운기하지 않은 손길로 그저 만저주는 것에 불과했지만, 사람의 따뜻한 손이 몸에 닿는 것마으로도 환자는 한결 편해진듯 했다. 원래 콜레라는 처음 발생할 당시에는 미열이 나지만 수분이 빠져나가고 기력이 소해질수록 체온이 저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럴 때 따듯한 체온을 전해주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환자의 상태를 개선시킬 수 있었다. 콜레라의 치료법이 발견되기 전 환자를 돌보던 사람들 또한 차가워지는 환자의 몸에 자기 몸을 대어 덥히며 눈물겨운 마지막 노력을 쏫아 붓곤 했다고 한다. 처음에 사람들은 렌의 손에서 아무런 빛줄기나 치유마법의 흔적을 찾을수 없자 다소 실망했다. 그러나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침을 찔러 넣을 때에나 환자의 몸 구석구석을 어루만질때에나 렌의 모습은 너무도 정성스럽고 엄숙했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렌이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환자는 계속 구역질을 했지만 그 강도는 점점 약해졌다. 그렇게 5분 정도 지나자 환자는 구토를 멈췄다. 사방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따. " 자, 빨리 수액을 먹이세요!" 렌의 말에 돌로스는 화자의 입에 수액을 서둘러 떠 넣었다. 다행히 환자는 들이마신 수액을 도로 토해내지 않았다. "이대로 반 파잔 정도만 구토를 하지 않고 수액을 습수할 수만 있다면 다시 상태가 좋아질 거예요. 열 손가락 손톱 바로 아랫부분, 그러니깐 여기, 여기를 꼭꼭 눌러주면 한결 구토가 잦아듭니다." 렌은 돌로스 사제와 그곳의 사람들에게 잘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이 환자 보호자분 안 계세요?" 하필이면 그 환자에게는 아무 보호자도 없었다. 렌은 애가 탔다. "아까 구토 안하고 수액 잘 들이킨 환자의 가족중 아무나 이리 좀 와주시겠어요? 조금만 도와주시면 돼요." 아무도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제발요!" 렌은 간절하게 외쳤다. 그러자 누군가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 환자는 지금 우리 그이보다 훨씬 더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대, 그 환자 옆에 갔다가 더 나쁜 병이 옮아오면 어떻게 해요? 치료사 아가씨가 책임질 수 있어요?" 냉정함을 잃으면 안 되는데 렌은 또 화가 났다. "이미 병균은 옮은 상태인데 새삼 뭘 더 옮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댁의 환자가 지금 상태가 좋아진 게 누구 덕분이라고 생각 하는거예요? 그런 식으로 말할 거면 당장 그 환자 데리고 나가세요! 보프님! 보프님!" 렌은 복도 가운데에서 조합원들에게 이것저것 바삐 지시하고 있는 보프를 부르려고 했다. 그러자 환자 보호자는 두려움에 가득 차 렌에게 뛰어왔다. "잘못했어요!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쫓아내지 마세요! 여기 와서 그 마법물을 먹은 덕분에 겨우 우리 그이가 살아났는데, 만약에 여기서 쫓겨나면 도로 죽게 되는 거 아닌가요?" 렌은 지치고 힘이 빠진 기분으로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연민이 솟아올랐다. 저 여자는 아무것도 몰랐다. 당연한 두려움이고 의문이었다. 그러니 화를 낼 일은 아니었다. "다 낫지 않은 환자를 쫓아내지는 않을거예요. 조금 전에는 화가 나서 한 말이었어요. 죄송해요." 렌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당황에서 몸 둘바 몰라했다. 렌은 다시 물기 어린 목소리로 여자에게 간청했다. 렌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자 여자는 더욱 황당했다. "여기는 좁아서 간호할 사람이 더 오기도 힘들어요. 이미 계신 분이 도와주셔야 해요. 암주머니의 남편 되시는 분은 이제 1파잔 정도마다 한 번씩 수액만 먹이면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러니 남는 시간에 이 환자 좀 돌봐주세요. 부탁이에요. 요령껏 하시고 손만 잘 씻으시면 아무 걱정 없어요." 렌을 보고 뭉클해졌는지 여자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여자는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되죠?" 렌은 활짝 우승며 대답했다. "조금 전에 들었던 것처럼 이 환자 열손가락의 손톱 아래 살 두덩이 부분을 계속해서 꼭꼭 눌러주세요. 제가 했던 것처럼 환자의 상태를 봐가며 수액을 먹여주세요." 여자는 자신 없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니 똑바로 하셔야 해요." 여자는 다시 조금 더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카엔님, 이 침 좀 불로 소독해주세요." 카엔은 고개를 끄덕이고 불길을 일으켜 오리하르콘 침을 소독했다. 렌은 카엔에게 감사를 표할 겨를도 없이 다음 구토환자에게로 갔다. 그 환자는 다행히 보호자가 있는 환자여서 한결 수월햇다. 렌은 앞서서 똑같이 침을 놓고 정명기를 불어넣고 수액을 먹였다. 그렇게 열 명의 구토 환자를 보고 나자 렌은 온몸에 진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2층, 3층의 환자를 봐야했다. 렌은 의식불명인 환자들에게 고통스러운 눈길을 한 번 보낸 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의식불명인 환자 중 한 명의 보호자- 젊은 아버지 였다-가 울부짖었다. "이뵈, 치료사, 우리 아들은 안 봐주고 그냥 가는 거야? 내 자식은 안 봐주고 그냥 가는 거냐구!" 그는 얼굴 전체를 일그러드리며 처절하게 외쳤다. 그의 옆에 누워 있는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는 이미 피부에 푸른기가 돌고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저 상태라면 앞으로 길어야 세 시간, 짧으면 두 시간... 렌은 숨을 삼켰다. 죄책감에 심장이 찔리는 기분이었다. "다른 방 구토 환자들과 향락의 집 쪽 구토환자들을 보고 나면 다시 와서 봐드릴께요." 렌은 애써 태연하게 말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렌의 목소리는 떨렸다. 렌의 일거수 일투족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환자의 아버지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우리 아들은 이대로 죽는 거야?" 그는 덜덜 떨며 물었다. 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 거냐고?!" 그는 악을 썼다. "우리 마누라는?" "우리 아버지는요?" 다른 환자 보호자 두 명이 그 남자를 따라 외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무사히 수액을 마시고 기운을 차려가는 환자들과 그 보호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어차피 죽을 사람들이야!" "다 죽은 사람 붙잡고 쓸데없이 힘쓰다가 치료사님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구? 우리들 모두 다 죽으란 소리야?!" "맞아! 산사람이라도 살아야지!" "당신들이 이미 다 죽어가는 사람 살려달라고 억지 썼다가 치료사님이 화내고 가버리면 어쩔 거야? 책임질 거야?!" 금방이라도 치고 박을 듯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렌은 어지러웠다. 뭐라고 말해야 하는데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울음을 참는 것만도 힘에 부쳤다. 렌의 괴로움을 읽은 카엔은 어떻게든 사람들을 진정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아주 가볍게 정신조작을 하면 될 것이다. 그래, 의식불명 환자의 보호자들에게만 마법을 걸자. 그들을 소리치게 하는 것은 사실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었다. 어떻게든 렌을 붙잡아 자기 가족을 치료하게 하면 나을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 하지만 그 희망은 이미 절망에 잠식되어가고 있었다. 절망을 조금 더 불러일으켜 아예 첸며하게 하자. 그러면 저들은 더 이상 렌에게 애원하지 않겠지. 혼자서 절망에 떨겠지... 카엔은 소리를 지르고 있는 환자 보호자 세 명의 마음을 살짝, 아주 살짝 건드렸다. 이미 커벼 있던 절망은 카엔이 건드리자 마자 먹구름처럼 그들의 마음을 뒤덮었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다 말고 그대로 주저앉아 기운 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 조금 전까지 살기등등하던 반대편 보호자들도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들도 여차하면 자신들이 저들의 처지가 될 뻔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절망에 떨고 울고 있는 저들을 향해 새삼 욕설을 퍼부을 사람은 없었다. 고함이 난무하던 병실은 어느새 세 줄기의 크고 작은 울음소리만이 남았다. 렌은 하얗게 질린 채로 단호하게 말했다. " 일단 구토환자가 먼저입니다. 하지만 구토환자를 다 보고나면 반드시 다시 와서 봐드리겠어요. 적어도 제가 할 수 이쓴 최손은 다하겠어요." 그리고 렌은 카엔에게 나직이 말했다. " 이제 우리 2층으로 가요." 카엔은 렌을 부축이다시피해서 계단으로 올라갔다. 계단 중간에서 렌은 숨으 몰아쉬며 잠시 쉬었다. " 저 눈물은 나중에 흘릴게요. 그때 저 좀 안아주세요." 렌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카엔은 너무 애처로웠으나 그가 할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렌의 등을 두드려주는 것뿐이어었다. " 카엔님. " 렌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다 말을 멈췄다. 입술을 너무 꽉 깨물어서 렌의 입술은 하얗게 되었다. 렌은 카엔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손아귀의 힘이 너무 강해 아플 정도였다. 그는 렌의 모습과 생각에 압도당했다. " 카엔님, 저는 맹세해요. 제 목숨, 그리고 제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모든것을 걸고 맹세해요. 앞으로 무슨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저는 고칠수 있는 환자, 나을 수 있는 환자들이 저런 식으로 죽어가지 않도록 할 거에요. 누구든지 병을 고치는 방법을 배울수 있도록 책을 쓸 거에요. 그리고 제가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병원가 치료사 학교를 세울 거에요. 모든 생명들이 가치 있고 동등하게 다루어지는 세상을 만들거에요." 렌의 눈은 활활 불타올랐다. " 그렇게 되도록 도와주실 건가요, 카엔님? " 카엔은 뭔가 뭉클하고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는 엄숙하게 말했다. " 내 모든것을 걸고 렌을 돕겠습니다. 나 또한 목숨걸고 맹세합니다." 렌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마워요, 카엔님." 렌은 한결 가벼워진 걸음걸이로 ? 兀騈?올라갔다. 2층, 3층의 구토 환자들까지 다 둘러보고 수액을 공급받는 대 부분의 환자들이 점차 정상을 되 찾는 것을 확인한 후- 2층과 2층에도 역시 의식불명인 환자가 각각 일곱 명, 열한 명씩 있었으나 그들 또한 치료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렌은 다시 카엔에게 부탁하여 향락의 집으로 이동했다. 향락의 집에서는 겨울 여신의 사제 비안이 사람들을 지휘하여 렌이 시킨대로 착실히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다. 시체를 다루어 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비안은 환자를 돌보는 데나 위생관리에나 모두 능숙했다. 하기는 그렇지 않았다면 시체를 늘 접하는 처지에 전염병이나 다른 질병에 감염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항략의 집 쪽 환자들은 대부분 남구역 거주자들로서 새로 발생한 환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아직 질병이 많이 진전되지 않은 초기 단계여서 의식불명 상태에 이른 사람들은 한두 명에 불과했다. 구토로 수액을 삼키지 못하는 30여 명의 환자를 돌본 렌은 숨 쉴 틈도 없이 다시 카엔에게 부탁드려 길드회관으로 이동했다. 밤은 깊었지만 길드회관은 여기저기 밝혀놓은 불빛으로 환햇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삐 오고가는 모습을 보면 마치 무슨 축제라도 벌어지는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 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들어가는 사람들은 환자를 부축하고 있었고 나오는 사람들은 시체를 내왔다. 들것에 실린 시체 한 구가 렌 옆을 스쳐지나갔다. 렌은 차마 시체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마 아까 치료를 미뤄두었던 환자 중 한 명이리라. 렌은 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한 기분이었다. 카엔은 렌의 마음을 읽고 렌의 어깨를 감싸쥐다시피 하여 회관 안으로 부축했다. 1층 병실에 들어간 렌은 피곤해서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병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호나자들은 수액 덕분에 이제 차도가 완연했다. 구토하던 환자들 또한 손톱 아랫부분 십왕=열 손가락손톱의 뒤쪽 가운데에서 약 2,3 밀리미터 떨어진 점-을 자극한 덕분에 구토의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어 이제는 토해내는 것보다 섭취하는 수액의 양이 많아졌다. 환자들은 점차 체내로 수분과 전해질 균형을 찾아가고 있었고, 피부색과 피부의 탄력도 상당 정도 회복되었다. 심한 환자에게서 보이던 다리 경련도 대부분 잦아들었다. 물론 설사는 당분간 계속되겠지만 이제 큰 보기는 넘긴 셈이었다. 내일부터는 더 이상 수액을 먹지 않고 가볍게 소금간을 한 미음을 섭취하면 자연치유되기까지 사나흘 정도만 조리하면 모두 무사히 완쾌될 수 있었다. 환자와 그 보호자들은 렌을 보자 다시 감사의 인사를 퍼붓기 시작했다. 혹은 고마움에 어쩔 줄 모르며 흐느꼈다. "치료사님!" " 이 은헤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치유마법사놈들 백 명을 보내준대도 치료사님과 안 바꿀거예요!" "여신들께서 기적을 내려주신 거죠?" 렌은 사람들의 칭송에 잠시 흐뭇했다. 하지만 곧 몇몇 얼굴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까 치료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의식불명 환자 다섯 명 중 네명은 이미 없어졌다. 그리고 남은 한 명 또한 이제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6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할머니 였다. 이곳 사람들은 평균수명도 짧고 빨리 늙으니 아마 실제 나이는 50세 남짓일것이다. 그 할머니는 보호자도 없어서 아까 으식없이 누워 있을 때에 아무것도 그 할머니를 치료해달라고 울부짖지 않았다. 가족들이 다죽어버린 걸까? 아니면 원래 혼자인 걸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의문이 스쳐갔다. 렌은 필사적으로 냉정을 유지하며 할머니에게로 가서 맥을 짚었다. 맥은 약하고 희미했다. 사맥(死脈)이었다. 렌은 절망했다. 아까 이 할머니부터 치료했다면 살릴 가망이 있었을까? 내가 판단착오를 한 건 아닐까? 사람의 목숨을 놓고 누구를 고를지 선택해야 한다는 건 너무 무섭고 힘든 일이었다. 할머니는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임종의 순간이 다가온 것 같았다. 이제 렌이 할머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렌은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남은 약간의 멍명기를 조금씩 환자의 몸안으로 흘려 넣었다. 그 순간, 손목에서 희미하게 전해져오던 맥은 갑자기 펄떡펄떡하고 잠시 강해졌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다시 살아나지 않을까. 이 현상이 회광반조(回光反照)임을 잘 알면서도 렌은 잠시 부질없는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채 정명기를 다 쏟아내기도 전에 맥박은 완전히 사라졌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텅 빈 죽음의 감촉에 렌은 몸서리쳤다. 렌은 환자의 손목을 잡은 채 그대로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방 안에 있던 돌로스 사제가 망연자실해 있는 렌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고통에 가득 찬 렌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돌로스는 렌의 몸을 가볍게 밀쳤다. 렌은 힘없이 손목을 놓고 조금 물러났다. 돌로스는 먼저 기도문을 읊조리며 할머니의 두 눈을 감겨주었다. 그 다음에는 맑은 물을 찍어 할머니의 미간에 한 방울, 입술에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안식의 기도'라는 겨울 여신의 기도문을 우울한 가락에 실어 나직하게 영송했다. 슬픔의 끝에는 기쁨이 고통의 끝에는 환희가 죽음의 끝에는 생명이 가다릴지니 겨울 여신 케이아나여, 이 지친 영혼을 인도하시어 안식으 뜰에서 쉬게 하시고 모든 괴로움을 잊게 하시고 순결한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유명한 기도문이었는지 그 자리에 있던 다른 환자와 보호자도 조용히 기도문을 따라 읊었다. 방 안은흐느끼 듯한 기도의 가락으로 가득찼다. 렌은 이곳에서 울면 안 된다는 생각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카엔도 황급히 따라나갔다. 눈물을 참으며 렌음 부탁했다. "카에님,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으로 잠깐만 데려다주세요." "그래요." 카엔은 렌과 함께 마이리아 인근에 있는 자신의 여름별궁 후원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정원은 언뜻 보기에는 사람의 손이 전혀 닿지 않은 듯했지만 실은 최고의 정원사들이 밤낮으로 심혈을 기울여 이루어낸 최고 걸작이었다. 정원 한쪽에는 허름하게 보이는 정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또한 일부러 허름하게 보이게끔 정성을 쏟아 만들어낸 정자였다. "여기가 어디예요?" "마이리아 시 인근의 공원입니다." 카엔은 거짓말을 했다. 평소 같으면 렌은 아름다운 주위풍경을 보고 감탄했겠지만 지금 렌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렌은 정자에 앉아 멍하니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카엔님" "네." "이제 저 좀 울게요." 렌은 카엔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흐느꼈다. 그의 가슴팍은 축축히 젖어 들어갔다. 빗소리에 흐느낌이 섞여들었다. 양의 무리에서 염소를 골라내듯 살 자와 죽을 자를 갈라놓을 권한은 내개 없었다. 열 목숨을 살리기 위해 한 목숨을 버려서는 안 되었다. 그 죄업은 온전히 나의 것이야. 렌은 어지러운 생각 속 에서 끊임없이 자책하며 울고, 또 죽어간 사람들이 애처로워서 다시 울었다. 또다시 그런 상황이 돌아와도 결국 고치기 힘든 환자를 포기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렌은 그저 울기만 했다. 카엔은 렌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수가 없었다. 갑자기 렌은 울음을 멈추었다. "오래 울 시간이 없어요. 많이 울면 많이 지칠 거고 그럼 내일 환자를 볼 때 지장이 있겠죠. 환자들이 다 낫고 나면 그때 가서 안심하고 울 거예요." 렌은 결연하게 말하며 카엔의 옷 자락을 끌어당겨 눈물을 닦았다. "렌, 내가 뭔가 해줄 일이 없나요?" 카엔은 간절하게 물었다. "환자를 한시라도 빨리 제게 데려다주세요. 그러면 제 힘으로 살릴 수 있을 거예요." "알았어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렌은 잠시 말을 끊었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좀 더 마음을 열어주세요. 카엔님이 하루하루 마음을 열어가시는 거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살릴 수 없으면 가엾이 여기고 함께 슬퍼하기라도 해야 돼요. 그게 안되면 그렇게 하려고 노력이라도 해야 해요." 자신의 마음을 읽는 듯한 렌의 말에 카엔은 뜨끔했다. 렌이 마음을 읽지 못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는 때때로 벌거벗은 듯 두려웠다. 렌은 카엔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평소 따듯했던 렌의 손끝은 피곤에 절어 차고 축축했다. "카엔님, 하루 종일 힘드셨죠? 내일은 더 힘드실 거예요. 그러니 우리 길드회관으로 돌아가서 잠시라도 눈을 붙여요." 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렌을 안고 잠시 토닥거렸다. 그러다가 애처롭고 가여운 마음에 렌의 이마에 키스했다. 애타게 사랑을 구하는 키스가 아니라, 자신의 체온과 기운이 렌에게 닿아 위로가 되길 바라는 그런 키스였다. 렌은 눈을 감고 조용히 카엔의 키스를 받았다. 이마에서 전해져오는 따뜻함이 마음 저렸다. 눈물이 다시 흘렀지만 아까처럼 쓰디쓴 것은 아니었다. 슬픔 속에 감미로움이 섞였다. 이렇게 죽음과 고통이 난무하는 순간에 행복을 느껴도 되는 것일까. 눈은 울면서 입가에는 미소를 지어도 되는 것일가... 렌의 마음을 읽으며 행복해하던 카엔은 호주머니에서 꿀과자 하나를 거냈다. 이틀 전 황궁에 들렀을 때 세 개를 챙겨놓았는데 두 개는 그 사이에 먹고 한 개만 남아 있었다. "렌, 이거 먹지 않을래요?" 렌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으로 꿀과자를 내려다보았다. "세상에. 이거 꿀과자 잖아요? 어디서 나셨어요?" 카엔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 이 동네에도 꿀과자 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이리아 시가 원래 테라미즈보다 더 역사와 전통이 있잖아요?" 렌은 카엔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꿀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꿀과 초콜릿과 촉촉한 과자의 맛이 입 안에 섞여 들었다. "아아,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아요." 렌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순간이동을 위해 카엔의 품에 안겼다. 둘은 곧 길드회관으로 순간이동했다. 얼마나 지쳤는지 렌은 카엔의 품에 안긴 채 잠이 들었다. 렌을 안아들고 두리번거리던 카엔은 보프와 마주쳤다. "레에.. 레이를어디에다 재워야 할지 모르겠군요." 가명을 서야 한다는 것은 의외로 신경쓰이는 일이었다. "이리 따라오시오." 보프는 잠에 곯아떨어진 렌에게 측은한 눈길을 던지며 카엔을 3층으로 안내했다. "대단한 아가씨요." "그렇습니다." "레이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 여기 옮겨진 환자들 중 반은 죽었을 거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카엔은 새삼 이 길드장을 다시 쳐다보았다. 보프는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벽돌공 길드장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가 아니었다면 절대 반나절 만에 사람들을 모아 환자를 옮기고 간병체계를 세울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결단력이라든지 사심 없음은 정말 보기 드문 것이었다. 물론 길드장의 마음속에도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많았다. 그래도 그는 자기 자리를 보전해야 한다든지 자기 목숨부터 구해야 한다든가 하는 생각은 뒷전으로 미뤄놓구 어떻게 해서라도 한 명의 생명이라도 더 구해야 한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서 제국의 역대 수상들과 비교해보아도 모자람이 없는 능력과 성품이었다. "그대도 대단합니다. 통솔력이나 친화력이나 결단력 모두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들과 비교해 손색이 없습니다." 오만하게 들리는 말투엿으나 어쨋든 칭찬이라 보프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마법사 양반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봤는지 모르겠지만, 어쨋든 거창한 칭찬 정말 고맙소이다." 웃음을 그친 보프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이봐요, 마법사 양반, 사실 댁은 이 아가씨한테 홀딱 반해서 마법사 체면은 내던진 채 염치불구하고 쫓아다니는 거 아니오? 고백은 했소이까?" 카엔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푸후후, 내 그럴 줄 알았소. 거, 젋은 사람이 말수도 적고 사람들 눈길도 피하는 게 척봐도 쉽게 사랑고백같은 건 못할 것 처럼 보이던데, 역시 그랬구려." 혼자서 껄껄 웃던 보프는 다시 덧붙였다. "그 아가씨, 사람들 앞에서는 의연한 척 했지만 무척 마음이 여린 것 같은대, 마법사님이 잘 좀 따뜻하게 보듬어주시오, 아마 오늘 마음 고생이 심햇을 거요."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카엔은 새삼 렌과 함께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고마워하는 일이 부쩍 많아졌음을 느꼈다. 보프는 다시 사람들을 지휘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카엔은 길드장 집무실-그곳도 이미 병실로 변했다- 옆에 붙어있는 작은 골방에 렌을 뉘었다. 골방에 있는 얇은 모포 몇 장으로 렌의 몸을 감싼 카엔은 안타까움에떨며 핏기 없는 렌의 뺨을 쓰다듬었다. 피곤에 절어 곤히 잠든 렌은 뺨에 카엔의 손가락이 닿았는데도 깨지 않았다. 그는 렌의 귀에 속삭였다. "렌, 나도 렌을 사랑합니다. 내게 렌을 사랑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렌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하게 키스한 카엔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저지른 죄의 무게는 날이 갈수록 무겁고 그를 짓눌렀다. 그동안 그는 그 무게를 잊고 살았다. 그를 제외한 다른 인간모두를 그와 별개의 존재, 그에게 아무 으미 없는 존재로 생각했기에 그들을 죽이더라도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 동안 그가 어떻게 살 수 있었겠는가. 그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어떻게 그가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렌과 함께 지내는 한순간 한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더 이상 그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닌, 피부 아래에 뜨거운 피가 흐르고 각기 저마다의 인생을 살아 가는 생상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죄가 고스란히 남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과거의 죄가 비수처럼 그의 마음을 찔렀다. 그가 저지른 일들을 렌이 알게 되면 과연 렌은 그를 용서해줄수 있을까. 4 장 죽음속에 생명은 있다 카엔은 보프 및 다른 조합원들과 함께 1층 부속실에서 새우잠을 자다가 자신을 흔드는 렌의 손길에 잠에서 깨었다. "카엔님, 일어나세요. 할 일이 많아요." 카엔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다른 사람들도 부스럭거리며 차례로 일으켰다. "대체 지금 몇 파잔입니까?" 밖은 아직 어둣어둑했으니 아직 3파잔도 안됐을 것이다. "2파잔 반(5시_에요. 12파잔(자정)부터 주무셨으니 그정도면 충분해요." 렌은 딱 잘라 말했다. 카엔은 불편한 잠자리에서 선잠을 자 온몸이 삐걱거리는 기분이었다. "렌은 얼마나 잔 겁니까?' "1파잔 반(새벽 세 시)까지 잤어요. 그리고 나서 반 파잔 정도 정명기를 축기할 수 있거든요. 그 다음에는 밤새 자지 않고 환자를 간호한 여자분들과 교대했고요." 렌의 눈 밑에는 검은 그림자가 생겼고 얼굴도 창백해서 카엔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1파잔 반( 세 시간)이면 너무 조금 잔 거 아닙니까?" "오래 잘 시간이 없어요." 렌은 힘없이 대꾸했다. 카엔은 애처로웠으나 그가 어떻 게 할 방도는 없었다. 조합원들이 어지간히 일어나자 렌은 손뼉을 쳐 주의를 모았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확인한 렌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여러분, 어제 환자가 많이 실려와 치료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 환자들이 이미 병균을 많이 퍼뜨렸을 테니 오늘과 내일 이틀간은 새로운 환자가 더 많이 발생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내일까지가 고비입니다. 어제 제가 치료하는 걸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설사와 구토가 시작되자마자 바로수액요법으로 치료하면 환자의 상태는 악화되지 않고, 살아날 가능성은 크게 높아집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오늘 하실 가장 중요한 일은 환자가 어디에서 생겼는지 서둘러 파악하여 그들을 서둘러 이리로 데려오시는 겁니다. 여기로 오면 살 수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셔도 좋습니다. 사람들의 목숨이 여러분께 달려 있다는 걸 명심하시고 부디 힘써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치료해드리겠습니다." 좀 전까지의 힘없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렌의 목소리는 신념에 넘쳤다. 사람들은 모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제 그들은 뭔가에 홀린 듯했다. 절망이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희망으로 변했고, 그들은 처음보는 치료사 소녀의 허황된 말을 맹목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무수한 환자들을 길드회관으로 옮겨놓았을 때 그 이해할수 없는 희망은 사라졌고, 줄지어 누워있는 화자들을 보면서 새삼 정말이 엄습했다. 조합원들은 바보같이 헛된 희망을 가졌던 스스로를 조소했다. 그런데 저 치료사 소녀가 단호하고 확신에 찬 태도로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한 지 1파잔도 되지 않아 환자들은 생기를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가족과 친구들이 살아난 기쁨은 물론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 기쁜 것은 자신들 스스로가 이 폐쇄된 빈민구역에서 병든 돼지처럼 죽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푸른 죽음에 걸려 죽는 것은 죽음 중에서도 가장 비참했다. 가족들에게 외면당하고 거리에 버려저 온몸에 똥 오줌을 묻힌 채 몸을 떨다가 푸르죽주가게 말라 비틀어져 죽는 것. 운이 좋은 시체는 겨울 여신의 사제가 베풀어주는 안식의 기도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행운아는 세 명에 한 명도 안 되었다. 대부분의 시체는 아무런 존중도 받지 못한 채 태워지거나 쓰레기처럼 구덩이에 처박혔다. 안식의 기도를 받지 못하면 다시 태어나지 못하고 망혼의 계곡에서 길 잃은 영혼이 되어버린다는 믿음을 굳게 간직하고 있는 그들에게 그보다 더 두려운 죽음은 없었다. 이제 그들은 자신이 그렇게 죽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혹시 병에 걸리더라도 저 소녀라면 자신들을 고쳐줄수 있다. 저 소녀라면 믿을 수 있다. 조합원들은 렌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따를 자세가 되었다. "치료사 아가씨, 말씀만 하십시요!" "똥 치우는 일이든 시체 나르는 일이든 닥치는 데로 하겠습니다!" " 우리들이 병에 걸리면 아가씨가 고쳐주시겠죠?" 사람들은 와르르 웃었다. 카엔은 자신이 어제 불어넣은 거짓 희망 대신 진짜 희망이 사람들 마음속에서 눈부시게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끼며 가슴 벅찼다. 사람들이 저마 할 일을 하러 떠나자 렌은 차근차근 카엔에게 할 일을 지시했다. "카에님,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이 푸른죽음은 얼마나 빨리 치료를 받는가가 관건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빈민구역 외곽 쪽 환자들을 여기로 옮기려면 적어도 2,3 파잔 정도는 걸릴테니 그쪽은 카엔님은 책임지고 순간이동으로 옮겨주세요. 수고스럽더라도 집집마다 환자가 있는지 소리쳐 확인하시고 환자가 있는 경우 바로바로 여기나 향락의 집으로 이동시켜주세요." "알겠습니다. 렌은 호자서 괜찮겠어요"?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아요. 카엔님이야 말로 어제부터 무리하셨지만 조금만 더 힘써주세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렌은 힘이 드는지 벽에 등을 기댔다. 창백한 렌의 얼굴을 본 카엔은 문득 생각나 물었다. "렌, 내가 나가 있는 동안 어제처럼 길드회관과 향락의 집을 왔다 갔다 하려면 방법이 있어야 할 텐데, 이동마법진이라도 만들어 줄까요?" 카엔의 말에 렌의 얼굴은 환해졌다. "그러면야 정말 좋지요." 반색하던 렌의 얼굴은 다시 어두워졌다. "하지만 마력이 있어야 마법진으로 이동할 수 있는 거라면서요?" "원래는 그렇지만, 마력을 공급해줄 수 있는 마법아이템 같은 게 있으면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마법진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내게 그런 마법 아이템이 있으니 믿어도 됩니다. 양쪽을 바로 다닐 수있어야 한명이라도 더 구할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카엔의 마력이라면 마법아이템 같은 것 없이도 수십 회 사용가능한 마법진을 손쉽게 만들 수 있었다. 향락의 집과 길드회관은 걸어서 1파잔밖에 안되었는데, 그 정도 거리를 이동하는 마법진은 그야말로 앉아서 꿀과자 먹기였다. 그래도 렌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카엔은 자신이 마법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꾸며댔다. "정말, 정말 고마? 熾?" 일시에 피곤이 가신 것 같은 렌의 모습에 카엔은 보람을 느꼈다. 그녀를 위해 더 많은 걸 해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직 어둑어둑한 밖으로 나간 그는 땅에 나뭇가지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렌이 배운 정신게 마법진과 전혀 다른 체계였지만 렌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카엔은 마지막으로 마법진에 마나를 부여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몸에 지닌 작은 장신구에서 마나가 흘러나오는 것 처럼 가장하고, 그 장신구를 마법진 한가운데 묻었다. "이제 향락의 집 마당에다가도 하나 더 만들어 놓으면 됩니다. 시동어는 '엘리오카에니넨'입니다." '엘리오카에니넨'은 누리디안 고어로 '카엔을 사랑해'라는 뜻이었다. 카엔은 시치미 떼고 시동어의 뜻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렌은 입속으로 시동어를 몇 번 되뇌었고, 카엔은 잠시 뭐라 말할 수 없는 흐뭇한 기분에 잠겼다. "향락의 집에 마법진을 만드시는 대로 여기 들르실 필요 없이 바로 환자들을 찾아 나서세요. 자, 어서 가세요." 렌이 단호하게 말하자 카엔은 못내 걱정스러운 눈길을 던지면 순간이동햇다. 향락의 집에 마법진을 설치해놓고 빈민구역 지도를 하나 챙겨든 카엔은 빈민구역 남동쪽부터 탐색을 시작했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비가 쏟아졌지만 빗줄기는 한결 약해져서 다니기에 불편하지는 않았다. 탐색은 쉬웠다.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이 지르는 마음속의 비명만큼 잘 들리는 것도 없었다. 두려움과 고통에 가득 찬 그 비명은 사람의 생각중에서 가장 읽기 싫고 끔찍하고 추하고 혐오스러운 것이었지만 그만큼 멀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의식불명인 사람들도 감정은 뿜어냈다. 생명체라면 누구나 가지는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사념. '사람이 죽을 때 그 맘이 착하다고, 흥~' ,지금까지 읽은 것은 정 반대였다. 그래서 그는 병든 자는 되도록 황궁에 두지 않았다. 부슬비가 내리는 빈민구역을 걸으며 인간들의 생각을 탐지하고 있으려니 어제 정신없이 렌과 다닐 때는 의식하지 않았던 혐오감이 되살아났다. 더러운 거리, 더러운 냄새, 더러운 마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는 인간의 추함... 마음을 열고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리라는 렌의 당부가 생각났지만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문득 그는 환자가 내뿜는 것임이 분명한 사념 하나를 탐지해냈다. 길 오른쪽에 있는 다 쓰려저 가는 5층집의 4층에서 흘러나오는 사념이었다. 그는 4층 계단까지 순간이동한 후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렸다. 아무 대답도 없자 그는 그냥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여는 순간 악취가 코를 찔렀다. 아무리 맡아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토사물과 배설물의 냄새였다. "이봐요, 언제부터 이랬죠?" 카엔이 묻는 말에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는 헛구역질을 하느라 대답을 하지 못했다. 카엔은 그 남자의 생각을 읽었다. 간밤부터였다. 카엔이 렌의 어깨너머로 배운바에 따르면 아직 희망이 있었다. "가족들은 모두 어디 갔습니까?" 한 명은 죽고 두명은 도망갔다. 이틀 전 마누라가 이 병으로 쓰러지니까 큰아들 녀석이 어쩔 줄 모르다가 지 어머니를 길에 내다 버렸어. 둘째 아들이 대들었어. 어머니를 버리다니 형이 사람이냐고... 하지만 그녀석도 제 어머니를 도로 이 집구석에 데려다 놓을 생각은 하지 않더구만. 그리고 어제 저녁부터 내가 설사를 시작하니까 두 녀석 다 하얗게 질려서 도망가 버렸어. 그래도 다행이지. 제 어미한테 한 것처럼 날 길에다 내다 버리지 않았으니.. 어차피 빈민구역은 다 폐쇄되었는데 대체 어딜 간다고... 이 비 다 맞으며 다니면 감기 걸릴텐데.. 어차피 죽을 목숨, 차라리 내가 나가 순순히 길바닥에서 죽어 주는게 나았는데... 밤새 설사하고 구토했더니 하늘이 노랗네. 저 녀석은 대체 왜 온거야. 할일이 없는 사람인가? 푸른죽음에 걸리고 싶어 환장한 놈인가? 뭘 자꾸 묻는거야? "낫고 싶어요?" 카엔은 구토를 계속하며 상념을 쏟아내는 환자에게 다시 물었다. 질문을 받은 순간 물밀듯이 밀려오는 화자의 생각에 카엔은 어찔했다. 그래,낫고 싶어! 낫고 싶다구! 죽기 싫어! 왜 내가 죽어야 해? 이제 겨우 40대 인데... 무서워.. 나 살고 싶어... 죽으면 다 끝이겠지? 안식의 들판 어쩌구 하는 건 다 거짓말이지? 나 살고싶어..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죽기싫어. 정말 죽기 싫어. 나 뭐든 할테니 제발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환자는 다리에 경련이 오기 시작햇는지 토사물 위에 주저앉아 다리를 덜덜 떨었다. 그러다가 설사를 시작했다. 바지가 누렇게 물들고 역한 냄새가 풍겨왔다. 환자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이런 꼴을 보이기는 죽기보다 싫었어. 너는 누군데 여기 와서 이 비참한 꼬을 구경하는거지? 정말 날 낫게 할수 있는 거야? 환자는 간절함, 비참함, 굴욕, 그 모든것이 섞인 눈으로 카엔을 올려보았다. 마음을 못 읽 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호나자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를 수는 없으리라. "당신은 살수 있습니다. 나을 수 있어요." 카엔은 속삭이듯 나직하게 말했다. 그말을 듣자마자 환자의 마음은 폭죽이 한꺼번에 터지는 것처럼 빛났다. 살 수 있다고? 정말이야? 믿을 수 없어! 나 살 수 있는 거야? 진짜야? 나 정말 살고 싶어. 이렇게 죽기는 싫어. 제발... 제발...제 발... 환자의 절규를 듣고 있으니 숨이 막혔다. 그는 황급히 화자에게 마력을 쏘아 보냇따. 환자는 은보랏빛 구름같은 것이 자기에게로 밀려오자 입을 벌리고 카엔을 쳐다보았다. "병을 고쳐줄 수 있는 사람에게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환자는 카엔에게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사의 눈길을 보냈다. 환자의 두 눈에 눈물이 넘쳐흘렀다. 고마워, 자네. 내 이렇게 똥구덩이 속에서 홀로 죽어갈 걸로만 생각했는데.. 죽더라도 다른 사람과 함께 죽을 수 있다면 덜 무서울 거야..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이제 내가 살아나기만 한다면 내 몸 부서져라 일해서라도 은혜갚음을 할게.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온 세상에 선한 신들이 모두 자네를 축복하기릴... 환자는 빛에 휩싸여 곧 사라졌다. 카엔은 길게한숨을 쉬었다. 환자가 내뿜는 강렬한 감정을 고스란히 다 읽어내고 나니 꼳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큰 소리를 질렀을 때 남는 멍멍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어딘가에 앉아 쉬고 싶었지만 지너분한 실내에 앉을 만한 곳은 없었다. 그리고 이제 겨우 첫 환자 였다. 갈길은 멀었다. 집집마다 흘러나오는 환자의 사념을 찾아 한 명씩 순간이동시키던 카엔은 아무래도 비능률적이라는 생각이 들자 사념을 탐지하기 위해 약간의 마법을 써보았다. 사람들의 정신에 영향을 주지않을 정도의 약한 마력이었다. 그러자 즉시 인근 가옥들 몇군데에서 환자의 사념이 탐지되었다. 그는 가까운 곳부터 차례로 방문해서 환자의 상태를 파악한 수 순간이동시키기를 되풀이 했다. 전염병이 상당 정도 퍼지고 있는 것인지 이곳 남구역의 환자수는 생각보다 많았다. 그러나 다행히 대부분 발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악화된 환자는 없었다. 버려져 홀로 남아 있는 환자도 상당수 있었지만 가족이 옆에서 돌보고 있는 경우도 꽤 돼 었다. 그 경우에는 어디로 옮기는 것인지, 왜 옮기는 것인지 간단하게 설명해주고 렌이 가르쳐준 위생수칙을 남은 가족들에게 알려준 후 환자를 이동시켰다. 이따금씩 보호자를 함께 이동시키기도 했다. 그는 위치확인, 상황설명, 순간이동을 기계적으로 되풀이 했고, 오전이 다 가기 전에 100여 명을 렌에게 이동시킬수 있었다. 잠시 길에서 한숨을 돌리던 그는 다시 어딘가에서 새어나오는 사념을 탐지했다. 지금까지 본 어느 환자들보다도 더 비참하고 끔찍한 사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고 사념을 쫓아갔다. 사념은 어느 골목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쓰레기와 오물로 가득 찬 더러운 골목길이었다. 그곳에서도 사람은 보이지 않아 카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그느 마침내 사태를 파악하고 몸이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사념은 길가의 쓰레기통에서 새어나오고 있었고, 쓰레기통 위에는 돌덩이 하나가 얹혀 있었다. 그는 몸서리치며 마법을써서 묵직한 돌덩이와 차마 손대기 조차 싫은 더러운 쓰레기통 뚜껑을 위로 띄어 올렸다. 몸을 숙여 쓰레기통 안에서 들여다본 순간 카엔은 구역질 하기 시작했다. 온갖 잔인한 짓을 겪기도 하고 자행하기도 했던 그였지만 쓰레기통 안의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볼수 없이 처참했다. 물에 젖어 곤죽이 됀 쓰레기 위에 놓여 있던 것은 사람이었다. 수분을 다 싸버리고 토해내 비쩍 말라비틀어진 환자는 원래 몇 살이었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구정물과 쓰레기로 뒤범법이 된 그 환자는 쓰레기통에서 나가려고 온 힘을 다해 발버둥쳤는지 손톱 밑이 오물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더 참혹한 것은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웅크린 자세로 쓰레기 위에 계속 배설물과 토사물을 쏟아내며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의식을 잃어가는 가운데 계속 사념을 뿜어내고 있었다. 살고 싶어. 아니 죽고 싶어. 누가 나 좀 죽여줘. 아냐, 그래도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아냐, 죽고 싶어. 환자는 카엔이 보는 앞에서 꺽꺽대며 눈자위를 뒤집었다. 카엔은 흠칫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환자를 흔들었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환자의 눈동자는 잠시 제자리로 돌아왔다가 곧 다시 뒤집혔다. 그러다 잠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카엔은 환자의 상태가 시시각각 악화되는 것을 보면서 당황했다. 빨리 렌에게 보내야겠어. 그러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이 상태의 환자를 보내면 렌이 볼 무렵에는 의식불명이 될 거야. 그러면 렌은 환자를 구해야 ? 求윰?마느냐로 갈등하며 괴로워하겠지. 그리고 이 환자를 살릴수 없는 스스로를 책망하겠지. 잠시 고민하던 카엔은 곧 마음을 정했다. 그는 환자에게서등을 돌렸다. 그런데 등 뒤에서 환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목소리를 낸것은 아니지만 환자는 마음속으로 있는 힘껏 카엔을 불렀다. 카엔은 발걸음을 멈췄다. 날 죽여줘. 날 죽여줘. 이렇게 살아 있고 싶지 않아. 제발 죽여줘!! 카엔은 부르르 떨었다. 그 몸을 홱 돌려 다시 쓰레기통 앞에 섰다. 참혹하고 처절한 눈앞에 광경이 그의 마음을 움직엿따. 그는 본 모습을 드러냈다. "소원대로 죽여주겠다. 그대는 서제국 황제의 손에 죽는 것이니 영광으로 알라." 환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당신이 황제라고? 온 세상을 다 부숴버릴 수 있다는 바로 그 황제 라고? 환자는 희미한 눈동자에 억지로 초점을 맞추어 카엔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눈부신 은보랏빛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죽기 직전의 자 특유의 직감으로 그는 카엔의 말을 믿었다. 정말이야? 진짜야? 진짜 황제인 거야? 환자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런데 나 하나 못 구해주는 거야? 날더러 이 지옥을 고스란히 안고 죽으라는 거야? 환자는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생각을 쏟아냈다. 진짠지 아닌진 몰라도 황제라면 내 말 좀 들어봐. 내 남편이 나를 이렇게 쓰렉통에 넣었어. 우리 아이가 이 전염병으로 죽자 그이는 두려움에 떨다 미쳐버렸어. 나까지 이 지경이 되니까 그는 어쩔 줄을 몰랐어. 그이는 나를 길에다 버리려고했어. 내가 벌버둥치니까 그이는 나를 골목으로 끌고 왔어. 그래서 쓰렉통에 처넣고 위에 덜동이를 눌러놓았어. 내가 저 쓰레기통 안에 들어간 뒤로 얼마나 지난 거지? 하루? 아틀? 사흘? 나흘? 나도 모르겠어. 십년 같았는데... 사람 목숨이란게 얼마나 모진건지.. 나는 죽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고 버텼어. 차라리 빨리 죽으면 좋았을걸..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아? 얼마나 미칠 것 같았는지 알아? 이대로 쓰레기통속에서 숨이 끊어진 채로 아무도 내 시신을 거둬주지 않게 될까봐 얼마나 두려웠는지 알아? 왜 이런 불행이 나게에 닥쳐 온거야? 이게 누구 탓이지!? 환자는 몸에 얼마 남지 않은 수분을 눈물로 흘려보냈다. 쓰레기 범법이 되어 시커멓게 된 환자의 얼굴에 두 눈물 자국이 생겼다. "내 탓은 아니다." 카엔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마음에 대답했다. 아냐, 당신 탓이야! 우리 빈민구역 사람들을 이렇게 처박아 놨잖아여! 이 안에서 우리 끼리 죽어버리라고 가둬났잖아!! "그건 이곳 시장이 한 일이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카엔은 힘없이 말했다. 시장이 당신 신하 아냐? 이 자치령에서 뭔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나 해? 당신, 위대하신 황제폐하. 당신은 우리 빈민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사는지 알기나 해? 자식을 잃어버리는 슬픔, 남편에게 버림받는 슬픔이 얼마나 괴로운 건지 알아? 당신이 어떻게든 하려고 했으면 이 지경은 안 됐어 ! 여기 와 있었다면 이곳 사정도 뻔히 다 알았을텐데, 왜 시장한테 빈민구역을 구호하라고 하지 않았지? 왜 그냥 다 죽게 내버려뒀지? 너 때문이야! 이 모든 지옥은 다 너 때문이야! 더 살 맘도 없어! 그래, 날 죽여! 죽여 버리라구 !! 그리고 너도 지옥에 떨어져 !! 환자는 몸을 꺾꺾대다가 갑자기 생각이 끊어졌다. 그리고 사람이 죽기 직전에 내뿜는 비명같은 날카로운 음향이 그의 머릿속에 메아리 쳤다. 잠시 후 정작이 찾아왔아. 카엔은 구정물로 범벅이 됀 화자의 목에 손을 대 보았다. 맥이 뛰지 않았다. 그는 휘청하면서도 환자에게 몇 걸음 물러섰다. 온몸에 식은 땀이 흘렀다. 그저 죽어가는 자의 넋두리 일뿐이야. 나는 잘못한게 없어.. 나 이상으로 제국을 잘 다스릴 사람은 없어... 내 통치 하에서 서제국은 발전했고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어. 그 이상 더 뭘 어쩌란 말이야? 너의 죽음은 내 책임이 아니야! 내가 이 손으로 죽인 자들만 해도 감당하기힘든데, 네 죽음까지 날더러 책임지란 말이야?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에는 자신의 책임도 있다는 것을..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이 제국을 방치해두고 있었다는 것을... 제국은 어느새 늙고 병든 드래곤처럼 되었다는 것을... 그는 수천 명을 순간이동시키는 것보다 더 지쳐, 심장을 움켜 쥐고 벽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렌 덕분에 겨우 다시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수 있게 되었는데, 사람들의 생각에 귀 기울이게 되자마자 그 생각들은 사정없이 그를 찔렀다. 죄책감, 영원한 책감... 카엔은 렌에게 모든 것을 숨긴 채 순진하고 경험 없는 중급 마법사 노릇을 계속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 스스로가 더 이상 비밀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과거를 렌이 알고도 과연 그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멀리서 6파잔(정오)을 알리는 종소리? ?들려왔다. 마이리아 시청에서 치는 종이었다. 넋을 놓고 있던 그는 흠칫하며 몸을 일으켰다. 과거의 죄든 죄책감이든 죽은 자의 저주이든 살릴 사람은 살려야 했다. 환자 한명이라도 더 찾아내서 렌에게 데려다줘야지... 문득 실소가 새어나왔다. 어느새 그도 렌을 닮아가는 모양이었다. 남구역 외곽에서 찾을 만한 환자는 거의 다 찾았냈는지 마력을 약간 더 높여 환자의 생각을 살펴보는데 그들의 생각은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는 중구역 외곽을 찾아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동하기 전 그는 마지막으로 몸을 돌려 쓰레기통을 쳐다보았다. 이미 죽은 그 여자에게 그가 해줄 일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었다. 긴 한숨을 쉬며 카엔은 손에서 불꽃을 일으켰다. 스레기통 전체에 불이 붙어 활활 타기 시작했다. 이름모를 이름이여, 아무도 그대의 시신을 거둬주지 않으리라는 걱정은 이제 더 이상 하지 않아도 좋다. 서제국의 황제가 친히 그대의 시신을 화장해 주는 것이니... 중구역 외각으로 이동한 카엔은 부지런히 움직여 40여 명의 환자를 더 찾아내 이동시켰다. 찾기 쉬운 곳에 있는 환자는 길드원이 데려가고 찾기 어려운 구석에 틀어박힌 환자는 이미 죽어버려서 이동시킬 환자는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환자를 찾아내고 이동시키는 데 열중해서 몇 명을 이동시켰는지조차 잊어버렸다. 한 명이라도 더 구하면 자신의 죄가 조금이라도 덜어질 것만 같았다. 정신없이 환자를 이동시키다보니 머리가 아플정도로 외쳐대는 환자들의 마음속 절규에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가끔 의식을 잃은 환자들을 발견했지만, 그는 그들을 이동시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들을 찾아낸들 어차피 렌에게 그들을 구해줄 여력도 없으니, 의식불명 환자를 순간이동시키는 것은 피차 불필요한 괴로움만 가중시키는 것일 뿐이었다. 카엔은 이른 아침 길드회관을 떠나기 전 길드장 보프의 마음을 읽었다. 그때 보프는 카엔과 마찬가지로 의식 잃은 환자는 구호하지 말라고 길드원에게 지시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당연하고 없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카엔은 정신을 잃은 환자를 버려두고 떠나는 일이 어느새 점점 괴로워졌다.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방치하는 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 뭔가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렌 말고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치유마법사가 와도 의식불명이 된 환자들을 고칠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는 계속 고민했다. 사실 그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얼마 전까지의 자기자신이 보이던 행태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하루종일 렌의 생각만 하고 렌의 마음만 읽다보니 점점 그녀에게 동화되어 가는것 같았다. 그의 마법 실력을 감안하면 환자 수천명 옮기는 것도 아무일이 아니었지만, 마음의 괴로움이 몸에 영향을 주어서 그런지 그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피곤함을 느꼈다. 그래도 렌의 부탁을 생각하면 여기서 멈출수 없었다. 옮길 만큼 환자를 옮긴 후 카은엔 마지막으로 정신탐지마법을 강하게 펼쳤다. 중구역 외곽에 더 옮길 환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 북구역 외곽으로 이동할 생각 이었다. 꺼질 듯 말듯한 희미한 의식하나를 탐지한 카엔은 조심스럽게 그 의식의 소재를 탐지해 나갔다. 전체적인 기색으로 보아서는 어린 아이 같았다. 그런데 그 사념에 다가가면 갈수록 카엔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번의 사념은 지금까지 그가 탐지했던 환자들의 것과는 너무 달랐다. 분명히 환자의 사념이긴 한데, 환자라면 당연히 내뿜는 처절한 독기와 원망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고결하고 성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카엔은 의아해하면서 사념으 좇아 서너 번 미세순간이동을 했다. 사념이 퍼져나오는 곳은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이었다. 그는 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의 광경은 그날 내내 거듭해 보았던 것과 똑같이 참혹했다. 악취가 코를 찌르는 실내에는 시체 두구가 뉘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 조금 떨어진 곳에는 넝마뭉치 비슷한 것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뭔가 달랐다. 시체 두 구는 푸른 죽음 병 환자의 시체답지 않게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보통은 배설물과 토사물이 지저분하게 묻어 있기 마련인데 그 시체 두구는 마치 누가 염을 해준듯 단정했다. 사념은 시체들에서 조금 떨어진 그 넝마뭉치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카엔은 조심스럽게 넝마를 걷어보았다. 허약하고 수척해 보이는 여자아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대략 열 상 정도 되어 보였다. 아이에게서는 역시 배설물의 악취가 풍겨 나왔다. "아이야, 어찌 된 거지"? 카엔은 부드럽게 물었다. "엄마..... 아빠..... 흑흑...... 살리려고............ 쿨룩쿨룩.... 하지만......." 아이는 힘없이 울먹이면서 간간히 기침을 하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카엔은 아이의 말과 마음을 종합하여 곧사정을 파악했다. 아이는 어릴 때부터 폐가 좋지 않았 다. 주위사람들 모두 다 아이가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들 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아이의 부모는 재산을 거의 탕진했다. 거액을 써가며 치유마법사에게 여러 번 데려가기도 하고 좋다는 약재는 다 사 먹었다. 주위에서 아무리 포기하고라고 만류해도 듣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그들은 중류구역에서 빈민구역으로 쫓겨나다시피 이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도 아이는 차도가 없었다. 아이는 병마의 고통에 시달리면서 일찍 철이 들었다. 그리고 자기 때문에 고생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파도 내색하지 않고 고생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파도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내가 빨리 죽으면 부모님께서 덜 고생하실까? 어떻게 하면 내가 죽어도 가슴아파 하지 않으실까? 아이는 매일 그런 생각에 몰두 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죽음은 아이에게 친구가 되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죽음이 친구가 되고나니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더 기쁘고 값졌다. 매일매일 세상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사람들은 빛났고, 매 순간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다. 아이는 그런 기분을 부모님께도 알려드리려 애썼고, 어느순간부터 부모님도 아이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 전염병이 닥쳐왔다. 아이의 부모중 아버지가 먼저 병에 걸렸다. 나흘 전의 일이었다. 처음 아버지가 설사를 시작했을때에는 가족 중 누구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룻밤을 넘기고 푸른죽음에 관한 소문이 들려오자 그제야 온 가족은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자신을 놔두고 빨리 도망치라고 아내와 딸에게 애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평생 함게 살았으니 죽을 때에도 함께 죽겠다, 내가 떠나면 누가 당신을 돌보겠냐면서 어머니는 아이만을 밖으로 쫓아내고 자신은 남았다. 어머니는 집안의 금붙이를 꽁꽁 싸서 아이에게 주고 빈민구역이 폐쇄되기 전에 어서 빨리 도망가라고 했다. 하지만 아이는 아픈 부모를 놔두고 떠날수 없었다. 아이는 길에서 자고 근처에 맴돌면서 매일 창문으로 부모님의 옹태를 살폈다. 어머니까지 병에 걸린 걸 알게 되자 아이는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부모 모두 더 이상 기력이 없게 돼었을 때 아이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를 본 부모는 경악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다시 슬퍼했다. 셋은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부모는 더 이상 아이더러 도망가라 하지 않았고, 그때부터 아이는 부모 곁에서 몸을 닦아주고 배설물을 치우며 필사적으로 간호했다. 그러다가 보모님은 어제 저녁 무렵 거의 같은 시작에 죽었다. 평생 사랑하던 두 사람이 한날한시에 함께 죽은 것이다. 아이는 비슷한 무렵부터 설사를 시작했다. 아이는 설사를 하면서도 남은 힘을 끌어모아 부모의 시체를 깨끗이 닦고 주위를 치웠다. 그리고 새 옷을 꺼내 부모에게 입혔다. 기력이 딸리는 상태에서 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이었지만 어쨋든 겨우 해냈다. 아이는 마지막으로 전에 봤던 대로 겨울 여신의 사제들이 하는 것처럼 부모의 이마와 입술에 맑은 물을 한 방울씩 뿌렸다. 그리고 안식의 기도를 읊었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외워두었던 기도였다. 거기까지 마치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이제 부모님께서는 무사히 안식의 들판으로 가서 새로운 생명을 받으실것이다. 여신께서 정말 계시다면 사제가 아닌 보통 아이가 하는 기도도 들어주실 것이다. 그러고 나서 아이는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몸에서 배설물이 계속 빠져나가고 정신이 아득해지고 팔다리가 떨리면서 죽음이 점점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들어온 것이다. 아이의 마음은 슬픔에 차 있었지만 맑고 고요했다. 카엔은 감동했다. "넌 죽음이 두렵지 않아?" 아이는 침을 섞어가며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아이의 맑은 마음과 합쳐지자 카엔의 귀에는 아이의 거칠고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음악처럼 들렸다. "두렵지 않아요. 저는 그동안 정말로 행복했어요.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부모님께서 제가 죽는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슬퍼하실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조금만 기다리면 저는 안식의 들판에서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왜 고통은 수많은 인간들을 비참하고 독하게 만드는 한편으로 때로는 이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영혼을 빚어내는 것일까? 그가 지금까지 보아온 셀 수없는 영호들 중 가장 아름다운 연혼은 많은 고통을 받고 그것을 이겨낸 영혼이었다. 보석처럼 빛나는 아이의 영혼을 보니 지저분하고 수척한 아이의 모습에 렌의 모습이 겹쳐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이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생각이 희미해지자 카엔은 다급해졌다. "얘야, 정신차려!" 아이는 이미 의식을 잃어 카엔이 아무리 흔들어도 꼼짝하지 않았다. 카엔은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이를 안은 채 벽돌공장 길드회관으로 순간이동했다. 새벽녘부터 환자는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렌이 예상했던 대로 3차 감염이 진행되어서 인지 환자 수는 폭발적이었다. 길드원이 옮겨놓은 환자, 카엔이 순간이동시킨 환자, 소문을 듣고 가족이 직접 데려온 환자들이 넘쳐 흘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실려오는 환자들의 대부분이 초기 환자 라는 것이었다. 길드원들과 카엔이 새로 발생한 환자들을 신속하게 옮겨온 덕분에 렌이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환자는 없었다. 그리고 어제 들어온 환자들이 놀랍게 차도를 보이는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렌의 말이라면 덮어놓고 따르게 되어 사람들을 지휘하는 것인 한 결 수월해졌다. 렌이 치료법을 안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환자간호를 자원했다. 좁은 공간에서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왔다갔다 하면 오히려 감염의 우려가 높아지므로 상당수는 돌려보내야 했지만, 다소라도 경험이 있는 사람들로 봉사자를 엄선한 덕분에 일은 한결 효율적으로 돌아갔다. 렌은 전날보다 한결 많아진 일손들을 지휘해가며 숨 쉴 틈 없이 일했다. 길드회관이나 향락의 집 모두 이제 수용인원이 넘쳐 흘러 환자들을 아무리 빽빽하게 배치해도 어떻게 둘 곳이 없었다. 비라도 그치면 바깥에 차양을 치고 수용하겠지만 비는 아직도 부슬부슬 내렸다. 하는 수 없이 길드장 보프는 길드회관과 맟 붙어 있는 민가 몇채를 임으로 접수하라고 지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길드회관에 환자들이 몰려드는 걸 보고서 민가의 거주자들이 이미 도망갔기 때문에 접수하는 데 저항은 없었다. 환자가 도착하면 렌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은 신속하게 환자를 씻기고-대부분 환자들은 배설물이 잔뜩 묻은 상태였다- 환자를 적당한 방으로 옮겼다. 각 방을 담당하는 겨울 여신의 사제들과 밀라는 그 즉시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고 환자나 보호자에게 발병 시키, 설사 횟수와 정도를 물어 종이에 적은 후 환자 몸에 붙였다. 그러고 나면 아낙네들이 경구수액을 들고 와 환자에게 먹였다. 길드원들에 의해 배설물 양동이는 주기적으로 비워지고, 지하 부엌에서는 계속 물이 끓고 경구수액이 만들어졌다. 어제부터 치료받아 크게 차도를 보이는 환자들은 이제 수액을 끊고 가볍게 소금으로 간을 한 미음을 받아먹었다. 일단 체액균형이 맞은 이상, 부드러운 미음으로 장을 달래는 것이 오히려 설사에 더 좋았다. 사람들은 약 대신 음식을 먹어도 된다는 것 자체에 기뻐하며 벌써 다 나은 것처럼 즐거워했다. 길드회관과 향락의 집에서 식사해야 하는 사람들 수가 늘자 그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만도 큰일이었다. 위생을 유지하면서 수맣은 사람을 한꺼번에 먹일 방법을 연구한 렌은 궁리 끝에 죽을 끓이게 했다. 봉사자들은 차례로 그곳에 가 손을 씻은 후 끓인 물로 소독한 그릇에 죽으 받아 먹었다. 렌은 구토하는 환자나 의식을 잃어가는 환자가 있는지 돌아다니며 계속 체크하고 침과 정명기로 그들의 기운을 북돋워주었다. 한동안 길드회관의 환자를 돌본 후에는 마법진을 이용해 향락의 집으로 가서 다시 그쪽의 환자들을 보고, 거기 일이 일단락 되면 다시 길드회관으로 돌아와 이족의 환자를 살폈다. 길드회관 1층에서 정신없이 환자를 치료하던 렌은 누군가 자기 어깨를 짚자 흠칫하여 돌아보았다. 길드장 보프였다. "치료사 아가씨, 식사는 했소?" "새벽에 죽을 조금 먹었어요/" 렌은 힘없이 대답했다. "벌써 7파잔(오후 두 시)인대. 그럼 여태 점심도 안 먹었단 말이오?" "환자들이 자꾸 밀려들어와서요." 렌은 힘없이 웃었다. "힘이 있어야 치료도 하는 거 아니겠소? 어서가 서 먹고 오시오." 보프는 엄하지만 따뜻하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렌은 뭉클한 기분을 느끼며 밖으로 나갔다. 부슬비는 이제 거의그쳐 안개비로 바뀌었고 하늘도 많이 밝아졌다. 세면대가 설치된 곳과 죽을 끓이고 배급하는 곳이 마당 양쪽에 차양으로 덮여 있고 그 사이를 수 많은 사람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봉사자들도 많았지만 잘 모르는 얼굴도 많았다. 렌은 사람들을 헤치고 식사 전 손을 씻기 위해 세면대가 설치된 차양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누군가가 렌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따라 여기저기에서 몇몇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다. 렌은 당황했다. "왜들 이러세요?" "레이님, 제 아이를 축복해주세요!" 렌은 피곤에 절어 뿌옇게 된 눈을 가늘게 뜨며 자기 앞에 무릎 꿇은 그 사람을 자세히 내려다보았다. 아이를 안고 있는 아낙네였다. 그녀는 렌의 발치에 곷을 내려놓은 후, 떨리는 손으로 품에 안은 아이를 쓰다듬으며 간절한 눈빛으로 렌을 올려다 보았다. "축복이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렌은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아낙네는 눈에 눈물을 가득 잠고 대답했다. "레이님 께서는 겨울 여신의 축복을 받으셔서 모든 사악한 질병을 물리치신다고 들었어요. 모두들 레이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푸른 죽음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들 해요. 이 버? 껸事?빈민구역에 신의 축복이 내려졌다고 말이에요. 제 큰아이는 이미 죽고 지금 제게는 이 아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러니 제발 제 아이를 축복해 주세요." 아낙네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렌 주위에 모여 있던 다른 사람들도 애타게 외치며 렌의 발치에 꽃을 던졌다. "제발 저희들에게 축복을!" "푸른 죽음을 쫓아주세요!" "손길을 내려주십시오!" "축복을!" "축복, 여신의 축복을!" 렌은 자신이 빈민구역에 나타난 지 겨우 하룻밤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소문이 퍼졌다는 사실에 놀랐다. "저는 축복을 내려주는 신의 사자가 아니라, 그냥 지식과 치료술로 사람을 치료하는 치료사일 뿐이에요." 렌은 타이르듯 말했다. 그러나 아낙네는 애절하게 다시 간청했다. "신의 축복이 아니라면 푸른 죽음을 어떻게 고치신단 말이세요? 치유마법사들도 못 고친 푸른 죽음을 말이에요! 레이님께서 신의 축복을 행하실 수 있다는 걸 온 빈민구역이 다 알아요! 레이님께서 정체를 감추신 여신의 현신이라는 사람마저 있는걸요! 그러니 제발 제 아이를 축복해주세요!" 사실 목숨에 관련된 소문은 가장 빨리 퍼지기 마련이었다. 특히 길드원들이 빈민구역 곳곳에 뛰어다니며 물을 끓여먹고 손을 깨끗이 씻으라는 지시를 전한 덕분에 소문의 전파에는 한층 가속도가 붙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는 주민들의 물음에 길드원들은 푸른 죽음을 고칠 수 있는 기적의 소녀가 나타났다고 전했다. 피할 방도 없이 죽음에 직면했던 이들에게 살 실이 열렸다는 소식은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어리석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소식을 자기 방식대로 이해했다. 푸른죽음을 고치는 것은 기적이고 기적은 신에게서 오는 것이니 사람들을 고쳐준다는 소녀는 바로 신의 사자일 것이다. 그 소녀가 축복해주면 병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집, 두 집 건너가면서 소문은 점점 눈덩이 처럼 불어났고 마침내 렌이 겨울 여신 케이아의 현신이라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집안에 틀어박혀 벌벌 떨던 사람들은 용기를 내어 가족들을 끌고 길드회관으로 왔다. 오로지 렌의 축복 하나만을 바라면서 말이다. 렌은 몸을 떨었다. 가엾은 사람들... 믿을 거라고는 오직 기적하나밖에 없었던 사람들... 지금 과학적인 치료방법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저들은 그저 축복을 구하는구나.... 내가 저들을 축복할 자격이 있는 건가? 아무 권리도 없이 생명을 저울질하는 내가? 카엔님은 오늘 내내 의식불명 환자는 한 명도 이동시키지 않았어. 그리고 보프님도 길드원들에게 비슷한 명령을 내린 것 같아. 어제 내가 그들을 치료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나는 지금 의식불명 환자가 오지 않는 데 안도하고 있어. 안 보이는 곳에서 그들은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저 눈앞에 그들이 보이지 않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어. 내게는 저들에게 축복을 줄 자격이 없어.... 렌은 말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러분, 이 소녀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마십시오." 갑자기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렌은 눈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겨울 여신의 사제 비안이었다. "어떻게 여기 오셨어요? 향락의 집에 계시지 않았나요?" 그녀를 보자 렌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안은 부드럽게 렌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비누가 떨어져서 더 얻을 수 있나 하고 와봤는데, 마침 제때에 온것 같네요." 비안은 다시 렌의 귀에 속삭였다. "치료사 아가씨, 할수 있는 만큼만을 하면 되는 거에요. 모든걸 혼자서 하려고 하지 말아요. 모든 슬픔과 불행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 말아요." 비안은 사제복 후드를 벗고 사람들 앞에 섰다. "여신의 어리석고 가여운 아이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절망의 벼랑 끝에서 구원을 찾고 있습니다. 왜 이런 고통이 그대들에게 내려져야 하는지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들이 이 소녀에게서 신의 권능과 희망을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요." 비안의 말에 사람들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겨울 여신의 사제들은 사실 평소에 그다지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죽음과 소멸을 상징하는 겨울 여신은 누군가의 임종때에나 찾게 되는 여신이었고, 겨울 여신의 사제들은 사람이 죽은 후 시체를 축복하고 장례를 맡는 것이 그 임무의 전부였다. 검은 옷을 입은 겨율 여신의 사제들이 지나가면 사람들은 그들이 불은을 몰고 다니는 것처럼 길을 비켰다. 그러나 누군가가 죽게 돼는 경우 이야기는 달랐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그녀들이 곁에 없으면 불안해했고, 유족들은 망자를 위해 그녀들이 안식의 기도를 올려주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했다. 그리고 이번처럼 전염병이나 대량의 사망자가 발생할 때 그녀들의 존재는 빛을 발했다.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겨울 여신의 사제들에게 의지했다. 위기가 지나고 나면 그녀들에게서 불행이 옮을까봐 두렵다는 듯 다시 외면하곤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지금 죽음과 질병이 넘쳐? 躍4?이곳에서 헌신하고 있는 비안의 말은 천금의 무게로 다가왔다. 모두가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여신들께서는 기적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여신들께서는 그저 천지 만물과 이세상의 모든생명들이 순리에 따라 흐르는지 지켜보시고 흐트러진 흐름을 바로잡으실 뿐입니다. 이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워 보여도, 이해할수 없는 고통과 슬픔이 그대를 찾아온 것 같아도, 그 모든 일에는 의미가 있고, 순리가 있습니다." 비안은 렌을 가리켰다. "저는 여신께서 그대들을 가엽이 여기시어 이 소녀를 이곳에 보내주신 거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여신의 권능은 기적이나 축복으로 시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소녀는 천지만물의 순리를 조금이나마 깨우쳐 그것을 그대들에게 베풀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 소녀가 손을 댄다고 해서 그대들이 낫는 것도 아니고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해서 여신의 축복이 그대들에게 임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그대들이 해야 할 일은 이소녀에게서 축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소녀가 알고 있는 순리를 가르쳐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안은 렌 앞에 맨 처음 다가온 아낙네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내가 할 수 있는 축복의 기도는 오로지 망자를 위한 것이니, 그대나 그대의 아기를 위해 기도해줄 수는 없겠군요. 그러나 내 그대를 위해 비밀을 하나 가르쳐주겠습니다. 가장 힘들 때야 말로 가장 침착하고 냉정해야 합니다. 모든 두려움과 광기와 어리석음을 버리고 맑은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세요. 그러면 구원의 길이 보일 것입니다." 아낙네는 멍해져서 물었다. "그.. 그럼 정말 저 아가씨는 신의 사자가 아닌 건가요?" 비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낙네는 반신반의해 되물었다. "그런데도 저 아가씨는 푸른 죽음을 고칠 수 는 있다고요?" "그래요." 비안은 엄격하고 메마른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비안의 말에 흥분을 가라앉힌 아낙네는 눈물을 닦은 후 렌에게 물었다. 그녀의 두 눈에는 자식을 살리려는 결연함이 빛났다. "치료사 아가씨, 제가 우리 아기를 지키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거죠? 말씀만 해주세요. 뭐든지 다 하겠어요. 렌은 형언할 수 없는 감사를 담아 비안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어깨의 무거움이 덜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약해, 내가 할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고 있고, 지금까지 내가한 일도 모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못 했을 일들이야. 카엔님, 보프님, 비아님 그리고 수많은 길드 분들... 그 모든 분들의 힘으로 지금 나는 사람을 고치고 있는 거야. 렌은 피곤함이 가시고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제가 차근차근 말씀드릴 테니 잘 들으셔야 해요." 렌은 아낙네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레은 다시 사람들에게 잘 들리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 여러분 중에서 제 소문을 듣고 축복을 받으려고 찾아오신 분은 오른손을 들어주세요." 얼추 백 명은 넘는 것 같았다. "제가 푸른 죽음에 걸리지 않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장 간단한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손을 깨끗이 씻으세요. 그리고 음식물과 물은 꼭 끓여 드세요. 그것만 제대로 하시면 푸른죽음에 걸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너무 간단한 방법에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걸 보고 렌은 덧붙였다. "만약 여러분이나 가족이 설사를 하기 시작하면 무조건 여기나 향락의 집으로 바로 오세요. 그러면 여러분을 낫게 할 약을 드리겠습니다. 설사가 시작되고 나서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오기만 하시면 절대 죽지 않습니다." 렌의 말이 끝나자 길드원과 봉사자들은 모두 렌의 말에 맞장구 쳤다. " 정말 그렇다니깐요! 내 눈으로 봤습니다. 그 신기한 물을 먹이니깐 1파잔 만에 다 죽어가던 사람이 확 원래대로 돌아오더라구요." "나는 어제부터 이 환자투성이 길드회관에서 일하고 있지만, 치료사 아가씨가 시키는 대로 손 잘 씻고 끓인 음식만 먹었더니 아직까지도 멀쩡하답니다. 오히려 집에서 문 걸어 잠그고 바들바들 떠는 것보다 더 안심이 된다니까요." 길드원들의 이야기에 사람들의 얼굴은 희망으로 빛났다. "사제님, 저들을 위해 축복의 기도를 해주시겠어요? 사제님께서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밖에 모른다고 하셨지만, 제가 지금까지 본 사제들 중에서 비안 사제님이야말로 가장 생명에 가까우신 분입니다. 사제님께서 섬기시는 심이 겨울 여신이자 죽음의 여신이라 하더라도 사제님의 축복이야말로 저들에게 진정한 힘이 될겁니다." 렌이 간곡히 부탁하자 비안 사제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애타는 사람들의 모습을 둘러본 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곳에서 계신 모든 분들을 위해 경전의 한 구절을 낭송하도록 하지요." 비안 사제는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비에 젖어 질척한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사람들 모두 그녀를 따라 무릎을 꿇 었다. 렌도 마찬가지 였다. 온 세상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듯이 부족한 인간들에게도 신은 깃들어 있는 것 연약하고 덧없는 생명을 신들께서는 가엾이 여기시니 고통과 질병 속에 신음하는 인간들이여 절망하지 말고 구원을 기다리라 언젠가 신들의 품으로 돌아갈 그날까지 잠시의 평온을 허락받기를 기도하라 고통 속에 기쁨이, 죽음 속에 생명이 있음을 깨달으라 길을 잃고 헤매는 자들이여 어둠 속에 등불을 찾듯 시을 찾으라 신들께서 그대들 앞에 빛을 비추시어 죽음의 황야에서 생명 충만한 옥토로 인도하시리라. 비안 사제는 곡조를 붙여 나직하게 기도를 읊었다. 이슬람의 이맘이 코란을 읊는 것처럼, 인도의 수행자가 라마야나를 읊는 것처럼, 비안의 목소리는 애조를 띠고 출렁이며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저번 안식의 기도 때처럼 비안의 기도를 따라 읊었다. 이곳에 온 애타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청한 것이었지만 정성어린 비안의 기도는 렌의 가슴속 깊이 파고들었다. 사실 렌은 무신론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다보니 혼란과 슬픔은 차분히 가라앉고 마음이 씻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렌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 중 하나가 진심을 담은 기도라는 걸 새삼 느꼈다. 누군가가 렌을 위해 기대해 준것도 참으로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기도가 끝났자 사람들은 하나 둘씩 일어났다. 모두 개운하고 맑아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백성들이 어리석다고 하나 사실 그들은 어리석지 않았다. 무엇이 진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그들은 결국 꽤뚫어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지금 비인의 기도에 감화되고 위안받은 것이다. 그들은 길드 회관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렌을 한 번씩 더 쳐다보았다. 렌은 그들이 언제라도 오면 치료해 주겠다는 듯이 꼿꼿이 서서 미소 지었다. 사람들은 렌에게 마주 웃어주었다. 그때 마당 한쪽이 환하게 밝아지며 카엔이 나타났다. 마법사가 순간이동하는 것을 처음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길을 멈추고 감탄하면서 카엔 쪽을 쳐다보았지만, 카엔은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렌에게 달려왔다. " 이 아이를 살려줘요 ! " 카엔은 다급한 목소리로 렌에게 애원했다. 렌은 깜짝 놀랐으나 곧 침착하게 지시했다. "아이를 저쪽으로요!" 렌은 아이를 마당 한쪽의 차양 아래로 옮기게 했다. 누군가가 얇은 깔개 하나를 서둘러 가져와 아이의 몸 아래에 받쳤다. 아이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렌은 정명기를 일으켜 아이의 맥을 짚었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콜레라도 콜레라지만 아이는 원래부터 몸이, 특히 폐가 너무 약했다. 그래서 수분을 약간 잃자 몸이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급속도로 쇠약해 진것이다. 카엔은 옆에서 렌이 진단하는 것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살릴수 있습니까?" 카엔의 질문에 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엔은 렌의 생각을 읽었다. 힘들긴 하지만 살릴 수 있어. 그래 , 살릴 수 있어. 하지만 오늘치 정명기를 전부 쏟아 부어야만 할 거야. 그러고 나면 다른 환자들은 어떻게 하지? 이 아이 하나를 살리려고 그들을 다 죽일 수는 없잖아? 지금까지 다른 의식불명 환자를 다 죽게 내버려둔 셈인데 이 아이만 구할 수는 없잖아? 아아, 하지만 카엔님이 이렇게 다른사람을 위해 뭔가를 부탁하는 건 처음인데, 어떻하지? 카엔은 애가 탔다. "제발, 제발 이 아이를 살려줘요! 정말로 착한 아이에요! 이렇게 죽게 내벼려두긴 아까운 아이에요! 제발!!"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렌과 카엔과 아이를 지켜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렌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안돼요. 이 아이 하나만 구할 수는 없어요." 렌은 눈물을 흘리며 아아의 손몰을 놓고 한 발짝 물러섰다. 카엔은 아이를 덥석 안아 올렸다.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이 아이를 구해줘요!" 온 세상을 파괴할 수 있는 마력을 지니고도 이 작은 아이의 목숨 하나를 구할 수 없단 말인가. 카엔은 자괴감과 비통함에 몸서리쳤다. 다시한 번 렌에게 부탁하려는 순간 카엔의 품속에 안겨 있던 아이의 목은 힘없이 옆으로 꺾였다. 카엔은 깜짝 놀라서 아이를 서둘러 땅에 내려 놓았다. 렌은 정신없이 아이에게 달려가 다시 맥을 짚었다. 카엔 또안 아이의 사념이 완전히 끊긴 것을 확인하고 망연자실했다. "죽은 겁니까?" 카엔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심장이 멎었어요." 렌은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엔의 눈에서 애통의 눈물이 흘렸다. 주위 사람들은 안타까운 탄식을 발했다. "하지만 아직 살릴 수 있어요." 렌은 결연하게 말했다. 렌의 두 눈에는 의지가 활활 불타올랐다. "살릴 수 있다고요?!" 렌은 경악해서 물었으니 렌은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황급하게 되물었다. "혹시 라이트닝 볼트나 전격마법, 뇌격마법 같은 거 하실줄 아세요?" "물론입니다." "어서 빨리, 아주 약하게 제 손에 쏴보세요." 카엔? ?의아해하며 초저강도로 렌의 손 위에 뇌격마법을 시전했다. 이제 렌은 완전히 냉정함을 되찾았다. "거기 있는 분 아무나 빨리 물 좀 떠다주세요!" 렌은 서둘러 아이의 옷자락을 풀어헤치고 가슴을 드러냈다. 물이 오자 렌은 황급히 카엔의 두손에 물을 발랐다. "아까 정도의 강도로 두손을 아이 심장 부근 여기, 여기에 대고 뇌격마법을 쏘세요!" 카엔은 시키는 대로 아이의 심장에 두손을 대고 뇌격마법을 쏘았다. 아이의 몸이 펄쩍 뛰었다. 렌은 카엔이 뇌격마법을쏘는 순간 그 즉시 맥을 짚었다. 아직도 맥이 뛰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아주 조금 더 세게요!" 카엔은 조금 전 보다 약간 센 정도로 아이의 심장에 뇌격 마법을 쏘았다. 아이의 몸이 더 크게 펄쩍 뛰었다.렌은 다시 맥을 짚었다. 아직도 아니었다. "조금만 더 세게. 한번 더요! 지나치게 세게하면 절대 안돼요! 이렇게!" 렌은 애타는 마음에 카엔의 양손을 붙잡아 아이의 심장에 대었다. 카엔은 이를 악물고 다시 한 번 아이의 심장에 뇌격마법을 쏘았다. 다시 아이의 몸이 펄쩍 뛰었다. 카엔의 손에서 뇌격마법이 방출되는 순간 렌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손에서 단순한 전류가 아닌 이상한 기운이 전해져왔다. 정명기와는 다른 이질적인 느낌이 손을 타고 렌의 핏줄을 따라 심장까지 갔다가 순식간에 다시 나갔다. 잠시 멍해져 있던 렌은 곧 정신을 차리고 아이의 맥을 짚었다. 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고개를 끄덕인 레은 곧 아이의 심장에 두 손을 대고 한없이 정명기를 쏟아 부었다. 카엔은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는 데 경악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은 영문을 모른 체 이미 죽어버린 아이에게 치료사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심장을 다시 뛰게 한다고 해서 꼭 살아나는 건 아니었다. 이미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탈수현상이 오래지속되고 몸이 망가져버렸다면 심장박동을 되살리고 정명기를 불어넣는다 해도 밑 빠진 독에 물붓기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 아이는 다른 환자들과 달리 몸의 수분이 그다지 많이 잃지 않았다. 아이는 그 전에 폐병으로 이미 쇠약해졌던 탓에 아직 신체의 수분과 전해질 균형이 완전히 깨지기 전의 상태에서 기력을 잃고 심장이 먼저 멎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심장이 다시 뛰게 된 이상 기운을 보충해주고 그 다음 수분, 당분과 전해질을 조금만 더 섭취시키면 회복할 가능성이 컷다. 물론 폐병은 나중에 찬찬히 치료해야겠지만 말이다. 정명기는 끝도 없이 아이의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아이가 워낙 쇠약해져 있던 터라 정명기가 상당 정도 들어갔는데도 아이는 눈을 뜨지 않았다. 이미 오정 중에 정명기를 많이 썼기 때문에 그날 새벽에 축기해 놓은 정명기는 바닥나기 시작했다. 렌은 이를 악물고 최수의 한줌까지 정명기를 짜내어 아이에게 불어넣었다. 그순간, 아이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눈을 번쩍 떴다. 카엔은 물론 주위를 겹겹이 둘러싼 사람들은 모두 탄성을 올렸다. "기적이야!" "죽은 사람이 살아났어!!" "이럴 수가 !"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은 아랑곳 하지않은 체 렌은 반가움에 가득 차 아이에게 외쳐 물었다. "정신이 드니?!" 아이는 눈을 두세번 깜박거리다 렌에게 힘없이 물었다. "언닌 누구?" "난 치료사야! 넌 이제 살았어! 여기 이 오빠 기억나? 널 이리로 데려왔는데!" 렌은 카엔을 가리켰다. 카엔은 렌 옆에서 하염없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응, 기억나요." 아이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렌은 다정하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이샤에요." "그래, 이샤. 참 좋은 이름이구나." 랜은 아이에게 마주 웃어주었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그제야 몰려왔다. 렌은 아직도 눈물로 범벅이 된 채자신의옆에 서 있는 카엔의 손을 꼭 쥐었다. 카엔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랜의 손을 맞잡앗따. 카엔 또한 지금 감격에 떨고 있었다. 조금 전 이샤의 심장에 뇌곡을 쏘는, 세 번의 애타는 노력 끝에 마침내 그의 손바닥으로 파닥이는 심장박동이 전해졌을 때의 그 감동이란! 광막한 죽음의 바다에서 눈부신 생명이 튀어 올랐다. 그의 온몸에 생명의 힘이 넘쳐흘렀다. 그는 왜 렌이 그토록 애써서 사람들을 살리려 하는 것인지 마침내 이해했다. 그리고 회한이 몰려왔다. 그의 눈에 다시 눈물이 넘쳤다. 복잡한 눈물이이었다. 카엔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짓던 렌은 서서히 기운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 이 아이에게 수액을 주세요!" 렌은 황급히 지시하고 서둘러 침통에서 침을 하나 꺼냇다. 그리고 정수리 부근에 있는 백회혈에 찔러 넣었다. 기절하는 걸 일시적으로 막기 위해서였다. 지금 이대로 기절하면 꼬박하루는 지나야 깨어날 거인데 그러면 그 사이에 오는 환자들은 더 이상 볼수 없을 거이다. 전염병 발생이 절정에 이른 지금, 하루의 공백이란 엄청난 것이었다. 렌은 희미해지는 의식을 추슬렀다. 오늘내일 발병이 예상되는 수많은 환자들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미 한번 의식 불명 환자를 살렷으니 앞으로 이곳에는 환자가족은의식불명 환자들을 끌고 올것이다. 그들을 거절할 명분은 더이상 없었다. 앞사람은 치료해주고 뒷사람은 거절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무리 힘이 모자라서 그렇다고 설명해도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들은 절대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랜 스스로도 이제 그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의식불명이 된 수많은 사람들을 깨우고 회복시키는 것은 정명기 만으로는 불가능 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저번에 백혈병 걸린 아이를 고치려 할 때는 실패했지만, 다시한번 생명력을 써야 했다. 되든 안 되든 한 번 시도는 해봐야 했다. 생명력을 반쯤 포기한다면 그럭저럭충분할 것이다. 렌은 눈을 감고 '활인치상치병대법'의 마지막 구절을 되뇌며 실날같은 남은 정명기를 모으기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카엔의 외침이 유리창 너머로 들리는 것처럼 아득해져 갔다. 짜내고 짜내 모은 미약한 정명기는 렌의 심장 주위에 넘실거렸다. 혹시 이번에도 저번처럼 실패하면 어쩌지? 렌은 두려움을 애써 누르며 마지막으로 크게호흡했다. 정명기가 막 심장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카엔이 다급하게 렌을 불렀다. "잠깐만! 나를 좀 봐요!!" 렌은 눈을 떠 카엔을 쳐다보았다. 그는 슬픈 얼굴을 하고 간청했다. "지금 뭘 하려는 건지 알아요. 하지만 그만둬요. 날 위해서.." 그의 눈동자 속에서 희미한 은보랏빛이 일렁였다. 마력적이고 위험한 빛이었다. 렌은 멍하니 그 빛을 바라보았다. 렌의 머릿속에 차례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내가 생명력을 포기하면 결국 나는 생명력을 소진하고 그만을 남겨둔채 일찍 죽어버리게 될 거야. 그는 너무 슬퍼할거야... 그리고 나도 일찍 죽고싶지 않아.... 할 일은 너무 많고 시간은 너무 모자라..... 내가 오래 살아 있으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거야.... 아무도 내게 생명력을 포기하라고 하지 않아... 어차피 내가 모든 사람을 다 구할 수는 없어.. 그리고 죽는게 무서워....... 렌은 결국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포기했다. 5 장 흑룡의 추적 데이그랜은 푸른 바람의 엘프덤의 전 수장이었던 티우샤 옆에서 함께 걸으며 엘프의 낙원으로 향했다. 티우샤는 이미 열흘 전 에돈에게 엘프점의 수장 지위를 인계하고 데이그랜과 함께 라빌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예상대로 늑장을 부리는지 그가 엘프의 낙원으로 떠날 때가 다 되어서까지 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라빌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티우사는 아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행스럽기도 했다. 라빌은 묘하게 인간적인 데가 있어서 다른 엘프처럼 그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를 할아버지처럼 따랐던 라빌은 아마도 울고 매달리며 그를 난처하게 할 것이 분명했다. 조용하고 평온한 죽음의 길에 울부짖는 그녀의 존재는 부담스럽기 그지 없었다. 엘프가 엘프답지 못하다는 건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다는 것만큼이나 서글픈 일이었다. 엘프의 낙원은 푸른 바람의 엘프덤에서 엘프의 보통 걸음으로 약 닷새 정도 걸리는 계곡에 있었다. 순간이동을 하면 순식간에 도착하겠지만 붕괴하는 엘프들은 반드시 그곳까지 한걸음 한걸음씩 걸어가야 했다. 티우사 또한 그 관례에 따라 지금 붕괴하는 몸을 이끌고 걸음을 떼었다. 그렇게 걷는 동안 그의 골격에 붙어 있던 피부는 조금씩 바스러져 길에 뿌려졌다. 엘프의 낙원까지 가는 길가에는 그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엘프들이 서 있다가 그가 좋아하는 무나이꽃을 발치에 던졋다. 그의 몸에서 떨어져나간 피부는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가루가 되어 새하얀 무나이 꽃 위에 내려 앉았다. 엘프들은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티우사의 고결함에 어울리는 잔해라고 서로 속삭였다. 가끔 어떤 엘프는 그와 함께 한동안 걸으며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가 옛날 예석 음유시인으로 인간세계에서 활약하던 시절에 부르던 노래였다. 어떤 엘프는 그를 위해 송시를 지어 읊었다. 티우사는 그 모든것에 만족하여 기분 좋고 느긋하게 걸었다. 근육 부위의 살들이 조금씩 떨어져나가면서 어느덧 팔다리가 삐걱거렸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 미소를 던지는 엘프에게 미소로 화답혀며 그는 인생의 마지막 남은 길을 기꺼이 걸어갔다. 데이그랜은 티우사 옆에서 그 길을 함께 걸었다. 티우사는 피부가서서히 떨어져나가는 걸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는 한없이 느린 엘프의 행동이 몹시 갑갑했다. 답답해하는 데이그랜을 보자 티우사는 웃음지으며 물었다. "지루하지 않으십니까? 지금 엘프에게 시간동조하신 상태 아니십니까?" 그의 얼굴은 피부와 근육이 많이 떠어져나가 이미 얼굴의 골격이 드문드문 보이는 상태였다. 그렇기에사실 웃음짓는다는 표현은 ? ジ?눼? 그러나 데이그랜은 티우사의 목소리에 담긴 웃음기를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그렇다. 엘프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똑같이 흐르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천 년씩이나 이 느린 흐름을 참고 견디지?" 데이그랜은 진저리치며 물었다. 시간동조, 즉 폴리모프한 생물의 시간 흐름에 맞추는 것은 오로지 드래곤만이 가능한 능력이었다. 하루 살이가 하루에 전 생을 살고 개가 15년 만에 수명을 다한다고 해서 그들이 진실의 잛은 삶을 한탄할까? 그렇지 않다. 모든 생명은 저마다의 시계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1녈이 개에게는 5년으로 느겨지고,하루살이에게 하루는 평생으로 느껴진다. 인간들은 나고 죽는 미물들의 짧은 생을 불쌍히 여기지만 미물들은 정작 자신의 생이 짧다고 느겨지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서로 다른 시간의 흐름 속을살아나가는 것이다. 드래곤 또한 드래곤 나름의 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만 년이라는 긴 일생을 지루함 없이 보낼수 있었다. 하지만 이따금씩 다른 생물로 폴리모프 할 때 그들은 그생물의 시간에 동조했다. 드래곤으로 있을 때의 일 년은 드래곤의 백년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만 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을 때로는 빠르게 흘려보내고 때로는 한없이 느리게 연장했다. 생의 길이가 생체시계의 빠르기가 일치하지 않는 유일한 경우가 바로 엘프와 드워프였다. 엘프와 드워프는 인간들보다 훨씬 오래 살지만 그들의 시간의 흐름은 인간과 동일했다. 대신에 엘프와 드워프는 그 기나긴 시간흐름에적응하는 방법으 나름대로 찾아냈다. 엘프는 스스로 거의 정지된 듯 느린 시간의 흐름을 만들어 냈다. 그들의 게으름은 그들의 생존방법이었다. 한편 드워프는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집요하게 뭔가를 탐구했다. 두 가지 다 훌륭한 바업이어서 엘프와 드워프는 모두 잘 적응해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드래곤으로서 엘프의 느긋함을 체득한다는 건 쉬지 않은 일이었다. 데이그랜의 눈에 엘프들은 그저 모든일을 열 배씩 느리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글쎄요, 어쩌면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엘프들은 사라지고 이 긴긴 시간을 무리 없이 견뎌낼 수 있는 엘프들만이 살아남는 건지도 모르지요. 저희들은 어차피 드래곤께서 창조하신 종족이 아닙니까?" 티우사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희미한 비난의 기색을 느끼고 데이그랜은 고개를 저었다. "창조라는 건 과분한 표현이다. 그리고 그건 내 선조들이 한 일이지 나와는 상과없없는 일이다." 데이그랜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티우사는 거칠고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데이그랜은 대력을 울리던 음유시인이었던 티우사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떠올리며 가슴아파했다. 그는 더 이상 티우사의 목소리를 듣고시지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 배웅하는 엘프도 모두 뒤에 남겨져 길에는 티우사와 데이그랜밖에 없었다. 적도에서 멀지 않은 고산지대인 이곳은 언제나 봄같은 날씨였고 길가에도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티우사를 배웅하느 엘프들의 노랫소리는 한참 전에 희미해져 새들의 지저귐과 둘의 발자국 소리 말고는 정적을 흘렀다. 길 위에 소복하게 쌓인 무지갯빛 가루들은 앞서 간 엘프들의 잔해였다. 이미 죽어간 엘프들의 부서진 살을 밟으며 자신의 살을 이 길에 뿌리고, 언젠가 다시 그 살을 다른 엘프들이 밟으며 죽음의 길을 가리라는 생각을 하자 티우사는 흐뭇했다. 그때 그들의 앞에 빛이 뿌려졌다. 무지갯빛 가루가 사방에 날려 주위는 잠시 뿌옇게 되었다. 먼지가 가라앉자 라빌의 모습이 드러났다. "티우사님!" 라빌은 울면서 티우사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그녀가 손을 댄 부분은 살이 바스러져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본 라빌은 황급히 몸을 떼었다. "죄송해요." 라빌은 흐느낌을 삼키며 말해다. 티우사는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다. 늦었구나." 라빌은 다시 울었다. "티우사님께서 이렇게 많이 붕괴하신 줄 알았더라면 서둘렀을텐데! 저는 그냥 붕괴에 대비해 준비하시는 줄로만 알았어요! 에돈님께서도 아무 말씀 안 하셨고요! 느긋하게 엘프덤에 들어섰더니 티우사님께서 벌써 엘프의 낙원으로 떠나셨닥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죄송해요!" 라빌은 차마 티우사에게 손을 대지 못하고 다시 흐느꼈다. "가엾은 것. 아직도 죽음과 생명에 집착하느냐? 엘프의 생을 반이나 살고도 아직생사를 극복하지 못하였느냐? 다른 엘프처럼 삶도 죽음도 무심하게 여길 수는 없느냐? 평온하고 행복한 내 마지막 길을 눈물로 어지럽히려느냐?" 티우사는 애처로워하는 라빌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티우사는 키가 작고 라빌은 커서 그가손을 뻗어 라빌을 쓰다듬는 모습은 조금 우습게 보였다. 붕괴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이제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은 작은 접촉에도 그의 손바닥 살은 부서져 내렸다. 라빌의 푸른 머리카락 위에 무지갯빛 가루가 쌓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장식가루를 뿌린 것으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 이 아이가 라빌인가?" 데이그랜은 둘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티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라빌, 인사드려라. 고귀하신 지혜의 흑룡 데이그랜님이시다.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시는구나." 라빌은 깜짝 놀라 황급히 왼쪽 무릎을 꿇고 오른손을 가슴에 대었다. "위대하신 흑룡께서 어인 일로 엘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미천한 엘프를 찾으셨나이까?" 데이그랜은 건성으로 손짓햇다. "일어나라. 너와는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지. 지금은 그를 배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라빌은 고개 숙여 다시 인사히고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걸어가는 둘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조금 더 걸어가자 어디에선가 희미한 폭포소리가 들렸다. 데이그랜은 주위 어디에도 폭포가 안 보여 의아해하다가 곧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뚫린 작은 틈에서 폭포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라빌, 이제 돌아가거라. 너는 여기까지다." 그 절벽 앞에 티우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주저하던 라빌은 곧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속삭였다. "평온한 죽음을... " 티우사는 데이그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데이그랜님께서는 엘프의 법도를 초월하신 분이시니 저와 함께 들어가시겠습니까? 엘프의 마지막 붕괴를 보신 적은 없으시지요? 상당히 볼 만 하다고들 합니다." 남의 일인 것처럼 유쾌하게 말하는 티우사의 태도에 데이그랜은 웃었다. "좋다. 원래 예의는 아니지만, 굳이 그대가 초대하는 이상 거절할 이유는 없겠지." 둘은 라빌을 뒤로 남기고 절벽 틈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티우사는 이제 힘이 다 빠진 듯 때때로 절벽에 기댓으나 데이그랜은 도와주지 않았다. 엘프의 낙원까지 마지막 길을 혼자 힘으로 걷는 것은 자존심 있는 엘프가 반드시 홀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데이그랜은 티우사가 절벽에 몸을 기댈 때마다 옷자락 사이로 떨어져 내리는 무지갯빛 가루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절벽 사잇길을 빠져나온 둘은 탄성을 올렸다. 거대한 폭포가 요란하게 떨어져 내리는 가운데 바위틈마다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대기는 향기롭고, 햇볕은 따뜻했다. 눈에 들어오는 곳마다 뿌려진 무지갯빛 가루, 여기저기 꽃어럼 흩어져 있는 하늘빛, 바닷빛, 쪽빛 크리스탈이 이 세상 같지 않은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티우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위 위에 걸터 앉았다. 그의 얼굴에는 평온함과 만족감이 충만햇다. "이곳이 바로 엘프의 낙원입니다." 붕괴는 이제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어, 티우사의 몸을 감싸 있던 얇은 천은 부서지는 살과 함께 흘러내리고 피부는 근육속에 감춰져 있던 뼈가 드러났다. 티우사는 성대가 붕괴하기 전에 하고시은 말을 다하기 위해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형형한 눈길로 데이그랜을 바라보는 티우사는 입을 열었다. "테이그랜님, 드래곤에게 위기가 온 것입니까?" 정곡을 찔린 데이그랜은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드래곤 전체의 위기다." "찾으신다는 소녀가 그 위기에서 드래곤을 구할 수 있습니까?" "그건 모른다. 실날같은 희망이 있을 뿐이다." 티우사는 깊은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주제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리석고 늙은 엘프에게도 쓸 만한 지혜는 한 조각쯤 잇는 법이니까요." 티우사는 힘든지 잠시 말을 멈췃다. "삶과 죽음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사라집니다. 또한 사라지는것 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현상을 넘어선 본질, 본질을 넘어선 그 안의 것을 직시하십시오. 변하지 않는 것이 없듯이 변하는 것 또한 없습니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될 것입니다." 티우사의 목소리는 이제 갈라지고 약해져 거의 들리지 않았다. "티우사!" 뼛속에서 보호되고 있던 내장마저 부서지자 마지막으로 남았던 뼈들이 서서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눈동자도 부서져내려 두개골의 안와부오 안저부가 훤히 드러나고 코의 연골이 붕괴되어 그 자리에는 구멍 두개만이 남았다. 한때 장밋빛을 띠었던 입술또한 부서져내려 하얗게 빛나는 치아가 밖으로 노출되었다. 티우사는 힘겹게 턱뼈를 달싹이며 벼만 남은 손으로 데이그랜의 팔을 움켜쥐었다. "데이그랜, 그대는 어떨지 몰라도 그대는 내 평생의 친구였습니다. 제 몸의 잔해 한 개 쯤 장식으로 간직해주시기를......... , 그대에게 평안이 있기를........... " 말을 마친 티우사의 두개골이 목에서 떨여졌다. 하얗던 두개골이 바닥에 닿는 순간 푸른 크리스탈로 변해 산산이 부서졌다. 그와 동시에 온몸의 뼈가 차례로 부서져 내렸다. 티우사가 앉아 있던 곳에는 무지갯빛 가루와 크리스탈 더미만이 남았다. 데이그랜은 망연자실하여 그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티우사의 ? 윱?주위에 흩어져 있는 어떤 크리스탈보다도 더 딮고 푸른 빛을 띄었다. 오후의 햇살이 그 뼈-크리스탈- 위를 비추자 크리스탈은 수천, 수만의 영롱한 푸른 그림자를 사방에 던졌다. 천국같은 풍경이었다. 엘프의 무덤을 왜 엘프의 낙원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부르는지 의아해했던 데이그랜은 이제 그 말의 참뜻을 이해했다. 깊은 상실감이 그를 사로 잡았다. 지금 한줌의 잔해로 변해 이 엘프가 자신이 아는 어떤 생명체보다 더 지혜로웠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지혜의 드래곤인 자신보다 더 지혜롭고 현명했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고 가지고 잇는 모든 것에 만족하여 평온하게 살다 갔다. 티우사는 행복한 엘프였다. 데이그랜은 크리스탈 무더기의 꼭대기에서 빛나고 있는 엄지 손가락 만한 사파이어 빛 크리스탈을 주워들었다. 아마도 엘프의 쇄골에서 깨져 나온 것 같았다. 그는 주인을 잃고 남아 있는 엘프의 옷을 뒤적여 가느다란 금실 허리띠를 찾아냈다. 그 허리띠를 크리스탈에 두 세번 감은 그는 끈의 끝부분을 묶어 자신의 목에 걸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약지에 끼고 있던 흑수정 반지를 빼내어 크리스탈 무더기 위에 조용히 내려 놓았다. "평온한 죽음을..."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는 참았다. 드래곤으로서 엘프의 죽음에 눈물을 흘린다는 건 수치였다. 대신에 마음속으로 그는 조용히 울었다. 이 세상의 아름다눈 것 하나가사라진 것 같아 그는 슬펐다. 돌아가는 길은 굳이 걸어갈 필요가 없이 데이그랜은 바로 절벽 입구로 순간이동했다. 절벽 앞에서 라빌이 기다리고 있었다. 라빌은 데이그랜에게 뭔가 물으려다가 그의 목에 걸린 푸른 크리스탈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한참 후에 라빌은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편히 가셨나요?" "그렇다. 내가 아는 모든 생명체의 임종 중에서 가장 평온했다." "티우사님의 마지막 길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너에게 감사를 받기 위해 한 일은 아니다." 데이그랜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다시 한번 크리스탈을 만지작 거렸다. 그의 마음은 티우사가 죽기 전에 그를 한번이라도 친구라고 불러주었다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로 가득찻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나를 따라오라. 갈 곳이 있다." 데이그랜은 라빌을 안고 순간이동했다. 여름 햇살이 쏟아지는 공터에서 테룬과 팔라르는 검을 든 채 조용히 대치 중이었다. 팔라르가 지난 두 달 동안 조르고 졸라 마침내 이루어진 비무였지만 , 테룬은 진검승부는 극구 고사햇기에 아쉽게도 둘은 목검으로 싸울수밖에 없었다. 팔라르의 몇 차례공격을 테룬이 모두 가볍게 무산시킨 후라, 산책이라도 나온 듯 여유로운 테룬의 모습과 옷매무시가 헝클어진 채 거칠개 숨을 몰아쉬는 팔라르의 모습은 너무 대조적이었다. 팔라르가 갑자기 기합을 지르며 뛰어올랐다. 노랄운 정도의 탄력으로 높이 솟아 올랐던 팔라르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테룬의 정수리를 양단하려는 듯이 목검을 내리쳤다. 그라나 테룬은 목검이머리에 닿기 직전에 가볍게 고개를 비껴 공세를 피했다. 머리카락이 조금 나부꼈을 뿐 옷깃조차 흐터러지지 않았다. 비검 중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태연한 모습이었다. 팔라르는 일체의 낭비가 업슨 테룬의 동작에 감탄하였지만 한 편으로 호승심을 불태우며 다시 자세를 바로 잡았다. 테룬과의 저번 비무 이후로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테룬을 이길 방도를 연구했다. 황제가 그동안 여러 가지 일로 검의 수련을 게을리 했던 반면 그는 국방대신으로서의 업무에 쫓기면서도 매일매일 검을 놓지 않고 꾸준히 연무해왔다. 테룬이 그보다 강한 점은 두 가지. 그중 하나는 검강이었다. 제대로 된 검강은 검기를 가지고는 도저히 정면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보통 검사도 평생을 수련하면 장년기 끝 무렵쯤 되어서 어설프게나마 검강을 시전할수 있게 도지만, 테룬의 경우소드 마스터의 혈통 덕분인지 몰라도 믿기 어려울정도로 어린 나이때부터 검강을 시전할 수 있었다. 눈이 시릴 정도의 그 빛을 보고 있노라면 상대방은 저절로 전의를 상실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하나는 완벽할 정도의 예측력과 신체에 대한 완벽한 통제력이었다. 검이 어디로 올리 예측할수 있고 온몸의 근육 하나 하나를 의지에 따라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최소의 동작으로 검을 피하고 막을 수 있었다. 그 두가지를 합치자 테룬은 거의 무적이 되었다. 하지만 팔라르에게도 강점은 있었다. 그 하나는 실전경험이었다. 그는 철이 들면서부터 끊임없이 전쟁터에서 사람을 베어왔다. 국경지대의 공국과 중립국 사이에서는 크고 작은 분쟁이 계속 되었고, 그가 무가인 매긴 가의 전통에 따라 전장을 누비고 시체의 산을 쌓아가며 가문에서 배운 검술을 그대로 체화했다. 그렇게 얻어진 경험은 절대 가벼이 볼 수 있는게 아니었다. 태어날 대부터의 혈통에서는 뒤떨어졌다 해도 경험만은 그가 앞 섰다. 다른 하나는 그의 정신이 지극히 안정되 있다는 것이다. 고수와 고수간의 대결에서 안정된 정신력은 검 자체의 파워나 기술보다 때론 중요한 역활을 하는데, 어딘지 늘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테룬에 비해 팔라르는 정신은 훨씬 굳건햇다. 그건 모두 사랑하는 마누라와 아들 덕부이라고 생각하며 팔라르는 씩 웃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비밀무기가 하나 더 있었다. 팔라르의 웃음을 본 테룬은 엄격하게 말했다. "그대가 원해서 한 비무이다. 진지하게 임하라. 결코 봐주지 않을것이다." 팔라르는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하게 검을 고쳐 잡았다. 아무리 상대가 황제폐하라 해도 두 번째 비무를 스스로 청해놓고 다시 진다는 것은 무인으로서의 수치였다. 팔라르는 다시 몸을 날려 테룬에게 덤볐다. 먼저의 비부 때에 이미 시전한 바 있는 암현다요의 초식이었지만, 저번처럼 허리를 노리는 게 아니라 가슴을 노리는 변초였다. 파공음과 함께 해일이 몰려가듯 검세가 테룬의 오니쪽 가슴으로 향했다. 테룬은 그러나 팔라르의 검로를 이미 읽고 있었다는 듯 검을 들지도 않고 몸을 피했다. '훗, 예상대로 움직이시는군.' 팔라르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실 이번의 검세는 허초였다. 한 달 전 그의 검술은 한 단계 뛰어올라, 종전까지는 전혀 불가능햇떤 초보적인 형태의 검강을 마침내 시전할 수 있게되었다. 테룬과 '조용한 숲'에서 했던 비무 덕분이어었다. 역시 자기보다 뛰어난 고수와의 대결만큼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도 없었다. 그때 아무 손익 계산없이 테룬의 비무요청에 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정도의 검세를 내기 위해서 고거에는 전력을 다해야 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하지만 테룬은 팔라르의 실력이 단시일에 이렇게까지 급진전한 줄 모르고 있을테니, 그 약간의 차이를 이용하면 단 한번의 기회는 만들 수 있을 터였다. 팔라르가 다시 자세를 가다듬으며 한숨 돌릴 줄 알았떤 테룬은 팔라르의 검이 살아 있는 듯 검붉은 빛줄기를 뿜어내며 자신의 오른쪽 옆구리로 방향을 틀어 파고들자 크게 당황했다. 지금까지는 여유 있게 피하기만 했지만 이번의 공격은 도저히 그렇게 넘길 수 없었다. 테룬은 황급히 검을 들어 팔라르의 검을 막았다. 그러나 테룬의 검은 검강이 담긴 팔라르의 검을 완벽하게 막지 못했다. '찌이익!' 소릭를 내며 테룬의 오른쪽 옆구리의옷깃이 찢어졌다. 약간 긁힌 듯 피가 배어나왔다. 팔라르는 크게 당황하여 외쳣따. "폐하, 괜찮으십니까?" 테룬은 팔라르의 외침을 듣지 못한 듯 오른쪽 옆구리의 상처를 멍하니 쓰다듬었다. 상처는 가벼게 긁힌 것에 불과했지만 지금 피가 흐르는 곳은 하필이면 옛 흉터 바로 옆이었다. 새로 생긴 상처에서 피가 흘러 묵은 상처를 물들이자 묵어두었던 악몽이 되살아났다. "어머니, 이러지 마세요! 어마마마! 어머니 말씀 잘 들을 테니 제발 이러지 마세요!" "네 약속을 내가 어떻게 믿지? 너도 결국 배신할 거잖아!" "절대 아니에요!"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아? 너만 없었더라면! 네가 그걸 다 보상해줄수 있어? 내 인생을?!" "하라는 대로 무든지 다 할께요!" "너도 남자야! 너도 나를 괴롭히고 비참하게 만들거야! 내게 고통만을 줄 거야!" 악몽.. 절망.. 고통.. 슬픔.. 후회.. 새 상처보다 옛 상처가 수천 배 더 아팠다. 몸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수만 배 더 아팠다. 테룬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부터 치밀어 오르는 격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그 모든 격렬함을 검에 담아 휘둘렀다. 무시무시한 검강이 폭사했다. 테룬에게 다가오려던 팔라르는 황급히 뒤로 펄쩍 뛰었다. 간발의 차이였다. 목표 없는 검강은 빛처럼 빠르게 쏘아나가 비무장 끝의 참나무에 부딪쳤다. 우지끈 소리를 내며 아름드리 참나무 둥치가 꺾였다. "폐하!" 팔라르는 조금 전 느꼈던 생명의 위협도 잊고 테룬을 불렀다. 그의 부름을 듣지 못한 듯 테룬은 한동안 멍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폐하, 정신 차리십시오!" 팔라르는 다시 테룬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잡았다. 테룬은 흠칫 놀라며 부르르 떨었다. 그는 흐트러진 파라르의 모습과 부러진 참나무를 번갈아보고 겨우 정신을 수습했다. "미안하다, 팔라르.." 팔라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폐하,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다. 비무는 무승부로 하지..." 테룬은 지친 듯 비무장 한쪽의 돌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대도 앉으라." 팔라르는 조심스럽게 테룬의 옆에 앉았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저 참나무는 저 자리에 옮겨 심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딱하게 되었군. 저번에도 내가 비무장을 엉망으로 만들었거든... 아무래도 조경예산을 늘려주든지 아니면 비무장 주위에는 아무 나무도 심지 말라고 일러야겠다." 테룬이 쓴웃음을 지으며 서툴게 농담을 하자 팔라르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테룬의 가정 사를 거의 다 알고 있는 팔라르는 자신의 막내 동생 나이 정도 밖에 안 되는 테룬이 안쓰럽기 그지 없었다. 아까 찢겨진 옷자락 사이로 보이던 새 상처 옆의 묵은 상처는 틀림없이 여자의 손톱자국이었다. 그것도 피가 철철 흘러나올 정도로 깊이 파고들어 생긴 상처임이 틀림없었다. 누가 그 상철르 남겼는지 팔라르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대의 어머니, 매긴 백작부인은 어던 분이셨지?" 테룬은 갑자기 묻자 팔라르는 다시 당황했으나 우직한 무인답게 그는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엄청난 여장부셨죠. 제 아버지도 무시무시하신 분이셨지만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한 손에 쥐고 마구 흔드셨으니..... 저희 형제들 모두 어머니께는 꼼짝도 못 하고 죽는 시늉을 해야 했습니다." 팔라르는 말하다 말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은 저희 아버지께서 출정을 나가셨다가 어느 창기와 바름을 피우셨는데, 그 소문이 재수 없게도 어머니 귀에 들어갔지요. 뭐, 원래 남자라는 게 그런 거 아닙니까?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어찌나 화가 나셨는지 아버지께서 늘 아끼시던 전쟁의 신 조각상을 번쩍 들어 내던지셨답니다.그런데 그냥 화풀이로 목표없이 내던지신 거라면 좋을 텐데... 그게 하필이면 아버지를 향해 던지신 거였단 말입니다." 팔라르의 말에 테룬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그때 저희 형제들도 모두 옆에 서서 부부싸움을 보고 있었는데, 아버지께서는 용케 피하신 덕분에 조각상은 그 옆에 떨어졌지요. 그러니까 어머니께서 더 화가 나셔서 경고를 하시더군요. '여보, 이번에도 피하면 당신은 끝장이에요! 나 이 집을 나가버릴 거예요!'라고 말입니다. 그러고서는 이번에는 그 옆에 있던 묵직한 화병을 던지셧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아버지께서 피하지도 않고 그 화병에 얻어맞으시더란 말입니다! 하긴 동대륙 최고의 무인으로 일컬어지던 아버지께서 화병 정도에 맞았다고 해서 무슨 큰 탈이 날리는 없었지만요." 팔라르의 말에 테룬은 마침내 큰 소리로 웃었다. 팔라르는 신이 나서 덧붙였다. "그게 끝이 아닙니다. 자실들 앞에 체면을 왕창 구기신 아버지께서는 저희 형제들을 따로 부르셔서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내 너희들을 위해 충고하건데, 절대 무가(武家)에서 마누라 감을 데려오지 말아라! 안 그랬다가는 내 꼴 난다! 가장의 권위가 서야 집안이 바로 서는 것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서는 '근데 내가 그런 말했다는 얘기는 절대 너희 엄마한텐 비밀이다.' 고 하셨지 뭡니까! " 팔라르는 자기가 말해놓고서는 스스로 우스운지 껄껄 웃었고, 테룬도 따라 웃었다. 어릴 때 한 번 만나본 희미한 기억 속의 선대 매긴 경은 지금 눈앞의 팔라르보다도 더 기골이 장대한 무인이었기에 팔라르가 묘사하는 것 같은 장면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팔라르는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두 분은 정말 금슬이 좋으셨죠. 저희 형제들은 모두 어머니 같은 아내를 얻어서 아버니, 어머니 사시듯 살아보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마침내 그 소원을 이뤘습니다. 그 모습을 부모님께서 보지 못하신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테룬은 팔라르가 자신을 위로하기 우해 일부러 기운차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 점 구김살 없는 팔라르의 가정사를 듣고 있으니 더욱 괴로워졌다. 테룬은 다시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렌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며칠간은 그럭저럭 잘 버텼지만, 작은 충격이나 사소한 계기에도 악몽은 너무 쉽게 되살아낫다. 다가오는 밤에도 편한 잠자리는 기대하기 어려울 듯했다. 그 모습을 본 팔라르는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폐하, 좋은 여자를 찾아서 가정을 꾸미십시오. 남자란 아내와 자식이 생기면 달라지는 법입니다. 소문에 듣자하니 프린다인 공국의 티르안 공녀가 아주 참하다고 합니다. 그 정도면 황후로 책봉되기에 손색이 없는 가문이고요. 그러면 폐하의 악몽으 사라질 것입니다." 팔라르의 말에 테룬은 찌르는 듯한 시선으로 팔라르를 노려보았다. "티르안 공녀 얘기는 누구에게 들었느냐?" "샤이트가 며칠 전 얘기하던데요. 저도 개인적으로 알아봤지만 정말 괜찮은 아가씨인 것 같습니다." 테룬은 아무런 속셈 없이 이야기 하는 팔라르의 태도에 화를 낼 수 없었다.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그 문제는 당분간 거론하지 말라." 샤이트는 황제를 찾다가 황제가 팔라르와 함께 비무장에 있음을 확인하고 황급히 그곳으로 달려갔다. 황제가 팔라르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은 언뜻 보기에 무척 평온했으나, 샤이트는 꺾어진 나무와 황제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 곧 좀전에 무슨일이 있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무슨 일이었는지 묻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다. "폐하, 전할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폐하, 카로딘 대공국의 현 대공이 죽었습니다. 방금 전 카로딘 대공국의 수 도 카로드에 파견되어 있는 첩자가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의 두 형은 순순히 계승권으 포기했고 셋째 아들인 일드인이 예상했던 대로 대공위에 올랐습니다." 샤이트가 전해온 놀라운 소식에 테룬의 안색은 어두워졌고, 팔라르는 흥분하여 벌떡 일어났다. 카로딘 대공국은 동제국과 서제국의 중간, 즉 드래곤의 회랑 부근의 평야에 넓게 자리잡고 있는 강대한 공국이었다. 너른 평야지대를 국토로 하고 동서제국의 무역에서 오는 이익마저도 취하는 나라답게 국력은 강했고 재정은 풍부했다 백여 년 전 하라스 2세가 2차 정복전쟁을 벌여 카로딘 왕을 사로잡고 왕국을 대공국으로 격하시킨 이래로 카로딘 대공국은 파이브른 제국의 신하국이었다. 그러나 제국이 약해지면서 군신관계는 형식적으로 되어가고 제국의 공국에 대한 지배력도 점점 느슨해졌다. 사실 카로딘 대공국이 그동안 독립하지 않은 이유는 단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섣불리 독립했다가 의지할 곳 없는 상태에서 서제국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어버리느니 형식적으로 동제국의 공국 노릇을 하면서 최대한 자치를 누리는 게 낫다는 정치적 계산이었다. 다른 하나는 지난 2대에 걸쳐 용렬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 대공위를 물려받았다는 점이다. 동제국의 황제도 용렬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카로딘의 대공들도 그에 못지않았기에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칠생각 따위는 통하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약 4년 전부터 카로딘의 대공을 대리하여 실질적으로 정무를 맡아온 카로딘의 공자 일드인은 달랐다. 테룬보다 열 살 정도 많은 그는 야심 많고 능력 있는 자로 소문나 있었다 두 명의 형을 제치고 대기뤈을 획득함으로써 사실상 후계자가 된 그는 지난 4년간 카로딘 대공국의 세제와 군제를 획기적으로 개편하여 국력을 키웠고, 특히 신병양성에 힘을 쏟았다. 누가 보더라도 단순히 내치에만 힘쓰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동안 그의 수상쩍은 행동을 추궁할 사람은 동제국에 없었다. 이제 정식으로 대공위에 오른 이상 일드인은 범이 날개를 단 격이나 진배없었다. 틀림없이 그는 동제국을향해 조만간선전포고를 할 것이다. "대공이 병상에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고는 해도 그렇게 위독하지는 않았던 걸로 아는데?" 테룬의 질문에 샤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지나치게 갑작스런 죽음입니다. 저나 그쪽의 정보원 모두 일드인이 그 아비를 독살했으리라는 데 가능성을 두고 있습니다." "지금 카로드에 있는 정보원이 몇 명이나 되지?" "6서클 마법사 한명, 5서클 마법사 세 명, 그리고 비마법사 십여명 정도 입니다." 보고하던 샤이트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일드인이 우낙 마법사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준 덕분에 지금 카로딘에는 8서클의 마법사가 두 명이나 있고, 7서클,6서클 마법사들도 우리보다 많습니다. 그래서 그 숫자로는 제대로 정보를 캐내는 데 역부족입니다. 아무래도 마법이 발달한 서제국과 카로딘이 지리적으로 가까우니 마법사들을 스카우트하기도 편하고 연구 환경도 잘 갖춰져 있어, 마법사들이 돌제국보다는 카로딘 대공국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테룬도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동제국에 대한 불온한 움직임은 없나?" 테룬의 물음에 팔라르는 즉시 대답했다.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일드인이 대공위에 올라 모든 것을 공고히 하기까지는 아마도 두 달 정도는 걸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계승이나 전대 대공의 죽음에 수상쩍은 점이 많은 만큼 아마 그는 군대를 일으켜 불만을 잠재우려 할 것입니다. 아주 전통적인 방법이지요. 대공국의 독립이라는 것처럼 훌륭한 명분도 없으니까요." "그때까지 우리 중앙군이 전열을 갖출 수 있을까?" 테룬이 팔라르에게 묻자 팔라르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이런 말씀을 제 입으로 드리자니 참으로 죄송스럽습니다만, 황군이라는 게 애당초 워낙 오합지졸이었지 않습니까? 저희 정의군에 브림이 함락되었다는 것부터가 사실 한심한 얘기였습니다. 지난 석 달 동안 맹훈련을 시켰지만 아직 질적으로 부족하고 수도 모자랍니다. 공국들로 부터 원군을 받지 않으면 안 도리 상황입니다. 한두 개 공국으로부터 의무정수만큼의 원군만 온다면 그럭저럭 될것 같지만, 그들이 과연 원군을 보내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우수한 마법사를 확충하는 것도 시급합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과연 어느 공국이 추문과 반란으로 허약해진 제국에 힘을 보탤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아마도 각 공국들은 지금손익계산에 분주할 것이다. "폐하, 프린다인 공국에원군을 요청하셔야 합니다. 가장 충성스러운 공국이고 병력도 훌륭합니다." 샤이트가 말하자 테룬은 곧 탐탁치 않아 하는 태도로 물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티르안 공녀도 불러들이고 말인가?" 샤이트는 불쾌해하는 테룬의 기색과 난처해하는 팔라르의 표정을 보고서 곧 사태를 파악하고 화제를 돌렸다. "뭐든지 폐하께서 뜻하시고 명하시는 대로입니다 . 그리고 마법사라면 한 명 충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샤이트가 말했다. 테룬은 별로 기대하지 않고 조금 시큰둥하게 물었다. "강한 마법사이기는 한가?" "그건 아직 잘 모르지만 ,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어제 오후 수상부에 면담요청이 들어왔느데, 저 유명한 '치유하는 손'라빌이 고향 엘프점에살던 남동생을 동제국 황실에 소개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그 남동생이 고향을 떠날 일이 생겼는데, 이왕이면 호강할수 있는 곳에서 지내는게 좋을 것 같다고 하면서 황실마법사로 써달라고 합니다." 치유하는 손 라빌의 남동생이라는 말에 테룬은 놀랐다. "라빌이라고? 동서제국에 명성이 자자한 바로 그 치유마법사 라빌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기록을 찾아보니 그녀는 전대 황실과도 인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선황 폐하께서 아직 즉위하시기 전 낙마사고를 당하셔서 사경을 헤매셨을 때 그녀가 치유마법을 써서 출혈을 막고 응급조치를 취해 선황 폐하를 구한 적이 있었답니다." "그녀는 적들의 침입을 막는데 필요한 마법은 못 하지 않나? 그런 쪽으로 뛰어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녀의 동생도 치유마법만 하는 건 아닌가?" "그 동생은 치유마법보다 오히려 공격마법이나 탐색마법에 능하다고 합니다. 믿기는 어렵지만 8서클에 이르는 것은 참으로 드문 일인데 말입니다." 사실 데이그랜은 이미 샤이트의 관저에 펼쳐놓은 도청마법으로 동제국 황실의 사정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이쪽의 구미에 맞게 가짜 이력을 구성한 것이지만 샤이트나 테룬이 그런 사정을 알 리는 없었다. "잘 되었군. 8서클이 아니라 7서클 정도만 되어도 괜찮지. 언제 만나보기로 했나?" "오후에 수상 집무실에서 쿠드님과 함께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그렇다면 약송장소를 황제집무실로 변경하도록 하라. 내가 직접 만나보겠다. 물론 쿠드와 그대도 함께 오도록." "예, 폐하." 태룬은 몸을 일으키려다 샤이트와 팔라르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소드 마스터의 눈빛에 샤이트와 팔라르는 테룬을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내가 그동안 보였던 불안정함 때문에 경들이 걱정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나는 이 나라를 잘 다스릴 것이다. 내가 하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내가 아무리 불행하더라도 백성들만은 행복하게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내가 불행하기 때문에 백성들이라도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 불행한 사람이야 말로 행복의 소중함을 알 수 있으니까. 나는 백성들의 행복을 나의 행복으로 삼아 스스로를 위로할 거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혈유의 피를 뿌리고 이 자리에 앉은 의미가 없다. 경들은 이런 내 각오를 알아주겠는가?" 그 물음에 샤이트와 팔라르는 압도당했다. "예, 폐하!" 둘은 합창하듯 대답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를 믿고 도와줄 수 있겠는가?" "예!" "고맙다." 테룬은 약간 쓸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신하들을 남긴 채 집무실로 향했다 "팔라르!" 테룬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샤이트는 팔라르는 불렀다 "왜?" "우리는 행운아야, 그렇지?" "우여곡절 끝에 폐하께서 우리의 황제가 되셨으니 정말 행운이라고 할 수 있지." 팔라르의 대답에 샤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냐. 폐하께서 겪으신 정도의 고통을 보통 사람이 겪었다면 아마도 미쳐버리거나 성격이 삐뚤어져버렸을거야. 하지만 폐하께서는 놀랄 만큼의 의연하싶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불행에서 교훈을 얻으시는 모습을 보이시니, 이런 분을 주군으로 모실 행운은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지." 샤이트는 말이 끝나자 팔라르는 조금 전의 사건을 떠올리며 침중하게 말했다. "자네 말이 맞아. 폐하 가은 분은 정말 드무시지. 자신의 고통을 교훈으로 삼아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걱정하시니 말이야. 하지만 샤이트... 자네, 폐하께서 걷으로 의연하시다고 해서 안심하면 안돼. 아직도 폐하의 가슴속에 수많은 상처가 남아있다는 걸 자네도 알지? 그런 상처는 절대 저절로 낫는 게 아냐. 어쩌면 평생 낫지 못하는 상처일 수도 있어." 샤이트는 길게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어쩌겠어? 마음의 상처를 누가 낫게 할 수 있겠어? 정작 그 상철르 낸 장본인은 이미 죽어버렸느데... 폐하께서는 황후 마마를 닯은 렌이라는 소녀에게 마음을 붙이고 계신 것 같지만, 그런 식으로 죽은 사람의 허깨비를 언제까지나 붇잡고 계신다면 폐하의 상처는 절대 나을 수 없어." "내가 아까 무심코 티르안 공녀 얘기를 했더니 몹시 불쾌해하시던데?" "그건 자네가 서툴렀어. 여자문제는 훨씬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데, 무인인 자네가 그런 걸 알기나 해?" 팔라르는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장가 잘 가서 잘만 사는데 뭐. 어쨋든 폐하께 행복이 찾아보면 좋으련만.." 둘은 테룬에 대한 충성심과 연 민이 뒤섞인 복잡한 기부으로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데이그랜과 라빌은 잠시 푸른 바람의 엘프덤에 들러 몇 가지 필욯나 소지품만 챙긴 후 그곳에서 동제국 수도 브림까지 바로 순간이동했다. 남대륙에서 브림까지 한 번에 이동하느 것은 오로지 드래곤과 서제국 황제만이 가능한 마법이었다. 평소 같으면 라빌은 눈을 크게 뜨고 감탄했을 것이고 데이그랜은 자화자찬을 했겠지만, 티우사의 죽음이 아직도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했다. 둘은 브림의 최고급 여관 - 저번에 데이그랜이 묵었던 바로 그 곳이었다-을 숙소로 잡았다. 브림에도 엘프 상관이 있지만 데이르갠은 굳이 다른 엘프를 만나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에 그리로 가지 않았다. 여관 지배인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녀 엘프가 푸른 머맄락을 출렁이며 등장하자 입을 쩍 벌렸다. 원래 엘프는 아름답다고 하지만 나란히 서 있는 엘프 두명을 한꺼번에 보니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특히 일행 중 남자 엘프의 아름다움은 로망을 잃은 평범한 중년 남자인 그마저도 어절 줄 모르고 얼굴을 붉히게 할 정도였다. 그 남자 엘프가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지배인은 크게 당황했다 "저.. 지배인님." 낮지도 높지도 않고 그윽하게 노래하는 듯한 엘프의 목소리는 얼굴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예, 아, 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지배인은 말을 더듬었다. "여관 4층의 개인실이 두개 딸린 특별실을 주십시오. 비어있지요?" "아, 예, 물론입니다." "거기 동제국 면으로 된 가운이 비치되어 있지요? 남프리아 면으로 된걸로 바꿔주십시오. 저는 동제국의 거친 질감이 싫습니다. 슬리퍼는 털이 보송보송한 걸로 주시고, 시트는 원래 있던 흰색을 걷어내고 푸른색으로 깔아주시고, 꽃은 에이델화가 좋습니다. 풍성하게 꽂아주십시오. 식사는 아침만 가져다주시면 되는데, 오렌지 주스는 무가당이 좋으니 절대 설탕 넣지 마시고, 토스트는 한쪽만 익혀주십시오. 달걀은 어떤 걸 먹고 싶어질지 모르니 스크램블, 완속, 반숙을 모두 가져다 주시고요. 베이컨은 바짝 익혀 기름을 빼주시고, 겯들이는 과일은 망고, 복숭아, 레몬 한조각씩이면 딱 적당합니다. 여러 번 투숙해본 듯 익숙하게 쏟아 붓는 데이그랜의 주문에 지배인은 어안이 벙벙했다. "에, 저, 잠깐 받아적겠습니다." 지배인은 곧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메모했다. "숙박비는 하루에 50실버, 일주일에 3골드 입니다. 아, 숙박계를 적어주셔야 하는데요." 데이그랜은 씩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라빌누나, 귀찮으니까 누나가 적어." 라빌은 데이그랜이 능청스럽게 누나라고 부르자 잠시 정신이 혼미했다. 그러나 라빌 또한 500년간 인간세계를 다니며 쌓아온 인생겸험이 있는지라 곧 능숙하게 대꾸했다. "그래, 귀여운 동생아, 누나가 적으마." 데이그랜이 의외의 반응에 황당하며 라빌을 멍하게 쳐다보는 동안 라빌은 태연하게 데이그랜을 제치고 프론트데스크로 나아가 숙박계를 적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배인은 탄성을 올렸다. "푸른 바람의 엘프덤 출신 라빌님이시라면, 저, 혹시, 치유하는 손 라빌님 아니십니까?" 라빌은 싱긋 웃었다. "맞습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부끄럽게도 그런 과분한 이름으로 불러주더군요." 지배인은 감격에 떨며 자기도 모르게 라빌의 손을 덥석 잡았다. "라빌님, 사인 좀 해주십시오! 가보로 간직하겠습니다! 그리고 숙박료는 제 재량으로 반으로 깎아드리겠습니다!" 결국 라빌은 지배인이 요구하는 대로 꽃무늬가 수놓아진 비단 손수건 세장에 지배인, 지배인의 아내, 지배인의 딸 것까지 사인을 해주어야 했다. 방으로 올라온 데이그랜은 라빌을 쳐다보며 감탄했다. "네가 그렇게 유명인이라니 뜻밖이군." "부끄럽습니다." "어쨋든 너를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일은 편하게 되었군. 티우사가 너를 추천할 때만 해도 긴가민가 했는데.. 네 임기응변 실력도 상당한 거 같고."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다니 다행입니다. 데이그랜님의 계획으 어찌 되시는지요? 제가 뭘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련지요?" 데이그랜은 어디까지 이야기해 줘야 할지 잠시 난감했다. 용들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알리지 않아야 하겠지만, 라빌의 자연스러운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사정을 말해줄 필요가 있었다. 데이그랜은 결국 진실과 거짓말을 적당히 섞어 이야기해주기로 결심했다. "사실은 내가 꼭 필요한 중대한 실험에 쓰기 위해 이계에서 소녀 하나를 소환했느데, 중간에 마나의 유동이 어지러워지는 바람에 그 소녀가 내 레어로 오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나중에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 소녀는 동제국 현 황제 테룬의 귀양지에 나타나서 그와 함께 잠시 머무르다가 테룬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떠났다고 한다. 전후 사정을 모두 종합해 보면 테룬의 혈통에 흐르는 소드 마스터의 기가 마나를 어지럽힘으로써 그런 일이 발생한 것 같다. 어쨋? ?그 소녀를 못 잊었는지 테룬 황제는 그 소녀를 찾고 있어군. 그리고 그 소녀를 찾는데 도움을 줄 마법사를 구하고 있고." 라빌은 이제야 사정을 알겠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데이그랜님께서는 동제국의 힘을 별리 그 소녀를 찾으시려는 건가요? 그러기 위해 동제국의 황실에 고용될 수 있도록 신원보증을 부탁하시는 거지요? 그래서 엘프로 폴리모프하시고 제 동생을 자처하시는 거고요." 눈치 빠른 라빌의 말에 데이그랜은 흡족해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렇다면 일단 엘프식 이름부터 정하셔야겠어요. 연령은 어느정도로 하실 건가요? 제 부모님께서는 100년 전 붕괴하셨으니 엘프의 가임연령을 감안하면 적어도 300살은 되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굳이 엘프덤을 떠나 동제국으로 들어오려는 사연은 뭐라고 하실 거예요? 아시다시피 엘프가 고향을 떠나 인간세계로 나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니까요." 데이그랜은 잠시 고민했다. "글쎄, 나는 너만큼 엘프의 사정을 잘 모르, 네가 그럴 듯한 이야기를 짜내지 그래?" 데이그랜의 말에 라빌은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대답했다. "일단 성함은 라비언으로 하시죠. 저는 형제가 없었지만 만약 형제가 태어났다면 '라브'를 앞에 넣었을 테니까요." "라비언이라, 좋은 이름이구." "연령은 그냥 300살로 하죠." "좋다." "그 다음으로, 엘프덤을 떠난 사연은 역시 여자문제가 좋겠어요." "여자문제라고?" 데이그랜은 황당해서 되물었다. "예, 엘프들은 담백해서 치정사건이 잘 일어나지는 않지만, 가끔 엘프 한 명에게 두명의 반려신청을 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글너 일이 생기면 서로 양보하기도 하나 꼭 원만하게 해결되는건 아니에요. 그러면 중간에 낀 엘프가 잠시 엘프덤을 떠나 머리를 식히고 오죠. 이때 잠시라는 건 대략 20년 정도를 말해요. 그렇게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면 대개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어 있곤 하죠. 일단 폴리모프하신 데이르랜님의 모습이 워낙 아름다우시니 여자 엘프들이 데이그랜님을 사이에 두고 실랑이한다는건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릴 것 같은데요." "그래 ,상당히 말이 되는군." 데이그랜은 아름답다는 말에 흐뭇해져서 맞장구쳤다. "예, 말이 될뿐만 아니라, 인간 남자들은 그런 문제로 도망쳤다고 하면 묘하게 동지의식을 느끼고 잘 해주는 경향이 있더군요." 데이그랜은 빙긋 웃었다. 그도 여자문제로 곤란을 겪는 사람들에 대한 인간 남자들의 동지애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럼 종합해볼께요. 시나리오는 이렇습니다. 라빌에게는 라비언이라는 200살 연하, 그러니까 금년에 갓 300살이 된 남동생이 있었는데, 얘는 평소에 얼굴이 워낙 미남이라 수많은 여자 엘프로부터 시달림을 받아왔다. 하도 시달리다가 이것저것 모두 귀찮아진 그는 누나인 라빌에게 인간세계에 적당히 있을 곳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특히 이왕이면 평소 연마해온 공격마법과 탐색마법을 써먹을 수 있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곳으로 부탁했다. 그런데 인간세계 중 서제국 황실에는 마법사가 필요 없고 시시한 공국에는 가기 싫으니 갈 곳은 역시 동제국밖에 남자 않았다. 라빌은 동제국 황실의 전대의 인연도 있고 해서 라빌이 부탁하면 동제국 황실에서도 거절하지 않을 터라, 결국 누나를 따라 여기로 오게 되었다. 어떠세요?" "그래, 아주 그럴듯해, 하하하!" 데이그랜은 흡족해서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럼 당장 동제국의 고위관리에게 편지를 넣든지 방문하든지 해서 내 얘기를 전하도록해, 알겠지?" "예, 최대한 부지런히 움직이면 글피정도까지는 편지를 넣을수 있을것 같습니다." 순간 데이그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글피라고?" "예, 요 며칠무리햇으니 내일 저녁까지는 푹 자야 할 테고, 그 당므날에는 푸른바탕에 무나이 꽃이 그려지거나 흰 바탕에 에이델꽃이 그려진 편지지나 편지봉투를 사서 문안을 구성하고 글을 써야 하고, 그리고 나서 다시 푹 자고 나면 글피 오후쯤에는 동제국 수상관저 민원실에 편지를 전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조금 급한 감이 없지는 않지만요." 데이그랜은 마침내 흥분했다. "뭔 소리야? 감히 드래곤이 명령하는데 늦장을 부려? 글피라니, 너 정말 죽고싶어?!" 데이그랜이 힘을 일부 개방하여 라빌을 압박하자 라빌으 엄청난 기운에 파랗게 질려 벌벌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더 서두를게요..." 드래곤의 마력에 어쩔 줄 모르는 엘프를 보며 힘을 거둔 데이그랜은 타이르듯 간곡하게 말했다. "미안하다. 하지만 중요한 일이니 엘프식으로 느긋하게 할 여유가 없다. 당장 편지를 작성하도록 하라. 편지지는 아무거나 쓰고. 고르긴 뭘 골라. 그리고 오늘 중으로 편지를 접수해서 냉리 바로 면담을 하도록 하자꾸나."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빌은 풀이 죽어 대답했다. 샤이드와 쿠드가 양쪽에 시립한 가운데 테룬은 라빌과 그 동생이라는 라비언을 맞았다. 그 둘이 황제집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샤이트와 쿠드, 테룬은 모두 탄성을 올렸다. 라빌도 무척 아름답지만 동생인 라비언의 아름다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푸른빛 머리결, 투명한 상아빛 피구, 그 상아빛 뺨에 살짝 도는 홍조, 머리카락 색과 똑같이 검푸른 내해보다 더욱 짙은 파란색 눈, 섬세하고 오뚝한 콧날, 핏빛처럼 붉은 입술, 호리호리한 체구, 그 못든 것의 완벽한 조화.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누나의 아름다움을 무색하게 할 정도였다. 라비언이라는 엘프는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말을 잃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그가 시선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짓자 샤이트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미로닌보다 미남은 이 세상에 없으리라 생각했느데, 저 라비언은 정말로 단 한군데도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얼굴이었다. 쿠드 또한 라비언의 시선을 받자 나이와 지위도 잊고 당황했다. 그는 눈을 어디다 둘지 몰라 허둥지둥하다가 결국 지팡이를 떨어뜨렸다. 테룬만이 라비언의 시선을 받고도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훗, 만만치 않군. 그래, 한 제국의 황제라면 그 정도느 돼야지. 더구나 소드 마스터 아닌가.' 라빌이 먼저 한쪽 무릎을 꿇고 절하며 말했다. "파이브룬 제국의 황제폐하를 뵈옵니다. 푸른 바람의 청량함이 늘 폐하와 함께 하기를." 데이그랜도 라빌을 따라 절했다. 테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바람의 상냥함이 늘 그대들과 함께 하기를." 테룬이 엘프식 인사법으로 응대하자 라빌과 데이그랜은 모두 놀랐다. "폐하께서 엘프의 예절로써 맞아주시니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푸른 바람의 엘프덤 출신인 라빌이라고 합니다." "그대의 명성은 익히 들었다. 우리 동제국에 은혜를 베푼 일도 있는데 어찌 그대를 모르겠는가? 뭐든 부탁하기만 하면 힘닿는 대로 도와주겠다." 테룬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라빌은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실 제 동생인 라비언이 몸을 의탁할 곳을 찾고 있습니다. 얘는 저보다 200살 어려서 금년에 갓 300살 되었는데, 300살라는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아직도 철이 없어서 처힌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늘 말썽만 피운답니다. 누나로서 부끄럽기 그지없지요. 하지만 제 부모님은 이 애를 낳으시고 얼마안되어 붕괴하셨고 동생을 교육시켜야 할 저는 외지로 돌아다니는 바람에 저렇게 큰 것이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라빌은 간밤에 겨우 네파잔(여덟 시간)밖에 못 잔것이 약이 올라 데이르랜이 어쩌지 못하는 틈을 타 맘껏 데이그랜에 대한 악평을 늘어놓았고, 데이그랜은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꾹꾹 참았다. '너 이따 두고보자.' "보시면 아시겠지마 이 애가 좀 반반합니다. 그래서 최근에 여자 엘프 세 명으로부터 동시에 반려신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잘 타일러 해결하면 될 것을, 그게 귀찮고 싫다면서 한 20년 정도 인간세상으로 도피하겠다지 뭐에요? 제가 인간세상은 복잡하고 어지럽다고 아무리 설득해도 워낙 고집이 세서 제 말은 한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더군요.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이 아이가 안심하고 맡기 곳은 여기 동제국 황실밖에 없을 것 같아 이리 끌고 온 것입니다." 라빌의 말이 끝나자마자 데이그랜은 바로 소리를 질렀다. "누나, 너무 심하잖아! 내가 철없는 어린애야? 말썽망 피우다니! 여자 엘프들이 한꺼번에 들러붙으면 나 말고 다른 남자엘프들도 다 도피한다구!" 서로 티격태격하는 라빌과 데이그랜의 태도가 몹시 그럴듯했기에 그 자리의 사람들은 아무도 데이그랜의 정체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다. "마법을 할 줄 안다고?" 테룬의 물음에 데이그랜은 라빌을 슬쩍 흘겨보며 대답했다. "예, 어릴 적부터 마법에 흥미가 있어 열심히 수련한 덕분에 지금은 8서클 정도 됩니다. 공격마법과 탐색마법이 주특기입니다. 엘프들은 마법 수련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제 누나나 저는 별종이라서 엘프의 관례에 벗어난 엉뚱한 짓을 곧 잘 해왔죠. 뭐, 가문의 내력이라고 해도 되고요. 하지만 저보다는 누나가 훨씬 더 별종입니다. 아니 별종이 아니라 괴짜가 맞겠네요." '후훗, 복수했다.' 엘프의 입에서 직접 8서클이라는 얘기가 나오자 모두 기뻐했다. "마법을 시험해봐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쿠드, 부탁한다." 쿠드는 한 발 앞으로 나와 입속으로 뭔가를 읊조리며 공을 빚듯이 양손을 부드럽게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바닥 사이에는 보일 듯 말듯 검은색 구체가생겨났다. 계속 소으로 그 주위를 쓰다듬으며 구체를 키운 그는, 구체가 아이 주먹만해지자 힘차게 허공으로 띄어 올렸다. 구체는 살짝살짝 일렁였지만 대체로 구형을 유지하며 떠 있었다. 마나가 응집되어 있는 그 구체는 쿠드와 마찬가지로 8서클이거나 그보다 높은 서클이 아니면 깰 수 없는 것이었다. 쿠드가 하는 양을 지켜보단 데이그랜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며 구체 앞으로 다가갔다. 미약한 마나를 뿜어 허? 貶?높이 뜬 구체를 자기 양손으로 서서히 끌어온 그는 마나를 양손에 집중시킨 후 구체 주위로 양손을 빙빙 돌리며 마나를 가했다. 쿠드와 같은 8서클 마법사로 설정한 상태에서 지나치게 빨리 구체를 깨면 안되었기에 그는 일부러 뜸을 들였다. 약 1난(10분) 정도 지나자 구체는 데이그랜의 양손 안에서 부르르 떨며 물결치기 시작했다. 구경하던 사람들 모두 손에 땀으 쥐었다. 조금 더 지나자 구체는 이제심하게 요동쳤다. 데이그랜이 마지막으로 힘을 주자 구체는 밝은 빛을 사방에 뿌리며 폭발음을 냈다. 그러고 나니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데이그랜은 이마에 일부러 만들어 놓았던 땀방울을 우아하게 손수건으로 닦으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쿠드는 흥분하여 바로 대답했다. "이 엘프청년은 틀림없이 8서클입니다! 아, 청년이라고 불러서 죄송합니다. 워낙 젊어 보여서...... 그대들의 연령으로는 아직 청년 맞지요?" 데이그랜은 매속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300살이면 엘프 나이로는 아직 미숙한 청년일 따름입니다." 모두들 겸손한 그의 태도에 호감으 느꼈다. 다만 지난 하루 반 동안 데이그랜의 자화자찬에 시달렸단 라빌만은 속으로 치를 떨며 가증스러워했다. "조건을 말해보라. 그대를 고용하고 싶구나." 테룬은 짧은 시험결과에 만족하여 바로 물었다. "글쎄요. 보수는 넉넉할수록 좋고, 이왕이면 황궁 안에 머무는게 편할 것 같습니다. 물론 바깥출입은 자유롭게 허락해주셔야 하고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걸 좋아하니 황실 수석 요리사가 요리한 음식을 먹고 싶군요. 다른건 필요없습니다. 아, 그리고 제가 공격마법을 쓸 줄은 알지만 인간들 사이의 분쟁에 적극적으로 끼어드는건 곤란하니, 가능한 마법공격을 사용 하는 일 말고는 다른 일을 시켜주시지 않으면 감사히겠습니다. 끝으로, 고용기간은 제가 그만 두겠다고 할때까지로 정햇으면 좋겠습니다." 어렵지 않은 합리적인 조건이었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래, 그렇다면 내일부터 바로 황궁으로 들어오라. 환영하겠다." 결정을 내린 테룬은 주위의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샤이트 경, 쿠드 경, 그대들은 잠시 나가주겠는가? 이들과 따로 할 말이 있다." 샤이트는 의혹의 눈길을 던졌지만 곧 쿠드를 끌고 조용히 물러갔다. 문이 닫히자 테룬은 라빌과 라비언에게 손짓했다. "이리 가까이 오라." 두 엘프를 바라보며 테룬은 입을 열었다. "사실 저들 모르게 따로 부탁할 게 있다." 데이그랜과 라빌은 모두 그 소녀 이야기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긴장했다. 테룬의 눈빛은 과거를 회상하며 아련해졌다. "내가 가장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 있을 때 나를 구해주었던 소녀가 있다. 흑성에 귀양가 있던 그때, 그 소녀는 어디에선가 나타나고 살 의욕을 잃던 내게 생에 대한 욕구를 불어넣어 주고, 아무도 고칠 수 없다는 내 몸에 자기 생명의 일부를 희생해서 고쳐주었다. 그녀 덕분에 나는 이 자리에 있게 되었지. 그 은혜를 내가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테룬의 목소리는 떨렸다. "처음엔 모든게 다 잘 될걸로 생각했다. 나는 황제로 즉위하고, 그녀는 황제가 된 네게 찾아와 자신이 베푼 은혜에 대한 보답을 받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며, 나는 그녀와 함께 행복해질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고 내 밤은 악몽으로 어지럽혀졌지. 나는 과거의 죄에 새로운 죄를 쌓아올렸고, 내손에 묻은 피, 내 핏속의 분노, 내 가슴 속의 고통은 매일 같이 나를 괴롭혔다. 황제의 옥좌는 가시로 짠 것 같고 왕관은 내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았지." 라빌과 데이그랜은 고통에 가득착 테룬의 말을 경청했다. "나는 살아가야겠다는 결심을 버리지 않을 것이야. 그녀의 생명이 내 몸 안에 흐르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살아갈수는 있겠지만, 행복해지지는 못하겠지." 테룬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실날같은 희망이지만, 나는 그녀가 내 몸을 고쳐준 것처럼, 그리고 내게 삶의 의욕을 되찾아준 것 처럼, 이번에는 내게 다시 행복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아니, 그녀가 옆에 있어주기만 하면, 나는 그녀가 내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더라도 행복할 것 같아. 그러니 그대들은 내가 그녀를 찾는 걸 도와주지 않겠나?" 감동잘하기 잘하는 라빌은 어느새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였다. 그 소녀가 바로 데이그랜이 찾는 소녀라는 것도 잊고 라빌은 외쳤다. "폐하,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다 하겠어요!" 황당해하며 라빌을 쳐다보던 데이그랜은 좀 더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사람을 찾으려면 뭔가 단서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테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열여석 내지 열일곱 정도 되는 소녀로, 이름은 렌이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키는 대락 5보탕 반(160센티미터) 정도 되고, 눈도 머리도 검은 색이다. 내 어머니인 펠리시티 전 황후와 ? 錚璨?정도로 닮았다. 엄청난 미모지.. 아마 서제국 영토 내에 있을 것이고, 곁에 마법사가 한 명 붙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마법사의 힘에 의해 외모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그 마법사가 렌을 괴롭히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이다. 마법에는 마법으로 상대할 수밖에 없기 그대 라비언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테룬은 그 마법사가 서제국 황제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엘프들에게도 서제국 황제는 두려운 존재였기에 그 이야기를 한다면 두 엘프가 몸을 사릴 우려가 있었다. 라빌은 아무것도 몰랐지만 이미 도청마법으로 사정을 파악해놓은 데이그랜은 테룬이 외 그 사실을 숨기는지 짐작했다. "다른 특징은 없습니까?" 이제부터는 정말로 그가 모르는 정보가 나올 차례였다. 데이그랜은 집중해서 테룬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이 세상 사람들이 쓰지 않는 신기한 치료술을 썼다. 자신을 치료사라고 자처했는데, 몸 안에 쌓아둔 청량하면서도 따뜻한 기를 환자에게 불어넣기도 하고, 또 작은 침 여러 개를 사람 몸 여기저기 꽂기도 하면서 사람을 치료했지. 어떤 치유마법보다도 신기했지만 그녀 스스로는 치유마법이 아니라고 하더군." 라빌은 테룬의 말을 듣자마자 비명을 지를 뻔했으나 곧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데이그랜은 다행히도 테룬에게 집중하고 있어 라빌에게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또 다른 특징은요?" "밝고 긍정적이지만 눈에는 슬픔을 띠고 있고 동정심이 가득하지. 호기심이 많아 워든지 열심히 배우려 하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도와주지 못해 안달을 해. 그녀와 함께 있는 건 겨우 한 달 남짓이지만 내가 그녀의 본성을 잘못 보지는 않았을 거야. 참으로 현명하고 착한 소녀야." 테룬은 흑성에서 함께 산책을 나누던 그때를 회상하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런데 왜 그녀를 찾는 걸 신하들에게는 비밀로 하는 것입니까?" 그 물음에 테룬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엘프인 그대가 얼마나 인간 세계의 사정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동제국에 얼마 전 불상사가 일어났던건 대략이나마 들었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내가 찾고 있는 그렌이라는 소녀는 놀랍게도 펠리시티 전 황후와 무척 닯았다. 전 황후가 일으켰던 파란을 생생히 기억하는 신하들에게 전 황후와 닯은 소녀가 등장한다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지. 그리고 사실 렌은 아무런 배경도 사회적 지위도 없어서 객관적으로 볼 때 최고의 황후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신하들은 아마도 나를 말리고 싶을 거아. 그리고 제국에 힘을 보태줄 수 있는 강한 공국의 공녀를 황후로 맞기를 바랄 것이다. 그들은렌을 제 2황후로 삼는 것조차 반대할 거야." 테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신하들이야. 나라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고 충성스럽지. 수상인 샤이트는 내가 명령하면 아마도 열심히 렌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진심을 알아. 제국의 황실에 실질적인 버팀목이 될 수 있는 황후를 맞이하는 것이 그의 목표인데, 내가 명령한다고 해서 그가 전신전력으로 렌을 찾을까? 사실 그는 이미 한 번 내게 그녀가 죽었다고 보고한 적이 있어. 그때 그는 이미 그녀가 살아있을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있었으면서도 내게 그걸 숨겼지. 내 불안정한 못브을 보고 비로소 그는 그녀가 살아 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는 얼버무렸지만 나는 그때 그의 본심을 읽었어. 그를 탓할 생각은 없다. 내가 수상이라도 렌이 달갑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정말로 그녀가 필요해... 그녀가 그리워..... 황제가 되어서 이런 작은 소망하나 이룰 수 없느 건가?" 테룬의 목소리는 점점 잠겨들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데이그랜은 다시 물었다. "내가 약간의 예산과 인력을 배당할 테니 간간이 서제국 내로 들어가 렌의 행방을 탐문해보도록 하라. 그녀는 감추려 해도 스스로 빛이 나는 존재이니, 아까 내가 말한 특징들을 종합해가며 잘 찾아보면 찾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을거이다. 다만 신하들이쓸데없이 간섭하지 않게끔 너무 표 나게 찾지는 말도록. 8서클인 그대의 마력이라면 적절히 서제국과 동제국을 왕래하면서 잘 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물론 국가대사가 닥치면 그것이 우선이겠지만. 그리고 그녀의 곁에 있는 마법사는상당히 강한 자일 가능성이 크니 조심하도록 하라. 그가 그녀의 행적을 감추고 다닐 수도 있고 그녀의 자유를 속박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 마법사 또한 나처럼 그녀의 매력에 반해 따라다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데이그랜은 예상대로 일이 풀려나가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장 이 지리에서 얻은 정보-렌이 특이한 치료술을 쓴다는 것-만 해도 크나큰 가치가 있었지만, 도와줄 인력까지 생기면 이제 얼마 후에는 렌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생겼다. 물론 렌을 찾았을 때 그녀를 테룬에게 데려다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라빌." 라빌은 넋을 놓고 있다가 테룬이 부르자 깜짝 놀라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예, 예? " "그대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을 하니 언젠가 렌과 마추질 수도 있을 것이다. 환자들을 치료할 때 그들에게 아까 내가 묘사했던 것과 같은 방법을 쓰는 치료사가 있는지 물어봐다오." "예..." "이만 물러가도 좋다." 테룬의 손짓으로 데이그랜과 라빌은 조용히 집무실을 나왔다. 라빌은 여관으로 돌아오자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물었다. "저.. 흑룡이시여,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일이 잘 풀려 기분이 좋아진 데이그랜은 흔쾌히 대답했다. "그래, 뭐든지 물어봐, 뭐가 궁금한데?" "그 렌이라는 소녀요. 찾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무슨 실험에 쓴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데이그랜은 어제 라빌에게 대강 지어서 설명했던 내용을 떠올리며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 건데요?" 데이그랜은 잠깐 생각했다. 라빌이 큰 도움을 주었으니 어느정도 사실을 알려줘도 무방할 갓 같았다. 처음 렘을 이 세계로 끌어올 때부터 예상했던 결과를 그는 슬쩍 내비쳤다. "글쎄, 아마도 결국 목숨을 잃게 되지 않을까?" "목숨을 잃는 다고요?" 반문했던 라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뭐야, 동정하는 거냐? 너는 정말 대부분의 엘프들과는 다르군. 보통 엘프들은 자기 생사나 타인의 생사에 모두 무심한데 말이야. 어차피 인간들은 100년도 채 못살고 죽어버리지 않나? 100년도 안 되는 그 인생 동안에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온갖 추악한 짓을 다 하니, 그 짧은 인생이 조금더 일찍 끝난다고 해서 애통해할건 없어. 너희 엘프들처럼 천 년을 산다면 모를까." "예, 그건 그렇죠.." 라빌은 멍하니 대꾸했다. 그러다가 라빌은 고개를 쳐들어 데이그랜에게 부탁했다. "저, 마이리아 시에 환자들을 좀 남겨두고 왔는데, 제 힘으로 마법진 호핑을 해서 마이리아 시로 돌아가려면 적어도 엿새는 걸리것 같거든요. 죄송하지만 저를 바로 마이리아 시로 이동시켜주시면 안 될까요?" "허 참,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다면서 어제는 그렇게 늑장을 부린가여?" 라빌은 약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저, 환자들에게 빨리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는데 티우사님의 일 때문에 잊고 있었습니다." 라빌이 티우사의 이야기를 거론하자 데이그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쁘게 일처리를 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슬픔이 되살아났다. 그녀도 슬퍼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약간의 동정심이 생겼다. "언제 이동시켜주면 되겠는가?" "지금 당장요." 그 말에 데이그랜은 기분이 상한 듯 투덜거렸다. "내가 일 시킬 때는 한없이 늑장을 부리다가 자기가 급하니까 부지런을 떨어? 쳇, 그런 식으로 선택적 게으름을 피우면 나한테 미움을 받을 거야." 라빌을 웃기려고 일부러 유쾌한 투로 비꼰 곳이데, 라빌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데이그랜은 김이 샜다.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그래, 좋아, 네가 바라는 대로 마이리아 시로 보내주마. 거기 서봐." 라빌은 얼마 안 되는 짐을 들고 데이그랜이 시키는 대로 방 한 가운데 자리잡고 섰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그때까지 잘 지내도록. 그리고 애송이 황제가 말한 대로 사람들을 치유하다가 렌이 라는 소녀를 만나가던 동제국 황실에는 알리지 말고 나한테만 알리도록해." "예, 데이그랜님." "아, 참, 마이리아 시의 드워프들에게 드래곤의 명령이니 렌을 찾는 데 협조하라고 전해줘." "예" 데이그랜은 검은 빛으로 넘실거리는 물결 가은 것을 라빌에게 쏘아보냈다. 그 검은 물결은 라빌의 온몸을 빈틈없이 감쌌따. 잠시후 그 속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가 곧 사라졌다. 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데이그랜은 검은 물결을 거둬들였다. '훗, 나처럼 수월하게 대륙간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자는 용들 중에도 없을거야.' 데이그랜은 흡족해했다. 데이그랜의 힘으로 마이리아 시 근교까지 순간이동된 라빌은 평소답지 않게 근거리 순간이동을 거듭 써가며 급히 렌과 카엔이 묵고 있더 여관으로 향했다. 해가 밝게 빛나고 있었으나 라빌이 이 마이리아 시를 떴던 동안 비가 많이 왔었는지 아직 도시 곳곳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여관 주인은 한편으로는 반가워하고 한편으로는 원망하는 기색으로 라빌을 맞았다. "아이고, 라빌님! 마이리아 시에 큰일이 있엇는데 이제야 오시면 어쩌십니까?! 라빌님이 계셨으면 기적의 소녀 레이님께서 훨씬 수월하게 환자를 보셨을 텐데요!" 라빌은 의아해하면서 되물었다. "기적의 소녀라고요? 큰일이라고요? 데체 무슨 말씀이세요?" 여관 주인은 침을 튀겨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아 글쎄, 라빌님께서 사라지시자마자 여기 마이리아 시의 빈민구역에 푸른 죽음 병이 퍼졌지 뭡니까? 지금까지 간간이 생겼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엄청나게 퍼졌지요. 빈민구역 사람들 중에 자기나 가족이 그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라? 薦?자신이 없는 동안 그런 큰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자 하얗게 질렸다. "그래서요? 어떻게 되었나요? 가엾게도 많이 죽었겠죠? 아아, 고치는 방법은 몰라도 환자들 곁에 제가 있었어야 했는데!" 라빌의 말에 여관 주인은 활짝 웃으며 그간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 했다. "근데 고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있더라니까요. 여기 묵으셨던 레이님, 그 평범하게생긴 아가씨요, 그 아가씨가 일행인 마법사님, 그러니까 그 칼린님이라는 분과 함께 폐쇄된 빈민구역 안으로 들어가 지금까지 아무도 모르던 신기한 방법으로 그 엄청나게 많은 환자들을 닥치는 대로 치료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마법사님 또한 맹활약을 하셨지요. 5서클 마법사로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시면서 수많은 환자들을 이동시키셨으니까요." "환자가 얼마나 발생했는데요?" "빈민구역 내에서 총 3.400명의 환자가 발생했는데, 레이님이 빈민구역 안으로 들어가시기 전에는 이틀 만에 500명의 환자가 발생해서 그중 300명이 죽었지만, 레이님이 치료하시기 시작한 후에는 닷헤 동안 2,900명의 환자 중에 겨우 80명만이 죽었답니다. 세상에, 푸른 죽음 병이 퍼졌는데 겨우 서른 명 중 한명 밖에 안죽었다니, 이런 기적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여관 주인이 말을 잠깐 멈춘 사이에 라빌은 레이, 아니 렌의 행적을 물어보려 했으니, 여관 주인은 스스로의 이야기에 도취되어 다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부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레이님은 치료를 하다가 죽은 아이도 살리셨어요! 절대 가짜나 사기행각이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증인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답니다! 빈민구역 폐쇄가 풀리고 거기 사람들이 나오자마자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서로 침을 튀겨가며 이야기 하는데, 세상에, 저는 마법 중에 그런 마법이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너무 신기해서 그 목격자들을 아예 이 여관으로 불러다가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얘기하게 했다니까요! 물론 이 여관이 바로 레이님이 머무시던 여관이라고 선전도 하긴 했지만요." "그래서요? 그 다음에는요?" "레이님은 그 아이를 살리시고 나서 힘을 너무 많이 쓰셨는지 쓰러지셨다가 다음 날 일어나셨느데, 그 놀라운 이야기가 그 사이에 순식같에 황궁에까지 퍼졌는지, 황궁에서 환자들을 돕기위해 마법사들이 파견되고 물자도 내려오고, 그 살아난 아이는 기적의 아이 라고 해서 황궁으로 데려갔답니다. 레이님은 정신을 차리신 후 마법사들을 지휘해가며 계속 빈민구역 환자들을 구호하셨지요." "정말 다행이네요." 라빌은 기쁨에 겨워 눈물을 글썽였다." "그게 다가 아니라니까요! 아무튼 더 있어요! 다들 비가 많이 와서 그렇다고들 하는데, 아무튼 빈민구역 환자들이 다 나아갈 무렵, 이번에는 푸른 죽음 병이 중류구역에 까지 퍼졋지 뭡니까! 순식간에 무시무시하게 많은 환자들이 픽픽 쓰러지느데, 하이고, 제 마누라가 그 망할 놈의 병에 걸려 설사를 하더라고요. 눈앞은 캄캄하고 어찌할 줄은 모르겠고, 차라리 제가 대신 아팠으면 싶고, 아이고, 아무튼 뭐라고 말을 할수 없더라니까요. 이런 대머리에 뚱땡이도 그저 좋다는 순둥이 마누라인데....." "그런데요?" "그런데 소식을 들으신 레이님께서 마법사들을 이글고 혜상같이 나타나셔서 척척척 환자를 고치시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환자들이 옮겨지고 보살핌을 받은 후 2파잔도 지나지않아 눈이 퀭하던 환자들이 멀쩡해지지 뭡니까! 마누라가 제 손을 잡고 '여보, 이제 저 살아난거 같아요!' 할때 얼마나 뭉클하던지.........." "중류구역에선 환자가 얼마나 발생해서 얼마나 죽었나요?" "그러니까 통틀어서 2,000 여 명의 환자가 생겨서 그중 스물 네명 만 죽었답니다. 죽은 사람들도 대부분 죽을 때가 다 된 노인네들이나 원래 약한 어린애, 환자들이었고요. 그동안 레이님께 빈민구역과 중류구역에서 맹활약하신 덕분에 마이리아 시민들은 평생 다 못 갚을 크나큰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레이님이 아니었다면 5,500명의 환자 중에 적어도 3,000명은 죽었을 테지요. 이런 고마울 데가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여관 주인은 자기 말에 스스로 감동했는지 연신 눈물을 찍어냈다. 라빌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치유행을 다니면서 푸른 죽음 병에 걸린 사람들과 여러 번 마주쳤던 기억을 떠올렸다. 끝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그녀가 해줄수 있는 것은 그저 몸을 닦아주고 추워한느 사람들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겨울 여신의 사제를 데려다가 임종의 기도를 베풀어주게 하는 것뿐이었다. 사람들이 아무 도움도 되어주지 못하는 자신을 애타는 눈길로 바라보며 구원을 바랄 때의 그 안타까움은 아직도생생했다. 치유마법사로서 가장 괴로운 순간이었다. 그런데 레이가 그 병을 고쳤다니, 라빌은 절대로 레이, 아니 렌을 죽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다시한번 다짐 했다. "지금 레이님은 어디 가야 만나? ?수 있죠?" "아, 지금 이번에 사망한 환자들을 위해 겨울 여신의 사제들이 겨울 여신의 신전앞에서 합동 위령제를 지낸다는데, 아마 거기 가시면 뵐수 있을 겁니다. 이번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레이님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는 사람들로 지금 거기는 인산인해일 겁니다. 저도 가보고 싶었지만, 여관을 비울 수가 없어서 마누라를 대신 보냈죠." "고맙습니다! 저 그리고 가볼께요!" 라빌은 여관 주인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이리아 시 토박이로서 엘프에게 익숙한 여관 주인은 엘프가 저렇게 서두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지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했다. 겨울 여신의 신전은 마이리아 시 중류구역 중 비교적 외진 곳에 있고, 교모도 봄 여신의 신전에 비해 현저하게 작았다. 사람들은 장례식을 위해서 사제를 초빙할 때에만 겨울 여신의 신전을 찾았고, 평소에는 행여 죽음의 불운이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 일불러라도 멀리 돌아갔다. 그러나 지금 겨울 여신의 신전 앞은 일찍이 없었던 엄청난 인파로 붐볐다. 평범한 시민들은 물론, 그런 자리에도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마이리아 시의 시장 딜루나 데 마이리아와 그 가족, 시장 가문에 못지않는 귀족들, 대상인들, 테리미즈에서 파견된 치유마법사들까지 모두 그자리에 나와 있었다. 라빌은 순간이동으로 겨울 여신의 신전앞에 도착하자 마자 사람들에게 레이님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모두들 고개를 저었다. 집단위령제에 당연히 나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안 보인다는 것이다. 그녀가 이런 자리에 안 나올리 없다고 생각한 라빌은 닥치는대로 이 사람 저사람 붙잡고 하나하나 얼굴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한 명씩 확인해서는 언제 다 확인할지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라빌을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자꾸만 방해하는 바람에 렌을 찾는 것이 더욱 힘들어졌다. 멀리 보이는 단상에서는 벌써 위령제의 마지막 단계가 진행되고 있었다. 라빌은 조급해졌다. 그때 누군가가 라빌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엘프님, 저기 어떤 언니가 엘프님을 찾는데,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어린 아이였다. "누가 날 찾는다고?" "으응....... 저보다 요만큼 큰 언니가요. 그 옆에 조보다 이만큼 큰 오빠도 있던데요." 아무래도 렌과 칼란-그것도 본명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인 것 같았다. " 그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데요?" "저를 따라오세요." 아이는 종종걸음으로 사람들을 헤치며 앞서나갔다. 라빌은 자신에게 인사하는 사람드을 뿌리치며 아이를 따라갔다. 아이는 라빌이 서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좁은 골목길앞에서 걸음을 멈췄따. "저 안에 있어요. 그럼 안녕." 아이는 종종거리며 뛰어가 버렸다. 골목 안에는 두건을 쓴 남녀가 담 옆에 숨어 위령제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자는 라빌이 나타나자 마자 반색하며 두건을 벗었다. 렌이었다. "라빌님! 이렇게 다시 뵙게 되는군요!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 아까부터 저를 찾으시는 걸 봤지만 지금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감당할수 없기에 궁여지책으로 여기 오시게 한 거에요!" 라빌은 렌을 보자 가슴이 벅차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왜 말씀이 없으세요? 고향에 볼일이 있다고 그러셨느데 일은 잘 처리하셨나요? 저도 그 사이에 여기에서 많은 일을 겪었어요. 사람을 고치기도 하고, 잃기도 하고, 정말 힘드었어요." 렌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많이 울었는지 렌의 눈은 벌써 퉁퉁부어 있었다. "렌님.." "네?" 무심코 대답했던 렌은 조금 지나서야 라빌이 자신을 본명으로 불럿다는 사실을 깨닫고 숨이 멎었다. 렌 옆에 서 있던 카엔도 놀라 두건을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라빌은 절박하게 외쳤다. "렌님! 어서 빨리 도망치셔야 해요! 드래곤이, 흑룡이 렌을 찾고 있어요! 렌님의 목숨이 위험해요! 어서 빨리요!" < 4권에서 계속 > 꿀과자 만드는 방법 꿀과자의 창시자 디오룬 반의 8대손 코룬 데 반이 후대를 위해 남기다. * 기밀 엄수 요망 * 반 가문의 후손, 혹은 그로부터 허락받지 않은 자가 이 조리법을 볼 경우 그에게 대지 신의 저주가 있을지어다. * 재료 * 약 40 개분 박력분 60카로벤(1카로벤은 5그램임), 버터 30카로벤, 분당 20카로벤, 베이킹파우더 1카로벤, 바닐라향 약간, 꿀(카로딘 대공국 산 특등급) 2분의 1컵, 계란 1개, 덩어리 초콜릿(가당) 10카로벤, 5서클 마법사 (빙계마법에 강한자) 반죽 / 재료 중량 : 일반 쿠키 사이즈로 약 40 개 분 * 만드는 법 * 01. 버터, 박력분, 베이킹파우더, 바닐린파우더를 넣고 비비면서 섞는다. 02. 분당을 넣고 고루 섞는다. 03. 계란을 넣고 반죽한다. 04. 차가운 곳에서 1.5~2파잔 (3~4)시간 ? ㅅ?휴지시킨다. 05. 초콜릿은 중탕하여 녹인다. 06 빙계마법사로 하여금 꿀을 차갑게 얼리게 한다. 07. 언꿀에 초콜릿을 입힌 후 다시 얼린다. ( 빙계마법의 지속시간은 1.25난(12분 30초)으로 하고, 크기는 동제국 10실버 은화 정도면 적당함) 08. 꿀과 초콜릿이 부서지지 않도록 반죽을 입힌다. 09. 오븐에 넣어 180℃에서 1.3난 (13분)동안 굽는다. 10. 완성된 쿠키 위에 식용꽃이나 과일을 장식한다. * 주의 사항 * 1. 반죽이 너무 치대면 바삭바삭한 맛이 덜해지므로 부슬부슬하게 섞도록 한다. 2. 꿀보다 초콜릿이 두꺼우면 꿀의풍미가 손상되므로 초콜릿을 지나치게 많이 입히지 않는다. 3. 완성된 쿠키는 중간에 누르면 꿀이 새어나오니 먹기 직전까기 건드리지 않고 차가운 곳에 보관한다. 4. 빙계마법사들은 대부분 성질이 더러우니 잘 구슬려야 한다. * 렌이 코룬 데 반으로부터 입수하여 비밀유지를 위해 시간과 온도만을 이계의 단위로 수정함 < 3권 중반부터의 타이핑 후기 > 죄짓는 기분으로 타이핑을 하니 더욱 힘이 드는군여... (무식하게 일일이 타이핑해가면서 하려니 영... ) 이 책의 저자 한도현님께 죄송스럽기 그지 없구여.. 그냥 아무생각없이 어쩌다가 푸르나에서 건져서 찾아서 본것이 너무 맘에 들어서 멋대로 뒷부분을 쳐서 이렇게 올리게되었네여... 죄송해여.. 부디 용서를 구해여... 콜레라에 닥쳤을때의 느낌이 대충 '타임슬립 닥터 진'이라는 만화를 본 탓인지... 조금은 묘한 느낌이 생기더군여 ^^; 그쪽에서도 어쩌다가 과거로 오게 된 뇌과의사가 메이지 시대 - 료마가 있었으니 신선조도 있었겠고.. 막말이 맞을련지두.. ^^;- 인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시대를 누비면서 자신의 의술을 펼치지만 다만 과거의 전염병에 관한 역사을 알고 콜레라에 미리 대비해 링거를 준비해두는 것에서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는 정도일라낭.... 의학만화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꽤 추천해주고싶은 만화에요 ^^ ( 누가 그 만화좀 스캔 해서 올려줘여 ㅠ.ㅠ ) 그리구.. 이 꿀과자 만드는 방법 보신분들이 많을텐데.. 저두 포함해서 말이져... 대지 신의 저주를 어찌 감당하면 좋죠 ㅠ.ㅠ 치료사 렌 4 권 - 과거의 죄는 긴 그림자를 남긴다 - 1장 전염병, 그 후 2장 저주받은 도시로 3장 과거의 죄는 긴 그림자를 남긴다 지나가는 이야기 기억을 지운 어느 여인에 관하여 4장 추적의 끝 5장 대결 외전 꿀과자의 탄생과 발전에 얽힌 우여곡절 1 장 전염병, 그 후 카엔은 렌이 기력을 잃고 잠들어 다음날 오후 깨어날 때까지 많은 일을 했다. 그는 먼저 황궁으로 돌아가 페람 공작을 불렀다. 언제나처럼 페람 공작은 카엔 앞에 도달하자마자 머리를 땅에 대고 넢죽 없드렸다. 그러나 정신없이 보통 사람들을 만나며 보낸 지난 이틀간의 경험 탓인지 카엔은 페람 공작의 자세가 눈에 설었다. "몸을 일으키라. 지금 나는 본 모습을 감추고 있으니 내 쪽을 쳐다보아도 상관없다." 페람은 카엔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감히 황제를 쳐다볼 수 없어 페람은 고개를 숙인 채 눈길을 피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힐끗 황제의 모습을 곁눈질했다. 황제가 은보랏빛 머리카락에 은보랏빛 눈동자를 지녓다는 은밀한 소문이 있었으나, 지금 황제의 머리색은 그냥 평범한 회색이었다. "마이리아 시 빈민가에 푸른 죽음 볌이 퍼지고 있다. 그대는 알고 있었는가?" 며칠 전 어느 마법사의 보고서에서 읽은 것 같기도 했지만 잘 기억나지 않아 페람은 식은땀을 흘렸다. "망극하옵니다." 카엔은 별달리 화내지 않고 물었다. "마이리아 시 말고 푸른 죽음이 퍼지고 있는 곳이 또 있는가?" "예, 코스티라 시와 그 인근에서 이천여명 정도 발병해서 벌써 사백 명 정도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프리아 공작령에서도 상당히 대규모로 발생했다는 보고가 며칠 전에 통신구를 통해 들어왔습니다. 변명을 드려 송구하오나, 마이리아 시는 자치시라서 아무래도 보고가 늦고 내용도 엉성한 편입니다." "치료는 어떻게 하고 있나?" "특별한 치료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치료법은 모두 효과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어서요." 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코스티라 시, 남프리아 공작령, 마이리아 시의 마법사들을 파견하라. 마법사는 이동마법에 강한 자로 6서클 내외면 적당할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환자를 수송케하라. 그리고 겨울 여신의 사제들도 함께 이동시켜 화자 간호를 맡도록 하라." "하지만 아무리 그리 한들........." 카엔이 페람을 쳐다보자 페람은 황제의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치료법은 있다. 제국 내에 널리 알려야 한다. 푸? ?죽음은 물과 음식을 끓여 먹고 손을 깨끗이 씻으면 예방할 수 있고, 이미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물 1 피타 당 소금 한 차 스푼, 설탕 네 차 스푼을 녹여 계속 마시게 하면 대부분 낫는다. 자세한 것은 마이리아 시 빈민가에서 환자를 구호 중인 겨울 여신의 사제들과 레이라는 치료사에게 묻도록 하라." 페람은 치료사라는 말에 몸을 움찔했다. 저번에 나와림 안딘 소동이 벌어졌을때 그는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된 렌 파즈의 이력을 샅샅이 조사했었다. 분명히 그때 렌의 특기는 치료술이었다. "그래, 맞다. 렌이 바로 푸른 죽음을 고치고 있는 치료사이다. 레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지. 물론 가장마법을 써서 본래의 미모도 감추고 있고. 그녀가 알려준 방법대로 하면 푸른 죽음은 확실히 낫는다." 카엔은 페람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의 마음을 읽고 먼저 대답했다. "그, 그게 참말이십니까?" 자기도 모르게 반신반의하는 말이 튀어나오자 페람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다시 엎드려 머리를 쿵쿵 찧었다. "감히 폐하의 말씀을 의심하다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카엔은 귀챃은 듯 손을 저었다. "되었다. 일어나라. 아무튼 그녀의 말대로 하면 틀림없이 병은 낫는다. 지금 6서클 마법사 중 동원 가능한 자가 몇명이나 되지?" "에.. 국정 수행에 필요불가결한 중요업무를 맡은 마법사들을 제외하고 나면 대력 도시별로 열 다섯 명씩은 파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7서클 이상이라도 파견하겠습니다." 카엔은 조금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7서클 이상이 올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근거리 순간 이동이 대부분이니 마법력이 센 한명보다는 적당한 마법력을 지닌 여려 명이 낫다. 7서클이 빠지나가면 공백이 클 테니 6서클 마법사만 파견하라. 그들 모두와 겨울 여신의 사제들을 먼저 마이리아 시로 보내 렌에게서 치료법에 관한 설명을 듣도록 하고, 그 다음 3분의 1을 그곳에 남기고 나머지는 코스티라 시와 남프리아 공작령으로 파견하도록 하라." 카엔의 말에 페람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폐하, 그 렌이라는 소녀는 지금까지 폐하와 함께 있었던 것입니까? 마이리아 시에서요?" 페람은 황제의 진노를 각오하고 질문을 던진 것이었으나 황제는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그렇다." "그렇다면 그녀는 폐하의 정체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까?" 카엔은 쓸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페람은 다시 물었다. "폐하,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간단한 물음이었다. 그러나 카엔은 페람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생각을 읽었다. 폐하께서 그 소녀를 그토록 아끼신다면 언제까지 비밀을 유지해가며 함께 다니시는 게 쉽지 않으실텐데. 그 소녀는 뒤늦게 진실이 밝혀질 경우 더 큰 충격을 받을 거야. 한시도 피하지 못하고 마음을 읽힌다는 게 어디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인가. 폐하께서 그저 그녀를 데리고 잠깐 장난치시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내가 보기엔 폐하의 마음은 아무래도 그녀를 사랑하시는 거라면 지금처럼 하셔서는 안되는데.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역시 그대는 정말로 비상하군. 맞다.. 나는 렌을 사랑한다." 카엔은 한숨을 토해내듯 나직한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폐.. 폐하!" 페람은 말문이 막혔다. 경악한 그는 자기도 모르게 황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똑바로 쳐다보는 황제의 모습이었다. 원래는 은보랏빛이었겠지만 칙칙하게 가라앉은 머리카락, 원래는 은보랏빛이었을 테지만 그저 회색으로 보이는 눈동자, 장연한 이목구비이지만 왠지 희미하고 기억에 남지 않는 외모.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뚫고 분명히 보이는 눈 속의 고통.... 그동안 언제나 전설 속의 신이나 괴물처럼만 여겨졌던 황제는 그 순간 사람으로 보였다. 아무리 엄청난 마법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사람의 마음을 자유자재로 읽는다 하더라도, 사랑의 고통에 떠는 황제는 그저 자신과 똑같은 인간일 뿐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페람은 황제에게로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의 무례를 깨닫고 멈춰 섰다. "고맙다." 카엔은 페람이 자신을 비웃지 않고 그저 안타까워한다는 걸 감사히 여겼다. 역시 그가 뽑은 수상다웠다. "폐하, 신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페람은 충심을 담아 물었다. "그저 내가 지시한 대로 충실히 따라주면 된다.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물샐틈없이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예산과 인력이 모자라면 무한정 배정해서라도 한 명이라도 더 살리도록 하라. 그리고 황제의 은덕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구했다는 소문도 퍼뜨리면 좋겠지." 마지막 말을 덧붙인 후 카엔은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고, 페람은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웃음을 지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멋있게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마찬가지였다. "아, 그리고 마이리아 자치시에는 많은 개혁이 필요한 것 같더군. 플로인을 보내 그곳 시장 딜루나 데 마? 見?틸“?경고하고, 자치권 일부를 박탈하도록 하라. 시정에 대한 제국의 감사권을 확대하고, 예산편성권과 결산권도 다시 제국으로 환수하라. 마이리아 시는 지나칠 정도로 귀족 위주로 운영되어왔다. 이제는 통제할 때가 되었다." 페람은 황제의 말에 가슴이 떨려왔다. 이 일을 계기로 이제 황제가 본격적으로 정무를 보기 시작하다는 것이 만천하에 알려질 것이고, 그동안 황자게 완전히 정무에서 손을 뗀 것으로 알고 기고만장해 있던 귀족파들은 설 땅을 잃을 것이다. 더이상 '그림자 황제' 따위의 망발을 하는 자느 없으리라. "훗, 그림자 황제라는 말은 나도 들어봤다. 아니, 들어본 게 아니라 마음을 읽었지. 주란트 공작, 쿠니 백작, 보네이 후작. 로이스 백작, 살르프 자작..... 아, 다 읊기도 귀찮군. 그자들은 황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해. 그러니 걱정 마라." 카엔은 차갑게 말하자 페람은 다시 오싹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황제가 자신의 편이 라닌게, 아니 자신이 황제의 편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를 절감했다. "마이리아 시의 밀정이 그곳 빈민가에서 벌어지는 독특한 치료 행위를 파악하고 통신구를 이용해 황궁에 보고했으며, 황궁에서는 보고받은 즉시 새로운 치료법을 배워 백성들을 구호하기 위해 마법사들을 파련하게 된 거라고 해두면 큰 의심은 사지 않을 것이다." 카엔은 주의사항을 이르고 말을 마쳤다. "폐하, 폐하께서 당분간 정체를 밝히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차라리 마법사나 사제들을 파견하는 건 포기하시고 그냥 덮어두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마법사들과 사제들은 호기심이 많아서 렌님께 이것저것 캐물을 텐데요." 페람의 말에 카엔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회한을 담아 대답했다. "그녀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야. 하지만 나는 그녀가 사람을 살리려는걸 방해할 수밖에 없었어. 그대신 내가 해줄수 있는 일은 그 정도다.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린다면 그녀는 기뻐할 것이다." 카엔은 물러가라고 신짓했고, 페람은 조용히 뒷걸음쳐서 물러갔다. 수상집무실로 돌아가면서 페람은 황자게 얼마나 불행한 사람인가, 그렇지만 얼마 전까지에 비해 현재의 황제는 얼마나 인간적으로 보이는가에 관해 다시 한번 생각에 잠겼다. 마이리아 시의 현 시장 딜루나 데 마이리아는 우울한 중년이었다. 그녀의 저택은 쾌적하고 우아했으며 그녀가 다스리는 마잉리아 시는 부유했지만 그 어떤 것도 잃어버린 젊음을 돌려줄 수는 없었다. 하프 엘프인 그녀의조상들은 수백년을 살았다고 하던데, 그 엘프 조상의피는 수십 대에 걸쳐 인간과 통혼하면서 다 희석되었는지 퍼석하고 주름투성이인 그녀의 얼굴은 같은 또래의 추한 부인들과 하등의 차이가 없었다. 거울을 보던 그녀는 한숨을 쉬며 최고급 주름살 제거제로 알려진 나이팅게일 똥을 담은 미스릴 케이스를 끌어당겼따. 마른 낙엽같은 손으로 나이팅게일 똥을 눈가와 입가에 꼼꼼히 바른 후 그녀는 다시 얼굴 전체에 수분크림을 펴 발랐다. 열중해서 화장하던 그녀는 누군가가 방문을 똑똑 두드리자 눈살을 찌푸렸다. 아침 화장 시간에 방해받는 걸 싫어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가 없을 텐데, 감히 누구아. "무슨 일이냐?" 딜루나는 날카롭게 물었다. "시장님, 어서 빨리 접견실로 내려오십시오!" 가내 보좌관 츠바이아 였다. 다급한 목소리가 보통 일이 아닌듯 했다. 그녀는 허락도 받지않은 채 문을 열고 뛰다시피 방으로 들어왔다. 딜루나는 불쾌감을 담고 츠바이아를 째려보았다. 일부러 못생긴 보좌관을 골랐건만 자신보다 열 살 남짓 어린 츠바이아는 젊음 그 하나 만으로도 자신보다 빛낫다. "내가 아침 화장 때에는 방해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츠바이아는 평소라면 딜루나의 노여움에 움찔했을 테지만 지금은 딜루나가 아무리 새된 소리로 고함을 쳐도 꼼짝하지 않고 황급히 말했다. "황궁에서, 황궁에서 8서클 마법사 플로인님께서 오셨습니다!" 딜루나는 벌떡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일로? 황궁은 그동안 우리 시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는데?" "저도 모릅니다. 아무튼 빨리 채비하시지요." 딜루나는 그때까지 손에 들고 있던 크림 통을 던지다시피 내려놓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불안감, 초조감 , 온갖 좋지 않은 예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마이리아 경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아시다시피 지금 시내에는 안 계십니다." 츠바이아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딜루나는 츠바이아가 마음속으로 고소해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지우지 않았다. 모계로 시장 지위가 이어지는 마이리아 시에서 시장의 남편들은 아내의 성을 따르고 경의 호칭을 받았다. 이따금 대상인의 자제들도 많았으나. 자기 가문의 상속권을 포기해야 하기 땜누에 차남인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마이리아 경'들은 적극적으로 시장에 관여해왔고 그 아내는 허수아비 시장에 불과했지만 딜루나는 달랐다. 권력욕과 소유욕의 화신인 그녀는 남편에게 권력을 순순히 양도하지 않았다. 귀족파와 결탁하여 마이리아 시의 자치권을 조금씩, 조금씩 늘려가는 짜릿한 맛이란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웠다. 권력을 바라고 장가들었던 남편은 기대가 배신당하자 다른 방법으로 그녀에게 복수했다. 그는 툭하면 마이리아 시를 떠나 다른 여자들을 만났다. 딜루나 또한 맞바람을 피웠지만. 하루하루 늙어가는 지금 자신의 아름다움보다 권력과 재력을 찬양하는 젊은 남자들과 놀아나는 것만으로는 그녀의 마음속 공허함이 달래질 리 만무했다. "됐다! 그 양반이 있은들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딜루나는 가운에 팔을 꽤고 아랫층으로 내려갔다. 플로인은 침착하고 냉정한 표정으로 접견실 소파에 앉아있다가 딜루나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 가볍게 목례했다. 그의 지위로 볼 때 예법에 어긋나지 않지만 자치시의 시장에 대한 인사로는 무례해 보일 수도 있는 태도였다. 플로인과는 칠 년 전 황궁에서 열린 연회에서 만난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는 7서클에 불과했는데 어느새 8서클 마법사가 되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마법을 익히는 자들은 대체로 보통 마법사들보다 천천히 나이를 먹기에 플로인의 외모는 오래 전에 만났을 당시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동안 권력의 핵심에서 활약해온 덕인지 그에게서는 은근한 위엄이 풍겨 나왔다. "시장님, 아침 일찍 예고도 없이 방문하는 무례를 저지른데 대해 사죄드립니다." 플로인은 우아하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괜찮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신지요?" 딜루나는 신경질적으로 응대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물었다. "이곳 마이리아 시의 빈민 구역에 엄청난 규모의 전염병이 발행한 것을 알고 계십니까?" "아, 푸른 죽음 말이군요? 엄청난 규모란 말씀은 다소 과장인듯 합니다만........ 원래 빈민구역에서는 늘 푸른 죽음이 퍼졋다가 사라지곤 하지요. 이번에 발생한 것도 그런 연례행사일 뿐입니다. 그건 다 그들이 신의 은총을 받지 못해서 생기는 질병이니 제 힘으로도 어쩔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딜루나는 플로인이 빈민구역의 전염병같은 사소한 문제를 들고 나오자 완전히 침착함을 되찾아 부드럽게 응대했다. "예상대로 시장님께서는 별로 관심이 없으시군요. 하지만 자애로우신 황제 폐하께서는 그렇지 않으셔서, 이곳의 불행을 전해 들으시자마자 안타까워하시며 마법사들과 사제들을 파견해 그들을 구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딜루나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폐하께서요..?" "예 그렇습니다." 딜루나는 날카롷베 외쳤다. "폐하께서 그런 명을 내리시다니, 믿을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정무에 손을 놓으셨다는 건 테라미즈넨 시골의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인데, 지금 플로인님께서는 혹시 수상 각하의 명을 폐하의 명이라 사칭하시는게 아닙니까?! 그리고 마이리아 시는 자치시입니다! 제국의 관원이 마이리아 시에서 공무를 보기 위해서는 제 허락이 필합니다!" 플로인의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다. "안타깝지만 시장님의 염원과는 다르게,황제 폐하께서는 얼마 전부터 다시 정무를 보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명은 폐하께서 직적 내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다른 칙령 또한 내리셨습니다. 앞으로 마이리아 시에 대한 감사권, 예산 편성권, 결산권을 모두 제국이 행사할 것입니다." 딜루나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누구 맘대로요? 우리 제국에는 법도 없습니까? 테라지미즈넨 제국 건립 때부터 마이리아 시의 자치권은 신성불가침이 아니었습니까? 지금 막가자는 건가요?" 플로인은 조롱하듯 느릿느릿한 말투로 대답했다. "제국법에 따르면 마이리아 시의 시장이 동의할 때에는 자치권을 포기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까? 아, 읽어드릴까요?" 플로인은 소매 속에서 메모 한장을 꺼내 느릿하게 읽었다. "지방 자치법 제 25조 제 1항, 위의 자치권은 제국이 비상상황에 처한 경우, 자체단체의 수장이 동의하는 경우, 당해 자치단체에 거주하는 성년자중 5분의 4가 자치권 포기에 찬성하는 경우 제국에 복귀한다. 시장님께서도 익히 알고 계시는 조항이지요? 저는 시장님께서 순순히 동의해주실 것으로 믿어마지 않습니다." 딜루나는 이제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동의하다니, 제가 미쳣다고 동의한답 말입니까? 플로인님, 그대는 전부터 황제파였지요? 지금 귀족파로 알려진 저를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게 아닙니까? 페람 공작을 믿고 이러시는 건가요? 그동안 손하나 까딱 못하던 페람 공작을 믿고 이러시느 거라면 오산입니다! 우리 귀족파를 깔보지 마십시오!!" 플로인은 측은하다는 듯 딜루나를 쳐다보다가 소매 속에서 다시 뭔가를 꺼냇다. "이걸 읽어드릴테니 한 번 들어보시지요." 딜루나는 소리를 지르다 말고 멈췄다. "뭐, 뭐에요?" 플로인은 딜루나의 불안감 어린 시선은아랑곳하지 않고 또 다른 메모를 읽어내려갔다. "아아, 이 파렴치한 양반은 어디 가서 계집년을 끼고 있기에 통 집에 안 오는 거야? 차라리 시시껄렁한 일이라도 맡겨서 붙잡아 두는게 나을 뻔했어. 수십명의 젊은 애인보다는 변변한 남편이 나은 법인데.. 젊어지는 비법 같은 건 없나? 왜 남자는 천천히 늙고 여자만 빨리 늙는 거야? 나이팅게일 똥이 거의 떨어졌네. 또 멜룬 상회에 주문해야겠어. 아무래도 지점장이 바가지 씌우는것 같단 말야. 벨루나 언니는 나이팅게일 똥에 아무 효험도 없다고 그랬었는데. 아, 하필 언니생각이 떠오르다니. 언니에게 꿀과자를 먹이던 일이 생각나버렸잖아. 그 독은 정말 잘들었지. 하지만 모두들 독인 줄은 모르고 병인 줄로만 알았으니. 가엾은 언니.... 하지만 어쩔수 없었어. 시장 자리는 하나였으니.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동제국 황후도 꿀과자에 독을 탔다고 그랬지? 내 독이랑 비슷한 거였나? 그 여자는 어쩌다 들통이 났지?" 플로인 은 거기까지 읽고 겸연쩍게 웃었다. 지긋한 나이인 그가 딜루나의 뾰족한 목소리를 흉내 내어 메모를 읽으니 스스로 우스웠던 모양이었다. "어.. 어떻게....." 딜루나는 그 전날 오후 집무실에서 잠시 멍하니 떠올렸던 생각이 고스란히 플로인의 입에서 읊어지자 하얗게 질렷다. "이제 폐하의 건재하심을 믿겠습니까? 자치권 이양에 동의하시지요?" 딜루나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법사들은 그날 새벽 느닷없이 떨어진 황제의 명에 다들 혼비백산하여 황궁으로 모였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일반관료들보다 훨씬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기에-사실 엄청난 마법력으로 일국의 황제가 되어 수배 년 동안 불노불사하며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모든 마법사의 꿈이 아니겠는가- 뜻밖의 칙령에 놀라면서도 이번 일을 잘해내어 인정받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들 사이에서는 이번 칙령이 페람 공작이 아닌 황제로 부터 직접 나온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한편 겨울 여신의 사제장은 각지로 보낼 사제 오십 명을 뽑느라 새벽잠을 설쳤다. 특별히 사람의 신체를 다루는 데 재주가 있는 사제들-주로 시체를 염하는 전문가들-로만 일시에 오십 명을 뽑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사제장은 이번 일이 오랫동안 기고만장해온 봄 여신의 사제들을 꺾을 기회가 되리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비교적 일찍 모였지만 사제들을 모으는데 다소시간이 걸렸기에, 그들이 모두 모여 마이리아 시로 이동한 것은 대략 5파잔 (오전 10시) 무렵이었다. 6서클 마법사 50명, 여사제 50명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가우데 그들을 둘러싼 7서클 마법사들이 일시에 마법을 쏘아 거대규모의 이동마법을 시전하는 광경은 수도 테리미즈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장관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은 페람 공작과 그의 비서 두 명밖에 없었다. 마법사들과 사제들이 마이리아 시로 떠날 무렵, 주란트 공작가의 지하의 비밀 회의실에서 때 아닌 회의가 열렸다. 상석에 앉은 주란트 공작의 표정은 침울했다. 쿠니 백작, 보네이 후작, 로이스 백작, 살르프 자작, 테일 백작 등 그자리에 모인 다른 귀족들은 주란트 공작이 입을 열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스티언, 말 좀 해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이런 아침에 긴급회의라니, 답답해 미치겠네!" 침묵을 견디다 못해 쿠니 백작이 주란트 공자을 을 다그쳤다. 주란트 공작은 천천히 무거운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자네들, 저번 나와림 안딘 소동 때 나가 했던 말 기억하나?" 주란트 공작의 물음에 귀족들은 한마디씩 답했다. "그래 페람 공작의 자작극이라고 했었지. 귀족파를 견제하기 위해 황제가 친히 나와림 안딘을 지명한 것처럼 꾸민 거라고." "내가 보기에도 그랬어. 나와림 안딘으로 뽑힌 아이가 사실은 여자아이였다는 거라든지, 우리 정보망으로 아무리 탐문해도 그 아이의 과거를 추적할 수 없었다든지, 수상한 점이 한두가자가 아니었거든." 동료들이 저마다 의견을 말하자 주란트 공작은 길게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대 그게 자작극이 아닌 것 같네, 도저히 황제의 마력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 사람들은 경악했다. "뭐라고?" "그게 정말인가?" "잘못 안 거 아닌가?" 주란트 공작은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늘 새벽, 마이리아 시의 연락책에게서 연락이 왔네. 기억하지? 딜루나 데 마이리아 와 귀족파간의 협정에 따라 마이리아 시에 파견했던 6서클 마법사 젠킨 말이야. 그가 통신구로 연락해왔어. 오늘 새벅에 플로인이 시장관저로 와서 마이리아 시에 마법사와 겨울 여신의 사제들을 보내 푸른 죽음 환자들을 치료함과 동시에 마이리아 시의 자치권 대부분을 환수하겠다고 통보했다는군." "그 도도한 딜루나가 순순히 응했다던가?" "물론 저항했지. 그랬더니 플로인이 어떻게 했는지 아나? 품에서 딜루나가 전날 오후에 모음속으로 떠올렸던 생각을 그대로 옮겨 적은 쪽지를 줄줄 읽어주었다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말 인가?" "그렇다네, 딜루나는 그 쪽지의 내용을 듣고 하얗게 질려 자치권 이양에 동의했다고 하네." 보이네 수작이 책상을 탕 치며 소리쳤다. "믿을 수 없어! 우리 모두 분명히 듣지 않았다? 30년 전, 우리의 소중한 친구였던 코엘이 말해주지 않았나? '황제는 죽었어. 죽은거나 다름없어.' 그렇게 코엘이 열 번 스무 번 되뇌이던 걸 모두들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 않나? 그 말을 믿고 우리가 귀족파를 결성해 이날 이때까지 온 게 아닌가?" 물론 모두들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30년 전, 그들이 아직 황립 아카데미의 학생이었떤 그 시절, 그들 모두의 친구, 빛나는 태양같던 코엘이 어느날 갑자기 나와림 안단으로 지명되고, 열흘 후에 혼이 나간 채로 돌아왔던 그 일을 어덯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들 모두는 코엘을 보자 경악하고 분노했다. 펑펑 울며 코엘에게 어쩌다 이렇게 되였느냐고 황제가 무슨 짓을 했기에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대체 황제는 인간이냐고, 아니면 악마냐고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제대로 그들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그저 혼잣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코엘은 그때 힘없이 되뇌었다. '호아제는 죽었다.죽은거나 다름없어' 라고. 코엘은 그 말을 마치자 마자 완전히 넋나가 백치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복수를 맹세했다. 코엘의 중얼거림이 정확히 무슨뜻인지 그 당시에는 알수 없었다. 하지만, 그 후 황제가 일체의 정무에서 손을 뗀 점, 코엘이 황제에게 불려갈 무렵 이미 마법력이 7서클에 달했던 점, 그들이 황제에 대해 활활 불타오르는 분노와 역심을 품고 있다데도 아무 일이 없었던 점을 종합해 볼때, 그들은 황제가 방심하다가 코엘에게 마법공격을 받고 치명상을 입은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귀족파를 결성한 것은 그 추측이 확신이 굳어지게 된 때의 일이었다. 코엘의 일이 있고나서10년이 지나도 황제는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의 역심은 변함없건만 황제가 건재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가계를 잇거나 책임 있는 자리에 올라서 힘을 얻은 그들은 서서히 귀족파의 세력을 넓혀갔다. 지나치게 오랜 황제의 치세에 염증을 느끼고 황제의 긴긴 부재에 의아해하는 귀족들은 의외로 많았다. 그래서 그들의 설득은 생각했던 것보다 잘 먹혀들어갔다. "황제가 엄청난 마력을 지녔다고 하는데, 두 눈으로 그걸 똑돆히 본 사람이 있소? 다 수 백년 전 얘기 아니오?" "사람도 늙으면 힘이 빠지는데, 수백 년이 지났으니 황제 또한 마력이 없어지지 않겠소?" "당장 나를 보시오. 황제에 대항하는 세력을 키우는데도 아무 일도 없지 않소?"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수긍했고, 처음에는 미약했던 그들의 세력은 황제의 부재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이제는 황제파의 세력을 힘으로 누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지금 이때, 황제의 재출현이라니! "이제 어떻게 하지?" 사람들의 얼굴에 공포가 스쳐지나갔다. 주란트 공작은 침울하게 말했다. "우리에게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겠나?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는 수밖에... 그나마 지금 상황에서 최선이라면 모두 영지로 돌아가 자중하는 것 정도겠지. 나는 수도에 남아 있으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여차하면 내가 모든 걸 책임지겠네." 사람들의 얼굴에 비굴함과 미안함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자네가 그렇게 해준다면 우리는 안심하겠네." "역시 귀족파의 수장다우이." "자네만 믿겠네." 권력의 쓴맛과 단맛을 뼛속까지 아는 주란트공작이었지만,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니 저저로 조소가 나왔다. 저들이 과연 그때의 그 소년들이었는지 의심스러웠다. 30년 전, 소년들은 아케데미의 동급생이자 나와림이었던 코엘의 인품에 이끌려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주란트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 주란트 공작이 아버지에게 채찍질당해 고통스러워하고 있노라면 코엘은 눈물을 흘리며 그를 위로하곤 했다. 냉정하고 잔인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질려 친정으로 돌아가 버린 어미니에게서는 느낄수 없어는 따뜻한 우정이었다. 다른 소년들도 자신처럼 코엘에게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다. 코엘을 중심으로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친해졌고, 소년들과 코엘은 서로 평생 변치 말고 생사를 함께하자는 우정의 맹세를 했다. 그러나 우정의 맹세는 코엘이 황제에게 유린당해 미쳐버리면서 복수의 맹세로 변했고, 복수의 맹세는 다시 어느 순간 권력의 맹세로 변질 되었다. 황제의 부재가 길어지고 서제국의 통치권이라는 엄청난 고깃덩어리가손에 잡힐 듯 다가오자, 노희하게 닳고 닳아버린 친구들은 어느 순간 그저 권력이라는 고기를 다투는 탐욕스런 개가 되었다. 뭐, 주란트 공작 자신 또한 다를 바 없었다. 피는 못 속이는 법이었다. 그의 아버지처럼 그도 나이를 먹으며 냉정하고 잔인해졌다. 정신을 차리고 ? 릿?그도 그의 아버지처럼 자식을 채찍질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처럼 그도 불행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크리프도 자신처럼 불행했다. 유일하게 주란트 공작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그 모든 불행을 보상하고도 남을 정도의 엄청난 권력, 서제국의 황위가 그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황제가 건제하다니... 엄청난 좌절감이 밀려왔으나 주란트 공작은 용케 냉정을 유지했다. "서두르게. 황제의 마력이 그대로라면 우리에게 시간이 없어." 주란트 공작의 말에 모두들 부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빠져나가고 난 다음의 텅 빈 지하회의실은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웟다. 렌이 다음날 점심 무렵 마침내 일어났을 때에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카엔은 렌의 곁을 지키고 있다가 자세히 그동안 일어난 일을 설명해주었다. 전날 렌이 이샤를 살리자마자 기적에 관한소문은 한층 살이 붙어 순식간에 빈민구역 전체를 휩쓸었다. 수많은 숭배자가 렌이 보여준 기적에 감동하여 모여들었으며 환자들 또한 쇄도했다. 한때는 렌이 자기 목숨을 바쳐 이샤를 구했으며 렌은 다시 깨어나지 못할 거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그러자 루머를 듣고 한편에서는 숭배자들이 몰려와 렌의 쾌유를 빌고, 다른 한편에서는 환자들이 이제 어떻게 하면 좋으냐 아우성치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카엔과 보프, 그리고 비안은 사람들 앞에 나서서 렌은 무사하고, 다음날이면 깨어나서 모두들 잘 돌봐줄 거이며, 렌이 행한 일은 기적이 아니라 그냥 치료였다고 거듭 설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아다. 보프가 마구 화를 내고 카엔이 비밀스럽게 정신조작을 하고 나서야 사람들은 진정했다. ( 물론 카엔은 정신조작에 관한 부분은 렌에게 말하지 않아다.) 그리고 나서야 겨우 환자들을 돌볼 여유가 생겼다. 카엔을 비롯한 봉사자들은 렌이 잠든 동안 더 한층 힘을 내어 환자들을 구호했다. 렌이 가르쳐준 대로 했더니 거의 죽은 사람은 없었다. "거의 죽은 사람이 없었다고요?" 렌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예, 구백여명의 환자들이 추가로 왔는데 지금까지 그중 겨우 서른 한명만이 죽었습니다." "서른한 명이요?" 렌은 멍하니 바보처럼 되뇌었다. 겨우 서른한 명이라고? '겨우'라고? "여기까지 찾아올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빠지고 의식이 없어진 환자들은요?" 렌은 다시 물었다. 카엔은 속삭이듯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었어요. 그들은 사망자 집계도 못 했습니다. 그렇지만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은 최대한 살렸습니다." "구토를 해서 수액을 못 마시는 환자들은요?" "남구역에서 새로 발병한 환자들은 워낙 빨리 옮겨진 덕분에 구토가 심해지기 전에 대부분 수액을 섭취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구토가 이미 심해진 후 옮겨진 환자들은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그 서른한 명입니다." 카엔은 안타깝게 덧붙였다. "미안해요, 렌... 내가 어제 무리한 부탁을 하는 바람에...." '그리고 목숨을 바쳐 사람들을 구하려는 그대의 마음을 조작해 포기시키는 바람에....' 카엔은 뒷말을 조용히 삼켰다. 렌은 고개를 저었다.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아니에요. 카엔님의 부탁 때문이 아니에요. 그저 제가 냉정을 잃었기 때문이에요. 눈앞의 한 명을 살리지 말고 닥쳐올 환자 수십명을 살렸어야 했는데, 하지만 어덯게 그렇게 할 수 있었겠어요? 눈앞에서 사람이, 어린아이가 죽어가는데! 너무 다급해서 찬찬히 생각해볼 여유도 없었는데!" 카엔은 렌이 자책감이 빠지는 것을 보고 함께 괴로워했다. 그러다 그는 황급히 말했다. "렌,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황궁에서 조금 전에 사람들이 왔습니다." "황궁에서요? 혹시 우리들을 쫓아온 건가요?" 렌은 깜짝 놀랐다. "아닙니다. 렌이 행한 치료법에 관힌 소식이 황궁에 들어가서, 수상인 페람 공작이 마이리아 시와 다른 푸른 죽음 발발 지역의 환자들을 구호하기 위해 여기로 마법사들과 겨울 여신의 사제들을 파견 했습니다. 모두들 렌이 일어나기를 기다리 있어요. 렌은 그들을 신속하게 지도해서 사람들을 수송하고 치료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카엔의 말에 렌은 새로운 활력이 솟아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한시가 급하네요! 당장 그들을 모아주세요!" 마법사들과 겨울 여신의 사제들 백여 명은 벽돌공 길드회관 앞에 모여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초조하게 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초라한 고셍 푸른 죽음을 고칠 수 있는 탁월한 치료사가 있다는 걸 아직도 믿지 못하겠는지, 서로 웅성거리며 대체 어떤 사람이 나올지, 어떤 방법으로 고치라는 건지 궁금해하며 서로서로 의혹으 나누었다. 렌은 창박의 상황을 확인하고 서둘러 짤막하게 정명기를 운기했다. 아침이 아니라서 거의 기가 쌓이지 않았지만 기력을 회복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평범한 모습의 렉이 밖으로 나오자 그동안 사람들이 전해준 기덕같은 이야기를 듣고 기대에 부풀어 있던 마법사들과 사제들은 다소 실망했다. 그러나 렌은 침착하게 치료방법을 설명했다. 인체의 기본원리부터 시작해서 전염병이 퍼지는 원인,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버밖지 최대한 간략하면서도 알기 쉽게 설명하자, 무시하는 듯한 눈초리는 곧 존경으로 바뀌었다. 파견된 마법사 중에는 치유마법사들이 상당수 끼어있었고 사제들 또한 인체에 대해 문외한은 아니었다. 그들은 렌이 이야기하는 치료의 원리가 얼마나 새롭고 놀라운 것인지 알아볼 눈이 있었기에한층 더 감탄했다. 그들을 끌고 다니면서 수액 만드는 모습, 환자에게 먹이는 모습, 환자들을 돌보고 구토를 멈추게 하는 모습까지 차례로 보여주고, 마이리아 시에서 활동할 사람들을 추리고, 다시 남은 사람들을 둘로 나누어 각각 남프리아 공작령과 코스티라 시로 떠나보내고 나서야 렌은 겨우 한숨을 돌렸다. 그동안 카엔은 가능한 한 마법사들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애쓰며, 마법사들이나 사제드이 렌에게 정체를 캐묻거나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는지 은밀히 감시했다. 모두들 치료법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어 우려했던 것처럼 난처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으나 ,딱 한번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 카엔이 만들어둔 길드회관과 향락의 집을 연결하는 마법진이 마법사 중의 한명의 주의를 끌었고, 하필이면 그때 렌도 그 마법사의 옆에 있었다. 카엔은 모르는 척 다른 곳을 보며 딴 전을 피우면서도 온 신경은 그쪽으로 집중했다. "치료시님, 이 마법진은 대체 어느 마법사가 만든 겁니까?" "어느 아는 마법사가요." 렌도 카엔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있는 줄 알기에-물론 렌은 카엔이 황궁에 고용된 마법사이면서 자기를 데리고 탈출했다는 것 때문에 신분을 숨기려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일부러 모호하게 대답했다. "정말 훌륭한 솜씨인데요! 6서클인 저도 이 정도 마법진을 그리려면 좀 더 수련을 쌓아야 하는데, 이마법진을 그린 마법사느 최소한 7서클은 되어야겠군요!" 그의 말에 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했다. 렌의 의문에는 아랑곳없이 마법사는 계속 물었다. "마법아이템을 쓴 건가요?" "예, 그렇지만 정확히는 잘 몰라요." "시동어는 뭐지요?" "엘리오카에니넨이요" "엘리오카에니넨? 엘리오카에니넨? 어디보자, 그건...." 마법사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누리디안어를해석하려는 마법사의 의중을 읽은 카엔은 혼비백산하여 그에게 망각마법을 날렸기 때문이다. "저기 마법사님?" 마법사가 멍하니 있지 렌은 어리둥절해서 그를흔들었다. "네?아, 안녕하세요." 마법사는 렌을 향해 배시시 웃으며 의미없는 인사를 던진 후 총총히 다른 데로 갔고,렌은 다시한 번 의아해했다. 카엔은 등을 돌린 채 식은 땀을 닦았다. 용케 위기를 넘겼지만, 좀 전의 그 마법사가 '카엔을 사랑해' 하고 두 번이나 말한 것을 생각하면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환자를 제대로 돌볼 줄 아는 인력이 오고 카엔과 길드원끼리 고군분투 할때보다 환자의 수송이 현격하게 용이해지자 위급환자의 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환자들은 특히 남구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지만 그들은 발병한 때로부터 반 파잔 (한 시간)도 안 되어 바로바로 이동되었고 6서클 마법사들이 마법력과 황궁에서 내려준 물자를 이용해 만든 천막병원 덕분에 수용장소 문제도 해결되었다. 마법사들과 사제들은 실제로 환자들이 낫는 것을 보면서 더욱 의욕이 생겨 열심히 일했다. 마법사와 피부 관리 마법을 시전했던 마법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렌은 그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지만, 곧 저들이 자신의 현재 모습을 알아볼 리 없다고 스스로 달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헤어드라이어와 피부 관리를 할 때에는 그렇게 심드렁해 보였던 마법사들이 지금은 땀을 흘려가며 환자수송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니 렌은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웃다가 렌은 놀랐다. 왜 자기 눈으로 보지 않은 것은 덜 슬프게 느껴질까. 눈앞에 한 명이 죽을때는 그렇게슬펐는데 잠든 사이에 죽은 수십명의 일은 어느새 잊혀가고 있었다. 이렇게 무심해지면서, 덜 아프게 되면서 살아가는 걸까. 살아가는 건 이렇게 잔인한일일까. 아니면 이렇게 살아갈수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일가. 그때 카엔이 다가왔다. 그는 마치 렌의 마음을 읽은 듯이 말했다. "살아 있다는 건 참 좋은 거지요?" "그래요." 렌은 엄청난 무게를 담아 대답하며 그의 손목을 꼭 잡았다. 다음날이 되자 발병환자의 수는 상당히 줄고, 그 다음날에는 현저히 줄었다. 초기에 치료를 받았던 환자들은 이미 회복되어 건강한 모습으로 나가고 새로 들어오는 화자는 거의 없어 공간에도 여유가 생겼다. 렌은 이제 전염병의 확산이 저지되었음을 확인했다. 길드원들의 얼굴에는 안도의 웃음이 감돌았다. 살아남은 자의 기쁨이 대기를 채웠다. 렌은 이제 겨우 한시름을 놓았? ? 그러나 그날 저녁 무렵부터 안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중류구역과 상류구역 일부에서도 푸른 죽음에 걸린 환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소문이 들려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길드회관에 갑자기 빛이 뻗어 나오더니 마법사 한 명이 나타났다. "여기 푸른 죽음을 고칠 수 잇는 치료사가 있다던데, 빨리 나오시오!" 마법사는 약간의 확성마법을 섞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보프가 뛰어나왔다. "누구요? 무슨 일이요?" 마법사는 보프를 위아래로 흝어보고 거만하게 말했다. "자네는 여기 길드장인가 보군. 나는 시장님의 특별보좌관이자 7서클 마법사인 오길이다. 치료사님은 어디계신가?" 보프와 함께 뛰어나온 렌은 마법사의 불손한 태도에 치를 떨었지만 처음 당해본 일이 아닌지 보프는 의외로 담담했다. "이분이 바로 그 치료사입니다." 마법사는 렌을 내려다보며 실망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아가씨가 그 기적의 치료사라고? 이런 어리고 평범한 소녀가?" 화를 꾹 참으며 렌은 대답했다. "그래요, 제가 맞습니다." 마법사는 통 믿을 수 없다는 듯 계속 렌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길드원들과 황궁에서 온 마법사들, 사제들이 주위에 모여 그녀가 바로 그 치료사라고 확이해주자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여기 계신 마법사들과 사제들을 모두 끌고 봄 여신의 신전으로 오시오. 시장님의 명령이오. 중류구역과 상류구역에 환자들이 생기고 있소. 한시바삐 치료해야만 하오." 길드원들은 즉시 분노에 찬 외침을 터뜨렸다. "아니, 우리들을 여기 가둬놓고서 떼로 죽어나가도 콧방귀도 안뀔 때는 언제고, 자기넫르이 아프니까 당장 치료사를 빼돌려? 그러고도 시장이야?!" "절대 그렇게는 못해! 빈민구역에 환자가 한 명도 안 남을 때까지 치료사님은 못 내드려!" 보통 같으면 7서클 마법사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지난 며칠간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현장을 직접 목격한 길드원들에게 무서울 것이 없었다. 오길은 당황했다. 그 광경을 보며 렌은 한발 앞으로 나섰다. 렌이 손을 들자 길드원들은 조용해졌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빈민구역 사람들도 역시 시장님의 시민이지요?" 렌의 질문이 뜻하는 바를 몰라 잠시 당황하던 오길은 석연치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소.." "지난 며칠간 여기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시장님께서는 무얼하셨죠?" 렌의 말에 찬동하는 함성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맞아!" "대체 뭘 한 거야!" 주위의 반응에 당황하던 오길이 소리를 질렀다. "무, 무엄하오! 이.. 이럴때가 아니오! 시장님의 막내따님마저 쓰러지셨단 말이오!" 렌은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흥정하는 것이 마음에들지 않았지만, 먼 나중을 생각한다면 얻을 수 있는 것은 지금 최대한 얻어야 했다. "시장님께서 직접 여기로 오셔서 사죄하시고 요구조건을 들어주시지 않는 한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저를 강제로 데려가신다 해도 저는 손하나 까딱하지 않겠습니다 렌은 냉정하게 말하고 등을 돌렸다. 길드원들의 함성이 마당에 울렸다. "그, 그렇다면 마법사님들과 사제님들이라도...." 오길은 더듬거리며 주위를 돌아보자 황궁에서 온 마법사 중 한 명이 대표로 나섰다. 렌에게 마법진에 관하여 물어본 그 마법사 였다. "저희는 여기로 올 때 기적의 치료사님, 그러니까 레이님의 명령에만 따르라고 지시를 받았습니다. 수상 각하께서 친해 내리신 지시입니다. 레이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한 이곳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차분하게 말하는 그의 태도에 오길은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 "알겠소! 모두 후회할 거요!" 그는 씩씩거리며 사라졌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중년 여자 한 명을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헝크러진 머리카락, 지쳐 보이는 모습, 단정치 못한 옷매무새의 그 여자는 놀랍게도 시장인 딜루나 데 마이리아였다. "내가 시장입니다! 누가 치료사인가요?" 그녀는 미친 듯이 외쳤다. 이틀 전 청천벽력과도 같은 자치권 이양 요구를 받고 이미 기력이 빠진 그녀는 정식 이양식 날짜가 한 달 정도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빈껍데기 같은 상태였다. 거기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의 발병은 이중의 타격을 주었다. 막내딸은 딜루나가 사실 이 세상에서 진심으로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또한 이 세상에서 딜루나를 사랑해주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딜루나를 닮아 벌써부터 권력에 대한 탐욕을 보이는 맏딸과 여자들 쫓아다니기에 바쁜 아들과는 달리 막내딸은 한없이 상냥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그런 막내딸이 일 파잔(두 시간) 전부터 설사와 구토를시작했다. 본래 그리 건강하지 못했던 터라 급속도로 쇠약해지고 있었다. 오길을 황급히 그 기적의 치료사라는 소녀를 데려오게 했으나 순순히 오지 않자, 딜루나는 허둥지둥 직접 온 것이다. 렌이 나서자 딜루나는 무릎을 꿇고 진흙바닥에 몸을 뭉개며 렌? ?손을 잡고 매달렸다. "우리 달을 살려줘요! 사과하라면 사과하고 기라면 길 테니! 어서 빨리 우리 막내를 구해줘요! 제발!" 미친 여자처럼 울부짖는 그녀의 모습에 사람들은 모두 당황했다. 렌은 애써 그녀를 일으켰다. "제정신이 아닌 엄마에게가 아니라 마이리아 시의 시장님께 묻겠습니다. 정말로 저들에게 미안합니까?" "그래요! 미안해요!" "저들도 사람이고 이 시의 시민인데 시장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저들을 내버려두셨죠?" "그래요! 내가 잘못했어요! 뭐든지 할게요! 제발 우리 막내를 살려줘요!" 딜루나는 렌의 손에 입을 맞추더니렌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지금 딜루나가 하는 사과가 진심일 리 없었다. 그저 딸의 목숨을 구하고 싶다는 일념에 아무 생각 없이 마음에도 없는 사과의 말을 외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평생 그녀는 그렇게 살아왔을 텐데. 렌은 한숨을 쉬었다. "시장님의 사죄보다 시장님이 저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실 것이지가 더 중요합니다. 다음 사항을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뭐를 하면 되죠?" "첫째, 빈민구역 내의 모든 길에 하수도를 파주시고, 이왕이면 모두 복개해주세요. 그리고 지금 있는 우물보다 훨씬 깊은 우물을 빈민구역 곳곳에 파주시고, 각 우물 주위는 지상의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꼼꼼하게 방수처리를 해주세요." 딜루나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지금 제게서 전염병 치료의요령을 배운 사람들이 많이 있고, 특히 겨울 여신의 사제 비아님께서는 상당 부분을 이해하셨으니, 빈민구역이든 어디든 시장님의 권한이 미치는 지역 내에서 전염병이 발발하면 그녀를 책임자로 삼고 시에서 일하는 모든 마법사들을 동원해 환자들을 치료해주세요. 지금처럼 무작정 폐쇄하지 마시고요." "알았어요. 들어주겠어요." "그와 별도로 시 전체를 치료한 데 대한 대가로 제게 치료비를 주세요." "좋아요. 그렇게 하겠어요." "황궁에서 파견되신 마법사님들이 증인이 되어주실 겁니다. 식언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이에요." "그렇다면 가겠습니다." 그 말에 딜루나는 안심하여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레은 돌로스 사제와 황궁에서 파견된 마법사와 사제를 각각 다것 명씩 남겨두고 빈민구역의 환자들을 돌보게 한 후 나머지 사람들을 데리고 중류구역으로 이동했다. 빈민들은 무척 아쉬워했으나 이미 눈앞에서 자신들을 위해 진행되는 협상과정을 지켜보았기에 더 이상 반발은 없었다. 중류구역과 상류구역에는 환자들을 수용할 만한 큰 건물들도 많고 여러 가지 여건이 빈민구역보다 나아 치료는 훨씬 수월했다. 환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으나 5일 정도 지나자 한풀 꺾이기 시작했고 노인과 아이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은 무사히 목숨을 건졌다. 무사히 나은 사람들 중에는 시장의 막내딸, 그리고 렌이 묵었던 여관 주인의 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죽은 사람도 있었다. 비안 사제의 연로한 아버지, 견습사제 밀라의 상관이었던 모니아, 그리고 구혼의 언덕 꼭대기에서 주스를 팔았던 유쾌한 주스 장수. 그렇게 돈을 밝히고 탐욕스러웠던 봄 여신의 사제 모니아는 병에 감염되자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그녀는 다른 사람보다 병이 빨리 진행되어 렌이 살펴볼 무렵에는 이미 손쓸 방도가 없었다. 사랑과 아름다움과 번영을 가져다준다던 봄 여신도 죽음에 직면한 그녀를 구하지는 못했다. 견습사제 밀라는 자신의 상관인 모니아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흐느꼈지만 렌은 오히려 모니아의 죽음보다는 밀라의 슬픔이 더 안타까웠다. 주스 장수는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희미했지만, 오렌지를 짜느라 누렇게 물든 손톱 끝부분을 보자 기억이 났다. 마이리아 시에서 첫날, 햇살 찬란하던 여름 아침에 렌은 그 손에서 주스를 받아 카엔과 나누어 마셨고, 그때 렌은 주스 장수의 손톱을 보며 무심코 '오렌지를 많이 짜면 손톱이 물드나 봐'라고 생각했었다. 혈색이 사라진 시체의 손톱은 더 샛노랗게 보여 조금 섬뜻했다.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마음은 슬퍼도 머리는 냉정해야 했다. 생명은 약하면서도 강하고 무한히 불가사의해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나 한정되어 있었다. 그저 안간힘을 쓸 따름이었다. 그 옆에서 카엔 또한 애썼다. 그는 잣니이 격리하고 있던 마음속의 성벽이 이제 완전히 무너져 내렸음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렌의 곁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카엔에게 다정한 웃음을 던지고 허물없이 말을 걸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엔이 렌을 짝사랑하여 쫓아다니는 걸로 알고 있었고, 그에게 음창한 농담을 던지기도 하고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에 대해 이런저런 충고도 해주면서 친숙하게 굴었다. 그들, 보통 사람들은 모두 가슴속에 온갖 추악함과 비열함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카엔은 그 속에서도 이따금씩 믿을 수 없이 아름답게 선의가 빛난다는 것을 배 워가는 중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추악함과 악착같음이 사실은 선의와 한 뿌리라는 걸 느껴가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환자를 치료해나가다 보니 어느 날 마침 마이리아 시 전 구역에 걸쳐 단 한 명의 환자도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치료가 시작된 후 딱 열하루만의 일이었다. 자칫하면 마이리아 시민 10만 명 중 3분의 1정도는 죽일 뻔했던 전염병은 적절한 초기치료와 대응조치로 5,500명만이 발병하여 결국 생각보다 훨씬 적은 4백 명의 희생자를 낸 후그렇게 물러갔다. 전염병사에 길이 남을 일이었다. 희생자가 많았기에 마이리아 시에서는 시의 예산으로 합동 위령제를 열기로 결정했다. 이번 전염병 치료에 큰 공을 세운 겨울 여신의 신전 앞 광장을 위령제 장소로 정하여 겨울 여신의 사제들이 주최하고 시가 협찬하는 엄청난 규모의 위령제였다. 렌과 카엔은 위령제를 보고 바로 떠나기로 했다. 일을 너무 크게 벌려놓아 정체가 밝혀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작정 떠날 수는 없었다. 마이리아 시에서 머문 시간은 한 달 남짓이었지만 많은 인연을 맺었기에 정리할 것도 많았다. 먼저 렌은 카엔과 함께 치료비를 받으러 딜루나 데 마이리아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시장관저에 없었다. 최근의 연달은 충격으로 휴양을 위해 인근 별장으로 가버렸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전해준 사람은 딜루나의 가내보좌관 츠바이아 였다. "치료사님, 마법사님, 어서오십시오. 저는 행정부시장 서리 츠바이아 데 밀리트 입니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츠바이아는 평범한 외모였지만 절도 있고 씩씩한 태도가 몸에 배어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온몸에서 발산하는 생기와 의욕이 그녀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행정부시장 서리요?" 렌이 의아한 듯 묻자 츠바이아는 힘찬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어제 일자로 행정부시장 서리에 임명되었습니다. 이제 자치권 이양식이 거행되면 서리가 아닌 정식 행정부시장이 되지요." 뜻밖의 말에 눈썹을 꿈틀하던 카엔은 츠바이아의 생각을 읽고 곧 사정을 파악했다. 플로인이 일처리를 제대로 한 것이다. 자치권의 이양으로 생기는 권력의 공백상태를 막기 위해 마이리아 시 내부에서 행정부시장을 임명한다는 것은 훌륭한 발상이었다. 사실 지금 츠바이아는 인생의 절정에 오른 듯 기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하급귀족의 딸로 태어나 자치시장의 가내봐좌관 자리까지 올랐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츠바이아는 목표를 더 높이 잡았다. 딜루나 데 마이리아의 온갖 변덕과 신경질을 꾹 참고 가내보좌관 일을 보면서 츠바이아는 착실히 마이리아 시의 사정을 파악해왔다. 기회는 기다리고 준비하는 자의 것이다. 그리고 츠바이아는 기회가 왔을 때 멋들어지게 그걸 잡았다. 츠바이어는 딜루나 데 마이리아에게 자치권 부분 박탈을 통고하고 돌아가려는 플로인을 붙잡고 자신의 능력과 소신을 보여주었다. 또한 외부에서 감독자를 파견하는 것보다 이미 시의 귀족을 부시장으로 임명하는 게 반발을 최소화하고 만사를 원만하게 진행시키는 길이라는 것을 설파했다. 나름대로 첩보망을 통해 츠바이아의 신상을 파악하고 페람 공작과 상의한 플로인은 마침내 어제 츠바이어를 행정부시장 서리로 임명했다. 그녀의 정치인생은 이제 비로소 궤도에 오르게 된 것이다. "뜻밖이군요. 밀리트라면 하급귀족에 불과한데 행정부시장에 임명되다니요. 더구나 마이리아 가문의 일족도 아닌 분이." 카엔은 그녀를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약간 멸시하는 태도로 물어보았다. 하지만 츠바이아는 화내거나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마법사님, 모든 고인 물은 썩습니다. 마이리아 시는 너무 오래 똑같은 체젣로 운영되다보니 이미 썩은 냄새가 온 천지에 진동할 정도입니다. 지금 우리테리미즈넨 제국 또한 변화없이 서서히 썩어가고 있지만 마이리아 시는 제국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썩어왔습니다. 사람들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역사가 변하는 이상, 정치체제도 그에 맞추어 변해야 합니다. 자발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결국 피가 흐르고 사람이 죽고 나서야 변합니다. 제가 임명된 것은 그런 비극을 막기 위한 의미있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카엔은 츠바이아의 대답에 흡족해했다. 개인적인 야심이 상당히 섞여 있기는 해도 그녀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다만 그는 서제국이 썩어가고 있다는 대목이 마음에 걸렸다. 역시 그런가... "저, 부시장님, 저희가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치료비를 청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둘 사이의 의미심정한 분위기를 깨뜨리며 렌이 말했다. 츠바이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드려야죠, 치료사님.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렌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적어도 350골드는 주셔야 겠는데요." 츠바이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약간 입술이 뒤틀며 말했 다. "치료사님이 해주신 일을 생각한다면 더 드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500골드라도 드렸을 거에요. 하지만 굳이 350골드를 청구하신다니 350골드만 받겠습니다." 그녀의 장난기를 알아채고 렌은 마주 미소지었다. "200골드로 깎으셨더라도 받았을 거예요." 둘은 함께 소리 높여 웃었다. 그러다 렌은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저, 부시장님, 시장님께서 제게 빈민구역의 상하수도 시설 정비와 전염병 구호체계를 확립을 약속하셨는데, 부시장님께서도 그게 성사되도록 힘써 주십시오. 만약에 제대로 되지 않으면 푸른 죽음이나 다른 전염병이 언제라로 다시 발생할 수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꼭 성사시킬 테니까요." 확신에 찬 츠바이아의 말에 렌은 마음이 놓였다. 돈을 챙긴 렌은 다시 카엔과 함께 길드회관으로 갔다. 이제 환자들도 다 나가고 예전처럼 돌아온 길드회관의 모습은 왠지 낮설었다. 빈민구역에서는 이제 더 이상 죽음의 냄새가 나지않고 길가에 시체들도 모두 치워졌기에 이곳에서의 악전고투는 어느새 꿈만 같았다. 보프는 렌과 카엔이 찾아가자 벌떡 일어나 반갑게 맞았다. "마법사님, 치료사 아가씨, 어서오십시오!" 렌은 싱긋 웃으며 보프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 치료비를 아직 못받앗는데요." 썰렁한 침묵이 잠시 방 안에 흘렀다. 보프는 잠시 당황해하다가 곧 회계담당 콜디를 불렀다. "에, 콜디! 콜디! 이리좀 와보게!" 콜디는 길드장의 부름에 서둘러 달려왔다. "예, 보프님." "저번 치료사 아가씨에게 얼마를 줬었지?" "10골드 23실버요." 렌은 재빨리 대답했다. "그건 다 실비로 썼어요. 치료비는 별도에요." 렌의 말에 보프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좋소,좋소, 아주 좋소, 그럼 얼마를 드리면 되오? " 렌은 머릿속으로 심각하게 계산하는 척했다. 그 옆에서 콜디는 초조하게 손을 비볐다. "80실버요." "80실버?" "네, 더는 깎아드릴 수는 없어요." 렌이 장난기 어린 말투로 덧붙이자 보프는 다시 한번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콜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돈을 가져왔다. 길드비가 완전히 떨어진 후 다시 한 번 모금을 했기에 지금 대략 2, 3 골드 정도의 잔액은 남아 있었다. 콜디는 상자에서 10실버 은화 여덟개를 골라 두 손으로 정중하게 렌에게 건넸다. "저희는 위령제가 끝나면 바로 떠나려고 해요." 렌의 말에 보프는 섭섭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아가씨와 마법사님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두 분이 구한 생명 모두가 두 분을 축복할 거요." 보프의 말에 카엔은 씁쓸한 웃음을 지엇다. 이곳에서 그가 구한 생명은 그의 손에 죽은 생명의 수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보프님, 정말 여러가지고 감사했습니다." 카엔은 그답지 않게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마법사가-비록 치료사와 같이 다니는 정체불명의 5서클 마법사라 하더라도- 평민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보프는 당황하여 맞절을 했다. 그러나 보프가 지금 받는 인사의 진정한 의미를 알았다면 기절초풍 했을 것이다. "보프님, 변치 마십시오. 그대는 이 세상에서 정말로 필요한 사람입니다." 카엔이 의미심정하게 말하자 보프는 머쓱해져서 웃었다. 그 옆에서 렌이 맞장구 쳤다. "그래요, 보프님처럼 훌륭한 분은 저도 몇 분 못봤어요. 보프님이 스무살만 젊었다면 저는 보프님께 시집갔을 거예요." 렌은 말을 마치자마자 보프의 뺨에 키스를 하고, 다시 그를 얼싸안았다. 카엔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졌다 다시 붉으륵푸르락해졌지만 렌은 울면서 작별인사를 나누느라 보지 못했다. 렌은 카엔과 함께 치료하는 동안 숙소로 썼던 겨울 여신의 신전으로 돌아와 이샤를 찾아갔다. 이샤는 카엔이 처음으로 구해달라고 부탁했던 그 아이로 부모가 모두 죽어 갈 곳이 없어진 이샤는 겨울 여신의 신전에서 콜레라로 쇠약해진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콜레라에서는 회복되었지만 폐병은 그대로라서 이샤는 여전히 기침을 하고 있었다. 렌은 부드럽게 이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샤, 이제 언니는 떠나야 해." 이샤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안 가시면 안돼요? 아님 저를 데려가시면 안 돼요?" 렌은 안타깝게 대답했다. "널 데려갈 수는 없어. 언니는 이 오빠랑 함께 앞으로도 계속 힘든 여행을 할 거거든. 어디 몸담을 데는 있니? 없으면 언니가 여기 사제님께 부탁해서 이곳에 머물도록 해줄게." "사실은요, 언니, 조금 전 황궁에서 오신 마법사님 한 분이 다녀가셨어요. 저를 황궁에서 보살펴주고 싶대요. 거기엔 훌륭한 치유마법사님도 여럿 계시고 여기보다 습해서 폐병에도 더 좋을 거래요." 사실 카엔이 페람 공작을 통해 비밀리에 명령한 것이었다. 레은 이샤를 위해 기뻐했다. "그래, 정말 훌륭한 치유마법사니이 계시지. 정말 잘 됐구나. 그래, 꼭 황궁으로 가도록 해. 내가 아무도 모르게 뭐 하나 적어줄 테니, 황립 아카데미에서 치유마법사 교수 로 계신 무난 하차크 교수님을 찾아가서 보여드려. 알았지?" "무난 하차크 교수님이요?" "그래, 8서클 마법사이시고 흰 머리에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에 웃음을 띠고 계신 아주 좋은 분이셔. 내가 적어주는 건 너를 낫게 할 방법이야. 비밀이니까 하차크 교수님 말고는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돼." 이샤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샤의 안색이 창백하고, 맥이 허하고 잦으며[虛數(허삭)], 미열이 있고, 기침을 하는 것으로 보아 이샤의 병은 평온하고 부드럽게 폐를 보호해주면서 장기간 치료하면 나을 수 있었다. 렌은 가감보폐탕(加減補肺湯)의 처방을 이쪽 세계의 식물 이름과 단위에 맞추어 적어주었다. 가감보폐탕의 원료 중 숙지황은 아예 이 세계에 없는 것이었지만, 렌은 하차크 교수님의 능력을 믿고 숙지황 만드는 방법을 꼼꼼하게 함께 적어놓았다. 이 세계에서 포이롯이라고 불리는 생지황을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려 숙지황으로 만드는 건 보통 일이 아니지만, 하차크 교수님이라면 기를 쓰고 학구열을 불태워 숙지황을 만들고야 말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렌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 약을 꾸준히 먹고, 거기다가 평소에 음식을 약간 맵게 먹도록해. 알았지? 그리고 엄지손가락 안쪽을 자주 자극해주고, 매사에 지나치게 슬퍼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그러면 언젠가는 나을 거야." "언제 떠나시는 거예요?" 렌은 이샤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아마도 내일 떠날 거야." 이샤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언니, 오빠, 정말 감사해요! 저 꼭 살아서 두 부의 은혜를 갚을게요! 저도 언니처럼 치료사가 될래요!" 이샤의 말을 듣자 렌은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보람을 느꼈다. 이샤는 다시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죠?" 이샤가 황궁으로 들어가는 이상 다시 만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렇지만 렌은 차마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 언젠가는... 이샤가 건강하고 튼튼하고 예쁘게 자라면 보러갈께." 카엔도 옆에서 이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꼭 다시 만날테니 아무 걱정 마라." 카엔은 일어나기 전 다 한 번 이샤의 심장에 손을 대어보았다. 약하지만 규칙적으로 팔딱팔딱 뛰는 심장박동에 카엔은 새삼 감동했다. 그가 두손으로 살려놓은 심장이었다. "살아나주어서 고맙구나, 이샤." 카엔은 자신에게 남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다시 일깨워준 아이의 뺨에 조용히 키스했다. 위령제 날인 걸 하늘이 알기라도 하는 건지 다음날은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여름이 건기인 마이리아 시에 장마가 내려 무수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비였다. 뜨거운 햇살이 물기를 증발시켜 대기는 습하고 무더웠다. 렌과 카엔은 사람들이 부르러 오기 전에 서둘러 짐을 싸 몰래 겨울 여신의 신전을 빠져나왔다. 감새패 증정 따위의 식순이 예정되어 있다고 했는데, 둘 다 그런 의례에 붙잡히는 건 딱 질색이었다. 둘은 광장 한가운데 마련된 단상에 잘 보일 만한 적당한 골목을 찾아 짐을 깔고 앉았다. 사람들은 눈에 띄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으슥한 장소여서 위령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위령제를 기다리며 둘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은 어쩌죠?" "아, 말이요? 여관 마굿간에 그대로 있을 텐데....... 위령제가 끝나면 살짝 여관에 들르죠. 거기에서 말과 함께 순간이동하면 될 겁니다." "카엔님, 이번에 정말 고생하셨죠? 카엔님은 깨끗하고 향기로운걸 좋아하신다는 건 저도 잘 알아요. 그런데 그 많은 토사물에 배설물에........... 어휴, 정말 괴로우셨을 거에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렌이 한 고생에 비하면....." "훗, 저두 실은 깨끗하고 향기로운 게 좋아요. 치료하면서 토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걸요. 그치만 환자를 치료하면서 토하면 어떻게 해요? 누가 그런 치료사를 믿겠어요? 그래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참았죠. 근데 남들 토하는 거 보고 있으면 정말 토하고 싶어져요." 렌이 담담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 있던 카엔이 문득 물었다. "렌, 렌은 왜 그렇게 다른 사람을 위하는 거죠? 보통은 자기 목숨을 던져서까지 남을 구하려고 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아닌 그냥 보통 환자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려고 하다니......." 렌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본래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답니다. 지금 사람들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 속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면 모두 깜짝 놀라고 측은히 여겨 구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니, 그렇게 함으로써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으려는 것도 아니고, 자기 무리와 친구들에게 명예롭게 되기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비난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금인사견유자장입어정), 皆有출?惻隱之心 (개유출척측은지심), 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 (비소이내교어유자지부모야), 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 (비소이요예어향당붕우야), 非惡其聲而然也 (비오기성이연야). < '출'자가 한자에 없어여ㅠ.ㅠ 굳이 더 알고 싶으시다면 맹자(孟子)의 공손추 장구 상(公孫丑章句 上編)에서 6장 불인인지심장(不忍人之心章) 에서 찾아보세여.. 워드에는 있는 한자인데 귀찮아서 워드패드로 하는데.... 옮기면 한자가 깨져서...ㅠ.ㅠ > 제가 읽은 책에 그런 구절이 있었지요. 그저 마음속 깊이에서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저저로 우러나는 거라고요. 카엔님이 정신없이 이샤를 살려달라고 부탁하신 것처럼요." 그러다 렌은 처연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저도 알아요. 제가 남들 같지 않다는 걸...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무작정 사람을 구하려고 하지는 않겠죠. 제가 훌륭해서 그런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것뿐이니까요. 왜 그런걸까요? 왜 그렇게까지 하고 싶어지는 걸까요?" 그러더니 렌을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상하지도 않아요! 저도 결국은 남들처럼 제 목숨일 더 소중한걸요! 그래서 제생명력으로 사람을 치료하려다가 포기해버린걸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렌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렌이 울음을 참고 있다는 걸 카엔은 알 수 있었다. 때맞추어 위령제를 알리는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카엔은 조용히 렌을 부축해 골목 가장자리로 데려갔다. 구슬픈 소리를 내는 관악기의 음률에 맞추어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베일을 쓴 겨울 여신의 사제들이 앞으로 나왔다. 사제들의 움직임은 장중하고 엄숙했다. 사제들은 통곡하는 울음소리를 내고, 소맷자락을 찢고, 다시 통곡하고, 또 소맷자락을 찢었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슬픔을 표현하는 겁니다." 카엔은 옆에서 조용히 설명했다. 사제들은 다시 둥글게 원을 지어 조용히 시계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그냥 도는 것이 아니라 차례로 원의 한가운데에 한얀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저것은 겨울 여신 케이아나 의 흰 눈을 상징합니다. 눈은 모든 고통과 추함과 기억을 덮어버리지요. 저렇게 눈을 뿌리는 동작을 통해 망자가 눈에 덮이듯 순결해져서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사제들은 이제 멈춰 섰다가 원형에서 일자형으로, 다시 브이(V)자 형으로 대열을 바꾸었다. 중앙에 서 있는 사제는 다름 아닌 비안이었다. 비안은 마이리아 시 겨울 여신의 신전에서 수석사제는 아니었지만 이번 일의 공로를 인정받아 위령제를 주재하게 되었다. 그녀는 한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광장의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다. 슬픔의 끝에는 기쁨이 고통의 끝에는 환희가 죽음의 끝에는 생명이 기다릴지니 겨울 여신 케이아나여, 이 지친 영혼을 인도하시어 안식의 뜰에서 쉬게 하시고 모든 괴로움을 잊게 하시고 순결한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확성구슬을 쓰고 있는지 비안 사제의 목소리는 광장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벽돌공 길드회관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릎을 꿇고 비안 사제와 함께 안식의 기도를 영송했다. 그 기도를 듣고 있으니 처음 죽었던 그 할머니 생각이 났다. 참았던 울음이 마침내 터져 나왔다. 그래도 울수 있다는건 좋은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슬퍼하며 울수 있다는건 더욱 좋은 일이었다. 흐느끼는 렌의 모습을 안타깝게 내려다보던 카엔은 렌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물었다. "렌의 세계에는 어떤 종교가 있었지요?" 예상대로 렌은 눈물을 닦고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동제국과 서제국의 종교가 다르듯, 제가 살던 곳에도 참으로 많은 종교가 있었죠. 하지만 제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종교는 두 개 에요." 렌은 아득한 기억을 더듬었다. "한 종교는, 세상에 신은 단 하나 밖에 없고 다른 신은 모두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어요." "신이 하나라고요?" 다신교밖에 모르는 카엔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다. "예, 그 종교는 사실 어느 변방 종족의 종교였어요. 부족신앙이었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어요." "어떻게요?" "그 종교에서는,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죄 속에서 태어나고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모두들 살아가면서 더 많은 죄를 범해서 죄 위에 죄를 쌓아올린다고 해요. 그 모든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단 한점의 죄도 짓지 않은 순결한 속죄양이 필요하다고 하고요. 하지만 인간 중에 그런 자는 없었어요. 그래서 신은 죄 없고 순결한 자신의 아들, 자신의 분신을 인간의 아기로 세상에 보내 세상사람 모두를 구원할 속죄양이 되게 했어요." 렌의 목소리는 점점 잠겨들었다. "그 아기는 처녀의 몸에서, 가장 비천한 환경에서 나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고난 속에서 자랐어요. 그가 어른이 된 후 에는 마침내 기적을 행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병든 사람을 고치고, 귀신들린 사람에게 귀신을 내쫓고,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살아나게 했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죠. 이민족의 치하에서 고통받던 그의 부족을 구해달라고 애걸했어요. 하지만 그는 거절했어요. 그가 가르친 것은 단 한 가지였어요. '서로 사랑하라!' 하지만 그건 정말 위험한 가르침이었어요. 사랑이란 정말 엄청난 거잖아요? 단순하고 정직한 가르침일수록 더 무서운 거잖아요?" 렌은 카엔을 쳐다보았고 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를 두려워한 사람들은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어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어요. 그는 양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이마에는 가시면류관이 씌어져 십자가에 매달렸어요.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신의 아들로서, 온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그렇게 죽어갔어요. 처절한 고통 속에서요. 그렇지만 그는 그 후 사흘 만에 부활했어요. 40 후에는 광휘 속에서 승천했고요." "참 아름다운 이야기군요." "네, 그 종교의 경전 중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참으로 감동적이죠?" 그 구절은 카엔의 마음에도 와 닿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카엔의 마음속으로 한 번 더 구절을 되뇌었다. 그의 짐을 덜어줄 무언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종교는요?" "제가 아는 다른 종교는 섬기는 신이 없어요." "섬기는 신이 없어도 종교라고요? 그게 어떻게 종교가 됩니까?" 카엔이 깜짝 놀라자 렌은 미소지었다. "그 종교의 창시자는 아까의 종교랑은 정 반대의 왕자였어요. 왕자의 어머니는 왕자를 낳은 후 7일 만에 죽었고, 그 아버지인 왕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왕자를 아껴 온갖 부귀영화 속에서 살게 하고 세상의 추함과 고통은 전혀 보지 못하게 했어요. 그래서 왕자는 세상이 좋은 것으로만 가득 차 있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어느 날 왕자는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을 보게 되었어요. 그가 가진 모든 좋은 것은 언젠가는 결국 사라지고 그 또한 늙고 병들어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는 그 숙명에 그 또한 매여 있었던 거에요. 그는 왕자의 지위와 부귀영화를 버리고 수행하러 떠나갔어요. 먹지도 자지도 않고 수련하며 그는 숙명을 떨쳐버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요. 온몸에 뼈밖에 남지 않고 뺨음 꺼지고 광대뼈는 튀어나왔어요. 그렇게 6년.. 그러다 그는 문득 고행을 그치고 젖 짜는 아낙네로부터 우유 한 잔을 받아먹은 후 보리수 아래에서 참선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어요." "무엇을요?"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모두 고통이라는 것,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그 변하고 무상한 점에 집착함으로써 그 모든 고통이 생긴다는 것, 나아가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상하지만 또한 무상하지 않고, 또 모든 것이 변하나 또한 변하지 않으며, 그 모든것이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음으로써 집착을 버릴 수 있게 되고, 그리하여 삶도 죽음도 없는 완벽한 적정과 소멸의 상태를 이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을요." "그 얘기 또한 아름답군요." 그가 겪어온 모든 고통 또한 다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고 집착에서 비롯된 것일까? 카엔은 궁금해 졌다. "예, 정말 그렇죠? 그는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 위대한 가르침을 세상사람들에게 펼쳤어요. 깨닫기만 하면 바로 부처, 자신처럼 되는 거라고요. 그래서 그 종교에는 신이 없어요." 카엔은 렌이 해준 다른 세계의 종교 이야기에 감동해 한동안 말이 없었다. 렌 또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안식의 기도 뒤에 기나긴 기도의 영창이 이어져, 위령제는 이제 거의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전염병에 휩쓸려 덧없이 죽어간 사람 모두 안식을 찾기를... 그들 모두의 고통을 잊고 평안에 잠기기를... 렌과 카엔은 손을 꼭 잡고 함께 기원했다. 그러다가 카엔은 문득 사람들을 헤치고 뭔가를 찾는 라빌을 발견했다. "렌, 저기 라빌 아닙니까?" "어머, 정말 라빌님이네요!" 렌은 반가워서 손뼉을 쳤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라빌을 불러올까 잠시 궁금하던 렌은 골목 앞을 지나던 어린아이 하나를 불렀다. " 얘, 이리 와봐." 렌은 아이의 손에 동전 하나를 쥐어주며 말했다. "저기 엘프님 보이지? 이쪽으로 불러와줄래? 그 동전은 네가 가지고." "알았어요! 나중에 도로 뺏기 없기에요 !" 아이는 깡충깡충 뛰며 라빌에게로 달려갔다. 잠시 후 라빌은 의아해하며 아이를 따라 골목 앞으로 왔다. 두리번거리던 라빌은 곧 렌을 발견했다. 그러나 렌이 반가움에 울먹이며 라빌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도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라빌은 문득 입을 열었다. "렌님" 갑자기 튀어나온 본명에 렌은 숨이 멎었다. "렌님! 어서 빨리 도망치셔야 해요! 드래곤이, 흑룡이 렌님을 찾고 있어요! 렌님의 목숨이 위험해요! 어서 빨리요! " 2 장 저주받은 도시로 카엔은 렌과 라빌을 데리고 시 외곽의 허르만 ? 캑瑛막?순간이동했다. 사람들은 모두 위령제에 가서 식당에는 여종업원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소 안심이 된 일행은 두건을 눌러 쓴 채나직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라빌이 먼저 푸른 바람의 엘프덤과 동제국에서 있었던 일을 숨가쁘게 이야기했다. 깜짝 놀랄 만한 소식들이었다. 라빌이 숨을 돌릴 때마다 렌가 카엔의 질문이 정신없이 이어졌다. 그 다음에는 렌이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이야기 할 차례였다. 렌의 이야기에 라빌 또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서로 대화를 마치고 나자 긴 침묵이 흘렀다. 렌은 라빌의 이야기를 믿기 어려웠다. 이 세계 최강의 존재인 드래곤이 자기를 차원이동시켜 끌어왔다는 것, 그리고 실험용으로 쓰기 위해 추적 중이라는 것, 모두 지어낸 이야기처럼 들렸다. 반신반의함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타인의 의지로 운명을 좌우당하는 것이야말로 렌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었다. "그 드래곤이 누구라고요?" 렌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지혜의 흑룡 데이그랜님이요." 라빌은 렌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햇다. "그 데이그랜인지 뭔지 하는 드래곤이 지혜의 흑룡이라고요? 하, 기가 막히군요! 인간을 무슨 벌레나 장난감 보듯 하면서 지혜의 흑룡이라고요?" 너무 화가 나서 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가 없었다. 그 옆에서 카엔은 렌보다도 더 놀라고 분노했다. 사실 그는 그동안 렌이 어떻게 저쪽 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올 수있었는지에 대해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드래곤에 의한거라니! 그리고 실험에 쓰기 위한 도구라니! 모든 것이 아귀가 맞았다. 드래곤의 마법이라면 이계에서 이쪽세계로 사람을 차원이동시키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의문이 풀림과 동시에 흑룡에 대한 강렬한 적의가 솟아올랐다. "라빌님, 흑룡의 계획에 대해 좀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카엔은 분노를 참으며 라빌에게 물었다. "예, 칼란님, 아니 카엔님. 죄송해요.. 아직도 가명에 더 익숙해서요. 흑룡께서는 엘프 마법사로 가장하여 동제국 황실에 받아들여진 이상 자신의 마력과 동제국의 첩포조직을 이용하여 렌님의 행방을 탐지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침과 신기한 기운을 이용해 사람을 치료하는 소녀를 탐문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시던데요." "흑룡에 대한 그 존댓말은 집어치울 수 없습니까? 듣기 거북합니다!" 카엔은 마침내 분통을 터뜨렸다. 라빌은 한숨을 쉬었다. "죄송합니다. 엘프님 저로서는 흑룡께 불손한 언사를 쓰기 곤란합니다. 드래곤께서 엘프를 지으셨으니........" 렌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다시 깜짝 놀랐으나 곧 본론으로 돌아왔다. "이제 어떻게하죠?" 렌은 굳은얼굴로 물었다. 카엔은 여차하면 자신이 직접 나서고 제국의 모든 마법사들을 동원해서 드래곤을 초토화시키겠다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길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드래곤의 마법은 그로서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드래곤 한 마리와 일대일로 붙는다면 가까스로 이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드래곤이 두 마리 이상이면 절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카엔은 너무 화가 나고 혼란스러워 냉정하게 대책을 떠올리려 해도 그럴싸한 대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떻게 렌을 보호해야 하지? 그는 초조하게 깍지를 꼈다 풀었다 하며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그 옆에서 라빌이 먼저 떠오르는 생각을 이야기 했다. "렌님이 워낙 이 도시에서 일을 크게 벌려놓았기 때문에 아마 머지않아 동제국 황궁까지 그 소문이 전해질 거예요.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에요. 그러니 한시바삐 떠야 해요." "어디로 도망가죠? 적당한 인근의 시골로 순간이동해서 숨어 지내면 될까요?" 렌의 질문에 라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렌님은 드래곤의 마력에 대해서 잘 모르시죠?" "예" "그리고 카엔님의 마력은 5서클이라고 하셨죠?" 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빌은 기운 없이 말했다. "저도 치유마법이 8 서클일 뿐 다른 마법은 5서클 정도 수준밖에 안 됩니다. 카엔님이라면 아시겠지만 5서클 마법사가 아무리 순간이동을 해도 드래곤이라면 당장 어디로 이동했는지 흔적을 찾아낼수 있어요. 드래곤의 마력에 의한다면 심지어 8서클 마법사의 순간이동 경로까지도 간단히 추적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궁극의 마법이라 불리는 9서클 마법의 위력이에요. 서제국 황제처럼 9서클이라면 몰라도 그 밖에 드래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마법사는 이 세상에 없어요." "아, 그래서 제가 흑성에서 테라미즈로 올 때 추적하지 못한 거군요? 그때 저는 서제국 황제가 소싯적에 만들었다는 스크롤을 이용했거든요." "예, 흑룡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어요. 렌님이 테라미즈로 간 사실을 알아냈다고 하셧죠. 그렇지만 흑룡께서는 아무래도 렌님의 생기를 느끼실 수 있으신것 같아요. 흑룡께서는 처음부터 렌님이 살아 있다는걸 계속 ? ?탭構?계셨거든요.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아마도 흐룍님께서 렌님을 차원이동시킬 때 렌님의 생기를 마법의 기준점으로 삼아 끌어오셨기 때문인 것 같아요. 만약 그렇다면 흑룡께서 이 도시나 이 근방으로 오시는 순간 렌님의 소재를 쉽게 추적하실 수 있을 거예요. 생기만으로 원거리에서 위치를 추적할 수는 없지만, 대략 50아반 정도 이내로 접근하면 드래곤의 마력으로 충분히 탐지가 가능하거드요." "마법으로 생기를 감출 수 없나요? 카엔님한테서 충분히 그럴수 있다고 들었는데요." 라빌은 카엔을 한 번 쳐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저나 카엔님이나 다 5서클인데, 5서클 마법사가 드래곤의 마력을 피해 생기를 감춘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요. 9서클은 되어야 드래곤의 마력을 피할 수 있다니까요." "그럼 어떻게 해요? 이대로 날 잡아 잡수 할 수는 없잖아요!" 렌은 발을 동동 굴렀다. 카엔은 몇 번이나 입을 열려다 말았다. 그의 마법이라면 렌의 행적을 지울 수도 있고 생기를 감출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이 세계 유일의 9서클 마법사, 즉 서제국 황제라는 것을 밝혀야 했다. 그는 아직 렌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힐 자신이 없었다. 심난해하는 렌과 카엔을 보며 라빌은 찬찬히 설명했다. "동서대륙을 통틀어 드래곤의 마력에서 안전한 곳은 딱세군데가 있습니다. 한 군데는 테리미즈에 있는 서제국의 황궁, 다른 한 군데는 브림에 있는 동제국 황궁입니다. 두 군데 모두 드래곤조차 깰 수 없는 마법결계로 보호되어 있다고 해요. 하지만 렌님은 테리미즈에서 도망쳤으니 그리로 돌아갈 수는 없고,또 동제국 황궁으로는 절대로 가면 안되죠. 바로 거기에 데이그랜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까요." 라빌의 말을 들으며 카엔은 다시 한번 나와림 안딘 소동을 일으킴 것을 후회했다. 그때 성급한 마음에 그 일을 저지르지만 않았어도 렌은 황궁에서 자신의 보호 하에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테룬 황제에게 보호를 요청하면 안 되나요? 드래곤의 정체를 폭로하여 동제국 황궁에서 드래곤을 내쫓게하고 그곳에서머무르면 되지 않을까요? 테룬 황제는 제게 생명의 빚이 있으니 거절하지는 않을 거에요. 또 저를 보고 싶어 한다고 하니까요." 라빌은 즉시 대답했다. "렌님은 드래곤의 무서움을 모르시는군요. 데이그랜님께서 황궁에 들어가시기 전이라면 결계로 막을 수 있을까, 이미 황궁에 들어와 계신 상태에서 데이그랜님을 쫓아낸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에요. 테룬 황제가 소드 마스터라고는 해도 드래곤과 정면으로 싸워 이긴다는 건 가능성이 희박해요." 진퇴양난에 처했다는 기분을 느끼며 렌은 물었다. "동제국 황궁과 서제국 황궁을 뺀 다른 한 군데는요?" 라빌은 조금 주저하닥 마침내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전에 말틴이라는 도시 얘길 했었죠? 서제국 황제의 고향이라는 말틴이요. 동제국과 서제국 중간의 검푸른 내해 가장자리에 자리 잡아 한때 번영했지만 황제의 저주가 내려져서 모든 생명체는 사라지고 죽음의 땅으로 변한 도시요." 그 말에 카엔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떨려왔다. 그는 떨림을 멈추기위해 안갆미을 썼다. 그러나 카엔의 겉모습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기에 이야기에 몰두한 렌과 라빌은 눈치 채지 못했다. "그곳에 황제가 펼쳐놓은 마법장은 너무 강해서 그 마법장 안에 일단 들어가면 어떠한 생기도 새어나오지 않아요. 진짜 죽음의 땅이죠. 빛은색을 잃고, 대기는 불길하고, 살아있는 생명이라곤 아무 것도 없어요. 드래곤의 마법도 그 안에서는 힘을 잃어요. 아니, 그곳의 마법장은 인간보다는 오히려 드래곤에게 더 상극이에요. 마나를 통해 사물을 인식하는 드래곤의 입장에서는 마치 칠흑 같은 암흑으로 덮인 거나 마찬가지라고 해요." "생명이 살 수 없는 땅이라면 저희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마법장 안에 들어간다고 당장 죽지는 않아요. 이제는 마법장이 상당히 약해졌기 때문에, 아마 한 달 정도는 머물러 있어도 괜찮을 거에요. 그 이상이면 위험하지만요. 중요한 건 그곳에 들어가 있으면 드래곤이 찾지 못한다는 거에요. 저주받은 도시에서는 마나가 흐르지 않으니까요." 렌은 라빌의 설명이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아 답답했다. 라빌도 답답해하며 다시 말했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데이그랜님께서 일단 렌님이 마이리아 시에 머물렀다는 걸 알게 되신다면 여기서 시작해서 렌님의 행방을 추적해나가는건 시간문제예요." 렌은 곤혹스런 눈빛으로 카엔을 쳐다보았다. "카엔님, 어떻게 하죠?" 카엔은 애써 냉정하게 라빌에게 물었다. "여기에서 말틴까지는 1,500아반(1,500마일)이나 됩니다. 말을 타거나 걸어가면 길 중간에서 잡힐지 모르고, 5 서클 마법사의 마법으로 순간이동한다면 여러 차례 쉬어가며 이동하느라 역시 따라잡힐 텐데, 대체 어떻게 그리로 간다는 겁니까?" 라빌은 이 미 다 생각해 둔 듯 바로 대답했다. "카에님도 아실지 모르겠지만, 마이리아 시 엘프 상관에는 마법진이 있어요. 그 자체로 마력을 지닌 마법진이어서 저나 카엔님 정도의 마법을 보태면 8서클 정도의 파워를 낼 수 있어요. 마법진을 통하면 카로딘 대공국 수도 카로드 시까지 두어 번의 마법진 호핑으로 순식간에 갈 수 있고, 거기에서 말틴까지는 20아반 정도 니까 말틴에 마법진이 없더라도 카엔님과 제 마법으로는 그 인근까지 한 번에 이동할 수 있지요. 엘프 상관의 마법진은 여러 엘프들이 번갈아 이용하는 거라서 3 , 4일만 지나고 나면 마나의 자취가 흐트러져 우리의 행방을 추적하기 쉽지않을 거예요. 물론 드래곤의 마법이라면궁극적으로 추적해 내겠지만 적어도 시간은 벌 수 있겠죠. 그리고 데이그랜님께서 동제국 황실을 위해 일을 시작하시는 건 내일부터인데, 사정을 파악하고 첩보원들을 지휘하시려면 며칠 정도는 걸릴테니까 제 생각으로 6, 7일 정도는 여유가 있어요. 혹시 데이그랜님께 말틴까지 따라오시더라도 저주받은 도시내에서는 마나를 전혀 쓰지 못하시는 이상 우리와 마찬가지로 전능하지 않은 하나의 생명체일 뿐이에요. 그러니 데이그랜님 또한 함부로 마틴의 마법장 안으로 들어오시지 못할 거 예요." "그렇다고 해서 렌이 언제까지나 말틴에서 숨어 지낼 수도 없지 않습니까?" 카엔이 다시 문제제기를 하자 라빌은 재빨리 대답했다. "물론 말틴으로 가는 건 임시방편이에요. 제 생각으로는, 일단 렌님을 말틴에 머무르게 하면서 시간을 벌고, 그 사이에 카엔님이 테룬 황제에게 머무르게 하면서 시간을 벌고, 그 사이에 저나 카엔님이 테룬 황제에게 가서 구원을요청하는게 좋을 것 같아요. 테룬황제는 적어도 렌님을 아끼고 보호하려 하고 있으니까요. 아마도 제가 가는게 낫겠지요. 이미 전에 테룬 황제를 대면한 적이 있으니까요. 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테룬 황제의 힘을 빌려 적절한 유인책을 써서 데이그랜님을 일단 황궁에서 내보낸 후, 테룬 황제의 고위 마벖를 말틴으로 데려와 렌님과 카엔님과 저를 황궁으로 이동하게 하고, 그다음 데이그랜님이 황궁에 돌아오시기 전에 황궁의 결계를 닫아버리면, 흑룡께서도 렌님을 어찌지는 못하실 거예요." 라빌의 계획에는 빈틈이 없었다. 카엔이 서제국 황제인 것으 모르는 상태에서 짜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카엔은 카엔대로, 렌은 렌대로 내키지 않았다. "그 계획대로라면 저는 언제까지나 동제국 황궁에서 나가지 못하고 같혀 지내야 하는 거예요? 그건 싫어요." 렌이 말하자 라빌은 화를 냈다. "렌님, 지금 그게 문제에요? 어찌 됐든 살고 봐야죠! 일단 드래곤을 피해 살아남으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든 방도가 생길거라고요! 살아 있는 게 제일 중요한 거에요!" 라빌의 꾸지람에 렌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빌님 말씀이 맞아요." 그러다 렌은 걱정거리가 떠올라 다시 물었다. "저나 카엔님이 안전하게 동제국 황궁에 숨어 있다 해도 밖에서 드래곤이 난동을 부리며 우리를 내놓으라고 하면 어떻게 해요? 테룬 황제라도 무한정 버티지는 못할 거 아녜요?"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용족은 원래 인간의 일에 가능한 한 개입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어요. 자기네들 생사가 달린 일이라면 모를까, 실험체를 내놓으라는 정도의 일을 가지고 원칙을 깨지는 않을 거예요." 렌이 어느 정도 수긍하는 것을 본 라빌은 카엔을 쳐다보았다. "카엔님의 의견은요?" 카엔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갑자기 선택의 순간이 다가올 줄은 몰랐다. 그의 앞에 놓은 선택은 두 가지 였다. 하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신부을 고백하고 렌을 서제국 황궁으로 데려가는 것. 다른 하나는 라빌의 계획을 따라 말틴으로 가는 것. 사실 결론은 하나였다. 테룬에게 렌을 보내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렌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러려면 그는 렌에게 모든 것을 밝혀야 했으나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하필 이면 말틴이라.... 카에은 두 손 사이에 얼굴을 묻고 고민했다. 렌과 라빌은 초조하게 카엔을 지켜보았다. 상당한 시간 그들은 미동도 없이 글렇게 앉아 있었다. 카에은 마침내 결심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 우리 말틴으로 가기로 하죠." 그는 이제 마침내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와 렌을 말틴으로 이끄는 것이 라빌이 아니라 무언가 초자연적인 운명의 힘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가장 큰 죄, 가장 괴로운 과거, 모든 얽힘이 시작이었던 그 곳에 렌을 데리고 가, 그 참혹한 모습을 보게하고, 스스로의 상처를 후벼 파고, 오랜 세월 묻어두었던 죄책감을 다시 날카롭게 벼리자. 렌과 자신, 단 둘만이 남았을 때, 모든 상처가 다 무르익어 곪아 터졌을 때 비로소 렌에게 고백하자. 그리고 그녀를 서제국 황궁으로 데려가 안전하게 보호하자. 그러면서 그녀에게 평생 용서를 빌자. 그 는 죽음을 눈앞에 둔 것 처럼 무서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했다. 진실을 밝히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엘프 상관의 마법진은 먼 누리디안 대제국 시절에 이루어진 것으로 동, 서, 남대륙에 걸쳐 총 열다섯 개가 있었다. 서제국에 다섯 개, 동제국에 네 개,서제국과 동제국 사이의 중립공국들-소위 드래곤의 회랑이라 불리는 지역-에 세 개, 그리고 남대륙에 세 게 였다. 먼 옛날 위대한 엘프 마법사의 힘으로 만들어졌다고 하고 엘프를 총에하던 어느 드래곤의 힘으로 만들어졌다고도 하는 이 마법진들은 엘프들이 인간세계로 편안하고 안전하게 나올 수 있는 소중한 수단이었다. 물론 마법진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무작정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이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각각의 마법진에는 대략 어림잡아 4서클의 마법력이 부여되어 있었다. 그 말은, 4서클의 마법사가 마법진을 이용하면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8서클의 마법사 의 1회 순간이동거리 한계만큼 이동할 수 있따는 것이다. 하지만 이른바 '마나 보존의 법칙'에 따라 4 서클 마법사의 자체 마나와 4서클 마법사가 엘프의 마법진을 이용해 이동할 수 잇는 거리는 7서클 마법력으로 가능한 거리, 즉 대략 800아반(800마일)정도에 불고했다. 또한 8서클 마법사가 마법진을 이용해도 '최대 마나 불변의 법칙'에 따라 궁극의 마나라 일컬어지는 9서클 이상의 마력을 낼수는 없었다. 각각의 마법진은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대걁 800 아반씩 떨어져 있었으므로, 무역을 위해 인간계로 나오는 엘프들은 적어도 4서클 이상의 마법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법진의 마나뿐만 아니라 이동자 자신의 마나까지 함게 소비해야 하므로, 엘프들은 마법진에서 마법진으로 1회 순간이동한 후에는 며칠 쉬면서-원래는 하루만 쉬어도 되지만 엘프들은 쉰다는 핑계로 며칠씩 연회를 하며 빈둥거리곤 했다- 마나와 기운을 회복하고 다시 그 다음 마법진으로 거듭해 목적지에 도달했다. 마치 뜀뛰기와 비슷하기에 이와 같이 이동하는 것을 '마법진 호핑'이라 불렀다. 렌 일행은 의아해하는 엘프들을 헤치고 엘프 상관 지하의 마법진에 도달했다. 라빌은 뭔가 챙겨야 한다며 황급히 뛰어가더니 작은 단지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라빌이 오자마자 일행은 바로 마법진 호핑을 시작했다. 렌 일행은 먼저 마이리아 시와 카로드 시 중간쯤에 있는 서 제국 동부의 상업도시 차얀의 엘프상관까지 순간이동 했다. 보통 같으면 2, 3일 쉬면서 원기를 회복해야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들은 즉시 다시 카로딘 대공국의 수도 카로도 시까지 순간이동했다. 카로드 시의 엘프상관 지하에 설치된 마법진에 내려서자 라빌과 카엔은 숨을 고르고 잠시 휴시을 취했다. 라빌은 연이은 두번의 순간이동으로 핼쑥해져 마법진 위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카엔은 전혀 피곤함으 느끼지 않았지만 굳이 자신의 상태를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마력에 편승해 이동한 렌은 라빌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제 어디로 이동하지요?" 카엔의 물음에 라빌이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말틴의 마법장 내부로 바로 이동할 수는 없어요. 거기에서는 모든 마법이 불가능하니까요." "여기서 하룻밤 지내고 보급품을 장만해서 내일 순간이동하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라빌님은 지금 너무 피곤해 보이는 군요." 카엔의 말에 라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엘프들이 드래곤을 얼마나 경외하느느지 카엔님도 아시죠? 우리가 다른 엘프들에게 모습을 보이면 얼마 안 돼서 바로 드래곤의 귀에 들어갈 거예요. 이 방에서 나가지 않고 바로 순간이동해야 해요." 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렇다면 일단 말틴 근처까지 가서 거기서 쉬고 식량도 구한 후에 말틴으로 가도록 하죠. 말틴에서 제일 가까운 마을이 어디입니까?" 라빌은 기억을 더듬었다. "제가 마지막으로 말틴에 갔던 게 50년 전인데, 그때 말틴의 마법장 경계에서 서쪽으로 20아반(2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주민 백여명 정도의 작은 마을이 있어요.거기로 가죠." "그럼 라빌님이 위치설정을 해주십시오." 카엔과 라빌은 일단 마법진에서 벗어나 구석에 섰다. 다른 마법진 안에서는 다른 마법진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렌을 중심에 두고 각자의 마나만으로 이동해야 했다. 라빌은 모을수 있는 마나량이 아슬아슬하여 힘겨워했으나 카엔이 슬며시 도와주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5서클인 카엔에게 아직도 여력이 있다는 점이 으아했으나 라빌은 카엔의 도움을 감시히 받아들였다. 말틴 부근의 평야는 황량했다. 렌 일행이 나타나면서 일으킨 흙먼지가 바람에 날리고 해는 서쪽 지평선으로 저무데 너른 평원에는 풀 한 포기 없었다. 까마귀 한 마리가 불길한 울음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것 말고는 움직이는 생명체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정적이 찾아왔 다. 무거운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는지 라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순간이동에서 오는 피로 때문에 라빌은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겨워 했다. "이 근방을 둘러보면 마을이 있을 거예요." 말을 마친 라빌은 풀썩 흙먼지를 날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렌고 카엔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평야에 흐르는 가느다란 실개천이 눈에 띄었다. 그 실개천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렌은 지평선 위로 올라오는 가느다란 연기 한 줄기를 발견했다. "저기 마을이 있나봐요. 일어나세요, 라빌님. 제가 부축해 드릴께요." 렌과 카엔이 라빌을 부축해가며 실개천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자 지평선 한쪽에 마을 하나가 나타났다. 렌 일행은 지는 해를 받으며 눈 앞에 보이는 마을로 천천히 걸어갔다. 4백여호 정도 되는 집들과 작은 상점 몇 개와 여관 한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잇는 작은 마을이었다. 평범한 마을이어쓰나 지나치게 고요하고 묘하게 음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상하군요." 라빌이 입을 열었다. "뭐가요?" 렌이 묻자 라빌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50년 전에 제가 여기 들렀을 때는 집은 20여 채정도밖에 없었고 전체 주민도 백 명 남짓이었어요. 그런데 그 사이에 마을이 훨씬 커졋네요. 이 황량한 땅에 마을이 커질 이유가 없는데요." "인구가 증가하는 건 좋은 일이잖아요." "그렇지만 마을 분위기도 이상하고, 뭔가 아닌 느낌이에요." 마을 사람들이 한 명도 나와 있지 않은 거리에서 일행은 작은 술집 겸 여관의 간판을 발견하고 그리로 들어갔다. 여관 나무문을 열때의 '끼익'하는 소리마저 깜짝 놀랄 만큼 크게 울렸다. 여관 주인은 불친절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은 무덤덤한 태도로 그들을 맞았다. "식사, 숙박 모두 다입니까?" "네, 저녁식사, 숙박, 내일 아침식사요." "거기 앉으십시오." 여관 주인은 메뉴도 묻지 않은 채 감자와 스프와 말라비틀어진 오렌지 두개를 내왔다. "마을이 참 조용하네요." 렌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여고나 주인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오늘 마을 사람 한 명이 죽었습니다." "오, 저런.." 렌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그냥 그렇겜나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합심해서 편해 보내줬지요." "편히 보내주다니요?" 렌이 묻자 여관 주인은 머뭇거리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마 가슴에 답답하게 맺힌 응어리를 풀고 싶은 것 같았다. "내 팔촌 동생이었습니다. 뭐, 그다지 가까운 녀석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그렇게 말렸는데도 그놈은 기어코 말틴 쪽으로 가더니 그만...... 그저 먹고 살자니............ 허, 참..." "무슨 말씀이세요? 말틴에서 뭐가 어쨋길래요?" 렌의 질문에 여관 주인이 되물었다. "이 근처 분들이아니식누요?" 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관주인은 길게 한숨을 쉬다가 말을 이었다. "이 근처 분들이 아니시라면 잘 모르실 겁니다. 모두들 쉬쉬하는 일이니... 금지령이 내려진 서제국 내에서야 말할 것도 없지만 여기 사람들도 가능하면 그 얘기는 꺼내지 않으려고 하는 터라..... 하긴 뭐하러 끔찍한 얘기를 새삼 꺼내겠습니까?" 렌은 카엔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여기는 서제국 영토가 아닌가요?" 카엔도 속삭였다. "서제국은 한때 이 일대를 정복했었지만 그 후 사실상 통치를 방기한 상태이지요. 미즌넨 산맥 동쪽은 일종의 권력 공백 상태여서 소국과 소영주들이 난립하고 있습니다." 카엔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렌은 여고나 주인에게 물었다. "무슨 끔찍한 얘기요?" "황제의 저주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예, 대강요. 근데 황제의 저주 때문에 왜 이곳 사람이 죽나요? 말틴은 여기서 한나절은 걸리잖아요." 여관 주인은 렌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은 채 허리춤에서 담뱃대를 꺼내 불을 붙이고 뻑뻑 몇 모금 피웠다. 담배연기가 모두 허공으로 사라질 때쯤 되어서야 그는 말을 이었다. "이 근처에 풀이 자라기를 합니까, 곡식이 자라기를 합니까? 이 척박한 땅에 빌붙어 있는 우리들이 뭘 먹고 산단 말입니까? 그저 유일한 살 길이라고는 명월석을 채취하는 것 뿐인데, 하필이면 그 명월석이라는 게 말틴에서만 난다 이 말입니다. 그나마 말틴 안의 명월석 광산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게 된것도 얼마 안 됩니다. 한 30년 정도 될까, 마법장이 줄어든 덕분이지요. 그 영향으로 마을도 커졌지요. 하지만 다들 조심하기는 해도 욕심에 눈이 멀어 무리하다 보면 꼭 이런 일이 생기니........." "무슨 일이요?" 렌이 묻자 라빌이 끼얻르었다. "피부에 잿빛 얼룩이 생기고 그게 온몸으로 번져가는 것 말이지요?" 라빌은 두건을 눌러쓰고 있었으므로 여관 주인은 라빌이 엘프인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조금 놀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거기 여자 손님께서는 외지분인데도 좀 아시는군요. 바로 그 증상입니다. 말틴 안으로 들아가서 일하다가 보면 처음에는 한 두군데 잿빛 얼룩이 생기다가 어느 순간에 그게 언몸에 물들지요. 그게 정말 참 을 수 없이 끔찍하게 고통스럽단 말입니다. 하필이면 뇌가 제일 나중에 부서지기 때문에 그 지경이 된 사람은 온몸이 부서질때까지 죽어라 비명을 지르며 그 고통을 다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기에, 하는 수 없이 그 전에......" 여관 주인은 잠시 손으로 눈가를 짚었다가 다시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담배연기가 실내에 가득 찼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모두 그가 생략해버린 뒷 이야기가 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위험하게 명월석을 채취하러 가지 말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 안되나요?" 렌이 묻자 여관 주인은 '이런 철부지를 봤다' 하는 눈초리로 렌을 쳐다보았다.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그나마 미즈넨 산맥 동쪽에서는 여기가 제일 살기 좋은데요. 여기 오면 살 길이라도 찾을 수 있는 걸입쇼. 그러니까 오히려 사람들이 자꾸 여기로 이주하는 거지요. 이 마을 주민들이 다 마찬가지 입니다. 어디 한 군데 갈 곳이 없어 마침내 여기까지 굴러들어온 사람드이죠." "풀 한포기 제대로 안 나는데 살기 좋다뇨?" "세금이 없고 징병이 없으니까요. 세리들도 이 근방으로는 안 오고, 징병관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더구나 명월석 광산도 있어서, 목숨걸고 눈 딱 감고 몇 달 고생하면 운 좋은 사람은 한 재산 건질 수도 있으니, 살기 좋다고 할 만 하죠." "남쪽에 있는 카로딘 대공국으로 가면 안 되나요?" "거기는 이민자를 안 받습니다. 불법이민이 발각되면 공국네에서 벌어들인 돈도 모두 몰수당하고 추방됩니다. 그리고 거기 세금도 만만치가 않아요. 그 뭐시더라, 일드인이가 알드인인가 하는 공자가 정권을 잡고부터는 그쪽 사람들도 허리가 휜답니다. 또 거기는 한 번 군대에 끌려가면 10년동안 못 나온다고 그러던데요. 열여덟 살 넘은 남자는 닥치는 대로 끌고 간다던데요." "테라미즈넨 제국은요?" "서제국에서도 미즈넨 산맥 동쪽의 주민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황제가 자기 고향을 워낙 싫어해서 그렇다고들 하네요. 그리고 말틴의 그 지독한 꼴을 본 다음에는 서제국 황제가 너무 무서워서 그 황제가 다스리는 땅에는 발을 들여놓고 싶지도 않습니다. 서제국 사람들은 그런 악마를 황제로 모시고 사는 모양인데, 여기 와서 한번이라도 말틴 구경을 하고 나면 그런 생각이 싹 가실 겁니다. 도저히 사람의 탈을 쓰고서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니까요." 여고나 주인이 말을 마치자 침묵이 흘렀다. 모두 묵묵히 음식을 먹고 여관 주인을 따라 방으로 올라갔다. 여관방은 하나 뿐이었고 침대도 두개 밖에 없었지만 곧 여관 주인이 허름한 간이 침대를 하나 더 가져다주었다. "제가 제일 어리니깐 간이침대에서 자겠어요." 렌은 라빌과 카엔이 뭐라 말하기 전에 간이침대에 털썩 앉았다. "라빌님, 여관 주인 아저씨가 말한 그 증상좀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어요?" 렌이 묻자 라빌은 우울한 어조로 답해주었다.. "마나란 것이 물, 불, 나무, 흙, 금속의 다섯 가지 힘이라는 것은 알고 계시죠? 이 세계에서는 물, 불나무, 흙, 금속의 성질을 가진 힘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고, 마법사들은 그때그때 그중 하나의 힘을 순도 높게 모아 증폭시켜 마법을 시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말틴, 황제의 저주가 내려진 그곳에서는 힘의 구분이 사라져버려요. 그래서 마나의 다섯 힘은 서로 뒤엉켜 결국 잿빛 죽음의 힘으로 바뀌고 말죠. 모든 마법도 깨져버리고, 생명은 시들어버려요. 모든 색을섞어버리면 회색으로 변하듯 말이죠." 라빌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맨 처음 황제의 저주가 내려졌을 때에 마법장 중심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해요. 물론 제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요. 저는 그 일이 있을 무렵 마법장 경계까지만 접근했었는데, 그때 조금 독기가 옅은 마법장 외곽에서 그 바깥으로 사람들이 참 많이 도망쳐 나왔었어요. 그들의 몸 여기저기에는 잿빛 얼룩이 생겨있었고, 그 얼룩은 미쳐 손쓸 사이도 없이 퍼져나가 온몸을 잿빛으로 물들여버렸어요. 인간이 내는 소리라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사람들은 산산이 조각났지요." 라빌은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며 표정을 흐렸다. "그렇지만 얼룩이 아직 작을 때 치유마법으로 씻어주면 얼룩이 사라지고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요. 옛날에 제가 했던 일이 바로 그거예요. 그렇게 해서 구할 수 있었던 사람은 죽은 사람에 비하면 정말 얼마 되지 않았지만요. '치유하는 손'이라는 남부끄러운 별호를 얻게 된 것도 그 일이 계기가 되었죠." "지금은요?" "지금은 마법장이 그때보다 상당히 약해져서 마법장 안으로 들어가더라도 옛날처럼 바로 죽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저번처럼 말했듯이 한 달 정도가 한계입니다." 렌은 조그 주저하다 물어보았다. "아까 그 죽은 여관 주인의 팔촌이라는 사람도 미리 봤다면 살릴수 있었을까요?" 라빌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일찍 발견했담녀 살릴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제 힘으로 없앨수 있는 얼룩은 함 뼘 정도 크기가 한계에요. 그것보다 커지면 제 치유마법으로는 안되요. 그리고 온몸에 퍼졌다면 서제국 황제가 와서 고치지 않는 한 살릴 방도가 없어요." 라빌은 우울한 어조로 다시 덧붙였다. "사실 제가 50년 전 이 말을에 들렀을 때에는 그런 환자가 없었어요. 아무도 말틴에 들어갈 엄두도 못 냇으니까요. 그런데도 하도 세상이 살기힘들어지다 보니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막다른 골목에 몰리는군요." 렌도 슬프게 말했다. "가혹한 정치는 맹수보다도 무섭지요. 옛날에 어떤 성인이 길을 가다가 허술한 세 개의 무덤 앞에서 슬피우는 여인을 만났답니다. 사연을 물었더니 시아버지, 남편, 아들을 모두 호랑이가 잡아먹었다는 것입니다. 그 성인이 '그렇다면 이곳을 떠나서 사는 것이 어떠냐' 고 묻자 여인은 '여기서 사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면 무거운 세금 때문에 그나마 살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이곳 마을 사람들의 처지가 딱 그와 같군요." 카엔은 라빌과 렌이 두런두런 얘기하는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좀 전에 이곳에서 순간이동했을 때 마을 주위의 모습을 보고 받은 충격에서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비옥하고 찰진 흙에 무엇을 심어도 잘 자라던 곳. 봄이면 여리디 여린 연둣빛 모가 초록빛 융단처럼 논을 채우고 가을이면 고개 숙이던 벼 이삭이 바람을 따라 출렁이던 곳. 햇살 따라사롭고 때마다 고마운 비가 내리던 곳. 실개천이 아니라 맑고 수량이 풍부한 강이 들따라 넘실거리며 흐르던 곳. 그래서 '축복의 평야'라고까지 불렸던 곳. 그 옛날의 아름다운 풍경은 간데없고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말라비틀어진 잡초와 황량함과 죽음뿐이었다. 물론 이런 실정을 그가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신하들의 보고를 통해 간접적으로 아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의 차이는 컷다. 그동안 말틴의 일을 의식적으로 외면해왔지만 이제는 그럴수 없었다. 말틴에 펼친 마법의 독기가 여기까지 영향을 준단 말인가. 처음 마법을 펼쳣던 그때에는 오로지 말틴만이죽음의 저주를 받았는데, 그 독기가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주위로 퍼져나가고 있단 말인가. 그날 밤 렌과 라빌이 잠든 동안 카엔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는 평야 한가운데에 서서 밤바람을 맞으며 대기와 토양에 섞여 있는 독기를 다시 한 번 가늠했다. 친숙하고 불길한 기운이었다. 바로 그가 먼 옛날에 뿌려놓은 그 기운이었다. 묵은 상처를 들여다보듯 그는 동이 틀 때까지 그 기운을 느끼며 그곳에서 그렇게 멍하니 서 있었다. 다음날 그들은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났다. 렌이 깨우자 잠꾸러기인 라빌마저도 불평 한마디 없이 바로 눈을 떳다. 식량과 물과 텐트 등 필요한 것을 챙긴 후 그들은 길을 나섰다. 짐은 셋이 나누어 짊어졌다. 실개천을 따라 계속 걷다보면 말틴 시가 나타난다고 했다. 마을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들은 실개천이 뻗어나가는 동쪽 방향으로 15아반(15마일) 정도를 순간이동했다. 렌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말을 잃었다. 끝이 아득할 정도로 커다란 잿빛 반구가 평야에 솟아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것은 잿빛이 아니었다. 회색빛도 아니었다. 그저 '색이 없는 상태'에 불과했다. 컬러텔레비전의 채도 버튼을 계속 눌러 화면을 그대로 흑백으로 바꾸고 명암을 약간 어둡게 조절한 것 같은,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기분 나쁘고 섬뜻한, 뭔가 사악한 힘이 내려앉아 그 반구 내의 색을 빨아들여버린 것 같은, 그런 비인간적이고 초현실적인 색이었다. 그 반구는 점차 가까이 갈수록 시야를 꽉 채웠다. "원래 저 마법장은 말틴 중심부를 기준으로 반경 50아반, 직경 100아반 정도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주위의 독기가 흩어지는 만큼 마법장 자체의 크기는 줄어들어 지금은 반경이 60아반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잉크가 번져가는 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잉크로 까만 점을 찍고 물을 떨어뜨리면 주위로 검은색이 퍼지면서 중앙의 까만 점은 조금씩 작아지지요? 저 마법장의 독기도 비슷한 방식으로 퍼지는것 같아요." 라빌은 암울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말을 꺼냈으나, 눈앞의 광경에 압도당한 렌과 카엔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아 대화는 그냥 끊겼다. 일행은 마을에서 계속 이어져 실개천을 따라 말틴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뭔가 색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안심하기 위해 렌은 걷다 말고 자꾸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또 등 뒤에 남아 있는 풍경을 뒤돌아보아야 했다.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요?" 렌은 조금 떨면서 물었다. "네, 두 분이 어디 숨으시는지 확인하고 저는 다시 동제국 수도 브림으로 갈 거예요. 그리고 한 달이 지나기 전에 돌아올게요. 만약에 제가 한 달 내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마법장을 벗아나셔야 해요. 한 달이 넘어가면 마법장의 독기에 잠식당한다는 걸 절대 잊지 마셔야 해요. 그 경우에는 서제국 황제에게라도 도움을 청하세요. 아셨죠? 하지만 꼭 시간 내에 돌아올게요." 라빌의 다짐에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마침내 마법장 바로 앞까지 도달햇다. 코앞에 심연처럼 펼쳐진 흑백의 공간은 오싹할 정도로 무심하고 무생물적으로 보였다. "정말 저 안에 들어가도 괜찮은 건가요?" 렌이 다시 묻자 라빌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이 마법장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제가 연구를 해봐서 잘 아는데 한동안은 괜찮아요. 다만 인체에 작은 흑백얼룩이 생기면 무저건 뛰쳐나와야 해요. 그리고 이걸 입으세요." 라빌은 마을에서 구한 두건 달린 회색 망토 세벌을 짐 속에서 꺼내어 렌과 카엔에게 한 벌씩 주고 자기도 입었다. 다 입은 것을 확인하자 라빌은 전날 마이리아 시의 엘프 상관에서 챙겨온 단지를 꺼냈다. 그 안에는 무지갯빛이 나는 가루가 가득 들어 있었는데, 라빌은 가루를 한 움큼 정도 쥐어 렌과 카엔에게, 그리고 자신에게도 뿌렸다. 셋의 망토는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이 가루는 뭔가요?" "엘프의 시체에서 무서진 살 가루에요. 저 마법장의 성질과는 상호 배치되기 때문에 이걸 뿌려두면 마법장의 기운이 침투되는 걸 조금은 막을 수 있어요." 렌은 엘프 시체의 가루라는 말에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정신없이 털어버리려고 했으나 라빌은 렌의 팔을 잡고 말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시체도 살아 있는 생명도 다 자연의 일부일 뿐이에요. 우리 엘프는 시체라고 해도 특별히 혐오하지 않아요. 특별히 신성시하지도 않고요. 그러니 불쾌하게 여기지 마세요. 다만 다른인간들에게는 말하지 말아야 해요. 인간들이 알게 되면 엘프를 죽여서라도 저 살가루를 얻으려 할 거예요. 렌님도 인간들이 어떤지는 잘 알고 있을 테니, 더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하시죠?" 렌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빌은 손수건 세 장을 꺼내 다시 무지갯빛 가루를 뿌린 후 렌과 카인에게 한장 씩 주었다. "이걸로 입과 코 주위를 가리세요. 호흡을 통해 독기가 침투하는걸 어느정도 막아줄 거예요." 렌과 카엔은 손수건을 삼각형으로 접어 코와 입을 가린 후 뒤로 묶었다. 라빌도 그렇게 했다. 심각한 순간인데도 두건을 쓰고 입과 코를 가린 서로의 모습을 보니 웬지 강도단처럼 보여 렌은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나왔다. 라빌이 먼저 마법장 안으로 들어가자, 만반의 준비를 하고 마음을 가라앉힌 렌은 그녀를 따라 눈앞의 이질적인 공간에 발을 내디뎠다. 카엔도 그 뒤를 따랐다. 한걸음, 한걸음 뗄 때마다 사물의 색채는 점점 옅어졌다. 이질감을 달래려 카엔에게 뭐라 말을 걸려던 렌은 두건과 손수건 사이의 틈으로 살짝 보이는 카엔의 눈동자 색깔이 은보랏빛으로 돌아온 걸 발견했다. 라빌도 그걸 눈치 챘는지 카엔에게 물었다. "가장마법이 풀렷네요? 원래 눈동자가 은보랏빛이세요? 이 근방이 고향이신가봐요?" "이 근방 사람들 중에 은보랏빛 눈이 흔한가 보죠?" 렌이 끼어들어 묻자 라빌은 바로 대답했다. "은보랏빛 눈동자와 은보랏빛 머리카락은 드래곤 회랑 부근에서는 상당히 흔한 색이에요. 이를테면 말틴에서 태어났다는 서제국 황제도 은보랏빛 눈동자와 은보랏빛 머리카락을 지녔따고 들었어요. 저는 그 얘길 황제의 저주가 내려질 무렵 황제를 직접 분 사람들한테 들었지요. 지금 서제국 사람들은 다들 잊어버린 것 같지만요. 서제국에서 아무리 황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걸 엄격히 금지한다고는 해도, 인간들이 그렇게 짧은 세월 동안에 그토록 많은걸 잊어버리는 걸 보면 우리 엘프들로서는 신기하기 짝이 없지요. 카엔님, 이 지방분이 맞나요?" 라빌의 물음에 카엔은 조용히 대답했다. "예, 이 지방에서 태어난 게 맞습니다." 모처럼 카엔의 입에서 나온 과거 얘기에 렌은 이것저것 물어보려 했지만 곧 초현실적인 주위의 풍경이 렌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그런 생각을 모두 날려버렸다. 시시각각 탈색되어가는 주위 풍경은 1난(10분)쯤 걸어 들어가자 완전히 흑백으로 변해버렸다. 렌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 하늘에 하얀 점 같은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숙여 땅을 내려다보았다. 흑백의 공간속에서 렌과 카엔과 라빌의 살결만이 본래의색을 유지했다. 흑백 영화 위에 인물만 컬러로 색을 입힌 것 같은 묘한 느낌이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마저 흑백이 되어버렸는데, 왜 사람의 몸만 색이 그대로죠?" 렌이 묻자 라빌은 조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저는 350년 전에 혼자 힘으로 좀 연구해봤고, 50년 전에는 다른 엘프들과 함께 와서 다시 연구했느데, 그 결과에 따르면 이 마법장은 모든 마나의 흐름을 완전히 멈춰버리는 작용을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나 다른 생물의 몸은 내부에 자체적인 흐름이 있기 때문에 한동안은 마법장 안에 들어와도 몸속에 흐르는 마나가 곧바로 멈추지 않고, 따라서 생물체는 색채를 유지합 니다. 하지만 몸안에서 흐르는 마나는 마법장의 멈춰있는 기운과 상충하면서 결국 같이 멈춰버리죠. 마버장의 기운이 아주 강하면 순식같에 몸속의 마나의 흐름이 멈추고, 그 생물은 그 즉시 죽어버립니다. 반면에 무생물은 자체적인 마나의 흐름이 아주 미약하기에 마법장의 영향을 쉽게 받지만 또 그만큼 영향이 작아서,색채만 빼앗길뿐 부서지거나 하지는 않아요." 라빌의 설명은 다소 어려웠지만, 묘하게 렌이 배운 기 순환의 이치와 비슷해서 렌은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 가야하죠?" "조금만 더 가면 말틴 구시가지가 나옵니다. 쉬지 않고 걸으면 오늘 밤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서제국 황제가 펼친 이 마법은사람들과 살아 있는 것들만을 죽이기 때문에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어요. 또 비와 바람이 이 마법장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기에 건물이 상하게 하는 풍화작용도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고요. 그러니 말틴 중심가에 가보면 두 분이 쉬실 만한 튼튼한 건물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마법장의 한가운데로 접어든 탓인지 말소리는 바깥에서처럼 자연스럽게 퍼지지 않고 일정 거리를 넘어서면 힘을 잃었다. 그 느낌이 매우 어색해서 렌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라빌이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시간 정도 걷자 시의 외곽으로 접어들면서 회색과 흑색의 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원래 무슨 색인지 알수는 없지만 난프랑스와 스페인 풍을 뒤섞어놓은 듯한 양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건물들이었다. 길은 깔끔하게 보도블록으로 포장되어 있었으나, 그 위에 잿빛 가루와 산산이 조각난 검은 크리스탈이 곳곳에 수북하게 쌓여 있어 지저분해 보였다. "이건 뭐지요?" 렌이 묻자 라빌이대답했다. "350년 전, 이 마법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 황제의 마법에 쏘였을 때 그들의 온몸은 순식같에 잿빛으로 물들었다고 했죠? 그렇게 독기에 노출되자 급속도로 결정화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 그들의 살은 부스러져 회색 가루가 되고 뼈는 깨져 검은 크리스탈이 되었습니다. 엘프들이 죽을 때에도 비슷하기는 하지만, 엘프들의 살은 무지갯빛 가루가 되고 뼈는 푸른빛 크리스탈이 되는데, 저 사람들에게는 정 반대의 현상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저 가루와 검은 크리스탈은 썩지도 않아요. 땅에 묻으면 땅을 오염시켜버려요. 그래서 마법장의 독기로 죽은 사람들의 살과 뼈는 마법장 안으로 갖다 버리죠." 라빌의 말에 렌은 비명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꾹 참으며 길옆으로 비켜섰다. 어찔해져 비틀거리는 것을 카엔이 잡아주었다. 렌은 두려움을 누르고 다시 어느 집 문앞에 수북하게 쌓인 잔해쪽으로 다가갔다. "이게 사람의 시체에서 나온 거라고요?" "네" 렌은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근처에서 굴러다니는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잔해를 살짝 뒤적여보았다. 잿빛 가루가 스르르 미끄러지고 크리스탈 조각도 몇 개 굴러 내렸다. 그 밑에 뭔가 검고 커다랗게 빛나는 게 보아자 렌은 손을옷자락으로 덮어 직접 살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걸 끄집어냈다. 그 물체는 다름 아닌 까맣게 물든 두개골이었다. 결정화가 진행되다 만 듯 두개골의 반 정도가 크리스탈이 아닌 뼈 상태로 남아 깨지지 않은 채였다. 렌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 일부만 결정화되는 경우도 있나요?" 라빌이 대답했다. "네, 이곳의 독기에 충분히 노출되기 전에 멈저 숨이 끊어진경에는 독기가 뼈까지 채 미치치 못하기 때문에 결정화되다가 마는 거지요. 엘프들도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사고나 그 밖의 사유로 일찍 죽는 경우에는 살과 뼈가 결정화되지 못하고 그냥 인간처럼 썩어버립니다. 그래서 그렇게 죽은 엘프의 시체는 잘 묻어주지요." 끔찍함과 공포가 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렌은 잔해 무더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세히 보니 수북하게 쌓인 잿빛 가루 아래에 시체가 입고 있던 옷이 언뜻언뜻 보였다. 옷은 다소 상했지만 제대로 썩지않아 아직도 그 형체가 남아 있었다. 복사꽃을 수놓은 허리띠와가죽으로 만든 남자용 신도 보였다. "여기 보면 남녀의 옷이 다 있는데, 왜 한 사람의 뼌느 완전히 결정화되고 다른 사람의 뼈는 형체가 남아 있는 거죠?" 그때까지 한 마디 말도 않고 가만히 있던 카엔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건 아마도, 저 둘이 각기 다른 때에 죽었기 때문일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라빌도 맞장구쳤다. 렌은 자세히 설명을 구하는 눈초리로 카엔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저 둘은 부부이거나 연인이거나 부녀지간, 혹은 모자지간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남매일 수도 있고요. 한 명은 황제의 저주가 내려질 대 바로 이곳에 있었을 테고, 다른 한 명은 이곳에 남은 사람을 찾기 위해 마법을 펼치고 난 후 얼마 지나 이곳에 들어왔겠죠. 그리고 옷과 전해만이 남아 있는 걸 보고, 마법의 독기 채 몸에흡수되기 저에 자결했을 겁니다." 차분하게도, 슬프게도 들리는 목? 恬?눼? "이 마법은, 이 끔찍한 마법은 영원히 계속되는 건 아니죠?" 렌이 절망적으로 묻자, 라빌은 우울하게 대답했다. "저를 비롯한 엘프들이 연구해본 바에 따르면, 이 마법의 반감기는 대략 420년 정도라고 합니다." "반감기라면, 마력의 세기가 반으로 줄어드는 기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맞아요. 마법이 펼쳐진 지 350년이 지났기 때문에 지금 이 마법장 안의 마법은 대략 반 조금 넘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앞으로 70년 정도 지나면 딱 처음의 반으로 줄어들고, 그로부터 다시 420년이 지나면 거기에서 다시 반으로, 420년이 지나면 마력은 맨 처음의 6, 7 퍼센트로 줄어들게 되는데, 그때쯤에는 여기에도 사람이 살 수 있게 될거예요." 렌은 머릿속으로 숫자를 더해보았다. 앞으로 1,330년... 아득한 세월에 렌은 말문이 막혔다. 렌이 너무 침울해진 것을 보고 안타까웠는지 라빌이 덧붗였다. "그건 이 마법장만의 얘기이고, 여기에서 독기가 새어나가 다시 2차로 오염된 인근의 땅이라든지 마법장의 독기에 오염되어 죽은 사람의 독기는 반감기가 그보다는 좀 짧아요. 엘프의 현자들이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그 경우의 반감기는 250년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더구나 독기 자체도 원래의 독기보다 약하기 때문에, 대략 300년 정도만 더 지나면 아무 해도 없게 될 거예요." 하지만 그 역시 아득한 세월이어서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 시 중심가로 걸어갈수록 근사하고 잘 지어진 집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조각상으로 지지되는 대리석 다리라든지 세공사가 한껏 멋을 부려 만든 가로등이라든지, 도시 구석구석을 채우는 모든 것이 이 도시가 한때 얼마나 풍요하고 아름다웠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시선이 닿는 곳마다 굴러다니는 검은 크리스탈과 수북하게 쌓여있는 잿빛 가루는 모든 상상을 방해했다. 묵묵히 걷다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 태양은 중천에 떴다가 다시 서쪽으로 서시히 지기 시작했지만, 태양의 고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햇빛의 세기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마법장 안에서는 태양의 열기조차 변질되는 것 같았다. 편광 필터 속에서 헤매는 듯했다. 유일하게 숨통을 틔어주는 것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실개천에 흐르는 맑디맑은 물이었다. 마을에서 흘러온 물이었다. 한때 유량이 풍부했었다는 걸 말해주듯 강둑은 넓디넓었다. 하지만 졸졸 흐르는 물은 강둑과 강둑 사이에 드러난 자갈을 조금 적실 뿐이었다. 목이 마르기도 했지만 왠지 물을 직접 느껴보고 싶어 렌은 강둑을 따라 내려가 몸을 구부리고 실개천에 손을 뻗어 입에 가져가려 했다. "랜님! 안돼요!" 라빌이 놀라 황급히 소리쳤다. "그건 독물이에요! 마시면 큰일나요! 어서 버리세요!" 렌은 깜짝 놀라 물을 버렸다. "바깥에서부터 흘러온 물은 이 도시를 지나면서 서서히 오염되어버렸어요. 몸을 씻는 정도는 괜찮지만, 절대 마시면 안돼요. 우리가 가져운 물도 반드시 마개를 꼭 닫고 가능한 바깥 공기에 노출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라빌은 다시 한 번 주의를 주었다. 조금 더 걸어가자 시장이 나왔다. 차양과 진열대의 중간을 지나가며 렌은 350년 전 시장의 잰해를 구경했다. 진열대 위에는 아직까지 장신구라든지 의류라든지 주방용품, 도자기 등 썩지 않는 물품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여기저기 동전과 은화, 금화도 흩어져 있었다. 시체의 잔해들은 그 사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상상하지 않으려 아무리 애써도 350년전 이곳에서 웃고떠들며 물건을 흥정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들은 아마도 무엇이 자기들을 덮쳤는지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주판알을 튕기다가,거스럼돈을받다가, 예쁜 머리핀을 고르다가, 연인과 다정하게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밀려온 독기에 그들은 순식간에 부스러졌을 것이다. 생명의 순환이 멈춰버린 이곳에서는 그들이 그때 마지막으로 남긴 자취만이 그대로 허무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렌은 참을 수 없는 고요함과 괴기스러움과 공포에 몸을 떨었다. 도로 가장자리르 따라 조심조심 걸어서 그들이 도착한 곳은 시의 중앙광장이었다. 라빌이 예상했더 대로 그곳에 도착한 때는 이미 해가 지고 난 후였다. 어둠이 세상을 감싸자 색채 없는 세상의 이질감은 한결 가벼워지고 주위는 그저 보통의 밤풍경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이 진하고 불길한 대기가 이곳이 마법장 안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라빌이 초롱에 불을 붙이자 흑백의 불꽃이 타면서 주위의 풍경이 한눈에 드러났다. 중앙광장은 마이리아 시의 중앙광장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상당한 규모였다. 광장고 건물의 배치는 마이리아 시와 비슷했으나 건축양식은 확연히 달랐다. "일단 여기 있는 적당한 건물에 머무시는게 좋겠어요. 지금까지 오면서 봤던 목조건물들은 외관상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350년이 지난 것들이라 아무래도 위험하지만, 여기 있는 건물들 은 대부분 석조건물이라서 그 정도 세월은 끄떡없거든요. 자, 그럼 어느 건물로 들어가시겠어요?" 라빌은 카엔과 렌은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렌이 건물들을 둘러보며 망살이는 동안 카엔은 광장 바닥에 주저 앉았다. 흔들리는 초롱불에 윤곽이 드러난 시청 건물을 보는 순간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벅찬 감정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아기가 뒤뚱거리며 힘차게 걷는다.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시원하다. 눈에 익은 커다란 건물이 가까이 다가오다. 아기는 뒤에서 소리치는 엄마를 뒤로하고 계단 위에서 손을 흔드는 커다란 남자에게로 뒤뚱거리며 잰 걸음으로 달려간다. 남자는 한달음에 계단을 내려와 아기를 아아 올린다. 남자의 머리속에는 아기에 대한 사랑, 기쁨, 반가움이 뿜어져 나온다. 아기는 남자에게서 읽혀가는 그 복잡한 생각들이 뭔지 아직 잘 모른다. 그저 눈앞의 남자가자기를 엄청나게 좋아한다는 것만 안다. 이 남자에 대한 호칭은 '아빠'다. 잊어버리지 않을 때까지 지겨울 정도로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에 아기는 이제 확실히 이 남자가 아빠라는 것을 안다. "아빠! 아빠! 나 왔쪄!" 아기는 외친다. "우리 카엔이 왔구나! 여보, 직장에서까지 애를 데려오면 어떻해?" 아빠는 뒤에 따라오던 여자를향해 약간 나무라듯 말한다. 하지만 아빠에게서 읽혀지는 생각은 말과는 다르다. 여자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빠는 그저 마냥 행복해하고 있다. 아기는 왜 말과 생각이 다른 걸까 하고 조금 의아해한다. 아기 뒤에 따라오던 여자는 '엄마'다. '엄마'라는 말도 역시 지겨울 정도로 들어서 배웠다. 엄마의 머릿속에서도 아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생각들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모두 기분 좋고 즐거운 느낌이어서 아기는 다시 까르르 웃는다. "얘가 아빠 보고 싶다면서 자꾸 조르잖아요.호호호." 낯선 남자가 아빠 옆으로 와 뭐라고 한다. "기스리, 괜찮네. 워낙 예쁜 아이잖아. 물론 자네가 아니라 자네 부인을 닮아서 그런 거지만 말이야." 이 남자의 생각이나 말도 어려워서 잘 모르겠지만, 이 낮선 남자의 생각도 역시 기분 좋다. "우리 카엔이 얼마나 무거워졌는지 보자. 어디, 이영차!" 아빠는 아기를 들어올린다. 땅이 갑자기 멀어지고 온 세상이 한 눈에 보인다. 아기는 좋아서 까르르르 웃느다. 하지만 아빠는 기운차게 한 바퀴 아기를 휙 돌리자 아기는 갑자기 무서워진다. "꺄아, 아빠! 무셔워! 엄마! 엄마!" 아기는 울면서 외치자 엄마에게서 당황함과 분노가 뿜어져 나온다. 아기는 놀라서 더 크게 운다. "당신, 왜 애를 울리고 글래요?" "하하하, 미안, 미안.. 이 녀석이 너무 귀여워서." 아빠는 겸연쩍은 듯 미소지으며 말하자 엄마의 기분은 눈 녹듯이 풀린다. 아기도 안심이 되어 다시 까르르 웃는다.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시원하다. 모든 불행이 시작되기 전, 아무도 그의 능력을 모르던 무렵, 달콤하고 짧은 행복의 순간... 아름다운 몇 가지 기억의 조각...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는 오로지 행복함만이 번져 나오고 그가 읽은 주위의 모든 생각은 다 기쁘고 즐거운 것이었던 그때... "괜찮으세요? 얼굴이 핼쓱하세요. 역시 연달아서 순간이동을 하시는 건 무리였나봐요." 렌은 두건 속으로 손을 넣어 카엔의 이미를 짚었다. 카엔은 흠칫놀라 고개를 들었다. 다정함과 걱정이 가득 담긴 렌의 눈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냥 잠시 현기증이 나서........" "아까 순간이동 때 제게 힘을 너무 많이 나눠주신거 아니에요? 피차 5서클이라 마법력은 뻔한 건데 말이에요." 라빌이 묻자 카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정말로 괜찮아요." 카엔의 이미에서 손을 떼고 그를 일으켰다. 카엔의 옷에 묻은 잿빛가루를 털어주려던 렌은 그것이 바로 죽은 사람의 몸에서 떨여저간 살 부스러기라는 걸 새삼 깨닫고 진저리를 쳤다. "카엔님, 저 시청 건물이 싫으시면 다른 데로 가요."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카엔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본 렌은 카엔이 진정한 걸 확이하고 나서야 계단을 올라갔다. 라빌과 카엔은 렌의 뒤를 따랐다. 그 옛날 절정에 이르던 말틴 시의 풍요를 보여주듯 시청 건물은 돈을 아끼지 않고 최고의 예술가를 고용했을때 비로소 성취될수 있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다지 밝지 않은 초롱불로 비춰 본 것 만으로도 레은 이곳이 시청 건물이 얼마나 빼어난 건축물인지 금방 알수 있었다. 이미 서제국 황제의 사치스러움과 아름다움을 경험해본 렌의 눈에도 말틴의 시청은 흠잡을 데 없이 우아하고 장중했다. 다만 원래 찬란했을 벽화와 건축자재의 색치가 그저 흑백으로밖에 보이지 않는것이 안타까웠다. 렌의 궁금증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 라빌이 말해다. "렌님이 지금 쓰다듬고 있는 기둥은 원래 장밋빛이었답니다." 렌은 놀라서 라빌을 돌아보었다. "라빌님으 여기가 이렇게 되기 전에도 와보신 적이 있으세요?" 라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350년 전까지 여기 말틴은 카로딘 대공국의 영토였어요. 카로딘 대공국은 그 무렵 카로딘 왕국으로 불리면서 동서대륙과 남대륙을 연결하는 드래곤의 회랑을 대부분 점령하고 있었고요. 서제국과 동제국도 생기기 전 여러소국들이 난립하던 그 시절에 카로딘 대공국은 가장 강한 나라였지요. 엘프들은 카로딘 대공국의 수도 카로드에서 다시 여기 말틴으로, 그리고 말틴에서 동대륙과 서대륙으로 이동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말틴과 엘프상관에 설치되어 있던 마법진은 서제국 황제의 마법에 휩쓸려 파괴되고, 그때 엘프 상관에 있던 엘프들 30여명도 죽어 버렸습니다. 어쨋든 그래서 엘프들에게 말틴은 친숙한 도시였습니다. 저도 저주가 내리기 전 서너 번 와봤고, 이곳의 엘프 상관에 머무르기도 했었죠. 카로딘 대공국은 지정학적인 위치상 아무래도 남대륙과의 교류가 활발해서 드워프나 엘프 모두에게 잘 해주는 편이었지요. 이곳 말틴은 '축복의 평야'에서 생산된 농산물의 집산지였고, 명월석 광산이 다시 거기에 엄청난 부를 더해주었습니다. 참 부유하고 풍요로운 도시였어요. 그 부가 지나쳐서 주민들이 다소 무절제하고 향락적이기는했지만, 정말 아름다운 도시였고요. 여기 광장을 둘러싼 대부분의 건물들은 장밋빛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이곳 시청 건물에 저녁 햇살이 떨여저 장밋빛이 더 한 층 불타오르는 광경은 정말 아름다웠지요. 황제의 저주가 내려진 후로는 아까 말했듯이 50년 전에 이 안에 한번 들어와 본 적이 있습니다. 다른 엘프들과 함께 이곳 마법장의 성질과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왔었지요. 드래곤께서 푸른 바람의 엘프덤 수장이신 티우사님께 명령하신 거라고 하더군요." 아버지의 퇴근 무렵 어머니와 함께 시청에 마중 나올때면 볼수 있었던 석양은 카엔의 기억속에도 남아 있었다. 카에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주었다. 가슴이 터질 듯 뻐근햇다. "그런데 단 한 사람의 마력으로 이 지경이 된 거군요. 생명체는 사라지고, 모든 색도 사라지고, 무생물과 죽음만이 남아 있는 거군요." 렌은 분노를 억누르며 조용히 말했다. 셋은 적당한 곳에 짐을 내려놓고 시청 내부의 탐험에 착수했다. 큰 건물이어서 대강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함참 걸렸다. 실내느 의외로 멀쩡했다. 이곳에 펼쳐진 마법이 생명체만을 파괴하는 것이어서 그런지, 사무실마다 대리석 탁자, 철제 의지, 탁자 위에 놓인 서류뭉치, 빈 컵 같은 것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마치 자리를 비운 사람들이 언제라도 금방 돌아올 것 같은 느낌이 이었다. 그러나 렌이 무심코 서류뭉치에 손을 대자 종이는 그냥 바스러져 버렸다. 또 유심히 보니 화부에 심어져 있던 정체불명의 식물은 그대로 새까맣게 말라비틀어져 굳어진 채였다. 렌이 손을 대자 그 식물은 산산이 바스러졌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을 휩쓴 마법장은 식물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기척 없는 실내의 온갖 집기들은 라빌이 들고 있는 초롱불이 흔들리 때마다 그림자를 일렁이며 불길한 느낌을 자아냈다. 초롱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좀 더 꼼꼼히 살펴보니 사무실의 바닥 여기저기에는 잿빛 가루와 검은 크리스탈이 쌓여있었다. 처음 라빌에게서 설명을 들었을 때에는 잿빛 가루 몇 점만 보아도 흠칫했지만, 하도 많이 보다 보니 렌은 이제 무덤덤해져서 더 이상 놀라지 않아다. 그저 마음이 더 무거워질 따름이었다. 렌 일행은 위층으로 올라가 다행히 거처할 만한 곳을 발견했다. 화려한 철제 침대가 놓여 있고 대리석으로 만든 화장대와 탁자, 의자 세트까지 놓여 있는 방이 서너 개 줄지어 있었다. 시장과 고위공무원의 숙직실로 쓰였던 듯했다. 각각의 방에는 화장실도 딸려있었으나 당연히 물은나오지 않았다. 라빌이 약간 곤란하다는 엍로 말했다. "이 안에서는 아시다시피 마법도 통하지 않고 물도 흐르지 않으니, 크고 작은 볼일은 밖에서 나가서 보시고 세수나 목욕도 아까 그 실개천에서 하셔야 할 거예요. 먹는 물은 반드시 아가 싸온 식수만 이용하셔야 하고요. 그리고 저기 침대 위에 씌여진 시트와 이불은 놔두고 챙겨온 침낭을 이용하세요. 섬유도 이미 상당히 오염되어 있으니까요." 350년 전의 그 일 당시에 침실에 남아 있던 사람은 없었던지 침실들 어디에도 시체의 잔해는 보이지 않았다. 라빌이 시키는 대로 적당한 방을 골라 바닥에 침낭을 깔고 나자 렌은 진이 빠져 침낭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죽음으로 가득 찬 도시를 잔뜩 긴장한 채로 20아반 가까이 걸어온 피로가 이제야 한꺼번에 몰려왔다. 측은한 눈길로 렌을 내려다보던 라빌은 다시 엘프의 무지갯빛 살가루를 단지에서 꺼내 각각의 침낭에 뿌렸다. "이제 주무셔도 돼요. 저는 오늘 하룻밤만 쉬고 내일 일찍 여기 마법장 밖으로 나가 브림으로 갈게요. 두 분은 여기에서 한 달 동안 숨어 기다리세요." 라빌은 단지에서 자기가 쓸 무지갯빛 가루를 조금 ? 解?나서 단지를 내려놓았다. "이건 한 달 동안 유용하게 쓰일 거에요. 하지만 독기를 예방할수는 있어도 이미생긴 독기를 없애주지는 못하니까 만에 하나라도 몸에 잿빛 얼룩이 생기면 무조건 마법장으로 나가셔서 치유마법을 시전받으셔야 해요. 알았죠?" "네" "마스크는 잘 때에도 풀지 마세요." "예" 렌은 지친 몸을 침낭에 쑤셔 넣었다. 탁하고 무미건조한 공기가 손수건을 뚫고 콧속을 지나 폐로 스며들 때마다 몸에 검은 기운이 번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렌은 손수건을 거의 눈 바로 아래까지 글어올리며 뒤척였다. 라빌은 아직 깨어 있는 걸 본 렌은 옆에 누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라빌님은 여기 말틴에 대해 정말 많이 아시는군요." "그 옛날 참상을 보고 너무 놀라 그 후로 시간 날때 마다 연구해 왔지요. 하지만 아마 저 말고도 말틴에 대해 연구하는 엘프나 인간들이 있을 거예요." "라빌님은 왜 서제국 황제가 이 끔찍한 저주를 내리게 되었는지 아시나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말틴 시에서 황제의 가족을 인질로 잡았다던가 뭐라던가 그랬던 것 같아요." 카엔은 흠칫했으나 다행히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아다. "저 때문에 라빌님이 드래곤에게 쫓기게 되거나 생명의 위협을 받는 건 아닌가요?" 렌의 질문에 라빌은 태평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드래곤의 피조물인 엘프 주제에 감히 위대하신 흑룡의 뜻을 거슬렀으니 데이그랜님께서 진노하셔서 제 목숨을 빼앗을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만에 하나 용서할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도 충분히 길었는걸요. 그 동안 저는 엘프답지 안히고 인갑답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렇다면 제 500년 삶 중 400년은 덤인 거겠죠. 후훗, 절더러 인간과의 혼혈이 아니냐고 묻는 엘프도 있었답니다." 자신의 목숨을 이미 버릴 각오로 하고 있는 라빌의 말에 렌은 눈물이 핑 돌았다.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으나 렌은 애써 태연하게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라빌님이 혼혈이라면, 엘프의 좋은저과 인간의 좋은저만 따서 이어받으신 혼혈일거에요." 침낭에 나란히 누워 둘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카엔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절대로 라빌님이 드래곤에게 당하도록 놔두지는 않겠습니다." 라빌은 흐뭇하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카엔님. 말만 들어도힘이 나네요." 라빌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쌕쌕 숨소리를 내며 곯아떠어졌다. 역시 잠을 좋아하는 엘프다웠다. 그 모습을 보며 렌도 잠을 청했으나 쉽게 잠이 오지 않아 악몽과 선잠을 되풀이하며 뒤척거렸다. 라빌 건터편에 누운 카엔이 잘 자고 있을지 걱정되었으나 그쪽에서는 아무 미동도 없어 렌은 안심했다. 카엔은 밤새 한 잠도 자지 못한 걸 렌은 알지 못했다. 다음날 새벽, 라빌은 어울리지 않게 이틀연속으로 일찍 일어났따. 그녀가 부스럭거리는 바람에 렌과 카엔도함께 잠에서 깨었다. 렌은 몸에 밴 습관대로 정명기를 운기해보았으나 예상대로 주위의 기운이 너무 탁해서 정명기는 쌓이지 않았다. 하긴 지금 이곳은 렌이 생전 처음 본 탁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어 운기를 해도 오히려 독기가 쌓일 정도였다. 아무 생명도 깃들지 않은 죽음의 대기 속에서렌은 의기소침해졌다. 라빌은 메고 온 짐에서 사흘 치 식량과 물만 남겨놓고 나머지를 모두 꺼낸 후 등에 배낭을 짊어졌다. 이네 마법장 경계까지 걸어갔다가 마법장을 벗어나면 즉시 순간이동해서 가까운 엘프상관으로 가고, 거기서 다시 마법진 호핑을 통해 동제국 수도 브림으로 간다는 것이 라빌의 계획이었다. 마침내 라빌이 떠날 때가 되자, 렌은 라빌 혼자 드래곤이 있는 브림으로 떠나보내는 것이 못내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생각으로는 브림에 도착해서 테룬황제를 만날 수 있기만 한다면 적당한 핑계를 대어 데이그랜님을 황궁 밖으로 내보내는 건 누워서 꿀과자 먹기예요. 그러니 렌님은 카엔님과 함께 안심하고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되요." 라빌은 말하다 말고 한쪽 눈을 찡긋하며 렌을 잡아끌었다. 카엔이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라빌은 렌의 귓속에 속삭였다. 손수건너머로 새어나오는 숨결은 간지러웠다. "렌님, 렌님이 동제국에 가는 걸 내키지 않아 하는 이유를 알아요." 렌은 깜짝 놀랐다. "테룬 황제가 렌님과 카엔님의 사이를 갈라놓을까봐 걱정되는 거지요?" 렌은 카엔을 힐끗 보고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빌은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다 방도가 있어요." 라빌의 말에 솔깃해져서 렌은 라빌의 입가에 귀를 더 가까이 가져다댔다. "테룬 황제는 렌님에 대한 마음이 보통이 아니니 렌님이 프리라면 당장 달려들 테지만, 렌님에게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애인이 있다고 하면 하는 수 없이 포기할 거예요. 그러니 렌님은 여기 있는 동안 카엔님과 갈 데까지 가야해요." 그 말에 렌은 황당해졌다. "뭘 어쩌라고요?" 라빌은 계속 웃으며 태연하게 속삭였다. "카엔님 같은 타입은 샌님에다가 생각이 많아서 선뜻 행동에 나서지를 못해요. 그러니 이쪽에서 먼저 나서야 해요. 그 대신에 한번 갈데까지 가면 책임은 확실하게 질 테니, 뒷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요." 렌이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라빌은 더 열을 내며 말했다.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니까요. 그래서 둘 사이를 기정사실로 만들어놔야 한다고요." 렌은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쉬며 털어놓았다. "사실은 저도 저번에 한 번 멍석을 깔아줬는데, 카엔님은 아무래도 저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 "멍석을 깔아준다는 게 뭐예요?" 렌은 약간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뭐, 말하자면 이쪽에서 먼저 빈틈을 보이는 거죠." "그런데도 카엔님은 아무 짓도 안했나요?" "예, 그러니 카엔님이 절 사랑하는지 어쩐지 잘 모르겠어요." 라빌은 렌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말도 안 돼요. 카엔님이 렌님한테 어떻게 하는지 보고도 모르세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행동들이라고요. 그러니 혼자서 의기소침해 있지 말고 잘 해봐요." "어떻게요?" 라빌은 곤혹스러워 하는 렌을 보며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렌님이 먼저 고백하세요. 이런저런 남녀 간의 전략전술따위는 이미 두 분께 의미가 없어요. 지금 상황에서는 정공법이 최고에요. 고백하시고, 덮치헤요." 렌은 마침내 참을 수 없어 입을 가린 손수건이 휘날릴 정도로 폭소를 터뜨렸다. "어쨋든 노력할께요. 분발할 테니 걱정 마세요." 렌은 라빌의 손을 꼭 잡고 다짐했다. "렌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겠어요?" "뭔데요?" "렌님의 얼굴 전체를 볼수 있을까요? 저는 한번도 렌님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없잖아요. 마법이 풀린 후에도 계속 손수건으로 덮여 있었으니 말이에요. 우리는 친구니까 서로 진짜 얼굴을 알아야지요." 렌은 라빌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정말, 우리는 친구지요? 제가 엘프도 아니고 라빌님보다 훨씬 어리다 해도 우리는 친구이 거지요?" 라빌은 밝게 웃었다. "물론이지요." 렌도 밝게 웃었다. 렌은 입을 가리고 있던 손수건을 풀었다. 눈앞에 드러난 눈부신 아름다움에 라빌은 감탄했다. "렌님이 이야기해준 수많은 사건들이 이제 이해가 되네요. 내 남편이 봤다면 당장 모델 서 달라고 달려들었을 텐데요. 하지만 지나친 아름다움은 때로 재앙의 씨앗이 되니 늘 조심하도록 해요." "고마워요, 라빌님." 자상한 라빌의 말에 렌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3 장 과거의 죄는 긴 그림자를 남긴다 라빌이 떠난 후 렌과 카엔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렌은 조금 전에 라빌과 나눈 대화가 머릿속에 떠나지 않아 왠지 겸연쩍고 쑥스러운 기분이었다. 먼저 고백하라고? 그리고 덮치라고? 사실 의술을 익힌 렌에게 카엔을 덮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방심한 틈을 타 두 세군데 마비침과 자극침을 놓기만 하면 그 다음 일은 일사천리 일것이다. 해부학적으로 중요 부위가 어디에 붙어있고 무슨 기능을 하는지, 어디를 자극해야 쾌감이 오는지 등등을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 말이다. 렌은 무심코 카엔을 덮치는 광경을 상상했다. 음, 먼저 그에게 다가가 농담을 하면서 정신을 빼놓다가 적당한 때를 노려 기습적으로 침을 놓아 마비시키고, 그 다음에 키스하고, 충분히 키스한 다음에 자극침을 두어 군데 놓고, 상의를 벗기고......... 상당히 구체적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렌은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떨쳐냈다. 여자의 자존심이 있지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낯 뜨거운 상상을 하다가 아무것도 모른 채 멍하니 있는 카엔을 쳐다보니 저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렌은 괜히 멋쩍어져서 카엔을 향해 씩 웃었다. 카엔은 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렌을 쳐다보다가 어디가 답답한 듯 입을 가린 손수건에 대고 몇 차례 기침을 했다. 카엔은 렌의 생각을 고스란히 읽은 후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느라 일부러 헛기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 말틴에 온 후 처음으로 드는 웃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창문 너머로 동이 트고 도시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자 웃음기는 사라졌다. 그의 아득한 기억 속에 선명하게 박혀 있던 것과 똑같은 말틴 중심가의 풍경은 전날 밤 어둠 속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강렬하게 그의 가슴을 찔렀다. 이제 렌에게 모든 진실을 이야기 할 때가 되었다는 걸 그는 깨달았다. 그러나 며칠만이라도 지금까지처럼 렌과 지내보고 싶었다. 그래, 며칠만이라도... 따져보면 시간은 많지 않았다. 라빌이 걸어서 마법장을 벗어나는 데 꼬박 하루, 마법장의 영향에서 회복하여 장거리 순간이동을 할 수 있기까지 또 하루. 아마도 라빌은 이틀동안 걸어서 엊그제 묵었던 마을까지 간 후 하룻밤 정도 쉬고 순간이동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일 밤 까지는 그 마을에서 라빌을 따라잡아야 했다. 이미 라빌에게 정이 든 카엔은 그녀가 동제국으로 가서 불필요한 위험으 무릅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어젯밤 라빌에게 한 약속도 그런 뜻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 마법도 통하지 않는 이 마법장에서 순식이동하여 라빌을 뒤쫓아 간다면 렌은 당장 그의 정체를 눈치 챌 것이다. 그러니 그가 정체를 밝힐시한은 내일 밤까지였다. 오늘은 렌과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 그리고 내일 고백하자. 카엔은 마음을 정했다. "렌, 뭘 하고 싶어요?" 카엔은 애써 밝게 물었다. 그러나 렌은 의외로 심각해졌다. "글쎄요. 저는 말틴의 참싱을 좀 더 똑똑히 보고 서제국의 사람들에게 제가 본것을 두루 알리고 싶어요. 제가 서제국에 이쓴 동안 저는 황제의 저주니말틴의 비극 같은건 전혀 몰랐어요. 제국 정부가 함구령을 내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서제국 주민들도 대부분 전혀 모르고 있겠죠. 하지만 그들도 자신의 번영과 풍요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야 해요. 과거의 비극이 그냥 잊혀지는 건 더 비극적인 일이에요." 카엔은 렌의 대답에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그는 한참 숨을 고리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고통스럽고 끔찍한 광경을 더 볼 필요가 있을까요? 과거의 비극을 다시 헤집는 건 아물어가는 상처를 다시 벌리는 것 아닐까요? 그냥 이대로 잊어버리게 내버려 드는 것도 나름대로의 방법이 아닐까요? 렌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개인이든 국가든 자기의 치부와 상처를 낱낱이 들여다보고 반성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똑같은 비극이 발생하게 되어 있어요. 특히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마법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다는 거이 밝혀진 이상 반드시 흉내 내려는 사람드이 나올 거예요.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두가 알아야 해요. 그래서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이 다시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해요." 렌은 역사책에서 본 기억을 더듬었다. "제가 살던 세계에서 제가 태어나기 40년쯤 전에 온 세상의 모든 나라가 둘로 갈라져서 세계대전을 벌였던 일이 있었어요. 패전국 중에는 독일이라는 나라와 일본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두 나라 모두 전쟁 중에 끔찍할 정도로 많은 민간인들을 아무 이유 없이 학살했어요. 그런데 독일은 전쟁이 끝난 후 그런 악행을 저지른 자들을 하나하나 수십년에 걸쳐 찾아내서 법의 심판을 받게 했지만, 일본은 승전국과 적당히 타협해서 전쟁과 학살을 주도한 중요 인물들 중 대부분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그냥 넘어갔어요. 그후로 수십 년 후 어떻게 되었는지 아세요? 독일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똑독히 알고 그런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하는데, 일본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조차 제대로 몰라요. 그리고 자기네들이 이웃나라를 침략한 건 그들을 위해서였다는 둥, 자기네들 덕분에 침략당한 이웃나라가 오히려 발전했다는 둥, 한심한 망언을 계속 하고 있지요." 렌이 일본이 저지른 난징 대학살이나 생체실험등의 만행을 떠올리며 열을 내어 말했다. 카엔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모든 것을 밝히기로 결심한 이상 렌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럼 우리 도시 한 바퀴 돌기로 하지요. 말틴이 검푸른 내해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느 건 렌도 알지요? 여기까지 오면서 시의 서쪽과 중심부는 대강 봤으니 시 북쪼으로 올라가 시계방향으로 돌아 동쪽의 검푸른 내해 유역까지 갔다 돌아오면 말틴의 주요부는 거의 다 보는 셈이 됩니다. 조금 작게 돌면 오늘 중에 다 볼수 있을 겁니다." "좋아요." 렌과 카엔은 돌아다니면서 먹을 건량과 물을 조금 챙겨 길을 나섰다. 하얀 햇살 아래 흑백으로 빛나는 도시의 풍경에 렌은 눈이 시렸다. 그리고 카엔은 마음이 시렸다. 카엔이 계획한 루트를 따라 둘은 묵묵히 북쪽으로 한 시간 반 정도를 걸었다. 말틴의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집드은 조금씩 초라해지고, 거리는 다소 지저분해지고, 시체의 잔해에 덮여있는 옷가지들도 남루해졌다. 시청이 있던 중앙부와 검푸른 내해에 면한 서부의 부유층이 모여 살고 시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중앙로 부근에도 그럭저럭 유복한 사람드이 모여 살았지만, 북쪽과 남쪽에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다고 했다. 카엔은 걸으면서 이따금씩 렌에게 이것저것 설명해주었다. 350년 만에 찾아온 말틴이었으나 아직도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도 놀라웠다. 슬픈 기억만 간직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길가의 사소한 물건들만 보아도 물밀듯이 밀려오는 추억에 그는 휘청거렸다. 고통과 슬픔속에 감당하기 어려운 그리움이 섞이는 건 그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기억을 더듬으며, 대문에 걸어놓은 붉은 리본은 그 집에서 딸이 태어났따는 표시이고 푸른 리본은 아들이 태어났다는 표시라든지, 집집마다 방충망이 달려 있는 것은 여기 말틴이 검푸른 내해 유역에 자리? 袖?덕분에 습도가 높아 여름에 모기가 많이 생겨서라든지, 그런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을 나직하게 설명했다. 카엔의 설명은 마치 눈으로 직접 본것처럼 생생해서 렌은 계속 감탄했다. 또 한편으로는 더욱 가슴이 아팠다. 이곳은 격식 갖춰 잘 정돈된 중앙광장 부근의 주택가들보다 더 사람 냄새가 났고, 그래서 생생하게 살아있던 사람들이 어느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는 것이 한층 더 실감났다. 어느덧 주택가는 끝나고 멀리 북쪽에 야트막한 언덕이 보였다. 실눈을 뜨고 그쪽을 자세히 보단 렌은 사람들이 그 언덕 주위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발견했다. "저기는 뭐지요?" "아마도 명월석 노천광일 겁니다." "저기는 마법장에 속하지 않나요?" "마법장이 막 끝나는 부분입니다. 어제 우리가 처음 마법장에 들어왔을 때 한동안 색채가 엷어 희미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 계속 됐지요? 저기가 바로 글너 곳입니다. 최초에는 마법장 내에 있었지만, 마법장이 축소되면서 독기가 조금 옅어져 보통 사람들도 그럭저럭 어느정도 버틸 수 있게 된 겁니다." 렌은 전전날 밤 여관 주인에게서 들은 증세가 생생하게 떠올라 조금 방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저기 한 번 가보면 안될까요? 아무래도 저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증상이 궁금해서요." 카엔은 렌의 치료벅이 또 도졌구나 하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지금 숨어다니는 처지인데,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좋을게 있겠습니까? 웬만하면 이번에는 참도록 해요." 렌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카엔은 렌이 영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걸 읽을 수 있었다. 하긴 그녀가 원하는 걸 못 해줄 건 또 뭐란 말인가. 어차리 내일이 되면 그녀에게 내 정체를 알게 될 테고, 함께 서제국 황궁으로 돌아가면 그 다음에야 안전해질 테니 알려지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렌이 서제국 황궁으로 돌아가고 나면 드래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여태까지처럼 자유롭게 환자를 보살펴보기도 쉽지 않으리라는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카엔은 렌이 부탁하는 걸 다 들어주고 싶어졌다. "마법장 안에서 나오는 걸 들키면 모두들 의심할 테니, 우리 빙 돌아서 가도록 하죠." 렌은 기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명월식은 희미한 푸른빛을 띠기에 노천광도 전체적으로 푸른빛이지만, 마법장 안에서 그 푸른색은 탈색되어 회색에 가까운 빛깔로 가라앉았다. 약간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 오히려 이곳이 마법장 안이라는 걸 상기시켰다. 불길안 기운이 가득찬 마법장 속에서 넓적한 원뿔 모양으로 파고들어간 노천광은 마치 개미 지옥같았다. 노천광은 두개 였고, 각각의 노천광에 달라 붙어 일하는 사람들 수는 얼핏 보아 백여 명 정도 되어 보였다. 마을의 가구 수가 총 400호, 각 가구당 여기서 일할 만한 장정이 한 명씩이라고 한다면, 마을의 장정 두 명 중에서 한 명은 지금 여기 나와 일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희미하게 탈색된 배경 속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만은 총천연색이었다. 광부들은 저마다 적당한 위치를 자리 잡고 서서 곡괭이로 바위를 부수고 그 속에서 명월석을 골라내는 일 반복하고 있었다. 이미 지표에 가까운 곳의 명월석은 다 캤는지 땅이 상당히 넓고 깊게 파고들었다. 노동자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독기를 막기 부족한지, 다들 일하다 말고 쉬고, 또 조금 일하다가 쉬기를 반복했다. 왜 저렇게 괴로워할까 생각하던 렌은 비로소 라빌이 손수건 위에 뿌려준 엘프 가루의 위력을 깨달았다. 엘프가루-렌은 달리 적당한 명칭을 찾지 못했다-가 확실히 독기를 상당 정도 막아주는 것 같았다. 노천광으로 다가갈수록 예의 그 시체의 잔해가 많아졌다. 옛날에 죽은 사람들인지 아니면 얼마 전부터 여기 몰려와 명월석을 캐다가 새로 독기에 오염되어 죽은 사람들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죽어간 것마은 틀림없었다. 렌과 카엔이 가까이 다가가는데도 노동자들은 뜻밖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른 분들이시군요. 한참만에 오셨네요." 노천광 가장자리에서 일하던 광부 한명이 말을 붙였다. 그의 몸에는 벌써 여기저기 팥알만한 잿빛 얼룩이 생겨나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렌은 '잿빛'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몸의 다른부분은 컬러인데 얼룩이 생기는 부분만이 흑백이었다. 마법장의 사물들처럼 색이 사라지는 현상 때문에 얼룩은 얼핏 잿빛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다른 분들이라뇨?" "앞에 오신 마법사님들 말입니다." 렌은 당황함을 감추며 태연하게 둘러댔다. "저희는 후발대예요. 그래서 그분들은 잘 몰라요." 광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하면서도 쉬지않고 곡괭이를 내리쳐 땅을 팠다. 한참 파서 돌무더기가 생기자 그는 털퍼덕 주저앉아 돌 더미 속에서 명월석 조각을 골라내 허리춤의 주머니에 하나씩 집어넣기 시작했다. 카엔은 광부가 떠올리는 생각 속에서 '마법사들'에 정신을 집중했다 . "앞에 오신 마법사들은 여기서 큰 무리 없이 일처리를 잘 하고 갔습니까?" 카엔이 질문을 던지자 광부가 떠올리는 마법사들의 이미지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예, 그럭저럭 연구도 잘 하셨고, 몸에 얼룩이 많이 생긴 친구를 연구해서 고쳐준다고 데려갔는데, 고치기가 쉽지 않은가 봅니다. 보름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 돌아오질 않으니.........." 광부가 기억하는 마법사들은 아무 장식 없는 회색의 소지 위에 회색의 망토를 걸치고 두건과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모습이었다. 지금의 렌과 카엔의 모습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마법사에 대해 좀 더 물으려던 카엔은 광부가 갑자기 두 팔을 미친 듯이덜덜 떨며 '아파! 아파! 아파!' 하고 외치다가 땅바닥을 구르자 당황했다. 렌도 놀라서 광부에게 다가갔으나, 너무 격렬한 발작에 어쩔 줄을 몰랐다. 열심히 명월석을 캐던 광부들은 그의 발작에 잠시 일손을 멈췄다. 주위는 쥐 죽은 듯 고요해지고 비명과 울부짖음만이 메아리쳤다. 그 광부는 목이 떠나가라 소리 지르며 팔에 생긴 잿빛 얼룩을 마구 긁어대고 땅에 비벼대다가 그래도 아픔이 가시지 않자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 그의 팔과 이마는 순식간에 피범벅이 되었다. 1난(10분) 정도 지나자 광부는 겨우 발작을 멈추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 정신을 차렸다. 그는 한동안 헉헉거리다가 다시 곡괭이를 잡고 겨우 일어났다. "이 얼룩이 많이지니까 가끔 이런 일이 생기네요." 광부는 기진맥진한 말투로 변명하듯 설명하고는 목에 걸고 있던 땟물 줄줄 흐르는 수건으로 피를 대강 닦은 후 다시 곡괭이질을 시작했다. "계속 일하시면 어떻해요? 쉬셔야죠!" 렌이 안타깝게 외치자 광부는 주름투성이 얼굴을 웃는 듯 우는 듯 찡그리며 말했다. "이 몸뚱이도 이제 얼마 못갈텐데 일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일해야죠.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 내가 죽어도 마누라랑 애들이 그럭저럭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는 더 이상 렌을 쳐다보지도 않고 힘겹게 곡괭이를 들어 올렸다가 체중을 전부 실어 바닥에 내리 꽂았다. 지금 우는 건 왠지 광부에 대한 모독인것 같아 렌은 입술을 꼭 깨물며 울음을 상켬다. "서제국 황제가 원망스럽지 않으세요? 그자만 아니었다면 이곳이 이렇게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리지도 않았을 테고, 지금 이렇게 괴로워하지 않으셔도 됐을 텐데요." 렌이 묻자 광부는 다시 그 웃는 듯 우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말하면서도 그는 곡괭이를 내리찍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원망은요? 오히려 감사해야죠." "네?" "만약에 이곳이 이렇게 변하지 않았더라면 여기는 어느 부자나 귀족의 소유가 되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나같이 힘없고 빽 없는 무지렁이는 이 근처에 얼씬도 못했을 테고, 혹시 여기 광부로 고용됐어도 명월석을 캐서 가져가기는커녕 입에 풀칠도 못할 정도의 푼돈이나 받고 죽어라 일했겠지요. 그리고 퇴근할 때에는 옷을 전부 벗고 항문검사까지 당해야 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가 이렇게 저주의 땅이 된 이후로 조금이라도 살길이 잇는 사람은 이 근처로 올 엄두를 절대 안 내니까, 그 덕분에 우리들같이 이제 아무런 갈 곳 없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한심한 인생들이 눈먼 명월석을 캐 갈수 있는 겁니다. 저는 빚에 쫓겨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 조금만 더 모으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빚도 다 청산하고, 우리 아이들은 고개들고 떳떳하게 살 수 있을 거고, 제대로 된 양가집에서 자란 배필도 얻을 수 있겠죠. 그렇게만 되면 나는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광부는 헐떡이면서도 더 한층 힘을 내어 곡괭이질을 했다. "쳇. 여한이 없다고?" 옆의 다른 광부가 침을 뱉으며 끼어들었다. "이봐요, 날 보쇼!" 끼어든 광부는 바지를 걷어 다리를 보여주었다. 종아리 뒷부분이 커다랗게 잿빛으로 물들어 있고 그 옆으로 엄지손가락 얼룩들이 잔득 생겨 있었다. "이거봐요! 왜 내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여기서 일하는지 압니까? 마법사 양반들, 닷새 동안 굶어본 적 있습니까? 온 뱃속을 쇠고랑으로 긁는 듯한 미치도록 아픈 그 기분을 아냐구? 오죽하면 굵어죽는 것보다 차라리 여기서 일하다 죽는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여길 왔겠수?" 광부는 말하다 스스로 치미는 분통에 못이겨 눈물을 닦았다. "난 카로딘 대공국 출신이요. 거기에서 소작농을 하면서 근근이 살았지요. 그런데 흉년이 한 번 와서 하는 수 없이 고리채를 얻으 쓰고 나니까 남는게 엇더라구요. 승냥이 떼 같으 지주랑 마름들 등쌀에 어쩌겠소? 딸은 얼굴이 반반해서 도시에 몸 팔러 갔다가 소식이 끊기고, 아들은 군대로 끌려가고, 참마로 기가 막힙디다. 이대로 죽나 싶었는데, 그래도 세상에 인정이 남았던지, 옆집 사람이 쌀 한되를 주면서 구걸해서라도 여기 말틴에 와보라고 하더군요. 말틴 근처까지만 오면 명월석 광부를 모집하는데, 선불금도 당겨 쓸수 있고 명월석 캔 건 거의 다 자기 몫이 된다고요." 광부는 한숨을 푹 쉬다가 다시 치를 떨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여기까지 왔지만, 이게 사람 할 짓이요? 언제 죽을지 몰라 조마조마해가면서 오늘 하루만 더, 오늘 하루만 더, 이렇게 사는게 사람 사는 거요? 뭐, 서제국 황제가 고맙도고? 나 참, 기가 막혀서! 애당초 그놈이 카로딘까지 싹 다 정복해버렸으면 거기도 서제국만큼 살기 좋아졌을 거 아뇨! 뭐, 자기 고향은 싫다는 이유로 정복해놓고도 그냥 떠나버려? 그게 황제가 할 짓이야? 백성이라는 게 황제 맘대로 버리고 싶으면 그냥 버려도 되는 그런 쓰레기만도 못한 목숨들이냐고!" 그 광부는 다시 렌과 카엔을 보며 소리 질렀다. "그리고 당신들, 마법사라고 우르르 몰려와서 목숨걸고 뼈 빠지게 일하는 광부들을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살펴보고, 그리고 나서는 혹시나 병이라도 고쳐줄 것 처럼 굴다가 그냥 획 가버리고, 그래도 돼는 거요? 이 죽어버린 땅에서 뭐 얻어갈 게 있다고 기웃거리는 거야? 당장 꺼져버려! 이곳에서는 마법이 안 된다며? 그러니 당신들 하나도 안 무서워! 반 죽여놓기 전에 어서 꺼져!" 광부는 흥분해서 곡괭이까지 마구 휘둘렀다. 렌과 카엔은 황급히 도망쳤다. 광부는 조금 쫓아오다가 제풀에 지쳐 헉헉거리며 멈췄다. 그리고 다시 분통이 터지는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는 한 번 진저리를 치다가 다시 한숨을쉬며곡괭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렌은 눈물을 참으며 힘없이 돌아섰다. "나중에 우리가 안전해지거든 반드시 저 사람들이나 마법장에 오염된 사람들 모두를 구해줄 방법을 찾아봐요." 렌의 말에 카엔은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덕에 내려와 둘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카엔은 이미 렌에게 말틴에서 볼 수있느 가장 끔찍한 광경을 숨김없이 보여주자고 마음먹은 터였다. 그의 발걸음은 동남쪽, 검푸른 내해로 향했다. 그가 오래 전 은밀히 파견한 조사단의 보고에 따르면 그 해변에 펼쳐진 참상이야 말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가장 끔찍한 광경이라고 했다. 명월석 노천광에서 해변까지는 대략 두 파잔 (네 시간)정도 결렸다. 이미 점심때가 되었지만 둘 다 식욕이 나지 않아 이다금씩 멈추어 물을 마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아가 거기 노천광이요. 마법사들이 왔다고 햇죠?" "예" "어디서 파건한 마법사들일까요? 혹시 서제국에서 광부들을 치료하기 위해 보낸 걸까요?" 렌이 특유의 선의를 담아 해석하자 카엔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서제국 황제는 여기를 아주 싫어해서 정복해놓고도 철수해버렸는걸요." 그리고 그가 최근에 페람 공작에게 그런 일을 명한 적도 없었더. 마법사들이 그의 명을 받아 이곳에 조사하러 들어돈 것은 대략 100여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럼 다른 마법사들이 저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들어온 걸까요?"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치료하기 위해서 온 마법사들이 보름 전에 잠깐 왔다가 사라진후 다시 나타나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아마도 지적 호기심에서 마법진을 연구하러 온 마법사들일 겁니다. 사람들을 몇몇 치료해준 것도 치유마법이 얼마나 잘 듣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일 것이고, 한 명을 데려간 건 실험에 쓰기 위해서겠지요." 카엔의 정신마법이라면 아까 그 광부에서 뇌가 다 망가질 때까지 모든 기억을 짜내어 그 마법사들이 광부에게 뇌가 다 망가질 때까지 모든 기억을 짜내어 그 마법사들이 광부 앞에서 했더 모든 대화와 몸짓을 캐내고 그걸 재구성하여 그들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가난과 고통과 절망 속에서 마지막 남은 희망을 붙잡고 있는 그 가련한 인생을 더 처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한참 걷자 다시 고급주택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도 마이리아 시처럼 바다-검푸른 내해는 사실 호수지만, 워낙 커서 사람들이 그냥 바다라고 불렀다-를 볼 수 있는 정망 좋은 곳에 상류층 주택이 볼려 있었다. 축축하고 가라앉은 대기 덕분에 물가가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시체의 잔해가 거의 보이지 않아 렌은 그나마 조금 편해졌다. "여기 사람들은 마법이 펼쳐졌을 때 다 다른 곳으로 도망간 걸까요? 시체의 잔해가 거의 보이지 않네요." "그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는 않았을 거라니요?" "황제가 펼친 마법은 순식간에 온 도시를 덮었다고 합니다. 사실 순식간이라는 표현은 조금 과장이지만, 대락 그의 손에서 뿜어나간 마법장이 말틴 전체를 덮어버리는데는 1난(10분)이면 충분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짧은 시간에 사람들이 어디로 피했겠습니까? 멀리서 시커멓고 무시무시한 기운이 다가오는 게 똑똑히 보이는데 도망갈 곳은 없으니, 아마도 그들은 해변으로 줄달음질 쳤겠죠. 그리고 그곳에서최후를 맞았을 겁니다." 사실 그는 마법장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눈앞에 있는 사람 들이 순식간에 바스려져버리는 것만을 보았을 뿐, 마법장이 퍼져가는 외곽의 사람들이 어떻게 도망갔는지는 보지 못했다. 그러니 나중에 해변에 펼쳐진 참상을 보고받고 나서 그는 아마도 그런식으로 일이 진행되었으리라고 추측했다. 카엔의 대답이 너무 끔찍했는지 렌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해변으로 가까이 갈수록 집들이 점점 더 고급스럽고 화려해졌다. 중앙광장 부근의 관공서보다 더욱 커다랗고 사치스러운 저택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 저택은 대부분 나신을 드러낸 남녀가 서로 껴안고 있거나 입맞춤하는 벽화나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부끄러움 없으 마음껏 욕정을 드러내는 흑백의 춘화와 조각상 덕분에 거리의 음침함이 조금 덜어지고, 그 옛날 이곳을 활보했을 청춘남녀들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떠올랐다. 무한한 생명력에 가득차 거리를 뛰어다니고 사랑을나누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했을 그들. 수 백년 전 사람들의 웃음소리, 발자국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렌은 있지 말아야 할 고셍 있는 것 같은 기분, 죽은 자들의 영면을 방해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영면이라고? 이들이 과연 영면할 수 있었을까? 단 한순간도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원한에 차 말틴의 마법장 안을 떠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땅의 저주가 풀리고 이곳이 다시 자연의 일부가 되고 순환하는 그날이 올땎지 말틴의 영혼들 또한 계속 저주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묵묵히 걷다보니 하얀 저택들 사이로 마친내 검푸른 내해가 보이기 시작했다. 바다 만큼 넓어서 내해라고 불리는 거대한 호수였다. 새하얀 저택 앞에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해안선과 그 너머에 끝없이 펼쳐진, 원래는 검푸르렀을 회색빛 바다는 얼핏 지중해의 어느 관광지를 찍은 흑백의 기념엽서처러 보였다. 마법장 속에서 죽어버린 나무들의 까만 둥치마저도 풍경에 어우러져 독특한 붕위기를 자아냈다. 참 아르다웠다. 생명 없는 무기질이기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지도몰랐다. "참 평화롭네요" 렌은 한 점 미동도 없는 눈앞의 풍경을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로 묘사했다. 평화와 죽음과 무(無)는 모두 다른 것이지만, 달리 무어라 묘사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카엔은 아무 대답도 업이 렌을 지나쳐 성큼성큼 해변으로 다가갔다. 렌은 조금 놀라서 서둘러 카엔을 따라갔다. 모래사장은 회색이었다. 원래 회색 모래였을지, 시체의 가루가 섞여 회색이 되어버린건지, 시체의 가루가 섞였다면 얼마나 섞인 것인지, 지금 이 흑백의 세상에서 렌이 알 방법은 없었다. 그저 모래 사이에서 간간이 반짝이는 흑색 크리스탈과 장신구들이 이 모래사장에서 죽은 사람들이 참 많았음을 알려줄 따름이었다. 카엔의 말처럼 이 근방 사람들은 팔찌와 목걸이를 짤랑이면서 해일처럼 몰려드는 마법장을 피해 헛되이 해변까지 도망쳐왔을 것이다. 그리고 마법장이 덮치는 순간 이 모래사장에서 부서져 내렸을 것이다. 그래도 물만은 변함없었다. 해류의 흐름도 마법장 안에서는 멎어버리는지 먹빛처럼 진한 빛을 띤 물을 물결도 파도도 일으키지 않은 채 해변을 덮고 있었다. 그 고요함에 약간의 위안을 받으며 렌은 카엔을 따라 물가로 갔다. 앞서 가던 카엔은 갑자기 멈춰 서서 미동도 없이 물속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뒤따라온 렌이 뭔가 말을 걸려는 순간,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온몸의 영혼을 다 뒤집어 쏟아내는 듯한 절규였다. 얕은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수 많은 시체들이었다. 시체들은 대부분 눈을 부릅뜬 채로 죽는 순간의 모습 그대로 썩지도 않고 보존되고 있어다. 더 끔찎한 것은 시체들이 대부분 어딘가가 잘려나간 채라는 것이었다. 팔다리, 머리의 반, 몸통의 반쪽, 세로로, 혹은 가로로 잘려진 그 시체들은 그 상태 그대로 수백년 동안 물속에 잠겨 있었다. 마법장이 해변을 휩쓴 그 순간 물밖으로 나온 신체의 부분만이 정확하게 그대로잘린 것이다. 그리고 물은 마법장의 영향을 받아 성질이 바뀌어350년 전의 시체토막을 그 안에 그대로 품고 있었다. 카엔을 따라 물속을 들여다본 렌은 잠시 자신이 보고 있는 게 뭔지 알지 못했다. 눈으로 본것을 이해하는데 걸리는 찰나의 시간에 렌은, 어쩌면 저렇게 모든 게 해부학 교과서와 똑같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잘려진 두개골 안에서는 좌뇌와 우뇌가 주름이 잡힌 채로 고스란히 들어있고, 세로로 비스듬하게 반 토막 난 시체의 종단면으로는 식도와 작은 창자가 한눈에 보였다. 토막난 다리 속에는 뼈와 근육과 진피와 표피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얼굴의 앞쪽에 잘려나간 시체의 코는 구멍 두 개만 남기고, 치뜬 눈 윗부분의 각막이 잘려나가 그 안의 유리체가 물에풀렸는지 둥그런 안구 안쪽의 망막이 그대로 보였다. 그 찰나지간에 렌은 다시,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컬러가 아니라 흑밹이라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살색,갈색,? 湛본?몸뚱이들이 이 물속에서 얽혀 있는 광경을 보았다면 그건 얼마나 더 끔찍했을까... 마침내 눈으로 본 광경이 머릿속에 입력되자 뱃속에서뭔가 꿈틀하기 시작했다. 렌은 황급히 입을 가린 손수건을 떼어내고 물속에 즐비한 시체들 위에 힘없이 구역질을 했다. 토사물은 잠시 색을 띄었다가 물에 떨어질때 쯤에는 흑백으로 변해 물과 섞이고, 곧 시체 위에 가라앉았다. 오열하는 카엔 옆에서 렌은 한없이 토했다. 아침, 전날 저녁, 전 날 점심에 먹은 모든 걸 다 게워내고 마침내 시큼한 위액 말고는 더이상 토해낼 것이 없을 때 까지... 구역질이 멈추자 렌은 뒷걸음질쳤다. 공포에 가득차 황급히 뒷걸음치다가 렌은 모래사장에 엉덩방아 찧었다. 카엔이 계속 비명을 지르는 동안 렌은 엉덩방아 찧은 그 자세 그대로 한동안 얼어붙어 있었다. 이런 걸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 몰랐다. 세상에 이렇게 끔찍한 광경이 있을 수가... 카엔은 렌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홀린 듯이 물속에 시선을고정시킨 채 끊임없이 비명을 질렀다. 그 긴 세월 동안 그의 죄는 사라지지 않고 이곳에 그대로 잠겨 있었던 것이다. 모든 순환을 멈춰버린 그의 마법장 안에서 시체들은 옛날 모습 그대로의 죄를 증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늙지도 않는 그의 몸뚱이처럼 그의 죄 또한 늙지 않는 것이다. 100여 년 전 마법사 조사단이 보내온 보고서에는 뭐라고 되어 있었지? '물속에 수많은시체들이 잠겨 있었다.'고만 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들은 왜 더 자세히 쓰지 않았지? 나는 왜 그들을 직접 만나보고 정신탬색을 하지 않았지? 내가 저지른 죄를 왜 좀 더 낱낱이 파헤치지 않았지? 저 시체들은 왜 저렇게 된 걸까? 아, 그래, 아마도 내 마법이 물의 기운과 상극이어서 그런 걸까? 그래서 물속으로 들어간 부분은 마법장의 영향을 적게 받아 그대로 남고 물 밖으로 나온 부분은 부서져버린 건가? 물이 내 마법을 약화시켜 시체를 부서지지 않게 한건가? 차라리, 물속에서도 물 바깥에서 처럼 시체들이 다 부서져버렷더라면 이 시체의 바다는 없었을 텐데! 카엔은 갑자기 비명을 멈추고 시체 하나를 유심히 드여다보았다. 두 팔이만이 잘려 비교적 온전한 시체는 그가 아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직장 동료이자, 그가 어릴 때 아버지를 마중하러 시청에 가면 늘 반가이 맞아주던 바로 그 아저씨였다. 그 아저씨는 그가 어릴 때 보았던 모습보다 훨씬 늙어 있었지만 그래도 입매나 눈매에 젊은 날의 자취가 남아 있었다. 여기로 도망쳐온 거라든지, 입고 있는 옷이라든지, 여러모로 볼 때 말년에 상당히 유복해져서 이 근처 어디가에 안락하게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는 마법장이 몰려오자 물속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그리고 마법장이 물을 덮치는 순가 물속에서 헛되이 몸을 숨기다가 물 밖으로 나온 두 손이 그대로 가루가 되고 물속에 잠겨 있는 나머니 몸뚱아리는 생명이 끊어진 채로 박제처럼, 생물표본처럼 보존되어버렸을 것이다. 카엔은 다시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는 비명을 멈추지 않은 채 미친 듯이 해변을 뛰어다니며 물속에서 아는 얼굴을 찾아보았다. 시체의 바다 속에서 그는 아는 사람을 하두명 더 찾아냈다. 그럴 때마다 비명은 더욱 커졌다. 성대가 갈라져버릴 정도로 그는 비명을 질렀다. 가라앉은 수천 구의 시체들이 모두 한꺼번에 벌떡 일어나 그를 집어삼키려는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작은손, 힘찬 팔이었다. "정신 차리세요, 카엔님!" 렌은 울면서 외쳣다. 카엔은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렌은 안간힘을 다해 바둥거리는 그를 모래사장까지 끌어냈다. 그가 모래사장으로 나와서도 계속 발버둥치자 렌은 카엔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제발 정신차리세요, 카엔님!" 렌은 눈물 콧물을 다 흘리며 애원했다. 카에은 멍한 눈으로 렌을 바라보았다. 그런 카엔을 마주보며 렌은 카엔의 얼굴에 붙어 있는 은보랏빛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그리고 간절함을 담아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를 꼭 끌어안았다. 예전에 렌이 슬퍼할 때 카엔이 해주었듯이. 카에은 이마에 닿는 온기와 그를 안은 몸의 포근함에 그대로 온몸을 맡겼다. 한없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지옥의 소용돌이 속에서 뭔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그를 끄집어내는 기분이 들었다. 마비된 심신이 조금씩 풀리고,서서히 제정신이 돌아왔다. 렌은 카엔을 얼싸안고 그의 등을 이루만지며 나지갛게 말했다. 눈말이 계속 렌의 뺨을 적시고 카엔의 뺨도 함께 적셨다. "카엔님, 언젠가는 이 죽음의 땅에도 생명이 다시 돌아올 거예요. 언젠가는 다시 찬란한 빛깔이 돌아와,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하얗고 장미빛은 붉게 보이는 날이 올 거예요. 침묵은 깨지고 세상은 새들의 노랫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찰 거예요. 저 저주 받은 시체들은 그때가 되면 잘 썩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게 될 거예요. 그러니 절망하지 마세요. 생명을 그렇게 나약한 게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여기 있잖아요. 서 있기만 해도 부스러졌던 이 죽음의 땅 한가운데에 우리는 지금 멀쩡히 살아 있잖아요. 이곳 말틴이 다시 그 옛날처럼 축복받은 말틴이 되는 걸 우리 살아생전에 보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후손은 언젠가 그 모습을 볼 것이고, 다시 여기에서 생명을 번성시키게 될거에요. 그러니 울지 마세요. 제 말이 믿어지지 않으시나요? 지금 여기, 죽음의 대지, 죽음의 바다에도 생명은 숨어 잇어요. 모든 것이 죽어 있는 것 같아도 이 모든 죽음을 능가하는 생명은 바로여기, 이곳에 숨어 있어요." 렌은 자신의 가슴, 그리고 카엔의 가슴을 차례로 가리켰다. 그리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랑은 죽음을 이겨내요. 저는 카엔님을 사랑해요. 카엔님이 저를 사랑하는 것처럼요. 그러니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요." 렌은 카엔의 은보랏빛 눈동자를지그시 들여다보았다. 카엔 또한 렌의 암갈색 눈동자를 취한 듯이 바라보았다. 고통 대신 감동이 그의 마음을 채웠다. 그는 더듬으며 수줍게 물었다. "내가 렌을 사랑한다는 걸 어떻게, 어떻게 알았지요?" 렌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로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유도심문이었어요. 역시 저를 사랑하셨군요." 카엔은 순간 멍하다가 정말 문자 그대로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하고 많은 온 세상 도시 중 하필이면 이곳에서, 그의 죄가 생생히 남아 잇는 이 해변에서 이렇게 미친 듯이 웃음이 터져 나오다니! 그가 정신없이 웃는 것을 보면서 렌도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웃던 두은 어느 순간 얼싸안고 함께 울었다. 눈물은 끝없이 샘솟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포옹을 풀고 카엔은 옷매무새를 바로했다. 그는 온 마음을 담아 엄숙하게 말했다. "렌, 다시 제대로 말하겠어요. 나는 렌을 사랑합니다." 정체를 밝힌 후에 사랑을 고백하겠다던 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그는 후련했다. 후련하면서도 슬펐다. 이제 외면하지 않고 돌아보니 그의 죄는 결고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스스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니 어찌 렌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그는 장차 다가올 모든 결과를 감수했다. 렌은 사랑 고백을 받은 감동에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시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 행복할 수가! 이렇게 온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쁠수가! 주위는 흑백이었지만 렌의 눈에는 한순간 모든 게 다 총천연색으로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사랑받는다는 것은 이렇게 좋은 거였다. 그런 렌을 카엔은 다시 끌어안았다. "렌, 미안해요. 좀 더 일찍 고백하지 못해서." "괜찮아요. 뭐든지 괜찮아요." 카엔은 렌의 얼굴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안돼요, 카에님! 저 조금 전에 토했잖아요!" 렌은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으며 허리춤에서 양치할 때 쓰는 박하향 나는 물병을 꺼냇다. 열심히 양치한 렌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카엔을 쳐다보았다. "이제 키스하셔도 돼요." 카엔은 황당하게 렌을 바라보다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라도 지금 터져나오는 이 웃음을 평생 잊지 않으리라. "렌, 정말 사랑합니다." 렌은 이번에는 자신의 입술을 누르는 카엔의 입술을 순순히 받아 들였다. 그의 코에, 눈꺼풀에, 뺨에, 이마에, 그리고 입술에 닥치는 대로 키스하고 키스받았다. 너무 달콤해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몸속 깊숙이에서 휘몰아치는 행복감과 황홀함에 렌은 어찔했다. 그렇게 한참 키스를 나누던 둘은 약간 기진맥진해져서 약속이나 한듯 모래사장 위에 주저앉았다. 렌은 다시 나직하게 속삭였다. "사랑과 웃음은 죽음을 이겨내요. 우리 둘이 함께 사랑하고 웃을수 있는 한 세상에서 무서울 건 아무것도 없어요." 카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터질 것 같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렌, 그대가 있기 때무에 나는 아무것도 무섭지 않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와주어서 너무 고마워요." "저도 이 세상에 와 카엔님을 만나게 되서 너무 기뻐요." 렌은 카엔의 손을 꼭 맞잡았다. 밀어를 나누던 렌은 문득 물속에 잠겨 있는 토막난 시체들을 생각하자 마음이 어두워졌다. "우리 시청으로 돌아가요. 여기는 우리가 행복한 기분을 나누기에는 너무 슬픈 곳이에요." 렌이 말하자 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몸을 일으켜 손을 꼭잡고 시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길을 걸으며 렌은 카엔에게 여러기자 이야기를 했다. 사랑이 그녀에게 힘을 주어 렌은 의욕에 넘쳣다. "카엔님, 제 꿈에 대해 전에 말씀드렸죠? 병원과 치료술 학교를 열고, 치료술 책도 쓰겠다는 거요." "예, 기억합니다." "저는 그 병원이랑 치료술 학교를 여기 말틴 근처에다가 짓고싶어요. 물론 독기가 미치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다가 지어야 하겠지만요. 여기는 서제국과 동제국의중간지역이니 양쪽 제국사람들이 배우거나 치료하러 오 는 데에도 나쁘지 않고,또 말틴을 수시로 방문하면서 이 끔찍한 독기를 해소시킬 방법을 연구하느 데에도 좋지 않겠어요? 그리고 서제국 황제가 말틴에 한 처참한 짓이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면 지금 비정상적으로 정체된 서제국 체제에도 뭔가 변화를 줄수 있지 않겠어요? 인간성에 반하는 범죄자가 수백 년 동안 거대 제국을 통치하는 지금의 상황은 분명히 잘못됐어요. 그런 자는 반드시 단죄되어야 해요." 카엔이 슬픈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자 렌은 한층 더 힘이 나서 꿈을 펼쳤다. "카엔님이 거기서 치유마법을 가르쳐주세요. 라빌님도 교수로 초빙할 수 있으면 더좋겠죠? 부자에게는 많이 받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적게 받고, 서로서로 아는 치료법을 나누고, 치유마법과 치료술을 병합하는 방법도 계속 연구하고요." 렌의 꿈은 계속 되었다. "괜찮은 시설의 병원과 학교를 같이 세우려면 최소한 2천 골드는 있어야 할 거예요. 병원과 학교의 기금으로 쓰려면 추가로 천 골드는 더 있어야 할 테고요. 지금 치료비 받은 게 350골드, 그리고 남은 금붙이를 합쳐도 고작 이삼백 골드뿐이니 앞으로 갈 길이 멀어요. 그렇지만 꾸준히 벌어가면서 요령껏 투자하면 의외로 빨리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 그리고 저를 실험용으로 쓰겠다는 그 드래곤이랑 담판이라도 해서 일단 신변의 위협을 없애는 게 급선무겠죠? 말로 해서 들을지 어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지금까지 들은 얘기를 종합해보면 드래곤이란 생물이 그렇게까지 막무가내는 아닌 것 같아요. 제가 모르는 무슨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러니 테룬 황제가 중재에 나서면 어덯게 잘 풀릴지도 몰라요. 드래곤은 원래 동제국에 호의적이라면서요? 동제국으로 가고 나면 방법을 강구해봐야지요. 테룬 황제에게는 카엔님과 제가 사랑하는 사이라는 걸 확실히 알릴테니 걱정마세요. 아예 주례를 부탁해도 되겠네요. 암튼 치료술 책을 쓰면 싼값에 온 세상에 두루 푸뜨릴 거예요. 처음엔 당장 급한 기본 위생과 기초 치료술, 그리고 기초 중의학에 고나한 걸 내고, 그다음에는 점차 세부적인 내용으로 작성해서 전집을 만드는 거예요. 병원 옆에는 하차크 교수님이 하시는 것처럼 약초밭을 두고 치료에 필요한 약초를 자급자족할수 있도록 하면 좋을 거에요. 그리고 그 약초밭 옆에 더도 덜도말고 닥 2층짜리 작은 지을 지어요. 하얗게 칠하고 집 안에는 침실과 육아실과 서재를 두는 거예요. 1층에는 거실과 부엌만 두고, 2층에는 침살과 육아실을 서재를 두고요. 부엌은 햇볕이 잘 드는 중간에 두어 모두들 즐겁게 요리도 하고 식사도 할 수 있게끔 해야죠. 카엔님도 물론 요리하실 거죠? 카엔은 요리책 '신혼 3개월 요리마스터, 나도 사랑받는 아내가 될수 있다'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렌이 빤히 바라보자 그는 속마음을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렌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서재를 같이 쓰는 게 좋으세요, 아님 혼자 쓰는 게 좋으세요? 작은 서재 두 개를 만드는 게 좋을지 큰 서재 하나를 만드는 게 좋을 지 잘 모르겠네요. 아, 그리고.........." 렌은 갑자기 몹시 부끄러워하며 얼굴이 빨게졌다. 카엔은 렌의 마음을 고스란히 읽고 다시 서글퍼졋다. "에, 저, 카엔님, 아기 좋아하세요?"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밖에 없는 이 저주받은 능력이 후대에 이어질까봐 아이를 낳을 생각을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렌이 자신을 용서해줄지에 대해 점점 자신감이 사라지는 지금, 렌의 질문에 대해 '예, 나는 이 세상 무엇보다도 그대와의 사이에 태어나는 아기가 좋습니다'라고 흔쾌히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는 엄청난 슬픔을 느끼며 다소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렌은 들뜬 기부을 조금 가라앉혔다. "그래요. 카엔님 또래의 청년들은 대개 아이들을 별로 안좋아하죠." 렌은 조금 멋쩍은 기분으로 맞장구 쳤다. 황홀한 사랑의 마법은 깨지고 마법장 안에 죽음처럼 깔려있는 우울함이 다시 돌아와, 둘은 더이상 아무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시청까지 묵묵히 걸어갔다. 두 시간 정도 걸어서마침내 시청에 도착한 둘은 침낭 위에 쓰러졌다. 하루 종일 밖을 쏘다니면서 먼지와 모래를 뒤집어썼기 때문에 당장 씻어야 했지만, 렌은 이틀 연속 장거리를 걸어다닌 피곤함에 절어 손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침낭 위에 널부러져 있던 렌은 아까부터 카엔이 보이는 태도를 곰곰이 돌이켜보았다. 왠지는 몰라도 카엔은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난 후에도 계속 주저하고 있는 듯했다. 정말 카엔이 샌님이라서 행동을 주저하고 있는 거라면, 내친 김에 지금 이쪽에서 나서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생각까지 들었다. 남자는 원래 여자가 먼저 나서는걸 싫어한다던데, 카엔님도 그러면 어떡하지? 그래도 카엔님이 계속 망설이는 걸 무한정 지켜보고 만 있는 것도 너무 답답한걸. 생각을 거듭하던 렌은 마침내 결심하고 일부러 명랑하게 말했다. "카엔님, 옷이 너무 지저분해져서 갈아입어야갰네요. 뒤돌아보지 마세요." 렌은 배낭에서 얇은 잠옷을 꺼내 라빌이 준 무지갯빛 가루를 뿌린 후하루종일 입었던 옷을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엇따. 벗은 옷으로 손과 얼굴과 발에 묻은 먼지를 대강 닦은 렌은 입을 가린 손수건을풀고 하나로 묶어 두었던 머리끈도 푼 후 조심스럽게 돌아 카엔 앞에 섰다. 렌의 모습을 본 카엔은 숨이 막힐것 같았다. 하얗고 차가운 달빛속에서 어깨까지 닿는 검은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서 있는 렌의 모습은 밤의 요정처럼 아름다웠다. 달빛은 렌이 걸친 잠을 지나쳐 도자기 같고 악기같은 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의 몸속에서 뜨거운 열류 같은 것이 치솟아 올랐다. 그러나 카엔은 이성을 잃기 직전에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눌렀다. 렌은 카엔이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채 카엔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자신을 보는 그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져 렌은 망설였지만, 카엔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알 수 없는 격정이 렌을 대담하게 했다. 처녀의 수줍음을 떨쳐버리고 렌은 한발짝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카엔님, 저....." 카엔님, 저는 카엔님을 정말 사랑해요. 저는 두렵지 않아요. 카엔님을 더 가까이 느껴보고 싶어요. 우리 이 죽음의 땅에서 가장 생명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을 해요. 서로의 숨결이, 몸이, 영혼이 섞여 하나가 되도록 해요.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렌의 마음을 읽은 카엔은 부르르 떨었다. 단 한 점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그에게 열고자 하는 렌의 마음에 카엔은 한없이 감동했다. "렌,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말아요." 카엔도 렌의 앞으로 한발 다가가 렌을 부드럽게 안았다. 그는 엄청난 욕망을 억누르며 그녀의 입술에 다정하고 부드럽게 키스했다. 렌은 한편으로는 안심하고 한편으로는 아쉬워하며 키스를 받았다. 입술이 얽히며 형언할 수없는 감미로움이 렌의 몸을 타고 흘렀다. 카엔과 키스할 때마다 점점 강하게 느껴지는 생소하면서도 설레는 뜨거움이었다. '이제 카엔님의 키스가 일등이야.' 렌은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렌은 카엔의 키스 기술이 향상된것이 아니라 카엔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강해지면서 그의 키스를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렌은 키스의 부드러움에 취해 카엔의 목에 팔을 감았다. 이번에는 렌이 먼저 카엔의 입술에 키스했다.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혀끝이 스쳐지나갔다. 렌과 카엔은 똑같이 감전되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그러나 렌이 그의 입술에 재차 키스하려는 순간, 카엔은 한숨을 쉬며 렌에게 수면마법을 걸었다. "피곤하지요, 렌? 어서 자요." 렌은 순간적으로 멍하나 안타까운 표정을 짓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카엔은 품속에서 축 늘어지는 렌을 받아 안아 침낭 위에 눕히고 침낭을 여며주었다. 그리고 렌의 입과 코 위에 무지갯빛 가루를 뿌린 손수건을 덮어주었다. 그는 치솟는 욕망을 자제한 스스로가 대견했다. 신분을 숨긴 채로 렌을 안는 것은 비겁한 짓이었다. 자신이 만든 마법장이고 이 안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는 그 혼자 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이 마법장 에서는 그조차도 평소의 100분의 1 정도의 마력밖에 내지 못햇다. 수면마법을 쓰는 정도로 힘을 들어서 카엔은 잠시 헐떡였다. 밤이 깊어 아치형의 근사한 창문으로 하얀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달빛은 벽 쪽에 침낭을 붙이고 누은 렌의 감은 눈위로 서렸다. 손수건으로 가린 입이 안타까웠다. 조금 더 자세시 렌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손수건을 건드리지 않고 그저 렌 옆에 하염없이 앉아 그녀의 감은 눈매만 보았다. 그는 그 아래 숨겨진 모든 것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다. 밤에 내린 정적이 생생했다. 늦여름 보름이니 이제 슬슬 온갖 가을 풀벌레들이 울기 시작할 때였다. 말틴 사람들은 이맘때면 잠을 잊은 채 환희 불을 밝힌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밤새 지칠 줄 모르는 쾌락을 좇곤했다. 유녀들은 아름답게 치장하고 연회가 열리는 해안가 권력자의 저택으로 밤출근하고 부유한 한량들은 당시 유행했던 느슨하고 얇은 토즈를 걸치고 그 길목에서 유녀와 수작했다. 그렇게 흥청망청 놀지 못하는 중산층들은 도시 곳곳의 공원에서 닷푼짜리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에 맞추어 밤 새 춤을 추곤 했다. 어린아이들도 때로 부모와 함께 따라 나와 일찍 자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들떠 다른 아이들과 함께 공원을 뛰어다녔다. 어렴풋한 그의 어릴적 기억속에도 그때 들었떤 춤곡이 아련했다. 그러나 그 모두가 아득한 옛날의 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곳에는 죽음처럼 고요가 흘렀다. 그는 그날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되새겨보았다. 긴 하루 였다. 아직 밝히지 않으 그의 죄는 계속 가슴을 짓누르고 있어지만 더 이상 무섭지만 은 않았다. 그는 이제 자신의 죄를 렌에게 고백함으로써 렌이 그를 미워하게 될 가능성까지도 감수하고 견뎌낼수 있었다. 그는 렌을 사랑함으로써 그동안 저지른 죄에 비해 과분한 기쁨과 행복을 이미 누렸다. 렌에게 사랑받음으로써 지금까지 흘려보낸 의미없는 긴 세월은 마침내 의미를 찾았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카엔이 모든 걸 밝히기로 마음 먹은 날이 밝았다. 그는 전날 밤도 역시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러나 온몸에 흐르는 긴장감이 피곤을 잊게했다. 카엔은 렌과 함께 빵과 물을 나누어 먹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렌, 혹시 서제국 황제의 생가에 가보고 싶지 않아요?" "서제국 황제의 생가라고요 정말요? 어디에요?" 렌은 호기심에 가득차 물었다. 황제에 대한 혐오감이 드는 만큼만이나 그가 어떻게 나고 어떻게 자라서 그런 인간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여기서 멀지않습니다. 걸어서 한 파잔(두 시간) 이내에 도착할수 있습니다." "서제국 황제의 모든것이 비밀이라는데, 카엔님은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그건 거기 가서 얘기해 줄게요." 렌은 카엔의 어두운 얼굴빛을 보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뭔가 안좋은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으나 렌은 애써 털어버렸다. 사랑 고백을 받은 어제의 감격이 아직도 남아 렌은 한없이 행복했다. 이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비록 어제는 너무 피곤해서 키스를 받다 말고 잠들긴 했지만 카엔의 다정함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했다. 렌은 앞으로는 허벅지를 찌르는 한이 있더라도 키스중간에 잠드는 일따위는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럼 어서 출발해요." 점심거리를 조금 챙겨서 둘은 말틴 시 서남쪽의 중류지구로 향했다. 그쪽은 처음 말틴 시로 걸어 들어올 때 보았던 중서지구 주택가와 비슷했지만 거기보다는 다소 생활수준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거리에는 사치스러운 조각상이나 벽화 같은 장식이 없는 대신 중류층다운 실용주의와 검소함이 드러나 있었다. 어두운 회색빛-실제로는 무슨 색인지 모르겠지만-벽돌주택이 좁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틈 없이 빽빽하게 이어지고, 포장된 길 한쪽에는 하수로가 파져 있었다. 창에 이불보가 널려 있고 집과 집 사이 좁은 틈에는 빨랫줄이 걸려 있었다. 이런 길에는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쓴 어린애들이 와아 하고 소리 지르며 떼 지어 달려가고 시장바구니 가득 저녁거리를 장만해 돌아가던 아낙네들이 어린애들에게 어서 빨리 집으로 들어가라고 야단쳐야 제격이었다. 또 집집마다 요란한 음식냄새가 부끄러움 없이 길 밖에까지 진동해서 끼니를 놓친 행인들을 유혹해야 맞았다. 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고 저주받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널어놓은 빨래만이 빨래줄에 미동없이 늘어져 있는 이곳에서렌은 다시 짙은 죽음을 느꼈다. 카엔은 렌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때때로 뒤돌아보면서 성큼성큼 앞서갔다. 정말 오랜만에 오는 옛 동네인데도 그의 발길은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며 그를 끌어들였다. 꿈속을 걷는 것처럼 그는 정신없이 걸음을 옮겼다. 희미하고 아련하지만 깨고 나면 눈물 자국만 남아 있을 뿐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 꿈을 꾸었을 때와 똑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마지막에는 거의 뛰다시피 하면서 마침내 자신의 생가에 도달했다. 뭉클하고 울컥한 기분에 사로잡혀 그는 옛 집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렌은 황급히 달려 그를 겨우 따라잡은 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입을 손수건으로 가린 채여서 더욱 숨이 가빴다. "다 온 건가요?" 카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렌은 카엔의 앞에 있는 집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주위의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벽돌로 지어진 좁다란 삼층집이었다. 카엔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 앞에 계속 서 있자 렌은 카엔을 지나쳐 그 집의 정문으로 다가갔다. 정문은 나무로 되어 있고 정문에 걸려 있는 나무문패에는 '디오리'라고 적혀 있었다. "그 문패는 나중에 바뀐 겁니다. 서제국 황제가 태어날 무렵 그 문패에는 '기스리'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카엔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억누른 듯한 딱딱한 말투였다. "그렇다면 서제국 황제는 평민이었군요?" "예, 그는 여기서 태어나 만 다섯 살이 되기 조금 전까지 부모와 함께 이 집에서 살았습니다." 이제 렌도 조금씩 의혹을 느끼기 시작했다. 5서클의 마법사 사서에 불과한 그가 어떻게 서제국 최고의 비밀이라고 할 수있는 그 모든 일을 알고 있는지 불안했다. 카엔의 입에서 나올얘기가 서서히 두려워졌다. 그런 렌의 마음을 읽으면서도 카엔은 홀린 듯 말을 계속했다. 그는 옷자락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문 앞에 돌로 된 문턱에 걸터앉았다. 렌도 그 옆에 같이 앉아 커져가는 불안감으 달래며 카엔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기스리, 어머니 이름은 일다 기스리였죠. 가린 기스리는 원래 우리가 지나쳐온 그 마을 부근의 가난한 농가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가린 기스리의 아버지는 말틴 근처의 평야에서 농사를 짓는 평범한 농부였지만 가린은 어릴 때부터 머리가 아주 총명했습니다. 그 덕부에 대지의 신을 섬기는 사제에게서 글을 배울 수 있었고, 죽을 힘을 다해 공부한 덕에 마침내 시청의 하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하급 공무원이 된다 해도 귀족이 아닌 이상 승진은 두 단계로 끝나고 월급은 쥐꼬리였지만, 시청에 줄을 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힘이었기에 그는 괜찮은 중류층 집안의 아가씨를 아내로 맞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가린 기스리는 굉장히 잘 생긴 남자였기 때문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또 그의 아내가 된 일다 자이난 또한 무척 아름다워서 중류계급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둘은 어느 공원에서 열린 사교 댄스회에서 만나 첫눈에 반했습니다. 작은 규모로 상회를 하던 처가에서는 미모로 널리 알려진 딸을 부잣집에 시집보내 연줄을 만들어볼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노발대발했습니다. 하지만 공무원이라는 자리가 생각보다 사업에 도움이 많이 도움이 된다는 걸 알고 곧 마음이 바꿔 결혼을 허락했고, 사위와 딸에게 이 집까지 장만해주었습니다. 이 집은 가린과 일다 기스리의 신혼집이었죠. 일다는 결혼한지 1년 반 만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서제국의 카에닌 테리미즈넨 황제입니다." 카엔은 목이 타는지 챙겨가지고 온 물통의 뚜껑을 열고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그는 입을 훔친 후 사무적인 말투로 계속 이야기했다. "그 아이, 카에닌 기스리는 처음에는 보통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고 합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말을 조금 빨리 깨쳤지만 그 아버지가 워낙 영리했기 때문에 다들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 거라며 기뻐했답니다. 아이가 이따금 이상한 말을 하기는 했지만 부모 모두 아이들은 원래 그런 소리를 하면서 크는 거라고 여겼죠. 그런데 카에닌의 부모는 아이가 세 살이 되기 조금 전부터 사이가 멀어져 각자 바람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말틴에서 그런 일은 상당히 흔했다고 합니다. 워낙에 자유분방하고 문란한 도시였으니까요. 대개 사람들은 첫아들을 낳아 상속자가 확실해지고 나면 서로 바람을 피워도 그렇게 크게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가린 기스리와 일다 기스리 부부도 그런 경우 였습니다. 각자 따로 놀면서도 둘은 그럭저럭 정상적인 가정인 양 꾸려나갔기에 겉보기에 카에닌의 가정은 단란하고 완벽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카에닌은 어느 날, 부모의 마음속을 읽지 않으면 도저히 알수 없는 비밀을 폭로했습니다. 부모가 각자 피우고 있는 바람의 상대가 누구인지, 언제 어디서 만날 것인지 낱낱이 말하고, 제발 그 아저씨 아줌마 만나러 가지 말고 자기랑 있자고 울며불며 매달린 것이죠. 부모는 공포에 질렸습니다. 그동안 가끔혹시나 하고 의심해본 적은 있었지만 설마설마 했는데, 자기 자식이 남의 마음속을 고스란히 읽어내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이제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 어찌 무섭지 않겠습니까? 그때부터 부모는 어쩔 줄 몰랐습니다. 무슨생각을 해도 다 아이가 알게 되고, 심지어 아이가 무서워한다는 것까지도 속속들이 아이가 읽어버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부모는 미칠것 같았습니다. 아이 또한 그런 부모의 생각을 읽으면서 미칠 것 같았죠." 카엔의 이야기에 빠져든 렌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래요, 정말로 그랬을 거예요. 가엾게도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야기에 몰입해 있던 카엔은 렌의 대꾸에 흠칫 놀랐다. 그러다가 무덤덤하게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부모는 어떻게든 정상적으로 지내보려고 했지만 그들은 보통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을 읽어내는 아이라는 건 그들이 감당하기 힘든 큰 짐이었죠. 그래도 한동안 그들은 종전처럼 살아 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아이의 비밀이 주위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자기들 마음속의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진실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읽힌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은 모두 들고 일어났습니다. 아이가 악마의 자식이고 신들에게 저주받았다면서 아이를 없애지 않으면 부모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위협했습니다. 부모는 괴로웠지만 한펴으로는 막다른 길에 몰렸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그들 스스로 이 아이를 버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생명의 위협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버리게 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거죠. 부모는 마을 사람들에게, 아이가 다시는 찾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갖다 버릴 테니 아이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그렇게까지 모진 사람들은 아니었기에 마지못해 부모의 간청에 응했지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중에서 뽑힌 감시단과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멀리멀리 나가 인적없는 산골짜기에 아이를 놓고 왔습니다. 그렇게 카에닌은 혼자가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어떻게 돼었나 요?" 아이가 무사히 목숨을 부지해서 황제가 되었다는 걸 잘 알면서도 렌은 안타까워하며 물어보았다. "다행히 카에닌이 굶어 죽기 직전에 산골짜기를 지나던 상인 일행이 발견해서 구해주었지요. 그때 아이가 조금만 철이 들었더라면 카에닌의 인생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가엾게도 아이는 자기가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걸 숨길 정도로 철이 들지는 못했습니다. 겨우 다섯 살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아이의 능력은 곧 상인 일행에게 알려졌습니다. 그 일행의 우두머리는 아이의 능력을 크게 쓰일 수 있다는 걸 금방 알아봤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자기 곁에 두기는 아무래도 불길했지요.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능력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는 자기와 거래하던 대상인에게 아이를 넘겼습니다. 물론 값은 잘 쳐서 받았습니다. 대상인은 아이를 애지중지 가둬 키웠습니다. 아이는 처음에는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하며 대상인이 시키는 대로 뭐든지 했습니다. 대상인이 자기를 괴물로 여긴다든지 자기를 이용해서 돈 벌 궁리만 한다든지 하는 정도는 참을 만하다고 여겼지요. 어쨋든 산골짜기에서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요." 이제 렌은 아예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이는 어느 순간엔가,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자신은 평생 대상인의 저택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람 마음을 읽는 괴물 취급을 받으며 이용만 당하다가 죽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대상인에게 벗어날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상인이 얼마나 자기를 귀히 여기고 가치 있는 장사도구로 생각하늕지 잘 알기에 아이는 대상인이 자기를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해질 정도로 그의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온갖 진실과 거짓을 섞어가면서 대상인과 그의 가족을 서로 이간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생각보다 쉬웠다고 합니다. 원래 가족들이란 언제나 서로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고 서로에게 가장 많으 비밀을 숨기는 법이죠. 그의 계획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아니, 지나치게 성공했죠. 대상인의 가족 중 두명은 자살했으니까요. 아이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처참한 결과가 나온 데 괴로워했지만 그 모든 것이 아이 탓이라는 것을 안 대상인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대상인은 복수심에 불타 아이를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주인에게 팔아버렸습니다. 음산하고 변태적인 어느 8서클 마법사에게요." 렌은 상상만 해도 끔찍해져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마법사는 탐구심과 호기심이 많아 태생적으로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소년이 굴러들어오자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헐 값에 카에닌을 사온 마법사는 그때부터 온 갖 실험과 학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카에닌은 그의 청소년기의 상당 부분을 그렇게 고통 속에서 보냈습니다. 하지만 카에닌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마음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니까요. 지금 그의 편이 되어줄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마법사의 머릿속에서 마나를 운용흐는 방법을 조금씩, 조금씩 단편적으로 연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마법사에게 그 사실이 발각되었습니다. 물론 카에닌은 허락 없이 마법을 배웠다 것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당했습니다. 마음을 읽을 뿐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카에닌은 몸을 떨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카에닌은 자기가 마법사의 마음을 약간이나마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매일매일 정신집중을 계속 한 끝에 그는 마침내 마법사의 정신조작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그 능력을 이용해 마법사를 죽이고 마법사와 금붙이를 모두 챙겨가지고 도망쳤습니다. 이제 그는 평범한 마법사로서 인생의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었나요?" "아니었습니다." 렌은 너무도 처절한 황제의 인생역정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아 그는 평범한 생활에 적응하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의 주위에 그와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 차례로 미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정신을 조작한 것이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정신을 조작하려고 애쓰다 보니, 정신조작은 마음을 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미치는 것은 그 부작용이었던 것입니다." 그때의 그 끔찍한 절망감은 아직도 그의 기억 속에 생생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쏟았더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이상한 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미쳐버렸을 때, 그는 자신도 함께 미쳐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떠나 미즈넨 산맥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그는 아무도 찾지 못할 깊은 산속에 숨어 어떻게 하면 무의식적으로 정신을 조작하는 걸 막을 수 잇을지 필사적으로 연구했습니? ? 이따금씩 산적이나 불량배를 데려다가 실험도 해보았습니다." 카엔은 그 시절을 돌이키면서 그때 만났던 어느 가엾은 처녀가 불현듯 생각났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을 견디지 못해 모든 기억을 지워달라고 자기 발로 찾아왔던 처녀였다. 부탁대로 그녀의 기억을 지워주었는데, 그녀는 행복하게 살다 갔을지.. 천수를 누렸다 하더라도 아마 300년 쯤 전에는 죽었겠지... "그렇게 하면서 그의 정신마법과 마법서클은 급속도로 향상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유자재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마음을 조작하는 것을 제어할 수도 있게 되었고요. 그 산속에서 그는 또 황룡을 만나 그의 드래곤 하트를 얻었지요. 거의 천하무적의 마법사가 된 그는 세상으로 내려왔지만 무얼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가 원하면 뭐든지 가질 수 있었는데 말이죠. 그는 한동안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친구를 한명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정말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였습니다. "다행이네요." 렌은 눈물을 닦으며 미소지었다. 카엔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 친구는 마치 렌처럼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 정도로 깨끗한 영혼은 그가 살아온 그 긴 세월 동안 그 친구, 30년 전의 코엘, 그리고 렌, 이렇게 단 세 명 뿐이었다. 그를 배반하던 그 순간까지도 그 친구의 영혼은 깨끗했다. 자신을 배반한 그 친구가 선하고 오히려 악한 것은 자신이라는 생각이 그를 얼마나 괴롭혔던가. "그 친구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국들이 난립하고 전란이 계속되는 서제국을 통일해서 평화를 이룩하자는 게 그 친구의 소원이었습니다. 결국 카에닌은 그의 신념에 감회되어 그 친구와 함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정복전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케에닌의 이름은 곧 서제국 전체를 진동했습니다. 말틴도 예외가 아니었습지요. 그러나 카로딘 대공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말틴의 영주는 한펴으로는 카에닌의 친구로 하여금 카에닌을 배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카에닌의 부모를 인질로 잡았습니다. 카에닌은 그들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군대를 모두 뒤에 남겨놓고 단신으로 말틴에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청이 있는 말틴 시 중앙광장에 카에닌은 카로딘의 군대와 대치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묶여 있고 그의 친구는 그의 부모 옆에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부모가 그의 앞에서 자결했고, 카에닌은 이성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 번 다시 써서는 안 될 사악한 마법, 황제의 저주를 펼쳐 말틴 주위 반경 50아반 내의 모든 생물을 깡그리 몰살시켰습니다." 카엔은 그 옛날의 일을 떠올렸다. 그의 양손에서 은보랏빛 구슬이 생겨나 사방에 무한히 퍼져가고, 그 구슬이 닿는 순간 사람들이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소리없이 무서지던 그 광경.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반구는 이미 그가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말틴 전체를 먹어치웠다. 다시 멈추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반구는 커지기를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힘을 빨아들여 더 빠른 속도로 온 세상을 덮었다. 마침내 반구가 멈췄을 때 그의 주위에 생명체라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의 부모와 친구의 시체마저 흔적없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주위의 온 세상에 색채란 색채는 완벽히 사라졌다. 남은 것은 황제의 저주에 끄떡없이 서 있는 주인없는 건물들뿐이었다. "부모가 그의 눈앞에서 자결했다고요?" "예" "그래서 그 마법사를 펼친 거라고요?" 렌은 너무 참혹한 이야기에 부르르 떨었다. "그렇습니다. 그후 카에닌에게 감히 반기를 드는 자는 없었습니다. 카에닌은 거기에서 정복전쟁을 멈추고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던 테리미즈를 수도로 정했습니다. 그가 그곳을 수도로 정한 것은 그곳이 수도의 후보지중 말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수도가 완성될 무렵 그는 엄청난 규모의 대관식을 올리고 새로운 제국의 정치체제를 정비해 나갔습니다. 지금 서제국을 지탱하는 대부분의 제도가 그때 생겨났죠. 이를테면 나와림 제도는 그 무렵 귀족으로 전락한 소국의 왕과 대공들이 자기 자식을 인질로 보낸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관료제도나 수상제도도 마찬가지로 그때 생겼죠.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보내다 보니 카에닌은 결국 정치에 흥미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카엔은 숨을 몰아쉬었다. 다음 말을 잇기 위해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용기를 끌어 모았다. 렌은 본능적으로 불안감을 느끼며떨림을 멈추려 애썼다. "그래서 그는 주위의 감섭없이 편안하게 지내기 위해 황궁도서관을 만들고 스스로 그곳의 사서가 되었습니다. 그곳에서그는 눈에 띠지 않는 5서클 마법사로 가장해 제국 전체에서 수집한 책을 읽으면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그를 알아보는 자도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도 없었지만, 이따금씩 이름을 쓸 필요가 생기 면 그는 먼 옛날 그의 부모가 그를 불렀던 아명을 썼습니다. 어쨋든 제국 전체에 흔한 이름이었으니까요." 카엔의 말을 듣는 순간렌의 정신은 아득해졌다. 점점 커져가던 의혹은 분명히 그 실체를 드러냈다. 렌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황제의 아명은, 그 아명은 카엔이었겠군요?" "그렇습니다..." 렌은 벌떡 일어났다가 힘없이 벽에 기댔다. 가슴 속에서 뜨겁고 아픈 것이 치밀어 올랐다. 어찌할 바를 모르며 렌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러다가 렌은 다시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한없이 흐느꼈다. 카엔이 달래려고 렌의 등에 손을 대자 렌은 세차게 뿌리쳤다. 참혹한 어린 시절을 보낸 카엔에 대한 가엾음, 이 끔찍한 짓을 벌인 그에 대한 분노, 지금까지 그에게 속아온 데 대한 배신감, 불신, 그 못든 것이 뒤범벅이 되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행복했는데, 한순간에 처참한 현실이 땅속에서 파헤쳐진 해골처럼 드러난 것이다. 한참 울다가 렌은 입을 열었다. "지금 제 마음을 읽고 계세요?" "그렇습니다." "멀리 떨어져도 마음이 읽히나요?"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라면 읽히지 않습니다." "그럼 그만큼 떨어져주세요. 생각을 해야겠어요." 카엔은 무어라 말하려다가 힘없이 순순히 물러섰다. 렌은 계속 같은 자세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끊임없이 눈물을 떨구며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렌은 마침내 눈물을 닦고 벌떡 일어섰다. 쪽그리고 앉았다가 일어서는 바람에 다리가 저려 렌은 비틀거렸다. 카엔이 놀라 달려와 부축하려 하자 렌은 다시 그손을 뿌리쳤다. "왜 그동안 제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렌은 회한에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렌을 잃을까봐 너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카엔은 조용히 대답했다. "카엔님이 바로 서제국 황제 카에닌 테라미즈넨인가요?" "예" "처음 만날 때부터 제 마음을 읽었고요?" "예" "저를 나와림 안딘으로 지명한 것도 그래서였나요?" "예" "제가 마음을 닫아버렸을 때 카엔님이 저를 불러 깨운 것도 당연한 거였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제 곁에 붙어 있었을 테니까요." 카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리아 시에 마법사랑 사제가 파견된 것도 당연히 카엔님의 입김이 작용한 거였겠네요?" "그렇습니다." "혹시 저랑 다니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작한 적도 있으세요?" "예" "언제 어디서 그렇게 하신거죠?" "마이리아 시에서 환자들이 떼를 쓸때 그들을 말리기 위해 두세 차례 정도 썼습니다." "혹시 저에 대해 정신조작마법을 쓰신 적도 있나요?" 렌의 얼굴은 창백해 졌다. 카엔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예" "언제요? "렌이 이샤를 살린 후 생명력을 포기하고 다음 환자를 고치려 했을 때요." "그럼 그건 제가 스스로 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었나요?" "아닙니다. 내가 조작한 것이었습니다." 렌은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잠시 멍하니 있었다. 안간힘을 다해 렌은 다시 물었다. "그리고 이 지옥, 이 끔찍한 마법장을 만든 게 정말 카에님이 맞나요? 순간적인 분노에 불타 죄 없는 사람 삼만 오천며을 살상하고 이 땅에 죽음의 저주를 내린 게 바로 카엔님이란 건가요?" "그렇습니다." 카엔은 그동안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한꺼번에 심판받느 기분으로 침중하게 대답했다. 렌은 다시 목놓아 울었다. 너무 처절하게 울어 카엔은 자신의 가슴이 찢처지는 것 같았다. 몸 안의 물을 다 짜내버리듯 렌은 그렇게 울었다. "왜 그런 짓을 하신 거죠? 아무리 화가 나셨다고 해도 그 수많은 사람들을 왜 한꺼번에 죽이신 가죠? 그들 모두에게 죄가 있는 건 아니었을 텐데?" 혼잣말을 하듯렌은 울며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렌! 잘못했어요! 제발 용서해줘요!" 카엔은 렌을 부둥켜안고 함께 울었다. 카엔의 말을 들은 렌은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되물었다. "왜 제게 용서를 구하죠? 왜 제게 미안한 거죠?" "렌을 속이고 렌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까요. 렌의 정신을 허락없이 조작했으니까요." "이곳 주민들에게는 미안하지 않으세요? 제게 한 일보다 훨씬 더 끔찍한 짓을 하셨는데요?" 렌은 다시 물었다. "물론 뭐라 말할 수 없이 미안합니다. 그것도 용서해 줘요." 카엔은 게속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제게 카엔님이 지은 죄를 용서할 자격이 있는 건가요? 피해자는 제가 아닌데도요? 제가 뭔데 카엔님이 지은 죄를 마음대로 용서할 수 있겠나요?" "온 세상이 용서하지 않아도 렌만 용서해준다면 나는 살아 갈수 있습니다. 제발, 용서한다고 한마디만 해줘요." 카엔은 렌의 손을 붙잡았다. 렌은 그 손을 뿌리쳤다. 그러다 다시 렌은 눈물을 철철 흘렸다. 렌은 하염없이 울며 한참 동안 멍하니 생각했다. 왜 그를 사랑하게 된거지? 왜 이렇게 괴롭게 되어버린 거지? 그의 죄를 받아들일수 없어.. 하지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어... 난 어떻하면 좋아.... 카엔이 간략하게 해준 이야 기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괴로운 인생을 살아왔는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카엔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그러면 그를 결국 용서하게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곁에서 손을 꼭 맞잡으며 어쩔 수 없었다고, 이제는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지금 그의 뺨을 적시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히 지나갈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그의 죄가 너무 엄청났다. 그를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희생자 모두에 대해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날 해변에서 보았던 토막 난 시체들과 부들부들 떠는 광부의 모습이 생각났다. 과연 그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건가. 그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려는 순간 카엔의 따뜻한 입술이 떠올랐다. 렌의 가슴은 둘로 쪼개지는것 같았다. 괴로워... 괴로워... 찢어지는것 같아... "어차피 제게 카엔님을 용서할 자격 따위는 없어요." 렌은 힘없이 말했다. "그리고 저 스스로 카엔님의 죄를 감당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카엔님을 제 마음을 읽으실수 있으니 제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아시겠죠?" 외면하려 해도 너무 선명하게 떠오르는 렌의 마음을 카엔은 물론 읽고 있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이 용서되지 않는데 렌더러 용서해달라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렌의 입에서 용서하겠다는 말이 끝내 나오지 않자 엄청난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앞으로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용서해줄 가능성은 있는 건가요?" 카엔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어보았다. 렌은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으며 과연 그럴 수 있을지생각해보았다. 세월이 흘러 이곳의 기억이 희미해지면 카엔님을 책망하는 마음도 줄어들겠지.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잘못을 쉽게 잊고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건 외면하니까. 이곳에서의 충격이 가시고 나면 나도 카엔님의 죄를 잊어버리고 외면하면서 그저 카엔님과의 행복만을 구하려고 할 수도 있을 거야. 그러나 그렇게 살면서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는 없을 거야. 그리고 그건 용서가 아냐. 그저 망각일 뿐이야. 무책임한 망각일 뿐이야. 그러나 평생 내가 그를 용서할 수 없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돌을 던지더라도 누군가 한 사람은 그를 용서해주어도 되자 않을까?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지 않을까? 만약에 그가 속죄한다면, 어쩌면... 아니, 오히려 내가 그의 곁에서함께 속죄해야 하지 않을까? 그를 사랑한다면, 그를 위해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을까?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죠." 렌은 딱딱하게 대답했다. 카엔의 눈은 무저갱 속에서 한줄기 빛을 발견한 듯 희망으로 빛났다. "그럼 렌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렌은 마침내 눈물을 닦고 말했다. "당분간 카엔님 곁을 떠나고 싶어요."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로 그의 곁에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카엔의 얼굴을 하얗게 질렸다. "왜죠? 렌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잖아요! 나를 속일 수는 없어요!" 렌은 고개를 저었다. "사랑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건 아니에요. 저는 아마도 카엔님 곁에 있으면 끊임없이 제 마음속으로 카엔님을 단죄하겠죠. 제가 제 자신의 죄를 늘 자책하듯이요. 매일매일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심판받으면서 살 수 있으세요? 그 마음을 카엔님은 고스란히 다 읽어낼 수밖에 없을 텐데요? 그걸 생각하면 저 스스로가 너무 괴로워요." "견디겠습니다. 죗값을 치르는 걸로 알고 견디겠어요." "제가 견디지 못해요. 그런 제 마음이 카엔니에게 어마나 상처를 줄지 잘 알면서 어떻게 견디겠어요? 너무 고통스러워서 견디지 못할 거예요." 렌은 슬프게 말했다. "그래도 당장 렌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흑룡이 렌을 추적하고 있는데 어떻게 렌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카엔은 간절하게 말했다. "서제국 황제의 마법이라면 드래곤을 해치울 수도 있고, 드래곤이 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생기를 완전히 지울 수도 있다면서요? 저를 안전하게 보낼 방법 정도는 충분히 강구해낼 수 있지 않으세요?" "나를 떠나서 뭘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세상엔 거친 사람들도 많고 소녀 혼자 몸으로 뭘 하기에는 너무 힘들텐데요." 카엔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묻자 렌의 눈에도 다시 눈물이 돌았다. 그러나 렌은 당차게 말했다. "제 한 몸은 제가 돌볼 수 있어요.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고요." 카엔은 더 이상 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입을 닫았다. "드래곤에게 당하지 않도록 해주실 수 있나요?" 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을 찾으면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렌, 일단 마법장을 벗어나서 라빌이 동제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따라잡아야 합니다. 아마 라빌은 우리가 들렀던 그 마을로 가는 중일 겁니다. 그녀가 일단 동제국의 수도로 들어가 버리면 그곳에 있는 흑룡에게 사정을 들켜 목숨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그녀를 찾아 일단 함께 서제국 황궁으로 돌아가요. 거기서 렌이 안전하게 내 곁을 떠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서제국 황궁으로 가는 건 싫어요." 렌이 고개를 젓자 카엔은 조용히 달랬다. "당장은 서제국 황궁으로 가는 게 안전합니다. 드래곤은 내 마법으로도 힘든 상대입니다. 그 다음엔 렌이 바라는 대로 자유롭게 보내주겠습니다." 기억 속의 서제국 황궁에서 좋은 추억만 있었다. 카엔과 처음 만났던 도서관, 달빛 아래 첫 키스를 나눴던 황궁 후원, 반 년 동안 렌의 보금자리가 되었단 나와림 숙소 35호실.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언젠가 카엔님의 몯느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게 될 날이 올까.. 여기 말틴의 희생자들에 대한 죄스러움을 느끼지 않고도 그를 사랑할 수 있게 될 수 있을까.. 그가 나를 계속 속였는데도 왜 나는 그가 나를 보내주겠다는 저 말을 믿는 걸까..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처다보는 카엔과 눈길이 마주치자 렌은 마음이 약해졌다. "좋아요. 카엔님을 따라 가겠어요. 다만 제가 보내달라고 하면 저를 보내주세요. 카엔님이 순순히 보내주신다면, 언젠가 제가 카엔님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때 카엔님을 다시 찾아올게요. 그때까지는 저를 찾지 마세요." 딱딱한 말투였으나 카엔은 렌의 간절한 마음을 읽었다. 나는 그를 대신해서 온 세상 사람들의 용서를 구할거야. 그의 죄를 씻을 방법을 찾을 거야. 내 힘으로는 미약하겠지만 어떻게든, 언제까지라도, 무슨수를 써서라도. 렌의 마음이 그의 가슴에 사무쳤다. 비에 젖은 새처럼 바들바들 떨며 눈물 흘리는 그녀를 애처로이 바라보던 그는 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안타까워 하다가 사무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마법장 중심부에서는 나도순간이동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마법장 바깥으로 나가기만 하면 순간이동이 가능하니 거기까지는 걸어가도록 해요. 그 다음에는 바로 순간이동해서 라빌을 따라잡겠죠." 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같으면 함께 손잡고 걸어갔겠지만 렌이 그의 곁으로 다가오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아 카엔은 긴 한숨을 시고 앞서 걸어갔다. 렌이 뒤에서 따라오는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는 홀가분했다. 이제 더 이상 렌에게 자신의 신분을 들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었다. 렌이 그를 원망하하면서도 아직 그를 사랑하고 있다느 것, 마음을 읽히면서도 혐오스러워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여긴다는 것이 그에게 힘을 주었다. 렌이 나를 위해 온 세상 사람들의 용서를 구한다고 했으니, 나 또한 온 세상 사람들의 용서를 구하리라. 지나가는 이야기 - 기억을 지운 어느 여인에 관하여 위나는 슬펐다. 너무 슬퍼서 죽을 것 같았다. 그녀가 몸과 마음을 다바쳐 사랑했던 연인 프로스는 전쟁터에서 죽어버렸다. 전쟁이 너무 격렬했기에 시체를 찾을 수도 없었다. 그의 전우이던 마을 청년이 가져다준 프로스의 옷자락만이 위나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이었다. 위나는 프로스와한 마을에서 자랐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꿈같은 몇 달이 지나고 프로스는 어느 날 군대로 끌려가게 되었다. 위나는 프로스가 전장터로 떠나기 전날 밤 그와 몸을 섞었다. 둘 모두에게 첫날발이었다. 위나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몸을 열었고, 프로스는 서투른 열정으로 위나를 사랑했다. 위나의 몸 비밀스러운 곳까지 구석구석 그의 손길이 닿았고, 둘은 진정으로 서로의 것이 되었다. 프로스는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으니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고, 위나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몇 달을 기다린 끝에 돌아온 것은 그의 사망 소식과 피에 얼룩진 웃옷 한 조각 뿐이었다. 위나는 그를 다시 볼수 없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 결국 자살을 시도했다. 한 번은 마을의 저수지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지나가는 마을 사람이 발견하고 구해주었다. 그 다음에는 인적이 드문 어귀의 나무에 목을 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위나가 채 줄을 드리우기도 전에 그녀를 감시하던 어머니가 달려들어 줄을 끊어버렸다. "날더러 어떡하란 말예요?" 위나는 울부짖었다. "이것아,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위나의 어머니도 함께 울부짖었다. "하지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고,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아요! 이제 더 이상은 못 견디겠어요!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나을것 같단 말예요!!" "네가 기어코 죽겠다면 차라리 나부터 죽여!" 위나는 미친 듯 자신을 잡아 흔들며 우는 어머니에게 차마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못하고 함께 울었다. 그후 위나는 혼이 나간 듯 유령처럼 마을을 떠돌며 그렇게 하루 하루를 보냈다. 남들은 세월이 가면 나아질 거라고들 위로했지만, 이상하게도 프로스에 대 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그를 잃은 고통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고 오히려 나날이 커졌다. 그러나 두 번 자살에 실패하고 나자 이제 죽을 결심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위나의 어머니는 계속 그녀를 감시햇고, 자신이 죽고나면 슬퍼할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위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위나는 우연히 마을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이봐, 미즌넨 산맥에 산다는 괴물 마법사 이야기 혹시 들은 적있나?" "아니, 무슨 이야기인데? 귀신 얘기야?" "글쎄, 실은 건넛마을에 사는 내 오촌 조카 있잖아? 투빌 말이야. 그 녀석 사냥꾼이잖아. 이번에 곰을 잡으려고 미즈넨 산맥으로 들어갔다가 그냥 맨몸으로 돌아왔거든. 그런데 더돌 덜도 아니고 딱 지난 3년 동안의 기억을 몽땅 잃어버렸다네." "뭐?" "놀랍지? 진짜로 아무것도 생각이 안난대. 심지어 자기 둘째들도 몰라보더라니깐. 근데 그게 처음이 아니거든. 미즈넨 산맥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들 중에는 가끔 그렇게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도 있고, 미쳐버린 사람도 있다고 해. 그중에는 잠시 기억을 도로 찾은 사람도 있는데, 그 사람 얘기로는, 은보랏빛 눈에 은보랏빛 머리를 한 아름다운 마법사가 마법을 걸어 자기 기억을 지웠대." "에이, 세상에 그런게 어딧어? 내 사십 평생에 기억을 지우는 마법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네. 그 사람이 거짓말한 거겠지. 자기 건망증 탓할 생각은 안하고. 한심한놈." "아냐, 진짜래. 그사람이 그렇게 분명히 말했는걸. 그 마법사는 그 사람이 무스 생각을 하는지도 다 알아맞히고, 그사람한테 속박 마법인지 뭔지 걸어 꼼짝 못하게 한 후 기억을 지웠대." "그렇게 기억을 다 지웠다면 그걸 어떻게 기억해?" "실은, 그 사람이 그런 얘기를 뒤죽박죽 섞어서 하고는 바로 미쳐버렸다네." "뭐어?" "정말이야. 저 아랫마을에서도 있었던 일이야." "아이구, 정말이라면 나도 조심해야겠네. 대체 미즈넨 산맥 어디쯤이야?" "뭐 정확하지는 않은데, 어둠의 골짜기와 요정의 바위 사이 어디쯤이래." 위나는 얘기를 듣고 가슴이 뛰었다. 정말로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걸까? 매일매일 자신을 괴롭히느 이 애끓는 사랑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위나 자신도 살 길이 있다면 죽고 싶지는 않았다. 죽는 것보다는 기억을 지우고서라도 살아가는게 나았다. 그날 밤 위나는 어머니 몰래 보퉁이를 싸가지고 미즈넨 산맥으로 향했다. 위나의 마을에서 미즈넨 산맥까지는 대략 이틀 길이었지만 위나는 뛰다시피 정신없이 걸어 하루 반만에 미즈넨 산맥 기슭에 접어들었다. 위나는 다시 미친듯 요정의 바위 근처까지 올라갔다. 거기서 위나는 애타게 목청을 높여 외쳤다. "마법사님! 마법사님! " 위나는 요정의 바위에서부터 어둠의 골짜기까지 두 파잔(네 시간)넘게 걸리는 길을 걸으며 목이 쉴때까지 계속 외쳐 불렀다. "마법사님! 기억을 지우는 마법사님! 제발 나와주세요!" 혹시 못보고 지나칠까봐 위나는 그 길 아래로 나뭇가지를 비집고 다니며 외쳤다. 손과 뺨이 나뭇가지에 스쳐 피가 나고 며칠 째 쉬지 않고 걷느라 시달린 발은 이제 물집이 터져 쓰라려오기 시작했다. "마법사님!" 위나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나를 찾는 건가?" 위나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했으나 이상하게 눈이 부셔서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눈이 시려 눈물이 고였다. " 왜 날 찾은 거지?" 위나는 대답하려 했으나 그녀가 미쳐 입을 열기도 전에 그 마법사는 줄줄 말하기 시작했다. "그대의 이름이 위나가 맞나? 프로스라는 사람을 사랑했는데, 그가 전쟁터에서 죽어버렸고, 그를 생각할때마다 너무 괴로워서 차라리 그에 관한 모든 걸 잊어버리고 싶다는 건가?" 위나는 자기 마음을 책 읽듯이 고스란히 읽어내는 마법사의 말에 소름이 끼쳤다. 위나는 마법사가 바위 위에서 스르르 내려와 자신에게 다가오자 겁에 질려 뒷걸음질치다 그만 넘어졌다. "재미있군. 지금까지 많은 실험을 했어도 실험대상이 자기 바로 걸어 들어온 적은 없었는데." 마법사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입가에 씁쓸한미소가 떠오르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너두 내가 무섭나? 내게 부탁하러 찾아왔으면서요?" 위나는 사실 엄청나게 마법사가 무서웠지만 꾹 참고 대답했다. "무섭지 않아요!" 위나가 대답하고 나서는 마법사가 자기의 두려움을 이미 읽었을 거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다시 겁에 질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다만 희미하게 마법사의 쓸쓸한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내 정신조작 마법은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 그래서 나한테 정신조작을 당하거나 기억이 지워진 사람들은 그 부작용으로 때때로 미쳐버리기도 하지. 그런 건 알고 있나? 알면서 부탁하는 건가?" 마법사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듯하자 위나는 용기가 났다. "예, 알아요! 그리고 괜찮아요! 어차피 죽을 결심도 했었는데, 미치는 것쯤 무섭지 않아요!" "그래? 그렇다면 어떤 기억을 지워주길 원하는 거지?" 위나는 마법사에 질문에 눈물부터 흘렸다. "프로스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지워주세요. 그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것, 우리가 서로 사랑했다는 것, 그가 죽고 나서 내가 죽을 것 처럼 괴로웠다는 것, 그 모두를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깨끗이 잊어버리고 다시 자기만 혼자 행복하게 살아가겠다니,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닌가?" 위나는 가슴이 찌르는 그의 질문에 망연자실했다가 곧 그 질문이 자기 마음속의 괴로움을 그대로 읽고 옮긴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위나는 울먹이며 대답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죠. 죽지도 못하니, 그렇게라도 살아야죠." 마법사느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위나는 그가 어떻게 할지 몰라 초조하게 기다렸다. "기억을 지우다가 잘못해서 미쳐도 좋다는거지?" "네" "사랑했던 사람의 기억은 모두 다 지워달라고?" "네" "영원히 그대의 기억 속에서 절대 떠오르지 않게끔 그렇게 지워 달라는 거지?" 그 말에 위나는 망설였다. "영원히'라는 단어가 지니는 무게가 갑자기 절박하게 다가왔다. 어찌지? 어쩌지? 위나가 주저하는 동안 마법사는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럼 그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프로스의 모든 것을 깨끗하게 지워주지." "잠깐만요!" "왜?" "저, 죽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는 프로스에 관한 기억이 되살아나게끔 해주세요!" 그를 그냥 그렇게 잊어버리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게 그대의 타협인가? 좋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기억을 지웠다가 되살렸다 하는 건 더 워려워서 미칠 확률도 높아진다. 그래도 괜찮은가?" "예" 위나는 결연하게 대답했다. "그럼 거기 앉아서 눈을 감아." 위나는 시키는 대로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무언가 뜨겁고 차가운 기운이 머릿속을 한동안 헤집었다. 머리가 온통 얼어버리고 타버리는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어느 순간 위나는 정신을 잃었버렸다. 다시 눈을 떠보니 마을 근처의 공터였다. 위나는 공터의 부드러운 잔디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왜 자신이 거기 있는지 몰라 의아해하면 집으로 걸어갔다. "엄마, 저 왔어요. 저기 마을 어귀 공터에서 누워 있다가 눈을 떳는데, 제가 왜 거기서 그러고 있었는지 통 영문을 모르겠어요." 위나의 어머니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황급히 뛰어나와 위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위나야! 무사했구나!" 어머니가 목을 놓아 울자 위나는 어리둥절했다. "엄마, 왜 그렇게 우세요?" 위나의 어머니가 평온하고 부드러운 위나의 표정을 보며 무언가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너, 도대체 프로스는............" "프로스가 누구예요?" 차분하고 심상하게 되묻는 그 말투에 위나의 어머니는 숨을 삼켰다. "프로스를 몰라?" "몰라요. 우리 마을 사람이가요?" 위나의 어머니는 갑자기 위나를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가엾은 것! 차라리 잘 됐다! 잘 됐어!"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마을 사람들은 프로스에 대한 기억을 잃은 위나를 애처로워하며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조금 지나자 위나는 자신의 기억에 공백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자신이 프로스라는 청년을 사랑했는데 그 청년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그러나 그건 남의 이야기 같이 생소하김나 했다. 위나는 중매로 옆 마을에 사는 부농의 둘째아들에게 시집가다. 열정은 없어도 따뜻한 사람이어서 부드러운 애정 속에 위나는 행복했다. 위나는 아들딸을 번갈아 여덟 명 낳았다. 그중 넷은 어릴적에 병으로 잃었지만 넷은 무사히 커 어른이 되었다. 딸들은 시집보내고, 아들들은 장가를 보냈다. 아들 중 한 명은 전쟁통에 징집되었다가 그만 목숨을 잃었다. 그때 느낀 처절한 슬픔은 왠지 낯설지 않았지만 위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위나의 눈가에는 주름이 잡히고 허리는 구부정해졌다. 옛날 꽃답던 위나는 이제 손자 손녀들에게서 '할머니!' 하고 불리는 게 사는 낙이 되었다. 위나는 오래 살았다. 평생을 함께 보낸 남편은 어느새 병으로 떠나보내고 시집은 마을에서 사귄 친구들도 하나하나 떠나버려, 마지막에 그 또래 중에서 남은 건 위나밖에 없었다. 반백이 되어버린 자식들을 볼 때마다 위나는 갈때가 머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위나는 심장이 터질 듯 아파왔다. 왈칵 죽음의 공포가 밀려왔다. 그와 동시에 머리가 깨질 듯 지끈거리면서 희미하게 끼어 있던 안개 같은 것이 일시에 걷혔다. 그리고 추억이 물밀듯이 밀려옸다. 열여덟 처녀 적에 처음으로 사랑했던 프로스의 기억이었다. 그와 처음으로 눈을 마주친 일, 처음으로 손 잡던 일, 처음으로 키스한 일, 처음으로 몸을 연일, 그 모든 기억에 위나는 가슴이 저렸다. 그리고 그? ?전쟁터로 보낼 때 느꼈던 엄습하는 불안감, 그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가슴 찢기는 괴로움도 그대로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떻게 그에 관한 일을 그동안 잊을 수 있었을까? 그의 얼굴, 그의 미소, 그의 말소리, 그의 몸, 그의 손길, 그 모든 걸 왜 지워버렸을까? 열 여덟 처녀였던 그 시절 그토록 가슴 시리게 사랑했던 그를 왜 잊어버리겠다고 했을까? 희한이 밀려들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를 지우면 안 되는 것였다. 그에 관한 기억을 끝까지 짊어지고 살아가면서, 그를 자신의 일부로 만들고 그의 모든 것을 자신의 일생으로 살아내야 하는 거였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그를 잊어도 자신만은 그를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고름이 끼고 충혈된 눈에 눈물이 흘러 주름에 고였다. 위나는 뼈저리게 후회했다. 나는 잘못 살았어. 정말 잘못 살았어. "잘못 살긴! 너는 잘 살았어. 잘한 거야, 위나. 네가 나 때문에 평생 괴로워했으면 나도 괴로웠을 거야." 갑자기 명랑한 프로스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위나는 흐릿한 눈을 들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군대로 끌려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때 그 모습과 똑같이 젊고 밝은 프로스였다. 그는 위나에게 손을 뻗었다. 위나는 어느새 주름이 펴지고 팽팽해진 자신의 손을 내밀어 프로스의 손을 잡았다. "정말? 내가 그 긴 세월 동안 프로스 널 잊었어도 원망하지 않았어?" 위나의 목소리는 어느새 쉬고 갈라진 노인의 목소리에서 높고 부드러운 처녀의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사실 약간은 원망했지만, 그래도 나는 네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뻣어." 프로스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이 그윽한 표정을 지으며 위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순간 위나는 다시 열여덟 살 처녀가 되었다. 다시 뺨에 홍조가 돌고 가슴이 뛰었다. 영영 묻어버린 줄 알았던 격정이 되살아났다. 위나는 프로스를 잊어버리고 있던 그 긴긴 세월 동안에도 자신이 계속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나랑 가자." 프로스는 가볍게 말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위나도 가볍게 물었다. "안식의 들판으로." "안식의 들판이 정말 있어?" "그럼, 나는 원래 예전에 새로 태어나야 했지만, 널 기다리느라 아직까지 계속 그곳에서 머물고 있었어." 위나는 감격했다. "사랑해, 프로스." "나도 너를 사랑해, 위나." 위나는 프로스의 손을 잡고 따라나섰다. 무겁고 몸에 맞지않는 옷 같은 육체는 가볍게 벗어던졌다. 온 세상이 빛으로 가득 찼다. 위나의 가슴속에도 행복과 사랑이 충만했다. 육체를 떠나기 직전 위나는 문득 생각했다. '아, 그 마법사가 바로 우리 제국의 황제 폐하셨구나.' 위나의 손이 힘없이 땅에 떨어지고 고개도 옆으로 꺾였다. 노파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히고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위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맞으러 온 프로스의 모습이 카에닌 테라미즈넨의 한 조각 자비심에서 빚어진 환상, 사라의 상처에 지친 여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끼워넣은 행복하면서도 슬픈 꿈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4 장 추적의 끝 동제국 황궁은 시녀들의 감탄성과 수다로 가득 찼다. 그건 모두 새로 황궁에 오게 된 엘프 마법사 라비언 때문이었다. 전날 라비언을 본 시녀들은 열심히 동료 시녀들에게 소문을 퍼뜨리기에 바빳다. 엄청나게 미남이고 무려 8서클의 마법력을 지니고 있는데다 저 유명한 라빌의 동생인 엘프 마법사가 황궁에 기거하게 되었다니, 시녀들 모두 흥분할 만도 했다. 그래서 모두들 누가 시키지 않는데도 라비언의 방으로 몰려가 청소며 장식에 공을 들였다. 그의 중요성을 말해주듯, 라비언에게 배정된 방은 대공 급의 귀빈에게만 배정되는 '꿈의 방' 이었다.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방이었으나 그 방을 꾸미다가 혹시나 라비언고 마주치지나 않을까 싶어 시녀들은 일부러 미적거리며 꽃을 새로 꽂고 쿠션을 다시 놓으며 시간을 끌었다. "아름다운 아가씨들, 고생이 많으시군요." 시녀는 일제히 "깨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곧 모두 얼굴을 붉혔다. 푸른 머리카락을 드리우고 푸른 엘프 비단을 휘감은 절세미남 엘프가 음악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름답다고 해주면서 미소를 던지는데 어느 여자가 태연할 수 있겠는가.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이 제 방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꾸며주시니 뭐라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아가씨들이 여기 모여 있으니 제 방이 꽃밭처럼 느껴집니다. 이사하느라 조금 지쳐 이제 쉬고 싶습니다만 아쉽기 그지없네요. 여러분에 대한 감사는 미소로 대신하지요." 보통 남자가 했다면 온몸에 닭살이 돋을 만큼 느끼한 대사였으나, 완벽하게 아름다운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자연스럽기 짝이 없었다. 시녀들이 얼굴을 바륵레 물들이며 총총히 방을 나가자 데이그랜은 소파에 몸을 던졌다. 높은 천장과 반짝이는 샹들리? ? 푸른 바람의 엘프족 취향에 맞춰놓은 푸른 침고, 아치형 창으로 한눈에 들어오는 후원 풍경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황궁 전체가 검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게 남대륙에 있는 그의 레어를 연상케 해서 데이그랜은 한결 마음이 편했다. 이사를 오전 중에 모두 마쳤기 때문에-이사라고 해봤자 사치품으로 가득 찬 트렁크 세 개 정도였지만-황궁에서의 첫날 오후는 고스란히 비어 있었다. 데이그랜은 문득 테룬 황제가 언제라도 찾아오라고 말한 것을 떠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황제 집무실에 도청 마법을 시전해놓으면 앞으로 두고두고 편할 것이다. 황제 집무실까지 가기 위해서 세 단계 정도의 절체를 거쳐야 했지만, 첫 단계 절차를 담당하는 무슨 자작인가가 황제는 지금 집무실에 없고 언제나처럼 황궁 후원에서 식후의 검술연습 중이라고 알려주었다. 데이그랜은 엘프답게 정중히 인사하고 그냥 물러나올수밖에 없었다. 약간 김이 샌 데이그랜은 어쩔까 하다가 황제를 보러 나왔다가고 하고서 그냥 돌아가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아 물어물어 연무장을 찾았다. 연무장 앞에는 경비병 두 명이 서 있었다. 황제를 보호사기 위해서라기보다 황제의 검으로부터 근처를 지나가는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경비병이었다. "경비병 아저씨, 저 새로 온 엘프 마법사 라비언인데, 황제 폐하를 좀 뵙고 싶거든요." 데이그랜은 다시 싱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 경비병들은 데이그랜의 눈부신 미몸에 놀라 당황했다. "아, 예." 데이그랜은 그들이 멍해 있는 동안 그들을 지나쳐 연무장으로 가려 했다. "아, 저, 잠깐만 멈춰주십시오!" "왜요? 보면 안됩니까?" "그게 아니라, 저기, 폐하를 방해하시면 안되는데요." "방해하지 않고 그냥 구경만 하겠습니다. 폐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나요?" "그건 아니지만 폐하의 검기가 워낙 세서 감당하기 어려우실 텐데요." "괜찮습니다. 저는 마법사잖아요." 데이그랜은 다시 미소를 지어 경비병의 얼을 빼놓은 후 유유히 연무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연무장 가장자리의 그늘에 멀찍이 서서 황제가 검술연습 하는 광경을 거듭 감탄하며 지켜보았다. 테룬의 연습은 간단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아주 천천히 검을 내리긋는 동작이었으나 데이그랜은 곧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눈을 감은 채였는데도 테룬의 검이 그리는 궤적은 완벽하게 똑같았다. 저처럼 완벽하게 동일한 동작을 반복하기 위해 테룬황제는 아마도 아주 어릴 때무터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끊임없이 검을 연마해왔을 것이다. 짧은 생을 사는 인간이 뭔가를 향해 모든 것을 쏟아 붓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드래곤인 그에게는 늘 생경하고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잠시 후 테룬은 검을 멈추고 심호흡을 한 후 그대로 눈을 뜨지않은 채 다시 검을 내리긋기 시작했다. 종전과 똑같은 동작이었으나 뭔가 달랐다. 찰나지간의 정적이 흐른 후 곧 사방에서 엄청난 기운이 테룬에게로, 정확히는 테룬의 검으로 몰려들었다. 얼마 후 검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었고, 그 빛은 점점 밝아지면서 커졌다. 빛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부드러운 동작이었으나, 데이그랜은 테룬이 한 번 검을 내리그을때마다 마치 천둥이 울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드래곤인 그마저도 압도당할 정도의 엄청난 기운이었다. 지금 테룬이 이른 경지는 파이브룬 제국을 건국한 하라스 대제마저도 능가하고 있었다. 파이브룬 가의 가계에 소드 마스터의 인자를 집어넣어 준 것은 데이그랜 자신이었다. 데이그랜은 그 인자가 파이브룬 가의 후대에 종종 발현하라는 것을 알고있었다. 특히 소드 마스터의 인는 파이브룩 대겅 자신처럼 수(水)의 기운이 강한 체질을 타고난 경우 더욱 강한 힘을 발하리라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드래곤에게서 뽑아낸 이질적인 인자여서 인간의 힘으로 어디까지 체화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는데, 지금 황제가 보이는 신위는 체화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데이그랜이 처음 예상했던 한계를 이미 가볍게 넘어선 것이었다. 하긴 이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가 렌을 불러내기 위해 펼친 차원이동마법까지도 교란시킬수 있었을 터였다. 다시 생각해보아도 그때의 일은 참으로 꼬였다. 하필이면 데이그랜이 마법을 펼치던 그 무렵 테룬이 자기 어머니의 이미지, 즉 그녀와 닮은 렌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떠올렸다든지, 테룬이 망가진 몸으로 검기를 펼치지 못해 그 기운이 다 정신으로 쏠렸다든지, 그런건 다 좋았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렌과 데이그랜, 테룬 3인의 기운이 같은 성질을 지녔다는 데 있었다. 테룬과 데이그랜이 같은 기운을 지닌 건 당연했다. 그가 테룬의 조상인 파이브룬 대공에게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어 줄 때 기준으로 삼은것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자가 아니면 어차피 그의 기운을 받아들여도 죽거나 폐인이 되어버릴 게 분명했다. 그후 파이브룬 대공에게서 태어난 후손 중 소 마스터의 형질이 발현되는 자들은 모두 흑룡과 같은 기운을 지닌 경우에 한정되었다. 렌과 데이그랜이 같은 기운을 지닌 것 또한 마찬가지 이유였다. 데이그랜이 차원이동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상대는 그와 같은 기운을 지닌 생명체로 제한되어 있었다. 물론 렌의 경우는 그 외에 특별한 한 가지 기운이 더 있었지만 말이다. 인간들 중 흑룡이 지니는 기운과 같은 순수한 물의 기운을 지니는 렌과 테론 같은 자들은 대략 10만 명에 한 명 정도였다. 물론 순수한 불의 기운, 흙의 기운, 쇠의 기운, 나무의 기운을 지닌 자들도 비슷한 비율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자신의 순수한 기운을 가당하지 못한 체 죽어버리고, 성년까지 무사히 자라는 경우는 다시 그중 백에 한 명 정도였다. 이 순수한 기운의 소유자들은 대부분 여자는 여자대로, 남자는 남자대로 서로 비슷한 분위기의 빼어난 외모를 지녔고, 음의 기운과 양의 기운 사이에 서로 강하게 끌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게 렌과 테룬의 기운이 서로 끌리는 바람에 일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데이그랜의 마법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같은 종의 음양이 끌리는 힘에는 미치지 못했고, 렌은 데이그랜의 레어 대신 테룬의 귀양지에 나타났다. 사실 데이그랜이 놀란 것은 렌이 테룬을 치료한 후 의외로 쉽게 떠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테룬의 기운이 치료 후 일시적으로 불안정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렌이 지닌 그 신비한 기운이 서로간의 끌림을 다소 약하게 했을 수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렌을 직접 만나봐야 알 수 있었다. 이제 테룬이 내려치는 검은 온 천지를 뒤흔들 듯한 기세를 담고 있었다. 지축을 뒤흔들며 쿵쿵 울리는 듯한 검기에 데이그랜은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데이그랜만의 느낌일 뿐 실제로 주위의 모든 사물은 일체의 미동도 없이 고요하게 정지되어 있을 뿐이었다. 서제국의 황제를 막기 위해서 인간에게 지나친 개입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데이그랜은 곧 그 생각을 털어버렸다. 서제국 황제의 능력에 드래곤이 개입했을 개연성이 큰 이상, 그걸 견제하기 위해 다른 인간에게 드래곤의 능력을 불어넣어준다는 건 나쁜 방법도 불공정한 방법도 아니었다. 더구나 그 일은 드래곤이 아닌 인간 측에서 나서서 성사된 것이었다. 물론 데이그랜 스스로 지적 호기심을 누르기 어려웠던 것도 계기가 되었지만. 몇 백 년 전이었던가. 그자, 파이브룬 대공으 정말 용감했다. 드래곤이 있는 남대륙까지 와 드래곤과 담판할 생각을 하는 건 보통의 각오 가지고는 안 되는 일이었다. 데이그랜은 검은 머리 검은 눈의 대공을 보자마자 당장 마음에 들었다. 대공이 보기 드물게 순수한 수(水)의 기운을 지닌 자이기도 하고, 데이그랜이 검은색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온갖 요소를 복잡하게 계산하고 예측하고 연구하는 대공의 태도가 데이그랜의 평소 자세와 참 닮았던 것이었다. 파이브룬 대공은 8서클 마법사 두 명을 대동하고 남대륙까지 와, 흑룡의 레어 앞에 데이그랜이 유흥거리 겸 오락용으로 설치해놓은 온갖 함정을 목숨 걸고 하나한 해소했다. 그리고 나서는 확성구슬을 이용해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 "저는 동대륙 파이브룬 대공국을 다스리는 파이브룬 대공입니다!" 데이그랜은 그때 청룡 안티니아의 레어에 놀러가 있었다. 조금씩 악화되던 시오카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그 무렵에는 어느 드래곤도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저 탈피를 앞에 둔 몸살을 좀 오래 앓는 거라고들 여겼다. 아무튼 데이그랜은 뭔가가 자기 레어를 건드렸다는 것을 알고 즉시 레어로 돌아와 대공이 하는 짓을 지켜보았다. "저는 무사히 이 함정을 돌파했습니다! 그러니 제 소원을 하나 들어주십시오!" 데이그랜은 뜻밖의 이야기에 흥미가 생겨 인간으로 폴리모프한채 대공 앞에 내려섰다. 대공은 평소에 데이그랜이 인가으로 폴리모프할때 즐겨하던 외모와 흡사했기에 둘은 쌍둥이처럼 보였다. "이봐. 어디서 뭔 소리를 듣고 온 거야?" "예?" 대공은 당황했다 "그 함정 돌파니 소원이니 하는 건 뭔 소리야?" 대공은 주저하며 대답했다. "아, 저, 흑룡의 레어 앞에 설치되어 있는 함정을 돌파하면 흑룡께서 소원을 하나 들어주신다고 들었는데요." 데이그랜은 그말에 배를 잡고 떼굴떼굴 굴렀다. "푸하하하하! 으하하하하아! 어디서 그딴 소리를 들은 거야? 진짜 재미있는 소리군! 바보야, 그런 게 어딧어? 다 내 맘이지! 함정에 잘못 걸려든 인가 두어 명을 풀어주고 선물까지 줬더니 그딴 소문이 돈단 말이지! 푸하하하하!" 대공은 이제 완전히 홍당무가 되었다. "그래, 뭐야?" 데이그랜은 빙글거리며 물었다. "네?" "소원이 뭐냐고? 나를 웃게 했으니 어지간한 소원이라면 들어주지." 레어로 이동한 파이브룬 대공은 소원 을 말했다. 소원은 의외로 심각하고 어려웠따. 그것은 자신에게 서제국 황제 카에닌 테라미즈넨을 견제할 힘을 달라는 것이었더. 대공대륙에는 크고 작은 공국과 왕국이 난립하고 있었으나 아무도 나서서 동대륙을 통일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것은 모두 서제국 황제 때문이었다. 동대륙 통일을 꿈꿔본 야심가들은 만약 자신이 나서서 동대륙을 통일한다 해도 그 때는 서제국 황제가 그를 제거하기 위해 일어설지 모른다는 걱정을 품고 통일전쟁을 주저했다. 차라리 서제국의 군대가 밀어닥친다면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해볼 방도가 있었지만, 서제국 황제가 9서클 마법으로 특정한 개인을 공격한다면 피할 수 있는 자는 인간세계에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젊은 파이브룬 대공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동대륙을 통일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제국 황제의 9서클 마법에도 밀리지 않을 만한 힘이 필요했고, 그런 힘으 지닌 존재는 드래곤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데이그랜은 뜻밖의 난제에 고심했다. 서제국 황제가 궁극의 마법인 9서클에 도달한데다 황제의 저주같이 드래곤들이 펼칠 수 없는 마법까지 시전할 수 있는 이상 마법으로 서제국 황제를 견제하는 것은 무리였다. 또 드래곤이 거기까지 개입하는 게 괜찮을지 어쩔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고민하던 데이그랜은 결국 방법을 생각해냈다. 파이브룬 대공을 당장 변화시킬 수는 없어도 파이브룬 대공의 몸에 태어날 아이에게 소드 마스터의 자질을 불어넣는 것은 가능했다. 9서클의 마법을 맞아 검기로 가를 수 있는 소드 마스터라면 서제국의 황제가 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에 덤으로 장래의 황궁에 방어마법결계를 설치해 준다면 최소한 서제국황제가 한밤중에 몰래 찾아와 동제국 황제를 살해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때 데이그랜이 파이브룬 대공에게 펼친 마법의 효과로 대공이 나중에 결혼해서 낳은 아들 하라스는 태어날 때부터 소드마스터의 자질을 타고났다. 그리고 하라스 대제가 동서대륙 전체에 무제(武帝)로 이름을 떨치고 마침내 동대륙을 통일했을 때에는 데이그랜도 은근히 기뻤다. 이 모든 것이 아직도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수 세대가 지나버렸다니, 이간의 시간은 참 빠르고 허무했다. 테룬은 연무를 마치고 땀을 갂으며 데이륵내을 돌아보았다. "라비언, 언제부터 와 있었지?" "조금 전부터입니다, 폐하." 테룬은 자기 앞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엘프를 보며 눈이 부셔 실눈을 떴다. 그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예리하고 총명한 눈을 반짝이고 있는 이 엘프에게서는 지금껏 테룬이 보았던 몇 명의 엘프들에게서 공통적으로 풍겼단 나른함과 초탈함이 보이지 않았다. "이사는 마쳤나?" "예" "방은 마음에 드는가?" "예, 아주 마음에 듭니다." "잘 됐군." 잠시 이야깃거리가 떨어져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마침 그대에게 할 이야기도 있고 하니 내 집무실로 가지." "예" 둘은 뜰을 가로질러 황궁으로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폐하, 폐하의 무위(武威)를 감히 견식하고 나니 제 안계가 넓어지는듯 합니다." 데이그랜은 평소 인간과 접촉하면서 익혀둔 처세의 기본원칙에 따라 아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외로 테룬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내가 펼치는 건 무위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것이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테룬은 눈앞의 엘프에게 어디까지 얘기해도 좋을지 망설였다. 그러나 동제국의 소드 마스터 혈통이 드래곤에게서 온 것이라는 사실은 알만한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 굳이 숨길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완전히 낯선 타인에게 얘기하는 게 때로 더 마음이 편한 법이었다. 인간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엘프에게 마음 터놓고 이야기 할수 있는 기회란 자주 오는 것이 아니었다. "혹시 우리 동제국 황가에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소드 마스터는 드래곤의 마법에서 비롯된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 "예, 저흐이 엘프들은 아무래도 드래곤의 일에 고나해서는 잘 아니까요." "그렇다면 이야기하기가 쉬워지겠군." 테룬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만약 독수리가 잘 날고 치타가 잘 뛴다면 그건 놀랄 일일까?" 데이그랜은 뜬금없는 테룬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드래곤이 강하다면, 엘프가 아름답다면, 드워프가 성실하다면, 그건 당연한 거겠지?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강한 것으 그저 소드 마스터의 혈통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테룬은 손에 든 목검을 다시 한 번 꼭 주었다. "나는 그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소드 마스터가 된 것뿐이다. 그런데 그게 어느 순간 벽이 되어버렸어. 이해할 수 있겠는가?" 데이그랜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아직도 테룬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매일매일 무의식적으로하늘을 마음껏 날던 새가 어느 날 정말 제대로 잘 날아보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을 때, 그 새는 정? ? 제대로 잘 날 수 있게 될까? 그렇지 않을걸. 원래 너무 당연하게 잘 하는 걸 새삼 더 잘 하려 해도 그건 쉽지 않겠지. 아니, 아마도 정말 제대로 잘 날아보려는 소망을 갖는다는 것조차도 어렵겠지. 그러니 뭔가를 타고난다는 건 축복이지만 한편으로는 저주이기도 해." 테룬은 생각하는 바를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 "바로 내가 그런 경우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검을 잡았다. 그리고 주위의 감탄을 한 몸에 받았지. 검기 정도는 몽정도 하기 전에 마스터했고, 성년이 되기 전에 검강을 시전할 수 있었어. 그 덕분에 내 어머니가 쓸데없는 야심을 갖게 되신 거겠지만" 테룬은 쓸쓸하게 웃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렇게 키가 자라듯 내 검술이 자라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무공을 하라스 대제와 비교하는 사람들의 얘기에 흡족해했지. 그러데 모든 무공을 잃고 손발을 못 쓰게 되었다가 다시 회복되었을 때, 그리고 종전처럼 검을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과연 그렇게 검강을 쓸 수있는게 무공의 전부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너머에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검강 너머에 있는 그 무언가를 잡을 수가 없었어. 지그맊지 내가 이룬 것은 내 힘이 아니다." '이봐,황제야, 너 정도면 인간치고 진짜 후륭한 거야. 욕심도 많구만.' 데이그랜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감탄했다. 계속해서 현재의 한계를 뛰어넘고 또 새로운 한계를 스스로설정한 후 그것을 다시 뛰어넘으려는 인간의 저 끝없는 집념은 드래곤이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데이그랜이 인간을 마음에 들어하는 경우란 흔하지 않았지만 그는 은근히 청년 황제에 대해 호감이 생겼다. 특히 그는 이 인간이 얼마나 괴로운 과정을 거쳐 이 자리까지 왔는지 대강 알았기에 한층 더 테룬이 마음에 들었다. 이따금씩 폭주하기는 해도 이 정도면 훌륭한 자제력이었다. "저희 엘프들이 뭔가를 이룬다는 걸 그리 중시하지 않습니다만........." 데이그랜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테룬은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때로는 엘프들의 그런 태도가 부러워. 인간들은 평생 뭔가 이루고 뭔가 보여주기 위해 짧은 생을 마쳐버리곤 하지., 그렇지만 그게 인간인걸." "폐하께서 이루고 싶으신 건 무엇입니까?" 황제는 걸으면서 한참 동안 생각했다. "내가 이루고 싶은 건 딱 세가지야. 검강을 뛰어넘어 검의 극의(極意)를 얻는 것. 렌의 도움을 받아 나를 괴롭히는 악몽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녀를 언제까지나 내 곁에 두는 것. 그리고 파이브룬 제국을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드는 것." 어느새 그들은 황제 집무실에 도착했다. 황제와 데이그랜은 소파에 적당히 앉았다. "폐하, 조금전에 말씀하신 세 가지 이루고 싶은 일 중하나만 이룰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데이그랜의 질문에 테룬은 한참을 생각했다. "어려운 질문이군." 그의 얼굴은 어두워졋다. 테룬은 다시 한참 만에 마지못해 대답했다. "파이브룬 제국을 살기좋은 나라로 만드는 게 가장먼저다." 데이그랜은 눈을 크게 떳다. "진심이십니까?" 테룬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나라의 황제 된 자로서 일신의 행복을 우선할 수는 없다. 황제가 자기 개인의 쾌락과 즐거움을 좇기 시작하면 백성들은 그만큼 도탄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나는 아버지 같은 황제가 되고 싶지는 않아. 아버지는 그저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하면서 평생을 사셨지. 그래서 동제국의 평민 중에서 먹을 걱정, 돈 걱정 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다. 군대는 약해지고, 상업은 각정 세금 때문에 맥을 못추고, 지주들의 토색질로 소작농들과 농노들은 죽어나고.......... 나라고 해서 왜 그런 사정을 모르겠는가?" 테룬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제룬 형님은 훌륭한 황제가 되셨을 거야. 후훗, 그대 앞이니까 이런 얘기를 하는 거다. 내 신하들은 내가 아제룬 형님 이야기만 꺼내면 질겁하거든. 공식적으로 형님은 요녀에 홀려 황제를 배신하고 나라를 망친 악적으로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형님은 좋은 분이셨어. 나처럼 무술을 잘 하지는 못하셨지만 책을 많이 읽으시고 생각이 많은 분이셨지. 성실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니셨고. 그런 분이 순식간에 그렇게 망가지다니.. 하긴 나도 그랬으니까. 렌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나도 형님처럼 망가진 채로 있었겠지." 테룬은 아득하고 그리운 눈빛으로 렌을 회상했다. 그러다가 그는 단호히 말했다. "결국 형님의 죽음은 나와 내 어머니 모두의 책임이다. 그러니 나는 그 죽음의 무게를 짊어질 수밖에 없어. 이미 나는 내 일신의 행복이라는 작은 소원은 뒷전을 미뤄두었다." "그렇다면 렌이라는 소녀를 찾는 일과 나라의 일이 서로 상층한다면 렌을 포기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테룬은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쓸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신의 앞 에 놓여있는 아득하고 영원한 불행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지라도, 그의 영혼이 비명을 지를지라도, 그의 제국을 버리고 렌을 택할 수는 없었다. 그의 죄책감은 렌에 대한 그의 마음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에 놓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데이그랜은 테룬이 보이는 태도에 조금 감동했다. 그는 테룬에게 렌을 빼앗아가는 것이 상당히 미안했지만 그 대신에 모든 일이 잘 풀린 후 동제국을 위해 그의 힘을 보태주는 것으로 보상 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는 렌이 만약 테룬 앞에 나타난다면 테룬의 탣가 180도 달라지리라 확신했다. "파이브룬 제국을 살기좋은 나라로 만드는 데 저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습니다." "고맙다. 8서클 마법사인 그대가 도와주면 여러모로 큰 힘이 될거이다." 테룬은 쓸쓸한 얼굴 그대로 입가에 웃음 을 띄었다. 그때 호위병이 수상 샤이트의 도착을 알렸다. "폐하, 몇 가지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들라." 샤이트는 황제 집무실에 들어와 라비어을 발견하고는 잠시 멍하니 할 말을 잃었다. 전날 보았을 때보다 더 한층 아름다워 보이는 라비언은 눈살을 약간 찌부푸리며 샤이트를 잠시 쳐다보다가 곧 누군가가 생각났다는 듯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이 매혹적인 미소를 던졋다. 온 세상이 한꺼번에 밝아지는 듯 눈부신 미소였다. 샤이트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한두 걸음 뒷걸음질치다가, 곧 자기의 실책을 깨닫고 더욱 당황했다. 속으로 킥킥 웃던 데이그랜은 적당한 시점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 밀었다. "수상 각하, 업무가 있으신지요? 그렇다면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폐하, 이만 물러가도 될는지요?" "그래, 나중에 다시보지." 테룬이 허락하자 데이그랜은 엘프 특유의 유연하고도 나릇한 걸음걸이로 샤이트를 스쳐지나갔다. 샤이트는 멍하니 그를 따라 시선을 움직이다가 다시 머리를 흔들며 제정신을 차렸다. 샤이트 옆을 지나 문을 닫기 직전 데이그랜은 소리 없이 도청마법을 시전했다. 옆에 지켜보던 사람이 두 명이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눈치 채이지 않게 도청마법을 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얼마나 대단한가. 데이그랜은 속으로 자화자찬했다. 이미 그가 황궁의 마법 결계 내에 들어온 이상 그 안에서 도청마법을 시전하는 것은 인간들 식으로 표현하자면 누워서 꿀과자 먹기였다. "폐하, 카로딘 대공국의 침략이 예상보다 훨씬 앞당겨질 가능성이 높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어쩌면 보름 내에 국지전이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무슨 소리인가? 대공이 죽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아직 대관식도 치르지 않은 일드인 공자가 어떻게 개전을 감행할 수 있단 말인가?" 황제는 깜짝 놀라 묻자 샤이트는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일드인 공자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 개전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들자 그에 맞추어 아버지인 대공을 독살한 것 같습니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미 국경지대로 군대의 재배치가 끝나, 카로딘군은 언제 개전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임전 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엊그제 보고할 때만 해도 두어 달 정도 걸릴 거라고 하지 않았나?" 샤이트는 죄송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대답했다. "저희 측 첩보원들이 카로딘 대공국 마법사들의 역정보에 걸려든 것이었습니다. 전대 대공의 사망 후 이런저런 사후 처리를 고려할 때 두어달 이라면 일단 그럴 듯하게 들리니까요. 그들이 우리를 방시맣게 하고 선제공격을 함으로써 기선을 제압하려 한 것입니다. 그게 모두 우리 측에 마법사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속았다는 건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프린다인 공국에서 알려왔습니다." "프린다인 공국에서?" 테룬은 크게 놀랐다. "예, 프린다인 공국에서 그 동안 마법사의 스카우트에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동제국 황실이 허송세월하는 동안 카로딘 대공국에 첩자를 파견해 그쪽의 상황을 파악했고, 우리 쪽에 자신들의 정보를 알려온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원군을 보내겠다는 제의까지도 해왔습니다. 테룬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놀랍군, 프린다인 공국이 그 정도 전력을 가지고 잇고 더구나 그걸 우리 쪽에 거침없이 드러내다니. 대체 그들의 속셈이 무엇이지? 그 모든 걸 대가 없이 제공하겠다는 건 결코 아닐텐데?" "예, 물론입니다. 저와 대화한 것은 그쪽의 8서클 마법사 라우프이데, 그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지만 동제국에 대한 프린다인 공국의 신종(臣從)을 깨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으며 대가 또한 동제국이 받아들일수 없을 정도의 지나친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다만 그 대가에 관한 논의는 자신이 아닌 프린다인 공국의 티르안 공녀가 직접 이리로 방문해서 아뢸 것이라고합니다. 아마 2, 3일 내에 순간이동으로 이쪽으로 올 듯합니다." 테룬은 티르안공녀 이야기가 나오자 의심스럽다는 듯 샤이트를 쳐다보았으나 샤이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눈길을 피 하며 화제를 바꾸었다. "그밖에 몇 가지 보고드릴것이 있습니다. 제국 남부 직할령과 남부 공국들에 대규모 수해가 발생했는데, 직할령에는 예비비를 내려 수해를 복구하게하고 피해를 입은 공국들에게는 적당한 금액을 하사금으로 내리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지." "수해발생지역 곳곳에서 푸른 죽음이 창궐하고 있는데, 치유마법사들의 수도 모자라고 그들 대부분은 다가올 전쟁을 위해 아껴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즉위 초기에 전염병이 창궐하면 민심이 흉흉해질 염려가 있으니 적어도 치유마법사의 3분의 1정도는 전염병 발생지역에 파견해서 황실이 그들에게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보임이 적절할 듯 합니다. "치유마법으로 푸른 죽음을 고칠 수있기는 한가?" "사실 치유마법으로 푸른 죽음을 고친 예가 가끔 있기는 하지만 우연의 일치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그래도 일단 치유마법사가 나타나면 어느 정도 민심이 안정되는 효과가 있으니까요. 아, 그리고 열흘 전쯤에 서제국의 마이리아 시에서 푸른 죽음을 실제로 치료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상당히 신빙성 있는 소문인 듯합니다. 소식을 전해온 첩자가 흥분할 정도였습니다." "정말이람녀 확인해봐야겠군." "예, 그래서 그쪽의 첩보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는 대로 즉시 보내라고 햇습니다." "잘했다." 자기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서 꿀과자를 먹으며 빈둥거리던 데이그랜은 집무실에서 나누던 지루한 정치 얘기를 한 귀로 흘려듣다가 푸른 죽음 이야기가 나오자 귀가 번쩍 뜨였다. "헤에, 인간들이 푸른 죽음을 고칠 수 있게 되었단 말이야? 다른 동물고는 달리 온갖 잡병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인간이 신기해서 그도 한동안 인간의 질병을 연구해본 적이 있었다. 그가 태어나서 살아온 세월은 인간의 문명이 태동해서 발전해온 전 기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지혜의 흑룡답게 인간의 문명 발달을 따라가며 시시각각 변해가는 인간의 생태에 흥미를 품고 관찰해왔다. 그때 그는 몇 가지 결론을 내렸는데, 인간이 그렇게 많은 병에 걸리는 원인은 첫째, 원래 인간이 타고난 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 가축을 키우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인간들의 많은 병은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던 옛날의 생활태도를 버리고 도시와 마을에 갇혀 살게 되면서 생겼다. 그들의 몸은 그렇게 갇혀 사는 데 적합하도록 되어 잇지 않았기에 그로부터 수많은 잔병들이 생겨났다. 그 자체로도 몸에 좋지 않았지만, 모여산다는것이 특히 전염병에는 치명적이었다. 인간이 도시와 마을을 이루고 살기 전에는 이렇게 전염병이 많지 않았다. 괴상한 병이 돌아도 그럭저럭 한 무리를 죽이고 나면 사라져버렸다. 또 그런 괴상한 병이 도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런저런 동물들을 차례로 길들여 가축으로 쓰게 되자 그 동물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병들이 차례로 인간들에게 옮았다. 그리고 인간들은 동물을 가축으로 쓰기 시작한 바로 그 무렵부터 잔뜩 모여 살게 되었기에 한 명이 병에 걸리면 순식간에 퍼져버렸다. 푸른 죽음, 검은 죽음, 붉은 죽음, 병은 많기도 했다. 그런 병이 한 번 퍼지면 도시 인구의 3분의 1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그럼에도 그들의 생명력은 참으로 강해서 그렇게 죽어도 그 빈자리를 다시 메우고 오히려 수를 한없이 불려가며 지상을 차지해간다. 산이며 들이며 모든 것을 먹어치워 간다. 그에 비하면 드래곤은, 그리고 드래곤이 만든생명체들은.......... 데이그랜은 우울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일어났다. 변화를 좋아하는 지혜의 흑룡인 그에게 인간은 참으로 많은 변화를 보여주는 존재였다. 그 작고 미미한 것들이 핑핑 눈이 돌아갈 정도로 변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정말로 재미있었다. 그런데 마침내 푸른 죽음까지 고치다, 미물인 주제에 참 대단했다. 마이리아 시라고 했던가. 데이그랜은 문득 그곳에서 어떻게 푸른 죽음을 고쳤는 지 궁금해졌다. '라빌이 그리로 갔으니 라빌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시간이 나면 잠깐 마이리아 시에 들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같았다. 다음날 데이그랜은 엘프답게 행동한다는 핑계로 마음껏 늦잠을 잤다. 미리 엘프의 습성에 대해 단단히 교육받은 시녀들은 그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다니고 햇살이 그의 눈을 찌르지 않도록 두꺼운 커튼도 내려주었다. 그러면서도 한 번씩 잠든 그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그 아름다움에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결국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데이그랜을 깨웠다. "라비언님! 라이번님! 일어나십시오!" 데이그랜은 처음에 라비언이 자신의 가명이라는걸 깨닫지 못한채 계속 자다가 작은 손이 자신의 몸을 흔들자 마침내 진저리를 치며 일어났다. 어린 시동은 극강의 아름다움을 지닌 엘프 마법사 라비언이 약간 불쾌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가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 자신을 향해 미소를 던지 자 멍해졌다. '후훗, 귀여운 것, 내 미모에 홀딱 반했군. 그나저나 파충류든 조류든 포유류등 어린 것들은 참 이쁘고 귀엽다 말이야.' 데이그랜은 웃음기를 지우지 않으며 물었다. "내 방에 딸린 시동이냐? 이름이 뭐지?" 소년은 뺨을 붉히며 대답했다. "예, 시동이 맞습니다. 이름은 피온입니다. 라비언님께서 자질구래한 심부름을 시키실 게 있으시면 언제라도 저를 부르십시오. 부속실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요." "이 방에 딸린 시녀도 있지 않나?" "예, 그렇지만 시녀장님이 시녀들을 라비언님 곁에 너무 가까이 두면 다들 제정신을 차리지 못할 거라고 하시며 저를 여기에 배치 하셨습니다." 대강의 사정을 짐작하고 데이그랜은 속으로 웃었다. "무슨 일인데 날 깨웠지? 너도 알다시피 엘프는 일찍 일어나는 걸 싫어한단다." 소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일이 있으니 빨리 황제 집무실로 오시라는 전갈입니다. 조금 전에 수상 각하의 전령기사가 왔다 갔는데, 되도록 빨리 오시랍니다." "그래, 고맙다. 가보돍 하지." 데이그랜은 침대에서 일어나 매무새를 정돈했다. 자고 일어난 그대로인데도 그의 모습은 흐트러진 것이 오히려 더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며 이루 말할 수 없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스스로 빚어낸 모습에 예술가가 느끼는 것 같은 만족감을 만끽하며 데이그랜은 거울에서 눈을 뗐다. "피온이라고 했지? 잘부탁한다." 데이그랜은 부드럽게 소년의 뺨을 쓰다듬자 소년은 다시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데이그랜은 소년의 태도를 보며 속으로 조금 비웃었다. 인간들이란 자신들이 왜 그렇게 아름다움을 원하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적으로 아름다움에 끌리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눈으로 볼때 인간들이 외치는 인간 자신의 아름다움이란 그저 기능성과 생식능력, 그 두가지에 불과했다. 기능적으로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좌우대칭이 맞는가,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의사전달과 감정표현이 원활한가, 애는 잘 낳거나 잘 만들 수 있게 생겼는가. 인간들의 미적 기준이란 그가 보기에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를테면 대부분의 인간들이 눈에 큰 걸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큰 눈이 감정을 잘 전달하기 때문일 뿐이다. 또 가슴이 탱탱하고 허리가 잘록하고 엉덩이가 빵빵한 여자를 아름답다고 치는 건 그런 여자들이 대개 애를 잘 낳기 때문이고, 혈색 좋고 주름 없고 피부 고운 걸 남녀 불문하고 선호하는 건 그렇게 건강한 신체에서 건강한 애가 들어서기 때문이다. 그걸 영원한 아름다움이 어쩌고 저쩌고 하며 뭔가 특별한 것처럼 포장해서 시도 짓고 노래도 바치지만, 결국 동물이면서 모두가 가지는 종족 보존의 본능을 발현한 것에 불과하다. 똑같은 동물 주제에 자신들은 뭔가 특별한 것처럼 구는 게 참 우습다. "저, 라비언님?" "그래, 가자." 데이그랜은 채근하는 피온에게 다시 웃어주었다. 프린다인 공국의 티르안 공년느 그날 오전 8서클 마법사 라우프를 대동하고 동제국 황궁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며칠 전 동제국 황궁 정보를 흘릴 때부터 미리 브림에서 200아반 정도 떨어진 중소도시까지 와 있었다. 그리고 전날 접견을 윤허받자마자 즉시 브림으로 이동한 것이다. 황궁의 마법결계 안으로 둟고 들어가는 것은 8서클 마법사가 아니라 드래곤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티르안공녀는 황궁 정문앞에 설치된 화려한 접견소에서 조용히 결계가 열리기를 기다렸다. "라우프, 제가 잘할 수 있을 까요?" 공녀는 값비싼 회색빛 엘프비단으로 만들었지만 아무 장식이 없어 금욕적으로 보이는 소즈를 입고 혈색이 없는 얼굴을 엄격함과 냉정함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투가 약간 떨려 나오는 것은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결코 예쁘다고 할 수는 없는 평범한 모습이지만 무척이나 총명해 보이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면서 때때로 두 눈이 무섭도록 반짝일 때에는 매력적이라고 까지 해줄 수 있는 얼굴이었다. "물론입니다. 공녀님. 계획하시 대로 될것입니다." 40대 후반의 마법사는 중키에 약간 살이 찐 마음씨 좋은 아저씨 같은 인상을 하고 있었다. "황제 폐해와 샤이트 수상께서 듣던 바와 같이 현명하시다면 우리 일이 잘 풀릴수 있겠지요." 공녀는 그 말만을 하고는 다시 입을 꼭 다물었다. 얼마 되지 않아 황궁의 8서클 마법사 쿠드가 나타났다. "공녀님,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참으로 죄송합니다. 어제 알현요청을 하셨기에 적어도 4, 5일은 걸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워낙 빨리 도착하셔서 의전을 갖추느라 조금 시간이 걸렸습니다." 공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쿠드님, 오랜만입니다. 저희쪾에서 지나치게 서두른 것이니 오히려 제가 사과드려야지요. 지금 바로 폐하를 알현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가능하면 수상 각하도 함께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말의 교환을 기대하더 쿠드는 잠시 당황했으나 곧 고개 를 끄덕였다. "여기 서십시오." 공녀와 라우프는 쿠드의 지시에 따라 마법진 위에 섰다. 쿠드는 그옆에 서서 암호를 외웠다. 물샐틈 없는 황궁의 결계를 여는 유일한암호였다. 라우프는 암호를 귀 기우려 듣고 외워보려고 했으나 그래봤지 무익한 노력이었다. 결계의 암호는 아무도 모르도 모르는 특별한 원칙에 따라 주기적으로 바뀌도록 되어 있었다. 황궁에 정기적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은 개인 인식 통과마법표로 통과가 가능했지만 외부에서 오는 손님들은 이렇게 암호를 아는 사람이 접견소에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테룬이 반란을 일으켜 황궁에 진입했을 때에도 쿠드는 사전에 내응하여 성문의 결계를 일시적으로 해제하지 않았다면 반란은 실패했을 것이다. 물론 쿠드가 독단으로 성문 전체의 결계를 해제했던 건 아니었고, 그의 능력으로는 그렇게할 수도 없었다. 그 모두가 병석에 누운 하라스 4세 황제의 밀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결국 황제 또한 마지막으로 가서는 자신의 큰아들인 황태자를 포기한 것이다. 가볍게 결계를 통과하여 황궁의 실내에 내려선 일행은 바로 황제의 집무실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연락을 받은 황제가 신하들을 대동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식 접견이었다면 의전행사가 끝도 없이 이어졌겠지만 이것은 공식 접견이 아닌 실무 방문이었기에 그 모든것이 생략되었다. 공녀는 시립한 신하들을 재빨리 흝어보았다. 샤이트, 파라르, 그리고 어제 새로 영입했다는 라비언이라는 엘프 마법사였다. 공녀는 엘프의 엄청난 미모에 놀랐으나 곧 의연한 태도를 갖추며 예법에 맞게 절했다. "프린다인 공국의 공녀 데 프린다인이 황제 폐하께 알현을 청하옵니다." 테룬은 현숙하고 총명하다고 제국 내에 소문이 자자한 티르안 공녀의 평범한 모습에 약간 실망했지만 실망을 감추며 부드럽게 물었다. "먼 길을 잘 왔다. 힘들지 않았는가?" "라우프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왔습니다." "프린다인 공국의 마법 전력은생각보다 훨씬 강한 것 같군." "모두 폐하의 도우심이고 폐하의 전력이옵니다." "그대 공국에서 보내준 정보도 참으로 도움이 되었다. 그 정도 정보력이라면 제국 구석구석에 프린다인 공국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겠더군." "황공하옵니다. 저희 공국의 정보력은 오로지 적국만을향한다는 사실을 폐하께서도 잘 아실것입니다." 부드러운 화술 덕분에 상호간의 경계심이 다소 가려졌지만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라우프, 그대는 오랜만이군, 3년 전 선왕 폐하의 탄신제 때 프린다인공을 모시고 온 걸로 기억하는데........." 라우프는 고개를 깊이 숙여 절하면서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프린다인 공이 직접 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예, 사실 병환 중이시라 거동이 불편하시기 때문에, 공께서 신임하시는 공녀께서 대신 오신 것입니다." "그대가 이번 접견의 전권을 행사하는 건가?" 테룬은 심상하게 물어본 것이었으나 티르안 공녀는 고개를 쳐들고 즉시 반박했다. "폐하, 아닙니다. 이 접견의 전권은 저에게 있습니다." "티르안 공녀, 그렇다면 그대는 라우프의 자격을 증명해주기 위해 따라온 게 아니란 말인가?" "예, 라우푸는 이번 접견에서 제 보좌역에 불과합니다." "공녀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모든 접견은 제가 아니라 공녀님께서 주도하실 것입니다." 라우프는 또한 황급히 덧붙였다. 미리 상황을 예상하고 있던 샤이트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으나 테룬과 파라르는 무척 놀랐다. 비공식 모임이라고는 해도 여자가 한 공국을 대표한다는 것은 동제국 역사에도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테룬은 티르안 공녀가 거론한 요구조건이이라는 게 무엇일지 곧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쪽에서 먼저 조건 운운할 필요는 없었다. 조건이란 건 어디까지나 조건을 거는 쪽에서 먼저 말해야 하는 법이었다. "폐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개전이 임박했습니다. 이미 폐하께 소식을 전해드렸지만, 이제 머지않아 카로딘 대공국군이 동제국의 영토를 침공할 것입니다. 그들은 10년 전 부터 전쟁을 준비해 왔습니다. 청년드을 가려 뽑아 정예군을 만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마법사를 스카우트 하고, 마지막에는 신속한 공격을 막기 위해 군대를 국경지대에 전진배치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완결되자 일드인 공자는 자기 아버지인 카로딘 대공을 독살했지요. 참으로 외람되오나 지금 제국중앙군의 전력은 카로딘군을 상대하기에 부족합니다. 앞으로 2년 후라면 모르겠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지 아직 반년도 체 안되었습니다. 그동안 아무리 병력 육성에 심혈을 기울여오셨다 하더라도 반년은 허수아비 같던 제국군이 거듭나기에는 짧은 기간 입니다." "무엄하도! 어찌 제국군을 허수아비라 칭한단 말이오!" 파라르가 흥분하여 외쳤다. 티르안공녀는 냉? ㅗ構?대꾸했다. '국방대신 각하, 저는 국방대신 각하를 모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객관적인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프린다인 공국의 정보력을 얕보지 마십시오." 파라르는 분을 참지 못했지만 사실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저는 해결책 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제국군의 가장 큰 문제는 마법사와 잘 훈련받은 정예병의 부족입니다. 7서클 마법사 열명, 8서클 마법사 한명을 지원해다리겠습니다. 그리고 정병 2만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예상을 뛰어넘는 제안에 모두 놀랐다. 그러나 여기서 공녀의 제안에 속없이 좋아하는 것은 동제국군의 전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었기에 다들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우리에게도 8서클의 마법사가 한 명 더 생겼다는 것을 아는가?" 데이그랜은 자신이 언급되자 한쪽 손을 들어올리며 티르안 공녀를 향애 생긋 웃었다. 티르안 공녀느느 엘프 마법사의 친근한 태도와 미소에 혈색 없었던 얼굴을 잠시 붉혔으나 곧 침착함을 되찾고 차갑게 반문했다. "어제 영입하신 저분, 엘프 마법사 라비언님 말씀이시지요? 평화를 사랑하고 살생을 싫어하는 엘프 마법사가 전력에 도움이 되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데이그랜은 인간 몇 천정도 죽이는 건 일도 아니라고 대꾸하고 싶어 입이 간지러웠지만 꾹 참고, 마치 자신의 무능력이 미안하다는 듯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방어마법이라든지 치유마법이라든지 제가 할 수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하면 이런 저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어쨋드 8서클이니까요. 또 다소 유별나게도 제 취미는 공격마법이었거든요, 아름다운 공녀님." 티르안 공녀는 엘프 마법사 라비언의 말에 파르르 떨며 억지로 분노를 참았다. 자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라비언의 말은 비아냥거림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데이그랜은 모처럼 총명한 인간을 보자 지혜를 사랑하는 흑룡으로 칭찬의 말을 한 것이었지만, 그런 사정을 그녀는 물론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8서클 마법사 한 명이 더해진다 해도 제국군의 전력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고, 저희 공국의 도움이 그만큼 절실하다는 건 모두 인정하실 겁니다." 티르안 공녀는 단정적으로 말을 맺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무엇을 원하는가?" "제국 건국 이후 한 번도 고쳐지지 않아던 "파이브룬 제국 내 작위와 봉토의 계승권에 관한 하라스법." 즉, '하라스 계승법'의 개정을 원합니다." 예상대로였다. "물론 여자의 작위와 봉토 상속권을 인정해달라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그대에게는 남동생이 있지 않나? 티론 공자라고 했던가? 그대보다 여섯 살 아래였지, 아마?" 테룬의 얼굴은 불쾌감으로 일그러졌다. 권력다툼에 목숨을 건 여자는 그의 어머니만으로도 충분했다. "폐하, 제가 동생을 제치고 공국의 계승권을 주장해서 불쾌하십니까? 물론 불쾌하시겠지요. 하지만 만약 제가 남자였대도 그러셨을까요? 제가 남자였다면 더 나이가 많은 제가 공국을 계승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모든 사람들이 제가 동생보다 명석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는 공국을 누구보다도 잘 다스릴 자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프린다인 공국을 포기해야 합니까? 폐하께서 명심하실 점이 또 있습니다. 티론의 뒤를 밀고 있는 제 외삼촌 볼레브 백작은 화평론자입니다. 제 아버지 프란다인 공의 병세가 위중한 이때, 티론과 볼레브 백작이 정권을 잡고 원군을 거절한다면 제국의 운명은 어찌 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오로지 자신의 계승권을 확보하기 위해 마법사와 2만 명인나 되는 정병을 전쟁터로 내몰겠다는 뜻인가?" "아닙니다! 제가 그 제의를 한것은 제국과 공국의 이익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원교근공(遠交近攻:멀리 있는 나라와는 교류하고 가까이 있는 나라는 공격해야 한다)은 병법의 기본입니다. 카로딘이 독립하거나 세력을 키우면 카로딘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저희 프린다인 공국으로서는 참으로 난처한 지경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결국 카로딘 대공국을 견제하는 것이 저희 공국에 있어서 절체절명의 과제인 것입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저 개인의 이익 또한 다소나마 도모하려는 거지요. 또한 저는 제가 프린다인 공국을 다스리는 것이 제 동생이 다스리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테룬은 확신에 찬 공녀의 태도에 감탄했으나, 그래도 결국 남매간의 권력다툼에 휘말려들게 되었다는 불쾌감은 가시지 않았다. "하라스 계승법은 조법(祖法:국가의 시조가 만든 법)이라 고치기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겠지?" 동제국의 하라스 대제가 파이브룬 제국을 건국하면서 만든 조법(祖法)에는 황제와 내각 의 대신들과 공 이상의 제후 모두가 동의해야 개정할 수 있다는 불문법(不文法)이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다만 다음 조건이 맞아떨? 沮測?경우에는 개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주전론인 제 주도로 프린다인 공국의 군대가 참전하여 대승하는 것, 둘째, 제가 폐하의 배필이자 제 1황후가 되는 것입니다." 테룬은 매매계약의 조건처럼 자신의 결혼 문제를 거론하는 티르안 공녀가 갑자기 혐오스러워졌다. "그대에게는 아가씨다운 꿈이나 사랑의 환상 따위는 없단 말인가? 그대에게 사랑이나 결혼은 그저 그대가 원하는 것을 얻는 수단에 불과하단 말인가?" 황제의 비난에 티르안 공녀는 창백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지지않고 꿋꿋하게 말했다. "폐하, 제가 평범한 집안의 보통 아가씨라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이라든지 아기자기하고 단란한 가정이라든지 하는 걸 꿈꿧겠지요. 하지만 폐하, 위정자에게 그런 달콤한 미래는 사치일 뿐입니다. 지금 제가 예를 들어 어느 평민과 사랑의 도피라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제 동생 티론은 제국의 원군 요청을 거절할 것이고, 제국군은 카로딘군에게 패하겠지요. 그러고 나면 카로딘 대공국은 제국에서 독립할 것이고, 어쩌면 제국 자체를 무너뜨리고 자신들이 카로딘 제국이 되려 할지도 모릅니다. 카로딘 대공국과 오랜 세월 동안 앙숙이었던 저희 공국은 그 다음 목표가 될 것이고, 제국이라는 보호막이 없는 프린다인 공국은 결국 지상에서 사라지고 말겠지요." 공녀는 못을 박듯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폐하께 사랑하는 분이 계시다면 얼마든지 맞아들이십시오. 다만 제1황후는 제가 되어야 합니다." "제1황후가 된다고 해서 하라스 계승법을 고칠 수는 없을 텐데?" "당장 모든 여자에게 남자와 동등한 계승권을 보장해 달라는 건 무리겠지요. 저도 잘 압니다.제가 바라는 것은 하라스 계승법중 섭정 조항의 개정입니다. 여자에게도 섭정의 자격을 인정하고, 황제의 재가가 있을경우 섭정권을 10년 연장하여 계승권자가 30세에 이를 때까지 대리통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정도 개정하는 것도 역시 무리일 것이다." "여자의 섭정권을 황후에게로 한정한다면요? 그 경우에는 훨씬 개정이 쉽겠지요? 이번 전쟁에서 카로딘 대공국이 패배한다면 황권은 크게 강화될 테니 제후들은 황권 강화의 방향으로 가는 법 개정에 섣불리 반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제 아버지 프린다인 공이 저를 지지한다면 모두들 그저 일개 공국 내의 권력다툼으로 여겨 가벼운 마음으로 개정에 동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다른 여인을 제 2황후로 맞이하고 그녀를 더 아끼더라도 그대는 질투하지 않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는가? 그대도 여자인데?" 티르안 공녀는 단호히 대답했다. "제 가치는 사랑받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저는 폐하께서 마음속에 누구를 품으시든 추호도 개의치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저를 황궁을 떠나서 프린다인 공국으로 물라나고 그곳의 섭정통치에만 힘쓰겠습니다. 증거를 보여듣릴까요? 폐하께서는 마음속에 한 소녀를품고 계시지요? 신기한 치료술을 쓰는 치료사,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하고 기이할 정도로 폐하의 모후를 닮은 렌이라는 이름의 소녀 말입니다. 그 소녀의 행방을 말씀드리면 제 진정을 믿으시겠습니까?" 티르안 공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팔라르 데 매긴과 티르안 공녀가 데려온 라우프를 제외한 모두가 그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테룬이 애타는 목소리로 황급히 물었다. "렌, 그녀의 행방을 안다고?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는가? 무사한가?" 티르안 공녀는 차갑게 대답했다. "그녀는 제가 아는 한 무사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행방을 말씀드리기 전에 저의 제안에 대답해주셔야 합니다." 테룬은 수상인 샤이트를 돌아보았다. 샤이트는 테룬의 귓가에 속삭였다. "폐하, 수락하십시오. 지금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샤이트는 한편으로는 낭패감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렌의 행방이 알려지는 것은 그의 뜻과 달랐지만 일단 렌의 문제가 걸려 있는 이상 황제가 티르안 공녀의 제의를 함부로 거절하지는 못할 것이다. "폐하, 폐하께서 선대 황후 마마르 똑같이 닮았다는 그 소녀를 제 2황후로 맞아들이신다면 엄청난 반대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제1황후로서 그 반대를 막아드리겠습니다." "티르안 공녀, 그대의 제안을 수락하겠다. 그러나 내게도 조건이 있다. 그대를 황후로 맞아들이는 것은 카로딘 대공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가 될 것이다. 전쟁을 앞두거나 전쟁 중에 국혼을 하는 것은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프린다인 대공국 내 그대에 대한 반대 세력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 그러나 하라스 계승법의 개정은 그대가 황후가 되기 전, 그리고 이번 전쟁이 끝나기 전에 미리 추진하도록 하겠다. 전쟁이 시작되면 카로딘 대공국의 편에 서지 않는 다른 공국의 동의만으로도 법 개정이 가능할 텐데, 나를 지지하는 제후들은 전쟁 중에 그런 사소한 문제에 반대하여 분란을 만들지는 않을 테니, 개정을 생각보다 쉬? ?것이다." 티르안 공녀는 테룬의 말에 고개를 숙여 긍정의 뜻을 표했다. 황제가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를 지적하자 그녀는 놀랐으나, 곧 그가 생각보다 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녀는 조금 안심했다. "그때까지 그대가 브림의 황성에서 머무르도록 허락하고 그대에게 황제의 약혼녀에게만 허락되는 "타림 안디"의 칭호를 내리도록 하겠다. 그대가 원군과 마법사를 제공하는 것과 교환으로 칭호가 부여될 것이고, 칭호에 걸맞는 의전도 뒤따를 것이다." 티르안 공녀는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깊이 절했다. 몸을 일으킨 그녀는 애타게 궁금해하는 황제의 눈길을 받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언제라도 그 소녀를 제거할 방법을 있을 거야. 일단 지금은 황제의 신임을 받는 게 제일 급선무야.' "폐하께서 신기한 의술을 쓰는 열일곱 내지 열여덟 정도 되는 치료사 소녀를 찾고 계신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알았지?" "저는 폐하께서 즉위하신 후폐하와 관련된 정보를 있는 대로 모았지요. 최대의 의혹은 어떻게 폐하께서 무공을 회복하셨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흑성에서 사람을 몰래 보내 소문을 모으도록 했습니다. 그 후 황실에서 새어나온 소문도 추가로수집했고요. 여러가지 정보를 종합해본 결과, 저는 펠리시티 황후 마마와 흡사하게 생긴 소녀가 치료사를 자처하며 신기한 방법으로 폐하의 병을 고쳤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그 소녀에게 남다른 마음을 품고 계사다는 것도요." "그건 그렇다 치고, 그녀의 행방은?" 티르안 공녀는 황제의 채근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속도로 느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원래 정보란 닥치는 대로 모으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모은 정보를 취사선택하여 거기에서 의미있는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마이리아 시에서 푸른 죽음 병이 발생했다가 사망자를 거의 발생시키지 않고 수그러들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저는 앞으로 프린다인 공국령에서 푸른 죽음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서 병 치료와 관련한 정보를 수집하게 한 것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정보원들이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의 소녀가 여러 개의 바늘과 신기한 기운으로 환자들을 치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녀의 인상착의는 다소 듣던 것과 달랐지만 저는 그 소녀가 폐하를 고쳐준 소녀와 동일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폐하의 상세나 푸른 죽음이나 모두 고치는 것이 사실상 물가능하다는 점은 마찬가지인데, 그 두 병이 모두 고쳐지는 우연이 비슷한 시기에 연달아 두 번 있었다고는 믿기는 어렵지요. 그렇다면 우연이 아니라 동일 인물이 양쪽을 모두 고쳤다고 생각하고 생각하는 게 더욱 설득력 있지 않습니까? 또 인상착의나 외모는 마법이나 변장으로 쉽게 바꿀 수 있으니, 그 점이 다소 다르다고 해도 꼭 다른 사람이라고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결정적인 거은 소녀가 쓴 가명이 '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레이', '렌', 비슷하지 않습니까? 테룬은 벅찬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두 손을 맞잡았다. 그 모습을 티르안 공녀는 착잡하게 바라보았으나 겉으로는 전혀 그런 마음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대가 말한 소녀가 아마도 내가 찾는 소녀인 듯하군." 데이그랜도 속으로 뛸 듯이 기뻐했다. 이렇게 쉽게 그녀를 찾을 수 있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동제국 황실에오자마자 렌의 행방을 알게 되다니, 엘프 마법사 행세를 하며 황궁에 들어온 보람이 있었다. 데이그랜은 선수를 놓칠세라 재빨리 나섰다. "폐하, 마이리아 시는 워낙 엘프에게 호의적인 도시이고, 엘프 마법진을 이용하여 마이리아 시까지 가면 시간이 그렇게 걸리지도 않으니, 제가가서 그 소녀를 찾아오겠습니다." 그가 나서자 테룬은 반색했다. 사실 쿠드는 국정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전쟁을 앞둔 지금 쿠드를 마이리아 시로 내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 주면 고맙겠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돌아올 수 있겠는가?" "게으름을 부리자 않으면 엘프 상관의 마법잔으로 마법진 호핑을 해서 마이리아 시까지 가는 데 사나흘이면 충분합니다. 거기 도착하면 누나 라빌이 있을 테니 누나의 명성을 이용해 찾아보면 어렵지 않게 그 소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보름 내로 충분히 돌아올 자신이 있습니다." 물론 데이그랜은 렌을 발견했을 경우 다시 돌아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만약 렌 옆에 서제국 황제가 있을 경우 어떻게 그를 물리쳐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가득찼다. 자신은 없지만 어떻게든 선제공격하면 이길 수 있으리라. 그 다음은 렌을 자신의 레어로 데려오고 다른 드래곤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리리라. 그런 사정을 모르는 테룬은 라비언의 제안이 여러모로 기꺼웠다. 그는 머리속에서 앞으로 다가올 전쟁의 전망을 정리해보았다. 라비언의 말대로 엘프 마법진을 이용한다면 라비언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마이리아 시까지 충분히 갔다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면 라비언 또한 전쟁에서 한몫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테룬 또한 렌 옆에 있을지도 모르는 서제국 황제가 마음에 걸렸다. "라비언만 남고 다른 사람들은 잠시만 나가주게." 모두들 의아해하며 방을 나갔다. 테룬은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 책상 서랍 마지막 칸에 손을 대고 주문을 외워 서랍의 보안을 해제한 후 검은 구슬을 하나 꺼냈다. "이것을 받게." 데이그랜은 황제가 내미는 구슬을 받자마자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것은................" "그래, 맞아. 위대하신 지혜의 흑룡 데이그랜께서 파이브룬 대공을 통해 동제국 황실에 남긴 보물이다. 엄청난 마력이 응축되어 있어서 유사시에 해제 주문만 외고 상대방에게 던지면 상대방을 꽁꽁 얼릴 수 있다. 아마 지상에서 존재하는 공격구슬 중에서는 이것이 최강일 것이다. 그대가 공격마법에 능통하다고 하니 사용법은 알고 있겠지?" 데이그랜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 옛날 파이브룬 대공에게 소드 마스터의 혈통을 심는 마법을 걸었을 때, 대공을 맨손으로 돌려보내기가 조금 그래서 덤으로 방계마법 계통의 공격구슬을 하나 만들어 들려 보낸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직도 남아 있어 자신의 손에 다시 들어오다니, 정말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었다. 자신이 정말로 8서클의 엘프 마법사였다면 이 마법구슬이 매우 요긴했겠지만 그에게는 별 쓸모가 없었다. 그래도 그는 감사한 척 하며 구슬을 갈무맇ㅆ다. "사실 렌의 옆에 있다는 마법사는 서제국 황제 카에닌 테리미즈넨일 가능성이 높다. 만에 하나 그대가 렌 옆에 있는 서제국 황제를 물리쳐야 하는 상황에 몰리면 그 구슬을 사용하도록 해. 그 구슬에 담겨 있는 마법도 9서클 급이니 그가 방심한 틈을 타서 요령껏 쓰면 서제국 황제를 물리칠수도 있을 것이다." "예, 폐하." 테룬은 데이그랜의 손을 꼭 잡고 다시 간절하게 말했다. "부탁해, 라비언, 제발 그녀를 무사히 내게 데려다줘. 나는 때때로 내 안에 무언가 보이지 않는 게 터질 날 만을 기다리며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정말로 그녀가 보고 싶어. 그녀를 봐야 해." 데이그랜은 양심이 콕콕 찔렸지만 테룬의 말에 감읍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그녀를 무사히 데려고 오겠습니다." "그래, 정말 고맙다." 데이그랜은 엘프 식으로 깊이 절한 후 황제 집무실을 나왔다. 데이그랜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황궁 밖으로 나섰다. 결계 때문에 황궁 내에서 바로 순간이동마법을 시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적당히 황궁에서 떨어지자 그는 즉시 대륙간 순간이동마법을 펼쳐 마이리아 시까지 바로 이동했다. 엘프 상관에 들어선 데이그랜은 라빌의 행방을 물어보았다. 푸른 바람의 엘프덤 출신으로 보이는 꽃미남 엘프가 라빌을 찾자 그곳의 엘프들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라빌님은 엊그제 여기에 오셨다가 즉시 마법진으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셨는데요." 조금 어린 여자 엘프 한 명이 데이그랜의 아름다움에 취한 듯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데이그랜은 의혹을 느꼈다. 분명히 라빌은 이곳에 치료할 환자들이 남아 있어서 급히 마이리아 시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는데, 바로 다른 데로 떠났다고? 갑자기 뭔가에 퍼뜩 생각이 미친 데이그랜은 다시 물었다. "어린 엘프님, 그럼 라빌님은 혼자 왔나요?" "아뇨.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의 인간 소녀 한 명, 은색 비슷해 보이는 회색머리에 회색 눈의 인간 남자 한 명과 함께 오셨어요. 그들과 함께 마법진으로 이동하셨고요." 계속 물으려던 데이그랜은 갑자기 멍해졌다. 그는 인간 소녀와 인간 남자가 틀림없이 렌과 카에닌이라는 걸 짐작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이지? 왜 라빌이 렌과 서제국 황제와 함께 움직인 거지? 그는 라빌의 태도, 렌과 카에닌 황제의 행적, 그리고 그밖에 그가 지금까지 들은 모든 정보를 종합해보았다. 아, 그렇게 된 거였다! 렌과 카에닌 황제가 함께 다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카에닌 황제가 렌에게 상당하 정도의 자유를 허락하고 있다는 점도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람들을 치료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렌과 카에닌 황제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일 가능성이 컸다. 그 둘이 마이리아 시를 활보하려면 당연히 변장 마법을 써야 했을 테고, 라빌과는 그 상태에서 만났을 것이다. 라빌은 렌과 카에닌황제의 정체를 알았을 수도 있고 몰랐을 수도 있지만, 테룬 황제와 자신의 설명을 듣고 난 후에는 적어도 렌이 문제의 그 소녀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렌을 실험용으로 쓴다는 자신의 말에 놀라 황급히 이곳으로 돌아와 렌을 도피시켰을 것이다. 대강의 상황을 유추해낸 데이그랜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감히 엘프 주제에 나 위대한 지혜의 흑룡을 속여? ? 뺐?너를 가만두지 않으리라! "마법진으로 어디까지 간다고 하던가요?" 데이그랜은 화를 꾹 참고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다시 물었다. "그런 구체적인 말씀은 안 하셨는데요." "달리 행선지를 아는 엘프는 없나요?" "없을걸요. 후다닥 왔다가 후다닥 가셔서 누구와도 얘기를 못 했거든요. 엘프답지 않게 왜 그렇게 서두르셨는지.......... 아무튼 라빌님은 참 여러모로 독특하시죠. 인간과 어울리면서 인간의 병을 치료하러 다니시지를 않나, 유난히 부지런을 떠시지 않나.........." 데이그랜은 종알거리는 엘프의 말을 끊고 다시 물었다. "여기 지하의 마법진으로 이동한 게 맞니요?" "예" "부탁인데 잠시 동안 지하 마법진에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해줄수 없나요?" 데이그랜은 말하면서 최고로 마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엘프는 넋이 나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이에요.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할께요." "부탁합니다." 데이그랜은 팬 서비스 정신으로 다시 한 번 눈부시게 웃어준 후 서둘러 지하로 내려갔다. 천장이 높은 지하 광장에는 직경 10보탕(3미터 정도) 크기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데이그랜은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 눈을 감고 남아 있는 마나의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마법진에 남은 마나는 열서너 회분이나 되었다. 수십 회의 순간 이동 마나가 서로 섞이고 간섭한 탓에 행선지를 추적하기 쉽지 않았지만, 데이그랜은 그가 가진 모든 마력을 동원하여 차례로 최근의 마나부터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작업에 돌입하자마자 거은 물빛 마나가 그의 주위를 휘몰아쳤다. 다행히 마나의 양과 질을 가늠하여 혼자 이동한 것은 제외하고 여러 명이 이동한 것만 남기면 되었기에 공제 작업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독 이동한 마나의 흔적을 전부 공제하고 난 후 남은 마나는 총 다섯 회 였다. 흔적 하나하나에 신경을 집중하여 상호간섭효과를 분리하고 난 각각의 마나를 분석하더 데이그랜은 마나의 흔적 중하나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이동한 사람은 세 명인데 발현된 마나의 색채는 두 가지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말은, 이동한 일행은 전부 세명이지만 그중 한 명은 마법을 쓸 줄 몰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바로 이거야!' 데이그랜은 기뻐하며 그 흔적에 정신을 집중했다. 어디지? 다시 테라미즈인가? 아니면 남대륙 쪽인가 ? 혹은 동대륙? 데이그랜은 이마에 땀이 송글거릴 정도로 애를 쓴 끝에 마침내 마나의 방향을 탐지해냈다. 그들의 목적지는 서제국 동부의 상업 도시 차얀이었다. 데이그랜으 즉시 차얀의 엘프상관으로 순간이동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무엇을 찾는지 명확했기에 찾는 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차얀의 마법진을 이용한 자들 중 두 종류의 마나가 섞인 세 명의 일행은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행선지는 카로드였다. 데이그랜은 순식간에 다시 카로드의 엘프 상관으로 이동했다. 데이그랜은 그곳에서 다시 마법진의 마나를 탐색하려다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마법진이 아닌 그 바깥에서 마나의 흔적이 느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번에는 마법진이 설치되지 않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단 말이가? 데이그랜은 마법진에서 벗어나 마나의 흔적이 느껴지는 곳에 손을 댔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여 다시 마나의 방향을 추적했다. 한참 만에 손을 뗀 데이그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말틴이라니! 온 세상에서 드래곤들이 가장 혐오하는 곳, 모든 마나가 사라져버린 죽음의 땅으로 가다니! 이제 그는 렌 일행의 의도를 확실히 알았다. 그들은 드래곤이 쫓는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그곳으로 간 것이다. 그곳 안에서라면 데이그랜이나 다른 드래곤은 모두 장님이나 다름없었고 오히려 보통 인간들보다 더 무력해졌다. 그러니 데이그랜이 렌을 따라 마법장 안에 발을 들여 놓을수는 없었다. 참으로 영리한 대응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천년만년 마법장 안에 숨어 있을 수는 없을 텐데, 뭘 어쩌려는 거지? 렌을 그 안에 숨겨놓고 데이그랜을 공격할 방도를 찾으려는 건가? 데이그랜은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한시바삐 그들의 뒤를 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운 좋게 그들이 말틴의 마법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따라잡기만 한다면 승산은 있었다. 절대로 그들이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놔두지는 않으리라. 데이그랜은 거듭 다짐했다. 5 장 대결 데이그랜이 내려선 말틴 부근의 평야는 황량했다. 마법진을 탐색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었는데 어느새 한밤중이 지나 짙고 검푸른 새벽하늘 동쪽에는 여명의 희미한 빛이 어른거렸다. 마나가 희박해서 그런지 모든 사물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 데이그랜은 몇 차례 눈을 껌벅거렸다. 너른 평원에는 풀 한포기 없었고 그 자신말고 움직이는 생명체는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끝없는 정적이 흘렀다. ? ?堅瀏@?마나의 흔적을 찾아보었았으나 부근에 재차 순간이동을 한 마나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데이그랜은 렌 일행이 한동안 걸어서 이동했으리라 추측했다. 역시 영리했다. 그래도 마법장안에 숨어 지내려면 이것저것 필요한 게 많을 텐데, 어딘가 근처의 마을에 들르지 않았을까? 데이그랜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어슴푸레한 새벽빛 아래로 평야에 흐르는 가느다란 실개천이 눈에 띄었다. 그 실개천을 따라 시선을 집중하니 지평선 가까이에 작은 마을이 보였다. 데이그랜은 다시 그 마을까지 순간이동했다. 인적 없이 음울하고 쓸쓸한 마을의 단하나뿐인 거리를 천천히 지나쳐 걸어가면서 그는 뭔가 독특한 기운이 없나 신경을 곤두세웠다. 렌의 기운이야 당연히 서제국 황제가숨겼겠지만 라빌의 엘프 기운은 혹시 포착될지도 몰랐다. 엘프들 주위에 흐르는 마나는 인간보다 훨씬 평화롭고 조용하니 라빌의 기운이 별도의 마법으로 가려지지 않았다면 이 마을 안에서 그녀가 찾는 게 어렵지는 않을 터였다. 언제라도 서제국 황제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데이그랜은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데이그랜은 작은 술집 겸 여관의 간판 아래에서 멈춰 섰다. 여관의 2층에서 흘러나오는 엘프의 기운은 절대 착각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했다. 그는 잠긴 여관문을 마법으로 따고 조용히 이층으로 올라갔다. 라빌은 초라한 방에서 베개에 머리를 묻고 죽은 듯 자고 있었다. 데이그랜은 방 안을 살펴보았으나 어디에도 렌이나 서제국 황제의 흔적은 없었다. 데이그랜은 거칠게 라빌을 흔들어 깨웠다. 라빌은 신음소리를 낸 후 베개에 머리를 더 깊게 파묻었다. "라빌! 일어나라! 흑룡이다!" "흑룡이 모야?" 라빌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데이그랜은 화가 치밀어 양손에 얼음마법을 일으켜 라빌에게 쏘았다. "으악!" 라빌은 엄청나게 차가운 무언가가 자신을 덮치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 데이그랜을 발견하고는 사파랗게 질렸다. 데이그랜은 엘프의 모습을 지우고 평소에 즐겨하던 흑발 흑안의 인간 형상으로 변했다. 속을 들여다볼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에 가득 담긴 분노에 라빌은 덜덜 떨었다. "네가 감히 흑룡을 능멸하느냐? 드래곤의 피조물인 주제에?" "아................저는.................." 라빌은 드래곤이 내뿜는 엄청난 위압감과 공포에 질려 더듬거릴뿐 말을 잇지 못했다. "렌은 어디에 있느냐?" "마, 말틴의 마법장에......." "그 옆에 있는 마법사는 서제국 황제지?" "서제국 황제라고요? 카엔님이요?" 덜덜 떠는 와중에도 라빌은 화들짝 놀랐다. "몰랐느냐? 그렇다면 렌도 그 사실을 모르는 거야?" "예, 예. 아마도요." 라빌은 계속 떨면서 대답했다. "그럼 지금 둘다 마법장 안에 있다는 거냐?" 라빌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왜 그들과 같이 있지 않고 나온거지?" "하, 하, 할일이 있어서요." 데이그랜은 라빌을 노려보다가 냉정하게 말했다. "네 죄는 나중에 묻겠다. 그들이 마법장 안에 있는 이상 내가 어쩔 수는 없으니 네가 돌아가 다시 들어가 그들을 마법장 밖으로 유인해내야겠다." 라빌은 데이그랜의 말에 얼어붙을 듯 가만히 있었다. "어서 대답해!" 라빌은 온몸이 굳어질 정도로 두려움을 간신히 극복하고 힘을 짜내어 대답했다. "못합니다." 데이그랜은 하잘것없는 엘프가 끝까지 자신의 뜻을 거스르자 정말로 미친 듯 화가 났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라빌의 목을 잡았다. 손에 점점 힘을 주자 라빌의 얼굴은 피가 몰려 시뻘게졌다. 라빌이 컥컥거리자 데이그랜은 왼손도 함께 라빌의 목에 대고 조이기 시작했다. 이제 아주 살짝 더 힘을 주면 그녀의 목숨은 끊어질 터였다. 라빌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금 여기서 흑룡의 손에 죽는다면 나의살이 무지갯빛으로 부서지고 나의 뼈가 푸른 크리스탈로 응결되어 엘프의 낙원에 흩어지는 일은 없겠지. 내 몸은 인간들처럼 피를 튀기며 쓰러져 흓 속에서 썩어가겠지. 그러나 라빌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이제 죽으면 그 옛날 허무하게 먼저 보내버린 내 아기라빌리안과 사랑스런 팔불출 남편 리안을 다시 만날 수 있으려나. 죽으면 엘프의 천국이 아닌 인간의 천국으로 가고 싶어. 간절히 바라면 인간의신들이 나를 인간의 천국으로 보내줄까. 라빌은 저항하기를 멈추었다. 그 순간 여관의 덧창 틈 사이로 아침했살이 새어들었다. 햇살은 데이그랜과 라빌을 골고루 비추었다. 데이그랜의 목에 걸린 티우사의 잔해, 엘프의 낙원에서집어온 푸른크리스탈은 햇살을 받아 불타듯 빛났다. 순간적으로 방 안 전체에 푸른빛 반사광이가득 찼다. 갑자기 티우사 생각이 떠올랐다. 데이그랜은 문득 손에서 힘을 뺐다. 그리고는 라빌의 목을 잡았던 양손을 풀었다. 라빌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데이그랜은 싸늘하게 말했다. "너를 당장 죽이지는 않겠다. 네가 그들을? ?曠卍뼉?않는다면 그 대신에 너를 인질로 쓰지. 네가 저들을 위해목숨을 걸 정도면 저들도 너를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겠지? 인질로서의 가치는 충분할 듯하구." 라빌은 얼굴에 몰렸던피가 서서히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데이그랜이 조였던 목을 문질렀다. 라빌은 자신을 인질로 쓰겠다는 데이그랜의 말에 다시 안타까워하며 외쳤다. "그렇게까지 해서 렌님을 꼭 잡아야겠습니까? 렌님을 실험용으로 쓴다고 하셨는데, 그 실험이란 게 대체 뭐예요? 렌님은 실험 따위에 희생되어서는 안 돼요! 인간 중에서도 가장 고결하고 아름다운 인간인데!" 데이그랜은 차갑게 라빌을 노려보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드래곤의 비밀이니 너에게 모두 말해줄 수는 없지마, 렌을 찾느냐 마느냐는 드래곤들뿐만 아니라 엘프,드워프의 운명에도 크나큰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 내게 협력하는 게 너한테도 좋을 것이다." "그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가?" 의혹에 찬 눈으로 라빌이 올려다보자 데이그랜은 손을 내저었다. "그 이상은 말해줄 수 없다. 어쨋든 너는 인질 노릇을 해야겠다." 데이그랜은 라빌의 팔을 붙잡고 거칠게 그녀를 일으켰다. "그들은 말틴의 어느 방향으로 갔지?" 라빌은 입을 꼭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데이그랜은 코웃음을 쳤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뻔하지. 실개천을 따라 말틴 중심부로 가지 않았느냐?" 라빌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본 데이그랜은 잣니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하고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내가 50년전 엘프들을 파견해서 말틴의 마법장을 조사하게 했을 때 인간이 마법장에서 버틸 수 있는 한계가 20일 정도라고 나왔는데, 50년이 흘러서 마법장이 좀 약해졌으니 지금은 한 달 정도로길어졌겠지? 그럼한 달 후에는 렌이 마법장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을 테지?" 데이그랜의 냉정한 분석을 들으며 렌에게 시시각각으로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절감했다. '5서클 마법사인 카엔이 흑룡을 당해낼 수는 없을 텐데'하고 고민하던 라빌은 다시 카엔이 서 제국 황제, 즉 인간 중 유일하게 9서클에 도달한 자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가 바로 말틴에 죽음의 저주를 내린 장본인이라는 말이었다. 라빌은 카엔에 대해 형언할 수없는 공포를 느꼈다.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천연덕 스럽게 따라다니다니! 라빌은 카엔이 겉으로는 렌에 대해 진심인것처럼 행동하지만 인간치고는 긴 인생을 살면서 일종의 유희 삼아 렌을 가지고 노는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어서 가자. 일단그들이 지나가는 순간 바로 감지할 수 있도록 말틴의 마법장 주위에 탐지마법을 시전해놓고서 이 마을에서 기다리면 되겠지. 그러면 절대로 내 수중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거야." 데이그렌은 무뚝뚝하게 말하며 라빌을 잡고 말틴의 마법장 앞으로 순간이동했다. 그들은 실개천 앞에 내려섰다. 데이그랜의 순간이동은 칼같이정확해서 그들이 내려선 지점은 마법장에서 겨우 5보탕 ( 1.5 미터 ) 떨어진 곳이었다. 라빌은 평야 위에 솟아오른 커다란 잿빛 반구를 보고 다시 몸을 떨었다. 언제 보아도 섬뜩한 풍경이었다. 데이그랜 또한 치솟는 혐오감을 주체하지 못했다. 마나로 이루어진 생명체인 드래곤에게 모든 마나가 멈추고 섞여버린 말틴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데이그랜은 먼저 라빌에게 마법을 걸어 움직일 수 없게 해놓았다. 라빌은 얼음처러 굳어진 채 안타까운 눈빛으로 데이그랜이 하는 행동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데이그랜은 앞으로 나아가 대략 마법장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3보탕(0.9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섰다. 그 자신의 수기(水氣)를 오른쪽손에 집중시킨 후 왼손 손톱을 날카롭게세워 오른손 엄지 끝을 그었다. 붉은 피가 솟아나왔으나 피는 수기(水氣)의 영향을 받아 곧 검게 변했다. 피는 이제 사악한 독약처럼 보였다. 데이그랜은 정신을 집중하여 피를 뿌렸다. 검은 피는 땅 위에서 일렁이다가 서서히 두 줄기 선을 교차하여 그리며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때때로 상처에서 피를 더 짜내가며 데이그랜은 계속 피를 뿌렸다. 피는 마치 마법장에 더 이상 접근하기 싫어하는 것처럼 대략 3보탕의 간격을 두고 마법장을 따라 퍼져갔다. 얽힌 피의 선은 어느새 시야를 벗어났다. 데이그랜은 계속해서 같은 자세로 피의 선을 이어나갔다. 대략 반 파잔(한 시간)이 지나자 피의 선이 마법장을 한 바퀴 돌아 검푸른 내해의 수면 위에서 맞닿았음을 느껴졌다. 데이그랜은 손을 내렸다. 마나를 너무 많이 써서 현기증이 일었지만, 이 정도 손실은 반나절이면 회복할 수 있었다. "가자." 데이그랜은 라빌의 마비마법을 풀고 다시 마을로 순간이동했다. 초라한 여관방의 침대에 걸터앉아 데이그랜은 숨을 골랐다. 금방 시전한 마법은 거의 극한까지 간 고난도의 마법이었기에 그는 기진맥진했다. "무얼 하신 건가요?" 라빌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데이그랜은 라빌으 차갑게 쳐다보다가 곧 평소의 가벼운 태도로 대답했다. "궁극의 탐지마법을 펼쳤다. 서제국 황제 녀석은 틀림없이 기운을 숨는 마법을 쓸테니 보통의 탐지마법으로는 탐지가 안 되거든. 그 녀석이 9서클의 마법으로 기운을 숨긴다면 나도 9서클의 마법을 써서 그걸 깨야지. 마나로 가득 찬 내 피를 사용했으니 서제국 황제라 해도 꼼짝 못하고 걸려들 거다. 물론 탐지마법만 시전한 건 아니지만 그 이상은 안 그르쳐줄거야." 라빌은 고개를 푹 숙였다. "자, 우리는 여기서 뭔가가 탐지될 때까지 기다린다. 정말 끔찍하게 누추한 방이지만, 그래도 할 수 없지." 데이그랜은 불평하면서 초라한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라빌도 고개를 푹 숙인 채 침대맡에 앉았다. "라빌, 너 언제까지 그렇게 계속 앉아 있을 거야? 어쩌면 여기서 한 달 동안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는데, 힘 빼지 말고 누워. 누워서 엘프 놀이라도 해.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하고 한 없이 뒹굴거리는 걸 엘프 놀이라고 한다면서?" 데이그랜이 빈정거리자 라빌은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나도 너랑 이렇게 놀고 있기가 싫지만, 어쩌겠어? 내가 멀리 가 있다가 장거리 순간이동마법으로 여기까지 오면 그만큼 기운이 빠질 텐데, 서제국 황제는 그렇게 힘 빼고 상대할 정도로 만만하지 않거든." 데이그랜은 서제국 황제 카에닌과의 피할 수 없는 건곤일척의 승부에 대비하여 가수면 상태로 빠져들었다. 파충류인 그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래오래 가수면에 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데이그랜은 한참 후 뭔가가 그의 혈관을 간질이는 듯한 느낌에 퍼뜩 눈을 떳다.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눈을 감을 때까지도 계속 앉아 울고 있던 라빌은 어느새 눈물이 얼룩진 채로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고, 주위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일어나라!" 데이그랜은 라빌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라빌이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바로 순간이동했다. 그가 뿌려놓은 피의 마법진에 뭔가가 걸렸고. 그 장소는 바로 그가 아침 무렵에 마법을 시전했던 곳, 마법장 앞의 실개천이었다. 데이그랜은 최대한 기척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그곳에 내려섰다. 렌과 카엔은 카엔의 생가인 말틴 서남구역에서부터 마법진 외곽을 향해 쉬지 않고 계속 걸었다. 렌이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카엔은 스스로 렌에게 한참 떨어져서 앞서 걸었다. 그는 렌의 마음속에서 휘몰아치는 온갖 생각을 읽기가 너무 괴로웠다. 그가 가끔 걸음을 늦추면 등 뒤에서 렌의 생각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엄청난 죄를 저지른 그에 대한 원망,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번민, 그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애절함. 렌의 마음이 그에게 전해져올 때마다 카엔은 화들짝 놀라며 걸음을 빨리했다. 그는 왜 렌이 자기 곁에 있고 싶지않다고 했는지 이해했다. 렌의 마음을읽으면서 그가 괴로워할 때마다 렌은 더 괴로워할 것이다. 그렇게 괴로워하다가 결국은 서로 상처를 주게 될 것이다. 그가 마음을 읽지 못한다면 상처가 없는 척 가장할 수도 있으련만. 렌 또한 앞서 걸어가는 카엔의 등을 바라보며 괴로워했다. 그는 약했다. 세상에서 제일 강하면서도 한없이 약했다. 렌은 그에게로 뛰어가 아무 걱정 말라고, 여기 내가 있으니 안심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선뜻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불쪽으로 약간 방향을 튼 그들은 한참을 걸어 저녁 무렵,마침내 실개천변에 이르렀다. 그곳에서부터 둘은 실개천을 따라 처음 왔던 길을 그대로 되밟았다. 점심때 조금 지나서부터 지금까지 쉬지않고 내리 걸어 지칠대로 지쳤지만 렌은 불평하지 않았다. 라빌은 아마 어제 저녁 무렵 그 마을에 도착해을 테고, 장거리 순간이동을 하는 데 필요한 컨디션 조절을 위해 하루나 이틀 정도는 그 마을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 오느래 세 번 연속 순간이동한 것은 라빌에게 정말 무리여서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사흘은 쉬어야 했다. 하지만 라빌이 렌을 구하려는 급한 마음에 무리한다면 내일 새벽에라도 순간이동을 시도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늘 밤중까지는 라빌을 따라잡아야 했다. 마침 마법장을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에는 이미 한밤중이 되어 있었다. 렌은 털썩 주저앉아 입을 가리고 있던 손수건을 떼어내고 망토를 벗어버렸다. 정신없이 걸어온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렌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저, 여기서 조금만 쉬어요." 렌은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헐떡였다. 카엔은 렌의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다가 렌에게 조금 떨어진 곳에 주저앉았다. 손수건과 망토를 벗어버리자 한결 시원했다. 마법장을 벗어나고 나니 시전해 두었던 가장마법은 어느새 다시 돌아와 그의 머리도 회색빛으로 변하고 렌의 모습도 평범해졌다. 렌은 무어라 말했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는 렌의 마음을읽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다가앉았다. "이곳은 카엔님의 고향이었다고요?" 렌의 말소리는 담담했다. 렌의 마음속에서도 아까와 같은 격정은 느껴지지 않아 그는 조금 안심했다. "예" "아름다운 곳이었다죠? "예, 어떤 면에서는 테리미즈보다 더 아름다웠죠." "카엔님이 버려진 곳은 어디였나요?" "이곳에서 서쪽으로 한참 가면 산악지대가 나옵니다. 미즈넨 산맥이라고 불리지오. 저는 그 산속 깊은 곳에 버려졌습니다." "산속에서 얼마 동안 혼자 있었죠?" "닷새요." 렌은 신음소리를 삼켰다. 다섯 살 꼬마가 닷새 동안이나 산속에서 혼자 있었다니. "먹을 건 있었나요?" "어머니가 조금 챙겨주셨는데, 어찌어찌하다가 읽어버렸습니다." 렌은 눈물이 흐를것 같아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의 괴로운 과거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낮에 겪은 격정만으로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테라미즈넨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난 거죠? 원래 성은 기스리였다면서요." 렌은 좀 더 안전한 화제로 말을 돌렸다. "누리디안 고어로 '테라'는 땅, '미즈'는 물, '넨'은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그 세 단어를 조합해서 테라미즈넨이라고 지었지요. 원래 미즈넨 산맥이라는 이름은 내가 테라미즈넨이라는 이름을 짓기 전에도 있었는데, 거기에다가 '테라'를 붙인 겁니다." "그 마법, 황제의 저주는 대체 어떻게 시전하는 거죠?" 카엔은 순순히 대답했다. "태초에 세상에는 큰 힘이 하나 있습니다. 그 큰 힘이 모든 마나의 시초라고들 해요. 그 큰 힘은 어느 순간 둘로 갈라졌습니다. 어둠과 빛, 여자와 남자, 음과 양으로요. 두 개로 나뉜 힘은 서로 어우러지고 부딪치다가 다시 다섯 개의 힘으로 나뉘었습니다. 그 다섯 개의 힘이 바로 물, 나무, 불, 흙, 금속, 다시 말해 흑,청, 적, 황, 백의 힘입니다. 수, 목, 화, 토, 금의 다섯 마나는 차례로 흐르며 세상을 순환하고, 그 힘이 온 세상의 생물과 무생물을 움직입니다. 나는 어느날, 그 다섯 개의 힘을 꺼꾸로 돌리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금, 토, 화, 목, 수의 순으로 꺼꾸로 흐른 히모가 음과 양으로 돌아가고, 음과 양의 힘은 다시 합쳐져서 아무것도 없음으로 돌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나오지요. 그것이 바로 황제의 저주입니다." 렌은 그가 어쩌다가 황제의 저주를 펼치게 되었는지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었지만, 자신이 감당 못할 더 한층 처절한 사연이 튀어나올까봐 두려웠다. 카엔 또한 렌이 무엇을 듣고 싶어 하는지 읽었지만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가만히 있었다. 렌은 그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케엔의 행동중 가장 마음에 맺혔던 것이다. "앞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멋대로 조작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시겠어요?" "예, 그럴게요." "저 말고 다른 사람들마음도요." "예, 약속해요."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황제의 저주를 펼치 않겠다고 약속해주시겠어요?" "약속하겠습니다." 카엔은 진실을 담아 간절하게 말했다. "헤, 정말? 약속하는 거야?" 차가운 목소리가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자 렌과 카엔은 깜짝 놀랐다. 카엔은 재빨리 렌을 몸 뒤로 숨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어, 안녕? 카에닌 맞지? 말로만 들었는데 이렇게 카에닌 테라미즈넨 황제 폐하를 직접 뵙게 되다니 정말 가문의 영광이군." 밤의 어둠 속에서 그보다 더 한층 어두운 무언가가 나타났다. "너, 너는?" 카엔이 놀라 외치자 데이그랜은 씩 웃었다. "나? 나는 위대한 지혜의 흑룡 데이그랜이다." 데이그랜은 장난기를 지우고 진지한 태도로 렌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렌, 그대를 마침내 이렇게 만나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렌을 이 세계로 불러온 것은 바로 나, 데이그랜입니다. 그동안 그대를 찾지 못해서 얼마나 애가 탔는지 모릅니다. 이제 그대를 이렇게 두 눈으로 보니 용족의 운명이 정녕 다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데이그랜은 렌의 몸에서 일렁이는 기운을 느끼며 감격에 가득 찼다. 서제국 황제가 기운을 숨기는 마법을 펼쳐놓은 듯했지만 이미 자신이 펼쳐놓은 마법장으로 무력화되었고, 이정도 거리에서는 아무리 마법으로 가려 있다고 해도 렌의 깨끗하고 정순한 기운이 숨겨질 리 없었다. 지금까지 그가 쏟아 부은 노력은 이제 보답받을 수 있게 되었다. "무슨 소리냐? 대체 렌을 어쩌려는 거냐?" 카엔이 소리치자 데이그랜은 차갑게 카엔을 노려보았다. "카에닌, 너는 이 일과 아무 상관이 없어. 사실 너는 렌과 아무런 인연도 없지. 일이 꼬여서 우연히 렌이 서제국으로 흘러든 것뿐이야. 굳이 이 세계의 인간 중에서 렌과 인연이 닿는 자를 찾자면 동제국의 테룬 황제 정도랄까? 그러니 너는 이 일에 참견할 자격이 없다. 순순히 렌을 내놓으시지." 카엔으 더 이상 데이그랜에게 대꾸하지 않고 마력으 모았다. 드래곤과 마력을 겨루는 것은 이것이 두 번째였지만, 처음 겨룰 때 얼마나 고전했는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데이그랜은 카엔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간곡하고 다정하게 렌을 향해 말했다. "렌, 이리 와요. 렌을 부른 건 바로 나입니다. 내 기운이 그대에게 친숙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내게로 오고 싶지 않나요? 그대를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불렀는지 아나요? 이리 와요. 한걸음만, 한걸음만 내디디면 되요. 그대는 나와 함께 있어야 해요." 데이그랜의 미소는 따뜻했고 그의 목소리는 최면적이었다. 데이그랜은 몸을 조금 틀자 렌은 데이그랜의 얼굴을 달빛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의 얼굴은 자오 오라버니, 테룬 황제와 흡사했다. 검은 눈, 검은 머리, 뚜렷한 이목구비, 의지력과 강인함과 부드러움이 교차하는 표정까지 모두 그대로 였다. 렌은 데이그랜의 얼굴이 만들어낸 형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왈칵 그리움이 몰려오는 걸 어쩌지 못했다. 그리고 무언가가 자신을 그에게로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몸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나와 자신을 그에게로 이끌었다. 처음 자오 오라버니를 만났을 때, 그리고 테룬 황자를 만났을 때 느꼈던 끌림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끌림은 그것보다 몇 배나 더 강력했다. 렌의 눈빛은 몽롱해졌다. 렌은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내디뎠다. "렌, 안되요! " 다급해진 카엔은 급히 데이그랜에게 마력을 쏘려 했다. 일렁이는 은보랏빛이 카엔의 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카엔이 은보랏빛을 데이그랜을 향해 쏘려는 순간, 빛은 무언가에 벽에 부딪친 듯 사그라졌다. 뛰어가서 렌을 잡으려 해도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카엔은 당황했다. 그 모습을 보며 데이그랜은 맘껏 자랑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카에닌, 이제 드래곤의 무서움을 알겠어? 너의 마력을 막기 위해 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아? 다름 아닌 내 피를 썼단 말이야. 이제 네 마나는 너의 몸을 벗어날 수 없어. 너는 이미 내 피를 밝았거든. 영광인줄 알아. 내가 피를 흘려서까지 마법을 시전한 경우는 지난 5,000년간 한 번도 없었는데, 너는 나로 하여금 싸우기도 전에 피를 흘리게 했으니, 그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 데이그랜은 다시 렌은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느릿하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느 미치도록 감미로웠다. "렌, 잘하고 있어요. 이리, 한걸음만 더 내디뎌요. 렌이 정말 보고 싶었어요. 렌은 내게로 오기 위해 그 머나먼 이계에서 이곳까지 온 거예요. 렌, 자, 어서!" 카엔은 멍하니 한 발짝씩 떼고 있는 렌을 보며 점점 절박해졌다. 렌은 어느새 카엔을 지나쳐 앞으로 가려 하고 있었다. "렌, 가면 안되요! 멈춰요!" 카엔은 렌을 붙잡으려 했으나 렌은 어느새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나아갔다. 이제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카엔은 결국 렌을 향해 정신마법을 쏘았다. 정신마법은 마나와 상관없는 마법이기 때문에 마법장으로 속박당하지 않는 것이다. '렌, 미안해요!" 렌은 머리를 헤집는 것같은 뜨겁고 차가운 기운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카엔은 있는 힘껏 팔을 뻣어 겨우겨우 렌을 받아 안았다. 렌은 엄청난 두통에 신음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카엔은 렌의 고통을 보며 참을 수 없이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워낙 렌이 데이그랜에게로 끌리는 힘이 강했기에 그가 렌에게 쏘아 보낸 정신마법도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사람보다 강한 렌의 정신력을 믿고 한 위험한 도박이었다. "렌, 정신이 들어요? 나를 알아볼 수 있겠어요? 렌은 너무 머리가 아파 울음을 터뜨렸다. "카엔님, 너무 아파요! 머리가 깨질 것 같아요!" 카엔은 겨우 안심했다. 그는 렌을 얼싸안고 거듭 사과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데이그랜은 카엔과 렌을 보며 쳇 하고 입맛을 다셨다. 이제 렌에게 호소해서 스스로 오게 하는 방법은 더 이상 통하지않게 되었다. 조금 전에 한껏 자랑하긴 했지만 사실 그가 카엔에게 걸어놓은 마법은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능한 카엔과 격돌하지 않고 렌을 끌어오려고 했는데, 일이 꼬이게 된 것이다. 데이그랜은 카엔이 마법을 푸는 방법을 깨닫기 전에 한시바삐 렌을 빼오기 위해 이번에는 견인마법을 썼다. 그러자 카엔의 품속에 있던 렌의 몸이 서서히 데이그랜에게 끌려가기 시작했다. 카엔은 기를 쓰고 렌을 붙잡았다. 그러나 데이그랜이 끄는 힘은 너무 강력해서 렌은 저차 카엔의 품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마나를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데이그랜의 마법을 그가 맨몸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렌은 비명을 질렀다. '렌을 지켜야해! 어떻게 하면 좋지? 흑룡의 마법을 어떻게 깨지?" 카엔은 애가 탔다. 렌도 깨질것 같이 아픈 머리로 있는 힘껏 생각을 짜냈다. 그러나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렌은 이제 카엔의 품은 완전히 벗어나 카엔이 잡고 있는 것은 렌의 오른손뿐이었다. 카엔은 양손으로 렌의 오른손을 필사적으로 잡아당겼다. 카엔의 손에 터걱하는 충격이 전달되었 다. 렌의 오른쪽 어깨가 빠진 것이다. 렌은 다시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카엔은 오른쪽 어깨가 빠진 것이다. 렌은 다시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카엔은 깜짝 놀라 손을 놓으려했으나 렌이 외쳤다. "놓지 말아요!" 카엔은 정신 차리고 다시 안간힘을 다해 렌의 손을 잡았다. 이제 여차하면 어깨의 살이 찢어질 것 처럼 보엿다. '어쩌지? 어쩌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카엔의 양손 가득 식은 땀이 맺혀 렌의 손을 막 놓칠 무렵, 렌이 외쳤다. "카엔님! 피에는 피예요!" 카엔은 갑자기 머리속이 확 밝아지는 것 같았다. 그는 렌의 손을 잡은 두 손 중 하나를 놓고 손목을 물어뜯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피가 뚝뚝 떨어졌다. '마나여, 내 피에 모여라! 내 피여, 마나를 머금어라!' 카엔은 정신을 집중했다. 선명하게 붉던 그의 피는 어느 새 은보랏빛을 띠기 시작했다. '어디지? 흑룡이 피를 뿌린 곳이 대체 어디야?" 카엔은 차라리 눈을 감았다. 그의 오른손에 잡혀 있는 렌의 작은 손, 이글거리는 그의 마나를 한껏 머금고 피를 토해내는 왼쪽 손목의 상처, 검고 차가운 흑룡의 마나. 아, 그리고 끝없이 둥글게 이어지고 있는 한층 더 검은 저 기운! "그래 찾았어!" 카엔은 눈을 그게 뜨고 이제는 은보랏빛으로 빛나는 그의 피를 약 2보탕(60센티미터) 떨어진 땅바닥에 부렸다. 그러자 미리 그려놓은 선을 따라가듯 은보랏빛 선이 땅 위로 둥글게 퍼졌다. 빛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끝없이 뻗어나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은보랏빛은 푸른빛으로, 황금빛으로, 흰빛으로 빛나더니 팍 하고 사라져버렸다. 그와 동시에 카엔은 묶여 있던 마나가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카엔은 당장 최고 강도의 방어마법을 펼쳤다. 은보랏빛 방어구가 카엔과 렌의 주위를 펼쳐졌다. 데이그랜은 생각보다 빨리 마법이 깨지자 당황하며 견인마법의 강도를 높였다. 그러나 견인마법은 방어구에 부딪쳐 튕겨 나왔다. 데이그랜의 마력이 끊어지자 공중에 떠서 끌려가던 렌은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카엔은 재빨리 렌을 받았다. 카엔은 급히 렌의 어깨를 살펴보았다. 가엾게도 렌의 오른쪽 어깨는 탈골 되고 어깨뼈 주위의 살까지 찢어져 참혹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당장 치유마법을 펼쳐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카엔은 데이그랜을 노려보았다. "데이그랜. 너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제 그만 포기하지 그래. 서제국 전체, 아니 인간 전체를 네 적으로 돌릴 생각이냐?" 데이그랜은 입가를 뒤틀며 웃었다. "수포로 돌아가긴, 아직 정면승부는 하지도 않았는걸. 내가 피를 써서 마법진을 그린 건 오늘 아침의 일이데, 그동안 나는 하루종일 쉬어서충분히 회복됐지만, 너는 조금 전에 내 마법진을 해소하느라 힘을 잔뜩 배버렸지. 더구나 이 근방에는 네가 가 만들어놓은 마법장의 영향으로 마나도 거의 없단 말이야. 그러니 객관적으로 볼때 누가 이길 것 같아?" 데이그랜은 말하다 말고 한 손을 연극이라도 하듯 우아하게 휘둘렀다. "그리고 짜잔! 우리의 사랑스런 라빌이 여기 있습니다!" 그 순간 데이그랜이 시전해둔 차단마법이 걷히더니 라빌의 모습이 허공에서 서서히 나타났다. 라빌은 말도 하지 못하고 몸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마법으로 속박당한 채 렌을 향해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라빌님!" 렌은 목청이 터져라 외치며 라빌에게 뛰어가려 했다. 그러나 카엔은 렌의 몸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걸 보며 데이그랜은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라빌을 허공에서 받아 품에 안았다. 데이그랜은 극적인 태도로 감격했다는 듯이 말했다. "렌, 이 엘프는 렌을 구하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걸었어요. 나는 정말로 감동했습니다.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것을 목격하는 건 언제나 감동적이죠. 나는 인간들로 치면 참으로 긴 세월을 보냈지만 그런 일은 몇 번 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라빌이 렌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 렌도 라빌을 구하기 위해 먼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렌에게 당장 목숨을 내놓으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렌은 그저 내개로 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나는 당장라빌을 풀어주겠습니다. 풀어줄 뿐만 아니라, 라빌이 드래곤을 기만한 죄는 몽땅 사해주고, 라빌을 안전하게 푸른 바람의 엘프덤으로 보내주겠습니다. 아, 거기에다 덤으로, 저 친구, 카에닌 테라미즈넨에게도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하죠. 물론 그가 먼저 시비를 걸지 않는 한에서요. 어때요, 구미가 당기죠?" 렌은 데이그랜이 말하는 동안 미친 듯이 카엔의 손을 풀려고 애썼다. 그러나 한쪽 어깨가 빠진 상태에서는 몸부림치는 것조차 힘들었다. "카엔님, 제발요! 제발 놓아주세요! 라빌님을 구해야 해요!" "안됩니다! 절대 놓아줄 수 없습니다!" "저 때문에 랍리님이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요!" "렌, 날 떠나지 말아요! 렌은 나보다 라빌이 소중한 건가요?" 렌은 눈물을 쏟았다. "누가 중요 하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건 책임의 문제라고요!" "그래도 안돼요!" 데이그랜은 그걸 보며 카엔에게 말했다. "이봐, 서제국 황제, 너는 무척이나 렌을 사랑하는 것 같으데, 만약에 네 탓으로 내가 지금 라빌을 죽인다면 너는 렌의 원망을 평생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너를 볼 때마다 렌은 너 때문에 죽은 라빌이 생각날 텐데. 너는 더구나 사람의 마음을 저절로 읽는다면서. '카엔님이 라빌을 죽였어요!'.'카엔님 때문에 라빌이 죽었어요!' 이런 생각을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들으면 너무 괴롭지 않겠어?" 데이그랜은 렌의 말투를 흉내내며 말했다. 카에은 맞받아 외쳤다. "흑룡! 네가 나와 렌을 무슨 말로 흔들어놓든 나는 절대 렌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라빌이 죽게되 더라도 그 원망은 내가 감당하겠다! 렌, 몸부림 치지 말아요! 미안하지만 마법을 걸겠습니다!" 카엔은 렌에게 가벼운 마비마법을 걸었다. 렌은 꼼짝하지도 못하고 카엔의 품에 안긴 채 안타깝게 라빌을 쳐다보았다. 데이그랜은 자신의 위협이 먹혀들지 않자 별로 미련을 갖지 않고 즉시 라빌을 땅바닥에 버렸다. 라빌은 힘없이 바닥을 굴렀다. 사실 라빌을 인질로 삼겠다는 건 그녀를 죽이는게 내키지 않아서 그 스스로 만든 핑계였을 뿐이었다. "자, 그럼 이제 정면승부인가?" 데이그랜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마나를 끌어 모았다. 충분히 쉰 덕분에 그의 몸은힘이 넘쳐 흘렀다. 그에 비해 카엔은 마나가 전혀 없는 마법장 안에서 며칠을 보낸 데다 조금 전에 피를 흘려가며 마법진을 해소하느라 힘이 바닥난 상태였다. 더구나 카엔은 렌을 품안에서 보호해야만 했다. 데이그랜은 충분히 마나가 모이자 몸속에서 터질 것처럼 넘쳐흐르는 마나를 조금씩, 조금씩 변환시키기 시작했다. 변환이 진행될수록 온몸이 차가워지고 그 주위의 온도도 저점 내려갔다. 아아, 이 차갑고 깨끗한 기분이 그는 너무 좋았다. 한가기 사바응로 퍼졌다. 시리도록 검은 기운이 하얀 서리를 일으키며 그의 몸 구석구석을 휩싸고 돌앗다. 이따금씩 검은 기운이 꿈틀거리며 팍 튈 때마다 카엔과 렌은 충격에 몸을 떨었다. 데이그랜은 승리의 웃음을 지었다. 마법의 진수, 9서클의 빙계마법이 마침내 완성된 것이다. 빙계마법의 좋은 점은 차갑고 상쾌하다는 것 말고도 상대방을 얼린 후 다시 녹여서 다시 살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후훗, 그러니 안심하고 렌과 카엔에게 마법을 퍼부어도 괜찮았다. 이왕 9서클 마법을 시전하는 김에 아주 제대로 해볼까? 데이그랜 은 마음을 정했다. 그는 인간의 모습을 버리고 원래대로 흑룡의 형상으로 돌아옸다. 순간 주위의 공간이 일렁이면서 지상에서 가장 크고 위대하다는 드래곤의 모습이 드러났다. 렌은 입을 벌린 채 눈앞에 나타난 초현실적인 행불체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서양의 드래곤과 동양의 드래곤을 섞어놓은 것 같은 그 존재는 공중에 떠서 비인간적인 냉정합을 띤 채 렌과 카엔을 내려다 보았다. 흑룡은 서서히 입을 벌렸다. 극도로 차가워진 용의 긴 몸을 따라 안개 같은 하얀 김이 물결쳤다. "렌, 업드려요!" 카엔은 렌에게 걸어놓았던 마비마법을 풀며 외쳤다. 그는 있는 힘껏 마나를 모아 은보랏빛 방어구를 만들어 자신과 렌을 감쌌다. "훗, 겨우 그정도 방어구인가? 귀엽군 그래." 데이그랜은 허공을 가득 채우는 우렁찬 목소리로 말하며 방어구 주위를 두 세번 돌았다. "간다!" 데이그랜은 우렁차게 외치며 빙계마법을 내뿜었다. 카엔은 모든 힘을 방어구에 집중해서 필사적으로 마나를 막았다. "헉!" 엄청난 기운이 카엔을 덮쳤다. 그는 마치 복부를 쇠망치로 맞은 듯한 고통을 느꼈다. 입가에서 피가 몇 방울 떨어졌다. "카엔님!" 렌이 외쳤으나 카엔은 돌아보지 않았다. "계속 엎드려 있어요!" 카엔은 마나를 다시 끌어 모아 제 2파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미처 방어구를 다시 완결짓기도 전에 데이그랜이 뿜은 제 2파 빙계마법이 덮쳐왔다. "안 돼!" 카엔은 악으로 버텼으나 결국 방어구에 약간의 틈이 생기고, 그의 왼쪽 다리는 순식간에 하얗게 얼어버렸다. 카엔은 다시 피를 토했다. "후훗, 잘 버티는군. 이제 마지막 공격이야. 어디, 어떻게 막는지 볼까?" 엎드려 있던 렌은 이제 마지막이라는 걸 직감했다. 이대로 둘다 죽을 수는 없었다. 렌은 카엔이 숨을 몰아쉬고 있는 틈을 타서 방어구 밖으로 뛰어나갔다. "날 데려가요! 날 죽여요! 대신에 카엔님만은 살려줘요!" 렌의 모습을 본 흑룡은 환희에 떨며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망연자실한 카엔은 필사적으로 왼쪽 다리에 걸린 빙계마법을 풀려 했으나 이미 거의 바닥난 그의 마나로는 어찌할 수 없었다. 흑룡은 이제 승리를 확신했는지 다시 인간의 모습이 되어 렌에게 다가왔다. "렌, 잘 생각했어요. 이리와요. 저 천구의 목숨은 이제 건드리지 않을게요." 데이그랜은 다정하게 말했다. 렌은 눈물을 뿌리며 데이그랜을 행해 걸어갔다. 그 모? 응?본 카엔은 끝까지 자신을 생각해주는 렌에 대한 감동과 함께 흑룡에 대해 감당할수 없는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 이제 남은 방법은 단 한가지 였다. 그래. 그 방법을 써서라도 렌을 지키겠어. 약속을 어겨서미안해요, 렌... 온 세상 사람들에게 악마라고 비난받더라도, 이 주위 사람들을 전부 쓸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렌이 앞으로 나를 다시는 용서하지 못하게된다하더라도, 나는 렌이 죽게 놔둘수는 없어요. 카에은 모든 감정이 사라진 듯한 얼굴로 양손에 마지막 남은 얼마 안되는 마나를 모두 끌어 모았다. 은보랏빛 마나는 천연히 빛나다가 다시 오색빛으로 변했다. 한동안 그 색 그대로 돌던 마나는 어느 순간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세차게 돌기 시작했다. 색은 점점 탁해지고 기운은 점점 암울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마나는 잿빛으로 변했다. 데이그랜은 카엔이 뭘 하는지 깨닫고 얼굴을 일그러졌다. 카엔이 이 두손 사이에 떠 있는 저 작은 마나구를 터뜨리면 그 옛날 황제의 저주를 펼칠 때와 똑같은 정도의 위력을 낼수 있었다. 데이그랜은 황제의 저주가 보통 마법과 전혀 다른 원리로 작용해서 소량의 마나로 엄청난 효과를 낸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미 마나를 거의 다 소진한 카엔이 다시 황제의 저주를 시전하는 것으 보고 경악했다. 렌은 데이그랜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이상한 예감이 들어 등 뒤를 돌아보았다. 렌은 너무 놀라 손으로 입을 막았다. 카에의 손에서 빛나는 건 저 사흘 동안 말틴 안에서 지겹게 봈던 바로 그 잿빛이었다! 카엔은 잿빛 구름을 이제 양손으로 들어올렸다. 데이그랜도 카엔을 저지하기 위해 그가 모을 수 있는 모든 마나를 끌어 모았다. 그의 손에서 빛나는 검은색 마나는 카엔의 손에서 만들어진 마나보다 훨씬 컸다. 그러나 렌은 직감적으로 카엔이 만들어낸 마나구가 더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이그랜의 마나로도 황제의 저주를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순간, 렌은 돌아서서 카엔에게 달리기 시작했다. "안돼요! 카엔님! 다시는 그 마법 쓰시면 안돼요!" 렌의 눈앞에 색채가 사라져버린 죽음의 말틴, 온 천지에 널려 있던 잿빛 가루, 해변에서 본 절단된 시체들, 명월석 노천광의 광부들, 그리고 인간 마을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여기에서 황제의 저주가 펼쳐지면 이제 겨우 살아나기 시작했던 말틴으 도로 죽음의 땅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사정거리 내외 모든 사람들은 가루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가 다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내가 막을 거야. 렌은 정신없이 뛰어가는 가운데 정명기를 끌어 모았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력까지도함께 끌어냈다. 한 인간의 생명력은 그 어떤 마나보다도 강해. 해볼 거야. 그 순간, 카엔의 손에서 떠난 잿빛 구와 데이그랜의 손에서 뿜어진 검은 기운, 그리고 랜의 몸의 한군데에서 만났다. 지축을 뒤흔드는 엄청난 폭발이었다. 9서클로서도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 데이그랜과 카엔은 황급히 엎드렸다. 한참 동안 휘몰아 치는 마나의 폭풍에 데이그랜과 카엔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마나의 일렁임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데이그랜과 카엔은 몸을 일으켰다. 카엔은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라빌이 충격에 휩쓸려 저쪽으로 밀려간 것이눈에 띄었다. 그렇다면 렌은? 대체 렌은 어디갔지? "렌! 렌! 어디 있어요?" 카엔은 목청이 터져라 울음섞인 목소리로 렌을 외쳐 불렀다. 그는 길 잃은 어린아이같은 심정으로 렌을 찾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렌은 없었다. 데이그랜도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의 격돌로 마나가 몽땅 고갈되어 탐색마법을 펼칠 수도 없었지만, 그는 아무래도 탐색마법을 펼쳐도 렌을 발견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어던 인간이라도 9서클의 마법이 격돌하는 한 가운데에서 살아날 수는 없었다. 카엔은 애타게 렌을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자 억지로 마나를 일으켜 렌을 찾아보아려 했다. 그러나 마나는 모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기를 쓰고 마나를 모았다. 그렇게 무리를 했지만 그느 끝내 실패하고 피를 토했다. 카엔은 핏방울을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그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실이 현실로 다가왔다. 카엔은 데이그랜에게 달려들었다.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렌이!" 카엔은 울부짖으며 데이그랜을 주먹으로 치려고 했다. 이미 마나가 바닥난 상태에서 그가 할수 있는 것은 주먹질밖에 없었다. 데이그랜 또한 마나가 바닥나고 당장 폴리모프할 수도 없게 되었기에 주먹질로 맞받아쳤다. 그러나 주먹싸움에 있어서는 호리호리하고 유약한 카엔보다 근육질로 폴리모프한 데이그랜이 일방적으로 유리했다. 데이그랜은 카엔의 공격을 두 세번 가볍게 피해내고 카엔의 배에 가볍게 주먹을 먹였다. 컥컥거리며 카엔이 정신을 차리지 못 하자 데이그랜은 다시 카엔의 뺨에 주먹을 날렸다. 카엔은 휘청 하며 쓰러졌다. 터진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왜 나 때문이야? 너 때문이지." 데이그랜은 참담한 표정으로 차갑게 말을 이었다. "렌이 죽은 건 바로 너 때문이다. 네가펼치는 황제의 저주를 막기 위해 렌이 뛰어든 걸 너도 봤잖아? 그게 왜 내 탓이야?" 데이그랜은 마지막 순간 렌이 온몸을 눈부시게 아름다운 기운으로 휘감고 둘의 마나가 부딪치는 한가운데로 뛰어들던 장면을 떠올렸다. 정말 아름다운 기운, 어느 드래곤의 기운보다도 깨끗하고 조화로운 기운,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다녔던 기운이었다.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었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버리다니. 이제 드래곤은 끝장인가. 청룡 안티니아의 말처럼 이제 드래론은 필멸의 길을 걷는 것익. 카엔은 바닥에 쓰러진 채로 한없이 울었다. 데이그랜의 말이 그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그도 알았다. 다시는 황제의 저주를 쓰지 않겠다고 약속하고서도 약속을 어겼고, 그 때문에 결국 렌을 죽음올 몰아넣었다. 밀려오는 자책감을 감당할 수 없었다. 데이그랜은 카엔을 쳐다보녀 치를 떨었다. 살의가 솟아올랐다. 저놈 때문에, 저놈 때문에! 그러나 살의는 곧 사그라졌다. 아니,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이미 드래곤이 멸망의 길로 접어든 지금 카엔을 죽이느냐 마느냐 따위는 이제 더 이상 큰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마나도 바닥나고 무기도 없는 지금, 맨손으로 인간을 죽이는 불쾌한 일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데이그랜은 저만치 널브러져 있는 라빌에게 다가갔다. "이봐, 정신차려!" 라빌은 데이그랜이 흔들자 두세번 눈을 껌벅이며 제정신을 차렸다. "렌님은요?" "너도 마지막 순간을 보지 않았느냐? 죽었다! 저 녀석이 죽였지!" 라빌은 숨이 턱 멎는 듯했다.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데이그랜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냉정하게 말했다. "라빌, 나랑 가자, 나는 여기 더 있기 싫다." 카엔은 그말을 듣자 일어나 달려왔다. "라빌을 건드리지 마라! 나는 렌에게 라빌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카엔은 라빌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라빌은 흠칫하여 카엔의 손을 뿌리쳤다. "카엔님고는 절대 같이 가기 싫어요! 카에님이 서제국 황제인 줄 알았다면 저는 절대로 카엔님과 같이 다니지 않았을 겁니다. 카엔님이 황제의 저주를 다시펼치지만 않았다면! 그랬다면 렌님은 살수 있었을 텐데! 어떻게 그 지옥을 다시 만들 생각을 할수 있었지요? 랜님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면서!" 라빌의 질책에 카엔은 힘없이 손을 내렸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가슴에 피멍이 되어 맺혔다. 데이그랜은 라빌이 카엔에게 매몰차게 대하는 것을 보고 라빌에 대한 마음이 조금 풀렸다. "이봐, 라빌, 여기서부터 한동안 걸어가다 반나절만 지나면 마나가 쌓일테니, 그때는 너를 푸른 바람의 엘프덤으로 보내주마." 데이그랜은 라빌을 부축해 일으켰다. 라빌은 힘겹게 일어났다. 데이그랜은 전투가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패잔병처럼 라빌을 부축한 채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을 행해 한걸음씩 떼기 시작했다. 카엔은 그 둘이 새벽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걸 멍하니 바라보며 렌이 사라진 그곳에 주저앉았다. 이제 눈물은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마음의 고통이 너무 커 차라리 마비가 된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것, 렌을 만나 짧은 행복을 맛본 것, 마침내 그의 손으로 렌을 죽인것, 그 모두가 다른 사람에게서 일어난 일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 자리에 앉아 렌을 추억하는 그는 모든생명의 진액이 빠져나가버린 허깨비, 껍데기에 불과한 것만 같았다. 그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이제 더 쌓아올릴 죄도 없고, 더 살 낙도 없었다. 얼마나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지평선 너머로 서서히 태양이 솟아오르고 온 천지는 붉게 물들었다. 볼품없는 황량한 평야라도 여명은 아름다웠다. 그가 옛날에 만들어 놓은 불길한 마법장만 잿빛 그대로였다. 그는 렌이 흔적없이 사라져버리고 난 그 자리에 멍하니 바라보며 미동도 하지 않고 계속 그대로 앉아 있었다. 무언가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 빛나는 물건을 손을 뻗어 끄집어냈다. 그가 발견한 것은 보석과 금화를 담은 주머니였다. 렌이 평소 허리춤에 달고 다니던 것이었다. 렌 생각이 치밀어 올라 카엔은 견디기 힘들었다. "카엔님, 카엔님 또래 총각들은 저축을 열심히 해야 해요." "제가 얻은 수입의 10퍼센트는 카엔니 드릴게요!" "돈을 모을때는 모으고 쓸 때는 써야 한다고요!" 렌인 돈에 관한 이야기를 할때의 그 명랑하고 발랄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렸다. 카엔은 주머니를 소중하게 품에 넣었다. 그리고 흙먼지 위에 눈물을 흘렸다. 내가 이곳에서 죽으면 내 몸은 썩어서 렌의 잔해와 섞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죽어서라도 한 몸이 될수 있겠지. 그러나 렌은 내 시체와 자신의 ? 쳉셀?섞이는 걸 원할까? 최후까지 렌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나를 미워하고 원망하지는 않을까? 나는 렌이 죽은 이곳에서 같이 죽을 자격이 있는 건가? 아니, 잠깐, 잔해라고? 시체의 잔해라고? 카엔은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카엔은 벌떡 일어나 그와 데이그랜의 마나가 격돌했던 바로 그 지점을 파기 시작했다. 그는 미친듯 흙먼지를 휘저었다. 손톱이 부러지고 손끝에서 피가 날때 까지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한참을 헤집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카엔은 털썩 주저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마나와 데이그랜의 마나가 격돌한 충격으로 렌이 아예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져버린 것이라면 조금 전에 그가 주운 귀금속 담긴 주머니도 역시 사라졌어야 옳았다. 한편 렌이 그의 마나에 맞아 말틴 주민들처럼 가루로 변한 거라면 옷가지와 보석 같은 건 그대로 남아 있어야 했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라면, 그렇다면............ 카엔은 가슴이 뛰었다. 어쩌면, 어쩌면 렌이 살아있을 지도모른다. 그는 다시 주저앉았다. 피를 말리는 심정으로 그는 마나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이곳은 마법장 바로 옆이어서 마나가 무척 희박한데다 아까의 격돌로 데이그랜과 그가 주위의 모든 마나를 고갈시켜버렸기에 마나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마력으로는 약간의 마나를 끌어들일 수만 잇으면 충분했다. 영원 같은 시간이 지나 미미한 마나가 모이자 그는 땅바닥을 기어 다니고 주변의 흙을 손바닥으로 흩어가며 그곳에 남아 있는 마나의 질과 양을 조심스럽게 측정했다. 한참 동안 작업에 몰두하던 그는 다시 피를 토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밝아졌다. 그의 마나와 데이그랜의 마나가 격돌하고 거기에 렌의 기운까지 더해졌을 때, 그의 마나는 렌의 기운으로 대부분 소거되었지만, 남은 마나느 렌의 기운과 섞이고 데이그랜의 마나와 충돌하여 상호 간섭과 왜곡현상이 발생했다.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대부분의 마나는 소용돌이치며 흩어졌으나 나머나 약간의 마나는 순간이동 마나로 변환되었다. 데이그랜과 카엔은 9서클이어서 그런 식으로 방향을 잃은 마나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으나 아무 마력이 없는 렌은 고스란히 그 영향을 받았다. 9서클의 마나가 휘몰아치는 가우데 생겨난 이상 현상이라 렌의행방을 추적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렌이 그 속에서 죽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신했다.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카엔은 다시 눈물이 북받쳐 올라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렌을 찾으리라. 그녀를 찾아도 그녀가 원치 않는 한 그저 숨어서 그녀를 말없이 도우며 지켜보리라. 그리고 렌이 원한다면 이번에야말로 렌을 놓아주리라. 이제 두려움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오랜 세월 동안 저지른 모든 과오를 하나하나 고쳐나가리라. 렌이 살아 있는 이상 이제 그에게 무서울 것은 없었다. 그는 남은 마나를 긁어모아 순간이동했다. 라빌을 부축하고 마을을 걸어가던 데이그랜으 날이 밝아오고 태양이 뜨자 조금씩 마나가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이봐, 그만 울어라." 라빌은 그때까지도 계속 흐느끼고 있었다. "울고 싶은 건 바로 나라고. 그녀가 그렇게 흔적도 없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바람에, 이제 모든 게 끝났단 말이야." "렌님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리 없어요." 라빌은 계속 울먹였다. "그 마나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겠어?" 데이그랜은 계속 라빌을 달래다가 갑자기 무언가가 퍼뜩 생각이 미쳐 말을 멈추었다. 잠깐, 분명히 카에닌의 마나느 렌이 뿜어낸 그 아름다운 기운에 의해서 상당 정도 해소되었다. 그리고 남은 카에닌의 마나는 나의 마나와 격돌했다. 그러나 카에닌의 남은 마나량이 나의 마나량보다 훨씬 적었던 이상 양측의 마나가 제대로 격돌했다면 나의 마나가 더 많이 남아 카에닌에게 타격을 주든가 아니면 주위로 흩어졌어야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카에닌이 타격을 입지도 않았고 격돌의 현장에 흩어진 마나가 충만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카에닌과 나의 마나는 대체 어디로 간 거지? 혹시 렌의 기운이 나의 마나에 왜곡과 간섭을 야기했다면? 그렇다면 나의 마나가 변형되어 어떤 작용을 한 거지? 만에 하나 공격용의 마나가 다른 성질로 전환되어 렌에게 영향을 미친 거라면? 렌은 정말로 죽은 건가? 절망감이 너무 커서 내가 자세히 살피지 못한 건 아닌지? 드래곤의 운명이 걸린 일인데 너무 속단한 게 아닌건가? 데이그랜은 갑자기 초조해졌다. "너, 여기서 꼼짝말고 기다려!" 데이그랜은 대치의 현장으로 순간이동했다. 서제국 황제는 벌써 떠나버렸는지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현장에 손톱으로 직접 파해친 흔적과 옷자락으로 쓸고 다닌 자국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데이그랜은 왜 서제국황제가 저런 짓을 했는지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해답을 얻어냈다. 데이그랜은 즉시 나마를 끌? ?모았다. 그 또한 몸을 숙이고 땅바닥을 기어 다니며 주위를 샅샅이 조사했다. 한참 지나 그는 마침내 카엔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렌은 살아 있을 가능성이 컸다. 데이그랜은 기쁜 한편으로 후회스러웠다. 드래곤의 미래에 다시 한줄기 희망이 생긴 것은 기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럴 줄 알았다면 카에닌 테라미즈넨을 그냥 두고 떠날 게 아니라 두들겨 패서라도 죽였어야 했다. 앞으로 그는 두고두고 데이그랜이 렌을 찾는것을 방해할 것이다. 훗, 그래도 카에닌 테라미즈넨이 먼저 찾도록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렌이 마나의 혼돈 상태에서 순간이동한 이상 렌은 자연스럽게 동제국 쪽으로 쓸려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동제국은 그의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최후의 승자는 내가 될 것이다. 데이그랜은 주먹을 불끈 쥐고 순간이동했다. 외전 꿀과자의 탄생과 발전에 얽힌 우여곡절 파이브룬 제국이 건국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도유망한 젊은 제과제빵업자 디오룬 반은 파이브룬 제국의 수도 브림으로 이사하여 제과점을 열었다. 창의력 있고 열정적인 그의 제과점은 곧 입소문을 타고 장안에 널리 알려졌고, 제과점은 원래의 계획보다 훨씬 번창했다. 디오룬은 참한 아가씨를 만나 결혼을 했고, 그걸 계기로 시내 중상류지구로 가게를 확장 이전했다. 모든 일은 잘 풀리는듯 보였다. 그러나 하필이면 어느 날 아침, 디오룬은 재수 없게도 반죽을 가득 담은 양재기를 들고 가게 앞을 바삐 뛰어가다가 옆집에 사는 7서클 빙계마법사 킨토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킨토는 반죽을 전부 뒤집어쓰고 처참한 꼴을한 채 디오룬을 노려보았다. "너, 너, 감히, 내게........" 그는 너무 화가 나서 말을 잊지 못했고, 디오룬은 하얗게 질렸다. 파이브룬 제국이 내건 좋은 조건에 끌려 마법사에게는 변방이나 다름없는 이곳 동제국으로 이주해왔다. 그가 이 거리에 하숙을 얻어 살게 된 이후로 킨토의 차갑고 더러운 성질머리는 곧 거리 전체에 유명했다. 원래 킨토 자신의 타고난 성품도 그다지 훌륭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직업이 사람됨을 만든다고, 빙계마법을 계속 익히며서 그의 냉랭한 성품은 한층 강화되어 이제는 마법을 펼치기도 전에 찬바람이 쌩쌩 부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구나 7서클의 빙계마법사는 드문 존재여서 동제국으로 이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상당한 고위직을 약속받았기에 킨토는 더욱 안하무인이 되었다. 그래서 거리의 주민들은 모두 킨토에게 벌벌 기었다. 디오룬도 물론 킨토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지금껏 조심해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모두 킨토에게 벌벌 기었다. 디오룬도 물론 킨토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지금껏 조심해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렇게 딱 걸리다! 디오룬은 공포에 떨며 사과했다. "킨토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정말 죽여주랴?" 차갑기 짝이 없는 킨토의 말에 디오룬은 아찔했다. 마누라와 어리디어린 아들 녀석이 눈앞에 떠올랐다. "진짜, 진짜 잘못했습니다! 이 죄를 어떻게 보상해야 좋겠습니까?" "보상? 흥, 네 눈에는 내가 시시한 보상 따위를 바라는 걸로 보이나 보지?" 디오룬은 이제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정말로 잘못했다니까요!" "흥, 그게 용서를 구하는 자의 태도냐?" 한가기 스멀스멀 올라오는 킨토의 기운에 디오룬은 이제 죽었구나 싶었다. 귀하디귀한 빙계마법사가 살인을 저지른다 해도 당국은 처벌은 커녕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개죽음을 당하는구나... 그때 갑자기 디오룬은 킨토가 자신의 제과점에서 단 과자를 두어번 사간 일이 생각났다. 그는 힘껏 외쳤다. "자.. 자, 잠깐만요! 킨토님, 단 거 좋아하시죠?" 험악하게 굳어 있던는 표정을 조금 풀며 대답했다. "험험, 좋아한다고 할 수 있지." "과자도 좋아하시죠?" "에, 그렇지." "제가 세상에서 제일 달콤하고 촉촉하고 살살 녹으면서 완벽하게 맛있는데다가 지금까지 아무도 만들어본 적이 없는 과자를 만들어드리면 봐주시겠습니까?" 킨토는 디오룬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벌써 입맛을 다셨다. 디오룬은 이제 살았구나 싶었다. "언제까지 만들 수 있느냐?" "아.. 저, 한달.. 아니 열흘, 열흘이면 됩니다!" 한 달이라고 말하려던 디오룬은 킨토의 표정이 험악해지자 황급히 열흘이라고 고쳐 말했다. 그날부터 디오룬은 가게 문을 닫고 침식을 잊은 채 궁극의 달콤한 과자를 만들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설탕, 꿀, 각종 과일의 잼과 달콤한 즙, 단 재료란 재료는 모두 다 가져다놓고 이렇게 조합하고 저렇게 조합하기를 반복했다. 단 과자는 여러 가지 만들어졌다. 그중에서 지금까지 상품화되지 않은 과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두가 자신이 킨토에게 묘사했던 '세상에서 제일 달콤하고 촉촉하고 살살 녹으면서 완벽하게 맛있는 과자'에는 미치지 못했다. 어느새 디오룬은 자신이 왜 그런 궁극의 과자를 만들어야 했는지 ? 缺??잊은 채 열을 내가며 연구에 몰두했다. 며칠 밤을 새웠는지 생각도 나지않았다. 약속했던 열흘이 다 되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킨토가 닫혀 있는 제과점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왔을 때 화들짝 놀랐다. "그 엄청난 과자는 만들었느냐?" "아, 저, 아직...." 디오룬은 하얗게 질려 말을 더듬었다. "이것들으 다 뭐냐? 이것들도 무척 맛있어 보이는데?" 킨토는 디오룬의 시작품(試作品)들을 가리키며 군침을 삼켰다. 그러나 킨토가 그중 하나를 집어 들어 맛을 보려 하자 디오룬은 갑자기 킨토의 손을 쳐냈다. 그는 위엄을 갖추며 엄숙하게 외쳤다. "킨토님! 그걸 드시면 안 됩니다! 제과업계의 선두줒자라 할 수있는 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건 '세상에서 제일 달콤하고 촉촉하고 살살 녹으면서 완벽하게 맛있는 과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킨토는 맛있는 과자를 먹으려다가 눈앞에 빼앗긴 아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빙계마법을 일으켰다. "네가 정녕 죽고 싶으냐!" 디오룬은 하얗게 김이 서린 킨토의 두 손을 보고 공포에 질려 뒷걸음쳤다. 그러다가 그는 순간적으로 엄청나게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잠깐만!" 디오룬이 또 다시 위엄을 갖추어 엄숙하게 외치자 킨토는 의아해했다. "뭐냐?" "딱 2파잔(네 시간)마 주십시오. 궁극의 과자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진짜냐?" "예, 이번에는 틀림없습니다. 다만 1파잔 반 (세 시간) 지나서 이곳에 한 번만 더 들러주십시오." 확신에 찬 디오룬의 태도에 킨토는 긴가민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대신 이거는 가져가도 되지?" 킨토가 시작품들을 가리키자 디오룬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궁극의 과자를 드시기 전에 저런 걸로 혀를 버리시면 안 됩니다. 그때까지는 물 말고는 아무것도 드시지 마십시오." 킨토는 다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성질을 용케 억눌렀다. "좋다. 어디 두고보자. 맛이 없기만 해봐라." 찬바람을 일으키며 킨토가 사라지고 나자 디오룬은 정신없이 재료를 섞어 반죽을 만들었다. 반죽을 잘 휴지시키고 초콜릿까지 중탕해서 놓여놓았을 때 킨토가 다시 나타났다. "네 말대로 다시 왔다." 디오룬은 반색을 하며 킨토를 맞았다. "잘 오셨습니다. 여기에 빙계마법을 좀 시전해 주십시오." 디오룬이 내민 것은 새로 주조된 동제국 10실버 은화 크기 정도되는 작은 틀에 담긴 꿀이었다. "빙계마법을?" "예, 지속시간이 1.3난(13분 정도) 되도록 해주실수 있습니까?" "그 정도야 7서클인 내게는 식은 죽 먹기지." 킨토는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빙계마법을 일으켜 꿀을 얼렸다. 디오룬은 언 꿀을 재빨리 미지근하게 녹아 있는 초콜릿에 담갔다가 빼냈다. "다시 한 번 초콜릿을 살짝 얼려주십시오. 역시 지속시간을 1.3난으로 해서요." 킨토는 귀찮아하면서도 호기심이 생기는지 순순히 시키는 대로 했다. 디오룬은 준비한 반죽을 얼린 꿀-초콜릿 덩어리에 번개같이 예술적으로 입혔다. 그리고 미리 예열해놓은 오븐에 넣고 정해진 시간동안 잘 구웠다. 거대한 오븐에 놓여 있는 단 한 조각의 과자는 그야말로 운명적이고 의미심장하게 보였다. 시간이 다 되자 디오룬은 엄숙하게 과자를 꺼냈다. 향긋한 냄새가 퍼졌다. 킨토는 벌써부터 코를 벌렁거렸다. "이 향기는 뭐지?" "꿀에서 나는 겁니다. 깊은 산에서 딴 최고급 자연산 꿀을 썼으니까요." 과자를 집으려는 킨토의 손을 뿌리치며 디오룬은 과자를 자신이 집어 반으로 쪼갰다. "자, 보이시죠?" 과자 안에 초콜릿 속에 꿀이 가득 담겨 있었다. 황금빛이 넘실거리는 그 모양에 킨토는 숨을 죽였다. "자, 드셔보시죠?" 디오룬은 킨토에게 과자 반 조각을 건네주고 나머지 반은 자기 입속에 넣었다. 과자는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아아, 이 감격의 맛이란! 둘이 먹다 둘 다 죽어도 모르겠구나! 이제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디오룬은 스스로의 업적에 도취되어 무아지경에 빠진 채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뭔가 갑자기 와락 자신을 껴안는 바람에 정신이 들었다. "자네는 천재야! 천재라고! 세상에! 어떻게 이런 과자를 만들 수 있었나? 이거야말로 자네가 말한 대로 '세상에서 제일 달콤하고 촉촉하고 살살 녹으면서 완벽하게 맛있는 과자'일세!" 킨토는 디오룬을 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디오룬은 자신의 업적이 높이 평가받자 킨토에 대한 악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 과자의 탄생은 킨토님 덕입니다." 디오룬은 겸손하게 웃으며 말했다. "영광일세." 킨토도 쑥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니 과자 이름은 킨토님께서 지어주시죠." 킨토는 뜻밖의 부탁에 당황하고 감격하면서 잠시 고심했다. "역시 이 과자의 제일가는 특징은 속에 찰랑찰랑 꿀이 들어있는 거니까, '꿀과자'가 어떻겠나?" 디오룬은 처음에는 너무 평범한 이름이 조금 실망스러웠으나 거듭 되뇔수록 단순하면서도 명백한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그의 얼굴에 만족스 러운 미소가 퍼졌다. "꿀과자라, 참 좋은 이름이네요! 감사합니다! 두고 보십쇼! 앞으로 사람들이 '누워서 식은 죽 먹기'하고 하는 대신 '누워서 꿀과자 먹기' 라고 하느 때가 올 겁니다!" "그래!" 둘은 손을 맞잡고 함께 감격을 나누었다. 그 후 결국 킨토와 디오룬은 사업협정을 맺었다. 킨토는 빙계마법을 제공하고 디오룬은 과자를 만들어 팔되, 그로부터 나오는 이득은 3 대 7-킨토가 3, 디오룬이 7이었다-로 나눈다는 것이었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비싼 값을 불러도 과자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동제국의 황족과 귀족, 부유한 상인 중 꿀과자를 먹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킨토와 디오룬은 모두 엄청나게 부자가 되어 여생을 행복하게 보냈다. 위기는 디오룬의 아들인 보룬 대에 닥쳐왔다. 하라스 대제의 손자인 하라스 2세 황제 때의 일이었다. 영웅호색이라 그런지, 하라스 2세 황제에게는 황후가 네 명 있었다. 황제는 그중 셋째 황후를 제일 총애했다. 황제의 총애에서 밀려난 둘째 황후는 셋째 황후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다가 마침내 그녀를 독살했다. 그런데 일이 꼬이느라고 첫째 황후와 넷째 황후도 함께 독살당한 것이다. 졸지에 황후 셋을 잃게 된 황제는 범인이 둘째 황후이고 범행에 사용된 게 다름 아닌 '반 제과점'에서 만든 꿀과자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꿀과자의 맛이 워낙 진해서 어지간한 독약을 섞어도 표가 나지 않았기에 독살용으로는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황제는 처음에는 반 가문을 멸문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 또한 꿀과자의 팬이었기에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했다. 그는 결국 동제국 전체에 꿀과자 금지령을 내리고, 반 가문의 전 재산을 몰수하고, 반 가문의 일원을 모조리 제국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처벌의 수위를 낮추었다. 보룬은 그 무렵 50대 후반이었다. 동서대륙 중간의 소립소국들은 늘 전쟁이 끊이지 않아 꿀과자 같은 사치품을 만들어도 팔리지 않을 테니, 동제국을 떠나면 갈 곳은 서제국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룬의 나이에 그 먼 길을 여행하는 것은 무리였다. 가족들 십여 명만으로 이루어진 초라한 일행이 미즈넨 산맥을 넘을 무렵. 보룬은 쇠약해진 끝에 눈을 감았다. 새로이 가장이 된 보룬의 큰아들 도룬은 피눈물을 흘리며 가족들을 이끌고 천신만고 끝에 서제국의 수도 테라미즈까지 왔다. 수중에는 돈 한푼 없고 먹여야 할 입은 잔뜩 있었지만 도룬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젊음과 꿀과자 만드는 비법이 있었다. 그는 먼저 근처 제과점에 취직하여 악착같이 일해 약간의 돈을 모은 후 그 돈으로 빙계마법사를 한 파잔 (두 시간) 고용 했다. 번개 같이 꿀과자 스무 개를 만든 그는 머리를 썼다. 제과점에서 배달 나온 사람으로 가장하여 최고의 귀족가의 집사를 만나고, 그들에게 꿀과자를 하나씩 선물했다. 모두들 한순간에 꿀과자의 노예가 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그렇게 집사들을 포섭함으로써 온 귀족가가 그의 고객이 되었다. 곧 주문이 쇄도했고, 얼마 되지 않아 도룬은 브림에 있던 것보다 더 큰 제과점을 열었다. 꿀과자는 테라미즈 전체를 휩쓸었고, 어지간한 귀족이 아니면 감히 입에 대보지도 못하는 신분의 상징이 되었다. 도룬의 영광은 그 시절 명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던 평민 출신 수상 비세츠가 꿀과자를 맛보게 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평소에 단것을 즐겨 먹는 황제의 취향을 익히 알던 비세츠 수상은 꿀과자의 진가를 알아보고 카에닌 황제에게 진상했다. 카에닌 황제는 꿀과자를 먹는 순간 이것이야 말로 그가 꿈꿔오던 궁극의 단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황제의 전권으로 도룬에게 엄청난 하사금과 함께 백작위를 내리고 반 가문이 꿀과자에 '황실 납품 과자'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도 허용했다. 그때부터 도룬 반은 귀족들에게만 붙는 '데'의 호칭을 성 앞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명예와 부귀가 한 몸에 있었지만 도룬은 고향인 동제국을 잊을수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 황실에서특사가 파견되어 새 황제가 꿀과자를 잊지 못하고 있으니 다시 돌아와 달라는 전갈을 전하자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도룬은 치욕스러운 과거를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동제국이 우리를 불명예스럽게 내쫓았으니, 받아들일 때는 가장 명예롭게 맞아들이시오. 여기 서제국과 마찬가지로 백작위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동제국으로 절대 돌아가지 않겠소." 도룬은 당당하게 말했다. 특사는 그 제안을 동제국에 전했다. 처음에 귀족들은 하나같이 빵쟁이 주제에 귀족위를 바란다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노발대발했다. 그러나 도룬에게서 꿀과자 대접을 잔득 받아 완전히 도룬 편이 된 특사가 서제국에서 가져운 꿀과자 종합선물 3종세트를 귀족들에게 하나씩 돌리자 반응은 확 달라졌다. 모두들 꿀과자 먹은 벙어리가 되어 반대가 쏙 들어간 것이다. 결국 도룬에게 백작위를 수여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도룬은 다른 가족들을 테라미즈에 남겨두 고 자신은 아내와 사랑하는 막내딸과 함께 동제국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동서제국의 수도에 각각 있는 '반 제과점'은 모두 본점이 되었다. 도룬은 막내딸과 사위에게 동제국의 본점을, 큰아들에게 서제국의 본점을 남겨주었고, 그 후로 서제국의 '반 제과점'은 아들이 이어가고 동제국의 '반 제과점'은 딸이 이어가는 전통이 생겼다. 양 제국의 '반 제과점'은 10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계속 꿀과자 발전에 협력해왔다. 그들은 이따금씩 꿀과자를 이용한 독살사건이 생길 때마다 일치단결해서 '꿀과자 문화 재정립 운동'을 벌이기도 하고, 꿀과자 제조, 판매를 부당하게 금지하는 법안이 나오려 하면 함께 항거하면서 결속을 다져왔다. 그들은 동일한 좌우명을 사용하여 자신들이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거듭 상기하고 있는데, 그 좌우명은 다음과 같으며, 그 심오한 뜻으로 좌우명을 보는 사람 누구에게나 깊은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오직 맛있는 것만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 4권 타이핑 후기 > 닭살송 ( 팥죽송 리듬에 맞춰서... ) 닭살~ 닭살~ 닭살~ 닭살~ 닭살~ 닭살~ 닭살~ 닭살~ 렌카엔~ 렌카엔~ 닭살~ 닭살~ 닭살~ 닭살~ 닭살~ 닭살~ 닭살~ 닭살~ 렌카엔~ 렌카엔~ 닭살~ 닭살~ 닭살~ 닭살~ 닭살~ 닭살~ 닭살~ 닭살~ 레엔~ 카아엔~ 닭살~ 닭살~ 닭살~ 닭살~ 닭살~ 닭살~ 닭살~ 닭살~ 데~ 이그랜~ 데~ 이그랜~ 데~에~ 이그래엔~~~ 치료사 렌 5 권 - 핏빛 들판에 눈물을 뿌리며 - 1 장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2 장 치료사 구와인 3 장 변화의 바람 4 장 종군 치유마법사가 되다 5 장 야전병동 6 장 피는 피를 부르고 7 장 핏빛 들판에 눈물을 뿌리며 1 장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렌은 뭔가가 얼굴을 지나가는 느낌에 눈을 떳다. 벌레 같았다.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렌은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오른쪽 어께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너무 심해 잠시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헐떡이던 렌은 왼팔로 땅을 짚고 겨우 일어났다. 오른쪽 어깨의 고통에 조금 적응이 되자 다시 온몸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아프지도 않은 곳이 하나도 없었다. 카엔이 쓴 정신마법인지 머리도 깨질 듯이 아팠다. 한참을 괴로워하며 고통에 익숙해진 후에야 렌은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렌이 있느 곳은 숲이었다. 활엽수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하게 자라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깊은 숲인 것 같았다. 공기는 습하고 무더웠으며 나무둥치 사이로는 이런저런 수풀이 무성하게 나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으나 날이 흐리고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하침인지 저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젖은 땅에 뒹굴어서 몸은 온통 흙투성이였다. 렌은 기를 쓰고 몸을 끌어 가까운 나무둥치에 등을 기댔다.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리얼하게 아픈 것으로 보아 꿈은 아닌데, 마지막 본 들판의 황량했던 광경과 지금의 풍경이 너무 달라 도무지 뭐가 어찌 된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 본 광경이 뭐였더라? 그래, 카엔님은 두 손으로 잿빛으로 물든 마법구를, 흑룡 데이그랜은 검은 마법구를 만들어 서로에게 던지려 하고 있었지. 나는 카엔님의 마법구를 보고 아무 생각 없이 그 속으로 뛰어들었고. 나는 성공한 걸까? 카엔님이 펼친 황제의 저주는 해소된 걸가? 사실 황제의 저주를 정명기로 해소시킨다는 건 이치로 따져볼때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뭔가를 해소시킨다는 건 섞어서 변환시킨다는 것인데, 마나와 정명기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배척하지 않는가. 그래도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렌은 생명의 힘을 쓴다면 모든 마나를 무(無)로 돌리는 카엔의 마법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카엔의 마법이 마나의 흐름을 역행하고 마침내 멈추면서 그로 인해 나오는 에너지를 발산하는 거라면, 그 정반대로 잠재되어 있던 생명 에너지를 일시에 끄집어내어 발산할 경우 마법을 무력화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렌은 뛰어들었고, 마지막 순간에 카엔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죽음의 힘이 자신의 생명력과 맞부딪치면서 다시 마나의 선순환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정말이었을까, 아니면 환상이었을까. 렌은 어깨에서 다시 통증이 밀려오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났다. 어깨가 탈골이 되자 어깨뼈 주위의 피부도 조금 찢어진데다가 어깨뼈를 감싼 근육까자 상당히 손상된 것 같았다. 어깨뼈가 빠졌다면 자칫하면 습관성 탈골이 되어버릴 염려가 컸다. 렌은 이를 악물고 왼쪽팔로 오른쪽 상완부를 잡고 팔 관절을 살짝 돌려가며 어깨뼈를 맞추었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쏙 나왔다. 그러나 일단 뼈가 맞춰지자 통증은 다소 사라졌다. 엄습하던 고통이 덜어지자 다시 카엔 생각이 밀려 왔다. 가여운 사람... 렌은 그가 어떤 마음으로 황제의 저주를 다시 펼치려 해는지 알았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 천 명, 만 명보다 렌 한 명이 더소중했던 것이다. 그의 마음을 생각하면 감동하면서도 괴로웠다. 내가 카엔님 옆에 있으면 카엔님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 거양. 여차하면 또다시 황제의 저주를 펼칠 테지. 아무리 내게 거듭거듭 약속하면서도 막상 나한테 위기가 닥치면 자기 스스로도 어쩔 수 가 없을 거야. 눈물이 떨어졌다. 내가 잘못한 것일까? 맨 처름 카엔님이 황제라는 걸 알았을 때 그가 한 짓은 천인공노할 만행이라고 확실히 얘기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난 끝내 카엔님을 단죄할 수 없었고, 카엔님은 다시 황제의 저주를 펼쳤어. 그래서 난 생명력을 써가며 그를 막을 수밖에 없었어. 렌은 퍼뜩 생각이 떠올라 몸 안에 미미하게 남은 정명기를 운기해보았다. 그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온몸을 엄습했다. 렌은 예기치 않았던 통증에 놀라 비틀거리다가 결국 중심을 잃고 언덕 아래로 두세 바퀴 굴러 떨어졌다. 기를 쓰고 몸을 추스른 렌은 다시 한 번 정명기를 운기해보았다. 또다시 참기 힘든 정도의 통증이 찾아왔다. 그래도 계속 정명기를 운기한 결과, 렌은 생명력이 반 이상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나마 반이라도 남은 것은 급박한 당시의 상황에서 생명력이 정명기로 화할 충분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렌은 망연자실했다... 반이라니! 그렇다면 길어야 앞으로 20년! 전에 테룬 황제를 치료할 때에는 여든 살까지 살 거 예순다섯 살 정도까지 살아도 괜찮다는 기분이었으나 이제 여생이 반으로 줄자 정말로 남은 세월이 얼마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살고 싶은데... 그렇게 일찍 죽기 싫은데.... 할 일도 너무 많은데....... 마법 속으로 뛰어들 때는 너무 급해서 아무 생각도 안 났지만 막상 수명이 확 단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렌은 더럭 무섭고 슬펐다. 싫어... 일찍 죽기는 싫어... 눈물이 넘쳐흐르고 온몸에 기운이 빠졌다. 렌은 상심하여 계속 눈물을 흘리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날이 개어 나뭇가지 사이로 가느다른 햇살이 빗겨 내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침햇살인지 저녁햇살인지 분간이 안 갔으나 렌은 나뭇가지가 뻗어나간 방향을 보고 남쪽을 가늠한 후 해가 서쪽에 있다는 걸 알아냈다. 해가 거의 져가는 걸로보아 저녁 무렵이었다. 몸은 쑤시고 마음은 괴로웠지만 목마름과 배고픔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렌은 기를 쓰고 일어나서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빗물은 흙바닥 여기저기에 고여 있었지만 여름에 땅에 고인 물을 먹는 것은 자살행위였고, 먹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목이 타들어가고 위액이 헛되이 꾸륵거렸다.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렌은 왼팔을 뻗어 높이 달린 잎에 고인 물을 털어냈다. 그쪽에 있는 물은 아무래도 덜 오염되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허겁지겁 잎사귀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물은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렌은 기를 쓰고 다시 잎사귀 하나를 잡아당겼다.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잡아당겼기 때문에, 나뭇잎에 고인 물은 렌의 입으로 무사히 흘러들었다. 렌은 몇 방울이 안되는 물에 입맛을 다셨다. 천상의 감로수같이 달콤했다. 그렇게 잎사귀 몇 개에 고인 물을 겨우 조금이나마 마시고 나자 안도감과 함께 졸음이 밀려왔다. 그렇지만 이 숲에 어떤 야생동물이 있는지 모르는데 이데로 잘 수는 없었다. 렌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돌과 나무로 그럭저럭 마법진을 만든 후 휘어진 나무둥치에 몸을 기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 렌은 새소리에 눈을 떳다. 마법진 덕분에 야생동물의 습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딱딱한데서 잤기 때문에 온몸이 배기고 뻐근했다. 배는 이네 너무 고파서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렌은 굴러 떨어지다시피 하며 나무둥치에서 내려와 엉금엉금 기어 먹을 것을 찾았다. 눈에 보이는 풀 중에 아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었지만 요기가 될 만한 건 없었다. 그래도 일단 먹을 수 있는 풀은 전부 잡아 뜯어 닥치는 대로 입 안에 넣고 씹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렌은 나뭇가지 하나에 몸을 의지해 용케 일어났다. 먼저 물과 먹을 것을 찾고, 그 다음에 방향을 잡아 인가로 내려가야 했다. 하지만 렌은 이 숲속이 얼마나 깊은지, 대체 어디에 붙어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몰라 한없이 막막하기마 했다. 혹시 저번처럼 다른 세계로 떨어진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렌은 그럴 리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차원이동이라는 건 공간이동보다도 훨씬 어려운 거라는데, 그런 일이 우연히 생길 확률은 일단희박하다고 봐야 했다. 다만 기온이라든지 식생을 볼 때 이곳은 말틴보다 훨씬 남쪽인 것 같았다. 렌은 이곳이 같은 세계이길 간절히 바라는 자신의 마음을 문득 깨달았다. 다른 세계라면 카엔님을 다시는 볼 수 없을 테니까. 둑이 터진 것처럼 눈물이 다시 쏟아졌다. 이제 렌은 어찌해야 좋을지조차 알지 못했다 한참 울면서 걸음을 옮기던 렌은 다시 엄습하는 목마름과 배고픔에 슬픔조차 잊었다. 태양이 작열하면서 나뭇잎에 맺힌 비는 다 증발해버렸고 고인 물은 마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먹을 것은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풀도 너무 많이 먹고 나니 배고픔을 달래주기는 커녕 속이 뒤집혔는지 헛구역질만 나왔다. 푸른 이파리들이 섞인 토사물을 보니 기가 막혔다. 렌은 이제 그냥 주저앉았다. 이대로 굶어죽는 것일까. 그 난리를 치고 나서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사라져버리는 걸까. 차라리 한 버에 죽는 건 해보겠지만 이런 식으로 서서히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는 걸 손 놓고 봐야 하는 건 참기 힘들었다. 그리고 다시 견딜 수 없이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왔다. 이제 물, 물, 물 하고 온몸이 외쳐댔다. 배고픔도 더 심해져 쇠스랑으로 위벽을 긁어대는 것 같았다. 물과 먹을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렌은 허리춤을 뒤졌다. 350골드와 귀금속이 들어 있는 주머니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제대로 달려 있는 것은 양치할 때 쓰는 향수병이랑 침통, 그리고 비상용으로 쓸 몇 가지 약초를 조금씩 모아 놓은 주머니뿐이었다. 렌은 잠시 망설이다가 향수병의 물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도 모금 정도였다. 원래 먹는 물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물은 식도를 조금 적셨다는 느낌조차 주지 못한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 넣은 렌은 향수병을 버리려다가 만약을 대비해 힘없이 다시 병을 허리춤에 묶었다. 그리고 항생 작용을 하는 약초를 오른쪽 어깨에 붙였다. 렌은 계속 적지로 걸음을 떼었다. 일단은 남쪽이 더 고도가 낮고 숲이 성근 것 같아 그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계속 내려갔으나, 사람이 다니는 길이 나 있지 않은 수풀을 헤치고 걷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힘이 빠진 렌은 해가 지기도 전에 다시 적당한 나무둥치를 골라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숲속에서의 사흘째 되는 날, 렌은 마침내 샘물을 발견했다. 감격한 렌은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차가운 샘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이 달콤했다. 태어나서 먹어보는 가장 맛있는 것이었다. 생명이 온몸에 충만하는 느낌이었다. 배가 터지도록 물을 마시고 한숨을 쉬며 그 옆에 쓰려졌던 렌은 갑자기 뭔가가 떠올라 몸을 일으켜 샘물을 들여다보았다. 역시 가장마법은 풀려 있었다. 그 9서클 마나의 도가니 속에서 마법이 풀린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렌은 왼손에 낀 반질르 만지작거렸다. "나는 너무 예뻐." 주문을 외우는 순간 가장마법이 시전되고 물에 비친 렌의 모습은 다시 평범해졌다. 아직도 마법이 작동하다니 다행이었다. 렌은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목마름이 해소되고 나니 곧 다시 배가 고팠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배가 고프다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너무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따뜻한 양송이 수프가 먹고 싶어. 새하얗게 갓 구은 식빵에 버터와 잼을 함께 발라 먹고 싶어. 고기만두랑 굴짬뽕도 먹고 싶고, 광동식 탕수육, 탕수도미도 먹고 싶어. 베스킨라빈스의 자모카 아몬드 퍼지랑 하겐다츠의 모카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어. 살이 쪄도 좋으니까 KFC의 프라이드치킨을 한 통 사서 통째로 앉은 자리에서 먹고 싶어. 버거킹의 치즈와퍼랑 피자헛의 콤비네이션 피자랑 블루베리 치즈 케익이랑 두껍게 잘라서 구운 안심스테이크랑 신선초 얹은 닭죽이랑 딤섬이랑 몸땅 다 먹고 싶어. 크림치즈를 퍼먹고 싶어. 평소에는 육식을 즐기지 않았지만 배가 고프니까 자꾸 기름진 음식만 떠올랐다. 특히 홍콩에서 먹었던 음식들이 자꾸자꾸 떠올랐다. 이 세계에 온 후 바쁘게 지내느라 한동안 생각도 못한 음식들인데, 지금은 왜 이리 새록새록 생각나는지 몰랐다. 비프스테이크, 비프 커틀릿, 한국에서 수입되 신라면, 일본식 미소라멘, 탄두리 치킨, 양고기 카레, 상어지느러미 요리, 동파육, 제비집요리, 부추잡채... 아, 그리고 페닌슐라 호텔에서 먹던 애프터눈 티 세트, 아쌈 홍차에 곁들인 스콘과 샌드위치와 쿠키, 프링글스 양파맛, 리츠 크래커,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도 금방 지어서 밥 냄새가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 촉촉하고 탱글탱글한 쌀알이 빛나는 흰 쌀밥. 멍하니 끝없이 먹을 것을 하나하나 떠올리던 렌은 정말 이러다가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서 렌은 기를 쓰고 일어났다. 물가를 떠나기가 아쉬웠지만 렌은 배가 터지도록 물을 마시고 나서 유일하게 물병으로 쓸 수 있는 빈 향수병에 물을 담아 다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곳의 숲음 마치 렌이 살던 광동성의 숲 같았다. 아직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채 고스란히 자연의 이빨을 드러내고 ? 獵?야생의 숲이었다. 진한 흙냄새와 나무 냄새가 허공을 가득 채웠다. 오래 썩은 부엽토는 발밑에서 푹푹 꺼졌다. 나무며 풀이며 모두 인간, 아니 자기를 제외한 다른 생명 모두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듯 가시, 뿔, 날카로운 잎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장은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에 위험한 동물도 숨어 있을 것 같았다. 요란하게 새가 울며 날아갈 때마다 렌은 흠칫 놀라며 떨었다. 렌은 숲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잘 알았다. 흔희들 숲에는 이런저런 먹을 게 많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숲의 모든 야생돌물들은 뭔가 먹을 것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고 식물들은 자신의 것을 동물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 갑옷을 두른다. 먹을 만한 것은 다른 동물이 먹어버리고, 남아 있는 것은 먹지 못할 것뿐이다.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식량 없이 이런 숲에서 살아남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절망이 몰려왔다. 상처투성이인데다가 몸의 기운을 다 쏟아버린 렌이 더 걷는 것은 무리였다. 렌은 결국 얼마 못 가서 다리의 힘이 풀리며 쓰려졌다. 정말 죽는 건가... 렌은 다시 일어나 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일어나지지 않았다. 눈앞이 흐려졌다. 아냐, 이렇게 죽지는 않을 거야. 살아서 꼭 맛있는 음식을 먹을 거야. 그러다 렌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 있었는지 몸이 불끈 솟아올랐다. 렌은 벌떡 일어나 달려들었다. 검은 나무둥치에서 자라고 있는 것은 버섯이었다. 흰 바탕에 약간의 노란 빛이 감도는 버섯은 송이버섯 비슷하게 생겼지만 송이버섯과는 조금 달랐다. 렌은 당장이라도 입에 털어넣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침통에서 메스를 꺼내 버섯의 밑둥을 잘랐다. 오리하르콘 메스로 처음 자르는 것이 버섯이라니, 왠지 실소가 나왔다. 버섯을 자른 후 렌은 고민에 빠졌다. 대체로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지만, 색이 화려하다고 해서 무저건 독버섯은 아닌 것처럼 칙칙한 색을 띄고 있다고 해서 독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독버섯을 잘못 먹으면 죽을 수도 있었다. 렌은 망설였다. 그러나 지금 이걸 안 먹으면 어차피 이 숲에서 굶어죽을 것이다. 렌은 결국 참을 수 없는 허기에 져버렸다. 불을 피울 수단도 없어서 렌은 그냥 버섯을 한입 베어 물고 잘근잘근 씹었다. 맛은 좋았다. 깊은 숲에서 자란 버섯만이 가지는 신선한 향이 퍼졌다.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났다. 이제는 살았다는 기분이 온몸에 가득 찼다. 나무 둥치 아래에서 자라난 버섯의 거의 절반은 먹고 나서야 렌은 한숨으 돌렸다. 이제 렌은 몸에 어떤 이상이 생길지 기다렸다. 그러나 두어 시간이 지나도 별일은 없었다. 독버섯은 아닌것 같은 같았다. 렌은 남은 버섯을 모두 잘라 챙겼다. 이제 산을 내려갈 기운이 생겼다. 다시 한참을 걷는데 갑자기 속이 슬슬 아파왔다. 와락 공포감이 들었다. 어떤 버섯의 독은 상당 시간이 지난 후에야 몸에 퍼진다는데 이 버섯도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렌은 황급히 나무 뒤로 들어가 볼일을 보면서 떨었다. 이대로 죽는 걸까. 설사를 하다가 죽어간 푸른 죽음 환자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한참 동안 볼일을 보고 나자 더 이상 탈은 없었다. 아마도 빈속에 갑자기 날 버섯을 너무 많이 먹어서 속이 놀란 모양이었다. 렌은 나뭇잎으로 어설프게 뒤처리를 한 후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너무 쪼그리고 볼일을 본 탓에 다리가 저렸다. 비틀거리다가 렌은 하마터면 자기 배설물을 깔고 넘어질 뻔했다. 가까스로 위험물을 피해 그 옆으로 나동그라진 렌은 주저앉은 채 허탈하게 웃었다.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소오강호 같은 무협소설을 보면 주인공들은 계속에 떨어지거나 위기에 닥칠 때마다 영약과를 먹든지 비급을 발견하든지 해서 오히려 무공이 급상승하곤 했는데, 왜 나는 그 흔한 기연하나 못 만나지? 아냐, 기연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그저 과일나무 한 그루나, 무슨 눈먼 열매 하나라도 나타나 주면 안돼? 아냐, 이런 게 안 나타나도 나는 악착같이 살아날 거야. 여기서 이렇게 의미 없이 죽지는 않을 거야. 렌은 아픈 속을 부여 잡고 다시 버섯을 뜯어먹었다. 이렇게 이틀을 더 걸었다. 숲은 계속 깊어지기만 했고 여전히 인적은 없었다. 버섯도 다 떨어지고 이제 먹을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이따금씩 샘이 나타나는 게 다행이었다. 렌은 샘이 나올 때마다 배가 터져라 물을 마셕면서 기계적으로 걸었다. 너무 배가 고파지면 나뭇잎을 따서 씹었다. 이미 배는 고픈 걸 초월해서 위염이 생겼을때 느끼는 것 같은 둔탁한 통증만이 남았다. 렌은 한걸음을 떼고 그 앞에 다시 다른 걸음을 놓는 것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게 한발, 한발.. 이 길고 긴 숲은 언젠가 끝날거야. 나는 죽지 않을 거야. 다시 살아서 내 이야기를 이어나갈 거야. 어느새 렌은 다른 모든 것을 잊었다. 카엔도, 상처도, 흑룡도, 자신이 처한 상황도, 그 어느 것? ?지금 내딛는 한걸음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신체의 힘이 아닌 다른 무엇에 의지해 렌은 계속 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렌은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숲이 끝나고 들판이 나타난 것이다. 논이었다. 이제 막 달리기 시작한 푸른 벼이삭들이 바람에 맞추어 쏴아 하고 흔들렸다. 멀리에서 어느 아낙이 소리치는 걸 들으면서 렌은 서서히 논두렁에 쓰려졌다. 이제 살았구나. 이델린은 논에 딸린 작은 밭에서 몇 파잔째 당근을 캐는 중이었다. 모자를 썼지만 늦여름의 뜨거운 태양은 팔과 등에 사정없이 내리쬐었다. 그래도 그녀는 손을 늦출 수 없었다. 벼를 수확하려면 한 달도 넘게 남았는데 먹을 것은 거의 떨어져가고 있었다. 그나마 금년까지 남편이 붙여먹던 논을 계속 경작할 수 있었지만 내년이 되면 또 어찌 될지 몰랐다. 남편이 군대로 끌려간 지도 벌써 넉 달이 넘었다. 그리고 살아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었다. 이런 변방마을까지 징병관이 올 줄은 몰랐는데, 지나치게 유능한 징병관은 지난봄에 이델린의 마을까지와 열다섯부터 마흔까지의 사내들을 몽땅 쓸어갔다. 그 후로는 이델린이 혼자 죽을 힘을 다해 농사지었다. 이델린이 사는 마을은 카로딘 대공국에서 가장 서쪽, 심지어는 토인 강보다도 더 서쪽에 있었다. 전쟁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동제국 황제직할령과는 정 반대편이었다. 그래서 이런 먼 곳까지 징병관이 나타나자 모두 깜짝 놀랐다. 미리 예상했다면 남정네들을 도망이라도 보냈을 텐데 징병관들도 나름대로 요령이 있어 기습적으로 군대를 끌고 와 그들을 데려간 것이다. 사실 요즘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당장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대공이 갑자기 죽고 일드인 공자가 대공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뒤부터 이델린은 불안하고 초조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남편이 무사할지, 언제 돌아올지, 어디 아프지는 않은지, 밥은 챙겨 먹는지. 그래도 먹고 살아야 했다. 보리 수확한 건 거의 다 징세관에게 빼겼고 추수 때까지 입에 풀칠할 길이란 밭떼기에서 채소농사를 짓는 것밖에 없었다. 이델린은 억지로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몸 건강하고 경작할 논밭이 있고 아들도 잔병 없으니, 마을 사람 중에서는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죽도록 일하면 굶어죽지는 않을 것이다. 한참 만에 허리를 펴려니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힘겹게 겨우 몸을 편 이델린은 피곤에 지친 눈으로 무심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호룬 숲 쪽에서 누군가가 내려오는 걸 발견했다. 멍하니 누굴까 하고 바라보던 이델린은 그 사람이 푹 쓰러지자 깜짝 놀라 달려갔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이델린은 황급히 그 사람을 일으켰다. 열 일고여덟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무척 고생한 듯 옷은 엉망진창이고 눈도 퀭한 게 오래 굶은 것 같았다. 게다가 여기저기 심한 상처가 나 있었다. 이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이델린은 소녀를 일단 자기 집에 데려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렌은 이델린의 집으로 옮겨진 후 온몸의 상처에서 생긴 간염증 때문에 고열에 시달렸다. 앓다 말다 하면서 렌은 비몽사몽간에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항생제도 없고 약초도 없는데다가 체력도 바닥난 이런 상태라면 그냥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칠지만 서늘한 손이 렌을 어루만져주었다. 또 가끔 렌의 입으로 미음 같은 것을 흘려 넣어주었다. '대지의 신 이노의 축복이 그대에게' 라는 속삭임을 몇 번 거듭해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기를 사흘, 마침내 렌은 정신을 차렸다. 렌이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옆에는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놀고 있었다. 아이는 렌이 신음소리를 내자 깜짝 놀라더니 어머니를 데려왔다. 아이 어머니는 무식하고 피곤에 지쳐 보였지만 렌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나갔다. 조금 지나자 밥 빗는 냄새가 진동했다. 렌은 밥이 끓는 냄새에 넋이 나갔다. 이 세계에 온 후 처음으로 맡는 밥 냄새였다. 어떤 향수보다도 향기롭고 그리운 냄새였다. 여기가 대체 어디길래 밥을 먹지? 벼농사를 짓는 걸로 봐서 남쪽인가 봐? 렌은 당장이라도 일어나 밥을 먹으러 달려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한참 만에 여자는 음식을 가져왔다. 쟁반에는 밥이 아닌 흰죽과 짭짤한 밑 반찬이 담겨져 있었다. 모두 황홀하게 맛났다. 렌은 허겁지겁 다 먹어치웠다. 다 먹고 나서야 비로소 감사를 표할 여유가 생겼다. "정말 감사합니다." 렌이 고마워하자 여자는 거침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고맙긴. 서로도와야지." 투박하지만 정감 어린 말투에 렌은 마음이 편해졌다. "여긴 어디지요?" "어디긴, 아랫마을이야. 호룬 숲가의 아랫마을." "호룬 숲이요?" "아가씨가 바로 거기서 나왔잖아? 카로딘 대공국에서 제일 큰 호룬 숲을 몰라? '카로딘 서에는 호룬숲, 카로딘 도에는 모인강' 이라는 말도 못 들어봤어?" 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 나 아가씨는 어쩌다 호룬 숲에 들어갔던 거여? 난 이델린이라고 하는데, 아가씨 이름은 뭐야?" 여자가 질문공세를 펴자 렌은 자신이 카로딘 대공국 서부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카로딘 대공국이라면 동제국의 제후국이었다. 렌은 아무래도 정체를 숨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적당한 가면을 찾던 렌은 쩍 벌어진 여자의 입속에 박혀 있는 시커먼 어금니에 시선이 닿았다. '레진이 있다면 하얗게 박아 넣을 수 있을 텐데.' 렌은 무심코 대답했다. "저는 레진이라고 해요.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말씀들릴께요." 렌이 긴 한숨을 쉬자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중에 말해줘도 돼. 쉬어. 아, 그리고 얘는 파디라고 해." 이델린은 다리에 매달려 있는 사내아이를 가리켰다. 렌을 보며 애타게 눈을 굴리다가 도망가 버렸다. 렌은 조용한 방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쉬었다. 흰죽은 두어 끼니 더 나왔다. 그리고 렌이 기력을 차리자 그 다음에는 뜨겁게 김이 나는 하얀 쌀밥이 나왔다. 이델린은 밥을 내오면서 이제 쌀이 없다고 미안해했다. 그제야 렌은 이델린의 다리에 매달리다시피 하여 몸을 배배 꼬는 파디가 그렇게 애처롭고 강렬한 눈빛으로 무엇을 쳐다보는지 알아챘다. 렌은 목이 메었다. 그동안 아파서 눈치를 미처 못 챘지만 지금 와서 살펴보니 이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왜 몰랐을까.. 왜 몰랐을까... 렌은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이델린 앞에서 두어 술을 떴다. 그러다가 숟가락을 놓았다. "아직 된 밥을 먹기는 조금 힘드네요. 파디야. 식기 전에 너 이거 먹을래?" "응! 응!" 파디는 반색하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델린이 파디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못써! 레진 누나 먹는 걸 뺏어먹는 건 버릇없는 짓이야!"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저는더 못먹어요. 식기전에 파디가 먹으면 좋지 않겠어요?" 렌은 이델린이 자신의 변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렌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슬프게 바라보자 결국 울먹였다. "죄송해요." 이델린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죄송하긴.. 다 그런거지. 그래도 그건 레진 네가 다 먹어도 돼. 어차피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면 쌀밥 한 그릇 지어주려고 감춰놓은 건데, 사람 살리는 게 먼저지 뭐. 지치고 아플땐 따끈한 쌀밥 한 그릇만한 약이 없다고. 그리고 요즘 돌아가는 꼴을 봐서는 그이가 제대할 때 쯤되면 쌀에서 군내가 풀풀 날 거야." "그래도 파디한테 먹일래요. 이렇게 먹고 싶어 하는데.." 렌은 몸에 살이라곤 별로 없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파디는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이번에는 이델린도 말리지 않았다. 자식에게 뜨거운 쌀밥을 먹이고 싶은 마음은 사실 이델린이 더 간절했다. 이델린은 렌을 잘 살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하게 생긴 소녀였지만 눈이 총명하게 반짝이는 게 괜찮은 아이로 보였다. 그리고 밥을 남겨서 파디에게 주는 걸로 봐서 경우도 바른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날 이델이라고 불러. 알았지? 너 말투로 보니 카로딘 사람은 아닌것 같은데, 카로딘에는 친한 사람끼리는 이름의 끝의 '인'을 떼고 아명만 부르는 관습이 있거든. 그러니 나도 널 레즈라고 부를게." 아델린이 시원스럽게 말하자 렌은 입 안의 밥알을 몽땅 내뿜을 뻔했다. 레... 레... 레, 레즈 라고? 맙소사! 렌은 식은 땀을 닦으며 더듬거렸다. "저.. 저기, 저는 그냥 레진이라고 불러줏요." 이델린은 약간 서운해 하다가 곧 밝게 웃었다. "그래, 넌 보아하니 성인식 치른 지도 얼마 안 된거 같은데, 그 나이 때에는 어른 대접을 받고 싶어 하는 법이지. 좋아." 이델린은 얼굴에 미소를 가득 지었다. "저,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감사 따위는 필요 없고, 빨리 낫기나 해. 보아하니 온몸에 엉망이라서 다 나으려면 한참 걸릴 텐데. 다 나을 때까지 안심하고 있어도 돼. 단 내일부터는 보리밥이나 고구마밖에 없을 테니 각오해." 이델린은 웃으며 파디가 바닥까지 핥아먹은 밥그릇을 쟁반에서 챙겨가지고 나갔다. 그렇게 렌은 그 마을에서 한 달을 보냈다. 마을은 별다른 이름 없이 '아랫마을'이라고말 불렸다. 전체 가구수가 60여 호 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소작농으로 보리와 쌀의 이모작을 지어 그럭저럭 먹고 살았다. 보리는 식량으로 먹고 쌀은 거의 다 세금과 도조로 냈기 때문에 쌀밥 한 번 배불리 먹어보는 게 이들의 소원이었다. 전쟁 준비를 해야 한다면서 보리까지 거둬가기 시작한 후에는 모두들 사는 것이 더 힘들어졌다고들 했다. 이델린은 새벽부터 밤까지 논에서 일했고, 렌은 몸이 회복될 때까지 파디와 함께 놀아주며 집안에서 쉬었다. 그리고 몸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서서히 깨달아갔다. 반 이상 사라져버린 생명력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체력도 상당히 약해졌다. 그리고 한 번 빠졌더 오른쪽 어깨는 계속 뻐근했다. 그저 언젠가 무사히 낫기를 바랄 수밖에 없? 駭? 가장 기막힌 것은 정명기를 일주천할 때마다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파온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몸에 축적할 수 있는 정명기의 양도 반 이상 줄어들었다. 마치 몸속 어딘가에 있는 정명기 담는 그릇이 반으로 쪼개져버리고, 그 쪼개진 틈 사이로 독이 스며든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고 난 후 렌은 정명기를 모아보려고 새벽에 일어났다. 그러나 운기를 시작하자마자 정명기는 몸 안 구석구석에 찌르듯한 통증을 가했다. 숲속에서 정명기를 운기해보았을 때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현상이었다. 렌은 고통에 굴하지 않은 채 이를 악물고 계속 정명기를 축기했다. 너무 아파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래도 렌은 계속 기를 모았다. 그러나 종전의 반에 못 미치는 양을 모으자, 정명기는 더 이상 모아지지 않고 스르르 새어나갔다. 고통에 헐떡이다가 렌은 다시 한 번 시도 했다. 그러나 똑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계속하고 또 해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 였다. 마침내 렌은 포기했다. 혹시 이 주변의 기운이 문제인가 생각도 해보았지만, 주위에는 처음 정명기를 수련했던 광동성의 숲보다도 더 맑은 기운이 충만해 있었으므로 그럴 리는 없었다. 이대로 폐인이 되어버리는 걸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걸까. 엄청나게 무서웠다. 그리고 비참했다.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며칠 지나도 몸이 더 이상 나아지지않으리라는 것이 확실해지자 렌은 체념하게 되었다. 이제는 망가진 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반으로 줄어든 정명기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렌은 고통에 정신을 잃지 않고 정명기를 운기하는 걸 연습하기 시작했다. 온몸이 바늘로 찔리느 것 같아도 이를 악물고 참으면 제정신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나면 그럭저럭 정명기가 모였다. 전에 정명기를 순환시킬 때 느껴지던 청명함과 상쾌함 대신 고통만 엄습했지만, 그래도 그렇게나마 정명기를 모을수 있다는게 다행이라고 자위할 수밖에 없었다. 보름 정도 지나자 몸은 조금씩 회복되었다. 렌은 찢어지게 가난한 이델린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도 없어 호룬 숲에서 돈이 될만한 약초 몇 가지를 캐다가 말려서 선물로 주었다. 그럭저럭 그동안 머문 밥값 정도였다.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리자 렌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죽었다 살아나자 카엔이 너무 보고 싶었다. 자신의 생사를 모른 채 슬퍼하고 있을 카엔을 생각하면 애가 탔다. 어서 빨리 소식을 알리든지 그에게 가야했다. 용서든 뭐든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방법은 몇 가지가 있었다.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호룬 숲을 지나고 미즈넨 산맥을 넘어 서제국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몸이 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험준한 미즈넨 산맥을 혼자 두 발로 걸어서 넘는 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미즈넨 산맥의 거봉들은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카로딘이 그 영토였던 말틴을 서제국에 뺏긴 후로 카로딘과 서제국은 거의 교류가 없어서 미즈넨 산맥을 찾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른 방법은 엘프를 찾아 엘프 마법진을 이용한 마법진 호핑을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라빌의 말에 따르면 엘프들은 흑룡에게 렌을 찾으라는 지시를 받아놓은 상태이니, 엘프에게 부탁하는 즉시 당장 흑룡 데이그랜의 귀에 들어가고 말 것이다. 마지막 방법은 적당한 마법사를 찾아 순간이동이나 서제국의 통신마법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통신마법은 교신자가 서로 사전에 마법연결을 해놓아야 가능했다. 그게 아니면 마법연결이 된 통신구 세트를 두 명이 나눠 가지고 있어야 했다. 이도저도 아니면 통신마법을 쓸 수 없었다. 순간이동도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카로딘에서 서제국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미즈넨 산맥은 강력한 마법장이 흐르고 있어 예로부터 마법사들의 수련지로 유명했지만, 반면 바로 그 마법장 때문에 순간이동의 성공률은 현저히 떨어졌다. 순간이동은 작은 교란이 큰 오차를 낳을 수도 있는 까다로운 마법이다. 순간이동마법이 미즈넨 산맥의 마법장으로 교란되며 서제국으로 간다는 게 동제국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마법장의 영향을 극복하려면 적어도 7서클 이상은 되야 했다. 결국 렌이 할 수 있는 일은 대도시로 가서 7서클 이상의 믿을 만한 마법사를 찾은 후 그에게 순간이동을 부탁하는 일 밖에 없었다. 믿을 만한 7서클 이상의 마법사를 만나는 것도 역시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에 비해 그게 제일 가능성이 높았다. "7서클 마법사가 있는 제일 가까운 도시가 어디예요?" 어느날 밤 렌은 이델린에게 물었다. "그야 우리 카로딘 대공국의 수도 카로드지. 7서클 마법사가 뉘 집 애 이름인가? 수도에나 가야 코빼기라도 볼 수 있지." "여기서 카로드까지는 얼마나 걸리죠?" "글쎄, 보통 속도로 가면 한달 반이나 두 달 정도겠지?" "그렇게 멀어요?" "여기는 카로딘 대공국의 서쪽 끝인데, 카로드는 거의 동쪽에 붙어 있거든." 카엔과 함께 수천 아반을 단숨에 훌쩍훌쩍 이동하던 게 생각나 렌은 한숨을 지었다. "어떻게 가면 되지요?" 이델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쉽지 않은 길이야. 특히 여자 혼자 몸으로는. 요즘은 사내들이 다 군대에 끌려간 탓에 치안도 별로 안 좋고 강도들도 많아. 그래도 굳이 가겠다면 조금 더 안전한 남쪽으로 빙 돌아서 가. 그럼 석달 정도 걸리겠지만 한결 나을 거야." "다른 방법은 없나요?" 이델린은 곰곰히 생각하가 대답했다. "그럼 조금 더 기다렸다가 치료사 구와인이 오면 그를 따라가도록 해." "치료사요?" "응, 한두 달에 한 번 씩 이 마을을 들르거든. 마지막으로 온게 한달 전이니 조금만 기다리면 올 거야. 그를 따라가면 한결 편하겠지." "어떤 사람인데요?" "오십 살 정도 됐고, 진짜 능구렁이야. 돈도 밝히고. 치료사들이 다 그렇지 뭐.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냐." "그런 사람이 절 데리고 가겠다고 할까요?" "글쎄. 레진은 약초에 관해 잘 아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한 번 그걸 가지고 구슬려봐. 안되면 할 수 없지만, 세상물정에 밝은 사람이라서 같이 다니면 훨씬 편할 거야." "그래봐야겠네요."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렌은 떠날 때를 대비하여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몸을 힘겹게 끌고 좀더 부지런히 약초를 모았다. 호룬 숲은 자연의 기운이 충만한 깊은 숲이라서 쓸 만한 것이 많았다. 쨍쨍한 가을볕에 딴 약초를 말리고 나면 하루해가 갔다. 렌은 그렇게 모은 약초를 이델린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구와인을 만날 때에 대비해 간직했다. 한편 구와인이 능구렁이라는 말을 듣고 렌은 아무래도 남장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남자 옷을 준비했다. 옷은 이델린이 옆집에서 얻어다주었다. 옆집 아들은 비실거리는 열여섯 소년이었는데, 징병관에게 끌려간후 옷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옷은 다행히 렌에게 잘 맞았다. 그 무렵 징세관이 왔다. 살찐 말을 타고 얼굴에는 기름이 줄줄 흐르는 중년 남자였다. 그는 두 명의 조수를 데리고 와서 촌장을 닦아 세웠다. "이 마을 납세할당액중 아직 3할을 못 채웠다는 걸 아나?" 징세관은 할아버지뻘은 되어 보이는 촌장에게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저번에 털어가셨지 않습니까. 이제 먹고 죽을 것도 없습니다." 촌장은 결과를 각오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어허. 이런 답답할 때가 있나! 자네는 전쟁이 일어난 것도 모르나? 우리 위대한 카로딘 대공국이 마침내 카로딘 대 제국이 될 수 있는 이 중요한 때에 감히 세금 내기를 거부한단 말인가?" "대공국이든 왕국이든 제국이든 그게 우리 무지렁이들이랑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먹고 살건 남겨주셔야 우리가 살아남아 내년, 또 내후년 계속해서 농사지어 세금을 내지 않겠습니까." "오호, 그래? 말이 조금 이상한데. 당장 먹고 살 건 남겨놨나 보지? 이봐라, 어디 과연 그런지 샅샅이 뒤져봐라!" 징세관의 명령에 따라 징세보조 두 명은 60여호 되는 마을의 집들을 샅샅이 뒤졌다. 하얗게 질린 촌장은 말릴 힘도 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곧 집집마다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정들 없이 여자와 아이, 노인들만 남은 마을 사람들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추수 때가지 버틸 식량을 모조리 빼았겼다. 징세보조는 얄미울 정도로 곡식을 숨기는 장소를 잘 알았다. 집 뒤공터, 벽 속, 이부자리 속이나 베개 속, 심지어는 잘 싸서 뒷간에 달아놓은 것까지 찾아냇다. "안돼요! 제발!" "보리쌀은 남겨줘요!" "산목숨 그냥 이대로 죽으라는 거니까!" 어른들은 찢어지는 처절한 외침 사이사이로 아이들의 영문 모르는 울음소리가 섞였다. 울음소리는 점점 이델린의 집으로 다가왔다. 이델린은 두 손을 꽉 깍지 낀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남은 보리쌀을 잘 싸서 침대 밑 구들장 아래에 구멍을 파고 그 안에 넣은 후 다시 흙으로 덮어넣았다. 제발 못 찾고 넘어가기를 이델린은 빌고 또 빌었다. 그 옆에서는 렌이 불안해하는 파디를 달래며 초조해했다. "못보던 계집아이인데, 누군가?" 징세보조는 렌을 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제 외조카예요." 이델린은 딱딱하게 말했다. "흠, 그래? 안 닮았는걸. 몸매는 그럭저럭 괜찮지만 영 박색인데 시집이나 가겠나? 머리는 또 왜 그리 짧아?" 징세보조는 농지거리를 하며 초라한 집안을 슬슬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는 가지고 있는 꼬챙이로 여기저기 푹푹 찔러보기도 하고 벽을 탕탕 쳐서 소리를 듣기도 하며 집안을 꼼꼼하게 조사했다. 부엌의 온갖 그릇을 다 열어보고 뒷간까지 검사한 그는 대강 볼건 다 봤다는 듯이 땀을 훔치며 숨을 골랐다. 이델린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그걸 본 징세보조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이봐, ? 絹? 설마 여기서 벌써 조사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날 우습게 보면 안 되지." "이델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앙탈하기는, 첫. 이봐, 내가 뭐 너한테 흑심이라도 품었는지 알아? 10년 전이라면 몰라도, 완전히 촌 농사꾼이 돼버린 네 꼴에 요만큼이라도 꼴리는 줄 아냐고? 뻗대기는." 징세보조는 계속 빈정거리며 수치심에 파르르 떠는 이델린을 뒤로 하고 침실로 들어갔다. 나무로 엮어 만든 초라한 침상을 다시 구석구석 살펴본 징세보조는 씨익 웃으며 침대를 옆으로 밀었다. "어, 여기 흙의 색이 다르네?" 그는 놀랐다는 듯이 가지고 있는 꼬챙이로 그곳을 푹푹 찔렀다. "어, 뭐가 느껴지는데? 뭐지?" 그는 놀리는 듯한 말투로 바닥을 헤집었다. "우와, 만히도 하네. 이게 도대체 몇 로벤이야?" 그는 포대자루를 끄집어내며 들으라는 듯 감탄했다. "그게 없으면 우리는 다 굶어죽어요! 제발! 반만이라도!" "이봐, 나도 실적 못 채우면 윗사람한테 얼마나 시달림 당하는데! 내 사정도 봐주라고!" "당신, 원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잖아!" 징세보조는 잠시멈칫하다가 다시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변했지. 하지만 이걸 알아야 돼. 어차피 모두 다 살 수 없으면, 이기는 편, 강한 편, 돈 많은 편에 붙어야 한다구. 나는 운이 좋아서 용케 그 편에 붙었고, 너랑 네 남편은 운이 나빠서 이러고 있는 거야. 네 남편이 내 위치에 있다고 쳐. 그놈이라고 지금 나처럼 이러지 않을 거 같아? 내가 널 봐주면 나는 잘릴 테고, 그럼 내 자식들이 굶어죽는데, 너라면 어쩌겠어?" 징세보조는 말을 마치고 보릿자루를 들고 나가버렸다. 이델린은 넋 놓고 주저앉았다. 그러다 처절하게 피울음을 울었다. 이제 집안에 남은 식량은 징세보조가 남겨 놓고 간 보리쌀 한 줌과 고구마 반 포대 뿐이었다. 그것으로는 도저히 추수 때까지 버틸수가 없었다. 렌은 뭐 먹을 게 없나 싶어 호룬 숲으로 다시 들어갔으나 먹을 만한 게 통 남아 있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식량이 될 만한 건 전부 채취해갔기 때문이다. 처음 렌이 호룬 숲에서 먹을 걸 구하지 못하고 고생했던 것도 알고보니 그 탓이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다정했던 이델린도 징세관이 다녀간 그 다음날부터 태도가 변했다. 식량이 없어 쩔쩔매는 날이 계속되자 그녀는 슬슬 렌에게 이제 떠날 때가 되지 않았나 하고 눈치를 주었다. 렌은 계속 약초를 캐다주었지만, 사람들이 어차피 약초에 관해 잘 모르는 이상 당장 약초를 팔 방도도 없고 약초를 먹는다고 배가 부를것도 아니어서 이델린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콱 죽어버릴까?" 묽은 고구마 죽을 나눠 먹은 후 주린 배를 움켜진 어느 밤 이델린은 멍하니 넋두리했다. "이렇게 지독한 꼴을 보고 왜 살지? 굶어죽을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그냥 나랑 파디랑 함께 토인강에라도 뛰어들면 간단하지 않을까?" "그러지 마세요, 이델. 산사람은 살아야죠. 죽긴 왜 죽어요." 자신의 말이 얼마나 공허하게 들릴지 뻔히 알면서도 렌은 되풀이해 말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죠. 살 수 있을 때까지 살아야죠." "산 사람은 살라고? 지금 이게 사는 거야?" 이델린은 피울음을 울었다. 렌도 함께 피울음을 울었다. 그리고 하루빨리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구와인은 렌이 떠날 결심을 한 지 사흘 후, 벼가 노랗게 패여 완연히 고개를 숙일 무렵 찾아왔다. "치료사가 왔습니다! 치료사가 왔어요! 어깨 결리시는 분, 잠이 안오시는 분, 허리 아프신 분, 소화불량이신 분, 모두 나오세요! 한방에 나을 수 있는 만병통치약을 드립니다! 농사짓다 어디 찢기신 분, 뼈가 부러지신 분, 모두 나오세요! 싸악 낫게 해드립니다!" 이델린의 집 마당에서 약초를 말리던 렌은 확성구슬에서 나오는 요란한 소리를 듣고 구와인이 왔음을 알았다. 렌은 서둘러 약초를 챙기고 짐을 꾸린 후 남자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이델린이 일하고 있는 밭으로 찾아갔다. 작별인사를 하려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델린은 렌이 왜 왔는지 짐작하고 손을 털며 일어났다. "이제 가는 거야?" 섭섭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하는 말투였다. 그 안도감을 느끼고 렌은 미안하면서도 속상했다. 또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수척해진 이델린의 모습에 마음이 쓰라렸다. "예, 가야해요." 렌은 이델린의 흙투성이 손에 약초 봉지 세 개와 오리하르콘 침 두개를 쥐어주었다. 오리하르콘 침 한 개의 가격은 대락 1골드 정도 였다. 더 주고 싶었지만 침의 개수가 적어지면 침술 시전이 곤란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건 파디의 설사병과 야뇨증에 좋은 약초고요, 이건 귀한 금속인데 나중에 정말 힘드실 때 도회지에 가셔서 파세요. 마을의 다른 사람에게는 얘기하지 마시고요. 아마 귀금속을 가지고 있다는게 알려지면 누군가 탐내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절 살려주셧는데 이것밖에 못 해드려서 죄송해요. 언젠가 은혜를 마저 갚을 날이 있겠지요." 손바닥에 비싸 보 이는 침을 보는 이델린의 눈은 순간적으로 탐욕으로 불타올랐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어딘가에 이런 걸 더 감추고 있지 않을까?' 하고 묻는 것 같았다. 렌은 와락 겁이 났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이델린이 덤벼든다면 몸이 성하지 않은 렌이 감당할 수 없었다. 차라리 금붙이를 가지고 있다는 걸 숨기는게 나았을까? 괜히 마지막에 마음이 흔들려서 실수한 게 아닐까? 떠나기 직전에 주면 괜찮으리라고 생각했느데, 혹시 지금에라도 다른 힘센 남정네를 불러 소지품을 전부 강탈하면 어떻하지? 그러나 이델린은 렌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이델린이 어떻게 나오든 렌으로서는 도리를 다하느 게 옳았다. 렌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제게 지어주신 죽과 밥은 평샌 잊지 않을게요. 그게 어떤 쌀인지 잘 알아요. 그런 걸 낯선 사람을 위해 선선히 내주시다니, 정말 잊지 않을게요. 저라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이델린은 렌의 말을 들으며 탐욕이 사르라지고 대신 자신을 알아준 데 대한 감격과 조금 전의 탐욕에 대한 죄책감이 찾아오는 걸 느꼈다. 이델린은 허둥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무슨 그런말을 해? 그래봤자 쌀 한 봉지인걸. 사람 목숨이 중하지 뭐. 그리고 이런 걸 다 주고 그래? 약초는 벌써 여러번 챙겨줬잖아. 그리고 이 침이 뭔지는 몰라도 돈 되는 거라면 됐어. 먼 길 가려면 한 푼이 아쉬울 텐데, 도로 집어넣어."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이델린은 렌이 주는 걸 더 이상 맘 편히 받을 수가 없었다. 이 착한 소녀에게 마음껏 도움을 베풀 수도 없는 가난이 원망스러웠다. 이델린은 더러운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이델의 마음을 다 알아요. 그래도 받아두세요. 파디를 위해서라도요. 다른사람에게는 말하지 마시고요." 눈물을 흘리던 이델린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렌은 이델린을 한 번 꼭 껴안았다. "이델, 아무리 힘들어요 용기를 잃지 마세요.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야 해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살아 있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올 거예요." 말을 마친 렌은 몸을 돌려 확성구슬 소리가 나는 마을 공터로 걸어갔다. 사람은 왜 이렇게 어떨때는 이기적이었다가 어떨 때는 착해졌다 하는 걸까?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일까, 악한 것일까? 이델린은 맨 처음 렌을 구해줄 때에는 아무것도 아까워하지 않고 나서다가 어느 순간 다시 욕심을 내고, 그러다가 또다시 끓어오르는 욕심 대신 선의를 드러냈다. 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해보면 역시 이델린의 본성은 선했다. 다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극한의 비참함이 그녀를 비천하게 한 것 뿐이었다. 나중에 카엔님을 만나면 꼭 부탁할 거야. 이렇게 먹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게 해달라고 할 거야. 만약 카엔님이 어쩔수 없다고 한다면 내 힘으로라도 바꿀 거야. 백성을 이렇게 다스리면 안돼. 국가라는 건 이러기 위해 있는게 아니야. 나쁜 나라, 좋은 나라, 무슨 나라든 간에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는 사람이 나오게 한다면 그런 나라는 없는 게 나아. 이런 건 나라도 아냐. 이 비옥한 들판에서, 벼가 풍요롭게 익어가고 물이 넘쳐 흐르는 축복의 땅에서, 직접 자기 손으로 농사짓고 거두는 사람들이 먹을 게 없어 굶어죽다니,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야. 렌은 눈물을 뿌렸다. 렌은 비로소 왜 사람들이 말틴으로 갔는지 깨달았다. 이곳은 비옥하고 말틴은 척박했지만, 말틴 사람들은 황제의 저주에 물들지언정 적어도 굶어죽지는 않았다. 밥을 굶는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지난 며칠간 절절히 경험해본 렌으로서는 말틴으로 간 사람들의 심정이 너무나 잘 이해돠었다. 그들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렌은 또 왜 그 시절 카엔이 그토록 빠른 속도로 서대륙 통일을 이룩했는 지 알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독재자이건 살인마이건 사람들은 상관없었다. 그저 그전에는 다른 세상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열광했을 것이다. 변화를 꿈꾸지 않기에는 현실은 너무 비참하고 그들은 변화를 스스로 이뤄내기에는 너무 약했다. 그래, 서제국 건국 350년 후 내가 본 서제국의 마을에서는 가난한 사람은 있어도 굶어죽는 살마은 없었어. 거기도 원래는 여기 같았겠지 그러다가 서제국이 세워지고 체제가 바뀌고 나서 지금처럼 되었을 거야. 그렇다면 여기도 최소한 서제국처럼 될 수 있을 거야. 언젠가는.. 2 장 치료사 구와인 마을 공터로 다가갈수록 확성구슬에서 울려 퍼지는 장광설이 더 잘 들려왔다. 이델린이 묘사했던 것같이 혀에 기름을 친 듯 매끄러운 말솜씨였다. 치료사의 사기술을 대강 터득한 렌이 듣기에도 사기성 짙은 내용이 끊이지도 않고 계속 이어졌다. 그의 손길로 사람들을 주무르니까 30년 동안 누워 있던 환자가 벌떡 일어났다느니, 그가 개발해낸 새로운 만병통치약을 먹자 거시기가 서본지 20년 지난 70세 노인이 젊은 애첩을 들여 밤새 다섯 번 했다느니, 뭐 그런 얘기들이었다. 워낙 황당한 선전을 듣고 있자니 조금 전의 우울함이 점차 가셨다. 렌은 눈물을 닦고 마음의 준비를 하며 공터로 걸어갔다. 어느 순간 장광설은 딱 그쳤다. 그리고 그 대신에 확성구슬을 거치지 않은 육성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젠장, 더럽게 장사 안 돼네! 차라리 추스 시작할 때 쯤 올걸! 저번에 징세관이 쓸어가서 당분간은 안 올줄 알았는데, 또오다니! 그리고 하필이면 그 직후를 들르게 되다니!흐이구, 징세관이 쓸고 간 마을에서 장사는 무슨 장사야! 재수 옴 붙었네!" 마을 공터에는 이델린의 묘사대로 능글맞게 생긴 40대 후반의 남자가 투덜거리며 짐을 다시 꾸리고 있었다. 공터에는 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렌은 그를 자세히 관찰했다. 비쩍 말랐는데 배는 올챙이 처럼 나오고, 얼굴 여기저기엔느 마마자국 비슷한 얽힌 흉터가 가득하고, 눈빛은 번들번들 번득이고, 입가에는 불평과 심술이 맺혀있었다. 구와인은 렌이 처음으로 보는 진짜 치료사였다. 그를 보는 순간 렌은 왜 사람들이 치료사와 사기꾼으 동의어로 생각하는지 이해되었다. '아아, 치료사라고 말하는 순간 무시당하는 것도 절대 무리는 아니었어.' 렌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사람과 여행을 하는게 현명한 선택일지 의심하며 렌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남장에 맞추어 일부러 목소리 톤을 낮추었다. "안녕하십니까? 치료사 구와인 님이시죠?" 렌의 정중한 말투에 구와인은 긴장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렇소마는.............." 구와인은 렌의 위아래를 훑어보고 목 먹어 휑한 눈매와 허름한 옷차림을 확인한 후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표정을 풀었다. "뭔 일이요? 치료받게? 보아하니 오른손이 불편한 거 같은데?" 렌은 그가 의외로 오른손의 불편함을 예리하게 지적하자 구와인을 조금 다시 보았다. "아뇨, 그건 아니고요. 실은 제가 카로드까지 여행하려고 하는데,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구와인은 이제 완전히 말투를 바꿨다. "허어, 카로드까지? 먼 길인데. 자네 같은 소년이 혼자 여행하기에는 힘든 길이지. 그리고 이 구와인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동안 카로딘 대공국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여행에는 전문가가 되었다, 이말씀이야. 그러니 찾기는 젣로 찾았어." "예." 렌은 그가 열변을 토하다가 잠깐 숨을 멈추는 틈을 타서 겨우 맞장구쳤다. "그렇지만 이런 유능한 여행안내자와 공짜로 동행한다고? 그거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세상만사는 전부 다 주고받는 것인데, 자네가 나랑 동행하면서 내 전문가적인 여행지식을 공짜로 이용한다면 매우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렇다고 내가 뭐 많은 것을 요구하냐면 그것도 아냐. 더돌 덜도 말고 하루에 딱 3실버, 어때?" 렌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하루에 2실버는? 물론 그쪽 밥값과 숙박료는 그쪽에서 부담해야겠지만." "저는 돈이 없는데요." 구와인은 렌의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허, 별 웃긴 놈도 다 보겠네. 너 치료사가 자선사업 했다는 말 들어봤어? 치료사가 돈 안받고 사람 고쳐줬다는 말 들어봤어? 어디서 바랄 걸 바라야지. 치료사한테 와서 공짜로 뭘 해달라니, 나참 살다살다 별 꼴을 다 보겠네." 구와인은 괜히 시간낭비했다는 듯이 투덜거리며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저, 제 말 좀 들어보십시오." 렌은 구와인의 옷자락을 잡았다. "저도 치료사거든요. 그것도 괜찮은 치료사입니다. 특히 약초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이 아니까 도움이 될 겅몌요. 저를 데리고 카로드까지 가주시면 가는 동안 제가 알고 있는 약초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구와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풀지 않았다. "그 약초라는게 혹시 내가 파는 만병통치약 같은 거 아냐?" "아뇨, 진짜로 효과가 있는 겁니다." "진짜 효과가 있는 약초 처방이라는 건 치료사가 평생 밑천으로 써먹는 건데, 그걸 순순히 털어놓겠다는 말이냐? 고작 길 안내 값으로? 그걸 날더러 믿으라는 말이냐? 너 같으면 믿겠냐?" 렌은 왼손으로 구와인의 손목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었다. 정명기 없이 맥을 짚는 방법을 알기는 했지만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 렌은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참아가며 정명기를 운기했다. 구와인은 렌의 손을 뿌리치려다가 뭔가 신기한 기운이 흘러들어오자 주저했다. "저, 요즘 방광이 아파서 오줌이 영 잘 나오지 않습니까?" 구와인은 눈을 크게 떴다. "그, 그걸 어떻게 알았지? 누구한테 들었냐? "지금 진단한 겁니다." "허, 믿을수 없어." "믿으시든 마시든 간에 이거나 한 번 드셔보십시요." 렌은 모아 놓은 약초중 황기, 복령, 옥발(옥수수수염)을 꺼내 분량을 맞춘 후 구와인에게 주었다. "이걸 물에 넣고 달여드시면 되는데요, 효과가 나타나려면 며칠 걸리거든요. 그러니 저랑 동행해서 며칠 동안 여행하시다가 영 효과가 없으면 그냥 저랑 헤어지시고, 효과가 있으면 저를 치료사 조수로 써주시면 됩니다. 저는 이거 말고도 쓸 마한 약초 처방을 많이 알거든요. 그렇게 확인해보시면 될 거 아닙니까?" 구와인은 약초를 공짜로 받게 되자 슬그머니 웃으며 물었다. "너, 이름이 뭐냐?" "레진이라고 합니다." "나이도 어려보이는데, 벌써 '인'을 붙였냐? 안 어울리니 그냥 레즈라고 부르마. 레즈, 딱 좋은데." 렌은 당황해서 급히 말했다. "싫습니다! 제대로 레진이라고 불러주세요!" 구와인은 피식 웃었다. "허, 꼭 나이 어린 것들이 어른인 척한다니까. 뭐, 어쨋든 좋다. 너는 앞으로 나를 구와인 아저씨라고 불러라. 만약에 이 약초가 효과가 없으면 너는 당장 내 옆에서 꺼지고 그때까지 들어간 돈도 몽땅 다 물어내야 한다." "예." "보아하니 어느 돌팔이 치료사의 조수쯤 해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치료사라는 게 툭하면 한데서 자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생이라는건 알겠지? 특히 나는 발품 파는 걸로 먹고 사는 셈이라, 더 고생일 거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치만 혹시 카로드까지 빙 돌아서 가는 건 아니죠?" 구와인은 한숨을 쉬었다. "휴, 원래는 이 마을 저마을을 골고루 들르려고 했는데, 전쟁이 일어난 후부터는 워낙 재물과 곡식이 씨가 말라서 괜히 헛짓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차라리 카로드로 바로 가서 종군 치료사나 해볼까 하거든. 그러니까 거진 직행길이 될거다." "종군 치료사요?" "치료사 해봤다면서 그것도 몰라? 전쟁터에서 치유마법사의 부족한 일손을 돕고 급한 대로 부상병 치료도 하는 거 말이다. 그것도 그럭저럭 돈이 되지. 원래 전쟁이 나면 민간에는 돈이 말라도 군대에는 돈이 넘쳐나거든. 잘 기억해두어라. 내가 하는 말은 하나하나 다 금과옥조니까." 구와인은 마지막 짐을 노새에 싣고 옷의 먼지를 털었다. 그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렌을 다시 쳐다보았다. "레진이라고 했지? 오줌병이 안 나으면 그날로 내칠 테니 그리 알아! 따라오너라!" 렌은 들고 있는 작은 보퉁이를 노새등에 얹으려 했다. "허, 젊은 놈이 그것도 무거워서 불쌍한 고로롱이를 괴롭혀?" 렌은 구와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화들짝 놀라 보퉁이를 도로 끌어안았다. "죄송합니다." "우리 고고롱이는 내 평생의 친구란 말이다. 너 제대로 내 조수노릇을 하려면 나를 모시듯 이 고로롱이도 돌봐야 한다." 노새는 들으라는 듯이 '고로로로롱'하며 울었다. "예." 주인을 닮아 성깔이 만만친 않아 보이는 노새를 보며 렌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또 일부러 남자 말투를 흉내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걷기에 이골난 사람답게 구와인은 숲길이나 거친 길도 성큼성큼 쉬지않고 걸었다. 아직도 몸이 부실한 렌은 그의 걸음을 따라잡기가 힘겨웠지만 혹시 머뭇거리다가 그를 놓칠까봐 두려워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목에서 비린내가 날때까지 억지로 따라갔다. 구와인은 이따금씩 렌이 뒤쳐지면 찌르는 듯한 눈길을 렌에게 던지며 재촉했고, 그러면 렌은 죽을 힘을 다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처음 카엔과 함께 치료행을 나설 때와는 딴판이었다. 그때는 3골드짜리 준마-짐말이긴 했어도 착하고 끈기있는 말들이었다.-를 타고 여차하면 순간이동도 해가면서 유유자적 다녔는데, 두 발로 긴긴 여정을 한 걸음, 한걸음 걸어 나가야 한다는 건 생각보다도 훨씬 힘든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의 치료행은 치료사의 실상과는 동떨어진 호화판 유람여행일 뿐이었다. 수다스러운 것 같던 구와인은 막상 열심히 걸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걷는 데에 신경을 집중했다. 아열대에 가까운 남극의 숲에서는 모든 생물이 북쪽보다 더 드세고 인간에게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구와인은 호랑이 발자국을 발견하자 렌에게 보여주었다. "조심해라. 원래 호랑이는 사람고기는 안 먹짐나 비위를 거스르면 뭘 어떻게 할지 몰라. 호랑이도 배가 고프면 사람을 먹는데, 그렇게 한 번 사람고기 맛을 본 호랑이는 다른 건 안 먹고 사람고기만 먹지. 호랑이 발자국을 보면 일단 아무리 바빠도 지름길은 포기하고 숲 가장자리로 나가야만 한다." 렌은 겁에 질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금씩 그런 짤막한 대화를 나누는 것 말고는 구와인과 렌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걸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광동성의 숲을 닮은 이국의 숲을 걷고 있노라면 별별 생각이 다 났다. 카엔님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알고 있을거야. 틀림없이 알고 있을 거야. 내가 마음속에서 카엔님의 존재를 느끼는 것처럼 카엔님도 나를 느끼고 있을 거야. 나를 찾고 있을 거야. 아아, 카엔님에게 돌아가는게 현명한 걸까? 나라는 존재 때문에 그가 이성을 잃고 또다시 황제의 저주를 쓰게 된다면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그가 예전에 저지른 죄과도 아직 속죄하지 않은 마당에? 그를 원망하지 않고 그의 곁에 머무를 수 있을까? 아아, 그래도 그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 너무 너무 보고 싶어서 몸이 아파. 사랑이란게 이런 건가? 이건 그냥 그립다든지 그냥 좋다든지 그런 게 아냐. 정말로 몸이 아파. 너무 보고 싶어서 몸이 아파. 가슴이 아프고 속이 쓰리고 입 안이 타들어가고 눈무이 나. 사랑이란 이런 거였어. 감당할 수 없는 그리움과 슬픔이 북받쳐 올라 렌은 휘청거렸다. 그러다가 구와인이 채근하면 다시 정신없이 걸었다. 닷새 정도 숲과 길을 번갈아 걸은 후 구와인은 솔 남작령으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구와인의 오줌소태는 많이 나아져서 이제 구와인은 렌을 신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렌이 가르쳐주는 이런저런 약초에도 점점 흥미를 보이며 캐물어 오히려 렌이 지칠 지경이었다. 구와인이 택한 솔 남작령은 누리디안 대로의 시작점에 있는 첫 번째 마을이자 근처 곡창지대에서 수확한 곡물의 중간집하지여서 다른 마을보다는 한결 윤택했다. 그래서 구와인은 솔 남작령에서 모처럼 치료사 영업을 할 예정이었다. 솔 남작령에 접어들면서 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민들의 퀭한 눈과 비쩍 마른 몸은 아랫마을과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굶어죽지는 않을 정도로 먹고 살만은 해 보였다. 그리고 중심가에는 그럴싸한 상점가와 광장도 있었다. 구와인은 침을 튀겨 가며 영주를 칭찬했다. "여기 영주인 솔 남작이 상당히 유능하거든. 그래, 유능하다는 말이 딱 맞아." "어떻게 유능한데요?" "누구한테 뇌물을 줘야 하는지 기가 막히게 잘 알지." "예에?" 렌이 황당해서 묻자 구와인은 목을 가다듬고 장광설을 풀 준비를 했다. "레진아, 네가 알아야 할 게 있는데, 이 세상일이라는 게 무조건 곧이곧대로 한다고 해서 잘 풀리는 게 아니다. 적절하게 기름 치는 방법만 알면 어려운 길도 피해 가고, 험한 길도 돌아갈 수가 있는 것이지. 솔 남작이 만약 카로딘의 고관대작들한테 세금 줄여달라고 항의 따위나 했다면, 그놈들이 콧방귀나 뀌었을 것 같으냐? 그렇게 하는 대신에 솔 남작은 카로딘의 물정 밝은 관리 한명을 매수하고 그 관리를 통해서 약발이 듣는 주요 고관대작들에게 골고루 약을 쳤다더라." "약을 치다뇨?" "뇌물을 줬다고. 그래서 여기 솔 마을의 징세할당량이 상당히 줄어든 거지. 뇌물을 쓴 걸 감안해도 남는 장사였지." "아, 그렇군요. 그럼 그 혜택은 여기 마을 사람들이 두루 받았겠네요?" 그 말에 구와인은 다시 코웃음을 쳤다. "쳤, 그럴 리가 있냐. 원래 그 뇌물은 솔 남작이 자기 돈으로 낸게 아니라 마을 사람들한테 뜯어낸 거였는데, 일이 잘 풀려서 세금이 줄어든 다음에는 그 줄어든 분량 중 한 7할은 자기 몫으로 하고 나머지 3할만 마을 사람들의 몫으로 돌렸다더라. 그래도 그만큼 여유가 생긴 덕분에 굶어죽는건 면할 정도가 된거지." 이야기를 하면서 구와인은 '개구리 뒷다리'라는 단골 술집 겸 여관으로 렌을 데려갔다. 솔 마을 중심가에는 여관이 두 개 자리 잡고 있었는데, 구와인의 말에 따르면 '두꺼비 앞다리'와 '개구리 뒷다리'중 '개구리 뒷다리'가 원조이고 음식맛도 더 깔끔하다고 했다. 구와인은 침대 두개짜리 방 하나를 잡고 안쪽의 침대에 짐을 놓자마자 바로 도구를 챙겨 마을 광장으로 나갔다. "자, 서두르자. 해가 남아 있을 때 영업을 개시해야지." "치유마법사가 있는 곳에서는 치료사 영업을 하면 안된다고들 하던데, 여기는 괜찮습니까?" "여기뿐 아니라 이 근방의 모든 치유마법사는 다 카로드로 갔어. 그러니 당분간은 무주공산이야. 그저 돈들이 없는 게 문제지. 그나마 여기 솔 남작령은 한결 낫지만." 구와인은 대답하는 한편으로 예의 확성구슬을 꺼냈다. 그는 목을 가다듬은 후 허풍으로 가득 찬 멘트를 시작했다. "치료사가 왔습니다! 치료사가 왔어요! 어깨 결리시는 분, 잠 안오시는 분, 허리 아프신 분, 소화불량잇니 분, 모두 나오세요! 한방에 나을 수 있는 만병통치약을 드립니다! 농사짓다 어디 찢기신 분, 뼈가 부러진 분, 모두 나오세요! 싸악 낫게 해드립니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걸 본 그는 다시 한번 목청을 가다듬은 후 조금 더 그윽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 아시는 분이 많으실 줄로 압니다. 제가 여기 들른 지 어언 일년이 지났지만, 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솔 남작령 분들께서는 아직도 저를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많군요. 저를 모르시는 분들도 모두 제 소문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제가 치유력 가득한 손으로 환자를 마사지했더니 30년 동안 누워 있던 할머니가 벌떡 일어났다는 얘기, 그거 진짭니다. 또 제가 개밸해낸 이 놀랍고도 새로운 만병통치약을 드신 70세 노인께서 20년 만에 첩을 들여 가지고 밤새 다섯 번을 얘기, 그것도 진짭니다. 그 환자분들 아직도 쌩쌩하게 돌아다니고 계십니다. 그 할머니, 지금 여기서 80아반 떨어진 호룬 숲가의 아랫마을에 건재하십니다. 그 할아버니, 그 옆의 윗마을에서 지금도 애첩과 행복하? ?살고 계십니다." 렌은 아랫마을에서 그런 할머니를 본 적도 그런 얘기도 들은 적도 없었기 때문에 지금 구와인이 하는 얘기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걸 금방 눈치챘다. 그러나 구와인은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계속 비슷한 거짓말을 했다. "자,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기가 막히게 환자를 고쳤느냐? 여러분, 지금 제 말을 믿을까 말까 고민하고 계신 거 다 압니다. 아니, 치료사 주제에 환자를 고쳐? 치유마법사도 아닌 주제에 뭔 소리야? 치료사가 붕대 감아주는 거랑 사기 치는 건 봤어도 진짜로 환자를 고 치는 건 내 한 번 못봤다! 지금 이렇게들 생각하고 계시죠? 거기, 거기, 그리고 거기 선생님, 다 압니다." 관중들 속에서 어색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게 다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특별하니까요." 구와인은 한껏 위엄있게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잠시 숨을 가다듬은 구와인은 렌을 불렀다. "레진아, 이리 와라." 렌은 영문도 모른 채 구와인에게 다가가자 구와인은 렌의 오른쪽 손목을 잡고 작은 칼로 렌의 팔을 살짝 그었다. 렌은 깜짝 놀라 피하려 했지만 구와인의 손아귀 힘이 워낙 강해 빠지지 않았다. 결국 렌의 팔뚝에는 아주 가느다란 상처 한줄기가 남았다. 상처에서 피가 한 방울 새어나왔다. "자, 보이시죠?" 구와인은 렌의 팔뚝에 남은 상처를 일일이 관중들에게 보였다. "이제 모두 쥐 죽은 듯이 조용히 해주십시오." 구와인은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모으고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힘을 주었다. 관중들은 뭔가 신기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 숨죽이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관중들은 일제히 탄성을 올렸다. 구경하던 렌도 마찬가지였다. 구와인의 손에 서린 희미한 하얀 빛은 틀림없는 마나였다. 구와인은 눈을 뜨고 엄숙한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이제 이 아이의 상처를 고치겠습니다. 레진아, 여기 모이신 분들이 보기 쉽도록 팔뚝을 여기쯤에 놓아라." 렌은 약간의 기대감을 품은 채로 시키는 대로 탁자 앞에 앉아 오른 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구와인은 마치 자신이 사제나 성녀쯤 되는 듯이 거룩하고 경건한 표정을 지으며 렌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렌은 꼬챙이 같은 구와인의 손가락이 자기 팔을 마구 주무르자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으나 영업을 위해 꾹 참았다. 그러나 주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렌의 기대감은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대략 3분 정도 그리 했을까, 실처럼 가느다란 상처는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다시 탄성을 올렸다. "와, 마법이다!" "마법이야! 치유마법이야!" "세상에, 치료사가 치유마법을 쓰다니!" 사람들은 점점 많이 모여들었다. 구와인은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며 땀을 닦고 엄숙한 표정으로 렌의 팔을 들어올렸다. "자, 보십시오. 상처하나 없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함성을 올렸다. 렌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 가느다란 생채기 하나를 치료하기 위해 3분이나 마나를 퍼붓고 주물럭대야 하는 걸 보니 한심했다. 구와인은 어찌어찌해서 치유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는지 몰라도 도저히 사람 고치는 데 쓸 치유마법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런 건 전혀 모른 채 치유마법을 쓸줄 아는 치료사가 여기까지 와서 치유마법을 시전해 보였다는 것 자체에 감격했다. 그 후 손님은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치유마법사가 전장으로 떠난 지 상당히 된데다, 어차피 치유마법사가 있었더라도 거기 갈 돈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구와인은 렌을 옆에다 세워두고 이것저것 심부름을 시키면 환자들을 치료했다. 이따금씩 경험에서 우러나온 효과적인 치료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구와인의 치료는 대부분 그 만병통치약 판매로 귀결되었다. 매우 수상쩍어 보이는 흑갈색 액체인 만병통치약은 작은 병 하나에 5실버라는 상당히 비싼 가격에도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런 식이었다. "치료사님, 우리 애가 피부병이 통 낫지 않는데..........." "그럼 이 만병통치약을 아침 저녁으로 한 번씩 환부에 바르십시오." "벌써 한달째 속이 쓰린데요." "그럼 식후에 한 숟가락씩 만병통치약을 드십시오." "우리 며느리가 통 애가 서지를 않아서요. 아들네미가 군대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마음이 급한데 어쪄죠?" "둘이 합방할 때 망병통치약 탄 물을 끌여 그 향기가 온 방에 가득하게 하면 됩니다." 렌은 그저 입을 쩍 벌리고 구와인의 상술을 지켜보기만 했다. 만병통치약의 원료가 무엇이지 아무리 캐물어도 구와인은 선선히 가르쳐주지않았지만, 렌은 그가 몰래 약을 만드는 걸 훔쳐보고 대강 재료를 알아냈다. 주로 감초와 보리쌀 끓인 물과 약간의 설탕이었다. 인체에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는 게 그저 다행일 따름이었다. 그때까지 그렇게 급한 환자는 없었다. 몇몇 외상 환자들이 치유마법을 시전해달라고 졸랐으나 구와인은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둥, 날씨가 나빠서 마나가 모이지 않는 다는 둥 몇 가지 그럴싸한 핑계를 대 어 만병통치약만 팔고 슬쩍 넘어갔다. 그런데 비쩍 마르고 병색이 완연한 환자 한 명이 구와인에게 다가오자 구와인은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 환자는 옷차림이 화려한 게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처럼 보였다. "너, 구와인, 이 자식, 이 새빨건 거짓말쟁이!" 환자는 어디서 기력이 나는지 다짜고짜 쇳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 시작했다. "뭐, 만병통치약이라고? 날 이 꼴로 만들어놓고, 뭐, 보름이면 나아? 일년 지났다, 이 자식아! 지금 내 꼴 보고 어디 한 번 다시 말해보시지! 이런 사기꾼 같으니라고! 하긴 치료사 하는 말은 믿은 내가 바보지! 내가 바보야!" "아.. 아하.. 아하하하하, 왜 이러시나? 제가 아는 분인가요?" 구와인의 말에 환자는 다시 벌컷 화를 냈다. "우리 아버지 얼굴은 잊어도 네놈 낮짝은 안 잊는다!" 구와인은 난처해하며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원래 만병통치약이란 건 파는 쪽이나 사는 쪽이나 반쯤은 거짓말이라는 걸 피차 양해하고 거래하는 것이어서 그렇게 화를 내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데 저 남자에게는 뭐랬더라? 아, 그래 생각났다! 저 남자의 생채기를 치유해주고 나서 내가 실력있는 유명한 치유마법사라고 사칭했었지. 그러고 나서 슬슬 말을 거드니까 저 남자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속병이 있다는둥, 위가 쓰려서 제대로 못 먹게 된지 벌써 몇 년째라는둥, 술술 털어놓았찌. 그리고 내가 그말을 그대로 다시 반복하니까 천하의 명의라고 감탄했지. 푸핫, 그런 건 사기술의 기본인데 그런 거에 속아넘어가다니, 어벙한 놈. 덕분에 내 만병통치약을 3골드에 팔어먹을수 있었지. 3골드라면 화낼 금액이기는 해. 뭐 정 난리치면 어떻게 2골드 쯤 돌려주고 무마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던 구와인은 사내의 입에서 더 격한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진짜로 겁에 질렸다. "이 썩어빠진 치료사 놈! 너 내 육촌 형님이 누군지 알아? 바로 이 마을 남작님이시다! 내 너를 치도곤하고 육시하고 오살하고 능지처참을 해주마! 그리고 네 주둥이는 철사로 꽤매 주마!" 아이고 맙소사, 잘못걸렸구나! 어쩐지 옷차림도 괜찮고 달라는 대로 선선히 3골드를 주길래 봉 잡았다 했는데 하필이면 영주의 친척이었다니! 그런 귀족 나부랭이들은 자기가 허구한 날 백성을 착취하면서도 자기가 속아넘어가면 절대 가만히 안 있지! 평생 사기치면서 단 한번도 실수가 없었던 이 구와인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구나! 그때 렌이 나섰다. 렌은 상황을 대강 파악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사정은 대강 알겠지만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흥분하면 할수록 속이 더 쓰려집니다." "네놈은 또 뭐냐?" 그 위장병 환자는 불신의 눈초리를 다시 렌에게 던졌다. "저는 얼마 전부터 이 치료사 구와인 아저씨와 동업하게 된 레진이라는 치료사입니다. 이분은 사실 그렇게 실력이 있는 분은 아니지만 또 그런 벌을 받을 정도로 악의가 있는 분도 아닙니다. 제 이분 대신 무료로 치료를 해 드릴 테니 이분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지 않겠습니까?" 환자는 렌의 말에 더 흥분하며 날뛰었다. "이제 보니 두놈이 함께 나를 속이려 들어? 못된놈들! 뭐가 어쩌고 어째?" 환자는 팔다리를 마구 휘젔다가 정말로 속이 쓰린지 윗배를 움켜쥐었다. 렌은 그걸 보며 급히 달려가 환자를 부축했다. "저, 잠깐만요." 렌은 환자의 맥을 짚었다. 정명기를 운기할 때의 찌르는 듯한 통증 때문에 운기하지 않고 맥을 짚었다. 우관(右關:오른쪽 손목의 엄지 아래 조그마한 돌기가 튀어나온 곳)에서 음양이 섞인 맥이 느껴지는데 전체적으로 음한 기운과 허한 기운이 강했다. 렌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환자의 병색을 살피며 몇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윗배에 통증이 있고, 소화불량, 자주 체하는 느낌, 두통, 트림, 기운이 떨어지는 무기력감이 드시죠?" 환자는 화내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저놈한테서 들었냐?" 렌은 부드럽게 웃었다. "제가 구와인 아저씨랑 동업한 지는 며칠 안 됐는데, 그런 얘기를 들을 새나 있었겠습니까? 어쨋든 음식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고, 배가 고파도 식욕은 없지요?" "그래." "그런 증상이 거의 일 년째 계속되었고요?" "맞아." 환자의 태도는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환자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진지한 태도로 랜을 쳐다보았다. "자, 여기 앉으시죠." 렌은 구와인이 펴놓은 탁자앞에 마련된 환자용 간이의자를 가리켰다. 환자는 순수히 거기에 앉았다. 렌이 구와인이 앉아 있는 치료사용 의자로 다가가자 구와인은 즉시 벌떡 일어나 자리를 내주었다. "혀를 한 번 내밀어보시죠." 환자는 시키는 대로 순순히 혀를 내밀었다. 예상대로 혀 한가운데에 누런 설태가 잔뜩 끼었다. "혹시 명치 부위도 같이 아프십니까?" "맞아! 어떻게 그런 거를 다 알지?" "다 아는 수가 있지요." 렌은 이제 환자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것을 확인했다. "가만히 계십시오." 침을 쓰면 정체? ?드러날 것 같아 렌은 환자의 손발을 끌어당겨 몇 군데 경혈을 지압해 주는 걸로 대신 했다. 환자는 아파도 별 소리 하지 않고 꾹 참다가 지압이 끝나자 한 결 개운한 얼굴을 했다. 그 다음에 렌은 약초 주머니에서 모려분(牡蠣粉)을 꺼냈다. 모려는 위산을 중화, 제산하고 진통작용을 해 탄산, 가슴앓이를 완해하는 작용이 있지만 냉한 성질이 있어서 이 환자처럼 만성위염으로 실증(實症)이 허증(虛症)으로 변한 경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그래도 당장 진통이 멈추는 효과는 있으니 일단 그걸로 환자의 신임을 사고 맞는 약초를 구해 제대로 치료해야 했다. 렌은 모려분을 물에 타서 환자에게 건넸다. "이걸 드셔보시죠." 환자는 반신반의하면서 다 마셨다. 얼만 지나지 않아 환자는 속이 편해진 것을 느꼈다. "허 참, 신기하네! 그 약 남은 것도 다 내가 실테니 몽땅 줘! 얼마야?" 뒤에 서 있던 구와인은 환자의 화가 완전히 풀리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레진아, 왕창 바가지 씌운 후 내빼자꾸나." 구와인은 렌의 귀에속삭였다. 렌은 구와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환자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손님의 위염이 맨 처음 생길 때에는 뜨거운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차가운 약으로 다스리는 게 맞았죠. 하지만 그게 수년 동안 고질이 되면서 기가 허해지니까 이제는 차가운 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랫 따뜻한 약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지금 드린 약은 차가운 성질이라 당장은 효과가 있어도 자꾸 드시면 결국에 가서는 위를 아주 망쳐버리고 맙니다. 그러니 제가 적어드리는 이 처방대로 드셔야지 금방 드린 그 가루를 더 드셔서는 안됩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재로가 되는 약초는 제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산에 자주 다니는 사냥꾼이나 숯쟁이들에게 일러두면 구하기가 어렵지 않을 겁니다." 뒤에서 구와인은 발을 동동 구르며 다시 귓속말했다. "이 바보야, 왜 그딴 말을 해? 다시 이 마을에 올것도 아니면서. 그냥 비싼 값에 약이나 팔고 가면 그만이지." 구와인의 생각보다 말소리가 컷던지 뒤에 앉아 있던 환자는 서늘한 말투로 경고했다. "구와인, 이 자식, 다 들었다. 지금은 정직한 네 동업자를 봐서 넘어가지만 다시 이 마을에 발을 붙이면 죽을 줄 알아라." 렌은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황기건중탕의 처방을 적어주었다. 자황기(황기를 꿀에 버무려 말린 뒤 볶아서 사용), 백작약(술에 축여서 말린 뒤 볶아서사용), 자감초(감초를 꿀에 버무려서 말린 뒤 볶아서 사용), 계지, 황금, 인삼, 엿침가 등을 이 세계의 이름을 바꾸고 분량과 만드는 방법, 복용하는 방법까지 자세히 적었다. 사실 렌이 살던 세계에서도 만성위염, 위궤양을 앓는 환자들이 신경안정제, 위염차단제, 소화제, 제산제 같은 서양 약 대증요법으로 위염울 치료하다가 오히려 위무력증에 걸려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에 비해 한방약은 위염과 위궤양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니, 위장병은 질병 중에서도 양방치료보다 한방 치료가 더 탁월한 효과를 보이는 대표적인 질병이라 할 만 했다. 그렇지만 한방치료의 경우에도 경험이 적은 한의사들은 종종 위장병이 아직 실증(實症:대체로 외부의 안좋은 기운이나 병균이 침범해서 생기는 병을 말함)의 단계에 있는지 허증(虛症:대체로 기운이 허해져서 생기는 병을 말함)의 단계로 접어들었는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약을 잘못쓰다가 환자를 망치는 일이 있기 때문에, 환자의 체질과 질환의 상태를 늘 살펴 그때그대 맞는 처방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즉, 위장병은 대부분 초기에는 실증(實症)이기 때문에 위를 보(補)하는 약 대신에 실증(實症)을 제거하는 약재를 사용하지만, 가벼운 증상일지라도 오래된 경우는 허증이 대부분이므로 냉해진 위의 기운을 따뜻하게 보하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거꾸로 하여 냉해진 위에 더 냉한 약을 쓰면 완전히 위가 절단 나는 것이다. 그러니 무작정 무슨 병에 무슨 약이 좋다더라 하는 얘기만 듣고 그런 보약만 찾아먹는 건 아주 위험한 일이고, 반드시 제대로 된 한의사에게 찾아가 진단받은 후에 처방약을 받아야 했다. 렌이 환자에게 한 말은 바로 그러한 얘기였다. "제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악화되지 않았으니까. 제가 드린 처방을 잘 드시고, 공복에 호박죽이나 계란 힌자위에 참기름 반 숟가락을 잘 섞어 드시면 그것도 좋습니다." "그래, 고맙다." 환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처방전을 받았다. "저, 치료비는........." 구와인은 눈치를 보며 말하자 환자는 버럭 화를 내며 탁자를 쾅쳤다. "이놈이 그래도 정신을 못 차렸나! 치료비라니! 당장 오늘 내로 이 마을을 떠나지 못해! 내 저 동업자 청년을 봐서 특별히 봐주는 거니까, 치도곤을 당하기 싫으면 오늘 내로 떠나!" 환자는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렌에게 덧붙였다. "너도 이놈 따라다지며 영업할 생각은 관두고 웬만하면 다른 동업자를 구해라." "충고 감사합니 다." 렌은 살짝 웃었다. "하지만 치료비는 주셔야겠습니다. 구와인 아저씨와 저는 별개입니다. 지금 드린 약재와 처방은 모두 귀한 거라 그 값을 주셔야 겠습니다." 기필코 치료비를 받는다는 렌의 신념은 이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환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얼마냐?" "전후 사전을 고려해서 10실버만 주십시오." 생각보다 치료비가 적었던지 환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1실버 은화 열개를 탁자에 얹어놓고 떠났다. 찬바람을 일으키며 환자가 떠나자 주위의 구경꾼들도 다 떠났다. 이미 이 마을에서 장사 공쳤다는 걸 깨달은 구와인은 주섬주섬 탁자며 장사도구를 챙겼다. "모처럼 푹신한 침대에서 자나 했는데, 할 수 없지. 개구리 뒷다리에서 저녁이나 먹고 떠나자." 투덜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속셈을 짐작한 렌은 5실버를 구하인에게 주었다. "에헤헤, 안 줘도 되는데. 역시 너는 참 경우가 바르구나." 구와인은 속보이게 좋아했다. '개구리 뒷다리'의 음식은 상당히 맛있었다. 직접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구와인은 렌 덕분에 곤경에서 벗어났다는 걸 잊지 않고 좋은 음식을 시켜주었다. 이곳의 음식은 쌀밥과 반찬이 나오는 동양풍이어서 렌은 기쁘게 먹었다. "정말 맛있군요." "사양 말고 많이 먹어라. 당분간 이렇게 먹기 힘들 테니. 아무튼 오늘 일은 정말 이노스 신의 가호가 있었다. 우리 평민 목숨이야 파리만도 못하니 아까 그 영주 육촌 머시기한테 잘못 걸렸으면 최소한 곤장 30대는 맞았을 테고, 잘못하면 장독으로 죽었을 테지." 빙빙 돌려 고맙다고 말하는 것인 줄 눈 치채고 렌은 웃었다. 열심히 음식을 퍼먹다가 구와인은 문득 물었다. "너 진짜로 사람의 병을 아는 거냐?" "조금은요." "그리고 그걸 어떻게 치료하는지도 아는 거야?" "역시 조금은요." "그냥 처방 몇 개만 아는 게 아니라 치료법을 아는 거야?" "예." 구와인은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그 치료법을 나 같은 놈도 배울 수 있는 거야?" "노력하신다면요." 구와인은 다시 묵묵히 밥을 먹었다. "아까 보니까 치유마법을 쓰시던데, 그건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구와인은 한숨을 쉬었다. "너도 보지 않았느냐? 그거야 그냥 눈요기지, 그런 생채기 따위 아물게 한다고 무슨 쓸모가 있겠냐." 렌이 계속 궁금한 눈길을 던지자 구와인은 마침내 말했다. "그래, 네 덕에 오늘 목숨도 구했으니 이따가 노숙하면서 얘기해주마." 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숲에 자리 잡은 렌과 구와인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렌은 다시 카엔과 노숙하던 생각이 나 걷잡을 수 없이 슬펐다. 그날 나는 그에게 요리를 배우라고 야단쳤고, 스프도 끓여주었지. 다시 통증 같은 그리움이 밀려왔다. 숨을 쉴 수 도 없을 정도였다. 우는 것으로는 풀리지 않는 한없는 안타까움이었다. 구와인은 렌의 표정을 힐끗 보너디 말했다. "레진아, 너도 나이답지 않게 괴로움이 참 많은 것 같구나." "아닙니다." "아니긴. 젊은 애가 너무 많은 걸 끌어안고 있으면 결국에 가서는 사람을 버린다." "예." "내가 어떻게 치유마법을 배우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고 했지?" "예." "그래, 궁금하겠지. 이 마을 저 마을 떠도는 사기꾼 같은 치료사 나부랭이 주제에 치유마법이라니." 구와인은 눈에 서린 교활함을 약간 풀고 기억을 더듬었다. "나는 그러니까 전전대 황제이신 아제룬 폐하께서 즉위하실 무렵 태어났지. 어디보자, 내가 금년에 몇 살이더라? 마흔 여덟인가, 마흔 아홉인가. 이제 나도 죽을 때가 다 되었구나. 내 나이도 못 세니. 암튼 그때 나는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찢어지게 가난하게 자랐지." 구와인은 그리운 눈빛을 띄었다. "찢어지게 가난하다고는 해도 요즘 같지 않았어. 그럭저럭 먹고 살 만은 했으니까. 암튼 그러다가 내가 열 살 때쯤에 흉년이 닥쳐왔고, 아버지는 5실버를 받고 나를 지나가던 치료사에게 팔았다. 5실버면 요즘 돈으로는 30실버는 되니까 아주 잘 쳐받은 거지. 뭐, 아버지도 나쁜 뜻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내가 집에서 쫄쫄 굶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그런 거겠지." 구와인은 피식 웃었다. "내가 배운 사기술은 거의 다 그 치료사한테 배운 거다. 내가 파는 만병통치약도 그 자식의 처방전을 거의 베낀 거고. 뼈 맞추는 거, 붕대 감는 거, 이빨 뽑는 거, 뭐 그런 것도 배웠지. 그리고 민간요법들, 그러니까 이런 병에 이런 약초, 저런 병에 저런 약초, 그런 것도 조금 배웠고. 제대로 듣는 건 별로 없었지만. 아, 글도 배웠다. 그건 아직도 고맙지. 하지만 지독한 놈이었어. 먹을 것도 거의 안 주고 죽도록 부려먹었지. 너도 알다시피 치료사가 장사하려면 눈요기가 필요하니까 나한테 허리꺾기나 공타기 재주 같은 걸 가르쳐서 써먹었는데, 뼈가 굳으며 안 된다고 매일매일 식초를 먹게 하고, 살찌고 근육 생기면 안된다면서 고기 같은 것도 절대 안 줬지. 그래두 나는 그럭저럭 ? ?버텼어. 눈치껏 훔쳐 먹기도 하고. 뭐, 지금이나 그때나 눈치와 말발이 나를 살렸지. 어쨌든 그놈 밑에 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아서 어느날 그놈의 돈 보따리를 통째로 들고 도망쳤는데, 그게 그러니까 대략 지금 너 또래였을 거다. 그 치료사놈을 안 보니까 참 살 것 같더라. 돈 쓰는 재미도 만만치 않고. 하지만 뭐 그 도이 천년만년 가겠냐? 돈이 달랑달랑해지고 어쩌나 하다가, 그저 배운 게 도둑질이라, 나도 다시 치료사질을 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도 나쁘지 않았어. 그때만 해도 나는 젊었고 꽤 인기도 있었으니까. 너, 이걸 알아야 한다. 계집들은 미끈하게 잘 생긴 놈들보다 말 잘하는 사내들을 더 좋아하는 법이야. 그대를 사랑한다는 둥 그대의 입술은 장미꽃보다도 붉다는 둥 몇 마디 하면 홀라당 넘어오지. 절대 얼굴이 밥 먹여 주는 게 아냐. 그 시절에는 참 좋았지. 토실토실한 여자, 마른 여자, 새침한 여자, 너그러운 여자, 마을마다 애인이 한 명씩 있었는데 다들 나름대로 괜찮았어. 너 여자랑 자본 적 있냐?" 렌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구와인은 껄껄 웃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너, 미루면 미룰수록 너만 손해야. 세상에 그것보다 더 황홀한 건 없지. 나는 거시기가 안 선 지 벌써 10년은 됐지만 그래도 이따금씩 이쁜 여자를 보면 설것 같은 기분이 들지. 네가 나한테 잘 보이면 카로드에 가서 총각 딱지 떼게 해주마. 괜찮은 단골집이 있거든." 껄껄 웃던 구와인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진짜 여자를 만났어. 첫사랑에 빠진 거야. 어느 농부의 딸이었는데, 고분고분한 맛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었지만 그 되바라진 게 매력이었어. 얼굴은 그닥 이쁘다고 할 수 없었지만 가슴은 컸지. 애도 잘 낳게 생기고. 꽤 똑똑해서 허구한 날 날더러 제대로 살아보라고 채근했지. 자기랑 장사라도 하자고. 웃을 때는 참 눈부셨지. 젖꼭지가 보일락 말락 한 야한 옷을 입고 내 앞에서 일부러 궁둥이를 흔들곤 했는데, 참 탐스러웠어." 구와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나는 정착했지. 살맛이 나더라. 한 군데에 박혀 있다는 것도 근사하고, 아침마다 같은 여자가 내 옆에 누워 있다는 건 더 근사했지. 사실 이제와서 하는 얘기지만, 그런 생활 2, 3년 계속되었다면 나는 못 견디고 그냥 다시 박차고 떠났을지도 몰라. 하지만 진짜로 어떻게 되었을지는 나도 모르지. 그년은 일 년도 못되어 죽어버렸으니." 렌은 놀랐다. 그러나 구와인은 태연하게 계속 말했다. "그때 나는 그년이랑 여기서 서쪽으로 한 50아반 되는 도시에서 여자 속옷 장사를 했다. 웃지 마라. 꽤 잘 됐으니까. 장사는 그저 말발이야. 치료사질이든 속옷장사든 다 마찬가지지. 그런데 그 도시에 치유마법사가 한 명 왔어. 5서클인가 6서클인가 그랬는데, 아무튼 우리 도시에 치유마법사가 왔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지. 우리 카로딘에 마법사가 많다고는 해도 거기는 마법사가 오기에는 좀 작았거든. 하,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렇게 일이 꼬일 수 있는지 기가 막힌데, 뭐 그런 게 다 운명이니까. 마누라가 하루는 지나가는 마차에 치였어. 귀족 놈이 모는 마차였지. 나름대로 나쁜 귀족 놈은 아니어서 사고 즉시 치유마법사한테 데려가주더군. 치유마법사가 치유마법 시전하는 걸 그때 처음 밨는데, 세상에, 눈물이 멈추지를 않더구나. 마누라가 끝끝내 다리 병신이 될 줄 알았는데 상처에 새살이 돋는 그 모습니라니! 그 후에도 두어 번 더 치료받으러 갔지. 그 귀족놈이 치료비는 선불했으니까. 그런데 그 치유마법사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야. 나한테 마법을, 특히 치유마법을 익힐 자질이 있다는 거야. 처음에 나는 믿지 않았지. 농부의 자식이었던 전직 치료사가 치유마법이라니, 가당키나 한가? 그런데 그 치유마법사가 마나를 느끼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나한테 마나를 불어넣어줬는데, 진짜로 마나가 느껴지는 거야!" 구와인은 이 대목에서 어쩔 수 없이 흥분했다. "그런데 그 치유마법사 하는 말이, 치유 마법을 더 배우려면 돈을 내라는 거야. 자기도 그렇게 스승한테 돈을 바쳐가면서 마법을 배웠다면서. 엄청난 돈이었어. 우리 속옷가게를 팔고 집까지 팔아야 할 정도로 큰돈이었지. 뭐, 당연히 망설였지. 하지만 마누라가 부추겼어. 잠깐 힘든 건 참을 수 있고 일단 치유마법사가 되면 평생 아무걱정이 없을 텐데 왜 주저하냐더군. 그리고 내가 마법을 배우는 동안에는 자기가 날품팔이라도 해서 살림을 꾸려가겠다고 하더군. 정말 착해빠진 년이었어. 영악한 척하면서도..." 마누라 얘기를 하면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오자 구와인은 멋쩍어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나도 사실 배우고 싶었다. 너도 치료사라면 알 게 아니냐? 피가 철철 흐르고 살점이 떨어져나간 환자가 허겁지겁 실려와 그 가족들이 전부 애타는 눈길로 너를 바라보는데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면, 세상에 그것처럼 기가 막히는 일이 어디있겠냐? 나도 몰랐었느데, 치유마법을 배울 수 있다는 말에 그렇게 흥분했던 걸 보면 그동안 마음에 맺힌 게 참 많았었나 보더라."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가게를 팔았지. 워낙 잘 되던 가게라 금방 팔렸어. 그리고 한동안 그 치유마법사는 그럭저럭 내게 마법을 가르쳐주었어. 하지만 1서클을 넘어서려는 순간 그 치유마법사가 그러더군. 돈을 더 줘야만 마법을 더 가르쳐주겠다고. 그래서 집도 팔았지. 셋집을 얻고. 그런데 그때 나는 눈앞에 목표가 보이니까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내 마누라는 뭔가 이상하다는걸 눈치챘지. 똑똑한 여자라고는 안 그랬나, 내가? 그래서 그 바보같은 년은 돈을 들고 튀려는 치유마법사를현장에서 붙잡은 거야. 바보 같지? 참말로 바보 같지? 그딴 돈이 뭐라고." 구와인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목이 약간 잠겨서 그는 컥컥댔다. "그 마법사는 내 마누라를 죽였지. 그리고 나한테 누명을 씌었어. 나는 도망쳤다. 죽어라 도망쳐서 군대에 종군치료사로 들어갔지. 그때나 지금이나 군대에 들어가면 어지간한 죄는 덮어주니까. 나중에 복수도 했어. 돈을 모아 용병을 고용해서 잔인하게 죽였지. 마법사란 족속들은 기습에는 속수무책이거든. 5년이 걸린 복수였지. 돈을 모으는 데 5년 걸렸다. 종군치료사도 하고 전장의 시체들 틈에서 귀금속도 훔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지. 암튼 그 군대에서 치유마법사 한 명을 만났느데,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날 보고 뭐라는지 알아? 나는 원래 마법을 배울 자질이 충분했는데 잘못 배우는 바람에 영원히 1서클을 넘지 못하게 되었다는 거야. 가르치는 방법이 단단히 잘못됐는데, 가르치는 사람이 모르고 그런 건지 일부러 그런 건지 모르겠다는 거야. 참 기가 막힌 얘기지. 알아보니 그 사람 말이 사실이더군." 거기서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 다음에는요?" "그 다음이래 봤자 별거 있나. 복수하고 나서는 맘 잡아 보려고 다시 결혼 한 번 했는데 잘 안 되고, 그 여자한테서 딸련 하나 봤지만 그 여자가 새서방 얻을 때 딸려 보내버렸고, 뭐 그렇지. 그래도 돈 버는 재미는 괜찮았어. 50평생 계속 치료사질하면서 밥은 안굶었고, 지금은 별로 남은 게 없지만 왕처럼 떵떵거리며 호기도 부려봤으니, 이만하면 됐지. 사실 엉터리 치유마법이라도 시전해보이기면 인기가 많기 때문에 돈은 남들보다는 더 벌었어. 어찌어찌 다 탕진하기는 했어도.." 구와인의 말은 만족스럽게도 쓸쓸하게도 슬프게도 들렸다. 렌은 그의 인생 얘기에 뭉클해졌다. 구와인은 사기꾼이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 후에는 더 이상 치유마법은 안 익히셨습니까?" "나도 애가 타서 연구 많이 해봤는데 정말 안 되더라. 그나저나 레진아, 아까 네가 이것저것 설명한 그 치료술은 진짜가 맞는 거냐? 네 말대로 하면 진짜로 사람이 낫는 거야? 진짜로 나한텐 가르쳐 줄거냐?" "예, 그러겠습니다. 약속합니다." 렌은 구와인의 이야기에 취해서 정신이 없다가 구와인이 갑자기 묻자 바로 대답했다. 구와인은 렌의 대답에 가슴이 뛰었다. 그가 아무리 사기꾼 돌팔이 치료사일지라도 피가 흐르는 사람인 이상 그 오랜 세월 동안 자기 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이 편할 리는 없었다. 그래도 그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그동안 그저 모르는 척 외면하고 둘러대면서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자위할 뿐이었다. 그런데 진짜로 사람을 낫게 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는 말에 구와인은 설레었다. 거기에다가 덤으로 명치료사로 소문나서 돈까지 많이 벌게 되면 금상첨화 아닌가. 다 늙어서 설렘은 무슨 얼어 죽을 설렘.. 그래도 설레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사람을 치료해보고 싶다는 숨겨진 소망이 그의 가슴을 채웠다. "그런데 너는 치유마법은 안 쓰냐?" "저는 몸에 마나가 쌓이지를 않아요." 렌의 말에 구와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나가 쌓이지 않기는............... , 뭔 헛소리야. 네 몸에 들고 나는 그 기운이 마나가 아니면 뭐란 말이냐? 내가 보기에는 딱 물의 마나같은데. 그것도 보기 드물게 순수한 물의 마나인걸. 미미하긴 하지만. 내가 보기엔 너도 딱 마법사 체질인데."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럴 리 없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법을 익혀 보려고 아주 쌩발악을 했던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으냐? 분명히 마나가 있다니까! 세상에 마나 없는 사람이 어딧냐? 그저 느끼지 못할 뿐이지." 자세한 사정-자기는 다른 세계 출신에 다른 기를 익혀서 마나가 몸에 머물지 못하는 체질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어 답답해하던 렌은 문득 뭔가가 생각나 벌떡 일어났다. 분명히, 분명히 나는 마나를 느낀 적이 있어. 그래, 이샤를 살릴때, 멈춘 이샤의 심장에 전기충격을 가하기 위해 카엔님의 양손을 붙? 璲?이샤의 심장에 대었을 때, 카엔님이 뇌격마법을 방출하는 순간 이샤의 심장에 대었을 때, 카엔님이 뇌격마법을 방출하는 순간 카엔님의 손에서 단순한 전류가 아닌 이상한 기운이 전해져왔어. 분명히 기억해. 정명기와는 다른 이질적인 느낌이었어. 그게 내손을 타고 핏줄을 따라 심장까지 갔다가 순식간에 다시 나갔었지. 그게 마나였던 걸까? 어찌된 일인지 따져보는 것보다는 마나를 정말로 느낄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게 더 급했다. 렌은 마법수업 첫 시간 들었던 내용을 돌이켜보았다. 마나라는 것은 천지간에 흩어져 있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모든 마력의근원은 마나라고 했다. 그리고 마법사가 되기 이해서는 먼저 마나를 느껴야 한다고 했다. 몸에 들고나는 입자 같고 파동 같은 것을 상상해보라고 했던가. 형체 없는 기운이 바람처럼 피부를 뚫고 들어와 몸 안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바람에 쓸려가듯이 몸 밖으로 흘러가는 것을 느껴보라고 했던가. "레진아, 이봐, 너 혼자 힘으로 느끼는 건 쉽지 않을 거다. 내가 도와주마." 렌이 무얼 하려는지 눈치채고 구와인이 말했다. 그는 긴 얘기를 한 끝에 묘하게 감상적이 되어서 왠지 레진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는 아까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기를 쓰고 마나를 모았다. "자, 손을 줘봐라." 기를 주입할 때에는 보통 등에 장심을 대지만 마나를 주입할 때에는 그와 달리 손을 잡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렌은 자신의 왼손을 잡은 구와인이 이를 악물고 불어넣어 주는 마나를 느껴보려 애썼다. 처음에는 잘 몰랐다. 그러나 눈을 감고 가만히 몸속을 응시하자 정말로 하얀 바람 같은 것이 왼손에서부터 불어와 몸속을 잠시 떠돌다가 다시 밖으로 흩어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구와인이 헉헉거리며 잡은 손을 풀어도 렌은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마나를 응시했다. 느껴졌다. 마나의 색은 전체적으로 하얗다. 그 하얀 별 같은 것들이 몸 주위에 잔뜩 떠 있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반딧불 같은 것이었다. 렌은 조금 더 자세히 응시했다. 아니, 자세히 보니 하얗지 않았다. 검고 푸르고 하얗고 노랗고 빨간 빛이-검은 빛이라는 건 조금 묘했지만 정말로 그런 것이었다. 빛이 없는 칠흑 같은 무광택의 어둠이 아니라 빛나는 검은 에나멜 같으 느낌이었다- 어우러져 하얗게 보이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한층 더세밀하게 응시하는 순간 렌은 자신의 몸으로 불어왔다 나가는 마나의 대부분이 검은 빛이라는 걸 발견했다. 바로 물의 기운이었다. 흑룡의 기운과 비슷하다는 걸 깨닫고 렌은 놀랐다. "느껴지냐?" "느껴져요." 렌은 경외감에 가득 차 대답했다. "축하한다." 축하한다는 구와인의 목소리에는 질투심과 순수한 축하가 반반씩 섞여 있었다. 렌은 뭐라 해야 좋을지 몰랐다. 구와인은 갑자기 심사가 뒤틀렸는지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난 잘 테니 네가 알아서 뒷정리해라. 내일 아침도 네가 먼저 일어나서 깨우고." 구와인은 돌아누워 씩씩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를 골았다. 마나를 느낀 흥분에 렌은 잠이 오지 않았다. 내친 김에 마나를 끌어들여보고 싶었다. 테리미즈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던 내용을 떠올리며 렌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렌이 마법사를 읽고 이해한 바에 따르면 마나는 일종의 에너지였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모으는 원리는 충전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또 조금 달라싿. 전의 세계에서는 전혀 없던 마나라는 개념을 머릿속으로 이해해서 유형화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렌이 읽은 내용에 따르면 수련자는 맨 처음 마나를 느끼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다음에는 의지력-이 의지력이라는 것이 참으로 묘한데, 무조건 아무나 강렬히 바람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마나를 좌우할 수 있는 힘을 타고나지 않고는 백날 고생해도 소용없다고 했다-으로 마나를 부르는 수련을 한다. 마나는 기와는 달라서 몸에 쌓이지 않는다. 몸 안으로 몰려왔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흩어져버린다. 마법 서클이 높으면 높을수록 일시적으로 몸 안으로 불러올 수 있는 마나의 양이 커지고 그 지속시간도 길어진다. 그 마나를 전환하여 마법을 시전하게 된다. 마나의 절대량이 수련을 계속한다고 해서 선형으로 연속적으로 커지는 것은 아니다. 마나의 양은 한동안 증가하다가 고원을 형성한다. 즉 한동안 수련해도 마나량이 증가하지 않는 시기가 온다. 이 시기를 잘 넘기면 마나량은 한 단계 급상승한다. 그러한 단계가 바로 서클이다. 마치 원자핵을 둘러싼 전자껍질이 하나씩 늘어날때마다 수용할 수 있는 저자의 수가 늘어나듯이, 서클이 늘어나면서 마나량은 단계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마나량이 무한정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먼저 첫 번째 관문은 1서클이다. 1서클의 마나량은 보통 사람의 몸을 자연스럽게 들고 나는 마나량의 약 세 배, 그걸로 할 수 있는 마법은 물체를 10센티미터쯤 띄우거나 구와인처럼 가느다란 생채기를 낫게 할 수 있는 정도이다. 마법을 배우는 사람 중 1서클을 넘기는 사람은 대략 열에 한 명정도밖에 안 된다. 태생적으로 마법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약 1,000명 중 한 명이니, 사실 1서클을 넘기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다. 게다가 1서클의 시기에 수련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부를수 있는 마나의 양은 거기에서 한정되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나면 4서클 정도까지는 수련기간에 비례해서 비교적 쉽게 마나가 늘어난다. 4서클이면 엄청난 파괴력 같은 건 없어도 일상생활에서는 큰 힘을 발휘할 수있기 때문에, 서제국의 경우 마법원에서 수련하다가 4서클에서 멈춘 마법사들은 마법인증서를 받아 낙향해서 그럭저럭 부유한 생활은 한다. 5서클부터는 차원이 다르다. 5서클이면 백 마일 넘는 거리를 한 번에 이동할 수 있고, 상당히 심한 상처도 치유마법으로 보통 하루에 열 명까지 치료할 수 있다. 5서클의 화염마법이면 저택 한 채 정도는 손쉽게 태울 수 있다. 그래서 서제국의 경우 5서클 이상의 마법사는 원칙적으로 국가공무원이 되어 나라의 녹을 먹는다. 5서클 이후부터는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는 것이 지극히 어렵다. 노력도 중요하지만 자질을 타고나야 그 위의 서클로 올라갈 수 있다. 그렇게 피땀 흘려 노력해도 보통 인간은 8서클이 한계이다. 그러나 예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원래 9서클은 드래곤만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수백 년에 한 번씩 특출한 인간이 나와서 9서클에 도달한다. 누리디안 대제국을 건국할 당시 황제를 보필했던 대마법사 도틴, 그리고 카엔이 바로 그들이다. 엘프 중에도 9서클에 도달한 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바로 그 9서클 엘프가 엘프 상관의 마법진을 구축했다고 한다. 그런 예가 있기 때문에 수많은 마법사들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헛되이 9서클에 이르기 위해 평생 수련을 계속해나간다. 9서클은 소위 궁극의 서클이다. 마나의 양은 9서클 이상으로 늘어날 수 없다. 마법사들은 마나의 양이 한정될 수밖에 없는 것인 이 세계에 베풀어진 하늘과 땅의 에너지가 유한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쨋든 렌이 지금까지 본 바에 따르면 마나라는 건 자연 에너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마법이라는 건 그러한 에너지를 모아서 자유자재로 변환시키는 능력이었다. 렌은 정명기와 마나의 관계에 대해서도 곰곰히 생가갷ㅆ다. 정명기가 마나를 배척한다는 건 지난 봄에 카엔님이 거듭 확인해 주었다. 나도 수긍할 만한 설명이었기에 그 후에는 다시 마나를 느껴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후 마나는 내 몸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어. 적어도 마이리아 시에서 이샤를 치료할 무렵에는. 그게 지금부터 대략 한 달 반 정도 전이었지? 그리고 지금 와서는 명백하게 마나가 자유자재로 내 몸을 통과하고 있어. 그렇다면 두 가지 가설이 가능해. 하나, 정명기와 마나는 상호배척하지 않고, 그 둘이 상호배척한다는 것은 카엔님의 오해였다. 둘, 정명기와 마나가 상호배척하는 것은 맞지만 , 마나를 배척하지 못할 정도로 정명기가 약해지거나 빈틈이 생겼기 때문에 이제 내몸에 마나가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내 생각은 후자야. 왜 빈틈이 생겼을까? 그건 아마도 테룬 황자를 치료하며서 생명력을 썼기 때문이 아닐까? 생명력이 일부 소멸되면서 정명기 또한 그만큼 서서히 소멸해간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 세계의 기운이 내가 살던 곳보다 워낙 깨끗해서 정명기를 축기하는게 쉬웠기 때문에 나는 그런 변화를 좀처럼 눈치채지 못한 거겠지. 그리고 아직 내몸을 지배하는 정명기의 힘이 마나의 힘보다 더 강한 동안에는 내가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의 마나가 몸속에 들어올 수 없었겠지. 그렇지만 카엔님의 마법을 막기 위해 내 생명력의 반 이상 소실되면서 정명기 또한 반 이상 함께 줄어버렸을 테고, 그 결과 내 몸을 장악해 온 정명기는 이 세계에 충만한 마나를 이겨내지 못하게 되었을 거야. 그래서 결국 상당량의 마나가 내 몸을 들락거리게 되었을 거고, 1서클밖에 안 되는 구와인 아저씨가 내 몸에 흐르는 마나를 볼 수 있게 된 것일 테지. 아아, 모르겠어. 카엔님에게 물어보면 잘 알 텐데 아냐, 그는 내 생명이 반 이상 사라져버렸다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파서 내 질문에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을 거야. 차리리 물어보지 말까? 하지만 카엔님을 만나면 그는 내 마음을 읽겠지? 그리고 내 생명이 사라진게 그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내 잠재의식까지 읽어버리겠지? 렌은 후회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어 다시 카엔님 생각을 하게 되다니. 결국 울게 될 걸 알면서... 구와인이 울까봐 렌은 소리 없이 흐느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렌은 눈물을 닦고 마나의 수련을 시도했다. 밤은 깊고 공기는 진해서 마나 수련에 딱 적당한 때였다. 원래 정명기는 새벽에 수련하는 게 좋지만 마나는 자정에 수련하는 게 좋다고 했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올빼미형인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렌은 눈을 감고 다시 마나를 느꼈다. 그리고 '의지력'을 써서 몸 주위의 마나를 불렀다. '마나여, 내 몸 안으로 들어오라.' 렌이 탐독한 마법사 중에 '마법은 상상력이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고 상상하는 능력, 자연은 다채롭고 변화 무쌍하지만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일관된 힘이 흐르고 있다고 그려낼수 있는 능력이 바로 마법이었다. 상상력이라면 나도 남들에게 뒤지지 않아. 렌은 계속 마나를 불렀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듯 마나는 렌에게로 불어왔다. 흰 마나, 금빛 마나, 푸른 마나, 붉은 마나, 검은 마나가 섞여 빛의 구룸처럼 몰려왔다. 빛의 구름은 렌의 몸을 뚫고 다시 바람이 불어가듯 가버렸다. 그러나 자세히 응시하니 검은 마나 몇 점은 몸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고 몸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렌은 다시 마나를 불렀다. 그러자 또 마나의 구름이 불러왔다. 그리고 마찬가지고 검은 마나가 조금 더 렌의 몸속에 남았다. 몸속에 남은 검은 마나는 조금씩, 조금씩 심장에 모여들었다. '마법의 근원은 심장'이라는 말에 딱 들어맞았다.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심장을 빼놓고 인공심장을 끼워넣는 것 같았다. 마나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은 참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 낯선 기운에 매혹되어 렌은 수지 않고 계속 마나를 불렀다. 마나의 양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졌다. 아주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눈 깜짝할 사이였다. 마나가 쉬지 않고 점점커지자 렌은 무서워졌다. 멈추려 해도 멈춰지지 않았다. 어느 단계를 넘자 마나가 스스로 마나를 불렀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온 몸에 심장박동에 맞춰 쿵쿵거렸다. 가슴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그만!" 렌은 초인적인 노력으로 마나의 흐름을 멈췄다. 식은 땀이 온몸에 번들거렸다. 렌의 심장은 놀라서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고여있는 마나는 잠시 동안 그대로였다. 마나가 다시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걸 느낀 렌은 늦기 전에 당장 무언가 마법을 시전해보고 싶어졌다. 1서클 유저에 이르지 못한 초보도 시전할 수 있는 마법이 뭐였더라? 그래, 조명마법! 렌은 눈을 감고 다시 몸속의 마나가 빛으로 변환되어 오른손 끝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심장에 모여 있던 마나는 렌의 의지대로 오른손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조금씩 성질이 바뀌어갔다. 렌은 눈을 떴다. 오른손에서는 작지만 아름다운 하얀 빛이 뿜어 나오고 있었다. 야행성 새 몇 마리가 놀라서 푸드득 날아갔다. 구와인은 자다 말고 눈이 부신 듯 끙끙거리며 눈을 팔로 덮었다. 그리고 렌은 눈물을 글썽이며 밤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법을 보는 것과 마법을 직접 시전한다는 건 정말로 하늘과 땅만큼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장님이 온 세상의 모습을 그저 귀로 듣고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눈을 떠서 자기 눈으로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만큼이나 달랐다.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불가해한 현상을 자신이 직접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 절감되었다. 물리적한계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광대무변한 비밀의 세계를 향한 신비의 문이 열렸다. 렌은 처음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스스로 믿기 어려워하는 선자처럼 경외감에 떨었다. 빛은 서서히 사라졌다. 렌은 아쉬움을 가득 담고 이제 불을 끄고난 형광등처럼 희미한 밝음만 아른 거리는 오른손을 계속 바라보았다. 렌은 카엔과 헤어진 후 처음으로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어떤 일이 생길지라도, 어떤 고통을 당할지라도, 지금의 이 기쁨, 어제 몰랐던 것을 오늘 알게 되고 어제 하지 못했던 일을 오늘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느끼는 이 희열을 빼앗아갈수는 없었다. 오른손 약지에 남은 마지막 한 점의 빛까지 사라지고 나자 렌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조금 전의 희열 대신 의문이 찾아와다. 지금 자신의 마나 축적 속도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빨랐다. 더구나 축적되는 건 순수한 물의 마나뿐이었다.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렌은 그게 자신이 이 세계로 온것, 그리고 흑룡에게 이끌렸던 것과 관계가 있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갑자기 하루의 피곤이 몰려들어와 그녀는 제대로 자리를 펴지 못한 채 선잠을 잤다. 그 다음부터는 도보여행의 연속이었다. 구와인은 더 이상 마을에서 치료하려는 생각을 버렸는지 이따금씩 먹을 걸 사러 마을에 들르는 것 빼고는 거의 숲의 지름길을 탔다. 가끔씩 들르는 마을의 풍경은 대부분 비참했다. 짜낼 수 있을 때까지 다 짜내고 남은 찌꺼기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굶주림에 지쳐 퀭한 눈을 하고 있었고, 구와인과 렌이 지나가도 텅 빈 허공을 보듯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도 돈을 주면 먹을 것을 구할 수는 있었다. 렌은 구와인을 따라 기를 쓰고 걸었다. 정명기를 운기할 때마다 느끼는 통증? ?견딜 수 없기도 하고 당장 정명기를 쓸 일도 없을 것 같아 렌은 카로드에 도착할 때까지 한동안 정명기 수련을 쉬기로 했다. 그 대신에 렌은 새로 시작한 마법 수련에 재미를 붙였다. 마력은 일찍이 책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커져갔고, 렌은 왜 그럴까 궁금하면서도 수련을 멈출수 없었다. 매일매일 수련할수록 심장에 불러들일 수 있는 마나의 양은 더 많아졌다. 중간에 두어 번 정도 마법이 잠시 늘지 않던 시기가 있었지만, 그 고비를 넘기고 나자 마나량은 급격하게 다시 늘었다. 렌은 자신이 2서클인지 3서클인지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지만, 어쨋든 정말 이례적으로 마법이 빨리 느는것은 틀림없었다. 어느 정도 마나를 불러들일 수 있게 되자 렌은 이 마나를 치유마법으로 변호나하는 것을 연습했다. 본래 치유마법으로 변환하기 가장 좋은 마나는 나무의 마나, 즉 푸른 마나 였으나-라빌이 치유마법사로 이름을 날린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다른 성질의 마나도 약간의 손실을 감수한다면 치유마법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푸른 마나 다음으로 치유마법에 적합한 마나는 사실 검은 마나였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렌은 마침내 자신의 검은 마나를 큰 손실 없이 치유마법으로 전환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때는 맨 처음 마법을 성공시켰을 때만큼이나 기뻤다. 그러면서도 렌은 걱정이 되었다. 세상일에 공짜란 없는 법이다. 이렇게 급속도로 마법을 익히는 것이 왠지 불안했다. 지금까지 뭐든지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서 얻었는데, 마법만은 너무 손쉽게 손에 넣은 것 같아 뭔가 찜찜했다. 그리고 정명기 대신 마법을 수련하다보니 묘하게 감정적이 되어갔다. 정명기는 워낙에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것인데, 마법은 그 반대로 작용하는 것 같았다. 마법을 수련하고 나면 심장이 격하게 뛰면서 온갖 감정이 생생하게 일어나 날뛰었다. 카엔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인생의 고단함에 대한 슬픔, 알 수 없는 분노. 그런 렌을 지탱해주는 것으 뜻밖에도 구와인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면 렌은 구와인에게 부작용이 적은 것을 골라가며 치료술을 가르쳐주었는데, 구와인은 정말 열심이어서 렌은 절로 가르치는 보람이 생겼다. 치료술을 어디에서 배웠는지 묻지도 말고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도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하자 눈치 빠른 구와인은 뭔가 사연이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는 그런 것보다 당장 치료술을 제대로 배우는 게 더 시급했다. 게으르기 짝이 없는 라빌을 가르치느라 애를 먹었던 렌은 마침내 숙제와 예습, 복습을 충실히 하는 제자를 만나게 되자 신이 났다. 첸 사부님이 자신을 가르칠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었다. 구와인이 배우고 싶어 하는 건 단수히 치료행을 다니면서 써먹을만한 비방 몇가지가 아니었다. 제대로 된 치료의 원리 전부는 것이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었다. 그도 자기 안에 지식과 치료술에 대한 엄청난 갈증이 감추어져 있었다는 걸 비로소 깨닫고 놀랐다. 매일 저녁 그는 렌을 붙잡고 끝없이 진문공세를 퍼붓다가 갑자기 그런 자기 자신이 멋쩍어져서 변명을 주워섬기곤 했다. "너도 알다시피, 사실 우리 치료사라는 게 참 한심한 직업 아니냐? 사람이 병들고 아파서 울부짖는데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또 사람들도 치료사라면 그냥 한 수 아래로 보니까 우리한테서 그다지 바라는 게 없지. 그러니 그저 아픈 사람 마음이라도 달래주고 봉사료나 받는 셈 치지만, 나라고 속 편할 리가 있겠느냐. 그래서 옛날에는 그렇게 치유마법사가 우러러보였었지. 일단 치유마법을 펼치기만 하면 상처가 낫는 게 눈에 보이니 말이다. 그치만 나도 안다. 치유마법사 놈들도 그저 찢기고 찔리고 터진 상처나 아물게 하지, 뭐 대단한 걸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이거야. 그러면서 한없이 뻐기기나 하지. 쳇, 그놈들도 고칠 수 있는 병보다는 못 고치는 병이 더 많은 주제에. 그러니 내가 지금 제대로 된 치료술을 배운다는 데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내 소원은 더도 덜도 아니라, 치유마법사도 못 고친 병자를 내가 척 보고 그 자리에서 고치는 거란다." 구와인은 저명한 치유마법사가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도저히 나을 수 없는 병이오'하고 말하는 순간 자신이 혜성같이 나타나 '나라면 그 병을 고칠 수 있소!' 하고 말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스스로 도취되었다. "저도 고칠 수 있는 병보다 고칠 수 없는 병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리고 병은 제가 고치는 게 아니라 환자가 스스로 고치는 거예요. 저는 그저 환자의 몸이 알아서 자기 병을 고칠 수 있도록 조금 도와주는 것 뿐입니다." 렌은 웃으며 대꾸했다. "젠장, 김새는 소리나 하고, 넌 어린 녀석이 왜 그리 멋을 모르냐?" 구와인은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네가 아는 치료술을 다 배우려면 얼마나 걸리겠느냐?" "저는 그럭저럭 6년 정도 걸렸지만, 구와인 아저씨는 ? 틘떫?그 두배는 걸릴 거 같은데요." "맙소사." "그래도 가장 필요한 기초 응급요법이라도 가르쳐드릴 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래, 어쨋든 고맙다. 하지만 나도 공짜로 배우는 게 아니라 길안내에 숙식제공까지 해 주고 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밑지는 장사야. 밑지는 장사고말고." 계속 투덜거리는 구와인을 보며 렌은 피식 웃었다. 구와인은 렌의 마법이 이미 1서클을 넘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의 마나량은 그의 능력으로 감지할 수 없었기에 렌이 그 후 얼마나 빨리 마법을 익혀가고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렌은 그의 마음을 생각해서 한밤에 마법을 수련할 때마다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부지런히 걷기도 하고 구와인이 워낙 지름길을 속속들이 알고 안내하기도 한 덕분에 렌과 구와인은 원래 예정했던 한 달 반보다 훨씬 앞서 한 달 만에 카로드에 이르렀다. "저게 모인 강이고, 저 건너편 기슭에 보이는 도시가 카로드다. 크지?" "그러네요." 렌은 넓디넓은 강 너머에 아득하게 보이는 도시의 윤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는 카로드의 엘프 상관 지하에서 마법진 환승만 했기 때문에 실제로 카로드를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모인 강은 검푸른 내해에서부터 시작하여 남으로, 남으로 흘러 평야를 적시고 마침내 남대양에 이른다. 강은 점점 넓어져 하류인 카로드에 이르면 대해처럼 넓어지고, 모든 것을 감싸듯 한없이 느리게 흐른다. 강물은 탁하지만 하늘빛이 비쳐 푸르게 보였다. 그 위에 카로드의 궁궐과 누각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강을 건너는 나룻배가 조금 있으면 출발할 테니, 우리 선착장에서 기다리자꾸나." "예." 렌은 구와인이 이끄는 대로 선착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통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사공은 출발시긴이 될 때까지 기다리며 하품을 하고 앉아 있었다. "이보슈, 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 구와인이 다짜고짜 묻자 사공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댁 같으면 이럴 때 카로드에 가고 싶겠수? 지금 카로드로 건너가는 놈은 목숨 내놓고 전쟁터에서 한몫 보려는 작자들밖에 없수. 저기 갔다가 이리 건너올 때는 그럭저럭 피난민들로 좀 채우지만. 가는 길에는 댁들밖에 없을것 같네그려." 구와인은 눈을 부라렸다. "흥, 그따위로 말한다고 내가 어디 뱃삯 한 푼이라도 더 낼줄 알아? 누구를 호구로 아나?" 닳고 닳은 구와인의 태도에 사공은 기가 죽었다. "그냥 그렇다는 거요. 뭐 내가 언제 돈 더 달랬나. 어쨋든 전쟁 시작된 이후로 동쪽으로 건너가는 사람이 통 없어진 건 사실이요. 댁들도 알아서 조심하시구려." "쳇, 내 목숨은 내가 챙기니 염려 끄셔." 구와인은 투덜거리며 배에 올라탔다. 고로롱이 배 타는 데 익숙한 지 구와인이 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 올랐다. "손님이 더 없다면 이제 그만 가지." "그럽시다." 사공은 배를 출발시켰다. 작은 돛이 달린데다 적당히 순풍이 불어와, 사공은 이따금씩 노를 젓고 돛을 조정하며 방향을 잡는 거 말고는 배가 바람 따라 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너른 강이어서 건너는 데 시간이 걸렸다. 모처럼 여유가 생기자 렌은 뱃전에 턱을 괴고 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강은 넓어 물결도 미동도 없었다. 오로지 배가 그리는 궤적만이 강의 잔잔함을 깨뜨렸다. 배가 일으키는 물결은 여러 겹으로 배를 따라 흐르다가 어느 순간 희미해지며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물을 계속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치 물이 아닌 몸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 끊임없음에 압도되어 렌은 갑자기 눈물이 터져나왔다. 흐르는 것이 정녕 이와 같다. 미미한 내 존재는 겨우 20년 정도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이 세계는 나라는 인간의 자취도 남지 않은 채 변함없이 그대로 흐를 것이다. 카엔님의 긴 인생에서도 나와의 일은 그저 한순간의 달콤한 혹은 씁쓸함으로 남고 결국은 그 모든 가슴앓이도 세월에 희석될 것이다. 인간이 홀로 태어나 죽는 존재라는 숙명이 한순간 렌을 덮쳤다. 스스로 감당할수 없는 고독감에 렌은 계속 처연히 목 놓아 울었다. "레진아, 사내자식이 너무 울면 고추 떨어진다. 그럼 장가도 못가." 구와인은 어쩔 줄 모르고 렌을 쳐다보다가 위로한답시고 한마디를 던졌다. 렌은 잠시 멍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구 푸하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어찌 됐든 웃을 수 있다면 그걸로 좋은 거야. 카로드에 발을 들여놓자 도시 전체에 퍼져 있는 불안감과 위기감이 확 닥쳐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대기에 감도는 희미한 피비린내와 도시 곳곳에서 눈에 띄는 병사들 때문일 것이다. 아직 전선은 국경지대를 벗어나지 않았지만, 전황이 카로딘군 측에 불리하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 동제국군이 카로드까지 쳐들어올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자, 넌 이제 어쩔 거냐?" "입이 무겁고 사려 깊은 7서클 마법사 없을까요? 마법을 써서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렌은 그런 마법사를 찾기만 ? 玖?마법 대금으로 오리하르콘 칼이라도 지불하리라 마음먹으며 물었다. "뭔 일인데?" 구와인은 호기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렌은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적당히 각색해서 말했다. "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재가하셔서 절 두고 새아버지를 따라 미즈넨 산맥을 건너 동쪽으로 가셨는데, 얼마 전에 어찌어찌 얼락을 주셨습니다. 저랑 같이 살고 싶다고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그다지 건강하지 못해서 산맥을 넘어갈 자신은 없고, 마법사의 도움을 받는 것 말고는 그쪽으로 갈 방법이 없거든요." "허이구, 너도 참 고생을 바가지로 했구나. 딱한 녀석같으니라구. 어디보자, 공식적으로 일하는 마법사들은 다 군대로 갔을 테지만, 숨어 있는 마법사 한두명 쯤은 내가 알아볼수 있지. 날 따라오너라." 구와인은 렌을 이끌고 구불구불한 카로드의 골목길을 이리저리 꺾어 들어가다가 작은 금은방에 이르럿다. "원래는 돈을 받아야 하지만, 네가 내게 치료술을 가르쳐준 공을 생각해서 공짜로 일을 봐주마." 구와인은 한껏 생색을 내며 금은방 문을 열었다. "이보게, 푸긴, 내가 왔네." 쪼그라든 미라같이 생긴 금은방 주인은 돋보기로 보석 하나를 들고 검사하다가 구와인의 말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죽지는 않고 살아 있었군." "자네도 용케 말라비틀어지지 않았군 그래." "무슨 일인가?" "7서클 마법사 중에 군대로 가지 않은 사람이 있나?" 푸긴은 구와인의 질문에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왜? 뭘 어쩌려고?" "여기 이 젊은이가 마법을 쓸 일이 있다느데." 푸긴은 인상을 썼다. "조금 빨리 오지 그랬나? 자네도 알다시피 제야에서 돈을 벌던 7서클 마법사가 두 세명 있질 않았나? 그런데 동제국과의 전투에서 우리 카로딘군이 패하고 나서야 재야 마법사들도 전부 군대로 끌려갔어." "카로딘군이 패했다고? 그런 얘기는 못들었는데? 카로딘군은 그 동안 백전백승이었는데, 진짜로 패했다고?" "그야 위에서 입조심들을 시키니까 그렇지. 나도 패할 줄은 몰랐어. 그 물샐틈없이 얄미울 정도로 완벽한 일드인 공자가 자기 아버지까지 죽이면서 전쟁을 일으킨 이상 승산이 100퍼센트라고 봤거든. 그래도 어디 세상일이 생각대로 되나. 동제국 쪽에서 우리 쪽 예상과는 달리 미리 대비를 한 데다가 그 황제의 검술실력이 워낙에 인간의 경지를 넘어서서 결국 최초의 큰 전투에서 패할 수밖에 없었다더군." 구와인은 눈알을 굴리며 생각을 더듬었다. "나는 이번에 종군치료사로 또 들어가 볼 생각인데, 위험할까?" "맙소사, 아예 죽을 자리를 찾아가지 그래?" 구와인은 태연하게 말했다. "돈이 거의 떨어졌거든. 도박도 좀 하고 기분도 좀 내다보니. 나야 뭐 늘 그렇지.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워낙에 종군치료사 일을 좋아하잖아?" 구와인은 위험하게 눈을 빛냈다. 푸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알긴 알지. 그래도 적당히 해둬. 늙어죽을 때가 다 됐으면 죽을 자리를 잘 찾아야지." "아무튼 그럼 7서클쯤 되는 마법사는 만날 수 없다는 거야?" "평소라면 몰라도 지금은 마법사란 마법사는 전부 다 군대에서 일하고 있으니, 그런 마법사를 찾기란 쉽지 않을 거다. 아니, 이 시점에서 태평하게 후방에서 영업하는 마법사란 없다고 봐도 틀림없을 거야." 렌은 막막해졌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푸긴은 렌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한 번 쳐다보았다. "높은 서클 마법사느 왜 만나려고 그러느냐? 무슨 물건 운송이라도 부탁하려고? 아님 통신마법이라도 부탁하려는 거냐? 이봐, 꼬마야, 꿈 깨. 지금 카로드 시내에는 마법사 씨가 말랐고, 혹시 남아있더라도 엔간한 돈으로는 꿈쩎도 안 할 거야." "돈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할 일 입니다. 어떻게 만날 방법이 없나요?" 푸긴은 계속 고개를 저었다. "내가 원래 재야 마법사 중개를 하고 있지만, 요즘 같아서는 영 힘들다." 그때 옆에서 구와인이 불현듯 흥분해서 외쳤다. "레진아! 너 나를 따라 군대에 가보지 않을래? 카로딘 중앙군은 지금 카로드 외곽에 주둔 중이니까 쉽게 찾아갈수 있을 게다. 전쟁이 시작되고 나면 원래 마법사가 우글거리는 데는 군대밖에 없어. 그리고 종군마법사는 본시 군대 일 말고 개인적인 업무를 보면 안되지만, 언제 그런 규칙이 지켜진 적이 있어야 말이지. 적당한 사람 붙잡고 늘어지며 의외로 쉽게 일이 풀릴 거다! 나는 어차피 종군치료사로 지원하기 위해 거길 가야 하니. 너는 나를 따라 슬쩍 병영으로 들어갔다가 적당한 마법사를 찾아서 부탁할 일을 부탁하면 되지 않겠냐? 이래봬도 나는 전에 카로딘 군대에서 두 번이나 종군치료사로 일한 경력이 있어서 군대에 아는 사람도 많고, 도와주겠다는 사람 찾기도 쉬울 거다." "그래주시겠습니까?" "그럼, 그 정도는 내가 해줘야지. 서로 돕고 살아야 하지않겠냐? 널 데리고 들어간다고 돈이 더 드는 것도 아니고. 너는 내게 그 사이에 치료술이나 더 가르? 컨寧?된다." "볼일 볼 거 없으면 어서들 꺼져." "알았어, 알았다구! 고로롱이나 부탁해!" 둘은 다음날 병영으로 가보기로 하고 일단 구와인이 안내하는 대로 적당한 여관에 찾아갔다. 렌은 저번에 구와인이 소개했던 '개구리 뒷다리'의 음식 맛이 훌륭했던 것을 기억해내고 이번에 가는 여관도 괜찮으리라 확신했다. 여관은 의외로 괜찮았다. 찾아간 곳은 '대공국의 뒷골목'이라는 이름의 여관이었다. 여관보다는 술집이 주력이라 거대한 홀에 술을 찾아온 병사들이며 일반일들이 빈자리 없이 가득 차 웅성이고 있었다. 구와인은 여종업원과 잘 아는 듯 몇 마디 야한 농지거리를 던지고 여종업원의 엉덩이도 두어 번 주무른 후 괜찮은 자리를 안내받았다. "솔카야, 너 마담 좀 오라고 그래. 구와인 어르신이 오셨다고 냉큼 아뢰라." "예에, 어련하시겠어요. 하늘같이 높으신 구와인 어르신이 오셨는데 당연히 마담이친히 나와 영접해드려야겠지요." 솔카라는 여종업원은 빈정거리면서도 정말로 마담을 데려왔다. "어이, 마담, 나 왔어." "흥, 오랜만이네요. 신수는 훤해 보이는 데 , 돈푼이나 만졌수? 요즘 같아서는 천하의 구와인도 쉽지 않을 텐데?" 마담은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구와인에게 수작을 걸면서 렌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가장마법으로 가려서 별로 특징이 없어 보이는 렌의 모습에 흥미를 잃은 마담은 다시 구와인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하이고, 이번 같은 불경기가 한 번만 더 오면 내가 아니라 내 할아버지도 맥을 못 추겠어. 세상이 어찌 되려는지. 도저히 먹고 살길이 없을 것 같아서 종군치료사로라도 들어가 볼까 해." 구와인의 말에 마담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종군치료사? 요즘 전쟁이 격하다는 데 생목숨 내놓는 거 아녜요?" "그래?" "그렇다니까요?" "요즘은 밑천이 떨어져서 좀 위험하더라도 해볼 생각이야. 위험하면 위험할수록 수당이 높겠지, 뭐. 그나저나 어디, 세상 돌아가는 얘기좀 해봐. 지난 몇 달 동안은 저어기 벽지 서쪽지방에만 가 있어서 통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네." 구와인은 슬슬 마담을 부추겼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래 봤자 뭐 특별한 게 있나요? 전쟁이 일어났고, 동제국의 테룬 황제가 전장에서 혼자 힘으로 뭐 수백 명을 죽였다나 수천 명을 죽였다나. 암튼 그래서 우리 카로딘 군대는 완전히 사기가 떨어졌고. 아, 그래요, 서제국 황제가 모습을 드러내고 무슨 어마어마한 개혁을 시작했다던데, 그 얘기 들었수? 400살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직 미청년이랍디다. 나도 그런 마법이 있으면 한 번 해봤으면 좋겠네." 카엔의 얘기가 나오자 렌은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서제국에서 무슨 일이 생겼나요?" 렌이 끼어들자 마담은 다시 한 번 렌을 훑어보고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그러던데. 무슨 회의인지를 만들고 무슨 위원회도 만들고 평민과 귀족의 차별을 철폐한다든가 어쨋든가 뭐 그렇대. 그리고 서제국이 점령해놓고 나서 비워두었던 드래곤의 회랑 북쪽에도 서제국 공무원들이 들어가서 거기 사람들을 위해서 뭘 한다던데, 당최 뭔 얘긴지느 잘 모르겠어." 눈물이 핑 돌았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침내 카엔은 오랜 칩거를 깨고 서제국 황제로서 세상 사람들을 위해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렌은 그것이 과거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첫걸음이라는 걸 확신했다. 카엔이 대견스럽고 기특했다. 내가 없으면 패닉 상태에 빠질 줄 알았는데, 그렇게 꿋꿋하게 잘 있다니. 안도감이 드는 한편으로 걷잡을 수 없이 그가 보고 싶어졌다. 지금 내가 그의 곁에 있으면 개혁 작업을 이것저것 도와줄 수 있을 텐데. 옛날 지구 역사에서 어떤 개혁이 실패하고 어떤 개혁이 성공했는지 가르쳐주기도 하고, 시행착오를 방지할 수 있는 방법도 알려줄 수 있을 텐데. 렌은 애가 탔다. "구와인 아저씨, 정말 병영에서 적당한 마법사를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럼, 나만 믿어라!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냐?" 그 말에 렌은 갑자기 구와인의 말이 의심스러워졌다. 그러나 구와인은 확신을 주려는 듯이 씨익 웃으며 렌의 등을 두드렸다. 렌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렌은 일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카엔이 어떻게 개혁을 추진하고 있을까, 카엔의 실체를 안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한없이 궁금할 따름이었다. 3 장 변화의 바람 마이리아 시의 벽돌공길드 길드장인 보프는 가을철 건축 성수기를 맞아 벽돌 수급과 판매 상황을 집계하고 원활한 판매대책을 세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일 년 중에 지금이 제일 중요한 때였다. 특히 푸른 죽음이 할퀴고 지나간 빈민구역의 분위기 쇄신을 위해서라도 이번 가을에는 가능한 높은 이익을 올려야 했다. "저, 길드장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조합원 토리가 길드장실에 고개를 내밀었다. "손님 ? 누구?" "마법사님이신데요." "저런, 마법사님이시라면 ? 慕?모셔와야지! 기다리시게 하느 무례를 범하면 쓰나!" 보프는 당황해서 벌떡 일어났다. 저번 푸른 죽음 때 수 많은 마법사가 환자를 위해 일해주기는 했어도, 평민들에게 아직도 마법사는 어려운 존재였다. 직접 마법사를 맞으러 가려는 보프는 문 앞에서 딱 마법사와 마주쳤다. 그는 허둥지둥 인사했다. "어이구, 마법사님, 이 누추한 벽돌공길드까지 웬 일이십니까?" 마법사는 침착하고 점잠은 중년 남자였다. 그는 아주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프에게 인사했다. "길드장 보프님이시죠? 저는 황실에서 나온 플로인이라고 합니다." "서제국에 다섯 명 밖에 없는 8서클 마법사인 그 플로인님이시란 말입니까? 아니, 이런 황공할 때가!" 보프는 깜짝 노랄 코가 땅에 닿도록 절하려 했다. 그러나 플로인이 보프의 팔을 잡고 말렸다. "이러지 마십시오. 제가 불편합니다." 보프는 어쩔 줄 몰르고 어정쩡하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근데 평민 벽돌공인 제게 황실에서 무슨 일이신지요? 무슨 안좋은 일이라도............" 보프는 얼굴 가득 불안감을 내비치자 플로인은 가볍게 웃었다. "안좋은 일은 전혀 아닙니다. 혹시 칼란이라는 마법사를 기억하십니까?" "기억하다마다요! 치료사 아가씨 레이님과 함께 저번에 우리 빈민구역 환자를 구하려고 그렇게 애쓰셧는데, 기억하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참 고마웠지요. 게다가 떠날 때에는 이 보잘것없는 제게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까지 해주셨으니, 정말 보기 드문 분이지요." 플로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고개 숙여 인사를 하셨다고요?" "예, 뭐가 잘못됐습니까?" 플로인은 애써 얼굴빛을 태연하게 했다. 황제 폐하께서 보프에게 절대 자기 정체를 미리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핫니 이상 이상한 기색을 눈치채여서는 안 되었다. 그래도 세상에, 폐하께서 고개 숙여 인사를 하셨다니! 권력의 심장부에서 오랫동안 일해와 권력의 미세한 향방에도 민감해진 그는 폐하께서 이사람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은근해지고 태도는 더 정중해졌다. "보프님, 바쁘시겠지만 저와 함께 황궁에 가주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보프는 불안감에 떨었다. 플로인은 다시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 걱정 마십시오. 저번 푸른 죽음의 처리와 관련해 황실에서 궁금한 점이 있어서 부르는 것이니까요. 황궁에서 그때의 치유마법사 칼란님도 보시게 될 겁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가야지요." "즉시 채비를 하시지요. 제가 순간이동으로 모실 테니 여행길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보프는 당황했다. "아, 저, 그럼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보프는 부길드장 배비와 회계담당 콜디를 불렀다. "이봐, 배비, 나 볼일이 있어서 며칠 자리를 비울것 같은데, 가을철 생산판매 관리좀 잘 맡아주게." "그래, 걱정 말게." "콜디, 자네도 배비를 도와서 깔끔하게 처리해주고." "예, 길드장님, 걱정 마십시오." 플로인은 보프가 이것저것 지시하고 챙기는 것을 감탄하며 구경했다. 플로인이 들은 바에 따르면 보프는 글을 제대로 못 읽고 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는데 지금 그가 일처리 하는 것을 보면 어지간한 제국 관료보다도 나았다. 그렇다면 혹시 폐하께서 의중에 두신 것이......... 플로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폐하께서 부드러워지셨다고해도 여전히 신하들의 마음을 책 읽듯이 읽으시는 이상 폐하의 뜻을 함부로 추측하는 것은 목이 달아나기 딱 좋은 일일 뿐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8서클 마법사의 힘으로 순간이동이라는 것을 해보고, 다시 상상속에서도 감시 그려볼 수 없는 눈부신 황궁을 보게 되자 보프는 완전히 얼이 나갔다. 그래서 플로인이 자신을 어느 호화로운 방으로 인도해주고 조용히 나가도 눈치채지 못했다. "보프님." 맑은 목소리에 보프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마법사 칼란이었다. "아니, 마법사님 아니시오? 여기에는 어쩐 일이시오? 마법사님도 푸른 죽음 때문에 불려오셨소? 얼굴이 많이 상했는데,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소?" 보프는 반색을 하면서 칼란에게로 달려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어디선가 헉 하는 소리가 들려와 보프는 고개를 돌렸다. 방구석에 웬 노인 한 명이 서서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무척 값비싼 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지위가 높은 사람인것 같아 보프는 일단 칼란의 손을 놓고 그쪽을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칼란은 웃으며 노인에게 눈짓했고, 노인은 방의 그늘로 한 발짝 뒷걸음쳣다. 보프는 어떻게 하나 망설이다가 칼란이 말을 걸자 다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자, 보프님,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어떻게 지내긴, 잘 지냇소이다. 마이리아 시의 행정부시장이 바뀌어서 일처리를 잘 해준 덕에 이제는 빈민구역에서 하수도 썩는 냄새가 안 나서 살것 같소. 그러고 보니 레이 아가씨는 어디 갔소이까?" 그 질문에 칼란은 쓸쓸하게 웃었다. "아마 ? 瀛逵@?보기 힘들 겁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아 보프느 더 묻지 못했다. "일단 이리 앉으시지요." 보프는 칼란이 이끄는 대로 화려하고 푹신한 소파에 엉거주춤 걸터앉았다. "그리고 이것도 한 번 드셔보시지요. 꿀과자인데 참 맛이 좋습니다." 보프는 말로만 듣던 꿀과자를 보자 떨리는 손으로 하나를 집어 조심스럽게 입에 넣었다. "햐, 진짜 맛이 끝내주는구려!" "그렇지요?" 칼란은 다시 웃으며 꿀과자를 하나 더 권했다. 보프가 과자와 음료수를 먹고 나자 칼란은 심각하게 물었다. "보프님은 이 나라의 황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보프는 어리둥절해졌다. "황제라니, 카에닌 테라미즈넨 황제 폐하 말슴이시오?" "예, 진지한 질문이니 잘 생각해서 대답해주십시오." "글쎄,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보프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마침내 대답했다. "일단 동서대륙을 통틀어서 지금상태에서는 우리 황제 폐하가 나라를 제일 잘 다스리고 있는 건 틀림없소. 귀족들이야 황제 폐하때문에 권력다툼을 제대로 못해서 죽을 맛이겠지만 우리 같은 평민들에게는 상관없는 얘기이고, 삐걱거리기는 해도 그럭저럭 잘 굴러가니 말이요. 하지만 우리 제국은 그동안 너무 변화가 없었소. 이미 평민들의 힘이 귀족 뺨치게 커졌는데도 평민들의 지위는 3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지 않소? 난 그게 황제 폐하의 탓이라고 보오. 워낙에 막각하신 황제 폐하께서 떡 버티고 계시니 그분이 뭐라 하시기 전에는 신하들이 이거 바꾸자 저거 바꾸자 하기도 그렇고, 또 귀족인 신하들이 자기네들에게 불리하게 바꾸자고 할 리도 없지 않소?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매사가 바뀔 때가 되면 바뀌어야 하거든." "역시 그렇군요." 칼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만약 황제가 나서서 보프님에게 개혁을 도와달라고 하면 어덯게 하시겠습니까?" "으하하하, 마법사님은 농담도 잘하시오! 푸하하하!" 보프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끝끝내 보프가 믿지않자 카엔은 쓴웃음을 지으며 가장마법을 풀었다. 카엔의 눈과 머리카락이 은보랏빛으로 변하고 그의 얼굴을 한 꺼풀 덮고 있던 것 같은 기운이 사라지자 카엔은 눈부신 미청년으로 변했다. 보프는 입을 쩍 벌리고 카엔을 쳐다보았다. "마법사님, 원래는 엄청난 미남이셨구려.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소? 너무 미남이라서 그러셨더 거요?" 아직도 보프가 눈치채지 못하자 카엔은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방 구석의 그늘에서 기다리고 있던 페람 공작에게 눈짓했다. 페람은 보프의 옆으로 걸어와 말했다. "보프님, 반갑습니다. 저는 제국의 수상 페람 공작입니다." "수, 수상 각하시라고요?" "보프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분은 우리 제국의 황제 폐하이십니다." 보프는 한동안 자기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마침내 머릿속에 내용이 입력되자 보프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허겁지겁 바닥에 넙죽 엎드려 머리를 바닥에 쿵쿵 띻으며 절했다. "폐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죽어도 쌉니다!" "보프님, 그만하시지요." "폐하, 존댓말이라니요! 제발, 제발 반말로 하십시오!" 보프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식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계속 이마를 쿵쿵 찧었다. 카엔은 한숨을 쉬며 마법을 써서 보프의 몸을 들어올렸다. "그대가 어색하다면 반말을 하지. 하지만 이제 내 앞에서 더 이상 엎드려 절할 필요는 없다. 그런 관례는 다 없애버리기로 했다." 보프가 받은 정신적 충격을 가늠하며 카엔은 그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여기 앉도록 하라. 페람도 이리 와서 앉고." 둘은 순순히 앉았다. 아직도 황제의 모습을 바로 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보프는 힐끔힘끌 곁눈질로 그를 훔쳐보았다. "그대에게 묻겠다. 좋은 정부란 뭐라고 생각하나?" "이런 무지렁이 벽돌공에게 왜 그런 걸 물으십니까? 저는 모릅니다." "그대 나름대로의 해답을 갖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마음을 읽는다는걸 잊어버렸는가?" 보프는 그 말에 소름이 쫙 끼치고 공포가 몰려왔다. 그렇다. 황제는 늙지도 죽지도 않고 사람 마음을 자유자재로 읽고 심지어 마음을 마구 조작하기도 하는 그런 전재였다. 그는 감히 황제를 쳐다보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여 황제로부터 떨어져 앉으려 해다. 그러다가 그는 그런 자기의 마음을 계속 황제가 읽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숨이 막혀왔다. 카엔은 한숨을 쉬며 가벼운 마법을 뿌렸다. 보프는 무엇엔가 얻어맞은 것처럼 홛르짝 놀라며 눈빛이 몽롱해졌다. 그 상태로 조금있다가 보프는 부르르르 떨며 정신을 차렸다. "이제 괜찮은가?" 보프는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 황공해하며 곁눈질로 황제를 쳐다 보았다. 황제의 눈은 몹시 슬퍼보였다. 보프는 갑자기 황제에게 무척 죄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황제가 마음을 읽? ?다는 것만으로 그를 괴물같이 생각하고 공포심을 느낀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다. 황제도 사람이지 않는가. 치료사 아가씨의 마음을 얻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기도 하고, 죽어가는 소녀 앞에서는 눈물을 뿌리기도 하지 않았는가. "폐하, 추태를 보여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보프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할 것 없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마음속에 온갖 지옥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 그게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읽힌다 상상만 해도 반쯤 미쳐버리지. 그대는 내가 본 사람 중에서 보기 드물게 마음이 깨끗하고 올바른 사람이어서 마음을 읽힌다고 해도 무서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얼마간 충격이 있나 보군." "깨끗하고 올바르다니요! 이 촌 벽돌공한테 무슨 말씀이십니까?" 카엔은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보프는 말해밨자 소요없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조금 지나가 충격 대신에 기쁨이 차올랐다. 황제가 날 알아줬다! 내 마음이 깨끗하고 올바르다고 했다! 평생 성실하고 공정하게 살면서도 남들이 알아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용기가 솟아올랐다. "폐하, 저는 정치도 모르고 배운 것도 없는 일자무식 벽돌공입니다. 그래서 그냥 제가 아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가장 기본적인 건 살아남는 거겠죠. 그러니 못 먹어서 굶어죽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병들거나 다쳤을 때 고칠 방도가 있는데도 돈이 없어서 못 고치고 죽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그냥 먹고 자고 건강하다고 해서 제대로 살아 있는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사람답게 살아야지요. 그러니 배우고 싶은데 돈이 없고 기회가 없어서 못 배우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배운 지식을 써먹고 싶은데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써먹을 수 없게 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 제국은 지금 못 먹어서 굶어죽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가끔 흉년이 들었을 때 무더기로 죽기는 하지만, 정부에서 구휼미도 나오고, 아무튼 다른 나라보다는 형편이 낫다는 거 저도 압니다. 하지만 평민들 중 병 들거나 다쳤을 때 제대로 치료받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폐하께서도 마이리아 시에서 푸른 죽음을 고쳐보셨으니 잘 아실 게 아닙니까? 사람이 죽어 가는데 구할 방법이 없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평민 중에 제대로 배우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제 경우를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저는 어린 시절 무척이나 글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서방을 하는 영감은 글을 배우고 싶으면 한 달에 10실버씩 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버지께 가서 10실버만 달라고 했다가 죽도록 얻어터졌지요. 벽돌 굽는 거나 잘 배우라고요. 평민이 괜히 글을 알면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게 되고 바람만 들게 된다고 하시면서요. 그래서 저는 그때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나이를 먹었습니다. 나이 먹고 나니까 이제 새삼 뭘 배운다는 것도 쉽지 않아서 결국은 아직까지도 일자무식입니다. 하지만 제가 만약에 글을 배울 수 있었다면, 그리고 다른 공부를 할 수 있었다면, 제 인생은 통째로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요. 가끔 운 좋게 평민 중에 글을 배운 사람도 있기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라고 배운 걸 써먹을 수 있습니까? 하급 지방공무원 시험이 있기는 하지만, 거기 붙어봤자 9급, 그리고 승진해봤자 8급, 가끔 특출나게 6급까지 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대상인의 자제들뿐 아닙니까?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다 똑같은 사람인데, 귀족이라고, 돈이 많다고 해서 일을 더 잘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차별이 존재해야 한단 말입니까? 평민 중에서도 교육을 받기만 하면 얼마든지 귀족보다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버려두는 건 제국으로서도 큰 손실이 아닙니까?" 보프는 자기도 모르게 흥분해서 얼굴을 붉히며 열변을 토했다. 카에은 역시 자기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며 고개르 끄덕였다. 그리고 페람 공작은 일자무식인 벽돌공의 입에서 나오는 높은 식견에 계속 놀라고 감탄했다. "그대가 말한 그런 문제점들을 나도 깨닫고 있다. 그래서 그런걸 이제 고쳐나가려고 한다. 그대가 도와줄 수 있겠는가? 나는 그대에게 새로 신설하는 개혁부 대신의 자리를 맡기려 한다." 보프는 다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폐하, 저는 글도 못 읽고 배우지도 못한 일자무식입니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글을 못 읽는 건 페람이 충분히 해결해줄 것이다. 그렇지, 수상?" "예, 물론입니다. 보프님께 유능한 보좌관이나 비서를 배정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줄로 압니다." 보프가 마음에 든 페람은 재빨리 대답했다. "저는평민입니다! 평민이 무슨 대신입니까!" 카엔은 보프의 말에 미소지었다. "평민에게도 출세할 기회를 주어져야 한다고 조금 전에 그대 입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보프는 식은땀을 흘렸다. "폐하!" 카엔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무리 내가 후원한다 해도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350년 동안 고착된 제도를 하루아침에 뒤엎는 일이니. 그대를 출세시키려는게 아니라, 그대의 능력을 써먹고 이용해 먹으려는 것이다. 그대가 처음 벽돌공 길드의 길드장으로 취임했을 때, 그대는 산적한 온갖 난제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난감했었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뛰었지? 지금 나는 그대의 마음속에서 똑같은 기분을 읽고 있다. 지금 그대는 당황하고 난처해하면서도 또 마음 한편에서는 우리 제국이 뭐가 문제이고 그걸 어떤 방식으로 고쳐야 할지 차례차례 떠올리고 구상하고 있는 걸 안다. 더 얘기하지 않겠다. 벽돌공 길드를 정리하는 데 이틀을 줄 테니, 가족과 함께 테리미즈로 옮겨오도록 하라. 폐람, 그대가 잘 알아서 해주겠지?" "물론입니다, 폐하." 보프는 황제가 자기 머리속을 스쳐간 모든 생각을 다 읽었음을 알고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폐하, 미력한 제 힘이나마 다하여 제국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긴장이 사라지고 편안한 분위기가 흘렀다. 보프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마침내 물어보았다. "폐하, 그럼 그 치료사 아가씨도 황실의 분이십니까? 여기 황궁에 계신가요? 혹시 뵐 수 있다면 좋겠는데요." 카엔은 보프의 머릿속에서 생생히 떠오르는 렌의 모습을 읽으며 목이 메었다. "그녀의 본래 이름은 렌이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는 없다." 보프는 얼마 전 제국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나와림 안딘 소동을 기억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바로 그분이셨군요. 그럼 지금 그분은 어디 계십니까?" 페람은 당황하여 보프의 팔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페람의 표정을 본 보프는 치료사 아가씨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는 페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외쳤다. "치료사 아가씨는 무사한 거지요? 아무 일도 없는 거지요?" 카엔은 보프의 기억 속에서 밝게 웃고 있는 렌의 모습을 읽으며 애써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녀가 무사히리라 믿고 있다. 이 세계에 신이 있고 섭리가 있다면 그녀는 반드시 무사할 것이다." 카엔의 목소리는 잠겨들었다. 그는 한쪽 손으로 양쪽 미간을 짚으며 페람과 보프에게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페람과 보프는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황제는 마치 울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카엔이 최초로 본모습을 드러낸 것은 페람에게였다. 그 다음 그는 플로인을 비롯한 서제국 내 다섯 명의 8서클 마법사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맨 처음 페람에게 본모습을 드러낼 때에는 카엔도 무척 망설였지만, 일단 한 명에게 드러내고 나자 거침이 없어졌다. 이렇게 쉬운 것을 왜 그동안 그렇게 망설였나 싶기도 했다. 그러다 그는 렌의 사랑이 사람들의 그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극복할 힘을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싫어해도 렌이 사랑해주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모두들 경악했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신하들은 곧 아름다운 황제의 모습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황제가 때때로 드러내는 인간적인 고뇌와 기쁨, 슬픔을 보면서 황제에 대한 공포감을 조금씩 지워갔다. 그들은 앞에 두고 황제는 제국 전체를 개역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그가 굳이 페람 공작과 마법사들만을 앞에 두고 개혁안을 설명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다섯 명의 8서클 마법사들 중 귀족 출신은 한 명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모두 평민 출신이었다. 마법의 재능은 귀족, 평민을 가리지 않고 고르게 나타났는데, 평민의 인구가 귀족보다 많으니 당연히 마법사 중에 평민 출신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비록 지금 특권층의 지위를 향유하고 있다 해도 평민이었던 자신의 근원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 및 제국 내의 마법사 세력은 당연히 황제의 개혁에 충실한 지지자가 되었다. 마법제국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세제국에서 마법사 세력의 지지는 군대의 지지만큼이나 든든한 뒷받침이었다. 벽돌공 길드장 보프를 불러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다음으로 카엔은 모두의 경악 속에서 내각회의에 모습을 드러냈다. 은보랏빛 광휘가 지워지고 난 후 황제의 참모습이 드러나자 페람과 플로인을 제외한 대신들은 기겁을 하며 모두 땅에 얼굴을 박고 엎드렸다. "모두들 고개를 들고 나를 보라. 앞으로 내 앞에서 절하는 예법은 폐지한다. 그저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항거할 수 없는 위엄이 서린 카엔의 목소리에 대신들은 덜덜 떨며 일어나 카엔을 쳐다보았다. 그들 각자의 머리속에는 저마다 복잡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카엔은 내각회의에 참석한 대신들의 생각을 하나하나 음미했다. '허거덕! 혹시 우리를 몽땅 죽이려는 거 아닐까? 황제의 얼굴을 본 사람은 다 죽었다는데!" '폐하께서 노망이 나셨나? 아냐! 아냐! 지금 생각은 안 한 거야! 노망이라니, 내 생각을 읽으셨다면 난 죽은 목숨이잖아! 노망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폐하, 저 노망이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영원한 총명,명석, 지혜로우십니다! 폐하는 총명해! 폐하는 명석해! 폐하는 지혜로워!' '세상에, 엄청난 미남이잖아? 내 첩보다도 더 아름답잖아? 그동안 왜 얼굴을 숨겼던 거야?' 예상했던 것과 비슷한 생각들을 읽은 카엔은 실소하며 준비해온 개혁안을 발표했다. "대신들은 들으라. 우리 테라미즈넨 제국은 350년 전 이룩한 정치조직 하에서 그 동안 변함없이 체제를 유지해왔다. 그 제도는 당시로서는 적절한 것이었으나, 제국은 지난 350년 동안 계속 발전해왔고, 현 체제는 더 이상 제국에 맞지 않게 되었다. 이에 짐은 제국의 정치제도를 개혁하여 제국민 모두의 권익과 복지 향상을 도모하려 한다. 이를 위해 제국 개혁을 위한 12인 위원회를 결성하고, 또한 평민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입증한 마이리아 시의 보프를 개혁부 대신으로 임명하겠다. 경들은 모두 짐의 기대를 부응해줄것으로 믿는다. 경들의 가슴속에 짐과 제국에 대한 충성심 외에 다른 어떤 사심도 끼어들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혹시 사심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사심을 짐에게 읽힐 정도로 어리석지 않으리라 믿는다." 카엔은 약간 장난기를 섞어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대신들 가슴속에 쏴아 하고 스쳐지나가는 공포심을 음미했다. 이 정도 경고면 저들 중에 반개혁이나 반황제의 기치를 드는 허튼짓을 하는 자들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카엔은 마지막으로 제국 개혁을 위한 12인 위원회의 조직을 발표했다. 위원 중에는 보프, 페람 공작, 8서클 마법사 플로인, 멜둔 상회의 대표이자 평민파의 우두머리라고 할수 있는 가이 멜둔, 그리고 대신과 부대신 중 평소 평민들과 교류가 많았던 사람들이 적절히 포진되어 있었다. 어전에는 침묵이 흘렀다. 기대와 좌절, 흥분, 공포, 그 모든 것이 엇갈리는 감정의 도가니를 뒤로 하고 카엔은 조용히어전을 떠났다. 카엔은 12인 위원회에 자신이 생각하는 개혁의 기본방향을 제시했다. 그의 계획은 가능한 한 충격을 줄이면서 서서히 개혁을 진행하되 일단 개혁이 시작되면 개혁이 그 자체의 추진력을 가지고 계속 진행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12인 위원회는 황제의 뜻을 받들어 오래지 않아 개혁안을 만들어냈다. 사실 12인 위원회의 대부분은 평소부터 개혁, 혹은 혁명을 염두에 두고 꾸준히 연구해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기회가 생기자 봇물이 터지듯 개혁안이 쏟아져 나왔다. 과격하기까지 한 개혁안의 수위를 조절하는 데에는 뜻밖에도 보프가 주도적으로 나섰다. 현실의 냉엄함을 뼈저리게 경험해온 그는, 말만 앞선 휘황한 개혁안이 나올 때마다 여기없이 깨부수며 개혁안의 현실성과 온건성을 확보하는 데 큰 역활을 했다. 첫 번째 개혁은 보통고육의 실시였다. 평민들에게도 5년간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여 읽고 쓰는 것과 계산하는 법 등 기초적인 내용을 가르치되, 각 학급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에게는 무상의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부여하고, 최종적으로는 테라미즈 황립 아카데미의 입학 자격까지 주도록 했다. 다만 당장 제국 전체에 실시하는 데에는 물자와 인력이 부족했으므로, 이구 3만 이상의 도시 지역에서 부터 먼저 실시하고 점차 농촌지역으로 확대하도록 했다. 두 번째 개혁은 평민 출신이 제국공무원에 임용될 기회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평민의 직급제한을 철폐하고 능력마 있다면 대신이나 수상까지도 될 수 있도록 했다. 평민 출신 수상 비세츠의 예가 있기는 했지만 그는 나와림 출신이어서 예외를 인정받은 것이었고, 그동안 나와림이나 마법사를 제외한 평민이 대신이나 수상이 된 예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실제로 평민이 그렇게 출세한다는 것은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했지만 상징적인 의미는 컸다. 거기에 더해 평민에 대한 보통교육의 효과가 나타나는 10년 후부터는 평민, 귀족을 가리지 않는 고급공무원 시험제를 운용하도록 했다. 시험을 통해 고급공무원을 임용하는 것이야 말로 신분제를 철폐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공정한 길이었다.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황제가 있는 한 커닝이나 입시부정은 없으리라. 세 번째 개혁은 귀족 통치권의 개혁이었다. 지금까지 귀족령에 대해 인정되어왔던 상당 정도의 자치권을 50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회수함으로써, 개혁의 마지막 단계까지 가면 귀족은 자기 영지 내에서 토지의 임대로를 받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임의로 할 수 없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네 번째 개혁은 제국의회의 신설이었다. 12인 위원회는 격론과 싸움, 토의 끝에 귀족, 마법사, 평민의 수르 똑같이하는제국의회를 신설하기로 하고, 10년 후에 개원하는 것을 목표로 대표자의 선출방식, 유권자의 범위, 제국의회의 권한과 의원의 지위 등을 정하기 위한 특별소위원회를 신설했다. 맞막 개혁은 서제국 보건의료체제의 개혁이었다. 이 부분은 황제가 특별히 강조한 부분이기도 했다. 치유마법사와 새로 신설될 제국 치료학교 출신의 치료사가 팀을 이뤄-카엔은 자기와 렌이 한 팀이 되어 치료행을 다니던 추억을 잊지 못했다- 일정 인구를 관할하는 치료소를 열고, 그와는 별도로 복잡하고 중대한 질병의 치료를 위한 대규모의 병원을 제국 내 주요 도시에 개원한다는 것이었다. 일단은 치료사의 육성이 시급했기에 정식 병원 및 치료소의 개원은 당분간 먼 이야기였다. 하지만 여러 차례 고사 끝에 새로 신설된 보건부의 대신으로 임명된 하차크 교수는 황제의 뜻에 충분히 공감하고, 3년 후에 치료학교를 개교, 10년 후에 병원과 치료소를 설립을 목표로 매진하기 시작했다. 카엔은 그와 별도로 플로인에게 렌의 수색을 명했다. 일단 렌이 미즈넨 산맥 서쪽, 즉 서제국 쪽을 휩쓸려가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마나의 폭풍 속에서 방향성 없이 순간이동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미즈넨 산맥에 존재하는 강한 마법장은 마나의 흐름을 방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제국을 빼더라도 세상은 너무 넓었다. 유능한 마법사들이 말틴이 위치한 드래곤의회랑 남북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카로딘과 동제국까지 두루 흩어져서 렌을 찾기 시작했지만, 은밀한 수색작업은 더디기 짝이 없었다. 렌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렌의 신변은 위험해지는 것이고, 마에 하나라도 흑룡이 먼저 렌의 행방을 발견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큰 도움이 안 된다는걸 알면서도 카엔은 정무를 보는 사이사이틈을 내서 수시로 드래곤의 회랑까지 이동해 직접 렌을 찾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테라미즈에서 드래곤의 회랑까지의 초 장거리 순간이동은 9서클인 그에게도 쉽지않은 일이었으나, 카엔은 하루 이틀 정무를 보고 나면 다시 순간이동해서 렌을 찾는 일정을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반복했다. 그가 처음 추적을 시작한 것은 말틴 부근에서부터였다. 평범한 모습으로 가장한 채 그는 반경을 넓혀 가며 렌이 휩쓸려 이동했을만한 마을을 하나하나 찾아보았다. 렌에게 앞으로 다시는 정신조작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 그는 더이상 뇌에서 강제로 기억을 짜내지 않고 질문을 던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생각만을 읽었다. 그러나 아무리 묻고 돌아다녀도 렌의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수색반경은 점점 넓어졌지만 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카엔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한때 정복했다가 버린 땅을 헤매며 그는 그렇게 읽기 싫어 외면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어지러워 멀미가 날 때까지 끝없이 읽고 또 읽었다. 오랜 동안 무정부 상태의 비참함에서 허덕여온 드래곤의 회랑 북부 사람들은 의심이 많고 비겁하고 욕심에 차 있었다. 그들은 서제국에서 공무원과 군대가 들어와 이 지역을 통치한다는 말에 희망보다는 불안을 품었다. 이 척박한 땅에서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여 겨우 가지게 된 한 줌의 소유물마저 뺏길까봐 떨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의 평버하게 생긴 열일고여덟 살 또래의 소녀를 못 보셨습니까?" "못 봤소!" 대부분의 대답은 짧고 퉁명스러웠다. 어떤 사람은 아예 그 정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거면 충분했다. 만약 렌을 본 사람이라면 렌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고 카엔은 즉시 렌의 이미지를 읽어낼 수 있으니 말이다. 한 명 한 명에게 물을 때마다 카엔은 입 안이 타들어가는 초조감을 느꼈다가 찰나의 갈망 후 여지없이 찾아오는 실망감에 휘청였다. "할머니, 말씀 좀 묻겠습니다." 카엔은 황궁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마을만 더 확인하자고 생각하며 말틴에서 200아반 정도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에 들렀다. 그리고 마을 어귀 작은 집의 문간에 의자를 놓은 채 졸고 있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나 돈 없어!" 할머니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팍파감과 완악함에 카엔은 숨이 막혔다. 그러나 그는 애써 부드럽게 다시 물었다. "물건 사시라는게 아니고 뭐 좀 여쭤볼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혹시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소녀를 못 보셨나요?" "못 봤어!" 할머니는 눈앞에 나타난 청년이 자기의 숄을 빼앗아가지 않을까, 아니면 집안의 꿀단지 속에 숨겨둔 동전을 훔쳐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네가 만약 내 물건에 손끝 하나라도 대기만 해봐라. 부지깽이로 죽도록 때리고 눈알을 후벼 파고 손가락을 다 부러뜨려 줄 테다. 아니, 부엌칼로 입을 찢어줄 테다. 할머니가 그려내는 적나라하고 참혹한 영상에 카엔은 어찔했다. 그러나 그 영상 어디에도 렌의 모습은 없었다. 카엔은 실망하며 돌아섰다. "그 소녀가 누구야?" 갑자기 할머니가 물었다. 눈에 띄게 어깨가 쳐진 그의 모습에 호기심을 느낀 것이다. "그녀는........" 카엔은 갑자기 눈물이 쏟았다. "그녀는 제가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생전 처음 보는 고약한 할머니 앞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는 자기 모습이 스스로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녀를 보고 싶었다. 너무 보고 싶었다. 할머니는 청년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자 당황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몹시 감동했다. 누구가를 간절히 사랑했던 젊은 시절의 추억이 떠올라 그년느 가슴이 떨렸다. 지칠 때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고 만 이 청년에게 무언가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녀의 가슴은 조금 전까지의 의심과 두려움 대신 연민으로 가득 챴다. 카엔은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 비척비척 자기에게 다가오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할머니는 팔을 뻗어 카엔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카엔은 반쯤 숙인 엉거추줌함 자세가 되었다. 할머니는 이미 축 늘어지고 말라비틀어진 가슴에 카엔의 머리를 잡아당겨 두팔로 꼭 안았다. 그녀의 몸에서는 오래 씻지 않아 퀴퀴한 노인네의 냄새가 났다. "그 아가씨는 무사할 거야. 다 잘 될 거야. 걱정하지 말게. 다 잘 될 거야. 꼭 다시 만나게 될거야. 다 잘 될 거야." 할머니는 카엔의 귀에 되뇌었다. 주문처럼 계속되는 그녀의 위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마음을 평온하게 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를 본 할머니는 기쁘게 외쳤다. "그래! 웃으라고! 누가 그러더군, 사랑과 웃음은 죽음도 이겨낸다고!" 그 말에 갑자기 다시 청년이 울음을 터뜨리자 할머니는 영문을 모른 채 연신 더러운 옷자락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할머니의 위로와 손길에도 카엔은 계속 울었다. 4 장 종군 치유마법사가 되다 카로드 외곽에는 본래 카로딘 대공국의 수도 카르도의 방위를 위해 만인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카로딘 사람들이 '독립전쟁'이라 부르는 동제국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본래의 병영만으로는 넘쳐흐르는 병사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어, 결국 기존의 막사 주위로 하얀 천막으로 된 임시막사가 끝없이 늘어서게 되었다. 국경지대에서 현재 동제국군과 대치 중인 카로딘 군대가 4만 명, 이곳 카로드 외곽에 3만 명, 그리고 후방과 요지에 3만 명. 그러나 동제국과 치른 두 번째 전투에서 대퍃여 수천 명의 부상자와 사망자가 나왔기 때문에 후방의 3만 명이 다시 카로드로 집결한 후 전군이 동제국과 건곤일척의 대전투를 벌일 거라느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카로드에서 동제국 국경까지는 겨우 50아반밖에 안 되고 두 번째 전투의 패배로 전선이 카로드 쪽으로 10아반 넘게 후퇴했기 때문에 카로드는 이미 전쟁터나 마찬가지였다. 렌은 구와인을 따라 병영을 행해 걸으며 대기 중에 떠도는 피 냄새와 땀 냄새를 생생하게 맡을 수 있었다. 전쟁의 향기였다. 구와인은 어쩔 수 없는 남자였는지 전쟁의 분위기에 취해 자기도 모르게 피가 끓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렌은 이 분위기가 그저 불길하기만 했다. 병영의 입구에는 군대에 줄을 대고 있는 상인들과 비밀스런 곳이 다 비치는 옷을 입은 창녀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군대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내와 입을 맞추고 포옹하는 병사들의 모습도 종종 눈에 띄었다. 출정이 머지않은 듯 어린 병사들의 얼굴에는 흥분과 긴장이 교차했다. 반면 노병들은 우울하고 걱정스런 표정을 떨치지 못했다. 구와인은 사람들을 헤치고 앞서 나가자 렌은 정신없이 따라갔다. 병사가 지키고 있는 병영 입구에 다다른 구와인은 품속에서 신분을 증명하는 나무패 하나를 꺼냈다. 군번이 새겨져 있는 낡은 나무패였다. 병사는 나무패를 받아 꼼꼼하게 검사했다. "무슨 일이요?" "에, 저는 5년 전의 카로딘-오스린 전쟁, 그리고 그 전의 카로딘-볼린 전쟁에서 종군치료사로 일했던 구와인이라고 합니다. 이번의 카로딘 독립전쟁에도 제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구와인은 두 손을 비비며 약간은 비굴하게, 하지만 능숙하게 말했다. "이 소년은 누구요?" "제 조수입니다." "종군치료사 모집은 저쪽에서 하고 있으니, 저기 보이는 커다란 파란 천막 두 개 중 왼쪽 천막으로 가보시오." "예, 대장님 , 감사합니다." 병사는 구와인이 천연덕스럽게 계급을 올려 부르자 씩 웃었다. "저, 그전에 킨 백인대장님부터 뵈었으면 좋겠는뎁쇼." "킨 백인대장님은 저쪽, 제 8만인대 중간쯤으로 가면 뵐 수 있소." "정말 감사합니다." 구와인은 비굴할 정도로 깊이 절하고 돌아섰다. "정말로 군대에서 마법사를 만날 수 있을까요?" 렌은 바삐 걸음을 옮기는 구와인을 허둥지둥 따라가며 물었다. "그럼, 우리 카로딘은 서제국 빼고는 가장 마법사가 흔한데 그 마법사드이 다 병영에 모여 있으니, 여기만큼 마법사 만나기 쉬운 곳도 없어. 내가 잘 아는 장교가 몇 명 있으니까, 어렵지 않을 거다." "직접 7서클 마법사를 아는 건 아니고요?" 구와인은 두어 번 헛 기침을 했다. "너 잘 모르나 본데, 아무리 내가 발이 넓다고 해도 7서클 마법사면 하늘의 별인데, 내가 무슨 재주로 7서클 마법사를 알겠냐? 대신에 7서클 마법사를 잘 아는 장교 정도는 아니까, 그 다음은 네가 알아서 말을 잘 해보는 수밖에." 7서클 마법사가 하늘의 별이라니, 채이고 채이는 게 7서클 마법사이고 6서클 마법사 정도면 피부 관리, 헤어드라이 같은 일이나 하던 서제국과는 딴판이었다. 마법사가 흔하다, 쉽게 만날 수 있다던 구와인의 호언장담이 그냥 호언장담으로 끝날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킨 백인대장님!" 구와인은 조금 걸어가다 천막 옆에 서 있는 40대 중반의 장교 한 명을 발겨하고 반갑게 외쳐 불렀다. "아니, 자네 구와인 아닌가!" 장교는 반색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얼굴에 생채기가 나 있고 징박힌 가죽갑옷에 핏자국으로 보이는 갈색 얼룩이 여기저기 묻어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그가 겪은 전투의 격렬함이 한눈에 드러났다. "예, 또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구와인의 말에 표정은 어두워졌다. "혹시 또 종군치료사로 지원했나?" "예, 그러려고요." "웬만하면 이번에는 참전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왜요?" "여기 좀 앉지, 얘기가 기니까. 아, 저 소년은 누군가?" "예, 제 조수인데, 실은 저 녀석이 7서클 정도 되는 마법사를 꼭 뵙고 부탁드릴 일이 있다고 해서요. 킨님은7서클 마법사 호라크님과 가까운 사이 아니십니까?" 장교는 한숨을 내쉬었다. "감히 내가 호라크님과 가깝다고 자처할 수는 없지만, 이러나저러나 상관없게 되어버렸네. 호라크님은 저번 전투에서 전사하셨으니." "예에?!" "믿어지지 않겠지만 사실일세. 그것도 동제국 테룬 황제의 칼에 맞아 도아가신 걸세." 구와인은 입을 쩍 벌렸다. "믿기 어려운가 보지?" "예." "그럼 저번 전투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주지. 우리 카로딘군이 동제국군과 붙은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한 건 알고 있나?" "예, 물론입니다." "그 첫 번째 전투에서의 승리가 패착이었어. 우리 모두 방심했지. 전쟁의 방향을 가를 정도로 대규모 전투가 아니었는데, 국지전에서의 승리만으로 모두 자만한 거야. 특히 일드인 대공 전하께서 그러셨지. 대관식 전에 앞당겨 개전한 게 주효했다고 판단하고, 이제 파죽지세로 동제국 수도 브림까지 밀고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셨나 보네." "그래서요?" "그래서 우리 제 8마인대는 브림까지 가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할 요지인 푼단 고원으로 향했지. 제 5, 제 10만인대는 그대로 이곳에 남아 수도를 방위하고. 그밖에 이미 전방에 있던 병사들까지 합쳐 그곳으로 향한 군대가 대략 4만 명 정도였다네. 총대장은 팔빈 백작님이시고. 내 백인대는 우익을 맡아서 전진해는데, 그나마 그게 다행이었네. 중앙부는 거의 괴멸하다시피 했으니." "어쩌다가요?" "처음 전쟁을 시작할 때 우리 쪽 정보원들의 정보에 따르면 급히 집결한 동제국군은 겨우 2만 명이고, 동제국의 유일한 8서클 마법사 쿠드는 궁성을 떠날 수 없어서, 그쪽의 최고 마법사는 7서클밖에 안 된다고 했지.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까 동제국군 2만명에 프린다인공국군 2만명이 더해져 저쪽 군대는 총 4만 명인 걸세. 게다가 저쪽에서도 8서클 마법사가 있었던 거야. 프린다인 공국에서 데려온 뭐래더라? 라우프였더가? 어쨋든 우리 쪽에서 8서클 마법사가 두 명인데다가 저쪽은 신병들이고 우리는 정병이라 승산은 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요?" "전쟁은 숫자놀음이 아니라네. 더하기 빼기 하고 얼마가 남느냐 그런게 아니지. 그런 거라면 얼마나 간단하겠나?" 동제국군의 사령관은 그 유명한 팔라르 데 매긴이었다네. 덩치 크고 육중하지만 여우같이 약삭빠른 놈으로 유명하지. 그가 새로 합류한 프린다인 공국군까지 자기 수족처럼 부리면서 우리 군을 밀어붙이는데, 거기에 정신없이 대처하다보니 우리 쪽 대형이 무너지기 시작했지. 그때 8서클 마법사 베오인님이 나서셨다네. 하지만 올리오인님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셨지. 그래도 아쉬운 대로 8서클 마법사 두 분 중에 한 분이라도 나타나니까 한시름 놓이더군.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나? 동제국의 테룬 황제가 직접 전쟁터로 뛰어든 거야! 뭐, 저쪽에서도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겠지. 원래 황제란 후방에서 보호받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보기엔 자기네 황제가 직접 나서니까 동제국군도 당황했던 것 같아. 아무튼 테룬 황제는 어마어마한 검강을 뿌리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전선을 뚫고 일직선으로 베오인님에게 달려들었지. 나는 그때 옆의 백인대장이 말해주어서 처음 알았는데, 소드 마스터의 검이면 8서클의 마법이나 방어구 정도는 손쉽게 벨 수 있다는 거야. 베오인님은 입이 쩍 벌리고 당하기 직전이었지. 그런데 베오인님 바로 옆에 서 있던 7서클 마법사 호라크님이 방어구를 일으키며 테룬 황제 앞을 막아선 거야. 당연히 베 오인님은 칼에 맞았고, 검기는 호라크님의 방어구를 찢고 다시 베오인님의 방어구마저 찢어버렸어. 하지만 베오인님은 자기 때문에 죽은 호라크님 쪽은 쳐다봊도 않고, 잠깐 여유가 생기자 즉시 순간이동마법으로 줄행랑을 쳐버렸다네. 세상에! 치사하지 않나? 아무튼 마법사란 족속이 하는 짓이 참! 그러고도 불알 달린 사내라 할 건지, 원. 암튼 그래서 테룬 황제는 사실상 적진에 고립된 셈이었지만, 우리 쪽에서 얼이 빠져 있는 동안 동제국 황제 친위대와 병사들이 재빨리 황제가 만들어 놓은 빈자리로 밀고 들어왔지. 그족 8서클 마법사 라우프도 계속 엄호마법을 쓰고 테룬 황제도 다시 자기 진영으로 살육을 계속하면서 우리 군의 중앙부는 완전히 괴멸되어버렸다네. 상대방을 막을 고위마법사도 이제 한 명 없으니, 그야말로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지. 끔찍한 광경이었어. 테룬 황제는 그 무시무시한 검기를 뿌리며 반쯤 미쳐서 우리 병사들을 끝없이 척살하는데, 무슨 악귀나 마왕 같았네. 아니, 피에 굶주린 살인마 같았지. 황제가 지나가고 나면 다 쓰러지고 빈자리만 남았어. 이번 전쟁이 내가 참전한 전쟁 중 큰 전쟁으로는 세 번째이고 자잘한 전투는 스무 살 때부터 수도 없이 겪었지만, 그렇게 무서운 광경은 처음이었다네. 아마 동제국 황제와 그 친위대 손에 순식간에 천 명에 천명은 죽었을 거야. 한 번 그렇게 전열이 흐트러지고 나면 끝장인 건 알지? 우리 쪽 사령관인 팔빈 백작님께서 결국 후퇴를 명하셨는데, 테룬 황제는 정말 비정하더군. 테룬 황제와 그 부하들은 후퇴하는 우리 군 병사들을 끝까지 쫓아서 계속 죽이는데, 그건 전투가 아니라 그냥 도살이었어. 그래서 전사자 수가 대폭 늘어났지. 보통은후퇴하면서 부상자들을 수습할 여유 정도는 있는데, 그때는 그런 여유도 없었거든. 그리고 원래 우리 카로딘군은 부상자에 대해 냉정하니까. 자기 발로 걸을 수 있는 부상자들은 죽어라 뛰어 도망쳤지만 그렇지 못한 녀석들은 그냥 죽을 수밖에 없었지. 아마 총 4만 명중 2만 명은 죽었을 거야. 전장에서 여기까지 한 잠도 자지 않고 만 하루를 꼬박걸어 돌아온 게 엊그제 일이라네." 킨은 부르르 떨었다. "어쨋든 나는 살았어. 그리고 내 부하들도 대부분 살았고. 그거면 됐지." 킨은 힘없이 덧붙였다. 킨의 비장한 이야기에도 구와인은 기가 죽지 않았다. "원래 전쟁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닙니까? 살 사람은 살고, 죽을 사람은 죽는 거지요. 제가 듣기로는 카로딘이 절대 호락호락 꺾이지 않을 거라던데요." "말이라도 고맙네. 그나저나 자네는 내 이야기를 다 듣고도 끝끝내 종군치료사로 지원할 생각인가?"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어지간한 위험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집니다. 절 걱정해주는 살마도 없고 말입쇼. 그리고 이 구와인이 누굽니까? 이럴 때 제가 전장으로 안 나가면 누가 나가겠습니까?" 킨은 피식 웃었다. "자네 속셈은 다 아네. 전쟁터에서 귀금속 훔치는 짓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구와인은 머리를 긁젹였다. "도박에 손을 대는 바람에........... 뭐, 대장님이야 당연히 눈감아 주시겠지요? 그래도 웬만하면 적군의 것만 훔칠 겁니다." "자네를 누가 말리겠나." 킨은실소했다. "그나저나 대장님 그렇다면 7서클 마법사를 만날 방법은 있습니까?" "호라크님이라면야 내가 주선을 해줄 수 있었겠지만 돌아거셨고. 글쎄, 현재 야전병동을 책임지고 있는 6서클의 비조닌 마법사님께서 사실은 7서클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던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네. 하지만 그분은 개인적으로는 잘 몰라." "예, 감사합니다. 그저 몸조심하십쇼." "고맙네. 야전병동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지? 저쪽 제 5만인대 깃발 오른쪽으로 30데보탕(1데보탕은 약 3미터임) 정도 떨어진 파란 천막이야. 그저께 저녁때 부상병들이 몰려와서 아마 엉망진창일걸." "예." "자네도 몸조심하게." 킨 백인대장은 구와인의 손을 잡아 토닥거리고는 놓아주었다. 둘 사이에 따뜻한 정이 흐르고 있다느 건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구와인은 렌을 데리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 "들었지? 일이 꼬이는구나. 원래 호라크님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건데, 어쩌냐. 호라크님은 저 킨 백인대장님한테 빚이 있고 킨 백인 대장님은 나랑 보통 인연이 아니어서 저분을 통해 부탁하면 어찌어찌 될 줄알았는데. 비조닌 마법사님이 7서클이라면 좋겠지만, 혹시 7서클이래도 아마 네 부탁을 쉽게 들어주지는 않을 거다." 렌은 테룬 황제가 피에 굶주린 살인마가 되어 천 명이 넘는 병사들을 베었다는 이야기가 아직도 귀에 쟁쟁해서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 병사들이 죽은 게 자기 탓이 아니라는 것은 렌도 알고 있었다. 렌이 살린 사람 모두의 죄악을 렌이 책임질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렌은 가슴이 아팠다.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다. 이런저런 잡생각은 커다란 파란 천막 앞에 이르자 싹 사라졌다. 렌은 거? ?본능적으로 천막 속에서 새어나오는 질병과 괴사와 피의 냄새를 맡고 흠칫했다. 엄청나게 강한 냄새였다. 콜레라가 횝쓸던 마이리아 시 빈민구역의 냄새와도 다소 비슷했지만, 거기보다는 배설물 냄새가 약하고 피 냄새와 썩는 냄새가 짙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오랜 여행을 갔다 돌아와 냉장고를 열어보니 전원이 나가서 냉장고 안의 모든 음식이 한꺼번에 썩어버린 것 같은 냄새였다. 저버에 마이리아 시에서 평생 맡을 고약한 냄새를 다 맡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지독한 냄새도 있다는 걸 렌은 깨달았다.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구와인도 역시 냄새를 맡고 얼굴을 찌푸렸으나 곧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진 천을 젖히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맙소사, 많이도 당했구먼!" 구와인은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르게 외쳤다. 거대한 천막 안에는 얼핏 보아 약 4, 5백 명 정도 되는 부상자들이 촘촘히 눕혀져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찔리고 찢기고 잘려 엉망진창이었다. 신음하거나 정신을 잃고 있는 부상자들 사이로 대여섯 명의 의무병들이 붕대를 갈아주기 위해 왔다 갔다 하고 있었지만 부상자의 수가 워낙 많아 그들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대부분의 붕대는 더럽고 피에 흠뻑 젖어 있었으며 환자들은 거의 아무런 처치도 못 받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끔찍하게 지저분했다. 구와인은 익숙한 눈길로 천막 안을 훑어보고는 말해다. "레진아, 너는 부상병을 처음 보냐? 여기까지 걸어와서 누워 있을 수 있는 정도면 괜찮은 거다. 정말로 전황이 다급했는지 중환자는 전부 버려두고 걸을 수 있는 환자만 데려온 거야. 그래도 사람목숨이란 게 질겨서, 저 사람들 중 3 분의 2정도는 살아날 거다." 중세와 근세의 중간쯤에 있는 이 세계의 전투는 마법으로 인해 그 양상이 아주 다르게 전개되었다. 기사와 보병, 궁병, 성벽에 마법사가 추가되면서 전투는 더 복잡해지고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저쪽의 마법사가 화염마법을 쏘면 이쪽 마법사는 방어마법으로 막아야 한다. 만약 마법의 교환에서 어느 한쪽이 실패하면 마법은 병사들 머리 위에 떨어져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수백의 사상자를 낸다. 그만큼 마법사의 역활이 중요하지만, 마법사는 대포알 수가 한정되어 있는 대포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포격의 수와 강도는 마법사클에 의해서 정해진다. 결국 마법사를 얼마나 확보하는가, 그리고 그들을 얼마나 유효적절하게 전투에 투입하는 가가 승리의 관건이었다. 어떤 지휘관은 마법사를 기선제압용으로 쓰고 어떤 지휘관은 막판에 사용할 비장의 카드로 아껴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적군의 마법을 어느 정도 막아낼 만큼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마법을 쓸수 있는 자들이라면 치유마법사마저도 긁어모아 전장으로 세우는 것이다. 그래도 마법사들은 전장레서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원거리에서 적군을 공격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아군에 둘러싸여 후방공격만 하면 되었다. 또 상대방 마법사가 마법으로 공격해도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있는 곳까지 날아오면서 많이 약해지기 때문에 방어구나 방어마법으로 자기 한 몸은 보호해낼수 있었다. 그리고 진짜 절박한 위기의 순간에는 염치불구하고 순간이동마법을 펼쳐 혼자라도 도망가 버리면 된다. 물론 저번 푼단 고원의 대전투처럼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 마법사가 죽게 되는 경우도 가끔 있었지만 그런 일은 정말 드물었다. 그렇게 전투가 끝나면 시체와 바상자가 남는다. 이긴 쪽이든 진 쪽이든 마찬가지다. 대체로 전장의 관례는 이긴 쪽에서 먼저 자기네 부상자와 사망자를 수습해가고, 그 다음 진 쪽에서 나선다. 모아진 시체와 부상자들은 마법사들이 후방으로 순간이동시킨다. 전투가 격렬했다면 마법사들의 마나가 극한까지 소진되어버렸을 테니, 마법사들의 마나가 회복되기까지는 반나절 내지 꼬박 하루가 걸린다. 그러니 부상자들을 수습하는 것은 전투로부터 반나절내지 하루가 지난 시점읻. 이때쯤이면 대출혈이 있거나 내장파열을 당한 중환자들은 이미 죽어버린 후이다. 마법사들은 생존자 중에서 살 가망성이 있는 부상병, 살 가망성이 없더라도 귀족인 부상자, 지위가 높은 전사자를 모아 남은 기력을 총도원해 그들을 후방으로 순간이동시킨다. 물론 진쪽의 거동이 불가능한 부상자중 지위가 높은 자가 있다면 이긴 쪽에서 먼저 포로로 잡거나 주살한다. 그러나 마법사들이 이 전투에서 마법을 소진해버린 경우, 부상자들은 별수 없이 자기 발로 후방까지 걸어가야한다. 결국 이 후방까지 오게 된 부상병들은 전투에서 죽지도 않고, 다시 꼬박 하루 이틀 정도를 전장에 버려진 채 버티거나 아니면 후방까지 제 발로 걸어온 장하고 끈질긴 자들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방까지 온 부상병들은 대부분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살아날 수 있는 경상자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상 당수가 죽어갔다. 얼이 빠져 있는 렌은 아랑곳하지 않고 구와인은 천막 구석의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마법사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얼굴에 금방 비굴하고 약삭빠른 표정이 떠올랐다. "마법사님, 종군 치유마법사님이시죠?" 마법사는 구와인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3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잘생긴 마법사는 너무 지쳐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렌이 보기에 그는 마치 격무에 시달리는 엘리트 의사 같았다. "저는 전에 종군치료사로 일을 해본 경험이 있는 치료사 구와인이라고 합니다. 보수만 괜찮다면 이번 전쟁에서도 제 미력한 힘을 보태드리고 싶습니다." 마법사는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어떤 경험이었지?" "최근에는 카로딘-오스린 전쟁과 카로딘-볼린 전쟁입니다. 그 밖에도 그 이전의 전투에 여러 차례 참전했습니다." 구와인은 나무패를 다시 꺼내 마법사에게 보여주었다. 마법사는 보는 둥 마는 둥 나무패를 책상 위에 던져놓고 말했다. "여차하면 전투현장에 투입될지도 모른다. 자네는 그래도 종군치료사로 일하고 싶은가?" 구와인은 약간 흥분된 어조로 대답했다. "위험이 있는 곳에 이익이 있는 법이지요. 위험한 만큼 수당은 더 잘 쳐주시겠지요?"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한 달에 3골드를 주고, 전투가 벌어지고 최전방에 나가게 되면 전투 1일당 10실버씩 추가 수당을 지급하겠다. 자네는 경험이 많아 보이니 내 밑에서 일하고, 의무병들 몇 명을 추가로 훈련시켜서 치료사 보조 노릇을 할 수 있도록 해주게. 최소한 붕대 감는 거랑 지혈하는 거라도 가르쳐놓게. 내 이름은 비조닌이고 6서클 치유마법사다. 군대의 계급으로는 대강 백인대장보다는 높고 천인대장보다는 낮지만, 우리는 별도 계급체계로 운영되니까 자네는 내 명령만 들으면 된다. 전에 해봤으니까 잘 알겠지만, 치료사는 대략 십인대장급 대우는 받을 수 있다. 치료사는 원래 천막당 세 명씩은 배치되야 하는데, 그 중 한명이 지난 번 전투에 파견되었다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결원이 생겼으니, 그 자리에 자네가 들어가게. 의무병들은 천막당 다섯 명씩 있는데, 자네 밑으로는 한 병이 배치될 거다." "옛, 마법사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 소년은 뭔가?" "아, 예, 원래 제 조수인데, 종군치료사 하려고 온 건 아니굽쇼, 그냥 볼일이 있어 절 따라온 겁니다." "그래 알겠다. 근무는 내일부터다." "예." "저, 혹시 마법사님께서는 7서클이 아니십니까?" 구와인이 묻자 비조닌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구와인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벌써 소문이 퍼졌군. 숨기려고 했지만 할 수 없지. 7서클인 걸 자랑하고 다니다간 언제 공격마법사로 끌려갈지 몰라 숨기고 있었던 건데. 일부러 떠벌리고 다니지만 말게." 구와인은 멍하니 환자들을 둘러보던 렌을 쿡 찔렀다. "야, 레진아, 어서 부탁드려봐라. 7서클이시라잖아." 렌은 야전병동의 끔찍한 상황에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그나마 중환자는 모두 버려두고 경환자만 데려다 눕힌 것이 저 꼴이라니. 렌의 눈으로 보기에 당장 제대로 된 처치를 하지 않는다면 저들 중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은 반도 안될 것 같았다. 더러운 붕대, 피에 절은 요와 이불, 씻지 않은 손으로 이 환자 저환자 주물러대는 치료사와 의무병들. 저 환자들은 차라리 야전병원에 오지 않고 그냥 숙소에서 쉬는게 나을 뻔했다. 저대로 놔두명 환자들 상당수는 소위 '병원 괴사'증세로 죽어갈 것이다. 게다가 부상을 입은 후 하루 이틀 정도 지나버렸다면 이미 손상처치의 '황금시간(Golden Hour)'은 지나가버린 셈이었다. "잠깐만요." 렌은 구와인을 끌고 천막 밖으로 나왔다. "부상병으 보니 끔찍하냐? 그래 가지고 앞으로 무슨 담력으로 치료사질을 해서 먹고 살겠다는 거냐?" 구와인은 쯧쯧 혀를 찼다. "지금 본 천막이랑 그 옆의 파란 천막이 야전병동인가요?" "그래." "저건 설마 임시병동이겠죠? 환자들은 저기서 잠깐 있다가 다른 병원으로 옮겨지는 거겠죠?" 렌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냐. 그나마 여기가 제일 괜찮은 시설이야. 치유마법사님께서 계시지 않냐. 그리고 병원은 무슨. 자그마한 게 하나 있었는데, 치유마법사님들이 다 참전하면서 문을 닫았지." "치유마법사가 앉아 있으면서 왜 아무것도 하지 않죠? 최소한 외상 환자는 치료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렌은 날카롭게 물었다. 구와인은 철없는 아이를 보듯 한심하게 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치유마법사가 치유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질 않냐. 7서클이라 해도 스무 명쯤 연속으로 치유마법을 쓰고 나면 기진맥진하지. 지금 부상병은 수백 명이니, 저 한 분으로는 역부족이겠지. 그나마 존경할 만한 분이지 않냐. 보통 치유마법사는 장교나 귀족들이나 돌보지 졸병들한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데, 척 보니까 저분은 힘이 다 빠질 때까지 일반 사병들한테까지도 치유마 법을 펼쳐주신거 같던데." "다른 치유마법사는 없나요? 왜 저분밖에 없는 겁니까?" 렌은 애가 타서 물었다. "내 생각에는, 지금 전황이 워낙 불리하니까 아마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은 전부 전장으로 끌어내 공격마법 담당으로 돌린거 같다. 치유마법사라도 대부분 자기 신변보호를 위해 어설픈 공격마법은 쓸수 있으니까 아쉬우나마 전력에 도움이 되거든. 저양반도 그러지 않냐. 7서클인게 밝혀지면 공격마법사로 끌려간다고." 렌은 치를 떨었다. 몸속에서 무슨 불길 같은 것이 치밀어 올랐다. 저 병사들이 테룬에게 당한 부상병이라는 것, 끔찍하게 더러운 환경에서 죽음만 기다리고 있다는 것, 윗사람들이 저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않고 있다는 것,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뒤죽박죽 되었다. 저들을 치료하지 않으면 안돼. 내가 낫면 최소한 지금보다는 덜 죽을 거야. 하지만 그러다가 정체가 발각되면? 카엔님이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다시 못 만나게 된다면? 렌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레진아, 뭘 망설이냐? 밑져야 본전이데. 자, 어서 부탁하자꾸나." 구와인은 렌을 끌고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저, 마법사님, 이 녀석은 제 조수인데, 미즈넨 산맥 서쪽으로 불치병에 걸리셔서 오늘내일하는 어머니가 계신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어머니 얼굴을 보고 싶다는데, 마법사님께서 아시다시피 미즈넨 산맥을 건너는 순간이동은 7서클이 넘어야 가능하지 않습니까? 혹시 마법사님의 도움을 받아 순간이동을 할 수 없을까요? 이녀석이 대가르 지급한다고 하는데요." 구와인은 렌이 해준 이야기에다가 한술 더 떠 애절하게 말하며 비조닌의 눈치를 살폈다. 렌은 착잡한 심정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죄책감이 스멀스멀 가슴에서 부터 피어올랐다. 그가 도와주겠다고하면 여기서 죽어가는 저 부상병들은 그냥 잊어버리고 훌쩍 서제국으로 날아가야 하나?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아무리 카엔님과 행복해진다 하더라도 순간순간 저들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지 않을까? 저들을 버리고 떠났다는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지금 제정신인가? 날더러 병영을 비우고 순간이동을 시켜달라고?!" 비조닌이 버럭 소리지르자 구와인은 기가 죽어 손바닥을 비볐다. "에, 그래도 마법사님은 상대적으로 출입이 자유롭지 않읏비니까? 보아하니 급한 환자는 대강 보신거 같고, 이녀석 사정도 워낙 급해서요. 이틀이면 될 텐데요. 대가는 지불한다고 하는걸입쇼." 비조닌은 구와인의 말에 새삼 렌을 살펴보았다. 갑자기 렌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비조닌의 눈이 빛났다. "너 혹시 마법을 쓸 줄 아니?" 렌은 주저하며 대답했다. "예, 배운 지 얼마 안 되기는 했지만요." 비조닌은 벌떡 일어났다. "날 따라오너라." 그는 황급히 렌을 자기 개인천막으로 잡아 끌었다. 구와인도 멍청하게 따라왔다. "어디, 네가 발할 수 있는 마나르 전부 다 발해보렴. 마나구는 만들 줄 알지?"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작해봐." 마법사는 조금 전까지의 무력함을 순식간에 떨여버린 듯 초조하게 말해다. 렌은 그의 열정에 이끌렸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눈을 감고 마나의 흐름을 느끼며 주위의 흐르는 물의 마나를 심장으로 끌어당겼다. 심장이 터질 정도로 정도로 마나가 모이자 렌은 마나를 두 손으로 흘려보냈다. 두 손 사이에서 탁구공만 한 검은 마나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됐다." 비조닌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르 끄덕였다. "잘됐구나! 잘됐어!" 구와인은 멍청하게 물었다. "뭐가 잘됐다는 겁니까?" 비조닌은 렌을 향해 밝게 웃었다. "네 부탁을 들어주겠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나를 도와 보조 치유마법사로 일해다오." 렌은 어안이 벙벙해서 멍하니 비조닌을 쳐다보았다. "보조 치유마법사라고요?" "그래, 지금 부상자를 돌볼 치유마법사가 너무 부족해서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는데, 네 마법이면 최소한 하루에 서너명은 더 치료할 수 있겠다!" 비조닌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왜 하필 한 달입니까?" 구와인이 끼어들었다. 비조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우리 카로딘이 이기든 지든 이 전쟁은 한 달 이상 가기는 어려울걸세. 워낙에 일드인 대공께서 정면승부를 하려 하시니." 구와인은 다시 물었다. "그럼 완전 대전투에 휩쓸리게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다가 죽으면 어떡합니까?" 비조닌은 자꾸 초를 치는 구와인이 얄미운 듯 째려보았다. "자네도 알다시피 치유마법사는 군대의 후방에서 주로 활동하니 어지간하면 죽을 일은 없을 걸세." 비조닌은 다시 고개를 돌려 렌에게 사정했다. "지금 보다시디 이곳의 상황은 말이 아니다. 마법사란 마법사는 전부 공격마법사로 전방에 끌려가고, 부상병은 끝없이 밀어닥치는데 태반은 손도 못 대 채로 죽어버리니, 나 혼자서 이리뛰고 저리뛰고 해도 도무지 방법이 없고. 네가 도와주면 큰 도움 이 될 거다. 겨우 한달이야. 직위도 백인대장급 대우를 받고 월급도 섭섭지않게 나오고, 혹시 치유마법을 모르면 내가 치유마법도 가르쳐주마, 응?" 비조닌의 말을 듣던 렌의 가슴에 서서히 안도감이 차올랐다. 저 부상병을 버리고 가지 않아도 된다. 그들을 치료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서제국으로 가는 거다. 렌은 문득 깨달았다. 비조닌이 바로 순간이동을 시켜주겠다고 했다더라도 렌은 결국 거절하고 부상병을 돕기 위해 남았을 것이다. 렌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정말 잘됐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자꾸나. 내일 아침 일찍 여기로 와라." 렌은 문득 생각나 물었다. "저, 아까 월급도 주신댔죠?" "그래, 6골드를 지급하겠다." 자기 월급이 카엔이 받는 월급의 여섯 배나 된다고 생각하니 쓴 웃음이 나왔다. 맙소사, 나는 날강도나 다름없는 헐값으로 9서클 마법사를 부려먹었었구나. "일부라도 선불을 받을 수 있을까요?" "얼마나 필요하냐?" "돼는 대로요." 비조닌은 금고에서 1골드를 꺼내주었다. "그럼 내일 보자꾸나!" 비조닌은 유쾌하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렌은 1골드 금화를 손에 들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직접 생명유지장기를 다치지 않는 한 전장에서 부상병들이 죽는 가장 큰 두가지 원이은 출혈과 간염이었다. 현대전에서조차 그랬는데 하물며 수혈도 소독도 없는 이 세계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조금 전 본 부상병들 중 출혈이 문제인 부상병은 거의 없었다. 피를 많이 흘린 부상병들은 이미 다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염은 과다출혈을 피한 부상병들의 생명을 계속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니 최소한 추가적이 병균노출은 막아야 했다. 렌은 기억을 더듬었다. 화학공업적으로 소독약이 대량생산되기 전에 쓰였던 소독약이 뭐였지? 곧 렌은 어느 의학사 책에서 본 내용을 떠올렸다. 소독약이 사용되기 전, 그러니까 19세기 초중반까지는 수술을 받은 환자 40퍼센트 정도만 살아남을 정도로 병원감염률이 높았고, 그래서 '환자는 사망해도 수술은 성공한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 였다. 그러다가 리스터라는 의사가 1860년대에 석탄산에 적신 붕대로 사지절단환자의 환부를 감싼 데에서 소독은 시작되었다. 석탄산에 적신 붕대로 수술환자를 처치하자 열한 명의 수술환자 중 두 명을 제외한 모든 환자가 완쾌되었다. 석탄산 용액을 스프레이로 병실과 수술실을 뿌리자 감연률은 더욱 낮아졌다. 그 명성으 곧 전 유럽에 퍼져갔다. 그래서 석탄산(페놀,phenol)은 소독약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석탄산 계수'는 소독약의 소독력을 나타내는 기준으로 현대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나 석탄산은 독성이 있고 환부에직접 닿을 경우 자극이 심하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에탄올 70 퍼센트 용액, 질산은 용액, 포름알데히드, 머큐로크롬, 옥도정기 같은 다양한 소독약들이 그후로 차례로 등장했다. 그 여러가지 소독약 중 이곳의 중세적인 기술로 제조 가능한 건 에탄올과 석탄산 정도였다. 에탄올과 석탄산, 어떻게 구한담? 그리고 소독약도 소독약이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식염수가 많이 필요했다. 끓여서 멸균한 후 소금을 넣은 생리식염수가 있어야 환부를 세척하고 균을 희석시킬 수 있었다. 그나마도 원래는 증류수로 만들어야 하는 거지만, 아쉬운 대로 그냥 끓이기라도 해야 했다. 할 일이 너무 많아 렌은 한숨이 나왔다. 일단 내일부터 일을 시작히게 되면 밖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을 테니 오후 내로 소독약을 구하거나 만들 수 있을지 알아봐야 했다. 그 여러 가지 재료 중 제일 구하기 쉬은 것은 역시 알코올이었다. "저, 구와인 아저씨, 전에 보니까 등잔용으로 알코올을 쓰던데 그런 건 어디서 구하죠?" 렌은 천막 밖에서 빈둥거리던 구와인을 찾아 물었다. 구와인은 기막혀 하며 대답했다. "그런 귀한 걸 등잔용으로 쓴다고? 맙소사, 그런 건 돈이 썩어나는 서제국 봄 여신의 신전에서나 하는 짓이야. 사람이 마실 술도 모자라는데, 그걸 등잔용으로 태우다니! 돼지기름이나 쓸 것이지, 곡식으로 만든 알코올을 태워 없애다니! 어쨋든 우리 카로딘에는 그런 나쁜 풍습은 없다." 렌은 곤란해 하며 다시 물었다. "그럼 아저씨가 아는 사람 주에서 혹시 증류즈 제조업에 종사하거나 그 관련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은 없나요?" 구와인은 조금 생각하다가 이마를 탁 쳤다. "있지! 있고말고! 대공국의 뒷골목, 그러니까 우리가 어제 묵은 그 술집 겸 여관 주인이 양조장을 하는데, 거기서 아주 독한 화주를 만들어내거든. 그 아들네미가 징집을 당했는데, 지 아버지가 뇌물을 무지 많이 써서 전방으로 안 가고 여기 후방의 취사병으로 눌러 앉았다고 하더라. 이름이 뭐랬더라? 부빈이던가? 보빈이던가? 그래, 부빈이었어." 렌은 다행이다 싶어서 다시 물었다. "혹시 이 근처에 석탄을 연료로 많이 때는 공장이나 사업장이 없나요?" "바로 그 ? 瑩뗌恙【?얼마 안떨어진 제철소에서 석탄을 많이 때지. 선철을 만들려면 코크스가 필요한데, 코크스를 만들려면 석탄을 때야 하거든." "그 제철소에서 석탄을 때고 난 후에 시커멓고 끈적한 물 비슷한것이 줄줄 흐르지 않나요?" "응, 잘 아네?" "그 부빈이라는 병사 좀 만나볼 수 있을까요?" "음......... 아마 제 10만인대 1번 식당에서 근무하고 있을 거다." 구와인은 귀찮아하면서도 렌을 부빈에게 데려다 주고 자기는 볼일이 있다면서 어디론가 가 버렸다. 둘은 저녁때 다시 전날 묵었떤 대공국의 뒷골목에서 만나기로 했다. 부빈은 20대 초반의 귀여운 청년이었다. 고생을 하지 않고 곱게 자란 티가 역력했지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식사와 식사 사이의 한가한 시간이라 그는 식당 구석에 앉아 빈둥거리고 있었다. "부빈님, 저는 내일부터 종군치료사로 일하게 된 레진이라고 합니다. 뭐 좀 부탁드릴게 있는데요." 렌은 자신을 치유마법사로 소개하는 게 어색해서 그냥 치료사라고 말했다. "무슨 일이오?" 종군치료사는 따로 계급이 없지만 군대 내에서 종군치료사를 십인대장급으로 대접했기 때문에 일단 부빈은 렌에게 어정쩡한 경어를 썼다.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아주 강하게 증류한 술을 구할 수 있을까요? 맑은 술이요." 부빈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집안이 양조장을 하기는 해도 군대 안에서 술을 들여오는 건 금지되어 있어서.... " 다시 부탁하려던 렌은 병사의 안색을 자세히 보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저, 잠깐만요." 렌은 병사의 손목을 번갈아 잡으며 좌우의 촌구(寸口:양쪽 손목에서 맥이 뛰는 부위, 손목뼈 말단에 있는 조그마한 돌기를 중심으로 좌촌(左寸), 좌관(左關), 좌척(左尺),우촌(右寸), 우관(右關), 우척(右尺)으로 나뉜다)를 짚으니, 좌척에서 맥이 뜨고 크게 빠르고 힘이 있었다. 좌척은 신(腎)이니, 거기에서 양(陽)하고 실(實)한 맥이 잡힌다는 것은 배설기관 쪽에 염증이 생겼다는 말이었다. 렌은 다시 눈을 감고 맥을 천천히 느껴보었다. 다시 짚어도 마찬가지였다. 부빈의 안색을 찬찬히 살핀 렌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병사님, 혹시 거시기에 염증이 있지 않으십니까?" 부빈은 화들짝 놀랐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벌써 말투부터 달라졌다. "증상이 어떻게 되시죠?" 부빈은 얼구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에, 저기, 그러니까, 2, 3일 전부터 오줌구멍이 붓고 따끔거리더니, 어제부터는 거기서 고름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오줌을 눌 때마다 거시기가 뜨겁고 아픕니다." "많이 아픈가요?" 렌이 묻자마자 그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많이 아파요. 일다 저 고자가 되는 거 아닙니까? 아직 장가도 못갔는데요. 제가 맏아들이라 집안을 이어야 하는데, 저 아들도 못 낳으면 어떻해요? 치료사님, 어쩌면 좋지요?" 부빈은 그동안 창피해서 누구한테도 말 못하고 끙끙 앓다가 마침내 털어놓게 되자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이제는 아예 줄줄 울다가 딸꾹질까지 했다. "제가 한 번 봐도 될까요?" "거시기를요?" "예, 봐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빈은 머뭇거리며 허리띠를 풀고 남근을 드러냈다. 포경도 하지 않고 씻지도 않아 극악한 모양을 하고 있는 남근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풀풀 풍겨왔다. 렌은 혐오감을 억누르며 거시기 끝이 벌겋게 부어오르고 고름이 맺혀 있는 걸 확인했다. 임질인 게 거의 확실했다. 사실은 이리저리 돌려 확인해봐야겠지만, 차마 저 물건을 손으로 잡고 확인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절대로, 절대로 고름 만진 손으로 눈을 만지면 안 됩니다! 잘못하면 장님이 됩니다!" 렌은 엄격한 말투로 주의를 주었다. 만일 농이 눈에 들어가면 농루안(膿漏眼:임균에 감연되어 일어나는 급성결막염으로, 고름이 흘러나오고 심한 경우 실명하기도 한다)이 될 위험이 있었다. 부빈은 겁에 질려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마음을 진정한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이 병은 서제국 병이 맞기는 맞는가요?" "예." 렌은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정말로 웃기는 이야기지만, 카로딘 사람은 성병을 서제국 병이라고 하고, 서제국 사람드은 동제국 병이라고 하고, 동제국 사람은 카로딘 병이라고 했다. 마치 매독을 이탈리아 사람은 프랑스 병으로, 프랑스 사람은 나폴리 병으로, 러시아 사람은 폴란드 병으로, 폴란드 사람은 독일 병으로 부른 거나 비슷했다. "최근에 병에 걸릴 만한 무슨 계기라도 있었습니까?" 부빈은 얼굴을 붉힌 채 털어놓았다. "사실은 닷새쯤 전 외출허가가 나와서 카로드 뒷골목의 창녀집에 갔는데, 그년이 병에 걸렸나봅니다. 처녀라고 우기더니, 나 참." 렌은 야단쳤다. "스스로 조심하셨어야죠! 병영 근처 창녀촌들이 위험하다는 건 어린애들도 다 아는 건데, 쾌락이 좋아도 목숨은 소중히 여기셔야죠! 앞으로 정히 하고 싶으면 다 나은 후에 자위로 해결하십시오! 그리고 성교는 장래를 약속한 사람하? 炙?하시고요!" 부빈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저, 나을 수 있는 건가요?"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페니실린이 없어서 쉽지는 않겠지만 고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예, 그러니까 어서 그 물건이나 집어넣으십시오." 렌이 인상을 구기며 말하자 부빈은 병이 나을수 있다는 말에 화색을 띠며 주섬주섬 바지를 올렸다. 렌은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일단 우슬(牛膝:쇠무릎뿌리. 혈액이 잘 돌게 하고 어혈을 없애는 성질이 있으므로 월경불순, 난산, 산후복통, 산후자궁무력증, 타박상, 부스럼등에 쓴다. 식균작용을 해서 임질에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을 꺼내주었다. 가을에 캐는 약초여서 미리 뿌리를 씻어 말려두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이걸 매일 이만큼 정도 달여 드십시오. 양이 좀 부족할 텐데, 근처 언덕을 찾아보면 찾기 어렵지 않을 테니 떨어지면 조금 더 찾아서 드시고요. 그리고 혹시 알로에를 구할 수 있을까요?" 알로에는 강력한 살균, 소염작용을 하기 때문에 페니실린이 없는 이 상황에서 그나마 차선책이었다. 렌이 알로에의 생김새를 조금 설명하자 부빈은 손뼉을 쳤다. "아, 그거요!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척박한 언덕에 많이 자라고 있죠! 저는 이고장 토박이라서 잘 압니다." "그 알로에를 잘라서 즙을 낸 후 환부에 바르기도 하고 먹기도 하십시오. 그로기 제발 그 물건좀 깨끗하게 씻으십시오." 렌은 눈살을 찌푸리며 부빈의 아랫도리를 가리켰다. "에헤헤, 예." "그리고 알로에가 남으면 있는 대로 채취해서 제가 가져다주십시오. 다른 환자 치료에도 필요합니다. 저는 야전병동에서 근무하게 되었으니까 밤에 저를 찾아오시면 치료해 드릴게요. 침도 놓고 이것저것 해야 하니까요." "예, 잘 알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요. 이래봬도 제가 뒤 배경이 좋은 편이라 치료사님 말씀하시는 건 어지간히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부빈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렌은 부빈이 예상치 않게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나오자 조금 당황했지만,사실 맥 한 번 짚어보고 안색만 조금 들여다본 후에 어디가 아픈지 알아낸다는 건 이 세계 사람들한테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부빈이 그러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럼 아까 부탁한 증류주를 구할 수 있을까요? 보통 마시는 증류주보다 두 배 정도 독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원래 소독용 에탄올은 전혀 물에 타지 않으며 반응성이 떨어져서 소독효과가 없고 반면에 올코올 농도가 50퍼센트 이하로 내려가도 역시소독효과가 현저히 떨어졌다. 렌이 알기로는 독한 증류주의 도수가 대략 30퍼센트 내지 40퍼센트이니 그 두배면 60퍼센트 내지 80퍼센트. 그럭저럭 소독약으로 쓸 만 했다. "물론입니다. 실은 우리 양조장에서 전에 '세계에서 가장 독한 술 만들기 대회'를 하면서 그 정도 독한 술을 만들어 봤답니다. 아마 그 대회때 쓰고 남은 게 좀 있을 겁니다." 부빈은 활짝 웃으면서 장담했다. 렌은 다시 물었다. "양조장 근처 제철소에서 석탄을 땐다면서요?" "예." "그럼 석탄 때고 난 주위에 검고 끈적끈적한 물 같은게 흐르지 않나요?" "맞습니다. 질척거리고 독한 냄새가 나는 물이 흐르지요." "그걸 좀 모아다 쓸 수 있을까요?" 부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다 쓰시게요?" "환자들 치료하는 데 필요합니다." 부빈은 의아해하면서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아버지한테 연락해서 술이랑 검은 물이랑 다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부빈은 성병을 고칠 수있다는 생각만 해도 흐뭇한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가능하면 빨리 가져다주시면 좋겠는데요." "그럼 내일까지 가지고 오라고 하죠. 우리 아버지는 저라면 껌벅 주긱 때문에 제가 말만 하면 바로 대령입니다." 렌은 부빈의 모습이 과보호를 받는 온실 속의 아이 같아 속으로 한숨을쉬었다. "부빈님이 편지를 써주시면 제가 그냥 가서 부탁할 테니 좀 써주시겠습니까?" "헤헤헤, 그러죠. 대신 제 병을 잘 봐주셔야 합니다." 렌은 소탈한 부빈이 맘에 들어 그러마고 거듭 대답했다. 부빈은 고자가 될 뻔한 자초지종을 자세히 적어 보낸 덕분에 '대공국의 뒷골목' 주인이 부빈의 아버지는 무척이나 렌에게 고마워 했다. 자식이 창녀랑 동침했다가 서제국 병에 걸렸다는 부분을 읽을 때는 노발대발 했지만, 어디가 아픈지 입을 열기도 전에 이 치료사가 귀신같이 병명을 알아맞히고 치료법까지 가르쳐줬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감사했다. 이 치료사 소년이 부탁한 건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화주는 너무 독해서 시합이 끝난 후에는 처박아 놓았었고, 쓰레기나 다름없는 콜타르(석탄을 태우고 나면생기는 끈적끈적하고 검은 폐기물) 를 모아주는 것은 돈 한 푼 들지 않는 일이었다. 부빈의 아버지는 양조장 일꾼 두 명을 시켜서 아예 원하는 곳까지 화주 한 통과 콜타르를 날라주겠다고 약속했다. 렌은 내친 김에 재야 마법사 중개를 하는 보석상 푸긴을 찾아가 혹시 연금술사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5실버를 소개료로 내고 적당한 연금술사를 소개받은 렌은 그에게 찾아가 콜타르에서 석탄산을 분류(分溜)해줄 것을 부탁했다. 아직 제대로 된 화학이 없는 이 세계에서 그 역활을 대신하고 있는 것은 연금술이었다. 이 세계의 연금술들은 마법사만큼 높은 지위에 있지 못했지만 그래도 치료사보다는 존경받았다. 그들은 '생명의 돌'이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는데, 그건 렌의 세계에서 말하는 '현자의 돌'가 비슷한 것으로, 그 돌을 지닌 자는 불로불사하는 신비한 효능이 있다고들 했다. 생명의 돌을 얻고자 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각종 화학적인 실험방법에 능통하게 되었고, 실제로 그 화학적 실험에서 얻어진 물질들을 각종 저주, 축복, 질병치료용 마법재료로 팔아서 돈을 벌었다. 가끔 렌처럼 그 숙련된 실험솜씨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요청하면 그 요청대로 실험을 해주거나 특정 물질을 만들어주는 것도 생업의 하나였다. 실험기법을 몇 개를 가르쳐 준 덕분에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값에 연금술사에게 일을 떠맡긴 렌은 겨우 마음이 편해져서 여관으로 돌아왔다. 알코올과 석탄산이 구비되었다면 부상병들의 간염과 싸울 원시적인 무기는 겨우 갖춘 셈이었다. 새벽에 일어난 렌은 구와인과 함께 병영으로 행했다. 개인천막을 배정받아 짐정리를 끝내자마자 렌은 부상병들을 돌보려고 서둘러 병동으로 갔다. 천막에서 드려온 것은 숨넘어가는 듯한 처절한 비명소리였다. 그러나 렌 옆에 있던 구와인은 얼굴만 약간 찌푸릴분 태연자약했다. "이게 무슨 소리죠?" "마법사님이 절단수술을 하시나보다." 렌은 황급히 천막으로 뛰어 들어갔다. 수술대 위에는 환자 한 명이 누워 있고 의무병 세 명이 그 환자의 팔다리를 힘껏 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치유마법사 비조닌은 손에 톱을 들고 환자의 오른팔을 자르려 하고 있었다. 화살에 맞은 상처가 덧나 팔뚝까지 곪아 있었기에 자르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긴 했다. 그러나 환자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그냥 막무가내로 톱질이라니! 공포에 질린 환자는 있는 힘껏 비명을 질러댔다 톱이 뼈를 자르는 드드륵 드르륵 하는 소리가 너무 끔찍했다. 피와 살점과 뼛조각이 렌에게까지 튀었다. 렌은 깜짝놀라 뒤로 물러났다. "으악! 그냥 날 죽여! 으악! 악!" 부상병은 너무 심하게 소리를 지르다가 얼굴이 시퍼렇게 되면서 끽끽거렸다. 그의 얼굴은 눈물콧물로 범벅이 되어 일그러졌다. "그만하세요!" 렌이 소리지르자 비조닌은 냉정하게 렌을 한 번 쳐다보고는 톱질을 계속했다. "이렇게 안 하면 죽어!" "진통제, 마취제, 뭐라도 없습니까?" 렌이 하얗게 질려 묻자 비조닌은 냉정하게 잘랐다. "아편은 너무 귀하고, 다른 건 없다." 침술로 마취할 단계는 이미 지나가버려서 렌은 부들부들 떨며 참혹한 광경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백정이 짐승을 잡는 거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환자는 결국 기절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비조닌은 땀을 닦은 후 환자의 잘린 팔에 대로 치유마법을 시전했다. 완전히 잘린 팔의 절단면을 깨끗이 아물게 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어서 비조닌은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 녀석은 그나마 고르고 골라서 살 가망이 제일 큰 놈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수술한 거다. 치유마법을 시전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감염증으로 죽어버리니 치유마법을 시전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절단수술도 함부로 할 수없어. 정 급하면 치료사들도 나서서 절단수술을 하지만 그 경우에는 회복을 장담할 수가 없고, 그러니 이 환자는 행운아야. 지금은 이렇게 괴로워했지만 정신이 들면 살아나게 된 걸 감사할 거다." "수면마법을 써봤는데 절단하게 되면 너무 심한 고통에 결국깨어나고, 의식을 잃게 하는 마법도 써봤지만 그렇게 하니까 수술으 끝나도 눈을 뜨지 못했다. 내가 이러고 싶어 이러는 줄 아느냐? 건방진 놈!" 비조닌은 렌이 하는 말에 몹시 기분이 상했는 지 몸을 획 돌려 천막을 나가버렸다. 옆에서 구경하던 구와인은 황급히 렌의 팔을 붇잡고 말했다. "레진아, 어서 사과해라. 치유마법사님이 치료사를 시키지 않고 직접 나서서 절단수술을 해주시고 다 끝나고 나서 치유마법까지 펼쳐주신다는 건 보통일이 아닌데, 거기다 대고 불평을 해?" 렌은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비조닌이 할 수 있는 최손을 다한 거라는 건 렌도 잘 알았다. 지금 이 세계의 의료수준으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러나 이곳의 문제는 치유마법사 한 명, 치료사 한 명이 더 열심히 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부상병의 응급구호, 수송, 치료, 수술, 위생, 소독, 마취, 그 모든 분야에 걸친 구조적인 문제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후방지원부대라 해도 여기는 군대였다. 상관인 치유마법사에게 치료사가 대드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치료방법을 바꾸는 것도 역시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비조닌의 신임을 얻어야 했다. 렌은 천막을 나가버린 비조닌을 따라잡았다. "저, 조금 전에는 죄송했습니다. 마법사님 고생하시는 건 잘 알지만, 너무 끔찍한 광경이어서........." 렌은 고개를 푹 숙였다. 비조닌은 금방 마음이 풀린 듯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너 같은 소년이 그런 광경을 어디에서 봤겠니. 사실은 나도 환자가 고통스러워 한느 게 언짢아 필요이상으로 화를 냈구나." 그러나 결국 렌과 비조닌은 다시 부딪쳣다. 비조닌은 렌이 제대로 된 치료술을 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치유마법을 쓰게 할 작정만하고 있었다. "저기, 저기의 환자는 각각 팔, 다리에 가벼운상처를 입엇는데, 저 정도면 2, 3서클의 치유마법으로도 아물게할 수 있을 거다. 나느 조금 전 절단환자에게 치유마법을 시전해서 지금은 기력이 전혀 없거든. 그러니 네가 어디 한 번 치료해봐. 너의 치유마법 솜씨를 봐야 일을 맡길 수 있을테니 말이다." 렌은 비조닌이 가리키는 환자들에게로 다가갔다. 렌은 먼저 첫번째 환자를 살펴보았다. 허벅지가 거친 칼로 잘린상처였다. 거칠기는 해도 칼에 잘린 상처나 절창이 난 후 즉시 세척하고 봉합했더라면 일차 유합으로 가볍게 끝날 상처였으나, 이틀이 넘게 방치되면서 조직이 감염이 생겨 주위에 고름이 잔뜩 맺히고 괴저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부상병은 이미 감염즈응로 고열에 들떠 신음하고 있었다. 이제와서 검상을 치유마법으로 아물게 한다고 해서 낫게 할 수는 없었다. 항생제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항생제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저들이 열과 염증을 이기고 살아나느냐 마느냐는 저들의 운이야. 어차피 가능성은 반반이지만, 일단 우리는 상처라도 아물게 해줘야 하지 않겠니? 그러니 어디 한 번 해보거라." 렌은 저항했다. "이 사람은 이대로 치료하면 안 됩니다." "자신이 없니?" 비조닌은 부드럽게 물었다. "아닙니다. 치유마법을 시전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하면 상처 자체는 나을지 몰라도 절대 이 환자가 낫지는 못합니다. 상처를 먼저 세척하고 죽은 조직과 이물질을 제거하고, 소독하고 그 다음 마지막에 치유마법을 시전해야 합니다." 비조닌은 렌의 말에 기가 막혀서 외쳤다. "무슨 소리야? 상처에 물이 닿으면 큰일 난다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인데? 세척이라니, 너 도대체 어디서 뭘 배운 거냐? 차라리 끓는 기름을 붓거나 열로 지지는게 낫지, 세척이라니!" 렌은 망연자실해서 다시 비조닌을 쳐다보았다. 끓는 기름을 상처에 붓는다고? 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외상 치료에는 치유마법사가 그럭저럭 제 몫을 다 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게 얼마나 잘못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치유마법이 표피에 새살을 돋게 하는 효과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상황에 맞추어 유효적절하게 쓰지 않으면 오히려 해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기름붓기에 지지기라니, 무슨 고문도 아니고 대체 그 무슨 원시적인 방법이란 말인가! "제발 그렇게 치료하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렌은 애원했다. 그러나 비조닌은 단호했다. "내 환자를 무책임한 진료에 내맡길 수는 없다! 절대 안 된다! 차리리 다음 환자나 봐라!" 종군 치유마법사가 된 이상 렌은 비조닌의 부하였고, 군대에서 상관자의 명령에 불복하는 것은 항명죄에 해당했다. 렌은 힘없이 다음 환자에게로 갔다. 이번 환자는 아까의 환자와는 양상이 달랐다. 칼로 어깨를 베였는데, 마치 면도날로 한 번에 그은 것처럼 절단면이 깨끗했다. 그 때문인지 앞서의 환자처럼 창상을 입은 후 이틀 저도 지났느데도 상처 주위에 감염이나 괴저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 환자는 대체.........." 렌이 의문을 가득 담고 비조닌을 쳐다보자 비조닌은 렌의 의문을 이해한다느 듯이 바로 대답했다. "소드 마스터의 검기에 당한 부상병이다. 칼날이 직접 닿았다면 저렇게 깨끗할 수가 없지." 소드 마스터라면 바로 테룬 황제였다. 렌은 자신이 구해준 사람의 칼에 다친 부상병을 착잡한 심정으로 낼다보았다. 어쨋든 이 환자는 감염증이 나타나지 않아 이대로 창상만 치유하면 될 것 같았다. 렌은 눈을 감은 채 마나를 불렀다. 주위의 마나가 심자응로 모여들었다. 심장이 터질 정도로 마나를 모은 렌은 그 마나를 치유의 마나로 변환시켜 두 손으로 흘려 넣었다. 준비가 끝나자 렌은 벌어진 환부를 양손으로 잡아당겨 붙인 후 치유마법을 쏟아 부었다. 흰 빛은 환부 주위에 잠시 어른거리다가 곧상처에 스며들었다. 환자에게 처음으로 치유마법을 시전하는 거라 얼마만큼 마법을 쏟아부어야 하는지 잘 감이 오지 않은 렌은 당장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계속 마법을 시전했다. 조금 지나자 창상은 순신간에 상피화되고 세포를 지나 섬유증식까지 ? 醍?완료되어버렸고, 교원섬유(膠原纖維)라고도 불리우는 반혼만 남았다. 렌은 자신이 순식간에 마법으로 치료한 상처를 감걱에 겨워 어루만졌다. 그러나 곧 심장이 터질 듯이 아파왔다. 렌의 고통을 감지한 비조닌은 우울하게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치유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횟수는 한정되어 있다. 지나치게 시전하면 심장이 아프지. 모든 마법이 그렇다. 그러니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포기할 지, 누구에게 마법을 쓰고 누구에게는 쓰지 않아야 할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렌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비조닌의 말에 가슴이 저렸다. 그는 적어도 아무 생각 없이 돈과 권력만 밝히는 치유마법사는 아닌 것 같았다. 렌은 치료술에 관해서 다시 한 번 설명하려다가 주저했다. 비조닌 처럼 자부심이 강하고 열심인 전문가일수록 자신의 전문성에 도전하는 걸 싫어하는 법이었다. 상처를 세척해야 한다는 정도의 말에도 불같이 화를 내지 않았는가. 결국 방법은 치료술을 제대로 쓰면 사람이 낫는다는 증거를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 기회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점심나절까지 렌은 비조닌을 도와 치유마법으로 비조닌이 지시하는 환자들의 상처를 아물게 했다. 심장이 아파서 더 이상 마나를 쓸 수 없게 된 후에도 렌은 손길을 늦추지 않고 부지런히 환자를 돌보고 상처를 살폈다. 그 모습에 비조닌은 만족스러워했다. 점심때가 다 지나 렌과 비조니이 겨우 주먹밥을 먹으며 쉬고 있는데 어린 병사 한 명이 달려왔다. 전령인 것 같았다. 비조닌은 그 병사가 하는 얘기를 들으며 점점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마침내는 분통을 터뜨렸다. "제정신들인가! 이 부상병들을 놔두고 지금 오라니! 귀족 나리들이란!" 그는 분노를 삭이느라 한참 애쓰더니 겨우 진정하여 렌에게 말했다. "나는 별수 없이 귀족들을 돌보러 가야겠다. 여기엣거 좀 떨어진 전장에서 귀족 몇 명이 다쳤다는데, 거기 치유마법사가 죽어서 치료해줄 사람이 없다는구나. 내가 보기에는 크게 다친 것 같지도 않지만 어쩌겠냐? 사령관 각하께서 명령하신 건데. 그나마 네가 나타난게 천만다행이다. 내가 떠나고 나면 치유마법사인 네가 가장 계급이 높은 셈이니 좌우병동을 모두 네가 감독해라. 아까 보니 치유마법도 그럭저럭 쓰는 것 같고 환자 도보는 것도 능숙해 보이니, 능력이 허락하는 한도에서까지 환자를 돌보면 된다. 무리하지 말고. 모르는 게 있으면 좌병동의 푸가틴에게 묻도록 해라. 그는 치료사지만 경험이 많아 도움이 될 거다. 너, 정통 치유마법 말고 사이비 치료술로 치료하면 절대 안 되다!" 말을 마친 그는 자신의 권한을 나타내는 청동패를 렌에게 넘겨준 후 전령과 함께 사라졌다. 렌은 갑자기 떠맡게 된 책임에 당황해 잠시 멍했지만 곧 정신을 수습했다. 렌이살던 세계에서 의사가 자리를 뜨게 되면 잘 아는 간호사보다는 낯선 의사에게 책임을 맡기는 것처럼, 비조닌 마법사도 현 상황에서 렌에게 책임을 맡기는 게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이리아 시에서 이미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해본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차라리 비조닌이 없어진 게 다행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구식 방법으로 치료해서 부상병을 죽일 생각으 추호도 없었다. 나중에 경을 치더라도 당장 할 일을 해야 했다. 렌은 먼저 의무병 두 명을 불러 지시했다. "식당에서 가마솥과 땔감을 얻어와 병동으로 좀 옮겨주시겠습니까? 소금도 좀 가져오시고요. 그 다음에는 물을 끓이고 소금은 제게 주십시오." "예." 의무병들은 자기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소년의 지시에 불만스러웠하면서도 명령에 따랐다. 물을 끓이는 동안 렌은 다른 치료사들과 의무병들을 불렀다. 그들은 새로운 상관이 익숙지 않은 듯 불편한 얼굴을 하고 수군거렸다. 치유마법사에게 복종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군율이었으나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애송이 치유마법사가 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치료사 중 자신을 푸가틴이라고 소개한 자가 먼저 불만을 표시했다. 구와인과 몇 마디 인사를 나누는 것을 보아 그와 원래 알고 지내는 사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척 보기에도 구와인보다는 훨씬 성질이 깐깐한 것 같았다. "뭐 하는 겁니까?" 끓고 있는 물을 가리키며 그가 물었다. "환자들의 창상 부위를 씻길 식염수를 만드는 겁니다." 렌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무슨 소리입니까?" 푸가틴은 언성을 높였다. " 저 물에 소금을 5퍼센트 정도 탄 후, 그걸로 환자들의 상처를 씻어주면 감염을 상당 정도 막을 수 있습니다. 먼저 저 물로 상처를 씻고 제가 드릴 액체로 소독한 후 붕대를 감으십시오." 렌은 단호하게 말했다. 푸가틴은 세상에서 그런기가 막힌 소리를 처음 들어봤다는 듯이 렌을 쳐다보다가 마지못해 말투를 느그러뜨리며 타이르듯 이야기했다. "마법사님, 듣자하니 마법을 배우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는데, 순식간에 3서클에 이르렀다고 해서 세상 무서운 줄 모? 8?안 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디서 이상한 걸 주워듣고 해보려는 모양인데, 사람 목숨가지고 장난치시는 거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상처가 났을 때 그냥 놔두면 아물지만 물이 들어가면 보통 엉망진창으로 곪지 않습니까? 그리고 딱지가 졋을 때 물에 담그면 어떻게 되죠? 딱지가 떨어져나가면서 흉이 지고 곪기도 하지요? 그래서 원래 부상자 치료할 때 첫 번째 금기가 물에 닿지 않게 하는 겁니다. 물에 사악한 기운이 서려 있다는 걸 모르는 치료사는 없습니다. 그 대신에 뜨거운 기름이나 불은 그 사악한 기운을 없애 주기 때문에 상처를 기름이나 불로 지지는 거지요. 렌은 즉각 반박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염증이 생기는 건 세균이라고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 때문입니다. 이 벌레는 상처 부위로 들어가 온몸을 돌아다니며 독을 퍼뜨립니다. 하지만 우리 몸에도 이 벌레랑 싸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정령이 있어서, 어느 정도까지는 세균을 물리칠수 있습니다. 그 과저에서 세균도 죽고 정령도 죽지요. 그 죽은 시체가 모인 게 고름입니다." 이들이 알아듣게 설명하려니 참 힘들었다. 유일하게 구와인만이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들었다. 그는 지난 한 달동안 그런 이야기를 지겹게 반복해서 들어왔던 것이다. 렌은 진땀을 흘리며 설명을 계속해나갔다. "어쨌든 제일 좋은 방법은 처음부터 세균이 몸 안에 들어가지 않게 하도록 하는 건데, 깨끗한 소금물로 씻으면 상당 정도 세균을 없앨 수 있고, 앞으로 제가 쓸 알코올이나 석탄산으로 소독해도 세균을 죽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환자의 상처부위만 조심하면 되는 건 아닙니다. 부상자가 누운 이부자리, 감고 있는 붕대, 이런 데에서도 다 세균이 침투하니까 당장 병상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게 급선무지요. 사실 지금 야전병동은 둘 다 너무 지저분합니다. 제발 제 말을 들으십시오. 제가 가르쳐딀 방법은 치유마법을 쓰지않아도 환자를 고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믿어주십시오." 푸가틴은 렌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마법사님, 대체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한갓 치료사라고 얕보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저는 저 친구 구와인처럼 여기저기 떠돌며 사기치고 치료행각을 한 게 아니라, 줄곧 병영에서 치료사 노릇을 하면서 훌륭한 치유마법사님들에게 많은 것으 배웠습니다. 비록 마법을 하지는 못하지만 저 스스로는 치료사 중에서는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이런 제 실력을 알아주셔서 비조닌 마법사님께서도 제게 다른 치료사들 모두를 감독하는 중책을 맡기셨지요. 그러니 제 말도 귀담아들으십시오. 이부자리를 갈아준답시고 환자를 이리저리 옮기다간 환자의 생명이 위채로워진다는 걸 모르십니까? 그리고 붕대를 갈아주지 않은 환자가 더 많이 살아났다는 얘기도 못 들어보셨습니까? 대체 어디서 그런 이상한 이론을 배워가지고 고집을 피우시는 겁니까? 환자들이 다 죽으면 마법사님이 몽땅 책임지실 겁니까?" 푸가틴의 얘기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소독의 원리와 해부학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서 청소를 위해 환자를 마구 굴리거나 붕대를 갈아주면서 더러운 손으로 환부를 주물럭대면 차라리 가만히 놔두는 것 만 못했다. 하지만 제대로 소독하기만 한다면 위생상태의 개선은 부상병의 상태를 극적으로 호전시키는 지름길인 것이다. "책임지겠습니다. 환자들이 죽어나가면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그리고 환자들이 살아나면 여러분께 치료법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치료사들은 불신의 눈초리를 던질 뿐이었다. 렌은결국 원치 않은 권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들이 저보다 나이 많고 경험 많은 치료사라 해도 저는 치유마법사입니다. 비조닌 마법사님께서 제게 청동패를 주신 이상 제게는 여러분을 해고할 권한이 있습니다. 비조닌 마법사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제 명령을 거역하는 치료사는 모두 해고하겠습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같이 쌀쌀한 태도로 말하자 치료사들의 불평은 쏙 들어갔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울화와 억울함이 가득했다. 평생 치료사로 천대받으며 살아왔는데, 이제는 아들이나 손자뻘로 밖에 보이지 않는 애송이한테까지 이래라저래라 명령을 듣게 된 신세를 참을 수 없었다. 렌도 그들의 마음을 잘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경고합니다. 명령을 어기는 치료사는 해고하겠습니다." 과연 이들을 데리고 저 수많은 부상병들을 잘 치료할 수 있을지, 그리고 치료사 푸가틴에게 장담한 것처럼 부상병들의 목숨을 자신이 책임질 수 있을지, 렌은 겁이 나고 무거웠다. 그러나 렌은 고개를꼿꼿이 들고 가슴을 폈다. 나는 렌이야.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운명이라면 나는 저들을 모두 살리겠어. 저들의 목숨을 책임지겠어. 5 장 야전병동 야전병동의 기적에 관한 소문은 곧 카로드 주둔군 내에 두루 퍼졌다. 어린 치유마법사 한 명이 나타나 야전병동을 확 바꿔버린 뒤로 사망자 수가 현저히 줄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소년은 병동을 천국처럼 변화시켜 부상병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팔다리 절단수술을 할 때에도 신기한 마법을 써서 아프지 않게 해준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밤마다 병동을 돌며 부상병들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준다고 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 치유마법사가 온 후로 감염증으로 죽는 부상병의 수가 종전의 5분의 1로 감소했다는 것이다. 레진이라는 그 소년마법사는 이상하게도 소문이 퍼지는 걸 두려워하는 듯 부상병들에게 저대로 쓸데없이 얘기하고 다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소문이라는 건 그렇게 부탁한다고 막을 수 있는게 아니었다. 무사히 나은 부상병들은 자기 친구나 전우들에게, '절대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면 안 돼!' 하고 다짐을 받은 후, 자신이 어떤 시긍로 이 세상 어느 병원에서도 겪을 수 없는 자상하고 세심한 치료를 받았는지 감동에 떨며 이야기 했다. 야전병동의 책임자인 치유마법사 비조닌이 귀족 나부랭이들의 별로 대단치 않은 부상을 치료하느라 여드레를 허비하고 돌아왔을때 그를 맞이한 것은 바로 이런 소문이었다. 친한 백인대장 하나가 그를 보자마자 달려와 손발을 휘젓고 침을 튀기며 소문을 전하자, 비조닌은 그가 하는 이야기가 대체 무슨 소리인지 처음에는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 백인대장은 지겹지도 않은지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되풀이했고, 그 모습을 옆에서 구경하던 십인대장 한 명도 끼어들어 함께 열을 올리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비조닌은 의구심과 불안감, 당혹감을 억누르며 야전병동으로 돌아섰다. 그 순간 그를 맞이한 것은 평소처럼 썩어가는 생선 내장 냄새가 아니라 뭔가 독하면서도 상쾌한 냄새였다. 얼핏 맡기에는 콜타르 냄새 같았다. 콜타르 냄새 때문에 썩는 냄새가 안 나는 건가 그러나 평소 같으면 아무리 지독한 콜타르 냄새로도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괴저와 피와 부폐의 냄새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누워 있는 부상병들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깨끗한 이부자리에 누워 깨끗한 붕대를 감고 있는 부상병들은 대부분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잠을 자거나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지독한 냄새 속에서 입을 열기조차 힘들었던 며칠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레진 마법사가 자신이 없는 사이에 통째로 많은 것으 바꿔놓았다는 거 알수록 그는 불쾌해졌다.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중 의무병이 아닌 여자들이 섞여 있는 걸 보고 그의 기분은 한층 나빠졌다. 그의 화가 폭발한 것은 절단수술을 받은 환자가 젖은 붕대를 감고 있는 걸 발견했을 때였다. "대체, 대체, 이게 뭐야!" 그가 소리를 버럭 지르나 병동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부상병들은 잡담을 멈추고 긴장하여 비조닌을 쳐다보았다. 다리가 멀쩡한 부상병 한 명이 황급히 일어나 옆 병동으로 달려갔다. 렌을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부랴부랴 달려온 렌은 대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워하며 고개를 숙이고 불호령을 기다렸다. 차라리 불호령이면 좋으련만, 비조닌은 금방 냉정을 되찾은 듯 싸늘하게 물었다. "무슨 권한으로 이런 짓을 했지?" "비조닌 님이 떠나신 이상 제가 야전병도의 유일한 치료마법사였으니까요." 렌은 긴장하면서도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 여자들은 대체 뭐냐?" 비조닌은 전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계속 물었다. "이곳의 이부자리와 붕대를 세탁하고 병사를 돌볼 일손이 부족해서 제가 여자 일손 몇명을 고용했습니다." 렌의 대답에 비조닌은 화가 치미는 듯 발을 굴렀다. "돈은 어디서 났느냐?" "선불금으로 받은 걸 썼습니다." "팔다리를 절단한 저 부상병들은 왜 젖은 붕대를 감고 있지? 대체 제정신이냐? 사지를 절단한 후에 젖은 붕대를 감으면 절단한 것도 소용없이 다시 감염이 생겨 썩어버린다는 걸 모른단 말이냐? 그리고 애당초 치유마법으로 아물게 하지 않을 거면 아예 절단수술을 하지 말아야 하는 건데, 그런 것도 모르느냐? 절단수술을 받은후 치유마법을 못 받아 죽은 부상병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하느냐? 내가 엉터리 치료술을 사용하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 했는데, 네가 감히 그 지시를 어긴 거냐? 네가 저 짓을 할때에 옆에서 말리는 치료사도 없었냐?" 이제 비조닌은 마구 고함쳤다. "저들은 무사합니다. 나을 것입니다." 렌은 비조닌의 태도에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낫는단 말이야? 네가 어디서 무슨 이상한 걸 배워서 실험하고 싶었는지는 몰라도, 내 환자를 상대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란 말이다!" 비조닌은 치를 떨며 팔을 절단한 부상병들에게 달려가 콜타르 냄새가 코를 찌르는 축축한 붕대를 잡아 뜯었다. 그는 불길한 예감에 떨었다.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그가 치유마법사로 처음 참전했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도 이곳처럼 부상병은 끊임없이 밀려들고 치유마법? 榮?모자랐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몇몇 환자만 직접 집도하여 절단수술을 하고 나머지는 치료사들로 하여금 절단수술을 시행하게 했다. 그가 수술한 환자에게는 치유마법을 펼쳐주었지만 치료사들에게서 수술받은 자들에게까지 순번이 돌아가지 못했다. 며칠 후 그는경악했다. 그가 치유마법으로 아물게한 절단 환자들은 모두 멀쩡했는데, 치료사들이 절단한 환자들은 대부분 엄청난 고열에 시달리며 패혈증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환자들은 결국 거의 다 죽어버렸다. 그때 그는 무척 괴로워했다. 그들의 죽음이 꼭 자기 탓인 것만 같았다. 그 후 비조닌은 절단수술은 꼭 자신의 손으로 집도하고, 수술받은 부상자에게는 다 아물때까지 치유마법을 시전해주겠다는 대원칙을 세웠다. 그 원칙을 지금까지 지킨 덕분에 병사들로부터 존경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이 초보 치유마법사가 그 원칙을 무너뜨리다니! 그러나 마침내 붕대를 다 뜯어낸 비조닌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치유마법이 시전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절단면에서 아무런 염증이나 괴사나 고름을 찾아볼수 없었던 것이다. 절단면은 슬슬 엉기고 있는 중이었다. 고름냄새도 나지 않았다. 며칠 지나면 무사히 아물 수있을 것처럼 보였다. 비조닌은 자신이 본것을 믿을 수 없어서 다시 잘린 부위를 코앞에 대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자 아주 약간의 치유마법이 시전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주로 혈관부위였다. 비조닌은 묻는 듯한눈초리로 렌을 쳐다보았다. 렌이 옆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어차피 한 명의 치유마법사가 쓸수 있는 치유마법의 강도와 횟수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한사람을 치유할 때 가능한 적은 양의 치유마법을써야 한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상처를 완전히 치료하지 못하는 한 남은 상처부위에 감염이 생겨버리므로, 한 명을 제대로 치료하려면 상처가 완벽히 아물 때까지 치유마법을 쏟아 부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아는 방법대로 석탄산, 그러니까 콜타르를 가열해서 만든 액체를 물에 타서 그걸로 상처를 소독하면 감염은 생기지 않습니다. 일단 간염을 막기만 하면 치유마법은 출혈이 일어나는 혈관을 위주로 적은 양만쏟아 부어도 충분합니다. 그 다음에는 몸이 알아서 상처 부위에 딱지와 섬유질을 만들고, 흉터는 좀 남아도 무사히 아물게 됩니다. 이것으 절단수술의 경우만 아니라 다른 중상자 치료에도 모두 해당됩니다." 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상변들 중 몸을가눌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일어섰다. "레진니 덕분에 저는 목숨을 건졌습니다. "저도 레진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저는 팔 한쪽을 잃어야 했지만, 그래도 전 같으면 십중팔구 죽었을텐데, 지금은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비조닌은 부상병들과 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자세한 설명을 들어야겠다. 따라와라." "예." 렌은 비조닌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하며 비조닌의 개인천막으로 따라갔다. 비조닌이 다시 캐어묻는 듯한 눈길을 던지자 렌은 차근차근 자신이 한 일을설명했다. 어떤 것은 곧이곧대로, 어떤 것은조금 숨겨가며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 했다. 살균과 소독의 원리, 소염과 해열성분을 지닌 약초들, 소독약을 만드는 방법과 그 소독효과, 팔다리가 썩어가는 경우 언제사지를 절단해야 하고 언제 그대로 살릴 수 있는지등등, 설명하고 것은많고도 많았다. 그리고 가슴에 담아둔 것으 더 많았다. 그걸 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처음 렌이책임을 맡았을 때 가장 힘드 것은 의무병과 치료사들을 설득하여 자신의 지시대로 움직이게하는 것이었다. 치료술을 잘 모르는 의무병들은 렌이 시키는 대로 잘 했지만, 머리에 이미 다른 고정관념이 들어있는 치료사들은 여간해서는 렌의 말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때 구와인이 큰 도움을 주었다. 구와인은 능글능글한 대신에 선입견이 없었고, 그동안 렌에게서 치료술의 기본원리를 배워 렌이 무슨 말을 하든지 남들보다 잘 이해했다. 그가 나서서 렌이 시키는 대로 치료하자 다른 사람들의 반신반의함은 어디 잘되나 한 번 두고 본 후 괜찮으면 따라하자는 쪽으로 바뀌었다. 최초의이틀간은 렌과 구와인, 의무병만이 나서서 환자를 치료했다. 그리고 다른 치료사들은 돕지않고 구경만 했다. 첫날은 의무병들과 렌이고용한 아낙네들이 이부자리와 붕대를 삶아 빨고 병동을 청소하는 것을 감독하고, 식염수를 환자들의 창상 부위를 세척하고 죽은 조직을 제거한 후 미온수에 섞은 석탄산 용액을 적신 붕대를 감아 주는 것으로 하루해가 다 갔다. 환자들은 한 명식 진단하면서 렌은 몇몇 환자들의 경우 어쩔 수 없이 절단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미 괴사가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어 자르지 않으면 그냥 죽게 되어 있는환자들이었다. 양쪽 병동의 청소 및 소독, 환자들의 드레싱이 일단락되자 렌은구와인에게 부탁했다. "저, 금방 죽은시체 를 어디 가면 구할 수 있지요?" 구와인은 렌을 멍하니 보며 물었다. "어디다 쓰게?" "절단수술을 연습하려고요." "한 번도 해본 적 없냐?" "예." "그래, 병동에서 죽은시체를 쌓아두는 구덩이가 있으니, 의무병을 시켜 한 구 가져다주마." 구와인은 말하다 말고 농담을 덧붙였다. "이왕이면 이쁜 아가씨 시체가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병사들은 모두 사내 녀석드이니, 그나마 그중에서 깨끗하고 튼튼한 놈으로 골라다주마." 구와인은 렌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입으 다물었다. 그날 밤 렌은구와인이 의무병을 시켜 날라다준 시체를 대상으로 절단수술 연습을 했다. 병영 거의 끝에있는 비교적 외진 곳이었다. 거적을 풀자 스무 살 된 청년이 나타났다. 구와인 말로는죽은 지하루 정도 된 시체라고 했다. 이미 시반(屍班)이 여기저기 생겨서 흉측했지만 그 상태에서도 잘 생긴 청년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죽는 순간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두눈을 부릅뜬 채였다. 한여름이 지나서 아직 부패는 심하게 진행되지 않았지만 은근히 시체 썩는 냄시가 풍겼다. 렌은 먼저 시체의 눈을 감겼다. 눈을 감고 나니 시체는 마치 잠들어 있는 듯이 보였다. 옆에서 흔들리는 등잔불에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시체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처럼 보여 묘한 생기가 흘렀다. 렌은 두려움과 연민을 참고 시체를 살펴보았다. 옆구리에 생긴 검상, 더 정확히는 거기에서 생긴 출혈이 직접적인사인임이 명백했다. 렌은 심호흡을 크게 한 후 오리하르콘 메스와 침을 꺼냈다. 마치 산 사람 사지를 절단하는 것처럼 꼼꼼히 마취침을 놓고, 그 다음에 오른쪽팔에 메스를 찔러 넣었다. 부패하기 시작한 근육은 힘을잃어 예리한 칼날은 한 번에 쑤욱 뼈까지 닿았다. 칼날은 피를 머금자 기쁜 듯 부르르 떨었다. 응고되지 않은 혈액이 주르르 흘렀다. 렌은 칼의 살기를 억제하며 뼈를 둘러싼살을 빙 돌려 잘랐다. 썩은 피의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메스의 날카로움에 의지해렌은 다시 하얗게 드러난 뼈에 칼날을 박아 넣었다. 드워프 츄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메스는 거짓말처럼수월하게 뼛속까지 들어가 박혔다. 칼이 조금 뻑뻑하게 뼈에 끼이자 렌은 톱질하듯 칼날을 움직여 나머지 뼈를 잘랐다. 어느 정도 뼈를 자른후 마지막으로 힘을 주자 의외로 뼈는 쉽게 툭 부러졌다. 한쪽을 자르는 것만으로는 연습이 모자랐다. 렌은 하얗게 질린채 오른쪽 팔, 왼쪽 다리, 오른쪽 다리까지도 다 잘랐다. 사지가 모두 잘린시체는 부서진 마네킹이나 인형처럼 보였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렌은 마침내 울었다.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이 렌은 침을 보두 빼고 메스와 침에 뭍은 피를 닦아 가져온 석탄산통에 담갔다. 석탄산 냄새가 퍼지나 시체 썩는 냄새는 조금 희미해졌다. 사지가 잘린 시체를 그냥 두고 보기가 가슴아파 렌은 실과 바늘로 거칠게나마 사지를 꽤메 주었다. 몸에 밴 시체냄새는 여간해서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렌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무릎을 끌어않고 한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기진맥진한 렌은 휘청거리며 자신의 천막으로 들아왔다. 아무리 피곤해도 치유마법이 필수불가결인 이 상황에서 마법 수련을 거를 수는 없었다. 심장으로 몰려오는 검은 마나는 전날보다 더 격렬하고 더욱 강했다. 마나에 취해 몸을 맡기던 렌은 마력이 하루 사이 더 커졌다는 걸 깨달았다. 자기도 모르느 새 3서클을 훌쩍 뛰어넘어버린 것 같았다. 무서운 속도였다. 대가 없이 뭔가를 얻는 데 대한 두려움이 와락 밀려왔다. 그 대가가 무엇인지는 그 다음날 새벽 바로 밝혀졌다. 렌은 왠지 불안한 기분에 모처럼 정명기를 수련해 보았다. 그러나 전보다 훨씬 더 심한 고통이 엄습했다. 하늘이 노래지느 것 같은 괴로움에 렌은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오기가 솟았났다. 렌은 다시 한번 정명기를 운기했다. 온 몸이 바늘로 찔리는 것 같았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래도 렌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겨우 운기를 마친 렌은 절망했다. 기를 쓰고 모은 정명기는 반의 반으로 줄어 있었던 것이다. 애타게 원인을 찼던 렌은 자기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정명기를 운기할 때마다 왜 고통이 점점 더 심해지는지, 그로기 전보다 축기디는 양이 현저히 줄어드는 까닭이 무엇인지 이제야 비로소 알았다. 마나 때문이었다. 마나가 몸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자 마법을 수련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대신에 마나가 정명기를 배척하게 되고 그 결과 정명기의 운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마법 수련을 하면 할수록 정명기가 축기되는 양은 줄어들어간 것이다. 렌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정명기가 내과질환에 효과가 있다면 치유마법은 외과적 손상에 즉효였는데, 이곳 야전병동의 부상병을 위해서는 정명기보다 치유마법이 더 필요했다. 정명기가 어찌 되든 간에 치유마 법을 조금이라도 더 수련하여 당장 눈앞의 환자를 고쳐야 했다. 고민 끝에 련론을 내린 렌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최초의 절단수술을 하기 위해 야전병동으로 갔다. 당장 절단하지 않으면 안 될 부상병 세 명을 선별하고, 그들을 별도의 천막 옆으로 옮기게 한 후 먼저 한 명을 천막 안으로 옮기게 한 후 먼저 한 명을 천막 안으로 이동시켰다. 렌은 구와인만 남기고 다른 의무병을 모두 물리친 다음 부상병의 절단 부위를 꼼꼼하게 알코올로 닦았다. 발목에 화살을 맞아 이미 썩어가는 다리는 무릎 위 10센티미터 정도에서 잘라야할 것으로 보였다. "자르지 마! 소대지 마! 나 그냥 이대로 죽을 거야!" 부상병은 눈물을 흘리며 고함을 질렀다. "야, 레진아, 의무병들을 다 내보냄녀 나 혼자서 저놈 발버둥치는 걸 어떻게 감당하냐. 이 늙은이한테 뭘 어쩌라고." 구와인은 속삭였다. 렌은 그에게 농담을 던질 기분이 아니어서 아무 대꾸없이 그냥 부상병을 내려다보았다. "아프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레은 부드럽게 달랬다. 부상병은 두 눈을 부릅떴다. "차라리 날 죽여! 제발! 자르지 말라고!" 렌은 한숨을 쉬며 침을 꺼내 부상병의 수혈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다리 부분의 감각이 없어지도록 꼼꼼하게 마취침을 놓았다. 마취를 끝낸 렌은 부상병의 다리를 꼬집어보았다. 마취가 제대로 되어서 부상병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뭘 한거냐?" "부상병의 다리를 자르는 동안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한 겁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마십시오." 구와인이 신기하게 뜯어보는 동안렌은 메스를 꺼냈다. 석탄산으로 소독한 메스는 기분 탓인지 왠지 조금피에 물든것 같았다. 메스를 허벅지에 박아 넣는 기분은 정말이지 더러웠다. 처음 맹장수술 할 때도 끔찍했지만, 이번에는 특히 아예 잘라버리기 위한 칼질이어서 더 괴로웠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온갖 생각이 지나가도 손은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오리하르콘 메스는 살아있는 피를 머금게 된것이 기쁜 듯 수월하게 살을 잘라나갔다. 감당하기 어려운 살기가 칼에서 새어나와 렌은 잠시 어지러웠다. 정명기를 일으킬 수 있다면 살기를 진정시킬 수 있을 테지만 지금 정명기로 인한 고통을 감내할 수는 없었다. 칼을 들어 부상병을 마구 베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용캐 달래며 렌은 칼을 뼈에 다시 박아 넣었다. 뼈까지 모두 잘라내자 고름이 가득차 있던 다리는 힘없이 수술대 위에서 나뒹굴었다. 절단면에서 흐르는 피는 구와인이 재빠르게 닦아냈다. 마지막으로 렌은 마나를 약간만 모아 치유마법을 일으켰다. 모두를 치유하기에 터무니 없이 부족한 마법, 요령껏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미 렌은 치유마법을 어떠 방식으로 사용할 것인지 마음먹고 있었다. 절개면에 자리 잡은 몇 가닥의 굵은 동맥과 정맥이 최우선이였다. 살을 재생하는 데에는 마나가 많이 들지만 혈관은 그렇지 않으니, 가장 적은 마나로 최대의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은 혈관부터 아물게 하는 것이었다. 렌은 다리 위로 고개를 숙여 혈관들 주위로 집중해서 마나를 쏘았다. 혈관은 쉽게 엉겨 붙었다. "지금 보셨죠?" 구와인은 뭘 보라는 건지 멀뚱해서 렌을 쳐다보았다. "혈관의 정확한 위치를 알면 적은 마나로도 혈관을 이어붙일수 있습니다. 지금 제가 헌 것처럼요. 그러니 생채기를 아물게 하는 1서클 마법으로도 생명을 구할수 있습니다." "저, 정말?" 구와인은 떠리는 목소리로 묻자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관이 제대로 붙은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쉰 렌은 석탄산 용액에 적신 붕대를 절단면에 대었다. "이 위로 붕대를 감아주십시오." 구와인은 익숙한 솜씨로 붕대를 다리에 감았다. 수술이 끝났지만 아무런 만족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멀쩡하던 사람이 이제 다리를 잃었으니 , 그렇지 않아도 살기 힘든 이 세계에서 그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갈지, 아니, 당장 깨어나서 현실을 감당할 수 있을지. 렌은 독한 마음을 먹고 마치침을 뱄다. 침의 개수가 한정되어 있어 무한정 침을 꽂아놓을 수도 없고, 마치효과를 지속시키려면 가끔씩 침을 돌려주어야 하는데 다음 환자가 기다리는 상황에서 그리 할수도 없었다. "으아아악!" 예상대로 환자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수면마법으로도 못 막는 고통이니 수면침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 렌은 환자가 더 몸부림치기 전에 수면침도 황급히 뽑아냈다. "내 다리! 내 다리!" 환자는 고함을 질렀다. "아파! 아파! 내 다리!" 환자가 발버둥치자 구와인은재빨리 의무병을 불렀다. 의무병이 들어와 환자의 두 팔과 성한 다리를 붙잡았다. 환자들은 들려나가면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의 얼굴이 고통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차라리 죽여 달랬잖아!" 그는 어린애처럼 울부짖으며 렌을 노려보았다. 렌은 마침매 참을 수 없어져서 마주 고함쳣다. "그럼 죽어버려! 당신이 죽어도 말리지 않아!" 환자는 렌의 고함에흠칫했다. 렌은 ? 玭〉資?속삭였다. "가족들을 생각하십시오." 그 말에 환자는 다시 울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가족들을 생각하면 지금 죽어야지! 병신 먹여 살리려면 마누라랑 아이들이랑 얼마나 고생하겠어!" 렌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의무병들에게 손짓했다. 의무병들은 그를 끌고 나갔다. 그의 울음소리와 고함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다른 두 명의 절단수술은 이미 독하게 마음을 먹고 있어서인지 처음만큼 어렵지 않았다. 두 번째 수술은 오른쪽 복사뼈 부근에서 자르는 것이었다. 부상병은 마흔이 다 된 노병으로, 오히려 담담히 감사를 표했다. "아프지 않게 잘라 주시다면서요? 그리고 끝나면 치유마법도 펼쳐주신다면서요? 20년 동안 전쟁을 헤매면서 치유마법사의 손에서 치료받는 행운이 제게 올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의 말은 진심 어린것이었지만, 그의 몸은 사시나무 떠듯 떨었다. "자르는 동안에는 고통이 없을 겁니다." 렌은 부질없는 위로를 던졌다. 수술이 끝나고 마치침을 빼서 고통이 찾아왔을 때에도 그는 울지 않았다. 군인으로서 우는 건 수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차라리 소맂르며 울라고 하고 싶었지만 렌은 참았다. 마지막 환자는 딱 렌 또래의 소년병이었다. 팔뚝에 맞은 화살 상척가 덧나 오른팔이 벌겋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벌써 썩어가고 있어서 역시 자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렌은 자기도 모르게 물어보았다. "대체 몇 살입닏까?" "두 달 전에 열여덟이 됐어요. 그리고 군대에 끌려왔죠." 소년은 흔드리는 눈동자에 눈물을 가득 담아 애원했다. "제발, 제발 자르지 말아주세요! 저희 집은 대대로 목수일을 하는데, 팔이 없으면 저는 먹고 살 길이 없단 말입니다!" "자르지 않으면 죽습니다. 목수일 말고 다른 살길을 찾아보셔야 할 겁니다." 렌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냉정하게 소년의 말을 끊은 후 소년이 더 뭐라 말하기 전에 수면침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단칼에 소년의 팔을 잘랐다. 메스의 살기는 더 기쁘게 날뛰고 칼날은 한결 더 예리하게 느껴졌다. 수술이 끝난 후 정신이 든 소년은 육체의 고통보다 마음의 충격이 더 큰 듯 비명조차 지르지 않은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한시간 동안 세 건의 절단수술을 해치우고 나니 그냥 모든 걸 다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레진아, 나도 가금 절단수술을해봤는데, 몰론 그러다가 죽인 사람이 살린 사람보다 많긴 하지만, 그래도 제법 살아났거든. 살아난 놈들은 처음에는 원망하지. 그래도 한참 지나면 결국 고마워하더라. 원래 세상일이 다 그런거 아니냐? 뭐니뭐니해도 살아있는 게 죽은 것보단 백 번 나은 거야. 그러니 너무 괴로워하지 마라. 네가 그렇게 섬세한 건 아직 총각이기 때문이야. 계집을 한 백명만 안아보고 나면 세상에 별로 무서울 일이 없게 되지." 적나라한 구와인의 말이 위로가 되어서 렌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엉엉 울고 싶었지만 환자들이나 부하들 앞에서 울 수는 없었다. 카엔님이 계시다면 그의 가슴에 기대어 울 수 있을 텐데. 렌은 밖으로 나왔다. 눈에 물이 찰 것 같아 몇 번 눈을 깜박여야 했다. 피비린내와 고름내와 석탄산 냄새가 함께 뒤섞여 숨쉬기 조차 힘든 천막 안과는 달리 바깥공기는 거짓말처럼 맑고 하늘은 파랬다. 인간들은 지옥을 만드는데 천지는 무심했다. 하늘이 너무 파래서 눈물이 금방 말랐다. 소독이라는 걸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하고 약도 먹어본 적이 없었던 부상병들은 약간의 소독, 적은 양의 약초에도 금방 호전되었다. 가능한 구하기 쉬운 흔한 약초로 어설프게 짓는 약이 생각보다 훨씬 잘 들었다. 그리고 전 같으면 당연히 죽었을 부상병들이 살아나자 다른 치료사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특히 푸가틴이라는 치료사는 사람을 고치는 데 대한 정열이 있고 워낙에 노력형이어서, 렌이 설명하는 치료의 원리를 물을 빨아들이듯 흡수하고 렌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편 구와인은 렌의 지도로 치유마법을 사용하느 요령을 익히면서 점점 신이 났다. 혈관 이어붙이기, 상처에 한치 정도 간격을 두고 살짝살짝 치유마법을 써 대강 상처 붙이기, 그런 방법이라면 1서클로도 환자의 치료가 가능했다. 병사들로부터 마법사님이라는 칭송을 들으며 구와인은 처음으로 보람이란 걸 느꼈다. 구와인이나 푸가틴 모두 의외로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훌륭한 제자들이었다. 렌은 그 둘을 게으름뱅이 라빌과 비교하면 쓴웃음이 나왔다. 닷새가 지나자 병동은 제자리를 잡아갔다. 한동안 큰 전투가 없었는지 부상병들은 더 이상 후송되지 않았다. 렌은 밤마다 병동을 돌며 환자들을 살폈다. 다정한 한마디 말, 꼭 나아서 다시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위로만으로도 그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가벼워지는 만큼 렌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마법사님, 팔이 미친듯이 가려운데긁을 수가 없어요." 렌에게서 팔 절단수술 을받은 소년병이하소연 했을 때 렌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너무 가려워서 잠이 안 와요. 어떨때는 자면서 팔을 긁으려고 하다가 허공만 긁고 깜짝 놀라서 깨죠. 언젠가는 이 가려움증이 없어질까요?" 렌 또래의 소년병이 그렁그렁 눈물이맺힌 채 물을 때 렌이해줄수 있는 것은 그저 이불을 고쳐 덮어주는 것뿐이었다. 노랄운 것은 렌이 3서클에 도달한 지 딱 칠일 만에 다시 4서클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심장이 터져나갈 정도로 몸을 혹사시켜가며 마나를 써서 부상병들을 치료한 것이 오히려 마나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된 듯 했다. 다만 마법이 커질수록 예상대로 정명기는 줄어들었다. 렌이 생각한 대로 정명기와 마법은 상호배척관계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시험 삼아 정명기를 운기해봤는데, 정명기는 먼저보다도 더 줄어들어, 평소의 10분의 1 정도밖에 쌓이지 않았다. 빨리 아물게 해야 할 외상환자가 끝없이 누워 있는 상황에서 렌은 어쩔수 없이 정명기를 버리고 마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어찌되든 당장 한 명이라도 더 치료해야 하지 않겠는가. "............ 그래서 지금까지 절단수술은 열여덟 건 시행해서 열여섯건 성공했고, 두 명은 수술이 너무 늦어서 결국 사망했습니다. 비조닌님께서 떠나실 때의 총 환자수 786명 중 384명은 어느 정도 회복해서 원대복귀했고, 57명은 사망했고, 나머지는 아직 입원중이지만, 그중 100여 명 정도는 2. 3일 내로 퇴원해서 원대복귀가 가능할 것같습니다. 회복 후 원대복귀를 하지 못하고 제대해야 할 환자들은 200명 정도 됩니다." 렌은 사무적인 수치로 보고를 맺었다. 무미건조한 사망자와 부상자 통계 속에 감워져 잇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비조닌 마법시님도 잘 알겠지. 그가 그 고통을 안다면 날 이해해주겠지.. 제발 그렇기를... "환자를 다시 보러 가자꾸나." 비조닌은 냉랭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일어났다. 렌은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그를 따랐다. 비조닌은 병동의 환자를 일일이 살폈다. 붕대를 들추어보기도 하고, 상처의 냄새를 맡거나 상처에 대놓은 약초를 앂어보기도 했다. 레진의 치료가 효과적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레진을 우러러보는 병사들의 눈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신뢰감과 존경심으로 가득한 저 눈길.. "어디 네 방식대로 치료를 해보거라." 렌은 순순히 비조닌의 말에 따랐다. 아직 치료받지 못한 환자 한명을 붙잡아 능숙한 솜씨로 상처를 소독하고 죽은 조직을 제거하고 치유마법을 쓴 후 석탄산에 적신 붕대를 상처에 감는 데에는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비조닌은 렌의 손에서 피어난 하얀 치유마법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너 혹시, 설마 그새 4서클이 됐느냐?"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조닌은 입을 쩍 벌렸다. 떠나기 전에는 분명히 3서클이었는데, 열흘도 안 되서 한 서클이 높아지다니! 그런 일은 9서클에 오른 전설의 대마법사의 어린 시절에나 있는 일이었다. 설마 이소년이? 그럴리 없겠지만, 혹시? "넌 대체 누구냐?" 비조닌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우연힌 마법을 익히게 된 떠돌이 치료사일 뿐입니다." 렌은 들킬까봐 걱정하며 대답했다. "대체 어떻게 저런 치료방법을 알게 된 거지?" "우연히 어느 현자를 만나서 배웠습니다." 비조닌은 렌이 뭔가를 숨기려 한다는 걸 눈치챘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네가 환자의 감염을 막는 데 사용한 그 액체를 보여줄 수 있겠니?" 렌은 연금술사에게 부탁하여 넉넉하게 분류해놓은 석탄산 용액을 보여주었다. 비조닌은 냄새를 맡고 만져본 후 용액을 마셔보려고 했다. "안 돼요! 먹으면 안 되는 겁니다!" 렌은 황급히 말린 후 식은 땀을 흘렸다. 석탄산, 즉 페놀은 독극물인 것이다. "이걸 적신 붕대로 상처를 감싸면 곪지 않는다고?" "예." 비조닌은 다시한번 환자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그는 이제 깨달았다. 이 소년의 말은 진짜였다. 이 소년의 치료법도 진짜였다. 오랜 치유마법사의 경험에서 그는 환자의 안색을 보고 누가 죽어가고 누가 살아날 건지 대강 알아낼 수 있었다. 그가 떠나기 전에는 반이 넘는 환자가 사색을 띄고 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의 얼굴에 생기가 흘렀다. "제길!" 비조닌은 욕설을 내뱉자 렌은 깜짝 놀라 그르 쳐다보았다. "제길! 제길! 제길!" 비조닌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네가 조금만 더 일찍 나타났다면! 이 방법, 이 소독약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움켜쥔 손에서 모레가 새어나가듯 그의 손을 떠나 죽어간 무수한 병사들을 생각하면 비조닌은 한탄했다.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자위하며 그 수많은 죽음을 겨우겨우 견뎌냈는데, 이렇게 방법이 있었다니! 병사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 이 순간 그는 기쁨보다는 고통과 자책감을 느꼈다. 렌은 그의 심정을 이해했지만 아무런 위로도 하지 못했다. "자, 이렇게 하자!" 마음을 정리한 비조닌은 마침내 말했다. "너는 좌병 동을 맡아라. 나는 우병동을 맡으마. 내가 네가 아는 치료법을 다 가르쳐다오. 그대로 따라할 테니. 치유마법은 아무래도 내가 위이니 그 부분은 네가 내게 더 배워야겠지만, 다른 부분은 내가 배울 게 많을것 같구나. 제대로 가르쳐주기만 하면 전 재산이라도 주겠다." 간절하게 바라보는 그의 눈길을 마주 바라보며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 재산은 필요 없습니다. 나중에 미즈넨 산맥 서쪽으로 보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 꼭 그렇게 해주겠다." 렌은 비조닌의 손을 맞잡았다. 한동안 뜸했던 부상병들은 동제국과 카로딘 사이의 국지전이 재개되면서 다시 끊임없이 밀어닥쳤다. 누가 보아도 전황은 카로딘군이 불리했다. 동제국군은 카로딘 의 수도 카로드를 목표로 계속 소규묘 전투를 벌였고, 카로딘 군은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조금씩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자코리 협곡과 시닌 강에서 벌어진 국지전은 모두 카로딘의 패배로 끝났다. 지휘관들은카로딘이 절대로 지지않을 것이라고 소리높여 외쳤지만 병사들의 믿음은 점점 옅어졌다. 그리고 치유마법사들과 치료사의 손길은 점점 바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부상병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그것도 한 버에 수백명이 순간이동되어 왔다. 모두들 깜짝놀랐다. 그들은 카로딘에서 약 30아반 떨어진 보페트 평원이라는 곳에서 펼쳐진 전투에서 발생한 부상병들이었다. 비조닌이 순간이동 경위르 묻자 부상병들은 통곡했다. 비교적 달 다친 부상병 한 명이 울먹이며 사정을 말했다. 보페트 평원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은 그날 새벽의 일이었다. 카로딘군의 명장 코브인 장군은 만 오천 명을 끌고 카로드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라고 할수 있는 보페트 평원에서 적을 맞았다. 뜻밖에도 카로딘의 8서클 마법사 두 명은 그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뭐라고? 대체 왜?" 비조닌이 놀라서 물었다. "베오닌님은 며칠 전 푼단 고원 대전투에서 부상당하셔서 출정을 못하시다고 그러셨습니다." " 동제국구의 8서클 마법사 라우프는 그럼 어떻게 막았는가? " "우리쪽 지휘관은 백전불패의 명장 코브인 장군님이 아니십니까. 그분은 살을 내주고 벼를 취하는 수법으로 결국 동제국군을 막으셨습니다. 역부족이었지만, 어떻게든 전멸당하는 것만은 모면했습니다. 코브인 장군은 카로딘 쪽 병사 5천 명을 라우프 쪽으로 돌격시켜 병사들이 거의 다 죽을 때까지 밀어붙이셨습니다. 그 사이에 나머지 만 명의 병사들로 하여금 양동작전을펴게 하셨습니다. 처참한 전투였습니다. " " 사상자는?" " 5천 명 정도 되리라 짐작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 주위에 침묵이 흘렀다. 만 오천 명 중 5천명의 사상자가 나왔다면 엄청난 숫자였다. " 그렇게라도하지 않았다면 모두 죽었겠지. " 병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어떻게 순간이동해서 여기 오게 돼었나? 5천 명이 죽을 정도의 격렬한 전투라면 마법사들한테 부상자를 순간이동시킬 여력은 없었을 텐데? " " 그건, 그건.......... " 병사는 말을 더듬다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을 섞어 더듬거리며 하는 그의 말은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으나, 모두들 그를 채근하지 않고 조용히 들었다. 병사는 하필이면 8서클 마법사 라우프 앞에 던져진 제 7만인대 제2천인대 소속이었다. 돌격명령을 받은 순간 눈앞이 캄캄했으나 그동안 받은 훈련 덕택에 그는 기계적으로 주위 병사와 보조를 맞추어 라우프 쪽으로 달려갔다. 동제국 병사들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지만 정작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라우프와 다른 동제국 마법사 들은 혼이 나갈 정도의 위력을 지닌 화염구를 계속 쏘았고, 그의 주위에서 전우들은 비명을 지르며 끊임없이 타죽었다. 당황한 병사들은 주춤했다. 그러자 동제국 병사들은 더 기세등등해서 밀고 들어왔다. 그들의 칼에 다시 수많은 병사들이 쓰러졌다. 이제 죽었구나 싶었는데 뒤쪽에서 순간이동해서 그들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7서클 치유마법사 다나인이었다. 수염이 성성한 노마법사인 그는 본래 치유마법사이지만 공격마법사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전선으로 차출되었던 것이다. " 모두 괜찮은가? " "마법사님! 여기까지 오시면 어떡합니까? 마법사님은 원래 치유마법사님이신데 후방에 계셔야지요!" 백인대장 한 명이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 그럼 자네들이 죽게 하겠나? 자네들이 다 죽고 나서 치유마법을 펼칠 부상병도 없어지면 안 되지 않나? 찾아보면 살길은 있을 걸세. 자네들이 계속 밀고 들어가 라우프를 잡으면 결국 살수 있지 않겠나? 나도 힘을 보태겠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게." 다나인은 평소 연습하지 않아 서투른 공격마법을 애써 펼쳐내며 말해다. 그를 중심으로 모인 제 2천인대와 다른 네 천인대는 라우프를 향해 전진했다. 얼마나 죽었는지 모른다. 마법과 창칼과 화살이 난무하는 가운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그의 십인대 중 세명이 없어져 있고, 다시 세어보면 또 두 명이 없어 져 있는 식이었다. 이제 전황이 어쩌되었는지, 누가 살고 누가 죽었는 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미 동제국군이 그들이 뚫고 들어온 뒤쪽의 퇴로를 애워싸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후퇴할 수도 없었다. 적진의 한 가운데에서 그들은 뭐가 어떻게 어떻게 되어가는 지도 모른채 그저한 걸음 한걸음 떼며 이를 악물고 버텼다. 어느새 돌격대 5천명 중 2천명만 이 남았다. 그때 멀리서 후퇴작전이 성공했는지 카로딘 병사들이 카로딘 군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자 , 저쪽에서는 작전대로성공했나 보네! 자네들도 힘내게!" 다나인은 끊임없이 격려하면서 계속 전진했다. 그러나 갑자기 라우프가 있는 쪽의 하늘이 어두워졌다. "아! 안돼!" 다나인은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 무슨 일입니까? " " 라우프가 붕괴마법을 펼치려나 보네! " 붕괴마법은 지반을 붕괴시켜 일시에 많은 수를 죽일 수 잇는 마법으로 8서클 이상만이 쓸 수있는 최고급 마법이었다. 시전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마력의 소모가 큰 대신 다른 마법에 비해 한꺼번에 많은 수를 죽이는 데에는 가장 효과적이었다. "어서들 내 주위로 모이게!" 다나인은 다급하게 외쳤다. 동제국군 쪽 하늘이 점점 시커멓게 변해가는 가운데, 남은 병사들은 허겁지겁 다나인 옆으로 달려왔다. " 더 빨리! 한 명이라도 더 끌고 오게! " 다나인은 조급하게 외쳤다. 병사들은 죽을 힘을 다해전우들을 끌고 왔다. 그러나 난전 중이라 쉽지 않았다. 동제국군 수십 명이 병사들을 끝까지 추격하자 다나인은 그들을 향해 공격마버을 한번 펼쳤다. 동제국 병사들이 몇 명 쓰러졌다. 그러는 사이에 다시 몇 명의 카로딘 군이 더 달려왔다. 다나인은 안타깝게 동쪽하늘과 주위의 병사들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이제 더이상 기다릴 수 없는것을 확인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자, 거기도! 어서 빨리!"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채근한 그는 마나를 모았다.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마나를 끌어모은 그는 희미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 내 아내와 딸들에게 사랑한다고 전해주게. 늘 성에 찰만큼 병사들을 치유해주지 못해서 안타까웠는데, 막판에 수많은 생명을 한꺼번에 구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구먼." 발밑의 흙이 막 붕괴되기 시작할 무렵, 그는 폐부에서 짜내는 것 같은 엄청난 고함을 지르며 가지고 있는 단도를 심장에 박아 넣었다. 그 순간 엄청난 빛이 퍼지고, 그 주위에 50데보탕 내의 병사들이 일제히 이곳으로 순간이동되었다. " 그 분은 그렇게 우리들을 구하시고 뒤에 남으셨습니다. " 병사가 말을 마치는 순간 주위는 다시 병사들의 통곡으로 가득찼다. " 아아, 그분이 그렇게 가시다니! " 비조닌은 다나인의 최후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비조닌은 그동안 마음속으로 자신이 머지않아 8서클 치유마법사가 될 거라고 생각하며 은근히 7서클 마법사 다나인을 얕잡아보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 다나인의 숭고한 죽음 앞에서 그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졋다. 렌은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초조하게 환자들을 곁눈질했다. 순간이동으로 전장 한가운데에서여기까지 옮겨진 부상병들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중환자들이었다. 전투의 격렬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대부분 엄청나게 피를 흘리고 있었고, 불에 타거나 폐부와 내장을 찔리거나 팔다라를 잃은 자들도 많았다. "지금 얘기를 듣고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서 치료해야 합니다!" 렌이 외치자 비조닌은 곧 정신을 차리고 단호한 어조로 명령했다. " 치료사들과 의무병들은 즉시 지혈과 응급조치를 취하라!" " 저, 우선 환자들을 분류해야 합니다! " 렌이 말했다. "그게 뭐지?" 렌은 조급한 마음에 빠른 말투로 설명했다. 효율적인 치료를 위해 야전에서는 환자들을 몇 단계로 분류한다. 보통 긴급환자(T1), 응급환자(T2), 비응급환자(T3), 지연환자(T4)의 네 단계로 분류하는데-그렇게 하는 게 NATO식이었다-긴급환자는 생명이나 사지를 구하기 위한수술이 필요하지만 수술시간이 짧은 환자, 응급환자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수술이 필요하지만 처치가 늦어도 생명에 위협적이지 않은 환자, 비응급환자는 가벼운 부상을 입어 당장 숙련요원에 의한 처치를 받지 않아도 되는 환자, 지연환자는 치료가 복잡하고 시간을 많이 소요하기 때문에 요원가 자원을 낭비하는 환자다. 환자 분류는 결국 살리기 힘든 환자를 일찌감치 포기함으로써 한정된 시간과 자원 내에서 최대한 많은 환자를 살리기 위한것이다. 재빠른 설명을 들은 비조닌은 그렇게 하는 게 얼마나 효율적인지 바로 깨달았다. "네가 분류해라! 그에 따르마! 나는 네 분류에 따라 순서대로 치료하겠다!"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환자분류는 끔찍한 일이고 달갑지 않은 권한이었다. 부상병들은 순식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알아챘다. 렌은 긴급환자에게 붉은색, 응급환자에게 파란색, 비응급환자에게 검은색, 지연환자에게 노란색으로 표시했는데, 노란색을 받으면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하고 그냥 죽는다는 말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렌은 부상자드의 애절한 눈길을 피하며 닥치는대로 환자들을 초진하고 호흡및 기도확보, 외부대출혈 처치, 심혈관계 쇼크 상태 처치를 하면서 빠른 속도로 환자들을 분류해나갔다. 이따금씩 너무 심한 출혈을 보이는 환자들은 가볍게 치유마법을 써서 지혈시켯지만 가망이 없는 환자는 이마에 노란색을 칠한 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장 죽음에 가까운 부상병들이 가장 애타게 삶을 갈구했다. 화염마법을 맞아 피부가 3분의 1을 넘게 3도 화상을 입고 복부는 아예 내장이 보일 정도로 타버린 자도, 폐 부분에 철퇴를 맞아 제대로 말도못하는 자도, 머리가 움푹 들어갈 정도로 심하게 맞은 데다 양팔이 모두 떨어져나간 자도, 렌이 이마에 노란 물감을 칠하는 순간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차라리 검은색을 칠해줘!" "나는 아직 안죽었어!" " 제발, 제발 죽게 내버려두지 마! " 부상병 한 명이 멍이 들 정도로 세게 렌의 팔목을 잡자렌은 흠칫 놀라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다 죽어가는 사람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 있었는지 부상병은 절대 렌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 이거 놔요! " 렌은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 살려줘! 제발 살려줘! " 부상병은 애타게 외치다가 갑자기 꺼억하는 소리를 냈다. 그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지고 배설물 냄새가 확 풍겼다. 죽으면서 괄약근이 풀리자 몸 안의 똥오줌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주위는 일순 고요해졋다. 렌은 잠시 몸이 굳어 꼼짝도 하지 못하다가, 옆에서 구와인이 툭 치자 비로소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 레진아, 정신차려라. " 구와인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 아, 저 손! 저 손! " 렌은 더듬으면서 아직도 풀리지 않은 손을 가리켰다. 구와인은 힘을 주어 환자, 아니 사망자의 손을 풀었다. 렌의 손목에는 어느새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손에 남은 멍자국은 무슨 낙인인 것처럼 뜨거웠다. 그러나 주저 할 틈이 없었다. 렌은 두 손으로 자기 뺨을 때려 억지로 정신차렸다. 미친듯이 환자를 분류하고 지혈하고 심폐소생술을 하고 죽은 사람을 내가게 하니 어느 덧 해가 졌다. 온몸에서 풍기는 피와 죽음의 냄새가 견딜 수 없어졌다. 겨우 급한 환자의 응급처치를 마치고 나자 구와인이 렌을 불렀다. " 얘, 레진아, 잠깐 나가자. " 렌은 멍하니 그를 따라 천막 밖으로 나갔다. 구와인은 허리춤에서 파이프를 꺼내더니 거기에 연초를 잘 다져넣고 불을 붙인 후 한모금을 빨고 렌에게 건넸다. 렌은 고개를 젓다가 문득 충동적으로 파이프를 받아 깊이 들이마셨다. 독한 연기가 폐를 채우자 렌은 눈물이 나올 정도로 기침을 했다. 그러나 담배 연기 덕분에 피 냄새는 조금 옅어졌다. 부검을 한 의사는 꼭 담배를 피우다더니, 이래서인가. 구와인은 렌이 기침하는 모습을 보며 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리다가 갑자기 물었다. " 레진아, 너는 왜 환자들을 치료하냐? " 뜻밖의 질문에 렌은 당황했다. " 사람이 죽어가는 걸 두고 볼 수 없으니까요." " 왜 사람이 죽어가는 걸 두고 볼수 없냐? " 렌은 말문이 막혔다. " 원래 사람이 죽어가는 걸 두고 보지 못하는 게 인지 상정 아닌가요? " 구와인은 킬킬 웃었다. "인지 상정은 무슨 얼어죽을 인지상정.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건 인지상정일지 몰라도 사람이 사람을 살리는 건 인지상정이라고 할수 없지." 렌은 발끈해서 반박하려고했다. 그러나 구와인은 틈을 주지 않았다. "저 부상병들은 다 사람 손에 다친거다. 생각해봐라. 얼마나 열심히 죽이는 방법을 연습하냐? 그래서 얼마나들 많이 죽이냐? 반대로 죽이는 방법 연구하는데 들이는 돈의 10분지 1만큼도 살리는 방법 연구하는 데에는 안 쓰잖아. 안그러냐? 원래 있던 치유마법사도 다공격마법사로 끌어가버리는 판이 아니냐? 그러니 사람이 원래 착하다는 둥,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게 인지상정이라는 둥 그딴소리는 하지 말아라. 사람이 사람을 왜 구하는지 아냐? 그건 순전히 자기 자신으 위해서야. 내 경우는 돈을 위해서이고, 저 비조닌 마법사님의 경우는 아마도 치유마법사로서의 자존심 때문일게다. 네 경우도 그냥 네 자신을 위해서 일거다." 구와인 은 말을 마치고 훌쩍 일어나 가버렸다. 렌은 구와인의 말이 심장에 박히는 것 같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렌은 그날 밤 왜 자신이 그렇게 열심히 사람을 살리려고 하는 건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런 걸 고민하기에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죽음의 행진이 너무 끔찍했다. 영원의 악순환,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 언제나 사람은 사람을 죽인다. 이유도 없이 상처를 입히고 피를 흘린다. 아무리 고치고 살려내도 그들은 결국 다시 다른 사람들 손에 죽는다. 때로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인다. 그래도 계속 치료해야 하다. 의문을 가지고 손길을 주저하기에는 상황이 늘 급박하고, 잠깐의 망설임이 한 명의 생명을 앗아간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확실한 것은 렌의마음속에 점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쌓인다는 것이었다. 한 명을 구하는 건 너무 어려운데 한 명을 죽이는 건 너무 쉬웠다. 귀하고 아까운 목숨들이 끊임없이 죽어가는 걸 보면 렌은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자기의 무기력함에 분노하고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위정자들에게 분노했다. 그리고 반향 없는 분노에 좌절하면서 희망이 옅어지고 절망이 고개를 들었다. 혹시 이게 인간의 참모습은 아닐까. 죽고 죽이는 게 본모습이고 서로 아끼고 위하는 건 그저 가면이 아닐까. 인간은 짐승과 한 치도 다를 바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인간의 선함은 추악하고 탐욕스럽고 잔인한 인가의 본성을 가리기에는 너무 미약한 장막이 아닐까. 며칠 후 카로드에 주둔한 세 만인대 모두가 카로드 남쪽으로 15아반쯤 떨어진 모인 강 유역의 살린 평원으로 이동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앞서의 전투에서 패하고 남은 병력과 후방의 여유 병력들도 모두 그쪽으로 합류한다고 하니 전부 합쳐서 거의 7만 명에 이르는 대병력이었다. 병영 전체가 술렁거렸다. 병동에 수용된 부상자들은 대부분 원대복귀 할 수 없는 중상자들이어서 렌은 비조닌과 상의하여 치료사푸가틴과 의무병 두명만을 남겨놓고 전방으로 이동했다. 비조닌은이번 전투가 보통 위험한 게 아니니 웬만하면 핑계를 대고 빠지라고 렌을설득했으나 레은 도저히 병사들을 버려두고 그낭 떠날 수가 없었다. 비조닌은 렌의 마음을 이해하고, 나중에 정말로 위험해지게 되면 렌을 순간이동으로 피신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렌은 순간이동마법을 배워볼까도 생각했지만 마법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마법이라 전장에서 속성으로 배울 수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15아반은 짐이 없으면 하루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지만 3만 명이 한꺼번에 이동하는 것이어서 살린 평원에 도착하는 데는 꼬박 이틀이 걸렸다. 렌도 갑운 짐을 지고 살린 평원까지 걸어갔다. 가는 길에 구와인과 부빈이 번갈아 끼어들며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그들은 병사들의 분위기, 앞으로의 전망 등을 수시로 전했다. 병사들은 모두 이 살린 평원에서의 전투가 이번 카로딘 독립전쟁을 끝낼 마지막 운명의 전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전투의 승패에 대해서는 온갖 추측이 난무했으나 놀라운것은 병사들 사이에 흐르는 묘한 낙관주의였다. 카로딘의 두 8서클 마법사가 적군을 한 번에 쓸어버릴 극강, 최고의 마법을 개발했고, 그 동안 카로딘이 계속 졌던 것도 적을 방심시키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은밀하게 돌았다. 취사병이어었다가 렌의 추천으로 의무병이 된 부빈은 그 소문을 전하며 흥분했다. "아아, 얼마나 엄청난 광경일까! 아마도 카로딘 역사에 길이 남게 될 전투일 거야! 내 아들들한테 자랑할 수도 있겠지? 이 아버지가 살린 평원에서 싸웠다, 그래서 동제국군을 물리치고 우리 카로딘에 독립을 가져왔다, 이렇게 말이야!" 렌은 부빈을 설득해서 말을 놓도록했기 때문에, 옆에 사람이 없으면 부빈은 렌에게 반말을 하고 렌은 부빈을 형이라 불렀다. "죽는 사람 보는 게 뭐가 그리 엄청나겠어요? 그저 끔찍하겠죠." 렌이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부빈은 한심하다는 듯이 렌을 쳐다보며 바로 반박했다. "너 불알 달린 사내자식이 맞기는 맞아? 사내라면 모름지기 창칼이 부딪치고 피가 튀기는 전장의 로망을 알아야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장에서 죽을지 모른다고 벌벌 떨더니, 마법사들이 적군을 물리쳐준다고 하니까 이제 용감한 척하는거 아니에요? 에당초 부빈 형은 부모님 빽으로 취사병 노릇이나 했었잖아요." 렌이 지적하자 부빈은 얼굴을 붉히며 벌컥 화를 냇다. "그, 그건 부모님이 나 몰래 알아서 하신 일이야! 나는 처음부터 전투병이 되고 싶었다구! 그런데 이번에는 전투병 노릇 좀 해볼까 생각하던 참에 네가 날 의무병으로 끌고왔고!" "아이구, 예, 잘못했어요." 렌은 웃으면서 사과했다. 엪에서 따라가던 구와인은 한심하다는 눈길로 부빈을 바라보며 말참견했다. "멍청한 놈, 자기 목숨 소중한 줄 알아야지.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운 놈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창칼에 꼬치처럼 꿰여 죽고, 시체도 못찾기, 훈장 나부랭이 하나 받고, 남은 가족들은 쫄쫄 굶다가 거지 되는 거 몰라? 영웅? 전사? 그런거 다 쓸데없다. 그저한 목숨 부지해서 무사히 돌아가는게 최고야." 부빈은 즉시 반박했다. "그럼 구와인님은 왜 맨날 그렇게 야전치료사로 참전하시는 겁니까? 야전치료사도 실제로는 싸우는 병사들 못지않게 위험하다잖아요?" 부빈과 구와인은함께 일하면서 벌써 많이 친해졌다. 구와인은 부빈이 단골 술집(대공국의 뒷골목)의 장래 주인이 될 놈이라는 걸 의식해서 일부러 친한 척했기 때문에 순진한 부빈이 넘어간 셈이다. 구와인은 부빈의 말에 잠시 한숨을 쉬었다. " 나도 이러고 싶어 이러는 게 아니다. 너 전쟁터에서 세월을 보낸 용병이 다 정리해서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참지 못하고다시 전쟁터로 떠나버렸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지?" "예, 우리 술집에도 그런 손님들이 꽤 있는걸요." 부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지 아냐? 사람이란 참 이상한 동물이야. 처음에는 전쟁터에 나가면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몰라 바들바들 떨고, 옆에서 누가 쓰러니면 눈앞에 캄캄해지고, 손에 창을 들었는지 칼을 들었는지 정신이 없고, 전장에서 얽혀 미친 듯이 싸우다 처음 사람을 죽이면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것 같지. 하도 충격이 크니까 전쟁터에서 싸우자마자 미치는 놈도 있어. 그치만 대부분은 그럭저럭 이겨내지. 그러고 나면 이제 전처럼 무섭지는 않아. 사람을 죽여도 담담하고, 전투가 시작되기 전의 미칠것 같은 공포감도 그럭저럭 참을수 있게 되지.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거기서 한발 더 나가서, 전쟁터에서 피 튀기며 목숨 걸고 사람 죽이는 그 갈데까지 간 상황이 되어야 아, 내가 살아있구나, 사는 게 이렇게 짜릿하구나 하고 느끼게 되거든. 어떤 놈들은 아예 거기에 중독이 돼서, 칼부림도 없고 피도 안튀기는 평화로운 고향마을로 돌아가면 도대체 적응을 못해. 아무 일도 없는 걸 못 견디는 거지. 죽을지 살지 몰라서 눈은 충혈되고 가슴은 쿵쿵대고 온몸이 저릿저릿한 그 기분을 못 잊는 거야. 그런 놈들은 결국 다시 군대를 찾게 되지. 그리고는 그 피구덩이 속에서 자기가 살아 있다는 걸 느끼지. 그러다가 다 늙어서 싸울 수 없게 되거나 팔다리 병신이 되어버리거나 아니면 아예 죽어버릴 때까지 전쟁터를 못 떠나느 거야. 그놈들은 그게 진정한 사나이라는 둥, 영웅이라는 둥 떠들어대지만, 나는 잘 안다. 왜냐면 나한테도 그런 증세가 있으니까. 그건 그냥 중독이야. 술주정뱅이가 술을 못 마시면 못 살듯이, 그런 긴장감이 없으면 못 사는 거야. 참 바보같고 한심한 얘기지만 어쩔 수 없는 거지. " 렌과 부빈은 모두 조용해졌다. "그러니까 백전의 용사니 어쩌니 하는 놈들 얘기는 듣지 말고 그냥 그저 몸 사릴 궁리나 하라구. 뭐, 나도 한동안 전쟁터에서 피 구경을 못 하면 몸이 근질거리기는 하지만 나는 내 문제가 뭔지는 알거든. 아, 사람이 죽는 걸 못 보면 갑갑해서 못 사는구나 하고 깨달은 다음에는 그 냥 그대로 인정하고 그걸 즐기면서 어떻게 목숨을 부지할까 하는 연구를 했지. 자, 이제부터는 강의료를 받아야 하지만 내 특별히 너희 둘에게는 공짜로 해주마. 전쟁터에서 싸우면서도 죽지 않는 제일 좋은 방법은 첫째, 전쟁터에 가지 않는 거고 둘째, 어쩔수 없이 싸워야 하면 신발끈이라도 매면서 할 수 있는 데까지 미적거리는 거고, 셋째, 적군이랑 싸울 때는 무조건 흐름 가운데로 들어가야해." "흐름이라고요?" "그래, 잘 보다보면 우리 군대의 흐름과 적군의 흐름이 있거든. 제일 바보 같은 건 그 흐름이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데에서 싸우는 거지. 거기서 싸우면 십중팔구 죽어. 하지만 우리 편의 흐름 중간 쯤 몸을 집어넣으면 엔간해서는 다치지 않지. 그걸 잘 찾아내는 것도 요령이야." 부빈은 심각하게 새겨들어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위험한 게 위에서 무차별적으로 떨어지는 마법사의 공격인데, 그것도 사실 요령이야. 진짜로 위험한 8서클 마법사들은 사실 전쟁터에서 쉽게 못 만나니, 8서클 마법사한테 당했다면 그냥 팔자라고 봐야지. 보통은 4서클 내지 6서클 마법사들이 그럭저럭 공격을 펼치는데, 그런 건 날아오면서 힘이 약해지는 경우가 많거든. 그러니 돈을 모아서 마법 방어석 같은 아이템 하나쯤 사두는게 좋아." "구와인님도 갖고 계십니까?" 부빈이 묻자 구와인은 씩 웃었다. "물론 갖고 있지. 아주 안전한 곳에 보관해놨지." 렌과 부빈은 모두 구와인의 거시기 근처에서 굴러다니고 있을 마법 방어석을 떠올렸다. "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쩔 수 없이 적군과 마주쳐서 싸우게 될 때의 요령을 알려주마. 잘 살펴봐서 근처의 나무나 바위 같은게 있는지 확인하고, 적군이 몰려오면 무조건 소리지르며 그쪽으로 달려가. 마치 그쪽에 적군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는 푹 쓰러져. 그 다음엔 비명을 지르며 납작 누워. 엎드리는 것보다는 눕는게 좋아. 주위 상황을 실눈으로 살필 수 있으니까. 이런 경우 지형지물 옆에 눕는 게 필수적이야. 왜 그러냐면 기병이 말을 몰고 달려올 수도 있거든. 원래 말들은 절대 사람을 안밟지만, 군마들이 우르르 두두두두 달려오다 보면 그 길목에 누워 있는 놈들은 짓밟히고 말지. 그러니까 말들이 달려오지 않을 곳에 누워야 해. 누운 다음에는 평소 지니고 다니는 피 주머니를 꺼내거나 그게 없으면 근처에 쓰러진 병사의 피를 묻혀서 적당히 피칠을 한 후 다 죽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한다. 약간의 연기력이 필요하지. 그렇게 누워 있다가 우리쪽이 이기는 것 같으면 적당한 때 일어나서 부상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싸우러 일어난 용감한 군인인 척하면 되고, 우리 쪽이 지는 것 같으면 무조건 일어나서 도망가지 말고 우리 쪽 주력군이 한꺼번에 후퇴할 때 묻어서 도망가도록 해. 하지만 그 정도 되면 정말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위험한 지경에 이른 거니까, 그 전에 알아서 살길을 찾아야겠지. 알겠느냐?" "결국 도망가는 방법 아닙니까, 그거?" 부빈은 한심하다는 듯이 묻자 구와인은 엄숙하게 선언했다. "내 말 새겨들어라. 사람 한 명 더 죽이거나 영웅이 된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는 건 아냐. 병사들이 죽어가면 높으신 분들만 좋지. 그러니 자기 목숨 부지하는 게 제일 중요한 거다. 다른 거는 다 쓸데없는 일이야." 이틀 만에 도착한 살린 평원은 아름다웠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른 평원에는 거의 다 익은 벼들이 고개를 숙이고 가을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황금물결을 자아냈다. 참새들은 하늘 높이 날아다니고 뭉게구름은 벽옥색의 하늘을 장식했다. 그러나 그 평화로움은 자연에 국한된 것이었다. 평원의 주민들은 속속 도착하는 수만의 군대를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들은 원래 피난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추수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떠나지 않고 남은 자들이었다. 지휘관 한 명이 손짓하자 병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저마다 손에 횃불을 들고 있었다. 지휘관이 다시 손짓하자 병사들은 일제히 논으로 들어가 불을 붙였다. 이미 거의 다 익어 물기가 쪽 빠진 벼들은 활활 잘도 탔다. 곧 대기는 벼 타는 연기와 냄새로 가득 찼다. "그만해! 이놈들아! 네놈들이 적군이냐, 아군이냐! 이게 무슨 짓이냐!" 어느 촌로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쇠스랑을 들고 병사 한 명에게 달려들었다. 병사는 당황하며 뒷걸음질로 피하다가 넘어졌다. 병사가 약한 모습을보이자 용기를 얻은 마을 주민 몇 명이 합세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논에 불붙이는 데 열중했던 병사들은 곧 동료의 위기를 눈치채고 마을 주민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만들 해라! 더 저항하면 반역죄로 처단하겠다!" 병사 한 명이 외쳤다. "이놈들아, 네놈들은 애비 에미도 없느냐? 네놈들은 입에서 들어가는 밥이 하늘에서 떨어졌더냐? 어떻게 지은 농산데, 모 심고 물 대고 뙤약볕에서 죽을 고생하며 김 매어가며 지은 농산데, 추수를 겨우 보름 남겨놓고 불을 질러? 차라리 나를 죽여라!" 노인 한 명이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곡괭이를 휘두르자 병사는 피하려다가 어깨에 곡괭이를 맞았다. 피가 흘렀다. 병사는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칼을 빼 노인을 찔렀다. 노인은 심장에 칼을 맞자 놀라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벌써 시커멓게 타버린 벼 위로 힘없이 푹 쓰러졌다. 잿더미 사이로 피가 스며들었다. 다른 주민들은 노인이 죽는 걸 보고 공포에 질렸다. 분노 대신 두려움이 찾아왔다. 그들은 힘없이 농기구를 내리고 도망갔다. 병사들은 그들을 쫓지 않고 묵묵히 불 지르기를 계속했다. 마른 들판이라 순식간에 불이 번져 살린 평원을 태우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제는 재로 변한 논 위에 군대는 숙영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곧 다가올 건곤일척의 대전투를 조용히 기다렸다. 조금 전까지 파랗던 하늘은 노란 연기로 가득 차 흐려졌다. 렌은 틈을 보아 죽은 노인 곁으로 다가갔다. 피와 재로 범벅이 된 노인의 시신은 아직 수습이 안 된 채 이제는 숙영지로 변한 논바닥 가운데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렌은 노인의 얼굴을깨끗이 닦아주고 멀리 논둑에서 아직 서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그들은 말없이 다가와 노인의 시신을 거둬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렌은 울었다. 6 장 피는 피를 부르고 일드인 대공은 이제 겨우 서른이었다. 모두들 그가 너무 젊다고 생각했으나 그 자신만의 서른이 세계를 차지하기 딱 좋은 나이, 너무 어리지도 너무 늙지도 않은 적당한 나이라고 생각했다. 누리디안 대제도 서른에 정복전쟁을 시작했고 동서대륙을 통일했을 때도 겨우 서른다섯이 아니었던가. 그가 처음 카로딘 독립의 포부를 가지게 된 것은 열두 살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구체적이 계획을 세운 것이 십이년 전, 그가 막 성인식을 치를 무렵이었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가 아는 모든 사람들 중 자신이 가장 총명하고 가장 야심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야심을 펼치기에 카로딘 대공국은 너무 작았다. 그의 아버지인 에콜린 대공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셋째 아들의 놀라운 재능을 알아볼 눈은 있었다. 일드인 위로 형이 둘이나 있었으나 그는 맏아들과 둘째 아들을 제쳐놓고 일드인을 편애했다. 건강이 안 좋던 에콜린 대공은 일드인이 갓 스물이 되자마자 일드인을 대공 대리로 임명해서 대공의 업무와 권한 중 반이 넘는 부분을 넘겼다. 당연히 큰형과 둘째형은 반발해싿. 그러나 일드인은 그저 부드러운 낯빛으로 형들을 대하며 늘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들을 좌우할 약점을 찾기 위해 애썼다. 인간이라면 모두 약점이 있다. 설사 약점이 없다 하더라도 만들면 되는 것이다. 큰형의 약점은 여자였다. 작은형의 약점은 탐욕이었다. 그는 그 약점을 적절히 활용해서 처음 몇년 동안 큰형과 작은형의 환심을 샀다. 그의 세력이 충분히 커진 후에는 더 이상 약점이 아닌 실력만으로도 큰형과 작은형을 누를 수 있게 되었다. 동생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낀 형들은 일드인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일드인의 탁월한 능력에 감복하여 형들이 스스로 포기한 거라 여겼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 에콜린 대공마저도 그러했다. 일드인이 기다리기만 하면 대공위는 당연히 그의 품으로 굴러 떨어질 상황이었다. 원래 그의 구상은 서제국의 카에닌 황제가 은거하고 동제국의 하라스 4세가 앓아누운 권력의 진공상태를 이용해 카로딘 독립전쟁을 일으키고 그 여세를 몰아 동제국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은 그의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하라스 4세의 황태자 아제룬은 범용한 인물이었으나, 소드 마스터라 소문마저 있는 이황자 테룬이 반란을 일으켜 황위에 올랐고, 카에닌 황제 또한 무슨 나와림 안딘과 얽혀 모습을 드러내고 내정개혁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조급해졌다. 하루라도 빨리 거병해야 테룬 황제 즉위 초기의 혼란을 틈탈 수 있고, 개혁에 정신없을 카에닌 황제의 간섭도 배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인 에콜린 대공을 다그쳤다. 그러나 애콜린 대공은 뜻밖에도 거병을 거절했다. 하라스 4세나 그 큰아들 아제룬이라면 몰라도 테룬 황제는 벅찬 상대라는 것이었다. 일드인은 겁 많고 평범한 아버지에게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하루하루 동제국이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하는 수 없이 최후의 선택을 했다. 에콜린 대공은 독이 든 꿀과자를 먹고 잠들듯이 세상을 떴다. 모두 일드인을 의심했으나 아무도 감히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다. 그의 형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래서 형들도 역시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버지와 형들을 죽이면서 많이 울었으나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일어나지 않으면 카로딘의 독립은 영원히 불가능하리라 믿었다. 역사는 언제나 영웅을 부르고, 영웅은 또한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프란다인 공국이 참전하는 바람에 전쟁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으나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서막, 눈속임에 불과했다. 전사자가 벌써 3만이나 났으니 눈속임 치고는 거창했지만 그만한 보람이 있었다. 남은 문제는 하루라도 빨리 마법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정말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이오?" 일드인은 8서클 마법사 베오인에게 물었다. "예, 물론입니다." "올리오인, 그대도 같은 생각이오?" 올리오인은 대답하는 대신 수긍의 뜻으로 정중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예, 이제 마지막으로 실험만 해보면 됩니다. 가능하면 생체실험이 좋겠습니다. 특히 마법사를 상대로 하는 것이 더 확실할듯 합니다." 일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적당한 실험대상이 있소. 7서클 마법사이데 괜찮겠소?" 베오인과 올리오인은 그 7서클 마법사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일드인의 스승이었다가 그의 배덕을 고발하면서 반역죄를 뒤집어쓴 노마법사 아나민이었다. 둘의 얼굴은 약간 창백해졋다. 스승을 희생하겠다는 그의 말투에는 단 한 점의 망설임이나 동정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담담함에 베오인과 올리오인은 모두 몸을 떠었다. "예, 괜찮습니다." 올리오인이 황급히 대답했다. 카로드 근교의 버려진 연병장은 무척 넓은데다가 주위에 인가도 없어 마법실험을 하기에 손색없는 완벽한 장소였다. 외부에 실험을 탐지당하지 않기 위해 이곳 주위에는 물샐 틈 없이 마법결계가 쳐져 있었다. 일드인은 중앙의 의자에 앉아 초조하게 실험용 마법사들이 끌려오기를 기다렸다. 일드인 옆에 선 베오인과 올리오인은 마지막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뒤에 선 7서클 마법세 세 명 또한 얼굴 표정을 굳힌 채 긴장감을 떨쳐버리려 애썼다. "잘 되겠지? 당연히 성공할 걸로 믿소." "전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걸로는 부족하오. 반드시 성공해야 하오." "예." 베오인은 식은땀을 닦으면 다시 심호흡을 했다. 잠시후 경비병 몇 명이 60대가 거의 다 된 노마법사를 끌고 왔다. 노마법사는 일드인을 보자마자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일드 삼공자 저하! 하늘이 무섭지도 않소이까? 그토록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또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호오, 7서클 마법사 아나민님 아니십니까? 아직도 살아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아니민님께서 벌써 돌아가셨다면 귀중한 실험체가 하나 사라졌을 텐데, 천만다행입니다. 그 나저나 스승님, 저를 대공 전하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아직도 삼공자 저하라 부르시니 옛날 생각이 나서 좋기는 한데 조금 서운하군요." 일드인은 비아냥거렸다. "일드님, 이 늙은이의 충고도 듣지 않으시고 기어코 선대공 전하와 형님을 독살하신 후 이 전쟁을 일으키시다니, 어찌 사람의 도리를 따르지 않으시고 참람과 죄악의 길을 가신단 말씀입니까! 제가 그리 가르쳤습니까! 어찌 이 카로딘에 멸망을 가져오려 하십니까!" 노마법사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일드인은 가면처럼 띠고 있던 웃음기를 지우고 벌떡 일어나 노마법사를 노려보았다. "아남! 네가 감히 나를 아명으로 부르다니! 네가 비록 내 스승이었다 하나 너는 그저 힘이 봉쇄된 어리석은 7서클 마법사에 불과하다! 네가 말한 도덕이니 도리니 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그 나이가 되어서도 깨닫지 못하느냐!" 일드인 뒤에서 시립하고 있던 8서클 마법사 베오인과 올리오인은 슬며시 고소한 웃음을 지었다. 7서클인 주제에 공자들을 어릴 적부터 가르쳣다고 해서 8서클인 자신들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고 있던 아나민 마법사였다. 아나민이 자신들보다 특별히 거만한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인간이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서클-물론 역사에 남은 9서클 대마법사가 몇몇 있기는 했지만- 에 도달한 자신들 위에 다른 마법사가 있다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아니민의 비참한 모습은 몹시도 흡족했다. "아남 스승님, 제 말씀 좀 들어보십시오." 일드인은 다시 존대를 풀며 존대를 했다. "스승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가? 우리 카로딘이 동제국보다 못할 게 뭐가 있습니까? 카로딘의 역사가 천오백년인데 동제국은 겨우 백오십 년도 채 안 되지 않습니까? 문화와 역사와 국방력 무엇하나 동제국에 빠지지 않는데, 왜 동제국에 고개를 숙여야 된단말씀입니까? 백오십 년 전, 그때는 우리 카로딘도 약했습니다. 카로딘 왕국이라고 칭하긴 했지만, 북부 말틴은 서제국에 뱃긴 지 오래되었고 중부는 힘이 약해 영주들이 독립하는 것을 막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스승님, 제가 열두 살 때 여쭤보던 물음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아나민은 탄식했다.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드 공자님. 어떻게 하면 카로딘을 제국으로 만들 수 있느냐고 물으셨지요." "그때 스승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예, 그것은 대공 전하와 대공자 저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라고 말씀드렸지요." "그 말씀이 제 일생의 목표를 지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아버지와 형님들을 뛰어넘어 제가 대공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일드인은 엄숙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아나민은 다시 탄식했다. "저는 본능적으로 알았습니다. 동제국과 서제국이 모두사실상 통치권의 공백을 보이고 있는 이때가 아니면 우리 카로딘에 기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 스스로 채찍질해가며 모두에게 능력을 인정받고 아버님의 신임을 독차지하고 부국강병의 길로 우리 카로딘을 끌어갔습니다. 그리고 비밀무기도 육성했습니다. 아아, 더도 덜도 말고 딱 3년만 그 상태가 유지되었더라면! 그랬다면 저는 순타낳게 대공위를 이어받고 손쉽게 동제국을 무찌를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노스 신께서는 제가 너무 쉽게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싫으셨나 봅니다. 서제국 황제도 다시 나타나고, 동제국 황위도 유약한 하라스 4세 황제와 의붓어머니의 치마폭에 휩싸인 바보같은 아제룬 황태자의 손을 떠나 찬탈자 테룬의 손에 들어갔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거사를 단행했습니다. 이번이 아니면 제가살아있는 동안 카로딘에 다시는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저는 알았으니까요. 이번 전쟁의 승기는 우리 카로딘에 있습니다. 뿌리도 없고 근본도 모르는 하라스 대제에게 뺏긴 주권을 이제 찾을 때가 된겁니다!" 일드인은 불길처럼 치솟아 오르는 신념과 열기에 도취되어 외쳤다. "백성들을 생각하십시오! 일드 공자님! 그대가 일으킨 무모한 전쟁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백성? 역사가 백성을 기억합니까? 아무도 백성따위는 기억하지 않습니다! 역사는 오로지 정복자, 승리자만을 기억할 뿐입니다. 스승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누리디안 대제가 동서제국을 통일했을 때 그가 죽인 사람들을 쌓아놓은 탑은 호케 산보다도 높았다고 하지요. 하도 많이 죽어서 토인 강과 모인 강이 붉게 물들었다고도 하고요. 하지만 그런 정복전쟁이 있었기에 동서대륙에는 평화가 찾아왔고, 누리디안 문명은 일찍이 없었떤 번영을 누리지 않았습니까? 지금 잠시 고통스러워도 결국백성들은 독립 카로딘의 치세 하에서 태평가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 "일드 공자 저하, 저하께서는 잘못 알고 계십니다! 역사가 정복자, 승리자만을 기억한다고요? 아님니다! 역사는 백성들이 만들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통치자는 다만 백성들에 ? 피?쓰이고 버려지는 도구일 뿐입니다. 카로딘의 독립을 원하십니까? 무엇을위해 원하시는 겁니까? 그저 동제국의 지배를 받기 싫어서가 아닙니까? 백성들에게 아무 부담없는 형식적인 군신관계마저도 참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저하께서 아무리 카로딘의 독립을 원한다 해도 백성들이 원하지 않으면 이 전쟁을 질 것입니다! 제가 본 카로딘 백성들중 전쟁을 환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저하 개인의 욕심으로 일으킨 전쟁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 일드인은 한숨을 쉬었다. "노망 든 노인네의 말을 더 듣기는 지겹군. 베오인! 올리오인! 마법을 시전하시오! 아, 마법을 시전하기 전에 아남 스승님께 저항할 수 있는 기회는 드려야겠지요? 베오인, 아나민 마법사에게 걸려 있는 봉쇄마법을 푸시오. 스승님, 어디한 번 실력을 다해서 싸워보시죠.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이 제자에게 마지막 즐거움을 주십시오." 베오인과 올리오인은 일드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당으로 내려섰다. 중년의 7서클 마법사 세 명도 따라 내려섰다. 그들은 노마법사 아나민을 둥글게 에워쌌다. 베오인과 올리오인은 먼저 나직하게 주문을 외우며 투명한 방어구를 만들었다. 대략 반경 3데보탕(9 미터) 정도 되는 방어구 였다. 방어구가 완성되자 베오인은 먼저 아나민 마법사에게 걸린 봉쇄마법을 풀었다. 그러나 아나민이 채 몸을 추슬러 공격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다섯 마법사들은 각기 마나를 일으켰다. 다섯 마법사의 손에서 푸른빛, 붉은 빛, 노란 빛, 하얀 빛, 검은 빛의 마나구가형성되었다. 베오인과 올리오인의 마나구는 다른 세명의 것보다 조금 컸으나 그들은 곧 마나구의 크기르 조절하여 옆의 다른 세명의 것보다 조금 컸으나 그들은 곧 마나구의 크기를 조절하여 옆의 다른 마법사들과 맞추었다. 한동안 마법사들의 두 손 사이에서 빛을 발하던 오색 빛의 마나는 일순 찬연하게 빛나면서 자연스럽게 푸른빛에서 붉은빛으로, 붉은 빛에서 노란 빛으로, 노란 빛에서 하얀빛으로, 하얀빛에서 검은 빛으로, 검은 빛에서 다시 붉은 빛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다섯 마법사들은 필사적인 힘으로 마나의 방향을 되돌렸다. 마나의 방향을 역방향으로 뒤집으려면 9서클의 마법력이 필요했다. 원래 8서클 마법사 열 명을 세워놓는다고 해서 9서클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베오인은 일종의 마법합벽진을 이용해서 다섯 명의 8서클 마법사의 상승작용에 의해 일시적으로 9서클을 내는 방법을 개발해냈다. 그래서 지금 이 마법이 가능해진 것이다. 마나는 자연스런 흐름이 저지당하자 미친 듯이 어지러지고 흔들렸다. 그러나 그들이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힘을 주자 갑자기 마나는 방향을 바꾸어 천천히 꺼꾸로 돌기 시작했다. 베오인과 올리오인의 입가에서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나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피는 멈췄다. 원을 그리며 다섯 마법사의 손에서 손으로 흐르는 마나 색은 점점 탁해지고 기운은 점점 암울해졌다. 마나가 도는 속도는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빨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마나는 잿빛으로 변했다. 그것이 바로 황제의 저주였다. "스승님, 제 말을 들으실 정신이 있으신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들으십시오. 스승님께서 저를 무모하다고 생각하셨지요? 아무리 동제국이 허수아비라 해도 일개 공국으로서 제국을 치는 것은 승산이 없다고 보셨지요? 그러나 저의 이 비밀무기를 보십시오! 이래도 제가 패배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사실 동제국을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 저는 참 많이 고민해왔습니다. 그리고 서제국의 개입을 어떻게 하면 완전히 막을 수 있을까도 궁리해왔지요. 그 해답은 말틴에 있었습니다. 말틴, 아름다우 도시, 쾌락과 풍요의 도시! 한때 우리 카로딘의 보석이었떤 곳! 그러나 서제국 황제가 저주를 내려 영원한 죽음의 도시가 되어버린 곳! 만약 황제의 저주를 시전할 수 만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동제국군은 우리 카로딘의 발아래에서 잿빛 가루로 화할 것이다! 그리고 서제국은 우리가 그들을건드리지 않는 한 소모적인 마법대결의 악순환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카로딘과 동제국 사이의 일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법사들을 그리 보내 연구시켰습니다. 처음에는 가망이 없어 보였지만, 여기 베오인이 고심 끝에 마침내 비밀을 알아냈습니다. 말틴에 직접 가서 보기도 하고, 거기 주민들을 데려다 실험도 하고, 몇몇 마법사들은 마법을 시전하다가 스스로 잿빛 가루 신세가 되어 버렸지만, 그 모든 희생을 딛고 저는 마침내 성공했습니다.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낸 저기 베오인입니다. 9서클 마법사가 없는 대신, 다섯 명의 마법사를 한꺼번에 쓰면 어떨가? 그들의 힘을 합치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 결과는 지금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이 제자가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제발 그마두십시 오!" 아니민은 다시 부르짖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싼 잿빛 기운에서 뿜어나오는 죽음의 저주를 느끼면서도 마지막 힘을 짜냈다. "일드 공자님, 그대는 잘못생각하고 있습니다! 황제의 저주를 한번이라도 사용하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비밀은 다른나라에도 퍼질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나라와 나라같의 전쟁은 사람들 사이의 전투가 아닌 대량살상마법의 교환이 될 것이고, 그렇게 몇 번의 전투가 있고 나면 전쟁이 벌어지는 나라들으 모두 말틴처럼 초토화 될것입니다! 그대는 황제의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까? 사람들의 몸은 잿빛으로 부서져버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평생 낫지않는 잿빛 얼룩을 지니고 고통에 떨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푸른 들판은 흑백으로 변해 아무 곡식도 키울 수 없게 되고, 생명의 물은 죽음의 물로 변해 그 물을 마신 사람들은 모두 황제의 저주를 직접 받은 것처럼 잿빛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때 가서후회한다 하더라도 이미 오염된 국토는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제 저하는 다스릴 땅도 통치할 백성도 없는 죽음의 벌판에서 홀로 황제의 관을 쓴 채 배회하게 될 것입니다!" 일드인은 어두운 안색으로 옛 스승의 말을 듣다가 반박했다. "저라고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줄 아십니까? 스승님의 말씀도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유능한 마법사를 동원해서 황제의 저주를 펼치는 법을 알아내는 데 걸린 시간이 겨우 8년입니다. 길다면 길지만 짧다면 짧은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카로딘 말고 다른 나라도 마음만 먹으면 언젠가는 황제의 저주를 펼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 방비책 없는 카로딘은 속절없이 그나라에 당하고 말 겁니다. 그러나 만약 카로딘이 황제의 저주를 먼저 펼쳐 그 위력을 만천하에 내보인다면, 그래서 동제국과 인근 공국들을 모두 굴복시킨다면, 카로딘의 지배하에 있는 그들 나라들은 섣불리 카로딘에 대항할 엄두를 못 낼 것입니다. 혹시 그들 나라 중 한 나라에서 황제의 저주를 먼저 펼칠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그나라와 우리 카로딘이 전쟁을하게 되면 결국 서로의 국토를 망쳐놓는 것 밖에 되지 않으니, 오히려 서로 간에 섣부른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되지 않겠습니가? 전쟁은 오히려 황제의 저주 덕분에 억제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황제의 저주를 펼치는 것이 당장은 백성들과 이 세상을 괴롭히는 일로 보일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백성들 모두에게는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 "어찌 공포와 의속과 약육강식으로 나라를 다스리려 하십니까?" "그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정보갛고, 강한 나라는 약한 나라를 정복하고, 잠깐의 평화후에는 끊임없는 전쟁이 있고, 그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이 없었던 적이 단 한순간이라도 있었습니까? 평화라해도 잠시 전쟁이 없는 상태일 뿐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최소한 정복당하는 약자는 되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 스승님,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일신에 지닌신 7서클 마법을 전부 뿜어보십시오! 마음껏 저항해보십시오! 우리 카로딘의 비밀무기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어디 한 번 몸으로 보여주십시오! " 일드인은 반쯤 도취되어독백처럼 외쳤다. 일드인이 말으 끝내는 순간 다섯 마법사들은 일제히 마나를 앞으로 뿜어냈다. 거대한 바퀴처럼 그들 앞을 휘돌던 잿빛 마나는 아나민 마법사를 향해 응축되어가기 시작했다. 아나민 마법사는 자신을 죄어들어오는 불길한 기운에 대항해 하얀 방어구를 불러일으켰다. 잿빛 마나는 잠시 방어구에 부딪쳐 더 나아가지 못했다. 마법사들은 다시 더 힘을 주어 방어구를 압박했다. 아나민 마법사는 피를 토하면 저항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방어구는 뱃빛으로 변하고 마나는 사정없이 아나민 마법사를 덮쳤다. 잿빛 마나는 소리 없이 폭발했다. 잿빛 마나는 다섯 마법사가 만들어노은 방어구 안쪽 전체를 휩쌌다. 아나민 마법사는 뭔가 비명을 지르려는 것 같았으나 목소리가 채 나오기도 전에 마나의 세례를 받았다. 그의 손이 먼저 잿빛으로 변하고, 다시 머리카락이, 얼굴이, 그리고 온몸의 살들이 마치 검은 물감이번지듯 잿빛으로 변했다. 그 모든 살점과 근육은 다시 잿빛 먼지로 하해 흩어졌다. 그리고 그의 뼈도 다시 순식간에 검게 물들어 텅 하는 소리를 내며 와르르 떠어져 내렸다. 뼛조각은 검은 크리스탈이 되어 산산이 부서지고, 그의 의복은 주인을 잃고 힘없이 펄럭거리다가 바닥에 조용히 가라앉았다. 다섯 마법사는 황급히 잿빛의 반구에서 몸을 빼어 밖으로빠져나왔다. 반구 안은 흑백으로 변했다. 말틴의 마법장과 너무나 똑깥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마법사들은 스스로 펼친 마법이 믿기지 않는 듯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공포와 자부심이 뒤섞인 표정이 그들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갑자기 일드인 대공이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훌륭해! 정말 훌륭해! 이건 영락없는 말틴에 펼쳐진 황제의 저주의 축소판이구려!" 다서 마법사들은 일드인 대공에게로 몸을 돌려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홍조를 띄우며 대공의 찬사에 감사를 표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일드인은 호기심을 빛내며 물었다. "그대들이 전력을 다해 황제의 저주를 펼친다면 그 세기는 어느 정도요?" 베오인이 지친 목소리로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더도 덜도 아니고 서제국 황제가 말틴에 펼쳤던 것과 동일한 세기가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즉, 직경 100아반 내의 모든 생명체를 멸할 수 있을 줄로 압니다. 다섯 명의 힘을 합친 결과이지요. 물론 조절이 가능합니다. 크게는 100아반, 적게는 지금 펼친 정도로 3데보탕도 가능하지요." 베오인은 사실 저주의 크기를 조절하는 부분은 조금 자신이 없었으나 일부러 호언장담했다. 일드인은 감탄성을 발했다. "그렇다면 저 반구는 얼마 동안 지속되는 거요?" "말틴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마나의 독이 반으로 줄어드는 데 420년, 다시 그 반으로 줄어드는 데 또 420년이 걸립니다." "모인 강 옆의 살린 평원을 최후의 대전투 장소로 택했는데, 그럼 살린 평원은 앞으로 죽음의 땅이 되겠군." 일드인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는 곧 밝게 웃었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동제국 영토 전체가 우리것이 될테니 걱정할 일은 아니오." "예, 전하." "그대들이 나를 폐하라 부를 날도 머지 않았고." "예." 다섯 명의 마법사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실험은 대성공으로 보이는 데, 혹시 실험체가 더 필요하오? " 베오인은 겸손해하려 애썼으나 대공의 칭찬을 받자 결국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은 조금 전의 실험에서 거의 완벽할 정도로 원하는 결과를 얻어냈기 때문에 굳이 더 이상 실험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실험은 최종 확인을 위한 것이었고, 성공은 이미 그 전에 보장된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의 실험은 보안을 위해서라도 적절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저기 세 명의 7서클 마법사의 마법을 일시적으로 8서클로 증폭시키는 것은 조금 더 안정화작업이 필요할것 같습니다만, 그것도 이제는 거의 숙련단계에 이르러 실전에서는 무리 없이 펼쳐내게 될 것입니다. 어쨋든 한 번만 확실히 성공하면 되니까요. 가낭 중요한 것은 저희들이 에워싸는 전장 안에 동제국 황제가 직접 뛰어들도록 확실히 조치하는 것입니다. " 일드인은 씩 웃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소. 내가 알아본 바로는 찬탈자 테룬은 평소에는 멀쩡하다가 피만 보면 스스로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전쟁터로 뛰어들어 살육을 계속한다고 하오. 저번의 푼단 고원 전투에서도 그 바람에 우리가 패하지 않았소? 그러니 그가 그런 지경이 되도록 약간만 부추겨주면 되는 것이오." 일드인은 흡족하게 웃었다. "정말 수고했소! 이 전쟁이 끝나면 내 그대가 상상하지 못한 재화와 영예를 내리리다." "예, 전하." 베오인은 웃음을 감쳐려 애썼다. 모두들 뒤에 남은 커다란 잿빛 반구와 그 안에 남은 시체의 잔해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다. 카로드에 주둔했던 3만 명 외에 더 후방과 더 전방의 4만 명이 추가로 살린 평원에 합류하자 평원에는 전운이 감돌고 종전의 평화로군 농촌 풍경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사방에 굴러다니는 말똥 냄새와 태운 볏짚 냄새가 대기에 가득 찼다. 카로딘군은 모인 강으 등지고 동제국군으 맞는 배수진을 쳤다. 평원 중간에 있는 작은 숲 하나가 유일한 엄폐물이었다. 이런 지형에서는 정면승부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병사들도 다가올 전투가 그런 식으로 진행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다가올 전투에 대한 긴장감을 씻으려 애썼다. 이틀 후 살린 평원 건너편 언덕에 동제국군이 나타났다. 언뜻 보아도 거의 10만은 되어 보이는 엄청난 대군이었다. 카로딘군은 수차 패배하여 심각한 전력의 손실이 있었는 데 반해 동제국군은 그동안 거의 사상자가 없었고 거기에 더해 동제국군이 승승장구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동안 주저했던 공국들에서도 원군을 보내온 것이다. 중앙에 펄럭거리는 흑룡의 깃발은 동제국 황제의 상징이었다. 카로딘군은 두려움과 전의에 불타 그 깃발을 노려보았다. 그 깃발 바로 아래의 막사에서는 흑룡 데이그랜이 빈둥거리고 있었지만 동제국군이나 카로딘군 누구도 진짜 흑룡이 거기 잇다는 걸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라비언님, 그대는 8서클 공격마법이 전공이라면서 왜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겁니까?" 프린다인 공국에서 온 8서클 마법사 라우프는 참다 참다 못해 라비언의 막사에 뛰어들자마자 분통을 터뜨렸다. "아아, 라우푸님, 무슨 일이신가요?" 비듬실 같은 푸른 머리카락을 드리운 채 푸른 비단 침상에 비스듬히 드러우? ?빈둥거리던 데이그랜은 놀라지도 않고 상냥한 미소를 지은 채 응대했다. 침상 위에 뒹굴고 있는 데이그랜의 모습은 그야말로 완벽한 엘프놀이 그 자체였다. 라우프는 그 눈부신 미소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라비언의 막사를 뒤덮고 있는 호화로운 실내장식을 둘러보니 다시 울분이 치솟았다. 도대체 이 엘프는 전투에서 마나 한 번 안쓰면서 남아도는 마력은 전부 인테리어에 쓰는 거 아냐? 도대체 이 전쟁터에서 엘프 비단으로 만든 최고급 침상에다 바닥을 덮은 테라미즈산 양탄자하며 저기 저 드워프제 은식기들은 어디서 난 거야? 그리고 저 푸른 엘프 비단에 자수로 뒤덮은 실내복이라니! 세상에! 라우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쪽의 8서클 마법사가 두 명인데 동제국군에서 실제로 활동하는 8서클 마법사는 라우프 한 명 뿐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른다. 라우프는 혹시라도 저쪽 8서클 마법사 두 명이 한꺼번에 나타나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까 하고 전전긍긍하던 그 순간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황실 전속 마법사인 8서클의 쿠드는 참전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고령에 노환이 겹쳐 거동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동제국 수도 브림에 남았다. 대부분 마법사들과 마찬가지로 쿠드 또한 심장이 좋지 않았다. 마나를 모으고 방출하다 보면 심장에 부하가 걸리기 때문에 자기의 한계를 알아서 적당히 해야 하지만, 사람이란 게 항상 욕심을 부리기 마련이어서 무리하다 보면 결국 나이가 들어 심장병으로 고색하는 것이다. 쿠드의 첫 번째 심장발작은 하필 출정식 직전에 있었다. 쿠드는 상태가 좋아지는 대로 곧 전선으로 나오겠다고 했으나 보름도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심장발작을 겪었다. 이제 그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분명해졌다. 그런 상태에서 참전은 무리였다. 하지만 라우프는 새로 영입된 엘프 마법사가 쿠드의 공백으 채워주리라 기대하며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더구나 공격마법이 전공이라지 않은가! 티르안 공녀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테룬 황제가 찾는 그 렌이라는 소녀는 마이리아 시 이후의 행적이 드러나지 않아 더 이상의 탐색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했다. 그러니 저 게으름뱅이 엘프 마법사는 참전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저놈은 웃음을 뿌리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주제에 전장에는 왜 따라와! 라우프는 다시 분노를 진정시키며 타이르듯 말했다. "라비언님, 잘 아시다시피 저쪽에는 8서클 마법사가 두 명이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 쪽에서 동등하게 저들을 상대하려면 라비언님께서도 힘을빌려주셔야하지 않겠습니까." 데이그랜은 평생 닦은 연기실력을 뽐내며 커다랗고 파란 아름다운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담았다. "라우푸님, 말씀하시는 바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괴롭습니다. 테룬 황제 폐하께 몸을 의탁한 제가 이렇게 아무 일도 안하고 놀고 있는 것이 어찌 속이 편하겠습니까. 흑흑." 그 대목에서 데이그랜은 적절히 눈물 한 방울을 또르르 흘러내렸다. 남녀불문하고 홀릴 것 같은 아름다운 눈물이었다. "제가 특별히 라우프님께만 비밀을 하나 고백하겠습니다. 사실은 저는 피가 너무너무 무섭답니다. 원래 저는 누나인 라빌을 따라 치유마법을 배우려 했지만 피를 보면 기절할 것 같아서 전공을 공격마법으로 바꿨거든요. 먼 거리에서 공격마법을 쏘면 직접 피를 보지않아도 될 것 같아서요. 그런데 열심히 수련해서 8서클까지 이르러 막상 마법을 쓸 기회가 생기고 보니 제 마법으로 사람들이 죽을지 모른다는 게 참을 수 없습니다. 흑흑. 제 손에 죽게 될 사람들이 모두 이 세상에 태어나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고 저마다 가족이 있을 텐데, 자연과 조화를 사랑하는 엘프로서 그들을 죽이는 게 참 쉽지 않아서........... 정말 죄송합니다. 흑흑흑. " "아아, 라비언님,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이제 울음을 그치시지요." 라우프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도 염치는 있는데 그냥 밥벌레 노릇만 하고 있겠습니까.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이런 저라도 일어나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어드릴 테니, 당장 아무런 도움이 못 되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데이그랜은 촉촉이 젖은 눈으로 라우프를 바라보자 라우프는 간장이 녹을 것 같은 기분에 반쯤 정신이 나갔다. "아아, 울었더니 조금 어지럽네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만쉬고 싶습니다만........" 부드러운 축객령에 라우프는 아쉬운 마음을 접고 막사를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데이그랜은 속으로 킥킥 웃었다. 인간끼리의 전쟁에 손을 빌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의 목적은 테룬 황제의 곁을 맴돌며 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데이그랜의 취미는 전쟁 구경이었다. 때때로 그의 가슴에 의혹이 스며들 때가 있었다. 인간 들이 드래곤보다 사실은 우월한 존재가 아닐까? 하나하나는 작고 약하고 단명하지만 그들 전체는 결국 드래곤을 능가하는 것이 아닐까? 청룡 안티니아의 말처럼드래곤은 이미 필멸의 길에 접어들었고 지상 최고의 생물이라는 지위는 이미 인간에게 넘어가버린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인간들이 서로 죽고 죽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의혹은 깨끗이 사라져버렸다. 저토록 욕망과 증오와 어리석음에 가득 찬 존재들이 드래곤보다 우월할 리 없다. 그렇다. 인간은 그저 레밍과 같은 존재다.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하지 못한 채 그저 욕망이 시키는 대로 줄달음치다가 서로 죽이고함께 죽는 그런 존재이다. 데이그랜이 태어난 것은오천 년 전, 인류의 세계에 이제 막'문명'이라는 것이 발생할 무렵이었다. 그 무렵 어린 용이었던 그는 지혜의 흑룡답게 무한한 흥미를 가지고 인간들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그는 실망했다. 세대에서 세대로 넘어가면서도 인간들의 어리석음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바뀌 것은 외피, 의상, 건물과 장식드뿐, 그들의 속마음은 그대로였다. 물론 그의 실망을 달래줄 뛰어난 인간들이 이따금씩 태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체 인간들의 삶과 심성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작은 돌멩이를 연못에 던지면 몇 개의 파문을 그린 후 곧 잔잔해지듯 위대한 인간들 또한 그렇게 사라졌다. 아예 다른 생물로 태어나지 않는 한 인간에게 더 이상 가능성은 없다. 그것이 데이그랜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 대전제 하에 데이그랜은 멸종 위기에 처한 불개미와 병정개미의 전투를 구경하듯 흥미진진하게 인간끼리의 전투를 구경했다. 이번의 대전투는 더 흥미로울 것이다. 그때였다. '데이그랜! 데이그랜! 빨리 와주세요! 시오카가......!' 청룡 안티니아였다. '무슨 일입니까? 시오카가 어떻다고요?' '조금 전부터 갑자기 상태가 안 좋습니다! 어서 제 레어로 와주세요!' '알겠습니다!' 데이그랜은 하얗게 질려 황급히 남대륙에 있는 안틴아의 레어로 순간이동했다. "폐하,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참전하라고 다그친 바람에 기분이 상해서 사리진 것 같습니다." 라우프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엘프 마법사 라비언이 사라진 것이 자기 책임인 것 같아 그는 어쩔 줄 몰랐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원래 엘프들은 변덕스럽고 인간의 척도로는 재기 힘든 존재가 아닌가? 그리고 나도 처음부터 엘프가 공격마법을 전공했다고 했을 때 좀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오겠다는 쪽지를 남기고 갔으니 다시 오겠지. 그대 혼자서 베오인과 올리오인 두 명을 상대하기 쉽지 않겠지만, 정 어렵다면 저번처럼 내가 직접 검강으로 둘 중 한명을 상대하겠다." 티르안 공녀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정보부에서 전해지는 소식을 총괄 수렴하여 테룬 황제에게 전하기 위해 전장에 나와 있었다. 평소에 그녀가 즐겨 입는 장시 없는 드레스는 황궁에서는 지나치게 검소해 보였으나 이곳 전장에서는 썩 잘어울렸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카로딘의 8서클 마법사 베오인과 올리오인이 마법을 시전할 수 없게 된 것 같습니다." 티르안 공녀의 말에 모두 크게 놀랐다. "타림 안딘, 그게 정말이오?" 티르안 공녀에게 황제의 약혼녀를 뜻하는 타림 안딘이라는 칭호가 내려진 후 테룬 황제는 황실 예법에 따라 그녀에게 높임말을 썼다. "그렇습니다. 사실은 들은 지 몇 파잔 안 되는 최신 정보입니다. 그 정보와 지금까지 제가 접한 다른 정보들을 모두 종합, 분석하면 지금까지의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티르안 공녀가 분석을 시작하자 모두 경청했다. 그녀가 동제국군에 합류한 지난 두 달 남짓 동안 공녀는 자신의 능력을 여러 차례 증명했다. "일단 우리가 지금까지 확보한 정보에 따르면 카로딘 군의 전력은 우리의 기대에 조금 못 미칩니다. 저는 당초 카로딘군의 전력을 지금 드러난 것보다 조금 과대평가했었고, 프린다인군이 참전하지 않을 경우 동제국군이 패배할 확률이 거의 60퍼센트 정도 된다고 예상했습니다. 프린다인 군이 참전할 경우 승률은 거의 반반 정도라고 보았고요. 그런데 지금 동제국군의 전력으로는 프린다인군이 참전하지 않았다 해도 카로딘군과 동제국군이 거의 평수를 이루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정도라면 카로딘군이 선제공격의 이점을 취한 걸로 감안하더라도 주도면밀한 일드인 공자가 겁 없이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전력은 절대 아니지요. 그렇다면 일드인 공자에게는 뭔가 달리 믿는 구석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제 정보원의 말에 의하면 카로딘의 8서클 마법사 베오인과 올리오인이 7서클 마법사 세 명과 함께 어떤 특수하고 강력한 마법을 연구해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마법은거의 성공단계였다고 합니다. 제 추측으로는 아마도 일드인 공자가 믿는 구석은 바로 그 마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까 베오인과 올 리오인이 그 마법을 완성하려고 기를 쓰다가 결국 뭐가 잘못되었는지 마나를 상실하고 몸져누었다는 정보와, 마법은 이미 완성되었으나 마지막 대전투에서 쓰려고 아껴두고 있다는 정보가 함께 들어왔습니다. 자, 한쪽 정보는 거짓이겠죠. 어느 쪽이 역정보이고 어느쪽이 진짜 정보인지 파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정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납니다. 일단 저번 푼단 고원 전투에서 베오인과 올리오인 중 베오인만 잠깐 모습을 보였고 실질적으로 아무 마법을 펼치지 않아 카로딘군의 대패에 일조했던 걸 모두 기억하시지요? 또 그 후 자코리 협곡 전투나 보페트 평원 전투에는 아예 그들이 나타나지 않았지요.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만약 그런 무서운 마법을 완성했다면 푼단 고원 전투 이후 왜 그 마법을 한 번도 쓰지 않았겠습니까? 푼단 고원에서부터 보페트 평원 전투까지 카로딘군의 사상자가 삼만 명에 달하는 데, 그 많은 병사들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달리 노릴 것이 없지 않습니까? 무서운 마법이 있다면 바로바로 쓰면 되는 것이지, 뭘 기다리겠습니까? 이런저런 점을 다 종합해보면, 베오인과 올리오인이 마법의 부작용으로 쓰러졌다는 정보가 사실이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서운 마법을 완성했다는 정보는 그들의 부재를 은폐하기 위한 가짜 정보인 것 같습니다. " "만에 하나라도 그들이 마법을 완성한게 진짜고 그들이 쓰러졌다는 정보가 거짓이라면?" 테룬 황제가 물었다. "그렇다면 베오인과 올리오인이 쓰러졌다는 건 순전히 동제국군을 방심하게 하기 위한 정보겠지요. 그러나 그들 두 명의 8서클 마법사가 아무리 새로운 마법을 발명해냈다 하더라도 8서클이라는 마법의 한계가 있는 이상 기껏해야 병사 일이만 명을 해치울 정도일 겁니다. 그것도 우리 쪽 라우프가 반박마법을 전혀 펼치지 않았을 경우의 얘기입니다. 라우프의 반박마법이 있다면 그 수는 반 이하로 줄어들 거고요. 그렇다면 그들의 전력은 마법까지 합쳤을 때 우리보다 약간 우월한 정도이겠지만, 그 정도는 우리 군의 높은 사기와 전략전수로 충분히 극복 가능하고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카로딘이 두 마법사가 쓰러졌다는 정보를 역정보로 퍼뜨린다 해서 특별히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어차피 정면승부를 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니 결국 두 마법사가 쓰러졌다는 정보 쪽이 진짜라는 얘깁니다. " 티르안 공녀의 합리적인 분석에 모두 수긍했다. 팔라르 데 매긴이 입을 열었다. "저도 타림 안딘 마마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저드이 무슨 허접한 신마법으 들고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살린 평원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이상 전군이 전군을 상대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대치가 길어지면 파탄이옵니다. 우리가 더 다수인 상황에서 무슨 신마법이니 어쩌니 하는 저들의 역정보에 주저하다보면 잡은승기를 놓치는 것뿐입니다." 테룬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언제가 좋겠소?" "내일 정오쯤이 좋겠습니다." 테룬 황제는 문득 렌을 떠올렸다. 렌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수만 명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자신을 엄히 꾸짖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전쟁은 전쟁이었다. 렌 생각을 하자 테룬은 가슴이 저렸다. 라비언의 말에 따르면 렌은 같이 다니던 마법사-아마도 서제국 황제인 듯했다-와 함께 마이리아 시에서 사리진 후 행방을 알수 업섹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서제국 황제는 테라미즈에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곁에 렌이 있다는 소식은 전혀 없다. 혹시 서제국 황제가 렌을 죽인 것이 아닐까? 아니면 렌이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서제국 황제가 얼굴을 드러내고 수백 년간 유지되어온 정치체제를 뒤바꾸는 대개혁을 하게 된 데에는 뭔가 계기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것이 인생을 뒤흔드는 엄청난 일이었음이 틀림없다. 테룬은 그것이 혹시 렌의 죽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저번 푼단 고원 전투에서의 폭주도 거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제발 살아만 있어줘.' 테룬은 간절히 기원했다. 카엔은 카로딘 대공국의 서쪽의 작은 도시 전당포에서 발견했다는 침 두 개를 손에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페람, 이걸 발견한 게 누구라고?" "카로딘으로 파견했던 6서클 마법사 로이알입니다." "그를 어서 들라 해라!" 황제를 알현하는 영광을 입게 된 로이알은 잔뜩 긴장하여 감히 카엔을 쳐다보지 못하고 엉거주춤 상체를 숙인 채 황제 집무실로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보라." 로이알은 고개를 들어 듣던 대로 아름다운 청년인 황제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러나 황제의 눈을 마주치자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지금 자기의 마음이 속속들이 황제에게 읽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아는 그는 가능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걸 어떻게 찾았지?" 황제의 질문에 로이알은 두려움을 이기고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그는 다른 마법사 한 명과 카로딘 서부지역의 수색작업에 투입되었다. 부유한 상인으로 가장하여 가장 귀한 물건을 사들이는 것처럼 행세하며 소식을 묻고 다녔으나 아무래도 정체를 숨긴 채 표 나지 않게 하는 수색작업이어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날, 카로딘 서부의 작은 도시에서 누군가 혹시 오리하르콘이 필요하지 않냐고 물어왔다. 상부에서 지시받은 내용에 따르면 자신들이 찾고 있는 소녀의 소지품 중에서 오리하르콘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귀가 번쩍 뜨였다. 물건은 가늗란 침 두 개였다. 그는 꼼꼼히 침을 살펴본 끝에 누군가가 놀랄 만큼 정교하게 '죽음에서 생명이 태어나리라' 라는 글귀를 누리디안 고어로 새겨 넣은 것을 발견했다. 예사 솜씨가 아니었다. 로이알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물건의 행로를 추적한 끝에 약 한 달 전 어떤 아낙이이 물건을 팔러 전당포에 왔다는 것을 밝혀냈다. "제가 알아낸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그 아낙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르더군요. 인근 주민이라고 추측될 뿐입니다." "수고했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알아내겠다!" 카엔은 오리하르콘 침을 움켜쥐며 외쳤다. 로이알이 나간 후 카엔은 페람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봐야겠다. 내 부재를 알리자 말고, 개혁 작업은 종전과 같이 추진하라. 시간이 있으면 가끔 들르겠다." "폐하, 혼자 가시려는 겁니까?" "다른 사람은 거치적 거릴 뿐이다. 혹시 다른 이력이 필요하면 연락하겠다. 그리고 내 행적은 알릴테니 걱정마라." 카엔은 자신을 염려해주는 페람의 마음을 읽고 미소지었다. 페람은 시실 카엔보다 수백 살이나 어린 셈이지만, 그는 어느 순간부터 황제를 자기 손자나 아들 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폐하, 꼭 렌님을 찾아 돌아오십시오!" "고맙다." 카엔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카로딘 서부의 그 도시로 순간이동했다. 평원을 사이에 두고 양군이 대치한 지 꼬박 이틀이 되자 동제국군과 카로딘군은 모두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카로딘군 쪽이 먼저 도착한지라, 벌써 기다리기 시작한 지 닷새쯤 되는 셈이었다. 야전병동은 일드인 대공의 천막 바로 옆, 즉 대공친위대 진영 옆에 세워져 비교적 안전하다고 할 수 있었기에 병동주위의 병사들은 상대적으로 두려움을 덜 느꼈다. 그들은 이렇게 기다리느나 차라리 빨리 나가 싸우다 죽는 게 낫겠다는 둥, 살린 평원 근처에는 창녀촌이 없어 심심해 죽겠다는 둥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해댔다. "전쟁터에서 치유마법사와 치료사들은 어떻게 하죠?" 렌은 구와인에게 물어보았다. "그야 납작 엎드려서 눈알이나 굴려야지." 반쯤 농담 삼아 대답한 구와인은 렌의 화난 듯한 표정에 겁에 질린 시늉을 하며 다시 제대로 대답했다. "치유마법사는 소속 만인대의 최후방에 자리 잡고 소속 만인대의 전진에 맞춰 병동천막을 이동해가며 적진으로 들어가게 되지. 물론 최후방에서 말이야. 의무병들이 앞으로 뛰어들어 부상병에게 응급처치를 하고 치유마법사가 있는 최후방의 야전병동으로 끌고 오면 치유마법사는 환자들의 상태를 봐서 급하거나 중요한 환자는 자신이 보고 나머지 환자는 치료사로 하여금 치료하게 하는 거다. 그나마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국소전이 계속될 때뿐이고, 전면전이 시작되면 최후방이고 최전방이고 따로 없이 엉망진창이 되지. 사방에서 피가 튀기고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간도 못 한 채 그냥 뒤섞여 싸우게 되면, 진짜 이게 전쟁이구나 싶고, 심장은 쿵쿵 뛰고 몸은 알 수 없는 열에 들뜨지. 하지만! " 구와인은 반쯤 황홀경에 빠져 묘사하다가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렌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절대 거기에 넋 놓지 말고 그 지경에 처하면 전에 말한 것처럼 적당히 몸에 피칠하고 납작 엎드리란 말이다, 알겠느냐?" 렌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와인이 자신을 걱정해주는 마음이 느껴져서 렌은 고마웠다. 그 순간 갑자기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길게 한번, 짧게 두번, 다시 길게 두 번 울리는 뿔피리 소리는 카로딘군 진영에서 나고 있었다. 뿔피리 소리가 멎자 일순 정적이 찾아왔다. 건너편의 동제국군도 마찬가지였다. "카로딘 병사들이여!" 누군가가 소리 높여 외쳤다. 아마도 일드인 대공이 확성구슬을 이용해서 연설을 시작하는 것 같았다. 카로딘 병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카로딘 병사들이여! 나는 일드인 대공이다! 우리 카로딘은 누리딩나 대제국의 정통을 이어받았다. 누리디안 대제국이 우리 카로딘을 흐르느 토인 강과 모인 강 사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누리디안 대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우리 카로딘은 대제국의 전통을 지키고 그 빛나는 정신을 보전해왔다. 그런데 척박하고 낙후된 동대륙의 어느 시골에서 칼 쓰는 것밖에 모르는 하라스라는 범부가 하루아침에 동대륙의 통일을 운운하며 일어나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무수한 공국드을 닥치는 대로 멸망시키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다." 이 대목에서 카로딘군은 함성을, 동제국군은 야유를 퍼부었다. "그 무렵 카로딘은 그저 섬세하고 우아할 뿐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었기에 야만적이고 잔인한 하라스의 손에 꺾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카로딘은 더 이상 거짓 충성의 맹세를 하지 않을 것이다! 파이브룬 제국의 압제에 신음하지 않을 것이다! 떨쳐 일어나 우리 카로딘의 독립을 되찾을 것이다! 동제국의 황제는 그 아비와 어미와 형을 죽이 패륜아, 찬탈자이다! 정의의 신을 대신해 우리 카로딘이 그를 응징할 것이다! 제군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전투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제 이 전투를 끝으로 우리 카로딘은 공국이 아닌 제국이다! 그리고 그대들은 고향에 개선하여 평생 영웅으로 살게 될 것이다! 그대들이 흘리는 피는 우리 카로딘 제국의 초석이 될 것이다! " 카로딘군은 일드인의 연설이 끝나자 저마다 무기를 두드리며 평원이 떠나가라 소리질렀다. 그러나 동제국군 진영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함성은 곧 잠잠해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흑룡의 깃발 바로 아래에 흑마를 타고 있는 검은 갑옷의 장수였다. 억누른 분노가 가득했지만 목소리는 냉정했다. "파이브룬 제국의 병사들이여, 그리고 카로딘의 병사들이여! 150년 전 태조 하라스 대제께서 동대륙을 통일하셨을 때 대제께서는 자비로우셨다! 대제께서는 카로딘을 아끼시어 대공의 칭호를 내리셨고, 언제나 신하가 아닌 동제국의 형제로 대우하셨다! 돌이켜 보라! 언제 우리 파이브룬 제국이 카로딘에 지나친 조공을 요구한 적이 있었는가? 카로딘 백성들을 괴롭힌 적이 있었는가? 지금 카로딘 백성을 괴롭히는 것은 카로딘의 통치자들인가, 아니면 우리 파이브룬 제국인가? 그대들 카로딘의 병사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잘 알것이다. 철부지 일드인 공자는 내가 패륜아이고 찬탈자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카로디의 병사들이여! 일드인 공자야말로 패륜아이고 찬탈자이다! 그가 전대 대공과 자신들의 형들을 모두 독살했다는 걸 아는가? 그러고도 어찌 내게 비난을 퍼부을 수 있단 말인가? 제국은 자비롭다. 그러나 주인의 손을 무는 개에게까지 자비롭지는 않다. 자,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무기를 내려놓고 자비를 구하라! 그렇다면 너그러이 그대들을 용서하겠다!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그대들에게 보여주겠다! 황제의 분노가 얼마나 무섭고 무자비한가를!" 테룬 황제는 그의 명검인 단수검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1데보탕가까이 되는 검은빛 검강이 치솟아 올랐다. 양측 군사들이 그걸 보는 순간 동제국군은 미친 듯이 환호하고 카로딘군은 쥐 죽은 듯조용해졌다. 푼단 고원 전투에서 황제가 저 검강을 날리며 무자비한 살육전을 펼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탓이었다. 일단 기세 싸움에서 동제국군의 승리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드인은 오히려 기쁘게 웃었다. 지금 당장은 카로딘군이 약하게 보이며 약하게 보일수록 좋은 것이다. "자, 베오인, 올리오인, 이제 준비를 시작해야 하지 않겠소?" "예, 동제국군이 살린 평원에 최대한 진입하고 테룬 황제까지 뛰어드는 순간 마법을 시전하겠습니다." "저들 마법사, 라우프인지 누군지가 황제의 저주를 막아낼 가능성은 없소?" "우리 다섯명이 힘을 합치면 9서클의 힘을 낼 수 있습니다. 라우프의 힘으로는 막기에는 역부족일 겁니다." 일드인은 다시 한 번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 베오인이 7서클 마법사 세 명의 마법서클을 8서클에 가깝게 증폭하기 위해 사용한 마법약은 인체에 심각한 해악을 끼치는 것이었으나 그러 사실은 오로지 일드인과 베오인 사이의 비밀이었다. "내가 마법의 사정거리 밖으로 피하는 시간도 감안해주구려." "물론입니다." 일드인은 다가올 승리를 생각하며 흥분을 억누르지 못했다. 북소리가 울렸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제 10만인대의 꽁무니에서 의무병들과 함께 대기 중인 렌은 숨을 고르며 긴장감을 견뎠다. 등뒤에는 높은 분들의 천막과 대공친위대가 강둑을 등진 채 자리잡고 있고, 눈앞에는 수많은 카로딘 병사의 등이 보였다. 그리고 먼 언덕에는 동제국 황제의 흑룡기가 펄럭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병사들의 등을 보니 묘하게 안심되었다. 저들이 다 죽지 않는 한 내가 죽을 일은 없겠지. 그러다 렌은 흠칫했다. 자신이 한 비열한 생각에 몸을 떨었다. "저놈들이 다 죽지 않는 한 우리가 죽을 일은 없을 거다." 렌을 툭치며 구와인이 말했다. 그의 뻔뻔함에 렌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그리고 만약에 정말로 카로딘 마법사들이 획기적인 마법을 개발했다면 저 앞의 병사들도 무사할 수 있겠지요." 렌은 맞장구쳤다. 그 마법은 아마도 거대한 방어마법이거나 강화도니 화염마법 같은 거겠지. 둘을 보던 비조닌은 엄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레진 마버바,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너는 순간이동도 못하고 방어마법이나 공격 마법도 할 줄 모르니 내 곁에 있는게 제일 안전할 거다." "예." 렌은 비조닌에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렌이 비조닌 곁으로 다가가자 구와인도 덩달아 바짝 붙었다. 이윽고 저 앞에서부터 거대한 물결 같은 웅성거림이 뒤쪽에서 서서히퍼져왔다. 진격이었다. 한동안 병사들은 대오를 유지하며 정연하게 전진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동제국군 진영에서 불덩이가 날아왔다. 공격마법이었다. 렌은 흠칫했으나 야전병동에서 함께 전황을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은 태연했다. "저 정도는 우리 쪽 마법사가 해소시킬 거다." 정말로 카로딘 진영의 누군가가 금빛 구슬 같은 것을 쏘았다. 불덩이에 닿은 금빛 구슬은 팍 하며서 불덩이를 감쌌다. 발길을 늦추지 않으면 않으면서도 불안하게 머리 위를 올려다보던 병사들 사이에서 안도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불덩이는 거의 다 잦아드어 힘을 잃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 바로 밑의 병사들은 몸을 던지며 옆으로 피했다. 그러나 미처 피하지 못한 한 명의 맞았다. 살린 평원 전투의 첫 부상자였다. 의무병 두 명이 뛰어가 황급히 부상병을 끌어왔다. 비조닌이 나서서 부상병을 살펴보았다. 심하지 않은 어깨 화상이어서 그는 가볍게 치유마법을 쏘아주고 부상병을 다시 떠밀었다. 부상병은 아직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으나 체념하고 곧 앞서 가는 동료들에게 뛰어갔다. 그의 눈 속에 공포가 가득했다. 불덩이는 계속 떨어져 내렸다. 카로딘의 마법사들은 열심히 막았으나 역부족이었는지 불덩이 중 몇몇은 방어마법을 뚫고 병사들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엎드렸다. 그러나 결국 불덩이 하나마다 몇 명씩 죽어나갔다. 조금 지나자 불덩이 대신 돌덩이와 얼음덩이가 떨어져 내렸다. 역시 한 번 떨어져 내릴 때마다 몇 명씩 죽고 다쳤다. 그러다 군단은 몇 명의 사상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척척 전진을 계속했다. 카로딘 측에서도 역시 비슷한 마법을 날려 보내고 동제국 진영에서도 여기처럼 사상자가 생기고 있을 터였다. 병사들이 픽픽 쓰러지는 것을 보자 렌은 후방에서 의무병들이 부상병을 데려올 때까지 그냥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다. 석탄산, 알코올, 붕대, 그밖에 몇 가지 응급처치 도구를 담은 배낭을 집어 들고 렌은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레진 마법사! 치유마법사는 후방을 지켜야 한다!" 비조닌이 뒤에서 외쳤지만 렌은 돌아보지 않았다. "자네, 그리고 의무병 부빈, 어서 레진 마법사를 쫓아가게! 명령이야!" 비조닌이 외치자 구와인은 투덜거리며 렌을 쫓아갔다. 부빈도 역시 배낭을 집어 들고 달려갔다. 렌은 정신없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의무병! 의무병!" 노병 한 명이 어린 소년병의 가슴에 난 상처를 두 손으로 막으며 절망적으로 외쳤다. 피는 노병의 손바닥을 밀어낼 것 같은 기세로 펑펑 솟아올랐다. 렌은 황급히 달려갔다. 노병은 애타는 눈길로 렌을 쳐다보았다. "이 녀석 좀! 제발!!" 렌은 노병의 손을 밀쳤다. 소년의 가슴은 커다란 돌에 강타당한 충격으로 으스러져 있었다. 놀랍게도 소년은 아직 죽지 않았다. 렌은 하얗게 치유마법을 일으켰다. "헉, 마법사다!" 노병과 주위의 병사들은 모두 놀랐다. 전장 한가운데로 치유마법사가 뛰어드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렌은 정신없이 치유마법을 쏟아 부어 소년을 살리려고 했다. 그러나 소년은 이미 살 만한 상태가 아니었고, 여기다 치유마법을 쏟아 붓는 것은 낭비였다. 렌은 망설이다가 힘없이 치유마법을 거둬들였다. "마법사님! 제발!" 노병은 다시 렌에게 애걸했다. 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의 상처도 역시 중해 보입니다." 렌은 깊게 찢긴 노병의 다리를 보며 거기로 손을 뻗었다. 출혈이 계속되고 있어서 마법으로 지혈하지 않으면 노병의 생명도 곧 위험한 지경에 빠질 것임이 틀림없었다. "내 다리는 됐어! 이 아이를 봐달란 말이오!" 노병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소년은 가망이 없습니다." 렌은 겉으로는 냉정하게, 하지만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며 노병의 말을 잘랐다. 노병은 다시 한 번 애걸하려다가 그만뒀다. 소년은 이미 죽어 있었다. "아, 게리야........." 노병은 말문을 잃었다. 렌은 기계적으로 석탄산 용액을 꺼내 넋을 잃은 노병의 상처를 소독하고 혈관을 찾아 마법으로 지혈했다. 구와인이 재빨리 석탄산에 적신 붕대로 노병의 상처를 싸맸다. 렌은 그 사이에 다른 부상병에게 달려갔다. 의무병 부빈이 며칠간 배운 서툰 솜씨로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고 있었다. 부상병은 머리를 맞아 머리 전체가 피투성이였다. 머리의 출혈은 보기보다는 심하지 않았지만 그 충격으로 의식을 잃고 숨도 못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부빈 형, 비켜요!" 렌은 즉시 한 손을 환자의 이마에 대 고 뒤로 밀어 머리가 젖혀지게 하고 다른 손으로는 턱 밑의 오목한 뼈 부분을 위로 끌어올려 기도를 개방했다. 환자의 코와 입 가까이 대어 내쉬는 숨을 느껴보았으나 환자는 숨을 쉬지 않았다. 렌은 재빨리 환자의 입을 벌렸다. 잘 벌어지지 않자 메스를 꺼내 틈새를 넓혔다. 예상대로 입 안에는 구토물이 가득 차 있었다. 머리를 맞은 충격 때문에 의식을 잃으면서 구토한 것 같았다. 렌은 손가락을 넣어 꺼낼 수 있는 데까지 구토물을 꺼냇다. 그 다음 환자의 입에 자기 입을 대고 인공호흡을 실시했다. 환자의 입에서 시큼털털한 토사물 맛이 났다. 렌은 초인적인 노력으로 구역질을 참으며 인공호흡을 계속했다. 갑자기 환자가 푸학 하며 숨과 함께 토사물을 내뿜었다. 렌은 급히 피했다. 환자의 토사물이 다시 기도로 넘어가지 않게 머리를 들어주면서 머리의 상처를 살펴보니 당장은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경부 고정! 기도확보!" 렌이 외치자 의무병 부빈이 달려와 그동안 배운 대로 환자의 목을 요령껏 지지대로 감아 고정시킨 후 땅에 눕혔다. 저 부상병은 살아날 것이다. "이놈도 이상해!" 렌은 구와인이 소리치는 쪽으로 다시 달려갔다. 병사는 사지를 부들부들 떨며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단순한 정신적 충격으로 보였다. 렌은 붕대를 꺼내 병사의 입에 틀어막고 엄청난 고통을 참으며 모처럼 정명기를 운기해서 병사의 뺨을 있는 힘껏 세게 때렸다. "정신 차려! 이 바보야!" 병사의 눈에 검은 자위가 돌아왔다. 구와인의 옆에서 입을 벌리고 웃었다. "헤헤헤, 그런 치료는 나도 할 수 있겠다!" "여기 화상환자가!" 부빈이 다시 저쪽에서 소리쳤다. 렌은 또 그쪽으로 뛰어갔다. 불덩이에 맞아 몸이 반쯤 탄 병사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고 있었다. "붕대와 석탄산을!" 렌이 외치자 부빈은 서둘러 배낭에서 붕대와 석탄산을 꺼냈다. "어서 옷을 벗겨요!" 부빈은 주머니칼로 병사의 옷을 다 찢었다. 속옷까지도 전부 다 벗기고 나니 몸통 앞쪽의 거의 반쯤 타버린 참혹한 모습이 드러났다. "들것 위에 뉘어요!" 부빈과 뒤에 따라온 의무병 한 명이 힘써 부상병을 들것 위로 옮기자 렌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불에 타서 너덕너덜해진 병사의 죽은 피부를 석탄산 적신 붕대로 벅벅 문질렀다. 병사는 목청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말도 안 되게 과격한 방법이었지만 별수 없었다. 죽은 피부를 거의 다 벗긴 렌은 손에 약한 치유마법을 일으켜 껍질이 벗겨진 병사의 피부 부위를 살짝살짝 스쳤다. 세포 한두 개 정도의 두깨가 될까 말까한 얇은 막이 만들어졌다. 슬슬 마법의 과부하로 인해 심장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통을 참을 수 없어지기 전에 세포막은 다 만들어 졌다. "절대로 이 얇은 막 부분에 손이나 다른 게닿지 않도록 조심하고, 이 환자는 지급으로 후방에 보내세요!" 의무병과 아까의 노병이 들것을 들어 흔들리지 않게 애쓰면서 화상환자를 후방으로 날랐다. 화상환자의 경우 제일 큰 문제는 노출된 피부를 통한 감염이었다. 불타 죽어버린 피부 대신 치유마법으로 얇디얇은 피부막을 만들어주었으니, 운이 나빠 다시 피부막이 찢어지지 않는 한 감염 없이 무사히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마법사님!" 쉴 틈 없이 다시 구원을 요청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여기도요!" "구해줘!" "의무병! 의무병!!" 부상병은 점점 늘어갔고 렌은 사방에서 외치는 소리를 좇아 정신없이 응급치료를 계속했다. 비명소리와 북소리와 대기를 찢는 파공성이 계속 이어졌다. 어느새 가을해는 저물고 사방은 어두워졌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전투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전투의 첫날은 정작 양쪽 군대가 제대로 접전을 벌이지 못한 채 마법사들의 대결만으로 그렇게 끝났다. 렌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장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마법사님, 가시죠." 낯선 의무병이 침울한 표정으로 렌을 잡아끌었다. 렌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뒤쪽에 설치된 임시병동으로 돌아왔다. 그는 렌처럼 직접 전장으로 뛰어들지는 않았으나 의무병들이 날라 오는 부상병들을 부지런히 치유했다. 렌이 전장으로 뛰어들어 수많은 부상병들에게 초기 응급처치를 해준 덕분에 비조닌의 부담은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한가하게 렌에게 감사를 표하기에는 상황은 너무 암담했다. 카로딘군은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하루 종일 얼마 전진하지 못한채 희생자만 잔뜩 내고 겨우 제자리를 지켰을 뿐이었다. 쌍방의 마법대결이 카로딘군의 일방적인 열세로 끝난 것은 카로딘의 8서클 마법사 두 명이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제국군의 8서클 라우프 마법사가 쏘아대는 마법을 막기 위해 카로딘의 7서클 마법사들이 모두 동원되었고 그 때문에 동제국군의 7서클 이하 마법사들이 쏘아내는 마법은 거의 대부분 제대로 저지되지 않고 카로딘 진영에 떨어져 내렸다. 그 결과 카로딘의 사상자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비조닌? ?몇 차례 종군 경험이 있었지만 이날의 전투는 첫날 마법전투치고는 지나치게 처참했다. "아무래도 우리 쪽에 비밀마법이 있다는 건 헛소문인 것 같다." 밤늦게까지 렌과 함께 야전병동의 환자들을 치료하던 비조닌은 절망에 차서 넌지시 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냐? 오히려 8서클 마법사님들께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 렌은 별달리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낮에 미뤄두었던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비조닌은 바삐 손을 놀렸다. "아무래도 계속 여기 있다가는 위험할 것 같은데, 네가 원한다면 피난할 수 있도록 허가증을 써주겠다. 카로드에서 좀 떨어진 시골에 숨어 있다가 누가 이기든 전쟁이 끝나고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다면 네 소원대로 미즈넨 산맥 건너로 순간이동을 시켜주마. 지금 당장이라도 네 소원을 들어주고 싶긴 하다만, 순간이동을 시켜주면서 마나를 다 써버리면 이 환자들을 치료할 방법이 없어지니 당장 보내줄 수는 없구나. 미안하다." "지금 절더러 환자들을 두고 떠나라고 하시는 겁니까?" "넌 원래 종군 치유마법사도 아니지 않느냐? 내가 어떻게 널더러 목숨을 걸라고 하겠느냐?" 렌은 비조닌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욱컥했다. "제가 아까 전장으로 뛰어든 걸 보지 못하셨습니까?" 비조닌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그러는 거다. 내일 전투는 아무래도 우리 카로딘군에 불리하게 전개될 것 같은데, 네가 오늘처럼 뛰어들어 싸우면 정말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조심하겠습니다. 내일은 자제하겠습니다." 비조닌은 렌의 말을 그다지 믿지 않았지만 다시 권하지도 않았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지친 몸을 이끌고 렌은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아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다음날은 해가 뜨기도 전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충분히 마법으로 기세를 제압했다고 본 동제국군은 이제 본격적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사정거리에 접어들자 화살이 날아오고 조금 후에는 기병들이 돌격해왔다. 그리고 보병들이 카로딘 진영으로 달려왔다. 전술도 전법도 모르는 렌으로서는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카로딘군이 밀린다는 건 문외한인 렌의 눈에도 명백했다. 전투는 점점 혼전을 치닫고 쓰러지는 병사는 점점 많아졌다. 후방은 안전할 거라고 했지만 그렇지도 않아 보였다. 병동 주위의 병사들은 중앙의 대공 막사를 수시로 곁눈질 했다. 혼전에도 불구하고 끄덕 않고 휘날리는 카로딘 대공국기를 보며 마음의 위안이라도 얻으려는 듯. "킨 백인대장님!" 갑자기 구와인이 외쳤다. "누구라고요?" "나랑 친한 백인대장이 저기 쓰러졌다! 가봐야겠다!" 구와인은 치료배낭을 집어 들고 황급히 전장으로 달려갔다. 렌도 역시 치료배낭을 들고 구와인을 쫓았다. 뒤에서 비조닌이 뭐라고 외쳤지만 렌은 발길을 늦추지 않았다. 구와인은 밀집한 병사들을 요령껏 잘 피해가며 용케 부딪치지 않고 킨이 쓰러져 있는 곳까지 달려갔고, 렌은 그가 만든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하늘에서는 화살이 계속 날아오고 이따금씩 마법사가 쏘는 불구덩이도 날아왔지만 아직 카로딘군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어서 당장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대장님! 저 구와인입니다!" 구와인은 땅에 쓰러져 신음하는 킨을 보고 외쳤다. 오른쪽 가슴에 화살을 맞은 킨은 정신을 잃은 채였고 백인대원 두 명이 안절부절 못하며 자신의 백인대장을 지키고 있었다. "레진아! 도와다오!" 구와인은 애타게 외쳤다. "알겠습니다! 대장님 입에다 아무거나 틀어막아요!" 렌은 황급히 말하며 메스를 꺼냈다. 화살은 완전히 몸을 꿰뚫은게 아니어서 상처를 찢고 화살을 빼내는 수밖에 없었다. 렌은 화살 주위에 고통경감과 지혈을 위한 침을 몇 군데 놓았다. 그 순간 화살 한 대가 렌에게 날아왔다. 백인대원 중 한 명이 황급히 가죽방패로 화살을 막았다. 등골이 오싹했다. 렌은 애써 마음을 진정하며 다시 킨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필이면 킨은 지금 깨어났다. "참으세요! 지금 마취침을 놓을 시간은 없으니 그냥 이를 악물고 참으셔야 합니다!" 킨은 입에 헝겁을 문 채고개를 끄덕였다. 렌은 알코올로 화살이 박힌 살 주위를 닦은 후 메스로 살을 찢었다. 킨은 움찔했다. 화살촉이 빠져나갈 정도가 되자 렌은 조심스럽게 메스로 살을 헤집고 화살촉을 빼냈다. 킨의 얼굴이 고통으로 하얗게 일그러졌다. 렌은 다시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화살촉이 폐를 건드렸다. 치유마법을 가볍게 시전해주었지만 살아나느냐 마느냐는 그의 운이었다. 구와인이 손에 땀을 쥐며 보고 있다가 대강 치료가 끝나자 석탄산 붕대로 킨의 가슴을 꽉꽉 동여맸다. 능숙한 솜씨였다. "자, 이제 돌아가자." "다른 부상병들은요?" 렌은 당황해서 물었다. 이미 주위에는 수많은 사상자들이 널려 있었다. "다른 부상병들은 알 바아니고, 나는 킨 대장님만 구하면 돼. 자, 어서 야전병동으로 돌아가자." 구와인은 능숙하게 킨을 들쳐 업었다. 렌은 화가 났다. "저는 안돌아갑니다! 거기 킨 백인대장님의 부하들이시죠? 부축해서 대장님을 야전병동까지 데려다주세요! 그리고 구와인아저씨는 여기 남으세요!" 렌이 입고 있는 마법사 옷에 기세가 눌렸는지 병사 두 명이 다가와 구와인에게 킨을 받아 부축했다. "네가 뭔데 내게 이래라 저래라냐?" 구와인은 기분 나쁘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저 좀 도와주세요! 제발요! 도와주시면 5골드 드릴게요! 저 오늘 지나면 비조닌 마법사님에게 남은 월급 5골드 받기로 되어 있단 말예요! 어차피 여기나 거기나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라고요!" 구와인은 렌의 애절한 얼굴을 보고 잠시 생각하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한 거다." "예." 렌은 그 후 구와인과 함께 전장에 쓰러진 병사들을 치료했다. 마법사가 와서 손수 부상병을 치료하는 것을 보자 병사들은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도 길을 열어주거나 부상병들을 데려오며 렌을 도왔다. 그러나 사상자들은 점점 많아지고 카로딘군이 자꾸 뒤로 밀리면서 렌과 동제국군 사이를 가로막은 카로딘 병사들의 장막도 점점 얇아졌다. "이제, 금나 후퇴해야 해. 더 있으면 정말 위험하다." "알고 있어요." 렌은 바쁜 손길로 한 명이라도 더 치료하려고 애쓰며 대답했다. "이제 가요." 렌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때 갑자기 카로딘군 후방의 일드인 대공의 막사에서 확성구슬 소리가 들려왔다. "찬탈자 테룬, 제 어미와 붙어먹은 놈! 누구 씨인지도 모르는 후레자식! 동제국이여, 너희들의 황제로 섬기는 놈의 정체를 아느냐?" 일드인 대공의 목소리였다. "맙소사, 지금 카로딘이 지고 있는 상황에서 동제국 황제의 울화를 돋워 뭘 어쩌겠다는 거야?" 구와인은 어이없는 얼굴로 후방을 쳐다보았다. 확성구슬에서는 계속해서 테룬 황제의 비리가 흘러나왔다. 대부분 렌이 테룬에게서 들은 대로였다. 렌은 저 확성구슬 소리를 듣고 테룬 황제가 얼마나 분노할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갑자기 번쩍하면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 일드인 대공의 막사와 그 주위으 대공친위대들, 일반 병사들, 야전병동까지 한꺼번에 불길에 휩싸였다. "아!" 렌과 구와인은 입을 쩍 벌렸다. "저기엔.... 저기엔 비조닌 마법사님이랑 부빈 형이랑 어제 치료한 부상병들이 다 있었는데....." 렌은 말을 잃고 털썩 주저앉았다. "킨 대장님도 아까 저기에 보냈는데......... 우리가 저기 돌아갔더라면....... " 구와인도 말을 더듬었다. 그러다가 격한 어조로 말을 쏟아 부었다. "이 전쟁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당연히 대공 막사 주변은 8서클 마법사들이 보호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데 8서클 마법사는 며칠 전부터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이제는 대공 막사가 저쪽 8서클 마법사의 마법을 고스란히 다 맞아버리다니! 틀림없이 우리쪽 8서클 마법사들한테 무슨 일이 생긴거야!" 원래 전쟁이란 이렇지 않아! 내가 전쟁터에서 밥 얻어먹고 산 지가 벌써 몇 년인데 그걸 모르겠냐? 최소한 이쪽 군대가 하루 이틀은 더 버텨주는 게 정상이란 말이야! 마법사들 간의 마법대결만으로도 보통 이틀은 소요된단 말이야! 그런데 순식간에 대공 막사까지 날아가다니! 일드인 대공이 벌써 죽는다는 건 너무 말이 안되지 않냐! 렌은 넋을 잃고 계속 야전병동 쪽을 쳐다보았다. 불길은 순식간에 잦아들고 곧 그쪽의 상황이 드러났다. 잿더미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걷잡을 수 없는 떨림이 엄습했다. 전쟁의 참혹함이 갑자기 비수처럼 렌의 가슴을 찔렀다. "아........ 아........." 렌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계속 부들부들 떨자 구와인은 렌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정신차려! 전쟁터에서 정신을 놓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렌은 비명을 질렀다. 숨이 다 끊어 질 것 같은 비명이었다. 너무 가슴이 아파 비명을 지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구와인이 다시 렌의 뺨을 쳤다. "정신 차려!" 렌은 헐떡이며 멈췄다. "다 죽은 건가요?" 렌은 멍청하게 물었다. "그래, 저기 있던 사람들은 다 죽었다! 원래 전쟁이란 그런 거야! 죽고 죽이고! 운 좋으면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나고!" 구와인은 사방을 둘러보며 빠져나갈 길을 탐색했다. 그러나 점점 난전으로 변해가는 전쟁터에서 살아날 길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서서히 동제국군이 자신들을 가로막은 카로딘군을 베어가며 전진했다. 동제국군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와 있었다. "자, 이쪽으로!" 구와인은 렌의 손을 잡고 달렸다. 렌은 무의식적으로 그와 보조를 맞추어 달렸다. 이제 양쪽 군대가 뒤엉켜 완전히 혼전이 되어버렸다. 쌩하고 화살이 날아왔다. 렌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 화살을 피했다. "악!" 어느 병사인가가 그 화살에 맞았는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에 피가 튀었다. 렌은 잠시 멈춰 병사를 확인하려 했으나 구와인은 손을 놔주지 않았다. "뛰어야 해! 멈추면 죽는다!" 사방에서는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난무했다. 그러나 묘하게 구와인은 요령껏 잘 피했다. 옆에서 다시 병사 한 명이 칼을 맞았다. 구와인은 황급히 렌을 끌어당겼다. 병사는 렌을 스쳐 땅에 넘어졌다. 렌은 시선을 돌릴 틈도 없이 계속 구와인에게 끌려갔다. "계속 피하다 보면 모인 강까지 갈 수 있을 거고, 거기에서 강 속으로 몸을 숨기면 죽지는 않을 거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에서 다시 확성구슬 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찬탈자 테룬! 어리석게도 엉뚱한 데에다가 8서클의 마법을 허비했구나! 나는 멀쩡하다! 나는 네가 그 더러운 피를 이곳 살린 평원에다 다 쏟고 쓰러지는 걸 보기 전까지는 죽지 않을 것이다!" 일드인 대공의 목소리였다. "맙소사! 그럼 좀 전에 불탄 야전병동과 대공친위대가 전부 미끼였다 말이야?" 구와인은 뛰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믿어지지 않는다는 투로 외쳤다. "제기랄! 일드인! 그 찢어 죽일 놈!" 구와인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킨 대장님이 그런 개죽음을 당하시다니!" 구와인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렌의 손목을 붙잡은 그의 손귀에힘이 들어갔다. "젠장! 킨 대장님은 카로딘군 사령관을 해도 손색이 없는 분이셨는데!" 구와인은 계속 울면서 독백처럼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킨 대장님을 카로딘-노린 전쟁에서 처음 뵈었다. 헉헉. 그때 나는 마누라의 복수를 하려고 벌벌 떨던 독기 어린 청년이었고 킨 대장님은 나보다도 더 어린 청년이었지. 헉헉. 그 분은 내게 치료사 일자리도 마련해주시고 전쟁터에서 돈 마련하는 법도 가르쳐주셨어. 덕분에 나는 마누라의 복수를 할 수 있었고, 그 보답으로 카로딘-오슬린 전쟁에서는 그 분 목숨도 구해드렸지. 그런데 제길! 저런 개죽음을 당하시다니!" 구와인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때 동제국 진영에서 갑자기 검푸른 빛이 하늘로 치솟았다. 소드 마스터의 검강이었다. "자기 병사들까지 미끼로 내거난 악적 일드인! 황제 폐하의 칼을 받아라!" 분노에 가득 차 확성구슬을 통해 나오는 목소리는 테룬의 것이었다. 테룬은 아마도 직접 전장에 뛰어든 것 같았다. 동제국군의 함성은 더욱 커지고 화살과 마법은 더 정신없이 날아왔다. 카로딘군의 진영은 이제 완전히 무너지고 끝없이 동제국군이 밀려들어왔다. 온몸에 피칠을 하고 살기등등한 동제국군은 먹이를 눈앞에 둔 늑대 무리처럼 카로딘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사방은 시체들과 싸우는 병사들로 가득했다. 악귀 같은 얼굴을 하고 병사들은 서로 찔러댔다. 한 폭의 지옥도였다. 병사들의 눈은 충혈되고 입에서는 게거품이 흘렀다. 쓰러진 시체들은 군화와 군마에 짓밟히고 살아 있는 부상병도 시체처럼 짓밟혔다. 눈물이 났다. 저렇게 하라고 상처를 치료해준 건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죽고 죽이는 걸까. 저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저렇게 죽어가는 걸까. 정신없이 달리면서 렌도 이따금씩 시체를 밟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 살을 밟는 물컹하고 끔찍한 느낌이 온몸에 찌르르 전달되었다. 그러나 구와인은 렌이 멈추거나 피할 틈도 주지 않고 렌의 손을 꽉 잡은 채 무자비할 정도로 열심히 뛰어싿. 쉰이 다 된 노인네의 몸 어디에 그런 힘이 숨어 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이제 멀리 강이 보였다. 강둑을 마지막 지지대로 삼고 버티고 있는 카로딘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구와인은 그 숫자를 눈으로 가늠해보고 탄식했다. "젠장! 대체 병사들은 다 어디 간거야? 벌써 후퇴한 건가? 왜 제7만인대, 제5만인대, 제10만인대밖에 없지? 나머지 4만명은 도대체 어디 있는거야? 벌써 후퇴했나? 싸움터를 놔두고? 이상해! 너무 이상해!" 계속 달리던 구와인은 강둑에 하나둘씩 보이는 동제국군 군복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동제국군이 강을 건너 역방향에서도 포위해 들어오고 있었다. "제길! 저기도 동제국군이다! 안 되겠다! 이 근처에서 숨자!" 구와인은 몸을 낮추고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래, 저기!" 구와인은 렌을 붙잡고 반쯤 몸을 숙여 재빨리 뛰어갔다. 렌도 따라서 몸을 낮추고 발을 놀렸다. 구와인이 끌고 간 곳은 시체더미였다. 뭔가의 마법폭발로 수십구의 시체가 3미터 정도의 높이로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은 폭발의 충격 때문인 듯 약간 움푹 패여 있었다. 별다른 엄폐물이 없는 이곳에서 숨을 곳이라고는 그곳밖에 없었다. "자, 이 밑으로 들어가!" 구와인은 기어서 구덩이 안으로 내려가 시체더미 옆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렌은 그 옆에서 바들바들 떨며 차마 따라 들어가지 못했다. "뭐해! 어서 이리로!" 구와인은 계속 렌을 다그쳤다. 렌은 독한 마음을 먹고 구덩이로 뛰어들었다. 구와인은 렌을 가능한 한 시체더미 아래로 가깝게 끌어당겼다.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구덩이에 고인 피 때문에 온몸이 피범벅이 되었다. "자, 얼굴에 피를 발라!" 구와인은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자기 얼굴에 바르고 렌의 얼굴에도 발라 주었다. "여기가 제일 안전해. 이 시체더미가 저쪽 동제국군 진영에서 날아오는 마법과 화살을 막아 주는 방패 역활을 해줄 거다. 그리고 이런 시체더미는 워낙 끔찍해서 다들 눈길을 돌리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들키지 않을 게야. 이제 입 다물고 동제국군이 지나가길 기다리면 된다. 한참 치열한 전투 중에는 다들 미쳐 돌아가기 때문에 서성거리는 것만으로도 죽기 딱 좋지만, 혹시 동제국군이 이기더라도 전투가 대강 일단락되면 병사들도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더 이상 사람 죽일 기분이 안 나지. 그때 우기가 기어 나오면 들키더라도 죽지는 않을 거다. 치료사나 치유마법사는 쓸모가 있기 때문에 쉽게 안 죽여. 내가 이 방법으로 목숨을 건진 게 두 번이나 된다. 알겠냐?" 구와인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렌은 구와인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시체더미 밑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가 바로 위의 병사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병사는 갑자기 눈을 껌벅였다. "악!" 렌은 비명을 질렀다. "조용히 하라니까!" 구와인은 목소리를 낮추어 윽박질렀다. 렌은 다시 병사를 올려다보았다. 병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렌의 얼굴을 적셨다. "너무 아파. 너무 아파 죽겠어." 병사는 아직 죽지 않았다. 렌은 파르르 떨었다. "아파! 아프다구!" 병사는 이제 목청껏 비명을 질렀다. 단말마의 고통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렌의 몸에까지 병사의 떨림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렌은 손을 뻗어 어떻게든 병사를 치료해보려 했다. 그때 렌 바로 옆에 누워있던 구와인이 갑자기 단검을 꺼내 병사의 목을 푹 찔렀다. "무슨 짓이에요!" 렌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구와인은 다시 그 칼로 렌의 목을 겨눴다. "조용히 해. 안 그러면 이 녀석 처럼 목을 따버릴테다. 이 녀석을 살려뒀다간 비명을 질러 주위의 병사들을 다 끌어모을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죽을 녀석이었고." 구와인은 냉정하게 말했다. "나는 살아날 테다. 이왕이면 너도 살아나면 좋겠지. 그러니 조용히 해라." 렌은 무섭고 기가 막혀 벌벌 떨었다. 비명도 나지 않았다. 병사의 목에서 콸콸 흘러나온 피가 렌의 목을 타고 흘렀다. 그 끈적끈적하고 뜨뜻미지근한 느낌이 벌레가 지나가는 것 처럼 불쾌했다. 렌은 갑자기 생각이 나 주위의 흩어진 돌멩이 몇 개를 적당히 사방에 던졌다. "뭐하는 거냐?" "간이 마법진이에요. 제대로 마버진을 펼치려면 한두 파잔(서너 시간)정도는 걸리지만 이 정도만 해놔도 얼핏 봐서는 우리를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그런 근사한 재주가 있으면 진즉에 말하지. 그럼 저녀석을 안죽여도 됐잖아." 구와인은 투덜거렸다. 귓전에는 여전히 병사들의 고함소리, 비명소리,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코로는 마비가 될정도로 강렬한 피 냄새, 배설물 냄새, 오징어 타는 것과 흡사한 시체 태우는 냄새가 밀려왔다. "조금만 기다려라. 밤이 되기 전에 전투가 끝날 거다." 구와인은 타일렀다. 일분일초가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몸 위에 깔린 시체들의 무게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겁고 바닥에 고인 식은 피의 차가움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렌은 오들오들 떨며 누운채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랗던 하늘은 먼지와 연기로 뿌옇게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동제국 병사들과 카로딘 병사들은 주위에서 끝없이 죽어나갔다. 갑자기 렌은 허공 위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다섯 명의 마법사가 100여 미터 정도 위의 허공에 떠 있었다. 그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둥글게 서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렌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그들을 노려보았다. 마법사들은 각기 오색의 마나구를 하나씩 만들어 오색 빛을 회전시키고 있었다. 잠시 회전이 멈추었다. 그러다가 둥근 빛은 갑자기 잿빛으로 변했다. "아!" 황제의 저주였다! "조용히 하랬지." 구와인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렌은 갑자기 주위의 모든 상황이 일순간 이해되었다. 왜 8서클 마법사들이 안 보였는지, 왜 일드인 대공이 일부러 테룬 황제의 화를 돋우었는지, 왜 전장에는 3만 명만 남고 다른 4만 명의 병사들은 없어졌는지. 그 모든 것은 지금 이순간을 위한 것이었다. 모든 게 덫이었다. 카로딘 병사들조차도 미끼였다. 황제의 저주를 위한 무대장치일 뿐이었다. 렌 말고는 주위의 어느 누구도 지금 벌어지는 일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여전히 죽기 살기로 싸우고 고함과 비명이 계속 대기를 채웠다. 그러나 주위의 모든소리는 희미해지고 쿵쿵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만이 무섭도록 크게 들렸다. 온몸인 굳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잠시 후면 순식간에 황제의 저주에 쓸려갈 것이다. 모두들 잿빛 가루로 변해 흩어져버리고 황금빛 벼의 물결이 출렁이던 살 린 평원은 천 년 동안 죽음의 땅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한 채 흔적도 없이 여기서 죽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후 렌은 눈을 의심했다. 다섯 명의 마법사들은 갑자기 사라지고 그들의 손에서 손으로 흐르던 잿빛 마나도 씻은 듯이 없어졌다. 그 대신 다섯 명이 떠있던 중간지점에는 은보랏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마법사 한 명이 대신 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오색 빛이 잠시 반짝이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마법사는 서서히 땅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힘이 용솟음쳤다. 렌은 엄청난 속도로 시체더미에서 몸을 뺏다. 그리고 창칼이 부딪치는 틈을 비집고 그 마법사가 떨어지는 지점을 향해 달렸다. 눈물을 흩뿌리면서 렌은 외쳤다. "카엔님!" 7 장 핏빛 들판에 눈물을 뿌리며 카엔은 카로딘 서쪽의 소도시에서부터 렌을 수색을 시작했다. 먼저 그는 전당포 주인에게 오리하르콘 침을 팔러 온 여자에 관해 묻고, 그녀의 이미지를 얻은 후에는 다시 인근을 돌아다니며 그녀를 아는 사람이 없는지 탐색했다. 결국 백여 명의 생각을 읽은 끝에 그는 그 여자-이델린이라고 했다-가 카로딘 서쪽 끝의 호룬 숲 기슭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에서 왔다는 것을 알아냈다. 순식간에 그리로 날아간 그는 손쉽게 그녀를 찾아냈다. 이델인은 처음에는 렌에 관한 것을 털어놓지 않으려고 주저했지만 카엔은 그녀의 마음을 읽고 렌이 약 두달 전에 그 마을에 와서 보름 조금 넘게 머무르다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델린의 마음속에서 떠오른 다치고 쇠잔해진 렌의 모습에 카엔은 눈물이핑 돌았다. "그녀는 무사합니까? 어디 아프지 않더가요?" 이델린은 평범하지만 다정한 눈을 한 청년이 울먹이며 묻자 마음이 약해졌다. 이렇게 애절하게 묻는 사람이 나쁜 사람일 리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렌을 발견했고 언제 어디로 떠났는지 곧이곧대로 다 말해주었다. 카엔은 렌이 몹시 약해진 원인이 자신이 펼쳤던 황제의 저주를 막으려 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같았다. "그녀, 레진을 살려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뭐라 감사해야 할지......" 카엔은 이델린의 손을 꼭 잡았다. "정말 착한 소녀였어요. 레진이 주고 간 그 이상한 금속을 팔아서 몇 달 정도는 큰 걱정없이 살수 있게 되었답니다. 조금 사기꾼 기질이 있는 구와인이란 치료사를 따라 카로드까지 가다고 했는데...... 무사할지......" "무사할 겁니다. 무사해야 합니다." 카엔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되뇌었다. "레진을 도와주신 보답입니다. 이걸 받으시죠." 카엔은 10골드 금화 열 개를 꺼내 이델린에게 주었다. "아니, 이 많은 돈을!" 이델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신에 레진의 일이나 제가 와서 묻고 갔다는 건 절대 비밀입니다." "물론이죠" 카엔의 눈이 은보랏빛이 일렁이며 이델린의 눈을 응시했다. "만약 아무에게라도 이야기하면 레진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느 않으시죠?" "예,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그럼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을 거죠?" "예,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않을 거예요." 카엔은 빛을 지웠다. 이 정도는 아주 가벼운 암시인데다가 이델린의 본심과 일치하는 것이어서 그녀는 아무런 악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카엔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 데까지 가서 황급히 순간이동했다. 이동경로를 대강 아는 이상 렌과 구와인 일행을 추적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카엔이 렌과 구와인 일행의 행적을 따라 카로드까지 오는 데에는 겨우 이틀 정도 걸렸다. 그러나 막상 카로드까지 와보니 카로드 시민들은 거의 다 피난해버려 시가지는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이미 최후의 대전투가 카로드 외곽 살린 평원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구와인이라는 사기꾼치료사가 종군치료사로 종사한 적이 있다는 것을 누군가의 기억에서 읽을 카엔은 어쩌면 그가 군대로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살린 평원까지 다시 순간이동했다. 그리고 투명마법을 펼친 채 전망 좋은 언덕에서 전장을 살펴보았다. 전투의 현장은 언제 보아도 끔찍했다. 피 냄새와 시체 타는 냄새는 차라리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정작 괴로운 것은 병사들이 뿜어내는 마음속의 살기와 절망과 증오와 공포였다. 수만 명 병사들의 악에 받친 비명 같은 상념이 한 덩어리가 되어 섬세한 카엔의 신경을 마구 난도질했다. 한참 지나서야 겨우 익숙해진 그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중앙에 배치된 3만 명 정도 되는 카로딘 병사들은 대책 없이 동제국군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지만 이들을 엄호하고 상대방 마법사로부터 보호할 고위마법사는 거의눈에 띄지 않았다. 카로딘의 마법사가 수에서나 서클에서나 동제국에 비해 우위에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 이들이 펼치는 마법공격을 보면 7서클 마법사 몇 명이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상태? 隔?8서클 마법사는 아예 없는 듯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양익에 배치된 각 2만 명의 카로딘 병사들이 전투 초반부터 거으 무질서하다고 할 수 있는 모습으로 양쪽 끝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 상당수는 강을 건너 건너편 강안으로 도망가고, 나머지 병사들은 최대한 멀리 강변을 따라 뛰어 갔다.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한 가지였다. 카로딘의 8서클 마법사들은 무슨 까닧에서인지 전멸했다. 그렇기 때문에 마법공격에 저토록 속수무책이고 양익의 병사들마저 도망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공 막사를 등지고 있어서 더 이상후퇴할 길이 없는 중앙군만이 계속 싸우고 있는 것이다. 카엔은 카로딘군이 배수진을 친 이유도 아마 그것이리라고 짐작했다. 그렇다면 이 전투는 오래 가지 않을 것이고 카로딘군은 철저히 패배할 것이다. 설마 이곳에 렌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 순간 갑자기 일드인 대공의 막사 쪽에서 테룬 황제를 비방하는 확성마법이 터져 나와자 카엔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불리한 전황에서 저런 식으로 나오다니, 일드인 대공은 대체 뭘 어쩌자느 거지? 놀라움이 가시기도 전에 곧이어 동제국의 8서클 마법사가 8서클의 극한까지 화염마법으 펼쳤다. 마법의 불길은 대공 막사와 인근의 야전병동, 대공친위대를 한순간에 모두 불태웠다. 수천 명이 한꺼번에 타죽은 것 같았다. 카엔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지독한 전쟁에서도 웬만하면 부상병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관례인데, 야전병동까지 태운 것은 너무 심하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곧, 동제국의 마법사가 마법을 펼칠 때 자신의 마법이 카로딘군 측의 마법사에 의해 어느정도 저지되리라 예상하고 필요 이상의 강도로 마법을 시전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카로딘 측에서 아무런 저항이 없었기 때문에 그 마법이 고스란히 대공막사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퍼진 것이다. 정말로 카로딘군에 8서클 마법사가 없단 말인가? 그들은 대체 어떻게 되었지? 잠시 후 일드인 대공의 목소리가 확성마법을 타고 다시 들려오자 카엔은 움찔했다. 확성구슬을 타고 퍼져나가는 내용은 가증스러웠다. 일드인 대공은 동제국의 8서클 마법을 소진시키기 위해 자기 친위대와 야전병동을 미끼로 내건 것이다. 잔인하고 인정머리 없는 그 전략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러나 전략 자체로는 훌륭했다. 만약 정말로 카로딘에 있던 두 명의 8서클 마법사가 활동하지 못하게 된 거라면 지금 일드인 대공이 쓴 것처럼 상대방의 8서클 마법을 소진시키는 방법 외에는 저쪽 8서클마법사에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테룬 황제가 일드인 대공의 처사에 분노한 듯 검강을 일으켜 전장으로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카엔은 질투심을억누르며 검강을 휘두르는 테룬 황제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남자인 그가 보기에도 테룬 황제의 모숩은 군신(軍神)같았고, 저 무시무시한 검강은 카엔의 9서클 마법과 막상막하였다. 카엔은 드래곤이 자신을 막기 위해 동제국 혈통에 개입해서 소드 마스터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흥, 그래도 렌의 사랑을 얻은 것은 내쪽이야. 카엔은 묘한 경쟁심을 품고 계속 테룬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그는 테룬이 반쯤 피에 취해 넋이 나간 채로 칼을 휘두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서 더 무시무시하긴 했지만,저렇게 파괴본능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은 정신적인 문제임이 틀림없었다. 렌의 머릿속에서 읽은 테룬의 과거사가 떠올랐다. 카엔은 문득 테룬이 가엾어졌다. 암울한 가족사로 인해 망가진 사람은 세상에 너무 많았지만 테룬은 그중에서도 아주 지독한 경우였다. 그러나 중요한 건 렌을 찾는 것이었다. 카엔은 전장이 난무하는 마나와 살기를 헤치고 렌을 찾아보려 애썼다. 그때 갑자기 기묘한 기운이 그의 주의를 끌었다. 숨기려고 애쓰는 듯 했지만 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전장의 한강누데 상공에서 퍼져 나오는 그 기운은 그에게 몹시 친숙하고도 불길한 잿빛 기운이었다. 그리고 둥글게 허공에 떠서 잿빛 마나를 역방향으로 돌리고 있는 것은 다섯 명의 마법사들이었다. 황제의 저주였다! 그는 대체 저들이 뭘 하고 있는 건지 찰나적으로 알아챘다. 틀림없이 저들은 카로딘측의 마법사들이고, 동제국군과 동제국 황제를 유인한후 자기네 군대까지 포함해 한 꺼번에 황제의 저주로 쓸어버리려는 속셈일 것이다. 피가 얼어붙는 것 같은 기분이 이었다. 그가 저지른 죄악이 끝나지 않고 다시 저렇게 이어지다니! 감시 그의 악행을 흉내내고 이용하는 자가 있다니! 이 평원을 죽음의 들판으로 만들려 하다니! 카엔은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했다. 그는 즉시 그 다섯 명이 만든 원진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네놈들은누구냐?!" 카엔은 외쳤다. "그러는 너는 누구냐?!" 마법사중 한 명이 되받아 쳤다. "나? 나는 카에닌 테리미즈넨이다!" 카엔은 본모습을 드러냈다. 광휘 가 사라지고 은보랏빛 머리카락과 은보랏빛 눈동자를 지닌 미청년이 나타나자 마법사들은 공포로 하얗게 질렸다. "카로딘의 개들아! 누가 감히 너희들에게 황제의 저주를 펴치라고 허락했느냐! 일드인 그자냐? 내가 살아있는 한 이 지상에서 다시 황제의 저주가 펼쳐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당장 마법을 거두라!" 카엔은 무시무시한 위엄을 담아 외쳤다. "방해하지 마십시오. 이 전쟁은 카로딘과 동제국의 일일 뿐입니다. 저희 카로딘은 테라미즌네 제국과 적대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마법사 한 명이 두려움을 이기고 정중히 말했다. "베오닌, 맞지? 황제의 저주는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내 죄다! 네놈들이 나의 죄를 되풀이하게 그냥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어서 마법을 거두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서제국 황제라 해도 우리의 이 마법을 막을 수 없습니다. 저는 다섯 명의 8서클 마법이 한 명의 9서클 마법보다 강하리라고 믿습니다." 베오인은 두려움을 감추며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그는 그동안 밤잠을 설치고 수십 명을 희생시켜가며 완성한 이 원진이라면 9서클 마법사조차 격퇴시킬 힘이 있다고 확신했다. 카엔은 그의 오만함에 한층 더 분노했다. "좋다! 어디, 내 정신조작 마법을 견딜 수 있나 보자!" 카엔은 다섯 마법사의 머리를 향해 다섯 줄기 은보랏빛을 쏘았다. 베오인은 황급히 옆의 마법사들과 보조를 맞추어 손을 들어올렸다. 카엔의 정신조작마법은 잿빛 마나의 흐름에 튕겨나왔다. 카엔은 당황했다 "물러가십시오. 저희들은 정말로 서제국과 적대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베오인은 다시 한번 타이르듯 말했다. 그는 의아해했다. 왜 서제국 황제가 그의 최대 업적이라 할수 있는 황제의 저주를 완벽하게, 아니 더 훌륭하게 재현해낸 수제자나 마찬가지인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카엔은 더욱더 화가 났다. "이따위 저주받은 사악한 마법이 내 최대의 업적이라고? 네가 정녕 죽고 싶으냐? 좋다, 어디 한 번 해봐라!" 베오인은 엄습하는 불안감을 달래며 옆의 마법사들과 눈짓했다. 마지막까지 문제가 있던 7서클 마법사들의 마나 부족도 약물과 마법 아이템으로 완벽하게 8서클 수준으로 보충되었다. 그의 계산으로는 8서클 마법사 다섯 명의 상승효과를 자아낸다면 그 힘은 단순한 마나의 산술적인 힘을 넘어서 마법 궁극의 한계라고 일컬어지는 9서클을 능가할 가능성까지 충분히 있었다. 만약에 여기서 서제국 황제를 굴복시킨다면 그의 명성은 마법사(魔法史)에 길이 남으 것이다. 눈앞에 영광의 길이 어른거렸다. 야심이 공포를 극복했다. "공격해라!" 베오인은 단호하게 명령했다. 다섯 마법사는 이미 그들 사이를 둥글게 흐르던 잿빛 마나를 있는 힘껏 앞으로 밀어냈다. "마법을 증폭하라!" 베오인은 서제국 황제를 막기 위해서는 그들이 펼칠 수 있는 극한까지 마법을 펼쳐야 함을 알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잿빛 마나에 자신들의 마나 한 점까지 다 보탰다. 이제 잿빛 마나의 흐름은 살린 평원뿐만 아니라 인근 100아반을 모두 쓸어버릴 정도의 마력을 가지고 일렁거렸다. 마나는 서서히 원을 좁혀가며 카엔을 향해 다가왔다. 카엔은 방어마법을 펼쳐 막으려 했다. 그러다 그는 멈칫했다. 이 세상의 마법중에서 가장 강한 것은 황제의 저주였다. 9서클에 이르는 황제의 저주를 똑같은 9서클의 방어마법으로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가 막아내지 못한다면 결국 저 잿빛 마나는 아래의 전장을 휩쓸고 살린 평원과 인근 카로드까지 저주받은 지옥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결국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그의 죄였다. 과거에 저지른 죄를 씻기도 전에 다시 그의 죄는 새끼를 쳐서 세상을 더럽히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다. 그동안 감히 실험하지 못하고 이론적으로만 생각해 왔던 방법이지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카엔은 마나를 일으켰다. 그리고 능숙한 솜씨로 마나를 오색으로 나누었다. 마나는 순회전으로 회전시키다가 다시 역방향으로 회전시키자 그의 손 사이에는 잿빛 마나구가 형성되었다. 다시는 황제의 저주를 일으키지 않으리라 맹세했었지만, 운명은 언제나 그의 뜻과 어긋났다. 카엔은 눈을 감았다. 그의 주위로 엄습하는 잿빛 마나가 느껴졌다. 그는 모든 힘을 다 짜내 두 손 사이에 집중했다. 다섯 마법사들에게서 뿜어 나오는 잿빛 마나가 그의 몸을 넘실거리려는 순간, 그는 처절한 울음을 내지르며 마나를 폭발시켰다. 온몸에 걷잡을 수 없는 충격이 밀어닥쳤다. 대기가 찢어지고 땅이 흔들렸다. 코와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마나의 폭발은 무한정 계속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격랑은 잦아들기 시작했다. 카엔은 눈을 떴다. 그의 주위에는 잿빛 마나 대신 축제 때 뿌리는 꽃 같은 오색의 마나가 부드럽게 반짝거리다가 살졌다. 그리고 그를 둘러쌌던 다서 마법사는 그가 보는 앞에서 잿빛이 아닌 무지갯빛 가루로 화해 허공에 흩어졌다. 해냈다. 막아냈다. 기쁨이 가슴 깊이에서부터 차올랐다. 주인을잃은 다섯 마법사의 옷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땅으로 떨어져 내림과 동시에 카엔도 서서히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자신이 마법을 극한으로 밀어붙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장이 견딜수 없이 아팠다. 그러나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아까의 격동은 오로지 그에게만 느껴졌던 것이었는지, 아래족 전장의 병사들은 누구 하나 방금 전 허공에서 모두를 죽일 뻔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전투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저들은 내가 자기네들을 구해줬다는 것을 모르겠지. 하지만 렌이 알면 기뻐할 거야. 나를 용서해줄 거야. 그리고 다시 사랑해줄거야. 그걸로 충분해. 카엔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바닥에 툭 떨어졌다. 떨어지는 순간 몸에 만만치 않은 충격이 가해졌지만 이미 의식을 잃은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전장의 피구덩이 위에 떨어져 내린 카엔을 본 렌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카엔님! 카에님! 제발 정신 차리세요!" 렌은 애타게 그를 불렀다. 렌은 그의 눈꺼풀을 뒤집어보고 경동매을 짚어보았다. 숨도 쉬지 않고 심장도 멈춰 있었다. "안돼! 절대 죽게 내버려두지 않아!" 렌은 버럭 고함을지렀다. "심폐소생술을 하면 될 거야!" 렌은 카엔의 가슴을 빠르게 열다섯 번 누르고 다시 코를 잡은 채 그의 입에 두 번 숨을 불어넣었다. 또 가슴을 열 다섯번 누르고숨으 두 번 불어넣기를 되풀이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전격마법을 쓸줄 안다면 이샤를 구할 때처럼 심장에 전기충격이라도 가해볼 텐데, 이제 어쩌지? 갑자기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구와인 아저씨! 야전배낭을 가지고 이리 오세요!" 렌은 있는 힘껏 소리질렀다. 100여 미터 넘게 떨어진 시체구덩이 아래 누워 있더 구와인은 렌의 고함소리를 들었으나 선뜻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어서요! 제발이요!" 렌은 울부짖었다. 폐부를 찢는 것 가은 그 울음소리에 구와인은 마음이 흔들렸다. "제길, 내가 제 명에 못 죽지!" 구와인은 치를 떨고 투덜거리다가 결국 일어났다. 그는 시체구덩이 옆에 던져둔 피 묻은 야전배낭을 집어 들고 몸을 낮추어 렌이 있는 곳까지 재빠르게 달려왔다. 구와인은 누워있는 청년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청난 미남일세! 누구야? 은보랏빛 머리카락이라니, 북부 말틴 근처 사람인가봐?" 렌은 구와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빼앗듯이 배낭을 잡아채 석탄산 병을 꺼냈다. 두 손에 석탄산을 뿌리고 메스를 꺼내 카엔의 옷자락을 찢은 후 그의 왼쪽 가슴에도 넉넉하게 석탄산 용액을 발랐다. "이사람 코 잡고 입에다 숨을 불어넣어주세요. 인공호흡하는 방법은 잘 아시죠?" "물론 너한테 배워서 잘 알지." "어서요." 구와인은 순순히 카엔의 입에 자기 입을 대고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그 사이 렌은 메스를 카엔의 인쪽 젖꼭지 조금 아래 좌측 4-5 늑골 사이를 찔러 넣었다. 피가 흘렀다. 렌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흉벽을 열고 오른손으로 카엔의 심장을 잡았다. 그리고 직접 심장마사지(Open Cardiac Massage)를 시작했다. 그의 심자은 한손에 잡혔다. 죽어있는 심장은 애처로울 정도로 연약하고 힘이 없었다. 교과서대로 하는데도 심장은 스스로 뛸 줄을 몰랐다. 이대로 그가 죽어버리는 건 아닐까. 안돼. 제발. 렌은 심장마사지하는 손길을 늦추지 않으면 않으면서 온몸을 엄습하는 고통을 참아가며 모처럼 정명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동안 마법수련 때문에 거의 소진되어버린 정명기는 카엔에게 힘을 주기에는 너무 약했다. 렌른 정신없이 자신의 생기까지 정명기를 실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통해 카엔의 심장에 흘려 넣었다. 제발.. 제발... 얼마나 생기를 나눠줬는지 모를 정도로 정명기를 불어넣었는데도 그의 심장은 뛰지 않았다. 갑자기 렌은 카엔의 심장이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정명기만으로는 부족하고 마나가필요할지도 몰랐다. 렌은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정명기를 일으킨 상태에서 렌은 다시 마나를 불렀다. 졍명기는 예상대로 마나를 밀어냈다. 렌은 다시 마나를 불렀다. 튕겨나갔던 마나는 다시 몸 안으로 들어왔다. 정명기는 낯선 기운인 마나와 섞여 마구 날뛰었다. 그러다가 두 가지 기운은 렌의 몸속에서 펑하고 충돌했다. 머리가 하얗게 될 정도의 고통이 찾아왔다. 그러나 엄청난 고통속에서도 렌은 카엔의 심장을 잡은 오른손을 놓지 않았다. 오른손을 통새 두 기운이 함께 카엔의 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카엔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기쁨의 눈물이 카엔의 얼굴과 핏빛 들판을 적혔다. 렌은 구와인을 밀치고 카엔의 호흡을 살펴보았다. 숨도 이제 고르게 쉬고 있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그 순간 렌은 피를 토했다. 투두둑 입에서 쏟아진 피가 카엔의 얼굴에 진 눈물자국을 덮어 버렸다. "레진아! 너!" 구와인이 놀라 소리쳤다. 렌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보통일이 아니라는 건 렌이 더 잘 알았다. 기진맥진 하고 온몸이 바늘로 찌르는 것 처럼 아프고 심장은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이제 렌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구와인 아저씨, 이 사람 가슴좀 꿰매주세요. 소독한 실을 사용해서요. 그리고 붕대를 감아 주세요." 구와인은 묵묵히 배낭에서 실과 바늘으 꺼내 석탄산에 푹 담갔다가 능숙한 솜씨로 절개 부위를 꿰매고, 1서클밖에 안되는 미약한 치유마법을 일으켜 가까스로 절개부위 일부를 붙였다. 그리고는 다시 붕대를 석탄산에 적셔 카엔의 가슴에 칭칭 감았다. "고마워요." 렌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젠장." 구와인은 투덜거렸다. 그러다가 그는 동제국군 두 명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네놈들은 뭐냐? 카로딘 끄나풀들이냐?" 병사 두 명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동안의 계소된 살육에 취해 그들의 눈동자는 번들거렸다. 먹잇감을 발견한 승냥이 떼 같은 눈빛이었다. "나리님들, 헤헤...... 저희들은....." 구와인은 두 손을 비비며 얼렁뚱땅 넘어가려 했다. 그러나 병사 한명이 렌의 옷을 보고 외쳤다. "마법사다! 마법사 옷이다!" 병사는 두려움에 가득 차 반사적으로 렌을 향해 창을 찔렀다. 구와인이 번개같이 뛰어들어 창을 대신 맞았다. 창끝이 그의 오른쪽 허벅지에 푹 박혔다. 허벅지에서 피가 콸콸 흘렀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쓰러져 있던 렌은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났는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만해! 그만하란 말이야!" 렌은 병사에게 달려들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렌의 손에 들려 있는 피 묻은 메스가 부르르 떨렸다. 메스는 마치 이제야 쓸 곳을 찾았다는 듯이 그동안 억제되어 있던 살기를 한꺼번에 개방했다. 렌은 살기와 아드레날린에 취해 병사들을 향해 메스를 마구 휘둘렀다. 메스는 살아있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칼날은 병사의 가슴팍에 가 박혔다. 피가 쿨럭 솟아났다. 렌은 다시 칼을 뽑아 두 세 차례 더 휘둘렀다. 병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난자당해 쓰러졌다. 렌의 뿌연 눈에 다른 병사가 들고 있던 검으로 카엔을 찌르려 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를 그냥 놔두란 말이야! 손대지 마!" 렌은 미친듯이 그 병사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메스가 다시 파르르 떨렸다. 병사는 등을 맞아 신음했다. 렌은 병사가 완전히 쓰러질 때까지 몇 번이고 계속 그의 등을 칼로 찔렀다. 알 수 없는 희열이 엄습했다. 순수한 기쁨, 육식동물이 희생자를 포식할 때 느끼는 것 같은 승리감이 가득 차올랐다. 병사는 마침내 풀썩 엎드린 채 바닥에 무너졌다. 그제야 렌은 메스를 떨어뜨렸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살인. 아니, 살육. 생명의 단절. 후회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 다시오면 구와인과 카엔을 지키기 위해 또 저 병사들을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렌은 무엇보다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결국 자신도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깨끗하고 고결한 척하며 생명의 소중함을 노래했지만 결국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생명을 저주 없이 빼앗을 수 있는 한 마리 짐승일 뿐이었다. 온몸에서 힘이 빠졋다. 몸에 검은 피가 가득 차서 선한 기운이 전부 몰아내는 것 같았다. 살기와 독기가 온몸에 넘쳐흘렀다. 그리고 마지막 한 점의 정명기마저 렌의 몸을 빠져나갔다. 깜짝 놀란 렌은 다시 정명기를 일으켰다. 그런 걸 수련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정명기를 일으킬 때마다 엄습하던 고통조차 없었다. 살인에 대한 벌인가.. 아니면 그저 깨끗함을 잃은 몸에 더 이상 정명기가 깃들지 않는 것일까... 계속된 몸과 마음의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렌은 쓰러졌다. 주위에서 일어난 일을 모른 채 아까보다 훨씬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카엔의 얼굴이 그녀 앞에 있었다. 그러나 눈물이 고여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내 마음의 심연을 다 읽어버릴 거야. 아무리 숨기려 해도, 내가 얼마나 살기에 차서 병사들에게 칼을 휘둘렀는지, 그들이 쓰러지는 순간 얼마나 생생하고 저열한 승리감에 떨었는지 다 알압릴거야. 내가 그의 마음속에 그려놓은 깨끗하고 고결한 소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야.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 그래서 겨우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이 지경이라니.. 그는 황제의 저주를 막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는데, 나는 반대로 사람을 죽이다니. 그러다 렌은 보았다. 검푸른 검강을 휘두르며 전진하는 테룬 황제의 모습을. 아름다웠다. 무섭게 아름다우면서도 잔혹했다. 수 미터까지 길어진 검푸른 빛의 검강은 가로막는 것을 다 거침없이 베고,테룬이 지나가는 길목의 병사들을 모두 토막이 나 땅에 쓰러졌다. 그는 자신이 무? 昰?베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듯했다. 피에 미친 검귀같은 그 모습에 렌은 부르르 떨었다. 동제국 친위대는 황제의 강함에 추해 경배하듯 그의 두를 따라 달렸다. 친위대 또한 그들의 황제처럼 칼을 휘두르며 살아남은 카로딘군을 학살했다. 그 모습에서 렌은 피할수 없는 죽음의숙명과 도저히 떨쳐버릴수 없는 인간의 야수성을 보았다. 아무리 내가 발버둥쳐도 인간들이 서로를 죽이고 지배하는 사슬은 영원히 끊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인간은 그저 옷을 걸친 짐승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무엇 때문에 사람을 구하려고 그렇게 발버둥쳤을까.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허무감이 그녀를 덮쳤다. 렌은 다시 테룬을 쳐다보았다. 그의 기세로 볼때 테룬 황제는 머지않아 이곳까지 올 것 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면 그는 렌과 카엔을 발견할 지도 몰랐다. 적어도 엘프 마법사로 가장해 테룬 곁에 머물러 있던 흑룡은 틀림없이 렌과 카엔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렌의 목숨뿐만 아니라 카엔의 목숨도 위험해질 터였다. 찰나지간에 렌은 결심했다. 테룬 황제를 막아서자. 라빌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이상할 정도로 내게 집착하고 있다고 했으니, 내가 나서면 멈출 거야. 테룬 황제가 여기까지 오기 전에 먼저 나서서 그에게 가자. 그가 카엔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흑룡이 카엔님에게 손대지 못하게 하자. 이제 수명이 거의 다 소진되었다는 걸 렌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지금 테룬 황제 앞으로 나아가 정체를 밝힌다 해도, 그 결과 흑룡의 제물이 된다 하더라도, 어차피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차라리 그녀가 죽어가는 모습을 카엔이 보지 못하는 편이 나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시시각각 죽어가는 것을 옆에서 고스란히 지켜보아야 하는 고통을 그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아냐, 사실은 무서워.. 죽는 게 무서워.. 사랑하는 사람 없이 홀로 죽어가는 게 너무 무서워.. 그러나 원래 사람은 그런 존재가 아니던가. 홀로 태어나 타인을 해하고 상처입히고 안간힘을 다해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다가 결국 홀로 죽어가는 존재가 아닌던가. 세상은 원래 그런 게 아닌가. 사랑조차도 결국은 죽음에 의해 지워지는 물거품이 아닌가. 생명조차도 우주에 가득한 죽음에 비하면 너무 미약하고 찰나적인 환상이 아닌가. 렌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카엔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쏟은 피로 그의 얼굴은 지저분했다. 렌은 소매로 정성껏 피를 닦아내고 카엔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그의 입술에서는 렌이 흘린 눈물 맛과 피가 쏟은 피 맛이 났다. 그리고 그가 흘린 그 자신의 피 맛도 났다. 정신을 잃은 중에도 렌의 입술이 닿는 감촉이 기분좋은지 카엔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렌은 울음을 참으며 손가락에서 마법반지를 빼서 그의 새끼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카엔의 눈부신 얼굴은 평범해졌다. 그의 마력과 외모는 이제 숨겨져쓰니 흑룡이라 해도 그를 쉽게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 대신에 렌의 아름다움은 원래대로 남김없이 드러났다. 얼굴에 범벅이 된 핏자국도 렌의 미모를 가리지 못했다. 렌은 휘청거리며 다시 구와인에게 기어갔다. 구와인은 렌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너...... 너......." "네, 이게 제 원래 모습이에요." 렌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저분을 지켜주세요. 제게는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이에요. 아까처럼 요령껏 숨겨주세요. 아마 오래지 않아 깨어날 거예요. 적당히 숨어계시다가 저분이 깨어나면 얘기를 전해주세요." "뭐라고 전하는데?" 렌은 울움을 삼켰다. "저를 더 이상 찾지 말라고요." 말을 마친 렌은 몸을 돌렸다. 아까 자신이 죽인 병사의 창을 집어든 그녀는 그 창을 지팡이 삼아 무거운 몸을 지탱하며 테룬 황제가 폭풍 같은 기세로전진해오는 방향을 향해 힘겨운 한발 한발을 내디뎠다. 렌은 아쉬운 듯 다시 카엔 쪽을 돌아보았다. 구와인은 다친 다리를 끌고 요령껏 주변의 시체와 갑옷을 이용해 카엔을 숨기고 있었다. 어지간히 눈썰미 좋은 사람이라도 도저히 발견하지 못할 정도의 위장이었다. 안심이 된 렌은 다시 열심히 발걸름은 떼었다. 한 걸음 더 갈수록 카엔은 더 안전해지는 것이다. 피와 광기에 물든 테룬의 무시무시한 검강은 이제 렌 바로 앞에까지 다가왔다. 렌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외쳤다. "멈춰요!" 피에 취해 사정없이 검을 휘둘르던 테룬은 렌의 외침에 흠칫했다. 기억에 있는 목소리, 아니 잊지 못할 목소리였다. 핏발이 서서 살기가 충전하던 그의 눈에 서서히 이성이 돌아왔다. 테룬을 쫓아 황급히 질주하던 동제국 친위대도 테룬과 함께 멈춰 섰다. 테룬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는 누구지?" 렌은 소매로 얼굴의 핏자국을 닦았다. 테룬은 입을 벌렸다. 그는 황급히 말에서 내려 렌에게 다가왔다 그 동안 가슴에 담아두었던 형언하기 어려운 그리움과 갈망이 갑자기 실체 가 되어 그를 후려쳤다. 그는 차마 건드리기조차 아까운 귀한 보석을 만지듯 렌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렌, 그대가 어떻게......." 렌은 푹 쓰러졌다. 테룬은 깜짝 놀라 렌을 받아 안았다. 그는 황급히 소리 높여 라우프와 다른 치유마법사드을 불렀다. 렌은 힘없이 손을 저으며 기운을 짜내어 말했다. "제가 전에 드린 생명을 아직 기억하신다면 더 이상 무의미한 살생은 그쳐주세요. 동제국은 이미 승리하지 않았나요?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만이라도 살려주세요." "그러겠다." 테룬은 황급히 대답했다. 이미 살린 평원은 동제국군으로 거의 뒤덮여 있었다. 테룬은 확성구슬에 대고 외쳤다. "카로딘의 병사들이여! 그대들이 악적 이드인의 꾐에 넘어가 어쩔 수 없이 동제국에 반기를 들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면 그대들을 다시 동제국의 신민으로 받아들이겠다! 더 이상 저항해도 소용없으니 어서 항복하라!" 사방에서 창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마워요." 이제 카엔님이 동제국군의 창칼에 휩쓸릴 염려는 없어졌다. 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오 오라버니와 닮아서인가, 테룬에게서는 왠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옛 추억이나 혈육 같은 향기가 났다. 동류라는 느낌이랄까. 흑룡이 말한 게 그런 뜻이었나. 순수한 물의 기운끼리 끌리게 되는 이치라고 했었다. 그러니 그 느낌은 카엔을 생각할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 같은 그리움과 안타까움, 사랑과는 너무 달랐다. 사랑하는 카엔을 떠나 얼마 안 남은 죽은 날까지 테룬에게 몸을 의탁해야 한다는 것이 한없으 서글펐으나, 모두를 위해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테룬의 품에 안겨 전장을 떠나며 렌은 시체를 태우는 연기와 말발굽이 일으키는 먼지 너머로 이 피투성이 전장 저쪽에 누워 있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들판에 두 줄기 피눈물을 뿌렸다. < 6권에서 계속 > < 5 권 타이핑 후기 > 손가락에 힘이 딸려면 오탈자가 늘어만 가네여... 6 권 중간 쯤 까지 하다가 내용이 그다지 안 땡겨서 슬럼프 되서 기브업됬네여 ㅠ.ㅠ 그래서 일단 5권만 올리게되었네여.. 6권은 못올려드리게 되서 죄송해여. 6권 누가 타이핑좀 부탁드려여 ^^; 다시 대여점에서 한번 본거 또 빌리기두 뻘쭘하니.. 집사 그레이스 4권나오면 다시 타이핑 해봐야겠네여 ^^; - Alice 1. 도서명 : 치료사 렌6 (고통의 끝에는 사랑이 있다.) 퓨전 판타지 소설 2. 지은이 : 한도현 3. 출판사 : 북박스 4. 출판년도 : 2004년 10월 30일 5. 봉사자 : 장선미 <지은이 소개/ 한도현> “치료사 렌”은 연재 편당 리플만 100개 이상씩 이어지며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와 인기를 얻은 판타지 소설이다. 이 뜨거운 반응은 “치료사 렌”을 단숨에 가장 주목할 만한 소설로 부상시켰고, 그 독창성으로 말미암아 판타지 장르의 확산까지 예견케 했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치료사 렌”의 획기적인 특징은 치료사라는 캐릭터의 등장이다. 판타지의 세계에서 마법의 한 범주에 지나지 않았던 힐링 능력을 특화시키고, 그것을 주된 스토리로 삼으면서 소설의 상상력을 극대화한 결과는 독자들을 충분히 매료시키고도 남았다. 그 외에도 이 작품은 북박스가 2004년 기대작 1순위로 꼽을 만큼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뛰어난 역량과 상상력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전문 의학서를 자료로 활용할 만큼 진지한 연구자의 미덕도 지녔다. 현재 작가는 ‘삼사라’라는 필명으로 마녀넷에서 활동 중이다. <차례> 1장 새는 날아갔지만 2장 상처는 깊어가고 3장 동제국 황궁의 안팎에서 4장 사랑의 여러 얼굴 5장 감춰진 과거 6장 눈물의 끝 7장 용서하는 자가 용서받는다 잠깐! 이것만은 알아두자! 서바이벌 응급구조법 1장 새는 날아갔지만 카엔이 정신을 차린 것은 다음날 아침나절이었다. 코를 찌르는 피 냄새에 진절머리를 치며 일어나 보니 그는 검게 탄 볏짚 위에 누워 있고 자신의 몸 위에는 피로 물든 갑옷이 쌓여 있었다. 그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갑옷을 헤치고 일어나려고 했으나 피에 젖은 갑옷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낑낑거리는 동안 흐릿한 머리가 맑아지면서 카로딘 마법사들을 해치우고 황제의 저주를 막은 후 떨어져 내리던 마지막 순간의 기억이 떠올랐다. “청년, 일어났나?” 옆에서 성격 더럽게 생긴 초로의 남자가 말을 걸었다. 그는 카엔의 몸위에 걸쳐진 갑옷을 치워주었다. 그에게 쏟아져 나오는 생각도 얼굴만큼 더러워서 카엔은 움찔했다. “당신은 누굽니까?” 카엔은 친근한 척 말을 거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쌀쌀맞게 물었다. “아, 나? 내 이름은 구 와인이고, 치료사야. 카로딘군의 종군치료사로 일했지. 지금이야 뭐 저쪽 동제국군이 빠져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지만. 치료사는 적군이라도 보통 그냥 보내주고, 가끔은 오히려 자기네 쪽에서 자기네 부상병을 치료해달라고 고용하기도 하니까 걱정 말게, 자네를 내 조수로 소개할 테니. 자네 이름은 뭔가?” 구와인은 동제국 병사들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카엔이라고 합니다. 당신은 왜 내 옆에 있는 겁니까?” “그거야 레진이 부탁했으니까. 자네는 레진을 잘 아나? 알고 보니 엄청나게 아름다운 얼굴이던데, 혹시 레진이 계집아이 아닌가? 맞지? 자네 이름은 뭐야? 레진이랑은 무슨 관계지?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 구와인이 말하는 순간 그의 생각 속에서 생생히 떠오르는 렌의 모습을 읽고 카엔의 가슴은 마구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순간 가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카엔은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렌은 어딨죠?” 카엔은 다급하게 물었다. “렌이라니?” “레진의 본명이 렌입니다.” “렌이라고? 허 참.” 구와인은 특유의 말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의 탄생에 관한 장황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호룬 숲가 아랫마을에서 렌을 만난 이야기, 함께 카로드까지 오게 된 이야기, 그 후 카로딘군에 종군해서 렌과 함께 부상병들을 치료한 이야기까지 오랜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해나갔다. 카엔은 숨이 넘어갈 정도로 애가 탔지만 그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들었다. 구와인이 거듭해서 렌의 모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구와인의 머릿속 렌은 의연하고 꿋꿋해서 그녀의 행적을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카엔은 가슴 벅찼다. “그래서 레진을 거기 저쪽의 시체더미로 끌고 가서 용케 몸을 숨겼는데, 갑자기 그 녀석이 벌떡 일어나 달려가는 게 아닌가! 나는 레진이 미쳤나 싶었는데, 가만히 보니까 하늘에서 뭐가 떨어져 내리는 거야. 그게 자네 맞지? 대체 왜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거야? 마법사들이 자네를 하늘로 끌고 올라갔던 건가? 마법사의 마법에 날아간 거야? 암튼 나는 시체더미 아래에서 계속 떨고 있는데 그 녀석이 나를 막 부르는 거야! 별 수 있나. 나도 위험을 무릅쓰고 그쪽으로 뛰어갔지. 그랬더니 레진이 나한테는 자네 인공호흡을 시키고 자기는 칼로 자네 가슴을 짼 후에 손을 넣어 심장을 주무르더군. 쩝, 남자 입술에 인공호흡 이라니. 혹시라도 내가 그런 취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네. 이 구와인이 친히 뽀뽀를 해준 셈이니 가문의 영광인 줄로 알아.“ 카엔은 구토가 나오는 걸 용케 참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레진이 한참 심장을 주물럭주물럭 용을 쓰는 것 같더니, 세상에, 심장이 다시 뛰지 뭔가. 숨도 다시 쉬고. 살다 살다 그런 걸 다 보다니, 오래살고 봐야 해. 그래서 한시름 놓으려는데, 하필이면 동제국 병사 두 명이 달라들지 뭔가. 그놈들은 레진이 쓱싹 해치웠지. 훌륭한 솜씨였어. 음, 훌륭한 솜씨이고말고. 그치만 사람을 처음 죽여 봤는지 불쌍하게도 레진은 한동안 벌벌 떨더군. 그러다가 동제국 황제가 달려오는 걸 보고 다시 잠시 고민하더니 자네한테 한 번 뽀뽀한 후에 자네 손에 그 이상한 반지를 끼워주고 동제국 황제한테로 가더군. 아마도 그냥 놔두면 자네가 너무 눈에 띄니까 그랬겠지. 그러면서 자기를 찾지 말라고 자네한테 전해 달랬어. 근데 레진이 막아서니까 반 미쳐서 칼을 휘두르던 동제국 황제가 딱 멈춰서던데? 대체 레진이랑 동제국 황제랑 무슨 사이야? 자네랑은 무슨 관계고?“ 카엔은 필사적으로 구와인의 생각 속에서 떠오르는 렌의 모습을 읽었다. 구와인이 그 당시 정신이 없었는지 렌의 모습은 불분명했고, 오로지 렌이 마법반지를 빼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 순간만이 선명했다. 렌이 슬프게 ‘저를 더 이상 찾지 말라고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읽고 카엔은 숨이 멎는 듯했다. “왜 자기를 찾지 말라고 한 겁니까?” 카엔은 파랗게 질려 외쳤다. “목소리 좀 낮춰. 동제국 군인들이 듣겠어.” 구와인은 책망했다. “낸들 아나. 내 눈에는 그 시커먼 반지까지 끼기 전의 자네 얼굴이 동제국 황제보다 훨씬 더 꽃미남인 것처럼 보이지만, 여자들이 꼭 꽃미남을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 멋있는 남자보다 센 남자를 좋아하는 경우가 많아. 레진이의 취향이 근육미남이어서, 꽃미남이랑 근육미남을 비교해보고 근육미남한테 간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않겠나. 더구나 자네는 척 보아하니 얼굴 빼면 쥐뿔도 없어 보이는데 저쪽은 황제 아닌가.” 구와인은 약간 빈정거리며 말했다. 카엔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골라 입은 허름한 옷을 내려다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레진이 하도 간곡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이 구와인님이 손수 자네를 위장해주고 여태 자네 옆에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는 거나 알아둬.” 구와인은 옆에서 계속 자기 ? 眉岵?하며 떠벌였지만 카엔은 신경쓰지 않고 무슨 일이 있었을까 곰곰 생각해보았다. 일단 렌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테룬에게로 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앞으로 자신을 찾지 말라고 했을까. 혹시 끝내 나를 용서하지 못한 건 아닐까. 만약에 나 대신 테룬을 선택한 거라면? 카엔은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렌이 변할 리 없다. 렌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리 없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자신을 되찾으려고 테룬과 싸우다가 다칠 것을 염려해서일까. 이유가 뭐든 간에 나를 위해서 그런 것이리라. 그녀는 언제나 그랬으니까. 카엔은 자신이 렌을 믿는 마음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놀랐다. 그녀의 변치 않는 사랑이 그에게 무한한 자신감과 안정감을 준 것이다. 렌이 뭐라고 하건 간에 렌을 쫓아가리라고 결심한 카엔은 즉시 몸을 일으켰다. “테룬 황제는 어느 쪽으로 갔습니까?” “저쪽으로 갔다네. 병사들 얘길 들어보니 대공궁에 있는 일드인 대공이 자결했다든가 어쨌다든가 하던데.” 구와인은 카로드 도심 쪽을 가리켰다. 카엔은 황급히 그쪽으로 순간이동하려 했다. 그러나 심장에 다시 격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무리하지 말게. 한 번 멈췄던 심장인데. 레진이 살을 째고 심장을 주물럭대고서야 겨우 다시 뛰기 시작했다고 하지 않았나.” 구와인은 모처럼 따뜻한 말투로 말렸다. 카엔은 얼마나 지나야 마법을 쓸 수 있는지 가늠해보았다. 적어도 한 파잔 정도는 더 있어야 했다. 마법이 없는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통신구슬을 꺼냈다. 구와인의 눈이 커졌다. “그, 그거! 토, 토, 토, 통신구슬!” 카엔은 구와인에게 엄청나게 무서운 눈길을 던져 침묵시킨 후 통신을 열었다. 가벼운 차음마법을 걸어 그의 주위로는 말소리가 새어나지 않았다. “플로인, 나다.” “폐하!” 플로인은 깜짝 놀라 외쳤다. “지금 어디에 있는가? 황궁인가?” “폐하께서 카로딘으로 가셨는데 어찌 제가 마음 편히 황궁에 있겠습니까? 저는 카로딘 북쪽 국경의 소도시 에르갈에서 몇몇 마법사들과 함께 폐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혹시 거기에 마스니도 있는가?” 마스니는 이제 막 50줄에 접어든 8서클 여마법사로, 순간이동과 방어마법, 그리고 다양한 첩보계 마법이 특기였고, 대외첩보 책임자였다. “ 예.” “그래, 그대들 둘이면 일단 충분할 것 같다. 나머지는 계속 황도를 지키도록 하고, 그대들은 최대한 빨리 카로드의 대공궁 인근으로 오라. 알겠는가?” “예, 칙명대로 즉시 거행하겠습니다.” “얼마나 걸리겠는가?” “한두 파잔 정도 걸길 것 같습니다. 저희들이 마법으로는 한 번에 이동하기에 조금 무리인 거리라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최대한 빨리 오기만 하면 된다.” 대화를 마친 카엔은 잠시 고민했다. 플로인과 마스니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안전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기다리다가는 테룬 황제가 렌을 그 사이에 어디로 빼돌릴지 몰랐다. 그리고 잠시 사라진 흑룡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몰랐다. 결국 카엔은 즉시 대공궁에 잠입하기로 결심했다. 지금 심장의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으나 기습한다면 승산은 있었다. 그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심장 상태가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주위는 시체와 부상자들로 가득했다. 이미 전투가 끝났기 때문에 동제국군 측 치료사들과 의무병들이 자기네 부상병들을 거두고 있었다. 만약에 대승이 아니었다면 보통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적군 부상병들의 숨통을 끊는 일까지 겸하지만, 워낙 철저한 승리여서 승자의 관용을 베풀 여유가 생긴 듯했다. 동제국 치료사와 의무병들은 그저 차가운 눈길 한 번씩만 던지고 카로딘 부상자들을 내버려두었고, 두려움에 떨던 카로딘 부상자들은 그들이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지나갈 때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구와인과 카엔 옆으로도 치료사 한 병과 의무병 두 명이 다가왔다. 그러나 구와인이 ‘끄응, 끄으응, 나 좀 살려 주구려’ 하며 한층 처량하게 죽는 시늉을 하자 그들은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그냥 지나갔다. 심장은 참기 어려울 만큼 더디게 회복되었다. 카엔은 그동안 계속 렌에 관한 것을 구와인에게 꼬치꼬치 물었다. 렌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 가장 가슴 아팠다. 렌 곁에 있었다면 모든 살인과 악행은 내가 다 도맡아 하고 렌은 깨끗하고 고결한 채로 보호해주었을 텐데. 얼마나 괴로웠을까. 마침내 심장의 통증이 사라지고 마나를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카엔은 벌떡 일어났다. “그대의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이걸 서제국 관청 아무데나 가져다 보이십시오.” 카엔은 품에서 작은 황금패 하나를 내주고는 카로드 도심으로 즉시 순간이동했다. 카로드 시내는 동제국 군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들 지치고 피범벅 이었지만 이제 더 이상 전투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거리에 흘러넘쳤다. 카엔은 요령껏 병사들을 헤치고 렌과 테룬 황제의 행방을 찾았다. 병사들의 생각을 읽어본 결과 테룬 황제는 카로드 중앙의 대공궁에 있었다. 그렇다면 렌도 아마 거기 있을 터였다. 카엔은 즉시 그쪽으로 이동했다. 대공궁 앞에는 마법결계가 쳐져 있었다. 테룬 황제 곁의 8서클 마법사 라우프가 카로딘 측의 마법결계를 파쇄한 후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대공궁 주위에 쳐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카엔에게는 있으나마나였다. 전력을 다해도 부족한데 전투에서 남은 마나를 겨우 긁어모아 만든 허접한 결계 따위는 그저 가려움만 줄 뿐이었다. 당장이라도 결계를 깨고 대공궁을 쑥밭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었지만, 렌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이상 무턱대고 덤빌 수는 없었다. 카엔은 정체를 숨기고 잠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대공궁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조금 지나자 적당한 사람이 나타났다. 대공궁을 향해 총총히 가는 30대 중반의 6서클 마법사였다. 그는 ‘일이 제대로 안 되어서 어쩌지? 폐하께 보고하면 실망하실 텐데’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테룬 황제를 만날 예정이라는 뜻이었다. 카엔은 그 마법사를 재빨리 덮쳐 마비시킨 후 그의 어깨 위에 사이좋은 친구처럼 팔을 두른 채 사람이 없는 뒷골목으로 끌고갔다. “이름이 뭐지?” “노, 노볼.” 마법사는 몸을 엄습하는 고통을 느끼자 하얗게 질려 대답했다. “무슨 일을 맡고 있지?” “공격마법사.” 노볼은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에 떨며 무의식적으로 답했다. “네 상관은 누구고 암호는 뭐지? 너는 동제국에서 어떤 지위에 있고, 지금 뭘 하다 오는 길이었지?” 노볼은 입을 꽉 다물었지만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떠올렸고, 카엔은 그가 떠올리는 걸 남김없이 읽어냈다. “좀 자고 있어라.” 카엔은 노볼에게 가볍게 수면마법을 걸었다. 전 같았으면 목숨을 취했겠지만 렌을 만난 이후 사람 목숨의 무게는 예전 같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황제 노릇을 하기도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무릇 황제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저울로 달아 가벼운 쪽 사람들을 가차 없이 버릴 수 있어야 하는데, 이제 도저히 그럴 자신이 없었다. 노볼의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변장마법으로 노볼의 외모까지 복사한 후 세 파잔 정도 지속하는 은폐마법으로 노볼을 숨기고 대공궁의 정문으로 향했다. 대공궁 정문의 결계 입구에는 병사 열 명이 서서 통과하는 자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노볼님, 가신 일은 잘되셨습니까?” 병사 한 명이 친근하게 물었다. ‘마법약을 구하러 가신다더니만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 그나저나 방어석을 만들어주신다는 약속은 지키는 거야, 마는 거야.’ 병사의 생각을 모두 읽은 카엔은 억지로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연금술사들이 다 피난해서 마법약을 못 구했네. 그나저나 방어석 만들어준다고 하고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지? 한숨 돌리자마자 만들어주겠네.” 급히 복사한 목소리는 듣기에 약간 어색했으나 병사는 눈치채지 못했다. “어이구, 감사합니다!” 병사는 희색을 띠며 외쳤다. 그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카엔은 계속 억지웃음을 띤 채로 결계를 통과했다. 잠시 지르는 느낌이 들었으나 눈에 띄지 않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결계의 압력은 해소되었다. 사실 이 정도는 결계라기보다는 장식용 마나울타리 정도에 불과했다. 적어도 그가 테라미즈 황궁에 설치해둔 결계나 동제국 브림의 황궁 결계 정도는 되어야 결계다운 결계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사람들을 스쳐지나갔다. 아는 척하는 사람들에게는 적당히 응수하고 사람들의 생각을 유연하게 읽어가며 그는 손쉽게 대공집무실 앞까지 도착했다. 안에서 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카엔은 렌을 찾기 위해서는 테룬과의 격돌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막 대공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려던 카엔은 누가 그를 부르자 깜짝 놀랐다. “노볼!” 카엔은 놀라움을 감추며 상대방의 생각을 읽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예, 티볼든님.” 노볼의 상관이자 7서클 마법사인 티볼든이었다. “마법약은 구했는가?” “못 구했습니다.” “어차피 급한 것은 아니니까 상관없네. 그나저나 그 약 누구한테 쓸 건지는 알고 있었나?” “모르는데요.” “그 왜 전 황후 마마를 꼭 닮은 소녀 있지 않나? 어제 전쟁터에서 폐하의 앞을 가로막은 그 소녀 말일세.” 카엔은 부르르 떨었다. 그는 초인적인 노력으로 겨우 평정을 유지했다. “그 소녀가 어제 저녁 티르안 공녀 마마, 라우프님과 함께 엘프 마법진으로 브림의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았겠나. 아마도 서제국 황제에게 쫓기고 있으니 안전한 곳으로 보내달라고 몹시 조른 듯하네. 브림의 황궁은 서제국 황제뿐만 아니라 드래곤조차 뚫지 못하는 철통같은 마법결계를 자랑하니 말일세. 그렇지만 순간이동을 위해서 라우프님께서 따라가신 건 그렇다 쳐도 티르안 마마께서 직접 따라가신 건 의외야. 어찌 그리 마음이 넓으신 건지. 폐하께서 그 소녀를 은애하시는 게 틀림없는데도 전혀 질투심을 보이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소녀 혼자 아픈 몸으로 황궁에 가면 편히 쉬기가 쉽지 않을 테니 자신이 따라가서 내명부의 기강을 잡겠노라고 하셨지 뭔가. 정말로 황후의 재목이 아니신가.“ 카엔은 다리에서 힘이 빠져 자기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내게 쫓기고 있으니 안전한 곳으로 보내달라고? 동제국 황궁으로 갔다고? “정말로 그녀가 서제국 황제에게서 도망쳐야 하니 동제국 황궁으로 보내달라고 했답니까?” 그 물음에 티볼든은 의아해하며 카엔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네. 나야 폐하로부터 전해들은 거지만, 왜, 뭐가 이상한가?” 카엔은 분노와 당황에 어쩔 줄 몰랐다. 티볼든은 영문을 모른 채 말을 계속했다. “폐하께선 영 그녀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으셨던 모양이지만, 당장 위험하다는데 어쩌겠나. 아직 일드인 대공이 자결한 후의 사후처리도 남아 있어서 여기를 뜨실 수도 없으니, 그저 마법약 같은 거라도 장만해 보내셔서 성의표시를 하고 싶으셨던 게지. 그나저나 걱정이야. 펠리시티 마마와 똑같이 생긴 소녀라니, 대체 우리 파이브룬 제국의 황실에 또 무슨 암운이 드리우려는지. 폐하께서도 자제하셔야 할 텐데.“ 티볼든은 자기가 말해놓고는 지나치다 싶었는지 스스로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렌의 행방을 들은 카엔은 침착함을 되찾으려 애썼다. 사정이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렌이 그렇게 말한 데에는 무슨 사정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렌이 왜 갔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렌을 되찾아 오느냐다. 이미 렌이 동제국 황궁의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면 차라리 지금 이곳에서 테룬과 정면승부한 후 그의 목숨을 빌미로 렌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웬일인지는 몰라도 드래곤이 테룬 옆에 없는 이 기회를 놓친다면 일은 훨씬 어려워질 터였다. 카엔이 고민하고 있는 동안 갑자기 대공집무실의 문이 활짝 열리고 테룬이 걸어 나왔다. 카엔은 숨을 삼켰다. 테룬 황제는 전날의 대승 후 즉시 친위대를 이끌고 카로드에 입성했다. 카로딘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백성들은 이미 피난해서 성도는 저녁 햇살 속에 텅 비어 있었다. 테룬은 라우프로 하여금 엘프 상관의 마법진을 이용해 렌과 티르안 공녀를 동제국 수도로 이동하게 한 후 즉시 대공궁으로 향했다. 그가 대공궁에 들어갔을 때 일드인 대공은 시종들을 물리고 살아남은 부하들도 모두 피신시킨 후 집무실의 의자에 홀로 의연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초췌하면서도 자부심을 잃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테룬, 우리는 그대가 어렸을 때 만난 적이 있었지. 아마도 내가 스무 살, 그대가 열 살이었던가? 황실 연회에서였지? 기억하는가? “일드인, 감히 폐하께 반말을 하다니, 무엄하구나!” 테룬 뒤에서 팔라르 데 매긴이 외쳤으나 일드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억하는가?” 담담한 일드인의 말투에 끌려 테룬은 대답했다. “그래, 기억한다.” 일드인은 허무하게 웃었다. “그때 나는 그대를 보고 참 불행한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에 굶주린 애타는 눈길과 주위에 대한 적개심이 뒤섞여 있는, 물어뜯는 이리 같은 아이였던 걸로 기억해.” “그렇게 보였는가?” 테룬은 조용히 물었고, 일드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오랜만에 친척 동생을 만난 것처럼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지금 그대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불행해 보인다. 그대의 가족사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동제국의 모든 것을 가진 그대가 그처럼 불행하다니,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닌가. 그에 비해 나는 정말 행복한 인생을 보냈어. 부모님께서는 자식들 중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주셨고, 모든 것이 다 내 뜻대로 됐고, 마침내는 대공까지 됐어. 그리고 사나이라면 한 번쯤 꿈꿔 볼 만한 일도 했지. 제국을 상대로 황제의 관을 놓고 전쟁까지 벌였으니까. 근사한 인생이었어. 그리고 사람들은 나를 동제국에 대항하여 마지막으로 전쟁을 일으킨 최후의 대공으로 기억해주겠지. 나는 후회하지 않아. 그래, 수많은 병사가 죽고 카로딘은 사라지게 되었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아. 이번 전쟁은 어차피 일어나야 할 전쟁이었다. 지금까지의 느슨한 주종관계는 더 이상 제국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고 있나? 동제국은 각각의 공국과 작은 황제령으로 쪼개져 여러 개의 독립국가가 되어버리느냐, 아니면 서제국처럼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재탄생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지. 그런 상황에서 과연 공국들에게 신뢰를 보여주었었나? 공국들이 자치권을 포기하고 제국에 완전히 복속하고 싶은 마음? ?들게 했던가? 아니지. 오히려 추저분한 스캔들이나 양산하고, 나중에는 내전까지 일으켰지. 그러나 이번 전쟁은 오히려 동제국이 불러일으킨 셈이다.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이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리고 동대륙의 역사를 결정지었을 것이다. 나는 이 전쟁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쳤다.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기리라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안배했는데, 가장 중요한 안배는 마지막 순간에 틀어져버렸고, 그 후 내가 할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었어. 대체 왜 그렇게 되었을까? 틀림없이 성공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루지 못한 것일까? 이노스 신께서는 내가 황제의 자리에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신 걸까? 적어도 쓸데없이 무공만 강한 그대보다는 내가 더 나라를 잘 다스리리라고 생각했는데.“ 화가 날 법했으나 테룬은 화가 나지 않았다. 일드인의 말, 특히 제국의 정세에 관한 부분이 그의 가슴에 와 닿은 것이다. “혹시 그 안배라는 것이 마지막에 마법사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과 관련이 있나? 정말로 소문처럼 엄청난 신 마법을 개발하려다가 8서클 마법사 두 명이 모두 희생된 건가? 카로딘군의 말도 안 되는 이상한 행보나 배수진이 다 그것 때문이었나?” 테룬의 물음에 일드인은 야릇한 미소를 띠었다. “그건 직접 알아보게나. 나머지 비밀은 내가 무덤까지 가지고 갈테니.” “네 결정으로 인해 죽은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은 느껴지지 않나?” 테룬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자, 나는 그대에게 대승을 안겨줬고, 앞으로 동제국의 앞길은 순탄할 거야. 이번 전쟁의 결과를 숨죽이며 기다리던 다른 공국들은 앞으로 동제국에 감히 반기를 들지 못할 테지. 오히려 이번 전쟁 덕분에 그대의 손에 묻힐 피는 줄어들 것이야. 그러니 내게 자비를 베풀어주게. 내 시신을 화장하여 모인 강에 뿌려주기 바라네. 그걸로 나는 만족하네. 그러나 그대가 황좌를 차지하고 모든 것을 가진다 해도, 과연 그대는 앞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만족할 수 있을까? 그대 눈 속의 불행은 무감각한 나조차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한데, 불행한 황제를 가진 파이브룬 제국은 과연 어떻게 될까?“ 조소하듯 말을 마친 일드인은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던 꿀과자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의 입가에서 주르륵 피가 흐르고 일드인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끝까지 침착했으나,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결국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았던지 일드인은 핏발 선 눈을 부릅뜬 채였다. 그 모든 악착같은 집념과 노력과 배덕의 결과가 겨우 이것이라니, 허무하고 허무했다. 테룬은 일드인의 눈을 감겨주었다. “이자의 시신을 끌어내어 화장하라. 그가 죽은 걸 널리 알릴 필요가 있으니 화장은 공개적으로 하고,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순순히 자결했다는 소문도 퍼뜨려라. 카로딘의 귀족들은 모두 포로로 취급하되 정중하게 대우하도록 하고, 이곳 대공궁을 포함해 다른 주요 관청을 모두 접수하라. 이제부터 카로딘은 황제 직속령으로 삼도록 하고, 프린다인 공국에게 카로딘 전체 조세의 5퍼센트에 대한 권리를 허여한다. 프린다인 공국군은 당분간 종전과 마찬가지로 팔라르 데 매긴 사령관의 휘하에 두도록 하라.“ 그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테룬은 밤 새 한잠도 자지 못하고 카로딘의 내정을 파악하기 위해 기를 썼다. 수도를 지키던 샤이트 수상도 티르안 공녀와 교대하여 카로딘 인수 작업을 돕기 위해 다음날 저녁때쯤 엘프 마법진을 이용해 카로드로 오기로 했다. 모든 것은 물샐 틈 없이 완벽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승리감에 흡족해야 할 이때 그의 가슴은 싸늘하게 식었다. 일드인의 조소가 그의 머릿속에 불쾌한 오물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도 알았다. 피만 보면 광기에 취하는 그의 증세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추악해졌다. 처음 무의식적인 살육을 자행했을 때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두 번째에는 무감각해졌다. 세 번째에 가서는 오히려 광기의 살육까지도 당연하게 여겨 전략 구상에 포함하게 되었다. 그렇게 낮의 태양 아래에서 피에 무심해지자 밤의 어둠 속에서 악몽은 더 심해졌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렌이 있었다. “마법약을 구해보게.” 테룬은 충동적으로 티볼든에게 명했다. 라우프가 황궁으로 가있는 동안에는 7서클 마법사 중 최고참인 티볼든이 테룬을 시봉하고 있었다. “저, 어떤 마법약을 말씀하시는지...... .” “아까 황궁으로 보낸 소녀를 위한 마법 약이다. 원기를 돋우고 심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성분이 들어 있는 걸로, 알겠는가?” 이 시대의 마법약은 대부분 형편없는 중금속 덩어리였지만 물론 테룬은 그런 건 몰랐다. “예, 즉시 제 부하 노볼을 시켜 찾아보라 하겠습니다.” 렌이 그의 선물을 보고 기뻐할 생각을 하며 테룬은 겨우 미소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이 전날 밤의 일이었다. 밤새 급한 일을 대강 마치고 한숨을 돌리러 나가던 테룬은 마법사 노볼과 마주쳤다. “노볼, 마법약은 어떻게 되었는가?” 테룬이 묻자 카엔은 흠칫했다. 카엔이 테룬을 이 정도 가까운 거리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읽기조차 두려울 정도의 상처투성이 영혼이었다. 렌을 만나기 전의 카엔 이었다면 지적인 호기심에 차서 낱낱이 벗겨보고 까발려볼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의 병든 마음이었다. 카엔은 태연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이곳의 연금술사들이 다 피난해서 마법약을 구하기 쉽지 않을 듯합니다. 죄송합니다.” “역시 그렇군.” 테룬은 아쉬워했다. “폐하, 황공하오나 가까이에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카엔은 애써 정중하게 말했다. “무슨 일인데?” 테룬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카엔은 테룬에게 한발 더 다가갔다. 그리고 그 순간 있는 힘껏 속박마법을 펼쳤다. 눈부신 은보랏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가 곧 황금빛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리기도 하고 엎드리기도 했다. “헉!” 테룬은 온몸을 무게에 휘청거렸다. 카엔이 펼친 것은 무거운 진흙덩이에 갇힌 듯 마나가 온몸을 옭아매 꼼짝도 못하게 하는 마법이었다. 마력이 점점 조여와 몸을 제대로 지탱하고 있기조차 힘들었다. 속박마법을 극한까지 쓰자 카엔의 변장마법은 서서히 풀렸다. “다, 당신은 혹시...... .” “그렇다. 애송이. 내가 바로 서제국의 황제 카에닌 테라미즈넨이다.” 카엔은 무시무시한 위엄과 냉기를 발산하며 말했다. 테룬은 그 기세에 압도되었다. 은보랏빛 머리와 눈동자를 지닌 사람은 드래곤의 회랑 지역에 상당히 흔하지만, 그는 눈앞의 청년이 다름 아닌 바로 그 카에닌 황제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좀 전의 마법이나 황제의 기세는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테룬은 잠시 공포에 사로잡혔다. 동서대륙을 통틀어 서제국 황제를 눈앞에 두고도 공포에 떨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는 안간힘을 써서 온몸의 속박을 풀려 했으나 금빛 마나의 덩어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러는 것이오?” “당연히 렌을 찾기 위해서지. 그녀를 다시 여기로 데려오라. 그럼 네 목숨은 살려주마.”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주위로 몰려들었으나 서제국 황제의 손아귀에 붙잡힌 자기네 황제를 보고 모두 속수무책이었다. “그녀를 대체 어쩌려고! 그녀를 그렇게 아프고 힘들게 만들고서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요?” 테룬이 외치자 카엔은 흔들렸다. “렌이 아팠다고? 힘들었다고? 렌은 어땠지?” 카엔은 자기도 모르게 애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유모에게서 간악하고 음탕하고 변태적인 서제국 황제의 얘기를 들으며 자랐던 테룬은 카엔의 태도를 지독한 위선으로 느꼈다. 그는 불처럼 화를 냈다. “바로 당신이 그렇게 만들고서 왜 내게 묻는단 말이오! 일 년 전 나랑 헤어질 무렵만 해도 렌은 의연하고 굳건하고 긍정적이었는데, 내 앞에 나선 그녀는 지치고 병들고 미래에 대해 아무런 희망도 품고 있지 않았고.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줄 알았소. 바로 당신이 그렇게 만든 거 아니오?” “지치고 병들었다고? 희망을 품지 않고 있었다고?” 카엔은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그렇소!” 카엔은 테룬의 기억 속의 렌이 지금 테룬이 말한 바로 그런 모습이라는 것을 읽어냈다. 카엔은 결국 냉정을 잃었다. “그건 내가 한 짓이 아니다! 그녀가 아프다면 더더욱 그녀를 내게 돌려줘!” 카엔은 외쳤다. “나는 절대로 렌을 내어줄 생각이 없소. 렌을 당신에게서 보호할 것이오! 수백 년 동안 늙지도 죽지도 않으면서 인간의 마음을 희롱하고 황제의 저주까지 내려 수만 명의 사람을 한꺼번에 죽인 살인마에 괴물 같은 당신은 렌을 가질 자격이 없소!” 테룬의 말에 카엔은 이성을 잃었다. “날더러 괴물이라고? 살인마라고? 나는 네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네 마음은 처참하게 찢어발겨져 있구나! 너는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받지도 못하는 자다! 너야말로 렌을 가질 자격이 없다!” 카엔은 처절하게 외쳤다. 테룬은 부르르 떨었다. 카엔의 말은 그가 가장 아파하는 부분을 사정없이 찔렀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인간의 마음을 농락하는 서제국 황제의 말에 흔들린다면 그야말로 서제국 황제가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일 뿐이었다. 테룬은 손에서 검강을 일으키려고 애썼다. “나는 렌을 내줄 생각이 없소. 내 시체를 밟고서 그녀를 데려가든지 아니면 당신이 그 늙어빠진 가짜 몸뚱이를 여기에 두고 가시오.” 카엔은 테룬의 말이 격장지계라는 걸 알면서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한층 더 마법을 강화했다. 테룬을 휘감은 금빛의 일렁거림은 점점 빨라져 나중에는 거의 일렁거림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그와 비례해 압력은 더욱 강해졌다.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테룬은 밀려오는 압력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온몸을 극도로 긴장 시켰다. 그는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어딘가 빈틈이 있을 것이다. 내 검을 믿자. 소드 마스터의 검강이라면 서제국 황제도 대적할 수 있다는 드래곤의 말을 믿자. 테룬의 몸은 이제 땀으로 번들거렸다. 그러나 그의 오른손 끝에서는 조금씩 검강이 빛나기 시작했다. 카엔은 테룬에게서 일어나는 변화를 눈치챘다. 소드 마스터의 검이 9서클 마법사의 마력을 물리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테룬이 그의 마력에 미약하게나마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는 새삼 경악했다. 가증스러운 드래곤들! 자기네들 힘으로는 내 황제의 저주에 대항할 엄두를 못 내니까 감히 나를 견제하기 위해 소드 마스터를 만들어내? 인간들끼리 싸우라 이거지? 분노와 함께 호승심이 끓어올랐다. 진정한 적수를 만났다는 기분이 든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어디 한 번 해봐라! 내 물리쳐줄 테니!” 카엔은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마나가 더 한층 온몸을 죄어오자 희미하게 빛나던 테룬의 검강은 힘겹게 떨리다가 서서히 스러졌다. 바닥에 엎드려 힐끔힐끔 격투를 훔쳐보던 테룬의 신하들은 안타까운 탄식을 발했다. 카엔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테룬의 의식이 서서히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카엔은 마지막으로 마나에 한층 더 힘을 가했다. 숨이 막혀 정신이 희미해지면서 테룬은 절망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그는 인간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엄청난 의지력을 발휘해 강렬한 검강을 일으켰다. 검강은 강렬한 파공성을 일으키며 마나를 찢었다. 테룬을 얽어매고 있던 기운은 순간적으로 은보랏빛으로 변해 산산이 흩어졌다. 카엔은 깜짝 놀라 한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마나를 불렀다. 테룬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를 인질로 잡아 렌과 교환하는 것이 카엔의 목적이었다. 이 번 한 번의 공격만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승산은 아직 그에게 있었다. 은보랏빛은 다시 그의 두 손 사이에서 찬연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테룬 또한 그걸 보며 검강을 가다듬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어느 쪽도 섣불리 공격에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프로인과 마스니가 나타났다. “폐하! 마나의 심상치 않은 요동이 있어 따라왔는데, 역시 폐하셨군요!” 프로인이 외쳤다. “소신도 힘이 되어드릴까 하여 황급히 달려왔습니다.” 마스니도 헐떡이며 덧붙였다. 첩보부장인 마스니는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막시 위해 얼굴에 투시마법까지 막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누가 여기까지 오라고 했나! 대공궁 밖에서 기다릴 것이지!” “어찌 폐하께서 홀로 저들을 대적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맞서 싸울 터이니 폐하께서는 옥체를 보중하십시오.” 플로인은 결연히 말했다. “그대들이 힘을 보탠다 해도 8서클 마법 따위로는 소드 마스터를 상대하는 데 방해만 될 뿐이다. 어서 비켜라.” 카엔은 차갑게 말했다. 그의 엄격한 말투에 플로인과 마스니는 하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카엔이 신하들과 실랑이하는 찰나에 테룬은 이미 1데보탕(3미터)정도 되는 검강을 세워 카엔을 겨누고 있었다. 사방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영원과도 같은 일초 일초가 흘렀다.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테룬의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흘렀다. 테룬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엔은 테룬의 정신 속에서 아주 미미한 흔들림을 감지했다. 카엔은 때를 놓치지 않고 황제의 저주를 제외하고는 그가 펼칠 수 있는 최강의 공격마법인 석화마법을 펼쳤다. 퍽 하는 소리가 나며 테룬의 단수검 끝이 흙으로 변해 부서져 내렸다. 천하의 명검인 단수검도 카엔의 마력을 이기지는 못한 것이다. 그러나 테룬의 검강은 일시적으로 줄어들었다가 다시 순식간에 원래의 길이로 회복되었다. 테룬의 입가에서 가느다간 피가 흘렀다. 카엔은 다시 한 번 마력을 가했다. 테룬은 온몸이 강타당하는 충격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마력의 중심을 향해 검강을 휘둘렀다. 그의 검강은 마력의 일부를 찢었으나 검의 일부가 다시 흙으로 변해 흩어졌다. 이제 단수검은 반 토막이었다. 카엔은 다시 공격을 가하려 했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이 깨어질 듯 아파왔다. 우려했던 대로 전날의 후유증이었다. 카엔은 아픔을 무시하고 계속 마법을 시전했다. 그러나 테룬 또한 카엔의 이상을 즉시 감지했다. ? 榴?입술을 깨물어 마지막 힘을 짜냈다. “폐하!” 카엔 뒤에 멀찌감치 물러서 있던 마스니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순간이동으로 카엔 앞을 막아섰다. 그녀는 옷자락 속에 숨겨둔 단검을 꺼내 자신의 심장을 찌르려 했다. 테룬의 검강은 마스니에게로 향하고, 마스니의 단검은 이미 심장을 찔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에서 엄청난 마나가 막 뿜어져 나오려는 순간, 카엔은 황급히 마스니와 뒤쪽의 플로인을 데리고 순간이동했다. “무슨 짓이냐!” 카로드에서 10아반 정도 떨어진 어느 숲 속으로 이동한 카엔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가 마스니의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치유마법을 뿌리자 단검으로 생긴 상처는 곧 아물었다. 마스니는 가면을 벗어들며 풀이 죽어 말을 더듬었다. “저, 저는...... .” 카엔은 그녀의 생각을 읽고 더욱 화가 났다. “내가 심장을 찌르는 금단의 마법을 칙령으로 금지하지 않았더냐? 네가 감히 내 명을 어겨?” 마스니가 마지막 순간에 시전하려 한 마법은 어떤 마법학교나 마법원에서도 가르치지 않지만 어느 정도 수준을 넘어선 고위마법사라면 대부분 암암리에 알고 있는 금단의 마법이었다. 마법의 근원은 심장이고, 심장은 피와 함께 마나를 부르고 내보낸다. 심장이 부른 마나는 전부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는 남아있고 일부는 그냥 흩어져버린다. 모든 에너지가 100퍼센트의 효율로 전환되지 못하는 것처럼 마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심장에 칼을 찔러 넣어 잠력을 폭발시키는 경우 사용되지 못하고 잠재된 마나는 한꺼번에 배출되고, 시전자는 순간적으로 평소의 자기 서클보다 1,2서클 높은 마력을 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건 항상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시전자가 마지막 순간에 손을 떨어 심장이 아닌 엉뚱한 곳을 찌를 수도 있고, 찌르는 순간에 맞추어 마나를 격발시켜야 하는데 그 타이밍을 놓칠 수도 있다. 보통 완벽하게 성공하는 확률은 열 번 중 너덧 번 정도밖에 안된다. 그리고 성공한다 하더라도 물론 그 시전자는 생명을 잃게 된다. 그래도 항상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금단의 마법을 시전 하는 자들이 나타나곤 했다. 마스니는 마지막 순간에 카엔에게 이상이 있음을 감지하고, 그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지려 한 것이다. 그녀의 본래 마법서클은 8서클이니, 금단의 마법을 쓰는 경우 일시적으로 9서클에 이를 수 있다. 그 정도라면 잘만 하면 소드 마스터의 검강도 막을 수 있으므로, 순간적인 판단으로서는 아주 훌륭하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엔이 화를 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가 언제 내 대신 죽으라 했더냐!” 그동안 그가 죽이고 그가 떠안은 수많은 목숨에 하나를 더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렌이 자기를 구출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목숨을 희생했다는 걸 알면 얼마나 화를 내겠는가. 마스니는 울먹이며 말했다. “폐하, 폐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40년 전, 그러니까 폐하께서 완전한 은거에 들어가시기 전에 마법원에서 폐하를 뵌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때도 폐하께서는 광휘로 용안을 가리고 계셨기에 직접 우러러 뵙지는 못했지만, 폐하께서는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시고, 열심히 하라고 격려까지 해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시골에서 마법의 자질을 인정받아 마법원으로 뽑혀 왔지만, 계집아이인데다가 아무 배경 없는 시골 출신이어서 몹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텃세란 직접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못하지요. 그런데 폐하께서는 그 은보랏빛 광휘를 두르시고 마법원의 신입생을 시찰하시면서, 그 해의 신입생 중 딱 제 앞에 멈춰 서시고는, 제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고, ‘이 아이가 올해의 신입생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군. 개인교수를 배정하여 특별교 육하게 하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후 제 처지는 놀랍도록 바뀌었습니다. 마법원 교수님들은 물론이고 동급생들 또한 절대 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지요.“ 카엔은 사실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매년 마법원 입학생을 사열하고 그중 우수한 마법 수련생을 지목하는 일은 그가 완전히 세상일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수백 번이나 해온 지겨운 일상이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눈앞에서 울먹이며 말을 잇는 초로의 여인에게서는 수십 년 전의 어린 소녀의 모습을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세월이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그러나 아마도 그때 그는 마스니에게서 재능을 보았을 것이다. 장차 8서클로 성장할 수 있는 재목이라면 그의 눈을 벗어나지 않았으리라. 결국 그녀는 8서클 마법사가 되어 그의 눈앞에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가 마스니를 지목한 후 일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굳이 마스니의 마음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모두들 황제에게 언제라도 마음을 읽힐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을 테니 마법원 교수며 학생이며 전부 마음속에서부터 마스니에게 잘 대하려 고 필사적으로 애를 썼을 것이다. “폐하게서 보신 대로 제게는 마법의 재능이 있었고, 폐하께서 그렇게 지목해주신 덕분에 저는 걱정 없이 수련을 계속하여 마침내 마흔에 8서클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마법원을 졸업한 후 저는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제국의 공무원으로 봉사해왔지만, 참으로 보람 있고 뜻 깊은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니 폐하를 위해 이 한 목숨을 바치는 것은 저로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카엔은 마스니에게서 순수한 충성심을 읽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외로움과 집착까지도 읽었다. 무엇에도 연결되지 않은 고독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황제에 대한 충성심밖에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충성이 무엇이든 간에 한 인간이 그런 식으로 자기 목숨을 던지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예전의 카엔이라면 생명으로 생명을 바꾼다든지 백성들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그런 것이 몹시 괴롭게 느껴졌다. 아아, 황제 노릇을 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는구나. “목숨을 바치는 건 절대 당연한 일이 아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아라.” 카엔의 말에 마스니는 감격해서 눈물을 글썽였다. 플로인은 카엔과 마스니 사이의 대화를 들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도 마스니처럼 충성심을 보였어야 했다. 황제 폐하께서 마스니를 보는 저 눈빛은 얼마나 따뜻한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조금만 더 용감하게 앞으로 나섰더라면 폐하께서는 그에게도 저런 눈빛을 보여주시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그가 페람 공작을 이어 차기 수상이 되는 일도 더욱 앞당겨지지 않았겠는가. 카엔은 플로인의 생각을 읽고 쓴웃음을 지으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플로인.” 플로인은 화들짝 놀라 하얗게 질렸다. “그대도 나름대로 충성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대의 충성심은 그대의 출세욕과 능력만큼이나 훌륭하지. 하지만 그대에게는 부인과 애인과 아이가 있지 않은가. 그렇게 많은 걸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함부로 목숨을 내던질 수야 없지. 나는 더 이상 목숨을 던질 수 있다든지 그런 걸 가지고 충성심을 가늠하지는 않아.” 플로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던진다는 건 몹시도 서글픈 일이니까.” 카엔은 비로소 깨달았다는 듯 천천히 말했다. 문득 렌이 생각났다. 렌은 목숨을 던져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 늘 목숨을 던지려고 했다. 그 희생정신에 카엔은 늘 감동했다. 그러나 그게 과연 정상일까? 그녀의 그 지나칠 정도의 선함은 나름대로 또 다른 심연을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언젠가 렌이 스스로에 대해 비슷한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 생각났다. 다시 만나면 반드시 물어보리라. 다시 만나기만 한다면. 카엔은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마나의 유동이 느껴졌다. 엘프로 가장한 흑룡의 기척이었다. 카엔은 다급해졌다. 그는 황급히 테룬에게 강제통신마법을 펼쳤다. 좌표와 사전설정 없이 강력한 마나로만 시전하는 강제통신마법은 9서클 마법사만 시전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그게 가능한 건 그가 테룬의 위치와 기운을 확실히 알고 있고, 테룬의 현재위치와 이곳이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상대방은 상당한 고통을 느낄 테지만 카엔은 개의치 않았다. (테룬 황제, 나는 카에닌 테라미즈넨이다.) 테룬은 조금 전의 전투에서 아직 회복되지 않아 거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언제 카에닌 황제가 다시 나타나 공격할지 몰라 자신의 검을 움켜쥔 채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러다가 엄청난 통증과 함께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명심하라. 흑룡을 조심하라. 그는 렌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 엘프 마법사가 바로 흑룡...... .) 목소리는 머리를 부술 듯이 울려 퍼졌다. 뇌가 터질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테룬은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서제국 황제가 사라진 후 잠시 한시름 놓고 있던 신하들은 다시 마법공격에 당하고 있는 것 같은 자신들의 황제를 보며 벌벌 떨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갑자기 목소리는 사라지고, 고통 또한 씻은 듯이 가셨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던 테룬의 눈앞에 엘프 마법사 라비언이 나타났다. 라비언은 테룬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전혀 모르는 채 미안함이 가득 찬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사과부터 했다. “폐하, 저로서도 어쩔 수 없는 급한 일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카로딘과의 결전 중에 자리를 비우게 되었습니다. 일이 잘 풀리자마자 서둘러 돌아왔는데, 혹시 제가 자리에 없어 폐하께서 곤란을 겪으신 건 아니십니까?” 테룬은 아직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멍한 눈으로 라비언을 쳐다보았다. 조금 지나서야 서서히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사전좌표설정도 없이 통신구도 없이 통신마법을 보낸다는 건 9서클 마법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테룬은 조금 전의 메시지가 서제국 황제의 솜씨임을 의심하 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 서제국 황제는 무슨 속셈으로 그런 전언을 보냈을까? 갑자기 의혹이 엄습했다. 그러나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아름다움을 한껏 과시하는 눈앞의 엘프 마법사는 아무리 뜯어봐도 서제국 황제의 말처럼 드래곤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라비언, 이리 오라.” 데이그랜은 시키는 대로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테룬에게로 다가갔다. 테룬은 찰나 지간에 엄청난 검기를 일으켜 다짜고짜 데이그랜을 덮쳤다. 데이그랜은 경악하며 반사적으로 방어구를 일으켜 검기를 막았다. ‘캉!’ 하는 맑은 소리가 울리며 검기는 튕겨나갔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데이그랜은 푸른 실 같은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화를 내며 물었다. 테룬은 불신에 가득 찬 눈으로 엘프 마법사를 쳐다보다 서서히 검기를 거둬들였다. 테룬은 이미 검기의 발출과 회수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만약 라비언이 진짜 엘프라는 게 밝혀지면 그를 해하기 전에 검기를 거둘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 엘프 마법사는 방어구로 검기를 막은 것이다! 비록 기세를 전부 발출한 것은 아니었지만 서제국 황제조차 막기 힘든 그의 검기를 마법 방어구로 막는다는 건 8서클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라비언만 남고 모두 나가도록 하라!” 테룬이 외치자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하며 하나씩 방을 나갔다. 모두 나가자 테룬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혹시 흑룡, 위대하신 지혜의 흑룡 데이그랜님이 아니십니까?” 데이그랜은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났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일단 시치미를 뗐다.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 그는 말끝을 흐렸다. “서제국 황제가 그러더군요. 엘프 마법사 라비언이 흑룡이라고요. 맞습니까?” 데이그랜은 더 이상 부인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제대로 넘어가지 못한다면 위대한 지혜의 흑룡이라는 칭호를 쓸 자격이 없다. 시오카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져서 그녀를 보살피던 자신의 마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청룡 안티니아는 데이그랜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데이그랜의 기운으로는 직접 시오카를 도울 수 없었다. 그저 안티니아에게 조금 더 기운을 불어넣어주어, 그 기운을 다시 안티니아가 시오카에게 전하게 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가이레스가 화룡만 아니었다 해도 일은 쉬웠겠지만 그 바보 같은 놈은 화룡이다. 치유와는 가장 거리가 먼 화룡이 하필이면 시오카를 낳은 놈이라니, 일은 꼬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시오카는 그럭저럭 괜찮아졌다. 그렇지만 겨우 한숨 돌리고 나니 카로드 쪽에서 뭐가 꽝꽝 했고, 그래서 황급히 돌아와 보니 이 난리다. 데이그랜은 테룬 황제를 잘 뜯어보았다. 마법에 의해 당한 흔적, 남아 있는 마나의 기색, 틀림없이 서제국 황제의 싸운 흔적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놈이 갑자기 이리로 와서 테룬 황제를 공격했을까? 여태 수백 년 동안 잠잠하다가? 틀림없이 렌 때문이다. 카에닌 놈이 테룬 황제를 공격했다면 그건 렌이 테룬 황제의 수중에 있기 때문이다. 테룬 황제와 싸워 렌을 빼앗으려다가 잘 안 되니까 도망가면서 내 정체가 드래곤이라는 둥, 나한테 렌을 넘겨주지 말라는 둥, 미주알고주알 지껄인 거다. 데이그랜은 렌을 찾았다는 기쁨을 감추려 애쓰며 열심히 궁리했다. 다짜고짜로 건국의 상징인 나를 공격할 정도면 테룬은 지금 흥분해 있다. 이 녀석은 렌의 일이라면 무조건 이성을 잃지 않았나. 틀림없이 지금 나에 대한 의심이 하늘을 찌를 테니, 렌을 순순히 넘겨받을 때까지는 의심을 풀어주고 안심시키는 게 좋겠지. 그래, 거짓말을 할 때는 9할의 진실에 1할의 거짓을 섞는다는 원칙대로, 그럴싸하게. 데이그랜은 엘프의 가장을 풀고 기본 인간형인 검은 머리 검은 눈으로 돌아왔다. 테룬과도 형제처럼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파이브룬 대공과 더 비슷한 모습이었다. 아니, 황궁의 중앙 홀을 장식한 거대한 초상화로 익히 잘 알려진 파이브룬 대공의 모습 그대로였다. 일부러 파이브룬 대공과 더 닮게 연출한 것이었고, 테룬도 그건 알 테지만, 인간이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에 알면서도 속는 어리석은 존재가 아닌가. 근육질 체격에 걸처진 하늘하늘한 엘프 의상은 데이그랜의 까다로운 미학적 감각에 도무지 맞지 않았지만 일단 무시했다. “그렇다. 나는 국조(國祖)파이브룬 대공을 도와 파이브룬 제국을 건국한 지혜의 흑룡 데이그랜이다. 본래 드래곤은 인간의 일에 개입하지 않으나, 나는 파이브룬 대공의 열정과 신념에 감동하여 그에게 힘을 빌려주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애정을 가지고 파이브룬 제국을 지켜보아왔다. 불간섭의 원칙을 깨고 나온 것은 오로지 렌과 서제국 황제 카에닌 테라미즈넨 때문이다. 사실 렌은 남대륙의 소녀로 내 보호하에 있던 인간부족 출신이다. 그대도 알다시피 남대륙의 인 간들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많지. 아무튼 그녀가 내 레어 부근에서 물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때 하필이면 내가 마법을 시전하던 중이어서 그녀는 엉뚱한 곳까지 끌려들어가게 된 것이다.“ 데이그랜은 한껏 위엄을 담아 말했다. 테룬은 아아 그렇구나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데이그랜이 하는 말은 렌을 처음 만났을 때 렌에게서 들었던 것과 거의 일치했다. “그녀를 찾는 건 내게는 그렇게 큰 의미가 없지만, 렌은 사실 드래곤의 해츨링인 시오카라는 아이와 아주 친한 친구로 사귀게 되었지. 렌은 무척이나 총명하고 당당해서 드래곤 앞에서도 기죽지 않았기 때문에, 시오카의 친구로 제격이었어.” 그 대목에서도 테룬은 역시 수긍했다. “렌이 없어졌을 때 시오카는 유일한 친구가 없어져서 무척 상심하고는 내게 렌을 찾아달라고 졸랐어. 그래서 귀찮지만 하는 수 없이 찾아 나서게 된 것이다. 엘프 마법사 라비언으로 속인 건 미안하지만, 생각해봐. 내가 나 흑룡이요 하고 나타나면 온 동제국이 다 뒤집어져서 위대하신 흑룡이시여 어쩌구 하며 난리법석을 피우지 않겠나? 나는 워낙 소박하고 겸손해서 그런 건 딱 질색인데 말이야. 암튼 우여곡절 끝에 렌이 서제국 황제의 눈에 든 모양인데, 그래서 일은 골치 아프게 되었지. 그는 위대하고 강력한 지혜의 흑룡으로서도 만만치 않은 상대니까. 그를 저지하고 렌을 보호하려면 그대와 내가 힘을 합쳐야만 하고, 그래서 내가 정체를 드러내게 된 거야.“ 끝까지 위엄을 갖춰 얘기하려 했지만 결국 데이그랜은 막판에 가서 자화자찬을 하고야 말았다. 그렇지만 테룬은 데이그랜의 자화자찬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귀여운 녀석. “그렇지만 서제국 황제는 제게 흑룡에게서 렌을 보호하라고 했습니다. 흑룡께서 렌의 목숨을 노린다면서요. 그는 렌을 몹시 아끼고 있는 것 같던데, 그가 굳이 그런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데이그랜은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하고 생각했다. 틀림없이 내가 렌을 죽이려 한다는 둥 어쩌고 하면서 고자질을 했구나. 그러나 테룬이 저렇게 털어놓는다는 건 이미 상당 정도 설득되었다는 말이었다. “그가 그렇게 오해를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내가 치유하는 손라빌한테 렌을 찾아다니는 건 실험에 쓰기 위해서라고 말했거든. 서제국 황제는 라빌에게서 그 얘기를 전해 들었고. 하지만 사실 그렇게 말한 건 드래곤의 해츨링이 하찮은 인간을 유일한 친구로 삼아 애정을 느낀다는 말을 하기가 창피해서였다. 그리고 서제국 황제가 저지른 악행과 무수한 살인을 생각해봐. 그가 렌을 아낀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이겠나? 그의 기나긴 인생에서 렌이란 존재는 잠깐 가지고 놀다 버리는 장난감에 불과할 텐데. 그리고 렌에게 뭐가 행복일까? 늙지도 죽지도 않는데다가 마음까지 모두 읽고 조작하는 괴물 곁에 붙잡혀 있는 게 좋을까, 아니면 자신과 같은 보통 인간, 그래, 그대 같은 보통 인간 곁에서 함께 늙어가는 게 좋을까? 데이그랜은 통찰력을 담아 말했다. 데이그랜의 마지막 말이 테룬의 마음을 결정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위대하신 흑룡을 의심하였으니...... .” 데이그랜은 한껏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만족감을 숨겼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금까지처럼 엘프 마법사 라비언으로 행세할 테니 그대도 협력해줘. 아무한테도 내 정체를 알려주면 안 돼. 그리고 둘만 있을 때에는 위대하신 흑룡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데이그랜’ 이라고만 불러줘. 그대의 선조인 파이브룬 대공과도 그리했으니.” 데이그랜의 허물없는 말투에 테룬은 당황했다. “아, 정말 데이그랜님이라고 불러도 됩니까?” “물론이지.” “예, 데이그랜님.” 완전히 테룬이 넘어온 것을 확인한 데이그랜은 흡족했다. “그대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거지?” “일단 서둘러 환궁해야겠지요. 아직 전후처리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곳은 안전하지 않으니까요. 샤이트 데 위든 경이 내일쯤 올테니 그와 교대하면 될 겁니다. 서제국 황제가 혹시 제 군대를 해치지 않을까 걱정되기는 하지만, 일단 그가 렌을 걱정하고 있는 이상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내가 순간이동으로 그대를 황궁으로 보내주겠어 그리고 렌을 시오카와 만나게 해주고, 그 후에는 다시 그대에게 데려다주겠다. 아, 물론 어디까지나 렌의 뜻에 따라서.” “그리 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잠깐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한 파잔 내에 돌아올 건데, 이곳에는 임시 결계를 설치해놓을게. 내일까지는 그럭저럭 버틸 거야.” 데이그랜은 신뢰감 주는 사람 좋은 미소를 가득 띠어 보이고는 사라졌다. 그러나 테룬은 전설의 드래곤을 만났다는 감격이 가시자 다시 의혹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도 서제국 황제는 너무 절실해 보였다. 만에 하나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정말로 흑룡이 렌을 노리는 거라 면? 일단 렌에게 확인하기 전까지는 데이그랜을 렌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데이그랜은 대공궁에서 적당히 벗어나자 통신구슬을 꺼내들었다. 렌을 수색하는 일을 시작할 무렵 샤이트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재빨리 엘프로 변신한 후 그는 통신을 열었다. “수상 각하!” “오오, 라비언님!” 데이그랜은 샤이트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던지며 물었다. “혹시 렌이라는 소녀가 황궁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라비언님. 어제 타림 안딘 마마와 함께 왔습니다.” “걱정이 크시겠습니다.” 샤이트는 입을 다물었으나 데이그랜은 그가 뭘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 수상은 전부터 펠리시티 전 황후와 똑같이 닮은 렌이 황궁을 어지럽히는 걸 원치 않았다.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렌이라는 소녀와 저를 잠시만 통신하게 해주시겠습니까?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그녀가 타림 안딘 마마와 동제국 황실의 앞길에 절대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드리겠습니다.” 통신구슬로는 상대방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데이그랜은 샤이트의 망설임을 느낄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얼마나 지났을까. 통신구슬 건너편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렌님? 저는 엘프 마법사 라비언입니다.” 렌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렌은 라비언이 바로 데이그랜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 당연히 놀랄 터였다. “혹시 거기 수상 각하께서 함께 계시다면 잠시만 물러가 주십시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데이그랜은 말을 계속했다. “저는 내일쯤 폐하를 모시고 황궁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폐하께서 렌님께 아마 여러 가지를 물어보실 텐데, 아시는 대로, 사실대로 대답하시면 됩니다. 즉, 렌님이 남대륙 출신이라는 것과, 해츨링 시오카의 친구라는 것과, 제 마법에 휩쓸려서 흑성으로 이동하게된 거라고요. 잘 아시겠지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왜 그렇게 대답해야 하지요?” “가장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떨까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알겠습니다.” 렌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데이그랜은 감탄했다. 정말 영리하고 용감한 소녀야. 인간치고는 정말 훌륭해. 카엔이 애써 테룬에게 쏘아 보내던 통신마법이 중간에 끊겨버리자 카엔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강대한 마나의 간섭이 있었던 걸로 보아 틀림없이 드래곤이 나타난 모양이었다. 과연 테룬이 이해했을까? 그의 말을 믿어줄까? 드래곤에게서 렌을 보호해줄까? 카엔은 침착하자고 되뇌며 머리에서 손을 떼었다. 아까는 테룬의 머릿속에서 렌에 관한 생각을 읽고 너무 흥분했지만, 이미 테룬을 위협해 렌을 되찾은 것이 쉽지 않게 된 이상 렌을 최대한 보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카엔은 깊이 심호흡을 했다. 옆에서 숨죽이고 카엔을 지켜보던 마스니는 살짝 주위를 곁눈질하고는 황급히 바닥에 떨어진 카엔의 길고 고운 은보랏빛 머리카락 몇 가닥을 주워 품속에 갈무리했다. 카엔과 플로인은 황당한 눈길로 마스니를 쳐다보았으나 마스니는 시치미를 뗐다. 카엔은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저주에 쓸 건 아니겠지?” “아, 아, 아닙니다! 폐하! 설마!” 마스니는 얼굴을 붉히며 부인했다. 플로인이 ‘맙소사, 밤의 철나비라 불리는 마스니 누님이 저런 줄은 정말 몰랐는데, 역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거야’ 하고 생각하는 것이 읽혀졌다. 잠시 미소짓던 카엔은 다시 한 번 일어난 일, 그리고 앞으로 할 일을 곰곰 생각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마음을 정했다. “나는 이제 브림으로 간다. 가서 렌의 뜻을 확인하겠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할 것이다.” 2장 상처는 깊어가고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렌이 머물고 있는 동제국 황궁 ‘꽃의방’에 나 있는 좁은 창으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몹시도 을시년스러웠다. 전날 흑룡 데이그랜과의 짧은 대화 이후 가뜩이나 어지러운 렌의 마음은 더욱 어지러워졌다. 카엔의 상태가 좋지 않은 걸 아는 렌으로서는 데이그랜의 말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 테룬 황제 앞으로 나설 때부터 흑룡에게 잡힐지 모른다는 건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확실한 건 흑룡이 렌에게 뭔가를 바라는 이상 협상의 여지는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다 부질없게 여겨졌다. 황궁으로 온 후 사흘째, 렌은 좀처럼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살린 평원에서의 연이은 충격으로 몸이 많이 망가진 것 같았다. 정명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카엔을 구할 때 정명기와 마법이 부딪치면서 심장에 지나치게 무리가 가는 바람에 마법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생명력 또한 거의 다 소실되어버렸다. 모든 것을 다 잃고 죽어가는 병든 몸만이 남았다. 카엔이 렌을 찾아내면 그는 렌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즉시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왜 그녀가 죽어가는지도 당연히 읽어낼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렌의 마지막 나날들이 하루씩 스러질 때마다 카엔은 죽음을 앞둔 렌의 고통, 두려움, 어쩔 수 없는 원망, 그 모든 것을 남김없이 읽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건 카엔과 렌 모두에게 너무 지나친 짐이었다. 그러나 카엔이 찾아올 수 없는 이곳에서 조용히 죽어가는 게 최선이었다. 렌이 묵게 된 방은 황후만이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이었다. 타림 안딘이 있는데 어찌 정체불명의 소녀에게 그 방을 내주느냐는 신하들의 거센 반대가 있었으나 (사실 거센 반대는 대부분 렌이 펠리시티 전 황후를 놀랍도록 빼닮은 것 때문이었다.) 타림 안딘인 티르안 공녀가 손수 나서서 불만을 잠재웠다. 사람들은 티르안 공녀의 덕을 칭송하는 한편 건방지게도 꽃의 방을 차지하고 나선 근본 모르는 계집의 버릇없음을 비난했다. 하지만 그건 모두 렌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렌은 아직도 그 병사들을 거듭 찌르는 순간 느꼈던 찰나적인 희열을 잊을 수 없었다. 이겼다는 느낌, 살았다는 느낌, 한 마리 육식동물이 되어 먹이의 목을 물어뜯는 것 같은 통쾌함과 승리감. 정당방위이건 뭐건 간에 그 느낌은 부정할 수 없는 솔직한 심정이었다. 죽음은 온 세상을 지배하고 생명은 너무 약했다. 인간은 너무 쉽게 짐승으로 변했다. 병든 사람들을 살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 세상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그런 자신조차도 결정적인 순간이 되자 다른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이빨을 드러내고 상대방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실을 절감할 때마다 그동안 노력했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짙은 허무감이 엄습했다. 세상의 모든 추악한 비밀을 알아버리고, 원치 않는데도 갑자기 어른이 되어버린 기분에 사로잡혔다. 세상에 희망이 있고 기적이 있다고? 결국 모든 것은 서로 죽고 죽이는데? 인간도 죽고 지구도 죽고 태양도 죽고 우주도 죽고 온 세상은 차갑게 식어버릴 텐데? 그 옛날 나날의 작은 기적을 노래하던 나는 어디 갔지? 불변하는 차디찬 진실 앞에 떠는 나는 옛날의 나와 같은 사람인가? 이런 마음을 카엔으로 하여금 읽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조용히 죽고 싶었다. 그래서 어제 흑룡이 전해온 제안은 차라리 다행스러웠다. 아마도 테룬 황제를 속이고 렌을 빼앗아 하고 싶은 대로 하려는 거겠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자신도 없으니, 그렇게 흑룡의 손을 빌려 조금 일찍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너무 많이 흘려 말라버린 것 같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갑자기 노크소리가 들렸다. 렌은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문이 열리고 테룬 황제가 렌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는 살린 평원에서와는 달리 세련되고 화려한 검은 토즈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렌은 아직도 테룬 황제에게서 피비린내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렌 자신에게서도 이제 풍기기 시작한 살인자의 냄새였다. “울고 있었군.” 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생이 많았지? 서제국 황제에게서 도망친 후 카로딘군의 치료사로 일했다고 들었다. 왜 바로 내게 오지 않았지?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고 있어? 렌? 테룬은 애타는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 렌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바라는 건 단 한 가지입니다. 얼마 동안만 이곳에서 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이상 폐를 끼치지는 않겠습니다. 폐하를 위해 제 생명의 일부를 쏟았으니 그 정도 부탁은 들어주시겠지요?” 렌의 말에 테룬은 폭발했다. “얼마 동안만이라고? 다시 떠나려고? 날 두고 다시 멀리 가버리려고? 네가 떠난 후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면서 그런 소리를 태연하게 하는 거야?” 렌은 차가운 눈으로 테룬을 올려다보았다. “괴로우셨다고요?” “그래!” “그래서 반미치광이가 되어 그 수많은 병사들을 학살하셨습니까?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살해할 수가 있지요? 저는 보았습니다. 폐하께서 그 무시무시한 검강을 휘두르면 사람들은 끝없이 쓰러져나가 폐하께서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고, 폐하 뒤를 따르는 친위대들은 감격에 겨워 자신들의 황제가 하는 대로 똑같이 따라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테룬은 변명했다. “폐하께서 그 학살극을 벌이실 때는 이미 전쟁은 끝나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전장에 있었기 때문에 잘 압니다. 폐하께서는 의미 없이 수많은 목숨을 사라지게 하신 거예요!” “아, 아, 나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광기에 취해 있었어! 그대도 알지 않는가! 내 마음이 정상이 아니란 걸!” 렌은 가슴까지 꿰뚫는 눈길로 테룬을 쳐다보았다. 테룬은 발가 벗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폐하, 아무리 처절한 광기에 취해 있다 하더라도 아군까지 척살하지는 않으셨지요? 폐하의 마음 어딘가에는 이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폐하의 ? 뗌슨淡【??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 광기를 전쟁에 이용하고 계셨습니다. 제 눈에는, 폐하께서 그 광기를 합법적으로 터뜨리고 마음속의 응어리를 일시적으로나마 해소할 기회를 잡아 무의식 어디에선가 기뻐하고 계셨던 것처럼 보입니다. 아닙니까? “아, 나는 모르겠어! 정말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테룬은 고통스러워하며 외쳤다. 테룬은 마침내 울기 시작했다. 렌은 몸을 떨었다. 테룬의 영혼에 난 상처들은 전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보였다. 몸에 난 상처가 깊어졌기 때문일까. 가슴이 아파졌다. 결국 렌도 따라 울었다. 그녀는 울먹이면서 핏기 없는 찬 손을 들어 테룬의 손을 잡고 타이르듯 말했다. “제게 폐하를 비난할 자격 따위는 없어요. 저 또한 살인자이고 이미 제 손에 피를 묻혀버렸어요. 지금까지 폐하께 퍼부은 비난은 오히려 제 자신에 대한 비난이에요. 폐하나 저나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폐하께 용서의 말,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하는 것은 저 스스로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스스로를 용서하고 남을 용서하려면 힘이 필요한데, 제게는 이제 그런 힘이 남아 있지 않아요.” 렌은 조용히 흐느꼈다. “그래도 내겐 그대가 필요해.” 테룬은 렌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으며 애원했다. 온기가 거의 없는 손이었으나 그 미미한 온기가 그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폐하, 제가 뭘 어떻게 해드리기를 바라시나요?” 렌은 조용히 손을 빼어 눈물을 닦았다. 어느새 차분함을 되찾은 렌의 말에 테룬은 말문을 잃었다. “아, 나는 그저, 그대가 내 곁에 있기를 바랄 뿐이야. 그대가 내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나는 정상이 되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가 가라앉을 것 같아.” “곁에 있는다면...... 폐하의 첩으로서요?” 렌이 조용히 묻자 테룬은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건 아니다. 그대를 제1황후로 만들어주겠다. 지금 타림 안딘인 티르안 공녀는 황후가 되는 게 목적이 아니야. 오히려 프린다인 공국을 차지하는 게 목적이지. 이번의 대승으로 내 재량은 전보다 훨씬 커졌으니, 그녀를 프린다인 공국 최초의 여자 대공으로 만들어주면 그녀는 불만 없이 타림 안딘의 자리를 내놓을 것이다.” 렌은 아득한 눈길로 테룬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좀 전과 마찬가지로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에 테룬은 움찔했다. “당신은 저를 사랑하나요? 아니잖아요?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할 수도 없으면서 왜 저를 붙잡으려는 거죠?” 슬프면서도 담담한 렌의 질문에 테룬은 멍해졌다. 그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 그대마저도!” “그대마저도라뇨?” “서제국 황제가 그랬다. 내 마음이 처참하게 찢어발겨져 있다고. 그래서 아무도 사랑하지 못한다고.” “그를 만났나요? 어디서요? 그는 어떻게 됐죠?” 렌은 다급하게 물었다. “카로드 대공궁에서 널 내놓으라면서 나를 공격했다. 그러다가 자신의 신하들이 나타나니까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후퇴했지. 그가 내게 말했다. 엘프 마법사 라비언이 사실은 흑룡 데이그랜인데 너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그대와 서제국 황제는 대체 어떤 관계인가?” “그저 서제국 황제가 잠시 제게 흥미를 가졌던 것뿐입니다. 제 치료술이라든지 제 미모라든지 이것저것에요. 일시적인 변덕에 지나지 않을 따름입니다.” 렌은 거짓말했다. 렌과 카엔이 서로 사랑한다는 게 알려지면 적국이나 다름없는 이곳 동제국 황궁에서 그 정보가 어떻게 악용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샤이트 수상 같은 사람은 렌과 카엔의 관계를 알게 된다면 반드시 렌을 이용해서 서제국으로부터 뭔가를 얻어내려 할 터였다. 테룬은 렌의 대답에 안도했다. 그래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흑룡께서 너를 노리신다는 것이 사실인가?” 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 사실이라면 내 힘을 다해서 널 흑룡에게서 보호해주겠다.” 테룬은 간절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저는 해출링인 시오카의 친구인데, 우여곡절 끝에 남대륙에서 흑성으로 순간이동된 거예요. 데이그랜님이 제 목숨을 노릴 리가 없지요. 혹시 와계시다면 그분을 만나게 해주세요. 그와 함께 남대륙으로 가서 시오카를 만나보고 싶어요. 그리고 이곳에는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아요.” 렌은 마음을 정하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평생 이렇게 괴로워하며 살아야 하는 건가? 아무리 기다려도 더 괴로워지기만 하는데! 더 미칠 것 같은데! 그저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도 안 되는 건가! 그대는 치료사잖아! 내 몸을 고쳐주었으니 내 마음도 치료해주어야 하는 것 아니야?” “제 마음도 알고 보니 추했고, 제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치료할 자격 따위는 없었습니다. 제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렌은 한없는 허무함을 담아 대답했다. “나는 그대를 보내줄 수 없어. 흑룡께서 원하 신다 하더라도, 그대가 원한다 해도, 절대로 결계를 열어주지 않겠다.” “그렇다면 여기 머물게만 해주시고 저를 더 이상 찾지 마세요.” “그럴 수 없어.” 렌은 연민을 담아 테룬을 응시했다. “저를 계속 만나신다 해도 구원은 없을 거예요.” “아!” 테룬은 탄식했다. 무어라 말하려 애쓰던 그는 결국 포기하고 힘없이 방을 나갔다. 그의 뒷모습에 렌은 마음이 흔들렸으나, 그 흔들림은 곧 가라앉았다. 렌을 만나보아도 좋다는 테룬의 연락을 받은 데이그랜은 기운차게 렌의 방으로 향했다. 그 오랜 기다림은 끝나고 이제 렌은 확실히 그의 수중에 있는 것이다. 데이그랜은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엘프 마법사의 모습을 한 채 방으로 들어섰다. “렌,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군요!” 그는 활기차게 인사했다. 렌은 핏기 없는 하얀 얼굴로 그를 맞았다. 자신의 목숨을 빼앗아갈지도 모르는 흑룡과 만났는데도 렌은 공포 대신 조용한 체념과 슬픔만을 보였다. 그 차분하고 품위 있는 태도에 데이그랜은 감탄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곧 일그러졌다. “어떻게 된 거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 아름답고 이상한 기운은 어디 간 겁니까?” 데이그랜은 다짜고짜 렌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러다 문득 멈춘 그는 렌의 몸을 정신없이 여기저기 만지기 시작했다. 렌은 그가 자기 몸을 마구 주물러도 특별히 제지하지 않고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가 쓰디쓰게 말했다. “이제 알겠군요.” “뭘?” 데이그랜은 손을 멈췄다. “당신이 왜 절 소환했는지 그 이유를요. 당신은 제 정명기가 필요했던 거지요?” “그 아름답고 무색투명한 기운의 이름이 정명기입니까?” “그래요. 모든 것을 바로 세우는 기운이라는 뜻이에요.” “멋진 이름이군요.” 데이그랜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 아름답고 무색투명한 기운은 제가 이 두 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순간 사라져버렸어요. 영영, 완전히.” 렌은 나직하게 말했다. 데이그랜은 망연자실했다. 사라져버렸다고? 그 모든 고생과 노력이 전부 다 물거품이 되어버렸단 말인가? 그는 휘청거리다 주저앉았다. 데이그랜은 있는 힘을 다 짜내서 물었다. “왜 사라져버린 겁니까?” “정명기는 온 세상에 가득한 기운 중 가장 맑고 깨끗한 것만 거르고 또 걸러서 모은 기운이에요. 맑고 순결한 소녀의 몸으로만 익힐 수 있지요. 책에는 일정 단계를 넘어서고 나면 순결지신을 버려도 상관없다고 되어 있었죠.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살인과 정명기는 서로 상극이었던가 봐요. 살린 평원의 전투에서 저는 살기위해 병사 두 명을 죽였고, 그 순간 정명기는 사라져버렸어요. 이제는 아무리 애써도 정명기는 단 한 점도 느껴지지 않아요.“ 렌은 무한한 쓸쓸함을 느끼며 조용히 설명했다. 데이그랜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물었다. “정말로 정명기는 영영 사라져버린 겁니까?” “아마도.” “아마도라면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남아 있다는 거 아닌가요?” 렌은 다시 쓰게 말했다. “글쎄요. 한 번 살인으로 더럽혀진 몸에 다시 순결한 정명기가 깃들 것 같지도 않지만, 제 목숨 자체가 얼마 안 남았으니 더 이상 희망을 품는 건 어리석은 일이겠지요.” 데이그랜은 엄청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끝난다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드래곤이 어떤 종족인데!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내려온 그 얼마나 위대한 종족인데 종말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 파국이 보이자 그 절망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건가.” 데이그랜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뭐가 끝난다는 거지요?” “드래곤 종족이, 그리고 드래곤이 지어낸 모든 것들이.” 렌은 조금 놀랐다. “대체 절 이용해 뭘 하려 했던 건가요?” 렌은 조용히 물었다. “드래곤 종족 전체의 멸종을 막으려 했지요.” 데이그랜은 멍하니 말했다. “멸종이라뇨?” “전부는 말해줄 수 없지만, 그래요, 그대도 약간 정도는 알 자격이 있겠지요. 시오카라는 황룡의 해츨링이 있습니다. 그 애가 마지막 황룡입니다. 전대 황룡이 죽은 후 그 아이가 황룡의 대를 이어야 했지만, 어느 순간 그 아이는 성장을 멈추고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드래곤이 청, 황, 적, 백, 흑의 다섯 용으로 나뉜다는 건 알고 있지요?“ “예.” “그 다섯 힘은 철저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느 한 힘만 없어져도 균형은 깨지게 되고, 드래곤들은 마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소멸하게 됩니다. 시오카는 그 힘의 가장 약한 고리입니다. 그녀를 낫게 하는데 그대의 힘이 필요했습니다.” “어떤 식으로요?” “사실 이런 일은 드래곤 역사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드래곤들은 모두 당황했죠. 그중 지혜의 드래곤인 저는 ? 軻瑛岵막?시오카를 고칠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유일한 방법은 마나간의 균형을 잡는 것인데, 한 번 일그러진 균형을 바로잡는다는 건 우리 드래곤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의 모든 마나는 드래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마나를 쓰는 이 세계의 생물체의 힘으로도 균형을 바로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미 쓰러지기 시작한 팽이가 혼자 힘으로 바로 서기 어려운 거나 마찬가지죠. 결국 외부의 힘이 필요했죠. 그래서 나는 우리 세계와 연결된 다른 세계를 두루 살펴보았습니다. 높은 세계, 낮은 세계. 이따금씩 도움이 될 만한 생명체를 발견하기도 했지만, 그들을 이 세계로 끌어올 방법이 없었고, 나는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그러다가 그대를 발견했습니다. 그대는 내가 필요로 하는 신비한 기운을 갖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순수한 물의 기운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순수한 물의 기운은 바로 내가 불러올 수 있는 기운이었죠. 그래서 이리로 불러온 겁니다.“ “왜 제가 협조할 거라고 생각하신 거죠?” “렌, 그대를 협조하게 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일단 그대 배에 난 총알자국을 치유마법으로 낫게 해주고 그대의 생명을 구해주었으니 그대는 내게 생명의 빚이 있었죠. 그대가 내 레어에 무사히 오기만 했다면, 그대는 생명의 은인인데다가 그대와 같이 물의 기운을 지닌 내 말이 이끌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겠죠. 적당히 거짓말하고, 거기에다가 아픈 아이를 보여주면서 도움을 호소하면, 그대는 아마도 도와주었을 겁니다.“ “어떤 방식으로 도와줘야 하는 건데요?” 데이그랜은 주저하다가 말해버렸다. “그대의 그 맑은 기운은 다른 드래곤의 기운을 중화시켜 시오카의 몸에 흡수되도록 하는 중개역할을 합니다. 복잡한 과정이지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해츨링 시오카가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성룡으로 탈피하는 데는 꼬박 40년이 걸립니다. 그대의 젊은 시절, 아니 사실상 인생 전부이지요. 한 번 그렇게 탈피 과정이 시작되면 그대의 의지로 벗어날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습니다. 그게 다 끝나고 나면 그대의 인생은 사실상 다 흘러가버리는 셈이 되지요. 내가 할 일은 그대를 속여 그 과정에 자진해서 참여하게 하는 것이었고요.” 렌은 비로소 대강의 사정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정말로 데이그랜의 말대로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홍콩의 바다에 빠졌다가 눈을 떠보니 자오와 똑같이 닮은 남자가 친숙한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면?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내 배에 난 총상을 자신이 치유해주었고 자신이 나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했다면? 죽어가는 어린 생명이 있으니 구해 달라,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애절하게 부탁했다면? 결국 렌은 넘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잠시 분노가 일었으나 곧 가라앉았다. 어차피 모두 다 지나간 일이 아닌가. “소용없는 말이긴 하지만, 이제 흑룡님 뜻대로 하세요. 그저 저를 카엔님께 도로 넘기지만 마세요.” 렌은 나직하게 말했다. “아니, 왜죠?” “그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인간의 마음, 저 스스로의 마음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제가 죽어가는 것은 저번에 카엔님이 펼친 황제의 저주를 막느라. 그리고 이번에 카엔님이 살린 평원에 쓰러졌을 때 그의 생명을 되살리느라 제 자신의 생명력을 거의 다 소진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사실을 카엔님께 숨기고 싶어요. 그는 그걸 알게 되면 평생 자책하고 괴로워할 텐데, 저는 도저히 그걸 견딜 수 없어요. 그리고 전에는 카엔님이 제 마음을 읽는 것이 두렵지 않았었지만 이제는 두려워요. 제 마음 속에도 지옥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저는 절대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생명의 위협이 닥쳐왔을 때 전혀 주저하지 않고 두 명이나 죽였어요. 지금까지 저는 제 생명을 바쳐 카엔님을 구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지만, 죽어가는 순간이 되면, 저를 죽게 한 모든 것에 대해 엄청난 증오감을 품을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그 증오감은 카엔님에게로 향할 수도 있겠지요. 사람의 마음은 믿을 수 없고 인간은 언제라도 짐승으로 변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그런 저의 마음을 카엔님에게 고스란히 읽어 내게 하고 싶지 않아요.” 데이그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렌이 묻자 데이그랜은 긴 한숨을 토했다. “글쎄요. 내가 속한 종족의 멸망을 조용히 지켜보아야 할까요? 아니면 포기하지 말고 조금 더 발악해야 할까요? 그대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넋이 나간 듯 혼잣말을 하던 데이그랜은 한참 멍하니 있다가 마침내 대답했다. “당장 뭘 어떻게 하진 않겠습니다. 그대를 남대륙으로 데려가면 안티니아나 다른 용들 모두 이제 끝장이라는 걸 알게 되겠죠. 그런 걸 모른 채 하루라도 더 희망을 품고 있게 하는 게 나을 겁니다 .” “그럼 저를 여기 두고 혼자 떠나실 건가요?” “아뇨. 나 스스로도 아직 납득하지 못하겠으니, 정말로 그대의 정명기가 완전히 사라진 건지 여기 머물면서 조금 더 지켜보겠습니다.” “만에 하나 정명기가 다시 돌아오더라도 제 수명은 이미 얼마 안 남았는데, 어떻게 시오카가 탈피할 때까지 40년의 세월을 견딜 수 있겠어요?” 데이그랜은 렌의 질문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유일한 희망은 그대인데 그럼 무조건 포기해야 합니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시 전부 잘 풀리더라도 이미 제가 모든 사정을 알게 됐는데, 새삼 어떻게 설득하시려고요?” 데이그랜은 허탈하게 웃었다. “카에닌 테라미즈넨이 있지 않습니까. 온 드래곤이 목숨을 걸고 그를 해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내게 협력하라고 그대를 협박해야지요.” “저번에 카엔님과 대결했을 때에는 사실상 졌잖아요.” “그건 황제의 저주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카에닌이 다시는 황제의 저주를 쓰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는 살린 평원에서 목숨을 걸고 카로딘 마법사들이 펼치는 황제의 저주를 막아냈더군요. 솔직히 한 번 펼쳐진 황제의 저주를 막아낼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그 흔적을 읽고 정말 놀랐습니다.” 데이그랜의 목소리에는 감탄이 서려 있었다. “멸망을 앞두고도 의외로 쉽게 침착성을 되찾으시는군요.” “그건 아마도, 우리 드래곤들이 서서히 약해져가고 있다는 걸 오래 전부터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다른 드래곤 중에는 화룡 가이레스처럼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녀석도 있지만, 나는 우리 종족의 끝을 볼 수 있습니다.” 렌은 데이그랜의 절망에 묘한 동지의식을 느꼈다. 사실 그의 친숙한 기운 때문인지 렌은 데이그랜이 무척이나 가깝게 느껴졌다. 자오 오라버니, 테룬 황제에게서 느끼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결국 우리는 함께 죽음을 기다리는 거군요. 제게 남은 날들보다는 데이그랜님의 날들이 조금 더 길 테지만, 그래도 시한부 인생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군요.” “그냥 ‘데이’라고 줄여 불러도 돼요. 렌이야말로 남은 나날 동안 무얼 할 겁니까? 대체 그대의 생명은 얼마나 남은 겁니까? 렌은 깊은 밤의 어둠보다도 더 어두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 석 달? 반 년? 운이 좋으면 일 년?” “너무 짧군요.” 데이그랜은 탄식했다. “예, 그래서 저는 조용히 죽어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예요.” “테룬 황제에게는 말하지 않을 겁니까?” “글쎄요, 굳이 미리 말해서 오랫동안 괴로워하게 할 필요는 없을테죠.” “그대가 죽으면 테룬 역시 슬퍼할 텐데, 그건 걱정되지 않나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카엔님이고, 그의 고통과 슬픔을 더는 게 제게는 가장 중요해요. 제가 다른 곳에 있으면 카엔님이 어떻게든 저를 찾아낼 테니, 죽는 날까지 카엔님을 피할 수 있는 곳은 드래곤의 레어를 제외하면 이곳뿐인걸요. 이기적이라고 비난받아도 할 수 없어요. 테룬 황제의 슬픔은 제가 구해준 그의 목숨 값이라고 해야지요.” 데이그랜은 렌의 심정이 묘하게 이해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모든 생물은 다 죽어요. 세상에는 죽음이 더 흔하고, 제 죽음은 그런 흔하디흔한 죽음 중 하나일 뿐이에요. 제가 죽고 나면 슬퍼하는 사람들이 다소 있겠지만, 그들 또한 결국 언젠가 죽을 테고, 그 모든 슬픔의 기억은 결국 다 사라질 테니...... .” 렌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득한 허무와 절망을 느끼고 데이그랜도 입을 다물었다. 데이그랜이 나간 후 렌은 선잠이 들었다. 몸이 아프니 잠은 얕고 꿈은 어지러웠다. 꿈에서 렌은 자신의 손으로 죽인 두 병사를 보았다. 그들은 악귀처럼 온몸에 피칠을 하고 렌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나쁜 년! 네년 때문에!” “내 마누라랑 어린 자식은 어쩌라고!” “네가 나를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여주마!” 렌은 그들이 집요하게 자신을 쫓아오자 단 한마디 변명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도망쳤다. 그러나 아무리 도망치려 애써도 다리는 천근처럼 무겁고 병사들은 뻗으면 렌을 잡을 수 있는 거리까지 쫓아왔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용서? 우리를 다시 살리면 용서해주지!” “네년이 죽으면 용서해주지!” 병사들은 렌의 몸에 창과 칼을 동시에 찔러 넣었다. 생생하고 섬뜩한 고통이 엄습하면서 렌은 눈을 떴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머리는 멍멍하고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아까의 고통은 너무 실제와 똑같아서 렌은 자기도 모르게 창칼이 들어갔던 곳을 손으로 더듬어보았다. 멀쩡했다. 실소하던 렌은 떨기 시작했다. 렌이 지금 느끼는 건 아주 간단했다. 만약에 지옥이 있으면 어쩌지? 사람을 죽이면 무조건 지옥에 가게 되는 건 아닐까? 내가 죽인 그 사람들이 귀신이 되어 아직도 이 세상을 헤매며 나를 쫓아다 니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원초적인 공포 앞에서 정당방위였다는 둥 어쩔 수 없었다는 둥 카엔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후회하지 않겠다는 둥 하는 낮의 다짐은 의미를 잃었다. 무슨 화려하고 고상한 죽음에 대한 담론 따위는 다 쓸데없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허공에 뭔가가 흔들리며 떠다니는 것 같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기척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다. 렌은 그때마다 공포에 질려 숨을 죽였다. 그러다가 스스로 한심해졌다. 이제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내려다보아 사람들에 부끄럽지 않던 시절은 지나갔다. 악몽 없는 편안하고 부드러운 밤은 사라졌다. 그녀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짊어진 채 남은 날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녀의 죄가 바로 절망의 원천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절망이 온 세상에 대한 절망을 불러온 것이다.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어떻게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살인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아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언제나 두 번째 살인은 처음보다 쉽다. 세 번째 살인부터는 무감각해진다. 그렇게 살인에 익숙해지고 사람을 죽이는 걸 이러저러한 이유로 손쉽게 정당화하게 되면서 살인자들은 점점 인간에서 짐승으로 전락하게 된다. 범죄자들뿐만이 아니다. 말 한마디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권력자들, 전쟁터에서 수백을 척살한 전쟁영웅들, 기사들, 사형집행인들. 살인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자신을 정당화하지만 그 본질은 살인일 뿐이다. 인간은 그렇게 동족을 살해하는 집단일 뿐이다. 아, 그리고 마침내 렌은 그 살인자 집단 속으로 한 발짝 걸어 들어간 것이다. 그 끝없는 죽음과 살인의 지옥을 만들어낸 모든 사람들, 렌 자신, 테룬 황제, 일드인 대공, 장교들, 마법사들, 병사들, 그 모두에 대한 분노가 일어났다. 자신으로 하여금 살인을 저지르게 한 모든 사람, 모든 상황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자랐다. 렌은 그저 이 더러운 마음을 카엔이 보지 못하는 것만을 다행으로 여겼다. 3장 동제국 황궁의 안팎에서 테라미즈넨 제국 첩보부는 파이브룬 제국이 건국될 무렵부터 동제국에 대해 물샐 틈 없는 첩보활동을 전개해왔다. 카에닌 황제는 사실 동제국의 세력이 동대륙 안에만 머무르는 한 동대륙 사람들이 제국을 만들든 왕국을 만들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신하들의 입장은 또 달랐다. 그들 모두의 권력의 원천은 테라미즈넨 제국이었기에, 그들은 서제국에 대한 단 한 점의 위협마저도 좌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우려를 바탕으로 설립된 것이 서제국 첩보부였다. 파이브룬 대공이 동대륙 정복에 나설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첩보부는 동제국이 건국된 것을 계기로 8서클 마법사가 첩보부장으로 취임하여 대대적인 기구 확대, 개편작업을 벌였고, 현재까지도 8서클 마법사가 첩보부장 자리를 맡는 전통이 계속되고 있었다. 신하들 간의 권력분배를 이유로 첩보부에서는 국내첩보를 배제하고 해외첩보만을 담당했지만 첩보부에서 관장하는 인력과 예산은 엄청났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은 품위 있고 인자한 초로의 귀족 부인처럼 보이는 마스니였다. 그녀의 본 얼굴을 아는 사람은 황제인 카엔, 수상 페람, 그리고 다른 네 명의 8서클 마법사밖에 없었다. 그녀의 비밀주의는 한창 때의 카엔 만큼이나 철저했지만 그것은 카엔처럼 사람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맡은 임무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은 덕분에 그녀는 본얼굴을 오히려 변장처럼 사용하곤 했다. 평소의 맨 얼굴을 드러내면 아무도 그녀가 대외첩보부의 수장으로 명성이 자자한 ‘밤의 철나비’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폐하, 여기가 마음에 드십니까?” 마스니는 서제국 첩보부가 보유한 여러 채의 안가 중 가장 호화롭고 품위 있는 귀족의 저택으로 카엔을 안내했다. 카엔은 사실 검은색을 많이 쓰는 동제국의 우중충하고 남성적인 건축양식이 아주 촌티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기대에 찬 마스니의 얼굴을 보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누구 소유로 되어 있는 저택이지?” “웨논 공국의 고젠 백작가 소유로 등기되어 있습니다.” “안전한가?” “물론입니다.” 마스니는 간단히 사정을 설명했다. 150년 전 첩보부가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 첩보부장이던 8서클 마법사 치로는 동제국 황실에 완벽하게 첩보원을 심기 위해 부하인 7서클 마법사 한 명을 동대륙 북부의 웨논 공국 출신 평민 마법사 고젠으로 위장시켜 동제국 건국전쟁에 처음부터 참전하게 했다. 그는 기대 이상의 맹활약을 펼쳐 하라스 대제로부터 백작위를 받았고, 동제국의 황실을 출입하며 완벽한 첩자 노릇을 했다. 제1대 고젠 백작은 웨논 공국의 궁벽한 산골에 저택을 짓는 한편 수도 브림에도 호화저택을 사들였다. 그때 구입한 저택이 바로 이곳이었다. 백작위는 대대로 동제국 브림 담당 첩보책임자가 적당한 혈연관계를 가장하여 승계했지만 가끔은 첩보? 括揚?직접 백작으로 행세하기도 했다. 현재의 고젠 여백작은 마스니였다. “고젠 백작가는 150년 전부터 괴벽한 마법사 가문으로 소문을 내왔기 때문에 저도 고젠 백작부인으로서 직접적인 활동 따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늦가을에 열리는 대지의 신 이노스의 축제 때 두 번 정도 참석한 게 다입니다. 그래도 동제국 사람을 별도로 포섭하는게 아니라 아예 세습 귀족 자리를 확실하게 첩보부가 확보하고 있다는 건 대단한 강점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고젠 백작가의 일원으로 가장해서 당장 동제국 황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건가?” 마스니가 약간 한심한 눈으로 카엔을 쳐다보았다가 자신의 무엄한 태도에 스스로 화들짝 놀랐다. 카엔은 멋쩍게 웃었다. “그래, 미안하다. 명색이 황제인데 이렇게 모르니. 하지만 내가 정무에서 거의 손을 뗀 지도 100여 년이 지났고, 지난 30년 동안은 아예 정무에 신경을 껐었으니, 이해해줘.” 마스니는 황제의 부드러운 말에 또다시 감격의 눈물을 글썽거렸고, 카엔은 마스니의 눈이 광팬의 눈으로 돌변하는 것을 보며 약간 두려워졌다. 그러나 마스니는 곧 첩보부장으로서의 전문가적 태도를 회복하여 자세히 설명했다. “동제국 건국 시부터 그들이 제일 두려워했던 것은 폐하께서 마음 내키는 순간 언제라도 황궁으로 침입하여 그들을 절단내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드 마스터의 혈통이 항시 발현되는 것도 아니고, 설령 소드 마스터라 하더라도 밤에 자지 않고 늘 전투태세로 방비할 수도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생존을 순전히 폐하의 자비에 맡길 수도 없고요. 그래서 그들은 드래곤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철벽 마법결계를 만들어냈습니다. 마법결계는 아주 복잡한 방식으로 움직이는데, 기본적으로 운영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완전히 신분을 인정받아 모든 마법결계를 무상출입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샤이트 수상이라든지 국방대신 팔라르 데매긴, 마법사 쿠드, 이런 고위공직자들은 몸 자체에 마법결계를 통과할 수 있는 통과마법을 심어 암호 없이도 외궁과 내궁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경우에라도 황제가 직접 결계 설정을 바꿔버리면 출입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리고 궁에서 근무하는 일반 공무원, 근위병, 시녀들은 일단 몸에 마법결계를 통화할 수 있는 통과마법표를 심되 주기적으로 암호를 받습니다. 암호가 없으면 통과가 안 되죠. 물론 암호를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직접 상급자가 나와서 신원을 확인합니다. 그들 중에서도 내궁의 황제 침전과 황제집무실까지 출입하는 사람들은 더욱 엄격한 감독을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평소에 궁에 자주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 이를테면 지방귀족이 어쩌다가 궁으로 들어올 경우에는 내부의 결계감독자의 도움을 받아 결계를 통과합니다. 또 큰 행사가 있을 경우에는 외궁의 결계단계가 하향 조정되어 다수의 사람들이 신원확인만 거친 후 궁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별도의 허락이 없는 한 내궁까지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좀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군. 테라미즈의 내 황궁결계도 철통같기는 하지만 외궁까지 그렇게 엄중한 결계로 보호하지는 않는데.” “사실 동제국의 결계는 폐하의 마법을 막는다는 처음의 취지와는 달리 지금은 내부의 반란과 반대파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더 많이 이용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동제국 황실에서는 툭하면 독살사건이나 후계자 다툼이 일어났으니, 폐하를 막는다는 핑계를 대 자기네 황실의 경계를 강화하고 내부의 세력을 경계한거지요. 그래도 황궁의 결계는 황제와 최고마법사의 뜻에 따라 언제라도 해제될 수 있습니다. 저번 내전 때에도 하라스 4세 황제와 쿠드가 2황자 테룬을 위해 내궁과 외궁의 결계를 모두 풀어놓았었지요.“ “그럼 동제국 황궁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지?” “전대 첩보부장이자 8서클 마법사였던 고 로비탄 경께서는 15년 전 저를 첩보부 차장으로 발탁하시자마자 바로 동제국 관청에 형식상의 혼인신고를 하고 고젠 백작부인으로 앉히셨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저는 동제국에서 로비탄님과 부부 행세를 하게 되었지요. 로비탄님과 저는 10년 전 고젠 백작 부처로서 동제국 황실의 이노스 신 축제에 참석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 후 로비탄님께서는 돌아가시고 제가 첩보부장이 되었지만 백작부인으로서의 제 지위는 남았습니다. 이미 동제국 귀족가와 황실에서 저의 신분을 확인하는 이상, 폐하께서는 저의 친척으로 행세하시면 됩니다. 그렇지만 고젠 백작의 지위가 지금 그다지 높지 않은데다가 지방 귀족인 이상 내궁 통과까지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현재로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일단 동제국 귀족가에 고젠 백작부인과 그 친척이 이곳 브림에 왔다는 것을 알리고 겉으로는 사교활동, 물밑으로는 첩보활동을 계속하면서 한 달 후에 있을 대지의 신 이노스의 축제 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노스 신 축제 때에는 귀족들에게 내궁 일부를 제외한 황궁 전체를 개방하고 결계의 단계도 많이 낮아집니다. 렌님이 축제 파티장에 직접 나오신다면 일은 훨씬 간단해지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축제날 당일에는 결계를 뚫는 게 다른 때보다는 한결 쉬워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폐하, 들어가셔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동제국 황제를 공격하여 렌님을 되찾아 오실 생각이시지요? 폐하의 마력에는 감히 미치지 못합니다만, 우리 제국의 8서클 마법사들을 좀 더 불러올까요?“ 카엔은 고개를 저었다. “내 목표는 어떻게든 렌을 만나 그녀의 의향을 확인하는 것이다. 렌이 테룬의 곁에 있고 싶다면 그대로 두고 그녀의 행복을 빌어줄 것이다. 혹시 렌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그리 간 것이고 강제로 억류되어 있는 거라면 그녀를 데리고 나올 것이다. 렌의 뜻을 이루는 데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나는 그녀가 뜻하는 바를 들어줄 거다. 하지만 렌의 진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섣불리 강공을 펼칠 수는 없어. 자칫하면 그녀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 카엔은 끓어오르는 질투심과 번민을 떨쳐버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결연히 말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먼저 렌을 만나야 해. 그녀를 만나 직접 진심을 읽지 않고서는 나는 스스로 어찌할 수가 없어. 나는 사람의 마음을 자유자재로 읽는 내 능력을 평생 저주해왔지만, 지금은 이 능력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사람의 마음을 읽고 확인하지 못하면 안개에 휩싸인 듯 갑갑하구나.” 카엔은 탄식했다. 사랑에 고민하는 황제의 모습에 마스니는 연민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둘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대의 아들로 하지.” 갑자기 카엔이 입을 열었다. “네?” “그대의 아들로 가장하겠다고.” 마스니는 당황하며 반문했다. “아, 아들이요? 제 아들이요?” “그래, 이렇게.” 카엔은 마스니의 얼굴을 뚫어지게 관찰하며 가벼운 변장마법으로 눈과 코, 입가의 선을 조정했다. 그의 얼굴은 누가 보아도 마스니와 혈연관계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까지 변했다. 마스니는 요염하거나 표정이 풍부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단정하고 절도 있는 얼굴을 남성형으로 바꾼 결과는 상당한 미남이었다. 마스니는 숨을 죽이고 카엔의 능숙한 변장마법을 지켜보았다. “어떤가?” 카엔은 마스니를 끌고 커다란 거울 앞으로 갔다. 자신의 변장마법에 카엔은 흡족해했다. 마스니는 경이로움과 감격에 가득 찼다. “폐하, 정말 훌륭한 변장마법입니다.” “어머니, 제 모습이 어떻습니까?” 카엔은 빙긋 웃으며 가볍게 물었다. 마스니는 어머니라는 그 한 마디에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걸 느꼈다. 자신의 혈육 같은 얼굴을 하고 자신을 어머니라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 마법을 익히기 위해 결혼, 아이, 그밖에 수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지금 이 자리에 올랐지만, 갑자기 그녀가 버린 모든 것이 지금 카엔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났다! 마스니는 짙은 회한에 쌓였다. 내가 잘한 걸까? 잘 산 걸까? 내가 포기한 그 수많은 것들이 사실은 가장 소중한 것들이 아니었을까? 동시에 자신과 닮은 모습을 한 카엔에 대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낯선 기분이 들었다. “내 아들.” 마스니는 그 낯선 기분을 한껏 담아 탄식하듯 말했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 카엔에게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저의 무엄한 언사를 용서해주십시오!” 카엔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대가 느끼는 그 낯선 기분은 모성애라는 것이다.” 그는 마스니의 내부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에 아찔했다. “아!” “인간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에 속지. 그대가 자신의 모습을 닮은 청년을 보고 모성애를 일으키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카엔은 마스니에 대한 연민과 그가 제대로 가져보지 못했던 모성애에 대한 그리움에 차서 조용히 말했다. 그러다가 그는 명랑하게 말투를 바꿨다. “어차피 우리는 이곳에서 모자지간으로 행세할 거니까, 완벽한 가장을 위해서 평소에도 어머니와 아들 역할을 연습하는 게 좋을거야. 그대가 편하다면 이곳에 있는 동안은 날 아들처럼 대해줘.” “폐하를......제 아들처럼......요?” 마스니는 눈에 눈물을 가득 담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예, 어머니.” 카엔도 그녀의 기분에 동조되어 나직하게 대답했다. 가짜 모성애, 가짜 혈육. 그러나 그를 향해 뿜어져 나오는 이 맹목적인 애정은 얼마나 달콤한 가. 렌의 사랑과는 또 다른, 부드러운 솜이불에 쌓여 있는 것 같은 이 기분. 수백 년 전 잠시 가졌다가 영영 빼앗겨버린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 제 이름은 뭐지요?” 카엔은 아직도 눈물을 글썽이는 마스니를 향해 미소지으며 물었다. 마스니는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대답했다. “아, 가명이요? 아, 저, 에스틴은 어떨까요?” 마스니가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카엔은 이름의 유래를 마스니의 마음속에서 읽고 황당한 기분이 되었다. 이미 모든 것을 읽었다는 카엔의 눈빛을 본 마스니는 식은땀을 흘리며 이실직고했다. “폐, 폐하, 에스틴은 제가 소녀 적에 탐독했던 로맨스 소설의 남자주인공이 맞습니다. 워낙 멋있어서 홀딱 빠졌었지요.” “푸훗, 그대는 소녀시절뿐만 아니라 지금도 밤마다 로맨스 소설을 읽지 않나?” 마스니의 마음을 좀 더 읽은 카엔은 웃으며 말했다. “폐하! 그것만은 죽어도 절대 비밀로 해주십시오! 첩보부장이 로맨스 소설 독자라는 게 밝혀지면 제 부하들이 얼마나 기가 막혀 하겠습니까!” 마스니는 사색이 되어 외쳤다. “글쎄, 그대가 얼마나 어머니 노릇을 잘 하는지 보고 결정하지.” 그러면서도 그는 스스로 놀라웠다. 신하들과 이렇게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열리다니. 그건 모두 렌 덕분이었다. 렌, 사랑하는 렌. 내 보화. 내 꽃. 내 영혼. 그가 그동안 그토록 인간을 불신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걸 혐오했던 것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렌을 통해 그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배웠다.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지만 이제 그는 변했다. 그리고 그가 변하자 세상도 달라졌다. 그건 그가 렌에게서 받은 수많은 선물 중 하나였다. 남편인 고젠 백작이 죽은 후 오랫동안 은둔해 있던 고젠 백작부인이 아들의 신붓감을 찾는다는 이유로 브림의 사교계에 나타나자 동제국의 귀족들은 호기심에 차 백작부인과 그 아들을 부지런히 초대했다. 고젠 백작가는 동제국 건국 때부터 작위를 받은 뿌리 깊은 명문인데다가 마법사 가문이라는 특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역시나 마법사 가문답게 괴팍하여 좀처럼 사교계에 등장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대가 바뀔 때에나 한두 번씩 입궐하였고,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에는 몇몇 들과 소규모 모임만을 가진 후 부리나케 영지로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 고젠 백작부인은 놀랍게도 아들까지 대동하고 나타나서 적극적으로 사교계의 파티와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사교계에 퍼진 소문에 따르면, 고젠 백작부인의 아들은 전대의 고젠 백작과 백작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가 아니라, 고젠 백작부인이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아 데리고 들어온 자식이라고 했다. 10여 년 전 고젠 백작이 상당히 나이 든 부인을 데리고 입궐했을 때에는, 백작이 마법의 능력을 지닌 아들을 얻기 위해 이미 마법력을 지닌 아이를 낳은 전력이 있는 평민 여마법사를 일부러 골라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그런데 정작 백작은 새로 얻은 아내에게서 자식을 보지도 못한 채 죽었으니, 사교계 사람들로서는 흥미진진하게 수군거릴 만했다. 또 ‘파이브룬 제국 내 작위와 봉토와 계승권에 관한 하라스법’에 따르면 작위를 가진 귀족이 직계비속 없이 사망했을 경우 피가 섞이지 않은 의붓자식이 작위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10년 동안 다른 친척의 이의가 없어야 하니 백작부인의 아들은 아직 정식 귀족도 아닌 셈이었다. 에스틴 데 고젠이라는 이름을 지닌 문제의 의붓아들은 이런저런 상황을 종합하면 사실 혈통을 중시하는 사교계에서 멸시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겨우 스무 살을 갓 넘은 나이에 벌써 6서클에 다다른 놀라운 마법력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자신의 어머니를 닮아 상당히 준수한데다가 다른 마법사들과는 달리 무척이나 사교적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내 마음을 잘 이해하고 마음에 쏙 드는 말만 해주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사교계 부인들의 중평이었다. 에스틴이 슬픔에 찬 모습으로 간간이 비치는 사랑 이야기도 부인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그는 최근에 약혼녀를 병으로 잃었다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랑스런 소녀였는데, 가엾게도 폐결핵에 걸려 피를 토하다가 죽은 지 딱 일 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 년이 지났어도 저는 그녀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녀의 장미꽃 같은 향기는 아직도 제 가슴에 살아 있답니다.” 에스틴이 아련한 눈빛으로 그렇게 얘기할 때면 소녀들은 까무러치고 부인들은 뭉클해했다. 그의 어머니인 고젠 백작부인이 이번에 반 강제로 아들을 끌고 사교계에 나온 것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시름에 잠겨 있는 아들에게 신붓감을 구해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교계의 부인들은, 고젠 백작부인과 에스틴을 위해 매일같이 모임과 파티를 열어 수많은 부인들과 그들을 따라온 결혼적령기의 귀족처녀들을 만나게 해주었다. 그들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선 데에는, 장차 8서클 마법사가 될지도 모르는 에스틴에게 잘 보이자는 것과 (스무 살에 6서클이면 마흔 정도에 8서클에 이를 확률이 상당히 높았다) 상당한 재산가로 알려진(브림의 성내에 있는 대저택 만 보아도 고젠 백작가의 재산 정도를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고젠 백작가에 자기의 딸이나 최소한 친척 처녀라도 시집보내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마스니는 가능한 한 많은 귀족부인들을 단시일 내에 만나기 위해서 이런 전략을 세웠다. 어차피 당장 내궁으로 들어가 렌을 마날 수 없는 현 상황에서는 내궁 출입을 자유로이 하는 귀족 수석시녀와 차석시녀들 및 궁중에서 한 자리 하는 그들의 남편들을 만나 황궁내의 형편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것이 차선책이었다.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상 카엔은 여러 명의 귀족부인들을 연달아 만남으로써 현재 황궁 내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거의 손에 잡힐 듯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은 약혼녀라든지 잃어버린 사랑에 괴로워하는 청년이라든지 하는 스토리는 마스니가 귀족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보다 많은 초대를 받기 위해 평소에 로맨스 소설을 탐독하여 얻어진 실력을 동원해 덧붙인 것이었다. 그 결과는 예상대로 대성공이었다. “에스틴님, 티르안 마마께서 폐하와 요즘 사이가 좋지 않으시다는 소문 들으셨나요? 우리 제국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두 분께서 서로 애정을 지니시고 한시바삐 혼례식을 올리시는 것이 좋을 텐데, 걱정입니다.” 품위 있는 말투로 입을 연 것은 루온 자작부인이었다. 그녀의 옆에는 생쥐처럼 자그마하지만 귀여운 루온 자작 영애가 얼굴을 붉힌 채 카엔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서 갑자기 이상한 년이 굴러들어왔으니 당연히 심기가 불편하겠지. 테룬 황제 폐하와 모후 사이의 수상한 소문은 티르안 공녀도 벌써 들었을 텐데, 펠리시티 마마와 똑같이 닮은 년이 나타났으니 티르안 공녀가 속 편하면 이상한 거 아냐? 그나저나 티르안 공녀도 착한 여자는 아닌데 어떻게 굴지 흥미진진해 죽겠네.’ ‘엄마는 왜 먼저 나서서 말하는 거야? 내가 말하려고 했는데, 에스틴님한테 말 걸 기회가 없어져버렸잖아. 그나저나 에스틴님의 재산은 우리 자작가보다 많겠지? 의붓자식이긴 해도 백작위는 결국 에스틴님이 상속받는 거겠지? 내가 거기로 시집가면 다시 브림의 사교계로 돌아올 수 있을까? 백작부인이 되면 힘없는 자작가라고 멸시하던 년들이 찍소리도 못하겠지? 모녀의 내심을 순간적으로 읽은 카엔은 한심함을 감추려 무진 애를 썼다. “갑자기 나타난 아가씨 한 분의 소문은 저도 들었습니다. 사실 궁금하군요.” 카엔이 우아하게 찻잔과 꿀과자를 집으며 응대하자 가벼운 감탄성이 퍼졌다. 동제국은 지금 한창 서제국풍을 따르는 게 유행의 첨단이어서, 서제국 예의범절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그도 그럴 것이, 서제국의 예의범절은 다 카엔의 취향과 스타일에 따른 것이었다) 카엔의 몸놀림이나 말투는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귀족 아가씨들의 찬사와 동경을 자아냈다. 루온 자작부인에게 선수를 뺏길세라 사스트란 백작부인이 먼저 서둘러 말했다. “사실은 제가 그 아가씨를 담당하고 있답니다. 뚜렷한 작위와 품계 없는 분을 모시는 것이라 매우 난감하긴 하지만, 폐하께서 정성껏 돌보라 명하셔서 일단 명대로 하고 있지요. 물론 제가 직접 돌보는 것은 아니고 저야 당연히 시녀들을 감독하고 있습니다만.” ‘매일매일 넋이 나간 눈으로 꼭 펠리시티 그 요부 같은 얼굴을 하고 침대에만 누워 있는 계집애를 무슨 재미로 돌본담? 티르안 공녀쪽이 훨씬 떡고물이 많은데. 하지만 만에 하나 그 계집애가 폐하 눈에 들어 총희가 될지도 모르니 박대할 수도 없고. 나는 왜 이리 일이 안 풀린다지? 그나마 엘프 라비언님이 종종 찾아오는 걸 보는게 유일한 낙이니. 아아, 저번에 폐하와 티르안 공녀가 그 계집애 때문에 대판 싸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에는 어찌나 조마조마하던지.’ 카엔은 엘프 라비언으로 가장한 흑룡 데이그랜이 종종 렌을 찾아온다는 사스트란 백작부인의 기억을 읽고서는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왜 데이그랜이 렌을 자꾸 만난다는 거지? 테룬 황제는 흑룡을 조심하라는 나의 경고를 무시했단 말인가? 그리고 왜 데이그랜은 렌을 만나고도 당장 드래곤의 레어로 데려가지 않았단 말인가? 그가 궁금함을 표현하기도 전에 어느 귀족 처녀가 먼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엘프 마법사 라비언님께서는 그 아가씨와 사이가 좋으시다면서요?” “예, 하루에 한 번 정도는 들르신답니다.” 사스트란 백작부인의 생각을 읽으니, 데이그랜은 라비언으로 행세하면서 매일같이 렌의 방에 들러 사람들을 물리고 반 파잔이 넘게 이야기하다가 돌아간다고 했다. “폐하께서는요?” “폐하께서는 몇 번 들르셨지만 그 아가씨가 계속 물리셨지요.” 사스트란 백작부인의 기억 속에서 그 장면이 생생히 떠올랐다. 테룬 황제가 렌의 방 앞에서 제발 만나달라고 간절히 애원한다. 사스트란 백작부인은 황제의 뜻을 렌에게 전한다. 렌은 창백하고 기운 없는 모습으로 거절하고, 사스트란 백작부인은 곤혹스 러운 표정을 지으며 렌의 의사를 테룬 황제에게 알린다. 테룬 황제는 무작정 렌의 방으로 뛰어들려다가 멈칫하고 결국 고개를 흔들며 힘없이 돌아선다. 렌은 역시 테룬 황제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사정이 뭔지는 몰라도, 적어도 테룬 황제를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간 것은 아니었어! 카엔은 렌의 아픈 모습을 읽은 후 괴로움과 사랑을 뺏기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뒤범벅이 되어 어쩔 줄 몰랐다. “그럼 그 아가씨도 나름대로 타림 안딘 마마를 배려하고 있는 게 아닌가요? 타림 안딘 마마의 허락 없이는 폐하를 받아들일 수 없다거나, 뭐 그런 게 아닐까요?” 한 순진한 귀족 처녀가 다시 물었다. 그 물음에 바리던 후작부인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타림 안딘인 티르안 공녀를 모시고 있는 수석시녀였다. “배려라니요. 근본도 모르는 계집이 무슨 배려입니까. 타림 안딘마마를 배려하는 마음이 손톱만큼이라도 있었다면 애당초 꽃의 방에 순순히 들어가지도 않았겠지요. 그 이상은 제가 모시는 분께 누가 될 것 같아 더 이상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만, 저는 누군가가 전 황후 마마를 닮은 소녀를 일부러 찾아내서 폐하께 접근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그 말에 대부분 수긍했다. 카엔은 바리던 후작부인의 생각을 조금 더 열심히 읽었다. ‘틀림없이 그 계집은 제1황후 자리를 얻기 전까지는 폐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위협한 거겠지. 그러니까 폐하께서 우리 티르안 마마께 제1황후 자리를 양보해줄 수 없겠느냐고 애걸하신 거 아니겠어? 요악한 펠리시티 황후를 똑같이 닮은 계집이 별수 있나. 그저 남자를 홀려서 원하는 걸 얻으려는 거겠지. 벌써 엘프 마법사 라비언님까지 홀려놓는 걸 봐. 그래도 우리 티르안 마마께서 그냥 앉아 당하실 것 같아? 흥, 어림도 없지. 두고 봐. 반드시 그 계집을 제거하고야 말 테니. 샤이트 수상과 합심해서 서제국 황제에게 그 계집을 팔아넘기고야 말거니까. 그렇게 되면 늙지도 죽지도 않고 마음까지 줄줄 읽어대는 그 괴물 마법사 황제 옆에서 노예 노릇이나 하다 죽으라지.‘ 카엔의 안색은 눈에 띄게 변했다. 마스니는 걱정이 되어 부드럽게 물었다. “얘야, 어디 아프니? 얼굴빛이 안 좋구나.” 이제 마스니는 남들 앞에서 모자지간으로 행세하는 것에 완전히 익숙해져서 처음에는 그렇게 어색하던 반말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일시적인 역할극에 지나지 않는 이 가짜 엄마 자식 관계에서 뜻밖의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스니의 마음을 읽자 카엔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어머니, 괜찮습니다. 오히려 어머니 얼굴에 피곤한 빛이 도는데, 일어나시겠어요? 제가 부축해드리겠습니다.” “이 어미를 노인네 취급하는 거냐?” “그럴 리가요. 어머니는 아직도 젊고 아름다우신걸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모자지간의 대화를 들으며 주위의 귀족부인네들은 모두 감탄과 부러움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죄송하지만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흠 잡을 데 없이 우아한 인사를 남기고 카엔은 마스니와 함께 자리를 떴다. “마스니, 조만간 티르안 공녀와 샤이트 수상 측에서 우리 서제국에 접촉을 꾀할지 모르겠다.” 마스니는 깜짝 놀랐다. “그런 생각을 읽으셨습니까?” “그래, 티르안 공녀의 수석시녀인 바리던 후작부인에게서 읽은 것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무슨 일로요?” “아마도 서제국에 렌을 넘겨주는 대신 대가를 요구할 것 같다.” 마스니는 반색을 했다. “그렇게만 되면 일은 쉬워지는 것 아닙니까?” “어떤 대가일지 모르지만, 그래, 렌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얼 주어도 아깝지 않으니 그런 방법으로라도 렌을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면 그 이상 좋을 수 없겠지. 특히 저쪽에서는 렌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잘 모르고 있으니 지나친 대가는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마스니는 긴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전 첩보망을 완전가동해서 티르안 공녀와 샤이트 수상의 직속 부하들의 행적을 감시하겠습니다.” “그래, 그나저나 동제국 황실의 사정이 생각 외로 복잡한 것 같아 걱정이다. 왜 테룬 황제가 흑룡으로 하여금 렌을 만날 수 있게 했는지, 흑룡은 렌을 실험용으로 쓰겠다고 하고서는 왜 가만히 놔두고 있는 건지, 렌은 왜 흑룡을 만나주는 건지, 아, 모르겠어.” “폐하,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입니다. 티르안 공녀 측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해도 이노스 신의 축제 때 저와 함께 입궁하셔서 모든 것을 직접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마스니는 부질없는 위로를 던졌다. 그래도 말 뒤에 숨은 뜨거운 진심이 오히려 더 위로가 되었다. “고맙다.” 카엔은 다시 힘내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그대의 그 로맨스 소설적인 전략은 정말 훌륭하더군. 나는 시골 백작가 모자가 이렇게 많은 초대를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역시 대단해.” 카엔의 칭? 廈?마스니는 얼굴을 붉혔다. “폐하, 자꾸 로맨스 소설을 가지고 놀리시는데, 제가 마법원에 있을 적에 그런 소설을 읽은 건 저뿐만이 아닙니다. 대게 여자 마법수련생들은 로맨스 소설을 읽고 남자 수련생들은 영웅소설을 읽었지요.” “영웅소설?” “예, 저도 읽을 만한 로맨스 소설이 다 떨어져서 몇 번 읽어봤는데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대부분 줄거리는 전형적이지만, 원래 영웅 스토리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보통 출생의 비밀을 가진 마법사나 검사가 주인공으로 나와 계곡에 떨어져 마법아이템을 얻거나 전대의 마법사를 만나 무공과 마법을 완성한 후 결국 대마법사나 소드 마스터가 되는 내용인데, 읽고 나면 속이 시원해지고 스트레스가 풀리지요. 허황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현실은 냉엄하고 가능성은 한정되어 있으니, 그런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을 위안받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좀 읽어봐야겠군.” “그럼 제가 필독도서목록을 적어 드리겠습니다. 물론 로맨스 소설까지 포함해서요. 제가 추천해드린 책을 다 읽으셔야 진정한 영웅소설, 로맨스 소설 독자라 자처할 수 있으니, 엉뚱한 책부터 읽지 마시고 절대로 제 추천목록에 따라 읽으셔야 합니다!” 으스스한 열정을 품고 강력하게 말하는 마스니의 모습에 카엔은 약간 질려서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테룬은 초조하고 불안했다. 렌을 만나면 모든 것이 다 풀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렌은 일 년 사이에 너무 변해버렸다. 슬픔 속에서도 밝은 미소를 짓던 렌의 모습은 사라져버렸다. 렌의 완강한 거절은 그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그러나 렌의 눈에 가득한 허무와 절망은 왠지 익숙했다. 어디서 보았을까? 왜 이렇게 낯익은 느낌이 나는 거지? 그러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건 바로 그의 어머니, 펠리시티 전 황후의 눈빛이었다. 분노와 탐욕으로 번득이는 두 눈동자 아래에 깊이 가라앉아 잘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그곳에 있던 허무와 절망. 그의 어머니는 모든 걸 다 가지고도 왜 그랬을까. 그리고 렌은 지금 왜 그런 눈빛을 하고 있을까. 렌이 저런 상태인 이상 그녀에게 그를 도와달라고 애원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테룬은 렌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고 싶었다. 티르안 공녀를 설득해서 타림 안딘 지위를 내놓게 하고, 렌을 제1황후로 책봉하리라. 막상 동제국 최고의 여인이 되고 나면 렌도 다소나마 기뻐하겠지. 티르안 공녀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테룬은 고민했다. 그녀는 정말 잘 해주었고 최선을 다해왔다. 이번의 승리는 사실 반 정도는 티르안 공녀와 그녀가 제공한 병력 덕분이었다. 특히 쿠드가 병석에 누운 상태에서 8서클 마법사 라우프가 없었다면 동제국이 패배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티르안 공녀는 냉정하고 사리분별을 할 줄 아는 여성이니 그가 합당한 대가를 제공하면 제1황후의 자리를 포기할 것이다. 아, 차라리 렌이 무언가 갖고 싶다고 요구했다면! 뭔가 해달라고 졸랐다면! 그게 뭐든 간에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렌의 소원을 들어주고 렌의 마음을 얻었을 것이다. 그는 지금 자신의 마음이 애타게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던 그 시절과 너무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사람을 시켜 티르안 공녀를 불러오게 해 그녀의 도착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티르안 공녀는 황제가 무슨 일로 자신을 부르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처음에 티르안 공녀는 렌의 소식을 황제에게 전해줌으로써 그의 마음을 사고, 나중에 렌이 발견되면 다른 수를 써서 제거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다가 동제국이 예상 외로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고 테룬 황제의 발언권이 크게 강화되자 그녀는 전략을 수정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목표는 완전하고 확실하게 프린다인 공국의 통치자가 되는 것이었다. 전쟁 전에는 하라스 계승법을 우회적으로 개정해서 제1황후로서 프린다인 공국의 섭정이 되는 것만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선책이었지만, 이제는 아예 여자가 대공위를 이을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는 것까지도 가능해졌다. 프린다인 공국은 이번 전쟁의 참전으로 이미 대공국 승격이 예정되어 있었다. 거기에 더해 카로딘 대공국으로부터 나오는 세입의 일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고, 제국 중앙행정조직이 아직 카로딘 대공국을 확실히 장악하기 전에 카로딘 대공국에 프린다인 공국의 세력을 침투시킬 수도 있게 되었다. 그녀가 프린다인 대공이 되기만 한다면 티르다인 대공국을 동제국에서 가장 강한 공국으로 키워낼 자신이 있었다. 엉망진창인 중앙정계에서 황제의 변덕과 아들의 출산 여부에 좌우되는 황후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보다는 대공이 되어 직접 자신의 대공국을 다스리는 것이 백 번 나았다. 렌이라는 소녀는 그와 같은 무리한 요구를 테룬 황제에게 할 수 있는 비장의 카드였다. 펠리시티 전 황후를 닮은 치료사 소녀라는 말에 처음 연상된 것은 요염한 미소를 띠며 치료를 핑계로 테룬의 온몸을 주무르는 음탕한 계집의 모습이었다. 정보부를 통해 동제국 황실의 어두운 가족사를 거의 속속들이 알고 있던 티르안 공녀로서는 어머니를 닮은 치료사 소녀에게 홀딱 빠진 테룬이 어느 정도 이해되었다. 거기에 생명의 일부까지 나눠 주었다니, 테룬이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모후를 꼭 닮은 소녀가 갑자기 테룬이 귀양 가 있던 흑성에 나타났다는 것부터가 아주 수상했다. 일단 다른 배후 세력은 없어 보였지만 펠리시티 황후를 닮은 소녀가 야심을 품고 흑성의 테룬에게 일부러 접근한 것일 수도 있다. 생명의 일부를 나눠주었다는 건 아마도 거짓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도박이라면 공녀 자신도 할 수 있었다. 치료사라는 최하층의 직업에서 단숨에 동제국의 황후로 뛰어오르는 일인데, 인생의 몇 년 정도가 대수인가. 방법을 알기만 하면 말이다. 아니면 서제국의 끄나풀일 가능성도 상당히 있었다. 테라미즈로가 끊임없이 서제국 황제와 엮인 것이라든지 지금도 서제국 황제의 추적을 받고 있다든지 하는 것은 어쩌면 서제국의 밀정이라는 점을 감추기 위한 역공작일 수도 있다. 애초부터 생명을 나눠주어 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서제국의 서진마법이 아니면 말이 되지 않는다. 어느 모로 보나 렌이라는 소녀가 아주 수상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거기에 아직 국혼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황제의 마음이 흔들리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다. 그래서 티르안 공녀는 렌에게 절대 아무런 빈틈도 보이지 않겠노라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마법진 호핑을 할 때에도 담요에 싸여 시녀의 부축을 받고 있던 렌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렌에게 꽃의 방을 배정한 것도 자신의 평판을 올리고 렌의 평판을 낮추기 위한 의도였다. 렌을 돌보기 위해 배정한 사스트란 백작부인 또한 돈과 권력에 넘어오기 쉬운 여자였다. 포석은 완벽했다. 테룬 황제가 자신에게 고마워하고 의지하고 있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다. 펠리시티 전 황후의 악행이 아직도 기억되고 있는 브림의 귀족사회에서 렌의 평판을 망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또 황제가 제1황후 자리를 굳이 렌에게 주고자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얻어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렌과 테룬 황제 생각을 할 때면 가슴에서 희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티르안 공녀는 애써 부정했다. 나는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동제국을 통틀어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여성이야. 난 강해.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얻을 거야. 내가 원하는 것은 권력이야. 티르안 공녀는 평정을 찾으려 안간힘을 썼다. 황제집무실 앞에 선 티르안 공녀는 겨우 평소 같은 유능하고 냉정한 태도를 회복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뺨에 홍조가 스치고 지나갔으나 그녀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다. “티르안입니다, 폐하.” 문 앞에 시립해 있던 시동이 즉시 들어가 공녀의 도착을 알렸다. “드시도록 해라.” 시동이 다시 달려와 인도하자 티르안 공녀는 당당한 태도로 황제 앞에 나섰다. “폐하, 티르안입니다.” “타림 안딘, 어서 오시오.” “폐하, 어인 일로 부르셨습니까?” 테룬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대에 대해서는 정말로 감사하고 있고. 그대가 아니었다면 지난 전쟁은 훨씬 힘겹게 진행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우리 파이브룬 제국이 패배했을지도 모르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정말로 그대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티르안 공녀는 테룬이 미루던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가슴이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을 말해보시오.” 티르안 공녀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는 프린다인 공국이 대공국으로 승격되기를 바라지 않소? 사흘 후 칙령에 의해 대공국 승격이 선포될 것이오.” “감사합니다.” “그리고 구 카로딘 대공국에서 나오는 조세수입 중 5퍼센트를 앞으로 15년 동안 프린다인 공국에 배분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내렸소. 아마 타림 안딘 그대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예, 저는 10년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15년이라니, 참으로 관대하신 조치에 감격했습니다.” “그리고 그대를 제1황후로 삼겠다는 약속 말인데...... .” 티르안은 심장이 식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대가 제1황후가 되기를 원한 건 프린다인 공국의 섭정공 자격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소? 그런데 지금 신하들과 귀족들과 내게 파이브룬 제국의 중건자라는 칭호를 헌정한다고 하오. 그다지 큰 실제적인 의미는 없는 것이지만, 중건자라는 것은 적어도 국조 하라스 대제와 동급이라는 것이니, 내가 전권으로 조법(祖法)을 개정한다 해도 다소의 반발은 있을지언정 귀족들이 막무가내로 반대하지는 못할 것이오. 나는 그대의 본래 뜻에 따라 하라스 계승법을 개정하여 아예 그대가 현 프린다인 공 사망 이후 바로 대공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오. 복잡한 예외규정을 만드는 형식이 되겠지만, 적어도 그대 자신의 대공위 계승은 확실하게 못 박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그대는 더 이상 굳이 제1황후가 될 필요가 없게 되오. 그대도 알겠지만, 황제가 건재하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한 제1황후는 그다지 큰 권력을 갖고 있지 못하오. 오히려 대공의 권력이 훨씬 크지. 게다가 그대도 처녀로서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결혼이나 사랑을 포기하는 것은 가능한 한 피하고 싶을 테니, 제1황후보다는 프린다인 대공 쪽이 낫지 않겠소?“ “그 말씀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께서 제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좀 더 확실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티르안은 날카롭게 물었다. 테룬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렌에게 제1황후 자리를 주고 싶소.” 예상했던 말이었으나 뜻밖의 충격이 티르안을 덮쳤다. 그녀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물었다. “폐하께서는 이미 제게 제1황후 자리를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테룬은 미안해하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보다 더한 보상을 해주면 되지 않겠소. 그대가 원하는 건 프린다인 공국의 통치권이지 제1황후 자리가 아니지 않소? 만약에 그대가 동의해주기만 한다면, 카로딘 대공국의 조세 중 7퍼센트를 20년간 프린다인 공국에 할당하는 것으로 해줄 수도 있소.” “폐하, 폐하께서는 제가 무얼 원하는지 어떻게 아십니까? 제가 보기에 폐하께서는 그 렌이라는 아가씨가 무얼 원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계신 것 같은데요.” 티르안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렇다면 제1황후가 되고 싶단 말이오? 왜?“ 티르안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당초의 약속이니까요! 약속은 신성한 것이니까요! 저는 절대 양보할 수 없습니다! 저를 이미 타림 안딘으로 책봉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제가 반역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절 타림 안딘 자리에서 내쫓으실 방법은 없으실 텐데요.” “그대가 제1황후가 되더라도 허울뿐일 텐데, 그런 허울뿐인 결혼 생활이 사람을 얼마나 불행하게 하는지 그대는 모른단 말이오? 나는 그런 모습을 지겹도록 보았소! 우리 동제국 황실에 생긴 비극을 그대도 알지 않소.” “위정자에게 개인적인 가정생활의 불행 같은 건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제 부모님도 불행하셨고 저도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겠다는 기대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저는 제 공국과 동제국에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길을 갈 뿐입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약속을 지켜주십시오.” 티르안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내뱉듯이 말했다. “그대에게 그 약속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이 있소? 나는 황제요.” “귀족들은 모두 제 편입니다. 여론도 제 편입니다. 아실 텐데요.” “다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폐하께서야말로.” 티르안은 우아하게 절하고 황제집무실을 나왔다. 그러나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4장 사랑의 여러 얼굴 공녀는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다. 맙소사! 맙소사! 이런 일이 생기다니! 나는 테룬 황제를 사랑하고 있었어! 절대로 사랑 따위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그렇게 맹세했는데! 사랑이 모든 걸 망치는 걸 그렇게 치를 떨며 지켜봐왔는데! 지금 사랑 같은 사치스런 짓을 할 여유라고는 없는데! 공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의 아버지인 현 프린다인 공은 공자이던 젊은 시절 이웃 영지인 볼레브 백작령의 백작 영애인 그녀의 어머니와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어리석은 일이었다. 프린다인 공의 지위라든가 처한 입장을 고려하면 그는 매긴 가와 같은 무가의 딸이나 중앙귀족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세력을 강화해야 했다. 프린다인 공국과 붙어 있는 백작가 따위는 위협이 될지언정 보탬은 될 수 없었다. 그래도 사랑의 열정에 불타던 그는 아버지인 전대 대공을 졸라 결혼에 성공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전대 대공이 죽자 프린다인 공국을 이어받았다. 유약한 아버지에 비해 어머니는 권력욕에 불타는 욕심 많은 여자였다. 그녀는 맏딸인 티르안 공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글쎄, 잠시 사랑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동생인 티론 공자가 태어나자 공비로써의 지위에 보탬이 되지 않는 딸보다는 아들에게 모든 사랑을 쏟아 부었다. 병석에 누워 골골하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맏딸을 가엾게 여겼으나, 그것만으로는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는 공녀의 마음을 달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병석에 누운 아버지를 대신하여 공국의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어머니의 오빠, 그러니까 공녀의 외삼촌인 볼레브 백작은 자신의 영지보다 프린다인 공국에 머무는 날이 더 많았다. 어린 동생 티론은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지도 모른 채 병든 아버지보다는 자신에게 한없이 잘해주는 어머니와 외삼촌만을 따랐고, 티르안 공녀는 모두의 관심에서 소외된 채 고독하게 컸다. 공녀는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조용히 권력의 씨줄과 날줄을 헤아리는 법을 배웠다. 어머니와 외삼촌의 심복을 제외한 다른 신하들과 친해지고 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노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는 아무 선택권 없이 적당한 귀족에게로 팔려가듯 시집보내지고, 공국은 볼레브 백작가의 손에서 좌지우지될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카로딘 대공국에 완전히 삼켜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믿을 것은 무섭도록 총명한 그녀의 머리밖에 없었다. 그녀가 8서클 마법사 라우프의 신임을 얻게 되었을 때 마침내 전기가 왔다. 라우프는 프린다인 공국에서 최고의 중신이었으나 당장 공비와 볼레브 백작파에 가담하지는 않은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도 어차피 언젠가는 티론 공자가 공작위를 물려받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이상 공비와 반목하지는 않았다. 그저 프린다인 공이 죽기 전까지 표나게 공비 측에 붙는 것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티르안 공녀는 열여덟 살 무렵 어느 날, 라우프와 약속을 잡아 담판을 했다. “라우프님, 지금 공국의 정세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라우프는 평소 눈에 띄지 않든 공녀가 대놓고 묻자 크게 놀랐다. “글쎄요. 별 문제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대체 무엇을 물으시는지...... . 혹시 언제 시집가시게 되는지 궁금하셔서 물으시는 거 아닙니까?” 라우프는 가벼운 농담으로 질문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넘어가지 않았다. “대답하기 싫으시다면 제가 답하겠습니다.” 라우프님, 제 어머니와 외삼촌이 우리 공국의 권력을 거의 다 장악하셨다는 건 라우프님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제 어머니께서는 사실 권력욕은 많으시나 구체적으로 무얼 어찌 해야 할지는 잘 모르시는 분이시죠. 그러니 실제로 우리 공국을 좌우하는 건 외삼촌 볼레브 백작님이시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라오프는 직설적인 공녀의 말에 당혹감을 감추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볼레브 백작가가 카로딘 대공국과 몇 년 전부터 물밑으로 접촉해오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알고 계시겠지요?” “예, 알고 있습니다. 공녀님께서야말로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게 되셨는지요?” “저도 아는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 카로딘 대공국의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십니까? 일드인 삼공자가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 후 카로딘 대공국 전체가 급속도로 군국주의화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아십니까?” “예.” “한 달 전 동제국 수도 브림에서 펠리시티 황후의 제1황후 독살 사건이 일어나 펠리시티 황후와 그 아들 테룬 황자가 처형당한 것도 물론 알고 계시겠지요? 자, 장기판의 말은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도 알고 계시겠군요.” 공녀의 질문에 라우프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공녀에게서 보이는 은은한 위엄에 압도당했다. “공녀님께서 말씀해주십시오.” “예, 라우프님을 믿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조만간, 그러니까 1,2년 내에 카로딘 대공국과 파이브룬 제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아마 지금 병석에 누운 하라스 4세 폐하의 승하가 계기가 되겠지요.” 라우프는 크게 놀랐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명 드리지요. 지금 사실상 카로딘 대공국의 정권을 장악한 일드인 공자는 무척 야심 많은 자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비축해놓은 군비는 절대 카로딘의 자체 방위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마법사며 병사들이며, 라우프님께서도 잘 아시겠지요. 그리고 그는 최근 들어 더 한층 군비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그런 한편, 동제국은 지금 지리멸렬입니다. 테룬 황자가 제거되었으니 아제룬 황태자가 당연히 제위를 계승하리라고들 생각하겠지만, 결코 쉽지는 않을 겁니다. 테룬 황자에 대한 온 국민의 사랑과 신망이 워낙 두텁고, 아제룬 황태자에게는 엄청난 약점이 있으니까요.“ 그 약점이라는 건 펠리시티 황후의 처형을 담당한 아제룬 황태자가 그녀를 죽이지 않고 빼돌렸다는 것이었다. 공녀가 담판을 결심한 것도 그 정보를 얻고 나서였다. “그게 무엇입니까?” “당장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언제라도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날 수 있는 엄청난 약점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그러니 만약에 테룬 황자가 잃어버린 무공을 회복한다면 황제 자리를 놓고 형제간에 내전이 벌어질 겁니다. 혹시 테룬 황자가 무공을 영영 잃어버린 채 그냥 죽는다 하더라도 아제룬 황태자가 황제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카로딘이 동제국을 침공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는 셈입니다.” 라우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 상황에서 우리 프린다인 공국이 취할 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동제국에 협력하는 것, 또 하나는 카로딘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지금 ? 뭬튼〈?상황대로 우리는 아마도 카로딘 쪽에 서겠지요.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일드인 공자는 처음에는 감언이설로 온갖 것을 약속하겠죠. 그러다가 동제국에 대해 확실한 승리를 거두고 나면, 우리 공국쯤은 한입에 먹어치울 수 있는 후식 정도로 여기겠죠. 프린다인 공국은 카로딘에 합병되어 영영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반면, 만약에 우리가 동제국에 선다면 어떨까요? 저울추는 흔들리겠죠. 제가 보기엔 아제룬 황태자가 동제국의 제위를 계승한다면 동제국에 어차피 승산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테룬 황자가 차기 황제가 된다면 동제국의 승률은 다소 높아집니다. 그때 우리 프린다인 공국이 동제국의 손을 들어준다면, 결국 동제국에게 승리가 찾아올 것이고, 프린다인 공국은 엄청난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라우프는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탁월한 분석이십니다.” 공녀는 차가운 미소를 띠며 다시 덧붙였다. “이제는 라우프님 개인의 이익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 공국이 카로딘 대공국의 편을 들어서 카로딘 대공국이 승리했다고 치지요. 그래서 카로딘 대공국이 황제의 관, 혹은 최소한 동대륙 여러 제후국의 맹주 자리를 획득했다고 가정하지요. 그 경우, 결국 우리 공국의 세력은 몹시 약해져서 라우프님께 8서클 마법사에 걸맞은 대우를 해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라우프님께서는 지위에 맞는 대우를 해줄 다른 나라를 찾아보셔야 할 테고요. 그때가 되면 라우프님께서 가실 곳은 카로딘 대공국밖에 없는데, 그곳에는 이미 8서클 마법사 베오인과 올리오인이 있습니다. 그러니 라우프님께서는 뒤늦게 가신다 해도 서열 3위 대접밖에 못 받으실 겁니다. 반면 우리 공국이 동제국의 편을 들어 동제국이 승리했다고 치죠. 동제국의 8서클 마법사는 쿠드 한 명뿐인데, 그는 이미 상당히 노쇠한 상태입니다. 우리 공국과 동제국이 연합군으로 싸운다면 전후 라우프님께서 동제국 황실로 옮기시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테고, 그렇게 되면 라우프님은 동제국 전체를 아우르는 최고의 마법사가 되시는 겁니다.“ 라우프는 티르안 공녀가 그려주는 미래의 모습을 들으며 눈에 띄게 동요했다. 공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자, 라우프님, 어느 길을 택하고 싶으십니까?” 라우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 “프린다인 공 전하께서는 아직까지도 공비 마마와 처남 볼레브 백작님을 지지하고 계신데,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공녀는 이제 거의 성공했다는 것을 알고 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이걸 보십시오.” 라우프는 유리병 안에 담긴 회색 가루를 받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연금술사에게 그게 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비소라더군요.” 라우프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유리병을 떨어뜨릴 뻔했다. “제 어머니께서는 그걸 연금술사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지은 마법약이라고 하시면서 제 아버지께 장기간에 걸쳐 매끼마다 드렸습니다. 라우프님께서 연금술이나 마법약에 대해 얼마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비소 중독의 증상은 피부가 거칠어지고 식욕이 떨어지고, 머리카락이 쉽게 끊어지고, 손바닥과 발바닥 부분의 피부가 두터워지고, 피부에 백색 가로무늬가 나타나는 거랍니다.” 라우프는 탄식했다. “프린다인 공 전하의 증상이로군요.” “라우프님께서 제 편에 서주신다면 저는 이걸 아버지께 보이고 아버지의 마음을 돌린 후 제 세력, 아버지의 잔존세력, 라우프님의 세력을 모두 모아 일시에 어머니와 볼레브 외삼촌의 세력을 공격 하겠습니다. 그럼 승산이 있습니다. 만약 라우프님께서 제 편에 서주시지 않는다면, 글쎄요, 그렇다면 저는 이 비소병을 부수고 시집이나 가야겠지요.” 라우프는 꼬박 하루를 고민한 후 결국 공녀에게 가담했다. 그 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내의 배신에 분노하고 무기력해진 아버지를 대신해 티르안 공녀는 어머니와 볼레브 외삼촌의 세력을 축출했다. 볼레브 외삼촌은 자기 영지로 돌아가 버려 결국 처단하지 못했지만 어머니가 티론을 끼고 도망가려는 건 그 직전에 붙잡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즉시 티론과 함께 연금에 처해졌다. 그러나 위험은 상존했다. 원래 약한데다 비소 중독으로 몸을 완전히 망친 프린다인 공이 사망하고 나면 공작위는 티론에게 가는데, 그가 어린 이상 법적으로 최근친 성년남자인 볼레브 외삼촌이 섭정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티르안 공녀가 쏟아 부은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생각보다 오래 버텨주고 있었다. 아내에게 배신당한 분노가 오기로 변해 아버지를 지탱해주었다. 가엾은 아버지, 어리석은 아버지. 그래서 그녀는 절대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런데 그렇게 조심했건만, 하필이면 이렇게 중대한 때에 사랑에 빠지다니! 왜 테룬을 사랑하게 되었? 뺑? 대답은 간단했다. 테룬 황제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로 어머니에게서 사랑받지 못한 버림받은 아이의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로 상처를 지니고 있었다. 그 또한 그녀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 불행했다. 같은 종류의 상처를 지닌 사람을 만났다는 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위안이었다. 서로의 상처를 나누고 위로하며 그렇게 함께 지내고 싶다는 소망이 그녀 안에서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자라났다.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주고 싶어졌다. 티르안 공녀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치를 떨었다. 언제나 덜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권력을 갖고, 더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한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 테룬 황제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그녀만이 테룬 황제를 사랑하는 이상 프린다인 공국의 위상과 그녀의 지위를 놓고 밀고 당기는 협상이 제대로 될 리 없다. 아까만 해도 그렇다. 허울뿐인 제1황후보다는 실세인 여자 대공이 되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은가. 렌이 있는 이상 자신이 제1황후가 된다 해도 펠리시티 전 황후에게 휘둘린 전대 제1황후 꼴이 될 것이 뻔하지 않은가. 그래도 황제가 렌을 언급하는 순간 그녀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불끈 질투심이 일어나며 다른 모든 생각을 눌렀다. 티르안은 한숨을 쉬며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맙소사, 나는 그를 사랑해. 그녀는 자신의 방에서 불을 끈 채 아무도 들이지 못하게 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생각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눈앞에서 계속 테룬의 모습만이 어른거렸다. 그의 검은 눈동자, 윤곽이 뚜렷한 얼굴, 국정을 살필 때의 그 결연한 태도. 아아, 그가 차라리 머리 비고 칼만 휘두를 줄 아는 멍청이였다면 내가 이렇게 사랑에 빠지지도 않았을 텐데! 그러나 테룬은 지혜로웠다. 이따금씩 과거의 상처에 휘둘릴 때도 있었으나, 그는 현명하게도 자신의 짐을 신하들과 나눌 줄 알았고, 신하들 뒤로 한걸음 물러서서 젊은 신하들을 키워주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공녀는 가슴이 뛰었다. 모든 것을 스스로 장악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에게 테룬의 그런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테룬의 통치방식을 흉내내게 되었다. 다른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테룬의 장점만 떠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티르안 공녀는 실소했다. 내가 이 사랑의 마음을 떨쳐버릴 수 있을까? 아냐, 불가능해. 절대 죽어도 안 될거야. 티르안은 마침내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하는 어리석은 짓을 왜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독점하고 자기 것으로 하고 싶은 열망은 너무나 강렬한 것이어서, 다른 모든 것은 그에 비하면 한 점 의미도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벌떡 일어나서 방 안을 맴돌던 티르안은 마음을 정했다. 렌이라는 소녀가 어떤 계집인지부터 알아야겠어. 그 다음에 행동을 결정하겠어. 공녀는 몸을 일으켜 렌의 방으로 향했다. 바리던 후작부인이 공녀의 뒤를 따랐다. 꽃의 방 옆 부속실에서 심심한 듯 연애소설을 넘기고 있던 사스트란 백작부인은 공녀를 보자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타림 안딘 마마!” “렌이라는 소녀는 지금 방 안에 있나요?” “예, 마마.” 공녀는 바리던 후작부인과 함께 꽃의 방으로 들어갔다. 사스트란 백작부인도 황급히 따랐다. 네 기둥이 달린 커다란 침대 한가운데에 누워 있는 렌은 이불에 쌓여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공녀가 들어오자 렌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티르안 공녀는 새삼 관심을 가지고 렌의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 보았다. 전에 힐끗 보기는 했지만 다시 보아도 역시 펠리시티 전 황후와 거의 흡사했다. 그러나 펠리시티 전 황후와 같은 요기는 감돌지 않았다. “그냥 누워 있어도 된다. 나는 타림 안딘이자 프린다인 공국의 공녀인 티르안 데 프린다인이다. 렌이라고 했지? 마법진 이동 때 보기는 했지만, 그때는 그대의 몸이 너무 안 좋아 보여 말을 걸지 못했다. 몸은 괜찮은가?” 공녀는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처음부터 하대를 했다. 단아하고 한곳 빈틈없는 공녀의 태도는 누가 보더라도 완벽하고 법도에 맞았다. 궁중에서 닳고 닳은 바리던 후작부인과 사스트란 백작부인도 공녀를 감탄하는 눈길로 바라볼 정도였다. 타림 안딘으로서 꽃의 방을 천한 계집에게 내어주시고 병문안까지 하시다니 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신가. 시녀들은 그러다가 렌에게로 눈을 돌리자 자기도 모르게 새삼 부르르 떨었다. 이미 죽은 펠리시티 전 황후와 너무 닮은 모습이 불길하게 여겨진 것이다. 렌은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 동제국에서의 타림 안딘이라는 게 일종의 예비 황후라는 건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타림 안딘 마마를 뵈옵니다. 염려해주신 덕분에 몸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너그럽게도 이방에 머물게 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저는 이런 좋은 방이 오히려 불편합니다. 아무 작은 방 에라도 옮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티르안 공녀는 공손한 렌의 말이 오히려 맘에 들지 않았다. “내가 듣자니 너는 황제 폐하께서 아직 흑성에 유폐되어 계시던 때 목숨의 일부를 희생해서 그분의 생명을 구했다면서?” 그녀의 말투는 의혹에 차 있었다. “예, 저는 치료사였습니다. 제 치료가 아니라면 폐하께서는 도저히 회복하실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목숨의 일부를 희생하는 치료술을 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저는 그때 폐하께서 발견하시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바닷가에서 얼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한 일은 생명을 구해주신 은혜를 갚기 위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렌은 아득한 기억을 더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목숨의 일부를 희생했다는 것이 정말인가?” 티르안 공녀는 약간 흥분하여 다그치듯 물었다. “예.” “증거가 있는가?” “증거 따위 없습니다. 입증할 생각도 없습니다.” 렌은 조용히 대답했다. “제1황후가 되고 싶은가? 테룬 황제 폐하의 신부가 되고 싶은가?” 티르안의 목소리에는 자기도 모르게 독기가 섞였다. 렌은 허무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티르안 공녀는 자신의 마음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렌의 눈동자를 피하려했다. 그러나 피할 수 없었다. “가엾게도......” 렌은 한마디 내뱉은 후 갑자기 두 줄기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티르안 공녀의 눈 속에 가득한 상처를 고스란히 다 보았다. 왜 세상에는 상처 입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걸까. 왜 이렇게 사람들이 지닌 상처가 잘 보일까. 몸의 상처를 고칠 힘이 없어지자 마음의 상처들이 더 잘 보이게 되는 걸까. 내 마음의 상처가 더 커져서 남의 상처까지 더 잘 보이는 걸까. 공녀는 부르르 떨었다. “무슨 소리냐?” “죄송합니다. 몸이 아프니까 마음이 약해져서...... .” 티르안 공녀는 시녀들에게 눈짓했다. 시녀들은 조용히 방을 나갔다. 티르안 공녀는 언성을 높여 다시 물었다. “무슨 소리냐니까!” 렌은 대답하지 못하고 힘겨워하며 계속 흐느꼈다. 그러다 힘없이 침대 위로 다시 쓰러졌다. 티르안 공녀는 렌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렌은 겨우 입을 열었다. “가엾은 분. 그렇게 많은 상처를 짊어지고 있다니. 보상받을 수도 없을 텐데.” “무슨 소리냐!” “테룬 황제 폐하는 누군가를 사랑하기에는 너무 상처가 많으신 분입니다. 마마의 폐하에 대한 사랑은 아무 반향 없이, 보답 없이 허비될 겁니다. 마마의 상처와 불행 또한 더 깊어질 겁니다.” 동정심에 가득 차서 렌은 말했다. “그런 걸 네가 어떻게 안단 말이냐!” 렌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보여요.” 렌은 문득 생각났다. 원래 그녀가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마음의 상처를 쉽게 감지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예민해진 건 죽음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죽어가는 사람 특유의 직감이 아닐까. 티르안 공녀는 이성을 잃었다. 렌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마구 뒤흔들었다. “나는 불행하지 않아! 나는 사랑 따위에 지지 않아! 나한테는 상처 따위는 없어!” 렌은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괴로워졌다. “한 번만 더 그런 소릴 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더러운 계집! 너는 절대 황후가 되지 못할 거야!” 그때 데이그랜이 들어왔다. “공녀님, 무슨 짓입니까!” 그는 황급히 공녀에게서 렌을 떼어놓았다. 공녀는 겨우 이성을 차렸다. “라, 라비언님, 추태를 보여 죄송합니다.” 공녀는 더듬거리며 사과하고는 렌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부리나케 나가버렸다. 데이그랜은 조심스럽게 렌을 부축하여 눈물을 닦아주었다. 렌은 몸이 힘들어 잠시 숨을 헐떡거렸다. “무슨 일입니까?” “아무 일도 아니에요.” “렌, 말해주십시오. 테룬 녀석한테 이야기할까요? 공녀가 괴롭히는 거 맞죠?” 렌은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공녀의 눈에서 본 상처는 아직도 생생했다.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이 황궁의 주인들은 어쩜 이리 슬프고 상처투성이인 가엾은 영혼들인지...... .” 말하다 말고 렌은 피식 웃었다. “데이그랜님이 절 걱정해주시다니, 이거야말로 고양이가 쥐 생각하는 격이군요.” 데이그랜도 따라 웃었다. “상처투성이인 가엾은 영혼들이라니, 무슨 상처를 말하는 겁니까?” “테룬 황제며 티르안 공녀며 하나같이 사랑받지 못한 아이의 눈을 하고 있어요. 고통에 차고, 늘 뭔가에 쫓기고, 늘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그런 눈이요. 그거 아세요? 사랑받지 못한 아이는 스스로 살아나가야 해요. 그렇게 기를 쓰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면서 사랑받고 자란 아이보다 강해질 때도 있지만, 홀로 강해진다는 건 그만큼 많은 상처를 입는다는 말이에요. 상처가 나아도 흉터는 남듯, 고통을 이겨내도 늘 행복해지는 건 아니죠. 제가 보기 에는 테룬 황제의 상처가 티르안 공녀의 상처보다 더 깊은 것 같아요. 공녀에게는 최소한 테룬 황제를 사랑할 힘이 아직 남아 있지만, 테룬 황제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것 같으니까요.“ 렌은 가슴 아파하며 말했다. “공녀가 황제를 사랑한다고요? 그 시체같이 냉정한 공녀가? 그래서 당신을 괴롭힌 겁니까?” “아마도요.” 데이그랜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푸념했다. “나는 인간들의 지저분한 욕망이나 어리석음까지는 이해할 수 있어도, 그 바보 같은 사랑놀음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죽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그래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걸 예로 들죠. 렌 그대처럼요. 그렇게 한다 해서 렌 그대에게 무슨 득이 있습니까? 그대가 후손을 남기는 데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고, 도무지 뭐 얻는 게 없지 않습니까. 우리 드래곤에게는 사랑 같은 어리석은 감정 따위는 없어요.” “오, 인간들 또한 사랑이 뭔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랍니다. 사랑의 행복, 사랑의 고통, 다 한없는 수수께끼지요. 어떤 사람은 사랑이 그저 번식의 도구라고 하지요. 어떤 사람은 불멸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게 다 진실일 수도 있을 테지요.” 렌은 나직하게 말했다. 갑자기 카엔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말끝에 울먹임이 묻어나왔다. 그래도 렌은 애써 참았다. 이미 돌아갈 길은 자신이 다 차단했으니, 갑자기 카엔이 보고 싶은 마음이 치솟더라도 그에게 달려가 죽음의 고통을 함께 맛보게 할 일은 없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데이그랜을 향해 렌은 한 번 미소지어주었다. 데이그랜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마음이 편해졌다. 그것은 그가 렌에 대해 아무 복잡한 감정 없이 그저 필요와 호기심만을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감정의 얽힘이 없는 이종족과의 교류는 지금 복잡한 감정과 허무감에 휩싸여 서서히 죽어가는 렌에게 딱 적당한 소일거리였다. 데이그랜 또한 렌과의 대화가 즐거웠다. 드래곤의 멸망을 기다리면서 달리 할 일도 없고 해서 시작한 대화였으나, 이야기를 계속 할수록 렌의 지식을 접하는 것이 큰 기쁨이 되었다. 지혜의 드래곤답게 그는 새로운 것을 아는 데에서 보람을 느꼈는데, 렌이 지닌 지식은 그의 지식의 범주를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글쎄, 어쩌면 인간들은 사랑이라든지 꿈이라든지 종교라든지 그 밖의 비합리적인 온갖 것들 덕분에 우리 드래곤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뜻밖의 통찰력이 담긴 데이그랜의 지적에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요.” “왜 공녀에게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으니 건드리지 말라고 하지 않는 겁니까?” “저는 병이 있는 게 아니라 생명력을 소진하고 쇠잔해져서 시들어가는 것뿐인데, 공녀가 믿겠어요? 그저 자신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겠죠. 그리고 제 스스로의 죽음을 담보로 자비를 구걸하는 건 내키지 않아요.” 그녀는 힘겹게 말했다. 렌이 부쩍 피곤해하는 걸 본 데이그랜은 불을 꺼주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는 그 길로 테룬 황제를 찾아갔다. “폐하, 다른 신하들을 모두 물려주셨으면 합니다.” 테룬이 손짓하자, 보고 중이던 대신 한 명과 하급관리 세 명, 시동 두 명은 즉시 물러갔다. “데이그랜님, 무슨 일이십니까?” “음, 테룬, 너 공녀가 렌을 괴롭혔다는 걸 알고 있나?” 테룬은 깜짝 놀랐다. “공녀가 렌을 괴롭혔다고요?” “그래, 조금 전에 찾아와서 렌을 붙잡고 흔들면서 너는 절대로 제1황후가 될 수 없을 거라면서 욕설을 퍼부었어. 아, 그리고 여기저기 굴러먹다 나타난 더러운 걸레 같은 계집년이라고 했어. 머리채도 붙잡고서 목이 빠져라 마구 흔들고, 내가 제때 들어가지 않았다면 손톱으로 얼굴을 다 긁어놓을 기세더군. 못되기도 하지.” 데이그랜은 이것저것 상당히 과장해서 고자질하며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어쩔 작정이야?” 테룬은 얼굴 표정을 굳혔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엄중히 경고하지요.” “그래, 그리고 결계 말인데.” 데이그랜은 차가운 눈으로 테룬을 보며 말했다. “감히 내 통과마법표를 취소했더군. 내가 이곳의 결계를 깨지 못하리라 보나?” 테룬은 당황해서 즉시 변명했다. “아, 그건, 렌이 데이그랜님을 따라 여길 떠나고 싶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갑자기 그녀가 떠나버릴까 봐서요. 죄송합니다. 흑룡께서 홀로 떠나신다면 언제라도 결계를 열어드리겠습니다.” 만약 렌이 정상적인 몸이었다면 데이그랜은 대판 싸워서라도 결계를 깨고 남대륙으로 렌을 데려갈 테지만, 지금 그렇게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테룬, 너 여자의 마음은 제대로 아는 거야? 그런 식으로 여자를 묶어놓기만 한다고 일이 잘 될 것 같아? 멋있는 남자는 여자한테 강요해서는 안 되는 법이라구. 언제까지 그렇게 붙잡아놓을 수 있겠어?” 데이그랜은 어설프게 충고했다. 테룬은 우울하게 ? 遊鄂杉? “저도 잘 압니다. 일단은 한 달 후 있을 이노스 신 축제 때까지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때까지는 어떻게는 렌의 마음을 돌려놓겠습니다.” “안 돌려놔지면? 렌이 계속 널 싫다고 하면 어쩔 건데?” 테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무작정 계속 거절하지는 않을 겁니다! 자기 목숨까지도 나눠주었는데! 저를 끝까지 거부하지는 않을 겁니다! 절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절 버리지 않을 겁니다!” 테룬이 부들부들 떨며 폭발하려는 걸 본 데이그랜은 가벼운 냉각마법을 테룬에게 쏘았다. 한기가 몸을 스쳐가자 테룬은 움찔하며 겨우 진정했다. “죄송합니다.” 테룬은 자신의 마음이 점점 불안해지는 걸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 죄송해야지. 그 공녀가 어떻게 해봐. 오늘 와서 렌을 괴롭히는 거 보니 앞으로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예.” 데이그랜이 나가고 나자 테룬은 털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공녀에 대한 원망이 솟구쳤다. 혹시 공녀가 협박해서 렌이 자기를 거절하는 건 아닌가. 공녀의 성격과 사람됨이라면 그렇게 제1황후 자리를 고집하는 것도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일 것이다. 그렇지만 감히 공녀가 렌과 자신 사이를 방해하는 건 용납하지 않으리라. 공녀는 다음날 테룬의 호출이 있자 올 것이 왔다는 걸 알았다. 테룬은 화를 겨우 참고 있는 표정으로 차갑게 입을 열었다. “타림 안딘, 대체 렌을 공격한 이유가 뭐요?” “예?” “렌에게 욕설을 퍼붓고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다면서? 렌의 얼굴도 손톱으로 할퀴려 했다면서?” “예?” “어떻게 아픈 사람에게 그럴 수가 있소?” 공녀는 말문이 막힌 채 테룬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대가 권력을 원한다는 것은 나도 익히 알고 있었소. 그래서 나는 그대에게 그걸 충족시킬 조건을 제시했던 것이오. 제1황후 자리를 왜 그렇게 고집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제1황후 자리를 이용해서 다른 음모를 꾸민다든가 그 권력욕으로 동제국 황실을 어지럽힐 생각을 한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오.” “폐하!” 공녀는 머릿속이 하얗게 될 정도로 분노해 외쳤다. “나는 그대가 절대로 이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렌에게 가서 그런 짓을 한 것도 무슨 속셈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아오. 원래 어려움은 함께할 수 있어도 성공을 함께 나누기는 어려운법. 카로딘 대공국을 무찌를 때까지만 해도 그대와 내 이익은 완벽하게 일치했지만, 이제 과실을 수확할 때가 되니 그대와 나의 길은 달라지고 있는 것 같소. 이해하오. 당연한 거니까. 하지만 그대가 그대의 목표를 추구하고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렌을 이용하거나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건 용납하지 않겠소.“ 공녀는 어떻게 방까지 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는 분노와 억울함에 부들부들 떨었다. 독 같은 질투심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어떻게 그가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어떻게! 미움은 어느새 테룬보다는 렌에게로 향했다. 공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전날 본 대로 렌은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렌이라는 그 계집은 뭔가 이상했다. 그 시선, 마음을 파고드는 그 말들, 그리고 그 눈물! 렌이 얼굴만 믿고 테룬 황제를 홀리는 그런 요녀가 아니기 때문에 더 위험했다. 공녀는 렌이 자신만큼이나 총명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총명하고,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의연하고, 거기에 테룬 황제의 마음을 얽어매고 있는 전 황후와 닮은 얼굴. 절대로 정상적인 수단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세상을 얻은들 테룬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일까. 공녀는 자신의 마음이 이미 정해진 걸 알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프린다인 대공국을 어떻게 차지하느냐, 지금 상황을 어떻게 유리하게 이용하느냐 등등의 계산은 전부 날아가 버렸다. 대신 공녀의 계산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테룬을 독점할 수 있느냐로 향했다. 공녀는 스스로를 정당화시켰다. 테룬이 일시적인 감정에 휩싸여 렌을 제1황후로 맞이하는 것은 펠리시티 전 황후의 악몽을 깨우는 일일 뿐이다. 그녀가 그를 위해 어떻게든 나서서 렌을 제1황후로 삼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래, 이건 그를 위한 일이야. “수상 각하.” “오,타림 안딘 마마, 어찌 여기까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수상 샤이트는 황급히 집무실 내의 사람들을 물리쳤다. “지금 황궁에 들어온 렌이라는 소녀 말입니다.” “예.” 샤이트는 혹시라도 티르안 공녀가 제1황후 자리를 포기하는 대신 다른 조건을 내걸까봐 긴장했다. “우리 제국의 안위를 위해서는 그녀를 제거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보입니다.” 샤이트는 일단 안심했다. 그러나 공녀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제국의 안위라니요?” “수상 각하께서도 들으셨겠죠? 서제국 황제가 테룬 황제 폐하를 공격했다는 소식 말입니다. 지? 鳧?당장 안전한 황궁에 계시니 급한 불은 끈 셈이지만, 화근을 제거하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다시 서제국 황제의 공세가 펼쳐질지 모릅니다. 여자애 하나 때문에 양 제국에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얼마나 큰 비극이 벌어질지 수상 각하께서도 잘 아시겠지요. 우리 동제국은 절대 서제국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가 믿는 서제국 황제가 그동안 실컷 데리고 놀던 계집 하나 때문에 전쟁을 일으킬 리 없다는 것뿐인데, 서제국 황제는 한 번 성질이 폭발하자 수만명의 말틴 시민을 한 순간에 없애버린 자입니다. 사실 이미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지요. 그러니 화내기 전에 한시바삐 그에게 렌을 돌려주는 게 상책입니다.“ 샤이트는 탐색하는 눈길로 공녀를 응시했다. “저는 사실 타림 안딘 마마께서 여자도 대공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하라스 계승법을 개정해달라는 조건으로 제1황후 자리를 포기하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 렌님을 서제국에 넘기자는 건 제1황후 자리를 고수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예.” “왜 그리하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생각하시지요.” 샤이트는 재빨리 머릿속에서 몇 가지 가정을 해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혹시 공녀가 황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라도 그거라면 동제국에는 크나 큰 이익이 되는 셈이었다. “솔직히 털어놓겠습니다. 타림 안딘 마마, 저는 마마께서 제1황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마께선 현명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곳에 대한 충성심이 남다르신 분이시지요. 면전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쑥스럽지만, 마마께서는 정말 황후로서 손색이 없으신 분입니다. 마마의 뒤에는 프린다인 대공국이 버티고 있기도 하고요. 마마의 제1황후 즉위와 함께 동제국의 중앙집권화는 더욱 가속될 것이고, 아마 한두 세대만 지나고 나면 파이브룬 제국은 서제국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통일된 중앙집권제국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과실은 우리 제국과 프린다인 대공국이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날을 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러니 마마의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저는 제1황후 책봉 문제나 렌님의 처리 문제에 관해서는 전폭적으로 마마를 후원해드리겠습니다.“ 티르안 공녀는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역시 샤이트 수상은 테룬 황제의 바람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어리석은 신하는 아니었다. “원래 저는 엘프 마법사 라비언이 렌을 제거하는 걸 도와주지 않을까 했는데 그는 오히려 렌의 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제가 직접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여기 동제국 브림에서 활동 중인 서제국의 첩자 중 동제국의 이중첩자나 신분이 알려진 자가 있습니까?” “예, 몇 명 있습니다.” “그중 제일 거물을 알려주십시오. 제가 직접 교섭하겠습니다. 충분한 대가를 받고 렌을 넘기도록 하죠. 그쪽에서 교섭에 응할지 어쩔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거의 틀림없이 교섭에 응하리라 봅니다. 그렇게 되면 받아낼 수 있는 최대의 대가를 요구해야지요. 테룬 황제 폐하께서도 나중에 들으시고 감탄하실 수밖에 없을 정도의 대가를요. 폐하께서는 동제국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전쟁과 제국의 멸망을 막고 동제국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렌을 넘겼다고 한다면, 분노하실지언정 벌주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버리고 나면 결국 제국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실 것입니다.“ 티르안은 열변을 토했다. “첩자를 알려주는 일이라면 굳이 저를 거치지 않으셔도 되는 게 아닙니까? 마마의 정보력은 저보다 한 수 위라고 알고 있는데요.” “이 일에 수상 각하께서 참여하셨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밀어주신다고 말씀하시고서 벌써 발을 빼려는 건 아니시겠지요?” 샤이트는 진심으로 탄복의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역시 티르안 공녀님께는 못 당하겠습니다. 좋습니다. 폐하의 진노도 제가 막아드리고, 공녀님의 제1황후 책봉도 제 힘을 다해 밀어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고맙습니다.” 원한 것을 모두 얻은 티르안 공녀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수상 집무실을 나섰다. 밖에서 기다리던 바리던 후작부인은 공녀의 안색이 밝게 변하자 안심하며 공녀에게 물었다. “역시, 수상 각하께서도 마마의 편이시지요?” “물론이다.” “그렇다면 마마께서는 역시 서제국에 그 계집을...... .” “입 조심하도록 해라. 죽고 싶지 않다면.” 바리던 후작부인은 사색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그녀는 티르안 공녀가 받은 수모를 되갚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에 희희낙락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은 그날 저녁 파티에서 카엔에게 남김없이 읽혀졌다. 이틀 후 서제국 첩자와의 접촉은 성사되었다. 샤이트 수상이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동제국 수도 브림에서 활동 중인 첩자 중 최고위 인물은 7서클 마법사 솔로츠였다. 그는 약 15년 전쯤에 드래곤의 회랑 출신이라면서 동제국으로 들어와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해온 자였다. 동제국 첩보부에서는 약 5년 전부터 솔로츠가 서제국 첩자라는 사실을 인지했지만, 그의 동태를 감시함으로써 서제국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굳이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동제국이 그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게 알려진 이상, 그는 더 이상 쓸 수 없는 패가 되어버렸다. 큰 손실이었지만 걸려 있는 일이 워낙 중대한 일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약속장소는 브림 인근의 어느 귀족 별장이었다.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고 지나치게 인적이 드물지도 않아,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평범한 차림을 하고 갈 경우 거의 완벽한 보안이 보장되는 장소였다. 티르안 공녀는 라우프를 대동하고 중하급 귀족이 타는 허름한 마차를 이용하여 그곳에 도착했다. 가을밤이 깊어 날씨는 상당히 쌀쌀했다. 공녀는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외투 깃을 조이며 마차에서 내렸다. 하인은 아무도 없고 작은 등 하나만이 켜져 있는 실내는 으스스했다. 그들 앞으로 갑자기 한 남자가 나섰을 때 티르안 공녀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남자는 마법사 복장을 걸쳤고 4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솔로츠님이십니까?” 라우프의 질문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곤란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거 이렇게 정체가 다 탄로나버렸으니 더 숨길 것도 없군요. 제가 바로 솔로츠입니다. 서제국 첩보부 소속 7서클 마법사이지요. 이번 일이 끝나면 저는 즉시 귀국할 겁니다. 물론 제 후임자가 오겠지만, 그가 어떤 신분, 어떤 정체로 오는지 알아내시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저희 쪽의 제안은 상부에 알리셨습니까?” 티르안 공녀의 질문에 솔로츠는 바로 대답했다. “예, 실은 일의 중대성 때문에 제 최고 상관께서 직접 이리로 오셨습니다.” “상관이라면...... .” “첩보계에서는 밤의 철나비라고 불리는 분이십니다만...... .” “밤의 철나비!” 티르안 공녀와 라우프는 함께 외쳤다. 둘 다 첩보에 밝은 사람들이라 서제국 대외첩보의 수장인 정체불명의 여마법사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공녀와 라우프는 모두 긴장하고 솔로츠의 뒤를 따라갔다. 품위 있는 응접실에는 은은한 조명이 밝혀져 있고 추운 가을밤의 한기를 덜기 위해 벽난로 안에 장작불도 지펴져 있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가면을 쓴 중년 부인이고, 다른 한 명은 그녀의 부관으로 보이는 평범한 젊은이였다. “타림 안딘 마마, 라우프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정말로 영광입니다.” 부인과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녀를 향해 가볍게 절했다. 공녀는 떨림을 진정시키며 부인에게 물었다. “당신이 바로 밤의 철나비라 불리는 서제국 최고의 첩보책임자 인가요?” “맞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부관입니다.” ‘밤의 철나비’라는 암호명은 마스니가 첩보부에 처음 들어갈 무렵 탐독하던 어느 영웅소설에서 따온 것이었는데, 이 유치찬란한 별호가 이렇게 유명해질 줄은 그녀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었다. “저의 제안을 서제국의 황제 폐하께 전해드렸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렇지만 이야기에 앞서 먼저 자리에 앉으시지요. 차와 꿀과자라도 드시며 긴장을 푸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마스니의 여유 있는 태도에 끌려 티르안 공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니는 우아한 태도로 차를 따라주고 이미 탁자에 놓여 있는 꿀과자 접시도 티르안 공녀 앞으로 끌어다놓았다. 그동안 카엔은 맹렬히 티르안 공녀의 생각을 읽기 시작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꿀과자를 연신 집어먹으며 티르안 공녀의 머릿속에 정신을 집중했다. “먼저, 렌 아가씨를 어떻게 동제국 황궁에서 빼내실 생각이시지요? 그 철통같은 결계를 해제하는 것은 타림 안딘의 지위로도 힘든 일일 텐데요.” 마스니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티르안은 그 계집에게 아가씨는 무슨 아가씨냐고 쏘아붙이고 싶은 심정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카엔은 물론 그 생각을 읽고 험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눈에 띄지 않는 부관의 표정 따위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전에 서제국에서 렌을 넘기는 대가로 무엇을 줄지 알고 싶습니다.” “그건 저희 폐하께서 렌 아가씨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느냐의 문제이지요. 공녀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마스니가 오히려 반문하자 티르안 공녀는 잠시 당황했으나 곧 조리 있게 대답했다. “무척 소중하게 여기시겠죠. 그렇기 때문에 직접 저희 테룬 황제 폐하를 공격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렌 너는 서제국 황제에게나 가. 그래서 그 인간 같지 않은 괴물 서제국 황제에게 영원히 속박당해서 정신을 난도질당하고 능욕당하다가 죽으란 말이야.’ 증오심에 가득 찬 공녀의 생각을 읽고 카 엔은 혐오감마저 들었다. 사랑과 질투와 미움이 독기가 되어 카엔에게 전해져왔다. 그러나 그걸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방이 바라는 말을 해주는 것이야말로 설득의 기본이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카엔은 예의바른 태도로 마스니의 허락을 구했다. 마스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황제 폐하께서는 황궁에서 렌 아가씨의 맑고 깨끗한 정신을 발견하시고서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신분을 숨기고 함께 다니기도 하셨지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잠시 렌 아가씨와 헤어지기는 하셨지만 폐하께서는 한시도 렌 아가씨를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공녀는 부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맘에 들지 않았다. 렌이라는 계집은 사랑받기보다는 고통당해야 했다. 감히 내 마음속의 비밀을 엿보고 저주 같은 말들을 퍼붓다니! 테룬 황제폐하의 마음을 사로잡고도 마치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척 고고한 흉내를 내다니! 감히 나를 가엾이 여기다니! 그런데 서제국 황제마저도 렌을 소중히 여긴다고? 카엔은 공녀의 마음을 읽어가며 완급을 조절했다. “폐하의 깊은 뜻을 저희 신하들이 어찌 알겠습니까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희 폐하께서는 원래 맑고 깨끗한 정신을 가진 사람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십니다. 두 분 모두 30년 전의 코엘이라는 나와림 안딘 사건을 알고 계시겠지요? 그 코엘이라는 나와림 안딘도 역시 보기 드물게 맑고 깨끗한 정신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래서 폐하께서는 무한한 호기심을 가지시고 그의 정신을 한 조각 한 조각씩 해부하셨지요. 코엘도 아마 그렇게 폐하께 정신을 해부당할 정도의 총애를 받아 행복했을 것입니다. 비록 나중에 완전히 미쳐버리기는 했지만요.“ 카엔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래서 더 공포스러웠다. 카엔의 마지막 말에 공녀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폐하께서는 렌 아가씨 또한 그 정도로 총애하고 계십니다. 폐하께서는 아직 렌 아가씨의 정신에 제대로 손을 대기도 전에 렌 아가씨가 폐하의 수중을 떠난 것을 몹시 아쉬워하셔서, 심지어 동제국 황제 폐하를 공격하기 위해 직접 나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제 렌 아가씨가 다시 돌아오시면, 저희 폐하께서는 미뤄두었던 정신 해부를 하시면서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즐거움을 맛보시겠지요.” 카엔은 약간의 씁쓸함을 느끼면서도 스스로를 한껏 비인간적인 괴물로 묘사했다. 그것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진실이었다. 공녀는 완전히 창백해져서 더듬거리며 물었다. “저, 정신 해부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사람의 정신은 여러 개의 층으로 되어 있는데, 그 층을 하나씩 벗겨 가면 가장 기억하기 싫고 괴롭고 추잡한 생각과 기억들이 마구 튀어나온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그 더럽고 추악한 생각에 직면하면 여지없이 미쳐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생각보다 오래 버티기도 하지요. 폐하께서는 이번의 렌 아가씨는 조금 더 오래 버텨서 기록을 세우지 않을까 기대하고 계십니다.” 공녀와 라우프는 자기도 모르게 공포로 가득한 시선을 교환했다. 역시 서제국 황제의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다. 공녀도 대부분의 동제국 어린이들처럼 말 안 들으면 서제국 황제가 잡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터였다. 그 모든 음습하고 사악하고 비인간적인 소문이 진실이라니, 소름이 쫙 끼쳤다. “그, 그렇게 기대가 크시다면 그만큼 커다란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으시겠군요.” 이 대목에서는 마스니가 나섰다. 그녀는 그윽하고도 냉정하게 말했다. “잘 아시겠지만, 저희 폐하는 보통 인간의 범주로는 혜량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께는 모든 것이 다 장난감에 불과하지요. 그러니 대가라는 것도 장난감에 걸맞은 액수를 벗어나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녀의 대사는 모두 카엔에게서 사전에 지시받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마스니는 마음속으로 몹시 황감하고 죄송스러웠다. “장난감이라도 수십 년 만의 장난감이라면 그 가치는 보통이 아닐 테지요. 그리고 칼자루는 우리 쪽에서 쥐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공녀는 겨우 침착함을 되찾고 대꾸했다. “원하시는 것을 한 번 말씀해보십시오.” “최장거리용 통신구슬 30세트, 최장거리 이동용 마법스크롤 열장, 그리고 말틴과 카로딘 사이의 중소자유국가들에 대한 불간섭을 요구합니다.” 마스니는 생각보다 약소한 요구조건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오오, 조금 지나치군요. 장난감 하나의 값으로 그렇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다니. 하지만 흥정에 앞서 공녀님께서 어떤 식으로 렌 아가씨를 빼내실지부터 들어볼 때가 된 것 같네요.” 공녀는 이제 패를 다 꺼내 보일 때가 왔음을 알았다. “한 달 후면 이노스 신의 축제가 있습니다. 평소에 동제국 황궁은 철저한 결계로 보호되지만, 이노스 신의 축제 때는 여러 공국에서 몰려드는 하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축제 회? 揚?결계 등급이 하향조정됩니다. 서제국의 마법력과 정보력이라면 축제장으로 침투하는 거나 빠져나가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요.” “그건 저희들도 이미 알고 있는 바입니다.” “제가 약속해드릴 수 있는 것은, 렌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축제회장까지 데리고 나오겠다는 겁니다.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테룬 황제 폐하께서 한껏 서제국 황제 폐하의 출현을 경계하고 계시는 상황에서 과연 렌을 축제회장에 데리고 나가시겠습니까? 저는 저희 폐하께서 도저히 렌을 데리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게끔 상황을 만들어놓겠습니다.” “만약 제대로 안 된다면 어찌 책임지겠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마음먹고 한 일 중에 제대로 안 된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제가 실패한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대화의 내용을 공개하셔도 좋습니다.” 카엔은 티르안 공녀의 자신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읽었다. 그가 마스니에게 눈짓하자 마스니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폐하께서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폐하께서는 정말로 렌 아가씨를 총애하고 계시니까요.” 마스니의 마지막 말에 공녀는 다시 몸을 떨었다. 지금 자신은 질투에 휩싸여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렌이라는 소녀가 과연 서제국 황제에게 끌려 가 미쳐버릴 때까지 정신을 해부당할 만큼 큰 잘못을 저지른 걸까?“ 그러나 공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인정에 이끌리지 않고 단호하게 결정해온 덕분에 이 자리에 이른 것이다. 그녀의 손에 직접 피를 묻힌 적은 없지만 그녀의 명령으로 죽은 사람 수는 벌써 수만 명이다. 이제 와서 한 명의 목숨을 가지고 망설이는 것은 그녀답지 않은 일이었다. 공녀는 자신을 진심으로 가엾이 여기던 렌의 눈길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떠오르는 것을 애써 물리치고 흥정을 마무리 지었다. “거래는 성립되었습니다. 렌은 한 달 후 서제국 황제 폐하의 것이 될 것입니다.” 티르안 공녀의 말에 마스니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예,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공녀께서 약속을 어기신다면 프린다인 공국에는 황제의 저주가 내려질 것입니다.” 티르안 공녀와 라우프를 보낸 후 카엔과 마스니는 다시 벽난로 앞에 앉았다. 마스니가 먼저 고개를 푹 숙였다. “폐하, 참으로 죄송합니다. 아까 제가 감히 한 폐하에 대한 묘사는 아무리 폐하의 명이라 하더라도 신하된 도리로서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묘사는 사실 상당 부분 진실이었으니 그렇게 미안해할 것 없다.” 마스니는 더 한층 황감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대는 티르안 공녀가 테룬 황제를 사랑하는 것을 눈치챘나?” “아뇨! 전혀요! 그녀는 너무나 냉정해 보였는데요.” 마스니는 크게 놀랐다. “공녀는 서제국 황제를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걱정이야. 사랑에 빠진 사람의 감정은 어디로 튈지 모르거든. 가장 저열한 감정과 가장 숭고한 감정이 모두 사랑에서 비롯되곤 하지.” 마스니는 동경하는 눈으로 멍하니 카엔을 바라보았다. “폐하의 그 말씀은 로맨스 소설의 한 구절 같습니다. 정말 훌륭하신 말씀이십니다.” 카엔은 황당해하면서도 말을 계속했다. “지금 공녀의 동기는 질투야. 집요하고 무자비한 질투. 그 질투심에 공녀의 비상한 머리와 냉정한 마음이 결합해서 결국 렌을 서제국 황제에게 팔아버리겠다는 결론을 내린 거지. 그러나 사랑에 빠진 여자의 질투심에 의지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니 정보 수집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그는 렌이 축제의 그날까지 무사히 동제국 황궁에서 버티기만을 기도했다. 무언가 렌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커져갔지만, 그는 애써서 그 불안감을 억눌렀다. 렌은 자신을 둘러싼 시녀들의 기류가 심상치 않게 변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눈에 확 띄지는 않지만 종전의 그저 냉담하던 분위기에서 한결 더 험악해진 느낌이었다.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해도 어느덧 렌은 동제국 황궁이 돌아가는 방식을 거의 다 파악하고 있었다. 나와림으로 서제국 황궁에서 일 해본 것이 도움이 되었다. 동제국에 서제국풍이 유행한 이래로 동제국의 많은 제도가 서제국을 답습하고 있어서 대강 꿰어 맞춰보면 그럴싸하게 들어맞았던 것이다. 서제국보다 중앙권력이 약한 탓에 많은 것이 어설프지만 그래도 황궁은 황궁이었다. 수많은 시녀들과 궁내관들이 피라미드처럼 계층을 이루어 황제와 대신들과 귀족들을 수발하고 있었다. 서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서제국은 황녀나 황후가 없어서 모든 조직이 황제를 중심으로 짜여져 있지만, 이곳은 시녀들의 감독체계가 황족 여인들을 중심으로 짜여 있다는 것이었다. 시녀들만을 예로 들자면, 황후나 황족을 수발하는 수석시녀는 반드시 작위를 가진 귀족부 인이 맡도록 되어 있다. 수석시녀는 대신 다음 가는 위치에 있고, 그 밑의 시녀들을 감독하는 것과 황족이 이동할 때 따르는 것이 주된 임무이다. 다만 남자 황족의 경우 수발업무는 궁내관이 대신 맡는다. 수석시녀의 급수는 자신이 모시는 황족의 지위에 따라 결정된다. 평시라면 제1황후의 수석시녀가 시녀장이지만, 황후가 없는 지금은 황제의 수석시녀인 그리틸 백작부인이 모든 시녀를 지휘, 감독하는 시녀장이었다. 그리고 타림 안딘 티르안 공녀의 수석시녀인 바리던 후작부인이 그 다음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작위도 높고 세력도 강한 바리던 후작부인이 시녀장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수석시녀 밑에는 차석시녀가 다섯 명인데, 차석시녀는 적어도 기사급 이상의 딸이나 부인들 중에서 선발하도록 되어 있다. 그중 한 명은 수석시녀의 직속 비서급이고, 다른 네 명의 차석시녀는 그보다는 조금 아래 급이지만, 이들 역시 모두 궂은 일을 직접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런저런 일들을 하는 것은 차석시녀 아래의 열 명의 평시녀이다. 하지만 그 밑에도 견습시녀라는 급이 하나 더 있어, 정말로 힘든 일은 평시녀 밑의 삼십 명에 이르는 견습시녀들이 다 한다. 그러니 렌에게 딸린 시녀는 대략 46명 정도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렌이 접하는 시녀들은 차석시녀까지가 전부였다. 수석시녀와 차석시녀들은 귀족가의 여인네들답게 정치의 향방에 아주 민감했다. 그들은 이미 황제가 티르안 공녀에게 타림 안딘 자리 및 제1황후 책봉을 포기하라고 강요하였다는 것과 티르안 공녀가 그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는 것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또 티르안 공녀 측에서 렌을 제거하기 위해 뭔가 계획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되었다. 사스트란 백작부인 이하 시녀들은 모두 반쯤은 정치 전문가였다. 그녀들은 처음에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소녀의 시녀가 되었다는 것에 약간의 기대감을 품었지만, 되어가는 꼴을 보니 이 소녀가 황후가 될 가망성은 없어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 소녀와 친하게 되거나, 혹은 친하다는 오해를 받는다면 나중에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몰랐다. 사스트란 백작부인과 차석시녀들은 사실 이 문제를 놓고 여러 차례 토론했다. 아무리 황제가 막무가내로 원하는 대로 하고자 해도, 렌이 티르안 공녀의 동의 없이 황후가 될 수는 없었다. 저번 전쟁에서 티르안 공녀의 공은 너무 컸다. 자신의 병사들이 피를 흘려 이루어낸 공은 절대로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제후들의 지지를 권력의 기반으로 삼은 봉건국가인 파이브룬 제국에서 제후의 공을 포상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이제 티르안 공녀의 뜻이 분명해진 이상, 황제가 싫어하든 좋아하든 티르안 공녀는 황후가 될 것이다. 이럴 때 잘 해야 했다. 정권 교체기나 황후 책봉, 황태자 책봉 시에 시녀가 맹활약하여 그 아비나 남편의 작위를 올린 예는 수도 없이 많았다. 반면에 황후들 간의 권력다툼에서 줄을 잘못 서 함께 처형된 경우도 비일비재 했다. 저번의 펠리시티 황후 때만 해도 그랬다. 황후를 모시던 수석시녀와 차석시녀들은 모두 참수당했다. 유약한 하라스 4세가 그들의 남편과 자식에 대한 참수형은 면하게 해주었지만, 그래도 시녀들의 남편과 자식들은 모두 작위를 강등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래서 렌의 시녀들은 행동에 나섰다. 어차피 궁중이란 곳에 대한 눈치가 빤한 이상, 적극적으로 티르안 공녀에게 렌의 동정을 낱낱이 보고하는 한편, 자신들이 렌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상한 조짐이 나타난 것은 티르안 공녀가 왔다간 후 사흘 정도 지나서부터였다. 시녀가 쟁반에 담아서 방까지 가져다주는 음식이 눈에 띨 정도로 지나치게 짜거나 싱거워졌다. 가뜩이나 몸이 좋지 않아 입맛이 없던 렌은 몇 숟가락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수저를 놓았다. 그나마 빵은 보통 빵이어서, 물 한 모금 마시고 빵 한 입 먹으며 겨우 허기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렌은 요리사가 바뀌었나 하고 의아해하다가, 조금 생각해보고 나서 비로서 진상을 파악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맛없는 음식이라니, 지금 상황에서 더도 덜도 아니고 딱 적당한 제스처였다. 시녀들이 얼마나 고민했을지 짐작이 갔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황후가 될지 모르니 독약을 탈 수는 없을 테고, 그렇다고 나를 떠받들어서 티르안 공녀에게서 미움을 살 수도 없었겠지. 이런 유의 암투와 음모는 이야기책에서 많이 봤지만 직접 겪는 것은 처음이라, 자신 속에 침잠해가던 렌에게는 오히려 이따금씩 주위를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처음에 렌은 시녀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박을 약간은 재미있게 관찰했다. 그동안에도 테룬은 매일같이 렌의 방문 앞에서 들어가기를 청했다. 그리고 렌은 매일같이 거절했다. 사스트란 백작 부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황감한 태도로 렌의 거절을 전해야 했다. 그래도 황제는 렌의 뜻을 거슬러 방문을 박차고 강제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는 늘 방문 앞에서 부들부들 떨다가 힘없이 돌아섰다. 그 기가 막힌 광경은 이제는 황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궁중 사람들은 렌이 그런 식으로 버티는 것이 황제의 마음을 완전히 얻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이라는 파와, 티르안 공녀를 두려워해서 몸을 사리는 것이라는 파로 갈렸다. 어찌 되었든 렌이 황제와 대화조차 나누지 않는다는 상황은 시녀들의 용기를 북돋웠다. 그래서 그녀들은 한발 더 나갔다. 그날 렌에게 배달된 음식은 놀랍게도 모두 간이 딱 맞고 맛도 훌륭했다.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음식이었다. 렌은 아마도 티르안 공녀가 자제하라고 명령했든지 뭔가 변화가 있었던 거라고 생각하며 약간은 감개무량하게 수프부터 떠먹었다. 몇 숟갈 째인가, 입 안이 잠시 서늘했다. 곧 날카로운 통증이 혀와 입 안쪽 점막을 엄습했다. 입을 열자 베인 상처에서 솟아나온 피가 수프 위로 뚝뚝 떨어졌다. 렌은 수프를 적시는 피를 내려다보며 멍하니 그대로 있었다. 때마침 데이그랜이 들어왔다. 그는 빙글거리며 인사를 하려다 곧 피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무슨 일입니까?” 렌은 힘없이 웃었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아무 일도 아니기는요! 어서 입을 벌려봐요!” 데이그랜은 억지로 렌의 입을 벌리고 상처를 살펴보았다. 입 안에는 자잘한 상처들이 나 있고 작은 유리조각들이 여기저기 박혀있었다. “맙소사!” 데이그랜은 눈살을 찌푸리며 한쪽 손으로 렌의 턱을 잡고 다른 손으로 유리조각을 하나씩 빼냈다. 잘 안 되는 것은 마법을 썼다. 유리조각을 다 뽑은 그는 치유마법을 렌의 입 안에 뿌렸다. 상처는 곧 아물었다. “고마워요. 그러고 보니 이 세계로 끌어올 때 제 배에 난 상처도 치유해주셨죠?” “천하의 흑룡이 치유마법인들 못하겠습니까.” 데이그랜은 습관적으로 자화자찬을 하면서도 걱정스럽게 렌을 쳐다보았다. “누가 이런 겁니까?” “제 시녀들일 테죠. 화내지 마세요.” 데이그랜이 화를 터뜨리려 하자 렌은 황급히 덧붙였다. “그저 다 생존본능일 뿐이에요. 인간도 역시 동물의 일종이고, 살아남는 것과 후손을 남기는 것이야말로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걸요.” “대체 그것과 이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리고 그대는 인간인데 스스로를 동물로 생각하는 겁니까?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들이 마치 동물과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는데요.” 렌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가끔 동물을 넘어선 사람들도 있지만, 그래도 인간은 역시 동물인 것 같아요. 제가 인간성에 대해 가졌던 희망은 수많은 끔찍한 죽음을 겪으면서 조금씩 사라져 지금은 저 자신도 스스로를 동물 이상인 존재라고 자처할 수 없는걸요. 생각해보세요. 티르안 공녀가 테룬 황제를 사랑하게 된 이상, 그녀의 최우선 과제는 그를 차지하고, 그와 함께 성교해서 그의 아이를 낳는 거예요. 즉, 자신의 유전자와 우수한 그의 유전자를 섞어 자신의 유전자의 생존확률을 높이는 거죠. 물론 이건 표면상으로는 사랑이나 질투, 독점욕 등으로 나타나지만, 그 이면에는 그런 생물학적 본능이 작용하는 거예요. 그리고 제 시녀들은 번식보다는 생존이 목적이죠. 티르안 공녀가 생사여탈권을 쥐게 될 상황을 가정하면 어떻게든 그녀에게 잘 보여야 하니까, 정당성이니 옮고 그름이니 하는 건 살아남아야 한다는 지상명제 앞에서 뒷전으로 밀리는 거예요. 인간 속에 있는 동물이라는 건 너무도 확고하고 완강해서, 저는 때때로 인간이 쓰고 있는 문명인의 가면이 너무 얇은 것처럼 느껴져요. 물론 저를 포함해서요.“ “유전자가 뭡니까?” 심각하게 말하던 중에 데이그랜이 느닷없이 호기심을 빛내며 질문을 던지자 렌은 웃었다. “아,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데, 어쩌면 데이님은 본능적으로 유전자가 뭔지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대단한 마법의 비밀 같은 거라면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됩니다. 어쨌든 적어도 인간이 동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나와 견해가 일치하는군요.” “아직 견해가 일치한다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점점 그쪽으로 기우는 건 사실이에요.” 렌은 피범벅이 된 수프 그릇을 옆으로 치웠다. “계속 이런 짓을 하게 놔둘 겁니까?” “그럴 수는 없겠죠. 아무래도 테룬 황제와 티르안 공녀를 한꺼번에 만나야 할 것 같아요. 원하신다면 따라오셔도 좋아요.” 렌은 담담하게 말했다. 데이그랜은 왠지 스펙터클한 싸움 구경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로 흥분해서 외쳤다. “몰론 따라가지요!” 렌은 피식 웃으며 데이그랜을 물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옷장 안에는 테룬이 선물해준 값비싼 소즈들이 가득 걸려 있었지만 렌은 그중에서 가장 수수한 것을 골랐다. 약간 비틀거리며 방을 나서자 데이그랜이 급히 렌을 잡아주었다. “고마워요. 이제 가죠.” 사스트란 백작부인은 렌이 방을 나서자 입을 쩍 벌리고 쳐다보았다. 렌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대나 차석시녀들이 제게 한 짓은 절대 황제 폐하께 고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그러나 마지막의 유리조각은 좀 유치했어요. 그리고 부탁인데, 폐하와 타림 안딘 마마를 함께 뵙고 싶으니 타림 안딘 마마께서 황제집무실로 오시도록 기별을 넣어주세요.” 하얗게 질린 사스트란 백작부인을 뒤로한 채 렌은 데이그랜의 팔을 붙잡고 힘겨운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결국 힘이 빠져 데이그랜의 품에 안겨야 했다. 여러 차원의 별별 남자 품에 다 안겨보고 나서 이제는 파충류 품에도 안겨본다고 생각하니 실소가 나왔다. 티르안 공녀의 공작은 확실했다. 원래 동제국 황실은 황권이 약하고 제후들과 귀족들의 입김이 강한 곳이었다. 그녀는 프린다인 공국과 친분이 있는 몇몇 귀족들을 통해 현재 황궁에 머물러 있는 정체불명의 계집에 대해 황제에게 문제를 제기하도록 했다. 평소에는 황제의 여자 한 명쯤에 대해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테지만, 현재 황후 자리가 비어 있고 새로 온 계집이 펠리시티 황후와 뭔가 연관이 있다는 소문도 파다한데다가 그녀의 과거가 완전히 비밀이라는 점이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모두들 펠리시티 황후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은 영리하기로 소문난 티르안 공녀가 프린다인 대공국의 최초의 여대공이 되어 프린다인 대공국을 강하게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차라리 그녀가 황후가 되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테룬은 완강했다. 지금처럼 계속 살아갈 수는 없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렌이라는 작은 희망마저 버리고 나면 그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영혼을 나날이 잠식해가는 광포함과 분노와 절망은 이제 별다른 계기 없이도 이빨을 드러냈다. 그가 무너지고 나면 후계자 없는 동제국은 당장 무너질 것이다. 왜 신하들은 그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않는 걸까. 왜 마음의 고통이 몸의 치명상만큼이나 괴롭다는 걸 모르는 걸까. 렌을 황궁에서 내보내라는 신하들의 계속된 공세에 그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폐하, 대체 어쩌실 겁니까?” 팔라르 데 매긴이 뜬금없는 말을 꺼내자 테룬은 의아해서 되물었다. “뭘 어쩌라는 건가?” “맙소사. 폐하, 아직 황후도 정해지기 전에 여자 둘을 황궁에 한꺼번에 불러다놓은 채 수수방관만 하시깁니까?” 직설적인 팔라르의 말에 테룬은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대마저 그 문제를 거론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정해졌다. 나는 렌을 제1황후로 책봉하고 싶다.” “아이고, 폐하, 지금 타린 안딘 관련 법제를 알고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타림 안딘을 폐하려면 반역죄나 그에 상응하는 죄로 유죄가 확정되어야 한다는 걸 모르십니까? 그래서 저번 전쟁 전에 공녀의 협조를 확실히 얻기 위해 타림 안딘의 칭호를 수여하신 거 아닙니까!” 팔라르는 어이가 없어 외쳤다. “조법(祖法)상 타림 안딘이 있다면 그녀가 아닌 다른 여인을 제1황후로 책봉할 수는 없도록 되어 있질 않습니까!” “안다니까! 그래서 공녀에게 양보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래서 순순히 양보하겠다고 하던가요?” “아니, 많은 반대급부를 제공하겠다고 했는데도 의외로 완강했다.” 팔라르는 철없는 막내 동생을 보는 것 같은 한심한 눈초리로 황제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정말로 그 렌 아가씨가 아니면 안 되는 겁니까?” “그래, 그대도 알지 않아? 내 마음이 안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걸. 나는 렌이 없으면 견딜 수가 없어. 그녀를 내 곁에 영원히 묶어 놓고 싶단 말이다.” 테룬은 절절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팔라르는 감동했다. “폐하, 정히 그렇다면 타림 안딘을 폐위시키지 않더라도 렌 아가씨를 제1황후로 책봉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테룬은 다급하게 물었다. “사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파이브룬 제국의 조법상 세속의 작위와 이노스 신 사제단의 작위는 동급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이노스 신을 섬기는 대신관은 황제와 동격이고 수석신관은 황태자와 동격인 식이지요. 이건 뭐라더라, 파이브룬 제국 건국 시에 이노스 신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전의 고법(古法)을 그대로 살려 한 줄 끼워 넣은 형식적인 조항이랍니다. 저는 정확히 모르지만 어쨌든 제 아내가 그랬습니다.” “그대의 부인은 무가의 딸이라고 하지 않았나? 어떻게 그녀가 그런 걸 알지?” “사실은 제 장인어른께서 워낙에 무공 수련에만 열심이시고 영지를 돌보는 걸 게을리 하셔서 제 장모님과 아내가 영지를 관리해 왔는데, 그때 법률공부도 같이 했답니다. 지금 제 영지 내 법률문제도 제 아내가 처리하고 있지요?” “그렇군. ? 瀏굘?그게 렌과는 무슨 상관이지?” “그 조항은 거의 죽은 조항이지만 아직 법률적 효력은 있기 때문에, 그 조항을 적절히 이용하면 렌 아가씨에게 타림 안딘과 동급의 지위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아!” 팔라르의 말은 요컨대, 렌을 이노스 신 대신관의 양녀로 입적시키면 렌의 지위는 황녀와 동일해지고, 결국은 타림 안딘과 동격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 경우 같은 지위를 가진 두 명 중 누구를 제1황후로 책봉해도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조문이 있는데 왜 나는 몰랐지?” “조법을 개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괜히 그런 조문이 널리 알려지면 저 땍땍거리는 신관들 기나 살려주니까 그렇겠지요.” “그래, 어쨌든 렌을 입적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파이브룬 대공국 고법에 따르면 아무 때 아무 여자아이나 입적 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나라에 공이 큰 여성으로서 이노스 신 사제단과 세속의 권력이 모두 양자 입적에 동의하는 경우 이노스 신 축제 때 모든 황족과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이노스 신 대신관의 축복으로 이노스 신의 딸, 그러니까 ‘이노스 안딘’으로 책봉하게 되어 있답니다. 사실 이 제도는 여자에게 작위를 단독으로 내리지 못하는 동대륙의 관습상 공훈을 세운 여성에게 편법으로라도 그 공에 상응하는 지위를 내려주려는 거였지요.“ 팔라르의 말이 서서히 이해가 가면서 테룬의 얼굴은 점점 밝아졌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다. 이노스 신의 대신관을 설득하는 거야 손쉬운 일이고, 렌은 흑성 시절에 내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이노사 안딘으로 봉해질 충분한 명분도 있지. 아, 이럴 때가 아니다! 이노스 신의 축제 때까지는 얼마 안 남았으니 어서 서둘러서 신전 측과 교섭을 해야겠다!” 기뻐하는 황제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팔라르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폐하, 만약을 대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제가 이런 방법을 알려드린 거라든지 이노스 신전 측과 교섭하는 건 타림 안딘 마마와 샤이트 수상에게는 비밀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타림 안딘 마마께서는 워낙에 총명하신 분이셔서 만약 폐하께서 이런 방법을 꾀하시는 걸 아신다면 반드시 막으시려 할 것이고, 샤이트 그 친구 또한 타림 안딘 마마를 지지하는 형편이라...... .” “그대의 말은 잘 알겠다. 조심하겠다.” 테룬 또한 팔라르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았다. 그 후 신전 측과의 교섭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노스 신의 대신관은 다 늙어빠진데다가 겁이 많고 기백이라고는 눈 뜨고 찾아봐도 없는 자였다. 테룬이 이노스 신 축제에 관해 상의할 게 있다는 핑계로 그를 황제집무실로 불러 반쯤은 어르고 반쯤은 협박하자 대신관은 다가오는 이노스 축제에서 렌을 이노사 안딘으로 축복하겠다고 승낙했다. 테룬이 걱정하는 것은 서제국 황제가 방위 수준이 낮은 축제장에 렌을 되찾기 위해 침투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저번의 대결로 서제국 황제를 상대하는 데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 축제장의 결계를 즉시 강화해도 될 터였다. 무엇보다는 그는 서제국 황제의 마음을 믿지 않았다. 어린 소녀 한 명을 되찾기 위해 적진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영생이나 다름없는 자기 목숨을 건다는 것은 서제국 황제에 대해 알려진 통설에 비추어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테룬도 팔라르도 티르안 공녀가 이 일에 개입되어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티르안 공녀가 주도한 것이었다. 그녀는 몰래 팔라르의 부인과 친한 귀족 부인 한 명을 섭외하여, 팔라르의 부인과 궁중의 소식에 관해 수다 떠는 과정에서 이노사 안딘에 관한 얘기를 꺼내도록 한 것이었다. 공녀는 황제가 대신관을 불러 모종의 협의를 마쳤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처절했다. 티르안 공녀는 초조하게 이노스 신 축제까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사스트란 백작부인은 황급히 티르안 공녀에게로 뛰어갔다. 그녀는 티르안 공녀로부터 수많은 보석과 의상을 선물로 받아 이미 그녀의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마마! 타림 안딘 마마!” 부속실의 바리던 후작부인은 호들갑 떠는 사스트란 백작부인을 경멸의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급하시나요?” “렌 아가씨가 폐하를 알현하러 갔습니다! 중대한 얘기가 있으니 타림 안딘 마마께서도 그리로 오시랍니다!” 바리던 후작부인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저희 마마께서 그 계집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분이십니까? 어인 호들갑이십니까?” 그러나 바리던 후작부인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방문이 열리고 티르안 공녀가 나왔다. “아, 사스트란 백작부인, 오셨군요.” “예, 마마를 뵙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그 렌은 그동안 완강히 폐하를 뵙기를 거절해왔는데, 갑자기 알현이라니요?” 사스? ??백작부인은 우물쭈물하다가 말해버렸다. “사실은, 제 아랫것들이 렌 아가씨에게 올리는 수프에다가 유리조각을 잔뜩 넣는 바람에...... .” 티르안 공녀는 그 말에 치솟는 화를 참기 어려웠다. 정말로 어리석은 것들! 과잉충성도 정도껏 해야지! 그러나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후, 그대의 마음은 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은 웬만하면 하지 않는 게 좋아요. 혹시 폐하께서 그 일로 진노하신다 해도 내가 막을 테니 걱정 마세요. 어쨌든 가보긴 해야겠군요.” 티르안 공녀의 다정한 말에 사스트란 백작부인은 감격의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녀를 남겨둔 채 공녀와 바리던 후작부인은 잰걸음으로 황제집무실로 향했다. “타림 안딘, 어인 일이오?” 티르안 공녀는 자신을 쳐다보는 테룬 황제의 차가우면서도 경계심 가득한 눈빛에 가슴 아팠다. “저도 영문을 모르겠지만, 렌 아가씨가 이곳에서 저와 폐하를 모두 보고 싶다는 기별을 보내왔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서둘러 달려오는 길입니다.” 티르안은 마음속의 격동을 내색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렌이? 지금 이리로 오고 있다고?” 테룬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예.” “무슨 일인지 혹시 아오?” “아뇨.” 테룬은 초조하게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기다렸다. 조금 지나자 시종이 렌과 엘프 마법사 라비언의 도착을 알렸다. 데이그랜은 보란 듯이 엘프의 우아함을 흉내내며 자신의 품속에 안겨 있는 렌을 조심스럽게 소파에 내려놓았다. 테룬은 렌을 품안에 안고 있는 것을 자랑하는 듯한 데이그랜의 태도에 갑작스러운 부아가 치밀었지만 겨우 겨우 참았다. “폐하를 뵙습니다. 지금 저는 힘이 없어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는데 이대로 앉아도 될는지요.” 렌은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물론이야.” 핼쑥한 렌의 얼굴을 보고 테룬은 가슴 아파하며 서둘러 대답했다. “타림 안딘 마마를 뵙습니다. 마마께 여기까지 오시라 해서 죄송합니다.” 티르안 공녀는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렌이 그동안 시녀들에게 당한 수모를 테룬에게 고자질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녀는 재빨리 머릿속에서 그럴싸한 변명을 몇 가지 떠올렸으나 모두 마땅치 않았다. 초조해 보이는 공녀를 보고 렌은 안심하라는 듯 가볍게 눈짓했다. 렌이 뭔가 중대한 말을 할 것 같다고 예감한 테룬은 신하들을 모두 나가게 했다. “폐하,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렌은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그 자리의 모든 이들은 긴장해서 렌이 마저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제가 폐하께 일시적으로 몸을 의탁한 것은 그저 서제국 황제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잠시라도 편히 있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 생각 없음이 폐하께는 불필요한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타림 안딘 마마께는 뜻밖에 마음의 어지러움을 가져다드린 것 같아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렌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두 분께서는 기대하실 것도 걱정하실 것도 없습니다. 저는 지금 죽어가고 있으니까요.” 테룬 황제와 티르안 공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말문이 막힌 두 사람을 앞에 두고 렌은 계속 차분하게 말했다. “제 목숨은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제 몸은 여기저기 고장 나고 생기란 생기는 다 빠져나가서 지금 이렇게 말할 수 있고 숨쉴 수 있는 게 놀라울 정도입니다.” 렌은 다가온 자신의 죽음을 남의 일처럼 조용히 묘사했다. 그렇지만 비통함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말은 더욱 신빙성 있게 들렸다. 테룬은 그러나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럴 리 없어! 이렇게 어리고 젊은 그대가! 죽음이라니! 지금 그대는 내게서 벗어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거지?” “아닙니다.” 테룬은 렌의 말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듯 데이그랜을 쳐다보았다. 데이그랜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테룬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거짓말이야! 날 위해서라도 죽지 말아줘!” “오, 폐하, 죽음이 찾아왔을 때 누가 그 마수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저라고 왜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제 몸은 약해졌지만 제 정신은 아직도 삶을 갈구하고 있어요. 그래도 이제 저는 체념하고 죽음에 몸을 내맡기는 법을 배워가는 중입니다.” “나를 이 지옥에 놔둔 채 홀로 죽겠다는 건가!” 지옥이라는 말에 렌은 흠칫했다. 티르안 공녀도 마찬가지였다. 일그러져가는 테룬의 얼굴은 너무 처절하고 고통스러워 보여 렌은 감히 위로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폐하, 모두가 마음에 지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가 폐하의 지옥을 사라지게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렌의 말에 테룬은 폭발했다. “이 미칠 것 같은 분노, 발작, 피의 갈망, 그런 걸 내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건가! 나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내 유일한 구원은 그대였는데 , 그대마저 이렇게 나를 떠난다고 하면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그래! 언제나 그랬어! 내게 행복한 순간이라곤 없었어! 나는 항상 분노와 죄책감과 싸웠어!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참는 게 내 인생의 전부였어! 나는 언제나 죽고 싶었어! 그대가 나를 살려준 후 나는 부질없게도 잠깐의 희망을 가졌지! 내 마음의 병도 언젠가는 낫고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을 느끼고 사랑도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이제 그대가 나를 영원히 떠난다니! 테룬은 자신의 검을 뽑아 목을 그으려 했다. 바로 옆에 있던 티르안 공녀는 비명을 지르며 테룬에게로 몸을 날렸다. 테룬의 검에서 뿜어 나오는 검기에 티르안 공녀는 튕겨나갔다. 데이그랜도 황급히 마법을 써서 테룬을 저지했다. 검기는 가까스로 마법에 저지되었다. 그러나 데이그랜의 마법은 조금 늦어 티르안 공녀의 오른쪽 어깨가 길게 베어나간 후였다. 공녀의 어깨에서 뚝뚝 흘러나오는 피는 황제집무실의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테룬은 검을 떨어뜨렸다.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은 잠시 얼어붙은 듯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데이그랜이 먼저 정신을 차려 마법으로 티르안 공녀를 지혈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며 테룬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는 허깨비다. 황제의 옷을 입고 걸어 다니지만 사실 나는 껍데기밖에 남지 않았어. 내 가슴은 다 타서 재가 되어버렸고, 내가 느끼는 감정은 슬픔과 알 수 없는 분노뿐이다. 나는 때로 흉포하게 사람들을 베고, 그러면서 잠시 마음의 위안을 찾지. 어떨 때 나는 칼을 들어 내 온몸을 스스로 난자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휘말려. 그러다가 제국을 생각해서 필사적으로 참곤하지. 그 모든 걸 견딜 수 있게 해준 것은 그대, 렌이었어.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사라져버리는 거라면, 나는 더 살 이유가 없다.” 방 안은 그의 울음소리 말고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티르안 공녀는 테룬의 말과 울음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가엾은 사람. 가련한 내 사랑. 그녀는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데 한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차라리 내 가슴이 대신 아팠으면. 차라리 내가 그의 고통을 다 가져갔으면. 그러다가 티르안 공녀는 문득 자신의 마음과 테룬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묘사한 렌의 말이 떠올랐다. 렌은 테룬의 마음에 병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병을 고치는 방법도 알지 않을까. 티르안 공녀는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모든 자존심을 다 버리고 소파에 앉은 렌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렌의 발등에 대었다. 모두가 당황하는 가운데 그녀는 눈물을 쏟으며 간절히 애원했다. “나는 압니다! 렌 그대가 폐하를 고칠 수 있다는 걸 알아요! 제발 저이를 구해주세요! 그대가 해달라는 것, 원하는 것, 뭐든지 다 드리겠어요! 원한다면 타림 안딘의 지위라도! 아니 내 목숨이라도!” 렌은 놀라서 티르안 공녀를 힘겹게 일으켰다. 렌은 안타까움에 가득 차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제가 그랬죠? 마마께서 상처 입으실 거라고요. 폐하를 구할 방법은 제게 없습니다. 차라리 몸의 상처라면 낫게 할 방법을 강구하겠지만, 마음의 상처는 제가 모르는 병입니다.” 티르안 공녀는 눈을 번득였다. “아닙니다! 나는 압니다! 그대는 방법을 알아요! 나를 속일 수는 없어요! 제발!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뭐든지 해주세요! 혹시 나나 내 시녀들이 그대를 구박한 것 때문에 그런 건가요? 그렇다면 내 목숨으로 사죄하겠어요!” 공녀는 땅에 떨어진 검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데이그랜이 재빨리 마법으로 검을 멀리 튕겼다. “이거야 원 자살하기 대회도 아니고, 쩝.” 데이그랜은 투덜거렸다. 공녀는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계속 흐느꼈다. 그 처절한 눈물이 렌의 마음을 움직였다. 차갑고 이기적인 공녀가 목숨을 걸 만큼 황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렌에게 크나큰 감동을 주었다. “저는 정말로 잘 모릅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복잡하기 짝이 없어서 섣불리 비전문가가 손을 댔다가는 오히려 미치거나 악화되는 수가 많습니다. 저는 그런 책임을 떠맡을 자신이 없습니다.” 티르안 공녀는 다시 한 번 렌에게 간절한 눈길을 보냈다. “그래도 그 모든 걸 다 감수하겠다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렌은 한숨을 쉬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 방법은 뭐지?” 테룬 황제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렌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해와 용서입니다.” 5정 감춰진 과거 렌의 나직한 말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제가 마음의 병을 고치는 법을 조금만 더 공부했더라면 다른 방법을 말씀드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그 분야에 대해 아는 건 너무 적습니다. 제가 아는 거라고는 그저 과거의 기억과 상처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걸 되새기고 완전히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폐하의 분노와 절망은 전 황후 펠리시티 마마에 뿌리 를 두고 있지요? 그건 폐하께서도 아시고 저도 압니다. 황궁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지요.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면 해답도 간단합니다. 과거의 사슬에서 벗어나시면 됩니다. 어떻게 과거의 사슬에서 벗어나냐고요? 잊어버리면 될까요? 복수하면 될까요? 망각은 마음의 상처를 더 깊이 곪게 할 뿐입니다. 복수는 또 다른 상처를 더할 뿐입니다. 제가 아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진심으로 폐하 자신과 펠리시티 마마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폐하 자신과 가해자까지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테룬 황제는 렌의 말에 버럭 소리질렀다. “날더러 그 요녀를 용서하라고? 절대 그럴 수는 없다! 그녀야말로 내 모든 불행의 근원인데! 억지로 용서하려고 해도 절대 안 될거다! 렌은 측은한 눈길로 테룬을 쳐다보았다. “쉽지 않다는 건 저도 잘 압니다. 아무리 용서하겠다, 용서하겠다 하고 되뇐다 해도 진심으로 용서가 되는 것도 아니고 마음의 병이 낫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이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해라니! 날더러 그녀의 그 모든 추잡한 죄악을 용납하라는 건가! 싫다! 그렇게는 못해!” 렌은 긴 한숨을 쉬었다. “펠리시티 전 황후의 죄는 참으로 크나크지요. 그걸 다 용납하라는 게 아닙니다. 왜 그녀가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걸 이해하시고 그녀를 가엾게 여기시라는 겁니다.” “그 요녀를 이해하고 가엾게 여기라니! 그건 불가능하다! 그녀는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어!” “폐하, 저는 펠리시티 전 황후를 위해 그녀를 용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폐하 자신을 위해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용서는 이기적인 행위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 용서하는 겁니다. 남을 구원함으로써 자신을 구원하듯이, 다른 사람을 용서함으로써 스스로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 이치를 모르신다면 더 이상 방법은 없습니다.” 렌은 말을 마쳤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티르안 공녀가 침묵을 깼다. “렌, 어떻게 하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폐하께서 스스로를 이해하시고 펠리시티 마마를 이해하실 수 있지요?” 렌은 희미한 미소를 띠며 공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녀님,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폐하의 가슴에 숨겨진 엉킨 실을 풀 듯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해자인 펠리시티 전 황후가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자랐고, 그녀의 일생에 얼마나 많은 불행이 있었기에 그녀가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 그 모든 것을 알아내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결국 폐하께서는 스스로를, 그리고 모후를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용서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테룬은 힘없이 물었다. “그러고 나면 이 모든 고통이 정말 사라지는 건가?” 그의 말에 렌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한 번 난 마음의 상처가 흔적도 없이 아물 수는 없지요. 폐하의 고통이 깨끗이 사라지지는 않을 테고 폐하께서 갑자기 행복해지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나 적어도, 폐하를 사로잡고 있는 분노와 절망은 덜어질 것이고, 폐하께서는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으실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폐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실 수도 있을 겁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나자 렌은 갑자기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흥분 상태에서 너무 많은 말을 한 것이다. 데이그랜은 힘없이 소파에 쓰러지는 렌을 받아 안았다. “내가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주겠다. 테룬 너는 웬만하면 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거다. 아, 그리고 티르안 공녀, 아까 테룬을 대신해 막아서는 모습은 상당히 감동적이었습니다.” 데이그랜은 경망스럽게 말하면서도 그와는 상반되는 조심스런 태도로 렌을 안아 올렸다. 티르안 공녀는 방을 나가는 데이그랜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물었다. “저분은 엘프 마법사 라비언이 아니군요? 아마도 드래곤, 위대한 신 지혜의 흑룡이시겠죠?” “그렇소.” “어떻게 하실 건가요?” 테룬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만 한다면, 렌이 말하는 대로 한 번 해볼까 하오.” 테룬은 렌을 사랑하고 싶었다. 렌이 죽기 전에 제대로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괴로움, 렌을 향한 그 마음에 제대로 이름을 붙여 렌에게 주고 싶었다. 티르안 공녀는 ‘사람’이 ‘렌’을 가리킨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녀가 사랑하는 이 사람은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도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여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로 향할 것이다. 렌이 죽은 후에도 그의 가슴 속에 남은 렌의 그림자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한없는 무력감을 느꼈지만, 그래도 그녀는 테룬의 행복을 바랐다. 그것은 그녀의 일생에서 최초로 조건없이 남을 위해 뭔가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서제국 첩보부장 마스니와 한 약속, 렌의 다가오는 죽음, 테룬 황제의 고통, 어깨에 남아 있는 욱신거림이 모두 뒤범벅이 되었다. 머리가 무거워 제대로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밤새 한 점도 자지 않고 고민한 테룬은 마침내 마음을 정하고 병석에 누워 있는 8서클 마법사 쿠드를 찾아갔다. 그는 거의 20년 동안 동제국 황실의 수석마법사로 일하면서 황실의 비밀에 관여해왔었기에 펠리시티 전 황후의 일을 묻기에는 제격이었다. 쿠드의 침실은 황궁의 한쪽에 위치해 있었다. 수상에게조차도 허락되지 않은 황궁 내의 침실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는지 알 수 있었다. 최근 두 번의 심장발작 때문에 쿠드의 얼굴에는 사색이 가득했다. 이제 50대 중반에 이른 그에게 세 번째 발작이 찾아오는 순간 그는 바로 죽은 목숨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 테룬도 알았다. 쿠드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테룬이 제지했다. “쿠드, 미안하다. 그대가 나 때문에 무리를 하다가 이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무척 죄스럽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이 쓸모없는 노신에게 어인 일이십니까?” 테룬은 헐떡이며 묻는 쿠드를 내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펠리시티 전 황후 말인데.” 쿠드는 눈에 띄게 긴장했다. “그녀의 과거를 얼마만큼 알고 있지? 그대가 아는 건 전부 다 내게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쿠드는 애써 태연하려 했다. “폐하께서도 그 마지막 비극의 순간에 듣지 않으셨습니까. 어린 나이에 팔려가셨다가 다시 황궁으로 팔려 오시고, 제2황후가 되시고, 폐하를 낳으시고,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그렇게 돌아가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아는 건 그 정도가 다입니다.” 테룬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쿠드를 다그쳤다. “그대가 아는 게 그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아는 건 단 하나도 빠짐없이 몽땅 다 내게 말해다오.” 쿠드는 테룬이 다그치자 절망적인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폐하, 이제 다 끝난 일입니다. 제발 덮어두소서. 과거의 악몽을 끄집어내면 유령들이 튀어나오기 마련입니다. 펠리시티 마마께서 그렇게 돌아가심으로써 모든 것은 다 일단락 지어진 것입니다.” “말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는가?” “그렇습니다. 일국의 황후가 그런 지저분한 과거를 지녔다는 것이 다른 나라에 알려지면 우리 파이브룬 제국의 위엄은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왜 굳이 그런 일을 하려 하십니까?” “정말로 그것이 모든 이유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가? 다른 이유가 튀어나온다면 그대가 책임지겠는가?” 테룬은 험악한 표정으로 쿠드에게 거듭 물었다. 쿠드는 눈물을 흘렸다. “폐하, 노신을 이제 그만 괴롭히소서.” 그가 숨을 몰아쉬기 시작하자 테룬은 하는 수 없이 포기했다. “다시 오겠다. 그리고 그대가 말해주지 않더라도 나는 다른 신하들을 동원해서 모든 것을 알아내겠다.” “폐하!” 쿠드는 울부짖었다. 테룬은 쿠드의 방을 떠나면서도 지나치게 완강한 쿠드의 태도가 의아했다. 무언가 불쾌하고 끈적끈적한 것이 머릿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대체 그는 무엇을 감추려고 하는 건가. 테룬이 채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궁내관 한 명이 황급히 달려왔다. “폐하! 쿠드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뭐라고!” 테룬은 즉시 쿠드의 방으로 다시 달려갔다. 연락을 받고 불려온 라우프도 이미 그 자리에 있었다. 라우프는 능숙한 손길로 쿠드의 가슴 위를 더듬고 있었다. 테룬이 들어오자 그는 길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폐하, 쿠드님께서는 자결하신 듯합니다.” “자결이라고?” 테룬은 경악했다. “예, 심장 부근에 마나의 폭발이 있었습니다.” “혹시 심장발작 때문에 마나의 폭발이 있었던 건 아닌가?” 라우프는 고개를 저었다. “심장발작이 일어나는 경우 심장의 힘이 떨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심장 주위의 마나는 평소보다 희박해집니다. 그런데 지금 쿠드님의 심장 주위에는 상당히 강한 마나가 잔류해 있습니다. 명백히 시전자 스스로가 심장에 과도한 마나를 주입한 것입니다. 심장이 감당하기 힘든 마나를 한꺼번에 억지로 부르면 심장이 터져버리는데, 고위마법사의 경우 자결에 종종 그런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 라우프의 자세한 설명에 테룬은 일단 수긍했다. 왜 자살했을까. 그의 마음속에서는 의혹이 먹구름처럼 번져갔다. 테룬은 이제 일종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과거의 일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아직 정식 임명절차를 거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황궁 마법사로 활동하게 된 라우프는 테룬의 명에 따라 심복 몇 명과 함께 동제국 구석구석을 다니며 펠리시티 전 황후의 과거에 대한 정보를 가져왔다. 펠리시티 전 황후는 카로딘 대공국 출신이었다. 그녀는 카로딘 대공국과 동제국 황제직할령의 접경지역, 울창한 아열대림 숲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러다가 열세 살 때 인근 인페드 시의 세력가 상인에게 양녀로 보내졌고, 열여섯 살 때 다시 그 상인에 의해서 동제국 황제인 하라스 4세, 즉 테룬의 아버지에게 바쳐졌다. 그리고 겨우 일 년 만에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여기까지는 조금이라도 정보에 밝은 사람이라면 대체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거기까지는 나도 알고 있다. 그밖에 새로운 내용이 없는가? 펠리시티 전 황후의 가족이나 이웃이나,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는가?” 테룬이 채근하자 라우프는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실은 펠리시티 마마와 어느 정도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테룬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고, 펠리시티 전 황후의 나이로 보아 가족이나 친척 중에는 아직까지 살아 있는 사람이 많을 텐데? 예를 들어, 그녀의 어머니나 아버지, 즉 내 외조부모는?” “펠리시티 마마께서는 열세 살 무렵에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펠리시티 마마의 아버지께서는 마마께서 폐하를 낳으신 후 얼마 안 되어 돌아가셨습니다. 펠리시티 마마를 선황 폐하께 바친 그 대상인도 역시 펠리시티 마마께서 폐하를 낳으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습니다.” “그랬군.” 라우프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계속 말했다. “실은 펠리시티 마마의 친아버지와 양아버지의 죽음 모두 자연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라우프는 조금 덜 껄끄러운 이야기부터 먼저 꺼냈다. “펠리시티의 마마의 양아버지, 즉 문제의 대상인은 코뷸린이라는 자였는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21년 전 어느 날 지나가던 용병의 칼에 다섯 토막이 나 죽었습니다. 저는 인페드 시 기록보관소에 남아 있는 수사기록과 검시기록을 뒤져보고 뭔가 의혹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용병의 신분으로 그 지역을 좌우하는 엄청난 세력가를 살해했다면 아주 철저한 수사가 진행되었어야 하는데, 그 당시 수사는 지극히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용병은 겨우 이틀 동안 인페드 시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추가조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이감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감 도중에 일행 전체가 산적의 습격을 받아 전멸했습니다. 범인인 용병을 포함해서요. 수사는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정말 이상하군.” “예, 그리고 펠리시티 마마의 친아버지의 죽음에도 약간의 의혹이 있습니다. 그는 동제에서 유명한 주정뱅이로, 딸을 팔아 받은 돈을 몇 년 안 되어 모두 탕진한 후 폐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원래대로라면 그는 총애받는 제2황후의 아버지로서 부귀영화를 누려야 했겠지만, 그는 자신이 황후의 아버지라는 걸 떠벌리지 않고 조용히 있었지요. 공식적으로는 대상인 코뷸린이 펠리시티 마마의 친아버지로 알려져 있었으니까요. 그러다 그는 어느 날 술에 취해 마을 늪가로 들어갔는데, 거기에서 악어 떼의 습격을 받아 갈갈이 찢겨진 채 죽었습니다. 아주 참혹한 죽음이었습니다.“ 테룬은 끔찍한 광경을 상상하고 치를 떨면서도 물었다. “그런 일은 남국의 아열대 지방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대체 무슨 의혹이 있다는 건가?” “그가 죽기 얼마 전부터 마을 늪으로 가는 길은 높은 말뚝으로 막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굳이 그가 그 늪으로 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고 나서 이틀 정도 후 그 늪가에서 그의 발자국과 함께 다른 사람 두 명의 발자국을 발견했다는 어느 나무꾼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매일매일 비가 와서 발자국이 금방 씻겨나가지만 그 무렵은 이상하게 비가 뜸해 발자국이 지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발자국이라니, 그것도 역시 이상하군. 펠리시티 전 황후를 알던 이웃 사람들은?” “그녀의 집 가까이에 어느 노마법사가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펠리시티 마마를 귀여워하고 학문도 조금 가르쳐주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펠리시티 마마는 그 집에 발길을 끊었고, 그 노마법사는 그 후로는 펠리시티 마마나 그 집안과 일체 관계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그 노마법사는 아직도 생존해 있는가?” “역시 폐하께서 태어나신 후 조금 지나 죽었습니다.” 테룬은 입을 쩍 벌렸다. 이제는 도저히 우연이라고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죽었지?” “심장이 터져서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한 마법사의 심장발작이라고 생각했던 듯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쿠드님과 마찬가지로 마나를 폭발시켜 자결했든가 다른 마법사가 손을 써 심장을 터뜨린 것 같습니다.” 테룬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결론을 차마 입에 담지 못했다. 그러나 라우프 또한 이미 이 모든 죽음이 펠리시티 전 황후의 짓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테룬은 라우프의 눈에서 그의 생각을 짐작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버럭 화를 냈다. “이렇게 모든 게 다 막혀버려서야! 어쩌라는 거야! 그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이렇게 아무도 없나?” 라우프는 테룬의 역경을 예상했다는 듯 ? 恣낯?숙이며 대답했다. “한 명이 있기는 있습니다. 펠리시티 마마의 어머니와 아주 가깝게 지냈던 동네 아낙인데, 상당히 노쇠했지만 아직 기억은 또렷해서 폐하의 궁금증을 약간은 풀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고? 어서 그 아낙을 데려오라!” “예.” 라우프는 시동으로 하여금 황제집무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낙을 불러오게 했다. 평생에 걸친 고된 노동으로 삭아 쪼그라든 노인이었다. 그녀는 황궁 구경은커녕 태어나서 지금까지 고향 마을을 떠나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눈을 어디다 둘지, 절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개를 숙여야 할지 들어야 할지 몰라 쩔쩔 맸다. 테룬은 약간 짜증내며 성급하게 물었다. “그대 이름은 뭐지?” “아, 아딘입니다.” “그대는 내 모후인 펠리시티 전 황후를 알고 있나?” 아낙은 부들부들 떨며 바닥에 납작 엎드려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폐하. 전 황후 마마의 모친이 제 친구였습니다.” “펠리시티 전 황후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지?” 아낙은 황제의 질문에 사시나무 떨 듯 떨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불행했나?” 황제의 거듭된 질문에 아낙은 통곡하기 시작했다. “폐하! 저는 모릅니다! 저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묻지 마시고 그저 저를 죽여주십시오!” 황제는 짜증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너는 분명히 뭔가를 알고 있다! 왜 대답하지 않는 것이냐!” “폐하! 제발 더 묻지 말아주십시오! 모든 것은 제 죄입니다!” 아낙은 계속 울부짖다가 갑자기 벽난로 쪽으로 몸을 던졌다. 날카로운 벽난로 창살 끝이 그녀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아낙의 입에서 혀가 튀어나오고 가슴에서는 피가 콸콸 쏟아졌다. 피 냄새와 배설물 냄새가 황제집무실에 순간적으로 가득 펴졌다. 테룬과 라우프는 망연자실하여 한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했다. 테룬은 결국 샤이트를 불러 도움을 구했다. 그러나 샤이트는 다짜고짜로 마음속에 있던 말을 뱉어냈다. “폐하, 과거의 악몽을 깨우는 일은 이제 그만두십시오. 대체 왜 지나버린 고통스런 과거를 파헤치려 하십니까? 과거를 그냥 잊으시고 미래를 바라보실 때가 아닙니까? 과거를 안다고 해서 바꿀 수는 없지 않습니까? 벌써 쿠드님도 자결하시고, 펠리시티 전 황후의 고향에서 불러올린 그 아낙도 자결하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 고통스러우시다는 것은 잘 압니다. 폐하께서 보통 사람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힘든 일을 많이 겪으셨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이 파이브룬 제국을 끌어나가실 황제이십니다. 폐하께서는 더 한층 힘을 내셔서 한갓 덧없는 마음의 고통 따위는 극복하시고 우리 제국을 강대국으로 길러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척이나 일리 있는 샤이트의 말에 테룬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샤이트는 말을 계속했다. “폐하, 지금 폐하께서 하고 계신 일은 렌 아가씨의 조언에 따른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녀가 하는 조언이 과연 제국을 위해 최선이라 할 수 있을까요? 한갓 치료사 소녀가 정치와 제국의 운명에 대해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조언을 충실히 따른다 해서 과연 폐하의 마음의 병이 나을 수 있겠습니까? 저도 전해 들었습니다. 그녀 스스로도 마음의 병은 전문이 아니라고 했다면서요. 그리고 폐하께 펠리시티 마마를 이해하고 용서하라고 했다면서요. 폐하, 이해와 용서에도 한계가 있는 겁니다. 저는 그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펠리시티 전 황후는 단 한 점도 용서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그저 단죄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건 아직까지 제 의심에 불과하지만, 펠리시티 전 황후는 자신의 과거와 조금이라도 깊이 관련된 사람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과거를 파헤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테룬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렌과 티르안 공녀를 뺀 모든 사람이 다 그에게 과거를 파헤치는 일을 그만두라 하고 있었다. 샤이트마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펠리시티 전 황후가 그렇게 철저히 없애버린 과거를 이제 와서 파헤친다는 것이 너무 힘겹게 느껴졌다. “알았다. 생각해보겠다. 하지만 렌의 의견을 다시 물어보겠다.” 테룬은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렌에게로 갔다. 렌은 이제 더 이상 테룬을 물리지 않았고, 그것만으로도 그는 감사했다. 테룬은 전보다도 더 해쑥해진 렌의 얼굴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이제 그의 눈에도 렌의 얼굴에 깃든 죽음의 그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인 일이십니까?” 렌이 묻자 테룬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다들 날더러 이 일을 그만두라고 해. 과거를 헤집으면 상처만 더 커질 거라고들 한다. 어떤 사람은 죽기까지 했어. 내가 알기로는 어머니의 과거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이제 없어.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테? 湧?안타깝게 물었다. “그냥 모든 것을 덮어둔 채 지금처럼 계속 살아가실 수 있겠어요? 만약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면 그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렌은 측은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럴 수는 없다!” 테룬은 평생 자기 앞에 펼쳐질 지옥 같은 불행을 상상하고 몸을 떨었다. “그러면 지금 품고 계신 펠리시티 마마에 대한 기억만으로 그녀를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그녀를 이해하는 토대가 될 수도 있을 테지요.” 테룬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다는 것이 내키지 않아 얼굴을 찌푸렸다. 때마침 티르안 공녀가 렌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테룬이 렌의 방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방해가 된다면 나가겠습니다.” 티르안 공녀가 딱딱하게 말하자 렌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폐하를 돕기로 결심한 것은 타림 안딘 마마 덕분이니 원하신다면 이곳에 함께 계셔도 좋습니다. 폐하께서도 괜찮으시지요?” 렌의 물음에 테룬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렌에게 사의를 표하는 티르안 공녀의 마음은 쓰렸다. 그러나 그녀는 테룬에 관한 모든 것을 빠뜨리지 않고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그녀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지라도 최소한 지켜보기는 해야 했다. 공녀가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도록 구석의 의자에 앉은 것을 보고 렌은 다시 물었다. “한 번 기억나는 대로 떠올려보십시오. 어머니와 관련된 최초의 기억이 뭐지요?” 테룬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시동이 와서 엘프 마법사 라비언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들어오시라고 할까요? 괜찮으시겠어요?” 테룬은 거절하려다가 다시 마음을 바꿔 고개를 끄덕였다. 동제국에 그토록 큰 은혜를 베푼 흑룡을 거절하는 것은 그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데이그랜은 곧 빙글거리며 들어왔다. “하하, 여기 모두 와 계셨군요. 영리한 타림 안딘 마마께서는 벌써 제가 흑룡이라는 걸 눈치채셨다고요?” 데이그랜의 말에 티르안 공녀는 흠칫 놀라 일어섰다. 그러나 데이그랜은 안심하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자, 하시던 거 계속하시죠. 저는 그저 구경만 할 테니까요.” 데이그랜은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다. 렌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테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테룬은 안락의자에 앉아 몸을 기댔다. 어머니와 무척 닮았지만 다정하고 슬픈 빛을 띠고 있는 렌의 얼굴이 그에게 힘을 주었다. “최초의 기억이라...... . 그래, 아마 내가 다섯 살 정도 되었을 때의 일인가. 아름다운 정원이었어. 아마 황궁의 후원 뜰이었던 듯해. 내 기억 속에서 어머니는 눈부시게 아름다웠지. 그 시절 어머니는 나를 유모에게만 맡겨두고 거의 돌보지 않으셨던 것 같아. 그래도 그날은 웬일인지 나를 만나주셨어. 나는 꽃이 만발한 정원의 벤치에 앉아 있는 어머니가 이야기 속의 천사처럼 생각되었어. 나는 주저하면서 어머니께 다가갔어. 나는 언제나 먼발치에서만 어머니를 보았던 것 같아. 그래도 어머니가 내게 무척 소중하신 분이라는 건 알고 있어서, 언제나 유모들에게 보챘어. 왜 어머니는 안 오시냐고. 그러면 유모들은 어머니는 황후라서 바쁘시니까 내가 참아야 한다고 달랬어. 그렇지만 아제룬 형님의 어머니는 황후인데도 언제나 아제룬 형님 곁에 계셨어. 내가 형님에게 놀러 가면 제1황후 마마께서 형님을 대하시는 태도가 나를 대하시는 태도랑 조금 다르다는 걸 어린 마음에도 느꼈어. 그래서 항상 어머니가 곁에 있어주시는 형님이 몹시도 부러웠어. 그걸 느낄 때마다 나는 어머니께 달려가 울고 싶어졌지. 그날 나는 딱 그런 기분이었어. 그래서 눈물을 글썽이며 어머니께 달려갔어. 하지만 어머니는 나를 보자 얼굴을 차갑게 굳히더니 이렇게 말하셨어. 아, 나는 아직까지 그녀의 말을 기억해. ‘어머, 누가 이 아이를 여기 데려온 거야? 누가 이 애 좀 데려가 줘! 내가 아이를 싫어한다는 걸 잘 알잖아?’ 가면을 쓴 것같이 차가운 어머니의 얼굴은 무섭게 아름다웠어.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렇게 느꼈어. 나는 너무 뜻밖의 쌀쌀맞은 반응에 놀라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어. 그래도 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어머니의 옷자락을 움켜쥐었어. 그러자 어머니는 더러운 물건이라도 닿은 듯 흠칫하며 내 손을 뿌리치셨어. 나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더 한층 크게 울었어. 수석유모가 놀라서 달려와 나를 품에 안아 다른 곳으로 데려갔지. 나는 유모의 품에 안겨 엉엉 울면서도 어머니를 돌아보았어. 어머니는 멍하니 의자에 앉아 계셨어 . 참으로 이상한 표정을 하고 계셨지. 그러다 어머니는 다시 내 쪽을 쳐다보더니 울고 있는 나를 보고는 무어라 하려다가 고개를 돌리셨어. 나는 다시 서럽게 울었어. 유모는 몹시 측은해하며 나를 계속 달랬어. 하지만 유모의 눈길은 제1황후 ? 떳떤꼈?나를 보시는, 그저 동네의 불쌍한 아이를 보는 것 같은 그런 눈길이었어. 제1황후 마마께서 친아들 아제룬 형님을 볼 때의 그 뭐라 할 수 없는 한없이 자애로운 눈길은 아니었어. 나는 알았어. 내가 바라는 그런 눈길은 오로지 어머니만이 줄 수 있는 건데, 내 어머니는 내게 그런 눈길을 줄 마음이 없다는 걸.“ 가엾게도, 렌은 한숨을 쉬었다. “다른 기억은요? 어린 시절은 어땠지요? 펠리시티 황후 마마와 종종 만날 기회가 있으셨나요?” 렌의 물음에 테룬은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황궁의 아이는 빨리 자라지. 모든 사람이 황궁의 아이들에게 자기의 무언가를 걸기 때문에 황궁의 아이들은 지나치게 많은 것을 짊어지고 원래 자기 나이보다 더 빨리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게 되지. 나는 일여덟 살 정도 되어서부터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알게 되었던 것 같아. 나보다 다섯 살 위인 아제룬 형님은 놀라울 정도로 아버지를 닮아갔어. 문약한 거라든지 소심한 거라든지. 다 그랬지. 그에 반해 나는 파이브룬 대공과 하라스 대제를 닮았다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어. 커갈수록 점점 그랬어. 내가 검에 대해 놀라운 재능이 있다는 것이 알려진 후에는 사람들은 공공연히 내가 하라스 대제의 화신이라고들 했어. 아버지의 태도는 복잡했어. 자기와 닮은 큰아들을 측은하고 딱하게 여긴 반면 자신을 전혀 닮지 않은 나는 무척 자랑스러워 하셨어. 그게 너무 눈에 띌 정도여서 귀족들 중 일부는 서서히 나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어. 내 어머니는 그들을 이용하셨지. 그녀는 그런 귀족들 앞에서 전시하고 자랑하기 위해서만 나를 찾으셨어. 내가 다섯 살이었다면 속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미 나는 어머니의 의도를 알 정도로는 철이 들어 있었어. 어머니께서 나를 부르실 때마다 나는 무척 화가 났어. 그러면서도 나는 어머니께서 부르시면 그리로 달려가 착한 아들 노릇을 연기했지. 그런 자신이 혐오스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그때 잠시만이라도 나는 행복한 모자지간의 꿈을 꿀 수 있었으니까. 그래, 정말로 나는 스스로 어쩔 수 없었어.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중앙에 앉아 계시고, 그 주위에는 찬탄하는 얼굴로 그녀를 우러러보는 귀족들이 둘러앉아 있었지. 내가 궁내관의 손에 이끌려 방에 들어가면 어머니는 평소에는 절대 보여주지 않는 한없이 자애로운 눈빛을 하고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시는 거야. “테룬, 사랑스러운 내 아가.” 그 ‘내 아가’ 하는 말투는 너무 다정해서 나는 아기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싶어지곤 했어. 그래도 그때 이미 나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울음을 참을 수 있을 정도로 컸기 때문에 용케 참았어. 나는 필사적으로 애쓰며 무심하게 ‘어머니, 안녕하셨습니까?’ 하고 인사했지. 그래도 내 목소리에는 늘 내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과 갈망이 묻어 나와서 나는 얼굴이 붉어지곤 했어. ‘그래, 착한 아가, 이리 엄마 가까이 오렴.’ 그게 그녀의 정해진 대답이었고 다른 말은 하지도 않았어. 아, 하지만 나는 어머니가 ‘착한 아가’라고 나를 부르고 ‘엄마 가까이 오렴’ 이라고 할 때마다 그녀가 나를 정말로 착한 아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어. 내가 머뭇거리며 어머니께 다가가면 어머니는 팔을 뻗어 나를 그녀의 넓은 치마폭 속에 감싸듯이 안아주셨어. 치마폭이 흔들릴 때마다 엄마의 향기가 났어. 내가 꿈에도 그리던 엄마의 향기가. 나는 그때마다 내 어머니가 나를 정말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졌어. 하지만 내 머리를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길은 혐오감으로 떨렸고 내 몸을 감싸 안는 어머니의 팔은 내 몸에 단 일초라도 닿기 싫다는 듯 약간의 거리를 유지했어. 그래도 나는 비굴하게 그 자세 그대로 어머니 품에 안겨 있었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머니 곁에 있을 수 없었으니까. 나는 그림자처럼 그렇게 어머니 곁에 서 있고, 어머니는 나를 화제로 귀족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셨어. 주로 내 칭찬이었지만 나는 어머니가 날 교묘하게 이용해서 스스로의 지위를 강화시키려 하신다는 걸 눈치챘지. 그래도 나는 어쩔 수 없었어. 나는 어린애였고, 아이에게 어머니는 너무 절대적인 존재였으니까. 나는 혹시라도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봐 의젓하고 품위 있는 태도로 어머니 곁을 지켰어. 손님들이 가고 나면 어머니의 태도는 늘 바뀌었어. 순식간에 가면을 쓴 듯 차가운 표정으로 변해서 무슨 혐오스러운 파충류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것처럼 나를 밀쳐내셨지. 나는 늘 각오하고 있으면서도 늘 상처받았어. 그렇게 나를 밀쳐내신 다음에 어머니는 가끔씩 짓곤 하던 그 복잡한 표정을 지으셨어. 그러다 금방 외면하고는 궁내관에게 외치셨지. ‘궁내관, 황자를 모셔가도록!“ 언제나 그것이 끝이었어. 그런 모임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있었어. 나는 스스로 몹? ?한심해하면서도 그렇게나마 어머니와 만날 수 있다는 걸 기뻐했어. 그리고 다시 그런 자신에게 비참해했어. 내 혼란은 밖으로 표나게 보일 정도가 되어서 주위 사람들은 걱정했지. 나는 어머니와 만나기 전날이면 흥분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와서는 몹시 상태가 안 좋아져서 울면서 토하곤 했거든. 내 유모는 그런 나를 무척 걱정해서 때때로 나를 말리곤 했지만, 나는 그래도 어머니께서 부르시면 다시 가지 않을 수 없었어. 아버지를 뵈러 갈 때에도 비슷했어. 그때에도 어머니는 평소에 하지 않던 다정한 어머니 역할을 연기하셨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머니의 연기에 맞춰드렸지.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셨어.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도 나름대로 복잡하셨던 것 같아. 아버지가 아제룬 형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았어. 형님에게 보이는 아버지의 애정은 동물적이고 확실했지. 아버지의 나에 대한 애정은 반면에 동경하지만 스스로는 절대 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갈망 같은 것이었어. 질투와 자격지심이 섞인 그런 애정이랄까. 그래도 나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다는 걸 알고 있었고,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릴 일은 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아버지 앞에서는 더 열심히 다정한 모자지간을 연기했어. 아버지는 원래 눈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분이셨으니까, 쉽게 속아 넘어가셨지. 그렇게 한 번씩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알현하고 나면 나는 온 몸이 땀에 젖어 쓰러질 정도로 지치고, 어떨 때는 정말로 기절해서 쓰러지기도 했어. 그런 나를 지탱해주는 것은 매일매일 더 재미가 붙어가는 검술뿐이었지. 유모가 끝내 갈린 것도 그 일과 관련해서였어. 그녀는 어느 남작의 딸로, 젊은 시절 남편과 아기를 잃고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나를 돌보아왔는데, 내가 어머니를 만나고 올 때마다 몹시 흔들리고 날이 갈수록 말수가 적어지니까 마침내 용기를 낸 거야. 내가 열 살 정도 무렵이었던가. 그녀는 어머니께 가서, 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고 나를 어머니답게 제대로 사랑하고 아껴주든지 아니면 아예 나를 내버려두어 달라고, 그러면 자신이 나를 키우겠다고 했어. 엄청난 월권행위였지. 사실 목숨을 건 거나 마찬가지였어. 어머니는 당연히 불같이 화를 내시어 유모를 내치셨어. 지하감옥에 가두셨지. 그 소식을 듣고 나는 어머니께 달려가서 애원했어. ‘어머니! 유모가 잘못한 건 맞지만 그녀는 저를 위해서 그런 거예요! 제발 그녀를 용서해주세요!“ 그러자 어머니는 흥분하셨어. ‘너는 이 어미보다 그깟 유모가 더 중요하다는 거냐!’ 나도 흥분했어. ‘유모가 저를 돌보는 동안 어머니가 제게 해주신 게 뭔데요! 모임에서 저를 보란 듯이 전시한 거 말고 대체 뭘 하셨죠?’ 그 말을 듣자 어머니는 이성을 잃으셨어. ‘내가 해준 게 뭐가 있냐고?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어머니는 빨갛게 물들인 날카로운 손톱으로 내 몸을 움켜쥐었어. 옷자락이 말려 올라가 손톱이 내 오른쪽 옆구리를 파고들었어. 나는 너무 아파 비명을 질렀지만,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어머니의 눈물이었어. 어머니는 마치 상처받은 게 내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듯이 펑펑 울고 계셨어. 나는 당황했어. ‘어머니, 이러지 마세요! 어마마마! 어머니 말씀 잘 들을 테니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제발 울지 마세요!’ 나는 뭐라 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죄스러움에 가득 차 외쳤지. 너무 큰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나는 어쩔 줄을 몰랐어. ‘네 약속을 내가 어떻게 믿지? 너도 결국 배신할 거잖아!’ ‘절대 아니에요!’ 나는 대체 무슨 배신을 말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기계적으로 대답했어.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아? 너만 없었더라면! 네가 그걸 다 보상해줄 수 있어? 내 인생을?’ 어머니는 저주에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어. 나는 몸을 떨었어. ‘어머니가 하라시는 대로 뭐든지 다 할게요! 제발! 절 놓아주세요! 제발 울지 마세요!’ ‘너도 남자야! 너도 나를 괴롭히고 비참하게 만들 거야! 내게 고통만 줄 거야!’ 어머니의 목소리는 독기와 증오로 차 있었어. 그 미움이라는 건 너무 생생해서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았어. 나는 안간힘을 다해서 아직도 내 옆구리에 파고든 채였던 어머니의 손톱을 떼어냈어. ‘어머니, 어머니는 왜 절 미워하세요? 제가 뭘 잘못했기에 그렇게 저를 미워하세요? 말씀해주세요! 차라리 말씀해주시고 저를 벌주세요!’ 나는 어머니처럼 펑펑 울며 악을 썼어. 어머니는 내 물음에 갑자기 울음을 멈추셨어. 그리고 보통 때의 그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돌아갔어. ‘왜 널 미워하냐고? 왜 내가 널 미워하겠어? 너는 내 아들인데, 나는 널 사랑한단다. 네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이셨 어. 아, 펑펑 울던 모습보다, 그 차갑고 냉정한 얼굴보다, 미소짓는 어머니의 모습이 나는 더 무서웠어. 나는 이제 더 이상 어머니께 애원해도 아무 진실한 대답도 나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어. 그래서 아픈 옆구리를 움켜쥐고 힘없이 황자궁으로 돌아왔어. 손톱이 파고든 자리는 살점이 떨어져나가 무척 아팠지만 나는 어머니가 한 짓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치유마법사를 부르지도 않고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혼자 앓았어. 다행히 나는 튼튼해서 염증을 이기고 곧 괜찮아졌지만, 흉터는 그대로 남았지. 유모는 감옥에서는 곧 나왔지만 내 곁으로 다시 오지 않은 채 먼 고향의 남작영지로 돌아가 버렸지. 그 후 내 옆에 더 이상 유모는 없었어. 나는 이제 유모가 필요한 어린애가 아니라는 이유로 유모를 두는 걸 거절했어. 이제 나는 더 이상 어머니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어. 검술 수련이 좋은 핑계가 되어주었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소드 마스터가 탄생할지 모른다는 기대로 모두들 술렁이고 있었으니까. 황실의 권위는 아버지 하라스 4세 폐하의 실정으로 거의 땅에 떨어지다시피 했고, 공국들은 저마다 황실의 감독에게 벗어나려고 꿈틀거리고 있었는데, 황실 직계에서 소드 마스터가 탄생하기만 한다면 그런 분위기는 일시에 쇄신될 수 있었지. 사실 소드 마스터가 있다고 해서 전쟁의 대세가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소드 마스터가 가지는 상징성이라는 건 어마어마하잖아. 서제국에 9서클 마법사가 있다면 동제국에는 소드 마스터가 있다는 것이 동제국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자부심의 원천이니까. 그래서 나는 황궁에서 좀 떨어진 교외의 별궁에서 지쳐 쓰러져 죽기 일보직전까지 검술을 수련했어. 아예 황궁을 나가지 않고 검술 스승들과 기타 과목 스승들을 제외한 외부인의 출입은 일제 엄금했지. 검술은 나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진보했고, 내 검술 스승들은 차례로 손을 들었어. 그리고 마침내 나는 15세 때 흔히 소드 마스터의 징표라고 여겨지는 검강을 시전할 수 있게 되었어. 나는 스스로 강해졌다고 생각했어. 나는 이제 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 더 이상 상처입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했어. 그 생각이 얼마나 오산이었는지 밝혀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내가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는 것은 비밀이었지만, 황궁에 비밀 따위는 없는 법이지. 아제룬 형님의 입장을 생각해서 모두들 쉬쉬하긴 했지만, 황궁의 무게중심은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내쪽으로, 그리고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어머니 펠리시티 황후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지. 어머니가 내 수련의 성공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어주셨을 때, 그녀는 놀랍게도 나를 보며 우셨어. 내가 이렇게 훌륭하게 장성해서 너무 기쁘다고, 그동안 내게 너무 소홀해서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나를 꼭 껴안아주셨어. 그녀의 손길에는 이전의 떨림은 없었어. 그리고 어머니의 품은 내가 꿈꿔왔던 것처럼 그렇게 다정하고 자애로웠어. 나는 다 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어머니가 안아주시자 나는 바보처럼, 아기처럼 울기 시작했어. 차갑게 굳어 있던 내 마음은 한 순간에 녹았어. 파티가 끝난 후에도 어머니는 계속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시고, 내 뺨에 키스하면서 ‘착한 아기’라고 속삭여주셨어. 아, 나는 계속 울었고 어머니는 내 뺨의 눈물을 부드러운 손수건으로 연신 닦아주셨어. 나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고, 그게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어. 바보같이 나는 어머니가 나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그동안 일부러 내게 차갑게 대하신 거라고 생각했어. 정말 바보 같았지. 그날 밤 이후 나는 그녀의 마수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니까. 어리석게도. 왜 아이는 그렇게 애타게 어머니를 갈구하는 걸까? 왜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되풀이해서 헛되게 어머니의 사랑을 찾는 걸까? 내가 뭔가 달라졌더라면 어머니는 나를 사랑해주셨을까?“ 티르안 공녀가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렌은 차분함을 잃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 후는요? 결국 펠리시티 마마께서는 아제룬 황태자에게 가셨다는데, 어떻게 된 거였죠?” 잔인할 정도로 정확한 렌의 물음에 테룬은 숨을 몰아쉬었으나, 오히려 렌의 냉정함이 고마웠다. “나와 어머니의 관계는 기억하고 있지? 나는 무척이나 피폐해졌어.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지켜본 어머니의 모습은 정말로 이상했어. 감정의 기복이 무척이나 심하고, 나를 사랑해주시는 듯하다가도 어떨 때는 무척이나 나를 증오하시는 것 같기도 했어. 나는 지쳤어.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죄의식이 나를 좀먹었지. 어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이 내게는 독이었어. 나는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었고, 더 이상 내가 나 자신이 아닌 것 같았지. 어느 날 나는 어머니와 대판 싸웠어. 더 이상 나를 망치지 마시라고 제발 이제 나를 내버려 두시라고. 어머니 답게 사랑해주실 수 없다면, 나라는 존재를 그냥 잊어버리시라고. 나는 어머니께 울면서 호소했어. 나는 무기력했고, 어머니의 자비에 기대는 방법 말고는 달리 힘이 남아 있지 않았지. 그러자 어머니는 무척이나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이셨어. ‘나는 언제나 네가 바라는 일만 한단다. 내 아들, 너만이 내 사랑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온몸에 소름이 기치는 것을 느꼈어. 내가 온힘을 다해 눈물로 호소하는 그런 순간에조차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면 그녀는 내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요녀, 악녀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지. 나는 안간힘을 다해 비로소 어머니에게서 벗어났어. 나는 이제 완전히 어머니를 내 마음속에서 지워버리겠다고 결심했지. 나는 그때부터 어머니를 전적으로 확실하게 증오할 수 있었어. 그 증오심이 내게 힘이 되었어. 그 무렵 어머니는 아제룬 형님을 유혹하셔서 결국 손아귀에 넣으셨지. 나는 어머니가 형님을 유혹해서 하루하루 망가뜨리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면서도 그들에게 관여하지 않고 홀로 검술만 수련했어. 어머니도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으셨어. 나는 어머니께서 형님께 가신 것이 아제룬 형님의 권력이 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소드 마스터가 된 걸 아시고도 아바마마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셨으니, 아바마마의 의중은 결국 형님을 계속 황태자로 놔두신다는 거였거든. 그래도 여전히 검은 내 친구가 되어주었어. 때때로 드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은 검을 잡고 검강을 마구 날리다보면 쓰러졌어. 그 무렵부터 내 발작이 시작되었지. 때때로 정신없이 칼을 휘두르고 피를 봐야 마음이 진정되는 그 증세 말이야. 나는 피나는 노력으로 그 증세가 전쟁터에서만 나타나도록 제어할 수 있게 되었고, 그 후 몇 번의 전쟁에 참전하여 수많은 병사를 도륙하며 명성을 전 대륙에 알리게 되었지. 내가 많이 죽일수록 나에 대한 칭송은 더 높아졌어. 전 제국의 무가와 검술가들은 모두 나를 동경하고 따르게 되었어. 그런 건 모두 내가 바라는 바는 아니었어. 하지만 내 명성이 너무 커지자 아제룬 형님의 장인인 폴코 공작은 병석에 누우신 아버지를 대신해 하루라도 빨리 아제룬 형님이 제위를 물려받게 하려고 공작에 나섰어. 내 어머니는 그에 대항해서 저 꿀과자 독살사건을 일으켰고. 그 다음부터는 모두 제국에 널리 알려진 대로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죽이고 내 칼에 쓰러지셨지. 그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는 말씀하셨어. 그녀의 양아버지에게 학대당해 온 이래로 평생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고, 모든 남자는 그녀의 적이었다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어. 나 또한 어머니의 적일 뿐이었어. 어떻게 한 아이의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적으로 삼을 수가 있지? 원래 어머니란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고 돌봐주는 존재가 아닌가? 테룬의 마지막 말은 울분으로 떨렸다. “그녀도 무척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같은데, 그녀를 이해해볼 생각은 없으신가요?” 렌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렌, 그대의 말을 듣고 나도 애써봤어! 그렇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 나는 어머니를 부인하고 증오함으로써 비로소 나 자신이 된 거야! 그걸 버리라는 건 나 자신을 통째로 부인하는 거다! 어머니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망쳐놨어! 나도! 아버지도! 형님도! 그녀가 무슨 고통을 당했든지, 그녀는 자기 안에서 그걸 더 악독하게 바꿔서 온 사방에 독기를 뿌리고 죽은 거야!“ 테룬은 악을 썼다. “어머니를 증오할 수조차 없는 것보다는 증오하는 게 차라리 낫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증오에서 오는 힘은 불안하고 파괴적이고 일시적입니다. 남을 증오함으로써 행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렌은 조용히 말했다. “아무리 애써도 이해가 안 되는 걸 어떡하란 말이야! 진심으로 이해하라면서? 그냥 이해하는 척하는 게 아니라 마음 깊이에서 이해해야 한다면서? 난 절대 그럴 수 없어! 그래, 어머니 입으로 직접 모든 설명을 들었으면 모를까, 절대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어!” 테룬은 털썩 주저앉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헤에, 어머니에게 저렇게 집착하는 건 젖먹이동물의 특성인가? 우리 드래곤은 절대 그런 게 없는데. 신기하군.” 데이그랜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자 렌과 테룬, 티르안 공녀는 모두 데이그랜을 쏘아보았다. “어이쿠, 미안.” 데이그랜은 무성의하게 사과했다. 어쨌거나 데이그랜의 말 덕분에 팽팽한 긴장은 다소 누그러졌다. 렌은 자신이 읽은 몇 권 안 되는 심리학책의 내용을 기억 속에서 더듬었다. 그러나 기억은 희미하고 빈약했다. 그때 조금이라도 더 정성껏 읽었더라면! 한 권이라도 더 제대로 읽었더라면! 렌은 한없이 안타까웠다. “제가 아는 건 일반론뿐입니다. 그것도 수박 겉핥기식으로요. 하지만 그거라도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게 나을 테니 말씀드리지 요. 부모에게서 학대받은 아이들이 자란 후에는 어떤지 아십니까? 모든 학대받은 아이들이 잘못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지니고 있게 됩니다. 어린 시절에 학대받았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내가 받은 것은 학대가 아니었어, 그건 별일이 아니었어, 그런 일을 겪는 사람은 많아, 나는 그냥 그런 일이 있다는 걸 잊어버릴 거야. 이렇게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라고 상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상처는 안에서 곪아가지요.“ “어머니가 날 학대하신 건 아니야. 그저 내버려두었을 뿐이지. 그녀가 다시 내게 접근한 건 내가 열다섯 살 때인데, 그때 나는 이미 사리분별이 가능한 나이였으니 그걸 학대라고 할 수는 없어. 나는 그저 그녀의 사악함에 분노할 뿐이야.” 테룬은 부정했다. “폭행, 성적 학대, 굶기거나 가둬두는 것만이 학대가 아닙니다. 감정적으로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말로써 아이를 괴롭히는 것, 그 모든 것이 다 학대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종류의 학대가 더 깊은 상처를 남길 수도 있어요. 데이그랜님, 좀 전에 젖먹이동물이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게 이상하다고 하셨지요? 그래요. 우리 포유류는 그렇게 태어났어요. 누군가가 돌보아주지 않으면 죽어버려요. 먹을 것을 주고 따뜻한 곳에서 재워줘도 다정한 손길과 부드러운 속삭임 없이는 인간의 아기는 죽어버린답니다. 아기를 어루만져주지 않는 것, 키스해주지 않는 것, 우리 아기 착한 아기라고 속삭여주지 않는 것, 그 모든 것이 다 끔찍한 학대입니다. 그리고 열다섯 살 때의 일이니까 성적 학대가 아니라고요? 오, 폐하, 아무리 폐하께서 어머니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감정적으로 어머니에게 매여 있고 그녀를 거역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면, 그녀가 그런 우월함을 이용해 폐하께 고통을 가한 것은 명백히 학대입니다.“ “그대는 어머니를 이해하라고 해놓고 왜 그녀를 다시 비난하는거지?” “폐하, 절대로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펠리시티 전 황후가 저지른 일은 모두 다 끔찍한 악행입니다. 절대로 그걸 정당화하셔서는 안 됩니다. 아이를 학대하는 걸 정당화할 수 있는 핑계 따위는 세상에 없습니다. 그건 모두 펠리시티 전 황후의 잘못입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왜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 그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다 렌은 한탄했다. “하지만 이제 펠리시티 전 황후의 과거를 캐낼 모든 끈은 끊겨버렸으니......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어요. 폐하께서는 그저 지금의 고통을 안고 사시는 방법을 배우셔야 할 겁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무기력함에 눈물이 나왔다. 역시 세상은 고통과 부조리로 가득하고 그걸 해결할 방법은 없다. 어쩔 수 없다. 그녀가 모든 문제에 대해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테룬 황제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불행한 사람도 아니다. 다들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어가는 것이다. 렌은 이제는 익숙해진 체념에 몸을 맡기고 베개에 힘없이 등을 기댔다. 피곤이 무거운 공기처럼 내려와 몸을 눌렀다. “렌, 펠리시티 전 황후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데이그랜은 갑자기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모두 깜짝 놀라 데이그랜을 쳐다보았다. “렌이 알다시피 우리 드래곤, 특히 지혜의 흑룡들은 오랫동안 계속해서 인간을 상대로 이런저런 실험을 해왔지요. 아, 화내지는 말아요. 그저 지적 호기심에서 그런 것이고, 우리의 눈에 인간들은 조금 영리한 원숭이처럼 보일 뿐이니까요. 500년 전쯤 나는 순수한 나무의 기운을 지닌 모녀를 잡아다 내 레어로 끌고 와서 이런저런 실험을 했습니다. 그때 참 여러 가지 실험을 했는데, 그중 한 실험을 하다가 나는 아주 재미있는 결과를 발견했습니다. 아, 그 실험은 내가 계획했던 것은 아니지만, 원래 위대한 발견은 다른 실험을 하던 도중에 우연히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건 내 다소 무리한 실험 때문에 딸 쪽이 먼저 죽어버리고 나서 석 달 정도 지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목숨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데이그랜의 담담함에 렌은 오싹했다. 그러나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인간들끼리도 서로 죽이는데 하물며 포유류와 파충류 사이에서는 오죽하겠는가. 데이그랜은 약 500년 전 일어났던 그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때 그는 거의 천 년 동안에 걸쳐 ‘순수한 기운의 인간’을 연구해왔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여러 가지 기운을 지니고 있지만, 가끔씩 인간들 사이에서도 드래곤처럼 드물게 다섯 가지 마나의 기운 중 하나만을 지닌 인간이 태어났다. 그런 사람들은 마법을 배우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마법서클이 올라가고, 마법을 배울 기회가 없더라도 자기 분야에서 빼어나게 두각을 나타내곤했다. 그 인간들이 데이그랜의 호기심 을 자극했다. 그래서 그는 한동안 인간 마법사 중 어린 나이에 8서클에 도달한 경우만 골라 납치해서 살펴보았다. 그들 중에는 간혹 수, 목, 화, 토, 금의 순수한 기운을 지닌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인간들은 정말 가물에 콩 나듯이 나타났다. 비율로 따지면 대략 2백여 년에 한 명 꼴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그보다 많겠지만, 세상에 알려진 경우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데이그랜은 500년 전 운 좋게 모녀가 모든 순수한 나무의 기운을 지닌 경우를 발견했다. 그때 그는 겨우 서른 살에 8서클에 이른 여마법사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녀를 찾아갔다. 그 여마법사를 보자마자 데이그랜은 그녀가 순수한 기운을 지닌 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외모는 청룡 안티니아, 순수한 나무의 기운을 지닌 존재와 똑같았던 것이다. 그 여마법사가 갑자기 나타난 흑룡 앞에서 겁에 질려 있는데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그녀의 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딸 또한 어머니의 판박이였고, 역시 순수한 나무의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순수한 기운을 지닌 사람이 태어날 확률은 하늘의 별따기이지만, 그 자식이 순수한 기운을 이어받을 확률은5분의 1 정도이고, 손자가 다시 그로부터 기운을 이어받을 확률은 다시 그 5분의 1이므로, 조부모가 순수한 기운을 지닌 사람인 경우 손자가 순수한 기운을 지닐 확률은 25분의 1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렇게 순수한 기운을 지닌 사람이 마법을 배우게 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고, 그런 사람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경우는 더더욱 드문데다가, 부모와 자식이 모두 살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그는 모녀가 모두 순수한 기운을 지닌 걸 발견했을 때 뛸 듯이 기뻤다. 데이그랜은 당장 그 자리에서 둘을 납치하여 자신의 레어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동안 꿈만 꿔오던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둘에게 강제로 마나끈을 연결한 후 한쪽에게만 나무의 기운과 상극인 금속의 마나를 주입해보기, 둘에게 물의 마나를 주입해서 그들 자신의 나무의 마나가 얼마나 증폭되는지 관찰하기 등, 할 실험은 무궁무진했다. 거듭되는 실험 끝에 어리고 약한 딸이 먼저 죽어버렸다. 사실 그녀의 죽음은 데이그랜의 실수였다. 어머니에게 주입해도 견디기 힘들 정도의 물의 마나를 딸에게 잘못 주입했던 것이다. 딸을 잃은 어머니는 미친 듯이 오열하며 넋이 나갔다. 약간의 죄책감을 느낀 데이그랜은 더 이상 실험을 하지 않고 그녀를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3개월 정도 지났을까, 그녀가 반쯤 넋이 나가서 하는 말이, 허공에서 딸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데이그랜은 처음에 반신반의했지만, 자세히 탐지해보니 그 딸의 기운은 아직 그 딸의 기운이 순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생명체가 지닌 대부분의 혼탁한 기운은 죽고 나면 바로 주위의 기운과 섞여버리지만, 순수한 기운의 경우는 다른 기운과 바로 섞이지 않고 한동안 뭉쳐 있게 되는 것이다. “맑은 냉홍차에 진한 시럽을 부으면 바로 섞이지 않고 저어주어야 하는 것과 비슷하지요.” 데이그랜이 가벼운 말투로 설명하자 다들 진저리를 쳤다. 죽은 인간의 기운을 가지고 그런 비유를 하는 데이그랜이 혐오스럽게 느껴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설명해나갔다. 갑자기 그 기운에 흥미를 느낀 데이그랜은 서서히 그 기운을 한곳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이미 섞여 흩어져버린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그는 죽은 딸의 기운을 거의 대부분 모으는 데 성공했다. 마나구 안에 그 기운을 가두어놓은 후 그는 그걸로 뭘 할까 고민했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한참 동안 내버려두다시피 했던 그 여마법사를 끄집어내어 그녀에게 죽은 딸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가더니 딸의 말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맙소사, 그런 일이!” 렌은 경악했다. “정말이지 나도 무척 놀랐습니다. 그녀는 이따금씩은 딸의 말투로 얘기하고 이따금씩은 자신의 말투로 얘기하면서 무척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꼭 딸의 영혼이 자신에게 빙의된 것 같다고 했지요. 내가 보기에는 그건 딸의 영혼이 아니라 그 영혼의 찌꺼기에 불과한 것 같았지만요. 하지만 적어도 혼자서 자작극을 벌인 건 아니었습니다. 그 어머니 쪽에서는 전혀 모르던 얘기를 딸 쪽에서는 여러 차례 했으니까요.“ 데이그랜은 지적 호기심을 번득이며 얘기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지요?” 데이그랜은 렌의 눈길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녀는 한동안 그 상태를 유지하다가 결국 미쳐서 죽어버렸지요. 그래서 내가 잘 묻어주었습니다.” 데이그랜의 대답에 침묵이 흘렀다. “그래서 지금 그 방법을 쓰자는 건가요?” 렌이 차갑게 묻자 데이그랜은 약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 꼭 그,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이 꽃의 방이라든지 황제? ?침실 부근에서 순수한 물의 기운이 떠다니는 걸 느낄 수 있는데, 그건 역시 일곱 달 전에 죽은 펠리시티 전황후의 기운이 아닌가 해요.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여기저기에 기운이 많이 남아 있어서, 모으면 아마 원래 그녀의 기운 중 7,8할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많이 남아 있는 건 이곳의 마법결계 덕분입니다. 내 레어와 마찬가지로 여기도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어 일부러 결계를 열지 않는 한 내부의 마나나 기운이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거든요. 만약 제대로 마나를 모으기만 하면, 모아진 순수한 물의 마나를 받아들일 순수한 기운의 인간인 렌이 여기 있으니까, 어쨌든 그 방법이 가능하긴 하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물의 기운을 지닌 인간이라면 저기 황제 폐하도 계시지 않나요?” 렌이 날카롭게 묻자 데이그랜은 고개를 저었다. “실은 죽은 자와 기운을 받아들일 자의 성별이 같아야만 합니다. 성별이 다를 경우 반발력이 생겨서 아주 위험합니다. 대개 죽은 자의 기운을 집어넣자마자 바로 죽거나 미쳐버립니다. 그 실험도 해봐서 압니다. 그러니 펠리시티 전 황후의 기운을 받아들일 사람은 렌밖에 없는거죠.” 티르안 공녀는 애타는 눈길로 렌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호소하는 것은 명백했다. 마지막 남은 이 방법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위험은 아랑곳하지 않는 맹목적인 무자비함이 가득했다. 렌은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이봐요! 그래요! 나는 지금 죽어가요! 하지만 적어도 나는 온전한 정신으로 죽고 싶어요! 내가 여기로 온 것은 평온하게 죽을 자리를 찾기 위해서였어요! 몸이 부서지는 고통은 참을 수 있어요! 하지만 내가 나 자신의 온전한 생각을 유지하지 못한 채 미쳐서 죽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어요! 나도 이제 지쳤어요! 그동안 그만큼 했으면 됐지 않나요? 이제 나도 그냥 편히 제정신으로 죽으면 안 되나요?” 렌이 갑자기 악에 받쳐 소리지르자 다들 놀랐다. 테룬이 몸을 일으켰다. “절대로 렌에게 그런 위험한 일을 시킬 수는 없다. 누구라도 렌에게 그런 일을 강요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테룬은 티르안 공녀를 쏘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공녀는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에 그의 눈길을 외면했다. 분노와 원망과 질투가 다시 한 번 공녀의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그저 그를 걱정했을 뿐인데! “렌, 내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는 렌이 하루라도 더 내곁에 있기를 바랄 뿐이다.” 테룬은 다시 슬픈 목소리로 렌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렌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미안해요.” 렌은 힘없이 말했다. 그리고 티르안 공녀를 향해서도 말했다. “미안해요.” 사람들은 조용히 방을 나갔다. 렌은 답답하고 괴로웠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녀는 정신의 자녀였다. 몸이 부서지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온전한 정신을 상실하는 것은 감내할 수 없었다. 미친 채로 죽음의 끝없는 공허함에 몸을 맡기는 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었다. 6장 눈물의 끝 카엔은 초조하게 축제날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부지런히 황궁에 관계된 사람들의 마음을 읽었다. 티르안 공녀는 그날 보았듯이 무섭게 총명했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도 간접적으로 움직여 테룬 황제로 하여금 렌을 ‘이노사 안딘’으로 책봉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렌은 거의 틀림없이 축제장에 나오게 될 터였다. 티르안 공녀는 정말 명석했다. 차기 첩보부장으로 발탁하고 싶을 정도였다. 파티에서 만난 수석시녀 사스트란 백작부인과 바리던 후작부인의 생각 속에도 특기할 만한 사항은 없었다. 사스트란 백작부인이 렌이 먹는 음식에 장난을 치고 마침내는 유리조각까지 집어넣었다는 걸 읽었을 때에는 그녀를 찢어죽이고 싶었지만, 카엔은 일의 진행을 방해하게 될까봐 겨우 그런 마음을 억눌렀다. 카엔은 두 수석시녀의 머릿속에서 렌이 테룬 황제를 만나러 간 것과 다시 테룬 황제와 티르안 공녀가 렌의 방으로 찾아온 일을 알아냈지만 그녀들을 모두 닫힌 방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는 없었다. 이런저런 일들을 다 처리한 그는 이제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카엔은 동제국 브림의 반 제과점 본점 앞에 서서 ‘오직 맛있는 것만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디오룬 데 반, 꿀과자의 창시자)’라고 새겨져 있는 구리판을 보며 감격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그렇다. 바로 이곳이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꿀과자의 탄생지인 것이다.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구리판을 쓰다듬었다. “폐하, 대체 여기서 무얼 하시려고요?” 마스니가 속삭였다. “두고 보면 안다.” 카엔도 마주 속삭였다. 실내는 동제국 최고의 제과점답게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서제국에서는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디자인의 온갖 꿀과자들이 아름다운 진열장에 가득했다. 카엔이 정신없이 유리에 코를 박고 과자 구경을 하는 동안 마스니는 조금은 한심한 기분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단 것에 관심이 없는 그녀는 꿀과자라면 환장을 하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귀여운 여자점원을 향해 마스니는 우아하게 말을 걸었다. “이곳의 주인, 반 백작부인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이미 연락문을 보내들렸습니다만......” 마스니의 말에 점원은 잠시 놀랐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제과점에 딸린 응접실에서 기다리자 잠시 후 밀가루 투성이 앞치마를 두른 마음씨 좋은 아줌마 같은 통통한 중년 여인이 나타났다. “고젠 백작부인, 에스틴 데 고젠님,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중년 부인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인사했다. 그녀는 빵집 아주머니처럼 보여도 사실 엄청난 이윤을 창출하는 반 제과점의 진정한 주인이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 반 백작은 오로지 제과 기술 하나로 백작위를 받아낸 반 가문의 현 계승자였다. 탁자에는 당연한 듯이 차와 함께 최고급 꿀과자가 놓여 있었다. 황급히 꿀과자를 하나씩 집어먹은 카엔은 곧 이루 말할 수 없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맛을 음미했다. ‘음, 서제국 본점보다도 한결 더 뛰어난 맛이야! 역시 꿀과자의 원조는 다르다는 건가! 이럴 줄 알았다면 동제국 반 제과점도 강제로 서제국으로 옮겨 오든지 수시로 여기 와서 사먹는 건데!“ 마스니가 자신을 향해 눈짓하자 카엔은 말을 시작했다. “사실은 부탁이 있습니다. 이런 디자인으로 꿀과자를 만들어주십시오. 그리고 제게 보내주십시오.” 카엔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서툴게 그려졌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서제국풍 꿀과자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꿀과자의 전문가인 반 백작부인만은 쉽게 알아보았다. “이걸 어디다 쓰시려는 건가요?” 반 백작부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고객의 비밀은 언제나 철저히 지키지 않으십니까?” “물론이지요.” “고객의 비밀을 절대로 발설하지 않으시는 게 반 제과점의 자랑이지요? 그래서 그 무수한 독살사건에서도 반 제과점은 살아남았지요?” 카엔의 눈빛은 영롱한 은보랏빛으로 반짝였고, 백작부인은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예, 우리는 절대로 고객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습니다.” “백작부인께서는 저 디자인의 과자 다섯 개를 만들어서 고젠 백작가로 보내주십시오. 직접 만드시고 직접 포장하신 후, 비밀리에 배달해주십시오. 오늘 저녁때까지 부탁드립니다.” “예.” “그 다음에는 다시 내일 점심때쯤 제게서 저 꿀과자를 다시 받아 가신 후 황실에 납품해주십시오. 정상적으로 황실 꿀과자랑 섞어서 납품하시면 됩니다.” “예.” “물론 비밀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모두 잊어버리시는 겁니다.” “예, 비밀입니다. 그리고 모두 잊어버리겠습니다.” 카엔은 눈에서 빛을 지웠다. 그는 렌과 정신조작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후 정신을 다치지 않는 다른 방법을 연구해왔는데, 지금 사용한 최면 및 암시도 그 방법 중의 하나였다. 효과는 조금 떨어지지만 전혀 부작용이 없기 때문에 얼마 전부터 그는 이 방법을 애용하고 있었다. 다만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피시전자의 원래 마음과 새로 주입하는 생각이 상충되지 않아야만 했다. 그래도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복잡하면서도 단순한가. 몇 가지 이해관계의 연상 작용만으로도 사람들은 쉽게 무의식을 열어주었다. 조금 전 일어난 일을 까맣게 잊고 영문을 모른 채 계속 미소짓고 있는 반 백작부인에게 카엔은 다시 상냥하게 말했다. “실은 제가 꿀과자의 열렬한 팬입니다. 제가 얼마나 꿀과자를 사랑하는지 알려드리기 위해 뵙자고 한 것입니다. 꿀과자가 있어서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카엔의 말에 반 백작부인의 미소는 커졌다. “오, 감사합니다. 사실 사람들이 꿀과자를 먹고 잠시나마 행복해하는 것이 저의 보람입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당연히 꿀과자를 사고 싶습니다만...... .” “그럼 제가 안내해드리지요.” 반 백작부인의 설명을 들으며 가게를 둘러본 카엔은 결국 꿀과자 종합5종세트를 9골드 98실버에 두 개 구입해서 고젠 백작가 저택으로 돌아왔다. 마스니는 아직도 의구심이 풀리지 않은 채였다. “무얼 하시려는 거죠?” “묻지 마라.” 카엔은 얼굴이 빨개졌다. 마스니는 더욱 궁금해졌으나 입을 다물었다. 꿀과자는 약속대로 저녁 무렵 배달되었다. 카엔은 자신이 서제국에서 즐겨 먹던 문양대로 완벽하게 꿀과자가 만들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꿀과자를 집어든 그는 조심스럽게 꿀과자를 요리조리 돌려보고는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 다음 손에서 은보랏빛을 일으켜 꿀과자를 휘감았다. 그 다 음이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카엔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사랑하는 나의 렌...... . 그대가 내 곁을 떠난 뒤로 나는......나는....... .” 더듬거리던 카엔은 화를 내며 꿀과자를 부숴버렸다. “맙소사! 이렇게 더듬거리다니!” 그는 다시 목청을 가다듬고는 두 번째 꿀과자를 집어 들었다. “내 사랑하는 렌......내 마음속의 꽃. 나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그대를 생각하고 눈물을 글썽입니다. 아, 제길! 이렇게 유치찬란하다니!” 그는 두 번째 꿀과자도 부숴버렸다. “폐하, 차라리 먼저 글로 쓰신 후에 읽으시지요.” 방 밖을 지나다가 우연히 카엔의 목소리를 엿들은 마스니는 안간힘을 다해 웃음을 참으며 충고했다. 카엔은 소리를 질렀다. “무엄하구나, 마스니!” “예, 망극하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가지고 있는 로맨스 소설이라도 몇 권 빌려드릴까요?” “닥쳐라!” 마스니는 킥킥대며 사라졌다. 카엔은 부서진 꿀과자와 이제 겨우 세 개밖에 남지 않은 성한 꿀과자를 번갈아 내려다보다 결국 마스니의 충고에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가 굳이 꿀과자에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 렌에게 보내기로 한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동제국 황궁의 결계는 마법물품의 출입도 통제한다. 마법에 걸린 아이템이 허가 없이 황궁의 출입문을 넘나들면 반드시 경보가 울리고 출입은 정지된다. 하지만 꿀과자는 다르다. 꿀과자의 경우는 꿀을 얼리는 과정에서 반드시 마나가 작용하고, 특히 갓 만들어진 따끈한 꿀과자의 경우 그 마나량은 마법결계에 걸릴 정도에 이른다. 그러나 꿀과자의 황궁 내 일일소비량은 상당하기 때문에, 그 수많은 꿀과자가 왔다 갔다 할 때마다 그걸 일일이 검사하다 보면 날이 새버리고, 결계는 정상적으로 운용될 수 없다. 그래서 꿀과자는 결국 마법결계의 검사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니 카엔이 꿀과자에 음성전달마법을 걸더라도 마나의 수위만 적절히 저절한다면 황궁의 결계를 통과하여 렌의 손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수많은 과자 중 그의 마법이 걸린 과자가 렌의 손까지 전달되는 것은 어려운 과정이지만, 적절히 암시를 사용하기만 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일단 꿀과자에 새겨진 서제국 문양을 보기만 하면 렌은 그게 카엔이 보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것이다. 책상에 앉은 카엔은 펜을 집어 들고 고민했다. “사랑하는 나의 렌.” 그 다음은 도무지 써지지 않았다. 아, 아까 마스니에게 화내지 말고 로맨스 소설이라도 빌려달라고 할걸 . 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하던 그는 마침내 밤을 새워 연애편지를 완성했다. 완성된 꿀과자는 다음날 점심 무렵 반 제과점에서 찾아온 배달꾼의 손에 전해졌다. 카엔은 투명마법을 써서 이동하면서 꿀과자가 그가 의도한 경로를 따라가는지 계속 지켜보았다. 반 백작부인은 약간 몽롱한 눈으로 꿀과자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오자 즉시 배달꾼의 손에서 꿀과자 상자를 낚아챘다 . 배달꾼은 약간 의아해했으나 곧 잊어버렸다. 사실 그가 이 일을 잊어버린 것도 카엔의 암시에 의한 것이었다. “배달하면서 제일 좋은 일은 뭐지?” “그야 팁을 받는 것입죠.” “하하, 아무나 팁을 받는 건 아닐 텐데. 고객을 만족시켜야 팁을 받는 거 아니겠나.” “그야 물론입죠.” “그럼 예를 들어 고객이 1골드 정도의 팁을 준다면, 자네는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뭐든지 할 용의가 있나?” 엄청난 돈에 배달꾼은 흥분했다. “그러문요! 뭘 원하시는데요?” “어제 여기로 꿀과자 배달한 것, 그리고 오늘 다시 가져가는 것, 둘 다 절대로 함구해줄 수 있겠나?” 카엔의 손에는 1골드 금화가 들려있고, 그의 눈은 은보랏빛으로 반짝였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요.” 금화를 탐욕스럽게 쳐다보며 배달꾼은 약간 몽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아예 기억에서 지워주는 게 좋겠네.” “물론입죠. 아예 기억에서 지우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이 정도의 암시로도 기억은 쉽게 지워졌다. 인간의 마음이란 알면 알수록 오묘했다. 반 백작부인은 받은 꿀과자를 들고 황실로 납품될 7파잔(오후 두시)분 꿀과자 (꿀과자는 매일 3,5,7.9.11파잔 다섯 번에 나뉘어 황실에 납품되었다. 갓 구워 바삭한 상태로 납품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는 그 상자 안의 꿀과자 한 개와 카엔에게서 돌려받은 꿀과자 한 개를 바꿔치기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한 일을 잊어버렸다. 상자는 여느 때처럼 반 제과점의 문장을 단 마차에 실려 황실로 향했다. 외성 경비병은 형식적인 검문 후 즉시 마차를 통과시켰고, 마차는 내성 일차 결계 앞까지 달려가 그곳에서 멈췄다. 카엔의 추적은 거기까지였다. 이미 그는 사스트란 백작부인에게 꿀과자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꿀과자를 가지러 나오라고 암시를 걸어둔 터였다. 그녀의 렌에 대한 반감은 상당히 커서 그 암시를 걸기까지 카엔은 무척 애를 먹었다. 전처럼 정신조작마법을 제대로 써볼까 하는 충동이 불끈 불끈 일었으나 그는 용케 참았다. 카엔이 그 다음 일어나게 될 일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모든 일은 정확히 그가 예상한 대로 일어났다. 사스트란 백작부인은 7파잔에 도착한 꿀과자 중 묘하게 마음에 끌리는 독특한 문양의 꿀과자를 포함해 꿀과자 열 개를 골라 쟁반에 담았다. 자신이 직접 렌의 간식을 챙기러 나온다는 건 평소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 날은 왠지 핑계 김에 꿀과자 몇 개를 집어먹고 싶어진 것이다. 사스트란 백작부인은 직성이 풀릴 만큼 꿀과자를 집어먹은 다음에야 쟁반을 들고 일어섰다. 꽃의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차석시녀가 준비해놓은 우유를 쟁반에 함께 담아 무성의하게 렌의 방을 노크했다. “수석시녀입니다. 오후 간식입니다.” 그녀는 작위도 없는 계집 앞에서 자신을 ‘수석시녀’라고 낮춰 불러야 한다는 사실이 아직도 무척 불만이었으나 저번 유리조각 사건 이후로 그런 마음을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들어오십시오.” 사스트란 백작부인은 무성의하게 쟁반을 렌의 침대 옆 탁자에 놓고 나갔다. 렌은 꿀과자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체념하고 죽어가는 중에도 맛있는 것을 보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었다. 결국 식욕은 살고자 하는 욕구다. 렌은 마음속으로는 더 살 욕심을 버렸는데, 렌의 몸은 아직도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허탈하게 웃으며 꿀과자를 멍하니 보던 그녀의 얼굴에 갑자기 경악이 스쳐갔다. 이것은! 이것은! 열 개의 꿀과자 중 단 한 개의 문양이 다른 것과 달랐다. 그리고 그 문양은 다름 아닌 서제국 황실의 문양이었다. 렌이 나와림 노릇을 하면서 지겹도록 보아왔던 바로 그 서제국 황실 꿀과자였다. 렌은 거의 본능적으로 저 꿀과자가 카엔이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갑자기 북받쳐 오르는 그리움과 설움에 어쩔 줄 모르며 꿀과자를 집어 들었다. 너무 귀하고 소중해서 차마 먹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눈물이 두 눈에 넘쳐흐르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렌은 꿀과자를 소중히 품에 안았다. 감히 먹지는 못하지만, 렌은 카엔에게 키스하는 기분으로 꿀과자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카엔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렌은 깜짝 놀라 꿀과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목소리는 마치 그가 직접 말하는 것처럼 생생했다. 아, 사랑하는 나의 렌. 지금 이 말을 되풀이하는 게 벌써 다섯 번째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대실패였고, 세 번째와 네 번째에 가서는 편지를 먼저 써놓고 그걸 읽었지만, 하다 보니까 너무 어색해서 그것도 다 부숴버렸습니다. 꿀과자에 음성전달마법을 시전하는 건 쉽지만 그 내용을 저장하는 건 너무 어렵군요. 그대가 무슨 사정이 있어 동제국 황실로 갔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이제 나는 그대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그대를 내 뜻대로 하겠다는 욕심은 모두 버렸습니다. 나는 오로지 그대가 행복하기만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늘 그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주기만 바랄 뿐입니다. 아, 정말 나는 렌이 보고 싶습니다. 아...... . 이 대목에서 카엔은 울먹였다. 억지로 울음을 참는 듯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렌의 눈에서도 결국 눈물이 넘쳐흘렀다. 밝은 목소리로 소식을 전하려고 했는데, 정말 미안합니다. 렌, 나는 정말로 그대가 그립습니다. 그대가 나를 깨워주기 전까지 나는 수백 년 동안 차갑게 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대가 나를 찾아와 내게 온기를 불어넣어주고 나를 다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죠. 그대가 내게 해준 것은 너무 많은데 내가 해준 것은 너무 적다는 걸 느낄 때마다 나는 한편으로는 너무 죄스럽고, 한편으로는 그걸 모두 보상해주겠다는 기대감에 부풉니다. 우리들이 다시 만나면 나는 그대가 내게 베풀어준 만큼 그대에게 다시 주겠습니다. 그대의 사랑, 미소, 따뜻함, 온기, 그 모든 것을요. 내가 지닌 것은 그대보다 못할지 모르지만 내 마음은 그대만큼이나 뜨겁습니다. 나는 차라리 그대가 내 마음을 읽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랬다면 그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그대로 가득 차 있는지 알 수 있었을 겁니다. 아, 맙소사, 이건 아까 본 로맨스 소설의 구절이잖아! 렌은 울면서도 킥킥 웃었다. 아, 제길, 이게 마지막 꿀과자라서 다시 고칠 수도 없고! 렌, 어쨌든 나는 이제 렌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내 더러움과 추악함까지도 모두 렌에게 드러낼 자신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다 보여줘도 렌이 나를 계속 사랑해주리라는 것을 아니까요.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렌이 지난번 나와 헤어진 이후 얼마나 힘겨운 일들을 겪었는지 모르지만, 내 사랑을 의심하지는 말아요. 사람은 힘겨운 일을 겪으면서 마음속에 더러움과 상처를 쌓아가게 된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나는 렌의 마음속에 쌓인 ? 瀏?지저분한 것까지도 모두 통틀어 사랑합니다. 그것만은 믿어줘요. 나는 렌이 지닌 모든 것을 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 동제국 황궁 시녀들의 기억에서 렌의 창백한 모습을 읽을 때마다 나는 조급해집니다. 혹시 저번에 나와 흑룡 데이그랜이 격돌했을 때 내 마법을 막으려고 생명력을 지나치게 쓴 건 아닌가요? 아니면 살린 평원 전투에서 내 심장을 뛰게 하려고 또 생명력을 써버린 건가요? 제발,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생명력을 마구 뿌려대지 말아요! 제발, 그 일들이 렌의 수명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말해줘요! 카엔의 말투는 무척이나 다급해졌다. 그 애타는 목소리에 렌은 자신이 이곳으로 오기를 잘한 거라고 자위했다. 지금 그는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의구심과 죄책감으로 가득한데, 렌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 나면 얼마나 괴로워할까. 렌, 다가오는 이노스 신 축제 때 나는 렌을 구하러 황궁 파티장으로 갑니다. 렌도 꼭 그 자리에 나와 줘요. 그러면 나는 결계를 깨고 테룬 황제와 간악한 흑룡을 물리친 후 렌을 구하겠습니다. 렌, 전에 테라미즈에 작은 집을 사서 나와 함께 살고 싶다고 했지요? 나는 벌써 렌의 취향에 맞추어 렌이 머릿속에 떠올린 것과 똑같은 집을 스물여섯 채 사두었습니다. 테라미즈 곳곳이랑 마이리아 시에요. 그러니 제발 한시바삐 내게 돌아와 줘요. 하고 싶은 말은 태산같이 많지만, 더 이상 저장하면 마나가 넘치니 이만 끝내겠습니다. 렌, 사랑하오! 정말로 사랑합니다! 아, 렌, 우리가 다시 만나면...... . 목소리는 거기서 끝이었다. 렌은 꿀과자를 부둥켜안고 피를 토하듯이 처절히 울었다. 온몸에 기운이 전부 다 빠져나갈 때까지 그렇게 울었다. 미칠 정도로 그가 보고 싶었다.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그 은보랏빛 눈동자를 단 한 번만. 제발.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카엔이 또다시 자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자책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렌은 다시 한 번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현기증을 참으며 책상 앞에 앉았다. 사랑하는 카엔님. 저는 저번에 말틴에서 카엔님과 헤어진 후 카로딘 전쟁터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느라 생기를 많이 소모했어요. 눈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걸 보니 저 스스로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제 목숨은 그래서 얼마 남지 않게 되었죠. 죄송해요. 아마도 저는 다시 카엔님을 만나지 못할 것 같아요. 제 목숨은 이제 경각에 달려 있거든요. 그래서 흑룡 데이그랜도 저를 데려가는 것을 포기했어요. 다 죽어가는 저는 아무 쓸모가 없으니까요. 우스운 일이지만, 그는 제가 죽음을 기다리는 지금 말벗이 되어주고 있답니다. 저는 조금 있으면 새로운 시도를 한 번 해보려 합니다. 죽은 펠리시티 전 황후의 남아 있는 기운을 받아들여 그녀의 생전 기억을 되살리는 마법인데, 마나의 동질성 때문에 제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해요. 테룬 황제가 지닌 마음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그녀의 기억을 되살릴 필요가 있거든요. 아주 위험한 일이지만, 가만히 있어도 어차피 죽을 테니까 한 번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죽을 때까지 새로운 치료법을 시도해보는 건 치료사로서 마땅히 보여야 할 자세가 아니겠어요? 제가 죽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저는 카엔님을 만난 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요. 카엔님 덕분에 저는 무척이나 행복했어요. 카엔님의 길고 긴 여생에서 저를 잃은 슬픔은 언젠가는 사라질 거고, 카엔님을 만나지 않으려는 건 제가 죽으면서 겪는 고통을 카엔님께 그대로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예요. 하지만 제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카엔님은 이 세상에서 제게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만약 인간이 영혼을 지닌 존재라면 우리 둘의 영혼은 언젠가 다른 곳에서 다시 만날 수도 있겠죠. 그러니 안녕, 내 사랑. 렌은 눈물이 편지지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편지를 쓰고 종이를 세 번 접어서 밀랍으로 봉했다. 테룬에게 부탁하면 나중에 외교루트를 통해서라도 카엔의 손에 전해질 것이다. 편지의 내용은 거짓말처럼 담담했지만 렌은 격렬하게 떨며 다시 울었다. 죽기 싫었다. 그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너무 보고 싶었다. 만나서 원망도 하고 사랑한다고 고백도 하고 그의 품에 안겨 도 보고 키스도 하고 싶었다. 한없이 두렵기만 한 죽음의 심연에서 자신을 지켜달라고 떼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렌은 이미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다음날 렌은 데이그랜에게 죽은 자의 마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데이그랜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번 일과는 상관없이 축제날 전에 조용히 죽겠다고 마음을 정했어요. 공연히 하루하루 삶을 연장해봤자 큰 의미도 없으니까요. 그러니 어차피 죽을 바에는 테룬 황제를 위해 시도라도 해보는 게 좋겠지요. 데이님도 이제 헛된 희망을 버리고 드래곤을 구할 다른 방법을 찾으실 때가 됐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렌의 반문에 데이그랜은 긴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하고 계속 렌의 곁을 지켰지만 렌의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고 그 아름다운 정명기도 되살아나지 않았다. 사실 더 이상 희망은 없었다. “테룬 녀석은요? 그 친구는 렌이 미치거나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텐데요.” “제가 하고 싶다면 하는 거지요. 어차피 마법시전은 데이그랜님이 하실 테니 데이그랜님의 의향이 더 중요하지요. 어쩌시겠어요?” 데이그랜은 잠시 고민했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는 마침내 다시 빙글거리며 웃었다. “렌이 바란다면야 이런 좋은 실험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지요. 후후.” “좋아요. 그럼 제 뜻을 테룬 황제에게 전해주세요. 무대장치를 만들고, 공연을 해야겠지요.” 렌은 남의 일인 것처럼 차분하게 말했다. 그 다음날, 축제를 사흘 앞두고 데이그랜은 렌의 의향을 테룬 황제에게 알렸다. 장소는 황제의 침전으로 정했다. 그곳이 바로 펠리시티 전 황후가 죽은 곳이니 그녀의 기운을 받아들이기에는 가장 적당했다. 테룬 황제와 티르안 공녀는 소식을 듣고 곧 그리로 달려왔다. “렌! 제발 마음을 바꿔줘! 하루라도 더 사는 게 낫지 않아?” 렌은 테룬의 말에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굳이 더 살고 싶지 않아요. 그냥 죽는 것보다는 이게 나아요. 제가 마법의 부작용으로 미치는 기색이 보이면 데이님이 절 죽여주기로 하셨어요.” 데이그랜은 렌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티르안 공녀는 렌에 대한 고마움과 질투와 그 밖의 여러 가지 상념이 섞인 복잡한 얼굴을 하고 렌을 쳐다보다가 외면했다. “자, 다들 들어오세요.” 렌은 마치 그곳이 자기 방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 방에 들어서자마자 렌은 자신의 방에서 악몽을 꿀 때마다 감지했던 낯설면서도 왠지 친숙한 기운을 훨씬 진하게 느꼈다. 데이그랜은 렌을 가장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히고 무릎 위에 담요도 덮어주었다. 렌은 희미한 미소로 감사를 표했다. “시작하기 전에 말씀드릴 게 있어요. 만약에 제가 펠리시티 황후의 기억을 불러오더라도, 그녀가 폐하께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마세요.” “왜지?” “학대받은 아이들은 때로 어른이 되어 자신을 학대한 부모를 찾아가기도 하죠. 그리고는 부모가 자기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잘못했다고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장면을 상상하죠.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아요. 오히려 가해자인 부모는 아이쪽을 비난해요. 그 모든 일은 너 때문이었다고요. 가해자인 부모의 그런 반응은 학대받은 아이의 가슴을 찢죠. 펠리시티 황후도 아마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겁니다. 그녀의 그런 반응을 참을 수 없으시다면 어떠한 반응을 보이든, 폐하를 원망하든 용서를 구하든, 폐하께서 그녀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은 그녀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폐하 자신에게 달린 일입니다. 폐하께선 제가 말씀드린 것 같은 위험을 감수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각오가 되어 있다.”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시작입니다.” 데이그랜이 말하자 테룬과 티르안 공녀는 다른 의자에 앉아 긴장하며 렌을 주시했다. 데이그랜은 방 안에 서려 있는 아주 희미한 물의 마나를 서서히 모으기 시작했다. 그의 두 손 사이 공간에 검은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조금 지나자 기운은 더 크고 진해졌다. 꽃의 방에 서려 있는 얼마 안 되는 기운도 빨려 들어와 합쳐졌다. 그리고 평소 펠리시티 전 황후가 즐겨 찾던 곳에 약간씩 서려 있던 기운들도 모두 모였다. 거의 4난(40분) 정도 지나자 데이그랜은 조금 힘겨워하며 말했다. “이제 모을 수 있는 건 다 모았습니다. 렌, 몸의 기운을 전부 다 빼고 머릿속을 텅 비우도록 해요.” 렌은 긴장하며 데이그랜이 시키는 대로 했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엄청나게 불쾌한 기운이 몸속에 쑤셔 박히는 기분이 느껴졌다. 위 내시경을 하거나 관장을 하는 것 같은 불쾌감이었다. 렌은 저항하려 했으나 데이그랜의 말을 기억하고 억지로 참았다. 이제 다 되었나 싶을 때마다 기운은 자꾸만 밀려들어왔다. 머릿속이 쿵쿵쿵 울렸다. 심장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고, 온몸의 근육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코에서 피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렌은 꼼짝도 못하고 덜덜 떨었다. “조금만 더 참아요!” 렌은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통이 멎었다. 그 대신 이상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몸의 일부가 투명해진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의 몸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머릿속이 멍하고 서늘했다. “일단은 성공한 것 같습니다.” 데이그랜이 속삭였다. 렌은 한참 동안 부들부들 떨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 이상한 기억들이, 아주 이상한 기억들이 자꾸자꾸 떠올라요.” 테룬이 물었다. “어떤 기억이지?” “모르겠어요. 너무 어지러워. 아!” 렌은 얼어붙은 듯 멈춰 있다가 다시 온몸을 요동했다. 데이그랜은 깜짝 놀라 마나를 일으켜 렌을 감쌌다. 렌의 요동은 겨우 진정되었다. “데이그랜님, 대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말 시키지마!” 데이그랜은 테룬의 물음에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렌은 넋을 놓고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모두들 꼼짝 않고 렌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렌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속삭였다. “이상해요. 이상한 장면이 눈앞을 스쳐가요. 그래요. 아, 저건 내 모습이야! 내가 거울을 보고 있어! 그래! 나는 다시 육신을 입었어! 이 더러운 육신을! 그래! 다시 살아난 거야!” 렌의 목소리는 중간에 갑자기 바뀌었다. 테룬은 섬뜩해져서 벌떡 일어났다. 렌의 목소리는 그가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그러다 목소리는 다시 차분하게 변했다. “제 안에서 펠리시티 전 황후의 마나, 아니 그녀의 영혼이 출렁거리고 있는 기분이에요. 조금만 방심해도 그녀는 자꾸 튀어나와 내 몸을 지배하려고 해요. 원래 이런 건가요?” 데이그랜은 달래듯이 조심조심 말했다. “그녀의 영혼이 아니라 그녀의 기억입니다. 과거의 기억을 품고 있는 그 이질적인 마나를 렌의 머릿속에서는 펠리시티의 영혼이라고 받아들이는 거죠. 그러니 마음을 편안히 하도록 해요. 그저 책을 읽듯이 이미 죽어버린 사람의 옛 기억을 읽어낸다고 생각해요.” “렌, 내 어머니의 기억이 그대 속에서 읽혀지는 건가?” 테룬은 약간 성급하게 물었다. “그래요.” 렌은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뭐가 떠오르지?” “자꾸 튀어나오는 이 기억! 아, 그건 그대, 테룬에 관한 기억이에요! 아, 내 아기! 내 아기가 보고 싶어! 하지만 보면 안 돼! 내가 내 아기를 망칠 거야! 아니, 내 아기가 나를 망칠 거야! 안 돼! 테룬! 내 아기! 어느 순간 렌의 목소리는 다시 조금 낮고 허스키한 펠리시티의 목소리로 변했다. 테룬은 떨기 시작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어머니!’하고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데이그랜은 테룬의 어깨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저었다. 렌은 다시 진정했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떠오르는 기억을 묘사했다. “언제 적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아마도 폐하께서 아직 아기였을 때의 기억인 것 같아요. 그녀, 펠리시티는 몹시 폐하를 보고 싶어 해요. 하지만 그녀는 왠지 용기를 내지 못해요. 시녀를 불러요. 그러다가 다시 마음을 바꿔요. 그렇게 여러차례 고민하다가 그녀는 결국 정원으로 나가요. 그녀의 고민을 감지한 수석시녀가 황자를 불러오려는 것을 보자 그녀는 가만히 놔둬요. 그녀 스스로 마음을 정하지 못해요. 그녀는 계속 고민해요. 아, 내 아기가 보고 싶어! 언제나 먼발치에서만 봤는데! 테룬, 내 아가! 하지만 나는 널 보고 싶지 않아! 너만 아니었으면! 아냐! 널 보고 싶어! 이 세상에서 내가 자아낸 것 중 유일하게 빛나는 내 아가! 테룬! 널 보고 싶어!“ 렌의 목소리는 다시 찢어질 것 같은 비명으로 바뀌었다. 모두 홀린 듯이 렌을 바라보았다. “아, 발소리가 들려! 수석유모가 내 아가를 데려오나 봐! 어떡하지? 어떡하지? 아, 나는 그 애를 만날 준비가 안 됐어! 누가 테룬을 좀 멀리 데려가게 해! 그 애가 날 만나면 망쳐질 거야! 나는 그 애의 엄마가 될 자격이 없어! 아, 테룬이 달려와! 어떡하지? 그래, 말해야 해! 어서! 어머, 누가 이 아이를 여기 데려온 거야? 누가 이 애 좀 데려가줘! 내가 아이를 싫어한다는 걸 잘 알잖아? 이렇게! 그럴싸하게! 아, 다행이야! 말했어! 수석유모가 아이를 데려가는 군! 안심이야! 아, 내 아기! 너는 나를 원망하겠지? 나도 널 원망해! 하지만 내 아가! 너는! 너는!” 렌은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내다가 헐떡이며 겨우 멈췄다. 테룬은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머니!’ 하고 외치려 했다. 그러자 데이그랜이 황급히 경고했다. “펠리시티에게 말을 걸지 마! 렌이 그녀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 펠리시티를 향해 말을 걸면 펠리시티의 마나가 렌을 완전히 지배해버릴지도 몰라! 내 실험에서도 그렇게 돼서 죽은 인간들이 좀 있었단 말이야!” 테룬은 긴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정말 이상한 기억이군요.” 렌의 입술 사이에서 지치긴 해도 원래대로의 맑은 목소리가 나오자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렌, 다른 기억은?” 테룬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렌은 기진맥진해서 한동안 숨을 몰아쉬다가 다시 몸을 곧추세웠다. “아, 다른 기억이 떠올라요. 커다란 어른이 주먹으로 그녀의 얼굴을 마구 내리치고 있어요. 아파요! 너무 아파! 주먹은 너무 아프고 그녀는 너무 어려요! 그리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어요! 가엾게도! 뺨에서 피? ?터져 나와요! 너무 아파요! 아빠! 때리지 마세요! 저 착한 아이가 될게요! 제발 때리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제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주세요! 무서워요! 엄마! 어디 계세요! 저 죽기 싫어요!” 렌의 목소리는 필사적인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테룬은 조급하게 물었다. “그건 언제 적의 기억이지?” “여섯 살? 일곱 살? 모르겠어요.” 렌은 완전히 지쳐서 힘없이 대답했다. 데이그랜은 렌의 상태를 보고 심각해졌다. “생각보다 너무 체력이 소모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펠리시티의 마나를 제거해야겠어요.” 렌은 데이그랜의 손을 잡고 말렸다. “아직 아무것도 제대로 밝혀진 게 없는데, 조금만 더요.” 데이그랜은 렌의 얼굴에서 결연한 의지를 읽고 물러섰다. 렌은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쉬며 머릿속에 오가는 생각을 정리하다 겨우 말했다. “이런저런 기억이 무질서하게 튀어나오긴 하지만, 정말 중요한 기억은 물밑에 억눌려 있는 것 같아요. 사람의 기억이라는 게 얼마나 복잡하고 방대한데, 이런 식으로 해서는 제가 죽을 때까지 해도 안 될 거예요.” “그럼 어떻게?” “제가 펠리시티 전 황후의 기억을 떠올릴 때, 황제 폐하께서 제게 ‘어머니’하고 말을 걸어 주세요.” “그럼 완전히 그녀의 마나에 사로잡혀버릴지 모르는데?” “후, 해보니까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정신이 남달리 강인하다는 건 폐하나 데이그랜님 모두 다 아실 테니까요. 어정쩡하게 조금씩 시도하느니, 아예 확 저질러버리지요.” 렌은 눈을 감았다. 구정물을 휘저었을 때 침전물이 수면 위로 떠오르듯 다시 어지러운 기억이 하나씩 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상한 풍경들. 낯설면서 친숙한 풍경들. 아열대의 밤. 야자수와 끝없이 내리는 비. 온갖 벌레들. 늪지. 공포. 절망. 고통. 화려한 의상들 향수와 보석. 증오. 눈물. 절규. 욕망. 갈구. “어머니.” 테룬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펠리시티 황후를 불렀다. 렌은 몸속의 낯선 마나가 거세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렌은 이제 저항하지 않고 그 낯선 기운에 몸을 맡겼다. 테룬은 다시 조금 더 크고 애타는 목소리로 불렀다. 거센 파도처럼 낯선 마나가 온몸으로 퍼져갔다. 구석구석 촉수를 뻗치듯 낯선 마나는 이제 미약하게밖에 남아 있지 않은 렌의 기운의 공백을 대신 채우고 세력을 확장했다. 렌의 정신은 침입자에게 완전히 자리를 내주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제 그림자가 되고, 새로 몸을 차지한 마나가 내뿜은 승리의 환희가 온몸을 채웠다. 저게 그냥 마나라고? 남은 기억의 잔존물일 뿐이라고? 렌의 정신은 자신의 몸을 차지한 낯선 기운이 단순한 마나가 아닌 온전한 펠리시티의 영혼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영혼이란 게 존재하는 건가. 그래서 죽은 후에도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걸까. 렌은 손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지배력을 빼앗긴 채 자신의 몸을 지배한 낯선 영혼이 광기와 증오와 원망을 내뿜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았다. “어머니.” 다시 한 번 테룬이 펠리시티를 불렀다. 렌은 몸 안에서 펠리시티의 영혼이 마구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테룬? 네가, 네가 날 부른 거니?” 약간 허스키하면서도 의혹에 찬 목소리가 렌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테룬이 경악하는 게 느껴졌다. “정말로, 정말로 어머니세요?” 데이그랜이 옆에서 속삭였다. “이봐, 테룬, 아니랬잖아. 저건 그저 남겨진 마나에 기록된 과거의 기억일 뿐이랬잖아.” 렌은 아니락 대답하려 했다. 이렇게 생생한 감정으로 가득 찬 것이 그저 기억일 뿐이라니! 누가 뭐래도 렌의 몸을 빼앗은 이 존재는 실체였다! 온전한 존재였다! 그러나 렌은 대답할 수 없었다. 렌의 입은 어느새 렌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렌의 정신마저도 점점 새로 들어온 존재에 침식당하고 있었다. 아니, 렌의 정신과 펠리시티의 정신은 섞여가고 있었다. 렌은 이제 서서히 온전하게 제 모습을 갖춰가는 펠리시티의 끔찍한 기억에 망연자실했다. “테룬, 내 아들.” 렌의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머니, 어찌 된 겁니까?” 테룬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펠리시티 황후의 영혼은 렌의 입을 빌려 대답했다. “나는, 나는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어. 내가 갈 곳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어. 나는 그래서 한없이 황궁 안을 떠돌았어. 조금씩, 조금씩 내 기운이 흩어져가는 게 느껴졌어. 내 영혼도 그걸 따라 흩어졌어. 나는 몽롱해졌어. 이렇게 사라지는 건가 싶었어. 하지만 그냥 사라지고 싶지 않았어. 그러다 갑자기 뭔가가 나를 끌어 모았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 계집, 나를 몹시도 닮은 주제에 한없이 착한 척하는 이 기분 나뿐 계집의 몸속에 들어와 있었던 거란다.” 독기와 빈정거림으로 가득 찬 말투는 펠리시티의 생전 말투 그대로였다. 테룬은 한참 동안 잊고 있었던 과거의 악몽이 ? 寸?기억나 섬뜩했다. “어머니, 제게 얘기해주세요. 대체 왜 저를 그토록 미워하셨는지. 어머니가 어떻게 나고 자라셨는지, 그 모두를요. 제게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제가 가엾다면 제발 말씀해주십시오.” “싫어! 내가 과거를 없애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 절대 싫다! 안 돼!” 렌은 펠리시티의 정신에서 갑자기 용솟음치는 분노와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많은 죽음들, 제 외할아버지, 코뷸린, 그 마법사, 그들 모두 어머니가 살해하신 겁니까? 과거를 숨기기 위해서요?” “아니다!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기 위해서였어!” 펠리시티는 악을 썼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렌은 엄청나게 화가 났다. 일시적으로 몸의 지배력이 돌아왔다. “그런다고 과거가 바로잡히지는 않아요! 그대의 과거가 그대의 자식 테룬에게 그대로 남아 있는 게 보이지도 않나요?” 렌은 혼신의 힘을 다해 외쳤다. “무슨 얘기지?” 펠리시티는 깜짝 놀라 물었다. 두 새의 목소리가 한 사람의 입에서 번갈아 나오는 장면은 몹시 기괴했으나, 그 자리의 누구도 그 기괴함에 놀랄 여유 따위는 없었다. “당신 아들 테룬은 엄청나게 불행해요! 그는 이제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해요! 그는 제 앞에서 자살하려고 했어요! 그건 전부 당신 탓이에요!” 렌의 몸속에 있는 펠리시티의 영혼이 몹시 동요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나는 그 애를 위해 끊임없이 희생했어! 왜 내 탓이라는 거야!” “왜냐고요? 당신 아들은 당신을 사랑하려고, 당신에게서 사랑받으려고 평생 안감힘을 다했는데, 당신은 그를 거절하고 배반하고 이용했잖아요! 스스로도 알고 있잖아요! 왜 그렇게 되었는지, 왜 그런 인간이 되어버렸는지, 죽을 때까지 말하지 않고 숨긴 기억이 뭔지, 다 얘기해봐요! 나는 벌써 조금씩 그 기억을 읽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직접 말해봐요!” “네가 뭔데 내게 그런 걸 강요하는 거지? 네가 뭔데!” “난 치료사예요! 난 당신과 당신 아들 모두를 구하고 싶단 말이에요!” 렌은 목청 높여 외쳤다. “하, 너만 내 기억을 읽을 수 있는 줄 알아? 건방진 계집애야,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네 과거를 읽을 수 있어! 날 구하고 싶어서라고? 고상한 척하지 마! 너도 겨우 한 발짝 차이야! 너도 운이 나빴으면 나처럼 됐을 거야! 어리석은 계집애야! 네가 왜 그렇게 남을 구하려는 줄 알아? 흥!” “왜지요?” 렌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흥, 너 스스로도 알면서 외면했던 걸 나한테 묻는 거니? 하, 정말 바보 같구나! 그래, 대답해주지! 너는 다른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해서 인정받지 않으면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어리석고 가엾게도! 그래서 죽어라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치료하고 나중에는 생명까지 내어준 거야! 안 그러면 너는 살아갈 가치가 없으니까! 그러면서 정작 위기에 빠지니까 너도 가차 없이 사람을 죽였잖아! 너도 나나 마찬가지로 병든 영혼이야!” 렌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그런 건가! 그래서 그렇게 애타게 필사적으로 사람들을 구하려 했던 건가! “아니야! 나는 이미 극복했어! 내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애쓴 건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야!” 그러나 갑자기 전에 읽은 책의 구절이 생각났다. 그렇다. 학대받은 아이는 커서 어떤 경우 주위 사람을 위해 한없이 희생하기도 한다. 주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베풀고 희생하면서 자기 자신이 쓸모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다. 그냥 편안히 본모습대로 있으면 아무도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고, 그들의 존재이유는 없어지는 거니까. 렌은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펠리시티의 말이 옳다는 걸 알았다. 렌의 지식에 비추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랬다. 사실 너무 전형적인 케이스여서 그동안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어머니의 사랑만큼이나 아버지의 사랑도 중요했다. 그동안 완강히 아버지를 기억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버지 없이도 이렇게 잘 컸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정체성을 형성한다. 아버지에게서 사랑받는 아이는 세상에 대한 자신감을 배우고 자신의 존재이유를 얻는다. 아예 아버지가 없으면 모를까, 아버지가 있는데 사랑받지 못하면,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학대당하면, 아이는 그냥 태어난 것만으로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다른 이유가 필요해진다. 집안일에 도움이 된다든가, 돈을 벌어 온다든가, 희생적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다든가. 그 모든 것은 가엾은 몸부림이다. 자신이 살아 있을 이유를 선행과 희생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고 사는 것일 뿐이다. 첸 사부님께서 쏟아주신 사랑도 소용없었어!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난 마음속 깊이에서 첸 사부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해주신 것은 내가 놀랄 정도로 명? ?漫?箚?생각했어! 나는 내심으로 늘 불안했어! 내가 게으르고 말을 듣지 않고 공부를 못 하게 되면 첸 사부님이 나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낼지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러면 나는 또 그 끔찍한 아버지의 구타와 학대에 시달리게 될거였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필사적이 되었던 거야! 그리고 내가 한 치료들! 대체 열세 살짜리가 뭘 안다고 다짜고짜 홍콩의 빈민굴에 가서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했던 거지! 그리고 이 세계에 와서도 뭐가 그렇게 다급하고 안타까워 목숨을 나눠주면서까지 사람들을 구했던 거지? 그게 전부 다 내가 세상에 존재할 이유를 구걸하는 거였었나? 그리고 그 오랜 동안 왜 나는 아버지, 내 친아버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지? 일부러 생각하길 회피한 거였나? 아, 내가 한 선행이 과거의 상처에서 비롯된 무의식적인 것이라면 과연 그건 의미가 있는 걸까. 내 인생은 그저 과거의 그림자에 얽매인 무의식의 발악에 불과했던 게 아닐까. 펠리시티의 공격이 심장에 꽂혀 렌은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 펠리시티는 렌의 정신이 흔들리자 한층 기고만장해 렌의 몸에 대한 지배력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확장해나갔다. 렌은 달콤한 악취에 휩싸이듯 무기력하게 늘어졌다. 데이그랜과 테룬은 렌의 상태가 시시각각 안 좋아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았다. 이러다 미치는 건가. 내 정신은 이대로 소멸되는 건가. 하지만 그러면 데이그랜이 나를 죽여주겠지. 그 순간 탁자 한쪽에 치워져 있는 꿀과자가 렌의 눈에 들어왔다. 전날 카엔에게서 선물 받은 꿀과자가 떠오르고, 카엔의 생각이 렌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모든 것이 다 이어져 있었다. 그녀의 일생에서 겪은 온갖 일들 중에 불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국 사랑으로 귀결되었다. 지배력을 빼앗겼던 두 눈에서 눈물이 넘쳐흐르고, 렌의 입은 자유로워졌다. 홍수로 둑이 터지듯 말이 쏟아져 나왔다. “아, 펠리시티, 당신에게 말하겠어요. 당신 말이 맞아요. 나는 상처로 가득하고 내 행동 하나하나는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내 상처, 내 콤플렉스, 내 어두움과 내 그늘, 그 모든 것이 나 자신이에요. 나는 내 상처를 통해 다른 사람의 상처를 이해했고, 고통 받으면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줬어요. 그렇게 하면서 내 상처와 내 고통도 어느새 사라졌고, 내게서 치료받은 사람들은 다시 나의 치료사가 되어 내게 상처와 고통 대신 사랑과 기쁨을 주었어요. 그래요. 내 치료의 시작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내 치료의 과정은 설 자리를 찾기 위한 구걸이었어요. 내 스승님은 그런 나를 걱정하셔서 치료비를 받으라고 신신당부하셨죠. 이제 나는 그분의 마음을 이해하고 무한히 감사해요. 그분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는 못했지만, 나는 끝없이 사람들을 치료해나가면서 결국 나 자신을 구원했어요. 내 상처는 치료로 이어졌어요. 내가 상처입지 않았다면 나는 상처 입은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고 치료하지 못했을 거예요. 내가 행복하고 걱정 없이 자랐더라면 나는 지금 이 모습의 내가 되지 못했을 거예요. 나는 무수히 상처받았지만 결국 그 모든 상처가 내 스승이 되었어요. 그리고 그 상처가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를 이어주었어요. 나는 기뻐요. 내가 저지른 모든 잘못, 내가 입은 모든 상처, 그 모든 것 중 의미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아서 너무 기뻐요. 나는 지금 이대로의 내가 너무 사랑스러워요. 나는 결국 이 자리까지 왔어요. 펠리시티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펠리시티는 렌의 말에 분노했다. “너는, 너는 내 불행의 백분의 일도 겪지 않고서 그 얼마 안 되는 상처를 이려냈다고 잘난 척하는 거야? 네가 감히? 널 도와주고 사랑해주고 걱정해주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지? 내 곁에는 단 한명도 없었어! 나는 그 모든 고통을 홀로 이겨나가야 했어! 그러고서 네가 감히 나를 이해한다는 둥, 날더러 잘못했다는 둥, 그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거야?” 렌은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도 당신을 몰라요. 당신의 과거가 묻혀버리면 당신의 고통은 그저 의미 없는 것이 되어 당신의 남은 영혼과 당신 아들의 영혼을 영원히 괴롭힐 거예요. 자, 당신은 이미 죽었어요. 이제 당신이 과거를 밝힌다 해도 당신은 더 이상 상처입지 않아요. 아무도 당신을 괴롭힐 수 없어요. 당신이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주면 내가 당신을 위로해주겠어요. 당신을 가엾이 여기고 이해하고, 당신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겠어요.“ 렌의 말에 펠리시티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네가 뭔데 나를 위해 울어주겠다는 거야? 네가 뭔데 감히 내게 동정을 베풀겠다는 거야?” “나는 치료사. 나는 언제나 사람들의 상처를 보고 울어요. 내 안의 상처가 함께 아프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상처만큼 크고 깊지는 않지만 내게도 ? 纂낡?있어서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가엾게 여길 수 있어요. 내 작은 상처가 당신의 큰 상처를 고치는 길잡이가 될 거예요. 내 눈물이 당신 상처 위에 뿌려질 때 그 상처는 나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이 상처를 열고 과거를 보일 때 당신의 아들 또한 당신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 겁니다.” “테룬이? 그 애가?” 펠리시티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운 기색이 섞여들었다. 테룬은 어머니의 목소리에 렌, 아니 펠리시티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테룬은 그녀를 외면하고 싶은 기분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펠리시티의 목소리는 갑자기 다급해졌다. “계집애야, 너도 알잖아! 이미 내 기억을 읽었잖아! 내 과거가 얼마나 추악한 지 봤잖아! 그걸 다 까발리라고? 그게 다시 사람들에게 새 상처를 줄 텐데?” 렌은 확신에 차 대답했다. “묵은 상처에 새 살이 돋게 하려면 상처를 도려내야 해요. 그러기 위해 생기는 상처는 좋은 상처예요. 상처를 덮어두면 곪을 뿐입니다. 용기를 내세요. 이 자리는 당신을 단죄하려는 자리가 아니에요. 그저 당신을 위해 울어주려는 자리일 뿐이에요. 그리고 당신의 아들을 믿으세요. 그는 강해요. 그는 지금껏 살아남았고, 이제 당신의 도움으로 마침내 새로 태어날 거예요.” 펠리시티는 주저하며 물었다. 이번에는 테룬에게였다. “어떤 끔찍한 과거라도 들을 생각이 있느냐, 내 아들아?” “예, 어머니.” 테룬은 무겁게 대답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펠리시티는 긴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마침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모두들 알다시피 드래곤의 회랑 남쪽, 카로딘 대공국과 동제국 황제 직할령이 맞닿은 숲가에서 태어났어.” 렌은 펠리시티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 모든 일을 그녀와 함께 겪었다. 그 참혹하고 끔찍한 온갖 기억을 함께 되살렸다. 7장 용서하는 자가 용서 받는다 찌는 듯한 무더위, 긴 우기, 무성한 아열대의 숲. 펠리시티의 기억 속 고향은 렌의 고향과 몹시 비슷했다. 렌은 어린 펠리시티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펠리시티의 목소리는 마치 무성영화에 깔리는 효과음 같았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펠리시티의 목소리도 따라서 어려졌다. 몹시 애처롭고 가느다란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어머니, 언제나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늘 그녀를 미워하고 야단치던 아버지. 어린 펠리시티의 눈에 아버지는 괴물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낳은 첫아이가 딸이라고 화냈고, 아무리 애써도 둘째아이가 생기지 않자 더 화냈다. 렌은 마치 자신의 과거를 보는 듯한 유사함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펠리시티의 운명은 렌과 달라졌다.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나를 때리곤 했어. 이렇게 어린아이를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그는 줄기차게 나를 때렸어. 어머니가 나를 가로막고 나서면 어머니를 때렸어. 가엾은 어머니. 나는 아버지에게 애원했어. 엄마를 때리지 마세요.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게요. 착한 아기가 될게요. 제발요. 아빠,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어린 펠리시티는 끝도 없이 빌었다. 모든 게 그녀의 잘못인 것만 같았다. 내가 나쁜 아이여서야. 내가 계집아이로 태어났기 때문이야. 다 내 탓이야. 그녀는 이따금씩 술이 깬 아버지가 다정하게 대해주는 드문 순간을 몹시도 갈구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되뇌었다. 그래,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셔. 가끔 날 때리시긴 하지만 사실은 날 사랑하셔. 내가 더 착한 아이가 되면 앞으로는 날 때리지 않으실 거야. 렌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펠리시티의 기억이 진행되어나가는 모든 순간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러다 내가 일곱 살 때 어머니가 임신을 했어. 그게 모든 것을 바꿔놓았어.” 아내가 칠 년 만에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된 그녀의 아버지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는 몹시 소중하게 아내를 대하고 손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술을 끊었고 집안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펠리시티는 모처럼 찾아온 평화에 안도했다. 그 두어 달이 펠리시티의 어린 시절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때였다. “나는 그때 마을에서 은거하는 노마법사에게서 글을 배웠어. 아, 글이라는 건 정말 재미있었어. 아버지는 계집아이가 무슨 글이냐고 화를 냈지만, 어머니는 나를 두둔해주었고, 어머니의 임신에 기분 좋아진 그 사람은 너그러이 그걸 용납해주었지. 하지만 행복은 너무 짧았어! 어느 날 아버지는 술에 취해 들어왔어. 잔뜩 고주망태가 된 그는 어머니에게 다가갔지. 술 냄새를 풍기며 그는 말했어. 여보 마누라, 지금 뱃속에 우리 아들이 있으니까 하면 안 되겠지? 어머니는 진저리를 치며 쏘아붙였어. 안 되고말고요. 그렇게 술에 취해서 뭘 어쩌려는 거예요? 그러자 그는 내게로 고개를 돌렸어. 그는 정말로 취해 있었어. 그 썩은 술 냄새를 풍기며 그는 ? 뺐韜?다가왔어. 헤헤헤, 어미가 안 되면 딸아이가 대신해야 하는 거란다. 이리 오렴. 어디 보자. 우리 딸이 얼마나 컸는가 보자. 나는 방구석으로 도망갔어. 하지만 그는 내 머리채를 잡고 나를 끌어냈어. 그의 손이 내 치마 속으로 들어왔어. 어이구, 다 컸구나. 나는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몰랐어. 확실히 미색이야. 정말 절색이야. 쓸모없는 딸자식이라도 이 정도 예쁘면 팔아치워도 비싼 값을 받겠지. 그는 계속 중얼거리면서 내 비밀스런 곳을 만졌어. 나는 그가 하는 짓이 뭔지도 몰랐지만 그냥 너무 더럽고 끔찍한 기분이 들었어. 어머니가 일어나서 아버지에게 몸을 던졌어. 이 짐승 같은 놈아! 그만해! 그러자 아버지는 어머니의 배를 찼어. 어머니는 벽에 부딪쳐서 의식을 잃었어. 아버지는 내게 속삭였어. 네가 착한 아이가 되지 않으면 네 엄마를 또 때려줄 테다. 네 엄마가 맞으면 그건 전부 네 탓이야. 나는 겁에 질려 반항하는 걸 멈췄어. 그리고 내 몸속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어. 나는 죽고 싶었어. 죽고 싶었어. 죽고 싶었어. 그를 죽이고 싶었어.“ 아, 그녀는 피하지 못했다. 렌은 피했는데, 그녀는 피하지 못했다. 렌은 다리 사이의 틈으로 전해져오는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끔직한 고통을 펠리시티와 함께 느꼈다. 그 처절한 몸과 마음의 고통을. “어머니는 하혈을 했어. 나도 거기서 피가 많이 나왔어. 나는 피가 나오건 말건 맑은 물로 피부가 벗겨질 때까지 거기를 닦고 또 닦았어. 하지만 그 이상한 더러움은 계속 거기에 달라붙어서 떨어져 나가질 않았어. 아, 아직도 그 더러움은 내 몸에 붙어 있어. 아버지는 다음날 제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들지 못하다가 나가버렸어. 어머니는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내게 물었어. 펠리야, 아무 일도 없었지? 그녀의 눈에는 공포심이 서려 있었어. 나는 알았어. 그녀가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해주길 간절히 바란다는 걸. 나는 힘없이 대답했어. 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어머니는 내 말을 믿었어. 아니, 그저 믿는 척한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미칠 것만 같았어. 나는 어머니를 떠나 내게 글을 가르쳐준 노마법사에게 달려갔어. 나는 애원했어. 구해주세요! 마법사님, 제발 구해주세요! 아빠가 저를 혼내고 때리고 이상한 짓을 했어요! 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여기서 살게요! 나는 아버지가 내게 한 짓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몰랐어. 마법사는 물었어. 아버지가 널 혼냈냐? 나는 대답했어. 네, 혼냈어요! 그리고 엄마도 막 때렸어요! 마법사는 고민하다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어. 네 아버지가 너를 혼내고 야단치더라도 그건 너를 위해서 그런 거야. 그리고 네 아버지가 네 엄마를 때린 건 잘못한 일이지만, 그래도 그는 가장이지 않니. 너랑 네 어머니를 먹여 살려주시는 분이 아니냐. 그러니 가서 아버지 말씀 잘 듣고 어머니도 잘 돌봐드려라. 조금 혼났다고 그렇게 달려와서 울고불고 떼쓰면 나쁜 아이야. 나는 그게 아니라고 설명하고 싶었지만 뭐라 해야 할지 몰랐어. 그런 게 아니에요! 그 집에 계속 있으면 저는 죽고 말 거예요! 나는 악을 썼어. 그러자 마법사는 대답했어. 네가 많이 속상한 모양인데 그래도 아이는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게 가장 행복한 법이란다. 자,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의 말은 친절했지만 무관심했고, 상식에 맞았지만 사실은 아무 내용도 없는 말이었어. 나는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어. 지옥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어. 도저히 그렇게 갈 수는 없었어. 나는 건넛집의 아딘 아줌마에게로 갔어. 아딘 아줌마는 어머니의 절친한 친구였지. 아딘 아줌마, 제발 저 좀 구해주세요! 아빠가 엄마를 때리고 저한테 이상한 짓을 했어요! 그러자 아딘 아줌마는 대답했어. 아, 그 아줌마는 나를 그렇게 귀여워해주었었는데, 그때 그 아줌마는 그렇게 대답했어. 미안해, 펠리야. 내게 너나 네 엄마를 도울 힘은 없단다. 우리집 살림도 빠듯한걸. 꾹 참고 기다리렴. 네 아버지도 원래 심성은 착한 사람이니까 곧 괜찮아질 거야. 나는 목을 놓아 울었어. 그리고 체념했어. 이 세상에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 갈데없는 막막함. 사방이 막힌 것 같은 그 절망감. “어머니는 아들을 낳았어. 내 남동생을 . 하지만 어머니는 그 후에도 회복이 안 되었고, 나는 열심히 이따금씩 아버지에게 걸려 그 짓을 당해야 했어. 도망치고 싶었어. 하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내 귀에 속삭였어. 네가 도망가면 네 엄마와 동생을 아주 요절을 내버릴 테다. 대신에 네가 착한 아이 노릇을 하면 네 엄마한테도 네 동생한테도 잘 해주마.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그래도 나는 반항했어. 그러자 그는 나를 마구 때리고, 어머니도 죽도록 패고, 아직 젖을 떼지 못한 남동생도 마구 두들겨 팼어. 어? 鍛求?몸이 성치 않았어. 임신기간 중에 맞은 데다 마음고생이 심해서 몸을 풀고 나서도 늘 힘겨워했어. 거기에 젖먹이 아기까지 딸려 있으니, 날 데리고 도망갈 형편도 안 되었어. 그래서 어머니는 내게 부탁했어. 미안하다, 펠리시티. 제발 당분간만. 너랑 나랑 네 동생이랑 함께 도망갈 수 있을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네 아버지 화를 돋우지 말아줘. 어머니가 그 부탁을 하는 순간 나는 어머니에게서조차 배신당했다는 걸 알았어. 세상에 내 편은 아무도 없었어. 나는 이제 기계적으로 몸을 내맡겼어. 그리고 유령처럼 집안을 돌아다녔어. 내 눈에는 원망이, 내 입가엔 냉소가 서렸어. 나는 스스로를 지키겠다고 결심했어. 언젠가는, 언젠가는 어느 누구에게도 강해질 거야. 아무도 내게 상처 입히지 못하게 할 거야. 그리고 내게 고통을 준 모든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서 모조리 죽여버릴 거야. 처참하게 죽일 거야. 사지를 차례로 찢고 껍질을 벗겨 죽일 거야. 그 생각을 하면 힘이 났어. 그게 내 버팀목이 됐어. 어머니는 계속 아팠어. 그녀는 나를 보며 때때로 울었어. 미안하다고 했어. 하지만 이미 나는 어머니를 마음속에서 지워버렸어. 아버지도 마음속에서 지워버렸어. 나를 괴롭히는 이 남자는 유령이야. 이 남자는 내게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해. 이 남자가 무슨 짓을 하건 나는 상처입지 않아.“ 펠리시티의 말을 전하는 렌은 숨이 차서 헐떡였다. 이야기는 잠시 끊겼다. 테룬이 깍지 낀 두 손을 피가 날 정도로 움켜쥐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펠리시티의 마음은 그걸 보고 잠시 출렁였다. 그녀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떻게 대상인 코뷸린에게 입양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펠리시티가 열세 살 때 그녀의 어머니는 결국 병으로 죽었다. 아버지는 그 후에도 계속 펠리시티를 탐하다가 어느 날 도박빚을 지고 결국 펠리시티를 팔아버렸다. 그녀의 미색은 인근 마을에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에 대상인 코뷸린이 펠리시티를 손에 넣기 위해 하수인을 써서 아버지를 함정에 빠뜨린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어느 나이든 부자가 그녀의 소문을 듣고 양딸로 입양하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 부자는 나이가 들었지만 자식이 없이 외로운 사람이라 그녀가 딸 노릇만 잘 하면 그의 재산이 모두 그녀의 것이 될 거라는 얘기도 했다. 펠리시티는 어쨌든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겨우 열세 살, 그 어린 나이, 아름다운 가마에 타고 인페드 시로 가는 길에 펠리시티는 억누르려 해도 자꾸 희망이 솟아나는 걸 느꼈다. 빛나는 태양. 푸른 초원. 북쪽으로 조금씩 올라갈 때마다 한결 시원해지는 맑은 공기. 산산이 부서졌던 영혼도 다시 하나로 될 수 있을까. 그러자 그녀의 기대는 너무 허무하게 배반당했다. 귀여운 아이야, 이리 오려무나. 내 너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마. 코뷸린이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그 사악하고 느끼한 목소리에 펠리시티는 모든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코뷸린은 온갖 더러운 수단을 써서 거부가 된 자였다. 폭력단을 거느리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의 취미는 예쁜 계집을 모아 학대하는 것, 그리고 돈을 쌓아놓고 세는 것이었다. 펠리시티는 그에게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불행 속에서 잡초처럼 자라난 펠리시티는 눈에 파랗게 독기가 서려 있었다. 쉽사리 굴복하지 않는 정신을 꺾는 재미있는 일은 그에게 달리 없었다. 그녀는 새로운 적을 만난 것이었다. 코뷸린은 노련했다. 그는 펠리시티의 정신을 망가뜨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알았다. 그는 펠리시티에게 어떨 때는 육체적 고통을 주고, 어떨 때는 선물을 주고, 어떨 때는 밥을 굶겨 애걸하게 하면서 그녀를 끊임없이 가지고 놀았다. 어린 펠리시티에게 그건 너무 지나친 시련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 이겨냈어. 나는 매일같이 다짐했어. 이런 하찮은 인간은 날 상처 입히지 못한다고. 나는 살아남겠다고. 나는 절대 지지 않겠다고. 그래, 나는 그의 훌륭한 제자가 되었어. 그에게서 배운 모든 걸 나는 나중에 훌륭하게 써먹었어. 음모를 꾸미는 방법, 뇌물과 이권으로 사람을 사로잡는 방법, 남자는 비위를 맞추고 유혹해서 넋을 잃게 만드는 방법. 모두가 하나같이 내가 살아남는 데 꼭 필요한 것이었어. 나는 어느 순간 그를 내 손안에서 가지고 놀게 되었어. 나는 절대 속마음을 들키지 않게 되었어. 단단한 갑옷을 입고 완벽한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대할 수 있게 되었어. 그때부터 나는 안전해졌어. 테룬을 낳기 전까지는.“ 코뷸린은 정말 부자여서 그의 집안에는 전속 치유마법사까지 있었다. 노인이었다. 펠리시티가 학대당해 상처투성이가 되면 치유마법사는 가엾이 여기며 펠리시티를 치유해주었다. 그는 무척 솜씨가 좋아 그가 어루만지고 난 자리에는 흉터가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느 순간 펠리시티에게 욕정을 품었다. 다시는 사람을 믿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그녀는 그동안 자기도 모르게 그 치유마법사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그의 눈에 욕정이 빛나는 순간 그녀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 정신을 차렸다. 최고의 미소를 지으며, 어느새 제2의 천성이 되어버린 농염한 색기를 풍기며 그녀는 그를 유혹했다. 치유마법사는 순식간에 그녀에게 유혹되었다. 그녀는 모든 것이 끝나자마자 자해하며 비명을 질렀다. 하녀들이 달려왔다. 코뷸린도 달려왔다. 자기 소유물을 건드린 자에 대한 코뷸린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그의 수석호위가 마법사의 목을 잘랐다. 그녀는 무릎 꿇고 사과했다. 주인님, 죄송해요. 그가 강제로 절 범했어요! 마법으로 저를 속박해서 저항할래야 저항할 수도 없었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넋을 잃을 것 같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코뷸린에게 다가갔다. 그녀에게 화를 내려던 코뷸린은 무기력해졌다. 그녀는 바닥에 구르는 치유마법사의 몸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했어. 그래, 이제 나는 나 자신을 지킬 수 있게 되었어. 마침내 나는 첫 살인에 성공했어. 지금 내 몸을 더듬는 이자도 언젠가는 같은 방법으로 죽여줄 거야. 앞으로 수많은 자들이 저자의 뒤를 따르겠지. 이제 나는 안전해.” 펠리시티는 의기양양하게 말했고 렌은 너무 슬퍼 목을 놓아 울었다. 그녀가 고통당하는 기억보다 온갖 더러움에 물들고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게 되어가는 모습이 더 괴로웠다. “왜 울지?” “너무 슬프고 너무 애통해서요! 그대가 너무 가엾어서요!” 구슬픈 울음소리가 새어나올 때마다 렌의 몸속에 가득 찬 펠리시티의 기운은 물결처럼 흔들렸다. “너는 진심으로 슬퍼하는 구나. 왜지?” 펠리시티는 독기가 약간 빠져나간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의 어린 시절은 바로 내 어린 시절이기 때문이에요.” 렌은 울먹이며 대답했다. 렌이 걸은 길은 펠리시티의 길과 겨우 한 발짝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그 한 발짝의 차이로 렌은 바른 길을, 펠리시티는 치욕의 길을 걷게 되었다. 렌이 더 착하거나 펠리시티가 더약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결국 도와 줄 단 한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가 그 모든 차이를 만든 것이다. 렌은 펠리시티 인생의 기구함을 슬퍼하며 하염없이 울었다. 삶이라는 것은 얼마나 수많은 불행한 인연으로 얽혀 있고 인간이란 얼마나 가련한 존재인가. 한동안 렌이 우는 걸 지켜보며 말이 없던 펠리시티는 어느 순간 렌의 슬픔을 차갑게 뿌리치고 계속 이야기했다. “내가 열여섯 살 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어. 황실마법사 쿠드는 하라스 4세 황제를 위해 순수한 물의 기운을 지닌 계집을 물색하고 있었는데, 내가 바로 그런 기운을 지니고 있었던 거야.” 당시 동제국 황궁의 사정은 복잡했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하라스 4세의 실정으로 황권은 땅에 떨어졌고 공국과 속국들은 저마다 자치권을 주장하며 꿈틀거렸다. 그러나 하라스 4세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그를 닮아 유약한 어린 황태자의 재롱을 구경하거나 각양각색의 계집들과 놀며 눈앞의 시름을 잊을 따름이었다. 황제를 보다 못한 쿠드는 황제의 취향에 딱 맞을 만한 간언을 했다. 동제국 황실에 소드 마스터의 기운은 이미 희석되어 마지막으로 소드 마스터가 나타났던건 50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황실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소드 마스터의 기운은 순수한 물의 기운을 지닌 후손이 태어날 때 다시 나타난다고 했다. 황제가 지닌 기운은 그저 잡탕이었고 황태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만약에 황제가 순수한 물의 기운을 지닌 여자를 찾아내어 그 여자에게서 아들을 본다면, 그 아들이 순수한 물의 기운을 지녀 그 결과 황실의 소드 마스터 형질이 발현될 확률은 적어도 5분의 1 정도는 되었다. 황제는 쿠드의 계획에 찬성했다. 그는 특히 순수한 물의 기운을 지닌 여자가 눈부신 미인인 경우가 많다는 말에 기뻐했다 . 어쨌든 밑져야 본전이고, 잘 되면 제국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었다. 쿠드는 제국 구석구석을 다니며 검은머리, 검은 눈의 빼어난 미인들을 수소문했고, 마침내 카로딘 대공국의 대상인 코뷰린의 딸 펠리시티가 그런 기운을 지녔다는 것을 알아냈다. “코뷸린은 몹시 아쉬워하면서도 나를 내주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결국 그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결심했어. 그는 지독한 비밀주의자였어. 그의 난행은 비밀정원 안에서만 일어났고, 장님과 벙어리 하인들만이 그곳에 출입했어. 그의 심복만이 그의 악행을 알고 있었지. 그래서 그는 쿠드가 나를 방문했을 때 내 친아버지로 행세할 수 있었어. 다른 사람들은 그와 나의 진정한 관계를 몰랐으니까. 용의주도한 코뷸린은 내 출생증명서랑 기타 등등의 서류도 전부 자기 이름으로 위조해놓았고, 심 지어는 내 처녀막까지 마법으로 재생시켜 놓았거든.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중에 내 손에 죽었지. 내가 마음속으로 맹세했던 대로, 그는 다섯 토막이 나서 죽었어. 나는 그렇게 황궁으로 들어갔어. 그리고 내가 지닌 모든 매력과 요염함을 총동원해서 황제를 사로잡았어 . 훗, 그는 정말로 맥을 못추었어. 완전히 내게 푹 빠졌지. 테룬을 낳기도 전에 날 제2황후로 봉할 정도였으니. 권력은 달콤했어. 황제가 내게 빠졌다는 것이 소문나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접근했고, 나는 요령껏 그들을 내 편으로 만들기 시작했어. 내 세력을 늘리면 늘릴수록 나는 강해지는 거고,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게 되는 거였어. 그리고 그거 알아? 그 오랜 세월동안 피해자 노릇만 해왔는데, 이제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다른 사람을 해칠 수도 있고 괴롭힐 수도 있는 게 얼마나 통쾌했던지!“ 펠리시티는 한껏 힘주어 말했다. “그래서 행복했나요?” 렌의 말에 펠리시티는 대답하지 않았다. “행복했었냐고요? 전혀 행복하지 않았잖아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믿을 사람 하나 없고, 한없이 외롭고, 알 수 없는 죄책감에 괴로워했잖아요.” “나는 살아 있었고 두들겨 맞지도 않고 강간당하지도 않았어! 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어! 그거면 충분했어!” 펠리시티는 외쳤다. 그러다 그녀는 힘없이 덧붙였다. “그 상태가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아, 테룬을 낳고 나서 모든 게 변했지. 그 다음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 “해야 해요.” 렌은 펠리시티가 왜 망설이는지 꿰뚫어보면서 그녀를 다그쳤다. “하기 싫어! 싫단 말이야!” “그 얘기를 하는 게 당신 자식에게 아무리 상처가 될지라도, 말해야 해요!” 펠리시티는 렌의 눈을 통해 고통스럽게 테룬을 바라보았다. 테룬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머니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의 눈길을 외면했다. 펠리시티는 신음했다. 그러다 독기에 차 외쳤다. “네가 감히 내 눈길을 피해? 네가? 내 마음도 모르고? 그래, 좋아! 다 까발려주겠어! 내 아들아, 잘 들으렴! 네 혈관 속에 흐르는 피가 얼마나 더러운 건지!” 하라스 4세는 펠리시티를 제2황후로 맞을 무렵 이미 중년이었다. 오랜 세월의 황음과 무기력이 그의 건강을 서서히 침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제2황후를 맞은 후 그는 반짝 원기를 회복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펠리시티에게 탐닉했다. 그 결과 펠리시티는 곧 임신했다. 펠리시티는 임신기간 중 묘한 우울증에 빠져 침잠해 있다가 마침내 아들, 제2황자 테룬을 출산했다. 쿠드는 주도면밀하게 핏덩이인 테룬을 살펴보고 그가 순수한 물의 기운을 타고났음을 알렸다. 소드 마스터의 형질이 발현하는지는 더 두고 봐야겠지만, 적어도 가장 어려운 관문은 넘은 셈이었다. 황제는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마음은 복잡했다. 이제 강인한 동생이 태어났으니 날이 갈수록 그를 닮아가는 유약한 큰아들 아제룬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소드 마스터를 만들어내는 종마 노릇이나 해야 하나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펠리시티는 황제의 복잡한 심경이 장차 아제룬과 테룬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면밀히 계산하면서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던 중 그 일이 생겼다. “그전에 왜 테룬을 낳았을 때의 심정은 이야기하지 않는 거죠?” 렌의 목소리가 펠리시티의 목소리를 가로막았다. “무슨 심정?” 펠리시티는 애써 무심한 척하며 넘기려 했다. “그대와 나는 지금 서로의 마음을 공유하고 있으니 내게 거짓말할 생각 따윈 하지 말아요. 그대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대신 말하겠어요.” 펠리시티는 막으려 했다. 렌의 손은 어느새 펠리시티에게 지배력을 빼앗겼다. 두 손은 필사적으로 렌의 입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렌은 다시 단호하게 펠리시티의 기운을 물리쳤다. 두 손은 힘없이 무릎 위로 떨어졌고 렌은 말을 계속했다. “폐하, 잘 들으세요.” “폐하를 뱃속에 넣고 있는 동안 폐하의 어머니는 당신에게 냉담했어요. 아기가 원망스럽고, 온 세상이 우울했어요. 하지만 진통이 시작되자 그녀는 아기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애착이 솟아나는 걸 느꼈어요. 당신의 어머니는 여러 시간의 진통 끝에 당신을 낳았어요. 긴긴 진통이 끝나고 무사히 당신이 세상에 나와 첫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그녀 또한 감동의 울음을 터뜨렸어요. 증오나 슬픔에서 비롯되지 않은 첫 울음이었어요. 핏덩이인 아기를 품에 꼭 안고 그녀는 맹세했어요. 이 아이는 내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아이를 지킬 거야. 이 아이에게 이 세상 좋은 것을 모두 줄 거야. 그녀는 이 무조건적인 애착에 압도당해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 그녀가 다른 존재를 이렇게 엄청나게 사랑하게 되자 그녀는 두려움까지 느꼈어요. 그녀? ?아기에 대한 사랑은 너무 커서, 유모가 대기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석 달 동안이나 직접 아기에게 젖을 먹였어요.“ “정말입니까, 어머니?” 테룬은 믿지 못하면서, 하지만 믿고 싶어 하면서, 렌 속의 펠리시티에게 물었다. 펠리시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말입니까?” 테룬이 다그치자 펠리시티는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그랬어!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그 일이 생겼다. 신하들은 귀한 자손을 보기 위해서는 임신 중에 동침하면 안 된다고 간언했다. 하라스 4세도 비슷한 속설을 들었기에 그는 욕망을 참고 펠리시티의 출산을 간절히 기다렸다. 다른 여자와 동침해도 성욕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는 자신이 펠리시티에게 너무 빠져 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펠리시티가 테룬을 낳고 산후조리가 어느 정도 끝난 후에도 황제는 그녀를 가질 수 없었다. 그는 비로소 당황하고 절망했다. 이 대목에서 펠리시티는 빈정거렸다. “흥, 사내란 두 다리 사이에 달려 있는 그 알량한 물건에 목숨을 걸지. 황제든 거지든 말이야. 황제가 얼마나 애가 탔을지 짐작이 가지? 눈앞에는 동제국 최고의 미녀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있는데 그의 두 다리 사이에 있는 물건은 힘없이 덜렁거리고 있으니 말이야. 그는 무기력함과 질투심으로 반쯤 미쳤어. 그래서 그는 결국 나를 폭행하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날 강간하게 했어.“ 테룬은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라고? 이게 네가 그토록 듣고 싶어 하던 진실이란다. 이런 얘기를 해주는 게 네게 무슨 도움이 될지는 도무지 모르겠지만.” 펠리시티는 부들부들 떠는 테룬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모처럼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는데, 이렇게 다시 그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자 황제는 차갑게 말했다. 테룬을 위해서라도 순순히 받아들이라고. 반항할수록 테룬에게 불리할 뿐이라고. 그 말에 펠리시티는 저항을 멈추었다. 테룬은 그녀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온 세상에서 그녀가 마음을 기울이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렇다. 그녀는 황제를 잘 알았다. 그 나약하고 부드러운 외관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황제는 콤플렉스와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었다. 평생 주위의 기대에 한 번도 부응해보지 못하고 아버지에게도 바보 같은 놈이라고 멸시당하고 제위에 오른 20여 년 동안 승리라고는 거두어보지 못한 한심한 자였다. 황제가 테룬에 대해 이중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건 명백했다. 자기와는 닮지 않은, 모두가 선망하는 새로운 황실의별. 아직 어린 아기이지만 벌써부터 황제보다 더 큰 신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펠리시티는 전부터 황제가 테룬을 보는 눈길에 사랑과 함께 질투와 원망이 섞여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황제는 테룬에게 위험한 존재였다. 골육상쟁이 흔한 동제국 황실이었다. 테룬의 목숨이 위험했다. 그녀는 테룬을 지켜야 했다. 반항을 포기하고 몸을 내맡기자 익숙한 고통이 그녀의 몸을 다시 채웠다. 어떤 면에서 그녀는 안도했다. 이런 일은 너무 여러 번 당해봐서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그녀는 다시 다짐했다. 이런 건 날 상처 입히지 못해. 난 견딜 거야. 모두 복수할 거야. 그렇게 당하고 나서 호화로운 제2황후궁에 돌아오자 유모는 언제나처럼 테룬을 데려다주었다. 금실로 수놓인 강보에 싸여 방실방실 웃고 있는 테룬을 보자 펠리시티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엄청난 분노가 밀려왔다. 순간적으로 펠리시티는 아기를 두 손으로 찢어발기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녀는 사납게 테룬에게 달려들어 아기의 두 팔을 잡았다. 손톱이 아기의 살에 푹 박혔다. 아기는 깜짝 놀라 자지러지게 울었다. 그녀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황급히 손을 뗐다. 넋을 잃은 채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마침내 유모를 불렀다. “오늘부터 제2황자는 유모들이 알아서 책임지고 돌보도록 해라. 그리고 지금 본 것은 입도 뻥긋하지 말도록 해.” 유모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테룬을 안은 채 사라졌다. 그리고 펠리시티는 그 자리에 그대로 못 박힌 채 처절한 피눈물을 흘렸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망가졌다. 학대를 받아서 망가져버렸다. 그녀는 아이의 엄마가 될 자격 따위는 없었다. 아들을 제대로 사랑할 능력도 없었다. 자신의 분노를 제어할 수도 없었다. 그 분노를 아기에게 쏟아 부었다. 그녀가 그토록 저주했던 그녀의 아버지와 똑같은 짓을 그녀는 자기의 아기에게 한 것이다. 그래, 차라리 테룬에게서 나 자신을 격리함으로써 그 애를 보호할 거야. 그녀는 결심했다. “그렇다면 왜 그동안 제게 그런 얘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테룬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다시 물었다. “그건...... .” 펠리시 티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제대로 된 어머니가 없는 네게서 아버지마저 뺏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야. 하라스 그는 자신의 더러움과 불만과 어두운 욕구를 내게 다 풀고 너에게는 선량한 얼굴만을 보여주었지. 뒤틀린 사랑이었을지언정 그는 너를 사랑했어. 그리고 결국 아제룬이 아닌 너를 선택했지.” 테룬은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아버지가 그런 인간이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자 모든 것이 아귀가 들어 맞았다. 그 정도로 끔찍한 비밀이 아니었다면 쿠드가 자살할 리 없었다. 그의 발밑 땅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온 세상이 캄캄해졌다. “아버지까지 그런 분이셨다니.” 테룬은 렌을 원망하는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이런 걸 알아서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건가. 정말로 과거를 덮어두고 잊어버리는 편이 낫지 않았나. 그러나 그 시선을 받은 것은 펠리시티였다. “네 아버지는 그런 자였어. 너도 알고 있었을 텐데. 다만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 뿐이지. 그렇게 세월이 흘렀어.” 세월은 흘렀다. 테룬은 그녀와 떨어져 수많은 유모에 둘러싸여 자랐다. 그리고 그녀의 수모도 계속되었다. 그녀를 욕보일 사내들은 늘 8서클 마법사 쿠드가 데려왔다. 그녀는 황제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고통과 쾌락을 연기하고 모든 오욕을 다 감수했다. 그런 한편으로 착실히 세력을 키웠다. 테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황제와 제1황후를 누를 실력을 쌓아야 했다. 그래서 황제의 눈을 피해 애인들을 만들었고, 그들을 이용해 정보와 자금과 권력을 늘려갔다. 그녀가 유일하게 믿는 게 있다면, 그녀와 잔 사내는 결국 그녀에게 복종한다는 것이었다. 황제가 그녀를 감시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감시책임자조차 유혹해 수중에 넣었다. 이용가치가 떨어진 애인들은 가차없이 죽여버렸다. 그런 중에도 그녀는 아들을 만나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는 악착같이 참았다. 아들이 자신의 족쇄가 되었다는 원망과 아들에 대한 사랑이 뒤범벅이 되어 그녀는 자신에게서 어떤 행동이 튀어나올지 몰랐고, 그런 일그러진 감정을 아이에게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정 참기 어려울 때에는 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거라고 스스로 핑계를 대어 때때로 다과회나 파티에 아들을 불러왔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도 그녀는 참고 참았다. 지극히 의례적인 몇 마디 외에는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고 가짜 미소 외에는 아무 다정함도 보여주지 않았다. 테룬이 여덟 살 되던 무렵부터 하라스 4세는 점점 건강이 악화되어갔고 그에 따라 그의 뒤틀린 욕망은 가라앉았다. 그녀의 육체적인 고통도 비로소 끝이 났다. “그 지경이 되어서야 그 작자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어. 눈부시게 아름다운 나를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 너무 괴로워서, 내가 말없이 불능인 자신을 멸시하고 있을 것 같아서, 자신이 나를 확실히 지배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하려고 그런 짓을 했다고 고백했지. 훗, 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용서했어. 물론 거짓으로. 나는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고 잊어버리겠어요. 나는 이렇게 말했어. 그는 감동했고, 나에게 한층 더 빠져들었어. 나는 속으로 언젠가는 그에게 반드시 복수해주겠다고 다짐했어. 하지만 폭행과 강간의 세월이 끝났어도 내 마음은 병든 그대로였어. 나는 아직도 너, 내 아들 테룬을 미워하는지 사랑하는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몰랐어. 그래서 나는 전처럼 네게 차갑게 대했지. 너는 괴로웠겠지만 그래도 그게 최선이었어. 그런데 그 건방진 수석유모가 감히 내게 충고했어. 너를 불러내지 말라고! 아, 그년은 몰랐을 테지! 날 만나러 오는 그날 네가 기대와 불안으로 떨었던 것처럼 나도 그랬다는 걸! 나는 네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보고 싶어서 네가 오기로 한 날 전날에는 대개 한잠도 자지 못했어! 그리고 네가 가고 난 다음에는 보통 반나절을 눈물로 보냈어!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지. 그런 건 다 내 약점이 되어버리니까. 그런데 그 유모가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그리고 네가 와서 유모의 역성을 들다니! 내가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는지 알겠니? 그때 그 가슴이 얼마나 찢어졌는지 아니?“ 펠리시티의 처절한 물음에 테룬은 말을 잃었다. “네가 검을 수련한다는 핑계로 날 떠나버린 후 나는 더 황폐해졌어. 5년이란 세월 동안 내 속은 썩을 대로 썩었어. 너에 대한 미움과 분노와 사랑과 그리움이 전부 뒤엉켜서 나는 반쯤 제정신이 아니게 되었지. 그래서 열다섯이 된 너를 보았을 때 그런 짓을 저질렀던가봐.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 나는 그저 내 아들이 소드 마스터가 된 걸 축하해주고 싶을 뿐이었어. 그런 핑계로라도 널 다시 보고 싶었어. 네가 거절하지 못할 정도로 성대한 파티를 열고 널 초대했지. 널 보는 순간 나는 너무 기쁘고 미안하고 행복했어.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났지. 나는 모든 걸 다시 처음부터 잘 해보고 싶었어. 너는 이제 성장했지만 여전히 내 아기였고, 내가 안아주자 너도 울었지. 난 네게 그동안 주지 못한 엄마의 정을 모두 주고 싶었어. 하지만, 나는 이미 완전히 망가져 버렸던가봐. 그날 밤, 네가 다시 검술을 수련하기 위해 떠나겠다고 했을 때, 나는 갑자기 이성을 잃었어! 분노가 나를 휩쓸었어! 내 인생에서 너는 전부였지만, 너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내가 어떻게 너를 보호하고, 얼마나 괴로이 너를 떠나보냈는데! 내 젊음이, 아니 내 인생이 전부 다 너를 지키느라 흘러갔는데! 나는 절대 너를 놓아주지 않겠다고 결심했어! 그래서...... 그래서 나 스스로도 나 자신을 어쩔 수가 없었어. 하지만 내가 얼마나 너를 망치고 있는지 깨닫는 순간 나는 너에게서 떠나기로 결심했어. 그리고 그 대신 아제룬을 선택했지. 그 결정은 너를 위한 것이었어. 그를 망치면 황제 자리는 결국 네게 돌아올 테니까. 그게 다란다.“ 펠리시티는 말을 마쳤다. 그러다 다시 발작하듯 외쳤다. “이 자리의 누구도, 테룬 너도, 그리고 지금 이 몸의 주인인 렌이라는 계집도, 온 세상 누구도 나를 욕할 자격이 없어! 온 세상은 내가 가장 괴로울 때 단 한 번의 도움도 주지 않았어! 나는 내가 받은만큼 돌려준 것뿐이야! 그리고 아들아, 너는 내가 유일하게 진심을 준 존재인데, 너는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나를 거절하고 내게서 등을 돌렸어! 계집애야, 대체 왜 나를 불러낸 거야? 왜 나를 다시 깨워 과거의 고통을 처음부터 끝까지 되풀이하게 한 거야? 나는, 나는 그냥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싶었을 뿐인데!“ 두 눈에서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펠리시티는 울먹이며 띄엄띄엄 중얼거렸다. “내 인생은 고통뿐이었고, 내가 이 모진 목숨을 부지하면서 더 많은 고통이 생겨났어. 내 영혼을 없앨 수 있다면 깨끗이 없애줘. 나는 앞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 안식의 들판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걸 소망하기에는 나는 너무 더럽혀지고 너무 지쳤어.” 긴 침묵이 흘렀다. “아니에요.” 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라니!” “펠리시티 그대에게도 희망은 있어요.” “무슨 희망?” “그대의 모든 고통이 누군가에게 이해되고 용서되는 희망이요.” 펠리시티는 힐끗 아들을 바라보았다. 테룬은 하얗게 질린 채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테룬 황제 폐하, 잘 들으십시오. 그리고 펠리시티, 당신도 들으세요. 아이는 정직해서, 사랑으로 자라면 사랑을 베풀고, 폭력과 증오로 자라면 다시 그 폭력과 증오를 세상에 되돌립니다. 그렇게 폭력과 증오는 부모에게서 아이로, 다시 그 아이로 이어져 갑니다. 그 영원한 폭력과 증오의 사슬은 누군가가 일부러 끊겠다고 결심하지 않는 한 끊어지지 않아요. 폭력과 증오의 사슬을 끊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아이가 학대당할 때 아이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것. 아이를 보호하는 걸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 쉬쉬하지 않고 원인을 찾아 단호히 응징하는 것. 하지만 실제로는 어떻지요? 많은 경우 아이의 말을 믿어주지 않아요. 아이의 말을 믿더라도 창피하니까 덮어두려고 해요. 제일 기가 막힌 건 분란을 막기 위해 아이더러 참고 견디라고 하는 거예요. 가엾게도, 펠리시티 당신도 바로 그런 일을 겪은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그 순간 망가진 거예요. 그 옛날 당신은 어쩔 수 없었어요. 당신은 달리 방법이 없었어요. 당신은 어린애였고, 당신을 보호해줘야 할 어른들은 모두 책임을 저버렸어요.“ 렌은 눈물을 흘렸다. “내 눈물이 값싼 눈물이라는 걸 나도 알아요. 그치만 당신을 둘러싼 사람들은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요. 그대의 주위에 있던 수 많은 사람들 중 단 한 명이라도 그대에게 손을 내밀어줬어야 했어요. 단 한 명이라도, 그저 몇 달만이라도. 누구라도 그대를 보호하고 아껴주었으면 그대는 그런 인생을 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대는 원래 용감하고 총명했으니 결국 바르게 살아갈 힘을 얻었을 텐데.” 렌은 계속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녀 몸속의 펠리시티는 방해하지 않고 렌의 말을 조용히 들었다. 테룬도 홀린 듯 렌을 쳐다보았다. “학대받은 아이들이라 해도 운 좋게 정상적으로 자라나기도 해요. 대체로 주위에 믿을 만한 사람이 있어서 학대로 인한 상처를 덜어주는 경우이지요. 하지만 펠리시티 당신에게는 그런 믿음을 보여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러니 펠리시티 당신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었겠어요? 태어나서 첫 번째로 마음을 연 사람에게 배신당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 수 있었겠어요?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배워서 익히는 건데, 당신에게 믿음을 가르쳐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아, 나중에라도, 당신의 남편이나 하다못해 친구라도 당신의 상처를 이해하고 감싸주었다면, 당신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니 당신 이 스스로를 지킬 방법이란 단단히 갑옷을 껴입는 것 밖에 없었죠. 나는 강해, 나는 이런 학대로 상처받지 않아, 나는 더 이상 부모님이 필요 없어, 나는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들이 날 때리고 괴롭히고 비난해도 실망하지 않아. 하지만 상처받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갑옷을 껴입게 되면 결국 그 아이는 커서 그 갑옷 속에 갇혀버리고 마는 거예요. 테룬,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테룬은 흠칫 놀랐다. 렌이 하는 말은 그가 어린 시절 그 수많은 밤 눈물로 베개를 적시면서 스스로 거듭 다짐했던 바로 그 말이었다. ‘나는 소드 마스터가 될 거야! 그러면 누구도 나를 상처 입히지 못할 거야! 더 이상 어머니도 나를 괴롭히지 못하게 될 거야! 나는 강해질 거야!’ 침대 속에서조차 목검을 끌어안고 자면서 어린 시절의 그는 얼마나 이를 악물었던가.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또 어땠던가. 그의 어머니도 그와 마찬가지로 상처받지 않겠다고 부르짖지 않았던가. 그는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 같은 오싹함에 몸을 떨었다. “테룬, 당신이 어린 시절 어머니의 냉담한 거절로 고통당하던 게 기억난다면 당신의 어머니가 끝없이 가해지는 폭행과 성적 학대 속에서 그 얼마나 더 큰 고통을 당했을지 상상해 보세요. 연약하고 힘없는 어린 소녀가 도와줄 사람 하나 없이 육신과 영혼을 산산이 파괴당하는 그 끔찍한 과정을요.” 테룬은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렇게 괴로우셨던 겁니까?” 펠리시티는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는 몰라.”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왜 제게 그렇게 대하셨던 겁니까! 아버지나 아제룬 형님께는 복수라 치고, 제게는 왜 그러셨습니까! 제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다면서요!” 렌이 펠리시티 대신 대답했다. “그녀는 망가졌어요. 그녀가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 그녀를 고쳐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그런 상태로 그녀는 생존을 목표로 살아갔지만, 가엾게도 처음으로 사랑할 대상이 생겼어도 그녀는 온전히 당신을 사랑할 수가 없었어요.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으니까요. 그녀가 배운 거라곤 학대하고 학대받는 것, 참는 것, 복수하는 것, 강한 척하는 것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테룬, 당신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줄 수도 없었죠. 그래도 그녀는 당신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어요. 테룬, 당신은 당신 안에 거대한 분노가 들끓고 있는 걸 알고 있죠? 학대받은 아이들의 가슴에는 그런 분노가 잠재되어 있어요. 그 분노는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어요. 아주 작은 계기로도요. 당신은 그 분노를 전쟁터의 살육이라는 방식으로 합법적으로 터뜨려왔지만, 펠리시티는 어땠죠? 학대받은 사내아이들은 커서 분노를 싸움터나 전쟁터에서 쏟아내고, 더 한심한 놈들은 자기 마누라나 아이들에게 풀지요. 하지만 학대받은 여자아이들이 크면 자신보다 약한 사람은 자식밖에 없으니 그들은 그 분노를 대개 자식에게 투영하지요. 아, 그 수많은 아기들! 데이고 찢기고 베인 무력한 아기들! 저는 빈민굴에서 그런 아기를 참 많이도 봤어요! 당신을 멀리하겠다는 결심은 그녀로서는 최선이었어요. 그녀는 그렇게 당신을 사랑했는데! 아무리 일그러진 방식으로라도 어쨌든 사랑은 사랑이었는데! 엄마가 젖먹이 아기를 떼어놓는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당신이 알기나 해요?“ 렌이 울부짖자 테룬은 저항했다. “하지만, 내가 열다섯 살 때의 일은! 그건 무슨 변명으로도 용서가 안 된다!” 렌은 처연하게 말했다. “그래요. 그녀가 한 짓은 천인공노할 짓이죠. 하지만 몹시도 가여운 일이에요. 아버지에게서 학대당한 소녀는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를 침범당하고 스스로도 경계를 그을 줄 모르게 되죠. 해서는 안 되는 일과 해도 되는 일의 구별이 희미해지게 되어버리는 거예요. 바로 자신의 부모, 모든 걸 가르쳐주는 존재가 그런 일을 저질렀으니까요. 더 가슴 아픈 건, 부모에게서 성적으로 학대당한 아이들 중 어떤 경우는 세상의 인간관계를 성적으로만 보게 된다는 거예요. 유일하게 익숙한 인간관계는 그것뿐이니까요. 극단적으로 남자들을 증오하기도 하고, 극단적으로 성에 탐닉하기도 하지요. 그렇게 영혼에 남은 상흔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상처 입은 자를 괴롭히는 거예요.“ 테룬은 말을 잃었다. 과거의 비극이 그렇게 먼 미래에까지 아로새겨져 인간의 운명을 뒤트는 것이라니. 렌은 다시 나직하게 말했다. “세상에 고통은 많고 많아요.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고 그 고통을 다시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지요. 대개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요. 가족은 가장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서로 가장 깊은 상처를 주고받고, 상처는 부모에게서 아이로, 다시 그 아이에게로 전해지지요. 펠리시티의 인생은 불행 그 자체였고, 그녀는 자신의 불행을 불살라 많은 사람을 다시 불행에 빠뜨렸어요. 그렇지만 과연 그녀만을 단죄할 수 있을까요? 무한한 가능성과 미래를 품고 있었던 ? 柳析?그렇게 처참하게 망가져버린 것이 그녀 혼자만의 탓일까요? 그래서 우리는 그녀를 이해해야 하는 거예요. 이해한다는 건 별다른 게 아닙니다. 위기의 순간에 누군가가 내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면, 선의에서 비롯된 작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 또한 그녀와 같은 처지에 놓여 그녀처럼 불행한 운명을 겪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불행을 피하고 마음속에 미덕을 품을 수 있게 된 것은 우리 스스로의 능력이 아니라 그저 행운이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운명 앞에 인간은 한없이 작다는 걸 인정하고 겸허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짐승이 도사리고 있고, 우리가 인간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엄청난 기적이라는 걸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스스로의 불행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수한 죄악을 저지르게 된 것을 함께 슬퍼해주는 것입니다. 테룬, 당신은 어머니의 불행과 죄악을 슬퍼해줄 수 있나요?“ 테룬은 마침내 눈물을 흘렸다. 그렇다. 그는 슬퍼했다. 그녀가 피하지 못한 모든 비극과 고통을 자기 일처럼 슬퍼했다. 그는 어린애처럼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 안의 어린 소년이 눈을 떠 함께 울었다. “어머니, 거기 계세요?” 테룬의 말에 렌의 의식을 밀치고 펠리시티가 다시 나왔다. “그래.” 그녀의 목소리는 딱딱하고 냉담했다. 테룬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렌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렌의 이마에, 아니 펠리시티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의 눈물이 렌의 얼굴을 적셨다. “제가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제가 조금만 더 어른이었더라면, 제가 저 자신의 불행에만 사로잡히지 않고 어머니를 이해하려고 조금의 노력이라도 했으면, 그랬다면 저는 어머니를 그 계속되는 불행에서 구해드릴 수 있었을 겁니다. 우리 둘 모두를 구원할 수 있었을 겁니다. 어머니가 끝도 없이 죄악을 저지르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저 스스로의 분노와 고통에 빠져 어머니를 외면했습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저를 용서해주세요.“ 눈물로 흐려진 눈앞으로 무수한 과거의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생각해보면 자신을 바라보는 펠리시티의 그 복잡한 표정은 사랑과 갈망과 체념이었다. 왜 몰랐을까. 렌은 몸속에 있는 펠리시티의 기운이 마구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펠리시티는 당황했다. 아들의 입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또 다른 말이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그녀는 용서를 구하는 아들에게 무어라 해야 할지 몰랐다. “아, 아...... .”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독기가 빠지기 시작했다. 그녀를 두르고 있던 단단한 영혼의 갑옷이 차례차례 땅에 떨어져 내렸다. 아무 보호막 없이 그녀의 영혼은 아들을 직시했다. 그녀는 갓 태어난 핏덩이인 테룬을 안고 처음으로 세상과 연결된 기분이 들었던 그때, 이 아기를 자기 자신보다도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때로 돌아갔다. 아들의 진심이 그녀에게 와 닿았다. “테룬, 날 용서해주겠지?” “어머니께서 절 용서해주신다면요.” 울먹이면서 한 그 말이 펠리시티의 마음을 녹였다. 펠리시티는 손을 뻗어 아들을 꼭 끌어안았다. 펠리시티의 마나는 빛나기 시작했다. 렌의 몸도 함께 빛났다. 렌의 눈을 통해 수십 년 동안 쌓여왔던 한이 눈물이 되어 흘러나왔다. 렌의 몸을 채웠던 음산한 마나는 어느새 개운하고 맑은 기운으로 서서히 변했다. “이제 나는 사라져도 여한이 없어. 내 아들아, 정말로 미안하다. 내가 네게 준 것은 불행뿐이었지만 너는 내게 평생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행복을 주었구나. 그래, 그것만으로도 나는 태어난 걸 후회하지 않아.” 펠리시티는 속삭였다. “나는 평생 나 자신의 불행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돌보지 않았었지.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행을 주었지. 아들아, 나를 위해 속죄해줘. 온 세상에 무수히 많은 학대받는 아이들, 그들을 구해줘. 도움의 손길을 갈구하는 아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줘. 나처럼 모든 도움을 거부당하고 불행해지지 않도록. 작은 도움만으로도 그 아이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야.“ “예, 그러겠습니다. 어머니, 제 평생을 바쳐 그렇게 하겠습니다.” 렌의 몸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한층 강해지고 펠리시티의 목소리는 한층 더 선량해졌다. “렌, 고마워요! 내 영혼과 내 아들의 영혼을 치료해줘서!” 렌은 미소지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짓는 충만한 미소였다. “펠리시티, 당신도 내 영혼을 치료해주었어요. 당신의 고통과 슬픔을 따라가고, 그 고통과 슬픔을 용서받으면서, 제 안에 있던 죄악도 함께 용서받았어요. 그리고 제 안을 채웠던 끝없는 허무감과 무력감도 녹듯이 사라졌어요. 고마워요.” “나 같은 여자의 축복이 무슨 소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대에게 축복 있기를!” “펠리시티 당신에게도 안식 있기를!” 테룬은 펠리시티의 마나가 렌에게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다급해졌다. “어머니! 아직 가시면 안 됩니다! 하고 싶은 말이 태산인데!” “아들아, 나는 이미 죽은 자. 미련을 버렸으니 나는 사라져야 한단다. 사랑한다, 테룬.” 테룬은 악을 썼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렌의 몸에서 빛이 사라졌다. 테룬은 펠리시티가 그의 마지막 말을 들었는지 어쩐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다시 울었다. 그의 마음에 맺혔던 응어리와 분노는 사라졌다. 대신에 인생의 고단함과 운명의 덧없음이 그를 사로잡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기분과 한없이 무거운 기분이 함께 들었다. 용서란 것이 이런 것이었던가. 이런 마법 같은 거였던가. 그의 마음에 사랑이 충만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 아버지에 대한 사랑, 렌에 대한 사랑. 상처도 그대로, 과거도 그대로, 고통도 그대로였지만 그는 자신이 치료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이제 온전히 사랑할 수 있었다. 이런 것이 사랑이었다. 상대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것. 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상대에게 보여주는 것. 그의 눈앞에 지치고 쇠잔하지만 무척이나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렌이 비쳐졌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어머니의 그림자도 아니고 집착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렇다. 그는 렌을 지금 모습 그대로 사랑했다. 그러나 다시 슬픔이 그를 가득 채웠다. 늘 세상의 좋은 것은 모두 너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세상의 좋은 것이 모두 그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렌이 죽기 전에 그녀에게 자신의 사랑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렌은 그를 이해했다. 그래서 얼싸안은 두 팔에 힘을 주어 그를 한 번 꼭 껴안았다. “이제 모든 게 잘될 거예요.” 다정한 그녀의 말에 테룬은 다시 울었다. 렌은 팔을 풀고 의자에 축 늘어졌다. 온몸의 힘이란 힘은 다 바닥났지만 기이하게도 몸과 마음이 무척 가벼웠다. 렌은 원래 이 위험한 치료를 빌려 죽을 생각이었다. 며칠 남지 않은 축제날 카엔을 만나기 전에 죽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금 렌의 마음은 달라졌다. 이제 카엔을 만나도 걱정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카엔을 만나 그녀의 마음을 읽게 하고 싶었다. 그녀가 깨달은 비밀을 그에게도 알리고 싶었다. 그 비밀이란 단순했다. 모든 생명은 서로 죽고 죽이지만 또 한편 서로 의지하는 존재라는 것. 그래서 생명은 죽음으로 이어지고 죽음은 다시 생명을 낳는다는 것. 그렇게 모든 영혼은 형태를 바꾸어가며 세계와 공명한다는 것.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생명은 언제나 다른 생명에 빚을 지고 살아가지만, 그렇기 때문에 생명은 서로에게 소중하다는 것. 그래서 생명은 서로를 위해 슬퍼하고 서로를 가엾게 여기고 서로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은 허무한 일이 아니었다. 세상은 부조리와 증오와 살육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섭리와 사랑과 생명으로도 차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그저 동전의 양면일 뿐이었다. 세상은 아름다웠다. 생명이 죽고 죽이면서 서로 살리고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살아 있는 게 기뻤다. 온몸이 터질 것처럼 기뻤다. 렌은 자신의 유머감각이 다시 살아나는 걸 느꼈다. 이 웃음기, 얼마 만에 느끼는 거였나. 그녀는 조금 전의 괴현상을 해석하려 애쓰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데이그랜을 바라보았다. 렌은 늘어진 채로 웃었다. 이곳에 오고 나서 종종 짓던 허탈하고 자조적인 미소가 아니라 진심에 찬 미소였다. “데이님, 제 몸에 집어넣은 게 그냥 마나덩어리라고 하셨죠?” “예, 그랬었습니다.” 데이그랜은 쩝 하며 대답했다. “데이님이 모으신 게 마나의 8할 정도랬죠?” “맞아요.” 데이그랜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런데 틀림없이 제 속에 있던 건 단 한 점의 누락도 없이 온전한 펠리시티의 영혼이었으니, 그게 마나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 틀린 거 아닌가요?” “아아, 그것이...... 그러니까...... .” 데이그랜은 대답을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그러다 참을 수 없어져서 물어보았다. “영혼이라는 게 정말 존재하는 겁니까?” 렌은 밝게 웃었다. “위대하신 지혜의 흑룡 데이그랜님이 하찮은 인간인 제게 묻는 건가요?” 데이그랜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다시 물었다. “만약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면 드래곤에게도 영혼이 있는 겁니까?” 렌은 다시 씩 웃었다. “후후후. 그건 스스로 알아보셔야 할 거예요. 어쨌든 이번 일은 데이그랜님의 공이 컸지만, 사실은 엉망진창이었어요. 데이그랜님도 잘 아시죠?” “네.” 데이그랜은 기가 죽어 대답했다. “보통은 치료를 도와준 사람에게 경중에 따라 치료비의 몇 할 정도 나눠주지만 데이그랜님은 이번엔 치료비를 나눠가질 자격이 없어요. 그러니 치료비는 온전히 제 몫이에요. 그리고 앞으로 이름 앞에 붙인 ‘지혜의’ 어쩌구는 떼세요. 대신 ‘덜렁대는’ 이라든지 ‘막무가내’라든가 ‘저지르고 보는’ 이라든지 뭐 그런 걸 붙이시죠. 덜렁대는 지혜의 흑룡 데이그랜, 어때요?” 렌의 놀림에도 데이그랜은 할 말이 없어 멋쩍은 웃음만 지었다. “황제 폐하!” 렌이 다시 자신을 부르자 테룬은 깜짝 놀랐다. “응?” “치료비요. 치료비를 주세요.” 테룬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마침내 이해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엇을 받고 싶지?” “쉼터요.” “쉼터라고?” “네, 학대받는 여인들과 아이들이 찾아오면 한 달 동안 먹여주고 보살펴주는 쉼터요. 일단 동제국의 5대 도시에 하나씩 설치해주세요. 한 달이면 짧은 기간이지만 동제국의 예산으로 더 길게 잡는 것은 무리겠죠. 철저한 보안으로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의 비밀을 보장하고, 남편이 찾아와 행패부리는 걸 막을 수 있게 무사 한 명 정도는 배치하고, 혹시 거짓으로 들어와서 공짜로 숙식하려는 여자와 아이들을 거를 수 있도록 진실반응 스크롤도 갖춰놔야겠죠. 비싸고 정확한 스크롤은 필요 없어요. 그저 2서클 마법사 정도가 만든 거면 충분해요. 쉼터의 예산과 운영방식은 제가 내일 자세히 적어드리겠어요. 아마 5대 도시에 하나씩, 수용 인원을 50명씩으로 하면 집값 빼고 운영비가 한 달에 300골드 정도 되겠지요. 일 년이면 3,600골드고요. 대 동제국의 예산으로 그 정도면 껌값이겠죠?“ “껌이 뭐지?” 렌은 잠시 당황했다. “아, 씹어 먹는 과자 같은 건데, 남대륙 사람들이 많이 먹어요.” 렌이 당황하는 걸 본 데이그랜은 모처럼 신이 났다. “그래, 남대륙 사람들은 매일같이 껌을 씹지. 그걸 많이 먹으면 피부가 고와진다고 하거든. 귀한 과자여서, ‘자다가도 껌이 생긴다’ 라든지 ‘눈물 젖은 껌을 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에 대해 논하지 말라’ 든지 그런 속담도 있지.” 기가 살아난 데이그랜을 보며 렌은 혀를 찼다. 저게 어디 지혜의 흑룡이람. “그리고 별도로 제 몫으로 500골드를 주세요.” “그건 어디다 쓸 건데?” 렌은 밝게 말했다. “제 손에 죽은 병사들의 가족들에게 위자료로 줄 거예요. 그들을 찾는 데 도움을 주세요. 혹시 제가 그들을 찾기 전에 수명이 다해 죽으면 폐하께서 저 대신 그들을 찾아 그 돈을 전해주세요.” 렌이 죽음을 언급하자 테룬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대가 죽기까지 얼마나 남았지?” “글쎄요. 아주 길어야 일 년?” 테룬은 한층 어두운 표정을 지었으나 렌의 얼굴은 여전히 밝고 명랑했다. 이제 그녀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았다. “그대에게 할 말이 있어.” “뭐지요?” “축제장에서 하겠다.” 테룬은 그곳에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청혼하리라 결심했다. 그녀의 삶이 얼마나 남았든 그녀와 함께 있으리라. 그리고 거절당하더라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에게 감사하리라. “저도 축제장에서 드릴 말씀이 있어요.” 렌은 테룬이 그곳에서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가엾은 사람. 내 혈육처럼 친숙한 기운을 지닌 사람. 그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가 사랑하는 나는 그걸 돌려줄 수 없다. 렌은 테룬을 사랑했지만 그것은 카엔을 사랑하는 그런 사랑은 아니었다. 테룬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 카엔에 대한 여자의 남자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러니 렌이 테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연민과 이해와 인간애뿐이었다. 렌은 축제장에서 테룬에게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거절당한 사랑의 고통을 스스로 감당하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 렌은 카엔의 손을 잡을 것이다. 테룬은 괴로워하겠지만, 그는 그래도 살아갈 것이다. 더 이상 과거의 유령이 그를 괴롭히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상처는 아직 고통스럽지만, 상처는 서서히 아물 것이고, 흉터조차도 언젠가는 흐려질 것이다. 렌은 다정하게 테룬의 뺨을 쓰다듬었다. 남은 힘이 모두 빠져나갔다. “이제 쉬겠어요.” 데이그랜이 달려와 그녀를 안아들었다. 데이그랜과 렌이 나가자 티르안 공녀는 긴 한숨을 쉬었다. 조금 전의 엄청난 기적에서 그녀는 철저한 제3자였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제 분노와 증오를 버리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나 그것은 그녀 덕분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 사랑은 그녀를 향하지 않았다. 공녀는 서제국 황제의 마수가 뻗쳐 있으니 렌을 파티장에 보내지 말라고 경고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렌이 사라진 문 쪽을 멍하니 바라보는 테룬을 보자 그런 마음은 사라져버렸다. 그녀 안에도 상처가 있고 학대받은 아이가 숨어 있지만, 그녀는 그래도 그 상처와 학대받은 아이를 부여잡고 지금까지처럼 살아갈 것이다. 지금까지처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렌이 사악한 서제국 황제에게 끌려가고 나면 테룬은 방법이 없었다. 그는 나라를 위해 체념할 것이고, 그녀는 결국 테룬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저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 렌이 죽기 직전까지 서제국 황제에게 영혼을 해부당하며 고통받게 된다면, 나는 그 죄를 감당할 수 있을까? 테룬 황제에게 알려야 하지 않을까? 공녀는 스스로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이제 사흘 남았다. 카엔은 고젠 백작가의 저택에 앉아 창밖의 황궁을 내다보았다. 이미 그는 렌의 방이 어디인지 파악해놓고 있었다. 다른 황궁 건물들에 가려 렌의 방 창문이 바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가슴은 뛰었다. 내가 보낸 꿀과자는 잘 받았을까. 날 그리워하고 있겠지. 아프다던데 이제는 괜찮아졌을까. 내 편지가 유치하다고 웃지는 않았을까. 이제 사흘 남았다. 사흘 후면 그녀를 만날 수 있다. 내 사랑 렌을. 데이그랜은 렌을 꽃의 방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렌의 얼굴에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는 렌이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비관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조금 전의 기적을 보고 그조차도 희망이 생겼다. 어쩌면 드래곤들에게도 다른 길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 인간의 마음이 상처를 고치는 것과 한 종족의 멸망을 막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이계에서 온 기적의 치료사 렌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방법은 없을 것이다. 길고 긴 역사를 자랑해온 용족은 이대로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만 할 것이다. 거짓 미소가 지워지고 데이그랜의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 찼다. 잠시 다가올 멸망을 잊고 이곳에서 렌과 노는 것도 즐거웠으나 언제까지나 그런 식으로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다른 용들에게 얘기해야지. 이제 끝이라고. 더 이상 우리들에게 미래는 없다고. 용족이 사라져도 인간들은 그들의 빈자리를 메울 것이다. 그들은 드래곤들보다 훨씬 격렬하게 자신들의 미래를 만들어갈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그 충동적이고 잔인하고 무자비한 성정이 자신들의 멸망을 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드래곤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렌의 뺨에 손을 대었다. 그 순간, 그는 경악했다. 아주 미약했지만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하는 이 투명하고 아름다운 기운, 생명으로 충만한 기운, 바로 렌이 정명기라고 부르는 그 기운이었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숨이 가빠지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실낱같은 희망이 다시 살아났다. 그동안 그는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나. 이 작은 희망에도 이렇게 심장이 뛰다니. 그는 숨을 골랐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저 기운의 원리가 뭔지는 몰라도 렌이 사람을 죽였을 때 저 기운이 사라진 건 심리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렌이 스스로를 용서하고 기쁨을 다시 느끼게 되었을 때 기운이 돌아온 거겠지. 여전히 렌은 죽어가고 있었고 희망은 거의 없었지만, 작은 희망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데이그랜은 결심했다. 아마도 렌에게 드래곤을 구할 열쇠가 숨어 있을 것이다. 사흘 후 결계가 약해질 때 렌을 데려가리라. 가을밤은 깊고 달은 밝았다. (7권에서 계속) 잠깐! 이것만은 알아두자! 서바이벌 응급구조법 안녕하세요? 저는 치료사 렌의 작가 한도현입니다.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려 간단한 응급구조법 두 가지를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심폐소생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의식을 잃고 숨과 심장박동이 멈추었을 때, 계속 피와 신선한 공기를 공급해주면 나중에 병원으로 옮겨진 후 살아날 확률이 대폭 높아집니다. 하지만 그 상태에서 5분 이상 방치되면, 즉 뇌에 공급되는 피와 산소가 5분 이상 중지되면, 인간의 뇌는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고, 나중에 아무리 처리를 해도 살아나기 힘들어집니다. 6분이 지나면 사실상 사망입니다. 다른 세포는 재생이 되어도 뇌세포는 한 번 파괴되면 그걸로 끝이거든요. 더도 덜도 아닌 5분, 딱 5분이 죽음과 생명의 경계를 가릅니다. 멈춘 심장과 폐에 혈액과 공기를 공급하는 요령이 심폐소생술입니다. 여기서는 가장 기본적인 구강 대 구강 인공호흡법과 심장마사지 요령을 소개해드릴게요. 기본 순서는 이렇습니다. 1. 환자가 의식이 있는지 확인한다. 2. 도움을 요청하고 119에 신고한다. 3. 환자를 평평한 곳에 수평으로 눕힌다. 4. 심폐소생술을 실시한다. 1.의식이 있는지, 숨을 쉬는지 확인한다. 환자를 부드럽게 흔들며(절대 세게 흔들지 마세요) ‘정신 드세요?’ 하고 물어보고, 환자의 코에 손을 대서 숨을 쉬는지, 가슴에 귀를 대어 가슴이 뛰는지 확인합니다. (5권 말미 에서 렌이 하던 거 기억나시죠?) 2. 도움을 요청한다. 이건 물론 당장 해야 하는 일이지요. 하지만 여러 명이 있을 경우 분담해서, 한 명은 신고하고, 다른 사람은 환자를 돌보는 게 좋고요. 혼자밖에 없는데 옆에 응급환자가 있고 인적은 없고 날은 어두워지고 휴대폰 충전은 까먹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환자를 놔둔 채 신고하러 가기보다는 환자 곁에서 응급처치부터 해야 합니다. 3. 환자를 평평한 곳에 눕히고 기도를 확보한다. 응급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딘가에서 떨어지거나 넘어져서 의식을 일은 경우 뼈가 부러진 경우도 많으니 절대 함부로 옮기지 말고, 굳이 옮겨야 하는 경우 들것을 사용하고, 들것이 없으면 여러 사람이 함께 몸을 잡고 수평으로 옮기는 게 좋습니다. 목과 몸통이 따로 돌아가지 않도록 목을 지지하여 옮기는 게 포인트입니다. 기도 확보는 아래에서 설명할게요. 4. 심폐소생술을 실시한다. 환자 옆에 두 명이 있으면 2인 1조로, 한 명밖에 없으면 인공호흡과 심장압박을 번갈아 실시합니다. 요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강 대 구강 호흡법은 이렇습니다. 첫째, 환자의 목을 뒤로 젖혀 기도를 개방합니다. 의식을 잃은 환자는 혀가 목구멍으로 말려들어가 기도를 막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턱을 앞으로 당겨주고 이마를 뒤로 눌러주면(그림 1 참조) 혀의 위치가 바뀌면서 기도가 열립니다. 그 상태에서 숨을 불어넣어야 환자의 폐까지 닿지요. 이렇게 하면서 입 안에 손을 넣어 혹시 이물질이 있는지 확인합니다. 둘째, 한 손은 환자의 이마를 누르고 그 손의 엄지와 검지로 환자의 콧구멍을 꽉 집어서 코를 막은 후 환자의 입에 자기 입을 덮어서 완전히 환자 입을 밀봉합니다. 셋째, 최대로 숨을 내쉬어서 환자의 입 안에 공기를 불어넣어주는데 이때 환자의 가슴이 약간 불룩해질 때까지 숨을 불어넣습니다. 공기를 불어넣은 다음에는 입을 떼어 숨을 크게 마시고 다시 같은 요령으로 숨을 불어넣습니다. 그러면서 환자의 가슴이 스스로 오르내리는지 확인합니다.(그림 2 참조) 처음에는 2~3초에 한 번씩, 10여 차례 뒤에는 5초에 한 번씩 실시하는 게 요령입니다. 심장압박은 이렇습니다. 손바닥 중 엄지랑 붙은 도톰한 부분있지요? 그 부분이 환자 양 젖꼭지 중간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 놓인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그 위에 다른 손을 포개서 함께 힘을 가하고요.(그림 3 참조) 심장은 왼쪽에 있지만 압박하는 부분은 가슴의 중앙, 양 젖꼭지 한가운데라는 걸 꼭 기억하세요. 가슴을 3~5센티미터 정도 압박한다는 기분으로 누르세요. 그럼 심장이눌리면서 그 안에 고였던 피가 밖으로 나오고 혈액순환이 이루어집니다. 맥박이 뛰는 속도보다 약간 빠르게 한다는 기분으로 압박하면 됩니다. 살짝살짝 하면 효과가 없고요, 조금 무리겠다 싶을 정도로 팍팍 눌러야 합니다. 이거 하다 보면 갈비뼈가 나가는 수도 있는데, 갈비뼈는 다시 붙지만 한 번 목숨이 날아가면 그걸로 끝이니 갈비뼈가 나가더라도 놀라지 말고 계속하여야 해요. 환자 옆에 두 명이 붙어 있을 경우에는 둘이 분담해서 인공호흡 한 번 하는 동안 심장압박 다섯 번 하는 비율로 속도를 조절하면 되고요, 한 명밖에 없을 경우 심장압박을 열다섯 번 한 후 인공호흡을 연달아 두 번 하고 다시 심장마사지로 돌아갑니다. 더 자세한 응급구조 요령은 대한적십자사에서 정기적으로 교육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한 번 대한적십자사 사이트에 들어가서 확인하십시오. 위에다 적은 건 기본 중의 기본이고요, 환자의 상태나 연령에 따라 심폐소생술 하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거든요. 그 다음은 질식환자 처치법입니다. 그중에서도 하임리히 구급법이요. 이건 음식을 먹다가 잘못해서 사탕이나 뼈 같은 이물질이 식도가 아닌 기도로 넘어가 기도를 꽉 막았을 때 하는 응급처치입니다. 혹시 ‘사랑의 블랙홀’ 이란 영화 보셨나요? 그 영화 후반부에 주인공 빌 머레이(처음에는 재수 없었다가 나중에는 만능 러브리하게 변한 아저씨)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옆자리 아저씨가 음식을 먹다 갑자기 목을 쥐고 꺽꺽거리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러자 주인공이 그 아저씨 뒤에서 허리를 얼싸안고 우싸 해서 목에 걸린 갈비뼈를 튀어나오게 하죠. 그게 바로 하임리히 구급법입니다. 음식 먹다 목에 걸렸을 때 무작정 인공호흡만 하면 오히려 음식을 더 깊숙이 집어넣는 역효과가 나기도 하죠. 음식 먹다 목에 걸렸다면 하임리히 구급법입니다. 큰 물질이 기도를 곽 막고 5분 지나면 역시 사망입니다. 요령은 간단해요. 누가 음식을 먹다 갑자기 컥컥거리며 안색이 파랗게 되고 눈이 튀어나오면서 목을 감싸 쥐고 괴로워하면 일단 뭐가 기도에 잘못 들어갔다고 의심할 수 있겠죠? 그럴 땐 먼저 환자의 등을 숙여 한 손으로는 가슴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환자의 양 어깨뼈 중간 부위 등 부분을 탁탁 손으로 쳐서 이? 걍珦?뱉어내게 합니다(그림 4 참조). 이 방법으로 안 되면 하임리히법을 씁니다. 환자 등 뒤에서 두 팔로 환자를 얼싸안되, 깍지 낀 두 손이 환자의 배꼽 위 정도에 오도록 하고, 환자의 몸무게를 팔에 실은 상태에서 손을 확 안쪽으로 흩어 올립니다(그림 5 참조). 목에 걸린 게 한 번에 튀어나오지 않으면 이 방법을 너덧 번 반복합니다. 환자가 의식을 잃은 경우에도 이 방법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누가 갑자기 쓰러지면 심장마비로 그런 건지 이물질 때문에 질식한 건지 잘 모를 수도 있지요? 잘 모르겠는 경우 일단은 앞에서 말한 응급처치 요령대로 환자를 눕히고 도움을 요청하고 기도를 개방하면서 인공호흡을 실시하되, 숨을 불어넣어도 환자의 가슴이 부풀어 오르지 않으면 중간에 뭐가 막혀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때 하임리히법을 쓰는 것이 요령입니다. 어휴, 길어졌지요? 사실 저 위에 적어놓은 걸로는 많이 부족하고요, 제대로 하려면 여러 시간에 걸친 응급처치 교육을 받아야만 합니다(부끄럽지만 저도 아직 안 받았답니다). 위에 적은 건 다 책과 동영상을 통해 혼자서 익힌 겁니다). 그래도 정말로 다급한 상황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구급차는 오지 않을 때, 저 위의 방법을 기억하셔서 환자를 구하신다면, 그럼 정말로 복 받으시는 겁니다. 1장 이노스 신의 축제 2장 다시 테라미즈로 3장 절망 속의 희망 4장 드래곤의 레어로 5장 드래곤의 비밀, 베일을 벗다 6장 황룡 오피아의 이야기 7장 생명의 노래는 사랑의 노래 8장 씉은 시작으로 이어진다 아노스 신의 축제 늦가을의 햇살은 한 해의 마지막 온기를 세상에 던졌다. 축제의 설렘과 흥분이 브림 전체에 넘쳐흘렀다. 사람들은 수확물을 아낌없이 써가며 축제를 준비했다. 모두들 새 옷을 맞추고 음식을 장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서대륙에 비해 춥고 궁핍한 동대륙이지만 일 년 중 이때만큼은 모두 삶의 힘겨움을 잊고 축제 에 몰두했다. 운명은 늘 가혹하고 삶은 언제나 고단하기에 더더욱 축제가 필요한 것이다. 황궁도 예외는 아니었다. 금년은 내전의 상흔을 치유하기 위해 특히 성대하게 축제를 치르기로 했기 때문에 황궁은 지난해에 비해 훨씬 많은 예산을 이노스 신의 축제에 배정했다. 수많은 시녀들은 저마다 손에 옷감이며 식재료들을 가득 든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경비대와 친위대 또한 축제일을 대비한 경계근무에 나섰다. 렌은 이틀간 죽은 듯이 쉬어 한결 개운해진 몸으로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 거울 앞에 섰다. 몸 안에 가득 차 일렁이는 정명기 덕분에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정명기가 돌아온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무한히 기뻤다. 정명기와 함께 희망도 돌아왔다. 삶의 욕구도 돌아왔다. 그 전에 정명기를 운기할 때마다 느꼈던 찌르는 듯한 고통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에 맨 처음 정명기를 배울 때와 같은 청명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이 그녀를 가득 채웠다. 아니, 조금은 달랐다. 저명기는 원래 거르고 걸러 단 한 점의 흐림도 없는 맑은 기운 이었지만, 사라졌다 다시 돌아온 정명기는 흐린듯 하면서도 편안하고 부드러우 면서도 더 강했다. 그리고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온 세상의 이치가 거미줄처럼 얽혀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기분, 모든 것이 선명하게 이해되는 기분, 눈을 가리고 있던 무언가가 떨어져나간 기분도 들었다. 렌은 자신의 지혜가 한 단계 성장했다는 것을 알았다. 혹시나 수명도 돌아왔을까 싶었지만 아니었다. 아쉽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는 법, 그녀의 생명으로 카엔의 생명을 구했으니, 한 생명으로 한 생명을 바꾸었으니, 그만하면 만족할 만하지 않은가. 렌은 미소지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카엔을 만날 수 있다. 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면 그는 슬퍼할 것이다. 너무 슬퍼 죽을 것처럼 괴로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읽어내 ㄹ것이다. 내가 행복해한다는 걸. 내 마음은 삶의 기쁨과 그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다는 걸. 카엔앞에서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그동안 형편없이 말랐지만 다행히 혈색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죽음의 그늘은 여전히 얼굴에 드리워 있지만 형언 할 수 없는 생기 또한 함께 빛났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그는 나를 아름답게 보아줄 거야. 이노스 신의 축제를 위해 미리 주문된 소즈가 제때 도착해서 렌의 앞에 놓여졌다. 며칠 전이었다면 그 눈부심과 화려함이 버거워 입기를 거절했겠지만, 지금 렌은 가벼이 모처럼의 사치를 즐길 마음이 되었다. 렌의 주위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들은 렌에게 딸린 다섯 명의 차석시녀들이었다. 그동안 수석시녀인 사스트란 백작부인과 한통속이 되어 렌을 구박했던 그녀들이지만, 오늘 따라 렌에게서 퍼져 나오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운에 그녀들은 현기증이 날 지경이 었다. 왜 그동안 이 소녀를 그렇게 구박했을까. 왜 그녀를 펠리시티 황후의 화신처럼 생각했을까. 이렇게도 매력적이로 이렇게도 사랑스러운다. 다섯 시녀들은 모두 렌으 ㄹ시중드는 손에 더 한층 정성을 기울였다. 렌이 이따금씩 그들에게 던져주는 미소와 다정한 몇마디가 그녀들을 행복하게 했다. 렌 아가씨를 모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깐깐한 티르안 공녀보다는 훨씬 낫잖아. 어떻게 렌 아가씨가 그동안의 음침한 모습에서 이러허거ㅔ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면 역시 폐하께서는 이 아가씨를 포기하지 않으실 거야. 그러면 우리는 제1황후를 모시는 시녀가 되는 거야. 시녀들의 상상은 나래를 탔다. 그들은 렌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 오늘 오후의 축제에서 서제국 황제가 나타나 렌을 데력ㄹ 거라는 것, 티르안 공녀가 그 일에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하나도 몰랐다. 그녀들의 백일몽은 조금 있으면 물거품처럼 사라질 테지만, 원래 백일몽이란 그런 거였다. 렌의 흑단 같은 검은 머리는 곱게 빗겨지고 머리 위에는 미스릴로 만든 장식띠가 드리워졌다. 장식띠 끝에는 정사각형 두 개를 엇갈리게 겹쳐 팔각별 모양으로 만든 황금빛의 작은 펜던트가 달려 있었는데, 그것은 동서남북신 모두의 아버지인 이노스 신의 상징으로, 이노사 안딘으로 책봉될 렌에게 신전에서 보내온 선물이었다. 논처럼 새하얗고 나비 날개처럼 얇은 엘프비단 속옷 위로 푸른 허리띠가 매어지고 다시 그 위로 새하얀 겉옷이 걸쳐졌다. 겉옷 위에는 장식띠의 펜던트와 똑같은 황금빛의 팔각별이 수놓아져서 렌이 이노사 안딘의 신분을 지니게 되리라는 것을 나타냈다. 그 위로는 나비의 날개처럼 얇은 보랏빛 가운이 한 겹 더해졌다. 새하얀 비단 위에 엷은 보랏빛이 합쳐져 은보랏빛이 되자 렌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단장을 마친 렌의 모습은 완벽했다. 약간의 병색이 드러나 가련해 보이는 것이 오히러 더 애츳한 느낌을 자아냈다. "고마워요." 렌은 부드럽게 말했다. 시녀들은 그 한마디에 담긴 따듯함과 진심에 자신들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정말 아름답군." 넋이 나간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모두들 깜짝 놀랐다. 테룬 황제였다. 시녀들은 모두 공손히 무릎을 굽혀 절하고 렌으 ㄴ가볍게 목례했다. 테룬은 지난 사흘간 매일 밤 악몽없는 단잠을 잤다. 많이 울고 많이 웃었다. 침전과 집무실에서 그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렌을 생각했다. 어머니. 가엾은 여인.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단 한 번의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던 여인. 그녀가 남긴 상처는 아직 그의 가슴에 생생했지만 이제 그는 그 상처가 언젠가는 나으리 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흉터는 남겠지만 그는 치유될 것이다. 그리고 렌.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생명이 일 년도 채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새삼 그 사실이 망치로 후려치듯 그의 가슴을 쳤다. 이제 겨우 사랑하는 법을 배웠는데. 이제 겨우 그녀를 온전히 그녀의 모습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는 건드리기조차 되스러울 정도로 눈부신 보석을 보는 눈길로 렌을 응시했다. 렌도 그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테룬의 눈 속에는 더 이상 광기가 보이지 않아 렌은 새삼 마음을 놓았다.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찼던 고름ㅇ은 이미 터져나갔으니 이제 그의 상처는 서서히 아물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강하다. 다만 광기 대신 자리잡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 렌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걸 주려고 왔어." 테룬은 멋쩍게 입을 열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흑옥으로 만들어진 긴 목걸이였고, 흑옥 끝에 달려 있는 커다란 장식은 바로 둥그렇게 ㅗㅁ을 감고 있는 흑룡이었다. 살아 듯 있는 듯 생생한 조각만 보아도 이 물건이 범상치 않은 것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렌은 주저했다. "선물인가요?" "그렇다." "치료비는 이미 받았으니 선물은 필요 없어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렌의 말에 테룬은 상처받았다. "렌, 그대는 이런 작은 호의마저도 거절하는 건가? 버리든지 남을 주든지, 일단 받아만 둬!" 그의 눈빛을 읽은 렌은 한숨과 함께 미소지었다. "후, 그렇다면 받겠어요." 렌은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목에 걸까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목걸이를 옆의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테룬은 조금 섭섭했지만, 그래도 렌이 선물을 받아준 것만으로도 안도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음의 신과 싸우며 그녀의 생명을 연장할 것이다. 이노스 신께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녀가, 정말로 그녀가 죽는 일이 있다면, 그녀의 마지막 순간이 행복으로 채워지도록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테룬은 렌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저 그녀가 자신의 곁에 머물러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행복했다. 그는 어느새 그만큼 나아 있었다. "이노사 안딘 으로 책봉되는 걸 승낙해줘서 고마워. 그대가 이노스 신을 믿지 않는다는 건 나도 안다." 테룬의 눈에서 빛나는 고마움을 읽으며 렌은 미안함을 속으로 삼켰다. 나는 당신을 떠나 카엔님에게 가기 우해 승낙한 거랍니다. 당신의 짧은 행복은 조금 후에는 뼈아픈 고통으로 변할 거예요. 그래도 당신은 이겨낼 거예요.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을 테죠. "고맙다니, 저야말로," 렌은 수 많은 말을 마음속에 조용히 담았다. 티르안 공녀는 축제 당일까지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다시 태어난 듯한 테룬 황제의 모습을 보면 그녀는 엎드려 렌 앞에 감사를 표하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그러다가도 그의 마음속에 렌이 얼마나 크나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자신의 자리는 얼마나 작은가를 깨달을 때면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질투와 혐오심이 다시 그녀를 채웠다. 렌의 선량한 영혼이 악마 같은 서제국 황제에게 파괴되도록 내버려둔다는 건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닐까. 눈 딱 감고 그녀가 죽을 때 까지 그늘 속에서 숨어 그녀가 인생의 마지막 나날을 이곳에서 평온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아,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녀는 결국 새로 태어난 테룬 황제의 영혼을 사로잡아버릴 거야! 결국 테룬의 마음은 영원히 렌에게 빼앗기고, 나는 렌이 죽고 난 다음 테룬의 껍데기만을 차지하게 될 거야! 그가 렌과 일 난, 일 파잔을 더 보낼수록 그는 더욱 더 강렬하게 렌을 사랑하게 될 거야! 그리고 나는 평생 그 사랑을 극복하지 못하게 될 거야! 결국 공녀가 망설이는 사이 렌을 서제국 호아제에게로 넘기는 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 가장 바쁜 것은 역시 라우프였다. 원래 티르안 공녀가 밤의 철나비와 약속한 것은 렌을 축제장으로 인도하는 것까지였다. 그러나 서제국 측에서는 결계의 약화까지도 요구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일이 초, 서제국의 첩자이거나 고위마법사일 누군가가 렌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을 때 순간적으로 결계를 약화시켰다가 아무도 눈치채기 전에 다시 원래대로 복귀시키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말은 쉬워도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축제장의 결계는 말은 일단은 내궁에 비하면 약하다. 그리고 기본적인 관리는 수석 황실마법사가 된 라우프의 손에 맡겨져 있다. 하지만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결계의 지배권은 순식간에 황제에게로 넘어가 드래곤조차도 빠져나갈 수 없는 철벽으로 변해버린다. 그리고 이 계획의 핵심은 서제국 측에서 축제장에 잠입하여 렌을 강탈해 가면 티르안 공녀가 국익을 내세워 테룬 황제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제1황후 자리를 확고히 한다는 것인데, 혹시라도 공녀와 라우프가 렌의 납치에 가담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라우프는 신경르 면도날처럼 곤두세우고 결계를 순간적으로 약화시켰다가 다시 강화하는 연습을 무수히 거듭했다. 그리고 자신의 최단기록을 단축하고 나서야 비로소 만족의 미소를 띠었다. "타림 안딘 마마, 우리의 계획대로 진행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습니다." 티르안 공녀는 다소 초초한 심경으로 라우프의 보고를 들었다. "기록 단축에 성공하셨나 보죠?" "예, 제 최단기록은 2초였는데, 오늘 새벽에 마침내 1.3초까지 단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정도라면 일부러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드래곤이라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속도입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원래대로 진행하는 겁니까?" 티르안 공녀는 한동안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마마, 냉혈의 대공녀께서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시면 어떡하십니까?" "라우프, 그대는 렌이라는 소녀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냉정할 수 있는 거겠죠. 그녀는 영혼을 꿰뚫어보는 마음의 치료사입니다. 산산조각난 테룬 황제 폐하의 마음을 다시 온전하게 고쳐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죽기 직전까지 괴물 같은 서제국 황제에게 유린당하게 한다는 것은....." "마마, 이렇게 약한 말씀을 하시다니, 정말로 마마답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미 서제국과 계약을 했습니다! 우리 쪽에서 약속을 번복했다가 프린다인 대공국에 '황제의 저주' 라도 내려지면 어쩐단 말입니까!프린다인 대공국이 말틴처럼 되는 걸 바라시는 겁니까!" 티르안 공녀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건 아니에요." "그럼 원래대로 진행하는 겁니까?" "잠시만 있다가, 1파잔 후, 축제 사작 직전에 답을 드리겠어요." "알겠습니다." 라우프는 불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티르안 공ㄴ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일어나 렌의 방으로 향했다. 여느 때와 달리 북적이는 꽃의 방은 활기가 넘쳐흘렀다. 미소를 가득 담은 채 밖으로 나오던 시녀 한 명이 공녀와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절했지만 공녀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방 안에 들어서자 티르안 공녀는 숨이 멎는 듯했다. 방 한가운데 서 있는 렌의 모습은 일찍이 공녀가 보았던 모든 여인들 중 가장 아름다웠다. 심지어는 전성기 때의 펠리시티 전 황후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 완벽하게 순격ㄹ하면서도 한편으로 무한히 사랑스럽고, 그러면서도 부서질 듯 연약해 보이는 저 모습. 그리고 탁자에 놓여 있는 저 목걸이! 티르안 공녀는 탄신ㄱ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저 목걸이는 제1황후에게만 내려지는 징표, 위대하신 지혜의 흑룡 데이그랜께서 파이브룬 대공의 대공비에게 친히 하사하신 국보가 아닌가! 테룬 황제가 렌에게 저걸 주었다는 것은 이미 그가 확고히 마음을 저했다는 뜻이었다! "그 목걸이가 무슨 목걸인지 아나요?" 공녀는 차갑게 물었다. 렌은 고개를 저었다. "오로지 제1황후만이 가질 수 있는 국보, 동제국 최고의 여인임을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정말로 기쁘시겠군요." 티르안 공녀는 비꼬아 말했다. 그녀는 차갑게 뒤돌아서 다시 나가려 했다. "타림 안딘 마마,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슴니까?" 렌의 말이 그녀를 붙잡았다. "무슨 일이죠?" 렌은 시녀들을 물렸다. "주제넘은 말씀을 드리는 것 같지만, 마마, 이 물건의 주인은 마마인 듯싶습니다." 렌은 목걸이를 집어든 두 손을 공녀에게 조용히 내미었다. "지금 나를 동정하는 건가요? 내가 이런 동정을 흔쾌히 받아들이 거라 생각했나요? 티르안 공녀의 목소리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렌은 지지않고 두려움 없느 맑은 눈으로 공녀를 직시했다. "마마, 받으십시오, 테룬황제 폐하를 지켜줄 사람은 마마뿐입니다." 렌의 목소리에 서린 묘한 비장함에 티르안 공녀는 멈칫했다. 혹시 그녀가 아는 걸까? 오늘 오후에 서제국으로 납치된다는 걸? 그러나 렌의 기색 어디에도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렌 또한 이번 일에 티르안 공녀가 관련되었다는 걸 모르고 있었기에, 결국 둘은 상대방이 오후에 다가올 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 모르고 있는 셈이었다. 렌은 소파에 앉았다. 티르안 공녀는 렌의 손짓에 따라 그 옆에 앉았다. 감히 타림 안딘에게 손짓하다니 무례하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렌이 보이는 묘한 태도 때문에 티르안 공녀는 버틸 수 없었다. 렌은 속삭이듯이 말을 시작했다. "마마, 제가 여기 온 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에서입니다. 저는 제 목숨만큼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티르안 공녀는 깜짝 놀랐다. 진위를 탐색하기 위해 렌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들여다보았으나 한 쌍의 눈동자는 끝없이 깊을 뿐이었다. "저는 제 죽음을 그가 지켜보아야 하는 고통을 주기 싫어서 이곳으로 피신했습니다. 제 죽음이 테룬 황제 폐하께도 똑같은 고통을 주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폐하의 고통 보다는 제가 사랑하는 그의 고통이 제게는 더 가슴 아픈 일이었어요, 결국 저는 테룬 황제폐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폐하께는 한없이 조송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그대는 폐하를 위해 목숨을 걸지 않았나요? 그래서 폐하의 영혼을 치료해 드리지 않았나요?" "마마 그건 처음에는 자포자기였고, 나중에는 인간애였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사랑은 아니었어요." "하자만......." 렌은 강렬한 눈빛으로 티르안 공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눈 빛은 곧 연민과 따뜻함으로 흐려졌다. "마마, 결국 제 존재가 사라지고 나면 폐하는 깊은 상처를 입으실 겁니다. 사랑으로 받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그 사랑을 드릴 마마가 여기 계셔서 저는 마음이 놓입니다." 렌은 티르안 공녀의 손을 잡았다. 공녀는 손을 빼려 했지만 렌의 손힘은 의외로 강했다. 레느이 목소리는 조금 다급해졌다. "하지만 온전한 사랑을 주지 못할 때 그 사랑은 독이 되기도 합니다. 폐하만큼은 아니지만 마마의 영혼도 상처투성이라는 걸 저는 알아요. 마마는 사랑할 능력을 잃지는 않으셨지만, 마마의 사랑하는 법은 몹시도 어색하고 서툴러서 그만큼 안타깝고 답답합니다." "흥, 엉망진창인 내 집안 얘기를 들었다는 건가요? 그래, 날더러도 어머니를 용서하라는 둥, 이해하라는 둥, 그런 소리를 할 건가요?" 렌의 눈빛은 한층 더 다정해졌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마마, 마마께선 그동안 살아남기 우해 발버둥쳐온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하기만 하셔도 됩니다." 티르안 공녀는 말문이 막혔다. "힘드셨죠? 자기편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는 상황에서, 어린 소녀가 안간힘을 써서 버텨오느라, 그 오랜 세월 너무 힘드셨죠?" 렌은 나직하게 물었다. 부드러운 물이 바위를 뚫듯 렌의 목소리는 공녀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아냐! 난 강해! 그 모든 세월은 내게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했어! 나는 힘들지 않았어!" 티르안 공녀는 버럭 소리질렀다. 그러나 갑자기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방울이 투? 琯?떨어져 내렸다. 공녀는 당황했다. "아, 아, 왜 눈물이 나는 거지?" 렌은 공녀를 잡아당겨 꼭 끌어안았다. 공녀는 힘없이 렌에게 안겼다. 밀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렌에게서 번져오는 부드러운 기운은 몹시도 안온했다. "저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잘 알아요. 보호받지 못하고 불안에 떨며 어린 시절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큰 상처인지. 손을 내밀어도 잡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얼마나 사무치게 외로운 건지. 그렇지만 이러허게 살아남았잖아요. 결국 공녀님도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손으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잖아요. 그동안 정말 힘드셨지만, 여기까지 잘 오셨어요." 공녀는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의 고통과 고독을 이해해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눈물은 두 줄기다 되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울먹이며 띄엄띄엄 말했다. "그래, 정말 힘들었어. 너무 힘들었어. 강해지고 싶지 않았어, 그냥 철모르는 아이처럼 뛰어놀고 싶었어. 하지만 그렇게 살면서 희생양이 되기는 싫었어. 그래서 언제나 나 자신을 채찍질 했어." 렌은 조용히 공녀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약간의 정명기를 손에 싣자 공녀는 한없이 편안한 기분에 온몸이 풀렸다. 끝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올수록 마음은 점점 가벼워졌다. "공녀님의 고통이 테룬 황제 폐하의 고통과 몹시도 닮아 있다는 사실을 아시죠? 그래서 저는 안심이 됩니다. 전장에서 함께 상처입은 전우처럼, 공녀님은 그의 곁에서 위로하고 위로받을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나는 그럴 수 없을 거야! 그는 내게 마음을 열지 않을 거야!" "티르안님, 사랑의 힘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선의를 잃지 마세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건 사랑의 첫걸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건 두 번째 걸음, 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게 되는 건 세 번째 걸음, 그리고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 욍도 그 주위의 모든 사람, 나아가 온 세상 사람마저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게 마지막 걸음입니다. 티르안님이 무릎을 꿇고 테룬 황제 폐하를 구해달라고 제게 애원했던 그 순간, 마마는 순식간에 세 걸음을 내디디신 거예요. 그 간절하고 순수한 마음은 조금 지나면 욕망과 아집과 이기심에 흐려질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질 때, 마마는 그 순간을 떠올리기만 하시면 됩니다. 자신 안에 있는 선의를 믿으세요, 인간 안의 선의는 약하지만 끈덕져서 마마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한 선의는 되살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의와 사랑에 뿌리를 두면 마마는 테룬 환제 폐하의 마음을 여실 수 있을 겁니다." 공녀는 형기를 담은 렌의 눈을 취한 듯 바라보았다. 그랬다. 렌앞에 몸을 던져 황제를 구해달라고 애원하던 그 순간, 공녀의 마음 속에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테룬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자신의 안위, 제1황후의 자리 권력다툼, 심지어 테룬의 사랑을 차지하느냐 마느냐, 그 모든 것이 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었다. "마마, 그리고 이 동제국을 끌고나갈 힘이 있는 분으로서, 마마는 마지막 네 번째 걸음까지도 내디디셔야 합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다 마마처럼 고통받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는 그런 사람들이에요. 백성들을 통계로, 숫자로 보지 마십시오. 그들을 군중으로가 아니라, 저마다 서로 다른 얼굴을 가진 마마와 똑같은 사람으로 여기셔야 합니다. 그들을 한 사람 한사람 사랑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통치자로서의 마마의 의무입니다." 엄격해진 렌의 말투에 티르안 공녀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렌은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제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서 저는 티르안님을 더 이상 돕지 못하지만, 저는 티르안님 안에 있는 강인함을 믿어요," 렌은 다시 한 번 공녀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공녀는 뭉클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나 다정하게 안아준게 얼마만의 일인가! 아니, 그녀의 기억속에 그랬던 적이 있기나 했었나! 공녀는 휘청이며 일어나 방을 나갔다. 자신이 저지르게 될 죄의 무게가 그녀를 엄습했다. 렌을 서제국 황제의 제물이 되게 할 수는 없어! 나는 잘못 생각했었어! 렌을 보호해야 해! 하지만 어떻게 하지? 이제와서 약속을 번복하면 정말로 서제국 황제는 내게 재앙을 내릴 거야! 렌이나 테룬 황제에게 내 음모를 고백하면 나는 영원히 경멸당할 거야! 그들이 모르게 렌을 보호해야 해! 하지만 대체 어떻게! 그녀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때 저 멀리에서 유쾌한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엘프 마법사 라비언, 아니 흑룡 데이그랜이 눈에 들어왔다. 데이그랜은 지금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따. 렌에게 정명기가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왠지 좋은 징조로 여겨졌다. 사흘 전 그는 기적을 목격했다. 왠지 렌이 그런 기적을 드래곤들에게도 베풀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따. 그러려면 오늘 오후 축제장에서 렌을 데리고 줄행랑을 쳐야만 했다. 마나는 충만했고 컨디션은 최고였따. 다만 아무리 축제장의 결계가 약하다 해도 황궁으이 결계자체가 만만한 게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결계를 부수는 것과 테룬의 공격을 막는 걸 동시에 할 수 없다는게 문제였다. 결국 연기력을 발휘하여 테룬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 티르안 공녀, 안녕?" 데이그랜은 공녀에게 허물없이 말을 걸었다. 이미 공녀가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상 굳이 존대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공녀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데이그랜을 쳐다보았다. "응?왜?" 데이그랜의 시선은 공녀가 손에 들고 있는 목걸이로 향했다. "헤에, 그거 내가 백 몇 십년 전에 내 레어 앞마당에 굴러다니는 돌을 주워 드워프 한 놈한테 만들라고 시켜서 파이브룬 녀석 마누라한테 선물로 준건데. 그런 구닥다리가 아직도 남아 있다니 놀랍네." "데이그랜님." 메마른 목소리로 공녀가 입을 열었다. "데이그랜님은 렌님을 소중히 여기시죠? 렌님이 황룡 해츨링 시오카님과 친구라고 하셨죠?" "맞아, 근데 왜?" "오늘 오후를 조심하세요, 결계를 주의하세요, 렌님을 지켜주세요, 그리고 제가 이 이야기를 했다는 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공녀는 재빠르게 속삭인 후 스스로 흠칫 놀라 총총히 달려가 버렸다. 공녀는 자기 방까지 황급히 도망치듯 달려와 숨을 몰아쉬었다. 아까 그 정도의 힌트라면 위대하신 지혜의 흑룡 데이그랜님은 금방 무슨 뜻인지 눈치챌 것이다. 그럼 적어도 렌을 보호하기 위해 약간의주ㅢ라도 기울일 것이다. 그렇게 아주 잠깐만 저지하면 그동안 테룬 황제는 충분히 결계를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공녀는 서제국 황제가 직접 축제장으로 와서 자신의 마음을 읽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데에 생각이 미쳤다.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공녀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진정 시켰다. 한갓 계집 하나를 구하기 위해 이런 위험한 곳에 서제국 환제가 직접 뛰어들지는 않겠지. 기껏해야 그의 8서클 마법사 두세 명을 보낼 거야. 하지만 난 만약을 대비해서 축제장에는 나가지 않을 거야. 내궁에서 몸을 숨기고 있을 거야. 그러면 서제국 황제가 직접 온다 하더라도 내궁 결꼐를 뚫고 들어와 내 마음을 읽지는 못할 거야. 라우프더러 약속대로 결계를 열라고 하기만 하면 서제국 쪽에서 굳이 나를 의심하지는 않을 거야. 그저 흑룡이 혼자서 눈치채고 자신을 방해했다고 생각할 거야. 원래 서제국 황제와 드래곤은 사이가 나빴으니까. 애초에 내가 약속한 건 렌을 축제장으로 나가게 하는 것과 결계를 잠시 열어준다는 것이었어. 그 두 가지를 모두 이행하는 이상 서제국 호아제가 나를 의심할 리는 없을 거야. 한 몇 달 이곳 내궁에서 지내다 렌이 죽고 나면 서제국 황제의 관심은 식어버리겠지. 그동안 나는 여기에서 렌이 마지막 순간을 편안히 보낼 수 있도록 해줄 거야. 그녀가 테룬 황제 폐하와 내게 베푼 은혜는 너무 크니까. 티르안 공녀는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을 느꼈다. 이해관계도 계산도 아닌 다른 동기로 뭔가를 한다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데이그랜은 공녀가 남긴 수수께끼 같은 말을 놓고 생각에 잠겼다. 덜렁대기는 해도 그는 지혜의 흑룡이었다.답은 금방 나왔다. 그래, 서제국 황제 카에닌이 렌을 노리는 거야! 아마도 결계를 약화시키기로 공녀랑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겠지! 그런데 왜 공녀는 내게 그걸 가르쳐주는 거지? 데이그랜은 거기에 대해서도 적잘한 대답을 찾아냈다. 틀림없이 공녀는 렌과 서재국 황제가 사랑하는 사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렌이 사랑하는 사람의 품으로 돌아가 행복하게 되는 걸 공녀는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결과 가 되더라도 말이다. 인간의 질투심이란. 데이그랜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수천년 동안 인간의 삶을 지켜보면서 질투가 얼마나 인간을 망가뜨리는지 여러 번 보아왔다. 가 까이서 본 질투의 모습은 더 한층 추악했다. 어쨌든 그의 입장에서 이 정보는 지극히 반가운 것이었다. 푸른 바람의 엘프로 가장한 데이그랜의 푸른 눈빛이 잠시 불투명한 검은 빛으로 반짝였다. 그는 즉시 렌의 방으로 갔다. "어머, 라비언님!" "라비언님!" 시녀들이 호들갑을 떠는 소리가 방 안에까지 들려왔다. 데이그랜이 언제나처럼 엘프 마법사로 변신한 채 놀러온 것이다. 데이그랜 은 그 수많은 시선을 익숙하게 받아넘기며 렌에게만 미소지었다. "렌, 몸은 괜찮습니까?" 그의 미소에 자지러지는 여인들을 보고 쓴웃음을 지으며 렌은 차분히 대답했다. "예, 몸과 마음이 다 좋아요." 데이그랜은 다짜고짜 렌의 손을 덥썩 잡았다. 렌의 몸에서 느껴지는 정명기는 한층 짙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말틴에서 잠시 렌 과 조우했을 때 보았던 정명기와는 달랐다. 탁하지만 더 강하고 더 부드럽고 더 따뜻했다. 물도 불도 흙도 나무도 쇠도 아닌 이 기운, 마구 뒤섞여 있으면서 무한히 아름다운 이 기운은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어떻게 드래곤 도 아닌 한낱 인간이 이렇게 아름다운 기운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어떻게 모든게 섞인 이 기운이 순수한 드래곤의 마나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데이그랜은 시녀들에게 잠시 나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말을 꺼낼까 말까 주저했다. 오늘 오후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걸 렌도 알 고 있는지, 카에닌 녀석이 정말로 구하러 오는 건지. 그녀석의 목숨을 담보로 협박이라도 해볼까 하다가 데이그랜은 결국 아무 말 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데이님, 제 정명기가 돌아온 건 알고 계시죠?" 렌은 속삭이듯 물었다. 데이그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기운이 탐나시죠?" 렌은 부드럽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제 수명이 얼마 안 남은 이상, 데이그랜님이 말씀하셨던 방법으로는 시오카를 구할 수 없어요." 렌의 말에 데이그랜의 얼굴은 굳어졌다. 그는 손을 놓았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노력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대의 수명은 잘 하면 1년 까지도 갈 수 있다면서요! 40년까지는 안 돼도 1년 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대는 저 미치광이 테룬 녀석도 괴지 않았습니까!" 데이그랜은 소리질렀다. 렌은 연민이 담긴 눈으로 데이그랜을 바라보았다. "저번에는 제가 열심히 듣지 않았지만, 제가 이해한 바로는 저를 매개로 다른 드래곤의 마나를 전환해서 시오카에게 전해주는 거라 면서요." "맞습니다." "당초에 시오카가 그렇게 된 원인이 뭐죠?" "모릅니다." "제 생각으로는, 모든 이링 순조롭게 데이그랜님의 생각대로 풀려서 제가 40년의 세월을 바쳐 시오카를 성룡으로 만든다 하더라 도 시오카는 제대로 된 성룡 노릇을 하지 못할 거에요. 생명이 스스로를 지탱할 힘 없이 다른 생명에 기대서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 문제를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일단 그녀를 성룡으로 만들고 나면 그 다음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데이그랜은 침중하게 대답했다. "전에도 시오카와 같은 증상이 드래곤에게 나타난 적이 있었나요?" "영원보다도 더 긴 드래곤의 역사 속에서 그런 일은 없었씁니다." "영원보다도 더 긴 역사라고요?" "우리 드래곤들은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세월동안 존재해왔습니다." "그럼 그게 대략 어느 정도라는 거예요?" "글쎄, 아마도 6,500만 년 정도 되지 않을까요." 엄청난 숫자에 렌은 잠시 말을 잃었다. 갑자기 뭔가 떠오를 듯했으나 아물거리다가 사라졌다. "아무튼 결국 데이그랜님은 드래곤에게 처음으로 나타난 증상을 그 원인도 모른 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고쳐보겠다는 건데, 과 연 그게 잘 되겠어요? 병의 원인을 알아야만 진정한 치료를 할 수 있는 거라고요. 그러니 데이그랜님은 제게 헛된 희망을 걸지 마세요." 렌은 연민을 담아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절망해야 당연하지만, 나는 묘하게도 또 다른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미신이라고 웃어도 좋겠지만, 나는 렌 그대에게 우리 드래곤 모두의 구원이 달려 있다는 강렬한 예감이 듭니다. 그러니 렌, 내가 그대를 포기할 거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요." 데이그랜은 다정하면서도 약간 무시무시한 미소를 지으며 렌을 떠났다. 불안감이 렌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카엔은 이노스 신의 축제에 침투할 준비를 하면서 그가 어린 시절 말틴에서 알았던 것과는 너무 달라진 이노스 신앙에 생소함을 느꼈다. "기도문이 뭐라고?" "위대한 대지의 아버지 이노스 신이여, 당신의 준엄한 땅에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시옵고, 당신의 은혜로 선 인들을 받아들이시오며 당신의 정의로 악인들은 내치시오소서." 마스니가 또박또박 불러주는 기도문을 들은 카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어린 시절 말틴에서 외웠던 기도문은 '사랑이 넘치는 대지의 아버지 이노스 신이여. 자애로운 아버지가 막내딸을 아끼듯 저희를 아껴주시고 자비의 대지에 저희의 모든 고통을 품어주소서' 였다. 풍요의 대지 말틴과 카로딘에서 태어난 자비의 종교는 춥고 황량한 동제국에 퍼지면서 어느새 심판의 종교로 변했고, 그의 추억 한 자락을 차지하던 옛 모습은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사백 년이면 얼마나 긴 세월인가. 아무도 그가 어린 시절 배웠던 것 같은 이노스 신앙을 기억하지 못했다. 머리 좋은 카엔은 두번 듣고 기도문을 모두 외웠다. 이노스 신의 축제는 반쯤은 종교행사였기 때문에 기도문을 모르면 금방 탄로 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낯선 기도문에 씁쓸했다. "아, 의상은 다 준비됐나?" "예." 마스니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카엔에게 전날 밤 도착한 맞춤의상들을 내보였다. 카엔은 한 달 전 이곳 브림에 오면서 평생 입어도 모자랄 정도의 동제국풍 의상들을 맞추었으나, 한 열흘 전부터 갑자기 그 의상들 가지고는 부족하다며 다시 채근하여 결국 최고급 의상들을 새로 맞춘 것이다. 사랑하는 소녀에게 잘 보이고 싶은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녀의 눈에는 카엔의 작태가 아무래도 한심해 보였다. "이 은보랏빛 토즈가 제일 마음에 들지만 아무래도 너무 표가 날테고, 이 진줏빛 토즈는 어떤가? 아니, 진줏빛은 봄 이상한가? 차라 리 이 푸른색 토즈가 나을까? 아, 그리고 여기다가 이 토파즈 장식띠를 하면 괜찮겠지? 렌이 보고 감탄해 주겠지?" "예, 정말 훌륭하십니다. 정말 눈부시게 멋있습니다. 렌님도 황홀해하실 겁니다." 벌써 반 파잔째 카엔 옆에서 의상을 품평하고 있는 마스니는 이제 슬슬 짜증이 나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성의하게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카엔은 홱 돌아보았다. "지금 속으로 푸른색은 영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왜 멋있다는 거지? 그대가 감히 내게 짜증을 부리는 건가?" '아이구, 맙소사! 늙으면 애가 된다고 하더니!' "마스니! 무엄하다! 뭐? 늙으면 애가 된다고?" 마스니는 찔끔한 표정을 지었으나 카엔은 그녀가 속으로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고 있는 것을 읽었다. "그대에게는 이제 황제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없나 보지?" 카엔은 무서운 목소리로 추궁했다. 그러나 마스니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카엔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누구 탓을 하겠는가." 결국 카엔은 진보랏빛 토즈에 은색 허리띠를 매고 티르안 공녀쪽과 약속한 징표인 사파이어 목걸이를 거는 것으로 타협했다. 원 래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지만 지금의 모습도 여인의 마음을 진탕시킬 정도로 수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마나를 운용해 보았다. 심장의 상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이 정도면 파티장에서 동제국 황제와 드래곤을 한 번에 물리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보안이 제일 우선이다. 싸움은 최후의 선택이다. 가능하면 아무도 모르게 렌에게 다가가 순식간에 그녀를 데리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렌이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마스니는 의장을 갖춘 카엔에게 다가왔다. 그녀 또한 동제국풍의 최고급 소즈로 한껏 멋을 낸 상태였다. 고젠 백작부인으로 손색이 없는 매력적이고 품위 있는 모습이었다. "에스틴, 가자꾸나. 이 어미를 에스코트해주겠지?" 마스나는 약간의 연극조로 카엔의 팔을 잡았다. 카엔은 그녀의 손을 마주 감싸 쥐었다. 마스니의 손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태연 하게 말했지만 그녀는 떨고 있었다. 카엔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마스니의 떨림이 멎었다. "예, 아름다우신 어머니. 축제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지만, 동대륙에서 이노스 신앙이 퍼지게 된 것은 카엔 때문이었다. 이노스 신은 동서남북신의 아버지인 대지의 신으로 누리디안 대 제국 시절에 상당히 유행했던 신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신들이 점 차 세분화되면서 이노스 신앙은 누리디안 대제국의 전통을 지킨다고 자부하는 카로딘 대공국에서만 명맥을 유지해왔고, 다른 곳에 서는 케케묵은 옛날 신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다 서제국에서 모든 인간의 힘을 뒤어넘는 위대한 마법사 황제 카에닌 테라미즈넨이 등장하자, 서제국 영토에 속하지 않은 자 들은 뭔가 카에닌 황제에 대적할 만한 절대적인 힘에 의지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 그들의 마음에 모든 방위신의 아버지인 이노스 신은 크나큰 호소력으로 다가왔다. 결국 이노스 신은 절대자, 유일신과도 같은 급으로 포장되어 약 삼백 년 전부터 급격히 교세를 확장했다. 특히 이노스 사제단이 백 오십 년 전 파이브룬 대공국의 정복전쟁에 협력하면서 이노스 신앙은 동제국에서 거의 국교나 다름없는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후 이노스 교단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면서 황권이 약한 동제국의 또 다른 구심점 노릇을 해왔다. 이노스 신의 신관들은 사실상 공무원이 되고, 이노스 신의 축제는 국가의 행사가 되었다. 동제국 황궁에 이어 이노스 신의 축제를 위한 축제장이 있는 것 또한 그런 연유에서였다. 교리에 따라 팔각형으로 지어진 축제장은 한꺼번에 수백 명의 귀족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북부의 검은 대리석을 아낌없 이 써서 만든 덕분에 축제장은 장중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지어냈다. 벽의 여백을 가득 채운 부조들은 그 지나친 엄숙함에 음악적인 경쾌함을 부여했다. 그리고 검은색이 너무 분위기를 무겁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천장에서부터 황금빛 커튼이 드리워졌다. 일 년 중 가장 큰 행사답게 무엇 하나 돈을 아낀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카로딘 대공국에서 거둬들인 전리품으로 황실 금고를 가 득 채운 덕분에 샤이트 사상은 부담 없이 콧노래를 부르며 지출결의서에 서명할 수 있었다. 그의 목적은 이번 축제에 참석한 모든 귀 족들에게 이제 테룬 황제의 치세는 더 이상 흔들릴 수 없는 확고한 것이 되었음을 공표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제일 쉬운 방법은 역시 물량공세였다. 축제장 앞에서 초대장을 검열받는 귀족들의 반응은 끝없는 화려함에 대한 감탄과 동결, 돈을 물 쓰듯이 한 데 대한 부러움, 시 기, 질투 등등 복잡했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 모두 압도되었다는 것이었다. "에스틴, 지루하지 않니?" 마스니는 초대장 검열을 기다리며 자연스럽게 카엔을 향해 물었다. "아뇨, 어머니. 황궁 축제는 처음이라 하나같이 신기하네요." 카엔은 대답하면서도 축제장을 예리한 눈초리로 둘러보았다. 그는 함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귀족들 몇 명의 생각을 읽어냈지만, 모두들 이노사 안딘으로 책봉된다는 소녀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할 뿐 구체적인 정보는 이무것도 없었다. 초대장 검열을 마친 마법사가 조용히 주문을 외우며 가볍게 마나를 뿌렸다. 카엔은 약간 따끔한 기분을 느꼈다. "자, 통과마법이 심어졌으니 이제 들어가셔도 됩니다." 마법사는 공손하게 말했고, 카엔은 마스니와 함께 문턱을 넘어섰다. 미약하지만 빈틈없이 쳐진 결계의 그물이 그를 덮치고 조여 오 다가 통과마법에 닿은 순간 스르르 약해졌다. 마스니의 안색도 살짝 변했다. 그녀는 방금 느낀 결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순간적 으로 절감한 것이다. 마스니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카엔은 웃어 보였다. "어머니. 속이 안 좋으신가 봅니다. 저기 의자에라고 앉으시겠어요?" 마스니는 표정을 드러낸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애써 태연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걱정 마라."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마스니와 카엔을 발견한 귀족 부인과 영양들이 몰려왔다. "에스틴님!" "고젠 백작부인!" "이쪽으로 오시죠!" 소녀들은 형언할 수 없이 수려한 카엔의 모습에 자지러지는 시늉까지 하며 그의 관심을 사려고 애썼다. 카엔은 다시 정신을 집중해서 사람들의 생각을 읽었다. 그러나 너무 여러 생각이 뒤섞여 있는데다가 마음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 아 생각이 영 제대로 읽혀지지 않았다. "에스틴, 우리 저기 앉자꾸나." 카엔의 상태를 안절부절 살피던 마스니가 자연스러운 태도로 카엔을 벽 쪽의 카우치로 데려갔다. 그녀는 카엔의 옆에 앉아 그의 귀 에 속삭였다. "지금이 6파잔(정오경)이니 약 반 파잔만 더 있으면 식이 시작될 겁니다. 마음을 편히 하십시오. 저기 북쪽 문이 열리면서 테룬 황제와 렌님과 티르안 안딘과 이노스 신관의 대신관이 나올 겁니다. 이노사 안딘 책봉식부터 한 후 대신관이 다시 북쪽 문으로 퇴장하면 태룬 황제의 개회사와 함께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될 겁니다. 아마도 렌님은 테룬 황제의 손에 이끌려 단 아래로 내려와 이쪽으로 오실 텐데, 테룬 황제가 렌님에게 멀어지는 순간 폐하께서는 즉시 렌님 곁으로 이동하십시오. 폐하께서 거신 사파이어 목걸이가 징표입니다. 라우 프는 미리 약속해놓은 대로 사파이어 목걸이를 건 남자가 렌님께 다가가는 순간 결계를 약화시킬 것입니다. 폐하께서 그 즉시 결계 밖 으로 순간이동하시면 아무도 쫓아오지 못할 겁니다. 이번일은 틀림없이 성공할 테니 안심하십시오." 마스니는 스스로 다짐하듯이 말했다. "잘 되겠지?" "물론입니다." 카엔은 온몸의 신경을 최고조로 긴장시킨 채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한참 후 북문이 열렸다. 원래 황제가 가장 먼저 나와야 하는 법이지만, 오늘만큼은 이노스 신의 축제인지라 이노스 대신관과 그의 수석신관 두 명이 황제보다 앞서 나왔다. 이노스 교단의 현 대신관인 도일린 데 이노스는 백작가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 부모의 손에 이끌려 이노스 교단에 입문 했고, 순탄한 견습사제 시절을 보낸 후 집안의 지원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출세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 갔다. 브림 책임신관 시절에 전 황제 하라스 4세로 부터 많은 기부금과 지원을 이끌어낸 덕분에 그는 별 반대 없이 10년 전 지금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능구렁이같이 노회하면서도 지나치게 표 나는 일은 벌이지 않았기에 비교적 평판이 좋았다. 이번에도 난데없는 이노사 안딘 책봉이라는 황제의 무리한 요구를 선선히 받아들이면서 그 대가로 상당한 기부를 받아낸 데다가 이노스 교단의 신관들에 대해 두어 가지 면책특권까지 덤으로 얻어내는 공을 세워서 그의 입지는 무척이나 탄탄해졌다. 그래서인지 대신관의 표정을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 다음으로는 테룬 황제가 나왔다. 축제용으로 따로 지어 화려함과 위엄의 극치를 달리는 황제복을 보자 카엔은 은근히 배가 아팠 다. 나도 황제복을 입을 수만 있었다면 저놈보다 다섯 배는 멋있었을 텐데. 테룬 황제 다음으로는 엘프 마법사 라비언이 따라 나왔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황실 수석마법사도 아닌 엘프 마법사가 황제 바 로 뒤를 따라 나오는 것은 의전에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데이그랜이 테룬에게 졸라 끼어든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런 사정 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엘프 마법사가 데이그랜이라는 걸 알고 있는 카엔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끝으로 은보랏빛으로 보이는 긴 소즈 자락을 끌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렌 이었다! 순간 온 세상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카엔은 당장 그녀에게 달려가 그녀를 부둥켜안고 온 얼굴에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순식간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는 고개를 약간 젖히고 눈을 세차게 깜박거려 용케 눈물을 참았다. 겨우 침착함이 돌아왔다. 주위는 한동안 고요했다. 모두들 렌의 미모에 얼이 나간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는 뭔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비인간적이기까지 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무두 말을 잃었다. 조금 지나서야 갑자기 웅성거림이 커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말과 생각이 한꺼번에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정말 아름답군!' '요녀 펠리시티랑 어찌 저렇게 닮은 건가?' '넋을 잃겠어! 정말 성스러워 보여!' '저 계집은 펠리시티 전 황후랑 무슨 관계였던 거지?' '정말로 이노사 안딘으로 봉하는가 보군. 놀랄 일이야.' '그나저나 타림 안딘이 안 보이네? 역시 저 계집이 이노사 안딘으로 봉해지는 걸 볼 생각을 하니 배알이 뒤틀렸나 봐? 후후후, 고 소하군.' '이 나라는 어찌 될꼬. 참으로 걱정일세. 황제가 여색에 휘둘리면 나라가 제대로 될 리 없건만.' 카엔은 사람들 마음속 생각을 읽고서야 비로소 티르안 공녀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혹시 약속을 번복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는 정신없이 축제장을 살폈다. 축제장 한쪽에서 서서 결계와 마나의 흐름을 지휘감독하고 있는 라우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그에게서 약 10보탕(3미터)정도 떨어진 곳까지 갔다. 이 정도 거리면 생각을 엿 들을 수 있었다. '마마께서 마음을 바꾸지 않으셔서 천만다행이야.' 카엔은 더 집중해서 라우프의 생각을 엿들었다. '혹시라도 마음을 바꾸셨다면 서제국의 황제의 노여움이 우리 프린다인 공국에 떨어졌을지도 모르니 말야. 그나저나 마마께서 흔 들리시다니 정말 놀랐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는 마마께서 렌이라는 계집에게 마음이 약해지시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그나저나 배가 고프군. 허브를 얹어 숯불로 구운 닭구이가 먹고 싶어. 와인 소스를 얹은 돼지 고기와 버섯볶음도.어휴, 명색이 황실 인데 허접한 건지. 참으로 걱정이로다. 결국 마마는 안 나오시려나 보군. 렌이 서제국 황제에게 납치당하는 모습은 보기 싫으셨겠지.' 카엔은 두서없는 라우프의 생각을 인내심 있게 읽어 내며 대강 사정을 파악했다. ㄱ는 티르안 공녀와 라우프가 계획을 바꾸지 않았다 는 걸 확인하고 안심했다. "아, 에스틴, 예식이 이제 시작되려나 보다." 마스니가 카엔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카엔은 고개를 끄덕이고 정면을 주시했다. 어느새 단장 위의 옥좌에는 이노스 신의 대신관이 앉고, 그 옆에는 수석신관 두 명이 좌우에 서 있고, 렌은 그 앞에서 무릎을 끓고 있었다. 카엔은 렌이 별것도 아닌 대신관 앞에서 무릎꿇고 있는 장면에 속이 뒤틀렸으나 억지로 참았다. 그가 있는 곳과 렌이 있는 곳은 너무 멀어 렌의 생각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그저 렌의 맑고 평온한 표정을 보며 마음을 달랠뿐이었다. 몇가지 복잡한 기도의식이 이어지고, 대신관은 앉았다 일어섰다 하며 누리디안 고어로 된 기도문을 외웠다. 주위의 귀족들은 대신관의 몸동작에 따라 일어났다 앉기를 반복하며 기도문을 따라했다. 카엔은 몇몇 기도문을 몰라 당황했지만 자세히 보니 귀족들도 대부분 누리디안 고어를 잘 모르는지 입속으로 웅얼웅얼 얼버무리고 있었다. 그는 태연함을 되찾고 기도하는 흉내를 계속했다. 마침내 지루한 기도가 끝나자 대신관은 양대륙 공용어로 말을 시작했다. "소녀여, 그대의 이름이 렌이 맞는가?" 확성마법 덕분에 대신관의 말은 장중하게 축제장에 퍼져나갔다. "예, 대신관이시여." "위대한 대지의 아버지 이노스 신의 정의를 믿는가? 그의 심판이 준엄하고 그의 자비가 선인들에게만 내려짐을 믿는가?" 렌의 질문을 받는 순간 미리 예행연습을 한 대로 대답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대신관 예하, 저는 믿습니다. 이 세상에 인간의 힘을 뒤어넘는 위대한 섭리가 있어 모든 생명에 태어남과 죽음의 의미를 부여한 다는 것, 사람들은 저마다 그 위대한 섭리에 다른 이름을 붙이기에 신은 천 가지 다른 이름을 가지지만, 결국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신 이든 섭리이든 영원한 무언가를 붙잡고 있다는 것, 그렇게 인간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마음속에 간직하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은 죽음 으로도 사라지지 않고 불멸한다는 것을요." 렌은 펠리시티 전 황후의 영혼과 조우했을 때 느꼈던 그 벅찬 깨달음을 조금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적어도 평생 신을 섬기는 일을 해온 대신관이라면 그녀의 진심을 알아 줄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도 저 뒤 어딘가에서 카엔도 그녀의 말을 듣고 있을 것이다. 대신관 도일린은 정해진 대로 대답하지 않는 그녀를 야단치려다 렌의 맑은 눈에서 빛나는 진실을 읽고 흔들렸다. "그대는 진실로 영혼의 불멸함을 믿는단 말인가?" 대신관의 목소리는 떨렸다. 이 소녀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저는 영혼이 존재하고 불멸한다는 것을 압니다." '믿는다'는게 아니라 '안다' 였다. 마치 영혼을 직접 보기라도 했다는 말투였다. 렌의 눈에서 빛나는 신념은 대신관이 이노스 교단 내에서 권력의 사다리를 헤치고 올라가면서 겨우 두 세번 마주했던 것이었다. 그 에게 유일하게 초라함을 안겨주었던 몇몇 사제들이 있었다. 그들은 교단의 개혁을 부르짖다 그의 손에 제거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와 달리 무언가 현세를 초월하는 지혜를 깨닫고 있는 듯했다. 두려움 없는 그들의 눈빛이 떠올랐다. 이제 늙어 남 은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는 그들이 미처 전하지 못하고 간 가르침이 아쉬웠다. 그들과 똑같은 눈빛을 보이는 렌에게 수천, 수만 가지 를 묻고 싶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위엄을 버리고 그리할 수는 없었다. 대신관 도일린은 아쉬움을 떨치고 말했다. "그대는 정녕코 이노스 신의 딸이로다. 이노스 신의 뜻을 대행하는 대신관으로서 내 그대에게 렌 데 이노스의 이름을 내리노라." 렌은 미리 들은 식순대로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이마에 성수를 받을 차례였다.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어 다리가 휘청거렸다. 갑자기 눈앞이 핑 돌았다. "앗!" "저런!" 여기저기서 탄식이 들리는 가운데 렌의 몸은 힘없이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카엔은 번개같이 앞으로 튀어나가려 했으나 마스니의 손이 그를 막았다. 그 사이 대신관의 뒤에 서 있던 데이그랜 - 엘프 마법사로 변장한 - 과 테룬 황제가 거의 동시에 튀어나왔다. "렌!" 둘은 합창이라도 하듯 외치며 각기 렌의 왼손과 오른손을 잡아챘다. 렌은 축 늘어졌지만 다행히 땅에 쓰러지지는 않았다. 데이그랜 은 테룬의 손을 우아하게 밀치며 렌을 품에 안았다. "내가 데려가서 앉힐게. 너는 식순을 진행해야 하잖아." 데이그랜은 테룬에게 속삭였다. 렌을 뺏긴 테룬은 그 자리에서 데이그랜과 싸울 수도 없어 얼굴을 붉히며 데이그랜을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카엔 또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도마뱀 주제에!' "폐하, 제발 진정하십시오." 마스니는 카엔의 귀에 대고 애타게 속삭였다. 카엔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눈으로 렌을 쫓았다. "고마워요." 렌은 상냥하게 데이그랜에게 인사를 던진 후 그가 부축하는 대로 축제장 한쪽의 안락의자에 몸을 기댔다. 데이그랜은 마치 렌을 지 키려는 듯 안락의자 뒤에 버티고 섰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테룬은 렌이 무사히 앉은 걸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개화를 선언 했다. "위대하신 이노스 신께 영광을! 지상에 번영을! 파이브룬 제국에 풍요와 승리를!" 귀족들은 환성을 울렸다. 아름다운 음악이 연주되고 수상 관저의 가객 미로닌이 앞으로 나와 축제의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은 그의 미성에 취해 흥겹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모두들 박수를 쳤다. 사람들의 얼굴은 밝게 상기되었다. 박수소리가 잦아들 즈음 사람들의 시선은 테룬 황제에게로 향했다. 원래대로라면 황제와 타림 안딘의 첫춤을 출 테지만 타림 안딘이 축제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상 황제가 누구를 선택할지는 미정인 셈이었다. 조금이라도 정세에 밝은 사람들은 황제가 렌을 선택하리라고 짐작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귀족 아가씨들은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않고 뚫어지게 황제를 쳐다보았다. 옆에서 샤이트가 간했다. "폐하, 첫 춤의 상대를 고르시지요." 테룬은 긴장한 표정으로 멀리 안락의자에 늘어지듯 앉아 있는 렌을 바라보았다. 렌 뒤에서는 데이그랜이 야릇한 미소를 띤 채 테룬을 쳐다보고 있었다. 테룬은 심호흡을 하고는 렌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테룬의 행보를 지켜보았다. 테룬은 렌 앞에 멈추고 잠시 숨을 고른 후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사람들은 경악하고 렌은 당황했다. "이러지 말아요!" 렌이 아무리 테룬의 팔을 잡고 일으키려 해도 테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굽혀 이마를 한동안 땅에 대었다가 천천히 고개 를 들어 렌의 눈을 응시했다. 렌은 눈길을 돌릴 수 없었다. "이노사 안딘, 그대는 내 생명과 내 영혼을 구해주었소. 나는 그대에게 모든 것을 빚졌으나 나는 너무 가난하여 내가 그대에게 줄 것 은 내 사랑과 나의 제국밖에 없소. 그대는 내 사랑을 받아주겠소? 나의 황후가 되어주겠소?" 사람들은 황제의 굴욕적이기까지 한 자세와 그의 간절한 말에 깜짝 놀랐다. 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점점 주위가 소란해졌다. 카엔은 그 틈을 타서 사람들을 헤치고 렌이 앉은 안락의자쪽으로 다가갔다. "저는……." 렌이 입을 열자 주위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저는 폐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 사랑은 오직 한 사람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폐하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내게는 그동안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은 한번도 한 적이 없잖아!" 테룬은 부들부들 떨었다. "폐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했었지요." 렌은 놀랄 정도로 냉정하게 말했다. 귀족들은 렌이 감히 황제의 청혼을 거저러하는 모습을 보며 경악했다. 그들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카엔은 테룬과 렌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위치까지 왔다. "그대가 사랑한다는 그는 대체 누구인가?" 테룬은 이를 악물고 물었다. '제발, 제발 그가 서제국 황제라는 말만 하지 말아줘! 차라리 날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놔둬! 진실을 밝히지 말아줘! 그대가 언젠 가 날 사랑해줄 수도 있으리라는 환상에 잠길 수 있게!' 테룬의 마음속에서 처절한 절규가 들려왔다. 카엔은 숨을 삼켰다. 카엔은 테룬의 마음을 읽자마자 다시 렌의 마음에 정신을 집중했다. '가장 가혹한 진실이 가장 좋은 약인 법. 사랑의 문제에서 동정과 달콤한 거짓말은 한때의 마약일뿐. 나는 그대를 위해 진실을 말 하겠어요. 이제 그대는 진실을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강해졌으니 그대를 위해서도, 내 사랑하는 카엔님을 위해서도.' 렌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가 사랑하는 그는 세상에서 가장 여린 가슴을 가졌으면서도 한때 세상에서 가장 잔인했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그는 사랑을 배워서 원래 착한 모습을 되찾았어요. 그는 그 사랑을 제게 주었고, 저도 그에게 제 사랑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한히 행복했고 앞으로 도 무한히 행복할 겁니다. 그가 누구인지 당장 밝힐수는 없지만, 저는 그를 사랑합니다." '그래요, 나는 행복할 거에요. 얼마 안 남은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 카엔님, 지금 여기 어딘가에서 듣고 계시나요?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 내 생명과 내 사랑을 카엔님께 드린 걸 후회하지 않아요. 사랑해요! 사랑한다고요!' 카엔은 렌의 생각을 읽고 눈앞이 하얘졌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나의 렌이? 나 때문에? 카엔은 마스니의 손길을 뿌리치고 렌에게로 몸을 던졌다. "렌!" 조금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라우프는 사파이어 목걸이를 건 남자가 렌을 덮치는 것을 보자 즉시 결계를 해제했다. 렌의 뒤에서 기회를 노리던 데이그랜은 결계가 순간적으로 약해진 것을 감지했다. 그는 카엔이 렌을 붙잡기 직전에 렌에게로 손을 뻗었다. "어딜!" 데이그랜은 의기양양하게 웃음지었다. 렌은 그의 두 손아귀에 힘없이 잡혔다. 아, 이제야 마침내 렌을 수중에 넣었다! 그리고 지금 결계는 없는거나 다름없다! 데이그랜은 한없이 기뻤다. 그는 온몸의 힘을 모아 즉시 순간이동하려 했다. 카엔은 전신의 마나를 모아 데이그랜을 저지했다. 그의 가장마법은 순식간에 풀려 은보랏빛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확연히 드러났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데이그랜은 카엔의 마나에 저항했다. "감히 인간 따위가 내 마법을 방해할 수 없어! 카에닌 너는 황제의 저주를 빼면 시체야!" 데이그랜 또한 온몸을 다해 카엔과 싸우며 본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테룬 황제와도 파이브룬 대공과도 흡사한 그의 모습에 사람들 은 다시 탄성을 울렸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엘프 마법사 라비언의 원래 정체가 흑룡이라는 것을 즉시 알아 차렸다. 데이그랜은 카엔의 마법을 가까스로 피하고 다시 순간이동하려 했다. 렌은 데이그랜의 품에 무자비할 정도로 단단하게 안겨서 제 대로 숨조차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데이그랜과 렌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안 돼!" 카엔이 소리질렀다. 그는 엄청난 힘을 모아 속박마법을 펼쳤으나 데이그랜과 렌은 속박마법이 그의 몸에 닿기 직전에 투명해졌다. 그순간 결계가 닫혔다. 데이그랜은 보이지 않는 촘촘한 그물 같은 것에 튕겨 땅에 떨어졌다. 렌 또한 데이그랜 옆에 나뒹굴었다. 렌과 가까운 쪽에 있던 테룬이 황급히 렌을 받아 안았다. 카엔은 창백해져서 데이그랜과 렌과 테룬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테룬, 대체 무슨 일이냐! 왜 방해한 거냐!" 데이그랜은 평정을 잃고 버럭 소리질렀다. 테룬은 왼손 가운뎃 손가락에 끼고 있는 흑옥 반지에 손을 댄 채였다. 결계를 닫는 장치 였다. "결계를 닫았습니다. 데이그랜님, 렌을 대체 어디로 데려가려 하신 겁니까?" 테룬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데이그랜은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몇 가지 가능한 설명 중 그는 가장 그럴 법한 것을 선택했다. 그는 멋쩍게 웃었다. "나는 네가 렌을 저 녀석에게 뺏길까봐 그녀를 안전한 내 레어로 일단 피신시키려고 한 거다. 이렇게 네가 때맞추어 결계를 닫을 수 있을 줄은 몰랐거든. 하지만 저 녀석이 렌을 납치해가기 전에 다행히 무사히 결계가 닫혔으니 우리 둘이 힘을 합쳐 카에닌 녀석을 해 치우자!" 카엔은 그 옆에서 소리쳤다. "저 간악한 흑룡은 렌을 데려다가 제물로 쓰려는 거다! 절대 속지 마라!" 테룬은 주저했다. 테룬은 품속의 렌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누구의 말이 사실인가?" 더 이상 데이그랜의 장단의 맞춰줄 이유는 없었다. 렌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데이그랜님의 말이 거짓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저를 노렸습니다." 테룬은 렌의 양팔을 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렌은 아파서 얼굴을 찡그렸다. 카엔은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지켜보았다. "그렇다면 그대는 누구와 있고 싶은 거지? 내 곁에 있고 싶다고만 말해! 그럼 내가 지켜주겠어! 카에닌 황제도 흑룡도 해치우고 그 대를 지켜주겠어! 제발 그렇게 말해!" 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카에닌을 향해 있었다. 테룬은 렌의 눈에 가득한 카에닌에 대한 사랑을 알아차렸다. 바보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한, 그가 그토록 받기를 갈구했던 끝없는 사랑. 맹렬한 질투심이 몸속에서 끓어올랐다. "렌, 그대는 정녕코 서제국 황제 카에닌 테라미즈넨을 사랑하는가?" 렌은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테룬을 애타게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렌의 눈이 모든 것을 말했다. 테룬은 더 한층 분노가 들끓는 얼굴로 카엔에게 향했다. "당신은 렌을 사랑하오?" 카엔은 지금 이 자리에서 렌에 대한 사랑을 고백해서 테룬의 질투심을 자극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인간의 여 러 가지 감정 중 질투만큼 강력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도 없지 않은가. 간절히 말하고 싶은 그 한마디를 카엔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는 몇 번이나 주저하다가 결국 눈물을 흘렸다. "그대가 렌을 흑룡에게서 지켜주기만 한다면, 나는 물러나겠다. 그대가 렌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주기만 하면, 그녀를 따듯 하게 보살펴주고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히지 않게 해주고 그녀를 미소짓게 해준다고 약속하기만 하면, 나는 조용히 물러나겠다." 결국 그는 렌을 위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칼자루를 쥔 것은 테룬 황제였다. 렌은 흑룡에게서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마치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엄습했다. 그러나 렌은 그를 보고 있었다. 카엔은 렌이 그의 마음을 전부 이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카엔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렌도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그를 향해 미소지었다. 테룬은 렌과 카엔이 시선을 마주하는 것을 보면서 다시 질투가 끓어올랐다. 그걸 본 데이그랜이 때를 놓치지 않고 옆에서 외쳤다. "이봐, 테룬, 속지마! 살인마 미치광이 카에닌이 사랑이라고? 그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겠냐? 그게 말이나되냐? 저 녀 석은 나랑 너를 이간질해서 이 자리를 빠져나가려고 하는 거다! 넘어가면 안 돼! 네가 말만 하면 우리 둘이 카에닌을 협공할 수 있어! 그러면 승산은 우리 쪽에 있는 거다! 일단 카에닌 녀석만 해치우고 나면 렌은 포기하마! 내 목적은 카에닌이다! 렌은 너 좋을 대로 해라! 정신 차려, 테룬! 렌이 카에닌 녀석에게 빠져 있는 게 보이지 않아? 저 녀석에게 렌의 몸과 마음을 다 뺏길 참이야?" 테룬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질투심에 점점 사로잡혀가는 것을 느꼈다. 이 음습하고 어두운 감정은 몹시도 친숙했다. 그는 칼을 빼들었다. 단수검이 부러진 후 새로 장만한 드워프제 명검이었다. 검에서는 어느새 검푸른 검강이 피어올랐다. 칼끝은 흔들림 없이 카엔에게 겨눠졌다. 데이그랜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카엔은 테룬의 마음을 읽고 절망했다. 그는 테룬의 품에 안겨 있는 렌 때문에 감히 공격마법을 펼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안절부절 못했다. 데이그랜은 환희하며 협공을 펼치기 위해 한 발짝 떼었다. 잠시 아무도 꼼짝 않는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순간 테룬이 오른손으로 크게 칼을 휘둘렀다. 쌔액하는 파공음과 함께 검푸른 검강은 물결처럼 대기를 갈랐다. 그리고 피가 튀었다. "테룬, 네가!" 데이그랜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외쳤다. 사람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어서 받으시오!" 테룬은 품속의 렌을 카엔에게 던졌다. 카엔은 재빨리 렌을 받아 안았다. "어서!" 테룬이 다시 외쳤다. 카엔은 렌과 마스니의 손을 잡고 즉시 순간이동했다. 데이그랜은 가슴의 상처를 부여잡고 그들을 쫓아 순간이동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결계에 부딪쳐 튕겨 나왔다. 데이그랜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테룬을 노려보았다. "네가 감히! 내 손으로 키운 동제국의 황제인 네가! 너희 인간들에게 소드 마스터의 권능을 준 게 누군데! 그런 네가 마지막 순간에 날 배신해?" "데이그랜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테룬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허탈한 표정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경악한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 입을 쩍 벌린 채 뚫어져라 황제와 흑룡을 쳐다보는 사람, 결계로 막힌 연회장을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안간 힘을 쓰는 사람, 연회장은 엉망진창이었다. "야, 내궁 쪽 결계라도 열어. 얘기 좀 하자." 데이그랜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테룬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궁쪽 결계를 열자마자 데이그랜은 남은 마나를 끌어올려 황제의 침 전으로 순간 이동했다. 데이그랜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겨우 억누르며 멍하니 앉아 있는 테룬을 노려보았다. "왜 그런 짓을 했지?" 데이그랜의 물음에 테룬은 뜬금없이 대답했다. "데이그랜님, 제 마음은 너무 많이 나아버렸습니다." "뭔 소리야?" "렌은 제게 너무 많은 걸 가르쳐 주었습니다. 저는 제 이기심과 질투심으로 렌을 붙잡기에는 그녀를 너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렌의 눈에서 카에닌 황제에 대한 사랑을 확인했을 때, 저는 차마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오로지 그녀의 행복을 위해 저는 저 자신의 행복을 포기했습니다. 내 인생에서 단 한 번 날아왔던 아름다운 작은 새는 이 차갑게 얼어붙은 황궁을 겨우 한 바퀴 돌고 희미한 온기만을 남긴 채 다시 날아가 버렸습니다. 아, 저는 아마도 평생 그 작고 아름다운 새를 다시는 보지 못하겠지요. 그녀는 제 품이 아닌 다른 사람의 품에서 남은 날을 살다 죽어갈 테지요. 그리고 저는 이곳 얼어붙은 동궁에서 기억에 남은 희미 한 온기를 부여잡고 평생 살아가야겠지요." 테룬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저는 지금 가슴이 너무 아파 데이그랜님께서 손을 쓰지 않으시더라도 이 고통을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녀가 너무 보고 싶어서 죽을 것만 같습니다. 저는 예전에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다 겪어 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보다 더한 고통도 있다는 사실을 알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지금이 좋습니다. 사랑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지금 이 사랑이 뭔지 몰랐던 그 옛날보다 행복합니다." 데이그랜은 당장이라도 테룬을 죽이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감히 내 일을 망쳐? 인간 따위가?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주제에 행복하다고?" 테룬은 오히려 데이그랜을 마주 노려보았다. "데이그랜님도 저를 속이셨지 않습니까? 렌을 제물로 삼는다니. 뭔지는 몰라도 렌의 생명을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까?" 데이그랜은 뜻밖의 예리한 추궁에 망설이다가 침통하게 대답했다. "그래, 네 생각이 맞다." "그 역할이라는 게 렌에게는 안 좋은 거지요?" "그래." "무슨 일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녀의 일생 전부를 바쳐 죽어가는 어린 드래곤의 생명을 살리는 역할이었다. 원래 나는 그 때문에 렌을 이계에서 소환한 거다. 그녀가 죽어가고 있는 이상 그나마도 가능성이 희박해져버렸지만, 나로서는 실날같은 가능성이라도 걸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테룬은 놀랐다. "그녀가 이계에서 왔다고요?" "그래." "그렇군요. 그녀의 지식 모두 이 세계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비범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군요." "그렇다." "결국 그녀에게 황룡을 치료하도록 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계획하신 거군요." "그래." 테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만약 데이그랜님이 강제로 렌에게 황룡을 치료하게 할 생각을 하셨다면 그건 단단한 오산입니다. 렌을 그렇게나 모르십니까? 그 녀는 환자가 눈앞에 있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치료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데이그랜님은 차라리 렌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애원하셨 어야 합니다. 억지로 데려가려고 하셨다니, 어리석은 짓을 하신 겁니다." "너까지도 지혜의 흑룡에게 어리석다고 하는 거냐! 어리석은 건 너다! 스스로 렌을 포기하고 카에닌 녀석에게 보내버리다니! 그렇게 자기 발등을 찍다니! 그러면서 내 일까지 망치다니! 네가 무사할 줄 아느냐?" "드래곤께서 저희 파이브룬 제국 황실에 수많은 은혜를 베푸신것 잘 압니다. 그주에 가장 큰 은혜가 바로 저와 같은 소드 마스터 의 인자를 심어주신 거라는 사실도요. 하지만 드래곤께서 순수한 호의로 그런 일을 하신 게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결국 데이그랜님 의 의도는 인간들끼리 서로 싸우게 하려는 거였지 않습니까. 그러니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해서 저를 비난 하실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드래곤들의 꼭두각시가 아니니까요." "네가 정녕 드래곤의 복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아냐!" 테룬의 깊은 눈으로 데이그랜을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벌써 수백 년째 데이그랜님을 제외한 다른 드래곤들의 활동은 거의 정지 상태가 아닙니까? 아까 황룡 을 치료하기 위해 렌을 데려왔다고 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모든 것이 다 연관되어 있는 것같습니다. 데이그랜님만 막으면 다른 드래곤은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제 억측인가요?" 데이그랜은 테룬이 보여준 의외의 통찰력에 섬뜩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이곳은 제 결계입니다. 상처입은 데이그랜님께서 제 결계 안에서 소드 마스터인 저에게 대항해서 뭘 어찌시겠습니까? 제 처분을 기다리실 수밖에요. 데이그랜님께서 동제국과 저와 렌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담보할 만한 뭔가를 보여주시면 보내드릴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데이그랜님을 영원히 이곳에 묶어놓을 수밖에 없겠지요." 데이그랜은 분노를 억누르며 오히려 웃었다. "너도 역시 어리석은 인간이구나. 언제나 자기 멋대로인데다 은혜를 배반하고 약속을 어기고, 모든 걸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 는구나. 흥, 내가 네 조상 파이브룬 대공에게 소드 마스터의 능력을 불어 넣어주었을 때 아무런 안전장치도 해놓지 않은 줄 아느냐? 어리석은 놈!" 데이그랜은 복수심에 가득 찬 웃음을 지으며 서서히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손에 검푸른 마나가 생성되는 것과 동시에 테룬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아!" 테룬은 저항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촌각이 지나기도 전에 테룬의 온몸은 검푸른 빛으로 물들며 완전히 마비되었다. 그는 의 식을 잃으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흥, 어리석은 놈!" 때마침 침전의 문이 열리고 티르안 공녀, 샤이트 수상, 마법사 라우프, 그 외 몇 명의 신료들과 기사들이 뛰어 들어왔다.그들은 검 푸른 빛으로 변한 자신들의 황제와 그 옆에서 무시무시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데이그랜을 보고 경악했다. 티르안 공녀는 기절할 것같이 울렁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입을 열었다. "흑룡이시여, 대체 무얼 하려 하십니까?" "아, 뭐 하려고 하냐고? 여기서 나가려고. 이 녀석은 일이 잘 풀리면 도로 보내주마." 데이그랜은 씩 웃었다. 공포와 현기증이 엄습했다. 공녀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냉정해야 해! 티르안 공녀가 날카롭게 다시 물었다. "무적의 결계를 어떻게 뚫고 나가시려고요?" 데이그랜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티르안 공녀에게 말했다. "하라스 대제 녀석이 이 결계 만들 때 나도 도왔거든. 그래서 좀 아는 게 있어. 결계의 지배자인 황제가 죽으면 지배권은 자동으로 그 계승자에게 돌아가지. 지금 테룬은 마법의 관점에서 보면 죽은 거나 다름없으니 결계의 계승권은 당연히 너, 티르안 공녀한테 있 다구. 그래서 이 녀석이 가운뎃손가락에 끼고 있는 이 결계반지의 소유권도 너한테 있고 말이야. 다른 사람, 심지어 내가 건드려도 작동하지 않는 이 결계반지가 네 손에서는 다시 생명을 얻겠지. 그러니 이리 와서 어서 이 반지를 빼가렴. 그리고 나를 위해 결계를 열어주렴. 너의 사랑하는 테룬 황제의 목숨이 걱정된다면 말이야." 티르안 공녀는 하얗게 질려 테룬과 데이그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지금 일어나는 일은 그녀의 이해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나중에 차분히 생각해보면 답을 알 수 있겠지만, 당장은 행동해야 했다. 샤이트 수상과 티르안 공녀, 라우프는 눈빛을 교환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공녀는 한숨을 쉬며 테룬 황제의 손에서 반지를 뺐다. 그리고 자신의 엄지손가락에 반지를 끼어 넣었다. "어떻게 하면 되지요?" "저 녀석, 라우프인지 뭔지한테 물어봐." 라우프는 재빨리 귓속말로 결계를 푸는 방법을 설명했다. 티르안 공녀는 반지 위에 다른 쪽 손을 올려놓았다. "약속해주세요! 반드시 황제 폐하를 원래대로 돌려보내주겠다고요!" 데이그랜은 잠시 생각하다가 사악하게 웃었다. "내가 왜 그런 약속을 해야 하지? 칼자루는 내가 전부 쥐고 있는데." 데이그랜이 손톱 하나를 길게 만들어 부드럽게 테룬의 목을 쓰다듬자 모두들 헉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어차피 나는 카에닌 테라미즈넨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이 녀석이 꼭 필요하니, 이유 없이 죽이지는 않으마. 일이 잘 되든 잘못되든 원래대로 돌려보내 줄게. 반 년 안에." "절대로 그를 해치면 안 돼요!" "그래그래. 드래곤이 알을 보호하듯 그렇게 애지중지할게. 약속한다. 드래곤이 거짓말하는 거 봤어?" 그 말에 모두들 한층 더 불안해졌다. 티르안 공녀는 너무 손을 꼭 맞잡아 손톱이 손바닥 속으로 파고들 정도였다. 데이그랜은 갑자기 비웃듯 덧붙였다. "너는 이 녀석을 사랑하지? 어때,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올 테냐? 네가 따라오면 테룬 곁에서 이 녀석을 보살필 수 있도록 해주마." 공녀는 당장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냉정하게 말했다. "저는 황제폐하께서 돌아오시는 그날까지 타림 안딘으로서 파이브룬 제국을 지킬 겁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황제 폐하께서 잘못되신다면 제 모든 힘을 다해 복수할 겁니다." 침착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별일 없을 거라니까 그러네." 티르안은 눈물을 참으며 눈을 감고 라우프가 가르쳐준 대로 정신을 집중했다. 황궁을 싸고 있는 거미줄 같은 결계가 눈꺼풀 뒤로 환 히 보녔다. '흩어져라!' 티르안은 데이그랜 주위의 거미줄을 조용히 밀쳤다. 데이그랜은 결계가 약해지는 걸 느끼고 웃음지었다. "그럼 안녕! 다들 몸 건강히 잘 있길!" 데이그랜은 어울리지 않게 다정한 목소리로 인사를 남긴 채 테룬을 안고 사라졌다. 남은 사람들은 망연자실하여 서로 얼굴만 바라 보았다. 그제야 티르안 공녀는 바닥에 쓰러져 처절하게 울었다. <<<<<<< 다시 테라미즈로 >>>>>>>>>> 카엔이 일시에 모든 마나를 방출하며 순간이동한 곳은 다름 아닌 테라미즈 황궁의 황제 침전이었다. 장거리 순간이동에 따르는 현기증이 렌을 엄습했다. 몇 초가 지나고 나서야 몸과 영혼이 하나로 합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대 로라면 바닥에 쓰러져야 마땅하겠지만 카엔이 렌의 몸을 단단히 받쳐준 덕분에 렌은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반면에 마스니에 요란하게 나뒹굴었다. 카엔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대륙간 초장거리 순간이동은 8서클인 그녀에게는 무리였던 것이다. 물론 마스니는 감히 불평할 수 없었다. 모두 한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렌의 눈에 기쁨의 눈물이 차올랐다. 렌은 가녀린 손을 뻗어 카엔의 뺨을 만졌다. 정말로 카엔 이었다. "카엔님!" 죽기 전에 그를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게 되다니! "렌!" 카엔의 눈에는 반대로 슬픔이 차올랐다. "렌, 렌이 죽어가는 건 나 때문인 거지요? 내가 황제의 저주를 펼치려 할 때 그걸 막으려고 몸을 던졌기 때문이죠? 그리고 살린 평 원에서 내게 생명을 나눠주었기 때문인 거죠? 왜 그랬습니까?" 카엔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렌은 카엔의 뺨을 토닥토닥했다. "왜 그랬냐니요? 바보같이. 그야 카엔님을 사랑하니까 그랬지요." "그게 내게 어떤 고통을 줄지 몰랐단 말입니까!" 렌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너무나 밝게 웃었다. "카엔님은 제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면 어떻게 해시겠어요? 앞뒷일 생각하지 않고 저를 구하려고 몸을 던지지 않으시 겠어요? 저도 그냥 그런 것뿐이에요. 저도 무작정 카엔님을 구하고 나서 죽어가는 동안 무척 괴로워했어요. 도로 물렀으면 좋겠다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죽는 건 너무 억울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괴롭지 않아요. 저는 마음의 평화를 찾았어요. 제 마음 을 읽을 수 있으시죠?" "그래요. 정말로 렌은 괴로워하지 않는군요." 카엔은 환하게 빛나는 렌의 마음을 읽으며 경탄했다. "저는 이제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란 걸 믿어요. 사람의 영혼은 죽음보다 강한 걸요. 카엔님, 제가 죽는다 해도, 카엔님이 죽 는다 해도, 우리의 차원과 시공을 뛰어넘어 거듭거듭 만날 수 있을 거에요. 저를 믿으시죠?" "아무리 그렇다 해도, 우리가 다시 환생한다 해도, 지금 이 모습의 렌,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착한 나의 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닙니까?" 카엔은 렌을 다시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그야 그렇죠. 그러니 마음껏 슬퍼하세요. 슬퍼하는 게 당연해요. 제 앞에서 눈물을 숨기지 마세요. 저는 이제 카엔님의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해요. 하지만 카엔님도 저를 위해 강해지세요. 그렇게 해주시겠죠?" 카엔은 무한한 안타까움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렌의 말대로 슬픔을 참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아, 렌을 사랑하게 된 이후 그가 지은 웃음, 그가 흘린 눈물은 지난 수백 년 동안을 다 모은 것보다도 많았다. 내 소중한 보석, 내 렌, 내 사랑, 내 생명. 카엔은 렌의 입술에 키스했다. 오랫동안 굶주려온 거친 키스를 렌은 마치 성찬을 받듯 받아들였다. 키스는 키스로 이어지고 짜릿 한 느낌이 혀끝을 스쳤다. 삶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한참 지나 둘은 입술을 뗐다. 렌은 비로소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그녀는 눈부시도록 화려하게 치장된 보랏빛과 금빛의 침전을 호기심에 가득 차 돌아 보았다. 사치와 최고의 취향과 예술의 결정체라 할 만했다. 한 때 렌은 이곳에서 의식을 잃은 채 며칠 밤낮을 보냈지만 그것은 렌의 기억에 없었다. "저기 넘어져 있는 저분은 누구세요?" 렌은 나뒹군 자세 그대로 입을 쩍 벌린 채 렌과 카엔의 애정행각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초로의 부인을 가르켰다. "아, 우리 제국의 동제국 담당 첩보부장 마스니입니다." 마스니는 실책을 깨닫고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는 렌에게 엄숙하게 인사했다. "렌님, 인사드립니다. 8서클 마법사 마스니입니다." 마스니는 렌을 보자마자 왜 카엔이 그토록 이 소녀에게 사로잡혀 있는지를 바로 깨달았다. 그렇다. 이 소녀라면 수백 년 동안 방황 하던 자신의 황제에게 마음의 안식을 줄 만했다. "마스니님, 반가워요. 카엔님이 마스니님을 무척 좋아하지요? 한 눈에 보아도 알겠어요.: "아니 렌님, 제발 '님' 자는 빼주세요! 황후가 되실 분께서 신하에게 님이라뇨! 계속 그러신다면 저는 앞으로 다시는 폐하께 아는 척을 하지 않겠습니다!" "훗, 그게 무슨 협박이에요? 아하하하! 그럼 그냥 마스니라고 불러도 돼요?" "네! 물론이죠!" "그럼 마스니 언니라고 부를게요. 저도 렌이라고만 부르세요." 마스니 언니라는 호칭에 쉰 살이 넘은 여마법사는 얼굴이 붉어지며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아아, 이 소녀는 어쩜 이렇게 재치 있고 경우가 바르담. 내가 꽤 젊어 보이긴 하나 보지? 우후후후, 아하하하하하. "마스니, 염치를 알아라." 마스니의 마음을 고스란히 읽은 카엔이 따끔하게 한마디 하자 마스니는 입맛을 다셨다. "아, 예. 쩝, 언니는 말고 그냥 마스니 아줌마라 불러주세요." 모두 모처럼 밝게 웃었다. 렌은 마음이 놓였다. 카엔님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저렇게 마음을 열어가고 있었구나. 내가 죽어도 카엔님은 외롭지 않을 거야. 카엔은 렌의 마음을 다시 읽고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렌의 마음에서 죽음을 읽을 때마다 괴로 워할 수밖에 없었다. 카엔은 마스니를 손짓하여 물러나게 하고 렌을 자신의 침대에 눕혔다. 렌은 시키는 대로 얌전히 누웠다.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하루였다. "카엔님, 여기 앉으세요." 렌은 침대 한쪽을 툭툭 쳤다. 카엔은 얌전히 렌 옆에 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시죠?" "네, 무척." 이미 카엔은 렌의 마음속에서 그동안 일어난 일들 중 일부를 읽었지만 그대도 그는 렌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렌은 말틴에서 카엔과 헤어진 후 일어난 수많은 일들을 차례로 얘기했다. 카엔이 펼치는 황제의 저주를 막느라 생명력이 반이나 없어진 일, 구와인을 만나 카로딘까지 와 종군치료사가 된 일,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고,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지 못한 일, 전장에서 카엔을 발견하고 생명력을 거의 모두 쏟아 그를 구한 일, 동제국의 수도 브림으로 가서 테룬의 마음을 치료한 일. 카엔은 렌이 한 대목씩 말할 때마다 울고 웃었다. 이미 렌의 마음을 읽어 알고 있었지만 렌이 죽어가는 것은 역시 그의 탓이었다. 렌은 줄줄 눈물을 흘리는 카엔의 얼굴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카엔님은 저한테 생명의 빚이 있는 거 알고 계시죠? 그러니 제가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해주셔야 해요." "그럴게요. 정말로 뭐든지 다 해줄게요." 카엔은 간절히 말했다. "그럼 콧물부터 좀 닦으세요. 아까부터 콧물이 눈물과 섞여서 자꾸 입술로 흐르는데 못 봐주겠어요." 렌은 웃으며 비단 손수건을 카엔의 코에 대었다. "자, 코 푸세요. 크응!" 얼굴을 붉히며 코를 푼 카엔은 다시 렌에게 부탁했다. "렌, 정말로 나는 렌에게 받은 것은 너무 많고 해준 것은 너무 적습니다. 내가 해수 있는 것도 너무 적고요. 그러니 내가 할 수 있 는 얼마 안 되는 걸 해줄 때 제발 거절하지 말아요."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너무 지나치지 않게만요." 그녀는 이미 기진맥진했다. 졸리다기보다는 너무 피곤해서 기절할 것 같았다. 의식이 아물아물 멀어졌다. 그래도 렌은 카엔의 손 을 놓지 않았다. "키엔님, 저 행복해요. 이제 저는 제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카엔님 곁에 있을 수 있겠지요." 카엔은 뭉클했다. 그 말을 끝으로 렌은 잠이 들었다. 카엔이 신호하자 시녀 세 명이 들어왔다. 카엔은 벌써 한참 전에 시녀들의 시력을 회복시켜주었기 때문에 시녀들은 더 이상 장님이 아니었다. 카엔이 나직하게 지시하자 그녀들은 렌이 돌아올 날을 고대하며 무수하게 장만해둔 렌의 실내복 중 하나를 챙겨 가지고 왔다. 미스 릴 대야에 담긴 따뜻한 물과 엘프비단제 수건도 들고 왔다. 카엔은 실내복을 보자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고 은회색에 엘프 레이스가 달린 것으로 가져 오라. 그리고 지금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니 당장 궁내관에게 말해 렌의 의상 과 소품 일습을 다시 준비하도록 하라." "예." 시녀 한 명이 조용히 나갔다 들어왔다. 그녀는 눈치 빠르게 실내복 여러 종류를 챙겨서 가지고 왔다. "그래, 그걸로." 시녀들은 전문가다운 손길로 조용히 렌이 입은 이노사 안딘의 예복을 벗기고 물에 적신 수건으로 꼼꼼히 렌의 몸을 닦은 후 엘프비 단제 실내복을 입혔다. 카엔은 애써 외면하려 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렌의 알몸으로 눈을 돌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너무 마른데 다가 어깨에는 상처까지 나 있었다. 가엾게도, 가엾게도. 그는 시녀들이 나갈때 까지 겨우 울음을 참다가 그들이 나가자마자 눈물을 떠뜨렸다. "정말 미안해요, 렌. 제발 죽지 말아요. 렌이 죽지만 않는다면 나는 뭐든지 할 겁니다. 제발." 그의 눈물이 렌의 얼굴에 떨어지자 그는 황급히 놀라 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았다. 다행히 렌은 깨지 않았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진정했다. 그의 손길 아래 닿은 렌의 뺨은 미열로 뜨거워 안쓰러웠다. 이제 렌은 내 눈앞에 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음의 신으로부터 렌을 지킬 것이다. 다시는 렌을 힘들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렌의 입술에 그의 입술을 갖다댔다. 그녀의 입술은 열로 말라서 바삭거렸다. 그녀의 숨결에서는 매화향과 병자의 단내가 났 다. 이 입술은 이제 그의 것이었다. 렌은 곧 황궁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마치 오랫동안 떠났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다. 한때 그토록 공포에 떨며 한 걸음 한 걸음을 떼었던 황제의 침전은 이제 렌의 침실이 되었다. 그리고 카엔은 그 옆에 새로운 침전과 집무실을 만들어 수시로 렌을 보살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 준다는 것은 이렇게 무척이나 마음 편한 것이었다. 동제국에 있을 때는 남의 옷을 얻어 입은 것처럼 어색했고 테룬의 호의에 기대는 것도 하나하나 다 불편했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무슨 억지를 써도 다 받아들여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렌이 뭔가를 조르기도 전에 카엔은 렌에게 뭘 해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의 사치취향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막상 자신의 황궁에서 거리낌 없이 본격적으로 사치를 부리는 걸 지켜보니 어이가 없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했다. "렌을 위해 조그만 옷방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 바꾸고 새 옷으로 채워 넣을게요." 이런 카엔의 말을 듣고 그의 품에 안겨 구경한 옷 방은 그냥 작은 드레스 룸이 아니었다. 광활한 공간이었다. 그 안에 옷이 가득 차 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렌은 입을 딱 벌렸다. "대체 이 많은 옷들은 어디서 구하신 거예요?" "렌이 올 걸 기다리면서 주문했지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전부 몇 벌이에요?" "글쎄,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삼사백 벌 정도?" "맙소사, 사치도 이런 사치가 없잖아요! 이 많은 옷을 언제 다 입는다고 그래요? 죽을 때까지 입어도 다 못 입겠어요!" 렌의 말에 카엔의 얼굴은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의 얼굴에 굳은 결의가 서렸다. "렌, 매일매일 이 옷을 한 벌씩 갈아입고 한 번 입은 옷은 다시 안 입는다면 이 옷을 다 입는데 1년이면 충분할 겁니다. 렌은 그보다 는 훨씬 더 오래 살도록 할 겁니다. 오래 살게 만들겠습니다. 렌이 오래만 살아준다면, 한 번 입었던 옷은 절대 다시 입히지 않겠습니 다." 렌은 가슴이 아파 할 말을 잃었다. "어휴, 어쩜 수백 살을 먹어도 이렇게 애 같아요? 떼쟁이! 돈을 아껴 쓸 줄 아셔야죠!" 시녀들은 렌의 말을 들으며 흠칫했지만, 카엔은 렌에게 야단맞는 것이 행복하기만 했다. "아마 다음 걸 보면 더 놀랄 겁니다." 카엔이 그 다음 순서로 보여준 수많은 보석들에 렌은 완전히 기가 질렸다. "아까는 의상실이더니 여기는 보석상이군요. 의상실에, 보석상에, 정말 백화점이네요." "백화점이 뭡니까?" 렌의 생각을 읽던 카엔이 궁금한 어조로 묻자 렌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온갖 것들을 다 파는 거대한 상점이요. 카엔님, 제발 쓸데없는 사치는 이제 적당히 하세요! 제가 얼마나 검소하고 알뜰한지 아시 면서요!" "원래 황제가 아낌없이 소비하면서 예술과 공예가 발전하는 겁니다. 그리고 렌, 나는 렌에게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아요." 카엔은 빙긋 웃으며 수많은 보석 중 찬란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집어 렌의 손에 끼워주었다.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오리하 르콘으로 단순하고 소박하게 감싼 품위 있는 모양의 반지였다. 까르띠에 풍이었다. "이제 렌은 절대로 내 곁을 떠나면 안 됩니다." 카엔의 다짐에 렌은 슬프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떠나지 않겠어요." 눈물이 가득 고인 카엔의 두 눈을 보고 렌은 다시 말을 고쳐 대답했다. "아니, 죽음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할 거에요." 카엔의 사치는 스케일부터 달랐다. 게다가 완강했다. 렌이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내인 카엔 때문에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렌마저 도 사치에 익숙해져버리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마법을 할 줄 아는 시녀 두 명이 렌의 몸을 씻겨 주고 마사지해준다. 그 다음에는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기기묘묘한 별미들이 소화가 쉽도록 죽과 유동식으로 만들어져 침대까지 날라져온다. 가끔은 카엔이 식사시간에 때맞추어 들러 렌에게 직접 음 식을 떠먹여준다. 실내복에 조금이라도 땀이 차면 바로바로 갈아 입혀진다. 아름다운 꽃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악사들이 와서 부드 러운 음악을 연주해준다. 그리고 렌이 갑갑해할 때마다 카엔이 순간이동으로 황궁 후원으로 데려다주고, 가끔은 더 멀리까지 근거리 순간이동을 해서 좋은 경치를 구경시켜준다. 렌이 매일매일 조금씩 쇠약해지지만 않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8서클 치유마법사 하차크 교수가 전속으 로 렌을 돌보았기 때문에 그는 이샤를 함께 데려왔다. 카엔이 손수 목숨을 구해주었던 바로 그 아이였다. "렌 군!" "언니!" 렌은 침대에 누운 채 그들을 맞았다. 하차크 교수는 수척해진 렌의 모습에 말을 잃었다. 이샤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이샤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지만 하차크 교수는 겨우 참았다. 그는 적당한 화제를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수많은 여학생들을 울리던 렌 군이 알고 보니 여자였다니. 아카데미가 얼마나 발칵 뒤집혔는지 아느냐?" 렌은 방긋 웃었다. "사이라, 사이라 데 주란트는 잘 있나요? 저한테 사이라가 사랑 고백까지 했던 거 기억나시죠? 약초밭에서요." "그래, 기억나고 말고. 사이라는 이제 최고학년이 되었지. 그때 사이라에게서 사랑 고백 받는 장면을 목격하고 나는 렌 군이 완전 히 바람둥이인 줄로만 알았단다." 하차크 교수는 껄껄 웃었다. "다른 친구들도 다 잘 있죠? 나와림 친구들이랑, 크리프랑, 모두 보고 싶네요." "이미 졸업한 학생도 있고 아직 아카데미에 남아 있는 학생도 있지만, 모두 다 건강하게 잘 있단다." 렌은 그리움에 잠겼다. 그 시절 렌은 아무 걱정 없이 첫사랑의 기쁨과 행복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 났던가. "이샤는 어때?" "언니, 나 건강해졌어요!" 이샤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 "그래, 렌 군이 보내준 처방을 이샤에게 꾸준히 복용시키고 식사를 조절했더니 점점 튼튼해지더구나. 이제 이샤는 우리 부부의 자 랑이자 기쁨이란다. 나는 틈틈이 이샤에게 치유마법을 가르치고 있는데, 얼마나 영리한지 몰라." 아이가 없는 하차크 부부에게 이샤는 축복이나 다름 없었다. 노부부는 마치 손녀딸을 기르듯 정성을 다해 이샤를 보살펴부었고, 이샤 의 뺨에 살이 오르고 눈에 행복이 담기는 것을 보람으로 삼았다. "잘 됐어요. 정말 잘 됐어요." 렌은 기쁨의 눈물을 글썽거렸다. "언니, 내가 치유마법 열심히 익혀서 꼭 언니를 낫게 해줄테니까, 그때까지 지지 말아야 해요!" 이샤가 렌의 손을 꼭 잡고 다짐하자 렌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하차크 교수의 얼굴은 어두웠다. 카엔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렌 옆에서 하차크 교수의 마음을 살피다가 깊은 절망을 읽고 함께 절망했다. 그는 하차크 교수를 끌고 옆방으로 갔다. "하차크, 그대가 보기에 렌은 어떤가?" 하차크 교수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내가 그대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걸 모르나? 어서 사실대로 말해다오!" "폐하, 도저히 제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기본적인 생명력이 고갈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하차크 교수의 말은 그저 편안하게 죽을 수 있게 돌보라는 뜻이었다. 카엔은 하차크 교수에게 분노를 떠뜨리려다 겨우 참았다. "알겠다." 카엔은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 후 카엔의 허락을 받아 렌의 소중한 사람들이 방문했다. 카엔으로서는 렌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달갑지 않았으나, 그는 렌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어떤 양보라도 할 수 있었다. 나와림 친구들이 크리프 데 주란트와 사이라 데 주란트를 대동하고 제일 먼저 찾아왔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절부터 했다. "타림 안딘 마마께 문안 올립니다." 렌은 뜻밖의 호칭에 어리둥절하다가 조금 지나서야 상황을 이해했다. 요컨대 황궁에서 렌의 공식 호칭은 최종적으로 '나와림 안 딘' 이었지만 렌이 여자라는 것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이상 더 이상 '나와림 안딘' 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그 대신 '타림 안딘' 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우리 사이에 왜들 이래? 어서 일어나!" 렌은 얼굴까지 붉히며 외쳤다. 렌의 성난 목소리에 친구들은 주저하며 일어났다. 그러나 렌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친구들은 모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은 렌의 얼굴에 완연한 병색이었다. 이성을 잃고 파니안이 먼저 외쳤다. "렌, 대체,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거야? 누가 널 이렇게 만든 거야??" 그러나 그는 즉시 자기의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사죄했다. "타림 안딘 마마, 소신의 실수를 용서하여주십시오!" 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이라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수딘도, 지벤도, 보크넬도, 체이스도, 말썽꾸러기 크리프까 지도 모두들 너무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앞으로 우리들끼리만 있을 때 반말을 안 하면 폐하께 말씀드려서 엄히 처벌받도록 할 거야, 알겠지?" 렌은 일부러 명랑하게 말했다. 사이라가 울음을 터뜨리며 렌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렌,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렇게 아파 보이는 거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렌은 사이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 "나을 수 있는 거지? 다시 건강해지는 거지?" 렌은 눈물이 가득한 사이라의 눈을 마주 보며 슬프고 다정하게 웃었다. "응, 고생을 너무 해서 이렇게 됐지만 정양하면 다시 건강해질 거야." "정말이지? 그렇게만 되면 나는 렌한테 시집갈 거야! 렌이 여자라도 좋아!" 사이라가 말하자 그때서야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리프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야, 사이라, 정신 차려. 네 약혼자 파니안이 바로 뒤에 있는데 뭔 소리야?" 렌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파니안을 쳐다보았다. "정말이야?" 파니안과 사이라의 얼굴이 빨개졌다. "응, 얼마 전에 아버지랑 주란트 공작님께서 정하셨고, 사이라와 나도 승낙했어." 파니안이 수줍어하며 대답했다. 둘의 약혼 뒤에는 복잡한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 황제파가 카에닌 황제의 힘을 업고 그간 득세해온 귀족파를 압박해가기 시작하자 주란트 공작은 결국 백기를 들고 자기 딸 사이라를 페람공작가에 보내겠다고 제의했다. 그리고 페람 공작은 귀족파가 현 재 진행 중인 개혁에 공공연히 반대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미 결혼한 맏아들 도리안 데 페람 대신 차남 파니안이 상대방으로 정해졌다. 나쁜 약혼은 아니었다. 부모님이 정해주신 상대와 결혼해야 한다는 건 귀족가 자세들의 숙명이었다. 사이라와 파니안의 공통된 화제는 렌밖에 없었기에, 둘은 정기적인 만남에서 주로 렌의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며 가까워졌다. 렌도 대강의 사정을 짐작했다. "정말 축하해. 그러고 보니 모두들 이제 어른이 된 것 같아." "렌 너도. 너야말로 우리들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여." "응, 참 많은 일을 겪었으니까." 모두들 렌 옆에 둘러앉아 그동안의 이야기, 학교 소식, 렌이 테라미즈 바깥을 여행하며 겪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크리프는 원래대로라면 세력을 잃은 귀족파의 사돈이 된 덕분에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그다지 나쁘지 않은 보직을 받아 초년생 관료 노릇을 하고 있었다. 파니안은 아카데미에 남아 있었다. 지벤은 결국 마법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체이스는 꿈에 그리던 재무부로 가게 되었다. 모두들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렌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가슴이 저려왔다. 차분히 행복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친구들이 천진난만하게 장래의 계획이나 미래의 꿈을 이야기할 때면 명치가 아렸다. 문득 울적해지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옆방에서 열심히 업무를 보면서도 틈틈이 이쪽 방의 상황을 엿보던 카엔이 렌의 상태를 감지하고 벌떡 일어났다. 문이 벌컥 열리며 카엔이 들어오자 모두들 혼비백산하며 머리를 땅에 대고 무릎을 꿇었다. "폐하를 뵈옵니다!" "됐다. 일어나라!" 카엔은 소년소녀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렌에게로 달려갔다. "렌, 괜찮아요? 이제 피곤하지요? 저들을 돌려보내겠습니다." 렌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쯤 고개를 들며 둘을 쳐다보던 친구들은 카엔이 몸을 기울여 걱정스럽게 렌의 얼굴을 쓰다 듬고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는 모습과 렌이 두 팔로 카엔의 목을 감싸 안는 장면을 보자 얼굴을 붉혔다. 뭐라 할 수 없이 따뜻하고 안타까운 사랑의 느낌이 둘 사이에 흘렀다. 사이라가 멍하니 말했다. "폐하께서는 정말로 렌을 사랑하시는군요." 렌이 카엔 대신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카엔님은 날 정말 사랑하셔. 그래서 나는 행복해." 사이라는 안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이야. 렌이 행복해서. 렌처럼 착하고 생각 깊고 사람들에게 수많은 은혜를 베푼 사람은 복을 많이 받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야 해." "그래, 나는 오래 살 거야." 렌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친구들은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들이 모두 나가자마자 렌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카엔님, 사실은 저 더 살고 싶어요!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요! 카엔님이랑 재미있는 일도 더 많이 하고, 사람들도 돕고, 여행도 다니 고, 시집도 가고, 아기도 낳고 싶어요! 이렇게 죽는 건 너무 일러요! 죽기 싫어요!" 카엔은 어쩔 줄 모르고 렌의 등을 다독거리기만 했다. 그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그도 렌과 함께 울었다. "렌,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렌은 눈물 범벅인 뺨을 역시 축축한 카엔의 뺨에 대고 맞비볐다. "미안해 하지 말아요.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카엔님을 만나 사랑하게 된 건 제 인생에서 일아난 가장 멋진 일이었어요. 저는 그저, 얼마 있으면 카엔님을 떠나야 한다는 게 슬플 뿐이에요." 카엔은 렌의 말에 다시 가슴이 미어졌다. "기적은 있을 겁니다. 렌은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거고, 나는 절대 사신에게 렌을 뺏기지 않을 겁니다." 렌은 측은하면서도 사랑스런 눈길로 카엔을 보았다. "기적이요?" "렌이 이곳에 있는 것, 우리 둘이 서로 만나 사랑하게 된 것, 그게 모두 다 기적이 아니면 뭡니까, 그 수많은 기적에 다른 기적 하나쯤 더 보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요. 저도 그럴게요." 기적밖에는 의지 할 것이 없는 상황을 슬퍼하며 렌은 조용히 대답했다. 다음날 새벽 렌은 모처럼 정명기를 운용해보았다. 가부좌를 틀자마자 정명기는 힘차게 렌의 몸을 휘돌았다. 일찍이 정명기가 이 렇게 강했던 적이 없었다. 더 이상한 것은, 원래 정명기는 한없이 맑은 기운이어야 하는데 지금 렌의 몸속에 흐르는 정명기는 이것 저것 섞인 탁한 기운이라는 점이었다. 렌은 의아했다. 정명기는 생명력과 강력히 연관되어 있어 생명력이 줄어드는 만큼 정명기도 줄어드는 건데 왜 생명력이 쇠잔해지는데도 정명기는 점점 강해지는지. 왜 정명기가 전보다 탁해졌는데도 이렇게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이 드는 건지. 렌은 이번에는 마나를 모아보았다. 마나를 부르기에 적합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왠지 호기심이 생겼다. 심장의 통증 없이 마나는 부드럽게 모여들었다. 그 전에는 오로지 물의 마나만이 모였는데, 이제는 온갖 종류의 마나가 한꺼번에 모여들었다. 그녀는 반쯤 무아지경인 가운데 마나를 끝없이 불렀다. 심장이 아파올 때면 정명기가 스르르 심장으로 흘러들면서 통증을 감소시켰다. 지켜서 더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렌은 마나 부르기를 멈추었다. 렌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옆방에서 카엔이 일어나 렌에게로 왔다. "렌, 어떻게 여러 종류 마나를 한꺼번에 부른 거죠?" 카엔은 놀라움에 차 물었다. "어떻게 여러 종류의 마나가 한꺼번에 모여 있을 수 있지요? 렌은 원래 순수한 물의 기운을 지녔잖아요? 그리고 렌의 그 아름다운 기운, 정명기는 왜 전과 색이 다른 거지요? 그 전에는 투명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잡탕색, 아니 무지갯빛이 된 겁니까?" 그의 상식으로는 여러 종류의 마나를 동시에 한꺼번에 부른다는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오히려 자연계에 어지럽게 섞여 있는 여 러 종류의 마나를 걸러 일시적으로 한 종류만 모으는 것이 마법 수련의 핵심이나 진배없었다. 순수한 기운을 지닌 자들의 경우 굳이 거를 필요가 없어서 급속도로 마법이 느는 거였다. 게다가 정명기의 색이 변하다니, 전에는 마나를 튕겨내는 투명한 기운이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오색의 기운으로 변해 다른 종류 의 마나들과 섞여 있지 않은가. 카엔이 말하자 새삼 의문이 들었다. 렌은 문득 카엔이 카로딘의 다섯 마법사를 물리치던 순간 반짝이던 무지갯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라빌이 말틴에서 건네주었던 엘 프 가루가 생각났다. 뭔가 잡힐듯한 느낌. 마나가 왜 어떨 때는 잿빛이 되고 어떨 때는 무지갯빛이 될까. 혹시 거기에 뭔가 중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생각을 깊이 하는 순간 마음의 평정은 깨어지고 기운은 흩어졌다. 심장에 찌르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렌!" 카엔은 급히 렌 옆에 앉아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마법 같은 거 하지 말아요! 더 이상 몸에 무리가 갈 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렌에게 필요한 마법은 전부 다 내가 대신해줄 테 니, 렌은 쉬기만 해요! 청소 마법이든, 세탁 마법이든, 머리 손길 마법이든, 뭐든지 말만 해요!" 다급한 카엔의 얼굴을 보며 렌은 상냥하게 웃었다.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대로 죽는 말만 기다린다면 저는 벌써 죽어버린 거나 다름없어요. 뭔가 궁금한 게 있고 배우고 싶은 게 있는 한 저는 아직 살아 있는 거에요. 저를 말리지 마세요." 렌의 말에 가슴이 아파진 카엔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렌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이 세계에 오기 전 읽었던 소설 중에 그런 게 있었어요. 어느 세계에 이계인들이 만든 하늘을 나는 커다란 배가 나타났어요. 그래서 어느 여자 학자가 그 배를 조사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갔다가 결국 이계인에게 잡혀 오랜 세월 그들의 관찰대상이 되어야 했 어요. 하지만 그 여자 학자는 올곧고 고결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서 마침내 이계인들도 그녀를 존경하게 되었어요. 세월이 흘러 그 녀가 늙고 병들어 죽음을 앞두게 되자 이계인들은 그녀가 다시 젊고 힘차게 살 수 있도록 마법으로 그녀의 몸과 뇌를 바꿔주겠다고 제안했어요." 렌의 이야기가 재미있어 카엔은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할 경우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될지 모른다면서 그들의 제의를 단호히 거절했어요. 그 대신에 이계인 들만의 비밀 도서관에 들어가 우주와 생명의 신비를 공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어요. 그 이계인들은 인간들에 비해 엄청나게 지 혜롭고 많은 걸 알고 있었거든요. 이계인들은 그녀에게 말했어요. 그 도서관에 한 번 들어가면 살아생전에 다시는 나올 수 없다고요. 그건 결국 그녀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거라고요. 그래도 그녀는 그렇게 해달라고 했어요. 왜냐면 그녀는 무언가를 배우고 알게 되는 것이 그녀가 살아 있는 징표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최후의 최후까지 살아 있고 싶었기 때문이에요.결국 그녀는 그 도서관 에 들어가 눈앞이 흐려지고 숨이 가빠지는 마지막까지 평생 만져볼 기회조차 없으리라 생각했던 엄청난 지식을 만끽하다가 행복하게 눈을 감았어요.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으시죠?" 그는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어두웠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 그를 죽음의 절망에서 구해주었던 것도 역시 그런 지식에 대한 갈구였으니까. "그래요. 렌이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카엔은 안타까움을 삼키며 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발. 기적이 찾아오기를. 첫눈이 내렸다. 테라미즈의 새하얀 대리석 건물 위로 하얀 눈이 쌓이자 테라미즈는 동화책 속의 한 장면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중에서도 황궁과 테라미즈 아카데미가 위치한 도시의 중심부는 더 한층 아름다웠다. 어른들은 이 서설이 다가올 겨울의 추위를 예고하는 것 같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볼을 빨갛게 물들인 채 신나게 뛰어다녔다. 그들에게는 이 눈이 다 녹기 전에 눈뭉치 하나라도 더 뭉쳐서 던지는 것이 제일 큰일이었다. 그렇게 바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마차소리가 들리면 황급히 길옆으로 피했다. 여러 마리 말들이 끄는 귀족들의 마차가 또가닥 또가닥 소리를 내며 수시로 중앙대로를 질주했다. 눈에 띄게 마차수가 늘어난 걸로 보아 한동안 얼굴을 보이지 않았던 카에닌 테라 미즈넨 황제 폐하께서 다시 황궁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집무를 보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사실인 듯도 했다. 서민들은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황제 폐하께서 개혁 작업을 정력적으로 추진하다가 잠시 행방을 감추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는 모두들 불안해했다. 이대로 전부 흐지부지되면 어떡하나. 모처럼 희망이 눈앞에 있었는데 그러다가 소문이 돌았다. 황제 폐하께서 사랑해 마지않으신 소녀, 나와림 안딘 소송을 일으켰던 렌이라는 치료사 아가씨가 동제 국 황제에게마저도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는 동제국 황제의 마수에서 사랑하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친히 동제국의 수도 브림까지 가서 소드 마스터인 동제국 황제와 간악한 흑룡 데이그랜을 9서클의 마법으로 가볍게 물리친 후 당당 히 귀환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소녀들이 들으면 까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질 것 같은 낭만적인 소문이었다. 거리의 소설가들은 벌써 그 소문을 소 재로 소설을 여러 권 써내서 재빨리 출판에 들어갔다. 낭만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남자들에게는 그 소문은 황제를 피와 살로 이 루어진 인간으로 느끼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다. "얘야, 너 요즘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는 거지?" "그럼요, 아버지." 잘 차려입은 중년 남자와 열 살쯤 된 꼬마는 마차가 지나가는 걸 구경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내후년부터 평민, 귀족 구별 없는 특수 아카데미가 신설되니까 무조건 너는 첫해에 들어가야 한다. 출세하려면 뭐든지 맨 처음이 좋은 거야. 네가 평민으로서 최초로 거기 들어가면 네 평생은 걱정 안 해도 될 거다." "잘 알고 있어요, 아버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자신만만하게 웃는 아들이 미더워 아버지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너는 이 다음에 바로 저렇게 귀족이 되어 저런 마차를 타고 다니게 되는 거란다." "그럼 아버지도 꼭 태워드릴게요." "허허, 녀석도 참! 기특하기도 하지!" 개혁은 평민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평민들에게 새로운 기회는 결국 귀족처럼 될 수 있는 기회일 따름 이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사실 평민 중에서도 이 부자지간처럼 미리 가정교사를 고용해 공부를 해둘 수 있는 소수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다. 모든 평민들이 진정으로 평등이나 민주주의 같은 이념을 배우려면 백수십 년이 흘러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인간 세상에 진정한 평등 따위가 있기나 한 것일까. 그래도 소년과 아버지는 눈앞에 열린 작은 기회에 흥분하고 기뻐했다. "렌님." 마스니는 황제의 침전으로 스스럼없이 들어왔다. 시녀 두 명이 공손히 절하며 마스니를 안내했다. 그녀의 마법 로브 위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워낙에 방열이 잘 되는 로브라서 체열조차 새어나가지 않은 때문이었다. 렌은 그걸 보며 즐거이 웃었다. "후훗, 마스니, 눈사람 같아요." 마스니는 일부러 얼굴을 찡그려 보았다. "어머, 이렇게 멋있는 눈사람이 어디 있다고요?" 렌은 다시 킥킥 웃었다. 마스니는 일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눈을 쓸어 마법으로 증발시켰다. "오늘은 몸이 좀 어떠십니까?" "한결 좋아진 것 같아요. 역시 먹고 자고 엘프놀이만 하니까 좋네요." "예, 정말로 좋아 보이십니다." 마스니는 안타까움을 누르며 마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이 말했다. 창백하고 마른 렌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좋아 보인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그녀의 눈에서 빛나는 생기가 병색을 가려 주었다. "오늘은 재미있는 걸 가져 왔답니다." 마스니는 로브에서 책 두 권을 꺼냈다. "그게 뭐죠?" "후훗, 보기만 하세요." 렌은 호기심에서 차서 책을 받았다. "황제와 치료사, 어리고 순결한 치료사와 사랑에 빠진 황제의 이야기,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숭고한 스토리라고요?" 렌은 어이가 없어 다음 책을 집어 들었다. "그 다음 이건 뭐죠? 사랑의 치료사? 아름다운 그녀가 치료하지 못하는 남자는 없다?" 마스니는 이제 소리내어 웃었다. "렌님과 폐하의 소문이 쫙 펴진 후로 이런 로맨스 소설이 불티나게 팔린답니다. 종이 질도 나쁘고 제본 상태도 좋지 않지만 한 권에 겨우 2실버밖에 안 하기 때문에 서민들도 많이 사서 보지요." 렌은 기가 막혀 한숨을 쉬었다. "맙소사, 제가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버릴 줄은 몰랐는데요." "뭐가 그렇게 재미있습니까?" 카엔이 때맞추어 걸어 들어오며 물었다. "카엔님, 저랑 카엔님을 소재로 한 로맨스 소설이 나왔대요." 렌은 명랑하게 말했다. "어디, 한 번 줘봐요." 카엔은 렌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읽다가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농밀한 애정표현 장면이 나온 것이다. "카엔님의 연애편지보다는 훌륭하지 않나요?" 렌은 슬그머니 웃으며 물었다. 카엔이 대답하기도 전에 마스니가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아, 그 꿀과자 연애편지 말이죠? 아하하하! 폐하께서 그거 만드시느라 제 로맨스 소설을 세권이나 빌려 가셨었죠! 처음에 빌려드 리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거절하시질 말든가 하시지. 뒤늦게 얼굴이 빨개지셔 가지고 부탁하시는데 얼마나 웃겼는지 아세요?" "그 연애 편지는 정말 걸작이었어요!" 렌과 마스니는 함께 배를 잡고 웃었다. "마스니, 밤의 철나비같이 유치찬란한 별호를 쓰는 주제에 내 연애편지를 비웃다니!" 카엔은 잠시 화를 내는 시늉을 하다가 함께 웃었다. 웃음이 멎자 그는 렌의 머리맡에 걸터앉아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그녀가 이렇게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수척한 모습에 한없이 가슴이 아팠다. 렌은 마치 카엔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그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던졌다. "카엔님, 전 행복해요. 무척 행복해요. 그러니 슬퍼하지 마세요." "알아요. 나도 행복합니다." 카엔은 말소리에 울음소리가 섞이지 않도록 애쓰며 대답했다. "미스니, 제가 부탁드린 건 어떻게 됐지요?" 렌은 화제를 돌렸다. 렌이 부탁한 것은 동제국의 현 정세와 데이그랜의 행보였다. 저번에 자신을 위해 테룬 황제가 흑룡 데이그랜은 배반한 셈이 되었 으니 데이그랜의 성격에 미루어보면 동제국이나 테룬 황제는 결코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게다가 드랜곤들은 머지않아 멸망할 테니 그들이 이판사판으로 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오늘 마스니는 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왔다. 마스니의 표정이 굳어졌다. 카엔은 이미 그녀의 생각을 읽고 안색이 변했다. 렌은 초조하게 마스니가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아시다시피 동제국의 첩보망은 저번 일 이후로 쑥대밭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고젠 백작가가 서제국과 관련이 있다는 게 파티장 에서 백일하에 드러나 버렸으니까요. 폐하와 제가 신분을 드러낸 탓에 고젠 백작가의 이름을 빌려 활동하던 첩보원들은 몽땅 다 색 출되었습니다. 그리고 남대륙에는 애당초 첩보망이라는 게 아예 없으니, 드래곤들이 그곳에서 뭔 짓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낼 방도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저희 첩보부에서는 정확한 첩보를 입수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스니는 카엔을 힐끗 보고서는 덧붙였다. "사실 폐하께서 나서주시면 순식간에 정보를 캐낼 수 있겠지만, 폐하께서는 단 한순간도 렌님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하시니 제가 신하 된 처지에 감히 폐하께 부탁을 드릴 수도 없었지요." 약간의 원망이 섞인 마스니의 말투에 카엔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요? 그래도 결국 뭔가 알아내셨으니 지금 말씀을 꺼내신거 아닌가요?" 미스니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흑룡 데이그랜이 테룬 황제를 잡아갔습니다." "뭐라고요?" 렌은 놀라서 외쳤다. "밖에 알려진 내용은 테룬 황제가 그날 축제장에서 흑룡과 싸워 이겼으니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어 요양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매우 그럴싸한 이야기여서 저도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고요. 하지만 엊그제 우리 서제국 마법원에 이런 것이 도착했습니다. 마법원 중 비교적 결계가 약한 곳이긴 했지만 순간이동으로 결계를 뚫고 물체를 전송한다는 건 보통 마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마법원 은 이것 때문에 발칵 뒤집혔었죠." 마스니가 꺼내 보인 것은 손바닥만한 크기의 원반 모야 흑옥이었다. "이 흑옥의 발신지를 축적한 결과 남대륙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마법원의 마법사들이 꼼꼼하게 검사해 봤는데 폭발한다든지 독극물을 품고 있다든지 등등의 위험은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오늘에서야 가지고 오게 된 것입 니다." "남대륙이라고요?" "남대륙에서 9서클 마법을 가진 누군가가 보내온 것입니다. 즉, 드래곤이 보내온 것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흑옥은 흑룡의 상징 입니다." 마스니는 잠시 뜸을 들였다. "흑룡이 이걸 보냈다는 건 그의 마력에 전혀 이상이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그순간 제 머릿속에 퍼뜩 스쳐지나간 건 테룬 황제가 흑 룡을 패퇴시켰다는 게 거짓 소문이 아닌가 하는 거였습니다. 패배한 흑룡이 9서클 마법을 쓸 정도로 멀쩡하다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 까? 그리고 흑룡을 패배시킨 위대한 테룬 황제가 무슨 큰 병이 났기에 몇 주씩 공식석상에서 얼굴을 감추었겠습니까? 저는 즉시 다시 동제국 브림에 파견된 마법사들로 하여금 추가정보를 캐내게 했습니다. 그 결과 테룬 황제는 지금 황궁에 없고, 흑룡 데이그랜이 테 룬 황제를 잡아갔으며, 티르안 공녀가 샤이트 수상과 함께 합심하여 황제의 부재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냈습니다." 렌은 하얗게 질렸다. 왜 일이 그렇게 되었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자신 때문이었다. 걱정했던 대로 렌을 뺏긴 흑룡의 분노가 테룬에게로 향한 것이었다. 렌은 즉시 흑옥에 손을 뻗었다. 카엔이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렌의 손길이 닿자마자 흑옥에서 확 빛이 나더니 실제 크기의 5분의 1정도 되는 데이그랜의 모습이 떠올랐다. 모두 깜짝 놀랐다. 특 히 마스니는 그 흑옥을 작동시키기 위해 전날 하루 종일 고생했던 터라 더욱 놀랐다. "저런 것도 가능한가요?" "9서클이라면 영상을 저장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아마도 렌의 기운이 시동장치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카엔이 대답했다. "카엔님은 저번에 꿀과자로 목소리만 전달하셨잖아요." "그건 꿀과자가 별로 좋은 도구가 아니라서 그랬습니다. 저런 질 좋은 흑옥을 쓴다면 저 허접한 영상보다 두 배는 깨끗하게 만들 수 있 어요." 보통 때 같으면 삐진 듯한 카엔의 말투에 웃엇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렌은 데이그랜의 영상을 주시했다. 데이그랜은 원래의 취향대로 검은 벨벳과 담비털과 흑옥으로 한껏 멋을 낸 채 근사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렌은 데이그랜이나 카엔이나 사치 취향에서는 막상막하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카엔은 렌의 생각을 읽고 있었는지 옆에서 움찔했다. 데이그랜은 렌 앞에서 완벽한 서제국 귀족풍 예절에 따라 귀부인에게 하는 최상의 인사를 하고는 빙긋 웃으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태연자약하고 연극적인 그의 몸짓은 퍽이나 얄미웠따. - 렌, 잘 있었나요? 건강은 어때요? 어이, 카에닌, 모처럼 애인과 상봉해서 해피해피하게 보내고 있나? 렌, 나는 테룬 녀석의 칼에 맞아 한동안 컨디션이 무척 안 좋았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정양하느라 이렇게 소식을 늦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내 걱정을 무척 했을 텐데, 미안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보시다시피 멀쩡하니 걱정 말아요. 데이그랜은 씩 웃었다. - 그리고 물론, 내 상태가 완벽하게 좋아져야 렌의 애인 녀석이 여기 쳐들어와도 물리칠 수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나는 지금 여기 내 레어에 테룬 녀석을 데리고 있습니다. 그 녀석은 지금 반쯤 죽은 상태가 되어서 시퍼러둥둥한 색깔을 한 채 누워 있습니다. 그 리고 그 녀석을 되살릴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나 하나뿐입니다. 데이그랜은 몸을 조금 비켜 뒤쪽의 석대에 누워 있는 테룬을 보여주었다. 검푸른 빛으로 물든 테룬의 모습은 마치 청동상을 보는 것 같았다. 렌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손으로 막았다. - 이럴 때 자화자찬해서 미안하지만, 내가 백 몇 십 년 전에 파이브룬 대공 녀석에게 소드 마스터의 인자를 넣어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인간을 어떻게 믿느냐, 인간이란 언제나 자기 편한 대로 배신을 때리는 존재가 아니냐, 이 녀석의 자손으로 태어나게 될 소드 마스터의 검강이 꼭 서제국 황제에게만 향하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 여차하면 드래곤이 그 검에 쓰러질지도 모 르지 않느냐.그래서 저는 소드 마스터의 인자에 딱 붙여서 소드 마스터의 생명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인자를 함께 집어 넣었지요. 렌에게 설명하기는 복잡하지만, 그 인자를 발현시키면 순식간에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번에 그 방법을 써먹은 덕분에 나는 테룬 녀석의 칼에 찔려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 녀석을 무력화시켜서 여기까지 데려올 수 있었지요. 아, 역시 나는 지혜의 흑룡이라는 이름에 속색이 없는 훌륭한 흑룡이 아닙니까? 데이그랜은 얄밉게 웃었다. 그러다가 그의 표정은 진지해졌다. - 전에 내가 말했던 시오카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 핼쑥하고 병색이 완연한 아이의 모습을 보면 당장 달려와서 고쳐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가엾지도 않나요? 이 아이에게 우리 드래곤의 미래가 걸려 있습니다. 렌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니, 내가 얼마나 절박한 심정인지 잘 알 거 아닙니까! 데이그랜은 어느새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허공에 긴 금발머리를 나부끼며 눈을 감은 채 마법구 속에 떠 있는 창백하고 여윈 여자아 이의 모습을 가리켰다. 렌은 그 여자아이의 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 우리 드래곤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겠습니다. 렌은 목숨이 얼마 안 남았다고 했죠? 그럼 죽는 그날까 지라도 시오카를 도와주십시오. 그게 새 발의 피만큼의 도움밖에는 안 된다 해도 그렇게 해줘요. 렌을 중계기로 삼아 시오카에게 내 마나를 쏟아 부으면 시오카의 생명은 조금이라도 더 연장될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우리 드래곤의 멸망은 조금이라도 지연될 수 있을 테죠. 그게 일 년이든, 아니, 몇 개월이든, 제발요! 그렇게만 해준다면 렌을 돕느라 목숨까지 건 불쌍한 우리 테룬도 다시 살려놓고, 렌이 사랑해 마지않는 재수 없는 카에닌 녀석에게도 앞으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겠습니다. 데이그랜은 애절한 표정을 띠며 말하다가 갑자기 잔인함을 드러냈다. - 시오카가 죽고 나면 그 마나의 불균형이 모든 드래곤에게 영향을 미쳐 사멸할 때까지 겨우 백 년. 드래곤들에게는 눈 깜짝할 정도 로 짧은 시간이지만, 인간들에게는 무척이나 긴 시간이죠. 만약에 드래곤들이 작정하고 깽판친다면 모든 인간의 문명을 싸그리 파괴 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고요. 인간과 드래곤 사이에 대전쟁을 바라는 건 아니겠죠? 그러니 기다리겠습니다. 렌이 와줄 거라고 믿 어요. 안녕. 데이그랜은 다시 우아하게 절을 했다. 절을 끝냄과 동시에 팟 하며 영상은 사라졌다. 렌과 카엔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렌, 안 돼요!" 카엔이 먼저 소리질렀다. "하지만 가야 해요!" 렌은 외쳤다. 카엔은 버럭 화를 냈다. "데이그랜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이런저런 말을 하니까 데이그랜을 인간으로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는 용입니다! 도마뱀이라고 요! 인간하고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인간을 그저 자기 발톱의 때만큼도 못하게 여기는 존재란 말 입니다! 그런데 렌의 얼마 안 남은 삶을 그런 놈에게 맡긴단 말입니까? 난 절대 렌을 보내지 않겠습니다!" 렌은 달래듯이 속삭였다. "제가 가겠다고 고집을 피운다면요?" 카엔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만약 렌이 계속 고집을 피운다면 정신조작을 해서라도 막겠습니다. 렌이 그곳에 가서 개죽음을 당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어떻게 저와 카엔님을 위해 희생한 테룬 황제를 모른 척 할 수 있겠어요. 카엔님도 아시잖아요. 사랑하는 사람 을 양보한다는 건 칼로 심장을 베는 것보다도 더 아플 텐데. 테룬 황제는 절 위해 은인이나 다름없는 데이그랜에게 칼을 돌렸잖아 요. 그건 정말 정말 보통 각오로는 할 수 없는 고귀한 일이었잖아요. 그를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게다가 드래곤들이 작 정하고 나서서 세계를 멸망시키면 어떡한단 말이에요." 렌은 다정하고 슬프게 말했다. 카엔은 테룬이 자신에게 겨눴던 칼을 데이그랜에게로 돌린 그 순간 테룬의 마음을 떠올렸다. 끔찍하게 처절하고 비참하고 슬프고 그러면서도 한없이 고결하고 순수하고 사랑에 찬 마음이었다. 그는 똑같은 상황이 닥쳐왔을 때 테룬처럼 행동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카엔은 약해져가는 마음을 다잡아가며 다시 외쳤다. "수천만 년 동안 이어온 용족이 멸망의 위기를 맞고 있는데, 그놈들이 렌을 얼마나 괴롭히겠습니까! 렌의 온몸이 너덜너덜해질 때 까지 혹사시키지 않겠습니까! 렌이 그렇게 죽어가는 건 상상만 해도 미칠 것 같단 말입니다! 그놈들을 황제의 저주로 싹 쓸어버렸 어야 했는데!" 카엔을 구슬리려던 렌은 그가 말한 '수천만 년' 이라는 대목과 '황제의 저주' 라는 대목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잠깐만요, 수천만 년이라고 하셨죠?" "네." 카엔은 어리둥절해서 대답했다. "데이그랜도 그랬어요. 드래곤의 역사가 6천만 년이 넘는다고 했어요." 렌은 생각에 몰입했다. 6천만 년. 묘하게 귀에 익은 숫자였다. "그리고 황제의 저주요. 그 원리는 마나의 혼합이었죠?" "맞습니다. 마나의 혼합, 균일화입니다." 드래곤, 6천만 년, 마나의 고갈, 황제의 저주, 무지갯빛. 뭔가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았다. 카엔은 휙휙 바뀌는 렌의 생각을 쫓아가기가 힘들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관념들이었다. 렌은 고개를 확 들어 카엔을 다시 쳐다보았다. "카엔님, 전에 드래곤의 심장을 먹었다고 그러셨죠?" "네." "그 얘기를 자세히 전부 다 제게 해주세요." 카엔은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끄덕했다. 그는 여전히 렌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혹시 학자들 중에 드래곤의 생태를 연구하는 사람이 있나요?" "많지는 않지만 있기는 있겠지요." 카엔이 대답하자 옆에서 마스니가 참견했다. "테라미즈 황립 아카데미에 괴짜 교수 한 명이 있습니다. 워낙에 용을 좋아해서 용가리 아돔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지요." "그럼 당장 그분을 모셔와 주세요!" 렌은 벌떡 일어나 방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렌, 뭘 어쩌려고요?" 카엔은 렌을 붙잡아 세웠다. 렌이 입을 열기도 전에 강렬한 사념이 카엔에게 전달되었다. "설마?" "맞아요. 어쩜 정말로 드래곤을 고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것도 드래곤들이 생각했던 거랑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요!" <<<<<<<<<<< 절 망 속의 희망 >>>>>>>>>>>>>> 아돔 데 라브의 본업은 역사 교수였다. 그는 변변찮은 자작가에서 태어나 테라미즈 황립 아카데미에 남아 결국 역사 교수가 되었다. 세력 없는 자작가의 셋째 아들로서는 아주 잘 풀린 편이었다. 그에 대한 평은 대체로 좋았다. 꽉 막혔지만 성실하다, 꼰대이지만 성격이 나쁘지는 않다. 수업은 엄청 재미없지만 그래도 잘 들어 보면 들을 게 있다, 이런 것이 그에 대한 동료 교수와 학생들의 평이었다. 요컨대 답답하고 고지식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 이었다. 그런 그에게는 비밀스러운 취미가 있었으니 그것은 드래곤 연구였다. 사실 서제국에서 드래곤을 연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장 카에닌 테라미즈넨 황제 폐하께서 드래곤이니 엘프니 드워프니 하 는 이종족들을 무척이나 싫어하셨고, 드래곤을 연구한다고 해서 직장 얻는 데 도움이 되거나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법원에서라면 드래곤을 연구할 법도 하지만, 드래곤과 맞먹는다고 알려져 있는 위대한 9서클의 황제 폐하께서 친히 마법을 지도 해주시는데 굳이 제멋대로에 위험하고 인간과 마나의 작용방법도 다른 드래곤을 연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드래곤을 신처럼 떠받드 는 동제국의 마법 수준을 보라. 서제국의 발뒤꿈치도 못 따라오고 있지 않은가. 다른 나라에서 드래곤을 숭상하는 만큼 서제국에서는 드래곤을 혐오했다. 위대하신 마법사 황제가 이미 우상화되어 있으니 드래곤 따위는 필요 없었다. 드래곤 혐오는 황제 숭배와 함께 어느 정도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조장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아돔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의 어머니는 남대륙에 면한 드래곤의 회랑 출신이었다. 그쪽은 아무래도 드래곤의 거주지 인 남대륙과 가까워서인지 드래곤을 싫어하는 풍조도 없었고 드래곤에 얽힌 신화와 전설도 많았다. 아돔은 어릴 적 어머니에게서 그 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났다. 그러나 그가 아카데미에 진학해서 자신이 들은 드래곤 이야기를 동급생들에게 해주었을 때 동급생들은 모두 구닥다리 옛날얘기를 믿느냐며 비웃었다. 그리고 그에게 '용가리 아돔' 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아돔은 희생자 역에 딱 어울렸다. 외모도 샌님같이 볼품없고 몸도 비실비실한데다가 성격마저 음울하고 소극적이어서 억울한 일 을 당해도 저항하거나 고자질할 담력조차 없었다. 거기다가 취미가 용가리라니, 따돌림 당할 완벽한 조건을 갖춘 셈이었다. 그는 동급생들의 비웃음과 경멸을 받고 나서야 드래곤 이야기를 꺼낸 걸 거듭 후회했다. 죄 없는 가벼운 실수였으나, 따돌림의 희 생자는 아주 사소한 이유만으로도 정해지고, 한 번 낙인이 찍히고 나면 여간해서는 도망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졸업하고서야 따 돌림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얻어맞고 놀림받으면서도 그는 그럭저럭 버텨 좋은 성적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그런 그를 학창시절 동안 지탱해준 것은 오히 려 드래곤이었다. 드래곤 따위에 왜 관심이 있는 거냐고 놀리는 놈들에게 드래곤의 의미라든지 중요성을 설명하다 보니 그는 어느 새 전설과 신화를 넘어 진지하게 드래곤을 연구하게 되었다. 지금 그는 드래곤이라면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아는 드래곤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게다가 그 덕분에 언감생심 꿈에도 생각 못할 황 제의 침전으로 불러가게 되었으니, 돌고 도는 세상의 이치는 참으로 오묘했다. 아돔은 제일 좋은 옷을 꺼내 입고 전날 밤 긴장으로 한잠도 못 자 퍼석한 얼굴을 한 채 말로만 듣던 동관의 황제 침전으로 향했다. 소문에 따르면 지금 침전에는 타림 안딘이신 렌 마마가 머물고 계시며 황제 폐하께서 수시로 들락거리신다고 했다. 그러니 여차 하면 폐하와 마주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미 폐하께서 많은 사람에게 직접 얼굴을 보이셨다고는 하나 아카데미의 평교수에 지나 지 않는 그에게 폐하와 마주치는 광영은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걱정, 아니 공포가 덮쳐왔다. 평소에 소극적이고 할 말을 못하는 만큼 그의 마음속은 남들보다 한층 더 지저분한 생각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걸 남김없이 타인에게 읽힐지도 모른다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한 공포였다. 그래도 명예욕이 앞섰다. 그는 몸의 떨림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궁내관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렌님. 아돔 데라브 교수님을 모셔왔습니다." 궁내관이 말하자 나직하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확성구슬을 통해 들려왔다. "어서 이리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목소리는 무척 다정하고 아름다워서 아돔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곧 침전 문이 열리고 아돔은 떠밀리다시피 침전 안으로 발을 떼었다. 그는 익히 들은 대로 침전에 들어서자마자 무릎을 꿇고 머리 를 땅에다 받으며 외쳤다. "위대하시고 영명하신 카에닌 테라미즈넨 황제 폐하와 그의 반려이신 지혜와 자비의 타림 안딘 렌 마마께 영광과 신의 축복을!" 미리 연습해둔 요란한 인사가 끝나자마자 소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일어나세요, 아돔 교수님. 저도 아카데미 학생이었는데 제자한테 그렇게 몸을 굽히시면 어떡해요." 아돔은 주저하며 몸을 일으켰다. 병색이 완연하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운 소녀가 미소를 띤 채 침대에 누워 상체만 조금 일으켜 베 개에 기대고는 그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생김새는 전날 호출령을 받은 후 부랴부랴 렌을 가르친 적이 있는 아카데미의 교수들에게 물어물어 얻은 정보 그대로였다. 소녀 옆에는 은보랏빛 머리카락에 은보랏빛 눈동자를 지닌 미청년이 서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황제였다. 아돔은 자신 을 꿰뚫어 보는 그 눈빛에 오금이 저리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미청년은 아돔의 한심한 꼴을 보다 못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렌, 아무래도 내가 있으면 저 교수가 제대로 말도 못할 것 같네요. 옆방에서 듣고 있을 테니 내가 필요하면 언제라도 부르도록 해 요." "예, 카엔님. 제가 와달라고 하면 바로 와주셔야 해요." 렌은 미소지으며 카엔을 보냈다. 그제야 아돔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 저, 타림 안딘 마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미천한 소신께 말씀만 내려주십시오." "일단 저기 앉으세요. 그리고 제발 타림 안딘 마마라고 부르지 마시고 그냥 렌이라고만 불러주세요." 아돔은 황송해 죽겠다는 시늉을 하며 공손하게 의자에 앉았다. "자, 드래곤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을 얘기해 주세요." 자신의 전문 분야가 나오자 아돔은 생기가 돌았다. "드래곤에 관한 모든 것이라고요? 그렇다면 렌님께서 저를 부르신 건 참 잘 하신 겁니다. 서제국 내에서는 저 이상으로 드래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달리 없으니까요. 일단 드래곤의 전설부터 시작하기로 하지요." 아돔은 목소리를 다듬었다. 태초에 세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위대한 의지가 눈을 떴다. 위대한 의지는 자신을 빛과 어둠으로 나누었고, 빛 과 어둠은 곧 충돌하며 세계를 만들어냈다. 빛과 어둠은 자신의 신성을 하늘과 땅과 물에 나누어주고 이제 신의 속성을 잃었다. 그리하여 하늘의 신, 대지의 신, 물의 신이 생 겨났다. 여자인 하늘의 여신, 남자인 대지의 신, 중성인 물의 신은 서로 교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사계절의 여신이 태어났다. 봄의 여신과 가을의 여신은 하늘의 여신과 대지의 신의 교합으로, 여름의 여신은 하늘의 여신과 물의 신의 교합으로, 겨울의 여신 은 대지의 신과 물의 신의 교합으로 생겨났다. 또 이들은 다시 동서남북 네 방위의 남신을 낳았다. 사계절의 여신들과 동서남북의 남신들은 다시 서로 교합하여 온 세상에 생명을 채우고, 다양한 권능을 지닌 수많은 신과 여신들을 낳았다. 그러던 중 수많은 신들은 지상에 자신을 찬양할 지성을 지닌 존재가 없는 것을 섭섭히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상을 지배 할 유일한 지성 있는 존재로 드래곤을 창조했다.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었다. 드래곤은 신들의 축복을 한껏 받아 위대한 존재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들은 신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스스로 더욱 위대 해졌다. 위대해진 만큼 교만해진 그들은 신의 손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마저 망각하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창조했다고 여겼다. 심지어는 그들은 신이 있다는 사실마저 인정하지 않았다. 그 하늘을 찌르는 교만에 신들은 분노했다. 그래서 그들은 드래곤들을 심판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드래곤들은 신들마저 위협할 정도로 강대해졌기에 신들은 가장 강력한 징벌을 택하기로 했다. "그 징벌이란 무엇이었죠?" "하늘의 별 하나를 통째로 지상에 떨어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돔은 스스로의 얘기에 열중하여 목소리를 깔며 극적으로 말했다. 거대한 별이 지상에 떨어진 순간 세상은 불바다로 변했다. 온 세상의 땅이 흔들리고 바다가 출렁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상에서는 빛이 꺼지고 끝도 없는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다., 끝없이 눈이 내렸고 지상의 모든 생물은 죽어갔다. "드래곤들은요?" "원래대로라면 드래곤들도 멸종되어야 했지요. 그게 징벌의 목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전설에 따르면요." "전설에 따르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데요?" 전설에 따르면 대징벌이 닥치기 전 드래곤들의 잘못과 다가올 징벌을 깨달은 소수의 현명한 드래곤들이 있었다. 그들은 신의 노여움을 이해하고 징벌이 지나갈 때까지 몸을 낮추어 기나긴 잠에 빠져들기로 했다. 그들이 동면에 들어간 그 순간 신의 징벌은 지상에 강타했고 그들의 말에 따르지 않은 다른 드래곤들은 한줌 재가 되어 지상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아주 아주 긴 세월이 흘렀답니다." "긴 세월이라면 얼마만큼요?" "어리석은 사람들은 6,500만 년 전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건 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6,500만이란 숫자는 인간의 머리로 생각하기에는 너무 긴 세월이니까요. 신들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게 10만 년 전이라는데 어떻게 6,500만 년이 가능하겠습니까. 아마도 실제로는 6만 5천 년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원래 전설에서 숫자가 백 배나 천 배로 과장되는 건 흔히 있는 일입니다." 아돔은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마침내 신의 노여움이 모두 지나가고 드래곤이 세상에 다시 나왔을 때 그들은 모든 재앙과 분노의 흔적이 사라진 평화로운 지상을 보고 감격했다. 드래곤들은 더 이상 종전처럼 온 세상을 지배하려는 생각을 버렸다. 신들은 그것을 보고 안심하여 세상을 지배할 새 로운 생물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었다. 강대하고 긴 수명을 자랑하는 드래곤에게 혼이 났던 신들은 이번에는 인간을 지극히 미약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미약한 인간에게 사회와 문명과 지혜를 주어 혼자서는 미약한 존재라도 뭉치면 드래곤에게 대적할 정도로 강대해질 수 있도록 했다. 인간이 등장하자 드래곤은 점점 힘을 잃고 지상 최고의 생물이라는 왕좌를 인간에게 내주게 되었다. "엘프와 드워프는요? 그들은 어떻게 창조된 거래요?"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든 렌이 묻자 아돔은 조금 자신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사실 엘프와 드워프 부분은 논란이 있습니다. 어떤 신화에 따르면 신들이 드래곤을 징벌한 후 텅 빈 지상을 채우기 위해 엘프와 드 워프를 만들었지만 그들이 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인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신화에 따르면 드래곤들은 오랫동안의 동면에서 깨어나자 자신들의 종복으로 쓰기 위해 엘프와 드워프를 만들었지만 그걸 본 신들이 드래곤의 오만을 깨우치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두 가지 신화는 거의 비슷하게 퍼져 있습니다. 저는 드래곤 신화를 연구하면서 엘프와 드워프 전설 부분도 함 께 연구했지만 어느쪽이 맞는건지는 밝혀낼 수가 없었습니다." 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테라미즈 아카데미에서 배운 신화와는 좀 다르네요. 그 신화에서는 대징벌 얘기 같은 건 없었는데요. 그리고 드래곤과 인간과 엘프와 드워프가 창조된 것도 거의 비슷한 시기인 것처럼 되어 있었거든요." 아돔은 렌이 의문을 제기한 것이 기특하다는 듯 교수가 영민한 학생에게만 보여주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요. 저도 그런 내용을 담은 교과서로 역사를 가르치니까요. 하지만 남대륙이나 드래곤의 회랑에 전해 내려오는 신화의 원형은 조금 전 제가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우리 제국의 구미에 맞게 수정한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제국에서는 드래곤을 가능하면 평가절하하고 우리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권위를 높이려고 하는데, 드래곤이 한 때 온 세상의 지배자 였다든가 인간보다 훨씬 전에 창조 되었다든가 신을 위협할 정도였다든가 하는 내용은 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역사를 가르치는 사 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원래 역사란 지배자, 승리자의 것이지요. 왜곡되지 않은 진실한 역사 따위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 니다." 아돔은 한숨을 쉬었다. "그 다음은요?" 렌은 아돔의 이야기가 역사철학 쪽으로 빠질까봐 재촉했다. "에, 그게 다입니다. 어떤 전설에서는 인간이 멸망하고 나면 다시 드래곤이 온 세상을 정복할 거라고도 하고, 어떤 전설에서는 인 간이 창조된 후 드래곤은 서서히 멸망의 길을 걷고 있으며 그들의 최후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도 하지요. 또 어떤 전설에서는 인간이 신을 잊고 오만해지는 순간 드래곤들이 인간을 벌할 거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우리 생전에 그 끝을 볼 일은 없을 테죠." 아돔은 엄숙하게 말을 맺었다. 렌은 아돔에게서 들은 드래곤 전설에서 벌써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추측해낼 수 있었다.그러나 무조건 추측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 었다. 과학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교수님께선 드래곤 신화만 연구하신 건가요? 아님 다른 것, 예를 들어 드래곤의 생태라든가 섭생이라든가 번식 같은 것도 연구하셨 나요?" 렌의 질문에 아돔은 자부심에 가득 차서 몸을 곧추세웠다. "드래곤 전문가라 자처하면서 어찌 드래곤의 생태를 연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연구했지요. 어리석은 학자들은 신화 만 공부하고 과학에는 눈을 돌리지 않지만, 그런 건 참된 과학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사실 그 분야에서는 제가 독보적입니다. 그리 고 이건 제가 나중에 책에 쓰기 위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던 건데, 저는 현대의 드래곤 말고도 대징벌 이전 시대의 드래곤에 관해서도 아울러 연구해왔습니다." "어떻게요?" "이 지상 곳곳에는 대징벌 이전부터 전해 내려왔다고 하는 드래곤 뼈들이 남아 있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수집해서 연구해왔는데 그로부터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뼈라고요?" "예, 어떤 뼈는 사람 키보다도 훨씬 기록 사람 몸통보다도 훨씬 굵지요. 그 뼈들은 보통 땅에 묻혀 있거나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다 가 어찌어찌해서 드러난 것인데,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 뼈를 갈아 마시면 벼을 고칠 수 있다고 잘못 알고 파내는 바람에 많이 훼손 되고 소실되었습니다. 그래도 월급을 아끼지 않고 모은 덕분에 그럭저럭 연구에 필요한 만큼은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론이 뭔가요?" 아돔은 연구결과를 렌에게 알려도 괜찮을지 미심쩍다는 눈초리를 한 번 보내고는 주저하다가 말했다. "대징벌 이전의 드래곤은 한 종류가 아니었습니다. 물에 사는 드래곤, 하늘을 날아다니는 드래곤, 풀을 뜯어먹는 드래곤, 다른 짐승 을 잡아먹는 드래곤, 참으로 수많은 종류가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의 드래곤과 비슷한 모양을 한 드래곤은 딱 한 종류뿐이었습니다." "어떤 종류요?" "지금의 드래곤보다는 조금 작은 날개와 꼬리가 달려 있지만 전체적으로지금의 드래곤과 흡사하게 생긴 종류였습니다. 제가 그 드래 곤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 것은 드래곤의 회랑에서였습니다. 그쪽 골동품과 약재상에 신기한 드래곤 뼈를 발견하면 연락해달라고 해 놓았는데, 어느 날 연락이 와서 찾아가 보니 거의 완전한 형태의 드래곤 뼈가 보존되어 있는게 아니었겠습니까? 그것도 한 두마리가 아니라 거의 수십 마리 분량이 보존되어 있는게 아닙니까? 저는 정말로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지요. 그것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맞춰 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어떻게 놀라웠는데요?" "첫째, 대징벌 전의 드래곤은 지금의 드래곤과 무척 비슷했지만 날개는 더 작고 꼬리를 짧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의 드래곤들은 아주 커다란 날개와 긴 꼬리를 자랑하지 않습니까? 대징벌 전의 드래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돔은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둘째, 그 드래곤들의 뼈는 다양한 색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날개와 꼬리뼈가 작은 경우에는 뼈의 색이 엷고, 날개와 꼬리 뼈가 큰 경우에는 색이 비교적 진했지요. 그리고 그렇게 물든 뼈의 경우 희미한 결정화 현상도 보였습니다." "결정화 현상이라고요?" 아돔은 이제 완전히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의 태도로 강의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열심히 듣는 학생 앞에서 평생 가르쳐보고 싶은 내용을 강의하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음, 결정화 현상은 엘프와 드래곤이 죽을때 나타나는 골격의 경화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엘프와 드래곤의 수명을 다해 죽게 되 면 피부와 근육은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뼈는 크리스탈이 되어 깨지지요. 마법사들은 그런 현상이 마나의 운용과 관련되는 것이라 고 하는데 아직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그런 현상은 엘프와드래곤에게서만 나타나고 아직 인간들에게서 그런 현상이 나타난 예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말틴의 경우는……" 아돔은 열을 내어 말하다가 무심코 말틴 얘기를 꺼내고는 하얗게 질렸다. 다름 아닌 황제 폐하의 침전에서 감히 폐하께서 극도로 싫 어하시는 말틴 얘기를 꺼내다니! 내가 미쳤지! 아돔은 즉시 바닥에 넙죽 엎드려 쿵쿵쿵 바닥에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 렌은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곧 그가 왜 그러고 있는지 눈치챘다. "그러지 마세요. 이제 카엔님은 말틴 얘기를 꺼냈다고 해서 처벌하거나 하지는 않으세요. 혹시 그러겠다고 하면 제가 처벌 못 하게 말릴 테니 안심하세요. 카에님은 다른 사람 말은 안 들어도 제 말은 잘 들으시거든요." 아돔은 렌의 말에 부르르 떨며 공포에 질린 얼굴로 엉거주춤 일어섰다. "시간이 촉박하니 어서 계속 얘기해주세요." "아, 아, 마, 말틴의 경우에는 아시다시피 인간에게도 결정화 현상이 나타났었지요. 잿빛으로 그 부분은 직접적으로 관계없으니 대강 넘어가겠습니다." 아돔은 더듬거렸다. 그가 카엔의 침실과 이어진 쪽의 문을 몇 차례 두려움 어린 눈길로 곁눈질하다 아무 일이 없자 겨우 진정하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결정화 형상이 희미하게 나타난 뼈가 있는 점에서 추측해보면, 원래 드래곤은 마나를 사용할 수 없는 존재였다가 어느 순간 알수 없는 계기로 마나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 희미하게 물든 뼈는 마나를 사용할 수 있게 된 초기 단계의 뼈가 아닌가 싶은 거지요. 하지만 모든 것이 추측일 따름입니다. 그 이상은 저도 모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동료 교 수들에게 하면 동료 교수들은 펄쩍 뛰지요, 드래곤은 처음부터 마나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도록 신이 창조한 생물인데 원래는 마나 를 쓰지 못하다가 나중에서야 마나를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말이 되냐고요. 휴우, 증거가 더 있다면 반박이라도 할텐데, 증거도 없 고, 드래곤에게 찾아가 물어볼 수도 없고 드래곤학이라는 게 다 그렇지요." 렌의 머릿속에서는 복잡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럼 지금 현재 살아 있는 드래곤의 생태에 관해 아는 대로 얘기해주시겠어요?" 아돔은 다시 자신 있는 부분으로 주제가 넘어가자 한결 편안한 얼굴로 줄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음, 아시는대로 드래곤은 수명이 약 만 년이고, 알에서 태어나 두 번의 변태를 거친 후 성룡이 됩니다. 해출링 상태에서는 꼬리도 짧고 날개도 없지만, 첫 번째 변태에서 긴 꼬리가 생기고, 두 번째 변태에서는 날개가 생기면서 성룡이 됩니다. 그렇게 성룡이 되고 나면 온 세상을 울리는 위대한 용의 잠재능력과 자태를 갖추게 되지요." "전에 듣기로는 적룡이 황룡을 낳고 황룡이 백룡을 낳는다는데, 정말 그런가요?" 아돔은 렌의 지식에 흐뭇함을 표시하며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문외한들이 생각하듯 적룡이 적룡을 낳고 황룡이 황룡을 낳는게 아닙니다. 흑룡은 청룡을 낳고, 청룡은 적룡을 낳고, 적룡은 황룡을, 황룡은 백룡은, 백룡은 흑룡을 낳지요. 다만 이상한 것은……" 아돔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한 것은?" "제가 알기로는 지금 이 세상에 용족은 다섯밖에 없습니다. 청룡, 적룡, 황룡, 백룡, 흑룡 각 한 마리씩이요. 여러 엘프들에게 물 어서 알게 된 거니 틀림없습니다. 청룡 안티니아, 적룡 가이레스, 백룡 네린, 흑룡 데이그랜, 그리고 이름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 지만 어린 황룡 한마리까지, 총 다섯 마리라는 겁니다. 이런저런 소문을 종합해보면 황룡이 태어난 것은 약 삼사백여 년 전이고, 그 황룡을 낳은 것은 적룡 가이레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이레스는 수컷이 아닙니까? 수컷이 어떻게 알을 낳습니까? 게다가 적룡은 황 룡 탄생 당시 한 마리밖에 없는데 어떻게 혼자서 황룡을 낳는단 말입니까? 원래 아기를 만들려면 암컷과 수컷이 함께 응응응을 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아돔은 말하다 말고 얼굴을 붉혔다. "응응응이 뭔데요?" 렌이 장난스럽게 묻자 아돔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시뻘개졌다. "죄, 죄송합니다. 귀한 분 앞에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렌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니까요. 자, 아무튼 그래서 교수님의 생각은 어떠신데요?" 아돔은 심각하게 대답했다. "지금 알려진 바로는 화룡 가이레스가 수컷인 건 확실합니다. 그러니 제 생각으로는 몇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가이레스가 암컷 화룡을 어딘가에 숨겨두고 알을 낳게 했지만 암컷 화룡이 워낙 세상에 드러나지 않아 화룡 가이레스가 직접 황룡을 낳은 것으로 잘못 알려진 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어쩌면 몇몇 어류나 개구리가 그러하듯 드래곤 또한 암컷이 되었다 수컷이 되었다 할 수 있는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최소한 상대는 있어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교합 없이 혼자 낳은 알이 저절로 드래곤이 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최소한 고등동물 중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마 화룡은 같은 화룡이 아니더라도 다른 종류의 용, 이를테면 청룡이나 흑룡과 교접하여 알을 낳앗다고 보는 것이 합니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드 래곤에게 직접 묻지 않는 한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일단은 후자의 가능성이 더 큰 것 같습니다. 드래곤의 힘이란 워낙 세 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에 알려진 다섯 용 외에 또 다른 용이 숨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거든요."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렌이 이야기를 계속하라는 눈길을 보내자 아돔은 맥없이 웃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가 전부입니다. 아마 저보다 더 드래곤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저 스스로도 제연구 가 얼마나 부족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렌님께서 관심을 가지시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드래곤이란 정말 무한히 신비하고 비밀에 가 득 찬 생물입니다. 아마 렌님께서도 드래곤에게 빠지시면 저 못지않게 열광하실지도 모릅니다. 렌님께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건 제 가 그동안 드래곤을 연구하면서 모은 자료와 삽화들입니다. 잘 보시고 나중에 꼭 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렌은 아돔이 덜리는 손으로 내미는 두툼한 종이뭉치를 받아 펼쳐 들었다. 트리세라톱스, 브라키오사우루스, 스테고사우루스, 브론토사우루스, 프테라노돈, 티라노사우루스와 흡사한 모양의 공룡들의 그림과 그들 을 발견한 장소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었다. 여러 가지 공룡을 그린 삽화는 서툴지만 정성이 담겨 있었고 과학적으로도 생각보다 훨씬 정 확했다. 렌은 홍콩에 간 지 얼마 안 되어 개봉한 영화 '쥬라기 공원'을 극장에서 본 후 공룡에 대해 흥미가 생겨 그 분야의 책을 두어 권 읽어 보았기 때문에 아돔의 연구 성과가 얼마나 깊고 폭넓은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정말 훌륭하시군요. 이렇게 혼신의 힘을 다하셔서 단 혼자서 이 정도로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내시다니, 정말 감탄할 수밖에 없네요." 렌의 짧은 칭찬에 아돔의 얼굴은 기쁨으로 상기되었다. 학자로서 자신의 연구를 인정받는 것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겸손 하려 애썼다. "드래곤학이 음지의 학문이기는 하지만, 어찌 제 혼자 힘으로 그만한 성과를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모두 전대의 학자들이 쌓아놓은 결과에 터 잡은 것일 따름입니다." 렌이 마저 뒷장을 넘기자 생소한 그림들이 나왔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공룡' 이 아닌 진짜 드래곤들을 그린 그림이었다. 아돔이 말한 것처럼 어떤 드래곤들은 상대적으로 날개와 꼬리가 작았고, 어떤 드래곤들은 그보다 날개와 꼬리가 더 길었는데, 후자가 더 나중의 것으로 추측된다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던 렌은 전체적으로 드래곤들이 일반 공룡보다 신체에서 머리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고, 특히 뒤로 갈수록 머리가 점점 커졌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만큼 지능이 높아졌다는 말이었다. "이 자료는 정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잘 보고 소중히 보관했다가 꼭 돌려드릴게요." 렌의 말에서 만남을 끝내고 싶어 하는 기색을 읽은 아돔은 주저하며 몇 차례 자신의 자료에 눈길을 돌리다가 결국 미련을 떨치고 일어났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언제라도 드래곤에 관해 궁금하신 것이 있으시다면 저를 부르십시오." "네, 교수님. 오늘 정말 고마웠습니다." 아돔이 나가자마자 카엔이 들어왔다. "렌, 대체 뭘 어쩌려는 겁니까?" 카엔의 얼굴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렌의 머릿속에서 오고가는 그 복잡한 개념들!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렌은 이 세상에 가득 찬 수많은 생명이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나는 신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자부하지만, 렌은 아예 신이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카엔은 진화의 개념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는 쉽게 수긍하지 못할 터였다. 렌은 카엔의 질문에 대답하지 오히려 되물었다. "카엔님, 전에 황룡의 심장을 먹었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싸워 이기신 건가요?" "아닙니다. 황룡은 자신의 심장을 반 강제로 내게 떠맡겼습니다. 황룡은 자살하려고 미즈넨 산맥에 왔었고, 나를 만나자 반색하며 자신의 심장을 내게 주었습니다." "용이 자살이라고요?"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사실이 그랬습니다." "그때 얘기를 좀 자세히 해주세요." 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35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 시절 카엔은 미즈넨 산맥에서 은거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는법,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의 마음을 조작하지 않을 수 있는 법을 연마하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조작하는 능력은 그에게 저주였다. 그는 그저 사람들에게서 약간의 따뜻함을 바란 것뿐이었지만, 그 염원은 무의식적으로 발현되었고, 그 부작용의 결과 사람들을 미 치게 만들었다. 그는 혹독한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내내 그런 것에 무척이나 굶주렸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작은 따뜻함에도 감동했다. 그런 한편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자신의 능력 때문에 그는 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득한 생생하고 추악한 악의 또한 진저리칠 정도로 적나라하게 느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주었으면,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마음속에 좋은 생각, 선량한 생각만을 품고, 그런 모습 과 마음을 내게 보여주었으면.' 하는 죄없고 애처로운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가혹했다. 그와 마주한 사람 모두 그 가 원하는대로 변했다. 선량하고 친절한 마음씨를 품고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사랑해주었다. 그러다 조금 지나 미쳐버렸다. 그는 자신의 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미즈넨 산맥 깊은 곳에 숨어 수련을 계속하게 된 것이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던가. 수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해본 끝에 이제 그는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작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세상으로 내려갈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산속에서 보낸 수 년 동안의 고독에 그는 지쳤다. 다시금 사람이 그리워졌다. 그는 이번에 산을 내려가면 정말로 잘해보아야겠다, 진짜로 사람들과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체를 숨기고 능력을 숨기기만 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무렵,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그는 묘한 시선을 등 뒤에서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신경과민인 가 싶기도 했지만, 흔들리는 나뭇가지, 발자국이 나 있는 낙엽더미 등 아주 사소한 징후들이 자꾸만 보였다. 그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8서클 마법사인 그의 이목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말이었다. 오싹했지만 한편으로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 서 그는 오히려 자신 쪽에서 감시자를 추적해나가기 시작했다. 감시자 쪽에서도 그걸 의식했는지 이따금씩 단서를 남기며 그를 이끌었다. 최종적으로 그의 발길이 닿은 곳은 그가 가끔 물을 길러 가던 작은 샘이었다. 붉게 물든 나뭇잎이 바람에 날려 우수수 떨어지는 늦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샘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흙의 마나가 미미하기는 하지만 조금씩 모여 한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카엔 은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마나를 극도로 일으키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흐름의 끝에는 금발의 미청년이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그냥 미청년 정도가 아니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아름답게 생긴 청년이었 다. 황금빛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출렁이고, 머리와 눈색에 맞춘 황금빛 토즈는 엘프비단으로 된 최고급이었다. 게다가 토즈자락 끝에는 앰버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 미청년은 카엔을 보자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카엔은 주저하면서도 그 미청년에게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그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미청년에게서는 아무런 생각과 감정이 읽혀지지 않았다. 엘프나 드워프조차도 감정은 읽혀지는데, 저 미청년의 경우에는 벽에 가로막힌 듯 깜깜하기만 했다. 공포가 엄습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게 이렇게 무서울 줄은 몰랐다. 마음을 읽을 수 없는 걸 보면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저 청년은 인간도 엘프도 드워프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당신은 드래곤입니까?" 카엔은 태연하려 애쓰며 물었다. 자기도 모르게 그는 존잿말을 썼다. 미청년은 놀랍다는 듯이 카엔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나는 조화의 황룡 시오카난이라고 하네." "드래곤이 여기 미즈넨 산맥에는 웬일입니까?" 두려움을 이기려다 보니 그의 말투는 오히려 따지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카엔의 건방진 말투에도 시오카난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대를 만나러 왔다네. 내게 그대의 이야기를 좀 해줄 수 있겠나? 그대는 어떤 사람이지?" 카엔은 마음을 읽을 수 없는 상대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 때문에 시오카난과 대화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읽는 능력 때문에 상상 못할 고초를 겪어온 그였지만, 정작 아무것도 읽혀지지 않는 상대방 앞에 서니 그는 마치 자신이 귀머거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날 만나러 왔다니,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시오카난은 조금 미안한 듯 웃었다. "지금 인간계에서 순수한 흙의 기운을 지닌 8서클 마법사는 자네밖에 없었거든. 자네를 찾느라고 무척 고생했다네." 조용히 말하는 시오카난의 눈은 금빛 유리알처럼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다. "내게서 뭘 원하는 겁니까!" 카엔은 두려움을 떨쳐버리려는 듯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시오카난은 미동도 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말하지 않으면 가겠습니다." 카엔은 몸을 홱 돌렸다. 그러자 시오카난은 묵묵히 황금빛 마나를 쏘아 카엔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카엔은 오싹했다. 그는 고개 를 돌려 시오카난을 쳐다보았다. 황룡은 여전히 아무런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저 드래곤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카엔은 죽은 목숨이었다. 지금의 마나는 그런 능력의 과시였다. 그동안 그렇게 수많은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왔는데 여기에서 만용을 부리다가 개죽음을 당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카엔은 한 숨을 쉬며 시오카난에게 다가갔다. 시오카난은 미안해하는 미소를 가득 지으며 자기 옆의 바위를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카엔은 그곳에 앉았다. "어떻게 내가 드래곤이라는걸 알았나?" 시오카난은 다시 부드럽게 물었다. "그건……" 카엔은 망설였다. 시오카난은 달래듯이 말했다. "비밀인가 보지? 하지만 나는 이제 조금 있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걸세. 그러니 그대가 내게 비밀을 말해주더라도 그 비밀은 안 전해." 카엔은 드래곤이 자살하려 한다는 말에 크게 놀랐다. 그는 정말인가 싶어 시오카난의 안색을 살폈다. 아까는 두려움 때문에 마치 살펴볼 겨를이 없었지만, 찬찬히 보니 시오카난의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게 묘한 절박함과 절망이 서려 있었다. 드래곤이 자살이라 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말하게." 시오카난은 다시 채근했다. 카엔은 망설였지만, 오랫동안 굳어진 비밀주의 때문에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시오카난은 카엔의 가슴에 손을 댔다. 손가락을 살짝 꿈틀하는 것만으로 상상도 하지 못할 엄청난 고통이 밀려들었다. 너무 지독한 고통이어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시오카난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말하지 않더라도 나는 그대의 비밀이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네. 그동안 내가 그대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그 정도도 못 알아 냈을 것 같은가? 그대는 마음을 읽을 수 있지? 맞지? 그래서 이곳 산맥에 숨어든 거지?" 카엔은 경악했다. 고통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듯 비밀을 털어놓았다. "맞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생각을 자유자재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엘프나 드워프의 경우라도 생각을 읽지는 못하지만 감정은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서는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새어나오지 않으니 그대는 인간도 엘프도 드워프도 아닙니다. 그러니 당 신은 드래곤일 수밖에요." 카엔의 대답에 시오카난은 손을 떼었다. 심장의 고통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사는 게 결코 쉽지는 않았을 텐데?" 부드러운 시오카난의 어조에 흔들려 카엔은 내친 김에 그가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이야기 했다. 시오카난이 그와 마찬가 지로 흙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는 게 묘한 친숙함을 자아낸 덕분에 그는 원래 의도했던 것보다 더 자세히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시오카난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런 고통을 겪었다니, 정말 미안하네." 카엔은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조금 지나자 시오카난의 얼굴은 다시 밝아졌다. "무사히 그대를 찾게 되어 정말 기쁘군. 그대를 제때 못 찾았으면 일이 복잡해질 뻔했거든. 이 늙은 용을 불쌍히 여겨 내 얘기를 좀 들어주겠나? 절대 그대에게 해가 되는 이야기는 아니라네." 그의 얼굴 어디에도 늙음은 보이지 않았지만 시오카난의 눈빛은 이미 인생의 모든 것을 겪고 삶의 희망을 잃은 노인네의 것이었다. 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그대가 내게 그대의 비밀을 말해주었으니 나도 내 비밀을 조금쯤 알려주겠네. 나는 조화의 황룡이야. 이 세상의 모든 것 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 내 목표지. 지난 8천 년 동안 나는 인간이 되어보기도 하고, 엘프나 드워프가 되어보기도 하면 서, 이 세계에 조화롭게 어울리려고 노력해왔네. 하지만 어느날, 나는 내 존재가 근본부터 조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네. 조화라니! 조화는커녕 온 세상에서 가장 부조화한 존재가 우리들 드래곤이었던 것이야.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걸. 하 지만 알게 된 후에도 전처럼 살 수는 없게 되었네. 다른 길은 없었어. 나는 그래서 홀로 죽기로 결심했네. 이미 내 후계자인 시 오카가 태어나 있어서 내가 무작정 죽어버리더라도 그녀가 다시 내 마나를 이어받아 완벽한 조화의 황룡 노릇을 하게 되거든. 내 가 안심하고 죽을 수 있는 방법은 내 마나가 시오카에게 흘러가지 않도록 심장채로 인간에게 주는 수밖에 없었네." 카엔은 대체 지금 드래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오카난은 더 이상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 여기서 죽는 게 맞는 거야. 드래곤이란 존재는 이미 이 세상을 너무나 왜곡하고 있으니까." 시오카난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그대도 우리 드래곤 때문에 운명이 왜곡된 불행한 생명중 하나일 수도 있겠지." 뜻밖의 말에 카엔의 얼굴은 굳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대의 그 생각을 읽는 능력, 그것도 어쩌면 우리 드래곤의 무심한 장난에서 비롯된 걸지도 모르네. 그대도 8서클 마법사이니 어느 정도 알겠지? 남대륙의 인간들 중에 특이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걸. 그게 우연이라고 생각하나? 왜 하필이면 남대륙일까?" "그렇다면……" 카엔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도 잘은 모르네. 아마 장본인은 지혜의 흑룡 쪽이겠지. 선대 지혜의 흑룡들은 대대로 인간을 상대로 그런 류의 실험을 계속해왔으 니까, 그 과정에서 자네 같은 특별한 능력이 생겼을 수도 있지." 카엔은 분노로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아무튼 내 심장을 그대에게 선물로 주겠네. 그대는 거기다가 입을 대고 마나를 흡수해야 해. 그럼 그대의 마력이 급속도로 상승할 수 있을 걸세." "왜 내게 마나를 준다는 겁니까?" 카엔은 분노를 억누르고 물었다. "첫째는 그대가 지금의 인간 중에서는 유일하게 선척적으로 순수한 흙의 마나를 타고났고, 그 마법을 8서클까지 축적한 마법사이 기 때문일세. 9서클에 달하는 흙의 마나를 완전히 받아들이려면 8서클은 되어야 하거든. 그리고 그 순수한 흙의 기운을 제대로 받아 들이려면 받는 쪽 역시 순수한 흙의 기운을 지녀야 하거든. 사실 그대를 찾느라 고생했다네. 둘째는 그대의 선조에게 내 동료 드래 곤이 저지른 일에 대한 사죄라고 생각해주게." "그러니까 왜 하필 인간에게 마나를 넘겨야 한단 말입니까? 왜 그 시오카인지 뭔지 하는 해출링에게 마나가 흘러가면 안 된다는 겁니까!" 카엔은 추궁했다. "그 이상은 우리 드래곤의 비밀이야. 자, 어떻게 할 텐가! 그대에겐 아무 손해가 없는 일이야! 아니, 오히려 엄청나게 득을 보는 일 일세!" 시오카난은 초조하게 다그쳤다. 카엔은 망설였다. 용의 심장에 대한 전설은 그도 여러 번 들어보았지만 지금 왜 이 용이 초면인 자신에게 이런 엄청난 호의를 베풀 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발!" 시오카난은 다시 한번 부르짖었다. 카엔은 아직도 대답하지 않았다. 의심 많고 남을 믿지 못하는 그의 성격상 시오카난의 말에 웬 떡이냐 하고 냉큼 응할 수는 없었다. "안 되겠군." 시오카난은 한숨을 쉬며 손가락을 튕겼다. 한 서클의 차이란 이렇게 엄청난 것인가. 카엔은 순식간에 속박당해 꼼짝도 할 수 없었 다. 시오카난은 싱긋 웃었다. "자꾸 시간을 끌면 죽기 싫어지거든. 미안하네!" 시오카난은 잠시 망설이다가 오른손에 금빛을 일으켜 스스로 심장에 박았다. "윽!" 시오카난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카엔은 속박당한 채 눈을 휘둥그레뜨고 시오카난을 쳐다보았다. 시오카난의 손에는 어느새 황금빛에 휩싸인 심장이 들려 있었다. 시오카난은 고통을 참으며 심장을 카엔의 입술에 갖다댔다. 피냄새가 확 몰려와 카엔은 기절할 것 같았다. 시오카난은 가볍게 카 엔의 입술을 벌렸다. "자, 이제 시작이야." 엄청난 마나가 벌려진 입술을 통해 카엔의 전신으로 퍼져갔다. 한 번 흐름이 시작되자 그가 아무리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무아지경 속에서 계속 마나를 받아들였다. 마나는 온몸을 휘 돌다 심장으로 몰려갔다.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이제 시오카에게 마나가 자동적으로 흘러가지 못하게끔 마나의 속성을 바꿔야겠네. 그대의 녹색과 머리색에 맞추어 은보랏빛이 좋겠지? 앞으로는 그대가 일부러 흙 계통의 마법을 쓰지 않는 한 그대의 마나는 은보랏빛으로 발현될 걸세." 드래곤의 손이 그의 전신, 특히 심장을 두들기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의 고통보다도 더한 고통이었다. 결국 카엔은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 만에 정신을 차려보니 시오카난은 사라져버리고 그의 입술에 닿아 있던 심장도 흔적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 대신에 사방에 금빛 먼지가 쌓여 있고 그 틈에서 금빛 크리스탈이 빛났다. 카엔이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저건 시오카난의 잔해였다. 그는 죽은 것이다. 카엔은 마법을 일으켜보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으로 그의 심장은 주위의 마나, 그것도 흙의 마나만을 빨아들였다. 9서클이었다. 그것도 턱걸이가 아닌 완전하고 확실한 더 올라갈 곳 없는 9서클이었다. 은보랏빛 광휘가 그의 손끝에서 찬란히 빛 났다. 그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회에 사로잡혔다. 이제 그는 이 세상에 무서울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 도취감 때문에 그는 황룡이 왜 굳이 자신에게 용의 심장을 취하라고 강요하다시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잊어버렸다. 카엔은 마법을 사용하여 드래곤의 잔해를 땅에 파묻고 산을 내려갔다. 그게 황룡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그리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복전쟁을 시작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카엔의 간략한 설명을 듣자 렌은 오히려 의구심이 더 커지는 것을 느꼈다. "꼭 카엔님에게 마나를 전해주어야만 했다구요? 파국을 막기 위해서? 후계 황룡에게 마나가 전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게 대체 무슨 말이죠?" 카엔은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일단 굳이 내게 마나를 전해주어야 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시오카난이 자신의 마나를 다시 후대 황룡에게 전하지 않으려 했다 면 사실상 그게 유일한 방법입니다. 용이든 인간이든 죽으면 그 마나는 대기중에 퍼집니다. 아무 방해가 없으면 마나는 이 지상 전체에 고루 퍼져나가겠죠. 하지만 순수한 기운을 지닌 생물이 작정하고 그 마나를 빨아들이면 마나는 길을 바꾸어 그리로 몰려 갑니다. 순수한 기운을 지닌 생물이 자신과 같은 성질을 지닌 마나에 대해 행사하는 힘은 그렇게 강력하답니다. 그래서 용이 그 렇게 자유자재로 마나를 쓰고, 인간 중에서 순수한 기운을 지닌 자들이 그렇게 쉽게 마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시오카난이 그냥 남대륙에서 자살했다면 그의 마나는 가까운곳에 있는 순수한 흙의 기운을 지닌 황룡 해츨링에게 모두 흡수되었을 것입니다.하 지만 그가 작정하고 나에게 자신의 마나를 몽땅 전해준 이상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지요. 이해가 안 가는 건 왜 그가 자신의 마 나를 후대 황룡에게 전하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나도 거듭 생각해봤지만 끝내 해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렌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마나! 순수한 기운! 그 모든 게 다 연관되어 있어!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생각을 해봐야겠어요. 정보가 너무 모자라요! 잡힐 듯 잡힐 듯한데, 아, 답답해! 마법책, 드래곤 책, 그리고 역사책, 뭐든지 다 필요해요!" 렌의 서슬에 카엔은 감히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다음날과 그 다음날 렌은 드래곤과 마나와 역사에 관한 책들을 빌려 쉬지 않고 탐독했다. 거의 강박적인 그 태도에 카엔은 이제 제발 그만하라고 야단쳤으나 렌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사흘째 되는 날 결국 렌은 식사를 다 토하고야 말았다. "그러길래 내가 그만 하라고 했잖습니까!" 카엔은 시녀들이 오기도 전에 황급히 청소 마법으로 주위를 깨끗이 치운 후 화를 버럭 냈다. 렌이 토한 모습을 시녀들에게 보이면 창피해할 것 같아서였다. 렌은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자상한 카엔의 마음 씀씀이가 가슴에 스몄다. "정말로 이제는 그만할게요." 그러다 렌은 덧붙였다. "사실 이제 더 읽어볼 것도 없어요. 나머지 부분은 직접 드래곤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만 되면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 겠지요." 카엔은 렌의 생각을 읽고 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결국 드래곤을 고칠 수 있게 됐단 말입니까!" "예, 어쩌면요." "그래서 가겠다는 겁니까?" "네." "절대 보낼 수 없다고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카엔은 버럭 소리질렀다. 그러나 렌은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입술에 조용히 자기 입술을 갖다 댔다. 카엔이 당황하는 사이 분 노는 어느새 사라지고 열정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카엔은 어느새 렌의 몸을 끌어안고 키스에 열중했다. 작고 연약한 렌의 몸은 그의 품안에서 부드럽게 숨쉬고 있었다. 향긋한 살 냄 새가 풍겨왔다. "걱정하지 마세요. 카엔님이 뭘 걱정하시는지 다 알아요. 제가 모든 비밀을 다 알아버리고 나면 훌쩍 드래곤을 치료하겠다고 떠나 버릴까 봐 걱정하시는 거죠? 카엔님을 이 세상에 놔두고 홀로 드래곤의 레어에서 불행하게 죽어버릴까 두려우신 거죠? 하지만 카엔님, 안심하세요. 가더라도 카엔님을 두고 혼자 가지는 않을 거에요. 약속해요. 아니, 오히려 카엔님이 꼭 같이 가주셔야 할 것 같아요." "그럼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일단은 흑룡에게 전언을 보내야겠죠. 그가 어떻게 답하는지 기다려보고 그 다음에 정하려고요." 카엔은 렌의 생각을 읽으면서 조금 안심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인은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렌의 편지를 가지고 남대륙으로 출발했다. 곧바로 드래곤의 레어로 가는 건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 기에 그는 푸른 바람의 엘프덤에 들러 그곳의 엘프에게 렌의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기로 했다. 마법진 호핑을 해서 엘프덤까지 가는 데는 아무리 빨라도 이틀 정도 걸리고, 거기서 엘프가 흑룡 데이그랜에게 편지를 전하러 가 는 데에는 또 며칠이 걸리게 마련이었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 다그쳐도 엘프로 하여금 그 특유의 게으름을 떨치고 서두르게 하는 것 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렌과 카엔은 그런저런 사정을 종합해볼 때 데이그랜에게서 뭔가 반응이 올 때까지 적어도 열흘 정도는 소요되리라고 예측했다. 그 기간 중 카엔은 렌에게서 렌이 추측해낸 드래곤의 비밀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모든 개념이 그가 알고 있던 상식과 너무 달랐기 때문에 렌은 설명을 여러 차례 반복해야만 했다. 그래도 카엔은 남들보다 비상하 게 명석한 머리를 지닌데다가 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마침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거였군요!" 카엔은 탄식했다. "네, 아마도 그런 거였다고 생각해요." "하, 정말로 그런 거라면 너무나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가 바깥에 새나가면 이 세상을 온통 뒤흔들지도 모릅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게 세상의 이치이고 자연의 섭리랍니다." "그렇다면 렌은 이제 드래곤들에게 가서 그 이치를 설명하고 그들을 이해시킨 후 렌이 지금 생각하는 대로 그들을 치료할 거란 말 이죠?" "네." "렌은 작정을 하고 드래곤이라는 종족을 살리겠다는 건데, 과연 그들을 살려두는 것이 인간을 위해 좋은 일일까요? 인간에게 드래 곤은 지나치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닙니까? 그들을 살려둘 경우 드래곤은 두고두고 인간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그들을 살리는 게 옳아요." 카엔이 제기하는 의문은 렌 또한 잠시 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렌은 이미 마음을 정리하고 해답을 찾은 상태였다. 카엔은 렌의 마 음을 다시 읽었다. "그렇군요. 그래요. 그 부분은 렌의 생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결국 드래곤을 살리는 건 인간을 위해서에요." 렌은 다짐하듯 되뇌었다. "하지만 그들이 렌의 말을 믿으려 할까요?" "그들은 믿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미 드래곤들은 자신들의 종족이 멸망하리라는 걸 예감해왔어요. 황룡 해츨링 시오카의 병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요. 결국 그들은 제가 얘기하는 방법 말고는 궁극적으로 그들을 구할 방법이 없다는 걸 이해하게 될 거에요." "너무 안일한 생각입니다. 증거가 필요해요! 증거가 있어도 들을까 말까 한데, 렌의 말은 순전히 추측이 아닙니까?" 카엔의 말에 렌은 한숨을 쉬었다. "하긴 믿기 어려운 얘기이긴 하죠. 그들을 믿게 할 방법이, 어쩌면 그건 시오카난이 자살하게 된 계기와도 연결되어 있을 겁니다. 시오카 난이 그냥 저절로 비밀을 깨닫고 갑자기 자살을 선택하게 된 건 아닐 겁니다. 그의 깨달음을 불러일으킨 뭔가가 있었을 겁니다. 그건 직접 드래곤들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아니면 황룡의 레어를 뒤져서 찾아내든지요."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이제 할 일은 흑룡의 회신을 기다리는 일뿐이군요. 회신이 오면 남대륙으로 가 드래곤에게 렌의 발견을 이야기하고, 증거를 찾아 그들에게 확신시키고, 그 다음 그들을 고쳐야 하는 거군요." 카엔은 그 모든 일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걸 예감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흑룡 데이그랜은 청룡 안티니아와 함께 시오카 앞에 서 있었다. 시오카에게서는 이제 생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안티니아도 더 이상 시오카에게 줄 힘이 없었다. 안티니아는 시든 화초 처럼 늘어진 채 간신히 데이그랜을 맞았다. "생각해보면 100년 전 가이레스 녀석이 너무 무리했던 것 같습니다." 데이그랜은 처음 시오카가 아프기 시작했던 무렵의 일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가이레스 녀석은 자기 딸이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채 드래곤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위험한 상태에 빠지자 미친 듯이 날뛰면 서 자기가 가진 모든 힘을 다 쏟아 부었지요. 그리고 나서는 나가떨어졌지요. 쳇, 화룡이 그렇게 폭주하면 금방 힘이 소진되는 건 당연한 이치인데, 아무리 화룡이라 해도 그렇게 생각이 없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안티니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건 오로지 데이그랜 그대가 아직 알을 낳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알이란 자기의 분신인 법이에요. 내가 가 이레스를 보면 이렇게 안타까운 심저이 드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가 성룡이 되어 나와 마찬가지로 다섯 마나의 한 축을 맡게 되 었다 할지라도, 나는 가이레스가 알에서 깨고 나와 나를 향해 눈망울을 빛내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전대 화룡이신 레미아님께서 좀 더 오래오래 사셔서 가이레스가 해츨링으로 좀 더 오래 남아 있기를, 그래서 내 품을 떠나지 않기를 은밀히 바라기도 했답니다." 안티니아는 애잔한 얼굴로 옛날을 회상했다. "그것도 다 이제는 의미 없는 과거가 되어버리겠군요.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도 드래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겠지요. 이 지상에서 지성있는 동물이라곤 드래곤, 인간, 엘프, 드워프뿐인데, 엘프와 드워프는 드래곤이 사라지고 나면 곧 그 뒤를 따를 테 고, 인간은 너무나 쉽게 모든 것을 망각하는 존재가 아닌가요?" 데이그랜은 침울함을 떨쳐버리려 애쓰며 안티니아를 위로했다. "그래도 저는 렌이 여기 오면 뭔가 새로운 희망이 열릴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테룬 녀석을 제 레어에 잡아놨으니 렌은 아마 그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여기 오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렌이 이리로 오겠다고 계속 고집을 부리면 카에닌 황제는 결국 렌에게 질 수 밖에 없을 테고요. 그러니 너무 쉽게 체념하지 마십시오." 안티니아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르 설레설레 흔들었다. "네린은 어떻습니까?" 데이그랜의 물음에 안티니아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 "아시다시피 그는 우리들 중 가장 고룡이지요. 게다가 황룡의 힘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고요. 아무 힘을 줄 수 없는 시오카의 상태가 그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는 요즘 거의 누워 있기만 해요." "역시 마나의 균형이 깨어져가고 있군요." "그런데 희망을 가지라고요? 데이그랜, 나는 최초에 그대가 이계에서 소녀를 데려와 시오카를 살리자고 했을 때에도 회의적이었어 요. 그대나 나나 그게 임시방편밖에 안 된다는 걸 잘 알잖아요! 이번은 이렇게 넘긴다 치고, 네린의 대를 이을 백룡은 또 어쩔 작 정인가요! 그렇게 안간힘을 써서 겨우겨우 시오카를 살린다고 해도, 그녀가 제대로 다음 대의 백룡을 낳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안티니아는 그녀답지 않게 격하게 말했다가 곧 힘없이 덧붙였다. "미안해요, 데이그랜. 그대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지 알면서.하지만 나는 자애와 생장의 청룡, 우리의 운명을 되돌릴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누구보다 강하게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데이그랜은 아무 말 없이 안티니아를 끌어당겨 꼭 안아주었다. 데이그랜에게서 전해지는 물의 기운이 안티니아 본연의 나무 기운을 자극하여 그녀는 조금 기운이 났다. 자신의 레어로 돌아온 데이그랜은 억지로 힘껏 지었던 밝은 표정을 지우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물의 정령 두엇을 불러 몸을 씻 은 후 그는 최고급 서대륙 와인을 꺼내 한 잔 마셨다. 이대로 누워서 그냥 세월이나 보내다가점잖게 죽음을 맞을까? 사오카가 죽은 후 마나의 붕괴가 완결되기 전에 그냥 미리 목숨을 끊어버릴까? 아니, 차라리 남은 힘을 끌어 모아 인간계를 왕창 뒤 엎어버릴까? 데이그랜은 벌떡 일어나 방안을 돌아다니다가 옆방의 테룬에게로 갔다. 그는 여전히 검푸른 빛을 띤 채 생명의 기운이 전혀 느껴 지지 않는 상태로 누워 있었다. 데이그랜은 테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렌이 이 모습을 봤으면 당장이라도 달려오겠다고 할 텐데. 왜 아무 소식이 없는 걸까. 카에닌 녀석이 렌을 막고 있는 거겠지? 흠, 하 긴 여기 오면 뭐가 어찌 될지 모르니 나라도 말렸을 거야. 그래도 렌이 조르면 카에닌이 결국 들어줄 줄 알았는데, 혹시나 해서 미끼 를 데려온 거지만 소용없게 된 셈인가. 결국 서대륙으로 가서 인간들 수천의 목숨이라도 인질로 잡고 위협하는 수밖에 없나. 하지만 서대륙으로 직접 가는 건 호랑이 입 속 에 뛰어드는 셈이야. 거긴 카에닌 녀석의 세력권이니까. 하아. 그 순간 갑자기 자신의 결계를 두드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데이그랜은 눈앞에 영상을 띄웠다. 얌전히 결계 앞에서 기다리는 자는 티우사가 죽은 후 푸른 바람의 엘프덤 수장 자리를 이어받은 에든이었다. "무슨 일이냐?" 에돈은 지극히 우아한 태도로 느릿느릿 몸을 숙여 절했다. "위대하신 지혜의 흑룡 데이그랜님. 티우사님의 뒤를 이어받아 외람되지만 저희 푸른 바람의 엘프덤의 새로운 수장을 맡게 된 에 돈입니다. 기억하시는지요?" "기억한다니까! 무슨 일이냐고!" 에돈은 다시 한 번 레어 입구에 나타난 허공의 영상을 향해 무릎을 꺾어 공손히 절해 최고의 예를 표한 후 다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그 느릿느릿한 행동거지를 보며 데이그랜은 답답해 분통이 터질 지겨이었지만 엘프들이 저러는 건 천성인지라 꾹꾸 참으 며 지켜보았다. "얼마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열흘 전에 한 남자가 찾아왔습니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부터 밝혀야 하는 거 아닌가? 데이그랜은 당장 가서 에돈의 목을 잡고 흔들며 빨리 자초지종을 말하라고 하고 싶은 충동을 겨우겨우 억눌렀다. "그 남자는 40대 중반의 인간 남자로서, 제가 보기에는 8서클에 이른 마법사였습니다. 그 높은 마력 때문에 조금 걱정했으나 그는 지극히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자식 이름이 뭐였냐고!" "예, 물론 제가 나서서 그의 이름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자신이 케라미즈넨 제국의 8서클 황실 마법사인 플로인이라 고 대답했습니다." 데이그랜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훗, 역시 렌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던 거야! "네 얘기를 마저 듣고 싶다! 빨리 들어와! 결계를 열어주마!" 그 순간 에돈은 데이그랜의 방 안으로 순간이동되었다. 데이그랜의 모습을 본 에돈은 다시 한 번 한쪽 무릎을 꿇고 가슴에 손을 대며 지극한 예를 갖추려 했다. "제발 그만하고 빨리 이야기나 마저 해봐!" 데이그랜이 버럭 소리지르자 에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지못해 바닥에 앉았다. "예를 충분히 갖추지 못해 정말로 죄송합니다. 위대하신 지혜의 흑룡께서 급하신 듯하니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그래! 빨랑!" 열흘 전에 한 남자가 푸른 바람의 엘프덤을 찾아왔다. 마이리아시의 엘프 상관에서부터 시작해 마법진 호핑으로 찾아온 것이었 다. 그는 다급한 어조로 자신이 테라미즈넨 제국의 8서클 마법사 플로인이며 흑룡 데이그랜에게 전할 것이 있다고 했다. 말을 듣고 수장인 에돈이 나섰다. 흑룡의 레어가 어디 있는지는 수장만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는 여러 가지를 물어 플로인 의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 플로인에게 환영잔치를 열어주었다. "잔치를 열어주었다고?" 데이그랜은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이지요. 어찌 찾아온 손님을 잔치도 안 열어주고 그냥 맞이 할 수 있겠습니까? 예저을 지키지 않는 엘프를 어찌 엘프라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일이 급한 걸 알기에 잔치는 지극히 간소하게 치렀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러고 나서는 그 다음날 플로인을 배웅하는 잔치를 열어주고, 그 다음날 플로인을 돌려보내고, 그 다음날 엘프회의를 열어서 플 로인에게서 받은 물건을 데이그랜님께 전달하는 게 옳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랬겠지." 데이그랜은 이제 이야기를 빨리 들으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체념하여 대꾸했다. "그래서 그 다으날 저를 배웅하는 잔치를 다시 열고, 잔치가 끝난 다음 행장을 갖춘 후 이틀 전에 이곳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휴우, 서둘러 잔치를 여느라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서둘러 본적은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그래, 그랬을 거야. 당연히 눈썹이 휘날리도록 서둘렀을 테지." 데이그랜은 빈정거렸다. "그래서 전달해달라는 물건은 여기 있습니다." 에돈은 품에서 엘프비단으로 싼 물건을 공손하게 내밀었다. 데이그랜은 빼앗듯이 물건을 받아 비단을 벗겼다. 그가 서제국으로 보 낸 것과 똑같이 생겼지만 흑옥이 아닌 자수정으로 된 원반이었다. "너는 물러가 봐라." 데이그랜은 황급히 에돈을 다른 방으로 순간이동시킨 후 원반에 손을 댔다. 그 순간 자수정 원반 위에 영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가 서제국에 보냈던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다만 얄밉게도 그가 만들었던 것보다 조금 더 깨끗한 영상이었다. 카에닌 놈이 저번 의 흑옥판을 의식하고 일부러 더 잘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사실 렌은 카엔이 그 영상을 만들었을 때 '데이그랜의 영상이 500만 화소라면 카엔님의 영상은 800만 화소 정도는 되는 것 같아 요' 라고 평해 카엔을 무척이나 기쁘게 했었다. "흥, 카엔닌 놈! 얄미운 녀석!" 데이그랜은 투덜거리며 영상을 응시했다. 영상은 침대 머리맡에 상체를 기대고 앉아 있는 렌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렌은 그가 동제 국 브림의 황궁에서 보았던 때보다 더 수척해졌지만 눈빛은 더욱 형형하고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힘이 가득 차 있었다. - 데이그랜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렌은 예의바르게 인사부터 했다. - 데이그랜님이 보내주신 메시지는 받아봤어요. 테룬 황제는 지금도 거기 누워 있는 거겠죠? 별일은 없는 건가요? 틀림없이 다시 살릴 수는 있는 거죠? 다급한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다 렌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 스스로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발버둥 치는 데이그랜님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인질을 잡아 위협 하는 건 잘못된 방법이에요. 옳고 그름을 떠나서, 제가 테룬 황제를 구하기 위해 데이그랜님의 레어로 가겠다고 떼를 쓴들 카엔님 이 넘어오겠어요? 연적이 죽어 신이 나면 났지, 테룬 황제를 구하라고 혼쾌히 저를 보낼리가 없지 않나요? 그리고 제가 간들 데이 그랜님이 말한 것 같은 방법으로 시오카를 구할 수 없다는 건 너무나 명백하지 않나요? 데이그랜님은 그저 시오카의 탈피만 도와 주면 된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겟지만, 잠깐 영상으로 비춰진 시오카의 모습으로 찰색해보면 시오카의 문제는 훨씬 더 뿌리가 깊 어요. 탈피가 된다 하더라도 시오카는 결국 죽어버릴 거에요. 제가 보기엔 시오카를 살리기 위해서는 데이그랜님의 모든 마나를 다 쏟아 부어도 모자라요. 그냥 탈피에 필요한 마나로는 한참 부족하단 말이에요. '마나량 불변의 법칙' 을 알고 계시죠? '마나량 제 2법칙' 도 알고 계시죠? 모든 마나는 다른 성질의 마나로 변환되면서 상당 부분이 소실되고 백 퍼센트 완벽하게 전환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데이그랜님이 아무리 저를 매개로 쓰신들 마나는 모자라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전부 다 쏟아 붓고 나면 그건 결국 데이그랜님의 죽음을 의미해요. 윗돌을 빼어 아랫돌을 막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요. 데이그랜님의 죽음은 역시 마나 균형의 붕괴로 이어질 테고요. 그러니 어느 모로 보나 시오카와 용족의 구원은 불가능해요. 데이그랜은 렌의 말에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만약에 렌의 말처럼 시오카의 병세가 너무 깊어 단순히 탈피로 끝나는 문제가 아 니라면, 시오카는 결국 무슨 수를 써도 살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럼 날 더러 어쩌라고!" 데이그랜은 들어줄 사람 없는 허공을 향해 버럭 소리질렀다. 그러나 렌이 다시 말을 시작하자 데이그랜은 곧 정신을 차리고 렌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 제가 절망적인 상황을 굳이 강조한 것은 데이그랜니이 제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이에요. 확신 할 수는 없지만, 데이그랜님이 솔직하게 드래곤의 비밀을 제게 알려주시고 제 의문점을 몇 가지 풀어주신다면, 저는 어쩌면 시오카를 완전하게 고 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니, 시오카뿐만 아니라 드래곤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지나친 희망을 품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작은 가능성은 있어요. 완전한 절망은 아니에요. 데이그랜은 벌떡 일어났다. -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직접 시오카가 있는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카엔님이 꼭 저와 함께 가야 해요. 그러니 저와 카 엔님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한 저는 그리 갈 수 없어요. 그리고 물론 테룬 황제의 목숨도 아울러 보장받아야 되겠지요. 자, 지금 칼자루는 제가 쥐고 있어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떤 방법으로 저와 카엔님과 테룬 황제의 안전을 보장해주실 거죠? 대답을 기다리 겠어요. 그리고 안전이 충분히 보장되었다고 생각되면 그리로 가겠어요 렌은 몰아서 말을 너무 많이 한 게 힘겨운 듯 잠시 헐떡거렸다. 그러다 그녀는 숨을 고른 후 데이그랜을 향해 무척이나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것을 관조하는 듯한 맑고 서늘한 눈빛은 흐릿한 영상 속에서도 선명했다. - 데이그랜님, 저는 사물의 이치가 마치 그물처럼 얽혀 있고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으며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들도 사실은 보 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요즘 들어 점점 깨닫고 있어요. 그 깨달음이 시오카와 용족을 구하는데 도움 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렌이 이해심 가득한 미소를 짓자 데이그랜은 자기도 모르게 매혹되어 영상에 손을 뻗었다. 그순간 렌의 모습이 사라지고 카엔의 모 습니 나타났다. 데이그랜은 화들짝 놀라 손을 잡아 빼며 쳇 하고 혀를 찼다. - 흑룡, 똑똑히 들었지? 나는 이미 렌의 모든 생각을 읽었다. 내가 읽은 대로라면 렌은 정말로 너희 용족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 른다. 그러니 현명하게 행동하기 바란다. 네 대답을 기다리마. 영상은 거기서 끝이었다. 데이그랜은 럭셔리한 소파에 털썩 몸을 누이고 생각에 잠겼다. 그랬다. 그는 렌에게 정명기가 돌아온 그 순간부터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결국 렌이 드래곤을 구원할 방법을 찾아내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의 예감은 이제 실현될 것이다. 과연 그녀가 말해줄 방법이 무엇일까. 뱃속이 당기는 기분이 들 정도로 그는 초조하고 그러면서도 갈망에 찼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다른 드래곤들에게 연락해서 금방 들은 소식을 전했다. 네 드래곤들은 그곳에서 밤을 새워가며 회의를 거듭했다. 카엔은 침대에 누워 있는 렌에게로 다가갔다. 렌은 카엔의 얼굴에 떠오른 복잡한 표정을 보며 의아해했다. "카엔님, 무슨 일이죠?" "데이그랜니 연락을 해왔습니다." "아!" 카엔은 간략히 설명했다. 데이그랜은 결국 렌의 뜻에 따르겠다는 취지의 회신을 보내왔다. 그뿐만 아니라 치유하는 손 라빌을 데 리고 마이리아 시의 엘프 상관까지 직접 왔다. 그곳에서 그는 렌과 카엔을 기다리겠노라고 했다. 카엔의 설명을 들은 렌의 얼굴에 순수한 감탄이 떠올랐다. "정말 교묘하군요. 마이리아 시의 엘프 상관이라니, 게다가 라빌님이라니. 라빌님은 틀림없이 인질인 거겠죠?"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데이그랜 놈은 자신의 안전에 대한 담보로 라빌을 끌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엘프 상관에 자리잡은 이상 여차하면 그곳 지하의 마법진을 통해 마나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원거리 순간이동으로 도망갈 수 있으니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인 거죠." "제가 부탁한 안전보장 부분은 어떤 식으로 해결하겠대요?" "아마 스스로의 몸에다가 금제를 가하려는 것 같습니다. 어떤 식으로 할지는 직접 들어봐야 하겠지만요." "그럼 이제 갈 준비가 된 거네요. 카엔님도 정말로 따라가실 건가요?" 렌이 다짐하듯이 묻자 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안전보장을 받는다 해도 드래곤의 레어는 적진이나 다름없는데, 서제국은 어쩌시고요?" 카엔은 부드럽게 웃었다. "렌,렌은 아직도 내 마음을 잘 모르는군요. 나는 이제 세상에 무서울 것도 괴로울 것도 더 바랄 것도 없습니다. 내가 단 하나 바라 는 것이 있다면 렌과 한순간이라도 더 오래 있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렌을 혼자 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서제국 은……" 카엔은 회한에 잠겨 잠시 말을 멈추었다. "서제국은 물론 뭔가 조치가 필요하겠죠. 아예 지금 말을 해놓는게 낫겠군요." 카엔은 허공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페람, 지금 즉시 내 침전으로 오라. 할 말이 있다. 이왕이면 보프와 플로인도 함께 데리고 오도록 하라." 렌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대체 무슨 말을 하시려고요?" "조금만 기다려요. 곧 알게 될 겁니다." 수상 페람 공작과 개혁부 대신 보프, 그리고 화실 수석 마법사 플로인은 황급히 황제의 침전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뭔가를 예감한 듯 한결같이 굳은 표정이었다. 카엔은 다정하면서도 쓸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모두들 제멋대로 인간 같지도 않은 황제를 섬기느라 그동안 고생했다. 특히 그대들은 그 전의 신하들에 비해 나랑 훨씬 더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고, 심지어 내 얼굴도 직접 보았고, 내가 벌인 여러가지 일들까지 수습하느라 바빴지." "폐하, 황공하옵니다!" 세 신하는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일제히 외쳤다. 카엔은 페람 공작의 마음에서는 '그래, 정말 고생했어! 고생했지! 그렇지만 보람 있었어' 하는 마음을, 플로인의 마음에서는 '고생했어도 보상만 충분하다면야.' 하는 마음을, 그리고 보프의 마음에서는 '폐하께 서 왜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거지? 혹시 뭔가 중대한 변화가 있으려는건가?' 하는 마음을 읽었다. 간단한 말에도 이렇게 제각각의 반응을 보였다. 페람은 충성스럽고, 플로인은 늘 그렇듯이 이해관계를 따지고, 보프는 드러난 사 물의 이면을 보았다. 역시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오묘한 것이다. "렌 덕분에 나는 마음을 열게 되었고, 그대들을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대들은 내게 마음을 속속들이 읽혀서 두렵고 혐오스럽기도 했겠지만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 렌이 말했듯이, 마음을 읽는 것은 그저 한발 앞서 알게 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심으로 누 군가의 마음을 알고자 하면 결국 알 수 있는 것이고, 나는 내 능력으로 그걸 조금 더 앞당긴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래서 내가 알게 된 것은 그대들이 모두 정말 좋은 신하들이고 좋은 사람들이란 것이다. 그대들은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 도 좋다. 내 신하가 되어주어서 고맙다." "폐하!" 여간해서는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플로인마저도 감격해서 외쳤다. 페람은 아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없어져도 그대들이 그럭저럭 잘 꾸려나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게 되었다." 이번에는 렌마자도 깜짝 놀랐다. "카엔님! 무슨 말씀이세요!" 카엔은 렌의 손을 꼭 잡았다. 그는 렌을 안심시키려는 듯한 웃음을 지어 보인 후 다시 신하들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물론 완전히 사라진다는 건 아니다. 그대들이 알다시피 나는 조만간 렌과 함께 남대륙에 있는 흑룡의 레어를 방문할 예정이다. 위 험한 여정이고, 렌은 어쩌면 거기서 숨을 다하게 될지도 모른다." "정말입니까! 렌 아가씨가 죽는다는 말입니까!" 보프가 흥분해서 외쳤다. "그렇다. 나의 렌은 아마도, 아마도……" 카엔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카엔은 필사적으로 담담한 목소리를 짜내서 말을 계속했다. "벌써 몇 년이지? 340년인가? 350년인가? 한 황제가 다스리기에는 너무 긴 세월이 아닌가? 한 마법사의 치기 어린 충동으로 건국한 제국은 내 생각보다 훨씬 커지고 강해져서 이제는 스스로의 생명을 얻었다. 계속 제국으로 남을 수도 있고, 혹은 공화국이 되거나 연합국이 될 수도 있겠지만, 테라미즈넨 제국은 내가 없더라도 계속될 것이다." "폐하!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 신하는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그들은 피가 날 때까지 이마를 땅에 쿵쿵 박았다. 카엔은 가벼운 손짓으로 그들의 행동을 저지했다. "내가 그 긴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얼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대들도 알다시피 그 얼음은 이제 다 녹았다. 내 시간은 다시 흐르고 있고, 나는 다시 내 인생의 무게를 등에 짊어지고 있다. 내가 짊어지고 가기에는 제국은 너무 무거워. 나는 젊디젊은 외모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미 인생의 황혼을 열두 번도 더 지난 먼 옛날의 유물일 따름이다. 난 내 한 몸과 사랑하는 사람만을 감당하기에도 힘겹다. 렌이 내 곁을 떠나면 그 짐은 더욱 무거워질 테지. 렌과 함께 제국을 여행하면서 나는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었다. 내가 있어서는 충분한 변화는 찾아오지 않아. 그러기에는 내가 모두에게 너무 두려운 존재니까. 크게 달라지 는 건 없다. 당분간은 장차 나 없이도 제국이 움직일 수 있게끔 법체계를 갖추고, 각종 시스템을 정비하고, 제국에 대한 진정한 충성심 을 갖춘 자들로 요직을 채워야겠지. 물론 그러한 변화에 대한 황제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음도 만천하에 알려야 할테고, 거기까지는 내가 해주겠다. 그 다음에는 나는 모습을 감추겠다. 사람들은 그 전처럼 내가 변덕을 부려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세월이 더 흐르면 황제 없는 상태에 익숙해질 것이다. 그대들은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상황을 보아가며 적절한 시점에 내가 완전히 사라 졌다는 소문을 조금씩 퍼뜨리도록 하라. 너무 급격한 변화로 세상이 혼란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폐하! 저희 신하들과 백성들을 버리시고 어디로 가시려 하시나이까!" 페람 공작이 울부짖었다. "글쎄, 어디로 가야 할까?" 카엔은 자신 없는 태도로 맥없이 웃었다. "렌이 목숨을 다할 때까지는 렌의 곁에, 그 다음엔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그의 말 속에 가득한 슬픔에 신하들은 모두 말을 잃었다. 렌은 카엔의 마음을 전부 이해했기에 더 가슴이 아팠다. "나는 이틀 후 마이리아 시로 떠날 것이다. 급한 결제는 그때까지 다 올리도록 하라. 이번에 떠나면 그 다음에는 몇 달 후에 돌아 오겠다. 정말로 급히 연락할 일이 있으면 남대륙의 드래곤 레어로 전언을 보내면 된다." "예, 폐하." 신하들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대답했다. 모두 나가고 나자 카엔은 부드럽게, 조금은 애절하게 렌을 바라보았다. 그는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렌, 모든 게 잘 되고 드래곤도 무사히 고치고 렌도 계속 살 수 있게 되면, 그때는 꼭 나와 결혼해줘요." 렌은 활짝 웃었다. "물론이죠! 그럴게요! 사랑해요! 카엔님의 아내가 될게요!" 렌은 카엔의 목을 두 손으로 감고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예정된 죽음 따위는 문제도 아니라는 듯이. 카엔은 가슴 벅찼다. 렌이 승낙하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 렌의 마음속에서 빛나는 순수한 행복은 읽는 것만으로도 감동적 이었다. "고맙습니다, 렌." 카엔은 렌의 귀에 떨림을 담아 속삭였다. "그래서 말인데요, 카엔님." 렌은 야릇한 장난기를 섞어 말을 돌렸다. "네?" 카엔은 렌의 마음을 읽으며 당황했다. "레, 레, 렌, 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청혼도 받았겠다 뭐가 문제에요? 그럼 딱 1파잔만 있다가 다시 제게 와주세요." 렌의 생각을 다 읽은 카엔은 완전히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져서 눈길을 피했다. "아, 저, 나는 너무 바쁜데……" "꼭 와주세요." 렌은 단호하게 말한 후 카엔을 살짝 떠밀었다. 카엔은 여전히 붉게 물든 얼굴을 하고 주저하며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렌은 침대 옆의 협탁 서랍에 들어 있는 약초 두어 종류를 꺼냈다. 그리고 시녀를 불렀다. "저 목욕하는 것 좀 도와주세요. 그리고 실내복 가운 중에서 가장 얇고 안이 다 비치는 걸로 골라주세요. 이왕이면 은보랏빛으로 요. 이 약초는 목욕물에 띄워주세요. 그리고 물 한 컵만 갖다주세요." "예." 시녀는 그림자처럼 조용히 움직여 시키는 대로 실내복과 물을 가지고 왔다. 가운은 엘프비단 중에서도 가장 최고급으로 만든 것이 어서 찢어질 듯 투명하게 얇으면서도 찢어지지 않고 이루 말할 수 없이 부드러웠다. 게다가 눈부신 진보랏빛 레이스로 장식되어 있 었다. 렌은 다시 협탁에서 환약 서너 알을 꺼내 입에다 털어 놓고 물을 마셨다. 일시적으로 몸의 원기를 북돋워주는 약이었다. 평소에는 먹지 않는 독한 약이었으나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저를 목욕탕으로 좀 데려다주세요." "예." 시녀는 다른 시녀 한 명을 더 불러 렌을 양쪽에서 부축하여 욕실로 데려갔다. 그녀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벗고 탕 안으로 들어가자 시녀들은 꼼꼼하게 렌의 머리를 감기고 몸을 씻겼다. 그 전에는 시녀들이 이렇게 도와주는 걸 가급적 사양하려고 했었지만 오늘만은 특별이었다. 목욕이 끝나고 가운을 걸친 후 허리띠를 여미자 모처럼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아까 먹은 환약 기운 덕분인 것 같기도했다. 렌 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거울 앞에 섰다. 수척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봐줄 만 했다. "고마워요. 간단한 간식거리와 포도주를 가져다주시면 좋겠어요." 시녀들이 부탁한 것을 쟁반에 담아가지고 왔다. 렌은 더 필요한게 없나 확인한 후 시녀들을 물렸다. 그리고 침대 위에 비스듬히 나 름대로 요염하게 누워 카엔이 오기를 기다렸다. 카엔은 시킨 대로 정확히 1파잔 뒤에 방으로 왔다. "렌, 나는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아프고 연약한데. 절대 안돼요!" 렌은 장난기 어린 얼굴로 카엔을 쳐다보다가 결국 푸웃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분이 목욕은 왜 하셨는데요!" 렌은 카엔의 긴 은보랏빛 머리카락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물기를 가리키며 배를 잡고 웃었다. "아, 이런 실수를……평소엔 깔끔하게 잘 말리는데…… 오늘은 너무 당황스러워서……" 카엔은 더듬거렸다. "아하하하!" 렌은 웃음을 터뜨리며 카엔의 목에 팔을 감았다. "카엔님, 좋아요. 그럼 우리 일단 여기 앉아서 이야기나하죠." 렌은 몸을 조금 왼쪽으로 뒤척여서 침대 오른쪽에 카엔이 앉을 만한 공간을 만들었다. 카엔은 이불을 걷어내고 베개를 세워 렌 옆 에 기대앉았다. 그는 태연하려 애썼으나 렌이 입은 얇디얇은 실내복 사이로 보이는 우유빛 속살이 자꾸만 눈에 들어와 도저히 냉정 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던 렌은 애잔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카엔님, 제가 살던 그 세계에서는 처녀나 총각이 죽으면 너무 한이 많아 편안히 승천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요?" 카엔은 가슴이 아파져서 눈살을 찌푸렸다. "네. 그래서 그 요절한 처녀나 총각은 처녀귀신, 총각귀신이 되어 이승을 떠돌면서 멀쩡한 다른 처녀나 총각에게 붙기도 하고, 사람 들의 정기를 빨아먹기도 하는 악귀 노릇도 한다고요.그들이 그 엄청난 한을 다 소진하기 전까지는 정처 없이 구천을 떠돈다고들 생 각했어요. 그래서 일찍 죽은 처녀, 총각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의 영혼이 그렇게 되는 걸 막기 위해서 영혼결혹식을 올려주었어요. 정식으로 중매인을 보내고 납폐를 하고 사주단자가 오가고 성대한 결혼식도 치렀지요. 다만 신랑 신부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붉은 비단으로 장식된 종이인형이었지만요. 그렇게 혼인을 맺은 양가는 정식 사돈관계가 되고, 신부는 신랑집의 며느리가 되고, 마 치 그런부부가 정말로 부부의 연을 맺어 알콩달콩 살다가 죽은 것처럼들 여겼지요." 슬픈 이야기였다. 이미 죽어버린 자식의 넋을 그렇게라도 달래야 하는 부모의 심정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그래서 말인데, 저는 처녀귀신으로 죽고 싶지는 않아요." 렌의 말이 너무 가슴 아파 카엔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죽을 때 한이 남으면 안 되잖아요. 해본 사람들 말로는 거시기 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다는데, 못해보고 죽으면 억울하잖아요. 물 론 상당수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 게 잘 하는 건지 잘 모르고 엉터리로 하기도 하지만,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제대로 잘 하면 이 것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대요. 저는 의학 공부를 하면서 관련서적도 많이 읽어보았기 때문에 간접지식만은 빵빵하답니다." 렌은 웃음을 띤 채 카엔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카엔은 정말로 당황해서 뭘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렌의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떠 오르는 적나라한 '간접지식' 들은 간접지식 답게 실제보다도 더욱 자극적이어서 읽지 않을래야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렌, 나는…… 그러니까……" 카엔은 계속 더듬었다. "카엔님,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차 있어요 모든 생명은 너무 약해서 정말로 쉽게 죽어버리죠. 하지만 생명은 다시 끊임없이 태어남 으로써 그 끝없는 죽음을 극복해요. 죽음을 극복하는 것은 사랑이에요. 제게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렌은 간절하게 말했다. "혹시 너무 마르고 볼품 없어져서 안고 싶은 마음조차 안 드는 건 가요?" "그럴 리가요!" 카엔은 버럭 소리지르며 부인했다. "그럼 제 아름다움을 찬양해 보세요." 렌은 빙긋 웃으며 요구햇다. 카엔은 당황하다가 목을 가다듬고 엄숙하게 말을 시작했다. "렌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역시 영혼입니다. 렌의 빛나는 영혼은 내가 지금까지 본 영혼 중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 영혼 이 날 사랑해주는 나만의 것이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렌의 눈동자." 카엔은 손가락으로 렌의 눈꺼풀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 "이 눈동자는 그 아름다운 영혼을 여지없이 드러내죠. 따뜻하고 다정하면서도 신념에 차서 흔들림 없는 눈동자. 내가 맨 처음 렌을 보고 반한 것도 이 눈동자 때문입니다. 전에는 슬픔이 그렁그렁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평온하고 행복해 보여요. 어떻게 그럴 수 있 을까." 카엔의 손길은 렌의 입술로 내려갔다. 렌은 묘한 떨림이 온몸으로 번져가는 것을 느꼈다. 카엔 또한 마찬가지였다. 욕망이 갑자기 치솟아 올라 눈앞이 흐려졌다. 눈앞의 소녀를 와락 품에 안고 완전히 그의 것으로 하고 싶다는 충동이 그의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는 용케 그것을 억누르고 말을 계속했다. "이 입술, 역시 나의 것인 그대의 입술. 내게 무한한 사랑을 전해준 그대의 입술." 카엔은 결국 스스로를 억제하지 못하고 렌의 입술에 그의 입술을 갖다 댔다. 렌은 자신의 입술을 열어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온기 와 사랑이서로의 입술에서 입술로 전해지고 숨결이 거칠어졌다. 카엔은 이제 더 이상 치솟아 오르는 욕망을 참지 못했다. 그는 입고 있던 가운을 벗어던지고 렌이 입은 얇디얇은 가운의 허리띠 매 듭을 허겁지겁 풀었다. 렌은 카엔이 떨리는 손으로 매듭을 풀다 몇 차례 실수하자 가볍게 웃으며 매듭을 푸는 걸 도와주었다. 마침내 렌의 나신이 드러났다. 희미한 침실의 조명을 받은 렌의 몸은 무척 마르고 가녀려서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카엔은 그녀의 모습이 이 세상 어느 여자보다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동물적인 소유욕이 솟아올랐다. 그의 눈빛을 보자 렌은 조금 전까지의 용감함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마음을 채우는 것을 느꼈다. "무서워요." "그럼 이제 그만할게요." 카엔은 렌의 마음을 황급히 말했다. 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오늘이 아니면 안되요. 이제드래곤의 레어로 가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요." 렌의 말에 카엔은 기다렸다는 듯이 렌의 몸 위로 자신의 몸을 기울였다. 엘프비단처럼 결이 고운 렌의 살결에 그는 뭉클해졌다. 그 는 렌의 손에, 가슴에, 발에, 배에 키스했다. 마침내 이제그는 그녀를 가지는 것이다. 그는 감격에 차서 렌의 몸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은 무척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했다. 그는 렌의 마음을 읽어가며 렌이 무서워하지 않을 정도로만 렌의 몸을 만졌다. 몸 구 석구석의 감각이 점점 깨어났다. 그의 손길이 정말로 렌의 몸을 서서히 지배해가고 있는 죽음을 쫓아내고 삶을 다시 불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서로의 열기가 서로에게 전해지고 입술과 입술이 만나 숨결을 나누었다. 렌 또한 이제는 격정에 휩싸여 가녀린 두 팔을 카엔의 목에 휘감고 그의 뺨과 목과 눈꺼풀에 정신없이 키스했다. 렌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카엔의 몸을 밀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몸을 내맡겼다. 카엔은 감격하여 조심스럽게 렌과 하나가 되었다 "아!" 렌은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냈다. "사랑합니다, 렌. 내 목숨보다도 더." 렌의 몸에서 긴장이 풀어졌다. 고통이 서서히 사그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카엔은 안심했다. 그는 렌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참고 그녀의 몸을 다시 부드럽게 애무했다. 어느 순간 렌은 미묘한 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카엔은 더욱 정성들여 노력했다. 렌의 얼 굴에 소녀가 아닌 여자의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렌은 평생 처음 느껴보는 쾌감이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사랑해요, 카엔님!" 그 순간 카엔도 렌의 안에 자신의 생명을 쏟아냈다. 몰입과 고통과 열락의 영원 같은 찰라가 지나갔다.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그의 온몸을 채웠다. 이 순간을 위해 그는 그동안 존재해왔던 것 같았다. 카엔은 흐느꼈다. 한없이 서 럽게, 기쁘게 울었다. 렌도 함께 울며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한참 만에 둘은 기진하여 침대에 누웠다. 그들은 조용히 서로의 숨소리를 들었다. 카엔은 벌떡 일어나 렌의 몸 아래 깔려 있던 실내 복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역시나 붉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뭐하시는 거예요?" 렌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카엔은 감격과 미안함에 차서 대답했다. "아, 렌, 많이 아팠죠? 여기 피가 남아 있습니다. 보존마법을 걸어 황실의 국보로 남겨야겠어요." 렌은 실내복에 남은 핏자국에 보존마법을 거는 카엔을 황당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보존마법이라고요? 어휴, 못말려요.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말을 타거나 격렬한 운동을 하다 보면 저절로 찢어지는 거란 말 이에요!" 종알거리던 렌은 문득 무척이나 쑥스럽고 부끄러워져서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 위까지 뒤집어썼다. "렌, 갑자기 왜 그래요? 이미 우리는 함께 사랑을 나눈 사이인데." 카엔은 넉살 좋게 웃으며 렌의 곁에 누웠다. 빙긋 웃는 카엔의 얼굴이 얄미워진 렌은 카엔을 당황하게 할 만한 질문을 궁리했다. "카엔님, 지금까지 몇 명하고 해본 거죠?" "아, 렌, 저기……" 카엔은 얼굴이 새빨개져 더듬거렸다. "카엔님, 무지 잘 하시던데, 어디서 배우신 거에요?" "아, 그, 그러니까……" 카엔은 계속 더듬거리다가 결국 항복했다. "다른 걸 물어보면 안 되나요? 뭐든지 대답해줄 테니까……" 렌은 싱긋 웃다가 곰곰 생각에 잠겼다. 카엔은 렌의 생각이 흘러가는 걸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 "30년 전 나와림 사건은 대체 뭔가요?" 카엔은 렌이 무척이나 오래 이 질문을 할 기회를 기다려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긴 한숨을 지으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코엘이라는 나와림이었습니다. 어리고 순진하고 세상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는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습니다.그 영혼 은 놀랄 정도로 내 첫 친구와 닮아서 나는 숨이 멎을 정도로 놀랐었죠." "첫 친구라면, 350년 전 카엔님으로 하여금 이 제국을 건국하도록 이끌었다가 나중에는 카엔님을 배반했던 그 친구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렌은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카엔이 순전히 심심풀이로 그 나와림 안딘을 미치게 했다고 믿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카엔이 하는 얘기를 듣자마자 사정이 단순하지 않았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내 친구는 나에게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인간의 정을 알려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우정은 어디까지나 내 비밀을 알기 전까지였 습니다. 그는 내가 인간의 마음을 자유자재로 읽고 조작하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내게서 돌아섰습니다. 그가 비밀을 알게 된 동기는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무심코 내 부모님과 출생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을 내보인 적이 있는데, 그는 그걸 기억하고 나를 위해 부모님을 찾아줄 생각을 한 겁니다. 차라리 내가 알았다면 못하게 막든지 정신조작이라도 했을 텐데, 나는 그때 전장에 있었고 그는 내 곁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뭘 하고 있는 지 몰랐습니다. 내 친구는 용케 내 부모님을 찾아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들에게서 들은 것은 내가 얼마나 지독한 괴물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어 그 이후의 내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그가 발견한 것은 더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인간의마음을 조작하다가 미치게 했다든지, 미즈넨 산맥에 몸을 숨기면서 지나간는 사람들을 붙잡아 실험용으로 썼다든지, 내가 그동안 숨기려고 애써 왔던 비밀을 그는 생각보다도 훨씬 쉽게 알아냈습니다. 아마 내가 그를 지나치 게 믿고 개인적인 일을 무심코 너무 많이 털어 놓았던가 봅니다. 그는 엄청나게 고민하다가 결국 나처럼 위험하고 비인간적인 존 재에게 서대륙을 맡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건 그 나름대로의 정의감이었습니다. 그는 전에 말했듯이 때마침 접근해 온 말틴의 시장에게 내 비밀을 알리고 내 부모님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그 배반의 결과 말틴은 황제의 저주로 소멸하게 되었던 거고요." 렌은 카엔의 뺨을 쓰다듬었다. 카엔은 그녀의 가벼우면서도 사려 깊은 손길에 위안을 받았다. "어쨌든 코엘을 만났을 때 나는 정말로 놀랐습니다. 내 친구와 그렇게 쌍둥이처럼 닮은 영혼을 지니고 있다니, 나는 심지어 그가 환생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외모는 달랐지만요." "제가 살았던 세상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환생을 믿었어요." "그래요. 이 세계에서도 그렇지요. 한 번의 생으로는 그 엄청난 기쁨과 슬픔과 고통과 회한을 어찌하기에 부족하니까요. 어쨌든 나는 코엘을 보자 오랜 옛날 내 친구에게 품었던 애증이 다시 살아나는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를 나와림 안딘으로 임명해서 내 곁에 두었습니다. 그에게는 내 얼굴도 보여주고 죄 없고 사소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이번에는 잘 될지도 모른다, 그는 처음부터 내가 마음을 읽는 황제라고 알고 있고 내 치세 하에서 나고 자랐으니 선입견 없이 내게 마음을 열어줄지도 모른다 고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어쩌다가……" "그에게는 약혼녀가 있었습니다. 그가 몹시도 사랑하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였습니다. 나는 그를 위해 몰래 그 약혼 녀의 마음을 읽어보았습니다. 그 결과는 끔찍했습니다. 그녀는 궁중에 흔하고 흔한 귀족 영양, 그러니까 모습은 장미꽃처럼 아 름답지만 마음속은 시궁창처럼 더러운 그런 계집이었습니다. 나는 고민하다가 코엘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렇지만 코엘은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나를 비난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저를 독점하고 싶으신 거죠! 제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거죠! 폐하께서는 왜 사람의 선의를 믿지 않으시는 건가요?' 하고 그는 외쳤습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약혼녀를 내 침전에 데려다 코엘 앞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그 약혼녀의 마음을 가리는 장벽을 제거하고 그녀로 하여금 자신 의 추한 마음을 고스란히 직면하고 다 토해내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한 건, 글쎄요. 한편으로는 내가 옳다는 걸 증명하 고 싶었고, 또 한편으로는 내가 코엘에게 그다지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데 대해 질투심을 느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예상했던 것처럼 마음속에 가득한 더러움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고는 미쳐버렸습니다. 자기 안의 추악함을 직면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쳐버립니다. 인간이 억누르고 있는 마음속의 추악함은 상상 이상입니다. 다들 아닌 척하고 있을 따름이지요. 그 아닌 척할 수 있다는 게 또 인간의 강함이지만요.코엘은 자신의 약혼녀가 미쳐가는 모습을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그 또한 미치기 직전이라는 건 알았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코엘이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은 데 대한 배신감으로 나 또한 반쯤은 이성을 잃었으니까요. 코엘은 넋이 나간 자기 약혼녀를 끌어안고 줄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바보같이 약혼녀의 추악 한 이야기를 듣고도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를 원망했습니다. 내가 원망하려면 그녀를 원망하지 왜 나를 원망하 냐고 분노에 차 묻자 그는 독백처럼 말했습니다. 나는 바보라고,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면서도 정작 인간의 마음은 하나도 모르는 지독한 바보라고요. 사람을 사랑하는 건 그 사람이 악하고 착하고를 불문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거는 건데, 그건 온 전히 자신이 짊어져야할 짐인데, 왜 허락도 없이 끼어들어 자기의 사랑을 망쳐버렸느냐고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게 물었습니다. 사람을 사랑해본 적이 있냐고요. 나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른다. 앞으로도 아마 죽을 때까지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자 코엘은 쓰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폐하는 그럼 죽은 거군요. 죽어버린 거예요. 원래의 카엔이라는 사람은 이미 오래 전에 죽고 지금 여기 있는 폐하는 허깨비에 불과한 거군요. 그는 그렇 게 거듭 되뇌었습니다. 그러면서 미쳐버린 약혼녀의 얼굴을 한없이 쓰다듬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의 눈에서는 총기가 사라지고 그는 이유도 모른 채 마지막으로 입에 올렸던 '황제는 죽었어' 라는 말만을 계속 되풀이했습니다. 그는 영영 제정신으로 돌아 오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가 평생을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살 수 있도록 돌봐주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꼭 내 친구를 두 번 죽인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내가 가까이 하는 모든 사람들을 망쳐버리는 것 같은, 영원히 저주받은 것 같은 기분에요. 그래서 나는 모든 정무에서 손을 떼고 도서관의 그곳에서 의미없는 세월을 흘려보내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저를 만났죠." 렌은 탄식처럼 속삭였다. "그래요. 렌을 만나서 사랑하게 된 지금, 나는 왜 코엘이 날더러 바보라고 했는지,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했는지 전부 이해합니다. 코엘이 말하고 싶은 건 그런 거였을 겁니다. 어차피 인간의 마음은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사람을 사랑하 지 않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것. 사람이 사람의 속을 모르는 이상 타인을 사랑하는 데에는 위험부담과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지 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 어떤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든 간에 사랑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거라는것. 그걸 나는 렌을 만나고 나서야 배웠습니다. 렌을 잃는 고통에 괴로워하면서도 나는 렌을 사랑함으로써 무한히 행복하니까요." 카엔은 다시 한 번 렌을 품에 안았다. 둘은 부드럽게 키스했다. 조금 전 렌의 몸을 가질 때의 감동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 그가 겪은 가장 행복하면서도 슬픈 순간이었다. 그의 품에서 렌의 숨소리는 조금씩 가늘어졌다. 조금 전의 격정으로 뺨에 남았던 홍조는서서히 희미해지고 렌의 얼굴은 전보다 도 더 창백하게 변했다. 그는 렌이 마치 이대로 죽어버릴 것 같아서 렌의 뺨을 찔러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닿은 부분은 잠시 빨갛게 되었다가 금방 원래의 색으로 돌아갔다. 렌이 잠결에 '우웅' 하고 칭얼거리는 것을 보고서야 그는 겨우 마음을 놓았다. "렌, 그대는 오늘이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우리의 첫날밤이었지만 마지막 밤은 아닐 겁니다. 우리 앞에는 수많은 또 다른 밤들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렌은 다시 건강을 찾을 거고,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거고, 나와 결혼해서 내 아이를 낳고 나와 함께 늙어 갈 겁니다. 렌이 건강해져서 무사히 돌아오면 우리 온 제국이 다 깜짝 놀랄 정도로 화려한 혼례식을 올릴 겁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죽음의 신조차도 내게서 렌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할 겁니다." 그는 속삭였다. 렌의 알몸이 그의 몸에 닿을 때마다 그는 안도했다. 그는 렌의 손을 꼭 잡은 채 잠이 들었다. <<<<<<<< 드래곤의 레어로 >>>>>>>>>> 겨울의 마이리아 시는 전에 왔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이번 겨울은 여느 때와 달리 추운데다 눈이 많아서 웬만해서는 눈이 오지 않는 마이리아 시에도 흰 눈이 쌓였다. 적갈색 건물 위에 쌓인 흰 눈은 동화처럼 환상적이었다. 콜레라, 아니 푸른 죽음이 휩쓸었 던 지난 여름은 먼 옛날의 악몽처럼 느껴질 따름이었다. 날은 추웠지만 시내에는 활기가 감돌았다. 새로 행정부시장이 되어 사실상 시의 전권을 넘겨받은 츠바이아 데 밀리트가 시정을 전면적으로 개혁한 덕분에 오랫동안 정체되어 왔던 마이리아 시는 점차 달라지고 있었다. 순간이동으로 마이리아 시 외곽에 내려선 카엔과 렌, 플로인은 시청에 들르지 않은 채 미리 대기시켜 놓은 마차를 타고 조용히 엘 프 상관으로 향했다. 몸이 허약해져 추위를 쉽게 느끼는 렌을 위해 카엔은 렌이 입은 은여우 코트에 빈틈없이 방한마법을 걸어주었지 만, 그것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는 자신의 팔로 렌을 거의 감싸다시피 했다. 그들은 말없이 엘프 상관으로 들어섰고 엘프들은 굳은 표정을 한 채 역시 말없이 그들을 안내했다. 눈치없는 엘프들이지만 지금 자신 들의 귀빈실에 머물고 있는 것이 흑룡이고 그가 자신들의 동족인 라빌을 인질로 잡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전에도 한 번 와본 적 있는 귀빈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친숙한 엘프식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폭신한 카페트가 깔린 바닥 위에 여기저기 커다란 쿠션이 놓여 있고, 데이그랜과 라빌은 각기 적당한 쿠션 위에 비스듬히 누워 군것질을 하고 있었다. 예상과 다른 긴장감 없는 풍경에 렌은 휘청했다. 라빌은 반갑게, 하지만 슬프게 웃어 보였다. "렌님, 이렇게 되었네요. 데이그랜님께서 저를 강제로 데려오시는 바람에…… 인질 노릇을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죄송해요. 렌님 이 아프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수척해지다니…… 제가 해드릴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너무나 죄송해요." 라빌의 착한 눈에 슬픔이 그렁그렁 맺혔다. 렌은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꼭 잡았다. "미안합니다, 렌. 이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저 정도의 담보도 없으면 렌이나 카에닌 황제가 친히 마이리아 시까지 와줄 것 같지 않 아서 그랬어요. 아무리 나라도 적진 중의 적진인 테라미즈 시까지 가는 건 무리여서…… 라빌은 여기서 쉬다가 때가 되면 가고 싶 은 데로 가라고 하죠." 데이그랜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카엔은 뭐라고 쏘아붙이려다가 그냥 참았다. 어쨌든 미이리아 시도 서제국 영토이니 여기까지 기어들어왔다면 녀석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남대륙에서의 나와 렌의 안전은 어떤 식으로 보장할 것이냐?" 카엔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쌀쌀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데이그랜은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아, 카에닌, 나도 네 마음을 안다. 렌을 절대로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싶다는 거겠지? 얼마 남지 않은 렌의 목숨마저 내놓으라고 떼 쓰는 내가 미워 죽겠지? 하지만 할 수 없어. 나라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카엔은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 그러자 데이그랜은 렌에게 반문했다. 이번에는 무섭도록 진지한 태도였다. "렌, 그 전에 묻겠습니다. 정말로 시오카를 고칠 수 있는 겁니까? 나는 안전보장을 위해 내 목숨을 걸겠습니다. 렌도 그만큼 내게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렌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치료사에요. 환자를 직접 제 눈으로 보기 전에는 어떤 확신도 드릴 수 없어요." 카엔은 렌의 고지식함에 혀를 찼다. 적당히 맞장구 쳐주고 상대가 원하는 대답을 준 후 안전보장부터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그 렇지만 데이그랜은 렌의 대답에 오히려 만족했다. "그래요, 역시 렌이군요. 언제나 진실만을 말해주니 렌의 말은 믿을 수 있어요. 그럼 바꿔 묻겠습니다. 시오카를 고칠 가능성은 있는 겁니까?" 데이그랜의 질문에 렌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반문했다. "데이그랜님, 드래곤은 한참 동안 동면했었죠? 그것도 잠시도 아닌 아주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인간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나 긴 시간 동안 동면했었죠?" 데이그랜은 깜짝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동면에 들어간 용은 더도 덜도 아닌 딱 다섯 마리였죠? 드래곤의 수가 다섯을 넘는 경우도 있지만, 진정한 드래곤의 힘은 오로지 다섯 용에게만 집중되는 거지요?" "맞아요." "드래곤은 교접 없이 혼자서 알을 낳지요?" "맞습니다." "이 모든 게 드래곤을 고치는 초석이 될 거에요. 제가 시오카와 다른 드래곤을 관찰하고, 아직 남은 몇 가지 의문에 대해 답을 찾아 내고 나면요." 렌의 눈에는 환자를 치료하려는 의사와 진실을 밝히려는 과학자의 의지가 함께 빛나고 있었다.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눈이었다. 데이그랜은 렌이 치료의 가능성을 상당히 높게 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치료에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까지도 걸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저런 눈빛 앞에서 계산이나 꿍꿍이나 음모 따위를 따지고 있는 것은 너무나 무례한 일이었다. "그래요, 렌. 렌의 말을 믿겠습니다. 그리고 렌이 하자는 대로 하겠습니다." 렌은 데이그랜에게 감사의 미소르르 던졌다. 데이그랜은 엄숙하게 말했다. "렌과 카에닌과 테룬의 안전보장을 위해 내가 생각해낸 방식은 이겁니다. 어떤 마법으로도 깰 수 없는 금제를 내 스스로의 몸에 가 하겠습니다. 그 금제는 렌이 남대륙으로 이동한 순간 작동하기 시작해서 모두가 남대륙을 떠날 때까지 유지됩니다. 그 금제가 걸려 있는 동안 렌이나 카에닌 녀석이 원하기만 하면 둘은 언제라도 내 목숨을 빼앗을 수 있게 됩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현재 힘을 유지하고 있는 드래곤은 나밖에 없으니, 그 금제는 사실상 드래곤 전체의 목숨을 속박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렌이 드래곤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이상, 나도 내 목숨을 내걸겠습니다. 어때, 카에닌, 이 정도 안전보장이면 충분하지 않나? 내가 얼마나 필사적인지 잘 알겠지?" 카엔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어떤 식으로 절대 깨지지 않는 금제를 가한다는 거지?" 데이그랜은 옷자락을 헤치고 흠 하나 없이 미끈한 가슴을 드러냈다. 그는 가슴에 손을 대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손가락이 서서 히 가슴 속으로 들어갔다. 데이그랜은 고통을 참으며 심장을 헤집고 엄지손톱 크기 정도의 살점을 떼어내었다. 엄청난 마나의 상실 로 상당한 타격이 왔지만 데이그랜은 흔들리지 않았다. 심장 조각은 검푸른 빛으로 빛났다. 데이그랜은 입 속으로 뭔가를 외우며 심장 조각을 공중에 띄웠다. 검푸른 빛은 순간적으로 팟 하고 빛나다가 렌과 카엔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심장 조각은 붉어진 채 허공에 잠시 떠 있다가 스르르 사라졌다. 데이그랜은 창백하게 질려서 다시 쿠션위에 누웠다. "아까의 심장 조각은 내 심장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마나의 자취는 그대로 그대들의 몸속으로 들어갔으니, 이제 렌이나 카에닌이 정신을 집중해서 내 죽음을 강렬히 원한다면 나는 그 즉시 죽은 목숨입니다. 장거리 순간이동을 하려면 마나가 좀 진정되어야 하니 조금 쉬도록 하죠." 카엔은 금방 데이그랜이 펼친 마법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기에 침묵을 지켰다. 그는 정말로 데이그랜이 이렇게까지 하리라고 는 예상하지 못했다. 라빌도 멍한 표정으로 모두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드래곤이 자기 생명을 인간에게 맡긴다는 건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데이그랜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당장 죽는 것도 아니니 모두들 너무 그러지 마요." 조금 지나자 그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라빌, 너는 여기 남아서 엘프놀이나 하다가 나중에 너 가고 싶은 데로 가렴." 데이그랜의 말에 라빌은 울상을 짓다가 힘없이 도로 드러누웠다. 렌의 안전이 걱정되었지만 따라가겠다고 떼를 쓸 상황은 아니었다. 얼마 지나 마나가 회복된 데이그랜은 앞장서서 지하의 마법진으로 내려갔다. 카엔과 렌은 조용히 따라갔다. 데이그랜과 카엔의 마 법력이라면 굳이 마법진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지만 마법진이 있는 곳은 그 자체로 마나가 안정되어 있어서 이동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카엔과 데이그랜 둘 다 경쟁하듯 수월하게 대륙간 초장거리 순간이동을 해내서, 렌은 별로 멀미도 없이 순식간에 남대륙으로 이동되 었다. 마침내 흑룡의 레어에 도착한 것이다. 렌은 물론이고 카엔도 드래곤의 레어에 와본 것은 생전 처음이었기에 둘은 정신없이 데이그랜의 레어를 구경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중앙홀 비슷한 곳이었다. 까마득하게 높은 검은 대리석 돔이 기둥도 없이 천장을 가리고, 그 바로 아래로는 원 형의 대리석 분수(역시 검은색이었다)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물을 뿜어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분수를 장식하고 있는 것 은 흑옥의 드래곤 상이었다. 분수 주위에는 검은 벨벳으로 감싼 카우치와 스톨과 방석이 군데군데 적절하게 놓여 있고 역시 적당한 간격으로 엘프제나 드워프 제, 인간제의 조각품과 미술품들이 배치되어 있어, 엄청나게 넓은데도 불구하고 중앙홀은 전체적으로 아늑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 리고 실내가 모두 검은색이어서 어찌 보면 음울할 것 같지만, 벽에 박힌 온갖 오색 보석들과 정체를 알수 없는 오묘한 조명 덕분에 레어의 분위기는 별이 빛나는 밤처럼 경쾌했다. "렌, 어때요?" 데이그랜은 경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근사해요." 렌은 감탄을 감추지 않으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카엔은 슬그머니 일침을 놓았다. "내 황궁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너무 어둡고 장식들도 아취 없이 난잡하지 않습니까?" 렌은 카엔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아듣고 웃으며 카엔의 옆구리를 찔렀다. "예의 없게 굴지 말아요." 둘의 대화를 엿들은 데이그랜은 킥 웃었다. "뭐 마실거라도……" 데이그랜이 능숙한 집주인처럼 묻자 렌은 고개를 저었다. "테룬 황제는요?" 단도직입적인 렌의 질문에 데이그랜은 웃음기를 지우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벽 한쪽이 스르를 사라지고 문이 나타났다. 그 안으로는 침대에 누운 청동빛의 인영이 보였다. 렌은 안색이 변해 그리고 달려갔다. 테룬은 검푸른 빛으로 변해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숨도 쉬지 않고 심장도 뛰지 않았다. 서양식 진단방법에 의하면 바이탈 사인이 없는 이상 그대로 사망이라고 보겠지만 렌이 정명기를 일으켜 그의 몸에 불어넣자 아주 희미한 생명의 기운이 미약하게 느껴졌다. 정명기가 아니면 포착하지 못할 정도의 기운이었다. "아직 살아 있군요." "그렇습니다." "다시 살릴 수는 있는 거지요?" "물론입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살려줄 겁니다. 혹시 렌이 드래곤들을 고칠 수 없다고 밝혀지더라도 저 녀석은 살려주겠습니 다. 불쌍한 녀석 아닙니까." 렌은 데이그랜의 말에서 진실을 읽을 수 있었다. "저도 최선을 다할게요." 렌은 말하다 말고 하얗게 질려 휘청거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카엔이 번개같이 달려와 렌의 몸을 받아들었다. "너무………피곤해서…… 제가 깨어나면 다른 용을 모두 ………" 렌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채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카엔은 렌은 조심스럽게 근처의 카우치에 눕혔다. 그의 얼굴은 심각해 졌다. 이런 식으로 의식을 잃는 일이 점점 빈번해지고 있다. 정말로 렌의 날은 얼마 남지 않은 걸까? 아직도 믿을 수 없지만, 그녀 는 정말로 죽는 걸까? 카엔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렌을 살펴보려는 데이그랜이 눈에 들어오자 갑자기 울컥한 기분이 치솟아 그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네놈 때문에 렌이 이 고생을!" 데이그랜은 순식간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차가운 비웃음을 띠었다. "렌이 죽는 건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잖아. 왜 나한테 그러는 거야?" 카엔은 멱살을 쥔 손을 힘없이 풀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래, 알아. 너무 뼈저리게 잘 알아. 그녀는 나를 원망하지 않지만, 나는 백 번, 천 번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다." 카엔은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간절하게 물었다. "너희 드래곤들은 인간들이 상상도 못하는 온갖 마법을 알고 있지? 그중에 렌을 살릴 마법은 없는 건가? 내 생명과 바꿔서라도 렌 을 살릴 수는 없는 건가?" 데이그랜은 슬픔을 숨기며 냉정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종족의 발등에 떨어진 불도 끄지 못하고 있어. 뭘 바라는 거야? 그리고 생명을 바꾸는 마법 따위 없다는 건 네 가 더 잘 알잖아? 렌은 자기의 생명력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했지만, 온 세상에 그걸 할 줄 아는 사람은 렌 혼 자뿐인데, 렌이 그 방법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목숨을 자기에게 쏟아달라고 할 리가 없잖아. 동제국 황 궁에 있을 때 렌에게서 얼핏 들었는데, 그 치료법은 아무나 수련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수련하는 데에는 몇 년씩 걸린다는데? 그 리고 이 세계 사람이 그걸 수련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는데? 그 전에 렌은 죽어버릴 텐데? 우리 드래곤들이 렌에게 생명을 구걸하는 걸 방해하지나 말아줬으면 좋겠어. 렌은 너보다는 훨씬 자비심에 넘쳐서, 죽어가는 우리 드래곤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으 니까." 카엔은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렌을 안아들었다. "너희 방은 저쪽이야. 나란히 붙은 방이니까 알아서 고르도록 해." 카엔은 휘청거리며 방으로 갔다. 방은 크고 밝고 안락했다. 렌을 위해 새로 꾸몄는지 이 방은 검은 대리석 대신 진줏빛 비단과 금빛 벨벳과 사랑스러운 소녀상과 생생한 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욕실을 열어보니 거기도 역시 진줏빛과 금빛이었다. 조금 안심이 되었 다. 이런 분위기라면 렌이 잠깐이나마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듯했다. 그는 이불을 걷고 렌을 눕혔다. 그리고 옆방으로 가지 않은 채 렌옆에 누웠다. 그는 지난 이틀 동안 그랬던 것처럼 렌의 손을 꼭 잡았다. 마이리아 시로 떠나기 전까지의 이틀 동안 그는 렌과 세 번 사랑을 나누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달콤하고 간절한 세 번의 사랑이었다. 렌이 단 한 점도 남김없이 그에게 모든 것을 내 맡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그는 무한한 기쁨과 자랑스러움과 애 처러움에 떨었다. 앞으로 다시 렌과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 단 한 번이라도. 그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안타까운 욕구에 괴로워했다. 렌 옆에서 뺨을 대고 잠시 쉬던 카엔의 눈썹이 갑자기 꿈틀거렸다. 그의 눈길이 방 안 여기저기로 향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복도 로 나갔다. "데이그랜! 데이그랜!" "뭔 일이야?" 데이그랜은 렌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깜짝 놀라 순간이동해왔다. 카엔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손님 대접이 엉망이군. 왜 방 안에 카로딘 산 침향이 없는 거지? 그건 기본 중에 기본인데! 그리고 찻잔 세트는 왜 싸구려 프린다인 공국제지? 당연히 테라미즈 산 자기여야 하잖아? 슬리퍼도 엘프제가 아니고, 벨벳커튼 묶는 끈도 미스릴이 아니라 그냥 은이고, 왜 이렇게 하나같이 이등품뿐인 거냐? 내 렌을 편안하고 안락했던 내 황궁에서 끌어내서 이런 허접한 환경에 머무르게 할 수는 없다!" 데이그랜은 입을 쩍 벌렸다. 그도 한 사치한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카에닌 테라미즈넨 황제의 수준에는 도저히 못 미쳤다. 엘프 제 슬리퍼에 미스릴 커튼 끈이라니.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안하다. 구해 오마." 데이그랜을 괴롭히고 나자 카엔은 겨우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다음날 렌이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 데이그랜은 부지런히 다니며 가이레스, 안티니아, 네린, 시오카를 모두 자신의 레어로 데려왔다. 시오카는 말할 것도 없고 가이레스와 안티니아, 네릴 모두 눈에 띄게 약해져 있었다. 시오카는 언제나처럼 마법구에 감싸 허공에 띄 워놓고, 나머지 넷은 데이그랜의 응접실에 놓인 원탁 앞에 앉아 렌이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렸다. "데이그랜, 정말로 렌이라는 소녀가 시오카를, 그리고 우리를 구해줄 수 있다는 거야?" 가이레스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가능성은 있다고 했어. 달리 방법도 없잖아." 데이그랜이 대답하자마자 다시 네린이 차갑게 물었다. "그녀에게 드래곤의 비밀을 전부 가르쳐주어도 괜찮은 건가? 인간들이 어떤 존재인지 너도 잘 알 텐데. 그들은 약속 어기기를 밥 먹듯이 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거라면 뭐든지 이용하는 존재가 아니냐." "네린, 렌은 믿을 만한 인간입니다. 인간들 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요. 제가 여러차례 보아 확인한 사실입니다." 네린은 용족 중 가장 고령이었기에 데이그랜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녀와 함께 온 카에닌 황제는 우리가 전부터 경계해온 자인데, 그건 어떻게 할 거냐?" "렌이 그와 함께가 아니면 여기로 오지 않는다고 해서 어쩔 수 없습니다." "너는 그녀를 여기로 오게 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거는 금제를 가했다면서! 드래곤이 멸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찌 긍지를 잃는 단 말이냐! 그렇게까지 비굴해져야 했느냐!" 안티니아가 곧바로 반박했다. "네린, 그대는 잘못 알고 있습니다. 살아남는 문제에서 긍지 따위는 필요 없는 겁니다." "안티니아, 그대야말로 자비의 청룡이라는 것 때문에 판단력을 흐리는 게 아닙니까? 인간들의 도움을 받기 시작하면 결국 그들에 게 이용당하게 된다는 걸 모릅니까?" 거의 동년배의 고룡인 네린과 안티니아가 팽팽하게 싸우자 분위기는 어수선해졌다. 그러나 렌이 카엔의 부축을 받아 응접실에 나 타나는 순간 싸움은 그쳤다. 모두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대와 불안을 품고 렌을 쳐다보았다. "환영합니다, 렌." 네린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 자리의 용들 중 가장 고룡, 거의 수명을 다한 노령의 용이었다. 딱딱한 인사였으나 어쨌든 몸 을 일으켰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예를 갖춘 셈이었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렌의 반려이신 카에닌 테라미즈넨 황제께도 감사드립니다." 안티니아도 몸을 일으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녀는 네린보다 500년 정도 오리긴 하지만 거의 같은 세대의 고룡이었고, 이 자리의 용들 중에서는 두 번째로 나이가 많았다. "이이는 그냥 카엔이라고 부르셔도 돼요." 카엔이 어두운 표정을 하면서 대꾸하지 않자 렌이 웃으며 나섰다. "그대는 어떻게 드래곤을 고치겠다는 것입니까?" 짧은 인사가 끝나자마자 네린이 엄숙하게 물었다. "먼저 여러분들의 기운을 차례로 느껴봤으면 좋겠습니다." 드래곤들이 주저하자 먼저 데이그랜이 일어났다. "자, 렌, 나부터요." 그는 아무 거부감 없이 두 손을 렌에게 내밀었다. 렌은 정명기를 가득 일으켜 데이그랜의 두 손을 잡은 채 눈을 감았다. 각렬하고 검은 물의 기운, 제어하는 다른 기운이 모두 희미해져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진 마나, 폭풍 치는 밤바다 같은 위험이 느껴진다. 렌 자신의 기운과 같아 친숙하지만 이제는 너무 강대해져 생소하기까지 한 기운. 이렇게 강한 기운은 오래가지 못한다. "됐습니다." 렌은 그의 손을 놓았다. "다음은 제 기운을 읽으시죠." 안티니아가 일어나 렌 곁으로 왔다. 렌은 다시 눈을 감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원래는 한없이 밖을 향해 퍼져야 하는 생장의 푸른 기운. 그러나 지금은 수명을 다한 고목처럼 비실거린다. 나무 둥치를 휘감은 기 생식물에 나무의 수액을 다 빨아 먹히듯 그녀의 기운은 무언가에 다 빨려버렸다. 원래는 그렇게 나쁘지 않은 상태였을 텐데, 그녀는 자신의 기운을 아낌없이 주어버렸다. 지금도 그녀의 기운은 끊임없이 사오카 를 둘러싼 마나구로 흘러들고 있다. 하지만 바로 흘러들어도 모자랄 판에 그녀의 기운은 먼저 불의 기운, 그 다음 다시 흙의 기운 으로 거듭 변환해야 한다. 기운은 모자라고 시오카에게 닿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다음 순서인 가이레스는 말없이 앉은 채로 렌에게 손을 뻗었다. 활활 타는 불의 기운, 그러나 이제 거의 꺼졌다.한 번 확 타버리고 나니 더 이상 불이 붙지 않는다. 화룡이 아니었다면 기운을 조절 할 수 있겠지만 화룡답게 그는 한 번에 기운을 다 써버렸다. 아마도 시오카에게 기운을 쏟아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의 기운을 조 절하여 흙기운을 북돋는 것은 쉽지 않다. 불은 밖으로 향하는 기운, 흙은 그 기세를 바꾸어 안으로 향하기 시작하는 기운, 그는 익 숙지 않은 일을 행하다가 기운을 소진했겠지. 마지막으로 네린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차갑고 시린 쇠의 기운. 원래는 모든 것을 거두는 날카롭고 준열한 기운이지만, 흙기운의 도움을 받지 못해 이 기운은 거의 쇠잔했 다. 날은 무뎌지고 엄격함은 약해졌다. 그는 흙기운이 사라지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지탱해줄 다른 기운이 없는 상태 에서 서서히 금속의 기운을 빛을 잃고 있다. 렌은 다 읽고 난 후 긴 한숨을 쉬었다. "시오카도 봤으면 좋겠습니다. 잠깐만이라도 마나 보호구를 해제해 주시겠어요?" 안티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나구를 해제했다. 시오카가 천천히 허공에서 원탁으로 내려왔다. 짙은 금발머리를 축 늘어뜨린 그 녀는 열두셋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형편없이 말라 있고 연약해 보여 절로 동정심이 우러날 지경이었다. 렌은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는 시오카의 손을 잡았다. 이것이 살아 있는 생명의 기운인가. 아주 희미한 흙기운이 느껴지지만 너무 약하다. 지금까지 이런 기운으로 생명을 지탱해왔다 는 게 놀라울 정도다. 음의 흙기운은 원래 섬세하지만 이건 이미 죽음의 기운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저 드래곤들은 그동안 깨진 독에 억지로 물을 퍼부은 셈이다. 그녀가 살아 있는 건 기적이다. 렌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안티니아는 힘겹게 마나구를 일으켜 다시 그걸로 시오카를 감쌌다. 시오카는 조금 전처럼 허 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어떻습니까?" 데이그랜이 모두를 대표해서 물었다. "제가 알기로는, 그리고 지금 기운을 느껴본 결과로는, 드래곤의 힘의 비밀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래적으로 매우 효율적인 마나 수집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모든 힘은 집중하면 커진다는 원리에 따라, 여러분은 여러 가지 혼탁한 기운 속에서 순수한 한 종류 의 마나만을 각각의 드래곤에게 집결시켜 그걸 통해 엄청난 마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각각의 집중된 강대한마나는 상호 견제하고 보완하면서 균형을 유지하지요, 맞습니까?" 렌은 머릿속에서 그걸 레이저와 비슷한 이치라고 정리했다. 늘 보는 가시광선, 즉 태양빛은 일곱 빛깔 무지개색이 합쳐져서 하얗 게 빛나지만, 그중 순수한 하나의 스펙트럼만을 골라 증폭시키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렌이 지금까지 본 바에 의하면 마나도 비슷 한이치로 작용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건 조금 공부를 한 인간 마법사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요." 네린은 약간은 비웃는 태도로 말했다. 그러나 렌은 멈추지 않고 다시 질문했다. "드래곤은 그냥 때가 되면 누구와도 교접하지 않고 혼자서 알을 낳지요? 암용이 수룡과 사랑을 나누는 일 따위는 없지요? 암용이건 수룡이건, 혼자서 알을 낳는 거지요?" 렌이 지금 말한 내용은 인간은 물론 엘프들에게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기에 이미 렌의 지식을 알고 있던 데이그랜을 제외 한 나머지 드래곤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다. "그걸 어떻게……" 렌은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드래곤은 생명체를 변화시킬 수 있지요? 한 생명에서 다른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지요?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그냥 마법을 불어넣 는 게 아니라, 생명의 근원 자체를 바꾸는 거지요? 그래서 엘프도 드워프도 소드 마스터도 만들어낸 것이죠?" 거의 아는 사람이 없는 극비사항을 렌이 차분하게 입 밖에 내자 이번에는 데이그랜을 포함한 모두가 경악했다. "그걸, 그걸 대체 어떻게……" "제가 지금 이야기한 내용, 그리고 드래곤이 오랜 세월 동안 동면해왔다는것, 인간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드래곤 전설, 화석에 서 나타난 드래곤의 역사와 생태, 그 모든 걸 종합해보면 퍼즐조각을 맞추듯이 의문은 하나씩 풀립니다. 제가 추측하는 모든 걸 말씀드리기 전에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여러분이 알고 계시는 드래곤의 역사는 어떤 거지요?" 렌의 질문에 드래곤들은 서로 눈길을 교환했다. 마침내 백룡 네린이 입을 열었다. "내가 가장 고룡이고 더구나 정의의 백룡이니까 드래곤 중에서는 가장 명확하게 진실을 전할 수 있겠지요. 렌이 바라는 건 한 점 의 가감도 없는 진실 아닙니까?" "네, 그래요." 네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득한 눈길을 한 채 조용조용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드래곤들이 과거의 모든 걸 아는 건 아닙니다. 확실한 건 10만 년 전 다섯 용이 이곳 남대륙에서 깨어났다는 겁니다. 우리들 은 그 다섯 용을 새로 깨어났다는 의미에서 존경을 담아 '신룡' 이 라고 부릅니다. 드래곤의 세대로는 지금으로부터 약 15세대 전의 일입니다. 신룡들은 자신들의 후손들에게 자신들이 모든 존재 중 가장 위대한 존재이고 6,000만 년이 넘게 잠들어 있다가 비로소 깨 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후손들에레 우리들 드래곤이 그 옛날 이 세상을 지배했던 것처럼 다시금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타고났다 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 말을 믿으시겠죠?" "그럼요. 신룡들께서 후손들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지상에 드래곤보다 더 강대한 생물이 어디 있습니까?" "왜 그렇게 오랫동안 동명했다고 하던가요? 그렇게 오래 동면하는게 가능하기는 한가요?" "마나를 안정화시키고 기후변화가 없는 땅 속으로 들어가면 3,4만 년 정도는 쉽게 동면 할 수 있으니, 같은 원리로 6천만 년이 넘게 동면하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굳어진 테룬 황제를 보았지요? 동면시에 드래곤은 스스로를 그런 상태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신룡들이 동면에 들어간 것은 큰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는데, 드래곤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이야기여서 그런지 자세히는 전해지지 않 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어쨌든 신룡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10만 년 정도만 동면하려고 했는데, 동면기간 조절에 문제가 있어 지나치게 오랜 기간 동안 동면하게 된 것이었답니다." "그럼 계속 잠들어 있다가 하필이면 10만 년 전에 깨어난 이유는 뭐죠?" "그 부분도 자세하게 전해들은 바는 없지만, 어느 초기인간이 드래곤의 레어를 침범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말을 제 전대 백룡으 로부터 얼핏 들었습니다." "초기인간이요? 아, 원인(原人)을 말하는 거군요?" "지금 인간보다는 더 털이 숭숭하고 키가 작고 머리가 나쁜 존재였습니다."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네안데르탈인 비슷한 것이리라. "그들 새로 깨어난 드래곤들은 강대한 마나를 갖추고 있었기에 어려움 없이 세계에 적응해 나갔습니다. 어느 정도 적응하자 알을 낳아 후사도 이었고요. 새로 태어난 드래곤들은 전대 드래곤이 죽는 순간 그들의 능력과 마나를 이어받았고, 다시 그 다음 대의 드래 곤들이 계속하여 지금까지 이 세상을 지배해 온 것입니다." 드래곤이 지금까지 세상을 지배해온 거라는 대목에서 카엔은 눈썹을 꿈틀했으나, 사려 깊게도 빈정거리지는 않았다. "혹시 신룡들의 말을 적어 놓은 기록은 없나요?" "원래 드래곤에게는 말만 있을 뿐 문자가 없었습니다. 인간들이 처음 문자를 만들어냈을 때 우리들은 얼마나 신기해했는지 모릅니다. 그 후 우리들도 인간에게서 문자를 배웠지요. 다만 신룡 중 황룡 오피아가 10만 년 전 자신의 목소리를 마나 저장판에 저장해 놓았 는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도무지 읽혀지지가 않습니다." 렌과 카엔은 시선을 교환했다. "뭐가 어떻게 잘못되었다는 건가요?" "전대 황룡 시오카난이 자신의 레어에서 발견했다면서 제게 보관을 맡겼는데, 시오카난이 사라진 후 혹시나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애써봤지만, 마나가 어그러진 것인지 통 해독이 안 됐습니다." "혹시 그 마나저장판을 볼 수 없을까요?" 데이그랜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볍게 손짓했다. 전대 황룡 시오카난이 마나 저장판을 데이그랜에게 맡긴 이래로 마나 저장판은 줄 곧 이곳 흑룡의 레어에 보관되어 있었다. 마나저장판은 원탁 위로 순간이동되어 부드럽게 놓여졌다. 마나저장판은 원반 모양의 황옥이었다. 카엔이나 데이그랜이 영 상을 저장할 때 쓰던 것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데이그랜이 마나저장판에 손을 뻗자 마나저장판은 치칙거리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념파가 흘러나왔다. 머릿속에서 사념파는 여자 목소리처럼 울렸다. "그래서…… 우리 드래곤은……… 나는…… 충격……… 결국…………………드래곤은……" 소리는 띄엄띄엄 새어나오다가 곧 끊겨버렸다. 데이그랜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보시다시피 이런 상태입니다." "어떻게 더 제대로 들어볼 방법은 없는 건가요?" "없습니다." 그때 카엔이 데이그랜에게 물었다. "저 황옥판을 가져가도 될까요?" "뭐하게? 네 마력으로 해독해보려고? 관둬. 우리 드래곤들도 실패했는데, 네 힘으로 뭘 어쩌게?" "어차피 너희들에게는 무용지물이 아니냐? 그렇다면 내게 저걸 준다고 뭐가 달라지지?" 렌은 둘의 얼굴이 험악해지는 걸 보고 끼어들었다. "웬만하면 카엔님 해달라는 대로 해주세요. 칼자루는 제가 쥐고 있다는 걸 잊으셨나요?" 데이그랜이 피식 웃으며 한발 물러섰다. "좋아, 가져가. 가져가서 목걸이를 만들든 귀걸이를 만들든 맘대로 해." 카엔은 데이그랜이 맘을 바꿀까 두려운 듯 황급히 황옥판을 집어 들었다. "드래곤과 엘프, 드워프의 관계는요?" "그 부분은 지혜의 드래곤이 더 잘 알겁니다. 그의 선대가 주로 한 일이니까요." 네린은 데이그랜에게 이야기의 주도권을 넘겼다. 데이그랜이 이어받아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건 약 4만 년 전에 일입니다. 우리 드래곤이 10만 년 전 깨어났을 때 세상에 살고 있던 초기 인간은 무척 한심하고 어리석은 존재여서 드래곤들은 그들에게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4만 년 전, 갑자기 초기인간들보다 훨씬 영리하고 교활 하고 말만 잘 하는 복잡한 생물, 바로 지금의 인간이 나타났습니다." 크로마뇽인이었다. "그들은 초기인간보다 몸은 약했지만 지능은 훨씬 높아서 순식간에 초기인간들은 그들의 손에 멸종되었습니다. 내 7대조 선대인 지혜의 흑룡은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 인간을 관찰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하고 인간의 말을 드래곤의 언 어로 통역하는 마법까지 개발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한 가장 놀라운 일은 엘프와 드워프를 만들어 낸 것이었습니다." "엘프와 드워프를 만들어냈다고요?" 렌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새삼 데이그랜의 입에서 그 사실을 확인하자 다시 놀랐다. "그렇습니다. 신룡들은 후대 드래곤들에게 드래곤이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주었지만, 후대 드래곤 중 그 런 능력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드래곤은 없었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고요. 그러다가 4만 년 전 선대 지혜의 흑룡이 새로 나타난 인간에게 그 능력을 써볼 생각을 한 겁니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너무나 불완전했습니다. 수명은 삼사십 년도 채 안 되면서 바라는 것은 지극히 많고, 욕심에 차 있고, 능력은 또 지극히 한심하고, 그러면서도 지성은 짐승답지 않게 상당히 발달해서 드래곤 들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복잡한 생각들을 하곤 했습니다. 사실 드래곤의 어휘력은 인간과 상대하면서 부쩍 늘어난 것입니다. 그 지 혜의 드래곤은 지독하게 모순된 인간이라는 존재를 한 번 완벽하게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온 세상을 돌아다니 면서 적당한 인간들을 잡아와 전대 드래곤들이 전해준 대로 생명의 본질을 바꾸는 실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을 바꾸는 건 어떻게 하는 건데요?" 렌은 짐작하면서도 물어보았다. "인간이나 다른 짐승의 생식기가 있는 곳에 마나를 집중하고 원정하는 형질을 갖춘 모습을 상상하면 그런 후손이 태어납니다." 설명한 데이그랜은 멋쩍게 웃었다. "아, 저도 해봤지만 말처럼 쉬운 건 아닙니다. 막상 그렇게 변형을 가한 후 애를 낳게 해보면 머릿속으로 구상했던 것과는 다른 기 형아가 나오는 경우가 훨씬 많지요. 그래도 한 열 번 해보면 한 번 정도는 성공했고, 실험체는 무궁무진했으니까 결국에는 마음먹는 대로 되었습니다. 인간의 수명은 드래곤보다는 훨씬 짧으니까 실험용으로 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원래 훌륭한 실험용 동물 이 되기 위해서는 수명이 짧아야 하고 새끼를 많이 낳아야 하지만, 인간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실험체였습니다. 말을 할 줄 아니 까 실험의 성패가 훨씬 쉽게 드러났거든요. 그가 제일 처음 만들어본 건 드워프였습니다. 인간들이 만드는 조잡한 돌로 된 도구보다 더 근사한 도구를 만들 능력을 지니고 있고 지상에 빨빨거리고 다녀 드래곤의 비위를 거스르는 일도 없으면서 인간들보다 수명도 길 어서 오래오래 드래곤의 하인으로 써먹을 수 있는 그런 생물을 만드는 게 목표였습니다. 몇 차례 실패 끝에 만들어낸 생물은 그의 생각대로 빛을 싫어하고 지하와 광물과 물건 만들기를 좋아하면서 수명도 200년 정도로 월등히 긴 존재였습니다. 다만 실용성에 중 점을 두다 보니 좀 볼품이 없었지요. 드래곤이 다른 생물로 폴리모프하면 그는 그 생물의 미학적 관점에서 사물을 보게 되는데, 인 간으로 폴리모프한 후 드워프를 보면 솔직히 영 아니었거든요." 렌은 생명을 장난감처럼 취급하는 태도에 분노했다. 자기도 모르게 렌은 데이그랜에게 쏘아붙였다. "제가 만난 드워프는 드래곤보다 더 위대하고 더 아름다운 영혼을 지니고 있었어요. 그리고 오히려 드래곤보다 더 이세상의 본질 에 대해 잘 꿰뚫어보고 있었고요. 그대들이 재미삼아 드워프를 만들어냈다 해도 이미 어느 순간 드워프는 드래곤의 손을 떠나 그 대들을 초월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아세요? 그리고 그대들이 한 건 창조가 아니에요!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인 데, 그대들이 한 건 이미 있는 걸 멋대로 변형시켜본 것에 지나지 않아요! 대체 무슨 자격으로 감히 그렇게 생명체를 주물러 댄 거죠?" 데이그랜은 흥분하는 렌을 보며 차분히 대답했다. "자격이라고요? 재미있는 표현이군요. 글쎄요. 우리 드래곤들이 그렇게 한 건 그럴 힘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할 힘이 없으 면 그렇게 안 했겠죠. 그걸로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렌은 당장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숨만 몰아쉬었다. 데이그랜은 웃어넘기고 말을 계속했다. "아무튼 내 선대의 흑룡은 드워프를 만들었을 때의 성공과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더 야심작에 도전했습니다. 인간들이 보기에 감탄할 수밖에 없을 만큼 아름답고 인간들보다 더 지혜롭고 수명도 훨씬 길어서 드래곤의 애완동물로 쓰기에도 적당하고 인간들에 게 지나칠 만큼 있는 그 지긋지긋하고 지독한 욕심도 없는 존재를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미학적인 완성을 피한 것이죠. 역시 몇 번의 실패 끝에 그는 완벽한 성공을 거두어 그들을 엘프라 칭했습니다." 렌이 다시 뭐라 쏘아붙이려 하자 데이그랜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드워프나 엘프나 대단한 성공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내생각에는 그들은 결국 인간들에게 밀려 사라질 것 같 거든요. 그들의 생명력은 인간들의 그 집요한 생명력에는 절대 못 미치니까요. 만들어낸 생명의 단점이랄까." 데이그랜의 얼굴에 떠오른 초연한 표정을 보고 렌은 치를 떨었지만, 지금은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 때는 아니었다. "시오카가 태어나서 저렇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해주세요." 렌이 다시 질문하자 가이레스가 말을 이어받았다. "내가 그 아이를 낳았으니 그 부분은 내가 말하는 게 옳겠지요. 모든 일의 발단은 황룡이 350년 갑자기 소멸한 것입니다." 저들은 카엔이 전대 황룡의 심장을 먹었다는 걸 모르는 걸까? 렌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았으나 카엔은 태연자약했고 아무도 카엔에 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전대 황룡은 정말 이상한 용이었습니다!" 가이레스는 다혈질의 화룡답게 분통을 터뜨렸다. "시오카난이라는 이름의 그 황룡은 명색이 조화의 황룡인지라 툭하면 인간들과 조화를 이루어 보아야겠다면서 인간으로 폴리모 프해서 인간들 속에 숨어들어 살곤 했죠. 그는 350년 전에 급기야 자기 레어를 비우고 미즈넨 산맥으로 가서는 거기서 갑자기 소멸해버렸습니다. 우리는 그가 자살한 게 아닌가 생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창 때의 성룡이 갑자기 죽을 리가 없 지 않습니까? 흥! 드래곤이 자살이라니! 천만다행으로 내가 이미 500년 전에 황룡의 대를 이을 황룡 해츨링 시오카를 낳아 둔 덕분에 급격한 마나의 불균형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오카는 갑작스럽게 성룡으로서 흙의 마나를 감당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겨우 15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때 이른 2차 탈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그녀는 인간형으로 폴리모프한 상태였기 때 문에 그 모습 그대로 탈피의 과정에 접어들었죠. 그리고 계속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우리들은 한동안 별 걱정하지 않았습 니다. 탈피에는 보통 150년 내지 200년은 걸리기 때문에 그 정도 기간은 자연스러운 거니까요. 그렇지만 200년이 넘어도 그녀가 꼼짝하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기운이 약해진데다가 그 영향이 우리들에게까지 나타나자 우리 모두는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내 기운을 일시적으로 증폭시켜 시오카에게 쏟아 부음으로써 그녀의 잠을 깨우는 극약처방을 써보기로 했 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대실패였습니다. 내 기운은 다 소진되어 아직까지 회복되지 않았고, 그녀는 내 기운을 받았음에도 불구 하고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점점 시오카의 기운이 약해지자 결국 안티니아가 자신의 마나를 2차변환해서 시오카의 상태를 유 지시켜주게 되었습니다. 나무의 마나에서 불의 마나로, 다시 불의 마나에서 흙의 마나로 전환하는게 2차변환입니다. 3차변환 이 상으로 가면 변환의 효율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시오카를 도울 수 있는 건 안티니아 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애초에 어리석은 짓만 하지 않았다면 일은 조금 쉽게 풀릴 수 있었을 텐데, 후회해도 소용없지요. 세월이 흐르자 안티니아의 힘도 한계에 부딪혔 습니다. 수시로 데이그랜이 안티니아에게 힘을 보충해주었지만, 2차변환이라는건 굉장히 비효울적인 거라서 데이그랜이 안티니아 에게 아무리 힘을 보충해줘도 안티니아가 그 기운을 비효율적 2차변환을 통해 시오카에게 전하는 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던 겁니다. 시오카가 약해지면서 황룡으로부터 힘을 받아야 금기를 유지할 수 있는 네린도 약해지고, 오로지 시오카의 힘에서 마이 너스의 영향을 받는 흑룡 데이그랜만이 비정상적으로 점점 기운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이제는 정말로 위기감을 느끼기 시 작했습니다. 그때 데이그랜이 말했습니다. 자기가 연구해본 바에 따르면 2차 변환으로 마나를 쏟아 붓는 건 지극히 비효율적인 방식이니 변환 없이 직접 기운을 쏟아 부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낫지 않느냐, 그럼 자기 기운을 시오카에게 직접 전해주어 서 시오카로 하여금 탈피과정을 마치게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적당한 매개체를 찾으면 현재의 시오카의 상태로 볼때 40년만 더 탈피과정을 진행하면 완결 될 것 같다. 그러니 희망은 있다, 그러더군요. 원래 마나는 순리대로 흐릅니다. 변환 없이 바로 나무의 마나를 흙의 드래곤에게 쏘아 보내면 흙의 드래곤은 도움을 받기는 커녕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고, 수룡 쪽에서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중간 단계에 있게 되면 타격은 중화되고 마나는 온전히 상대방에게 전달됩니다. 정말 놀라운 아이디어였죠." 가이레스가 한숨을 돌리는 사이 데이그랜이 쓴웃음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하지만 내가 말한 방식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어떤 생물이 매개체 노릇을 하려면 마나와 섞이지 않는 독특한 기운을 가져야 했 죠. 그렇지 않으면 내가 불어넣은 마나가 그 매개체 안에서 다 섞여 버리게 되고 시오카에게까지 전달되지 못할 테니까요. 또 남 은 탈피과정이 40년은 소요되니까 그 생물의 여명은 40살 이상 되어야 했죠. 그런데 그런 기운을 가진 생물은 이 세계에는 없었 습니다. 나는 내 능력이 닿는 한에서 우리 차원과 인접한 다른 차원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마나를 극도로 일으켜 다른 차원을 살피는 것은 겹겹의 흐릿한 유리창 너머로 바깥을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거의 안 보이지만 가끔 밝은 빛이 지나가면 알 수 있는 그런 거 말입니다. 그것도 순수한 물의 기운이라면 내가 감지할 수 있고 이리로 끌어올 수 있었습니다. 말로는 쉽게 들리겠죠? 하지만 실제로는 엄청나게 정신을 집중해서 몇 시간씩 고생해야 겨우 운동장만한 면적을 살펴볼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그게 말 처럼 쉽다면 내가 왜 이 세계에서 렌을 찾느라 그렇게 고생했겠습니까? 매일매일 열심히 조금씩 찾아나갔지만 이계의 생물들 중 마나와 섞이지 않는 기운을 가진 존재는 없었습니다. 그대도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나는 계속해서 찾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 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마침내 그런 존재를 찾아냈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기운을 지닌 존재였지요. 바로 렌, 그대를 말입 니다." 데이그랜은 감격 어린 눈으로 렌을 바라보았다. "그대의 기운이 물속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쉽게 그대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한 번 찾은 후에는 이제 놓치지 않고 계속 그대를 추 적할 수 있었고요." 물속이라고? 렌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아마도 홍콩의 리펄스 베이에 해수욕을 하러 간 때였던 것 같았다. 주윤발의 별장이 있기도 한 리펄스 베이는 렌의 아파트에서 멀지 않아서 가끔 자오 오라버니와 함께 수영하러 갔었다. "나는 그대를 이쪽 세계로 끌어올 준비를 착실히 해서 다른 용들까지 다 부르고 차원이동마법을 시전했지요. 그대가 차원의 경계 를 넘어오는 순간 나는 그대가 치명상을 입었다는 걸 알고 즉시 그 상태에서 치유마법을 시전했습니다. 원거리 이차원 치유마법이 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하고도 여력이 남아서, 아예 통역 마법까지 함께 시전했지요." "그래서 일이 꼬인 거였군!" 거이레스가 버럭 화를 내자 데이그랜은 자화자찬하다가 자기 발등을 찍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아, 가, 가이레스, 마지막 말은 안 한 거로 하지. 이제 렌의 이야기를 들을 차례가 아닌가?" 데이그랜이 당황하여 말을 돌리자 렌은 빙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아직 의문은 남아 있어요. 황룡이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그 결과가 왜 시오카에게 악영향으로 나타났는지는 조금 더 파고들어가 봐야 할 것 같군요. 원래 전대 용이 죽으면 후대 용에게 악영향이 나타나나요?" 안티니아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부분은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요. 보통 전대 용이 노령에 접어들면 그 대를 잇기 위해 다른 용이 알을 낳지요. 화룡 가이레스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전대 화룡이 칠천 살 내지 팔천 살 정도가 되어 이제 후사를 준비해야 할 때가 되 었을 때, 청룡인 저는 적당한 시기에 알을 낳습니다. 청룡이 낳은 알은 깨어나서 화룡 해츨링이 됩니다. 그게 여기 있는 가이레스 였죠. 아, 참고로 암용이 낳은 알은 수컷이고 수룡이 낳은 알은 암컷이랍니다." 목이 화를 낳고 음과 양이 서로를 낳은 이치였다. "해츨링은 태어나서 100년 정도 지나면 30년 동안 동면하며 1차 탈피를 하여 긴 꼬리를 갖게 되고, 다시 그로부터 200년 정도 지나 면 150년 내지 200년 동안 동면하며 2차 탈피를 해서 날개를 지닌 성룡이 됩니다. 가이레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전대 화룡 이 아직 살아 있는 이상 불의 마나는 모두 전대 화룡에게 모여 있었고, 어린 화룡인 가이레스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어 전대 화룡 곁에 가끔 머물기도 하고 인간세계를 돌아 다니기도 하면서 약한 성룡으로서 천 년 정도를 보냈지요. 그러다가 전대 화룡이 죽 자 그의 마나를 전부 받아들여 진정한 성룡이 된겁니다. 이게 정상적인 용들의 일생입니다. 가끔은 비정상적인 탈피과정을 거치기도 합니다. 3만 년 전쯤에 어느 흑룡이 마나를 탐구하면서 스스로의 몸에 무리한 실험을 하다가 겨우 5,200살에 죽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때 그 흑룡의 대를 이어야 할 해츨링은 아직 1차 탈피에도 들어가지 못한 100살짜리였습니다. 모두 마나의 불균형을 걱정했지만 해 츨링은 즉시 연달아 30년 만에 1차, 2차 탈피를 모두 마치고 완전한 성룡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오카 또한 그렇게 되리라 생각해서 처음에는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안티니아는 당시의 일을 생각하며 긴 한숨을 지었다. "대강 필요한 내용은 다 들은 것 같군요. 지금까지 알아낸 것만으로도 이미 제가 짐작하고 있던 걸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아요.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해보고 내일이나 모레쯤 제 결론을 말씀드리겠어요." 가이레스는 불같이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인간 여자, 얼마나 더 시간을 끌겠다는 건가?" 데이그랜이 그를 잡아 앉혔다. "가이, 진정해. 칼자루는 렌이 쥐고 있다구. 예의를 보여, 예의를. 렌,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잘 압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렌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 일어났다. 카엔도 렌과 함께 일어났다. 방으로 돌아온 렌은 카엔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그 황옥판 안에 우리가 찾는 증거가 들어 있는 거 아닐까요?" "틀림없습니다. 왜냐면 내 심장이 이 황옥판에 격렬히 반응하고 있거든요. 확실히 이 황옥판은 전대 황룡 시오카난과 관련이 있는 겁니다. 이건 단순히 최초의 신룡이 남긴 황옥판이 아닙니다. 최초의 신룡이 남긴 메세지 위에 다시 시오카난이 개입한 겁니다." "해독하실 수 있겠어요?" 카엔은 골똘히 생각했다. "아마도요. 내 생각엔 시오카난이 일부러 이걸 남긴 게 아닌가 싶습니다. 꼭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가 해독하기를 바란 게 아닐까 요? 자신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겠죠. 그러니까 데이그랜에게 맡겼겠지요." "그래요. 그렇다면 해독할 방법도 있을 거에요." 결국 밤새도록 렌은 책상에 앉아 종이와 펜을 끌어당겨 열심히 뭔가를 쓰며 복잡한 생명수 모양 도형들을 그려대고, 카엔은 그 옆 의 소파에서 마나의 강도를 조절해가며 계속 황옥판에 쏘아대었다. 그 밖에서는 데이그랜이 초조하게 새로운 소식을 기다렸다. <<<<<<<<<<<<< 드래곤의 비밀, 베일을 벗다 >>>>>>>>>>> 데이그랜은 몇 번이나 안절부절 못하며 렌과 카엔을 깨우려 하다가 포기했다. 그는 그 둘이 밤새 자지 못하다가 새벽녘이 되어 겨우 눈을 붙인 걸 알고 있었다. 다른 드래곤들은 데이그랜을 계속 다그쳤지만 데이그랜은 잠이 든 인간을 무작정 깨우지 않을 정도의 예 의범절은 있는 용이었다. 결국 둘은 점심때가 넘어서야 일어났다. 데이그랜은 안도하며 모두를 다시 회의실에 모았다. 모두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오카를 살릴 방법은 찾아냈습니까? 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네린이 물었다. "드래곤 여러분의 문제는 다름 아닌 생명의 근원에 연결된 문제입니다. 제 설명을 찬찬히 들으시면 아마 여러분도 납득하실 수 있 을 거에요. 여러분들, 생명 탄생의 비밀을 아시나요?" 막연한 질문에 용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제가 아는 한에서 생명 탄생의 비밀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먼 옛날, 이 세상이 처음 탄생했을 무렵, 세계는 화산과 용암 과 뜨거운 바다와 메탄가스와 끝없이 쏟아지는 비와 번개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새로 태어난 세계는 생명체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뜨겁고 격렬한 바다 속에 번개가 내리치고 그곳에서는 생명의 씨앗 이 탄생했습니다." "대체 그게 우리 드래곤과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는 여기에 세계탄생의 신화 따위를 들으려 모인 것은 아닙니다." 네린이 차갑게 말했다. 렌도 못지않게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기다려 주세요. 제 얘기를 끝까지 들으세요. 그 생명의 씨앗은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닌 그런 존재였습니다. 지극히 단순하고 아 주 작은 정보만을 담고 있었습니다." "정보라고요?" 데이그랜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 이렇게 바꿔서 설명해보죠. 저기 자신을 똑같이 복제해낼 수 있는 마법구 같은 게 있다고 쳐요. 마법구 표면의 무늬, 크기, 등 등 모두요. 그런 마법구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죠?" 데이그랜은 약간 잘난 척하며 대답했다. "음, 일단 그 마법구가 스스로 마나를 모을 수 있도록 마법식을 짜 넣어야 하겠죠. 그리고 그 마법구가 마나를 모아 자기 원래 크기 의 두 배 정도로 커지면 반으로 갈라지도록 하되, 원래 마법구에 짜 넣었던 마법식도 그대로 두 개로 복사했다가 반으로 갈라지도록 해야겠지요." "정확해요!" 렌은 감탄하며 설명을 계속했다. "이 생명의 씨앗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생명의 씨앗을 구성하는 물질이 있는 한편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을 똑같이 만들어 낼 수 있는가에 관한 정보, 그러니까 설계도 같은 것도 들어 있었습니다." "내가 말한 마법구와 똑같이요?" "예, 그 정보는 '유전자' 라고도 불리지요. 그 정보가 들어 이음으로 인해 생명의 씨앗은 생존욕구와 번식욕구를 가지게 되었고, 그 순간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된 것입니다." "아!"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흙과 바다와 번개로부터 생명이 탄생할 수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도저히 그런일은 우 연히 되는 것이 아니므로 창조주의 개입이 있었을 거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저절로 그리 된 거라 하고, 어떤 사람은 이 땅이 아닌 머나먼 우주에서 생명의 씨앗이 날아온 거라고도 합니다. 제가 살던 세상에서는 아직 정확한 해답을 모르는 상태였지요. 그렇지만 그 작고 여린 최초의 생명이 모든 생명의 선조라는 건 대체로 일치된 견해였습니다." "그 최초의 생명은 어떻게 되었지요?" "그 생명이 할 줄 아는 건 살아 있는 것과 자기 자신을 똑같이 만들어내는 것, 그 두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똑같 이 만들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데이그랜이 끼어들었다. "그렇겠지요. 자기 자신을 복사하는 마법구도 그랬거든요. 내가 일부러 손대주지 않으면 한 대여섯 번 복사하고 난 후 맥없이 흩어 져버리곤 했지요. 주로 마나의 부족 때문이었지만, 마법식의 자동복사가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지요." "맞아요. 이 최초의 생명체도 그랬어요. 이 생명체는 먼저 몸집을 키워 그 다음에 둘로 갈라짐으로써 번식했는데, 몸집을 키우기 위해서는 많이 먹어야 했지만 먹을 것이 늘 풍부한 건 아니었고, 또 둘로 갈라질 때 원래의 정보를 두 개로 복사했다가 양쪽에 정확 히 하나씩 나누어야 했지만 그것도 종종 실수가 생겼습니다. 다시 예를 들어보죠. 하나의 마법구로 하여금 그와 똑같은 내용을 담은 마법구를 자동복사하게 하고, 다시 그 마법구에서 그 다음 마법구를 똑같이 자동복사하게 하고, 다시 그 마법구에서 그 다음 마법구 를 똑같이 복사하게 하는 식으로 계속 반복했을 때, 복사가 정확하지 않아 실패했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렌도 알겠지만 마법의 이론상 당연히 처음 마법구와 마지막 마나구가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처음 한 두개 정도 는 똑같겠지만, 거듭거듭 복사하다 보면 조금씩 내용이 달라 지지요. 맨 처음 마나구에 '렌은 예쁘고 총명한 아가씨이다'라고 저장 해놓았다면, 마지막 마나구에서는 '래는 예뿌그 총멍혼 아까시이댜'라고 바뀌는 식이지요." "바로 똑같은 일이 여기 이 최초의 생명체에게도 생겼습니다. 거듭거듭 분열하면서 복사 결과는 조금씩 원래의 생명체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생명체가 가지는 정보는 바로 그 생명체를 행성하는 설계도이지요. 설계도가 달라지니까 갈라져 나온 생명도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이제 최초의 생명체와 똑같이 생긴 수많은 생명체가 있고, 최초의 생명체에게서 갈라져 나왔지만 최초의 생명체와는 조금씩 다른 여러 종류의 생명체가 있게 되었습니다." 렌이 워낙 쉽게 설명한 덕분에 드래곤들은 렌의 설명을 금방 이해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 수많은 생명체를 둘러싼 환경은 끊임없이 변했습니다. 어떨 때는 덥고, 어떨 때는 춥고, 어떨 대는 해가 내리쬐고, 어떨 때는 끝없이 비가 오고, 그렇게요. 생명체들은 비슷하지만 조금씩 달랐기에, 어떤 생명체는 바뀐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해서 살아남고, 어떤 생명체는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날이 한참 더울 때는 더위에 잘 견디는 생명체가 많이 살아남아 더위에 잘 견디는 몸을 생성하는 정보를 자신의 복제물을 통해 퍼뜨리고, 날이 추울 때는 또 그 반대였죠. 그렇게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생명체들 중 어떤 것들은 자기들끼리 뭉쳐 다니다가 나중에는 한 몸이 되었는데, 왜냐면 그게 먹이를 구하거나 다른 생명체를 잡아먹는 데 더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복제하고 변이하고 합쳐지고 살아남고 죽는 걸 반복하다 보니 이제 나중의 생명체는 최초의 생명체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아주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유성생식이 생겼습니다." "유성생식이라고요?" "예, 유성생식이란 서로 다른 두 생명체가 자신의 생명의 씨앗을 반씩 섞어 자신의 후손을 만드는 걸 말합니다. 그게 생긴 이유는 명백합니다. 생명체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생명체는 주위환경의 변화에 더 민감해집니다. 하지만 자신을 똑같이 둘로 나누기만 해서는 다양하게 변화하는 주위환경에 적응할 수 없었습니다. 선조가 추위에 약하면 후손도 추위에 약하고, 선조가 더위에 약하면 후손도 더위에 약했습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환경 변화라도 생기면 모두 다 죽어버리곤 했죠. 하지만 생물이 그냥 자기가 가진 원 래의 정보를 복사해서 나눠주는 게 아니라, 자기의 정보 반, 상대방의 정보 반을 서로 뒤섞어서 후손을 만들어내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요? 그 경우 뒤섞는 방법은 끝도 없이 많고, 그 두 생물의 후손들은 아주 다양할 테죠?" "그렇겠죠." "한 생물이 자기를 그냥 똑같이 복제해나갈 경우 작은 환경의 변화만 생겨도 그 후손들은 멸종하겠지만, 두 생물이 서로의 정보를 뒤섞어서 다양한 후손을 만들어내게 되자, 그중에서 급격한 환경 변화에도 적응할 수 있는 놈이 한둘 정도는 있게 되었고, 그 선 조는 어떤 환경변화가 찾아와도 웬만하면 자기의 후손 한둘 정도는 남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 선조는 더 이상 자기와 완벽히 똑같은 존재를 후대에 남길 수는 없게 된 거 아닙니까?" 데이그랜의 적절한 지적에 렌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이 유성생식, 즉 교접의 의미입니다. 생명체는 자기와 똑같은 존재를 계속 복제해 나가면서 원래의 모습을 영원히 그대로 유지하는 걸 어느 순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자기가 지닌 모습과 형질의 절반을 포기해서라도 이 세상에 살아남을 확률을 높이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생명이 나타난 후 한참 동안 세상은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둘 로 가르는 무성생식을 되풀이한다 해도 그 다양성에는 한계가 있었으니까요. 그러다가 교접하는 생물이 출현한 이후, 생명은 수억 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급속도로 다양해져서 일찍이 없었던 수많은 다른 종류의 생물이 세계에 넘쳐흐르게 된 것입 니다. 최초의 생물은 바다에서 태어났지만 바다가 수많은 생물로 가득차자 이제 생물은 육지에서도 살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서도 척추를 가진 동물로 한정해서 설명할게요. 최초의 척추동물은 어류였습니다. 광어나 대구나 상어 같은 생선 말이에요. 그 어류들은 물속에서 어려움 없이 풍족하게 살았지만, 점점 다른 어류들의 수가 많아지고 먹을 것을 구하기가 어려워지자 경쟁자들이 적은 육지로 조금씩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생선들은 지느러미에 다리가 생겨 바다 밑 진흙탕을 걸어다닐수 있게 되고, 물 밖에서도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조금씩 물을 벗어나 물가에서 살았고, 그래서 개구리나 도룡 뇽처럼 물과 물을 번갈아 가며 살아가는 생물이 태어났습니다. 거기에 조금 더 나아가자 이제 어떤 생물들은 완전히 물을 떠날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파충류' 였죠. 파충류 중에서도 특히 몸집이 크고 강해서 지상의 정복자라고 불리 기에 손색이 없는 무리가 있었는데, 그들을 우리 세계에서는 '공룡' 이라고 불렀습니다. 커다란 도마뱀 같은 것이었습니다." "공룡이라고요? 우리들 용이랑 비슷한 건가요?" "그대들의 선조라고 할 수 있지요." 데이그랜을 제외한 모든 용들의 안색이 변했다. 다혈질인 가이레스가 벌떡 일어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리들을 도마뱀이라고 부르다니! 그깟 도마뱀들이 우리 선조라니! 너, 인간 계집, 드래곤이 무섭지도 않느냐!" 렌은 가이레스의 분노를 가볍게 받아넘겼다. "인간의 선조는 원숭이입니다. 드래곤의 선조가 도마뱀이라고 해서 뭐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지금은 흥분하실 때가 아닙니다. 제 말을 끝까지 들어주세요." 데이그랜이 씩씩거리는 가이레스를 억지로 잡아 앉혔다. "공룡은 지상의 다른 모든 생물을 압도할 정도로 크고 다양했습니다. 그들은 하늘과 땅과 바다를 지배하며 온 세상에 자신들의 자 손을 퍼뜨렸습니다.수억 년 동안 공룡은 이 세계의 지배자였습니다." 렌의 말에 가이레스의 분노는 조금 수그러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 세계에 마나를 다룰 줄 아는 공룡이 탄생했던 것 같습니다." "마나를 다룰 줄 아는 공룡이라고요?" "예, 어떻게 공룡이 마나를 다룰 줄 알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하나의 형질이 발전하여 완숙하게 되는 기간을 감안해보면 그 일이 일어난 건 아마도 7천만 년 전쯤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 어느 공룡의 돌연변이가 우연히 마나를 모으고 사용하는 형질을 지 니게 되면서 그 형질을 후손에게 퍼뜨리고, 그것이 반복되면서 마침내 드래곤이 자유자재로 마나를 사용하게 된 게 아닌가 생각됩 니다." "드래곤이 돌연변이에서 태어났다고? 건방진 인간 계집!" 가이레스는 다시 벌떡 일어나 소리질렀고 데이그랜은 한숨을 쉬며 다시 가이레스를 잡아 앉혔다. "모든 생명은 돌연변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게 생명의 원천입니다. 돌연변이가 없는 생명은 죽은 겁니다." 렌은 엄숙하게 선언했다. "제가 살던 세계에서는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없었습니다. 제 추측이긴 하지만, 아마 제가 살던 세계와 이곳의 차이점은 그 옛날 우 연히 돌연변이의 결과로 마나를 사용할 줄 아는 드래곤이 출현했느냐 아니냐, 딱 그 하나인 것 같습니다. 인간들이 왜 원숭이에서 진화했는지 아시나요? 그건 어느 원숭이가 우연히 두 발로 걷고 양손을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두손이 자유로워지자 그것이 뇌의 발달을 자극했고, 그 결과 영리한 원숭이는 더 잘 살아남게 되었고, 그것이 다시 두뇌 발달을 촉진해서 결국 오늘의 인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드래곤도 비슷했을 것 같아요. 아마 맨 처음 마나를 사용한 드래곤은 지극히 간단한 방법만을 썼겠지요. 아주 소량의 마나를 모아 접근하는 작은 동물에게 충격을 준다든지 하는 것 말이에요. 그 드래곤은 그래서 다른 드래 곤보다 더 쉽게 먹이를 구할 수 있게 되었을 테고, 다른 드래곤보다 더 잘 살아남게 되고 자손을 많이 낳게 되어, 그것이 몇 세 대에 걸쳐 거듭되면서 드래곤은 점점 더 마나를 잘 사용하게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마나를 사용하는 복잡한 일을 하면서 그들의 두뇌는 점점 더 발달하게 되고, 마나를 운용하는데 필요한 날개와 꼬리도 점점 더 커지고 킬어졌을 것입니다." 드래곤들은 모두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렌을 쳐다보았다. "그런일이 실제로 가능한 겁니까?" 렌은 대답했다. "인간의 예를 들죠. 그대들이 10만 년 전 잠에서 깨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던 무렵에 이 세상에 퍼져 있던 최초인간은 어떻게 되었죠? 초기인간과 거의 비슷하지만 더 영리한 지금의 인간에 밀려서 모두 멸망해 버렸죠? 그리고 10만 년 작았던 말들이 지금은 눈에 띄게 커졌지요? 수만 년 전 이세상이 추웠을 때 북구를 뒤덮았던 맘모스는 지금 단 한 마리도 남지 않았지요? 그 옛날 이 세 상에 쌀이니 밀이니 하는 건 하나도 없었지만, 지금은 인간이 재배한 곡식이 세계의 들판에 넘실거리지요? 생명은 끊임없이 변합니 다. 한정된 공간 내에 수많은 생명이 태어나 가장 적합한 생명만이 남고 나머지 생명은 도태됩니다. 그게 바로 진화의 원리입니다." 데이그랜은 드래곤들 중 렌이 말하려는 요점을 가장 먼저 파악했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나는 이제 렌이 뭘 말하려는지 알겠습니다! 가장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거지요? 그리고 약한 자는 강자의 먹이가 되는 것이 자 연의 섭리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나는 렌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우리들 최강의 드래곤이야말로 이 세계의 지배자, 이 세계의 최강자입니다!" 렌은 한숨을 쉬었다 . "그런 게 아니에요. 가장 잘 살아남는 다는 건 가장 강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잘 살아남은 생명이 뭔지 아세요? 바퀴벌레에요. 바퀴벌레는 수억 년 전부터 지금까지 거의 변함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끄덕 없이 살아왔어요. 아마 앞으로 이 세계가 더 추워지거나 더워지거나 불벼락이 떨어진다 해도 바퀴벌레는 끝까지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남을 겁니다. 그렇다고 한 마리의 바퀴 벌레가 강한가요? 아니잖아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 두가지를 흔히 혼동하죠.제 생각인데 그대들의 선조도 똑같은 착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즉 가장 강한 것이 가장 잘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여긴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요?" "그대들의 지금 모습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아요. 진화가 아무리 여러 방향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도저히 그대들처럼 진화할 수는 없어요. 대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처음에는 쉽게 결론을 낼 수 없었지만, 생각할수록 모든 퍼즐 조각은 하나씩 맞아들어 갔습니다. 그대들은 교접 없이 알을 낳습니다. 그건 자기가 자기를 낳는다는 말입니다. 즉, 스스로를 복제한다는 것입니다. 그대들은 또한 생 명의 근원을 바꿀 능력이 있습니다. 엘프, 드워프나 테룬 황제의 선조를 바꾸었듯이요. 그대들은 각각의 드래곤이 절대적으로 순수 한 한 종류의 마나를 가집니다. 각각의 다섯 마나는 한 드래곤에게만 집중됩니다. 결국 저는 이렇게 결론 내렸습니다. 어느 순간 그대들의 선조 드래곤은 아까 얘기했던 '유전자'를 바꾸는 능력을 획득했습니다.그 선조 드래곤은 자신의 자손을 인위적으로 온 세상에서 최고로 강한 생물로 만드는 데 그 능력을 사용했습니다. 자, 마나를 쓰는 드래곤들을 가장 강하게 하는 방법은 무얼까요?" 데이그랜이 탄식했다. "한 종류의 마나를 오직 하나의 드래곤이 전부 다루도록 하는 거겠죠." "맞아요. 바로 그게예요. 그대들의 선조는 어느 순간 그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신의 자손의 형질을 변환시켰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마나 중 한 종류를 집중해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자신의 다섯 후손들에게 불어넣었습니다. 하지만 그대들의 선조 는 그 대신 자손들의 생식능력을 희생했습니다. 마나를 집중해서 다루는 능력은 지극히 섬세하고 예민한데 다 다섯 마나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후손들이 다른 드래곤과 교접하여 다른 형질을 가진 자손을 낳을 경우 마나의 균형은 깨어지고 마나 의 집중으로 인해 강대한 힘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것일테죠. 그래서 그대들의 선조는 자신이 창조하고 변형한 그대로, 똑같은 모습과 형질의 후손이 대대손손 이어지도록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대들이 말하는 신룡이란 결국 다섯 쌍둥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 또한 대대로 자신들의 쌍둥이를 낳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렇게 다른데요? 우리들이 어떻게 쌍둥이란 말인가요?" 안티니아가 의혹에 차서 물었다. "그것은 그대들의 속성, 즉 마나 때문일 거에요. 팬지꽃에 파란 물을 주면 파란 꽃이 피고, 빨간 물을 주면 빨간 꽃이 피는 거나 마 찬가지입니다. 용의 경우에도, 물의 기운으로부터 힘을 얻는 것은 나무이니 물의 용이 낳은 알은 나무의 기운을 띠고, 마찬가지로 나 무의 용이 낳은 알은 불의 기운을 띠는 거겠죠. 그렇지 않다면 물의 흑룡이 같은 물의 흑룡이 아닌 나무의 청룡을 낳는 걸 어떻게 설 명할 수 있겠어요? 전대 용과 당대 용을 다 보신 네린님이아 안티니아님께 한 번 여쭤보죠. 청룡 데이그랜과 그 전대 청룡의 성격이 나 행동거지나 의모는 서로 비슷했나요? 그리고 가이레스님 전대의 화룡은 가이레스님과 비교해서 어땠나요?" 네린이 대답했다. "가이레스의 전대 화룡은 암용이었지만 성격이나 행동거지는 정말로 가이레스와 비슷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니 데이그랜 의 전대 흑룡은 수용이어서 데이그랜과 거의 흡사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너무 당연하게 여겼는데……" "그건 절대로 당연한 게 아니에요. 당연할 리가 없지요! 결국 지금 그대들 또한 모두 쌍둥이들이고, 서로 다른 속석을 띤 채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드래곤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렌이 말하는 것은 지금까지 드래곤들 자신도 몰랐던 엄청난 비밀이었다. 그들은 렌의 말 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침묵을 깨고 데이그랜이 물었다. "지금까지 렌이 말한 것과 우리 드래곤의 멸종은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렌은 바짝 마른 입술을 꼭 깨물었다. 오랫동안 이야기 하는 것이 이제 힘겨워졌다. 그래도 렌은 다시 힘을 짜냈다. "신룡들이 동면에 든 것이 6,500만 년 전이라고 들었어요. 그들이 왜 동면에 들었는지 아시나요? 그 재앙이라는 게 뭔지 아시나요?" 드래곤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데이그랜의 눈은 호기심으로 빛났다. "6,500만 년 전, 아주 커다란 혜성이 이 땅에 충돌했어요. 혜성이란 하늘을 가르며 지나가는 커다란 얼음덩이입니다. 혜성은 밤 하늘에 긴 꼬리를 남기며 빛나고, 보통은 우리가 사는 이 땅 근처에도 오지 않지만, 이따금씩은 이 땅에 끌려와 충돌하지요." "아, 나도 지난 5천 년 동안 그런 게 지나가는 걸 밤하늘에서 몇 번 본 적 있습니다." 데이그랜이 참견했다. "6,500만 년 전 이 땅을 덮친 혜성은 특히 커다란 것이었습니다. 그 충돌의 충격은 온 세상을 뒤흔들었어요. 바닷물은 엄청난 속도 와 힘으로 육지를 덮치면서 모든 생물을 삼켜버리고, 산의 나무와 들판의 풀들은 불타버리고, 지진과 화산 폭발과 온갖 자연재해들 이 뒤이었어요. 그리고 나서 이 세상에는 길고 긴 겨울이 찾아왔어요. 화산재와 불타는 숲의 연기가 태양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끝 없이 눈이 내리고 모든 식물들은 눈 속에 묻혔습니다. 앞서의 자연재해 때문에 이미 대부분의 생명은 죽었지만 긴 겨울 동안 남아 있는 생명들도 죽어갔습니다. 그런 한편으로 그 빈자리를 새로운 생명들이 메웠습니다. 원래 생명은 작은 빈틈만 있어도 새로이 싹트니까요. 세상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드래곤들이 살았던 과거의 세계는 사라졌습니다." 렌은 마치 본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했고 드래곤들은 숨을 죽였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낸 겁니까?" 데이그랜이 물었다. "지금까지 제가 본 바로는, 이 세계는 드래곤의 존재를 제외하면 놀랄 정도로 제 세계와 닮아 있어요. 제가 살던 세계에서도 6,500만 년 전 거대한 혜성이 지구에 부딪히면서 수많은 생물이 멸종했어요. 여러 가지 증거를 종합해보면 이 세계에서도 똑같은 일이 생겼 다고 추측할 수 있어요." "그렇군요." 데이그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살펴본 다른 차원 우주는 렌의 말처럼 이 세계와 흡사했다. 그쪽 세계의 문명 발달 속도가 이쪽 보다 조금 더 빠르고 그쪽 세계에 드래곤이 없기는 하지만 산, 들, 식물, 동물, 인간 모두 이 세계와 구조적으로 똑같았다. 드워프와 엘프와 정령만은 이 세계와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드래곤에게서 비롯된 존재들이 아닌가. "그리고 증거도 있습니다." "증거라고요?" "예, 조금 후 카엔님이 설명할 겁니다. 어쨌든 신룡들은 다가올 재앙을 예감했습니다. 그래서 온갖 충격에도 견딜 수 있게끔 자신들의 몸을 동면에 빠뜨리고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길고 긴 세월 동안 잠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다가 깨어나면 세상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오고 그들은 다시 지상의 패자로 군림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잘못 생각했어요. 그들의 몸은 너무나 완벽하게 최고의 마나를 운용할 수 있도록 맞춰져 있었지만, 그들을 둘러싼 6천만 년 후의 세상은 너무나 변해 있었습니다. 6천만 년은 너무 긴 세월이었고, 그들의 몸은 바뀐 세상에서는 더 이상 최적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들은 새로운 세상에 맞추어 그들의 후손의 몸을 다시 바꿀 수도 없었을 거에요. '최적' 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고, 그들은 위험한 줄 위 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그냥 그대로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기로 했을 거에요. 6천만 년 전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모습으로 복제된 다섯 드래곤이 각기 한 종류의 마나를 집중하여 모은 후 무안할 정도로 엄청난 마법의 힘을 휘두르는 그런 모습으로 말이에요. 그렇게 드래곤의 세대는 거듭되어 오늘의 그대들에 이르렀습니다. 그대들은 강했지만, 세계와 그대들과의 불균형, 똑같은 복제가 거듭되면서 나타나는 결합들은 조금씩 축적되었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힘이 아슬아슬한 균형 을 잡고 있다가 어느 순간 균형이 깨지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멸망하는 겁니까?" 데이그랜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겠지만, 한가지 가능성은 시오카처럼 마나의 불균형으로 인해 어른의 문턱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용이 나 타나는 것입니다. 그게 다른 용에게도 영향을 미쳐 모두가 조용히 시들어버리고, 용족의 운명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죠." 렌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드래곤들 사이에서는 절망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들 모두 멸망을 예감하고 있었기에 렌의 말을 쉽게 부인하지 못했다. "생태계의 정점에서 선 생물은 쉽게 멸종합니다. 그들의 개체수는 상대적으로 적고, 그들의 존재는 너무나 많은 조건에 의해 지탱 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조건 중 단 하나만 변화하더라도 그 생물은 더 이상 생태계 속에서 살아나갈 수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체로서 가장 강한 생물이 종족으로서는 가장 약하다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숲을 침범하고 나무를 베어 가며 도시를 만들었을 때 어느 동물이 제일 먼저 없어졌지요?" 안티니아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호랑이였죠." "그 다음에는요?" "늑대였습니다." "그 다음에는요?" "사슴이요." 안티니아는 자비의 청룡답게 생명체들에 관심이 많아 바로바로 대답했다. 그러다 그녀의 감탄성을 발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군요! 정말 가장 강한 호랑이가 가장 먼저 사라졌군요! 그러고 나서 그 다음 강한 동물이, 마지막으로 약 한 동물이 사라져버렸군요!" 목소리 높여 대답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곧 흐려졌다. "우리 드래곤이 바로 그 호랑이나 마찬가지라는 건가요?"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하지만 지금 얘기한 건 오히려 조금 낙관적인 종말입니다. 더 끔찍한 종말이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드래곤 전체의 멸종보다 더 끔찍한 종말이 있다는 겁니까?" 네린이 하얗게 질린 채 물었다. 렌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요. 모든 것의 종말. 세계의 끝. 더 이상 마나를 감당하지 못한 드래곤들이 매개가 되어 전 세계적인 규모로 황제의 저주와 같 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 그래서 온 세상의 살아 있는 생명이 거기에 휩쓸려버리고 마침내 드래곤들마저도 죽어버리는 것." 드래곤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럴 리 없다고요!" 데이그랜이 떨리는 목소리로 부인했다. "저번에 카로딘의 다섯 마법사들이 자신들의 마나를 모아 황제의 저주를 펼치려다가 카엔님에게 가로막힌 적이 있었지요? 최악의 방식으로 균형이 깨질 경우, 드래곤 하나하나가 그 다섯 마법사들처럼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다만 이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일 부러 황제의 저주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드래곤들이 스스로 마나를 제어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마나가 폭주하면서 뒤엉켜 그 사악한 잿빛의 기운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고, 그 기운에 닿는 모든 생명체가 사라지고, 기운이 휩쓸고 지나간 세상 은 색채를 잃은 죽음의 세계로 변하는 것입니다. 8서클의 마법사 다섯 명이 모였을 때 그들이 낸 힘은 카엔님과 동일했습니다. 그렇다면 9서클의 마나 다섯 개가 뒤엉킨 파괴력은 어떨까요?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 힘은 온 세상의 생물을 몽땅 죽이고 도 남겠지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거죠?" 안티니아가 하얗게 질려서 물었다. "강한 힘을 제어하려면 완벽한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생명의 세상에 완벽이란 없어요. 자기복제를 거듭하다 보면 아무리 완벽한 복제시스템을 갖췄다 해도 미세한 변이를 막을 수는 없어요. 그렇게 결함이 축적되다 보면 결국 마나를 제어하는 기제가 불완전해집니다. 차라리 마나가 모이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렇지는 않으니, 결국 구멍 난 댐에 잔뜩 물을 가두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지요. 어느 날 댐은 무너지고, 그 안에 있던 엄청난 물은 일시에 세상을 휩쓰는 것입니다. 전대의 황룡은 그걸 막기 위해 자살 한 것입니다. 둑이 무너지기 전에 물을 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결과 드래곤들이 모두 마나의 불균형으로 죽어버린다 해도, 이 세상 생명 모두를 죽이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가이에스가 버럭 소리질렀다. "믿을 수 없다! 드래곤이 그런 존재라니! 거짓말이야! 그리고 시오카난이 자살했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거냐!" "카엔님이 제게 말해주었습니다. 이 황옥판의 메세지를 들어보십시오. 전대 황룡이 자살하면서 자신의 마나를 카엔님에게 다 주었 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저는 지금 말한 결론을 예감하고 있었지만, 황옥판에서 나온 메세지는 제게 확신을 더해주었습니다. 카엔님, 부탁드려요." 모든 드래곤들은 다시 경악했다. 가이레스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혹시 네놈이 시오카난을 죽였느냐? 너의 엄청난 능력에 혹시나 했었지만, 역시 네가 범인이었던 거냐?" 카엔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내가 시오카난을 만났을 때 나는 겨우 8서클이었다. 너는 정말로 절정기의 황룡이 애송이 8서클 마법사에게 당할 정도로 약하다고 생각하나?" 카엔의 말에 가이레스는 대꾸할 말을 잃고 주저앉았다. 카엔은 한껏 긴장한 얼굴로 황옥판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의 심장은 다시 터질 것처럼 뛰었다. "나는 고심 끝에 이 황옥판을 해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황옥판에는 그대들이 '신룡' 이라고 부르는 동면에서 깨어난 다섯 용 중 조화의 황룡 오피아가 남긴 메시지와, 그후 전대의 황룡 시오카난이 덧붙인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내가 이걸 해독할 수 있 었던 건 아마도 전대의 황룡 시오카난이 죽을 때 내게 자신의 마나를 모두 넘겨주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좌중이 조용해지자 카엔은 전에 렌에게 말했던 대로 어떻게 시오카난을 만나 그가 어떻게 자신에게 심장의 마나를 넘겨주고 죽었 는지 다시 설명했다. 용들은 카엔의 말을 경청했다. 너무나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오히려 신뢰감이 드는 그런 이야기였다. "그때 시오카난이 다른 말은 하지 않았나?" 데이그랜이 차갑게 물었다. "내가 들은 건 그게 다였다., 하지만 해독하고 보니 내가 궁금했던 모든 내용은 전부 황옥판에 숨겨져 있었다." 카엔도 역시 차갑게 대답했다. "역시 자살한 거였다니! 드래곤이 자살이라니!" 안티니아가 탄식했다. 카엔은 어수선한 드래곤들의 모습을 냉정하게 둘러보고는 황옥판에 손을 얹고 마나를 분출했다. 은보랏빛 마나는 순식간에 금빛 으로 변해 황옥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확 하고 금빛이 퍼지며 황옥판에서는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사념 파였다. 드래고들은 모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시오카난의 사념파는 슬프고 나직했다. 이따금씩 격정에 흐트러지기도 했지만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 나는 조화의 황룡 사오카난입니다., 이 메시지는 어쩌면 다시는 재생되지 못한 채 묻혀버릴지도 모르고, 어쩌면 한 번쯤 재생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확실한 건 누군가 이 황옥판을 해독할 때쯤 나는 이미 죽어 있을 거란 점입니다. 원래 이 메시지를 남긴 용은 10만 년 전 동면에서 깨어난 다섯 신룡 중 한 분, 그 시절의 조화의 황룡 오피아입니다. 나는 내가 기 거하는 황룡의 레어 중 가장 깊은 곳에서 우연히 이걸 발견하고는 수많은 밤을 고심한 끝에 그녀의 메시지를 해독해낼 수 있었습니 다.마침내 해독한 메시지는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나는 그후 한참 동안 고민했습니다. 어떤 것이 옳은 길일까. 나는 나약하기 짝 이 없는 조화의 황룡일 뿐이어서, 내 존재가 부조화의 극점에 있다는 것, 그 부조화 때문에 용족이 조만간 온 세상과 함께 멸망하리 라는 걸 알면서까지 태연자약하게 삶을 계속해나갈 힘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내 동료들에게 다가오는 멸망을 예고하는 괴로운 역할 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내 손으로 죽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 결국 나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자살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내 마나가 시오카에게 흘러가지 않도록 드래곤이 아닌 다른 종족에게 내 마나를 몽땅 흡수시켜야 하겠죠. 다행히도 드래곤의 회랑 북서쪽 미즈넨 산맥에서 마력이 8서클에 이르는 흙의 마법사가 은거수련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 니다. 아직 서른도 안 됐지만 8서클이라니 순수한 기운을 지닌 인간이겠지요. 나는 이제 그쪽을 찾아가볼 생각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조용히 끝날 것입니다. 내 마력으로 이 황옥판의 원래 메시지는 봉인했습니다. 혹시 몰라 이 황옥판의 존재를 데이그랜에게 알려놓기는 하겠지만, 내 예 상대로라면 내 자살 이후 더 이상 앞으로 황룡은 없을 것이고, 가엾은 시오카는 결코 성룡이 되지 못할 것이고, 드래곤이라는 종 족은 조용히 소멸해버릴 것이고, 비밀은 영영 묻혀버릴 겁니다. 하지만 그게 순리입니다. 어차피 그렇게 될 거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종말을 맞지 않는다면 더 큰 비극이 생길 겁니다. 그럼 모두들 안녕히. 사오카난의 착하고 부드러운 사념파가 끝나자 역시 그 목소리와 무척이나 비슷한 음색을 지닌 여자의 사념파가 흘러나왔다. 이번 의 사념파는 시오카난의 것보다 훨씬 음질이 좋지 않고 지직거렸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좌중은 극도로 긴장 해서 귀를 기울였다. <<<<<<<<< 황룡 오피아의 이야기 >>>>>>>>>>>. 나는 조화의 황룡 오피아. 이곳은 내 레어. 내 레어에서 가장 깊은 어두운 곳. 나와 함께 깨어난 내 형제들이 나를 이곳에 가두었 다. 그들은 내 말을 믿지 않는다. 아니,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어리석은 용들. 조화의 눈으로 보면 옳고 그름이 이렇게 분명한 것을, 생명에 집착할수록 생명은 더 멀어져가는 것을. 이제 며칠 지나면 내 다음 대의 황룡 해츨링이 탈피를 마치고 성룡이 될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나를 죽이러 올 것이다. 내 마나는 순조롭게 다음 대의 황룡에게 전해질 테고, 용들은 진실에서 고개를 돌린 채 그들의 거짓 삶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우리가 낳은 해츨링들은 우리가 무척이나 위대한 존재인 줄로 알고 있다. 그들은 우리를 '신룡' 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다. 가엾은 것들. 나는 6,500만 년 전에 태어났다. 내가 어느 정도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주위에는 나와 똑같이 생긴 용 넷이 더 있었다. 우리들 은 형제였다. 아니, 남매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우리들은 성별이 없었다. 하지만 원래 탈피 전의 드래곤들은 얼핏 보아서는 성별을 구 별하기 힘들기 때문에 주위의 누구도 그걸 눈치 채지 못했다. 우리들에게 없는 게 또 있었는데, 그건 어머니였다. 우리들은 오로지 아버지에게서만 태어났다. 아버지는 어느 암용을 잡아 그녀 의 생식기에 마력을 집중하고 자신의 모습을 따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알 다섯 개를 만들어 냈다. 그게 우리다. 아버지는 마나를 쓰 는 용 중 가장 위대한 용이었고, 오랜 연구 끝에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까지 획득했다. 그는 그 능력을 알 다섯 개에 집어넣 었기 때문에, 우리는 따로 익히지 않고도 처음부터 생명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어린 시절 우리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다른 어린 용들과 즐겁게 뛰어놀았다. 함께 소철나무를 헤치고 사냥을 하면서 젖먹이 동물을 잡아먹기도 하고 이마에서 피가 흐를 때까지 박치기 놀이도 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그때 용들은 무척이나 많았다. 우리랑 즐겨 놓았던 어린 용들도 수십이었고 어른 용들도 그만큼 있었다. 어른 용들은 어린 용들에게 자상했다. 우리들은 어른들의 보살핌 속에 행복했다. 마나를 쓸 줄 모르는 무식한 공룡들 중에는 자기 알과 새끼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것들도 있었지만, 마나를 쓰는 지성 있는 용들은 달랐다. 지금은 사라진 남대륙 중앙의 키마 호수에서 맞았던 해질녘이 기억난다. 성룡들은 하늘을 메우고 날개를 펴고, 날지 못하는 어린 용 들은 호숫가에서 첨벙거리고,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습한 안개는 석양을 받아 붉게 물든던 그때, 그때는 참 평화롭고 즐거웠는데. 우리 다섯 쌍둥이들은 첫 번째 탈피를 무사히 마쳐 근사하고 긴 꼬리를 갖게 되었다. 같이 놀던 누구보다도 긴 꼬리였다. 우리들은 으스대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엄하게 야단치며 그것을 금했다. 그는 우리의 꼬리를 다른 어린 용들처럼 짧게 보이게 하는 마법을 일 일이 걸어 주고 나서야 마음을 놓았다. 그밖에도 우리들은 여러 가지로 남달랐다. 우리들은 누구보다 영리하고 힘쎈 다섯 쌍둥이로 알려져 주위의 부러움을 많이 받았 다. 다만 우리는 마나를 쓰는 다른 용들보다 2차 탈피가 늦었다. 다른 용들은 보통 수명이 천 년이고 200살이 되면 2차 탈피까지 모두 마치지만, 우리들은 250살이 넘어도 2차 탈피를 시작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주위의 어른 용들에게 여러 차례 변명을 하면서 의심을 사지 않으려 애썼다. 그의 말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서 아무도 아버 지를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의심을 살까 걱정할 정도면 차라리 다른 용들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살면 될 텐데, 아버지는 그 렇게 하지도 않았다 . 그 이유는 나중에 밝혀졌다. 결국 우리가 다른 용들의 마나를 흡수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250살이 될 무렵 마침내 우리들은 일제히 탈피에 들어가게 되었다. 탈피에 들어가기 직전 아버지는 우리를 불렀다. "너희들에게 말해줄 게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에 재앙이 내릴 것이다." 우리들은 그르렁거리며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재앙이라뇨?" "내 마법이 드래곤들 가장 강하다는건 너희들도 알고 있겠지?" "네." "너희들이 태어나기 전 내가 갓 성룡이 되었을 무렵. 하늘에 재앙의 별이 나타났다. 재앙의 별은 태양보다도 더 카다랗게 빛났지만 땅에 떨어지지 않은 채 무사히 지나갔고 우리 용들은 모두 안심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내 심장의 일부를 떼어 재앙의 별 에 쏘았다. 심장 조각에 재앙의 별에 박혔고, 그 후 나는 재앙의 별이 어디 있는지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재앙의 별은 한동안 멀어 졌다가 어느 순간 다시 돌아와 시시각각 우리가 사는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들은 처음 듣는 엄청난 이야기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너희들이 탈피를 마치려면 150년이 걸릴 것이다. 다른 용보다 세 배는 더 긴 시간이지. 그리고 탈피를 마친 후 겨우 3년이 지나면 재앙의 별은 이 땅을 삼킬 것이다." "아버지! 그럼 다른 용들에게 알려야 하잖아요!" 아버지는 아주 이상한 눈빛으로 우리들을 둘러보았다. "알려도 소용없다. 아니, 알려서는 안 된다. 그 재앙에서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나뿐인데, 그건 너희들에게만 안배되어 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너희들이 무사히 탈피를 마치고 성룡이 되면 알게 될 거다. 자, 이제 똑바로 들어라! 성룡이 되면 깊고 깊은 땅속에 레어를 파고, 온몸을 시체처럼 단단히 굳혀서 어떤 외부의 충격에서도 영향받지 않고 동면할 수 있는 마법을 펼쳐라." "그건 엄청난 마나를 필요로 하잖아요! 이 지구상의 어느 용도 그 마법을 펼칠 수는 없어요! 그건 가상의 마법이에요!" 우리들은 모두 아버지에게서 마법 수업을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았다. "때가 되면 너희들은 그 마법을 펼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 탈피에 들어가라." 우리들은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의문을 품은 채 탈피에 들어갔다. 잠을 자면서도 우리 쌍둥이들은 서로의 마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의 마나는 다른 드래곤처럼 평범했다. 굳이 설명하자면 대략 마나를 쏘아 날아다니는 익룡을 한 번에 떨어뜨릴 수 있는 정도였다. 그 정도로도 살아가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드래곤이 그들 무식한 공룡보다 우월한 점은 오히려 생각하 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들 중 누구도 탈피를 마치고 나면 엄청난 마나를 휘두르는 절대의 드래곤으로 되리라는 걸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안온한 꿈과 마나에 잠겨 동면의 세월은 갔다. 마침내 탈피의 순간은 다가왔다. 나는 내 표피 아래에서 새로운 날개가 자라나는 걸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등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파왔다. 나는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얇은 흙으로 덮인 내 레어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표피는 찢어지고 엄 청나게 커다란 날개가 튀어나왔다. 어느 드래곤보다도 커다란 날개였다. 내 형제들도 동시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들도 나처럼 커 다란 날개와 엄청나게 긴 꼬리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순간 황금빛 흙의 마나가 끝없이 내 날개를 통해 다시 내 심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황홀했다. 내 몸이, 내 힘이, 내 마나가 무한히 팽창해 온 세상을 덮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쾌감이 있는 줄 몰랐다. 폭발할 것 같은 엄청난 쾌감이었다. 극치의 황홀경에 빠져 있는 지 얼마나 되었을까. 더 이상 마나는 흘러오지 않았다. 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려 날개를 파닥이며 땅에 내려섰다. 다른 형제들도 나와 함께 내려섰다. 우리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변했다. 나와 샤난은 확연한 여성형, 다른 셋은 남성형, 그리고 모두들 일반적인 드래곤보다 훨씬 더 커 다란 몸집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정신없이 쳐다보았다. 그러다 비로소 정신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끔찍한 광경이었다. 우리를 제외한 모든 드래곤들이 죽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마 나를 우리에게 빼앗긴 채 부서졌다. 나중에 알아보니 지상에 보이지 않는 드래곤들은 그들의 레어에서 마찬가지 모습으로 죽어 있 었다. 주위의 모든 마나를 압도하는 우리들 자신의 마나 말고는 어디에서도 드래곤의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들은 말을 잃었다. "어떻게 된 거지?" 맞이 노릇을 하던 파야가 한참 만에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몸에는 오로지 물의 마나, 검은 마나만이 가득 차 있어!" "그래, 그리고 오피아에게서는 흙의 마나만이, 샤난에게서는 나무의 마나만이 느껴져!" 이제는 하얀 쇠의 마나로 가득 찬 셈린도 외쳤다. "우리는 강해! 엄청나게 강하다구! 아버지가 말씀하신 건 바로 이거였어! 탈피를 마치는 순간 우리는 다른 드래곤들에게서 각자 한 종류의 마나를 몽땅 빨아들여 지상에서 가장 강해지게 되어 있었어! 아버지는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어! 그래서 다른 용들은 우리가 탈피를 마치자마자 한꺼번에 저렇게 죽었던 거야!" 불의 마나로 온몸을 두른 게루스가 선언했다. 그의 목소리 속에는 약간의 죄책감과 함께 숨길 수 없는 자랑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이 참상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해진 스스로를 어쩔 수 없었던 거다. 탈피 전에 내가 알던 조용하고 내성적인 게루스와는 너무 다 른 모습이었다. 나는 그와 반대로 덜덜 떨며 주위의 참혹함에 눈을 돌렸다. "너무 끔찍해! 이들은 왜 이렇게 죽어야 했지? 우리가 이렇게 강해질 필요가 있었어? 무엇 때문에? 왜 모두들 죽이면서까지 강해 져야만 했던 거야?" 내 마음속에 가득 찬 주위의 생명체에 대한 공감 또한 전에는 없던 것이어서 나는 당황했다. 파야는 냉정하게 게루스와 나의 말을 막았다. "아버지를 찾아보자. 아버지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실 거야. 아버지의 마법과 지식이라면 다른 용들처럼 속수무책으 로 마나를 고갈당해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거야. 우리를 이렇게 만든건 바로 아버지잖아!" 그의 눈 속에는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의 성격 또한 전과는 달라 보였다. 모든 게 변했다. 파야의 말에 맞는 듯했기에 우리는 아버지의 레어로 갔다. 예상대로 아버지는 마법장을 일으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었다. 하지 만 우리를 보고 마법장을 해제하는 순간 그의 마나는 급속도로 우리에게 빨려오기 시작했다. 그가 지닌 여러 색채의 마나가 각기 색깔별로 나뉘어 우리들에게 흡수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성공했구나!" 아버지의 목소리는 희열에 가득 찼다. 그는 온몸의 마나가 빨려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한마디라도 더 하려고 애썼다. "이제 너희들은 지상 최강의 유일한 드래곤이다. 너희들은 엄청나게 긴 수명과 다가올 재앙을 이길 수 있는 엄청난 마나를 가지게 되었다. 시간이 없다. 어서 깊은 레어를 파고 동면에 들어라. 최소한 10만 년 동안은 동면해야 한다. 곧 이 지상을 재앙의 별이 강타할 것이다. 정말 자랑스럽구나, 내 아이들아. 아니, 너희들은 내 자신이다. 드래곤의 역사는 너희들로 인해 다시 씌어질 것 이다. 너희들은 영원히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최강의 생물로 남을 것이다." "모두 다 죽여놓고 드래곤의 역사는 무슨 역사에요!" 내가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울부짖자 아버지는 훈계하는 듯한 눈초리를 내게 던졌다.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어차피 재앙이 닥쳤을 때 모두 죽느니 너희들이라도 살아남는 게 낫지 않 느냐! 조화의 황룡이 되었다고 해서 공감의 능력을 필요 이상으로 발휘하려는 거냐! 지금은 다른 죽은 드래곤을 동정할 시간이 없 다! 어서!" 아버지는 급속도로 쪼그라들어 말을 마치자마자 부서져 내렸고, 우리는 아버지의 시체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서 서두르자!" 파야가 재촉했다. 그의 지휘를 받아 우리는 탈피 때보다 훨씬 더 깊은 레어를 파 들어가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력한 마나를 마구 휘두른 다는 건 형언하기 어려운 쾌감이었다. 우리가 탈피에 들어가기 전 이 세상에는 적어 수백 마리의 드래곤이 있었다. 그 수백 마리 드래곤의 마나가 우리 다섯에게 응축된 것이니 얼마나 힘이 넘치겠는가. 용들 중 가 장 아버지를 원망하는 나조차도 힘을 휘두르는 희열을 억제할 수 없었다. "저거 봐!" 샤난이 외쳤다. 하늘을 찢으며 이글이글 불타는 커다란 별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밤이었는데 세상은 낮처럼 환했다. 모두 들 입을 쩍 벌리며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신들 차려!" 파야가 외쳤다. 우리는 다시 각자 최대한의 마나를 뿜어내며 땅속 깊은 곳의 흙덩이를 순간이동 시키고 우리의 몸을 그 빈 공간으 로 다시 이동시켰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가까스로 위쪽을 흙으로 막자마자 엄청난 충격이 온 땅을 뒤흔들었다. 그 순간 나는 궁극의 동면마법을 펼쳤다. 스스로 가능하리라고 생각해 본 적 없던, 거의 죽는 것처럼 온몸을 아주 오랫동안 굳힌는 마법. 내 몸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굳어지고 나는 의식을 잃었다. 흑룡 파야가 다시 나를 깨웠다. 내 레어는 원래 땅속 깊숙한 곳에 자리잡았는데 어느새 땅은 융기했다. 다시 침식되어 반쯤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다른 용들의 레어도 비슷했다. 파야는 나 말고 다른 용들도 모두 깨웠다. 차례로 깨어난 우리는 반쯤 어리둥절한 눈 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공기는 동면에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차갑고 습했으며, 그 옛날에는 없었던 이상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마나 를 운용하자 숨쉬기가 훨씬 편해졌다.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커다란 꽃이 달린 처음 보는 이상한 식물들이 가득 차 있고, 우리 레어 옆의 키마 호수는 온데간데 없었다. 그리고 아주 작고 군데군데 털이 나고 얼굴과 몸뚱이는 맨숭맨숭한 두 발 달린 생전 처음 보는 동물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파야가 죽인 듯했다. 나는 원래 예정했던 10만 년보다 훨씬 긴 세월이 흘렀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지난 거지?" 얼빠진 목소리로 게루스가 물었다. 파야는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보고 대답했다. "6천만 년은 넘고 7천만 년은 안 되는 것 같아." "어떻게 아는 거야?" "아버지가 가르쳐 주셨어. 별이 여기서 저기까지 움직이는데 10만 년 정도 걸린다고. 지금 저 별은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움직였으니 6천만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전에 없던 지혜가 가득했다. 스스로도 그런 자신이 놀라운지 그는 이런 저런 생각들을 마구 쏟아냈다. "아버지는 재앙을 예감하시고 우리에게 모든 마나를 몰아주신거야! 우리가 모든 마나를 한 종류씩 다 빨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 몸을 변형시켜 긴 세월 동안 궁극의 동면을 할 수 있게 만든 거야!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되었고, 심지어 우리의 성격이나 외모 나 성별이나 색깔까지도 지니고 있는 마나의 속성에 따라 변화된 거야!"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다른 모든 드래곤을 죽인 거고." 내가 힘없이 덧붙이자 다른 드래곤들은 나를 경멸하는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어차피 그들은 재앙의 별 때문에 죽을 거였어."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는 우리 때문에 죽은 거잖아." "모두 다 죽는 것보다는 나아. 누군가는 살아야 하는 거 아냐? 우리는 선택받은 최강의 드래곤이고, 약한 자는 언제나 강한 자를 위해 죽는 거야." 파야는 단호하게 말했다. 샤난은 나를 위해 변명을 해주려다 파야의 말을 듣고서 입을 다물었고, 나도 입을 다물었다. 우리 앞에는 길고 긴 시간, 전보다 열 배는 긴 수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각기 일신에 지니게 된 엄청난 마나와 새로 운 능력을 개발하느라 시간 가는줄 몰랐다. 전보다 훨씬 지혜로워진 흑룡 파야는 우리들의 지극한 강대한 마나가 어떻게 상호균형을 잡고 있는지 연구해서 매일매일 그 연구 성과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쇠의 마나를 지닌 백룡 셈린은 지나칠 정도로 강렬한 각자의 마나를 제어하는 방법을 알아냈고, 불의 적룡 게루스는 제어했던 마나르 폭발시켜 엄청난 파괴력을 내는 방법을 터득했다. 초목과 생장의 청룡 샤난은 자신의 마나로 상처를 치유하는 법을, 그리고 나 조화의 황룡 오피아는 다른 생명들과 시간동조하고 다른 생물로 폴리모프하는 법을 습득했다. 우리는 서로의 지식을 공유했다. 대부분의 마법은 아버지가 '이론상' 으로만 연구했던 궁극의 마법이었지만, 더 갈 수 없을 정도 로 극한의 마나를 지니게 된 우리들에게 그 이론상의 궁극 마법은 누워서 식은 죽 먹기였다. 우리는 그 무한한 마나를 휘두르며 새로운 세상을 탐구해 나갔다. 우리가 태어날 무렵 세상을 뒤덮었던 삐쭉삐쭉한 잎의 소철 대신 넓은 잎과 아름다운 꽃과 달콤한 과일을 가진 새로운 나무들이 숲 의 지배자가 되었다. 세상을 가득 채웠던 수많은 공룡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그 대신 털로 뒤덮이고 알 대신 새끼를 낳는 짐승들이 지상을 누볐다. 그중에서도 엄청나게 몸집이 크고 긴 털과 긴 코를 지닌 젖먹이 동물은 특히 흥미로웠다. 예전의 드래 곤이었다면 여럿이 붙어 겨우겨우 이길 정도였겠지만, 우리는 한결 추워진 세계의 북쪽에서 설원을 누비며 이따금씩 그동물을 사 냥했다. 그렇게 세월은 갔다. 다시 깨어나 6,000년 정도 흘렀을 무렵,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차례로 각기 짧은 동면에 들어갔다. 그리고 알을 하나씩 낳았다. 나나 샤난 같은 여성 드래곤이 알을 낳는다는 건 그렇다 치고 파야 같은 남성형 드래곤이 알을 낳는 건 좀 이상했지만, 그 모든 것이 무척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파야는 그게 모두 아버지의 안배이고 마나의 이치라고 했다. 헤츨링들은 암컷도 수컷도 아니었다. 그러다 1차 탈피를 마치자 그들은 어느 정도 암컷스러운, 혹은 수컷스러운 외양을 띠었다. 암 컷의 외양을 띤 드래곤에게 태어난 헤츨링은 수컷의 외양을 띠고, 수컷의 외양을 띤 드래곤에게서 태어난 헤츨링은 그 반대로 암 컷의 외양을 띠었다. 그러다 2차 탈피를 마치고 나면 그들은 완연히 한쪽 성의 외양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우리 들처럼 암컷도 수컷도 아니었다. 다만 음양의 기운 때문에 그런 외형을 할 뿐. 어린 드래곤 헤츨링들은 무척 예뻤다. 나는 내가 낳은 백룡 해츨링 보다 게루스가 낳은 황룡 해츨링에게 더 애착이 갔다. 남성형 인 게루스가 낳은 해츨링이어서 그 아이는 나처럼 여성형이었고, 놀랄 정도로 내 어릴 적 모습과 닮아 있어서 그 아이를 보고 있 노라면 나는 다시 어린 시절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다 나는 발견했다. 그 아이의 앞발에 내 앞발과 마찬가지로 작은 꽃 모양의 얼국이 있는 것을. 크기, 위치, 뭐 하나 다른 게 없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공포에 질렸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유령을 본 적이 있는가? 세상에 자기 자신만큼 무서운 유령은 없다. 그 아이가 나와 똑같다는 걸 발견했을 때 나는 모골이 송연했다. 그때 내 기분은 그랬다. 게다가 내가 나 자신과 똑같은 해츨링을 낳는 건 몰라도, 왜 게루스가 나와 똑같은 해츨링을 낳았단 말인가? 수많은 의문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나는 다른 드래곤 몰래 해츨링들을 관찰했다. 그들 모두는 자신과 같은 속성을 띤 용의 어린 시절과 완벽히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 었다. 이들은 모두 우리 다섯 용의 복제품이었다. 나는 비로소 아버지가 '영원히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상 최강의 생물로 남을 것이다' 라고 한 말뜻을 이해했다. 그건 너무 끔찍한 일이었다. 나는 수천 년 동안 폴리모프와 시간동조를 통해 다른 생물들과 여러 차례 공감해 왔다. 그건 조화의 황룡인 나의 특성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생명으로 가득한 이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다른 드래곤들 보다는 잘 알았다. 우리 드래곤은 존재 자체가 어긋나 있었다. 똑같은 복제품만을 낳은 괴물이라니! 그래도 나는 자위했다! 아메바나 플라나리아도 자신을 복제하지 않는가. 고등동물 중에서 스스로를 복제하는 경우란 아예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알아낸 비밀을 나는 혼자서만 간직했다. 더 끔찍한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나는 해츨링들을 관찰하는 걸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 새 내 버릇이 되었다. 다른 용들은 그저 내가 워낙 해츨링들에게 자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나를 조절해 해츨링들과 공감을 시도했을 때, 나는 해츨링들 사이에 흐르는 마나 속에서 아주 미미한 불균형을 발견했다. 그 극히 미세한 불균형은 우리 다섯 성룡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거듭해서 다시 해보아도 불균형은 그대로였다. 나는 공감의 능력을 극도로 발휘해서 계속 해츨링들 사이의 마나를 느껴 보았다. 그러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너무 큰 내 비명소리에 해츨링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다. 아버지는 정녕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영원한 지상 최강의 생물이라고? 바보 같은 아버지! 이 세상에 영원 따위가 있을 턱이 있겠는가! 최강이라니, 드래곤도 다른 생 물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냥 생물에 불과할 뿐인데! 아버지가 꿈꾼 최강의 드래곤은 우리 대에서는 이루어졌다. 우리들은 문자 그대로 최강이었다. 하지만 우리 다음 대에서는 달랐 다. 그들은 복제품이긴 하지만 아주 작은 결함이 있는 복제품이었다. 당장은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대를 거듭할수록 불균형은 축적되고, 어느 순간 마나는 뒤엉켜 온 세상을 휩쓸 것이다. 아버지의 필생의 역작은 사실 대실패작일 뿐만 아니라 재앙의 별보다도 더 지독한 재앙이었다. 나는 흑룡 파야, 이제는 고룡이 된 지혜의 흑룡에게 내가 알아낸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는 놀라면서 내 말을 경청했다. 그러나 진 심으로 믿지는 않았다. 내가 착각했을 지도 모르고, 마나가 뒤엉킨다고 해서 재앙이 찾아올 리도 없다, 왜 최악의 경우만 생각하 느냐,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울부짖었다. 언제 재앙이 닥쳐올지 모르지만 이대로 계속가면 재앙은 틀림없이 찾아온다고. 왜 너무도 뻔한 미래를 부정하 려 하느냐고. 드래곤은 이 세상에 짐밖에 되지 않는다고, 우리 드래곤이라는 존재를 이제 지워야 한다고. 우리들, 그리고 우리의 해츨링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고. 그러자 파야는 다시 말했다. 지금 우리들은 재앙의 별도 이겨내고 엄청난 마나를 휘두르며 무서울 것 없는 지극히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왜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삶을 포기해야 하느냐, 온 세상이 우리와 함께 멸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하루라도 더 살겠다. 그의 눈빛이 위험하게 빛나자 나는 뒷걸음쳤다. 그러다 용기를 냈다. 그의 마나는 물, 내 마나는 흙, 흙은 물을 이긴다. 그러나 내가마나를 일으키자 그는 샤난을 불렀다. 그리고 샤난에게 간략하게 내가 한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파야는 싱글거렸다. "어때, 샤난? 오피아의 말처럼 우리 모두 죽고 해츨링들도 다 죽일까?" 그녀는 해츨링도 죽어야 한다는 말을 듣자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오피아,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사랑스러운 해츨링들이 죽는 걸 볼 수는 없어! 어떻게 그런 일을!" 아, 샤난은 번식과 생장과 자비의 청룡이었다. 그녀가 해츨링의 죽음을 두고 볼 리는 없었다. 그녀는 나무의 마나를 일으켜 나를 향 해 쏘았다. 그녀의 마나는 내 마나와 상극이었기 때문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마나를 피하며 혼자서라도 목숨을 끊으려 했다. 그러나 파야는 벙글거리며 말했다. "오피아 쓸데없는 짓 하지마. 내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이미 황룡 해츨링이 태어난 이상 네가 지금 죽어도 네 마나는 흩어져서 모 두 황룡의 해츨링에게로 갈 거고, 우리 드래곤들 사이의 마나 균형과 생명력은 그대로 유지될 거야." 나는 힘없이 손을 내렸다. 샤난은 나를 속박했고 파야는 나를 내 레어에 가두었다. 그는 만약에 대비하기 위해 황룡 해츨링이 무사 히 2차 탈피를 마치는 그날까지는 나를 살려두겠다고 했다.샤난은 파야의 말대로 비밀을 지키기로 했기 때문에 이제 이 일을 아는 드래곤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나는 마나의 흐름을 읽고 있다. 이제 해츨링의 탈피는 거의 끝났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레어의 황옥을 이용해서 내가 아는 바를 기 록으로 남기는 것뿐. 그리고 이 황옥판을 파야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놓는 것뿐. 파야나 샤난이 계속 비밀을 지킨다면 한두 세대 후의 용들은 아무것도 모르게 될 것이다. 그들은 계속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자신 들의 강대한 마나를 터드려 온 세상을 흑백의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언젠가 어느 조화의 황룡이 우연히 이 황옥판을 발견한다면 그는 나처럼 드래곤의 존재와 미래에 대해 고민 하게 될지도 모르고, 뒤틀린 드래곤의 운명을 바로잡을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6,500만 년 전의 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건조하고 뜨거운 상쾌한 대기, 맛있는 공룡들, 다정한 동료 드래곤들, 그들은 지금 의 우리들처럼 강력한 마나를 지니지는 못했지만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진정 행복했다. 그러나 오직 똑같은 복제품만이 있는 지금의 세계에서 나는 한없이 외롭다. 그들은 생물일까? 그들은 살아 있는 걸까? 나는 살아 있 는 걸까? 아니면 우리들은 어느 미친 드래곤이 꾼 악몽에 불과한걸까? <<<<<<<< 생명의 노래는 사랑의 노래 >>>>>>>>>> 황옥판에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모두들 말이 없었다. 데이그랜은 몇 번 마른기침을 했다. 청룡 안티니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렀다. 화룡 가이레스는 망연자실했다. 네린이 마침내 침묵을 깼다. "렌, 그대는 우리 드래곤에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법을 알려주려는 겁니까? 내가 보기엔 그것밖에 방법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런 거 라면 필요 없습니다. 이미 우리 드래곤들은 죽음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데이그랜도 그답지 않게 격한 어조로 말했다. "결국 시오카난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온 세상이 드래곤과 함께 멸망하는 것을 막았으니 그러면 된 것 아닙니까? 더 까발릴 게 남아 있습니까? 우리더러 뭘 더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멸망의 때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느니 아예 그냥 다함께 죽어버리죠! 어차피 우 리는 6,500만 년 전에 죽어버렸어야 하는 복제품 아닙니까!" 데이그랜은 말하다 말고 감정에 복받쳐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허탈했다. 렌은 드래곤들의 충격을 이해했다. 그녀는 나직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어떻게 태어난 존재이든 일단 태어난 이상 생명은 생명입니다. 100명의 쌍둥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한 명 한 명 서로 다른 개 체입니다. 원본만이 진짜이고 복제는 가짜인것도 아닙니다. 복제라고 해서 살아갈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선대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지언정 다른 시대에 태어나서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추억을 만들고 다른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대 드의 존재는 유일무이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살아 있는 생물들이 다 그렇듯이요. 그래서 그대들도 살아 있을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데이그랜은 눈물을 닦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래서요?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겁니까?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 다른 생물들을 다 죽이겠다는 겁니까? 우리가 원래대로 살아 있다 보면 결국 온 세상을 황제의 저주로 휩쓸어버리게 된다면서요! 시오카를 구한다 해도 우리들은 세상에 멸망을 가져오는 저주받은 존재로 전력하는 거 아닙니까!" 렌은 긴 한숨을 쉬었다. "해결책이 없었다면 제가 여기 오지 않았을 겁니다." 렌의 말에 드래곤들은 일제히 렌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에 가득한 불신과 희망과 의혹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렌은 숨을 가다듬 으며 말을 이었다. "생명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저는 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그 문제를 오랫동안 생각해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본질이 뭔데요?" 데이그랜은 이런 상황에서도 호기심에 차 물었다. "하나의 생명이 다른 생명을 만나 또 다른 생명을 낳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얼마 지나면 수명을 다하고 죽어갑니다. 그 자손 은 또 성장하여 다른 생명을 만나 또 자식을 낳고, 때가 되면 다시 죽어갑니다. 그렇게 생명은 계속해서 섞이고 나고 자라면서 이어 집니다. 그 생명은 원래의 모습 그래도 계속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의 생명에서 본래 자기 자신의 모습만큼 확실한 것은 없 습니다. 죽음이 원래 당연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생명들은 확실한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 대신 자손을 낳고 죽음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왜 죽어야 할까요? 세상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어서, 어버이가 계속 살아 있는 한 어버이는 결국 자식의 몫을 빼앗게 되지요. 자식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그만큼 낮아지고요. 그래서 어버이는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식들에게 더 많은 가능성 을 열어주게 되었습니다. 아니, 어떤 어버이는 심지어 자기 몸을 자식들에게 먹이로 주기도 합니다. 지성이 발달하면서 본능이 흐려 져버린 인간의 부모들조차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요. 가끔 예외도 있기는 하지만요." 렌은 카엔의 손을 꼭 잡았다. 카엔은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위로가 담긴 그 웃음에 렌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자손을 소중히 여기는 걸까요? 그건 자손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똑같은 존재가 그저 계속되기만 한다면 더 이상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렇게 고정되는 순간 그의 존재는 생명 으로서 그대로 끝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나을 수도 못할 수도 있는 자손, 그들을 닮았지만 또 다른 자손이 태어나는 순간, 그 의 생명은 더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 가능성이야말로 생명의 본질입니다. 교접, 혼혈, 변이, 출산, 탄생, 죽음, 그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입니다. 생명의 본질과 죽음의 본질은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상 실하는 것. 그걸 위해 현재의 자신을 희생하는 것. 그래서 생명과 죽음 안에는 사랑이 충만해 있습니다. 생명의 노래는 사랑의 노 래입니다." 경의로움으로 가득 찬 드래곤들 앞에서 렌은 노래하듯 말을 이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 저는 그대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 또한 찾아 낼수 있었습니다. 그대들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대들의 선조는 그대들의 가능성을 모두 봉쇄해버렸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그 모습 그대로 최강으로 남기기 위해 그대들을 고정 시켜버렸고, 그대들은 자신의 복제품만을 낳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바로 각각의 드래곤이 저마다 최강의 순수한 마나를 사용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죠. 생명이 스스로를 구하려 하는 걸 비난 할 수는 없겠지만, 그대들의 선조, 지금의 드래곤이라는 존재를 조작해낸 그 드래곤은, 자신 이 생명을 조작할 수 있다는 것에 도취되어 생명이 무엇인지를 망각한 것입니다. 생명은 나고 자라고 죽고 변이하는 가운데에 그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생명의 순환에서 순혈은 독이고 혼혈은 축복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입니다. 자신 의 힘을 과신하여 필연적인 파국을 외면한 것입니다. 최악의 결과를 막기 위해 황룡 시오카난은 자결했고, 이제 그대들의 마나는 균형을 잃어 그대들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마나의 균형을 되돌릴 수 있을까요?" 데이그랜은 이제 렌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 무엇인지 짐작했다. "아마 우리의 본질을 바꾸어야 하는 거겠죠?" "맞아요. 바로 그거에요." "어떻게?" "섞이기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약해지기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지금의 모습을 버리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마세요. 버려야 얻을 수 있 고, 죽음이 있어야 삶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드래곤의 모습을 버리세요. 하나의 마나를 전적으로 다스리는 막강한 드래곤의 특성을 버리세요. 인간처럼 엘프처럼 이 세 상처럼 자연스럽게 온갖 마나를 받아들이고 포용하십시오. 인간들은 어떻죠? 모두들 여러 가지 마나를 뒤섞어서 몸에 품고 있지만 그래도 어떨 때는 드래곤보다 강하지요? 우리 인간은 드래곤의 눈으로 보면 수명도 짧고 어리석고 마법도 무척 어렵게 익히지만, 그래도 인간들의 지혜가 종종 드래곤을 넘어서지 않나요? 왜 그럴까요?" "왜죠?" 데이그랜은 경탄하는 말투로 물었다. "인간이 무척이나 다양하기 때문이에요. 착한 사람, 악한 사람, 순수한 기운을 가진 사람, 잡탕기운을 지닌 사람, 지혜로운 사람. 어리석은 사람, 그 모든 스펙트럼의 끝에서 끝까지 모여 인간이라는 집단을 이루고, 그 복잡함과 다양함 속에 수많은 가능성이 있 어 마법사와 기사와 과학자와 용사와 시인과 음악가가 태어나 이 세사을 채우는 거지요. 마나를 예로 들어보지요. 인간들은 참으로 다양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인간들은 혼합된 마나를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드래곤 처럼 순수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 태어나지요? 저라든지, 여기 카엔님 같은 사람들 말이에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결국 보통 사람들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그 순수함이 섞이고, 비범함은 평범함 속에 파묻혔다가, 수많은 세대가 지난 후 다시 그 비범 함이 불현듯 발현되지요? 그래서 인간이 발휘하는 비범함은 무척이나 안정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거대한 평범함이 비범함을 받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인 간의 비범함은 수많은 평범함이 모이고 경쟁하고 협조하고 뒤섞이면서 태어난 것입니다. 평범함이야말로 비범함의 원천입니다. 반면에 드래곤의 비범함은 그 수많은 평범함을 도려내버리고 오로지 비범함만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드러나는 비범함 이 삼각뿔처럼 굳건한 것이라면, 드래곤의 비범함은 팽이 같은 것입니다. 팽이가 돌다가 어느 순간 멈추면 모든 것이 끝장인 것 입니다. 그러니 드래곤들은 스스로 평범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시오카에게서 일어난 파탄을 막고, 드래곤의 연쇄붕괴를 저지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데이그랜은 다시 물었다. "그럼 그렇게 해서 우리 자신들의 목숨을 구한다고 하죠. 우리들이 마나를 섞어 약한 존재가 되어버리면 인간들이 우리들을 가만히 두겠습니가?" 렌은 다시 대답했다. "마나를 섞는다는 것은 불확실성에 발을 내딛는다는 의미일뿐 반드시 약해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강해질 수도 약해질 수도 있 는 겁니다. 이세상에 태어난 생명체로서 불확실에 몸을 맡기고 다른 생명체와 경쟁하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건 드래곤들이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드래곤이 비정상적이었던 겁니다. 드래곤은 마나의 순수함을 잃고 난 후에도 여전히 강한 존재일 것입니다. 과거에 수많은 드래곤들이 함께 나누었던 마나가 지금 여러분 다섯 존재에 집중되어 있으니까요. 예전처럼 노력없이 무조건적으로 강해질 수는 없겠지만, 여러분들은 아마도 인간들처럼 일시적으로 순수한 마나를 집적하여 마법을 활용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을 테고, 어쩌면 전보다 더 강해질 수도 있겠지요. 지금 까지 드래곤들이 타고난 강함에 안주하여 그걸 뛰어넘을 노력을 게을리 해왔다면 앞으로는 다르겠지요." "우리 자손들은요? 렌은 우리들이 자신의 복제를 낳는 거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마나를 뒤섞은 상태에서 앞으로 낳게 될 알들은 어떻게 태어나 어떤 존재가 되는 겁니까? 그 알들을 부화될 수 있는 겁니까? 제대로 성룡이 될 수 있는 건가요? 우리의 후손 또한 우리처럼 똑같은 문제에 부딪치지 않을까요?" "여러분이 마나를 뒤섞어 원래의 드래곤으로 되돌아간 후, 여러분은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의 씨앗을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은 하나 의 완전한 드래곤인 그 씨앗을 반으로 쪼개십시오. 전문용어로는 감수분열이라고 합니다. 그걸 어떻게 하는지는 제가 자세히 정리 해두었습니다. 그 다음엔 감수분열된 씨앗을 다른 드래곤의 씨앗과 합치셔야 합니다." "어떻게?" "한쪽의 생명의 씨앗이 간직된 곳에 자신의 생명의 씨앗을 뿌리면 됩니다. 그걸 용이하게 하기 위해 신체의 일부를 변형시켜야 할 지도 모릅니다." "도마뱀처럼요?"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는요?" "여러분의 아이들은 다른 생물처럼 자연스런 과정을 거쳐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파충류이니까 아마도 온도에 따라 암수가 달라 지겠죠. 그들은 크면 다시 다른 생물처럼 서로 사랑을 나누고 자신들보다 못할 수도 있는 아이들을 낳을 겁니다. 그렇게 드래곤 의 생명은 이어질 것이고, 드래곤은 이 세계 생태계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될 것입니다." "결국 렌의 말에 우리가 마나를 섞어야 한다는 말인데, 어떻게요? 우리 드래곤들이 마나를 운용하는 건 매우 엄격한 원리에 따른 것이라, 무작정 섞어야지 하고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섞을 수 있는게 아닌데요? 우리끼리 마나를 뒤섞으면 결국 저 황제의 저주 랑 비슷한 대 폭발 현상이 일어나 버릴 텐데요?" 데이그랜이 다시 물었다.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렌은 확신에 차서 조용히 대답했다 "제 정명기요." 렌이 정명기를 일으키자 드래곤들은 모두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 따뜻하고 아름답고 모두들 감싸주는 듯한 생명으로 가득 찬 기운. "그리고 제 마나요." 렌이 자신의 마나를 일으켜 보이자 모두들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 둘이 공존하는 거죠? 원래 정명기는 마나를 튕겨내는 기운이 아닙니까? 게다가 렌의 마나는 지금 한꺼번에 다섯 종류가 다 섞여 있지 않습니까? 원래 렌은 순수한 물의 기운만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까?" 데이그랜이 묻자 렌이 잔잔히 웃었다 . "제가 살인을 저지른 후 한없이 제 안에 침잠했다가 다시 살아갈 기운을 찾았을 때, 사라졌던 제 정명기는 다시 돌아왔어요. 그 기운 은 전처럼 티 없이 맑은 기운이 아니라, 이 세상 자체와도 같이 탁하고 이것저것 뒤섞인 기운이었어요. 정명기가 그렇게 변했기 때 문인지 제가 부르는 마나 또한 이것저것 섞인 잡탕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제 정명기가 마나의 힘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에요. 오히려 더 은근하고 더 강하죠. 왜 그럴까요? 생명 그 자체는 절대 깨끗하고 순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피가 튀기고 더럽고 어지럽고 예측불가능하고 서로 교접 하고 죽이고 공생하고 투쟁하는 그것이 바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치를 깨달았을 때 정명기는 생명 그 자체의 모습으로 제게 돌아왔습니다. 자, 이 정명기로 여러분들의 마나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균형이 깨지는 걸 걱정하지 마시고 제게 여러분의 마나를 쏘아주세요. " 데이그랜이 다시 물었다. "그 정명기로는 5,6서클의 마나 이상을 지탱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렌은 평온하게 웃었다. "제 생명력을 바닥까지 전부 짜낸다면 여러분들의 모든 마나를 다 받아들이고도 남습니다. 생명력 중 가장 강한 생명력은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생명력이니까요. 제 안에 여러분들의 마나가 가득 차 평형을 이루면 그 다음에는 각자 제게 손을 뻗으세요. 뒤섞인 마나는 자연스럽게 여러분들의 몸속으로 다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럼 렌은요?" 데이그랜의 목소리는 떨렸다. "아, 저는 여러분들을 구하고 장렬히 죽겠죠." 렌의 목소리는 무척 밝았다. 카엔은 렌의 빛나는 얼굴을 외면했다. 드래곤들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스쳐갔다. 안티니아가 울먹이며 물었다. "왜 드래곤에게 그렇게까지 해주려는 거죠? 우리들은 렌에게 아무거도 아닌데?" 렌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우선 저는 어차피 죽을 거거든요.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몇 달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을 구하고 죽는 게 더 보람 찬 일이겠죠. 그리고 테룬 황제에게 빚을 졌는데 그것도 갚아야겠고요." 데이그랜이 떨리는 목소리로 재빨리 말했다. "테룬 녀석은 당장 되살려놓겠습니다." 렌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조금 심각한 얼굴을 하고 계속 말했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어요. 사실은 그게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여러분들은 인간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지성 있는 존재이기 때 문입니다. 제가 살던 세상에서는 오직 인간만이 지성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과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잃어버렸습 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으로 모든 걸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매일 매일 엄청난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도 멈출 줄을 몰라요. 그곳의 인간들은 때때로, 우월한 한 종족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다른 피를 지닌 인간들이 자신의 피를 더럽히지 못하도록 수백만, 수천만의 죄 없는 다른 인간을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드래곤들처럼 생명의 근원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까지 손에 넣었습니다. 아직은 실험단계이지만 그들은 머지않아 그 능력을 마구 휘두르게 될 거에요. 자기 자식들을 더 똑똑하게, 더 멋있게 아름답게, 더 튼튼하게 바꾸려 할 테죠. 그 결과는 어떨까요? 생명을 조작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라는 얘기는 제쳐놓더라도, 그런 식으로 조작을 거듭해서 인간을 점점 구 미에 맞게 개조하다 보면 인간들은 결국 드래곤들이 직면한 것과 같은 문제를 미래에 직면하게 됩니다. 일시적으로 더 강하고 총명해진 것 같겠지만, 결국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파탄이 드러나고, 그들의 강대한 능력이 스스로를 배 반하게 될 겁니다. 서로 최고가 되려고 복제와 수정을 거듭해서 모두가 비슷한 모습이 되어버리면, 마치 한 종류의 작물만 심어놓 아 해충에 약한 밭처럼 인간사회는 사소한 위험에도 지극히 취약해지고, 어느 순간 멸망이 찾아 올 겁니다. 인간의 인위적인 조작이 자연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이란 수학공식으로 짜맞춰 멋대로 조작해낼 수 있는게 아닙니다. 그대 들도 엘프와 드워프를 만들어냈죠. 하지만 보세요. 그대들이 지혜를 짜내서 만든 엘프와 드워프는 드래곤의 영향력 없이는 당장 이라도 인간의 손에 멸종당하겠지요. 인간은 스스로 투쟁하고 진화하면서 자신의 길을 열어왔지만, 엘프와 드워프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살던 곳의 인간들도 같은 과오를 저지르려 하고 있어요. 그들은 자신의 지식을 맹신해서 자신들의 무덤을 파고 있어요. 자연 에 대한 겸허함을 전부 다 잊어버리고 있어요. 하지만 이곳은 다릅니다. 아직 인간들은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들만이 최고의 지성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 어요. 제가 살던 세계처럼 마구잡이로 이 세상을 헤집고 다니지도 않아요. 그건 제 생각에는 여러분, 드래곤이라는 존재 덕붙입니다. 인간들이 스스로와 온 세상을 파멸로 몰고 가지 않을 정도의 지혜를 가지게 될 때까지만이라도 드래곤이라는 더 강한 존재가 인간 곁에 있어준다면, 인간이 사라져버린 꽃과 새와 짐승과 풀 앞에서 뒤늦게 후회하며 울부짖는 일이 없도록 인간의 자만심을 억눌러 준다면, 세상은 한결 좋아질 테고 인간이라는 종족은 조금 더 빨리 어른이 되겠죠. 결국 저는 인간이라는 종을 위해 이러는 것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수많은 인간들이 더 좋은 미래를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요." 모두들 벅찬 감동에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은 이 순간 진정코 인간이라는 종족이 드래곤보다 더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사실 을 인정했다. 온갖 추잡한 악인들이 있는 반면 렌 같은 존재도 있지 않은가. 카엔은 이미 렌의 마음을 읽어 렌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새삼 렌의 말을 들으니 심장이 떨려왔다. 그는 용들 앞에서 눈물을 터뜨리는 추태를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정작 눈물을 흘린 것은 데이그랜이어다. 그는 비인간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눈물을 쏟았다. 그는 예전에 티 우사가 죽을 때처럼 한없이 슬펐다. 그의 기나긴 5,000년 반생 동안 몇 번 마주치지 못한 보석 같은 사람, 왜 이런 아름다운 인 연은 이렇게 짧은 것일까. 왜 가장 좋은 것이 가장 빨리 사라지는 걸까. 저 하찮은 인간들 속에서 어떻게 이렇게 비범하고 지혜 로운 존재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드래곤에게 더 요구할 게 없습니까? 힘닿는 데까지 뭐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가 울먹이며 말하자 렌은 부드럽게 웃었다. "물론 요구조건이 많아요. 첫째, 더 이상 인간들을 가지고 실험하지 말 것. 둘째, 남대륙을 인간들의 손에서 지켜줄 것. 남대륙에 있는 엘프, 드워프, 그리고 인간 변종들은 모두 드래곤에게 비롯된 것이니, 그대들이 나서서 그들을 인간들에게서 지켜주세요. 드래곤이 없다면 그들은 인간의 탐욕을 감당하기 힘들 테죠."" 거기까지 말하고서 렌은 씨익 웃었다. "셋째, 우리 카엔님의 말동무가 되어주세요. 제가 죽고 나면 카엔님은 홀로 남겨질 테고 그를 사랑하는 다른 신하들도 결국 그 보 다 먼저 늙어 죽겠죠. 친하건 친하지 않건 간에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카엔님이라는 존재를 알고 얘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해 요. 카엔님은 너무 여리고 착해서 정말로 걱정이 돼요. 주변머리도 없고, 잘 삐지고, 수줍음도 지독하게 타고, 게다가 사람 마음을 읽어서 오만 생각이 들끓고, 정말 혼자 남겨두고 죽으려니 눈이 감기지 않는다고요. 카엔님의 말벗으로 데이그랜님이라면 딱이엥. 주책없고, 천연덕스럽고, 호기심 많고, 아무 일에나 끼어드니 말이에요. 거기다가 카엔님에게 마음도 읽히지 않으니 모처럼 카엔님도 보통 사람들이 나누는 우정 같은 걸 나눌 수 있겠지요." 데이그랜은 콧방귀를 뀌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그는 눈물을 닦고는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책임지고 카엔닌의 말동무가 되어주겠습니다. 나는 사실 저녀석을 정말 좋아한답니다." "나는 네가 정말 싫은데?" 카엔은 무뚝뚝하게 딱 잘라 거절했다. 자기를 걱정하는 렌의 말을 듣자 그는 가슴 속에서 뜨겁고 울컥 하는 것이 치밀어 올라 더 이상 울음을 참기 어려웠다. "카엔니임! 최소한 데이그랜님이 놀러 오면 거절하지는 마시라고요!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사실지 모르는데 최소한 함께 제 얘기를 하면서 저를 추억할 상대 정도는 있어야죠! 아셨죠?" 렌이 상냥하게 야단치자 카엔은 움찔했다. 그는 겨우 울음을 참고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럴게요." 데이그랜은 속으로 킥킥 웃었다. '역시 카에닌 잡는 렌이군.' "그리고 데이그랜님! 카엔님 가지고 놀리거나 하면 안 돼요! 밥은 잘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 정기적으로 챙겨주셔야 해요!" "옙!" '용 잡는 렌이야.' 데이그랜이 화들짝 놀라 대답하는 걸 보고 카엔도 고소해했다. 렌은 이제 기진맥진했다. "마나를 섞는 건 닷새 뒤에 할게요. 운이 좋으면 다 끝난 후에도 제 목숨이 남아 있겠죠." 렌의 말에 결국 카엔은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는 드래곤들 앞에서 부끄러움도 잊고 울부짖었다. 렌은 애처로워하면서 카 엔의 뺨을 쓰다듬었다. "바보! 왜 여태까지 억지로 참았던 거예요! 울고 싶을 땐 울어야 한다고요! 내가 죽는다는데 당연히 엉엉 울고 통곡을 해야죠!" 렌은 미소지으며 카엔을 얼싸안았다. "내가 울면 렌이 슬퍼할까봐……" 카엔은 울면서도 미안해했다. 렌은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밝게 웃었다. "카엔님이 울면 물론 슬퍼요. 하지만 억지로 참는 건 더 슬퍼요. 카엔님이 슬퍼하는 게 한편으로는 가슴 아프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사랑받는 것 같아 기쁘답니다." "렌!" 카엔은 렌을 꼭 부둥켜 안았다. "쳇, 끝까지 염장질이군." 데이그랜은 기어코 옆에서 한마디 하고야 말았다. 모든 것을 버리겠다고 생각하니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며칠 동안 단잠을 자고 푹 쉰 렌은 데이그랜이 마법을 불어넣어 깨운 테룬 황제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테룬은 한없이 슬퍼했다. 그러나 렌은 그를 보며 안심했다. 테룬은 이제 혼자 살아갈 힘을 얻었다. 그가 렌을 카엔에게 보내주었을 때 테룬은 이미 어른이 되었다. 한 번의 이별을 극복한 이상 두 번째 이별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 들을 죽음의 세계로 떠나보내며 죽음에 익숙해지고, 나중에는 스스로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가고 죽어가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렌의 목숨을 구하고 행복하게 해줄 걸로 믿었소." 카엔을 향한 테룬의 말에는 어쩔 수 없는 비난이 섞여 있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카엔은 울면서 테룬에게 끝없이 사과했다. 카엔은 테룬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처절한 슬픔을 지나칠 만큼 생생하게 읽었다. 그 마 음은 자신의 마음과 똑같이 닮아 있어서, 카엔은 테룬에 대한 연민과 스스로에 대한 연민으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테룬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그도 지금 가장 괴로운 것이 카엔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마치 카엔에게 못할 말을 한 것 같은 기 분이 들어 무척 죄스러웠다. "그대의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 렌을 위해 그대가 한 모든 일을 잊지 않겠다." "당신은……… 괜찮겠소?" 테룬은 조심스럽게 묻자 카엔은 쓸쓸하게 대답했다. "렌은 죽지 않을 것이다. 렌은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을 것이다. 나는 렌을 위해 남은 세월을 속죄하며 보낼 것이다." 둘의 모습을 보는 렌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지만, 렌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돌아섰다. 카엔은 조용히 렌의 뒤를 따랐다. 테룬도 따 라오려 했지만 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는 여기까지에요." 렌의 말뜻을 이해한 테룬은 피눈물을 흘리며 돌아섰다. 그들은 중앙홀에 다시 모였다. 마침내 렌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정명기를 시전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생명력을 긁어모아 정명기 에 싣기 시작했다. 심장을 뜯어내는 것 같은 감각이 엄습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편안했다. 육신의 고통이 정신과 분리되어 전혀 아프지 않았다. 편 안한 마음으로 렌은 생명을 조금씩 내주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렌을 지켜보았다. 렌의 얼굴은 무지갯빛으로 빛나고, 어느 순간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성스러운 빛을 띠었다. 렌은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세계의 모든 생물이 전부 한눈에 보였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눈부시게 빛나고, 생명체들은 전부 그지 없이 아름다웠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내는 맑은 소리가 거대한 화음이 되어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엇다. 태어나는 생명이 내는 탄생의 울음, 죽어가는 생명이 내는 단말마의 비명, 피비린내, 꽃 향기, 우지끈 뼈 부러지는 소리, 아기를 달 래는 엄마의 노랫소리,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신음소리, 맹수의 포효, 그 모든것이 실은 하나의 소리였다. 모두가 생명의 노래였다. 렌 자신의 노래였다. 살아있는 것이 너무 기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무한한 기쁨 속에서 렌은 생명력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정명기에 실었다. 눈을 뜨자 드래곤들은 모두 울고 있었다. 한 발짝 떨어져서 렌을 지켜보는 카엔도 울고 있었다. 렌은 그들을 향해 고요한 미소를 지 었다. 드래곤들이 다가왔다. 렌이 손짓하자 드래곤들은 미리 들은 대로 렌의 몸에 손을 대었다. 의식을 잃은 시오카는 가이레스가 부축하여 손을 대도록 했다. 카엔은 긴장하여 침을 삼켰다. 모든 손이 렌의 몸에 닿는 순간 드래곤드의 마나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렌은 잠시간의 무아지경에서 깨어나 긴장했다. 마나들이 위험하게 얽혀 어느새 조금씩 잿빛을 띠었다. 말틴에서 보았던 바로 그 죽 음의 잿빛이었다. 숨을 들이키며 렌은 정명기로 마나를 감쌌다. 포효하던 마나는 점차 진정했다. 그래도 위험했다. 렌은 아낌없이 정명기를 쏟아 부었다. 잿빛은 조금씩 가라앉고 마나는 본래의 색을 찾아갔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마나가 서로 섞여야 했다. 렌은 계속하여 정명기를 마나 속으로 뿜어냈다. 처음에는 각기 덩어리져 있던 오색의 마나는 점차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몸속으로 끝없이 마나가 들어올 때마다 렌은 아낌없이 정명기를 풀어 마나를 혼합시켰다. 그러나 마나는 다시 흔들렸다. 흙의 마나가 너무 모자랐다. 모든 마나를 다 섞으면 모자란 시 옼카의 마나가 중화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모두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달았다. 더 이상 방법이 없기에 모두 당황했다. 그때 카엔이 끼어들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렌의 몸에 자신의 손을 대고, 마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렌은 미안함과 사랑이 뒤섞인 눈빛으로 카엔을 쳐다보았다. 카엔은 렌에게 웃어보였다. 다섯 드래곤의 마나에 카엔의 마나가 더해지자 마나는 점차 안정되어갔다. 얼핏 보면 하얀 빛이지만, 자세히 보면 오색의 마나 입자 가 뒤섞여 무지갯빛으로 빛나고 있엇다. 그 휘황한 오색 빛이 렌의 몸 주위를 휘감았다. 모두가 마나를 다 뿜어냈음을 확인한 렌은 이제 자신의 생명력과 함께 드래곤들에게 마나를 되돌리기 시작했다. 자연히 카엔도 뒤 섞인 마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모두 무지갯빛 마나를 받아들이며 때로는 고통스러운, 때로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정제되고 순수한 마나만을 알던 드래곤들 에게 자연 그대로나 다음없는 이 뒤엉킨 마나는 충격 그 자체였다. 처음의 당혹감이 가시자 그들은 이 기운이 바로 그 머나먼 옛날 자신의 조상들이 그토록 친숙하게 받아들였던 바로 그 기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잊어버렸을 지 몰라도 그들의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무한한 그리움이 드래곤들을 가득 채웠다. 그렇다. 바 로 이 기운이야말로 진정한 마나이고 진정한 생명의 기운이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이 다시 받아들이는 기운 속에 렌의 생명이 섞여 있음을 알았다. 그들이 모를 리 없었다. 한없이 자비롭고 따스하 고 한 점의 망설임도 없는 이 다정한 기운을 어찌 깨닫지 못할까. 그들은 렌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끝없는 허기를 느끼며 렌이 보내주는 기운을 받아들였다. 그들의 몸이 그걸 요구 했다. 어느새 드래곤들의 외모는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가장 확연한 변화를 보이는 것은 시오카였다. 그녀는 열두세 살 정도의 파리한 소녀의 모습에서 점차 커져 어느새 열대여섯 살로 보였다. 그녀의 흠 없는 금발은 조금씩 빛이 바래 군데군데 은빛이 도는 적색으로 변해갔다. 다른 용들도 비슷했다. 데이그랜의 머리카락에는 청색과 은색이, 네린의 머리카락에는 흑색과 금색이, 안티니아의 머리카락에는 흑색과 적색이, 가이레스의 머리카락에는 황색과 은색이 섞여갔다. 카엔만이 달랐다. 그의 은보랏빛 머리와 눈동자는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타고난 것이었기에 뒤섞인 마나를 받아들여도 변함이 없었다. 용들의 머리카락에 색채가 더해질수록 렌의 혈색은 조금씩 파리해져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마나의 흐름이 바뀌었다. 마나는 도로 렌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마나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의 생명력도 함께 빨려 들어갔다. 렌도 드래곤도 카엔도 당황했다. "왜 이런 겁니까?" "렌,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들은 렌의 몸에 손을 댄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렌은 필사적으로 마나와 생명력의 흐름을 멈추려 했지만 자신에게로 몰려오는 기운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녀의 몸을 가득 채우 는 믿을 수 없는 활기에 황홀해졌다. 그래, 이 삶의 기운! 렌은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저들의 생기는 내게 전부 흡수되고 나는 계속 살 수 있게 될 거야! 살 수 있단 말야! 렌의 몸 안 가득한 세포 하나하나가 최치는 생명의 갈구는 너무 강렬해서 렌은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가까스로 마지막 순간에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자신이 충만한 생기에 넋을 잃고 있다가는 저들은 모두 죽을 거야! 카엔님마저도 죽어버릴 거야! 절대 그럴 수는 없어! 대 체 왜 이러는 거야! 방법을 찾아야 해! 렌은 곧 몸에 들어온 생기가 자신의 하복부를 중심으로 휘몰아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왜 갑자기! 렌은 정신을 그곳에 집중했다. 아주 미미한 생기가 느껴졌다. 렌은 정신을 더욱 집중했다. 정명기가 그리고 몰려가면서 마나의 혼 합체는 마구 출렁였다. 렌이 원인을 발견해낸 순간,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기였다. 이제 겨우 착상되어 막 분열을 시작한 작디작은 배아였다. 카엔과 그녀의 사랑의 결정체. 저 작고 미약한 것이 스스로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다른 생명을 빨아들이고 있구나. 가엾은 내 아기. 너는 죽기 싫어하는구나. 그래, 당연하겠지. 모든 생명은 태어날 권리가 있으니까. 하지만 아가. 생명이 스스로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해서 무작정 다른 생명을 빼앗을 권리가 있는 건 아냐. 하나의 생명이 자기 생명만 중한 줄 알면 그 생명은 결국 주위의 모든 생명을 파괴하고 자신마저도 파괴할 거야. 세상의 모든 생명은 서로 이어져 있으니까. 생명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거니까. 아가. 그러니 들어줘. 저들에게 생기를 되돌려줘. 정 안 되겠으면 네가 태어날 때까지의 생기만 남기고 나머지는 돌려줘. 제발. 너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아기가 아니니? 사랑이 이기심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걸 너는 모르니? 내 아가. 사랑하는 아가! 그순간 렌의 하복부에 집중되었던 기운의 덩어리가 일제히 해방되면서 생기, 마나, 정명기가 온통 뒤섞인 거대한 광휘의 덩어리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모두 눈을 감으세요! 그리고 모든 걸 운명에 맡기세요!" 렌은 다급하게 말했다. 그곳의 모두는 눈을 감았다. "지금 여기 휘몰아치는 기운을 감은 눈 너머로 느끼세요. 자신의 몫의 생명을 찾아가세요.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큼만. 겸허하게.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그저 순리대로 모든 생명이 흘러가도록. 자, 이제 스스로의 생명을 받아들이세요!" 렌은 다시 기운을 뿜어냈다. 모두들 비명을 질렀다. 무한것 것 같은 힘이 화살처럼 각자에게 꽂혔다. '순리대로! 그래, 순리대로!' 렌은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뱃속의 아기는 어느새 욕심을 버린 듯 흘러가는 기운을 붙잡지 않았다. 그것이 한없이 대견하면서도 서글펐다. 욕심을 부리지 말자. 더도 덜도 말고 운명이 허락하는 만큼만. 모두에게 기운을 나누어 주자. 렌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휘몰아 치는 기운에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났다. 기운은 렌을 스쳐지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기도 하고 또 새어나가기도 했다. 렌은 한없이 자유롭고 허허로운 심정으로 기운의 오고감을 너그러이 바라보았다. 영원 같은 순간이 흘렀다. 먼 곳에서 아득하게 카엔이 '렌에게 아기가!'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순간, 더 이상 기운은 흐르지 않았다. 렌은 눈을 떴다. 그녀는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 옆에는 카엔이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리고 다섯 드래곤이 렌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렌! 렌!" 카엔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성공했나요?" "성공했습니다! 모두들 무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주위에서 드래곤들이 한마디씩 했다. 하지만 렌은 눈앞에 바짝 다가와 있는 카엔의 눈가에 가장 먼저 시선이 쏠렸다. "카엔님, 눈 밑에 주름이 생겼어요. 다크 서클까지 있는 걸요. 너무 고생을 하셨나봐요." 렌은 애처로워하며 카엔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링클 프리 아이크림이라도 발라주고 싶었다. 카엔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웃고 울기만 했다. 약간 어두운 무지갯빛이 도는 머리카락을 출렁이는 청년이 렌에게 다가왔다. 외모는 족므 바뀌었지만 렌은 그가 데이그랜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데이그랜님." 렌이 빙긋 웃으며 말하자 데이그랜은 놀랐다 . "역시 렌이군요! 어떻게 내가 난 줄 바로 알아봤나요?" "눈동자 속의 야릇한 호기심 때문에요." 렌의 말에 용들 모두 소리내어 웃었다. "기분이 어떠세요?" 렌의 물음에 데이그랜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음, 몸이 내 몸 같지 않다고나 할까. 이상하게 가벼워요. 그동안 얼마나 부자연스러웠는지 이제야 알겠어요. 그동안은 엄청난 힘을 꾹꾹 눌러 담아 돌로 눌러 놓은 것 같았다면, 지금은, 글쎄, 내 몸이 여러 줄기의 강이 모이고 흘러가는 호수 같아요. 확실히 예전 같지는 않지만 더 편안하고 행복하고 자유로운 기분이 든다고나 할까요? 그동안은 다른 드래곤드로과 한데 묶여 옴짝달짝 못하는 기 분이었다면 지금은 비로소 나 자신이 홀로 선 하나의 드래곤이라는 기분입니다." 데이그랜의 말에 다른 드래곤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은요?" "카에닌 녀석이 뒤섞인 마나를 정제해서 마법을 사용하는 법을 몇 가지 가르쳐주었습니다. 인간치고는 총명해서 별 방법을 다 알 더군요. 그 녀석 마나도 저번 일로 뒤엉켰지만, 괴상한 수법을 써서 9서클 마법을 시전해내던데요." 카엔이 둘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다급하게 물었다. "렌, 몸은 어때요? 기분은? 아기는?" 렌은 눈을 감고 몸의 상태를 더듬었다. 하복부에서 느껴지는 친숙하면서도 이질적인 생명의 기운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운찼 다. 렌의 몸 구석구석에서도 힘이 넘쳐흘렀다. 렌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충만한 생명력이었다. 렌은 무어라 할 수 없는 감사의 빛을 가득 담아 모두를 바라보았다. "제게 생명을 양보해주셨군요." 모두들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안티니아가 미안함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렌은 우리를 위해 생명을 모두 버리려 했는데, 우리들은 목숨이 아까워서 조금밖에 양보하지 못했답니다. 아기 얘기까지 들었는데 도요. 정말 미안해요." 렌은 정명기를 운용해보았다. "조금밖에라뇨! 앞으로 십 년 정도는 더 살 수 있을 것 같은걸요!" 렌의 말에 카엔과 드래곤들은 안타까운 한숨을 토해냈다. 십 년이라니,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십 년이라니, 정말로 긴 시간 아닌가요? 저는 너무 기뻐요. 제게 십 년이면 드래곤 여러분께는 천 년의 세월일 텐데. 그건 너무 큰 양보 아닌가요?" 데이그랜이 끼어들었다. "우리들의 수명은 겨우 오백 년 정도씩 밖에 영향이 없었습니다. 저 열혈 카에닌이 문제죠. 저 녀석은 자기 생명을 자꾸만 더 렌에게 집어넣으려 했는데, 우리들이랑 연동되어서 자기 멋대로 할 수 없었던 상황이 아니었다면 아마 자기 생명을 몽땅 다 렌에게 쑤셔 넣 었을 겁니다. 그대로 저 녀석이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신이 나서 어찌어찌 우리들보다 더 많은 생명력을 렌에게 집어넣은 건 맞습니 다. 9서클에 고집은 또 쇠심줄이라서 말이죠. 아마 그 때문에 저 녀석의 불노장생은 깨졌겠죠." "카엔님, 왜 그러셨어요?" 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자 카엔은 기쁨과 슬픔을 어찌하지 못하고 엉엉 울었다. "렌, 미안해요. 더 많은 생명을 렌에게 주었어야 했는데." 그는 자기도 모르게 렌의 배에 자기 손을 갖다댔다.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이 렌의 가슴 가득히 밀려들어왔다. 드래곤들이 차례로 다가와 렌의 이마에 감사의 키스를 했다. 그들은 이제 전처럼 무조건적으로 절대의 힘을 휘두르는 최강의 드래 곤은 아니었지만, 새로 얻은 자유와 깨달음에 모두들 행복해 보였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렌의 물음에 네린이 대답했다. "우리들은 먼저 스스로의 몸에 적응하고, 마나를 걸러 일시적으로 9서클 마법을 시전하는 법도 배워보고, 그 다음에는 렌의 말대 로 서로의 생명의 씨앗을 섞어 다음 대 드래곤을 만들어볼까 합니다. 그 일을 하는 데에는 인간의 시간으로 수백 년이 걸리겠지만, 우리들은 이제 더 두려워할 것도 쫓길 것도 없습니다. 진정한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니까요." "렌은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요?" 데이그랜이 묻자 카엔이 대답했다. "그야 나와 결혼하는 일밖에 더 있겠나. 당장 돌아가서 렌이 컨디션을 회복하는 대로 국혼을 올리고 렌을 황후로 책봉할 거다. 데 이그랜, 그대와 다른 드래곤들도 모두 초대할 테니, 와주면 감사하겠어." "당연히 가야지. 그래서 둘이 서로 좋아 죽겠다고 히히덕 거리는 걸 끝까지 봐줘야지." 데이그랜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렌은 한껏 밝게 웃었다. "생명이 있다는 건 참 좋은 거네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도요. 아, 이 불확실성이 얼마나 기분 좋은지, 무한한 가능성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어요. 그게 바로 살아 있는 의미겠지요. 정말 행복해요." <<<<<<<<< 끝은 시작으로 이어진다 >>>>>>>>>>>> 렌과 카에닌 황제의 국혼은 동서대륙 전체를 휩쓰는 엄청난 화제였다. 둘의 사랑 이야기, 특히 렌의 모험은 여러 가지로 다채롭게 윤색되어 소설가와 화가, 음악가의 소재가 되었다. 적당한 서점에 렌이 잉태했다는 소식까지 발표되자 서제국은 광란의 도가니로 변했다. 너무 오랫동안 변화가 없었던 황실에 한꺼 번에 닥쳐온 초대형 이벤트 때문에 경제성장률까지 상향조정될 정도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둘의 결혼식을 구경하기 위해 테라미즈로 향했다. 이런 구경은 평생 한 번 하기 힘든 것이니 놓치는 사람이 바보 인 것이다. 각국의 사절단도 혼례식에 맞추어 테라미즈에 차례로 도착했다. 테라미즈 시내는 대경사를 맞아 흥청거렸고 숙박요금을 비롯한 각종 물가는 하늘로 치솟았다. 혼례식에 대비한 건물도색, 수리 등등으로 건축업자들도 정신이 없었다. 황궁의 시녀들과 궁내관들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사방에서 답지하는 혼인선물을 정리해야 하고, 사상 초유가 될 엄청난 예식 을 기획해야 했다. 어차피 황제와 예비황후는 알콩달콩 사랑모드에 잠겨 결혼식 진행 같은 사소한 문제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으 니 모든 걸 다 신하들이 알아서 해야 했다. 하객 중에 폴리모프한 드래곤들이 끼어 있다는 소문이 돌자 시녀들과 사람들은 한층 더 긴장했다. 드래곤들이 인간의 결혼식에 참 석하다니, 역시 카에닌 테라미즈넨 황제는 대단하신 분이라고 모두들 수군거렸다. 혼례식은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릴 무렵 거행될 예정이었다. 두 사람이 새 출발에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때였다. 혼례식의 주례는 뜻밖에도 마이리아 시에서 겨울 여신의 사제로 봉직하고 있는 비안이 맡았다. 이번 일로 봄 여신의 신전이 분개하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으나, 그들이 강대한 황제의 권력에 감히 대항할 수는 없었다. 동제국에서 황제를 대신하여 타림 안딘인 티르안 공녀와 8서클 마법사 라우프가 사절로 도착하자 이제 혼례식 준비는 사실상 끝 난 셈이었다. 혼례식 전날, 렌은 카엔과 함께 모처럼 투명마법을 시전하고서 테라미즈 황립 아카데미 구경을 했다. 다음날의 혼례식을 위해 7서클 피부 관리를 받아야 한다는 마스니의 고집을 꺾느라 둘 다 무처 고생했지만, 혼례식의 분주함에서 잠시라도 떠나 있으니 홀가분하 기 그지 없었다. "저기가 바로 제가 음악수업을 듣던 곳이고요. 저어기는 문학수업을 듣던 곳이에요." 눈을 빛내며 열심히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보며 이곳에서 공부하던 일이 엊그제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여기서도 정식 졸업장 을 받지는 못했지만, 렌은 이제 정규교육기관을 졸업하는 건 팔자에 없는 일이려니 했다. 렌이 설명하자 카엔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렌……" "왜 그러세요?" "실은 그 시절 투명마법을 시전하고 학과 수업마다 렌을 쫓아다녔답니다." "뭐라고요?" 렌은 황당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아니, 황제가 일도 안 하고 그래도 되는 거에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죠! 제 프라이버시 같은 건 무시해도 좋다는 거에요?" "미안해요. 앞으로는 안 그럴게요. 카엔이 사과하자 렌은 화난 듯한 표정을 풀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좋아요. 용서해드리겠어요." 둘은 다시 손을 잡고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여기가 바로 제가 처음으로 마법진을 시전했던 곳이네요." "아, 크리프랑 파니안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둘이서 서로 사랑을 나누는 환상을 구현했던 그 마법진 말이죠?" 카엔의 말에 렌은 입술을 쑥 내밀고는 카엔의 가슴을 한 대 쳤다. "꼭 그렇게 어두운 과거를 들춰내야만 하나요?" "하하, 미안, 미안해요!" "아, 저기는 축제날 제가 노래 불렀던 단상 맞죠?" "그렇습니다. 그날 솔직히 렌 노래는 별로였습니다. 외모와 제스처로 청중을 휘어잡기는 했지마요." "카엔님! 정말!" 렌은 카엔을 또 한 대 쳤다. 카엔은 즐겁게 웃으며 맞아주었다. 둘의 발길은 자연스럽게 황제 전용 후원인 우원(右園)으로 향했다. 매화향이 천지에 가득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예전에 앉 았던 바로 그 벤치에 앉아 조용히 꽃향기를 맡았다. "카엔님, 아마도 저는 우리 아기가 어른이 되는 걸 보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우리 아기가 다시 아기를 낳고 그 아기가 또 아기를 낳 으면서 우리의 생명은 계속 계속 이 세상과 이어질 거에요. 그리고 우리들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까지 많은 사랑을 하고 많은 추억을 함께 쌓을 수 있을 거에요. 살아 있기를 잘 했다는 걸 거듭거듭 느낄 수 있을 거에요." 렌은 나직하게 말했다. "그래요, 렌. 이제 나는 이해합니다. 생명과 죽음이 하나이고, 끝이 있기 때문에 시작이 있다는 것을, 버리지 않고는 얻을 수 없고,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이 세상은 참으로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카엔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는 렌에게 남은 십 년이라는 세월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그녀가 결국 그를 떠나게 된다 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도 이제 그는 조금씩 죽음과 타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그저, 그저 지금 렌이 그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렌이 죽어도 그의 곁에는 렌의 분신이 남을 것이다. 그는 최선을 다해 아기를 키울 것이고, 아기가 자라 어른이 되고 나면 말틴으로 갈 것이다. 이미 그는 말틴의 저주를 풀 방법을 구상하고 있었다. 렌이 했던 것처럼 그의 생명을 한꺼번에 짜내면 말틴을 휩쓸었던 황제의 저주 는 풀릴 지도 몰랐다. 그게 그가 이 세상에 대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속죄였다. 하지만 그것은 먼 훗날의 일,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는가. 기적이 다시 생겨 렌이 더 오래 살게 될지도 모르지 않은가. 카엔은 렌의 입술에 다시 한 번 키스했다. 렌은 얼굴을 붉히며 그의 키스를 받았다. "자, 우리 힘차게 살자고요! 애도 쑥쑥 낳고, 이왕 속도위반한 김에 거시기도 많이 하자고요!" 렌은 한없이 행복하게 웃었다. 이 세계는 이제 렌의 세계가 되었다. 태어날 아기를 위해 최선을 다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야 했다. 할일은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드래곤들에게 감수분열하는 생식세포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야 하고, 의학서도 써야 하고, 전에 얘기 했던 것처럼 병원도 만들고 의과대학도 만들어야 했다. 그런 동안에도 죽음의 신은 시시각각 그녀를 노릴 것이다. 그래도 렌은 희망에 찼다. 앞으로 어떤 불행이 닥쳐올지 모른다. 어떤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축복이니까.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