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 (Change) -프롤로그- * 제 새로운 소설입니다. 잼있게 봐 주시길... (프롤로그) 머리 카락은 진한 황금색... 눈동자는... 감고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피부는 순결해 보이는 백색이 티 하나 없이 매끄럽게 그녀의 피부를 덮고 있었다. "냐아옹~" 페르시안 종으로 보이는 한 마리의 흰색 고양이가 어슬렁 어슬렁 그의 주인에게로 다가갔다. 창문 사이로 아침을 알리는 갓 태어난 태양의 손길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언제나 그러했듯 그 귀여운 고양이는 무척이나 화려해 보이는 킹 사이즈의 대형 침대 위로 뛰어 올라 쌔근쌔근 달콤한 잠에 취해 있는 주인을 깨우기 시작했다. "냐아옹! 냐아옹!" 그 고양이는 정신없이 잠들어 있는 그녀의 귀에다 대고 울음 소리를 내기도 하고 그녀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음냐! 엄마. 5분만 잘게요..."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잠꼬대가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왔다. 그리고는 귀찮은 듯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그 고양이를 손으로 움켜 잡더니 떼어내어 침대 밖으로 내던지는 것이었다. "캬아옹!!" 고양이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음... 고양이 소리?" 결국, 미적거리던 소녀는 고양이 날카로운 울음 소리에 잠이 깨었는지 눈이 번쩍 떠졌다. 그러자 천연으로 빛나는 황금빛의 눈동자가 그 모습을 드러내어 그녀의 미모를 한층 더해주었다. 그녀는 아직 잠에 덜 깨었는지 멍한 얼굴로 부스스 일어났다. 어쨋든 그녀는 일어났으니깐 그 불쌍한 고양이는 자신의 주인을 깨우는 일에 성공한 셈이었다. "냐앙~" 조금 전, 자신의 주인의 손에 저 구석으로 내던져진 귀여운 고양이는 얼른 그녀가 일어나서 여느때 처럼 자신을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길 바랬다. 하지만 저 황금빛의 소녀는 여전히 몽롱한 얼굴을 한체, 멍하니 있더니, 이리 저리 두리번 거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냐앙?" 평소 때에는 항상 차분한 모습만을 보여주었던 주인이었는데, 오늘따라 멍청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그녀를 보자 고양이로서는 의아해졌다. "우웅? 여기가 어디지?" 소녀는 당황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고양이는 자신의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고양이?" "냐아앙~!!" 드디어 주인이 자신을 보아주자 고양이는 기쁜 마음이 되어 애교스런 태도(?)로 그의 주인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으앗! 고양이. 저, 저리갓!" 소녀는 기겁을 하며 자신에게로 달려온 이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하얀 털북숭이를 냉랭히 뿌리쳤다. 그리고는 자신이 입은 레이스가 달린 핑크빛 잠옷을 힐끔 내려다 보더니 탐스런 황금빛 머리카락을 쥐어뜯어며 발광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으으으, 내가 왜 이런 공주틱한 잠옷을 입고 있는 것이지? 그리고 무식하게 넓은 이 방은 대체 뭐야? 아악! 내 머리는 왜 이렇게 치렁치렁한 거얏! 대체, 뭐야! 뭐야! 내가 아직 잠에서 덜깨었나?" 그러더니, 소녀는 하얗고 길어 보이는 손가락을 들어 본인의 볼을 꼬집는 것이었다. "아얏!! 더럽게 아프네. 꿈인데도 이렇게 아플 수가 있나?" 소녀의 황금빛 눈동자는 이제 광기마저 어렸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상처입은 얼굴을 하고 있던 고양이는 제정신이 아닌 듯한 자신의 주인을 보자 겁을 먹었는지 슬금슬금 뒷걸음을 쳤다. "어, 거울!" 또 다시 두리번 거리던 소녀는 방의 한 벽면을 거의 차지하는 전신 거울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휘적휘적 다가갔다. 그리고, 잠시 후... "꺄아악!!" 처절한 소녀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 다음 편부터는 시점이 주인공에게로 옮겨집니다. 1인칭 시점으로... * 아까 올린 글이 날라가서 다시 올립니다. ㅠ_ㅠ (뒤바뀐 운명) -1- "꺅! 꺄악!" 엄청난 성량의 목소리가 조그맣기만 한 나의 입술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꺅? 에엥?" 비명을 지르던 나는 잠시 비명을 지르는 일을 멈추었다. 하지만 곧, 나의 안색이 급속도로 창백해졌고 길게 쭈욱 뻗은 나의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하아! 꺅! 이라니... 으아악!이 아니라... 기집애 같은 비명 소리가 나의 입에서 들리다니...' 높은 옥타브의 음성에 놀란 나는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경악을 하며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쿵광거리는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닫혀있던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러자 짧은 갈색 머리를 한 젊은 남자가 무척이나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드러내다가 잠옷을 입은 나의 모습을 보더니, 헉! 하는 헛바람 삼키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얼른 돌리는 것이었다. "라비스님! 괜찮으십니까?" 그렇게 고개를 돌리면서도 그 남자는 나의 신상에 대해 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나를 부르는 호칭에 더욱 혼란스러워질 뿐이었다. '으흑... 라비스라니!'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거울을 응시했다. 그러자 내가 보아도 아찔할 정도의 미인이 내 앞에 서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창백한 얼굴로... "이건... 꿈이야!"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더 이상 서있는 것이 힘들었다. 게다가 정신은 아까의 충격으로 인하여 더 이상 '사고'라는 것을 하기가 불가능해졌다. 너무 어지러웠다. 그 순간 나의 몸이 기우뚱하는 것을 느꼈다. 아니... 나의 육체가 아니라 내가 서있는 바닥이 기우뚱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라비스님!" 아까 그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가 나에게로 달려오는 것이 들렸다. 왜 저렇게 다급하게 나를 부르며 달려오는 거지? 그런 의문이 잠시 나의 머리에 맴돌았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의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가 필사적으로 나의 몸을 팔로 받치는 것이 느껴졌으나 그 이후로는 기억이 끊기고 말았다. * * * 나의 앞에 한 소녀가 울고 있었다. 그 소녀의 서럽게 우는 울음소리를 듣자 나의 가슴이 찌르르 아파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 소녀를 달래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왜 울고 있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꺼냈다. 그러자 숙이고 있던 소녀의 고개가 들렸고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나와 마주쳤다. '앗!' 그녀는... 그녀는 라비스였다. 그녀를 본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지금의 나는 어찌된 일인지 태연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라비스님! 그대가 눈물을 흘려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눈물 흘리는 이유가 저 때문이라면 당장 눈물을 거두십시오." 나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를 달래었다. 하지만 내가 한 말은 그 부드러움 속에 차갑기 그지없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것을 눈물 젖은 라비스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라비스의 황금빛 눈동자는 더욱 글썽해지더니 이내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그녀의 상처 입은 얼굴이 자꾸 나의 가슴을 찔렀다. "으흑... 너무해요! 어째서 당신은 나에게 눈물을 흘리지 마라 하시는 거죠? 제가 당신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 그렇게 부담스러우시나요?" 그녀는 한없이 쏟아지는 눈물과 함께 나에게 그 원망과 슬픔. 간절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아픔이 나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왔다. '아! 그녀를 달래 주어야겠어!' 나는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내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행동했다. 또 다시 나의 입에서 내가 뜻하지 않은 가시 돋친 말이 흘러나온 것이다. "라비스님... 당신은 엘제르크 남작님의 유일한 영애이십니다. 그 분의 뜻을 저버릴 생각이십니까? 지금 라비스님이 하고 계신 행동은 그저 부모님이 정해주신 정략 결혼에 대한 반항심일 뿐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젊었을 적, 정해진 운명에 거스르고 싶어하는 한때의 치기에 그렇게 약하신 모습을 보이시는 겁니까?" 내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너의 행동은 꼴볼견이니 더 이상 한심한 꼴을 보이지 마라' 였다. 그런 나의 말을 잘 알아들은 듯, 라비스의 얼굴 표정은 내가 보아도 가관이 되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눈물은 여전히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자 나는 걱정이 되었다. 지금 상황으로 보자면 그녀는 무슨 커다란 일이라도 벌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이제 할 말은 다 마쳤으니 가야겠다는 태도를 그녀에게 보이고 있었다. "정말... 냉정한 분이시군요!" 그때 나의 등뒤로 라비스의 나직히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흠칫 놀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착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가 순간 오싹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잠시나마 놀란 표정을 짓자 그녀는 히죽 웃었다. "카이엔! 언젠가는 이 순간을 후회할 날이 올거에요. 내가 흘렸던 눈물 만큼, 당신도 눈물을 흘리게 될 거에요." "그게, 무슨..." "훗... 글쎄요! 그게 무슨 말일 것 같아요?" 라비스의 두 눈에는 눈물이 여전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도톰한 붉은 입술은 섬뜩한 미소가 걸려 있어 보는 나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하였다. * 프롤로그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1화부분만 올립니다. 부분적으로 바뀌었지만 내용은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다른 2화부분부터는 그다지 바뀐 부분이 없기에 수정판은 그냥 1화부분만 올립니다. ㅡ.ㅡ;; 휴~ 나아진 것이 있으려나? 아! 카이엔부분은 짤렸다는...;;; (뒤바뀐 운명) -1- "꺅! 꺄악!" 엄청난 성량의 목소리가 조그맣기만 한 나의 입술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꺅? 에엥?"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고 받은 충격을 그대로 비명을 화하여 마음껏 내지르는데... 그 비명소리가 나의 귀에는 매우 생소하게 느껴지는 고옥타브였다. 본인의 비명소리에 지레 놀란 나는, 잠시 비명을 지르는 일을 멈추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을 천천히 나의 입술로 가져가며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에 다시 한번 눈길을 주었다. "아~ 아~ 아! 아!" 나는 입을 살짝 벌려 아아! 거리는 음성을 내보았다. 그러자 제법 청아하게 울리는 소녀의 목소리가 나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나왔다. 곧, 나의 안색이 급속도로 창백해졌고 길게 쭈욱 뻗은 나의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하아! 이게... 이게... 어찌 된 일이야?' 내가 그렇게 거울앞에 붙어서서 비틀거리고 있을 때, 나의 비명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급히 다가오는지 요란스런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벌컥 방문이 열리며... 짧은 갈색 머리를 한 젊은 남자가 무척이나 놀란 얼굴로 모습를 드러내었다. "라비스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 남자는 그렇게 나를 향해 외치더니, 내가 서있는 방안으로 주위깊은 눈길로 살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이 되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하였던 그의 안면근육을 풀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는 그렇게 나에게 물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사실 나는 괜찮지 못했다. 그가 나를 부르는 이상한 호칭 때문에 더욱 머리가 어질어질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가 사용하는 혀꼬부라지는 이상한 발음... 그리고 더욱 이상한 것은 내가 그의 말을 너무도 잘알아듣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거울을 응시했다. 그러자 내가 보아도 아찔할 정도의 미인이 거울에 비쳐졌다. 그것도 매우 창백한 얼굴로... 원래 하얀 피부였을 거울속에 비친 나는, 핏기 사라진 창백한 모습으로 인하여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건... 꿈이야! 어째서... 내 모습이 여자로 비치는 거지? 그리고 이 가느다란 목소리는...' 정말 기가막힐 노릇이었다. 저 거울속에 비친 소녀는 분명히 나였다. 내가 움직이는 대로, 그녀도 똑같이 움직이고 있으니... 나는 내앞에 서서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응시하였다. 눈앞에 팽글팽글 도는 듯 했다. 그리고,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것인지 다리가 후들거려 몸을 지탱하기가 매우 힘겹게 느껴졌다. "라비스님?" 그 남자는 점점 창백해지는 나의 안색이 매우 걱정스러워졌는지, 라비스라는 호칭으로 나에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때! "오오! 라비스니임~ 깨어나셨군요!!" 시녀들로 보이는 소녀들을 대동한 거구의 중년 여인이 격정적인 음성을 토하며 방안을 뛰어들어왔다. 그녀가 요란스럽게 뛰어들어옴으로 인하여 내가 서있는 바닥이 다 쿵쿵 울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나의 앞까지 다가오더니,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는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나직히 입을 열었다. "라비스님..." "누구...?"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질문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 아니면,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말을 거는 나의 모습을 보고 감격 이라도 했는지, 다시 격해진 그 육중한 몸으로 나를 덥썩 끌어안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를 끌어안고는 그녀는 꺼이 꺼이 우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정말 황당하고도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처음 보는 여자가 다짜고짜 나를 끌어안고는 취하는 행동이, 꺼이 꺼이 울음을 터뜨린다는 것이 나로서는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나는 켁! 하는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강렬한 포옹에서 빠져 나오려 애를 썼다. '으, 사, 살려줘!' 그런 나의 바램을 신께서 들어주셨는지 어쨋는지 곧, 누군가가 나를 구원하는 말을 하였다. "루이스님! 지금 라비스님께선 정신이 드셨다고 하나, 몸이 아주 안좋으신 상태에요! 안정을 취해야 한다구요!" 누군가가 그녀를 다그치는 말을 하자 루이스라고 불린 그녀는 그제야 나를 끌어안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창백해진 얼굴로 숨이 꼴깍 꼴깍 넘어가기 직전이었던 나는 다시 돌아오는 화색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는 정신이 돌아오자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황당한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저어..." 하지만, 이번에도 나의 말은 씹혔다. "라비스니이이임~!!" 갑자기 무시무시해진 루이스의 목소리에 나는 흠칫하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정말, 강심장도 오한이 들게 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라비스님!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결혼을 앞둔 아가씨가 다량의 수면제를 드시다니요?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잘못했으면 영원히 깨어나시지 못할 뻔했다구요! 정신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설마 죽을 생각으로 이걸 다 삼키신 것은 아니겠지요?" 그녀의 따발총 같은 다그침을 듣고 있으니, 있던 정신도 달아날 지경이었다. "무슨...?" "하지만, 안심하세요! 주인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난리가 나겠지만 지금 주인님께서는 출타중이시니, 제가 하인들 입단속을 시키겠습니다. 아아! 라비스님. 정말 간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만약 라비스님께서 깨어나시지 못했다면... 저는, 흐흑!" '우웅~ 저 아줌마 되게 무섭네... 자꾸 내 말을 씹다니!'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설명이란 것을 듣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 뒤에서 서있는 시녀로 보이는 소녀들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질문을 했다. "저어... 여긴 대체 어디죠? 그리고, 댁들은 누구세요?" "……!!" 휘이잉~!! 어디서 불어오는지 갑자기 찬바람이 이들 사이에서 불었다. 그들이 모두 한순간에 얼어붙은 얼굴을 하고서 나를 멍하니 쳐다보자 불길해진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그들의 눈치를 보았다. "라비스님?" 썰렁하고 무겁던 긴 침묵 뒤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루이스였다. "네, 네에?"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낮게 깔아진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절로 몸을 움츠려졌다. 하지만, 그녀의 위압감에 눌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냐고 물었는...데요?" 하지만 나의 말끝은 그녀의 위압적인 눈빛에 눌려 기어들어가고 말았다. '으흑! 여자의 몸이 되니, 성격도 소심해지는군.' 나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자 안면 근육이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넓쩍한 얼굴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헉! 무서버...' 나는 혹여 그녀의 솥뚜껑 같은 주먹이라도 날아올까봐 전전긍긍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루이스는 의외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 "앗! 루이스!" "루이스님!" 루이스의 육중한 몸이 뒤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마침 그녀의 뒤에 서있던 시녀들이 저마다 루이스를 부르며 몸을 받쳐 주었다. -2- 시녀 세명이 몸을 던져 그녀를 받쳐 들었지만 루이스의 몸을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는지 그녀들의 얼굴에 용을 쓰는 듯한 기색이 완연했다. 그러나, 루이스는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었는지 곧, 비칠비칠 일어났다. 그녀의 핏기 없어진 얼굴이 조금 전 내가 한 발언이 무척 충격적이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저어... 괜찮으세요?" 나는 조심스레 그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라비스님... 불쌍하신 라비스님. 흐흑!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이 유모도 알아보시지 못하시다니요? 라비스님께서 깨어나신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지만... 기억을 잃어버리시다니... 흑!" 다시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하더니 그녀가 두르고 있던 앞치마로 얼굴을 슥슥 문질렀다. 그러더니... 팽~!! 코를 푸는 것이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털털한 성격의 소유자임이 틸림없었다. 나는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을 얼른 다시 폈다. 여인이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조금 보기에 안좋다고 얼굴을 찌푸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흐음... 이래뵈도 난 한 매너 했었지! 여자를 울리는 남자는 나의 적... 헉! 근데, 지금의 나는 여자 같은데...' 하지만, 나의 뒤바뀐 육체에 대해 당황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나는 여자가 되어서도 버리지 못한 근성으로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느덧 루이스의 등을 토닥이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이봐요! 루이스라고 했죠? 그만 눈물을 그치세요! 뚝!"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이런 발언을 해서는 안되었지만, 나도 모르게,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에게 하던 버릇을 이 아줌마에게도 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행동을 미처 깨닫지 못한 나는 여전히 그녀를 달래는데에 열중했다. "흐끅! 라비스님.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하시는 거에요?" 팽~!! 그녀는 꺼이꺼이 울면서 또 다시 코를 풀었다. '에휴~!'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내가 기억을 몽땅 잃어버려서 그런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아! 어쩐다... 이게 꿈이 아니라면, 뭔가 잘못되서 일이 이 지경이 된 모양인데...' 나는 차분하게 생각하려고 노력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내가 이 곳에서 눈을 뜨기 바로 직전의 상황을 말이다. * * * 따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번쩍하고 별이 보이며 나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용서 못해! 그 계집애랑 놀아나다니... 이젠 정말 질렸어. 이제 그만 끝내!" 방금 전에 나의 뺨을 때린 한 소녀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연희야!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누구랑 놀아났다는 거야?" 그녀에게 맞은 뺨이 얼얼했다. "누구긴 누구야? 그 여우같은 계집애, 수연이랑 어제 같이 있었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녀는 자신의 화를 못이기겠는지 눈물을 글썽글썽하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 있다는 것은 그녀가 화를 무진장 참고 있을 때만 나오는 버릇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저리 치워! 이제는 믿지 않을 거야. 바람둥이 카사노바 같은 자식..." 나를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는 그녀를 보자 한숨이 나왔다. '에휴~ 내가 인기가 좋아서, 여자들이 자꾸 꼬이는 걸 어떻하라고... 그녀들의 마음에 모두 상처를 줄 수는 없는 일이잖아?' 그런 나의 처지에 통탄을 하며 나는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연희야! 수연이 그애는 그냥 나 좋다고 따라 다니는 애야. 나에겐 너밖에 없다고! 믿어줘!" "흥!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어? 네가 하는 말이라면 이젠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믿지 않을거야!"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믿어주겠어? 여기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할까?" 우리는 지금 학교의 옥상위에 있었다. 이 건물은 5층으로 되어있는데, 만약 뛰어내리면 운이 좋다면 죽지는 않겠지만, 반병신이 될 수 있는 위험한 높이였다. '설마! 네가 나보고 뛰어내리라는 말은 하지 않겠지? 요 깜찍한 것 같으니...' 그렇게 속으로 웃으며 나는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 뛰어내려! 나를 위해서 어디 뛰어내려봐!"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뭐?" "왜? 못하겠어? 그럼, 그렇지! 네가 나를 진심으로 생각할 리가 없어." "아냐! 나 너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뛰어내릴 수 있어!" 그렇게 그녀에게 외치고서는 나는 난간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과연, 그녀의 표정은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나는 속으로 헤죽 웃으며 그녀가 어서 나를 만류하기를 기다렸다. 바로 옥상 난간 앞까지 온 나는 왠지 오늘따라 까마득하게 보이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벌 써 수업이 끝난 듯한 몇몇 학생들이 현관 로비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으흠... 근데, 갑자기 왜 이렇게 어지렇지?' 기이하게도,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허공이 일그러져 보였다. 하지만, 나는 잠시 어지러움증을 느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 생각하며 연희가 보는 앞에서 뛰어내리려는 시늉을 해보였다. "연희야! 사랑해... 진심이야!" '으흐흐. 내가 봐도 정말 나는 멋진 놈이라니깐!' 그렇게 자아도취에 빠져서 연희를 바라보는데... "까아악!! 도현아!" 연희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비명을 지르며 나에게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응? 연희의 반응이 예상외로 강렬... 어어? 어?' 갑자기 현기증이 나더니 나의 몸이 기우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나의 몸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3- '하아, 말도 안돼! 그렇다면 내가... 내가 진짜루 몸을 던졌다는 얘기? 그렇다면, 나는 병원 에서 눈을 떴어야 하는데, 여긴 대체 뭐야? 내가 죽어서 천국에 온 것도 아니구... 게다가, 이 여자의 몸은 무엇이란 말이야? 설마...' 나는 문득, 예전에 봤던 '체인지'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그렇다면... '아악! 그럼, 내가 라비스라는 여자의 몸으로 뒤바뀌었다는 거야? 그럼, 라비스라는 여자는 어떻게 된거지? 그 여자도, 수면제를 잔뜩 먹고, 자살을 시도한 것 같은데... 이게 대체!' 내가 얼굴이 창백해져서 황금빛의 탐스런 머리카락을 또 다시, 쥐어뜯자 나의 옆에서 요란 스럽게 울던 루이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라비스님! 왜그러세요? 뭔가 기억이라도..." "루이스! 제가 왜 수면제를 먹은 거죠? 저에게 무슨 안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도무지, 기 억이..." 결국, 나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 행세를 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이들에게 나는 몸이 뒤바뀌었다. 나는 실은 남자다! 라고 말해 봤자 들어주지 않을 것이 뻔하였고, 만약 그렇게 말한다 해도, 정신이상자로 오해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친여자(?) 취급은 결코 받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기억을 잃은 라비스 행세를 하며, 루이스를 비롯한 이들의 도움을 받아, 라비스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두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어떻게 해야 할지 그때 생각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이곳 에 대해 잘 알아두면 어쩌면 다시 돌아갈 방법도 생길 듯 했기 때문이었다. "라비스님... 그, 그건..." 졸지에 나의 유모가 된 루이스라는 여자는 나의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어두워진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루이스? 사실대로 말해줘요. 비록 불미스런 기억이라고 해도, 내가 왜 수면제를 먹었는지를 알아야, 나의 기억도 빨리 돌아오지 않을까요?" 지금의 나는 갑자기 뒤바뀌어버린 모든 상항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상태였으나, 무턱 대고 이 황당한 상황에 대해 폭주모드의 상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알기 때문에,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히려 그녀를 달래듯 입을 열었다.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자, 루이스는 나만의 장점(?) 혹은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여자 홀리기 마수에 걸려들었는지 천천히, 무거워보이는 입을 떼었다. "라비스님은... 혹시 카이엔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시나요?" "카이엔? 처음 들어보는데?" "그는 라비스님의 아버지이신 남작님의 개인 경호원이었죠! 아! 그리고, 저기 서있는 갈색 머리의 청년은 라비스님의 경호원, '에드'에요! 아무튼, 라비스님은 그 카이엔이라는 작자를 매우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는 매우 냉정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죠! 이렇게 아름다운 라비스님을 거절하다니!" 여기까지 말한 루이스는 새삼스레 분노가 치밀어오르는지 한동안 씩씩거려서 나를 불안하게 하였으나, 그녀는 곧 다시 말을 이었다. "그 후로 라비스님은 계속 눈물로서 날은 보내셨는데, 이런 라비스님의 모습이 부담이라도 되었는지, 그 죽일 놈은 떠나버렸답니다." "흐음... 그럼, 나는 실연의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 이거군요." "흐흑!" "왠지 한심하게 느껴지는 여자야! 그렇다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다니..." "네?" 나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하자, 다시 흐느끼고 있던 루이스는, 나의 말을 들었는지 그녀는 고개를 들고 반문을 했다. "아, 아니에요!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하하..." 나는 겸연쩍은 태도로 그녀에게 변명을 하며, 웃음으로 적당히 떼우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 이 벌컥 열리며, 어떤 시녀가 뛰어들어왔다. "루이스님! 주인님이 지금 돌아오시고 있대요!" 그녀가 그렇게 숨넘어갈 듯이 외치자, 루이스를 비롯한 나머지 시녀들의 얼굴에 핏기가 사 라졌다. "아! 이거, 큰일났네! 주인님이 만약 이 일을 아시면, 분명 뒤집어지실텐데... 이를 어쩌지? 핫! 라비스님, 얼른 침대에 누우세요! 세라, 제인! 라비스님이 수면제를 먹고 기억을 잃으 신거 모두에게 입단속 시켜!" 카나! 어서 주인님 맞을 준비를..." 하지만, 루이스는 어쩔 줄 몰라하는 시녀들에게 침착하게 지시를 내렸고 시녀들은 그녀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전쟁터에서 부하들에게 작전 명령을 내리는 여걸의 모습을 떠올렸 다. 그러자, 웃음이 나와 살며시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때, 루이스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아앗! 라비스님, 그렇게 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침대로 가서 누우세요! 그리고, 만일 주인 님이 들어오실 것을 대비해서 아픈 척을 하란 말이에욧!" 그녀의 외침에 나는 찔끔하여 침대 속으로 얌전히 기어들어갔다. 그렇게 모든 것이 척척 이 루어지자, 루이스는 그제야 만족을 한 듯 양 입꼬리가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 그런데... 루이스! 어떻게 아픈 척을 해야 돼죠?" 나는 궁금했던 것을 루이스가 대답을 할 만한 때를 신중히 골라서 질문을 했다. 그러자, 루 이스가 내가 누워있는 쪽을 돌아보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라비스님! 그냥 감기 몸살에 걸린 것처럼 앓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주인님에겐 수면제를 먹었던 일을 결코 말하지 마세요! 전, 주인님에게 라비스님이 일찍 잠드셨다고 말할 것입 니다. 그러나, 만일, 주인님께서 라비스님을 보러 들어오신다면, 라비스님은 주인님에게 이렇게 말하세요! '아버님, 이제 오셨습니까? 제가 몸이 좋지 못해서, 이렇게 침대에서 뵙니다 !' 라구요." "네, 그렇게 하죠!" 그렇게 나의 대답을 들은 루이스는 나에게 인자해보이는 미소를 살짝 지어보이더니 시녀들 과 함께 방을 나갔다. 그러자, 지금까지 소란스러웠던 방이 금세 조용해졌다. '그 주인님이란 사람이 무척 무서운 사람인가 보지? 저렇게 무서운 루이스도 절절매는 것 보면은...' 괜시리 긴장이 된, 나는 만약 그 주인님이란 사람이 들어올 것을 대비해서 루이스가 가르쳐 준 멘트를 되뇌였다. 그런데, 그때... "냐항~!" 조금 전까지 잊고 있었던 그 하얀 털북숭이가 나에게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나는 고양이라 면 질색이었던 터라... 그 고양이에게 거부의 몸짓을 온몸으로 내보였다. "으헉! 저, 저리가! 저리 가란 말야~"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귀여운 고양이는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지, 사랑스러운 몸짓으 로 나에게 달려들고 말았다. 무척이나 애교가 많은 고양이였다. "으아악~!!" 결국, 나는 소리를 지르며, 그 고양이를 피해서 침대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우당탕 쾅!! 그만 허둥대다가 침대 밑으로 거꾸로 나자빠진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나의 몸에 전해진 충 격으로 인하여 볼썽사나운 꼴로 넘어진 상태에서 몸을 얼른 일으키지 못했다. "에구구... 이게 무슨 꼴이야?" 다행히 침대 밑에 바닥에 고급 융단이 깔려 있었기에, 심하게는 다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아픈 것은 아픈거였다. 결국, 고양이로 인하여 이렇게 넘어졌다고 생각되자 나는 화가 치 밀었고 나의 얼굴은 점점 험악하게 일그러져 갔다. "이봐! 못된 고양이!! 주인의 말이 말 같지가 않아? 너 때문에 넘어졌잖아!!!" 나의 높아진 목소리와 함께 눈빛이 살벌하게 변하자 얌체 같게도 그 고양이는 자신의 신변 에 위협을 느꼈는지 구석으로 내빼었다. "건방진 고양이 같으니..." 그렇게 투덜대며 다시 침대에 눕는데, 언제 다시, 슬금슬금 다가왔는지 바닥에서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고양이의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역시 혈통이 좋은 고양이답게 무척 예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녀석, 스머프에 나오는 아즈라엘 같아! 심술궂은 고양이...' 사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저 페르시안 고양이는 아즈라엘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그러나, 억지성이 다분했지만 여전히 아즈라엘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나였다. "이봐! 아즈라엘, 너 한발짝만 다가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러자, 털북숭이 고양이는 나의 협박성의 말을 '야옹아~ 이리온!' 과 같은 종류의 말로 알 아 들었는지, 기쁜 기색의 태도로 나에게 냉큼 달려들었다. "냐아옹~" '으헉!' -4- 그렇게, 아즈라엘과의 눈물겨운 실랑이로서 얼마의 시간을 보내고... 다소, 지친 모습이 되어 루이스가 일컬었던 그 주인이라는 사람을 기다렸다. 그러나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지, 그 주인님이란 사람은 나의 방에 들르지 않았다. 그래서, 맘 놓고 그날 밤부터 루이스에게 특훈(?) 훈련을 받기 시작했는데... "라비스님! 아까도 제가 설명을 했잖아욧! 아가씨께서는 아버님이신 다니엘 크로시벨의 외 동딸이며, 어머님께선 아가씨가 다섯 살때 돌아가셨다구요! 에휴~ 총명하시던 아가씨께서 왜 그러실까?" 그녀에게 라비스에 대한 강의(?)를 받고 있던 나는, 마치 수업 시간에 딴짓하거나 조는 학 생이 된 것처럼, 계속 하품을 하며 다소 불량한 태도로 루이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루이스는 마치 무서운 개인지도 선생님이라도 된 듯, 그동안 설명했던 내용들을 질문으로 서 나를 공격을 했는데, 그 질문에 답을 얼른 하지 못했던 나는 그녀에게 질책어린 잔소 리를 들어야 했다. "라비스님! 그동안 제가 설명을 할 때 졸고 있었던 것은 아니겠죠?" 그렇지 않아도 드높은 루이스의 목소리가 더욱 옥타브가 높아져 있었다. 내심 그녀의 카리 스마적(?)인 잔소리에 쫄아있던 나는 자꾸 나오려는 하품을 애써 참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루이스~~ 낼부터 열심히 배우면(?) 안될까... 요?" 나는 그녀에게 다소 애교성이 짙은 목소리로 말을 열었지만 더욱 험악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나의 말끝은 기어들어가듯 흐려지고 말았다. 루이스의 말로는 내가 그녀의 상전이 라는데, 어쩐지 지금의 나는 매우 비굴하게 느껴졌다. 평소에 내가 여자들에게 더욱 약하 긴 했지만 이정도까지는 아니었던 터라, 나는 내심 우울해졌다. "라비스니임! 이것은 크로시벨가의 집안 전체가 달린 일이란 말이에요! 아가씨는 왕실과 정 략을 맺었기 때문에 구설에 오르지 않으려면, 열심히 기억을 되찾아야..." "헉! 왕실이라고? 여기가 무슨 나라인데?" 나는 딴에는 무척 놀라서 그녀에게 질문을 하였지만, 루이스는 그녀의 거대한 몸이 휘청하 였다. "아아! 아무리 기억을 잃어버리셨다고 해도, 나라 이름도 모르시다니... 흐흑! 라비스니임." 루이스의 발작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녀는 닭똥 같은 굵은 눈물을 마구 쏟으며 가녀리기 짝 이 없는 나의 몸을 억세게 끌어안았다. 물론, 나는 그녀의 품을 빠져나오려 무척이나 버 둥거렸음은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 글을 읽는 분은 모두 다 아시리라... "아악! 루이스, 이거 놓으세요! 숨 막혀요." 나의 절규어린 목소리에 그제야 팔을 풀은 루이스는 젖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였다. 그녀의 눈빛이 너무 슬퍼보였다. "차라리... 평민으로 태어나셨다면, 아가씨께선 이 지경이 되지 않으셨을텐데... 남작 부인께 서 살아계셨다면, 라비스께선... 훌쩍!" "저어... 루이스. 루이스가 나를 걱정해주는 것은 고마워요! 하지만, 전 지금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려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게다가 지금 제가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루이스 뿐이에요, 그러니... 제발 더 이상 눈물 같은 것은 보이지 말고, 저를 도 와줘요! 제가 묻는 말에 성의껏 답해 주세요." "흑! 라비스님, 물론이에요. 아가씨를 도와드릴게요. 제 몸이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전 아가씨를 위해서 뭐든 할 겁니다." 그녀의 격정적이고도 다부진 말에 나는 내심 불안하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 래서, 그녀에게 피식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루이스. 그럼, 이제 제 질문에 차근차근 답해 주시겠어요? 여기 나라의 이름은 무엇이죠?" "로히얀스 왕국입니다. 아가씨. 다른 왕국에 비해 왕권이 비교적 강력한 나라이죠. 그만큼 보수적이기도 하기에, 귀족이신 아가씨에게는 무거운 책임이 뒤따를 겁니다." 처음으로 그녀가 나에게 순종적인 태도로서 답을 해주었다. 드디어, 그녀의 주인으로서 권 위를 되찾았다고나 할까? 암튼, 내심 뿌듯해지는 나였다. 그래서 그녀에게 빙긋 웃어보이며 계속 질문을 해나갔다. "아! 그렇군요. 그러면 내가 왕실의 누구와 정략을 맺고 있는 거죠?" 의욕이 불끈 솟아오르기 시작한 나는, 현재로서 나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인 정략 문제에 대해서 그녀에게 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매우 피곤하여 쉬고만 싶었는데, 이 제는 불안한 나의 위치를 굳건히 하기 위해 라비스에 대해, 그리고 그녀의 배경에 대해 뭐든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미카엔 투르타 덴 마르시에안 로히얀스 황태자이십니다." '헉! 이름 한번 더럽게 어렵네. 미카엔... 그 이후부턴 못 외우겠다.' 그런 쓸떼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물었다. "그 황태자 몇살이에요?" 이 나라의 황태자가 나의 남편(?)이 된다는데, 그 황태자의 나이 역시 무시할 수가 없어, 나는 그렇게 물었다. 아무리 황태자라지만, 혹시 그 황태자라는 사람이 중년의 아저씨일 경우에도 미리미리 대처방안을 세워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현재 23살이십니다. 그리고, 황태자비께선 20살이시구요!" "네, 네에? 황태자비라니요?" "에휴~ 이미 황태자께선 3년 전에 황태자비를 맞으셨습니다. 그녀는 공작가의 영애이셨죠! 사실, 황태자비를 간택할 때는 그 신분을 공작가의 영애로만 한답니다. 그래서..." "그, 그럼, 난 뭐에요? 벌써 부인이 있다면서 나를 왕실과 정략을 맞은 이유가 뭐냐구요?" 나는 그녀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라비스님께선... 황태자님의 후궁으로 들어가십니다." 루이스는 어두은 얼굴로 마지못해 나의 질문에 답했고 나는 입이 벌어져서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그, 그렇다면... 나는 첩으로 들어간단 말이야?' 나는 다시 머리털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라비스님!" "루이스! 그 정략, 깨면 안되요? 이건 말도 안돼!" "라비스님! 아가씨의 심정을 모르시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왕실과의 정략입니다. 크로시벨 가의 운명과 직결된 일이라구요! 게다가, 그 정략은 프레야 왕비께서 주선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고정하세요!" '아악! 그럼,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그렇게 속으로 절규를 하였으나 겉으로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루이스! 전 지금 몇살이에요?" 나의 질문에 그녀의 얼굴에는 잠시 황당한 기색이 스쳤으나 이내 표정을 고치고 입을 열었 다. "올해 열일곱이십니다." '흐억! 그럼, 여섯 살 차이? 넘, 어리잖아? 그리고, 난 원래 열 아홉이었는데... 암튼, 그 황 태자인지 뭔지, 순 도둑놈이군! 이렇게 어린 소녀를 첩으로 맞으려 하다니...' 그렇게 황태자에 대한 험담을 하고 있을 때 루이스는 이런 나의 생각을 모르는지, 계속 하 던 설명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5- 지금은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 루이스가 내 방을 나가고 두 시간 가까이 시간이 흘러갔 다. 나는 홀로, 조금전 루이스가 필기해준 메모지의 내용을 머리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나의 침대 밑에서는 아즈라엘이 쪼그리고 잠에 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뀐 잠자리가 불편한 지 자꾸 갸르릉 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하긴, 어제까지는 이 푹신한 침대 위에 주인과 같이 잠에 들곤 했는데, 오늘은 침대 밑으로 밀려났으니, 불편하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좀전까지도 나는 이 고양이와 한바탕 쇼를 했 었다. 그건, 아즈라엘이 나의 근처로 오는 것을 막는 일이었는데, 결국, 아즈라엘은 상처입 은 가련한 표정을 짓더니,-고양이 주제에 표정까지 짓는다.- 나의 침대 밑에서 쪼그리고 몸을 누운 것이다. "아함~ 졸려!" 빽빽한 글자가 적힌 종이를 내려다 보고 있자니, 멀미가 났다. 게다가 루이스가 적어준 글 자는 희한한 모양이었는데, -모양이 일본어의 히라가나 모양과 조금 비슷했다.- 생전 처 음보는 글자였다. 그러나, 나는 그 글자를 해석하는데 조금도 어려움을 갖지 않고 자연스럽 게 읽을 수 있었다. '아마도, 라비스의 남겨진 기억이 조금이나마 존재하는 모양이지...'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한참을 메모지를 읽던 나는, 문득 나의 자세한 생김새를 살피고 싶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대 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아까 루이스가 침대 곁에 촛불 하나만 남겨두고 다꺼버렸기 때문에 방안은 매우 어두웠다. 그래서 나는 침대 옆에 있는 촛불을 화장대 곁으로 가져왔다. 그러자 어렴풋이 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정말 내가 보아도, 적응이 안될 만큼 눈이 부시게 예쁜 모습이었 다. 화려하고도 진한 황금빛의 머리카락이 고운 곡선을 그리며, 나의 엉덩이 부분까지 넘 실거리고 있었고, 조그맣고도 갸름한 나의 하얀 얼굴은 주근깨 한 개도 눈에 띄지 않을만 큼 부드럽고 고와보였다. 그리고, 순금으로 만들어 그대로 박아놓은 듯한 나의 눈동자는 매우 맑은 빛을 발하며 반짝 이고 있었고, 선이 곱고 오똑하게 솟은 코는 제법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조 그맣지만 도톰해보이는 붉은 입술이 나의 얼굴에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그야말로 인간이 아닌듯한 미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우~ 정말 이쁘게 생겼네! 이렇게 이쁜 소녀가 그 카이엔인지 카라멜인지 한테 차여서 자 살까지 했었던 것인가? 그 자식 눈이 삐어도 한참 삔 모양이군. 에휴~ 만약 이 모습이 나의 육체가 아니었다면 금방 내가 꼬셨을 타입이었는데... 참으로 아까운지고!' 나의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가 만약 내 생각을 읽는다면 '웃기는 놈일세!' 하며 의아해 하겠 지만, 이렇게 여자의 몸으로 뒤바뀐 사실을 아는 것은 나 본인밖에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 었다. "하아! 그나저나, 내일은 왕성에 가야 한다고 루이스가 말했었는데... 어쩌다지? 히잉~ 엄마 가 보고 싶고, 연희도 보고 싶고... 수진이도 보고 싶어! 그리고, 정은이 누나는 더, 더욱 보고 싶어... 흐엉~ 앞으로 일주일 후면 기말 고사가 다가올텐데, 누군가가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자가 있다면 차라리 시험이나 보게 해줘! 그러면, 투정 안하고 열심히 공부 할 거야! 흑... 바람도 더 이상 피지 않을거고, 엄마한테도 효도할거야! 그러니, 나좀 다시 돌려보내줘~ 난 첩 같은 것은 죽어도 되기 싫단 말얏!" 나는 정신나간 듯, 허공에다 대고 눈물을 뿌리며 절규를 하였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곤하 게 잠들어 있던 아즈라엘이 놀란 듯 눈을 뜨더니, 결코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나의 모습을 보고는 겁에 질린 얼굴을 하였다. "냐앙~!!" "도데체 내가 무슨 죄를 많이 지었다고... 히잉!" [죄를 짓기는 많이 지었지...여자들을 울리는 죄란 매우 큰죄이니깐!] "허억! 이게 무슨 소리?"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갑자기 팔뚝에 닭살이 돋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주위를 휙휙 돌아보 며 살펴보았다. 그러자... 또 다시, 남자인지도 여자인지도 알 수 없는 중성적인 느낌의 목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이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누, 누구얏? 누군데, 숨어서 장난을 치는 거야? 어서 모습을 보여!" [훗! 바보... 숨긴 누가 숨었다고 그래? 난 네 코앞에 있는데...] "뭐, 뭣?"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느덧 내 앞에 다가와서 나를 올려다보는 아즈라엘을 내려다 보 았다. "아즈라엘?" [후훗... 이 고양이의 이름이 아즈라엘인 모양이지? 난 아멘시타... 그것이 나의 이름이지!] "아멘시타? 그럼, 넌 아즈라엘이 아니란 말야?" [그래! 난 잠시 너의 앞에 나타나기 위해 이 고양이의 몸을 빌린 것 뿐이야.] "그, 그럼, 넌 유령?" 나의 앞에 나타나기 위해 고양이의 몸을 빌렸다? 그럼, 아멘시타는 육체가 없는 존재라는 말이다. 육체가 없는 존재라는 것은 곧, 유령이라는 뜻...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등 골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다소 신경질적인 아멘시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 누구보고 유령이라는 거얏? 난 이래뵈도, 론티아의 정령이라구!] "엥? 론티아가 뭔데?" [흥! 안 가르쳐줘!] 아즈라엘의 몸에 들어가있는 아멘시타는 고개를 홱 돌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그의 행 동에 황당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안가르쳐주면 어쩔 건데? 넌, 고양이의 몸을 빌려서라도 나의 앞에 나타난 목적이 있을 거 아냐?" 그러자, 아멘시타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는 듯 하더니, 이내 침착해진 얼굴로 나에게 말 했다. [무, 물론, 너에게 나타난 용건은 있지! 흠흠... 론티아는 여기 저택 뒷 후원에 심어진 나무 의 이름이야! 그러니깐, 나는 론티아 나무의 정령이란 말이지... 나는 20년 전에 라비스의 어머니의 손에 의해 심어졌어! 그녀는 나를 무척이나 아껴주었지. 정말 아름다우시고 상냥한 분이셨는데...] 다소 시건방진 느낌이 강하게 들던 아멘시타의 목소리는 라비스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에 띄게 침울해지더니, 끝내 말을 잇지 못하였다. 무척이나 감정의 기폭이 심한 정령이 었다. '하긴, 정령이라면 매우 순수한 존재라 들었는데... 그 순수한 만큼 감정도 매우 풍부하겠지! 그나저나, '론티아' 라는 이름의 나무는 처음 들어보는데...' "너 정말 정령 맞아?" [이잇!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 정령은 거짓말 따위는 하지 않아!] 또 다시 발끈하며 화를 내는 아멘시타였다. 나는 그의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감정의 기폭이 매우 재미있게 느껴졌던 터라 그에게 다시 한번 찔러 보는 말을 하였다. "물론, 네가 진짜 정령이라면 거짓말은 하지 않겠지! 하지만 네가 진짜 나무의 정령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지?" 또 한번 그가 발끈하기를 기대하며 아즈라엘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멘시타를 바라보는데, 이번에는 별로 화내는 기색이 없이 그는 입을 열었다. [내가 너를 이 곳으로 데리고 올 때 잠깐 엿보았던 네 신상에 대해 한 번 말해볼까? 네 이 름은... 이도현! 별명은 이도령이었지 아마? 나이는 19살, 학교를 일년 일찍 들어갔음, 6월 24일 오후 5시... 학교 옥상에서 투신 자살 시도! 성격은 부드러움... 하지만 얼굴만 믿고 여자들을 밥먹듯이 울리는 천하의 바람둥이! 미안하지만, 내가 너의 영혼을 이곳으로 이끌었어! 어차피 넌 투신자살로 죽었을 운명이었던 것 같은데, 라비스라는 운명으로 한번 더 목숨을 연장하는 것도 좋지 않아?] 아멘시타의 표정없는 얼굴이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하아! 말도 안돼...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이야?' 나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그리고 현기증까지 나자 나의 몸은 잠시 휘청하였다. 사실, 지 금의 나의 육체는 수면제를 많이 복용했던 후유증이 남았었던 터라, 적당한 충격만 있어도 현기증이 났다. 그렇게, 충격으로 인하여 비실거리다가 어느 정도 정신이 들자 나는 화가 솟구치기 시작했 다. "이, 이이... 이 바아보!! 엉터리 정령 자식아! 난 투신 자살 따위는 할 생각이 없었단 말이 얏! 물어내! 다시 날 돌려 보내줘!!" 내가 광분을 하며 그에게 소리를 지르자 아멘시타는 매우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하게 뜨며 눈을 깜빡 깜빡했다. [어? 너 그때 죽을 생각 아니었어? 난 그런 줄 알고 차원 이동 게이트를 열었던 건데?] -6- 아멘시타의 무책임한 말에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꼈다. '하아! 하느님 아버지, 부처님, 예수님...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이거 혹시 장편으로 꾸는 꿈 아니에요?' 차라리 이것이 악몽이었음 하는 바램이었다. "날 여기까지 끌고 온 목적이 뭐야?" 차갑게 식은 나의 목소리에 소름이라도 돋았는지 아멘시타의 움찔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셀레나... 셀레나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였어!] 아멘시타의 시건방지던 목소리는 어느덧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되었다. "셀레나가 누구얏?" [그녀는... 라비스의 어머니... 그리고 나의 주인... 그녀는 자신의 딸이 행복해지길 바랬어! 그런데... 나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어. 나도, 라비스가 그렇게 죽음을 선택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그래서... 난 너를 끌어들여 라비스의 눈을 뜨게 한 거야! 비록, 넌 라 비스는 아니지만... 그 육체는 엄연히 라비스이니깐...] 아멘시타의 목소리가 느리게 들려왔는데, 그 목소리는... 울음 소리가 섞이지 않았는데도, 마 치 우는 것처럼 슬프게 들렸다. 괜시리 나까지 가슴이 아파왔다. 나는 잠시 침묵을 지키 다가 약간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그에게 입을 열었다. "아멘시타! 너 나무의 정령이라고 했지? 한가지 물어볼게! 여긴, 내가 살던 지구가 맞냐?" 사실, 계속 의심쩍었던 의문이었다. 어제부터 겪었던 이곳은 현실이라기엔 뭔가 이상했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말투하며, 처음보는 문자 그리고 정령이니, 론티아 나 무이니 그런 것은 모두 생소한 단어들이었다. [여기가 지구라는 것은 맞아! 하지만, 네가 살던 지구는 아니야. 너는 판타지 문학을 즐겨 읽었으니 잘 알거야! 여긴, 네가 살던 곳에서 판타지 세계라 일컬어지는 그런 비슷한 세 계야! 그러니깐 다른 차원의 세계이지.] 아멘시타의 말을 들은 나는 머리 속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노, 농담이지? 판타지 세계 따위가 있을 리가 없어..." [정령은 농담을 하지 않아! 오직 진실만을 말할 뿐이야.] 나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 켜보려 했으나, 나의 입속은 침이 말라버려 도저히, 침을 삼킬 수가 없었다. 털썩! 결국은 나의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않고 말았다. "이럴 수는 없어! 나에게 남은 미래는... 창창하던 나의 미래! 결국은 이렇게 황당한 일로 망가지고 말다니! 아멘시타, 책임져! 나를 이곳까지 네가 이끌고 왔다면 돌려보낼 수도 있잖아?" 그러자 아멘시타는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사실, 너를 다른 차원에서 이끌어 온 것도 내 권한 밖이었 으니깐... 나의 긴 수명의 일부를 희생한 대가로 널 이곳으로 간신히 이끌어 올 수 있었어! 그런데. 네가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니었다니! 정말 미안해... 나의 실수였어!] "으아악! 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이젠 어떻할 거야? 흐엉~ 난 돌아가고 싶다구!" [이도현... 너에 대한 책임을 질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모든지 들어줄게... 하지만, 다시 너를 돌려보낼 수는 없어! 나의 목숨을 바꾼다 하더라도, 이젠 그것은 불가능해!] 나는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황금빛의 머리카락이 물결을 치며 아래로 흘 러내려왔다.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앞으로 내가 내 자신을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 이대로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이라면 진작에 포기해버리고 새로운 삶에 익숙해지는 것이, 나를 위한 일 일지도 몰랐다. 한참을 침묵을 지키던 나는 문득 고개를 번쩍 들었다. 조금전까지 절망으로 젖었던 나의 눈 에는 이제까지 없었던, 결연한 의지를 내비친 눈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결국은 내가 선택해야할 운명은 이곳에서 -것두 여자가 되서... 그것이 가장 슬픈 일이다. 왜냐? 여자를 유혹할 수 없기 때문!- 라비스로서의 운명을 사는 것이었다. 어차피 라비 스가 되어야 된다면, 이대로 눈물을 질질 짜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 곳에 금방 적응할 수 있도록, 이용할 것은 최대로 이용해야 했다. "좋아! 네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나를 위해 뭐든지 해! 너의 책임을 지란 말이야! 날 돌려보 낼 수가 없다면, 라비스로서의 나의 운명을 책임져!" 내가 이 세계로 넘어온지 이틀째 되는 새벽! 그 도도하고 시건방지던, 희귀하고도 신성한 나무라 일컬어지는 론티아 나무의 정령, 아멘시타는 나에게 그 코를 꿰이고 말았다. -2- "라비스님... 흐흑!" 누가 나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끼고 있었다. 아니지! 그건 나의 이름이 아니었다. 나에게 주어진 요물스런 외모를 가진 이 육체의 이름이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떠보았다. 그러자 내가 누운 침대 곁에서 꺼이꺼이 울고 있는 중년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누구...?" 왠 낯선 여자가 내 옆에서 울고 있으니, 나로서는 눈을 뜨자마자 읊은 단어는 누구? 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질문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 아니면, 정신을 차린 나의 모습을 보고 감격이라도 했는지 눈이 크게 떠지며 입이 벌어졌다. "오오! 라비스니임, 깨어나셨군요!" 그러더니, 다짜고짜 그 육중한 몸으로 나를 덥썩 끌어안는 것이었다. "켁!" 나는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강렬한 포옹에서 빠져나오려 애를 썼다. '으, 사, 살려줘!' 그런 나의 바램을 신께서 들어주셨는지 곧, 누군가가 나를 구원하는 말을 하였다. "루이스! 지금 라비스님께선 정신이 드셨다고 하나, 몸이 아주 안좋으신 상태에요! 안정을 취해야 한다구요!" 누군가가 그녀를 다그치는 말을 하자 루이스라고 불린 그녀는 그제야 나를 끌어안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창백해진 얼굴로 숨이 꼴깍 꼴깍 넘어가기 직전이었던 나는 다시 돌아오는 화색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쉬어야 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는 정신이 돌아오자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황당한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저어..." 하지만, 이번에도 나의 말은 씹혔다. "라비스니이이임~!!" 갑자기 무시무시해진 루이스의 목소리에 나는 흠칫하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정말, 강심장도 오한이 들게 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라비스님!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결혼을 앞둔 아가씨가 다량의 수면제를 드시다니요?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잘못했으면 영원히 깨어나시지 못할 뻔했다구요! 정신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설마 죽을 생각으로 이걸 다 삼키신 것은 아니겠지요?" 그녀의 따발총 같은 다그침을 듣고 있으니, 있던 정신도 달아날 지경이었다. "무슨...?" "하지만, 안심하세요! 주인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난리가 나겠지만 지금 주인님께서는 출타중이시니, 제가 하인들 입단속을 시키겠습니다. 아아! 라비스님. 정말 간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만약 라비스님께서 깨어나시지 못했다면... 저는, 흐흑!" '우웅~ 저 아줌마 되게 무섭네... 자꾸 내 말을 씹다니!'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설명이란 것을 듣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 뒤에서 서있는 시녀로 보이는 여인들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질문을 했다. "저어... 여긴 대체 어디죠? 그리고, 댁들은 누구세요?" "……!!" 휘이잉~!! 어디서 불어오는지 갑자기 찬바람이 이들 사이에서 불었다. 그들이 모두 한순간에 얼어붙은 얼굴을 하고서 나를 멍하니 쳐다보자 불길해진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그들의 눈치를 보았다. "라비스님?" 썰렁하고 무겁던 긴 침묵 뒤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루이스였다. "네, 네에?"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낮게 깔아진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절로 몸을 움츠려졌다. 하지만, 그녀의 위압감에 눌려 이대로 물러서게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냐고 물었는...데요?" 하지만 나의 말끝은 그녀의 눈빛에 눌려 기어들어가고 말았다. '으흑! 여자의 몸이 되니, 성격도 소심해지는군.' 나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자 안면 근육이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넓쩍한 얼굴이 들어왔다. '헉! 무서버...' 나는 혹여 그녀의 솥뚜껑 같은 주먹이라도 날아올까봐 전전긍긍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루이스는 의외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 "앗! 루이스!" "루이스님!" 루이스의 육중한 몸이 뒤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마침 그녀의 뒤에 서있던 시녀들이 저마다 루이스를 부르며 몸을 받쳐 주었다. --------------------------------------------------- --- * 후훗... 이번 편은 쪼금 더 마니 썼슴다. 아아! 뿌듯해라....;;; -3- 시녀 세명이 몸을 던져 그녀를 받쳐 들었지만 루이스의 몸을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는지 그녀들의 얼굴에 용을 쓰는 듯한 기색이 완연했다. 그러나, 루이스는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었는지 곧, 비칠비칠 일어났다. 그녀의 핏기 없어진 얼굴이 조금 전 내가 한 발언이 무척 충격적이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저어... 괜찮으세요?" 나는 조심스레 그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라비스님... 불쌍하신 라비스님. 흐흑!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이 유모도 알아보시지 못하시다니요? 라비스님께서 깨어나신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지만... 기억을 잃어버리시다니... 흑!" 다시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하더니 그녀가 두르고 있던 앞치마로 얼굴을 슥슥 문질렀다. 그러더니... 팽~!! 코를 푸는 것이었다. 무척이나 털털한 성격의 소유자임이 틸림없었다. 나는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을 얼른 다시 폈다. 여인이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조금 보기에 안좋다고 얼굴을 찌푸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흐음... 이래뵈도 난 한 매너 했었지! 여자를 울리는 남자는 나의 적... 헉! 근데, 지금의 나는 여자 같은데...' 하지만, 나의 뒤바뀐 육체에 대해 당황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나는 여자가 되어서도 버리지 못한 근성으로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느덧 루이스의 등을 토닥이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이봐요! 루이스라고 했죠? 그만 눈물을 그치세요! 뚝!"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이런 발언을 해서는 안되었지만, 나도 모르게,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에게 하던 버릇을 이 아줌마에게도 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행동을 미처 깨닫지 못한 나는 여전히 그녀를 달래는데에 열중했다. "흐끅! 라비스님.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하시는 거에요?" 팽~!! 그녀는 꺼이꺼이 울면서 또 다시 코를 풀었다. '에휴~!'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내가 기억을 몽땅 잃어버려서 그런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아! 어쩐다... 이게 꿈이 아니라면, 뭔가 잘못되서 일이 이 지경이 된 모양인데...' 나는 차분하게 생각하려고 노력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내가 이 곳에서 눈을 뜨기 바로 직전의 상황을 말이다. * * * 따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나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용서 못해! 그 계집애랑 놀아나다니... 이젠 정말 질렸어. 이제 그만 끝내!" 방금 전에 나의 뺨을 때린 한 소녀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연희야!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누구랑 놀아났다는 거야?" 그녀에게 맞은 뺨이 얼얼했다. "누구긴 누구야? 그 여우같은 계집애, 수연이랑 어제 같이 있었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녀는 자신의 화를 못이기겠는지 눈물을 글썽글썽하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 있다는 것은 그녀가 화를 참고 있을 때만 나오는 버릇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저리 치워! 이제는 믿지 않을 거야. 바람둥이 카사노바 같은 자식..." 나를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는 그녀를 보자 한숨이 나왔다. '에휴~ 내가 인기가 좋아서, 여자들이 자꾸 꼬이는 걸 어떻하라고... 그녀들의 마음에 모두 상처를 줄 수는 없는 일이잖아?' 그런 나의 처지에 통탄을 하며 나는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연희야! 수연이 그애는 그냥 나 좋다고 따라 다니는 애야. 나에겐 너밖에 없다고! 믿어줘!" "흥!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어? 네가 하는 말이라면 이젠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믿지 않을거야!"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믿어주겠어? 여기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할까?" 우리는 지금 학교의 옥상위에 있었다. 이 건물은 5층으로 되어있는데, 만약 뛰어내리면 죽지는 않겠지만, 반병신이 될 수 있는 위험한 높이였다. '설마! 네가 나보고 뛰어내리라는 말은 하지 않겠지? 요 깜찍한 것 같으니...' 그렇게 속으로 웃으며 나는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 뛰어내려! 나를 위해서 어디 뛰어내려봐!"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뭐?" "왜? 못하겠어? 그럼, 그렇지! 네가 나를 진심으로 생각할 리가 없어." "아냐! 나 너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뛰어내릴 수 있어!" 그렇게 그녀에게 외치고서는 나는 난간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과연, 그녀의 표정은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나는 속으로 히죽 웃으며 그녀가 어서 나를 만류하기를 기다렸다. 바로 옥상 난간 앞까지 온 나는 왠지 오늘따라 까마득하게 보이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벌써 수업이 끝난 듯한 몇몇 학생들이 현관 로비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으흠... 근데, 갑자기 왜 이렇게 어지렇지?' 기이하게도,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허공이 일그러져 보였다. 하지만, 나는 잠시 어지러움증을 느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 생각하며 연희가 보는 앞에서 뛰어내리려는 시늉을 해보였다. "연희야! 사랑해... 진심이야!" '으흐흐. 내가 봐도 정말 나는 멋진 놈이라니깐!' 그렇게 자아도취에 빠져서 연희를 바라보는데... "까아악!! 도현아!" 연희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체 비명을 지르며 나에게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응? 연희의 반응이 예상외로 강렬... 어어? 어?' 갑자기 현기증이 나더니 나의 몸이 기우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나의 몸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 제가 쓰는 설 중에서 체인지가 가장 쓰기 힘듭니다. 그 이유는 저두 모르겠어요! ㅜ.ㅜ 아무튼, 또 한편, 올리게 되서 저는 뿌듯합니다. (설의 재미는 뒷전?) 하하... 앞으로 제 머리가 더욱 아파질 것 같다는... 쿨럭! -4- '하아, 말도 안돼! 그렇다면 내가... 내가 진짜루 몸을 던졌다는 얘기? 그렇다면, 나는 병원에서 눈을 떴어야 하는데, 여긴 대체 뭐야? 내가 죽어서 천국에 온 것도 아니구... 게다가, 이 여자의 몸은 무엇이란 말이야? 설마...' 나는 문득, 예전에 봤던 '체인지'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그렇다면... '아악! 그럼, 내가 라비스라는 여자의 몸으로 뒤바뀌었다는 거야? 그럼, 라비스라는 여자는 어떻게 된거지? 그 여자도, 수면제를 잔뜩 먹고, 자살을 시도한 것 같은데... 이게 대체!' 내가 얼굴이 창백해져서 황금빛의 탐스런 머리카락을 또 다시, 쥐어뜯자 나의 옆에서 요란스럽게 울던 루이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라비스님! 왜그러세요? 뭔가 기억이라도..." "루이스! 제가 왜 수면제를 먹은 거죠? 저에게 무슨 안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도무지, 기억이..." 결국, 나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 행세를 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이들에게 나는 몸이 뒤바뀌었다. 나는 실은 남자다! 라고 말해 봤자 들어주지 않을 것이 뻔하였고, 만약 그렇게 말한다 해도, 정신이상자로 오해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친여자(?) 취급은 결코 받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기억을 잃은 라비스 행세를 하며, 루이스를 비롯한 이들의 도움을 받아, 라비스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두는 것이 현명할 듯 했다. 그래서, 루이스에게 그렇게 질문을 한 것이었다. "라비스님..." 졸지에 나의 유모가 된 루이스라는 여자는 나의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어두워진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아흑! 이 여자... 내가 하는 질문을 자꾸 씹는군!' 내가 그렇게 속으로 투덜대고 있을 때.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며, 어떤 시녀가 뛰어들어왔다. "루이스님! 주인님이 지금 돌아오시고 있대요!" 그녀가 그렇게 숨넘어갈 듯이 외치자, 루이스를 비롯한 나머지 시녀들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아! 이거, 큰일났네! 주인님이 만약 이 일을 아시면, 분명 뒤집어지실텐데... 이를 어쩌지? 핫! 라비스님, 얼른 침대에 누우세요! 세라, 제인! 라비스님이 수면제를 먹고 기억을 잃으신거 모두에게 입단속 시켜!" 카나! 어서 주인님 맞을 준비를..." 하지만, 루이스는 어쩔 줄 몰라하는 시녀들에게 침착하게 지시를 내렸고 시녀들은 그녀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전쟁터에서 부하들에게 작전 명령을 내리는 여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자, 웃음이 나와 살며시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때, 루이스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아앗! 라비스님, 그렇게 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침대로 가서 누우세요! 그리고, 만일 주인님이 들어오실 것을 대비해서 아픈 척을 하란 말이에욧!" 그녀의 외침에 나는 찔끔하여 침대 속으로 얌전히 기어들어갔다. 그렇게 모든 것이 척척 이루어지자, 루이스는 그제야 만족을 한 듯 양 입꼬리가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 그런데... 루이스! 어떻게 아픈 척을 해야 돼죠?" 나는 궁금했던 것을 루이스가 대답을 할 만한 때를 신중히 골라서 질문을 했다. 그러자, 루이스가 내가 누워있는 쪽을 돌아보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라비스님! 그냥 감기 몸살에 걸린 것처럼 앓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주인님에겐 수면제를 먹었던 일을 결코 말하지 마세요! 전, 주인님에게 라비스님이 잠드셨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주인님께서 라비스님을 보러 들어오신다면, 라비스님은 주인님에게 이렇게 말하세요! '아버님, 이제 오셨습니까? 제가 몸이 좋지 못해서, 이렇게 침대에서 뵙니다!' 라구요." "네, 그렇게 하죠!" 그렇게 나의 대답을 들은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녀들과 함께 방을 나갔다. 그러자, 지금까지 소란스러웠던 방이 조용해졌다. '그 주인님이란 사람이 무척 무서운 사람인가 보지? 저렇게 무서운 루이스도 절절매는 것 보면은...' 괜시리 긴장이 된, 나는 만약 그 주인님이란 사람이 들어올 것을 대비해서 루이스가 가르쳐 준 멘트를 되뇌였다. 그런데, 그때... "냐항~!" 조금 전까지 잊고 있었던 그 하얀 털북숭이가 나에게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나는 고양이라면 질색이었던 터라... 그 고양이에게 거부의 몸짓을 온몸으로 내보였다. "으헉! 저, 저리가! 저린 가란 말야~"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귀여운 고양이는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지, 사랑스러운 몸짓으로 나에게 달려들고 말았다. "으아악~!!" 결국, 나는 소리를 지르며, 그 고양이를 피해서 침대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우당탕 쾅!! 그만 허둥대다가 침대 밑으로 거꾸로 나자빠진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나의 몸에 전해진 충격으로 인하여 볼썽사나운 꼴로 넘어진 상태에서 몸을 얼른 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나의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핫! 라비스님!" 방에서 나는 요란한 소리를 들었는지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고 뛰어들어왔는데, 그는 아까 아침에 봤던 갈색 머리 남자였다. 그는 나의 민망한 모습을 보고는 헉! 하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나에게 눈길을 주는 것이었다. 잠옷을 입고 고꾸라져 있는 나를 일으켜야 되나 말아야 하나, 상당히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흑! 쟤는 뭔데, 아까부터 불쑥 불쑥 뛰어들어오는 거지? 아야~ 아파라! 봤으면 얼른 일으켜주어야 할 것 아냐?' "뭐하고 있어요? 나 지금 허리를 다쳐서 혼자 일어나기 힘들단 말이에요!" 결국, 내가 그에게 한마디 하자, 그는 나에게 가까이 오더니 눈을 다른 쪽으로 돌린 체. 나를 부축하였다. 그리고는 내가 침대에 다시 눕는 것을 도왔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라비스님." 그는 고개를 꾸벅해 보이더니, 왠지 그 자리에서 도망치려는 듯이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정체가 궁금했기 때문에, 침착하지 못해 보이는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저기요! 형, 아니... 누구시죠? 아까 아침에 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습관대로 그에게 '형'이라는 호칭을 쓰려다가 얼른, 그만두고 호칭없이 그에게 궁금했던 것을 질문했다. 마땅하게 그를 부를 호칭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다 보았다. 아까 까지는 전혀 표정이 없던 그였는데, 지금의 그의 얼굴은 이유모를 안타까움과 가슴 아픔이 가득했다. 그래서 나는 의아한 얼굴로 마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왔고, 무미건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라비스님. 저는 아가씨의 경호원인 에드워드 입니다. 그냥 늘 부르시던 대로 '에드'라고 부르십시오!" "겨, 경호원이라구요?" "네, 그래서 저는 항상 라비스님 가까이 있는데, 조금 전엔 라비스께서 비명을 지르셔서 이렇게 무례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아까 잠깐, 눈이 마주쳤지만 에드는 이내 눈을 내리깔았고, 도무지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도데체 왜 그러지? 하며 나는 갸우뚱했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에드는 그렇게 자신이 해야 할 말만 급하게 내뱉고는 잽싸게 나가버리고 말았다. '참나... 사내 자식이 숫기가 없기는...' 그렇게 투덜대며 다시 침대에 눕는데, 바닥에서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고양이의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역시 혈통이 좋은 고양이답게 무척 예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녀석, 스머프에 나오는 아즈라엘 같아! 심술궂은 고양이...' 사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저 페르시안 고양이는 아즈라엘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그러나, 억지성이 다분했지만 여전히 아즈라엘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나였다. "이봐! 아즈라엘, 너 한발짝만 다가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냐아옹~" '으헉!' -5- 다행이도 그 주인님이란 사람은 나의 방에 들르지 않았다. 그래서, 맘 놓고 그날 밤부터 루이스에게 특훈(?) 훈련을 받기 시작했는데... "라비스님! 아까도 제가 설명을 했잖아욧! 아가씨께서는 아버님이신 다니엘 크로시벨의 외동딸이며, 어머님께선 아가씨가 다섯 살때 돌아가셨다구요! 에휴~ 총명하시던 아가씨께서 왜 그러실까?" 그렇지 않아도 드높은 루이스의 목소리가 더욱 옥타브가 높아졌다. 그래서, 아까 실컷 잤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고 싶은 하품을 간신히 참으며 잔뜩 쫄아있었다. "루이스~~ 낼부터 열심히 배우면(?) 안될까... 요?" 나는 그녀에게 다소 애교성이 짙은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더욱 험악해질 뿐이었다. "라비스니임! 이것은 크로시벨가의 집안 전체가 달린 일이란 말이에요! 아가씨는 왕실과 정략을 맺었기 때문에 구설에 오르지 않으려면, 열심히 기억을 되찾아야..." "헉! 왕실이라고? 여기가 무슨 나라인데?" 나는 딴에는 무척 놀라서 그녀에게 질문을 하였지만, 루이스는 그녀의 거대한 몸이 휘청하였다. "아아! 아무리 기억을 잃어버리셨다고 해도, 나라 이름도 모르시다니... 흐흑! 라비스니임." 루이스의 발작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녀는 닭똥 같은 굵은 눈물을 마구 쏟으며 가녀리기 짝이 없는 나의 몸을 억세게 끌어안았다. 물론, 나는 그녀의 품을 빠져나오려 무척이나 버둥거렸음은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 글을 읽는 분은 모두 다 아시리라... "아악! 루이스, 이거 놓으세요! 숨 막혀요." 나의 절규어린 목소리에 그제야 팔을 풀은 루이스는 젖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였다. 그녀의 눈빛이 너무 슬퍼보였다. "차라리... 평민으로 태어나셨다면, 아가씨께선 이 지경이 되지 않으셨을텐데... 남작 부인께서 살아계셨다면, 라비스께선... 훌쩍!" "저어... 루이스. 루이스가 나를 걱정해주는 것은 고마워요! 하지만, 전 지금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려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게다가 지금 제가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루이스 뿐이에요, 그러니... 제발 더 이상 눈물 같은 것은 보이지 말고, 저를 도와줘요! 제가 묻는 말에 성의껏 답해 주세요." 내가 이 여자의 몸으로 바뀐 뒤로 처음으로 제대로 조리있게 해보는 말이었다. 그러자, 루이스의 눈이 커졌다. "오오! 라비스님, 이제야 아가씨 답군요. 그래요! 아가씨를 도와드릴게요. 제 몸이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전 아가씨를 위해서 뭐든 할 겁니다." 그녀의 격정적이고도 다부진 말에 나는 내심 불안하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에게 피식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루이스. 그럼, 이제 제 질문에 답해 주시겠어요? 여기 나라의 이름은 무엇이죠?" "루히얀스 왕국입니다. 아가씨. 다른 나라에 비해 왕권이 매우 강력한 나라이죠. 그만큼 보수적이기도 하기에, 귀족이신 아가씨에게는 무거운 책임이 뒤따를 겁니다." 처음으로 그녀가 나에게 순순히 답을 해주었다. 드디어, 그녀의 주인으로서 권위를 되찾았다고나 할까? 암튼, 내심 뿌듯해지는 나였다. 그동안 잃고 있던 나의 페이스를 되찾은 것이었다. "아! 그렇군요. 그러면 내가 왕실의 누구와 정략을 맺고 있는 거죠?" 그렇게 되자 나에게는 의욕이 불끈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매우 피곤하여 쉬고만 싶었는데, 이제는 불안한 나의 위치를 굳건히 하기 위해 라비스에 대해, 그리고 그녀의 배경에 대해 뭐든지 알고 싶었다. "미카엔 투르타 덴 마르시에안 로히얀스 황태자이십니다." '헉! 이름 한번 더럽게 어렵네. 미카엔... 그 이후부턴 못 외우겠다.' 그런 쓸떼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물었다. "그 황태자 몇살이에요?" 나의 남편(?)이 될 자라면, 나이도 중요했다. "현재 23살이십니다. 그리고, 황태자비께선 20살이시구요!" "네, 네에? 황태자비라니요?" "에휴~ 이미 황태자께선 3년 전에 황태자비를 보셨습니다. 그녀는 공작가의 영애이셨죠! 사실, 황태자비를 간택할 때는 그 신분을 공작가의 영애로만 합답니다. 그래서..." "그, 그럼, 난 뭐에요? 벌써 부인이 있다면서 나를 왕실과 정략을 맞은 이유가 뭐냐구요?" 나는 그녀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라비스님께선... 황태자님의 후궁으로 들어가십니다." 루이스는 어두은 얼굴로 마지못해 나의 질문에 답했고 나는 입이 벌어져서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그, 그렇다면... 나는 첩으로 들어간단 말이야?' 나는 다시 머리털을 쥐어듣기 시작했다. "라비스님!" "루이스! 그 정략, 깨면 안되요? 이건 말도 안돼!" "라비스님! 아가씨의 심정을 모르시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왕실과의 정략입니다. 크로시벨가의 운명과 직결된 일이라구요! 게다가, 그 정략은 프리아 왕비께서 주선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고정하세요!" '아악! 그럼,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그렇게 속으로 절규를 하였으나 겉으로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루이스! 전 지금 몇살이에요?" 나의 질문에 그녀는 잠시 황당한 기색이 스쳤으나 이내 표정을 고치고 입을 열었다. "올해 열일곱이십니다." '흐억! 그럼, 여섯 살 차이? 넘, 어리잖아? 난 원래 열 아홉이었는데... 그 황태자인지 뭔지, 순 도둑놈이군! 이렇게 어린 소녀를 첩으로 맞으려 하다니...' 그렇게 황태자에 대한 험담을 하고 있을 때 루이스는 이런 나의 생각을 모르는지, 계속 하던 설명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오옷~ 또, 한편을 올렸땅! ^^v 님덜! 잼있게 봐주시길.... -6- 지금은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 나는 홀로, 조금전 루이스가 필기해준 메모지의 내용을 머리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나의 침대 밑에서는 아즈라엘이 쭈구리고 잠에 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뀐 잠자리가 불편한지 자꾸 갸르릉 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하긴, 어제까지는 이 푹신한 침대 위에 주인과 같이 잠에 들곤 했는데, 오늘은 침대 밑으로 밀려났으니, 불편하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좀전까지도 나는 이 고양이와 한바탕 쇼를 했었다. 그건, 아즈라엘이 나의 근처로 오는 것을 막는 일이었는데, 결국, 아즈라엘은 상처입은 가련한 표정을 짓더니,-고양이 주제에 표정까지 짓는다.- 나의 침대 밑에서 쪼그리고 몸을 누운 것이다. "아함~ 졸려!" 빽빽한 글자가 적힌 종이를 내려다 보고 있자니, 멀미가 났다. 게다가 루이스가 적어준 글자는 희한한 모양이었는데, -모양이 일본어의 히라가나 모양과 조금 비슷했다.- 생전 처음보는 글자였다. 그러나, 나는 그 글자를 해석하는데 조금도 어려움을 갖지 않고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었다. '아마도, 라비스의 남겨진 기억이 조금이나마 존재하는 모양이지...'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대 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아까 루이스가 침대 곁에 촛불 하나만 남겨두고 다꺼버렸기 때문에 방안은 매우 어두웠다. 그래서 나는 침대 옆에 있는 촛불을 화장대 곁으로 가져왔다. 그러자 어렴풋이 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우~ 정말 이쁘게 생겼네! 이렇게 이쁜 소녀가 왕실과 정략 결혼을 하는 것이 그렇게 싫어 자살까지 했었던 것인가? 에휴~ 만약 이 모습이 나의 육체가 아니었다면 금방 내가 꼬셨을 타입이었는데... 참으로 아까운지고!' 나의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가 만약 내 생각을 읽는다면 '웃기는 놈일세!' 하며 의아해 하겠지만, 이렇게 여자의 몸으로 뒤바뀐 사실을 아는 것은 나 본인밖에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하아! 그나저나, 내일은 왕성에 가야 한다고 루이스가 말했었는데... 히잉~ 엄마가 보고 싶고, 연희도 보고 싶고... 수진이도 보고 싶어! 그리고, 정은이 누나는 더, 더욱 보고 싶어... 흐엉~ 앞으로 일주일 후면 기말 고사가 다가올텐데, 누군가가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자가 있다면 차라리 시험이나 보게 해줘! 그러면, 투정 안하고 열심히 공부할 거야! 흑... 바람도 더 이상 피지 않을거고, 엄마한테도 효도할거야! 그러니, 나좀 다시 돌려보내줘~ 난 첩 같은 것은 죽어도 되기 싫단 말얏!" 나는 정신나간 듯, 허공에다 대고 눈물을 뿌리며 절규를 하였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곤하게 잠들어 있던 아즈라엘이 놀란 듯 눈을 뜨더니, 결코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나의 모습을 보고는 겁에 질린 얼굴을 하였다. "냐앙~!!" "도데체 내가 무슨 죄를 많이 지었다고... 히잉!" [죄를 짓기는 많이 지었지...] "허억! 이게 무슨 소리?"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갑자기 팔뚝에 닭살이 돋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주위를 휙휙 돌아보며 살펴보았다. 그러자... 또 다시, 남자인지도 여자인지도 알 수 없는 중성적인 느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이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누, 누구얏? 누군데, 숨어서 장난을 치는 거야? 어서 모습을 보여!" [훗! 바보... 숨긴 누가 숨었다고 그래? 난 네 코앞에 있는데...] "뭐, 뭣?"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느덧 내 앞에 다가와서 나를 올려다보는 아즈라엘을 내려다 보았다. "아즈라엘?" [후훗... 이 고양이의 이름이 아즈라엘인 모양이지? 난 아멘시타... 그것이 나의 이름이지!] "아멘시타? 그럼, 넌 아즈라엘이 아니란 말야?" [그래! 난 잠시 너의 앞에 나타나기 위해 이 고양이의 몸을 빌린 것 뿐이야.] "그, 그럼, 넌 유령?" 나의 앞에 나타나기 위해 고양이의 몸을 빌렸다? 그럼, 아멘시타는 육체가 없는 존재라는 말이다. 육체가 없는 존재라는 것은 곧, 유령이라는 뜻...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다소 신경질적인 아멘시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 누구보고 유령이라는 거얏? 난 이래뵈도, 론티아의 정령이라구!] "엥? 론티아가 뭔데?" [흥! 안 가르쳐줘!] 아즈라엘의 몸에 들어가있는 아멘시타는 고개를 홱 돌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그의 행동에 황당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안가르쳐주면 어쩔 건데? 넌, 고양이의 몸을 빌려서라도 나의 앞에 나타난 목적이 있을 거아냐?" 그러자, 아멘시타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는 듯 하더니, 이내 침착해진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무, 물론, 너에게 나타난 용건은 있지! 흠흠... 론티아는 여기 저택 뒷 후원에 심어진 나무의 이름이야! 그러니깐, 나는 론티아 나무의 정령이란 말이지... 나는 20년 전에 라비스의 어머니의 손에 의해 심어졌어! 그녀는 나를 무척이나 아껴주었지. 정말 아름다우시고 상냥한 분이셨는데...] 다소 시건방진 느낌이 강하게 들던 아멘시타의 목소리는 라비스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에 띄게 침울해지더니, 끝내 말을 잇지 못하였다. 무척이나 감정의 기폭이 심한 정령이었다. '하긴, 정령이라면 매우 순수한 존재라 들었는데... 그 순수한 만큼 감정도 매우 풍부하겠지! 그나저나, '론티아' 라는 이름의 나무는 처음 들어보는데...' "너 정말 정령 맞아?" [이잇!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 정령은 거짓말 따위는 하지 않아!] 또 다시 발끈하며 화를 내는 아멘시타였다. 나는 그의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감정의 기폭이 매우 재미있게 느껴졌던 터라 그에게 다시 한번 찔러 보는 말을 하였다. "물론, 네가 진짜 정령이라면 거짓말은 하지 않겠지! 하지만 네가 진짜 나무의 정령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지?" 또 한번 그가 발끈하기를 기대하며 아즈라엘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멘시타를 바라보는데, 이번에는 별로 화내는 기색이 없이 그는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은... 이도현! 별명은 이도령이었지 아마? 나이는 19살, 학교를 일년 일찍 들어갔음, 6월 24일 오후 5시... 학교 옥상에서 투신 자살 시도! 성격은 부드러움... 하지만 얼굴만 믿고 여자들을 밥먹듯이 울리는 천하의 바람둥이에다 난봉꾼! 미안하지만, 내가 너를 이곳으로 이끌었어! 어차피 넌 투신자살로 죽었을 운명이었던 것 같은데, 라비스라는 운명으로 한번 더 목숨을 연장하는 것도 좋지 않아?] 아멘시타의 표정없는 얼굴이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하아! 말도 안돼...' 나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그리고 현기증까지 나자 나의 몸은 잠시 휘청하였다. "이, 이이... 이 바아보!! 엉터리 정령 자식아! 난 투신 자살 따위는 할 생각이 없었단 말이얏! 물어내! 다시 날 돌려 보내줘!!" 내가 광분을 하며 그에게 소리를 지르자 아멘시타는 매우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하게 뜨며 눈을 깜빡 깜빡하는 것이었다. [어? 너 그때 죽을 생각 아니었어? 난 그런 줄 알고 차원 이동 게이트를 열었던 건데?] -7- 아멘시타의 무책임한 말에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꼈다. '하아! 하느님 아버지, 부처님, 예수님...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이거 혹시 장편으로 꾸는 꿈 아니에요?' 차라리 이것이 악몽이었음 하는 바램이었다. "날 여기까지 끌고 온 목적이 뭐야?" 차갑게 식은 나의 목소리에 소름이라도 돋았는지 아멘시타의 움찔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셀레나... 셀레나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였어!] 아멘시타의 시건방지던 목소리는 어느덧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되었다. "셀레나가 누구얏?" [그녀는... 라비스의 어머니... 그리고 나의 주인... 그녀는 자신의 딸이 행복해지길 바랬어! 그런데... 나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어. 나도, 라비스가 그렇게 죽음을 선택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그래서... 난 너를 끌어들여 라비스의 눈을 뜨게 한 거야! 비록, 넌 라비스는 아니지만... 그 육체는 엄연히 라비스이니깐...] 아멘시타의 목소리가 느리게 들려왔는데, 그 목소리는... 울음 소리가 섞이지 않았는데도, 마치 우는 것처럼 슬프게 들렸다. 괜시리 나까지 가슴이 아파왔다. 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약간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그에게 입을 열었다. "아멘시타! 너 나무의 정령이라고 했지? 한가지 물어볼게! 여긴, 내가 살던 지구가 맞니?" 사실, 계속 의심쩍었던 의문이었다. 어제부터 겪었던 이곳은 현실이라기엔 뭔가 이상했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말투하며, 처음보는 문자 그리고 정령이니, 론티아 나무이니 그런 것은 모두 생소한 단어들이었다. [여기가 지구라는 것은 맞아! 하지만, 네가 살던 지구는 아니야. 너는 판타지 문학을 즐겨 읽었으니 잘 알거야! 여긴, 네가 살던 곳에서 판타지 세계라 일컬어지는 그런 비슷한 세계야! 그러니깐 다른 차원의 세계이지.] 아멘시타의 말을 들은 나는 머리 속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노, 농담이지? 판타지 세계 따위가 있을 리가 없어..." [정령은 농담을 하지 않아! 오직 진실만을 말할 뿐이야.] 나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켜보려 했으나, 나의 입속은 침이 말라버려 도저히, 침을 삼킬 수가 없었다. 털썩! 결국은 나의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않고 말았다. "이럴 수는 없어! 나에게 남은 미래는... 창창하던 나의 미래! 결국은 이렇게 황당한 일로 망가지고 말다니! 아멘시타, 책임져! 나를 이곳까지 네가 이끌고 왔다면 돌려보낼 수도 있잖아?" 그러자 아멘시타는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사실, 너를 다른 차원에서 이끌어 온 것도 내 권한 밖이었으니깐... 그런데. 네가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니었다니! 정말 미안해... 나의 실수였어!] "으아악! 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이젠 어떻할 거야? 흐엉~ 난 돌아가고 싶다구!" [이도현... 너에 대한 책임을 질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모든지 들어줄게... 하지만, 다시 너를 돌려보낼 수는 없어!] 나는 주저앉은 체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황금빛의 머리카락이 물결을 치며 아래로 흘러내려왔다.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앞으로 내가 내 자신을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 이대로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한참을 침묵을 지키던 나는 문득 고개를 번쩍 들었다. 조금전까지 절망으로 젖었던 나의 눈에는 이제까지 없었던, 결연한 의지를 내비친 눈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결국은 내가 선택해야할 운명은 이곳에서 -것두 여자가 되서... 그것이 가장 슬픈 일이다. 왜냐? 여자를 유혹할 수 없기 때문!- 라비스로서의 운명을 사는 것이었다. 어차피 라비스가 되어야 된다면, 이대로 눈물을 질질 짜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 곳에 금방 적응할 수 있도록, 이용할 것은 최대로 이용해야 했다. "좋아! 네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나를 위해 뭐든지 해! 너의 책임을 지란 말이야! 날 돌려보낼 수가 없다면, 라비스로서의 나의 운명을 책임져!" 내가 이 세계로 넘어온지 이틀째 되는 새벽! 그 도도하고 시건방지던, 희귀하고도 신성한 나무라 일컬어지는 론티아 나무의 정령, 아멘시타는 나에게 그 코를 꿰이고 말았다. 와아~ 또 한편의 연참이 올라갑니다. 근데, 오널은 내가 몇편을 썼더라??? 그나저나, 이번 편은 좀 짧은 것 같군! 님덜~ 이해해 주시길... (왕성으로 출발!!) -1- 그 다음날 아침, 나는 꼭두새벽부터 루이스에게 거칠게 깨워졌다. "라비스님! 어서 일어나세요." "냐아앙~!!" 그리고, 여전히 아즈라엘의 몸에 머물러 있는 아멘시타도 나를 깨우기 위한 일에 동참을 하였다. "으음... 지금 몇시에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눈을 힘겹게 떠보이며 물었다. "다섯시에요!" '뭐, 다섯시라고? 그럼 아직 새벽이잖아? 얼마 자지도 못했은데, 벌써 깨우다니!' 그렇게 속으로 투덜대다가 너무 졸렸던 나는 다시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러자, 루이스는 욱! 하는 소리를 내더니, 나의 몸을 마구 흔드는 것이었다. "아아악! 대체 새벽부터 왜그래요? 나, 별로 못잤단 말이에요!" "일어나세요! 라비스님. 오늘 저녁에 왕성에 가야 하잖아요? 그 전에 왕성에서 취해야 할 예법을 체크하고 기억해 두어야... 앗! 라비스니임!! 어서 일어나란 말이에욧!" 그새 또 다시 나의 눈꺼풀이 감겨버린 것을 본 루이스는 나를 붙잡고 정신없이 흔들어댔다. 그녀의 터프한 손길에 나의 몸은 거칠게 흔들렸고 그렇게 너무 심하게 흔들리자 나는 두통이 이는 것을 느끼며 얼굴을 찡그렸다. "으으... 루이스, 제발 그만해요! 어지럽단 말이에요." 결국, 나는 루이스에게 항복을 하는 말을 했고, 그제야 나를 흔드는 것을 멈춘 루이스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는 보는 나로서는 속이 뒤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식한 아줌마...' 그렇게 속으로 투덜대는 나를 루이스는 마치 사랑스러운 딸을 바라보는 것처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하긴, 어머니를 일찍 여윈 라비스를 십년이 넘도록 키워왔던 그녀였으니, 라비스를 친딸처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자아~ 이젠 씻어야 하겠죠? 귀여운 아가씨." 루이스는 나의 등을 욕실 쪽으로 떠다 밀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 의해 내 방과 연결되어 있는 욕실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루이스는 내가 아침 목욕을 할 수 있게끔, 시녀들을 시켜서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향긋한 냄새가 나는 어떤 투명한 액체를 욕조 안에다가 또르르 부었는데, 나는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흐음... 좋은 냄새가 나는 것 보니, 향수 같은 건가? 쳇~ 향수를 욕조 물에다가 뿌리다니, 너무 아깝다!' 그런, 다소 무식한 생각을 하는 나였다. 게다가 루이스는 마지막으로 붉은 장미의 꽃잎을 욕조 물에다가 동동 띄웠는데, 나는 그 모습을 그저 멀뚱이 바라볼 뿐이었다. "자아! 이젠 옷을 벗으셔야죠! 라비스님." "네에?" 내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녀에게 반문을 하자 루이스는 의아한 얼굴로 나에게 입을 열었다. "라비스님! 목욕을 하시지 않으실 건가요? 오늘은 왕성에 가야하기 때문에, 이렇게 목욕을 하시지 않으면..." "아하하... 그, 그렇군요! 알았어요. 목욕을 할테니 루이스는 그만 나가세요! 저기 계시는 아가씨들도 모두 나가시고..." 나의 목욕을 도우러 왔던 시녀들을 아가씨라 지칭한 것이 그리 이상했는지, 루이스를 비롯한 시녀들은 눈이 동그레져서 나는 기묘하게 쳐다보았다. 그런 그들을 보자, 내가 뭔가 잘못 말한 것이 있음을 깨닫고는 쩔쩔매는데... "라비스님! 그럼, 혼자 목욕을 하신다는 건가요? 지금까지 한번도 혼자서 목욕을 해본 적이 없는 아가씨께서 어떻게 혼자서 목욕을 하신다는 겁니까? 저희들이 라비스님이 목욕을 하시는 것을 도와드릴 거니깐요, 어서 옷이나 벗으세요!" 루이스는 마치 어린애를 나무라는 듯이 입을 열었고 나는 그녀의 말에 기절할 듯이 놀랐다. '흐걱! 라비스, 라비스... 너 어린애였냐? 그동안 혼자서 목욕도 못했게? 그나저나, 어쩌면 좋단 말이야? 난 이래뵈도 숫총각이란 말이야! 저 많은 아가씨들 앞에서 알몸을 보이긴 싫어!!' 비록 육체가 여자의 몸으로 바뀌었다 하더라도, 나의 속은 여전히 남자였다. 그리고, 또 한가지 거북한 일은... '난... 라비스! 네 육체도 보기 민망하단 말이얏!' 나는 그렇게 속으로 절규를 해야만 했다. *오옷~!! 드뎌... 자연란이 되어 기쁘오! -2- 어찌되었든, 라비스의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 평생을 목욕 안하고 살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걸치고 있던 잠옷을 벗어야 했다. 그것도, 홀랑... 하지만, 그래두 그렇지... 옷을 벗더라도 저들 눈앞에서는 죽어도 옷을 벗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루이스를 비롯한 시녀들을 내쫒기를 시작했다. "루이스! 나 혼자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깐, 제발 나가줘요!" 그녀의 넓쩍한 등을 힘껏 밀며 나의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으나 그녀는 그 자리에 못박힌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정말 의아하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라비스님! 왜그러세요? 설마, 새삼스레 시녀들 앞에서 옷을 벗는 것이 부끄러워져서 그런 것은 아닐테지요? 루이스의 말에 나는 찔끔해 보였다. 그런 나의 표정을 놓치지 않은 루이스는 알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응시하더니,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는, 시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은 라비스님 혼자서 목욕을 하고 싶으신 모양이니, 그만 나가자꾸나!" 그렇게 해서, 시녀들은 모두 나가게 되었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어쨋든, 저 여인네들을 몰아내는데 성공을 했으니, 이젠 나의 손으로 목욕이라는 것을 해내야만 했다. 나는 어제부터 입고있던 핑크빛의 원피스형 잠옷을 내려다 보았다. 막상, 이 잠옷을 벗으려고 하니 손이 절로 떨려왔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잠옷의 단추를 풀어내렸다. '아아! 내가 내옷을 벗는데, 왜 이렇게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들까?' 결국, 눈을 질끈 감고는 잠옷을 과감하게 훌렁 벗었다. 그러자, 약간 서늘한 공기가 나의 살갗에 와닿았다. '으으, 추워!' 갑자기 내려가는 체온으로 인하여 나는 추위를 느꼈기에 얼른 욕조 안으로 몸을 담갔다. 곧, 알맞게 맞추어진 물의 온도가 나의 몸을 나른하게 하였고, 조금 전까지 가지고 있던 거북한 느낌도 누그러뜨려 주었다. 그러자 한결 기분도 좋아지는 나였다. "그래! 어차피 라비스로 살아가야 하는데, 이런 목욕하는 일로 쩔쩔맬 수는 없지! 얼굴에 철판을 깔자! 비록 내뜻이 아니었지만 이젠 여자의 몸을 가지게 되었으니, 내가 편하기 위해서는 익숙해져야 돼! 익숙해져야... 난 이제 여자야! 난 이제 라비스야! 싫든 좋든... 하아! 어쩌면 내가 신께 벌을 받은 건가? 여자들을 너무 울려서... 이젠 내가 여자가 되어 어디 한번 울어보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하다! 혹시, 정말 신이 이런 일을 꾸미셨다면, 그 '신'은 아마도 변태... 적인 성품의 '신'이실지도..." 그동안 받았던 충격의 스트레스로 인하여 내가 이런 횡설수설을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심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말도 안되는 황당한 일이 왜 나에게 일어났겠는가? 아무튼 맘을 굳게 다잡은 나는 철판을 두 세장쯤 깔은 얼굴로 나의 몸을 씻는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벅벅~!! 이것은 내가 몸의 때를 미는 소리였다. 물론, 여기도 목욕을 이런 식으로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19년동안 몸 담았던 한국의 방식대로 목욕을 무사히(?) 끝마쳤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목욕을 해낸 나는, 아까 루이스가 놓고간 목욕 가운을 걸치고는 욕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제인이라고 불렸던 붉은 머리의 소녀가 내가 목욕을 끝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살풋이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라비스님! 화장대로 가서 앉으세요. 곧, 리나가 와서 아가씨의 화장과 머리 손질을 해줄거에요! 목 마르지요? 여기..." 그녀는 들고 있던 크리스탈 잔을 나에게 내밀었다. 그 안에서 주홍색빛의 액체가 물결치고 있었다. '음... 과일쥬스라도 되는 모양이지? 후훗, 저 소녀 맘에 드는군! 그렇지 않아도, 떼를 미느라 힘 좀 썼더니 목이 말랐었는데...' "고마워요!"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그녀에게 지어보이고는 받아들은 그 음료를 단숨에 원샷을 했다. 그러자 제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머! 라비스님. 목이 무척 마르셨나 보네요. 항상 몇번에 걸쳐서 나누어 마시던 아가씨께서 그렇게 한번에 들이키시다니!" 하지만 나는 말없이 빈잔을 그녀에게 내주었고 그것을 받아든 제인은 방을 나갔다. [오늘... 아마 황태자를 볼 수 있을 거야!] 그녀가 나가고 나 혼자 방에 남게 되자, 그때까지 계속 고양이 행세를 하던 아멘시타가 말을 걸어왔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나는, 느닷없이 나의 귓가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에 움찔하였다가 나의 침대 위에서 팔자좋게 늘어져 있는 아멘시타를 보고는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야아~ 놀랬잖아!" [흣... 그 사이, 라비스의 육체에 많이 익숙해졌나 보지? 방금, 그 말투... 라비스와 정말 많이 닮았어!] "뭐?" [그리고, 너의 표정... 어제보다는 많이 안정된 느낌이야! 어쩌면, 넌 진짜 라비스가 될 수 있을지도...] 하지만, 아멘시타는 말을 다 맺지 못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나의 분노한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이 엉터리 정령이... 누구보고 라비스라는 거얏? 난 이도현이야! 그리고 엄연한 남자라구! 또, 닮았다느니 진짜 라비스가 될 수 있다느니, 그런 소리 또 한번만 지껄이면 흠씬 패줄테다! 글구 그 하얀 털을 다 뽑아버릴 거야!" 여지껏, 내가 라비스임을 스스로 최면까지 걸었던 나였는데, 왜 아멘시타의 그 한마디에 화가 치밀었는지 모르겠다. 아무런 뜻없이 말한 그의 말에, 내가... 19년동안 이도현으로서 살아왔던 내가 부정당하고 지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내 나름대로 사랑해왔던 나의 모습을 라비스로 인하여 잃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나의 모습은 라비스라는 금발의 소녀였기에 라비스로서 행동을 해야만 했다. 그것이 내뜻이 아니더라도... "아멘시타! 만약, 내가 라비스로 인해서 이도현이었던 나의 자아를 잃게 된다면, 널 평생 원망할거다! 어차피 계속 라비스로 살아가야 될지도 모르지만, 내가 이도현이었음은 결코 잊고 싶지 않아." 어쩌면, 나는 라비스의 모습으로 라비스처럼 행동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엄연히 이도현이었던 나의 영혼까지는 라비스에게 점령당하고 싶지 않았다. 똑, 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노크 소리에 잠시 잃었던 평정을 다시 찾은 나는 굳어진 표정을 풀고 고상한 어투로 들어오라는 말을 한 후. 화장대 쪽으로 걸어가 앉았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아멘시타는 급격한 속도로 나의 페이스를 회복하는 나를 보고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3- 나는 지금 덜커덕거리는 마차 안에 있었다. 그러니깐, 지금 마차를 타고 왕성에 가는 중이었다. 벌써, 두시간째... 아까 점심에 먹었던 음식물들이 자꾸 위로 올라오려고 하고 있었다. '으으, 나 죽을 것 같아!' 심한 멀미로 인하여 헤롱헤롱해진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으며 간신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안색은 그리 좋지 못해 보였는지, 내옆에 앉은 루이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감싸 안아주고 있었다. "그렇게 몸이 약해서야 앞으로, 왕성 생활을 어찌 견딜수 있겠느냐?" 내 앞에 앉아있던 나의 아버지인 다니엘 남작이 질책하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나의 한쪽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나의 감정들이 차갑게 가라앉는 것이 느꼈다. '저건, 아버지도 아냐! 어떻게 딸이 아파 죽겠다는데, 저렇게 매정한 말을 할 수 있지?' 사실, 나는 오늘 아침에 저 남작을 처음보았다. 라비스의 아버지라는 했던 다니엘 크로시벨 남작... 굉장히 현실적이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랬으니, 자신의 가문을 위해 딸을 왕실의 첩으로 내주었겠지만... 나는 새삼, 이 육체의 주인이었던 라비스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그런 저런 잡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밖에서 마차의 창문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의 경호원이라던 '에드'였다. "라비스님은 좀 괜찮으십니까?" 그도 내가 걱정되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갈색빛 눈동자가 염려의 빛을 잔뜩 띄고 있었다. '자식... 저 녀석도 무표정의 얼굴만 아니라면 꽤나 부드러운 인상인데...' 멀미로 인하여 괴로워하면서도 그런 잡생각은 끊임없이 하는 나였다. 아무튼, 그의 질문에 루이스가 대신 대답을 했다. "아무래도 아가씨께선 많이 힘드신 모양입니다." "그러면, 제가 이 근처에 멀미에 좋은 약을 파는 곳을 아니, 그 약을 구해오겠습니다." "아, 그래주시겠어요?" 루이스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에드는 마차의 창가에서 모습을 감추더니, 곧 '이랴!' 하는 외침과 함께 멀어져가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두시간이 넘는 힘든 여행 끝에 마차는 드디어 왕성에 당도하였다. 아까 에드가 사온 이상한 물약을 먹고 조금은 기운을 차린 나는 마차의 창문을 통해 왕성을 올려다보고는 놀래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이야! 대단해. 저기가 왕성이야?" 마치 베르사이유 궁전을 연상시키는 화려하고도 거대한 몇 개의 궁성들이 모여있었는데, 그 위엄이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우리는 왕성에 이미 도착을 했지만 왕성이 워낙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터라 황태자궁까지는 몇분을 더 소요하고나서야 도착할 수가 있었다. "라비스! 오늘은 황태자님과 첫대면이다. 그분께 실수하지 말고 잘 보이도록 하거라! 그리고, 그분을 뵌다음 왕비님을 뵐 것이다." 그동안 묵묵히 있던 다니엘 남작이 나에게 당부하는 말을 했다. "네, 아버지!" 물론, 나는 조신한 태도로서 그에게 답했다. 솔직히 내가 행동하는 나의 여성스러운 태도에 가증스러움도 느껴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 신상이 매우 피곤해질테니깐 말이다. 우리는 황태자궁의 시녀장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응접실로 안내되었고 시녀들이 내오는 차를 마시며 황태자가 오기를 기다렸다. "황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기다리는 시간이 어쩌면 매우 길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다니엘 남작은 차를 내온 시녀에게 퐝태자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자, 그 시녀는 그 질문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는지 당황한 얼굴로 한참을 망설인 뒤, 이윽고 결심을 했는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황태자께서는 지금 두 번째로 맞으신 후궁, 아사벨라님과 후원을 거닐고 계십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모시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다니엘 남작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그리고, 나 역시 현기증이 이는 것 같았다. '두, 두 번째 후궁이라고... 그럼, 뭐야? 난 몇번째가 되는 거지? 아악! 그 황태자란 녀석이 나와 같은 부류였던 거야?' 결국, 우리는 어디선가 자신의 첩과 놀아나고 있을 황태자를 한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나의 신세가 한심해지고 처량해지는 것 같았다. '하아!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내가 지금까지 라비스로서 행동했던 일들에 대해 갑자기 회의가 들었다. 답답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남작을 비롯한 루이스와 에드가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난 라비스가 아니에요! 그리고, 저 따위 망나니 같은 자식의 첩 같은 것도 될 생각이 없다구요! 난 갈거야!" 지금까지 얌전한 표정만을 지어온 내가 갑자기 입에 감히 담아서는 안될 말을 담으며 소리를 지르는 나의 모습이 그들은 놀라웠을 것이다. "라비스!!" 남작이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들렸지만 나는 무시하고는 그대로 응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에드가 나를 따라오는 것 같았으나, 나는 그의 손에 잡혀서 또다시 라비스의 흉내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창문 쪽으로 달려가서 창문의 틀로 올라선 다음, 나에게 달려오는 에드에게 협박을 했다. "에드! 나에게 다가오면 나 뛰어내릴 거얏!" "아앗! 라비스니임. 어서 내려오세요!" 내가 당장이라도 뛰어내릴 시늉을 하자 에드는 햐얀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리며 나에게 외쳤다. 여기는 비록 2층이었지만 만약, 떨어지면 크게 다칠 수 있는 높이였다. "이봐요! 아가씨. 지금 뭐하는 거요?" 그때, 나에게 다가오는 에드 뿐만 아니라, 저기 창문 밖에서도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나는 밖을 내다보았는데, 그곳에는 은발의 한 청년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헉! 이를 어째? 막다른 길에 갇힌 신세잖아?" 내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나의 발에 익숙치 않은 하이힐이 그만 말썽을 일으켰다. 삐끗하고 그만 미끄러지고 만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왠지 요즘들어 실수로 투신하는 일이 많아진 것 같았다. "꺄아악!!!" -4- "꺄아아악~!!!" 나는 찢어니는듯한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고 바닥은 바로 내 등까지 다가와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곧, 있으면 나의 몸은 바닥에 닿을테고 그러면, 끔찍한 고통이 나에게 전해질 것이다. 털썩!! "……?" '엥? 어째, 바닥에 도착은(?) 한 것 같은데,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거지? 게다가 이 푹신한 촉감은...?' 그렇게 의아해 하며, 나의 밑에 깔린 그 무엇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의 밑에 깔린체 기절해있는 아까의 은발 청년의 얼굴이 들어왔다. 꽤나 단아하고도 투명한 미가 느껴지는 그런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호오! 왕성에 이런 미청년이 있을 줄이야!" 잠시 나의 처지에 대해 망각해버린 나는 그 은발 청년의 얼굴을 정신없이 뜯어보았다. 그때, 그 청년의 얼굴이 미세하게 꿈틀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서야 나의 처지를 깨달은 나는 얼른 몸을 옆으로 비키고는 이 청년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그를 깨우기 시작했다. "이봐요! 이봐!! 어서 일어나란 말이에요!" 나는 그를 붙잡고는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머리가 울려오는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눈을 뜨는 것이었다. "정신이 들어요? 미안해요! 내가 그만 실수로 떨어지는 바람에..." 그가 눈을 뜨자 투명한 은보라빛의 눈동자가 나의 눈에 들어왔다 어찌나 맑은지, 그의 눈동자에서 나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쳤다. 하지만 그는 나의 얼굴을 응시한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혹시 머리라도 다쳐서 지금 그가 멍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나의 뇌리에 스치기 시작했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나는 손바닥을 그의 눈앞에다가 휙휙! 휘저어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이 잠시 깜빡이었을 뿐, 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으려 했다. '히잉~ 이 사람, 나 때문에 맛이 간게 틸림없어! 어쩌지?' 그때, 누군가가 급하게 뛰어오며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님!!" '헉! 이게 무슨 소리?' 황태자라는 말에 나는 찔끔 놀라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시종을 바라보았다. '설마... 여기 멍청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아니길 바랬지만 불행하게도 나의 추리는 척 들어맞고 말았다. "오오! 황태자님 괜찮으십니까?" 그 시종은 호들갑을 떨며 그 은발 청년의 안위에 대해 묻자 그 청년은 고개를 천천히 시종에게 돌리더니 대답은 하지 않고 엉뚱한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너무 아름다워! 디트. 이 아름다운 아가씨가 대체 누구인지 아는가?" "그, 글쎄요!" 그 시종은 당연히 나의 정체에 대해 모를테니, 황태자의 엉뚱한 질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가 황태자란 말에 잠시 긴장했었으나 그가 보이는 태도를 보자 내가 갖었던 그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편안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만만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황태자님이십니까?" 나는 내가 갖을 수 있는 최대한 정중한 태도로 그의 신분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방긋이 웃더니, 나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얼굴이 아름다운 만큼 목소리도 정말 곱군. 그렇다! 내가 이 나라의 황태자이다." 역시 일국의 황태자이어서 그런지, 모습은 저래도 말투는 엄청 오만불손하였다. 게다가, 그의 눈빛은 먹이를 탐하는듯한 기색으로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었는데, 은근히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나는 그를 다소 도전적인 눈빛으로 쏘아보아 주었는데, 그런 나의 눈빛을 본 그는 오히려 내가 귀엽기라도 하다는 듯이 피식 웃는 거였다. '아아! 정녕, 저 남자가 내 남편이 된단 말인가? 이럴 수는 없어!!' 내가 그렇게 속으로 나의 신세에 대해 절규를 하고 있을 때... "라비스님!" 이번에는 누군가가 나를 부르며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에드'였다. "괜찮으십니까?" 그는 아까 시종처럼 호들갑은 떨지 않았지만, 평소에 점잖던 그의 모습에 비하면 결코 침착한 모습이 되지 못했다. 그는 내가 다치지 않았는지 요리조리 살펴보았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살짝 지어보였다. 그러자 나의 멀쩡한 모습에 에드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라비스? 흠, 예쁜 이름이군! 근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 것 같은데..." 황태자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자신의 부인이 될-비록 첩이긴 하지만...- 여자의 이름도 모르다니, 내심 섭섭한(?) 기분도 드는 나였다. '아악! 그동안 여자의 몸으로 있었더니, 생각하는 것도 여성화가 되었나? 내가 그런 변태틱한 생각을 하다니...' 잠시 망령된 생각을 한 내 스스로에게 진저리를 쳤지만, 그래도 나는 그에게 나의 신분을 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왠지, 저 황태자가 내가 누군지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다. 평소의 나 같았으면, 그런 생각은 결코하지 않았겠지만 어쨋든, 지금의 나는 라비스였다. "저는 라비스 크로시벨이라 합니다. 황태자님. 크로시벨가의 영애이지요! 이젠, 제가 누구인지 짐작을 하시겠습니까?" 그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싱긋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점점 놀라워하는 표정으로 변해가는 그의 얼굴을 즐거운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5- 나는 그날 오후, 여러 사람들에게 야단을 맞아야 했다. 그것은, 황태자와 첫대면하는 날부터 말썽을 피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왕비님을 뵈고나서 나는 잔뜩 토라진 상태에서 다시 크로시벨가 저택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다니엘 남작은 집에 돌아와고 나서 나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어쨋든, 왕비님과 황태자께서 너를 이쁘게 봐주셔서 그나마 다행이다. 안그랬으면, 크로시벨가의 명예에 네가 먹칠을 할 뻔했구나. 얼굴 하나는 네 어미를 닮아 반반한 것이, 천만 다행이야!" 부들부들... 이것은 내가 온몸을 떠는 소리이다. 잘 자라는 인사도 없이 달랑 그 한마디만 던지고 사라지는 남작의 뒤모습을 한동안 노려보았다. '저, 저게... 아버지가 딸에게 할 소리야?' 나의 눈에서 뭔가 촉촉한 것이 고이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나의 아버지도 아닌데, 마치 상처라도 받은 듯이 나의 감정은 다니엘 남작에 대한 원망으로 점점 물들어 갔다. 마치 화선지에 먹물이 번지듯이... '내 안에 아직도 라비스의 감정이 살아있는 거야? 난 라비스가 아니고 이도현인데, 어째서 라비스처럼 느낄 수가 있지?' 이제는 눈물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의 심장박동수가 흥분으로 점점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흑! 용서못해...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 모두...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중얼대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라비스님. 오늘 피곤하셨을텐데, 그만 쉬도록 하세요!" 에드였다. 그는 나의 경호원이라는 신분 때문이었는지 언제나 나의 곁에 머물러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내 곁에 있으면서 나에게 어서 쉴 것을 충고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지금 이 순간 내 곁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런 이세계에서 적응하는 일도 너무 힘이 들었었는데, 이런 감정적인 일까지 겹치자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졌다. 그때, 때마침 에드가 말을 걸어주자 나는 더욱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눈물 콧물 뒤범벅이 된 얼굴로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들어 에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에드의 따뜻해 보일 것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를 보면 왠지 친형 같아서 마구 뒤흔들어졌던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흐엉~! 에드. 잠깐 어깨 좀 빌리면 안될까요? 훌쩍!" 그러자, 항상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던 에드의 갈색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내가 이렇게 추하게 우는 것이 무척 충격적이었나 보다. 아무튼, 그는 승낙의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는데,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나는 그에게 얼굴을 와락 파묻고는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우에엥~!!" 에드는 나의 행동에 약간 놀란 듯 했으나 내색은 하지 않고 내가 울도록 내버려 두었고, 나는 어린 아이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눈물로서 그에게 풀기 시작했다. 이런 말하면 왠지 변명 같지만, 사실 나는 눈물은 별로 없는 편이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눈물이 아닌 다른쪽으로 푸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누군가에게 기대며 울고만 싶었다. 아마도, 부정하고는 있지만 나는 모르는 사이에 연약한 심성의 라비스가 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에드의 하얀 셔츠를 붙잡고는 거의 눈물을 콸콸콸 내쏟는다는 표현이 어울릴만큼 눈물을 흘리며 꺼이꺼이 우는데, 에드의 오른손이 나의 어깨를 감싸려고 올라오다가 한참을 망설이더니 그냥 다시 내려가는 거였다. 그래서, 의아했던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는데, 왠지 찹찹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힘들어하는 것 같기도 하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에드?" 내가 그렇게 묻자 그는 다시 표정을 바로 잡더니, 나에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그만 쉬십시오!" 그렇게 말하고는 횅하니 가버리는 것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나로서는 그저 의아하기만 할 뿐이었다. "왜그러지? 내가 너무 어리광 부렸나?" 어쨋든, 그렇게 또 다시 힘든 하루가 지나갔고 그 다음날 아침, 루이스가 충격적인 소식을 들고 아침부터 호들갑스럽게 나를 찾았다. "라비스님, 라비스니임! 얼른 일어나 보세요!" "왜요? 루이스." 몽롱한 얼굴로 한쪽 눈을 부비며 뭔가에 흥분한 듯한 그녀에게 물었다. "방금 왕성에서 사람이 나왔는데요, 결혼식 날짜가 잡혔데요!!" "……!!" 나의 머리에서 번개가 내리치는 것 같았다. 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며 그녀를 응시하였는데, 그녀는 잔뜩 흥분을 하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글쎄, 황태자께서 얼른 라비스님을 세 번째 후궁으로 맞고 싶다고 해서 이렇게 결혼식 날짜를 서둘러 발표했다는 군요!" "겨, 결혼식의 날짜가 언제인데요?" "앞으로 열흘 후에 왕성에서 라비스님을 데리러 올 거에요!" -6- "이젠 어떻할 거야? 이 망할 나무 정령아!! 난 이젠 꼼짝없이 그 황태자와 결혼하게 생겼다구!" 나의 침대 위에서 웅크리고 한참 곤한 잠에 들어있던 아멘시타를 다짜고짜 콱 움켜지고는 마구 흔들어댔다. 그러자, 아멘시타는 매우 놀랐는지 그대로 아즈라엘의 몸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그래서, 아멘시타가 아닌 애꿎은 아즈라엘만 봉변을 당한 셈이 되었다. "캬아옹~!!" 불쌍한 그 페르시안 고양이는 그렇게 울부짖으며 나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애를 썼다. 하지만 아멘시타가 빠져나간 것을 모르는 나는 계속 흔들며 그저 고양이일 뿐인 아즈라엘을 다그쳤다. "어쭈~ 이젠 내말 무시하겠다? 빨랑 대답해! 대답해!" "냐앙~!" 아즈라엘은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나의 질문에 충실히 대답을 해보였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답은 그것이 아니었기에, 축 처진 몰골을 하며 아즈라엘을 그만 놓아주었다. 아멘시타가 빠져나가고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나아쁜 나무 정령 같으니... 감히 도망을 가?" 나는 이를 바득 갈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쿵쾅거리며 방을 벌컥 열어제쳤는데, 지나가던 한 시녀가 요란한 문 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나에게 입을 열었다. "헉! 라비스님, 어디 가세요?" "제인! 지금 당장 도끼를 가지고 와서 나를 뒷 후원으로 안내해요!" "네에? 도끼라니요? 라비스님."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면서 나에게 반문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일일이 대꾸를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저 그녀에게 도끼나 가져올 것을 명령했다. 결국은, 그녀는 어디론가 가서 도끼를 구해가지고 왔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살벌한 기세로 후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는 길목마다 자꾸 누군가가 나와서 놀란 얼굴로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물음을 던졌지만 그때마다 나는 입을 다물고는 그 기세를 몰아 론티아 나무가 있는 후원으로 당당하게 걸어나갔다. 그리고 아까부터 에드가 불안한 얼굴로 나를 따라오고 있었는데, 나는 굳이 그에게 저지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나의 눈앞에 후원의 가운데에서 떡하니 버티고 있는 한그루의 나무가 들어왔다. "저게 론티아 나무가 맞죠?" 나는 제인에게 확인차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질문에 답하지는 않고 매우 불안한 얼굴로 나에게 입을 열었다. "라비스님! 설마, 론티아 나무를..." "맞아요! 난 이녀셕을 베어버릴 거에요." 그녀에게 씨익 웃어보이며 입을 열자, 론티아 나무가 나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가지가 흔들리며 나뭇잎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사각거리며 들려왔다. "흥! 아멘시타. 네가 여기에 와있는 거 다알아! 넌 나를 위해서는 모든지 한다고 약속했어! 그런데,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네가 감히 나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이곳으로 도망왔어! 아멘시타! 나에게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해봐!" 내가 나무를 향하여 이렇게 외치자 제인은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제인! 당신은 시녀장에게 가보아야 하잖아요?" 그때까지 묵묵히 있던 에드가 제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제인은 얼떨떨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하, 하지만, 라비스님께서..." 그러나 에드는 그런 그녀에게 더 이상 설명의 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그녀를 끌고 갔다. 결국, 제인은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에드에게 이끌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나는 잠시 에드가 왜 자리를 비켜주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건... 아마도, 론티아 나무를 위해서였던 것 같다. 론티아 나무의 정령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쉽사리 모습을 내보이는 것을 싫어했는데, 제인과 에드가 이 곳에 있음으로 인해 론티아가 나의 질문에 대답을 섭불리 못하는 것을 눈치챈 것이었다. 만약 성질 급하게도 론티아 나무의 정령이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을 그냥 무시한다고 내가 오해한다면, 어쩌면 내가 이 나무에게 해를 입힐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쨋든, 에드는 그것을 막고 싶었던 것이다. '아! 이 나무는 라비스의 어머니가 아끼던 나무라고 했지...' [미안해! 난 일부로 여기로 피해온 것이 아니었어! 네가 아까, 내가 머물던 육체에 갑작스런 충격을 주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야!] 그제야 내가 성급했음을 깨달은 나는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그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어떠한 육체에 머무는 것은 완전하지가 못해! 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동물의 육체에 그 몸을 빌려 스며들 수 있는데, 만약 큰 충격이나 상처를 입게 되면, 나는 다시 본체로 돌아가게 돼!] "아! 미안해... 그런 줄 모르고 괜히 성급하게 굴었네! 사실, 난 너를 해칠 마음 없었어! 그저 도끼로 겁만 주려고 터프한 척 했지! 에헤헤" 그렇게 말하고는 겸연쩍게 웃어넘기는데,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오오! 다시 보아도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군. 그런데, 나의 예비 신부 라비스양께서 어찌 그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도끼를 들고 나무 앞에 서있는 것이지?" 갑작스럽게 들려온 낯간지러운 대사에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돌아보았다. 그러자, 약간의 청색빛을 띤 결이 좋은 은발을 가진 훤칠한 청년이 나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에엑? 저, 저 인간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7- "황태자님께서 어떻게 이 곳에..." 갑작스런 그의 출현에, 그에게 예를 갖추어야 된다는 것도 까먹고 버벅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미카엔... -그 뒷부분의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라는 이름의 황태자는 더욱 진해진 미소를 머금고는 나에게 말했다. "내가 그대를 왜 찾아왔을 거라 생각하는가?" 곱상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근엄한 말투였으나, 그의 신분이 명색의 황태자라 그런지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미끈한 외모에 주체 못하는 바람기의 소유자이었기에 무척 가벼운 인간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나 보다. '내가 그걸 어찌 아냐?' 그렇게 속으로 궁시렁거렸지만, 그걸 내색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조신하게(?) 그의 질문에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툭 내뱉은 나의 말에 황태자는 짓고 있던 미소를 접고는 기묘한 표정이 되어 나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사실, 귀족출신의 레이디가 이런식으로 황태자에게 대답해서는 안되었지만 귀족가의 예의범절 따위에 익숙하지 못하는 나였기에, 그렇게 모든 예법을 생략하고 황태자를 대했던 것이다. "흠, 그대는 내가 알던 귀족가의 레이디와는 많이 다른 것 같군!" 황태자는 중얼거리듯이 말하고는 론티아 나무가 서있는 그늘로 다가가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투명하게 빛나는 은보라빛 눈동자를 들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너도 앉아! 라비스." 갑자기 달라진 그의 말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근엄한 어조에서, 비록 하대였지만 친근한 느낌이 드는 편한 말투로 바뀐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급속도로 바뀐 그의 태도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는 시늉을 해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궁금하겠지? 아침부터 황태자라는 사람이 불쑥 모습을 나타내었으니..."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다시 싱긋 웃어보였다. '거참! 알 수 없는 인간이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황태자께서 어떻게 오신거죠? 그것도 혼자서... 왕성에서 여기까진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닐텐데요! 게다가 제가 여기에 있는 것은, 시녀들이 가르쳐 주었나요?" 내가 그렇게 묻자 황태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여전히 싱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름다운 나의 신부 라비스가 있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든지 알 수 있지!" "네에?" 온몸에 닭살이 순식간에 돋는 것을 체험하며 나는 그에게 반문을 했다. 그러자 그는 내가 놀라는 것이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뜸을 들이며 나를 응시하더니 이내 입을 열어 한 개의 단어를 내뱉었다. "텔레포트!" 나는 그가 내뱉은 말이 무슨 말인지 한참을 생각해야만 했다. '텔레포트라니! 그건 공간이동이라는 뜻인데... 설마 저 닭살 인간이 공간 이동을 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거야?' 여기까지 생각해 낸 나는 눈이 휘둥그레하게 떠질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님... 마법사이셨어요?" "후훗... 마법사라면, 마법사라고도 할 수 있겠지! 난 어릴 적부터 마나를 다루는 것에 큰 소질이 있었거든... 사실, 너를 어제 처음 본 뒤로 다시 너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서 어제 밤에 네가 있는 곳으로 이동해 갈까? 했는데, 만약 그렇게 한다면, 아무리 황태자라도 레이디에게 실례가 되기 때문에 오늘 아침까지 기다린 거지!" 그렇게 말하며 나 잘했지? 하는 듯한 태도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이곳이 만약 내가 알고 있는 판타지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 저 황태자는 아주 고위의 마법을 쓴건데, 역시 겉보기와는 다르게 능력이 아주 출중한가 보지?' 만약 그렇다면, 그동안 동경해 왔던 진짜 마법이란 것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눈을 번뜩이며 황태자에게 씨익 웃어보였다. 그러자, 황태자는 나의 눈빛에서 뭔가 불길함이라도 느꼈는지 움찔해 보였다. "황태자님! 마법이란 거, 저에게 보여주시면 안돼요?" "좋아! 라비스가 원하는데. 못보여줄 것도 없지!" 기대감에 찬 나의 반짝이는 눈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듯한 비장함을 보이며 황태자는 당장 스펠을 읊조리며 마나를 발동시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우리 주위에서 반경 20m 정도되는 범위안에서 은빛의 빛무리들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한 모습이라 나는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 은빛의 빛무리들은 점차 자취를 감추더니, 이윽고 향긋한 향기를 풍겨오기 시작했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기대해도 좋다는 듯이 씨익 웃으며 다시 마법을 발현시키는데에 몰입을 하였다. "아앗! 저건 꽃잎?" 갑자기 나의 주위로 날리기 시작한 예쁜 빛깔의 수많은 꽃잎들이 바라보며 감탄의 탄성을 내뱉었다. 그 꽃잎들은 마치 눈이 내리는 것처럼 하늘에서 아래로 휘날리며 떨어지고 있었는다. "와아~!! 정말 예뻐요! 되게 신기하네? 꽃으로 내리는 눈이라니..." 내가 그렇게 쉴새없이 감탄을 해대며 좋아하자 황태자는 뿌듯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몸을 일으키고는 나에게 다가왔다. "너를 만나게 된 기념으로 주는 나의 선물이다. 아! 이젠 가보아야 하겠군! 황태자란 직업이 워낙 바쁜 일이 많은 피곤한 직업이거든! 라비스. 앞으로... 열흘 후에 다시 보자! 그때는 나의 아름다운 신부로서..." 그는 그렇게 속삭이듯이 말하더니, 나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는 사라졌다. 아마도, 다시 텔레포트를 한 모양이었다. 그가 사라지자 사방에서 진동하던 꽃향기도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없이 떨어질 것 같던 아름다운 꽃잎들도 조금씩 그 수가 줄어들더니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흠... 황태자 녀석! 의외로 좋은 녀석인가 보네? 하지만, 난 남자라구! 그의 첩은 될 수 없어! 미안하지만, 황태자! 앞으로 열흘 후에 너는 날 보지 못할 거야!' (도둑과 함께 한 탈출!) -1- 새벽달이 뜨고 밤하늘을 가득 매우던 별들이 하나 둘씩, 그 빛을 잃어갈 무렵... 나는 지금이 기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시간 즈음이면 시녀들과 시종들은 모두 잠에 들었을 것이고, 게다가 고양이 모습으로서 늘 붙어있었던 아멘시타도 지금은 론티아 나무의 본체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 여기서 나가자! 나가는 거야..." 마음을 굳게 먹은 나는, 즉시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아까 낮에 몰래 구해다 놓은 여행용 배낭과 간편한 여행복을 수납장에서 꺼내들었다. 여행복은 남성용이라 약간 사이즈가 컸지만 지금은 옷의 치수를 따질 여유가 되지 못했다. 나는 입고 있던 잠옷을 벗고 여행복으로 갈아 입었다. "와아~! 오랜만에 가벼운 옷을 입었더니, 몸이 가뿐한걸!" 이 세계에 있는 동안, 계속 레이스가 달린 거추장스러운 옷만 입다가 간만에 간단한 옷을 몸에 걸치자 기분이 새로워지는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은 나는, 이제 본격적으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값나가는 보석이나 악세사리, 그리고 몇푼의 금화들을 가방 안에다가 쑤셔넣었다. 그리고, 낮에 창고에서 구해다 놓은 지도와 나침반 등을 가방 안에다가 모두 챙겨넣고는 배낭을 등에다가 매었다. 옷가지들은 모두 부피가 나가는 드레스였기 때문에 챙기지 않아서 짐은 생각외로 간단했다. "휴우~!" 나는 긴장감을 애써 달래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방문을 나서려 하는데... 끼익~!! 닫혀있던 창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헉! 이게 무슨 소리야?' 이것은 분명히 누군가가 밖에서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고 있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이는 도둑이 틸림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 새벽이라면 이른 시각인 지금, 저기 방문이 아닌 창문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재빠르게 옷장 옆으로 가서 몸을 숨겼다. 비록 어설프게 몸을 숨긴 것이었지만 지금은 방안이 어둡기 때문에 쉽게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곧, 누군가가 방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켜보았다. 은근히 겁도 나는 것 같았다. 그 도둑은 나의 침대 곁으로 다가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발자국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발을 디딘다고 해도, 어느정도는 미세하게 들릴 법도 했지만, 그 도둑은 놀라울 정도로 소리가 없었다. '근데. 도둑이라면 수납장이나 옷장 같은데를 뒤지지 않나? 왜 내 침대 곁부터 다가가는 거지?' 쥐죽은 듯이 꼼짝하지 않고 그 도둑에게 신경을 곤두세운 체, 고개를 갸웃거렸다. "훗! 벌써 알아챈 건가?" 그렇게 나만의 상념에 빠져있을 때 갑자기 그 도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나는 움찔거리면서도 스스로의 숨소리를 낮추려고 노력을 했다. "거기에 숨어있는 거, 다알아! 라비스 크로시벨. 이제 그만 나오시지? 난 숨박꼭질 같은 것은 취미없으니깐 말야!" 비록, 톤은 낮은 편이었지만 제법 맑은 목소리가 그 도둑에게서 다시 흘러나왔다. '어떻게 알았지? 저 도둑이? 근데, 내 이름을 알고 있잖아? 그렇다면, 날 찾아왔다는 소리?' 나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계속 그 도둑에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곧, 그 도둑이 나에게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와는 달리, 이제는 그의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가 나의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며 가픈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그의 목소리에 너무 놀랐던 나는, 숨을 쉬는 것을 잠시 멈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을 안듣는 아가씨이군! 라이트!" 그가 마지막으로 말한 단어는 아마도, 빛을 발현시키는 마법어였던 모양이었다. 그가 말을 마치자 마자 곧, 그의 손에서 작은 빛덩어리가 생겨났다. 그러자, 한치 앞을 분간하기 힘들었던 어둠은 가시고, 그 도둑의 얼굴이 나의 눈에 또렷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엥? 누구지? 처음보는 얼굴인데? 그런데, 마법을 사용하는 도둑이라니! 이 세계는 마법이 대중화되어 있나?' 이제 갓 스물을 넘겨보이는 흑발의 남자가 내 앞에 서있었다. 그는 약간 날카로운 인상에 차가워 보이는 까만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냥 쳐다보기만 해도 가슴이 쫄아들 것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험악하게 생겼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저 카리스마(?)가 철철 넘쳐보인다고나 해야 할까? 그 와중에서도 볼건 다 뜯어보는 나였다. "누, 누구세요?" 솔직히, 말하기 창피하지만 지금의 나는 겁에 잔뜩 질려있는 상태였다. 라비스의 몸을 갖게 되었더니, 겁도 무지하게 많아진 모양이었다. 내가 그렇게, 온몸을 검은 천으로 도배하고 있는 도둑에게 질문을 하자, 그는 별로 자신의 신분을 가르쳐주기 싫었는지 나의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씹고는 그의 할 말만 했다. "흠, 북장을 보니 집이라도 가출할 생각이었나 보지?" 정곡을 찌르는 그의 말에 나는 그저 삐질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는 도둑인 주제에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리더니, 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할 수 없군! 사실, 난 오늘 너를 납치하러 온 것인데, 네 스스로 가출할 참이었다면 더욱 잘된 일이야!" "네?" 나를 납치하러 왔다는 말을 당당하게 하는 그 도둑의 말에, 나는 황당해져서 그에게 반문을 했다. "이렇게 짐까지 싸들고 있다면, 간단하네? 나가자! 내가 너를 데려가 줄테니깐..." 나는 그에게 벙쪄하는 표정을 지어보였으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나를 훌쩍 드는 것이었다. "우앗!!" 나는 놀라며 버둥거려 보려고 했지만, 그는 나를 나무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들키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어!"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창문으로 가볍게 걸어가더니 나를 어깨에 맨 체로 아래로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2- "으아아악~!!!" 그가 나를 매고는 무려 3층이나 되는 높이의 창문에서 뛰어내리자, 무지하게 놀란 나는 여자로서는 별로 매력적이지 못한 톤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그 도둑은 나의 비명소리에 무척 놀란 듯, 나의 입을 얼른 손으로 막으며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나무랐다. "이봐!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어떻게 해? 온 집안 식구들 다 튀어나오겠구만!" 하지만, 나는 이제까지 두 번이나 투신했던 경험이 있던 터라, 이제는 아래로 뛰어내리는 것이라면 모든지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히잉! 죽는 줄 알았단 말야." 눈물을 질끔거리며 정말 놀랐다는 듯이, 내가 말하자 그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아아! 귀찮아! 내가 왜 이런 일까지 해야되는 거지? 그나저나, 네 비명소리 덕분에 귀찮은 놈 하나 따라붙었잖아?" 그는 짜증난다는 듯이 그렇게 내뱉고는 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나의 손을 덥썩 잡더니,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할 수 없군! 지금부터 죽을 힘을 다해 튀는 수밖에... 어서 튀엇!!" "에?" 하지만 그는 내가 그의 말을 마저 이해하기도 전에 나를 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아닌데... 내가 왜 오널 첨 본 도둑과 죽을 힘을 다해 튀어야 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 도둑의 말대로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따라붙었다는 그 귀찮은 놈이 바로 에드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출이란 것을 시도도 하기도 전에 허무하게 붙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라비스니임!!" 에드가 나를 절박하게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나의 이름을 애절하게(?) 부르면 부를수록 죽어라 달릴 뿐이었다. 그렇게 나를 납치하러 왔다는 생판 모르는 도둑과 같이 도망을 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아앗!!" 여자가 된 나의 육체는 운동신경도 엄청 둔해졌는지, 뜀박질 하나 제대로 못하고, 그만 발이 꼬여 앞으로 볼썽사납게 넘어지고 만 것이었다. "이런!" 도둑이 낮은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손은 그 도둑에게 잡혀있는 상태라 넘어지는 것으로 인하여 많이 다치지는 않았으나, 달리는 속도가 늦쳐진 우리는 금방 에드에게 따라잡히고 말았다. "라비스님! 괜찮으십니까?" 에드는 역시, 투철한 나의 경호원 답게 나의 안위부터 물었다. 그리고는 내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도둑에게로 고개를 홱 돌리며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것이었다. "넌 누군데, 라비스님을 납치해 가는 거냐?" 에드의 눈에서 소름끼치는 살기가 번뜩 번뜩거렸다. 비록 나에게로 쏘아져오는 살기가 아니었지만, 괜시리 오한이 드는 그런 매서운 살기였다. '에드가 저렇게 무서운 사람이었나?' 평소에는 결코 볼 수 없던 매서운 모습이라 나는 내심 놀랐다. 하지만, 저 뻔뻔해 보이는 도둑은 얼마나 두꺼운 낯짝을 가지고 있는지, 저런 살기를 대하면서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납치라니!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이군. 난 사랑하는 나의 연인 라비스가 원하는대로 같이 사랑의 도피를 한 것 뿐이라구!" '사, 사랑의 도피?' 나는 벙찐 얼굴로 그 도둑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그는 그저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어보일 분이었다. "사, 사랑의 도피라니? 거짓말 마라!!" 아마도, 그의 말에 벙찐 사람은 나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에드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듯이 도둑에게 외쳤다. "호오! 자신의 주인에 대한 믿음이 매우 강하시군. 하지만, 이거 실망시켜서 어쩌나? 내 말은 모두 사실인데... 정 못믿겠다면 라비스에게 직접 물어보지 그래?" 그러자, 에드의 눈길은 나에게로 옮겨졌다. 진실을 말해달라는 그의 눈빛이 나에게 전해졌다. "에드, 그, 그게 그러니깐... 저기..." 내가 버벅거리는 모습을 보이자, 에드의 눈은 의혹으로 가늘어졌다. 그러자 도둑은 답답하다는 듯이 나에게 말했다. "라비스! 뭐하는 거야? 설마 이대로 황태자의 후궁이 되고 싶다는 것은 아니겠지?" 그의 말에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 도둑! 대체 누구길래...' 내가 그렇게 놀란 얼굴로 바라보자 그 도둑은 빙긋 웃어보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게 싫다면, 어서 저 충견에게 자신의 의지를 증명해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거라고!" 그 도둑의 연기력은 정말 뛰어났다. 정말 이 사람이 라비스의 연인이라도 되나? 하는 생각이 나에게도 들 지경이었다. '어쩌면 좋지? 어쩌다 내 신세가 이렇게 되었을까? 난 영원히 라비스로서 살아가야만 하는 걸까? 이대로 내게 처음 주어졌던 삶을 포기해야 돼?' 하지만 나는 망설였다. 이런 식으로까지 거짓말을 해가면서 라비스의 정해진 운명에 도망을 가면, 과연 내게 얻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회의가 들었다. 어차피 다시 내가 살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면... 잃어버린 내 본연의 자아에 대한 서글픔이 갑자기 밀려왔다. "라비스...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무얼 망설이는 거야?" 그때,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이 나의 얼굴로 다가왔다. 그 도둑이었다. 그는 나의 얼굴을 한손으로 감싸더니 점점 나에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응? 저 도둑이 왜 얼굴을 가까이 대는 거지?' 내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자 그는 입술을 나의 귓가로 가까이 대더니 낮게 속삭였다.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가고 싶으면, 내가 하는대로 가만히 있어!" 그렇게 속삭이고는 다시 스치듯이 그의 입술을 나의 입술에 살짝 대는 것이었다. * 혹시 제 글을 퍼가시는 분은 사전에 저에게 멜을 주도록 하세요!! -3- '으악!! 이 자식! 뭐하는 거야? 이 죽일 놈이...' 그렇게 내 머리속은 이미 폭주 상태에 돌입을 하였으나, 겉으로는 그저 약간 움찔하였을 뿐이다. 왜냐? 에드가 지금 쳐다보고 있었고, 그 도둑의 말대로 나는 이 도둑과 사랑의 도피행각을 하는 연극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싫어도, 지금은 싫은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키스 한번 한다고 죽지는 않겠지...' 눈물을 머금고 그의 능청스런 연기에 약간의 호응을 해주었다. 그러자, 처음엔 가볍게 시작했던 키스가 점점 대담해지는 것이었다. '여기만 빠져나간다면, 저 도둑은 나한테 죽었어!! 그나저나 에드는 뭐하는 거냐? 빨리 빨리 반응 좀 보여라!' 내가 그렇게 생각할때 즈음... 처음엔 경악한 얼굴을 하고 있던 에드는 점차 분노의 얼굴로 바뀌더니, 이내 침착함을 잃고는 그 도둑에게 덤벼들었다. "이 노옴!!! 감히 라비스님에게 무슨 짓이야?" 도둑을 나에게서 떨쳐내고 그의 멱살을 잡았다. 에드의 두 눈은 마치, 불이라도 붙은 듯 화르르 타오르고 있었다. '호오! 생각외로 반응이 매우 격렬하잖아? 그럼, 지금이 내가 나설 적기로군!' 솔직히, 에드에게는 무척 미안했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자들은 모두 간사한 족속이라더니, 내가 보아도, 여자가 된 나는 너무 간사했고 이중적이었다. "에드!! 이러지 말아요!" 에드와 그 도둑의 사이에 끼어들어 적당히 뜯어말리며 울먹이는 얼굴을 해보였다. 그러자, 뭔가 복잡한 것 같기도하고 낭패한 것 같아 보이는 에드의 얼굴에서 여러 종류의 표정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그를 만난지는 얼마 안되었지만 언제나 한결 같았던 그의 얼굴... 그때 그가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도 든다. 그리고 그의 그런 표정이 한순간에 나의 뇌리에 깊이 뿌리박혔는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무튼, 에드는 그런 나의 행동에 많은 충격을 받았는지 힘이 빠진 듯, 잡고 있던 도둑의 멱살을 스르르 풀었다. "에드..."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두렵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나에게서 돌리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가세요... 라비스님. 라비스님께서 자신의 손으로 행복을 찾고 싶으시다면... 전 잘 압니다. 라비스님께서 얼마나 외롭게 유년시절을 보내오셨는지... 지금이라도 라비스님께서 선택한 행복을 잡기 위해 이렇게 떠나시겠다면... 저로서는 라비스님의 발길을 막을 권리가 없겠죠. 가세요! 전, 라비스님이 행복해지길 바랄 뿐입니다." 에드는 왠지 힘겨워 보이는 말투로 나에게 말하더니 다시 도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주 풍부한 표정을 나타내었던 그의 얼굴은, 그 도둑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다 사라져버렸는지 아주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무미건조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라비스님의 운명을 책임지실 분이라면, 성함이라도 기억하고 싶습니다." 에드는 이제, 그가 나의 연인이라는 것을 완전히 믿어버린 모양이었다. 조금전까지는 그를 향해 매서운 살기를 내뿜던 그였는데 지금은 비록 표정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180도로 달라진 정중한 태도로 흑발의 도둑에게 이름을 묻고 있었다. 그러자 도둑은 피식 웃어보이더니, 짧막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내 이름은 엔카... 엔카루스이다." 그러자, 그의 이름을 들은 에드의 얼굴에서 약간 표정이 생기는 듯 하더니, 그는 엔카루스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보였다. 그런 에드의 의외의 모습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비스님을 잘 부탁합니다. 부디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라비스님에게 상처주는 일을 했을 경우... 저는 당신을 평생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에드의 살기에도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던 엔카루스은 비록 자신의 몸은 낮추었지만 그의 결연한 태도를 보이는 에드의 모습에 찔끔하는 얼굴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한동안 망설이는 듯 하더니, 이내 뭔가 결심한 듯 에드에게 대답을 했다. "좋아! 약속하지. 앞으로 너를 대신해서 라비스의 방패막이가 되겠다고..." 엔카루스가 그렇게 다짐하는 맹세 비슷한 말을 하자, 에드는 안심이 그나마 되는지, 굳었던 얼굴을 피며 다시 한번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엔카루스는 별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는지 아까의 여유로운 미소는 더 이상 짓지 못했다. 하긴, 엔카루스가 진정한 사내라면 자신이 다짐했던 약속의 말에 꽤나 꺼림직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자신이 한 약속을 중시 여긴다면, 싫더라도 그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쳇! 잘난 척하더니만, 결국 자기 꾀에 자기가 발목을 잡힌 것인가?' 하여튼,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지만 이것으로 이상한 도둑 엔카루스는 아멘시타 다음으로 나에게 코꿰인 두 번째 녀석이 되었다. *이번엔 쪼금 짧군여! ^ㅡ^;;; -4- 크로시벨가 저택을 빠져나온 나는, 나의 가짜 연인(?) 엔카루스와 함께 어느 골목을 지나고 있었다. 톡! 데구르르~ 이것은 심통이 난 나의 발길에 채인 돌이 구르는 소리였다. 단지, 나의 발길에 닿는 지점에 있던 죄로 그 돌맹이는 나의 발에 채여 저만치 굴러가 멈추었다. "이봐!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그리고, 나를 납치하러 왔다니! 네 정체가 뭐냐?" 어느덧, 나는 그에게 반말을 쓰고 있었다. 나를 납치하러 왔다는 그에게 굳이 경어체를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계속 옆모습만 보이며 묵묵히 길을 걷던 그는, 나를 힐끗 바라보더니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꺼냈다. "귀족가의 레이디가 그런 얌전하지 못한 말투라니... 이거, 겉보기와는 다른데?" 그의 웃음기 섞인 말투에는 약간 빈정거림이 담겨있어, 은근히 기분을 잡치게 했다. 그래서, 나는 매끈한 이마에 힘줄 하나 돋은 얼굴로 그에게 소리쳤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이 망할 자식아!!" 드디어 나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엔카루스는 여전히 그의 특유의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며, 약간은 과장된 듯하게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크로시벨 남작의 영애는 무척 얌전하고 교양있는 숙녀라고 들었는데, 이거 정말 실망이군! 그렇다면 그동안의 모습은 모두 내숭이었단 말인가?"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싱글거리며 웃는 것이었다. 이는 분명, 나를 놀리며 재미있어 하는 태도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열이 뻗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까의 키스 사건도 생각이 나자 더욱 열이 났지만, 이대로 감정만 앞세워 그를 대한다면, 내가 불리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애써 감정을 누르며 그에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귀족들의 사교계에 대해서 아주 잘아는 모양이네? 그렇다면, 너는 도둑으로 가장한 귀족이겠군! 그렇지 않다면, 귀족행새를 하는 유능한 도둑일 수도 있겠고..." 그러자, 지금까지 그의 얼굴에 머물러 있던 장난스러운 미소가 사라졌다. "호오! 제법 냉정한 판단을 할 줄 아는 아가씨로군. 여느 귀족가의 레이디 같았으면, 진작에 꺅꺅거리며 도망을 치려 했을텐데..." 그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걸음을 멈추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씨익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훗... 물론, 나는 여느 레이디와는 다르지! 왠지 알아? 그건 내가 남자이기 때문이거든... 후훗!" 그러자, 엔카루스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뭐라 말하려 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을 가로채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난 말이지... 다른 레이디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 상황에 대처하려고 해! 뭔지 가르쳐 줄까?" 내가 그 부분까지 말하는 동안에도 엔카루스는 여전히 황당하다는 얼굴을 고수하고 있었다. 하긴, 그로서는 황당하기도 할 것이다. 이쁘장한 귀족가의 레이디가 자신이 남자라고 주장을 하고 있으니, 그가 그러한 얼굴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가 그렇게 내가 한 말에 대해 갈피를 못잡고 있는 동안, 나는 그의 육체의 급소를 향해 세찬 발길질을 했다. 퍼억!!! "흐윽!!" 잠시 방심을 하고 있던 그는 그대로 공격을 당하고는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이때다! 하며 뒤를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앗! 거기서!!" * * * * 한참을 달렸던 나는, 더 이상 엔카루스가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헉헉, 안보이네? 따돌린 것인가?" 내 뒤에 아무도 따라오지 않음을 확인한 나는, 거침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내가 얼떨결에 들어온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기 시작했다. "여긴 또 어디야? 제길!" 내가 들어선 곳은 어느 허름한 주택가였는데, 그 분위기가 모두 음침했고 집들은 모두 쓰러져 가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시각이 새벽인지라, 사람들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 은근히 나의 간담을 서늘게 하고 있었다. "냐옹~!" 쓰레기가 널려있는 지저분한 벽쪽에는 도둑 고양이들이 모여있는데, 원래 고양이들을 질색하는 나였던 터라,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왠지 흑인가가 생각나네... 설마 여기도, 그런 비스무리한 동네는 아니겠지?' 그런 불안한 생각을 하며 이 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 하던 차에... "크크큭...!" 어디서 듣기 싫은 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나쁘게 들려오는 낮은 웃음소리에 찔끔 놀란 나는, 소리가 들려온 쪽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직 날이 밝아오려면 한참을 있어야 했기 때문에, 어둠은 여전히 한치 앞을 분간하기 어렵게 스산하게 깔려있었다. "누, 누구냐?" 내가 그렇게 외치자, 어둠 속에서 몇몇의 사내들이 어슬렁거리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헉! 저들은 또 뭐다냐? 노숙자들인가? 아님, 깡패?' 그들은 금방 나의 주위를 에워싸며 탐욕스런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지저분하고 꾀죄죄한 모습이었는데, 족히 1년은 목욕을 하지 않은 것처럼, 때국물이 질질 흘렀다. 게다가, 옷차림은 천쪼가리를 수십번은 기움질을 해서 대충 걸친 듯, 이미 정상적인 의복의 형태를 벗어나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들의 행색은 전형적인 노숙자이나 상거지들의 모습이었다. 그들 중, 왕초격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침을 질질 흘리며 입을 열었다. "흐흐흐, 제법 곱상이잖아? 얼굴에 귀티가 나는 것보니, 있는 놈의 자식인 모양이군."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으엑!! 코 썩는다. 이게 무슨 썩은 내야?' 그가 다가오면서 그와 함께 고양한 냄새가 나의 코를 찔렀다. 그래서, 그에게서 최대한 떨어지기 위해 뒷걸음질을 쳤는데, 그는 내가 겁에 질려 그런 것이라 판단하고는 헤죽 웃어보였다. '더러운 자식! 그나저나, 나는 왜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꼭 도망을 와도, 이런 곳으로 오게 되다니...' -5- 그 지저분한 노숙자(?)들이 점점 거리를 좁혀오자 나는 이세계로 떨어진 후, 처음으로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사실, 그동안 호신술을 배워놓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여기서 저들을 때려눕히고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이를 어째?' "흐흐..." '흐억~ 하나님! 부처님! 예수님!! 여기 계신 모든 신님들... 제발 이 상황 좀 어떻게 해줘요!!' 나는 그동안 찾지 않았던, 생각나는 모든 신들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런데 그때! 여러 신들 중에서 한분이 나의 기도에 응답을 하셨는지, 무언가가 저 노숙자의 앞으로 튀어나왔다. "캬아옹~!!"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구석의 쓰레기 더미에서 저들끼리 놀던 도둑 고양이들이 갑자기 노숙자들에게 한꺼번에 덤비기 시작한 것이었다. "으악! 이 고양이들이 미쳤나?" 그 고양이들은 모두 지저분한 노숙자(?)들의 얼굴에 달라붙어 필사적으로 얼굴을 할켜대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놀란 나는, 도망갈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노숙자들이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처음에 몇마리에 불과했던 고양이들은, 저들중 제일 덩치가 큰 흑고양이의 울부짖음을 들었는지, 온 동네의 고양이들이 총출동한 것처럼 어느새, 수십 마리로 불어나 있었다. '설마, 고양이 신이...?' 고양이떼의 현란한 몸짓을 보며 그런 황당한 생각을 하는 나였다. "아이구~ 안되겠다! 도망가자!" 결국, 고양이의 기세를 당해내지 못한 노숙자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그렇게 노숙자들이 사라지자, 수십마리에 달하던 고양이들은 이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자기 갈길로 가버렸고, 나는 이 황당한 사건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잠시 후, 아까의 덩치 큰 흑고양이가 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 왠지 고양이의 표정이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그 표정을 본 나는 설마 설마하며 말없이 그 고양이를 내려다 보았다. [가출을 하다니! 이게 뭐하는 짓이야? 만약 내가 너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쩔 뻔했어?] "아, 아멘시타?" [그래! 나야...] "어, 어떻게..." [훗... 이 흑고양이의 몸을 빌렸지! 이 고양이는 아마도, 도둑 고양이들의 두목이었던 모양이야. 세상의 모든 식물들과 동물들의 눈은 바로 나의 눈이 될 수 있거든... 마침 고양이들이 옆에 있어서 너를 금방 찾을 수 있었지!] "그래... 정말 대단한 능력이네? 역시 신성한 론티아 나무의 정령이라니깐!" 사실 나는 가출했다는, 지은 죄가 있어서 은근히 아멘시타를 추켜세우는 아부성의 발언을 했다. 그러자, 아멘시타는 의외로 단순한 녀석이었는지 헤벌쭉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의 단순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 내가 이럴때가 아니지. 이도현! 어서 집으로 돌아가. 다니엘 남작이 네가 가출했다는 것을 알기 전에...] "싫어!" 내가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자, 아멘시타는 인상을 팍 쓰며 나에게 말했다. [네가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더욱 커다란 일에 휘말리고 말아!] "날 협박할 생각 말아!" 나는 그가 일부로 겁주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소리를 쳤다. 그러자 아멘시타는 답답하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협박이 아냐! 정령은 협박 따윈 하지 않는단 말이야. 네가 지금 돌아가지 않는다면, 너는 다니엘 남작의 분노보다는 더욱 힘겨운 것을 가슴에 안아야 할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아멘시타를 응시하자 그는 못할 말을 입에 담은 것처럼,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뭔가 결심한 듯 그는 체념한 얼굴로 나에게 입을 열었다. [넌 드래곤의 분노를 받게 될 거야...] "엑? 드래곤의 분노라니? 그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야? 난 드래곤 따윈 알지 못한단 말이야!" [이 나라의 왕비... 프레야 왕비님이 바로 드래곤이셔! 실버 일족이지... 지금은 비록 유희 중이시지만, 만약 그녀의 뜻을 저버린다면 그녀의 분노를 살지도 몰라!] "드, 드래곤? 그럼, 황태자는 드래곤의 아들이겠네?" [그래.... 정확히 말하자면, 하프 드래곤이 되겠지만...] '그럼, 드래곤의 자식이랑 결혼을 해야 한단 말이야? 아악! 그, 그건 더욱 싫어! 황태자가 남자인 것도 싫은데, 게다가 반쪽 파충류이라니!!' *이번 챕터의 마지막 편이오! 《체인지의 세계관에 대해...》 이 설의 세계관에 대해 대충 말씀드리자면... 이 설의 주인공... 이도현의 영혼이 떨어진 이세계는 로히얀스라 불리우는 왕권이 무척 강한 중세시대 배경의 왕국입니다. 로히얀스 왕국은 왕이 가진 권력이 절대적이고, 귀족들의 보수적인 성향과 계급의식이 매우 강해서, 은연 중에 그들이 일반 서민들에게 행하는 행포가 극심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런 이유로, 왕족이나 귀족들은 그들의 정통성을 매우 중시하기 때문에 왕족은 왕족이나 서열이 높은 귀족끼리 정략 결혼이 행해졌고, 귀족들은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가문과 정략을 맺습니다. 여기서 라비스 크로시벨이란 소녀의 육체를 갖게 되는 주인공은 남작의 딸로서 황태자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라비스의 아버지... 다니엘 남작은 전형적인 귀족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죠. 암튼, 남작의 딸이라는 라비스의 신분은 귀족으로 그다지 높은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실과의 정략은 왕족의 측실로 밖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로히얀스 왕국은 왕권이 발달한 나라이기 때문에 종교를 신봉하긴 하지만 신관들에게 권력을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세력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 턱없이 미약했고 대신에, 로히얀스의 왕은 자신의 권력을 뒷받침 해줄 마법이 발달하게 되고 중요시 됩니다. 가끔 마법이 천시되는 나라도 있지만, 여기 로히얀스 왕국만큼은 예외가 되는 거죠! 그로 인해서 이 나라에는 뛰어난 마법사들이 모이게 되고 그만큼 마법에 대한 체계도 발달하게 됩니다. 또한, 이 세계에 대한 종족과 몬스터에 대해 설명하자면... 다른 판타지 설들과 별로 다를 점이 없습니다. 이곳에도 엘프와 드워프가 있으며, 사악한 몬스터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최강의 환수라 불리우는 드래곤도 실존하는데... 이 곳의 드래곤도 기존의 드래곤에 대한 설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드래곤의 유희 중에 낳은 인간의 자식에게는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적인 법칙으로 적용하지 않습니다. 때론, 예외가 있을 수 있죠! 드래곤도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경우도 있으며, 그로 인해서 하프 드래곤이라는 특별하고도 희귀한 존재들도 태어납니다. 원래, 드래곤이 인간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그저 인간이 되지요! 드래곤이 인간과 결혼한다는 것은 단순한 유희에 불과하니깐요! 하지만, 어떠한 드래곤이 유희 중에 진심으로 한 인간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 인간에게서 낳은 아이는 -드래곤이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인정하는 경우에- 드래곤의 의지로 그 아이가 드래곤의 피를 갖고 태어날 수 있게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아이는 인간과 드래곤의 피를 절반씩 갖은 하프 드래곤이 되는 거죠! 이들 하프 드래곤들은, 실제로 겉보기에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능력 만큼은 드래곤의 절반에 해당하는 수치의 능력을 갖게 되죠. 이들은 또한, 드래곤의 특권인 용언을 사용할 줄도 안답니다. 그러나, 수명은... 인간의 수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어쨋든, 이들 하프 드래곤이 태어날 확률은 0.01%이기 때문에 아주 드물고 희귀한 존재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황태자의 신부가 되다!) -1- 결국, 나는 아멘시타의 말대로 크로시벨가의 저택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가출한지 몇시간도 안되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나를 보며 사내 자식(?)이 저 모양이냐고 혀를 차실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멘시타의 말에 의하면... 내가 왕실에 들어가기 직전인 요즘, 아멘시타가 나의 목숨에 대해 말하기를 '풍전등화'라 했다. 내가 그 이유를 물으니, 아멘시타가 대답하기를... [황태자에게는 한분의 정실과 두분의 측실이 계셔! 그녀들은 모두 네가 몸 담고 있는 집안에 비해 무척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 황태자비께서는 공작가의 영애이시고, 첫 번째 후궁이신 유리스님은 백작가의 영애이시고 두 번째 후궁이신 아사벨라님은 자작가의 영애이셔! 그녀들은 아마도, 또 한명의 후궁이 들어오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할 거야, 그렇다면, 그녀들이 취하는 행동은 무엇이라 생각해? 아마도, 네가 왕성으로 들어오기 전에 막으려 할걸! 조금만 방심하면, 너는 누가 보냈는지 모르는 자객에게 피살되거나 납치되고 말거야!] 그렇게 아멘시타는 나에게 무서운 말을 했던 것이었다. 나는 남자랑 결혼하는 것도 정말 싫었지만, 이런 이세계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것은 더욱 싫었다. 그래서, 풀이 잔뜩 죽은 얼굴이 되어 저택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설마, 정령이 나를 겁주기 위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을테니... 그의 충고에 따를 수밖에... 게다가 드래곤의 분노도 무시할 수는 없잖아?' 내가 다시 저택으로 돌아와 있을 때는 날이 어느 정도 밝아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라비스님!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함께 가셨던 엔카루스님은 어떻게 된 거죠?" 처음에 내가 저택에 돌아갔을 때, 에드는 잔뜩 충혈된 눈으로 나의 방문 앞에서 멍하니 서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서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가 가출하겠다고 나간 뒤로 계속 그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있다가 나를 보더니, 무지 반가워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가 이내 다시, 나를 꾸짓는 오라버니(?)의 얼굴로 표정을 탈바꿈하였다. 그가 그렇게 어리둥절한 얼굴로 질책하는 질문을 던졌을때... 나는 잠시 그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라비스님?" 그의 표정이 점차 의아함으로 바뀌어갈 무렵, 나는 만사 귀찮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엔카루스와는 헤어졌어! 그는 얼굴은 잘생겼지만, 성격은 드럽거든... 게다가 손버릇도 나쁘고... 나 졸려! 그만 자야겠어." 에드에게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았던 나는, 대충 성의없이 대답을 해주고는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무척 황당하다는 듯한 에드의 얼굴이 언뜻 보였지만, 나는 그의 황당함을 풀어주고픈 마음이 별로 없었다. 지금은 기분도 더러웠고 무척 피곤하였기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잠이나 자고 싶었다. 이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희망도 나에겐 없었다. 어차피, 영혼만 이세계로 떨어진 셈이니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나의 원래 육체는 투신으로 인해 이미 망가져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훗... 어쩌면, 나의 육신은 저 땅속 깊이 파묻혔을지도 모르지... 그래! 될대로 되라지... 어쩌면, 이것이 나의 운명일지도...' 운명같은 것은 결코 믿지 않았던 나였지만, 몇일이 지난 사이에 나는 어느덧 운명론자가 되어 있었다. 다시 리본과 레이스가 달린 실크로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잠옷을 갈아입은 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힘없이 지어보였다. '나는 라비스 크로시벨... 그래! 이도현은 이미 죽었어... 라비스, 네가 이긴 거야... 네가 나에게 떠넘긴 너의 운명! 이젠 내가 그 무게를 감당해야겠지? 후훗...' 왠지 자포자기가의 심정이 된 나는, 침대로 가서 누웠다. 방의 한구석에는 아즈라엘의 몸으로 들어온 아멘시타가 나는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양심이 있다면 그도 많이 괴로울 것이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 애꿎은 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 * * * 그로부터 정신없는 몇일이 흘러갔다. 나는 루이스의 도움을 받아, 라비스의 기억에 대해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고, 까다로운 왕실과 귀족의 예법도 익혀야 했다. 그리고, 귀족들의 필수라는 사교춤을 연마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해야만 했다. 나에게 사교춤을 가르친 자는, 루이스가 초빙한 '키아르'라는 춤선생이었는데, 이는 황태자보다 몇배나 느끼한 자였다. 게다가, 이 느끼한 춤선생은 나에게 춤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야릇한 추파를 던지며, 은근히 몸을 밀착시켜서 나는 춤을 배우는 것보단 이 사람에게 춤을 배워야 한다는 것에 더욱 곤욕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서, 시녀들과 루이스가 나가고 '키아르'라는 작자와 단 둘이 남게 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 그동안 쌓였던 분풀이를 약간(?)의 폭력으로서 풀었는데, 이로 인하여 그 키아르라는 사람은 눈이 밤탱이가 된 얼굴로 매우 불쾌해 하며 나에게 춤을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었고 나는 루이스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훗... 그래도, 그에게 스트레스를 풀었더니,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 걸!' 루이스의 잔소리를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며, 나는 남모르게 슬쩍 미소를 지었다. -2- 그렇게 열흘이라는 시간이, 왕실에 어울리는 완벽한 레이디(?)가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으로 후딱 지나갔다. "에휴~!" 오늘이 바로 왕실에서 사람이 나오는 그날임을 기억해 낸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똑, 똑! 태양이 완전히 얼굴을 들이내밀기도 전인 이 시각에, 나의 침실의 방문을 두드릴 자는 루이스 밖에 없었다. "들어와요!"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답했다. 그러자 곧, 문이 열렸고 밤갈색의 곱슬머리를 단정하게 틀어올린 루이스와 그녀의 일당(?)인 시녀들이 나타났다. "오오! 라비스님,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나요? 내가 문을 두들기도 전에 이렇게 일어나 계시다니..." 그녀가 놀랍고도 신기하다는 듯이 말하자, 그녀의 뒤에 서있던 몇몇의 시녀들도 수긍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쳇! 날 뭘로 보고... 그동안은 이 세계에 적응하느라 피곤해서 늦잠을 잔 것 뿐이라고!' 나는 그렇게 속으로 변명아닌 변명을 중얼거려 보았지만, 그녀들이 독심술을 할리는 만무했기 때문에, 나의 변명을 들어주지는 못했다. "이따가, 정오 즈음에 왕실 사람들이 올 거에요! 그 전에 어서 차비를 마쳐야..." "네에? 정오 쯤에요? 왜 이렇게 빨리..." 오늘 정오이면 왕성으로 가야한다는 말에, 나는 얼굴을 잔뜩 구겼다. 그러자, 루이스는 내가 자라온 이 저택을 떠나기 싫어서 그런 것이라 오해하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나의 등을 토닥였다. "라비스님! 그렇게 서운해 하실 필요는 없어요. 비록, 라비스님은 크로시벨가 저택을 떠나는 것이지만, 그래도 저와 에드는 라비스님을 따라가서 계속 보필을 하잖아요? 오늘 시집을 가는 아가씨가 그렇게 얼굴을 구기고 있으면, 보기 안좋아요!" "루이스!" 그렇게 나를 달래는 그녀를 보자, 나는 엄마가 생각났다. 내가 어릴 적에도 그렇게 투정부리는 나를, 엄마는 항상 부드럽게 달래주시곤 하였다. "루이스! 그게 정말이에요? 왕성에서도 나랑 같이 있어준다는 거..." 그녀의 모습이 엄마와 겹쳐보이자, 나는 문득 그녀에게서 위안을 얻고픈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품에 와락 안기며 말했다. "물론이죠! 아가씨. 호호! 오늘은 왠일이실까? 의젓하기만 하신 라비스님께서 어리광도 다 부리시고... 호호!" 나의 이런 행동에 루이스는 싫지 않았는지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우울했던 나의 기분도 한결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알게 모르게 루이스에게 많이 의지해왔던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황태자밖에 없는 왕성에 같이 가준다고 하니, 나는 내심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자아, 자! 제인, 카나, 세라, 리나! 어서 서둘러라. 황태자님이 한눈에 뻑 가시도록, 라비스님을 최대한 아름답게 꾸며야지!" '엑? 황태자가 나를 보고 한눈에 뻑 가다니... 제발 그런 불상사는 없었으면 좋으련만...' 이미, 황태자는 라비스인 나의 모습에 홀딱 빠져 내가 왕성에 도착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나는, 활기차게 시녀들을 다그치는 루이스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잠시 후... 능숙한 시녀들의 손길에 의해, 나의 모습은 점점 다듬어져 갔다. 화장술에 일가견이 있는 리나에 의해 나의 얼굴은 곱게 단장이 되었고, 세라가 골라 온 에메랄드 빛의 풍성한 실크 드레스가 나에게 입혀졌다. 그 드레스가 나에게 입혀지기 전에, 힘 좋은 루이스가 코르셋으로 나의 허리를 졸라 맸는데, 그때 나는 그녀의 손에 의해 질식해서 죽는 것이 아닌가 했었다. 그리고, 역시 리나가 나의 머리도 손질을 했는데, 고데기를 가져다가 정성스럽게 나의 머리를 말았다. 그 고데기라는 것은 요즘처럼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왠 화롯불 같은 것에다가 금속으로 된 그것을 적당히 달군 다음, 나의 머리카락을 지졌는데, 처음엔 리나가 그것을 들고 왔을 때 기겁을 해야 했다. 그것으로 머리를 손질한다는 것을 몰랐던 나는, 그녀가 나를 고문이라도 하려는 줄 알았다. 리나의 능숙한 손길에 의해 나의 머리 스타일은 일명 프랑스의 유명한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 머리 모양이 되었고, 나는 신기해 하는 얼굴로 거울을 이리 저리 훑어보며 감탄을 해야 했다. '와아~ 여자들은 정말 대단해! 이건 거의 신의 기술이야!' 화장을 안했던 나의 얼굴은 청순한 미가 느껴지는 그런 깨끗한 미인의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나의 미모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질 정도로 아찔한 미인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거참! 이거, 신화에 나오는 자신의 얼굴에 본인이 반했다는 나르시스가 된 기분이잖아?' 내가 그렇게 나의 얼굴에 감탄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시녀가 나의 방으로 호들갑스럽게 뛰어 들어왔다. "라비스님! 루이스님! 도, 도착했어요. 왕성에서 사람들이 도착했어요!"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순간 나의 안면 근육이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3- 루이스와 에드 그리고 여러 시녀들과 함께 나는, 왕성 사람들이 와있다는 저택의 입구로 불 편한 걸음으로 나갔다. 비록 이번이 두 번째로 신어보는 하이힐이었으나 불편한 것은 여전했기 때문에, 왠지 모르 게 어설픈 몸짓으로 걷게 되어, 뒤에 따라오는 에드의 얼굴에 불안감이 돌게 하였다. 언제 삐끗하여 볼썽사납게 넘어질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에휴~ 정말 여자들은 대단하다니깐! 이런 하이힐을 신고 우아하게 걸을 수 있다니! 우엥~ 발 아퍼!!' 불편한 신발 때문에 자꾸 구겨지려는 얼굴은 억지로 피며,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 노력 을 했다. "오! 라비스님. 황실소속의 에제크 기사단이 직접 라비스님을 호위하러 왔군요. 이렇게 영광 스러울 때가..." 루이스는 뭐가 그렇게 감동스러운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과연, 저택 입구에 는 푸른 빛의 갑옷을 늠름하게 차려입은 기사들이 차렷 자세로 반듯하게 서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다니엘 남작이 이미 나와있었는데, 그는 나를 보자 이렇게 말했다. "라비스! 이제 나오는 것이냐? 이분들을 너무 기다리게 한 것 같구나!" "죄송합니다." 그동안 루이스가 철저하게 나를 교육시킨 영향인지, 나는 조신하게 그의 말에 답했다. 하지 만, 속으로는 그에 대하여 온갖 흉을 보는 것은 루이스도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때, 에제크인지 뭔지 하는 기사단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다른 기사들과 는 달리 은빛의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에제크 기사단의 3부대 소속 부단장, 지브린 록펠러입니 다. 어서 마차 안으로 오르십시오!" 그는 생긴 것 만큼이나, 무지 딱딱한 어조로 나에게 입을 열었다. "그러지요!" 나는 그에게 고개를 살짝 끄떡여 보이고는 그들의 뒤쪽에 대기되어 있는 황금빛으로 치장되 어 있는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그 마차의 앞에는 여섯 마리의 백마가 묶여있는데, 척 보 기에도 모두 훌륭한 말이었다. 나는 어떠한 젊은 기사의 도움을 받으며 마차 안으로 들어갔고, 그 뒤를 이어서 루이스가 따라 들어왔다. "와아~ 루이스! 이 마차 엄청 고급스러운데요?" 푹신한 가죽 시트가 깔린 의자를 보며 내가 좋아라 하자, 루이스는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호호! 크로시벨가 소유의 마차와는 비교도 안되지요? 라비스님, 왕성에서는 이런 마차 뿐 만 아니라, 더욱 값지고 훌륭한 물건들이 넘쳐 흐른답니다. 라비스님은 황태자님의 총애만 얻는다면, 세상 부럽지 않은 권력과 부를 얻으실 수 있으실 거에요." "엑! 루이스, 난 황태자의 총애 따윈 얻고 싶지 않아요! 그가 나에게 닭살스런 대사를 읊을 때마다 나는 닭살이 돋는다구요! 흠... 그나저나, 저기 지브린이라는 기사말이에요. 굉장히 멋있지 않아요?" 사실, 나는 지브린이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갑옷을 멋지게 입은 그 모습이 멋있다고 한 말이 었는데, 나의 말에 오해를 한 루이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라, 라비스님? 그... 그게 무슨 큰일날 말씀이세요? 라비스님은 황태자님의 후궁이 되실 몸 이세요! 다시는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쳇! 나도, 저 기사처럼 멋지게 은빛 갑옷을 입고 싶단 말이야!' 루이스의 험해진 기세에 쫄은 나는, 속의 말을 하지 못하고 뾰로통해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 다. 하지만, 루이스는 뭐가 그렇게 걱정이 되는지 매우 어두워진 얼굴로 나를 지그시 바 라보았다. '설마, 내가 황태자의 후궁의 몸으로 지브린이라는 기사와 불륜에 빠질 거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하긴, 지금의 나는 여자의 몸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잠시 후 마차는 출발을 했고, 내가 탄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단들의 행렬들과 내가 가져가는 혼수용품(?) 그리고, 몇몇의 시녀들과 시종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간을 마차의 진동과 말발굽 소리 뿐인 무료한 여행이 시작되었고 나는 마차의 창문을 내다보며 밖의 경치를 시큰둥한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아악!!"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갑작스런 비명에 놀란 나는, 마차의 창문 밖으로 고 개를 내밀려는 찰나에 에드가 다급하게 다가오더니, 나에게 소리쳤다. "라비스님! 위험합니다. 마차 안에서 꼼짝하지 말고 계십시오!" 슝! 슈웅~!! 그때, 에드 바로 옆에서 은빛 화살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앗! 에드!" 내가 그렇게 외쳤을 때, 또 다시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악~!!" 아마도, 불시에 들어닥친 공격에 어떤 기사가 운없게도 당한 모양이었다. '헉! 저 은빛의 화살들은 뭐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친절하게도 누군가가 나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외침 을 터뜨렸다. "마법 도적단이다!! 어서 라비스님을 보호해!" 마법 도적단이라면 마법을 쓰는 도적단을 이르는 말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엔카루스?' -4- 난데없이 도적단의 마법공격을 받은 기사들의 대열은, 순식간에 흐트러지고 말았으나 부단 장인 지브린의 침착한 명령에 의해 기사들은 내가 타고 있는 마차 주위로 빙 둘러서서 방 어하는 태세를 취했다. 아마도, 그들은 매우 당황하였을 것이다. 비록 기사의 칭호까지 받은 그들이었으나, 그들은 검을 쓰는 자들이었다. 난데없이 마법 공격을 받는다면,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저들은 모두 마법을 쓸 줄 모른다. 두목급의 놈만 제외하면 나머지는 그저 도적에 불과한 놈들이니, 흔들리지 마라! 게다가, 방금전에 쓴 매직 미사일 마법을 보니, 그저 흉내만 낼 줄 아는 허접한 놈이 틸림없다! 지금쯤 지쳐서 당분간 마법을 쓰지 못할테니, 라비스님 을 철저히 보호하라!" 지브린은 그들의 부하들을 독려하는 말을 외쳤다. 그러나, 지브린의 말대로 저 마법을 쓰는 도적이 과연 허접한 놈일지는 아직 의문이었다. 슈웅~!! 그때, 또다시 서 너개 되는 빛으로 된 화살이 기사들 쪽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많은 인간들 이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가 그와 함께 들려왔다. 아마도, 도적들의 직접적인 공격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챙챙챙!! 이윽고, 금속으로 된 무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가끔가다, 서걱 서걱거리 며 무언가를 자르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들려왔다. "욱! 저렇게 떼로 몰려올 줄이야! 저들은 재물을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야! 저들의 목적은 라비스님이다!" 역시나 그 와중에서도 계속 입을 놀리는 지브린이었다. "오오! 라비스님. 이를 어쩌지요? 이는 분명 황태자의 후궁전이나 태자비께서 사주한 도적 떼들이 틀림없어요!" 사색이 된 루이스는 어절 줄을 몰라하며 나에게 입을 열었다. 나 역시, 혼란스러운 얼굴로 무의식중으로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는 무언가를 깨닫고는 소스라치게 놀 라며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을 멈추었다. '이... 이게! 난 손톱 물어뜯는 버릇 따위 없었는데... 내가 계집애처럼 손톱을 물어뜯고 있다 니!' 이는 분명, 라비스의 육체에 무인식 중에서 잠재되어 있는 버릇 중에 하나가 틀림없었다. 그렇게 갑작스런 혼란스러움으로 인하여 멍하니 있는데, 갑자기 마차의 문이 벌컥 열어 졌다. "으헥?!" 화들짝 놀란 나는, 기묘한 음성으로 낮은 비명을 내뱉으며 마차 문을 열어제낀 이를 바라보 았다. 그는 다행이도 에드였다. 에드는 한손엔 피가 잔뜩 묻은 롱소드를 들고 있었는데, 그의 옷에도 누구 것인지 모를 붉은 피들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라비스님! 여기를 어서 빠져나가야 됩니다." "오! 에드, 어서 라비스님을..." 에드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나에게 외치자, 루이스가 그런 그를 반기며 나를 데리고 어 서 빠져나갈 것을 말했다. "엑? 루이스는?" 이 상황에서 나만 빠져나가야 되나고 그녀에게 묻고 싶었지만, 에드는 더 이상 나에게 말할 시간을 주지 않고 급하게 나의 손을 이끌었다. 결국 나는, 에드에게 이끌려 마차에서 빠져나왔는데, 무지하게 튀는 빛깔의 드레스를 입은 나를 도적 중의 하나가 보았는지 외쳤다. "저 여자다! 도망 못가게 잡아!" '에구구~ 나하고 무슨 원한을 졌길래...' 그 도적의 외침에 기겁을 하며 에드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검정색의 일 색인 천을 두른 두적들이 나에게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흐걱!' 챙챙!! 다행이도, 푸른빛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나를 보호하려 필사적으로 몸을 던지는 바람에 그들의 손길은 금방 나에게 닿지 못했고 얼마간의 시간을 벌은 에드와 나는, 얼른 여섯 마리의 백마가 묶인 곳으로 가서 그 중 한 개의 고삐를 풀러냈다. "타십시오!" 에드는 내가 말에 올라타는 것을 도운 다음, 자신도 잽싼 몸짓으로 나의 뒤에 올라탔다. 그 리고... "이랴!" 말의 배를 힘껏 걷어차며 달리기 시작했다. 어떤 도적이 그렇게 도망가려는 우리에게 공격 을 가해왔지만 그때마다 에드는, 들고 있던 롱소드로 그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젠장! 도망가잖아? 잡아!" 누군가의 열에 받친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목소리는 매우 낯이 익었다. '저것은 엔카루스의 목소리야! 도대체 왜 그러는 거지? 왜 그는 나를 납치하려는 거야?' -5- 다각! 다각! 다각! 얼마간을 그렇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열나게 말을 몰았다. 뒤에서는 엔카루스로 보이는 남 자 한명과 또, 그의 부하로 보이는 남자 두명이 우리를 쫓고 있었다. 엔카루스는 마법을 쓸 줄 알았지만, 지금은 지친데다가 말을 모는 중이라 캐스팅(마법주문 외는 일)을 할 수 없었던 모양인지, 말을 죽어라 몰며 우리를 쫓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헉! 말이 지쳐가나봐! 이러다가 따라 잡히겠어!" 아까보다 좁혀진 그들과의 거리를 보며 내가 숨넘어갈 듯이 외치자, 에드는 입술을 질끈 깨 물며 나의 말에 답했다. "곧 왕성입니다. 조금만 더 가면..." 하지만, 점점 거리가 좁혀지더니, 이내 엔카루스와 그의 일당은 우리가 타고 있던 말의 양 옆으로 포위해 왔다. "제길!" 우리가 타고 있던 말은 비록 좋은 말이긴 했지만, 두 사람이 타고 있어서 그런지, 금방 지 쳐 따라잡힌 모양이었다. "여자를 내놓아라!!" 엔카루스의 일당(?)이 에드에게 외쳤으나, 에드가 그의 말을 들을리는 없었다. 에드는 그저 입을 굳게 다물고 끝까지 말을 모는데, 열중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자, 엔카루스는 번쩍 이는 흑색의 검을 빼내더니 에드에게 공격을 가했다. '온통 검은빛의 검이라니... 되게 독특한 검이네?' 곧, 검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날카로운 검신이 한번씩 교차할 때마다, 불꽃이 파바 팍 일었다. "윽..." 하지만, 에드가 실력으로선 조금 밀리는지 에드의 얼굴에서 힘겨워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그에 비해 복면을 한 엔카루스의 번뜩이는 까만 눈동자에서는 여유로움과 그의 특유의 거 만함이 엿보이고 있었다. 챙~!! 마침내, 에드는 엔카루스의 마지막 일격으로 검을 놓치고 말았다. 엔카루스는 그의 검을 높 이 치켜들더니 에드에게 내려치려 했다. 사실, 그의 실력으로 보자면, 굉장히 뛰어난 검술을 지니고 있었다. 생각같아서는 에드를 일 찌감치 베어넘길 수 있었겠지만, 아마도 나 때문에 그러지 못한 것 같았다. 에드와 나는 꼭 붙어있었기 때문에, 무작정 공격을 감행한다면, 그의 검에 나까지 베어질 수 있었기 때 문이었다. 아마도, 엔카루스는 나를 납치는 하되,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런, 제길!" 엔카루스가 낮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엔카루스는 치켜들었던 검을 걷어들이 고는 그의 부하들에게 외쳤다. "돌아가자!" 그가 그렇게 말하고 우리를 쫓는 것을 멈추자 그의 부하들도 우리를 뒤쫓는 것을 그만두었 다. '엥? 어떻게 된 거야?' 내가 그렇게 어리둥절해 하자, 뒤에서 에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왕성이 눈앞에 보이는군요! 저들은 왕성 앞에서 일을 저지를 만큼, 막나가는 도적들은 아 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왕성 앞까지 당도한 우리들은 닫혀진 왕성의 입구 앞으로 다가갔다. "문을 여시오! 황태자님의 세 번째 후궁이신 라비스 크로시벨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에드가 외치자, 안에서 기사 한명이 나왔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이오? 크로시벨님을 호위하러 나갔던 에제크 기사단들은 어찌 되었 소?" "오는 도중에 마법 도적단을 만났습니다. 저는 라비스님을 경호하는 '에드워드'라 하는데, 너 무나 급한 상황이라 이렇게 라비스님만 구출해 왕성까지 달려온 것입니다." 에드가 그에게 정중한 태도로 상황 설명을 하자, 그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 다. "저런! 그런 일이... 어찌 되었든, 다행이오! 나는 왕비님을 모시는 친위대장 '그레이 토머스' 라 하오! 왕비님의 명을 받고 크로시벨님을 기다리고 있었소!" 자신을 왕비님의 친위대장이라 소개한 토머스경은 그렇게 말하더니, 그제서야 나에게 눈길 을 돌렸다. "오! 일전에 왕성에서 크로시벨님을 뵌 적이 있었지요? 오늘 이렇게 가까이서 뵈니 정말 듣 던 대로 아름다운신 분이시군요!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예..." 그가 그렇게 인사하자 나는 얼떨떨해하며 덩달아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버벅거렸다. 그러면 서 나는 그를 언제 보았는지 기억해내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왕성에서 내가 그를 마주친 적이 있었나? 아우~ 아리송하다! 갑옷 입은 기사들은 그 얼굴 이 그 얼굴 같은데...' 다행히 그 기사가 나의 얼굴을 알고 있어서 나의 신분을 확인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끝이 났다. 에드와 나는, 토머스를 따라서 왕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황태자궁이 아닌, 왕비님이 있다는 중앙궁성의 옆에 있는 장미궁으로 가게 되었는데, 엄청나게 큰 궁성의 스케일을 보며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에드는 신분상, 더 이상 궁성의 깊숙히 들어가지 못하고 일층에 있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게 되었다. 그래서, 나 혼자 시녀들을 따라서 왕비가 계시는 방으로 가게 되었다. '아! 떨려. 여긴 무지하게 삭막한 곳인 것 같아...' 하늘을 찌를듯한 궁성의 위엄에 그만 압도되어 버린, 나는 내심 쫄며 시녀를 따라갔다. 지 금 내가 신고 있는 하이힐이 아까보다 유난히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6- "왕비 전하! 라비스 크로시벨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제법 지위가 있어 보이는 중년의 시녀가 굉장히 화려해 보이는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 니, 엄숙한 말투로 내가 왔음을 왕비에게 알렸다. 그러자, 방문 안에서 다소 우아해 보이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시라 해라!" 왕비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를 안내했던 그 시녀는 여닫이 형식으로 되어 있는 두 개의 육중 한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그러자, 굉장히 화려하게 꾸며진 침실 내부가 나의 눈에 들어 왔다. 온통 백색과 은색으로 꾸며진 실내는 은은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는데, 실버 일족답게 역시, 은빛을 선호하는 그녀의 취향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어서오시오! 라비스양. 먼길을 오시느라 수고하시었소."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부드러워 보이는 은발을 우아하게 틀어올린 한 여인이 나에게 아는 척을 했다. 그녀는 중년의 성숙한 미를 풍기는 근사한 미인이었는데, 이상스럽게도 그녀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전혀 없어서 20대로도 보여, 나는 그녀의 나이를 대충이라도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왕비님께 인사드립니다." 나는 치마자락을 양손으로 살며시 들어올리고는 무릎을 살짝 굽혀 왕비에게 인사해 보였다. "호호... 몇일 전에도 보았지만, 오늘 다시 보니, 라비스양은 역시 굉장한 미인이군요! 그리 고, 이렇게 우아한 자태라니... 미카엔이 아무래도 복이 많은 모양입니다." 그녀가 그렇게 웃는 얼굴을 하자, 나 역시 그녀의 장단에 맞추기 위해 어설프게 웃는 얼굴 을 해보였다. 그러자, 왕비는 기분이 좋은 듯 여전히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체 말을 이었다. "피곤하실텐데, 우선 쉬도록 하세요! 이따 저녁때, 미카엔의 후궁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연회가 열릴 것이오." 왕비는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아까 나를 안내했던 시녀를 돌아보더니 그녀에게 입을 열 었다. "타냐! 라비스님을 동쪽에 위치한 나의 침실 중 하나에 모시거라! 그리고, 라비스양을 위해 시중들을 몇 명의 시녀들을 붙여주도록 하고..." "예 알겠습니다. 왕비 전하!" 그렇게 해서 나는, 연회가 열리기 전에 왕비의 침실 중 하나인 어떠한 커다란 방에서 몸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왕비가 이렇게 손님방이 아닌, 자신의 침실 중 하나를 나에게 내주는 것은 나에 대해서 큰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나, 나는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내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왕비의 침실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개라는 것 정도였다. "목욕물을 받을까요? 라비스님?" '타냐'라는 시녀가 내가 목욕을 할 것인지 말것인지를 물었다. "네..." 아까 말을 타고 달리느라 먼지를 많이 뒤집어 썼기 때문에 목욕을 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 했다. 그러다 나는 문득 한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근데, 저어... 왕비님은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왕비님께선 올해 마흔 셋이십니다." "와아~ 그럼 스물살 때 황태자님을 낳으셨나보죠?" "네에..." "그럼, 왕비님 말구 다른 후궁분들도 계시나요?" "아닙니다. 현재 폐하께서는 왕비님만 계실 뿐입니다. 예전엔 몇분이 계셨지만 모두 병약하 셔서 일찍 돌아가셨지요!" "으음... 그래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말에 대충 응수하였다. 모두 병약하여 일찍 세상을 하직했 다는 것은 왠지, 석연치가 않았으나 나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 것을 골치 아프게 물고 늘어지며 생각을 해봤자 내 머리만 혹사시키는 것 뿐이었다. 타냐가 준비해준 목욕물에 목욕을 마치고 난 나는, 잠깐 눈을 붙일까 했으나 타냐가 연회에 가기 전에 치장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며, 은근히 압력을 넣는 바람에 나는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다시 화장이며 머리 손질이며, 맛사지 같은 것을 해야 했다. 처음엔 시녀라고 불리는 여러명의 소녀들이 전신맛사지를 해주겠다고 해서, 기겁을 하며 손 을 내저어야 했다. 비록, 여자의 몸이 되었다 하나 속은 남자였던지라 눈물을 머금고 그 녀들의 호의를 거절했기 때문에, 그녀들은 부분 맛사지로서 만족해야 했다. "라비스님! 연회에 입고 나갈 드레스에요! 정말 이쁘죠?" 어떤 시녀가 새하얀 드레스를 들고와 나에게 보여주며 기쁜 듯이 말했다. '치... 지가 시집을 가는 것도 아닌데, 왜 네가 흥분을 하고 그러냐? 남은 지금 죽을 맛인 데...' 속으로는 그렇게 울상을 짓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적당히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응수해주었 다. "호호... 정말 그러네요!" 우아해 보이는 나의 대답에 그 시녀는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나를 선망 의 대상 바라보듯이 바라보았다. '히잉~ 그런 눈으로 보지 말란 말이야! 난 내가 행동하는 것에 닭살이 돋을 지경이란 말이 야!' 나의 이중적인 행동에 넌더리가 나면서도, 여전히 이중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내가 가진 현실에 슬퍼하며, 그 시녀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그런 나의 미소가 결정타였는지 그녀는 꺅꺅거리며 나에게 수다를 늘어놓으며 시중이란 것을 들기 시작했다. "라비스님은 어쩜 그렇게 우아하세요? 너무 아름다우세요! 어머나~ 이 하얀 살결 좀 봐! 라비스님의 미모라면 황태자님의 총애를 한몸이 받으시고도 남으시겠어요!" '엑? 왜들 그렇게 황태자의 총애가 어쨋느니 하며 그딴 것을 운운하는 거야? 난 황태자의 총애따윈 필요없다구!' "어머! 라비스님? 추우세요? 닭살이 돋으셨네요?" 나의 처절한 속을 알지 못하는 그녀는 눈치없게도 그렇게 질문을 하며, 나의 속을 긁어놓았 다. -7-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나의 모습은 정말 내가 보아도 우아해 보였고 아름다워 보였다. 시녀 들에 의해서 또 다른 이미지로 아름답게 꾸며진 나의 모습을 보고는 놀라, 거울을 본체 입을 다물지 못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는 아까의 눈치없던 그 시녀가 농담하듯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 라비스님. 설마, 본인의 모습에 반하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하긴, 라비스님은 아름다 우시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두 조심하세요! 그러다, 황태자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면 어쩌시려구요?" 그녀는 가볍게 툭 내던지듯이 던진 말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찔끔하고 말 았다. "호호호! 농담이에요. 라비스님! 이젠 나가셔야죠? 아마도, 마차가 밖에 대기되어 있을 거에 요." 그렇게 해서 나는, 마차를 타고 연회가 열린다는 크리스탈궁으로 가게 되었다. 크리스탈궁 이란 연회만 주목적으로 개최될 수 있게 지어진 화려한 궁이었는데, 역시 연회가 열리는 궁성답게 다른 궁성과는 달리 건물의 모양이나 구조가 거의 예술의 경지라 해도 무방하였다. "라비스님! 내리시지요." 곧, 장미궁에서 출발한 마차는 크리스탈궁으로 어느새 도착을 하였고, 마차의 문을 열은 궁 성의 시종이 나에게 내릴 것을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어머나! 황태자님의 새로운 후궁이 되실 분이 도착하셨나봐!" 누군가가 내가 온 것을 알아차렸는지 외쳤고, 그 외침에 따라 아직 궁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잡담을 나누고 있던 몇몇의 귀족들은 일제히 나를 향해 바라보았다. '헉! 그렇게 한꺼번에 쳐다보면 부담스럽잖아?' 오늘 저녁, 내가 여기 궁성 안에서 많은 관심을 받게 될 것이란 것을 잘 알지만, 왠지 기대 에 찬 그들의 눈길이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다. 시종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린 나는, 이미 루이스에게서 혹독한 훈련을 받아 익숙해진 우아한 걸음걸이로 그들의 옆을 무심한 듯 스쳐지나갔다. "라비스 크로시벨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타냐가 크리스탈궁의 책임 시종장에게 내가 왔음을 알리자, 그 중년의 시종장은 고개를 끄 덕이더니, 궁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황태자 전하의 세 번째 후궁이 되실 라비스 크로시벨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그렇게 홀안에 있는 귀족들에게 내가 왔음을 선포한 것이다. "들어가시지요?" 타냐는 나에게 안으로 들어갈 것을 제안했고 나는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리고는 크리스탈궁의 홀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곳에는 다양각색의 귀족들이 저마다 화려 함의 극치를 선보이며 잡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저분이 이번에 황태자의 새로운 후궁이 되실 분인가요?" "네, 그런가봐요! 정말 듣던대로 굉장한 미인이군요! 저 정도면, 집안의 뒷배경이 없더라도 능히 황태자비나 아사벨라님을 누르시고도 남겠는데요?"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그들은 모두 나에게 눈길을 주며, 속닥대기 시작했는데, 귀가 밝은 편에 속하는 나는, 그들이 하는 말들을 다 들을 수가 있었다. '다 들려! 다 들려! 누가 누구를 누른다는 거야? 쳇!' 그렇게 나는 속으로 투덜대며, 나를 보며 속닥대는 그들에게 눈길을 주고는 방긋 웃어보였 다. 그러자, 그들은 나의 화사한 미소에 넋이 나간 듯, 그대로 얼어붙은체 입을 다물지 못 했다. '으으... 나의 버릇이 또 나왔군!' 예전, 내가 이도현이었던 시절에 나를 힐끗거리는 수많은 소녀들에게 형식적인 미소를 지어 주고는 그녀들의 꺅꺅거리는 행동을 보며 즐기곤 하였는데, 지금 여자가 되어서도 나는 그 버릇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었다. "국왕 폐하, 왕비 전하께서 납십니다!" 그때, 또 다시 시종장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서로 안부 인사를 나누며 시끄럽게 떠들던 귀족들은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왕과 왕비가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귀족들의 행동을 따라서 고개를 숙여보였다. "일어나시오! 모두들..." 다소 엄숙해 보이는 국왕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만 일어나라는 국왕의 허락이 떨어지는 말에 그제야 귀족들은 똑바로 일어섰다. "오늘 이렇게 연회를 주최하게 된 것은, 황태자가 크로시벨 남작의 영애인 라비스양을 후궁 으로 맞아들이는 것을 선포할 목적에서 이 연회를 개최하였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음... 그대가 라비스 크로시벨인가? 이리 가까이 오게!" 국왕은 나에게 좀더 가까이 오기를 명령하였다. 국왕의 명을 감히 거역할 수는 없는 일이라 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흠... 국왕이라 하길래, 엄청 대단한 줄 알았더니 그저 그런, 중년 아저씨잖아? 황태자와는 하나두 안닮았네!' 오늘 처음보는 국왕의 얼굴을 보며 느낀 나의 감상이었다. "그대는 오늘 이 순간부터 로히얀스의 그 다음 계승자, 미카엔 투르타 덴 마르시에안 로히 얀스의 세 번째 측실이 되었음을 짐이 선포하노라!" '엥?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나는 황태자와 결혼행진곡을 들으며 식이라도 치를 줄 알았는 데... 게다가, 미카엔은 코빼기도 안보이잖아?'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계속 국왕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악단은 음악을 연주하라! 그리고, 이 연회에 초대된 모든 귀족들은 오늘밤 즐겁게 보내며 황태자와 크로시벨양이 부부인연을 맺은 것을 경축하도록 하라!" 국왕의 말이 그렇게 떨어지자 마자, 왕실소속 악단은 경쾌한 왈츠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귀 족들은 모두 쌍쌍이 되어 춤을 주기 시작했다. '완전히 쌍쌍 파티잖아?' "라비스 크로시벨, 그대도 이 연회를 즐기도록 하라!" 왕은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나에게 지어보이며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네에... 폐하." 조신한 태도로 그에게 대답을 한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무심코, 젊은 귀족들이 몇 몇이 모여있는 곳을 바라보았는데... 나는 무지하게 놀라며 헛바람을 삼켜야 했다. 그 이 유는... '헉! 저게 누구야?' 화려한 예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윤기 흐르는 생머리의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엔카루스가 나를 쏘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엔카루스 뿐만 아니라, 그 근처에 있던 한 흑발의 여자와 밤갈색 머리의 여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여인들의 눈에는 적의가 담겨 있 어 심히 불쾌하였다. '내가 저 여자들에게 미움받을 짓을 했던가? 아무래도 초면인 것 같은데, 되게 기분 나쁘 네...' -8- 벌써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졌다. 일명 무도회라 불릴 수 있는 이 왕성의 연회는 그 분위기도 어느정도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우엥~ 발아퍼라! 얼른 쉬고파!' 오늘 하루종일 익숙하지 못한 하이힐을 신고 있었더니, 내발이 아프다고 계속 비명을 지르 고 있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처음보는 여인네들과 신경전을 벌이느라 나는 이미 탈진상태 였다. 다행히 아까 나를 째려보던 엔카루스는 언제 사라졌는지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에 아까 의 흑발과 밤갈색의 여인네들만 남아서 나를 정신적으로 피곤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들은 내 주위에 맴돌면서 내 행동이 천박하다는지 어쨋다느니, 계속 떠들어대고 있었는 데, 그녀의 말들은 고스란히 내귀로 들어와, 은근히 나를 짜증나게 하고 있었다. '쳇! 여자들이란... 저렇게 살벌한 적의를 나에게 갖는 것 보니, 황태자의 후궁이나 되는 모 양인데, 저런 여자들이 한명도 아닌 두명이나 된다니, 나 같으면 피곤해서 못살아!'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들은 나에게 관심없는 척을 했지 만, 계속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 미미하게 찔끔하는 것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훗... 한번, 찔러나 볼까?' 이제까지 끊임없이 나에게 다가오는 귀족신사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던터라, 나는 무료함을 달랠겸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아사벨라님과 유리스님이신가요?" 그러자 찰랑거리는 긴 흑발을 곱게 따서 컬러풀한 보석으로 된 머리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민 여인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대충 19살 정도 되어 보였는데, 그녀의 인상은 차가워 보였고 매우 강렬해 보였다.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그녀였다. '흐음... 누군가랑 이미지가 비슷해 보이는데...' "제가 아사벨라에요. 저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라비스님?" 그녀는 거만하게 눈을 내리깔며-사실은 내리깔지는 못했다. 키는 내가 더 컸으니,- 나에게 대꾸했는데, 그 거만한 말투도 누군가와 많이 비슷하다고 생각되었다. "훗... 물론, 아사벨라님께 볼일 따윈 없지만, 아까부터 저의 주위를 자꾸 맴도시기에, 혹시 저와 통성명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해서 이렇게 말을 걸었습니다. 뭐, 아니라면 할 수 없구요!"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그 옆에 서있는 밤갈색 머리의 여인에게 눈을 돌렸다. 그리고는 어서 너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라는 무언의 눈길을 그녀에게 보냈다. 그러자, 그녀는 아사벨라와는 달리, 쭈뼛거리는 태도로 나에게 입을 열었다. 아마도, 그녀 의 성격은 소심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아까 나를 보며 째려볼 수 있었던 것은, 아사벨 라의 영향이 컸으리라 사려되었다. '보나마나 뻔하군! 이 여자는 아사벨라의 곁에서 호구노릇이나 하는 것이 틀림없어.' "전 유리스에요." 겨우 자신의 이름만 밝히고는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호호, 역시 그러셨군요! 두 분이 많이 친하신 모양이죠? 측실끼리는 친하기가 쉽지 않은 데... 아사벨라님께서 아~주 잘해주시나 봐요! 훗... 제가 봐도 아사벨라님은 인상이 퍽이나 좋더군요!" 나는 사근거리는 말투로 그녀들에게 말했지만, 이것은 은연중에 비꼬는 말이었다. 특히 아 사벨라가 인상이 좋다는 말을 했던 것은 그녀의 인상이 매우 더러워 보인다는 것을, 살짝 내비친 말이었다. 역시, 내가 말한 의도를 충분히 알아들었는지, 아사벨라는 표정이 굳어졌지만, 그녀는 자기 컨트롤이 강한 여자였는지, 금세 아까의 거만하고도 누군가를 비웃는 듯한 얼굴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쳇! 재미없어. 열 좀 돋우어주려 했더니만... 그나저나 나도 지금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내가 여자들의 심기를 다 건드리다니! 하지만, 지금은 워낙 심심하니...' 왠지 계집처럼, 그녀들의 속을 긁어놓고 있는 나를 보며 애써 그렇게 변명과 같은 생각을 하였다. 아니! 분명, 무료함과 저조한 컨디션이 그 원인일 거라 나는 생각했다. "쿡! 얌전하게만 보았는데, 의외로 붙임성이 있으신가 보네요? 저희들에게 이렇게 먼저 말 을 걸어주시다니... 지금 나이가 몇이시죠? 내가 보기엔 적어도 나보단 2살은 어려보이 는데... 의외로 당찬 구석도 있으시군요! 호호, 라비스님의 말대로 저는 인상이 좋다는 말 을 간혹 듣는답니다. 그 말씀을 하신 분은 지금까지 딱 두분이셨지만... 황태자님과 라비스님. .. 뭐, 황태자님과 라비스님이 말씀하신 뜻은 서로 다르겠지만 말이에요." '흐음... 나이도 어린 것이 건방지게 까분다 이거지? 그리고, 황태자가 자신을 총애하고 있다 는 말을 은연중에 나에게 자랑하는군! 뭐, 나야 황태자가 누구를 총애하든 상관은 없지만...' 서로 그렇게 반어법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갈구는 대화를 유리스는 곧이 곧대로만 받아들였 는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왠지 웃음이 슬며시 나왔다. "훗... 역시 황태자님이 아사벨라님을 총애하실만 하시군요! 이렇게 상.냥.하.신 분이시라니! 앞으로 친하게 지내도록 하지요? 그리고... 아사벨라님은 매우 매력적인 분이세요. 제가 만약 남자였다면, 꼬셨을 타입이지요! 호호." 그러자, 아사벨라의 얼굴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게다가, 내가 꼬신다니 어쩐다니의 천박한 대사를 할 줄은 몰랐는지, 버벅거리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난 의외로 꼬인 성격인 것이 틀림없어! 상대방이 당황하는 모습에 이렇게 즐거워지다니...' 나중에 나의 성격에 대해서 깊이 고찰해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녀에게 예의바른 태도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아야 하겠군요! 아사벨라님 그리고 유리스님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 지만, 제가 지금 너무 피곤해서..." 그렇게 끝을 맺은 나는, 타냐를 불러 크리스탈 궁을 나왔다. 밖에는 이미 황태자궁으로 향 할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음... 왠지 신데렐라 이야기가 생각나는데? 자정을 가르키는 종소리가 울리고, 나는 저 짜증 나는 쌍쌍파티를 하는 궁성에서 나와 마차를 탄다라... 훗! 이대로 신데렐라처럼 집에나 갔으면 좋겠지만... 아! 구두 한짝은 벗어놓고 가야하나?' *이번이 마지막 편입니다. 담편부턴 5화로... [31] 체인지(Change) 제5화 -첫날밤(?) 보내기- (1) (첫날밤(?) 보내기) -1- 내가 탄 마차는 황태자궁으로 향하긴 했지만, 황태자가 머무는 궁성보다 조금 더 들어간 별 궁에서 멈추었다. '아아! 이제야 발 뻗고 편히 쉴 수 있겠군!' 나는 찢어져라 하품을 하면서, 어기적 어기적 시녀가 안내하는 대로 별궁 안으로 따라들어 갔다. 그리고, 타냐는 왕비를 모시는 시녀였기 때문에 별궁의 시녀에게 몇가지 당부하는 말을 하고는 다시 마차를 타고는 장미궁으로 향했다. 나를 안내하는 시녀는 20대 중반쯤 되어보이는 평범한 금발의 여인이었는데, 그녀의 머리카 락 빛깔은 나처럼 황금빛이라기 보다는 그저 그런 노란색에 가까웠다. "저기... 여기는 무슨 궁이죠?" 아직까진 귀족의 생활에 익숙치 못한 나였기 때문에 나는, 나보다 연상으로 보이는 그 시녀 에게 여전히 경어체로서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싱긋 웃어보이더니 나에게 입을 열었다. "말씀 낮추세요! 라비스님. 여긴, 앞으로 라비스님이 머무실 황태자궁성 중 하나인 백합궁이 라는 별궁이에요." '백합궁? 왠 궁성 이름들이 꽃이름이다냐? 그나저나, 여기 왕성에는 궁성들이 모두 몇 개나 되는 거야?' 측실이 머물수 있게 지어진 별궁이라 그 규모는 작았지만, 그래도 이 황태자궁성에 딸린 별 궁만 해도 무려 5개정도는 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곳 왕성의 규모에 혀를 내둘러야 했다. '그렇다면... 황태자는 측실들을 무려 다섯명이나 얻을 수 있다는 얘기인가?' 아까 마차를 타고 오면서, 별궁들을 대충 세어봤기 때문에 나는 대략 별궁의 개수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라비스님, 목욕물을 준비해 드릴까요?" 어느덧, 침실에 당도했는지 시녀는 어느 방문을 열면서 나에게 물었다. "아웅~ 지금은 너무 졸리고 피곤해! 그냥 세수만 할게." 그녀에게 하대를 하는 것이 왠지 어색했지만, 어쨋든 나는 그녀의 상전이었기 때문에 계속 경어체를 쓴다는 것은 이곳에서는 이치에 맞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말대로 나는 어색하더라도 그녀에게 하대를 하기로 결심했다. '으음... 여기가 내 침실인가?' 고급스럽게 꾸며진 널찍한 방은 크로시벨 저택에서 내가 쓰던 침실보다 더 넓어보였고 가구 들의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은 왠만한 예술품들과 함께 가치를 매겨도 될 만큼 대단해 보 였다. 하지만, 그런 가구들은 안타깝게도 나의 눈길을 별로 끌지 못했다. 너무 피곤하기만 한 나의 눈에는 그저 한 가운데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원형의 대형 침대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앞으로 내가 사용할 그 침대는 온통 새하얀 실크천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역시 공주틱한 분 위기가 나게끔 안이 비칠 정도의 얇은 하얀 천의 커텐이 침대의 바깥부분에 쳐져 있었고 푹신해 보이는 쿠션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흐음... 내 취향은 아니지만 멋진 침대로군!' 나의 몸을 쉴 침대가 굉장히 푹신해 보인다는 점에서 나는 이 침대를 꾸민 그 누군가에게 감동을 느꼈다. 털썩! 오늘 하루종일 나를 괴롭히던 하이힐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침대 위로 가서 털썩 몸을 누웠다. 그러자, 시원하고도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이 느껴져 기분이 좋아졌다. "앗! 라비스님. 우선 잠옷부터 갈아입으셔야지요!" "아우~ 귀찮아! 이대로 꼼짝도 하기 싫어." "라비스님! 그렇게 잠드시면 안된단 말이에욧! 잠시 후면 황태자 전하께서 오실지도 모르는 데..." 스르르 잠에 들려던 나는 시녀의 마지막 말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뭣?" "오늘은 황태자님이 바쁘셔서 아까 연회에 참석을 못했지만, 지금쯤 일을 마치시고 이쪽으 로 오고 계실 거에요! 어쩌면, 다른 측실의 별궁으로 가실지 모르지만, 오늘은 라비스님을 측실로 맞아들인 첫날이니 아무래도 이곳으로 오시겠지요!" "아! 그렇네. 난 측실이었지... 어쩌지? 아! 고양이!!" "네?" 황태자가 이곳으로 올지도 모른다는 말에 어쩔 줄 몰라하다가 나는 불현 듯 아멘시타가 머 리에 스쳤다. 그래서... "저기... 이름에 뭐지?" "전, '앤시아'라 합니다." "앤시아! 지금 당장 고양이나 강아지... 아무거나 빨리 구해와!" "네? 라비스님! 그게 무슨..." "시간이 없어! 황태자가 오기 전에 아무거나 한 마리만 구해서 나에게 갖다줘! 부탁이야." 그녀는 여전히 의아함을 얼굴에 담았으나 내가 급하게 다그치자 그녀는 나에게 이유를 묻는 것을 포기하고는 나의 황당한 요구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아카시아궁의 시녀장님이 기르시는 고양이를 빌려와야 하겠군요!" "아카시아궁? 거기가 어딘데?" "바로 이 근처에요! 아사벨라님이 머무시는 별궁이름이죠!" "그래? 다행이다! 빨리 그 고양이를 구해다 줘!" "네에. 그럼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앤시아를 다그쳐서 내보낸 다음, 나는 안절부절한 몸짓으로 방안을 왔다리 갔다리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황태자 전하 납십니다!" 방 밖에서 황태자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엑? 뭐야? 벌써 오다니... 이거 큰일났네!" 앤시아를 보낸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황태자가 이곳에 도착하자, 나는 급속도로 얼굴에 핏기 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에잇! 모르겠다. 어찌 됐든 시간이나 끌어보자!'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비장한 얼굴로 방문을 열었다. *소제목에서 왠지 야리꾸리한 느낌이...;;;(삐질!) [32] 체인지(Change) 제5화 -첫날밤(?) 보내기- (2) -2- "오랜만이군! 라비스." 황태자는 나의 침실로 들어서자마자 그를 따라온 궁인들을 모두 내치고는 나에게 다정한 말 투로 입을 열었다. 그는 간편해 보이는 바지와 헐렁한 블라우스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화려함을 추구하 는 그의 어머니와는 달리 그의 옷차림은 의외로 수수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의 상의는 흰색의 부드러워 보이는 천에 은색의 테두리가 기하학적으로 장식된 심플한 디자인이라서, 그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백색 계통의 색상을 선호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 "라비스? 왜 나를 보고도 말이 없지? 으흠... 나를 오랜만에 보고 감격이라도 해서 말을 잇 지 못하는 건가?" 은은한 보라빛으로 빛나는 그의 눈동자가 문득 장난기가 스쳐지나갔다. '흐음... 자수정을 닮았군! 인정하긴 싫지만, 이쁜건 이쁜거니깐.... 미카엔! 차라리, 여자로 태어나지 그랬냐? 그랬다면, 오히려 내가 너를 총애(?) 했을텐데... 아! 지금의 난, 여자 이지! 그렇다면, 나는 남자를 좋아해야 되는 건가? 아우~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그럼, 난 이젠 연애 한번 못해보고 죽어야 되나? 에엑! 그건 진짜 싫어!' 황태자를 앞에 세워둔체 내가, 나만의 고민에 골똘히 빠져 있자, 황태자는 이내 의아한 표 정을 지어보였다. "뭘,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날 언제까지 이렇게 세워둘 작정이야? 이거 정말 실망인데..." 그는 정말 실망했다는 듯이,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정말 표정이 풍부한 녀석이었다.- 그 는 내 침실의 구석에 위치한 쇼파에 털썩 앉았다. 그는 내색은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왠지 피곤해 보인다고 생각되었다. '피곤해 보인다라... 그러면, 그를 잠에 들게 하는 것도 손쉽겠군! 하지만, 지금은 아멘시타 가 없으니, 어쩐다? 술이나 떡이 되도록 먹여볼까?' 나 역시 피곤했기 때문에 더욱 더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가며 머리를 쥐어짜 보았다. 그렇게 내가 끙끙대고 있을 때 황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비스! 우리 이야기나 할까? 그래도, 오늘 정식으로 너와 인연을 시작한 부부인데, 넌 지 금 너무 뻣뻣한 것 같아! 아무래도, 내가 서먹해서 그렇겠지?" '으휴~ 저 부부라는 단어 좀 제발 쓰지 말아주었으면... 자꾸 닭살이 돋는단 말이야! 게다가 난 몇일 전까지만 해도, 19살의 남자였는데... 씨잉~!' 그렇게 속으로 울상을 지으며, 나는 황태자의 말대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역시, 앤시아가 고양이를 데리고 올때까지 그와 얘기나 하고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였기 때문이었다. "저어... 한가지 물어볼게 있는데요!" 내가 그렇게 입을 열자, 황태자는 내가 입을 열어준 것이 너무 반갑다는 듯이, 환해진 얼굴 로 입을 열었다. "그래! 뭐든 물어봐! 드디어, 라비스의 예쁜 목소리를 듣는군!" "황태자님은.... 음, 그러니깐... 영혼이란 것이 있다고 믿으세요?" 갑작스럽게 내가 질문한 내용이 너무 뚱딴지 같았는지, 황태자는 잠시 내 얼굴을 빤히 응시 하더니, 이내 쿡! 하며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쿡쿡! 난 또... 라비스가 엄청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물어본다기에 잔뜩 긴장했더니, 그런 질문이었어? 뭐, 라비스가 궁금하다면야 내가 대답 못할 이유가 없지! 흐음, 영혼이라... 어쩌면 존재할수도... 있을라나? 있겠지? 이런, 내가 대답하겠다고 해놓고선, 아리송한 대 답밖에 못하겠군! 아무래도 뭐라 단정하기는 어려운 질문인 것 같아.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묻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한쪽 다리를 꼬고 몸을 왼쪽으로 살짝 기대었다. "그냥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서요! 흠... 그러면, 영혼이란 것이 어느날 갑자기 육체가 뒤 바뀌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러자, 약간 장난끼를 띠었던 황태자의 자수정빛 눈동자는 조금이나마 진지한 기색을 보이 기 시작했다. "어느날 영혼이 갑작스럽게 육체가 뒤바뀐다라.... 그런 일이 만약 있다면 정말 특이한 경우 가 되겠군! 하지만, 그런 경우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아이들이 좋아하는 황당한 이야기 속이라면 몰라도..."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지요? 이 세계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한 일들도 많잖아요? 예를 들면, 나무나 꽃들에게 스며들어 있는 정령들 같은 거 말이죠! 아! 물이나 바람에도 정령들이 존재한다죠? 그렇다면, 우리의 눈에는 보이진 않지만, 영혼들이 존재할 수도 있고 ,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이 우리가 모르는 어디선가 벌어질 수도 있잖아요?" "글쎄... 정령과 영혼은 서로 다른 개념인 것 같은데? 흐음... 내가 현실적인 사람이라서 그 런가? 어쩌면, 라비스 내 말대로 그러한 일들이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 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것이 중요한게 아냐! 내가 왜 라비스와의 첫날밤에 영혼에 대해서 토론을 해야 하는 거지? 좀더 부드러운 내용의 대화를 하자구!" 잠깐 진지해지려던 황태자의 얼굴은 금세 다시, 풀어지고 말았다. '휴~ 마법사라기에 어쩌면 믿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왠지 내가 말해봤자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 아니, 그게 아닌가? 저 녀석은 지금, 진지한 대화 따윈 아무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내가 그렇게 생각에 잠기려는데... 방문 밖에서 구세주와 같은 앤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비스님! 고양이를 데리고 왔는데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반색을 하며 얼른 대답을 했다. "들어와!" 그러자, 회색빛의 얼굴 무늬를 가진 고양이를 품에 안은 앤시아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안으 로 들어왔다. "갑자기, 왠 고양이지?" 황태자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앤시아는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서 나는 얼른 황태 자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 "아하하... 제가 고양이를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앤시아를 시켜서 고양이 한 마리를 구해오라고 했어요! 와아~ 정말 이쁜 고양이이네? 냐옹아~" 고양이라면 질색을 했던 내가, 아즈라엘보다 훨씬 못생긴 뚱뚱한 고양이를 보고는 이뻐서 어쩔 줄 모르는 연기를 해내야만 했다. 나는 그 고양이를 안아들고 쓰다듬으며 꺅꺅거리는 행동을 해보였으나, 이놈의 망할 고양이 는 나의 눈물겨운 심정도 몰라주고, 나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괘씸한 것 같으니... 나두 너 싫어! 평소 때 같으면 너를 발로 차주었을 거야!' 나는 그 고양이를 은밀하게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러자, 그 고양이는 나의 강렬한 눈길에 압도 되었는지, 더 이상 발버둥을 치지 못하고,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래, 그래! 그래야 착한 고양이지! 이젠 아멘시타를 불러내 볼까?' 나는 그 고양이의 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는 아주 낮게 속삭였다. "아멘시타, 부탁이야! 제발 나에게 와줘! 지금 나의 모습을 보고 있다면, 어서 빨리..." 고양이를 끌어안고 뭔가를 속삭이는 나의 모습이 황태자는 요상하게 보였는지 나에게 말했 다. "라비스? 지금 뭐하는 거야?" 그의 목소리에 나는 움찔해 보이며, 황태자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어설프게 헤 쭉 웃어보였다. "헤헤... 고양이가 너무 귀여워서요!" "라비스! 이제 그만, 고양이를 내려 놓는 것이 어때? 설마, 그 고양이를 끌어안고 잘 생각은 아니겠지? 난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었으면 해! 아름다운 라비스." '에엑? 자, 잠자리?' [33] 체인지(Change) 제5화 -첫날밤(?) 보내기- (3) -3- "아하하... 졸리면, 먼저 주무세요!" 황태자가 그만 자자는 말에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겨우 이 말이었다. 왠지 거북한 공기에 나는 고양이를 끌어안고 있던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그러자, 고양이는 놀랐는지, 듣기 싫은 비명 소리를 내며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키야옹~!!" "어?" 결국은, 황태자로서는 정말로 황당한 일이 나의 침실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엔시아가 나가고 황태자와 나만 남았던 침실이라는 공간에서 고양이와 내가 쫓고 쫓기는 상 황이 연출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야아! 너 거기 안서?" "냐아옹!" 귀족의 레이디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평민의 소년이나 행할 수 있을 법한 그런 거친 행 동이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나에게서 나왔다. 우당탕~!! 고양이가 쇼파 있는 쪽으로 도망을 가길래, 나는 그 고양이를 잡기 위해 과감히 탁자위로 올라서서 그 위에 있던 장식물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고양이가 침대 쪽으로 도망을 가면, 나는 침대 위로 풀쩍 올라서서 푹신한 시트 위에서 달리기도 했다. "라아비스!!" 결국, 참다 못한 황태자는 나의 이름을 외쳤다. '허걱!' 황태자의 쬐금 열받은 듯한 목소리에 나는 찔끔하며, 침실을 헤집고 달리던 행동을 멈추었 다. 하지만, 때마침 고양이의 목덜미는 나의 왼손에 꽉 움켜잡혔는데, 그 상태에서 행동을 멈추고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황태자를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웃겼는지 결국은, 짐짓 엄 한 표정을 짓고 있던 황태자는 쿡쿡거리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풋! 하하하!" 정말 웃겨죽겠다는 듯이 허리를 숙이고 웃어보이는 그를 보며, 나는 그 다음 행동을 어떻게 취해야 할지 몰라, 그저 삐질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렇게 한참을 웃던 황태자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에게로 다가왔다. '헉! 뭐야?' 황태자는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앞에 당도하자 발걸음을 멈추고는 내가 들고 있 는 고양이를 내려다 보았다. "아무래도, 이 고양이가 있으면 내가 편하게 잠에 들 수가 없을 것 같군!" 그렇게 중얼거리듯 입을 열더니, 내가 든 고양이를 빼앗아 들고는 방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 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겨우 잡은 그 고양이를 방문을 살짝 열어 내보내며, 이렇게 소곤 거렸다. "미안하지만, 내일 다시 찾아와라!" 물론, 고양이는 얼씨구나! 하며 밖으로 나가버렸고 나는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히잉~ 아멘시타를 불러야 되는데...' "라비스? 그렇게 표정을 구길 필요없어! 오늘은 널 건드리지 않을거니깐! 난 싫다는 여자에 겐 억지로 강요하고 싶진 않아! 하아~ 그나저나, 나를 거부하는 여자가 있다니! 정말 충 격이 크군." 내가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었던 것이 그렇게 표가 났는지, 황태자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 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침대로 향하더니 그는 피곤했는지 침대에 눕자마자 그대로 잠에 들었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역시, 이대로는 안되겠어! 내가 이렇게 황태자나 다른 이들에게 쩔쩔매는 것은, 내가 혼자 설 수 있는 힘이 없어서야! 그리고, 그들을 이길 힘이 없지... 나도 뭔가 능력을 키워야만 해! 근데, 지금은 너무 졸립다! 잠은 자야 하겠는데, 침대는 저거 하나 밖에 없으니 할 수 없지!' 결국, 나는 화장을 지우고 좀더 간편한 복장-잠옷 비슷한 원피스형 드레스-으로 갈아입은 다음, 이미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는 황태자의 옆자리로 가서 잠을 청했다. * * * * 그 다음날 아침! 나는 창밖에서 나는 듯한 짹짹거리는 새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음?" 왠지 몸을 꼼짝을 못하겠다는 느낌이 들어, 정신을 차려보니 나를 꼬옥 안은체 잠들어 있는 황태자의 말끔한 얼굴이 바로 코 앞에서 보였다. "헉! 이게 뭐야? 왜 미카엔의 얼굴이 이렇게 가까이...?" 놀란 나는,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황태자를 힘껏 밀었다. 그랬더니... 우당탕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박자 뒤늦은 황태자의 비명소리도 들려왔다. "아야앗~!!" 나의 팔에 힘이 너무 들어갔는지, 그는 침대 밖으로 밀려나서 1큐빗(45~50cm)정도 되어보 이는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결국, 약간 난폭한(?) 방법으로 잠에 깨워진 황태자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몸을 일으켰 다. 그리고는 정말 아파죽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는데, 나는 내심 찔끔했지만 내 색은 하지 않고 그에게 당당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황태자님! 잠버릇이 무지 안좋으시네요. 괜찮으세요?" '그래! 이런 상황에서는 뻔뻔하게 나가는 거야!' 짐짓, 그에게 걱정해주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황태자는 자신의 잠버릇으로 인하여 침대에 서 굴러떨어진 것이라 믿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침대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아침 나절부터 나에게 낯뜨거운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아, 이거 참! 라비스랑 맞는 첫 번째 아침부터 스타일을 구기게 되었군! 그나저나, 잘잤어? 나의 신부... 이렇게 아침에 보니, 더욱 아름다운 것 같군!" 나에게 아침 인사를 하며 그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원래 깨끗한 외모를 지닌 그였지만 그렇 게 해맑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이자, 왠지 천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쳇! 남자 주제에... 뭘 믿고 저렇게 이쁜 거야? 그나저나, 저 끝도 없는 닭살 대사는 정말 못말리겠군!' [34] 체인지(Change) 제6화 -경국지색...?- (1) (경국지색...?) -1- 황태자의 후궁이라는 신분은 정말 따분하기 그지 없는 직책(?)인 것 같았다. 도대체, 아침 에 눈을 뜬 순간부터 지금 정오가 되는 시간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어느것도 없 었다. 황태자비 같은 경우는 귀족의 알현을 받거나, 약간의 정사에 간접적으로 참여를 할 수 있어 결코 무료하지 않는 시간을 보낼테지만, 후궁일 경우에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황태자의 총애를 얻기 위해 자신을 더 아름답게 가꾼다거나 교양있는 취미활동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후궁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전형적인 후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여자는 첫 번 째 후궁인 유리스에 해당되었고 두 번째 후궁인 아사벨라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가끔가 다가 쟁쟁한 입김을 가진 귀족과도 접촉을 하였는데, 그녀 주변에는 그녀를 뒷받침하는 보이지 않는 세력들이 있어, 황태자비도 그녀를 함부로 하지는 못했다. "더럽게 심심하네..." 나는 아침을 먹은 이후로 계속 침대에서 뒹굴뒹굴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료함에 몸을 떨다가, 하다못해 내가 잡일 비슷한 일을 손수 하려 들면, 시녀들은 기겁을 하며 나를 만류했다. 게다가, 그녀들은 내가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일마저도 따라다니며 대신 해주니, 그런 시녀들의 지대한 공헌으로 나의 무료함은 반나절만에 최고치에 달하고 말았다. "으아아~ 심심해애~!!! 뭐, 재미난 일 없을까?" 나는 그렇게 침대에서 뒹굴 뒹굴하면서 무료함에 대한 몸부림을 치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 리고는 그대로 방문을 박차고 나서자, 마침 지나가던 앤시아가 나를 불렀다. "라비스님! 어디 가세요?" "앤시아! 여기 혹시, 서재 같은데 없어?" "음... 전에 백합궁을 쓰시던 후궁께서 책을 좋아하셔서 서재가 있긴 있는데, 그분께서 돌아 가신후 지금까지 출입을 안해, 전부 오래되고 낡은 책들 뿐일 거에요!" "그래? 그럼, 책이나 읽으며 시간을 떼울까나? 앤시아! 나 그곳으로 안내해줘!" "그러죠!" 그녀는 나의 말에 빙긋 웃으며 답했다. '흐음... 앤시아는 비록 평범한 얼굴이지만 성격은 좋은 것 같아...' "앤시아!" "네?" 내가 부르자 앤시아는 고개를 돌리며 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초록빛 눈동 자가 나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머리카락색과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앤시아는 결혼했어?" 그러자, 앤시아는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아직 결혼은 하지 못했어요. 정말 부끄러운 일이지요? 제 나이라면 벌써 결혼을 해서 가정 을 갖고 아이들도 있어야 하는 나이인데 말이에요!" "지금 앤시아의 나이가 몇인데?" "스물 다섯이에요!" '으흠... 스물 다섯이라... 내가 살던 곳에서는 스물 다섯이면, 아직 창창하다고도 할 수 있는 나이이잖아? 그런데, 여기는 대체 결혼 적령기가 몇살인거야?'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20살 전후로 결혼이 이루워지는 모양이었다. 물론, 귀족들의 정략결 혼은 더욱 낮은 연령층에서 이루워지는데, 나는 17살이니 약간 이른 감도 있지만, 적당한 시기에 결혼이 성사된 셈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그녀가 안내하는대로 따라갔다. 서재는 3층에서도 제일 구석에 위치한 복도의 끝방에 있었다. 앤시아는 조금 전에 창고 비슷한 곳에 들려서 가져온 열쇠 꾸러미로 서재의 자물쇠를 열었 다. "저는 그만 가보도록 할까요?" "아니! 그냥 나랑 같이 있어." 안으로 들어서자 조금은 음침하게 느껴지는 서재의 내부가 내 눈에 들어왔다. 관리를 한지 매우 오래되었는지 먼지가 족히 1cm는 쌓여보였다. '정말 굉장하군!' 책의 종류는 매우 많아보였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내가 살펴보는 책들은 전부 드래곤에 관 한 책들이거나 마법에 관한 책들 투성이었다. "흐음... 전에 있던 후궁은 드래곤이나 마법에 대해 굉장한 괸심을 가지고 계셨나 보지?" "그, 글쎄요. 아마도, 그러셨겠죠!" 대답하는 앤시아의 말투가 약간 이상하다고 느껴졌으나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마법의 입문에 대한 책을 몇 개 고른 나는, 탁자에다가 놓고 대충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 법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대체, 이 책에 쓰여있는 내용들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엑! 머리 아파~ 뭐가 이렇게 어려워?' 결국, 몇장을 보지 못하고 나는 책을 덮고 말았다. "풋!" 책을 보며 오만상을 찌푸리는 나의 모습이 웃겼는지, 앤시아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나는 얼굴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마치 동생 바라보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앤시아!" "네?" 그러자, 앤시아는 나의 목소리에 퍼뜩 놀랐는지 얼른 웃음기를 거두며 답했다. "이리 가까이 와 봐!"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앤시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덥썩! 그녀가 가까이 오자 나는 그녀를 덥썩 끌어안았다. 그러자 앤시아는 무척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우엥~ 여자를 안아보아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니! 난 결국, 여자가 되어버린 것인가? 흐 음... 그 다음엔 황태자를 안아볼까? 그를 안아보았을 때 만약, 내 가슴이 떨리기라도 한 다면 나 죽어버리고 말거야!' 그렇게 우울한 생각을 하며 안고 있던 앤시아를 풀어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스르르 빠져 나가는 듯 하더니, 그대로 바닥에 풀썩 주저앉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앤시아?" "아하하... 라비스님! 깜짝 놀랬잖아요." "그랬어? 미안..." 나는 대충 그녀에게 응수해주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앤시아가 나를 계속, 바라보 는 것을 느끼고는 그녀를 다시 쳐다보았다. "라비스님에게는 이상한 마력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아요!" "마력?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깐...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물론, 라비스님은 아름다우 시니 남자분들이 라비스님에게 반하는 것은 당연하겠죠! 하지만, 라비스님은 그 아름다운 미모를 더욱 뛰어넘어서 뭔가 사람들을 반하게 하는 어떠한 요소를 지니신 것 같아요! 그것은 어쩌면 성별을 초월해서 여자들도 라비스님에게 빠지고 말거라는 느낌이 드네요!" "그래?" 약간 성의없는 듯한 말투로 나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성별을 초월하는 매력을 갖는다라... 어쩌면, 남자의 영혼에 여자의 육체를 가진 나의 황당한 경우에 대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앤시아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뭔가 자신만의 생각에 잠긴 듯 목소리가 잦아 들어 있었다. "라비스님은... 물론, 얼굴을 직접 뵌 분은 아니지만, 여신의 미모를 가졌다는 크리스티나 아 르젠님과 왠지 닮았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분은 아주 오래전에 어느 나라의 왕비였는데, 아름다우신 그 분의 미모로 인하여 대륙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며 융성했던 나라가 기우뚱 했다죠! 그리고, 어떤 블랙 드래곤도 그녀를 탐했다고 들었어요! 아마도, 그 드래곤으로 인 하여 나라가 뒤흔들렸겠지만, 그로 인해서, 이런 말까지 생겨났답니다. '아르젠은 미모 하 나로 나라를 흔들고 드래곤을 사로 잡았다.' 왠지 재미있지 않아요?" 조용한 줄 알았던 앤시아는 의외로 다른 여느 여자들처럼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 었다. '으흠... 아르젠? 왠지 경국지색이라는 한자성어가 생각나네!' 갑자기 짖궂은 생각이 들은 나는 그녀에게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앤시아! 나도 그 아르젠이란 여자처럼 나라를 뒤흔들어 볼까? 나도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왠지 듣고 싶어!" 그러자, 앤시아는 얼굴이 새하얘져서 나의 말에 답했다. "라비스님! 나라를 뒤흔들다니요? 그런데, 경국지색이란 말이 뭐죠?" [35] 체인지(Change) 제6화 -경국지색...?- (2) -2- "라비스님! 첫날밤을 그냥 보내셨다니요? 그래가지고 어떻게 황태자님의 총애를 얻으시려고 그러세요?" 이것은 아까부터 나의 침실에서 설교를 늘어놓는 루이스의 목소리이다. 두시간 전에 백합궁 에 도착한 이후, 다시 재회한 반가움도 잠깐... 지난밤의 일을 묻는 루이스의 질문에 솔직 하게 답해주었더니, 루이스는 펄펄 뛰며 계속 잔소리이다. "루이스! 묻겠는데, 왜 그렇게 황태자의 총애에 집착하는 거야? 물론, 그의 측실이 되면 총 애를 받는 것을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지만, 이건 도가 지나치잖아?" 루이스에게도 이제 하대를 하기 시작한 나였다. 아무튼 내가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하자, 루 이스가 미미하게 움찔하였고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헤에~ 루이스가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데?' 그래서, 나는 뭔가가 있구나! 하며, 그녀를 더욱 다그치기 시작했다. 그녀가 나를 다그치는 순간에서 다시 상황이 역전되어 내가 그녀를 몰아세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흐음... 루이스! 왜 당황하는 거지? 나에게 뭐 찔리는 거라도 있어?" "그, 그건..." "말해! 솔직히 말해줘! 루이스." 나는 두눈을 반짝이며 정말 궁금하다는 얼굴로 루이스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망설이듯 나의 눈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그녀는 무 겁게 그 입을 열었다. "네, 말씀드리죠! 라비스님... 제가 라비스님을 그동안 정말 제 딸처럼 소중히 해왔다는 거 라비스님도 아실 거에요! 말하자면, 길어지겠지만 짧게 말해드리죠! 예전엔 저에게도 젓 먹이 딸이 있었는데, 크로시벨가에 들어오기 전에는 생활이 무척 궁핍해서 끼니도 잇기가 무척 어려웠었죠! 결국은, 태어났을 때부터 허약했던 제 딸은 제대로 못 먹었던 것과, 생 활을 꾸려나가야 했던 저의 소홀함으로 얼마안가 죽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저는 자식을 잃은 슬픔에 빠져 정신 나간 듯 거리를 배회했었는데, 그때, 라비스의 어머니가 타고 있던 마차에 치일 뻔했었죠! 그렇게 해서 라비스의 어머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분은 정말 저를 진심으로 아껴주셨답니다..." 루이스는 옛날 생각이 나는지 허공에다가 못 박아 둔 그녀의 눈빛은 슬픔과 그리움, 그 모 든 감정들이 복합되어, 나직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때가, 암흑 뿐이었던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빛이 나가온 순간이었죠! 라비스의 어머님 은 정말 아름다우신 분이었어요! 그리고, 마음씨 또한 비단결 같은 분이셨죠! 그 분은, 저 에게 기꺼이 자신의 따님을 맡기셨어요! 그 따님이 바로 라비스님이시랍니다. 정말 천사 같 이 어여쁜 아이였지요! 전, 그때 라비스님을 보며, 결심을 했어요! 앞으로 제게 남은 삶을 크로시벨가와 라비스님을 위해서 바치기로..." 루이스는 내가 나온 대목에서는 정말 따스한 눈빛으로 나를 그윽하게 바라봄으로 해서 나를 뭉클하게 하였다. 그런데, 거기까지 말한 루이스는 갑자기 결의에 찬 눈빛이 돌변하더니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라비스님! 꼬옥, 황태자님의 총애를 얻어야만 해요! 이미 황태자의 측실이 된 라비스님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황태자의 총애를 얻어내는 것 뿐이에요! 그렇지 않다면, 끝내 불행해지고 마는 것이 황실의 측실이에요! 라비스님,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루이스는 나의 손을 덥썩 붙잡은체 결연하게 말했다. '도대체, 라비스의 어머니는 어떤 여자였기에, 죽은 후에도 이렇게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 치고 있는 걸까? 아멘시타도 부족해서, 이젠 루이스까지라니...' 내심, 라비스의 어머니인 셀레나에 대해서 궁금증이 치솟는 나였다. "알아... 루이스의 마음... 이젠 알겠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가 황태자의 총애를 얻어야 하는 이유가 크로시벨가를 위한 것이겠지?" "라비스님..." "알았어! 알았어! 루이스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깐... 그 얘기는 여기 까지만 하자구!" 나는 손을 내저으며 그녀의 입을 막았다. 황태자의 총애를 얻어야만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 는 그녀의 말이 나를 우울하게 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아멘시타가 나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도현! 물론, 너에게 알기 쉽기 설명하느라 이 곳을 판타지 세계라 설명한 거야! 그러니, 네가 라비스로서 숨쉬고 있는 이 세계를 부디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주었으면 해! 네가 차원 이동해온 이곳이 너에게는 현실 세계가 아닌, 꿈에 불과한 판타지 세계일 수도 있겠지만 , 이곳 사람들은 만약, 네가 존재하는 세계를 알게 된다면, 그 사람들한테는 이곳이 현 실이 되고 그곳을 꿈속의 세계 쯤으로 생각하게 될 거야! 그러니, 네가 지금부터 숨쉬게 될 이곳을 너의 현실로 받아들여! 이것이 어쩌면 너에게 예전부터 주어졌던 운명일 수 도 있으니깐...」 나는 아멘시타의 말을 속으로 곱씹으며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입을 열 었다. "루이스!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만약 그것을 거스르려 한다면 나는 불행해지겠 지? 좋아! 내가 경국지색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나라를 뒤흔드는 미인 말이야! 하하하..." 그러자, 루이스는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보며 아까 했던 앤시아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라비스님! 나라를 뒤흔드는 미인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이지요? 그리고, 경국지색은 또 무슨 말이에요?" * * * * "라비스님! 수면제는 또 어디다가 쓰시려구요?" 내가 루이스에게 수면제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더니, 그녀는 과민반응을 보이며 그렇게 반문 을 했다. 하긴, 예전에 수면제를 잔뜩 먹고 자살 시도한 라비스의 전적이 있으니 루이스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요즘, 스트레스 때문인지 몇일 째 잠을 못잤어! 부탁해, 루이스!" "그게 정말이죠?" 루이스는 그렇게 몇번이고 나의 대답을 확인하고 나서야 몇알의 수면제를 구해가지고 왔다. 그 수면제를 받아들은 나는 루이스가 나가고 드디어 침실에 혼자 남게 되자,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에휴~ 설마, 밤마다 이 짓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리고, 앤시아를 시켜 황태자가 올 즈음에 차를 내오게끔 말해 두었다. '미카엔! 왠만하면, 여기로 오지 말고 다른 후궁이나 황태자비에게로 가라! 왜 네 조강지처 를 놔두고 이곳으로 오겠다고 한거냐구?' 아침에, 황태자가 나의 볼에 키스를 하며 오늘도 이곳으로 오겠다고 했던 황태자의 말을 떠 올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자정이 되려면 세시간 가량 남은 시각이었다. '아직, 그가 오려면 멀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아까 서재에서 가져온 몇권의 책을 펼쳐들었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 납십니다." 시종의 우렁찬 목소리가 방문밖에서 들려왔다. '엑!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온거야? 젠장할...' [36] 체인지(Change) 제6화 -경국지색...?- (3) -3- 침실에 들어선 황태자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싱글거리는 얼굴로 나를 보자마자 손을 잡아끌더니, 침대 쪽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침대에 털썩 앉더니 나에게 입을 열었다. "라비스! 오늘 내가 뭘 갖고 온지 알아?" "글쎄요..." 나는 살짝 미소지으며 그의 말에 답했지만 속으로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하며 궁시렁 거렸다. 그러자, 약간은 상기된 얼굴로 그는 안쪽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짜안! 후훗... 내가 라비스에게 이걸 줄려고 잽싸게 달려왔지!" "그게 뭔데요?" "드워프제 다이아 목걸이이지! 내가 이걸 하루 빨리 구하려고 드워프의 족장을 엄청 닥달했 었거든! 이 목걸이 정도면 라비스와 아주 잘어울릴 거야!" 그는 어울리지 않게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나의 목에 직접 걸어주었다. '흠, 드워프가 만든 다이아 목걸이라... 엄청 비싸겠는데?' 나의 머리에 떠오르는 내용은 황태자에 대한 감동보다는 이 다이아를 팔면 현금이 얼마나 될까? 하는 것이었다. 똑, 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내가 대답하자 앤시아가 두잔의 차를 가지고 조심스레 들어왔다. "황태자님! 혹시, 론티아의 꽃잎으로 우려낸 차를 좋아하세요?" "론티아라면 굉장히 희귀하다는 신성한 론티아 나무를 말하는 건가? 그 나무는 자신이 원할 때만 꽃을 피워낸다고 하던데... 흠, 굉장히 좋은 향이 나는군!" 낮에 루이스가 가져온 론티아의 꽃잎으로 앤시아에게 차를 끓이게 한 것이었다. 론티아 꽃 잎의 차는 매우 귀한 것이라서 왕족이나 간신히 향을 맡아볼 수 있었다. 나는 앤시아에게서 두잔의 차를 받아들고는 쇼파로 가서 탁자 위에 놓인 꿀이 담긴 그릇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은으로 만들어진 티스푼으로 미리 수면제를 넣은 꿀을 황태자의 잔에 탔다. 그가 보는데에서 수면제를 탈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론티아 꽃잎차는 매우 쓰기 때문에 설탕이나 꿀을 약간 타서 먹는다.- 그리고, 나는 그 옆에 있는 설탕 그릇에 담긴 설탕을 한스푼 떠서 나의 잔에 탔다. 물론, 나의 그러한 행동을 황태자는 별생각없이 바 라보았고 아무런 의심없이 차를 홀짝대며 마셨다. '과연, 효과는 있을까?' 그가 하프 드래곤인 것을 감안하여 수면제를 보통량보다 조금 더 넣었지만, 그에게 효과가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라비스! 마법에 대해 관심이 있는 모양이지?" 그는 아까 나의 침대 옆에 놔두었던 책을 보았는지 그렇게 물었다. "네, 관심은 있지만, 배우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네요!" 그러자 그는 빙긋 웃어보이더니, 찻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가르쳐줄까? 나한테 배운다면, 아마도, 1년 안에는 3서클은 이룰 수 있을걸?" "어? 정말요? 3서클 정도의 마나를 이루려면 몇 년은 걸리는 줄 알았는데..." "물론, 그만큼의 레벨을 올리는 것이 쉽지는 않지! 아마도, 머리 나쁜 사람은 몇십년이 가도 배우기가 어려울 걸? 하지만, 라비스에게는 내가 있잖아? 필요하다면, 내가 라비스에게 마법을 걸어줄 수도 있지! 마법을 빨리 배울 수 있도록 말이야!" "와아~ 정말요?" 내가 기뻐하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황태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자리에서 일 어났다. "하지만, 맨입으로는 안되지!" "엑? 그럼, 어떻게 해요?" 그의 말에 나는 불안감으로 표정을 팍 구기자, 그는 다소 짖궂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나에 게 말했다. "쿡! 라비스, 그렇게 표정 좀 구기지마! 그럴때마다 나는 상처입는다구! 걱정말고 이리와. 잡아먹지는 않을테니... 음, 라비스의 안마나 받아볼까?" 하지만, 그는 상처입기는커녕 재미있다는 얼굴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황태자님! 혹시 졸리지 않으세요?" 나는 그에게 수면제의 효과가 나타나는지가 궁금하여 질문을 하였지만, 그는 졸리지 않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히잉~ 역시... 수면제는 안되는 모양이네!' 결국, 나는 팔자에도 없는 황태자의 어깨를 안마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한가지 궁금 한 것이 생각난 나는 그에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황태자님이 예전에 쓰셨던 텔레포트 마법 말이에요. 그거 혹시 용언 마법 아니었어 요? 주문없이 그냥 하던데..." "응, 맞아! 용언 마법... 라비스는 용언 마법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나 보지?" "네, 예전에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용언 마법은 드래곤들만의 특권이 아니 었나요?" 물론 책에서 봤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 책이 판타지 소설책이라는 것이 조금 문제 였지만...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나는 나면서부터 특별했는지 어렸을 적부터 마법에 큰 재능을 보였 다가 성년이 된 후로, 용언 마법을 행할 수가 있었어! 어떻게 보면, 인간이 드래곤의 능력을 갖는다는 것이 황당한 일이기도 하지만, 멋진 능력이니 그리 나쁘지도 않더군!" 그런식으로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그는 스스로가 하프 드래곤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 다. 아무튼, 그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자수정을 닮은 은보 라빛 눈동자가 나의 얼굴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헉! 뭐야? 드래곤 피어인가? 아닌데...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으니... 그런데, 왜 이렇게 꼼짝 을 할 수가 없지?' 왠지 그의 눈빛으로 인해 나의 몸이 굳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도 마주보았다. 과연, 황태자의 얼굴은 왠만한 미녀들도 통곡하고 갈 만한 단아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아름 다운 얼굴이 나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우엥~ 왜 그런 얼굴로 이렇게 가까이 오는 것이야?' 그의 얼굴이 내 앞으로 10cm정도 떨어진 거리까지 다가온 순간 그는 갑자기 내 가슴 안쪽 으로 푹 쓰러지더니,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참으로 황당하다면 황당한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수면제를 먹고 계속 멀쩡한 듯이 얼마간 있더니, 갑자기 이렇게 약효가 나타나다니... 하지 만, 나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으... 되게 무겁네~ 잠들거면 진작 좀 잠들 것이지!" [37] 체인지(Change) 제7화 -마법 매우기!- (1) (마법 배우기) -1- 백합궁의 후원... 이름은 백합궁이건만, 정원에는 장미를 비롯한 이름 모를 화려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 었다. 몇일째 요즘, 나는 마법을 배우는 일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황태자는 시간이 날때마다 나에게 와서 마법을 가르치는 일을 했는데, 나에게도 마법에 대한 소질이 있었는지, 그는 마법에 대해 이해가 빠르다며 나에게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물론, 칭찬에 약했던 나는 들뜬 마음으로 마법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자연 히 마법을 이해하는 속도가 빨라진 것이었다. 초여름이라는 이름의 계절이 이곳에도 다가오려는지 날씨는 무척 무더워져 있었다. 나는 얇 은 천의 심플한 드레스를 입은체, 정자 비슷한 곳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다 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카엔?" 나는 황태자님에서 어느덧 미카엔으로 호칭을 바꾸고 있었다. 물론, 황태자는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좋다며, 계속 이름을 부르게끔 했고 나 역시 딱딱한 황태자님이란 말보단 이름을 부르는 것이 나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 나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렇게 황태자의 이름을 불러보았으나 다가오는 그 누군가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이때 즈음이면 황태자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올 법도 한데... 고개를 돌려 그 누군가를 바라본 나는 흠칫 놀랬다. "엔카루스?" 그러자, 긴 흑발을 단정하게 묶은 엔카루스는 피식 웃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어! 오랜만이군. 그런데, 황태자의 이름을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다니... 요즘 사이가 좋은 모양이지?" 나는 경계의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왜 왔지?" "왜 왔냐니? 이거 섭하군! 당연히 라비스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왔지! 우리는 찐한 키스뿐 만 아니라 사랑의 도피도 감행했던 사이이잖아? "웃기고 있네..." 왠지 이 녀셕과 더 이상의 대화를 하면 나만 불리해질 것 같다는 느낌에 나는 책을 덮고 벌 떡 일어섰다. 그러나, 엔카루스는 나의 손을 꽉 잡더니, 확 잡아당겼다. 결국, 나는 다시 주저앉게 되었고 그런 나를 보며 엔카루스는 빙긋 웃어보였다. "이게 무슨짓이야?" 나는 그를 최대한 매섭게 째려보며 소리쳤다. 그러나, 이런 나의 눈빛이 그에게 먹혀들어가 지 않았는지 그는 여전히 두꺼운 낯짝을 하고는 나에게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매몰차게 구는 거지? 난 그저 잠깐 얘기나 할까 하려는데..." "그래? 아사밸라가 시켜서 온 것은 아니고? 너 아사밸라의 오빠 맞지?" "아항! 그거 때문에 혹시 삐진 건가? 그나저나, 벌써 눈치 채고 있을 줄은 몰랐군. 맞아! 황 태자의 두 번째 측실, 아사밸라가 나의 여동생이지." "그래? 그렇다면, 그때 나를 납치하고는 어떻게 하려고 했었지?" "처음엔, 간단하게 죽일까 했었는데 널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어! 이렇게까지 네가 이쁜 줄 은 몰랐지! 그래서, 나의 첩으로 삼을까 생각했었는데, 그런식으로 네가 도망을 가버릴 줄 이야..." 결국, 나는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그의 얼굴에 날렸다. 그러나, 엔카루스가 가만히 앉아 서 나의 주먹에 맞아줄리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나의 손목을 꽉 움켜 잡았다. 나는 연약한 소녀의 육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힘을 당해내지 못했다. "이거 놔! 곧, 있으면 에드가 올거야!" "에드? 그 허약한 녀석 말인가? 훗... 그 녀석이라면 내가 아까 올 때 잠시 잠재워 났는데?" "뭐?" "걱정마! 그냥 잠만 재웠을 뿐이니깐... 흠, 이렇게 너의 붉은 입술을 보니 다시 키스하고 싶 어지는군!" '으헥? 이자식은 왜 또, 끈적하게 구는 거야!' "어?" 하지만 다가오는 그의 얼굴 뒤로, 무언가가 나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그것은 근처에 서 있던 평범한 나무였는데, 그 나무가 갑자기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도, 한쪽 방향으로.... 자라난 그 나무의 줄기는 곧장 엔카루스에게로 뻗어왔고, 엔카루스의 팔과 다리를 칭칭 동 여매기 시작했다. "아앗!" 나무 줄기는 마치 거대한 구렁이가 되어 꿈틀대는 것처럼 엔카루스를 사정없이 동여매었고,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검을 뽑아내지 못한 엔카루스는 마법을 쓰기로 했는지 뭔가 중얼 중얼대며 캐스팅을 하기 시작했다. "화이어 애로우!!" 캐스팅을 마친 그는 낮게 마법의 시동어를 외쳤다. 그러자, 세 개의 불의 화살이 그의 근처 에서 생기더니 그에게 묶인 나무 줄기를 공격했다. 화르르~!! 불이 붙은 나무 줄기는 움찔하는 듯한 모양새를 잠시 보였고, 이로 인해 잠시 틈이 생긴 것 을 틈타 엔카루스는 검을 뽑아내어 나무 줄기들을 싹뚝 싹뚝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무 줄기들은 계속 자라났고, 이번에는 나무 줄기 중 하나가 엔카루스의 목을 향해 순 식간에 다가왔다. 물론, 정신없이 쏟아져 나오는 나무 줄기들을 잘라내느라 엔카루스는 그것을 미처 피하지 못했고, 결국, 목이 졸리고 말았다. "크흑!!" "아... 아멘시타?" 나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 나무에 아멘시타가 들어온 것을 짐작하고는 낮게 그의 이름 을 불러보았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잠시, 엔카루스의 목을 조르는 듯 하던 나무 줄기는 어느덧 힘이 빠졌는지, 스르르 풀려나 게 시작했다. "아! 죽었어..." 나는 나직히 중얼거렸다. "뭐?" 죽다 살아난 엔카루스는 자신의 목을 어루만지며 나의 말에 반문했다. "저 나무, 죽었어... 자신의 수명을 잔뜩 써서 한순간에 자라나버린 탓에 죽어버렸어! 히잉~ 네 탓이야! 저 나무에는 아멘시타가 들어와 있을텐데... 나를 구하려다 죽어버렸단 말이야! 돌려놔! 이 자식아! 우에엥~" 불에 타고 토막난 나무 줄기를 보며 내가 울어버리자 엔카루스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어 쩔 줄을 몰라 했다. "라비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멘시타가 저 나무에 들어와 있다고? 혹시, 아멘시타라는 존 재가 나무 정령이야?" [38] 체인지(Change) 제7화 -마법 배우기!- (2) -2- "흐어엉..." 화려한 꽃들이 만발한 후원 안의 정자에 두 남녀가, 그것도 한창 나이의 청춘의 두 남녀가 단둘이 있으면서, 여자는 울고 있고 남자는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는다면, 사정을 모르는 다른 이들은 무슨 상상을 할까? 게다가, 하늘은 푸르름을 자랑하며 화창하게 개어 있었고 은은한 꽃향기가 섞인 실바람까지 불어 나를 주위로 한 배경은 정말 로맨틱한 분위기를 한껏 연출하고 있었다. 다만... 조금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서있는 주위로 아무렇게나 굴러 다니는 나무토 막들이었다. 아니! 아멘시타가 잠시 몸 담았던 나무의 잔해라고 해야 되나? 지금까지 두꺼운 낯짝으로 어느 것에도 흔들림이 없을 것 같던 엔카루스의 뻔뻔하던 얼굴은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얼굴이 되어 나에게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떻게 할거야? 아멘시타는 내가 의지했던 몇 안되는 존재 중 하나였는데! 네가 죽였어!" 내가 표독스럽게 소리치자 이번만큼은 그는 미세하게 움찔해 보였다. 그러나 나에게 뭔가 할말이 생긴 듯 입을 열려고 하였으나, 나는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당장 꺼져! ×자식! 다시는, 내앞에 나타나지마!!" 그러자, 그는 그의 특유의 무표정하고도 잘난척하는 듯한 -흔히들 재수없는 표정이라 말하 죠!- 차가운 얼굴이 되더니, 나에게 입을 열었다. "좋아! 라비스, 네 말대로 당장 네앞에서 사라져주지! 하지만, 이것만은 말해야 하겠군! 네 가 말하는 아멘시타가 만약 나무정령이라면, 아멘시타는 죽지 않았어. 쿡! 어쨋든, 오늘 내가 너를 찾아온 보람은 있군!"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리 얄미운 엔카루스였지만,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방금, 태자궁의 시녀가 이곳을 지나갔지! 물론, 우리 둘의 다정한 모습도 보았고... 얼마 안 있으면, 꽤나 흥미로운 스캔들이 이곳 태자궁을 돌겠는데?" 나로서는 황태자가 나와 엔카루스의 사이를 의심한다 하더라도 별상관은 없었지만, 그것은 내 생각처럼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몇일전에 나는 앤시아로부터 한가지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프레야 황비가 황태자비였고 지 금의 왕이 황태자였던 시절에 왕에게는 여러명의 측실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어떤 기사와 바람을 피는 바람에, 이에 노한 왕은 그 후궁과 기사를 사형에 처했다 는 어쩌구니 없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스캔들에 휘말려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부 글부글 끓는 화를 억지로 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입을 열었다. "엔카루스! 나에게 이런 일을 하는 이유가 뭐지? 네 동생 때문이야?" "글쎄...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네가 황태자와 잘사는 꼴은 못본다는 거지! 의미는 네 마음대로 생각해! 아, 이만 가보아야 하겠군." 그는 애매모호한 말을 하고는 그대로 돌아서서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에 게 더 할말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그의 등을 향해 약간 높인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만약, 그런 소문이 돌아 황태자의 귀에 들어간다면, 너 역시 무사하지 못할텐데?" 그러자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는 돌아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아! 그렇군. 역시, 라비스는 영리하다니깐! 후훗... 난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는 성 격이라서... 만약, 황태자의 불호령이 너와 나에게 떨어진다면, 그때가서 생각해보도록 하지! 그럼, 다음에 또 보자구!" 그렇게, 무책임한 말만 늘여놓고는 그는 그대로 돌아서서 가버렸다. '무슨 속셈이지? 엔카루스... 정말 신경쓰이는 놈이야!' * * * * 나는 나의 침실의 침대 위에서 한시간째 정좌를 하고 앉아있었다. 그동안 책에서 배운대로 공기중에 어딘가에 퍼져있는 마나를 느끼기 위해서였다. 꼬르르... 저녁도 먹지 않고 계속 이짓을 하고 있었더니, 배속에서 아까부터 밥 달라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웅~ 배고파! 루이스에게 밥 좀 갖다달라고 할까나?'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화장대 앞으로 걸어가서 땋아놓은 황금 빛 머리채를 풀어 빗으로 빗어내리기 시작했다. 살짝 웨이브가 진 나의 머리카락이 촛불의 빛에 반사되어 화려하고도 매혹적인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치, 순금 가루를 머 리카락에 뿌려놓은 듯 했다. "훗... 이젠, 이런 나의 모습에도 적응을 한 것인가? 하는 짓이, 정말 계집애가 다 되어있군! 입고 있는 드레스도 이젠 너무나 익숙하고... 역시, 영혼은 육체에 몸담고 있는 동안은 그 육체에 속박을 받는 것일지도..." 그때, 다소 다급하게 느껴지는 익숙한 시종의 목소리가 방문 밖에서 들려왔다. "황태자 전하 납..." 하지만, 그가 말을 미처 끝맺기도 전에, 침실의 방문이 벌컥 열어젖혔다. '후유~ 역시, 그가 뭔가를 듣고 온 모양이군...' 나는 차분한 태도로 황태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평소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방긋 지어 보이며 그를 맞았다. "미카엔! 오늘은 무지 일찍 오셨네요?" 하지만, 그는 왠일인지 나의 말을 씹고는 그대로 나를 지나쳐 쇼파로 걸어가서 털썩 앉았 다. 항상 부드럽기만 한 그에게서 썰렁한 기운이 풀풀 나는 것이, 왠지 불길하기 짝이 없 었다. "라비스? 내가 왔으니, 어서 론티아 꽃잎 차를 내와야 하겠지?" "네?" 그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나는 식은땀이 다 났다. "그런데... 론티아 꽃잎 차는 향은 좋은데 마시고 나면, 너무 졸려서 말이야! 훗... 아무래도, 이젠 차는 마시지 말아야 하겠어! 라비스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는 시간이 줄어들잖아? 하아~ 그나저나, 나도 정말 큰일이군! 아무리, 언짢은 일이 있더라도, 라비스의 얼굴만 보 면 이렇게 풀어지고 마니..." 그렇게, 나를 한동안 바라보던 냉랭한 황태자의 얼굴에서 점차 표정이 생기는 듯 하더니, 이윽고 피식! 하며 낮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뭐, 뭐야? 저 표정 변화는...' 나는 더욱 불안해졌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그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라비스! 나 오늘은 정말 우울해! 오늘 저녁은 너의 달콤한 목소리와 미소로서 위로 좀 해 줘!" 그가 나에게 말하는 단어들은 대게 닭살스런 내용이었지만, 오늘은 특히나 '달콤한 목소리' 라는 어구가 나에게 거부감을 안겨다 주었다. '에휴~ 어떤 우울한 일이 있었냐는 질문은 차마 못하겠군!' "아! 근데, 마나 느끼는 일은 잘되어가?" "아니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의 말에 답했다. 그러자, 황태자는 빙긋 웃더니 입을 열었다. "저런! 라비스의 시무룩한 표정이라니... 마나가 잘 안 느껴져서 많이 속상한 모양이지? 아 무래도, 오늘 밤은 내가 라비스의 마법 선생이 되어야 하겠군!" 꼬르르... 그때, 주책맞게도 분위기 파악을 못한 나의 배속이 또 다시 밥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풋! 라비스, 아직 저녁을 안먹었어? 으흠... 저녁부터 먹는 것이 좋겠군! 사실, 나도 저녁은 굶었거든."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나의 침대 옆에 매달려 있는 어떠한 끈을 잡아 흔들기 시작했다. 그 끈은 바로 옆방의 루이스의 방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끈을 잡아 흔들면 루이스의 방에 있는 작은 종이 울리게 된다. 이것은 왠만한 귀족 집에서 하녀나 하인을 부르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호출 시스템(?)으로서, 전화기나 핸드폰이 없는 이곳에서는 널리 애용( ?)되고 있었다. 곧, 루이스가 왔고 황태자는 그녀에게 저녁식사 2인분을 가져올 것을 명령했다. [39] 체인지(Change) 제7화 -마법 배우기!- (3) -3- 깨작 깨작... 조금전 까지는 배가 고팠던 나였지만, 황태자의 눈치를 보느라 입맛이 싹 달아난 나는, 먹 는둥 마는둥 하고 있었다. "라비스! 왜 그렇게 못먹어? 내가 먹여줄까?" 어느덧 장난기가 자수정빛 눈동자에 가득 맺힌 황태자는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물론, 그는 내가 안색이 변하며 그의 제안을 거절할 것이란 것을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로 그런 질문을 했을 것이다. "에엑! 미카엔, 혼자 먹을 수 있어요!" 그리고, 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나는 펄쩍 뛰며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황태자 는 그런 나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킥킥~! 역시, 라비스는 너무 귀여워! 먹는 모습도 너무 예쁘고... 한가지 흠이라면, 애교면 에선 빵점이란 거지." '그래... 애교가 없어서 퍽도 미안하다! 그런데, 저 녀석의 심중을 알 수가 없네? 분명히 더 러워진 기분으로 모든 일도 팽개치고 이 곳을 찾은 것 같은데... 이대로 안심해도 될까?' 조금전 냉랭했던 기운은 말끔히 사라지고 평소의 그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카엔?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죠?" 그러자, 황태자는 여전히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체 나에게 말했다. "남편이 사랑스러운 아내에게 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설마, 라비스! 내가 너에게 잘하 는 것에 대해 불만있는 것은 아니겠지?" "하하... 불만은 없지만..." 물론, 그가 나에게 한마디 한마디를 할 때마다 내가 닭이 될 것 같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나의 운명을 쥐고 마음 내키는대로 행동할 수 있는 황태자의 앞에선 무조건, 조신하게 행 동하는 것이 앞으로 내가 살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도 강해져야 하겠지? 물론, 드래곤을 한방에 때려눕히는 것까지는 안 바래도 나의 몸을 지키고 숨길 줄은 알아야 하겠지...' 그렇게 마음을 잡은 나는, 황태자에게 방긋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미카엔! 오늘 밤은 미카엔이 나의 마법 선생이 되어준다면서요!" "물론, 라비스가 원한다면 기꺼이 그대의 마법선생이 되어드리지! 하지만, 조건이 있어!" '에휴~ 절대로 공짜는 없는 녀석이군! 흐음... 근데, 이상한 것을 요구하면 어쩌지?' 내심 불안감이 느끼지긴 했지만 짖궂은 생각이 들은 나는, 내가 먼저 선수를 치기로 마음먹 었다. 그래서... "조건이라니요? 그럼, 제가 키스라도 해드릴까요?" 그러자, 황태자의 투명함을 자랑하며 뽀얗던 얼굴이 -남자 주제에 여자보다 피부가 더 좋 다.- 확 달아오르더니 잘 익은 홍당무가 되어, 순간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흐음... 엔카루스 못지않게 뻔뻔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 훗! 잼있다.' 예전, 이도현이었던 시절이었을 때도 나는 나의 말 한마디에 상대방이 당황하는 모습을 은 연 중에 즐기곤 했는데, 지금 라비스가 되어서도 나는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나! 황태자님, 얼굴이 붉어지셨네요? 더우세요?" 나는 천연덕스럽게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묻자 그는 더욱 얼굴을 붉히며 나에게 심 통난 듯이 입을 열었다. "붉어지긴, 누가 붉어졌다는 거야? 흠, 그런데 방안 공기가 좀 덥군! 환기나 시킬까?"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 베란다 쪽으로 걸어갔다. 물론, 황태자의 의외 의 반응에 재미를 붙인 나는 그의 뒤를 따라나갔다. 황태자는 뒷모습을 보이며 수많은 별들이 총총히 떠있는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는데, 그 는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았는지 다소 고요해 보이는 얼굴이 되어있었다. 그때, 약간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황태자의 가느다란 은빛실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했 다. "정말 멋진 하늘이지?" 황태자는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에게 입을 열었다. "그러네요..." "사실, 난 너에게 마법을 가르쳐주는게 썩 내키지가 않아... 너에게 날개를 달아주면 저 하 늘로 날아올라가 버릴 것 같거든... 하지만, 라비스는 마법을 배우는 것을 원하지?" "……." "가르쳐 줄게... 처음엔 그저 라비스의 기뻐하는 얼굴이 보고싶어서 마법을 가르쳐 준다고 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왠지 불길한 생각이 들어! 너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면 언젠가는 꼭 후회할 것 같거든..."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싱긋 웃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라비스... 눈을 감아봐!" 그의 말에 나는 별생각없이 눈을 감았다. 그러자, 사락거리며 그의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나의 입술에 와 닿았다. 놀란 나는, 눈을 떠보았고 곧, 신비한 광경이 나의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예전엔 한번 본적이 있었던 은빛의 빛무리가 회오리치듯 나의 주위로 휘몰아치기 시작했고, 그 빛들은 모두 나에게 빨려들 듯 몰려들더니, 나의 육체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미...카엔?" 나의 육체를 꽁꽁 얼려버릴 듯한 기운들이 갑자기 내 몸안에서 요동을 치기 시작했고 그 힘 을 견디지 못한 나는 힘을 잃고 쓰러지면서 그의 이름을 가까스로 불러보았다. [40] 체인지(Change) 제7화 -마법 매우기!- (4) -4- 이제 막 돋아난 듯한 연녹색의 신록이 부드러운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고, 푸른빛을 띠기 시작한 잔디는 그 싱그러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경쾌한 새소리가 나의 귓가를 즐겁게 해 주었고, 꽃향기가 섞인 봄내음이 나의 코끝을 간질였다. "라비스! 이리온. 꺄하하... 다니엘, 정말 예쁘지 않아요?" 이곳은 굉장히 익숙했다. 그리고, 나를 부르는 저 여인의 목소리도 어쩐지 익숙하게 들렸다. '아! 여긴, 크로시벨가의 후원...' 나는 나를 부르는 여인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너무 어려서 뛰어봤자 뒤뚱거 리는 걸음걸이 이상은, 빨리 뛸 수가 없었다. "엄마아~!!" 나이를 많이 먹어보이는 나무의 굵은 가지에 그네를 매달아 놓았는데, 그녀는 그곳에서 그 네를 타고 있었다. 황금빛 긴 머리카락에 황금빛 눈동자... 라비스의 모습과 굉장히 닮아 있었지만 그녀는 더욱 성숙해 보였다. 내가 그렇게 그녀의 품으로 뛰어들자 그녀는 나를 안아들었고, 나의 얼굴을 부비부비하며 끊임없이 웃음소리를 내었다. "하하하... 셀레나! 그러다 라비스의 얼굴이 닳아지고 말겠소!" 그녀의 뒤에 서있던 다니엘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지금보다 10년이상은 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평소 그에게서 결코 볼 수 없었던 따뜻한 미소가 얼굴 전체에 머물러 있 었고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이쁜 걸요! 나는 라비스를 이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숙녀로 키울거에요!" * * * * "라비스님? 흐흑... 정신 좀 차리세요!" '이건, 루이스의 목소리?' 나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떠보았다. 그러자, 눈에 눈물이 고여있었는지 눈을 뜨자마자 주루 룩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추워! 루이스..." 정신이 어느 정도 들자, 나는 온몸이 바르르 떨리는 극심한 추위를 느끼며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아니! 이런 초여름의 날씨에 솜이불을 잔뜩 뒤집어 쓰셨는데도 추우세요? 이를 어째? 도대 체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라비스님! 제가 따뜻한 수프를 끓여왔으니 어서 먹고 기운을 차리세요!" "웅, 근데 루이스! 나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아! 그것 때문에 눈물이 나온 것 같은데... 왜이 렇게 잘 생각이 나지 않지? 뭔가 행복한 꿈을 꿨던 것 같은데..." 그러자, 루이스는 자상하고도 포근해 보이는 미소를 나에게 지어보이며 나를 토닥였다. "아마도, 라비스님의 어머니에 대한 꿈을 꾸셨겠지요! 라비스님은 어릴적부터 말씀하시곤 하셨죠. 어머니의 꿈을 꾸는 날이면, 그날은 정말 행복하다고..." "아! 그리고보니, 굉장히 그리운 느낌의 꿈이었던 것 같아!" "호호... 그러셨어요? 행복한 꿈이야기도 좋지만, 스프가 다 식겠어요! 얼른 드세요!" 루이스는 은접시에 담긴 수프를 들고 나를 채근하기 시작했고,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알았어! 루이스." 뜨거운 스프가 나의 배속으로 들어가자 나의 체온도 따라 올라가는지 추위도 어느정도 가셨 다. 나의 몸안에서 휘몰아치는 듯한 차가운 기운도 이제는 잠잠해진 듯, 몸과 마음이 평 안해졌고 그로인해 기분까지 괜시리 좋아졌다. "앗! 라비스님, 천천히 드셔야죠! 스푼은 놔두고 그냥 마셔버리시면 어떻해요?" "잘마셨어! 루이스... 음, 이젠 몸도 거뜬해졌으니 일어나야 하겠어!" 접시를 그녀에게 주며,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약간 어질했지만 내가 몸을 움직이는 데 에는 그리 문제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어? 벌써 해가 중천에 떴네? 앗! 그러고보니, 미카엔 녀석! 어제 마법 가르쳐준다고 해놓 고 가르쳐주기는커녕, 나에게 무슨 짓을 한거지? 가르쳐주기 싫으면 말로 할 것이지! 괜히 술 수 써서 나를 기절 시킨거냐고!!!" 그제야, 어제밤에 창밖 베란다에서 기절했던 것이 생각난 나는, 황태자에 대한 험담 비슷한 말을 늘여놓으며 뒤늦게 분개해 했고 그런 나의 모습을 본 루이스는 까무잡잡했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나에게 말했다. "라비스님! 황태자님께 그런 불경한 말씀을 하시다니요? 그러다 누가 듣기라도 한다면..." "흥! 듣긴 누가 듣는다고 그래? 아웅~ 그냥 마법 공부나 해야겠다." 그녀에게 그렇게 시큰둥한 얼굴로 대충 응수해주고는 나는 베란다에 의자를 하나 갖다놓고 그곳에서 책을 펼쳐들었다. 그러자, 제법 따가워진 햇살이 나의 피부에 와 닿았다. "라비스님! 그곳에서 책을 보시면 피부가 상하고 말거에요!" "나도 알아! 하지만, 밖의 공기를 쐬면서 하고 싶어."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기이한 문자들이 어지럽게 쓰여진 책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나름대로 집중을 하며, 그 문자들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데, 밑에 시녀들이 지나 가면서 떠드는 소리가 문득 들려왔다. "요즘, 아사벨라님! 정말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니? 그동안 혼자 잘난척, 황태자비님마 저도 무시하고 그랬었잖아?' "맞아! 정말, 게다가 성격도 좋지 않아서, 아사벨라님에게 당한 시녀들도 한둘이 아닐걸?" "킥킥! 그동안 황태자님이 몇번 찾아주셨다고 그의 총애를 얻은 것처럼, 으시대더니 정말 안 되었어! 라비스님이 들어오신 뒤로 황태자님은 매일같이 라비스님만 찾으시잖아?" "하지만, 황태자비님이 너무 가련하지 않아? 이젠 황태자님의 얼굴 구경조차 하기 힘들어졌 을 거 아냐?" "하긴, 그래..." 붉은 머리 소녀의 말 끝으로 그녀들의 말소리는 멀어져갔다. '흐음... 그러고보니, 난 아직 황태자비의 얼굴을 보지 못했네? 언제 한번 안부 인사겸, 찾아 가 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다시 책에 몰입을 했다. 그러기를 두시간... "앗!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네? 드디어 찾아냈어! 우와~ 신기해! 그럼, 이젠 매직 미사일의 스펠(마법주문)을 완성해 볼까?"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마나의 흐름과 성질에 맞는 스펠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기초 마법에 속하는 매직 미사일을 만들어내는 일이었지만, 나는 30분여간을 끙끙거리며 머리를 쥐어짜 내었다.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 쥐가 날 지경이었다. "히잉~ 수학의 미적분 푸는 일보다 수천배 어려운 일인 것 같아! 새삼, 마법에 탁월한 소질 을 보이는 미카엔이 존경스러워지네!" 스펠을 다 완성한 나는 그것을 나직히 읊조렸다. "후훗... 이젠 시동어만 외치면 되겠군! 그런데, 어디다가 쏘아보낼까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정면의 허공 위로 쏘아 올리기로 맘을 먹고 첫 번째 마법 시동 어를 외치는 역사적인 이 순간을 잠시 기쁜 마음으로 누렸다. "나가라! 매직 미사일~!!!" 그냥 매직 미사일이라 외쳐도 되지만, 조금 폼나게 하고 싶었던 나는 매직 미사일이란 단어 앞에 나가라! 라는 단어를 멋지게 덧붙였다. 그러자, 내가 서있는 근처의 허공에서 마나로 보이는 은빛의 작은 빛무리가 결집되더니 금세, 한 개의 화살 형태로 형상화 되었다. "꺅! 멋져! 내가 마법을 쓰다니! 역시, 난 천재였던가?" 그렇게 흥분을 나는 자화자찬하며 수선을 피웠다. 그러나, 어느덧 한 개의 화살의 형태를 갖 춘 그것은 내가 발동한 매직 미사일이 아니라 아이스 미사일이었다. 슈웅~! 그것은 단숨에 날아가더니, 황태자궁 중에서 가장 높아보이는 건물의 지붕으로 가, 콰과광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흠집이 난 지붕의 부스러기가 떨어지며 나를 경악으로 치 닫게 만들었다. "허걱! 저게 뭐야? 난 아이스 미사일을 만든적이 없는데? 게다가 황태자궁의 지붕에 가서 맞다니! 난 이제 죽었다." [41] 체인지(Change) 제7화 -마법 배우기!- (5) -5- 여기는 왕비가 머무는 장미궁... 역시, 왕비가 머무는 궁이라 그런지 다른 후궁전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고 건축물의 정교함과 우아함 그리고 화려함이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보는이로 하여금 주눅에 들게 하는 위엄마저 서려있어, '로히얀스왕국'에서 여인으로서는 제일가는 귄위를 지닌 왕비가 머물고 있음을 은연 중에 나타내었다.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은, 그러한 장미궁의 응접실... 프레야 왕비는 나를 비롯한 황태자비와 아사벨라 그리고 유리스를 불러 한자리에 모아놓고 우아함 몸짓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며느리(?)들과 함께 티타임을 즐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황태자비! 그대는 요즘, 바깥 출입을 거의 안하는 것 같더군. 혹여, 건강이 좋지 못한가?" "황공하옵니다. 제가 요즘 감기 몸살이 있어서 그동안 왕비 전하을 자주 찾아 뵈옵지도 못 했습니다. 용서하옵소서!" 약간 가냘프다는 느낌을 주는 붉은 머리의 여인이 왕비에게 변명 비슷한 말을 아뢰며 머리 를 조아려 보였다. 그러자, 왕비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감기 몸살이라니... 쯔쯧, 그대는 몸이 허약한 편이니, 몸조리에 신경을 좀더 쓰도록 하시 오!" "망극하옵니다." '흠... 사극에서나 나오는 단어들이 여기서 불쑥 불쑥 튀어 나오는군! 그런데, 저 황태자비라 는 여자... 왠지 가냘퍼 보여서 남자들이 지켜주고 싶어하는 타입인데... 왜 황태자의 관심을 그리 못받는 것이지? 얼굴도 저 정도면 중간 이상은 되고... 몸매는 날씬하긴 한데, 너무 밋밋하군!' 왕비와 황태자비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그렇게 잡생각에 빠져 있는데... "...비스! 그대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가?" 어느덧 왕비의 시선이 나에게 옮겨져 있었는지, 나를 질책하는 듯한 왕비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의 목소리에 퍼뜩 놀란 나는, 헤헤 웃으며 슬쩍 넘어가는 말을 했다. "황태자비님께서는 정말 품위 있으시고 아름다우신 분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건 강이 좋지 못하시다니... 하루 빨리 쾌차하시길 빌겠습니다." 빨리 쾌차하라는 부분에서는 황태자비를 향해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방긋 웃어보였다. 그러 자, 그녀는 고맙다는 의미의 미소를 나에게 살짝 지어보였다. 가냘픈 그녀의 인상답게 성 품도 매우 얌전한 모양이었다. "호호... 황태자비가 품위와 여인으로서의 덕목을 갖추긴 했지만, 미색으로서는 그대가 출중 하지! 그대라면, 예전에 여신의 미모를 갖었다는 크리스티나 아르젠하고도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그녀의 말에 나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조신하게 입을 열었다. "과찬이시옵니다. 왕비 전하!" '으헥!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이다냐?' 퍽이나 여성스러운 나의 행동에 치를 떨면서도, 나는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옆에 앉아있는 아사벨라를 힐끔 보았더니, 그녀는 왕비가 나를 칭찬하는 말을 한 것이 배가 아픈지, 별로 좋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여기 온다고 했을 때 괜히 떨었네! 그냥 차만 마시는 것 뿐이잖아?' 처음, 왕비가 나를 찾는다는 말을 앤시아가 전했을 때 무지하게 쫄았었다. 황태자궁의 지붕 에 흠집을 내놓은 직후라 내심 찔렸던 나는 왕비가,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추궁하려는 것이 아닌가 했었다. 그 이유는, 내가 쏘아보낸 아이스 미사일 때문에 왕성이 한바탕 뒤집어졌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왕실 마법사들이 총 출동을 했었고, 왕실 기사들이 우왕좌왕 했었으며, 몇몇 왕실 치안을 담당하는 관리들이 왕에게 추궁을 받았다. 그때, 왕실 마법사 중에서 마스터 급으로 보이는 흰색 로브의 마법사가 이러한 말을 해서, 나를 더욱 웃기게 하였다. 그의 말로는... 「누군가가 황태자궁에 경고성의 공격을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그는 아무래도, 인페르디아국의 첩자로 보입니다. 그는 황태자님이 쓰시는 빙계마법과 매우 비슷한 성질의 마나를 사용하였는데, 그로 인해 추적이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왕성 중 심부까지 잠입하여 그런 기술을 쓴 것으로 보아 매우 대단한 마법사임이 틀림없습니다.」 물론, 그러한 일들은 모두 내가 대충 보고 시녀들에게 들은 내용들이었다. 어쨋든, 내가 친 사고는 그렇게 황당하게 끝을 맺게 되었고, 지금은 이렇게 여유있게 장미궁에서 차를 마 시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대들에게 미카엔의 후사가 없는지 정말 걱정이오! 이제 미카엔의 나이도 스 물 셋이나 되는데..." 내가 또 그렇게 잡생각에 빠져 있는데, 왕비의 한숨 섞인 말소리가 들려왔다. '엥? 이렇게 부인들이 많은데, 자식이 없어?' 왕비의 말에 나는 의아한 표정이 되어, 황태자비를 비롯한 후궁들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니, 그녀들은 매우 민망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들이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길이 없었기에 그저 풀리지 않은 궁금증으로 가슴에 묻어두어야 했다. "음... 벌써 날이 저무는군! 그대들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시오!" "네에..." 왕비의 말에 황태자의 부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역시, 그녀들과 함께 자리 에서 일어나 응접실을 나오려 하는데... "라비스!" 왕비가 나를 불러세웠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는 몸을 일으켜 천천 히 나에게 다가오더니 나직히 입을 열었다. "라비스! 그대는 미카엔의 사랑을 받는 유일한 인간이다. 난 그대를 지켜볼 것이니... 처신을 잘하도록 하시오! 미카엔, 그에게 받는 것이 많아질수록 그대가 받는 질투와 미움도 커질 것이란 것을 그대는 유념하도록 하시오." 그렇게,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나에게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러한 말을 하는 그녀의 표 정 역시, 지금까지의 엄숙하고 자애로운 얼굴이 아니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굉장한 카리스마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그러한 젊은 여인의 얼굴이랄까? '남자' 라면, 누구나 매혹되어 버릴 아름다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나는 절로 후들거리며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해 서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프레야 왕비가 자신의 드래곤 피어를 살짝 담아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나는 지금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두려움에 대해 의아해 했다. '혹시, 이 여자도 이중인격의 소유자가 아닐까?' 나는 그러한 생각을 해보았다. 왕비는 핏기 사라진 나의 얼굴을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너에게서 미카엔의 기운이 느껴지는군!" 왕비는 눈을 내리깔고 잦아드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그런 그녀를 보자 나는 이미, 황 태자비와 후궁들이 나가서 왕비와 나만 남게 된 응접실이 문득 갑갑하게 느껴졌다. "왕비 전하?"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내가 입을 열자, 왕비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원래의 엄숙한 얼굴을 하였다. "아! 내가 라비스의 시간을 너무 빼앗은 것 같군. 이제 그만 돌아가도록 하시오!"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나에게 빙긋 미소까지 보여주었다. 물론, 나는 그녀의 행동에 대해 의아해 했지만, 그녀에게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응접실을 나왔다. [42] 체인지(Change) 제7화 -마법 배우기!- (6) -6- 백합궁으로 돌아온 나는 서재에 들러 드래곤에 대한 책들을 모조리 골라내었다. 그리고, 젊 은 시종 두명을 시켜 그 책들을 나의 침실로 옮기도록 하였다. 오늘 원래 계획은 1서클의 마나를 이루기 위한 첫발을 내디디는 것이었지만, 약간 그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나의 방에다가 책들을 쌓아놓는 것을 본, 루이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입을 열었다. "아니! 라비스님... 설마, 이 책들을 다 보시게요?" "응!" "이 책들을 보니, 전부다 드래곤에 관한 내용인 것 같은데... 이것들을 모두 읽어서 뭐하시 게요? 드래곤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실 것도 아니고..." "훗... 갑자기 드래곤에 대해 잘 알아두어야 할 일이 생겼거든!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 백승이라는 말도 있잖아?" "네에? 전 무식해서 그런지,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한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데 요?" "그래?" 나는 그녀에게 대충 응수하고는 침대에 올라가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털썩 누운 다음, 책을 펼쳐들고 읽기 시작했다. "으음... 골드 드래곤은 현명하고 사려깊은 존재... 어쩌고 저쩌고... 인간 세상에 나타나 마 법사나 현자들과, 마법 혹은 세상의 진리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즐기며... 그들은 지혜롭 지만 자존심과 자부심이 다른 드래곤들보다 더 강하다? 흐응... 한마디로 인간 세상에 짜안 하고 나타나서 잘난체 하기를 좋아한다는 말이군! 그리고, 그들은 선함과 악함을 넘어서 서 언제나 중립을 고수하며... 에잇! 실버 드래곤 부분부터나 읽어보자! 실버 드래곤은... 대체적으로 친절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가지고 있지만, 반면 드래곤들의 특징인 냉철함과 잔인성도 지니고 있어 약간 이중적인 모습을 가진 드래곤이다... 그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세 상에 나와 인간들을 대할 때에는 언제나 친절한 모습이지만, 그들은 다른 드래곤보다 훨 씬 냉정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진실함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으음 ... 왕비는 그렇다 치고, 미카엔도 이런 이중적인 성격일까?" 그렇게 데굴데굴 침대 위에서 구르며, 책을 읽고 있으려니 졸음이 몰려왔다. 요즘 들어서 잠이 많아진 나였다. 그래서, 그렇게 엎드린 체로 깜박 잠에 들었는데, 누군가가 나의 머 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것을 느끼고는 퍼뜩 잠에 깨며 눈을 떴다. "음, 미카엔? 언제 왔어요?" 흘렸던 침을 쓰윽 닦으며 내가 그렇게 묻자, 미카엔은 씨익 웃어보이더니 고급스러워 보이 는 술병 하나를 나에게 보였다. "라비스! 벌써 잠들면 어떻게 해? 오늘은 내가 너와 한 잔 하려고 이렇게 좋은 술까지 가지 고 왔는데... 이게 뭔지 알아? 100년 가까이 묵은 최고급 레드와인이지! 굉장히 맛있을 거야." 술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인 나는 벌떡 일어났다. 나는 '애주가' 까지는 아니었지만, 술을 종종 즐기곤 하였기 때문에, 미카엔이 들고온 와인이 매우 반갑게 느껴졌다. 게다가, 아주 오래된 최고급 와인이라니... 나로서는 그동안 냄새도 못맡아 왔던 그런 고급 술이었기 때문에, 나는 금방 헤벌쭉해진 얼굴로 실실 쪼겠다. 미카엔은 두 잔의 크리스탈 와인 잔을 진열대에서 꺼내오더니 쇼파에 털썩 앉아 피빛의 붉 은 술을 잔에 또르르 부었다. "와아~ 이거 굉장히 귀한 술일텐데... 그냥 이렇게 마셔도 괜찮아요?" "음, 괜찮아! 게다가, 이건 라비스와 나를 위한 것이니깐, 이왕이면 특별한 술을 마셔야 하 겠지? 그리고..." 미카엔은 거기까지 말하더니, 말끝을 흐렸다. 게다가, 그에게 어울리지 않게 침울한 듯한 분 위기도 감돌고 있어, 의아해진 나는 갸웃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무슨일 있어요? 표정이 영 아닌데..." 내가 그렇게 묻자, 미카엔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 내일, 로젠다르에 가게 될 거야!" "로젠다르? 거기가 어디인데요?" 내가 여전히 갸우뚱하며 그에게 묻자, 미카엔은 그것도 모르냐는 얼굴로 나에게 답했다. "로젠다르는 우리나라 위쪽에 위치한 나라이잖아? 여기서 엄청 떨어진 곳이지! 아마, 그곳 에서 외교사절로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려면 시일이 꽤 오래 걸릴 거야... 그렇게 되면, 라비스의 얼굴은 얼마간을 보지 못하게 될텐데..." 그는 그렇게 말하며, 표정을 잔뜩 구겼다. "흐음... 그럼, 공간 이동으로서 갔다오시지 그러세요?" "물론, 마법을 써서 갔다오려면 금방 갔다 올 수 있겠지... 하지만, 그곳으로 텔레포트를 하 려면 왠만큼 정확한 좌표를 지정해주어야 하는데, 난 그곳의 길을 전혀 모르잖아? 게다가, '로젠다르'하고 우리나라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서, 그동안 왕래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어차피 국경 근처까지만 공간 이동을 해야돼! 그리고, 이번 사절의 일행이 시종을 포함 해서 수십명이 되기 때문에 나혼자 그들을 몽땅 그 먼거리를 이동시키는 것은 정말 버거 운 일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무척이나 가기 싫은 모양이었다. 나야 뭐, 그가 어디를 가든 말든 상관은 없었지만, -솔직히, 오히려 그가 잠시 떠나있음을 반기는 입장이었다.-그가 저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으니 그의 기분에 맞추어야 했다. "그래도, 돌아오면 다시 볼 수 있잖아요? 그러면, 오늘 이 술은 잠시 헤어지는 이별주가 되 겠네요. 그런데, 로젠다르에 가게 된 것은 갑자기 정해졌나 봐요?" "응... 사실, 내가 아니라 재상이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로젠다르에서 황태자나 왕이 직접 오 기를 요구했다는 거야! 그래서 결국은 내가 가게 되었지! 어쨋든, 오늘은 라비스를 마지 막으로 보는 거니깐... 우선, 건배나 할까?" 미카엔은 들고 있던 잔을 나의 잔에 살짝 부딪치더니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나 역시, 와인 을 홀짝대며 그 맛과 향을 천천히 음미해 보았다. "햐! 정말 맛있어요. 역시 좋은 와인이네요!" "그래? 하지만, 맛이 좋다고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 이거 의외로 도수가 꽤 높으니깐..." "걱정마세요! 저 보기보다 술 잘마시니깐요!" 하긴, 나는 술을 잘마시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도현이었을 때 일이라는 것을 나는 그만 간과하고 말았다. 세 잔째 마시는 와인에서 나는, 정신이 알딸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라비스? 너 얼굴이 붉어졌어! 설마, 취한 것은 아니겠지?" "웅? 이상하다... 벌써 취할 리가 없는데..." 나는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볼썽사납게도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휘 청하였고 다시 쇼파에 푹 주저앉았다. "이런, 너 술 엄청 약하잖아? 벌써, 이렇게 취하다니..." 미카엔은 맞은편 쪽에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나의 옆자리로 옮겨와 앉았다. 그리고는 나 를 감싸안으며 나의 얼굴을 보더니, 약간 원망섞인 듯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하였다. "아니! 라비스... 벌써 잠들어 버리면 어떻게 해? 오늘 후로는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할텐 데..." 물론, 나는 그의 목소리가 몽롱한 중에서도 언뜻 들렸지만, 다시 눈을 뜨기 귀찮았던 나는 그의 품에서 완전히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휴~ 벌써 40편째 올리는 군여! 비록 허접글이지만 정말 뿌듯하다는... [43] 체인지(Change) 제8화 -왕실 마법사가 되다!- (1) (왕실 마법사가 되다!) -1- 그 다음날... 나는 언제 침대로 옮겨졌는지 대자로 누워서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라비스! 일어나!" 누군가가 나를 흔들며 깨우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 눈을 뜨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누우 며 얇은 비단 이불을 얼굴 위로 끌어당겨 덮었다. "우웅~ 내버려둬! 귀찮아." 나를 깨우는 그 누군가가 바로 미카엔이며 그가 황태자란 신분임을 인식하지 못한 나는, 정 말 귀찮다는 듯이 웅얼거렸다. "뭐? 귀찮아?" 쬐금 열받은 듯한 미카엔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여전히 잠에 취해 쌔근쌔근 숨소리를 낼 뿐이었다. "라아비스~!! 얼른 일어나지 못해? 안그러면 확 덮쳐버린다?" 결국, 나는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높아진 미카엔의 목소리에 잠이 달아났다기 보다는, 그가 말한 내용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었다. '으이그... 내 팔자야! 내가 저런 말에 찔끔하고 놀래서 잠을 깨다니! 증말 싫다~' 표정을 있는대로 구긴 나는 속으로 툴툴대며, 벌써 일어나서 나를 깨우고 있는 미카엔을 바 라보았다. 그는 일어난지 꽤 오래되었는지, 벌써 말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있었고 은빛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묶고 있었다. '부지런한 녀석...' "라비스! 지금, 나와 같이 폐하께 알현하러 가자! 시간이 없으니깐 서둘러!" 나는 그가 한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해, 그저 커다란 눈만 깜빡이며 미카엔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께... 알현이요?" "그래! 루젠다르국에 너랑 같이 가겠다고 말할 생각이야! 어제 밤새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 래도 너와 같이 가야할 것 같아. 어때? 너도 나랑 같이 가는 것이 좋지?" 순간적으로 표정이 팍 구겨지려는 것을 간신히 피며, 나는 그에게 반문했다. "같이 가자니요? 저는 외교사절로서 루젠다르에 갈 자격이 없지 않나요?" "물론 없지만, 자격이야 만들면 있지! 내게 맡겨!"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는 그를 보자,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하지만... 미카엔!" 나는 그에게 더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는 더 이상 나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는 분주해 보이는 태도로 시녀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고, 얼른 나의 시중을 들 것을 그녀들 에게 명령했다. '휴~ 미카엔 녀석...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친절한 성격인 듯 하다가도, 가끔보면 자기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독단적인 면을 보인다니깐! 나의 의견은 조금도 듣지 안잖아? 나아쁜 녀석!' 오늘로서 미카엔을 안보게 되나 했더니,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젠 '루젠다르' 라는 곳까 지 그를 따라가게 생겼다. 정말 생각할수록 한숨만 나왔다. '제길! 안간다고 버틸수도 없고... 아! 꾀병이나 부려 볼까? 아냐! 그에게 조건이나 달아보는 것이... 어차피, 루젠다르에 가게 될텐데. 여행 떠나는 셈치고...' 이리 저리 머리를 굴려보며 내 나름대로 결정을 내린 나는 그에게 입을 열었다. "미카엔! 이러면 어떨까요? 저를 왕실 마법사로 만들어 주세요! 그래서 황태자님을 보필하 는 왕실 마법사의 자격으로 외교사절이 되면 안될까요? 물론, 미카엔이 마법이 출중하다는 것을 루젠다르 측에는 숨기면서 말이에요!" "저기, 라비스! 미안하지만, 우리나라는 여자를 왕실 마법사로 뽑지 않는데? 저들도 그 쯤은 알고 있을 거야! 하지만, 저들은 내가 마법이 출중하다는 것은 알지 못하지! 나는 능력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으니깐... 어차피, 나도 나의 능력을 그들에게 숨길 생각이었지만 , 너를 왕실 마법사로 만드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 "전혀 무리일 것 까지는 없어요! 제가 남장하면 되죠!" 내가 그렇게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하자, 미카엔은 약간 황당하다는 듯한 빛을 내보이며 입을 열었다. "뭐어? 남장? 풋! 라비스, 네가 남장이 어울릴 거라 생각하는 거야? 너같이 여성스럽고 예 쁜 애가 남장을 하면..." 하지만, 미카엔은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나의 이마에 불끈 솟아오른 힘줄을 보았기 때문 이었다. "제가 남장이 어울리지 않는지는 해봐야 알겠죠!" 그에게 단어 하나 하나 강조하듯이 힘을 주며 말한 나는, 몸을 휙 돌려 수납장으로 성큼성 큼 걸어갔다. 그리고, 조그만 루비가 박힌 단도를 찾아낸 나는 그것을 미카엔에게 내보이며 싱긋 웃어보였다. "설마, 그것으로 머리카락을 자르려는 것은 아니겠지?" "후훗... 미카엔! 설마가 가끔은 사람을 잡는다는 말이 있답니다. 혹시 들어보셨는지요?" "뭐? 설마가 사람을 잡아? 그게 무슨 소리야?" 미카엔은 의아한 얼굴이 되어 나에게 물었으나, 나는 그저 의미심장한 미소만 그에게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머리카락이야 자르면 언젠간 또 자랄테니깐, 전혀 아까워 하실 필요는 없어요! 미카엔, 제 머리카락을 왠만하면 남자답게 보일 수 있도록 잘라주시겠어요?" 그러자, 미카엔은 그의 잘생긴 얼굴을 잔뜩 구기더니 날이 제법 날카로워 보이는 단도를 받 아들었다. "하긴, 너랑 같이 가려면 이렇게 하는 것이 나을지도... 게다가, 네가 남장을 하면 다른 놈들 이 너를 넘보지는 못하겠지? 네 미색은 누구나 넋을 잃고 한번쯤 바라보게 될 그런 얼굴 이니깐... 하지만, 이것으로는 네가 남자로 보이기는 힘들거야! 내가 너에게 일루전 마법을 걸어 줄게!" 그렇게 말한 미카엔은 엉덩이를 뒤덮는 나의 긴 머리카락을 솜씨 좋게 자르기 시작했다. 역 시, 그에게는 미적 감각도 있었는지, 나의 금발이 어깨 길이에 닿을 만큼 깔끔하게 커트를 쳤다. 그렇게 긴 머리카락이 잘려나가자, 여성스러웠던 나의 모습이 그나마 덜 부각되어 보였다. 게다가,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던 나의 얼굴은, 잘만하면 미소년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되었다. "솜씨가 좋으시네요? 여기에 로브를 걸치고 약간의 일루전 마법으로 속인다면, 소년으로 보 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머리 모양이 마음에 들었던 나는 생글거리는 얼굴로 그에게 말하자, 미카엔은 말없이 고개 를 끄덕였다. 그는 나의 이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의 기분이야 어쨋든 나는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계속 생글거리며 웃음을 만면에 띄었다. "흠... 얼굴형과 체형만 약간 남자답게 보이도록 하고, 이왕 완벽하게 하려면 음성변조까지 해야겠는걸? 네 목소리는 너무 가늘어!" [44] 체인지(Change) 제8화 -왕실 마법사가 되다!- (2) -2- "체형과 음성변조하는 것은 알현을 마치고 루젠다르로 떠나기 전에 해야 할 것 같은데요! 폐하께서 달라진 제 모습을 보고 무척 놀라시면 안되니깐요! 그런데, 떠나는 것은 언제인 가요? 훗...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아요! 위장한 왕실 마법사로서 타국으로 여행을 떠난다라..." 그렇게 들뜬 나의 모습을 본 미카엔은 한숨을 내쉬며 나에게 입을 열었다. "이럴 때 보면, 라비스는 아직 어린애 같다니깐... 하긴, 아직 어리다면 어리다고 할 수 있는 나이이겠지. 아무래도, 폐하께 알현을 하는 것은 나혼자 갔다와야 하겠어! 그 분은 약간 보수적인 성품이라서 지금의 라비스의 모습을 매우 탐탁치 않게 생각하실 거야! 내가 알아 서 허락을 받아 올 테니깐, 라비스는 여기서 나가지 말고 있어! 알았지?" 거기까지 말한 미카엔은 나의 머리를 한번 토닥이더니, 방을 나갔다. '쳇! 어린애 취급하긴... 이래뵈도 정신연령은 19살이라구! 하긴... 라비스의 육체를 가진 뒤 로 쪼금 성격이 여려지긴 했지. 흠... 그리고 보니, 생각하는 수준도 약간 낮아진 것 같아! 으엑~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되었지? 아! 이럴 것이 아니라, 왕실 마법사 흉내나 내볼까? 미리 연습을 해두어야지!' 오만상을 찌푸리며 내 자신에 대해 약간 회의적인 생각을 하다가, 남장을 하고 왕실 마법사 행새를 할 생각을 하자, 나의 붉은빛이 도는 도톰한 입술은 다시 상향 곡선을 그으며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나는 화장대 앞으로 다가가서, 내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그러자, 티없는 우유빛의 피부에 금발이 정말 잘어울리는 조막만한 얼굴이 거울에 비추어졌다. 나는 거울을 보며, 내 나름대로의 거만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향해 터프한 몸짓으로 손가락을 가르킨 후에, 왕실 마법사들의 쓰는 특유의 말투... 그러니깐, 엄숙하고도 깐깐해 보이는 듯한 말투로 위엄있게 외쳤다. "네 이놈! 오우거들! 감히 인간들의 마을에 침입하여 죄없는 인명들을 살상하다니! 너희들 을 체인 라이트닝 한방으로 깨끗하게 보내주마! 각오해라!" 그렇게 혼자서, 거울을 보며 쇼(?)를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며 앤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비스님! 두 번째 후궁이신 아사벨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 짐짓 리얼한 표정을 지으며, 나의 모습에 약간의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가 앤시아의 목소리 를 들은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마법사 흉내를 내는 것을 그만두었다. 방문이 열리며, 약간 화려한 차림의 흑발의 소녀가 들어왔는데, 그녀의 도도하고도 강한 인 상의 얼굴은 꽤나 독특한 화장으로 인하여 제법 도전적인 느낌의 매력이 잘 나타나고 있 었다. "오랜만이군요! 라비스님.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물론, 잘지냈지요! 앉으세요." 나는 그녀에게 자리를 권하며, 앤시아에게 차를 내오도록 말했다. "그런데, 라비스님의 머리가 굉장히 짧아져 있네요?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아사벨라는 걱정하는 것처럼 나에게 물었지만, 실은 그녀의 표정에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잔뜩 나타나 있었다. 하지만 약간 흥분해 있던 나는, 나도 모 르게 그녀에게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말았다. "후훗... 저 이번에 루젠다르에 왕실 마법사 자격으로 가게 된답니다. 그래서, 머리를 이렇게 잘랐... 에궁~!!" 헤벌쭉 해져서 그녀에게 그렇게 털어놓다가, 뒤늦게 나의 실수를 깨달은 나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기이한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내가 저지른 실수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쏘아져 나간 매직 미사일이었다. 결국, 아사벨라의 얼굴이 점차 놀라움으로 번져가는 것을 불안한 얼굴로 지켜볼 수밖에 없 었다. "라비스님! 루젠다르에 가신다고요? 그렇다면, 황태자님을 따라가신다는 겁니까? 그것도 왕 실 마법사의 자격으로서... 도대체 황태자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러한 일을 하신 것인지..." 그녀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그 누구도 아닌, 나만 데리고 간다는 것이 매우 분통이 터졌나 보다. "저기... 아사벨라님!" 나는 뭔가 그녀에게 말해야 될 것 같아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지만 그녀는 나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매우 험악해진 얼굴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는 못보내!! 절대루!!" 그녀는 그렇게 선언하듯이 외치더니, 나에게 간다는 말도 없이 그대로 방을 나가고 말았다. '헉! 이걸 어째? 설마, 아사벨라도 루젠다르에 따라간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내심 불안해졌지만, 뭐, 할 수 없지! 하는 심정으로 시간 떼울 겸 마법책이나 펼쳐들었 다. 설사, 그녀가 일행으로서 같이 가게 된다 하더라도, 피곤해지는 것은 미카엔일 뿐, 나는 아무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다소 무책임한 심정이 되어, 마법책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 쯤의 시간이 지났을까? 아마도, 한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무아지경이 되 어, 침대 위에서 책을 보고 있던 나는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바로 코앞에서 침대에 걸터 앉은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미카엔의 얼굴이 보였다. "허걱!"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였기 때문에, 갑자기... 그것도 바로 코앞에서 보이는 미카 엔의 얼굴에 나는 깜짝 놀랐다. "라비스! 일행이 더 늘었어. 아사벨라가 어떻게 안 것인지 모르겠지만, 중앙궁성의 알현실까 지 찾아와 루젠다르에 가겠다고 하더군." 그의 말에 내심 찔렸지만, 나는 내색은 하지 않고 그에게 다소 무미건조한 어투로 물어보았 다. "그래서, 아사벨라도 가게 되나요? 그녀도 외교사절로서 자격이 없을텐데..." "아니! 그녀에게는 자격이 있어. 그녀의 어머니가 루젠다르 출신이거든. 게다가 그녀의 어머 니는 루젠다르 왕의 먼친척뻘이지! 예전에. 두 나라의 화합을 위해 아모르 자작이 외교사 절로서 루젠다르에 간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사벨라의 어머니와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지! 그 길로, 아사벨라의 어머니는 아모르 자작을 따라 여기 로히얀스로 오게 되었고 그 후, 한동안 루젠다르와 냉전후에 이번에 다시 화친 교류를 하게 된 것인데, 아사벨라로 서는 루젠다르 왕에게 인사를 드릴 겸, 이번에 외교 사절의 일원으로서 가는 것은 좋은 명분이 되는 거야!" "흠... 그렇군요!" 그의 말에 나는 그런가 보다! 하며 별 감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 는 미카엔의 말에는 표정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더욱 난감한 것은... 아사벨라의 오빠가 되는 엔카루스 역시, 이번에 같이 가게 돼! 아사벨라가 그녀의 오빠를 나의 호위기사 겸, 자신의 보호자로서 끌어들였거든." "에엑? 엔카루스도 가게 되요?" 내가 그렇게 놀라며 그에게 반문을 하자, 미카엔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나에게 말했다. "라비스. 설마, 엔카루스가 이번에 같이 가게 된 것이 신경쓰이는 것은 아니겠지? 뭐, 라비 스가 그럴리야 없겠지만... 흠... 어쨋든, 라비스! 이따가 정오 즈음에 출발하게 될테니깐, 미리 채비를 하고 있어!" 미카엔은 그렇게 말하더니, 빙긋 웃는 얼굴로 나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자리에서 일 어났다. [45] 체인지(Change) 제8화 -왕실 마법사가 되다!- (3) -3- 내가 어느 정도 기본적인 채비를 마치고 있었을 때, 미카엔이 왕실 마법사들이 입는 로브를 구해가지고 왔다. 그것은 제법, 직위가 있는 마법사들이 입는 흰색의 로브였는데, 여름에 입을 수 있도록 매우 얇고 가벼운 천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 로브의 소재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왕실 마법사들이 입는 로브답게 고 급스럽고 질긴 천으로 되어있었다. 그 로브를 받아들은 나는 들뜬 마음으로 몸에 걸쳤다. 옷이 워낙 펑퍼짐해서 활동하기에는 좋아보였으나 약간 답답한 느낌도 드는 옷이었다. 내가 그렇게 로브를 걸치고는 정말로 대단한 마법사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좋아라 하고 있을 때, 미카엔은 나에게 어떠한 반지를 하나 주었다. 그 반지는 굵직한 크리스탈이 박힌, 정말 밋밋하기 짝이 없는 반지였지만, 가격은 제법 많이 나갈 것 같았다. "이게 뭐죠?" "보시다시피, 반지야! 내가 그 반지에다가 마법을 걸어놓았으니깐 꼭 끼고 있어야 해!" "마법이요?" "그래. 내가 그 반지에다가 무려 6서클의 마법들의 스펠들을 몽땅 집어넣었지! 네가 마법을 사용하고 싶을 때에는 그냥 시동어만 외치면 돼! 물론, 이 반지는 너의 목소리에만 반응을 할 거야!" "히야~ 이거 굉장하네요?" 미카엔이 말한 내용에 내가 감탄을 하자, 그는 나의 이런 반응이 매우 만족스러웠는지, 슬 며시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후훗... 명색의 왕실 마법사인데, 6서클도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건 말이 안되겠지? 하지만, 그것은 6서클 이상의 마나를 담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쓸때는 자제를 해가면서 써야해! 그 반지의 마나를 끌어모으는 능력은 한계가 있거든! 아마도, 하루 정도는 다시 기다려 야 할걸? 아! 그리고, 마법을 발동시킬 때, 그냥 시동어만 외치지 말고 약간 캐스팅을 하 는 척이라도 해야 할 거야. 안그러면, 남들은 네가 용언을 사용하거나 아니면 8서클이상 의 마스터인줄 알테니..." 미카엔의 친절한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반지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흐음... 이 정도의 물건을 만들 정도면, 미카엔의 능력은 거의 어린 드래곤하고도 맞설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그리고, 예전에 내가 선물한 다이아 목걸이 있지? 그것은 방어 마법이 걸려있으니깐, 그것도 빼놓지마! 그리고, 네가 입고 있는 로브 역시, 화염에 대한 방어능력이 있으니깐, 그것도 잘 기억해 두고..." 미카엔은 꼼꼼하게도 나에게 하나하나 일러주었고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완전히 아티펙트로 무장한 셈이군...' "...그리고, 일루전 마법은 간단하게 걸어줄게! 얼굴형만 약간 소년 이미지로 변형시키고, 목 소리는 조금 톤만 낮게 들리게끔 하면 될 것 같아." "칫! 뭐에요? 이왕 마법을 걸어줄거면 확실하게 해줘요!" 미카엔이 일루전 마법을 거는 것에 대해,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자, 나는 그에게 따져들었 다. 그러자, 미카엔은 정말 마음에 안든다는 듯한 얼굴로 이마에 표정 주름을 잔뜩 잡으며 투덜대는 듯한 어투로 나에게 답했다. "그 정도면 돼! 더 이상 뭘 바래?" 결국, 미카엔의 뜻대로 약간의 이미지만 소년틱하게 바꾸었는데, 일루전 마법을 걸었다 해 도 원래의 모습과 별로 다를 바가 없어서, 나는 약간 심통난 얼굴을 해보였다. "인상쓰지마! 이쁜 얼굴 망가지잖아? 네가 보기에, 별로 달라진 점이 없긴 해도, 네가 소년 으로 보이게끔 이미지 마법까지 덤으로 걸어놓았기 때문에, 남들은 그저 예쁜 소년이라고 생각할 거야! 어때? 미소년도 괜찮잖아? 후훗... 물론, 난 미소녀 쪽이 더 좋지만..." 나의 심통난 얼굴을 본 미카엔은 피식 피식 웃으며 나를 달래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지만 그가 말한 내용은 나를 더욱 심통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흥!" "라비스? 감히 황태자에게 흥! 이라니?" "쳇!" 미카엔은 짐짓 위엄을 담은 목소리로 나에게 꾸짖는 말을 했지만, 그의 위엄 따윈, 나의 귀 에는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쳇! 하는 소리를 내었다. 결국, 미카엔의 매끈한 이마에 힘줄이 하나 돋더니, 주먹을 살짝 쥐어 나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아얏~!!" 미카엔이 나에게 준 꿀밤의 세기와는 별개로, 나의 비명소리는 엄청 컸다. 여자가 되더니, 이젠 엄살도 무척 늘은 듯 하였다. 육체가 바뀌면 성격도 역시, 그 육체에 맞게끔 변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완벽히 변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 육체의 원래의 주인이었던 라비스는 엄살도 심하고 내숭덩어리인 새침떼기 소녀였던 것일까? 어쨋든, 나는 얼굴을 구기며 미카엔에게 대들었다... 기 보다는 따졌다. "미카엔! 왜 때려요?" "라비스! 처음엔 그저 얌전하기만 하더니, 이젠 갈수록 버릇이 없어져! 다음에 또 버릇없게 굴면, 그땐 꿀밤 두 대야!" 미카엔은 마치 어린애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나에게 말하였고, 나는 그러한 그의 말에 찔 끔하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46] 체인지(Change) 제8화 -왕실 마법사가 되다!- (4) -4- 로브의 후드를 깊게 눌러 쓴 나는, 에드가 준비해 놓은 말에 올라타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이 말은 조세핀이라는 이름을 가진, 혈통이 좋은 백마였는데, 명마답게 고집과 자존심이 대단하였는지, 쉽사리 내가 자신의 등에 올라타는 것을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나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에드는 다른 말을 데리고 오겠다고 하였으나, 나 에게도 오기가 생긴 나는 조세핀만을 고집하며, 말을 길들이기 위해 애를 썼다. "라비스님! 곧, 있으면 사절단이 출발을 할 것입니다. 아무래도, 마차에 오르심이..." "아냐! 왕실 마법사가 되었는데, 이왕이면, 폼나게 멋진 말을 타고 가야하지 않겠어?" 그렇게 말하며, 나는 부글 부글 끓어오르는 성질을 애써 죽이며, 조세핀의 눈을 부라렸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본 에드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못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 에드가 일루전으로 약간의 소년의 이미지를 갖게 된 나를 보았을 때, 굉장히 놀란 표 정을 지었었다. 그리고, 그 놀란 표정이 약간의 시간이 경과하자 다시 어떠한 표정으로 변하였는데, 그것은 뭔가 못마땅해 하는 표정이었다. 물론, 그는 티를 내지 않으려 했겠지만, 미미하게 나타나는 표정에서 나는 그의 심중을 읽 을 수가 있었다. '쳇! 뭐야? 미카엔도 그렇고, 에드도 그렇고... 내가 남장하는 것이 그렇게 못마땅한 건가? 난 좋기만 한데... 이 곳 남자들은 너무 보수적이군!' 어쨋든, 몇십분간을 그렇게 조세핀과 실랑이를 벌렸고, 결국 보다 못한 에드는 다른 말을 구해오겠다며 궁성의 마굿간으로 갔다. '에구... 지친다!' 나 역시, 조세핀을 길들이는 것을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약간 이상한 기운이 문득 조세핀에게서 느껴졌다. 그래서, 눈을 들어 조세핀을 바라보니... 거만하게 눈을 내리깔고 한심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는 조세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뭐, 뭐야? 저 눈빛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지금 뭐하는 거야?] "헉!" 갑자기 조세핀에게서 말소리가 들려오자, -물론, 전음이었지만.- 화들짝 놀란, 나는 헛바람 삼키는 소리를 내며 몇발짝 뒤로 물러났다. [뭐야? 이도현... 못볼 것을 봤다는 듯한 그 표정은?] "아, 아멘시타?" 내가 더듬거리며, 그를 확인하자 조세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멘시타는 고개를 끄덕여보였 다. "우와~ 아멘시타! 어떻게 된 거야? 무사했구나! 정말 걱정 많이 했어! 그동안 뭐하고 있었 던 거야?" 그렇게 많은 말을 쏟아내며, 나는 아멘시타를 덥썩 끌어안았다. 물론, 내가 안아봤자 아멘시 타의 목만 끌어안은 셈이었지만, 너무 반가운 마음이 들은 나는 아멘시타를 붙잡고 부비 부비를 하였다. [윽... 이거 놔!] "헤헤... 아멘시타! 그동안 뭐하고 이제야 모습을 보이는 거야?" 아멘시타를 놓아주며 나는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본체에서 몸을 회복하고 있었어! 그때, 그 시커먼 남자랑 싸우느라 타격을 많이 입었었거 든. 다행히 내가 몸 담았던 나무가 죽기 전에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타격이 심해서, 회복 하는 시간이 길어졌었던 거야! 아무튼, 네가 무사한 것을 보니 다행이야!] 그렇게, 아멘시타와의 재회를 감격스런 심정으로 나누고 있는데, 그때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보아하니, 이번 외교사절의 일행으로 합류하게 될 왕실 마법사인 것 같은데, 여기서 뭐하고 있는 것이오?" '헉! 이 목소린...'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멘시타가 시커먼 남자라고 지칭했 던 엔카루스가 검은색의 갑옷을 갖추어 입은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후드를 눌러쓰고 있어서 그런지,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더니! 양반은 못되는군.' 나는 그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보이며, 최대한 낮게 깔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엔카루스 아모르님이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시치미를 떼며 입을 열자, 엔카루스는 약간 날카로워 보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 라보았다. "그런데, 목소리가 누구와 많이 닮은 듯한..." "하하... 그러십니까? 저는 라히덴 크로시벨이라 합니다. 황태자님의 세 번째 측실이신 라비 스님과는 사촌이 되지요! 다니엘 남작님의 추천으로 이번에 사절단에 합류하게 된, 마법 사입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살짝 들어보였다. 그러자, 나의 얼굴이 그의 눈에 드러나 보였 는지, 엔카루스의 까만 눈에 놀랍다는 듯한 기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라히덴 크로시벨? 흐음... 사촌 치고는 라비스와는 너무 많이 닮았는데? 아직 나이가 어린 듯 한데, 왕실 마법사에 외교사절로서까지 발탁이 되다니! 실력이 매우 출중하신 모양이 군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치밀해 보이는 듯한 눈빛이 나의 얼굴을 면밀히 뜯어보는데, 나는 그에게 들키는 것이 아닌가 하며 조마조마해졌다. "그 말은 어렸을 적부터 많이 들었던 말이지요! 라비스와 제가 쌍둥이가 아니냐는 질문을 남들에게서 종종 받곤 합니다." "흠... 그렇소? 그러고 보니, 라히덴군도 눈동자가 황금빛이로군요! 라비스와 같은 아름다운 황금색... 그대와 같은 황금빛의 눈동자는 매우 드물지요! 하지만, 다니엘의 남작의 눈동 자는 어두운 갈색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렇다면, 라비스와 그대는 사촌 사이가 아니 라 이종 사촌이 될터인데... 그대는 크로시벨이란 성을 쓰고 있으니, 이상하군요! 쿡쿡!" '헉! 내가 눈동자 색깔을 생각 못했네? 윽... 나 바보 아니야?' 결국, 나는 약간 핏기 사라진 얼굴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괜히 그를 장난삼아 속이려다, 나만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튼, 라히덴군? 앞으로 좋은 활약 기대하겠소! 후훗... 아사벨라가 무작정 루젠다르로 따 라간다는 이유가 여기 있었군. 그럼, 이만!" 그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아카시아 궁쪽으로 사라졌다. 아마도, 아사벨 라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던 모양이었다. [멍청하긴...] 그동안 묵묵히 있던 아멘시타가 나에게 입을 열었다. 물론, 그의 말에 열이 받은 나는 도끼 눈이 되어 아멘시타를 째려보며 말했다.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어쨋든, 엔카가 내가 남장한 것을 눈치챈 것 같은데, 어쩌지?" [할 수 없지! 그와 될 수 있으면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밖에...] [47] 체인지(Change) 제9화 -루젠다르로 떠난 여행- (1) (루젠다르로 떠난 여행!) -1- 로히얀스 왕국... 로히얀스는 귀족과 왕권이 잘 발달되어 있는 보수적인 국가이다. 어쩌면, 왕국이 아니라 제 국이라 불려도 될 만큼, 로히얀스는 그만큼 왕권이 강하였다. 그때문인지, 국왕이 머무는 왕성은 그 규모와 화려함이 보통 서민들로서는, 상상할 수 있는 그 한계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왕성이 있는 로히얀스의 수도, '로히아나'는 왠만한 권세가 집안의 귀족들이 모여사는 도시답게 -지방 영주들은 제외한- 기본 상권 역시 발 달되어 있고, 특정 구역 그러니까 귀족들이 사는 저택가에는 꿈의 도시라고 불려도 될 만큼 , 화려했고 매우 번화하였다. 하지만, 귀족들의 저택가를 제외한 수도의 대부분은 역시 서민들의 빈민가가 차지를 하고 있는데, 내가 예전에 크로시벨가를 탈출하려다 길을 잘못들었던 곳이 바로, 그런 빈민가 였다. 조세핀, 아니! 아멘시타를 타고, 루젠다르로 향하는 외교사절단의 행렬에 끼어 당당하게 앞 을 나아가던 나는 이 세계에서 떨어진 후, 왕성 밖으로는 처음으로 나오게 된 셈이었다. -물론 예전에 얼떨결에 나온 것을 뺀다면- 그런데, 그렇게 수도의 번화가를 지나고, 그런 빈민가를 지나게 되자 생각보단 비참해보이는 광경에 나는 눈쌀이 절로 찌푸려졌다. 거리에는 허름한 옷을 걸친 빈티나는 서민들이 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꾸역 꾸역 모여들었는 데, 그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황태자를 선두로 한 이 행렬을 보며 만세를 불러댔다. "황태자 전하, 만세!!" "로히얀스 만세!" 하지만, 그러한 순박한 로히얀스의 백성들이 있는 반면에, 가난에 찌들어서 왕실과 귀족에 적대감을 품은 자들도 있었다. 물론, 그들은 강력한 왕권에 두려워 하여 노골적으로는 그런 티를 내지는 못했지만, 지나가는 행렬을 보며, 눈쌀을 찌푸리는 이들이 간혹 나의 눈에 띠었다. "라히덴군?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신가?" 나의 표정이 심각하게 구겨져 있었는지, 내 옆에서 말을 몰며 가던 왕실 마법사가 말을 건 냈다. 그는 흰머리가 희끗희끗 나있고 주름살이 제법 깊게 파여있는, 노년이라면 노년이 라고 말할 수 있는 왕실의 마법사였는데, 7서클의 마스터로서 수석 마법사였다. 그는 예전에 내가 황태자궁의 지붕에 아이스 에로우를 쏜 것을 보고는 인페르디아의 첩자가 잠입을 했느니 어쨋느니 했던, 제법 직위가 있는 마법사로서, 이번에 외교사절의 일행으로 발탁된 자였다. 어쨋든, 나는 그의 질문에 구겼던 표정을 피며 정중한 말투로 답변을 했다. "몸이 불편한 것은 아닙니다. 킬린님! 흐음, 그런데 이 곳 수도는 아름답기만 한 줄 알았는 데, 이런 어두운면이 있군요!" 그러자, 킬린이라고 불리워졌던 노년의 수석 마법사는 인자해 보이는 얼굴로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로히얀스의 수도, 로히아나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도시인 것은 사실이지! 그리고, 로히얀스 의 왕성 역시 화려함과 웅장함으로 유명하다네! 하지만, 그 아름다움과 화려함이 너무 지 나치지! 여기 로히아나는 빈민가가 거의 삼분의 이는 차지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빛이 너 무 강해서, 그 그림자가 가리워지고 말았다네!" 킬린은 의미심장하고도 애매모호한 말을, 마치 손자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주듯이 하였고, 나는 잠시 그의 말에 갸우뚱하였다. "그런데, 킬린님!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국왕 폐하는 비록 보수적이지만 온화한 성 품을 지니신 것 같은데, 어떻게 강한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보이지 않는 대단한 카리스마를 지니신 분인가 보죠?" "허허... 라히덴군은 아직 왕실의 숨은 면모를 도통 모르는 것 같군 그래. 하긴, 이제 왕실 마법사의 지위에 오른 어린 마법사이니... 처음, 황태자 전하께서 자네를 추천을 하였을 때 이 늙은이는 무척 놀랐었지! 이렇게 어린 나이에, 6서클의 마스터라니! 허허." '뭐야? 내가 묻는 것이 대답은 안하고 엉뚱한 말이나 하고...' 내가 그렇게 속으로 투덜대고 있음을, 킬린은 눈치라도 채었는지 어쨋든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국왕 폐하는 온화하시지만, 그 온화하심이 지나쳐시지! 군주의 자리란! 그 온화함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인데... 라히덴군! 지금의 강력한 왕권은 모두 왕비님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네. 그 분의 카리스마는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지." 킬린은 그렇게 말을 마치고, 보일 듯 말 듯 한숨을 내쉬었는데 나는 그 한숨이 무슨 의미의 한숨일까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나만의 사색에 잠겨 있는데, 아멘시타의 궁시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기에는 가벼워 보이더니, 왜이렇게 무거운 거야? 이러다 허리 디스크 걸리고 말겠어! 내 가 왜 너를 태우고 가야만 하는지... 투덜투덜~] 결국, 나는 허리를 숙여 아멘시타의 귀에 얼굴을 가까이 댄 다음, 낮게 입을 열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이건 네가 자청한 거라구! 아멘시타, 넌 내가 누구 때문에 여자가 되어 이곳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지, 잊은 것은 아니겠지?" 그러자, 아멘시타는 양심이 질렸는지 다시는 투덜대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런 아멘시타 를 기특하게(?) 여긴 나는, 그의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물론, 아멘시타는 나의 이런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만, 뭐라 말하지는 못했다. "깔깔! 꺄르르..." '엥? 이건 무슨 요사스런 웃음소리이다냐?' 행렬의 앞쪽에서 웃음 소리가 무척 크게 들려오자, 나는 고개를 들어 그쪽 방향을 바라보았 다. 그러자, 아사벨라가 마차에서 언제 나왔는지, 요염한 태도로 미카엔의 바로 옆에서 말을 몰며 아양을 떠는 모습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미카엔 역시, 황태자의 근엄한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똑같이 웃고 떠드는 모습... 참으로 꼴볼견이었다. '흥! 한심한 것들...' 그들을 무시하기로 마음을 먹은 나는 고개를 돌리며, 다른 쪽을 쳐다보았는데 그 곳에는 공 교롭게도 엔카루스가 있어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얼른 다시 고개를 돌려 아멘시타의 갈기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을 모는데, 엔카루스 는 내 쪽으로 말을 몰아왔다. "라히덴님? 어째, 심기가 다소 불편해 보이는군요!" 그는 얄미운 기색이 도는 말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나는 약간 쌀쌀맞은 목소리 로 그에게 대꾸했다. "그냥, 여행이 지루하게 느껴져서 그럴 뿐입니다." "흠... 그러면, 제가 말동무나 해드릴까요?" "필요없어요!" "하하... 그렇게 단호히 거절하시다니! 제가 무안해지는군요." '쳇! 너같이 뻔뻔한 녀석이 퍽도 무안하겠다.' 표정이 구겨지려는 것을 애써 무표정함으로 일관하면서 나는 속으로 투덜대었다. "곧 있으면, 숲길이 나오겠군요! 으음... 다음 마을까지는 오늘 안으로 못 갈텐데, 숲에서 야 영할 생각인가?" 엔카루스는 중얼거리듯이 말하였고, 나는 못들은척 무시하였다. 그러자, 엔카루스는 그런 나 를 보며 피식 웃는 듯 하더니,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라히덴님? 저한테 그렇게 냉랭한 이유를 들어보아도 되겠습니까?" '헉! 그런 질문을 하면, 할 말이 없잖아?' 엔카루스는 분명히 내가 라비스라는 것을 알고 질문을 한 것일테지만, 지금의 나는 라히덴 이라는 소년 마법사로 위장하고 있는 입장이라, 저녀석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 졌다. 엔카루스는 조금은 짓궂어보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라비스에게 들었던 얘기인데, 엔카루스님이 라비스에게 안좋은 일을 하셨다고 그러더군 요!" "음... 전 라비스에게 나쁜 일을 한 적이 없었는데요?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의 말에 발끈한 나는, 침착하지 못한 태도로 그에게 쏘아붙였다. "엔카루스님은 상당히 기억력이 나쁘시군요!" "라비스! 목소리 낮추는 것이 어때? 미카엔이 들으면 사랑 싸움이라도 하는 줄 알겠군." 갑자기 낮아진 목소리로 엔카루스는 그렇게 말하더니 빙긋 웃어보였다. '헉! 내가 너 녀석의 수법에 말려들어간 것인가? 역시, 엔카와는 대화를 하면 안되는 것이었 어!' 뒤늦게 나의 경솔함을 깨달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행렬의 선두에서 말을 몰던, 미 카엔이 나와 엔카루스에게 눈길을 주었던 것이다. 미카엔은 나와 엔카루스가 사이 좋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열이라도 받았는지, 그의 서 글서글해 보이는 눈매가 엄청 매서워졌다. [48] 체인지(Change) 제9화 -루젠다르로 떠난 여행!- (2) -2- 그 후로, 무척 불편하게만 느껴지는 시간이 매우 더디게 흘러갔다. 엔카루스는 원래의 자신 이 있던 위치로 돌아가서 말을 몰고 있었고, 앞서 가는 미카엔의 뒷모습은 척 보아도 저 기압이라는 티가 팍팍 나고 있었다. 물론, 그의 옆에서 애교를 떨고 있던 아사벨라는 계속 그에게 말을 붙이려 노력을 하였지 만, 어찌 된 일인지 지금까지 잘만 응수해주던 미카엔은 찬바람만 쌩쌩 불었다. 결국, 아사벨라는 더 이상 그에게 말을 거는 것을 포기했고, 내가 있는 쪽으로 돌아보았는 데, 그녀 역시 미카엔의 저기압 원인 제공자가 나라는 것을 눈치채었는지, 나를 무지하게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강렬한 눈길을 계속 무시했다. 그저 지금은 이런 상황이 피곤하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왜 이들의 질투를 받아야만 하는지, 정말 새삼스럽게 의아스러웠다. '휴~ 그러고 보니, 저들 셋 모두 질투로서 나를 못살게 구는 것 같은데... ' 미카엔과 아사벨라 그리고 엔카루스... 이들은 모두 나에게 질투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 만, 모두 각자 다른 성격의 질투였다. 미카엔은 아마도, 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이라도 피는 것이라 오해를 한 것일테고, 아사벨라 는 자신의 남자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는 것만 같아서 나에게 질투를 느끼는 것이었다. 그리고 엔카루스는 역시 나에게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 한데, 그것이 참으로 미묘 복잡한 것 같았다. 아마도, 엔카루스도 질투 일종의 감정을 나에게 느끼고 있는 듯 하다. 물론, 그 질투라는 마 음이 나에게만 향한 것을 아닐 거다. 역시 미카엔에게도 향하고 있겠지만, 자신도 갈피를 못잡는 것일테지... 잘난척하던 엔카루스와 같은 녀석이 오히려 미성숙한 정신 연령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부분에서는 모든지 잘난 녀석인데, 그러니깐, 복잡 미묘한 감정문제에서는 오히려 버벅거리는 경우가 엔카루스에게 해당되는 것 같았다. 예를 들자면, 초등 남학생들이 그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을 못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들 을 괴롭히는 것과 똑같다고 할 수 있다. '후훗... 나도 예전에 그런 적이 있어서 잘 알지...' 어쨋든, 나는 이들이 나에게 질투를 느끼든 미움을 느끼든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기이하게 도, 나는 이런 상황이 화가 나지는 않았다. 다만, 귀찮고 짜증이 날 뿐이었지... 아무튼, 외교 사절단 일행들은 어느덧 숲이라는 곳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마도, 시간은 이 미 저물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여름이라는 계절이었기 때문에, 아직 해는 남 아있었다. 미카엔은 일행들에게 적당한 장소를 잡아 야영할 준비를 하도록, 몇몇 기사들에게 명하였 다. "아멘시타! 나 너무 피곤하다. 이럴땐 다시 집에 돌아가고 싶어, 내가 태어났던 곳으로...이 곳에는 내가 알던 판타지 세계와 달라! 스릴있는 모험도 없고, 의리있는 동료들도 없고, 게다가 난 내가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싫어!" 나는 아멘시타의 얼굴을 감싸며 푸념섞인 말을 늘여놓았다. 그러자, 아멘시타는 순수한 정 령답게 감정이 매우 풍부하였는지, 나의 말에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며 나에게 울먹이며 말했다. [히잉~ 미안해! 도현아. 모두 내탓이야! 미안해!] "에휴~ 아멘시타! 울지마. 이제 와서 어떻게 하겠냐? 그냥, 여자가 되었으면, 여자인 채로 살아야 하겠지! 여자의 모습으로 남자의 삶을 살겠다고 외치면, 이상한 여자라는 소리를 듣거나, 레즈비언이라는 소리나 듣겠지." [흐흑! 너무 힘들어 하지마! 내가 너의 버팀목이 될게. 이것은 예전에 너에게 약속했던 것 이기도 했잖아? 흑! 그런데, 이도현. 레즈비언이란 말이 뭐야?] 마지막 아멘시타의 질문에 나는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킥킥! 하긴, 넌 이 말을 모르겠구나? 알 필요 없어! 별로 좋은 뜻의 단어는 아니니!" [아! 이럴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시커먼 남자를 다시 혼내 줄까? 다시 너를 괴롭히지 못하 도록...] "됐네! 괜히 시끄러워지기만 해! 너 역시 다칠 수도 있고... 그냥 너는 앞으로 충실히 말 역 할만 하면 되는 거야!" [으응...] 아멘시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말에 답했고 나는 흡족해져서 아멘시타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왕실의 기사들은 모두 분주해보이는 모습으로 야영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다. 날은 이제 어 둑어둑해져 가고 있었지만, 아직 완전히 어둠이 깔린 것은 아니었다. 기사들은 제일 먼저 미카엔이 쉴 천막 같은 것을 설치(?)했고, 그 다음으로 마법사들이 쉴 곳과 아사벨라가 쉴 처막을 꼼꼼하게 설치했다. 물론, 기사들은 그냥 노숙하는 형태로 침낭에서 잠을 청할 생각인지 더 이상 천막을 만들지 않았다. 나는 엔카루스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도 뭔가 잡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입 은 갑옷은 매우 간단하고 가벼운 것이었는지, -그는 가슴만 가리는 브레스트 플레이트에 검은색의 망토를 입고 있었다.- 활동하기에는 매우 자유로워 보였다. "잠시 얘기 좀 할까?" 나는 그의 앞에 서서 다소 오만해보이는 얼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엔카루스는 피식 웃어보이더니 말했다. "훗... 네가 먼저 나에게 말을 다 걸다니! 나야 상관은 없지만, 미카엔이 또 오해를 할텐데... 이러다 또 한번 스캔들이 나면 어쩌려고?"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사람들이 귀가 없을 만한 곳을 선택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엔카루스는 나의 뒤를 따라왔다. "어이! 라비스. 왜 이렇게 으슥한 곳으로 가는 거야? 설마, 나랑 밀회를 즐기자는 것은 아니 겠지?" "……." 적당한 지점에서 걸음을 멈춘 나는 몸을 돌려 엔카루스를 바라보았다. "바인딩!!" 내가 시동어를 외치자, 주위에 있던 모든 식물들... 나무나 질긴 풀 같은 식물들이 길게 자 라나더니 엔카루스가 있는 쪽으로 순식간에 다가와 꽁꽁 묶어버렸다. "훗... 엔카! 마법쓰기 위해서 스펠을 캐스팅하는 짓을 하면, 알지? 널 꽁꽁 얼려버릴 거야!" 내가 그렇게 협박성의 발언을 하자, 엔카루스는 당황한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니라, 그의 특 유의 여유로운 얼굴로 살짝 미소까지 띠며 나에게 입을 열었다. "이대로 꼼짝 않고 있을테니깐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해!" "앞으로 나에게 접근하지마! 또 다시 오늘과 같은 일이 생기게 한다면, 그땐 죽여버릴 거 야! 그리고, 혹시 나에게 어떠한 감정이라도 갖고 있다면 그것이 무슨 감정이 되었든, 네 속에다가 묻어버려! 내 말 알겠어?" 내가 그렇게 험악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하자, 엔카루스는 잠시 입을 다물고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평소 얄미운 느낌이 아니라 약간 진지해 보여서 나는 잠시 멈칫 했다. 잠시 후, 엔카루스는 한숨을 내쉬더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라비스! 너 미카엔을 사랑해?" '헉! 얘는 왜 갑자기 진지모드가 되었지? 그런 난처한 질문을 하다니!'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그에게 약간 냉정한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난 그럴 운명이거든.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난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거야!" 하긴, 나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할 팔자가 되어있다. 내가 남자의 영혼으로서 남자를 사 랑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여자의 육체로 여자를 사랑하겠는가? 퍽이나, 난해한 형태인 나는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 없는 팔자였던 것이다. [49] 체인지(Change) 제9화 -루젠다르로 떠난 여행!- (3) -3- 나는 그렇게 엔카루스를 묶어둔 채로 그 곳을 빠져나왔다. 어차피, 그는 스스로 내가 묶어 놓은 것을 풀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렇게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 기사들이 모아놓은 땔감으로 마법사들이 불을 피워났는지,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저녁 식사 준비로 몇몇은 분주해보였다. "라히덴군! 황태자님이 부르시네!" 킬린은 나를 찾고 있었는지 나를 보자마자 미카엔이 나를 찾는다는 말을 알렸다. 나는 그의 말에 끄덕이고는 황태자의 처소로 마련된 천막으로 갔다. 말이 천막이지, 황태자가 머무는 곳은 매우 넓어 보였고 안은, 제법 깔끔하고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미카엔은 누구와 이야기 중이었는데, 그는 왕실의 중신으로서 이번 에 황태자를 외교문제로 따라나온 자였다. 미카엔은 나를 보더니, 그를 밖으로 내보냈다. "부르셨어요? 미카엔." "앉아!" 그의 말에 나는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리며 그 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넌 다시 돌아가야 하겠어. 내일, 호위기사를 붙여줄테니깐 왕성으로 돌아가도록 해!" "뭐죠? 다시 돌아가라니... 혹시, 엔카루스와 저의 소문 때문에 마음에 걸려 다시 돌아가라 는 것은 아니겠죠? 난 돌아가지 않을 거에요!" "그게 아니야!" 미카엔의 목소리가 살짝 커져있었다. "그럼, 뭐에요?" "어쩌면, 네가 위험해질지도 몰라서 그래. 방금 첩자로부터 얻은 소식인데, 인페르디아국에 서 심상치 않은 조짐이 보여! 아마도, 우리가 루젠다르와 손을 잡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 기는 것이겠지." 미카엔의 은빛이 도는 자수정같은 눈에는 나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기색이 드러나보였다. 그 의 말에 나는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미카엔! 그런 거라면 걱정하실 필요없어요. 전 제 몸을 지킬 수 있어요. 미카엔이 나에게 능력을 주었잖아요?" "간단한 수준의 위험이라면 내가 이런 말을 안했겠지! 라비스, 이번 루젠다르를 향한 여행 은 생각보단 매우 위험할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인페르디아에는 매우 위험한 인물이 있어! 그 곳에는 고위마족의 여자가 인페르디아왕의 뒤를 봐주고 있는데, 이번에 그 여자가 관여할 것 같아!" "고위 마족? 흠... 미카엔! 고위 마족이란 것이 드래곤보다 강한가요?" "드래곤보다 강하냐고? 물론 직접적으로 둘이 붙으면 드래곤이 이기겠지! 그런데, 드래곤은 지금 대화와는 별로 관련이 없어보이는데? 아! 하지만, 그 고위마족이 마계에서 마룡을 소환해 낸다면, 드래곤이 이길 것이라는 장담은 못하겠군! 만약 젊은 드래곤이나 헤츨링 같 은 경우는 거꾸로 마룡에게 당할 수 있거든..." 하긴, 미카엔은 자신의 어머니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모르니, 내가 드래곤이라는 단어를 꺼낸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아무튼 그의 말에 나의 얼굴표정은, 약간 심각하게 구겨졌다. "흠... 그렇다면, 그 마족이 마룡을 소환해 낸다면 큰일이겠군요! 그 마족이라는 여자가 소환 능력이 매우 뛰어난가 보죠?" "그래. 그 여자는 마물소환 능력이 매우 뛰어난 존재이지! 여태까지 잠잠한 그녀였는데, 방 금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이번에 그 여자가 모습을 드러내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하니, 정말 걱정이야! 아마도, 그녀의 봉인된 힘이 풀린 탓이겠지!" "봉인 된 힘이요?" "응. 그녀는 몇십년 전에 한 실버드래곤에 의해서 힘이 봉인되었다고 했어! 어머니께서 해 주신 말씀이지! 그런데, 이번에 그녀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녀가 봉인된 힘이 풀려났다는 것이겠지. 아마도, 어떠한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 말이야." 미카엔의 말에 나는 차근차근 머리를 굴려보기 시작했다. 그의 말을 종합해 보자면... '실버 드래곤이라... 그렇다면, 혹시 왕비가 직접 그 마족의 힘을 봉인했던 것이 아닐까? 그 런데, 이번에 다시 그 힘이 풀렸났다면, 왕비보다 더 강한 힘의 소유자가 그 힘을 풀어주 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누구일까? 고위마족의 봉인된 힘을 풀 자가... 아무래도, 나이가 조 금 있는 드래곤밖에는 없는데. 역시! 왕비가 이번에 다시 봉인했던 것을 풀어준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대체 무슨 꿍궁이일까? 설마, 자신의 아들을 혹독하게 지옥훈련이라 도 시키려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면...' 여기까지 머리를 쥐어짜며 결론을 내고 있는데, 미카엔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무래도, 내일 아침 일찍 루젠다르 국경 근처로 일행들을 텔레포트를 시켜야 하겠어! 아 마도, 다른 마법사들의 도움까지 받아야 하겠지? 이동시킬 인원들이 매우 많으니깐! 그 리고... 라비스!" "네." "요즘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숨기지 말고 얘기해주면 안될까? 요즘, 넌 나를 너무 불안하게 해! 난 너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아. 이리 가까이 와봐! 라비스." 나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미카엔은 팔을 들어 나의 허리를 감싸안더니 자신의 품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나에게 키스라도 하려는 듯 폼을 잡자, 나는 질겁을 하며 그를 밀쳐내었다. 그때! 쿠구쿵~!!! 갑자기 내가 서있는 땅이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물론, 나는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 어졌는데, 그로인해서 나를 안고 있던 미카엔까지도 균형을 잃고 뒤로 나자빠졌다. "어엇!" 나는 넘어지긴 했지만, 미카엔의 몸위로 넘어졌기 때문에 다치진 않았지만, 미카엔은 쬐금 아팠을 것이다. '흠... 그러고 보니, 미카엔과 처음 만났을 때도 이와 같은 장면이었는데...' 그 와중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얼른 몸을 일으켰다. "황태자 전하!! 큰일났사옵니다." 그때, 누군가가 수선스럽게 천막안으로 들어오며 외쳤다. * 요즘 들어 연재 속도가 쬐금 빨라진 것 같네여! 곧, 있음 지금까지 썼던 것 리메 작업을 들어갈지도 모르겠어여! 오타랑 약간 어색한 것도 수정하고... 별로 오래는 안걸릴 것 같습니다. [50] 체인지(Chanhe) 《외전》외전Ⅰ-도현이의 일상- 《외전》 (외전Ⅰ-도현이의 일상) 시끌 시끌... 대학 강의실로 보이는 한 공간에 20여명 정도 되어보이는 학생들이 시끄럽게 잡담들을 나 누고 있었다. 아직은 강의가 시작되기 전이었는지, 강의실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어수선 그자체였다. 강의실에서 제일 끝에 위치한 책상에 한 남학생이 앉아있었는데, 그 남학생은 청년이라기에 아직은 앳띤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형에 깨끗한 피부 그리고 오똑하게 솟아오른 코가 제법 잘생겼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아무튼, 그 소년은 지금 이 순간이 매우 지루하였는지, 찢어져라 하품을 하였다. "도현아!" 누군가가 그 소년을 부르는 불렀다. 도현이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자, 강의실의 뒷문에서 서있던 한 여학생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아마도, 도현이와는 다른 학과였는지 강의실에 들어오지 않고 문에 서서 도현이에게 입을 열었다. "지금 수업 들어야해?" 그녀가 묻자, 도현이는 잠시 갈등을 했다. 지금은 세시가 조금 안된 시각... 이번 시간은 교양 과목 중의 하나인 기독교 윤리 시간이었 다. 정말 지루하고도 졸리운, 게다가 도현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도 아니었기에, 이번 강 의를 빼먹을까 말까? 고심을 했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를 결정한 듯 그녀를 바라고는 싱긋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아니!" 결국, 수업을 제낀 도현이는 자신을 찾아온 연희라는 여자애와 하루종일 거리를 쏘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연희가 잡지를 산다며 도현이를 서점으로 끌고 갔고, 덕분에 따라들 어간 도현이는 흔히들 여자애들이 즐겨보는 패션잡지들을 보게 되었다. 연희는 잡지에 나오는 미녀모델들이 나올때마다 꺅꺅거리며 도현이에게 보여주곤 했다. 물 론, 도현이는 잡지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연희의 관심사는 잡지에 나오는 유명 모델 들이었으므로 도현이는 적당한 얼굴로 그때마다 연희의 수선스러움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사실, 연희는 아마추어 모델이었다. 물론, 도현이와 같은 학교에 다니기는 했지만, 그녀는 모델이라는 직업까지 겸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도현이는 온종일 유명 모델들의 이름을 귀에 따갑도록 들어야만 했었다. "꺅! 도현아~ 얘 너무 예쁘지? 이번에 무섭게 뜬 신인이라는데, 키가 180cm이래! 대단하지 않니?" "흐음... 예쁘긴 한데, 키가 너무 크다! 여자가 180이면 너무 징그럽지 않나?" 그러자 연희는 도현이를 힐끗 째려보며 말했다. "징그럽다니! 멋있기만 한데... 아! 그리고 얘는 진짜 진짜 예쁜 얘인데, 이번에 그 유명한 프랑스 화장품 회사 ×××사의 전속 모델이 되었다고 하더라! 이름은 크리스휘나 아르제! 이름도 너무 예뻐!" 도현이는 연희가 가리키는 모델를 바라보았다. 그 모델은 이 잡지의 표지 모델로 나왔던 모 델이었는데, 미모가 굉장히 출중해 보였다. 게다가, 그녀는 황금빛의 긴 머리에 황금빛 눈 동자가 일품이었는데, 서양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양적인 매력까지 갖추고 있는 미인 이었다. 아무튼, 도현이는 크리스휘나 아르제라는 모델을 보자 문득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 감 정을 뚜렷이 설명하라면, 표현하기가 매우 힘든 그런 기이한 감정이었는데, 문득 도현이는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고 생각했다. 결국, 도현이는 그 잡지에서 눈을 떼고 연희에게 말했다. "나 판타지 코너에 가 있을게! 잡지 사고 나서 그쪽으로 와!" 도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다양한 판타지 소설들이 잔뜩 쌓인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현이의 이러한 행동을 연희는 의아하게 여겼지만,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도현이는 새로 나온 소설들을 훑어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도현이의 어깨를 탁 쳤다. "어머! 도현아~ 너무 오랜만이다!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든 거야? 연락도 자주 안하 고..." "앗! 정은이 누나! 여긴 왠일이야?" "훗... 당연히 책사러 왔지! 나같은 지적인 미인이 자주 가는 곳이 어디이겠어? 도현아~ 누 나 안보고 싶었어?" "하하... 당연히 보고 싶었지! 내가 누나 많이 좋아하는 거 잘알잖아? 와우~ 누나 못본 사이 에 더 예뻐졌는데? 설마, 나 말고 숨겨둔 애인이 생긴 거 아니야?" "어머머! 내가 도현이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런데, 도현아~ 혼자 왔니?" "아니, 친구 녀석과 같이 왔는데..." 도현이가 거기까지 말하다가, 왠지 등쪽에서 살기가 느껴짐을 감지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도현이의 눈에 연희의 모습이 보였는데, 연희는 굉장히 화가 많이 났는지 마치 불의 정령이라도 된 듯 보이지 않는 불길이 화르르 타오르고 있었다. 물론, 분노의 불길이 말이다. 도현이는 순간 찔금 하였다. 하지만, 도현이는 금세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연희에게 입을 열었다. "연희야! 벌써 잡지 샀어? 인사해! 여기 누나는 김정은이라고... 내 친구의 누나야!" 그러나, 연희는 계속 분노한 얼굴 표정을 고수하였다. "흥! 친구의 누나인지 뭔지 내가 알게 뭐야? 나 갈거얏!!" 연희는 그렇게 말하더니, 휙 돌아서서 서점을 나가버렸다. "풋! 도현아. 너 여전하구나? 이번에는 한 몸매하는데? 안따라가 보아도 돼?" 정은이라 불렸던 여자는 킥킥거리며 도현이에게 말했다. "괜찮아! 맨날 저러는 걸 뭐! 질투가 굉장히 많거든. 그런데, 누나! 오랜만에 만났는데 한 잔할까?" "흐음... 네가 쏘는 거야? 그렇다면 당근 가야지!" "후훗... 누나도 여전한 걸?" 도현은 그렇게 정은과 떠들어대며 서점을 나왔다. 그의 행동을 보자면, 정말 무책임하기 짝 이 없었지만 그는 진지한 것은 질색이었다. 사실, 그는 연희를 좋아하긴 했지만 이상스럽 게도 남들이 흔히들 말하는 사랑 따위의 감정은 느낄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 같이 있는 정은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여자들에게도 도현은 깊은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자신의 성격을 잘알고 있던 도현은, 이러한 자신의 가벼움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서 본인이 좋아하는 여자들을 만나 자신의 무미건조한 일상을 나름대로 즐겼다. "그런데, 도현이의 운명의 상대는 대체 누구일까? 궁금해! 너 솔직히 말해봐! 누구를 진심 으로 사랑해 본 적 없지?" 도현은 저녁시간이면 주로 잘가던 고급 웨스턴 바에 정은을 데리고 와, 적당한 테이블을 차 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칵테일 두잔을 주문한 도현은 잠시 상념에 잠겨있다가, 정은의 목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사랑? 사랑이야 많이 해봤는데? 하지만, 그 사랑에 목숨은 걸어본 적은 없는 것 같아!" "흐응, 그래? 하긴, 넌 이제 19살이니 진짜 사랑을 못해봤을 수도 있겠네! 하지만, 도현아! 이 누나가 충고를 하겠는데, 너무 가벼운 것은 안좋아! 그리고, 네가 사랑하지도 않는 여 자들에게 기대감 같은 것도 주지 말고... 명심해! 그렇게 여자들에게 상처를 주다가는 언젠 가 네가 상처를 받을 날이 올거야!" "웅~ 누나! 그건 너무 무서운 말인데? 하지만, 걱정없어! 나중에 내 운명의 상대한테는 잘 해줄 거니깐..." "야야~ 이도현! 그렇게 간단할까? 만약, 네 운명의 상대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님, 네가 그 운명의 상대를 사랑할 수 없는 위치에 있게 된다면? 그것도 아님, 너에게 상처받은 여자들이 너를 방해하며 물고 늘어진다면 어떻할래?" "에이~ 설마, 그런 불행한 일이 있을라구... 그리고, 나는 운명의 상대 따위도 믿지 않으니 깐, 그냥 이대로 살래!" "잘났어! 이도현... 언젠가 설마가 사람을 잡을 날이 올지도 모른단 말이야!" 정은은 도현보다 두 살은 더 먹은 인생의 선배답게 그에게 충고를 했지만, 도현은 그다지 진지하게 귀담아듣지 않았다. 하지만, 훗날... 도현이 정은의 충고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도현은 상상이나 하고 있었을 까? *외전은 3인칭 시점으로 나갑니다. [51] 체인지(Change) 《외전》외전Ⅱ-라비스의 첫사랑 이야기- (외전Ⅱ-라비스의 첫사랑 이야기) 크로시벨가의 저택... 오랜만에 개어진 맑은 하늘이 청명한 빛을 발하며, 제법 따뜻해진 봄바람과 함께 봄이 왔음 을 알렸다. 3층으로 된 고풍스런 저택에서 3층에 나있는 베란다에 한 소녀가 앉아있었다. 그 소녀는 길 고도 아름다워보이는 금발을 실바람에 나부끼며, 한 마리의 고양이를 안고 있었는데, 그 고양이의 품종은 페르시안 종으로 보이는 혈통좋은 고양이였다. "휴우~" 소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연신 고양이를 쓰다듬었는데, 그 손길은 무의식에서 나 오는 듯 규칙적으로 고양이의 머리와 등을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었다. "오늘은 볼 수 있을까? 페루." 소녀는 고양이에게 말을 건냈다. 물론, 페루라고 불린 고양이는 주인의 말을 알아들을리 만 무했기 때문에, 그저 갸르릉거리며 기분좋은 소리만 내었다. "하아~ 정말 보고 싶어! 카이엔, 카이엔... 이름도 너무 멋져! 그렇게 멋있는 분은 다시 없 을 거야! 페루, 나 어떻하지? 얼굴은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했는데, 왜 자꾸 그 사람의 얼 굴이 떠오르는 거지?" 자신의 말을 못알아듣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 소녀는 끊임없이 페루에게 말을 건내었 다. "페루!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그 분을 매일 볼 수 없는 방법... 아! 좋은 수가 있다. 아버 님께 말해서 그 분을 나의 경호원으로 채용하는 거야! 아! 그리고 보니, 내 경호원은 에 드가 있었네? 그럼, 어떻하지? 그렇지!! 그 분을 아버님의 경호원으로 추천하면 되겠다. 훗.. . 그러면 적어도 하루에 한번쯤은 볼 수 있겠지?" 그렇게 혼자 떠들어대던 소녀는 자신이 생각해 낸, 묘안으로 인하여 기분이 좋아졌는지 금 세 생글생글해졌다. 소녀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안고 있던 페루를 그대로 내던지고 곧장, 그녀의 아버지가 있는 다니엘 남작의 서재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로 페루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지만 소녀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단숨에 서재로 달려간 그녀는 서재의 문을 벌컥 열어제쳤다. 그러나, 다니엘 남작은 그 곳 에 없었는지 서재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 어디에 가셨지?" 소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이번에는 방향을 바꾸어서 그녀의 유모 루이스가 있는 주방쪽 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점심 시간이 다가오는 시각이었기 때문에, 소녀는 루이스가 그곳에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쪽으로 달렸다. "루이스! 루이스!" 소녀가 루이스의 이름을 숨가프게 부르자 주방쪽에서 덩치가 큰 중년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 내었다. "아니! 라비스님. 얌전하시던 라비스님께서 오늘은 어째 천방지축이십니까? 다니엘 남작님 께서 보시면, 크게 꾸중하시겠네요!" "루이스! 혹시, 아버님이 어디에 계신지 알아요?" "흐음... 주인님께선 아마도, 후원에 계실 거에요! 손님이 오셨거든요." "그 손님이 누구인데요?" "흐음, 카... 뭐라고 하던데? 잘 생각이..." "아! 카이엔이 왔구나!!" 라비스라고 불렸던 소녀는 자신이 애타게 보고파 했던 카이엔이 왔다는 소리에 금방 화색이 돌며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반짝 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결국, 라비스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우아한척 새침하게 걷기만 했던 라비스였 는데, 오늘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계속 달리게 되었다. 자신의 방으로 부리나케 달려간 라비스는 헉헉거리며 얼른 자신의 시녀중 하나인 리나를 부 르기 시작했다. 리나는 늘 라비스를 단장해주던 시녀였는데, 지금 이 순간에 그녀가 절실히 필요했다. "리나!! 리나!" 마침, 그녀의 방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리나는 자신의 상전이 매우 다급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재빠르게 라비스의 방으로 달려왔다. "리나! 지금 당장 제일 예쁘고, 고상하고, 세련되고 우아한 드레스로 빨리 골라와! 그리고, 나 머리손질 좀 다시 해줘!" 라비스는 굉장한 속도로 자신의 말을 리나에게 쏟아냈고 리나는 잠시, 그런 라비스의 모습 에 잠시 당황하였으나, 이내 침착해진 모습으로 라비스의 명령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리나의 능숙한 손길에 의해서 자신의 모습이 완벽하게 꾸며지자, 라비스는 그 길 로 후원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후원에 도착한 라비스는 자신의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나서, 그녀의 아버지와 카이엔이라는 청년이 있는 쪽으로 사뿐한 걸음으로 다가갔다. 카이엔은 다니엘 남작과 거의 대화를 끝마쳤는지, 폼으로 보아 곧 자리를 뜰 태세였다. 그것을 본 라비스는 급해지려는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며, 우아한 몸짓으로 다니엘 남작에게 입을 열었다. "아버님! 여기에 계셨군요. 루이스가 점심 준비를 다 끝마쳤어요!" "으음... 알았다. 곧, 들어갈 것이니, 너 먼저, 식사하도록 해라!" "아닙니다. 남작님! 지금 식사하세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남작의 말에 카이엔은 그렇게 말하며, 가버리려 하자 라비스는 얼른 그에게 입을 열었다. "저기... 카이엔님이시죠? 같이 식사하세요. 이왕 여기까지 오셨는데, 저희도 마침 식사하려 는 중이니, 같이 식사하시는 것이 어때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다니엘도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었는지 그도 한마디 거들었다. "흐음... 그렇게 하게! 라비스의 말대로 여기까지 왔으니, 같이 식사하는 것도 좋겠지." 다니엘까지 그렇게 말하자 카이엔은 거절할 수 없었는지, 승낙의 말을 했다. 그렇게 해서, 다니엘과 카이엔 그리고 라비스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라비스는 그녀 에게 주어진, 카이엔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카이엔님은 용병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네, 맞습니다. 라비스님!" 카이엔은 정중하게 그녀의 말에 답했지만, 왠지 그에게서는 범접할 수 없는... 다시 말하자 면, 함부로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차가움이 흐르고 있었다. 아마도, 매우 냉정한 성격인 듯 싶었다. 하지만 라비스의 눈에는 오히려 그의 차가워보이는 모습이 멋있게만 보였다. "어머! 그러고 보니, 카이엔님은 귀가 약간 뾰족하시네요! 호호... 그러니깐, 엘프 같아요!" 그러자, 카이엔은 살짝 미소짓는 듯한 표정을 해보이더니, 그녀의 말에 답했다. "잘보셨군요! 라비스님. 전 엘프의 피를 이어받았죠! 정확히 말하자면, 전 하프엘프입니다." "정말 하프엘프이신가요? 전 엘프는 한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엘프들은 모두 외모가 출중 하다고 들었는데, 카이엔님 역시, 엘프의 피를 이어받아서 그런지, 정말 미남이세요! 아! 그런데, 하프엘프들은 용병이란 직업도 갖는 모양이죠?" 커다란 눈이 더욱 동그래져서 라비스가 그렇게 말을 늘여놓자, 다니엘은 그녀가 약간 수다 스럽다고 느껴졌는지 그녀에게 질책하는 말을 하였다. "라비스! 경망스럽구나! 그리고, 식사중에 손님에게 말을 계속 건내다니, 그건 실례라는 것 을 모르는 것이냐?" "아! 죄송합니다. 카이엔님? 제가 그만 생각없이 굴었네요! 용서하세요." 다니엘의 말에 찔끔한 라비스는 고개를 숙이며 먼저 그녀의 아버지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하 고는 다시 카이엔에게 고개를 돌려, 그에게 사죄의 말을 했다. 그러자... "아닙니다. 실례될 것은 없습니다. 라비스님께서 오히려, 이 자리를 즐겁게 만들어주시고 있 는데요. 그리고, 라비스님! 하프엘프도 용병일을 하냐고 물었나요? 음... 물론, 저같은 경 우는 돈이 된다면 직업의 귀천은 가리지 않습니다. 하프엘프가 설 자리는 엘프들의 세계도 아닌 인간들의 세계이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죠! 원래 엘프 들은 고귀한 족속으로, 그들만의 세계에 몸담으며 살고 있죠! 전 그러한 엘프의 피를 이 어받았지만, 그들처럼 고귀한 족속의 일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인간들의 세계에서도 저는 평범한 인간이 될 수 없었죠! 오히려 천대를 받았죠. 그래서 제가 가진 능력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용병의 길입니다." 왠지 자조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그의 말을 들은 라비스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여린 심성답게 금세 눈물을 글썽글썽하였다. 그러다, 라비스는 무슨 결심을 한 듯 그녀의 아버지를 향하여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님! 이번에 카이엔님을 아버님의 경호원으로 채용하시는 것이 어때요? 어차피 저번에 피터가 경호원의 일을 그만두었잖아요? 카이엔님은 검술도 뛰어나시고, 약간의 정령술까지 알고 계신다니깐, 아버님의 경호원으로선 매우 적합할 거에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다니엘은 잠시 생각하는 눈치이더니, 뭔가 결정한 듯 카이엔에게 입 을 열었다. "이보게! 카이엔. 자네 이번에 내가 맡긴 용병일만 처리하고 나서, 나의 경호원의 일을 해보 는 것이 어떠한가? 자네의 능력이라면 내가 보수는 두둑히 주도록 하겠네!" "저야 거절할 이유가 없죠! 다니엘 남작님. 맡겨 주신다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결국, 그렇게 해서 카이엔은 다니엘의 경호원으로서 채용이 되었다. 라비스는 자신의 바램 이 이루어진 것이 너무 기뻤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그저 새침하고 우아한 표정으로 카이 엔에게 잘되었다며,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그렇게 며칠 후... 카이엔은 다니엘의 경호원으로서 크로시벨가에 오게 되었고, 라비스는 그날 이후로 매일 같 이 그에게 잘보이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꾸미며 교양있는 레이디의 모습을 완벽하게 해 내었다. 하지만, 이러한 눈물겨운 라비스의 노력을 카이엔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에게 정중하지만 늘 거리를 둔 딱딱한 태도로서 그녀를 대했다. 결국, 속이 상한 라비스는 어느 날, 중대한 결심을 했다. 그에게 고백을 하기로 한 것이었 다. 카이엔에게 고백을 하기 전날 밤... 라비스는 불안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만약 그녀가 고백을 한다면, 카이엔은 어떠한 반 응을 보이게 될까? 라비스로서는 정말 속이 탔다. 그녀를 새하얀 고양이, 페루를 안으며 또 다시, 그에게 말을 건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고양 이에게 이런식으로 혼자말을 건내는 것은 그녀가 어렸을 적부터 해오던 버릇중 하나였다. 어렸을 적부터 외롭게 자라온 그녀로서는 유일한 친구가 페루였다. 그래서 속상한 일이 있 거나, 외로워질 때에는 늘 페루에게 말을 건내곤 했는데, 그것이 이제까지 이어온 것이었다. "페루! 내일 내가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면, 그가 나를 받아줄까? 만약 싫다고 어쩌지? 너무 겁나! 하지만, 내일 그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거야... 날 응원해줘! 페루..." 라비스는 그렇게 밤새 페루를 안고 중얼거리더니, 새벽즈음이 되서야 잠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라비스는 그 어느날보다,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에게 찾아갔다. 카이엔은 왕성으로 출 타준비를 하는 다니엘을 기다리고 있는지, 다니엘의 방 밖에서 서있었다. "카이엔! 잠시 할 말이 있는데,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아주 잠깐이면 될 거에요." "그럼, 여기서 하십시오! 다니엘 남작님이 나오시기 전까지입니다." 카이엔은 무미건조한 말투로 라비스에게 말했고, 라비스는 그런 그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촉촉했던 붉은 입술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라비스는 자꾸 잠겨들어가 려는 자신의 목소리를 억지로 내며 입을 열었다. "카이엔님! 귀족가의 숙녀가 먼저 이런 말을 한다고 욕하지 마세요. 제가 카이엔님에게 할 말은... 할말은... 전 카이엔님을 사랑해요! 부디 제 마음을 받아주세요!" 라비스의 창백한 얼굴이 극심한 긴장으로 인하여 더욱 창백하게 되었다. 그녀의 길다란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으나, 라비스는 자신이 지금 그러한 가련한 모습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카이엔은 라비스의 고백을 받고서도 여전히 무미건조한 표정이었다. 잠시 후, 그의 입이 무 겁게 열렸는데, 그 내용은... "죄송합니다. 라비스님! 전 라비스님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냉정하다고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순간, 라비스의 커다란 황금빛 눈에서 눈물이 뚝,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 그러셨군요. 카이엔님에겐 사랑하시는 분이 이미 계셨군요." 라비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듯이 말하더니, 몸을 돌려 천천히 자신의 방을 향해 걸었다. 그녀 의 두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지만, 라비스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자존심에 매우 상처를 입었지만, 라비스는 그러한 자존심보다,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여지 지 못한 것에 대한 슬픔이 더욱 컸다. "흑! 흐흑..." 결국, 라비스는 그날 자신의 침실에 쳐박혀 페루를 안고서 하루종일 울어야 했다. 가끔 루 이스가 찾아와 라비스에게 우는 이유를 물었지만, 그녀는 문을 걸어잠그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울고난 라비스는 그날 이후로 더욱 말이 없어졌다. 원래 말이 그다지 많지 않은 그녀였지만, 이젠 그 말수가 더욱 줄어 그녀가 입을 여는 경우는 페루에게서만 한정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몇일 간을, 라비스로서는 지옥같은 나날을 보낸 그녀는 다니엘 남작에게서 더욱 충 격적인 소식을 접해야만 했다. 그것은 황태자와의 혼담이었는데, 왕실의 측실로 들어가야 한다는 그의 말에 라비스는 그저 죽고만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카이엔을 다시 한번 찾아갔다. 그리고 말했다. 그에게 자 신을 데리고 도망가주기를... 왕실의 후궁은 절대로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며... 그러자 카이엔은 말했다. "라비스님... 당신은 다니엘 남작님의 유일한 영애이십니다. 그 분의 뜻을 저버릴 생각이십 니까? 지금 라비스님이 하고 계신 행동은 그저 부모님이 정해주신 정략 결혼에 대한 반항 심일 뿐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젊었을 적, 정해진 운명에 거스르고 싶어하는 한때 의 치기에 그렇게 약하신 모습을 보이시는 겁니까?" "정말... 냉정한 분이시군요! 카이엔! 언젠가는 이 순간을 후회할 날이 올거에요. 내가 흘렸 던 눈물 만큼, 당신도 눈물을 흘리게 될 거에요." 여린 그녀답지 않게 독기어린 어조로 라비스는 그에게 말했다. "라비스님! 전 내일 떠날 것입니다. 저를 원망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로 인하여 라비스님께 주어진 길에 이탈하시지 말고 그대로 걸어가도록 하세요. 그것이 어쩌면, 라 비스님의 행복이 될 수 있으니깐요. 그럼..." [52] 체인지(Change) 제9화 -루젠다르로 떠난 여행- (4) -4- 몸을 바로 한 미카엔은, 넘어진 것으로 인하여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는지 살짝 얼굴을 찌푸 리며, 천막 안으로 달려들어온 기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알렌." "괴, 괴물이..." 그 기사는 숨넘어가듯한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그에게서는 더 이상의 정확한 보고를 얻어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때, 대충 뭔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할, 음향들이 미카엔과 나의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괴물이닷!!" "드, 드래곤이 나타났다!" "아냐! 멍청아! 저건 드래곤이 아니야." 쿠웅~!! 우지끈! 무언가 육중한 것이 땅바닥을 디디는 소리와 함께, 나무들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 설마... 마룡이?" 미카엔의 얼굴 핏기가 사라지며, 지금 상황에 대한 자신의 짐작을 나직히 중얼겨렸다. 그리 고는 잽싸게 천막 밖을 뛰어나갔다. 물론, 나 역시 상황이 궁금하였던 터라 미카엔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나의 눈에는 믿기 어려운 광경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어두운 빛의 칙칙한 피부를 가진 도마뱀의 형태의 거대한 괴물이, 드래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브레스를 이쪽으로 내뿜기 시작한 것이었다. 일행에 섞여있던 왕실 마법사들은, 그 마룡과 대치되어 재빠르게 캐스팅의 합창에 들어갔다. 중얼 중얼 중얼~!! 마룡의 거대한 입안에서 무시무시한 불길이 곧 쏟아져나왔고 마법사들은 하나 둘씩 빙계 계 통의 실드를 형성해 나가기시작했다. 하지만, 마룡이라지만 드래곤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브레스를 몇 명의 마법사들이 막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아주 찰나의 시간만큼은 그 브레스를 막았다고는 하나, 곧 마법사들의 실드는 한 개씩 소멸 해 갔다. "실드!" 미카엔은 모든 일행들을 보호할 수 있는 빙계속성의 거대한 실드를 단번에 만들어냈고, 그 기세를 몰아 또 다른 시동어를 외쳤다. "블리자드!!" 미카엔이 그의 맑은 목소리로 한 개의 단어를 외치자, 금세 마룡의 주변으로 은빛의 거대한 마나가 결집되더니 무시무시한 눈보라를 만들어냈다. 불과 몇초의 시간이 경과한 후, 마룡이 서있던 몇백 큐빗에 달하는 면적이 새하얗게 얼어붙 었고 마룡 역시, 그 징그러운 피부가 새하얗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크롸롸롸!!!" 마룡은 꽤나 고통스러운지 요동을 쳤다. 하지만, 그 마물은 드래곤의 일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최강의 마물이었던 터라 -드래곤처럼 마법은 사용하지 못하지만 다른 능력은 드래 곤과 동격이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일행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쿠웅~ 쾅, 쿵쾅!! 마룡이 발을 디딜때마다 땅이 울려서 나는 균형을 잃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아 무튼 마룡은 다소 무대포적인 태도로서 이쪽으로 달려왔고, 그리고... 미카엔이 형성해 놓은 실드에 몸을 박았다. 치직~!! "크롸롸롸~!!!" 마룡은 하늘을 갈라놓을 듯한 무시무시한 외침으로서 길게 한번 울부짖더니 다시 한번 실드 에 몸을 박으려 폼을 잡았다. 다소 무식해 보이는 행위였다. 이러한 행동을 보면, 마룡은 덩치만 무식하게 컸지 머리는 상당히 나쁜 모양이었다. "아이스 윈드!" 미카엔은 다시 한번 공격 마법을 외쳤다. 그러자, 실드 밖의 공기중에 있던 습기가 순식간 에 뭉치기 시작하더니 날카로운 얼음 덩어리가 되어, 매서운 바람과 함께 빠른 속도로 마 룡에게 날라가 피부에 파바팍! 박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공격마법은 질긴 피부로 된 마룡에게 그리 치명타를 주지는 못했다. "앗! 또 브레스를 뿜는다!!"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와 함께 마룡의 두 번째 브레스도 날아왔다. '헉! 이걸 어째? 나도 한몫 해야겠군.' "파워 실드!!" 내가 형성해 낼 실드가 미카엔보다는 낮은 위력을 갖는다는 것을 계산한 나는, 보통의 실드 보다 더 한단계 위인 파워 실드의 시동어를 외쳤다. 지금은 캐스팅을 하는 척인지 뭔지를 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자, 미카엔보다는 조금은 작은... 하지만 파워 실드답게 제법 두꺼 운 아이스 실드가 한 개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의 실드가 만들어지는 것과 동시에 마룡의 브레스가 쏟아져 나왔고 나의 실드는 마룡의 브레스를 간신히 견뎌내었다. "크르르..." 마룡은 이번 공격도 실패하자, 으르릉 거리는 소리를 내었고, 나는 흡족한 미소를 슬쩍 지 어보았다. 미카엔은 나를 돌아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곧바로 자신의 몸을 실 드로 감싸더니 허공위로 빠르게 솟구쳤다. 아마도, 공중에서 마룡을 집중적으로 공격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앗! 미카엔!" 갑자기 미카엔이 혼자서 겹겹이로 쳐진 실드 밖으로 나가자,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고 그는 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였는지 어쨋는지, 허공위로 날며 마룡에게 마법을 날리기 시작 했다. 결국, 나는 실드를 유지하는데에 집중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섬뜩할 정도로 서늘한 기운이 내쪽으로 다가왔다. "호호! 이제야, 저 반쪽 드래곤 녀석이 자리를 비웠군!" 요사스러워 보이는 여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오자, 흠칫 놀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러자, 백짓장 같이 새하얀 얼굴에, 흑단같은 새카만 머리카락을 발뒤꿈치까지 끌고 있는 한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헉! 저 여잔 어디서 나타난 거야?' "호호! 네가 황태자의 애첩 맞지? 아까 다보았지! 물론, 나의 수정구로 말이야! 꽤나 분위기 가 좋아보이던 걸? 호호." "넌 누구지?" "흐응, 나? 아까 네 낭군이 다 말했을텐데? 미안하지만, 널 좀 데리고 가야 하겠어! 그래야 저 황태자 녀석이 날 찾아오겠지? 깔깔!" "뭐?" 마족으로 보이는 그녀가 그렇게 큰소리로 웃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근처에 있던 마법사 들이나 기사들은 아무도 그녀를 볼 수 없었는지, 모두 마룡을 대적하는데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이곳으로 왔는지 엔카루스가 날 보더니 이상함을 느꼈는지 외쳤다. "라비스! 너 지금 누구랑 얘기하고 있는 거야?" 그러한 엔카루스를 본 마족의 여자는 몸을 잽싸게 움직여 나에게 다가오더니, 나의 어깨를 콱 붙잡았다. 그러나... 치직~!! 우르르 꽝~!! "까야악~!!" 그 순간, 마족의 여자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더니, 뒤를 순식간에 밀려났다. 나의 주 위로 빙계 계열의 실드가 생겨난 탓이었다. 그리고, 전격 마법중에 강력한 공격 마법인 라이트닝이 마른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와, 그 마족 여자를 공격을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고위마족의 신분답게 만만치 않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검은빛의 오라 비슷한 실드를 잽싸게 만들어내더니, 그녀의 몸을 방어해 냈다. 이 모든 일들은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그러니까 0.5초만에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결국, 이 러한 일들로 인하여 위쪽에서 마룡을 초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던 미카엔은 아래쪽의 심상치 않은 일들을 눈치채었는지, 나로서는 정말 민망한... 모습으로 무섭게 내려왔다. 그 민망한 모습이란... "라비스~!!!" 나의 이름을 열정적으로 부르며, 무서운 속도로 나에게 내려왔는데, 그의 표정으로 보아선 마족 여자를 단숨에 박살낼 기세였다. 아무튼, 나로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마족이 등장하더니, 내 주위로 실드가 형성 되고 그 다음엔 뭔가 번쩍하며 우르르 꽝했고 이번엔 미키엔이 저렇게 나의 이름을 부르며 내려오는 것이었다. '윽! 어지러워~' 어쨋든, 마족 여자는 미카엔이 저렇게 나오자 상황이 불리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녀의 표정 이 비장해졌다. * 짐, 앞부분의 리메 작업에 들어가긴 했지만 글은 계속 써나가고 있는 라얀입니다. ㅡ.ㅡ;;; 전투씬은 아마도, 첨인가여? 아무튼, 어색하네여! 긴박한 느낌보다는 오히려 웃기는(?) 느낌 이 드는 전투씬입니다.;;;; 에잇~! 멀라여! 걍 올립니다. [53] 체인지(Change) 제9화 -루젠다르로 떠난 여행!- (5) -5- 미카엔은 이쪽으로 다가오면서 한 개의 마법을 발동시켰다. "프리즈 필드!" 그 마법은 적당한 구역에 있는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드는 마법이었는데, 그 구 역의 넓이는 마법사의 능력에 따라 조절할 수가 있었다. 물론, 컨트롤이 미숙한 마법사일 경우에는 잘못하면 자신의 동료가 있는 곳까지 그 영향을 미쳐, 봉변을 당하게 되는 경우 가 있으나, 미카엔 같은 경우에는 그럴 걱정은 없었다. 그는 다른 것은 몰라도 마법에 대해서는 드래곤 다음으로 천재였기 때문이었다. 미카엔은 프리즈 필드의 영향권을 매우 축소시킨 대신, 그 영향력은 극대화 시켰다. 그러자 마족 여자의 검은색 실드가 점점 옅어져갔다. 궁지에 몰린 마족 여자는 결국, 자신의 힘을 극대화 시키더니 마계와의 차원의 문을 열었 다. 차원의 문을 여는 것은 굉장한 마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게이트를 계속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에도 굉장한 마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는데, 결국 그 마족은 금세 얼굴이 창백해졌다. "두고보자! 이 반쪽 도마뱀! 젠장! 그동안 힘이 봉인되 있었더니 오늘은 제대로 능력을 발 휘가 안되는군." 이를 갈며, 그렇게 허무하게 자리를 뜨는 마족을 나는 그저 혼란스럽게 바라보았다. 오늘은 황당한 장면들을 너무 많이 봤더니, 머리가 어질어질 하였다. 그녀가 게이트로 들어선 순간, 그녀의 실드는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 그녀로서는 매우 아슬 아슬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가 사라지자, 마법사들이 만들어놓은 실드를 몽땅 깨부시기 직전이었던 마룡도 다시 마계로 사라져버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로서도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괜찮아? 라비스?" "네. 괜찮아요! 미카엔. 하지만, 후훗... 저기 많은 분들이 제가 라비스라는 것을 알아버렸겠 군요! 아까 미카엔이 무지하게 큰 목소리로 나를 라비스라고 불렀으니..." "하하... 그러고 보니, 그렇군! 아깐 워낙 긴박했던 순간이라... 뭐, 할 수 없지! 라히덴에서 다시 어여쁜 나의 신부 라비스로 돌아오는 수밖에. 그런데, 아까 그 여자가 왜 나를 보고 반쪽 도마뱀이라고 했을까?" "그... 글쎄요!" 나는 그의 질문에 말을 얼버무렸으나 그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암튼, 미카엔은 아연한 얼굴로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는 일행들을 쭈욱 훑어보았다. 그 중 에 수석 마법사 킬린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미카엔에게 물었다. "황태자 전하! 저 마법사가 라비스님이셨습니까? 도대체, 이렇게 중요한 외교문제로 가는 타국에 후궁을 데리고 가시다니요? 루젠다르의 왕께서 황태자님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 니까?" 그러자 미카엔은 얼굴을 찌푸리며 그 늙은 마법사에게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킬린! 그 입, 다물게. 내가 라비스를 데리고 가는 것으로 인해 루젠다르에게 흉을 잡힌다 면, 할 수 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그런 일로 인해서 이번 일을 그르치는 결과를 낳게 만 들지는 않을 것이다. 난 그들에게 로히얀스의 위대함을 보여줄 것이다. 킬린! 나를 믿는다면 , 더 이상 라비스에 대한 문제로 이러쿵 저러쿵 하지 마라! 그리고..." 미카엔은 자신이 일국의 황태자란 것을 확실히 보이는 근엄함을 보이며, -사실은 자신의 권위로 억지로 저들의 입막음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만치 서있는 엔카루스를 바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엔카루스!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음을 명심해라!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는 잘알고 있겠 지? 너와는 비록 처남 관계에 있기는 하나, 나의 이해심에도 한계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미카엔이 그렇게 말하자, 엔카루스는 그에게 예를 갖추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튼 그렇게 주변 정리가 끝나자,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엉망이 된 주위를 다시 복구를 하 였고, 저녁 식사 준비하는 것을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들 분주한 모습을 보였으나, 미카엔은 아까와는 달리 천하태평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자신의 거처인 천막으로 들어가 며 나에게 말했다. "라비스! 들어와~ 네게 걸린 일루전 마법 풀어야 하겠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의 대답도 듣지않고 쏙 들어가버렸다. '하긴, 일루전 마법은 풀긴 풀어야 하겠지... 그런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냐?' 나는 터덜터덜 걸으며 미카엔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는 마법을 과도하게 많이 쓴 것으로 인하여 매우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몸안에 마나가 충분히 있었는지 이번에도 간단하게 내게 걸린 일루전 마법을 해제시켰다. 그리고, 덤으로 다시 나의 머리카락을 예전의 긴머리로 원상복구 시켜놓았다. "미카엔! 머리는 그냥 놔두지 그랬어요? 여행에는 긴머리가 거추장스럽고, 여름이라 굉장히 덥단 말이에요!" "네가 불편한 것은 안되었지만, 난 너의 긴머리카락이 좋아! 그리고, 무엇보다 예쁘잖아?" 그의 무성의한 말에 나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미카엔은 킥! 하고 웃더니 나의 이마 를 손가락으로 톡! 쳤다. "윽! 미카엔. 그렇게 자꾸 손찌검을 할 거에요?" "하하... 손찌검이라니? 그런 섭한 말을... 난 네가 귀여워서 그러는 건데..." "에엑! 닭살..." "라비스! 너 또, 꿀밤 맞고 싶은 거야? 자꾸 그렇게 말대꾸를 하다니!" 그렇게 미카엔과 대화를 하다가 나는 멈칫하였다. '헉! 내가 뭐하는 짓이지? 미카엔과 즐겁게 대화를 하고 있다니! 내가 미친 것이 틀림없어!' 내가 그렇게 갑자기 창백해지자, 미카엔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어보이며 나에게 말했다. "라비스, 왜그래? 어디 아픈 거야?" 그런 미카엔의 얼굴을 바라보자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결국, 나는 그에게 말도 없이 휙 몸 을 돌려 그의 천막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54] 체인지(Change) 제9화 -루젠다르로 떠난 여행!- (6) -6- 그 다음날 아침! 미카엔과 왕실 마법사들은 많은 일행들을 공간 이동시킬 마법진을 만들고 있었다. 평소때 같았으면 신기해 보이는 마법진을 구경하고 그랬을텐데, 지금은 그럴 맘이 조금도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왔다. "라비스님? 왜 그렇게 축 쳐져 있지요? 황태자님께서 라비스님에게 뭐, 소홀하게 한 일이라 도 있나요?" 아사벨라가 약간 웃음섞인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 섞인 목소리 는 약간의 조롱과 비웃음을 담고 있어, 상대방을 상당히 기분잡치게 하는 요소가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말대꾸해주는 것도 귀찮았으나, 그녀에게 열이 뻗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아사벨라님이 생각하시는 것과는 정반대랍니다. 미카엔이 나에게 너무 잘해주 고 있거든요! 그것 때문에 오히려 부담이 될 정도이지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씨익 웃어보였다. 하긴, 지금 미카엔에게 부담감을 느끼고 있 긴 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사벨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내가 황태자에게 호칭을 미카 엔이라고 당당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 매우 불쾌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아사벨라님! 지금은 제가 혼자있고 싶으니, 더 이상 방해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어머 그러세요? 그럼, 라비스님이 계속 혼자있을 수 있도록 저는 이만 자리를 비켜드리지 요! 저는 황태자님께 드릴, 차라도 한잔 끓여야겠어요! 호호." 그녀는 그렇게 얄밉게 말하더니,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쳇! 얄미운 말투는 엔카루스하고도 꼭 닮았군.' 다시 혼자가 된 나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일행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조그만 산새 한 마리가 나의 앞으로 푸드득 날아왔다. [왜 그렇게 얼굴을 구기고 있어?] "너 또, 몸을 바꾸었냐?" [응! 말의 몸속에만 있는 것은 갑갑해서 조금 더 자유로운 산새의 몸으로 들어갔지! 게다 가, 난 한 개의 몸 속에 이틀이상 있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렇게 몸을 자주 자주 바꾸어 주어야 해! 한 두시간 후에는 다시 말의 몸으로 들어갈 수가 있을 거야.] "그래?" 나는 시큰둥하게 응수하고는 초점없는 눈길로 어떤 한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그래?] "그냥... 내 본래 자아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고나 할까?" 그러자, 아멘시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자아의 정체성? 그게 무슨 말이야?] "꼬마는 몰라도 돼!" 그러자, 아멘시타는 발끈을 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꼬마라구? 난 너보다 1년은 더 오래 살았어!!] "흐응~ 그래? 하지만, 천년을 넘게 사는 론티아 나무의 나이로 따진다면 이제 20살인 너는 아직 꼬마야!" [아냐!!] "맞어! 넌 꼬마야!" [아냐!!!] "맞어!" [아냐! 난 꼬마가 아니야! 너 오늘따라 왜이렇게 심술궂는 거야?] 아멘시타는 씩씩거리며 나에게 따져들었다. "아멘시타! 난 대체 뭘까? 여자일까? 아님, 남자일까?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닐까?" 그러자, 아멘시타는 심각한 얼굴을 해보였다. 산새의 모습으로 있는 주제에 표정을 정말 다 양하게 지어보이는 웃기는 정령이었다. [글쎄... 난 지금의 너는 여자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를 한가지 예로 들어볼까? 만약 남자 였던 사람이 죽어서, 그 영혼이 다시 환생하였다고 생각해봐! 물론, 다시 태어난 육체는 여자이지! 그렇다면, 다시 여자로 환생한 그 남자의 영혼은 계속 남자라고 할 수 있을까?] "여자이겠지... 하지만, 이건 환생 문제와는 다르지 않아? 난 남자였던 19년 동안의 기억을 모조리 다 가지고 있어!" [난 별로 다르지 않다고 보는데... 물론, 다른 한가지는 있지! 그건 기억 문제... 만약, 내가 너의 기억을 모조리 지워버렸다면, 너는 완전한 여자로 살아갔을 거야! 자신이 당연히 여 자라고 믿으면서...] "엑? 그렇다면, 너 나의 기억을 지울 수도 있었어?" 그러자, 아멘시타는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만약, 그만큼의 능력이 나에게 있었다면, 나는 너를 완벽한 라비스로 만들어 버렸을 걸? 너의 예전 기억을 모두 지워 버리고, 너를 기억상실증에 걸린 라비스로 믿게 만들어 버렸을 거야!] 그의 말에, 나의 얼굴을 팍 구겨졌다. "...그렇다면, 너는 내가 완벽한 라비스가 되길 바라고 있겠군! 나아쁜 자식!! 너는 끝까지 나를 이용하고 있는 셈이잖아? 용서못해!!" 분노한 나는, 내앞에 있던 아멘시타를 꽉 잡았다. 조그만 산새의 모습으로 있던 그는 내 두 손안에 완벽하게 갇혀버렸다. 내가 그렇게 움켜쥐자, 산새는 짹! 하는 소리를 내었다. 이미 아멘시타는 다른 곳으로 옮겨간 모양이었다. 그때, 내 등뒤에 있던 나무에서 아멘시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현아! 진정해! 물론, 나의 실수로 그렇게 되었지만, 어차피 지금의 넌 라비스이잖아? 너 에게 주어진 한가지 길도 라비스이고... 난 너의 편이야! 그것을 알아주었으면 해! 그렇게 예전의 너의 모습에 집착을 한다면, 다시 도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상, 너는 미쳐버리 고 말거야! 두 개의 자아 사이에서 방황을 하는 것은 정신분열을 낳을 지도 몰라! 너를 위 해서 하는 말이야! 예전의 너를 버리고 인정해!] 아멘시타가 들어가있는 나무의 가지가 심하게 흔들렸다. "예전에 내가 너에게 했던 말, 기억나? 만약 도현으로서의 나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너를 증오하겠다고..." […….] "이젠... 너를 증오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그리고, 또 뭐가 옳은지 그른지 모르겠어! 내 본인에 대한 것도 자신이 없어지고... 이젠 내가 누구인지도 정말 햇갈려! 정말 미칠 것 같아..." 그러자, 아멘시타가 몸담은 나무는 더욱 그 가지가 흔들리며 나뭇잎들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아멘시타는 아무런 음성도 내지 않았으나, 나는 가지의 흔들림이 아멘시타가 울고 있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어떠한 울음소리보다 더욱 슬프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어쨋든, 여름의 태양이 하늘 꼭대기에 위치하기 전, 루젠다르로 향한 사절단 일행들은 미카 엔과 마법사들이 만들어 놓은 마법진으로 루젠다를 국경 근방으로 공간 이동을 하였다. 드디어 미카엔 일행들은 루젠다르로 그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타국으로의 여행에 대한 설레임이 사라진 지금, 그저 무미건조한 눈길로 루젠다르와 로히얀스의 국경이라 할 수 있는, 세젠느 강을 바라보았다. * 훗... 벌써 50편째이군여! (감개무량) 이번 화의 마지막 편입니다. [56] 체인지(Change) 제10화 -다가 온 위기!- (1) (다가온 위기) -1- 강가로 와서 그런지, 조금은 시원한 바람이 나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했다. 나는 바람으로 인하여 더욱 더 거추장스러워진 긴 머리카락을, 푸른색의 리본으로 질끈 묶어버 렸다. 강바람을 쐬자,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것 같았다. "굉장히 넓은 강이로군요!" 나는 옆에 서있는 기사에게 무심코 말을 걸었다. 그는 붉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20대 초반의 왕실 기사중 하나였는데,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아 검술은 출중해 보였다. "대륙에서 세 번째로 넓은 강입니다. 그만큼 유명한 강이지요! 게다가, 경치가 꽤 아름다운 편이어서 유명하긴 하지만, 다른 곳과는 달리 관광 명소로는 개발되지 않는 곳이기도 합 니다. 이 강이 국경에 위치해 있는 탓이지요." 그 기사는 정중한 태도로 나의 말에 답했으나, 왠지 그의 모습이 불안정해 보였다. 그래서 의아함을 느낀 나는 그의 얼굴을 다시 한번 빤히 보았는데, 그의 귓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나의 눈에 띄었다. 그것을 본 나는, 이 기사가 불안정해 보이는 이유를 깨닫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미카엔은 이곳에서 얼마간을 머무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이곳에는 루젠다르로 향하 는 배가, 원래 뜨지 않기 때문에 루젠다르 왕과 약속된 그 시간에 루젠다르 측에서 띄운 배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미카엔 일행들은 이 곳의 근방에 위치한 여관으로 향하기로 했다. 이 곳은 국경 근방 이라 좋은 여관이 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쓸만한 여관 두군데가 이 근방에 있긴 했다. 기사 중 하나가 말을 타고 달려가 미리 여관 주인에게, 여관을 깔끔하게 치우기를 명하였고 우리들은 천천히 간만에 제대로 된 쉴 곳을 향해 걸음을 하였다. 나는 조세핀 몸으로 들어간 아멘시타를 타고, 말없이 말을 몰았다. 가끔 나를 바라보는 미 카엔의 눈길이 느껴졌지만, 그냥 모른척을 했다. 그리고, 엔카루스 역시 나와 미카엔을 번 갈아 눈여겨 보았고, 아사벨라는 이러한 미묘한 기류에는 관심이 없는지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미카엔 하나일 뿐일 것이다.- 아니면, 신경을 쓰면서도 무시를 하고 있는 것인지 , 미카엔의 옆에서 말을 끊임없이 건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내가 신경쓰이는 것이 더 생겼는데, 그것은 조금 전 내가 말을 걸었던 붉은 갈색머리의 젊은 기사였다. 그는 아예 넋을 잃고 나를 바라다보는 경우가 잦았는데, 그의 눈길을 내가 느끼기 시작한 것은 조금전, 그와 대화를 하고 난 후부터였다. 그 전에는 그가 일행 속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몰랐었다. 아마도, 내가 사람들 얼굴 기억 하는 능력이 조금 부족한 탓이었을 것이다. 전형적인 형태의 여관 건물에 들어선 나는 방을 배정 받자마자, 짐을 풀고는 몸을 씻었다. 그리고, 다시 밖에 나가 아멘시타를 몰고 강가로 갔다. '세젠느'라는 이름의 강은 하늘의 색과 닮은 푸른빛으로 끊임없이 어디론가 흐르고 있었고, 아멘시타를 옆에 세워둔 채 멍하니 강가에 서있던 나는 한동안 그 푸르름을 바라보았다. 한여름에 들어선 계절의 날씨답지 않게 바람이 매우 시원하게 불어와 나의 로브자락을 펄 럭이게 하였다. "이곳은 굉장히 평화로워 보여! 고요하기도 하고... 국경 근방이라, 마을과 동떨어져서 그런 가?" [평화로워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고요한 것은 아냐!] "고요하지 않다니? 그럼, 지금 이곳이 시끄럽기라도 한다는 말이야?" 아멘시타의 말에 나는 의아해져서 그에게 반문을 했다. 지금 이곳은 잔잔히 흐르는 물소리 만 빼면 정말 고요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너의 귀에는 안들리겠구나! 여기 세젠느강에는 물의 정령인 '리엔시타'라고 굉장한 수 다쟁이가 살고 있는데, 아까부터 지금까지 내내 떠들고 있어! 귀가 따가울 지경이야.] 아멘시타는 얼굴을 찌푸리며 그렇게 말하다가, 리엔시타인지 뭔지 하는 물의 정령에게 뭔소 리를 들었는지, 얼굴이 아까보다 더욱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어보였다. "아멘시타! 너네 정령들은 모두 이름의 끝에 '시타'라는 단어가 붙냐? 그런데, 난 왜 물의 정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지? 너의 목소리는 이렇게 잘들을 수 있는데 말이야!" [그건, 리엔시타가 일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나에게만 입을 열었기 때문이야!] 아멘시타는 나에게 친절히 설명을 하고는 다시 물가로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리엔시타! 괜찮아. 여기 이 마법사 소녀는 나의 주인이거든...] 나는 아멘시타의 말에 약간 놀란 얼굴을 하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스스로 신성하다고 일컫 는 저 콧대높은 나무 정령이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아멘시타는 나의 눈길을 못느꼈는지 별다른 표정없이 물가 쪽으로 계속 눈길을 주고 있었다. 나 역시 그의 눈길을 따라 어느 한지점을 바라보니, 그곳에서는 놀랍게도 하얀 물보라를 일 으키며 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잠시 후, 그 물보라들은 곧, 사람의 형태로 그 모습을 갖 추어갔고 나는 휘둥그레진 눈을 깜박이며 그 기이한 현상을 계속 지켜보았다. [안녕? 나는 세젠느강... 물의 정령, 리엔시타! 호호호~ 론티아 정령의 주인이라... 흠... 빼 어난 외모만 제외하고는 별로 뛰어나 보이는 것도 없잖아?] 은근히 나를 깔아뭉게는 듯한 말투에 나는 약간 얼굴을 찌푸렸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 다. 리엔시타는 어느덧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갖추어 물에서 걸어나왔다. 그녀는 내가 익히 알고 있던 물의 정령 운디네와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온통 투명한 몸체에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 그녀는 그렇게 물가에서 나오더니, 아멘시타에게 또 뭐라 뭐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무척 이나 말이 많은 정령이었다. 그녀는 아주 나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나 역시 그녀에 대해 별다른 호기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그녀를 무 시했다. 그러다 나는 한가지가 궁금해졌다. "아멘시타? 넌 왜 리엔시타처럼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야?" 그러자, 리엔시타는 아멘시타가 뭐라 대꾸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멘시타는 아직 꼬맹이라 그래! 이제 20년 된 녀석이 뭘 할 줄 알겠어? 내가 이러한 모 습을 하고 물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나이가 많은 만큼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난 여기 세젠느강이 생긴 그 순간부터 존재해 왔거든...]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아멘시타는 꼬맹이라는 말에 발끈을 했는지 그녀에게 말대꾸를 했 다. [꼬맹이라니!! 넌 그럼, 할망구야!!] 다소 유치하게 느껴지는 위대한 론티아 정령의 말에, 몇천년의 세월을 살아온 물의 정령은 똑같이 발끈하며 대꾸를 하였다. [어머! 어머! 할망구라니~ 나처럼 아름답고 우아한 숙녀에게 무슨 실례야? 역시 꼬마들은 할 수 없다니깐~] 정령들은 나이를 먹으나 안먹으나, 정신 연령은 다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엄청 난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마치 친구처럼 반말로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정말 희한한 족속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다시 강가를 거닐었다. 그런데... [앗!! 위험해!] [57] 체인지(Change) 제10화 -다가 온 위기!- (2) -2- 아멘시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생각한 순간! 뭔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너무 순식간이라 내가 그것 이 무엇인지 미처 알아보지도 못했다.- 나에게로 쏟아져 왔다. 이럴 때에는 보통, 실드를 빌동시켜 나의 몸을 보호하는 것이 상책이었으나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나의 반사신경이 따라가지 못해, 미처 그러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주어진 능력이 있었으나, 아직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는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나에게로 날아온 것이 몇 개의 '매직 에로우'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이미, 때가 늦 어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황당하게 허무하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나의 머리에 잠시 스 쳤을 때. 촤아악~!! 왠 시원한 물소리가 들리며 파악~! 팍!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리엔시타가 재빠르게 물의 속성으로 실드를 쳐준 것이었다. 이렇듯, 비록 마법공격이었지만 나에게 어설픈 형태의 마법을 쏘아낸 자는 실패한 것을 깨 달았는지 더 이상 공격을 해오지 않았다. 아마도, 몸을 내뺀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 멘시타는 어느새 나의 백마인 조세핀의 몸에서 빠져나갔는지, 히히잉~하는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어떨떨해 하는 중에서도 나를 구해준 리엔시타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 "리엔시타! 구해주어서 고마워." [흥! 내가 구해주고 싶어서 구해준 줄 알아? 아까 아멘시타가 앗! 위험해! 하고 외치는 바 람에 그냥 엉겹결에 구해주게 된 것 뿐이야.] 리엔시타는 그렇게 새침하게 대꾸했으나, 나는 그녀에게 살짝 미소지어 보였다. 그녀는 단 지 내가 한 감사의 말을 듣는 것이 어색해서 그러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렇게 리엔시타에게 말을 건낸 동안 아멘시타는 다시 조세핀의 몸으로 들어왔는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너를 공격한 놈을 쫒아가보았는데, 그는 이미 죽어있었어! 그의 공격이 실패한 순간, 아마도, 다른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것 같아! 단숨에 절명한 것 같은데... 정말 잽싸기도 하지.] "죽다니? 그럼, 누구에게 죽었단 말이야? 그렇다면 여기에 또 누군가가 숨어있다는 말이겠 네?" [그건 나도 모르겠어! 아마도, 능력이 뛰어난 존재가 너를 노렸던 것 같은데... 방금, 너를 공격했던 인간은, 루젠다르의 마법사였어! 하지만, 그의 상태가 약간 이상해 보여. 비록 절명해 있다고 하지만, 그의 눈동자가 잔뜩 풀려있는 것을 보니, 누군가에게 잠시 조종당 했었던 모양이야.] "하긴, 루젠다르가 로히얀스의 외교사절로서 소속된 나를 노렸다면, 저렇게 어설픈 녀석을 달랑 한명 보냈을 리가 없겠지! 게다가 왜 갑자기 화친을 깨려는 행동을 하겠어? 이는 분명 인페르디아 측의 짓이야! 아마도, 루젠다르 측과 분쟁거리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 틀 림없어!" 내가 그렇게 추리하며 말을 마치자, 그 옆에 있던 리엔시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 다. [내가 여기 세젠느강의 정령이라, 이곳에 일어나는 기운에 대해서는 잘 느끼는 편인데, 이 번에 잠시 마족의 기운이 느껴졌었어!] "앗! 그럼, 그 마족 여자가 이번에도?" 내가 그렇게 놀라며 외치자, 아멘시타는 다소 심각해 보이는 얼굴을 해보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마족이 자신의 일을 성사시키려 했다면 왜 굳이 어설픈 능력의 마법사를 조종 했을까? 조금 뛰어난 마법사를 조종해서 공격할 수도 있었는데, 이상해!] "내 생각엔... 그 마족이 나를 죽일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겠지! 오히려 그녀가 자신의 존재 를 우리에게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하자면, 경고의 뜻으로 말이야! 내가 너를 노리고 있으니 다들, 조심해! 라는 의미가 내포된... 아니면, 나와 연관된 누군가를 괴롭히려는 속셈이었든지..." 나는 내 나름대로의 추리를 진지하게 말하였으나 리엔시타는 뭐가 웃기는지 킥킥거리며 입 을 열었다. [킥킥! 론티아 정령의 주인이 외모를 빼고 별다른 능력이 없길래 약간 실망을 했더니... 상 상력 하나는 아주 끝내주는 구나!] 그녀의 말에 발끈한 나는 결국, 이들 정령과 똑같은 수준이 되서 말대꾸를 하였다. "말어휘를 잘 선택해! 상상력이라니? 이건 추리력이야!!" 여관으로 돌아간 나는, 방안에서 쉬며 오랜만에 느껴보는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침대에 벌렁 누워, 뒹굴뒹굴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노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나는 별생각없이 대답을 했고, 곧 방문이 열리며 흑발의 소녀가 방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아사벨라는 쟁반에 두 개의 찻잔을 들고 있었는데, 나는 그녀가 찻잔을 들고 왔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워 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심심한데, 차 한잔이나 해요!" 그녀는 살짝 웃으며 그렇게 말하였으나 나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항상 날카로워 보였던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왠지 공허하게 느껴질 정도로 텅비어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심코 입으로 가져가려던 찻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아사벨라?" 나는 그녀를 일깨우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으나, 그녀는 나의 그런 의도를 깡 그리 무시하고는 갑자기 험악해진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옷속에 감추고 있던 굉장히 날카로워 보이는 단도를 꺼내들더니 나의 가슴에 박는 것이었 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순식간에 벌어졌고, 나는 으윽!! 하는 신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 었다. 그녀의 행동이 나로서는 매우 황당하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왜 그녀가 나에게 이러한 짓을 했는지, 그녀에게 입은 극심한 고통으로 인하여 머리가 잘 굴려지지가 않았다. "이게 무슨 짓..." 나는 쓰러지지 않고 간신히 몸을 버티며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아사벨라는 그녀의 얼굴에 튄, 나의 피를 쓰윽 닦으며 입을 열었다. "난 예전부터 너를 죽이고 싶었어. 너는 나에게서 황태자님을 빼아아갔어! 네가 죽으며 다 시 황태자님은 나의 것이 되겠지? 훗... 너를 증오해! 너는 죽어야 돼!" 아사벨라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 하였다. 나는 다시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다행히 조금 전의 그녀의 공격은 심장을 빗기어갔었지만, 피를 너무 흘린데다가 단도가 나의 가슴에 너무 깊숙히 꽂혀 나의 의식은 점점 현실과 멀어져 갔다. 결국, 나는 쓰러졌고 스러져가는 나의 의식을 마지막으로 붙잡으며 한 개의 이름을 중얼거 렸다. "...미카...엔..." 내가 이 이름을 중얼거리는데에 스스로 놀라면서 말이다. [58] 체인지(Change) 제10화 -다가 온 위기!- (3) -3- 그후로 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내가 눈을 떠서 바라본 천장의 모습은 내가 묵고 있던 여관의 방이 아니었다. 나는 몸을 일 으켜보았다. 그러자, 가슴 쪽이 약간 시큰거리는 느낌이 있었지만, 별다른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충 나의 상처를 살펴보니, 기이하게도 왠만큼, 상처가 아물어 있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신 성마법을 걸어준 것이 아니라면, 내가 쓰러져 있는지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는 얘기였다. 나는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는 머리카락을 추스리기 위해, 방안에 있는 화장대 앞으로 다 가갔다. 이곳은 왕성에 있는 내방 만큼은 아니었지만, 제법 방이 넓었고 가구도 꽤나 고 급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화장대의 거울에서 나의 모습을 비추어보자, 곧 초췌해진 나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초췌해진 모습에도 나의 외모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오히려 병약한 미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그런 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짜증이 치밀었다. 내 얼굴이 여성스럽고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에 대해 화가 느껴진 것이었다. 나는, 머리를 험하게 빗고는 화장대에서 머리를 묶을만한 것을 찾아내 대충 묶어버렸다. 그러다, 나는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나의 눈 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의식을 잃기 전에 가벼운 원피스 차림을 하고 있었다. 미카엔이 구해주 었던 왕실마법사 로브는 방에 걸어둔 채, 답답해서 입지 않았었고 그리고 목욕을 하면서 다이아 목걸이도 거추장스러운 느낌에 방에 그냥 나두었었다. 그리고 강가에 나갔다가 여 관으로 돌아갔었다. 그런데, 지금은 온통 피로 얼룩졌을 그 원피스 대신 다른 깔끔한 옷이 입혀져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문득, 미카엔이 이 다이아 목걸이에 방어마법을 걸어놓았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화염계 방어마법이 걸려 있다는 로브에 대해서도... "휴~ 내가 만약 다이아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면은 아사벨라는 그 자리에서 즉사를 했었겠 군. 그녀는 마법사가 아니니, 강한 전격마법 중 하나인 라이트닝을 당해내지 못할테니..." 나는 그 다이아 목걸이에 빙계실드와 전격 계열의 공격 마법이 걸려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며, 중얼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아사벨라는 어떻게 됐지?" 문득 그녀가 어찌되었는지 궁금해진 나는 방을 뛰어나가며 미카엔이 있는 곳을 찾았다. 방 을 나서자마자 곧, 길다란 복도가 나왔는데, 길을 모르는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어디로 가야 미카엔을 찾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쪽으로 다가오는 어떤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깔끔해보이는 유니폼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이봐요! 여기가 어디이죠?" "여긴, 케이튼의 '샹크트레안'입니다. 손님!" "엥? 샹크트레안? 손님?" 그의 대답에 의아해진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그는 빙긋 웃어보이더니 정중한 태 도로 다시 입을 열었다. "샹크트레안은 여기 루젠다르에서 다섯 번째로 큰 호화여관입니다." "아항! 그렇다면, 여긴 특급 호텔이라는 말이군요?" "특급 호텔이요? 저희는 그런 이름은 쓰지 않습니다. 손님!" "그나저나, 미카... 아니! 이 나라의 사절로 오신 황태자님은 어디 계세요?" "2층에 위치한 식당가에 계실 겁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고마워요!" 그 남자의 안내를 받으며 내려간 2층의 식당은 매우 화려해 보이는 레스토랑의 형태였는데, 왕성에서 얼마간 머물렀던 나의 눈에도 그 화려함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미카엔!!" 나는 일행중 한명인 어떠한 중신과 얘기하고 있는 미카엔을 발견하고는 그의 이름을 크게 부르다가 나의 실수를 깨닫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고리타분한 중신이 있는 곳에서 황 태자인 그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상당히 시건방진 행위였던 터라, 나중에 무슨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를 돌아본 그 중신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미카엔은 나를 보더니, 얼굴에 화색이 돌 았다. "라비스! 깨어났군."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에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미카엔! 아사벨라는 어디 있어요?" 그러자, 미카엔의 화색 돌던 얼굴은 다시 굳어졌다. "아사벨라님은 지금 죄인의 신분으로서 감금되셨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그 분께 매우 분노하셔서 극단적인 방법으로 그 분을 처벌하려 하셨으나 이 늙은이가 간신히 말렸답 니다." 언제 다가왔는지. 수석 마법사 킬린이 미카엔 대신 대답을 하였다.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동 그랗게 뜨며 그에게 반문을 하려 하였으나 킬린은 계속 말을 이었다. "외교 사절의 일원이신 아사벨라님은 루젠다르 왕실과 먼 친척 관계에 계시기 때문에, 아무 런 절차도 없이 그 분을 처벌하시는 것은 루젠다르와의 화친에 영향을 미칠 수가 있기 때 문이지요! 아마도, 그녀는 로히얀스로 돌아가자 마자 사형에 처하실 겁니다." "안돼요!! 미카엔! 그녀에게 사형이라는 형벌을 내리는 것은 그만두세요! 그녀는 비록 측실 이지만 미카엔의 부인 중 하나이잖아요? 게다가, 이번에 그녀가 나에게 해를 끼친 것은 그녀의 탓이 아니에요!" 나는 미카엔에게 말했지만, 그는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왜 그녀의 탓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지? 아사벨라는 너를 죽이려고 했어! 난 그녀를 용서하 지 못해! "그녀는 마족에게 조종 당한 거라구요!!" "마족? 그럴지도 모르지! 아사벨라는 영민한 편이라 그런 극단적인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 테니... 하지만, 그녀가 마족의 조종을 받았다 하더라도, 너를 죽이려는 행동은 아 사벨라의 의도에서 나온 거야! 그녀가 계속 그런 맘을 품고 있다가, 그저 마족에게 부추김 을 받은 거지! 아무리 고위 마족이라 해도, 완벽히 인간을 조종할 수는 없어. 그 인간이 가 지고 있는 사악한 마음을 이용하는 것 뿐이지." "그래서, 그녀를 처벌할 건가요? 미카엔! 정말 냉정하시군요. 그녀는 미카엔을 사랑하는데... 아! 그리고, 내 옷은 누가 갈아입혔어요? 내 옷을 갈아입힐 만한 사람은 유일한 여자인 아사벨라 밖에 없는데..." "물론, 내가 갈아입혔지!" 미카엔은 당연하다는 듯이 나의 말에 답했고 나는 그의 말에 점점 핏기를 잃고 굳어갔다. "그, 그럼...?" "남편이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나의 말에 답하였고 나는 그러한 그의 웃는 얼굴이 얄밉게 느껴져서 황태자에게 못할 말을 소리치고 말았다. "이... 이 벼언태!!!" 나는 그렇게 외치고는 그대로 몸을 홱 돌렸다. 물론 나의 이러한 충격적인 발언에 미카엔은 순간 돌이 된 듯 굳어져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내가 이러한 발언을 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킬린은 지금 이러한 상황이 매우 웃겼는지, 황태자 앞에서 웃음을 내비치지는 못하 고 웃음을 애써 참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것이 매우 힘드는지 얼굴이 매우 기이하게 일그 러져 있었다. 나는 그렇게 씨근덕거리며 나에게 지정되어 있는 객실로 돌아가다가 나는 잠시 망각해버린 사실을 생각해 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 아사벨라가 어디에 있는지 대답을 들었어야 하는데..." [59] 체인지(Change) 제11화 -이번에는 외교관이 되어...- (1) (이번에는 외교관이 되어...) -1- 미카엔은 오늘 저녁에 루젠다르 측, 그러니까 우리 사절단들을 마중나온 몇몇 인물들과 접 촉(?)을 갖는다고 했다. 아마도, 이 여관의 화려하기 짝이 없는 저녁 만찬과 함께 여러 가지 가벼운 담소를 빙자한 외교적인 대화들이 오가겠지만,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었기에, 아사벨라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언급을 안하는 미카엔에게 내심, 불만을 갖었다. 그에게 다시 찾아가서 몇번이나 아사벨라에 대해 말을 꺼내보았지만, 그는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고 싶지 않았는지, 입을 다물었다. 결국, 나 혼자서 아사벨라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마법사 킬린에게 질긴 질문 으로서 아사벨라에 대한 것을 캐내려 했지만, 이 늙은이는 의외로 입이 무거웠는지, 황태 자님의 명이 있기 전까지는 결코 입을 열 수가 없다며 그 역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쳇!' 그래서. 터덜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여관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무도 나와 상대를 안해주니 절로 심심해졌던 나는 여관의 로비에서 진열되어 있는 값비싼 미술품들을 감상 하며 로비에 비치된 푹신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미카엔 녀석... 은근히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내가 여자라고 무시하는 건가? 하긴, 로히얀 스 왕국이 꽤나 보수적인 나라라고 했으니... 그들이 생각하는 것도 보수적일 수밖에 없 겠지!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냉정할 수가 있지? 미카엔은 자신의 후궁을 사형에 처한다면 서 어떻게 망설임 하나 없냐구?' 그렇게 끝없이 미카엔에 대한 불만감을 속으로 토로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표정을 구기고 있어?" 옆자리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나에게 말을 건 이를 바라보았다. "엔카?" "후훗... 옆에서 보니, 표정이 아주 가관이더군! 어떻게 하면, 표정이 그렇게 시시각각으로 다양하게 변할 수가 있지?" 그의 말에 나는 살짝 웃어보이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엔카루스는 놀랍다는 표 정을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라비스! 네가 왠일이지? 오늘은 그다지 매몰차지가 않네? 게다가 나에게 웃음까지 보이다 니... 설마, 미카엔에게 싫증나고 나에게 그 맘이 돌아선 것은 아니겠지?" 그의 약간 가벼워 보이는 듯한 말에 나는 한심하다는 듯한 얼굴로 그에게 대꾸했다. "너 꼭 그렇게 미움을 벌어야겠어? 내가 너에게 매몰차게 굴지 않은 것은 너의 여동생 때문 이야! 그녀가 그렇게 된 것은 내가 원인이잖아? 어쨋든, 나는 너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깐, 그것가지고 이상한 쪽으로 오해하지는 말아줬으면 해!"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엔카루스는 그의 까만 눈동자로 나의 얼굴을 한동안 응시하더니, 무겁 게 입을 열었다. "아사벨이 그렇게 된 것은... 당연한 거야. 원래 그애는 냉정한 판단을 할 줄 알았던 아이였 는데,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마족의 마수에 조종당하고 말았지. 그건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야! 아모르 가문에 있어서도... 난 아사벨을 가엽게 여기지만, 그애가 자신의 저지른 짓에 대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의 말에 울컥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에게 소리쳤다. "그녀가 불쌍하지도 않아? 넌 그녀의 오빠야! 어떻게 그렇게 남 말하듯이 말할 수가 있지? 가문이라고? 웃기지도 않아!! 그리고, 너희들이 생각하는 방식! 너무 짜증나! 너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 똑같구나!" 내가 그렇게 지레 흥분을 하며 외쳐대자 엔카루스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래서, 저 녀석이 맛이 갔나? 하며 의혹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는데... "쿡! 라비스, 진정해. 네가 그렇게까지 아사벨을 생각해주는지 몰랐는걸? 그애가 무지 감동 해하겠군. 하지만, 정도껏 해! 라비스... 미카엔이 너를 좋게 봐주고 있어서 그렇지! 그 녀 석은 굉장히 냉정한 녀석이야! 부드러워 보이는 그 아름다운 얼굴로 누구에게나 쉽게 마음 을 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주지 않는 냉정한 성격의 소 유자이지! 그는 프레야 왕비를 매우 많이 닮았어. 아마도, 의외로 잔인한 면모까지 그녀를 닮았겠지... 그런 그가 과연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을까? 혹시 모르겠군. 너의 아름 다운 미모에 싫증난다면, 언제 냉정하게 돌아설지... 그땐, 나에게로 와! 내가 기꺼이 받아줄테니깐..." 찰싹! 그의 말에 열이 뻗쳐오른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뺨을 때렸다. 그리고, 그에게 착 가 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역시... 넌 재수없는 놈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휙 돌아서서 그대로, 미카엔이 루젠다르의 귀족들과 만남을 갖고 있는 미 카엔이 머물고 있는 방으로 갔다. 그 객실은 이 여관에서 국빈급의 인사들이 머무는, 이 곳에서 제일 화려한 방이었다. 아마도, 미카엔은 그 객실에 딸려있는 응접실에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있는 응접실로 들어가려 했으나 문밖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미카엔의 기사들이 나를 가로막았다. "라비스님! 지금은 들어가시면 안됩니다." "지금 당장 그에게 말해야 할 급한 일이 있으니, 비켜주세요!" 그러자, 기사들은 난감했는지 나를 강제로 막지는 못하고 우물쭈물하였다. 나는 그들을 무 시하고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응접실로 들어가는 문을 노크를 하였다. 똑, 똑! "무슨 일인가?" 안에서 미카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그대로 문을 열 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안에는 세명의 중년 귀족들이 앉아있었는데, 그들은 나를 보 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라비스? 무슨 일이지?" 미카엔은 처음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내가 찾아온 용건이 그다지 급한 것이 아님을 깨 달았는지, 그의 얼굴에 약간 불쾌함이 어렸다. "말씀 중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황태자 전하와 여러분께 말 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렇게 무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용서하세요!" 그러자, 미카엔은 나의 의외성의 발언에 약간의 흥미를 느꼈는지, 입을 열었다. "할 말이란 것이 무엇이지?" "저에게 며칠 후면 있게 될, 루젠다르와 로히얀스의 화친 외교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 을 주세요!" 황당하다면 황당하다고 할 수 있는 나의 발언에 루젠다르의 귀족들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나타내었고 미카엔은... 그는 잠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라비스!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발언이야? 자자! 이제 그만 방으로 돌아가도록 해! 아, 그리고 이분들에게 무례에 대한 사과를 해야하겠지?"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들에게 나의 무례에 대한 사과의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거만한 태도로서 그들을 대하고 있었는데 루젠다르의 귀족들은 그런 미카엔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의 태도에 대해서 불쾌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방금 제가 한 무례는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뭐, 루젠다르의 귀족 분들은 모두 너그러우실테니 제가 한 무례를 용서해 주실테지요?" 나는 그들에게 방긋 웃어보이며, 말했고 그들은 어떨떨해 하며 고개를 마지못해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 중, 맨 오른쪽에 앉은 콧수염을 기른 갈색머리의 귀족은 나의 미소에 흠뻑 취하기라도 했는지, 오히려 미소까지 지어보이며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렇게 무례를 무릅쓰고 화친 외교자리에 참석하기를 말씀드린 것은 제가 루젠다르국 에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루젠다르국과 저희나라에 모두 이익이 되는 제안이지요! 지금은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아무튼, 제가 그때 말씀드릴 수 있도록, 저에 게 자격을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훗... 저의 이러한 당돌한 말을 못믿으시겠다면, 황태자 전하께서 매우 서운해 하실테니, 여러분들은 그 부분을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나는 은근슬쩍 미카엔을 끌어들이며, 그들에게 강요하였다. 미카엔은 나를 의혹의 눈길로 잠시 바라보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시일 뿐, 그는 나의 말을 거들며 루젠다르의 귀 족들에게 입을 열었다. "믿으셔도 좋을 것입니다. 그녀는 비록 나의 측실의 자리에 있지만, 능력이 매우 뛰어난 여 자이지요! 그녀는 마스터급의 마법사이며 외교에도 매우 능한 출중한 인재입니다." '헉! 미카엔, 그렇게 부풀릴 것 까지는...' 그 뒤로도 미카엔은 나에 대해서 부풀리기에 재미를 붙이기라도 했는지, 한번 터진 뻥은 그 칠 줄을 몰랐다. 그는 나에 대해서 엄청 부풀려 그들에게 떠들어댔는데, 그가 왜저러는지 나조차도 의심스러워졌다. 어쨋든, 나는 미카엔의 다소 지나친 공헌으로 정식으로 외교사절로서 루젠다르 왕성에서 개 최 될 화친 외교자리에 참석할 자격을 갖게 되었다. [60] 체인지(Change) 제11화 -이번에는 외교관이 되어...- (2) -2- 그 후, 시간이 약간 흘러 일찍 잠드는 습관을 지닌 사람들은 벌써 꿈나라에 갔을 시각이었 다. 나는 침실에서 뒹굴뒹굴하고 있었고, 미카엔은 그 옆에서 잡다한 서류들을 검토하고 있었 다. "미카엔! 미카엔은 나중에 로히얀스의 국왕이 되겠지요?" "그럴테지..." "그렇다면, 미카엔은 나중에 어떠한 왕이 될 건가요?" "훌륭한 왕..." 그의 성의없는 대답에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지 간단한 대답이로군요. 그렇다면 다시 묻겠어요. 미카엔은 어떻게 훌륭한 왕이 될 거 죠?" "흐음... 글쎄." "로히얀스를 단순히 왕권 강한 보수적인 나라에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대륙에서 제일 강대 한 나라로 만들고 싶지 않아요?" 내가 그렇게 묻자, 미카엔은 진지해진 얼굴로 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거지?" "흐응~ 그냥, 물어봤어요! 미카엔, 내가 왜 아까 루젠다르 귀족들에게 그러한 짓을 저질렀 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왜 그랬는데?" "아사벨라를 풀어주세요! 미카엔이 그렇게 해주면, 전 미카엔의 힘이 되도록 힘을 다하겠어 요!" "푸훗! 라비스, 너에게 무슨 힘이 있는데?" 그가 웃어버리자 기분이 나빠진 나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아직! 하지만, 제가 가진 능력으로 미카엔이 루젠다르와 인페르디아 모두 꿀꺽 삼킬 수 있게 도와드리겠다는 거죠! 미카엔에게는 그러한 야심은 없나요?" 내가 여기까지 말하자, 미카엔의 얼굴은 약간 굳어졌다. "라비스! 넌 그렇게 안봤는데, 갈수록 의외의 모습을 드러내는 구나! 처음에는 그저 얌전한 숙녀에서, 이제는 시건방진 그리고, 황당하기까지..." "사람은 세월이 지나면, 변하기 마련이에요. 전 사람들의 속마음을 잘 꿰뚫어보는 편이죠! 물론, 미카엔의 속마음은 안개에 가린 듯 흐리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답 니다. 방금, 제가 두 나라를 삼킬 수 있게 도와드리겠다고 했을 때, 미카엔의 눈에서 잠시 빛이 반짝하는 것을 보았지요! 그건, 미카엔에게도 야심이 있다는 증거가 되겠지요? 제 가 틀렸나요? 게다가, 아까는 루젠다르 귀족들에게 저를 거드는 말을 했었잖아요?" "그건, 네가 무언가 재미있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랬지... 다소 무책임한 말이 되 겠지만, 나는 재미있는 돌발 상황이나 결과를 매우 좋아하거든." "그럼, 저를 믿어주시겠어요? 그리고, 아사벨라를 풀어주세요. 전 그녀를 좋아하지는 않지 만, 그녀를 이해하고는 있지요!" 미카엔은 나의 말에 잠시 생각하는 눈치이더니, 이내 미소를 짓고는 나를 향해 몸을 돌아누 웠다. "좋아! 너를 믿어보지... 이거, 아주 재미있을 것 같은데?" 미카엔은 그렇게 말하더니, 나를 끌어당겨 품에 안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밀치고는 일어나며 말했다. "미카엔, 죄송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것이 있네요! 전, 아직 미카엔을 받아들이지 못하 겠어요! 그건 미카엔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계시겠지요? 당분간, 절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그러자, 미카엔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못받아들이겠는데? 네가 아직 마음을 못열고 있었다는 것, 나도 짐작은 하고 있었어! 하지만, 넌 나의 부인이야!" "저도 알아요! 하지만, 미카엔이 저를 조금이라도 아끼는 마음이 있으시다면, 제 부탁을 들 어주세요!" "휴~ 라비스... 넌 너무 나에게 바라는 것이 많군! 내가 만약 거절한다면, 어떻게 할 거지?" 그의 말에 나는 싱긋 웃어보였다. "그렇다면, 언젠가 제가 미카엔을 떠나게 되는 날이 오게 되겠죠! 미카엔에게서 몸을 숨길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는 그 순간에 말이죠!" "날 협박하는 건가? 라비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다만, 저에게 시간을 달라는 것 뿐이에요." "좋아! 하지만, 라비스. 나를 너무 기다리게 해서 나를 화나게 만들지는 마! 그땐, 너를 강 제로 나의 것으로 만들어 버릴거니깐... 물론, 네가 나를 떠난다 해도, 내가 너를 못찾을거 라는 생각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그는 내가 말한 부탁으로 인하여 기분이 상했는지, 약간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몸을 편하게 누워 잠을 청하였다. '헉! 미카엔, 너야말로 나한테 협박하는 거잖아? 되게 무섭네...' 나는 속으로 투덜대며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미카엔은 감고 있던 눈을 다시 뜨 더니, 나를 향해 살짝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잘자! 라비스..." 그리고, 다시 눈을 감는 것이었다. '쳇! 쳇!' [61] 체인지(Change) 제11화 -이번에는 외교관이 되어...- (3) -3- 다음날 아침... 나는 미카엔보다 일찍 눈을 떴다. 평소에는 항상 늦잠을 자던 나였지만, 오늘은 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었다. 나는 이 여관에 딸린 마굿간으로 가보았다. 아멘시타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멘시타!!" 나는 마굿간 안에 서있는 새하얀 털의 늘씬한 말을 찾아내고는 서있는 채 잠들어 있는 조세 핀에게 아멘시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아멘시타는 지금 조세핀의 몸 속에 없었는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어디 간 거지?" 결국, 나는 아멘시타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길이 없었기에, 할 수없이 조세핀을 붙잡고 아 멘시타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멘시타! 어디있어? 당장, 조세핀의 몸으로 들어와!!" 그때, 마굿간으로 한 마부가 들어왔고, 조세핀을 붙잡고 아멘시타를 부르는 나를 보더니, 나 의 모습이 기이하게 느껴졌는지 의혹의 눈길로 나를 한번 쓰윽 보고는, 이내 한 마리의 말을 끌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런 마부의 모습에 나는 잠시 머쓱해 있다가 그가 나가자 다시 조세핀에게 다그치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빨랑 안와? 아멘시타! 주인이 부르면 잽싸게 달려와야 할 거 아냐!!" 히히힝~ 조세핀은 나의 이런 행동이 매우 성가시게 느껴졌는지, 히힝거리며 푸르릉거렸다. "욱! 짜증나~ 5초 내로 나타나지 않으면, 로히얀스로 돌아가 네 본체 나무를 베어버린다?" 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마굿간 안으로 어떠한 기운이 도는 듯 하더니, 조세핀의 얼굴 표 정이 불만어린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것을 본 나는, 아멘시타가 온 것을 깨닫고는 씨익 웃어보였다. "왜 이제야 나타나?" [쳇! 본체에 돌아가 있었어. 나도 영양섭취나 기운 회복 같은 것을 해야 하잖아? 그런 협박 을 하다니...] "그랬었냐? 나 너에게 급하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불렀어! 지금, 당장 루젠다르의 왕성으로 가줘! 거기서, 루젠다르 왕을 살펴보았으면 하는데..." [그 말은 즉, 나보고 첩자 노릇을 하라는 말이야?] "왜 하기 싫어? 너 예전에 나에게 했던 말, 벌써 잊은 것은 아니겠지? 넌 나를 위해서 뭐든 한다고 했잖아?" 아멘시타의 볼멘 소리에 나는 그에게 인상을 쓰며 지난 일을 들춰냈다. 그러자, 아멘시타는 더욱 표정을 구겼지만 나의 말에는 반박을 하지 못했다. 대신... [루젠다르 왕성을 얕보지마! 그 곳은 왕이 있는 곳이야! 나같은 어린 정령이 마음대로 왔다 갔다하며 첩자노릇을 할 수 없다구! 그곳엔 나와 같은 론티아 나무가 2그루나 있단 말이야!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아! 하나는 500년이나 묵었고, 다른 하나는 30년의 세월을 살았지 . 그에 비해, 나는 이제 20년의 나이밖에 되지 않았어! 아마,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그 들에게서 가로막힐 거야!] "흐응~ 그래?" 나는 다소 실망하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듯 말하다가, 다시 어떠한 생각이 미친 나는 다 시 그에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리엔시타! 그녀를 끌어들일 수는 없을까? 그녀는 몇천년을 살아온 물의 정령이 니 충분히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의 능력은 강하긴 하지만, 섣불리 인간들의 일에 끼어들지 않으려 할텐데... 게다가, 그 녀는 너를 주인이나 친구로서 아직 인정을 하지 않았잖아?] "네가 설득해줘!! 아멘시타. 아니면, 혹시 그녀를 꼬드길 만한 것이 없을까?" 내가 심각한 얼굴로 그에게 묻자, 아멘시타 역시 심각한 얼굴이 되어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 이더니, 이내 어떠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한결 밝아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리엔시타를 솔깃하게 만들 수 있는 한가지가 있긴 하지!] "그게 뭔데?" 나는 그의 말에 황금빛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물었다. "그녀는 물의 정령이라, 네가 가지고 있는 빙계속성과도 매우 가까워서 잘하면, 가능할 거 야! 네가 그녀를 꼬셔!! 그녀는 차가운 것... 아름다운 것, 그리고 자신과는 반대되는 색을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하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매력과는 상반된 매력에 끌리는 것과 같 은 이치라고 할 수 있어! 라비스, 너는 물의 정령을 대표하는 투명한 은빛과는 반대되는 황금빛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지고 있으니, 네가 잘만 꼬신다면...] "아멘시타!!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그런 퇴폐적인 발언을 할 줄을 몰랐어! 게다가 난 지 금은 여자의 몸으로 있잖아? 원래 남자였긴 했지만... 어쨋든, 여자인 그녀를 꼬시라니?" 아멘시타의 말에 나는 굳어진 표정으로 그에게 따져들었지만 그는 싱긋 웃더니, 나의 말에 친절히 설명하는 말을 하였다. [이도현? 넌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너는 우리 정령들이 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 는 거야? 리엔시타는 세젠느강의 정령이야! 세젠느강은 여성이라는 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리고 나 같은 경우에도, 역시 무성이지... 우리가 여성이나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은 그저 자신의 취향에 따라 그 모습을 한가지 성으로 정해서 가지고 있는 것 뿐이야!] "에엑? 무성이라고? 너 남자 아니었어?" 내가 그렇게 멍청하게 묻자, 아멘시타는 얼굴을 찌푸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난 무성이야! 그리고, 내가 그녀를 꼬시라는 말을 한 의미는, 이성끼리의 연애 의미로 꼬시 라는 뜻이 아니었어! 네가 가지고 있는 영혼의 매력으로 그녀를 끌어당기라는 의미였지! 네가 그녀를 꼬셔서 그녀가 네 말이라면 사족을 못쓰게끔 하라는 말이야! 정령들은 순수한 만큼 어느 한곳에 마음을 줘버리면, 그 한가지에 맹목적으로 매달리게 되지... 우리들은 인간들처럼 배신이라는 단어를 몰라! 미련할 정도로 그 한곳에 복종을 하다가, 만약 버 림을 받는다면, 그대로 수긍해버리는 것이 우리들 정령이야!] "그럼... 어떻게 그녀를 꼬시지? 꽃이라도 바칠까?" 나는 너무나 막연한 느낌에 농담 섞인 말을 그에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멘시타는 나의 말 에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없어! 리엔시타는 이미 너에게 반해있을지도 모를테니... 새침떼기 그녀 가 저번에 너를 구했던거 잊었어? 그녀는 아무리 내가 모시고 있는 주인이라 해도,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그리고, 그렇게 힘을 내보여 인간을 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내 가 그녀에게 가서 말해볼게! 분명히 그녀는 못이긴 척, 이곳으로 와줄 걸? 그럼, 넌 그녀 에게 잘대해주기만 하면 그녀는 금방 너에게 넘어올 거야! 물론, 리엔시타의 성격상... 너 를 무시하는 체를 하겠지만! 그럼, 갔다올게!] 아멘시타는 그렇게 말하고는 조세핀의 몸에서 빠져나갔다. 나는 그의 말에 어떨떨해 있다 가, 이내 의미모를 미소를 지어보였다. "후훗... 그렇단 말이지? 정말 잘 되었네... 난 아무래도 정령들과 인연이 많은 모양이군. 성 공적인 외교의 첫 번째는 확실한 정보수집이 될테니 그 첫 번째의 발판은 어느 정도 이룬 셈이군." [62] 체인지(Change) 제11화 -이번에는 외교관이 되어...- (4) -4- 아멘시타가 리엔시타를 데려오기만을 기다리며 나는 미카엔과 함께 루젠다르 귀족들과 오찬 을 하고 있었다. 역시, 그들과는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것이 불가능했는지, 미카엔은 그들과 일상적인 담소 를 빙자하여, 나라의 이익이 관련된 대화들을 나누고 있었다. 나 역시, 이들과의 대화에 끼어들 수 있는 자격이 생겼지만, 섣불리 끼어들지 않고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귀담아 듣고 있었다. 사실, 나는 로히얀스의 국익에 대해서는 그리 관심이 많지 않았지만, 아사벨라를 풀어주는 대신, 미키엔과 약속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돕 는 것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나는 이 일에 점점 흥미가 생겼다. 아무리 평범하던 사람도 한번 권력의 맛을 들이기 시작 하면, 마약과도 같이 그 길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어슴프레 체험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왕실의 화려함과 그리고 그것이 가지는 권위에 대해서 익숙해져 가 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고급 은접시에 담긴 고기를 나이프로 썰으며, 문득 미카엔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는 매우 진지해 보였다. 내가 평소에 대했던 약간 가볍고 성의없어 보이던 미카엔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부드러운 듯한 말 속에 날카로운 가시를 숨기며 저 귀족들을 공격을 했고, 자신의 의 도한 목적에 그들을 끌어들이도록 말을 유도하고 있었다. 그런 것을 보니, 그는 탁월한 왕의 계승자라는 것이 느껴졌다. 문득, 나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걸리었다. 왠지 그의 그런 모습이 흡족하게 느껴졌다. 그 러다,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그와 함께 지내다가는 정말로... 그에게 내 마음을 주게 되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이프와 포크를 놓고 냅킨으로 입술을 살짝 닦았다. 그러자, 미카엔은 말을 멈추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라비스? 왜, 더 안먹어?" 그의 말에, 나는 약간 형식적이라고 할 수 있는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저 먼저, 일어나야 하겠군요! 말씀 계속 나누세요." 그리고는, 아사벨라가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감금에서 풀려난 후, 자신의 방에 서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방 앞에 도착한 후, 가볍게 노크를 해보았다. 그러자, 약간 거만하고도 당당해 보이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한동안 감금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목소리는 당당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세심하게 귀를 기울인다면 그녀의 당당함속에는 한풀 꺽인 자신감과 상처입음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자신의 모습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그녀의 모습 이 눈에 들어왔다. "식사 하셨나요?"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찰랑거리며 보석 장식의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 났다. 그녀의 붉게 칠해진 입술의 끝에는 약간 냉소적인 미소가 걸리어 있었다. "이 곳의 음식들은 제 입맛에 맞지 않더군요." "잠시 바람 좀 쐬지 않을래요? 황태자님께서 말하시길, 루젠다르의 수도에는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고 하시더군요!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이곳의 도시도 구경할겸 저랑 같이 나가 도록 해요. 여기 케이튼은 상업의 도시이라 매우 번화했다고 하더군요." 그녀랑 같이 나가자고 하는 말을, 나는 쓸떼없이 길게 말했다. 그러자, 아사벨라는 훗! 하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라비스님? 저를 믿으시나요? 이번에도 저랑 같이 나가셨다가 무슨일을 당하실지 모를텐데 요?" 그녀의 말에 나는 생긋 웃어보였다. "아사벨라님은 두 번이나 마족의 꾀임에 빠지실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겠지요? 그리고... 아 사벨라님은 황태자님을 사랑하시잖아요? 황태자님도 그가 줄 수 있는 만큼의 사랑을 아사 벨라님께 주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 아사벨라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우리는 어 찌되었든, 같은 위치에 있으니깐요." 나의 말에 아사벨라는 한동안 나의 얼굴을 응시한 채 미동없이 서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는데... "전 라비스님이 위선자 같이 느껴져요! 지금 쯤, 속으로 고소해하고 있겠지요? 나는 라비스 님을 죽이려 했었으니깐요. 라비스님은 지금 현재 황태자님의 사랑을 받고 계시니, 저에게 이러한 동정을 베풀 수가 있는 거겠죠? 그런거라면, 그만두세요! 나는 동정을 받을 만큼, 그리 불쌍한 위치에 있지 않으니깐요. 그만 나가주세요! 라비스님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두통이 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화장대 앞으로 가서 그녀의 긴 생머리를 빗는 행동을 했다. 나는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가보도록 하지요." 나는 미련없이 그 방을 나오며, 다시 여관 밖으로 나갔다. 지금 즈음이며 아멘시타가 돌아 와있을 듯 했다. 마굿간 쪽으로 걸어가던, 나는 어떤 새하얀 소녀가 나에게로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소녀는 아사벨라와 같은 또래로 보였고, 새하얀 피부에 투명한 빛이 도는 은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웅? 누구지?'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에게 새침한 모습을 해보이더니, 입을 열 었다. "나를 찾았다며? 능력도 없는 게, 그렇게 무작정 일을 벌리고 보다니! 쯔쯧..." 그녀의 말에 나는 발끈하였으나, 그녀가 리엔시타라는 것을 알아챈 나는 성질을 애써 죽이 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리엔시타? 이렇게 완벽한 인간의 모습이라니... 못알아볼 뻔했잖아? 저번엔 투명한 물 그대 로의 모습이었는데..." "나야 뭐, 그 누구와는 달리 뛰어난 능력의 정령이니... 호호!" 그녀의 말에 나는 인상이 절로 쓰였지만 그녀를 내편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했으니, 계속 그 녀의 비위를 맞추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령들은 원래 그렇게 다 아름다운 모습이니? 정말 아름답구나! 리엔시타." 나의 말에 그녀의 하얀 볼은 약간 붉어진 듯 하였으나 여전히 뻔뻔스러운 모습으로 나에게 그녀의 주특기인 수다를 늘여놓기 시작했다. "호호... 역시! 너는 안목이 제법 뛰어나구나? 라비스! 그냥, 리엔이라 불러! 그게 편하니 깐... 리엔시타보단 역시, 리엔이 더 어감이 좋지 않아?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을 벌린 거야? 아멘시타의 말로는 루젠다르 왕이 어쩌구 저쩌구 하던데... 역시, 어딜가든 나를 필요 로 하는 곳이 너무 많단 말이야! 내가 워낙 팔방미인이다 보니... 어쩌구~ 저쩌구~ 깔깔 ! 호호!" 왠지 두서가 없고 어지럽게 느껴지는, 자화자찬이 많이 들어간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나는 머리가 어지러워졌으나 나는 애써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없이 이어질 듯 하는 그녀의 말을 적당한 곳에서 자르고는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리엔! 난 너의 힘이 필요해! 그래서, 널 불렀어! 날 도와줄 거지? 물론, 친구로서 말이야!" 나는 최대한 화사하게 보이도록 웃어보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무언가에 감 동한 듯한 표정을 하며 입을 열었다. "치, 친구?" "그래! 친구 말이야. 혹시, 내가 친구라고 말해서 기분 나쁘니?" 나는 커다란 황금빛 눈을 일부로 불안하게 내비치며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자, 리엔은... "꺄아~!! 어쩜 이렇게 이쁠 수가 있는 거지? 인간의 탈을 쓰고 말이야! 왠만한 정령들보다 더 이뻐!" 리엔은 그렇게 호들갑스럽게 말하더니, 나를 덥썩 끌어앉았다. '헉! 인간의 탈이라니? 그럼,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거야?' [63] 체인지(Change) 제11화 -이번에는 외교관이 되어...- (5) -5- 결국, 리엔시타는 몇번은 튕길거라 생각했던 나의 예상을 깨고 금방 나의 부탁을 들어주었 다. 아무런 대가없이 꽤나 귀찮은 일을 맡게 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단숨에 루젠 다르 왕성으로 사라졌다. 아마도, 그녀는 루젠다르 왕 근처에 물이나 액체가 있는 곳이라면 , 철저히 몸을 숨기며 그의 행동을 일거수 일투족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아멘시타의 말로는 그녀가 워낙 할 일이 없이 긴세월을 지루하게 살아와서 나의 부탁을 냉 큼 들어준 것이 아닐까 말했지만 어쨋든, 나는 그녀가 나에게 베푸는 호의에 감사하는 마 음을 갖기로 했다. 그리고, 아멘시타에게서는 다른 일을 시켰는데 그것은 아사벨라의 뒷배경과 아모르 가문에 대한 것들... 그리고 아사벨라의 어린 시절 같은 것을 조사하게 시켰다. 그것은 아모르 집 안에서 키우는 동물이나 식물들의 몸속에 들어갔다 나와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정령들에게 일거리를 주고나서는 나는 한가해진 몸으로, 뭔가 바쁜 스케줄에 정신없 어하는 미카엔에게 한가한 제안을 한가지 했다. "미카엔! 지금 바쁜가요?" "흐음... 이따가 케이튼의 시장의 초대에 응해주어야 해! 그는 상업도시의 시장인 만큼, 교역 문제와 의논할 것이 있으니..." "그럼, 저두 같이 가요! 언제 가죠?" "두시간 후에 출발..." "아! 그럼, 아직 시간이 조금 있군요! 그럼, 케이튼시의 상권에 대해서 우리 조사나 해보 죠!" 나는 씨익 웃으며 그에게 그렇게 제안을 했고, 미카엔은 나의 속셈을 알아채었는지 빙긋 웃 으며 답했다. "라비스! 너 도시 구경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괜히 상권을 들먹이는 것을 보니... 좋아! 우 리 데이트나 오붓하게 해볼까?" "윽! 미카엔!! 데이트라니요? 엄연한 상권 조사에요!" "흐음... 케인튼시에는 예쁜 옷을 파는 옷가게가 몇인지, 맛있는 음식점이 몇군데인지 그리 고 오락시설을 갖춘 곳이 몇군데나 있는지에 대한 조사이겠지? 물론, 중요한 조사이긴 하지! 어쨋든, 킬린이나 다른 관리들이 보기 전에 빨리 나가보자!" 미카엔은 생글생글 웃으며 나는 재촉하였고, 나는 데이트라는 말에 약간 꺼림직했지만, 워 낙 심심했었고 도시 구경을 해보고 싶었던터라 입을 다물고, 그와 여관을 빠져나왔다. 날은 매우 뜨거워져 있었다. 태양은 한여름의 열기를 한껏 내뿜고 있었고, 미카엔과 나는 일반인의 차림으로 케이튼의 번화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곳의 도시는 매우 평화로워 보였다. 시민들은 제법 번화가에서 사는 주민답게 모두 깔끔 한 편이었고, 길가에는 귀족들이 타고다닐 만한 마차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잡상인들이 매우 많았는데, 그들은 매우 다양하고도 희귀한 것을 많이 팔아 나의 눈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때, 한무리의 청년들이 우리 근처를 지나갔다. 그들은 모두 스무살 안팎으로 먹어보였는 데, 나의 외모가 눈에 띄었는지 모두 힐끔힐끔 나를 바라보며 지나고 있었다. 그러자, 미 카엔은 그들의 눈길을 눈치채었는지 그의 은보라빛 눈에 드래곤 피어를 살짝 담아 그들을 노려봐 주었고 그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모두 부리나케 사라졌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나는 놀라며 미카엔에게 입을 열었다. "미카엔! 방금, 드래곤 피어 아닌가요?" 그러자, 미카엔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의 말에 답했다. "드래곤 피어는 아니야! 나는 드래곤도 아닌데 어떻게 드래곤 피어를 내뿜을 수 있겠어? 그 거랑 비슷하지만 나의 경우는 그저 눈에 살기를 담아 그들을 노려본 것 뿐이야!" '흐음... 드래곤 피어 맞는 것 같은데... 자신이 가진 능력을 그저 살기로만 치부하고 있다 니...' 나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본인이 모른다면 그저 모르는 상태로 있는 것이 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쨋든, 미카엔은 나에게 옷을 사준다며 옷을 파는 상점으로 끌고 갔고, 나는 마지못해 따 라갔다. 역시, 여기 루젠다르는 보수적인 로히얀스와는 달리, 여성들의 옷 스타일이 다소 자유로워 보였다. 로히얀스의 여성복들은 전형적인 풍성한 형태의 드레스였는데, 이곳의 여성 의류들은 대부 분 그다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 같았다. 다소, 야하고 하늘거리는 느낌의 원피스가 있는가 하면, 정숙하고 심플한 실용적인 형태의 드레스도 있었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그냥 나가려 했지만 미카엔은 본인 혼자 들떠서 나에게 이것 저것 입 혀보려 했다. 그렇게 미카엔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꼼짝마라!!" "있는 것 다 내놔!!" 진부해 보이는 형태의 무장 강도가 가게를 침입하더니, 역시나 진부한 대사를 그렇게 읊는 것이었다. 나와 가게 여종업원은 그들을 보고는 놀라서 움찔하였지만, 미카엔은 누가 들 어와서 어떠한 대사를 읊는지 별로 관심이 없는지, 계속 옷을 고르는데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 맘에 드는 어떤 옷을 찾아내었는지 밝아진 얼굴로 나에게 외쳤다. "라비스! 너와 굉장히 잘어울리는 옷을 발견했어. 이것도 설마 싫은 것은 아니겠지?" 그러자 미카엔을 제외한, 강도들을 비롯한 가게 안에 있던 우리(?)들은 잠시 황당해하는 표 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몇초의 시간이 흐른 후... "있는 것 다 내놓으라는 말을 못들었어!! 앙?" 무장 강도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강도들은 열을 받았는지 미카엔에게 그렇게 소리쳤 다. 그러자, 미카엔은 매우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어보였고 나는 강도들에게 안되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들은 오늘 미카엔을 잘못 건드려 인생 종 칠테니 말이다. 하지만, 가게의 여종업원은 여 전히 사색이 되어있는 채, 어쩔 줄을 몰라했다. "시끄럽군! 감히 누구에게 재잘대고 있는 것이지?" 차갑게 가라앉은 미카엔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미카엔이 그들을 제발 조용하게 처리 해주길 바라며 그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미카엔의 당당한 위세에 쫄았는지 강도들은 잠시 버벅거렸다. 그러다가, 조금전 소리친 강 도가 다시 위풍당당하게 외쳤다. "아니! 저 놈이 심장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나?" 그의 말에 나는 순간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냐의 말을 심장으 로 잘못 말한 것이 웃겼기 때문이었다. [64] 체인지(Change) 제11화 -이번에는 외교관이 되어...- (6) -6- 결국, 옷가게 안으로 침입했던 세명의 무장 강도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제대로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미카엔에 의해 밖으로 끌려나갔다. 미키엔은 가게안에서 소란을 피우며 그들을 혼내고 싶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외교사절의 신분으로 남의 나라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는지, 마법의 힘을 이용해 강도들을 상점 밖에다가 던져 패대기를 쳤고, 그들은 미카엔이 마법사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쩔쩔매기 시작했다. 허풍만 잔뜩 들었던 어설픈 강도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미카엔이 그 위엄있는 모습으로 그들을 다시 강도짓을 못하도록 혼내줄 것이라 예상을 하며 계속 지켜보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미카엔은 그들을 패대기를 치고는 드래곤 피어가 담긴 눈길로 그들을 한번 훑어보아준 다음, 다시 아무일 없다는 듯이 가게 안에서 옷을 고르는데, 나는 그에게 다소 황당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미카엔! 이게 끝이에요?" 그러자, 그는 정말 불쾌했었다는 듯이 표정을 구기며 나의 질문에 답했다. "저들을 혼내는데에 나의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흐음, 이젠 슬슬 시청 쪽으로 가보아야 하겠는데?" 미카엔은 그렇게 말하고는 그동안 골랐던 옷들을 모두 계산하였다. 옷들은 대부분은 나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그의 취향대로 고른 옷들이었는데, 모두 여성스럽고 하늘거리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나는 미카엔이 샀던 드레스들을 결코 입지 않으리라 속으로 맘을 먹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상점 밖으로 나온, 우리는 거리에 광대들이 여러 가지 쇼를 하며 지나가는 행렬을 보았다. 나는 그 행렬이 신기하여 걸음을 멈추고 구경을 하는데, 어떤 코끼리를 타고 한 여자가 피리 같은 것을 불고 가다가, 문득 나와 같이 별생각없이 서있던 미카엔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녀는 붉은색 계통의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글레머 미인이었다. 물론, 화장을 진하게 하여 멀리서 보았을 때 미인으로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거리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청년들이나 아저씨들은 모두 침을 흘리며 넋을 놓고 그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미카엔을 보더니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윙크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의미모를 색기 어린 미소를 흘리며 행렬과 함께 사라져갔다. 나는 미카엔의 반응이 궁금하여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표정없이 서있다가 나의 눈길을 깨닫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저 광대들의 행렬을 따라가서 어디 즈음에서 펼쳐질 화려한 그들의 쇼를 구경하고 싶 었으나 미카엔의 스케줄이 안따라주니, 나는 아쉬움을 떨치며 이곳의 시청으로 향해야만 했다. 그렇게 케이튼의 시청으로 가서 미카엔과 함께 시장을 만나고 식사대접을 받고, 신경전이 많이 오간 대화를 나누었다. 대부분은 미카엔과 시장의 대화였지만, 나는 그 옆에서 외교에 대한 미카엔의 수법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워나갔다. 그리고, 저녁 즈음에 다시 여관으로 돌아와 한 마리의 비둘기로 변해있던 아멘시타의 보고 를 받았다. 그의 말로는... [아사벨라의 아버지인 아모르자작은 그동안 루젠다르와 교류를 가졌었나봐! 그는 훈련이 된 비둘기의 발목에 종종 편지를 묶어 루젠다르로 날려보냈었는데, 그 비둘기가 바로 내가 몸담고 있는 이 비둘기야! 하지만 그 편지들의 내용은 모르겠어. 그리고, 이번 아모르 자 작가의 남매가 이번 사절에 참여한 것이 석연치가 않아! 그저 루젠다르왕의 먼친척으로서 안부를 전하기 위해 이번 사절에 따라온 것이 아닌 것 같아. 게다가, 엔카루스, 그 시커 먼 남자가 마법 도적단을 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그 마법 도적단들은 각 지역마다, 흩어져 있는데, 이번에 로히얀스의 수도 로히아나로 조금 몰려드는 것이 조금 이상해!] 그의 말에 나는 매우 놀라워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아모르 자작가에서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말이네? 하지만, 그들이 일을 꾸민 다해도 왕성에는 왕비가 있어! 그녀는 천군만마의 힘보다 강대하지! 게다가 하프드래곤인 미카엔도 무시못하는데, 과연 그들이 우려할만한 위험이 될까?" [물론, 왕비는 강하지! 그녀는 이미 수천년을 살아온 최강의 환수이니깐... 하지만, 그녀가 이번에 즐기는 유희는 마지막 유희야! 그래서 그녀가 마지막 유희에 집착을 가지고 있지! 그런 이유로, 그녀의 마지막 자식인 미카엔에게 드래곤으로서의 능력을 물려주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아무튼, 문제가 되는 건 드래곤들은 모두 정해진 그 수명이 있는데, 그것 이 멀지 않았다는 거야! 그건 나의 짐작일 뿐이고, 정확한 그녀의 수명은 잘모르겠어! 하지 만, 걱정스러운 건 아모르 자작이 그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아!] "아니! 아모르 자작이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지?" [그것이 지금 석연치가 않다는 거야! 아모르 자작은 왕비의 마지막 유희가 끝나는 시점을 알고 있는 듯 한데, 그 정보를 어디서 들었을까? 내 나름대로 유츄해보았어! 드래곤의 수 명이 다하는 시점을 짐작할 수 있는 존재들은 드래곤과 상응하는 높은 레벨의 존재가 될 거야! 그렇다면, 지금 현재 그녀를 적대시하고 있는 높은 레벨의 존재가 누가 될까? 아마 도, 저번에 나타났던 고위마족의 여자가 아닌가 싶어! 그녀는 예전에 왕비에게 힘을 봉 인당한 적이 있어서 그녀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어!] "그럼, 아멘시타! 그 마족여자의 봉인을 풀어준 존재는 또 누구라고 생각해?" [그거까지는 나도 모르겠어! 어쩌면 왕비 자신일지도 모르지. 드래곤의 속은 알 수가 없으 니... 아니면, 마계의 지배자급의 마족이 그녀를 직접 풀어주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것은 가능성이 희박해! 마계의 지배자들은 인간계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으니깐. 어쩌면, 나의 예상을 깰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 여자 마족은 인페르디아의 왕을 돕고 있다 고 했잖아? 그런데, 아모르 자작이 그 마족 여자에게서 정보를 들었다면, 일은 정말 복잡 하게 꼬여들어가고 있는 것일거야! 사실, 이것에 대해 알아보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우연히 이 비둘기의 몸속에 들어갔다가 알게 된 내용들이지!] "그렇다면... 루젠다르와 긴밀한 접촉을 하면서 마족 여자와 교류를 하고 있다면, 루젠다르 와 인페르디아와 손을 잡았다는 소리잖아? 그렇다면, 그 두나라가 우리나라를 가지고 놀 았다는 소리인데... 흐음, 지금 상황을 종합해보자면, 루젠다르는 우리나라와 화친을 맺는척 안심을 시키고 인페르디아는 그것을 방해하는 척을 해서 우리를 더욱 안심시키고... 그렇 게 된다면, 왕비의 수명이 다하는 날 로히얀스는 쇠퇴하게 되겠군. 물론 미카엔이 있긴 하 지만, 그렇게 두나라와 고위마족이 덤빈다면, 미카엔도 힘들어질 거야!" 내가 그렇게 정리를 해가며 말하자, 아멘시타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는 손톱을 물어뜯 으며 잠시, 방안을 왔다리 갔다리 했다. 뭔가 방책을 세워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리엔시타가 돌아오길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불안스럽게 방안을 왔다갔다 하다가 다시 아멘시타에게 입을 열었다. "그럼, 아사벨라를 인질로 잡아서 자작에게 협박을 해볼까?" 그러자 아멘시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과연 그 수법이 통하게 될까? 엔카루스만 보아도, 저번에 아사벨라를 처형한다고 했을 때 별로 동요하지 않았었잖아?] [65] 체인지(Change) 제11화 -이번에는 외교관이 되어...- (7) -7- 늦은 저녁이 되도록, 나는 리엔시타를 기다릴 겸 아멘시타와 함께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런데... 촤아악~!! 방안에서 갑자기 물소리가 들리는 듯 하더니, 투명한 빛의 물들이 신비하게 느껴지는 광경 을 연출하며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물들은 어디서 갑자기 생겨났는지 모르겠지만, 아 무튼 그렇게 휘몰아치며 어떠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곧 사람의 형태가 되 어갔다. "리엔?" 내가 그렇게 묻자, 투명한 형태의 사람의 형상은 곧, 완벽한 소녀의 모습이 되었고 그녀는 사뿐한 걸음으로 이곳으로 다가왔다. "나 다녀왔어! 나 그동안 힘들었는데... 칭찬해줄 거지? 루젠다르 영감의 집무실에 있는 공 기중에 습기의 형태로 몇시간 내내 머물러 있었는데, 지루해서 죽을 뻔했어! 정말 고생했 다구~ 게다가 론티아 정령들 녀석들 몰래 잠입해 있느라 몸에서 쥐가 날 것 같았어! 그리고..." 리엔시타는 그렇게 나타나자 마자, 나에게 말을 늘여놓기 시작했는데 나는 한없이 이어질 것 같은 그녀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 "아, 고생 많았겠구나! 그런데, 리엔! 뭐 알아낸 것은 있어?" "흐응~ 당연히 있지! 내가 누구겠어? 수천년을 살아온 물의 정령이잖아? 그건 식은죽 먹기 라구~ 그 루젠다르 영감이 오늘 했던 행동을 시시콜콜 이 뛰어난 머리속에 담아 왔지! 호호... 그 루젠다르 영감은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욕실에 들어가 세수를 한 다음, 시중들기 위해 들어온 시녀와 여러 가지 이상한 종류의 대화를 나누었어!" "그 이상한 대화가 뭔데?" 나는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듣다가 그렇게 질문을 하였는데... "으응, 그 대화가 약간 민망한 부분이라 말하기 그렇지만, 그래도 중요하다면 말해야겠지? 그 루젠다르 영감은 시녀에게 이렇게 말했지! 처음보는 얼굴이군! 몇살이지? 하고 물었고 시녀는, 열다섯이요! 하고 대답을 했어. 그러자 그 영감은, 좋은 나이이군! 나이도 적당하 고 몸매도 나이답지 않게 많이 성숙했고 얼굴은 그만하면 꽤 귀엽군. 흐음... 이름이 뭐지 ? 그렇게 물으니깐 시녀는 어쩔 줄 몰라하며 대답을 했어! 시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깐... 호오! 이름도 귀엽군. 시링? 오늘밤에 나의 침실로 오거라! 그러자, 시링은..." "리, 리엔!! 그만 말해!!" 나는 민망하기 짝이 없는 내용들을 자세히, 그리고 리얼하게 흉내까지 내며 말해주는 리엔 에게 소리를 치며 중단을 시켰고, 리엔은 놀랬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그녀의 모 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리엔! 그런거 말고... 뭔가 중요한 정보가 될 만한 내용들을 말해줘! 예를들면, 나라끼리 오 간 기밀 문서에 대한 내용이나..." "아! 있어! 점심때, 그 루젠다르 영감이 어떤 문서를 전달받았는데, 그것은 인페르디아 왕의 서신이었던 것 같아! 어떤 마족 여자가 직접 그것을 가지고 왔다고 하는데, 다행히 집무 실까지는 들어오지 않고 왕의 비서관이 서신을 전달해 주더군. 그래서 들키지 않았지! 그 마족한테 말이야!" "그 서신의 내용이 뭐였는데?" 나는 리엔시타를 재촉하였다. "응, 그게 말이야! 루젠다르가 제안한 제의를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었어! 그 제의가 무엇 인지는 언급이 없었고, 음... 되도록 서두르자는 내용이던데?" "그래? 그렇다면, 이것으로 두나라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군." [그럼, 이제 어쩌지?] 묵묵히 있던 아멘시타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리엔시타는 그제야 아멘시타를 발견했다는 듯이 그를 보며 꺅꺅거리기 시작했다. "어머! 어머나! 이번엔 귀여운 비둘기가 되어있네? 이봐! 꼬맹이. 그렇게 밥먹듯이 몸을 바 꾸다니! 그러다가 자신의 본체가 나무였다는 것도 까먹지 않아?" 그러자, 아멘시타는 온화한(?) 성품의 새가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눈초리는 매우 사나 워져 있었다. 결국, 그의 입에서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입닥쳐! 할망구!!] "꺄악~!!! 할망구라니? 할망구라니이!! 용서못해! 나같은 미소녀에게 할망구라니!!" 리엔시타는 그렇게 수선을 떨며 흥분을 하였는데, 할망구라는 소리에 화가 치밀었는지 자신 이 가지고 있던 물의 힘으로 아멘시타를 덮쳐갔다. 그러자, 아멘시타는 잽싸게 푸드득 날 아올랐으나, 비둘기가 빠르면 얼마나 빠르겠는가? 곧, 넝쿨가지가 뻗어가듯이 투명한 빛의 물은 살아있는 듯 허공에서 춤을 추었고 비둘기로 있는 아멘시타를 포위해 갔다. '윽! 정신없어~!!' 푸드득~!! 나는 다소 산만한 모습의 정령들을 보며 소리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구구, 구우~!! 결국,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꼈는지 아멘시타는 비둘기의 육체에서 빠져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아멘시타가 가버린 것을 알아챈 리엔시타는 정말 아깝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힘을 거두어 들였다. 그런데, 그때! '허걱!' 언제 들어왔는지 미카엔이 황당함과 어지러움증이 복합된 표정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 는 것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미, 미카엔? 언제 들어왔어요?" 내가 그렇게 입을 열자, 리엔시타는 그제야 미카엔의 존재를 깨달았는지 미카엔을 돌아보았 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숨기기에는 너무 늦었다 싶었는지, 매우 어설프고도 어색한 미 소를 미카엔에게 지어보이며 꾸벅 인사를 해보였다. "아하하... 안녕하시와요? 저는 바빠서 이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파앗~! 하는 음향과 함께 투명한 물빛을 남기며 사라져 버렸다. "라비스? 방금, 너와 같이 있던 정령들은 대체 누구지?" 그는 그들이 정령들이란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는지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래서, 나는 이 난감한 상황과 그들과 맺은 인연에 대해서 그에게 설명하기 위해 머리속으로 차근차근 정 리를 해나갔다. * 인물 설정에 대해서... 여기 체인지에서 드래곤의 존재들은 보통 5000~6000년 정도의 수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카엔 같은 드래곤 2세는 비록 드래곤에 가까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하프 드래 곤이지만, 수명은 인간과 같습니다. (하프 드래곤치곤 능력이 많이 주어지긴 했지만...ㅡ.ㅡ;;) 그리고, 론티아 나무들은 그 수가, 한 나라 안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매우 희귀합니다. 그만큼 특별한 존재이지요! 또한 이 나무들은 땅에 심어져 싹을 틔우는 순간, 정령으로서 삶을 시작합니다. 한그루의 나무마다 한 개체의 정령이 존재합니다. 이들 정령의 수명은 보통 2000~3000년 정도입니다. 나무가 아주 오래살면 그정도 하지요? 물론, 이들은 신성한 나무로서 저마다 정령들이 존재하니, 병에 걸려 죽을 일도 없지요! 능력은 나이를 많이 먹을수록 뛰어나집니다. 한 1000년 정도 묵은 론티아들은 리엔시타처 럼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본체에서 떨어져 나와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이들은 1000년에 한 개씩 신성한 론티아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 열매는 죽은 사람도 살 려낸다는 영약입니다. 그리고, 리엔시타는 정해진 수명이 없습니다. 아마도, 세젠느강이 없어지지 않는 한... 계속 살겠지요? [66] 체인지(Change) 제11화 -이번에는 외교관이 되어...- (8) -8- 아멘시타는 원래 크로시벨가에 있던 론티아 나무정령이고 리엔시타는 세젠느강에서 만난 물 의 정령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미카엔은 매우 놀라워하며, 특히 리 엔시타에 대해서는 굉장히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멘시타와 같은 나이어린 론티아 정령들은 왕족이라면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령이었으나 리 엔시타와 같은 몇천년의 세월을 살아온 물의 정령일 경우에는 굉장히 자부심이 강했고 인 간들과의 교류도 전혀 하지 않는 정령이었던 터라, 미카엔으로서도 정말 뜻밖의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세젠느강의 정령인 리엔시타와 같은 경우는 거의 영원과 같은 세월을 사는 정령이었 기에, 특별한 능력도 많은 정령이었다. 그래서, 나라의 실력자들이나 야심가들은 그러한 정령들을 이용하고자 눈에 불을 키지만, 그들을 따르는 것은 순전히 정령들 마음이었던 터라 , 그들로서는 정령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정령들의 힘을 빌리자면, 그들 자신이 정령들을 끌어당기는 그 특유의 매력 과도 같은 것이 있어야 했지만, 그러한 능력은 타고난 것이어야 했기 때문에, 지배자들은 결국, 정령들과 친화력이 있는 존재들을 자신의 옆에 두고 정령들의 힘을 이용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내가 리엔시타와 교류를 하고 있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미카엔도 나를 달리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역시, 너의 미모는 정령들도 사로잡는 모양이군. 대단해! 라비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약간 잘난척을 해보였다. "제 외모로 그들을 사로잡은 건 아니에요! 누가 그러는데요. 저에겐 마력과도 같은 매력이 있대요! 하하." "하긴, 그것은 나도 인정해! 너를 보고 있자면, 정신없이 너에게 빨려들어가고 있다는 느낌 이 들거든." 나는 농담 반으로 그에게 말했지만 미카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어투로 응수하였다. 그의 노골적인 느낌의 칭찬 비슷한 말에 나는 그의 얼굴을 외면하였다. 그러자, 미카엔은 의아한 표정이 되어 나에게 물었다. "라비스, 뭐지? 그 반응은? 설마, 부끄러워 하는 건가?" 그의 말에 나는 잠시 닭살이 돋았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에게 입을 열었다. "미카엔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죠?" 나를 보면, 정신없이 빨려들어가는 것 같다는 그의 말이 갑자기 부담스럽게 다가왔던 나는 왠지 이대로 그와 함께 지내서는 안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죄를 짓는 느낌이었다. 얼마전까지 남자의 영혼으로 있었던 탓으로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무책임하게 그 가 나를 사랑할 때까지 그냥 지낸다면, 언젠가는 미카엔에게 그나큰 상처를 안겨줄지도 모 르기 때문이었다. "그야, 나의 아름다고도 사랑스러운 부인이라 생각하고 있지!" 약간 웃음기가 섞인 미카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시 그에게 눈길을 준 다음, 입을 열었다. "나를 사랑하고 있나요?" 그러자, 미카엔은 나의 질문으로 인하여 매우 쑥스러웠는지 약간 얼굴을 붉히며 뜸을 들였 다. 하지만, 그다지 지체하지 않고 나의 말에 답했다. "물론! 넌 내가 사랑한 첫 번째 여자이자 마지막 여자가 될 거야..." "그런가요? 저를 사랑해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미카엔!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 진심은 담 지 말아주세요." 왠지 차가운 듯한 말에 미카엔은 굳어진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진심을 담지 말라니?" 그의 부드러웠던 눈빛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전... 솔직히 말하면. 미카엔이 나에게 잘해줄 때마다, 부담스러워요." 왠지, 나의 무덤을 파는 발언을 그에게 하고 있는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냥 그에게 적당히 장단을 맞쳐주며 살아도 되겠지만, 나의 맘에 미카엔에게로 향하려 할 때마다, 나는 거짓된 나의 행동이 너무 싫었다. 차라리 그가 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편이, 라비스로서 이세 계에서 사는 것이 편할 것 같았다. "부담스러워? 하긴, 넌 처음부터 나를 거부했었지?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잘알 아! 하지만, 나에게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이지? 사랑하는 다른 놈이 있는 것 이군! 혹시, 엔카루스인가?" "아니요! 엔카루스는 아니에요." "그럼, 뭐야?" 미카엔은 결국, 화가 났는지 높아진 목소리로 나에게 말하며, 나의 두 어깨를 꽉 움켜쥐었 다. '내가 드디어 미친 것인가?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나는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그의 얼굴을 외면하며 말했다. "놓으세요! 아프다구요!" 그러자, 미카엔은 나의 어깨를 더욱 세게 쥐더니, 다그치듯 나에게 물었다. "넌 지금 일부로 나의 화를 돋구는 것 같아. 나의 눈을 똑바로 보며 너의 진심을 말해!" "난... 난... 히잉~ 모르겠어요! 난 미카엔이 아는 그런 라비스가 아니에요! 난 얼마전까지만 해도 남자로서 살아왔단 말이에요!" 그러자, 화가 잔뜩난 표정이었던 미카엔의 얼굴에서 항당해 하는 빛이 스쳐갔다. 그는 잠시, 나의 얼굴을 응시한 채 멍하니 있더니,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풋! 라비스, 이유를 대려면 그럴 듯한 것으로 대야지! 남자였었다니, 큭큭! 정말 귀여운 발 상이라니깐..."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잡고 있던 나의 어깨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어... "라비스! 이렇게까지 나를 화나게 만들고도 살아있는 여자는 오직 너만이 될 거야. 오늘은 나를 화나게 한 대가로 너를 나에게 주는 것이 어때?" 그렇게 말하고는 나의 이마에 키스를 하더니 그의 입술이 아래로 내려와 나의 입술에 와서 닿았다. 물론, 나는 그를 밀쳤으나 이번에는 나의 거부에 미카엔은 쉽게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세게 끌어안았고 나는 순간 울컥하였다. 나의 고뇌섞인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 고 끝까지 무시하는 그의 행동에 화가 난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발을 세게 밟았는데, 미카엔은 윽! 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나를 안았던 팔을 풀었다. 그 리고, 나는 그 기세를 몰아 그의 뺨을 치고 말았다. 어제에 엔카루스의 뺨을 때린 이후, 오늘은 미카엔의 뺨을 때리게 된 셈이었다. '헉! 황태자의 얼굴에 손찌검을 하다니! 어쩌지? 요즘, 나에게 마가 끼었나? 엔카에 이어 연 타로...' 결국, 미카엔의 얼굴은 차갑게 식더니, 분노어린 눈길로 나를 쏘아보았다. 처음 받아보는 그 의 매서운 눈길에 나는 움찔하였다. 미카엔은 한동안 나를 쏘아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냉정하게 들려 나는 소름이 끼쳤다. "이런... 장미에 가시가 있었군. 하지만, 아름다운 장미이더라도, 가시에 찔려 자신의 피를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후후... 너의 바램대로 너를 사랑하는 마음에 더 이상 진심을 담을 수 없게 되겠군."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홱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오늘따라 그가 닫고 나간 문소리가 크고 거칠게 들려왔다. * 결국, 하나 올렸군요...;;; ㅡ.ㅡ [67] 체인지(Change) 제11화 -이번에는 외교관이 되어...- (9) -9-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미카엔에게 가서 내가 잘못했음을 시인하고 싶은 맘도 없었다. 그럴 것이었다면, 이런 행동을 애초에 시도도 하지 않았을테니... 그날 나는 계속 뜬눈으로 밤을 보내며, 다시 나타난 정령들과 함께 보냈다. 아멘시타는 나 의 기분을 위로하려는 듯한 말을 계속 하였으나, 리엔시타는 그와는 반대로 계속 옆에서 다그쳤다. "리엔! 이젠 그만해. 머리가 어질어질해!" "그만 못하겠어!! 너무 바보같아!!! 만약, 황태자가 너에게 극단적인 벌을 내리면 어떻하려 고 해! 예를 들면... 이혼이나..." "풋! 리엔. 미카엔은 그러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이곳에서도 이혼이라는 것이 존재하냐?" "물론, 이혼이라는 것이 남편한테 평생 버림받는 것이잖아?" "이혼이 버림받는 거라구? 서로의 결정에 의해서 헤어져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반문하자, 리엔시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당연히 이혼이 단순히 버림 받는 것라 생각했다가 내가 하는 말을 듣고는 햇갈리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피식 웃고는, 다시 화제를 돌렸다. "이제 그만하고, 곧 있을 루젠다르와의 화친 회담은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 좀 내놓아봐!" [루젠다르와 인페르시아의 둘을 갈라놓는 것이 어때? 우리가 둘 사이를 이간질을 하는 거 야!] "그래! 맞아! 우리가 가서 루젠다르한테 인페르시아의 욕을 실컷 해주자!" 아멘시타의 의견에 리엔시타는 맞장구를 치며 흥분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녀에게 돌아간 것 은 한심한 듯 쳐다보는 아멘시타와 나의 눈길이었다. "응? 왜들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리엔! 너 얘였냐?] "뭐엇?!" [너 몇천년 살아왔다는 것, 아무래도 헛살아온 것 아닌지 몰라! 생각하는 것이 그렇게 단순 해서야!] "캬악~!! 꼬맹이~ 너 오늘 그 짧은 생을 마감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가만두지 않겠어!!" "에~휴~!!"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한숨을 그들이 들으라는 듯이 일부로 크게 내쉬었는데, 역시 나의 의도대로 그들은 서로 잡아먹을 듯이 싸우려는 것을 금세 멈추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더욱 울적한 표정을 지으며 조금 낮은 한숨을 한번 더 내쉬어 보였다. 그러자 그들은 왠지 찔끔한 표정으로 방금 그들이 행동한 것에 대해 반성했다는 태도를 보 였다. 아무튼, 그렇게 때론 현명한 정령들이지만 순수한 만큼 정신연령도 낮은 그들과 함께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미카엔 일행은 수도로 향하는 여행길에 올랐고 저녁이 되어서야 우리 는 루젠다르의 왕성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때까지도 미카엔은 나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나 역시, 그런 그를 모른 척하였지만, 갑자기 냉담해진 그의 태도가 적응이 되지 않 는 것은 사실이었다. 리엔은 그에게 당장 용서를 빌라고 끊임없이 설득하였지만, 나는 그때마다 고개를 가로저었 다. 그날 저녁, 너무 피곤하였던 나는 나에게 배정된 침실에서 죽은 듯이 잠을 잤다. 그 리고, 또 다시 다음날 아침... 나는 로히얀스의 외교사절의 자격으로서 정식 회담에 참여하 게 되었다. 미카엔은 나를 한사람의 신하로서 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의 태도에 대해 담 담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나는 회장의 홀안에 나에게 주어진 자리에 앉으며, 계속 나의 머리속을 정리에 나갔다. 화친 회담을 성공적으로 끝마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리엔시타는 역시, 공기중에 습기로서 회장안에 잠입을 하였고 아멘시타는 자신의 자존심을 최대한 죽여, 한 마리의 날파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로서는 벌레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이 난생 처음이었을 것이다. 물론, 아멘시타의 기운은 리엔시타가 덮어주어 이곳에 있는 론티아 정령들에게 눈치를 못채겠끔 하였다. 곧, 루젠다르의 왕이 회장에 등장하였다. 그는 배가 무지하게 많이 나온 늙은이였는데, 그의 눈빛에서는 간사한 빛이 돌고 있었다. 한마디로 기분나쁜 늙은이였다. 그는 또한, 나를 보 자마자 노골적인 형태의 농담을 건냈는데, 그것이 은근히 야한 느낌이 도는 농담이었다. 여자인데다가 황태자의 측실이라는 나의 신분을 알고는 은연중에 무시하는 태도를 나에게 보인 것이었다. 물론, 나는 상당히 불쾌하였으나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힐끗 미카 엔의 표정을 살피니, 그 역시 매우 불쾌한지 한쪽 눈썹이 꿈틀하였으나 그의 표정은 놀라울 정도로 무미건조하였다. 하긴, 이런 자리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죽이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아무튼, 회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루젠다르 왕에게 색골 영감탱이라며 속으로 끊임없이 욕을 하며, 겉으로는 계속 방긋방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짓도 익숙해지니,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루젠다르 왕은 로히얀스에 대해 많은 좋은 점을 끊임없이 늘여놓았는데, 그것은 감언이설일 뿐이라는 것을 미카엔도 잘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조금 말빨에 능한 아멘시타의 전음을 통해, 듣고는 회담의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러자, 미카엔과 색골 영감은 나의 이러한 논리 정연한 말빨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는 그러한 그들에게 한번 싱긋 웃어보이고는 내가 생각해도 유창하기 짝이 없는 발언을 줄줄 늘여놓았다. 물론, 루젠다르의 속사정에 대한 정보들은 리엔에게 계속 들어가며 말 이다. 그리고, 나는 루젠다르 영감에게 한가지 내용을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인페르디 아에 대한 발언이었는데... 루젠다르 영감은 내가 인페르디아에 대해 말을 꺼내자 눈빛이 약간 달라졌다. 나는 약간 뻥을 쳤다. 그것은 인페르디아의 뒤를 봐주는 마족 여자가 예전에 미카엔과 연인 사이였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러자, 미카엔은 능청스럽게도 나의 장단에 맞추어,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라비스! 이젠 그녀와는 끝난 사이야! 이런 자리에서까지 그말을 꺼내야 하겠어?" "그녀 때문에 내가 몇번이나 죽을 뻔했는데요? 이건, 그녀가 전하의 애첩인 나에게 앙심을 품은 것라구요!" "그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이젠,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고 오직 너만 바라보잖아?" "흥! 됐네요~ 황태자 전하!" 사랑싸움과도 같은 미카엔과의 말다툼을 루젠다르 영감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더니, 그저 허 허 웃으며,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하지만, 인페르디아에서 이번일을 주도적으로 꾸미고 있는 마족여자가 미카엔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면, 루젠다르로서는 약간 의심을 갖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의 이러한 농간을 완전히 믿지는 않겠지만, 여자들이란 마족이 되었던 , 신족이되었던 인간이었던, 자신이 갖었던 사랑에 대해 조금이나마 미련을 갖기 마련 이었으므로, 루젠다르측은 조금이나마 그녀에게 의심을 갖을 것이다. 물론, 우리로서는 루젠다르가 약간의 의심만 갖어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성과였다. 작은 의 심이란, 나중에 아주 사소한 문제에서 커지기 마련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역시, 루젠다르가 품는 마음과 마찬가지로 거짓 화친을 맺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들 의 두통수를 치면 그만이었기 때문에 국가들간의 신용이나 뭐니, 그런 것은 나중에 염두해 두어도 늦지는 않았다. 우리가 우선 해야 할 일은 루젠다르가 인페르디아와 동맹을 맺지못하게 방해만 하면, 우리 로서는 당분간 안심해도 될 것이다. 아무튼, 회담은 그렇게 무사히 끝났고 나로서는 할 일을 다한 것 같아, 홀가분해졌다. 나에 게 주어졌던 침실로 돌아온 나는 긴장으로 굳어진 몸을 풀며 리엔에게 말했다. "리엔! 너라면 가능하겠지? 미카엔이 나를 찾을 수 없게, 나를 숨기는 일이..." "뭐?' "떠나고 싶어... 난 무서워!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68] 체인지(Cgange) 제11화 -이번에는 외교관이 되어...- (10) -10- [안돼! 떠나다니? 네가 떠난다면 어디로 가겠다는 거야?] 이번에는 지나가던 조그만 새의 몸속에 들어와 있던 아멘시타가, 나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그리고, 리엔시타 역시, 펄쩍 뛰며 나를 만류하였다. 그녀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 려가면서 나에게 떠들어댔는데, 나는 그러한 그녀를 보고 있으려니, 우울한 중에서도 웃음 이 나왔다. "안돼! 안돼! 이혼은 안돼! 이혼은 슬픈 거야! 너 갈 때 없잖아? 히잉~ 왜 그 황태자를 사 랑하는 것이 두렵다는 거야? 뭐가 문제인데? 나 네가 슬퍼하는 것은 정말 싫어!! 이혼은 정말 나쁜 거야!" 내가 그를 떠난다는 것을 무조건 이혼이라고만 생각하는 리엔시타였다. 정말 생각하는 것이 귀여운 정령이었다. "풋! 리엔... 난 단순히 떠나겠다는 거야! 그건 이혼이 아니라구..." 그러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있던 리엔시타의 물빛 눈동자는 의아한 빛으로 변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의아심을 풀어주어야겠다는 의욕이 들지않아,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아멘시타에게 입을 열었다. "아멘시타! 넌 내가 어디로 가야 미카엔의 손길을 피할 수가 있다고 생각해?" [꼭 떠나야만 하는 거야? 꼭 그래야만 하겠어? 왜 그렇게 방황하는 거지? 그러면 너만 힘들 어지는데... 그냥 편하게 라비스로서의 너를 인정해!! 부정해도 넌 이제...] "닥쳐!! 아멘시타! 난 라비스가 아니야! 난... 난... 이도현이었어! 이도현... 이었어! 이미 나 의 많은 것이 변해버렸지만, 내가 이도현이었다는 것은 변하지 않아!" 하지만, 이도현이었다고 외치는 나의 목소리에는 왠지 자신이 없어보였다. 지금은, 내 본래 의 영혼도 너무 많이 변해, 가끔 나도 햇갈릴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멘시타는 그런 나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좋아. 네가 원하는대로 도와줄게! 하지만, 이것만은 말하고 싶어. 네게 주어진 운명에서 자꾸 돌아가려고 할수록 너에겐 많은 고난이 있을 거야. 어쩌면, 이것이 너의 길이겠지. 도현아! 서대륙으로 가! 그곳에서 숨어지낸다면 황태자도 쉽사리 너를 찾아내지 못할 거야 ! 물론, 리엔의 도움을 받아야 할걸. 네가 하고 있는 다이아목걸이랑 크리스탈 반지도, 그 마법의 힘을 봉인해야 할 거야! 그것의 기운으로 미키엔이 너를 찾아낼지도 모르니...] 아멘시타가 그렇게 말을 늘여놓자, 어느덧 눈물이 얼굴에 범벅이 되어있던 리엔이 혼란스럽 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이도현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라비스의 본명이 이도현이었어? 근데, 그게 뭐가 문제가 된다는 거지?" "리엔... 지금은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아! 사실, 난 지금 떠나기 싫은 마음도 있어! 하지만, 그러한 생각을 하는 나는, 내가 아니야! 라비스가 그러한 생각을 하는 거야! 미카엔을 생 각하는 마음 역시, 라비스이고 이도현이었던 본래의 나는 그러한 생각을 할 리가 없어! 난 떠날 거야! 그래야, 혼란스럽던 것도 사라질 거야..." [정신차려!! 이 바보야!!] 나의 횡설수설과도 같은 말에, 아멘시타는 갑자기 화를 내며 소리를 쳤다. 그러자, 내가 있 던 침실의 공기가 미미한 파장을 일으켰다. 마치, 우리가 숨쉬는 공기 역시, 화를 내는 감 정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듯...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아멘시타를 바라보았다. 아멘시타가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멘시타?" [정신차려! 라비스! 넌 진정한 너의 모습으로 미키엔을 생각하고 있는 거야! 원래 라비스라 면 미카엔을 사랑하지 않았을 거야! 그녀는 다른 누군가를 이미 사랑했기 때문이야! 제발 정신차려! 그러다 너의 영혼은 언젠가 병들고 말거야!] "아냐! 그렇지 않아! 날 라비스라고 부르지 마!!!" 나는 발악하듯 그에게 소리를 쳤고, 그러한 나의 외침에 리엔시타는 움찔하며 울음을 터뜨 렸다. 그러자, 아멘시타는 나의 상태가 매우 안좋아보였는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진정하기를 기다리려는 듯...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아멘시타는 나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도현아! 그래... 네가 원하는대로 해! 이곳을 떠나 새로운 세상을 보며, 진정한 너를 찾아! 하지만, 넌 아직 본래의 너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걸 명심해! 잠시 모든 걸 잊고, 너를 느껴!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할 거야. 너를 이렇게 만든 나를 원망해도 좋아! 네가 행복해 질 수 있다면... 나의 남은 수명도 버릴테니깐...] "흑! 흐흑, 나두... 너랑 같이 할게! 리엔은 라비스랑 영원한 친구할 거야! 그러니깐, 울지 마!" 이미, 눈물 콧물이 범벅된 다소 우스꽝스런 몰골이 되어있던 리엔시타는 오히려 나에게 울 지 말라며, 위로의 말을 하였다. 역시, 순수한 정령답게 눈물도 많은 리엔시타였다. 그런 그들을 보자, 나는 슬픈 가운데에서도, 행복한 기분도 들었다. 나를 이렇게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이들이 존재하고 있구나 싶었다. "고마워! 리엔. 아멘시타... 그리고, 미안해! 너희들에게 흉한 꼴을 보여서" 나는 잠깐있었던 감정의 소용돌이로 인하여 촉촉해진 눈가의 물기를 닦고는 그들에게 생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방금 마음을 먹었던 계획을 곧바로 실행을 하기 위해, 나는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보석류와 돈이 될만한 것들을 적당한 가방에 넣기 시작했고 여행 에 대충 필요할 만한 것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공간 이동마법은 할 줄 몰랐고, 정령들 역시, 나를 공간이동 시키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나서, 기분전환할 겸 밖으로 나가 왕성의 정원을 거닐었 다. 미카엔은 회담이 끝난 후로도, 많은 귀족 인사들을 만나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역시, 황태자란 직업은 바쁘기 짝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미카엔은 꽉꽉 들어찬 스케줄이 있었기 때문에, 한낱 측실일 뿐인 나는, 그가 일부 로 나를 찾아와주지 않는다면, 그의 얼굴 보기는 매우 어려웠다. 나는 애써 우울한 생각을 떨치며, 밤이 깊어질때까지 기다렸다. 미카엔은 오늘 내내 나의 침실에 한번 들르지 않았다. 리엔시타은 그가 속좁게 삐진 거라며 쫑알대었지만, 나는 그 녀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카엔은 나로 인해 그 나름대로 자존심과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마 음에 진심을 담지 말라는 말은 듣기에 따라 굉장히 냉정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때리기(?)까지 했으니... 훗... 그러고 보니, 왕족에게 손찌검을 하고서도 아무런 질책을 받 지 않는 여자는 아마도, 나 혼자뿐일 것이다. 또한, 그는 왕 다음으로 가장 고귀한 황태자라는 직위에 있는 그답게, 그 특유의 자존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자존심으로 인하여, 미카엔은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 못했기에, 어쩌면, 지금 이순간 속이 무척 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우스 운 일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를 사랑하는 라비스가 되고 싶지 않았기에, 이대로 그와의 인연이 끝나길 바랬다. 그래서, 밤이 된 후 미리 준비했던 검은색 천의 옷을 입고, 몸을 허공에 띄우는 플라이 마법을 써서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내가 이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은 미카엔이 준 크리스탈 반지덕분이었다. 내가 이 기술을 쓸 수 있는 경지는 아직 다다르지 못했기 때 문이었다. 리엔은 나에게 마법의 기운을 덮어주어 다른 마법사들이나 미카엔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였 다. 아무튼, 나는 마법을 쓰며 허공을 날아올랐고 나를 향해 맞부딪혀오는 바람을 가벼운 마음으로 느껴보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미카엔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사실, 난 너에게 마법을 가르쳐주는게 썩 내키지가 않아... 너에게 날개를 달아주면 저 하 늘로 날아올라가 버릴 것 같거든... 처음엔 그저 라비스의 기뻐하는 얼굴이 보고싶어서 마 법을 가르쳐 준다고 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왠지 불길한 생각이 들어! 너에게 마법을 가르 쳐 주면 언젠가는 꼭 후회할 것 같거든...」 지금 상황을 보니, 정말 미카엔의 예감대로 나는 그가 준 마법의 힘으로 하늘을 날아올라 그를 떠나고 있었다. 정말로 이러한 상황이 올 줄은 몰랐는데... '미카엔! 어쩌면,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겠지? 미안해...' * 이번 화의 마지막 편이군요! 흐음... 10편까지 가본 적은 없었는데... 암튼 라비스는 결국 떠납니다.^^;;; [69] 체인지(Change) 제12화 -새로운 세상으로!- (1) (새로운 세상으로!) -1-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일 것만 같은 드넓은 바다... 어느덧 여름의 붉은 태양은 하늘 위로 높 이 솟아올라서 푸르디 푸른 바다위를 달구고 있었다. 나는 리엔시타와 함께 갑판위 난간에 서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다 바람을 쐬고 있었다. 루 젠다르의 상업의 도시에 있는 항구에서 출발한 이 배는 아멘시타가 말한 서대륙을 향한 배였다. 나 홀로는 이세계의 세상에 처음 나온 셈이었으므로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곳의 세 상물정은 하나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리엔시타나 아멘시타 역시, 인간 세상의 세상물정에 대해서는 그리 빠삭한 편이 아니었던 터라,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만 했다. 게다가, 미카엔이 준 마법 아이템은 그 힘을 봉인하여 버렸기 때문에,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정령들 밖에 없었다. 아마도, 나에게 여러 가지 험난한 길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나는 생각하였다. 아무튼, 나는 날이 밝기 전까지 여기 항구에서 배를 타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써야 했다. 만 약 날이 밝아, 미카엔이 내가 없어진 것을 알고는 루젠다르 전체에 통제령과 수색령을 내 린다면 나로서는 이곳을 빠져나가기가 매우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약간 바가지를 써서 가장 빠른 야간 마차를 구한 나는, 항구까지 밤새 달렸었고 지금은 이 렇게 배에 간신히 올라, 멀어져 가는 루젠다르와 로히얀스가 있는 대륙을 쓸쓸하게 바라 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쯤 난리가 났겠지?" "아마도, 벌컥 뒤집어졌겠지..." 내가 리엔시타에게 말을 걸자, 그녀는 중얼거리듯 답했다. 아멘시타는 한 마리의 갈매기가 되어 근처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의 표정이 매우 씁쓸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멘시타는 정말 재주도 좋았다. 동물의 몸속에 들어가서도 언제나 자유롭고 다양한 표정 을 짓곤 하기 때문이었다. "미카엔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글쎄... 그는 진심으로 너를 사랑했으니, 많이 상심해하기도 하고, 너에게 배신감 비슷한 감 정도 느끼겠지. 네가 일부로 자신을 떠났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을테니... 그리고 속이 타 겠지? 너에 대한 걱정으로... 또, 루젠다르 왕을 달달 볶겠군 아무튼, 넌 루젠다르 왕성에서 실종된 셈이니, 그에게 약간의 책임을 전가하며 수색을 명할테니... 또, 너를 찾아내기 위 해 지금쯤 눈에 불을 키고 있을 거야! 하지만, 너의 기운은 내가 감추고 있으니 당분간은 쉽지 않겠지." 리엔시타는 눈에 훤하다는 듯이 자세히도 설명을 하였다. "그래도, 1, 2년이면 금방 잊을 거야! 어떠한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기 마련이니..." 어쩌면, 그것은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일 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 내가 잠시 망령된 감 정을 가졌다는 것도 잊게 될 것이다. 하지만, 리엔시타는 애매한 어투로 나에게 답했다. "글쎄... 과연 그럴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었는데 나는 그 모습에 약간 놀라워 했다. 지금까지 어린애 같고 수다스러웠던 모습만 보여주었던 그녀였는데, 지금 이순간 만큼은 놀랍도록 차분해 보였고 그녀의 표정에서 긴 세월이 느껴졌다. 그녀의 은빛에 가까운 머리카락이 약간 푸르게 변해있었다. 아마도, 바다의 영향을 받은 모 양이었다.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거칠게 휘날렸는데,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답게 느껴 졌다. 나는 그녀에게 빙긋 웃어보이고는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 나를 바라보던 리엔시타는 하늘을 날던 갈매기를 보더니, 갑자기 짧막한 탄성을 내었다. "왜그래?" "론티아 정령들을 생각 못했어!" "응?" "론티아 정령들은 모든 식물이나 동물들의 시야를 이용할 수 있잖아? 루젠다르 왕성에는 두 명의 론티아 정령들이 있었어! 어쩌면 그 정령들이 너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녀의 말에 나는 안색이 변하였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나에게 말했다. "라비스! 당장 안으로 들어가 있어. 그리고, 론티아들의 시야에 걸릴 만한 것은 모두 치워! 알았지? 아멘시타! 너는 론티아 정령들이 이곳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네 나름대로 결계를 쳐! 론티아의 습성은 론티아 정령인 네가 더 잘알겠지?" 리엔시타가 그렇게 말하자, 아멘시타는 피식 웃더니, 여유로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러고 있었어! 하지만, 걱정마!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론티아 정령들이라 해도, 그 시야에는 한계가 있으니... 아마도, 루젠다르를 벗어난 지금은 그들의 시야를 충 분히 벗어나 있다고 보는데? 나같은 경우는 비록 커다란 도시 하나쯤의 시야를 갖지만, 나이많은 론티아의 시야는 넓어봤자 나라 한 개를 벗어나지 못하니... 하지만, 황태자는 여 기서 멈추지 않고 론티아 정령들을 더욱 많이 끌어모을 거야! 그들을 각 나라마다 파견한 다면, 정말 골치 아파지겠군!] "그래? 그렇다면, 우선은 다행이겠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지? 미카엔이 그렇게까지 하며, 나를 찾는다면, 그들의 눈에 들키는 것은 시간 문제이잖아?" 나는 아멘시타의 말에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당분간은 시간은 있어! 론티아 정령들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니, 그들을 끌어모으는데 상 당한 시간이 걸릴 거야! 우린 그동안 론티아의 시야를 피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아서 숨어버리면 돼!" "그 무언가가 뭔데?" 진지한 얼굴로 방법을 모색하는 리엔시타의 말에 나는 반문하였으나 대답은 아멘시타가 하 였다. [론티아의 시야를 피할 수 있는 곳은 의외로 많이 있어! 각 나라의 왕성이나, 길드의 본부 의 내부, 신전 혹은 마법사들의 탑안이나 드래곤의 레어, 등등 중요 장소나 위대한 존재가 머무는 곳... 아니면, 론티아와는 상반되는 정령들이 모여사는 장소도 포함돼! 론티아 정령들이 어느곳이나 그 시야를 침투시킬 수는 없지!] "어, 그래? 하지만, 넌 내가 왕성에 있을 때도 잘만 나타나던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내가 너에게 나타난 것은 궁성 밖에 있을 때만이었어! 만약 내부에 있다면, 나는 네가 불 러도 듣지 못해!] "아! 그러면, 그때 내가 황태자랑 결혼해서 왕성으로 처음 간 날, 넌 내 목소리를 못들었던 거야?" [언제 불렀었어?] "응! 그때 미카엔과의 첫날밤이었는데, 나는 한 마리의 고양이를 붙들고 너를 불렀었지." [응, 그랬어? 근데, 왜 불렀는데?] "하하... 그냥!" 나는 약간 겸연쩍게 웃으며 그의 순진무구한(?) 질문에 대충 얼버무렸다. 그렇게 나는 정령 들과 떠들고 있는데, 누군가가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예쁜 아가씨들! 혹시 심심하지 않아? 우리랑 같이 노는게 어때?" 두명의 청년들이었는데, 생긴 것이 껄렁껄렁한 것이 영 재수없어 보였다. "별로, 안심심해요! 우리는 우리끼리 노는게 더 재미있어요!" 리엔시타는 그들의 뻔한 수작에 좋게 말하면 순진무구, 나쁘게 말하면 유아틱하게 답하였 다. [70] 체인지(Change) 제12화 -새로운 세상으로!- (2) -2- "에이~ 그러지말고 그쪽도 아가씨 둘 뿐인 것 같은데... 배안에서 여행하는 동안만이라도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그들은 모두 이십대 초반정도 되어보이는 미카엔 또래였다. 미카엔 또래이라... 그러고 보니, 이 순간에도 미카엔과 연결시켜서 생각하는 나였다. '저것들 헌팅하는 폼이 글렀어! 저렇게 껄렁껄렁해서야 여자가 걸려들겠나? 게다가 초면부 터 반말이라니... 아무리 우리가 어려보이기로서니. 얼굴이 안따라주면 기본 매너가 있어야 말이지!' 그들을 보며, 그렇게 속으로 궁시렁대는데... 그 껄렁맨 둘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어 왔다. 이에 짜증을 느낀 나는, 그들에게 생긋 웃어보이며... "죄송하지만, 이만 꺼져주시겠어요? 친하게 지내는 것도 좋지만, 저는 한가롭게 제 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군요!" 그렇게 말하며, 더욱 화사하게 방긋방긋 웃어보였다. 그러자, 그 껄렁맨들은 방금 자신이 기 분나쁜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미소로 인하여 그리고, 나의 말투와 내용의 불 일치로 인하여 매우 햇갈리는지, 아니면 나의 미소와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취했는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으며 버벅거리다가... "어! 그래요? 시, 실례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사라졌다. 아마, 본인들도 '어? 이게 아닌데...' 하며 의아스러워했을 것이 다. 아무튼, 그들이 그렇게 사라지자, 리엔시타는 약간 놀란 얼굴로 나에게 입을 열었다. "라비스! 너, 최면술도 쓸 줄 알아?" 그녀의 말에 피식 웃으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나의 장점을 잘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이 생긴 거지. 최면술은 아니야! 그나저나, 우리 어디 로 가야 하지? 내 수중에 있는 돈도 그다지 많은 편도 아니야! 우선 숙식 해결할 곳과 돈을 벌 곳을 찾아야 할텐데... 나의 몸을 효과적으로 숨길 수 있으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취직 자리가 없을까?" [음... 서대륙에 있는 나라중에 아스탄샤국으로 가보는 것이 어때? 그곳의 수도에는 서대륙 에서 제일 알아주는 마법사들의 탑이 있는데, 그곳이라면 적당할 거야!] 잠시 침묵을 지키던 아멘시타가 끼어들었고, 나는 솔깃해져서 그에게 물었다. "마법사들의 탑? 거긴 뭐하는 곳인데?" [평상시엔 마법에 대해 연구하는 곳이지만, 필요에 따라 아스탄샤의 치안을 담당하기도 해! 그 곳에 소속되어 있는 마법사들만 해도 300여명이 넘는데, 모두 5서클 이상인데가 8서클 마스터들이 10명 가까이 돼! 그러니깐 엘리트 마법사들이 모여있는 곳이지.] "히야~ 그럼, 그곳에 있는 마법사들은 돈도 많이 버냐?" 나의 목적은 그곳에 있었다. 이렇게 나홀로 세상밖으로 나오니, 지금 나의 머리속에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아마도, 그렇겠지? 아스탄샤는 서대륙의 반을 차지하며 융성하고 있는 나라야! 그 나라가 융성할 수 있었던 것도 뛰어난 마법사들을 많이 끌어모아 그들을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야! 그렇게 뛰어난 마법사들은 곧, 막강한 국력이 되거든! 8서클 마스터들이란 흔한 것이 아니잖아? 아무튼, 대우가 좋으니 실력있는 왠만한 마법사들은 아스탄샤에 있는 마법사들 의 탑으로 가려고 하지! 게다가, 그곳은 마법 아카데미 졸업장이 없어도 5서클 이상의 실 력이 있으면 다 받아주니, 라비스! 너 그곳으로 가면, 괜찮을 것 같아. 물론, 크리스탈 반지 의 힘을 이용해서...] 그의 말을 들은 나는, 꽤나 구미가 당겼으나 왠지 걱정이 되었다. 그곳은 굉장히 강한 결계 가 겹겹히 쳐져 있을테니, 내가 반지를 이용한다고 미키엔이 눈치채지는 않겠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미카엔의 능력의 한계를 정확히 모르니, 그의 디텍트 능력(물건이 나 존재의 기운을 탐지하는 능력)이 여기 10여명의 마스터들이 걸어둔 결계의 힘을 능 가한다면, 나는 반지를 사용한 순간 꼼짝없이 들키는 것이었다. 게다가, 마스터들이 10명 가까이 된다면, 내가 그곳에서 테스트를 받을 때 마법 아이템을 이용해서 마법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 저것 생각해본 결과, 나는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힘들겠어! 반지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는데... 에 휴~ 좋은 방법이 없으려나?" 그러자, 정령들은 모두 심각한 얼굴이 되어 고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리엔이 뭔가를 생각해 냈는지, 밝아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그냥 일반마법이 아니더라도, 정령 마법이 뛰어나다면, 그 마법사들의 탑에 소속할 수 가 있어!" "정령 마법? 난 그런거 할 줄 모르는데?" "괜찮아! 그런 건 우리가 다 척척 알아서 하는 거니깐. 넌 정령들을 부리는 척만 하면 돼! 하지만, 4원소 계열 이상의 정령들을 모두 부릴 줄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둘 뿐이니..." 리엔시타의 밝아졌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러나, 또 다시 뭔가 생각이 난 듯 그녀는 물빛 눈동자를 반짝 반짝거리며 나에게 입을 열었다. "라비스! 이럴게 아니라, 우리 정령 구하러 여행이나 떠날까? 물론, 주어진 시간은 별로 없 지만... 미카엔이 너를 찾는데에 처음부터 서대륙으로 손을 뻗치지는 않을테니... 그건 아 멘시타가 종종 알아보면 될 거야! 만약 미카엔의 사주를 받은 론티아 정령들이 여기로 오 게 된다면, 우리는 냅다 숨으면 되니깐!" 그녀의 말에 나는 그것도 괜찮을 듯 싶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이며 약간 결의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런데, 정령들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아?" "물론, 난 다 알아! 리엔이 누군데... 난 이래뵈도 수천년을 살아온 물의 정령이라구!" 리엔시타는 잘난척을 해보이며 자랑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아멘시타는 그의 특유의 표정인 한심하다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한번 쓰윽 보아주고는, 나에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우선 불의 정령을 찾는 것이 어때? 그들은 물의 정령보다는 존재하는 곳이 매우 한정되어 있지만, 공격력에 있어서는 매우 강한 정령들이니...] "싫어! 불의 정령들은 너무 싫어! 차라리 다른 정령들을 구해! 걔네들은 너무 싫어! 성격도 무지 안좋단 말이야!" 리엔시타는 얼굴을 팍 구기며 금세, 강력하게 거부하는 몸짓을 보였고,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긴, 너와 불의 정령들은 서로 반대의 속성을 가지니 싫어할 수도 있겠구나!" "아냐! 그래서가 아니야! 불의 정령들은 모두 성격이 더럽단 말이야!" [그건 네 생각이지!] "히잉~ 진짜야!!" 하지만, 아멘시타와 나는 그녀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무언의 의미있는 눈길을 주고 받으며, 불의 정령을 찾으러 나서기로 합의를 보았다. 아멘시타의 말로는 이 근처에서는, 서대륙 에서 아주 약간 못미치는 젠타로섬의 활화산에서 몸담고 있는 불의 정령이 존재하고 있다 고 했다. 그래서, 나와 정령들은 젠타로섬으로 가기로 결정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앞으로의 게획을 대충 세우고는 나는 약간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갑판위로 나와있는 다양각색의 사람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길고도 무료한 바다여행 같은 경우에는 사 람구경도 꽤나 재미있는 소일거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한쪽 구석에서 하프와는 비슷하지만 그 크기는 작은, 허름한 악기를 들고 연주를 하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흥미가 생긴 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보았다. 그러자, 바다의 파도소리에 묻혀있던 그의 노래가락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그리움을 말한다면 나는 하늘을 보리라. 나의 그리움은 저 하늘에 있으리. 네가 이루고자 하는 꿈을 말한다면 나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리라 나의 꿈은 저 하늘 곳곳에 박혀 있으니. 네가 그리움으로 나를 찾아온다면 나는 날개짓을 하리라 내 영혼은 하늘의 그림자가 되어 그의 부름을 기다려야 하리니. 네가 외로움을 말한다면 나는 하늘을 보리라 그가 두런거리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니. 네가 버리고자 하는 인연을 말한다면 하늘의 어두움에도 귀를 기울이리. 그래서, 네가 나에게서 떠나갈 때 너에게 하늘을 닮은 그리움으로 남을 방법을 그에게서 배우리라. 한 편의 시와도 같은 노래가사였다. 왠지 싸구려 티가 나는 악기의 음향이었지만, 그 가락 은 좋았고 연주 실력 역시 뛰어난데다가, 제법 청아한 미성의 목소리가 매우 매력적이었다. "굉장히 아름다운 노래이군요!" 그의 노래가 끝나자, 나는 찬사를 보내며 말을 걸었다. [71] 체인지(Change) 제12화 -새로운 세상으로!- (3) -3- 내가 그렇게 말을 걸자, 역시나 허름하기 짝이 없던 모자를 쓰고 있는 그 남자가 고개를 들 어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는 의외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이가 어렸다. 이제 많아봤자, 18살? 키가 크길래, 스물은 넘지 않았을까 했는데 아직 청년이라 지칭하기에는 너무 어 려보였다. 그리고, 그는 전체적인 얼굴선이 갸름하고 매우 고운편이라, 뚜렷하지 않은 이목구비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아름다운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얼굴은 그다지 잘생긴 것도 아닌데, 보는 사람은 그의 얼굴에 눈길이 오래 머물게 되는것을 보니, 그 소년 역시 특별한 매력을 지닌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 소년은 한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무거워 보이는 그 입을 열었다. "혹시, 라비스 크로시벨님이십니까?" 그의 미성에 가까운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묻는 질문에 나는 별생각없이 '네, 그런데요!' 하 고 대답할 뻔했다가, 멈칫하였다. 아무래도, 초면인 그가 나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 이 상하였기 때문이었다. "죄송하지만, 사람을 잘못보신 것 같군요. 전 라비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 소년은 빙긋 웃더니 나의 말에 답했다. "그래요? 하지만, 인상착의는 라비스 크로시벨님이시군요! 황금빛의 머리카락에 황금빛의 눈동자를 가진, 10대 후반의 소녀... 게다가 두명의 정령들. 역시, 라비스님이신 것 같습 니다!" "넌 누구야?" 소년의 말을 들었는지 리엔시타는 그렇게 소리치며 나의 곁으로 달려왔다. 그러자, 소년은 훗! 하며 웃더니 약간 시건방져 보이는 어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난 이곳 바다에서 머무는 바람의 정령, '아젠샤르'이다. 겨우 강따위에 몸을 담고 있는 너같 은, 시타의 이름을 갖는 정령들과는 다른 존재이지!" 그 소년의 말을 들은 리엔시타의 안색은 금세 파리해졌다. 지금 상황을 보니, 이 소년이 정 령들로서는 조금 급수가 높은 존재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령들 세계에서는 능력의 차 이는 천차만별이어도 계급제도 같은 것은 없는 모양인지, 리엔시타는 여전히 반말로 그에 게 소리를 쳤다. "바람의 정령? 그런데, 네가 왜 라비스를 찾는 것이지?"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는 한 인간에게서 명을 받았다." "그, 그럼, 미카엔?"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묻자, 아젠샤르는 싱긋 웃어보였다. "맞습니다. 그는 미카엔이란 이름을 가진 하프 드래곤이시지요!" "어떻게 내가 여기에 있는 줄 알았죠?" "이곳 카르스해의 모든 것은 저의 시야안에 들어오죠! 아마도, 하프 드래곤께서는 라비스님 께서 이곳을 지나가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루젠다르에 있는 론티아 정령 들의 시야권에 이미 벗어나셨다면, 아마도 라비스님은 여기 바다로 빠져나오셨으리라 생 각하셨던 것이지요. 그는 다른 여타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는 인간들과는 달리, 드래곤의 특 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한마디로, 모든 존재들을 자신의 발아래에 고개를 숙일 수 있게 만드는 권위를 물려받으신 분이시지요! 그래서 저는 그 분의 명을 따라 라비스님이 그분께 돌아갈 수 있도록..." "난 안가요!! 미카엔에게 전하세요. 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내가 그렇게 외치자, 그 소년의 표정없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내가 막을 거야! 라비스를 괴롭힌다면!" 그때, 리엔시타가 나섰다. 그러자, 아젠샤르는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그래? 어디 한번 막아보시지!!" "막을 거야!! 바다의 정령 라센샤르이시여! 저에게 그 힘을!!" 순간, 리엔시타의 물빛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을 발하더니, 지금가지 순풍으로 인하여 잔잔 하던 바다의 파도가 거칠게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파도는 높게 일어, 마치 살아있는 듯 물의 뱀 형상으로 아젠샤르가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그러자, 아젠샤르는 자신의 주위로 바람의 속성을 띤 실드를 형성하여 그녀의 공격에 방어 를 취했고, 부드럽게 불던 바람들을 끌어모으더니, 날카로운 단검들의 형상으로 리엔시타 에게 쏘아냈다. 바람과 물의 정령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들의 싸움으로, 아멘시타로서는 당황하였지 만, 자신에게는 동식물을 이용하는 능력 외에 공격력은 거의 제로였던 터라, 그로서는 리 엔시타를 도울 수가 없었다. 곧,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바다의 파도가 성이라도 난 듯 거칠게 휘몰아치기 시 작했고 바람은 미친 듯이 불었던 것이다. 결국, 순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겼던 돛을 단 배는 위험천만하게 기우뚱하기 시작했다. 두 정령들의 성급한 싸움으로 인하여 몇몇 불운한 승객들은 바다로 몸을 던져, 가족들과 생 이별을 하게 되었고, 몇몇은 갑자기 닥쳐온 재난에 비명을 질러대었다. 나 역시, 균형을 잃고 갑판위로 넘어져 눈에 보이는 기둥을 붙잡고, 여기저기로 굴러 다니 는 신세가 되지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돛을 내려라!" 배안의 선원들은 돛을 내리려 애를 썼지만 곧 칼날같은 바람의 줄기에 의해서 찢겨져 나갔 다. "리엔! 그만해! 이러다 다 죽겠어!" 성질급한 정령들은 자신의 감정을 앞세워 싸움을 하다가, 나의 외침에 리엔은 멈칫하는 모 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잠시 멈칫하던 그 사이, 아젠샤르는 그 틈을 봐주지 않고 공 격을 하였는데... "까아악~!!" 아젠샤르의 바람의 칼날이 조금은 투명해져있던 리엔시타의 몸을 관통하였다. "리에엔~!!!"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배 아래로 떨어지는 리엔시타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렇게 리엔시타가 거칠어진 바다속으로 그 몸을 감추자, 세젠느강의 어머니나 아버지격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푸른빛의 바다는 곧, 그 빛이 검푸르게 변하였다. 그리고, 분노를 하였는지 고막을 찌를듯 한 외침 비슷한 파도소리를 내며 더욱 거세진 파도로서 배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일이 그렇게 되자, 아젠샤르는 당황을 하였는지 자신의 바람의 힘을 방어 모드로 바꾸어 배 의 몸체를 감싸안았으나, 바다의 힘은 더욱 거세어져만 갔다. 하늘과도 같은 바다의 위대함을 바람의 정령이 당해낼 수는 없었다. 하늘과 바다는 형제... 하늘이 형이라면 바다는 동생이었다. 하늘은 높지만 바다는 깊은 푸르름을 가지고 있었다. 배의 몸체 반이 부서져갔다. 배안에 있던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 분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저 밑으로 사라져갔고, 나 역시 분노에 휩싸인 바다로 떨어졌다. 아멘시타는 어느덧 갈매기의 몸에 빠져나가 근처 바다에 있던 돌고래 몸속으로 들어가, 나 는 구해내려 애를 썼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고도 평화로웠던 모습으로 바다위를 유유히 떠가던 배는 우지끈 굉음을 내며 단숨에 부서져갔다. 배의 파편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지만 바다의 정령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바람의 정령인 아젠샤르를 아작내기 위해, 드래곤 형상으로 허공에 치솟아 아젠샤르를 공격하였다.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에서도 리엔을 찾으려 했다. "리엔!!" 하지만, 나의 목소리는 파도소리에 금방 묻혀져 갔고, 나를 태운 돌고래 아멘시타는 혼돈으 로 휩싸여진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륙이 있는 저편으로 헤엄쳐갔다. [72] 체인지(Change) 제12화 -새로운 세상으로!- (4) -4- 미안해! 리엔... 나 같은 거 만나지 않았다면, 넌 그렇게 죽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내가 너를 죽인 거야! 그때, 내가 너를 부르지만 않았어도... 정말 미안해! 찰싹~! 누군가가 나의 뺨을 때리는 것이 느껴졌다. 비록 세게 때리는 것은 아니었으나, 여러번 맞 으니깐 볼이 화끈거리며 은근히 아팠다. "으음..." 나는 나직히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떠보았다. 그러자, 나의 시야 정면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낯설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피빛의 붉은 눈동자에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의 얼굴 이었다. 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입안이 매우 말라있었는지 극심한 갈증이 밀 려왔다. "물... 좀... 주세요."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나의 할말을, 생전 처음보는 그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와 나에게 커다란 잎사귀 같은 것을 내밀었다. 그 잎사귀에는 매우 맑아보이는 물이 담겨있었는데, 너무나 목이 말랐던 나는, 그것을 벌컥 벌컥 들이켰다. 그렇게 어느정도 갈증이 가시자, 나는 여기가 어디이고 또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여러 궁금증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기가 어디죠?" 나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붉은 머리의 남자에게 물었다. 그의 머리색 은 눈동자 색만큼이나 선명한 붉은색이었는데, 머리길이는 짧았으나 뒷 꽁지머리는 약간 길었다. 게다가, 이목구비는 약간 샤프한 이미지여서 날카로워 보이는 반면, 얍삽하게도 보여 그의 머리색과 함께 전체적인 이미지를 통합(?)해 본다면, 한마디로 날라리 같은 스타일이었다. 아무튼 내가 그렇게 묻자, 그는 나에게 대답이란 것을 하기 시작했는데... "여기가 어디이냐고? 그렇다면, 대답해 주지! 네가 깨어나자 마자, 그것부터 물을 것이란 걸 짐작하고 있었으니... 여긴, 젠타로 섬이야! 그리고, 또 며칠이나 지났는지가 궁금하겠지? 그렇다면, 미리 대답해주지, 뭐! 난 어제 백사장에서 쓰러져 있던 너를 데리고 와서 보살펴 줬어! 고맙지? 후훗... 은혜는 나중에 차차 갚도록 해! 돌고래의 몸을 한 론티아 정령이 너를 여기까지 끌고 왔더군. 대단해! 밤낮을 헤엄쳐서 너를 데리고 온 모양이야! 며칠이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탈진해서 나에게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는 사라 지더군!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에 대해 궁금하겠지? 내 이름은 샤르... 멋진 이름이지? 앗! 그렇다고 그렇게 넋을 잃고 나를 바라보면, 내가 몸둘 바를 모르겠잖아? 난 미인에게는 굉장히 약하단 말이야!" '웃긴 넘...' 나는 그의 장황한 말에서 요점만 간추려 들은 다음, 내가 그에 대해 짐작하는 바를 물어보 았다. "샤르? 혹시, 불의 정령 아니에요?" "어? 어떻게 알았어?" "그냥...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단 이미지가 굉장히 다르네요!" "하하! 그래?" 정말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달랐다. 보통 정령들은 모두 순수하다고 들었는데, 지금 내 눈앞에서 있는 불의 정령은 결코 순수해 보이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타락해 보 인다고나 해야 할까? 날라리 정령... 흐음, 정말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정령의 힘이 필요하니... 그를 나의 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리엔시타를 떠올렸다. 그러자, 그를 나의 편으로 만드는 일이 왠지 부질없게 느껴졌다. 나 하나로 인해... 정령들의 희생이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어쩌면, '아젠샤르'라고 했던 바람의 정령도 지금 쯤이면, 소멸되어 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분노한 바다의 정령, 라센샤르의 힘은 정말 무시무시하였기 때문이었다. 라센샤르는 물의 정령 중에서도 가장 광범위하고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멘시타도 걱정이 되었다. 이틀 이상을 한 육체에 못버틴다고 언젠가 그가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런 아 멘시타가 그 먼바다에서 이곳 젠타로 섬까지 헤엄쳐 왔다면, 꽤 시일이 지났을 것이다. 그는 그동안 본체에 돌아가서 기운을 회복할 수가 없었겠으니, 탈진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 다. 모두 내탓이었다. 나는, 나를 사랑해주는 이들에게 계속 상처를 주는 것 같았다. "리엔..." 나는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다. 나의 볼을 타고 뜨거운 물줄기가 계속해서 흐르기 시 작했다. 그러자, 샤르는 얼굴을 찌푸리며... "이봐! 왜 우는 거야? 내가 그렇게 무섭게 생겼어? 그건 아닌데... 그나저나, 배 안고파? 며 칠은 굶었을 텐데... 그리고, 혹시 씻고 싶다면 여기 바로 근처에 깨끗한 호수가 있으니, 거기서 씻어! 너 지금 무지 꼬질꼬질한 모습이니..." "흐흑!" "아! 그러고 보니, 여긴 잡스런 짐승이나 몬스터들도 많이 있는데, 무서우면 내가 옆에서 지 켜줄 수도 있어! 하하." "흑! 리엔..." "이봐!! 그렇게 계속 질질 짜고 있을 거얏?!" 내가 우는 것이 짜증이 났는지 샤르는 나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고 나는 그의 갑작스런 목소 리에 움찔 놀라, 눈물 젖은 커다란 황금빛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자, 그는 내가 우는 것을 멈춘 것이 만족스러웠는지, 다시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먹을 것을 구해올테니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에휴~ 론티아 녀석! 나에게 애를 맡 겨 놓고 가다니! 내가 무슨 보모도 아니고! 쳇~" 그는 그렇게 투덜대듯 말하며 동굴 밖으로 나갔다. 동굴 밖이라... 그러고 보니, 내가 있는 곳은 무슨 동굴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여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매우 시원하였고, 의외로 아늑한(?) 느낌도 드는 곳이었다. 원래 동굴하면 매우 음침하고 박쥐같은 것이 마구 날아다니고 그런 줄만 알았는데, 여긴 굉 장히 깨끗하였다. 아마도, 어떠한 결계 같은 것이 쳐져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샤르는 산토끼 같은 것을 잡아와 장작이나 부싯돌을 가지지 않고도 그냥 단숨에 조그만 불을 일으키더니, 축늘어져 있는 토끼를 나무 꼬챙이에 꽂아 아주 맛나게 굽기 시 작했다. 그렇게 샤르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아무런 기구없이 익힌 토끼요리를 나에게 건내 주었다. 하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속 눈물이 나와 울고는 싶었지만, 저 불의 정령 샤르가 무서 워서 그러지도 못하고, 침울한 얼굴로 그저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내가 그렇게 먹는 것을 거부하자, 샤르는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대체 왜 안먹는 거야? 여기서 죽고 싶어? 난 시체 치우는 일은 질색이란 말이야! 어서 먹 어엇!!" 그렇게 또 한번 소리를 지르는 샤르의 모습에 나는 발끈하였다. 그래서... "날 내버려 둬! 난 지금 먹고 싶지 않단 말이야! 이 날라리 정령아!!" 그러자, 샤르의 얼굴은... 급속도로 냉각되기 시작하였다. '헉! 나도 모르게, 날라리 정령이라고 말했네? 어쩌지?' "나, 날라리 정령?" 이마에 힘줄을 세우고 그렇게 반문하는 샤르의 모습에, 나는 삐질거리며 어설프게 헤헤 웃 어보였다. 하지만, 저 정령에게는 나의 어설픈 웃음이 통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저, 저기... 샤르? 미안해요!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시끄럿! 나한테 미안하면, 어서 저 토끼나 먹어! 제길~ 그 론티아 녀석에게 너를 보살피기 로 약속을 했으니..." "히잉~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거에요? 난 정말,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단 말야." "왜?" 그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미간에 주름을 세우고는 나에게 물었다. "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왜 살고 싶지 않은데?" "나 때문에, 리엔이 죽었어요. 나로 인해서..." "정말 한심하군! 그래서 따라죽겠다는 것인가? 리엔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너를 위해 애쓰 는 이들을 생각해야지! 너만 속편하겠다고 죽겠다는 것은 정말 한심한 짓이야." 왠지 가슴을 콕콕 찌르는 듯한 그의 말에 나는 찔끔하였다. 하긴, 정말 그랬다. 그의 말대로 나의 지금 모습은 정말 한심하였다. 이세계에 떨어져서 여자가 된 뒤로, 나는 계속해서 무력하게 지내왔었다. 지금 이순간도, 나의 모습은 무력하게 짝이 없었다. 내 주위의 있는 이들을 힘들게 하고,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주고, 하지만 정작 내가 상처를 받고 내가 괴로울 경우에는, 무조건 도망만 치려는 나의 모습이 정말 무력하고 한심하였다. 아무런 힘도 없으면서, 그저 받기만 하는 나... 또 다시 나의 눈물이 떨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리엔의 죽음으로 인해서 느끼는 슬픔 때 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처지에 대해, 슬픔이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눈 물을 흘렸다. 죽음의 유혹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지만, 나는 한심한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눈물이 범벅되어 더욱 꾀죄죄해진 얼굴로 샤르가 마련해준 토끼요리를 먹었다. 그 리고, 바닷물이 말라 소금기가 느껴지는 머리카락과 피부를 씻어내기 위해 호수가로 갔다. 샤르는 자신이 입는 여분의 옷을 나에게 빌려주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은 채 물가로 가 서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았다. 그렇게 몸을 씻고 있는데... "이봐! 등이라도 밀어줄까?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아악! 샤르!! 필요없어요! 당장 꺼지란 말야!" * 체인지에서 나오는 정령들에 대한 설정에 대해서... 정령들의 종류를 크게 분류해서 말하자면, 아마도 불, 물, 바람 등등 기본 원소의 정령들이 있겠지요! 지금까지 나온 정령들의 종류는 위에 언급한 정령들이 되는 군요! 그외에도 신성한 나무 론티아 정령들이 있고 아직은 나오지 않았지만, 어떤 특정한 기운을 받아 생겨난 정령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령들의 능력은 그들이 몸담고 있는 개체에 대라 능력이 달라집니다. 또한 나이에 따라서 도 능력이 많이 달라지지요! 그래서, 정령들의 그능력과 강함은 매우 천차만별입니다. 예를 들어, 세젠느강의 정령 리엔시타와 바다의 정령 라센샤르를 비교해 본다면, 누가 더 강할까요? 아무래도, 바다의 정령이 더 강하겠죠! 자연의 기운의 혜택을 많이 받은 정령들 일수록 그 능력은 더욱 강해집니다. 아! 그리고, 어느 곳이나 존재하는 바람이라고, 혹은 강이나 물가라고 해서 정령들이 존재하 지는 않습니다. 조금은 특별한 자연의 기운이 많이 스며든 곳에 정령들이 존재합니다. 세 젠느강은 매우 아름답고도 특별한 강이죠! 하지만, 그저 평범한 강인 경우는, 물의 정령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론티아 정령들 같은 경우는, 조금 특별하죠! 신성한 나무라고 일컬어지며 신의 나무 라고도 불립니다. 이 나무들은 모든 개체마다 정령들이 존재하고 있지요! 하지만, 신성한 그 성격 때문에 그들이 갖는 공격력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동식물을 다스리고, 조금 더 나이를 먹는다면, 신성력을 갖기도 하지요! 그리고 정령들의 이름에 대해서는 이름의 끝에 시타와 샤르가 붙습니다. 조그만 개체에서 몸을 담고 있는 정령들 같은 경우는 시타가 붙고, 바다나 특별한 산. 혹은 그와 비슷한 능력이나 넓은 의미의 개체에 몸담고 있는 정령들 같은 경우는 '샤르'라는 이름을 갖습니다. 세젠느강의 정령 리엔시타는 거의 샤르라고 불릴 수 있는 조건을 갖기는 했지만, 조금 능력 이 못미치는 경우라서 그냥 시타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73] 체인지(Change) 제12화 -새로운 세상으로!- (5) -5- 샤르의 장난기 짙은 목소리에 나는 움찔 놀라며 소리를 질렀고, 곧 그의 낄낄거리는 웃음소 리가 들리며 멀어져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쳇! 저렇게 타락한 정령이라니... 정령이 맞긴 맞는 거야?" 나는 불쾌한 마음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감았던 길다란 황금빛 머리채를 신경질적으로 쥐 어짰다. 마치, 걸래 짜듯이 머리채를 비틀어짜는 나의 모습은 다소 과격해 보였지만, 이런 나의 모습은 그저 나의 방식일 뿐이었다. 나는 샤르가 준 옷을 입었다. 간단한 바지와 밋밋한 티셔츠... 크기가 너무 커서 보기가 흉 했지만, 그래도 깔끔한 옷을 걸칠 수가 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동굴 입구 에서 한가롭게 앉아있는 샤르에게로 갔다. "샤르! 당신은 나를 보살펴 주기로, 아멘시타와 약속했다고 했죠? 그렇다면, 샤르는 정령이 니 한번한 약속은 끝까지 지켜야하겠죠? 난 리엔의 죽음을 확인해야 하겠어요! 그러기 위 해서는 바다의 정령을 만나야 하는데, 샤르가 만나게 해줄 수 있어요?" "바다의 정령을 만나? 그 녀석 지금 심기가 무척 안좋은데, 왠만하면 지금은 상종 안하는 것이 나아!" "그래도 지금 만나야 하겠어요. 만나야 해요!" "에휴~ 좋아! 하지만, 뒷일은 책임 못져!" 그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하고는 나를 데리고 다시 바닷가로 내려갔다. 여긴,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인 모양이었다. 아마도, 섬이 그다지 크지 않는데다가 활화 산까지 있으니, 인간으로서는 썩 살기 좋은 섬은 아닌 듯 했다. 게다가, 저기 푸르른 하늘 위에 날고 있는 것은... "헉! 저게 뭐에요?" 굉장히 덩치가 큰, 누런 피부의 도마뱀 형태인데, 다리는 두 개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 은 커다란 날개를 퍼덕이며 우리를 발견한 듯 우리 머리위를 빙글빙글 돌며 날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익룡이 저렇게 생겼지 않았을까? 나는 생각해 보았다. "저건 와이번이야! 여기 젠타로섬에는 몇마리의 와이번이 살고 있지. 흠... 너 정도면, 한입 에 꿀꺽 삼킬 수 있지 않을까? 안될라나? 저놈들은 비록 조류(鳥類)형태의 몬스터들이지만 날카로운 이빨도 가지고 있어서 아마도, 너를 아작아작 씹어먹을걸. 게다가, 꼬리에는 치명적인 독도 있다구!" 샤르는 무슨 심보인지, 그렇게 나를 잔뜩 겁을 주기 위한 발언을 서슴치 않고 하였다. 그때, 와이번 녀석들의 사냥이 시작되었는지 날개를 반쯤 접고 우리쪽으로 낙하를 하였다. "흐음... 오늘 저녁 메뉴는 와이번 통구이가 되겠군! 맛있게 요리해줄테니 기대해!" 그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의 주변으로 불사조 모양의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곧, 한 마 리의 불사조 형태의 시뻘건 불길은 와이번에게로 날아갔고 콰앙~ 하고 와이번에게로 맞 부딪혔다. 아니! 퍼엉~ 인가? 아무튼... 와이번은 순식간에 진짜 통구이가 되어 바닥에 철푸덕 떨어져 내렸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샤르의 불사조는 아직 공격을 받지 않는 와이번들의 주변에서 배회하듯 날며 그들에게 그 위세를 과시해 보였다. 더 이상 공격따위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와이번은 우리가 사냥감으로는 적절치 못하겠다고 생각했는지, 한 마리의 희생를 뒤 로한 채, 그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버렸다. "히야~ 저게 와이번이군요! 생각보다 더 크기가 크네? 그런데, 샤르! 방금 샤르가 구운 와 이번 통구이는 너무 질겨보이는 군요! 게다가 더러워져 있고... 맛없게 생겼어!" 내가 신기하다는 듯이 시커멓게 된 와이번을 보며, 농담삼아 그렇게 말하자, 샤르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입을 열었다. "정말 멋없는 아가씨이군! 이럴 때에는 꺅~ 꺅~ 너무 무서웠어요! 샤르으~. 역시 샤르는 멋지군요! 이렇게 해야 하는데... 애교가 없어! 하지만, 얼굴은 예쁘니 봐준다!" '쳇~ 놀고 있네!' 하지만, 아까 샤르가 몬스터가 있다고 하더니, 정말로 있는 줄은 몰랐다. 그래서, 아까 내가 씻고 있을 때 그 근처에서 지키고 있었던 것인가? 그는 나쁜 존재는 아닌 듯 했지만, 이 상한 성격의 정령임은 틀림없었다. 그렇게 바닷가에 도착하자, 샤르는 바다의 정령 라센샤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예전에 리엔시타를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물줄기가 솟아오르더니, 곧 인간의 형상을 이루 었다. 인간의 모습을 띤 바다의 정령은 바다의 색과 같은 푸른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20대 초반의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왜 불렀지? 렌샤르..." 바다의 정령, 그녀는 공명하는 듯한 신비스런 목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다가,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나에게로 향했는데, 그녀의 눈길이 나에게로 닿자 나는 속으로 찔끔하였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휘몰아치는 듯한 깊은 푸르름을 느끼며, 나는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다의 정령인가요?" "넌 그때, 배에 있던 소녀로군! 용케도 죽지 않고 여기까지 살아오다니..." "리엔은... 죽었나요?" 그녀의 표정없는 얼굴이 왠지 두렵게도 느껴졌지만 나로서는 혹시나 하며 갖었던 리엔의 죽 음소식이 더욱 궁금하였기에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리엔시타는 죽지 않았다. 그애는 널 보기를 몹시도 원하고 있지!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인 간의 일에 끼어들지 말기를 충고했다." "정말인가요? 리엔이... 리엔이 살아있어요? 리엔이..." 나의 심장 소리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리엔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라센샤 르에게서 리엔의 죽음소식을 직접 듣게되면 어쩌나 하며, 은근히 불안해 했었다. 그렇게 되면 1%의 작은 희망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다행이야! 리엔... 다행이야! 네가 죽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나는 안도와 기쁨으로 두 눈을 적시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조금 밝아진 얼굴로 바다의 정 령을 바라본 다음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정말 고마워요! 리엔이 죽지 않은 것은 당신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리엔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난 잘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고, 정말 미안하다고..." 내가 그렇게 말하자, 라센샤르의 표정없던 얼굴이 약간 기묘하게 바뀌었다. "넌 리엔을 너의 수족으로 여기고 있는가? 아니면 동료로 여기고 있는가?" "리엔은... 제 친구에요! 줄지는 모르고 받기만 하는 못난 친구... 헤헤, 같이 지낸 시간은 짧 았지만, 저에게 소중한 몇 안되는 친구이지요!" "친구라... 정령을 그저 친구로 여기는 인간이라니, 리엔이 너에게 빠진 이유가 어렴풋이 짐 작이 되는군. 너에겐 위대한 존재도 움직이게 할 무서운 매력이 느껴져! 마력과 같은 매 력에 인간의 순수함... 네 이름이 뭐지?" "제 이름은...라비스입니다." "라비스! 리엔을 다시 너에게 보내도록 하지. 리엔이 너를 보지 못해서 상사병이라도 걸리 면 안되니..." 그녀의 무미건조하던 목소리는 어느덧 웃음기가 배어있었다. 바다의 정령, 라센샤르는 나에 게 리엔을 돌려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하며 다시 바다로 사라져 갔다. 역시, 위대한 바다의 기운을 담은 정령답게 그녀의 모습에서는 위엄이 느껴졌다. 나는 사라 져가는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며, 나 역시 은은한 미소를 살짝 머금어 보았다. "뭐야? 서로 반하기라도 한거야? 표정 없기로 유명한 라센샤르가 오늘은 왠일이지?" 샤르는 묵묵히 있다가 그녀가 사라지자, 중얼거리듯 말을 꺼냈다. 나는 그를 천천히 돌아보 았다. 지금까지 죽을상을 하고 있던 나는, 리엔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그에게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샤르? 나 기분이 너무 좋아요! 리엔이 살아있다니!" "이봐!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그렇게 너무 화사하게 웃지는 말란 말이야! 잘못하다가는 너 에게 반해버리겠어! 게다가, 네 이름이 라비스였어? 그러고 보니, 왜 이름을 여태 안가르 쳐준거야? 난 너에게 '샤르'라고 말해주었는데..." [74] 체인지(Change) 제12화 -새로운 세상으로!- (6) -6- 저녁때 즈음, 나는 리엔시타과 극적인 재회를 하였다. 그 전까지는 무료한 시간을 잠시 달 래기 위해, 샤르에게 '묵찌바'를 가르쳐서 그와 놀고 있었는데, 동굴 안으로 리엔시타가 울먹울먹한 얼굴로 갑자기 뛰어들었다. "리엔!!" 나는 그녀를 보고 너무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서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자, 리엔 시타의 물빛 눈동자가 더욱 글썽글썽해지더니, '우에엥~ 라비스!' 하며 어린아이 같은 울 음소리를 터뜨리며 나에게 안겨들었다. 그렇게 수천년을 헤어져 온 연인이라도 만난 양, 리엔시타는 끊임없이 얼굴을 부비대며 눈 물을 쏟아냈는데, 원래 눈물이 많았던 리엔시타였지만, 오늘은 더 많이 눈물을 보였다. "이봐~ 이봐~ 극적인 상봉도 좋지만, 이번엔 내가 때릴 차례란 말이야!" 한번 가르쳐준 묵찌바 놀이에, 샤르는 처음에는 유치하다며 안하려 들더니, 이젠 흠뻑 빠져 버렸는지, 굉장히 진지한 태도로서 묵찌바 놀이에 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샤르가 다소 불만어린 얼굴로 입을 열자, 리엔시타는 그제야 샤르가 눈에 띄었는지, 눈을 동그랗 게 뜨며 말했다. "어? 넌, 불의 정령?" "그래! 이제 알아보냐?" "아니! 네가 왜 라비스와 같이 있는 거야?" 리엔시타가 불신 가득한 얼굴로 그에게 외치자 샤르는 발끈하였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 에게 뭐라 말하려 하였으나, 나는 그의 말을 가로채며, 리엔시타에게 그동안의 일을 설명 하였다. 그러자, 겨우 그칠 조짐을 보이던 그녀의 눈물은 다시 글썽해지더니, 나에게 입을 열었다. "라비스! 그동안 고생 많았구나. 히잉~ 난 네가 잘못되었을까봐, 정말 걱정 많이 했어! 그 런데, 아멘시타는 괜찮을까?" "그게 나도 걱정이야! 이번에 나를 살리느라, 정말 많이 힘들었을텐데... 아마도, 본체에서 회복하고 오려면, 조금 시일이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러자, 리엔시타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의 투명하던 머리카락이 지금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아마도, 바다의 영향을 계속 받아서 그런 모양이었다. "아! 그런데, 너랑 싸우던 바람의 정령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그녀와 얘기를 하다보니, 그녀와 싸우다 바다의 정령에게 화를 입었을 바람의 정령이 생각 이 났다. 내가 그렇게 묻자, 리엔시타는 새삼 열이 받는다는 듯이, 주먹을 불끈 쥐며 나에게 떠들어댔다. '휴~ 그녀의 특징 중 하나인, 수다가 다시 발동한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의 말을 차분히 들어주었다. 그녀의 길고도 장황한, 게다가 두서 가 약간 없는 말을 종합하자면, 바다의 정령 라센샤르는 언제나 받은 만큼 돌려주는 성격 이었기 때문에, 리엔시타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으나 죽지는 않은 것을 감안하여, 그 바람 의 정령을 죽기 전까지 몰고 갔다가, 보내주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바람의 정령 아젠샤르는 어찌되었을까? 미카엔에게 나의 행방을 보고하러 갔을 까? 보통, 인간이라면, 자신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어 쩌면 미카엔에게 가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령들일 경우에는 거짓을 모르 는 순수한 성격인 만큼 강직하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는 미카엔에게로 갔을 가능성이 컸다. 물론, 사실대로 보고한다면, 미카엔은 아젠샤르에게 화를 낼 것이다. 아젠샤르의 침착하지 못한 행동으로 인하여 내가 죽을 뻔했으니... 미카엔으로선 아젠샤르를 그대로 소멸시킬 가능성이 매우 다분하였다. '그래도, 그는 미카엔에게 사실을 말하겠지...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내가 앞으로 가게 될 아스탄샤국의 마법사들의 탑에 대한 것도...' "그는 내가 젠타로섬에서 불의 정령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있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말하자, 리엔시타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 "아! 맞아! 저번에 배에서 우리가 앞으로의 일을 떠들었었지? 아젠샤르는 그 배에 있었고... 어쩌면, 황태자에게 우리의 행방을 보고할텐데... 그렇다면, 시간이 없잖아?" 이렇게 되자, 우리로서는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샤르! 난 지금, 젠타로섬을 떠날 거야! 갑작스럽겠지만, 나는 너에게 제안 한가지 할게! 너 나의 동료가 되어줄 거야?" 묵찌바를 하면서 자연스레 그에게 반말을 하기 시작한 나였다. 그는 초면부터 반말이었는 데, 나 역시 계속 경어를 쓸 필요는 없었다. "동료? 그나저나, 지금 떠난다고? 지금 떠나는 것은 좋은데, 타고 갈 배나 있어?" "아! 그러고 보니, 배가 없네?" 당황한 내가 그렇게 말하자, 샤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허둥대긴... 그런데, 너 황태자에게 쫓기고 있었냐? 무슨 큰죄를 지었길래! 혹시, 너 반역 자? 아님, 1급 탈옥수? 암살자? 생긴 걸로 보아서는 그렇게는 안보이는데... 흠, 역시 인 간은 특히, 여자는 겉모습만 보고는 판단하기 어렵다니깐!" 급한 상황에서 그가 그렇게 뜬 구름이나 잡으려는 듯 느긋하게 굴자, 나는 열이 뻗쳐 그에 게 외쳤다. "샤르!! 빨리 대답해! 내 동료가 되어 줄거야, 말거야?" "라비스! 너 나에게 부탁하는 어조가 그게 뭐야? 이왕이면 좀 나긋나긋하게 해주면 좋잖아? 그리고, 무슨 이유로 쫓기로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황태자인지 뭔지, 널 쫓아오면 내가 혼내줄테니깐... 염려마!" 여전히, 느긋한 샤르...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성질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암담하였다. 하지만 그때, 리엔시타가 나 대신 나서주었다. "바보! 넌 황태자를 못당해! 황태자는 드래곤의 능력을 가진, 하프 드래곤이란 말이야!" "뭐엇? 그렇다면, 진작 말해주었어야지! 빨리 튀어야겠다. 젠장! 배를 만들어서 타고 갈 수 도 없고! 우리는 공간 이동하는데에 별지장은 없는데, 라비스가 이동 능력이 없으니... 어 쩐다?" 결국, 샤르 역시 허둥대기 시작했다. 저렇게 그도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니, 그는 내가 한 제안을 이미 받아들인 상태인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드래곤이 오든, 하프 드래곤이 오든 아마도, 나 몰라라 했을 것이다. '휴~ 이럴 때, 아멘시타라도 있으면 고래의 몸으로 들어간 그를 타고서라도 대륙까지 갔을 텐데...' 여기서, 내가 아멘시타를 부른다 하더라도, 그는 로히얀스의 수도 로히아나에 있을테니, 그 의 시야권은 여기까지 미치치 못한다. 그가 맘먹고 이곳에 온다면 모를까. 우리 셋은 잠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어찌되었든 이곳을 벗어나야 했기 때문에, 바닷가 쪽으로 내려갔다. 샤르는 와이번들에게 나를 태우도록 한번 협박해보겠노라고 말 했지만, 나는 솔직히 불안하였다. 왠지, 호랑이 등에 업혀서 도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협박하여 한 동안 우리의 말을 듣게 한다 하여도, 언제 변심하여 나를 꿀꺽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몬스터들은 엄연한 몬스터들이니... 그렇게 불안에 휩싸여서 바닷가의 백사장 근처까지 왔을 때! 저만치로 보이는 바다 위에서 갑자기 작은 회오리가 불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것은 곧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였고, 나는 그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헉! 바람의 정령, 아젠샤르?' 리엔도 그를 알아보았는지, 약간 흥분한 모습으로 한발짝 앞으로 튀어나가며 그에게 소리쳤 다. "왜 또 온거얏? 설마, 황태자를 데리고 온 것은 아니겠지?" 그녀의 말에 아젠샤르는 얼굴을 살짝 찌푸려보였지만, 이내 무표정으로 일관하고는, 이쪽으 로 가까이 다가왔는데... 리엔시타는 바짝 긴장한 태도로 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아젠샤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그녀에게, 약간 차갑게 느껴지는 미성의 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해치러 온 것이 아니니깐... 우리 서로 섣부른 행동은 하지 말기로 하지? 그리고, 난 그 를 데리고 오지 않았어!" 그의 말에 나와 리엔시타는 의아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럼, 왜 왔어?" 리엔시타는 그래도 그를 못믿겠다는 듯이 그렇게 묻자, 아젠샤르는 그녀에게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 예전엔 리엔시타를 약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었는데, 지금은 그녀에게 정 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여보이는 것이었다. "너에게 사과하러 왔어! 미안해! 그때, 내가 한 공격에 그대로 당할 줄은 몰랐거든..." "웃기지마! 넌 그때, 내가 방심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공격을 했어! 넌 진심에서 우러나온 마음으로 나에게 사과를 하고 있는 거야? 라센샤르님의 명이 아니라?" "물론, 라센샤르의 협박이 있었긴 했지. 너에게 사과를 하라는... 하지만, 내가 이렇게 고개 를 숙이고 사과를 하는데, 받아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흥! 메롱이다~" 역시, 리엔시타답게 혀를 쏙 내밀며 그렇게 말했고, 아젠샤르의 얼굴은 살짝 일그러졌다. 그 로서는 자존심을 접고 그녀에게 사과하러 온 셈이었는데, 리엔시타는 그런 반응을 보였 으니... 하지만, 리엔시타로서는 그의 공격으로 죽을 뻔하였으니 사과 한마디 한다고, 마음이 돌아 서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리엔시타는 자신의 감정만을 앞세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한가지 약속해! 그러면, 네 사과를 받아들이도록 할게! 바다위를 머무는 바람의 정령인 네 가, 바다의 정령이신 라센샤르님의 눈엣가시가 된다면, 너로서는 매우 괴로워지겠지? 물론, 라센샤르님은 너와는 공존관계임을 감안해서 너에게 기회를 주려하심인 것 같은데, 호호 ~ 나도 너에게 한가지 기회를 주지 뭐!" 리엔시타는 인심쓴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였고, 아젠샤르는 그런 그녀가 얄미웠겠지만, 여전 히 무표정으로 일관한 채, 입을 열었다. "나에게 어떻게 기회를 준다는 것이지?" 그러자, 리엔시타는 약간 사악한 느낌이 드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언제나 순진무구한 얼굴 이었던 리엔시타가 그런 미소를 짓는다는 것이 나로서는 의외였지만, 나는 말없이 그런 그녀를 계속 지켜보았다. "그 기회란 것은... 여기, 라비스에게 충성 맹세를 해!" 그녀의 충격적인 발언에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뜨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에겐 바람의 정령이 필요하긴 했지만, 리엔시타가 아젠샤르에게 그러한 발언을 할 줄은 몰랐다. "리, 리엔?" 내가 다소 놀란 어조로 그녀에게 입을 열자, 리엔시타는 생긋 웃어보이며 나에게 맡기라는 듯한 얼굴을 해보였다. 아무튼, 아젠샤르는 매우 난감하고도 고뇌에 어린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미카엔의 명을 받아 나의 행방을 찾아 그에게 고하는 임무를 맡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충성맹 세를 해야 한다니... 그로서는 매우 난감한 요구였을 것이다. 물론, 그가 미카엔을 주인으로 섬긴 것은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나에게 맹세를 한다면 미카 엔과의 약속을 어기게 되는 셈이었다. 그것은 아젠샤르로서는 매우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러한 리엔시타의 요구는 일거양득이 되었다. 그를 나의 편으로 끌어들 인다면, 미카엔의 추적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네명의 정령들을 모두 모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행동이 어리길래 그들의 생각또한 어릴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수천년을 살아온 그들의 세월 은 무시할 수가 없는 일인 것 같았다. 아무튼, 아젠샤르는 한동안 표정을 구긴 채, 일생 일대의 고뇌의 순간을 보냈다. 나는 심각 히 고민하는 그의 얼굴이, 왠지 애처롭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결정이 섰는지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할 수 없군. 리엔! 나를 스스로 약속을 어기는 정령으로 만들다니... 이만하면, 나에게 복수 를 한 셈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그의 눈길을 나에게로 돌렸다. "라비스님? 저를 라비스님의 정령으로 거두워 주십시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아젠샤르는 그렇게 말하며 정중한 태도로 나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는 다른 정령들과는 달리 예를 차리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른 정령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자신이 내뱉은 말에 굉장히 책임을 느끼는 성격인 듯 하였다. 왠지 샤르와는 반대되는 이미지였다. 샤르는 왠지 가벼워보이고 얍삽해 보이는 반면, 아젠 샤르는 진지해보이고 차가운 이미지였다. "좋아요! 아젠샤르..." 나는 생긋 웃어보이며 그에게 말했다. "그냥 편하게 '아젠'이라 불러 주십시오!" 나이는 어려보이는 소년의 모습이건만, 하는 행동은 왠지 늙은티가 났다. 겉모습과는 달리 딱딱한 행동 때문일까? 아무튼, 아젠은 나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에게서 차가운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나에게 마음을 열지 않은 모양이군. 하긴, 억지로 나에게 맹세를 하였으니...' 그러다, 나는 한가지 궁금증이 머리에 스쳤다. "아! 그런데, 리엔하고 아젠은 모두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이네?" "응! 그것은 우리의 회복 능력이 빨라서 그래! 아마도, 여기 바다의 기운을 받아 더욱 회복 이 빨라졌겠지만..." 나의 질문에 리엔이 다시 나서서 촐싹대며 답했다. [75] 체인지(Change) 제13화 -마법사들의 탑!- (1) (마법사들의 탑) -1- 여기는 아스탄샤국... '프리실라'라는 이름의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은 로히얀스와는 많 은 면이 대조되는 나라였다. 첫 번째로 한가지 예로 비교해 보자면, 로히얀스는 남성 우월주위의 보수적인 나라였지만 아스탄샤는 제법 남녀가 대등한 권리를 가진 개방적인 나라였다. 그래서, 왕위 계승권도 왕자와 공주가 똑같이 그 기회를 부여받았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여성관리들도 있었는데 내가 가려는 마법사들의 탑에도 여성 마법사들 이 꽤나 되었다. 이렇게 여성이 나라를 다스리고 나라의 중신 중에도 여성들이 제법 있음 에도 불구하고 아스탄샤는 강대국으로 서대륙에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러가지 국법이나 제도들이 잘 정비되어 있는 듯하였다. 물론, 이곳 서대륙에서 유명한 마법사들의 탑의 역할이 크긴 했지만... 그리고, 또 한가지 짐작할 수 있는 건... 아스탄샤의 여왕 프리실라는 보통 여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녀는 아마도, 여느 남자들보다 더 뛰어난 무언가를 지니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우리는, 그러니깐 나와 샤르, 아젠, 리엔, 아멘시타는 여기 아스탄샤의 수도인 '텐시아'에 어 느덧 와있었다. 나는 일주일 전, 바람의 정령 아젠의 힘으로 서대륙까지 하늘을 날아와서, 샤르가 싸게 구한 마차를 타고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물론, 나의 짐들은 배에서 다 잃어버렸으나, 마침 내가 머리에 하고 있던 에메랄드 핀을 내 다 팔아 간신히 여행 경비를 충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미카엔이 주었던 크리스탈 반지와 다이아 목걸이는 계속 착용하고 있었으니, 다행하게도, 그것은 잃어버리지 않았다. 나는 강행군을 했던 일주일간에 여행으로 인해 속이 매우 안좋아져 있었다. 계속되는 멀미 에 연신 토하고 그랬으니, 지금으로선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령들은 이러한 나를 걱 정스럽게 바라보았지만 나는 왠만하면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물론, 그들은 나에게 쉬엄쉬엄 가기를 충고하였으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가진 돈 이 별로 없었으니, 정해진 시일안에 마법사들의 탑으로 도착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리 강행을 하였던 것인데, 역시 무리이긴 하였던 것 같았다. "아, 이젠 마차라면 진절머리가 나! 다신 말이나 마차 같은 것은 안 탈거야!" 나는 그렇게 파리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옆에선 리엔이 나를 토닥토닥하였고 아젠샤르는 바람의 힘으로 마차를 보호하여 최대한 진동이 없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미세한 진동이 라도 아주 오래타고 있으면, 멀미가 나기 마련이었다. 하긴, 일주일 내내 내리 마차만 탄다고 생각해 보라. 멀미를 안하고는 못배길 것이다. 뭐, 특별히 건강한 체질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샤르는 나에게 의외로 독한면이 있다며 혀를 쯔쯧 찼다. 하지만, 나는 음식물들을 제대로 넘기지 못하면서도, 마법사들의 탑에 가는 것에 대해, 집착을 가졌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나의 무력함에 대해 젠타로섬에서 뼈저리게 느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하루 빨 리 나의 능력을 키우고 싶었다. 내가 정령들을 이끌고 있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그들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마법사들의 탑에 소속하게 된다면, 나의 마법적 능력은 금세 키울 수 있을거라 생각한 나는 속으로 다짐을 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마법사들의 탑에 도착을 하였다. 마법사들의 탑은 이름처럼 탑이라기엔 하나의 성과 같은 건물이었다. 그 규모가 제법 큰편이었고 시설도 훌륭해 보 였다. 나는 그곳에 소속하기 위한 신청서를 작성하여야 했는데, 한가지 난감한 부분에 나는 부딪 히게 되었다. 그것은 나에 대해 신상을 작성하여야 하는 것인데, 지금 나에게는 나를 증 명할 만한 서류나 추천서 같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어느 곳이나 잠입에 능한 리엔시타가 여기 수도의 시청이라고 할 수 있는 관청으로 가서, 몇가지 서류들을 훔쳐가지고 왔고 또한. 수도에 있는 마법 아카데미의 학장실에 잠 입하여 졸업장 양식 같은 것을 훔쳐가지고 왔다. 물론, 마법 아카데미에는 마법사들이 잔 뜩 있었기에 매우 조심스러웠으나, 리엔시타는 완벽히 자신의 기운을 죽이며 맡은바 임무(? )에 성공을 하였다. 그리고, 리엔시타가 훔쳐온 서류들을 사기(?)술에 능하다고 할 수 있는 날라리 정령 샤르가 교묘하게 위조를 해나갔다. 그는 전직이 의심스러울 만큼 훌륭하게 일을 처리하였고 나는, 드디어 마법 아카데미의 졸업장을 가진, 텐시아 시민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이 들킬 가능성은 적은 편이었다. 마법 아마데미의 교수 마법사들이 학생들을 모 두 기억하기 어려울 만큼, 그 아카데미의 졸업자들은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나를 미심쩍 어하는 누군가가 파고들어 조사하지 않는 한, 나는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렇게 모든 서류들을 갖추어 나는, 마법사들의 탑에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그들이 통보한 자격시험 날짜, 그러니깐 앞으로 5일 후를 나는 차분히 기다려야 했다. 그 동안은 여관에서 묵어야 했는데, 수도의 여관비는 매우 비쌌던 터라 결국, 나는 한 여관 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 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 여관에서 내가 하는 일은 아래층 식당에서 서빙하는 일이었는데, 수도라서 그런지 다행히 험한 손님은 그다지 많지 않아, 생각보다는 힘든 일은 없었다. 오히려, 같이 일하는 급사 소년이 팔 겉어붙이고 내가 하는 일을 도우려 하여 나는 의외로 하는 일이 적었다. 물론, 가끔 추근대는 손님들이 있었긴 했지만, 그때마다 공기중에 숨어 있던 리엔시타가 그들을 은밀히 골탕을 먹였기 때문에, 나로서는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로히얀스 왕성에서 풍족하게 생활했던 습관이 남아, 잡일을 하는데에 적응 하는 일이 약간 힘들기는 했다. '에휴~ 나에게 이런 억척스러움이 있는 줄은 몰랐네!' 나는 한 테이블에 야채볶음과 흑맥주를 가져다 나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기요~ 아가씨!" 그때, 또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에~ 갑니다!" 나는 매우 익숙해진 태도로 그렇게 대답을 하며, 나를 부른 손님이 있는 테이블로 잽싸게 달려갔다. 그러자, 꽤나 옷을 고급스럽게 입은 한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네! 말씀하세요. 식사주문 하실 건가요?" "저기..." 주문은 하지 않고 자꾸 저기... 저기... 하는 그 소년의 모습에 나는 답답증을 느끼며 그에게 재촉을 하였다. 지금 나는 무지 바빴기 때문이었다. "아직 메뉴를 못 정하셨으면, 잠시 후에 다시 들르겠습니다. 그때, 주문해주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려 했다. "저기... 그냥, 맥주 한잔 주세요!" '쳇! 겨우 맥주 한잔 주문하는데, 그렇게 뜸을 들이다니! 아우~ 열받아!!!' 나는 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었지만, 겉으로는 그에게 생긋 웃어보이며, 정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네에~ 알겠습니다. 손님!" 다시 한번 그에게 접대용 미소로서 방긋 웃어주며 다시 돌아서는데... "저기요!" 그 소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흑! 저녀석 한 대 패주고 파! 나 무지 바쁜데...' 그렇게 눈물을 머금으며 나는 최대한 감정을 절제한 목소리로 그에게 입을 열었다. "네. 손님?" "죄송하지만... 저기... 아가씨의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 처음 본 순간, 반..." "하하, 손님! 죄송하지만, 전 다른 주문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그가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중간에 말을 끊고는 다시 주방으로 달려갔다. 나온 요 리들을 주문한 테이블에 날라주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제길! 저런 놈들이 하루에 적어도 한명씩은 있다니깐... 이젠 익숙해져서 여러가지 대처법 에도 통달할 지경이군!" 나는 속으로 그렇게 투덜대며, 내가 이도현이었을 적에도 안했던 잡일을 열심히 하며 자격 시험을 보기 전, 마지막 날을 보냈다. * 흐음... 라비스가 억척소녀가 되었어요. ㅡㅡ;;; 집 나와서 고생을 많이 하는군! [76] 체인지(Change) 제13화 -마법사들의 탑!- (2) -2- 내가 일하던 여관의 방에서 나는 정령들과 함께 여관에서의 마지막 날밤을 보내었다. 우리 는 여러 가지 잡담을 나누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아멘시타는 여기 여관 주인이 키우는 한 마리의 고양이의 몸속으로 들어가 있었는데, 그는 팔자 좋게 침대위에 늘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조그만 새나 고양이의 몸을 즐겨 찾는 것 같았다. 흠, 아멘시타의 취향 중 하나일까? "샤르! 그러고 보니, 샤르의 원래 이름은 렌샤르가 아니었어? 저번에 바다의 정령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었는데..." "맞아! 내 이름은 렌샤르야! 하지만, 계속 샤르라고 불러줘. 난 그게 마음에 드니깐. 샤르라 는 이름이 나의 이미지에 딱이지 않아?" "근데, 내일 과연 무사히 시험을 치를 수 있을까? 제발 잘되야 할텐데..." 샤르의 왕자병 기질이 다시 나오려는 발언을 무시하며, 나는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 자 샤르는 나의 무시에도 자신의 잘난척을 꿋꿋이 펼쳐 나갔다. "하하! 라비스. 넌 정말 괜한 걱정을 하는 구나! 이 샤르님이 있는 한, 넌 우수한 성적으로 그 마법사들의 탑에 들어갈 수가 있을 거야!" "샤르! 넌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불덩어리만 냅다 날리는 것뿐이잖아? 나처럼 우아하게 다양한 능력을 펼칠 줄 알아?" 샤르의 잘난척이 어린 발언에 리엔시타가 나섰다. 그러자, 샤르는 그녀의 말에 발끈을 하며 뭐라 뭐라 외치기 시작했고, 리엔시타 역시, 그녀의 말빨... 결코 논리정연한 말빨이 아닌, 무대포적인 수다성이 강한 말빨로 그에게 대꾸를 하였다. 결국, 그 둘의 끝없는 말다툼이 시작되었는데, 그 내용을 들어보자면, 대충 이런 내용이었 다. 네가 잘났냐? 내가 잘났다!! 아무튼, 그들의 유치찬란한 대화에 아젠샤르와 아멘시타는 그들 특유의 한심하다는 표정으 로 이들을 지켜보았는데... 그러고 보니, 아멘시타로서는 흠... 동지를 만난 셈인 것 같았다. 아멘시타와 같이 저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볼 수 있는 아젠샤르가 생긴 셈이었으니... '거참 귀여운 것들...' 나는 피곤한 몸을 추스리며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샤르는 리엔시타와의 말다툼을 멈추더 니, 나에게 외쳤다. "라비스!! 같이 자~ 난 오늘 침대에서 자고 싶은데..." 그의 말에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리엔시타의 재빠른 반응이 튀어나왔다. "샤르! 변태 정령 같으니! 엄연히 남녀가 유별한데... 라비스! 저 샤르는 무시해버리고, 나랑 같이 자!" "헹~ 리엔! 내가 비록 남자의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정령들에겐 성별이 아무 의미가 없다 는 걸 잘알잖아?" "그래도, 모습은 일단 남자이니... 생각하는 것도 남자로서 생각하게 될 것 아냐?" 여전히 시끄러운 저 두녀석들... 수다쟁이 리엔시타에 날라리 정령 샤르까지 가세하니, 나는 절로 정신이 없어졌다. 그래서... "시끄럿!! 그만 조용히 하고 잠이나 자!! 여기, 아젠이나 아멘시타를 본받으란 말이얏!" "엑! 라비스! 난 저기 애늙은이 바람의 정령이나, 고리타분 나무정령을 본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 샤르의 말에 애늙은이와 고리타분으로 지칭된 두 정령들의 눈초리가 매우 매서워졌다. 그러 자, 샤르는 그런 그들의 모습에 넉살좋게 웃어보이고는, 나의 명령대로 바닥에 쭈구려 잠을 청하는 척을 하였다. 물론, 정령들은 잠 같은 것은 자지 않지만... 지금 샤르는 잠을 자겠다며 다소 불쌍한 포즈 로 서늘한 기운이 올라오는 나무바닥에 쭈구려 누운 것이다. 그러면서, 샤르는 또 한번 아젠샤르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어이! 애늙은이! 잠이나 자게, 자장가나 불러봐! 너 노래 잘부른다며?" 정말, 그의 근본 바탕이 의심스러운 날라리 정령 샤르였다. 아무튼, 그 다음날 아침! 나는 여관 주인장에게 약간의 보수를 받고 마법사들의 탑으로 향했다. 여관 주인장은 나 때 문에 여관의 손님들이 더욱 늘었다며, 조금 아쉬워하는 얼굴을 하였으나 내가 여기 아스 탄샤에 온 목적은 여관에서 일하는 급사가 되기 위함이 아니었으니... 주인장의 그러한 표정 을 과감하게 무시하였다. 나는 마법사들의 탑 앞마당에서 공개적으로 펼쳐지는 자격시험장으로 가서 한쪽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아마도, 여기 소속되어 있는 마법사들과 한판 대결을 필치게 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곳 의 8서클 마스터라는 노인 마법사들이 심사위원이 되어, 자격여부를 심사하게 되는 것 같 았다. 나는 약간 긴장된 얼굴로 길게 흘러내린 황금빛 머리카락을 여러번 꼬아서 올린 다음, 싸구 려 핀으로 고정을 시켰다. 그러자, 약간 길고도 가냘픈 느낌이 드는 나의 하얀 목덜미가 드러나서 더욱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가끔 대기자들이나 여기 소속 마법사들이 나를 힐끔 힐끔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이젠 익숙해져서 그냥 그러려니 하였다. '휴~ 제발 나의 정령들이 사고 안치고 잘해내어 주었으면...' 정령들은 모두 각자 위치한 곳에 있다가 내가 부르면 짜안~ 라고 나타나주기로 약속을 하 였다. 나는 정령들의 실력들을 모두 믿지만, 마법사와 정면 대결로 싸우는 것은 처음이었 기에 약간 불안한 감정도 있었다. 아! 나의 걱정거리가 또 한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멘시타였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 데, 그는 요즘 들어서는 굉장히 의기소침해 있었다. 아마도, 자신과는 너무나 차이나는 정령들에 의해서 약간 소외감을 갖는 듯 했는데, 나는 그가 그렇게 스스로의 능력을 낮게 평가하여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 하지 않았으면 했다. 물론, 지금으로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동식물을 이용하는 수준... 어쩌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적을 수도 있다. 아무래도, 나이가 현저하게 어리니... 하지만, 아멘시타는 그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주었으면 했다. 나는 나직히 한숨을 내쉬며, 이미 시작된 첫 번째 시험 대기자와 여기 마법사와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곧, 현란하기 짝이 없는 마법들이 시전되었고 나는 시작부터 고난도의 마법 들이 마구 난무되는 광경을 지켜보며, 스스로 자신감이 저하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았다. 대결하는 장소는 반경 몇십 큐빗에 달하는 넓이였고, 그 장소는 아주 두꺼운 실드가 쳐져 있었다. 대결 시간은 정확히 30분... 곧, 첫 번째 대기자의 대결은 끝이 났다. 결과는 불합격... 대기자와 대결하는 마법사는 5서 클의 마법사인데, 그를 정해진 시간에 제압을 해내야만 합격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첫 번째 시도자는 그를 제압하는데 실패를 하였다. 비록 고난위도의 마법들을 시전하였으나, 그것은 처음부터 무리를 하였던 것이어서 나중에 는 지친 자신의 체력을 인해, 오히려 제압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튼, 그 첫 번째 도전자는 구겨진 얼굴로 시험장에서 물러났고... 두 번째 대기자가 그 자리에 올라왔다. 그는 정령 마법을 시행할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그 에 맞추어 그와 대결해줄 마법사도 정령계 마법을 쓰는 마법사가 상대를 하게 되었다. 나는 이들의 대결을 더욱 유심히 지켜보기 위해, 태도를 바로 하였다. [77] 체인지(Change) 제13화 -마법사들의 탑!- (3) -3- 두 번째로 나선 이는, 놀랍게도 20대 중반 정도 되어보이는 엘프였다. 어? 엘프가 아닌가? 귀가 필요이상으로 뾰족한데...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그의 인상착의는 숲속의 종족 엘프와 많이 닮았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엘프라는 느낌보다는 인간의 이미지에 더욱 가까워 보여, 엘프인지 아 니면 그저 귀가 약간 뾰족하기만 한 인간인지 매우 아리송하였다. 나는 엘프를 직접 본적이 없으니, 쉽게 판단이 내려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건... 저 남자를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는 것이다. 초면인 얼굴인데도 나는 그가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어쨋든, 그 두 번째 도전자는 자신의 정령들을 모두 불러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그의 주위로 네 존재의 정령들로 보이는 기운들이 감돌기 시작했는데, 기운만으로 그들이 무슨 정령인지 파악해낼 수가 없었던 나는, 그저 그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곧, 대결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서있던 땅이 갑자기 파헤쳐지기 시작하였고, 물의 속성의 공 격이 펼쳐지기도 했고, 굉장히 이상한 음향의 공명음이 맴돌기도 했다. 한마디로 어질 어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마도, 엘프로 짐작되는 저 남자는 꽤나 정령들을 능숙하게 부리는 듯 하였다. '헤궁~ 걱정이다! 과연, 내가 정령들을 제대로 통제해낼 수 있을까? 아무래도, 제멋대로일 것 같은데... 게다가, 서로들도 사이가 그리 좋은 편도 아니잖아?' 그렇게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는데, 어느덧 대결의 결과가 나왔는지 그들의 현란한 몸짓은 멈추었다. 심사위원으로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마스터 마법사들은 저 두 번째 도전자 에게 합격점을 주었다. 그러자, 합격점을 받은 그 남자는 별 감흥없는 얼굴로 정중하게 자신이 상대한 정령 마법사 와 심사워원들에게 꾸벅 인사를 해보이고는 대결장을 내려왔다. 그리고, 이젠 세 번째 도 전자... 바로 나였다. 나는 어설픈 몸짓으로 대결장으로 걸어가는데, 방금 테스트에 통과한 그 남자와 마주쳤다. 나는 별생각없이 그냥 스쳐지나가려 했지만, 그 남자는 나의 얼굴을 보더니, 굉장히 놀란 얼굴을 해보였다. '엥? 저 반응은 뭐지? 내 얼굴이 그렇게 놀랍게 생겼나?'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 뭔가 할 말이라도 있 었는지 잠깐, 머뭇거리더니 그 역시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고는 자신의 갈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결장인 원형 형태의 장소에서 걸음을 멈춘 나는, 우선 심사위원인 마스터 마법사들에게 잘보이기 위해, 그들에게 인사를 해보이며 방긋 웃어보였다. 사실, 이런 곳에서 방긋 웃는 일이란 그다지 필요없는 일이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요즘 나 는 사람만 보면, 우선 접대용 미소로서 방긋 웃는 것이 습관화가 되어있었다. 아마도, 여 관의 식당에서 5일간 일한 것이 어느새 몸에 밴 모양이었다. 일명 서비스 정신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나의 화사한 미소를 받은 노인 마법사들은, 흠흠거리며 헛기침을 해보이며 태평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그들은 나의 재능에 대한 기대는 별로 하지 않는지, 어서 30분이 지나가, 다음 참가자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잠시 후, 나를 상대할 정령 마법사가 등장했다. 20대 후반의 여성이었는데 생긴 것이 매우 깐깐해 보였다. 그녀가 은근히 나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시작하시오!" 대결의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리며, 우리 주위로 다시 새로운 실드가 형성되었다. 나는 정령들을 불러들였다. 그러자, 조그만 새의 모습으로 나의 옷주머니속에 들어있던 아멘시 타가 푸드득 날아올라 나의 어깨에 내려앉았고, 나머지 정령들은 각자 본연의 모습으로서 나의 주위에 맴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를 상대하는 여자를 비롯한 심사위원 마법사들은 모두 표정이 달라졌다. 나의 정 령들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리엔시타는 나의 주위로 두꺼운 물의 속성인 실드를 쳤다. 그리고, 불의 정령 샤르는 자신 의 모습을 아예, 불사조의 형태로 바꾼 다음, 직접공격에 들어갔다. 역시나 성급한 샤르... 바람의 정령 아젠샤르는 샤르의 곁에서 그의 뜨거운 불길의 영향권을 더욱 극대화 시켰다. 그가 일으키는 바람을 따라 샤르의 불길이 번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자, 실드안의 대 결장은 온통 시뻘건 불덩어리로 휩싸이게 되었다. 게다가, 아젠샤르는 무슨 심사인지 자신의 바람의 힘으로 심사위원 마법사들의 말소리들을 그대로 나에게 전달시켰다. 그러자 바람을 타고 노마법사들의 목소리가 나의 귀에로 생생 하게 들려왔다. "아니! 공격력으로선 제일 막강하다는 불의 정령을 부리고 있다니! 저건, 젠타로섬 활화산 의 불의 정령 아니오?" 역시, 마스터 마법사들답게 척 보고는 이 불의 정령의 출처까지 짐작해낸 모양이었다. 아무 튼 그들의 말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왠지 그들의 말소리가 수다스럽게 들렸다. "그리고, 바람의 정령에서 바다의 기운이 느껴지는구료! 바다에서 머무는 바람의 정령은 다 른 바람의 정령들보다, 그 범위가 크기로 유명하지 않소?" "호오! 나이 어린 소녀가 저렇게 능력이 큰 샤르급의 정령들을 능숙하게 부리다니!" 하긴, 정말 나의 정령들은 잘 짜여진 전략에 따라 움직이는 것 마냥, 상대를 공격하고 있었 다. 리엔시타는 거의 방어위주로 샤르는 공격위주 그리고 아젠샤르는 복합적인 형태로서, 그리고 아멘시타는... '흠, 쟤네들이 왠일이지? 서로 손발이 척척 맞고 말이야! 모두 제멋대로일 줄 알았는데...' 정령들을 상대하고 있는 여자도 만만치 않는 능숙한 솜씨로 정령들을 부리고 있었으나, 어 느덧 그녀의 얼굴에는 힘겨움이 가득 나타났다. 기세가 올라 흥분한 샤르는 더욱 정신 사나운 불의 공격으로 여자를 사정없이 몰아갔다. 그 러자, 그녀를 감싸고 있던 물의 속성의 실드가 깨어져 갔다. 그녀 역시, 물의 정령으로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샤르! 그만 둬!] 아멘시타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는 지금까지 세 정령들의 공격형태를 솜씨좋게 통 솔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내가 멀뚱이 있어도 정령들이 척척 알아서 잘 싸워 준다 했다. 하지만, 샤르는 이미 흥분한 자신의 기세를 멈추지 못하겠는지, 그의 시뻘건 불길이 곧, 여 자 정령 마법사를 낼름 먹어버릴 형태였다. 그는 불의 정령이라 그런지, 발끈도 잘하지만 흥분도 잘하는 모양이었다. 이러다, 잘못하면 여자가 죽게 생겼다. "샤르!! 그만둬!!" 나는 그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멈추지 않을 것 같던 그의 공격은 갑자기 멈칫하며 수그러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완벽하게 자신의 불길을 거두어 들였다. 여자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헉헉 거리며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에서 비오듯 땀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에 비해 나는 멀쩡한 모습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상 밖의 확연한 차이였다. 이를 지켜보며, 내내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던 심사위원 마법사들 중 하나가, 결국은 못참고 벌떡 일어나 나에게 외쳤다. "정말 대단하군! 합격이네!" "하지만, 주로 활동한 정령들은 모두 셋 뿐이군!" 그러나, 그 옆에 있던 다른 심사위원 마법사가 그렇게 토를 닸다. "마스터이신 마법사라면 나머지 한 정령은 론티아의 신성나무 정령이라는 것을 아실텐데요! 설마, 눈치를 못채고 있었던 것은 아니시겠지요? 그는 공격력을 제외한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그들에게 말하자, 나에게 합격이라고 외쳤던 노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맞소! 저 소녀는 합격 기준에 전혀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녀는 엄연히 네 존재의 정령들을 부렸습니다. 비록 한 정령은 소극적인 방법으로 전투에 동참을 했지만 말입니다. 게다가, '이레느'는 다른 일반 5서클 마법사와 맞서도 손색이 없는 정령 마법사인데 그녀를 가볍 게 제압했으니, 대단한 정령들을 부리는 저 소녀로서는 정말 대단한 것이오! 저 어린 나 이에 말이오!" 그렇게 해서, 나는 마법사들의 탑에 소속되는 것이 확정되었다. 나머지 심사위원 마법사들 도 저 노마법사의 말에 수긍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30분이 못지난 시각에 나의 대결은 합격으로 판정되어 완료된 것이다. 곧, 주위에서 감탄하는 음성과 함께 박수소리가 짝짝~ 하고 들려왔다. 나는 그들을 보며, 겸연쩍은 미 소를 지어보였고 정중한 태도로 심사위원과 상대했던 여자에게 인사를 하고는 그 곳에서 빠져나왔다. [78] 체인지(Change) 제13화 -마법사들의 탑!- (4) -4- 그날 오후, 나는 정식으로 마법사들의 탑에 소속된 정령 마법사가 되었다. 그래서, 마법사들 의 탑 내부, 쉽게 말하자면 기숙사 같은 곳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기숙사라고 표현하기엔 약간 어색하지만, 아무튼 마법사들의 숙소에 나의 방이 배정되었다. 숙소는 비록 작지만, 1인실로 쓸 수 있는데에 대해 나는 만족하기로 했다. 그날 저녁 식당 에서 저녁을 사먹은 후, 나의 방으로 돌아가는데 누군가가 나의 숙소 건물 앞에서 서있 었다. 아까 낮에 보았던 엘프처럼 생긴 남자였다. 사실, 오늘은 그와 나... 겨우 둘만 합격점을 받아 이곳으로 들어오게 되었었다. 그래서, 나 는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는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그리고는 여전히 별생각없이 들어가려 는데... "라비스님!"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 내 이름을 부르다니... 설마, 날 잡으러 온 사람은 아니겠지?' 나는 무지 놀랐지만,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로히얀스의 왕성에서 계셔야 할 라비스님께서 도대체 무슨 연유로 이곳에 계신 겁니까?" "누구시죠?" 내가 의아한 빛을 띠며 그렇게 묻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가 일부로 그를 모른척이라 도 하고 있다는 생각했는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어서 돌아가십시오! 라비스님이 계실 곳은 이곳이 아닙니다." "저를 아시는 분이신 것 같은데, 저는 댁을 잘 기억하지 못하니 죄송하지만 성함 좀 밝혀 주시겠어요?" "라비스님! 예전의 일로 인해, 저에게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그렇다면, 몇번이 고 라비스님께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신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이곳에서 지체하시지 마시고 돌아가십시오!" 그는 내가 가출(?)을 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그렇게 말하는 모양이었다. "예전의 일이라니요? 도대체 누구세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 남자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나에게 물었다. "라비스님... 설마 저를 기억 못하시는 것은..." "맞아요! 전 댁이 누구인지 전혀 감을 못잡겠으니... 죄송하지만, 누구인지 밝혀주시지요?" 그러자, 그 남자는 약간 당혹스런 표정을 짓더니 한동안 나를 보며 침묵을 지키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휴~ 라비스님의 눈을 보니, 사실인 듯 하군요! 전 카이엔이라 합니다. 예전에 라비스님의 아버님 되신, 크로시벨 남작님의 경호원 일을 잠시 했었죠!" "아! 당신이 그 하프엘프 용병이라던 카이엔?" 내가 그렇게 놀라며 되묻자, 그는 살짝 미소지어 보였다. "그런데, 라비스님은 무슨 이유로 이곳에 오신 겁니까?"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예전, 본래의 라비스가 짝사랑을 했다던 이 남자에게서 나는 이유없는 불쾌감 비슷한 감정 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가 없었지만 이 남자에 대한 라비스의 앙금이 나에게 잠재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쌀쌀맞아진 태도로 그에게 대꾸하고는 그대로 돌아서서 숙소로 들어가 려 했다. "라비스님! 로히얀스 현 황태자님의 소식이 혹시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나는 다시 걸음을 멈추어 그를 돌아보았고, 그는 이런 나의 모습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 "황태자님께선 굉장히 많이 변하셨다고 하시더군요. 뭐랄까... 굉장히 냉혹하신 분으로. 아마 도, 그 원인이 라비스님이 되지 않을까? 생각되어지는 군요. 저번에는 사소한 실수를 한 시종을 그대로 단칼에 배어버리셨다고 하더군요. 예전에는 하인들의 실수에도 왠만하면 그 냥 덮어주시던 분이..." "황태자님이 냉혹하게 변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그리 잘알죠?" "저는 용병입니다. 여러 가지 정보나, 왕실과 관계된 무성한 소문 같은 것에 민감하고 빠른 편이죠! 아마, 곧 있으면 전쟁이 있을 거라는 소문도 돌더군요." "그... 그것이 사실인가요? 미... 아니, 황태자님께서 변하셨다는 것이?" 그에게서 미카엔의 소식을 듣자, 나는 가슴 한구석에 지끈하는 것이 느껴졌다. 카이엔은 눈 을 내리깔고는 한숨을 나직히 내쉬어보였다. "라비스님... 돌아가십시오! 물론, 라비스님이 돌아가신다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되돌아간다 는 보장은 없지만, 만약 앞으로 로히얀스의 군주가 되실 황태자님께서 안좋은 방향으로 변하신다면 고달퍼지는 것은 그 백성과 신하입니다." 그는 나에게 충고하듯이 말을 마치고는 짧은 인사와 함께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카이엔이 라는 남자는 매우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성격을 가진 모양이었다. 왠지 감정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아, 사소한 일에 흔들림이 없을듯한 사람... 언제나 필요한 말만 하고,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지는 행동만 하는 사람인 듯 했다. 아니, 하 프엘프인 듯 했다. 그러니, 예전에 본래 라비스의 고백에도 눈깜짝 않고 거절을 했겠지... 그건 매정한 것이 아니라, 너무 이성적이라서 자초한 일이었다. 나는 숙소로 들어가서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아파오고 답답하였다. 정말 기이하고도 알 수 없는 증상인 듯 했다. 이런 것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었고 아픔이었다. "미카엔... 그건 한때의 감정일 뿐일 거야! 시간이 지나면, 금방 나 같은 것은 잊을 거야! 너 의 곁에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줄 여자가 있잖아?" "라비스... 그렇게 괴로우면, 황태자에게로 돌아가! 아니면, 그를 너의 기억에서 완전히 지우 든지..." 내가 혼자서 그렇게 중얼중얼대자 언제 나타났는지 리엔시타의 목소리가 들리며 나의 머리 를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리엔! 라비스보고 황태자에게 돌아가라니? 자수해서 광명 찾으라는 얘기야? 이봐! 라비 스~ 자책하는 것도 좋지만, 자수하러 갔다가 황태자가 너를 사형이라도 시킨다든가 감옥에 쳐넣으면 어쩌려고 해? 대체 무슨 죄를 지은 거야? 죽을 죄야?" 역시, 샤르의 목소리였다. 그는 내가 황태자의 측실이었다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어쩌 다 보니, 그에게 말을 하지 않았는데, 결국은 샤르만 모르고 있는 셈이었다. 왠지 교묘하게 '따' 시킨 느낌... [라비스!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너의 갈길이 무엇인지 더 이상 방 황하지마! 라비스... 그것이 길어진다면 언젠가 너를 망치고 말거야.] 역시나, 아멘시타... "저도 라비스님이 돌아가시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과묵한 아젠샤르도 한마디 했다. "아니! 나의 갈길은 황태자의 측실이 아니야! 난 마스터 마법사가 될 거야... 미카엔은 몇 년 지나면, 나의 이름조차 잊게 될걸? 그는 잠시, 나의 외모에 빠져있었던 것일 거야... 그 러니, 이제 그만 말해! 더 이상 미카엔이란 이름을 듣고 싶지 않아!" * 왠지 라비스는 하프종족과 인연이 많은 듯... ㅡ.ㅡa 이번 편의 주된 내용은 '싹트는 그리움' 편이군요. 흐음... 갠적으로 미카엔이 증말 불쌍해여! 얼릉 둘이 만나게 해주고 싶은데... 라비스는 흐음... 도현이니...;;;; [79] 체인지(Change) 제14화 -몬스터 토벌하기!- (1) (몬스터 토벌하기!) -1- 그 후로 며칠이 흘렀다. 이제 본격적인 우(雨)기가 시작되었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비가 내 렸다. 정말 지겹도록 내렸다. 그동안 나는 정령계열 마법에 대해 연구한답시고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이론에 대해 전혀 몰랐던 나는 그저 다른 마법사가 말하는 내용이나 논문(?) 같은 것을 나의 학습자료로 삼아 나름대로 마법에 대해 배워나갔다. 그리고, 여기 마법사들의 탑에 있는 , 마법에 대한 좋은 자료나 마법서들을 읽어보며 이제껏 나에게 없었던 배움에 대한 의 욕을 마음껏 불태웠다. 이젠, 한동안 보였었던 억척소녀 기질에서 모범소녀로 바뀐 셈이었다. 여기서 검은색 뿔테 안경만 쓴다면, 완벽한 모범소녀 이미지가 될텐데... 이곳은 안경이라는 물건이 없으니. 어쨋든, 나는 좋은 책들과 자료 그리고 많은 인재들 사이에서 마법에 대한 복잡 미묘한 원 리를 깨우쳐나가기 시작했다. 예전에 왕성에서 마법을 배울 때는 대부분 나혼자 배웠던 터라 완벽히 이해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었던 점이 많았는데, 지금은 모든지 완벽히 이해하 고 넘어가니, 그만큼 마법을 깨우치는 속도도 예전보단 빨라있었다. 마법사들의 탑 소속 선배 마법사들 중 하나가, 나의 잠재능력을 테스트 해보고는 이렇게 말 하였다. "라비스는 몸안에 빙계 계열의 기운이 매우 강하게 뭉쳐있어! 이정도면 굉장한 잠재능력을 가진 셈이지! 이것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빙계 마법은 무서운 속도로 익힐 수가 있을 거야!" 하지만, 나는 그것을 쓸 수가 없었다. 내가 만약 그것을 이끌어내어 마법을 사용한다면, 미 카엔은 금방 느낄 수가 있을테니 말이다! 자신이 준 마나의 기운을 모르겠는가? 물론, 그가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나를 찾는 전제가 있어야 하겠지만... 그래서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나만의 마나를 이끌어 모으기로 했다. 원래 모든지 시 작이 어려운 법인데, 나만의 마나를 느끼고 이해하며 그것을 필요에 따라 나의 마법적 능 력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마법공부 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어느덧, 늘 흐리던 하늘에서 오랜만에 여름의 태양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두껍던 구름들 도 모두 어디론가 흘러가 버리고 이젠 얇은 하얀 솜털 구름들만 남아, 다시 여름의 열기를 후끈 달구었다. 이제 한여름이라는 이름의 계절도 막바지에 이르렀는지, 아침 저녁으로는 조금 선선해졌지 만 한낮은... 정말 신경질이 날 정도로 무더웠다. 물론, 나는 다른 여타 마법사들보다는 더위로 인해 고생을 적게 하는 편이었다. 나의 방은 무지 시원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나만의 전용 에어컨... 바람의 정령, 아젠샤르가 있 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다 내음이 나는 시원한 바람을 계속 나에게 불어주었는데, 그로 인해 내가 방안에 홀로 있는 동안은 정말 시원하게 보낼 수 있었다. 아젠샤르... 정말 여러 가지로 유용한(?) 정령이었다. 물론, 본인은 자신이 이러한 한심한 짓을 계속 하고 있어야 하나? 하며 회의가 들겠지만, 그의 성격상 나에게 궁시렁대지도 못하고, 속으로 삭이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겨울 에는 불의 정령 샤르가 매우 유용할 듯 싶었다. '후훗... 정령 난로.' 나는 그러한 생각을 하며, 예전에 나에게 배웠던 묵찌바를 리엔시타에게 가르쳐서 같이 놀 고 있는 샤르를 슬쩍 바라보았다. 물과 불... 보통은 궁합이 맞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얘네 둘은 유치한 부분이 서로 맞 아떨어져서 그런지 의외로 친하게(?) 지내는 듯 했다. 대부분, 싸우는 경우가 많지만 애 들은 싸우면서 크고, 정도 든다고 하니... 아멘시타는 지금, 내가 새로 산 새끼 고양이의 몸속에 들어가 있었다. 역시나 가장 편안한 팔자 좋은 포즈로 침대에 늘어져 있었는데, 그의 눈빛은 어딘가 평소답지 않게 멍해 보 였다. 요즘 들어, 그렇게 멍한 표정을 자주 지어보이는 아멘시타였다. "아멘시타?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 [아, 그냥...] 나는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그에게 물었다. 오늘은 휴일이라 다른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방안에 틀어박혀 책만 읽어대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아멘시타는 나의 물음에 대충 대답을 하더니, 힘없는 몸짓으로 몸을 일으켜 구석으로 자리를 조금 옮긴 다음, 다시 누워 눈을 감아버렸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 새끼 고양이의 몸인 아멘시타를 안아들었다. 예전에는 고양 이를 매우 싫어하여 고양이 근처에도 안갔던 나였지만, 요즘은 고양이의 몸을 종종 애용(? )하는 아멘시타 덕분인지 그런 거부감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가라앉아 보이는 그의 기분을 풀어주고자, 일부로 장난스러운 태도로 그를 꼬옥 안아 얼굴에 부비부비하였다. [켁! 뭐하는 거야?] "헤헤... 지금 네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내가 그렇게 부비대고 있자, 묵찌바에서 진 벌칙으로 리엔시타의 여린 팔목을 다소 맵게 때 리고 있던 샤르가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앗! 라비스. 지금 아멘시타만 편애하는 거야? 나도 그렇게 귀여워 해줘~" "엑! 샤르~ 넌 하나도 안귀여워!!" 내 품안에서 버둥대고 있는 아멘시타를 안아들은 채 그에게 대꾸하고 있는데... 똑, 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라비스! 나, 엔젤라야!" 엔젤라는 귀엽게 나있는 주근깨에 곱슬거리는 백금발을 가진 20살의 소녀같은 여자였는데, 그녀는 내가 동생같다며 아주 잘해주는 선배 마법사들 중 하나였다. 그녀는 1년 전에 이곳 마법사들의 탑에 들어와서, 젊은 나이에 뛰어난 재능으로 인정받고 있는 유망주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나는 여러모로 그녀에게 많은 도움과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무슨일이야? 언...니..." 친한 연상의 여자들에게는 보통 언니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었으나 나는 무지하게 어색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언니라고 칭할 때마다 더듬고는 하였다. "호호! 라비스. 오늘같이 화창한 휴일에 재미없게 책을 읽고 있는 거야? 음, 너에게 전해줄 말이 있어서 들렸어! 우리에게 임무가 한가지 주어졌거든... 너에게는 첫임무가 되겠지? 너와 나 그리고 몇몇 마법사들과 함께 내일 루델린 산맥으로 떠나야 해! 아마도, 오전에 출발하게 될테니깐, 미리 미리 준비하고 있어!" "루델린 산맥이라면 요즘 갑자기 불어나기 시작한 몬스터들로, 골치를 썩고 있는 지역이잖 아?" "맞아! 우리는 그 몬스터들을 토벌하러 가는 거야! 그럼, 쉬어~ 나 갈게!" 그녀는 그렇게 할 말을 마치고는 급하게 어디론가 사라졌다. "첫임무라... 몬스터 토벌이라니! 흠, 이세계에 넘어온 이후 처음으로 몬스터들을 실컷 구경 할 수 있겠군!" [80] 체인지(Change) 제14화 -몬스터 토벌하기!- (2) -2- 그날 저녁, 나는 순전히 나의 힘으로 노력한 결과로 1서클의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1서클을 자유롭게 다루는 것은 아직 미홉하였지만, 이 정도면 꽤 많은 발전을 이룬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간단하게 우유와 에그 샌드위치로(삶은 달걀를 으깨넣은 샌드위 치) 식사를 한 후... 물론, 아멘시타에게도 샌드위치 조각을 내주었다. 그는 지금 동물의 육체를 가지고 있으니, 배는 고플테니 말이다. 짐을 대충 챙겨 아멘시타를 안고 숙소를 빠져나왔다. 나머지 정령들은 지금,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기운 회복하러 가고 없었다. 이번 몬스터를 토벌하기 위해 평성된 팀원은, 나를 비롯한 엔젤라 그리고 저번에 나와 함께 이곳에 들어온 카이엔, 이번 팀의 '리더'라고 말할 수 있는 40살의 중년 마법사가 함께 일 행이 되었다. 그 중년 마법사는 6서클 마스터인 제이크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였다. 짧은 연한 갈색 머리 에 회청색 눈동자를 가졌는데, 마법사답지 않게 덩치가 매우 큰 편이었다. 그에게 로브를 벗기고 갑옷을 입힌다면 기사나 검사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다 모인 팀원들을 주욱 훑어보더니 그의 눈길이 엔젤라에게서 딱 멈추었다. "엔젤라! 우린 지금 피크닉 가는 것이 아니라구! 그 많은 짐은 다 뭐지?" 그러자, 엔질라는 애교 섞인 웃음을 그에게 흘리며 입을 열었다. "어머나! 선배님. 이 정도의 짐은 숙녀에게 필요하다구요!" "그 가방 안에 뭐가 들었는데?" "숙녀에게 그런 것을 물어보면 실례에요! 다 필요하기에 가져온거라구요!" 그녀가 당당한 모습으로 그렇게 말하자, 제이크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어보였다. 그러더니, 그는 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엔젤라! 라비스를 본받도록 해! 라비스는 가벼운 배낭 달랑 하나잖아?" 그러자 엔젤라는 화들짝 놀라는 척을 하더니, 나에게 입을 열었다. "어머! 라비스. 아무리 여행 중이라 해도 챙길 건 챙겨야지! 피부 보호할 화장품이나 여러 가지 옷가지는 챙긴 거야?" 그녀의 질문에 나는 겸언쩍게 웃으며 답했다. "난 화장품 같은 건 안바르는데? 그리고 옷은 간단한 옷, 한벌만 여분으로 준비했어! 어차 피 오래걸릴 일도 아니고..." "뭐? 화장품을 전혀 안바른다고?!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고운 피부를 가질 수가 있는 거 지? 정말 불공평해!! 난 햇빛을 조금만 보아도 이렇게 주근깨가 생기는데..." "주근깨가 있어도 귀엽기만 한데 뭘!" "정말?" 나의 말에 엔젤라는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그렇게 반문을 했다. "이제 그만 출발하도록 하지요?" 엔젤라로 인하여 출발이 계속 늦쳐질 것 같자 묵묵히 있던 카이엔이 결국 입을 열었다. 그 의 말에 제이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스탄샤국의 북쪽 변방에 위치한 루델린 산맥 근처로 이동하기 위한 마법진을 그렸다. 엔젤라 역시 제이크를 도와 마법진을 그렸고 나는 멀뚱이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 자, 옆에 서있던 카이엔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라비스님은 언제부터 정령들과 교류를 가졌습니까? 마법이나 정령술에 대해 전혀 문외한이 시던 라비스님께서 갑자기 강한 정령들과 주종관계의 계약을 하시다니요?"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계약이요? 나는 정령들과 계약을 맺은 적이 없는데요?" "계약을 맺은 적이 없으시구요? 그럼, 어떻게 정령들을 부리게 되셨죠?" "전 정령들을 부리지 않아요! 전 그들을 그저 친구로서 대할 뿐이죠. 그리고, 그들은 친구로 서 나를 대가없이 도와주고 있는 것이구요." "정령들이 그저 친구로서 라비스님을 돕는다라... 굉장히 놀랍고도 믿기 힘든 일이군요. 정 령들은 인간들을 많이 꺼려해서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들이 만약 누군가에게 끌린다면, 강한 능력이나 그의 카리스마에 굴복하는 경우이죠! 대부분, 정령들 은 그런 경우로 인해서 힘에 의한 강제적인 계약을 하거나 자발적으로 주종관계를 갖습니다." 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제이크가 우리에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이엔, 라비스! 둘이 그만 속닥대고 어서 마법진 안으로 들어오게!!" 제이크는 우리에게 손짓을 하며 어서 들어오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잠시 후, 우리는 엔젤라와 제이크의 마력으로 신비하게 빛을 발하는 마법진에 의해 루델린 산맥 근처로, 정확히 말하자면 제이크가 마법진에 표시한 좌표로 공간 이동하였다. 사실, 이러한 마법진으로 인한 공간 이동은 대부분, 마법진에서 마법진으로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니깐. 우리가 이동하고자 하는 장소에 공간이동 마법진이 그려져 있어야 그곳으로 이동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예전 미카엔이 루젠다르 국경 근처로 이동하기 위해 그렸던 마법진... 그리고 이번 에 제이크가 쓴 마법진은 즉석에서 그린 하나의 마법진으로 이동하는, 매우 어렵고도 위 험부담이 큰 기술이었다. 그것은 마법진에 정확한 좌표를 기이한 형태인 마법어로서 그려주어야 했고, 많은 마력이 필요하여 대부분 두명 이상의 마법사의 마력이 필요로 했다. 만약, 좌표에 약간의 오차가 생긴다면 그것을 시행하는 사람은 여러 차원 중, 엉뚱한 곳으로 떨어져 완벽한 미아가 되 고 마는 것이다. 아무튼 제이크는 6서클 마스터에 7서클 마법을 왠만큼 사용하는 실력있는 노련한 마법사였 고 엔젤라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5서클 마스터였으니, 이 둘이 힘을 합친다면 별로 문제될 것은 없었다. "헉! 저건 뭐에요?" 우리가 이동해 가자마자, 하늘에서 왠 괴상한 새떼들이 우리를 반겼다. 그들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가슴 윗부분은 인간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주 망측한 모습이었다. 내가 그들을 보고, 놀라 그렇게 제이크에게 묻자, 제이크는 매우 심각해 보이는 얼굴로 나 의 질문에 답했다. "으음... 하피들이로군!" 그의 말에 나는 다시 하늘을 날아 다니는 하피들을 올려다보았다. '흠, 하피들이 저렇게 생겼었군! 직접 눈으로 보니, 되게 신기하네?' 곧, 하피들은 우리들을 향해 곤두박질 치듯이 아래로 내려왔다. 가끔 요사스러운 느낌의 노 랫소리가 우리의 귓전에 들려왔다. 아마도, 하피들이 부르는 노래인 듯 했다. 과연 저 괴 물들이 부르는 노래가 맞을까? 하는 의심이 들만큼, 노래의 음향은 매우 아름다운 편이었다. 제이크는 하피들에게 파이어 볼을 날리기 시작했고, 엔젤라는 몇 개의 매직 에로우를 만들 어내 저들에게 날렸다. 그리고 카이엔은 그가 부리는 정령들을 불러내었는데, 모두 세 존 재였다. 나머지 하나는 대지, 혹은 땅의 속성을 가진 정령이라 그런지, 공중 공격에는 아무 런 능력이 없는, 그를 불러내지 않은 듯 했다. 나 역시, 나의 정령들을 불러내었다. 그들을 불러내는 것은 아주 간단하기 짝이 없었다. 평 소 부르는 그들의 이름을 부르면 되니... 혹시 그들이 나의 부름을 못듣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도 했었지만, 그것은 나의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났 으니깐. 샤르는 신나게 하피들을 통구이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하피 통구이... 음, 그들은 새의 모 습이긴 하나, 윗부분이 여자의 모습이니 통구이가 된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가 않았다. 게다가, 리엔시타는 무슨 잔악한 심보인지, 샤르의 불에 그을려 부들부들 떠는 하피들에게 모두 찬물을 끼얹었다. 불에 화상을 입은 피부에 갑자기 찬물을 끼얹는다면 그 고통은 배로 커지기 마련이었다. 정 령들은 순수한 만큼, 잔인한 면모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무튼, 마법사들의 마법난사와 정령들의 활약으로 인해 하피들은 금세 전멸하였다. 땅바닥 에는 하피들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는데, 나는 금방 비위가 상해 얼굴을 찌푸렸다. 아젠샤르는 강한 회오리 바람을 일으켜 하피시체들을 몽땅 쓸기 시작했다. 그러자, 카이엔 은 땅의 정령을 불러내 거대한 땅구덩이를 파게 하였고, 아젠샤르는 하피들을 그곳에 모두 쳐넣었다. 그러자, 주위는 금세 깨끗이 청소가 되어 조금전과 같이 말끔해졌다. "휴~ 이것으로 우선 하피들은 청소했고... 다음, 몬스터를 찾아볼까?" 제이크는 빙긋 미소짓는 얼굴로 우리에게 입을 열었다. [81] 체인지(Change) 제14화 -몬스터 토벌하기!- (3) -3- 우리는 그 후로도 많은 몬스터들을 만났다. 그때마다, 손쉽게 해치웠지만, 깊숙이 들어갈수 록 우리들은 지쳐갔고, 몬스터들은 보다 더 강한 것들이 나왔다. "보통 몬스터들은 이렇게 한꺼번에 다양한 종족이 모여살지는 안잖아요?" 엔젤라가 제이크에게 물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마법을 계속 사 용한데다가, 다소 험한 산비탈을 오르고 있게 때문에, 그녀는 숨소리마저 매우 거칠어져 있었다. "뭔가 이상하군요." 그녀의 말을 들은 카이엔이 중얼거리듯 말했고,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더욱 심 각하게 구겼다. "혹시, 여기... 드래곤의 영역이나 뭐, 그런 것은 아니죠?" 혹시나 해서, 내가 그렇게 묻자 제이크의 심각하던 얼굴은 잠시 새하얘졌다. 그러다가, 아니 다 싶었는지 다시 안색이 돌아오며 나에게 입을 열었다. "라비스! 이곳엔 드래곤의 레어는 없어. 아직 마법사들의 탑에서 연구된 바로는 이곳엔 드 래곤은 살지 않아!" "혹시, 모르죠! 드래곤이 여기가 살기 좋다고 생각해서 최근에 이사왔을지..." 그러자, 제이크의 얼굴은 다시 새하애졌다. 그의 안색이 하얘졌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또 다 시 금세 새하얘지는 것을 보니, 나는 웃음이 나왔다. 거참! 일부로 그에게 겁을 주려고 한 소리는 아니었는데...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요! 드래곤의 영역에는 이렇게 몬스터들이 많잖아요? 게다가, 얼마 전까진 이렇게 몬스터들이 들끓지는 않았는지 최근들어 갑자기 불어난 것은 아무래도, 이 상해요!" 엔젤라가 나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었는지 제이크에게 말했다. "하긴,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겠군요." 카이엔도 거들었다. 그러자, 제이크는 더욱 심각해지고 핏기없는 얼굴로 우리에게 입을 열 었다. "그럼, 우리에게 한가지 임무가 더 추가되는 셈이군. 이곳의 드래곤 존재 여부를 밝혀야 하 니..." 우리가 그렇게 대화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는 동안, 또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나도, 이제 몬 스터들의 다양한 종류를 구경하는 것도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새로운 몬스터들이 나타날 때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제이크에게 그 이름을 묻는 것도 이젠 중단하였다. 온갖 종류 의 새로운 몬스터들이 나의 눈앞에 선보일 때마다, 나는 그저 못생긴 몬스터들 중 하나이 려니 했다. 이렇게 되자, 두 마법사들의 마력이 점차 고갈되어 갔다. 게다가, 웃기는 건 정령들도 지쳐 간다는 것이다. 카이엔은 어느덧 검을 꺼내서 직접 싸우고 있었다. 그는 정령을 다루는 것 뿐만 아니라, 검술도 출중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안되겠어요! 도대체 몬스터들의 끝이 안보이니... 이대로 철수하고 다시 오는 것 이 어떻겠어요?" 엔젤라가 제이크에게 외쳤다. 실은, 나도 그랬으면 했다. "휴~ 아무래도, 그래야 하겠어! 하지만, 돌아가는 일도 쉬워보이지가 않는군." 제이크가 그렇게 말했을 때, 아젠샤르가 내곁으로 다가와 뭐라 입을 열었다. "라비스님! 전방 백큐빗 즈음 떨어진 곳에는 몬스터들이 없군요! 우선 그쪽으로 피하심이 어떻겠습니까?" 그의 충고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길이 매우 험난하 였고 우리들은 꽤나 지쳤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는 싸우느라 지친 것이 아니라,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지친 것이지만... 나는 아직 직접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힘들었다. 천천히 연습하는거라면 몰라도, 실전은 여 전히 무리였다. 스펠 중얼대다가 일행들에게 뒤쳐져 몬스터들의 밥이 되고 싶다면 그래도 되겠지만. -초보 마법사는 캐스팅하는 동안은 엄청난 집중력을 보여야 하기에 은근슬쩍 다가오는 몬스터는 눈치채기 힘들다- 물론, 나를 보호하는 정령들이 있다지만, 그것은 몬스터들이 한두 마리였을 때나 얘기이다. 정령들이 이 몬스터를 상대하는 동안 다른 몬스 터들이 나를 노린다면, 할 말 없다. 눈 똑바로 뜨고 부리나케 도망이라도 다녀야지 별 수 있겠는가? 그러다가, 정령이나 공격 마법에 한 대 맞아 헤롱헤롱하는 몬스터 하나 붙잡고 열나게 때려주면 된다. 훗! 왠지 우 습군. '에휴~ 난 언제쯤 멋지게 공격마법을 쓸 수 있을까?' 하긴, 나의 이러한 생각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었다. 내가 마법에 손을 댄지 얼마나 지 났다고, 그런 야무진 꿈부터 꾼단 말인가? 그러다가, 아젠샤르가 말한 몬스터가 전혀 없는 구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들은 한숨 돌리며 지친 몸을 쉬었지만, 정령들은 혹시 모르는 경우를 대비하여 주위를 계속 살폈다. 역시, 정찰에는 바람의 정령 아젠샤르가 제격이었다. 그는 먼곳까지 금세 갔다가 돌아올 수 있으니... 그리고, 아멘시타 역시 여기 모든 식물들과 작은 동물들의 눈을 통하여 몬스터 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 낸다. 그때, 아멘시타가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나에게 입을 열었다. [이상해! 이곳엔 작은 동물이나, 곤충들마저 보이지가 않아. 물론, 몬스터들도 없고... 아무 래도, 우리는 드래곤의 영역권에 들어온 것 같아.] 설마 설마했는데, 진짜 드래곤의 영역일 줄은... 나는 얼른 그 사실을 일행들에게 전했다. 그 러자, 일행들은 모두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긴, 드래곤을 만난다면 모두 죽은 목숨이 될테니 안색이 창백해지지 않고는 못배길 것이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나는 것이 아닐까 정말 걱정스러웠다. "이곳은 빨리 빠져나가도록 하자!!" 제이크가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나의 영역으로 들어온 첫손님이 인간들이라니...] 어디선가 장엄하게 울리는 인간 목소리 같지 않은 음성이 우리의 귓가를 후려 팠다. '헉! 드... 드래곤?' 이 음성의 주인공이 어떤 존재인지 정령들이 제일 먼저 느꼈는지 나의 펑퍼짐한 로브 주머 니에 있던 아기 고양이 아멘시타는 움찔해 보였다. '제길! 정말 드래곤이야~ 우리가 첫손님이라니... 한번쯤 봐주지 않을까?' 나는 두려운 와중에서도 그런 속편한 생각을 하며, 서서히 몸을 드러내는 하나의 거체를 바 라보았다. 그것은 한 마리의 블랙드래곤이었다. 반질반질한 새카만 빛의 비늘을 가진, 무 시무시한 하나의 위대한 존재... 나는 바싹바싹 타는 입술을 혀로 축였다. * 몬스터 토벌하러 왔다가 드래곤을 만나다니... 무쟈게 운없는 쥔공과 그 일당들... ㅡㅡ;;; [82] 체인지(Change) 제14화 -몬스터 토벌하기!- (4) -4- 모습을 모두 드러내어 우리 앞에 서있는 시커먼 비늘의 드래곤은, 그 크기를 대충 치수로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거대하였다. 거의 한 채의 아파트 크기와 -십여층이 넘어가는 건 물-비슷하다면, 내가 적절히 설명한 것일까? 어쩌면, 두려움으로 인한 나의 마음 때문에 드래곤의 그 크기와 모습이 과장되었을 수도 있 었다. 아니면, 반대로 본래 드래곤의 거대함을 약간 축소하여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그저, 우와~ 크다! 라는 것만 나의 뇌리에 강하게 박혔을 뿐이었다. 아무튼, 그 드래곤은 입만 떡하니 벌리고 있는 우리들을 대충 한번 쓰윽 보더니,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것이었다. "헉! 브레스?"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강산으로 이루어진 드래곤의 브레스는 우리에게 쏟아져 나왔 다. 하지만, 드래곤이 숨을 들이쉴 때 마법사들은 그가 브레스를 내뿜을 거라는 것을 짐 작하였는지 재빨리, 플라이 마법의 스펠을 캐스팅 하였다. 그리고, 바람의 정령 아젠샤르는 나에게 바람을 날려, 나의 육체를 공중으로 띄웠다. 물론, 카이엔 역시 나와 같은 방법으로 허공으로 치솟아 드래곤의 브레스를 피했다. '정말 성질 급하고 무식하기 짝이 없는 드래곤이군! 전후 사정도 안들어보고 다짜고짜 브레 스를 내뿜다니!' 우리가 있던 장소가 브레스로 인하여 녹아내려 초토화가 되어있음을 보고, 나는 간이 오그 라들었지만, 드래곤의 무식한 행위에 대해 분노(?)의 감정도 들었다. 그래서... "이봐! 블랙 드래곤!! 왜 다짜고짜 브레스를 내뿜는 거야?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이라 지만 변명이나 사정을 한번 쯤 들어주어야 할 것 아니얏!" 나도 모르게, 그 거대한 존재에게 간 큰 발언을 외쳤다. 그러자, 나의 근처에 있던 샤르는 금세 표정이 해쓱해지더니 나에게 속삭였다. "라비스! 상대는 드래곤이야! 아무리 뛰어난 '나'라도 못이기는 상대라고!" 그건 나도 잘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신에게 도전하는 힘을 가진 이 종족을 당해낼 수 있는 존재는 이 지구상에 거의 없었다. 혹시, 미카엔이라면 모르겠군! '그'라면 이긴다는 보장은 못하겠지만, 적어도 상대는 해줄 수 있을테니... 나는 내가 방금 한 발언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창백해진 얼굴로 저 시커먼 드래곤을 바라보 았다. 그러자, 드래곤의 깊고도 그 심중을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나는 흠칫 하였지만, 눈을 돌리지 않고, 물론 굳어서 눈을 돌리지 못한 것이었지만, 그 드래곤과 계속 마주보았다. 마치 시간이 그대로 멈추어 버린 듯, 드래곤을 비롯한 여기 모든 존재는 미동하지 않고 그 자리에 굳어져 있었다. '흑! 난 이제 죽었다. 이대로는 죽고 싶지 않은데... 내가 여기에 있음을 미카엔에게 알려서 그가 나를 찾아오게 할까? 그의 공간이동 능력은 매우 범위가 넓으니... 죽는 것보단 낫 잖아? 아니야! 그건 왠지 이기적인 생각이야. 내가 살겠다고, 그를 위험한 이곳으로 끌어 들이고 싶지 않아! 그에게 준 것은 마음의 상처 밖에 없는데... 너무 뻔뻔한 일이야.'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나는 그렇게 만감이 교차하고 있는데, 드래곤의 음성이 들려왔다. [크리스... 크리스 맞아?] '엥? 크리스? 저거 나보고 하는 소리야?' 드래곤은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의 육체를 줄이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모습 으로 폴리모프를 하였다. 그리고는, 나의 코앞까지 날아와 멈추었다. 그러자, 나와 드래곤은 허공에서 대치된 모습을 보였다. 그는 그렇게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나의 얼굴을 살피더니, 놀라움으로 가득해진 그의 얼굴 은 다시 실망감으로 바뀌어 버렸다. "아! 크리스티나... 그녀가 아니었군. 하긴,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있을 리가 없지." 그의 실망감으로 가득찬 얼굴은 너무 애절해 보여, 내가 크리스티나가 아닌 점에 대해 미안 감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크리스티나... 어디서 많이 들은 익숙한 이름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크리스티나 아르젠'이란 이름으로서, 나의 외모에 대해 비교를 하던 이들의 말이 생각났다. 예전 백합궁에서 있었을 때, 시녀 앤시아가 나에게 크리스티나에 대해 잠시 얘기해 주었던 내용... 그러니깐, 크리스티나는 어떤 나라의 왕비였었는데, 그녀의 미모에 어떤 블랙 드래 곤이 반해 그 나라가 휘청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내가 앤시아에게 농담삼아 경국지색 이 어쩌고 저쩌고 했었는데... '그렇다면... 이 드래곤이 그 블랙 드래곤?' "얼굴은 그다지 닮은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너를 보고 '크리스'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군. 네 이름이 뭐지?" 나는 그의 말에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으로 보아선, 내가 이 드래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살아서 나가기 위해 그에게 부탁을 한다든가 이곳에 침범한 사실에 대해 사죄를 해야할 것 같았다. "제 이름은 라비스입니다. 드래곤님! 저희가 이렇게 드래곤님의 영역에 침범한 것은 무지로 인한 것이니, 부디 너그럽게 용서를..." "난 너그러움과 용서 따위는 몰라! 대신, 한가지는 약속하지. 너는 죽이지 않기로..." 나만 빼고 다 죽인다는 그의 말에 나는 발끈을 하며 그에게 외쳤다. "그렇다면, 제 동료들은 모두 살려주지 않겠다는 말인가요? 그럼, 할 수 없군요. 전 드래곤 님께 더 이상 용서와 너그러움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대신!"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그를 향해 살짝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잠시 끊었던 말을 다시 이었 다. "드래곤님께 한가지 조건을 내걸죠! 드래곤님께선 저를 잠시 크리스티나 아르젠으로 착각하 신 것 같은데... 드래곤님은 그녀를 사랑하셨죠? 제가 그녀와 닮은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 지만, 드래곤님께선 그녀와 어딘가 닮은 저를 죽이고 싶어하지 않으실테니, 훗... 죄송하지만 , 만약 저를 죽이고 싶지 않다면, 제 동료들을 살려주세요! 그렇지 않다면, 전 제 동료들 의 운명과 함께 하겠습니다." 정말 당돌하다면 당돌하기 짝이 없는 나의 발언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지금 상황으로선 죽 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이니... 나의 목숨을 걸고 간 큰 도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 혼자만 살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는 죽고 싶지는 않았지만. "후훗... 정말 시건방진 인간 계집이로군. 나에게 감히 조건을 내걸다니! 분명 넌 크리스와 닮았다. 그리고, 네 말대로 나는 그녀를 사랑했지! 하지만, 네가 그녀를 닮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너의 말을 들을 가치가 있을까?" '에휴~ 내가 블랙 드래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란 모양이군. 블랙 일족들은 성질 드럽기로 유명한데...' 나는 결국 죽는구나! 하며 모든걸 체념했다. 그래서, 잔악함과 짖궂음 그리고 교활함이 한데 어우러져 녹아있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저를 죽이세요!" 그러자, 동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그의 눈동자는 나의 말에 어떤 충격이라도 받았 는지, 매우 거칠고 난폭하게 변했다. "닥쳐! 한낱 인간 따위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다니! 너를 죽이는 것은 내가 결정해!" 그는 그렇게 나에게 소리를 쳤는데, 왠지 그의 눈빛이 슬퍼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내가 그 에게 못할 말을 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저, 나를 죽이라는 말만 한 것인데... "역시, 넌 크리스와 너무 닮았어! 예전에 그녀도 나에게 그러한 얼굴로 자신을 죽이라고 말 했었지... 더 이상, 그녀를 닮은 네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당장 사라져! 네 동료들과 함께..."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어디론가 공간이동으로서 사라져 버렸다. 그는 성질 드럽고 오만하 기 짝이 없는 최강의 환수, 드래곤이었으나 한낱 보잘 것 없는 인간 여자로 인해 어떠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되자, 나는 다시 미카엔이 생각났다. 그리고, 저 드래곤이 격한 모습으로 나에게 외 치던 모습이 미카엔의 모습과 겹쳐보여 나는 가슴이 굉장히 아팠다. '제기랄...' 아젠샤르는 나를 허공에서 내려주었고, 나는 바닥에 서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그러자, 일 행과 정령들은 나의 곁으로 다가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뭐라 말을 건네었지만, 나는 그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있던 나는, 나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무의식적이고도 기계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직히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마법사들의 탑으로 돌아가죠." [83] 체인지(Change) 제15화 -재회?- (1) (재회?) -1- 오늘따라 일찍 일어나게 된 나는 창문을 열고 요즘들어 더욱 서늘해진 아침 공기를 들이마 셔 보았다. 가을... 로히얀스 왕성에서 보냈던, 내가 이세계로 와서 미카엔을 만나고 그와 헤어졌던 여름이 가 고 가을이 온 것이다. 왠지 쓸쓸함이 묻어나는 계절, 헤어짐을 준비하는 계절,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계절... 하지만, 쓸쓸한 반면, 심적으로 뭔가 풍족하게 얻어지는 계절인 가을이 그 누구도 모르게 성큼 다가와 있었다. 붉게 물들은 밖의 나무들을 보며, 나는 살짝 미소지어 보였다. "추워! 문닫어!" 그때, 분위기를 깨는 샤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이상하게도 추위에 약한 편이었다. 그 리고, 아멘시타의 기운없는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배고파! 라비스...] "꺄! 라비스. 곧 있으면 겨울 오겠다. 우리 그때, 눈오면 눈싸움하고 재미나게 놀자!!" 그리고, 리엔시타... 물론, 아젠샤르는 여전히 표정없는 얼굴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들어 나는 왠지 정령들의 보모가 된 것만 같아 약간 씁쓸해지기도 했다. 나는 그동안, 마법공부에 대해 많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지금은 2서클 마스터하는 것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기초마법은 왠만큼 할 줄 알았다. 꽤나 큰 성과였지만, 그것은 나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렇게 노력파 였을 줄은, 나도 정말 몰랐었다. 나는 기지개를 한번 키고는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는 등, 외출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는 방을 나섰다. 오늘은, 아스탄샤 왕성으로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에 프리실라 여왕이 여기 마법사들의 탑을 방문하였었는데, 그때 나는 그녀의 눈에 들었었다. 그래서, 그녀의 부름을 받고 오늘은 아스탄샤 왕성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이곳의 주된 교통수단인 마차를 타고, 아스탄샤 왕성앞에 당도했다. 역시, 서대륙에서 융성 하고 있는 아스탄샤의 왕성답게 매우 화려했고 그 규모가 컸다. 왕성의 화려함으로 유명한 로히얀스의 왕성과 별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나는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여왕의 접견실로 갔다. 예복용으로 입은 푸른빛 로브의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데, 가끔가다가 나를 안내하던 시종은 힐끔힐끔 나를 보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이곳의 마법사들은 로히얀스와는 달리 폐쇄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어서인지, 얼굴이 보이 지 않게 후드를 눌러쓰고 있는 나의 모습이 다소 음침해 보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기나긴 복도를 아무말없이 내가 뒤를 따르고 있자, 그 시종은 왠 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시종은 그 불안한 마음을 못이기겠던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마법사님은 굉장히 실력이 뛰어나신 모양입니다. 이렇게 여왕 폐하의 부르심도 받고..." '훗... 그건 나의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이 외모가 출중해서 그런 것이지.' 하지만, 나는 그러한 속의 생각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며, 재미있는 생각이 들 었던 나는, 더욱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그의 말을 과감히 씹었다. 그러자, 그의 불 안한 심정은 더욱 커져, 그의 총총거리는 발걸음이 더욱 빨라져 있었다. '어? 이봐~ 그렇게 빨리 걸으면, 분위기가 안나잖아? 난 더욱 음침하고 뛰어난 신비스런 마 법사로 보이고 싶은데...' 그렇게 속으로 그에게 외치며, 나는 더욱 보폭을 크게 하였다. 물론, 발걸음 소리는 나지 않 도록 사일런스 마법(소리 죽임, 침묵 마법)을 건 다음, 그를 소리없이 따라갔다. 잠시 후, 뛰듯이 걷던 그는 뒤에서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설마 내가 따라오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바로 코앞에 후드로 인해 얼굴이 거의 가린 내가 떡하니 버티고 있자,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허억! 하는 외마디 음성을 내었다. 파리해진 그의 얼굴을 보자, 나는 너무했나 싶어, 얼른 후드를 벗고 그에게 물었다. "어? 놀라셨어요?" 음침한 얼굴일 줄만 알았던 후드 속의 얼굴이 엄청나게 화사한 모습으로 드러내자, 그 시종 은 더욱 놀랬는지 눈이 휘둥그레져서 입을 뻥긋거렸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싱긋 웃어 보인 다음, 그에게 말했다. "저 때문에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여왕 폐하의 접견실로 안내해 주세요!" 나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는데, 그는 여전히 나의 얼굴을 힐끔 거렸다. 이윽고, 접견실 문앞에 나는 도착을 하였고, 시종은 프리실라에게 내가 왔음을 알렸다. 그러 자, 프리실라는 위엄있는 목소리로 나에게 들어오라 말했고, 나는 접견실 안으로 사뿐하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호호... 어서 와요! 라비스양."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여왕 폐하." "물론이죠! 어서 앉으세요." 아스탄샤의 여왕, 프리실라는 30대 초반의 옅은 붉은 색의 곱슬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이었 다. '흠, 그러고 보니, 이곳의 여자들은 곱슬 머리가 많군. 엔젤라도 그렇고...' 아무튼, 그녀는 약간 작은 듯한 키에 굉장히 글레머적인 몸매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는 약간 파격적인 의상을 선호하는지 드레스의 가슴선이 굉장히 많이 파여있었다. 보는 내가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그녀는 아름다움을 거의 광적으로 신봉하는 여자였는데, 그로 인해서 보물 수집가 로도 유명하였다. 예를 들자면,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보석이나, 뛰어난 예술품과 조각품들... 그리고, 희귀하 고도 아름다운 빛깔을 가진 작은 새... 등등, 예쁜 거라면 사족을 못쓰는 여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여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시녀나 시종은 모두 매끈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였으니... 그때 나를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를 못했던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왜 라비스양을 불러들였는지, 궁금하겠죠? 다름이 아니라, 나는 라비스양을 나의 호위 마법사로 두고자 합니다." "전 폐하의 호위마법사가 될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호호... 상관없어요! 난 그저, 라비스양을 가까이에서 두고 싶을 뿐이니깐요. 내 주위엔 나 를 호위할 이들이 라비스양 말고도 많이 있으니깐, 라비스양은 부담갖을 필요없어요." 그녀의 말은 즉, 나를 그녀의 보물들 중 하나로 끼워넣겠다는 말이었다. 물론, 그녀의 말대 로 그녀의 호위 마법사가 되면, 나는 팔자를 피는 셈이었다. 마법사로서는 출세를 한 것 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 여왕은 그다지 맘에 들지가 않았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그녀에게 보이고는 나직히 입을 열었다. "폐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어차피 나로서는 왕권에 도전할 수는 없었던 터라, 그녀에게 일단 고개를 숙여보였다. "호호! 잘생각했어요. 라비스양? 말나온 김에 내가 중매를 서도 될까요? 라비스양은 너무 예뻐서... 내 동생 중 루스틴 왕자는 어때요? 지금 29살인데, 아! 그에겐 부인이 있지. 그럼, 제 아들은... 이제 10살 밖에 안되었지만, 금방 자랄테니 그래봐야 7살 차이니, 그다지 문제는 없어보이는데, 물론 라비스양을 정실로 맞아들일 거에요!" 그녀의 위엄있던 모습은, 내가 그녀의 호위마법사가 되겠다고 말한 순간, 갑자기 수선스럽 게 변하여, 나에게 떠들어댔다. '주책 바가지 아줌마... 이로군!' "오늘부터 왕성에서 지내도록 해요! 라비스양의 짐은 내가 사람을 시켜서 이곳으로 옮기도 옥 할테니... 그리고, 앞으로 일주일 후에는 아주 귀한 손님을 맞아야 하니깐, 그전까지는 이곳 왕성의 지리를 잘 익히도록 해요!" "귀한 손님이라면..." "호호... 동대륙의 한 왕족이 우리나라를 방문할 거에요." 그녀의 말에 나는 놀라, 설마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동대륙이라면 어떤 나라이죠?" "라비스양, 그것은 나라의 중요한 사안이니 말해줄 수가 없군요! 아무튼 그렇게만 알고 있 어요." [84] 체인지(Change) 제15화 -재회?- (2) -2- 여왕의 접견실을 나오고 나서, 다시 아까의 그 시종에게 안내받아 나에게 주어진 방으로 향 했다. 앞으로 내가 쓰게 될 방은 여왕이 주로 머무는 침실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제법 깔끔하게 꾸며져 있는 방... 아기자기하게 화려한 장식품들로 꾸며져 있는 것은 아니었 지만, 수수하면서도 왕성의 침실이라 짐작할 수 있게끔, 가구들은 모두 고급품이었다. '휴~ 아무래도, 나는 왕성과 인연이 깊은 것인가? 백합궁에서 나온지 얼마 안되서, 또 다시 이곳 아스탄샤의 왕성으로 들어오게 되니 말이야. 훗... 지금까지 모두 3국의 왕성에서 지 내본 셈이군. 로히얀스, 루젠다르, 그리고 아스탄샤...' 이렇게 자꾸 왕성을 맴돌게 되는 것을 보니, 분명 나의 운명은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는 듯 싶었다. 그러니, 가출해 나와서도 왕실과의 인연을 못 벗어나고 이렇게 또 다시, 왕성 안 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겠지. 그나저나, 나는 아까 여왕이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려 심기가 복잡해졌다. 동대륙의 왕족이라 니... 혹시, 미카엔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었다. '그가 무슨 일로 이곳을 찾는 걸까? 에잇~ 모르겠다. 나중에 생각해야지!' 나는 일단 복잡한 생각은 접어두고, 지금은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일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 래서, 아까 그 시종의 도움을 받으며 왕성의 지리를 구석 구석 익히기 시작했다. 여왕의 호위 마법사가 되자면, 길은 잘 알아두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여왕은 그저 나를 가까이 두기 위해서라지만, 나는 그녀의 호위 마법사가 된 이상, 나에게 주어진 일을 소홀히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그날 하루를 왕성을 돌아보는 일로 보내고, 다음 날은 여왕의 호의 마법사로서 그녀 의 곁에 붙어다니기 시작했다. 아니지... 내가 그녀의 곁을 따라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나를 어디든 데리고 다녔다. 여왕이라면, 집무로 바쁘기만 할 줄 알았는데 프리실라는 종종 놀러(?)도 다녔다. 그녀는 사냥을 즐기는 편이었는데, 그로 인해 나는 여왕의 사냥터에 가서 하릴없이 죽치고 있어야 했고, 또한 프리실라는 파티나 연회 역시 즐기는 편이었는데, 그녀가 그런 파티에 나갈 때면 나는 예쁘게(?) 치장되어서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녀는 많은 인사들과 마주칠 때마다, 나의 외모에 대해 자랑을 했는데...-아마도, 자신이 최근 모은 보물(?)에 대해 자랑을 한 것이리라.- 그때마다, 나는 고역이었다. 여왕의 측근 중에는 나를 안좋은 눈길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여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시종 중 하나는 나에게 질투라도 느꼈는지, 나를 보는 눈 길이 예사스럽지가 않았다. 분명, 저 시종은 여왕을 흠모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아무튼, 나는 명색만 여왕의 호위마법사일 뿐, 실제로는 그녀의 아름다운 인형이 되어 있었 다.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는 정말 짜증스러웠다. 그렇게 며칠... 나도 모르게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리고, 동대륙의 왕족이 온다던 그날! 나는 제발 미카엔이 아니길 바라며, 그날도 여왕의 인형 노릇을 하고 있었다. 프리실라는 그녀의 집무실에서 잡다한 서류들을 검토하고 있었고, 나는 집무실 구석에 놓여진 쇼파에 앉아서 마법서를 읽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집무실 문밖에서 어떤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로히얀스의 황태자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헉! 로히얀스의 황태자라면, 미카엔이잖아?' 나의 안색은 급속도로 창백해졌다. "흠, 이제야 도착을 하셨군! 라비스?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되겠지요?" 그녀는 나에게 말하고는 집무실을 나가려 했다. "폐, 폐하!!" 나는 왠지 다급한 어조로 그녀를 불러세웠고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전, 그냥 이곳에 있으면 안될까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라비스는 나의 그림자에요! 그림자인 라비스는 어디든 나를 따라야 합니다. 그것을 잊지 말도록!" 그녀는 그렇게 단호히 말하고는 미카엔이 있을 접견실로 향했다. 결국, 나는 왕실 소속임을 뜻하는 금빛 테두리가 있는 흰색 로브의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그녀를 따랐다. 나는 발걸 음을 옮길 때마다, 절로 다리가 떨려 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카엔을 볼 수 있겠다는 설레임 비슷한 기이한 감정도 들었다. '아! 또 내가 망령된 생각을...' 나는 잠시 가졌던 생각을 털어내 버리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런 나의 모습을 프리실라는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접견실에 도착을 하였고 나는 고개를 약간 숙여 왠만하면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호호호, 황태자 전하이신가요? 소문은 들었지만, 이렇게 미남이실 줄은 몰랐군요! 제가 프 리실라입니다. 아스탄샤국으로 발걸음을 하신 것을 환영해요!"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미카엔은 여전히 말쑥한 모습으로 프리실라에게 여왕의 대우를 해보였다. 그는 아주 잠깐 내쪽으로 눈길을 주었지만, 이내 거두어들이고는 자리에 앉아 프리실라와 대담을 나누었다. 그들의 대화는 가벼운 화제부터 시작되었다. "우연히 듣게 된 소식인데, 얼마전에 황태자비께서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전하께서 상심 이 크셨겠어요!" "훗, 역시 프리실라 여왕 폐하께서는 모르고 계신 것이 없군요! 그녀는 원래 몸이 약했었는 데, 얼마전부터 병이 악화되어 며칠 전에 눈을 감았지요! 요즘, 심기가 불편했던 관계로 그녀에게 좀더 신경을 써주지 못한 것 같아, 그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저런! 그렇다면, 황태자 전하께선 새로운 황태자비를 맞아들이셔야 하겠군요. 흠... 그러면, 전 어때요? 저도 황태자 전하의 부인으로서 입후보하고 싶은데..." "후훗... 폐하께서 저의 부인이 되는 것도 좋지만, 만약 그렇다면, 아스탄샤국이라는 이름의 결혼 지참금을 준비하셔야 할 것입니다." 미카엔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에게 농담조로 말했지만, 그의 눈빛은 별로 표정이 없었다. "흐음, 너무 비싼 대가이군요! 아무래도, 전하의 부인이 되는 것은 포기해야 할 것 같은데 요? 아! 이곳까지 오시느라 피곤하시겠어요. 본격적인 대담은 내일 오전으로 하지요! 시 종이 전하를 침실로 안내해 드릴 것입니다. 저녁때, 괜찮다면 시중들을 여자 하나를 보내 드리지요! 혹시, 취향이 어떻게 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저녁때, 시중들 여자를 보낸다라... 아마도, 같이 밤을 보낸다는 의미의 시중일 것이다. 아무 튼, 프리실라가 그렇게 묻자, 미카엔은 꽤나 의미 깊은(?) 말을 한마디 했다. "전 긴 금발을 가진 소녀를 좋아합니다. 그것도 진짜 황금빛의 금발이어야 하죠! 이왕이면, 눈동자 색도 황금빛이면 더욱 좋겠군요. 아! 그런데, 아까부터 저기 서있는 마법사가 계속 눈에 거슬리는데..." 미카엔은 그렇게 말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내쪽으로 다가왔다. 물론, 나는 움찔 놀라며 입 술을 살짝 깨물었다. "실례하지만, 마법사님의 얼굴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의 후드를 벗기려 했다. 순간, 가슴이 철렁한 나는 앞 뒤 생각할 겨 를 없이 그곳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이러한 나의 행동은 분명, 예법에는 어긋한 행동이었 지만 지금으로선 예법 같은 것은 따질 겨를이 없었다. [85] 체인지(Change) 제15화 -재회?- (3) -3- 나의 방까지 정신없이 뛰어온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여전 히 새끼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있던 아멘시타는 침대위에서 늘어져 자고 있다가, 내가 나 타나자 몽롱한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라비스! 왜그래?] "미카엔을 봤어." [뭐엇? 그럼, 네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거야?] 그가 화들짝 놀라며 묻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그건 아직 모르는 것 같은데... 방금, 그에게 들킬 뻔 했어! 이젠 어쩌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가 지금 이곳에 있는 거야?] "응. 그가 이곳에 있어..."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아멘시타에게 모두 말했다. 그러자, 아멘시타는 심각해진 얼굴 로 나와 같이 고민을 하기 시작했지만, 결국은 뾰족한 방안을 못찾고 그와 함께 끙끙거리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지금 내곁에 있는 정령은 아멘시타... 나머지 정령들은 모두 각자의 영역으로 돌아가 있었 다. 어차피 이곳 왕성에 있어 봤자, 별다른 할 일도 없었던 터라 원래 그들이 있던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창밖의 풍경은 푸른빛이 도는 새카만 하늘에 보름달 에 가까운 달이 하나 걸려 있는 모습이 되어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해가 넘어간지는 한참 된 모양이었다. 창밖을 내다 보며 나는 상념에 잠겨있는데, 나의 침실 방문이 끼익~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약간 불안한 감정에 사로잡혀있던 나는 지레 화들짝 놀라며, 노크도 없이 방으로 들어온 이를 바라보았다. "폐하?" 침실로 들어온 이는 프리실라였다. 그녀는 집무를 볼 때 갖추어입는 복장이 아니라, 간편한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라비스! 아깐, 왜 그렇게 접견실을 뛰쳐나갔던 것이지요? 로히얀스 황태자 전하께 무례를 범했다는 것을 스스로 잘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용서하세요. 폐하." "라비스! 지금, 전하께 용서를 구하러 가도록 하세요!" "지, 지금요?"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프리실라는 한숨을 내쉬어 보이며 나 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혹시... 전하께 용서를 구하러 가라는 말씀이, 황태자 전하께 시중들 여자로서 가라는 뜻을 담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지금, 날이 저문 이시각에 프리실라가 나보고 황태자의 침실로 가라는 말은... 뻔하였다. 그 녀가 낮에 미카엔에게 시중들 여자를 보내준다고 말을 하며 미카엔에게 취향을 물었는데, 미카엔은 자신의 취향을 금발의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를 가진 소녀로 말했으니... 나같은 천연 금발에 금빛 눈동자를 가진 소녀는 매우 드물었으니, 프리실라는 나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로서는 자신의 나라를 찾은 귀한 손님에게, 특히 나라끼리의 교류가 달린 문제에서는 그의 심기가 불편하지 않게 접대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그녀는 한나라를 짊어진 여왕이었으니, 자신의 아끼는(?) 보물을 그에게 내주는 것 쯤은 감 수해야 했다. '결국... 그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나는 로브를 벗고 수수한 원피스를 걸친 모습으로 시녀의 안내를 받으며, 미카엔이 머물고 있는 침실 앞으로까지 왔다. 시녀는 곧바로 돌아갔고, 나는 방문 앞에서 우두커니 서있었다. 사실, 모든걸 체념하고 다시 그의 황태자 측실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수없이 나의 머리 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나는 잠시 그가 있는 침실의 방문을 향해 한발짝 다가섰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역시, 이대 로는 안되었다. 만약, 지금 그에게 돌아간다 하더라도 나는 또 다시 혼란스러움으로 괴로 워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의 운명을 모두 그에게 맡긴 채 '그'만 바라보고 사는 측실이 되는 것은 싫었다. 왠지, 내 인생이 한심하게 느껴진다랄까? "미카엔... 우린 정말 묘한 인연인 것 같아. 나의 운명이 너에게 연결되어 있다면, 내가 피해 도 언젠가 또 다시 만나게 되겠지... 우린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났지만, 실은 다시 만난 것이 아니게 된 셈이구나! 내가 원래 라비스였더라면... 그랬었더라면..." 나는 그렇게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방문을 행해 말한 후, 다시 나의 침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나의 시야가 점점 뿌옇게 번져갔다. 내가 다시 나의 침실로 돌아와 있을 때까지도, 프리실라는 여전히 방안에 있었다. "폐하! 난 그에게 돌아갈 수가 없어요! 나를 그에게 보내지 말아요! 난 그의 측실이 될 수 없어요!" 내가 그렇게 횡설수설하듯 그녀에게 외쳐대자, 프리실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에게 물었 다. "무슨 일이에요? 라비스. 알아듣게 말해야죠?" "흐엉~ 난 미카엔의 측실이었어요! 흑! 그에게서 얼마전에 도망나온 거에요." "그게 정말인가요? 세상에~" "제발, 나를 숨겨주세요! 폐하. 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나는 격해진 감정을 다스리려 애를 썼지만, 그게 잘 안되었다. 프리실라는 나의 어깨를 감 싸고는 등을 토닥였다. 그녀는 그렇게 나를 감싸고 한동안 토닥이더니, 눈물로 범벅된 나의 얼굴을 들여다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라비스? 왜 도망을 나왔죠? 그가 못살게 굴던가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그건..." 내가 원래 남자였었기 때문에, 여성화가 되어가는 나의 모습... 게다가, 미카엔으로 인해 그 여성화가 더욱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말을 차마 그녀에게 하지는 못했다. 물론, 지금 현재로서도 나의 행동이 여자같고 가끔 내가 남자였었다는 것도 망각하게 되었지만, 여전 히 지금 나의 모습에 심한 거부감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무튼, 마땅한 말을 못찾고 버벅거리는데... "아마도,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요! 사실, 나도 라비스를 그에게 내주는 것이 내심 아까웠는 데, 호호~ 잘되었군요!" 그녀가 그렇게 편한 어투로 말하며 웃음을 보이자, 나는 격해졌던 감정이 그나마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그녀에 대해 안좋게 생각했던 나였는데, 지금 이순간 그 마음이 바뀌는 것 같았다. "고마워요..." "자자! 그만 눈물을 그치도록 하세요! 그나저나, 라비스 대신 시중들 여자를 빨리 구해야 하겠는데... 여기 시녀들 중엔 금발 소녀가 없으니... 그나마, 금발에 가까운 시아를 보내 볼까? 퇴짜 맞으면 할 수 없고..." * 이번 편에서 제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의 희비(?)가 엇갈리겠군요! 미카엔을 지지하시는 분은 실망하실테고, 그렇지 않으신 분은 무지 좋아하실 텐데...흠 근데, 이번 편... 맘에 안들어요! ㅡ.ㅜ 왠지.... 왠지.....;;; [85] 체인지(Change) 제15화 -재회?- (3) -3- 나의 방까지 정신없이 뛰어온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여전 히 새끼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있던 아멘시타는 침대위에서 늘어져 자고 있다가, 내가 나 타나자 몽롱한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라비스! 왜그래?] "미카엔을 봤어." [뭐엇? 그럼, 네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거야?] 그가 화들짝 놀라며 묻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그건 아직 모르는 것 같은데... 방금, 그에게 들킬 뻔 했어! 이젠 어쩌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가 지금 이곳에 있는 거야?] "응. 그가 이곳에 있어..."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아멘시타에게 모두 말했다. 그러자, 아멘시타는 심각해진 얼굴 로 나와 같이 고민을 하기 시작했지만, 결국은 뾰족한 방안을 못찾고 그와 함께 끙끙거리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지금 내곁에 있는 정령은 아멘시타... 나머지 정령들은 모두 각자의 영역으로 돌아가 있었 다. 어차피 이곳 왕성에 있어 봤자, 별다른 할 일도 없었던 터라 원래 그들이 있던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창밖의 풍경은 푸른빛이 도는 새카만 하늘에 보름달 에 가까운 달이 하나 걸려 있는 모습이 되어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해가 넘어간지는 한참 된 모양이었다. 창밖을 내다 보며 나는 상념에 잠겨있는데, 나의 침실 방문이 끼익~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약간 불안한 감정에 사로잡혀있던 나는 지레 화들짝 놀라며, 노크도 없이 방으로 들어온 이를 바라보았다. "폐하?" 침실로 들어온 이는 프리실라였다. 그녀는 집무를 볼 때 갖추어입는 복장이 아니라, 간편한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라비스! 아깐, 왜 그렇게 접견실을 뛰쳐나갔던 것이지요? 로히얀스 황태자 전하께 무례를 범했다는 것을 스스로 잘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용서하세요. 폐하." "라비스! 지금, 전하께 용서를 구하러 가도록 하세요!" "지, 지금요?"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프리실라는 한숨을 내쉬어 보이며 나 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혹시... 전하께 용서를 구하러 가라는 말씀이, 황태자 전하께 시중들 여자로서 가라는 뜻을 담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지금, 날이 저문 이시각에 프리실라가 나보고 황태자의 침실로 가라는 말은... 뻔하였다. 그 녀가 낮에 미카엔에게 시중들 여자를 보내준다고 말을 하며 미카엔에게 취향을 물었는데, 미카엔은 자신의 취향을 금발의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를 가진 소녀로 말했으니... 나같은 천연 금발에 금빛 눈동자를 가진 소녀는 매우 드물었으니, 프리실라는 나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로서는 자신의 나라를 찾은 귀한 손님에게, 특히 나라끼리의 교류가 달린 문제에서는 그의 심기가 불편하지 않게 접대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그녀는 한나라를 짊어진 여왕이었으니, 자신의 아끼는(?) 보물을 그에게 내주는 것 쯤은 감 수해야 했다. '결국... 그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나는 로브를 벗고 수수한 원피스를 걸친 모습으로 시녀의 안내를 받으며, 미카엔이 머물고 있는 침실 앞으로까지 왔다. 시녀는 곧바로 돌아갔고, 나는 방문 앞에서 우두커니 서있었다. 사실, 모든걸 체념하고 다시 그의 황태자 측실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수없이 나의 머리 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나는 잠시 그가 있는 침실의 방문을 향해 한발짝 다가섰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역시, 이대 로는 안되었다. 만약, 지금 그에게 돌아간다 하더라도 나는 또 다시 혼란스러움으로 괴로 워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의 운명을 모두 그에게 맡긴 채 '그'만 바라보고 사는 측실이 되는 것은 싫었다. 왠지, 내 인생이 한심하게 느껴진다랄까? "미카엔... 우린 정말 묘한 인연인 것 같아. 나의 운명이 너에게 연결되어 있다면, 내가 피해 도 언젠가 또 다시 만나게 되겠지... 우린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났지만, 실은 다시 만난 것이 아니게 된 셈이구나! 내가 원래 라비스였더라면... 그랬었더라면..." 나는 그렇게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방문을 행해 말한 후, 다시 나의 침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나의 시야가 점점 뿌옇게 번져갔다. 내가 다시 나의 침실로 돌아와 있을 때까지도, 프리실라는 여전히 방안에 있었다. "폐하! 난 그에게 돌아갈 수가 없어요! 나를 그에게 보내지 말아요! 난 그의 측실이 될 수 없어요!" 내가 그렇게 횡설수설하듯 그녀에게 외쳐대자, 프리실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에게 물었 다. "무슨 일이에요? 라비스. 알아듣게 말해야죠?" "흐엉~ 난 미카엔의 측실이었어요! 흑! 그에게서 얼마전에 도망나온 거에요." "그게 정말인가요? 세상에~" "제발, 나를 숨겨주세요! 폐하. 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나는 격해진 감정을 다스리려 애를 썼지만, 그게 잘 안되었다. 프리실라는 나의 어깨를 감 싸고는 등을 토닥였다. 그녀는 그렇게 나를 감싸고 한동안 토닥이더니, 눈물로 범벅된 나의 얼굴을 들여다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라비스? 왜 도망을 나왔죠? 그가 못살게 굴던가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그건..." 내가 원래 남자였었기 때문에, 여성화가 되어가는 나의 모습... 게다가, 미카엔으로 인해 그 여성화가 더욱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말을 차마 그녀에게 하지는 못했다. 물론, 지금 현재로서도 나의 행동이 여자같고 가끔 내가 남자였었다는 것도 망각하게 되었지만, 여전 히 지금 나의 모습에 심한 거부감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무튼, 마땅한 말을 못찾고 버벅거리는데... "아마도,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요! 사실, 나도 라비스를 그에게 내주는 것이 내심 아까웠는 데, 호호~ 잘되었군요!" 그녀가 그렇게 편한 어투로 말하며 웃음을 보이자, 나는 격해졌던 감정이 그나마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그녀에 대해 안좋게 생각했던 나였는데, 지금 이순간 그 마음이 바뀌는 것 같았다. "고마워요..." "자자! 그만 눈물을 그치도록 하세요! 그나저나, 라비스 대신 시중들 여자를 빨리 구해야 하겠는데... 여기 시녀들 중엔 금발 소녀가 없으니... 그나마, 금발에 가까운 시아를 보내 볼까? 퇴짜 맞으면 할 수 없고..." * 이번 편에서 제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의 희비(?)가 엇갈리겠군요! 미카엔을 지지하시는 분은 실망하실테고, 그렇지 않으신 분은 무지 좋아하실 텐데...흠 근데, 이번 편... 맘에 안들어요! ㅡ.ㅜ 왠지.... 왠지.....;;; [86] 체인지(Change)《외전》외전 Ⅲ-미카엔의 고뇌- (아스탄샤 왕성 《외전》외전 Ⅲ -미카엔의 고뇌- (아스탄샤 왕성에서...) 은빛의 달빛이 창가를 통해서 방안으로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제법 넓찍한 침실 안에는 그 은빛의 달빛과 닮은 은발을 가진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창가를 내다보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그녀가 맞다면, 지금쯤 이곳으로 찾아오겠군." 조금전, 낮에 프리실라 여왕의 접견실에서 후드를 잔뜩 뒤집어쓰고 서있던 마법사... 미카엔 은 왠지 그 마법사에서 라비스의 향기가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레 짐작이었지만... 그래서, 프리실라가 자신에게 시중들 여자의 취향을 물었을 때, 그는 일부로 라비스의 가 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금발의 소녀를 말했다. 그리고는, 그의 짐작을 확인할 겸 그 마법사의 얼굴을 보려 하였지만, 그 마법사는 움찔 놀 라더니,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렇다면... 그 마법사의 그러한 행동은 미카엔의 짐작을 더욱 확신시켜 주었다. 미카엔은 그렇게 라비 스임을 확신하자, 로브의 후드 속 라비스 표정이 상상이 되어,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황태자비가 죽고난 요즘, 며칠... 미카엔은 황태자비 간택 문제로 중신들에게 시달리고 있었 다. 다시, 공작가의 레이디 중에서 황태자비를 간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카엔은 이제 더 이상 부인을 맞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 생각없이 왕비가 추천하고 중신들의 의견이 모아진 가문의 레이디를 부인으로 삼았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부족함을 모르고 살아왔던 미카엔... 지금껏 자기 잘난 맛(?)에 살아왔던 그 였던 터라, 라비스의 경우에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자면, 자신을 그렇게 싫어하는 것은 아닌 듯 한데, 왜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자신과 거리를 두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처음 라비스를 보았을 때, 그는 라비스의 빼어난 미모에 매료되었었지만, 이제는 자신을 거 부하기만 하고, 자꾸만 도망가려는 그녀로 인해, 이젠 그 감정이 집착 비슷한 것은 변질 되어 있었다. 뭐든지 손만 뻗으면, 자신의 손안으로 들어오곤 하였는데, 라비스만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가 않았으니... 고귀한 위치에 있는 이들이 가지는 특유의 특징인 거만함과, 자신감 등등, 그러한 모든 성격을 가지고 있던 미카엔은 자신의 독단적인 면으로 인하여, 라비스에 대한 독점욕이 더욱 커져있었다. 그런데, 여전히 라비스는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하였다. 그로 인해서, 미카엔은 화가 났다. 정말 화가 났다. 처음, 그는 라비스가 없어진 것을 알았을 때, 그녀에 대한 배신감과 상실감 그리고 자신의 상처입음으로 인해 화부터 불길같이 일었다. 정령들을 동원해서, 그녀를 찾고 사람들을(대부분 용병) 풀어 그녀를 찾아오도록 명을 내렸 었다. 만약, 그때 라비스를 찾았었다면... 어쩌면, 미카엔은 라비스를 용서하지 못하고 그 녀를 나쁘게 대했을 수도 있었다. 한동안 미카엔은 감정적으로 되어있었으니... 한번은, 그를 근처에서 모시는 한 시종이 그에게 경솔한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시종은 20대 중반 나이의 약간 경망스러운 성격을 가진 남자였는데, 그는 라비스가 어떤 남자와 같이 야반도주를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자신의 추측을 미카엔에게 말했었던 것이다. 하긴, 라비스는 여러 가지로 많은 스캔들을 일으켰었다. 주로 엔카루스와의 일이었지만, 그 외에도 라비스를 흠모하는 이들이 많은데다가 그녀를 시기하는 무리들도 많았으니, 이런 저런 뜬소문과 스캔들이 난무하였었다. 그런 이유로 그 시종은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미 카엔은 순간, 분노를 하였었다. 그리고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는 한번도 피를 묻혀보지 않았던 그의 화려한 검으로 - 물론, 사람을 죽였다 하더라도, 모두 마법으로 피를 보았으니...- 그 시종을 단숨에 배어 버렸던 것이다. 그 일로, '황태자께서는 변하셨다.' 등등의 소문이 세인들의 입을 통해 급속히 퍼져나갔던 것이다. 역시, 소문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휴~" 미카엔은 지난 일에 대한 상념에 잠겨있다가, 다시 한숨을 내뱉고는 창틀에 걸터앉아 하늘 에 떠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미카엔 침실 근처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미카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쪽으로 다가갔다. 사뿐하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익숙한 발걸음 소리였다. "라비스..." 그는 나직히 중얼거렸다. 문밖에 작게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카엔... 우린 정말 묘한 인연인 것 같아. 나의 운명이 너에게 연결되어 있다면, 내가 피해 도 언젠가 또 다시 만나게 되겠지... 우린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났지만, 실은 다시 만난 것이 아니게 된 셈이구나! 내가 원래 라비스였더라면... 그랬었더라면..." 금방이라도 울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미카엔은 가슴이 아팠다. 당장 문을 열고 그녀를 덥썩 끌어안고 싶었지만, 그러한 자신의 감정을 내리눌렀다. "바보 같으니... 그런데, 원래 라비스였더라면이 대체 무슨 말이지?" 미카엔은 그녀의 뒷부분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우선 그것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미카엔은 갈등을 하였다. 이대로 라비스를 데리고 그의 나라 로히얀스로 돌아가야 할 것인 지... 아니면, 당분간 그녀를 포기해야 하는지... 어떤 사연으로 라비스가 프리실라의 호위 마법사가 된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만약, 이대로 그녀를 데리고 간다면, 프리실라의 심기 를 건드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미카엔은 그가 황태자로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동대륙의 전쟁 기운으로 로 히얀스에게 닥친 위험을 막는 일이었다. 그러자면, 아스탄샤의 도움이 필요했다. 지금 루 젠다르와 인페르디아가 검은 속을 가지고 아무도 모르게 손을 잡아, 로히얀스를 꿀꺽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미카엔으로서는 버거웠다. 내내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갑자기 무슨 믿는 구석이 생 긴 건지, 저렇게 날뛰기 시작하는 인페르디아를... 그리고,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간사한 루젠다르를, 두 나라를 한꺼번에 막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위 마족의 여자... 이 여자는 정말로 골치 아픈 존재였다. 게다가, 요 즘, 그의 어머니인 프레야 왕비는 그녀의 카리스마를 더 이상 내보이지 않았다. 뭐든지 소극적으로 변한 것이었다. 미카엔은 자신의 불길한 예감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프레야 왕비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우선 미카엔은 달콤한 조건을 아스탄샤에 제안해서 그를 끌어들여야 했다. 그렇게 된다면, 루젠다르는 섣불리, 인페르디아와 완벽히 손을 잡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튼, 라비스는 결국,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는지 더 이상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미카엔 은 아까 시녀가 가져다 준, 아스탄샤산의 독한 증류주를 잔에 따라 마셨다. 그리고 얼마쯤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누군가가 이곳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잠시 후, 문밖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 전하! 들어가도 되겠사옵니까?" 미카엔은 그녀가 왜 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문쪽으로 걸어간 다음, 자신이 직접 문을 열어 문밖에 서있는 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18살 정도 되어보이는 소녀였는데, 적당한 길이의 금발, 그러나 그저그런 노란빛에 가까운 금발이 등을 덮고 있었다. "왜 왔지?" 알면서도 묻는 미카엔의 심보란... 소녀는 당황한 얼굴로 머뭇머뭇거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미카엔은 훗! 하고 웃어보이고 는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넌, 라비스를 별로 안닮았군. 돌아가라!" 미카엔은 그렇게 말하고는 소녀가 미처 반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다시 의자로 돌아가 털썩 앉고는 마시던 술을, 마저 한병을 다 비웠다. 그렇게 시 간은 흘러 밤은 깊어져 갔고, 어느덧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미카엔은 다시 자리에 일어나서, 라비스가 있는 침실로 공간 이동을 시도했다. 조금 헤맸지 만 미카엔은 그녀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라비스는 침대에 누워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훗... 여기까지 왔는데, 라비스의 얼굴이나 보고 가야 하겠지?" 미카엔은 중얼거리며, 그녀의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의 허리를 숙여 자신의 얼 굴을 라비스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자, 미카엔의 은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라비스의 얼굴을 간질였다. "우웅..." 라비스는 잠결에 얼굴이 간지러운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약간 웅얼대는 소리를 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미카엔은 피식 웃고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그러자, 근처에서 약간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카엔은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는데, 그곳엔 한 마리의 조그만 고양이 가 경계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론티아 정령인가? 방금, 본 것은 못본 것으로 해라!" 미카엔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침실로 이동했다. * 흠... 외전의 내용상 미카엔과 라비스는 어설프게나마 재회를 한 것이군요!^^;; 이번 외 전의 죈공은 미카엔입니다. 1인칭 시점의 한계를 외전으로서 해결하는 라얀... 임당~ ! ㅡㅡ;; [87] 체인지(Change) 제15화 -재회?- (4) -4- 프리실라는 그렇게 나를 한동안 토닥여주고는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다. [괜찮아?] 아멘시타는 걱정스런 눈길로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는데, 나는 그의 질문에 답하지는 않고 잠시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멘시타는 이런 나의 모습이 의아해졌 는지 고개를 갸웃하였다. '귀여워...' 하지만, 아기 고양이의 모습인 아멘시타는 그동안 목욕을 시키지 않아서 매우 꼬질꼬질한 모습이었는데, 나는 그를 목욕을 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 전 눈물을 질질 짰던 나 답지 않게 그를 향해 씨익 웃어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아멘시타! 너 목욕 좀 해야겠다. 내가 씻어줄게! 이리와~" [엑! 네가 날 목욕 시켜준다고?! 싫어!!] "뭐야? 목욕이 하기 싫다고? 그럼, 아멘시타는 게이른 꼬맹이네?" 내가 그렇게 놀리듯 말하자, 아멘시타는 표정을 팍 구기며, 나에게 반박했다. [아냐! 난 나혼자 목욕할 거야!] "네가 무슨 수로? 그야말로 고양이 세수 밖에 더 하겠냐? 그런데, 아멘시타! 너 쑥스러워 하는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싫다며 발버둥치는 아멘시타를 억지로 끌어 욕실로 데리고 갔다. 그리 고는, 비누를 꺼내 보드라운 그의 하얀 털에 문지르고 거품을 내어 씻어냈다. 아멘시타는 눈에 거품이 들어갔다며, 엄살을 피웠고 나는 그런 그의 엄살을 과감히 무시하며 그를 아 주 깨끗하게 씻어내 주었다. 알맞게 온도를 맞춘 미지근한 물로 비누거품을 행궈내자, 아멘시타의 하얀 털은 젖어서 삐 죽삐죽 솟아오른 모양이 되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웃겼던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꺄하하~ 아멘시타! 너 너무 귀엽다!" [흥!] 아멘시타의 심통난 콧방귀를 나는 철저히 무시하며, 타월로 그의 털을 말려주었다. 그렇게, 아멘시타를 목욕시키고 나니, 괜시리 나의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 아멘시 타에 대한 나의 애정도 마구 솟아오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렇게 우울했던 기분이 금세 풀어진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고, 그날 기분 좋은 꿈도 꿨었다. 어떤 내용의 꿈인지는 기억이 잘 안났지만, 그동안 불안하고 우울했던 기분이 한순간에 날아갈 만큼, 기분 좋은 꿈이었던 같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미카엔과 프리실라의 대담이 이루어졌는데, 이번에 나는 그녀의 곁에 지킬 필요없이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전쟁이라는 단어가 오가고 했던 모양인데, 왠지 걱정이 되었다. 전쟁이란건 무서운 것이니깐... 정오 가까이 되는 시간, 미카엔은 자신의 모든 볼일은 마쳤는지, 로히얀스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프리실라는 자신의 수행원과 호위 기사들과 함께 로히얀스로 돌아가는 미카엔을 배웅하였는데, 나는 여전히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 쓴채 프리실라의 곁에서 떠나 는 미카엔을 지켜보았다. "가시는 황태자 전하의 모든 길마다 창조의 신, 라덴의 축복이 깃들기를 빌겠습니다." 프리실라는 그렇게 미카엔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내었다. 창조의 신, 라덴이란...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믿고 있는 가장 위대한 신의 이름이었다. 여기 아스탄샤에서는 그들 만이 주로 믿는 신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외국 손님에게 하는 인사말이었으니, 거의 공통 적으로 받들어지는 라덴이라는 신을 들먹였을 것이다. "폐하와 그리고, 아스탄샤 곳곳에 창조의 신, 라덴의 축복이 깃들기를 빌겠습니다. 그리 고..." 미카엔은 신을 믿는 신자는 아니었으나, 프리실라가 신의 축복을 들먹여 인사말을 했던지 라, 그 역시, 라덴의 축복을 들먹여, 답변 인사말을 해보였다. 그리고는, 그는 내쪽으로 눈 길을 잠시 돌리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놓고 갔던 보물을 다시 가지러, 언제 한번 아스탄샤에 들를 수도 있겠군요! 그럼..." 그는 그렇게 말하며, 말에 올라탔다. 아무래도, 아스탄샤 국경밖까지 그렇게 말을 타고 나갔 다가, 나중에 마법으로서 이동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가 마지막에 했던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미심쩍긴 했지만 그가 그 렇게 내쪽으로 눈길을 주고 그러한 말을 한 것은, 우연일 것이라 결론짓고 말았다. 만약, 그가 내가 라비스임을 눈치챘다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아무튼, 다행이긴 했지만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 나는 씁쓸했고 울적했다. 그리고, 인사 한번 못 나눠보고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그냥 다시 헤어지게 되는 것이, 정말 안타깝고 슬프기 짝이 없었다. 혹시, 마지막으로 보게 될 미카엔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미카엔의 모습 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라비스는 황태자 전하를 사랑하고 있지요?" 그때, 곁에 있던 프리실라가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는 그렇게 물었다. 물론, 나는 그녀의 말 에 화들짝 놀라며, 부인을 했다. "아니에요! 폐하. 난 그를 사랑하지 않아요!! 절대로 사랑하지 않아요!!" 그렇게 격한 몸짓으로 부인을 하는 나를, 프리실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한동안 바라보더니, 나에게 싱긋 웃어보이고는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도록 하지요! 오늘 저녁은 중신들의 가족과 만찬이 있으니, 만약 우울한 마음이 있다면, 만찬을 즐기며 그런 마음을 훌훌 털어내 버리도록 하세요. 아! 그리고, 오 늘은 유명한 가무단도 부를 거랍니다. 호호~ 오늘 저녁이 기대되는 군요!" 역시, 프리실라는 풍류(?)를 즐기는 여왕인 듯 했다. 노는 것을 저리도 좋아하다니... 유명한 가무단이라... 하긴, 볼만한 볼거리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좀 짧아요! ^^;;; 마무리 하는 이번 화의 마지막 편이라, 내용이라면 이별 장면 밖에 없군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쥔공...;;; 흐음... [88] 체인지(Change) 제16화 -아멘시타의 성장!- (1) (아멘시타의 성장!) -1- 날아가고 싶어. 하늘을 안으려는 저 꽃의 아이들처럼 그렇게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어... 아무 때나 훌쩍 떠나도 누군가의 눈물은 귀담아듣지 않고 사랑과 생명이 하나였던 시절을 그리며 아름답게 날아가고 싶어... 그리워했던 만큼 아파한 것을 기억하며 곧 태어날 작은 소망을 위해... 어느 가을날 나무들의 낡은 추억처럼 어디론가 바람에 흩어지고 싶어. 맑은 미성으로서 부르는 바람의 정령, 아젠샤르의 목소리... 그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언제 나 느끼는 것이었지만, 그의 노랫소리는 부드러운 실바람이 되어, 우리 모두의 귓가를 간 질이는 것 같았다. 역시, 바람의 정령이라 그런지 그의 노래는 바람과 같았다. 그의 마지막 노랫말인, 어디론가 바람에 흩어지고 싶다라... 가만히 들어보면, 굉장히 슬픈 말이었다. 게다가, 그가 부르는 노래의 음색은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은, 왠지 슬프고도 쓸쓸한 냄새가 났다. 어느덧, 여기 아스탼샤에도 겨울이라는 이름의 계절이 다가와 있었다. 세상은 자신의 부끄 러움을 감추려는 듯 순백의 새하얀 눈으로 그 모습을 가리우고 있었다. 온통 새하얀 세상... 그 아름다움에 감동한 나는,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창밖 베란다에 나와 아젠샤르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나의 볼과 귀가 얼어서, 이젠 감각이 둔화되어 있었지만, 나는 방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 지 않고 있었다. 요즘, 나의 마법력은 이미 3서클을 마스터 하는 것을 앞두고 있었다.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정말로 일취월장(日就月將)이었다. 아직까지는 그다지 막힘은 없었으니... 뭐, 아직은 중급 단계 이전이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의 이러한 결과에 대해 뿌듯해하며 은연중에 내가 천재가 아닐까?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역시 내가 교만해져서 그러는 것일까? "히잉~ 너무 슬퍼!!" 아젠샤르의 노래를 듣던 리엔시타는 눈물을 글썽이며, 중얼거렸다. 쓸쓸한 노래 하나 들었 다고 눈물을 글썽이다니! 역시, 눈물 많은 '리엔시타'다웠다. 게다가, 그녀는 조금전까지만 해도 자기 세상을 만난 듯 곱게 쌓인 눈밭에서 뛰어다니며 수많은 발자국을 만들어 내 더니만... 그녀는 대단히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 하였다. 나는 베란다에 놓은 의자에서 일어나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샤르가 만들어 놓은 몇 개의 불꽃이 너울거리며 허공에 떠있었는데, 그것은 기이하게도 연기가 나거나 타는 냄새가 안나서 방안의 보온 효과에 그만이었다. 게다가, 저녁에는 촛불이 따로 필요없었다. "샤르! 아멘시타 아직 안왔어?" "응! 그녀석, 요즘 계속 골골하더니... 쯧~ 깜깜 무소식이네? 정령이 그렇게 몸이 부실하다 니! 걔, 신성하다는 론티아 정령 맞아?" 그의 말에 나는 얼굴 표정을 구겼다. 아멘시타가 기운 회복하러 간다며 본체로 돌아간지 며 칠 째... 아직 소식이 없었다. 얼마 전부터 이상하도록 기운 없었던 아멘시타였는데, 그는 내가 그 이유를 물어도 제대로 답을 하지 않았다. 정말, 걱정되어서 속이 탔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보통, 론티아들은 병같은 것은 전혀 앓지 않는다고 하던데...' "샤르? 도대체 무슨 일일까?" 내가 그렇게 묻자, 샤르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나의 어깨를 토닥토닥하며 입 을 열었다. "라비스, 조금만 기다려 봐! 곧, 돌아오겠지. 아멘시타가 그때 돌아오면 이유를 물어보도록 하자고! 내 생각엔... 지금이 겨울이라서 그가 지금 골골하는 것은 아닐까? 보통 나무들은 겨울에 모두 죽은 듯이 지내잖아? 물론, 론티아들은 특별나다고 하지만, 그녀석은 예외 로 부실한 것이겠지." 샤르는 그렇게 말하며, 나의 침대에 벌렁 드러누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자, 방금 그가 지 었던 심각한 표정은 전혀 진지한 구석이 없어 보였다. 샤르는 금세 장난기 섞인 얼굴이 되어 나에게 한 대 맞을 말을 했다. "라비스! 춥지 않아? 내가 따뜻하게 해줄까? 내가 부비부비 해줄게!! 이리와~ 따뜻한 나의 품으로..." 퍼억!! "변태 정령 같으니!! 나는 걱정되어 죽겠는데..." 결국, 그를 한 대 때려주며 그에게 외치자 샤르는 나에게 맞은 부위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투덜대었다. "생긴 것 답지않게 폭력적이다니... 쳇~ 난 그저, 라비스가 우울해 하길래 기분을 풀어주려 장난 좀 쳐본 것 뿐인데... 주먹부터 날아오다니! 라비스! 이번 기회에 애교 좀 길러보는 것이 어때? 그런 성격으로는 남자들에게 인기 없다고!!" "엑! 샤르~!! 난 남자들에게서 인기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 또 맞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고 있어!" "쳇~!!" 그렇게 샤르와 옥신각신하면서도 나는, 샤르의 말대로 며칠을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하지 만, 여전히 아멘시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밤... 나는 아주 불길하고도 기이한 꿈을 꾸었다. 나는 꿈속에서 크로시벨가 후원에 있는 론티아 나무를 보았는데, 론티아 나무는 초여름 즈 음, 내가 크로시벨가에 있었을 때 모습, 짙은 녹색의 잎이 무성한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아멘시타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하며 그 론티아 나무앞에서 아멘시타를 불렀다. 그러자, 무지 기운 없어보이는 아멘시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라비스... 난 돌아갈 수가 없어...]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주변 배경이 어둡게 변하며 론티아 나무의 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곧, 아멘시타의 본체 론티아 나무는 새카맣게 마른 모습으로 나뭇잎이 하나도 없는 앙상한 가지만을 드러내었다. 그 론티아 나무의 모습은, 이미 죽음을 임박한 나무의 모습이었다. "아멘시타아~!!!" 그 모습에 나는 놀라며 비명을 지르듯이 그의 이름을 외쳤다. 그리고, 비명과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깨어난 나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런 끔찍한 꿈이 라니... 정말 불길하였다. "안되겠어! 어찌된 일인지, 내가 직접 알아봐야 하겠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잡고 있던 비단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89] 체인지(Change) 제16화 -아멘시타의 성장!- (2) -2- 결국, 더 이상 잠에 들지 못한 나는 정령들을 불러서 내생각을 그들에게 말하며, 어떻게 해 야 할지 의논을 하였다. "라비스, 그 꿈이 불길하긴 하지만, 그것은 네가 너무 과민하게 생각하느라 그러한 꿈을 꿨 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꿈은 반대라고들 하잖아." 샤르가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나의 과민함부터 탓했다. 그러자, 리엔시타는 그런 샤르의 말 에 토를 닸다. "샤르! 넌 어쩌면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어? 아멘시타가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는 것은 분명 무슨 일이 있다는 거잖아? 라비스가 저렇게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거야! 정말 샤르는 나빠!!" "이봐~ 리엔! 내가 그런 말을 한 것은 무심해서가 아냐! 무조건 나쁜쪽으로만 생각할 것은 없잖아? 그리고, 넌 라비스의 말이면 무조건 다 옳지?" "그래!! 라비스의 말이면 다 옳아!! 어쩔래?" 무대포적이고도 억지스런 리엔시타의 유치한 발언... 괜히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아무튼 그 렇게 되자, 샤르의 이마에는 발끈함으로 인해 힘줄이 돋아났다. "리이엔!!! 너 억지 쓸거야? 나이는 그렇게 먹었어도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어린애냐?" 그리하여 또 시작된 리엔시타와 샤르의 말싸움... 쟤네들은 지겹지도 않나? 그리고, 샤르는 리엔보고 유치하다면서 매번 말대꾸를 해주는 것은 또 무슨 심리일까? 내가 보기엔 둘 다 거기서 거기인데... '휴~ 역시, 저것들과 진지하게 의논할 생각을 한 내가 바보이지!' 나는 한숨을 쉬며, 아젠샤르에게로 눈을 돌렸다. 이제 믿을 건, 아젠샤르 밖에 없었다. 그 역시 둘의 말싸움을 보며 한숨을 내뱉다가 나의 눈길을 받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제가 알아보도록 하지요! 제가 알아본 결과에 따라 어떻게 해야 할지 라비스님이 결 정하세요." "아! 그래 줄래? 고마워! 그런데, 네가 크로시벨가에 가도 미카엔에게 걸릴 위험은 없을까? 미카엔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너를 기다리며 벼르고 있을지 모르잖아?" 내가 그렇게 묻자, 아젠샤르는 피식 웃어보이더니 나의 말에 답했다. "그럴 염려는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늘색빛의 짧은 머리카락이 그의 움직임에 의해서 살짝 살랑거렸다. 나는 방금, 그가 미미하게나마 나에게 웃어보였던 것에 대해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젠!! 너 방금, 웃었지? 햐~ 신기하다! 넌 나에게 한번도 웃는 모습 안보였잖아?" 내가 그렇게 지레 흥분하여 큰소리로 떠들자, 그는 나의 큰 목소리에 놀란 듯 움찔하였다. 그러자, 리엔시타는 샤르와 말싸움하는 것을 멈추고는 덩달아 흥분한 모습으로 그에게 외 쳤다. "와~ 아젠! 너도 라비스에게 반한 거야?" 그녀의 수선스런 질문에, 아젠샤르는 굳어진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리엔! 나는 주인을 모실 뿐, 반하거나 그러지는 않아! 그런 바보같은 질문을 하다니!" 여전히 리엔시타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아젠샤르였다. 아젠샤르는 그녀에게 그렇 게 톡 쏘듯이 말하고는 나에게 고개를 숙여 갔다오겠다는 듯한 인사를 해보이고는 금세 한줄기 바람으로 화해 사라졌다. "히잉~ 아젠은 맨날 무시하고... 난 아젠이 싫어!!" 리엔시타는 울상을 지어보이며 그렇게 말하자, 이번에는 왠일인지 샤르가 그녀의 말을 거들 었다. "나도 저녀석 싫어. 너무 건방지거든!" 정령들의 사이가 이리도 안좋으니... 나는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언제나 혼자 도도한 척, 개 인 플레이를 하는 아젠샤르, 둘이 만나기만 하면 아웅다웅하는 리엔시타와 샤르... 아멘시 타는 꼬맹이라 -어린 나이 때문에.- 나머지 셋 정령들은 그를 취급도 안해주고... 정말 걱정이었다. '휴~ 지금은 그런 걱정할 때가 아니지... 아멘시타! 제발 아무 일 없어야 돼!' 나는 속으로 그렇게 기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날이 밝아오려면 한참을 있어야 했지만, 오늘은 일찍 일어난 셈치고 머리를 묶기 위해 화장대 앞으로 걸어갔다. 요즘은, 머리카락이 더욱 많이 자라있어서, 숱이 많은데다가 무지하게 길은 이 머리를 감당하는 것 이 정말 버거웠다. 그래서, 몇번이고 자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여, 조그만 단도를 손에 쥐었다가 놓았다 가 했던 적이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나의 탐스런 머리카락을 자신의 목숨처럼 애지중지 하는 여왕의 얼굴이 생각나, 섣불리 자르지 못하고, 단도를 놓았었던 것이다. '제길! 내 머리도 내가 마음대로 못하다니!' 하긴, 눈이 아찔하게 느껴질 정도로 찬란한 황금빛을 발하는 나의 머리카락은, 내가 보아도 정말 희귀한 아름다움이었으니, 반짝이는 것과 아름다운 것에 목숨을 걸며 매니아적으로 좋아하는 여왕이 애지중지해 할만 하였다. 나는 머리를 대충 묶은 다음, 정령들을 시켜서 따뜻한 물을 데우게 하였다. 물론, 물을 준비 하는 것은 리엔시타였고 물을 데우는 것은 샤르였다. '휴~ 오늘도 여왕을 지겹게 따라 다니는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군.' 벌써, 여왕의 곁을 지킨지 두달이 지났다. 그러고 보니, 그녀를 따라 다니는 것이 아주 쓸모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녀의 곁을 지키면서 나는 여왕이라는 직분에 대해, 그리고 군주의 자리... 정치인들의 이중적인 사고방식과 그들의 방식들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요즘은 프리실라 여왕의 측근비서가 하는 일도 종종 수행하곤 했는데, 그것은 아마 도, 나에 대해 지나친 믿음을 가진 여왕의 입김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흠, 그러다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데... 아! 물론, 내가 그녀의 발등을 찍겠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튼, 그로 인해서 나는 어지간한 중신들에게도 고개를 빳빳이 들 수 있는 지경까지 되었 다. 물론, 나를 경계하는 무리들이 많았지만, 어디든 잠입하는 리엔시타가 있었으니, 나는 리엔시타의 귀뜀을 참고로 많은 이들을 스스로 경계하였다. 특히, 재상이라는 작자... 그 늙은이는 프리실라에게 마법사를 너무 믿지말고 가까이 하지말 라고 거의 매일같이 충고를 하지만, 그래봤자 나의 마법력은 겨우 3서클... 여왕은, 내가 위험이 되지 못한다며, 그의 말을 무시하곤 하였다. 그녀는 나를 그저, 능력없는 아름다운 보물로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보물... 그것은 때론 화가 될 수 있는데... '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나는 하던 생각을 털어내고 다시 아멘시타에 대한 생각을 하며, 욕조에 몸을 담갔다. 그러 다, 나의 가운데 손가락에 껴있는 크리스탈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것은 미카엔이 준 반지... 봉인된 마법 반지였다. 지금은 쓸모가 없는 반지이건만 나는 언제나 그것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다이아 목걸이 도... [90] 체인지(Change) 제16화 -아멘시타의 성장!- (3) -3- 로브를 걸친 나는 여왕의 집무실로 향했다. 지나가던 시녀나 시종들 그리고 하급 관리들은 나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보였다. 하지만, 나는 아멘시타에 대한 걱정과 초조 함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지 못했다. 그렇게 깊은 생각에 잠기며 집무실로 향하는데... 어디서 늙은 노인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건방지군!! 아무리, 폐하의 총애를 얻고 있다고 하나, 이젠 재상까지 무시할 셈인가?" 재상이었다. 그는 내가 미처 그를 못보고 지나친 것을 트집 잡아 아침부터 그렇게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아무리 성질이 나도 내색을 하지 않았던 나였지만, 오늘은 심기가 불편해 있던 탓인지, 그만 발끈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인상을 팍 쓰게 되었는데, 재상은 나를 트집잡을 거리가 생긴 것이 매 우 기쁜지 더욱 쩌렁쩌렁해진 목소리로 나에게 떠들어댔다. "이런 건방진 마법사를 봤나? 감히 이 재상에게 도전하는 것인가? 능력없는 마법사 주제 에... 얼굴 조금 반반한 것으로 폐하의 총애를 얻더니 이젠 나까지 기만하려 들다니!!" 재상은 별 것도 아닌 것으로 매우 분개해 하였다. 웃기는 늙은이... 이들은 내가 정령들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정령들의 능력을 매우 우습게 보고 있는데다가 겨우 3서클의 마력을 운용하는 것뿐인 줄 알고 있기에, 나의 능력을 하급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나는 이 늙은이를 밝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한번도 한 적이 없던 나였는데, 재상도 나에게 쌓인 것이 많았겠지만, 나 역시 그에게 쌓인 것이 많았나 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일부로 속을 긁는 말을 했다. "재상 나으리! 옳은 말씀이십니다. 전 능력없는 얼굴만 믿고 까부는 하찮은 마법사이지요! 그런 하찮은 저로 인해 고귀하신 재상께서 이리도 흥분을 하시다니요? 혹시, 재상님의 속은 매우 옹졸하신 것이 아닌지, 퍽이나 의심스럽군요! 재상님처럼 높으신 분은 저처럼 보잘 것 없는 이는 상종도 안할뿐더러 이처럼 길길이 날뛰시지도 않는답니다." "뭐... 뭐얏? 이런 건방진 계집이!!" 결국, 화를 못참은 재상은 벌개진 얼굴로 손을 들어 나의 뺨을 후려쳤다. 그러자, 나의 뺨에 대각선으로 붉은 선이 그려졌다. 재상의 손가락에 끼워진 보석반지... 그것이 나의 볼에 그어 이렇게 상처를 낸 것이었다. 나는 맞은 볼이 얼얼하고 상처로 인해 쓰렸지만, 다시 그에게 눈길을 주고는 생긋 웃어보였 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볼에 살짝 대어 상처를 만져보았다. 그러자, 붉은 피가 조금 묻어 나왔다. "이런! 이 상처를 보면, 여왕 폐하께서 꽤나 좋아하시겠군요! 폐하께서는 그분의 보물에 흠 집이 나는 것을 죽기보다 더 싫어하신답니다. 호호. 전 이만 가보아야 하겠군요!" 그러자, 재상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당황한 모습으로 나에게 뭔가 말하려 하였지만, 나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꾸벅해보이고는 그대로 여왕의 집무실로 향했다. '나에게 빌미를 잡힌 것이니 이젠, 더 이상 섣불리 나를 건드리려 하지 않겠지... 하지만, 나 의 목숨은 노릴지도 모르겠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집무실로 갔고, 나의 상처를 본 여왕은 역시나 수선스러워진 모습으 로 나의 상처에 대해 물었다. 나는 재상에 대해 말할까 하였으나, 다시 맘을 바꾸어 나의 실수로 인한 상처임을 여왕에게 말했다. 그러자, 여왕은 나에게 꾸중을 하며 잔소리를 해댔다. '흑! 내얼굴에 상처가 난 것 가지고, 왜 내가 이렇게 꾸중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하긴, 자신이 아끼는 보물에 흠집이 나면, 그 가치는 떨어질 수도 있으니 프리실라가 화를 낼 수도 있겠지... 프리실라는 당장 신관을 불러들여 나의 볼에 난 조그만한 상처를 치유하게 하였다. 그러자 나의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너무도 극성스런 그녀의 반응... 이럴땐, 프리 실라가 정말 무섭게 느껴졌다. 그렇게 아침의 작은 사건을 제외하자면,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하루가 지나갔다. 그리고, 자정 이 가까워져 가는 시각... 나는 아젠샤르를 기다리며 명상에 잠겼다. 명상을 하는 것은 나의 마력을 증진하는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나는 매일 밤, 혹은 아침에 명상을 하곤 하였다. 휘이익~!! '바람 소리?' 나는 눈을 떠보였다. 그러자, 아젠샤르가 차분한 태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되었어? 아젠." 그러자, 아젠샤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멘시타는 두 번째로 생명의 대가를 치루고 있습니다." "응? 생명의 대가?" "정령들은 보통, 자신의 능력이나 힘을 크게 벗어난 무언가의 일을 이루고자 할 때, 자신의 일정한 수명으로서 그 대가를 치릅니다. 아멘시타는 이미, 한번 자신의 수명을 깎아먹은 듯 한데, 이번에 또다시 그러한 일을 벌이고 있더군요. 아멘시타와 같이 어린 정령들은 그러 한 생명의 대가를 한번 이상 치르는 것을 못버팁니다. 오히려, 죽음을 앞당기는 것이지요!" "뭐? 대체 왜?" "그는 자신의 성장을 앞당기려 하고 있더군요! 본래, 론티아 정령들은 신의 나무로도 불리 워지는데, 일정한 나이에 오른 론티아 정령들은 신성력을 가지게 됩니다. 아무래도, 아멘 시타는 그 능력을 얻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나의 안색이 금세 파리해져 갔다. 그는 예전에 나를 이세계로 이끌어 올 때, 자신의 수명을 한번 썼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번이 두 번째란 소리인데... 대체 왜, 자신의 목숨을 담 보로 하면서까지 그러한 능력을 얻으려고 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예전 내가 세 존재의 정령을 얻은 후부터 아멘시타가 의기소침해 하는 것을 나는 느낄 수가 있었다. 그에겐 그저 동식물을 이용하는 능력뿐이었는데, 나머지 정령들은 모두 자신의 커다란 능력을 가지고 있어, 내가 필요로 할 때에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 문이었다. 게다가, 아멘시타는 예전 아젠샤르와의 싸움으로 인해 배가 침몰할 때도 그는 그저 물에 빠 진 나를 건지는 일밖에 하지 못했었다. 물론, 그는 훌륭하게 나의 생명을 구했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일을 맘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력했던 자신을... 그리고, 상처를 입 고 물에 빠졌던 리엔시타를 돕지 못했던 자신을... 나는 갑자기 눈물이 앞을 가렸다. "바보같이!! 멍청한 나무정령 같으니!! 그러다 죽으면 어쩌려고! 내 허락도 없이 죽어버리면 용서 안할 거야..." 나는 아멘시타를 한때 원망하는 마음도 가졌었다. 아멘시타로 인하여 내가 라비스가 되어 이세계로 떨어졌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젠 너를 원망하고 싶어도 못하는 걸... 이미 넌 나에게 있어 소중한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야.'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샤르가 다가와 나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 다. "그녀석... 그저 꼬맹이인 줄 알았는데, 여느 정령들보다 훨 낫군!" * @_@;; 잠안자고 뭐하는 짓인지... 밤을 샜거든여!^^;; 점점 폐인이 되어가는 라얀입니다. ㅡ.ㅜ [91] 체인지(Change) 제16화 -아멘시타의 성장!- (4) -4- 정령들, 샤르와 아젠샤르는 어딘가 각자의 영역으로 돌아갔고, 모두가 잠들었을 시각... 자정 을 넘긴지가 한참 되었건만, 방안에 홀로 있는 나는 아직 잠들지 않고 있었다. 아멘시타가 몸담았던 새끼고양이를 안고 침대에 누운 채로 눈만 깜박이고 있었는데, 저녁때 재상의 저택으로 보냈던 리엔시타가 돌아왔다. 매우 시원한 음향으로 나의 귓가를 자극하며, 푸른빛을 띤 투명한 빛무리가 모이더니 어느 새 그것은 투명한 물로 이루어진 소녀의 형상으로 탈바꿈하였다. "리엔?" 내가 그렇게 입을 열자, 리엔시타는 나를 향해 귀엽게 웃어보이고는 가까이 다가왔는데, 그 녀의 투명하던 몸은 나에게 다가오면서, 이내 완벽한 인간의 모습으로 갖추었다. 마치 물흐르는 듯한 그녀의 투명한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져 바닥을 끌었지만, 먼지가 묻거 나 하지는 않았다. 비록 행동은 어려 보일때가 많지만 외모상으로는 19살쯤 되어보이는 성숙한 소녀... 리엔시타 역시, 왠만한 남자들은 혹하게 만들 만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정령들은 모두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모양이었다. "아직 안잔거야? 어제도 많이 못잤잖아? 설마 라비스 날 기다린 건? 꺄아~ 정말 날 기다린 거야?" 나는 아무말도 안했건만, 리엔시타는 내가 잠못드는 이유를 지레 짐작하고는 그녀의 물빛 눈동자가 감동의 물결로 반짝반짝해졌다. 그런 그녀를 보자, 새하얀 푸들강아지가 연상되 었다. 맛있는 음식을 받고는 그 기쁨으로 인해 반짝반짝해진 눈으로 그 주인을 올려다보는 모양새...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리엔!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어?"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약간 건조한 어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리엔시타는 여 전히 감격으로 인해 생글생글한 얼굴로 나의 질문에 답했는데, 그녀의 밝아보이는 어조와 표정과는 전혀 다른, 내용의 말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응! 그 재상 영감이 온통 까만 옷을 입은 사람에게 라비스를 암살하라고 지시했어! 그 지 시받은 사람은 복면을 하고 있어서 얼굴이 안보였는데, 굉장히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였던 것 같아." "흐음... 그래?" 나는 그녀의 말을 성의없이 듣고있다가 그녀의 말에 끝나자 시큰둥하게 대꾸하였다. 그러 다, 암살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뒤늦게 깨달은 나는 벌떡 일어나서 그녀에게 반문했다. "뭐엇? 암살?" 나의 이러한 반응에 리엔시타는 싱긋 한번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걱정마! 그 복면남자 내가 손좀 봐주었으니깐!" "어떻게 손을 봐주었는데?" "그 재상의 저택에는 인공 호수가 있거든! 비록 작지만 깊이는 꽤나 돼! 그 복면남자가 그 옆을 지나갈 때, 내가 짜안~ 하고 나타나서 그를 물속으로 끌여들였지! 물론, 그 남자는 밖으로 빠져나오려 했겠지만, 내가 놓아주지 않았거든. 결국, 물속에서 몇번 허우적거리다 가 잠들어버렸어! 나 잘했지?" 리엔시타의 말로는 그 암살자는 그녀가 죽였다는 말이었다. 나의 칭찬을 기다리는 듯한 리 엔시타의 순진무구한 얼굴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령들은 이상스럽게도, 순수한 반면 냉정한 잔혹성을 보였다. 사람을 거리낌없이 죽여좋고 내가 칭찬을 해주기를 기다리 는 저 순수한 얼굴이란... 특히, 나의 정령들 중에서는 리엔시타가 가장 순수한 면을 보였는데, 그에 반비례하여 그녀 는 관심밖에 있는 것에는 매우 극단적인 냉정함을 보였다. 아니! 냉정함이라기 보다는, 무 지에 가까운 냉혹함이었다. 하지만, 리엔시타의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도 그녀에게서 순수함과 순진함만이 느껴지는 것 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 불의 정령 샤르는 정령답지 않게 세속의 물이 많이 들은 모습을 보였는데, 흥분 을 잘하여 무언가를 공격할 때 매우 거침없는 모습을 보이지만, 뭔가에 맹목적인 리엔시 타와는 달리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용통성도 보였다. 아무튼 나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자, 리엔시타는 자신이 기대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아서 매 우 실망한 듯 금세 풀이 죽은 모습을 보였다. "리엔! 네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복면남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생명을 가 진 무언가를 죽일 때에는 언제나 신중해야 돼! 그건 결코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빼고는 섣불리 무언가를 죽여서는 안되는 거야! 다음부터는 그것을 염두 에 두도록 해! 적어도 너로 인해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그에게 미안한 감정이라도 가져야지!" "히잉~ 알았어. 다음부터는 미안한 감정을 갖도록 할게!" 나의 설교하는 듯한 말에 리엔시타는 얼굴을 더욱 더 구겨졌지만 어쨋든 나의 말에 알겠다 는 듯 울상을 지으며 답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방금 말한 나의 말에도 약간 모순점이 있었다. 비록, 나를 죽이려던 사람이었지만 내가 살기 위해 그를 허망한 죽음으로 몰아넣고는 미안한 감정을 갖는다고 모든 것이 다 덮어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훗... 그나저나, 재상 늙은이... 본인이 내보낸 암살자가 자신의 정원에서 죽어있으니 꽤나 의아스러워 하겠군. 오히려,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겠지? 실컷 고민이나 하라지, 뭐!' 그런 반면에도 나는, 자신의 정원에 있는 작은 호수에서 동동 떠있을 암살자의 시체를 발견 하고 무척 당혹스러워할 표정을 지을 재상을 상상하며 고소해 하기도 했다. '에휴~ 나에게 이런 이중적인 성격이 다분할 줄이야! 반성해야 돼!' 그러나, 나의 이런 이중적인 생각은 인간이라면 무의식적으로 갖게 되는 감정이 아닐까 생 각해 보았다. "나 이젠 자야하겠어! 리엔. 아무튼 오늘 수고했어!" 나는 아멘시타의 일로 매우 우울한 상태라 리엔시타의 서운한 기색 같은 것에 신경써줄 겨 를이 없었다. 아젠샤르의 말로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했지만, 나는 너무 초조하였다. 만약 아멘시타가 생명의 대가로 인해 자신에게 가해질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나는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세계에 와서 만난 나의 최초의 친구... 예전 나의 모습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자 가끔은 조언자가 되어 주었던 아멘시타였는데...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던 나는 이내 다시 눈을 떴다. 결국, 이대로 잠을 잘 수 없었던 나는 어딘가에서 바람의 모습으로 있을 아젠샤르를 불렀다. 그러자, 아젠샤르는 금세 나의 앞에 나타났고 나는 그에게 외쳤다. "아젠! 나 크로시벨가로 가야 하겠어! 나를 그곳으로 네가 안내해!" 그러자, 두 정령의 눈은 금세 휘둥그레졌다. "라비스! 너 그곳에 가면 황태자에게 걸릴 위험이 커지잖아?" "그렇겠지... 하지만, 잠깐이라면... 아주 잠깐이라면 괜찮을 수도 있겠지. 그에게 들키면 할 수 없고... 그래도, 난 아멘시타를 보아야 하겠어!" "라비스님? 무슨 수로 그곳까지 가시겠다는 거죠? 저라면 하루만에 갔다오는 것이 가능한 일이지만, 라비스님에게는 긴 여행이 될텐데요?" 아젠샤르의 질문에 나는 살짝 웃어보이며 답해주었다. "난 유체이탈법(깊은 명상이나 충격을 이용해 자신의 영혼을 육체에서 분리하는 방법)을 쓸 거야! 보통 마법사들이 잘 쓰지 않는 방법이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나에게는 그 방법 밖에 없어! 난 공간이동술이 불가능하니... 영혼의 모습으로라면 어디든 금세 갔다 올 수 있겠지?" 솔직히 이러한 방법은 조금은 위험부담이 있어 약간 겁이 나기도 했지만, 나는 한번쯤 시도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이러한 것을 시도하는 것은 용기도 용기이지만, 나의 직업이 이젠 마법사가 되어서 그런지, 미지의 것에 대한 그리고... 불확실한 방법에 대해 탐구 하고자 하는 마음도 약간 곁들여져 있었다. [92] 체인지(Change) 제16화 -아멘시타의 성장!- (5) -5- 나의 마법서 중에서 유체이탈법에 대해 약간 나온 것을 읽으며 그대로 시행을 하였다. 나는 침대위에서 정좌를 하고 명상을 하는 폼을 취했다. 그리고 혹시 나의 방으로 누가 들어올 것을 대비하여 리엔시타가 지키도록 당부하였다. 내가 지금 하려는 것은 기존의 자연스러운 유체이탈과는 다른, 마법적 힘에 의존한 것이어 서 그 특징도 조금은 달랐다. 이것은 한가지 위험요소가 있었는데, 나의 영혼이 육체에 빠져나가있는 시간이 24시간이 지나게 되면, 나의 영혼은 육체를 못찾게 된다는 것이었다. 왠지 꺼림직하긴 했지만, 설마 별일이야 있을까 싶어 나는 그것을 시행했다. 나의 몸에서 도는 마나의 흐름을 멈추고 무아지경 명상에 빠져들어갔다. 곧, 나는 기이한 느낌과 함께 몸이 가벼워짐을 느끼며 눈을 떠보았다. 그리고 몸을 살짝 움직여보았는데, 나의 눈에는 여전히 나의 몸에 정좌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히 나의 몸은 본인의 의지대로 움직여주고 있었으나, 여전히 나의 눈에 보이는 육체는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 무지하게 신기한 현상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영혼은 나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눈에 휘둥그레져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 하고 있는 정령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들을 보며 빙긋 웃어보이고는 입을 열 었다. "어때? 내 모습 보여?" 정령들의 눈길이 내가 있는 곳으로 위치해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은 나의 영혼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듯했다. 그러자 나는 한가지가 궁금해졌다. 그들이 지금 보고 있는 나의 모습은 과연 이도현의 모습일까? 아니면, 라비스의 모습일까? "꺄아~ 라비스, 대단해! 성공했어!" 리엔시타의 호들갑스런 반응에 나는 의아해진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리엔! 지금 내모습 라비스의 모습 그대로야?" "응! 당연하지. 라비스는 라비스이니깐 라비스로 보이는 거야!" 짧은 한문장에 나의 이름이 세 번이나 들어가는 그녀의 말이 웃기긴 했지만, 지금 나는 그 러한 것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았다. 라비스의 모습 그대로라니! '난 이도현인데... 어째서 나의 영혼의 모습이 이도현이 아닌 것이지?' 내가 그렇게 아연실색해져서 멍하니 있는데, 아젠샤르가 재촉하는 듯이 입을 열었다. "라비스님! 시간이 별로 없으니... 어서 가시지요!" "아! 응..." 나는 그를 따라 날아올랐다. 아젠샤르는 나를 놓칠 것을 염려한 듯, 나의 손목을 꽉 붙잡았 고 그대로 빠르게 날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치 내가 빛이 되어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듯 주위의 배경들이 굉장히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너무 빨라서 주위 배경들의 모습을 거의 식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날자 순식간에, 우리는 바다에 도착하였고 그렇게 바다의 기운을 느끼며 나는 아젠 샤르를 따라 허공을 날았다. 굉장히 기이한 느낌이었다. 역시 육체가 느끼는 기분이랑 영 혼이 느끼는 그 기분은 차원이 달랐다.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꿈에서는 이렇게 날아본 적 이 몇번은 있었으니깐... 잠시 후, 우리는 대륙에 도착하였는데, 이렇게 빠르게 도착할 줄은 몰랐던 나는 시공을 초 월한 기이한 여행에 아찔한 기분까지 들었다. [까아~ 너무 재미있어!!] 내가 그렇게 신나게 외치자 묵묵히 날던 아젠샤르는 나의 이러한 목소리에 잠시 황당한 표 정을 지어보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쳇~ 뭐야? 그렇게 황당한 얼굴을 할 것은 없잖아?' 또 얼마 후, 우리는 마침내 크로시벨가에 도착을 하였다. 곧 나의 눈에 한그루의 론티아 나 무가 들어왔다. [아멘시타~!!] 나는 론티아 나무앞에 서서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하지만 그에게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 았다. 겨울이라 그런지, 그의 본체인 론티아 나무의 모습은 앙상한 가지만이 남아 무척 쓸쓸한 모습으로 서있었는데, 나는 느낄 수가 있었다. 아멘시타는 지금 몹시 힘겨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의 싱싱하던 초여름 때의 모습을 생각해 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아멘시타 본체의 모습은 왠지 죽음에 가깝다는 불길한 느 낌이 들었다. 나는 나무의 줄기에 얼굴을 기대며 그에게 속삭였다. [제발, 대답해줘! 내말 들리는 거야?] [라비스... 어떻게 된 거야?] 왠지 사그라질 듯한 아멘시타의 목소리... [아멘시타! 부디, 힘내! 죽으면 안돼! 절대로 네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미안해...] 나는 아멘시타 본체의 줄기를 팔로 감싸안았다. 그러자, 아멘시타는 아직 어린 나무라 그런 지 나의 손끝이 서로 맞닿았다. "라비스님! 오늘이 아멘시타의 고비가 될 거에요. 어쩌면, 잘된 일인지 모르겠군요. 만약 아 멘시타가 생명의 대가로 인한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라비스님은 아멘시타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아냐! 아멘시타는 결코 죽지 않아!! 아멘시타는 내가 지킬래!] 그러자, 아젠샤르는 한숨을 내쉬며 나의 곁에서 앉았다. 그렇게 얼마쯤의 시간이 흘렀을까? 영혼의 모습이 되니 시간관념도 없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줄기를 감싸앉은 채 얼굴을 기대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무의 가지들에 세차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마치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소리인 것 같아 나는 눈물이 다 났다. [아멘시타?] 나는 팔을 풀고는 나무의 모습을 바라보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어제 꿈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 나무의 줄기와 가지들에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꺄악!! 아멘시타!! 죽지마! 제발~] 나는 다시 줄기를 부둥켜 안고는 울었다. 영혼이 눈물을 흘릴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어 쨋든, 나는 놓치고 싶지 않는 소중한 무언가로 인해 난생 처음, 서글프게 울었다. 내가 그렇게 요란을 떨고 있는데 여전히 이 순간에도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아젠샤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비스님! 벌써 15시간이 지났어요! 미리미리 서두르셔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듣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줄기를 안고는 놓칠 까 두려운 듯 꼬옥 끌어안았다. 그렇게 한참을 울어대는데... 아멘시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라비스! 이젠 돌아가 난 괜찮아.] [응? 어엇?] 나는 고개를 들어 나무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이상하게도 나무의 모습이 조금씩 변해간다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후, 빠직! 하는 뭔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마치 허물 벗듯이 나무의 새카맣던 나무껍질이 벗겨져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점점 크기가 커져갔다. 줄기 의 굵기와 가지들이... 마치 컴퓨터의 그래픽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론티아 나무의 몸체는 조금씩 자라 기 시작했고, 가늘던 줄기는 내가 감싸안아도 삼분의 일도 감싸지 못할 만큼 두꺼워져 갔다. 그리고 나무의 키도 자라서 그 높이가 하늘을 찌를 듯 해졌다. 겨우 20년 묵은 나무가 이제는 적어도 500~600년 정도는 묵은 듯해 보였다. 나는 너무도 놀라 입을 벌리며 굉장히 커진 아멘시타의 본체를 바라보았다. "아멘시타가 이겨내었군요. 어쩌면, 라비스님이 곁에서 지켜준 것이 힘이 되었을지도 모습겠 습니다. 이젠 돌아가시지요! 영혼이 된 라비스님에게는 아무래도 시간개념이 없으신 듯 하군요." 나는 아멘시타의 자란 모습에 감격해하고 있다가 아젠샤르의 말에 고개를 돌리며 그에게 물 었다. [지금 몇시간 지났는데?] "제 생각엔 날이 밝았다가 다시 어두워진지 한참 지난 것을 보아, 20시간 가까이 지난 듯 싶습니다. 서두르십시오!" [허걱! 벌써? 에구구~ 큰일 났네? 아멘시타! 완전히 회복되면 돌아오도록 해! 나 먼저 갈 테니깐!] 나는 그가 회복된 것을... 그리고 성장한 것을 제대로 축하해줄 겨를없이 그렇게 대충 인사 하고는 나의 몸을 허공에 띄웠다. [가자! 아젠! 이왕, 시간이 남는다면, 로히얀스 왕성에도 들려보고 싶지만, 할 수 없지!] 나는 아젠샤르에게 활기찬 목소리로 외치며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93] 체인지(Change) 제17화 -혼란속의 혼란!- (1) (혼란속의 혼란!) -1- 오늘은 여러모로 의미깊은 날이다. 오늘은 내가 라비스로서 18살이 된 첫 번째 날이자, 이 도현으로서는 20살이 된 날이었다. 그리고, 여기 아스탄샤에서는 새로운 해로 바뀐 첫날 이었고, 앞으로 열릴 5일간의 신년 축제의 첫 번째 날이었다. 게다가, 나는 4서클 레벨의 마법에 첫발을 디딘 날이었는데, 오늘은 정말 여러모로 첫 번째 날인 것이었다. 나는 예복용 로브를 걸친 모습으로 왕실이 주최하는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맛나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과 함께 무용수들의 춤을 관람하거나 광대들의 쇼를 구경하기도 했다. 나는 만면에 은은한 미소를 띠며 귀족들과 가벼운 인사나 담소를 나누었지만, 나의 이런 겉 모습과는 달리 기분은 썩 좋지가 못했다. 얼마 전에, 유체이탈을 통하여 나의 영혼이 거의 완벽히 라비스화(?)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의 행동이 여성화가 되었던 것이고, 미카엔에게 애정 비슷한 감정을 가졌던 것일 까?' 누군가가 말을 걸지 않고, 누군가에게 웃어보이지 않아도 될 때는 나는 웃음기 전혀 없는 우울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요즘들어, 기분이 저조한 나의 심기를 프리실라는 알아채었 는지 그녀는 보통 4일간의 축제를 하루 더 늘려 모두 5일이 된 것이다. 그때, 한공연단 중 한 노파가 나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운명을 점칠 줄 아는 능력이 조금이나마 있는데, 마법사님의 운명과 미래에 대해서 점을 쳐도 되겠나이까?" 그 노파를 보며 나는 타로점을 보는 짚시여인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녀는 흑색과 흰색의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섞인 반백발의 곱슬머리를 가진 노파였는데, 왠지 분위기가 음침 하고 어두운 것이 썩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호기심이 당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나의 운명을 점칠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는 그녀가 이상한 카드나 그 비슷한 것을 꺼내기를 기다리며 그녀를 바라보는데, 그 녀는 의외의 것을 꺼내어 나의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그것은 하나의 거울이었는데, 멀쩡한 모습의 평범한 거울이 아니라, 마치 깨져서 금이라도 난 듯, 몇갈래로 일그러져 보이는 양면거울이었다. '꽤나 특이한 방법으로 점을 치는 할머니이네? 그런데, 다짜고짜 왜 나의 운명을 점치겠다 고 나섰을까?' 그렇게 갸웃하며 그녀에게 나는 물었다. "그것이 무엇이죠?" "영혼의 운명과 미래를 엿보는 거울이죠! 물론, 아무 운명이나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이 거 울녀석이 흥미가 당긴 운명만 저에게 보여진답니다." "그렇다면, 저 거울에 인격이라도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나의 질문에 그 노파는 후후! 하고 웃으며 느리게 답하였다. "인격이라기 보다는, 감정이 깃든 영적인 물건이라고 할 수 있죠!" "흐음, 그런가요?" 나는 별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희한한 물건도 다있구나 생각했다. 곧, 내 영혼을 들여다 보기가 끝났는지, 노파는 기이해진 얼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법사님에게는 두가지 인격이 보여집니다. 하나는, 남성에 가까운 인격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모습의 인격이라고 할 수 있죠! 마법사님의 인격은 이 두가지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인격에서 두 번째 인격으로 육체의 그릇으로 인한 강력한 영향으로 영혼 이 변색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아! 그리고 왕실에 몸담고 계신 마법사님이신지 그런지 마법사님의 운명에 대부분 왕실의 모습이 보여지는 듯 하군요." 나는 그 노파의 말에 온몸에 힘이 빠지는 듯하였다. "그렇다면, 제 첫 번째 남성에 가깝다는 인격은 지금 모습에 완전히 묻혀버린 건가요? 완전 하게 사라져버린 건가요?" "글쎄요... 아마도,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혹시 모르겠군요! 마법사님의 영혼이 어 떤 계기로 인해 처음의 모습이었던 되돌아갈지... 마법사님의 영혼이 지금의 모습으로 변 색된 이유가 어떠한 한가지 강력한 매개물로 인해 그리된 것이니깐요!" "그 매개물이란 것이..." "훗... 그것은 사랑 혹은 애정과 비슷한 것으로 보여지는 군요! 마법사님은 그 매개물과 가 까이 있는 한은... 그리고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있는 한은 절대로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 시지 못합니다." 그런 그녀의 청천벽력같은 말에 충격을 받은 나는 순간 어질해져서 휘청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별생각없이 이를 지켜보던 프리실라는 노한 모습을 보이더니, 홀의 구석에 시립해 있던 여왕의 호위기사들에게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명하였다. "저 요망한 주둥이를 놀리는 늙은이를 당장 하옥하시오!!!" 퍽이나 성질급한 여왕이었다. 나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그것에 대해 말해준 죄밖에 없던 노 파는 여왕의 노함에 얼굴이 파리해지더니 그대로 머리를 바닥에 박고는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다. "용서하소서! 제가 그만 경망스럽게도 망령된 주둥이를 놀렸습니다. 이 늙은이가 잠시 망령 이 나서 그런 것이니 한번만 용서하소서!!" "아니오! 멈추시오!! 제가 잠시 현기증이 나서 그런 것이니, 저 노파를 하옥하지 말아주세 요!" 당장 노파를 잡아다가 끌고가려던, 작위를 받거나 여왕에게 정식 칭호를 받은 정식기사라기 보단 하급 기사에 가까웠던 그들은 멈칫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는데, 이 광경을 본 재상이나 공작가 등등, 높은 지위에 있던 귀족들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은 건방지게도, 내가 여왕이 내린 명령을 내멋대로 철회시킨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게 다가 저 어설픈 기사들은 얼떨결에 나의 명령을 들었기 때문에, 여왕의 명예를 훼손한 셈 이었지만, 정작 여왕인 프리실라 당사자는 아무말도 안하고 그대로 넘어가니, 재상을 비롯 한 그들은 내가 아니꼽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이정도로 여왕의 나에 대한 총애가 도가 지나치니, 그들은 한쪽 구석에서는 이렇게 수군거 렸다. "여왕께서는 변하셨어! 엄격하시던 여왕 폐하께서 저리도 무르게 변하시다니! 다 저 요사스 런 마법사 때문이야! 분명히, 마법으로 여왕의 판단을 흐리시게 한 것일 거야! 어서 저년을 제거해야 할텐데..." 청력 증폭마법으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재상의 눈과 마주치자 그를 향해 화사하 게 생긋 웃어보였는데, 찔린 구석이 있음에도 능청스런 늙은 재상은 나에게 답변미소를 보내왔다. 역시나 간사한 만큼, 얼굴도 두꺼웠다. 그래서, 나는 그를 당혹시킬 한마디를 그에게 건내었다. "필몬스 재상님! 혹시, 재상님 정원의 호수에 까마귀 시체가 떨어지지 않았나요?" 그러자, 표정관리에 나름대로 능슥한 모습을 보이던 재상은 잠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까 마귀 시체란, 검은 복면의 암살자 시체를 말한 것임을 그는 눈치를 채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까마귀 시체라니?" 재상 옆에 앉아있던 로벨스백작이란 중년신사가 그렇게 묻자, 재상은 당황한 얼굴로 대충 그에게 얼버무렸다. "하하! 크로시벨 마법사님과 저 사이에 통하는 조크(Joke:농담)입니다." '훗... 조크 좋아하시네!' "오오! 크로시벨 마법사님과 재상께서 언제 이렇게 사이가 좋아지셨습니까?" 로벨스백작은 눈치없이 그리 질문한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 질문한 것인지 그렇게 묻자, 재 상은 나에게 우스갯소리를 가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크로시벨님! 그 까마귀는 자신을 쏘아맞힌 사냥꾼을 이를 갈며 기다리고 있답니다. 그렇게 전해주시지요! 하하." "호호, 그렇게 전해드리지요! 재상님." 그렇게 피곤하기 짝이 없는 귀족들과의 입씨름을 벌리다가 나는 내방으로 돌아왔다. 아까, 노파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려 마음이 매우 심란하였다. '결국, 난 미카엔과 만나지 말아야 하는 건가?' [94] 체인지(Change) 제17화 -혼란속의 혼란!- (2) -2- 내방 침대에 옷도 갈아입지 않고 털썩 누운 나는, 여전히 새끼 고양이 몸에 들어와 있는 아 멘시타에게 입을 열었다. 이젠 560살의 나이로 훌쩍 성장한 그는, 신성력을 갖추긴 했으나 아직 인간의 모습으로 나다닐 수 있는 능력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멘시타! 난 이제 내가 아니게 된 걸까? 네가 바랬던 대로 완벽한 라비스가 된 걸까?" [넌 여전히 너 그대로야! 네가 지금 몸담은 육체에 많은 영향을 받고있긴 하지만, 본질의 너는 그대로야! 넌 변하지 않았어! 제발 네 자신이 사라졌느니 어쨋느니 따위의 생각 좀 그만해!] 또다시 발작한 나의 자아의 정체성 문제로 내가 우울해하자 아멘시타 역시 흥분을 하며 나 에게 외쳤다. 그는 항상 나의 정체성 문제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을 했다. 그리고... 추위에 약함에도 불구하고 요즘들어 바깥 나들이가 잦아진 샤르는 방안에 동동 떠 다니는 불꽃으로 장난을 치다가 심심하였는지 불쑥 아멘시타와 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마도, 그는 밖에 있는 동안 왕성의 시녀들을 꼬시고 다니는 것이 틀림없었다. 정령 주제에 할짓 은 다하는... 역시 날라리 정령다웠다. "도대체 무슨 대화야? 자아의 정체성이 어쩐다는 얘기지? 라비스! 너 지금 정신분열증을 앓 고 있냐? 아니면, 다중 인격자?" 그의 질문에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훗... 나의 증상은 이중인격이라고 해야 할까? 샤르 넌 어떻게 생각해? 내가 남자와 여자 인격 사이에서 갈팡지팡하고 있다면?" "헉! 저, 정말이야? 너같이 예쁜애가 남자의 인격사이에서 갈팡지팡하고 있다니?! 역시, 안 되겠어! 그것은 네가 아직까지 진정한 남자와 뜨거운 사랑을 못해봐서 생긴 일이야! 너를 위해서 이몸이 희생하도록 할게! 어때? 라비스." 퍼억!! "넌 맞아야 정신 차리지?" 진지하지 못한 가볍기 짝이 없는 그의 발언에 나는 인상을 쓰며 그를 한 대 때려주었다. 그 러자, 그는 쳇~ 하며 다시 불꽃놀이(?)에 열중하였다. 발끈 잘하는 샤르가 매번 나에게 맞으면서도 나에게는 대들지 않아, 그것이 조금 기이하긴 하였지만, 나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렇게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귀족들 사이의 탐색을 갔다온 리엔시타가 돌아왔 다. "라비스! 큰일났어. 지금, 여왕의 집무실에서 긴급 군사회의가 벌어졌어!" "긴급 군사회의? 어디 전쟁 터졌어?" "응! 동대륙, 로히얀스와 인페르디아 국경 사이에서 가벼운 접전이 있었대! 곧, 전쟁이 있을 모양이야! 여왕은 로히얀스로 보낼 원군 문제에 대해 의논하고 있나봐!"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쟁이라... 나의 불안하던 것 중 하나였는 데, 결국 터지다니! 그렇다면 실버 일족의 드래곤이자, 카리스마의 여신인 프레야 왕비가 죽었다는 말일 수 있었다. 나는 다시 로브를 갖추어 입고 여왕의 집무실로 향했다. 물론, 나에게는 긴급 군사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집무실에서 회의에 몰두하고 있는 고급관리들 눈앞에, 나는 불쑥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 고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프리실라에게 말했다. "페하! 저를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을 주십시오! 전, 이번에 일어난 동대륙의 전쟁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내가 그렇게 외치자 프리실라는 커다래진 눈으로 나에게 뭔가 말하려 했다. 그러자, 이곳에 참여하고 있던 재상이 이것을 좋은 기회라 생각하였는지 나의 말을 거드는 발언을 했다. "폐하! 크로시벨님의 참전을 허락하시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크로시벨님은 뚜렷한 직위 에 있으신 것도 아닌데다가, 작위도 아직 없으시니... 이번 기회에 참전을 하여 큰 공을 세우시게 하여, 지금의 크로시벨님의 지위를 굳건하게 하고 그녀에게 나중에 하사할 작위 에 대한 합당한 동기를 스스로 만들게 하심이 옳은 줄로 사려되옵니다." 재상의 발언은 나를 위함인 것처럼 가장하였으나, 그의 속마음은 실력없는 내가 철없는 치 기로 전쟁에 참여하여 누구이지 모를 적들의 손에 목숨을 잃기를 바라고 하는 소리일 듯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 되오! 전쟁이 무슨 장난일 줄 아시오? 크로시벨님의 실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 니나, 크로시벨님은 전쟁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 왕실 호위마법사입니다. 저는 반대입니다." 재상의 말에 흥분을 하여 저렇게 침을 튀겨대며 말하고 있는 자는 군무대신이었다. '쳇! 무시하고 있으면서...' "제 생각에도 라비스양이 참전하는 것은 반대입니다. 라비스! 한번 더 신중히 생각해 보시 오!" 프리실라는 나에게 충고하듯이 말했으나, 나는 나의 의지를 꺽지 않았다. "폐하! 전 전쟁에 대해 모르며 군사지식도 없지만, 전쟁에는 어느정도 마법사들의 힘이 필 요하다는 것은 잘알고 있습니다. 전 조금이나마, 아스탄샤와 폐하와 조약을 맺으신 로히 얀스 황태자 전하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재상님의 말씀대로 저는 폐하의 성은 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저의 지위에 합당한 공을 세우고 싶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프리실라는 한숨을 내쉬어보였다. 그녀는 어쩌면, 내가 미카엔을 보이 지 않는 곳에서나마 돕고 싶어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좋소! 라비스. 그대를 이번 전쟁 참전 마법사로 임명하겠어요! 하지만, 그대가 나를 실망시 킨다면 나는 그대를 용서하지 않겠어요!" 프리실라는 나를 보며 그렇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왠지 부담감 같은 것이 생겨 나는 나였다. 프리실라가 말한 실망시키는 일이란, 생각해보면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나로 인해 전쟁이 안좋게 흘러가면 나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이겠고, 또 하나 여왕이 아끼 는 나의 아름다운 외모에 흠집을 내며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긴 말인 듯 싶었다. "폐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프리실라에게 그렇게 답하므로서, 나의 참전에 확정이 되었다. '휴~ 이제 곧, 시작될 동대륙의 혼란속에 발을 내딜 수 있겠군. 과연, 내가 미카엔에게 보이 지 않는 힘이 될 수 있을까? 욱! 머리 아파~ 그렇지 않아도, 내 영혼문제로 혼란스러워 죽겠는데...' 왠지 머리가 지끈 아파오는 나였지만, 일단 일은 저지르고 보았으니 누구에게도 실망감을 안겨주지 말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기다려라~!! 동대륙! 내가 간다!!' 아직 실력이 뛰어난 수준이 아니라서 압박감도 들었지만, 은근히 신이 나는 이 철없는 설레 임은 도대체 무슨 심리일까? [95] 체인지(Change) 제17화 -혼란속의 혼란!- (3) -3- 프리실라가 미카엔에게 약속한 대로, 동대륙의 로히얀스로 원군을 보내기 위해 긴급 군사회 의를 열었던 그날 이후! 프리실라는 즉각적으로 동대륙으로 향할 원군에 대한 군사정비를 마쳤다. 아마도, 미리 전 쟁을 예감하고 있었던 그녀는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역시, 괜히 여 왕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스탄샤의 5일간의 신년 축제가 끝난 후, 5만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군사들... 그야 말로 5만의 대군이 동대륙을 향한 바닷길에 올랐다. 역시,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며 번성 하는 '아스탄샤'답게 인구도 많아서 그런지, 아스탄샤 영토 자체에서 주둔하고 있는 군사들 의 숫자는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내 생각에는 백만대군을 원정에 내보내도 자체 나라 수비에는 전혀 무리가 없을 듯 싶었다. 게다가, 마법사들의 탑까지 있으니... 아무튼, 일개 병사와 기사들 그리고 마법사들을 태운 전함들은 동대륙으로 항해를 시작하였다. 물론, 순항이 되기를 기원하는 주술사들의 제사 를 드리고 출발을 한 것이다. 각 전함마다 마법사들이 몇 명씩 배치되었는데, 나는 선봉대에 배치되지 못하고 후방도 아 닌 중간에 끼어서 가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쨋든, 나도 뭔가를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뼈속까지 얼릴 듯한 겨울바다의 바람을 쐬며,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부디, 많은 피해없이 모든일이 잘 풀렸으면 했다. 나는 미카엔의 나라, -아직 미카엔은 왕이 아니지만- 로히 얀스가 번영하길 바랬다. 그의 나라라면, 비록 있었던 기간은 짧았지만 나 역시, 로히얀스 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미카엔을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 그저, 보고픈 사람이라는 것만 인정했을 뿐이었다. '그래! 내가 미카엔을 생각하는 것은 사랑의 감정이 아닐거야! 착각일 거야! 그저, 나를 좋 아해준 미카엔에 대해 그리움 같은 것이 싹튼 것 뿐이지. 그건 사랑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애정이라고 해야 하겠지.' "라비스?" 그렇게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는데, 누군가 익숙한 목소리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뒤를 돌아 본 나는, 그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이크 선배님? 여긴 왠일이세요?" "정말 맞구나! 설마 했는데.. 너야말로 여긴 왠일이지?" "후훗... 저 이번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어요!" "그래? 나도, 마법사들의 탑 소속 마법사들 중 하나로 뽑혀서 참전하게 되었는데, 이런 우연 이! 이렇게 같은 배에 오르게 되다니, 정말 반갑다!" 제이크는 사람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나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이렇게 바다위에서 전에 한번 동료였던 이를 만나게 되자, 서로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저두요! 근데, 엔젤라 언니와 나머지 분들은 모두 잘지내세요?" "물론, 다 잘지내지! 아, 그리고 이번에 카이엔 녀석도 참전하게 되었어! 그는 후방 쪽에 배 치되었지!" "그랬군요. 잘만하면 얼굴을 볼 수 있겠는데요?" 사실, 나는 제이크를 만나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곳엔 아는 사람이 한명도 없어 외톨이 기분도 들었지만, 모두 남자 뿐인지라 이상하게 위화감이 들기도 했다. 게다가,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병사들의 눈길은 왠지 기분이 나빴다. 물론, 기사들은 혼자 뿐인 레이디에게 잘 대해주려 애를 썼지만, 나의 외모를 보고 찬탄을 하며 얼굴을 뜯어보는 듯한 눈길은, 기분이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 "이정도의 속도라면 도착까지 앞으로 얼마나 걸릴까요?" "흠, 이 전함들은 모두 일반 배들보다는 빠른 편이니, 보통 배들보다는 3, 4일은 앞당겨 도 착할 것 같은데?" 그렇게, 나는 지루한 바다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제이크가 있어서 그에게 마법을 배 우는 것에 몰두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심심한 것은 심심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동대륙에 도착하기까지 하루하고도 반나절 정도를 남기고 있었을 때! 갑자기 모든 전함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었다. "무슨 일이지요?" 뭔가 일이 있는 듯 허둥대는 한 기사에게 내가 그렇게 묻자, 그 기사는 나에게 외치듯이 답 했다. "인페르디아의 것으로 보이는 배들이 보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미리 올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는 듯 합니다. 해상전이 있을 듯하니, 대비하십시오!" 퍼엉~!! 비록 적과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인페르디아군들은 선전포고라도 하려는 듯이 몇발 의 대포알을 우리쪽으로 쏘아보냈다. 물론, 그 대포알들은 아스탄샤 전함까지 사정거리가 닿지 않았지만 그 근처로 떨어진 여파로 인해 배가 약간 흔들렸다. "어, 어떻하죠?" 나는 불안해진 목소리로 제이크에게 입을 열었다. "기다려 봐야지!" "혹시, 저기에 뛰어난 마법사가 있어서 우리에게 메테오(운석을 소환하는 최강마법)를 떨어 뜨리거나 그러지는 않겠죠?" "후후... 그러지는 못할 거다! 우선 저들은 마법이 별로 발달되어 있지 않아서 뛰어난 마법 사가 드물지! 한마디로 모두 적당한 마법밖에 쓸 줄 모르는 어설픈 마법사 밖에 없다는 얘기야! 그리고, 만약 여기서 메테오를 떨어뜨리면 저들도 피해 입을걸? 땅에서 보다 바 다에서는, 그 충격여파가 멀리 퍼지니 저들 배가 모조리 뒤집어지겠지. 물론, 일반 공격마 법도 사정거리가 닿지 못할 거야!" 그렇게 무겁게만 느껴지는 얼마의 시간이 흘러가고, 아까 대포알을 쏘아보내고 나서, 별다 른 반응이 없던 인페르디아의 전함들은 갑자기 움직임을 보였다. 그것은 우리쪽으로 다가 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진을 이루려는 듯 어떠한 형태로서 전함의 자리배치를 하였다. '무슨 속셈이지?' 아무런 사정거리도 안되는 곳에서 서로 이렇게 노려만 보고 있자니, 정말 답답해지는 나였 다. 잠시 후, 인페르디아 전함에서 어떠한 조짐이 보였다. "앗!!" 인페르디아 전함에서 뭔가가 날아오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조금 크기가 큰 대형 화살이었 다. 그것들은 모두 촉에 불이 붙어서 소낙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곧 우리쪽 전함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불이다! 어서 불을 꺼!!" 곧, 우리 쪽 병사들과 장군급 기사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하였고, 곧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 다. "아! 저렇게 긴 사정거리를 가진 신무기라니! 인페르디아가 기술방면에서는 탁월한 솜씨를 지닌 것을 간과했군! 이러다, 싸움도 못해보고 당하겠어." 급속도로 번져가는 불을 보며, 제이크는 파리해진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96] 체인지(Change) 제17화 -혼란속의 혼란!- (4) -4- "안되겠다! 차라리 사정권 안으로 들어가서 우리도 맞서 싸우자!!" 잠시 불을 끄느라 우왕좌왕하던 기사들은 곧, 정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안되겠 다 싶었는지, 피해가 심하더라도 사정권 안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서 공격하기로 마음먹었 는지, 그렇게 군사에게 외쳤다. 마법사들은 허둥대며 불을 끄기 위한 마법스펠을 외우고 병사들은 싸움도 하기 전에 사기가 저하되는 등, 정말 난장판이었다. 한심하게 느껴지는 첫 싸움이었다. 도대체 지휘자가 누 구인지... '이러면 질 것이 뻔한데!' 나는 내 주위로 실드를 치고 정령들을 불러내었다. 그리고, 아젠샤르의 바람의 힘을 이용해 최고 지휘관이 있을 선봉에 위치한 제일 커다란 전함에게로 날아갔다. 그동안에도 계속 불이 붙은 커다란 화살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어떤 전함들은 미처 불을 끄지 못하고 병사들이 바다로 뛰어드는 것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언뜻 뒤에서 제이크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 듯 했지만, 나는 무작정 앞으로 날아갔다. 곧, 선봉 대장을 발견한 나는 그의 앞에 사뿐히 착지했다. 그러자, 그 선봉대장으로 짐작되 는 중년의 기사는 나의 갑작스런 출현에 놀란 듯 헛바람을 삼키며 뒤로 한발짝 물러났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싱긋 웃고는 입을 열었다. "당장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게 하세요!" 나도 모르게, 부탁으로서가 아니라 명령조로 그에게 말하게 되었는데, 이에 열을 받은 그 기사는 나에게 외쳤다. "아니! 마법사 주제에 건방지게 누구에게 나서는 것이냐?" 쯔쯧... 아마도, 이자는 목소리만 무지하게 큰 위인인 듯 싶었다. "이대로는 우리가 불리합니다. 질 것이 뻔해요! 부디 뒤로 물러나도록 명령을 내려주세요! 저에게 방법이 있으니 맡겨 주세요." "비켜라!! 건방진..." 그의 오만하고도 답답한 태도에 나는 울컥했지만, 우선 그를 무시해서라도 인페르디아를 막 는 것이 급선무인 듯 싶었다. 그래서... "리엔!!" 나는 리엔시타를 불렀다. 그러자 금세 나의 앞에 아름다운 한 소녀의 모습이 나타났는데, 그녀를 본 기사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부탁이 있어! 혹시, 바다의 정령 라센샤르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저들을 뒤집을 수 있 도록!"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 근처에 있던 기사들은 모두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바다의 정령 라 센샤르라... 방금, 자신이 잘못들은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되는지 모두 자신의 귀를 후볐다. 바다의 정령 라센샤르라면, 모든 정령들 중에서도 제일 으뜸인 정령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 거의 신격화되어 있었을 정도이니... 어부들은 종종 라센샤르에게 순풍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기도 했었다. 게다가, 드래곤들도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 바다의 정령, 라센샤르였다. 이 세상에 바다의 정령만큼 광범위한 힘을 가진 정령은 다시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라센샤르가 리엔시타의 부탁을 들어줄지 의문이었다. 예전에 리엔시타 본인의 말로는 라센샤르는 자신을 특별히 아낀다고 말했지만, 대가없이 인명에 피해를 주라는 부 탁을 들어줄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아무튼 리엔시타를 바다로 보내고나서, 나는 아젠샤르에게도 명령을 내리는 말을 했다. 아 젠샤르는 라센샤르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바다의 기운을 받아들인 강력한 바람의 정령 이었기에, 그의 힘만으로도 많은 힘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아젠! 저 배들을 날려버려!!" 퍽이나 과격한 어조로 아젠샤르에게 명령을 내리는 나. 그리고, 샤르에게도 일거리를 내주 었다. "샤르! 저 배들에게 불을 붙여! 그건 네 전문이지?" 그렇게 해서, 인페르디아와 아스탄샤의 전면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저쪽에도 안되겠다 싶 었는지 결국 거리를 좁혀왔고, 화살 소나기를 퍼붓거나 마법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도 공격을 퍼부었는데, 이렇게 되자 양쪽 다 소모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둘 다, 그렇게 무턱대고 공격을 감행하게 되니, 소모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몇몇 인페르디아의 전함과 아스탄샤의 전함은 맞부딪혀서, 이제는 서로 전함끼리 왕래하며(?) 병사들끼리의 싸움도 시작되었다. 물론, 인페르디아의 많은 배들이 아젠샤르 에게 그리고 뒤늦게 힘을 드러낸 라센샤르에 의해 뒤집어지긴 했지만, 워낙 많은 수의 전 함들이 있었으니, 아직도 멀쩡히 남아있는 전함들이 꽤 되었다. 하지만, 어느덧 승세는 우 리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하하하하!!! 역시, 아스탄샤군이다! 인페르디아 녀석들을 남김없이 다 쓸어버려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쩔 줄을 몰라하며 식은땀을 흘리던 선봉대장이라는 저 녀석은 어느 새 기세가 살아났는지, 듣기 싫은 웃음소리를 내며 깔깔대고 있었다. 은근히 얄미운 생각이 드는 나였다. 그나저나... 아비규환! 지금 이광경이 말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나가기 시작 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나는 왠지 죄책감 같은 것이 느껴 지기 시작했다. '저들을 과연 모조리 쓸어버려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착잡해진 눈길로, 마법의 불덩이와 화살이 난무하고 검으로 서로의 몸통을 쑤시는 광경을 바라보는데, 저기에 있는 마법사들 중 누군가가 내 존재에 대해 알아차렸는지 이 렇게 외쳤다. "저 여자다! 저 마법사가 조금전 무서운 마법을 부린 여자야!!!" 그렇게 되자, 저들은 나를 죽이려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나에게로 날아오는 파이어볼을 보고는 얼른 실드를 쳤고, 정령들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저들에게 더욱 공격을 세차게 퍼 부었다.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다. 전쟁에 참여 하겠다고 했던 나의 행동에 대해 조금씩 후회가 들 기 시작했다. 곧, 선봉대장과 내가 타고 있는 전함은 조금씩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승세는 기울어졌고 나머지는 군사들과 마법사들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왠지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푸른빛의 바다는 곧 피빛으로 물들었고, 피냄새를 맡은 식 인상어떼 비슷한 것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피의 바다... 인간들의 싸움으로 인해 푸르던 바다는 붉은 빛으로 그렇게 물들어 갔다. "미안해요! 라센샤르. 괜히 당신을 끌어들여 안좋은 꼴을 보이고 당신의 몸을 더럽히게 되 었군요!" 내가 그렇게 바다를 향해 중얼거리자, 어디선가 파도소리에 섞여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미안해 할 것 없어요. 어차피, 나는 당신을 돕고 싶었으니깐요... 하지만, 당신은 기억해야 만 할 거에요! 내가 지금 당신을 도왔다는 것을... 이 라센샤르가 라비스를 도왔다는 것을...] 라센샤르의 음성이 그렇게 들리고는, 다시 파도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라비스! 라센샤르는 나를 아낀다고는 하지만, 그저 그것으로 인간의 일에는 끼어들지는 않 았었을 거야! 라센샤르는 너를 돕고자 했어. 그녀가 왜 너를 도왔는지 모르지만, 아무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그녀가 너에게 그렇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대단한 거야! 자신의 몸을 피로 물들여가면서 말이야!" "왜? 왜 그렇지? 난 아무것도 아닌데? 난 바보였었나봐! 전쟁이 이렇게 비참하고 무서운 것 인 줄 몰랐어! 나로 인해서 도대체 몇 명이 죽은 거지?" 리엔시타의 말에 내가 그렇게 외치자, 곁으로 돌아와 있던 샤르가 눈쌀을 찌푸렸다. "라비스! 너 또 시작된 거냐? 정말 그렇게 한심하게 굴거야?" 왠지, 차갑게 느껴지는 얼굴로 나를 다그치는 샤르를, 나는 동그레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97] 체인지(Change) 제17화 -혼란속의 혼란!- (5) -5- "그렇게 나약한 소리할거면 전쟁에 뭐하러 따라나왔어? 전쟁이 뭐, 애들 장난인 줄 알았던 거야? 더 이상 희생이 나는 것이 싫다면, 네가 전쟁을 되도록 빨리 종료시켜! 그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니깐!!" 역시, 누구를 다그치는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샤르인 듯 했다. 마치 무서운 사감선생님의 꾸 중이라도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절로 쫄아드는 나였지만, 역시 샤르의 다그침에 발끈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래! 내가 이 전쟁을 종식시키면 되잖아? 왜 소리지르고 난리얏!" 나와 샤르가 그렇게 말다툼을 하고 있는데, 그 옆에서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선봉 대장은 나와 샤르의 사이를 끼어들 틈을 눈치보고 있다가, 내가 소리를 지른 후, 씩씩거리는 틈을 타 잽싸게 입을 열었다. "그대는 어느 부대 소속 마법사인가? 정말 그대의 공이 크군!" "전 따로 소속 따윈 없어요! 제 소개를 하자면, 여왕 폐하를 직접 모시고 있는 호위 마법사 라비스 크로시벨이라 합니다." 여전히 건방진 기색이 도는 나의 말투였지만, 그 기사는 그것을 따질 겨를이 못되었다. "폐하의 호위 마법사라구요? 그, 그런데 어째서 전쟁에 참전하셨는지?" 어느덧 그의 오만한 말투가 경어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씨익 웃어보이고 는 입을 열었다. "제가 자원했지요! 그나저나, 대장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군요." "뭡니까?" "저를 선봉대의 지휘 마법사로 임명해주십시오!" 왠지, 요즘들어 내가 오만불손해지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내가 편안히 활동하자면 그러한 요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번 전투는 거의 나로 인해 승리를 한 셈이니, 이 정도 요구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 기사는 잠시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듯 하더니, 결국 나의 공을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나 의 요구를 수락하였다. 어쨋든, 거의 승세를 잡은 우리 아스탄샤군은 오후쯤에는 거의 적들을 몰살시켰고, 그로 인 해 저녁때에는 아스탄샤군은 거의 축제 분위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갑작스레 맞이한 첫 번째 전투치고는 큰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제이크가 있는 배로 이동해 가서, 제이크 그리고 나머지 기사들과 마법사들과 함께 승 리를 자축하는 술을 마셨다. 독한 술, 한잔 반을 마시고 알딸딸해진 나는 갑판 위로 나가서 바다 바람을 쐬었다. 그러자, 제이크가 나를 따라나왔다. 나의 멍한 표정을 본, 제이크는 나에게 문득 물었다. "라비스! 혹시, 두고 온 약혼자라도 있나? 왜 그렇게 표정이 그리움에 젖은 것 같지?" "훗... 정말 대단하시네요! 제이크 선배. 내가 누굴 그리워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요?" "표정에 다 써있어!" "어? 그렇게 티가 나요?" "하하! 아니, 그런 것은 아니고 내가 그런 눈치는 좀 빠른 편이거든! 혹시, 상대가 누구인지 나에게 말해줄 수는 없나? 내가 조언은 해줄 수 있는데. 나는 실전경험은 별로 없지만 이 론은 빠삭하다구!" 왠지 익살스러운 제이크의 표정과 말투에 나는 편안함을 느꼈다. "훗... 그렇다면, 말해드리지요! 음, 그는 지금 동대륙에 있는데 나이는 현재 24살이에요! 그 는 부담스러울 만큼, 높은 위치에 있는데다가, 모든 것을 다 갖춘 완벽한 남자이지요! 전 그가 못견딜 정도로 보고 싶다가도, 이내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을 스스로 의심하곤 합니다." "으흠, 왠지 미묘복잡하군! 원래 연애 감정이란 것이 다 그렇지만... 그럼, 그도 너를 사랑하 고 있나? 아마도. 그렇겠지? 라비스 정도되는 미인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배길테니깐." "글쎄요..." 나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어보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다소 심각해진 얼굴의 제이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라비스! 그는 지금 동대륙에 있는데, 왜 라비스는 서대륙에 있는 것이지? 서로 좋아한다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와 전 떨어져 있어야만 해요! 그렇지 않다면, 저는 저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되 거든요!" 나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면, 그것은... 지금으로선,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 미카엔의 곁 에 있게 되면, 나는 완벽한 라비스가 되어야 하고, 그러자면 본래의 나는 버려야 하기 때 문이었다. "...그래도, 보고 싶겠지? 라비스가 사랑하는 사람 말이야!" "네! 보고싶긴 해요. 하지만, 나는 그에게 갈 수가 없어요!" 나는 울 듯이 말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시커먼 밤바다가 나의 시야로 들어왔다. "으흠..." 제이크는 뭔가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그 역시, 바다를 향해 고개를 떨구더니, 이내 다시 입 을 열었다. "라비스! 내가 좋은 수를 가르쳐 줄까? 라비스가 그에게 다가가지 않아도, 그를 볼 수 있는 방법! 일명 엿보기 마법이라고, 내가 개발 응용한 마법인데... 꽤나 쓸모있는 마법이야!" "엿보기 마법이요? 무슨 이름이 그래요? 왠지 사이비 마법같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제이크는 그의 진지한 얼굴을 살짝 찌푸리더니, 나에게 따지듯이 말했 다. "어허! 라비스. 이 선배가 모처럼 좋은 거 가르쳐주겠다는데, 뭐? 사이비? 에잇~ 안가르쳐 줄까 보다!" 제이크는 나에게 삐졌다는 듯이 등을 돌려보였다. 그런 그를 보자, 나는 웃음이 절로 나왔 다. 나이 들어서, 중년 아저씨가 애교떠는 것도 아니고... 사실, 미카엔에게 마음을 가져서도 안된다는 것을 그에게 미처 못말했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그에게 달래듯 말했다. "어? 제이크 선배님~ 가르쳐 주세요!" '헉! 이러니깐, 꼭 내가 애교떠는 것 같잖아? 애교라고는 눈꼽만치도 허용안했던 나인데...' 결국, 그렇게 해서 나는 마음에도 없는 엿보기 마법을 배우게 되었다. 엿보기 마법이란, 자 신이 익히 알고 있던 어느 장소의 한 물체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가, 마법스펠을 외우며 그 물체는 떠올리면, 그 물체를 매개로 하여, 그 장소가 다른 곳에서도 훤히 보인다는 것이다. '흠, 감시용이나 첩보용으로 꽤 쓸모가 있겠군!' 나는 그러한 생각을 하다가 어떠한 생각이 나의 머리에 스쳤다. "...그런데, 선배님? 이 마법은 왜 개발하셨어요? 어디에다가 쓰시려구요? 혹시, 여자방을 훔 쳐본다든가, 아니면..." 눈을 가늘게 뜬, 나는 그에게 신문하듯 캐물었는데, 제이크는 평소 진지하던 표정의 중년 마법사답지 않게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흥! 제이크 선배님도, 그렇고 그런 사람이었군요. 실망이에요!" "아냐! 오해야!! 라비스으~ 그건 오해야! 그런게 아니라구!!! 난 그저 마법 연구를 하다가 우연하게 개발해서 한번도 그런 것에 써먹은 적이 없단 말이야!!!" 그저 놀리기 위해 한 말인데, 저렇게 쉽게 망가지는 모습을 보이다니! 나는 처절하게 외치 는 제이크를 뒤로 하고, 쉬기 위해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매우 피곤하여 일찍 잠들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호기심 같은 것이 생겼다. '정말, 볼 수 있는 건가? 한번쯤 미카엔의 얼굴을 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 잠깐 얼굴만 보는 것이라면...' 나는 그 엿보기 마법인지 뭔지를 시행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우선, 나는 한번 본적이 있었 던 미카엔의 집무실에 걸려 있는 커다란 그림 하나를 떠올렸다. 그러자, 눈을 감은 나의 앞에 미카엔의 집무실이 흐릿하게 비추어지기 시작했다. '햐~ 꽤나 신기한 마법이네? 하지만, 미카엔이 지금까지 집무실에 있을까?' 잠시 후, 집무실의 모습이 명확히 비추어지기 시작했다. 집무실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헉! 미. 미카엔?' 한명은 미카엔, 나머지 한명은 그의 비서관인 듯 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 기에 호기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 보았다. "정말, 인페르디아의 해군이 아스탄샤에게 완벽히 격파당했단 말인가? 음, 이번에는 조금 위 험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들이 뜻하지 않는 성능 좋은 무기를 개발했던 터라..." "예! 사실, 처음에 아스탄샤로서는 희망이 없는 듯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스탄샤국에서는 한가지 히든 카드를 쥐고 있었다는 군요!" "그것이 무엇이지?"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진 마법사가 있었답니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마법사는 금발 의 미소녀 마법사라고 했었습니다." "금발의 미소녀? 혹시, 그 마법사 정령 마법을 쓰지 않았었나?" "예!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는지?" "풋! 푸하하하~!!! 쿡쿡." "저, 전하?" 미카엔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서 맘껏 웃음을 터뜨려 보이더니, 망연한 얼굴로 그를 지켜보 고있는 비서관에게 입을 열었다. "하하! 정말 재미있군! 그녀가 히든 카드가 될 줄이야! 프리실라 여왕, 정말 재미있는 발상 을 했군! 후훗..." 그렇게 말하며 또 다시 웃음을 터뜨리는 미카엔...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매끈한 이마에 힘줄 하나가 돋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히든 카드인 것이 뭐가 그리 우스운 거얏! 망할 자식!!" [98] 체인지(Change) 제17화 -혼란속의 혼란!- (6) -6- 그렇게 씨근덕거리고 있는데, 정신없이 웃어제끼던 미카엔은 갑자기 웃음을 뚝 멈추더니,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누구냐? 감히, 이곳을 엿보고 있는 자가?" '허걱!' 나는 움찔 놀라며 얼른 마법을 거두어들였다. 이러한 엿보기 마법같은 경우는 상대방이 느 낄 수 있는 마법적 기운이 아주 아주 미미하기 때문에, 거의 들킬 염려가 없을 줄 알았 는데, 역시 하프 드래곤인 미카엔에게는 안통하는 모양이었다. '되게 무섭네~ 간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게다가, 미카엔은 방금 외친 음성에 약간의 드래곤 피어를 담아 내뿜었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조금 전달되어, 나의 몸은 절로 떨려왔다.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한가지가 불현 듯 나의 머리를 스쳤다. '아! 그런데, 미카엔이 어떻게 금발미소녀 마법사가 나라는 것을 금방 알았지? 그렇다면, 미 카엔이 내가 아스탄샤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단 말이야?' 거기까지 생각되자, 나는 얼굴에서 핏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그가 알고 있었다면 왜, 왜 나를 잡으러 오지 않았던 거지?" 갑자기 혼란스러움을 느낀 나는, 머리속을 정리하기 위해 선실밖으로 나갔다. 살을 에일 것 같은 바다바람으로 인한, 추위를 피하기 위해 나는 로브의 후드를 최대한 깊게 눌러썼다. 나의 로브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는데, 로브자락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와 무지하게 추웠다. 그때, 야간근무(?)중인 기사로 보이는 한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소부대장 정 도 되는 직위를 가진, 중하급 기사인 듯 했다. "마법사님! 바람이 찬데, 왜 밖으로 나오셨습니까? 피곤하실테니, 일찍 쉬시지요! 내일 아침 일찍에는 작전회의에 참석도 해야하지 않습니까? 추우실텐데, 이거라도..." 유난히 창백해보이는 피부에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한 청년이었다. 그는 레이디를 향한 기사도 정신이 발휘되었는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이 두르고 있던 엄청 두껍고 따 스해보이는 털목도리를 나에게 건넸다. '내가 보기엔, 네가 더 추워보이는데... 입술 색깔도 파리해졌구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사양없이 그 목도리를 받았다. 그러자, 그 기사청년은 내가 목도 리를 받은 것이 매우 기쁜지, 활짝 웃어보였다. 순박한 시골청년의 기색이 도는 웃음이었 지만, 내가 보기엔 그가 이 목도리를 건넨 것은 단순한 기사도 정신뿐만 아니라, 나에 대 해 경외심 비슷한 감정도 품고 있는 듯 했다. 물론, 그가 그러한 경외심을 갖는 것은 나 의 외모가 큰 작용을 했겠지만. '이러다, 공주병에 걸리겠어...' "샤르!" 앉을만한 적당한 곳에 앉은 나는 샤르를 불렀다. 그러자, 보기만해도 따뜻해질 것 같은 진 한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샤르가 곧바로 등장했고, 청년기사는 갑작스레 등장한 샤르의 출현에 놀란 듯 눈이 약간 커졌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한번 빙긋 웃어주었고, 금세 그 효과가 나타나 그 기사는 황홀한 듯 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불 쬐게 불덩어리 한 개 만들어줘!" "알았어!" 샤르는 한번 손짓을 하여, 장작없는 작은 모닥불 하나를 만들어내더니, 정말 추워죽겠다는 듯이 어깨를 오돌오돌 떨며 나에게 말했다. "이젠 됐지? 나 간다~" 그렇게 말하며, 나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횅하니 가버리는 샤르... "방금, 저 남자는 누구죠?" 그의 질문에 나는 다시 방긋 웃어보이며 답했다. "불의 정령이에요!" "아!" 아무튼, 나는 생각하기 위한 여건이 만들어지자, 머리속을 차근차근 정리해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 옆에서 같이 불을 쬐고 있는 청년기사는 금세 나에게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물론, 지나가는 병사나 누군가가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야심한 시각에 한 커플이 데이트 를 즐긴다 하겠지만, 그동안 별별 스켄들에 시달려왔던 나는 이제 소문날 거리가 만들어 지는 그 계기에도 무심해졌다. '흠... 그때, 아스탄샤국에 미카엔이 왔었을 때 조금 미심쩍긴 했어. 특히 헤어질때는 그가 지나가는 말투로, 언젠가 다시 놓고간 보물을 찾으러 아스탄샤에 들릴지도 모른다고 했 었지. 그렇다면, 그가 그때 나를 두고 했던 말이었을까? 그런데, 왜 그때 나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았던 것이지? 아! 그리고 보니, 그때 접견실에서 프리실라가 미카엔의 취향을 물 었을 때, 그는 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금발의 소녀를 말했었지. 그리고, 나의 얼굴을 보려고 했었어. 난 그를 피해서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왔고... 그렇다면, 미카엔은 이미 그 때부터 나를 눈치채고 있었던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막상 그렇게 생각하고 보자 그럴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느껴졌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지? 그가 나를 찾아오지 않는 이유는, 내가 아스탄샤에서 더 이상 다른 곳으로 갈 염려가 없다고 여겨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새 나를 잊은 것일까?' 나는 조금전 마법으로 보았던 그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맑고도 다소 경쾌하게 느껴 지는 그의 웃음소리가 나의 귓전에서 들리는 듯했다. 그의 웃음소리는 정말 듣기가 좋아서, 마치 음악을 듣고 있는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어느덧, 나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걸리었다. 하지만, 미카엔이 나를 잊었을지도 모르겠 다는 불길한 생각도 들자, 의아스럽게도 우울한 기분도 들기 시작했다. 오히려 그가 나를 잊기를 바랬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더니... 특히, 여자는 더욱 더! "내일 오전 중이면 대륙에 도착을 하겠군요." 문득, 들려온 기사의 목소리... 나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그에게 답변하듯 중얼거렸다. "그렇겠군요... 별탈없이 빨리 전쟁이 끝나야 할텐데."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가 지나가고 전쟁으로 불안한 우리들의 마음에 희망이라도 심어주려는 듯 다시 밝은 태양이 얼굴을 내밀은 아침이 왔다. 나는 선봉대장이 타고 있는 전함의 한 선실안에서 여러 참모들과 장군들과 함께 작전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군사지식에 대해서는 전무한 나는, 어렵고 생소하기 짝이 없는 군사용 어가난무하는 저들의 말소리에 열심히 귀를 귀울여야 했다. "어제처럼, 인페르디아가 또 어떠한 신무기를 가지고 공격을 할지 모릅니다." "어제는 정말 아찔했습니다. 저들은 우리가 올 것을 대비해 철저한 전략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초반에 불화살을 무자비하게 쏘아댔던 것은 우리측 마법사들의 공격력을 마비시키려던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맞습니다. 어제 우리측 마법사들은 거의 불을 끄느라 정신없었지 않습니까?" "또 어제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역시 마법사들도 체계적인 전략에 따라 움직 여야 할 것입니다. 흠, 그러기 위해서는... 크로시벨 마법사님?" 지루한 작전회의에 나는 하품을 찢어지게 하다가 갑작스럽게 나를 부르는 호칭에 나는 화들 짝 놀라 얼른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나를 불렀던 선봉 대장은 얼굴을 살짝 찌푸 렸다. '쳇~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렇다고 얼굴을 구길 것은 뭐람!' 나는 속으로 투덜대며 그의 부름에 간단히 답했다. "네?" "흠흠, 다음에 있을 인페르디아와의 국경지방 '테헤란'에서의 전투는 어떻게 대처하실 생각 이십니까?" "음... 그거야, 마법사들은 안전한 후방에서 군사들의 싸움에 적절히 도움을 주게 할 생각입 니다. 게다가, 저에겐 신성력을 갖춘 론티아 정령이 있으니, 장군급 기사들의 부상에는 그때 그때 치유를 해줄 생각이고... 그리고, 마법사들에게는 전방에 실드를 치게 할 것입니다. 물론, 커다란 실드를 유지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니, 조를 나누어서 교대로 치게 해야 하겠죠! 또한 계속적으로 실드를 치는 것은 힘드니 적절한 시기에... 그리고, 저는 전방 에서 직접 정령들을 이용해 공격을 가하는데에 앞장을 설 것입니다." [99] 체인지(Change) 제18화 -사랑과 전쟁- (1) (사랑과 전쟁) -1-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몇번의 접전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서로들 몸을 사리느라 별다른 성 과없이 끝마쳐지곤 했다. 날씨는 점점 매서워져 갔고 병사들은 지쳐갔다. 그리고 마법사 들은 그 마력이 고갈되어가니, 나로서는 이러한 장기전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나는 제대로 목욕을 하지 못해, 갈수록 꾀죄죄해져가는 나의 모습과 맛없는 음식들 이 나를 더욱 짜증나게 하였다. 나의 이러한 현상은 왕성 생할에 익숙해져있던 탓일 듯 했다. 역시, 습관은 무서운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뭔가 대책을 강구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가다간 희생만 더욱 늘어날 뿐이었다. 게다가, 이 많은 군사들의 허기를 채우려면 엄청난 량의 군량이 필요할 듯 싶 었는데, 그렇게 되면, 로히얀스의 식량이 바닥나서 백성들이 허기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아~ 내가 이런 기특한 생각까지 하다니!' 그 와중에 자아도취에 빠지는 나... 정말 요즘들어, 대책없이 오만해지고 공주병에 시건방져 지는 것 같아 스스로도 걱정이 되었다. 예전에 내가 이세계에 온지 얼마 안되었을 때에는, 뭐든지 내색하지 않고 조심하며 누군가 의 심기에, 특히 왕족의 심기에 거스르지 않으려 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왕족이고 귀족 이고 뵈는게 없어진 듯 하니, 이러다간 나중에는 그 오만함이 하늘을 찌를까 심히 걱정 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미적지근한 전투 속에 한번의 대격돌이 일어났다. 그것은... 전투에 직접 나타난 미카엔과 인페르디아국의 고위 마족이 붙은 것이었다. 그날! 이곳의 모 든 장수들과 병사들은 모두 한순간에 엑스트라가 되어버렸다. 궁극의 공격 마법이 연타로 미카엔에 의해서 발현되었고 고위 마족에 의한 어둠의 마법, 죽 음의 마법, 대단한 소환술이 수많은 우리들의 눈앞에 선보여졌다. 정말, 무시무시했다.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찌 내가 저 싸움에 끼어들 수 있 겠는가? 다른 여타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고 말지! 가 끔가다가 저들의 싸움에 미처 못피한 몇몇 병사들이 휘말리기도 했다. 그들의 싸움으로 인해, 하늘이 번쩍 번쩍 갈라지는 듯 했고, 마치 마계로 떨어진 듯 희한하 고도 징그럽게 생긴 마수들이 멀쩡한 이땅에 불쑥 불쑥 나타났다가 미카엔에 의해 사라 졌다. 정말 환상적인(?) 싸움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그 강함에 나는 탄복을 넘어서서 경외감마저 들었다. 한마디로 반할 지경이었다는 말이다. 나는 조무래기 마물들이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으로 오지 못하도록 리엔시타와 아멘시타에 게 실드를 치게끔 했다. 아! 아멘시타는 신성력을 사용하니, 실드가 아니라 디바인 파워( 신의 힘, 성직자들이 쓰는 신성력)인 오오라를 발하였다. 아멘시타가 쓰는 디바인 파워는 마물들에게 효과만점이었다. 오오라가 닿기만 해도 지직! 하며 타버렸으니... 그러다, 날이 어두워지고, 세상을 뒤집어 엎을 듯하던 싸움은 끝이 났다. 마족 여자는 부상 을 입고 달아났고, 미카엔은 매우 지친 듯, 게다가 약간의 상처도 입어 임시거처로 들어 갔다. 물론, 나는 미카엔의 상태가 궁금하여 그에게 가보고 싶었지만, 꾹 내리참았다. 그와 마주치면, 그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멘시타! 이 전쟁이 빨리 끝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로브 주머니에 작은 새의 모습으로 들어있는 아멘시타에게 나는 물었다. [그거야, 이 전쟁의 원인인 인페르디아의 왕이 사라져야 하겠지! 그 다음엔 고위 마족이 마 계로 돌아가거나 소멸해야 하겠고...] "휴~ 걱정이야! 루젠다르 국경 근방인 세젠느 강 유역에서도 충돌이 있었다는데... 미카엔이 힘들겠어!" [훗! 너 부정하고는 있지만, 황태자 생각 뿐이구나. 왠만하면 인정하지 그래!] 아멘시타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나는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뜨끔한 나의 감정을 숨기고 대신 화가 치밀은 척을 하며 그에게 외쳤다. "인정하다니! 뭘? 아멘시타, 착각하지마! 난 라비스가 아니고 이도현이야!!" 그러자, 아멘시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마도, 내가 바보같아서이겠지... 나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난 이 전쟁의 씨앗인 인페르디아의 왕을 제거해야 하겠어! 그래야, 많은 이들이 고통받을 전쟁이 금방 끝이 나겠지!" [뭐엇?!] "아멘시타! 내가 인페르디아 왕성으로 의심없이 잠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는 그에게 물었다. [너, 농담이지?] "미안하지만, 진담이야." [안돼! 너 이러는 행동은 너무 바보같아! 잘못하면, 네가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을 하겠 다고? 넌 황태자를 사랑하잖아? 그럼, 인정해! 그를... 아니면, 그를 완전히 잊던가. 네 자 신을 위해서! 이렇게 어정쩡하게 행동할 거면 그만둬!] "난 미카엔을 위해서 그러겠다는 것이 아니야! 이 전쟁을 피해없이 빨리 끝내게 하려고 그 러는 거야!" [과연 그럴까? 네가 황태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정말 이 위험한 일을 자처하려 했 을까?] 나의 마음을 뚫어보는 듯한 아멘시타의 눈길을 피하며, 나는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대로 본래의 내 자신이었던 이도현을 쉽게 버리고 싶지 않아! 날 이해해줘. 아멘시타. 난 가끔은 미카엔을 생각하는 이 마음은 라비스의 것이라 생각하며 저주하고는 해! 이런 내가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 거니? 미카엔을 생각하는 만큼, 지금은 묻혀진, 내 자신도 너무나 사랑하는데... 만약, 내 자신을 버리게 되면, 난 그대로 사라질 것만 같아 너무도 무서운데... 바보같다고 생각해도 좋아! 나도 잘 아니깐... 미카 엔을 떠나 있으면 언젠가 그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겠지." 그러자, 나의 괴로운 마음이 아멘시타에게 전달되었는지,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흑! 흐흑... 너무 괴로워 하지마! 네가 괴로워할 때마다, 나도 마음이 아파! 하지만, 네 곁 엔 우리들이 있잖아? 리엔이랑 샤르, 아젠이...] 아멘시타도 리엔시타 못지 않게 울보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있 는데, 아멘시타는 저리도 서럽게 울고 있으니... 내가 그에게 못되게 굴어 울린 것 같은, 말도 안되는 죄책감마저도 들었다. "아멘시타! 난 강해질 거야. 무슨 짓을 해서든지...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 독해져야 하겠고! 그렇게 되면, 괴로운 일은 적어지겠지. 아니! 괴로운 일이 적어지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을 느끼는 감정이 무뎌지겠지. 나에게 있는 모든 감정을 죽였으면 좋겠어! 그러면, 사랑도 느 낄 필요 없을테니깐." 그러자, 아멘시타는 무지 놀란 모습을 해보였다. '내가 너무 무섭게 보였나?' 그의 모습에 찔끔한 나는, 나도 모르게 격해진 감정을 풀고 아멘시타에게 생긋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날밤 나는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물론, 정령들은 나의 이러한 행동을 말렸으나 나의 고집을 꺽을 수는 없었다. 결국은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인페르디아를 향해 국경을 넘게 되었는데, 아젠샤르의 바람의 힘으로 적의 눈에 띄지 않게끔 최대한 높은 고도에서 하늘을 날아 국경을 넘었고, 단숨에 인페르디아의 왕성까지 당도하였다. 리엔시타는 나와 정령들의 기운을 최대한 감추기 위해 노력을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다. 다 행히 마족 여자는 이곳 왕성 안에 없는 듯 해서, 잠입을 할 때 들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나가는 시녀 한명을 붙잡아 기절시킨 뒤, 그녀의 시녀복을 빼앗아 입고는 리엔시 타가 일러주는 왕의 침실로 발걸음을 하였다. 물론, 리엔시타가 주방에서 몰래 타서 가져온 찻잔을 손에 든채 말이다. 가끔 지나가는 시종과 시녀들이 있었지만, 나에게 특별히 의심을 품지는 않았다. 그저, 이곳 에 들어오지 얼마 안된 시녀로만 생각하는 듯 했다. "이곳이야." 리엔시타가 공기중의 습기의 형태로 잠입을 한 상태로 나에게 나직히 속삭였다. "너희는 이곳에 있어. 왕의 침실에는 탐지 마법 같은 것이 더욱 많이 걸려있을테니..." "조심해! 라비스..." 리엔시타는 조심스레 나에게 속삭였다. 그런 그녀의 당부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른침 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침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폐하! 들어가도 되겠사옵니까?" "누구냐?" 그러자, 안에서 중년의 묵직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밤 시중들을 '리나'라고 합니다." 나는 아무 이름이나 생각나는 여자이름으로 둘러대며 그렇게 말하고는 인페르디아 왕의 답 변을 기다렸다. "흐음, 오늘은 여자를 부른 적이 없는데... 어쨌든, 들어오너라!" 그의 말에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제법 독특하게 느 껴지는 가구들과 장식물들로 꾸며진 화려한 방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에휴~ 오늘은 내가 생애 최고로 가증스러운 행동을 하게 될 날이 되겠군.' [100] 체인지(Change) 제18화 -사랑과 전쟁- (2) -2- 방으로 들어간 나는, 화사하게 미소짓는 얼굴로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인페르디아의 왕은 짙은 밤갈색 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30대의 후반의 남자였는데, 제법 까다롭게 생겨서 나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음, 오늘은 '자르' 녀석이 굉장한 미인을 구해 들여보냈군. 네 이름이 '리나'라고 했나?" "네, 폐하." "하하, 그동안 별볼일 없는 계집들에게 신물이 나있던 참이었는데, 네 나이가 몇이더냐?" "열 여덜입니다." "호오~ 좋은 나이로고!" '그래... 좋은 나이이긴 하지. 그나저나, 왕족들은 원래 다 이렇게 문란한 것인가? 그렇다면, 미카엔도?' 나는 쓸떼없는 생각을 하며, 조신한 태도로, 그의 앞에 서있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그의 말에 나는 쭈뼛쭈뼛해 보였다. 그러자, 그는 내가 부끄러워 하는 것이라 지레 짐작하 고는 가볍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이러한 것은 처음일테지?" '흑! 닭살 돋아서 죽을 지경이야~ 남자를 유혹하는 일은 생전 처음인 것은 맞기는 맞지.'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침대로 와서 누워라! 나는 기다리는 것은 딱 질색이다. 수줍음이라는 것도 지나치면 짜증 이 나기 마련이거든." 그의 말에 나는 움찔하며 그가 있는 침대로 다가왔다. '하나님! 예수님! 부처님! 알라신... 또 이곳의 신 라덴이시여!' 나는 그동안 찾지 않았던 신들을 다시 주욱 열거하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아! 창조의 신이 라던 라덴을 하나 더 추가하여 부르짖기는 했다. 아무튼 내가 그에게 다가가자, 그는 손을 들어 나의 팔목을 움켜잡더니, 확 잡아끌었다. 그 러자, 나는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품에 안기는 꼴이 되었고, 그는 그렇게 나를 안더니 침대에 털썩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우에엑~!!!' 그렇게 나를 쓰러뜨린 그는, 뭐가 그리 급한지 다짜고짜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내가, 다가 오는 그의 입술을 필사적으로 피하자 그는 나의 목줄기에다가 그의 입술을 옮겼다. '젠장! 넌 꼭 기필고 내손으로 아작낼 것이야!! 그나저나, 이곳에서 마법을 쓰면 그대로 다 른 마법사들에게 들킬텐데...' 나는 마법스펠을 외우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잠시동안만 내 자신을 희생하기로 했다. 그렇 게 생각한 내가 그에게 저항하는 것을 멈추자, 그는 조금 느슨해진 태도로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득의에 찬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속이 뒤틀렸으나, 다시 다가오는 그의 탐욕에 찬 입술을 아무 저항없이 받아주었다. '훗! 이것이 너에게 마지막이 되는 죽음의 키스가 될 거다!' 나는 그가 정신없는 틈을 타, 조심스럽게 머리를 고정시키고 있던 머리핀을 빼내었다. 그러 자, 끝이 날카로운 비녀처럼 생긴 5인치 정도 되어보이는 핀이 빠져나왔고 나는, 그것을 힘껏 인페르디아 왕의 정수리에 박았다. "크헉!!" 곧, 사방으로 붉은 피가 튀며 인페르디아 왕은 외마디의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는 즉사 를 한 듯 한번 꿈틀하고는 더 이상 움직이질 못했다. 그것을 본 나는 잽싸게 침대에서 빠 져나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방을 나왔다. 그러자, 리엔시타가 걱정스런 기색으로 모습 을 드러내었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자!" 나는 파리해진 안색으로 그녀에게 외쳤고, 창문을 향해 내달렸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아 젠샤르가 나에게 바람을 날리려 하였다. 그러나... "넌, 누구냐?" 어둡고 서늘한 기운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검은 천의 옷을 걸친 한 소녀가 나에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마도, 공간이동으로서 나타난 모양이었다. "헉!" "아니! 너, 넌 로히얀스 황태자의 애첩?" 예전, 한번 마주친 적이 있었던 고위 마족여자... 그녀가 나를 알아보는 것을 보며 나는 순 간,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하였다. "인페르디아왕의 침실에 불길함이 느껴져서 와보았더니, 네가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다니! 무슨 짓을 한 거지?" 이쯤 되자, 나는 이판사판이 되었다. "샤르! 아젠! 리엔! 아멘시타! 모두 나와 저 여자를 공격해!!" 그러자, 정령들은 모두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어 마족 여자에게 각각의 방법으로 공격을 날 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멘시타는 오오라로서 나를 보호했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나의 정령이라도, 고위 마족을 이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녀는 미카엔하고도 상대했던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곧, 인페르디아의 고요하던 왕성은 난장판이 되었다. 그렇게 되자, 이곳 왕성에 있는 기사와 마법사들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나는 금세 막다른 길에 몰린 쥐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라비스! 너 혼자라도 도망쳐!" 샤르가 마족 여자에게 불길을 내뿜으며 나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나의 발길은 차마 떨어지 지가 않았다. "어림없는 소리! 감히 네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마족 여자는 그렇게 호통을 치며, 검은빛의 작은 병을 꺼내들어 바닥에 내리쳤다. 그러자, 그 병이 깨지며 그 주변으로 검은색의 짙은 안개 같은 것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헉! 저건 뭐지?' 나는 절망감으로 인해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검은 안개가 나의 근처로 다가온 순간, 아멘 시타의 오오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라비스!!" 정령중 하나가 나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고, 나는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호호호~! 걱정말아라! 이것은 단순한 수면제 같은 것일 뿐이니깐!" 단순한 수면제 역할을 하는 안개여서 그런지, 그것이 아멘시타의 오오라의 영향을 받지 않 았던 모양이었다. [101] 체인지(Change) 제18화 -사랑과 전쟁- (3) -3- 불쾌한 공기가 나의 몸을 감싸고 돌았다. 나는 잘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뜨며 몸을 움직여보려 애를 썼다. 그러나, 나의 몸은 뭔가에 구속된 듯 자유롭지가 못했다. 잠시 후, 내가 눈을 뜨자 왠지 끈적끈적하게 느껴지는 어둠이 나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우... 윽!" 나는 나의 정령들을 부르려 했지만, 나의 입에는 단단한 재갈이 불려있어 나는 겨우 신음성 의 음성만 낼 수 있었얼 뿐이었다. 손목이 아팠다. 얼마나 묶여있었는지, 손목의 살갗이 다 까져 있는 상태였다. 나는 쇠사슬로 된 족쇄로 양팔이 묶여있었는데, 그것이 내가 양팔을 벌린 모양으로 벽이 기 대어있는 모양새를 만들어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길를 기다렸다가, 침착한 태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사 방이 가로막힌 음침한 지하감옥 같은 배경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아! 여긴..." 나는 그제야 내가 왜 여기 와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정신을 잃기 전에, 인페르디아의 왕을 암살하였었다. 암살... 나는 끝이 날카로운 형태의 머리핀을 인페르디아왕의 정수리에 박았던 것이 기억이 났다. 아직도, 그 끔찍한 촉감이 나의 손에 남아있어 나는 끔찍함으로 몸을 떨어야만 했다. 내가 누군가를 그렇게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를 하게 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어떻게 나에게서 그런 과감성이 나왔는지, 지금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그러한 일을 하라면, 내 목숨이 위협받는다고 해도 다시 못할 것 같았다. 그건 너무 끔찍했다. 그때, 아무도 없던 감옥안에서 여자의 치마끄는 비슷한 소리가 났다. 나는 움찔 놀라 앞을 바라보니, 언제 와있었는지 긴 흑발을 고혹적으로 늘어뜨린 마족 여자가 나의 눈앞에 와 있었다. "오호호홋~ 이제야 정신이 드셨군 그래?" "……." "어때? 이곳이 마음에 들어?" '젠장! 너 같으면 맘에 들겠냐?' 나는 속으로 그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입은 현재 재갈에 물려있는 상태이니... "건방진 계집 같으니! 감히, 나의 계획을 방해하려 하다니! 그 반쪽 도마뱀이 인페르디아왕 을 살해하라고 시켰나?" "읍, 읍, 읍!!!" (재갈을 풀어줘야 대답을 할 거 아냐!!) "호호~ 미안하지만, 난 네 재갈을 풀어줄 수가 없어. 그랬다가는 너는 마법스펠을 중얼대겠 지? 난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이야!" 그녀는 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한다는 것을 잘알겠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독심술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동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만 그녀의 눈동자가 교활한 빛을 발하며, 반짝거렸 는데 나로서는 꽤나 얄미운 인상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한발짝 성큼 다가왔다. 그러자, 나는 미미하게 움찔하였고 그런 나는 보며 그녀는 싱긋 웃어보였다. 시커먼 칠이 되어있는 그녀의 길다란 손톱이 나의 볼을 어루만 졌다. "정말 아름다운 얼굴이야! 인간소녀답지 않은 얼굴인데? 정말 질투나는군. 그래서, 그 반쪽 도마뱀 녀석도 이 얼굴에 넋이 나갔던 것이겠지? 호호. 만약 이 얼굴에 흉칙한 상처가 난 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의 손톱이 나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그러자, 그 사이로 붉은 피가 새어나왔다. 나는 최 대한 독기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난 그 하프드래곤 녀석을 없애야만 해! 그는 그 망할 실버드래곤의 아들이지. 나의 힘을 봉인하여 얼마간을 암흑속에 가두워두었던 그 실버드래곤에게 난 보복을 하고 싶어. 하 지만, 이미 에이션트급으로 오른 드래곤의 힘을 나는 능가할 수 없었지. 어쨌든, 그녀는 수명을 다해서 죽었고 이제 나는 나의 분풀이를 그녀의 아들에게 풀 수밖에 없지! 물론, 그 반쪽 녀석도 죽이는 것이 쉽지 않아. 나의 봉인된 힘이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말이야."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다시 한번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하던 말을 이어갔다. "훗! 하지만, 자신의 애첩이 그에게로 다가간다면, 어떨까? 그는 아무래도 긴장감을 늦추고 방심을 하겠지? 게다가, 너희 둘은 얼마간 떨어져 있었더군. 조금 조사를 해보았지! 호호~ 그는 아마도 너를 그리며 애타는 가슴을 속으로 삼키고 있겠지?" "읍, 읍!" (대체, 무슨 꿍꿍이얏!) 나는 몸을 비틀며 나의 팔목에 묶인 족쇄를 풀려 했다. 그러자, 팔목의 까진 살갗이 다시 족쇄의 쇠붙이와 마찰을 일으켜 나는 쓰린 통증을 느껴야만 했다. "호호호~ 정말 재미있겠는데?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기습을 받는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 을까?" "으으, 읍!!!" (가만 안둘 거야!! 그가 호락호락 당할 것 같아?) 이런 나의 모습이 그녀로서는 정말 유쾌하게 다가왔는지 그녀는 깔깔대며 웃어댔고 나는 그 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으읍! 읍~!!" ( 내 정령들은 어디있어!!) "호호~ 그나저나, 네 정령들 정말 대단하더군. 너같은 별볼일 없는 계집이 그런 정령들을 손에 넣고 있다니! 정말, 정령들이 아깝다니깐. 그들은 여기! 내 손안에 있지! 그들을 잡 느라 정말 고생 많이 했어!" 그녀의 손에 어느덧 4개의 구슬이 쥐어져있었다. 붉은 구슬과 푸른 구슬 그리고 초록빛의 구슬, 하늘빛의 구슬... 그것들은 모두 검은빛의 기이한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이 여자의 손에 의해 봉인당한 모양이었다. 나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모든 것은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마족 여자는 다시 한번 깔깔대며 웃고는 봉인구슬들을 허공에 띄었다. 그러자, 그것들은 허 공에서 맴돌았는데, 작은 결계에 둘러싸인 듯, 마족여자가 지정한 그 특정한 범위를 벗어 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재미있는 것을 보여주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문을 외듯 뭔가를 짧막하게 웅얼댔다. 그리고는... "셰이프 체인지!!(Shape Change)" 시동어인 듯한 단어를 외쳤는데, 그 순간 으슬으슬한 한기가 도는 어두운 기운들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은빛이 마족여자의 전신을 감싸고 돌았는데, 잠시 후 그 빛들이 사라 졌을때는 나는 경악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아야 했다. 어느덧 마족여자는 나와 같은 황금빛의 머리카락을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리고 있었고 금빛의 보석을 그대로 박아놓은 듯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완벽하게 나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머리카락 한올까지 완벽히 닮은 모습이 바로 나의 앞에 서있자 나는 소름이 돋았다. 그러 나, 그렇게 나와 완벽히 닮은 모습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나에게는 없는 요사스러움이 눈에 가득하였다. 그렇게 나의 모습으로 변한 마족 여자는 생글생글한 얼굴로 작은 수정알이 달린 귀걸이를 자신의 귀에 착용했다. "이 귀걸이는 내가 있는 곳의 장면들을 저 수정구에 비치게 하는 역할을 할 거야! 다시 말 해, 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짓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다는 거지. 어때? 재미있겠지? 호호~ 그럼, 난 이만 그에게 가보아야 하겠어! 이젠, 그 반쪽 도마뱀은 나의 낭군이기도 할테니 , 어디 유혹하러 가볼까나?" 그녀는 요사스러운 웃음을 남기며 공간 이동을 하여 사라졌다. '제길! 안돼! 미카엔, 절대 속으면 안돼!' [102] 체인지(Change) 제18화 -사랑과 전쟁- (4) -4- 그렇게 가짜 라비스, 마족여자가 사라지고 난 후 얼마 안있어 조금 떨어진 곳에 놓여진 수 정구가 무언가를 비추기 시작했다. 그 수정구는 속이 투명하게 비쳐지는 완벽한 구 형태의 모양이었는데, 그 크기는 대략 볼링공의 크기만 하였다. 수정구에 비친 로히얀스군의 진지(陣地)는 제법 군령이 잡혀있었는지, 나태한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이 나라의 황태자가 직접 군사들의 지휘관 노릇을 하고 있어서 그러는 모양이었다. 미카엔의 보이지 않는 그 무거운 존재감이 군사들의 어깨를 내리눌렀 을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아직 전투는 시작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금 시각은 나른한 오후의 한때인 모양인지,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막바지에도 태양은 아직 그 힘을 잃지 않고 부드러운 햇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자신의 무기들을 점검하며 손질하고 있던 병사들은 지나가는 가짜 라비스를 흘끗흘끗 쳐다 보았다. 그러자, 가짜 라비스는 교태로운 웃음을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병사들을 모두 홀려놓았다. '저 여자가 내 이미지를 다 망가뜨려 놓는군!' 가짜 라비스는 천막들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곳으로 허락도 구하지 않고 들어갔다. 그러 자, 20대 후반의 남자가 누군가에게 보고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그 남자의 보고를 받는 단아한 외모의 한 미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미카엔이었다. 그는 언제나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인 말끔한 모습을 보였었는데, 전쟁터에 나와서도 여전히 그는 말끔하였다. 아마도, 그는 심플하고 단정한 멋을 즐기는 듯했다. "아무래도 그 분은 어제 저녁에 실종되신 듯 합니다." 미카엔에게 보고를 하던, 그 남자는 천막안으로 들어온 가짜 라비스를 발견하고는, 무척 놀 란 듯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아마도, 방금 그가 보고하던 내용은 나에 대한 얘기인 것 같았다. "라비스?" 라비스의 모습을 한 그녀를 보고는 미카엔은 믿기지 않다는 음성으로 나의 이름을 불렀다. '미카엔! 미카엔! 저 여잔 내가 아니야!' 수정구를 바라보는 나는, 속이 탔다. 가짜 라비스의 모습을 본 미카엔에게 보고하던 남자는, 놀라던 표정을 이내 지우고는 미카 엔에게 반듯한 태도로 인사를 하고는 천막을 빠져나갔다. 제 딴에는 자신의 주군이 그가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있게 해주려는 배려였던 것 같았다. "전하!" 약간 갸냘픈 듯한 전형적인 미인이 연상되는 목소리가 저 여자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평소 나의 목소리에 대해 그리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너무도 여성스러운 그 목소리에 얼 굴을 찌푸렸다. 처음, 놀라움으로 커졌던 미카엔의 눈은 이내 가늘게 떠졌다. "전하! 용서하세요. 제가 그동안 어리석었어요!" 가짜 라비스는 그렇게 말하더니, 미카엔의 품에 와락 안기는 것이었다. '헉! 저렇게 민망한 짓을 하다니!' 수정구를 통한 낯뜨거운 생중계에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전하! 그동안 정말 보고싶었어요!" 가짜 라비스가 그렇게 자신의 품에 뛰어들어 그런 열정적인 발언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안고 있는 미카엔의 얼굴엔 그다지 표정이 없었다. 미카엔의 오른손이 들어올려져 가짜 라비스의 탐스러운, 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풍성한 머리 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렇게 미카엔에게 안겨있던, 가짜 라비스는 그의 품안에서 교활한 미소를 머금더니, 그녀의 한쪽의 손의 손톱이 아주 길게 자라났다. 미카엔은 한동안 가짜 라비스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어느 순간 그 머리채를 거칠게 휘어잡 더니 뒤로 확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가짜 라비스는 아악~! 소리를 내며 고개가 뒤로 젖혀 졌다. "저, 전하?" 가짜 라비스의 커다란 금빛 눈동자가 더욱 크게 떠졌다. 저 상황에서도 끝까지 라비스 행세 를 하는 불굴의 의지... 나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헉! 미카엔은 왠만하면, 여자들을 거칠게 다루지는 않는데? 그만큼, 나에게 화가 많이 났다 는 것인가? 그나저나, 되게 아프겠다. 머리카락이 거의 한 움큼은 빠졌을 것 같은데... 그 런데, 왜 저렇게 부들부들 떨지?' 미카엔에게 머리채를 잡힌 가짜 라비스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곧,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왜 화를 내시는 거죠? 왜 드래곤 피어를?" "몰라서 묻나? 마족 아가씨." "하아~ 어떻게?" 미카엔이 발산하는 드래곤 피어는 그 정도가 매우 강한지, 가짜 라비스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모습으로 부들부들 떨던 가짜 라비스는 다시 그 모습이 본래 마족의 여자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아! 디스펠 매직(다른 마법주문의 효과를 해제)" "훗! 애교와 교태로움이 철철 넘치는 라비스라니... 나 역시 그쪽이 좋지만, 넌 독을 품고 있 으니 안되겠는걸. 또한, 나는 라비스가 공식적인 자리외에는 나를 전하라 칭하지 않고 이 름을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너에겐 라비스의 향기가 없어! 네 아무리 라비스로 위장해봤자, 향기없는 장미일 뿐이지." "이잇!" "하하하! 역시, 고위 마족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 나의 드래곤 피어 앞에 두 눈 부릅뜨고 멀 쩡히 서있다니!" "어떻게 하프 드래곤 주제에 이렇게 강력한 드래곤 피어를 뿜어낼 수가 있는 거지?" 그 와중에서도 가짜 라비스는 궁금한 것은 그냥 못넘어가겠는지 물을 것은 다 묻고 있었다. "나는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날, 그분에게서 완벽한 드래곤의 능력을 물려받았다. 그리 고, 그날 내가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았음을 깨달았지!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을... 지금은 완벽히 끄집어내서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너는 나의 상대가 되지 못해! 죽고 싶지 않다면 라비스가 있는 곳을 말해라! 네가 라비스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것은, 라비 스가 지금 너의 손에 있다는 말이 되겠지?" "어림없는 소리!! 난 충분히 너를 죽일 수 있어! 젠장할~ 나의 모든 힘을 끌어낼 수 있다 면, 너를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텐데..." 그러자, 미카엔은 그녀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외쳤다. "저번엔, 많은 이들 앞에서 드래곤의 힘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드래곤 피어를 못썼지! 드래 곤 피어란 것은 사용하면, 그 근처에 있는 존재들도 두려움을 느끼게 되니... 아! 그리고, 충고하겠는데, 난 방금, 이곳에 디스펠 매직을 걸어놓았다! 넌 이제 흑마법을 쓰지 못할 걸." 디스펠 매직이란, 시전자가 상대 마법사보다 마법력이 강하면, 그 상대 마법사는 그 디스펠 매직을 깰 방도가 없다. 마나의 운용이 안되니 모든 것은 무효화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적용되는 면적은 저 천막 안으로 한정되어 있으니 -물론, 면적이 좁은 만큼 영향 력도 강하지만- 마족 여자는 저곳에서 나가기만 하면, 다시 흑마법을 시행할 것이다. 그 러나, 미카엔의 강도 높은 드래곤 피어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그녀의 육체적인 전투력마 저 무기력 시켰다. 마족여자는 이제 몸을 떨다 못해, 자리에 풀석 주저앉았다. 드래곤 피어가 고위마족에게까 지 적용될 줄은 몰랐는데... 사실은 어설픈 지위의 고위마족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물론, 그녀의 힘이 완전하지 못하다 하니... 지금 저렇게 완벽하게 당할 수 있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미카엔은 그녀의 가녀린 목을 세게 움켜잡았다. 왠지 지금 미카엔의 표정없는 얼굴 이 잔인해 보인다고 생각되었다. 저런 모습의 미카엔은 처음 보는지라 나는 저 미카엔도 가짜 미카엔이 아닐까 하는 황당한 생각도 해보았다. "너의 얄팍한 술수에 내가 그렇게 쉽게 당할 것이라 생각했나? 어리석군! 그랬으니, 힘을 봉인당하기나 했던 것이겠지.어서 라비스가 있는 곳을 대!" 미카엔은 그녀의 목을 부러뜨릴 듯,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젠장! 그녀는... 켁! 목 좀..." 창백해진 그녀가 죽을 듯한 얼굴로 간신히 입을 열자, 미카엔은 움켜잡았던 손의 힘을 약간 느슨하게 하였다. "...지금, 인페르디아 중앙궁성 지하감옥에 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미카엔은 그녀의 목을 쥐지 않은 다른 한쪽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사정 없이 후려쳤다. 그러자, 그녀는 그대로 풀썩 쓰러져 기절을 하였고, 미카엔은 자신을 따라 나온 왕실마법사 킬린을 불러 그녀를 포박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는 찬막 밖을 나갔다. '곧, 미카엔이 오겠군.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은 좋지만, 다시 그의 측실이 되는 것 은 싫은데...' [103] 체인지(Change) 제18화 -사랑과 전쟁- (5) -5- 나는 정신이 가물가물해져 갔다. 어제부터 물과 음식들을 전혀 먹지 못한데다가 계속 쇠사 슬에 묶여있었으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위해 노력을 하며, 무심코 다시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마족 여 자가 기절해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정구는 계속 그녀가 있는 천막을 비추고 있었다. 노마법사 킬린은 그녀의 곁을 지키며 마법서를 읽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쓰러져 있던 마 족 여자의 몸이 꿈틀하였다. 물론, 무아지경에 빠져 책을 읽고 있는 킬린은 그런 그녀를 눈치채지 못했다. 마족여자는 눈을 떠서 자신의 사태를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소리없이 몸을 움직였다. 그녀 는 손과 발이 쇠줄에 묶여있었지만, 마족 여자는 다시 교활해보이는 미소를 슬쩍 머금었다. 그것을 본 나는 불안해져서 킬린이 얼른 그녀의 그런 모습을 눈치채길 바랬다. 조금 길다 싶은 마족여자의 손톱이 다시 길게 자라났다. 거의 검지 손가락 길이만큼 자라난 그녀의 손톱이 곧, 쇠줄에 다가갔고 그녀의 손톱에 닿은 쇠줄은 이내 검게 변하였다. 아 마도, 그녀의 손톱에 맹독이 스며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 쇠줄을 쓰윽쓰윽 단도로 나무토막을 자르듯이 썰었고, 곧 그 쇠줄은 툭하며 끊어졌다. 저렇게 유용하고도 날카로운 손톱이라니... 마족 여자는 그렇게 슬금슬금 천막안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마법사 킬린은 여전히 마법서 에 빠져서 그런 그녀의 탈출을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정말 무서운 손톱이네? 저것으로 급소를 공격당하면 큰일나겠군. 어쨌든, 미카엔이 알아채 어서 정말 다행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안도하다가, 불현 듯 한가지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독이 묻어나는 손톱! '설마? 설마... 아까 그여자가 나의 볼에 손톱으로 상처를 내었는데?' 순간, 나는 어질해졌다. 나의 현기증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피가 통하지 않는 듯 나의 입 술이 점차 차가워지고 입안이 지독하게 말라갔다. '안돼! 안돼!' 그제야 나의 심각성을 깨달은 내가 그렇게 폭주모드에 돌입하고 있는데, 육중한 문이 끼 익~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움찔하며 나에게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았다. '미카엔?' 그를 알아본 나는 고개를 돌려 외면하였다. 기껏 그에게서 도망와서 결국, 그에게 보이는 모습이 이런 비참한 꼴이라니! 이대로 공기중에 흩어져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미카엔은 열쇠가 있어야만 풀어지는 족쇄를 무슨 마법을 써서 풀었는지 쉽게 나를 구속하는 것들로부터 해방시켰다. 족쇄가 풀어지자, 나는 그대로 무너지듯 그의 앞으로 쓰러졌다. 왠만하면, 나의 힘으로 똑바 로 서고 싶었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럴 기운이 없었다. 나를 부드럽게 감싸 안은 미카엔은, 계속 말이 없다가 마지막에 나직히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돌아가자. 라비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정신을 잃었다. 나는 얼마간을 열에 들떠서 보냈다. 혼미해진 정신으로 알 수 없는 고통에 끙끙 앓아대다가 뭔가 슬픔에 복받힌 듯 눈물을 흘렸고,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인해 몸을 부들부들 떨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나는 침대위에 누워있었고 어떤 고풍스러운 방안에 있었다. 나 는 몸을 일으켜 거울이 있는 곳으로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걸어갔다. 잠시 후, 거울에 초췌한 얼굴의 한 소녀가 비추어졌다. 얼굴은 핏기라고는 전혀 없는 창백한 얼굴이었고, 예전보다 야위어있었다. 도톰한 붉은빛의 나의 입술은 그 빛이 파리해져 있어, 그야말로 병약한 기색이 완연하였다. 나는 떨리는 손을 나의 볼로 가져갔다. 나의 오른쪽 뺨에는 조그만 헝겊으로 그 상처가 감싸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떼어냈다. 그 러자, 마족여자에게 당했던 상처가 나의 눈에 드러났다. 나의 오른쪽 뺨은 검게 그 피부가 변색되어 있었다. 상처는 아물지 않은 듯 1cm가량이 찢 겨져 있었다. 왠지 거부감이 드는 모습이었다. "아!" 나는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끼익~! 그때,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미카엔이었다. "라비스! 깨어났군." 그는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나에게 말하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내 얼굴이..." "아! 그건, 아직 낫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 염려마. 라비스." 미카엔은 부드럽게 말하며 나를 일으켜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했다. 이에 움찔한 나는 그 를 뿌리치며 소리를 쳤다. "싫어요!! 보지 말아요! 내 얼굴이 이상해!!" "라비스!! 진정해! 네 얼굴은 이상하지 않아! 여전히 아름다워. 곧 나을 거야! 날 믿어." 나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말하는 미카엔의 은보랏빛 눈동자가 나의 눈에 들어왔다. 언제보 아도 맑고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인간이라면, 결코 가질 수 없는 신비한 은보랏빛... 지금은 그의 눈동자가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 "거짓말! 나의 오른쪽 뺨은 이미 독으로 인해 이미 감각도 죽어버렸어요. 이런 것은 다시 낫기 힘들어. 낫는다고 해도 나는 이런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야 해요. 차라리 잘된 일이 에요. 난 가끔은 내 얼굴이 싫..." "바보 같은 소리 하지마! 네 얼굴의 독은 완벽히 나을 수 있어. 그대로 둔다면, 그 독이 너 의 뇌속을 침투할 수도 있어. 라비스! 너를 시리아스섬으로 데려갈 거야. 그곳엔 신기한 것들이 많다고 하더군." "그럴 수는 없어요. 미카엔에게는 로히얀스의 황태자로서 할 일이 있잖아요? 아직 전쟁도 끝나지 않았는데..." 그러자 미카엔은 미미한 미소를 머금더니, 나의 말에 답했다. "전쟁은 이제 끝났어! 인페르디아왕이 죽고 그의 동생이 그뒤를 이었지. 그가 왕이 되고 첫 번째로 한 일이 나와 회담을 갖는 일이었어. 그리고, 너를 이렇게 만든 그 여자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지. 그녀를 놓친 것은 정말 안타깝지만, 당분간 일을 벌이지는 못할 거야. 라비스! 나는 로히얀스의 황태자라고 하지만, 나에겐 아버지이신 국왕 폐하가 계셔! 오랫 동안 내가 자리를 비워서는 안되겠지만, 내가 없다고 나라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야. 라 비스! 넌 나의 부인이야!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여자이고... 더 이상 혼자 서려 하지말고 나에게 기대! 라비스." 그렇게 말하며, 미카엔은 나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러자, 경직되었던 나의 마음이 풀어 져가는 듯했다. '그동안 그렇게 노력했는데... 그를 사랑하지 않기 위해, 내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그런데 왜 자꾸 그의 말대로 그에게 기대고 싶은 걸까? 나 이대로 라비스가 되어야만 할까? 나를 버려야만 할까?' 어쨌든, 내가 원하는 대로 전쟁은 끝이 났다. 그 누구도 이 전쟁이 이렇듯 황당하게 결말을 내릴 줄 몰랐겠지만, 전쟁은 끝이 났고 나는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으로 돌 아오게 되었다. 그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던 그 결과는 정말 한심하였지만, 나는 싫든 좋든 또 다시 그 의 얌전한 부인으로서 돌아가야 할 듯했다. 지금의 나는 또 한번 탈출을 감행할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를 잃고 싶지 않았다. 점점 나의 영혼을 잠식해가는 라비스의 마음 이 나는 두려웠다. '그래! 마음을 닫아버리자! 애초에 미카엔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그를 피해 도망다닐 필요도 없었잖아?' [104] 체인지(Change) 제19화 -환상의 섬을 찾아서!- (1) (환상의 섬을 찾아서!) -1- "미카엔! 제 정령들을 돌려주세요!" "이건 당분간 압수야!" "그건 제 정령들이에요! 그리고, 정령들을 오래동안 봉인하고 있으면..." "죽지는 않아. 이들은 이 봉인구슬에서 잠들어 있는 것이니깐. 이 정령들이 봉인에서 풀려나 있어야 자연의 기운이 필요한 것이지." 아까부터 나는, 미카엔과 정령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인페르디아 왕성 지하감옥에서 나를 구출할 때, 정령들의 봉인구슬도 함께 가져온 것이었다. 그가 저렇게 봉인구슬을 내놓지 않고 버티고 있는 이유는... 내가 또 정령들을 이용해서 도망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인 듯 했다. '히궁~ 내가 이 비실비실해진 몸으로 어디로 도망간단 말이야? 마족의 독이 뇌까지 스며들어 흉한 모습으로 죽고 싶지 않으면 싫더라도, 미카엔과 함께 있어야 하는데...' 미카엔 역시,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닐테지만, 혹여나 내가 과감하고도 어리석은 짓을 감행할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미카엔! 바보!!' 차마 입밖으로는 내놓지 못하는 이 한마디를, 속으로 그를 향해 외쳤다. 내가 아무리 간이 부었기로서니 왕족에게 바보라는 말을 할 수 있으랴. 그래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 이 마음을 어쩌지 못해, 나는 미카엔을 한번 노려보아 주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눈길을 미카엔은 사랑스럽다는 듯이 봐주고 하니, 나는 더욱 열이 났다. '설마, 미카엔은 나의 이 눈길을 애교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무튼, 나는 지금 왕족을 태운 그것 답게, 매우 화려한 배의 선실안에 있었다. 이 배는 미카엔이 말했던 시리아스섬인지 뭔지하는 섬으로 향하는 배였다. 배 안에는 미카엔의 호위기사, 킬린을 비롯한 마법사들, 그리고 배안의 선원들과 선장이 타고 있었다. 물론, 선장과 선원들은 미카엔이 고용한 실력좋은 뱃사람들이었다. 나는 미카엔에게 정령들을 달라고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에게 마족에게 당한 이 상처가 완벽히 나을 수 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나는 불안하였다. 어찌 된 것인지, 나의 상처는 며칠이 지나가도 전혀 아물 생각을 안하기 때문이었다. 독이야 어쨌든, 신관들의 신성력으로 이 상처라도 나을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미카엔은 내가 정신을 잃고 있을 때 벌써 그러한 시도를 해보았는지, 더 이상 신성력을 쓸 시도를 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 상처가 신성력으로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일테지. 하긴, 고위 마족이 독으로 낸 상처가 쉽게 낫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마계 출처의 독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인간세계에는 해독약을 없을 듯했다. 나로서는 꽤나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미카엔은 시리어스섬에 나를 낫게 할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는 하지만, 나는 킬린에게서 들은 얘기 한가지가 있었다. 시리아스섬이란 지도상에는 나와있지 않은 환상의 섬이라고... 그섬이 어느 지점에 박혀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었다. 정말 비관적인 말이었다. 환상의 섬이라니! 그렇다면, 미카엔은 환상의 섬을 찾겠다고 지금, 배를 타고 있는 것인가? 물론, 해독약을 찾기 위해 마계로 쫓아가 아무 고위마족에게 해독약을 내놓을 것을 닦달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바보같은 짓이라고 했다. 그들은 독을 품고는 있긴 하지만, 정작 해독약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니깐, 그들은 남을 해하기 위한 능력만 가지고 있었지, 남을 구하기 위한 방편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었다. 하긴, 그러니 어둠의 존재, 마족이라 불리는 것이겠지. 나는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라비스? 이리 와봐!" 미카엔은 조그만 상자같은 것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킬린이 심혈을 기울여 제조한 연고와 같은 약이었다. 나의 상처가 덧나지 않고, 상처로 인한 고통도 없게 하는 그러한 약이라고 했다. 미카엔은 그것을 손수 발라줄 요량이었는지 뚜껑을 가만히 열었다. "왜, 왜요?" "약 바를 시간이야!" '윽!' 미카엔은 나의 닭살을 돋게 만드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듯 했다. 나는 닭살도 닭살이었지만, 나의 상처를 그에게 보이는 것이 싫었기에 나는 필사적인 몸짓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항해를 하고 있는 동안은, 무지 한가한 미카엔... 언제나 국사에 바쁘던 그가 이렇게 한가했던 적은 거의 처음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 듯 했다. 이런 한가함이 그 역시 익숙치가 않았는지, 이런 일까지 미카엔은 자처하고 나섰다. "제가 할게요!" 그러자, 미카엔은 할 수 없다는 듯이 그것도 자신이 자상한 남편 노릇을 못하게 되어 정말 아쉽다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약을 나에게 내주며 말했다. "정말 고집불통인 숙녀로군!" 그렇게 바닷길에 나선 첫 번째 하루가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랜만에 얼굴을 내밀은 보름달이 하늘에 떠오른지 한참 지났을 무렵, 나는 미카엔과 또 다시 한침대를 써야 한다는 것에 대해 기겁을 해야 했다. 나는 비록 선실에 있는 침대였지만 그래도 왕성에서 쓰던 대형침대 못지 않은 고급스런 침대의 구석으로 가 몸을 누운 다음, 이불을 돌돌 말았다. 그 이유는 선실 안이 매우 추웠기 때문이었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본, 미카엔은 얼굴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라비스! 왜 그렇게 구겨져 자고 있는 거야? 그리고, 이불을 그렇게 모조리 가져가 버리면 어떻게 해?"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손을 뻗었다. 이에 나는 움찔하였고, 이런 나의 반응을 본 미카엔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라비스! 너 방금 그 반응은 무엇이지? 내가 너의 남편이라는 것을 잊은 거야? 이 이불은 2인용이라 같이 덮어야 해! 그렇게 구석으로 가면, 이불을 같이 덮을 수 없잖아? 설마, 아픈 너를 내가 어떻게 할까봐 그러는 거냐? 라비스?" '그렇게 인상쓰고 말하면 무섭잖아? 미카엔.' 나는 속으로 그에게 말하며, 여전히 그를 바라보며 눈만 말똥말똥 떠보였다. 그러자, 미카엔은 열을 받은 듯 이마에 힘줄을 세우며 이불을 잡아당겼다. '으엑!' 나는 그에게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불을 붙잡고 몸에 힘을 주었다. '젠장! 미카엔과 이불을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게 될 줄이야!' 나는 그에게 안겨서 자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리고 이불 또한 뺏기긴 싫었기에, 그렇게 이불을 가지고 유치하게 그와 힘겨루기를 하였다. "그만 고집피워!" 팽팽하게 당겨진 이불... 달밤에 이게 무슨 짓이람! 미카엔의 무시무시한 눈길이 느껴졌다. 그의 그 무서운 눈길을 대하자니, 식은땀이 다 났다. "뭐에요? 설마, 비겁하게 저에게 드래곤 피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겠죠?" "드래곤 피어라니? 난 드래곤 피어를 너에게 쓴 적이 없는데? 아! 그러고 보니, 너 내가 드래곤 피어를 쓰는지 어떻게 알아?" "아하하... 그냥!" "라비스! 너 지금 황태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냐? 이불 가지고 목숨걸지 마라! 어서 놔!!" 이불 가지고 황태자의 권위를 운운하는 것은 뭐람! 미카엔에게도 유치한 면이 있음을 발견한 나는 웃음이 나려 했다. "좋아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잡고 있는 이불을 놓았다. 그러자, 미카엔은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대처를 미처 못했는지, 앗! 하는 외마디 외침과 함께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이불도 함께 말이다. 설마, 그가 그렇게 볼썽사납게 떨어질 줄 몰랐던 나는 당황하며 그에게 외쳤다. "헉! 미카엔, 괜찮아요?" "끄응, 정말 스타일 구기는군! 그렇게 갑자기 놓으면 어떻게 해?" 그런 미카엔의 모습에 나는 잠시 고소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바다의 정령 라센샤르가 생각이 났다. '아! 내가 왜 그생각을 미처 못했지? 바다의 정령이라면, 그 섬이 어디에 있는 알 수 있을 거야!'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선실밖으로 나갔다. [105] 체인지(Change) 제19화 -환상의 섬을 찾아서!- (2) -2- 선실밖으로 나간 나는, 살을 에이는 듯한 겨울바다 날씨에 몸을 웅크렸다. 여러개의 방이 있는 복도를 나온 입구에서 나는 잠시 멈칫거렸다. 갑자기 두통이 일었던 것이었다. "라비스님! 괜찮으십니까?" 마침, 그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기사가 나를 향해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가 빠개질 듯 하게 아팠던 나는 잠시 신음소리를 내며 벽쪽으로 몸을 기대었다. "아! 황태자 전하!" 그때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왔는지 그 기사는 갑자기 몸을 바르게 하더니, 황태자 전하! 라는 소리를 내뱉었다. '황태자 전하?' 나는 멍해진 눈길로 나를 향해 다가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라비스! 왜그래?" 하지만, 그의 말소리도 흐릿하게 들렸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거추장스럽지? 내 머리카락은 왜 이렇게 치렁치렁해진 거야?' 뭔가 달라진 듯한 느낌에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나를 향해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라비스! 어디가 아픈 거냐?" "실례하지만, 지금 저를 보고 라비스라고 불렀습니까? 당신은 누구죠?" 그러자, 그 은발의 남자는 내 질문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는지 황당함과 놀라움, 걱정스러움이 한데 섞인 얼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라비스. 넌 나의 부인이잖아?" 그의 말에 나는 불쾌감 어린 얼굴을 해보이며 그에게 차갑게 말했다. "그게 무슨 정신나간 소리입니까? 하하하. 부인이라니! 난 남... 우욱!" 나는 남자라고 말하려고 했던 말을 미처 끝맺지 못하고는 나는 다시 신음성을 내뱉었다. 이렇게 머리 아파본 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나는 땀이 송글송글 맺힌 얼굴로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그러자,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한 미카엔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미카엔! 나 머리가 너무 아파요. 히잉~" 미카엔은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으며 나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약간 불안정한 목소리로 옆에 있던 기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킬린을, 킬린을 당장 데려와라!" 미카엔은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안고 다시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계속, 젠장~! 제길~! 하며 중얼대는 미카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 신분으로서 어렸을 적부터 엄격한 왕실 교육을 받아왔던 그가 그런 험한 말을 중얼댈 줄은 몰랐지만, 지금은 그가 고상한 말만 골라하기에는 심기가 매우 불편하였는지 계속 왕족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중얼대었다. 그는 나를 침대에 눕히고는 킬린이 오기를 기다리는지 방안을 왔다리 갔다리 하였다. 곧, 노마법사 킬린이 들어왔다. 그는 일반 마법 뿐만 아니라, 마법적 지식을 활용한 의술과 약간의 점성술까지 겸비한 매우 박식한 노인이었다. 그는 나를 진찰을 하고 방금 있었던 나의 증상에 대한 것을 미카엔에게 듣더니, 곧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흠, 라비스님께서는 아무래도 잠시동안 의식분열 증세를 보였던 것 같습니다." "의식 분열? 그렇다면, 정신분열 증세를 말하는 것인가?" "예, 비슷합니다. 전하!" 킬린의 말을 들은 나는 잠시 충격으로 현기증을 느껴야 했다. '하아~ 정신분열이라니... 내가 드디어 미치기 시작했단 말이야? 말도 안돼!' 내가 안색이 하얗게 질리자, 미카엔은 나에게 눈길을 주더니, 미처 생각을 못했다는 듯이 나에게 달래듯 입을 열었다. "라비스! 걱정마. 별일 아닐 거야. 금방 나을 수 있어. 그건 일시적인 증상이니깐, 너무 크게 신경쓰지마!" 미카엔은 그렇게 말하고는 킬린을 데리고 방 밖을 나갔다. 아마도, 거기서 대화를 나눌 생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에 대한 증상이 궁금하였던 터라, 청력 증폭 마법의 스펠을 외웠다. 그러자, 파도 소리에 약간 방해를 받긴 하지만, 미카엔과 킬린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의식 분열이라니! 그것이 왜 생긴 것인가? 킬린. 설마 독이 뇌까지 침투한 것은 아니겠지?" "아직 그것은 아닙니다만, 영향은 받은 듯 합니다. 이대로 두면 얼마 안가 증상이 심각해질 듯 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의식분열로서 증상이 나타난 것이지?" "저도 정확이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라비스님께서는 은연중에 뭔가 고민거리를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뭔가 두가지 양상으로 분리된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을 때 이러한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겠지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 정신분열, 그러니깐 이중 인격과 같은 정신병하고도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라비스의 저런 증상을 막을 방법은 없겠나? 약을 구할 때까지는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흐음, 이것은 라비스님 본인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자신이 가진 강한 열망이나 의지를 억지로 본인이 차단할 경우, 이러한 결과가 발생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라비스님의 의지가 담긴 마음과 그렇지 못한 마음이 극단적으로 분리되어 마치 의식이 나누어진 듯한 증상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뭔가 굉장히 복잡한 것 같군. 그런데, 라비스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이러한 현상까지 나타나는 것일까? 아무래도, 이것은 독의 영향이 크겠지?" "네, 그렇습니다. 전하." 미카엔은 내가 그들의 대화를 옅듣고 있다는 것을, 초조함과 불안감으로 인해 미처 못깨달았는지, 나의 증상에 대해 킬린과 대화를 나누었다. 어쨌든, 그들의 대화를 들은 나는 대충 나에게 어떠한 현상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가 있었다. 정말 최악이었다. '내가... 내가, 내 자신의 마음을 너무 혹사시키고 괴롭히고 있었던 것인가? 그럼,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끼익~!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미카엔이 다시 들어왔다. 나는 미미하게 움찔하였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만 자야지?" 모든 것을 덮어두려는 그의 부드러운 음성에 나는 순간 울컥하였다. 그래서... "더이상 나에게 잘해주지 말아요!! 젠장!! 차라리 날 미워하란 말이에요!" 나는 앙칼진 목소리로 그에게 외치고는 방 밖을 뛰쳐나갔다. "라비스!" 그가 외치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무작정 뛰쳐나갔다. "젤러스경! 라비스를 잡아!" 미카엔은 방밖에서 시립하고 있던 기사에게 외쳤다. 그러자 그 기사도 나를 잡기 위해 쫓아 왔고 나는 그의 손길을 피해 무작정 달려나갔다. 곧, 갑판 위로 당도하게 되었고 그 근처에 있던 선원이 나를 보며 외쳤다. "난간 가까이 다가가면 위험합니다!" 그건 나도 너무나 잘아는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더욱 난간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바다 위로 뛰어내릴 포즈를 하였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그러면 난 뛰어내릴 거야!!" 이것은 언젠가, 내가 이세계에 온지 얼마 안되었을 때, 황태자궁에서 나의 경호원 에드를 협박했던 말이었던 것 같았다. 아무튼, 내가 이런 말을 외치자 그 근처에 있던 이들은 모두 해쓱해진 얼굴을 해보였다. 그때 바다쪽에서 신비하게 공명하는 듯한 음성이 파도소리와 함께 묻어서 들려왔다. [라비스! 지금 뭐하는 것이지요? 라비스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겨줄 생각 인가요? 라비스는 정말 이기적이군요.] 바다의 정령 라센샤르의 말에 나는 움찔해 보였다. 정말 이대로 죽으려 했는데... 그건 차마, 나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못할 짓이었다. 특히 미카엔에게... 나는 무너지듯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미카엔은 나에게 다가왔는데, 그의 얼 굴 표정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나의 뺨을 내려치려는 포즈를 해보 였다. 은보랏빛을 발하는 그의 자수정과 같은 눈동자의 색깔이 짙은 보라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찔끔하며 눈을 감았다. 그가 나를 때려도 나는 할말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눈을 감 고 기다리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어 나는 다시 눈을 떴다. 그러자, 이미 손을 거둔 미카엔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무리 화가 나도, 몸이 정상이 아닌 나를 때릴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아무말 없이 그대로 선실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한 기사가 나를 부축하려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는 다시 바다를 향해 바라보았다. "라센샤르!! 나 낫고 싶어요! 낫게 해줘요! 시리아스섬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줘요!!" 왠지 처절한 듯하면서도 방금전 나의 모습과는 다른, 뭔가 의지를 담은 목소리로 바다의 정 령에게 외쳤다. [106] 체인지(Change) 제19화 -환상의 섬을 찾아서!- (3) -3- [시리아스섬은 남쪽바다의 금단(禁斷)의 영역에 있어요. 그곳은 네 마리의 보이지 않는 용 이 지키고 있어요. 그곳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답니다. 라비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일곱 개의 목숨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말 쉽지 않은 곳입니다. 보이 지 않는 용말고도 나머지 위험한 존재가 두가지가 더 있다는 소리입니다. 나는 라비스가 그곳으로 가는 것을 막고 싶지만, 라비스는 그곳으로 가야만 하겠지요? 여기서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린 다음, 밤이 되어도 태양이 지지 않는 곳까지 가세요. 그곳에 시리아스섬 이 있습니다.] 밤이 되어도 태양이 저물지 않는 곳이라면, 아마도 남극지방을 일컫는 말일 듯 했다. 그곳 이라면 한동안 내리 낮이었다가 일정한 순간이 되면, 다시 몇 달동안 밤만 계속 된다지 않는가? "라센샤르! 고마워요!" 그렇게 해서, 미카엔과 나를 비롯한 일행들을 태운 시리아스섬을 향한 배는, 남쪽으로 향하 게 되었다. 사실, 남쪽의 끝까지 가는 셈이어서 여행은 무지 지루하게 길어질 듯 했다. 물론, 배안에는 오랫동안 여행을 하기 위한 생필품을 저장하는 것이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 중간 중간마다 각 나라의 항구로 경유해서 가야만 했었다. 그렇다고, 여행이 더딘 것도 아니었다. 미카엔이 마침내 풀어준 나의 정령들, 특히 바람의 정령 아젠샤르가 알맞게 순풍을 불어주어 돛을 단 우리가 탄 배는 그야말로 최상의 속력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꺄하하~!! 저기 돌고래가 있어! 너무 귀엽다~" 미카엔이 정령들을 풀어주자 기분이 정말 좋아진 나는, 그렇게 웃어제끼며 바다위로 언뜻 눈에 듼 돌고래를 손으로 가리켰다. "헤에~ 라비스, 너 그거 아냐? 돌고래가 귀엽다고 말하는 네가 더 귀엽다는 거!"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샤르는 쾌활한 반면에 약간 느끼한 면모를 보여주어 나의 얼굴을 찌푸리게 하였다. 그리고, 리엔시타는 나의 얼굴에 난 상처를 보고는 지금까지 눈물을 짜고 있었고, 아젠샤르는 여전히 자신이 맡은 바만 묵묵히 수행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성장을 했다하나 여전히 정령들의 막내이자 귀염둥이인 아멘시타는 한 마리의 갈매기의 모습으로 나의 상처를 신성력으로 치유하겠다고 애를 썼지만, 별 성과가 없는 나의 상처를 보고는 울상을 지었다. 미카엔은 기사들과 취미삼아 검술 대련을 벌였고 -미카엔이 검술 대련에 취미가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선원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왠지 단조롭고도 한가로운 일행들의 모습이었다. "근데, 요즘 라비스는 황태자와 거의 말을 안하는 것 같아! 무슨 일있어?" 리엔시타의 질문이었다. 그녀의 질문에 샤르 역시 궁금하였는지 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내가 어제밤에 자살 소동 비슷한 것을 일으켰거든! 그것으로 인해 미카엔이 무지 화가 났 어. 차라리 잘된 일이야! 내가 일부로 그를 피하지 않아도 되니..." "히잉~ 라비스! 자살이라니? 무슨 안좋은 일이 있었는데? 라비스가 죽으면 리엔은 너무 슬 퍼서 죽고 말거야!" "엑! 리엔, 그런 소리 하지마!" 나는 리엔시타에게 질책하듯 외치고는 미카엔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정말... 난 저 녀석의 약점을 알고 싶어! 도대체 못하는 것이 무엇이지?" "훗! 날 황태자의 약점이 무엇인지 잘 알지!" 샤르는 장난기가 철철 넘치는 얼굴로 나에게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표정이 왠지 불길하였 지만, 그래도 궁금하였기에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 약점이 뭔데?" "바로 너! 황태자는 아직도 너를 자신의 여자로 만드는 것을 못하고 있잖아? 어? 얼굴이 홍 당무가 되었네? 이거 얼레리 꼴레리인데?" "샤르으~ 너 주우거었어!!" 한동안 봉인되어 있더니 샤르는 자신의 짖굿은 장난기에 몸이 근질근질하였나 보다. 나는 험악해진 얼굴로 그를 잡아서 패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얍삽하게도 샤르는 그 자리에서 쏙 빠져나갔고 나는 더욱 열이 올라 그와 추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거기 서!!" "내가 서면 때릴려고 그러지? 절대 안서!!" "으씨!!" 그렇게 샤르와 내가 배안을 다 헤집고 다니자, 노마법사 킬린은 검술 대련을 마치고 자리에 앉는 미카엔에게 너털 웃음을 내며 한마디를 하였다. "허허허! 전하의 세 번째 측실께서는 아직 어리시군요." 그러자, 미카엔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더니 그의 말에 답했다. "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난 순수해 보이는 저 모습이 좋아. 마치 순수한 정령들의 여왕 같 거든." * 이번 편은 짧군요! 글빨이 안서니... 뭐, 100회 특집으로 짧게 썼다면 돌 날아오겠죠?^^;; 오늘 제가 이렇게 덧글을 다는 이유는... 음, 그러니깐 100회를 자축하는 의미에서 간단한 이벤트를 하고자 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번 편이 100번째 편이거든요!^^ 외전 빼구... 저 이런 것 꼭 하고 싶었거든요! 잼있을 것 같아서리...;;; 흠, 첫 번째로 체인지에 나오는 캐릭의 인기투표를 하고자 합니다. 체인지에서 한번 이상 등장한 모든 캐릭이 그 후보가 되는데요. 가장 좋고 마음에 드는 캐릭 한명, 제일 보기싫은 캐릭 한명씩 뽑아주세요! 그리고 두 번째로는 베스트 커플을 뽑아주시고 그 이유를 적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떤 분은 리엔과 샤르를 결혼시켜달라고 하시더군요^^::) 세 번째로는 주인공에게 바라는 점을 간단히 적어주시고요. 네 번째로는 저에게 바라는 점을 적어주세요! 연참해주세요~ 그런 거 말구요^^;; 다섯 번째로는 이설의 제목이 체인지가 적합한지의 여부를 투표하겠습니다. 여섯 번째, 체인지에서 의문난 사항을 적어주세요! 그러면 제가 답변을 해드리겠 습니다. 일곱 번째, 기타입니다. 그밖에 님들이 하고 싶은 말들...을 적어주시면 됩니다. 제 이멜은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테니.. qyhsj@hanmail.net이구요. 꼭 꼬옥~~~ 많이 많이 참여해 주세요! ㅡ.ㅜ 위의 여섯가지 다쓰지 않아도 됩니다. 멜은 삼일 동안 받겠습니다. 그 후에 정리해서 발표(?)를 하지요!^^ 멜 마니 마니 마니 마니~~~~~~~~~ 보내주셔야 해요!!! 앙~ >.< [107] 체인지(Change) 제19화 -환상의 섬을 찾아서!- (4) -4- 태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일 무렵, 일행이 탄 배는 동대륙의 남단에 위치한 조그만 항구에 그 닻을 내렸다. 이곳은 왕국이나 제국이라는 명칭이 붙을 만한 나라가 되지 못한 조그만 도시국가였는데, 그 규모와 영향력은 터무니없이 작지만, 제법 독특한 문명을 발전시킨 나라였다. 이 나라의 이름은 '베니시아'였는데, 이 나라는 소국임에도 불구하고 기이하게도 주변의 강 대국에게 여지껏 먹히지 않고 잘살아왔다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모르는 뭔가 이유가 있 겠지만, 왠지 아름답고도 소박한 나라인 듯 싶었다. 게다가, 약간 남쪽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지 한겨울에도 그다지 매서운 추위는 없었다. 물론, 이곳에도 눈은 내렸지만, 겨울에 비가오는 경우가 더 많았다. 아무튼, 일행은 이곳에 내려 생필품을 사거나 잠시 쉬기 위해, 이곳 베니시아의 항구에 그 발을 들여놓았다. 선원들은 항구 근처에 있는 술집으로 베니시아의 진미를 맛보기 위해 우르르 몰려갔는데, 어지간히 술을 사랑하는 뱃사람들인 듯 했다. 하지만, 약간 거친 듯 하면서도 자유분방한 그들만의 특유한 성격들이 보기좋아보였다. 미카엔은 역시 위엄있는(?) 왕족답게... 가 아니라, 평범한 여행객 차림을 하고서 항구 근처 에 있는 시장을 구경나갔다. 물론, 그의 뒤에는 기사들과 호위 마법사들이 줄줄이 따라붙고 있어, 평범한 옷차림을 했다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미카엔이 높은 지위의 사람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듯 했다. 나 역시 미카엔을 따라나왔다. 길다란 황금빛 머리채를 늘어뜨린 채 -긴머리가 보온 효과 에 뛰어났기 때문에- 여성용 여행복을 입고는, 볼거리가 넘쳐나는 시장의 활기넘치는 모 습에 나는, 정신없이 눈동자를 굴리며 구경하고 있었다. 이곳의 시장은 내가 익히 알고 있던 한국의 시장모습과는 크게 달라있었다. 물론, 상인들이 소비자들을 호객행위를 하며 물건을 파는 것은 똑같았지만, 그 방식이나 파는 물품 등등, 여러 가지가 굉장히 색달랐다. 미카엔은 평범한 옷차림을 했다지만, 뒤로 줄줄이 비엔나처럼 따라붙는 많은 떨거지 때문에 집중되는 이목들이 매우 불편하였는지, 계속 성가셔 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킬린! 더 이상 나를 호위하는 것은 그만두고 각자 쉬도록 조치를 취하게! 내가 스스로의 몸을 지키지 못하는 나약한 왕족이 아닌 것은 자네도 잘알지 않는가?" 미카엔은 더 이상은 못참겠는지 홱 몸을 돌리고는 노마법사 킬린에게 말했다. 킬린은 왕실 마법사이지만, 그래도 수석마법사로서 그 지위가 있었기에, 저 떨거지들의 책임자 노릇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하!" 킬린은 안색이 변하며 뭔가 토를 달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미카엔은 그의 말을 자르며 자 신의 권위를 내세워 협박하듯이 그에게 말했다. "명령이다. 킬린! 당장 저들 모두 철수 시키게!!" 명령 불복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눈에 힘을 주며 말하는 미카엔을 보며, 킬린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고는 그의 말에 따랐다. "그럼, 전하! 두시간 후에는 꼭 배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이 노인을 걱정시키지는 마십시오! 전하라면 물론 걱정은 안하겠지만, 그래도 처신을 잘하시고 정해진 시간에 돌아오셔야 제가 걱정을..." "알았네! 킬린." 한없이 이어질 것 같은 노마법사의 잔소리성이 짙은 말소리에 미카엔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 더니, 그대로 킬린의 말을 잘라버리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내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덥썩 손을 붙잡고는 나를 이끄는 것이었다. "라비스! 우리 어디 구경갈까? 간신히 우리 둘만 되었는데, 잠시나마 우리가 황태자와 측실 의 신분임을 잊도록 하자!" 미카엔은 반짝 반짝해진 눈으로 나에게 말했는데, 그 눈빛은 기대감으로 충만된 눈빛이었 다. 거의 왕성에서만 지내던 그가, 한가롭게 평범한 인물로서 시장바닥까지 나온 것은 아 마도 처음인 듯 했다. 그러니, 저렇게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것일테지. '어? 그런데 저녀석, 자신이 나에게 화가 나있었다는 것도 그새 잊은 것인가?' 하긴, 그런면에서는 꽁하고 있는 것보단 금세 풀어지는 성격이 장점이긴 하겠지만, 나에게 는 그다지 반가운 장점이 아니었다. "흠, 시장이란 것은 없는 것이 없는 것 같군. 라비스! 넌 이런 곳에 자주 와봤어?" "물론이죠! 어렸을 때, 엄마 따라서 시장에 종종 오곤 했어요." 그러자, 미카엔은 놀랍다는 얼굴을 해보이며 나에게 반문을 했다. "아니, 남작부인께서 이런 곳에 자주 오셨단 말이야? 음... 굉장히 소탈한 성격의 분이신 모 양이군." 나는 내가 한국에 있었을때의 일을 말한 것이었지만, 미카엔은 남작가의 귀족 부인이 직접 시장에 나오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나는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앗! 우리 저기 구경 해보자! 희한한 생선이 굉장히 많군." 이곳은 바닷가가 근처이니 다양한 생선을 파는 상인들이 매우 많았다. 물론, 미카엔은 항상 요리된 생선만 접했었을테니 직접 실물을 보는 것은 흔치 않는 경험일 듯했다. 미카엔은 종류별로 나누어서 물에 담아 둔 살아있는 이름모를 여러 생선들을 보며, 신기한 듯 감탄을 해보였다. "이보게! 이 생선은 한 마리에 얼마하지?" 미카엔은 생선을 팔고 있는 나이 지극한 아줌마에게, 평소 그의 말투인 약간 오만성이 섞인 어투로 물었다. 그러자, 아줌마는 거만해 보이는 미카엔의 말투에 발끈을 하더니, 특유의 억센 아줌마 성격답게 커다란 목소리로 떠벌떠벌 외쳤다. "아니! 새파랗게 젊은 것이 총각은 부모도 없나? 내 아들이 총각보단 나이가 많아!! 어디서 어른에게 반말인가? 떠벌 떠벌~" '허걱! 일났네?' 귀청떨어질 것 같이 유난히 큰 아줌마의 목소리에 미카엔은 안색이 변하여, 잠시 황당한 듯 멍하니 있더니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새파랗게 젊은 총각?" "미카엔! 지금은 미카엔은 황태자 전하의 행색이 아니라구요. 어서 도망가요!" 나는 미카엔에게 작게 속삭이고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미카엔은 나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었는지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휴~ 저렇게 무서운 여인은 처음보는군. 나의 어머니보다 카리스마가 넘치는걸. 설마, 저 부인도 드래곤이 폴리모프한 것은 아니겠지?" 미카엔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웃었다. 드래곤이 풀리모 프한 것이라니... 미카엔의 황당한 발상이란! 저 아줌마가 조금 불같은 성격을 가진긴 했 지만, 그것으로 드래곤으로 단정짓긴 어려웠다. 하긴, 미카엔은 감히 자신을 윽박지르는 인물은 아직 만난적이 없으니 이러한 반응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듯 했다. 그러다가, 나는 갑자기 현기증이 이는 것이 느껴졌다. 결국은 나는 휘청하였고 미카엔은 놀 라며 나의 몸을 감싸안았다. "왜그래? 또 아픈 거야?" 미카엔의 놀란 얼굴이 내가 보아도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그런 그의 얼 굴에 나는 훗! 하며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내다가, 나의 몸에 피가 잘 통하지 않는 듯, 귓 가에서 웅웅거리는 음향이 울리며, 내앞의 시야가 그야말로 하얗게 변하였다. 보통은 시야가 어두워질 때, 밤처럼 어둡게 변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나는 정말로 거짓말 안보태고 하얗게 변하였다. 그저 하얀바탕에 미카엔의 실루엣만 보여,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입술이랑 손가락부분 같은 곳이 차갑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미카엔의 옷자락을 꽉 붙 잡았다. "...비스! ....스!! ..." 미카엔이 나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의식은 아직 남아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감각들이 차단되어지자, 겁이 난 나는, 미카엔의 이름을 겁에 질린 목소리로 불러 제꼈다. "미카엔!! 미카엔! 이상해! 아무것도 안보여. 안들려요. 히잉~ 미카엔!" 미카엔의 옷자락이 찢어질 정도로 거세게 움켜잡으며, 울 듯이 외쳤다. 그러자, 나의 몸안으 로 어떠한 기운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미카엔이 힐링마법(회복마법)을 쓴 듯 싶었다. 잠시 후, 나의 감각들은 다시 그 기능을 회복해 갔다. 하얗던 나의 시야는 다시 그빛을 되 찾아갔고, 귓가에서 웅웅거리던 음향도 사라졌다. "이젠 정신이 들어?" 해쓱해진 미카엔의 얼굴이 들어왔다. "아! 네." 그의 품에 안겨서 추태를 부린 것 같아, 나는 속으로 내 자신에게 질책하며 얼른 몸을 바로 하였다. 그러자, 어느새 모여들었는지 주위에서 웅성대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쯔쯧, 처자가 몸이 약한 모양이구먼!" "총각! 앞으로 고생 좀 하겠어! 하하하." "그러게! 그래도, 총각은 곱상인데다가 배필은 한인물 하는구먼! 헐헐." "정말 잘어울리는 한쌍일세!" 한순간에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우리는, 둘 다 붉어진 얼굴로 그 곳을 도망치듯이 빠져나왔 다. 그러자, 우리의 뒤로 왁자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휴~ 내가 이렇게 당황해보기는 처음인 것 같군. 라비스! 어서 돌아가자. 넌 좀 쉬어야 하 겠어." [108] 체인지(Change) 제19화 -환상의 섬을 찾아서!- (5) -5- 다시 배로 돌아오고 나서, 우리 일행은 다시 지루한 바다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베니시 아의 항구를 나오고 나서, 중앙대륙의 남쪽 끝에 위치한 국제무역항이라고 할 수 있는 ' 테스툰'의 카샤드항에 경유하였다. 카샤드항은 대륙의 남쪽 나라들의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그 중간점이라 국제무 역항으로서 꽤나 유명해진 곳이었다. 그래서, 볼거리도 많았지만 나의 체력과 기운은 그 후로도 계속 쇠약해져 나는 함부로 나들이를 나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여행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두 차례나 쓰러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도, 마족의 독이 나의 육체에 점차 영향을 주어서 그 기력이 쇠약해지는 듯 했다. 게다가, 나는 몽유병 증세 비슷한 것도 보였는데, 그때마다 내가 이상하게 행동하기라도 했는지, 미카엔은 도현이가 누구냐고 자꾸 물어왔다. 나로서는 정말 식은땀 나는 일이었다. 아마도, 내가 중간 중간 헛소리를 한 것이 틀림없었 다. 내가 의식이 흐려져 있는 동안, 그러니까 내가 기억을 못하고 있는 동안 나도 모르는 무슨 행동을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카샤드항을 나오고 나서 다시 여행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무료할 만큼 평화로운 여행이 계속 되었다. 그러다, 점점 기온이 내려가고 바다에 빙산이 점차 많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빙산의 어디에선가 너무도 아름다운 여성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음률은 소름 끼칠 정도로 아름다워서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아버리고 그 노래에 취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방안에 누워있다가 선실밖을 나가보았다.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각자의 일에 몰두하고 있어야 할 선원들이 모두 넋을 잃고 멍해진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놀라며, 이 배를 조종하고 있는 선원을 찾아가 보았다. 뭔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기 때 문이었다. 그러자, 이 배의 운명을 틀어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방향키를 붙잡고 있는 선원 역시 멍한 표정으로 황홀한 듯 노래에 심취해 있었다. 그가 붙잡고 있던 키는 아무렇게나 마구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 키를 붙잡고는 정령들을 불러내었다. 정령들은 이 노래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지 멀쩡한 모습으로 나의 앞에 나타났다. "어떻게 된 거야? 선원들이 모두 왜저래? 기사나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야! 난 이 배를 조종 할 줄 모르는데." 내가 하소연 하듯이 외치자, 샤르가 나서며 입을 열었다. "이건 세이렌의 노랫소리야! 아마도, 멍청하게 선원들이 이것에 대한 대처를 못한 모양이 야! 무조건 귀를 막고 가야 하는데..." "뭐? 싸이렌?" 내가 멍청한 얼굴로 묻자 샤르는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세이렌!!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해서 길을 잃게 하여 죽게 만드는 장본인들로 유명하지!" "아!" "히잉~ 어떻게 해? 라비스. 이러다가 배가 난파당하면 어떻하지?" 리엔시타가 울상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나 역시 뾰족한 방법이 없던 터라 그저 망연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미카엔이 갑판 위로 올라왔다. "미카엔!" "아! 라비스, 괜찮아? 이곳에 세이렌이 있다는 것을 간과했었군. 선장이 그런 것도 미리 대 처를 못해서야... 나중에 꼭 잘라야 하겠어!" 미카엔은 심각해진 얼굴로, 무능한 이 배의 선장을 한번 탓하고는 나에게 입을 열었다. "라비스! 우린 이 배를 조종할 능력이 없으니, 우선 배를 한자리에 묶어놓도록 해야 하겠 어! 안그러면, 빙산이나 빙산 조각에 부딪혀 배가 난파당할지도 몰라! 네가 정령들에게 명령을 내려!" 그의 말에 나는 잠시 당황한 얼굴을 하였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정령들을 직접 부릴 수 있는 자는 오직 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리엔시타에게 고개를 돌렸다. "리엔! 너의 힘으로 이 배를 이 자리에 묶어둘 수 있어?" 그러자, 리엔시타는 나름대로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러나 전혀 심각해 보이지는 않 는다.- 나의 말에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한번 해볼게!" 그러면서,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는데, 그러한 그녀의 모습으로 인해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도, 나는 웃음이 나려 했다. 리엔시타는 금세 투명해진 몸으로 바다로 뛰어내려갔고, 나는 다시 미카엔을 바라보며 갑자 기 든 의문을 그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미카엔! 왜 우리만 지금 멀쩡해 있는 것이죠?" "...그건, 넌 여자이고, 나는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은 자라 그래! 세이렌은 여성의 모습을 가 지고 그 요사스러운 노래로 남자들인 선원들을 홀리거든! 나 역시 정신이 몽롱해지는군. 어떻게 빨리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럼, 미카엔이 직접 세이렌들을 찾아내서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면 되잖아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야! 그녀들은 귀신같이 빙산이나 물속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 어, 나의 마법적 능력으로도 찾기가 거의 불가능해! 게다가, 노래소리만으로도 그 근원지를 파악할 수 없으니... 세이렌들을 잡아다가 그 혀를 뽑아낼 수도 없단 말이야! 오직 방법 은 그녀들이 스스로 노래를 멈추게 해야 하는데..." "그럼, 아멘시타나 아젠에게 그녀들을 찾아내도록 부탁하면 안될까요?" 그러자 미카엔은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이렌들 역시 정령 비슷한 존재들이라, 너의 정령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거야!" 미카엔의 말로는 지금 상황으로선 우리에게 아무런 방책이 없다는 말이었다. 정말 절망스런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때, 뭔가 방법이 떠올랐는지 미카엔은 나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라비스! 그럼, 이 방법 밖에 없을 것 같애! 네 바람의 정령 아젠샤르에게 명령을 내려! 그 는 노래를 잘한다고 했지? 저쪽에서 우리에게 노래로서 공격을 하고 있는 셈이니, 우리도 노래로서 방어를 해야 하겠지?" 그렇게 자신의 이름이 불쑥 튀어나오자, 근처에서 묵묵히 표정없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아젠샤르의 얼굴에서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아! 그렇군요!! 이에는 이, 노래에는 노래이지요!!" 나는 화색이 도는 얼굴로 그렇게 격한 어조로 답하고는 반짝반짝해진 눈빛으로 아젠샤르에 게 달려가 그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그러자, 아젠샤르는 나의 이런 모습에 미미하게 움 찔해보였다. "아젠!! 너밖에 없어! 해줄 거지?" 약간 야릇한(?) 느낌마저 도는 나의 대사에 아젠샤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 덕이며 답했다. "그러죠! 라비스님." 그렇게 해서, 세이렌과 아젠샤르의 노래 대결이 펼쳐지게 되었다. 나는 초조한 얼굴로 뱃머 리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아젠샤르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동안 목청을 가다듬더니, 이내 티없이 맑은 미성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 다. 그의 노래소리는 요사스러움이 묻어나는 세이렌들의 노래소리에 잠시 묻히는 듯 하 다가, 어느 순간, 그의 잔잔하고도 숭고한 느낌마저 드는 음률은 바람을 타고 이 곳 바다위 를 표류하기 시작했다. 마치 성가대가 성스런 신의 노래를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홀로 노래를 불렀지 만, 마치 여럿이 합창을 하는 듯한 웅장함마저도 들었다. 아젠샤르의 노래는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저 세이렌들의 노래와는 다른 느낌으로, 나의 가슴에 전율이 일으키게 하였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감동으로 촉촉해진 눈가를 닦으며 나는 그의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세이렌의 노래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있던 선원들이 점차 정신을 차려갔다. 그 들은 세이렌의 노래소리에서 점차 아젠샤르의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 바로 곁에서 들리는 듯하던 세이렌의 고막을 울리는 듯한 노래소리는, 조금씩 시들어가듯이 아젠샤르의 노래소리에 묻혀져 갔다. 선원들의 웅성거리는 음성들이 나의 귀에 들려왔다. "저건 천상의 목소리야!" "하지만, 바람처럼 쓸쓸하고 고독한 느낌인걸!" '하긴, 그는 바람의 정령이니깐!' 이윽고, 세이렌들의 노래소리가 그쳤다. 하지만, 아젠샤르는 한동안 더 노래를 부르더니 씁 쓸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 의아해진 나는 그에게 무언의 질문을 던졌다. "세이렌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라비스님. 그녀들의 노래소리로 알 수 있었지요. 그녀들은 자신의 마법이 걸려들지 않으면, 자신의 노래가 지게 된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바위가 되어버리죠. 그녀들은 모두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아, 그래..." 나는 왠지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중얼거리듯 대꾸하였다. 우리들을 유혹하려던 나쁜(?) 세이렌들이었지만, 나는 왠지 안타까운 느낌도 들었다. 어쨌든, 우리는 아젠샤르와 리엔시타 그리고 미카엔과 나의 침착한 대응으로 인해 이번 일 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다시 우리의 항해는 시작되었고, 그렇게 긴장감이 일순간 풀린 나는 또다시, 휘청하여 미카엔의 안색을 다시 한번 창백하게 하였다. [109] 체인지(Change) ☆이벤트 결과!☆ ☆이벤트 결과!☆ 《1》등장인물의 인기투표 좋아하는 캐릭터 : 1. 미카엔 (13표) * 허걱! 쥔공의 지지도보다 더 높다니! - 무엇보다 잘생겼고, 하프드래곤인데다가 라비스를 지극정성으로 아껴주어서 좋아하신다 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유없이 걍 좋다는 몇몇 분들도 계셨고...;;; 2. 라비스(도현) (12표) * 체인지의 쥔공이죠! - 약간 우유부단한 성격도 가지고 있지만, 무엇보다 이쁘니깐 봐준다는 의견도 있었고, ㅡㅡ;; 가끔 냉철(?)한 생각도 할 줄 알고, 또한 가끔 잔머리(?)도 굴릴 줄 아는 모습이 좋 다는 분, 그리고 귀엽고 착하다는 이유로 라비스에게 투표 한 장씩을 던져주셨습니다. 냐 하하~!! 아! 또 그리고, 항상 밝으면서도 스스로에 존재에 고민하는 라비스의 모습 등등... 3. 아젠샤르 (7표) * 헉! 대사두 별루 없던 것이 이렇게 이렇게 인기가 있었을 줄은... 하 긴, 그동안 많이 부려먹었으니... ㅡㅡ;; - 아젠은 생각이 깊고 다른 정령들과는 다르게 애들(?)같지 않은 면에 끌리신다는 분들과 무뚝뚝하지만 라비스에게 충성(?)을 하고 묵묵히 해줄 것은 다해주는... 라비스를 위해(아 마도, 마족 여자와 싸울 때를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무리수도 던지는 신념에 아젠을 좋 아하신다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아! 걍 바람이 좋아서 아젠을 좋아하신다는 분도 계셨죠!^^;; 4, 아멘시타 (3표) * 아마도 귀여운 아기 고양이의 몸에 있던 아멘시타를 좋아하시는 것 같 더군요. 5. 엔카루스 (1표) * 쥔공만 안괴롭혔어도 이보다 더 인기있었을텐데... 엔카루스! 토닥토닥 이얌~ 6. 에드 (1표) * 초반이후로 나오지 않고 있는데다가 등장씬도 별로 없어서 잊혀진 줄만 알 았던 에드가 한표 얻었네요!^^;; 하긴, 에드 정도면 괜찮은 녀석이죠! 7. 작가 (1표) * 헉! 뜨아~ 저에게 관심 가져주시는 분이 계실 줄은... 이분이 보내신 멜을 받고는 한참을 웃었다는.... 캬하하하~~~!!! 보기싫은 캐릭터 : 1. 마족여자 (11표) * 아직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인물이 이렇게 압도적 인 지지를 받다니... 불쌍~! - 마족여자를 싫어하시는 이유는 대부분, 라비스의 얼굴에 상처입힌 이유에서 그렇더군요. 게다가 미카엔을 유혹하려 했기 때문에...ㅡㅡ;; 2. 미카엔 (4표) * 이 부분에서도 당당히 2위를 차지한 미카엔임당~ - 너무 잘나서 싫어하신다는 분들이 대부분이더군요.^^;; 혹은, 그냥...;;; 3. 엔카루스 (4표) * 역시나 미움받고 있는 엔카루스... 이게 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 엔카! 4. 라비스 (3표) - 본래 라비스에게 표를 던져주신 분... 그리고, 라비스가 자아정체성 문제로 갈등 때리게 만드는 요인인 도현이에게 표를 던져주신 분이 있었지만, 그냥 라비스로 통합(?)해 버렸 습니다. 왠지 머리가 아파서리...;;; 5. 카이엔 (3표) - 예쁜 라비스를 차서 미움받고 있는 캐릭입니다. 그리고, 너무 이성적인 것은 냉혈한 같아 서 싫다는 분이 계시더군요. 6. 아사벨라 (1표) * 흠... 제가 제대로 정리를 한 것인지 의문이군요. 분명히 아사벨라를 찍어주신 분이 몇몇 분이 계셨던 것 같은데... 어째, 제가 정리한 메모에는 1표로 나와있는 것인지...ㅡㅡ;; 흐음... 뭐, 맞겠죠. 7. 제이크 (1표) 8. 첨에 등장했던 페르시안 고양이 (1표) 9. 라비스에게 추근대는 모든 인물(?) (1표) ㅡㅡ;;;; 《2》베스트 커플 1. 미카엔 & 라비스 (18표) * 거의 압도적이죠! ^^;;; -미카엔과 라비스를 베스트 커플로 뽑아주신 이유는 대부분 미남 미녀라서... 잘 어울리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니깐... 등등입니다. 2. 리엔 & 샤르 (4표) * 흐음... 물과 불이 만나면 뭐가 나올까? ㅡ.ㅡa 3. 엔카루스 & 라비스 (2표) 4. 라비스 & 아젠 (2표) 5. 리엔 & 아젠 (2표) 6. 마족여자 & 미카엔 (1표) 7. 라비스 & 아멘시타 (1표) 8. 도현 & 라비스 (1표) * 이분은 카사노바와 절대미인이라는 의미에서 한표를 던져주셨습 니다. 9. 에드 & 라비스 (1표) *마님(?)께 충성하는 하인과 마님의 사랑의 도피를 예시로 들어주 셨는데... 캬하하하~!!! 넘 잼씀다.^^;; 10. 리엔 & 라비스 (1표) * 허걱!! 라비스라면 도현을 말하는 것이겠죠?? * 의외로 다양한 커플이 나왔더군요. 약간 엽기적이고 기발한 커플이 있었지만... 아하 하...;;;; 《3》주인공에게 바라는 점! 1. 라비스 - 대부분,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미카엔을 받아들이라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그 외에 미 카엔에게 잘해주기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능력있는 여자가 되며, 전국의 소녀들 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좀더 자신을 잘 꾸며서 여자 카사노바가 되기를... 등등. ㅡㅡ;; 2. 미카엔(미카엔은 쥔공은 아니지만, 그래두 주연급이니...) - 단 한마디였습니다. 미카엔! 밀어붙여!! ㅡㅡ;;;;;;;;;; 《4》작가에게 바라는 점! - 역시나 대부분의 내용이 연참에 대한 얘기더군요.^^;; 물론, 그외에 라비스와 미카엔이 잘되게 해달라는 분들, 그리고 라비스의 밝은 모습을 보고싶다는 분, 등등 쥔공에 관한 내용이 있었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성실연재를 바라는 분도... 그리고 소신있게 좀더 좋은글을 쓰기를 바라는 분도 계셨습니다. 물론, 당근!! 저는 체인지가 좀더 좋은글이 될 수 있기를... 언제나 노력할 겁니다.^^ 《5》체인지의 제목 적합 여부 투표!! - 거의 반반이었습니다. 한 영혼의 육체가 바뀌고, 주위 환경이 갑자기 바뀌고, 성별이 바뀌고... 모든 것이 바뀌었지 요! 그런면에서는 체인지가 적합하다고 하셨습니다. 체인지에 대한 제목에 대해서는 그저 영혼이 서로 바뀌는 것에 대해 한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단 그런면에서는 저도 체인지가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뭔가 단순하고 썩 멋진 제목이 아니라서, 약간 맘에 걸리 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뭔가 내용을 포괄할 만한 더 멋진 제목이 있었으면 좋겠 다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곧, 있으면 체인지도 출판을 합니다. 이미 계약 상태이거든요. 만약 책으로 나온다면, 체인 지라는 제목보다는 더 쓸만한 제목이 있어으면 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의 제목에 뭔가 덧붙인다던가, 아니면 전혀 다른 색다른, 내용에 부합되는 제목이 있으면, 만약 있다면 저 는 바꿀 의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제목으로 밀고 나가고요!^^;; 만약, 괜찮은 제목이 있다면 저에게 추천을 해주세요! 지금의 제목보다 더 어울리는 제목이 나온다면, 저는 그 제목을 택할 것이고, 그 제목을 추천해준 분에게 감사의 표시로, 체인지 1권이 나오면 직접 1권을 우송해 드리겠습니다. 《6》의문난 사항. 1. 라비스의 경호원이었던 에드는 어찌되었으면 다시 안나오는지? - 흠... 그는 때가 되면 다시 나옵니다. (헉! 무책임한 답변...) 2. 아사벨라는 처형되었는지? -아직 저는 그녀가 쳐형되었다고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녀는 쳐형되지 않았으며 그녀 역시 때가 되면 다시 나옵니다.ㅡㅡ;; 3. 쥔공의 아버지인 다니엘 남작과 미카엔의 첫 번째 측실인 유리스 그리고 두 번째인 아사 벨라, 카이엔 등은 어떻게 되었는지? - 역시, 간단한 대답! 잘살고 있겠죠 뭐! (퍼벅!!!) @.ㅜ 4. 본래 라비스는 확실히 죽은 것인지? - 현 상황으로선 그녀는 이미 저세상 사람...;;;입니다. 5. 마족이 다시 돌아와서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는지? - 글쎄요. 그건 체인지의 다음 스토리가 진행되야 알 수 있는 일이죠! 6. 라비스는 독 때문에 죽는 것인지? - 그 역시, 비밀입니다.^^;;; 7. 본래 라비스은 도현의 몸으로 들어가 있는 것인지? - 그건 아닙니다. 본래 라비스는 죽어서 영혼이 떠나버렸기 때문에, 아멘시타가 라비스의 눈을 뜨게 하게 위해 억지로 도현의 영혼을 이세계로 이끌어온 것입니다. 마침, 도현은 자살하려고 폼만 잡고 있었는데, 진짜로 본의 아니게 투신하게 되어 아멘시타는 도현이 자살하여 죽은 것이라 성급하게 생각하고는 그의 영혼을 이끌어온 것입니다. 그러니깐 라비 스와 도현은 비슷한 이유인 연인 문제로(진짜 라비스는 짝사랑 도현은 잘난척하다가) 자 살한 경우가 되겠죠! 도현은 자살할 생각이 없었지만, 어쨌든... 둘의 운명은 어쩌면 비슷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비록 사는 세계와 성별은 다르지만... 그래서, 도현이 아멘시타의 눈에 띄인 것이 아닐까요? 8. 우리쪽 세계에서 도현의 시체는 발견이 되었는지? - 아직, 도현의 육체가 죽었는지, 식물인간 상태인지 모릅니다. 더 내용이 진행되어야 알 수 있는 일이죠! 9. 라비스가 마법사의 탑에 있었을 때, 미카엔에게 그 기운을 숨겨야 하는데, 몬스터 퇴치 등을 하고 다녔어도 되었는지? - 흐웅~ 물론, 마법사의 탑에서 나와 그렇게 나돌아 다니는 것은 미카엔에게 들킬 수가 있 겠죠! 하지만, 라비스는 자신의 기운을 전혀 내보이지 않고 다닌데다가, 만약 미카엔이 사 주한 론티아 정령들이 근처에 나타나면 아멘시타가 금방 알 수 있었겠죠! 10. 정령 & 미카엔의 능력 상관 관계는 어찌되는지? - 간단하게... 미카엔 > 라센샤르 > 아젠샤르 > 샤르 > 리엔시타 > 아멘시타입니다. 아! 공격면에서는 불의 정령인 샤르가 약간 앞서지만, 광범위한 능력으로 따진다면 아젠샤르가 앞서겠지요!^^ 여기까지입니다.^^ 100회 자축 이벤트에 참여해주신 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님들 모두 언제나 행복한 하루 하루가 되시길... 기원하며 라얀은 물러갑니다. [110] 체인지(Change) 제19화 -환상의 섬을 찾아서!- (6) -6- "이제 금단의 영역에 들어온 것 같아. 그리고 세이렌들이 우리를 맞은 그 첫 번째 환영인사 였던 것 같고..." "...그렇군요." 미카엔의 말에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기운없이 답했다. "...그러니깐, 시리어스섬에 도착할때까지 더 이상 아프지말고 힘내!" 그의 말에 나는 미미하게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다시 낫는다면, 나는 너를 로히얀스로 데리고 가서 나의 부인으로 정식으로 맞을 거 야!" "그게 무슨 소리이죠?"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에게 되물었다. 정식으로 나를 부인으로 다시 맞겠다니... 어차피, 나 는 그의 부인 중 하나로 되었는데... 나의 질문에 미카엔은 빙긋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너를 황태자비로 맞겠다는 말이야." "미카엔! 황태자비는 공작가의 영애로만 간택이 가능하잖아요?" "물론, 그렇지만... 법도야 바꾸면 그만이잖아? 아마도, 많은 반대가 있겠지. 하지만, 나는 너 를 황태자비로 맞아들이겠어!" 지금 미카엔의 말대로라면 남작가의 여식을 황태자비로 맞아들이겠다는 말이 되었다. 백작 이나 후작의 딸도 아닌 하급 귀족인 남작의 딸을... 엄격한 왕실의 법도가 존재하는데, 미카엔은 그것을 무시하겠다고 하니, 나로서는 정말 난 감하였다. 보나마나, 로히얀스의 최고 권위자인 국왕 폐하도 이 일을 인정해주지 않을테고, 수많은 중신들... 그리고, 왕실 종친들이나 귀하신 귀족 나으리들이 이일을 반대하고 나 설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왕실은 미카엔의 발언으로 인해 발칵 뒤집어질테고, 정작 나는 아무런 뜻도 없는 데 괜시리 피곤만 해질 듯 싶었다. 물론, 라비스의 아버지인 다니엘 남작이나 유모인 루 이스는 입이 찢어질 일이었다. 황태자비가 된다는 것은 장차 왕비가 된다는 일이 아닌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미카엔! 전 이대로 좋으니깐, 그런 일은 그만두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침대에만 누워있어 답답해진 몸을 일으켰다. 요즘은, 자리에 일어나 있는 것만 해도 현기증이 났다. 어떤 때에는 저번처럼 나의 감각기능들이 아주 마비되어 버리기도 하였다. 그때, 고막을 찢는 듯한 비명소리가 미카엔과 나의 귀에 강타하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그리고, 누군가가 우리가 있는 방쪽으로 달려오는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미카엔의 수행원 중 하나가 뭔가 급히 보고하기 위해 다가오는 것이라 생각하며, 그가 문을 열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고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꺄아악~!!" 나 역시 비명을 질러야 했다. 문을 급히 열고 들어온 자는, 얼굴과 온몸이 썩어 문드러진 좀비와 같은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카엔은 움찔해 보이며, 자신의 허 리에 착용되어 있는 보석이 박힌 화려한 검을 스르릉 꺼내들었다. 그러다가, 미카엔은 뭔 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였는지, 나지막한 탄성음을 내었다. 방금 들어온 좀비(?)는 왕실기사 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좀비는 내쪽을 보고는 놀란 듯 소리를 지르다가 자신의 검을 꺼내들었다. "이건, 환각이다!! 우린 환각의 영역에 들어온 거야!" 미카엔은 그렇게 외쳤지만, 좀비 기사는 그의 롱소드를 꺼내들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곧, 미 카엔과 이성을 잃어버린 좀비 기사는 맞붙게 되었고,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정령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정령들은 나의 앞에 금세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그들은 다행히 멀쩡 한 모습이었다. 나는 정령들을 불러내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한 모습으로 멍청하 게 있자, 보다 못한 샤르가 나에게 입을 열었다. "라비스! 지금 이 배는 저 황태자의 말대로 환각의 영역에 들어와 있어. 이러다 서로 죽이 고 죽이는 일이 벌어지게 될 거야."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곳은 점점 변해갔다. 내가 있던 방안은 음침하고 어두 운 동굴의 모습이 되었고, 내가 누워있던 침대는 반쯤 썩은 나무로 만들어진 관의 모습이 되었다. 게다가 그 안에는 바퀴벌레와 구더기 같은 징그러운 벌레들이 우글우글거리고 있었다. "까아아아악~!!!!" 그 끔찍한 모습에 나는 옆에 있던 샤르에게 매달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나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나는 더욱 놀라 보지도 않고 그 손길을 뿌 리치며 소리를 질러대자, 미카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비스, 나야!" 그는 미카엔이었다. 미카엔은 방금 좀비 기사 외에도 또 몰려왔던 마미(Mummy:미이라의 모습을 한 언데드)의 모습을 한 왕실 마법사들을 한꺼번에 잠재우고 나서, 그는 나에게로 다가온 것이었다. 그는 다른 이들처럼 좀비나 그 외에 징그러운 몬스터의 모습으로 변하 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여느 마법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드래곤의 피가 그의 몸에 흐르고 있기 때문인 듯 싶었다. "훗... 라비스는 그래도, 아름다우신 흡혈귀의 모습이 되셨군!" 미카엔은 나를 보고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그렇게 말하였지만, 나로서는 안색이 하얗게 질릴 말이었다. '헉! 그래서, 내 침대가 관의 모습으로 변했던 것인가?' 아무튼, 완전한 던전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배 안의 모습에 나는 질려버린 얼굴로 미카엔의 곁으로 다가갔다. 다리가 후들후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미카엔은 어두운 동굴 안으로 밝히기 위해서인지 조그만 빛덩어리 하나를 만들어내었다. 그 러자, 주변 모습이 환하게 나의 눈에 들어왔다. 이미 몬스터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일행들은 미카엔이 마법으로서 잠재워 버려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쓰러져 있었다. 다들, 끔찍한 모습을 하고 바닥에 누워있으니, 소름이 끼쳤다. "흠, 이곳의 환각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암담하군." 미카엔은 나의 손을 이끌어 동굴 안을 탐색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나 의 정령들도 그 뒤를 따라왔다. 아멘시타는 저번 항구에서 들려 사온 조그만 고양이의 몸속에 들어가 있었는데, 그는 리엔 시타의 품안에 안겨서 우리의 주위에 방어 오오라를 펼쳤다. 그러자, 수없이 우리 주위로 달려들던 흡혈 박쥐들은 오오라 막에 부딪혀 치직거리며 타들어가곤 했다. "...그런데 미카엔! 우리 배안의 구조가 이렇게 생겼었나요? 이렇게 일직선으로 한없이 통로 가 이어지지는 않는데..." "우리는 환각속에 있는 거야! 라비스. 우리가 그 환각을 풀기 위해서는 이곳의 우두머리를 제거해야 해! 던전 안의 주인은 누구라고 생각해? 그건 드래곤이나 용의 일종이 되겠지! 바다의 정령이 말했다고 했었지? 시리어스 섬은 네 존재의 보이지 않는 용이 지키고 있다고 ! 우리는 그 용을 찾으러 가는 거야! 보이지 않는 용이란 환각 속에서 존재하는 용이 되겠지." "아, 그렇군요!" 미카엔의 말에 나는 대충 이해가 갔다. 그렇다면, 환상의 섬이라 불리는 시리어스 섬도 환 각속에 존재하는 섬일까 하는 생각을 나는 해보았다. [111] 체인지(Change) 제19화 -환상의 섬을 찾아서!- (7) -7- 그렇게 얼마쯤 앞으로 나아갔을 때, 우리에게 달려들던 흡혈박쥐들은 어느새 그 모습이 변 화하여 몬스터인 가고일(날개달린 마신의 모습을 한, 돌로 된 골렘의 일종)로 바뀌었다. 아무리 환각속에 들어와 있다지만, 제 멋대로 바뀌는 그 모습에 내가 몸이 허약해져서 긴 악몽을 꾸는 것이 아닌가 했다. 아무튼, 그렇게 되자 아멘시타가 치고 있는 오오라 막은 그 힘이 딸리는지 가고일들이 수없 이 부딪혀 올때마다 그 막이 얇아져 갔다. 그러자, 미카엔은 커다란 아이스 볼을 하나 만 들어 내더니, 그것을 가고일들에게 날렸다. 미카엔의 아이스 볼은 가고일들에게 날아가 적당한 곳에서 멈추더니, 이내 파악~ 하고 터 지며 그 날카로운 얼음조각들이 무서운 기세로 사방으로 튀었다. 우리에게도 쏟아져오는 그 얼음조각들을 막기 위해, 리엔시타는 얼른 아멘시타의 얇아진 오오라 막을 보강하는, 물 의 속성으로 실드 막을 한 개 더 만들어내야만 했다. 마법적 기운이 서려 있어 일반 얼음보다 더욱 입자가 견고하고 단단한데다가, 마치 파이어 볼이 폭발하는 것과 같은 효과로 가고일에게 그 조각들이 날아가니, 수많은 가고일들의 몸에 날카로운 얼음조각이 박혀 금이 쩍쩍 갈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보통 골렘들이 그러하 듯 지능이 낮고 무대포적인 성격 그대로, 별로 피해를 입지 않은 가고일들은 여전히 우리 를 공격하였다. "쳇~ 귀찮군!" 그렇게 중얼거린 미카엔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실드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러더니... "네 이놈들!!" 마치 자신의 신하를 호령하는 듯한 어투로 가고일들에게 외쳤다. 그러자, 그의 외침에서 무 시무시한 드래곤 피어가 뿜어져 나와, 그에게 달려들려던 가고일들은 멈칫하였다. 비록 실드안에 있던 나였지만, 미카엔의 드래곤 피어가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주어 정령들은 움찔거렸고, 나는 계속되는 현기증으로 비틀거리던 참에 드래곤 피어의 영향을 받아, 다 리가 풀려 쓰러지려 했다. 하지만, 마치 나의 뒤에 서있던 아젠샤르가 나를 부축하였고, 그 덕분에 나는 간신히 몸을 지탱할 수가 있었다. 어쨌든, 가고일들은 잠시 멈칫하였고, 어떤 가고일은 날개에 힘이 빠 졌는지 그대로 추락하였다. 그렇게 추락한 가고일들의 수가 만만치 않았지만, 워낙 많은 수의 가고일이 있었던 지라, 여전히 동굴의 허공에는 가고일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곳의 규모는 대체 얼마나 큰 거야?' 아무래도, 환각속에 존재하는 던전의 형태라 그런지, 왠만한 통로도 드래곤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넒이였다. 그런 넓이의 공간이었으니, 그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가고일이라면 저걸 해치우려면 끝이 없을 듯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곳에 존재하는 어떤 위대하고도 강한 존재에게 지시를 받고 있는지, 우리를 공격 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주인과 비슷한 기운과 힘을 가진 또 다른 존재에 그들은 햇갈려졌 는지,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몇몇은 다시 미카엔에게 달려들었지만, 미카엔 은 비실대는 내가 있어 드래곤 피어를 더 이상 못쓰겠다고 판단되었는지, 빙계 공격마법 으로 그들을 때려 눕혔다. 더 이상 가고일들이 공격을 못해오자, 미카엔은 다시 나의 곁으로 와서 나를 부축하였고, 그렇게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는 다시 심한 현기증과 두통을 밀려와 신음을 내뱉으며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왜그래? 또 아퍼?" 걱정이 잔뜩 묻어나는 미카엔의 목소리가 왠지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리엔시타의 울먹 이는 목소리... "히잉~ 라비스, 아프지마! 라비스가 아프면 너무 슬퍼!" 나는 고개를 들어 나를 향해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왠지 숨이 가 파진 나는, 숨을 몰아쉬며 나를 부축하고 있는 미카엔에게 더욱 몸을 기대었다. 또다시 나의 육체의 기능들이 마비되어 갔다. 그렇지 않아도 추운 던전 안인데, 나는 더욱 추위를 느끼고 몸을 떨었다. 미카엔은 재빨리 나에게 회복마법을 걸었고, 나는 그나마 몸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은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다시 얼마쯤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뜬 나는 내가 지금까지 미카엔에게 업혀서 자고 있었 다는 사실에 기겁을 해야 했다. 나는 정신없이 자느라 침을 흘렸던 흔적을 아무도 모르게 지우고, -특히 미카엔 모르게...- 미카엔에게 입을 열었다. "미카엔! 내려주세요. 제가 왜 미카엔에게 업혀 있는 것이죠?" 정령들의 모습이 꽤 지쳐보인다고 나는 생각했다. 미카엔은 보기와는 다르게 체력이 있었는 지, 하긴 반은 드래곤이니... 그다지 지쳐보이지는 않았다. 약간 피곤해보이기는 했었지만. "네가 중간에 쓰러졌어. 이젠 괜찮은 거냐? 라비스." "네." 그러자, 미카엔은 나를 조심스럽게 내려주며 빙긋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라비스, 너무 잘자더군. 몬스터들이 몰려와 난리를 피웠는데도, 그렇게 세상 모르게 잘 수 있는 거냐? 게다가, 침을 얼마나 흘린 거야! 등이 축축해졌어." '윽! 그렇다고 민망하게 정령들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할 것은 뭐람. 쪽 팔리게!' 나는 붉어진 얼굴로 미카엔의 얼굴을 째려보았다. 그러자, 미카엔은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대다가, 문득 그의 맑게 울려퍼지는 웃음소리가 뚝 멈추었다. 나는 의아해진 얼굴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미카엔의 얼굴은 어느덧 심각해져 있었다. "라비스! 조심해. 드디어 가까이 왔어. 보이지 않는 용의 근처로. 정령 곁에서 계속 붙어있 도록 해!" 정령들도 그 기운을 느끼고 있는지 모두 표정이 굳어졌다. 나 역시, 어렴풋이 강대한 마력 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무거운 존재감... 이는 드래곤이나 그와 비슷한 존재의 기 운이었다. '과연, 무사히 시리어스섬까지 도착할 수 있을까? 나로 인하여 이들이 사지(死地)로 내몰게 되는 것은 아닌지...' 나를 위해서 여기까지 온, 정령들과 미카엔을 보며, 나는 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 이 뭐가 있을까 생각했다. 지금까지 아픈 몸으로 인해 짐만 되었던 나... 나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미카엔의 팔목을 나도 모르게 붙잡았다. 그러자, 그의 부드러운 눈 길이 나의 얼굴을 향하였다. "미카엔! 나를 위해서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어요. 이제 와서 이런 소리는 하는 것은 뻔 뻔한 일일지 모르지만, 난..." "라비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야! 너를 잃고 싶지 않은 나의 마음을 위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러니, 너나 조심하도록 해!" 미카엔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음침하고 축축한 느낌의 동굴의 모퉁이를 돌자, 우리는 굉장이 넓은 방과 같은 밀폐된 공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넓은 공간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음성의 목소리가 나의 고막을 때렸다. [금단의 영역에 감히 발을 들여놓는 자가 누구인가?] 나는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다시 바라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있던 공간에 한 개체의 거대한 생명체가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번쩍이는 빛을 발하는 푸른 비늘로 몸을 감싸고 있는 드래곤이었다. "환상속에서나 존재한다는 사파이어 드래곤이야!" '엥? 사파이어 드래곤? 그런 드래곤이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비늘 이 사파이어로 되어 있다는 소리인가? 저거 뜯어가면 금방 부자되겠군.' 미카엔의 외침에, 나는 두려운 중에서도 고개를 갸웃하며 다소 황당한 생각을 하였다. 아무튼 이 드래곤은 저번에 내가 봤던 블랙드래곤의 크기와 별 차이가 없을 듯 싶었다. 그 러나 생김새는 블랙드래곤과는 달리 날씬한 몸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박쥐의 날개 모양과 비슷한 그 날개는 크기가 작았다. 아마도, 날기 위해 달린 날개가 아니라 폼으로 달린 날개인 듯 했다. 보통 드래곤들은 무시무시한 외모를 가지기 마련인데, 저 보석 드래곤은 위압감이 넘침에도 불구하고 정말 아름다워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112] 체인지(Change) 제19화 -환상의 섬을 찾아서!- (8) -8- "우리는 시리어스섬을 찾아왔다!" 미카엔은 당당한 목소리로 그 사파이어 드래곤에게 외쳤다. 그러자, 도저히 표정을 알 수 없을 것 같은 그 드래곤의 거대한 얼굴은, 뭔가 미묘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말했다. [시리어스섬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드래곤은 우리에게 이유를 물었다. '흠, 저 드래곤은 그래도 우리에게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묻는군. 예전의 그 성질 고약한 블 랙 드래곤은 보자마자 브레스를 날렸었는데...' 나는 그러한 생각을 하며, 저 드래곤과 싸우지 않고 시리어스섬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른 다는 희망적인 생각을 품었다. "내 부인의 몸에 있는 독을 치료하고자 함이다!" […….] 미카엔이 그렇게 이유를 말하자, 사파이어 드래곤은 잠시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그 잠시의 침묵 동안, 나는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드래곤의 답변을 기다려야 했다. 그것은 정말 무지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잠시 후, 사파이어 드래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너희들이 시리어스섬을 찾아가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 그리고...] 사파이어 드래곤은 말을 잠시 끊더니, 미카엔 쪽으로 길다란 고개를 쭉 뻗었다. [너는 실버 일족인가? 어째서 인간의 여자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그녀를 위해 금단의 영역 을 침범하려 하는가?] "나의 어머니는 실버 드래곤이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인간이시지. 나에겐 드래곤의 피가 흐 르고 있지만, 엄연히 인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인간의 여자를 부인으로 맞는 것이 당 연하지 않는가?" [네가 인간이라고? 분명히 너에게서는 드래곤의 기운이 느껴진다. 드래곤이 유희중에 인간 과 결혼하여 낳은 아이는 보통 인간이 되는 것이 당연한데, 너는 드래곤의 기운이 느껴 진다! 너는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이다. 자신을 인간이라 말하는 드래곤이라니... 너의 기운 을 보아하니, 적어도 1000년 가까이의 세월을 보낸 듯 한데, 어째서 자신을 인간이라 말하느냐?] 그러자, 미카엔은 잠시 벙찐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그냥 드래곤 행세를 하는 것이 나을 듯 싶었는지, 이내 입을 열었다. "좋아! 난 실버 일족의 드래곤이다. 금단의 영역을 지키는 사파이어 드래곤이여! 드래곤으 로서 부탁하니, 우리를 시리어스섬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라!" 하지만 사파이어 드래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럴 수는 없다. 너희들이 시리어스섬이 굳이 들어가고자 한다면 나를 쓰러뜨려라!] 그러자 미카엔은 표정을 구기더니 투덜대듯 말했다. "정말 꽤나 고지식한 드래곤이군! 그럼, 내가 너를 쓰러뜨리겠다!" 미카엔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쪽으로 고개를 돌려 외쳤다. "라비스! 정령들과 함께 구석으로 피해있어!" 그의 말에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미카엔은 자신의 몸에 실드를 치고는 허공을 날 아올랐다. 그러자, 사파이어 드래곤의 푸른 눈동자가 번쩍하더니 허공에 뜬 미카엔의 육 체가 뒤로 빠르게 밀려나 동굴의 벽에 부딪혔다. 얼마나 세게 밀어붙여졌는지 돌벽에 금이 갈라질 지경이었다. 나로서는 가슴이 덜컥하였다. "저건 염력입니다! 사파이어 드래곤은 다른 드래곤과 달리 강한 염력과 초감각의 능력을 사 용합니다! 게다가 그들의 브레스는 강한 초음파입니다. 라비스님." 평소 입을 잘 열지 않던 아젠샤르가 나에게 말했다. 그의 말에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미 카엔을 바라보았다. 그는 실드로 인하여 아주 커다란 타격은 입지 않았는지, 금방 다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붉은 피가 새어나왔다. "아젠! 샤르! 리엔! 미카엔을 도와줘!" 내가 그렇게 외치자 이름이 호명된 세 정령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카엔이 있는 쪽으로 날 아갔다. 하지만, 미카엔보다 턱없이 능력이 부족한 그들이 무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이러다 정령들마저 소멸당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아멘시타는 남아서 드래곤과의 싸움으로 인한 충격에서 나를 보호하는 오오라 막을 펼쳤다. "프로스트 링(Frost Ring)!" 미카엔은 날아오는 드래곤의 꼬리를 피하며 마법 시동어를 외쳤다. 그러자, 거대한 냉기 고 리가 드래곤 주위로 만들어지더니, 그 크기가 팍 조여지며 드래곤을 공격하였다. 아젠샤르 역시, 공기의 입자를 칼날 모양으로 응축하여 드래곤에게 수없이 날렸는데, 드래곤의 신체중 약한 부분과 급소만을 향해 공격을 하였다. 침착한 성격답게 그는 무차별적인 공격 을 하는 샤르와는 확실히 대조적인 면을 보였다. "콜드 빔(Cold Beam)!" 미카엔은 계속 빙계열 공격마법 시동어를 외쳤다. 그러자, 냉기로 이루어진 덩어리가 미카 엔의 주변에서 빛과 같은 빠르기로 드래곤에게 쏘아져 나갔다. 미카엔은 프로스트 링으로 드래곤의 육체를 묶어놓고는 정신없이 공격마법을 퍼부어대는 것이었다. 정말 무시무시하고도 환상적인 싸움이었다. 굼뜬 드래곤이 한번 미카엔에게 묶이자, 잽싼 미카엔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게다가, 미카엔의 의중을 정령들은 알아채었는지 같이 정신없이 공격을 퍼부어대니 드래곤으로서는 혼이 다 빠질 지경이었을 것이다. 물론, 사파이어 드래곤은 얼마 후에 프로스트 링을 깨어내고 마법공격을 미카엔에게 날렸으 나 리엔시타와 아젠샤르가 근본적인 실드막을 형성해주고 있는데다가, 결코 침착하지 못한 샤르가 정신없이 불의 공격을 해대고 있었으니, 능력이 훨씬 앞서는데에도 불구하고 드 래곤은 정신을 못차렸다. 미카엔은 궁극의 마법을 쉬지않고 드래곤에게 퍼부었다. 그러다가, 사파이어 드래곤이 초음 파 브레스를 내뿜었는데, 그때 실드를 형성하고 있던 리엔시타가 떨어져 나갔고 아젠샤르 역시 부상을 입은 듯, 심하게 흔들렸으나 미카엔은 드래곤이 브레스를 날리고 있는 동안 마지막 힘을 다해 결정타를 날렸다. "크롸롸롸~!!" 사파이어 드래곤은 몸부림을 쳤다. 아마도, 그는 미카엔에게 진 듯 싶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쓰러져 있는 리엔시타에게 달려가 그녀를 안아들었다. "리엔!" 투명한 액체의 몸으로 변한 그녀의 육체가 반쯤 희미해져 있었다. "히잉~ 리엔! 아무래도, 안되겠어! 넌 세젠느강으로 돌아가 있어. 이러다 소멸될 거야!" 그러자, 리엔시타는 희미하게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라비스가 걱정되서 어떻게 돌아가?" "난 괜찮으니깐, 어서 돌아가! 명령이야!" 그러자, 리엔시타는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투명한 물빛을 공기중에 뿌리며 사라졌다. 리엔시타가 그렇게 돌아가자, 나는 다른 이들이 괜찮은지 보려고 고개를 돌린 순간, 몸부림을 치던 사파이어 드래곤이 그 행동을 멈추고 모습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 나 의 눈에 들어왔다. 푸른빛으로 번쩍거리던 사파이어 드래곤의 비늘색은 점차 선명한 붉은빛으로 바뀌었고, 몸 체와 날개는 조금전보다 훨씬 더 커졌다. 방금 푸른빛의 드래곤 모습보다 나이를 더 먹은 드래곤의 형태였다. "헉! 저건 또 뭐야?"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나의 옆에서 방어 오오라 막을 쳐주고 있던 아멘시타가 질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저건 루비 드래곤이야! 사파이어 드래곤이 소멸되고 두 번째 감시자인 루비 드래곤이 모습 을 드러낸 거야!] [113] 체인지(Change) 제19화 -환상의 섬을 찾아서!- (9) -9- 아멘시타의 말에 나는 절망적인 얼굴이 되어 미카엔에게 소리쳤다. "미카엔! 우리 도망쳐요! 이대로 모두 죽게 할 수는 없어요!" 그러자, 미카엔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나에게 답했다. 그의 모습을 보니, 모든 힘을 거 의 다 써버린 듯 매우 지친 모습이었다. "이미, 이곳에 들어온 이상 우리는 환각을 깨야만 나갈 수 있어. 싫더라도 저 녀석들을 다 쓰러뜨려야 해! 라비스." 그때, 사파어 드래곤이었던 몸체는 완전한 루비 드래곤의 모습으로 바뀌었고, 드래곤은 다 시 눈을 떴다. 이쯤 되자, 나는 뵈는게 없어졌다. 이러다가는, 나로 인해 모두 죽게 될지도 몰랐다. 이들이 죽게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나는 루비 드래곤의 앞으로 뛰쳐나갔다. 나의 뒤로 아멘시타의 놀란 외침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무시하였다. "드래곤이시여! 저희에게 기회를 주세요! 금단의 영역에 감히 침범한 것에 대해 사죄드립니 다. 앞의 사파이어 드래곤님께 해를 끼친 것을 사죄드립니다. 제발 저희들을 살려보내주 세요! 저는 죽이셔도 됩니다. 어차피 저는 죽을 몸이지만, 저들은 나 때문에 이곳까지 온 거예요. 저의 목숨을 대가로 가져가시고, 이들을 놓아주세요!" "라비스!!" 내가 드래곤에게 그렇게 외치자, 미카엔의 질책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를 돌 아보지 않았다. 의외로 무심한 얼굴의 루비 드래곤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에 나는 다리가 풀 렸지만, 억지로 몸을 지탱하며 이를 악물었다. 아젠샤르와 샤르의 초조해하는 눈길이 느 껴졌다. 나서서 죽겠다고 선언하는, 나의 발언을 탓하는 미카엔의 눈길이 느껴졌다. 그는 드래곤이 어떤 움직임만 보여도 당장에 몸을 날릴 태세를 하고 있었다. [훗... 드래곤 일족중 하나가, 이렇듯 목숨거는 인간 여자는 도대체 어떤 여자일지 궁금했 지.] 그 순간 루비 드래곤의 거대한 몸체가 급속도로 줄어들어갔다. 아마도, 폴리모프를 하는 모 양이었다. 곧, 드래곤은 번쩍이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운 미녀였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다시 변하여, 에메랄드 빛의 머리색을 가진 중년 남자의 모습으로 변하였 다가 다시, 투명한 머리색을 가진 노인으로 변하였다. 자꾸 그렇게 모습이 변하니, 눈이 어질어질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크리스탈 드래곤이다. 잠시 스쳐지나갔던 앞의 모습들은 루비 드래곤과 에메랄드 드 래곤이지. 나를 비롯하여 사파이어 드래곤까지 모두 네 존재는 하나이다. 네 개의 생명과 성격을 가졌지만,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이지. 너는 너의 목숨을 내놓겠다고 했는가?" 나는 놀라여 멍하니 있다가, 그의 질문에 뭔가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데, 미카엔이 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라비스의 목숨은 못가져간다! 크리스탈 드래곤!" 네 존재의 드래곤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나이가 많아보이는 드래곤 앞에서도 여전히 오만한 태도인 미카엔이었다. "허허! 성인이 되지 얼마 안된 드래곤답게 치기어린 면도 있는 실버일족이군. 하긴, 이렇게 아름다운 외모에 독특한 영혼을 가진 인간 여자라면 드래곤이라도 반할만 하겠지." 그는 미카엔이 성룡이 된지 얼마 안된 실버드래곤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모양이었다. 어쨌 든, 크리스탈 드래곤이 그렇게 말한 순간, 나의 몸에 걸려 있던 환각은 풀어져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이 여자의 목숨을 내놓지 못하겠다면, 그와 상응하는 소중한 것을 나에게 대가 로서 지불해라!" 목숨과 상응하는 소중한 것이라니... 그런 것이 있을까? 그렇다면, 저 드래곤은 결국 목숨이 나 내놓으라는 얘기인 듯 싶었다. "...나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은 결국, 내가 되지 않나요? 이건 이기적인 대답이 될 수 있겠 죠? 할 수 없군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드래곤에게 나의 목숨을 내놓겠다고 말하려는데, 그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크리스탈 드래곤은 나에게 답했다. "좋다! 너는 금단의 영역에 침범한 죄와 사파이어 드래곤의 목숨을 앗아간 죄값으로, 너에 게서 가장 소중한 너를 대가로 받겠다." 그는 그렇게 말을 끝마치고 새하얀 빛을 나에게로 쏘아보냈다. "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떨어졌고, 미카엔은 분노한 얼굴로 드래곤에게 공격을 가하려 했으나, 크리스탈 드래곤의 자취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결국, 미카엔은 낭패한 얼 굴로 나에게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라비스! 정신차려. 라비스!" 미카엔은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나를 안고는 나의 이름을 외쳐댔다. 그의 목 소리에 정신이 든 나는, 눈을 뜨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세게 끌어안고 있는 그의 팔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미카엔, 어떻게 된 거예요? 난 죽은 것이 아닌가요?" "그래. 넌 죽지 않았어." 그의 말에 나는 잠시 갸웃했다. "그럼, 그는 나에게서 무엇을 가져간 것이죠? 아!" 나는 미카엔에게 질문하다가, 나지막한 탄성음을 내었다. 드래곤이 나에게서 가져간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나의 기억이었다. 뭔가 텅 빈듯한 느낌에 확인해 보니, 나는 예전의 어떠한 것도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나는 멍한 표정을 한동안 지어보이다가, 걱정스럽게 나를 내려다 보는 미카엔에게 중얼거리 듯 입을 열었다. "미카엔! 나, 기억상실증 걸렸어요. 작년 여름 이전의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아요." "뭐?" "아! 저기 봐요! 미카엔. 밀폐되었던 동굴 벽에 통로가 하나 생겼어요." "아! 그렇군. 가자. 앞으로도 두가지의 위험한 장애물이 남아있지만, 우린 시리어스섬에 도 착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미카엔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인상을 무섭게 써보였다. "너 다시는 그런 짓 하지마! 아깐, 정말 아찔했었다구!"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어보이고는 몸을 일으키며 응수했다. "그건, 미카엔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앞으로가 걱정이에요.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지만, 앞 으로 남은 두가지의 위험은 피하기 힘들지도 몰라요." "그럴지도..." 나는 앞의 기억들이 몽땅 잘려나간 것이 꺼림직했지만, 지금은 그것에 대해 고민하고 머리 아파할 겨를이 없었다. 어쨌든, 일행들이 무사한 것만 해도 다행이지 않는가. 아마도, 드 래곤이 말하는 '나'라는 것은 나의 기억의 일부분을 말하는 것이었나 보다. 하긴, 목숨가 져가는 것보단 기억의 일부분만 가져가는 것이 나을 듯 싶었다. 어렸을적 추억이나 엄마에 대한 기억 같은 것들을 전혀 기억할 수가 없어서 가슴이 아프긴 했지만 어차피 지나간 것보단 현재가 중요했다. 그러다, 남아있는 기억 중에 자아문제로 혼란스러워 했던 기억이 떠올라 머리가 어지러워졌지만, 나는 당분간 묻어두기로 했다. "아젠! 샤르! 아멘시타! 모두 괜찮아?" 나는 몸을 일으켜 옷에 묻은 티끌들을 털으며 정령들의 안위를 물었다. [난 괜찮아!] "나도 괜찮아! 그런데, 아젠이 약간 비실비실하네?" 샤르의 말에 나는 아젠샤르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러자, 여기 저기 긁힌 몰골로 서있는 그 가 눈에 들어왔다. "전 괜찮아요." 아젠샤르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는데, 그 미소가 본인도 어색한 듯 이내 표정을 거두었다. "하하, 아젠! 너 웃는 거 예뻐! 왜 잘 안웃는 거야?" 내가 그렇게 웃으며 말하자, 아젠샤르는 더욱 얼굴이 굳어졌다. 아마도, 쑥스러운 기색을 저 렇듯 표현하는 모양이었다. [114] 체인지(Change) 제19화 -환상의 섬을 찾아서!- (10) -10- 동굴벽에 나있는 통로로 나가자, 우리 주위 환경은 또 한번 다시 바뀌었다. 우리가 발을 들 여놓은 그곳은 이름모를 야생 풀들과 꽃,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나있는 숲속이었는데, 굉장히 싱그럽고 깨끗한 느낌을 주는 숲이었다. 나는 숲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하며, 우리가 나온 동굴 입구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놀랍게 도 우리가 나온 동굴입구는 금세 사라져 있었다. "여긴 어디죠?" "글쎄..." 미카엔은 갑자기 바뀐 주변의 모습에 적응이 안되는지 계속 두리번거리며 나의 질문에 답했 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숲을 정찰하는데에 제격인 아멘시타에게 고개를 돌리며 그에게 물었다. "아멘시타! 여기가 대충 어디인지 짐작할 수 있겠어?" [잠깐만 기다려봐.] 아멘시타는 그렇게 말하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한동안 그렇게 눈을 감은 모습으로 있더 니, 눈을 뜨고는 약간 밝아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여긴, 섬이야! 우린 섬안의 작은 숲에 들어와 있는 거야!] "그러면, 이곳이 혹시 시리어스 섬?" "그럴지도... 하지만 라비스, 조심해야 해! 우리에겐 아직 위험이 남아 있어!" 미카엔은 신중한 어조로 나에게 말했으나,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기쁨에 나의 조심스런 행동 은 이미 풀어져 있었다. "제 생각엔, 그 드래곤이 우리를 곧바로 시리어스섬으로 보내준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이 미 섬에 도착해 있잖아요? 게다가, 이곳은 그다지 위험스러운 느낌도 없어요." 이곳의 숲은 정말 아름답고 맑은 산새의 노랫소리가 끊임없이 울려퍼지고 있었고, 다람쥐와 같은 작은 동물들이 나무 가지 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렇게 작은 동물들이 판을 치고 다닌다는 것은 그다지 위험스러운 존재는 없다는 얘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곳은 정말 따뜻했다. 지금까지 추위에 떨고 있었던 나는, 왠지 이곳이 천국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한 무늬의 날개를 가진 나비가 나풀나풀 날며, 나의 곁을 지나갔다. 그 모습에 나는 훗~ 하며 웃어보였다. 향긋한 풀내음이 나의 코끝을 스쳤다. 나는 홀린 듯, 방금 나의 곁을 지나간 나비를 따라 몇발짝 발걸음을 옮겼다. 겨우 몇발짝이었다. 그러다, 이곳엔 아름다운 모든 것이 다 갖추 어져 있지만, 흉한 것은... 그러니까, 벌레나 보기 흉한 곤충들은 전혀 눈에 띄지 않다는 것 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나는 기이함을 느끼며 내가 서있는 바닥의 보드라운 흙을 만져보았다. 그러나, 나의 손에는 흙에서 묻어나오는 티끌 같은 것은 없었다. 게다가, 이러한 흙속에서 서식하고 있을 작은 곤충들이나 개미 같은 것들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너무 깨끗하였다. 그제야, 이 숲이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미카엔에게 이 사실에 대해 말하 고 의논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어?!" 그러나, 근처에서 있어야 할 나의 일행들은 없었고, 고요한 정적만이 나의 곁을 맴돌았다. "미카엔! 아젠! 샤르! 아멘시타! 모두 어디 있는 거야?" 일행의 이름을 모두 부르며, 나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주위 경치도 아까와는 약간 변질되어 있는 듯 싶었다. 이에 당황스러워진 나는, 안절부절하다가 미카엔과 정령 들을 찾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나는 작은 호수를 발견하였다. "안녕! 껍데기." 옥구슬이 또르르 굴러가는 듯한 청명한 아이의 목소리였다. 나는 움찔 놀라여, 그 말소리의 내용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누, 누구야?" 그러자, 선명한 붉은 빛의 눈동자에 흑단같은 흑발을 가진 남자 아이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나에게로 다가왔다. "난 아시..." "아시?" "그래! 껍데기." 그의 말에 나는 발끈하였다. 무엇을 보고 껍데기라 말하는지, 꽤나 시건방진 꼬마였다. "껍데기라니? 너 무지 시건방진 꼬마구나! 너 어디서 왔어?" "꺄르르. 껍데기이니깐 껍데기라 부르지! 난 이곳에서 살아." "내가 왜 껍데기인데? 건방진 꼬마!" "지금의 넌 껍데기야! 본래의 너는 그 육체와 영혼의 본질을 잃어버렸으니깐." "그게 무슨 소리이지?"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뭔가 나의 가슴을 찌르는 듯한 말에 나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 러자, '아시'라고 본인을 소개한 그 꼬마는 나의 주위를 한바퀴 빙 돌았다. 그리고 나서, 나의 앞에 섰는데 방금 전까지는 10살의 모습을 하고 있던 아시가 열 서넛 정도의 모습으 로 훌쩍 성장해 있었다. 나는 놀라서 멍한 얼굴로 아시를 바라보았다. 그때, 또 어디선가 한 여자 아이가 튀어나왔 다. 그 여자 아이 역시 열살 정도 먹어보이는 꼬마였는데, 생김새가 아시와 쌍둥이처럼 닮아있었다. "바보! 지금의 네 모습이 진짜야. 껍데기라니! 아시를 혼내버려! 꺄르르." 그 여자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귀엽게 웃어보였다. '헉! 이게 대체 무슨 황당한 일이지? 저것들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혼란스러워진 얼굴로 이 꼬마들이 하는 소리를 곱씹어 보았다. 지금의 내모습이 껍데기라... 아시의 말에 나는 뭔가 찔끔해었다. 그런데, 여자애가 나타나 지금의 내 모습이 진짜라고 말하니, 저 꼬마들은 진짜 아이들이 아니라 나를 시험하기 위해 나타난 존재들인 듯 싶었다. 게다가, 지금의 내가 껍데기라니! 다시 생각해 보자, 나는 열 이 받았다. 그래서... "누구 보고 껍데기라고 하는 거야! 난 껍데기가 아니야!" 내가 그렇게 외치자, 나의 뒤에 선 여자애는 꺄르르 웃어제끼며 맞아! 맞아! 하며 동조하였 다. 내가 그녀를 돌아보니 그녀 역시 아시와 마찬가지로 열 서녓 나이의 모습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러자, 아시는 인상을 팍 쓰더니 나에게 외쳤다. "넌 껍데기야! 네 본래의 이름은 이도현이지? 넌 그 이름마저 잊어버린 거야?" 그의 말에 나는 다시 움찔하였다. 이도현... 그러고 보니, 지난 반년동안 이 이름 때문에, 무 지하게 고민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하지만, 내가 왜 그렇게 고민을 해야 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어째서, 그때는 내가 이도현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젠장! 저 꼬마들 때문에 내 머리가 쥐 가 나겠군.' "잘 생각해봐! 넌 이도현이었지? 하지만, 앞부분의 기억들을 모두 잃었어! 저기 요사스런 꼬마, '아인'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어! 넌 본래의 너를 잃어버린 거야." "아니야! 넌 아시의 말을 들을 필요 없어. 그건 네가 정신분열로 만들어낸 하나의 인격에 불과해! 내 본래의 너는 그대로 라비스야! 정신 분열로 만들어진 하나의 인격에 진짜의 너를 넘겨주려고 그래?" * 지금 라비스는 환각속에 존재하는 곳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쥔공에게 일어나는 일 또한 모두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일들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약간 황당하다고도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이번 19화는... 정말, 무지 길어지는 군요. ㅡㅡ;;; [115] 체인지(Change) 제19화 -환상의 섬을 찾아서!- (11) -11- 이렇게 되자, 내가 이도현이었다는 기억은 할 수 있겠는데, 왜 본인이 이도현인지 어째서 그렇게 자아 정체성 문제 고민을 했었는지는 기억이 뚜렷하지가 않아서, 나는 정말 혼란 스러웠다. 내가 정말 이도현이라는 자아를 잃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이도현은 자아분열로 인한 만들어 진 인격인지 정말 나도 햇갈렸다. 그렇게 내가 고민하고 있는 동안에도, 아시와 아인의 설득과 부추김은 계속 되었다. "너에게서 없어진 기억은 이도현으로서 살아왔던 기억이야! 왜 그것만 없어졌겠어? 너는 너 를 빼앗겨서 그렇게 된 거야! 그동안 육체도 라비스였는데, 이젠 기억마저 도현의 기억이 사라졌으니, 본래의 너를 거의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이지. 그러니깐 너는 껍데기야! 지금의 너의 모습은 허상이야!" "뭐?"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그렇게 반문했다. "라비스! 넌 라비스야! 지금의 너가 허상이라니? 네 지금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이 분하지 도 않아?" 아인의 반박이 이어졌으나 나는 순간 아시의 주장으로 그 마음이 기울었다. 정말, 나는 나 를 잃어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자, 아시의 모습이 열 다섯 나이로 약간 성장해 보였다. "본래의 너는 라비스야! 너는 미카엔을 사랑하지?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거짓이라 생각해?" 이렇게 되자, 아인은 약간 궁지에 몰린 어투로 나에게 물고 늘어지듯 다그쳤다. '아! 미카엔...' 그의 이름을 듣자, 나는 가슴이 아파졌다. 그를 생각하는 마음을 거짓이라고는 말할 수 없 었다. 지난 반년동안,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미카엔을 라비스로서 사랑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방해하고 괴롭게 마들던 요인은 이도현... "꺄르르." 아인은 그렇게 웃어보이더니, 그녀 역시 조금 성장하였다. 이제는 그들이 황당하게 성장하 는 모습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넌 미카엔도 사랑하지만, 너 자신도 사랑했어! 네가 그토록 괴로워하면서도 버리지 않으려 했던 것이 이도현으로서의 자아야!" 아시의 얼굴은 아까와는 달리 화가 나있는 듯 했다. "대체 너희들은 누구얏! 왜 나를 괴롭게 하는 거지? 아! 그러고 보니..." 이들은 내가 한번씩 흔들릴 때마다 조금씩 성장을 하였다. 게다가, 이들은 나에 대해 너무 도 잘알고 있었다. 사소한 감정까지... 이들이 나에게 이렇게 물고 늘어지는 이유가 무엇 일까? 그것은 나의 갈팡질팡함으로 인해 성장을 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성장을 해서 어쩌려는 것이지? 그러다, 나는 이들이 둘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시리어스섬까지는 두가지의 위험 이 남아있다고 했었는데... 이 둘은 너무 이상했다. 게다가, 이도현의 자아를 주장하는 아 시는 남자 아이이고 라비스를 주장하는 아인은 여자아이다. "너희들, 나에게서 원하는 것이 뭐지?" "그, 그거야 너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주려고..." 아시의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나는 싱긋 웃어보였다. "글쎄! 그 반대일걸. 너희들은 오히려 나를 혼란스럽게 하여, 두가지 자아가 충돌하여 나를 붕괴시키려 했을걸. 휴~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나도 참, 멍청하다니깐. 훗~ 너희들이야 말로 허상이 아닐까? 나의 깊은 곳에서 존재하는 덧없는 허상들. 허상들이 너무 자라나면 진짜는 사라지고 말지. 미안하지만, 나는 두가지 모습 다 사랑해! 어느 것이 거짓이라 말할 수 없어. 모두 진짜 나의 모습이야! 도현의 기억을 잃어버려 아쉽지만, 그것 역시 진정 한 나일테고 지금의 모습 역시 진정한 나일 거야. 이제 그만 허상들은 사라져 줘!"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시와 아인은 푸른빛과 흰색의 빛으로 화하더니, 나의 앞에서 결합해 보였다. 그러자, 연푸른빛이 된 빛무리는 나에게 다가와 나의 몸을 휩싸더니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환각이 깨어져 가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거울에 아름다운 이곳의 모습이 비치고 있기라도 하듯, 금이 쩍쩍 갈라져 갔다. 보통 이럴땐 쨍그랑~ 하고 소리가 나지 않나? 어쨌든, 환각은 그렇게 금이 가며 깨어져 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산새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고, 대신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하고 부드 럽던 공기는 점점 매서워져 갔고, 싱그러운 모습을 자랑하던 짙은 초록의 색들은 우리가 타고 있던 배의 갑판모습과 멀리 보이는 바다의 모습으로 변하여 갔다. 환각은 그렇게 깨어진 것이다. 현실로 다시 돌아온 나는, 배의 갑판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저기 근처에 왕실 기사와 마법사들이 흩어져 쓰러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라비스!!" 정령들과 미카엔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라비스! 어떻게 된 거야? 어? 얼굴의 상처가 다 나았군." 미카엔의 걱정스런 얼굴이 놀라운 얼굴로 바뀌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생긋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환각은 깨어졌어요. 미카엔. 결국, 마지막 위험한 요인은 저에게 있었더군요." "그게 무슨 말이야?" "훗... 그럴 일이 있었어요!" 나는 쾌활한 모습으로 그에게 웃어보이고는, 푸르름이 언뜻 언뜻 보이는 회색빛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위에는 태양이 그 모습이 살짝 가리워진 채로 떠있었다. 밤이 되어도 태양이 지지 않는 곳이라... 왠지, 문구가 멋지게 들렸다. '미카엔! 그동안 나는 허상에 집착해 왔는지 모르겠군요. 그 어느것도 진정한 나인 것을... 나는 이도현이었던 자아를 잃을까 항상 두려웠어요. 하지만, 이젠 그런 걱정은 안해요! 지 금의 내 모습이 이도현이고 동시에 새로 태어난 라비스이니깐요.' 나는 잃어버렸던 이도현으로서의 기억을 되찾았다. 물론, 그 보석으로 된 합성(?)드래곤이 나를 가져갔다고 하나, 그것 자체가 환각속에서 이루어지고 존재했던 일이었다. 환각과 허상이 깨어진 지금은, 그것은 하나의 깨어진 꿈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나의 상처는... 나는 얼굴을 어루만져 보며 생각했다. 시리어스섬 자체가 마력이 걸린 환각이었다. 그것을 힘들게 깼으니, 그것을 깬 당사자가 가 진 목적을 이루어 준 것일테지. 혹시, 시리어스섬이란 것이 대단한 존재의 고의적인 의도 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았다. "라비스! 이젠 로히얀스로 돌아가야지?" 그렇게 사색에 잠겨있는 나를 미카엔이 일깨웠다. "로, 로...히얀스요?" 내가 그렇게 떠듬거리며 되묻자, 미카엔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라비스! 왜 그렇게 말을 더듬는 것이지? 네가 그럴때마다 나는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고!" "아하하..." 나는 그에게 겸연쩍은 웃음을 보이며 속으로 그에게 외쳤다. '미카엔! 이젠 내가 자아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전전긍긍하지는 않겠지만, 그것과 는 별개로 너를 받아들이는 것은 여전히... 윽! 물론, 너를 한 인간으로서 사랑하긴 하지만... 내가 여자임을 수긍하는 것에도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잖아?' 나는 복잡한 표정을 지어보이다가, 그에게 다가갔다. "미카엔! 정말 고마워요. 훗... 제가 그 고마움의 표시로 미카엔에게..." 내가 그렇게 말을 꺼내며 가까이 다가가자, 미카엔은 기대에 찬 눈빛을 해보였다. "...앞으로 로히얀스까지 지루한 여행이 될테니, 재미있는 소일거리가 되는 놀이를 가르쳐드 릴게요! 제가 예전에 심심하면 하던 놀이인데, 혹시 끝말잇기라고 아세요? 우리 밥먹고 그거나 하며 놀아요!" [116] 체인지(Change) 제20화 -또 다시 이별- (1) (또 다시 이별) -1- 식사를 마치고 난 우리들은, 그동안 밤을 홀딱 새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시각적으로는 날이 점차 밝아오는 시각이었으나, 계속 날이 대낮처럼 밝아있었기 때문에 스스로가 피곤한 이 유를 얼른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카엔은 내가 조금전 끝말잇기 놀이를 가르쳐준다고 하니깐, 무척 황당한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는 대답도 안하고 선실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은근히 기분이 나쁜 나였다. 평소에 내가 유치한 면이 있었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황당하게 볼 필요성은 없었는데 , 게다가 내 호의를 무시하다니!! 결국, 나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간간이 들려오는 아젠샤르의 노래소리를 자장가 삼 아, 눈을 붙이기로 했다. 가끔가다가 선원들의 앵콜! 하고 외치는 소리와 휘파람소리가 들려왔다. 보나마나, 세이렌 사건 이후로, 팬이 된 그들은 아젠샤르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졸라댔을 것이다. 물론, 도 도하고 성격 딱딱하고 고집스러운 바람의 정령 아젠샤르는, 무척 난처한 얼굴을 했겠지만, 성격과는 다르게 노래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그답게 선원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을 것이다. 운명과 사랑은 하나가 되어 너에게로 흐르네 더 이상 눈물짓지 않기를.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상은 너를 위해 웃음짓고 너를 위해 눈물 흘리네 그것은 너에게 내려진 축복. 너의 눈빛에 감추어진 사랑이 흐트러진 붉은 꽃잎이 되어 우리의 가슴에 휘날리네 그것은 아름답지만 슬픈 향기. 너의 진정한... 아름다운 선율과 깨끗한 미성의 목소리, 역시나 아젠샤르의 노랫소리이다. 바다의 파도소리 에 묻히지 않고 그의 노래는 그대로 바다에서 머무는 바람이 되어, 겨울바다의 혹독함을 달래주었다. 이러다 조만간, 아젠샤르 팬클럽 창단식이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물론, 구성원들은 어 여쁜 소녀들이 아니라 모두 험악한 남자들이 되어, 조금 위화감을 주겠지만... '후후... 그러고 보니, 아젠은 얼굴도 깔끔하겠다. 노래 잘부르겠다. 우리 세계로 가면 금방 아이돌 스타가 되겠네? 아! 춤도 잘추면 금상첨화일텐데... 흠, 하지만 아젠의 성격상 연 예인은 힘들겠군.' 나는 실없는 잡생각을 -아젠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소녀팬들이 오빠아~하고 외치는 것을 상상했음- 하며, 깊은 잠의 나락에 빠져들어갔다. 그렇게 얼마 간을 잤을까? 나는 오랜만에 마음 편하게 잠들었던 것 같다. 그동안 나를 짓누르고 있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이 시리어스섬의 마력으로 말끔하게 사라진 지금, 나는 행복감마저 들었다. 시리어스섬에 갔다온 것은 정말 고생스러웠지만, 그만큼 얻은 것이 많은 것 같았다. 내얼굴 의 상처와 독 그리고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던 보이지 않는 독까지, 나는 모두 털어내 버릴 수 있었다. 만약, 내가 마지막 고비인 나를 시험당하는 과정에서 내가 무너졌다면, 나는 환각속에서 파 멸당했을테고, 끝까지 환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영혼이 갈갈이 찢겼을 것이다. 지금 생 각해 보니, 그건 정말 오싹한 일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몽롱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미카엔이 들어 왔다. "이제야 깨어나셨군. 잠꾸러기 아가씨." "제가 왜 잠꾸러기에요?" "훗... 왜냐고? 어떻게 15시간을 죽은 듯이 내리 잘 수 있는 거지? 너의 수면량에 경의를 표 한다. 라비스." "헉! 15시간이요?" "그래. 하지만, 이젠 날이 저물었는데 또 자야 하겠지?" "엑! 그건..." "하하! 혹시, 잠의 요정 '리스핀'이 친구하자고 다가오지 않았어?" 잠의 요정 리스핀이란, 예전에 책을 읽었던 내용 중에 이러한 정의가 있었다. 「잠의 요정 리스핀들은 사람 손바닥만한 몸체에 투명한 날개를 가진 요정으로서, 페어리와 는 구분된다. 이들은 요정가루를 가지고 다니며 장난을 치는데, 그 요정가루를 마신 인간은 잠의 나락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잠든 이는, 다시 리스핀의 요정가루를 마셔야 깨어나는데 , 만약 리스핀 요정들이 변덕을 일으킨다던가, 아니며 그들이 자신이 잠들게 했던 이들 을 깨우는 것을 잊었을 경우, 요정가루로 잠든 이는 영원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된다.」 물론, 나는 리스핀이 와서 잠든 것이 아니었다. 리스핀은 미카엔이 농담식으로 한 말이었기 에,- 그다지 웃긴 농담이 아닌 것이 문제였지만- 그냥 시큰둥하게 넘어갔다. "아! 미카엔, 지금 별로 피곤하지 않다면 나 마법이나 가르쳐줘요. 한동안 마법에 손을 놓고 있었더니, 조금씩 까먹는군요." 그러자, 조금전까지 멀쩡한 모습이었던 미카엔은 갑자기 피곤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침대에 벌렁 누웠다. 그리고는 왠지 한탄하는 듯한 어조로 나에게 입을 열었다. "라비스! 너에게서 로맨틱한 면과 사랑스러운 애교를 바란다는 것은, 태양이 서쪽에서 뜨게 하고 오크에게 마법을 가르치고, 트롤에게 시를 짓게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이겠지?" '아무리 비유라지만, 하필이면 오크나 트롤이라니... 은근히 기분 상하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대충 그에게 답했다. "그... 글쎄요." "난 가끔 네가 여자로서 자각이 없는 것 같아 심히 염려스러워!" "아하하... 그래요?" "아무래도, 너를 왕성으로 데리고 가면, 시녀들에게 여성으로서 미덕인 자수와 여성으로서 올바른 몸가짐을 가르치게 해야 하겠어! 그러면 아무래도 조금은 나아지겠지." "에엑!" 내가 놀라며 그렇게 외마디 음성을 내자, 미카엔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어쨌든, 우리 일행이 탄 배는 바다의 정령 라센샤르의 가호를 받으며 -그동안 항해 중에 폭풍우를 만나도 우리 배가 있는 주변은 파도가 거세게 일지 않았다.- 아젠샤르의 바람의 힘으로서 최고의 속도로 항해를 하였다. 돛을 단 배가 이러한 속도를 내기는 힘들었으나, 우리가 탄 배는 뱃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무 시하며 무시무시한 속도를 내었다. 이렇게 되자, 아름다운 노래로서 아젠샤르의 팬이 되었던 선원들은, 이러한 위대해 보이기 까지한 위력을 발휘하자, 그들은 거의 아젠샤르를 숭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엔 아젠 샤르가 바다의 정령 라센샤르보다 더 위대해 보였을 것이다. 이 정도라면, 샤르나 리엔시타 같았으면 어깨가 으쓱해졌을 상황인데, 아젠샤르는 여전히 선원들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선원들의 찬양 어린 발언에도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과감히 씹었는데 선원들의 눈에는 이러한 아젠샤르의 모습이 고고하게만 보였으리라 생 각되었다. 한마디로 콩깍지가 씌였다는 말이다. 하긴, 이번 여행에서는 정령 중 아젠샤르가 제일 고생을 한 셈인데, 본의 아니게 추종자를 만든 아젠샤르는 그 나름대로 보람을 느꼈으리라 사려되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었지만. 그때, 미카엔과 내가 있는 방안에 기이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미카엔 앞에 초록색 머리를 한, 청년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너는 론티아 정령? 무슨 일이냐?" 미카엔은 그가 론티아 정령임을 알아보고는 그렇게 물었다. 아마도, 그는 미카엔이 부리던 정령인 듯 싶었다. "지금 로히얀스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조금 전, 반정(反正)이 일어났습니다." "뭐? 반정이라니? 조금 더 자세히 말하라." "아모르 자작가에서 루젠댜르의 왕실의 힘을 빌려, 이번 반정을 주도하였습니다. 아직 왕성 은 장악되지 않았지만, 전하께서 빨리 가셔야 합니다." "아모르 자작 그 놈이! 결국은... 왕실 마법사단과 기사단들은 그것 하나 막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미카엔은 불같이 화를 내며, 론티아 정령에게 물었다. "아마도, 보이지 않는 강한 존재가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재상과 군무 대신 그리고 몇몇 주요 관리들이 매수된 듯 싶습니다." "그럴 리가!" 총 책임자인 재상과 한나라의 군사를 총괄하는 군무대신이 매수당했다면, 왕성을 지키는 것 은 매우 힘들어질 것이다. 게다가 정작 국왕 폐하는 아무런 힘이 없으니... 미카엔은 안색이 변하여, 론티아 정령에게 말했다. "내가 곧, 그들을 처단하러 갈 것이다. 건방진 아모르 자작! 설마했는데... 그들을 너무 얕봤 어! 제길." 자신이 너무 방심했음을 자책하던 미카엔은, 나를 돌아보더니 입을 열었다. "라비스! 난 지금 로히얀스로 공간이동해 갈거야! 넌 위험할지도 모르니, 이 길로 아스탄샤 로 가! 그곳이라면 안전할테니... 일이 수습되면 내가 너를 데리러 올게!" "미카엔! 그럴 수는 없어요. 저도 따라가겠어요!" "안돼! 내 말 들어!" 미카엔은 고압적인 어투로 나에게 외치더니, 자신의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나의 가운 데 손가락에 그것을 끼웠다. "이건, 내 어머니가 남겨주신 반지야! 널 정식으로 맞으면 줄려고 한 반지인데, 미리 너에게 줄게! 어머니의 권능이 부분적으로나마 깃든 반지이니, 지니고 있으면 너를 지켜줄 거다!" 그것은 은은한 은빛으로 빛나는 심플한 형태의 반지였는데 굉장히 아름답고도 고귀해보였 다. "왜 이걸 미리 주는 것이죠?" 내가 그렇게 묻자, 미카엔은 그저 빙긋 웃어보이고는 나를 끌어안았다. "당분간, 또 다시 라비스와 헤어져야 하니... 네가 그 반지를 끼고 있는한, 나는 너를 지옥에 서라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미카엔은 그렇게 말하고는 론티아 정령과 함께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곳을 잠시 멍히 바라 보던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선실 밖을 나가서 아젠을 찾았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왠지 불길해.' "아젠! 아젠!" 내가 그렇게 부르자 아젠샤르는 금세 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나는 그에게 명령을 내 렸다. "아젠! 미안하지만, 지금 로히얀스로 최고 속력으로 가야 해! 무리가 되더라도 바람을 최대 한 일으켜 줘!" [117] 체인지(Change) 제 20화 -또 다시 이별- (2) -2- "라비스님! 그게 정말입니까?" 나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노마법사 킬린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설마하는 심정으로 나에게 되물었다. "네, 킬린. 전하는 그 일을 수습하기 위해서 로히얀스로 가셨어요." "아니. 이런 일이... 재상과 군무 대신, 모두 믿음직한 폐하의 신하이셨는데, 어째서 매수당 했단 말입니까?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분들은 결코 매수당하실 분들이 아닙 니다." 나로서는 그들의 심성을 잘 알지 못했던 터라, 킬린의 말대로 뭔가 잘못된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뭔가 일이 잘못되었을 지도 모르죠! 암튼, 전하께서는 저보고 아스탄샤로 가라고 하셨지만, 전 아스탄샤로 갈 수가 없어요. 어쩌면, 위험한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전 이대로 로히 얀스로 갈겁니다. 킬린은 어떻게 생각하시지요?" "으흠..." 킬린은 조금전보다 더욱 깊게 파인 주름진 얼굴로,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라비스님에게 아스탄샤로 가시라고 하셨다면 그 말씀에 따라야 하는 것이 도리이 지만, 저 역시 폐하와 전하가 걱정이 되는군요." 그의 말에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우리는 로히얀스로 가는 거예요." 그렇게 킬린 외에도 왕실 마법사들과 기사들은 로히얀스로 가서 역적들을 처단하자고 입을 모았다. 게다가, 미카엔이 고용했던 선장도 나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저도 로히얀스의 국민으로서 나라와 폐하를 위해 돕고 싶습니다. 저희들은 평범한 뱃사람 들이지만,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될 것입니다. 사실, 저희들은 폐하와 왕실에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전하와 라비스님을 모시면서 생각을 달 리 하게 되었지요. 전하와 라비스님 모두 좋은 분이시고, 게다가 대단한 힘을 지닌 정령 들을 부리시는 라비스님을 존경합니다. 미천한 저희들의 힘이나마 힘이 되어드리고 싶습니다." 선장이 그렇게 말하자, 선원들은 모두 입을 모아 자신들을 거두어주기를 외쳤다. 나는 그러 한 그들의 모습에 가슴이 찡해졌지만, 아무런 능력도 없는 그들을 끌어들인다는 것은 그 들을 위험속으로 내몰게 되는 격이니, 나로서는 그들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들의 뜻은 정말 감사하지만, 혹시 있을지 모르는 위험에 여러분들을 끌어들일 수는 없습니다!" 나의 그러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선원들은 모두 완강한 태도로 국왕을 위해 힘이 되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정말 막무가내 기질이 다분한 사내들이었다. 나는 나직히 한숨을 내쉬며 킬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은밀한 눈짓으로 나에게 허락 하라는 사인을 보내왔다. 아마도, 우선은 허락하는 말을 해서 저들의 흥분한 심리를 잠재 우자는 의도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허락을 하는 말을 하였고, 그들은 단순한 심성을 가진 순박하지만 거친 뱃사람들답게 마구 날뛰며 좋아했다. 저리도 좋을까? 혹시 나라와 국왕을 구하겠다는 영웅심리가 발동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전속력으로 로히얀스를 향해 전진하였지만, 곧 한가지 난감함에 봉착하였다. 강한 바람으로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배의 돛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곧, 찢길 듯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속력을 낮추어야 할 것 같습니다. 라비스님." 킬린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안돼요! 지금 속력으로도 로히얀스까지는 며칠의 시간이 소요될 것인데, 이보다 속력을 낮 춘다면, 혹시 전하께 무슨 일이 생길 겨우... 만약의 경우이지만, 너무 늦게 될 거예요. 물론, 전하는 강하시니깐, 모두 간단히 처단하시겠지만 전 자꾸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라비스님의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강행군을 하며, -그래봤자, 아젠샤르만 혹사하는 셈이었지만- 왠만하면, 중 간 중간 항구에도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로히얀스로 향했다. 나는 시일이 지나고 로히얀 스로 가까워져 갈수록 초조해져 갔다. 중간에 딱 한번 항구에 들려 생필품과 간단한 무기들을 사들였다. 선원들에게 만약의 경우 를 대비해 호신용 무기들을 갖추게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멘시타를 통하여 로히얀스의 수도 사정을 알아보게 하였다. 곧, 그는 몇가지의 정보를 가지고 나에게 와서 보고를 하였다. [라비스. 놀라지 마! 황태자는 아무래도 반정을 진압하는데 실패한 것 같아. 정확한 사정을 모르겠지만, 로히얀스로 들어설 때 신중하고 조심해야 할 거야! 군사들이 도처에 쫙 깔렸고 국경 출입도 엄격히 통제하고 있는 것 같아. 며칠 사이에 굉장히 삼엄해지고 백성들이 반란과 푹동을 일으키는 것을 엄히 다스리는 것 같애!] 그의 말에 나는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그럼, 미카엔은?" [그건 나도 잘모르겠어! 소문에 의하면, 감옥에 갇혀있다는 말도 있고, 돌아가셨다는 말도 있고, 또...] "그만해!!" 나도 모르게 그에게 큰소리를 내었다. "...그럴 리가 없어! 미카엔이 그들 따위에게 질 리가 없어! 미카엔은 드래곤 만큰 강해! 아 마도 헛소문일 거야! 뭔가 확실히 잘못되었어! 리엔을 다시 보내야 하겠어. 왕성 안으로!" [안돼! 왕성엔 그때 봤던 마족 여자가 있어! 우연히 듣게 된 사실이야! 아무리 잠입 능력이 뛰어난 리엔이라도 그녀가 있는한 들키고 말거야! 진정하고 뭔가 대책을 강구한 다음 행 동해도 늦지 않아!] "뭐? 마족 여자? 그녀가 또 이번일에 끼어들었단 말이야?" 내가 그렇게 묻자 아기 고양이의 모습인 아멘시타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다면 미카엔이 그 마족에게 당했단 말이야? 아니야! 미카엔이 그렇게 싶게 당할 리가 없는데... 아무래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나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하였다. 아멘시타가 걱정스러운 얼굴 로 나를 올려다 보았지만, 나는 그의 눈길을 느끼지 못하며 계속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나는 킬린을 불렀다. 그는 현명한 노인이니, 같이 대책을 강구하면 뭔가 좋은 수가 생길 지 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킬린은 내가 부르자 충실한 신하의 태도로서 금방 모습을 내보였다. 그는 내가 황태자비가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킬린! 내가 직접 로히얀스로 가보겠어요. 킬린은 이 배를 돌려서 대기하고 있다가, 내가 정 령을 통하여 킬린에게 답을 주면, 킬린은 그것의 결과에 따라 행동하세요! 만약 상황이 나쁘면 킬린은 아스탄샤로 가서 여왕폐하를 알현하세요! 제가 친필로 편지를 써드리면, 여 왕 폐하께서는 킬린을 만나실 겁니다. 여왕 폐하께서 아무런 조약도 없이, 로히얀스를 도울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적어도 킬린에게는 작은 도움이나마 줄 거예요. 그리고 상황 이 좋으면, 저는 킬린을 로히얀스로 불러들일 겁니다. 제 말 아시겠죠?" "라, 라비스님? 그건..." 킬린은 매우 놀란 얼굴로 나에게 뭔가 말하려 하였으나 나는 그의 말을 가로채며 입을 열었 다. "제말대로 해주세요! 만약, 저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들은 나에게 함부로 해를 못끼칠 거예요!" "라비스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만약 라비스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전 황태자 전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걱정마세요! 킬린. 전 누구보다 안전할 수 있을테니..." "무슨 이유로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십니까?" "훗... 글쎄요." 나는 의미심장해 보이는 미소를 그에게 머금어 보이고는, 프리실라 여왕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어쩌면 프리실라는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녀가 나의 청을 거절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되었다. 그만큼, 그녀는 나를 아끼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보물이 위험에 닥쳤는데, 설마 모른 척이야 하겠는가? 그녀의 마음 을 이용하는 내 자신이 간사하게 느껴졌지만, 지금으로선 나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118] 체인지(Change) 제20화 -또 다시 이별- (3) -3- 「친애하는 여왕 폐하께 폐하를 뵈온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나갔군요. 곧, 폐하가 계신 아스탄샤에도 봄을 알리는 아 스타니아 꽃(봄에 피는 아스탄샤의 국화國花)이 만발하겠지요? 폐하의 도움으로 로히얀스와 인페르디아와의 전쟁은 이미 끝이 났지만, 저는 사정이 생겨 폐하께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폐하의 은혜를 이런 식으로 밖에 갚지 못하는 저를 부디 용서하십시오. 기회가 닿아 폐하를 다시 뵙게 된다면, 그때 폐하께 저에 대한 변명을 할 것이며, 폐하께서 내리시는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저는 지금 로히얀스로 갑니다. 위험에 빠지신 로히얀스의 폐하와 전하를 보필하기 위해서입 니다. 저는 비록 여왕 폐하의 은혜를 입었지만, 황태자 전하의 측실 중 하나로서 전하의 위험을 못본척 할 수 없기에, 이렇게 로히얀스로 가며 여왕 폐하께 서신을 띄웁니다. 만약, 폐하께서 이 서신을 보게 되신다면, 이 서신을 지닌 로히얀스의 왕실 수석 마법사 킬 린님에게 도움을 주십시오. 그 분이 말씀하시는 요구사항을 폐하께서 들어주신다면, 저와 로히얀스는 폐하의 은혜를 죽어서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의 호위 마법사 라비스 크로시벨 올림」 양피지에 프리실라에게 보낼 서신의 내용을 적은 다음, 나는 그것을 둘둘 말아 킬린에게 건 네 주었다. "킬린! 이 서신을 절대 잃어버리지 말아요. 로히얀스로 도착하면 연락 드리지요." "라비스님! 꼭 그렇게 하셔야 하겠습니까?" 킬린은 아무래도, 내가 걱정스러운지 이미 결정된 사항에 다시 한번 토를 달았다. "걱정마세요! 킬린." 나는 단호한 의지가 실린 어조로 그에게 말하고는 선실 밖을 나갔다. 그리고, 아젠샤르를 불러 그에게 명령을 내렸다. 요즘, 계속 그를 혹사시키는 것 같아 내심 미안한 감이 들었 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젠! 날 로히얀스까지 데려다 줘. 최대한 빨리!"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젠샤르는 표정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의 머리색 과 같은 하늘색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투명한 빛을 발하였고, 그 순간 그의 주위에서 정 령의 기운이 실린 부드러운 바람이 생기더니, 곧 나의 근처로 맴돌기 시작했다. "가시죠! 라비스님." 아젠샤르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맞잡고는 허공에서 나 를 받쳐주는 바람의 힘을 느끼며 하늘을 날아올랐다. 하늘을 날자 차가운 바다 바람이 나 에게 부딪혀 와, 끔찍한 추위가 느껴졌다. 게다가, 공기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펑퍼짐한 로브나 드레스를 입지 않고, 간편한 여행복을 입어서 그런지 나는 매서운 추위로 인해 로히얀스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대로 얼어죽으면 어떻하나 싶었다.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느라, 공기의 저항이 느껴져 나는 눈을 제대로 뜰수가 없었다. "으욱! 아젠~" 나도 모르게 억눌린 음성으로 그렇게 내뱉었다. 그러자, 갑자기 차가운 공기가 나의 육체와 차단되며, 칼같이 나에게 부딪혀 오던 공기의 저항도 없어졌다. "……?" 나는 눈을 가만히 떠보았다. 그러자, 나의 주위로 바람 속성의 실드가 쳐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젠샤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짧은 하늘빛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하늘을 나는 아젠샤르의 옆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나와 같은 또래로 보이는, 선이 곱고 앳띤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힘들지 않아? 실드를 유지하면서 나를 공중에 띄우는 일은 무척 힘들텐데... 요즘, 계속 나 때문에 쉬지도 못했잖아?" "……." "……?" "……." 내가 그를 한참을 바라보아도, 아무 대답도 없자 그제야 그에게 씹힌 것을 깨달은 나는, 그 에게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하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쳇~ 여전히, 나에게 억지 충성하게 된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너무 부려먹어서 삐진 것인가? 쳇~ 나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구!!' 그의 태도를 내멋대로 해석한 나는 속으로 그렇게 투덜대고는 다시 미카엔에 대해 생각했 다. 미카엔이 반정을 진압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말을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계속 불 길한 생각이 들었고 초조함으로 인해 속이 탔다. '혹시, 미카엔보다 더 큰힘을 지닌 존재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뭔가 함정에... 아무튼, 아모 르 자작이 반정에 성공했다면, 그가 왕 노릇을 하겠군.' 그렇게 하루를 꼬박 하늘을 날아서, 나는 로히얀스의 국경 지방 가까이까지 날아오게 되었 다. 아젠샤르와 나는 쉬지 않고 하늘을 날아온 셈이라, 모두 지친 몰골이 되어, 땅을 밟 았다. 나는 꼬박 하루만에 땅을 밟게 된 셈이었지만, 마치 몇 년 만에 땅을 밟아보는 것처 럼 기뻐했다. 로히얀스 외딴 시골의 한적한 숲에 착지한 나는, 아젠샤르를 쉬도록 보낸 뒤에 숲을 나오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하루를 굶었더니 허기가 몹시 졌다. 이곳은 수도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시골 지방이었으나, 나는 몹시 지쳤기 때문에 마을의 한 식당에서 요기를 한 다음, 수도로 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기운없는 몸을 억지로 이끌고는 마을까지 걸어가, 눈에 보이는 아무 식당이나 들어갔 다. 지금은 식사 시간대가 아닌지, 식당안은 몹시 한산했다. "어서 옵쇼~!" 한 급사가 달려와 나를 맞이했다. 적당한 테이블에 쓰러지듯이 자리한 나는, 주문을 받으러 온 그에게 아무거나 달라고 말하고는,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근처에는 화로가 있어서 무척 따뜻하였다. 갑자기 심신이 편해지자, 졸음이 밀려왔다. "손님! 식사 나왔는데요?" 그렇게 잠깐 잠이 들은 나는, 급사의 말에 퍼뜩 잠에서 깨며 고개를 들었다. "피곤하신 모양이군요. 여행 중이신가요?" 급사는 빙그레 웃고는 가져온 요리들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시골 식당에서 일하는 급 사답게 꽤나 정감 넘치는 인물이었다. "네, 맞아요." 나는 그의 질문에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리고는, 수저를 들어 따뜻한 감자 수프를 떠먹 으며 비교적 딱딱한 빵을 힘들게 찢었다. 지금까지 부드러운 빵만 먹어왔던 나였던 터라, 이런 서민들의 주식인 딱딱한 빵이 무척 먹기가 힘들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배가 무척 고프니 음식에 불만을 갖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열심히 식사를 하고 있는데, 식당 안으로 또 다른 손님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세명 의 건장한 사내들이었는데, 그들 역시 타지 사람들이었는지 시골 마을사람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지가 않았다. "오서 옵쇼! 손님들, 모두 세분이신가요?" 급사는 식사 시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시골 식당에 타지 여행자 손님들이, 들어오 는 것이 매우 신이 났는지, 그의 목소리가 처음보다 더 쾌활해져 있었다. 나는 구석 테이블에 자리하는 그들에게 잠시 눈길을 주었다. 그러자, 나를 힐끗 힐끗 바라 보며 그들끼리 눈빛을 교환하는 것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괜히 불쾌해진 나는, 그들이 무척 신경이 쓰였지만 그냥 식사나 빨리 하고 이곳을 나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대충, 식사를 마치고 카운터에 돈을 치르고 나서 식당 밖을 나왔다. 그리고 수도까지 가는 마차를 구하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마을 입구로 걸어갔다. 그렇게 한동안 걷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를 홱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를 미행하는 이들은 없었다. 내가 신경이 과민했나 생각하며, 나는 조금은 편해진 발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우선, 크로시벨가로 가서 다니엘 남작에게 왕성의 사정 좀 알아보게 해야지. 리엔이 왕성 안에 잠입하는 것이 어려우니 그를 통해서라도 알아내야 하겠지. 정보를 얻어야 계획도 설테니... 내가 우선적으로 몸을 숨기며 쉴 곳도 있어야 하니. 암튼 다니엘 남작은 자신의 딸이 부탁하는 것을 들어주겠지? 그리고... 비록 왕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그는 높은 직 책도 아닌데다 아모르 자작가에게 미움 받은 일도 없을테니, 크로시벨가는 안전할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까보다 경계를 늦춘 상태로 걸었다. 그런데 그때! "으읍!!" 누군가 뒤에서 어떤 약품 냄새가 나는 천으로 나의 입을 틀어 막았다. 나는 몸을 틀어 그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했으나, 나의 몸은 어떻게 된 일인지 점점 힘이 빠져나 갔다. [119] 체인지(Change) 제20화 -또 다시 이별- (4) -4- "으웅~" 부드러운 이불의 촉감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편안한 잠자리였다. 나른하고 기분 좋은 느낌 을 더욱 만끽하기 위해, 나는 이불속으로 더 파고들어가 부비적거렸다. 그러다, 나는 눈을 떴다. 익숙하지 않은 어둠이 나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 나는 내가 왜 여기 누워있는지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그러다, 나는 식당에서 나와 누군가 에게 기습을 당해 마취약으로 인해 잠들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났다. 내가 누워있던 곳은 고급스런 침대위였는데, 그밖의 것은 어둠으로 인해 보이지 않 아 나는 어둠이 눈에 익숙해지길 기다려야 했다. 조금씩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로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넓찍한 방안이었 다. 아마도, 귀족이나 왕실 안에서나 있을 법한 방안의 구조였다. 그러다, 나의 눈길은 어느 한곳에 머물러 고정되었다. 그곳엔 어떤 의자가 놓여있었고, 그 의자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나를 바라 보고 있었던 듯 별 미동 없이 고요하게 앉아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침착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누구시죠?" 약간 갈라진 나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흘러나왔다. "오랜만이야. 라비스." 톤은 낮지만 제법 맑은 목소리가 그쪽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들은 나는 더욱 소스라치 게 놀라야 했다. "에, 엔카루스?" "훗,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고 있다니 뜻밖인걸?" "여긴 어디지? 날 납치한 것이 너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그리고, 스펠을 중얼거린 다음, 낮은 목소 리로 빛을 밝히는 시동어를 외쳤다. 그러자, 작은 빛덩어리가 생겨 어두운 방안을 밝혀주 었다. "호오~ 그새 마법을 익혔나 보지?" "내 질문에나 대답해! 여긴 어디야?" 나는 고드름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차가운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의자에 앉아서 나를 올려다 보는 그의 얼굴에서 알 수 없는 미소가 그의 입술 끝에 걸리었다. "여긴, 네가 오고자 했던 왕성 안이다. 넌 미카엔 그 녀석을 보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 것 일테지? 후후... 어차피 이곳으로 올 생각이었는데, 나로 인해 손쉽게 왕성 안으로 들어오게 된 셈이니, 고마워하라고!" "왕성 안? 그러고 보니, 이번 반정은 네 집안에서 주도한 것인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저지른 거야? 미카엔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진정하라고! 라비스. 그렇게 네 남편의 행방이 궁금하다면 알려주지! 그는... 죽었어!" 엔카루스는 미카엔이 죽었다는 부분에서 일부로 말을 끌어 강조하였다. 그의 말에 나는 충 격으로 정신이 아찔하였으나, 그의 대답이 너무 황당하였던 터라 단호하게 부정하는 말을 그에게 외쳤으나, 나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욱 갈라져서, 지금 심적으로 굉장히 불안 정하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주는 꼴이 되어버렸다. "거짓말! 웃기지마! 미카엔이 이렇게 쉽게 당할 리가 없어!" "하하하! 물론, 넌 믿을 수 없겠지. 하지만, 그는 이세상에 없는 것은 변하지 않은 사실이니, 이를 어쩌나? 게다가, 무능력한 허수아비 국왕은 자신의 아들이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 면서, 나의 아버지인 아모르 자작의 눈치를 보느라 바쁘지. 곧, 왕위는 내 아버지가 갖게 될 거야. 아! 물론, 나는 아직 권력 같은 것에 관심없어. 그가 무슨 일을 하든 나와는 상관없지. 그러니,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말라구! 나는 그저 마법기사단이 된 이들의 단장 노 릇이나 하는 것 뿐이니깐." "마법 기사단?" 나는 지금 상황이 정말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에게 침착한 어조로 질문을 던 졌다. "그래. 마법 기사단! 그들은 내가 이끌고 있던 마법 도적단 일원들이지. 너도 안면이 있을테 지? 오늘 낮에 너를 납치한 녀석들도 마법기사단의 일원이고, 또 예전 너를 한번 납치하 려다 실패했던 녀석들도 마법기사단의 일원이지." "미쳤군! 도적단을 한순간에 기사단으로 만들다니!" 나는 그에게 경멸하는 눈빛으로 쏘아보며 비웃듯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나의 그러한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미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그 녀석들이 섭하게 생각할텐데... 그들은 일반 도적단이 아니야! 그들은 내 가 피땀 흘려 키운 녀석들이지! 그들에게 기사들이 쓰는 정식 검술을 가르쳤고, 또한 마 법에 소질있는 녀석에겐 마법도 함께 가르쳤지! 물론, 다른 멍청한 기사들과는 다른 면도 있지. 고리타분하고 격식에 얽매여 아무것도 못하는 그들과는 달리 용통성도 갖고 있으니깐." "훗... 이제야 알겠군! 넌 이날을 위해서 그 도적단들을 키워왔어. 그리고 루젠댜르인이었던 너의 어머니인 자작부인을 통해서 루젠댜르 왕실과 계속 접촉을 가지면서, 이 나라를 쟁 탈하기 위해 꿈을 꾸어 왔겠지? 물론, 넌 권력에 관심없다고 말하지만, 너의 아버지가 왕위 에 오를 수 있도록 넌 협조를 했어! 대체 미카엔은 너희들이 파놓은 어떤 함정에 결려 든거지?"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엔카루스의 얼굴에서 머물던 미미한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그의 까만 눈동자는 심중을 알아보기가 어려웠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작게나마, 지금 놀라워하고 있 다는 듯이 아까와는 다른 표정이 떠올랐다. "몇 달, 못본 사이... 조금 변했군! 라비스. 하지만 너의 아름다움은 여전한데?" "수작 부리지마!" "훗~ 넌 지금, 네 위치에 대해 잘 못깨닫고 있는 것 같군. 난 네가 이곳을 찾아올 것이란 것을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었지. 그래서 계속 수색을 했어. 널 찾기 위해. 만약 여기 왕성에 있는 마족의 눈에 먼저 띄었다면, 넌 죽은 목숨이었을걸? 어쨌든, 나는 일이 있으 니 나가보아야 하겠군. 아! 그리고, 여기서 도망칠 생각은 말아.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성큼성큼 걸어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가길 기다린 나는, 그의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나는 정령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나의 앞에 나타나야 할 정령들은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놀란, 나는 두 번 세 번 정령들이 이름을 불렀지만 여전히,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 서, 나는 방문쪽으로 걸어간 다음, 문의 손잡이 잡았다. 그러자, 치직 거리며 작은 전기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손을 떼며, 뒷걸음질을 쳤다. "젠장! 이 방은 결계가 걸려 있어!" [120] 체인지(Change) 제21화 -미카엔 구출 작전?- (1) (미카엔 구출 작전?) -1- 결국, 나는 방을 나가는 것을 잠시 포기하고는 방을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방안을 둘러보아도, 이 방이 어느 궁성 안에 속해있는 방이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책장에 검술에 관한 책들이 꽂혀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엔카 녀석의 방인가?" 나는 벽면을 따라서 조금 걸었다. 그러자, 내가 있던 방과 연결된 또 다른 방이 나왔다. 침 대가 있는 부분만 가릴 목적이었는지, 한부분만 두꺼운 벽으로서 두 공간이 분리되어 있 었다. 그리고 문 같은 것은 달려있지 않고 개방되어 있었는데, 이쪽 공간은 응접실 용도의 방인 것 같았다. 하지만, 밖으로 통하는 방문과 창문이 없어서 약간 비밀스런 용도의 응접실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그 공간으로 들어가 대충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벽면에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커튼 옆에는 끈이 달려있었는데, 호기심이 동한 나는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커튼은 양옆으로 스르륵 열리고 그 안에 거의 실물 크기인 초상화 하나가 떡하니 나타났다. "헉! 저게 뭐야?" 그 초상화의 주인공은 나였다. 화려한 황금빛의 머리카락이 물결치며 등허리를 지나, 엉덩 이 선까지 닿아있었고 머리카락과 같은 빛의 눈동자가 도도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 마도, 머리카락의 색을 칠할 때, 황금가루를 섞어 색을 칠했을 것이라 추측되었다. 일반 물감은 결코 저런 색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만 따진다면, 예술적 가치와 모델의 아름다움을 제외한다고 해도, 무지 비쌀 것 같았다. 아무튼. 눈부신 순백색의 피부와 살짝 웃음을 머금고 있는 붉은 장미빛의 도톰한 입술은 굉장히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보아도, 너무 아름다워서 황홀할 지경이었다. "정말 되게 잘그렸네? 도데체 누가 이런 그림을 그렸지?" 나는 이 그림의 주인공이 나라는 것을 망각하며 열심히 감탄을 하였다. 그러다, 침실쪽 방 문에서 똑, 똑! 하는 노크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는 커튼을 다시 닫고 침실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방문이 열렸고 나는 안으로 들어오는 이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엔카루스일거라 생각했지만, 안으로 들어온 이는 그가 아닌, 그의 여동생이었다. 그녀가 하고있는 백금 귀 걸이가 가볍게 흔들렸다. "아니! 넌?" 아사벨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렇게 입을 열었다. 나 역시 내심 놀랐지만, 나를 보며 놀 라는 아사벨라를 보며 생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네 오빠를 찾아온 건가? 오랜만이지?" "흥! 역시, 오빠가 너를 데리고 들어와 이곳에다가 감추어 두었군! 정말, 내가 그 자식의 여 동생이라는 것이 너무 싫어! 정말 미쳤어! 제 정신이 아니야!" 그녀는 이상스럽게 흥분을 하며 나에게 외쳤다. 그녀의 그러한 태도에 의아스러워진 나는, 할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것들을 끌어들이고 아버지를 조종해서, 반정을 일으키더니 전하에게 마저 해를 끼 치고, 이제는... 이게 다 네 탓이야! 너만 없었더라면..." "그게 무슨 소리야? 미카엔이 어떻게 되었지? 나 때문이라니?" 그녀가 뭔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 나는, 그녀에게 다그쳤다. 하지만... "아사벨! 여기서 뭐하고 있지?" "아!" 언제 다가왔는지, 그녀의 뒤로 엔카루스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굉장히 차갑게 느껴지는 그 의 말에 아사벨라는 움찔해 보이더니, 그대로 방 밖으로 뛰쳐 나가버렸다. "아사벨의 말은 신경쓸 것 없어. 라비스." "……." 나는 그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조금전, 아사벨라의 말을 종합해보자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 이 엔카루스가 계획한 일이 된다는 얘기가 되었다. 그가 이러한 일을 하는 목적이 무엇 일까? 아까 아사벨라는 모두 나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저녀석이 나 때문에 일을 저질렀다는 말이 된다. 조금전 봤던 나의 초상화를 떠올려 보았다. 내 짐작이 맞다면, 엔카루스는 정말 황당한 녀 석이었다. 물론, 그가 예전부터 이 일을 생각해 왔을테지만, 그의 그 결심은 나로 인해 더욱 굳혀졌을 터였다. 자신은 권력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세인들의 비난을 피하고는 실제로는 이 나라를 한손 에 움켜 쥐려는 속셈이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해도 정말 민망한 일이지만, 이미 남의 아 내가 된 나를 미카엔에게서 빼앗으려 했다는 얘기였다. '욱! 내가 추론한 결론이지만, 정말 닭살이다.' 뭐, 나를 한시도 안잊고 생각해주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엔카루스의 관심을 받는 것은 정말 사양하고 싶은 일이다. 그렇다면, 그가 애절히도 생각하는 나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표정없는 얼굴로, 장식장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크리스탈 글라스를 꺼내어 그것을 내리쳐서 깨뜨렸다. 그때까지, 엔카루스는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이 안가는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제일 날카로워 보이는 유리 조각 하나를 집어들어, 그것을 나의 오른손 동맥부분에 겨 냥하였다. '...그렇다면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는 열녀 행세를 하는 수밖에...' 나는 그를 보며 빙긋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엔카! 한발짝이라도 가까이 다가오면 난 죽어버리겠어! 어서 미카엔이 어찌 되었는지 말 해! 그는 정말 죽었어?"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엔카루스는 처음엔 당황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다시 그의 특유의 뻔 뻔한 얼굴로 돌아가서, 코웃음 치듯 입을 열었다. "왜 내 말을 못믿는 것이지? 그는 죽었어! 그리고... 실천하지도 못할 행동을 하는 것은 좋 지 않아. 어서 그 유리조각을 내려놓아!"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뒷걸음질을 치며 그에게 악을 쓰듯 외쳤다. 사 실, 나는 동맥을 끊을 만큼 용기는 없었지만, 그에게서 뭔가 알아내기 위해서는 하는 척 이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그 유리조각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동맥이 있는 부분을 살짝 그었다. 그러자, 그 부 분에 붉은 선이 생기며 붉은 피가 스며올라오기 시작했다. "앗! 무슨 짓이야? 그만둬!" 그는 나에게 소리치며 더 가까이 다가오려 했지만, 나는 그에게 외쳤다. "다가오지마!" 그리고는 나의 손목을 단번에 끊어버릴 듯, 단호한 태도를 취해보였다. 제길! 정말 아파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겁을 먹었다는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겁을 먹은 표정을 그에게 보인 순간, 나는 실패할 것이다. "젠장! 왜 이런 짓까지... 미카엔, 그 재수없는 자식을 그렇게 사랑하는 거야? 제발 그만둬! 라비스... 그는 죽지 않았어!" 뜨거운 피가 나의 손목에서 흘러내려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살짝 만 그은 것이기 때문에 아직 위험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엔카루스는 피를 흘리고 있는 내 모습에 냉철한 이성을 상실했는지, 심중을 알 수 없었던 그의 까만 눈동자에 언뜻 공포 감 비슷한 기색이 스쳤다. "...그는 어... 떻게 되었.. .어?" 나도 정말 가증스러웠다. 이렇게 사람의 감정을 냉정하게 이용하다니... 나는 거의 죽을 것 처럼 연기를 하는 반면에도, 독기어린 지금의 기세를 계속 잃지 않도록 했다. 내가 풀어 지는 기색을 보이면 그는 당장에 달려들어 내가 들고 있는 유리조각을 빼앗아 들테니 말이다. '후후... 내가 저 뻔뻔한 인간을 제압하게 될 줄은... 정말, 그의 말대로 나는 조금 변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지금 마계에 있어. 한 상급 마족이 국왕을 마계로 끌고 갔거든. 물론 미카엔을 마계로 끌어들이기 위해 한 행동이었지. 아무튼 미카엔은 자신의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마계로 갔고, 지금 나와 손잡고 있는 한 고위 마족의 여자가 그 차원의 문을 봉쇄했어." "너랑 손... 잡고 있는 마... 족? 그녀는 누구...?" "그녀는 미카엔에게 앙심을 가지고 있는 고위 마족이지. 이름은 '키리아'... 이제 그만 그 유 리 조각을 내려놔!" 이젠 엔카루스의 얼굴 표정은 처절하기까지 했으나, 나는 그런 그를 무시했다. "내 말에 대답...해!! 재상과 다른... 관리들은 어떻게 매수했... 어?" "그들은 매수당한 것이 아니라, '도플갱어'라는 이름의 마물에게 먹힘을 당하고 대신 그 도 플갱어들이 그들 행세를 하고 있는 거야. 제발! 이제 그것을 내려놔! 피를 너무 많이 흘 렸어!" 엔카루스의 말에 나의 손목에 눈길을 주었다. 그러자, 나도 모르는 사이 많은 량의 피가 흘 러나와 있었는지 융단이 깔린 바닥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나는 순간 어지러움을 느 꼈다. 하는 척만 한다는 것이... 내가 너무 오버한 모양이었다. 이제 알아낼 것을 다 알아냈다고 생각한 나는 경직되었던 긴장을 풀었다. 그러자, 긴장과 함께 나의 몸은 무너져 내려 쓰러졌다. 엔카루스는 재빨리 나를 안아들었다. "엔카! 그 '키리아'라는 여자로부터 내 존재를 감쳐줘! 그녀는 나를 알고 있어. 그녀는 날... 죽일 거야!" [121] 체인지(Change) 제21화 -미카엔 구출 작전?- (2) -2- "엔카! 그 '키리아'라는 여자로부터 내 존재를 감쳐줘! 그녀는 나를 알고 있어. 그녀는 날... 죽일 거야!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하고 있어! 제길~ 네가 이렇게 무모할 줄은..." 내가 그에게 부탁하자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엔카루스는 그렇게 답변하며 나를 침대에 눕혔 다. 솔직히 내가 너무 앞서서 생각을 하여, 엔카루스의 나에 대한 감정이 애틋한 것으로 생각한 것은 아닐까 우려도 했었지만, 내 짐작은 역시나 였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눈치채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 계속 숨겨야 할 것 같았다. 만약 그가 이 일을 알게 된다면, 왠지 이용당했다는 느낌에 기분이 무지 나쁠 테니 말이다. '우~ 역시 가증스럽다!' 엔카루스는 나의 상처를 응급처치를 하고, 직접 자신의 손으로 나에게 붕대를 감아주었다. 물론, 시녀들이나 의사를 따로 불러도 되겠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키리아'라는 마족 여자에게 내 존재가 노출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생각 외로, 나의 상처를 치료하는 일에 꽤 능숙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 는 아사벨라의 입을 단속해야겠다는 말과 함께 나의 식사를 가져오겠다고 하며, 방을 나 갔다. 그렇게 다시 혼자 남게 된 나는, 일어나 있으면 매우 어지러웠기 때문에 계속 침대에 누워 있었다. 피를 너무 흘린 탓이었다. 나는 미카엔을 구해올 방도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우선, 정령들을 불러올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다가, 여기가 궁성 내부라 정령들이 내 부름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왕성 자체는 외부와 단절되는 기본적인 방어 결계가 걸려 있느니 말이다. 그렇다면, 밖으로 나가서 그들을 불러야 했다. 그러나, 나는 이 방을 나갈 수가 없었으니... 이 방은 밖에서는 자유롭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듯 하였으나, 안에 있는 사람은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듯 했다. 물론, 이 방 주인인 엔카루스는 예외가 되었지만. '우선 정령을 불러 이곳을 빠져나가 킬린 일행에게 연락을 취해야 하는데... 아! 아사벨라를 이용하면...' 나는 '패밀리어'(정신적 교감으로서 작은 동물을 자신의 부하로 만드는 마법) 라는 마법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일정한 범위 안에서 생명 탐지 마법을 시전했다. 이 마법은 써본적이 없어서, 잘 될지 의문이었다. 그러다, 나는 근처에서 쥐로 짐작되는 작은 생명체 하나를 탐지해 냈다. 나는 그것을 목표 로 지정하여, 패밀리어 마법 스펠을 외우며 마나를 운용했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는 상태에서 마법을 시행하려 하니,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지만, 나는 그 작은 생명체에 마법을 걸었다. "제발 성공해라~" 한번에 성공이 되기를 간절하게 기원하며, 마법을 시전했다. 잠시 후, 그 생명체가 마법에 걸려들었음을 깨달은 나는 곧 바로 내가 있는 방까지 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오다가 고양이나 만나지 말아야 하는데..." 만약, 내 패밀리어가 된 그 생쥐가 가다가 재수없게 생명을 잃거나 하면은, 그 생명체와 정 신적 교감을 하고 있는 나 역시,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된다. 아마도, 내 정신 쳬계는 파멸 되어 미쳐버리거나 혹은, 생명을 잃는 결과까지 나올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꽤나 위험부담이 큰 마법이었지만, 지금 나에겐 방법이 없었다. 나의 부름을 받은 생쥐는 곧장 이곳으로 달려왔다. 아직까진 특별한 장애물은 없었다. 나는 그 작은 생명체가 가까이 다가옴을 느끼며 계속 그 생명체를 느끼는 것에 집중하였다. 그 리고, 마침내, 그 생쥐가 이곳으로 거의 다가와 있었을 때! 엔카루스가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열린 방문 사이로 생쥐 한 마리가 뛰어들어왔다. "앗!" 나는 외마디 외침을 내며 힘들게 침대에서 일어났는데, 생쥐를 본 엔카루스가 그 생쥐를 잡 으려 했다. "안돼에에~!!!" "찍찍~!" 나의 처절한 외침에 엔카루스는 멈칫하였고, 어린애 주먹만한 크기의 갈색털을 가진 생쥐가 는 나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엔카루스는 나를 기이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라비스?" "생쥐를 죽이지 말아! 이렇게 귀여운데, 힘없는 동물을 죽이려 하다니! 너무해!" 잠시 당황한 나였지만, 게다가 끔찍한 몰골의 생쥐가 나에게 뛰어들어서 질겁을 한 나였지 만, 이내 그 기색을 지우고 정말로 생쥐를 사랑하는 감수성 예민한 소녀로 가장하고 엔카 루스에게 외쳤다. '우엑! 끔찍해! 제발 부비적거리지마! 지저분하고 징그러운 녀석아~ 엔카 녀석이 날 이상한 여자로 보겠군.' 간단한 식사가 놓여진 쟁반을 들고 있던, 엔카루스는 잠시 기묘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더니,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생쥐를 좋아하는 소녀라니! 정말 특이한 취향이군." 약간 충격을 받은 듯한 그의 목소리였다. "아하하!" 그리고 삐질거리는 기색이 역력한 나의 겸언쩍은 웃음... 이 녀석 때문에 아까보다 더 어지 러워졌다. 엔카루스는 식사가 든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더니, 다시 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의 눈빛이 문득 날카로워져 있었다. "라비스! 혹시, 패밀리어가 뭔지 알아?" 나는 속으로 흠칫하였지만, 그러한 기색을 나타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패밀리어? 그게 뭔데?" "아니야! 아무것도. 하긴, 그것은 3서클 이상은 되어야 하는데... 네가 반년 만에 그것을 익 혀 시전할 리가 없겠지. 넌 기껏해야 1서클 정도 될테니..." "그거 마법 종류인가 보지?" 엔카루스는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생각했나 하는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고, 나는 한술 더 떠서 그에게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대로 방을 나갔다. "휴~ 살았다." 그가 사라지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진저리를 치며 나의 품에서 부비적 거리고 있는 생쥐를 털어내었다. "찍~!" 나는 그대로 책장 쪽으로 걸어가 꽂혀있는 검술 책의 종이를 작게 찢어내어, 거기다가 조그 맣게 글씨를 썼다. 「아사벨라! 너의 남편이기도 한 미카엔을 구하고 싶으면, 내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 줘! -크로시벨 씀-」 그리고는 그 종이를 작게 접은 다음, 생쥐의 입에 물렸다. 아사벨라 역시, 미카엔을 사랑할 테니 그를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이봐! 생쥐야~ 이 쪽지를 아카시아궁의 아사벨라에게로 전해주어야 해! 가면서, 고양이 조 심 무서운 새 조심하구... 그녀가 놀라지 않게, 그리고 그녀가 이 쪽지를 볼 수 있게 최선을 다해줘! 너만 믿는다." "찌찍!" 생쥐를 알았다는 듯이, 찍찍거리고는 쪽지를 입에 물고 창틀 쪽으로 움직였다. 그 생쥐는 나와 정신적으로 교감을 나누고 있으니 아사벨라가 있는 곳까지 잘 찾아갈 것이다. 생쥐는 쇠로 된 창살로서 폐쇄된 창문을 조그만 몸으로 가볍게 빠져나갔다. "제발 일이 잘되야 할텐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극심한 현기증을 느끼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122] 체인지(Change) 제21화 -미카엔 구출 작전?- (3) -3- 앉아있는 것조차 힘들었던 나는 아예 누워서 생쥐에게 계속 집중을 했다. '아사벨라가 쪽지를 본다면, 오히려 화를 내겠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나를 도와달라는, 달 랑 한마디만 썼으니... 하지만, 그녀는 이곳까지 찾아올 거야! 미카엔이란 이름을 언급했 으니깐. 궁금해서라도 오겠지.' 그러다, 나는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앗! 이 멍청아~ 뒤에 고양이가 널 노리고 있잖아? 달려! 앞으로 계속 달려!" 생쥐의 근처에서 고양이로 짐작되는 생명체를 감지한 나는, 주먹에 땀을 쥐며 그렇게 외쳤 다. 모르는 누군가가 이러한 나의 모습을 본다면, 혹시 정신나간 여자가 아닐까 한번 쯤 생각해볼 것이다. 그렇게 위험신호를 내가 보내자, 생쥐는 재빠르게 내달리는 것 같았다. 한동안 고양이와 추 격전을 벌린 것 같던 생쥐는 다행이 아카시아궁 건물의 쥐구멍으로 잽싸게 들어가서 구사 일생으로 위험을 벗어났다. 나는 다시 긴장을 했던 근육을 풀며, 아사벨라의 방 위치를 생쥐에게 계속 알려주며 집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했다. 잠시 후, 생쥐는 아사벨라의 방에 도착하였고 생쥐는 아사벨라의 방문을 발톱으로 벅벅 긁 어댔다. 그러자, 긁는 소리에 이상함을 느낀 듯 아사벨라가 방문을 열어본 모양이었다. 생 쥐는 잽싸게 열린 방문 사이로 방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결국, 쥐를 발견한 아사벨라는 비명을 질렀고 이에 놀란 생쥐의 정신적 충격의 여파로 나 역시, 심장 박동이 빨라진 것을 느껴야 했다. "에휴~ 깜짝이야! 생긴 것 답지 않게 생쥐보고 그렇게 난리를 필 것은 뭐람~" 나는 투덜대며 생쥐에게 잘보이는 곳에다가 그 쪽지를 놓아둘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생쥐 는 어느 장소로 풀쩍 뛰어올라가더니, 물고 있던 쪽지를 내려놓았고 그것을 확인한 나는 생쥐에게 걸려있던 패밀리어 마법을 풀었다. 이제 나는 기다리는 일만 남은 것이다. 마법을 계속 쓰느라 나는 극심한 피로가 느껴졌다. "에구구~ 밥먹을 힘도 없어. 어지럽구... 피가 모자라~" 아까 쥐를 만져서 몸을 씻어야 했지만, 지금 목욕을 하다간 그대로 기절을 해버릴 것 같아 서, 나는 할 수 없이 테이블까지 거의 기어가다시피 하며 몸을 움직였다. 정말 오늘따라 스타일 구기는 행동을 많이 하는 것 같았지만,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으니 우아한 행동따위 는 과감하게 버리기로 했다. 정말, 확실하게 망가진 모습을 보이는 나였다. 나는 이고생을 왜 해야 하나? 하는 회의감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미카엔이 마계에서 정착하 게끔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키리아가 미카엔을 그대로 내버려 둘 리도 없었고 마계에서는 전적으로 불리한 미카엔이 언제 패배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테이블까지 간신히 당도한 나는 수저를 들어, 무슨 죽같은 것을 떠먹기 시작했다. "으웅~ 치킨이 먹구 싶어! 아~ 된장국과 하얀 쌀밥이 생각난다. 흑! 이럴 때 고향에 대한 향수가 물밀 듯이 솟아오르다니..." 나는 부모님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보단 된장국과 쌀밥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이 앞을 가 렸지만, 어떻하리? 그냥 나중에 시녀들을 시켜서 된장국을 끓여보도록 명령을 내려볼 참 이었다. 물론, 그들은 된장이 뭔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것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나온다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에게 끝없는 부비 부 비~를 선사할 생각이었다. 본인이 싫든 좋든. "앗! 엔카 녀석! 이렇게 음식을 조금 담아오다니!! '죽'인 것도 마음에 안드는데, 이렇게 양 을 조금 밖에 안주는 것은 무슨 심보야?" 금세 바닥이 드러난, 그릇의 모습에 나는 더욱 고향에 대한 향수가 깊어져서 우울해졌다. 이미, 빈그릇이 되었지만 나는 수저를 놓지 못하고 빈그릇을 아쉽게 바라보았다. 정말 허 탈하고도 아쉬웠다. 그렇게 한참을 빈그릇을 노려보고 있는데...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나도 모르겠다.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아사벨라였다. 생각보다 무지 빨리 온 아사벨라의 모습에 나는 감동마 저 느껴졌다. 그녀가 이렇게 반갑게 느껴질 때가 있었던가? 하지만, 그녀를 반가워하는 나와는 달리 그녀의 얼굴 표정은 별로... 그다지, 좋아보이지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살벌하 게 느껴져서 위화감마저 들었다. "뻔뻔해도 정도가 있지! 나에게 이 따위 편지를 보낸 의도가 뭐야? 게다가, 그 끔찍한 쥐를 시켜서 보내다니! 네 근본 바탕이 의심스러워." 그녀는 다짜고짜, 내가 쪽지를 보낸 의도에 대해서 따져들었다. 나는 그녀가 그렇게 반응할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녀가 와주었다는 반가움에 밝아진 얼굴을 계속 유지하며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아사벨라! 와줘서 고마워. 사실 네가 안오면 어쩌나 했는데... 미카엔이 지금 마계에 있다는 거 알고 있어? 난 그를 구할 거야!"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사벨라는 나의 눈을 직시하며 나의 의중을 살피려는 듯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한참 후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꽤나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정말 뻔뻔해! 네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네가 아니었다면, 미카엔이 그럴 위 험에 빠지지도 않았어! 네가 아니었다면 오빠가 그런 일을 벌리지도 않았을 테고, 네가 아니었다면 미카엔이 왕성을 비우지 않았을 거야!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이러한 일이 터 진 것이니깐. 그런데, 그런 한심한 수작으로... 미카엔의 이름을 팔아서 나보고 너를 도우 라고 말하는 거야?" 그녀는 새삼 분노가 치밀어오르는지 나에게 외쳤다. "아사벨라! 길게 말할 시간이 없어. 곧 네 오빠가 이 방을 들어올지도 모르잖아?" "그는 다른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우고 있어. 나는 그 사이에 이곳까지 온 것이고! 착각하 지마! 난 너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네 추잡한 행동을 일깨우려 함이야!" 그녀의 독기 어린 말들이 나의 가슴이 박혀, 나는 문득 가슴이 아파졌다. 그녀가 나에게 이 러한 말을 하는 이유를 너무도 잘알고 있었기에, 이 상황이... 정말 안타깝게 느껴졌다. "나로 인해 네가 상처를 받은 일이 있다면, 정말 미안해.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말하고 싶 어. 난 네가 미카엔을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나 역시, 미카엔을 사랑해! 너와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공통된 감정은 어쩌면 그 성격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를 구하고 싶은 마음은 같겠지? 나는 이곳을 빠져나가 킬린 일행에게 연락을 취할 생각이야. 그러면 그는 아스탄 샤로 가서 여왕 폐하께 도움 요청을 할 것이고, 나는 다시 왕성 안으로 돌아올 거야. 이 곳에 있는 마족들은 너무 위험해. 어쩌면 네 오빠마저 배신할 존재들이야." 그러자, 아사벨라는 내 말로 인해서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지 아까보다 약간 불안정한 얼 굴을 해보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넌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어? 내 눈을 똑바로 봐! 이것은 나의 진심이야. 이곳에서 내가 죽더라도, 나는 로히얀스와 폐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이자 나와 너의 남편인 미카엔을 구하고 싶어. 지금은 내 부탁을 들어줘. 나중에... 모든 것이 다 잘되었을 때, 그때는 나 를 마음껏 미워해도 좋아. 나를 죽여도 좋아! 그러니... 으흑~!" 그녀에게 말하던 나는 감정이 복받혀 오르자 눈물이 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딱딱하게 서있던 아사벨라의 몸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역시, 못당하겠어. 난 지금까지 전하께서는 네 미모에 혹해서 너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 데, 그게 아니었던 거야. 넌 지금 이순간마저도 나를 비참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분해! 너보다 못한 내 모습에 너무 분하고, 옹졸한 나의 모습에 화가 나!" 아사벨라는 그렇게 외치고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위로 들렸다. 나는 그녀 가 혹시, 나를 때리려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녀는 내 얼굴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그녀의 그런 행동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를 돕는 것은 이 순간 뿐이야. 전하를 구하게 된다면, 난 다시 너를 미워할 거야. 너를 좋아하게 된다면, 나는 너무 비참해져서 죽어버리고 싶을 테니...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냐고 물었지? 물론, 나는 진실을 알아볼 수 있어. 그리고 지금 네가 진심을... 네 마음 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우엥~ 아사벨라!" 내가 더욱 망가진 모습으로 그녀에게 울먹이며 입을 열자, 그녀는 눈쌀을 찌푸렸다. 그리고 는 감동으로 나의 황금빛 눈이 반짝 반짝해져 있는 것을 외면하며, 다소 차가워진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기회는 지금 뿐이야! 지금 나가야 해! 오빠가 없는 지금. 난 그들에게 쇼핑하고 오겠다고 말할 셈이야. 넌 나의 시녀로 분장하도록 해! 그리고 명심해둬! 난 전하를 구하기 위해서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니깐. 다른 것은 어찌되어도 상관없어!" [123] 체인지(Change) 제21화 -미카엔 구출 작전?- (4) -4- 나는 아사벨라의 시녀가 되어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나의 머리는 가발을 써서 갈색머 리가 되었고, 약간의 화장(분장)으로서 얼굴의 인상은 촌티나게 바뀌어 있었다. 가끔 지 나가던 시종이나 시녀들이 나와 아사벨라를 힐끗 힐끗 쳐다보았지만, 그때마다 아사벨라는 당당한 태도로 앞으로 나아갔고, 오히려 자신을 힐끗대는 그들을 째려보았다. 그러자, 아사벨라의 째림을 받은 그들은 얼른 다시 눈을 내리깔며 자신의 갈 길로 걸어갔다. 가끔하다가, 왕성의 관리들과도 마주쳤는데 그들은 모두 마물들임을 나는 눈치챌 수 있었 다. 그들에게서는 간악함과 어두운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다. 나는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신성하고 엄격한 한 나라의 왕성이 마족들의 손아귀에 놀아나 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내색을 죽이고 눈을 열심히 내리깔며 그들을 지나갔다. '다시 와서 네놈들을 모두 처단할 것이다. 기다려라!' 마음속으로 나는 그들에게 외쳤다. 아사벨라는 건물 밖을 나와 시종에게 마차를 대령할 것을 명령했다. 그녀의 태도는 계속 오 만했다. 그때 왕성 내부의 모든 마차의 책임자라는 남자가 아사벨라 앞으로 나타났다. 아사벨라는 나에게 살짝 귀뜀하기를, 그는 하급 마족이 인간의 모습으로 가장하고 있는 것 이라 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아사벨라님." "나는 로히아나의 번화가인 '에레카 거리'로 갈 것이다. 쇼핑을 해야 하겠으니, 당장 마차를 대령해라!" 그러자, 그 남자는 나에게 한번 눈길을 주더니 별다른 것을 못느꼈는지 곧 마부들에게 마차 를 내오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태연한 태도로 별 문제없이 마차를 탔고 왕성을 빠져나 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나는 긴장을 풀며 안도를 했다. 이제는 빠져나가는 일만 남 았으니... 그러다, 왕성 입구에서 말을 타고 오는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다. "앗!" 때마침 엔카루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아사벨라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을 하였다. "어디 가는 것이냐? 아사벨!" 엔카루스가 물어왔다. "쇼핑하러!" "으음... 네가 웬일이지? 넌 쇼핑 같은 것은 별로 즐기지 안잖아? 항상, 상인들을 궁성 안으 로 불러들이던 네가 안하던 짓을 하는군." 그의 말에, 아사벨라는 작게 동요한 듯 했으나 아직까진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나는 식은 땀이 났다. "훗~ 오늘은 안하던 짓을 좀 해보려고! 전하도 안계시고 기분 나쁜 것들이 드글거리는 이 곳을 잠시나마 잊고 싶어!" 아사벨라는 평이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 내용은 자신의 오빠를 탓하는 내용이 숨어있었다. 그러자, 엔카루스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눈치이더니, 입을 열었다. "너 라비스를 만나거나 그러지는 않았겠지?" "흥! 내가 왜 그딴 계집을 다시 보러 가겠어? 오빠가 그 애를 삶아먹든 구워먹든 맘대로 해! 아예 가져버리든지..." '헉! 아사벨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사벨라의 거침없는 말에 나는 속으로 당혹스러워 했다. 그러자, 엔카루스는 그러한 그녀 의 말에도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더니, 잘갔다오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갈 길로 말을 몰아갔다. 그 모습을 본, 아사벨라와 나는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사벨라는 다시금, 마차를 모는 마부에게 외쳤다. "마차를 더욱 빠르게 몰아라! 그러면 금화로서 포상을 하겠다!" 아사벨라의 말에 그는 금화에 혹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 앞에 연결되어 있는 두 마 리의 말에게 채찍을 내려쳤다. 나는 아사벨라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네가 나에게 고마워 할 것은 없어! 나도 너처럼 내 남편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 뿐이니 깐." 그녀의 말에 나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아사벨라는 나를 째려보았다. "뭐야? 비웃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미카엔은 정말 복이 많은 녀석이라 생각해서..." 나는 그녀를 칭찬하는 내용을 내포하는 말을 했고, 나의 그 의중을 알아들은 그녀는 순간 어색해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이내 표독스러운 얼굴이 되어. "네 따위가 전하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부르다니! 아무리, 그가 너에게만은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을 했다고 해도, 나는 기분 나쁘니깐. 내 앞에서는 전하라고 부르도록 해!" "좋아! 네 말대로 하지. 그런데, 너 괜찮아? 만약 이 일을 네 오빠가 알게 되면 널 가만두지 않을텐데?" "그건 네가 걱정할 사항이 아니야! 친동생인 나를 죽이기야 하겠어? 그리고, 잡아떼면 그만 이니깐." 아사벨라는 나에게 냉랭하게 대꾸했지만, 나는 그녀가 마음에 걸렸다. 어느덧 마차는 왕성을 벗어나 에레카 거리를 향하고 있었다. 건물들과 거리의 형태가 점점 복잡해져 갔고, 행인들이 많아졌다. 아사벨라는 굉장히 복잡해 보이는 거리에 있는 한 상점 앞으로 마차를 세우게 하였고, 형식적으로 따라붙는 기사 한명을 대동하고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 틈에 껴있다가 여기 뒷문으로 슬쩍 빠져나가! 난 저 기사의 주위를 돌릴 테니." 아사벨라의 말에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꽤나 큰 대형 상점안에, 손님으로 들어와 있 는 사람들 틈에 파묻혔다. 언뜻 보니, 아사벨라가 자신을 따라나온 기사에게 뭐라 말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 무사하도록 해! 금방 다시 돌아올게!' 나는 속으로 그녀에게 말하고는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재빠르게 골목길로 몸을 숨 기고 인비저벌리티(투명화) 마법 스펠을 외웠다. 상급 마법인데다가 체력이 현저히 저하 되고 오늘만 해도 몇번 마법을 시행했던 지라, 스펠을 외는 동안 무지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 게다가, 나에게는 어려운 마법이었기 때문에 스펠 외는 시간도 거의 몇십분은 잡아먹었다. 잠시 후, 나의 마법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나는 파리해진 안색으로 -물론, 나의 몸은 투 명해져서 다른 이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젠샤르를 불렀다. "아젠! 나를 안전한 외곽 지역까지 데려다 줘!" 비틀거리는 나를 근심스럽게 바라보는 듯 하더니, 아젠샤르는 나의 명령에 토를 달지 않고 그대로, 나의 몸을 허공에 띄웠다. 나는 하늘을 날면서 리엔시타를 불러, 킬린 일행에게 보냈다. 그에게 마법사들의 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을 끌어들여달라는 메시지와 함께. 그리고, 하늘을 나는 도중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고 아젠샤르는 그런 나를 부드럽게 감싸며 나의 명령을 수행하였다. 그 후로, 나는 어느 외곽지역의 여관에 묵으며 계속 킬린 일행과 연락을 취했고,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정령들의 힘을 이용하여 수도의 동태를 살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그리고, 깊은 숲으로 들어가 마법사들의 탑과 연결되는 공간 이동 마법진을 그렸다. 물론, 나는 이 마법진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이 없었지만, 마법사들의 탑에서 제이크가 그린 마법 진의 이미지 형상을 그대로 전송받아 바닥에 그려넣었다. 이것은 마법적 능력이 아니라, 리엔시타의 도움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마법사들의 탑으로 가 제이크가 그린 마법진의 형태를 그대로 기억하여, 나에게 와 서 물의 힘으로 허공에 그려주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보고 그대로 베끼었지만, 솔직히 불안하기도 했다. 만약, 내가 그린 마법진이 조금이라도 오차가 있으면, 이 마법진으로 오 게 될 마법사들이나 킬린 일행들은, 차원의 틈에서 미아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몇 번이고 리엔시타를 통하여 확인을 하였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들이 오기를 기다 렸다. 곧, 왕성 안은 거센 피바람이 몰아칠 것이다. 마족과 인간의 싸움... 로히얀스와 루 젠다르의 충돌이었고 로히얀스, 아스탄샤 동맹과 루젠다르, 마족의 동맹 싸움이었다. 혹은, 미카엔을 위해 주축을 이룬 전 정권과 반정으로 새로 뒤바뀐 엔카루스 중심의 세력 싸움이었다. 흠, 말하고 보니 뭔가 거창해졌군! [124] 체인지(Change) 제21화 -미카엔 구출 작전?- (5) -5- 아스탄샤의 마법사들의 탑에서 이곳으로 오게 될 그들은, 킬린과 제이크가 주축 인물이 되 어, 움직이는 듯 하였다. 나는 결전의 날! 정령을 통해서 서로간에 정확한 시간 약속을 하 였다. 그것은 오늘 정확히 정오에, 그려진 공간 이동 마법진을 발동시키기로 한 것이었다. 나는 내심 부담이 갔지만, 첫타자로 킬린과 제이크가 마법진으로 이동해 와서, 나의 부족한 마 나로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것을 보강하기로 했다. 나는 이날 생각보다 많은 인원의 마법사들이 이동해 오는 것을 보고 놀랬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기 짝이 없었다. 나와 알고 지내던, 엔젤라와 카이엔과 그 밖의 선배 마법사들... 그리고, 마스터이신 노마법 사 한분도 오셨다. "꺄아~ 라비스! 오랜만이야!" 엔젤라는 이동해 오자마자 나에게 달려들었다. 결국, 나는 그녀와 격한(?) 포옹을 나누었고, -그녀가 갑자기 달려드는 바람에 미처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나는 기겁을 해야 했다.- 카이엔하고는 점잖은 인사를 나누었다. "라비스님! 오랜만이군요." 평이한 인사말이지만, 너무 재미없는 인사말이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의 내모습은 그를 짝 사랑했던 소녀의 모습이자, 예전 주인의 딸이었는데... 뭐, 나야 그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지만. 그는 용병 길드에서 믿을 수 있는 용병들에게도 비밀리에 연락을 취한 모양이었다. 오늘 오 후... 많은 실력자들이 이곳 왕성으로 모일 것이라 했다. 모든 것이 비밀리에 연락이 취해 지고 사람들이 모아지는 지금 모습을 보니, 나는 심장이 무지하게 뛰었다. 한마디로, 스릴 만점이었다. 물론, 이 일이 재밌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재미있어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으... 그러면 안되는데. 마법사들은 갑작스럽게 이곳에 사람들이 보여들어, 사람들이 수상하게 여기지 않게끔, 결계 를 몇겹으로 쳤다. 그리고, 일루전을 걸어 이곳의 숲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꾸몄다. 나는 제이크와 킬린 그리고, 마스터 노마법사와 의논을 했다. 내가 그동안 입수했던 왕성의 사정에 대해, 그리고 마족을 소탕할 전략에 대해. 나는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루젠다르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맡기로 했다. 만약 루젠다르 군 사들이 이곳을 넘어올 경우, 그들은 어차피 국경이라 할 수 있는 세젠느강을 넘어올 것 이니, 그들이 강을 건너올 때 리엔시타에게 그들을 모두 휩쓸게 할 계획이었다. 그러고 보니 , 국사 시간에 배웠던 살수대첩이 생각났다. 고구려의 유명한 장수 을지문덕이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적의 군사들을 유인하여 소탕 했던 작전, 물론 그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나는 그들이 배를 타고 오면은 리엔시타로 하 여금, 그들의 배를 모두 뒤집게 할 생각이었다. 죄없는 군사들을 모두 물귀신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차피 이것은 또다른 형태의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 일행들은, 그동안 내가 준비해둔 옷가지와 물품 등으로 모두 상인의 모습으로 변장을 하였다. 그리고, 수도까지 움직였다. 가끔가다가 검문 비스무리한 것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상인 행세를 하며 위험천만하게 넘겼다. 상인으로서 팔 물품들까지 구비했던 것이었다. 그래봤자, 약간의 비단과 기타 물품들이었지 만, 돈은 정말 많이 들었다. 에구~ 아까워라! 나는 가발을 쓰고 상인의 복장을 한 채, 말을 탔다. 사실, 태연한 척을 하고 있지만 나의 속 은 바싹 바싹 타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카이엔이 내 곁으로 다가와 말을 몰았다. "라비스님께서 이렇게 대단한 일을 주도하시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예전에 보았을때는 평 범한 소녀이셨는데, 정말 많이 변하셨습니다." 예전에 보았을 때라면, 크로시벨가에서 보았을 때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훗~ 그런 가요?' "하지만. 이러한 일은 내색은 안하시지만, 라비스님께서는 무척 버거우시겠지요? 제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힘내십시오!" "카이엔, 지금 저를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내가 그렇게 질문하자, 카이엔은 내가 이러한 질문을 하는 의도를 파악하려는 요량이었는 지, 대답을 하지 않고, 나의 황금빛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별다른 뜻은 없으니 솔직하게 답해주세요. 제가... 음, 그러니 까 카이엔에게 고백이라는 것을 했었을 때, 그때 카이엔은 라비스에게... 아니지! 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나요?" 나는 유모인 루이스에게 대충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을 그에게 질문했다. 사실, 이 남자 때 문에 본래 라비스가 자살을 생각했던 것이기 때문에, 나는 정말 궁금하였다. "라비스님! 아직도 저에게..." "아니요! 전 이젠 카이엔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어요. 다만 궁금해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니 부담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때, 카이엔이 사랑하는 분이 있다고 하 셨던 것 같은데, 그게 사실인가요? 지금 카이엔의 모습을 보면, 연인이 있는 것처럼 안 보여요." "흠, 글쎄요..." 카이엔은 중얼거리듯 말하며 대답을 회피하였다. 나는 그가 딱부러지게 답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어서 조금 의아스러웠다. 그런데 잠시 후 카이엔은 나에게 다시 말을 걸어왔다. "라비스님! 예전에, 라비스님의 아버님 되신 그분을 모시던 경호원의 신분으로서 라비스님 에게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죽지 마십시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자신이 위치했던 곳으로 가, 말을 몰았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 에 잠시 갸웃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생각보다 냉랭한 인간은 아니었던 것 같았기 때문 이었다. 어쨌든, 우리 일행은 수도까지 오게 되었고 시각은 깊은 한밤중이 되어 있었다. 외곽이라 하지만,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거리였던 것이다. "마족의 약점은 무엇이죠?" 왕성 근처로 당도하자, 나는 킬린에게 물었다. "마족에게 강한 힘은 디바인 파워(성직자의 신성 능력)입니다. 저희와 마족들간의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을 안다면, 신전 측도 이 일에 가담할 것입니다. 그들은 마족들을 거의 증 오하다시피 하니깐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조금 요란스럽게 싸워야 하겠지요? 하지만 , 고위 마족을 이기려면... 우리도 간사하고 기습적인 방법을 써야 할 것입니다." "정말 그렇겠지요? 전 그녀, 키리아의 약점을 대충 짐작하고 있어요. 그녀는 잠재적으로 프 레야 왕비님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그녀를 죽이겠어요! 우두머리를 죽인 다면, 아무래도 이 거사는 좀더 수월해지겠죠? 전 프레야 왕비님으로 가장할 것입니다." 나의 결의에 찬 발언에 킬린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라비스님? 어떻게...?" 더듬거리는 킬린의 모습에 나는 싱긋 웃어보였다. "킬린! 저에게 왕비님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일루전을 걸어주세요. 그녀가 속을 수 있도록! 저에겐 왕비님의 권능이 깃드신, 실버 반지가 있어요! 그것의 기운을 이끌어내면 그녀는 왕비님이 살아돌아오신 것으로 착각할 것입니다." "라비스님! 그건 그럴 듯한 방법이긴 하지만, 너무 위험부담이 큽니다. 전 라비스님이 돌아 가시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만약 안좋은 일이 생긴다면, 저는 황태자 전하를 무슨 낯으로 뵌단 말입니까?" "킬린! 그를 위해서에요! 그리고 로히얀스와 그의 백성들을 위해서입니다. 저도 솔직히 겁 이 납니다. 죽는 것은 누구나 두렵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제가 겁을 먹고 몸을 사린다면 영원히 이곳은 마족의 손에 떨어질지 몰라요. 그리고... 전하는 돌아가실지도 모릅니다." 나는 단호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킬린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한참을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으나,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실패를 하고 떼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그에게 상기시켰다. 결국, 그는 나에게 일루전을 걸어주었다. 역시 마스터는 아니지만 8서클을 사용하는 수석 마법사답게 일루전은 감쪽 같았다. 그리고, 마스터 노마법사가 제일 사악한 기운이 서린 장소를 디텍트 능력으로 어렴풋이 감지하고는 나에게 그 장소를 알려주었다. 보통 왕성 안은 마스터의 디텍트 능력으로도 잘 감지가 되지 않았으나, 마족의 경우... 그들 은 어두운 기운이 의외로 강하기 때문에 어렴풋이 디텍트 능력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를 공간이동 시켜주세요! 마스터 마법사님. 그리고, 제가 만약 죽게 된다면 제 대신 킬린 님이 제 정령들을 부려주십시오!" 나는 아멘시타가 신성력을 걸어준 은도금한 단검을 몸에 지니고는 마스터 노마법사와 킬린 에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마스터 노마법사는 나에게 다가와 뭔가를 건네주었다. "이것은 짧은 거리를 가볍게 공간 이동할 수 있는 마법이 걸린 아티펙트일세! 도움이 되리 라 생각되어 마법사들의 탑에서 가져왔으니, 자네가 쓰도록 하게!" 백금으로 만들어진 팔찌였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며 그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 그리고, 나는 마스터의 힘으로 왕성 안, 어떠한 방으로 공간 이동이 되었다. 약간 이동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긴 했다. 왕성 안의 방어 결계 때문에... 하지만 마스터의 능력이란 미카엔만큼은 안되더라도, 그 비슷한 능력은 흉내낼 수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 었다. 나는 뒤바뀐 주변 배경에 당황하지 않고, 화려한 침대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키리아였다. 나는 반지의 기운을 이끌어내었다. 사실, 그 반지안에 어마어마한 양의 빙계 기운이 서려있 어 내심 놀랐다. 키리아는 내 존재를 알아챘는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냐?" 나는 위엄있게 목소리를 깔았다. 그리고, 예전 왕비의 어투를 그대로 흉내내어 입을 열었다. "키리아!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 더러운 발을 들여놓았느냐?" 그러자, 키리아는 몹시 동요한 얼굴을 하더니, 눈을 크게 떴다. "실버 아나테스!" [125] 체인지(Change) 제21화 -미카엔 구출 작전?- (6) -6- '실버 아나테스'라면 왕비의 실버 드래곤으로서 이름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가 걸려들었음 을 기뻐하며, 그녀에게 위엄있고도 냉혹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럴 리가 없어! 아나테스, 네가 살아있을 리가 없어!" "감히, 내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냐? 내 아들은 어찌되었지?" 나는 분노를 담아 그녀에게 외쳤다. "아냐! 네가 다시 살아돌아왔을 리가 없어! 넌 거짓이야!" 키리아는 발악하듯 외치더니, 그녀의 주변에서 검은 기운 폭발하듯 커져 나에게로 쏘아져 왔다. 나는 얼른 팔찌의 힘으로 그녀의 바로 뒤로 공간 이동을 하였고, 단검을 꺼내들어 그녀의 심장을 겨냥하였다. 콰과광~!! 벽이 허물어지는 소리를 들어며 나는 단검을 힘껏 내리쳤다. 나의 단검이 그녀의 등을 뚫어 심장을 지나길 기원하며! 하지만, 약삭빠르게도 키리아는 몸을 틀었고 나의 단검은 그녀의 어깨를 스치게 되었다. '젠장!' "뭐, 뭐야? 너 이제 보니, 아나테스가 아니지?" 나는 일이 틀어졌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의 어깨에 상처라도 입혔으니, 여기서 포기하지 말아야 할까? "키리아!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나는 너를 단죄하러 온 아나테스이다!" 그러자, 키리아는 나를 부정하면서도 은연 중에 두려움이 드는지 약간 불안정한 모습을 해 보였다. "아니얏! 죽여버리겠어!" 키리아는 다시 흥분을 하며, 나에게 공격을 날렸다. 하지만, 나는 다시 재빠르게 공간이동을 하고는 실버 반지의 힘을 이끌어 내어, 일루전을 시전하는 스펠을 나직히 외웠다. 그리고, 내가 스펠을 외고 있다는 것을 눈치 못채게끔, 계속 아티펙트의 힘을 받아 그녀의 앞에 서 어지럽게 짧은 공간 이동을 하였다. 키리아는 무대포적인 행동으로 파괴적인 어둠의 힘을 쏘아냈고, 그로 인해서 방의 벽들이 거의 허물어졌다. 나는 간신히 스펠을 다 외우고는 일루전을 시전하였다. 그러자, 나의 옆에 또 한명의 프레 야 왕비의 허상이 나타났다. 이것은 상급 일루전이었다. 비록 반지의 힘을 받은 것이었지만, 내심 나는 내 자신이 대견하였다. 아무튼, 그렇게 허상이 나타나자 키리아는 내가 분신술이라도 행하는 줄 알았는지, 거의 발 광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우~ 저렇게 추한 모습을 보이다니!' 키리아는 정신적 혼란으로 이성을 상실했는지, 뚫린 벽 사이로 밖으로 몸을 날렸다. '앗! 도망가네?' 나는 플라이 마법을 써서 그녀를 뒤를 따라갔다. 이미, 나의 일행들이 공격을 시작한 모양 이었다. 몇몇 관리들의 모습을 하고 있는, 하급 마족들과 마법사들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 었고, 마법 기사단과 그외 어디서 나타났는지 용병들과 킬린을 따라온 선원들이 맞붙고 있었다. 왕성은 혼란과 혼돈으로 순식간에 휩싸이게 되었다. 왕실 소속의 기사들과 마법사들 그리 고, 군사들은 침입자들을 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킬린은 자신의 수족이었던 마법사들에게 어리석음을 일깨우려는 말을 외쳐댔다. 그러나, 왕 실 마법사와 기사들은 이미 실권을 쥔 아모르 자작의 명을 듣고 있는지라, 이미 우리들을 침입자로 간주하고 있었다. 왕성 안은 아까보다 사람들이 더욱 불어나 있었다. 밖으로 도망나온 키리아는 마물들을 소 환하기 위해 마계의 문을 열려 했다. "키리아!!" 나는 그녀를 막기 위해 아이스 미사일을 날렸다. 하지만, 그녀는 실드를 쳐서 나의 공격을 가볍게 받아내었고, 나를 향해 헤죽 웃어보였다. 아까와는 달리 여유있는 태도였다. 아마도, 내가 왕비가 아님을 간파한 모양이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또 한번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아젠샤르를 부 른 다음, 그에게 나의 목소리를 사방으로 퍼뜨리게 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네 이놈들! 어째서 저 사악한 마족을 위해 선량한 로히얀스인들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이 냐? 어서 저 마족 여자를 처단하여라!!" 내가 그렇게 외치자, 아젠샤르는 바람의 힘을 이용하여 나의 음성을 최대한 멀리, 그리고 뚜렷하게 퍼뜨렸다. 그러자, 정신없이 베고 치고 마법을 날리던 이들은 나의 모습을 보았고, 경악을 하였다. 왕 비가 살아돌아온 것임으로 순간적으로 인식해 버린 것이었다. 이렇게 혼란 중에는 그들의 이성적인 사고 능력이 무뎌져서 내가 왕비가 아님을, 그다지 의심하지 못했다. "왕비님이시다! 왕비님이 돌아오셨다!" 왕실 마법사와 기사들은 모두 동요하며 저마다 외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돌아왔다. 나는 로히얀스의 왕비이다! 나의 명령을 받들어 저 마족을 처단하라! 아모르 자작가의 반정은 실패했다! 아모르 자작은 더 이상 이 나라의 왕이 아니니, 저 마 족을 처단하여 진정한 로히얀스의 왕을 구하라!" 나는 위엄과 카리스마를 담은 목소리로 그들에게 외쳤다. 그러자,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왕이 아모르 자작이 아님을 깨달았는지, 키리아에게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가 키리아에게로 달려들자, 당황한 키리아는 낮은 욕설을 내뱉으며, 마물을 소 환하던 것을 멈추고 마계의 문을 더욱 크게 확대하였다. 그러자, 그 마계의 문은 마치 괴 물의 입이 된 것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아아악~!" 지금까지 살육을 행하고 있던 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마계의 통로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까아악~!!" 언제 이곳으로 나왔는지 아사벨라가 비명을 지르며 마계의 문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아사벨라!" 나는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결국, 나는 리엔시타만 남겨두고, 모두 정령들을 불러내었다. 그리고, 마계의 문으로 빨려들어가지 않도록 지탱하고 있던 힘을 풀고는 정령들과 함께 마계의 문을 향해 뛰어들었다. "앗! 왕비 전하!" "라비스니임~!!" 두가지 호칭이 잇달아 터져나왔고, 나를 따라서 킬린 일행과 엔젤라 카이엔이 나를 따라 마 계의 문으로 뛰어들었고, 역시나 자신의 동생을 구하려 함인지 엔카루스가 나와 동시에 마계의 문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엔카루스를 따르던 마법기사단이 뛰어들었고, 왕비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따르던 왕 실 마법사와 기사들이, 빨려들어가지 않도록 지탱하던 힘을 풀었다. 그렇게 아사벨라를 뒤를 이어 내가 마계의 문으로 뛰어들자, 자발적으로 뛰어드는 인간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왠지 웃기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렇게 해서 왕성 안에서 싸움을 하던 이들은 모두 마계로 빨려들어가게 되었고, 마 계의 문은 그 후, 한참만에 닫혔다. * 이번 화의 마지막 편이자, 어쩌면 2권 분량의 마지막 장면일지도 모르겠군요. 에구구... 허리야! 이젠 수정 작업을 해야 할텐데... 음, 그러고 보니, 라비스도 이젠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이는 군요. 처음 이세계로 왔었을 때는 미카엔에게도 말대꾸를 안하던 쥔공이었는데... 갈수록 시건방져(?)지더니, 이제는 왕비 행세까지... 어쩌면 마계로 가서 미카엔과 극적인 상봉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번편에서는 라비스가 그동안 인연을 갖었던 모든 이들이 몽땅 출연을 하는 군요! 아! 루이스와 남작 그리고 에드가 빠졌나요? 세어보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저도 모르겠다는... 아하하하...;;; 엑스트라들의 수가 넘 많 아서... [126] 체인지(Change) 제22화 -즉위식 그리고, 단죄- (1) (즉위식 그리고, 단죄) -1- 우중충하고 칙칙한 하늘, 기분 나쁜 기색이 끈적하게 묻어나는 공기, 이곳은 말로만 듣던 마계라는 곳이었다. 나는 일행들과 함께 다소 황폐해 보이는 들판으로 떨어졌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나는 힘 들게 일어나는데, 내 뒤로 줄줄이 잇달아 마계로 들어오는 이들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솔직히, 내가 마계의 문으로 들어올 때는 앞 뒤 생각할 겨를 없이 무작정 뛰어들었던 것인 데, 물론 미카엔이 마계에 있었기에 나는 더 더욱 들어왔지만, 이렇게 나를 따라서 많은 이들이 이곳으로 들어오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우아악~!" "에구구~!" "엄마아아~!" "우에에엑~!" 무척이나 다양한 비명소리가 잇달아 들려오는 것을 듣고는, 나는 황급히 자리를 비켜섰다. 그러자, 내가 있던 곳으로 사람들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저런! 밑에 있는 사람들... 정말 아프겠다." 나는 혀를 쯔즛 차며, 밑에 깔린 이들을 동정했다. "너! 설마 날 따라온 거야?" 그때, 아사벨라가 나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나는 마계로 오면서 일루전을 해지했기 때문 에, 지금은 라비스의 모습이었다. 아무튼, 아사벨라는 놀라움 가득한 얼굴로 그렇게 나에게 물어왔다. 그녀는 화려한 드레스 가 흙이 묻어 더러워져 있음에도 털 생각을 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음... 글쎄." 나는 애매하게 답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휴~ 그나저나, 미카엔은 어디서 찾지?' 마계까지 오긴 왔지만, 막상 광활한 이곳에서 미카엔을 찾자니, 무척 암담해졌다. 에휴~ 드 넓은 모래사장에서 조그만한 바늘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우면 어쩌지? 우리는 얼마쯤 길을 걸었다. 이곳에는... 온갖 마물들이 가득했다. 이름도 모를 다양한 마물들이 도처에서 마구 튀어나왔고, 우리는 그때마다 잡다한 마물들을 퇴치하느라 힘을 빼기 시작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뛰어난 마법사들과 검사들이 많이 있었기에 아직까지는 그다지 위험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한두 마리씩 튀어나왔던 것이다. 우리 일행... 거의 50여명이 되는 일행들 은, -아마도 50여명 정도 빨려들어온 후, 게이트는 닫힌 듯 하였다.- 마스터 노마법사의 디텍트 능력으로, 빙계 마나를 지닌 존재를 찾아 길을 걸었다. "마스터님! 정말 이 근처에 전하가 계시는 것 맞아요?" "그러네. 전하는 그리 멀지 않는 곳에 계신 것 같은데, 어째 전하가 계신 곳으로 가까이 갈 수록 상급 마물들이 많아지고 그 수도 많아진 것 같아 걱정이구먼. 앗! 조심하게!" 마스터 마법사의 외침에 나는 앞을 바라보니... 허걱! '저기 꾸역 꾸역 몰려오는 것이 설마 마물들은 아니겠지?' "꺄악~!! 정말 싫어! 돌아가고 싶어! 이곳을 나가게 해줘!" 아사벨라의 발악 소리가 무진장 크게 들려왔다. 귀가 다 얼얼할 정도였다. 그녀는 누런 침 을 질질 흘리며 길다랗고 날카로운 손톱과 발톱을 가진 마물들을 보며 질린 얼굴을 했다. 하긴, 나 역시 저 많은 마물들의 모습에, 숨이 탁 막히는 느낌이었다. "쿠에엑~!" 기이한 외침 비슷한 소리를 내며 마물들은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샤르! 모두 통구이를 만들어 버려!" 그러자, 샤르는 거대한 불꽃의 모습으로 나의 앞에 나타나더니, 무척 질색인 표정을 지어보 였다. "우엑! 저렇게 더럽게 생긴 것들과 싸우라고? 정말 모두 못생겼군!" 샤르는 그렇게 투덜대더니, 경쾌한 몸짓으로 마물들에게 몸을 날렸다. 아젠샤르는 바람 속 성의 실드로 나를 보호하며, 그 역시 마물들을 상대했다. 하지만, 앗! 아멘시타! 그가 없 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엔 그가 몸담을 만한 것이 없었다. 마계는 순수한 동물들이나 식물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도 식물들이 있긴 하지만, 모두 기형적인 형태의 식인 식물이거나 어두운 기운을 가진 식물이었다. 일행 중 마법사들은 모두 공격 마법을 마물들에게 퍼부었다. 하지만, 마물들은 인간의 냄새 를 맡고는, 끝없이 몰려왔고 우리들은 조금씩 지쳐갔다. 마물들의 살점이 사방으로 튀겼다. 역한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 일행 중에서도 피해가 점점 속출하기 시작했다 . 마물의 길고도 날카로운 형태의 발톱에 허리가 그대로 댕강 잘라진 이도 있었다. 아사벨라는 비명을 지르느라 바빴다. 그녀는 기절하기도 어려웠는지, 파리해진 얼굴이 내가 보아도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녀의 옥타브 높은 비명소리는 지금 우리의 상황이 무척 안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저 구석에서는 마물들 틈에 끼어 카이엔을 비롯한 기사들이 검으로 춤을 추듯 몸을 움직이 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젠장!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기이하게도 정령들의 힘은 평소보다 약해져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자연의 기운을 받을 수 없는 마계에서는 힘을 크게 쓸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우리가 있던 곳은 점점 시체가 쌓여갔다. 어둡고도 죽음의 기색이 감도는 땅을 핏물이 한껏 적시기 시작했다. 아니! 적시다 못해, 이제는 흘러내렸다. 붉은 빛의 핏물은 땅에 닿으면서 그 색이 죽어 검게 변하였다. 그리고, 마물들의 색을 알 수 없는 핏물이 같이 흘렀다. 나는 모든 공격 마법을 쉬지 않고 써댔다. 이젠 마법사들 중에서도 피해가 나기 시작했다. 이 곳은 정말 어지러웠다. 살육의 장면들이 내 눈앞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울고 싶었고 역한 느낌에 당장이라도 구토를 하고 싶었다. 나의 귀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치 바네사 메이의 '악마의 트릴'이 템포 빠른 바이올린의 음향으로 연주되고 있는 것 같았다. 본래의 경쾌한 느낌이 아니라, 약간 전율 버전으로서! 마물들을 베어내는, 검을 쓰는 용병이나 기사들이 세차게 검을 휘두를 때마다 , 그 장면들은 모두 하나의 음률이 되어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았다. 어떻게 말하면, 황 당한 비유가 되겠지만. 나는 뭔가 찌릿 찌릿한 전율에 휩싸여 나도 모르게, 마물들을 도륙하는 공격 마법을 무자비 하게 쓰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모든 마나를 소모하고 지친 몸으로 아직도 우리를 향해 이빨을 벌리고 발톱을 휘둘러대는 마물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엔젤라가 덩치가 적어도 5미터는 되어 보이는 상급 마물에게 몸이 찢기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엔젤라!" 나는 소리를 지르며, 그녀에게 뛰어가려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의 팔목을 거세게 잡았 다. 그는 엔카루스였다. 나는 그를 매섭게 노려보며 외쳤다. "놔! 이게 다 네 탓이야!" 그러자, 나를 잡고 있던 엔카루스의 손이 스르르 힘을 뺐고, 나는 엔젤라에게로 달려가 그 녀를 죽이고 나서, 또 다시 다른 이에게 공격을 하고 있는 마물에게로 달려들었다. 방금 전 누군가가 떨어뜨린 롱소드를 힘겹게 들고는 그 마물에게 내려쳤다. 그러자, 그 마물은 아주~ 간단한 몸짓으로 나에게 한번 팔을 휘둘렀고, 내가 들고 있던 롱 소드는 저만치로 정말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 그 마물이 나에게 입을 벌렸다. 그러자, 그 입 안에서 징그럽고 거대한 혀가 꿈틀거리는 것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다른 마물을 상대하고 있던 정령들은, 나를 구하려고 이쪽으로 날아오려 하였다. 하지만, 그 들이 나에게로 도착할 무렵! 나는 저 마물의 입 안에 들어가 생을 마감할 것만 같았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때! "쿠에엑~!!" 마물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떠 보았다. 괴물의 머리 부분에 화려한 형태의 장검 이 박혀 있었다. 그 검은 검신의 시작 부분까지 완벽하게 박혀 있었다. "미카엔!" 쓰러지는 마물의 뒤로 녹색빛을 띤 진득한 피를 뒤집어 쓴 미카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를 보며 매우 반가운 얼굴을 해보였으나, 그의 표정은 매우 화가 난 표정이었다. "누가 이곳에 사람들을 떼거지로 몰아온 것이냐?" 그는 나에게 명령조로 살벌하게 물어왔고, 나는 찔끔해 보이며 얼른 입을 못열었다. "정말 황당하군! 설마, 나를 구하기 위해 이곳으로 이렇게 마물들의 먹이감을 몰아가지고 왔다는 것은 아니겠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무분별한 형태로 드래곤 피어를 내뿜었다. 그러자, 마물들을 비롯한 우리의 일행들은 모두 똑같이 쓰러졌다. 나 역시 미카엔 앞에서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로 인하여 몸을 지탱하고 있던 힘을 잃었다. 미카엔은 쓰러지는 나의 오른쪽 팔을 한손으로 붙잡았고, 나는 무릎을 꿇고 축 늘어진 형태 로 그에게 팔을 잡힌 모습을 하게 되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나를 무심한 눈길로 잠시 내려다 보더니, 그는 뭔가 마법 시동어를 외쳤으나, 나는 극 심한 공포로 인하여 그가 말하는 단어를 알아 듣지 못했다. 잠시 후, 그의 몸에서 은빛의 빛줄기들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마물들 의 몸을 통과했고 마물들은 그대로 하얗게 얼어붙었다. "미... 카엔?" 나는 간신히 그의 이름을 내뱉었다. 그러자, 그의 은보라빛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오늘은 두 개 만월이 뜨겠군! 마력이 최고조가 되는 날이다. 라비스. 이곳은 태양이 뜨지 않는 대신 달이 두 개가 뜬다고 하더군! 이렇게 마력이 초고조가 되는 날... 나는, 게이트가 봉쇄되어졌다 하더라도, 충분히 인간계로 향한 차원 게이트를 열 수 있다. 멍청한 그 마족은 게이트만 봉쇄하면 내가 못 빠져나올 것이라 생각했던 거지." 미카엔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눈빛이 슬퍼보였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라비스. 내가 이곳에 왔었을 때, 그 분은 이미 차가운 시체가 되어 있으셨지. 이미 어두운 기운이 오랫동안 시체에 침투하였기 때문에, 그 분은 좀비가 될 지도 몰랐기에 나는 그대로 화장(火葬)을 했어." 아마도, 미카엔을 상대하기 위해서 마물들은 이곳으로 잔뜩 몰려왔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 마물들의 일부분에게 재수없게 걸려 당했던 것이고... 역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주 제에 어리석은 행동을 했던 것이다. 저들을 마계까지 이끌어 온 것은 나였다. 물론, 그것이 나의 의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 들은 나를 아 마계로 들어온 것이니. 스스로 내가 옳다는 자만심에 사로잡혔던 나를 탓했다. 미카엔을 감히 내가 구하겠다고 생 각했었으니... 내가 설치지 않아도 미카엔은 너무도 뛰어났기에, 모든 것을 잘해결 할 수 있었는데.. 너무도 무모했던 나를 탓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127] 체인지(Change) 제22화 -즉위식 그리고, 단죄- (2) -2- 우리는 마계의 어느 동굴에 와 있었다. 나는 샤르를 시켜 몇 개의 모닥불을 피우도록 하였 다. 아까 미카엔에 의해서 드래곤 피어로 정신이 나갔던 일행들은 간신히 정신을 차려, 미카엔을 따라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그들은, 미카엔이 조금 전에 공포를 자아내는 어떠한 마법을 썼을 거라, 지레 짐작을 하였 다. 미카엔이 설마 드래곤 피어를 썼을 거라 생각을 못하는 것이었다. 미카엔이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미카엔을 아주 어렸을 적부터 지켜봐 왔던 킬린 같은 경우는, 미카엔이 드래 곤이라는 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만약 드래곤이라면, 미카엔의 나이인 스물 넷의 나이는 갓 태어난 헤츨링(드래곤의 새 끼)의 나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헤츨링은 미카엔과 같은 궁극의 마법은 절대로 쓰지 못한다. 적어도 성룡이 되어야 하는데, 성룡이 되려면 적어도 600년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멍해진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정령들의 걱정스런 눈길이 느껴졌다. 그때, 미카엔이 내쪽으로 다가왔다. 미카엔이 이곳으로 다가오자,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얼른 자리를 비켜 섰다. 이제 그들은, 미카엔에게 잠재적인 두려움을 갖기 시작한 것이었다. 미카엔이 길다랗게 흘러내린 나의 앞머리를 쓸어올려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부드러운 손길에 움찔하였다. "아깐 너에게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 그냥 나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져서..." "제가 잘못한 걸요... 이들을 마계로 끌어들인 것은 저예요. 그리고... 전하께서는 아버지이신 국왕 폐하를 마족에게 잃으셨으니, 감정의 절제를 잃으신 것은 당연해요. 저들 앞에 드래곤 피어를 보이셨다는 것은 전하는 자제력을 잃으셨다는 거니깐요." "으음... 그랬었군, 아, 이제 슬슬 일어나야 하겠어! 이곳 마계의 두 번째 달이 떠오르는 시 간이다. 자세한 얘기는 로히얀스로 돌아가서 하자." 내가 미카엔이란 호칭 대신, 전하라는 호칭을 쓴 것을 미카엔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그냥 알면서도 넘어간 것인지, 그는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을 한동안 고요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우리는 미카엔의 힘으로 연 차원 게이트를 통하여, 다시 로히얀스의 왕성으로 돌아오게 되 었다. 나를 위하여 이곳까지 오게 되어 많은 피해를 입은 마법사들의 탑 마법사들에게, 나는 정말 면목이 없었다. 그들은 엔젤라와 또 다른 한명의 마법사를 잃었고, 몇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나는 마스터 마법사에게 미카엔의 말을 전하며 사죄의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마스터님! 정말 죄송하게 되었군요. 엔젤라와 다른 한분의 죽음은..." "그것은 자네가 자책할 일이 아니네! 라비스양. 우리 마법사들의 탑 일원들은 사악한 마물 이나 몬스터들을 퇴치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지! 그들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는 않았어. 물론 나 역시 그들의 죽음이 가슴이 아프나, 이것 또한 그들의 운명이지 않겠나? 그들의 시체 는 화장을 하여 이렇게 그들의 뼛가루를 다시 아스탄샤로 가져가 그들의 고향에 뿌려질 수 있을 테니, 그들은 자신의 죽음이 헛되다 생각하지 않을 걸세.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 며 영광이 된다네." "흐흑! 하지만, 전 엔젤라나 그 분께 정말 죄송합니다. 훌쩍! 그리고... 마스터님, 황태자 전 하께서 마법사님들께 많은 보상을 해주신다고 하니, 부상을 입으신 마법사님들이 모두 완 쾌되실 때까지 왕성에서 쉬었다가 가세요." 사실, 그들을 끌어들인 것은 나였기 때문에, 나는 죄책감으로도 괴로웠지만 무엇보다 한동 안 친하게 지냈던 동료들이었기에, 정말 슬픔이 컸다. 그렇게 마법사들의 탑 마법사들은 얼마간 왕성에서 손님으로서 묵게 되었고, 나는 다시 백 합 별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루이스가 맨발로 뛰어나와 나를 맞으며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그녀만큼 반가워하며 인사를 나눌 수가 없었다. 그동안 과도하게 마법을 쓴 후유증과 나에 대한 자책감 그리고 슬픔 등이 복합되어 며칠간 무진장 앓았기 때문이었다. "으흑! 라비스님.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길래 이렇게 야위었어요? 무심하신 라비스님,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가도록 라비스님을 걱정하는 저를 생각해 주셨어야지요? 그동안 왜 연락 한번 하시지 않으셨어요?" 내가 침대에 누워있는 내내, 루이스는 대성통곡을 하며 코를 팽~! 풀어대었기에, 나는 계속 잠을 설쳐야 했다. 그리고, 미카엔은 그동안 왕성의 일을 바쁘게 수습해 나갔다. 키리아는 어디론가 도망가 자 취를 감추었고, 엔카루스와 아모르 자작, 자작의 부인은 왕성 감옥에 하옥되어 왕실 재판을 받았다. 아사벨라는 그녀 역시, 자작가의 일원으로서 같이 죄를 받아야 했으나 그녀에게는 밝혀진 죄가 없었고, 이제 왕이 될 미카엔의 부인(측실)인 것을 감안하여, 그저 무기한 근신형이 가해졌다. 하지만, 그녀도 왕실 재판에는 출석을 하야만 했다. 아사벨라로서는 정말 불행한 일이었다. 나는 아사벨라가 나를 도와주었던 일을 증언해주기 위해 재판장에 출석을 하였다. 미카엔은 최종 판결을 내리는 왕실 재판관의 위치에 앉아 있었는데, 그가 앉은 자리가 까마 득하게 높아보여, 나는 새삼 그의 권위와 위엄을 깨달아야만 했다. 아사벨라는 자신의 가족이 사형만은 면하게 하기 위해, 미카엔에게 간청하였으나 그때마다 재판을 진행하는 진행자에 의해서 엄하게 꾸짖음을 들었다. 나는 그녀가 정말 안타깝게 느껴졌다. 오늘이 세 번째 열리는 재판이었는데, 오늘은 미카엔의 결정이 내려지는 날이어서 정말 불 안하였다. 두 번째 열리는 재판에서는 미카엔보다 아래에 위치한 자리에 앉아있던 세 명의 재판관이 반정을 일으킨 자작 가족에게 사형을 언도했지만, 오늘은 로히얀스의 최고 권력자 미카엔의 최종 판결에 의해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제발 미카엔이 너무 냉정하지 않기를 바랬다. 하지만, 죄는 분명하였고 그것은 가장 무거운 죄인 반역죄인지라 극형은 어차피 당연한 일일지 몰랐다. 잠시 후, 미카엔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그의 얼굴이 무척 피곤해 보였다. "나는... 간악한 마족과 결탁하고 적국인 루젠다르 왕실과 내통하여 반정을 일으킨 죄와, 로 히얀스의 국왕 폐하를 배신하고 그 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죄, 로히얀스의 최고 관리들을 마족의 희생양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죄, 로히얀스의 백성들을 기만하고 황태자인 나를 기만한 죄, 그리고 신성한 왕실을 모독한 죄를 물어, 로히얀스의 아모르 자작가 가족에 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들의 작위를 영구히 박탈하겠다." 미카엔의 위엄있는 목소리가 재판장에 울려퍼지자, 아사벨라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의 얼굴 이 하얗게 질렸고, 재판장 안에 참석한 이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재판을 받던 자작 부인은 그대로 그 자리에 기절을 하였고, 아사벨라는 몸을 미세하게 떨었 다. 그녀의 얼굴 표정이 점차 표독스럽게 바뀌어 갔다. 하얗게 질린 그 얼굴은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으나,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무자비하게 깨물었는지, 붉은 피가 살짝 엿보였다. 왕실 기사는 아사벨라를 호위해 가는 것인지 끌고 가는 것인지 모를 태도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나는 정말 이번 일이 안타깝게 생각되었지만, 미카엔은 나라의 군주로서 당연한 판 결을 내린 것이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자작가의 가족은 앞으로 일주일 후에 사형을 집행된다고 하였다. 교수형으로서. 나는 그날 엔카루스에게 면회를 갔다. 무거운 죄를 지은 이들이 하옥되는 왕실 지하 감옥... 아무리 면회로 오는 곳이지만, 무진장 꺼려지는 장소였다. 나는 간수에게 5분간의 면회 시간을 부여받고, 엔카루스가 홀로 갇혀 있는 감옥 앞으로 다 가갔다. 내가 가까이 가자, 엔카루스는 고개를 들어보였다. "라비스? 후후훗... 네가 나를 보기 위해, 이런 곳까지 몸소 나타나실 줄은 몰랐군. 아무튼 영광이라고 말해야 하나? 마지막이라도 네 아리따운 모습을 볼 수 있으니..." "넌 왜 그래야만 했지? 넌 그렇게 미카엔의 자리가 탐이 났던 거냐? 네 부모님을 이용해 가 면서... 너로 인해서 상처받을 이들은 생각 못한 거야? 네 동생은...? 그녀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 안해 봤어? 네가 저지른 일이 이런 결과가 될 줄은 생각 못했던 거야?" "지금 내 가족까지 걱정해주는 거냐? 그래! 네 말이 맞아! 난 미카엔 그 자식의 자리가 탐 이 났어! 그 지위와 권위 그리고 아름다운 부인까지! 난 내 가족 따윈, 어떻게 되어도 상 관없어! 하하... 내말을 듣고 넌 지금, 내가 죽일 놈이라고 욕을 하고 있을 테지? 후훗... 맞아 ! 난 원래 그런 놈이니깐."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철창으로 막아진 나와의 경계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 왔다. 그리고, 두손을 철창에 꽉 붙잡으며 어둠으로 가리워진 그의 얼굴을 가까이 드러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이글 이글 타오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난 다시 온다. 라비스. 다시 그가 가진 것들을 빼앗으러!" "뭐, 뭘! 설마, 귀신이 되어 맨날 이곳에 나타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그의 모습에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다시 돌아온다니! 사형을 앞둔 사형수가 그런 말을 하면, 왠지 공포 영화가 생각난단 말이야! 내가 그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하자,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폭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라비스. 그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이겠군. 한번 고려를 해보지! 하하하..." [128] 체인지(Change) 제22화 -즉위식 그리고, 단죄- (3) -3- 그 후로, 또다시 며칠이 지나갔다.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는 그날! 나는 왕성 안이 떠들썩해 짐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나를 위한 보약(?)을 가지고 들어오는 루이스에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 창밖을 보니, 군사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하던데." "엔카루스가 탈옥을 했대요!" "뭐엇? 그게 정말이야? 자작과 그 부인은?" 그러자, 루이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엔카루스만 감쪽 같이 사라졌다는 군요!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에요! 철통같은 왕실의 지하 감옥에서 감쪽 같이 사라질 수 있다니!" 정말 귀신 곡할 노릇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가 탈옥을 한 것일까? 그것도 감쪽 같이! 혹 시, 아사벨라가 도움을 주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힘든 일이었다. 아사벨라 역시 감 시를 당하고 있었고, 만약 그녀가 도움을 주었다면, 그녀의 부모님들도 도망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키리아가 나타나서 그를 빼갔던 것일까? 그것도 힘들었다. 왕실의 지하감옥은 많 은 결계와 탐지 마법이 걸려 있는데, 키리아가 마법을 써서 들어온다면, 금방 왕실 마법 사들이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흐음... 그러면, 엔카루스는 땅으로 꺼졌단 말인가? 아니면 하늘로 솟아... 아니지! 지하감옥 이니 하늘로 솟는 것은 좀... 나는 여러 각도에서 추리를 해보았지만, 도저히 그가 탈출할 수 있었던 방법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사형이 있는 그날에 탈옥을 했다니... '아! 그러고 보니, 미카엔도 인페르디아 왕성 지하감옥에 있는 나를 구할 때 간단히 구했었 지? 물론, 그는 드래곤의 능력을 가졌으니, 그에게는 손쉬웠다고 치자! 그러면 고위 마족인 키리아에게도 손쉬운 일일까? 아니야!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야! 난 그때 미카엔이 지 하감옥으로 들어오는 경로를 보지 못했고, 다시 돌아갈 때는 정신을 잃고 있었으니... 어쩌 면 그도 우여곡적 끝에 나를 구했었을 지도 모르지!' 나는 지하감옥의 간수 중에 엔카루스와 기밀하게 내통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 다. 그러면 마법을 굳이 쓰지 않고도 어찌 어찌해서 탈옥을 할 수도... 그렇다면 그는 왜 자신의 부모를 구하지 않았을까? 그의 부모까지 구하려면 더욱 들킬 염려가 커지기 때문 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가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니 어쩐다니의 말을 했던 것일까?' 그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려, 나는 불안해졌다. 그가 이번 일과 같은 뭔가 황당하고도 간 큰 짓을 또 벌이게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작과 그의 부인은 조금전에 예정대로 처형이 되었다는 군요." 나도 오늘 정오에 그들의 교수형이 되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들이 처형되는 장면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기에, 그냥 방안에서 틀어박혀 있었을 뿐이었다. 누군가의 고통스런 죽음을 보는 것은 정말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데, 어떤 시녀가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방문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이스님! 라비스님! 전하께서 이곳으로 오고 계십니다!" 그러자, 루이스는 그녀의 회갈색 눈동자가 갑자기 빛을 발하며 생기가 도는 얼굴로 나에게 입을 열었다. "오오! 라비스님~ 전하께서 라비스님을 찾으신답니다. 전하께서는 정말 라비스님을 사랑하 시는 것 같아요! 이번 기회에 그 분에게 사랑을 더욱 얻어서 왕비 자리까지 한번 노려보 세요! 혹시 알아요? 전하께서는 신분을 초월하는 사랑을 선택하실지! 호호호~" 그녀의 너무 앞서가는 발언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루이스! 너무 김치국부터 마시지 마!" "네? 김치국이라니요? 김치국이 뭐지요? 전 그걸 마신 적이 없는... 아! 이럴 게 아니라 어 서 전하를 맞으러 나가요! 라비스님." 루이스는 미카엔이 온다는 말에 나보다 더 좋아한다. 사실, 미카엔은 그동안 여러 가지 일 로 마계에서 돌아온 후, 나를 한번도 찾지 않았었다. "루이스 혼자 가! 난 그동안 이곳에서 책이나 볼 거야." "라비스니임!!!" 갑자기 커다래진 루이스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들어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까 와는 사뭇 다른 무시무시한 루이스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녀는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이 어린 눈빛으로 나에게 무언의 협박을 보내왔는데... 새삼, 그녀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이 나 서 나는 흠칫하였다. 그녀는 콧김을 내뿜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였는데... 나는 그런 그녀를 보고는 한 마 리의 거대한 코뿔소를 연상하였다. "에휴~ 알았어! 나가면 되잖아." 나는 속으로 투덜대며, 미카엔을 그동안 애타게 기다리던 부인 중의 한명으로서 극진히(?) 맞아야만 했다. 쳇~! 그렇게 미카엔과 내가 침실 안으로 들어서자, 루이스는 호호~ 거리며 방을 나갔고, 나는 어 색한 태도로 미카엔에게 차를 대접했다. 내가 어색했던 이유는 미카엔이 그답지 않게 어 색한 기색으로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에게 할 말이 있어서 지나가는 김에, 잠깐 들렀어!" "말씀하세요." 그러자, 미카엔은 한동안 뜸을 들였다. 그러다가, 나에게 선언하듯이 입을 열었는데, 나는 내심 불안하였다. 그가 하려는 말이 대충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곧 있으면 나의 즉위식이 있을 거다. 그와 함께, 나는 너를 왕비로 맞을 것을 선포할 생각 이야. 나의 정식 아내가 되어 줘!" '흐음... 루이스가 괜히 김치국을 마신 것이 아니었구나!' 왕비라... 여느 여자 같았으면 무진장 좋아했을 일이었다. 이것은 가문의 경사이자 영광이요. 크로시벨가 사람들은 나의 후광에 힘입어 왕실로 진출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나는 미 카엔을 생각하는 마음을... 한 여자가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하로서 그 를 생각하고 싶었다. 일명 충심이라 해야 하나? 아하하... 내가 얼굴을 굳히자, 미카엔은 슬슬 불안해졌는지 그 역시 얼굴이 굳어졌다. "전하! 전 왕비가 될 자격..." "됐어!" 내가 말하려는 내용을 미카엔은 눈치를 채었는지 재빠르게 나의 말을 끊었다. 하긴, 그로서 는 듣기 싫은 대답이 될 테니. "...그만 말해! 네 뜻은 오늘 저녁 연회에서 나에게 전하도록 해! 오늘 나는 크리스탈 궁에 서 연회를 열 생각이야. 여러 가지 불미스런 일로 인해 침체된 왕실 분위기를 회복할 겸... 그때, 나를 위해 드레스를 입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와 줘! 만약 네가 나오면 나 는 너에게 첫 번째 춤상대로 너를 택할 것이고, 너를 나의 정실 부인으로 공표할 생각이야 . 그것이 싫다면... 난 네 뜻을 인정하고 다른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할 거야." 그는 그렇게 몇번의 호흡이 필요한 말을 단숨에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내가 대 답할 시간도 주지 않으려는 듯, 그렇게 성급히 일어나 가겠다는 말을 하고는 방을 나가기 위해 벌컥 문을 열어제꼈다. 그러자, 지금까지 미카엔의 말을 옅들은 양, 루이스가 방문 밖에서 에구머니나~!! 하며 자지러지는 외침을 내었다. 그것을 본, 미카엔은 잠시 당황 한 표정을 짓더니, 그녀를 꾸짖는 것을 미처 잊어버렸는지 그대로 자신의 갈 길로 갔다. 그렇게 미카엔이 사라지자, 루이스는 무척이나 흥분한 얼굴로 침실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녀의 육중한 발걸음으로 인해 내가 서있는 바닥의 진동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그녀를 바라보는데... "오호호홋~!! 라비스니임~!!" 그녀의 기괴한 느낌마저 드는 웃음 소리와 흥분으로 인해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 웬지 불안하다. 루이스의 저 웃음 소리...' 루이스의 회갈색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었다. [129] 체인지(Change) 외전 Ⅳ-엔카루스가 라비스를 처음 만났을 때!- 외전 Ⅳ -엔카루스가 라비스를 처음 만났을 때!- 적당한 길이의 부드러운 흑발을 가진 스물을 갓 넘은 한 청년이, 오늘따라 더욱 히스테릭한 여동생의 하소연을 듣고 있는 중이었다. 햇빛에 그을려서 그런지 그의 피부는 그의 여동생보다 약간 어두운 편이었다. 하지만 잡티 가 없는 꽤나 매끄러운 피부를 가지고 있었기에, 남자다운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전하께서 이번에 또 측실을 들이신다니! 이대로는 안돼! 게다가, 그 시녀들의 말로는 그 남작의 딸은 정말 미인이라는데, 아마도 전하의 총애가 그녀에게로 옮아갈 거야! 정말 싫어!!" 결국, 그의 여동생 아사벨라는 테이블에 놓여있던 찻잔을 냅다 던졌다. 그리고, 엔카루스 그 는 그런 모습을 무덤덤한 표정으로 별관심없게 바라보고 있었다. "남작이라면, 저번에 몇번 얘기가 오갔던 크로시벨가?" "그래!" "음... 크로시벨가의 영애라면, 무척 얌전하고 교양있는 숙녀라고 들었는데?" "흥! 얌전하고 교양? 웃기는 소리야! 어제 시녀가 말하기를, 그녀가 황태자궁에서 사고를 쳤대! 자살 소동을 피웠다나? 결국, 2층에서 볼썽사납게 뛰어내렸는데 전하께서 그녀를 받아주셨나봐! 그럴 줄 알았으면 전하를 더 붙잡고 있는 건데... 그랬으면 그녀는 그대로 2층에서 떨어져서 어디가 부러지든 했을 거 아냐?" 아사벨라는 독기 어린 악담을 하며, 자신의 화를 삭였다. 엔카루스는 문득 흥미가 동했다. 크로시벨가 남작의 딸이라... 훗~ 황태자궁에서 자살 소동을 피웠다는 것을 보면, 그녀는 황태자의 첩이 되는 것이 싫어서 그러한 돌발 행동을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오빠! 그녀를 없애줘! 그녀가 왕성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오빠에게도 내가 전하의 총애를 받는 것이 더 이득이 될 거 아냐?" 솔직히, 그녀의 그러한 청을 들어주는 것은 꽤나 귀찮은 일이었지만, 엔카루스는 크로시벨 가의 남작 딸이 어떠한 여자인지 한번 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별볼일 없는 여자라면, 그대로 죽여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깐. 결국, 엔카루스는 적당한 날을 잡아 크로시벨가의 담장을 넘었다. 자정이 훨씬 지난 으슥한 밤! 그는 온통 검은 빛깔의 일색으로, 사전에 알아 둔 라비스 크로시벨이라는 소녀의 침실 창문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침실 안에는 미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촛불 하나 정도는 켜둔 모 양이었다. "설마, 이 시간에 깨어있을 리는 없겠지." 그는 플라이 마법 스펠을 나직이 외운 다음, 창문가로 몸을 띄웠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창 문을 열었다. 그녀가 깨어나면, 귀찮아질 테니. 역시 방안은 어두웠지만, 이미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그는 그다지 어둠에 장애를 받지 않았다. 한 개의 촛불이 화장대 앞에 놓여있었고, 침대는 방의 가운데에 놓여 있었는데, 앞부분이 벽면에 붙어있었고 레이스가 달린 커튼이 참으로 공주틱하게 꾸며져 있었다. 굉장히 부드러워 보이는 얇은 천이 침대를 전체적으로 가리고 있었다. 엔카루스는 그 침대 로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도 그녀가 침대에 없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숨소리를 죽이며, 그녀가 누워있을 침대에 신경을 몰두했다. 웬지 두근거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가 거의 침대 곁으로 다가갔을 무렵, 그는 침대에 그녀가 누워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 다. 그제야 침대로 몰두하고 있던 신경을 주위로 분산시켰다. 그러자 옷장 옅에서 아주 미세한 기척이 느껴졌다. "훗! 벌써 알아챈 건가?" 엔카루스는 실소를 하며, 입을 열었다. 자신의 침입을 재빠르게 알아채고 저렇게 어설프게 나마, 몸을 숨기고 있다는 것은... 그래도 보통 아가씨가 아님을 인정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거기에 숨어있는 거, 다알아! 라비스 크로시벨. 이제 그만 나오시지? 난 숨박꼭질 같은 것 은 취미없으니깐 말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좀더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말하면서 가까 이 다가감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있는 곳에서는 별다른 기척이 없었다. 제법,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소녀인 듯 했다. "말을 안듣는 아가씨이군! 라이트!" 그는 어둠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그녀를 보기 위해, 빛을 밝혀야만 했다. 그는 짧은 스펠 을 나직이 외우고는 마법 시동어를 외쳤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조그만 빛덩어리가 생겨 나며 어둠이 가시고 옷장 옆에서 겁에 질린 눈을 한, 소녀가 눈에 또렷이 들어왔다. 미인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라비스의 모습을 본 엔카루스는 숨죽인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 다. 단순히 미인이라는 말로만 그녀를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할 정도였다. "누, 누구세요?" 그녀의 붉은 입술이 살짝 열리더니, 가느다랗지만 그녀의 외모와 정말 잘어울리는 예쁜 목 소리가 흘러나왔다. "흠, 북장을 보니 집이라도 가출할 생각이었나 보지?" 그녀는 사이즈가 맞지 않는 남성용 여행복을 입고 있었고, 등에는 작은 배낭이 매어져 있었 다. 아마도, 현 상황을 보아하니 집을 나갈 모양새인 듯 했다. 엔카루스는 그녀의 침실을 무단으로 침입한 불청객이었지만, 어이없는 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없군! 사실, 난 오늘 너를 납치하러 온 것인데, 네 스스로 가출할 참이었다면 더욱 잘된 일이야!" "네?" 엔카루스는 그녀를 자신의 저택으로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녀가 황당해 하 는 반문을 하든 말든, 자신의 의지를 그녀에게 밝혀보였다. "이렇게 짐까지 싸들고 있다면, 간단하네? 나가자! 내가 너를 데려가 줄 테니깐..." 그리고는, 버둥거리는 그녀를 어깨에 매고는 침실을 빠져나왔다. "으아아악~!!!" 별로 매력적이지 못한 그녀의 비명소리... 엔카루스는 얼른 그녀의 입을 막았지만, 이미 때 는 늦어있었다. 조금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다고 저렇게 무식하게 소리를 지르다니! 엔카 루스는 문득 짜증이 치밀었다. 곧, 그녀의 비명소리가 귀찮은 놈 하나를 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부드러운 빛의 짧은 갈색 머리를 한 녀석이 그녀를 구하려는 듯 따라붙었다. 엔카루스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뛰었지만 그녀는 뜀박질 하나 재대로 못하는지 이내 넘어지고 말았다. 결국,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따라붙던 녀석에게 따라잡히고 말았고, 엔카루스는 그를 상대 해야만 했다. 엔카루스는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그의 눈길을 담담히 받아내었다. "넌 누군데, 라비스님을 납치해 가는 거냐?" 그의 살기가 느껴졌다. "납치라니!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이군. 난 사랑하는 나의 연인 라비스가 원하는대로 같이 사 랑의 도피를 한 것 뿐이라구!" 엔카루스는 즉석에서 한가지 시나리오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황태자의 측실이 되기 싫어 한 외간 남자와 사랑의 도피를 하는 미모의 소녀와 정체 불명의 남자...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우스웠지만, 지금 상황으로선 이것이 제일 제격이었다. 곧, 벙쪄하는 저들의 눈길이 느껴졌으나 엔카루스는 그들의 눈길에 미소로서 답했다. 일이 의외로 재미 있게 된 것 같았다. 엔카루스는 지금 상황에 흥미를 느끼며 앞으로의 시나리오가 어떻게 풀릴지 사랑의 도피행을 하는 주인공역을 하는 저 소녀는 자신의 역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정말로 기대가 되었다. "사, 사랑의 도피라니? 거짓말 마라!!" "호오! 자신의 주인에 대한 믿음이 매우 강하시군. 하지만, 이거 실망시켜서 어쩌나? 내 말 은 모두 사실인데... 정 못믿겠다면 라비스에게 직접 물어보지 그래?" "에드, 그, 그게 그러니깐... 저기..." 당황한 라비스... 그리고 그녀에게 진실을 말하기를 요구하는 '에드'라는 남자. 하지만, 라비 스는 당황한 기색을 얼른 감추지 못하여 에드라 불리운 남자는 의혹의 빛을 띠었다. 이들의 반응에 더욱 재미를 붙인 엔카루스는 자신이 그녀의 애인임을 확인시켜 줄만한 발언을 하였다. "라비스! 뭐하는 거야? 설마 이대로 황태자의 후궁이 되고 싶다는 것은 아니겠지?" 엔카루스의 말에 라비스는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동그랗게 떠진 황금빛의 눈동자가 엔카루스는 문득 아름답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다, 처음엔 약간 놀란 빛을 띠었던 라비스의 눈동자는 뭔가 슬픔에 젖은 듯한 빛을 해보였다. 자신 만의 고민이나 슬픔에 빠 진 듯 하였다. "라비스...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무얼 망설이는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의 귀가로 입술을 가져가 낮게 속삭였다.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가고 싶으면, 내가 하는대로 가만히 있어!" 그리고는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사랑의 도피행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를 성공적 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행동이었다. 라비스는 엔카루스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미처 못깨달은 듯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그 모습을 보며 엔카루스는 생각했다 . 순진한 아가씨이라고... 곧, 그녀의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이 느껴졌다. 상큼한 과일이 입안에서 녹아드는 느낌이었 다. 사실, 초면인 그녀에게 이런 짓을 하는 것은 무척 실례라고 할 수 있었기에, -물론 그녀의 침실을 침범한 것도 실례지만- 그냥 하는 척만 하려 했지만, 그녀의 입술이 닿자 엔카루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와의 키스에 빠져들어갔다. 그런데도, 라비스는 의외로 담담하게 연기를 해내었고, 엔카루스는 그녀를 순진한 아가씨라 고 생각했던 것을 고쳐먹어야만 했다. 그리고, 엔카루스는 문득 불길함을 느껴야만 했다. 미카엔의 측실로서 예정된 그녀에게 자 신이 대책없이 빠져들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런 일이 있은 후... 그녀가 미카엔의 측실이 될 것을 막으려 노력을 하였지만, 결국은 그의 부인 중 하나로 되 어 버린 그녀를 바라보아야 했다. 그녀가 미카엔의 측실로서 국왕에 의해 공표되던 그날... 크리스탈궁에서 열린 연회에서 봤 던 그녀는 무척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엔카루스는 굳어진 얼굴로 그녀를 쏘아보는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크로시벨가로 가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만약 그날, 라비스와 그런 일이 없었다면... 이미 미카엔의 부인이 되어 있던 상태에서 라비 스를 처음 보았다면, 그는 미카엔이 가진 것과 더불어 그녀를 빼앗겠다는 생각은 아마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 이번 외전은 엔카루스가 쥔공입니다. 으흠... 이거 쓰면서 계속 닭살이... ㅡㅡ;;; 올릴까 말까 고심했다는... 아하하..;;;; [130] 체인지(Change) 제22화 -즉위식 그리고, 단죄- (4) -3- 루이스는 들뜬 얼굴로, 내가 입을 드레스를 골라나야 하겠다면 방을 나갔고, 나는 그 순간 부터 고심을 하기 시작했다. 로히얀스의 왕비가 된다라... 어차피 반대는 있을 거다. 하지만, 미카엔은 왕이 될 것이고 미카엔이 자신의 주장을 굽히 지 않는다면, 아무리 고위 귀족들이나 중신들이라 해도 미카엔을 말리기는 힘들 것이다. 그는 왕이니깐. 내가 왕비가 된다면, 나는 어느 정도의 권력을 얻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함 께 완벽하게 미카엔에게 종속되고 말 것이고... 그건 싫었다. 나는 자유롭고 싶었다. 어느 것에도 묶이지 않고, 어차피 이세계에서 나에게 남은 삶을 마 감해야 한다면, 멋지게 판타스틱하게 살아보고 싶었다. 육체는 여자이고, 마음도... 음, 여 성스런 부분을 가지고 있지만 본래 영혼은 19년간을 남자로서 살아왔기에, 종속적이고 안주 된 삶은 별로 내키지가 않았다. "그러면, 연회에 나가지 말아야 할까?" 그렇다면, 미카엔은 다른 여인을 왕비로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실망감도 들겠지만 나에 게 화가 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나의 근본적인 문제까지 이해할 수 없을 테니, 나의 행동에 대해 의문이 들 것이다. 뭐가 문제될 것이 있다고 자신을 거부하는지에 대해. 어쩌면, 그가 왕비를 맞고 나면 나에게서 마음이 떠나갈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역시 지 치고 말 테니. 역시, 그건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나는 한 인간으로서 순수하게 그를 사랑하고 싶었다. 마 치 정령들이 그의 주인을 사랑하고 모시는 것처럼. 만약, 그의 정식 부인이 되어 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나는 그러한 내 감정이 깨질 것이고 변색될 것이다. 어쩌면 보통 여인 네들처럼, 그의 사랑을 갈구(?)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여인으로서의 무료한 삶을 살며 감정이 메마르게 될 것이다. 언젠가 미카엔의 사랑이 떠나게 되면, 그것으로 인해 망가진 모습을 보일 지도 모르고... 우 엑! 그건 정말 흉한 꼴이다. 언젠가는 정말로 미카엔과 나와의 관계는 변하게 된다. 영원한 사랑은 없으므로. 그런 것에 내 목숨을, 내 삶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의 곁을 항상 지키는 정령과 같은 존재가 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령 들이란 그 주인이 죽는 그 순간까지,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 주인을 받든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면 변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나는 미카엔의 강함과 범접할 수 없는 위엄에 내심 경외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 만 그와 동시에, 그것은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저번 마계에서 처절히 느꼈었다. 그땐 정말 내 자신이 초라했다. 만약 왕비가 된다면, 그와 같은 위엄을 갖을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왕의 부인으로서 갖는 위엄일 뿐이었다. 그리고, 미카엔의 빛에 가리워져서 나는 내 자신을 발전시킬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프레야 왕비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카리스마와 힘으로 거의 모든 것을 굴복시켰 고 국왕보다 그녀의 위엄이 더 빛이 났지만, 나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미카엔은 홀로 서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빛이 나기 때문에, 나는 결국 왕비가 된다 하더라 도 그의 종속자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저 그의 곁에서 항상 존재하는 자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내 자신을 그와 대등할 수 있도록 발전시키고 싶었다. 그렇게 나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데, 루이스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무엇보다 화려하고도 우아한 드레스가 들려 있었다. "루이스, 미안해! 난 아무래도 연회에 갈 수 없을 것 같아. 그는 다른 여인을 왕비로 맞을 거야. 그러니, 기대 같은 것은 갖지마." 까만 하늘에 엄지 손톱만한 반달이 떠올랐다. 흠... 반달이라기 보단 반달과 보름달의 중간 에 가까운 모양을 가진 예쁘지만 어설픈 반달이었다. 아까부터 루이스의 잔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지만, 나는 짜증이 치밀어 그녀를 억지로 방밖 으로 내몰았다. 막상, 연회에 나가지 않으니깐 불안감도 생기고 신경도 날카로워지게 되 었다. 나는 베란다에 나가 지나가는 귀족들의 마차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크리스탈궁으로 향하는 마차인 듯 싶었다. 저편으로 황태자궁이 위엄있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창문 사이 로 불빛들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미카엔의 모습이 내심 궁금하였다. 그렇게 멍한 얼굴로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다. 차가운 공기로 인해 나의 볼이 붉게 상기되었 을 것이다. "라비스..."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화려한 연회복 을 입은 미카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은은한 빛을 발하는 은빛 머리카락이 문득 바람에 휘날렸다. "미카엔?" "왜, 오지 않는 거지?" "난 미카엔의 부인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럼, 네가 되고 싶은 것이 뭐야?" "난... 미카엔의 수호정령이 되고 싶어요. 나를 왕비라는 직위 대신, 미카엔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측근 관리직으로 임명해 주세요." 미카엔은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달빛을 받았다. 그는 하얗게 쌓인 순결한 눈과 고귀한 달빛을 닮은 존재였다. 만약 그가 달 밝은 밤에 눈이 쌓인 곳에 서있다면, 그는 그 장소와 동화되어 아름다운 은빛을 뿌리며 사라질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이였다. "내가,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고 그녀를 사랑해도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 "그래! 네 뜻 알겠어. 이젠 너에게 화를 내는 것도 지치는 구나.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지 만, 언젠가 너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네 의지를 존중해 주겠어. 훗~ 예전 같았으면, 네가 뭐라하든 내가 내키는 대로 행동했을 텐데. 이젠 그런 것도 어려워 졌어. 너에게 그러한 결정에 대한 이유를 묻고 싶지만, 넌 대답을 회피할 테니. .. 이젠 나는 황태자의 신분이 아닌 이 나라의 왕이 될 거다. 라비스! 그만큼 나는 너 에게 소홀해지게 될 거야. 내가 해야하고 생각해야 할 일들이 많아. 사랑하는 소녀로 인 해 고민하는, 그럴 여유가 나에게 없다는 말이다. 라비스, 내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소녀... 네가 나의 부인이 되는 것을 거절하겠다면, 나는 더 이상 너를 붙잡지 못하겠다. 네 청을 들어주지! 그리고 측실이라는 애매한 신분... 필요하다면 풀어주겠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은빛 여운을 남기며 사라졌다. 마치 내가 허상을 본 것 같은... 아니 면 잠시 꿈이라도 꾼 것 처럼. 그는 나에게 직접적으로 화는 내지 않았지만, 그의 보이지 않는 실망감과 상실감 그리고 나 에 대한 분노가 느껴졌다. 왠지 나를 다시 여자로서 보지 않겠다는 말을 무지하게 돌려서 말한 것 같기도 했다. "절대 후회하지 않아! 미카엔. 나도 너처럼 보이지 않는 위대함이 될 거야!" [131] 체인지(Change) 제22화 -즉위식 그리고, 단죄- (5) -5- 오늘은 미카엔의 즉위식... 다시 말해 대관식이 있는 날이었다. 나는 예복용의 화려하지만 경건한 느낌이 드는 정숙한 드레스를 입고는, 연회만 주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크리스탈궁이 아닌, 왕성 밖에 위치한 위대한 창조신 라덴의 신전으로 향했다. 오늘은 이곳의 신, 라덴도 축복을 하는지 겨울이 가고 봄이 다가오는 환절기인 지금... 하늘 은 너무도 청명하였다. 이곳의 주술사나 점술가들도 미카엔이 왕으로서 다스리게 될 로히 얀스가 앞으로 번영하게 될 길조라며, 미카엔의 즉위를 축복하였다. 주변 국가들도 각자 사신들을 보내어, 미카엔의 즉위를 축하하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현재 사이가 별로 좋지 못한 루젠다르와 인페르디아에서도 형식적이나마 사신들을 보내왔다. 많은 귀족들이 앞다투어 이곳에 얼굴을 들이밀기 위해 노력을 하였고, 유명한 인사나 초청 예술가들도 참석을 하였다. 하여튼, 유명하고 대단한 인간들이 한자리에 모여 바글바글하 였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마치 궁성과도 같은 우아하고도 아름다운 건축물, 라덴의 신전 은 화려하기도 했지만, 은은한 멋을 풍기고 있어 단순히 예배만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관광으로도 꽤나 볼거리인 곳인 듯 했다. 게다가, 한나라의 수도에 위치한 가장 위대한 신을 모시고 있는 신전답게 그 스케일도 어마 어마하게 커서, 신전이 이렇게 화려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나를 따라 나온 내 전속(?) 경호원 에드는 이렇게 말했다. "라비스님! 이곳은 단순한 신전으로서만 아니라, 왕실 역대 대관식이나 결혼식 같은 성스런 행사가 이곳에서 치루어지기 때문에, 이 화려함은 그 격식에 맞추어진 것 뿐입니다." 그리고, 신전 안으로 들어선 나는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과 정신없는 인사를 나누어야 만 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친근하게 말을 건네오는 이들... 나 역시, 아스탄샤에서 갈고 닦은 귀족들 대하는 뻔뻔한 대처법으로 그들을 대했다. 나는 혹시, 아사벨라도 참석을 하는지 눈을 굴려 찾아보았으나, 그녀는 보이지가 않았다. 그 녀는 그 일이 있은 후, 자신의 궁에서 틀어박혀 한번도 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나는 미카엔의 첫 번째 측실, 유리스와 마주쳤다. 나는 그녀를 보고는 반갑게 아는 척을 하였으나, 그녀는 여전히 쭈뼛쭈뼛하는 모습을 보였 다. 그리고... 나는 다니엘 남작을 몇 달만에 처음으로 얼굴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지은 죄가 있어,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땐, 나도 모르게 찔끔해야 했다. 보수적이 고 전형적인 귀족의 성격을 가진 그가, 그동안 가출하고 사고나 치고 다녔던 자신의 딸을 어떻게 대할지는 뻔하였다. 나를 호위하고 있던 에드가 남작을 먼저 발견하고는 인사를 해보였다. "오랜만이구나! 라비스." 그가 내밀은 딸에 대한 첫인사였다. 생각보단 부드러운 말소리에 나는 경직되었던 긴장을 풀었지만, 그에게 뭐라고 답변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당황한 얼굴로 버벅거렸다. 그에게 아버지란 느낌을 갖지 못했던 나는, 무척이나 그가 낯설었고 어색했다. "몇달 못본 사이에, 조금 더 성숙해진 것 같구나! 그리고 야윈 것 같기도 하고... 갈수록 네 어미를 닮는 것 같군." 그는 생각 외로 가출건에 대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변한 나의 모습에 대해 말할 뿐... 그래도, 이 사람은 자신의 딸에 대해 아주 냉정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구나! 하며 나는 생각했다. "건강해 보이시는 군요. 아버지..." 무지 어색한 인사였다. 특히, 아버지란 단어에서는 더욱 더 어색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다니엘 남작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머금더니 한참을 나를 바라본 뒤에, 다른 귀족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몸을 돌렸다. 잠시 후, 대관식이 거행되기 시작했다. 굉장히 많은 이들이 각자 자리에 앉았고, 옷을 곱게 차려입은 한 여신관이 소프라노로 성스러운 느낌이 도는 노래를 불렀다. 아마도, 성가인 듯 했다. 그 여인의 노래로 시작하여, 그 뒤에 위치해 있던 소녀 소녀 성가대가 합창으로 성가를 부 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들떠있던 분위기는 그 성가로 인해, 엄숙해졌고 경건해졌다. 주위 에서는 이제 잡담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숨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후, 이곳의 대신관인 듯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금빛으로 치장된 예식용 신관복 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미카엔의 모습도 보였다. 어느때보다 위엄있는 모습으로... 미카엔은 대신관 앞에 서더니 무릎을 꿇는 자세를 해보였다. 이것은 대신관에게 예를 갖춘 것이 아니라, 창조신 라덴에게 예를 갖춘 것이었다. 그리고, 미카엔과 대신관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또 한명의 신관이 눈에 들어왔다. 그 신관은 앳띤 소년이었는데, 꽤나 맑고 순수하게 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 신관은 무언가를 조심스레 들고 있었다. 그것은 미카엔이 쓰게 될 왕관이었다. '흠, 신전에서 대관식에 쓸 왕관을 보관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저걸 보관하고 있으려면 꽤나 힘들었을 텐데. 왕관에 박힌 보석만 해도 엄청나니깐. 저것을 탐을 내는 이들이 있기 마 련이니...' 곧, 왕관은 대신관의 손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그것을 위로 번쩍 치켜 들은 대신관은 뭐라 뭐라 위엄있게 읊어대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신성했지만 지루하기도 했기에, 나는 대충 흘려 들었다. '저 무거운 걸 오랫동안 들고 있으면 팔이 아플 텐데...' 나는 아무런 안면도 없는 대신관의 안위까지 걱정해주며, 하품을 했다. 잠시 후, 왕관은 미카엔의 머리위에 씌여졌다. 그동안 지루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왠지 감격 스럽기도 했다. 미카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청중(?)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나는 많은 이들 사이로 껴있었기 때문에, 미카엔이 나를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며 그를 바 라보았다. 왕관을 쓴 그는 정말 왕 같았다. 아! 그는 이제 왕이지... 그때 미카엔의 눈길이 내쪽을 향했다. 그리고 정확히 나의 눈과 마주쳤다. 나는 그많은 인 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에 나와 눈을 정확히 마주친 미카엔의 능력에 -혹시 디텍트 능력일까?- 내심 감탄을 하며, 그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려 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미소 를 짓기도 전에 눈을 나에게서 거두어 들였고, 위엄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미카엔 투르타 덴 마르시에안 로히얀스는 전능하신 라덴의 의지와 선왕의 의지를 받들 어, 이순간 후로 로히얀스의 국왕으로서 모든 의무를 다해, 로히얀스를 위대한 동쪽의 나 라로 번영시킬 것을, 이곳에 계신 라덴께 맹세한다!" 이로서 미카엔은 왕이 되었고, 나는 더욱 더 드높아진 그의 모습에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 이것으로 미카엔은 나와는 전혀 다른 위치에서 서있는 존재가 된 것이었다. 내가 감히 마 주볼 수 없는 위대한 존재 말이다. 백합궁으로 돌아온 나는, 그동안 못하던 마법 공부를 하다가 내가 이 궁성으로 들어온 순간 부터 시중을 들어왔던 앤시아로부터 한 소식을 들었다. "라비스님! 내일 대관식 축하 연회에 왕비로 간택된 영애가 연회에 참석한다는 군요." "그 영애가 누구인데?" "그건 아직 몰라요!" 사실, 연회 체질이 아니었던 나는 그냥 조용히 쉬려고 했었지만, 내심 미카엔의 부인이 될 여인이 누구인지 궁금하였다. 그래서... "앤시아! 나 내일 크리스탈궁으로 갈 거니깐, 미리 준비 좀 해줘!"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책을 덮었다. 벌써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났다. 하지만, 식사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던 나는, 일찍 잠이나 자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왠지 기분이 저조했다. 내가 옳은 결정을 한 건지, 아직도 흔들렸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다, 예전 생각이 났다. 미카엔을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마법을 보여달라는 말에 꽃으로 눈을 내리게 했던 미카엔의 모습... 그리고 매일 밤 찾아오는 미카엔에게 론티아 꽃잎 차를 먹여서 잠들게 했던 일들.. . 쿡쿡! 지금 생각하니깐,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마족에게 독이 스민 상처를 입어 몹시 아팠을 때, 나를 치유하기 위해 모든 일을 제치고 환상의 섬인 시리어스섬에 동행해 주었던 일이 생각나자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 해졌다. 어쩌면, 지금 나는 내 생각만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모든 것을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갈 수는 없다. '나도 그처럼 높아질 수 있을까? 오늘 그의 모습은 너무도 높아 보였어! 이대로는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되고 말 거야... 그처럼 나도 태양이 될 수 없다 해도, 그와 같은 공 간에서 숨을 쉬는 구름이 되고, 바람이 되고 싶어, 아니! 그렇게 될 거야!' 태양은 언제까지나 빛이 나지만, 해바라기는 짧은 순간을 그 태양만 바라보다 시들어 버린 다. 나는 해바라기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정말 비참하다. 그때! 백합궁으로 중앙궁성의 한 시종이 찾아왔다. "폐하의 명입니다. 지금 이순간부터 라비스 크로시벨님은 폐하의 비서관으로 임명되었습니 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폐하의 측실 신분이 풀어졌음을 알려 드립니다." [132] 체인지(Change) 제23화 -세리아의 질투- (1) (세리아의 질투) -1- "케헥! 루이스~ 나 죽기 싫어~ 내가 왕비 자리를 찬 것을 이런 식으로 보복하는 것은 아니 겠지?" 내가 이러한 비명 섞인 외침을 하는 이유는 크리스탈궁으로 가기 위한 채비를 하는 중에, 루이스가 코르셋으로 나의 허리를 무자비하게 졸랐기 때문이었다. "굴러 들어온 장미빛 영광을 차다니! 지금 라비스님은 제정신인가요? 전, 그 생각만하면 자 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나고 합니다." "흐응~ 그래? 그것 참 안됐군! 루이스가 잠을 설치다니." "...그러는 의미에서, 라비스님! 오늘 연회에 입고 갈 드레스는 저것으로 입고 가도록 해요!" 그녀의 말에, 나는 시녀가 들고 들어오는 드레스에 눈길을 주었다. 그것은 연녹색의 공단 드레스였는데 치마는 굉장히 풍성하였고 우아하면서도 심플하였다. 그리고 알맞게 파여진 가슴선은 작은 물결모양으로 처리가 되어있었고, 그 가장자리가 은사로 기하학적인 무늬 가 수놓여 있었다. "흐음... 저걸 입으면 완전히 봄처녀가 되겠네!" "호호~ 예쁘죠? 왕실 재단사에게 심혈을 기울여서 제작하도록 한 드레스랍니다. 연녹색이라 면 화사한 봄 분위기도 풍기고... 유행은 앞서가야 하는 법이죠!" 나는 그 드레스를 입고 전신거울 앞에 섰다. "화장을 너무 눈에 띄게 한 거 아냐?" "화장은 그다지 진하게 하지 않았는데요? 라비스님은 화장을 안해도 예쁘시니, 오히려 자연 스럽게 해야 아름다우시니, 적당히 한 건데, 뭐가 불만이지요?" 뭐가 불만이냐? 라는 말투에 나는 그만 수그러든다. 사실, 지금 나의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 다. 지금의 내 육체는 과연 인간의 자식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그래서 나는 불만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눈에 띄는 외모가 화장으로 인해서 더욱 두드러져 보이면, 나는 정 말 불편하였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적당히 생겼으면, 내가 이 고생을 안하는 건데...' "...그러고 보니, 라비스님은 그때 수면제로 자살소동을 벌이고 난 후에, 정말 많이 달라지셨 어요! 성격도 달라지셨지만 외모도 더욱 아름다워지셨으니깐 말이에요. 호호~ 정말 불가 사의한 일인 것 같아요. 한번 죽을 고비를 넘기시더니, 전에는 외모만 예쁘장하셨는데 이제 는 모든 면에서 신비한 아름다움마저 느껴지는 것 같으니... 지난 반년 사이에 많이 성장 하신 느낌이에요!"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마차를 타고 크리스탈궁까지 이동하였다. 나는 백합궁을 나 오면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 백합궁에서 지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내일 이면 나는 중앙궁성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이제 나는 측실이 아니고 국왕의 비서관 중 하나가 되니깐. 크리스탈궁에는 어느때보다 귀족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 이유는 미카엔의 즉위를 축하하 는 의미도 있었지만, 앞으로 왕비가 될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이기도 했기 때문이 었다. 귀족들의 잡담이 무지 시끄럽게 들려왔다. 모두 왕비가 대체 누구일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얘기도 많았다. 사실, 많은 귀족들이 내가 왕비가 될지도 모른다는 추 측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신분이 되지 않았으나 미카엔이 각별히 나를 총애하고 있다는 것은 저들은 너무도 잘 알았다. 결국, 나에 대한 얘기는 저들의 도마 위에 올려져 다양하게 요리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숙덕거림을 무시하였다. "아! 아사벨라~" 나는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아사벨라의 모습에 반가워하며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며칠 사이 많이 수척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오만한 모습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그녀에 대한 얘기도 꽤나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너 폐하의 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며?" "응." "훗~ 정말 의외인데? 이번에 누가 왕비로 간택되었는지 알고 있어?" "아니! 아사벨라는 누구인지 알고 있어?" 내가 그렇게 묻자, 아사벨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글쎄... 하지만, 곧 알게 되겠지. 그리고... 너! 나한테 친한척 좀 하지마! 재수없으니깐." 그녀는 그렇게 매몰차게 말하고는 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나는 귀족들의 웅성거 림이 더 커지는 것을 느끼고는, 귀족들의 눈길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모아진 곳에 눈길을 주었다. 그러자, 나의 눈에 한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붉은 머리를 가진 소녀였는데, 인상 이 왠지 익숙하였다. "흥! 내가 그럴 줄 알았지! 저 여자는 예전 황태자비의 여동생이야. 황태자의 아버지인 베 른 공작이 이번에도 자신의 두 번째 딸이 폐하의 부인이 되도록 힘을 쓴 것이 분명해!" 아사벨라는 붉은 머리의 소녀를 보며 가증스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붉은 머리 소녀는 우 리쪽으로 다가왔다. "당신이 라비스 크로시벨인가요?" 그녀는 나에게 다짜고짜 물어왔다. 그녀는 황태자비와 약간 닮아있었지만, 연약한 인상의 그녀와는 다르게 이 소녀는 진한 붉은 머리를 가진 소녀답게 제법 말괄량이 기질이 다분해 보였다. 게다가 인상은... 왠지 제2의 아사벨라를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정 말 불길하였다. "네, 맞습니다만..." "훗! 정말 소문대로 미인이시네요. 제 언니에게 얘기 많이 들었지요. 전 예전 황태자비 전하 의 여동생인 '세리아'라고 합니다. 이번에 폐하의 정실로 간택이 되었지요! 폐하께서 한때 라비스님을 총애하셨다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 분의 부인이 아니시니... 전, 더 이상 폐 하께서 라비스님을 총애하는 일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하지만 혹시, 모르니 그 분께 꼬리 칠 생각은 말아요!" 초면에 저렇게 당돌한 발언을 하다니! 듣자 하니, 정말 기분이 나빴다. 꼬리를 치다니... 내 가 강아지인가? 내가 왜 미카엔에게 꼬리를 친단 말인가? "저런! 소심하시군요. 벌써부터 라비스님의 미모에 겁을 집어먹으셨나요? 폐하의 총애를 얻 지 못할까봐?" 아사벨라가 내 대신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여전히 비꼬는 기색이 현저한 말투였다. 그러자, 세리아는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그녀에게 외쳤다. "정말 무엄하군요! 감히 누구에게 그런 발언을 하는 거죠! 난 이 나라의 왕비가 될 거란 말 입니다." "호호~ 누가 세리아님이 왕비님이 되지 않을 거라고 말했나요?" "이, 이... 무엄한! 건방진 계집 같으니! 천박한 반역 집안의 계집 주제에..." 세리아는 아사벨라의 비꼼에 대범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쉽게 발끈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사벨라의 아픈 곳을 건드리는 발언을 하였는데... 짜악~!!! 이것은 뺨을 때리는 소리이다. 정말 경쾌하기 짝이 없는 울림이었다. 세리아는 붉은 손자국 이 난 한쪽 뺨을 손으로 가져가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자신의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다. "역시! 멍청한 것은 그 황태자비나 너나 똑같군! 재수없어!" 아사벨라가 그렇게 외치자, 세리아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 다. "가만두지 않겠어! 감히 나에게 손찌검을 하다니! 일러버릴 거얏!" 그녀는 아사벨라에게 받은 모욕과 많은 귀족들 앞에서 당한 망신으로 인해, 그렇게 울먹거 리는 목소리로 유아틱하게 외치더니 그대로 뛰쳐나갔다. 그런데... 고자질을 하겠다면, 누 구에게 하겠다는 것일까? 자신의 아버지? 아니면, 미카엔일까? "아사벨라! 왕비가 될 여자에게 손찌검을 하다니, 경솔했어!" "될대로 되라지!" 예전 같았으면, 그렇게 발끈을 하여 자신의 위에 있는 자에게 그런 경솔한 짓을 하는 그녀 가 아니었는데, 방금 그녀의 태도는 자제력을 많이 잃은 태도였다. 하긴, 나 같아도 아사 벨라의 입장이었다면, 가만히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세리아는 아사벨라를 벼르기 시작하였고 나는 중앙 궁성으로 거처를 옮겨 미카엔의 비서관으로서 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거의 매일같이 미카엔의 개인 비서인 비 서관장에게 혼이 났지만, 나는 빨리 일을 터득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또 한가지 나에게는 피곤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세리아였다. 그녀는 아직 결혼 식 전, 그러니깐 왕비로서 즉위하기 전 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일같이 중앙궁성에 들락 거리며 나를 감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혹여, 내가 미카엔에게 꼬리라는 것을 칠 것을 염 려해서 그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세리아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카엔의 얼굴을 좀처럼 볼 기회가 없었다. 나는 아직 보조 비서관이었고, 그와 직접 대면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한번은 그를 잠깐 볼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거의 사무적인 태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나는 비서관장님이 출타중인 관계로 내가 대신 서류를 미카엔에게 제출해야 할 일이 생겼다. [133] 체인지(Change) 제23화 -세리아의 질투- (2) -2- 푸른빛의 실크 리본으로 머리카락의 절반을 살짝 묶고 어깨 너머로 늘어뜨린 나는, 국왕의 비서관 복장인 제복 같이 생긴 약간 달라붙는 바지와 금빛 단추가 많이 달린 상의를 입고 있었다. 서류뭉치를 들고 미카엔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처음엔, 미로와 같은 중앙궁성의 구조에 많 이도 헤매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나는 집무실로 가는 도중, 한 시녀가 나를 힐끗 보더니 어디론가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띄 었다. 이상하게 생각되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집무실 문앞에 다다른 나는, 자꾸 긴장하려는 얼굴을 침착함으로 가장하며 표정관리를 한 다음, 문앞에서 시립한 시 종에게 입을 열었다. "폐하의 개인 비서관이신 스미스님의 대신으로 온, 보조 비서관 라비스 크로시벨입니다. 지 금 폐하를 뵈올 수 있나요?" 내가 그렇게 묻자, 회색빛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노년의 상급 시종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집무실 문을 향해 입을 열었다. "폐하! 보조 비서관인 크로시벨양이 폐하를 뵙기를 청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미카엔의 허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안 에서는 미카엔의 답변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자, 시종은 미카엔이 못들었으리라 짐작하 고는 다시 목청을 가다듬고 외쳤다. "폐하! 보조 비서관인 크로시벨양이..." 시종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안에서 미카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중에 스미스 보고 직접 다시 오라고 해라!" 그러자, 시종은 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난처한 얼굴을 해보였다. 미카엔은 나를 보는 것 을 거부한 것이다. 나의 얼굴은 굳어졌다. 정말 기분이 나빴다. 어째서, 나를 보는 것을 거절한 것인지... 나는 그저, 그에게 보고를 하러 온 것일 뿐인데. "죄송하지만, 나중에 스미스님께 다시 오도록..." 시종이 나에게 입을 열었지만, 이번에도 그는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왠지 화가 난 나는, 그만 집무실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시종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나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선 나는, 당당하게 그가 앉은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미... 아니, 폐하! 왜 저를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죠?" 나는 그렇게 외치며 그의 책상 위에 서류들을 탁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그에게 입을 열었다. "여기... 제가 폐하께 보고드릴 내용입니다. 스미스님께서는 출타 중이어서 오늘 중으로는 보고가 힘드셔서 저에게 맡기셨어요. 제가 대신 폐하께 보고를 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는데, 제가 잘못한 건가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미카엔은 나를 표정없는 얼굴로 올려다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크로시벨양? 내가 누구이고 이곳은 어떤 장소인지 알지 못하는가? 지금 행동은 무척 건방 지기 짝이 없는 행동임을 크로시벨양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군! 지금 그대는 내가 예전에 사랑하던 부인이 아니라, 보조 비서관일 뿐이다." 그는 신하를 대하는 태도로서 나에게 그 건방짐을 질책하였다. 그의 냉랭한 태도가 나는 너 무도 생소했다. 그는 나에게 한번도 이러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그때, 마지막으로 그가 백합궁으로 왔던 순간 조차도 그는 평소 모습이었다. 그는 그 이후로 완전히 돌아선 것일까? 하지만, 이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는 국왕이고 나는 엄연한 비서관인데, 내 가 그것을 무시했으니 역시 내가 어리석었다. 나는 잠시 놀라움으로 커졌던 눈을, 살며시 내리깔며 그에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용서하세요! 이것은 아르카닐시의..." "됐어. 이것은 내가 나중에 검토할 테니... 미안하지만, 이 서류들 서류 번호대로 정리 좀 해 주겠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의 곁을 스쳐지나가려 했다. 그때! 그의 말에 뭉치로 쌓여있는 서류들을 정리하려던 나는, 집무실의 창가에 뭔가 어른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한 마리의 덩치 큰 박쥐였다. 창문은 살짝 열려있었는데, 그 사이로 박쥐는 날아들어오더니, 쏜살같이 나에게로 날아왔다. "꺄악~!!" 나는 그것의 난데없는 공격에 팔로 얼굴을 가리고, 뒷걸음을 쳤다. 그러나, 무엇에 걸렸는지 나의 몸은 뒤로 기우뚱하였다. 에구구... 이제 그의 앞에서 볼썽사납게 넘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뒤로 넘어가던 나의 몸은 허리에 어떤 힘이 받쳐지더니, 다시 앞으로 기울었다. 나는 눈을 들어 나의 허리를 잡아 끌어안은 미카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유유히 빠져나가는 시커먼 박쥐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창밖을 쏙 빠져나가더 니, 나에게 한번 눈길을 주었는데, 그것의 얼굴은 웃는 인상을 하고 있었다. '설마, 설마? 저것은 아멘시타...? 대체 무슨 짓을 꾸민 거지? 아멘시타 나중에 너 주우겄 어!!' 정말, 타이밍을 기묘하도록 잘 맞춘 아멘시타였다. 무슨 목적으로 이러한 짓을 했는지 충분 히 짐작이 갔다. 나는 어색한 모습으로 그의 품을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빠져나가려 하자 미카엔은 팔에 힘을 주더니 나를 더욱 당겨 끌어안은 것이다. '흑! 분위기가 요상하게 변해버렸잖아? 진짜 아멘시타 가만 안둬!' 나는 그렇게 속으로 투덜대며, 다시 미카엔에게 빠져나오기 위해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나는 꼼짝할 수도 없었다. 이로서 시작된, 미카엔과 나와의 힘겨루기... 당근, 내가 불리했다. 미카엔은 나보다 힘이 더 세니깐! 결국, 나는 용을 써도 그의 품을 빠져나갈 수가 없자,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창밖을 보며, 앗! 저기 드래곤이 지나가네?! 라는 외침으로 미카엔의 관심을 돌린 다음, 잽싸게 그의 품을 빠져나갈까? 에 대한 유치한 생각이 점점 나의 머리속을 자리잡을 무렵! 미카엔은 감정적이 되었는지, 나를 끌어안은 모습으로 그의 얼굴이 점점 내앞으로 다가왔 다. 하지만, 그때! 집무실 문이 벌컥 열어제쳐지더니, 헐떡거리는 모습으로 나타난 붉은 머리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들어, 왕비 수업이라는 허울좋은 핑계로서 아예 중앙 궁성에서 머물고 있던 그녀... 저 소녀 역시, 기막히게 타이밍을 잘 맞추는... 아멘시타 다음 가는 존재인 듯 했다. "안돼에에에~~~!!!" 쩌렁 쩌렁한 그녀의 목소리가 집무실 안으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는 아까보다 더욱 사색이 된 시종의 얼굴이 살짝 엿보였다. 흐이구~! 웬지 코믹스런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 같아, 심히 민망하였다. [134] 체인지(Change) 제23화 -세리아의 질투- (3) -3- 결국, 미카엔은 안았던 나를 풀어주고는 세리아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러나, 그 눈길은 그다 지 고운 눈길이 아니었는지, 그녀는 찔끔을 하며 몸을 비비 꼬는 와중에서도, 미카엔 어깨 너머로 나를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아마도 시녀의 귀띔을 듣고 이곳까지 숨가프게 달려왔을 테니, 그래도 내가 미카엔에게 꼬리 치는(?) 사태를 막았으니깐, 그녀로선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심 미카엔을 방해해준 그녀에게 감사의 미소를 화사하게 보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나의 미소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려는지 잠시 표정이 심각해졌다. "세리아! 그대는 공작가의 레이디로서 예법에 대해서도 배우지 못했던 것이오? 그리고, 방 금 그 외침은 무엇이었지? 뭐가 안된다는 것이오? 크로시벨 비서관! 너도 마찬가지야!! 이 나라의 왕이 있는 집무실의 문을 벌컥 벌컥 열어제치다니!!" 세리아를 혼내던 미카엔은 나에게도 눈길을 주고는 같이 혼을 내었다. 그러다, 미카엔은 잠 시 말을 끊더니, 다시 세리아에게 입을 열었다. "세리아, 말해보시오! 무슨 연유로 예법을 무시해가면서 급하게 이곳을 찾았는지... 뭔가 다 급한 이유가 있을 거라 보는데." 미카엔은 아마도, 그녀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너무도 잘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 게 대답을 강요하는 그를 보면, 약간 짓궂은 면이 있는 것 같았다. "폐하! 왜 저만 혼내시는 거죠? 라비스도 저처럼 예를 무시하고 집무실 문을 열었다면서 요!" 세리아가 나를 물고 늘어졌다. 이왕이면, 같이 혼나자는 심보인가? "나는 지금 그대를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이오. 세리아. 만약 합당한 이유가 없으면 벌을 내릴 것이니 말해보시오!" 이젠 미카엔이 그녀에게 겁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리아의 호박색 눈동자는 글썽글썽 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말괄량이 기질이 있었지만, 의외로 단순하고 순진한 면이 있는 듯 했다. 약간 머리를 굴리는 것이 떨어져서 그렇지. "그, 그게... 라비스가 폐하께 꼬리를 칠까봐." "……." 미카엔이 아무 말이 없자, 세리아는 더욱 겁을 집어먹었지만 조금전 미카엔과 나의 로맨틱 한 현장에 더욱 집착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녀는 다시 그것을 따져 들었다. "폐하! 조금 전... 그것은... 그 행동은, 둘이서 설마 ...하려던 것은 아니지요?" "설마 무엇을 말이요?" "그러니깐, 그게 그것이... 그..." 세리아의 얼굴을 붉어져서 말을 재대로 하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키스'라는 말이 그토록 어 려웠던 것일까? 나는 내심 그녀가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미카엔의 얼굴을 슬쩍 보니, 그의 얼굴엔 점차 짜증이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으휴~ 정말 못됐군! '쯔쯧~ 저렇게 재대로 말도 못할 거면, 아예 말을 꺼내지 말지! 그래 봤자, 그녀의 왕비로 서 당당하지 못함과 위엄이 없음은 미카엔으로서는 탐탁지 못하게 생각하게 될 텐데.' 그녀에게 하대를 쓰지 않는 것으로 해서, 앞으로 왕비가 될 그녀를 존중해주고는 있지만, 앞으로 부인될 여자인데, 미카엔은 너무 냉정하고도 짓궂은 태도를 보이는 것 같았다. 저 러다, 세리아를 울리게 될지 심히 걱정스러웠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 할 것 같았다. "세리아님! 용서하십시오. 저는 폐하께 비서관으로서 보고를 하러 들어온 것인데, 조금 전에 창문을 통해 날아들어온 한 마리의 박쥐로 인해, 제가 어리석게도 놀라여 넘어질 뻔했습 니다. 그것을 본 폐하께서 감사하게도 저를 붙잡아주셨는데, 그때 세리아님이 들어오셔서 오해를 하신 듯 합니다. 이것은 저의 불찰이니 용서하십시오!"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그녀는 지금 바보같은 자신 의 모습을 수습하는 것과 왕비로서 체통을 깎이지 않기 위해서는, 내 변명을 믿기지 않아도 믿어야만 했다. 게다가, 나는 지금 미카엔 대신 그녀가 의심을 품은 상황 설명을 해주고 있으니, 그녀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믿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리고는, 현명한 그녀라면 나중에 나에게 따로 닥달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세리아는 머뭇머뭇거렸다. 갑자기 박쥐가 날아와서 넘어질 뻔한 나를, 미카엔이 잽싸게 다 가와서 그렇게 부축하며 끌어안고 있었다? 참으로 그녀로선 믿기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확실한 증거물인 박쥐가 코빼기도 안보이니... "닥쳐! 내가 그런 황당한 변명을 믿을 것 같아? 폐하에게 꼬리나 치는 천박한 계집 주제 에!" 저 소녀는 '꼬리를 친다'와 '천박한 계집'이라는 말을 아~주 즐겨 쓰는 듯 하였다. 지금, 그 녀는 미카엔에게 미움받을 짓만 골라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 것인지... 미카엔은 적어도 자신의 왕비가 될 여자가 사랑스러운 여인이 아니더라도, 당당하고 현명한 여자이길 바랄 것이다. 그리고, 공작식이나 되는 귀족가의 레이디가 교양있는 단어를 별로 즐겨 쓰지 않는다는 것은, 미카엔에게 점수 깎일 행동이었다. 음...나도 뭐, 교양있는 레 이디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녀는 미카엔이 아끼는 여자에게 그렇게 막말까지 하였으니... 그녀는 지금 자신의 체통을 깎는 행동과 미움을 버는 행동을 스스로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것도 아주 신나게(?)... 이러다, 내가 나서서 그녀를 돕는다는 것이 오히려 화를 불러일 으킨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내심 불안해졌다. "세리아, 당장 돌아가시오! 나는 지금 그대의 체면을 생각해서 험한 말은 하고 싶지 않소! 그리고, 그대는 아직 왕비가 아님을 명심하도록 해야 할 것이오! 아직 나의 그 무엇도 아닌 그대는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아직 상관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오! 내가 이 나라의 국왕 이라는 것을 잠시 망각한 잘못은 덮어두도록 할 테니... 돌아가서 자중하도록 하시오!" '상관할 권리가 없다!' 라니... 아직 부인이 아니다 하더라도, 앞으로 부인이 될 여자로서 상 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카엔은 다른 여느 약혼자들과는 다른 존재이니... 그는 왕이었다. 왕이란! 첩을 몇 명씩 거느려도, 심지어 할렘까지 거느리고 있어도 이렇다 할 반박을 못하는 존재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살았던 세계에서 지나온 역사 중에 오스만 제국이라는 나라... 그곳의 왕 궁인 톱카프 궁전 내부에서는 술탄을 위한 왕실의 여자들이 거처하는 할렘이 있었다고 들은 것이 언뜻 생각이 났다. 설마, 미카엔이 할렘까지 만들지는 않겠지만 바람을 피다가 부 인에게 걸려도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상황은 바람이라고 해야 할지 정의하기 가 난해하지만. '윽! 어째, 생각을 반복하다 보니 결론이 이상하게 나가는군.' 그렇게 내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네, 폐하." 세리아는 분노와 수치심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되어 나를 한번 매섭게 쏘아보고는, 미카엔에 게 그렇게 답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그리하여, 결국은 다시 미카엔과 단 둘이 남게 되었다. "저도 이만 가보..." 잽싸게 그에게 가야하겠다는 말을 꺼내자... "하던 일은 마저 끝내고 가야지?" "네? 뭐, 뭘요?" 나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 얼굴로 말까지 더듬으며 그에게 되물었다. "뭘 그렇게 놀라지? 아까 내가 말한 서류 정리 말이야!" [135] 체인지(Change) 제23화 -세리아의 질투- (4) -4- 비서관으로서 업무를 마치고 나의 침실로 돌아온 나는, 방으로 들어서자 마자 침대로 가서 쓰러져 누웠다. 왠지 오늘은 심적으로 피곤한 하루였다.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어서 스트 레스가 쌓였다. 하지만,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요즘들어 다시 꾸준히 마법력을 늘리는데 열심인 나는, 예전 미카엔이 준 빙계열의 마법적 잠재능력을 이끌어 내어 연마하였다. 그러자, 빙계열 마법들은 다른 여타 계열 마법보다 익히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다른 마법들은 4서클 능력의 레벨을 시전시키는 것도 불안전한데 반해서, 빙계열 마법은... "아자! 성공이다~!!" 나는 펄쩍 뛰어오르며 기쁨에 찬 외마디을 외쳤다. 드디어, 5서클 레벨의 빙계열 공격 마법 스펠을 완성시킨 것이다.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이것을 당장 시전해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후훗~! 그런데, 어디에다가 마법을 시전하지? 예전처럼 또 황태자궁의 지붕에다가 마법 을 날리는 실수는 하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베란다로 나가서 아젠샤르를 불렀다. 공중으로 날아올라가서 마법을 시전하기 위함이 었다. 나는 그렇게 기쁨으로 들떠 있었던 이유로, 누군가가 나를 은밀히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바람의 힘으로 왕성 위의 상공... 상당히 높이까지 올라간 나는, 아이스 윈드 마법 스펠을 외웠다. 그러자, 공기 중의 모든 수분 입자들이 날카로운 얼음 덩어리들로 화하여 바람과 함께 돌이 불 듯 어느 한방향으로 쏟아져 나갔다. 예전 미카엔이 마룡을 공격할 때 쓴 적 이 있던 빙계 공격마법... 이런 걸 내가 쓰게 되다니! 정말 멋진 일이었다. 비록 불안전한 5서클 레벨의 능력에서 머무는 아이스 윈드였지만. 내심 나에 대한 대견함과 뿌듯함으로 흐뭇해 하고 있는데, 이를 지켜보던 아젠샤르가 갑자 기 바람을 날리더니, 내가 일으킨 아이스 윈드의 범위를 아주 크게 확대시켰다. 게다가, 마법의 공격력보다는 겉멋에 중점을 둔 것처럼, 바람들을 멋지게 휘몰아치게 만들었다. 그렇게 되자, 내가 일으킨 아이스 윈드는 마치 7서클의 마법력을 가진 마법사가 시전한 것 처럼 위력이 무시무시해 보였고 멋지게 보였다. 물론, 실질적인 위력은 불안전한 5서클 레벨이었지만. 나는 아젠샤르를 향해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아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 아젠답지 않게 왠 아이스 쇼야? 우리 둘이 합작으로 누 구에게 선보이는 것도 아니고..." "훗~ 때론 보이지 않는 관람자를 위해 이렇게 쇼를 준비하는 것도 쓸 만한 일입니다. 라비 스님." 아젠샤르는 의미 불명한 낮은 웃음소리까지 내며 나에게 답했다. 요즘들어, 자주 웃는 아젠 샤르였다. 그나저나, 무슨 소리지? 보이지 않는 관람자를 위해 생쇼를 준비할 필요가 있 다고? 나는 미심쩍은 얼굴로 아젠샤르에게 눈길을 주었지만, 그는 더 이상 나에게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아주 황당한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제2의 프레야 왕비'라는 내용 이었다. 혹은 내가 카리스마 프레야 왕비의 재림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떠들어대는 이 들도 있었다. 내가 8서클 마스터인데 그 능력을 숨기고 있는 무서운 마법사라는 이들도 있어 , 나는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왕실 비서실로 출근하는 동안, 나는 흘끗대는 시녀 시종의 눈길과 지나가는 관리들의 시선 을 한몸에 받아야 했다. 대체 누가 저런 황당한 소문을 퍼뜨렸는지... 나는 속닥대며 지나가는 시녀들의 말소리를 듣기 위해, 청력 증폭마법 스펠을 나직이 중얼 거렸다. 그러자, 그녀들의 말소리가 고스란히 나의 귀로 들어왔다. "어제 루시가 새로 온 시종과 데이트하면서 들은 얘기라는데, 예전 폐하의 세 번째 측실인 라비스님이 사실은, 무시무시한 마법사이래!" "새로 온 시종? 아! 그 붉은 머리 남자 말이지? 그런데, 그게 정말이야?" 그제야, 나는 대충 소문의 범인들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아마도, 정령들이 이러한 짓을 꾸 민 듯 했다. 붉은 머리 남자란 아마도, 샤르인 듯 했고... 입이 그다지 무겁지 않은 정령인 샤르와 함께 리엔시타도 끼여 있을 것이 분명하였다. '이것들이, 시키지도 않는 짓을 벌이고 다니는 모양이군!' 나는 정령들이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이들을 어떻게 벌을 줘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때 누군가가 나의 길목을 막았다. "라비스! 너 무슨 간계를 꾸미고 있는 것이지? 폐하께 꼬리를 치더니 이젠 헛소문까지 퍼뜨 리는 거야? 당장 폐하에게서 떨어져! 그렇지 않다면, 내가 왕비가 되서 너부터 가만두지 않을 테니." 세리아는 일어나자 마자, 이 길목으로 달려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약간 부스스해 보 였다. "세리아님, 제가 폐하께 꼬리를 친다는 말은 삼가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그렇게 폐하를 유 혹할 작정이었다면, 무엇하러 측실의 신분을 버렸겠습니까?" "네가 다른 꿍궁이가 있는지 어떻게 알아? 건방진 계집 같으니!" "세리아님! 이곳엔 많은 시녀들과 시종이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의 처신을 생각해서 부디 목소리 좀 낮추시길..." "감히 왕비가 될 나에게 네 따위가 훈계하는 거얏! 오호라~ 네가 창피해서 그러지? 너의 더러운 수작이 드러날까봐? 더 큰목소리로 떠들어 주겠어! 넌 폐하에게 꼬리를 치고 헛소 문까지 퍼뜨려서 왕비 자리까지 넘보고 있어! 어림없는 소리! 너같은 천박하고 간악한 계집 이 왕비가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해? 호호호~ 나같은 고귀한 핏줄을 타고난 공작가에서만 왕비가 될 수 있다고! 꿈깨! 얼굴만 믿고 폐하를 넘보다니!!" '에구구... 말이 안통한다.' 나는 그녀의 말에 화가 난다기 보다는, 그녀가 안쓰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의 외침에 지나가는 시녀들과 시종들이 수군거렸다. 그때, 또다른 누군가가 이쪽으로 뛰어왔다. 그는 세리아의 아버지인 베른 공작! 아마도, 지나가다가 -국왕 집무실을 향하는 듯 했다.- 세리아의 외침을 듣고 이곳으로 달려오는 모양이었다. "세리아! 여기서 뭐하는 것이냐? 왕비가 될 네가 몸가짐이 이게 뭐야? 어서 돌아가!" 그는 최대한 낮춘 목소리로 그녀를 꾸짖었다. 그러자, 세리아는 입이 앞으로 나오더니 볼멘 목소리로 그에게 외쳤다. "싫어요! 아빠도 라비스편을 드는 것은 아니죠? 난 얘한테 따질 것이 있단 말이에요!" 그러자, 베른 공작은 그런 어린아이 같은 발언을 하는 그녀를 무시하고 내쪽으로 고개를 돌 렸다. "크로시벨양! 가던 길을 마저 가게! 그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세리아를 거의 질질 끌고 가듯이 데리고 갔다. 그에게 끌려가지 않으 려고 용을 쓰는 세리아의 모습... 확실히 귀족가의 레이디로서는 망가진 모습이었다. 나는 베른 공작이 돌아서기 전, 그가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를 머리속에 기억하였다. 그리고는 , 조용한 곳으로 가서 예전 제이크에게 배웠던 엿보기 마법을 시전했다. 하지만, 그에게 배웠던 엿보기 마법의 원형이 아니라, 약간 응용한 형태의 엿보기 마법... 이 것은 장면까지 엿보는 것이 아니라, 소리만 엿듣는 것이다. 이것은 잡음까지 덩달아 듣게 될 청력 증폭마법과는 달리 깨끗하고 생생한 말소리를 엿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이점이 있었다. 게다가, 쓰게 될 마나도 적게 들고 상대 마법사가 있다면 그에게 들킬 염 려도 매우 적었다. 이렇게 유용한 엿보기 마법을 개발해 내다니, 제이크는 아마도 마법의 천재인 인재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내가 그 마법을 응용하여 부수적인 새로운 것까지 개발하다니... 나도 역시 천재! 아니지... 이러다 자만심이 들 거야! 그렇지 않아도 공주병 증세가 가끔씩 보여서 걱정인데.' 나는 엿보기 마법의 응용 형태인 마법 이름까지 새로이 지어났다. '엿듣기 마법'이라고... 일 명, 도청인 셈이다. 후훗~ 그러고 보니, 엿보기 마법을 개발한 원조 마법사 제이크, 그리고 본의 아니게 그의 제자가 된 엿듣기 마법의 창시자 라비스 크로시벨이 되는 셈이다. 어쨌든, 나는 조금전 기억해 둔 펜던트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법에 집중을 하였다. 그러자 베른 공작의 말소리가 나의 귓가에서만 맴돌 듯이 나직이 들려왔다. [세리아! 넌 대체 누굴 닮아서 그렇게 멍청한 것이냐? 네가 가만히 있어도 내가 너를 왕비 로 밀어줄 테니, 제발 말썽 좀 일으키지 말아! 그리고, 라비스에 대한 소문은 헛소문이 아 니야! 어제 밤에 내가 그녀에게 뛰어난 마법사 자객을 보냈는데, 그가 직접 목격을 했다. 그녀는 자신보다 한수 위인 마법을 쓰고 있었다고! 그는 겁을 먹고 다시 돌아왔지! 하긴, 큰일날 뻔 했어. 그녀가 그렇게 뛰어난 마법사인지도 모르고 그녀를 해하려 했다면, 오 히려 우리가 당했을 거야! 그리고, 우리가 라비스를 해하려 했다는 것이 폐하의 귀에 들 어가면 왕비 자리는 물건너 가는 거야. 그러니깐...] 내가 여기까지 엿듣고 있는데, 미카엔의 개인 비서관인 스미스가 나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뭐하나? 크로시벨양. 지각이야!" [136] 체인지(Change) 제23화 -세리아의 질투- (5) -5- 세리아로 인하여 아침에 지각까지 하고, 베른 공작이 나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아침으로 하루를 시작한 나는, 헛소문에 관계된 계속되는 황당함으로 인해, 내심 정령들의 소행에 이를 갈아야 했다. 왕실 비서실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 비서관들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었다. 그들은 엉뚱하게 도. 내가 마스터 마법력의 힘을 숨긴 폐하의 숨은 실력자로 믿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왕실 마법사로서의 지위가 아닌 한낱 보조 비서관으로서 일하는 것은 어떠한 보이지 않는 사정 이 있을 거라 결론을 지었다. 아니! 폐하의 명으로 자신들의 근무태도를 감시하러 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하는지, 내 앞에서는 평소 게으른 비서관들도 열심히 일을 하는 척을 하였다. '쳇~!! 속 보여요. 비서관님들~' 또한, 예전 내가 가출하여 몇 달간 서대륙에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내가 폐하의 명으로 해외로 파견되어 뭔가 극비에 관련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수군거리기도 하였다. 아마도, 인페르디아와 전쟁이 있었을 때 내가 아스탄샤군의 마법사를 지휘했던 일이 이곳의 정보망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생각을 하는 듯 했다. 정말 그들의 상상의 나래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끝없이 흘러가 나를 당혹 스럽게 하였다. 내가 헛소문임을 극구 부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지레 짐작은 멈추지 않았다. 정말 대단한 상상력들이었다. 그리고, 예전보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또한, 나에게 잘보이기 위한 그 들의 속보이는 노력이 조금씩 엿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흠... 나에게 잘보여 봤자 나올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설마, 이들도 내가 왕비가 될 지도 모른다고 믿는 것은 아닌지... 정식 비서관들이 한낱 보조 비서관인 나를 어려워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정말 웃긴 일이었지 만. 뭐, 나로서는 예전보다 조금더 편해졌다는 이점이 있어 좋았다. 그렇다고, 나는 임무를 게을리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의 그러한 태도를 이용하 여, 현재 비서실에서 이루어지는 업무의 내용을 전부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중요한 서 류들을... 보조 비서관이 다룰 수 없는 내용들을 내가 보게 되었고, 이것으로 인해 현재 미카엔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지 대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후훗~!! 미카엔이 하는 일이 내 시야 안에 있다니! 정말 재미있네~' 그리고, 나는 베른 공작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을 했다. 이대로 두면, 그는 또다른 수법으 로 나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세리아가 왕비가 되는 일에, 내가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었다. 만약, 미카엔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면, 그는 간단하게 파혼이라는 가문의 불명예스런 일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카엔에게 의존하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측실의 신분을 버리고 왕비 자리를 거절한 것이 무엇때문이었는데... 그리고 일을 조용하게 끝내고 싶었다. 미카엔이 고작 예전 측실이었던 여자에게 얽매여 공 작가의 레이디와 파혼했다는 말이 나오면, 그의 위신이 깎일 수도 있었다. 아마도, 높으신 귀족 나으리들이 그렇게 떠들어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데굴 데굴(?)... 으음, 표현이 조금 이상하군. '흠... 그렇다면, 세리아 그녀가 스스로 왕비의 위엄을 깎는 행동을 많이 하는 것이, 나중에 그녀가 파혼으로 인해 생길 파급이 적어지겠군. 뭐, 그녀는 지금까지 그러한 행동을 수없이 해왔으니... 남은 건 베른 공작인가?' 사실, 나는 누군가의 결혼을 깨뜨리는 것은 정말 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번 일은 내가 자초 한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약 이대로 그녀가 왕비가 된다면, 나는 그녀와 베른공작의 손에 언제 어디서, 아무도 모르게 죽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세리아가 왕비 가 되면 겉과 속이 다른 면모를 보이는 간악한 인물인 베른 공작이 귀족들 사이에서 권력 을 잡을 것이다. '에휴~ 세리아가 좀더 괜찮은 여자였다면, 나는 그녀를 끝까지 도와주었을 텐데...' 아무튼, 미카엔의 곁에 그런 인물이 있다는 것은 정말 마음에 안드는 일이었다. 물론, 미카 엔이 그런 인물에 휘둘리거나 그러지는 않겠지만, 그런 인물이 주위에 넘쳐나게 되고 게 다가, 그런 인물이 자신의 딸이 왕비라는 점을 이용한다면, 미카엔은 많은 방해를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리엔시타와 아멘시타를 불러 그녀에게 베른 공작의 뒷조사를 하도록 시켰다. 그는 간악한 인물인 만큼, 뭔가 많은 비리가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뭔가 커다란 검은 비리가 나오게 된다면, 나를 그것을 폭로하여 그가 왕비의 아버지가 될 자격을 없앨 작정이었다. 나는 그렇게 모든 일이 마무리 되자, 머리를 계속 굴리느라 열(?) 받았던 머리를 식힐 겸, 중앙궁성 밖으로 나가 후원을 산책했다. 이제 봄이 다가오는 듯, 마른 나무가지에서는 연녹색의 작은 싹이 조금씩 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결 부드러워진 실바람이 나의 금빛 머리카락을 가볍게 날리게 하였다. 날이 조금 따뜻해지자, 어디론가 놀러가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드는 것 같았다. '훗~ 이런 것으로 인해서 봄에, 바람 나는 이들이 꽤나 많다지?' 게다가, 지금은 한낮이라 그런지 햇살이 정말 부드럽고 따스했다. 어제밤에 별로 잠을 많이 못잤던 나는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나는 시녀나 시종들이 많이 지나다니지 않는 장소를 택해 그곳에 자리한 다음, 몸을 쉬었다. 그리고, 잠깐만 쉬려 했던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또다시 어린 라비스가 되어 있었다. 왜 이제는 꿈속에서 마저도 꼭 라비스로 서만 꿈을 꾸는지 알 수가 없었다. 꿈속에서 라비스로서 나의 어머니인 셀레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녀는 여전히 젊은 여인 의 모습을 하고는 나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말 현실에서 한번쯤 보고픈 그립고도 아 름다운 미소였다. 나는 아장 아장 불안한 걸음마로 그녀에게 다가가 포옥 안겼다. 그러자, 그녀에게 안기는 순간 나는 다시 원래 지금 나이인 18살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추워요! 엄마." 꿈이라서 그런지, 나는 그녀의 본래 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러운 어투로 그러한 아 리광이 섞인 단어가 잘도 나왔다. 그러자, 그녀는 나를 더욱 감싸안았다. 꿈인데도, 이렇게 실감나게 따스하고 포근하다니... 기분이 좋아진 나는 그녀에게 더욱 파고들었다. 그동안 너무 외로웠는데... 정령들인 친구가 있어도 나는 혼자인 느낌이었고, 나 홀로 이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에 고향이 그리 웠고, 나를 사랑해주는 이가 있어도 언제나 힘들기만 했던 나인데... 지금 이순간 만큼은 그 외로움이 잠시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꿈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어느새 주변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 안 잠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에구~!! 큰일났다. 스미스 비서관이 갑자기 증발해서 나타나지 않는 나를 찾았을 텐데... 난 땡땡이를 칠 생각이 없었는데... 히잉~ 앗! 이건?" 내가 몸을 일으키자, 아래로 떨어지는 화려한 디자인의 중세풍의 코트가 눈에 들어왔다. 나 는 그것을 집어들며 고개를 갸웃했다. "엥? 이건 미카엔이 입는 옷인 것 같은데, 이게 어째 여기에 와 있다지?" *오늘은 더욱 짧군요! 하지만, 오늘은 이만큼 분량의 글도 무지 쓰기 힘들었다는... [137] 체인지(Change) 제23화 -세리아의 질투- (6) -6- 루이스가 가져다 준 저녁으로 식사를 하며, 나는 곁에서 뭔가 바느질에 골몰하고 있는 루이 스에게 입을 열었다. "루이스! 크로시벨가에 어머니의 초상화 있지?" "네, 라비스님." "어머니의 초상화는 아버지의 침실에 걸려 있는 것 하나 뿐이야?" 나는 꿀이 살짝 발라진 빵을 베어물며 의자에 앉아있는 루이스에게 계속 질문을 했다. 루이 스는, 이곳에 와서 내가 어머니처럼 의지하고 있는 유일한 여인이었다. 물론, 그녀는 나의 친어머니처럼 잔소리가 심하고 때론 무서운 위압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녀가 나에게 대하는 평소의 자상한 모습은... 나를 한없이 편하게 해주었다. "네, 그런데요. 아! 라비스님도 마님의 초상화가 필요하겠군요." "응. 내 침실에 걸어 둘 어머니의 초상화가 필요한데, 그렇다면 말이야. 루이스, 유명하고 실력있는 화가를 구해서 어머니의 초상화 복사본을 그리도록 해줘!" "네, 그러죠! 그런데, 라비스님. 호호~ 아직도 라비스님은 어머니의 그늘에서 빠져나오시지 못하셨군요. 한동안 어머니를 찾지 않으시기에, 이제 라비스님도 나이가 들었구나~ 했는데, 결국, 어머니가 그리우신 거죠?" "하하,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사실, 라비스의 친모인 셀레나를 본적이 한번도 없는 나였지만, 나는 가끔가다가 나의 꿈에 출현하는 그녀로 인해, 그녀에 대한 알 수 없는 그리움 마저 생겨 있었다. 게다가 오늘 꿨던 꿈은... 그동안 묵은 나의 스트레스와 힘들었던 감정이 한번에 잊혀질 만큼, 너무 행 복하고 따뜻한 꿈이었다. 만약, 그런 셀레나가 나의 침실에서 비록 그림으로서 라도 항상 웃고 있다면, 그녀의 따뜻 한 미소로 인하여 나는 스스로 내가 행복하다고 체면을 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흠, 그나저나... 저 미카엔의 코트는..." 식사를 다 마친 나는, 침대위에 놓아둔 미카엔의 코트를 집어들었다. 아마도, 이 코트로 인 해 내가 잠에 들어있는 동안, 감기에 들지 않고 편안히 잘 수 있었던 것 같았다. "... 추위를 차단하는 보호 마법이라도 걸려 있나? 이거 덮었다고 그렇게 따뜻해질 수 있다 니! 마치, 진짜 사람의 체온 안에 있는 것처럼. 어쨌든, 미카엔에게 고맙다는 말은 해야 하겠지? 하지만... 자고 있는 나를 발견했으면, 이왕이면 깨우고 갈 것이지. 코트를 덮어주 고 그냥 가면 어떻게 해? 쳇!" 루이스는 내가 먹은 빈접시를 가지고 나갔고, 나는 다시 홀로 남아 미카엔의 코트를 들고 궁시렁거렸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곧, 고요함이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고운 빛으로 타오르고 있는 여러개의 촛불들... 그들 역시 말없이 나를 지켜보았다. 행복한 꿈을 잠시나마 꿀 수 있게 해주었던 미카엔의 코트에 나는 얼굴을 가만히 가져가 보 았다. 다음날 아침! 나는 한 마리의 비둘기로 내 침실의 창가로 날아온 아멘시타와, 리엔시타를 만나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라비스! 알아냈어~] 알아낸 정보가 많은 듯, 아멘시타는 약간 들떠서 쾌활한 목소리로 나에게 외쳤다. 그는 언 제부터인가, 나를 도현이라고 부르는 일이 없어졌다. 그래도, 나는 상관은 없었기에 창문을 열어 차갑지만 상쾌하기 짝이 없는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그런 그의 모습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멘시타는 곧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떠들어댔고, 리엔시타 역시 내앞으로 나타나 아멘 시타에게 질세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흐음, 둘이 경쟁하나? 아무튼, 베른 공작은 꽤나 화려한 비리를 가진 인물이었다. 여느 정치인이나 귀족들도 다 그러하겠지만, 베른 공작은 후후후... 이만하면 그를 매장시키고도 남을 듯한 비리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는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자신의 모든 것은 완벽하게 베일에 가리워 놓았겠지만, 훗~ 내 정령들의 눈까지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리엔시타는 그의 비리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물까지 나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아멘시타에게 의기양양하게 씨익 웃어보였는데, 그녀의 득의에 찬 미소로 인해 아 멘시타는 얼굴을 구겼다. 그나저나, 비둘기도 얼굴 표정을 구길 수 있었을까? 나는 그들의 기대에 호응하는 칭찬을 그들에게 아낌없이 해주었고 그들을 다시 돌려 보냈 다. 이제 남은 건...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폭로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소문까지 이용한다면 베른 공작은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나는 증거물과 함께 공작의 비리를 담은 내용을 양피지에 썼다. 물론, 나의 글씨체를 약간 변형하여 그것을 썼고, 수도의 수사 관청... 왕실과 상류 계층의 비리와 범죄를 수사하고 감시하는 관청에 익명으로서 보내기 위해, 내가 믿을 수 있는 인물인 루이스를 통하여 이것 을 보낼 사람을 물색했다. 정령들을 통해서 전달해도 되지만, 그곳에는 마법사도 있을 테니 정령의 기운을 감지할 것 이고, 그렇다면 이것을 보낸 발신자도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정령을 부리는 존재는 일반 마법사보다 더 희귀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의 존재는 감추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만약의 보복도 피할 수 있 을 테고, 내가 왕비 자리를 노려 이런 일을 꾸몄다는 말도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베른 공작은 귀족으로서는 가장 고귀한 공작이라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크지 않는 자잘한 비리라면 수사관청에서도 흐지부지 넘어갈 수 있었으나, 이번에 내가 폭로하게 될 그의 비리는 모두 엄청나고 간악한 것들이 많아 그냥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나는 예전 카이엔으로 인해, 안면이 있게 된 용병 길드로 루이스를 보냈다. 그곳이라면 자 신의 의뢰인도 발설하지 않을 것이고, 성공적으로 내용물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만한 대가는 받고서 말이다. 그리고 나서, 정령들에게 적절한 시기에 소문을 퍼뜨릴 것을 말하고 나서, 나는 비서실로 출근하였다. "에휴~ 오늘 스미스 비서관이 잔뜩 벼르고 있겠군! 어제는 말도 없이 땡땡이를 치더니, 오 늘도 지각을 하게 되었잖아?" 소문은 오후부터 조금씩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아침에 스미스 비서관에게 꾸중을 들었지만, 그는 생각만큼 그리 크게 질책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격 려하는 말을 했다. "크로시벨양! 나는 자네가 매우 성실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네. 어제와 오늘은 뭔가 사정이 있어서 근무를 태만하게 했을 수 있겠지! 게다가, 요즘 돌고 있는 소문으로 인해 신경도 많이 쓰이겠지? 어쨌든, 앞으로 열심히 하면 되니깐. 곧 자네도 정식 비서관으로 임명될 수 있을 걸세."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일거리를 많이 내주었는데 나는 군말없이 그 일거리를 받아야 만 했다. '쳇~ 결국은 산더미 같은 서류로서 나를 벌주는 셈이잖아?' 나는 시시각각으로 들려오는 소문에 귀를 기울였다. 훗~ 어제는 내가 제2의 프레야 왕비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더니, 오늘은 왕비가 될 세리아 집안에 대한 비리와, 세리아의 부덕함에 대한 내용이 시녀 시종들과 관리들 사이에서 급속하게 번져갔다. 그리고, 저녁 쯤에 관청에서 몇 명의 수사관이 나와 조사라는 것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모 두 세리아의 경망스러운 행동과 그녀가 나에 대한 질투로 인해 나은 결과들이었다. 만약, 그녀가 얌전하게 자신이 왕비가 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면, 나는 그녀가 왕비가 되 도록 도와주었을 것이고, 베른 공작에 대한 나쁜면들을 나는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곧, 파혼이라는 불명예스런 단어가 미카엔 뿐만 아니라, 귀족들 사이에서도 튀어나오겠군.' [138] 체인지(Change) 제23화 -세리아의 질투- (7) -7- 나는 저녁때 미카엔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코트를 돌려주기 위해서였다. 내가 집무실 문앞 으로 다가가자 그곳에서 시립해 있던, 나이든 시종은 나를 보며 아는 체를 하였다. "아! 저번에 오셨던 보조 비서관이시군요." 하긴, 그날 그렇게 혼을 뺐던 그였으니 나를 기억할 만도 했다. 아마도, 세리아 역시 마찬가 지일 거다. "네. 그런데, 지금 폐하를 뵐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는 사람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잠깐만 기다리라는 눈짓을 해보이고는, 미카엔에게 내가 왔음을 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카엔의 대답이 금방 들려왔다. "들어가시지요!" 그 시종은 그렇게 말하며 나직하게 안도의 기색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이번에도 미 카엔이 나를 들여보내는 것을 거절할 경우, 내가 또 시건방진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 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러한 그의 표정을 읽어내고는, 내심 그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던 터라 그에게 감사 하다는 표시로 생긋 웃어보였다. 그러자, 그 노시종은 얼굴을 붉혔다. 흠, 왜 얼굴을 붉히는 거지? 내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미카엔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저기... 폐하. 이거 폐하의 옷이 맞지요? 돌려드리기 위해 왔는데..." "……." 나는 내쪽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있는 미카엔에게 입을 열었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흐 음... 아무래도 나의 말은 씹힌 것 같았다. 나는 반듯하게 개어둔 코트를 적당한 장소에 놓아둔 다음, 그에게 가야 하겠다는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잠잘 때 침 흘리는 버릇만 있는 줄 알았는데, 잠꼬대도 잘 하더군." '헉! 저게 무슨 말이야?' 나는 얼굴을 붉혔다. 무지 쪽팔리는 일이었다. 윽! 침 흘리는 버릇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칠칠 맞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가 잠버릇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잠꼬대까지 한다는 것은 나도 몰랐던 일이었다. 그런데, 저 말을 갑자기 왜 꺼내는 것일까 ? 설마, 어제 내가 잠꼬대를 했던 것일까? "자, 잠꼬대요?" "그래. 어제 보니 네가 굉장히 불쌍한 포즈로 잠들어 있더군. 추운지 몸을 잔뜩 웅크리며 말 이야." 그렇게 말하며 내앞으로 다가온 그는 살짝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제의 너는 마치 길을 잃고 어미를 잃은 작은 새 같았었지. 나쁘게 말하면 불쌍해 보였다 고나 할까? 아! 이제 그만 나가봐야 되겠어. 지금 왕실 최고 관리들과 회의가 있거든."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에게 불쌍해 보인다는 말에 충격을 받고 있 던 나는, 빠르게 입을 다시 열며 나가려는 그를 붙잡았다. "혹시! 세리아님에 대한 문제로 회의를 하시나 보죠?" 그러자, 그는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잘 아는군!" "...그게 소문이 무성하더군요. 그래서 폐하께서 그런 문제로 회의를 여실 거라 생각했어요." 미카엔은 가만히 나의 눈을 응시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슬쩍 외면하였다. "그렇겠지... 나는 여러 중신들과 논의한 후에, 그녀가 왕비로 간택되는 것을 다시 결정하려 고 해. 그리고, 너는 이번 일에서 그만 손을 떼도록 해!" 그 순간 나는 너무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손을 떼라니? 이번 일 배후에 내가 있다는 것을 미카엔은 알고 있는 것일까? "폐하?" 나도 모르게 떨리는 음성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나직하게 웃어보이더니 나에 게 말했다. "요즘들어 왕성 안에서 정령들의 활동이 부척 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여기서 멈추지 않고 네가 더욱 나서게 된다면, 너는 위험을 불러들일 지도 몰라. 너는 아직 스스로를 방 어할 만한 신분과 직위가 없으니깐. 어쨌든, 나는 정말 놀랐어! 네가 이렇게까지 일을 추 진하고 있었을 줄은... 너에게 관심을 계속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나도 네가 하는 일을 조 금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네 정령들은 그만큼 은밀히 움직였으니깐." "그... 그럼, 폐하께서는 이번 일을 꾸민 저를 처벌하실 건가요?" "이번 일로 내가 너를 처벌해야 할 이유는 없지. 하지만, 나는 네가 이와 같은 일은 더 이상 안했으면 좋겠어. 훗~ 그러고 보니, 무모할 정도로 큰일을 너 혼자서 벌이곤 했지. 그 리고... 어제 새삼 깨달은 건데... 너 보기보다 글레머 이더군!" "에엑!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후훗~ 글쎄! 단순한 칭찬이니, 그렇게 얼굴 붉히지 말라고! 그럼, 나중에 보도록... 오늘도 좋은 꿈 꾸고, 또 엄마 찾지 말고... 쿡쿡!"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집무실 밖을 나갔다. 아마도, 지금 중신들과 하게 될 회의로 인하여 세리아와 베른 공작가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를 그대로 왕비로 맞아야 하는지, 아니면 그녀와는 파혼하고 다른 집안의 영애를 왕비로 맞아야 하는지에 대한 찬반 이 갈릴 것이다. 그나저나, 나는 조금 약이 올랐다. 결국,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쉽 게 내가 하는 일을 알고 있었다니! 그리고... 윽~! 정말, 창피한 것은 둘째 치고 그가 너무 얄미웠다. '미카엔~! 바보!! 에잇~! 나도 바보!! 이렇게 바보같은 모습만 그에게 보이다니... 나는 언 제쯤에야 그보다 한발 앞설 수 있을까?' 미카엔의 집무실을 나온 나는 왠지 허탈해진 심정으로 내 침실로 향했다. 그때, 누군가가 나의 앞으로 가로막았다. 으음... 붉은 머리 소녀, 역시나 세리아였다. 누군가 내가 지나갈 길목에서 기다려 주는 이가 있다니... 이거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어디서 오는 거야? 또 폐하께 꼬리치고 오는 거지? 흑! 이젠 난 끝장이야! 지금 나를 처단 할 내용의 회의가 열리고 있지! 어때? 넌 고소해 하고 있지? 이젠 네가 왕비 자리를 노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야!" 있지도 않은 꼬리... 어째서, 나를 볼때마다 꼬리를 친다는 표현을 쓰는 것인지... 세리아의 단어 선택 능력은 '꼬리를 친다!' 라는 것이 한계인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세리아님! 세리아님은 폐하를 사랑하시나요? 아니면, 왕비 자리가 목적이신 가요? 세리아 님은 어째서 이렇듯 저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시는 거지요? 저는 어차피 고귀한 존재가 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행동에 반성을 하시고, 자중하는 모습 을 보이십시오! 세리아님은 베른 공작가의 두 번째 따님이시자, 돌아가신 황태자비님의 여동생이십니다." 음, 내가 너무 냉정하게 말한 것일까? 그녀의 기분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닌데... 위로라 도... "캬악~!! 네 따위가 나에게 훈계를 해? 그 따위 훈계는 지겨워!! 언니랑 비교당하는 것도 지겨워!!" 그녀는 갑자기 흥분을 하더니, 나에게 돌진을 했다. '허걱!' 그녀는 나의 머리카락을 쥐고 잡아뜯기 시작했다. 정말 여자에게 머리카락이 뽑히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정말 되게 아팠다. 숱많은 나의 머리카락이 얼마나 뽑혔 을까? 오늘 저녁은 쪽팔리는 일이 연달아 일어나서 정말이지 서글펐다. 이렇게 일진이 사나울 수 가! "꺄악~! 세리아님." 그녀가 흥분을 못이기고는 나를 세게 밀자, 나는 미처 대응을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그리 고, 융단이나 그 밖의 부드러운 것이 전혀 깔리지 않는 딱딱한 궁성 복도의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139] 체인지(Change) 제24화 -유령 소동!- (1) (유령 소동!) -1- 바닥에 머리를 부딪힌 순간, 나는 아무런 사고도 할 수가 없었다. 세리아의 찢어질 듯한 비 명소리가 들리는 듯 했지만, 왠지 아득하게 들렸다.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것일까? 무슨 끔찍한 일이라도 목격한 것일까? 나는 머리가 아프다는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숨이 가프고 몽롱했다. 나의 황금빛 머 리카락은 부분적으로 붉은 빛으로 물들어 갔다. 세리아의 비명소리로 인하여 주위에 있던 기사나 시종들이 이곳으로 달려왔지만, 나는 만사가 다 귀찮다고 생각했다. 그냥 편안히 잠이나 자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제대로 된 의식이 있었다면, 이광경에... 마치 내가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영화 속에 비운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착각을 일으켰을 것이다. 나는 꿈속을 헤매었다. 요즘들어 꿈을 자주 꾸는 나였다. 아마도 내가 잠을 너무 많이 자서 그런 것이 아닌가, 내 나름대로 추측을 해보았다. 나는 크로시벨가의 후원에서 그네를 타고 있었다. 후원은 온통 녹색빛과 드문드문 섞인 다 양한 빛깔의 꽃잎들로 인해 정말 아름다웠다. 처음에 나는 혼자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나 중에 보니, 누군가가 나의 등을 밀어주고 있었다. "라비스! 재미있니? 엄마가 이렇게 그네를 태워주니깐, 정말 재미있지?" 나의 등을 살며시 밀어주고 있는 이는 라비스의 어머니인 셀레나였다. 그녀는 여전히 20대 중반 정도나 되어보이는 젊은 여성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예전처럼 어린 아이의 모 습으로 있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18살의 소녀였다. 누가 보면 자매로 생각할 듯한 모녀지간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네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가 서보였다. 그녀는 나와 같은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지 고 있었고 굉장한 미인이었지만, 인상은 나와는 다르게 좀더 성숙해 보였고 화려한 아름 다움보다는 자애로움이 더욱 짙어보였다. 게다가, 그녀는 나보다 키가 약간 작은 모습이었다. "엄마?" "그래. 사랑스러운 나의 딸! 여전히 예쁘구나." 키는 내가 더 큰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를 여전히 5살 먹은 어린 아이 취급을 했다. 그녀 의 눈에는 내가 여전히 어린 아이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나를 연신 쓰다듬으며 볼에 키스를 해댔다. 그런데 그때, 또 다른 누구가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라비스!" 왠지 익숙한 목소리... "아멘시타?"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곳엔 고양이나 작은 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녹색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앳띤 소년의 모습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이제 십대 중반정도 되어보이는 귀여운 소년의 모습이었다. "기회가 왔어! 라비스. 다시 이도현으로 돌아갈 기회 말이야." "뭐엇? 다시 돌아간다고? 너 아멘시타 맞아?" "응! 내가 아멘시타야. 가자. 내가 데려다 줄게! 네가 이도현으로 돌아가는 순간, 라비스는 사라지게 될 거야." 그의 말에 나는 머뭇거렸다. 이도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동안 내가 바래왔던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찝찝하고 뭔가 잊어버린 듯한 느낌에, 나는 자꾸 망설 여졌다. "안돼!! 내 딸을 절대 못데려가! 라비스는 내 딸이야!" 앙칼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셀레나를 돌아보니, 그녀는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놓치지 않으려는 듯, 나를 꼬옥 끌어안았다. "셀레나님! 죄송하지만, 셀레나님께서 지금 안고 계시는 분은 라비스님이 아니십니다." "아니얏! 라비스는 내 딸이야! 절대 못데려가! 흑~! 절대로... 라비스, 넌 내 딸 맞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나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왠지 난감한 상황... 하지만, 그녀에게 나는 라비스가 아니니 돌아가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 래도, 나는 나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는데... "라비스! 엄마를 버리지마. 엄마 딸이 아니라고 말하지마. 엄마는 라비스가 행복해지는 것을 보고 싶어. 엄마는 항상 너를 지켜보고 싶어." 그녀의 비명과도 같은 말소리에 나는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엄마! 전 엄마의 딸이에요. 울지 마세요." 나도 정신 나간 것이 분명했다. 비록 꿈속이라지만, 라비스의 어머니가 저렇게 매달리며 운 다고 나의 갈길을 부정하고 그녀에게 내가 라비스라고 말하다니! 아무튼, 내가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는 순간 셀레나의 울음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나를 지켜보던 아멘시타와 크로시벨가의 후원이 흐트러지듯 조금씩 사라져갔다. 나는 눈을 뜨지는 않았지만, 나의 의식은 꿈이 아닌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주위에서 소란 스러운 음향들이 메아리 치듯 들려왔다. "앗! 폐하! 폐하! 라비스님께서 숨을 다시 쉬십니다. 라비스님의 의식이 다시 돌아오셨어 요!" 호들갑스런 킬린의 목소리였다.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흥분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비스? 정신이 들어? 눈을 떠봐!" '그렇지 않아도 눈을 뜨려고 노력을 하고 있으니, 너무 보채지마! 미카엔.' 나는 속으로 그에게 말하고는 힘들게 눈을 떠보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해쓱한 얼굴을 하고 있던 미카엔의 얼굴은 금세 펴지며 매우 기쁜 얼굴을 해보였다. "아! 다행이야~ 라비스. 네가 다시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다." 미카엔은 내가 눈을 뜬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지, 평소 그의 침착한 모습답지 않게 감정이 고조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미카엔이 나를 보며 기뻐하든 흥분을 하든 나는 두통이 너무 심하였고, 속은 미싯거렸으며 어지러운데다가 구토증이 심하게 올라왔기 때문에 그에 게 관심을 둘 여력이 없었다. "우욱~!" 나는 구역질을 하며, 추한 꼴을 보이지 않기 위해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러자, 잠시 밝 아진 얼굴을 하고 있던 미카엔은 다시 사색이 되며, 옆에 있던 킬린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킬린! 라비스가 왜 저러는 거지? 라비스는 의식만 차리면 별문제는 없다고 했잖아?!" "그게... 라비스님은 뇌진탕으로 인하여 잠시 두통과 구토 증세를 보일 수 있습니다. 안정만 취하신다면, 곧 나아지리라 사려됩니다." 킬린은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며, 나의 증상에 대해 설명을 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구토를 할 것만 같았던 나는 그의 설명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 론티아 정령에게 신성력으로서 치유를 하게 했는데도, 아직 그 증상이 남아있단 말인 가?" "그, 그게... 신성력이란 겉의 상처만 치유한 것이라, 뇌진탕의 후유증이 나으려면 절대적인 안정이..." "흐음, 그래. 안정이란 말이지? 그럼, 모두 나가도록! 라비스는 안정을 취해야 하니..." 킬린은 손수건으로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미카엔의 말에 답하다가, 이제 그만 나가보라는 말에 얼굴빛에 희색이 돌았다. 아마도, 지금까지 어지간히 닥달을 당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킬린을 비롯한 몇몇 보조 의사들, 그리고 시녀 시종이 썰물 빠지듯 방을 나가자, 주 위는 금세 고요해졌고 나는 그나마 두통이 덜해지는 것을 느꼈다. 구토증도 처음보다는 조금은 가라앉은 듯 했다. 하지만... '왜 미카엔은 안나가는 건데? 절대적인 안정이라면... 너도 나가야 하잖아?' 나는 마음속의 의문을 담은 눈빛을 그에게 해보이며 미카엔도 얼른 나가길 기대했다. 그러 나, 그는 그러한 나의 눈빛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은 듯, 내가 누운 침대에 걸터 앉으며 입을 열었다. "라비스! 넌 두시간 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어. 그리고 머리에 가해졌던 충격이 컸던 모양인 지, 아까는 몇분동안 호흡과 맥박이 멈추었지. 나는 이대로 네가 다시 눈을 뜨지 못할까봐 정말 두려웠어. 세리아가 그러한 짓을 저지르다니... 휴~ 모두 내 불찰이다."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폐하! 세리아님이 무슨 짓을 저질렀나요? 아! 그러고 보니... 실랑이를 벌이다가." "흠, 킬린이 말하기를 건망증 증세도 보일 수 있다고 그러더니, 지금 라비스는 뭔가 불안정 한 것 같군. 편히 쉬어! 내가 계속 곁에 있을 것이니..." "아니요! 됐어요. 여긴 폐하의 침실이신 것 같은데, 전 제가 머무는 곳에서 쉬어야 하겠어 요. 간호는 아마 루이스가 해줄 거예요." 그러자, 미카엔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려는 나를 제지했다. "넌 지금 쇠약해져 있는 상태이니 섣불리 몸을 움직이지 말고 여기서 쉬어! 네 침실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하는데..." "그래도 제 침실로 돌아가겠어요. 전 제 침실에서 루이스의 간호를 받아야 안정이 된다구 요!" "정말 희한한 체질이군. 내 침실에서 내 보살핌을 받으면 안정이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 렇게까지 무리해가면서 너의 침실로 돌아가려 하다니! 고집불통!" 구겨지는 미카엔의 인상에, 나는 뭔가 약간의 연기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페하! 저에게는 안정이 필요... 우욱~!" 다시 구토 증세를 일으키는 모습을 해보였다. 그러자, 그의 얼굴은 다시 해쓱해지며 다시 킬린을 부르려는 태도를 취하자, 나는 재빨리 그에게 말했다. "폐하! 전 제 침실로 돌아가야 괜찮아지고 금방 안정이 될 것 같으니... 제 의지를 고집이라 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자, 미카엔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었는지 나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라비스, 너 방금 일부로 그랬던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욱! 빨리 안정을 취해야..." 나는 다시 헛구역질을 하며, 현기증이 이는 듯 약간 비틀거리는 부수적인 행동까지 취해보 였다. 그러자, 미카엔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나의 손목을 잡더니 공간 이동 시동어를 나직이 외쳤다. 그러자, 나와 미카엔은 나의 침실에 있는 침대 위로 이동하게 되었다. 꽤나 편리한... 아! 그 러고 보니, 미카엔은 짧은 거리 이동은 나를 데리고서도 힘들지 않게 공간 이동을 할 수 있었다. "폐하. 전 제 침실로 오기 위해서 그다지 무리를 할 필요가 없었네요?" "하하... 그렇군! 내가 잠시 공간 이동이라는 편리한 마법을 깜박했거든." 미카엔은 그렇게 말하더니, 나를 침대에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 세리아와의 파혼 발표가 있을 거야. 아까 저녁에 그러한 사고까지 친 그녀를 옹호하 던 이들도 더 이상 그녀를 왕비로 내세우는 말을 꺼내지 못할 거다. 하지만, 죽은 황태자 비에게는 정말 미안한 생각이 드는군." [140] 체인지(Change) 제24화 -유령 소동!- (2) -2- 미카엔이 돌아가고, 다시 혼자 남게 된 나는, 루이스를 부르지 않고 그냥 침대에 누워있었 다. 사실, 아까 잠을 실컷 잤던 셈이니 잠도 더 이상 오지 않았고, 이대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끼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엥? 누구지? 루이스인가?' 나는 문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하지만 짙은 어둠으로 인하여 나는 누가 방을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루이스?" 치마 끄는 소리가 나길래, 나는 루이스일 거라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쪽에선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 존재는 그곳에서 못박힌 듯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빛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법 스펠을 외우려 했다. 하지만, 나는 문득 두통이 느껴지며 가장 기초적이라 할 수 있는 라이트 마법 스펠이 생 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하였다. 내가 마법 스펠을 까먹다니! "누구야? 들어왔으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냐?" "……." 보이지 않는 그것은 그저 그 자리에 우뚝 서있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알 수 없는 공포심을 안겨다 주었다. 원래 인간이란, 보이지 않는 사물에 근원적인 공포심을 갖기 마련이었다. 결국, 나는 정령의 이름을 불렀다. "샤르! 샤르!" 불의 정령이라면, 이곳을 밝힐 수 있을 테지... 하지만, 샤르는 나의 부름에도 내앞에 나타나 지 않았다. 그러자, 나는 더욱 당황하였다. 샤르가 왜 이곳을 나타나지 않는지 나는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그러다, 이곳이 궁성 안임을 간신히 떠올렸다. 내가 궁성 안에서 정령들을 부르면 그들은 나의 부름을 듣지 못했다. '아! 내가 머리를 다쳐서 바보가 되었나? 왜 이렇게 망각하고 있는 것들이 많지?' 나는 촛불을 찾기 위해 몸을 일으켰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침대에서 나와 일 어서려는 순간, 바닥에 고꾸라졌다. 에구구~! '흑! 이럴 줄 알았으면, 루이스를 불러놓던가, 미카엔의 방에 그냥 있을 걸.' 나는 침대 옆에 있는 끈을 잡아당기면 옆방에 있는 루이스가 나의 부름을 받고 이곳으로 올 수 있다는 것까지 미처 생각을 하지 못하며, 간신히 몸을 일으켜 촛불을 찾으려 했다. 왜 그렇게 촛불에만 의지를 하려 했는지... 나도 정말 바보 같았다. 그때! 끼익~ 쾅! 갑자기 방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고, 깜짝 놀란 나는 다시 주저앉아야만 했다. 그 러다 마침 서랍 안에 초가 한 개 있는 것을 발견하긴 했는데, 이것을 어떻게 불을 밝혀야 하는지 방도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이곳에도 성냥이나 라이터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것을 찾았던 나를 맘속으로 자책했다. '젠장~! 내가 왜 이렇게 겁을 먹고 있지? 몬스터를 만나도 겁을 먹지 않았던 나인데, 설마 유령이라도 나타난 것이겠어? 내 정령들 중 하나가 장난을 친 것일 수도...' 나는 장난을 치고 있을, 어둠에 가리워진 그 존재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그 존재의 어두 운 빛의 실루엣이 점점 드러났다. 그곳에 서있는 존재는 젊은 여자인 듯 했다. 귀족들이나 왕족들이 입을 만한 성하고 화려한 선을 가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나는 더욱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 존재의 정체를 알아본 나는 그대로 얼어붙은 듯 멈추어 서야 했다. "화, 황태자비?" 붉은 머리카락에 가냘픈 얼굴선을 가진,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듯한 그 얼굴은 분명 죽은 황 태자비였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 그리고 두 눈에서는 피눈물인지 피인지 알 수 없는 붉은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순간 숨이 막히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잊고 그 자리에 기절을 하고 말았 다. 다시 얼마쯤 시간이 흘렀는지... 내가 의식이 들었을 때는 아주 익숙한 상황이 재연되고 있 었다. "흐흐흑! 라비스님. 왜 이렇게 안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인지... 패앵~!! 흐흑~! 라비스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루이스가 옆에서 통곡하는 소리... 내가 이세계에 처음 올 무렵에도, 미카엔의 측실이 된지 얼마 안되었을 때도 이러한 상황이 있었고, 그녀는 내가 이렇게 정신이 들 때마다 내옆에서 코를 풀며 통곡을 하고 있었다. "루이스?" "앗! 라비스님. 정신이 드세요? 라비스님! 대체 문앞에서 왜 기절을 하고 계셨던 거예요? 뭔가 필요한 것이 있으셨으면, 저를 부르시지." "루이스. 나 새벽즈음에 죽은 황태자비를 봤어! 루이스는 못믿겠지만, 아무튼 정말 그녀였 어. 누가 장난쳤던 것일까?" 그러자 루이스는 굳어진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방금, 황태자비 전하라고 하셨어요?" "응. 아무래도, 내가 허약해져서 그런 헛것을 본 것이겠지?" "라비스님! 세상에~ 어제 밤에 황태자비 전하를 목격했다는 시녀들이 몇몇이 있어서, 설마 했는데... 라비스님도 그분을 보셨다는 말씀이세요?" 그녀의 말에 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럼, 내가 본 것이 헛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때, 문이 열리며 한 시녀가 무언가를 들고 조심스레 들어왔다. 그녀는 결이 좋은 백금발 을 길게 늘어뜨린 소녀였는데, 화려한 느낌은 들지 않았으나 꽤나 미인 축에 드는 소녀 였다. 나는 여려 보이는 그녀의 외모에 내심 감탄을 하며,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황태 자비나 세리아와 많이 닮은 호박색 눈동자가 나의 눈에 들어왔다. "죽을 가져왔으니 드세요. 라비스님." "아! 고마워요. 그런데, 처음 보는 얼굴이군요." 그러자, 그녀는 생긋 웃어보이며 나에게 답했다. "전 '마리'라고 해요. 어제 새로 들어온 시녀랍니다." 그녀의 대답을 듣다가, 나는 갑자기 세리아에 대한 생각이 미쳤다. 그녀가 어찌되었을지 궁 금하여 나는 루이스에게 물었다. "루이스! 세리아님은 어찌 되었지?" 내가 그렇게 묻자, 근처에 서있던 마리는 미미하게 움찔하였으나 나는 그녀의 그러한 반응 에 대해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리아님은 파혼 당하셨어요. 그리고 폐하께서 베른 공작의 작위를 박탈하실지도 모른다고 누가 그러더군요. 하지만, 폐하는 베른 공작이 예전 황태자비의 아버지인 점을 감안해서 어쩌면 큰 벌을 내리시지는 않을 것 같더군요. 요즘, 황태자비님이 자신의 아버지와 여동생 이 그렇게 된 것을 슬퍼해서 이곳 왕성을 떠돈다는 소문이 돌고 있거든요." [141] 체인지(Change) 제24화 -유령 소동!- (3) -3- 황태자비 유령의 출몰에 대한 입소문은 금세 왕성 안을 떠돌고 있었고, 몸이 좋지 않은 관 계로 비서실로 출근하지 않은 나는, 침실에서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머리를 부딪힌 후유증으로 건망증과 기억력이 무척 감퇴되어, 그것을 걱정한 나는 쉬는 동 안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야, 기억력이나 몽롱한 정신 상태 같은 것이 빨리 회복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두통은 가끔씩 계속되었고 컨 디션은 아침부터 바닥을 기었다. 루이스가 가져온, 고운 천으로 포장된 셀레나의 초상화를 풀어본 순간! 그 초상화의 얼굴 부분이 칼로 심하게 난도질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화를 참지 못했고 스트레스로 인하여 더욱 두통이 심해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나는 시녀와 시종들을 닥달하여 셀레나의 초상화가 이곳까지 거쳐온 경로를 조사하였으나, 뚜렷이 의심이 가는 인물은 없었다. 정말 울적한 하루였다. 나는 침대에서 뒹굴뒹굴 하며 시간이나 떼울, '로히얀스의 역사 이야기'라는 책을 펼쳐들었 다. 지금은 머리가 너무 아파서 마법 공부 같은 것은 엄두도 내기 힘들었다. 똑, 똑! 노크 소리... 아마도, 루이스이거나 시녀 중 하나일 것이다. "누구야?" "마리입니다. 라비스님." "들어와!" 그녀는 시녀라는 신분이니, 초면 이후로는 반말을 쓰기 시작한 나였다. 사실, 그녀는 왠지 알 수 없는 아이라는 느낌이 드는 소녀였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 이유는... 마리는 조용하고 여성스러우며 얼굴이 예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가 마음에 드는 그러한 이유가 나의 이도현일적 버릇이 남아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마음에 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이성으로서 마음에 든다는 것은 결코 아 니었다. 이제는 내가 마음에 들어야 할 이성은 여성이 아닌 남성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도 잘알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마리가 친해지고 싶은 존재로서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나도 프리실라 만큼은 아니지만, 예쁜 사람들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예쁜 소녀, 예쁜 소년, 예쁜 아기들 등등... 하지만, 예쁜(?) 노인은... 그것은 좀... 존경해야 하나? 이런! 내가 헛소리를, 아니! 망상을 했군. 마리는 고소한 냄새가 나는 쿠키와 차를 들고 왔다. 그녀의 치마 끄는 소리가 가볍게 들려 왔지만, 그녀의 발 디디는 소리... 기척은 거의 느껴지지가 않았다. "라비스님의 기분이 우울하신 것 같아서, 간식 좀 가지고 왔어요." "고마워! 마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잘 구워진 쿠키 하나를 집어들어 조금 베어 물었다. 그러자, 쿠키는 바삭! 하며 부서져 나의 입안에서 녹아들었다. 꽤 맛이 좋은 쿠키였다. "라비스님은 정말 좋으시겠어요." "응?" 문득 입을 여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라비스님은 굉장한 미인이시고, 폐하의 사랑을 받고 계시잖아요?" "그건... 마리도 미인인데? 그리고, 폐하의 사랑을 받는다는 건... 이제 그의 측실도 부인도 아닌 내가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아! 마리." "아니요! 라비스님은 정말 미의 여신도 질투하실 만큼 아름다우세요! 저하고는 비교가 안되 지요. 아! 그런데,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지요? 황태자비 전하가 피눈물을 흘리시며 나타나신다는데, 정말 불쌍하신 것 같아요. 자신의 동생과 아버지가 하루 아침에 가여운 신세가 되셨으니... 그렇게 피눈물을 흘리시며 이곳 왕성에서 떠도시는 것이 당연해요. 누 가 그런 못된 짓을 했을까요? 아마도, 베른 공작님께도 누군가 모함을 했을 것이 분명해요!" 나는 조용한 줄만 알았던 그녀의 입에서 끝도 없이 말이 흘러나오자, 약간 의외라고 생각했 다. 게다가, 저렇듯 베른 공작가를 옹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니! 아무튼, 그녀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 계속 이어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말과 생각에 도취되어 있 는 듯 했다. "사실, 황태자비 전하만큼 기품있고 우아하신 분은 없었죠! 비록 프레야 왕비님 만큼 왕족 으로 카리스마를 가지시진 못하셨지만, 전 그분을 존경해요! 폐하의 정실 부인이 되실 분은, 그분 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한답니다." 그녀는 그렇게 혼자 흥분하며 말하다가, 자신을 뚫어질 듯 바라보는 나의 황금빛 눈동자를 보고는 문득 자신이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아! 하는 탄성음을 내뱉고는 빠르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라비스님 외에는 폐하의 부인이 되실 분은 안계시죠. 호호." 나는 그녀에 대한 차분한 모습의 이미지가 산산조각이 되는 것을 느끼며, 그녀를 따라 겸연 쩍게 웃어보였다. "그런데, 마리는 왕성에 들어온 것이 처음이라면서 어떻게 황태자비 전하에 대해 잘알고 있 어?" 그러자, 마리는 약간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그녀 나름대로 표정관리를 하며 무표정을 고수하려 했지만, 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나는 이래봬도 표정 읽기의 명수... 가끔, 내가 아무 생각이 없을 경우, 나는 한없이 둔해지기도 하지만, 내가 신경을 곤두세운다면 미카엔 만큼 날카로워지기도 했다. 으음... 미카엔 만큼이라... 내심 내가 자랑스러워지는 기분이 드는 이유는 뭘까? "그, 그건... 제가 황태자비 전하를 동경해서 그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제가 아는 언니가 황태자궁의 시녀였어요. 저는 그때부터 왕성의 시녀가 되는 것을 꿈꾸어 왔 었죠!" 그녀는 임기응변 실력 역시 뛰어난 편인 듯 했다. "응. 그랬었구나! 그런데, 이번 소문은 뭔가 시기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마치 누군가 일부로 퍼뜨린 것처럼. 베른 공작에 대한 폐하의 처결이 내려질 무렵에, 황태자비 전하에 대한 소문이 돌다니! 이렇게 된다면, 황태자비 전하에게 미안함과 안타까운 감정을 가지 고 있는 폐하는 그들에게 그다지 커다란 벌을 내리지 못할걸?" "글쎄요. 전 우둔해서 그것까지는 잘모르겠네요." 나는 '마치 누군가 일부로...'에 은연 중에 강세를 두어 말하고는, 그녀의 표정을 자세히 살 폈으나 한번 당황한 직후로는 자신을 컨트롤하는 것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지, 그녀는 평범한 시녀 행세를 무리없이 해나갔다. 하지만, 나는 이대로 덮어두기에는 그녀가 왠지 꺼림직 했다. 게다가, 아침에 셀레나 초상화가 찢긴 것을 생각하자면... 그것은 나를 시중드는 시녀나 시 중들 중, 하나가 누구의 사주를 받거나 자신의 의지로서, 그러한 못된 짓을 저질렀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녀를 내보내고 나서, 잠시 더 뒹굴뒹굴하다가 궁성을 나와 정령들을 불렀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리엔시타에게 마리를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다, 봄의 기운이 며칠 전보다 물씬 풍기는 바깥의 공기에 나는 후원으로 걸음을 했다. 아직 꽃이 만발하지 않았지만, 이제 곧 후원에는 꽃들이 가득 피어날 듯 했다. 복잡한 일만 없다면, 기분 좋을 하루... "꺄하하~! 꺄르르~" 어디서 간드러지는 소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익숙한 음성에 나는 호기심이 동하여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폐하! 그게 정말인가요? 호호." '폐하? 폐하라고?' 나는 문득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래도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이니깐 조금더 가까 이 다가가 보았다. 물론,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곧, 나의 눈에 두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한명은 미카엔... 그리고 다른 한명은 마리. 미카엔은 후원에서 잠시 쉬고 있는 듯, 적당한 장소에 앉아있었고, 마리는 그의 옆에 붙어 서 온갖 애교를 다 떨고 있었다. 웬만한 남자들은 모두 홀려버릴 듯이. 그런데... 앗! 마리가 대담하게도 미카엔에게 안겨들었다. 조금씩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결국은 자연 스럽게(?) 그에게 안겨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키스해주세요! 폐하." 엄청 대담한 말... 나로서는 온몸에 닭살이 돋고 심한 거부감이 드는 발언이었다. 그나저나, '마리'라는 소녀는 두 얼굴을 가진 소녀가 아닐까, 생각했다. 어쩜 저렇게 사람이 달라보일 수가 있는 건지... 나와는 다른 의미로 정말 가증스러운 소녀였다. 갑자기 기분이 잡친 나는, 그대로 몸을 홱~! 돌려 나의 침실로 돌아왔다. 보나마나, 미카엔 은 그녀에게 키스를 했을 것이다. 미소녀가 저렇듯 달콤하게 유혹해 오는데, 그걸 거절할 남자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기분 나빠하고 있는 거지? 미카엔은 한 나라의 왕이니 시녀랑 놀 아날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그러다가 덜컥 첩을 맞아들이는 경우도 있는 법인데...' [142] 체인지(Change) 제24화 -유령 소동!- (4) -4- 침실로 돌아가던 나는, 우울한 마음을 다스리며 모든걸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렇게 계속 우울해 하다가는 안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으로 인해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나는 침실로 향하던 발길을 돌렸다. 마리는 뭔가 베른 공작와 연관이 있어 보였다. 나는 마리가 혹시 베른 공작가에서 일하던 시녀나 아니면, 그의 집안을 봐주고 있는 여성 모략가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시녀의 도움으로 세리아가 머물고 있는 침실까지 찾아갔다. 세리아를 통하여 뭔가 알 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였다. 완전한 처결이 있을 때까지 당분간 근신하고 있을 세리아의 침실 방문 앞에 선 나는, 방문 을 노크하였다. 내심, 그녀가 또 나의 머리카락을 잡아뜯지 않을까 겁이 나기도 했다. 나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했다. 잠시 후, 방문이 열렸고 세리아 대신 어떤 시녀가 얼굴을 내밀었다. "세리아님을 뵈러 왔는데요." "지금 세리아님은 편찮으셔서 만나실 수 없습니다." 평범한 갈색머리를 한 여인이 무표정하고도 기계적인 표정으로 나의 말에 답했다. "세리아님과 중요한 할 말이 있어서 온거예요. 세리아님께 말씀드려 주세요. 전 라비스 크로 시벨입니다." "아! 크로시벨님이셨군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하고는 안으로 들어가더니, 다시 금세 모습을 드러내어 나에게 입을 열었다. "들어오시랍니다. 그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들어갈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고는, 내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밖으로 나가며 천천히 방문을 닫았다. 나는 왠지 어둠침침하게 느껴지는 방안 깊숙이 들어가 세리아가 있는 침대로 걸어갔다. 그 녀는 내가 들어오자 부스스 몸을 일으켰고 쾡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 사이에 반송장이 되어있는 그녀였다. "세리아님. 몸이 많이 안좋아보이시는 군요." 그러자 그녀는 혈색이 없어 검푸르게 변한 입술을 열어, 심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나에게 말 했다. 그녀의 눈은 굉장히 겁에 질린 듯한 모습이었다. "언... 니가 찾아왔어! 언니가... 죽은 언니가 나를 찾아와서 나를 죽이려 해! 나를 죽일 거 야! 내가 왕비가 되려 했다고 나를 죽이려 해!" 약간 제정신이 아닌 듯한 그녀의 모습에 나는 크게 놀라며 세리아에게 입을 열었다. "세리아님!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황태자비 전하께서 세리아님에게도 나타나셨나요? 그녀 가 세리아님께 무슨 협박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정신 차리세요! 그녀는 세리아님의 언니가 아니예요! 그건 누군가 못된 장난을 치는 거라구요!" "아니얏! 언니가 맞아!" "세리아님!" 내가 그녀의 이름을 그렇게 외치는데, 그녀가 갑자기 커헉! 하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놀라며 그녀를 일으켰지만, 세리아는 검은빛이 도는 피를 토한 채로 눈이 뒤집혀 있었다. "이런!... 독을 당한 건가?"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어, 방밖을 뛰쳐나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누구 없어요?! 아무나 와줘요!!" 그렇게 세리아가 독살된 직후,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흑발 머리에 매우 신경질적으로 생긴 한 수사관에 의해 여러 가지 조사를 받고 있었 다. 지금 나는 세리아를 독살한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이다. 정말 눈물이 다 나오려 했다. "그때, 왜 그방으로 갔었죠?" "왜 날 의심하는 거죠? 때마침 그방에 들어가서 그녀의 죽음을 목격한 것으로 이렇게 누명 까지 써야 하나요?" "수사에 협조해 주십시오! 당신은 왕비 자리를 노려 그러한 일을 저질렀다는..." "당신 바보 아냐? 내가 만약 세리아님을 독살할 생각이었다면, 뭐하러 그렇게 소리를 지르 며 난리 법석을 떨었겠어? 그냥 조용히 그 방을 나왔겠지! 그리고, 그녀는 이미 파혼당해 있는데, 뭐하러 그녀를 죽인단 말야?!!" 나는 분통이 터져 그에게 그렇게 소리를 지르자, 그는 날카롭고도 신경질적인 면이 다분해 보이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글쎄요. 혹시 모르죠! 의심을 받지 않게 위해 일부로 그렇게 행동했었을 수도... 게다가, 그 녀는 이미 파혼을 당해 더 이상 위험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뭔가 당신의 비밀을 알고 있어서 독살을 했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그 방에는 당신 혼자 뿐이었다는 겁니다. 멀쩡하 던 그녀가 당신이 들어간 직후, 그렇게 되었으니... 우선적으로 당신은 첫 번째 용의자가 되는 것이니, 성실한 자세로 조사에 응해주십시오! 그래야 당신이 죄가 없다면 누명이 풀릴 것이 아닙니까?" 감정이 거의 들어가지 않은 듯한 그의 목소리에 나는 한 대 치고 싶던 마음도 그 의욕을 잃 고 수그러들고 말았다. 결국, 될대로 되라는 식의 포기 어린 마음이 들은 나는, 그에게 힘 없이 입을 열었다. "난... 요즘 떠돌고 있는 황태자비 유령에 대해 그녀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 찾아갔어요. 나는 유령 행세를 하고 있는 그 누군가를 대충 의심하고 있었거든요. 처음 내가 그곳에 찾아갔을 때는 세리아를 돌보고 있는 시녀 한명이 있었어요..." 결국, 나는 그에게 사실대로 모두 말하기 시작했다. 이젠 성질을 내며 그와 실랑이를 벌일 기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나의 얘기를 묵묵히 경청했다. 한동안 나의 진술을 듣던 그는 내가 말을 마치고 입을 다물자, 그는 계속 신경질적인 표정을 짓고 있 던 딱딱한 표정을 풀고 나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솔직하게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비스님. 당신이 죄가 없다면, 누명은 곧 풀릴 것입 니다. 아! 그리고, 이제부터는 누군가와의 접촉도 왠만하면 피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처음 그는 나에게 와서 자신을 '그랜트'라고 소개 를 했었다. 그는 백작가의 자제로서 상류층의 엘리트 수사관이라고 누군가에게 언뜻 들은 것 같았다. 아무튼, 그랜트는 방을 나갔고 나는 의기소침해저서 침실의 침대에 얼굴을 묻고는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나는 혹시 미카엔이 찾아오지 않을까 했으나 그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그 역시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그는 내가 저번에 베른 공작가를 매장시키는 일을 벌였던 것도 알고 있으니, 어쩌면 나를 의심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가 왕비 자리를 노렸을 리가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제엔장~!! 이 따위 세계는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아! 돌아가고 싶어! 엿 같아! 이젠 미카엔 이고 뭐고 다 필요없어!" 나는 이세계에 온 이후, 처음으로 환멸을 느껴야 했다. 예전에는 막연하게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던 나였는데, 이제는 경멸스럽고 저주스럽기까지 했다. 계속되는 스트레스와 수 난으로 인해, 나는 쌓였던 것이 점차 폭발할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라비스님? 너무 상심해 하지 마세요." 언제 방으로 들어왔는지, 마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흠칫 놀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은은한 미소를 띤 그녀의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매섭게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 기척도 없이 들어오다니, 꼭 네가 유령처럼 보이는군!" "호호... 제가 기척없이 들어와서 기분이 상하셨나요? 라비스님. 지금 후원으로 나가보세요! 폐하께서 라비스님을 찾으십니다." "왜 네가 그런 말을 전하는 거지? 그리고, 내가 왜 후원으로 나가야 돼?" "그거야, 폐하께서는 지금 후원에 계시거든요. 지금까지 저랑 줄곧 같이 계시다가, 라비스님 의 일을 듣고 저를 보내신 거예요. 그럼, 저는 말을 전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는 그녀의 말이 미심쩍었으나, 미카엔이 지금 후원에 있다는 것은 사실인 듯하여 나가보 기로 했다. 아까 내가 미카엔이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을 직접 보기까지 했으니, 거짓은 아닐 듯 했다. 물론, 아직까지 그가 후원에 있다는 것은 이상했지만. 게다가, 지금은 머리가 너무 아팠다. 오늘은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더니, 두통이 매우 극심해져 있었다. 뇌진탕 후유증이 아직도 안가셔서 그런지 머리쓰는 것도 많이 둔해진 것 같았다. 나는 후원으로 나가보았으나, 미카엔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그제서야 뭔가 이상 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바보 같이 속은 내 자신을 탓했다. 나는 황급히 궁성 안으로 발길을 돌렸으나,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라비스님!" 어느 소속인지는 모르지만, 왕실 기사의 갑옷을 걸친 한 청년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눈 에 들어왔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라비스님이 저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는 줄은 몰랐습니다." "네?" 그는 상기된 얼굴로 나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저에게 보내신 편지 잘 읽었습니다. 라비스님께서 왕비 자리를 거절하신 것도 저 때문이셨 다니, 저로서는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아니! 저게 무슨 헛소리야? 난 저녀석 처음 보는데...' 나는 경계의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으나, 그는 내 눈빛의 의미 따윈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그는 열정적인 모습으로 더욱 나에게 다가오며 계속 말을 이었다. "저 역시, 라비스님을 처음 본 순간부터 제 목숨처럼 라비스님을 사랑했습니다." "그게 무슨 헛... 어엇!"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가까이 다가와서는 나를 거세게 끌어안았다. 제길! 오늘따라 왜 이렇게 황당한 일만 일어나는지... 그때, 나를 안고 있는 기사의 등뒤로 미카엔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으잇~! 이거 놔! 망할 자식아!" 나는 몸을 비틀어 그의 몸을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그때! 스르릉~ 소름끼치게 날이 선 검이 뽑아져 나오는 소리가 들리며, 그 번쩍이는 검이 그 기사의 목을 겨냥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떨어져! 그렇지 않으면, 네 목이 날아갈 것이다." [143] 체인지(Change) 제24화 -유령 소동!- (5) -5- "떨어져! 그렇지 않으면, 네 목이 날아갈 것이다." 서릿발 서린 미카엔의 목소리가 나직한 음성임에도 불구하고 무지 무섭게 들렸다. 나를 안 고 있던 기사는 나를 놓더니, 창백해진 얼굴로 미카엔을 바라보았다. "폐하!" 그는 미카엔 앞에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나도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건가?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미카엔에게 의심받을 일이 한 가지 더 추가되는 셈이잖아?' 나 역시 창백해진 얼굴로 어느 한 장소에 눈길을 주다가, 우연히 이곳을 바라보는 마리와 마주쳤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어보이더니, 태연한 얼굴로 걸음을 옮겨 중앙 궁성안으로 가버렸다. 나는 그녀를 쏘아보다가, 미카엔의 눈길을 느끼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폐하. 전 마리에게 폐하께서 저를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는 이곳으로 나왔던 건데..." 나는 그에게 이 상황을 변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에게 이러한 변명을 해야 하는 것 이 정말 싫었지만, 그래도 미카엔의 얼굴이 저렇듯 살벌하니 나를 위해서 변명은 해야할 듯 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자 미카엔 앞에서 조아리고 있던 그 이름모를 기사는 눈 을 동그랗게 뜨며 나에게 외쳤다. "라비스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라비스님께서 저에게 이곳으로 나오라는 편지를 주신 것은 무엇이죠?" "난 편지 같은 것은 쓴 적이 없어요!" "저를 사랑하신다고 고백하시는 말을 편지로 써서 저에게 보내셨지 않습니까?" "뭐... 뭐라구요?" 나는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가 않았다. 내가 얼굴도 모르는 기사에게 사랑을 고백 하는 편지를 썼다니! 이런 유치하고도 진부한 상황이 지금 나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폐하께 감히 한마디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라비스님은 더 이상 폐하의 측실이 아 니십니다. 라비스님께서 무엇을 하시든 폐하께서 관여하실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건방짐을 질책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당당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전 라비스님을 정식 아내 로 맞아들이고 싶습니다." 나는 이것이 꿈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황당한 일이 나에게 일어날 리 가 없었다. 생전 처음보는 녀석이 떡하니 나타나서 미카엔에게 나를 부인으로 맞겠다고 선언을 하다니! 내 주위에 저런 정신나간 녀석이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미카엔에게 다시 눈길을 주었다. 그의 가지런한 한쪽 눈썹이 꿈틀하는 것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뭔가 커다란 일이 터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 나는 우선 나의 누명부터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젠장! 나는 당신을 모른다구요! 나는 편지를 보낸 적도 없고, 당신의 부인이 될 생각도 추 호도 없으니 당장 그 헛소리 좀 집어치워요!!" 나의 험한 말에 그 기사는 눈이 더욱 커져서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래도 나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저 기사 역시, 그 나름대로 불쌍한 위치에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폐하! 아마도, 이곳에는 마리의 수작으로 오게 되었겠지요? 정말 실망했어요! 게 다가, 아까는 마리와 놀아났던..."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 역시, 미카엔이 마리와 놀아나든 말든 내 가 따질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분노와 흥분으로 인하여 붉게 물들은 얼굴로 입술을 살며시 깨물고는, 이 자리를 뜨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거기 서! 라비스. 내가 너보고 가도 좋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미카엔의 말에 나는 다시 그에게 몸을 돌리고는 그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미카엔은 나를 불러세워 놓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발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기사에게 눈길을 주었다. 미카엔은 자신의 장검을 다시 칼집에 넣고는 그에게 입을 열었다. 아까와는 달리 말투가 많 이 풀어져 있었다. "용기가 가상한 젊은이로군! 감히 내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다니 말이야. 하긴, 라 비스 정도면 네가 목숨을 내놓을만 하겠지? 그녀는 가만히 앉아서도 남자들을 홀리는 여 자이니... 라비스를 아내로 맞겠다고 했나? 쿡~! 네 그 결심에 대해서는 나도 이해하지!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그것을 허락못한다. 라비스는... 내 여자이니깐!" '헉! 저렇게 낯 뜨거운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하긴, 미카엔은 여지껏 닭살 발언을 아주 당연하게 써왔었지... 엔카루스와는 다른 의미로 얼굴 두꺼운 녀석이야!' 이제는 부인도 측실도 아닌 나를 자기 여자라고 우기고 있는 미카엔의 발언에, 그 기사는 매우 억울한 듯한 얼굴 표정을 해보였으나, 감히 미카엔의 말을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만 떨구었다. "흐음... 그나저나, 라비스가 연애 편지를 얼마나 잘 썼는지 한번 보아도 될까?" 미카엔은 그렇게 말하며 기사에게 편지를 내놓으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기사는 잠시 망설이더니, 마치 소중한 것을 감추어둔 것처럼 자신의 품안에 넣어둔 고이 접은 종 이를 미카엔에게 내주었다. 미카엔은 그것을 읽었고 잠시 후, 그는 이렇다 저렇다 할 말도 없이 기사와 나를 보내주었 다. 나는 그가 오해를 푼 것인지 아니면, 언짢은 기분을 참고 태연한 척을 하고 있는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나에게 이렇듯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이 너무 불안하였다. 다시 나의 침실로 돌아온 나는, 지금까지 바보같이 당해온 나에게 화가 치밀었다. 하루 아 침에 살인 용의자가 되고, 처음보는 기사에게서 황당한 프로포즈나 듣고... 얼마나 멍청했 으면 그렇게 단 하루만에 철저하게 당한단 말인가? 아무리, 내가 몸이 안좋았다고 해도. 나는 머리를 빗기 위해 화장대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을 보니, 며칠 사이에 더욱 야위어 있 었다. 하지만, 나의 외모는... 여전히 내가 보고 있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아름다움이 보석 처럼 빛을 발했다. 벌써 이세계에 온지 일년 가까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사이 나의 모습은 약간 성숙해 있었 고, 조금 더 야위어 있었다. 그리고... 그저 화려한 외모였던 나의 모습은 절대적인 아름다 움으로 나의 몸에, 신성 오오라처럼 빛을 발하며 군림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내가 전혀 가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빛을 발하는 아름다움이라니... 참으로 신기 한 외모였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에 그렇게 멍해져 있는데, 방안에서 리엔시타의 기운이 느껴지기 시 작했다. 요즘 들어서는, 나의 정령들의 기운이 어설프게나마 느껴지기 시작한 나였다. "라비스! 알아냈어! 정말이지 나는 너무 유능한 것 같아!" 리엔시타의 흥분한 목소리... 알아낸 결과가 꽤 되는지 그녀는 그렇게 자화자찬을 했다. 나 는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리엔! 여기서 말하지 말고 글씨로 써! 이곳엔 옅듣는 보이지 않는 귀가 있을지도 몰라!" 그러자, 리엔시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가져다가 그곳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라비스! 마리는 네 짐작대로 평범한 시녀가 아니었어. 그녀는 베른 공작의 딸이자, 황태자 비의 이복 동생... 물론, 그녀는 베른 공작의 첩 소생이야. 그녀는 매우 어렸을 때 집을 나 와서 어디에서 흑마법을 익혔던 것 같아. 최근에는 어떤 흑마녀의 제자가 되어 무서운 흑 마법을 익혔다고 하는데... 그 흑마녀가 누군인지는 잘 모르겠어.」 리엔시타가 쓴 내용에 나는 놀라며 종이에다가 글을 썼다. 「그렇다면, 세리아와는 이복 자매이잖아? 그렇다면, 세리아를 죽인 것이 그녀가 아니란 말 이야?」 그러자, 리엔시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글을 썼다. 「마리는 보통 여자가 아닌 것 같아. 사실,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은 마족 여자 키리아에게 다가가는 것 만큼이나 어려워서 그녀가 이번 일을 주도했는지 그것까지는 알 수가 없 었어!」 마리가 흑마법사라면... 능력이 대단한 여자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녀가 곁에 있어도 어두운 기운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나 혼자 상대하기 벅찬 존 재였다. 물론, 그녀는 키리아만큼 무서운 존재는 아니겠지만, 어떤면에서는 키리아보다 상 대하기 까다로운 존재였다. 키리아는 마족이라는 점 때문에, 미카엔이나 내가 그녀의 강한 어두운 기운을 느끼게 되기 마련인데, 마리는 인간 마법사인지라 그녀가 자신의 기운을 감추는 능력이 뛰어나다면, 그녀를 상대하기가 매우 불편하였다. 만약 그녀가 이번 일을 모두 주도했다면, 그녀가 대체 원하는 일이 무엇일지 짐작을 해보았 다. 그녀는 아마도, 왕비 자리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베른 공작의 뒷배 경으로서... 그녀는 첩의 딸이라고 하나, 베른 공작이 그녀를 정식 딸로서 인정하기만 하면, 그녀는 왕비가 될 자격이 충분히 주어졌다. 그렇다면, 베른 공작은 자신의 두 번째 딸인 세리아를 대신하여 자신의 권력 도구가 되어줄 마리를 왕비로 내세우려는 속셈이 있는 듯 했다. 정말 무서운 작자였다. 세리아가 왕비가 되는 것이 실패하자, 이제는 자신에게 걸림돌이 되 는 세리아를 죽게 하고, 마리를 내세우다니! 나는 베른 공작과 마리의 간악함에 치를 떨 었다. "이제야 알겠어! 정말 너무하는군." 나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주먹을 꽉 쥐어보였다. 권력 다툼에 희생양이 된 세리아가 새삼 가여워졌다. '모든 원흉은 나야! 내가 왕비 자리를 거절하지만 않았어도, 이러한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몰라.' 나는 입술을 깨물며 리엔시타에게 다시 글을 적었다. 「리엔! 정령들을 불러줘! 은밀하게! 나는 이 일을 바로잡을 거야!」 [144] 체인지(Change) 제24화 -유령 소동!- (6) -6- 자정이 가까오는 야심한 시각... 나는 정령들과 침대 위에 모여앉아서 쑥덕대었다. 아니, 글 씨로 쓰는 대화였으니, 쑥덕대었다는 표현은 맞지 않겠군! 아무튼, 나는 정령들과 함께 베른 공작가를 어떻게 벌주어야 할지 작당 모의를 하였다. 이렇게 글씨로서 필요한 말만 서로 하게되니, 우리 모두는 진지하게 논의를 나눌 수가 있었 다. 그렇지 않다면, 샤르와 리엔시타는 말싸움으로 논의는커녕 분위기만 난장판으로 만들 었을 것이다. 그들은 글씨로서 그들의 끝없는 말싸움을 한다면, 부지런히 팔을 놀려야 할 테니. 게다가, 종이는 부족하고... 이곳의 종이는 꽤 귀한 편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상류계층에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서민들 중에서는 종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 어쨌든... 「...그럼, 우리도 당한 것만큼 똑같이 되돌려 주자!」 「똑같이 되돌려 주자니? 어떻게?」 「마리가 아마도, 황태자비 유령 행세를 했을 거 아냐? 그렇다면, 우리도 황태자비 유령 행 세를 해서 저들을 놀라게 해주자구!」 리엔시타의 의견에 우리는 잠시 침묵을 지켜야 했다. 과연 저 발언이 현명한 방법이 될지 아니면 멍청하고 유치한 방법 중 하나가 될지, 나는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샤르가 리엔시타를 바라보며 혀를 쯔쯧 찼다. 그는 아마도, 리엔시타가 또 황당한 생각을 한 것이라 판단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젠샤르는 달랐다. 그는 평소 진지한 얼굴이 더욱 진지해져서 종이 위에 자신의 의견을 쓰기 시작했다. 보기와는 다르게, 물흐르는 듯한 예쁜 글씨체가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와는 반대로 샤르는 흘림체였다. 그는 바람의 정령도 아닌데, 글씨가 마치 바람의 형태처럼 마구 날아 다니는 형상를 취하고 있었다. 정말 알아보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리고, 리엔시타는 여성스럽고 평이한 글씨체였고 나는... 으음, 말하기 싫군! 여전히 악필 이었다. 샤르와 막상막하였다. 물론, 루이스가 가져다 놓은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 멘시타는 글씨를 쓰지 못했기 때문에, 전음으로서 우리에게 의사를 전달하였다. 어쨌든, 아젠샤르는 글씨를 썼다. 「리엔이 말한 방법도 잘만 이용한다면, 좋은 방법이 되겠군요. 물론, 이 방법을 쓰자면 우 리는 완벽하게 해야 하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똑같이 유령 놀음을 한 우리는 바보가 될 테니. 베른 공작이 마법사가 아닌 점과 그에게 조금이라도 있을 죄책감과 양심을 이용하도 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젠샤르의 글을 본 아멘시타는 그를 동조하고 나섰다. [그것도 괜찮을 방법인 것 같네! 라비스. 그렇다면, 내가 황태자비에 대해서 자세히 조사할 게. 그녀의 어린 시절이나 사소한 버릇까지도... 그래야, 베른 공작을 속일 수 있겠지! 네가 황태자비가 되는 거야!] 「내가?」 [그래! 너 연기 잘하는 편이잖아? 황태자비가 죽어서도 자신의 이름이 이용되고, 자신의 여 동생이 희생된 것을 슬퍼하여 자신의 아버지에게 나타나 그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 괜 찮지 않아?] 아멘시타의 말에 나는 잠시 망설였다. 과연, 정령들의 말대로 이 방법이 통할지는 미지수였 다. 하지만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다. '이 어설픈 방법이 통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은 완벽해야 하겠지? 사람의 불완전한 심리를 이용하는 방법이라... 잘만 한다면,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 될 거야!' 결국, 나는 아멘시타를 베른 공작가로 보냈다. 그가, 베른 공작가의 동식물들의 기억들을 모 조리 다 읽는다면, 황태자비의 사소한 것과 어린 시절까지 충분히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리엔시타를 아까 나에게 프로포즈를 했던 황당한 기사에게 보냈다. 그에 대해서도 조사를 하는 것이 좋을 듯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리아를 돌보고 있던 그 정체 불명의 시녀도 알아보게 하였다. 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친 몸을 쉬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아젠샤르는 나의 침대 곁을 지키도록 명했다. 혹시, 마리가 이곳을 찾아오게 될 가능성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정령들에게 일거리를 내주었지만, 샤르에게는 시킬 일이 없어서 그는 그냥 보 냈다. 그는 자신만 왕따시킨다고 무척이나 투덜대었지만, 너무도 피곤했던 나는 그의 불 평을 관심있게 들어주지 못했다. 물론,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나는 침대의 이불속에 파고들며 눈을 감았지만, 너무 피곤한 탓인지 오히려 잠이 잘 오지가 않았다. 결국,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자 아젠샤르는 나의 침대 맡에 앉아서는, 아주 나직한 음성으로 자장가 비슷한 노래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그의 노래는 언제나 잔잔한 느낌이었다. 왠지 심신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의 노래에 나는 거짓말처럼 잠이 스르르 들기 시작했다. 가끔 스치듯 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흐음... 내가 아젠에게 아기 취급 당하는군. 뭐,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으니깐! 가끔 이렇 게 아젠을 애용해야지!' 그러고 보니, 아젠샤르의 역할이 하나 더 추가된 셈이었다. 여름에는 시원한 에어컨, 불면의 밤에는 자장가로서... 후훗~! 그 다음날 이른 아침!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루이스에 의해서 거칠게 깨워졌다. 그녀는 내가 늦잠 자는 꼴 을 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오늘 아침은 특히나 일어나기 힘들었던 나는, 루이스가 나를 깨우는 평소의 방법으로도 침 대에서 버티며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것이 그만 화를 불러 일으켰다. "루이스~ 5분만 잘게! 부탁이야~" 이것은 내가 아침나절에 그녀에게 읊는 지겨운 멘트였다. "어림없어요! 라비스님. 벌써 제가 20분째 깨우고 있다는 거 몰라요? 모름지기 교양있고 품 위있는 레이디는 일찍 일어나서 아침 운동으로 승마도 하고 자신을 꾸미기도 해야 하는데, 대체 라비스님은 언제 철이 드실 건가요?" "에엑~ 철 같은 건 안들어도 돼!" 그러자, 루이스의 핏대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심 쫄은 나였지만, 지금은 달콤한 5분의 수면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다시 잠을 청하며 이불속으로 파고 드는데... 내가 둘둘 말고 있는 이불이 어디론가 끌려가기 시작했다. "……?" 나는 이불과 함께 점점 침대를 이탈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우앗~!"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나는 볼썽 사나운 꼴이 되어 부드러운 이불과 함께 뒤엉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루이스를 찌릿~! 노려보았다. "루이스! 내 유모 맞아? 히잉~ 이건 너무 하잖아?" "호호~ 이젠 잠이 깨신 것 같군요! 어서 일어나서 씻고 몸을 단정하게 있어야지요. 마리에 게 시켜서 아침 식사를 가져오게 할게요!" "안돼에~! 이건 명령이야! 마리는 앞으로 내 침실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 나는 그녀에게 눈을 부라리며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체인지(Change) 제24화 -유령 소동!- (7) -7- 오늘도 몸이 안좋다는 이유로 비서실로 출근하지 않는 나... 오늘 하루도 많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침식사를 간단히 마친 나는, 루이스 에게 나의 침실로 아무도 들이지 못하도록 말을 해놓은 뒤, 리엔시타의 보고를 받았다. 그녀는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얼른 말하고 싶어 못견디겠다는 듯이, 서둘러 종이에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라비스! 아직까지 그 기사에 대해 특별히 알아낸 것은 없지만, 세리아를 돌보던 그 시녀 는 말이야! 뭔가 이상한 주술에 걸려 있는 것 같아.」 「주술? 무슨 주술? 나는 그녀를 잠깐 봤을 때는 특별히 이상한 점을 못느꼈었는데...」 「그래! 나도 처음에는 별다른 이상한 점을 못느꼈었는데, 계속 관찰하다 보니 이상한 점이 느껴지더라구!」 「그게 뭔데?」 내가 표정을 심각하게 바꾸고는 그녀가 답변글을 기다리자, 리엔시타는 신이 나는지 빠르게 글을 써내려갔다. 「그녀는 이상하리 만큼, 표정이 없고 기계적이야! 그래서, 좀더 면밀히 그녀를 살펴보았지. 그러다,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그녀가 문득 문득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명령이나 메시지라도 듣는 듯,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는 행동을 하는 거야. 게다가, 그녀의 눈 초점은 풀려 있고.. . 아무튼, 이상해! 물론, 그녀는 마리와 전혀 접촉을 갖지 않았지만, 혹시 모르지! 보이 지 않는 접촉을 계속적으로 가져왔는지...」 하긴, 리엔시타의 글을 보고나니, 나도 그 시녀를 잠깐 보았을 때 그녀가 감정이 결핍되어 있어보였고, 약간 기계적이라고 느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는 그저, 무딘 감정을 가진 사 람이려니 생각했지만, 리엔시타의 말을 들어보니 이상한 점이 느껴지기도 했다. 게다가, 그녀는 처음엔 세리아가 몸이 안좋다는 이유로 내가 그녀를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가, 내 이름을 듣고는 금세 태도를 바꾸어 세리아에게 내가 온 것을 알렸다. 나는 이러한 가정을 해볼 수가 있었다. 그녀는 마리의 명령으로, 내가 세리아를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물론, 그 시간에 마리는 미카엔과 후원에 있었지만 마리는 그 시녀를 조종하여, 내가 세리아를 찾아갔을 때, 그녀를 독살하도록 명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 시녀는 세리아에게 내가 온 것을 알리는 척을 하며, 나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해놓고는 제정신이 아닌 세리아에게 독을 투입시키고 나서, 나를 방안으로 들여보냈을 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시녀는 유유히 빠져나가 나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다. 이로써 마리는 자신은 전 혀 손도 안 대고도, 세리아를 제거함과 동시에 나에게 누명을 씌워 자신의 걸림돌을 해치 우게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 나라의 국왕인 미카엔은 나를 신뢰하고 있었으므로, 마리는 내가 단한번의 누명 으로서 제거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는, 나를 흠모하는 기사중 하나를 끌어들여 내가 그 기사를 사랑하여 왕비 자리를 거절했다는 시나리오를 짜서, 미카엔의 의심을 이중으로 받 게 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추리한 나는, 그렇게 혼자서 많은 일을 벌인 마리에 대해 감탄함과 동시에 그녀의 간악한 결단성에 혀를 내둘렀다. 반면, 자신의 뛰어난 흑마법으로 사람을 조종하고 자신의 이복 자매를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간악함을 철저하게 숨기며, 평범하고도 얌전한 시 녀 행세를 하는 그녀가 가증스럽고 증오스러웠기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것은 나의 추리였지만 거의 명백한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그녀의 행적들을 모두 퍼즐 맞추듯 짜맞추어 결론을 내리자, 나 는 모든 숨겨진 상황이 대충 내 눈안에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것 같았다. '대단하군! 마리. 하지만, 이젠 여기까지야! 네 간악한 행동이 나에게 꼬리가 밝힌 이상, 내 가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제부터 내가 죽은 황태자비가 되어 여동생의 복수를 해 주지!' 내가 그렇게 속으로 다짐하고 있는데, 리엔시타는 또다시 글을 썼다. 「그리고, 어제 너를 심문했던 수사관이라던 남자 말이야! 조금전에 오면서 봤는데, 왕성 안 으로 들어오고 있었어! 아마도, 왕성 방문 이유가 그 시녀를 신문하기 위해서라고 했던 것 같아.」 "뭐엇?" 나도 모르게 말소리를 입밖에 내며 그녀에게 외쳤다. 그러자, 리엔시타는 움찔 놀라며 다시 글을 썼다. 「왜 그래?」 그녀의 질문에 나는 글을 빠르게 써내려갔다. 「그 수사관이 시녀를 신문하려 들면, 마리는 그 시녀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뭔가 들통날 것을 염려해서 그녀를 해할지 모른단 말이야! 당장, 그녀를 막아야 하는데 어쩌지?」 나는 초조해진 얼굴로 다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수사관이 그 시녀를 신문한다는 것을 마리가 알아채지 못하게 하거나, 아니면 그녀를 해하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놓아야 하는데... 여러 방법을 모색할 겨를이 없던 나는, 결국 루이스를 불러 마리를 이곳으로 불러들이게 했다. 그녀가 만약, 수사관이 이곳으로 온 것을 아직까지 알아채지 못했다면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정령들을 그녀에게 보내서라도 더 이상 궁성 안에서 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막을 참이었다. 나는 리엔시타는 우선 내보내고 난 후, 마리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잠시 후, 방문에 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노크소리에 반가운 마음까지 들은 나는, 누군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안으로 들어와도 된다 는 답변을 외쳤다. 그러자, 방문이 천천히 열리며 마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태연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미소까지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마리? 어서 들어와. 내가 너를 부른 이유는 짐작하고 있겠지?" 나는 그녀가 나에게 신경을 쏟게 하기 위해서, 뭔가 자극이 될만한 내용의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기에, 나는 어제 기사의 황당한 프로포즈 사건을 걸고 넘어지기로 했다. "글쎄요! 짐작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녀는 살짝 미소 지은 얼굴로 그녀 특유의 조용한 어투로 나에게 물었다. 그녀의 검은 속 을 모르고 있었다면, 여전히 호감을 갖게 될만한 미소였다. "어제, 그 기사에게 나를 사칭한 가짜 편지를 건내준 것이 너지? 그리고, 폐하를 그 장소로 유도하고..." "라비스님! 전 라비스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모르겠군요. 지금 저에게 라비스님의 잘못을 덮어씌우려는 것인가요? 라비스님께서 그 기사와 정을 통하고서는 그 일이 폐하께 발각되자 저에게 덮어씌우려 하시다니, 정말 너무하시는 군요." "흥! 내가 너의 속셈을 모를 줄 알아? 난 어제 네가 폐하를 유혹하려는 것을 다 보았어! 넌 폐하에게서 나는 떼내기 위해, 그런 짓을 벌인 거야! 간사한 계집 같으니!" 방금 내가 말한 말투는 왠지 세리아랑 많이 닮은 것 같아서 우습기도 했지만, 나는 이왕 하 는 김에 질투에 눈이 멀은 대범하지 못한 소녀의 모습으로 연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라비스님! 귀족가의 숙녀분이 맞으시나요? 지금 행동은 그다지 교양있는 레이디의 모습이 아니신 것 같네요." '헉! 저건 내가 예전 세리아에게 했던 말투...' "너 폐하를 유혹해서 어쩌려는 속셈이지? 너 같은 거에게 폐하께서 눈이나 깜짝할 것 같아? 꿈 깨라구! 폐하는 아직도 나를 잊지 못하고 계시니깐!" 내가 말하는 것이지만, 스스로도 닭살이 돋았다. 내가 이러한 발언을 하게 될 줄은... 지금 나의 모습은 전형적인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질투에 눈이 멀은... "호호! 라비스님. 이제 보니, 아주 재미있는 분이셨네요? 폐하 앞에서는 그렇게 새침하게 구 시더니, 제 앞에서는 이렇듯 속을 다 드러내시다니... 너무 이중적이라 생각되지 않으세요?" "이중적?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천박한 계집 같으니, 시녀 주제에 폐하께 꼬리를 치 다니!" 그동안 나는 세리아에게서 너무도 많은 것을 배운 듯 싶었다. 새삼 그녀가 보고싶어지는 마 음도 들기 시작하는 나였다. 꼬리를 친다라... 그 문구는 세리아의 전용 문구였는데. 나는 속으로 세리아의 명복을 빌며 더욱 마리의 속을 긁는 말을 서슴없이 외쳤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한없이 망가지는 나였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적당한 시간을... 사실은 필요 이상의 시간을 마리를 나의 침실에 잡아두었더니, 나는 탈진 하는 것 같았다. 마리는 처음에는 조용한 모습만 보여주다가 나중에는 내가 박박 긁어대자 그녀도 흥분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루이스가 눈치없게 달려와서 나를 말리는 태도를 보며 정말 진땀을 뺐었다. 그렇게 긴시간을 마리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적당히 마무리 지어 내보내고 난 뒤, 나는 침대 에 누워 정령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리엔시타가 나에게 와서 종이에 글씨를 써 보였다. 「라비스! 대단해~ 시간을 아주 잘 맞추었어! 그 수사관은 지금 왕성을 나가는 중이야! 그 는 아마도, 알아낼 것은 다 알아내었을 거야.」 그녀의 글을 본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나는 미카엔에게 생각이 미쳤 다. 그는 정말로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인지, 정말 걱정이 되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에게 이번 일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 알고 있으면서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것인지... 저녁 즈음... 나는 돌아온 아멘시타에게 모든 정보를 듣고는, 은밀하게 왕성 안을 빠져나가 베른 공작가 근처 적당한 곳에서 마침내 유령 분장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일루전으로 황태자비의 모습으로 바꾼 다음, 평소 그녀가 좋아하던 옅은 노란색 빛깔 의 화려한 드레스를 골라 입은 상태에서, 챙겨온 화장도구로서 얼굴을 창백하게 하여 더욱 실감나게 유령 느낌이 들도록 꾸몄다. 정령들은 유령으로 분장한 나의 모습을 보며 굉장히 재미있어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마치 재미있는 장난을 꾸미고 있는 악동들과 같이 눈을 반짝 반짝 빛을 내었다. 물론, 아 젠샤르는 샤르에게 애늙은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답게 시큰둥한 표정이었지만. '흐음... 나도 섬뜩하도록 붉은 피를 발라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나는 그러한 유치한 분장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베른 공작가 안으로 들어가며, 아젠샤르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의 바람의 힘으로서 나의 몸을 약간 허 공에 뜨게 하여, 진짜 유령처럼 미끄러지듯 앞으로 이동하게끔 만들었다. '후후훗... 재미있군!' 나는 베른 공작이 나를 보며 짓게 될 표정을 즐겁게 상상하며 그가 머물고 있는 침실로 다 가갔다. *게시판이 제로보드로 바뀌었습니다.^^ 새 게시판이라 왠지 새로운 기분도 들고... 좋네요! 게다가 리플 기능도 있고... 흐훗~ 체인지(Change) 제24화 -유령 소동!- (8) -8- 나는 이왕이면 유령답게 방문보다는 창문을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리엔시타는 공작이 지 금 서재에 있음을 알려주었다. 베른 공작의 서재는 건물의 3층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곳의 창문 밖에는 베란다 같은 것이 없었다. "와~! 잘됐는데? 아젠! 나를 저 창문 밖으로 몸을 띄워 줘!" 나의 말에 아젠샤르는 나의 발밑에 보이지 않는 바람속성의 장막을 받치게 하여 나를 허공 으로 띄웠다. 그리고 정확히 서재의 창문 앞에 멈추게 하였는데, 그는 무슨 생각에서 인지 바람들을 창문으로 조금씩 날려 마치 노크소리의 효과가 나게끔 톡톡 건드렸다. 내가 명하지 않아도 척척 알아서 부수적인 효과까지 신경을 쓰는 아젠샤르였다. 잠시 후, 닫혀있던 창문이 열렸다. 그리고 열린 창문 사이로 베른 공작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창문에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기이하게 여기며 창문을 열어보았을 것이다. 휘이잉~!! 본연의 모습인 한줄기 바람으로 화한 아젠샤르가 무척 서늘하고 스산한 느낌의 바람소리를 마치 특수효과처럼 내었고, 그것을 들은 나는 웃음이 나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황태자비 의 흉내를 내었다. "아버지..." 나의 목소리는 바람과 함께 공명하며 마치 물리적인 것이 아닌 영혼의 목소리와 같은 느낌 으로 사방으로 울려퍼지지 않고 이 주위를 맴돌았다. 정말 능력 좋은 아젠샤르였다. 그가 무 슨 또다른 효과 장치를 해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바로 서재의 창문 근처에 서있던 키가 큰 나무 한그루... 이 나무에는 아멘시타가 들 어갔는지, 마치 나무가 울기라도 하는 듯 스산한 느낌으로 가지들이 마구 부딪히며 바스락 거렸다. 정말 이것들이 너무 오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베른 공작에게 약간 슬픈듯한 음성으로 아버지라 부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가느다랗게 떨며 눈은 촉촉해진 모습으로... 정작 오버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나였다. 아무튼 이러한 나의 모습에 베른 공작은 굳어진 얼굴로 한동안 멈칫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그리고는 한참 후, 그는 평소 그의 냉철하고 점잖았던 귀족의 이미지를 산산조각내는 다소 망가진 모습을 나에게 보였다. "너, 너는...? 아아악~!!! 세시아! 어, 어떻게?" 그는 뒤걸음을 치며 뒤로 물러나더니, 침착하지 못하고 허둥대느라 발이 꼬였는지 뒤로 벌 러덩 넘어졌다. 저런! 정말 아프겠군. 그나저나, 황태자비의 이름이 세시아였다니 나는 오늘 에서야 처음 알았다. 나는 더욱 웃음이 나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사실 그가 넘어지는 모습은 약간 코믹스러웠 기 때문에 웃음 참느라 무지 애써야 했다.- 더욱 서글픈 얼굴로 그에게 입을 열었다. "흐흑... 아버지! 어째서 세리아를 죽게 만들었나요? 제 하나 뿐인 동생... 비록 철은 없지만, 나의 하나뿐이었던 동생... 왜 죽게 만들었나요? 그토록 권력이 아버지에겐 중요했나요?" "세시아, 네가 어떻게? 넌 죽었는데...? 그럴 리가 없어. 내가 피곤하다 보니 헛것을..." "아버지! 어째서, 저를 부정하시는 거죠? 전 아버지의 딸인데... 너무 원망스러워요. 흐흑..." 나는 눈물을 억지로 쥐어짜기 위해, 속으로 온갖 슬픈 것(?)을 다 떠올려야 했다. 어렸을 적, 사촌에게 억울하게 맞았던 일... 키우던 강아지가 집 나갔던 일...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강 아 지가 집나간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몸보신으로 멍멍탕이 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일, 등등... 하지만, 나는 눈물은 커녕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 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세시아!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 나는 다 세리아를 위해 그랬던 것 뿐이야. 그 애가 왕비 가 되어야 그 애도 좋고 우리 가문에게도 좋지 않겠느냐? 세리아를 죽인 것은 다 그 계집 때문이야! 마리, 그 년이 모든 것을 꾸몄어! 설마, 아비인 내가 그 애를 해하였겠느냐?" 그의 말에 눈물을 질질 짜는 연기를 하던 나는, 얼굴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마리, 그 애 역시 아버지의 친딸이에요! 그런데도, 그런식으로 말하다니 정말 비열하시군 요. 자신의 과오를 딸에게 모두 떠넘기다니... 마리 역시 죄를 저질렀지만, 모든 것은 아버 지가 근원이에요." 그와 대화하면서 내가 그동안 추측했던 것이 모두 맞아떨어지고 있음을 나는 확신할 수 있 었다. 그리고, 베른 공작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형편없고 당당(?)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물론, 마리는 내 핏줄 중 하나이지만 그 애는 천한 몸에서 태어난 아이야! 내 딸들은 오직 너희 둘뿐이다. 마리가 세리아를 죽이고 나를 속이고 이용해서 자신이 왕비가 되려 한 것 이다." "그런 가요? 그럼, 전 세리아를 위해서 마리에게 복수를 하겠어요..." "그건 안돼!" 하긴 그로선 절대 안될 일이었다. 내가 마리에게 해를 가하면, 베른 공작은 왕비로 내세울 또 다른 딸을 찾아야 할 것이니... "그럼, 아버지. 저를 위해서... 저와 불쌍하게 죽은 세리아를 위해서 한가지 부탁을 들어주세 요.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전, 마리와 아버지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어요. 아버지와 마리가 그동안 행했던 모든 일들, 세리아가 불쌍하게 죽게 된 일을 사죄하는 글을... 세 리아가 땅에 묻히게 될 때 같이 묻어주세요. 그러면 세리아도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용서할 수 있을 거예요. 만약 아버지가 이러한 제 부탁마저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매일 왕 성에서 떠돌며 세리아를 위해 피눈물을 흘리겠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예전 마법사들의 탑 소속 마스터 마법사가 나에게 건내주었던 단거 리 공간 이동 아티펙트 팔찌를 사용해서, 그의 눈앞에서 스르륵 사라졌다. 그리고 근처의 덤불 속으로 이동하여 몸을 가리고는, 얼굴을 살짝 내밀어 내가 사라지고 난 허공을 멍하 니 응시하는 공작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다시 궁성 안으로 무사히 돌아온 나는, 황태자비의 모습으로서 그를 협박한 일이 부디 성공 적인 결과가 나기를 기원하며 잠에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나를 찾아온 이번 일의 수사관 그랜트에게 세리아의 관이 묘지로 들어가게 될 때, 불시에 들이닥쳐서 그 관을 수사하면 큰 증거물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귀띔해 주었다. 그리고 공작가 집안의 장사인 만큼 수사의 어려움이 있을 것이니, 그랜트에게 수사의 자유 를 허락하는 국왕의 친필이 담긴, 영장를 발부해주기 위해 미카엔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그리고 미카엔의 집무실에 찾아간 나는 미카엔에게 당당하게 요구했다. 영장을 써주기를... 그러자. "라비스! 이걸 왜 네가 직접 요구하는 거지?" "글쎄요. 제 누명을 벗기 위한 발버둥이라고 해야 할까요?" "너의 누명? 그렇다면, 너는 지금 누명을 쓰고 있다는 것인가?" 그의 질문에 나는 발끈하며 입을 열었다. "폐하는 저를 믿지 못하시는 건가요? 제가 세리아를 죽이고 그 생전 처음보는 기사와 놀아 났다고 믿는 것인가요? 뭔가 앞뒤가 맞지 않지 않나요? 내가 세리아를 죽였다면 나는 왕비 자리를 넘본 것인데, 왜 그 기사와 놀아나기 위해 왕비 자리를 거절했다는 말이 나오죠? 마리가 그러던 가요? 사실은 내가 뭔가 꿍꿍이가 있어 잠시 왕비 자리를 거절했던 것이라고?" 내가 그렇게 흥분을 하며 미카엔에게 외치자, 그는 그다지 동요하지 않는 얼굴로 나의 말에 간단히 대답했다. "아니." 그의 대답을 듣자, 나는 왠지 허탈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 혼자 열내고 흥분하며 기껏 열변 을 토했더니, 그는 무척이나 썰렁하게도 단순하게 '아니.' 라는 대답만 한 것이다. 하지만, 미카엔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친필로 영장만 써주면 넌 모든 누명을 벗을 수 있는 건가?" "네." 나는 시들해진 모습으로 그에게 간단히 대답했다. 그러자, 미카엔은 빙긋 웃어보이더니 나 에게 말했다. "그것 참 다행이군! 너의 노력으로 스스로의 누명을 벗을 수 있게 되었으니... 뿌듯하겠지?" "그럼요! 당연히 뿌듯하지요." 나는 그에게 자랑스레 답했다. 정말 뿌듯한 일이었다. 나의 힘으로 이 모든 일들을 해결하 고 누명까지 벗을 수 있게 되었는데...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미카엔의 도움이 전혀 없이도 말이다. 미카엔은 이런 나를 보며 더욱 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왠지, 미심쩍은 미소였다. 그러고 보니, '너의 노력으로 스스로 누명을 벗을 수 있게 되어 뿌듯하겠지?' 라는 그의 말이 왠지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는데, 이러한 나 의 눈빛에 그는 얼굴에 웃음기를 거두어 들이고는 나에게 서둘러 영장을 써주었다. '흐음... 왠지 찝찝하군!' 체인지(Change) 제25화 -4월의 신부- (1) (4월의 신부) -1- 이제 완연한 봄이었다. 나는 궁성 근처로 정령들과 함께 나들이를 나왔다. 이곳은 후원이나 화원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은 어색한... 그러한 곳이었다. 꽤 넓은 공간에 펼쳐진 이름 모를 풀들과 들꽃들... 그냥 편하게 말하자면 들판이라고 표현해야 맞을 듯 싶었다. 나는 부드러운 풀들의 위에 아무렇게나 벌렁 눕고는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 았다. 유령 소동이 있었던 지도 벌써 보름 가까이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랜트 수사관은 결국 마리와 공작의 죄를 증명하는 증거물인 공작의 글을 찾아내었고, 모든 것이 밝혀져 있는 그것을 토대로 마리와 공작을 체포하였 다. 그들은 수도에 있는 레스틴 감옥에 갇혀 각자 무기한에 가까운 세월을 감옥 안에서 썩게 되었다. 루이스의 말을 듣자면, 반역 죄인을 제외한 웬만한 죄수들은 이곳 레스틴 감 옥으로 가게 된다고 하였다. 반역 죄인들은 직접 왕성의 감옥으로 갇혀 직접 왕의 심판을 받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문제는... 베른 공작은 그 레스틴 감옥에 잘 갇혀있는데, 마리는 그 삼엄하다는 레스틴 감옥을 탈옥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저번에 엔카루스도 엄격한 왕성 감옥을 손쉽게 탈출하더니, 마리 역시, 탈옥 을 한 것이었다. 이곳 로히얀스가 그리도 허술한 곳이었단 말인가? 결국, 그랜트가 소속되어 있는 수사관청에서는 마리를 잡아들이기 위한 수배 령을 내렸지만, 마리는 어디론가 증발해 버렸는지 전혀 단서를 찾을 수가 없 었다. 왠지 한심한 상황... 어쨌든. 이로써 한때 잘나가던 베른 공작가는 하루 아침에 풍지박산이 난 셈이 었다. 공작은 영구히 작위를 박탈당하였고 두 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 었으며, 첩 소생인 또다른 딸 하나는 자신과 같은 신세인 죄인이 된 것이다. 공작의 욕심이 화를 부른 셈이었다. 왠지 씁쓸해진 나는, 만발한 들꽃으로 화관을 만들고 있는 리엔시타를 바라보았 다. 그녀는 어느새 화관을 다 완성하였는지 생글생글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라비스! 이거 한번 써봐! 너에게 너무 잘어울릴 것 같아."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으나, 곁에 서있던 샤르가 리엔시타에게서 화 관을 뺏어들고는 나의 머리에 씌어 주었다. "꺄하하~ 꽃의 요정 같아!" 리엔시타는 손뼉까지 치며 무지하게 좋아했다. 쑥스럽게시리... 나는 얼마 전부터 비서실에서 정식 비서관으로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실수도 가끔하지만, 내가 정식 비서관이 된 것은 혹시 보이지 않는 입김이 작 용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미카엔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렇게 왕실 안에서 심상치 않은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그 일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정말 알 수 없는 녀석... 이러면, 이번에도 내가 그의 발 아래에 있는 것 같이 느껴져서 은근히 기분이 나쁜데. 내가 일을 마치고 침실로 돌아왔을 때, 앤시아로부터 한가지 전갈을 들었다. 오 늘 밤에 열리게 될 연회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한다는 것을... 루이스는 벌써, 내가 입고 갈 화려한 드레스까지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에휴~ 꼭 가야 하나? 오늘은 일찍 자고 싶은데... 안가면 안될까?" "글쎄요. 아까 폐하의 측근 시종이 말하기를 의무적이라는 말을 굉장히 강조하 던데요? 이번 연회는 모든 귀족과 관리들이 참석한데요." 앤시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방을 나갔다. '쳇~! 미카엔. 정말 너무 독단적이군. 연회까지 의무적으로 오라고 그러다니! 귀 찮게.' 나는 연회를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었던 지라, 이러한 미카엔의 명령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그의 험담을 마음껏 하며 연회에 가기 위해 치장을 해야 한다 는 루이스의 잔소리를 과감하게 묵살하였다. 하지만, 루이스의 험악한 눈초리와 엄청난 잔소리를 끝까지 당해내지 못하고는 연 한 푸른색의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 손질을 해야 했다. "호호호~ 라비스님은 청색 계열의 드레스가 잘어울리는 군요. 이 정도면, 동대륙에 서 라비스님의 미모를 따라올 여자는 아마도 없을 거예요." "쳇~! 청색이 잘어울리든 말든!" "이런! 라비스님, 그러한 일로 토라지시다니요? 자자~ 얼굴 피세요! 라비스님은 웃 는 것이 더욱 아름다우니..." 그녀의 말에 나는 청개구리처럼 더욱 얼굴을 구겼다. 그리고, 오늘 완성해 보일 예 정이었던 5서클 레벨의 화염 공격마법인 파이어 링(Fire Ring)의 스펠을 머리속에 정리하였다. '오늘은 기필코 성공해야지!' 나는 일단 완성한 스펠을 미리 외워둔 다음, -물론, 이 스펠을 외우는데에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크리스탈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크리스 탈궁에 도착하고 나서 궁성의 연회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루이스와 나를 경호하는 에드의 눈을 피해 아젠샤르를 불러 허공으로 높이 날아올랐다. 조금이라도 빨리 오늘 완성한 파이어 링을 시전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심호흡을 한 다음, 멋지게 파이어 링의 시동어를 외쳤 다. 그러자. 퍼엉~! 화르르... "꺄악!" 내가 완성한 스펠이 뭔가 약간의 오차가 있었는지, 파이어 링은 내가 기대한 모습 으로 발현되지 않고 어설프게 나타나, 시전자인 나에게도 피해를 주었다. 그래서, 아젠샤르는 재빨리 나에게 붙으려는 불길을 꺼야 했다. 나는 갑작스런 열기 때문에 얼굴을 가렸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그러자, 나를 바라 보던 아젠샤르가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뭔가 입을 열려 하였으나, 마법의 실패로 기 분이 잡친 나는 그에게 나를 내려주기를 명령했다. 그리고, 아젠샤르가 나에게 뭔가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크리스탈궁으로 들어갔다. '으흠... 오늘따라 이목이 집중되는 느낌이네?' 나는 루이스의 말대로 푸른빛의 드레스가 나에게 잘어울려서 오늘따라 주목을 많 이 받나보다 생각을 하며, 나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눈웃음을 살짝 살짝 던져주었다. 그리고,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가는데. "호호~! 라비스. 오늘따라 의상과 헤어스타일이 화려하네? 그 온통 검은빛은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나 보지?" 여전히 화려한 모습인 아사벨라가 나를 발견하고 그렇게 말을 걸었는데, 그녀는 뭐 가 그리 재미있는지 말을 마치고 나서도 계속 깔깔대었다. 그녀의 그러한 반응에 나 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그제서야 받고는, 거울이 있는 곳으로 가서 나를 비추어 보았다. 그랬더니... "허억! 저게 누구야?" 약간 시커매진 얼굴, 불에 조금 그슬렸는지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이 문득 문득 튀어 나와 있었고, 우아하던 드레스는 군데 군데 검게 그슬려 있었다. 정말 최악의 모습 이었다. 체인지(Change) 제25화 -4월의 신부- (2) -2- "이... 이게 대체!" 나의 모습에 경악을 하며,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를 해나가야 할지 막막해졌다. 나는 회장의 구석에서 서서 기둥 뒤에 우선 모습을 가렸다. 귀족들 의 잡담소리와 웃음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아까 나를 보았던 귀족들... 특히 귀부인들이나 젊은 레이디들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 누며 키득대는 것이 나의 눈에 잡혀, 은근히 심기를 거슬리게 하였 다. '어쩐다...' 분명히 이대로, 우아하고 화려하게 짝이 없는 귀족들에게 이러한 나의 모습을 드러낸다면,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다행히 아까는 귀족들 이 얼마 없었지만, 지금은 그 사이에 더 많은 귀족들이 회장 안으로 들 어와 바글바글 해졌다. 흑! 바글바글이라... 나는 스스로의 멍청함과 덜렁거림을 수없이 자책을 하며, 단호한 결심 을 했다. 그것은,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고 보는 것이었다. 미카엔이 여 기 회장으로 오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지금의 이러한 민망한 모습을 특히 미카엔에게는 보일 수가 없었다. 그건 정말 부끄러운 일이 었다. 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게다가, 이건 나의 자존심 문제였다. 이렇게 망가진 모습을 귀족과 더 불어 미카엔에게 선보이게 된다면, 나의 위신이 깎아내려지는 일이었다. 나는 투명화 마법이나 아티펙트를 이용한 단거리 공간 이동을 써도 상관이 없을까 생각해 보았으나 혹여, 여기 연회장 안에 있을 왕실 마법사들의 관심을 받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여기 연회장에서 누군 가 마법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게 된다면, 나는 더욱 쪽 팔리는 일을 감수해야 할지도 몰랐다. 뭐, 미카엔도 공간 이동 같은 마법을 밥먹듯이 사용하긴 하지만, 왕실 마법사들이 그의 기운을 못 알아보겠는가? 하지만 나는, 킬린을 제외 한 다른 이들과는 별로 안면이 없어서 내가 궁성 안에서 빙계 마법(미카 엔의 기운이 실린)을 제외한 마법을 사용하면, 누가 마법을 사용하고 있 는지 알아보려 할 것이다. 물론, 마나가 거의 안드는 청력 증폭 마법이나 엿듣기 마법 같은 경우 는 내가 기운을 감추려 한다면, 충분히 감출 수가 있지만, 그 외에 모 든 마법은 다른 왕실 마법사들에게 다 노출된다. 특히 궁성 안은 말이 다. 아무튼 그렇게 혼자서 끙끙대고 있는데, 그때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살 짝 건드렸다. 나는 지금 다른 이에게 모습을 보이기 꺼리고 있는 중이 었던 터라, 갑작스런 건드림에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저어... 혹시, 라비스님이신가요?" 부드러워 보이는 밤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짙은 갈색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내 또래로 보이는 소녀였다. "마, 맞는데요." 사실, 지금은... '전 라비스가 아니랍니다. 잘못 보셨어요!' 라고 대답하고 싶은 것이 나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저 소녀는 온통 검은빛의 일색인 나의 모습을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 계속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 맞군요. 라비스님은 굉장히 아름다우신 분이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한번쯤 뵙고 싶었죠! 게다가, 폐하께서 라비스님을 매우 총애하신다면서 요? 정말, 너무 반가워요. 아! 그러고 보니, 제시도 라비스님을 보면 정말 좋아하겠네요! 훗~ 제시를 라비스님께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 그래도 관찮 겠지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가 뭐하고 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귀족들이 바 글바글한 무리속으로 사라졌다. 젠장! 지금은 누구에게도 이 창피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는데, 저 눈치없는 소녀는 누군가를 더 끌고 오겠다며 사라 지다니! 나는 빨리 뭔가 방법을 모색하여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데, 또 다시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살며시 건드렸다. 나는 이번에도 그 소녀 일거라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카엔의 모습이 나의 눈 에 들어왔다. "멋지군. 라비스." '윽!' 내가 염려했던 최악의 사태가 결국은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시종장이 쩌렁 쩌렁한 목소리로 '국왕 폐하 납십니다.'라고 아직 외치지 않았건만, 그는 이 렇듯 소리없이 다가와 나의 눈앞에 서 있었다. 아마도, 정식으로 회장안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공간 이동으로서 우선적으로 나에게 모습을 보인 듯 싶었다. 그나저나, 그는 내가 있는 곳을 왜 이렇게 금방 알아채고 있는 것인지... 그 가 예전에 끼워준 실버 반지가 나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주고 있다는 것까 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나는, 그가 디텍트 능력이 어지간히 뛰어난 모양이 다고 생각했다. "후훗~ 평소에도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너이지만, 오늘의 네 모습은 더욱 눈을 뗄 수가 없는데?" "놀리지 마세요! 폐하." 나는 창피함으로 붉어진 얼굴로 그에게 답했다. "그 드레스 차림으로 어디서 불을 뿜는 몬스터 하나를 무찌르고 왔나 보지?" 웃음기가 서린 그의 목소리에 나는 더욱 창피해졌지만, 반면 분해지기도 했다. "지금의 내 모습이 재미있나 보죠? 정말 짓궂으시네요! 오늘은 무엇 때문에, 연회에 의무적으로 참석하라고 하신 거죠?" 나는 목소리를 여전히 낮춘 상태에서 그에게 외쳤다. 그러자, 그는 만면에 퍼 져있던 웃음기를 거두었다. "오늘은 중요한 발표가 있어서 모든 귀족들과 관리들을 참석하도록 한 거야! 내가 아끼는 사람이 관계된 일이고 왕실의 일이라... 이렇게 모든 귀족들에게 발표를 할 겸 축하 연회를 연 것이지." "무슨 발표이지요?" "방황하던 청춘 남녀가 마침내 그 방황을 마치고 미래를 약속하는 발표이지. 아! 그러고 보니, 오늘 너에게 왕실 친척들을 소개시켜줘야겠다고 생각했는 데, 아무래도 지금의 네 모습은..." 그의 얼굴 표정은 웃음기가 거두어졌다고 하나,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뭔가 재미있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게다가, 지금의 그의 말은... 왠지. 나는 그를 기묘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설마..." "설마, 뭐?" 방황하는 청춘 남녀가 미래를 약속한다라... 그것은 결혼을 약속하는 약혼을 이르는 말인듯 했다. 그리고, 미카엔이 아끼는 사람이라면, 게다가 왕실의 일이라면... 어쩌면, 미카엔은 나와 자신의 약혼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시치미를 떼고 저렇게 놀리듯 말하다니! 또한, 나 를 왕실 친척들에게 소개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거의 나의 짐작이 맞는 듯 했다. 나는 더욱 그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정말 너무 독단적이시네요!" "그게 무슨 말이야?" "됐어요! 난 이대로 갈 거예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귀족들이 나를 보고 웅성거리고 쑥덕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씩씩거리며 회장 밖을 나갔다. 무수한 눈길들이 나에게로 쏟아졌 다. 오늘은 정말 최악의 날이었다. 벼르던 화염계 5서클 마법은 실패로 돌아갔고, 연회장에서 귀족들에게 망신스런 모습을 보였으며 미카엔은... 제멋대로 약혼 발표를 하겠다니! 아무리 꺼릴 것이 없는 왕이라지만, 혼자 마음대로 결정하 고 멋대로 발표를 해버리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안들었다. 크리스탈궁을 나와 마차도 타지 않고 무작정 걷던 나는, 새삼 방금 일로 화 가 치밀어... "에잇! 미카엔! 엿을 다발로 먹길 바래!" 나는 크리스탈궁을 향해 몸을 돌리고는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어보였다. 그러자, 어느새 나를 뒤따라 왔는지, 나의 경호원 에드가 의아한 눈으로 나 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비스님! 방금 그 모습은 어떤 의미가 담긴..." "하하핫~!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폐하께 내가 하는 친근한 인사법이라고나 할까?" 체인지(Change) 제25화 -4월의 신부- (3) -3- 나는 최대한 큰 보폭으로 무작정 걸었다. 다행히, 중앙궁성까지는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거리였지만, 그래도 마차가 아닌 직 접 걷는다면, 30분 정도가 걸리는 거리였다. 물론, 마차로서는 10분 거리였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뒤에서 에드가 나를 따라왔다. 그는 나의 이러한 행동이 걱정스러운지 나에게 충고하는 말을 하였다. "라비스님. 조금 전 크리스탈궁에서 라비스님이 보이신 행동은 아 무래도 지나치신 듯 합니다. 국왕 폐하 앞에서 그러한 행동을 보이 고, 도중에 허락없이 나오신 것은 폐하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신 것 이 됩니다." 그의 말에 나는 그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나도 조금은 걱정이 되긴 해! 아까는 나도 모르게 발끈했었던 것이 니깐. 에휴~ 일이 왜 이렇게 꼬이는 것인지... 폐하께서 아까의 일로 나에게 벌을 주신다면 어쩌지? 이유야 어쨌든, 나는 그에게 시건방 지게 행동하였으니..." 나의 말을 조용히 들으며 길을 걷던 에드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눈 치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다시 라비스님께서 연회장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가 감히 생각해보건데, 라비스님께서는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오해라니?" 그러자, 에드는 약간 겸연쩍은 얼굴이 되어 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까, 귀족들의 얘기를 얼핏 들었는데, 오늘 약혼 발표를 하신다는 분 이 폐하의 사촌 여동생이시라고 하더군요. 이번 연회는 그분을 위한 것 이라고 들었습니다." "허억! 그... 그게 정말이야? 진작 좀 말해주지!" 나는 울상이 되어, 그에게 그렇게 말해보았지만 어차피 에드는 나에 게 말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 밤은 온종일 실수만 연달아 하 는 나... 아까 파이어 링의 불에 그슬려 내가 제정신이 아니게 되어 경 솔해졌던 모양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아젠샤르를 불렀다. 그의 힘으로 나의 침실 까지 단숨에 날아가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미카엔에게 사과를 하는 것이 나을 듯 싶었다. 나는 침실로 돌아가서 루이스를 닥달해 새 드레스로 갈아입고 머리 를 새로 정리하였으며, 세수를 하여 지저분해진 얼굴을 깨끗이 하였다. 그리고, 마차를 타고 다시 크리스탈궁으로 향했다. 내가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누군가 나에게 다가왔다. 아까 밤갈색 머 리의 소녀였다. "라비스님! 아까 그냥 가시길래, 내심 서운했었는데 다시 몸을 단장하 고 오시느라 잠깐 나가셨던 것이었군요. 호호~ 아까 내가 소개하겠다 고 말했던 제시에요." 그녀의 곁에는 붉은 금발의 청년이 서있었는데, 그는 화려한 예복을 입 고 있었다. 보통 연회에서 입는 예복보다 좀더 격식적인 그 예복에 나는 혹시나 해서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전 이름만 들었을 때 단순히 숙녀분이시라 생각했는 데, 제가 큰 실례를 했군요. 혹시, 두 분이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신가요?" 그러자, 소녀는 수줍게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시는 제 약혼자랍니다. 그리고, 제가 단순히 애칭만 라비스 님께 말한 것이니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은 당연해요. 제시는 폐하의 측 근 호위 기사 직위에 있지요." 그 소녀는 자랑스럽게 나에게 말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 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그녀는 깜빡했다는 듯이 나에게 덧붙여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라비스님께 제 소개를 하는 것은 깜박하고 있었네요. 전 아이나스 덴 마르시에안이라 합니다. 폐하와는 사촌지간이 되지요. 폐하께서는 여동생이 안계셔서 그런지, 어렸을 적부터 저를 꽤 귀여워해 주셨어요. 사촌형제 중에서도 여자 형제는 저 뿐이었으니 그렇게 잘해주 셨던 것이겠죠. 저 역시 폐하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폐하께서 사 랑하시는 분이 누구일까? 계속 궁금했었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지금까지의 상황이 모두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리 고, 섣불리 판단하여 함부로 행동한 내가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나는 그녀에게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진심 어린 축하의 말을 하였다. "아이나스님! 약혼을 축하드려요. 폐하께 이렇게 아름다우신 동생분이 계 신 줄은 몰랐네요." 사실, 그녀의 외모를 따지자면 그리 미인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녀가 왠 지 아름답다고 생각되었다. 아마도, 결혼을 앞둔 행복한 신부의 모습이기 에 그렇게 느껴졌겠지만, 그녀는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봄의 계절의 신부처럼 정말 아름다웠고 순결해 보였다. 아무튼, 그렇게 어이없게 하고 있던 오해를 풀은 나는, 미카엔을 찾아보 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오오! 크로시벨님이시군요.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전히 봄의 싱 그러운 꽃잎처럼 아름다우십니다. 오늘 밤, 저에게 크로시벨님의 첫 번째 파트너가 될 영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연회장을 두리번거리고 있던 나는, 문득 들려오는 느끼한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한 젊은 신사가 나를 황홀한 듯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거부감을 느끼고는 이 자리를 얼른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그 근처에 있던 젊은 귀족들이 혹여 기회를 빼앗길까 염려하는지 앞을 다투어 내앞으로 몰려들었다. "아! 크로시벨님이시군요..." "처음 뵙는군요..." "영광입니다..." "괜찮으시다면, 크로시벨님, 오늘 밤..." 모두 대충 그러한 말머리로서 나에게 말을 걸어왔고, 나는 삐질 삐질 식 은땀을 흘리며 그들에게... "죄송합니다. 제가 바빠서... 하하!" 그렇게 말하고는 잽싸게, 몸을 은신(?)할 수 있는 테라스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엔 다행히 아무도 없었고, 나는 그냥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시 하늘에 떠있는 초승달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다, 예쁜 모양으로 세상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는 달의 모습에 넋을 잃고 아예 달구경을 하였다. "이곳에도 밤하늘의 모습은 내 고향과 다를 바가 없네?" 나는 그렇게 중얼대다가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내가 원래 있던 곳에도 저렇듯 달은 떠올라 밤하늘을 장식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나는 뒤에서 기척을 느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가버린 줄 알았는데... 언제 이렇게 돌아와 있는 거지?" 미카엔은 달빛에 취했는지 연회의 분위기에 취했는지 아니면 술에 취했 는지, 매우 풀어진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아까의 일을 사과하게 위해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그는 나 보다 조금 더 앞서 또 다시 말을 꺼냈다. "이렇게 다시 돌아왔으니, 아까 나에게 무례를 범했던 것은 모두 용서하기 로 하지. 라비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에게 더욱 가까이 왔다. 그리고는, 팔을 나의 허리 에 두르더니 앞으로 당겼다. '헉! 뭐, 뭐야?' 나는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라며 다가오는 그의 얼굴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고개를 뒤로 내빼야 했다. 그러자, 미카엔은 왼손을 위로 올리더니 나의 머리를 받쳐들어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에게서 고급 와인의 향이 풍겨져 왔다. * 이번 챕터는 약간 싱거운 듯 하군요... 별 내용이 없는.... ㅡㅡ;; 굳이 말하자면, 라비스가 약간 망가지고 오버했던 거랄까? 23, 24화가 너무 내용이 복잡했던 것 같아서, 25화는 그냥 쉬어가는 페 이지(?)로서 짧게 씁니다. ^^;; 아마도, 이번 제목을 보고 라비스가 신부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분들 이 많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분들께는 죄송하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군요! 하하...;;; 체인지(Change) 제26화 -스파이(?)가 된 라비스- (1) (스파이(?)가 된 라비스) -1- 나른한 오전... 사실, 보통은 나른한 오후라고들 하지만 나는 오전부터 무지 나른했다. 괜히 봄날이 아니었다. 게다가, 어제 밤은 무척 열받는 일까지 있었으니... 나는 미카 엔을 씹느라 잠을 설쳤던 이유로 무척 피곤하였다. 으으, 생각 할수록 열이 났다. 바보 미카엔! 나는 아침에 일어난 순간부터 비서실에 출근하여 나의 책상이 놓여있는 자리에 앉는 순간까지 하품을 끊이지 않고 해대었다. 비서실 동료들은, 나에게 갖었던 아름답고 우아한 이미지가 산산조각이 난다며 하품 좀 그만하라고 충고를 했지만, 나는 그들이 나에게 환상을 갖든 우아한 이미지를 갖든, 아쉽게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지금은 아침 회의 시간... 정식 비서관들이 모여 몇몇 사항을 가지고 가볍게 회의를 하는... 직원 회의 같은 거였다. 아니면, 아침 조회라고나 할까? 깐깐해 보이는 중년 아저씨... 스미스 비서관이 자리에 앉으면 회의는 곧바로 시작되었다. 나는 다시 한번 하품을 찢어지게 하 다가, 스미스 비서관과 눈이 마주쳤다. 스미스 비서관의 눈빛 공격... 그것은 날카로움도 아니고 탓하는 눈길도 아니었지만, 왠지 사람을 머쓱하게 만드는 뭔가 보이지 않는 위력이 있었다. 결국, 나는 입을 얼른 다물고는 성실한 자세로 회의에 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저 사람은 나의 상관이니 성실한 부하 직원의 이미지를 그에게 인식시켜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 자이라스국에 뭔가 심상치 않는 조짐이 있는 것 같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폐하께서는 자이라스국에 대해 상세히 조 사를 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비서관 여러분 중에, 누가 이번 일 을 전적으로 맡아서 해주시겠습니까?" 스미스 비서관의 말이 끝나자 마자, 나는 재빨리 손까지 들어보 이며 그에게 외쳤다. "저요!!" 나는 의외로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격인 듯 싶었다. 게다가, 무모 하기까지 한 성격은 예전에도 몇번 증명된 바 있지만. 어쨌든, 나는 007과 같은 첩보 영화를 이번 임무와 결부시키며 생기도는 눈빛으로 스미스 비서관을 바라보았다. 왠지 재미있 을 것 같았다. 타 국가의 심상치 않는 조짐에 대해 조사를 한 다라... 이건, 첩자가 하는 일이 아니던가. "으음... 크로시벨 비서관? 아직 크로시벨 비서관은 정식 비서관 으로서 별로 경험이 없어 정보 수집을 하는 일은 힘들지도 모르 는데?" "그건 걱정 마세요!" 나는 자신있게 그에게 외쳐보였다. 하지만, 스미스 비서관은 내 가 미덥지 못한 모양이었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잠시 고 민하는 듯한 얼굴 표정을 해보였다. "크로시벨 비서관은 어떻게 조사를 할 생각이지? 용병 길드를 이용할 생각인가? 아니면, 잘아는 뛰어난 첩자라도 있어 그와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는 방법이 있는 것인가?" "후훗~ 제가 어떤 방식을 조사하게 될지는... 음, 그건 비밀입 니다." 나의 대답에 그는 조금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 만, 나는 그의 표정은 알 바가 아니라는 듯이 무시하고는 그에 게 한가지 질문을 해보였다. "근데, 스미스 비서관님! 자이라스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이죠? 동대륙에 있는 나라인가요?" "으음..." 나의 질문에, 그는 대답 대신 뭔가 앓는 듯한 음성을 나직히 내뱉었다. 자이라스국이 동대륙의 인페르디아와 로히얀스를 근접한 곳에 위치한 소국이라는 것을, 어린애들도 -귀족에 한 해서- 거의 아는 사실을 나는 그에게 묻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떼를 쓰다 시피 하여 그 임무를 간신히 맡을 수 있었지만, 스미스 비서관은 역시 내가 못미더웠기 때문에 노 련한 비서관 파트너 한 사람을 붙여주었다. 그는 자작가 집안 의 자제로서, 이름은 카이슨 루렌트... 유명한 아카데미를 수석 으로 졸업한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인재였다. 20대 중반인 그 는, 아직 아무런 작위는 없지만 나름대로 사회적 지위와 인맥 을 가진 젊은이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단점이자 장점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여 자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미색이 출중 한 미녀가 그를 유혹한다 하더라도 꿈쩍도 하지 않는... 남자 동료들은 그가 별종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점이 마음에 들었 다. 그래야 그에게 완벽한 동료로서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이 었다. 그런데, 한가지 나쁜 점은... 그는 잘난척을 엄청한다는 것이 었다. 게다가, 남을 은근히 깔아뭉게는 습성이 있었는데 그 점은 조금 불편하였다. 그리고... 오후의 한때. 나는 미카엔의 집무실 문 앞에 결재 맡을 서류들을 들고 섰 다. 이제는 나와는 안면이 생긴 집무실 문앞 시립한 노시종 은 나에게 가볍게 눈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미카엔에게 내가 온 것을 고하려는 찰나에, 나는 그에게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는 쉿~! 소리를 내었다. 집무실 안에서 미카엔과 누군가와의 대화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폐하!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언제까지 왕비 자리를 비워두 실 작정이신 거죠?" "때가 되면 왕비를 맞을 것이니, 이제 그만 좀 하게! 제너스 백작." 짜증이 묻어나는 미카엔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중신 중 하나 로 보이는 남자의 목소리는 여기서 물러날 줄 몰랐다. "그 때가 대체 언제입니까? 이젠 왕비 자리도 문제이긴 하지 만, 후계자도 필요하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헉! 후계자?' 나는 그렇게 놀라며 귀를 기울이다, 그러다, 얼굴이 창백해져 있는 노시종과 눈이 마주쳤다. 감히 왕의 말을 엿듣고 있다니, 이것은 불경죄 중 하나였다. 결국, 나는 그에게 어설픈 미소 로서 씨익 웃어보이고는 다시 열심히 대화를 경청하는 태도를 취해보였다. "...그리고, 측실에게서라도 소생을 보시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 니까?" "글쎄..." "욱! 폐하!" '음... 저 아저씨 꽤나 다혈질이네. 저러다 혈압 오르면 어쩌려구.'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번 해쓱해져 있는 노시종에게 생 긋 웃어보였다. 일명 미소작전! 이렇게 엿듣고 있는 동안에는 그에게 화사한 미소를 아낌없이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래야 방해를 안하지! "이렇게 말하면 되겠나? 난 아직 애 아빠 될 생각은 없는데?" "윽... 그게 무슨 말씀..." 이 시점에서 제너스 백작은 그 자리에서 휘청했을 거라 생각했다. "후후... 너무 그런 충격어린 모습을 보이지 말게! 농담이야." "폐하! 지금 농담이 나오십니까!!" 결국, 제너스 백작은 혈압이 올랐는지 목소리까지 갈라져 있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여자에게서 나의 후계자를 볼 생각이네! 그러 니, 이젠 후계자 문제로 더 이상 토를 달지 말게! 물론, 그 여자가 왕비가 되든 아니든 말이야." "설마... 크로시벨님을 염두에 두시는 것은...? 아직도, 그분에게 서 헤어나오시지 못하신 겁니까? 그 분은 폐하의 의지로 측실의 신분에서 풀어주시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나는 내심 불안해졌다. 설마, 미카엔이 나에게서 후계자를 보겠 다고 선언하기라도 한다면, 나는 앞으로 어찌해야 될지 막막했 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날을 잡아서 그에게 술을 잔뜩 먹여 만취하게 하고는 나와 밤을 보냈다고 속여야 할 것 같았다. 그 리고 나서는, 거짓으로 임신했다고 선언한 다음 나중에 때가 되 면 갓난 아기를 구해다가, 내가 낳은 아이라고 속이면... 내가 그렇게 망상을 하고 있는데...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폐하." 제너스 백작이 그렇게 답하는 말소리와 함께 문쪽으로 걸어오 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황급히 몸을 숨기고는, 잡생 각을 하느라 마지막 미카엔의 말소리를 듣지 못한 것을 무척 아쉬워하였다. 그리고는, 약간의 시간을 보낸 후에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 즈음, 내가 침실에서 마법력 증진에 집중을 하고 있는데 나의 파트너가 된 비서관 카이슨이 찾아왔다. "무슨 일이죠?" 나는 앤시아를 시켜 그에게 차를 대접하며 그렇게 물었다. 그 러자 그는 마음에 안든다는 얼굴 표정으로 나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임무를 맡았으면 하루 빨리 착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 게 굼떠서야... 이래서 내가 여자와 일하기 싫다니깐!" 노골적인 비난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저 녀석은 단순히 여자 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여성 협오증이 있는지도 몰랐다. 불쾌해진 나는, 그에게 냉랭하게 되물었다. "그렇다면, 카이슨은 어떻게 일을 착수하실 생각이신가요?" "당장 현지로 떠나야 하겠죠! 그 일 때문에 온 것입니다." "네에?" 나는 동그레진 눈으로 그에게 반문했다. 단순히 정령들을 이용 하여 이번 일을 해결하려 했던 나는, 매우 귀찮은 일에 휘말리 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체인지(Change) 제26화 -스파이(?)가 된 라비스- (2) -2- "꼭 현지까지 가야 하나요? 여기서 각자 정보 수집하면 안될까 요?" "한심하군요! 그런 정신으로 이러한 중대한 임무를 맡으려 했습 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스미스 비서관님께 말씀하셔서 포기하십시오!" 나의 말에 카이슨은 나의 속을 긁는 말만 골라서 아주 아주 얄 밉게 말했다. 한 대 때려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 저 면상... 하 지만, 나는 침착한 표정으로 그에게 은은한 미소까지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전 절대 이 임무를 포기 못합니다. 포기하시려면 카이슨이나 포기하세요. 왜 저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시는 거죠?" 그러자, 카이슨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으이구~ 엘리트이면 뭐하나? 성격이 더러운데... 게다가, 엄청 독선적이기까지... 흥~! 이다. "정말 답답하군! 그렇다면, 여기에 가만히 앉아서 무슨 수로 정보 수집을 한다는 거지? 방도가 있으면 말해봐!" 이젠 반말까지 하는 카이슨이었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에게 친근 한 말투를 써주어야 서로 파트너로서 정도 붙을 것이라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방도는... 으음... 그건 비밀인데?" 그러고 보니, 그에게 정령을 이용해서 정보 수집을 하겠다는 말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수준 높고 강한 정령들을 자유로이 부리고 있다는 사실은, 미카엔과 킬린 그리고 몇몇 사람들만 아는 사실이 었다. 물론, 그 강함은 미카엔과 킬린만 한정적으로 알고 있는 사 실이었다. 이곳 세계에서는 정령 마법사가 일반 마법사보다 훨씬 희귀했으며, 설사 정령을 부린다 하더라도 그 정령들이 독립적이고 체계적인 사고를 하여 그 주인을 돕는 그런 능력까진 갖추지 못했다. 그저, 주인의 명령만 간신히 따르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정령을 부리는 정령술사의 능력이 뛰어나야 더 강해진다 지?' 그리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정령들이나 광범위한 자연의 기운을 받은 높은 레벨의 정령은 그 자존심이 강해서 쉽사리 인간들과 접촉을 갖지 않았다. 그저, 조금 강한 자가 힘으로서 어린 정령이나 약간 정령을 굴복시키는 것 뿐. 어린 정령과 시타급의 정령 중에서도 자연의 기운을 좁게 받아들이 는 정령들은 그 순수한 심성만 강하게 드러날 뿐, 그다지 독립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샤르 같은 존재가 좋은 예이다. 샤르는 정령답지 않게 세속에 많이 젖은 행동을 보였다. 그것은 그가 많은 세월과 풍파를 겪었다는 사 실이었다. 특히 인간들이 바글대는 세속에서 말이다. 어쨌든, 내가 정령들을 부리는 것이 드러난다는 것은 예전에 내가 정령들을 이용하여 일을 꾸몄던 일(베른 공작 매장, 유령 사건, 소 문 조작)이 다 드러나는 셈이었고, 앞으로도 내가 정령들의 힘으로 뭔가 하게 될 때 방해를 받을 수도 있었다. 결국, 그렇게 내가 대답을 당당히 못하자 카이슨은 나를 비웃으며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에 자이라스국으로 떠나도록 합시다. 우리 쪽에서 몇몇 첩자들을 그곳에 심어두긴 했지만, 지금 그곳은 많은 변혁이 이 루어졌다고 하더군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요즘은 그들과 연락이 쉽 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확한 정보를 알기 위해서는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지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청산유수와 같이 매끄럽게 자신이 할 말을 다하고는 나의 침실을 나갔다.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결에 자이 라스국까지 가게 생긴 이 상황에 나는 분하였지만, 일이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든, 그의 높다란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주어야겠다고 나는 다짐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간단하고 평범한 몸에 꼭 맞는 여성용 여행복을 입고 나서, 거울 앞 에 섰다. 은밀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모습이어야 하는데... 나의 외모는 너무 눈에 띄었다. 특히, 휘황찬란한 황금빛 머리카락은... 으음, 너무 튄다. 결국, 나는 나의 모습에 일루전을 걸기로 결심했다. 나의 머리색과 눈동자색을 검은빛으로 바꾸는 것! 나에게 일루전을 걸은 나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광택이 도는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허리선을 넘고 있었고, 눈동자는 깨끗하 고 맑은 선명한 검은빛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 거울에 비쳤다. "헉!" 나의 모습에 본인이 놀란 나... 곁에 있던 리엔시타의 눈도 휘둥그레 해졌다. 머리색을 검은빛으로 바꾸면, 조금은 덜 튀겠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것이 오산이었음을 깨달아야 했다. 금발의 모습의 나는 화려한 미를 발하였는데, 지금은 선명한 검은빛 과 새하얀 피부색이 대비되어 고혹적인 반면 순결한 미가 여신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누굴 유혹하는 듯한 나 의 고혹적인 모습에, 내 가슴이 다 떨렸다.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다가, 거울을 손으로 쥐고는 외치기 시작 했다. "이건 인간이 아니야! 라비스! 넌 왜이렇게 태어난 거야? 이 요사스런 육체와 네 망할 운명을 나에게 휙~ 던져주고 가버리면, 장땡인 줄 알 아?! 네가 포기한 남은 운명을 왜 내가 감당해야 돼? 왜 내가 라비스가 되어야 해? 네가 감당하지 못한 운명을 나라고 감당할 수 있을 것 같 아? 난 너와 아멘시타 그리고 셀레나가 원하는 대로 완벽한 라비스가 되어 버렸어! 그리고... 나의 영혼도, 마치 너와 쌍둥이처럼 라비스로서 변색되고 말았어. 라비스로서 생각하고, 라비스로서 행동하고, 라비스 로서 네 운명의 상대에게 끌리고, 젠장!" 나는 스스로의 미모에 충격을 먹고는 지레 흥분하여 그렇게 떠들다가, 다시 잠잠해진 모습으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있던 리엔시타 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 생각했는지 겁을 집어먹은 모습으로 눈물까지 글썽이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내가 라비스 크로시벨임을 인정했으니... 나는 라비스이 자 도현, 두가지 색의 영혼을 공유한 새롭게 태어난 라비스. 아마도, 죽은 너와 난 영혼의 쌍둥이가 아니었을까? 이게 너에 대한 마지막 원망이니, 훗~ 앞으론 이런 일이 없을 거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림을 마치고는, 짐을 챙겨 침실을 나왔다. 복도를 지 나쳐 가는 시녀들이 나를 힐끗 힐끗 바라보았다. 다시 머리색을 돌리고 온다는 것을 깜빡한 나는, 왜 저렇게들 쳐다보나 하며 의아해 했다. 그러다, 나는 복도로 난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여긴 궁성의 뒤쪽에 위치한 복도라서 후원이 쉽게 내다 보였다. 미카엔과 그의 어릴적 검술 스승이었다는 노기사가 대련하는 모습이 눈 에 들어왔다. 아마도, 아침 운동으로 저렇게 검술 대련을 하는 모양이었 다. "꺄아~! 넘 멋져!" "정말, 폐하의 그 부드러운 눈길을 1분만이라도 받아봤으면 소원이 없 을 거야." 복도의 창문으로 고개들을 내밀고 구경하는 시녀들의 모습이 나의 눈 에 들어왔다. 정말 못말리는 광경... 한심하기도 하고. '앗! 그런데, 나 역시 저 모습을 구경하고 있잖아?' 나는 스스로를 질책하며, 다시 가던 길을 가려 했다. 그런데, 미카엔은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내어 나에게 눈길을 주고는 해맑은 미소와 함께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그때, 노기사는 미 카엔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가했다. "아앗! 기습 공격을 하다니! 기사로서 정당하지 못하오!" 미카엔은 날아오는 검을 재빨리 막고는, 그렇게 자신의 방심을 묻어버 리고 노기사를 탓했다. 그러자, 노기사는 미카엔에게 뭔가 충고하려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 하는 듯 했으나, 미카엔은 그의 말까지 들을 여유가 없었다. 그는 그대로 이동하여, 나의 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에구~! 깜짝이야! 미카엔은 대련을 하느라,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머리색이 바뀌었군. 아름다워!" 그는 나에게 다가와 나의 긴 머리카락을 살며시 만졌다. 미카엔의 뒤 로는 얼굴이 불게 상기된 시녀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부러 워하는 표정들... '너네들은 이게 부럽냐? 나는 닭살이 돋는다.' 그녀들을 보며 내가 생각한 내용이었다. 미카엔은 몇가닥의 머리카락을 손에 살짝 쥐고는 자신의 입술을 갖 다대더니 가볍게 키스를 하였다. "잘 다녀와! 라비스. 네가 원하는 대로 창공을 가르는 당당한 한 마리 의 매처럼 끝없이 성장하는 당당한 숙녀가 되길 바래." 체인지(Change) 외전Ⅴ-미카엔의 고뇌(2)- (킬린과의 대화 중에서) 외전Ⅴ -미카엔의 고뇌(2)- (킬린과의 대화 중에서) 중앙 궁성의 한 응접실... 다른 화려한 방들과는 달리, 이곳은 고급스러워 보였지만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실내의 모습이 심플하였으며 간 소하였다. 복잡하고 요란한 것보단, 심플하고 깔끔한 것을 더 선호하는 미카엔의 취향이 이 방에도 잘 나타나 있는 셈이었다. 이 응접실 안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푹신한 쇼파가 중앙에 놓 여 있었는데, 그 쇼파에 미카엔과 수석 마법사인 킬린이 마주 앉 아있었다. 그들 사이에 있는 나무 제질로 만들어진 테이블이 있 었는데, 그 위에는 체스판이 놓여있었다. 흑과 백의 정사각형 모양이 그려진 전형적인 체스판의 모양이었다.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 세계의 체스판은 칸수가 더 많다는 것이다. 미카엔은 윗부분이 주교의 모자모양으로 되어있는 백색 체스의 말 을 가만히 움직였다. 그러자, 킬린은 한참을 고민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더니 흑색의 위저드 말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나서 미카엔 이 방금 움직인 비숍 말인 주교 모자모양의 말을 밀어냈다. "훗~ 역시 직업이 마법사라 그런지, 위저드의 말을 잘쓰는 군! 하 지만, 이것으로 끝이야." 미카엔은 룩(Rook-장기로 따지면 차(車)에 해당)을 움직여 킬린의 위저드 말을 밀어냈다. 미카엔은 킬린에게 비숍말을 내주고 위저드 를 잡은 것이다. 비숍말은 먹음직스런 미끼라고나 할까? 체스판에 서 비숍은 중요한 말이었지만, 위저드 말을 주로 쓰는 킬린으로서는 위저드 말을 잡힌 것은, 오히려 킬린이 큰 손해를 입은 셈이었다. 킬린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은 살짝 일그러졌다. "으음... 폐하.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무엇인가?" "폐하는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중신들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왕비를 맞으시는 일을 늦추시는 것도 그렇고, 라비스님의 측실 신분을 풀어주신 것도 저로서는 폐하의 심중을 헤 아리기가 정말 어렵군요." 킬린은 체스를 두다 말고 미카엔에게 그렇게 질문을 했다. 사실, 그는 미카엔의 응접실로 올 때 체스를 두려는 목적이 아니라, 미카엔과 허 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려는 것이 목적인 듯 싶었다. "킬린! 킬린은 내가 어떻게 했으면 하지?" 미카엔은 킬린의 말에 오히려 질문을 하며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정작 진지한 표정을 지었어야 할 체스를 놓을 때는 가벼워 보이는 표정 이더니... "폐하는 라비스님을 사랑하시고 계시겠지요. 그렇다면, 폐하는 그분을 해방시켜드리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분을 왕비로 내세우고자 하는 마 음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분을 측실인 신분인 상태에서 얼마든지 왕 비로 내세우는 자신의 의지를 밀고 나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분을 포기하시는 것도 아니면서 이러한 어정쩡한 상태로 방치하고 계시는 거죠? 폐하는 드높은 위치의 왕이십니다." 킬린의 말에 미카엔은 살짝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체스판에 놓여진 킹 옆에 놓여진 퀸의 말을 가만히 만지작 거렸다. "라비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의 왕비가 될 거야. 그리고, 나의 여 자가 될 것이지. 그녀 스스로의 의지로 말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킬린은 미카엔의 말이 알쏭달쏭하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미 카엔은 더욱 짙어진 웃음을 보이며 그에게 입을 열었다. "그녀를 왕비로 무리없이 만들기 위해서는 어차피 중신들의 애간장을 태워야 해. 그들에게 라비스만이 왕비가 될 수 있음을 인식시켜주는 것 이 낫겠지. 나는 들어오고 있는 모든 혼담을 다 물리치고 있으니깐! 그 리고..." 미카엔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긴 은빛 손눈썹이 응접실 안의 촛불에 의해 반사되어 은은한 빛을 발했다. 촛불의 빛에 의해 생긴 음영이 미카엔의 단아한 이목구비에 드리워져 그 모습이 더 욱 뚜렷해져 보였다. "내가 그녀를 적당히 사랑했다면, 어쩌면 그녀를 강압적인 방법으로 취 했겠지. 처음엔 나는 그러려고 했으니깐. 하지만, 이젠... 그 마음이 바 뀌었어. 나는 그녀의 껍데기만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영혼까지 완 벽하게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졌거든. 그러자면, 나는 기다려야 해. 그 녀가 진정으로 나를 원하게 될 때까지. 그것 때문에 많은 자제심이 필요 하긴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킬린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무겁게 입을 열어. "라비스님께서 만약 폐하를 원하시지 않는다면... 그땐, 어쩌시렵니까?" "흠, 글쎄. 그렇지는 않을걸. 후훗... 라비스 덕분에 내가 조금 힘들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에게 고마워 해야할 것 같아. 그녀는 내가 왕으 로서 필요한 인내심과 자제력이라는 자질을 어김없이 길러주고 있으니깐." 미카엔은 그동안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그리고, 라비스의 성격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며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왜 거부하고 기대 지 않으려 하는지, 그녀의 입장에서 이해 해보려 노력했다. 사실,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까지 미카엔은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고 이해 해보려 했던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라비스가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은 그날, 그는 그녀의 측실 신분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더 이상 여자로 보지 않겠다는 다짐까 지 했었다. 그 당시에 그는 라비스에게 화가 나기도 했고, 그녀를 정말 이 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라비스를 그저 한사람의 신하로서만 대하는 것은 결코 가능한 일 이 아니라는 것을 날이 갈수록 가슴 깊이 깨달아야만 했다. 결국, 그녀를 포기해야겠다는 것 마저 여의치가 않게 된 미카엔은, 문득 그녀가 지금 스스로 서기를 원하고 있을 거라 생각되었다. 그녀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왕비 자리를 거절하고 어쩌면 힘들 수도 있는 관리직을 택 한 것을 보면.. 결론은 그러했고, 지금까지 라비스가 벌려 왔던 일들... 그것만 생각해 보아도, 그녀는 한번도 자신에게 기대려 하지 않았고 스 스로 해결하려 했다. 그것은 지금 라비스가 한자리에 머물고 싶어하지 않 는다는 것이다. 미카엔은 라비스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마계로 사람들을 몽땅 끌고 왔었 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자신의 아버지를 잃은 충격과 슬픔, 분노로 인 해 자제력을 잃었던 탓으로 라비스에 대해 배려를 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화를 냈었다. 그리고, 잠시 마계의 한 동굴에서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 라비스는 뭔가 상처를 입었는지 자신에게 약간 딱딱해진 행동을 보였었 다. 호칭 하나만 보아도 알 수가 있었다. 그때까지 자신을 미카엔이라 잘만 부르던 그녀는 갑자기 미카엔에서 전하로 호칭을 바꾸어 부른 것 이었다. 물론, 그 뒤로는 다시 미카엔이라 불렀지만 미카엔은 그 순간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그때, 라비스는 뭔가 심적으로 미묘한 변화를 일으켰으 리라 생각되었다. 어쨌든, 그녀를 돕는 일이 오히려 그녀의 자존심을 상처입히는 일이 라는 것을 깨달은 미카엔은, 라비스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대신에, 간섭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저 그녀를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언제나 그녀 나름대로 노력을 하 는 라비스를 보며 그녀가 원하는 대로, 미카엔은 그녀가 스스로 성장 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때, 킬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폐하. 자고로 여자란! 자신을 내어준 이에게 그 마음이 기울기 마련 입니다. 그렇게 힘들게 기다릴 필요없이 이대로 밀고 나가셔도 상관은 없을 듯 합니다만." "아니! 그렇지 않아. 라비스는 다르거든. 내가 만약 강압적으로 그녀 를 취한다면 라비스는 오히려 나에게서 멀어지고 말 거야. 그리고, 나 는 그녀가 상처를 입는 것이 싫어. 그녀를 잃는 것은 더욱 싫고..." * 곧, 추석이군요. 모두 추석 잘 보내세요.^^ 음... 이번이 미카엔을 쥔공으로 한 두 번째 외전이군요. 이번 편에서 미카엔의 속마음이 좀 드러나지요? 암튼, 앞으로도 이렇게 현재 체인지 주인공을 제외한 주변 인물들로 외전의 주인공으로 하여 쓰게 될 것입니다. 3인칭으로서... 지금까지는 미카엔과 엔카루스 그리고 본래 라비스와 현실 세계에서 의 도현으로서 외전을 썼네요. 흠, 그 다음 주인공은 누가 될까? 여전히 미카엔...? (조연들을 편애하 면 안되는데...) 웅~ 근데, 제가 본편이 아닌 외전을 올렸다고 해서 불만이신 분은 없 겠죠? +.+ 글구, 추석날에는 체인지를 못올리겠네요. ^^;; 실컷 놀아야지! ㅎㅎㅎ 앗! 짐 비가 오네요~ 덧- 또 한가지! 사실상, 체스에는 위저드라는 말은 없지만, 여긴 마법사가 존 재하는 이세계이니 체스 방식도 약간은 다를 수가 있겠죠? 제 맘대로 한가지를 더 추가했어요. 글구 칸수도 더 많다고 설정해 버리고...ㅡㅡ;; 체인지(Change) 제26화 -스파이(?)가 된 라비스- (3) -3- 미카엔의 의미심장한 인사말을 듣고 나서, 나는 카이슨과 만나 왕실 마법사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갔다. 그들의 공간 이동 마법진 능력으 로 단숨에 국경까지 이동해 가기 위해서였다. 나는 킬린을 만나러 가 는 동안, 미카엔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 었다. '그는 나를 꿰뚫어보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가 나를 이해해주는 것 같아서 고맙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에, 나는 아직 멀었 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나는 킬린의 힘을 빌어 자이라스국의 국경 근방으로 이동해 가서 국경을 넘기전 카이슨과 나는 국경을 넘을 만한 방책에 대해 잠 시 의논을 해야 했다. "라비스는 제법 뛰어난 마법사라고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 론, 그것이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수준의 마법을 구사할 수 있기에 그러한 소문이 돈 것이겠죠? 뭔가 방책이 있다면 말해 보시지요." 카이슨은 꽤나 독선적이고 여자를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이 번에도 자신의 주장을 나에게 피력할 것이라 생각되었지만, 의외로 나에게 먼저 의견을 물어왔다. 하지만, 나는 그가 나에게 의견을 물어 뭔가 꼬투리를 잡으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았다. 그는 나를 무척 귀찮은 떨거지로 생각하고 있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 역시 그로 인해 정령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없게 되어, 그를 떨거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플라이 마법을 써서 높게 날아올라 국경을 넘을까 생각하는데요." "훗~ 마법을 써서 국경을 넘는다라... 역시 멍청한 방법이군요. 모든 국 경 지대에는 마법적 기운을 감시하는 탐지 마법이 걸려 있는 것은 기본 상식으로 알아두고 있어야 합니다. 라비스의 말대로 플라이 마법을 써 서 국경을 넘다가는, 불법으로 국경을 넘은 죄로 당장 붙잡혀 가게 되지 요." 역시나, 그는 나에게서 뭔가 꼬투리를 잡기 위해 그렇게 의견을 물었던 것이었다. '멍청하다니! 모를 수도 있는 거지.' 나는 열이 뻗쳤으나 그의 말이 맞는 말이었으므로 반박을 할 수가 없었 다. 그에게 억지 논리를 폈다가는 말발이 밀려 오히려 내가 멍청한 여 자로 낙인찍힐 수가 있었다. 나는 찌푸려지려는 얼굴 표정을 애써 폈다. 그에게 분해 하는 모습을 보 이는 것은 오히려, 내가 지는 듯한 느낌이었기에 나는 그에게 은은한 미 소까지 지어보이며 미소 띤 얼굴 표정과는 상반되는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 그렇군요. 기본 상식이라... 그런 기본 상식을 잘 알고 계시는 카이슨 은 어떤 방법을 이용하실 거지요? 그런 마법적 기운이 안된다면, 자연의 존재인 정령과 같은 존재에게 도움을 받으며 국경을 넘어야 하든가, 아니 면 국경을 당당하게 지날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카이슨이 생각 하고 계시는 현.명.하.고. 기발한 방법이 있다면 어디 들어 볼까요?" 나는 멍청하고 본인은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그에게 약간 비꼬며 말 하자, 카이슨은 얼굴을 찌푸리며 떨거지와 같은 내가 짜증난다는 듯한 눈 길로 나를 쏘아보았다. "정말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저렇게 발끈하다니, 역시 여자 들의 그 옹졸함과 좁은 생각들은 남자들을 너무 피곤하게 해! 어쩌다 내 가 이런 멍청한 떨거지와 파트너가 되었는지..."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내가 대단한 격투 기를 배웠던 것도 아니었던 터라 여자의 몸을 가지고 있는 나는, 육체적 공격으로서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카이슨은 쉽게 나의 손목을 붙잡았고, 나는 그에게 붙잡힌 손을 빼기 위해 다시 그에게 발길질 같은 행동을 했다. "으윽!" 정강이를 걷어 차인 그는 짧은 신음과 함께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는 화가 났는지, 나를 확 밀쳤다. "꺄악~!" 그의 밀침에 나는 볼썽 사나운 모습으로 뒤로 넘어졌고, 엉덩방아를 찌며 팔을 땅바닥에 지탱하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나의 팔 살갗이 까져서 무척 쓰렸다. 카이슨은 일부로 나를 밀치려는 의도는 아니었는지 내가 넘어지자 약간 당황한 얼굴을 하였다. 하지만, 나는 너무 화가 났고 분했던 터라 정령 의 이름을 외치고 말았다. "아젠!" 사실, 샤르를 부를까 했지만 샤르는 한번 공격이라는 것을 하면은 흥분을 하여 무자비해지기 때문에, 조금은 냉철한 성격을 가진 아젠샤르의 이름을 불렀다. '그'라면 적당하게 혼만 내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아젠샤르는 나의 부름에 금세 모습을 드러내었고 카이슨은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아젠! 저 녀석을 조금만 두들겨 줘! 다시는 잘난 척 하지 못하도록!" 나의 명령에 아젠샤르는 잠시 머뭇하였으나, 이내 바람의 힘을 그에게 날 렸다. 아젠샤르의 바람의 줄기는 약간의 냉기를 띠고는 카이슨의 몸 주위 를 회오리 치듯이 세차게 휘몰아쳤고, 이에 카이슨은 우욱! 하는 신음성과 함께 팔로 얼굴을 가려 보였다. 잠시 후, 아젠샤르는 바람을 가두어 들였고 나는 카이슨을 바라보았다. 그 러자, 그의 머리카락은 얼었는지 딱딱해져 있었고 그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카이슨, 지금 상황으로 뭔가 깨달은 점이 있겠죠? 떨거지는 내가 아니라 카이슨이라는 것을. 카이슨이 유능하고 똑똑한 인재라는 것은 잘알지만, 당신은 너무 자만심이 강하고 남을 완전히 파악하지 않고 무작정 무시하 는 모습을 보이죠. 그것은 당신 주위에 적을 만들게 되는 일이죠. 큰 단점 이기도 해요. 그렇게 여자들이라고 모두 무시했다가는 언젠가 큰 코 다칠 거예요." 나는 그에게 충고어린 말을 하였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그렇게도 무시했 던 여자에게 당하고 충고까지 들은 것이 수치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정말 자신이 부끄럽게 생각되서 그런지, 그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한동안 그는 말없이 있더니, 고개를 천천히 들어 나에게 입을 열었 다. "좋아요! 내가 어리석었군요. 그리고 당신을 인정하겠습니다. 정령까지 부 리고 있는 줄은... 후후... 그럼, 일이 간단하게 되었군요. 바람의 정령이라... 당신의 능력으로 국경을 넘을 수 있겠습니다. 당신의 정령이 이 근처에서 맴도는 바람의 정령들보다 상급이라면 말입니다." 그는 의외로 저자세로 나왔고, 나에게 화를 내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만약 그가 나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적을 하나 만들게 되는 셈이었다. 그것도, 내가 정령들을 부릴 줄 아는 마법사라 는 것을 아는, 적 말이다. '음... 역시, 잘난 척하고 여자 혐오증만 없다면 괜찮은 녀석일지도.' 그렇게 약간의 우여곡절 끝에 국경을 넘은 우리는 자이라스의 수도로 가 는 마차를 구한 다음, 곧바로 수도로 향했다. 첩자로서의 성격을 띤 이 번 임무를 해내자면 수도로 가는 것이 좋았다. 수도로 가야 뭔가 중요 하고도 제법 정확한 내용의 입소문을 더 많이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리엔시타나 아멘시타를 이용할까 했으나, 내가 직접 수도로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되었다. 카이슨은 지금 자이라스의 수 도에 침투해 있을 몇몇 첩자들과 접촉을 시도해 보아야 하겠다고 했다. 첩자들에게 소식을 듣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기에, 그리고 그들과의 연락 이 두절된 이유도 알아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수도로 가야 했다. "그런데, 라비스. 정말 소문처럼 폐하의 숨은 실력자입니까? 전 그동안 라비스에게 편협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아마도, 라비스의 외모 만으로 판단한 결과이겠지요. 전 단지 라비스를 폐하에게 총애를 받는 얼굴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는 여자라고 생각했거든요." 마차 안에 나란히 앉은 우리는 묵묵히 창밖만 바라보다가, 문득 카이슨 이 그렇게 말을 걸었다. 그의 말투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나를 무시하 는 어투가 아니라, 동료로서 조금은 존중하는 어투였다. "훗~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아깐 미안했어요. 전 조금 욱하는 면이 있거든요." "나야 말로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앞으로 열심히 해서 임무를 마 치도록 하지요. 잘 부탁해요. 앞으로 '카이'라고 부르십시오." 그의 말에 나는 방긋 웃어보였다.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빨리 인정하고 그것을 고치기는 쉽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카이슨은 금세 그것을 고치고는 자신의 높다란 자존심을 한번 접고 나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다. "네. 그러죠! 카이." 그렇게 카이슨과 화해하며 그동안 껄끄러워던 그와의 감정을 풀었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풀어진 얼굴로 마차의 창문을 통해 하늘을 올려 다 보았다. 화창하고 따스한 봄날의 하늘답지 않게 우중충한 잿빛 하늘 이었다. 그런데 그때, 마부석에서 마차를 몰고 있는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분 연인 사이이신가요? 아니면 부부이신가요? 잘어울리시군요." 마부가 지레 짐작을 하고는 그렇게 우리에게 외쳤다. 하긴,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었다. 젊은 남녀가 단둘이 여행을 하면 연인이라는 짐작이 제일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물론, 평범한 사람들 같은 경우에 말이 다. "맞아요! 여기 아름다운 숙녀분은 나의 약혼녀입니다. 수도에 계신 조부 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것이거든요." "아하~! 그렇군요. 정말 아름다운 약혼녀이군요. 자연과 자애의 여신 셀 레네스의 축복이 함께 하길 빌겠습니다." 카이슨이 둘러대는 말에 마부는 호탕한 성격이 드러나는 걸걸한 목소리 로 우리에게 진심어린 축복의 말을 했다. 나는 조금 거부감이 들긴 했지만, 그저 화사한 미소만 띄우며 카이슨에 게 살짝 속삭였다. "카이. 이곳 자이라스는 셀레네스라는 여신을 섬기는 모양이죠?" "네. 그녀는 이 나라에서 주로 떠받들여지고 있는 여신이죠. 그녀는 자 연과 자애의 여신이라고 불리지만, 그 여신의 미모는 굉장히 아름다워서 미의 여신 '크리시아나'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음, 그러 고 보니 예전 여신의 미모로 불리워졌던 크리스티나 아르젠도 그 여신의 이름에서 따왔다고들 하지요. 아! 그리고 셀레네스는 엘프들 혹은 정령 들의 여신이기도 합니다." 체인지(Change) 제26화 -스파이(?)가 된 라비스- (4) -4- 나는 여신 셀레네스에 대한 카이슨의 얘기에 흥미가 끌려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셀레네스를 모시는 신전들은 근래에 쇠퇴하고 있지요. 몇 백년 전에는 셀레네스 신전의 그 위엄과 권능은 창조신을 모시는 신 전과 거의 세력을 같이 했었거든요." "쇠퇴하고 있다구요? 왜요?" "그건, 셀레네스를 받들고 있는 신관이나 여신관들은 거의 이백년 전 부터 셀레네스의 권능을 볼 수 없을뿐더러, 더 이상 여신을 통해 신 성력을 발현시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 권위자들은 대부분 이 렇게 추측들을 하고 있죠. 여신 셀레네스는 신계로부터 추방을 당해 더 이상 신족으로서 권능을 쓸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의 말에 나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는 셀레네스를 신봉 하는 종교인도 아니었고 아무 상관도 없지만, 왠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간이니 신계라는 곳의 정확한 내막까지는 알 수 없었지 만, 뭔가 보이지 않는 사정이나 사건이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음, 그런데 카이! 만약 셀레네스가 신계로부터 추방을 당했다면, 자연 과 자애 그리고 미의 여신이자 엘프들 정령들의 여신인 셀레네스의 권 능이 없어도, 그녀에게 축복을 받는 존재들은 아무런 해 같은 것이 없 나요? 예를 들어, 여신의 가호를 받는 엘프족들이 혼란에 빠지거나 재 앙이 닥쳐 멸족하거나 말이죠!" 나의 질문에 카이슨은 내 질문이 재미있었는지 나직하게 웃음까지 터뜨 리며 입을 열었다. "후훗~ 그런 일로 멸족까지 가는 일은 없습니다. 여신 셀레네스는 단 순히 상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죠. 그녀가 자신의 가호를 받는 모든 것을 주관하고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자신을 떠받드는 이 들에게 축복을 해주는 것뿐이죠. 그녀가 자연과 자애의 여신이 된 것 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기운의 특성과 그녀의 심성으로 인해 그렇게 자연과 자애의 여신으로 상징화 된 것 뿐입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신 뿐이지요. 그는 전능하신 창조 신이자 어디든 심지어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존재하시는 모든 만물의 아버지입니다." "아, 그렇군요. 훗~ 그러고 보니, 카이는 꼭 종교인 같네요. 말하시는 것이 신관들 같아요." 나는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어쨌든, 이곳의 창조신은 내가 살던 세 계에서 따지자면 기독교의 하나님하고 비슷한 존재인 듯 했다. "하하. 역시 그렇게 보였나요? 전 어렸을 적 꿈이 신관이 되는 거 였습니다. 하지만, 집안에서 반대를 해서 그 꿈을 포기해야 했지요." 헉! 카이슨의 어릴적 꿈이 신관이었다니... 조금 의외였다. 나는 카 이슨이 신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깐깐하고 남 을 무시하는 모습의... 게다가, 잘난척을 무지 하며 근엄한 모습을 하고 있는 신관 카이슨의 모습을 떠올리자, 나는 웃음이 났다. "킥킥!" 나도 모르게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고, 카이슨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쏘아보았다. "뭡니까? 제가 신관이 되고 싶었다는 말이 그렇게 우스운 일입니까?" 꼬박 이틀 밤낮을 달렸다.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여행이었다. 결 국, 카이슨과 대화 나누는 일 밖에 다른 할 일이 없던 터라, 나는 카이슨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마차 안에서의 시간을 죽였다. 물론, 나는 미리 정령들을 수도 쪽으로 보내어 그곳의 동태를 살 피도록 하였다. 그리고, 창밖을 내다보며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풍경 들을 감흥없이 바라보았다. 맞부딪혀오는 바람으로 인해 나의 검은 긴머리카락이 가볍게 휘날렸다. 나는 얼굴로 흩어져 휘날리는 몇가닥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다가, 문득 이틀 전, 아침의 일이 생각났다. 미카엔...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동경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때론 그리운 것은 사실인데... 하지만, 나에게서 소중한 존재라는 것은 사실인 듯 했다. 손가락에 끼고 있는 실버 반지를 만지작 거렸다. 그리고, 끼고 있는 실버 반지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러다, 카이슨의 눈길이 느껴진 나 는 그에게 빙긋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날씨가 참 좋죠? 하늘이 조금 우중충하긴 하지만... 하하." 저녁 즈음, 우리는 적당한 여관의 방 두 개를 잡고는 각자 할 일을 했다. 카이슨은 어디론가 나갔고, 나는 방에서 정령들이 오기를 기다 렸다. 방의 침대 곁에 싸구리 초 하나가 끼워져 있는 촛대를 바라보았다. 나는 가만히 촛불을 응시하였다.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나는 생각 했다. 조그맣게 타고 있는 촛불이 너울 너울 춤을 추고 있다고. 그런데 그때! 조그맣게 타고 있던 촛불이 갑자기 길게 길어지더니, 방안의 허공에서 길게 늘어졌다. 참으로 신기한 광경...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곧, 길다란 불의 줄기가 허공에서 글자가 써졌다. 샤르의 형편없는 흘림체로. 「뭐해? 그렇게 멍청한 표정으로. 그리고 조심해! 이곳 수도에 엔 카루스의 끄나풀들이 드글대고 있어.」 그 글씨를 본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된 거야? 엔카루스가 여기 있다니?" 그러자, 불로 이루어진 글씨는 픽! 꺼지듯 사라졌고 대신 샤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지금 리엔이랑 아멘시타 아젠까지 모두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나는 그 중간 보고를 하러 온 것 뿐이고. 엔카루스가 여기 수도 에 있어! 그는 어찌된 일인지 이곳에서 뭔가 보이지 않는 배후 역 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그의 말에 나는 얼굴 표정을 심각하게 구겼다. 대체 무슨 속셈인 것인지. 샤르는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고 나는 다시 촛불을 응시 하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의외로 짜맞추기 추리에 소질이 있던 나는, 이번에도 머리를 굴림 으로서 뭔가 얻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예전, 왕성의 지하감옥에서 엔카루스를 마지막으로 봤던 일을 떠 올렸다. 그때 그는 나에게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했었다. 아마 도, 그렇게 말했던 것 같았다. 다시 돌아온다라... '그는 복수를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는 미카엔이 가진 것이 탐이 난다고 했던 것 같았다. 나 는 머리를 이리 저리 굴리다가 그만두었다. 아직 내가 알아낸 정 보는 희박하였고, 그것만으로 상황을 유추해내기는 힘들었다. 나는 이번 일에도 마족 키리아가 관련되어 있지 않기를 마음속으 로 바랬다. 그녀가 관련되어 있다면 또 뭔가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었다. 똑, 똑! 노크 소리... 아마도, 카이슨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방문을 열 어 방문 밖에 서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카이슨이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도록 하지요. 숙녀 방으로 들어가는 것도 뭣 하고...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를 따라 1층에 있는 식당겸 주점으로 가서 구석에 위치한 테이 블에 자리했다. 그는 급사에게 간단한 마른 안주와 흑맥주를 주 문하였다. 그리고는 나에게 얼굴을 조금 가까이 들이댄 다음, 소리 를 낮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알아낸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이곳 자이라스는 지금까지 인페르디아의 속국이었는데, 얼마전 독립하였다고 하더군요. 그리 고, 얼마 전부터 나타난 한 세력이 지금 왕을 몰아내고 자신의 세 력 중 하나를 왕으로 내세웠다고 합니다. 물론, 그 왕이 그 세력 의 배후, 혹은 두목은 아니죠. 그리고 이건 추측인데 그 세력의 배 후는 로히얀스 출신이 아닌가 생각되는 군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는 얼마전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탈출한 '엔카루스 아 모르'에요. 그의 세력이 여기 수도에 쫙 깔려 있을 거예요. 우린 좀더 행동을 조심해야 해요. 게다가, 나는 그와 안면이 있어 들킬 확률이 높아요. 우리 쪽에서 심어둔 첩자들의 활동이 많은 제약을 받은 것은 엔카루스가 로히얀스의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일 거예요. 게다가, 그는 마법 도적단의 두목이었으니 첩자들의 연결 루트를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죠." 내가 그렇게 말하자, 카이슨의 눈이 동그레졌다. 그는 놀랍다는 듯 이 혀를 내두르며 나에게 감탄이 섞인 말을 했다. "대단하군요. 라비스. 그 정도까지 알아내고 계신 줄은..." '후훗~ 그렇게 칭찬하면 쑥스럽지! 사실, 지금 카이슨의 말한 내용 은 내가 전혀 모르고 있던 내용이었는데.' 의기양양해진 나는, 나무로 만들어진 흑맥주잔을 들어 그의 앞에 놓 여진 잔에 부딪혔다. 그리고는, 쾌활해진 목소리로 기분좋게 그에게 외쳤다. "건배하자구요! 혹시, 여기도 술을 마실 때 한번에 쭉 들이키길 좋아 하시는 분들이 많나요?" 카이슨이 의아하게 쳐다보건 말건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에게 방 긋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맥주를 단숨에 들이키려고 폼을 잡는데, 나 에게 지정된 위층 객실에서 정령들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제는 나의 정령들 기운을 정확히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내심 뿌듯해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이! 전 이만 올라가야 하겠군요. 술은 아쉽지만 다음에 하죠." *146* 체인지(Change) 제26화 -스파이(?)가 된 라비스- (5) -5- 그날 밤, 정령들의 보고를 듣고 침대에 누워 머리에 쥐가 나도록 많 은 생각을 하다가, 뒤늦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나는 평소와는 다르게, 루이스의 과격하고도 터프한 나를 깨우는 행 동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일찍 일어났다. 욕실에 들어가 씻은 다음, 나는 카이슨이 묵고 있는 옆방으로 갔다. 그와 뭔가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엔카루스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곳 자이라스에 깊이 뿌리박고 있 었다. 그의 마법 도적단 출신인 심복이 이곳의 왕의 되어 있었고, 많은 중신의 자리에 그의 부하들이 심어져 있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어떤 방법으로 나라 하나를 집어 삼킬 수 있었는지. '그를 만나게 된다면 대단하다고 칭찬해 주어야 할까?' 나는 그가 이렇게까지 행동해야 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굉장히 끈질기고 집착성이 강한... 지금 이 모든 그의 행동은 내 존재에 대한 영향이 크리라 생각 되었다. 대체 왜 그렇게 그는 나에게 집착하는 것인지. 그리고 왜 그는 극단적 인 모습으로 이러한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까지 -물론, 그도 불행하다고 생각할지 의문이었지만- 이르게 한 것인지. 그는 부모님이 나 동생이 전혀 소중하지 않는지 의문이었다. 나는 왠지 씁쓸해졌다. 설마 내가 원인 제공자라는 생각은 애써 하지 않 았다. 그는 나에게서 어떠한 환상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 것은 그에게 처해 있는 여러 주위환경이 그에게 질긴 집착과 극단적인 결심을 낳게 했을 것이다. 자신이 처음으로 반한 여자가 된 나, 그리고 자신과는 다르게 완벽한 조 건을 가진... 지금도 나의 남편으로 믿고 있을 미카엔, 자신의 권력 욕구... 물론 이것은 처음에는 수동적이었다. 아무튼, 이 모든 것이 부분적인 요 소로서 그에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여동생으로 인해 나에게 괴롭힘 비슷한 행동으로 나에 게 관심을 가졌다가, 그 감정이 갈수록 커졌을 것이다. 그것은 또다른 형태의... 그러니까, 미카엔하고는 상반되는 성격의 쟁취 그리고 일방 적인 형태의 사랑이었다. 그리고, 대단한 노력파... 미카엔의 모든 것 이 천부적인 것에 비하면 말이다. 그리고, 반역이라는 죄를 저지르고 사형 선고를 받고 지하감옥에 갇혔 을 때, 더욱 더 극단적인 면모를 갖게 되었을 지도 몰랐다. 나는 예전에 그에게 한번 경고한 적이 있었다. 나에게 갖은 감정이 무 엇이든 그것을 지워버리라고... 아마도, 그때가 루젠다르로 외교사절로서 가던 길이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그가 나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짐 작하게 할 말한 발언을 하였을 때... 그는 나에게 미카엔을 사랑하냐고 물었다. 그리고 나는 대답했었다.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로 인해서 누군가가 상처받거나 불행해지는 것은 싫었다. 그로 인해 내가 행복해질 수 없을 테니. 나는 가라앉는 기분을 수습하며 카이슨의 방문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똑, 똑! "……." 다시 한번 똑, 똑! "……."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것을 보니, 그는 아직도 꿈나라임이 분명했다. 훗~ 이번 막중한 임무에 대한 나의 정신상태에 대해 어쩌구 저쩌구 하던 인 물이 나보다 더 늦게 일어나다니! 나는 그에게 잘난척을 하는 동시에 그 의 높은 콧대를 조금은 낮추어줄 기회가 온 것이라 생각하며 방문을 향 해 외쳤다. "카이! 아직도 자는 건가요? 한심하군요! 우린 이렇게 여유 부릴 시간이 없어요." "……." "카이! 빨리 일어나란 말이에요. 의논할 것이 있어요. 저 그냥 들어갑니 다?" 내가 그렇게 말하는데도 여전히 방안에서는 소식이 없었고, 나는 결국 방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어라?" 방안에 있어야 할 카이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가 아침 식사를 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나 싶어서, 식당으로 내려갔으나 그곳에도 그는 보 이지가 않았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주인 아저씨에게로 다가갔다. 그라면 카이슨이 언 제 밖을 나갔는지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아저씨! 어제 저랑 같이 왔던 일행이 언제 나갔는지 아세요?" "아가씨 일행? 글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인상착의를 설명해 주시겠소?" "음... 그는 짙은 갈색머리를 한 젊은 남자인데요. 키가 큰편이고 약간 깐 깐하게 생긴..." 나는 대충 생각나는대로 카이슨의 외모와 차림새를 설명하였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그제야 누군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느긋한 어조로 답했다. "아, 그 남자라면 자정이 넘는 시간에 다시 밖으로 나가던데 아직 들어 오지 않았나 보군요. 내가 새벽 한시에 여관문을 닫을거라고 말하니깐, 그는 내가 다시 여관문을 여는 여섯시 즈음에 돌아오겠다고 말하던데..." 여섯시라면, 지금이 7시가 넘었으니깐 시간이 조금 지나있는 셈이었다. 아마도, 그는 새벽사이 다시 첩자들과 접촉을 갖기 위해 나간 듯 한데,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나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혹시, 엔카루스 일당에게 걸려서 잡힌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방으로 올라가 아멘시타를 불러 카이슨을 찾도록 하게 했다. 아멘시타라면 동식물을 이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기억까지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으니, 카이슨이 지나간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카이슨이 있는 곳을 아멘시타를 통하여 알아낸 다음, 나는 그곳 으로 찾아갔다. 내가 찾아간 곳은 어느 허름한 여관이었다. 여기 역시 식당을 겸한 곳이라, 나는 식당의 적당한 테이블에 앉아 급사에게 아침 식사를 주문하였다. 우선, 이곳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아멘시타의 말로는 카이슨이 이곳으로 들어가 여지껏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이 식당에 있는 사람들... 주인을 비롯한 몇몇 남자들은 나를 힐끗 힐끗 쳐다보았다. 나는 그들의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고는 음식을 내온 급사 에게 입을 열었다. "여기서 하루 정도 묵으려 하는데, 빈방이 있어요?" 그러자 그 급사는 난처한 얼굴을 하며 빈방이 없다고 말하려는 듯 입을 여는데 그때, 여관주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끼여들었다. "마침, 빈방이 하나가 있습니다. 아가씨는 운이 좋으시군요. 조금 전에 체크 아웃(손님이 객실을 비움)된 깨끗한 방이죠. 금방 방을 준비해 드릴 테니, 식사하시고 올라가 보도록 하세요." 주인의 호의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는 말을 하였다. 그의 호 의가 순수하든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든 말이다. 주인은 내가 묵게 될 방의 침대 시트를 다시 깔고 여러 가지를 정리한다며 2층으로 올라 갔다. 그리고는 금세 다시 내려왔다. 제대로 방을 정리한 것인지... 의외로 그는 빨리 아래로 내려온 것이다. 식사를 마친 나는 급사를 따라서 2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뭔가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간단한 마법 스펠을 나직히 중얼거리며 외워두 었다. 급사는 나를 안내하며 2층의 복도 끝방까지 가더니 열쇠를 주고는 돌 아갔고, 나는 그가 돌아간 것을 확인하고는 리엔시타를 불러들여 카이 슨이 있는 곳을 확인하기 위해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읍!" 뭔가 잽싸게 다가오더니, 손으로 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다가온 존재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지만, 곧 그의 목소 리가 들려와 나는 그가 누구인지 깨달을 수가 있었다. "또다시 오랜만의 재회로군! 마법을 쓰는 것을 막으려면 이렇게 입부 터 막는 것이 좋겠지? 어쨌든, 다행이야! 내가 먼저 너를 발견할 수 있어서." 그는 엔카루스였다. 나는 그를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버둥거려 보았 으나, 검술로 단련된 그의 힘은 만만치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리엔시타를 불러놓고 있던가, 아니면 그녀를 통해 면밀히 이 곳을 살피고 들어와야 했는데, 성급하게 행동한 나를 자책했다. 그는 나를 붙잡고는 벽쪽으로 가서 나를 벽에 기대게 하고는 내앞에 마주보고 섰다. 물론, 손으로 나의 입을 막으며 말이다. 이거 왠지 야리꾸리한 포즈... 나는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지만, 그는 나의 이런 눈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어제 카이슨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 첩자들과 접촉하는 것을 내가 곳 곳에 심어놓은 녀석들에게 들었지. 그래서, 여관 길드를 통해 그너석 을 조사하게 했더니 그 녀석의 일행 중에 미소녀가 한명 있다고 그 러더군. 그래서 나는 혹시나 하며 너를 기다렸어! 그런데, 정말로 너 일 줄이야! 후훗... 라비스, 만약 키리아가 나보다 행동이 빨랐다면 너 는 분명 위험해졌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군." 엔카루스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키리아라니! 그럼, 이번에도 그녀가 관련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엔카루스와 손을 잡았던 일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얘기. 그들은 미카엔을 제거하자는 목적이 같은 셈이니, 서로 이용할만 했다. "머리색이 바뀌었군. 일루전을 쓴건가? 황금빛도 아름답지만 지금의 검은색도 잘어울리는데?" 그는 나의 입을 세게 틀어막고 있어서, 정말이지 고통스럽기까지 했 다.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한다? 하지만, 나는 더욱 난감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방문을 거칠게 열고 누가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마리!' 나는 더욱 동그랗게 된 눈으로 안으로 들어온 마리를 바라보았다. 정 말 황당하고도 최악의 사태... 마리 역시 자이라스국에 있는 줄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다니. 예전에 엔카루스처럼 감쪽같이 감옥을 탈출할 때 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 마리를 조사할 때 그녀는 근래에 흑마녀를 만나서 무서운 흑마법을 익혔었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그 흑마녀가 키리아였 던 것일까? "어쩐지 행동이 수상쩍다 했어! 엔카루스. 넌 그 계집을 아내라도 삼 겠다는 거야? 그렇게는 안될걸! 내가 가만두지 않아. 어차피 넌 자이 라스국에 로히얀스국까지 삼키려면 나를 아내로 맞아야 하니깐." '헉! 저게 무슨 말이지? 마리가 엔카루스의 아내가 되겠다고 말하다니. 그새 엔카루스가 마리를 꼬신 걸까? 참, 빠르기도 하지. 능력이 좋다고 해야 하나?' 나는 계속되는 놀라움에 이제는 머리가 어질 어질해질 정도였다. 지금 상황을 보니, 마리는 엔카루스의 행동에 의심을 품고 이곳까지 쫓아온 모양이었다. 정말 상황이 기묘하게 꼬이고 있었다. *147* 체인지(Change) 제26화 -스파이(?)가 된 라비스- (6) -6- "호호. 많이 놀란 모양이지?" 마리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마리! 넌 더 이상 상관하지마! 키리아에게 약물 중독된 주제에 그것을 진실이라 믿고 있다니." '약물 중독? 그렇다면, 마리가 마약 비슷한 약물에 중독이라도 되 었단 말인가?' 나도 모르게 내가 의아한 눈빛을 하고 있었는지, 마리는 깔깔 웃 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너는 키리아가 제조한 이상한 약물에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된 것을 말하고 싶은 거겠지? 그건 나도 알아! 난 멍청하지 않으 니깐. 키리아가 너와 자신의 일에 협력을 잘하도록 나에게 수를 쓴 것은 잘 알지만, 나에게 중요한 것은 동기보다는 결과야! 어찌되었 든, 난 현재 너를 좋아하게 되었으니깐." 이상한 약물로서 엔카루스를 좋아하게 되었다라... 그거 사랑의 묘약 과 같은 일종의 약물인 듯 했다. 이 세계에서는 그런 것도 제조가 가능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마리는 자신이 그러한 약물에 중독되었음 을 알면서도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위력이 대단한 모양이었다. 만약 저것이 엉뚱한데 쓰이기라도 한다면, 엄청 무서운 무기가 될 수도... 나는 그 와중에서도 묘약의 효능에 대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만 약 키리아가 미카엔을 제거하기 위해 그에게 묘약을 써서 그를 유혹 한다면... 헉!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결과가... 아니지! 미카엔은 드래곤의 피가 강하게 흐르고 있으니, 그러한 것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것 이다. 아무튼,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엔카루스가 나를 생각하는 그 감정을 이용한다면... 이 위기를 타개해 나 가야 하기 위해서는 나는 또 한번의 가증스런 모습을 보여야 할 것 같 았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우선 내가 살고 봐야 하니... 나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현기증이 도져서 몸에 힘이 빠진 척을 한 것이다. 내가 갑자기 이러한 모습을 보이자, 엔카루스는 쓰러지려는 나를 붙잡더니 틀어막고 있던 나의 입에서 손을 떼었다. 기회는 이때! "샤르!" 나는 샤르의 이름을 외쳤다. 엔카루스는 갑자기 내가 '샤르' 라는 이름을 외치자 그것이 정령의 이름임을 모르는 엔카루스는 잠시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화르르~! 샤르는 모습을 드러내자 마자, 커다란 불꽃으로서 엔카루스와 마리를 위협하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정령들을 몽땅 불러내었다. 나는 리 엔시타에게 카이슨을 찾게 하였고 창문 쪽으로 뛰어가 아젠샤르에게 나의 몸을 허공에 띄우게 하였다. 자이라스에 와서 심상치 않은 조짐에 대해 뭔가 알아내야 하는 이번 나의 임무... 이로써 완수한 셈이었다. 나는 엔카루스와 마리의 대화를 통해 그동안 미심쩍었던 사실까지 모두 알아낸 셈이니, 이젠 무사히 도망가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나는 여관 창문에서 허공으로 날아오르기 전에 엔카루스에게 한번 눈 길을 주었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지만, 내가 이렇게 그를 속이고 도 망가는 것에 대해 그다지 분해 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다만, 애써 만 난 자신의 그리움을 다시 놓치게 되어 안타깝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짧은 순간, 그의 표정을 읽은 나는 문득 가슴이 아파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그에 대한 동정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안타까웠다. 그의 심정 까지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방금 그의 모습에서 그의 감정이 전 해져 지금 이 상황이 매우 안타깝게 느껴졌던 것이다. 내가 어느 정도 허공 위로 떠올라 있었을 때, 리엔시타가 여관의 어느 방에 있는 카이슨을 찾아내었다. 아젠샤르는 카이슨 쪽으로 바람의 힘 을 보내어 그를 이쪽으로 이끌어 오게 하였다. 카이슨은 밧줄로 온몸 이 꽁꽁 묶여 있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그렇게 카이슨과 내가 적당히 멀리 도망치자 샤르는 엔카루스와 마리를 묶어두는 일을 그만두고 내쪽으로 합류하였다. "카이!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는데요? 이제 임무는 완수했으니 로히얀스 로 돌아가요. 아! 여관에다가 짐을 놔두고 왔는데... 중요한 물건은 없겠 죠?" 그러자, 리엔시타에게 도움을 받아 재갈과 밧줄이 풀려 몸이 자유로워 진 카이슨은 피식 웃으며 나의 말에 답했다. "네. 그다지 중요한 물건은 없습니다. 아무튼, 이번에 라비스에게 신세 를 지게 되었군요. 고맙습니다. 앞으로 제 잘못된 고정관념을 뜯어고 쳐야 할 것 같군요. 이 세상에는 저보다 잘난 사람은 많고, 여자들 역 시 남자들보다 강한 경우가 있다는 것을..." "이야~ 그것 참 바람직한 생각인데요? 자신의 한계를 누구보다 명확 히 깨닫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은 발전할 가능성이 높은 법이죠. 물론, 그가 더욱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하겠지만 말이에요. 어쨌 든, 카이가 좀더 겸손해졌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사실, 그동안 카이 는 너무 잘난척을 많이 했거든요." 내가 그렇게 방긋 웃으며 말하자, 카이슨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잘난척을 너무 많이 해서 미안하군요!" "앗! 삐졌어요? 저런! 나는 카이가 잘난척을 조금 하지만 마음은 넓 은 분인줄 알았는데?" "라비스. 그렇게 남자를 놀리면 못씁니다." 종일 하늘을 날았던 나는, 마침내 로히얀스 왕성까지 돌아오게 되자, 미카엔에게 보고할 보고서 작성이고 뭐고, 너무 피곤하여 침대에 쓰 러졌다. 나의 행색이 지저분해져 있었기에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 어야 했지만, 나는 그럴 기운이 없었다. 계속 허공에 떠있었더니, 침대에 누운 나는 아직도 공중에 동동 떠있 는 것 같아서 어지럽기까지 했다. 결국 나는 꾀죄죄한 모습으로 잠에 들었고, 그 다음날. 미카엔에게 그동안의 보고할 내용을 서류로 작성하였다. 그리고, 집무 실로 가기 전 나는 루이스를 시켜 목욕을 하였다. 목욕물에 장미잎을 동동 띄워서 그 목욕물에 목욕을 한 나는 은은한 장미향이 몸에 배 어들게 되었고, 하얗고 투명한 피부는 더욱 뽀샤시 해졌다. 나를 보며 내가 감탄... 이러다 공주병의 증상이 더욱 더 깊어질 것 같아 심히 걱정이었다. 나는 거울을 보며 헤벌쭉하게 웃어보였다. 왠지 오늘 아침따라 기분이 좋았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나는 나에게 걸려있던 일루전을 풀어 다시 머리색과 눈동자색을 황 금빛으로 돌아오게 하였고, 화장대에 앉았다. '오늘은 화장이라는 것을 좀 해볼까?' 화장대 앞에는 뭔가 고급스런 화장품들이 잔뜩 있었지만, 나는 스스 로 화장을 해본적이 없었고 화장을 거의 안하는 터라, 화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이것 저것 화장품 병과 상자 등등... 을 열어보고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막막했다. 시녀들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되었지만 나는 스스로 이런 걸 해보고 싶었다. 그러다 나는 붉은 색의 립스틱 비슷한 화장품을 발견 하였다. 나는 그것을 찍어 입술에 발라보았다. "헉! 쥐 잡아먹은 것 같잖아?" 새하얀 얼굴에 입술만 유난히 붉게 보여 질겁한 나는 황급히 입술을 지웠고, 다시 이것 저것 기웃거렸다. 그러다 결국 나는 화장하는 것 을 포기하고는 미카엔의 집무실을 향했다. "아! 오랜만이네요. 폐하께서는 안에 계신가요?" 나는 집무실 문앞에 이르러 시립해 있는 시종에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후원에 계십니다. 아침 산책 중이시죠. 크로시벨님도 한번 나가보시지요. 지금 후원에는 꽃들이 만발해서 아주 절경을 이 루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기분도 왠지 좋은데다가 봄 의 기운을 만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은 나는 후원쪽으로 나갔다. 미카엔은 인공 호수 쪽에서 시종 없이 혼자 서있었다. 막상 그의 모 습을 본 나는, 엄청 그가 반가워져서 활짝 웃는 얼굴로 그에게 다가 갔다. "폐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죠?" 내가 그렇게 묻자 미카엔은 나에게로 얼굴을 돌리고는 빙긋 웃어보 였다. "음... 네가 언제쯤 나를 찾아올까 생각하고 있었지." "엑!" 내가 닭살이 돋는다는 듯이 그런 음성을 내뱉자, 미카엔은 가볍게 웃 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행동에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 다보았고, 미카엔은 나의 의아함을 풀어주려는 듯 입을 열었다. "저에게 그대의 손을 잡을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아름다운 레 이디. 그대와 함께 봄꽃이 만발한 이곳을 산책하고 싶군요." '헉! 정말 닭살이다. 미카엔은 다 좋은데, 가끔 나를 닭으로 만들어 버 리는 아주 기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단 말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지금 상황이 무지 쑥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썰렁한 농담을 하였는데... "폐하! 비록 측실이지만 폐하께서는 부인이 계시는 유부남이고, 저는 아 직 미혼인 숙녀랍니다. 폐하의 지금 행동은 불륜이 된다는 것을 혹시 알 고 계시는지요?" 나는 방금 미카엔이 말한 말투에 맞추어 그에게 답변을 하였는데, 미 카엔은 불륜이라는 심각한 단어보다는 새침한 모습으로 답변하는 나의 모습에 더욱 웃음이 나왔는지, 쿡쿡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민망해지네...' "쿡쿡! 라비스. 너에게 그런 귀여운 면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쳇~ 폐하! 그만 웃어요. 전 폐하께 보고를 하러 왔단 말이에요." 그러자, 미카엔은 웃음기를 거두고는 나에게 진지한 얼굴로 해보였다. 그 러나 여전히 웃음기가 감도는 목소리로 나에게 입을 열었다. "맞아! 너에게 보고를 들어야 하겠군. 그 전에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뭔데요?" "너랑 가고 싶은 곳이 있어!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어졌거든." 체인지(Change) 제27화 -바닷가에서...- (1) (바닷가에서...) -1- 미카엔에게 보고를 마치고 들어온 나는, 자이라스국에서의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들어온 대가로 이틀간의 휴가를 얻게 되었다. 물론, 카이슨 역시 휴가를 얻었을 것이다. 나는 오랜만의 휴식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스미스 비서관에게 열쇠 를 받아서 중앙궁성의 서재로 갔다. 여긴 국왕이 있는 궁성의 서재 라 그런지, 대형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어마어마한 책들이 겹겹이 쌓여있었다. 물론, 국왕의 개인 서재는 따로 있었다. 나는 아침에 미카엔이 바다에 가자고 했던 말에 대해 곰곰히 생각 하며 책들을 훑어보았다. 바다라... 바다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했다. 그곳에 가면 답답한 마음이 시원하게 뚫릴 것 같기도 했고, 요 즘들어 깊어진 향수병도 조금은 털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였다. 그는 이따 오후 즈음에 집무실로 오라고 말했다. "으음..." 나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인상을 썼다. 바다에는 정말 가고 싶은데 나는 미카엔의 의도가 심히 미심쩍었다. 분명히 분위기 좀 잡아보자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가 나를 데리고 갈 바다는 분명히 서해안이 될 테니... 로히얀스는 동대륙 중에서도 서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분명히 미카엔은 서해안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미카엔은 자신의 집무를 마쳐야 하는 이유를 들며 나보고 오후에 오라고 했으니, 분명히 오후에 서해바다로 가게 되면, 멋진 석양을 볼 수 있을 것 이고 미카엔은 황금빛으로 물들은 바다에서 얼마든지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약았어! 하지만... "우우... 석양이라! 멋지긴 하겠군. 가고 싶다!" 나의 눈앞에는 멋진 저녁바다가 그려지며, 그 영상은 나를 자꾸 유혹하였 다. 헉! 이러면 안되는데... 나는 고개를 도리 도리 흔들었다. 그리고는, 모든 분야의 책들을 흝어보다가 문득 구석에 잡다한 책들이 모 여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것 저것 꺼내들어 살펴보았다. 그러다, 책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오래되어 보이는 책 한권이 눈에 띄었다. "이건 왜 이렇게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거지? 비밀스런 책인가? 이러면 더 보고 싶잖아!" 나는 언록(Unlock)마법을 써서 그 자물쇠를 풀었다. 생각외로 그 자물쇠 는 간단히 풀렸다. 호기심이 많은 나로서는 이 책에 흥미가 동했고, 나는 설레이기까지 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첫장을 넘겼다. 「오늘은 로히얀스력 351년 12월 05일... 나의 마지막 아이가 될 미카엔 이 태어난 날이다. 500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에게는 수많은 인간 자 손들이 있었지만, 내가 인정한 아이는 드래곤으로서 본체의 모습을 지닌 나의 두명의 아이들... 그들 뿐이었으나, 나의 마지막 유희에 태어난 미카 엔은 나도 모르게 애정이 간다. 어쩌면, 이 아이는 내가 사랑하는 두명의 아이들 외에 인간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 중에 내가 유일하게 인정한 나의 분신이 될 지도 모르겠다. 351년 12월 5일 아나테스 씀.」 이것은 프레야 왕비가 쓴 일기장이었다.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왕비의 일기장이 어째서 여기 도서관에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 만, 나는 그 일기장을 품에 안고는 나의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침실로 가서 차분하게 읽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남의 일기장을 읽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는 일이었으나, 나는... 후훗~! 남의 읽기장을 읽는 것 이 가장 재미있는 일 중에 하나라는 것을 너무나 잘알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그 일기장의 다음장을 넘겼다. 그러자 다음 페이지에 는 처음엔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는 백지가 눈에 들어오더니 이내 점 차 글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왕비가 무엇 때 문에 이렇게 특수효과까지 일기장에 걸어놓았는지 의아해 했다. 그 후로도 몇장을 읽었고 그러다 눈에 띄는 내용 한가지가 있었다. 「오늘은 나의 오랜 친구 셀레나를 만나는 날이다. 그녀에게도 그녀를 닮 은 딸이 하나 있었다. 우리는 한가지 약속을 했다. 나의 아들과 그녀의 딸 을 훗날 혼인 시키기로... 셀레나는 자신의 딸을 매우 사랑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녀와 나는 알고 있었다. 셀레나와 그녀의 딸에 대한 불행을... 셀레나는 자신의 딸이 열 일곱이 되는 해에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을 잘알고 있었다. 자신의 사랑하는 딸이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아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하지만 셀레나는 의외로 의연했다. 그녀 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운명의 전환점인 그 해에 새롭게 나의 딸이 될 라비스를 위해, 너 에게 이렇게 부탁하는 거야. 나는 그애가 행복해졌으면 해. 그렇지 않으 면 또 다시 많은 세월을 기다려야 하니깐.' 나는 미카엔이 아마도, 라비스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 확신하였다. 셀레나 의 예지 능력은 언제나 적중하였으니깐. 356년 3월 17일 아나테스 씀.」 그것을 읽은 나는 갑자기 소름이 쫙 돋는 것이 느껴졌다. 손이 풀린 나는 그 일기장을 잠시 놓았다가 이내 다시 그것을 들고는 떨리는 손으로 다음 장을 넘겼다. 그러자 또다시 백지가 나의 눈에 들어왔다. 나는 글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더 이상 프레야 왕비의 다음 일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가 끝인가?' 아무리 기다려도 더 이상 글자가 나타나지 않자, 나는 그것을 침대 곁 에 있는 서랍에 조심스럽게 넣어두고는, 잠시 침대 위에서 우두커니 앉 아있었다.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속이 울렁거리고 구토증이 날 것만 같 았다. 뭔가 배신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누군가를 향한 것인지는 나도 모 르겠지만. 갑자기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지고 누군가에게 기대고픈 생각이 들었 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침실을 나섰다. 내가 기댈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 미카엔이었다. 나는 미카엔이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혼란스러웠다. 나는 이곳 세계에 왜 오게 된 것인지...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인지, 나의 운명은 이렇게 예비되어져 있었던 것인지 정말 알 수 가 없었다. 눈물이 나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 나의 육체인 라비스는 툭하면 눈물샘이 터져 나오곤 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울보가 된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 나는 그동 안 애써 잊으려 했던 나의 부모님의 얼굴이 눈에 어른거렸다. 그동안 가슴 속 깊이 내리 누르고 있던 향수가 곪은 상처가 터지듯이 마구 나의 가슴 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나는 침착한 얼굴을 가장하며 미카엔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폐하! 일은 다 마치셨나요? 바다 보러 가요! 전 지금 당장 바다에 내다버려야 할 것들이 있어요." 그러자, 미카엔은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비스, 얼굴이 창백해! 어디 아픈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의 이마를 짚었다. "아픈 곳은 없어요! 그저 우울할 뿐이에요. 시원한 바다소리를 듣고 바다 바람을 쐬게 되면 나아질 거예요." 체인지(Change) 제27화 -바닷가에서...- (2) -2- 쏴아아아~! 시원한 파도 소리...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고운 백사장. 미카엔과 함께 온 바닷가의 모습이었다. 여기 세계에도 이렇게 멋진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나는 바다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신발을 벗어 맨발로 백사장을 거닐었다. 강한 바다 바람이 불어와, 나의 황금빛 머리카락은 거칠게 휘날렸 다. 계절상으로는 따스한 봄이었지만, 바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나는 바지의 끝을 무릎 아래까지 걷어올렸다. 요즘은 치마보다는 활 동하기 편한 바지와 셔츠를 고집하고 있는 나였다. 물론 나의 여성스 럽지 못함을 탓하는 루이스의 잔소리가 엄청 심했지만, 그녀의 잔소 리에도 이골이 난 나였기에, 왠만한 잔소리 쯤은 그냥 아무렇지 않게 흘려들었다. 첨벙~! 나는 파도가 밀려들어오는 곳으로 다가가 바닷물에 나의 발을 담갔다.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파도는 끝없이 밀려들어왔다가 사라졌다. 뒤쪽에서는 미카엔의 눈길이 느껴졌지만, 나는 그를 돌아보지 않고 멀 리 보이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미카엔 역시 나는 지켜볼 뿐, 다가와 말 을 걸지는 않았다. 여전히 나의 가슴은 답답하였다. 셀레나... 그녀는 대체 누구이길래, 나의 존재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 녀는 프레야 왕비에게 무엇을 부탁했을까? 그리고 미카엔이 나를 사랑하 게 될 것이란 걸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었을까? 그것은 미리 정해진 운명 이고 모든 것은 순리대로 그렇게 흘러온 것일까? 그렇다면, 이 운명은 누 가 정한 것일까? 아멘시타... 그는 신의 나무라 일컬어지는 신성한 론티아 나무의 정령, 그가 나를 이끌어 왔다. 아멘시타의 원래 주인은 셀레나였다는 것을 나 는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 아멘시타에게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아멘시타가 무언가를 알고 있으면서 나를 속여왔던 것일까?' 그러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령들은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을 나는 잘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아멘시타는 얼결에 눈에 띈 나 를 실수로 이곳에 이끌어 왔음을 시인했었다. [라비스?] 그런데 그때, 바다쪽에서 신비하게 느껴지는 여성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이 목소린... "라센샤르?" 나는 그렇게 말하며 바다를 바라보았으나, 여전히 바다는 시원한 파도소리 와 함께 짙은 푸른빛만 발하고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라비스. 나를 찾아온 건 가요?] 나는 라센샤르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바다를 보러 온 것이었으나, 라센샤 르가 바다의 정령이니 그녀를 찾아온 셈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약간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라비스는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나요? 얼굴이 매우 어두워 보이 는군요.] 그녀를 찾은 적도 없는데 알아서 척 나타나서 나의 도움이 필요하냐고 묻 고 있는 바다의 정령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 시리어스섬을 가던 길에 내 가 자살소동을 피웠던 때와 인페르디아와 해전을 벌이고 있었을 때도, 라센 샤르가 나에게 대가없이 도움을 주었던 기억이 났다. 나는 우울한 가운데에서도 머리를 굴려보았다. 이것은 라센샤르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증거! 정령들 중에서도 거의 신격화 되어 일부 인간 들에게 숭상을 받고 있는 라센샤르... 그녀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정 말 의외였다. 그러다, 나는 인페르디아와의 해전이 승리로 끝난 후 피로 물들은 바다의 모습에 미안함과 면목 없음을 느끼고 라센샤르에게 사죄의 말을 했었을 때, 그녀가 나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미안해 할 것 없어요. 어차피, 나는 당신을 돕고 싶었으니깐요... 하지만, 당신은 기억해야만 할 거예요! 내가 지금 당신을 도왔다는 것을... 이 라 센샤르가 라비스를 도왔다는 것을...」 그러한 말을 했던 것을 보니, 라센샤르는 나의 뇌리에 남고 싶었던 것이 아닐 까 생각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라센샤르! 당신은 왜 나를 돕고 싶어하죠? 위대한 바다의 정령인 당신이 인간인 나에게 대가없이 도움을 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나 요?" […….] 나의 말에 라센샤르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바다의 파도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괜한 소리를 하여 그녀의 심기를 상하게 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라 센샤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잘 알고 있어요. 그동안 부정하고 있었는데, 지금 내가 라비스에게 보이 고 있는 행동은 라비스의 정령이 되고자 하는 의미가 담긴 행동이었군요. 스스로 내가 인간인 라비스에게 당신의 정령이 되겠다고 나서게 되다니... 이것 역시 당신의 마력과 같은 매력 때문인가요? 라비스! 앞으로 나의 도 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 나를 불러요. 나 라센샤르는 라비스가 살아있는 동안은 라비스를 위한 바다의 정령이 되고 싶군요.] 마력과도 같은 매력이라... 그러한 것이 정말 나에게 있는지 잘 모르겠지 만, 라센샤르는 자신의 할말만 그렇게 하고 사라졌는지 더 이상 목소리 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거 왠지 일방적인 고백을 듣고 난 느낌... 역시 나의 정령들은 모두 일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예를 유 난히도 차리는 아젠샤르를 제외한 나머지 정령들은 나의 허락은 따로 필 요없이 알아서 나를 섬겼다. 아마도, 그들 모두 독립적인 성격이 강한, 다시 말해 자신의 생각이 뚜렷한 정령들이라 그런 듯 했다. 예전 카이엔의 말에 따르자면, 정령과 인간이 관계를 맺을 때 계약이 어 쩌고 저쩌고 했었는데, 나의 정령이 된 라센샤르를 포함하여 다섯의 정 령들은 모두 그러한 절차를 과감하게 생략 했다. 아!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들이라고 말해야 할까. 누군가가 나의 등뒤로 다가왔다. 앗! 미카엔이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 다. 나는 조금 전 우울했던 것도 잊고 바다의 정령을 얻은 기쁨에 마음 이 들떴다. 하지만, 차분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폐하! 저를 바다로 데리고 오신 이유가 무엇이죠?" 그러자, 미카엔은 빙긋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야 물론, 너에게 아름다운 바다의 석양을 보여주기 위함이지! 곧, 있 으면 해가 질 거야! 이곳은 정말 아름다운 해변가이기도 하지만, 해가 질 때는 그 모습이 더욱 아름다워지거든. 그 황금빛으로 빛나는 하늘과 바다는 너를 닮았어. 그리고... 축하한다! 또 한명의 친구를 사귄 것 말 이야. 정령들은 모두 너의 친구가 될 테지?" 그렇게 말한 미카엔의 손이 다가와 차가워진 나의 볼을 쓰다듬었는데, 그 의 손은 정말 따뜻해서 경직되었던 나의 마음이 그로 인해 풀어져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오늘 어이없게 기분이 풀어진 나였다. 아깐, 충격이 정말 컸었는데... 와~! 라비스, 대단한데? 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던 나는, 그저 부드러운 미소만 지어보이는 미카엔에게 화답하는 미소를 지었다. 체인지(Change) 제27화 -바닷가에서...- (3) -3- 미카엔과 나는 백사장에 나란히 앉아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바다 바람은 여전히 차갑고 거세었지만 아젠샤르가 우리 주위로 불어오 는 바람을 다 막아주고 있는지, 그다지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바다에서 머무는 바람이 아젠의 본연의 모습이었지.' 말없이 나를 위해 배려를 베풀고 있는 아젠샤르에게 속으로 고마운 마음을 갖으며 미카엔에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여긴 어디에 위치한 곳이죠? 여기 경치가 굉장히 좋아요!" "여긴 로히얀스의 가장 남단에 위치한 서해 해변가야." 나는 이곳에 대한 감탄을 뒤늦게 그에게 말하자, 미카엔은 뒷북치는 나의 발언에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이곳의 공간 이동 좌표를 정확히 알고 계신 것을 보니, 이곳에 종종 왔었나 봐요." 나는 미카엔에게 눈길을 주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부드럽고 결이 좋 은 은빛 머리카락이 꽤나 아름답게 느껴지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 다. 참으로 고귀한 얼굴. 위대한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한 나 라의 왕족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의 얼굴은 아름답기도 했지만 너무 고 귀해 보였다. 그저 귀티나게 생긴 외모와는 근본적으로 질이 다른... 이 세상 안에서 숨쉬고 있는 모든 존재의 위에 당연하게 군림하는 그러한 고귀한 얼굴이었다. 미카엔은 나의 손을 잡아올리더니,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지금와 서 더욱 확실하게 깨달은 점인데, 미카엔은 나에게 닭살 표현을 전혀 아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서 내가 종종 돋는 닭살에 괴로워했 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처음 미카엔을 봤었을 땐, 가벼운 성격의 바람둥이 녀석이 아닌가 했었 는데 그것은 내가 그를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평가를 내렸던 결과인 것 같았다. "난 어렸을 적부터 이곳을 종종 찾았어. 울적할 땐 이곳에 와서 저기 보 이는 수평선을 바라보곤 했지. 이곳은 마법에 걸린 바닷가야! 드래곤도 풀지 못하는 마법이 걸려 있지. 이곳에 오면 우울하던 마음도 거짓말 같 이 사라지거든." 나는 미카엔의 말에, 소년 모습의 미카엔이 이곳에 와서 혼자 청승을 떨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역시 미카엔의 그러한 모습 은 쉽사리 상상이 되지 않았다. 왠지 낯설었다. 미카엔은 곧, 회상하는 눈빛이 되었다. "...내가 열살 때, 국왕 폐하께서 여시는 사냥 대회에 참가했던 적이 있었거든. 참가자들은 모두 훈련된 기사들이거나 사냥에 능숙한 귀족 인 성인들이었어. 어머니는 어린 나를 그 대회에 내보내며 말했지. '너는 일국 황태자로서의 면모를 모두에게 보여라!' 하고 말이야. 나 는 사냥 대회에서 생명감지 마법을 써서 누구보다 사냥감을 재빨리 발견해 활을 쏘아 명중시켰고, 결국은 우수한 성적으로 국왕 폐하와 귀족들 그리고 대신들에게 극찬을 받았지. 하지만, 왕비 전하이신 나 의 어머니는 싸늘하고 냉랭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 보며, 나의 정당하 지 못함과 황태자로서의 대범함을 갖추지 못함을 탓하시고는 나의 우 승을 취소시켰어. 그때 나는 어머니의 기대에 미치지 못함과 내 자신 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우울해 하다가 우연히 이곳을 알게 되었던 거 야. 그 후, 나는 이곳을 종종 찾곤 했었는데 이만하면 괜찮은 장소이 지?" 그의 말에 나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에게 말했다. "그때, 폐하는 고작 열살이었으니, 황태자로서의 직분에 대한 부담감으로 그렇게 행동했었던 것은 당연해요. 그런데, 페하는 열살때에도 그렇게 장 거리 공간 이동 능력이 있으셨단 말이에요?" 그러자, 미카엔은 동그레진 나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고요한 느낌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때는 용언 같은 것은 할 줄은 몰랐지만, 마법은 제법 했었지. 하지만 그건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어렸을 적부터 피나는 노력과 나 의 천재성으로 얻어진 결과야." "그렇군요..." 왠지 기가 죽는 나였다. 피나는 노력과 천재성으로 얻어진 결과라... 고작 열살의 나이에 그러한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면 미카엔은 혹독한 조기 교 육을 받았음이 분명했다. 프레야 왕비 같은 무서운 엄마의 기대에 미치기 위해 미카엔은 노력했을 것이고, 그녀의 냉랭한 꾸짖음에 미카엔은 이만큼 성장했을 것이다. 나는 미카엔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에게는 노력이라는 단어는 전혀 상관 이 없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그에게도 역시 노력과 그에 따르는 좌절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본인의 입으로 자신의 천재성이 어쩌고 저쩌 고 운운하는 것을 보면, 약간 잘난척하는 기질도 있는 듯 했다. "어쩌면 이곳은 정말 마법이 걸려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굉 장히 우울했었는데, 이곳에 오고나서 기분이 금세 풀려 버렸으니깐요." 나는 미카엔에게 활짝 웃어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거 다행이군. 그나저나... 나는 언제쯤 너를 얻을 수 있게 될까? 나도 정말 바보로군. 스스로의 바램은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존재의 만남 이나 이어주고 있으니 말이야." 그의 말에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폐하! 다른 존재의 만남을 이어주고 있다니요? 혹시, 중매라도 섰나요?" 나의 질문에 미카엔은 가볍게 웃을뿐 답하지는 않았다. 대신 바다쪽으로 눈길을 돌리고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라비스, 저쪽을 봐! 일몰이 시작되었어." 그의 말에 나 역시 바다위에 떠있을 태양이 있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푸르던 하늘이 붉어져 가는 모습과, 붉어진 태양이 하늘 뿐만 아니라 하얗던 솜털 구름들 마저도 붉게 물들여 놓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황금빛... 미카엔의 손이 나가와 나의 손을 꼬옥 쥐었다. 그의 온기가 나의 손을 통 해서 가슴에 전해졌다. 곧, 바다가 영원히 그 자리에서 타오를 것만 같았던 태양을 조금씩 먹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왠지 숭고하게 느껴지는 일몰이었다. 나는 숨을 죽이 며 모습을 감추는 태양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의 황금빛 눈동자는 오늘 떠올랐던 태양의 마지막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오늘따라 이곳 일몰의 모습이 묘하게 느껴지는군. 저 황금빛의 태양처럼 너도 사라지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야. 이렇게 너의 손을 꼭 붙잡고 있지 만 네 존재가 마치 꿈결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미카엔은 그렇게 말하며 한참을 나를 바라보더니 가만히 끌어안았다. 예 전 같았으면 그를 뿌리쳤을 나였지만, 지금은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기묘한 마법에 걸린 듯한 바닷가 그리고 서서히 꺼져가는 태양이 마지막 축복을 하듯, 붉은 황금빛 가루가 뿌려지는 이곳에 내 자신이 취 해버렸는지, 미카엔이 나에게 깊은 키스를 할 때까지도 나는 그를 뿌리치 지 못했다. 그러다, 미카엔이 나를 쓰러뜨려 백사장에 눕게 만들고 나서야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그를 밀어내었으나, 그는 나를 놓지 않고 끌어안은 상태에 서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나는 왜 이리 뒷북치는 행동을 하는지... 거부 하려면 진작했어야 하는데, 잠시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 곳의 마법이 나에게 옮았던지. 설마, 내가 분위기를 많이 타는 성격은 아 니겠지? "라비스, 나의 정비가 되어줘! 나의 곁에서 로히얀스를 함께 바라보고, 로히얀스인들의 왕비가 되며, 그리고... 내가 평생 너만 바라보며 사랑할 수 있도록, 다시 나의 아내가 되어줘." 지금까지 나를 왕비로 맞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미카엔... 이것은, 미카엔과 나에게 연결되어 있는 운명과 인연의 끈이 순리대로 이어져 가 고 있다는 뜻이 될까? 프레야 왕비의 일기장을 읽고 나는 더욱 운명론자가 되어 있었다. 십몇년 후 본래 라비스의 죽음 후, 내가 이 육체의 주인이 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견한 셀레나의 예지에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좋아요, 폐하. 폐하의 정비가 되겠어요." 나의 말에 미카엔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나의 이마와 눈에 입을 맞추고 는 입을 열었다. "고맙다, 라비스. 그리고 둘이 있을땐, 미카엔이라 불러! 난 너에게서 나 의 이름을 듣는 것이 좋으니깐, 자이라스국에 대한 몇가지 문제를 해결 하는 대로 너를 왕비로 맞을 것이다. 동대륙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 한 신부로 만들어 줄 거야." 미카엔의 대단한 포부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왕비의 일기장! 내가 읽 었던 부분, 거기가 끝은 아닐거다. 나는 그 일기장의 뒷부분을 읽을 방법 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운명이 예비되어 있었든, 아니면 내가 이 세 계로 오게 된 계기가 보이지 않는 존재에 의해 조작되어 있는 것이든 나 는 여기서 주저앉지 않고 그것을 알아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 ㅡㅡ;; 이번 편은 로맨틱한 부분이 너무 많이 들어간 듯한... 에거, 닭살이...;; 오늘 제가 댓글을 단 이유는... 제목 때문입니다. 요즘 이것 때문에 골머리가 아프다는... 으윽! 체인지라는 제목이 갈수록 내용이 부합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누가 멋지고 삐까번쩍한 제목 좀 추천해 주세요~ 지금 내용에 부합하는 제목을 제 이멜로 보내주심 감사하겠습니다. 상품이 있냐고 물으신다면... 흠, 체인지 1권으로 해드리지요!^^;; (상품을 걸어야...) 추천해주신 님의 제목을 제가 쓰게 된다면 말이지요. 글구, 체인지 1권 출간은 아마도...11월달에 나오게 될 것 같아요. 아직 체인지 출판에 대해 모르시는 님들이 많이 계시더군요. 추천 좀 부탁 부탁~~~ 합니다. ㅡ.ㅜ 아! 또 한가지... 저에게도 체인지 팬클럽(?)이 생겼답니다. 아~ 기뽀!! ㅜㅜ 세이클럽 동회 club.SayClub.com/@anrtlwk 이곳으로 한번 쯤 놀러가보셔도 좋을듯...^^;; 아! 회원 가입하시면 더 좋구요...;;; 하핫~! *151* 체인지(Change) 제28화 -왕비의 일기장- (1) (왕비의 일기장) -1- 나의 침실 창문 사이로 아침 햇살이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창문 밖에서 비둘기들의 구우 구우~ 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평화로운 기운이 도는 아침이었지만, 나의 침실 안은 그다지 평화롭지가 못했다. 이맘때 즈음이면 루이스와 나의 전쟁 아닌 전쟁이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매일 내가 굴복하는 결과를 맞지만 그래도 어김없이 나는 그 다음 날 아침이면 루이스의 힘을 잔뜩 빼놓고는 했다. "라비스님! 어서 일어나세요!" "싫어! 오늘까지는 휴가잖아? 날 가만내버려 둬!" 빠득! '헉! 이게 무슨 소리지?' 문득 이를 가는 소리에 나는 오한을 느끼며 한쪽 눈을 살짝 떠서 나를 내 려다보고 있는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힘줄 몇 개 돋은 얼굴로 나 를 노려보고 있는 루이스의 커다란 얼굴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절로 꼬리 가 내려지게 만드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더 이상 버티다가는 뭔가 커다란 일을 당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하고는 눈물을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 났다. 내가 그렇게 일어나자, 루이스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호호. 라비스님, 어서 일어나셔서 몸 단장을 하세요! 오늘은 중요한 만남이 있답니다." "중요한 만남이라니?" 나는 그녀를 쏘아보며 그렇게 말하다가, 뭔가 그녀의 외모가 달라진 것 같 다는 것을 깨닫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그러고 보니, 루이스! 요즘 어디 아픈 곳이 있어? 그 넓적하던 얼굴이 반쪽이 되었어!" "넓적하던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니, 호호! 저로서는 반가운 일이군요. 사실, 요즘 제가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 탓인지 살이 조금 빠지는 군요. 아 무튼 그것은 심각하고 중요한 일이 아니니 그냥 넘어가고... 정말 중요한 일 은, 오늘 꽤 좋은 두 집안에서 청혼이 들어왔다는 거예요. 두 청년을 오후에 각각 다른 시간에 이곳으로 오게 해두었으니, 라비스님은 아름다운 모습으 로 단장을 하고 계세요. 이제 라비스님도 나이가 드셨으니 얼른 결혼을 하 셔야죠. 휴~ 이젠 폐하와의 결혼도 물건너 갔고... 이젠 이 수밖에 없군요." '청혼이라니? 봄은 젊은 남자들이 레이디들에게 청혼을 하는 계절인가? 왜 이렇게 나의 귀에 결혼에 대한 얘기가 많이 들리는지... 앗! 그러고 보니, 어 제 나는 미카엔의 청혼을 받아들였잖아?' 그러다, 어제 저녁 바닷가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자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대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미카엔... 역시 그는 보통 녀석이 아 니었다. 연애 감정면에 대해서는 거의 마음을 닫고 사는 나를 홀릴(?) 정도 면... 흐음, 아마도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순결한 여신관도 -이곳의 신관들 은 신만을 모시며 결혼은 하지 않는다.- 단박에 홀리지 않을까, 하는 망령 된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는 어제의 그 묘한 바닷가를 이용한 것이지만 어쨌든 수단과 적 절한 타이밍을 잘 이용한다는 것 역시, 하나의 능력이었다. 그렇다면, 그 수단은 그 바닷가이고 적절한 타이밍은 일몰 순간인 것인가? 그것만은 아 닌 듯 한데... 아마도, 나에게 있는 그를 생각하는 마음을 밖으로 이끌어 내기 위해 그는 어쩌면, 오랜 시간을 기다리며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 을 지도 몰랐다. 나 역시, 미카엔이 인내심이 대단한 녀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조급하지 않는 적절한 자제력과 기다림 그리고 보이지 않는 보살핌으로 나를 위해주었다. 그것으로 인해, 나는 그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갖게 되 었고 나 역시 그가 소중하다는 것을 더욱 더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카엔의 이러한 방식은... 예로 들자면, 영화나 음악과 같은 예술 작품을 들 수가 있다. 초반 부분부터 클라이막스까지는 계속 절정을 이끌어내기 위한 잔잔함과 그 모든 것을 준비하는 시간을 갖다가, 클라이막스 부분에 가서는 터뜨리듯이 그 절정을 이끌어내어, 그것을 감상하는 이에게 감동을 주는 것... '그래서, 미카엔이 그렇게 바닷가에서 분위기를 잡았던 것일까? 그가 나 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얘기하고 분위기를 한껏 조성한 것도...'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남자였던 적도 있었던 나였던 터라, 남자의 심 리를 잘아는 셈이 되는 내가 미카엔의 마수(?)에 넘어가게 되다니... 역시 과거가 어찌되었든, 나는 현재 여자로서의 행동과 반응을 어김없 이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영혼은 육체의 지배를 받는다라는 공식을 내 가 몸소 체험함으로서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의 영혼이 라비스의 모 습으로서 변색되었던 것일까? 나는 허탈해지기도 하고, 미카엔에게 넘어간 내 자신이 한심하게도 했지만, 나는 미카엔에게 분명 말했었다. 그의 정비가 되기로... 그렇게 혼자 생각하고 혼자 웃고 있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본 루이스가 나에게 입을 열었다. "라비스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내가 방금 말한 것, 들으셨어요?" "루이스, 그 약속 취소해! 그들이 만약 나와의 혼인 문제로 얘기가 오가 게 된다면, 그들은 폐하의 미움을 사게 될 테니깐." "아! 그럼... 라비스님, 폐하와 다시 잘되신 건가요?" 나의 말에 루이스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저녁때 나는 다시 프레야 왕비의 일기장을 꺼내들었다. 내가 읽었던 부분 으로 페이지를 넘겨 나는 그 일기장의 백지를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하지 만, 여전히 글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음이 답답해진 나는 창가로 가서 하늘에 떠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달이 무척 밝았다. 달빛이 은은하고 매우 고와서 나는 답답해진 마음이 조금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대체 저 일기장을 읽는 방법이 따로 있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저부 분이 저대로 끝인 것까?' 나는 일기장에 마법이라도 걸려있는지 눈여겨 보았으나 걸려있는 마법 같 은 것은 찾아내지 못했다. 아마도, 내가 마법력이 부족해서 마법이 걸려 있 더라도 내가 찾아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킬린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생각했으나, 이러한 것은 섣불리 보여주어 서는 안될 것 같았다. 물론, 미카엔은 더욱 더 안되었다. 그 역시, 일기장에 쓰여져 있는 내용을 보고는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창틀에 몸을 기대며 상념에 잠겼다. 내가 이세계로 온지 거의 일년... 내가 초여름 즈음에 이곳으로 왔으니 일 년이 조금 못되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나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정령 들을 만나고 미카엔을 만나고 마법을 익히고... 그동안 힘들었던 적이 많 았지만, 그 시련과 함께 나에게는 많은 발전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지금 나에게는 나의 힘을 악용한다면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 수 있을 정도 의 능력이 있었다. 강한 정령에 기본 마법력이 바탕이 되어주고, 두 나라 의 왕성 안에서 배워왔던 왕실에 대한 그 모든 것으로 말이다. 많은 시련으로서 성장한 내 자신과 길러진 판단력, 그리고 나의 힘이자 강 한 조력자들인 정령들... 나는 어쩌면 미카엔의 옆자리인 왕비 직위에서 그와 동등한 눈으로 여기 로 히얀스를 바라볼 수가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그의 종속자로서가 아닌 그와 비슷한 위치에서 그와 비슷한 시각으로서 말이다. 물론, 아직 미 카엔에게 내 자신은 턱없이 부족한 면이 많지만. "하아..."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침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침대 위에 놓여 진 일기장을 바라보는데. "앗!" 내가 펼쳐놓은 그 페이지에 어느새 글자가 나타나 있었다. *152* 체인지(Change) 제28화 -왕비의 일기장- (2) -2- 나는 긴장된 모습으로 그 일기장을 들어 새로이 나타난 왕비의 일 기를 읽기 시작했다. 「오늘은 미카엔이 다섯 번째로 맞는 생일이다. 그 아이는 내가 인 정한 인간 아이... 그것으로 인해 미카엔이 드래곤으로서의 몇가지 능 력을 물려받게 되었지만, 나는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놀라곤 한다. 이제 다섯 살 먹은 저 조그만 몸안에는 아직 각성되지 못한 엄청난 마력, 이 정도라면 사정을 모르는 다른 드래곤들은 이 아이가 폴리모 프한 드래곤이라 착각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아무리 드래 곤이라 해도 우리들은 몇백년이라는 기나긴 유년기를 보내고 저 정도의 마력을 갖게 되는데... 미카엔은 이제 다섯 살이다. 나는 미카엔을 황태자로 내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걸리는 건 지금 백합궁에 있는 국왕의 총애를 받는 측실 하나와 그녀의 두 왕자 이다. 356년 12월 5일 아나테스 씀」 나는 일기장을 내려놓았다. 프레야 왕비... 그녀는 비록 유희 중에 낳은 자식이지만 미카엔에게 나름대로의 모성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미카엔에게 배다른 형제가 있었는 줄은 몰랐다. 그러다, 나는 미카엔의 측실이 되기 위해 처음 왕성으로 가서 프레야 왕비를 만나고 난 후, 장미궁의 시녀인 '타냐' 에게 들었던 내용이 기억 났다. 그녀의 말로는 프레야 왕비 말고 다른 측실들이 있었지만 모두 병약하 여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했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갸웃하긴 했 었지만, 그냥 그대로 넘어갔다. 그런데, 백합궁의 머물던 전 측실이라... 그러고 보니, 백합궁의 서재에는 이상하리 만큼 마법이나 드래곤에 관 한 책들이 많았다. 솔직히 측실의 별궁 서재에서는 그러한 내용의 책 들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그 측실은 왕비가 드래곤이었음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인가?' 나는 왕비에게 제거되었을 측실들과 사라진 왕자들에 대한 것들이 궁 금하긴 했지만, 다시 일기장을 들어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자, 다 시 백지가 나의 눈에 들어왔고 나는 글자가 생기기를 잠시 기다리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일기장을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나는 평상시처럼 비서실에 츨근하여 그동안 쌓인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아직 미카엔은 나를 왕비로 맞겠다는 말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직 왕성이 조용한 것을 보면... "잘 쉬었어요?" 내가 자리에 앉자, 카이슨이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와 그렇게 인사를 하 였다. "네." 참으로 멋없는 대답... 그냥 한 음절로 끝나버리는 나의 대답에 카이슨은 피식 웃더니 곧바로 업무에 관한 본론를 꺼내었다. "어제 루젠다르에 심어진 첩자에 의해서 들어온 소식인데요, 곧 전쟁이 있을 거랍니다."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쟁이라니요? 또 루젠다르가 로히얀스를 넘보고 있대요?" "아니요. 루젠댜르가 이번에 넘보고 있는 나라는 인페르디아입니다. 저 번에 자객에 의해서 인페르디아 국왕이 살해되고 나서 그의 동생이 왕 위에 올랐었잖아요? 그 뒤로 인페르디아 내부에서는 많은 혼란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그렇게 나라가 어지러우면 그 주변에 있는 루젠댜르와 같은 나라들은 그 혼란에 빠져 약해진 나라를 노리게 되는 법이죠."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인페르디아 왕을 죽인 후, 키리아는 인페르디아와 잡고 있는 손을 뗀 모양이었다. 대신에, 엔카루스와 손을 잡 고 자이라스국을 꿀꺽했다. "그렇다면, 루젠댜르는 이제 신생국이나 마찬가지인 자이라스와 손을 잡았 겠네요." "네, 그렇죠! 뿐만 아니라 요즘 자이라스는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모양입 니다. 그 엔카루스라는 사람, 무서운 인물인 듯 싶군요." "네, 정말 무서운 사람이지요. 뿐만 아니라 마족인 '키리아' 라는 여자도 무서운 존재에요. 그녀는 여기 저기 붙으면서 동대륙에 있는 모든 나라 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잖아요?" 나는 이번 일에 대해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만약에 엔카루스가 조 종하고 있는 자이라스가 루젠다르와 함께 인페르디아를 무너뜨리며, 둘 은 사이좋게(?) 인페르디아를 나눠먹을 것이다. 물론, 루젠다르는 나중에 자이라스의 뒷통수를 칠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키리아가 그 것을 가만두지 않을 테고, 이것을 기회로 자이라스는 동대륙에서 무시 못할 나라로 거듭나게 될 듯 싶었다. 그렇다면... 내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스미스 비서관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비스! 폐하께서 부르시네!" 그의 말에 나는 미카엔의 집무실로 향했다. 요즘은 생각할 것이 너무 많 아서 머리가 아팠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집무실 안에 들어섰을 때는 마침, 몇몇 대신들이 미카엔과 대화를 마치 고 나오고 있었다. 그들 중 군무대신과 재무대신이 섞여있는 것을 보니... 흠. 그들이 다 나가자, 미카엔은 쇼파에 그대로 앉은 채로 조용하게 입을 열 었다. "앉아! 라비스." 그의 말에 나는 미카엔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번에 폐하는 인페르디아를 도와주실 모양이죠! 저 많은 대신들이 우르르 나가시는 것을 보면, 폐하는 전쟁에 참여하실 의향이 있는 것 같은데..." "맞아! 나는 인페르디아에게 약간의 원군을 보내줄 생각이야. 인페르디 아가 무너지게 된다면, 간신히 유지되고 있던 이곳 동대륙의 균형이 깨 어지고 말지. 루젠다르와 자이라스가 커지는 것은 막아야 해! 특히 자이 라스는..." "자이라스가 더욱 성장하기 전에 초반에 잡는 방법은 없을까요?" 나는 조금 생각에 잠겼다가 그에게 그렇게 다시 입을 열자 미카엔은 미 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물론, 그런 방법도 있지만 그것은 매우 힘든 방법이 될 거야. 그리고, 우리에게는 적이 자이라스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지. 지금은 균형을 유지 할 때야. 그리고, 아직 전쟁의 기운만 있을 뿐 전쟁이 당장 일어나는 것 은 아니니깐, 그 전에... 나는 너를 왕비로 맞을 것을 선언할까 하는데." 나를 왕비로 맞는 선언하겠다라... 분명히 많은 충돌이 있을 듯 했다. 나 는 하급 귀족의 신분인데다가 크로시벨 남작은 자신을 뒷받침해줄 만한 세력도 없었고, 도와줄 귀족들도 없었다. 아무리, 국왕이 자신의 의지를 밀고 나간다 하더라도 그것에 반대할 귀족 들이 많을 테니, 왕실은 이내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나로 인해서, 귀족들 이 서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느라 시끄러워지는 것은 싫었고, 그것으로 인해 미카엔이 많은 신경을 빼앗기는 것은 싫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미카엔." 나는 그의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자, 미카엔은 나의 황금빛 눈동자를 바 라보며 내가 그 다음 하게 될 말을 기다렸다. "그 선언을 하기 전에, 저를 왕실 부수석 마법사로 임명해 주세요! 그리고 전쟁이 터지면 저를 군사를 통솔하는 수뇌들 중 한명으로 임명해 주세요." ...저들이 감히 반대하지 못하도록 기를 꺽을 만한 왕비로서의 자질과 능 력을 모두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체인지(Change) 제28화 -왕비의 일기장- (3) -3- 그 후로 며칠... 나는 왕실 부수석 마법사로 임명되어 킬린의 바로 밑에서 일 하게 되었다. 왕실 마법사들을 이끄는 부수석의 자리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여러 가지 배워야 할 일도 있었고 부수석 마법사로서의 직분에 대해서도 익숙해지느라 계속 바빴다. 물론, 내가 이렇게 부수석 마법사 직위에 임명된 것에 대해 중신 들의 반대는 생각보다 적었다. 그 이유는 예전에 8서클 마법사이 니 어쩌니 했던 나의 소문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수석 마법사인 킬린이 나를 인정하였기 때문에, 대신들은 나의 이러한 직위를 모 두 수긍한 것이다. 나는 아멘시타를 루젠다르 수도로 보내고 키리아가 있는 자이라스 는, 좀더 기운을 감추는 것과 잠입에 능숙한 리엔시타를 자이라스 수도로 보냈다. 뭔가 정보들을 꾸준히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미카엔은 내가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아직도 허락하지 않 고 있었다. 키리아가 관여하고 있을지 모르는 이번에 일어나게 될 전쟁에, 나를 보내는 것이 심히 우려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떼를 쓰다시피 하며 지금 나의 의지를 꺾지 않고 있는 중이 다. 과연 누구의 고집이 이기게 될까. 내가 미카엔에게 왕실 부수석 마법사가 되겠다고 말한 것은, 군사 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되는 것에 더 수월해지기 위해서였다. 그냥 비서관에서 덜컥 군사를 이끄는 수뇌급 우두머리중 하나의 직위에 오르는 것보단, 군사력과 깊은 관계가 있는 왕실 마법사를 이끄는 부수석 마법사에서 군사를 이끄는 우두머리로 임명되는 것이 트러 블이 덜 생길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침실로 돌아가 정령들의 보고를 기다릴 겸, 마법력 증진에 힘썼다. 이제는 4서클 레벨의 마력도 완전해진 편 이었다. 그리고 빙계 계열 마법은 5서클도 무난히 발현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빙계와 상반되는 속성인 화염계는 저번 파이어 링의 실패처럼... 여전히 전반적으로 불안정했다. 역시 한 우물만 파야 할까? 파괴력면에 서는 전격계열이 가장 효과가 크긴 했지만, 이건 너무 어려웠다. 스펠 캐스팅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그래서, 전격 마법 스펠을 완성하려 고 애를 쓸 때마다 나의 머리는 쥐가 났다. 으으... 나는 머리를 식힐 겸, 침대에 누웠다가 문득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일기 장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을 열어 일기장을 꺼내들었다. 그리 고, 그것을 조심스레 펼쳐 들었다. 이번에는 별로 기다림없이 글자가 스르륵 나타났다. 그동안 며칠 일기장을 펼쳐 보지 않았더니, 이번에는 기다렸다는 듯 이 글자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것을 읽는 방법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날짜가 지나면 저절로 알아서 글자가 나타나는 모양 이었다. 정말, 웃기는 일기장. '설마, 누가 천천히 일기를 감상해 주기를 바래서 이러한 특수효과가 일기장에 걸려있는 것은 아니겠지? 프레야 왕비가 그런 별스런 취미 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 테고...' 나는 하던 잡생각을 접고는 일기장에 몰두했다. 「오늘은 정말 우울하다. 내가 이렇게까지 우울했던 적이 있었던가? 성인이 되어 첫 유희때의 설레임 후로는 나는 감정을 잊고 살았다. 오늘 셀레나가 죽으면서 나에게 한가지 유언을 남겼다. 왠지 가슴 아 프게 느껴지는 유언을... 한 영혼이 이토록 불쌍하게 보였던 적은 없었다. 나는 싫더라도 셀 레나의 유언을 들어주어야 했다. 그것은 한 고귀한 존재의 강한 의 지... 그 강한 의지가 곧 운명이 된다. 나는 오랫동안 고뇌를 해야 했다. 이번에 피하게 되면 다음 번에도 계속 될 운명이라면... 그러고 보니, 200여년 전의 일이 생각난다. 그녀의 본래 이름인 크리 스티나, 메르킨, 키리아 그리고 나의 일이... 362년 6월 24일 아나테스 씀」 나는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셀레나... 셀레나의 본래 이름이 '크리스 티나' 라는 것인가? 그러다, 나는 한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얼굴이 하얗 게 질렸다. 6월 24일... 이 날짜는 내가 현실 세계의 옥상에서 실수로 투 신한 날이었다. 셀레나가 죽은 날과 내가 이곳으로 오게되는 날과 이상 하게 일치했다. 나는 다음장을 넘겼다. 손이 금단 현상에 걸린 것처럼 마구 떨렸다. 내 가 페이지를 넘기자 누렇게 변색된 백지에서 다음 일기가 서서히 나타 났다. 하지만, 다음 일기는 매우 짧았다. 「오늘 나는 키리아의 봉인을 나의 손으로 풀어주었다. 그녀는 나를 원 망하고 있을 것이다. 죽도록... 365년 9월 18일 아나테스 씀」 나는 다시 다음 장을 넘겼다. 다시 백지가 나오고 더 이상 글자는 나타 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조용하고 침착한 태도로 덮었다. 그리고, 나는 얼마 전에 루이스가 다시 새로 가져온 셀레나의 초상화를... 벽에 걸려 은 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셀레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부드럽고 인자한 미소... 지금의 나의 모습과 너 무 흡사하지만, 그녀는 화려한 느낌의 나의 외모와는 달리 성숙하고도 부 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폭풍속 한가운데의 고요함을 지나는 것처럼 나는 차분한 얼굴로 초 상화를 바라보며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그러다, 나의 차분한 느낌이 드는 무표정한 얼굴이 분노함으로 바뀌고 들고 있던 일기장에 힘이 거세게 가해 졌다. "젠장!!"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난폭한 몸짓으로 일기장을 초상화가 있는 곳으로 집어던졌다. 그러자, 그 일기장은 셀레나의 초상화 한 가운데에 탁~! 소 리를 내며 부딪히고는 일기장의 수많은 페이지들이 거칠게 펄럭이며 바 닥으로 떨어졌다. 이 정도의 충격이면 책의 종이들은 찢기고도 남을 듯 한데, 그 일기장은 무슨 마법이 걸려 있는지 내가 그렇게 집어던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찢 기지 않았다. 눈물이 다 났다. 깨물은 나의 입술에서는 붉은 피가 살짝 스며나왔다. "대체 뭐야? 셀레나 당신은 대체 뭐냐구? 나에게서 원하는 것이 뭐야?!" 나는 소리를 질렀다. 화가 났다. 왠지 이용 당한 것 같아서... 내가 하필 이면 그 날짜에 투신하게 되었을까? 나는 옥상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에 갑작스런 현기증이 들었던 것이 문득 생각났다. 그것은 단순히 높은 곳 에서 아래를 바라본 탓으로 어지러움증이 들은 것이라 생각되었는데, 그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아래로 떨어짐과 동시에 이곳으로 영혼만 이동해 올 수 있었는지... 아멘시타는 하필 그때에 나는 발견하고 나를 이끌어 올 수가 있었는지...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닐 수도 있었다. 의도된 우연. 내가 너무 과민하게 생각하는 걸까? 나는 눈물도 났지만, 배신감도 들었다. 그 동안 꿈속에서 잠깐씩 셀레나 를 볼 때마다 나는 행복감이 들고는 했었는데... "라비스님!" 루이스가 나의 침실로 들어오면서 나의 이름을 외쳤다. "그 이름 외치지마! 기분 나빠! 나가! 나 혼자 있고 싶어. 흑!" 나는 그렇게 외치고는 침대에 얼굴을 묻고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루이스가 계속 나의 곁에서 나를 달래는 듯 하였으나, 나는 그녀의 목 소리는 그다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셀레나는 200년 전에도 존재했다. 그리고 프레야 왕비 뿐만 아니라 키리 아하고도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미의 여신으로도 숭배되고 있는 셀레네스의 이름을 비슷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셀레네스와 셀레나, 미의 여신으로서 또 다른 이름인 크리시아나와 크리스티나... 그녀가 셀레네스 당사자인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반은 신의 몸을 가지 고 있다는 셈이 되는데, 어째서 나는 아무런 신성력도 가지고 있지 않고, 디바인 파워 역시 흉내도 낼 수 없는 것일까? 만약 셀레나가 여신이라면, 왜 절친한 친구인 프레야 왕비에게 자신의 신 분을 밝히지 않았는지 의문이었다. 프레야 왕비는 셀레나의 본래 이름이 크리스시아나가 아닌 그저 크리스티나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셀레나와 셀레네스는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것일까?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체인지(Change) 제28화 -왕비의 일기장- (4) -4- 한참을 침대에 엎드려서 훌쩍대던 나는, 문득 나를 달래고 있는 루 이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자상한 미소를 나에게 지어보이며 어린애들에게 말을 거는 듯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귀엽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오늘은 왜 이렇게 기분이 안좋은지 이 루 이스에게 말해주면 안될까요? 혼자서 우는 것도 좋지만, 그건 너무 측 은해 보이잖아요? 자~ 말해봐요! 라비스님." "흑! 귀엽고 아름다운 아가씨라니? 루이스도 닭살 돋아! 게다가 그 말투 는... 내가 어린애가 된 기분이잖아? 훌쩍." "호홋~ 그럼, 라비스님은 어린애가 아니셨나요? 전 이제까지 라비스님은 어린아이인줄 알았답니다." "히잉~ 날 놀리다니! 난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니란 말야!" 나는 손으로 눈가의 물기를 닦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자, 루이스는 한 숨을 내쉬며 나를 끌어안고는 나의 등을 토닥였다. 그녀의 품은 정말이지... 넓다랗고 푹신(?)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울한 마음이 있다면 지금 풀어버리세요.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우세요. 라비스님, 저는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라비스님이 혼 자서 울고 계시는 모습은 정말 가슴이 아파요. 라비스님은 어렸을 적부터 혼자서 울고는 했었죠. 이제는 그런 모습을 별로 보이시지 않아서 내심 안 심했었는데, 라비스님은 여전히 어린 아이셨군요." 루이스에게서 자상함과 어머니와 같은 따스함이 느껴졌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어린아이가 되어 그녀의 품에서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고, 분노로 인한 눈물에서 루이스에 대한 고마움과 경직되었던 마음이 풀어져서 나온 눈물로, 나는 어린 아이같이 울었다. 내가 이렇게 누군가에게 기대서 마음 놓고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었던가? 지금 내가 루이스에게 보이고 있는 행동은 하나의 어리광이었다. 어린 시절 에도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어리광을 부려본 적이 없었던 나는, 지금의 내가 놀랍게도 느껴졌지만, 지금은 이대로 좋았다. 이런 식으로라도 나의 마 음을 풀지 않으면 나는 무척 괴로울 테니. 한동안 그렇게 그녀의 품에서 훌쩍대던 나는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마 음이 한결 평안해지는 것을 느낀 나는 눈을 반쯤 감고는 졸리운 듯한 목 소리로 입을 열었다. "루이스, 고마워... 루이스도 알고 있지? 내가 루이스를 어머니처럼 생각하 고 있다는 거. 내가 가장 믿는 사람은 루이스야." 다음날, 나는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왕실 부수석 마법사임을 증명하는 화 려한 문양이 수놓아진 흰색 로브를 입고, 왕실 마법사들이 모여있는 연구실 로 출근을 했다. 왕실 마법사들은 비서관 못지 않게 할 일이 많았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왕 성을 지키는 역할도 했지만, 전쟁시에는 그들만의 능력으로 국가의 전력에 꽤 중요한 힘이 되었다. 물론, 마법사들은 지속적으로 직접 전투에 참가한 다기보다는 중간 중간에 보강하는 역할만 하지만, 그것만으로 꽤 중요한 힘 이 되었다. 그리고, 왕실 마법사들은 나라 안에 있는 모든 마법 아카데미와 마법 협회 를 관리하기도 하는 관리의 업무도 하고 있었으며, 유능하고 젊은 마법사 인재들을 양성하는 일도 했다. 물론, 마법을 연구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하 고 있는 일이었다. 이곳 로히얀스는 아스탄샤와는 다르게, 왕실 마법사가 되는 것이 마법사 로서는 가장 큰 영광이었다. 그래서 마법 아카데미를 졸업한 자들은 왕 성으로 들어오기 위해 여러 가지 테스트를 받곤 하는데, 그러한 테스트를 하는 것이 수석 마법사나 부수석 마법사였다. 그렇다면, 부수석 마법사 직위에 있는 나에게 심사위원의 자격이 주어지는 셈이었다. '설마, 내가 나보다 높은 마력을 지닌 녀석을 테스트하게 되는 불상사는 없겠지?' 그렇게 나는, 부수석 왕실 마법사로서 여러 가지 임무을 수행하기도 했 지만, 카이슨하고도 지속적으로 만나서, 현재 전쟁 기운이 돌고 있는 루젠 다르와 인페르디아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내가 전쟁에 참전하게 될 경우, 미리 미리 대처 방안을 생각해 두기 위해 서였다. 하지만, 궁성 내부에서 시녀들이나 시종을 비롯한 떠들기 좋아하는 이들 은, 내가 이렇게 카이슨을 만나는 것에 대해 이상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는 떠들어대어, 나는 또다른 새로운 스캔들에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나에게서 스캔들이 자꾸 터져나올까, 의아하기도 했 었지만 궁성 생활에 익숙해진 지금은, 어느 정도 이러한 상황이 이해가 갔다. 그것은 내가 국왕의 총애를 한몸이 받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그 만큼 귀족들이나 궁성 사람들의 이목과 관심을 많이 받고 있는 나였기 때 문에, 사람들은 내가 젊은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만난다 하면은 민감하게 반응들을 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나는 본의 아니게 바람둥이로 소문이 나기도 했었다. 그 리고, 미카엔을 꼬드긴 주제에 남자들을 홀리고 다닌다는 등... 많은 비 난을 받기도 했었다. 물론, 그러한 비난은 미카엔을 흠모하는 시녀들의 입에서 나온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정말 한숨이 나오는 일이었다. 미카엔은 이러한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래도 기분은 그다지 좋지는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그런 일들도 꽤나 골치 아픈 일들 중 하나이지만 요즘 나는 왕 비의 일기장에 모든 신경이 가 있었다. 이것 때문에 동대륙에서 다시 돌고 있는 전쟁의 기운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지끈 지끈 아파오는 머리를 누르며 킬린에게 일찍 쉬어야 하겠다고 말하고는 침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곳 역시 골치 아픈 일이 기다리고 있 었다. 크로시벨 남작의 여동생이라는 한 귀부인이 찾아와 나를 기다릴 겸. 나의 침실 안에서 루이스와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이었다. 크로시벨 남작의 여동생 이라면... 지금 나에게는 고모가 되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생전 처음보는 아줌마가 고모가 되니,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남 작과 닮은 짙은 갈색 머리를 한 그 귀부인은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호 들갑을 떨며 아는 체를 했다. "호호홋~ 라비스, 많이 컸구나! 어쩜 이렇게 더 예뻐질 수가 있니? 2년 전 에 보고 못봤는데 몰라보게 예뻐졌구나~ 예전에도 예뻤지만 지금은 눈이 부 실 지경이야." "네, 하하하..." 나는 식은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러한 상황 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정말 난처하다. 나 역시 호들갑을 떨며 맞 장구를 쳐야 할끼? "정말 그렇죠? 라비스님은 작년 이맘때부터 정말 예뻐지더라구요. 지금 의 라비스님은 마치 미의 오오라를 풍기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그 귀부인의 호들갑에 루이스가 대신 나서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자, 귀부인은 눈을 반짝 반짝 빛내며 본격적으로 수다 모드에 돌입하였다. "그건 혹시, 폐하의 사랑을 받고 있어서 그런 것일 아닐까? 로히얀스에 서 라비스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라비스는 유명해! 폐하의 사랑을 받는 유일한 소녀라고! 호홋~ 곧, 라비스가 왕비가 될 거라는 소문도 은 연 중에 떠돌고 있지!" 그녀의 말에 나는 몹시 민망해졌다. 미카엔을 사랑을 받고 있어서 예뻐진 거라니! 엑~! '예전 라비스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보다는 그 아름다움이 덜 했나 보지?' 하긴, 예전에도 루이스가 나보고 갈수록 예뻐진다고 말하긴 했었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의 외모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있는데, 그 고모라는 귀부인은 나에게 눈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이렇게 라비스를 찾아온 것은... 오랜만에 라비스를 보러 온 이유도 있지만, 부탁할 것이 있어서야. 라비스도 어렸을 때 고모부를 한번 본 적이 있지? 너에게 꽤 자상하게 대했었잖니? 넌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이 정도의 부탁은 들어줄 수가 있을 거야. 네 고모부에게 왕실 관 직 중 적당한 자리를 좀 만들어 주겠니?" 결국, 이 아줌마는 나를 찾아온 목적이 이러한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던 것 이다. 나는 한숨을 나직히 내쉬고는 그녀에게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저에게는 그러한 권한이 없습니다. 지금의 저는 폐하의 애첩 이 아니라 폐하를 모시고 있는 충성스런 신하일 뿐입니다. 그저 그 분의 마 법사일 뿐이지요. 돌아가세요!" 그러자, 그 귀부인의 얼굴은 보기싫게 구겨졌다. 사실, 고모와 조카의 관 계라면 꽤 가까운 혈연관계가 되었는데, 그녀는 이러한 가까운 혈연관계 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내가 냉정하게 나올지는 몰랐는지, 그녀의 얼굴은 기분 상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알았다. 결국 너는 그녀와 꼭 닮았구나! 항상 미소 짓는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냉정하기 짝이 없지. 네 아버지가 왜 그렇게 메마른 인간이 되었는지 너는 혹시 알고 있니? 이만 가보아야 하겠구나." 그녀는 그렇게 의미심장한 말을 나에게 하고는 침실을 나갔다. 저 여자의 말이 대체 무슨 말일까? 나는 루이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약간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던 그녀는 내가 눈길을 주자 얼굴 표정을 풀고는 나에게 입을 열었다. "라비스님, 그냥 적당한 자리를 내어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래도 고모 되 시는 분인데, 게다가 라비스님의 믿을 만한 손발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 요? 라비스님의 주위에는 지금 라비스님의 편이 거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세요." "글세, 난... 별로 외척을 끌어들이고 싶은 생각이 없어! 내가 끌어들인 외척들이 미카엔의 시야를 막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으니깐! 루이스, 이거 알아? 예전에 누군가가 말한 것인데... 폐하의 약점은 바로 나라고 하더라. 완벽하신 폐하이지만, 그는 분명 나와 깊이 관련된 외척들에게는 그다지 냉 정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 어쨌든, 나의 손발이 될 조력자들은 나의 친구들로 족해." * 체인지... 제목은 그냥 이대로 써야 할 것 같군요. 저에게 제목을 추천해주신 분들에게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 중에 꽤 좋은 제목들이 있었긴 하지만, 그냥 이대로 이 제목을 썼으면 하시 는 분들이 꽤 되더군요.^^;; 체인지(Change) 제28화 -왕비의 일기장- (5) -5- 나의 전용 마차로서 그 고모되는 귀부인을 저택까지 정중히 모시 도록 루이스에게 명했다. 어찌되었든, 그녀는 크로시벨 남작의 여 동생이며 나의 고모되는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일언지하로서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여동생되는 그녀를 박 대할 수는 없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왕비의 일기장을 꺼내들었다. 이것을 읽을 때 마다 큰 충격을 받곤 했던 나는, 심호흡을 하며 어떠한 내용이 있 어도 충격을 받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을 하며 일기장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는... 내가 읽었던 부분의 다음 페이지를 넘겨 백지 안에 글자가 나타나기 를 기다렸다. 어제 밤에 일기를 읽었으니, 오늘은 그 다음 일기가 나타 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예측과는 달리, 이번에도 백지로 된 누런 종이에서는 글자가 금세 스르르 나타났다. 「오늘 루젠다르에서 미카엔의 사절단이 돌아왔다. 외교사절로서 다 녀온 보고를 나에게 하는 미카엔의 얼굴은 많이 상심한 듯해 보였다. 아마도, 라비스가 자신을 떠난 것을 상심해 하는 것이겠지... 나는 왠 지 웃음이 나왔으나, 상심해 하는 아들의 심정을 생각해서 일부로 근 엄한 모습을 보였다. 이 일을 계기로 미카엔은 뭔가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미카엔이 이런 일로 너무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라비스가 자신 에게로 돌아올 수 있게끔 현명한 판단과 행동을 하기를 바랬다. 그나저 나, 나는 미카엔이 저렇듯 한 여자로 인해 근심하는 모습이 왜이렇게 유 쾌하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나는 어머니로서 실격인 모양이다. 374년 7월 29일 아나테스 씀」 프레야 왕비에게 이러한 면이 있는 줄은... 항상 근엄하고 차가울 정도 로 엄격한 모습만 보여주었던 프레야 왕비였던 터라, 조금 의외였다. 나는 나직한 실소를 터뜨리며 다음장을 넘겼다. 그러자, 여전히 백지가 나왔고 나는 조금 기다렸다. 하지만, 글자가 나타나는 것은 별로 기대 하지 않았다. '또 며칠 즈음 기다려야 하겠지' 하며 생각하고 있던 나는 또 다음 일기가 스르르 나타나는 것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미카엔에게서 전갈이 왔다. 환상의 섬인 시리어스섬으로 가야 하는 이유로 로히얀스로 돌아가는 것이 잠시 늦어질 것 같다는 내용이 었다. 시리어스섬이라... 뭔가 의도적으로 느껴질 만큼 기막힌 우연에 나는 놀 라움을 금치 못했다. 200여년전, 그 당시 '크리스티나' 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던 셀레나는 나에게 한가지 부탁을 했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시리어스섬에 몇가지 마 법을 걸어주기를 부탁한 것이다. 시리어스라는 이름의 환상의 섬... 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그 시리어스섬에 미카엔이 가겠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셀레나는 이번에도 무언가를 예지하고 그러한 환상의 섬을 만들었던 것 일까? 나에게도 말못하는 무언가 비밀스런 진실이 있는 모양이다. 셀 레나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행동해야만 했을까? 375년 1월 23일 아나테스 씀」 셀레나가 예지한 것이라... 그녀는 자신의 딸이 열일곱이 되는 해에 영혼 이 뒤바뀌게 될 거라는 것을 예지하고 있었다. 셀레나가 시리어스섬을 만 들어낸 의도는 무엇일까. 나는 셀레나가 하고 예지의 내용이, 생각보단 꽤 구체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그녀는 나를 괴롭히고 있던 자아 정체성 문제까지 미리 예측하고 있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시리어스섬에서 겪었던 일 로서, 자아 분열 그리고 자아로 인한 혼란을 고친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시리어스섬에서 나는 이도현으로서의 내 자아 뿐만 아니라, 라비스로서 느끼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나의 모습도 내 진정한 자아임을 인정하며 깨 달았었다. 이도현이자 다시 새로 태어난 이도현으로서의 라비스... 그것이 나의 모습임을 그곳에서 비로소 인정했었다. 시리어스섬에서 두가지 모습으로 분리되어 나에게 나타났었던, 나의 허상들인 아시와 아인의 모습을 나는 잠시 떠올렸다. 어쩌면 한 영혼이 새로이 뒤바뀐 육체로 인해 적응하지 못하고 자아 문제로 혼란을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인 듯 하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예지하고 나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러한 환상의 섬까지 만들어 낸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게다가, 200여년전부터 자신의 딸이 겪게 되는 혼란까지도 예지를 통 해 그렇게 예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예지력... 보통 인 간들로서는 하기 힘든 일이었다. 나는 더 이상 충격받을 여지도 남아있지 않았던 터라, 매우 허탈해 하며 일기장을 덮었다. 그리고는 힘없이 침대에 털썩 누워 눈은 감았 다. 이젠 셀레나가 여신일거라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시리어스섬 이라는 환상의 섬까지 만들어낼 정도면... 신계에서 추방당해 인간계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살게 된 불운한(?) 여 신이라... 그나저나, 신들도 죽음을 맞이하던가? 그녀가 만약 여신이라면, 즉은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존재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 그렇지는 않겠군. 만약,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그녀는 그렇게 생전에 미리 예비책 을 만들어 놓을 필요없이, 나에게 뭔가 일이 닥칠 때마다 그 즉시 뭔 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은 이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한데... 그러면 이러한 가정을 해볼 수가 있다. 셀레나는 여신이었지만, 신계로 추방당한 그 순간 완벽한 인간이 되어 인간계로 떨어져 살다가, 수명이 다해서 죽었다? 흐음, 그것도 불완전 한 가설이다. 그녀가 만약 인간의 몸이 되었다면, 어떻게 시리어스섬 같은 대단한 환 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며, 엄청난 예지력을 보이고, 200여년이 넘는 긴 세월을 살 수 있었을까. 나는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가, 리엔 시타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들었다. "리엔?" 내가 그렇게 입을 열자, 곧 리엔시타의 모습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투 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은 역시 정령답게 순수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라비스! 드디어 루젠다르가 움직이기 시작했어. 곧 전쟁이 터질 것 같 아. 아멘시타가 알려온 사실이야! 그런데, 자이라스에 있는 키리아와 그 일당들은 너무 조용해서 약간 걱정이 돼!" 곧 전쟁이 터질 것 같다라... 그렇다면, 나는 빨리 미카엔과 담판을 지 어야 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나는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그에게 허락 맡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번 키리아에게 붙잡혀 독까지 당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미카엔은 이번 만큼은 나 못지않게 고집이 대단하였다. 나는 리엔시타에게 칭찬과 독려하는 몇마디를 해준 뒤, 다시 자이라스 로 보내고 나서 미카엔이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집무실로 갔 던 나는 다시 국왕의 접견실로 향해야 했다. 집무실에 시립한 시종의 말에 의하면, 지금 미카엔은 인페르디아의 사신을 접견하고 있다고 했 다. 인페르디아 사신이 무슨 공물 같은 것을 바치러 왔다고 했는데, 그 공물들은 값진 보화들도 있었지만, 여자들도 상당수가 끼어있다는 것 을 그 시종은 나에게 귀뜀을 해준 것이다. 여자라... 그것도 상당수라니... 미카엔도 하렘같은 것을 만들 생각인가? 결국 호기심이 동했던 나는, 접견실까지 찾아가고 말았다. 솔직히 미카엔 에게 바쳐진 여자들이 얼마나 예쁜지, 얼마나 많은지 따위가 궁금해서 접견실로 향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나는 접견실 문을 지키는 기사에게 급한 일이 있음을 둘러대고는 접견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사신으로 보이는 몇몇 인페르디아인이 눈에 들 어왔는데 그 중 한 남자가 미카엔에게 바칠 여러가지 선물들에 대해서 열 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이들은 미카엔이 원군을 보내주기로 약속한 그 일 때문에 그 대가로 이 렇게 선물들을 보내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선물 중에 여자들이 끼는 이유는... 그들의 문화적 특징에 있었다. 인페르디아는 여성의 대체적인 신분들이 거의 한심할 정도로 낮았는데, 그 심각함을 대충 설명하자면! 여자들이란, 직위가 높은 자들의 노리개 그리고 자식을 낳아줄 도구, 등 등이었다. 그로 인해, 인페르디아의 왕실은 아름답고 신분의 낮은 여자 들을 종종 선물용(?)으로 금은 보화 대신 쓰기도 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 내가 인페르디아왕을 암살하기 위해 그에게 접근 했었던 일이 생각난다. 지금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지는 일이었지만, 그렇게 여자들의 권리를 취급도 해주지 않는 나라이니 왕이란 작자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뻔하였다. "라비스!" 열몇 명 정도 되어보이는 인페르디아의 소녀들을 나는 쭈욱 훑어보고 있는데, 미카엔이 나를 발견하였는지 이름을 부르며 손짓을 해보였다. 가까이 오라는 뜻이었다. 결국,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그의 옆에 서보였다. "오늘 쯤에 네가 나를 찾아올거라 생각하고 있었어. 분명 네 주장을 펼 치러 온 것이겠지?"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그는 빙긋 웃어보이며 입 을 열었다. "후훗... 나도 너만큼 소식은 빨라! 이왕 온김에 인페르디아가 보내온 선물들을 같이 감상할까?"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다소곳이 조아리고 있는 소녀들에게 눈길 을 주고는 그녀들을 살폈다. 나 역시 그녀들에게 눈길을 주며 그에게 무 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중들 여자들인가요?" "응." "흠... 그렇군요." "저들 중 맘에 드는 소녀가 몇 명 있긴 하지만, 라비스가 직접 다섯명 쯤 골라!" 그의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제가요?" 그러자 미카엔은 나에게 눈웃음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본인 을 시중들 여자들을 나보고 고르라니! 무슨 속셈인지... 정말 흥이다! 나는 인페르디아 소녀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천천히 흝어보았다. 그리고는 그들 중 미모도 별로인데다가 성격도 안좋아보이는 소녀 다섯을 골랐다. "다 골랐어요! 마음에 드세요? 제가 보기에는 이 소녀들이 참 예뻐보이는데." "흠... 그래? 내가 보기에는 나머지 소녀들이 더 예뻐보이는데, 네가 저 소녀들이 마음에 든다니... 뭐, 상관은 없지!" 미카엔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그렇게 말하고는 시종장으로 보이는 한 나이든 시종에게 명했다. "디킨스! 오늘부터 저 다섯명의 소녀들은 라비스의 시녀로서 교육시키도록 해!" 그가 그렇게 시종에게 명하자 나는 동그레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저 소녀들을 자신의 측실들로 삼으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 는데... 미카엔은 나의 이러한 눈길을 느꼈는지 나를 바라보고는 의미모를 웃음을 던졌다. 헉! 뭐, 뭐야? 저 웃음은... 나는 미카엔을 노려보았다. 내가 질투로 인해서 이러한 행동을 보인 것은 정말 정말 절대로 아니었다. 그저 미카엔이 얄마워서 그런 것인데... 나의 이러한 마음을 미카엔에게 알리고 싶지만, 그러한 발언을 하면 나만 부끄 러워진다. 보나마나, 내가 질투를 해서 별로인 소녀들을 고른 것이라 생각 할텐데... 미카엔은 다시 사신들에게 눈길을 주고는 그들에게 입을 열었다. "인페르디아왕께 고맙다는 말을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 소녀들은 마 음에 드는 다섯명의 소녀들만 받을 것이니 그렇게 알고 나머지는 고국으 로 돌아가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이만 피곤하실 테니 편안히 쉬시 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침실은 디킨스가 안내해 드릴 것입니다." 미카엔은 외국의 사신에 대한 예우를 갖추어 그렇게 말을 마치고는 옥좌 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라비스! 나에게 할 말이 있지? 왕실 부수석 마법사가 이번 전쟁에 참전하 게 되는지의 여부에 대해 논의할 겸, 우리 잠시 산책이나 할까?" * 오늘은 쪼오금 길죠? ^^;; 아이~ 뿌듯해라~~~!! 체인지(Change) 제29화 -인페르디아 전쟁- (1) (인페르디아 전쟁) -1- "꼭 전쟁에 참전해야 하겠어?" 미카엔의 물음에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 미카엔이 왕비를 맞으시려는 저를 진정으로 생각하신다면, 제가 이 번에 참전하도록 허락해 주세요. 그것이 저와 미카엔, 로히얀스를 위하는 일이에요. 저의 신변을 걱정하시는 거라면, 그다지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 요. 저에겐 라센샤르를 비롯한 강한 정령들이 있잖아요?" 나는 그의 허락을 얻어내기 위해, 온갖 설득을 해야 했다. 처음에는 그냥 왕비가 되지 않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써볼까 했었으나, 미카엔이 그런 유치한 협박이 통할 리가 없으니... 나는 바다의 정령인 라센샤르의 이름 을 은연 중에 강조하며 미카엔을 안심시키는 말을 했다. 게다가, 내가 참전하는 것이 진정 나를 위하는 일이 되지 않겠냐는 말은 미카엔에게는 꽤나 호소력 있는 설득의 말이었다. 그가 나를 꽤나 위한다 는 것은 잘알고 있었다. 내가 그저, 수많은 중신들의 거센 반대에 미카엔의 보호만을 바라며 얌전 히 있다가, 미카엔의 힘으로 왕비 자리에 억지로 오른다면, 나는 수많은 귀 족들의 불만을 받게 될 것이다. 그건, 미카엔의 위신과 그를 상징하는 로히 얀스의 위신이 깎이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정작 당사자인 나 자신이 왕 비로서 평탄치 못한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미카엔도 그 점은 잘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가 걱정하는 문제는 키리 아... 나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라센샤르를 들먹인 것이다. "물론, 나도 네가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왕비의 자리에 오르길 바래. 하지 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너를 붙잡게 만드는 군." "미카엔! 약속하도록 하지요. 저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전 이번 인페르디아 전쟁에서 여자 영웅이 되어 돌아오겠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미카엔의 이름과 내 자신의 이름을 빛내 보이겠어요. 그리고... 무 사히 돌아와서 로히얀스의 왕비가 될 것을, 제 이름과 내 본연의 영혼을 걸고 맹세하겠어요!" 미카엔은 이제 더 이상 황태자가 아니었다. 옥좌를 지키는 로히얀스의 상징... 혹여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그는 저번처럼 나라일을 팽개치고 나를 위해 그의 자리를 떠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다음날, 나는 국왕의 이름으로 이번 전쟁의 참모들 중 하나로 임명이 되었다. 그래서, 곧 닥칠 전쟁에 대한 회의를 하는 비밀 군회의에 나 역 시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다른 참모들을 비롯한 군사들과 기사들을 이끄는 지휘관들은 모두 놀라움과 황당함을 감추지 못 했다. 국왕의 전 측실이 군사를 이끄는 중요한 요직인 참모로 임명될 줄은 몰랐 던 것이다. 노골적으로 놀라움을 표하는 그들에게, 나는 싱긋 웃어주고는 침착한 태도로 자리에 앉았다. 우선 내가 할 일은 저들을 제압하는 것... 그래야 나는 이번 전쟁의 영광 스런 종결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저번 인페르디아 왕을 암살하여 허무 하게 전쟁을 종식시킨 경우와는 천지 차로 다를 것이니, 나는 측실의 이 미지를 단숨에 묻어버릴 만한 군사 참모로서의 카리스마와 통솔력이 필 요했다. 전쟁 종결자... 이번에도 전쟁의 종결자는 내가 될 것이다. "허허! 기가 막히는 군요. 크로시벨님께서 군사 수뇌들 중 하나로 임명이 되시다니... 대체 폐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지." 나이 지극한 참모장의 말이었다. "글쎄요. 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는 감히 저희들이 알 수 없겠지 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현명하신 분이시니, 뭔가 현명한 결단을 내리셔서 저를 여러분들의 동료로서 보내신 것이 아닐까요? 그레이 참모장님을 비롯 한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폐하의 그 비범하심에 한치의 의심도 갖지 않으 셨으면 합니다." 침착한 미소를 은은히 띄우며 나는 참모장에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의 요지는 미카엔이 나를 참모로서 그냥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 카엔이 나를 참모로 임명할 정도로 나에게 능력과 힘이 있음을 은연 중에 저 들에게 심어주었다. 그리고, '저를 여러분들의 동료로서 보내신 것이 아닐까요?' 라는 발언을 하여 예전에 왕실에서 돌았었던 나에 대한 소문을 상기시켜 주었다. 마 스터 마법사, 국왕의 숨은 실력자, 제 2의 프레야 왕비 등등... 그 명칭도 많았지만, 국왕의 숨은 실력자로서 이들을 감독할 겸 이곳에 왔다는 것을 저들이 멋대로 오해하게끔 하는 것이다. 아무튼, 내가 그렇게 말하자 참모장을 비롯한 군사 관리들은 더 이상 토 를 달지 못했다. 나는 이러한 결과에 만족하며 자리에 앉아있는 한 기 사를 바라보았다. 아! 저 남자가 누군지 생각났다. 지브린 록펠러... 왕 실 에제크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는데, 그새 단장으로 승진한 모양이었다. 에제크 기사단은 내가 미카엔의 측실로서 왕성으로 들어가게 될 때, 나 를 호위하던 기사단이었다. 그때, 엔카루스가 이끄는 마법 도적단에 의 해 많은 피해를 보았었던... 나는 그에게 눈인사를 건네었다. 그러자, 그는 약간 당황한 모습으로 나 에게 고개를 조금 숙여 보였다. "흠, 흠! 어쨌든 크로시벨님은 이번 전쟁의 기운에 대해 어떻게 파악하고 계신지 약간의 조언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그레이 참모장이 다시 나에게 입을 열었다. 저것은 분명... 나를 테스트하 는 질문일 것이다. "이번 전쟁은 저희 로히얀스와 많은 관련이 있어요. 루젠다르와 동맹을 맺은 자이라스를 조정하는 세력이 모두 로히얀스와 인연을 갖었던 이 들이지요. 그만큼 우리는 여러 가지로 조심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그들은 모두 이곳 로히얀스의 왕성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에, 전략면에서도 우리를 대비한 무언가를 치밀하게 세웠을 거예요. 지금 그들은 자이라스에서 조용하게 지내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 하고 위험한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는 비록 인페르 디아의 원군으로서 인페르디아가 무너지지 않게 약간의 도움만 주는 입장 이라 하지만, 우리는 이번 기회에 앞으로 로히얀스의 화근이 될 그들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흐음..." "쿨럭...!" 끄덕 끄덕! 나의 발언에 이 회의장에 있던 이들의 반응들이었다. 그냥 헛기침 한번 하는 이가 있는 반면, 인정할 것은 인정할 줄 아는 이들은 고개를 가만히 끄덕여 보였다. "뿌리 뽑는 것도 좋지만, 너무 나서다가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은 아니오?" 누군가가 나섰다. "물론, 너무 나서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가 있지요. 하지만, 우리가 꼭 나 서서 설칠 필요가 있을까요? 이번 기회에 우리는 인페르디아를 도와주는 척을 하며 인페르디아가 그 위험세력을 직접 쓸어버리도록 하는 것이죠! 우리는 인페르디아가 그들 세력을 쓸어버리는데에 약간의 도움만 주면 됩 니다." 나의 말에, 회의장의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그럼, 크로시벨님께서는 뭔가 계책이라도 가지고 계시는 겁니까?" 그레이 참모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 "……!" "……." "……?" 내가 그렇게 간단히 대답만 하고는 입을 다물자, 그레이 참모장을 비롯한 이들은 모두 애가 탄 모습을 보였다. 어서 말하라는 재촉어린 시선을 나에 게 던졌으나, 나는 모르는 척 그들의 눈길을 무시하고는 방긋 방긋 미소만 지었다. 결국, 참모장이 그들의 무언의 재촉을 대표해서 나에게 입을 열었다. "그 계책이 무엇인지 크로시벨님의 고견을 듣고 싶군요." '고견이라고 말할 것까지는... 쑥스럽게시리!' 나는 참모장에게 다시 한번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참모장이라면 꽤 높은 직책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권위적 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나를 비롯한 여기에 있는 모든 이에게 예를 갖 추어서 말하였고, 그 누군가를 무조건 무시하거나 의견을 묵살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미카엔이 사람을 제대로 임명한 듯 했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흐뭇해진 미소를 그에게 짓고 말았다. 에구... 내가 나이든 사람에게 흐뭇해 하는 미소라니! 하지만, 그 참모장을 비롯한 군사 관리들은 나의 이러한 미소를 곡해하여 받아들였다. 아마도, 국왕의 숨은 실력자인 내가 참모장을 인정하는... 다시 말해, 좋게 평가한 모양이라 지레 짐작한 것이다. 내가 국왕의 숨겨진 눈과 귀라면... 이 모든 상황이 국왕의 귀로 들어가게 될 터, 저들이 갑자기 몸가 짐을 똑바로 하는 것들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총애하는 애첩으로서가 아니라 숨은 실력자로서의 간언이라면 국왕은 백퍼 센트 그 말을 믿을 것이고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쯔쯧~! 비록 의도한 상황이지만, 나는 한숨섞인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어쨌 든. 참모장이 나에게 질문을 했으니 나는 대답을 해야 했다. "여러분들은 키리아라는 마족을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그녀는 지금 자이라스 를 배후에서 조정하고 있는 존재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엔카루스라 는 로히얀스의 반역 죄인과 손을 잡기 전에, 인페르디아왕의 뒤를 봐주고 있 었죠! 현 인페르디아 국왕의 형이 되는... 그녀와 손을 잡았던 인페르디아왕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암살이 되었습니다! 전, 그 혐의를 키리아에게 씌울 작정 입니다." "흠, 그건 괜찮은 생각인 듯 하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을 텐데요. 게다가 요 즘 같은 경우는 소문을 퍼트릴 만한 첩자들도 활동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훗~ 그건 염려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에게는 믿을 만한 조력자가 있는 데, 그들에게 그 일을 맡길 생각입니다." 그러자, 군사 지휘관 중 하나인 한 기사가 놀라며 입을 열었다. "그럼, 크로시벨님께서는 그 일을 능히 해낼 만한 유능한 조력자가 있단 말입 니까?"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던 말을 다시 이었다. "네, 하지만 더 이상은 여러분께 자세히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전쟁이 터지 기 직전까지 저는 그 일을 마무리할 것이니, 여러분들은 저를 믿으시고 그 후에 결과를 기다려 주세요! 이것은 개별적인 전략에 불과하니 여러분들은 계속 진행하고 있던 군사 작전들을 수행하세요! 만약 제가 이번 일을 성공 시키지 못할 시에도 전혀 방해받지 않고 각자 임무를 수행하셨으면 합니다." "그럼... 크로시벨님을 믿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곧 있으면 전쟁이 터질 것인데 시간이 너무 촉박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군요." 그레이 참모장은 나의 계획을 수락하는 말을 하며 그것에 대한 약간의 근 심을 나타내었다. "물론, 시간이 약간 촉박해서 성공률이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저는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 정보수집에 능한 편이지요! 참모장님께서 책사(策士) 로서 저를 자주 활용해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그에게 부탁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책사(策士)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책을 안출해 내는 존재... 나는 우선 그에게 인정을 받고는, 나중에 전면전이 있을 경우 그에게 선봉 지휘관의 자격을 받아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2- 회의를 마치고 나오다가 나는 한 시녀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나 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왕실 마법사들의 연구실로 가는 길목에서 서 있다가 나를 보더니 꾸벅 인사를 해보였다. "라비스님이시죠? 저는 폐하의 두 번째 측실이신 아사벨라님을 모시고 있는 시녀인데, 아사벨라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아사벨라? 무슨 명을 받고 왔지요?" "아사벨라님은 라비스님을 잠시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잠깐 시간을 내 어 저와 로터스궁으로 가시지요." 로터스궁이란, 국왕이 머무는 중앙궁성에 딸려있는 별궁들 중 하나였다. 중앙궁성 근처에는 작은 별궁들이 모두 10개 정도가 모여있는데, 이 별 궁들은 국왕의 측실들이 머무는 궁이었다. 물론, 이 별궁들은 왕비가 머 무는 장미궁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꽤 화려하고 멋진 건축 물들이었다. 로터스... 그러고 보니, 로히얀스 왕성에서 존재하는 모든 별궁들은 모두 꽃이름으로 되어 있었는데, 로터스라면 연꽃이라는 뜻이었다. 아사벨라는 원래 있던 아카시아궁에서 국왕의 별궁인 로터스궁으로 그 거처를 옮긴 모양이었다. 어쨌든, 나는 아사벨라를 만나러 로터스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시녀의 안 내를 받으며 응접실로 들어섰다. "오랜만이야. 이번에는 군사 참모로 임명되었다며?" "으응... 넌 그동안 잘지냈어?" "훗~ 나야 그동안 못지낼 이유가 없지. 앉아." 아사벨라는 멸문한 집안에 국왕의 총애를 잃은 신세 처량한 측실의 신 분이 되었으나, 여전히 태도는 오만하였고 차림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솔직히 그녀에게 여러 가지로 미안했다. 우선, 그녀가 국왕의 총애를 잃은 것과 집안이 그렇게 풍지 박산이 난 것은 근원적 원인이 나에게 있 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미카엔에게 진실된 사랑은 못받 더라도, 측실로서 어느 정도의 총애는 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아니었다면 엔카루스는 권력에 탐을 내고 있더라도 그것이 도가 지나쳐 자신의 아버지를 이용하여 반정까지는 일으키지 않았을 지 도 몰랐다. "나에게 할 말이 있지?" "그래. 내가 너를 만나자고 한 것은 너에게 나에 대한 빚을 갚으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야." "너에 대한 빚?" 내가 그렇게 반문을 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전쟁에 나의 오빠가 연관되어 있다는 거, 나도 알고 있어! 넌 이번 전쟁에 참여하게 될 테지? 만약 오빠를 만나게 되면, 오빠를... 최악의 순 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네가 도와줘! 오빠가 포로로서 잡히게 된다면 그가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더 이상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과도 같 은 행동은 하지 않도록 네가 이끌어줘. 이건 부탁이 아니라, 네가 갚아야 할 빚이야." 내가 갚아야 할 빚... 그말이 맞긴 했다. 나는 아사벨라에게 갚아야 할 빚 이 있었다. 그녀가 나로 인해 불행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저번에 엔카루스에게 잡혀 있었을 때 그녀가 나를 탈출시켜주었던 적도 있 었지 않은가? 하지만, 엔카루스를 도와주는 것... 이것은 나로서는 난감한 요구이다. 엔카루스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은, 반역 죄인이자 나라의 화근을 도와주 게 되는 것이었고 잘못하면 일을 그르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갈등을 하였다. 나 역시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엔카루스가 그토록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나' 라는 존재가 그 불씨 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엔카루스는 그 한 개의 불씨로 인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평범한 삶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파멸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엔카루스가 지금 자이라스에 만족하지 않고 저렇듯 자신의 힘을 키 우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은, 그가 로히얀스를 노리고 있다는 것... 이러한 그의 행동들은 정말 아사벨라의 말대로 불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과 도 같은 행동이었다. 그것은 결국엔 불행한 자신의 파멸로서 이이질 지도 모 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무너지게 될 존재는 미카엔이 되겠지만... 미카엔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다. 나를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나로 인해 불행해지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왜 그렇게 한가지에 집착을 갖고 그것 으로 인해 자신이 불행해져야만 할까? 엔카루스는 내가 미카엔의 여자가 되었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 래서, 나를 비롯한 로히얀스까지 미카엔이 가진 것을 빼앗기 위해 그는 자 신의 소중한 것 마저도 희생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어긋난 인연과 그의 굴 절된 감정으로 빚어진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사벨라에게 입을 열었다. "아사벨라! 내가 너에게 빚을 졌다는 거... 나도 인정해. 하지만, 네 요구 는 완벽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 너도 나의 입장을 이해하리라 생각해. 대신, 너에게 이것 한가지만은 약속할게! 만약 그와 마주치게 된다면, 그 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집착을 버리도록 설득을 해볼게! 하지만, 그를 풀 어준다거나 목숨을 구해준다는 약속은 못하겠어." "훗~ 의외로 솔직하네. 난 네가 성의없는 약속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 거든. 오빠를 설득해준다라... 과연 오빠를 설득하는 것이 가능할지 모 르겠지만, 좋아!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겠지. 그리고... 넌 정말 별스런 애 야! 내가 너라면 폐하께 정비로 맞아달라고 말했을 텐데... 귀족들의 반발 따윈 무시하고 폐하의 총애로서 얻은 힘으로 강압적으로 그들을 눌렀을 텐데, 너는 그렇게 사서 고생을 하다니." 아사벨라는 나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왕실에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 유능한(?) 시녀가 많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사벨라, 강압적인 힘으로 그들을 누르면 당장은 내가 편할 지도 몰라. 하지만, 한 나라의 왕비로서 나는 진정한 나의 신하들을 만날 수가 없게 되겠지. 그들은 거짓으로 나의 앞에 고개를 조아리는 것이니깐. 그것은 나 를 사랑해주시는 폐하께도 폐를 끼치는 것이 되겠지. 어쩌면, 지금 나의 행동은 너무 강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지금의 내 의지를 믿어! 나의 의 지대로 폐하와 그의 나라 로히얀스를 위해 나는 행동할 거야." 그러자, 아사벨라는 그녀의 오만해 보이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그녀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넌 언젠가 왕비가 되겠지? 폐하께서 너를 왕비로 맞으시려 한다는 것을 나는 알아! 폐하께서 이제껏 왕비를 맞지 않으시고 모든 혼담들을 물리 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모두가 대충 짐작하고 있을 거야. 네가 왕 비가 될 것이란 것을... 훗~ 너에게 미리부터 잘보여야 할까? 폐하의 총 애를 받는 것은 이젠 물건너 갔으니, 왕비의 총애라도 받아야 하지 않겠 어?" 아사벨라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웃어보였다. 그녀가 나에게 이렇듯 사심 없는 웃음을 보인 적이 있던가? 나 역시 덩달아 웃어 보였다. 아사벨라는 옹졸한 여자는 아니었다. 차가운면과 오만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지, 저번에 미카엔이 그녀의 부모를 처형한 것에 대해 증오심 같은 것은 가지 고 있지 않았었다. 미카엔으로서는 그것이 정당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그녀 도 인정한 것이다. 아사벨라는 다시 나에게 입을 열었다. "네가 왕비가 되는 거, 인정해 줄게! 호호~ 폐하의 정비가 될 여자는 나의 인정이 필요하거든! 만약, 세리아라는 그 빨강머리가 왕비 자리에 올랐다 면, 난 그녀를 두고 두고 괴롭혔을 거야! 착하고 얌전하긴 하지만, 아둔한 죽은 황태자비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야!" 그녀의 말에 나는 휘둥그레 해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마 치 농담하듯 가볍게 말하며 웃어넘겼다. 그날 약간 늦은 오후... 나는 침실에서 마법서를 읽고 있었다. 마법이란 것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올라서지 않는 이상 조금만 긴장을 늦추어 마법을 익히는 것을 게을리 하 면 금세 그 능력이 퇴보하게 된다. 만약 오랫동안 마법에 손을 놓고 있으면, 4서클 레벨의 마법을 사용하던 마법사도 2서클 레벨의 기본 마법 스펠 완성하는 방법도 잊게 되어 마력 이 충분하여도 스펠 캐스팅 시간이 늦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책을 읽던 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나의 근처에 앉아 뭔가 바느질 을 하고 있는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나의 곁에서 시녀들이나 왕실 에 대해 항상 조잘대던 그녀가 요즘은 눈에 띄게 말이 없어져 갔다. 게다가, 그 얼굴도 갈수록 수척해져 가서 나는 정말 걱정이 되었다. "루이스!" "네, 라비스님." "요즘, 정말 아픈 곳 없어? 왜 그렇게 말라가? 정말 요즘은 루이스답지 않아. 요즘, 악몽을 심하게 꾸는 것도 정말 걱정이 되고... 가끔가다가 루 이스는 멍한 표정을 짓기도 해." "호호... 걱정마세요. 저번에 의사가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었잖아요?" 며칠 전부터 수척해가는 루이스를 걱정한 나는 왕실 소속 의사를 불러 그 녀를 진찰하게 하였으나, 그녀의 몸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뭔가 근심거리가 있는 것인가 생각하여 그녀에게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루이스는 그런 것은 전혀 없다며 딱 잘라 말하고는 했었다. 나는 한숨을 나직하게 내쉬고는 그녀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루이스, 피곤해 보이는데 일찍 쉬어." 그렇게 그녀를 자신의 방으로 보내고 나서 다시 책을 읽는데에 몰두 를 하는데, 리엔시타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라비스." 요즘같이 전쟁이 곧 터지기 직전인 때에는 리엔시타에게서 수시로 보고를 받아야 했다. 요즘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한 키리아이지만, 나 는 그녀의 행동을 계속 주시했다. 물론, 고위 마족인 키리아에게서 완 벽하게 자신의 기운을 숨길 수 없었던 리엔시타는 그녀를 직접 관찰 하는 것이 아니라, 수도에서 도는 소문과 그 주변 인물을 탐색하는 것으로 키리아 일당의 행동을 살피는 것이었으나, 키리아는 요즘 너 무 잠잠했다. 그에 비해 엔카루스는 자신의 마법 도적단 일원들을 꾸준히 훈련시 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법 도적단 일원들은 엔카루스를 따라 자이 라스까지 가서 그를 섬기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충성심과 의리가 대 단한 것 같았다. 그러다, 나는 문득 마리에 대한 것을 여지껏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는 것을 깨달았다. "리엔! 마리는 요즘 뭐하고 있지?" "아! 맞아. 마리도 있었지! 그녀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아. 그녀가 키리아의 제자로서 이번 일에 가담한 것은 알겠는데, 그녀는 엔카루스의 마법 도 적단 일원들도 그녀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아. 그녀는 거의 행동을 안하는 모양이야." "흠, 그래? 하지만... 마리 역시 위험 인물이니, 그녀에 대한 것도 자세 히 알아봐 줘.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라센샤르를 불러줘. 리엔, 너에 게 힘든 일을 계속 부탁해서 정말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그러자 리엔시타는 나에게 활짝 웃어보였다. 그녀는 나의 이러한 작은 감정의 표시에도 매우 기뻐하곤 하였다. "난 전혀 힘들지 않아. 오히려 나의 능력을 이렇게 잘 활용해주는 라비 스가 고맙게 느껴지는 걸? 그러니까, 나에게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역시, 정령들은 맹목적인 경향이 있었다. 순수한 존재인 그들에게는 한번 정해진 감정 외에 다른 감정이 끼여들 여지가 없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나는 리엔시타를 보내고 나서, 라센샤르를 기다렸다. 그녀를 인페 르디아로 보내 첩자 역할을 하게끔 명하기 위해서였다. 라센샤르라면, 정령 의 기운을 완벽히 감추고 인간 행세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외전Ⅵ -황태자비의 죽음- "전하! 왜 저는 전하의 아이를 가질 수가 없는 것이죠? 전 몸은 약 하지만 아이는 충분히 가질 수가 있어요!" 가냘퍼 보이는 한 붉은머리의 여인이 자신의 남편되는 은발의 청년 에게 따지듯 입을 열었다. 황태자비로서 그의 아내가 된지 벌써 3년이 넘어가지만, 세시아는 그 녀의 남편 미카엔의 아이를 임신할 수가 없었다. 공작가의 큰딸로 태 어나 왕실과 정략 혼인을 맺은 후... 황태자비로서 교육을 받고 얼굴도 모르는 미래의 남편을 위해 어린 시절을 다보냈던 그녀였던 터라, 세 시아는 그동안 묻어두고 내색하지 않았던 자신의 불만을 이렇게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것이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했었지만, 그것 역시 아닌 듯 했다. "세시아! 아이를 갖는 것은... 조금 더 나중에, 내가 후계자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릴 때에 가져도 늦지 않아." "왜죠? 어째서 지금은 안되는 거죠? 전하는 저에게서 후계자를 원하시지 않는 거죠? 전하의 첫 번째 소생이 왕위 계승권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 아지게 되니... 저에게서 첫 소생을 일부로 보시려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저도 알아요." 세시아는 결국은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말하자, 미카엔은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는 달래듯 가볍게 토닥였다. 세시아에게서 미카엔은 정말 다정한 남편이었다. 열 일곱살에 왕성에 시집 온 후, 스무살인 지금까지 세시아는 늘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미카엔에 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할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세시아는 미카엔의 품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 미카엔의 입술에 자신의 입 술을 살며시 가져갔다. 그의 부인이 된지 3년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 금 행동은 정말 세시아로서는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만큼 미카엔을 사랑했다. 자신을 다 내어주어도 좋을 만큼! 그 시각 무렵, 아사벨라는 자신의 애꿎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지금 미카엔이 세시아의 거처에 있다는 것을 시녀에게 보고 받고난 그 녀는 내내 기분이 언짢았다. 달이 떠오른지 한참되는 이 시각에 미카엔이 그 거처에 있다는 것이 너 무도 화가 났다. 미카엔이 한동안 빠져있었던 라비스도 그를 떠나가 있 는 지금, 아사벨라에게는 지금이 기회였다. 떠나가 있는 사람은 금방 잊혀질 테니, 이제 유일한 장애물이 된 황태자비 만 없으면 그녀는 미카엔의 총애 뿐만 아니라 그의 정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라비스가 떠나고 미카엔은 한동안 실의에 빠져있었다. 그런 그를 위해 아 사벨라가 해야 할 일은 그가 하루 빨리 라비스를 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사벨라는 자신이 믿을 만한 시녀들을 시켜서 왕성 안에 여러 가 지 소문을 퍼트렸었다. 그것은... 라비스가 어떤 남자와 눈이 맞아 함께 도망을 갔다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미카엔이 라비스에게 빠져있던 내내, 아사벨라는 그가 라비스에게 멀어지도록 여러 가지 수단을 써야 했었다. 솔직히 라비스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래서 그녀를 아무도 모르게 흠모하는 기사들이나 관리들이 많음을 아사벨라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점을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은 아사벨라는, 라비스의 작은 사소한 행동 에도 트집을 잡아 여러 가지 스캔들을 시녀들을 통해 일으켰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미카엔이 조금씩 흔들리는 모습을 아사벨라는 지켜보았다. 어제는 미카엔이 한 시종을 단칼에 배었다고 했었다. 그것은 아사벨라 자신이 퍼트린 소문인, 라비스가 어떤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을 갔다는 내용이 근원적 원인이 된 것이다. 사실, 아사벨라 역시 미카엔이 괴로 워하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치사한 방법을 써서라도 그의 사랑을 얻고 싶었다. 아사벨라는 그렇게 세시아와 밤을 보내고 있을 미카엔을 생각하며 한 가지 독한 결심을 했다. 그것은 황태자비인 세시아를 제거하는 것... 물론 그녀는 황태자비에게 악감정은 없었지만, 라비스도 없는 이때에 그녀를 제거하고 라비스를 못잊는 미카엔을 위로하며 그의 사랑을 얻는 다면 아사벨라는 왕비 자리까지도 넘볼 수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사벨라는 세시아의 몸이 허약하다는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조금씩 조금씩 말려 죽이는 것... 결국 생각한 한가지 방법은, 황태자비의 시녀 하나를 매수하여 그녀가 매일 즐겨마시는 마카렐스산 홍차에 약을 타도록 시키는 것이다. 수많 은 종류의 독 중에서 거의 독의 분류에도 끼지도 못하는 아니스의 가루 로서... 이것은 아니스라는 흑마녀가 개발해 주로 사용했다는 중독성이 강한 가루이긴 하지만, 독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니스의 가루는 미미한 독성이나마 몸에 축적되는 성질이 있어 꾸준히 일정기간 복용을 하면 그것에 중독되어 몸의 면역이 매우 약해지 게 된다. 물론, 아주 건강한 사람은 이러한 아니스의 가루가 소용이 없었 지만 몸이 허약한 세시아에게는 아주 적격인 약품이었다. 또한 그것은 다 른 독과는 달리 그것에 중독된 사람에게 독성이 검출되지 않아서 완전 범 죄로서는 아주 그만이었다. 아사벨라는 그 아니스의 가루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녀는 자신의 오빠인 엔카루스에게 부탁하여 그 가루를 구했다. 마법 도 적단을 이끌고 있는 그라면 아니스의 가루쯤은 비밀리에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구한 아니스의 가루를 시녀를 통해 매일 같이 황태자 비의 홍차에 타도록 지시했다. 나중에 세시아가 죽게 되어도, 미카엔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우선 이것은 마법을 쓴 계략이 아닌데다가 독성이 검출되지 않는 독성이 아주 미미한 아니스의 가루를 꾸준히 쓴 것이었고, 그는 지금 라비스로 인하여 세시아에게 그다지 많은 신경을 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시아는 몸이 원래 허약하니 그것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고 하면, 미카엔을 비롯한 사람들은 그다지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후로 그렇게 몇십일 동안 그녀는, 황태자비의 홍차에 지속적으로 아니 스의 가루를 탔다. 그것으로 인해 황태자비는 점점 더 건강이 악화되어 갔 고, 의사들은 황태자비의 건강이 악화되는 이유를 뚜렷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카엔이 아스탄샤에게 원군을 청하기 위해 아스탄샤로 떠나기 며칠 전에, 황태자비는 결국 목숨을 거두었다. 미카엔은 황태자비의 죽음에 대해 무척 상심해 하였다. 그로서는 그녀 가 조강지처였고 라비스를 만나기 전 3년 동안 나름대로 정을 준 여자 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이 진심어린 사랑이 아니라 단순한 애정이 라 할지라도. 시녀로부터 그녀의 죽음 소식을 들은 아사벨라는 자신이 계획한 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그다지 기쁘지가 않았다. 비록 자신이 꾸민 일이었고 그녀를 죽음으로 이르게 한 장본인이 바로 자 신이었지만, 생각보다는 많이 상심해 하는 미카엔의 모습을 보자, 아사벨라 도 가슴이 문득 아파졌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남편의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황태자비와 아 사벨라는 같은 처지였었다. 막상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접한 아사벨라는 자 신이 저지른 행동에 약간 후회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 "세시아, 나를 원망하지마. 원망할 거면 네 운명을 원망하도록 해!" 아사벨라는 자신의 사악한 면모를 자신의 가슴 속에 묻으며 죽은 황태자비 를 동정했다. =================================================== =========== (왕비의 일기장 5편의 일부분 수정 내용) 「오늘은 오랜만에 느긋한 기분으로 미카엔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다 가 환상의 섬인 시리어스섬에 대해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어디서 우연하 게 들었는지, 미카엔은 나에게 시리어스섬에 대해 호기심을 보이며 물어왔 었다. 그러고 보니, 200여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 그 당시 '크리스티나' 라는 이름 을 사용하고 있던 셀레나는 나에게 한가지 부탁을 했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시리어스섬에 몇가지 마법을 걸어주기를 나에게 부탁한 것이다. 시리어스라 는 이름의 환상의 섬... 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셀레나는 그때 무슨 이유로 그러한 환상의 섬을 만들었던 것일까, 나는 다 시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도 말못하는 무언가 비밀스런 진실이 있는 듯 하 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다. 374년 8월 23일 아나테스 씀」 셀레나가 환상의 섬을 만들었다니... 나는 일기장에 쓰여진 또다른 충격적 인 내용에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심호흡을 해보였다. 그리고, 흥분 되는 나의 감정이 차분해지도록 내 스스로를 다스리며 천천히 머리를 굴 려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딸이 열일곱이 되는 해에 영혼이 뒤바뀌게 될 거라는 것을 예지하고 있었다. 셀레나가 시리어스섬을 만들어낸 의도는 무엇일까. 나는 셀레나가 하고 예지의 내용이, 생각보단 꽤 구체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그녀는 나를 괴롭히고 있던 자아 정체성 문제까지 미리 예측하고 있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시리어스섬에서 겪었던 일 로서, 자아 분열 그리고 자아로 인한 혼란을 고친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후의 내용은 같아요. * 이 부분은 왕비의 일기장 5편 일부분입니다. 어느 분의 지적으로 버그 하 나를 다행히 발견하였습니다. ㅡㅡ; 전에 제가 올린 일기장 내용은 미카엔이 왕비에게 환상의 섬에 가겠다고 전 갈을 하는 내용이 있죠. 사실, 프레야 왕비는 그 전에 죽었는데... 제가 그것을 그만 깜빡하고 말았습니다. 바보...ㅡㅡ;;; 미카엔이 환상의 섬을 가게 되는 것은 라비스가 인페르디아 왕을 암살하고 난 전쟁이 끝난 직후이지요! 하지만 왕비가 죽은 시점은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내용에 맞게끔 일부분만 수정해서 다시 이렇게 올립니다. 일부분만... 아! 글구, 어떤 분이 이러한 질문을 하셨는데... 이분께 답멜을 보냈지만, 다른 분들도 혹시 이러한 의문을 가진신 분이 있지 않을까 해서 이렇게 덧글을 남깁니다. (오늘은 덧글이 길군.ㅡㅡ) '라비스가 궁에 들어가면... 아멘시타를 제외한 다른 정령들은 궁에서 불러낼 수 없다고 한 거 아니었어요?' 대답은... 아멘시타 뿐만 아니라 다른 정령들도 왕성 안의 결계로 인하여 라비스가 부 르면 그 부름을 듣지 못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얼마든지 라비스가 정령 이름 을 부르면 그 즉시 나타나지만 궁성 안에서만큼은, 라비스의 부름을 듣지 못 하죠! 이것은 왕성 전체에 기본적으로 쳐져 있는 보호 혹은 방어 결계 때문 입니다. 하지만, 라비스가 궁성 안에서 정령들을 불러내지 못한다고 해서 정령들이 궁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라비스의 부름이 아니 더라도 자신들이 원할 때에 얼마든지 궁성 안으로 출입을 합니다. 정령들이 꼭 라비스의 부름에 의해서만 그녀의 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거 든요. 요즘, 리엔시타는 수시로 라비스에게 와서 보고를 하고 있죠! 이것은 아마도, 라비스의 명으로 수시로 라비스의 침실로 와서 보고를 하는 것일 겁니다. 라비스의 정령들은 독립적인 사고를 하는 수준 높은 정령이기에 라비스의 부름에 의존해서 나타나고 움직이고 하지는 않습니다. 글구... 체인지에 숨겨진 버그 신고를 받습니다. 제가 이와 비슷한 실수를 또 했을까봐 겁이 나는군요. -3- 그 후로 다시 며칠이 지나갔다. 그동안 라센샤르를 통하여 인페르 디아의 수도에 헛소문을 퍼트리기도 하고, 몇번의 군회의를 갖으며 바쁘게 하루 하루를 보내야 했다. 이번 전쟁의 수뇌급들은 여전히 나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으 나, 처음의 노골적으로 무시하던 태도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게다 가, 내색은 하지 않고 있지만 인페르디아의 수도에 그러한 헛소문을 퍼트린 것을 아주 손쉽게 한 나에게 내심 놀라움을 갖고 있었다. 칭찬할 것은 그냥 솔직히 칭찬해주면 좋을 텐데... 그리고, 마리에 대한 것을 리엔시타에게서 보고를 받았는데... 그녀는 지 금 자이라스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행방을 자이라스에서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마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마도 키리아와 뭔가 부딪힘이 있었지 않을까, 나는 생각해 보았다. 마리가 비록 키리아의 제자라 하지만, 그녀에게는 키리아에 대한 존경심 이나 동료의식 같은 것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키리아는 마 리를 자신의 편으로 묶어놓기 위해 엔카루스를 사랑하도록 그녀에게 묘 약 같은 것을 먹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또 한가지 가정을 해볼 수가 있었다. 마리는 어쩌면 이 곳 로히얀스로 다시 건너왔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 는 빨리 그녀의 행방을 알아야 하는데... 하지만, 내가 뭔가 조치를 취하 기도 전에 인페르디아 전쟁은 터지고 말았다. 어느 날 저녁, 아멘시타를 통하여 루젠다르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 다는 소식을 접한 나는, 이 사실을 모두에게 알리고 군대 출진 문제에 대해 군회의를 소집하였다. "내일 아침 일찍 우리도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벌써 루젠다르가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이러다 인페르디아가 무너지고 나서야 출병할 생 각입니까?" 국왕의 근위 기사단장인 리아드 기마 참모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탕탕 치며, 자신의 성질 급한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싱긋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미소작전을 쓰는 나는, 나의 이러한 미소들이 성 질 급한 무관들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려주고 있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 다. "리아드님, 설마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저는 인페르디아를 무너지기 직전 까지라면 몰라도, 무너지게는 놔두지는 않습니다. 지금 당장은 그들에게 힘 을 실어주어야 하니깐요." 그러자, 리아드 기마 참모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나를 쏘아보았다. 인 페르디아에 헛소문을 퍼트린 것으로 그레이 참모장에게 인정을 받은 나 는, 그의 책사이자 참모로서 어느 정도 주도권을 부여 받게 되었다. 그리고 리엔시타를 통하여 인페르디아와 접전이 일어나게 될 지역의 지형들을 모 두 자세한 지도로 그렸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나는 군대 수뇌들에게 나의 정보 수집 능력을 한번 더 인정을 받게 되었다. 지금까지 첩자들에게 의지해서 작성한 지도들은 그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 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인페르디아는 지금 무너져서는 안되죠!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 그들이 망하면 우리도 망하게 되지요. 내일 새벽같이 군을 집결시키도록 합시다. 집결지는 루젠다르와 로히얀스의 국경 지역이 세 젠느강 근방이 좋을 것 같군요." "어째서 인페르디아 국경 근방인 접전 지역이 아닌 그곳을 집결지로 정 하는 것입니까? 크로시벨님은 우리가 인페르디아를 도와야 하는 원군의 입장으로 군사를 출병한다는 것을 망각하신 모양이군요." 리아드 기마 참모는 나에게 무슨 경쟁 심리라도 있는지 아니면 여자에 게 휘둘리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인지 그렇게 나를 깎아내리기 위 해 물고 늘어졌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빙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가 세젠느강의 근방으로 군사들을 집결 시키는 이유는 예전에 내가 미처 써먹지 못한 아주 좋은 전략을 써먹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그동안 정령들을 통해 알아낸 여러 가지 정보와 지형의 요건들을 모두 종합하여 이번 전쟁에서 로히얀스가 이득을 볼 전략을 머리속에 세워두었던 것을 이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내가 말한 이 전략은 그레이 참모장을 비롯한 몇몇 모사가들인 군사 수뇌들에 의해 채택이 되었다. 그렇게 군사를 움직이는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를 논의하고 난 다음, 나 는 밤이 깊어서야 겨우 나의 침실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그렇게 침실로 발걸음을 하던 나는 중간 중간 멈칫거렸다. 그 이유는... 오늘 밤 이후로는 미카엔를 만난 기회가 얼마간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 었다. 내일 새벽같이 떠나게 될 나였던 터라, 로히얀스를 떠나기 전에 그 의 얼굴을 보고 인사는 하고 싶었다. 하지만, 늦은 시각에 그를 찾아가는 것도 그렇고... 이런 여자다운 생각을 하는 내 자신에게 적응도 되지 않 는지라, 나는 국왕이 머무는 침실쪽으로 발걸음을 향하다가 다시 돌리기 를 몇번을 반복하였다. '제길... 내가 뭐하는 짓이지? 한심하긴...' 요즘은 너무 바뻤던 이유도 있지만, 비서관으로서의 업무를 그만 둔 이 후로는 미카엔과는 업무상으로도 만날 기회가 적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자꾸만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발걸음은 떨어지지 가 않았다. 가서 할 말도 없고... 어색하기도 하고... 갑자기 그를 찾아가서 그가 왜 찾아왔냐고 물으면, 보고 싶어서 만나러 왔다는 말은 정말 못하 겠고... 그것은 쑥스러운 차원을 넘어서 민망하기도 하였다. 그냥 잠시 헤어짐의 이별 인사를 하러 왔다고 말하는 것도 우스웠다. 이 러한 고민을 다 하다니! 그 사이 나는 퍽이나 소심해진 모양이었다. 그렇게 혼자서 복도안을 왔다리 갔다리 하며 아닌 밤중에 방황을 하던 나는 결국, 나의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왜 지금 미카엔이 보고 싶 은지 스스로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가 보고 싶은 것으로 고민을 하 는 내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나는 누군가와 떨어지게 되어서야 그리움 같 은 것을 느끼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평소에는 잘 모르다가, 막상 헤어진 다거나 헤어져 있어야 그 누군가가 그리워지는 바보같은 성격... 예전에 미카엔을 떠나 아스탄샤에 있었을 때도 이렇듯 그를 그리워했던 것이 생각이 났다. 한번은 제이크가 엿보기 마법을 가르쳐주어 그것으로 미카엔의 얼굴만 잠시 보려다가, 그에게 들킬 뻔한 적도 있었지 않은가. 웃음이 나왔다. 나는 터덜 터덜 걸으며 침실로 향하다가, 누군가가 나의 침실 근처 복도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서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미카엔!" 그를 알아본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미 카엔은 나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그가 나 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놀라움도 놀라움이었지만 이상하게 그가 너무 반 가워서 눈가가 물기로 촉촉해질 지경이었다. "피곤하겠군. 잠꾸러기 아가씨가 여지껏 잠을 안자고 있으니..." "여긴 왠일이세요?" "내일 로히얀스를 떠나게 되겠지? 혹시 있을지 모르는 전쟁의 위험에서 너를 보호할 행운의 축복을 하러 왔지!" "훗~ 행운의 축복이라니요? 미카엔이 신관이라도 되는 줄 아세요?" 그러자, 미카엔은 나직하게 웃으며 답변을 했다. "물론, 신관은 아니지만 네가 로히얀스를 떠나기 전에 이렇게 너에게서 왕이 아닌 미카엔으로 만날 기회는 오늘 밤밖에 없는데, 이런 나의 어설 픈 변명 정도는 그냥 모른척 넘어가 줄수도 있잖아?" 과연 어설픈 변명일까? 나는 피식 웃어보이며 약간 새침한 듯한 표정 을 지어보였다. 내가 이러한 모습을 보이다니! 정말 적응이 안된다. 게 다가, 지금까지 그를 보고 싶어했던 나인데, 이렇듯 그러한 감정을 숨기 고 새침한 모습을 보이다니... 여자들은 다 이런가? 나는 스스로 나의 행 동에 신기해 하였다. "흐음... 그렇군요. 그럼, 저에게 축복을 해주세요! 어떤 방법으로 축복을 할 건데요?" "가장 좋은 축복의 방법은... 아마도 네 입술에 키스를 하는 것이겠지!" "에엑!" 그의 발언에 나는 잽싸게 뒷걸음질을 치며 경계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 그러자, 미카엔은 웃음을 터뜨리며 나에게 말했다. "농담이야! 그렇게까지 온몸으로 거부의 뜻을 표하다니... 기분은 나쁘지 만, 그래도 놀리는 재미는 있으니 봐주지!" "쳇~ 농담맞아요? 축복의 방법이 너무 퇴폐적이에요!" "라비스! 키스가 퇴폐적이라니? 그건 신성한 거야! 흠... 좋아! 네 이마에 키스를 하는 것은 괜찮겠지?" 미카엔은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다시 다가왔다. 그리고, 나를 살짝 끌어 안아 속삭이듯 말했다. "사랑하는 나의 아름다운 소녀... 라비스가 인페르디아 전쟁에서 승리의 여신이 되어 돌아오기를... 은빛의 빛무리들이 너를 감싸며 파괴의 힘을 지닌 하늘의 손이 너를 보호하기를... 죽음과 어둠의 힘은 너를 비껴가고 수많은 이들의 빛이 되어 나의 곁으로 돌아오기를." 그가 말을 마치자 나는 그에게 어떤 신의 이름으로 축복을 하는 거냐고 물으려 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입을 열기도 전에 미카엔은 나를 조금 더 안쪽으로 당기더니 나의 입술에 축복의(?) 키스를 하였다. 설마, 이마와 입술을 혼동했었다는 식의 변명은 하지 않겠지? * 라비스와 미카엔... 둘이 맺어지게 된다면, 엄청난 닭살 커플이 될 것 같 다는... 걍 제가 보기에 말이죠.ㅡㅡ; -4- 다음날, 나는 전쟁에 참전하는 왕실 마법사들을 이끌고 근사 집결지 인 세젠느강 근방으로 마법진을 이용해 공간 이동을 하였다. 가까운 곳에 주둔해 있던 군대들은 속속들이 이곳 세젠느 강 근방으로 도착 하고 있었다. 로히얀스군들을 기다리며 나는 멀리 보이는 세젠느강을 바라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강이었다. 이번 전쟁으로 인해 저 깨끗하고 순결해 보 이는 세젠느강을 더럽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문득 가슴이 아 파졌다. 그렇게 되면, 리엔시타에게 정말 미안했다. 다른 정령들에 비해 더욱 순수한 면을 보이는 리엔시타... 아마도, 세젠 느강이 저렇듯 순결했기에 리엔시타 역시 순결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작은 실바람이 나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살며시 휘날리게 하였다. 나는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곳 동대륙에도 하루 빨리 평화가 찾아오기 를 기원하였다. 곧, 6월이 다가온다. 내가 이곳으로 온 시기가 6월이었으 니...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간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이곳으로 집결한 모든 부대들에게 나의 뜻을 전하였다. 작은 흐트 러짐이라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일장 연설로서 그들의 흥분을 고조시켰다. 아직 적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전투의 기미도 보이지 않건만 군사들은 그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나는 일부로 철통같은 군율을 이들에게 적용시키며 그들을 흥분시켰다. 그리고, 수뇌급들이나 알고 있어야 할 우리의 거짓 목적... 루젠다르가 인 페르디아를 치고 있는 동안 우리는 루젠다르의 뒤를 칠 것이란 것을 군 사들에게 은근하게 퍼트렸다. 그렇게 되면, 혹시 이곳 어딘가에 끼여있을 첩자들의 귀에 그 내용이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 첩자들은 루젠다르측 에 이 사실을 알려 그들을 긴장하게 만들 것이다. 아마도, 당장에 이곳으로 달려올 테지... 나는 수도에 있는 주력부대들과 기사단들까지 이곳으로 도착하기를 기다 리며 이곳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렇게 며칠... 우리의 부대들이 모두 도착했을 무렵... 루젠다르측의 군사들도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그들은 화살에 이곳 참모장에 보내는 편지를 묶어 이곳으로 날려보냈다. 물론, 그 화살은 멀리 나아게끔 마법을 걸은 특수 화살이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이곳에 군대들을 주둔하는 저의가 무엇이오? 그대들은 인페르디아에게 원군을 보낼 목적으로 군사를 출병한 것을 알고 있는데, 로히얀스는 나라 간의 악속따윈 우습게 여기는 그런 형편없는 나라였소? 우리 루젠다르는 그대들이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님을 현명한 그대들이라면 잘알고 있을 것 이오. 만약, 그대들이 이곳에서 군대를 철수시킨다면 그대들의 작은 요구쯤 은 들어줄 것이니... 불필요한 피는 흘리지 말도록 합시다. 루젠다르군 참모장 루시페르 카닐」 나라 간의 약속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루젠다르 역시 피차 일반인 것을... 저들은 모르는 것인가? 필요할 때만 나라 간의 신용을 운운하며 우리를 자극하는 말을 하는 내용에, 그레이 참모장은 답장을 썼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루젠다르의 수도요. 그 요구를 들어준다면 군대를 철 수 시키겠소. 로히얀스군 참모장 릴스 그레이」 루젠다르의 수도를 원한다라... 아주 시건방진 답장이었다. 아마도, 이 답장 을 받고 루젠다르측은 이를 갈 것이다. 수도를 원한다는 얘기는 나라를 통 째로 원한다는 말과 다를바가 없었다. 이것은 다른 의미의 선전포고였다. 루젠다르측은 우리가 수를 쓴다고 여기기도 하겠지만, 이렇듯 철통같은 기 세로 선전포고를 하는 우리를 그냥 두고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저들이 강을 건너서 우리쪽으로 공격을 해오기를 바랬지만, 루젠다르 군은 그러한 성급한 짓은 하지 않았다. 이 정도의 도발에 넘어가지는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나는 이런 것까지 예상하고 있었으니... 나는 포병 들과 몇몇 마법사들에게 계속 루젠다르를 들쑤시도록 명하였다. 루젠다르 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금세 강을 건너 루젠다르를 침범할 것처럼 굴 어, 저들이 긴장을 늦추지 않게 하였다. 그러자, 처음엔 그다지 많지 않 았던 루젠다르군이 조금씩 그 수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루젠다르의 주력 부 대가 이곳으로 배치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몇번의 도발에도 루젠다르국은 강을 건너오지 않았다. 저들도 참 어지간한 녀석들이었다. 하긴, 세젠느강은 굉장히 넓고 깊은 강이었기 때 문에 이곳으로 넘어오는 동안 우리들이 치사한 공격을 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들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리엔시타에게 이곳을 맡기고 미리 선발해둔 특수부대와 왕실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마법사 부대만을 이끌고 아주 비밀리에 로히얀스의 진지(陣地)를 이탈하였다. 우리측 일반 군사들도 우리가 빠져나간 것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리고 아멘시타의 도움을 받으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만한 지름길을 골라 빠르게 이동하였다. 인페르디아와 루젠다르, 자이라스 동맹군이 접 전이 일어나는 곳으로 가서 인페르디아가 무너지지 않게 우리는 도와야 했다. 세젠느강 근방에서 어느 정도 멀리 지나온 우리는 이동할 마법진을 만 들었다. 왕실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인페르디아 접전 지역 근방으로 좌표를 잡은 다음, 모두가 한꺼번에 이동할 대대적인 마법진을 발동시켰 다. 사실, 이런 마법진을 발동시키려면 엄청난 양의 마나가 움직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루젠다르 측에 있을 마법사들이 알아챌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특정 거리를 이렇듯 떨어져 와서 마법진을 그려 발동시 켜야만 했다. "라비스님! 정말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요?" 이동하기 전, 왕실 마법사중 하나가 나에게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물론, 우리는 이길 수 있을 거예요! 걱정마세요." 나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에게 태연하게 말했지만, 사실은 크나큰 부담 감으로 속이 새카맣게 탈 지경이었다. 많은 목숨들이 나의 손에 달려있었 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실패하면 나는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 게 될 것이다. 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려 했지만, 입안 마저 말라있었다. 다리 도 후들후들 떨려왔지만, 다행히 펑퍼짐한 로브로 인하여 그런 모습은 감 추어졌다. 그러나, 나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못했는지 근처에 있던 왕실 마법사중 한명이 나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라비스님! 용기를 가지십시오. 우리는 라비스님을 믿습니다. 만약 이곳 전쟁터에서 죽게 되어도 저는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전 라비스님 의 지휘 아래에서 이렇게 나라를 위해 싸울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 럽습니다. 라비스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 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고마워요." 비록 나직한 음성이었지만 그의 결연한 의지가 실린 말에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그런 약하고 한심한 모습을 보일 수 는 없었다. 마법사답지 않게 혈기가 넘쳐 보이는 그 젊은 마법사에게, 나는 조금은 여유를 되찾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곧, 우리들은 마법진으로서 인페르디아 접전 지역으로 공간 이동을 하였 다. 그리고, 현재 자이라스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인페르디아를 도와 첫 번째 전투를 벌였다. 루젠다르군들의 상당수가 현재 세젠느강 유역에 있는 지금, 우리는 단 시 간에 인페르디아와의 협공으로 자이라스를 무너뜨려야 했다. 루젠다르군이 이곳으로 몰려오면 우리는 힘들어지게 된다. 원래, 군사력만을 따지자면 인페르디아는 자이라스보다는 훨씬 우위에 있 었다. 하지만, 자이라스에 있는 마족 키리아로 인하여 인페르디아는 자이 라스를 무너뜨리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인페르디아는 키리아에게 헛소문으로 인하여 악감정을 가지고 있 었기에, 그녀를 비롯한 자이라스를 무너뜨리기 위해 필사적이 되었다. 인 페르디아 군사들은 자신들의 왕을 암살한 키리아를 처단해야 된다는 애국 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로히얀스 뿐만 아니라 인페르디아 사이에서도 영 웅이 되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직접 키리아를 처단함으로서 인페르디아군들이 로히얀스에 대해 경외감을 갖게 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여러 가지 이득이었다. 만약, 이번 일이 인페르디아 국의 백성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퍼진다면 인페르디아는 로히얀스의 정신적 속국이 되는 것도 기대할 수 있었다. 나는 바다의 정령 라센샤르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녀를 통하여 나는 직접 키리아를 상대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물론, 나 혼자 그녀를 상대하는 것 은 아니었다. 왕실 마법사들이 나를 보조를 해줄 것이고, 특수부대들이 왕실 마법사들을 엄호할 것이다. *흠... 인페르디아가 로히얀스의 정신적 속국이 될 것인지... 라비스가 너무 꿈에 부풀어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깐. 그나저나, 오늘은 제 컨디션이 바닥을 기는 군요. 컴앞에 오래 앉아있어서 허리두 넘 아프구... 게다가, 제 왼쪽 눈꼬리 쌍꺼풀 있는 부분이 조금 찢겼 습니다. 오늘 새벽... 물을 마시기 위해 어두컴컴한 거실을 지나 주방으로 향 하는 길에서... 그만~ 퍼억!!! 벽의 모서리에 부딪히고 말았거든요. 흑~~ 정말 무진장 아픕니다. ㅡ.ㅜ 아직두 아픕니다. ㅜ.ㅜ 아야야~~~ -5- 바다의 정령 라센샤르는 거대한 수룡의 모습으로 우리들 앞에 모습을 드 러내었다. 투명한 푸른빛의 드래곤 모습을 한 라센샤르는 실제 드래곤 만 큼이나 그 위압감이 대단하였다. 그렇게 갑자기 라센샤르의 등장으로 인 하여, 내가 이끄는 부대들 뿐만 아니라 인페르디아, 자이라스 군사들 모두 기절할 듯 놀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의 이러한 반응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나는 아젠샤르까지 불러내었다. 그리고 아젠샤르의 바람의 힘에 나의 목소리를 실어 힘있게 외쳤다. 그러 자, 나의 목소리는 마치 확성 스피커를 단 것처럼 사방으로 널리 또렷하게 퍼졌다. "키리아! 모습을 드러내어라! 나 라비스 크로시벨이 로히얀스와 인페르디아 를 대표하여 너를 처단하러 왔다!" 내가 취할 수 있는 온갖 폼을 잡아 어울리지 않는 위엄과 카리스마를 보이 며, 저들의 관심을 이끌었다. 이렇게 전쟁터에서 주목을 받게 되면 그만큼 위험부담이 커지지만, 나는 목숨을 담보로서 도박을 하였다. 평소 나의 무 모한 성격이 여기서도 잘 드러나는 셈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식으로 관심들을 이끌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이 모든 이 들에게 나의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니... 나를 따르는 부대들은 내 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는지 모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괜스레 미안 해지는 나였다. 내가 관심을 받는다는 것은 저들 역시 관심 집중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기 전쟁터에서 인기있어 봤자, 목숨을 지키는 일에서는 아무런 득이 되지 않았다. 나는 내심 초조해졌다. 나를 따르는 이들이 이런 나를 원망하면 어쩌나, 하 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이런 나의 걱정과는 달리 오히려 기세등등 해진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자이라스군들은 라센샤르의 모습과 전쟁터 전체 를 뒤흔드는 나의 목소리에 기가 질린 모습을 하였다. 또한 인페르디아군들은 여전히 놀라워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 놀라움은 굉장한 능력의 원군이 나 타남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어쨌든, 내가 바란 것은 바로 이것... 기선 제압이다. 초반 전쟁터의 승패는 군 사들의 사기와 지휘관의 능력 그리고 기선 제압이었다. 어차피, 나는 단시간 내에 자이라스를 무너뜨리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런 초반의 제압은 아 주 중요하였다. 나중에 가서는 군사들 수와 지형 그리고 보급 등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겠지 만, 지금 중요한 것은 현재의 상황이었다. "호호호. 난 또 누군가 했더니... 로히얀스 반쪽 도마뱀의 애첩이었구나! 그래 도 꽤 능력 있는데? 쓸만한 정령 하나를 더 달고 있으니... 기꺼이 상대해주 지!" 반쪽 도마뱀 애첩이라니... 말을 해도 그런식으로 하다니! 이미지 깎인다. 나 를 따르는 이들의 의아해 하는 얼굴들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반쪽 도마뱀 이란 말을 하프 드래곤과 연관지어서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저들... 게다가 미카엔이 하프 드래곤임을 알지 못하는 저들이, 내가 미카엔과 반쪽 도마 뱀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로 오해하는 불상사는 부디 없 었으면 했다. 곧, 키리아가 있는 쪽에서 무서운 마력이 느껴졌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 키며 불의 정령 샤르까지 불러내었다. 왕실 마법사들은 실드를 준비하는 듯, 마법 스펠들을 중얼대었다. 자이라스군과 인페르디아군 모두 서로 싸우는 것을 잠시 멈추었다. 뭔가 대 격돌을 예감한 것이다. 그들은 휘말리지 않기 위해 뒤로 물러났다. 키리아는 마계로부터 뭔가를 소환하는 모양이었다. 라센샤르는 키리아의 소 환술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녀를 제압하려는 듯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키리아 의 주위에는 수십명의 검은 로브를 걸친 흑마녀들이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키리아는 그동안 흑마법에 뛰어난 흑마녀들을 이끌어 모아왔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녀들 역시 마력들이 높아보였다. 키리아만 상대해도 어려운데 그 녀들까지 끼여있으니, 어려운 싸움이 될 듯 했다. 결국, 나는 라센샤르에게 많은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크르르르..." 음성만 들어도 꽤나 무서운 존재일 듯하다. 키리아에 의해서 소환된 존재는 머리가 세 개 달린 거대한 마룡이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얼굴이 창 백해졌다. 그냥 마룡도 힘이 드는데, 머리가 세 개씩이나 달린 마룡이라니! '그렇다면, 설마 브레스도 동시에 세군데에서 쏟아져 나오지는 않겠지?' 나는 그렇게 불길한 생각을 하는데, 진짜로 마룡의 첫 번째 머리의 입에서 브레스가 쏟아져 나왔다. "헉!" 그러자, 왕실 마법사들은 마룡의 브레스에 대항하여 몇겹의 거대한 실드를 펼쳤고 간신히 그 브레스를 막았다. 그러나 연이어서 마룡의 두 번째 머리의 입에서도 브레스가 쏟아져 나왔다. 젠장~ 키리아가 마룡 종류의 마물을 불러 낼 것이라 예상은 했었지만, 머리가 셋 달린 괴물을 소환할 줄은 정말 미처 몰랐다. 일이 이런 식으로 꼬이다니! 아무튼 두 번째 브레스에 왕실 마법사가 친 실드는 점차 깨어져 갔고, 아젠 샤르는 바람 속성의 실드를 펼쳐 우리를 보호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세 번 째 브레스가 연이어 쏟아져 나와 우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거의 동 시에 세 번의 브레스가 쏟아져 나오니... 우리가 있는 실드를 제외한 모든 곳 은 황폐화가 되었고 마법과 브레스 앞에서는 무력한 군사들은 도망가기 바빴 다. 아젠샤르의 실드는 두 번째 브레스는 막았지만, 세 번째까지는 버티지 못했 다. 곧, 라센샤르가 마룡을 공격하였지만, 마룡이 이미 쏟아낸 브레스까지 회 수할 방법은 없었다. 아젠샤르의 실드가 뚫리며 그 사이로 우리에게 쏟아지는 브레스를 보며 왕 실 마법사들은 다시 실드를 칠 스펠을 캐스팅하려 했지만, 미카엔처럼 용 언으로서 단시간 내에 마법을 발현시킬 수 없었다. 나는 예전에 미카엔이 준 실버 반지의 힘을 받아 미리 스펠을 외워두었던 빙계 속성의 커다란 실 드를 쳤다. 하지만, 나 혼자서 드래곤의 위력에 필적하는 마룡의 브레스를 막을 수는 없었다. 내가 한 개의 실드를 발현시킨 것으로 인하여 잠시 안도를 하였던 우리들은 곧 깨어지는 나의 실드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불길에 눈을 질끈 감았다. 더이상 우리를 보호할 실드는 없었다. 실드를 펼치는 능력이 있는 정령은 아젠샤르와 리엔시타였는데, 리엔시타는 현재 세젠느강에 있었고, 아젠샤르의 실드는 이미 깨어졌으니... 그 찰나와 같은 순간에 다시 실드를 형성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나저나, 같은 물의 정령인데 리엔시타에게 있는 방어 능력이 왜 라센샤르 에게는 없는지... 라센샤르 역시 샤르처럼 파괴의 능력만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나와 왕실 마법사들은 모두, 예상치 못한 마룡의 세 번 연속적인 브 레스에 절망감을 맛보아야 했다. 하긴 한번의 브레스를 막아낸 것도 대단한 데... 세 번의 브레스를 막아내는 것은 같은 드래곤족이 아니라면 정말 힘든 일이었다. 이렇게 황당하게 전쟁터에서 짧은 생을 마감할 줄은 누가 알았을까.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브레스로 인하여 맞게 될 죽음을 기다렸으나 약간 의 시간이 지나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 나는 눈을 뜨고 상황을 살폈다. 그러자, 나와 로히얀스 부대들 주위로 거대 한 은빛 실드가 생겨나서 저 브레스를 간단히 막아주고 있는 것이 눈에 들 어왔다. 그것은 빙계열의 실드였다. 그 뿐만 아니라, 마룡이 있는 장소에 치지직거리며 엄청난 섬광을 뿌리는 라이트닝 필드가 마룡 뿐만 아니라 키리아와 흑마녀들에게까지 피해를 주 고 있었다. 라이트닝 필드란 전격 계열 중에서도 꽤나 광범위한 공격력을 가진 상위 마법이었다. 한 장소에 번개들이 번쩍거리며 커다란 데미지를 주는 마법.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룡의 누런 피부가 시커멓게 탄 것이 눈에 들어 왔다. 마룡이 요동을 쳐서 우리가 서있는 땅이 지진이 일어난 듯 심하게 울 렸다. 라센샤르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룡을 퇴치하는 모습이 보였다. 곧, 왕실 마법사들의 흥분한 목소리들이 나의 귀를 강타했다. "오오~! 과연 라비스님이십니다. 저 끔찍한 브레스를 간단하게 막아내시다 니!" "라비스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고 저 마룡에게 반격까지 하시다니! 정말 대단 합니다." 무지 감격해 하는 그들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이 상황이 벌어진 이유를 곰곰히 생각하다가, 로히얀스로 떠나오기 전 미카엔이 나에 게 축복한답시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나의 아름다운 소녀... 라비스가 인페르디아 전쟁에서 승리의 여 신이 되어 돌아오기를... 은빛의 빛무리들이 너를 감싸며 파괴의 힘을 지닌 하늘의 손이 너를 보호하기를... 죽음과 어둠의 힘은 너를 비껴가고 수많은 이들의 빛이 되어 나의 곁으로 돌아오기를.」 은빛의 빛무리들이 나를 감싼다는 말은 아마도 빙계 실드인 듯 싶었고, 파 괴의 힘을 지닌 하늘의 손이란 전격 계열 공격 마법이었다. 그렇다면 마지 막 구절인 죽음과 어둠의 힘이 나를 비껴간다는 것은 흑마법에 대한 방어일 듯 싶었다. 이 모든 마법들은 내가 위험에 닥칠때 저절로 발현이 되는 모양이었다. '정말 눈물 나네! 진짜 축복의 말이었잖아?' 미카엔이 나에게 했던 말은 용언이었다. 나의 몸에 엄청난 마법을 한번에 세가지나 걸어주었던 것이다. 정말 대단한 녀석... 죽다 살아난 나였던 터라, 미카엔에 대한 감동스러움이 배로 컸다. 어쩌면, 나는 그의 축복대로 수많은 이들의 빛이 되어 그에게 돌아갈 수 있을 듯 했 다. -6- 참으로 힘든 전투가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마법사들은 마력이 고갈되어 갔고, 피투성이의 병사들은 체력이 다해 매우 지친 모습을 보 였다. 정령들 역시 지쳤다. 라센샤르를 비롯한 나의 정령들은 키리아의 마룡을 물리치고 키리아에게 공격을 가했지만, 아직까지 전투의 결말이 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이라스군들이 퇴각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우리는 힘을 내어 그들을 쫓았다. 인페르디아군은 도망가는 자이라스 군사들을 무참하게 베었다. 나 역시 말을 타고 자이라스군을 쫓았는데, 가끔가다가 우리군에 의해 베어 떨어진 적군의 팔이 보이기도 했고, 도망가다가 넘어 져 달리는 말에 의해 짓이겨지는 적군들도 보였다. 구토증이 밀려왔지만, 나는 그런 것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나 는 불연듯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예전에 읽었던 책들 중, 병법에 관한 것에서 이러한 내용이 있었다. '퇴각하는 군사들은 끝까지 쫓지 말라!' 복병 이 있음을 한번쯤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도 있 었는데, '도망가는 적에게 살길을 열어주어라!'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 는 법. 만약 살길을 조그맣게 열어줄 경우에는 그 한가지 희망을 향해 달아 나느라 죽자 살자 공격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저들을 단시간 내에 전멸시켜야 했다. '그래도, 너무 깊숙이 쫓아들어가는 것은 위험해!' 나는 달리는 것을 멈추고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그만 퇴각해!" 그러나, 이미 피로 흥분한 저들은 나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니, 제정신 이라 해도 나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지금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다시 아젠샤르의 바람의 힘으로 목소리를 실어 병사들에게 외쳤다. "그만 퇴각하란 말이야!!" 내가 그렇게 쩌렁쩌렁하게 외치는 순간, 갑자기 내 주위의 공기가 싸늘해지 더니 급속한 속도로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그것도 핏빛 안개가 말이다. 안 개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허억! 이건 뭐야?" 우리가 들어온 곳은 어느 숲이었는데, 그다지 울창한 숲은 아니었으나 안개 가 껴서 시야가 흐려지니 나무들과 풀들로 인하여 앞에 걸리적거리기 시작 했다. 당황한 나는 스스로 침착해지기 위해서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그리고, 더 듬 더듬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말을 모는데, 그때, 누군가가 나의 몸을 홱~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아앗~!" "조용히 해!" "헉! 에, 엔카...?" 나를 잡아당긴 이는 엔카루스였다. 그는 나를 자신의 말에 옮겨태우고는 어 디론가 방향을 잡고 말머리를 돌렸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어떻게 알았어? 지금 한치 앞도 보 이지 않던데?" "넌 지금 수많은 이들의 표적이 되었어! 이 안개는 키리아가 누굴 희생시켜 서 그 피로 만들어낸 거야. 이 안개는 마법도 통하지 않는 기이한 안개이지. 시야를 가릴 뿐만 아니라 기운도 완벽히 감추어 주거든. 너와 네 아군들은 여 기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겠지만, 자이라스군은 너를 비롯한 네 군사들을 볼 수 있을 거야. 너는 저들 시야에 노출된 것 한가지로서 넌 표적이 된 거지. 내가 너를 찾아낸 것처럼 너를 죽이려는 자들도 너를 찾아낼 걸?" 그는 엄청 빠르게 말하며 급하게 말을 몰려 하였으나, 그가 말이 끝남과 동 시에 어디선가 공격이 가해졌다. 결국 엔카루스는 그의 검을 뽑아들어 공격을 막았다. 챙~! 그리고... "저 금발 계집이 지휘관이다! 죽여! 엔카루스! 뭐하는 짓이야?!" 키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갑자기 돌변한 상황에 머리가 어지러워 졌다. 하지만, 나는 침착하게 머리를 굴려보려 애를 썼다. 마법도 통하지 않 는 기이한 안개라... 시야 뿐만 아니라 기운까지 감추어지는 거라면 정령들 도 나를 보호하지 못한다. 키리아는 그것을 노렸을 것이다. 이 안개는 또 하나의 결계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하여 정령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응답이 없었다. 제길! 그렇다면, 나는 안개 지역을 빠 져나가 정령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카앙~!! 시시각각 다른 음향으로 검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예전에 한번 본적이 있었던 엔카루스의 흑색검이 미미하게 빛을 발했다. 검신 자체가 순수한 흑색인 검... 아마도, 특이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검인 듯 했다. 게다가, 검에서 오묘한 빛깔의 빛이 은은하게 발하다니! 왠지 아름답 게 느껴졌다. "어서 비켜라! 나는 엔카루스 아모르다!" 엔카루스는 우리를 막는 군사들에게 외쳤지만, 그 군사들은 뭐에 홀렸는지 엔카루스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무차별 공격을 했다. 안개의 핏빛이 더욱 짙어졌다. 피비린내도 더욱 진동하였고 기분 나쁘고 끈 적끈적한 기운이 더욱 짙어졌다. 이것은 머리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아마 도, 키리아가 누군가를 더 희생하여 이곳의 안개를 짙게 한 모양이었다. 그 런데, 키리아는 누구를 희생하여 이런 기이한 안개를 만들어냈을까? "지독하군! 자신을 따르는 흑마녀들을 희생할 생각을 다 하다니." 묻지도 않았는데 나의 의문에 답하듯, 엔카루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엔카루스는 무더기로 쏟아져 오는 군사들을 사정없이 베어넘겼다. 그의 검 이 사방 팔방으로 휘둘러질 때마다 군사들은 볏단 쓰러지듯 픽픽 쓰러져 갔다. 정말 놀라운 실력이었다. 물론, 그는 지금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지만. 그런데, 더욱 대단한 것은 그의 검이 제대로 닿지도 않았는데 군사들이 베 어진다는 것이었다. 저것은 무슨 조화인지... 검과 검술에 대해서 지식이 전 무한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혹시 마법을 쓰는 검사라서 그런가? 그것도 아닌 듯 했다. 지금 이곳은 마 법은 안 통한다고 하니... "윽!" 엔카루스가 낮은 신음을 토해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혼자였고 한 개의 검으로 방어없이 공격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엔카루스 역시 공격을 받 아 자잘한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계속 안전할 수 있었다. 그의 품에 완벽히 감추어져 있으니. 나의 공격 수단을 모두 잃은 지금, 그에게 의지하게 된 나는... 정말 그에 게 미안했다. 어째서, 나같은 것을 목숨걸고 구하려는지... 물론, 전쟁은 그 가 키리아와 손을 잡고 주도하여 일으킨 것이지만 어쨌든, 지금 나는 그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군사들이 더욱 무더기로 몰려왔다. 아직까진 엔카루스는 잘싸우고 있었지 만, 갈수록 힘이 부치는지 호흡이 거칠어졌다. 이럴줄 알았으면, 나도 검 술을 익혀두는 건데... 그러다, 뒤쪽에서 검이 날아와 엔카루스의 어깨를 베었다. 붉은 피가 허 공으로 치솟았지만, 엔카루스는 자신이 상처를 입은 것을 모르는 것인지 앞으로 달리며 방해꾼들을 처단하는 것에 열중했다. "엔카! 이러다 죽겠어!" "바보 같으니! 누가 이런 곳에 오라고 했어? 얌전히 그자식 옆에나 있을 것이지!" 그 자식 옆이라니... 미카엔을 말하는 것인가? 엔카루스는 아마도 내가 이 곳에 직접 오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오늘따라 왜이렇게 나를 눈물나게 만드는 인간들이 많은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일이 꼬이는지... 울고 싶다.' 엔카루스의 손놀림이 둔해졌다. 그만큼 적에게 받는 상처들은 많아졌다. 나 때문에 자신의 군사들에게 공격을 받는 위치에 놓이게 되다니... 정말 미안했 다. 키리아는 결국, 엔카루스까지 죽일 셈인 모양이었다. 하긴, 그녀로서는 이 것이 막다른 길이니 자신의 협력자라 해도 봐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조금만 참아! 안개를 벗어나면 무사할 수 있어!" "정말... 바보 같군!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여자 하나 구하려고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다니. 제길!" 엔카루스의 얼굴이 창백해져 갔다. 곳곳에 베인 상처와 오른쪽 어깨의 상 처에서는 아직도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피로 인하여 나까지 축축히 젖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적으로 롱소드를 휘둘렀으니... 굉장히 많은 피를 흘렸을 것이다. "나 때문에 미안해! 흑~" "...더이상 힘들겠어." 엔카루스는 더 이상 검을 휘두를 힘이 없었는지 자신의 애검을 스르르 놓았 다. 그리고, 나를 몸으로 감싸며 계속 말을 달렸다. 어느 정도 자이라스군의 손길에서 벗어나게 되자, 이젠 화살들이 쏟아져 날아왔다. 그러다, 화살이 말 의 엉덩이에 와 박히게 되었고 우리는 낙마하여 아래로 굴렀다. 근처에 있는 자이라스군사가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엔카루스는 나를 밀어내고 그와 맞섰지만 아까 검을 놓아버려 그에겐 무기가 없었다. 게다가, 혼절 직 전까지 피를 흘렸으니 그가 제대로 싸울 능력은 없었다. "크헉!" 그 군사의 장검이 엔카루스의 배를 관통하였다. "이 나쁜 자식!!" 나는 분노하며 그 군사의 뒤쪽으로 달려가 근처에 있던 커다란 돌맹이로 그를 내리쳤다. 퍼억! 그리고 엔카루스를 흔들며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의식을 잃었는지 아 니면 숨이 끊어졌는지 미동도 없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를 떠나 달렸다. 그렇지 않으면 나까지 적들의 칼 집이 되고 말테니... 곧, 나는 안개 지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달렸 다면 엔카루스는 무사할 수 있었는데... "아젠!!"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아젠샤르를 부른 나는, 바람으로서 이곳의 안개를 걷어내게끔 하였다. 정령의 힘은 마법이 아니라 자연을 이용한 힘이니, 이 곳의 안개를 충분히 걷어낼 수 있을 것이다. 곧, 돌풍이 몰아쳤다. 나의 분노하는 마음이 정령에게까지 옮아져갔는지 바 람은 매서웠다. 커다란 돌풍으로 인해 핏빛 안개가 걷어져 갔다. 나는 그 광경을 눈물을 삼 키며 바라보다가 라센샤르를 불렀다. 그리고 그녀에게 키리아를 처단할 것을 명하였다. "와아아아~!!" 우리쪽 군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들리는 것은 누구의 함성인지 모 르겠다. 이제껏 안개로 인하여 속수무책 당하고 있던 우리 동맹군은 다시 바뀐 판도로 자이라스군을 징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투는 태양이 다시 떠오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태양이 어둠을 밀고 다시 세상을 밝히는 것처럼 우리는 자이라스군를 무너뜨렸다. -7- 나는 엔카루스의 시신을 찾기 위해 숲을 뒤졌지만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시신이라도 찾아서 로히얀스의 땅에 그를 묻어주고 싶었는 데, 그것 마저도 해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다, 나는 엔카루스가 떨어뜨렸던 흑색검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피들이 말라서 잔뜩 달 라붙어 있어 매우 지저분해져 있었다. 엔카루스의 피로 인해 붉은빛으로 물들은 로브 자락의 끝을 살짝 들 어 다시 걸음을 옮겼다. 키리아를 처단하고 있을 라센샤르에게로 향 하기 위해서였다. 피비린내가 나의 후각을 마비시켜 더 이상 역한 냄 새로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참혹한 군사들의 시신이 나를 고통 스럽게 했다. "우욱~!" 헛구역질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런 나의 모습은 참으로 꼴볼견이었 지만, 오늘 죽어간 많은 이들로 인해서 나는 가슴이 아팠다. 저들은 모 두 누군가의 평범한 남편이나 아들이었을 텐데... 오늘 전쟁으로 인해, 어딘지 모를 땅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그 육체는 참혹하게 식어갔을 것이다. 그러다, 나의 눈은 커다랗게 뜨여졌다. "엔카~!!" 피투성이의 엔카루스가 라센샤르와 맞서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가 나를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라비스! 나를 두 번 죽게 할 셈이야? 저 괴물같은 정령 좀 치워줘!" "라비스! 키리아의 농간에 속지 말아요!" "아까 내가 너를 구했잖아? 이번에는 네가 나를 구해!" "라비스! 속지 말아요!" 라센샤르의 외침과 엔카루스의 목소리가 뒤섞여서 들려왔다. 나는 참혹해 보이는 엔카루스의 모습에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엔카루스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왠지 간교해 보인다. "엔카! 정말 미안해... 흑~ 네 불행은 나로 인한 것이지? 그래서 더 미안해..." 라센샤르의 파괴를 담은 힘이 엔카루스에게로 쏟아져 왔다. "라센샤르! 그만해!" 그러자, 라센샤르는 멈칫하였고 엔카루스의 의미 알수 없는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나는 더욱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엔카! 다음에 혹시라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우리 이렇게 만나지 말자. 그 리고, 나를 향했던 너의 마음... 네가 마지막으로 남겨두고 간 네 마음... 그 마음만 받아둘게. 너에게 미처 못했던 이 말을... 하고 싶었어." 나는 약간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들고 있 던 엔카루스의 검에 힘을 주었다. 눈물을 흘리며 슬픈 목소리로 말하는 나의 모습에 잠시 홀렸는지, 엔카루 스는 멍하니 있다가 흠칫하였다. 감추어진 살기가 터지듯이 드러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나는 엔카루스의 그 흑색검으로 그의 심장을 향해 힘을 주어 찔러 들어갔다. "카아악~!! 감히, 네가... 네가..." "잘가, 엔카. 그리고... 거짓된 너의 모습이라도,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어." 엔카루스는 심장에 검이 박히게 되자, 그 모습이 일렁이듯 흩어지기 시작 했다. 그리고 본 모습이 나의 눈에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키리아였 다. 그녀는 분하다는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지만, 나는 눈물을 지우며 차가 운 눈빛으로 그녀를 냉담하게 쏘아보았다. "키리아! 지옥에나 떨어져! 감히 엔카루스의 모습으로서 나를 현혹시키려 하다니. 나로 인해 엔카루스가 두 번 죽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 키리아는 저주의 말을 하며 엔카루스의 검을 뽑아내려 했지만, 그것은 꼼 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에서 검은빛의 피가 흘러나왔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난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네 따위에게 고위 마족인 내가... 크헉!" 키리아의 모습이 점점 변해갔다. 하얗던 그녀의 피부는 어둡고 흉측하게 변해 갔고, 그녀의 손톱은 길게 자라났다. 그녀의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들 이 마치 뱀과 같이 꿈틀거리는 듯 했다. 그녀의 발악이 계속 이어졌다. 뭔 가 알아듣기 힘든 저주의 말이 끊임없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아마도, 나 를 죽이겠다는 내용인 것 같았다. 누군가의 저주를 듣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지독한 증오를 담은 그녀의 저주로 인해 소름이 끼쳤다. "이대로는 못 죽어! 널... 죽여버려야 하는데...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어야 해! 넌 그렇게 죽게 될 거야! 큭큭... 넌 그렇게 죽게 될... 거야!" 그러다, 그녀의 몸부림은 조금씩 멈추어 갔다. 아마도, 숨이 끊어진 모양이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나를 굉장히 언짢게 했지만, 곧 나의 뇌리에서 지워버렸 다. 기분 나쁜 말은 금방 잊는게 상책이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엔카루스의 검을 뽑아내었다. 그러자 의외로 쉽게 그 검은, 키리아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키리아의 시신은 내가 검을 빼낸 그 순간 순식간에 회색빛 재로 화하였다. 어떻게 보면, 허무한 죽음... 그 재들은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아젠샤르가 저 재들을 허 공에 흩어버리는 모양이다. "라비스. 루젠다르의 군대가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어요." 나를 조용하게 지켜보던 라센샤르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루젠다르의 군 대라... 지금은 너무 지친 상태라서 그들을 맞설 힘이 없다. 게다가, 군사들 도 계속된 전투로 많이들 지쳐있었다. 하지만, 우리 동맹군들은 자이라스군 들을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기는 충분히 올라 있었다. 나는 곧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억지로 반듯하게 하고는 근처에 있던 주인 잃은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다시 당당한 지휘관의 모습으로 돌아가 군사 들을 정비하였다. 루젠다르군들에게 흠잡힐 만한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 했 다. 그리고, 또다시 라센샤르에게 명했다. 최대한 위압적인 모습을 루젠다르에 게 보여주어 저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겁을 주도록 하였다. 루젠다르군들이 바로 우리 앞까지 도착하였을 때, 우리의 군사들은 조금도 지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나를 비롯한 몇몇 지휘관들이 군사들에 게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며 군사들을 정비한 까닭도 있었지만, 이번 전투 에서 완벽한 승리를 한 것으로 인해 기쁨에 도취 되어, 우리의 군사들은 모두 당당하고 용맹한 모습들이었다. "루젠다르군들은 들어라! 자이라스군들은 무너졌다. 자이라스군의 지휘관 들은 모두 처단되었고 특히 자이라스의 지휘관 중 하나인, 고위 마족 키 리아는 나의 손에 의해 처단되었다. 이곳은 너희가 도와야 할 자이라스 군이 없으니, 일찌감치 항복을 하여 너희들 스스로의 목숨들을 보존하라! 루젠다르군의 지휘관인 카닐 참모장은 현명한 판단을 할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너희들을 처단할 능력이 충분히 있으며, 너희들 뒤를 노리고 있는 세젠느강에 있던 로히얀스군들이 너희가 항복하지 않을 경우, 우리와 함 께 너희 루젠다르를 단죄할 것임을 명심하길 바란다!" 나는 아젠샤르의 바람의 힘에 목소리를 담아 루젠다르군을 향해 위엄있 게 외쳤다. 나는 키리아가 나에 의해 처단되었음과 세젠느강에 로히얀스군 들이 많이 주둔해 있음을 저들에게 은근히 강조하여 항복을 유도하였다. 그러자, 루젠다르군들은 협상을 할 것을 제의해 왔다. 협상이라... 솔직히 저들의 항복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싶지만, 더 이상 피를 흘리게 되는 일 이 생기는 것은 싫었다. 그래서, 그 제안을 받아들여 며칠 뒤 동대륙 4국 대표들은 로히얀스 왕성에서 회담을 갖게 되는 것으로 이번 전쟁은 대 충 마무리가 지어졌다. 물론, 나는 루젠다르와 자이라스가 약속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 왕족 인질들을 요구해야 했다. 루젠다르에서는 왕자를... 그리고 자이라스는 그곳의 황태자를 말이다. 루젠다르의 왕자는 아마도, 세젠느강에서 주둔 하고 있는 그레이 참모장이 이끌고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이라스 황태자는 내쪽에서 데리고 가게 된다. 우리는 인페르디아 왕성에서 잠시 머물며 인페르디아왕과 회담을 가졌다. 그들은 스스로 로히얀스와 형제국이 될 것임을 자처하였다. 물론, 형쪽이 로히얀스이고 동생쪽의 나라가 인페르디아가 되었다. 그렇게 형제국이 된 기념으로 우리는 몇가지 조약을 맺었다. 아무래도 형쪽의 나라가 유리한 내용의 조약임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우리는 드디어 로히얀스로 돌아가게 되었다. 참 으로 감개무량하다. 화려한 환송을 받으며 우리의 행렬은 인페르디아 국경까지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는 인페르디아가 내준 화려한 마차로 편안히 가다가 문득 창밖을 바 라보았다. 그러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우리의 행렬을 바라보는 한 여인에게 무심코 눈길을 주게 되었는데, 그녀를 바라본 나는 경악한 얼 굴을 하며 나직하게 한 이름을 중얼거려야 했다. "셀레나...?" 나는 마차를 얼른 멈추게 하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다시 그녀가 있던 쪽으로 눈길을 주었는데, 그녀는 그새 사라진 듯 모습이 보이지 않 았다. "아냐! 그녀일 리가 없어. 셀레나는 죽었잖아?" 내가 조금 닮은 사람을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었다. 하긴, 방금 본 여자 는 셀레나와 너무도 흡사했지만 셀레나라고 단정하기에는 너무 젊었던 것 같았다. 많이 먹어 봤자, 20대 초반으로 보였었는데... 하지만, 그 화려하고 진한 황금빛 머리카락과 그 미모는 그냥 닮은 사 람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그런 외모는 결코 흔한 것이 아니 었기 때문이었다. "라비스님! 무슨 일이십니까?" 나의 마차 근처에서 말을 몰던 왕실 마법사가 나에게 물어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방금 보았던 그 여자... 여신관의 차림을 하고 있었다. 셀레나가 인페르디아에 있을 리도 없 었지만 여신관이 되어 있을리도 없었다. 역시, 내가 잘못 본 듯 하다. 단순한 금발이 햇빛에 반사되어 나와 같은 화려한 금발로 보였을 수 도 있고... 그래도, 왠지 찝찝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미, 상당한 거리를 달려와 버렸으니 지금 그녀를 찾아본다고 해도 정령을 동원하여 한참을 찾아 보아야 할 듯 하다. 그건 조금 귀찮다. 지금 나와 나의 정령들은 모두 너무 지쳐있어 무조건 쉬고만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옆에 놓여져 있는 엔카루스의 검을 바라보았다. 더러운 핏자국들 이 말끔하게 지워진 엔카루스의 검은, 순수한 흑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엔카루스의 유품... 이것만이라도 아사벨라에게 전해주어야 했다. 엔카루스를 설득해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결국은 내가 그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그를 죽음까지 몰고 간 셈이 되었다. 가슴이 너무 아프다. * 곧, 1부 완결이 다가오는 군요. 모두 미리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두시 길...^^;; 아마도, 30화가 마지막 화가 될 것 같습니다. 1부 마지막... 아! 글구 이번 편이 29화의 마지막 편입니다. (떨어지는 꽃잎) -1- 로히얀스 왕성의 접견실... 이번 전쟁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은 로히얀스의 국왕인 미카엔을 접견하여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받았다. 그들 중에는 승진하는 이 들도 꽤 있었는데, 나는 미카엔에게 승진 대신 작위를 부여받게 되었다. 작위는 백작이었다. 크로시벨 백작이라... 정말 뿌듯하다. 중신들도 크로시벨가에 백작 의 작위가 내려지는 것에 그다지 불만들은 없는 듯 했다. 하긴 이 정도의 공을 세웠는데, 백작 정도의 작위를 하사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카엔은 우리가 이끌고 온 루젠다르와 자이라스의 왕족에게 최대 한 예우를 해주었다. 지금은 비어있는 왕자궁에 그들이 임시로 머 물수 있도록 해주었고 불편하지 않도록 시녀나 시종들을 붙여 주었 다. 그리고, 그는 나를 따로 알현실로 불렀다.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기쁘다. 라비스. 네가 자랑스러워!" 미카엔에게 자랑스럽다는 말을 듣게 되다니... 작위를 받는 것보다 더 뿌듯하다. "내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미카엔의 축복이 있었기 때문이죠. 미카엔의 축복은 여느 신관들의 축복보다 더 감동스럽고... 효과도 탁월하더군요." "그래? 그거 다행이군. 나의 축복이 효과가 있었다니... 라비스, 이 리 가까이 와봐. 널 잠시 안아보아도 되겠지? 네가 떠나 있는 그 동 안 네 걱정으로 제대로 잠든 날이 없었어." 미카엔은 의자에 앉은 채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정말 쑥스럽게... 아니, 부끄럽다고 해야 할까? 에엑!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이러니깐, 아주 조신한 소녀가 된 것 같아 심히 쑥스럽다. 그러고 보니, 나도 참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이러한 것으로 인해 쑥 스러워 하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뻔뻔하기도 한 나였는데, 이젠 얼굴 도 진심으로 붉힐 줄 안다. 미카엔이 이런 나를 보며 빙긋 웃어보였다. 그가 나의 속마음을 다 꿰뚫어보고 있는 듯 해서 기분이 나쁘기도 했지만, 나는 몸을 일으켜 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그는 나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는 부드럽게 안았다. "미카엔, 만약에 말이에요. 지금 제 모습이 이 모습에서 다른 모습으 로 바뀌게 된다면, 미카엔은 라비스로서 미카엔을 만났던 나를 알아 볼 수 있어요? 지금처럼 저를 똑같이 대해 주실 수 있어요? "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지?" "...아마도, 미카엔은 저를 못알아 보겠죠? 훗... 그냥 한번 물어봤어요." "라비스! 넌 언제까지나 내가 사랑하는 라비스야. 내가 너를 못알아 보게 되는 일은 없어." "그렇겠죠...?" 나는 잦아드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미카엔에게 몸을 기댔다. 내 가 왜 이런 질문을 미카엔에게 했을까? 이젠 내가 이 육체에 집착을 갖기 시작한 모양이다. 나의 침실로 돌아온 나는 시녀들의 호들갑스런 수다들을 듣고 있어야 했다. "라비스님! 굉장해요~ 조금 전, 폐하께서 공식적으로 라비스님을 왕비 로 맞아들이는 것을 발표하셨어요!" "꺄아~ 넘 멋져요! 그럼, 라비스님이 왕비님이 되면 저희는 왕비 전하 를 모시는 측근 시녀들이 되는 건가요?" 시녀들은 나보다 더 좋아했다. 하긴, 내가 왕비가 된다는 것은 나를 지 속적으로 시중들어온 그녀들 역시 승진한다는 것일 테니, 좋아하지 않 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녀들에게 적당히 미소를 지어보다가, 문득 루이스가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녀라면 제일 먼저 달려와 이 사실을 알리며 가 장 좋아했을 그녀인데, 몸이 많이 아프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루이스는 지금 뭐하고 있지?" "루이스님 말인가요? 아마 지금 바쁘실 거예요. 곧 있게 될 라비스님 의 결혼 준비도 하셔야 되니깐요. 호호~" 결혼 준비로 바쁘다라...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나에 게 얼굴도 내비치지 않고 호들갑도 떨어주지 않는 것에 대해 약간 서 운함이 느껴졌다. 나는 엔카루스의 검을 들고 로터스궁으로 향했다. 아사벨라에게 직 접 엔카루스의 이 유품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나의 경호원인 에드 가 나를 조용히 뒤따랐다. "곧 여름이 오겠어." "그렇겠군요..." 벌써 6월의 중순에 접어들었다. 곧 있으면, 내가 이곳에 온지 만 1년이 된다. "아! 이곳에도 론티아 나무가 있었네?" 산책할 겸, 걷다가 장미궁의 후원까지 발걸음을 하게 된 나는 후원의 가장 깊숙한 곳에 론티아 나무가 있음을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멘시타보다는 조금 어려보이는 론티아 나무였다. "론티아 꽃이 피워 있군요." 론티아 꽃... 나는 처음으로 보는 론티아 꽃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조그맣게 핀 황금빛의 꽃들이 너무나 예뻤다. 그 빛깔들은 평범한 꽃 들과는 달리 화려하고 순수한 황금빛이었다. 마치 나의 머리카락 색처 럼... 그러다, 그 꽃들이 질 때가 되었는지 몇 개의 꽃들이 바람에 날려 아 래로 떨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낙화(落花)하는 모습도 정말 아름 다웠다. "꽃이 지게 되면... 보통 나무들은 열매를 맺지 않아?" "물론, 그렇지만 론티아 나무들은 꽃이 진 후에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론티아의 열매는 천년에 한 개 열리는 아주 희귀한 열매이니깐요." "그래?" 나는 그렇게 론티아 나무 앞에서 약간의 시간을 지체한 후, 로터스궁 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아사벨라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이 되 었다. "그 검, 언제 한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거 엔카루스 아모르의 검이지 요?" "으응. 알아보네?" "훗... 예전에 그 검을 든 엔카루스와 상대해 본적이 있었으니깐요. 그때, 제 롱소드가 두 동강이 났었죠!" "그랬었나?" 기억 날 듯 하다. 예전, 엔카루스가 왕성으로 측실로서 들어가는 나를 납치하기 위해 마법 도적단을 이끌고 공격을 했었는데, 에드는 그때 나를 구사일생으로 구해 왕성까지 무사히 갈 수가 있었다. "그 검이 라비스님의 손에 있는 것을 보니, 엔카루스는 뭔가 안좋은 일을 당한 모양이군요." "응. 그는 인페르디아 전쟁터에서 수많은 군사들의 시신들과 함께 차 갑게 식어갔을 거야. 나는 지금 그의 여동생 아사벨라에게 그의 유품 인 이 검을 전해주러 가는 길이야." "안됐군요. 그가 만약 올바른 길을 걸었다면 그는 훌륭한 기사나 검사 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얼마든지 정당하게 출세를 할 수 있었는 데, 왜 그렇게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글쎄. 그는 너무도 위험한 꿈을 꾸고 있었던 탓이겠지..." -2- 나는 로터스궁의 응접실에 들어섰다. "아사벨라..." 그녀에게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그녀가 상 처를 덜 받을까? 하지만, 아사벨라 역시 짐작은 하리라 생각되었다. 지금 나의 손에는 엔카루스의 검이 들려 있으니... 아사벨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사벨라, 이 검은..." "그냥 놓고 나가... 네가 설명 안해도 아니깐, 그냥 나가... 지금은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 넌 곧 왕비가 되겠지? 이거 하나만은 명심해! 지금 네가 얻은 행복은 누군가의 불행을 딛고 얻게 된 행복이라는 것 을... 내 모습이 초라하지? 나에게 이제 남은 건 없으니깐! 그렇다고 날 동정할 생각은 말아. 난 초라하지 않아. 언젠가는, 이곳 로히얀스 에서 폐하말고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못하게 될 테니깐." "난 너를 동정하지 않아... 아사벨라, 넌 초라하지 않아. 나의 눈에는 지금의 네 모습은 당당해 보이는 걸. 넌 폐하의 부인 중 하나잖아? 나 역시... 폐하께 어울리는 여자가 되기 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어. 아사벨라! 지금의 당당하고 강한 모습... 거짓이 아니길 바래. 그저 남 에게만 보이기 위한 당당함이 아니라, 네 스스로의 강함에서 나오는 당당함이길 바래. 이제 그만 가봐야 하겠어. 내가 주제 넘는 말을 한 것이 아닐까 모르겠다. 아! 그리고, 넌 엔카의 여동생이잖아? 그를 위 해서 눈물을 흘려줘. 오빠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결코 초라 한 모습이 아니니깐."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사벨라의 눈에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마지막으로 보고는 응접실을 나왔다. 왠지 기분이 씁쓸했다. 그 후로 며칠, 나는 왕비가 되기 위한 몇가지 수업과 인페르디아 전쟁 후의 회담에 대한 것으로 바쁘게 지냈다. 루젠다르와 자이라스의 대표인 국왕들이 로히얀스 왕성으로 도착해 회 담을 갖게 되는 그날 아침, 나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게으름을 피우며 침대에서 미적거리고 있었다. "라비스님, 일어나세요! 오늘은 일찍 일어나신다고 하셨잖아요?" 누군가가 나를 깨우기 시작했다. "루이스, 5분만..." 내가 아침마다 읊는 멘트... 매일같이 읊는 말이면서도, 어째 그 내용이 변함이 없는 것인지... 곧, 있으면 루이스의 과격한 방법이 나에게 동원 될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들려온 것은... "라비스님, 전 루이스님이 아니라 아나에요! 어서 일어나세요." "아나?" 나는 눈을 떴다. 예전에는 루이스가 매일 나를 깨우러 왔었는데, 이제 는 그녀의 모습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가끔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되 어도, 그녀는 나에게 시녀로서 딱딱한 모습만을 보여주어 나를 종종 서운하게 하였다. 내가 뭔가 그녀에게 잘못했던가? "왜 루이스가 안왔지?" "글쎄요. 루이스님은 라비스님을 깨우는 것이 너무 힘들다면서 대신 저를 보내셨는데... 생각보단 금방 일어나시네요." 그녀의 말에 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녀를 친엄마처럼 여기고 있었는데, 그런 사소한 것에서 나는 그녀에게 서운함이 느껴 졌다. 내가 유일하게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존재는 루이스였는데, 왜 요즘은 예전같이 대해주지 않는 것인지... "호호. 라비스님! 서운하신 모양이군요. 너무 서운해 하시지 마세요. 루이스님은 요즘 라비스님의 결혼 문제로 너무 바쁘시고 몸도 별로 좋지 않으셔서 라비스님께 그렇게 신경을 많이 쓰시지 못하는 걸 거 예요." 아나는 나를 위로하듯 말하였으나, 나는 루이스가 마음에 걸렸다. 뭔가 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하루 하루 수척해가며 말수도 없어져 간다. 무슨 고민거리가 있길래. 나는 그녀와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터고 대화를 나누거나, 그녀를 유명 한 무녀들이나 주술사에게 보이고 싶었지만, 아직 그럴 여유가 없다. 나의 결혼식 겸 왕비 즉위식이 끝나고 나야 그녀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왕실 부수석임을 증명하는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진 흰색 로브를 입고 회담실로 발걸음을 향했다. 인페르디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휘 관이었던 자격으로서 나는 그 회담에 참석할 자격이 있었다. 회담실로 들어서기 전, 미카엔이 재상에게 뭔가 말을 듣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 국왕에게 하는 예로서 인사를 해보였다. 사석에서는 그에게 미카엔이라 이름을 부르는 나였지만, 공석에서는 나와 미카엔은 엄연히 국왕과 신하의 관계에 있었다. 미카엔이 나에게 부드러운 눈웃음을 던졌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깨 닫는 것이지만, 미카엔의 눈웃음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왠만한 여자들 은 모두 녹여버릴 듯한... 아름다움을 광적으로 신봉하는 프리실라 여 왕 같은 경우면, 진작에 넘어가버렸을 그런 눈웃음이다. 나는 재빨리 눈을 내리깔며 그의 눈길을 피했다. 에구구... 이 놈의 심 장이 말을 안듣는다. 이러다, 귀밝은 미카엔의 귀에 나의 심장 소리가 들리면 어쩌려구... 그건 창피하다! "흠, 흠..." 미카엔과 나 사이에서 도는 심상치 않은 기류에 중간에 끼인 재상은 헛기침을 해보였다. 어쨌든, 회담은 시작되었다. 우선 자이라스 대표측과의 회담이 우선 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본격적인 말발의 싸움과 신경전이 오고 가기 시 작했다. 미카엔은 자이라스의 국왕을 비롯한 대표들에게 은근히 협박을 가하며, 그들에게 몇가지를 요구하였는데... 자이라스의 왕은 국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과 주요 대신들 은 로히얀스 출신으로 임명되는 것들 등등이었다. 이것은 완벽한 로히 얀스의 속국이 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아마도, 자이라스 국왕은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애당초 그에게는 힘이 없었으니, 자이라스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은 엔카루스와 키리아였 었다. 그들이 없는 지금은 그에겐 아무런 힘이 없다. 그는 엔카루스의 부하로서 대리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국왕이라는 명칭은 허울 좋은 엔 카루스의 변명과도 같은 것! 자이라스와의 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다음날은 루젠다르와의 회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루젠다르와는 회담 분위기가 꽤 팽팽하게 이 루어졌다. 그들에게는 몇가지 불리한 조약을 체결해야 했는데, 그들은 몇번을 튕기고 몇번을 버티다가 결국은 그들로서는 굴욕적인 조약을 체 결하고 말았다. 인페르디아와 자이라스가 로히얀스의 밑에 있는 이 시점에 저들로서는 끝까지 버틴다는 것은 무리였다. 동대륙의 역사가 로히얀스에게로 기울게 되는 순간인 회담이었다. 그들 은 굴욕적인 모습으로 우리가 인질로 데리고 있던 왕자를 데리고 그들 의 나라로 돌아갔다. 이번에 체결한 조약의 내용과 이 관계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모르지 만, 어쨌든 지금은 미카엔의 나라 로히얀스가 날개를 펼치게 되는 순간 이 된 것이다. 그렇게 모든 일이 매듭지어지고 미카엔과 둘만 남게 되었을 때 그는 나 에게 입을 열었다. "앞으로 이틀 후면, 라비스가 나의 정식 아내가 되겠군. 지금까지도 많이 기다려왔지만 앞으로의 이틀이 너무 길게 느껴지는 걸." 그의 말에 나는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그에게 물 었다. "이틀 후라고요?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에요?" "라비스! 이틀 후가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나? 그 정도로 나를 애태웠으 면 충분해!" "그래도 너무 후다닥 해치우는 것 같아서 좀 그래요." "그래서 불만인 건가. 라비스?" "……." "……?" "...아니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집요하게 바라보는 미카엔의 눈길에 나는 그가 바라는 대답을 하였다. 물론, 그가 이렇게 나에게 근엄한 듯한 표 정을 짓고 있어도 그 표정 뒤에는 그의 장난기가 숨어있다는 것을 나 도 알고 있었지만, 이럴땐 그에게 모르는 척 해야 한다. 그나저나, 이틀 후면 며칠이지? 나는 머리속으로 날짜 계산을 해보았다. 요즘은 날짜가는 것도 무뎌져서 오늘이 며칠인지도 한참을 생각하곤 했 다. 오늘이 23일이니 이틀 후면 25일이다. 6월 25일... 이거 우연인가? 이곳 에 온지 만 1년이 지나고 난 다음, 결혼식을 하게되는 셈이었다. 그러다 미카엔이 분위기를 잡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것은 또 미카 엔이 나에게 로맨틱한 뭔가를 하려 한다는 징조... "아! 미카엔~ 우리 달구경 해요. 오늘은 날이 맑아서 별도 많이 떴을 거예요." 나는 벌떡 일어나서 그에게 외쳤다. 에구... 이제는 그에게 튕기는 것도 거의 습관이 되어 버렸다. "쳇~! 할 수 없군. 좋아. 달구경이나 해야지. 라비스가 하자는데... " 미카엔은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 간 투덜대는 듯한 말투... 이럴땐 그도 평범한 청년같다. 아니, 소년 같아 보인다. 앳띤 기색이 아직 얼굴에 많이 남아 있었고 아름다운 얼굴이라 어떤면에서는 소년같은 느낌도 들었다. "자아~ 가실까요? 나의 예비 신부 아름다운 레이디?" 미카엔은 나보고 팔짱을 끼라는 듯이 팔꿈치를 살짝 들어보였다. 그 의 그런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났다. 물론 행복한 웃음... 나는 그에게 팔 짱을 끼며 그에게 답변을 해보였다. "킥! 좋아요~ 나의 예비 남편(?) 멋진 미카엔!" "앗! 라비스 네가 그런 발언을 하다니... 좀 의외인데? 멋진 미카엔 이라니... 듣기 나쁘지 않군! 한번 더 말해봐~ 네가 그러니깐, 정말 신 기해!" "싫어요! 방금 제가 말한 닭살스런 발언으로 인해서 받은 타격이 크다 구요!" 정말 스스로도 놀랍다. 내가 이런 발언을 미카엔에게 하다니... 하지만, 나는 미카엔이 너무 좋았다. 그의 웃음소리가 좋았고 그의 눈길이 좋 았다. 나는 미카엔에게 헤헤~ 웃어보였다. 그러자, 미카엔은 나의 이마를 콩~! 하고 살짝 때렸다. 그의 꿀밤에 나는 맞은 이마를 문지르며 그를 노려보 았지만 미카엔은 이런 내가 귀엽다는 듯이 웃어보였다. 쳇~! 그러다 나는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미카엔과 나... 언제까지 이렇듯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한 동안은 불안하다. 행복의 대가로 불행이 찾아올까봐. * 음... 오늘은 조금 길다. ㅡㅡ; -3- 다음날, 나는 수많은 귀족들의 알현 요청에 시달려야 했다. 내가 왕 비로 즉위하게 되는 것을 축하한다는 명목 아래, 나의 눈에 들기 위 해 그들은 값진 선물들을 싸들고 나를 알현하기 위해 저 구석 지방 에서부터 허겁지겁 올라오곤 했다. 물론, 나는 그들의 선물은 받지 않았다. 그 값나가는 선물들을 받았다 가는 그들에게 발목을 잡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받은 것 만큼 나 역시 그들이 바라는 뭔가를 해주어야 하는데, 그들이 바라는 것은 뻔하였다. 그리고, 즉위식과 결혼식이 이루어지는 신전 측에서는 야단법석이 일 어났다. 미카엔이 결혼 발표를 하자마자, 날짜를 너무 급하게 잡아서 그들은 여유있게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보통 국왕의 결혼식은 나라 안에서는 화려하고도 가장 큰 행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미카엔이 후다닥 해치우려 드니, 신관들 은 지금쯤 아마도 울상을 짓고 있을 것이다. 나는 시녀들과도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나를 성가시게 구는 저 귀족들 을 피하여 침실에서 꼼짝않고 있었는데, 이제는 시녀들이 나를 못살게 굴었다. "라비스님! 내일 있게 될 결혼식에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되시려면, 오 늘부터 미리 미리 준비를 하셔야..." "무슨 준비를 해? 귀찮아!" "전신 맛사지를 왜 안하시겠다는 거예요?" "창피해!" 결국, 나는 플라이 마법을 써서 창밖을 빠져나갔다. 시녀들의 기막혀 하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나는 저들이 너무 피곤하였다. 루이스 만큼이나 완강한 성격들의 소유자였다. 나는 중앙궁성의 지붕에서 자 리를 잡고 앉아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쐬었다. 로히얀스 왕성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나는 중앙 궁성 중에서도 제일 높은 지붕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성 안이 시끌벅쩍하다. 전 체적으로 들뜬 분위기였다. 로히얀스는 축제 분위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로히얀스인들은 국왕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로히얀스의 전통 음식들을 해먹으며, 로 히얀스 왕성에 그들의 소박한 축하 선물들을 바쳤다. 그 중에서는 젓 소나 돼지, 닭까지 선물로 끌고 오는 농부들도 있어, 로히얀스 왕성은 그야말로 난장판에 처치 곤란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런 모습들을 보니, 나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내가 미카엔 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의 나라 로히얀스에 대한 애정이 마구 솟아오르 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나 드디어 결혼식날이 되었다. 오늘은 긴장이 되 어서 그런지, 평소와는 다르게 일찍 눈을 떠졌다. 막상 결혼식 날이 되니깐, 기분이 싱숭생숭해지고 묘했다. 나는 침대에 앉은 채로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러자, 그동안 안하던 잡념들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대로 괜찮을까? 미카엔의 아내, 로히얀스의 왕비, 이곳 세계의 존재 가 되어 살아도 나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그렇게 거부하던 운명이었는데, 이젠 그 운명이 한 방향으로 일사천리 흘러간다. 이도현이었던 나... 이도현으로서 살던 세계... 내가 그것을 붙 잡으려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 노력이 자아 분열이라는 결과로 나타나 나를 괴롭혔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나의 길을 조금씩 늦추었다. 이 것이 나의 운명이었는데... 이 나의 운명은 도대체 누가 정한 걸까? 예전 왕비의 일기장에서 본 구절이 생각난다. 「한 고귀한 존재의 강한 의지... 그 강한 의지가 곧 운명이 된다.」 그 고귀한 존재란 운명의 신이 되는 걸까. 아니면 특정인의 강한 의지를 말하는 것인가. 내가 예전에, 로히얀스 왕성을 탈출해서 미카엔을 피해 아스탄샤까지 갔었던 기억이 났다. 그렇게 가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다시 아 스탄샤 왕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자꾸 왕성을 맴돌게 되는 것은, 분명 나의 운명은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는 듯 하다고... 그러니, 가출해 나와서도 왕실과의 인연을 못 벗어나고 그렇게 또 다시, 아스탄샤 왕성 안으로 들어가고 결국은 이 렇게 로히얀스 왕성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운명이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다는 것을 조금 더 면밀히 살피면, 로히얀스 왕실의 상징인 미카엔을 들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나의 운 명은 미카엔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상한 쪽으로 확대되어 가는 나의 상념을 지 웠다. 그러다가, 한가지 생각이 불현 듯 떠올랐다. 셀레나는 라비스가 행복해지길 원했다고 했다. 지금 나는 그녀가 셀레네 스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그녀가 만약, 여신이라면 일기장에 나온 구 절과 연관시켜 생각해 볼수가 있었다. 고귀한 존재의 강한 의지... 그 고귀한 존재란 여신인 셀레나이고 그 의 지는 라비스가 행복해지는 것! 그 행복의 조건이 미카엔이 되겠고... 그렇다면, 셀레나는 나와 미카엔이 이루어지게끔 그 모든 것을 꾸몄다는 것인가? 머리가 아파온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미카엔과 이루어져야 했 을까? 그리고, 그녀가 만약 여신이라면 본래 라비스가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녀가 죽도록 내버려 두었는지 다른 세계에서 존 재하는 나를 이끌어오도록 조작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또한 그녀는 나와 미카엔이 서로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 하였는지... 정말 의문 투성이다. 나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왕비의 일기장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펼쳐들어 백지인 일기장에 글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 "어머! 라비스님, 오늘은 일찍 일어나셨네요." 나를 깨우는 담당이 된 시녀인 아나가 침실로 들어왔다. 마침, 일기장에서 스르르 글자가 나타나고 있었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덮고 아나 에게 입을 열었다. "아나! 나라고 매일 늦게 일어나는 줄 알아? 나도 가끔은 일찍 일어난단 말야! 너무 그렇게 신기하게 보지 말라구!" "호홋~ 알았어요! 목욕물을 준비해 드릴게요." 그렇게 시작된 아침은, 여러 시녀들에 의해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으로 꾸며지기 시작했다. 왕실 재단사가 맞춘 새하얀 웨딩 드레스를 입기 위 해 나는 코르셋으로 허리가 잔뜩 조여져야 했고, 미용 담당 시녀에 의 해 신부 화장을 해야 했다. 그리고, 화려하고 여성스러운 머리 모양을 하고 하얀 드레스에 어울리는 다이아몬드 악세사리를 걸쳤다. 마지막으로 굽이 놓은 비단 구두를 신고 나는 전신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름답다는 표현을 넘어서서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나의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드레스의 테두리 선에 나의 머리카락 색과 조화를 이룬 금사로 수놓아진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고귀함과 화려함을 연출하였 고, 적당하게 파져 드러나는 나의 가느다란 목선과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 어지는 나의 어깨선에는 하얀 피부에 너무 잘어울리는 투명한 다이아 목 걸이가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드레스의 풍성한 치마가 나의 가느다란 허리를 더욱 강조하여 더 욱 여성스러운 느낌이 들게 하였다. 나는 황금빛 눈동자로 나의 모습을 그렇게 직시하다가, 눈을 감아버렸다. 눈이 정말 부담스럽다. 나의 외모에서 풍겨져 나오는 미의 오오라가 나 의 눈을 마구 찌르는 것 같았다. 옆에서 시녀들이 쉴새 없이 감탄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에휴~ 내가 이렇게 모습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은 이번 한번 뿐이 될 것이다. 어디 심장 떨려서 거울도 제대로 쳐다보겠는가. 이런 외모는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기 보다는, 오히려 남들에게 감추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라비스님! 이제 나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에드가 궁성 밖에 마차가 준비되어 있음을 알리러 왔다. "응, 알았어." 나는 그렇게 답하며 에드를 바라보았는데, 그가 나의 모습을 애써 외면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몽롱한 눈길로 장차 왕비가 될 나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불경죄(?)를 범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저 심정... 나도 이해가 간다. 베일이라도 쓰고 가야 하나? 나는 다음부터는 화장따윈 절대 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침실 을 나서며 심호흡을 하였다. 오늘 정말 긴장이 된다. 결혼식이 이렇게 긴 장되는 일이었나. 그때, 루이스가 찻잔을 들고 나에게 다가왔다. "라비스님, 긴장되시는 모양이네요. 이거라도 드시고 가세요. 론티아 꽃잎 차입니다. 긴장 완화에 아주 좋아요." "아아, 고마워! 루이스." 나는 그녀에게 기쁜 듯이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 찻잔을 받아들었다. 그 동안 나에게 딱딱하게 굴던 루이스였지만, 그래도 나를 생각해주는 것은 루이스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장을 하는 나를 위해 론티아 꽃잎 차까지 준비하는 것을 보면... 나는 그것을 한모금 마셨다. 그러자, 따뜻한 기운이 나의 몸안으로 들어 가면서 긴장이 조금이 풀어지는 듯 했다. 미리 꿀을 탔는지 차맛도 약간 달콤했다. -4- 나는 홀짝대며 차를 마시고 있는데, 루이스가 몸을 미세하게 떠는 것 이 눈에 들어왔다. '몸이 많이 안좋은 건가?' 나는 그녀를 걱정하며 빈 찻잔을 그녀에게 내주었다. 그러자, 루이스는 말없이 빈잔을 받아들었다. 시녀들을 대동하고 궁성 밖으로 나가자, 궁성 밖에는 화려한 마차가 대 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행렬을 호위하기 위한 근위 기사단들이 나 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들이 모두 늠름해 보였다. 근위 기사단의 단장인 리아드경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인페르디아 전 쟁때 기마 참모였던 성질 급한 기사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차에 오르시지요." 그때, 군회의장에서는 나를 은근히 무시하는 태도을 보이던 그였는데, 지 금은 거의 왕비를 대하는 듯한 깍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에게 우아하고도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살며시 끄덕 이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곧, 내가 탄 마차는 출발하였고 창조신을 모시 는 신전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하늘도 정말 맑았다. 아마도, 날씨 도 오늘을 축복하는 모양이었다. 오늘 이후로 나는 로히얀스의 왕족이 될 것이며, 미카엔의 정실 아내가 될 것이다. 왠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미카엔이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나 의 모습을 보고 어떠한 표정을 지을까, 궁금해진다. 나는 혼자 피식 웃다 가 마차 창문 밖으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왠 까마귀가...? "까악~!" 그 까마귀는 듣기 싫은 울음소리를 내며, 내가 탄 마차위로 사뿐히 내려 앉았다. 그러자, 나를 호위하던 한 기사가 검을 휘둘러 그 까마귀를 쫒아 내었다. 푸드득~! 그 까아귀는 까악~! 거리며 기사의 검을 피해 어디론가 날아가버렸고, 다 시 아무일없이 나의 행렬은 신전 쪽으로 향했지만, 왠지 불길한 징조로 느 껴져 기분 나빠졌다. 하지만, 나는 곧 찝찝한 기분을 털어내었고, 나를 태운 마차는 어느덧 신 전 앞에 도착하였다. 나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아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예식이 이루어지는 홀 안으로 들어가니, 그곳에서는 나를 기다리 고 있었던 듯,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소년 소녀 혼성으로 이루어진 신관들이 경건한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사를 보아하니, 나를 축복하기 위한 성가인 듯 했다. 듣기가 정말 좋았 다. 그들의 축복으로 인해, 오늘은 더욱 축복받은 날이 될 것만 같았다. 거대한 홀의 양옆에는 수백명에 달하는 귀족 참석자들이 있었고, 가운데 에는 붉은 융단이 쭉 깔려 있었다. 그리고, 저 끝에는 예복을 입은 미카 엔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서있었다. 이렇게 미리 준비된 결혼식은 내가 등장하면 예식이 곧바로 시작되는 모 양이었다. 나는 당황하던 기색을 감추고는 미카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결혼이라는 거, 이렇게 진행되던가? 내가 결혼을 해봤어야지. 물론, 측실 이 된 적은 있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결혼식이란 신부측 아버지가 신부를 신랑에게 넘겨(?)주 는 방식인 것 같은데, 이곳은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수많은 눈길들 이 나를 향하고 있어 나는 무지 떨렸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미카엔의 눈길이 멀리서도 느껴졌다. 나는 눈을 들어 미카엔을 바라보았다. 그때, 나의 시야가 문득 일그러져 보였다. 현기증인 것인가? 나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몸이 휘청거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나의 다리도 후들거려 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너무 긴장하여 떨리는 것이라 단정하고는 침착해지기 위해 애를 썼다. 왕비가 되는 것 인데... 만인 앞에서 우아해 보여야 한다. 나의 몸은 미세하게 떨렸다. 이상하게 몸에서 한기가 느껴진다. 여름 감 기에 들 징조인 듯 하다. 그러다, 나는 귀족들 틈에서 자리하고 있는 루 이스를 발견하였다. 나는 그녀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으나, 루이스는 나에게 표정없는 얼굴만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내심 서운하다. 나의 결혼 식에 무엇보다 기뻐해줄 존재는 루이스일 거라 생각했는데... 냉정한 아버지만 있는 라비스로서의 나에게는 진심으로 기뻐해줄 존재는 루이스 뿐인데... 너무 서운하다. 곧, 미카엔이 있는 곳까지 도착하자 그는 나에게 근심 어린 얼굴로 나직 하게 속삭였다. "얼굴이 창백해 보여. 라비스." "괜찮아요..."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나의 목소리는 이상 하게 가냘프게 들려왔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가냘픈 나의 목소리는 애 처로움마저 느껴졌다. 우리 앞에 서있던 대신관으로 보이는 화려한 신관복의 노인은 한 여신관 이 고급스러운 상자 하나를 들고 오자, 그 상자 안에서 번쩍이는 왕관 하 나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국왕이 쓰는 것과는 달리, 여성스러운 느낌이 강 한 작은 왕관이었다. 신관들은 몇가지 까다로운 절차를 밟으며 왕관을 우선 미카엔에게 수여하 는 행동을 했는데, 나는 그 모습들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 힘들게 느껴졌다. 지금은 이상하게도 이렇게 서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괴로워서 곧 쓰러질 것 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체온이 내려가는지, 나는 여름이라는 계절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추위를 느 꼈고 호흡이 매우 가파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빨리 끝냈으면... 어서 쉬고 싶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후들거리는 다리로 억지로 몸을 지탱했다. 그리고, 갑작스레 나타나는 나의 괴로움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결혼식날 신부가 인상을 구기고 있는 것은 그다지 보기 좋은 것이 못되기 때문이 었다. 미카엔은 왕관을 받아 나의 머리에 씌여 주었다. 나의 즉위식은 신관이 아니라, 국왕이 직접 왕관을 씌여주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모양이었다. "라비스...?" 미카엔이 나를 걱정스레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그는 바로 나의 앞에 서서 나를 부르고 있는데, 그의 목소리는 아주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의 몸 일부들이 차갑게 식어가는 듯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 졌다. 이상하다. 뭐가 문제인 거지. 더 이상 서있는 것이 힘들다. 미카엔의 아내로서 더 이상 품위를 유지하 는 것은 더 이상 무리였다. 나는 입술까지 깨물며 버티던 것을 마침내 허물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챙강~! 금속으로 된 물건이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왕관이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 음향은 고요한 신전내의 홀 안에서 불길하게 울려퍼졌다. 미카엔은 재빨리 쓰러지는 나를 붙잡았고, 나는 그의 품에 안겼다. "라비스!" 미카엔이 사색이 되어 나의 이름을 불러대었지만, 나는 그에게 대답하 기도 힘들었다. 나의 육체가 서서히 식어갔다. 나의 생명이 뭔가에 의해 죽어가는 것이다. 그 무언가가 나의 육체를 지속적으로 마비시켜 갔다. 그것이 나의 신체의 기능들을 멈추게 하였다. 미카엔은 신관들을 부르며 나를 치유하게 하려 했으나, 나의 상태를 살피던 신관들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왕비 전하께서는 독을 당하신 듯 합니다. 이미 독이 온몸으로 퍼져 있 습니다. 이것은 신성력으로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폐하. 저희는 외상만 치유가 가능하니..." 나는 그 와중에서도 생각해보았다. 내가 누구에게 독을 당한 것인지... 그러다, 아까 아침에 루이스에게 차를 건네받아 마신 것이 기억이 났다. 설마... 설마, 루이스가 나에게 독을 먹일 리는... 그럴 리가 없다. 루이스는 나를 친딸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루이스가 있는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러자, 뭔가 혼란스러운 듯 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루이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안색 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녀가 뭔가를 부정하듯 고개를 거칠게 가로저었다. 나는 그녀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루이스, 아니지? 아니지? 루이스가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루이스를 믿었는데... 루이스를 나의 친엄마와 같이 생각했었는데... 루이스는 아 니지?' 나는 맘속으로 그녀에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의 눈가에서는 루 이스에 대한 배신으로 받은 상처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뭔가 혼 란에 빠진 듯한 그녀의 눈빛이 번뜩하는 듯 하더니, 그녀가 갑자기 소리 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악~! 라비스님! 내가 라비스님을... 아악! 안돼! 라비스님! 라비스님!" 그녀가 미친 듯이 외치며 나에게 다가오려 했지만, 근처에 있던 호위기 사들이 그녀를 붙잡았다. 루이스가 발버둥을 쳤다. 그녀는 나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고 나에게 다가오기 위해 발악을 하였으나, 기사들에게 묶여 그 자리에서 버둥대는 모습이 되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죽음이 다가오는 고통속에서도 가슴이 찢어 지는 듯 했다. 너무나 고통스럽다. 미카엔은 나를 의사에게 데리고 가려 했지만, 나는 그를 만류했다. "미카...엔, 늦었어요... 이젠... 나, 미카엔... 에게 할 말... 이 있어요... 미 카엔... 사랑해요... 미안... 해요... 처음부... 터 사랑했는... 데, 그걸... 일찍... 알았더... 라면..." "라비스! 라비스, 넌 죽으면 안돼! 이대로 떠나면 널 용서하지 않을 거 다! 라비스, 뭐가 늦었다는 거냐?! 넌 죽지 않아! 누구도, 누구도 널 데 려가지 못해! 사신이라고 해도 감히 너를 나에게서 데려가지 못할 거다!" 미카엔의 은보라빛 눈동자에서도 눈물이 맺혔다. 그의 눈물이 나의 얼 굴 위로 떨어졌다. 그가 울다니! 미카엔이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 다. 그가 눈물을 흘리니깐 이상하다. 미카엔... 울지 말아요. 미카엔이 나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놓지 않으려는 듯 힘을 주어 나를 안고 있으면, 사신이 과연 나를 피해갈까. 나의 몸안에 퍼져있는 독물들이 나의 육체를 서서히 죽여갔다. 뜨겁게 돌던 피는 차갑게 식어가고, 조금전까지만 해도 기운차게 뛰던 나의 심장은 느리게 가냘프게 뛰었다.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듯. 죽음이 지척까지 다가온 것이 느껴졌다. 나는 너무 슬프다. 왜 가장 행 복한 날에 가장 믿고 사랑하는 존재에게서 죽임을 당해야만 할까. 너무 슬프고 괴로워서 내 영혼이 갈갈이 찢기고 멍들 것만 같다. 키리아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대로는 못 죽어! 널... 죽여버려야 하는데...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 로...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어야 해! 넌 그렇게 죽게 될 거야! 큭큭... 넌 그렇게 죽게 될... 거야!」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 그녀는 그렇게 죽어가며 나를 저주하더니... 정 말 나는 그녀의 말대로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다. 이것처럼 고통스럽고 괴로우며 슬픈 죽음도 있을까? 내가 믿었던 존재에게서 죽임을 당하며 가장 축복받은 날, 내가 사랑하는 존재에게 가장 큰 상처를 안겨 주어야 하는데... 이대로는 너무 슬퍼서 죽고 싶지가 않다. 나의 볼로 눈물이 쉴새 없이 흘러내렸다. 미카엔은, 뒤늦게 다가와서 나를 의사에게 데려가려는 이들을 뿌리쳤다. 아무도, 나를 건드리게 하지 못 하게 하려는 듯. 나는 미카엔을 바라보며 힘들게 입을 떼었다. 그에게 본래 나의 이름을 가르쳐 주고 싶다. 라비스라는 이름은 내가 본래 주인이 아니니... "미카엔... 기억해... 주세요. 난... 라비스... 가 아니고, 도현..." 거기까지 말한 나는, 뭔가 나의 머리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뭔가 잊혀졌던 기억이... 살짝 벌린 나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그러다, 나는 죽음의 문턱이 가까이 옴을 느꼈다. 나의 숨이 끊어지기 전 에 그에게 말해야 하는데... 그에게 말해야... "...아, 미카엔... 나는 미카... 엔을 만... 나러 온, 나의 영... 혼은 셀..." 하지만, 나의 숨은 거기서 끊어졌다. 그에게 이것만은 말하고 싶은데... 나는 미처 하고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내가 사랑하는 그의 품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나의 이름을 울부짖는 미카엔의 목소리를 들으며... *곧, 수능이 다가오는 군요. 이 글을 보시는 님들 중에서도 수능생 분들이 계시려나? 암튼, 수능 보시는 님들! 모두 수능 잘보세요. 아! 수능 보시는 님들은 공부하시느라 모두 바쁘시겠네요.ㅡㅡ; 암튼... 이번 편 보시고, 님들 저에게 돌 던지지 마세요! 훌쩍. 저도 너무 슬 퍼요. 우엥~~~!! ㅜ.ㅠ 1부-에필로그) 황금빛 꽃들이 떨어진다. 그들의 화려함이 짧은 순간으로 막을 내리는 것은 누가 정한 것일까. 눈물을 감춘 바람이 그 꽃잎들을 조용히 흩어버린다. 론티아의 작은 꽃잎들. 잠시의 만남들을 기억하며 그들이 맞이한 마지막 순간을 슬퍼하며 우리 모두는 기원한다. 또다시 순결한 모습으로 피어날 수 있기를. ================================================================ 경건한 창조신의 신전 안... 미카엔은 이제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라비스를 안고 있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너무도 아름다운 신부... 이미 숨을 거둔 그녀의 모습 이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아름다운 그녀가 이제는 싸늘한 시신이 되 어있다는 것이 미카엔은 믿기지가 않았다. 조금 전에 숨을 거둔 시신 같지 않게 라비스의 시신은 너무도 차다. 그래서, 미카엔은 더욱 가슴이 아프다. 신관들을 비롯한 홀 안에 있던 이들은 자신의 국왕인 미카엔에게 조 심스레 말을 걸었지만, 미카엔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못듣는 듯, 라 비스만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라비스가 숨을 거둔 순간, 미 카엔이 외쳤던 처절한 울부짖음이 아직도 신전 안에 남아있는 듯 했 다. 그들은 죽음을 맞이한 왕비보다는 자신의 국왕을 걱정하였다. 미카엔은 그렇게 하루가 다 지나갈때까지도 라비스를 꼬옥 안은 채, 그녀를 놓지 않았다. 신관들의 말로는 라비스는 아주 기이한 독에 당했다고 했다. 그 독은 육체에 치명상을 입혀 숨을 끊는 것이 아니 라, 그저 피를 차갑게 만들고 심장을 멈추게 하여 멀쩡한 상태에서 서서히 차갑게 식어가게 만드는 그런 독이라고 했다. 슬픈 연인... 미카엔과 라비스는 행복한 연인이 될 축복받은 날에 가장 불행한 연인 이 되어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물 짓게 하였다. 그 시점에 한 소녀가 밖에서 신전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브의 후 드를 깊게 눌러쓴 소녀였다. 그래서, 그녀의 모습은 자세히 보이지 않 았으나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만은 언뜻 보였다. "너만은 행복해 질수 없지. 라비스. 넌 엔카루스를 죽게 만들었어. 네가 아니었으면 그는 죽지 않았을 거야! 내가 가만둘 줄 알았어? 호호. 네 낭군은 내가 겪는 고통을 똑같이 느낄 테지. 잘가라구! 라비스 크로시벨." 그녀는 그렇게 중얼대다가, 어디론가 발길을 돌렸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 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람 한점 없는 청명한 날씨를 보였는데 지금 은 이상하게 바람이 거세고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내릴 듯 우중충했다. 마리는 이런 급변한 날씨에 의아해하며 그녀의 갈 길로 갔다. 그녀가 증 오하는 한 인물에게 앙갚음를 했으니, 이젠 그녀의 갈 길로 가는 것만 남 은 것이다. 그녀는 결심했다. 비록 정상적인 방법으로 엔카루스를 사랑하 게 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녀가 사랑하는 엔카루스의 결실이었던 자 이라스를 꼭 다시 일으키고 말 것이라고! 바람이 통곡이라도 하는 듯하다.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기라도 하는 듯. 라비스의 침실... 그녀의 침대 위에는 왕비의 일기장이 놓여 있었다. 라비스가 미처 서랍 에 넣어두지 못한 일기장이다. 아까 라비스가 보지 못한 일기의 내용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 내용은 이러하다. 「오늘은 달빛이 유난히 차게 보인다. 창문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달빛 을 바라보니, 셀레나가 죽기 전 나에게 했던 말이 생각이 난다. "아나! 너 일기 쓰는 거 좋아하지? 너에게 부탁 하나 할게. 네가 쓰는 일기장에 이런 말좀 넣어 줘! 1년을 넘기면 영혼의 그릇을 잃게 된다 고..." 1년을 넘기면 영혼의 그릇을 잃게 된다니... 그녀는 왜 나의 일기장에 그러한 구절을 넣기를 부탁했을까? 그녀는 정말 알 수 없는 아이다. 나는 내내 잊고 있던 그 구절을 이제야 생각해 보며, 그녀가 했던 말을 나의 일기에 적는다. 그리고, 나는 나의 일기장에 한가지 마법을 걸었 다. 나의 일기장은 셀레나만 볼 수 있도록 말이다. 물론, 그녀가 이 일 기장을 보게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녀를 제외한 누구든 나의 일 기장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셀레나가 보고 싶다. 불쌍한 나의 친구. 374년 8월 25일 아나테스 씀」 이것이 라비스가 마지막으로 보려던 일기장의 내용이었다. 끼익~! 라비스의 침실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라비스의 시녀 아나였다. 그녀는 프레야 왕비의 애칭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우연 아닌 필연... 아나는 침대에 놓여진 왕비의 일기장을 발견하였다. 이제는 주인 없는 방이 된 침실... 아나는 하루종일 울어서 퉁퉁 부어 붉어진 눈으로 그 일기장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펼쳐들었다. "이게 무슨 책이지?" 아나는 그 책을 펼쳐들어 일기장을 훑어보았지만, 그녀에게는 모두 백지만 보였다. 아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 일기장을 품에 안았다. 어쨌든, 이것은 그녀의 주인이었던 라비스의 물건이었다. 아나는 그 일기장을 품에 안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후 로히얀스 왕성의 지하 감옥에서는 한 여인의 시체가 나왔다. 그녀는 라비스의 유모 루이스였다. 그녀는 감옥 안에서 혀를 깨물어 자살한 듯 입에 피를 흘린 채 발견되었다. 지하감옥의 간수장의 말로는 루이스는 그날 이후 매일같이 미친 듯이 통곡을 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조용해서 가보니 그녀는 싸늘 한 시체가 되어있었다고 했다. 그 간수장은 루이스가 왕비 전하를 살 해한 범인이지만 참으로 안된 여자라고 혀를 쯔쯧 찼다. 라비스가 만약 계속 살아있었다면, 그녀는 여느 귀부인들보다 더 떵떵 거리며 살 수 있었는데, 왜 그런 짓을 저질러 이렇게 불행을 자초했는 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그의 동료들과 함께 잡담을 나누었다. 한동안 축체 분위기였던 로히얀스 왕성은 찬바람이 돌았다. 누가 이런 비극을 만들어 냈을까? 라비스의 시신은 영구 보존 마법이 걸려 유리관에 넣어진 채, 우선적 으로 왕성 안에 모셔지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라비스의 시신은 도둑을 맞았는지 감쪽같이 사라졌다. 미카엔은 모든 인력을 동원하여 라비스의 시신을 찾게 하였으나, 그들은 끝내 라비스의 시신을 다시 찾 지 못했다. 라비스의 시녀 아나는, 시신이 도둑 맞은 그날 우연하게 그녀를 보았다. 라비스와 같이 황금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 라비스보다는 약간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라비스로 착각되어질 만큼 그 외모는 닮아 있었다. 아나는 순간 라비스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하였으나, 그녀가 다시 눈을 부비고 그녀를 보았을 때는 그녀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아나는 생각했다. 아마도, 헛것을 본 것이라고... * 아우~ 에필로그 올리기 무섭습니다.ㅡㅡ; 어쨌든, 이것으로 1부 마칩니다. 체인지도 연재한지 벌써 반년이 다되어가는군요. 체인지 프롤로그 올린 날짜가 5월 8일 어버이날이니... 세월 참 빠르당~!ㅡㅡ;;;; 처음 프롤로그 올릴 때는 아무 생각없이 덜컥 올려놓고, 1편은 조금 뒤 에 올렸죠. 아마... 그러다, 1화를 쓰고 난 다음부터 애정이 붙게 되었죠. 그때는 설마 체인지가 이 정도까지 진척이 될 줄은 몰랐었는데, 훗~! 체인지 는 저도 꽤나 인내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작품입니다. 그동안 몇 번 이나 연중하고 싶었는데... 결국 여기까지 쭈욱 오게 되었으니... 하마터면, 라비스와 미카엔이란 인물은 세상(?)에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할 뻔 했죠. 체인지 2부는 쪼오금 뒤에 연재될 것 같아요. 그렇게 오래걸리지는 않습 니다. 아! 그나저나, 루이스가 불쌍하군요, 전 갠적으로 라비스나 미카엔, 엔카보 다는 루이스가 불쌍합니다. ㅡ.ㅜ 불쌍한...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15-11-2001 11:34 Line : 301 Read : 3638 [23] 체인지[2부] -프롤로그- -------------------------------------------------------------------------------- -------------------------------------------------------------------------------- Ip address : 211.213.134.15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체인지-2부》 (프롤로그) 오전까지만 해도 맑았던 푸른빛의 하늘. 갑자기 하늘이 얼굴을 가렸다. 세상이 보기 싫어진 모양이다. 그리고... 잔잔하던 푸른빛의 바다는 바람이 분노한 듯 몰아치고 거대한 파도가 인간들이 번영하고 있을 대륙을 한번에 삼켜버릴 듯 성을 냈다. 바다위에 떠있던 모든 어선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분노한 바다의 신에게 목숨을 갈구했다. 무엇이 바다를 분노하게 하였을까. 저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기 전, 어부들은 공포에 찬 눈으로 그 들의 바다의 신을 보았다. 거대한 파도가 수룡의 모습으로 가끔씩 탈바꿈하였는데, 어부들은 첫눈에 바다의 신이 분노하였음을 알 수 가 있었다. 쿠르르... 거친 파도소리가 마치 바다의 신인 수룡이 으르렁거리는 음성으로 기이하게 들렸다. 육지에 있던 자들 역시 분노한 신을 달래며 용서를 구했다. 그들 역 시 영문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 돌풍이 불어닥쳤다. 이 돌풍이 모든 곳을 휩쓸었다. 오늘은 국왕의 결혼식... 오늘 하루를 축복하는 것만 같던 청명한 날 씨가 갑자기 미친 듯이 화를 내니, 사람들은 두렵기만 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모시는 신의 이름을 한결같은 어투로 외쳤다. '오! ...신이시여.' 라고. 나무들의 가지가 꺾여나갔다. 청명한 오전의 날씨를 보고 아낙들이 널었던 빨래들이 허공에 춤을 추듯 날아다녀, 그것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허탈한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다. 우우우웅~! 거친 바람으로 인해, 밖에서 뛰어놀다 집안으로 들어온 아이들은 바람소리에 겁에 질렸다. 바람소리가 무척 기이하게 느껴졌던 것 이다. 마치,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애절한 통곡을 하는 것처럼. 행인들은 거친 돌풍으로 인해 얼굴을 거리고 급하게 피신할 곳을 찾았다. 오늘은 튼튼한 건축물을 가진 여관 주인들과 주점 주인들 은 입이 찢어지는 날이었다. 왠만한 여행자들이나 행인들은 우선 몸을 피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여관으로 들어가 몸을 쉬고, 하다 못해 맥주 한잔이라도 주문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북적이던 수도의 거리는 이제는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국왕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축제 분 위기였는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거친 돌풍이 모든 곳을 휩쓸었다. 누군가 위대한 자의 분노를 살만한 무서운 죄라도 저지른 것인가. 로히얀스인들은 알 수 없는 불안에 떨었다. 우우우우웅~!! 해가 넘어가고 사방에 어둠이 깊이 내려앉을 때까지도 누군가의 분노 와 통곡은 계속되었다. ◈ ◈ ◈ 로히얀스의 아름다운 왕비인 라비스 크로시벨이 마지막 숨을 거둔 그 날 밤, 자이라스의 수도에 한 여인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새하얀 신 부 드레스를 입은 한 아름다운 소녀를 안은 채. 그 여인은 라비스와 똑같은 황금빛 머리칼이 굉장히 화려하게 빛을 내 고 있었고, 이목구비 역시 라비스와 매우 흡사했다. 하지만, 그 외모는 라비스보다는 두세살 가량은 더 나이가 들어보였고, 그녀의 인상은 앳 된 소녀의 외모를 한 라비스보다 성숙해 보였지만, 그 특유의 화려함은 라비스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아직 떠나면 안돼요." 여인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녀의 가냘픈 목소리에는 뭔가 절박함이 느껴졌다. 무엇이 그녀를 절박하고 다급하게 만들고 있을까. 그녀가 안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 마치, 달콤한 잠에 빠져든 듯 여인 의 품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도저히, 오늘 로히얀스 왕성에서 도 둑맞은 라비스의 시신이라고 생각되어지지 않을 만큼. 라비스의 매끈한 이마 중앙에는 엄지 손톱만한 투명하고 하얀빛이 서려 있었는데, 이 빛은 그 힘이 다해가는지 조금씩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이것은 라비스의 영혼이 이미 안식을 맞이한 육체에서 빠 져나가지 못하도록 한 여인이 걸어놓은 봉인의 표식이었다. 만약 라비스의 영혼이 육체에서 완전히 빠져나가게 된다면, 여인은 인간의 영혼을 거두어들이는 사신따위보다 더욱 두려운 존재에게 라 비스의 영혼이 노출되고 말 것이다. 이곳 세계에 있지 말아야 할 현재 라비스의 영혼은, 이곳 세계의 육체안에 있음으로서 그 부당함이 가리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이 육체에서 빠져나가게 된다면 신계에 있는 고귀한 존재들에게 들 키고 말아 이 영혼은 저곳 어딘가의 세계로 내쫒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형벌이 기다리게 될지 몰랐다. "아!" 그때, 라비스의 이마에서 빛나던 기이한 빛이 마침내 그 빛을 잃고 사라지고 말았다. 여인은 절망스런 기색이 깃든 탄성음을 내며 더 욱 서둘렀다. 그녀의 능력으로는 라비스의 영혼을 봉인시키는 것이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곧, 라비스의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기 시작했다. 이미 죽음을 맞은 영혼이 육체에 이탈하게 되면, 사신이 죽음의 냄새를 맡고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라비스의 영혼을 알아챈 그들이... "아, 조금만 더..." 여인의 눈앞에 셀레네스의 신전이 보이기 시작했다. 로히얀스에서 이곳까지 공간이동해 온 그녀였지만, 더 이상 그녀에게는 신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의 힘은 오늘 오전 이후,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신전 근처에서부터 줄곧 라비스를 안고 걷다가, 그녀는 신 전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셀레네스?" 누군가 갑자기 그녀의 앞을 가로막더니, 대뜸 그렇게 물어왔다. 여 인은 흠칫 놀라며 라비스의 시신을 꼬옥 끌어안은 채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의 앞을 막아선 자는, 에멜랄드빛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청년 이었는데 투명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에 조각같은 이목구비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머리색과 같은 에메랄드빛의 그의 눈동자가 빛을 내 었다. 차갑기 그지 없어보이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반 듯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잘생겼다는 느낌보다는 차갑고 냉랭 한 이미지가 더욱 강해 보였다. "아. 셀레네스의 그림자로군! 두 번째 그림자까지 각성해 있다는 것 은 셀레네스가 봉인과 망각의 세계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이겠지? 그 소녀는..." 그의 에멜랄드빛 눈동자가 라비스에게로 향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 의 표정없는 얼굴이 라비스를 본 순간, 뭔가 의미를 알 수 없는 표 정이 돌았다. 휘잉~! 그때, 작은 바람이 슬쩍 다가와 정체모를 남자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했다. 머리카락 한올 한올에 에메랄드빛 보석가루를 뿌려놓 은 듯, 그의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둘다 화 려한 빛깔의 머리색이었다. 보통 인간들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아 름답고도 화려한 빛깔. "당신은...?" 여인의 목소리가 문득 떨려왔다.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잘알고 있었 다. 그래서, 그녀는 두려웠다.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그러기 위 해서는 선제공격을 해야 했다. 부족한 자신의 능력으로 무사히 도 망을 가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은 신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 여인은 고민하다가 라비스의 팔목에 단거리 공간 이동 아티펙트인 팔찌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신력이 없는 지금, 이것을 이용해서 라도 신전까지 공간 이동을 하면 안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신 족이라 해도, 자신의 신전이 아닌 이상 함부로 침입은 못한다. 비록 힘을 잃은 여신의 신전이지만, 그래도 한때는 위대한 여신들 중 하나 였으니. 파앗ㅡ!! 여인의 몸에서 수십개의 날카로운 빛줄기들이 쏟아져나와 신족 청년 을 공격했다. 물론, 그 청년은 여인의 공격을 간단히 막고 되돌려 그 녀에게 공격을 했으나, 여인은 아티펙트를 이용한 단거리 이동으로 신전으로 금세 사라졌다. 깨어나세요. 나의 여신이여! 저들의 통곡소리를 들으세요. 세상이 눈물을 흘립니다. 하늘이 울고 바다가 울고 그대를 사랑한 누군가가 눈물을 흘립니다. 나는 부활의 날을 기다립니다. 그 날을 예비하기 위해 나의 생명을 거두어 줄 누군가를 찾아갑니다. 나의 생명을 그대에게 드리기 위해. 그대를 만나서 너무 행복했노라고 말하지 못함이 깊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깨어나세요. 나의 여신이여! 그대를 사랑한 누군가를 위해 눈을 뜨고 다시 그 아름다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세요. ======================================================= 신전의 경건한 예배실 안에 고결한 새하얀 천의 신관복을 인은 고 위 여신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성스럽고 비밀 스런 의식을 다급하게 치루어야 했다. "당신은 정말 셀레네스의 대리자이신가요?" 나이 지극한 여신관이 금발의 여인에게 물었다. 아마도 그녀가 셀 레네스를 모시는 대신관인 모양이었다. "그대는 내가 셀레네스의 대리자임을 의심하는 건가?" 셀레네스의 그림자이자 분신으로 불리워지는 대리자를 의심하는 것 은 곧 그들의 여신인 셀레네스를 의심하는 것! 대신관은 당황하여 황급히 부인하는 태도를 취해보였다. 그러나, 금발의 여인은 더 이 상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저 소녀는 누구인가요?" 다른 여신관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들은 셀레네스의 예배실 정면에 걸려있는 은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디바인 마크(성표-신을 상징하는 물 건) 앞에 누워있는 아름다운 소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저 소녀는... 셀레네스를 모시는 너희들이 보호해야 할 고귀한 존재이 다." 여인은 잠시 망설이다 그렇게 답했다. 보호해야 할 고귀한 존재이라니... 그렇다면, 저 소녀는 셀레네스의 또 다른 분신이라는 말인가. 여인의 애매모호한 말에 여신관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소녀가 깨어나거든, 보호하라! 그리고, 그녀를 로히얀스 왕성까지 인도하라. 저 소녀의 이름은 라비스..." 여인은 라비스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가 무릎을 꿇는 것은 셀레네스의 디바인 마크에 대한 예인지, 아니면 라비스에 게 취하는 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신족에게 노출된 라비스를 무사히 보호하려면, 여인은 한가지 방책을 써야 했다. 그것은 라비스의 외모를 조금 바꾸는 것! 조금 전, 한 신족에게 라비스 영혼의 모습을 들켰으니 영혼의 그릇인 육체의 외모 를 조금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외모가 바뀐 육체 안에서 라비스 의 영혼은 신족이나 마족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여인은 잠시나마 라비스의 위치가 파악되지 않도록 라비스의 몸에 있는 모든 마법적 물건들은 모두 봉인해 버렸다. 그래야, 조용히 라 비스를 되살릴 수 있을 테니. 여인의 황금빛 눈동자가 라비스의 얼굴에 향했다. 그녀의 눈빛은 매 우 슬퍼보였다. 이것은 자신의 숙명... 그녀는 라비스를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쳐야 했다. "내가 가진 생명은 이제 그대의 것... 나는 당신의 대리자이자 또 하 나의 분신이며 그림자, 여러 얼굴들 중 하나... 나는 이제 그대를 위 해 소멸의 길을 걷습니다..." ◈ ◈ ◈ 계속될 것 같았던 돌풍은 며칠이 지나 어느 순간에 멈추었다. 하지만, 로히얀스 왕성 안에서 도는 어둡고도 차가운 슬픔의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중앙궁성의 한 복도에 한 남자가 서있었다. 은빛의 아름다운 머리칼을 늘어뜨린 그는 이곳의 국왕인 미카엔이었다. 그는 시종도 없이 홀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아내이자 로히얀스의 불운한 아름다운 왕비의 초상화. 역대의 국왕과 왕비의 초상화가 주욱 걸려있는 이 복도에 미카엔은 못박힌 듯 서서 자신의 아내의 초상화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 었다. 고귀하고도 아름다운 그의 얼굴이 초췌해 보였다. "라비스. 넌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린 것이냐? 보고 싶구나. 라비스... 사랑하는 라비스... 네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안다면, 사신들 이 지키고 있는 망자의 곳이라도 기꺼이 찾아갈 텐데...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다. 이런 운명을 만든 자를." 로히얀스 젊은 국왕의 감추어진 분노와 슬픔이 잠시나마 드러났다. 따 지고 보면, 그는 지난 1년 사이에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을 모두 잃은 셈이었다. 그의 부모와 아내... 게다가, 라비스는 그 시신마저 잃어버려 미카엔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미카엔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라비스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동안 감정이 가득했던 그의 은보라빛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행복했어야 할 그날 이후 시작된 악몽이 그치질 않았다. 아마도, 이 지 독한 악몽은 계속될 듯 했다. *2부 다시 올리게 되는 군요. 첫부분의 조금은 저번에 올린 거랑 같아요. 프롤로그는 3인칭입니다. ㅡㅡ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15-11-2001 11:36 Line : 158 Read : 3454 [24] 체인지[2부] 제1화 -다시 피어나다!- (1) -------------------------------------------------------------------------------- -------------------------------------------------------------------------------- Ip address : 211.213.134.15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다시 피어나다!) -1- [내가 가진 생명은 이제 그대의 것...] 어둡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있는 것일까. 아직까지 나에게 안식이 주어진 것이 아니란 말인가. 누군가가 미치도록 보고 싶다. [나는 당신의 대리자이자 또 하나의 분신이며 그림자, 여러 얼굴들 중 하나... 나는 이제 그대를 위해 소멸의 길을 걷습니다.] 눈물이 난다. 그가 흘린 눈물이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대를 위해 존재해 왔던 것처럼, 나는 소멸합니다. 나의 생명은 이제 그대의 것... 그대에게 주어졌던 육체의 그릇은 또 한번의 기 회를 갖습니다.] 지금 나에게 들려오는 저 목소린 무엇일까. 누군가 나를 위해 소멸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것 이 아니다. 아!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나로 인해 불행해지는 것은 싫다. 그것으로 인해 내가 행복해질 수 없을 테니... 누군가의 불행이 나의 불행을 낳는다. ◈ ◈ ◈ "으음..."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러자, 눈부신 빛이 나의 각막을 자극 하여 나는 얼굴을 살짝 찡그려야 했다. 왠지, 속이 텅 빈 듯 공허 하게 느껴졌다. 뭘까? 이 공허한 기분은... "아! 깨어났군요." 내가 누워있는 침대 곁에서 서있던 여자들이 나에게 말했다. 그녀 들은 모두 젊은 여자들이었는데, 하나같이 모두 흰색의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있었다. "라비스님? 괜찮으세요?" "누구...?" 그들 중 한 소녀가 나에게 묻자, 나는 가냘픈 목소리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싱긋 웃어보이며 약간 발랄해 보이는 어 투로 나의 질문에 답했다. "여긴 셀레네스의 신전입니다. 저는 이곳 신전의 견습 신관이구요." "셀레네스의 신전이라구요? 셀레네스의 신전이 있는 곳이라면... 그럼, 여긴 자이라스인가요?" "네. 맞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자이라스이라니... 대체 어찌된 일인지, 나는 한동안 갈피가 안잡혀 굳은 듯한 나의 머리를 열심 히 굴려야 했다. 나는 분명 로히얀스의 왕성 안에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내가 전쟁이 끝나고 아직 자이라스에서 로히얀스로 돌아가지 못했던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나는 분명히 로히얀스로 돌아갔었고 미 카엔과... 미카엔과 결혼식을... 아! 나는 순간 얼굴에서 핏기가 썰물 빠지듯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 다. 나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자, 여신관들은 나를 걱정스 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무언가 말을 건네려 하였으나, 그녀들은 그 럴 기회를 갖지 못했다. "우윽!!" 죽음 직전의 기억... 그리고 죽음이 가져다 주었던 지독한 충격이 나를 강타하여 나는 고통스런 신음성을 내뱉어야 했다. "아, 안돼! 루이스... 루이스가...? 거짓말이야! 루이스, 아니지? 아닐 거야!" 나는 발작하듯 비명같은 외침을 지르기 시작했고, 당황한 여신관들 은 나를 붙잡고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라비스님! 정신 차리세요!" "흑~ 거짓말이야! 미카엔... 미카엔... 정말 미안해요. 사랑했는데... 난 이대로 죽기 싫어요." 여신관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한 여인이 눈물 흘리며 발작 하는 나를 끌어안으며 나머지 여신관들에게 외쳤다. "모두 나가거라! 지금 이 소녀는 안정이 필요하니..." 그러자, 대부분 소녀들이였던 여신관들은 이런 나의 모습이 안타 깝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였는지 아쉬운 기색으로 나를 힐끔거리 며 방을 나갔다. 그렇게 그녀들이 나가자 여인은 나의 눈을 직시 하며 입을 열었다. "라비스님." "흑! 흐윽~!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아." 저 여신관이 왜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일까. 눈물이 나오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누군가 나의 심장을 쥐어짜고 있기라도 하는 듯. "라비스님, 정신 차리세요. 라비스님은 죽지 않아요. 지금 이렇게 숨 을 쉬고 살아계시잖아요?" "미카엔, 미안해요! 미카엔..." 그가 나로 인해 흘린 눈물 때문에 더욱 슬펐다. 그리고 믿었던 루이 스의 배신이 나를 지독히도 괴롭게 했다. 그렇게 믿었고 그녀를 의지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몹시도 흔들렸던 루이스의 눈빛, 그리고 그 녀의 절규가 나의 가슴을 후려팠다. "라비스님, 아직도 죽음의 충격에서 깨어나시지 못한 건가요? 죽음 직전의 기억이 라비스님을 고통스럽게 하나요? 그럼, 잊으세요! 라 비스님. 만약 그런 고통스런 기억이 있다면 차라리 잊어버리세요. 뭔가 상처가 있다면, 그것이 다 아물고 나서 기억해도 늦지 않아요. 이래서는 라비스님의 정신은 온전치 못하게 될 거예요. 고통스런 기 억은 당분간 잊어요." 그녀의 말에 문득 나는 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나 의 눈에 맺혔던 눈물 방울들이 아래로 뚝 뚝 떨어졌다. "잊어...?" 마치 최면에 걸린 듯, 나는 그녀의 말에 반응했다. 그러자, 여인은 자 상해 보이는 미소를 살짝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자상한 미소 는 누군가와 닮은 것 같아서 나의 마음이 절로 포근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계속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잊어요?" 내가 다시 묻자, 그녀는 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고개를 다시 끄덕였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요. 고통스런 기억은 잊고 행복한 것만 기억하세요." 그녀의 말에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말 을 이었다. "...그리고, 편히 쉬도록 하세요. 라비스님은 여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 이니 곧 좋아질 거예요. 몸이 어느 정도 좋아지면 로히얀스 왕성으로 가야겠죠? 셀레네스의 뜻이랍니다." "아! 로히얀스 왕성... 이젠 돌아가야 하겠군요. 전쟁은 끝났으니..." 희미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여인은 잠시 굳어 진 얼굴을 하였으나 이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잠에 들었다.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15-11-2001 11:39 Line : 179 Read : 3227 [25] 체인지[2부] 제1화 -다시 피어나다!- (2) -------------------------------------------------------------------------------- -------------------------------------------------------------------------------- Ip address : 211.213.134.15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2- 다시 잠들었던 나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끼익~! 내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때, 한 소녀가 쟁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마도, 나의 식사를 가지 고 온 모양이었다. "일어나셨네요?" "네." "저녁을 가지고 왔어요. 라비스님은 아직은 몸이 좋지 않으시니 죽을 드셔야 할 거예요." 그녀가 살짝 웃어보이며 말하자, 나 역시 그녀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 어보이며 죽 그릇을 받아들었다. "저어... 저는 로히얀스로 돌아가던 길이 아니었나요? 뭔가 자꾸 햇갈 리는 군요. 우리 군이 무사히 로히얀스로 돌아간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왜 저만 이렇게 신전 안에 머물러 있는 거죠?" "그... 그건, 라비스님이 로히얀스로 돌아가시려 하던 중에 갑자기 쓰 러지셔서 이렇게 신전 안에서 우선적으로 요양을 하고 있는 것이 아 닐까요? 저는 얼마 전에 막 들어온 견습이라 자세한 것을 몰라요." "아, 그래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저를 떴다. "어머나! 라비스님이 끼신 그 은반지 말이에요? 굉장히 예쁘네요. 가운데 박힌 자수정도 너무 예쁘고... 그거 약혼 반지인가요?" 문득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호들갑스럽게 물었고, 나는 겸 연쩍게 웃으며 답했다. "네, 그런 셈이죠." "어머, 좋겠네요. 이건 그냥 흔한 은이 아닌 것 같은데... 아! 팔찌랑 한 세트인가요? 아니네? 팔찌는 백금으로 만들어져 있군요. 정말 디 자인이 너무 예뻐요." 내가 하고 있는 아티펙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약간 불편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녀에게 지어보이고 있던 미 소를 잃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악세사리와 보석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 모양이군요." "네, 저는 개인적으로 반짝이는 것을 너무 좋아하거든요. 호호. 저는 가난해서 그런 비싸보이는 악세사리는 제대로 구경해 본적이 없었 어요. 아! 내 정신 좀 봐~ 신관님들이 시키신 일들이 잔뜩 쌓여있는 데, 제가 수다를 떨었네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급하게 방을 나갔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 습을 보며 피식 웃어보이다가 앞으로 흘러내려오는 나의 머리카락 에 눈길을 주었다. "응?" 나는 의아한 기색을 띤 음성을 내었다. 황금빛이어야 할 나의 머리색이 흑단같은 검은빛이었던 것이었다. 내가 언제 일루전을 걸었던가. 나는 의아해 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나는 정신이 너무 없 는 것 같다. "앗!"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본 나는, 짧은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나 의 외모가... 조금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다리가 풀려 후들거리는 몸을 억지로 지탱하며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거울을 응시했다. 놀란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이. 이게... 뭐야? 저건 누구지?"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경우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남자였던 내가 라비스 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던 거고, 지금은... 길다랗고 곧은 머리카락이 검은빛을 발하며 여전히 치렁치렁하게 등허리까지 흘러내려와 있었고, 여전히 새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런 면에서는 예전과 별다르게 달라진 점이 없 었지만, 분위기가 좀더 성숙하고 여성스럽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이목구비도 약간 부드럽게 변해 동양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때나 지금이나 눈이 아플 정도로 아름다운 미색은 여전했다. "기, 기가 막혀! 나 정말 꿈꾸고 있는 것일까?" 나는 볼을 살짝 꼬집어보았다. "아얏~!" 나는 숱많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또다시 일어난 이 황당한 일 에 머리를 쥐가 나도록 굴렸다. "서, 설마... 또다시 이상한 세계로 떨어지거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 아니야! 아까 여신관이 로히얀스라는 단어를 당연한 듯 언급했었으 니깐. 아, 안돼!! 이런 황당한 일이 왜 나에게 자꾸 일어난 거야?!! 또 아멘시타가 장난친 거야?! 뭐가 어떻게 돌아간 거지?" 나는 발광하듯 그렇게 처절한 독백을 하며 방을 왔다리 갔다리 하 다가, 정령의 이름을 불렀다. "아젠! 리엔!! 샤르으~!! 아멘시타, 아무나 빨랑 와!" 내가 그렇게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응답이 없자, 나는 흠칫 하다가 이곳이 신전 안임을 상기하였다. 원래 정령들은 왕성 안이 나 신전 혹은 마법사들의 탑 같은 곳들에서는 응답을 듣지 못했었 다. 결국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다시 방안을 왔다 갔다 하다가 신전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방문을 벌컥 열어제쳤 는데, 마침 내가 있던 방안으로 들어오려던 참이었는지, 상당히 엄 숙하게 생긴 아줌마가 문앞에 서있었다. "깨어나셨군요. 셀레네스님을 위해 감사 예배를 드릴 시간입니다. 라비스님은, 셀레네스님의 축복을 받으신 분이니 오늘은 감사 예배 를 드려야지요." "아, 네." 얼떨결에 답한 나는, 내 자신에게 생긴 황당한 일에 대해 뭔가 그 녀에게 물으려 하였으나, 그녀는 그대로 뒤를 돌아 어디론가 발걸 음을 향했다. 결국, 나는 기회를 봐서 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 를 따라갔다. 팔자에도 없는 감사 예배를 보기 위해 말이다. 그나저나, 무슨 감사를 드릴 것이 있다고 감사 예배를 드려야 된다 는 것인지... 게다가, 이곳 신관들은 어떻게 된 것인지, 나는 말한 기 억도 없는데 전부다 나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인지 정말 의아했다. 내가 그렇게 유명했었나? 나는 앞서 가는 여신관을 가까이 따라붙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제가 셀레네스의 축복을 받았나요?" 왠지 멍청하게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라비스님은 셀레네스님의 대리자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받으셨 습니다." "네에?" "셀레네스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세요. 셀레네스님의 대리자가 곧 셀레네스님이시니깐요." 이 아줌마 신관은 갈수록 알송달송한 얘기만 했다. 대체 무슨 소리 인지... "저어... 근데, 제 외모가 조금 바뀐 것 같은데, 어떻..." "그것은, 셀레네스님의 주신 축복에 대한 결과라고 생각하세요." "대체 무슨 축복이길래, 그 셀레네스인지 뭔지 하는 분은 왜 멀쩡한 얼굴까지 바꾸고 그러죠?" 나는 계속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여신관의 태도에 발끈하며 그렇게 외쳤다. 비록 조금이라지만, 그래도 하루 아침에 본의가 아니게 외 모가 바뀌게 되었는데... 나로서는 침착해질 수가 없었다. 물론 바뀐 이 외모가 마음에 안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여신관은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서더니, 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분은 라비스님께 생명을 주셨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본 인의 귀중하신 생명 말입니다. 물론 그 분은 셀레네스님의 대리자이 시지만 그 분 역시 고귀하신 분입니다." 저 여신관이 나에게 화를 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 적반 하장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누가 생명을 달라고 했던가. 그리고... 내 가 생명 따위가 필요했던가. 화를 내야할 사람은 나인데, 오히려 저 여신관이 화를 내고 있었다. 어쩐지... 오늘은 정말, 내가 라비스로 바뀌고 나서 그 두 번째로 황 당한 하루인 것 같다. 으으... 왕성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나를 보고 놀라게 될 미카엔에게 뭐라고 말해야 될까.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17-11-2001 04:29 Line : 250 Read : 3200 [26] 체인지[2부] 제1화 -다시 피어나다!- (3) -------------------------------------------------------------------------------- -------------------------------------------------------------------------------- Ip address : 211.213.134.23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3- 셀레네스 신전의 예배실이 들어선 나는, 예배실 정면에 디바인 마크가 걸려있는 모습을 보며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은으로 만 들어진 그것은 원형 테 안에 복잡한 모양의 표식이 자리잡고 있 었는데, 그 표식은 눈의 결정모양 같기도 했고 별모양 같기도 했 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대어(마법어와 상통한다)로서 셀레네스 이름의 약자가 되기도 하고, 조금 더 모양을 다르게 보면 드래 곤이란 뜻도 포함되고 있었다. 어쨌든, 복잡하고도 많은 의미가 담긴 성표인 듯 했다. 예배실 안에는 벌써 몇 명의 신관들이 모여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정식 신관들이자 고위 신관들인 듯 했다. 신관복들이 모두 품위가 있어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나는 그동안 셀레네스를 나 자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그것이 사실일 지도 몰랐다. 왕비의 일기장에 따르면, 라비스의 어머니 셀레나는 크리스티나와 동일인 물이었고 범상치 않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여신관들이 내게 셀 레네스의 축복을 받았다느니 어쨌다느니의 발언을 늘여놓고 있는 것을 보아서는 어쩌면, 그녀가 셀레네스일지도 몰랐다. 여신관의 말로는 내가 대리자에게 생명인지 뭔지를 받았으며 여신 의 축복을 받았다는데, 그것은 나의 영혼이 셀레나의 딸인 라비스 의 육체를 받아 라비스로서 또 한번의 생을 시작하게 된 것을 의 미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셀레네스의 대리자란 셀레네스의 딸을 의미하는 듯 했다. 그렇다면, 이 여신관들이 내가 라비스의 육체를 가진 다른 영혼이 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얘기가 되었다. 나는 새삼 여신관들의 얼굴 을 다시 쳐다보았다. 저 여신관들은 셀레네스가 행한 일의 어디까 지를 알고 있는 것일까.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본의 아니게 엉뚱한 곳에 끌려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나인데, 그것을 축복이라 운운 하다니... 그리고 우연하게 이곳 신전으로 오게 된 나에게 감사예배 에 참여하기를 요구하다니. 저 여신관들이 뻔뻔한 것인지 아니면 셀레네스가 뻔뻔한 것인지, 아무튼 기분이 나빴다. 하긴, 다른 면에서는 어쩌면 나는 셀레네스를 고마워 해야 했다. 이 곳에서 나는 미카엔을 만나고 루이스를 만나고 정령들을 만났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두 나에게서 소중한 존재였다. 결국, 나는 군소리 없이 감사예배에 참석하며 기도하는 척을 했지만, 속으로는 셀레네스에게 여러 가지를 따졌음은 두말 하면 잔소리였다. 물론, 셀레네스가 과연 이곳에 존재하고 있을 지는 의문이었지만 말 이다. 그녀는 본래의 라비스가 5살 때 죽었다고 했었으니. 여신이라는 그녀가 죽었다는 것이 꽤나 미심쩍었지만 셀레네스인 셀 레나는 힘을 잃은 여신이자 내쫓긴 신족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지금 은 그녀가 존재하고 있지 않는 것이 사실일 듯 싶었다. 그리고, 셀레 네스가 없는 지금은...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도 없는 듯 했다. 그날 밤, 방으로 돌아온 나는 한 여신관에게 내일 이곳을 떠나도 좋 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그녀는 나에게 정식 신관 두 명을 붙여주겠 다고 했다. 비록 정식 신관이라고 하나 힘을 잃은 여신을 모시고 있 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신성력은 쓸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그녀들은 그저 신성력만 쓰는 일반 신관들이 아니라 전투 신관이었기 때문이었다. 전투 신관이란, 신력에 중점을 두는 신 관이 아닌 신전과 일반 신관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전투력을 가 지는 것에 중점을 둔 신관들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 대에 누웠다. 사실, 나는 아젠샤르의 힘으로 로히얀스로 단숨에 날아 갈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런 나의 능력을 모르는 여신관들은 나 에게 호위 신관을 붙여주었고, 나는 몇번 거절 끝에 승낙을 한 것이 다. 똑, 똑! 문득 노크소리에 나는 들어오라는 말을 하였고, 이에 방문이 열리며 아까 낮의 호들갑스럽던 견습 신관인 소녀가 들어왔다. "아! 주무시려던 중이었나요?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해요." "괜찮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빙긋 웃어보이며 입을 열자, 그녀는 가져온 차와 꿀과자를 내려놓으며 친근한 태도를 보였다. 굉장히 붙임성이 좋은 소녀인 듯 했다. "잠깐 얘기나 할까 하구요. 내일이면 라비스님은 떠나시잖아요? 섭 섭하기도 해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라비스님을 찾아왔어요. 음... 너무 궁색한 변명인가? 호호. 사실은 전 라비스님과 친해지고 싶어 서 찾아왔어요. 전 라비스님처럼 아름답고 우아하신 분을 무척 동경 하거든요. 게다가 라비스님은 마치 왕족처럼 고귀해 보이세요. 오늘 밤은 라비스님과 친해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서 이렇게 용기를 내 었답니다." "하하... 그러셨어요? 잘 찾아왔어요. 실은 저도 잠도 안오고 심심하 던 차였는데 잘되었군요." 왠지 나를 추켜세우는 그녀의 발언에 쑥스러워지는 나였지만, 싫지는 않았다. 나도 아부에 약한 성격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마 음을 터놓는 또래의 친구가 없어서 은연 중에 친구가 하나쯤은 있었 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나였기 때문에 아부가 아니더라도 그 녀의 이런 접근이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라비스님은 올해 몇이세요? 라비스님 같이 미인이신 분은 약혼자 분 도 굉장히 멋지신 분이겠지요?" 약혼자라는 말을 들으니깐, 미카엔이 절로 떠올랐다. 그와 약혼까지 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준 이 실버반지는 정표이자 약속의 반지였 다. 그가 나를 정식 부인으로 맞겠다는 의미가 담긴 그런 약속 말이 다. 어쨌든, 나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녀가 했던 질문에 대한 성실한 답변을 했다. 그녀가 묻지 않았던 말까지 그녀에게 주절이 답했다. 아, 내가 이렇게 정에 굶주려 있었던가. 나는 내 자신이 마음을 준 누군가가 나를 배신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절대 안한다. 어쩌면 이것은 장차 왕비가 될 나에게 약간의 장애가 될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런 생각을 갖는다면 누군가를 끝없이 의심하게 되고 누군 가를 사랑하는 것이 매우 힘들어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불행 이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 미카엔과 루이스 그리고 나의 정령들은 언제 까지이고 나를 사랑해주리라 믿는다. 그러고 보니, 라비스가 된 뒤 로 너무 감상적이게 된 나인 것 같다. "전 올해 열여덟이에요. 그리고, 이 반지를 주었던 분은... 정말 멋진 분이죠. 이 반지는 그저 약혼반지가 아닌 많은 의미가 담긴 소중한 것이죠. 그 분 어머니의 유품이기도 한 반지이거든요." "아, 그래요?" 문득 그녀의 눈빛이 번뜩인다고 생각되었지만, 아주 찰나의 순간 그 눈빛은 사라져서 내가 잘못 본것이라 단정했다. 내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내려놓자,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전 열일곱살이에요. 이름은 레니라고 부르면 돼요. 이곳 신전에 들어 오기 전까지는 어느 마법사 댁에서 하녀로서 일을 했었죠." "근데, 왜 갑자기 셀레네스의 여신관이 되신 거죠?" "그건, 솔직히 말하자면 셀레네스 신전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우선 은 굶을 걱정은 없어서에요. 게다가, 셀레네스의 여신관들은 어차피 신성력을 사용못하기 때문에 신력을 쌓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명상할 필요는 없거든요. 이곳엔 저같은 애들이 많이 있어요." 그녀의 말에 따르자면, 이곳 셀레네스의 신전 안의 견습 신관들은 전 부 능력도 없는 가난한 소녀들만 우글거리고 있다는 얘기가 되었다. 여기가 무슨 불쌍한 소녀들을 거두어주는 그런 수용소도 아니고, 지 금까지 신전이 무너지지 않고 버텨온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여신의 힘을 빌릴 수 없는 이들은 누군가에게 축복을 해주거나 성수 비슷한 것을 만들어 팔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이곳 신전을 운영하기 위한 아무런 수입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왕실에서 도움을 주는 입장 도 아닌 듯 한데 말이다. 레니는 그 뒤로도 여러 가지 수다를 늘어놓았고, 비슷한 또래인데다가 그녀가 붙임성이 좋아서 그런지 나는 어느새 말을 터놓고 그녀와 많은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녀와 나는 친구하기로 합의까지 했으 며 레니는 나중에 나를 만나러 언제 한번 로히얀스로 찾아가겠다는 말 까지 하였다. 그렇게 얼마 동안 얘기를 하느라, 나는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 도 불구하고 꿀과자와 차를 말끔이 먹어치우게 되었다. 밤늦게 잠들은 나는 다음날 부스스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 었다. 온몸이 찌뿌둥하고 왠지 기분이 멍한 것이 아침 컨디션이 꽤 저 조하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나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어야 할 실버반지 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나는 손 가락에서 빠진 것이 아닌가 해서 침대 곳곳을 찾아보았으나 반지는 아무 곳에도 보이지가 않았다.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하고 있던 단거리 공간이동 아티펙트인 백금 팔지 도 없어져서 나를 더욱 당황케 했다. "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라는 말을 중얼거리려 하였으나, 어찌 된 일 인지 나의 혀는 굳어졌는지 마비되었는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 다. 그저, '아' 라는 음성 밖에는 낼 수가 없었다. 나는 당황한 얼굴로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 다. 눈앞이 그야말로 캄캄해졌다.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 던 나는 다시 한번 말을 중얼거리려 했으나, 계속 '아' 라는 음성 외 에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의 혀가 하루밤 사이에 마비되 어 버린 것이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가 나의 물건을 훔쳐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끔, 나의 혀를 마비시켜났다. 누구지? 이런 짓을 한 자가...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제밤의 일을 상기했다. '레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과, 나의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절 망감에 나의 몸은 떨려왔다. 순진하고 발랄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나에게 친근하게 대했던 레니의 가증스런 모습에 분노가 느껴졌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말을 할 수 없게 되면 정령을 부를 수 도 없고 마법 스펠도 캐스팅할 수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의사 소통할 수 있는 능력 뿐만 아니라, 나의 힘도 한꺼번에 잃어버린 셈 이 된 것이다. '바보 같아... 그 친근한 모습에 넘어가버려, 쉽게 그녀를 믿고 이렇 게 당해버리다니!' 갑자기 나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잠시나마 마음을 열었던 존재에게 발등을 찍히고 그 믿음을 배신당한 것에 나는 분노와 함께 문득 슬픔이 느껴졌다. 당연히 분노의 감정만 느껴야 할 일에 슬픔이 느껴지다니, 나는 의아했다. '언제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믿었던 존재에게서 독이 든 차를 마시고... 그리고... 아! 믿었던 존재? 루이스!' "아..." 나의 몸이 심하게 떨려왔다. 잠시 잊혀졌던 기억들이 마치 주마등처 럼 빠르게 나의 머리속에서 스쳐지나갔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기억 하고 싶지 않았던 기억들. 그 기억들이 한 순간에 다시 잊혀졌던 공간에서 기어져 나와 나를 사슬처럼 죄기 시작했다. 그 기억들의 내용은... 아아! 나는 전쟁을 끝내고 로히얀스로 돌아갔었다. 그리고 미카엔과... 미카엔과 결혼식을 했었다. 그 전에 루이스가 준 차를 마셨고, 나는 예식 중에 미카엔의 품에서... "아아..."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그가 흘리는 눈물을 보며. 언제나 자상했던 루이스의 흔들리는 눈빛과 그녀의 처절한 절규를 들 으며. 지독한 한기로 인해 육체적 고통과 영혼을 찢는 슬픔으로 괴로워 하며. 나는 죽음을 맞이했었다.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18-11-2001 01:23 Line : 179 Read : 3438 [27] 체인지[2부] 제1화 -다시 피어나다!- (4) -------------------------------------------------------------------------------- -------------------------------------------------------------------------------- Ip address : 211.213.135.137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4- 충격으로 인해 어지러워졌던 나의 마음이 어느 정도 수습이 되었을 무렵, 나는 레니를 찾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이렇게 눈물을 질질 짜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로히얀스의 왕비이며 인페르디아 전 쟁을 승리로 이끈 여자 영웅이었다. 그리고, 뱃사람들이 신으로 모 시는 바다의 정령 라센샤르마저 나를 섬기는 고귀한 나인데, 이런 일로 인해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진짜 바보가 되는 것이며 나에게 주어진 호칭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입을 악물었다. 비록 오만하고 거만한 생각 이더라도 나는 내 자신에게 자긍심과 갖고 그에 걸맞는 책임을 져 야 한다고 생각했다. 음... 그러고 보니, 나의 신분도 참 화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여신이었던 어머니를 가지고 있었고 실버드래곤인 시어머니에 하프드래곤이자 로히얀스 국왕인 남편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아! 역시 나는 고귀하군.'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 죽음의 충격과 고통스런 기억이 주는 혼란을 어느 정도 벗어나고 잊을 수가 있었다. 나에게는 스스로의 고통보다 는 왕비로서의 자긍심과 미카엔이 준 실버 반지가 더 중요했다. 그렇게 억지로 스스로의 고통을 묻어버린 나는, 우선 레니를 조용하 게 찾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호들갑스럽게 여신관들을 다 동원한다 면 그녀는 겁을 먹고 달아날 것이다. 그녀가 나에게 굳이 말을 못하 게 하는 약을 먹였다면, 레니는 이곳 신전에서 나갈 생각은 없다는 얘기가 되었다. 아마도, 그녀는 나의 신분을 알지 못하고 그런 대담한 짓을 저질렀을 것이다. 내가 셀레네스와 긴밀히 관계되어 있다는 것은 고위 신관들 만 한정적으로 알고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신전 구석 구석을 뒤지며 레니를 찾다가, 그녀가 신전 앞 정원 에서 대신관의 방에 놓을 꽃을 꺾고 있는 중인지 꽃들을 한움큼 들 고 서있는 것이 들어왔다. "아아앗!!" 너무도 흥분하고 분노해 있는 나였던 터라, 내가 말을 못하게 되었다 는 것을 잠시 까먹고는 그녀에게 소리질렀으나, 나의 입에서 나온 음 성은... '아아앗!' 이었다. 에구~ 왠지 스타일 구기는 나의 모습이었다. 아무튼 레니는 나를 보더니, 얼굴색이 변하고는 그대로 뒤를 돌아 뛰 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를 놓칠 내가 아니었다. 나에게는 무척 소중 한 실버반지가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앗!!"(거기 서!!) 나의 이러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레니를 열심히 달렸고, 결국은 신전의 영역까지 벗어나게 되었다. 그나저나, 저 조그만 소녀는 왜 이렇게 발 이 빠른지 도저히 못잡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신발 하나를 벗어 그것을 레니가 있는 쪽을 힘껏 던졌다. 비록 고상한 방법은 못되었지 만, 그래도 급한데 체면을 차릴 겨를이 없었다. 타악~! 하지만, 나의 한쪽 신발은 아쉽게도 레니를 교묘히 피해가서 그 옆에 우연히 서있던 남자 앞으로 날아갔다. '허억!' 다행히, 그 에메랄드빛의 머리칼을 가진 그 청년은 좋은 운동신경을 가지고 있었는지 내가 우려했던 불상사는 안일어났다. 그는 나의 신 발을 오른손으로 척 받아냈던 것이다. 왠지 쪽팔렸지만, 사과는 나중 에 하기로 하고 나는 그를 지나쳐 계속 달리려 했다. "잠깐!" 그런데, 그가 달리는 나를 잡더니 그렇게 외쳤다. 제길~! 바빠 죽겠는 데... 그는 엄청 잘생기고 조각같은 얼굴로 나에게 물어왔다. "혹시...?" "아아아~!"(나중에 말해요!) 그리고는 다시 달리려 하였으나, 그는 나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는 날 카로운 기색이 느껴지는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신전에서 나오셨습니까?" 이쯤에서 나의 이마에서는 힘줄이 하나 솟아올랐다. 레니는 저만큼 도 망가고 있는데 이 화려 번쩍한 머리색을 가진 녀석은 나를 잡고 놓아 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혹시, 이 녀석도 나에게 반한 것인가. "아앗!"(그래! 이거 놔! 번쩍 머리 녀석아~) 나는 성질을 팍 내다가, 그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 다. 그로서는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테니... 의아하기도 했을 것이다. "혹시 말을 못하..."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고급스런 상의를 잡아당 겨 그의 얼굴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이 녀석의 손길을 빠져나올 방법은 이 방법밖에 없었다. 그의 에메랄드빛의 눈동자가 의아한 빛을 띤 순간이었다. 뻐억~!! "윽!" 나의 단단한 머리는 그의 얼굴을 강타했다. 아! 오늘 여러 가지로 스타 일 구긴다. 나중에 미카엔에게 이런 추태는 절대 보이지 말아야 하겠다. 아무튼 그가 잠시 나를 놓은 순간, 나는 열나게 달려 번뜩이는 눈으로 레니를 급하게 찾았다. 그러다, 그녀가 저만치서 도망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녀는 마침 어느 골목으로 커브를 돌기 직전이었다. 나는 다시 잽싸게 나머지 신발 하나를 벗어들었다. 그녀가 저 복잡해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선다면 나는 그녀를 찾기 힘들었진다. 그래서, 또 한번의 고상하지 못한 신발 날리기를 시도했다. 휘익~! "꺄악!" 이번에는 그녀의 뒷통수에 정확히 맞추었고 나는 달려가 잠시 주춤해 있는 그녀를 붙잡았다. "아앗!"(내놔!) 나는 그녀의 멱살을 잡으며 외쳤지만, 그녀를 나를 확~ 밀쳐내더니 뻔 뻔스런 얼굴로 나에게 입을 열었다. "이거 놓으라구! 그깟, 은반지 하나쯤 불쌍한 소녀에게 적선했다고 치 면 되잖아? 아! 백금 팔찌도 있었지." 그녀의 말에 나의 몸이 분노로 떨려왔다. 그래서 나는 참지 못하고 그 녀에게 주먹을 날려 그녀의 얼굴을 사정없이 쳐버렸다. 여자는 때리지 않는다는 나의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나의 주먹에 맞아 뒤로 나자빠졌고, 나는 그 기세를 몰아 그녀 의 멱살을 다시 잡고는 마구 흔들어대며 소리쳤다. "아아 아앗!"(그건 나에게서 소중한 거야! 내놓으란 말야!) "켁! 이, 이거 놔! 그건 이제 나에게 없어. 이만 포기하는 것이..." "아아앗!"(어디있어? 이 나쁜 계집애!) 나는 더욱 세게 그녀를 붙잡고 흔들었다. "케헥! 그건 어제밤에 이미 도둑 길드 안으로 넘어갔단 말야. 원한다면 거기서 받은 돈 줄 테니깐. 이거 놔줘! 그 은반지는 생각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았어." 퍼억! 결국, 나는 그녀에게 다시 손찌검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의 코에 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코피가 터진 것이다. 나는 그녀를 붙잡은 채. 벽돌 담장에다가 손가락으로 글씨 모양을 써 보였다. 그녀에게 반지의 행방을 묻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그녀는 켁 켁! 거리며 나의 물음에 간신히 답했다. "그, 그건 아마도 로히얀스로 건너가게 될 거야. 로히얀스는 자이라스 보다 잘사는 나라이고 돈많은 귀족들도 많으니깐, 보석류는 그곳에 위 치한 길드로 넘어가게 되어있어. 이만 포기하는 것이 어때? 한번 길드 안으로 들어간 물건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찾아."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다시 두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러나왔다. 다시 찾을 수 없다니... 외지에 혼자 남겨진 외톨이가 되어선지, 지금 나의 상황이 너무 서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여기서 무너지면 안되었다. 나는 미카엔의 옆을 지키는 고귀한 존 재이다. 무슨 짓을 해서든지 그 반지를 되찾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나 에게 맞아 헤롱거리는 그녀를 붙잡고 다시 신전쪽으로 끌고 갔다. 길드에서 반지를 되찾으려면 싫더라도 레니를 로히얀스까지 끌고 갈 수 밖에 없었다.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19-11-2001 21:51 Line : 217 Read : 3016 [28] 체인지[2부] 제2화 -시작된 여정- (1) -------------------------------------------------------------------------------- -------------------------------------------------------------------------------- Ip address : 211.208.73.1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시작된 여정) -1- 하늘은 구름 한점 없고, 붉은 태양의 열기는 강렬해져 이젠 완연한 여름의 날씨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럴 땐 아젠샤르를 불러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는 에어컨 노릇을 시켜야 제격인데, 이젠 그럴 수가 없어 왠지 슬프다. 정령들은 내가 부르는 이름 소리에 반응을 하고 부름에 답하는데, 이젠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셀레네스의 대신관이 내어준 여비, 10루실 골드(5루아 골드=1 루실 골드=여관 하루 숙박비 3루아 골드)와 여행용 신관복을 받아 입고는 여행길에 올랐다. 대신관은 두명의 정식 전투 여신관을 붙여주며 여행을 하는 동안 성 지 순례를 떠나는 신관으로 행세하라고 당부했었다. 그래서, 내가 그 이유를 물으니, 그녀는 셀레네스의 뜻이라고만 말하며 자신도, 잘 모 른다고 답하였다. 신관들은 대답하기 곤란한 답변을 해야 할 때면 무조건 신의 뜻이라 고 둘러대는 경향이 있는 모양이었다. 툭하면 셀레네스의 뜻이라고만 하니... 신전을 나오자 마자 나는, 밧줄에 묶인 채 투덜대는 레니에게 눈길을 주고는 찌릿! 그녀의 얄미운 낯짝이 뚫어지도록 쏘아보았다. 그러자... "흥! 얼굴은 곱상하게 생겨서는 신발이나 던지고 주먹부터 나가는 고 상하지 못한 성격이라니... 성스런 여신관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가 있 어? 째째하게 은반지 하나와 팔찌 가지고 이렇게 수난을 줄 수가 있 냐구?" 그녀의 뻔뻔함은 그 도가 지나쳐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실버 반지가 나의 약혼반지이고 이 반지를 준 존재의 어머니 유품이라는 것까지 레니는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러한 사실을 싸그 리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퍼억! 또다시 나의 주먹이 나갔다. 아아, 역시 난 레니의 말대로 주먹부터 나 가는 성격이었던 모양이었다. 레니 때문에 없던 성질도 마구 도진다. 타악! 퍽! 빠악~! 내가 레니의 두꺼운 면상을 강타한 음향을 뒤이어 또다른 고상하지 못 한 음향이 이어졌다. "레니! 라비스님께 그런 무례한 발언을 하다니? 용서를 구하지 못할 망 정, 그런 뻔뻔한 발언을 하라고 대신관님께서 너를 그렇게 가르쳤더냐?" 검집에 들은 레이피어로 레니의 머리를 툭 내리친 이는, 나와 이제 막 여행길에 오른 스무살 먹은 전투 여신관 아네샤였다. 그녀는 늘씬하고 큰 키에 검술로 단련된 군살없는 몸매를 가지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왠지 사악해 보이는 미소와 함께 레니를 사정없이 두들긴 다른 한 전투 여신관은 열아홉 먹은 붉은 머리를 가진 에스라였는데, 그녀는 검술보다는 날렵한 몸짓으로서 격투기에 능한 털털한 성격의 소녀였다. "씨잉~" 레니는 울상을 지어보였다. 그녀의 선배이자 정식 신관인 이 두 여신관 은 그녀를 감시하는 역할과 함께 그녀를 가끔 두들기는 임무도 맡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내가 던진 신발에 얻어맞은 후로 레니는 완전 히 동네북이 되어 있는 셈이었다. 솔직히, 소녀에게 이런 폭력을 행사하 는 것은 내 성격상 꺼림직한 일이었으나, 그래도 나는 너무 분하고 원통 했다. 흑~! 내 실버 반지와 일어버린 나의 목소리는 다시 찾을 수 있을 까. 그런데, 그때! "이봐요!" 세명의 소녀가 가련해(?) 보이는 한 소녀는 괴롭히고 있는 듯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는 우리 앞에, 그때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이 불쌍한 소 녀는 구하기 위해 나타난 정의의 기사는... 흠, 아닌 듯 했다. 눈을 반짝이며 애써 가련하고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니는 그에게 자신이 억울하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음을 강하게 내비쳤으나, 그 남자 는 그의 특유의 눈빛일 듯한 냉랭한 눈길로 레니를 한번 슥 봐주고는 그대로 지나쳐 나에게 다가왔다. "아앗?"(당신은 아침에 신발을 받아냈던 번쩍 머리?) 내가 짐작하건데, 그는 아예 신전 근처에서 진을 치고 나를 기다리고 있 었던 것 같았다. 으흠... 역시, 저 녀석은 나에게 반했던 것이다. 아까, 그 는 나에게 이곳 신전에서 나왔냐고 말을 걸다가 머리 박치기를 당했었는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는 워낙 다급했고 정신이 없어서 그런 무례를 범한 나였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 역시 말을 못하시군요. 이곳 신전의 여신관이십니까?" 그는 약간 실망한 기색으로 나에게 그렇게 말을 걸었다. 이에, 나는 이 마에 힘줄이 하나 돋는 것이 느껴졌다. 말을 못해서 실망이라는 걸까. 그렇지 않아도 레니 덕분에 혀가 굳어 말을 할 수가 없어 열이 받는데 저 녀석의 태도가 왠지 나의 심기를 건드렸다. 아무튼, 나는 그의 질문에 대신관이 했던 신관 행세를 하라고 했던 당부 를 떠올렸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렇군요. 아까는 신관복을 걸치고 있지 않아 여신관이신 줄 몰랐습니 다." 그는 더욱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하긴, 그는 실망스럽기도 할 것이다. 여신관들은 신만을 모시며 결혼따위는 하지 않는 순결하고도 고결한 존 재였으니... -아! 레니는 순결하고도 고결한 존재에서 예외이다- 결혼이 나 연애같은 것은 꿈도 꾸지 말아야 했다. 게다가, 나는 말 못하는 벙어 리라는 입장에 있으니 저 화려번쩍한 머리의 청년은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한 셈이었다. 기껏 반한 여자가 벙어리에 여신관이니. 나는 내멋대로 그의 실망한 기색의 이유를 확대 해석하며 그를 동정했 다. "와우~ 엄청 잘생겼는데? 라비스님에게 반한 걸까? 내가 신관이 아니었 으면 꼬셨을 타입인데... 아무튼 이봐요! 꿈깨세요. 라비스님은 이래봬도 고귀하신 분이라구... 아얏!" 머리칼이 여름 햇살로 인해 아름다운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며 여름임에 도 불구하고 투명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가 왠지 이질적으로까지 느껴지 는 이 잘생긴 청년을 보며, 에스라는 고결한 여신관답지 않게 감탄하다가 아네샤에게 어딘가를 꼬집힌 듯 짧은 비명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그는 에스라의 노골적인 발언에 약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가 에스라가 '고귀하신...' 이라는 말을 꺼냈을 무렵엔, 그는 날카로운 듯한 눈빛을 보였다. "호호. 라비스님은 차기 대신관이 되실지 모르는 고귀한 분이시거든요." 아네샤가 뭔가 만회를 하려는 듯 그렇게 웃으며 말했고, 번쩍 머리 청년 은 에메랄드빛의 눈동자로서 나의 투명하고도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동자 를 직시하며 나에게 다시 질문을 했다. "그럼, 혹시 이곳 신전에 황금빛의 머리칼을 가진 소녀가 있습니까?" 보석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그의 화려한 머리색이 예전 나의 황금빛 머리 칼처럼 윤기가 흘러 빛을 발하다 못해 금속성의 빛을 띠었다. "저희 신전에는 황금빛의 머리칼을 가진 소녀는 없습니다만, 왜 저희 신 전에서 그런 소녀를 찾으시는 거죠?" 그의 질문에 아네샤가 다시 나섰다. 우리중에서 제일 연장자라 그런지, 차분하고 큰언니와 같은 이미지가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제가 꼭 찾아내야 할 존재가 셀레네스의 신전 안에 있을거라 생각되어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신관님들께 여쭈게 되었습니다. 라비스님이시라 고 했습니까? 아름다우신 분이군요. 그녀와 왠지 많이 닮았습니다. 그래 서, 약간의 기대를 갖었지만, 당신은 아닌 것 같군요. 그녀는 적어도 이곳 의 여신관이거나 벙어리는 아닐 테니깐요. 그럼..." 그는 정중한 어투로 나에게 말을 마치고는 미련없이 발길을 돌렸다. 정 중한 태도였지만, 왠지 냉랭하리만큼 차가운 인상이었다. 인간적인 감정 이 결핍된 듯한 그런 차가움 말이다. 그나저나, 꼭 찾아내야 할 존재라니... 나는 어디론가 향하는 그의 뒷모 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하는 황금빛 머리칼의 소녀는 나를 말하는 것 일듯 했다. 내가 언제 기억 못하는 사이에 저 녀석을 알았던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녀석은 대체 누구이길래, 나를 꼭 찾아내 야 한다는 것일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사 라지는 그를 붙잡아 누구인지, 도대체 왜 나를 찾고 있냐고 묻고 싶었 지만, 내 속에 잠재된 뭔가 알 수 없는 본능이 그러지 말 것을 경고하 고 있었다. 자이라스 국경까지 가는 마차를 빌리고 마부를 고용한 우리 일행은 마 차 안에서 느껴지는 일정한 진동을 느끼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 다. 나는 들고 있던 책 한권의 크기만한 얇은 석판에 분필 비슷한 것으로 글자를 쓰고는 그것을 레니에게 보였다. 「너 나에게 쓴 독이 뭐야? 영영 나을 길이 없는 거야? 만약 내가 영영 낫지 못한다면, 나도 너의 혀를 뽑아내 주겠어!」 내가 그렇게 독살스런 내용의 글을 썼지만, 뻔뻔함의 대가인 레니는 아 랑곳 하지 않았다. "라비스! 너 정말 악필이구나? 그나저나, 이 밧줄은 언제 풀어줄 거야? 우린 친구잖아? 흑!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솔직히 그깟 돈 몇푼 정도는 열심히 일해서 물어주면 되잖아? 난 돈이 너무 궁했단 말야. 아까, 에스라님이 너보고 고귀한 존재라고 말한 것을 보아서 너는 귀족의 딸인 듯 한데, 이건 너무한 거 아냐? 넌 찢어질 듯 가난했던 나 의 심정은 몰라. 귀족인 너에겐 그깟 보석들은 아무것도 아닐 거 아냐? 그런데, 이런식으로 가녀린 소녀를 핍박하다니!" 그녀의 말에 나는 도끼눈을 하고는 그녀를 쏘아보았다. 친구? 나는 친 근한 태도로 나에게 접근하고 고통을 주었던 점은 정말 용서 못할 것 같았다. 아무리 돈이 궁해도 그렇지...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그러고 도 친구라는 말이 나올까? 실버반지는 나에게서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나와 미카엔을 연결시켜 주는 하나의 고리였다. 그리고, 지금 모습이 변한 이 시점에서는 나를 증 명할 만한 물건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는 나에게서 소중한 것을 훔쳐 내다 팔고는 벙어리로 만들었다. 나는 광분하며, 그녀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아앗?!"(그럼, 너는 그깟 돈 몇푼 때문에 나에게 상처주고 속이고 벙어 리로 만들었던 거냐?!) "케헥! 이, 이거 놔! 난 너에게 크게 잘못한 것은 없어! 내가 너에게 먹 였던 것도 극약이 아니야! 그건 단순히 많이 섭취하면 혀가 굳어지는 현상이 생기는데, 그런 건 며칠 지나면 다시 저절로 풀려! 진짜야..." 그녀의 말에 나는 부여잡고 있던 그녀의 멱살에 손을 스르르 놓으며 눈 을 크게 떴다. "아아?"(정말이야?)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20-11-2001 08:30 Line : 194 Read : 3141 [29] 체인지[2부] 제2화 -시작된 여정- (2) -------------------------------------------------------------------------------- -------------------------------------------------------------------------------- Ip address : 211.208.73.1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2- "이아아 아어..."(미카엔 바보...) 레니의 말에서 약간의 희망을 발견하게 된 나는, 마비된 혀가 더욱 빨리 풀릴 수 있도록 열심히 혀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 니, 계속 '아' 발음만 낼 수 있던 나였는데 이제는 '이' 발음과 '어' 발음도 간혹 낼 수 있었다. 이거, 원! 갓난 아기가 옹알이 연습하는 것도 아니고... 왠지 스타일 구긴다. "킥킥킥.... 푸훗!" 나의 이런 노력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레니는 눈물겨운 내 모습이 웃 겼던지 계속 킥킥거려 나의 심기를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아!!"(야!!) 나는 핏대를 세우며 레니에게 외쳤다. 그러나, 옆에 있던 두명의 전투 여신관들마저도... "풋!" 웃음을 터뜨렸다. 쳇~! 이게 뭐람? 나의 우아하던 이미지가 무너진다. 물론 진작에 무너졌지만, 아직도 내가 우아하다고 믿고 있는 나였다. 참으로 슬픈 착각이었다. 예전에도 이렇게 종종 망가진 모습도 보이긴 했지만 요즘은 그 강도가 더욱 심한 듯 했다. 이게 다 레니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그녀가 아니었 다면, 나의 죽음 직전의 기억도 어쩌면 기억해 내지 못했었을 것이다. 레니의 배신어린 행동으로 인해, 내가 루이스를 기억해 냈던 것이고 죽 음 직전의 고통을 기억해 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 던 기억들... 하지만 기억해 내야 하는 기억들... 그 고통은 어차피 내가 다 감수해 내야 하는 것들이었다. 이거 레니에게 감사의 말을 해야 하나? '기억을 찾게 해주어서 고마워!' 하고 말이다. 어쨌든, 갑자기 미카엔과 루이스가 생각났던 나는 다시 심장이 죄어옴 을 느꼈다. 나의 눈물 방울들이 볼을 타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때의 생 각만 떠올리면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나는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다가, 문득 레니가 웃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답지 않게 진지해 보였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나는 사생아야..." 갑자기 레니가 무거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내가 그녀에게 눈길을 주자 레니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어느 백작의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였어. 그래서 나 역시 그 집에서 하녀로서 일했는데... 어머니는 그곳 백작부인에 의해서 돌아가셨어. 백작 늙은이가 어머니에게 추근대었거든. 훗... 그래서, 나는 그 백작부인을 죽여버렸지. 난 귀족이 싫어. 라비스. 왕족은 더욱 더 싫구... 있잖아... 내 여동생은 돈만 있었다면 죽지 않았을 거야. 그 애는 돈만 있으면 나았을 한심한 병에 걸려 죽었거든. 우리 집은 찢어질 듯 가난했어. 라비스! 네 가 고민하고 있는 것이 뭐지? 겨우 약혼 반지? 그건 귀족 영애들만이 할 수 있는 고민이겠지? 난 몸도 팔아본 적도 있어. 내 여동생이 죽어가면 서도 부드러운 빵 하나 못 먹을 때... 어머니는 고지식해서 그런 더러운 짓은 죽어도 못하거든. 그래서, 내가 했지. 그리고, 내가 그 돈으로 약과 빵을 사가지고 갔을 때는... 동생은 죽어있더라. 그때 즈음에 나는 도둑 길드의 한 녀석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그에게 많은 것을 배웠어. 나 같은 애가 세상을 사는 방법을...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우 정이나 의리도 아닌 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녀의 충격적인 말에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러자 그녀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리며 나에게 말했다. "왜? 넌 이런 얘기는 동화책에나 나오는 슬픈 얘기인 줄 알았어? 하긴, 넌 귀하게 자랐을 테니, 나의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할 테지. 내가 왜 이 런 얘기를 하는지 알아? 난 네가 싫어! 넌 귀족의 딸에 얼굴 역시 빼어 난 부족한 것이 없는 애지. 그래서 싫어! 그리고 네가 한심해! 넌 지금 자신이 무슨 비극의 여주인공이나 된 것쯤으로 알고 있겠지?" 나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무거운 침묵이 우리 사이에서 잠시 흘러갔 다. 아네샤는 조용한 얼굴로 우리를 지켜볼 뿐이었고 에스라는 초조하 고 이런 분위기가 불편하게 느껴졌는지, 꽤나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 있 었다. 잠시 후, 나는 그녀에게 손을 가져가 그녀를 묶은 밧줄을 풀어주었다. 물 론, 그녀의 비참한 과거에 마음이 약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그녀를 풀어주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안타까웠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안타까웠고 한심했다. 나는 석판에 글씨를 썼다. 「네 말을 들으니, 내가 한심해지는 것 같아. 그래! 너의 입장에서 보면 약혼 반지 따윈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닐 테지. 하지만...」 나는 거기까지 쓰고 그녀에게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글을 쓴 석판을 레니에게 보여주고는 그것을 다시 대충 쓱쓱 지워 이어서 계속 글씨를 썼다. 「넌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어! 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돈을 위 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테지? 사실, 넌 막대한 손해를 보고 있는 거야. 그 실버반지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를 지녔거든. 그건 대 단한 아티펙트인데, 마법사들에게 팔면 엄청 비싸! 근데, 네가 받은 돈은 얼마이지? 우리 같이 그것을 찾자! 그러면, 나는 너에게 많은 돈을 줄 수 도 있어. 네가 경멸해 마지 않는 나는 돈이 아주 많은 신분이거든.」 그러자, 레니의 안색이 바뀌었다. "아앗! 멍청이! 난 역시 아직 멀었어! 그런 비싼 물건을 못알아보고 그 대로 싼값에 팔아넘기다니! 좋아! 라비스. 협력할게. 난 그 반지가 어디 로 흘러갈 건지 대충 짐작하고 있어. 정말 많은 대가를 치뤄줄 거지? 그리고, 그동안 나를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은 다 네가 해야할 몫이야!" 그녀는 아까의 진지모드가 다 어디로 갔는지 금방 헤헤거리며 나에게 웃어보였다. 나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 나는 그녀를 믿지 않는 다. 그녀는 분명 반지를 찾더라도 나에게 그것을 넘기지 않고 자신이 꿀 꺽하거나 나의 뒷통수를 칠 것이다. 훗... 그래도 뭐, 상관은 없었다. 우선, 급한 것은 반지를 찾는 것이 중요 하니. 레니는 반지를 찾기전에는 나를 배신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한가지 다짐을 하였다. 다시는 울지 않기로... 이런식으로 우는 것 은 역시 한심했다. 그것은 너무 나약했다. 나는 강해져야 했다. 어쩌면, 이것은 내가 훌룡한 왕비가 되기 위한 시련일 지도 몰랐다. 그동안 정령들에게만 너무 의지했던 것 같았다. 이젠 나는 스스로의 힘 으로 뭔가를 해결해야만 했다. 너무 힘겨워서 스스로 무너지고 싶을 때 는 억지로라도 스스로 자긍심을 가져야만 했다. 비록 오만하더라도 말이 다. 물론, 나는 자긍심 뒤에 올 내가 지어야 할 책임은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레니! 난 너에게 가르쳐 줄 거야.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 많다는 것을... 네가 배운 배신으로서 세상을 사는 방법은 한동안은 네가 밟고 올라선 존재 위에서 날개를 펼칠 수 있겠지. 하지만 짧아! 넌 언젠가는 떨어질 수 있을 거야. 너와 같은 강한 부류에 의해서... 나는 그 점을 너에게 가 르쳐 주겠어.' 속으로 뭔가 계산을 하고 있을 레니를 바라보며 내가 한 생각이었다. 아마도,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친구를 사귀었다고 생각했던 그녀였기에 쉽게 미련이 버려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많은 일이 있었던 오늘 하루가... 파랗던 하늘이 이젠 붉은 황금빛으로 빛났다. 석양이 마치 뭔가의 부활 처럼 느껴졌다. 붉은 황금빛이 이렇게 숭고하게 느껴졌던 적은 미카엔과 의 바닷가에서 보았던 석양 외에 두 번째가 되는 것이다. 그때의 석양은 뭔가 꺼져가고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오늘의 석양 은 기이하게도 그 반대의 느낌이었다. 왠지 기나긴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우리 일행은 어느덧 자이라스 국경 근처까지 오게 되었다. 여기까지 오게 된 시일은 모두 3일 밤낮이 걸렸다. 생각보단 별다른 큰일이 없이 여기 국경까지 오게 된 것 같아 나는 안심 이 되었다. 사실, 지금까지 아예 아무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아네 샤와 에스라가 나서서 모두 무사히 넘겼다. 그녀들의 실력은 생각보다 출중했었다. 여기사로서 활동해도 무방할 정도 였다. 숲에서 만난 도둑떼를 그녀들은 모두 혼쭐을 내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 도둑들이 오합지졸이었긴 했다. 그들은 인페르디아 전쟁 후, 더욱 흉흉 해진 자이라스의 결과물들이었던 것이다. 평범한 농부들이 도둑으로 그 직 업을 바꾼 어설픈 도둑들... 왠지 마음이 쓰렸다. 아네샤의 말로는 자이라스의 국왕은 며칠 전에 자살 했다고 했었다. 그는 엔카루스가 심어놓았던 마법 도적단의 일원이었던 존 재... 아마도, 엔카루스에게 충성했을 그는 치욕스런 회담 이후에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듯 했다. 그 후로, 로히얀스의 아세룬 공작이 자이라스로 보내져서 이곳의 국왕 비슷한 노릇을 하고 있는데, 아직은 자이라스의 구석 구석까지 미카엔의 손길이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인심이 흉흉해져 있는 것을 보면... 내가 힘을 되찾으면, 자세히 알아보겠는데,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우리 일행은 국경 근처에 위치해 있는 한 여관으로 들어섰다. 예전과는 달리 로히얀스와 자이라스로의 통행이 활발해져 있어서인지, 이곳 여관 은 대부분 크고 고급스런 여관도 많았다. "아! 배고픈데, 식사부터나 할까요?" 에스라가 쾌활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외쳤다.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21-11-2001 10:15 Line : 159 Read : 3486 [30] 체인지[2부] 제2화 -시작된 여정- (3) -------------------------------------------------------------------------------- -------------------------------------------------------------------------------- Ip address : 211.37.39.209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3- 우리는 돈을 아껴야 함에도 불구하고, 레니는 비싸고 화려한 여관으 로 갈 것을 우겼지만, 나는 그녀의 주장을 과감히 묵살하였다. 그리고 조금은 허름한 여관으로 들어섰던 우리는 에스라의 제안대로 1층의 식 당에서 식사 주문을 하였다. 사실, 나도 왕성 생활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지 화려하고 고급스러 운 여관에서 묵고 싶었던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나는 일부로 조금 허 름한 이곳을 택했다. 이곳이라면 국경을 오가는 용병이나 여행자들이 많이 묵고 있을 것이니, 자이라스와 로히얀스 사이에서 돌아가는 나 라 사정의 입소문을 어느 정도 주워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니가 비싼 정식으로 주문하는 것을 미처 말리지 못하며, 나는 열심 히 사방 팔방으로 귀를 열어 식당 안에서 떠들어대는 이들의 말소리 들을 옅들었다. "며칠 전에 정말 굉장했다며? 바다에서 갑자기 폭풍이 미친 듯이 불 고 로히얀스 전역에서도 돌풍이 불었다고 하더군. 게다가 각지에 있는 활화산까지 폭발하고 난리도 아니었던 모양이야!" "기상이변(氣象異變)인가?" "멍청하긴! 그것은 불길한 징조야! 그날 동대륙에서 최고의 미인이라고 칭송받던, 로히얀스 왕비가 결혼식날에 죽었다고 하던걸?" "아! 그 라비스 크로시벨 말이지? 그 여자, 아주 유명하지. 그 여자는 얼굴도 미인이지만, 여걸이라던데? 이번 전쟁은 그녀가 지휘를 해서, 루 젠다르와 이곳 자이라스가 묵사발이 된 거라고 하더군. 게다가, 그녀는 궁극의 마법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마스터 마법사라고 하더라. 그 뭣이냐? 드래곤인가? 푸른빛의 드래곤이라고 하던데, 아마도 블루 드래곤인 모양 이야. 그 블루 드래곤도 그 여자가 부리고 있다고 그러더군. 정말 대단한 여자라니깐. 일찍 생을 마감하기에는 아까운 여자이지." "그녀가 일찍 생을 마감한 것은 자이라스나 루젠다르로서는 다행한 일 이지. 그녀가 차라리 자이라스인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따지고 보면, 우리 자이라스가 이 지경이 된 것은 그녀 덕분이잖아? 그런데, 인페르 디아에서는 그녀를 추앙하는 이들이 많다고 하더군." 옆 테이블에서 사내들이 떠들어대는 잡담내용에 나는 황당하기도 했지 만 웃음도 나왔다. 라센샤르가 어느덧 블루 드래곤으로 탈바꿈해 있었고 나는 마스터 마법사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물론, 로히얀스 왕성 안에서도 내가 마스터 마법사이라는 소문은 돌기는 했었지만, 이렇게 왕성을 나와 자이라스에서도 나의 이런 소문을 듣고 있으니 왠지 재미있었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다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레니의 눈길이 느껴져 그 녀를 바라봤다. 아네샤와 에스라도 나를 놀라운 기색으로 바라보고 있었 다. 그녀들은 로히얀스 왕비의 이름이 라비스라는 것까지는 몰랐던 모양 이었다. "라비스! 동명이인(同名異人)이겠지? 하긴 네가 로히얀스의 왕비일 리는 없겠지. 그녀의 머리색은 찬란한 황금빛이라는데... 게다가, 그녀는 이미 죽었다는데." '그래... 나는 죽었었지. 하지만 되살아났어. 어떤 힘에 의해서...' 내가 셀레네스 신전에서 깨어났던 것은, 아마도 셀레네스와 연관되어 있 는 것 같았다. 처음 고위 신관들이 셀레네스의 은총으로 대리자의 생명을 받았다고 했었을때는, 그저 내가 라비스로서 또 한번의 생을 시작하게 된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은 아닌 듯 했다. 아마도, 나는 셀레네스를 모시는 대리자로 불리우는 한 고귀한 존재에게 대신 생명을 받은 듯 했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알 수는 없었지 만, 나는 일단 그 누군가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기로 했다. 곧, 급사는 식사를 내왔고 나는 하던 생각을 접고 간단한 식사를 한 다음, 생맥주를 주문하였다. 더운 여름이라 그런지 시원한 맥주가 간절했던 것이 다. 하지만, 이곳 세계의 맥주는 맛은 괜찮았으나 생각만큼 시원하지는 못 한 것 같아 조금은 아쉬웠다. "자아~ 건배하도록 하죠! 즐거운 여행을 위해!" 에스라가 나무로 만들어진 맥주잔을 들며 호탕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술을 마실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매우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빙긋 웃으며 잔을 들었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이 순간만큼은 사심없는 모습으로 유쾌하게 나무잔을 부딪혔고, 나는 예전 버릇처럼 맥주를 쭈욱 들이켰다. 술과 함께 가슴을 채우고 있던 답답했던 마음들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진 나는 스스로의 주량을 망각하며 또 한잔의 맥주를 마셔버리고 말았다. 어느덧 취기가 오르는지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 껴졌다. 술이 들어가자, 레니와 에스라는 죽이 잘맞는지 시끄럽게 떠들어대었고, 아네샤는 그런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들 아직은 모두 쌩쌩 한 모습들이었다. 나만 취한 모양이었다. 나는 풀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옆테이블에 용병으로 보이 는 한 젊은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에게 헤죽 웃어보였다. 그리고 는 다시 눈을 돌려 입구에 새로 들어오는 두명의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한 명은 기사였고, 다른 한명은 키가 훤칠한 마법사였다. 그는 고급스런 흰색 로브의 후드를 쓰고 있었는데, 왠지 행동이 기품있어 보였다. 마치 왕족이나 고귀한 귀족일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였다. 그런데, 저런 고귀 한 자가 왜 이런 허름한 곳으로 들어오는 것일까, 나는 의문이 들었다. 그들은 구석에 위치한 테이블에 자리하였고, 한 소녀 급사가 그들에게 달려가 주문을 받았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잔에 조금 남아있던 맥주 를 모두 들이켰다. '흠... 마법사가 꽤 잘생겼나 보지?' 마법사의 얼굴을 보며 주문을 받는 소녀의 얼굴이 붉어져 있는 것을 본 나는, 그렇게 짐작했다. 문득 피곤함을 느껴져서 방으로 올라갈까, 하였 으나 내심 저 마법사의 얼굴이 궁금했던 나는 계속 그를 주시했다. 저 남자에게 도는 왠지 모를 기품과 고귀함이 나의 눈길을 자꾸 붙잡아 놓 았던 것이다. 그러다, 마법사가 후드를 벗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후드를 벗자, 은빛의 고운 머리칼과 반듯하고 단아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순식간에, 식당 겸 주점인 홀 안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뭔지 모를 고귀함으로 눈길을 끌던 그였는데, 후드까지 벗자 그는 홀 안 에서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던 모든 이들의 눈길을 한몸에 받았다. 나는 갑자기 심장이 멈추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내가 너무 취한 모양 이었다. 얼마나 미카엔을 보고 싶어했으면 이렇게 헛것까지 보이게 되는 걸까. 이런 나의 모습이 정말 우습게 느껴졌다. '미카엔...' 나는 몸을 일으켜 비틀비틀 그에게 다가갔다. 더욱 깊어지는 취기로 인 해 나의 시야가 팽글팽글 돌았다. "멕스! 네가 찍은 여자가 저 놈에게로 다가가잖아?" 아까 용병들이 앉아있던 테이블에서 그런 내용의 말이 들려왔지만, 나는 흘려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미카엔이 자리한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자 미카엔 맞은편에 앉아있 던 기사가 경계의 눈빛을 하고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무시했다. 미카엔의 은보랏빛 눈동자가 약간 놀라움을 띠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미카엔 같잖아?' 취기로 인해 여전히 미카엔의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에 가져가려 했다. 그러자... "이런 무엄한!" 기사가 그렇게 외치며 벌떡 일어났으나, 나는 다리가 풀렸는지 미카엔 앞 에서 힘을 잃고 픽 쓰러졌다. 그리고, 미카엔은 나를 받쳐들며 나에게 말 했다. "아가씨, 괜찮습니까?" 미카엔이 왜 나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걸까. 그는 나를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는다. 언제나 라비스라고 불렀었는데... 비록 취중에 보이는 그의 환상이 고 나의 착각이라 하지만, 왠지 서운했다.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24-11-2001 05:02 Line : 202 Read : 3217 [31] 체인지[2부] 제2화 -시작된 여정- (4) -------------------------------------------------------------------------------- -------------------------------------------------------------------------------- Ip address : 211.37.39.209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4- 나는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깨끗한 피부에 단아한 이목구 비... 내가 보고싶어 하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이 수척해 보였다. 그동안 뭔가 큰 고통이 그의 가슴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듯. 수척해 보이지만 한없이 고귀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는 뭔가 표정이 감돌기 시작했다. 촛불의 조명을 받아 좀더 짙은 자수정빛으로 빛나는 그의 눈동자가 나의 얼굴을 혼란스러운 듯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렇게 나를 한동안 못박힌 듯 바라보았다. 마치,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 했다. 미카엔이 나를 부축하고 나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흘러가던 시간은 갑자기 정지되어 버린 것처럼 미카 엔은 그렇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나에게서 애타게 그리워하던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했다. 그는 내가 라비스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서 무언가 를 느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탓인지 나는 꿈 을 헤매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다물어진 미카엔의 입술이 뭔가를 말하려는 듯 살짝 벌어진 순간, 한 목 소리가 잠시 멈추어버린 듯 했던 시간을 깨어버리듯 들려왔다. "폐, 아니 마법사님! 이곳은 식사를 하기에는 적당하지 못한 곳 같습니다. 그냥 나가시죠. 어차피 오늘 밤에 돌아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미카엔과 동행으로 온 기사의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나도 예전에 한번 본 적이 있었다. 미카엔의 사촌여동생이라던 아이나스의 약혼자인 제시라는 애칭을 가진 미카엔의 측근 기사였다. "음... 그래야 하겠군. 하지만..." 미카엔은 망설이는 말을 하며 나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의 얼굴 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왕, 아니 라비스님을 닮은 여자에게 또 눈길을 주시는 겁니까? 이것은 그 분을 모독하시는 겁니다." 제시는 그렇게 말하며 미카엔의 부축을 받고 있는 나를 떼어내 밀쳤다. 그러자, 나는 균형을 잃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지고 말았다. 제시는 라비스를 닮은 여자들이 자신의 왕을 혼란케 한다고 생각해서 화가 났던 모양이었다. "앗! 이게 무슨 짓인가?! 제시. 힘없는 소녀를 밀치는 것은 기사다운 태도 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것인가?" 내가 넘어지자 미카엔은 제시에게 그렇게 외치고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마음이 상했던 나는 그의 손길을 외면했다. 눈물이 나오려 했다. "라비스님!" 그때, 아네샤와 에스라가 나의 곁으로 달려나왔다. 그녀들은 술을 마시고 있다가 내가 넘어지는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라비스라고?" 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미카엔은 약간 떨리기까지 하는 목소리로 그 렇게 반문했다. "정신차리십시오! 왕비 전하를 흠모해 그 이름을 일부로 비슷하게 쓰는 소 녀들은 꽤 됩니다. 게다가, 시녀들도 금발머리로 염색하고 이름 역시 비슷 하게 바꾸는 이들이 꽤 되지 않습니까?" 제시는 흥분한 어조로 자신의 국왕을 나름대로 일깨우려 했다. 그리고는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나를 경멸스런 눈으로 쏘아보았다. 내가 언제 그의 경멸스런 눈길을 받을만한 짓을 한 적이 있었던가.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이! 예쁜 아가씨~ 퇴짜맞은 모양이지? 그러게, 저 녀석에게 매달리지 말고 나한테 오라구! 예뻐해줄 테니..." 홀 안에서 술을 마시던 사내들의 조롱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최악 이었다. 나는 입술을 무자비하게 깨물며 그 사내들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미카엔 에게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왠지 그에게 화가 치밀었다. 나를 못 알아보는 것은 이해할 수는 있지만, 단지 나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냉정 해지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생각하자 화가 났다. 지금의 상황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변한 나의 모습을 보고 라비스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관심을 내보이는 것은, 나에 게서 라비스로서의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나를 조금이라도 닮은 여자라면 모두 지금처럼 관심을 내보일 것이다. 미카엔은 사내들의 저속한 발언에 불쾌감을 느꼈는지, 그의 고귀한 얼굴 에 분노의 기색이 살짝 스쳤다. 그는 나에게 손을 뻗더니 나의 팔을 꽉 잡고는 그대로 식당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약간 황 당한 기분마저 느껴지는 나였다. "앗?!" 나는 많은 의미가 내포된 짧은 비명을 내지르고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 으나, 나의 팔은 단단하게 붙잡혀 있었다. 속절없이 끌려가는 나였다. "앗! 이봐요~ 뭐하는 짓이에요?" 아네샤와 에스라가 달려와 미카엔을 저지시키려 했으나, 그녀들은 미카엔의 눈길을 받는 순간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멈추어섰다. 아마도, 미카엔의 눈길에는 드래곤 피어가 살짝 담겨 있었던 모양이었다. 평소 자제력 강한 미카엔의 모습을 보아왔던 나로서는 지금 미카엔이 이성 을 잃고 감정적이 되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이성을 잃게 만들었을까. "폐!... 마법사님!" 제시의 망연자실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의 눈에는 자신의 국왕이 한 순결한 여신관을 납치하듯이 억지로 끌고 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잇!!" 끌려가던 나는 잡혀있는 팔을 비틀며 그런 외침소리를 내었다. 나의 머리속 에는 별별 망상이 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미카엔이 라비스를 닮았다고 생각 하는 나를 억지로 데려다가 첩으로 삼으면 어쩌나 하는 망상 말이다. 어쨌든, 내가 그렇게 외침소리를 내자 미카엔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 고는 고개를 돌려 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이런..." 미카엔은 입을 열어 그런 소리를 내더니, 잡고 있던 나의 팔을 놓아주었다. '아! 이런...' 이라니? 대체 저 반응은 무엇인지... 설마, 자기도 모르게 나를 끌고 왔다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믿고 싶다. 나는 그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그러자, 미카엔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여신관님께 제가 실례를 했군요. 하지만, 순결하신 여신관님께서 저런 천 박한 곳에서 저속한 말을 듣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나의 소중 한 한 존재가 생각나서 이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미카엔은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한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끊었던 말을 이었다. "전 로히얀스 왕실 마법사로 있습니다. 언제 혹시라도 로히얀스의 수도인 로히아나로 오시게 된다면 왕성에 한번 들러주십시오."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나의 손목을 잡아 들어올리고는 손바닥쪽의 손목 가운데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놀라 내가 눈을 동그 랗게 뜨자 미카엔은 살짝 웃어보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 표식을 왕성에 있는 자들에게 보이면 여신관님을 무사히 왕성 안으로 들여보내줄 것입니다. 내가 여신관님께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그저 나의 소중한 그 존재와 닮아서가 아닙니다. 왠지 꼭 이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 어서입니다. 당신은 꼭 보호해야만 할 것 같은... 아! 이런 나의 심정을 뭐 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의 말에 나는 그가 입맞춘 손목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자, 나의 손목에 뭔가 빛을 발하더니 이내 그 빛이 사그라들고 그 부분에 조그만 원형의 표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미카엔... 미카엔... 아아, 미카엔...' 나는 속으로 그의 이름을 되풀이하여 불러보며 미카엔을 바라보았다. 문득 실바람이 불어와 나와 미카엔의 머리칼을 살짝 날리게 하였다. 나의 긴 흑 발의 머리칼 중 한가닥이 나의 얼굴로 내려왔다. 그러자, 미카엔은 그 머리 칼을 뒤로 넘겨주더니 눈을 내리깔고는 말했다. "여관을 옮기셔야 하겠군요. 저를 따라오십시오. 크고 비싼 여관에서 묵어 야 아까와 같은 일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그런 곳이 귀족들이 나 귀한 신분을 가진 자들이 묵게 마련이니깐요. 물론, 숙박비는 제가 지불 하도록 하죠. 일행분은 제 호위 기사를 시켜 데리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여전히 부드럽지만 그는 정중한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그래서 왠지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미카엔을 따라가던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그는 나를 돌아보았다. "역시 불편하신 모양이군요. 단순한 호의입니다. 거절하지 마십시오. 그나 저나, 정말 이상하군요. 당신의 눈빛이 왜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지 모 르겠습니다." 그는 내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채었는지, 이제는 나에게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자신의 말만 했다. 정말 미카엔과 나는 이상한 인연이었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나 나를 알아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도움을 받게 되다니... '미카엔, 나는 금방 돌아갈 거예요. 이런 초라한 모습이 아닌 로히얀스의 왕비이자 미카엔의 정실 부인으로서 당당한 모습으로... 기다려 줘요. 미카 엔. 힘을 다시 찾고 반지 역시 다시 찾고 나서 미카엔에게 돌아갈 거예요. 어쩌면 라비스로서의 본래 모습도 다시 찾게 될 지도 모르겠죠.' 그날, 나는 미카엔의 도움을 받아 한 호화여관에서 묵게 되었다. 물론, 미 카엔은 그의 기사와 함께 그날밤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 그는 이곳 자 이라스의 사정을 친히 알아보기 위해 이곳까지 왔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미카엔을 믿는다. 지독한 슬픔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왕으 로서 책임을 훌룡하게 다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를 언제까 라도 믿기로 마음먹었다. * 아! 글발 안받아서 이번 편 쓰는 거 무지 고생했습니다. 글구, 26일까지 앞부분 삭제할 겁니다. 근데 1권 분량만 우선 삭제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군요.ㅡㅡ; 오늘 내로 삭제공지 띄우겠습니다.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25-11-2001 23:37 Line : 185 Read : 2877 [33] 체인지[2부] 제3화 -반지를 찾아서!- (1) -------------------------------------------------------------------------------- -------------------------------------------------------------------------------- Ip address : 211.208.73.16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반지를 찾아서!) -1- 감미로운 빗소리가 나의 영혼을 적시듯 들려왔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까맣게 덮힌 비구름들이 사방을 어둡게 하였다. 이제 본격적인 여름 우기에 접어든 모양이었다. 나는 여관의 이층 홀 테라스에 나와서 내리는 비를 구경하고 있었다. 왠지 청승맞아 보이는 나였다. 가끔 불어오는 비바람이 순수한 밤의 여신 머리칼 같은 나의 흑발을 휘날리게 했다. 오늘은 어쩐지 기분이 기묘했다. 싱숭생숭하다고나 할까. 벌써 이 여관에 묵은지 이틀이 지났다. 나와 일행은 사실 그저께 국경을 넘으려 했지만, 갑작스레 닥친 호우로 인해 여행을 하는 것을 조금 뒤로 미루게 되었다. 그래서 비가 그칠 때까지 이곳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곳 호화 여관측에서는 우리 일행을 매우 극진히 대했다. 물론, 여관의 객실 지배인은 -고급 여관이라 그런지 다른 여관과는 달리 주인장 외에 지배인이 따로 있었다- 실실 웃는 얼굴로 언제까지든 묵어 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돈을 더 지불하지 않고도 말이다. 아마도, 미카엔이 돈을 많이 주었든지, 아니면 뭔가 지시를 했던 모양이 었다. 말하지 않아도 과일이나 고급 와인 같은 것을 객실로 서비스로서 보내왔고, 세심하게 우리를 배려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생각되었다. 레니는 여관에 묵고 있는 내내, 입이 찢어져 있었다. 그녀로서는 이런 여관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여관에 있는 동안 자신이 귀족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있는 듯 했다. 귀족을 경멸한다더니... 역시 그녀는 경멸과 함께 귀족의 생활을 동경하 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낮아진 기온으로 인해 조금 떨려오는 몸을 움츠리며, 방으로 돌아 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번개가 쳤는지 사방이 번 쩍하였고 천둥 소리가 엄청난 음향으로 나의 고막을 강타했다. 화들짝 놀란 나는 심하게 움찔하다가 테라스로 들어오는 한 소년과 눈 이 마주쳤다. 부드럽고 따뜻해 보이는 갈색 눈동자와 머리칼을 가진 소 년이었다. 그 소년은 귀족인 듯, 고급스런 옷을 입고 있었는데 대략 열 입곱 정도 먹어보였다. 갑작스레 출현한 그 소년으로 인해 더욱 놀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테라스로 막 들어서던 그 소년도 놀란 듯 눈이 똑같이 동그래져 있었다. "누나?" '헉! 놀래라~ 근데, 누나라니?' 갸름한 얼굴선을 가진 그 소년은 놀라움과 그리움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 을 짓고 있다가, 어느 순간 그 표정은 풀어지고 실망한 듯한 얼굴이 되었 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착각을 한 것 같군요. 제 누님과 닮으셔서..." 나와 닮았다는 인간들이 왜이리 많은 것인지... 소년은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서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소년에게 다가가 그를 붙잡았다. 그에게 '잠깐만요!' 하고 외칠 수 없으니, 나는 이렇게 그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소년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 았고, 나는 겸연쩍은 얼굴로 벽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써보였다. 「제가 누님과 많이 닮았나요?」 그러자, 소년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많이 닮으신 것 같군요. 뿐만 아니라, 저의 누님은 아가씨와 같은 셀 레네스를 모시는 여신관이십니다. 누님은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주 어렸을 때 셀레네스의 신전으로 들어가 여신관이 되셨거든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머뭇거렸다. 솔직히 처음보는 여자에게 자신이 사적인 말을 필요 이상 많이 했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나는 그 소년의 눈을 고요한 눈빛으로 직시하였다. 이런 나의 눈길을 받은 소년은 알 수 없는 그 무언가에 홀렸는지, 마음이 움직였는지 다시 그의 입술을 떼었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최면을 걸은 것일까. "...물론, 제 누님은 처음부터 아가씨와 닮은 외모를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원래 저와 같은 갈색의 머리칼에 조금은 평범한 외모를 가진 누님이셨는 데, 어느 순간 외모가 변해 있더군요. 훗... 제 말이 이상하게 들리시겠죠?"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계속 듣고 싶다는 의미를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신전이 자신의 집이 되고 동료 여신관들이 이제는 자신의 가족이 되어버 린 누님을 저는 종종 찾아가곤 했습니다. 부모님은 이미 발길을 끊으셨지 만, 저는 계속 누님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마법 기사단이 이곳 자이라스 를 장악할 무렵, 제가 신전에 있는 누님을 찾아갔을 때... 그때의 누님의 모 습은..." 소년은 그 부분에서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다시 그는 입을 열었다. 내가 재촉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얘기를 다 털어놓고 있었다. 무엇이 이 소년의 감정을 부추기고 있는 것일까. 처음 만난 나에게 이런 속마음을 얘기하도록 말이다. 나는 그의 얘기를 들으며 뭔가 기이한 감정 에 사로잡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화려하고도 순수한 황금빛의 머리칼에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 있더군요. 인간이 그런 순수하고도 찬란한 황금빛의 머리 칼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처음에 저는 누님을 알 아보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누님은 저를 알아보더군요. 예전과 같은 따 뜻한 얼굴로... 그 후로 저는 몇번을 누님을 찾아가기는 했었지만, 왠지 낯설었습니다. 그리고... 인페르디아 전쟁이 마무리될 즈음에 저는 다시 누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게 마지막... 아! 제가 초면인 아가씨께 무슨 소리를..." 그가 그렇게 말을 어느 정도 마쳤을 때는 나의 두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 었다. 나를 닮은 황금빛 머리칼의 여인이라니... 그런 외모를 가진 존재는 어머니인 셀레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저 소년은 자신의 누나가 그런 모습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머리 속이 뒤죽박죽 되는 것이 느껴졌다. 혼란스러웠다. 엔카루스가 마법 도적단으로 자이라스를 장악할 무럽에, 나는 스파이로서의 임무를 가지고 자이라스에 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 인페르디아의 전쟁 을 마무리 짓고 돌아갈 때... 아! 나는 신관복을 입고 있었던 셀레나를 닮 은 여자를 잠깐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단순히 잘못 본 것이라 생각했는데... 스물을 조금 넘긴 듯한 셀레 나를 닮은 그녀가, 이 소년의 누나였던 것일까. 그럼, 그녀는 대체 누구인 것일까. 혹시, 셀레네스였던 셀레나가 라비스 말고 또 다른 딸을 낳았던 것일까. 그렇다면, 왜 그녀는 처음부터 금발의 모습이 아니었고 나중에 모 습이 변했던 것일까. 알 수가 없었다. 나의 안색이 창백해지자, 소년은 나에게 걱정스레 물어왔다. "괜찮으세요?" "네에..." 이제는 간단한 음절 정도는 뻣뻣하게나마 말할 수 있었던 나는 그렇게 답했다. 그러자, 그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에게 벙어리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나는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손을 살짝 쥐었다. 그러자 소년은 약 간 움찔해 보였으나 뿌리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나는 왠지 그가 남동생 같이 느껴졌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소년 과 나는 어떤 한방향으로서 연결되어 있는 듯 했다. 그의 누나가 셀레나 와 닮은 모습으로 변한 것을 보면 말이다. 내가 그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지만, 소년의 손이 나의 차가워진 손을 덥 혔다. 말로는 표현 못할 나의 감정이 그에게 전해졌는지, 소년은 희미하게 웃어 보이더니 나에게 입을 열었다. "전 루이안트라고 합니다. 그냥 루이라고 부르세요. 음... 보기에는 어려보 이시지만, 왠지 느낌이 저보다 한두살은 많을 것 같군요.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벽에 라비스라고 써보였다. 그러자, 귀티나 보이는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감돌았다. "라비스님? 예쁜 이름이군요. 근데, 이 여관에서 머무시는 것을 보니, 지금 자이라스로 오시는 것이거나 로히얀스로 가시는 길이시겠군요. 전 로히얀스 로 가는 중입니다. 누님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누님께서 저에게 말씀하 셨거든요. 로히얀스에서 폐하와 왕비 전하를 위해 일하라고... 그래서 가는 길입니다." 나는 잡고 있던 루이안트의 손을 더욱 꽉 쥐었다. 이 소년의 누나는 대체 누구이기에 미카엔과 나를 위해 일하라고 말했을까. 나는 잡고있던 그의 손을 놓고는 벽에 다시 글자를 썼다. 「루이! 나와 동행하겠어요? 저도 로히얀스로 가는 길입니다.」 나는 왠지 이 소년에게 믿음이 갔다. 그것은 루이안트의 인상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에게서 느껴지는 그 무언가가 그를 신뢰하도록 만든 것이다. 어 쩌면, 이 소년은 나의 운명이 엮어준 인연 중 하나가 될 듯 했다. * 아..... 머리에서 쥐가... @.@;; 요즘은 한편당 쓰는 시간이 무척 길어졌습니다. 썼다 지웠다... 다시 쓰고 마음에 안들어 또 지우고..... 이 짓을... 몇번....... 그러고 나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습니다. 연참하시고 기일~~~게 쓰시는 다른 작가님들을 보면 신기하고 부럽게 느껴진다는.. 심지어 존경스런 마음까지.....+.+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26-11-2001 02:06 Line : 161 Read : 3171 [34] 체인지[2부] 제3화 -반지를 찾아서!- (2) -------------------------------------------------------------------------------- -------------------------------------------------------------------------------- Ip address : 211.208.73.16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2- 비가 지겹도록 내렸던 며칠이 지나고 나서, 우리는 여관을 나와 국경 을 넘었다. 물론, 루이안트 역시 우리 일행과 합류하였다. 국경의 관문은 금방 통과할 수 있었다. 아마도, 우리가 신관의 차림을 하고 있어서인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관문에서 멀어져 왔을 때, 나는 석판에 글을 써서 레니에게 보였다. 「레니! 네 생각에 반지는 로히얀스 어디 쯤에 있다고 생각해?」 그녀를 믿지는 않지만, 한번 떠보기 위해 반지의 행방에 대해 질문을 하자, 그녀는 성의없어 보이는 대답을 했다. "아직 몰라~ 내가 그쪽 길드와 접촉을 해봐야 알아."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다시 석판에 글을 썼다. 「너 엉뚱한 생각은 말아! 그럼, 혼쭐을 내줄 테니...」 약간 허풍과도 같은 말을 써서 그녀에게 보여주자, 레니는 코웃음을 쳤 다. "훗~ 네가 어떻게 나를 혼쭐을 내줄건데? 그리고... 나도 양심이 있다구! 너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게다가, 네가 반지를 찾으면 많은 대가 를 준다는데, 내가 왜 엉뚱한 생각을 하겠어? 난 손해볼 짓은 안한다구!" 딱!! 그때, 옆에서 걷던 에스라가 레니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레니! 너 정말 반성하고는 있는 거냐? 대신관님께서 너를 처벌하시려 는 것을 라비스님이 말려서 너를 데리고 온 거니깐, 넌 고마워해야돼! 그리고, 셀레네스를 모시는 신관으로서 부끄러운 줄 알아라! 만약 너 라비스님 말대로 엉뚱한 생각을 품으면 용서 안한다! 난 라비스님을 호 위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구!" 레니의 말을 듣고 있던 에스라가 끼어들어 그렇게 말하자, 레니는 자신 의 선배에게는 말대꾸를 할 수 없었는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저 분은 굉장히 터프하신 분인 모양이군요. 라비스님, 조금 쉬어가면 어 떨까요? 어차피 마을까지는 한참 걸어야 할 것 같은데..." "네." 내가 루이안트의 말에 답하자, 레니가 목뼈에 소리가 날 정도로 홱~! 고 개를 내쪽으로 돌렸다. "라비스! 너 말할 줄 알아?" 그녀의 말에 나는 별다른 표정없는 얼굴로 석판에 글자를 써서 그녀에게 보였다. 「아니! 간단한 음절 외에는...」 "음... 그래? 너 말하게 되면 나에게 말해! 그래야 축하라도 해주지." 레니는 생긋 웃어보이며 축하해준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녀가 정말 진심 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일행들은 숲의 적당한 곳에서 자리를 잡고 몸을 쉬었고, 나는 그들이 쉬고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 음을 옮겼다. 아마도, 그들은 내가 화장실(?)이라도 가려는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들 에게서 어느 정도 떨어지게 되자,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라센샤르!" 조금 나직하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나는 바다의 정령 이름을 불렀다. 아! 오랜만에 목소리를 제대로 내니깐 떨리기까지 했다. 이 감격을 누구한테 전할까? 아무튼 내가 정령의 이름을 부르자, 금방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위 대하게까지 느껴지는 한 정령의 기운이 느껴지는 순간, 나의 앞에는 투 명하고 푸른 빛의 한 젊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부르는 거지?" 아,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라센샤르의 목소리였다. 마음 같아서는 포옹 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내가 불렀어요. 그대가 돕기 원했었던 라비스인 내가..." 아직은 어눌하게 들리는 발음이었다. 하지만, 여관에서 며칠을 지냈던 동 안 나의 혀는 많이 풀려 있었다. 이렇게 마비된 혀가 풀려있음에도 불구 하고, 나는 그동안 일행들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었다. 물론, 어제 즈음 부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동안 갑갑해서 죽는 줄 알았다. 어쨌 든, 후훗... 나는 그냥 이대로 말 못하고 아무런 능력없는 착한 라비스 연 기를 하는 것이 나을 듯 싶었다. "라비스?" 라센샤르의 눈이 무섭도록 크게 뜨여졌다. '아, 라센샤르 네가 그렇게 눈을 크게 뜨면 무섭게 보인다구!'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초조한 기색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아... 라비스? 얼굴이 다르군요. 그런데... 당신의 영혼은 라비스로서 느 껴져요. 환생한 건가요? 정말 라비스인가요?" 환생을 며칠 만에 뚝딱 하는 경우가 어디있을까. 뭐, 어쨌든... 라센샤르의 두 눈에서 투명한 빛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라센샤르가 눈물 을 흘리다니... 그녀가 나를 보고 눈물까지 흘릴 줄은 몰랐다. 울보인 리 엔시타가 나를 보고 울음을 터뜨린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녀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살짝 만졌다. 그러자, 차갑고 시원 한 기이하기 짝이 없는 촉감이 느껴졌다. 그녀의 눈물은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라센샤르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맞아요. 당신의 친구인 라비스예요. 아, 라센샤르! 나는 여기서 길게 말 할 시간이 없어요. 한가지 부탁할게요. 들어줄 수 있겠죠? 여기서 돌아 가면 아멘시타를 찾아가세요. 그리고, 그에게 나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 는 대신, 이곳으로 오지는 못하게 하세요. 전 여기서 능력을 숨기고 있는 입장이니... 재회는 나중으로 미뤄야 해요. 아무튼 아멘시타에게 제 실버 반지의 행방을 찾도록 해요. 아무래도 시간은 걸리겠지만 그는 모든 동 식물들의 기억을 옅볼 수 있으니 반지를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반지를 잃어버린 시작점은 자이라스에 있는 셀레네스의 신전이니, 그곳에서부터 기억을 읽으면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라센샤르는 로히얀스에 있는 도둑길드의 모든 곳을 뒤지도록 하세요 반지를 찾게 되면, 은밀히 나에게 와주세요. 물론 나의 일행이 눈치채지 못할 때에 말예요. 들어주 시겠죠?" 나는 그녀에게 나직한 음성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단숨에 말하고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그녀는 평소 엄숙했던 표정을 잃어버린, 여전히 흥분한 얼굴로 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꼭 라비스의 물건을 찾아낼 겁니다. 위험할 때면 언제든 저를 불러주세 요. 라센샤르는 라비스가 다시 눈을 떠서 기쁘군요. 그리고, 나중에 이 라센샤르에게 당신의 목숨을 한번 앗아갔었던 존재를 찾아 응징하게끔 허락해 주세요. 라센샤르는 언제나 받은만큼 돌려줍니다. 죽음은 죽음으 로서... 저는 그 존재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라센샤르의 마지막 말은 왠지 나를 오싹하게 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아젠샤르가 리엔시타를 소멸 직전까지 몰고갔었을 때, 라센샤르 역시 그 보복으로서 아젠샤르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간 적이 있었지 않았던가. 그렇게 라센샤르를 돌려보내고 나서, 일행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나는 다 시 발걸음을 옮겼다. 숲의 공기가 왠지 상쾌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며칠 간 내렸던 비가 묵은 공기를 모두 씻겨내버린 모양이었다. 하늘이 구름 한점없이 청명했다. 내 마음까지 개운해지는 듯했다. 이제 다시 슬슬 시작되는 무더위 때문인지, 치렁치렁한 머리칼에 부담을 느낀 나는 주머니에 있던 가죽 끈을 꺼내들어 나의 긴 머리를 한데 모아 질끈 묶어버렸다. 그러자, 나의 새하얀 목덜미가 드러나 조금은 시원해지 는 것 같았다. "음... 이제 돌아오게 될 반지를 기다리면서, 레니의 가증스런 행동이나 지 켜볼까나?" 나는 힘차게 느껴지는 걸음으로 일행들에게 다가가면서 스스로에게 기합 을 넣었다. 아자! 아자! 하고 말이다.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체인지 Date : 28-11-2001 03:53 Line : 184 Read : 3056 [35] 체인지[2부] 제3화 -반지를 찾아서!- (3) -------------------------------------------------------------------------------- -------------------------------------------------------------------------------- Ip address : 211.213.134.12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3- 숲을 빠져나와 저녁 무렵에 간신히 마을에 당도한 우리는 한 조그만 여관에서 짐을 풀고 몸을 쉬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모두 잠들었을 즈음에 여관에 살짝 빠져나와 라센샤르의 보고를 받았다. "라비스, 실버반지는 지금 길드에 없어요. 그 반지는 이 근방의 길드로 흘러들어오긴 했었지만, 이미 다른 곳으로 빠져나간 모양이에요." 그녀의 말에 나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그럼, 아멘시타는 뭐라고 해요? 그도 반지의 행방을 모르는 건가요?" "그는 지금 본체인 론티아 나무 안에 없더군요.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아직 그에게 말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라비스님의 근처에 서 신족의 기운이 어렴풋이 느껴져요. 아까 낮에도 그런 것을 느꼈는데, 정말 이상하군요. 아까 확인을 해보았지만, 별다른 것은 발견되지 않았 는데..." "흠... 그건 라센샤르가 과민하게 느낀게 아닐까요? 제 근처에 신족이 있 을리 없잖아요? 라세샤르가 그렇게 느낀 것은, 제 주위에 여신관들이 있 어서일지도 모르겠군요." 빙긋 웃으며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으나 더 이상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전 이만 가보겠어요. 반지를 찾게 되면 다시 라비 스님께 오도록 하죠." 라센샤르는 말을 마치고는 이내 사라졌고, 나는 그녀가 사라진 곳을 잠 시 바라보다가 하늘을 올려다 보왔다. 그러자, 암흑만이 존재하는 듯한 시커먼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낮에는 맑았지만, 그세 흐려졌는지 밤하늘은 별이 거의 없었고 달도 구름에 반쯤 가려져서 희미했다. 풀벌레 소리가 듣기 좋은 음향으로 나의 귀에 들려왔다. 나는 잠시 밤산 책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다시 여름이 되니깐, 예전 생각이 떠오른다. 작년 이맘때 즈음에 나는 미카엔의 측실로서 매일밤 침실로 찾아오는 그 로 인해 매우 곤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수면제를 탄 차를 먹이곤 했었는데, 그 당시 황태자로서의 많은 직무 탓인지 그는 금세 잠 들고는 했었다. 물론, 그는 자신이 피곤해서 금방 잠들어버렸다고 생각하 는 듯 했었다. 피식~ 그때의 일을 생각하자, 나는 웃음이 나왔다. 그때는 나름대로 곤혹스럽고 절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지금 밟고 있는 이곳은... 미카엔이 있는 로히얀스, 그의 나라였다. 내가 로히얀스 땅을 밟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의 기분은 다르게 느껴 졌다. 그에게 조금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었다. 저벅 저벅. 그때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지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거기 누구예요?" 기척이 들려오는 쪽을 향해 낮게 외쳤다. 그러자, 어둠에 묻혀 가려져 있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그는 셀레네스 신전 앞에서 보 았던 에메랄드빛의 머리칼을 가진 미청년이었다. "다시 뵙는 군요." "앗! 당신은 그때의 반짝 머리?" 내가 그렇게 놀라며 외치자, 그는 얼굴 표정이 약간 기묘해졌다. "훗... 반짝 머리라니, 당신이 붙여준 별명인가요? 셀레나. 아! 애칭보다는 그냥 셀레네스라고 부르는 것이 낫겠군요. 아무튼 당신이 그렇게 모습까 지 바꾸고 벙어리 행세까지 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하마터면 속을 뻔 했죠." 그의 말에 나는 문득 황당함을 느꼈다. 저 남자가 나보고 셀레나라고 말 하다니... 하긴, 내가 셀레나를 닮긴 했다. 그럼, 저 남자는 셀레나와 아는 사이인 것일까? "당신은 누구죠?" "이제와서 저를 모르는 척하면 이대로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저는 아사드, 한때 당신을 우러러 본 적이 있었죠. 하지만, 이젠 아닙니 다. 당신은 힘을 잃은... 더 이상 신족이 아니니깐요. 당신을 미행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반지를 찾고 있는 중이더군요. 로히얀스 도둑 길드 에 있는 실버 반지를 얘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며칠 전 에 신전 앞에서 마주쳤던, 대리자에게 정신을 잃은 채 안겨있던 당신의 모습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때는 당신의 손가락에 평범하지 않은 실버 반지가 끼어 있었죠. 바로 이 반지 말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반짝이는 실버반지를 꺼내들어 나에게 보였다. "아! 내 반지, 이봐요! 제 반지를 내놔요! 왜 셀레나를 찾고 있는 거죠? 전 셀레나가 아니예요. 전 그녀의 딸일 뿐입니다. 사람을 잘못 보셨어요." 나의 외침에 아사드는 멈칫해 보였다.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의문의 빛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의 순간일 뿐이었다. 그는 뭔가 확 신하고 있는 듯 나에게 외쳤다. "정말 교활하군요! 딸이라구요? 후훗... 내가 그런 교활한 거짓말에 속을 줄 알았습니까? 당신은 이곳에 있으면 안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멋 대로 이곳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저는 그런 당신에게 창조신 아덴의 이름으로 당신를 징벌해야 하겠습니다!" 그의 기세에 뭔가 위험을 느낀 나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정령을 불 러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라센샤르!" 하지만, 라센샤르는 나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후후... 셀레네스, 당신의 정령은 듣지 못할 겁니다. 당신은 정령의 여신 이기도 하니, 정령을 부를 것이라 예상했지요." 그는 이곳에 결계를 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믿을 것은 나의 마법력 밖 에 없었다. 나는 우선 방어 실드의 스펠을 캐스팅했다. 그가 신력으로 공 격을 해올 것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셀레나를 동급으로 치면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역시 신족인 듯 했다. 셀레나는 여신인 셀레네스였으니. 어쨌든, 내가 무슨 마법인지 모를 스펠을 캐스팅하자 아사드는, 나의 마 법력이 위력적일 거라 지레 짐작했는지 나의 앞에 짧은 단거리 공간 이 동으로 다가왔다. "헉!" 갑자기 바로 눈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의 모습에 나는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고,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나의 가느다란 목을 움켜잡았다. 그로 인해 숨이 막히게 되자, 나는 더 이상 스펠을 캐스팅할 수 없게 되 었다. 하지만 그때! "라비스님!"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자 깨어났는지 에스라가 창밖으로 고개 를 내밀고 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내가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 았는지 잽싸게 그녀의 무기를 들고는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참으로 날 랜 몸짓이었다. 또한, 그녀의 우렁찬 목소리에 다들 잠에서 깨어난 듯 아네샤와 루이안트 역시, 여관 박으로 뛰어나오고 있었다. 물론 레니는 덩달아 여관을 나왔다. "나... 놔줘..." 나는 하얗게 안색이 변하여 그에게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가 나의 목을 조르고 있어서 숨이 막혀 왔다. "라비스님을 놔줘! 이 나쁜 자식아!!" 에스라가 달려오는 이들의 선두에 서서 그렇게 소리를 치며 달려왔다. 하지만, 아사드의 눈동자가 뭔가 번쩍하고 빛을 발하는 순간, 에스라를 비롯한 저들은 뒤로 나자빠졌고, 나는 절망감을 느껴야만 했다. "셀레네스! 당신의 대리자가 걸어준 가면을 이제 그만 벗어버리시지 요?" "나... 셀레... 나가 아니야..." 하지만, 아사드가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나의 육체에서는 무언가 변 화가 일어났다. 흑발의 직모로 찰랑거리던 나의 긴 머리칼이 다시 순수한 황금빛으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어깨위로부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내려오는 찬란한 황금빛의 머리칼을 볼 수가 있었다. 이렇듯 나의 머리칼색이 다시 예 전의 빛깔로 돌아오는 것을 보면, 나의 눈동자색이나 이목구비 역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듯 했다. "라비스님?" 아마도, 나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들이 모두 휘둥그래해져 있을 거라 짐 작되었다. 여신관들은 내가 지금 위험하다는 것마저 망각해 버렸는지 다 급함을 잃어버린 멍청한 기색이 도는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중얼거렸고, 나의 목을 조르고 있던 아사드 역시 조금 놀란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 체인지 퍼가시는 분들... 오늘까지는 체인지 1, 2권 분량 꼬옥 삭제해주시길 바랍니다. 삭제할 분량은 삭제 공지에 언급이 되어있습니다.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29-11-2001 14:28 Line : 160 Read : 3213 [36] 체인지[2부] 제3화 -반지를 찾아서!- (4) -------------------------------------------------------------------------------- -------------------------------------------------------------------------------- Ip address : 211.213.134.12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4- 그가 조르고 있던 손에서 약간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 틈 을 놓치지 않고 그를 힘껏 밀치고는 그에게서 떨어져 여신관들이 있는 쪽으로 잽싸게 달려갔다. 그러자, 아네샤와 에스라 그리고 루이안트는 나의 앞에 서서 아사드를 경계하는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 힘차게 도움닫기를 하며 아사드에게 달려나갔다. 다들 용맹하고 날렵한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평소 때라면 믿음직한 모습들이었지만 지금은 저 들이 걱정스럽다. 상대는 신족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예전에 왕성 서재에서 읽은 책에 의하면 신족이란, 마족과 비슷하 게 고위와 하위 신족으로 나뉘어지는데, 그 레벨이 천차만별이라고 하였 다. 고위 신족은 이곳 인간계에서 신으로 받들어지기도 하는데, 하위 신 족은 그런 고위 신족들의 수족이 되기도 한다고 적혀 있었다. 물론, 그들 중 아주 하급의 신족들은 아예 능력이 없어서 인간과 별로 구별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책에 있는 그런 내용들이 모두 사실일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면... 책에 있는 내용으로서 따진다면 아사드는 고위 신족은 아닌 듯 했다. 이 세계에서 존재하는 수많은 신들 중에서 아사드라는 이름은 못들어 봤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는 창조신이라는 존재의 수족인 것일까. 아 까, 창조신의 이름을 운운하던 그의 모습을 보자면 그렇게 짐작이 되 었다. 그나저나, 대체 셀레나는 왜 저 신족과 적대적인 관계가 된 것인지, 그 리고 그녀는 왜 신계에서 추방당하고 힘을 잃어 버렸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셀레나가 혹시 창조신의 자리를 넘보고 반란을 일으 켜서 신계에게서 추방되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으음. 셀레나는 원래 창조신이란 작자의 부인이었는데, 다른 신족이나 존재와 바람을 피다가 남편의 노여움을 받아 추방되었던 것일까. 나의 망상은 그렇듯 황당한 방향까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쨌든, 나의 동료들은 아사드가 신족인지 몰라서 그런지 용기있게 각 자 취향의 공격법으로 아사드에게 달려들었으나, 그들은 아사드의 한번 의 눈짓으로 저만치 꼴사납게 나가떨어졌다. "우아앗!" "에구구!" 어떻게 보면, 한심해 보일 정도로 무력한 모습들이었다. 나는 나를 위해 애써 주는 동료들을 생각해서 저들을 구경하고 있지 만은 않았다. 동료들이 아사드를 공격하고 있는 동안, 나는 가장 짧은 캐스팅 시간으로 최대의 공격력을 낼 수 있는 파이어 볼 스펠을 재빨 리 캐스팅했다. 그리고는, 내가 봐도 멋지고 힘있는 목소리로서 마법 시동어를 폼나게 외쳤다. "파이어 볼!!" 왠지 뿌듯한 순간이다. 내가 이렇듯 실전에서 민첩하게 공격 마법 스 펠을 캐스팅하고 있다니... 내가 시동어를 외친 순간, 내 주위에서 마나의 기운들이 결집되고 변 형을 일으키더니, 이내 한 개의 파이어 볼이 형성이 되었다. 그것은 야구공 만한 크기의 구형의 불덩어리였다. 아아, 야구공만한 크기라 니... 뭔가 한심하게 보이는 파이어 볼이었다. 그래도, 나의 마법력 정도면 적어도 배구공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파이어 볼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러다, 나는 빙계에만 소질을 보였을 뿐 화염계에는 그다지 출중하지 못했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떠올렸다. 아! 예전에 파이어 링의 실패로 인해 새카만둥이가 되어 연회에서 쪽팔림을 당했었던 악몽이 떠올랐 다. 그럼, 나는 탁구공 만한 크기의 파이어 볼이 나오지 않음을 다행으 로 생각해야 하는 걸까. "와!" 저만치에서 나자빠져 있는 나의 동료들은 내가 마법사라는 사실이 무척 놀라운 모양이었다. 그들의 탄성에는 약간의 존경심마저 엿보였다. 그들 은 마법적 지식이 전혀 없어서, 저것이 한심한 파이어 볼이라는 것을 모 르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나의 파이어 볼은 아사드를 향해 힘차게 날아갔다. 거기까진 좋 았는데... 아사드 바로 앞까지 날아간 나의 파이어 볼은 아사드에게 약간 의 그슬림조차 입히지 못하고 그의 앞에서 가볍게 픽하고 꺼져 버렸다. 왠지 김빠지는 장면... 그래도, 위력적인 화염 공격 마법인 파이어 볼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법 인데, 어찌 저렇듯 촛불 꺼지듯 가볍게 꺼져 버릴 수가 있는 것인지. 여기서 나의 스타일이 또 한번 구겨진다. 아사드는 기가 막히다는 듯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차라리, 비웃는 표정을 지으면 덜 비참할 것 같았다. 기분 나쁜 자식. "셀레네스, 그것 역시 나를 속이기 위한 연기입니까? 이제 그만 두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 녀석도 정말 어지간하다. 끝까지 나를 셀레네스로 믿고, 의심치 않으 니... 정말 내가 신족이고 셀레네스라면, 나는 권능인 신력을 잃어버렸어 도 이렇듯 한심한 능력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아! 빙계 계열의 마법을 보자면, 그리 한심한 것도 아닌데...' 나는 애써 스스로를 위안하며, 또다른 공격마법을 캐스팅할 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콜드 링이다. 이것은 위력적일 것이 분명했지만, 기나긴 스펠 캐스팅 시간을 아사드가 기다려 줄지 의문이었다. "라비스! 너 말할 수 있는 거야?" 그때, 내 근처에 서있던 레니가 나에게 그렇게 질문을 했다. 긴박한 상황 에서 그녀는 저런 질문을 할 정도로 내가 말할 수 있는 여부가 중요했던 것일까. 내가 그녀의 질문에 답하기도 전에 아사드가 나에게 외쳤다. "셀레네스! 이제 그만 본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봐요! 난 셀레네스가 아니라니깐요! 대체 왜 내 말을 믿지 못하고 무 조건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는 거예요? 나는 셀레나와 닮았긴 하지만 셀 레나가 아니라 그녀의 딸일 뿐이에요! 난 당신을 처음 본다구요!" "훗... 과연 그럴까요? 지금 당신에게 말걸었던 소녀... 당신의 친구겠지요? 그럼, 저 소녀를 한번 구해보시죠! 당신의 힘을 드러내어 나의 공격을 막 아 저 소녀를 구해 보란 말입니다." "앗! 그게 무슨 소리죠? 레니는 내 친구가 아니예요!" 그의 말에 나는 재빨리 그에게 그렇게 외쳤건만, 그는 내가 레니를 보호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짐작했는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어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곧 그에게서 뭔가 빛이 번쩍하더니 섬뜩할 정 도로 날카롭게 느껴지는 빛의 줄기가 레니에게 쏘아져 들어갔다. 레니의 눈이 휘둥그래 해지는 순간이었다. "아!" 저것은 공격성을 담은 신성력이었다. 겉보기로 보아, 한 대 맞으면 그대로 황천행을 할 것만 같은 위력적인 신성 공격이었다. 역시 신족이라 그런지 신의 힘을 빌어 신성력을 행하는 성직자들과는 차이가 있어 보였다. 그나저나, 내가 저 신력을 막기 위해 실드 스펠을 캐스팅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비록 얄밉지만, 나로 인해서 레니가 희생되려는 순간이 었다. 그것도, 황당한 이유와 오해로 인해서 말이다. 아아, 이럴땐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아! 하느님, 부처님 저 좀 도와주세요. 황당하고 다급하고 위험한 이 위 기를 저는 어떻게 넘겨야 할까요?' 나를 셀레나라고 믿고 있는 저 아사드라는 남자가 나를 도발하기 위해 레니를 공격하고 있는 이 시점에, 나는 절망스러울 때면 신들을 죄다 찾는 버릇대로 마음 속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아! 책대여점에서 체인지가 나온 것을 조금 전에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표지에 나온 라비스가... 그런 야시꾸리한 모습을 하고 있다니!! 아악!!! ㅜ.ㅜ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01-12-2001 11:43 Line : 229 Read : 4233 [37] 체인지[2부] 제3화 -반지를 찾아서!- (5) -------------------------------------------------------------------------------- -------------------------------------------------------------------------------- Ip address : 211.37.39.7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5- 역시, 나에겐 방법이 없었다. 나의 곁에는 나를 도울 만한 인물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기적처럼, 이 위급한 상황에 하느님이나 부처님 이 짜안~ 하고 나타나 나를 도와줄 리는 만무했기 때문에, 나는 한 가지 선택을 해야만 했다. 레니를 구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모른 척을 해서 그녀를 나로 인해 황 당한 죽음의 길로 인도할 것인지의 선택 중 말이다. 나는 결국 한가지 선택을 했다. 레니의 바로 곁에 있었던 나는 조금 몸을 움직였다. 이것은 역시 짧은 순 간 동안 내가 선택을 내리고 취한 행동이었다. 어쨌든, 내가 그렇게 몸을 살짝 옆으로 움직이자, 아사드의 신성 공격에 노출되어 있던 레니는 나의 육체에 의해 거의 가려졌다. 그리고, 대신 내가 아사드의 공격에 노출되게 되었다. 레니와 아사드의 눈이 휘둥그레해지는 순간이었다. 만약 이대로 죽게 되면, 나는 더 이상 미카엔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될 것 이다. 저번에 보았던 낯선 모습의 미카엔의 모습이 나에게는 마지막이 되 는 것이다. 그가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나를 어리석다고 탓 할 것이다. 나의 앞에서 에메랄드 빛깔의 눈부신 빛이 번쩍했다. 찰나와 같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미카엔의 얼굴을 떠올렸다. 역시, 나는 바보인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두려웠다. 누군가가 나로 인해서 불행해지는 것이... 누군가의 불행은 나의 불행을 낳는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누군가를 불행으로 몰아넣는 것은, 나의 불행을 부 추기는 행동이다. 나를 삼켜 버릴것 같은 신성 공격이 바로 코앞에서 느껴 졌다. 그것이 가까이 다가온 것만 해도 나의 육체는 고통을 느꼈다. "꺄아악~!!" 나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나의 비명은 고통으로 인한 것이 아니 었다. 또 다시 찾아올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비명이었다. 한번 안식을 맛보 았었던 나는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파앗-! 아무튼 나의 앞에서 당도한 에메랄드빛의 신성 공격은 번쩍하며 수십개의 갈래로 갈라져 사방으로 퍼져나가 버렸다. 다시 말해, 그 공격은 나의 앞에 서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는 말이다. 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커다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모 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벅. 아사드가 나에게 성큼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아마도, 내가 잘못 본 걸까요?" "……." "당신은 끝까지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 군요. 아무리 셀레네스라고 해도, 방어없이 제 공격을 받는 것은 죽음 뿐이었을 텐데..." "……." "결국 당신은 셀레네스가 아닌 것일까. 아니면... 훗." 그는 왠지 허탈한 기색이 도는 웃음을 흘렸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다리 가 풀려 바닥에 푹 주저앉았다. 그에게 답변하고 따질 힘도 남아있지 않 았다. 다만, 죽음이 피해간 것에 대한 안도감만 나에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오늘은 이대로 돌아가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셀레네스라는 것이 확신 이 될 때에 나는 다시 찾아올 겁니다. 아! 그리고 이건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에게 실버반지를 내주었다. 나는 얼결에 그것을 받아들였고, 아사드는 자신의 볼일이 다 끝나자 몸을 돌려 어디론가 발걸 음을 옮겼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사라지는 그였다. 아까 그의 공격이 나의 앞에서 흩어졌던 것은 아마도, 아사드가 자신의 공격을 재빨리 소멸시켰던 모양이었다. 내가 셀레네스라는 것이 확실치 않아서 공격을 회수했던 것일까. 신족들이란 아무 상관도 없는 존재에게 실수로 영향을 주는 행동은 하지 않는 모양이다. 여하튼 나는 그렇게 생 각되었다. 그리고... 아! 정말 셀레나 때문에 겪는 수난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이 세계에 와서 육체가 바뀐 것을 시작으로 해서... 그 후로도 그녀는 나를 이렇듯 괴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하마터면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꿈에 나타났던 그녀에게 따뜻함을 느끼곤 했던 나였는데... 이제는 다시 그녀에게 원망의 감정이 싹튼다. 아사드가 사라지고 나자 일행들은 나에게 몰려들었다. "괜찮으세요? 라비스님?" "네." 나는 아네샤와 에스라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물론, 실버 반지 는 나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잊지 않은 채 말이다. 아, 이젠 나의 물 건은 잘챙겨야 하겠다. "왜!" "……?" "왜, 아까 막아섰던 거야?" 멍하니 있던 레니는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나에게 따지듯 외쳤다. 설마, 나를 왜 구했냐고 따지는 것은 아닐 테지.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엄청 눈 부시고도 화사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일명 미소 어텍(Smile Attack)이다. 적을 나의 아군으로 만드는 무서운 마력 공격. 그러자, 레니는 흠칫해 보였다. 흐음... 왜 흠칫하는 걸까. "내가 아까 너를 막아섰던 건, 네가 아닌 나를 위해서였어. 어쩌면, 아까 그 남자의 말대로 나는 셀레네스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무의식 에서 작용한 행동일 지도 모르지. 나는 셀레네스가 아니라, 라비스 크로시 벨이니깐." "넌... 넌?" 다시 바뀐 나의 황금빛 머리칼과 눈동자로 인해 알아차렸을 그녀를 보며 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래... 라비스 크로시벨이 누구인지 이젠 감이 잡히겠지?" 그러자, 여신관들을 비롯한 루이안트는 갑자기 나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고개를 조아렸다. 레니 역시 덜덜 떠는 모습으로 나의 앞에 무릎을 꿇어 보였다. 이런 일행들의 모습에 나는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절... 죽여주세요. 흑! 왕비 전하." 레니가 나에게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루이안트는... "아! 왕비 전하, 루이안트는 우매해서 전하를 미처 알아보지 못했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의 누님이 왕비 전하를 닮은 모습으로 변했었던 것은 신의 뜻이라 생각됩니다. 저를 받아주십시오! 왕비 전하. 전하를 뵙고 모시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저를 부디 받아주십시 오!" 아! 점점... 더 당황스러운 나였다. 아네샤와 에스라 역시 고개를 조아린 채, 앞서 말한 이들의 말과 비슷한 내용의 말을 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 나는 얼른 입을 열 었다. "이제 그만들 하세요. 여러분들은 저에게 무례를 한 것이 없어요. 전 오 히려 여러분들의 스스럼없는 행동이 좋았답니다. 그리고... 레니!" 레니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다시 한번 흠칫했다. "예, 왕비 전하." "방금, 너는 이렇게 말했지? 죽여 달라고..." 그러자 레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 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에게 눈물 작전을 쓰는 것인가?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네, 죽여주세요. 어차피 왕비 전하는 저의 우상이시니깐요. 전하의 손에 죽는 것은 제 영광입니다. 흑! 전하이신 줄도 모르고 전하를 괴롭게 했던 제가 어리석게 느껴져 괴롭습니다. 희망없고 비참한 제 인생에서, 왕비 전 하는 귀족들이신 분들 중에 유일하게 동경하는 분이셨어요. 당당하고 강 한 모습으로서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전쟁을 승리로 이끄셨던 전 하의 모습을 동경하고 저의 희망으로 삼았었는데... 흑! 저는 전하가 돌아 가신 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더 이상 희망을 가지고 않았는데... 그토록 만나 뵙고 싶어했던 전하가 제 앞에 계신 분인지도 모르고 그런... 흐흑!" 아! 정말 마음 약해진다. 레니의 의외의 모습에 나까지 눈물이 그렁그렁 해지는 것 같다. "난 너의 나라 자이라스를 무너뜨린 장본인이야, 레니." "훌쩍. 전하! 저는 자이라스가 무너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인 이 바뀌었을 뿐이지요. 원래 자이라스는 인페르디아 속국이었지요. 그러 다 마법 도적단이라는 존재에 의해 자이라스 왕실은 주인이 바뀌었어요. 하지만, 그들은 뭔가 강압적이었어요. 게다가 흑마녀들이 무척 활개를 쳤 지요. 전 자이라스를 중오합니다. 물론 그건 애증(愛憎)이에요. 전 자이라 스에서 태어났으니깐요. 전 왕비 전하께서 자이라스에 희망을 가져다 주 신 거라고 믿어요. 비록 로히얀스의 손길 아래 있지만, 자이라스의 가난 한 백성들은 오히려 이제는 잘살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일행들 역시 침묵을 지 키며 나와 레니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래, 레니! 난 한번 더 너를 믿어볼 거야. 네가 나를 동경하고 있다고 해서가 아니야. 그냥 너를 다시 한번 믿어보고 싶어. 레니,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란 결코 어리석은 것이 아니야. 처음에 난 너와 친구 가 될 수 있어서 정말 기뻤어. 내가 느꼈던 그 기쁨을 너 역시 느꼈으면 좋겠다. 배신이라는 거, 언젠가는 사람을 멍들게 해. 배신을 받은 사람, 준 사람 양쪽 다 말이야." 내가 그렇게 조용히 말을 마치자, 레니는 울음을 터뜨렸다. 감정이 심하 게 복받쳐 흐끅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서 눈을 돌려 루이안트를 바라보았다. "루이안트! 그대를 받아들이겠어요. 저와 같이 왕성으로 돌아가도록 하 지요. 그대의 누님은 아마도 나의 대리자였던 것 같아요. 대리자가 무 엇을 뜻하는 것인지... 어떤 인연과 운명으로 연결된 것인지 나 역시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대를 꼭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같군요." 그러자 루이안트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무릎을 꿇고 나의 손등에 입 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맹세의 말을 했다. 왠지 기사가 하는 맹세의 말 같이 느껴졌다. "저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이안트 아스칼리테는 지금 이 순간부터 왕비 전하이신 라비스 크로시벨님께 목숨을 바쳐 충성할 것을 자애와 정 령의 여신 셀레네스 혹은 미의 여신이기도 한 크리시아나께 맹세합니다." 이것으로 나는 왕비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것일까? 나는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진실된 마음을 받는다는 것! 그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 체인지 퍼가는 홈 중에 작가들의 글 왕국인가? 아시리안 홈인가? 그 홈피는 체인지를 왜 삭제 안하는 거죠? 오늘까지 안하면 펌허락 더이상 안합니다.ㅡㅡ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02-01-2002 16:14 Line : 179 Read : 2126 [18] 체인지[2부] 제4화 -훌륭한 왕비가 되기 위한 지침- (1) -------------------------------------------------------------------------------- -------------------------------------------------------------------------------- Ip address : 211.211.235.199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훌륭한 왕비가 되기 위한 지침) -1- 어느덧 7월의 한달도 기울어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여름의 계절도 이제 중턱에 이른 셈인 것이다. 나와 나의 일행들은 이제 로히얀스의 수도 로 히아나를 지나고 있었다. 조금은 허름한 평민들의 주택가를 마차로 지나 상권이 형성된 번화가로 진입하게 되자 제법 깔끔한 차림을 한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가끔 지나는 길에는 귀족의 레이디나 부인들을 위한 헤어, 의상샵 같은 뷰티샵 같은 것도 눈에 띄었다. 또한 화려한 보석가게들도 있었고 고급 레스토랑들이 경쟁하듯 즐비하게 서있었다. 이곳은 귀족들을 위한 번화 거리인 듯 했다. 서민들이 즐겨 찾는 뒷골목이나 허름하고 잡다한 거리와는 확실히 품격이 달라보였다. 같은 도시 안에 있는 거리의 모습이 이렇듯 다르다니... 왠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귀족들을 위한 거리와 서민들을 위한 거리 가 따로 분리되어 있는 듯 했다. 그렇다면 이 화려하고 고풍스런 모습의 거리를 지나는 대부분의 사람은 귀족들일 듯싶었다. “와아~ 정말 멋진 거리예요! 전하. 역시 로히얀스예요.” 레니가 눈을 반짝이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그녀는 매우 들떠 있었다. 내가 짐작하건데, 그녀의 머릿속은 지금쯤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을 듯 했 다. 나는 그녀를 시녀로 삼겠다고 말했었는데 그 후로 레니는 계속 저렇게 들떠 있는 것이다. 하긴 왕비 측근 시녀가 된다면 웬만한 귀부인보다 더 영향력이 생기는 것이고 화려한 왕성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인데 기분이 좋 지 않고 배기겠는가? 그렇게 번화한 거리들을 지나 우리가 탄 마차는 왕성의 입구까지 도착하였 다. 위엄 있는 로히얀스 왕성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자 무척 설레고 긴장이 되었다. 아마도 미카엔의 모습도 곧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가 나의 모습을 보고 놀랄 생각을 하니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러다 나는 루이안트를 돌아보았다. 그 역시 긴장이 되어있는지 얼굴 근육 이 빳빳이 굳어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런데 그때. “멈추시오!” 왕성의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들이 우리가 탄 마차를 제지하였다. 우리는 왕 성에 출입할 수 있는 신분이 확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저지당한 것이다. 나는 마차의 창으로 얼굴을 내밀어 밖의 상황을 살폈다. 그러자 마차를 몰던 로히얀스의 시골 출신 마부가 경비병들에게 굽실거리며 허락받지 못한 평민은 왕성에 출입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다며 사죄하고 있 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으음... 아마도 내가 나서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내 가 나서기도 전에 누군가가 당당히 경비병들 앞에 나섰다. 그는 나의 충실한 기사(?)가 된 루이안트 아스칼리테였다. “문을 열어라! 감히 누구의 앞을 막는 것이냐?!” 역시 귀족 출신이라 그런지 그의 목소리에는 위엄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경비병들은 잠시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루이안트와 우리가 타고 있던 마차의 행색을 보고는 다시 의기양양해져 비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거참, 황당한 녀석이군. 우리가 누구의 앞을 막고 있는데?” “저 마차 안에 계시는 분은 로히얀스의 위대하신 왕...” “루이안트! 그만두세요.” 루이안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나를 소개하는 루이안트의 거창한 서 두에 부담감을 느끼며 그의 말을 잘랐다. 굳이 여기서 왕비라고 신분을 밝 히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나는 여기서 죽은 걸로 되어있는데다가 저들은 나의 얼굴을 모를 테니 말이다. 나는 우아한 몸짓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경비병들을 향해 저 하늘 에 떠있는 태양만큼이나 눈부신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들의 입과 눈이 크게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저 허름한 마차 안에서 하늘에서 하강한 천녀나 신녀 와 같은 초절정 미소녀가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저희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왕성의 문을 여세요.” “네, 그러죠. 헤헤. 아! 이게 아니지. 이곳은 아무나 들어가실 수는 없습니 다.” 그 경비병은 헤벌쭉해져서 나의 당당한 요구에 얼떨결에 답하다가 로히얀스 의 왕성을 지키는 자답게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고는 그렇게 외쳤다. “그럼... 이 표식이 있으면 들어갈 수 있나요?” 나는 한쪽 손목을 내밀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얼마 전, 미카엔이 나에게 직접 남겨주었던 표식이었다. 이것이 있으면 왕성 안에 있는 자들은 나를 무사히 안으로 들여보내줄 것이라 그가 말했었다. “앗! 이건...” 표식을 본 경비병은 놀라며 외쳤다. 아마도 미카엔은 이 표식을 가지고 있는 소녀가 있으면 안으로 무사히 들여보내라고 모든 이들에게 명령을 내렸을 것이 분명했다. 하하... 그가 남겨준 기이한 문양의 표식을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미카엔이 나에게 이것을 남겨줄 당시에는 그저 모습만 바뀌면 나는 무난히 왕성 안으로 출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 표식이 있어서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표식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정령의 도움을 받았어야 했을 테고, 그렇다면 내가 정령을 이용한다는 것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 모두에게 알려지게 되고 말 았을 것이다. 아무튼, 경비병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나에게 굽실거리기 시작했 다. “아이고! 귀하신 분이었군요. 몰라 뵈었습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여신관님. 제가 연락하여 중앙 궁성의 귀빈 응접실에 여신관님을 모시도록 조치를 취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럼...” 그의 배려에 나는 감사의 말을 하고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마차 안 에 있던 일행들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의아한 표정들을 지어보였다. “어떻게 된 거예요? 전하.” “별거 아냐. 그저 예전에 폐하께서 직접 주신 출입증을 제시했을 뿐이야.” 레니의 질문에 나는 가벼운 어조로 답했다. 그러다 나는 한 가지 장난기가 발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 기회에 한번 미카엔을 놀려주는 것이다. 결국, 나는 아네샤에게서 여신관들이 성스런 예식에 참여하거나 할 때 쓰이거나 긴 여행길에서 뜨거운 햇빛 같은 것을 가리는데 쓰이는 천을 빌려 그것으 로 나의 긴 머리칼과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일행들에게 내가 왕비임을 잠시 동안만 비밀로 하라고 일러두었다. 일행들은 나의 엉뚱한 요구에 의아해 했지만, 나는 그들에게 씨익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아무튼, 마차는 그렇게 한참을 달려 중앙 궁성의 앞까지 겨우 당도했다. 중앙 궁성은 입구에서 꽤나 깊숙이 들어가기 때문에 꽤 멀었던 것이다. 나는 중앙궁성의 시종에게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벌써 경비병의 연락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긴, 이곳 왕성에서는 다양한 마법 시스템 같 은 것이 있으니 금세 연락이 가능할 것이다. 마차에서 내린 나는 바로 앞에 위엄 있게 자리 잡은 중앙궁성의 모습을 잠시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곳이... 위대한 로히얀스의 국왕이자 내가 보고 싶어 했던 미카엔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나는 비서관으로서 그를 보필했고 왕실 부수석 마법사로 서 마법사들을 이끌었었다. 내가... 이곳에 다시 온 것이다. 많은 일이 있었 던 방황을 마치고 그의 옆에서 이곳 로히얀스를 바라보기 위해... 왠지 감정이 복받이고 기묘해진다. 그리고 가슴이 뛴다. 잠시 흩어졌던 것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는 순간이 온 듯 했다.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다 시 돌아온 것이고 나의 운명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 원래 흘러가던 한 방향 으로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혼자 감동에 휩싸인 나는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끼며 시종의 재촉 에 의해 중앙 궁성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 오랜만이죠? 한달 만에 체인지를 올리는 것 같군요. 늦어서 죄송하구요. 그리고 그동안 저에게 이멜 보내주신 분들께 제대로 답장을 하지 못한 것 같군요. 저 미워하지 않을 거죠?ㅜ.ㅜ 제가 워낙 게을러서...^^;; 아! 글구, 지민님? 으으... 왜 답장이 안가는 거죠? 자꾸 되돌아오는 군요. 답장을 못 쓰는 것은 제 본심(?)이 아닌데..... (퍽!).. 암튼, 오랜만에 체인지를 올리게 되서 너무나 기쁜 라얀입니다. 체인지 3권은 곧 나갑니다. 제가 분량을 잘 조절 못해서 꽤 책이 두꺼워 질듯....;; 아! 또 한가지.... 체인지 카페가 생겼답니다.^^* cafe.daum.net/changelayan -체인지 다음 팬 카페 club.SayClub.com/@anrtlwk -이건 원래 있던 세이 팬 동회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04-01-2002 06:07 Line : 199 Read : 1487 [19] 체인지[2부] 제4화 -훌륭한 왕비가 되기 위한 지침- (2) -------------------------------------------------------------------------------- -------------------------------------------------------------------------------- Ip address : 211.211.235.199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2- “꺄아! 여기가 정말 왕성이야? 에스라님, 여기 정말 멋지지 않아요?” “쉿! 레니, 조용해! 저 시녀가 너를 째려보고 있잖아?” 우리는 화려한 중앙 궁성의 홀을 지나 3층에 있는 귀빈실로 가게 되었 는데 3층부터는 어떤 시녀의 안내를 받게 되었다. 그녀는 호들갑스런 나 의 일행이 무척 거슬리는지 무척이나 인상이 험악해져 있었다. 그녀는 중앙 궁성의 상급 시녀 직분을 나타내는 시녀복을 입고 있었는 데 그 태도가 꽤나 오만해 보이는 중년 여성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 가 이래봬도 하급 귀족 출신이라는 것을 언젠가 루이스에게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녀의 안내를 받아 그렇게 복도를 지나다가 나는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 다. 후원을 볼 수 있는 복도에서 창문으로 미카엔의 검술 대련 모습을 지 켜보았던 일이... 나는 시녀를 따라가다 말고 이 복도가 그때의 그 장소라 는 것을 상기하고는 창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후원의 적당한 장소에서 미카엔이 그의 나이든 스승과 검술 대련을 펼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챙 챙! 이렇게 쉽게 빨리 그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이상하게도 심장 박동이 아까보다 더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 나의 심장도 드 디어 미친 모양이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동전 하나를 꺼냈다. 화폐 단위가 가장 낮은 조그 만 동전이었다. 무게도 가벼운 것이 현실 세계에서 쓰였던 50원 짜리 동전과 비슷했다. 내가 시녀를 따라가다 말고 한눈을 파는 것을 일행은 미처 눈치 못 챘 는지 계속 시녀를 따라가며 멋진 궁성의 내부에 감탄을 했다. 훗... 그들 은 왕성은 처음이니 그렇게 정신이 팔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짓궂은 미소를 살며시 머금고는 창으로 얼굴을 조금 내밀 었다. 그리고 신중하게 목표(?)를 조준하여 가볍게 던졌다. 나의 동전은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며 검술 대련에 열중하고 있는 미카엔을 향해 주저 없이 날았다. 나의 동전은 자신이 부딪히게 될 존재가 한 나라의 국왕이 자 드래곤의 아들이라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모양이다. “앗!” 동전은 자신의 목표 지점에 가서 정확히 떨어졌는지 문득 미카엔이 짧은 외침소리를 내었다. 이에 나는 잽싸게 숨었고 킥킥대었다. 나의 조준 실력 에 매우 흐뭇해하며 말이다. 그렇게 내가 던진 동전에 대한 파장은 미카엔의 짧은 외침으로 그치지 않 았다. 미카엔은 떨어진 동전의 소재지를 파악하려는지 내가 내다보던 창문 쪽으로 눈길을 주었고 이에 그의 스승은 미카엔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공 격을 가해왔던 것이다. “폐하! 오늘은 집중력이 떨어지시는 군요.” “앗! 리프먼경, 그대의 기사답지 못한 태도는 여전하군.” “폐하, 이번엔 무엇에 한눈을 파셨습니까? 폐하의 상념을 어지럽힐 수 있 는 존재는 딱 하나지 않습니까? 하하.” “물론, 그렇지! 그런데 방금 뭔가 기이한 느낌이 들었는데.” “오, 이런! 혹시 방금 떨어진 동전에게서 무슨 전율이라도 느끼셨습니까? 아니면, 조그만 동전으로 폐하께 감히 장난을 칠 수 있는 존재를 그새 하 나 만드신 겁니까?” “으음... 리프먼경, 그만하시오! 어쨌든 확인은 해야 하겠군. 저 곳에 숨은 고양이가 누군지...” 미카엔은 그렇게 말하며 그의 장검을 거두고 내가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움직여 떨어진 동전을 주웠다. 나는 눈만 내 밀어 그 모습을 보고는 일단 몸을 피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쯤에서 그를 놀려줄 기회를 접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몸을 돌려 달리기 위해 도움닫기를 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나의 팔 목을 세게 움켜잡았다. ‘헉!’ 그새, 미카엔은 단거리 공간이동을 하여 내 앞에 나타나 나의 팔목을 잡은 모양이었다. 아, 놀래라~ 나는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최대한 애쓰면서 그 를 바라보았다. 미카엔은 잡은 나의 팔목에 새겨진 표식을 보고 있었다. “아! 그때의 여신관님이시군요.” 미카엔은 그렇게 아는 척을 하더니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 그 를 얼핏 보고는, 나는 그가 나를 못 알아봤다는 서운함 대신에... 이야~ 미 카엔을 속였다! 하며 내심 기뻐했다. 아아, 상황에 따라서는 내가 이렇게까지 단순하게 변하는 구나! 하는 생각 이 드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기쁜 내색은 하지 않고 그의 말에 살며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꾸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나는 애써 눌러 참았다. “동전은 돌려드리지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잡고 있던 나의 손에 동전을 쥐어주었다. 그러면서 나의 손을 잡고는 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동전을 돌려주었으면 손을 놓 아줄 것이지, 놓지 않고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인지... 으음. 미카엔이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천으로 가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를 직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왜 갑자기 나를 그렇게 뚫어져 라 바라보는지 모르겠다. 가슴 떨리게 말이다. 미카엔은 계속 나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 감싸 쥐고 있다가 문득 그 힘을 더 가해 나의 손을 꼭 쥐었다. 그의 그런 행동에 나는 의문이 들었지만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 그의 은보랏빛 눈동자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러니, 지금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내가 고개를 들어 나의 황금빛 눈동자로 그를 바라본다면, 그는 내가 라비스라는 것을 알 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무튼, 나는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애쓰며 고개를 최대한 숙였다. 이러니깐, 그가 손을 붙잡아서 부끄러워하는 조신한 모습이 되는 것 같 아 심히 민망했다. “나에게 얼굴을 보여주시겠습니까?” ‘핫! 얼굴을 보여 달라니? 설마 들킨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망설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어차피 벙어리 여신관이었으니 말소리를 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그의 요구에 내가 거절을 하자 미카엔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뭔가 그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으, 정말 내가 들킨 것인지 들키지 않은 것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얼굴을 들어 그의 표정을 볼 수도 없고... 곧 미카엔은 다시 입을 열었다. “훗... 좋습니다. 아! 저는 이만 가보아야 하겠군요. 곧 시녀가 와서 여신관 님이 편히 쉴 침실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이따 저녁때 다시 보지요. 아름 다운 여신관님.”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의 손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는 뒤를 돌아 어디 론가 발걸음을 향했다. 그가 그렇게 사라지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가 나에게 저녁때 다시 보자고 그랬 을까? 아마도 그는 나와 저녁 식사를 같이 하겠다는 의미로 말한 듯싶었다. 어쨌든, 나는 미카엔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어서 어떤 식으로 재회를 했던 간에 기분이 좋았다. 그가 너무 반가웠고 그에게 나의 존재를 당장에 알려주 고 싶었지만, 그를 놀릴 수 있는 다시없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 마음을 눌러야 했다. 아무래도 나는 쓸모없는 일에 많은 열정을 소비하는 성격인 것 같았다. 잠시 후, 한 시녀가 나에게 다가왔고 나는 그녀를 따라서 나에게 준비된 침실 로 향했다. “저어... 제 일행들을 다시 봤으면 하는데요. 전 일행과 같이 이곳에 왔거든요.” “여신관님의 일행들은 걱정 마세요. 그 분들은 왕성 구경을 하며 따로 편하게 쉬시게 될 테니깐요. 폐하께서 그렇게 지시하셨습니다.” “그래요?” 그 사이 미카엔은 나의 일행들에 대한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린 모양이었다. 훗... 꽤 일처리가 빠른 국왕이었다. 나는 오랜 여행으로 인한 피곤이 몰려오 는 것을 느끼며 시녀가 안내해준 침실에서 목욕을 하고 몸을 쉬었다. 이렇게 깔끔한 방에서 몸을 쉬는 것은 정말 오랜만인 듯 했다. 나는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끼며 침대에서 뒹굴 거리는데, 시녀들이 나의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그럼 아까 미카엔이 저녁때 보자고 했던 것은 같이 저녁을 먹자는 소리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의아해졌지만, 워낙 배가 고팠던 지라 이내 하던 생각을 접고는 식사를 했다. 그리고는 미카엔을 어떤 방법으로 놀려주고 어떠한 극적인 방법으로 그에게 나의 정체를 밝힐까, 하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최대한 극적인 효과를 내야 할 텐데. 훗... 그가 놀랠 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즐거워졌다. 그렇게 나름대로의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고, 오랜만에 침실에 꽂혀있던 책을 꺼내어 독 서를 하고 있는데... 똑, 똑! 침실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나는 얼른 천으로 다시 얼굴 을 가리고는 들어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국왕의 측근 시종이 조심스레 들어와 나에게 입을 열었다. “로히얀스의 위대하신 국왕 폐하의 전언을 가지고 왔습니다. 국왕 폐하께 서는 여신관님께 한 가지 제의를 하셨습니다.” “네? 무슨 제의를 하셨는데요?” “폐하께서는 여신관님이 돌아가신 왕비 전하의 자리를 대신 해주시기를 원 하십니다.” “네에? 그, 그 말은 즉... 폐하의 청혼인가요? 저한테요?”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07-01-2002 13:21 Line : 190 Read : 1260 [20] 체인지[2부] 제4화 -훌륭한 왕비가 되기 위한 지침- (3) -------------------------------------------------------------------------------- -------------------------------------------------------------------------------- Ip address : 211.211.235.199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3- “네에? 그, 그 말은 즉... 폐하의 청혼인가요? 저한테요?” “글쎄요. 저는 폐하의 말씀을 그대로 여신관님께 전할 뿐입니다. 그 외 에는 다른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여신관님은 폐하의 전언에 대한 수락 이나 거절의 의사만 밝혀주십시오. 폐하께 직접 말입니다.” 폐하께 직접 제의에 대한 의사를 밝혀라... 그것이 시종이 전해온 미카엔 의 말이었다.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죽음으로서 그와 헤어 지게 되었다가 이렇듯 힘겹게 그에게 다시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는 나 를 다른 소녀로 오인하고 이렇게 청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왠지 실망스럽고 서운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나를 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존재는 너무도 쉽게 빨리 잊혀지고 마는 것 같아서 결국 나의 존재는 그것 밖에 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세삼 서글퍼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나는 이곳 사람도 아니고 그의 진짜 운명의 상대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는... ‘에휴~’ 나는 스스로의 머리를 콩콩~! 때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어댔다. 그렇 게 시간이 조금 흘러... 다시 또 다른 시종이 나의 침실을 찾았다. “여신관님을 폐하의 개인 서재로 모시고 오시랍니다.” 그 시종의 말에 나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국왕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지라 일단 그를 따라나섰다. 이젠 그와의 재회에 대한 기대감 같은 것은 사라졌다. 아무튼, 그 시종을 따라 미카엔의 개인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고 어느새 서재 앞에 도착하자 시종은 미카엔에게 나를 데리고 왔음을 알리고는 자 신의 갈 길로 미련 없이 사라졌다. 결국 나는 어색하게 서재 안으로 들 어섰다. 그러자 편안한 실내복을 입은 채 책을 읽고 있는 미카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는 서재 안으로 들어선 나에게 눈길을 주고는 한참을 말 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 그의 눈길에 나는 어찌 행동해야 할지 몰 라 그가 입을 열 때까지 딱딱하게 서있어야만 했다. 잠시 후, 미카엔은 낮은 나에게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는 내가 이곳의 국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내가 미카엔이 여신관으로서 나를 처음 만났을 때 국왕이라는 신분을 밝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내가 그의 신분에 대해 그다지 놀라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하 고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럼, 나에게 예를 갖추시오!” 이에, 나는 이마에 힘줄이 하나 솟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의 앞에 말없 이 무릎을 꿇어보였다. 미카엔은 나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더니 다시 입 을 열었다. “그대를 다시 보게 되기를 무척이나 소망했었습니다.” ‘무슨 소망씩이나... 결국 미카엔 녀석 여신관인 줄 알고 있는 나를 꼬시 기 위해 부른 셈이잖아?’ 나는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지금 상 황이 무척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여신관으로서의 나 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는 셈이었다. 앗! 그런데, 질투라니? 으음.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그대를 사랑해왔기에...” ‘하긴 그럴 테지. 그랬으니 겨우 한번 본 여신관에게 청혼을 할 테지. 나쁜 자식!’ “...이렇게 다시 보게 되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대의 이름을 수없이 되뇌느라 나의 목이 마르고 눈물이 마르고 영혼이 말라가는 나의 모습을 그대는 알고 있을지 모르겠군요. 라비스.” ‘헉! 한번 본 여신관에게 그렇게 애절했단 말이야?! 바람둥이 자식, 아주 시를 쓰는 군.’ 그의 말 마지막 어구에 라비스라는 이름으로 인해 나는 잠시 흠칫했지만, 미카엔은 여신관의 이름 역시 라비스로 알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속 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나에게 가까이 오시오, 아름다운 라비스.” ‘아름다운 라비스라고? 나의 이름을 아무 여자에게나 그딴 식으로 부르다 니... 아! 그러고 보니, 라비스라는 이름도 나의 본명은 아니잖아?’ 그렇게 뒤죽박죽 미카엔이 한마디 할 때마다 잡생각을 하던 나는 별생각 없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미카엔은 나의 손을 잡더니 부드럽 게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보여줄 것이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텔레포트 시동어를 나직하게 외쳤다. 그러자 나와 미카엔이 서있던 공간은 순식간에 그 모습이 바뀌었다. 내가 서있던 고 급 융단이 깔려있던 서재의 바닥은 왕성의 지붕으로 바뀌어 있었고 책이 가득 꽂혀있던 서재의 벽은 한여름 밤의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한 밤하늘 과 멀리 보이는 도시의 모습으로 바뀌어있었다. 미카엔은 나를 데리고 공간이동을 한 것이다. 왕성의 가장 높은 지붕의 꼭대기로 말이다. 꽤 높은 곳이라 그런지 약간 거친 바람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미카엔의 아름다운 은발이 저기 보이는 별들과 달빛처럼 은은 한 은빛으로 반짝이며 휘날렸다. 아무튼, 무척이나 높고 좁은 곳이라 나는 위태로움을 느끼며 이곳으로 나를 데리고 온 미카엔을 속으로 아낌없이 욕을 했다. 바람이 센 곳에 서 서있으려니 균형 잡기가 상당히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카엔은 그런 나를 아주 자연스레 감싸 안으며 나에게 어느 한 방향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켜보였다. 그가 가리킨 곳은 파묻힌 어둠 속에서 간 간히 조그만 불빛들을 발하고 있는 도시의 모습이었다. “라비스는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보수적인 것과 자유분방함이 한데 어우러지고, 어두운 면과 화려하고 눈부신 면이 기이하게 공존하고 있는 로히얀스의 아름 다움을... 왕비의 눈으로서 말입니다.” 이제 그의 본론이 나온 듯싶었다. “...나의 제의에 대한 답변을 이제 해주었으면 하는 군요. 내가 사랑하는 라비스가 잠시 비우고 간 왕비의 자리를 여신관이 된 라비스 그대가 다 시 맡아주십시오.“ 이쯤 되자, 나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미카엔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기적과도 같이 그대가 여전히 이 세상에 존재하며 숨을 쉬고 있듯이... 다시 나의 곁에서 이 로히얀스를 함께 바라보았으면 하는 군요.” 나의 몸이 떨려왔다. 나는 눈을 들어 그의 은보랏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의 눈동자색은 한결 짙어진 빛이었다. 그리고 무척이나 흔들리고 있었다. 얼굴을 감추느라 보지 못했던 그의 눈빛을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 보는 순간이었다.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척 놀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빛에는 의외로 장난기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의 눈동자 안에는 많은 감 정들이 짙은 빛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이제야... 네 얼굴을 만져보겠군, 라비스. 네가 언제쯤에야 네 황금빛 눈 동자를 보여줄까, 생각하고 있었어.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거짓말같이 숨 을 쉬고 있는 너의 따뜻한 숨결을 확인하고 느끼고 싶었거든.” 그렇게 미카엔은 손을 들어 나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낯 뜨거운 발언을 하 였다. 따뜻한 숨결을 확인하고 느낀다니... 역시나 숨결을 느끼는 방법(?)에 는 그 만의 방식이 있었다. 바로 키스라는 방법이... 그의 입술이 다가오자 나는 갑작스레 바뀐 상황에 기겁을 하며 그를 밀쳤 다. 라비스가 된 후로는, 지금 내 상황이 어찌되었든 무조건 밀치고 보는 것이 이제는 나의 슬픈 습관이 되어버린 듯 했다. “으악!” 결국, 나는 균형을 잃고 몸이 기우뚱하게 되었는데... 흐음, 여자로서는 그 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비명을 그에게 지르고 말았다. 내가 이도현으로서 실수로 옥상에서 투신한 뒤로부터는 높은 곳에서 균형을 잃는 것을 끔찍 이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미카엔은 얼른 팔을 뻗어 나의 허리를 감싸 안아 다시 자신에게로 끌어 당겼고, 그 바람에 머리와 얼굴을 감싸고 있던 천은 저 아래로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 그러자 나의 휘황찬란한 황금빛 머리칼은 완전히 그 모 습을 드러내어 허공에 나부끼며 매혹적인 빛을 발했다. 여신관이 아닌 라비스 크로시벨로서 미카엔과 완벽히 재회하는 순간이 었다. * 체인지 카페가 하나 더 생겼네요^^; 주소는... http://cafe.daum.net/vchangev 입니다. 그리고... 체인지 1부 아직 안지우신 분들은 얼른 얼른 지우시길.... 오늘 중으로 지우지 않는 곳이 있다면... 펌 허락 안할 꼬예요.ㅡㅡ;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13-01-2002 17:47 Line : 144 Read : 2366 [19] 체인지[2부] 제4화 -훌륭한 왕비가 되기 위한 지침- (4) -------------------------------------------------------------------------------- -------------------------------------------------------------------------------- Ip address : 211.208.73.23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4- 나는 맨 처음 미카엔과의 재회는 아주 감격적이고 놀라움으로 가득할 것 이라 기대했다. 죽은 줄 알고 있던 부인(?)이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 돌아온다면 그는 얼마나 놀라겠는가? 그것은 기적이라는 말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 하긴, 기적이라는 표현이 맞긴 했다. 나는 여신 의 대리자에게서 다시 한번 삶의 기회를 받은 셈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런 나의 기대대로 미카엔과 나의 재회는 무척 인상적이긴 했다. 그런데. “하하하. 라비스, 넌 여전하군.” “으, 미카엔. 절 놀리시다니 너무하네요!” “바보. 장난은 네가 먼저 시작했다, 라비스. 그리고 나를 완벽히 속이려면 네 손가락에 있는 그 반지나 빼고 하지 그랬어?” “앗?!” 이마에 힘줄 세우고 외치던 나는 그제야 나의 계획이 어디서부터 틀어졌는지 깨닫고는 안색이 변하여 짧은 외침소리를 내었다. 중요한 실버반지에 대해 잊 고 있었다니! 나는 그를 놀리려다 오히려 거꾸로 그에게 당한 셈이 된 것이다. 이렇게 허탈할 수가!! 역시 그와의 재회는 확실히 인상적인 반면 나로서는 무척 당황스러운 재회였 다. 쳇~ 미카엔 녀석 굉장히 즐거워하는 것 같다. “아직도 네가 나의 품안에서 이렇게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 안 믿겨져. 라비 스, 설마 이건 꿈은 아니겠지?” 게다가, 그 직후부터 쏟아져 나오는 미카엔의 닭살스런 발언과 낯 뜨거운 말 들이란! 참으로 열정적이기까지 했다. 그는 내가 다시 돌아온 것을 여신의 기적이라 고 말했다. 내가 셀레네스를 모시는 여신관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는 아마 도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또한 그는 이런 말도 했는데... “너는 미의 여신의 가호를 받는 소녀인 셈이군. 이렇듯 아름다운 너라서 미 의 여신인 셀레네스 역시 특별히 아낀 것일까? 아, 정말 믿기지 않아.” 그래서 나는 죽음에서 깨어나 보니 내가 셀레네스 신전에 있었더라는 말로 서 모든 설명을 대신하였다. 물론 셀레네스의 대리자에 대한 얘기까지는 굳이 하지 않았다. 나도 뭐가 뭔지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어쨌거나, 이 기적 같은 상황은 여신의 가호로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만은 사실인 듯싶었다. 미카엔은 여전히 의문이 남은 듯한 기색이었으나 일단 내가 돌아왔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 무척 기뻐해 주었다. 그날 밤 그는 내내 감정이 고 조된 기쁜 기색을 하고서 나를 놓아주려 하지 않아 나는 무척 곤욕스러 웠지만 말이다. 그러다 늦은 밤에 측근 대신들을 모두 불러내어 연회까지 베풀었는데, 그 대신들 중에서는 일찌감치 꿈나라에 갔다가 억지로 깨어난 기색이 역 력하여 미안한 느낌도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내가 돌아온 것을 믿기 힘들어하면서도 진심으로 기뻐해 주어서 나는 행복했다. 잠시 흩어지고 엇갈렸던 운명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 흐르기 시작한 행복 한 이날, 연회에서 미카엔은 한 가지를 선포했다. 그것은 지금 이순간도 쇠퇴해가는 셀레네스 신전을 다시 예전처럼 부흥 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현재는 셀레네스 신전은 자이라스에서만 남아 있지만 미카엔은 로히얀스 수도인 로히아나에도 신전을 건축하겠다고 하 였다. 그리고 국가적인 보조도 해주겠다고 약속하는 선언도 하였다. 창조신 아덴만이 자리 잡고 있던 로히얀스에 다시 예전의 영광처럼 셀레 네스가 그 세력을 뻗치게 될 계기가 되는 순간이었다. “왕비 전하, 일어나십시오!” “우웅...” “왕비 전하! 지금 태양이 중턱에 걸려있습니다. 어서 일어나셔서...” “어제 연회 때문에 늦게 잤던 말이야. 5분만... 루이...” 평소의 습관대로 나는 5분만을 외치며 루이스의 이름을 말하다가 나는 멈칫하고는 눈을 떴다. 아아, 이젠 루이스는 다시 나를 깨우게 될 일은 없는데 나는 여전히 버릇대로 루이스가 나를 깨우고 있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습관은 정말 무서운 것이라더니... 나는 눈을 뜨고는 나를 깨우던 중년 시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녀는 상 급 시녀복을 입고 있는 깡마른 몸매의 중년 여인이었는데, 풍만한 루이스 하고는 왠지 대조적인 이미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루이스처럼 위압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굉장히 깐깐해 보이는 그녀의 인상이 보통은 아닐 것 같아 보였다. “한 나라의 국모 되시는 분이 이렇게 늦게 일어나셔야 되겠습니까? 자고 로 훌륭한 왕비가 되기 위해서는 로히얀스 백성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셔 서 폐하를 보필하며 나라를 돌보셔야 합니다.” 이 중년 여인은 내가 머물게 되는 장미궁의 시녀장이 된 ‘마드린’ 이었다. 원래 ‘타냐’ 라는 이름의 여인이 시녀장이었지만, 그녀는 프레야 왕비가 돌아가신 후 시녀장 직책을 그만두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버려 마드 린이 시녀장이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마드린은 그렇게 첫인상부터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잔소리로 서 나를 달달 볶기 시작했고, 그녀는 입버릇처럼 훌륭한 왕비가 되기 위 해서는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위압적인 표정과 터프한 행동으로 나를 제압하곤 했던 반면, 마드린은 모든 것을 잔소리로서 해결하려는 여인인 듯했다. 아무래도 입 심이 대단할 것 같은... “마드린, 훌륭한 왕비가 되기 위해서는 꼭 일찍 일어나야 하나요?” “그럼요, 전하. 앞으로 전하께서는 적어도 아침 여섯시 이전에는 일어나 셔야 할 겁니다.” “에에엑~!! 뭐하러 그렇게 일찍 일어나요?” 그러자 마드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나를 응시했다. “전하께서는 우선 그 말투부터 고쳐야 하겠군요. 고귀하신 로히얀스의 왕비 전하께서 ‘에에엑~!!’ 이라니요? 자고로 훌륭한 왕비가 되기 위해 서는 마음가짐뿐만 아니라 행동과 말투 역시 우아하고 고상해야 합니 다.” ‘헉! 그렇다고 내 말투를 흉내 낼 것 까지는 뭐람!’ 아무래도 나는 그녀에게 잘못 걸린 듯 했다. 마드린은 불평 가득한 나의 모습을 보며 뭔가 투지에 활활 불타오른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마도 그녀는, 가끔 보이는 나의 자유분방(?)하고 털털한 행동 가짐을 우아하고 고상한 왕비다운 몸가짐으로 바꾸어야 하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모양이었 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루이스만큼이나 만만치 않은 존재를 만난 것 같 다는 불길함에 소리죽인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14-01-2002 04:17 Line : 151 Read : 1849 [20] 체인지[2부] 제4화 -훌륭한 왕비가 되기 위한 지침- (5) -------------------------------------------------------------------------------- -------------------------------------------------------------------------------- Ip address : 211.208.73.23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5- 결국 마드린은 내가 아침 식사를 마칠 무렵에 뭔가를 들고 왔는데 그것은 훌륭한 왕비가 되기 위한 지침 여섯 가지가 적혀 있는 종이였다. 「훌륭한 왕비가 되기 위한 지침 훌륭한 왕비가 되기 위해서는... 첫 번째, 아침 일찍 일어나며 언제나 매일 같이 정갈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로히얀스의 왕비란 로히얀스에 있는 모든 귀부인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어투는 언제나 고상하고 위엄 있으며 몸가짐은 우아해야 합니다. 세 번째, 국모이신 왕비 전하의 고귀한 직분을 명확히 알아 더 이상 마법 배우기와 같은 여자답지 못한 취미보다는 자수나 승마 혹은 귀부인들과의 친목회에 더 관심을 기울이셔야 합니다. 네 번째, 왕비 전하의 부군이시자 로히얀스의 국왕이신 폐하를 보필하고 왕실의 안주인으로서 연회를 개최하고 주도하는 등, 그 책임을 다하셔야 합니다. 다섯 번째, 어진 왕비가 되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국왕 폐하와 그 백성을 자신의 몸같이 사랑하셔야 합니다. 여섯 번째, 전하께서는 폐하의 후계자와 왕실의 자손을 생산하시어 로히 얀스와 왕실의 번영에 기여하셔야 합니다.」 마드린은 그것을 나에게 건네주었고 나는 별생각 없이 그것을 읽다가 적혀 있는 그 내용에 경악을 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내용은 지키기 힘든 것이긴 하지만 노력하면 어떻게 든 해결될 일이었지만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상당히 힘들었다. 승마는 그렇 다 치자! 자수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바느질의 ‘바’ 자도 모르는 나에게 이 렇게 엄청나게 어려운 일을 강요하다니! 그리고 다섯 번째는 그냥 우선 넘어가고... 마지막 여섯 번째 내용은 나의 핏기를 사악 가시게 만들었다. 남녀가 결혼을 하고나면 어여쁜 결실이 맺 어지는 것은 당연지사였지만 그래도... 으으으, 나보고 아이를 낳으라니?! 나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나는 들고 있던 종이를 떨어뜨 리며 그동안 내가 간과해왔던 2세라는 문제에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나는 미카엔과 만날 생각에 이곳까지 다시 돌아왔었지만, 그 뒤의 문제 까지는 미처 심각하게 생각을 해보지 않았었다. 어째서 나는 결혼이라는 성스러운 의식 후에는 첫날밤이란 것이 이어지고 첫날밤 다음에는 부부 사이의 어여쁜 결실이라는 결과가 이어진다는 것을... 왜? 왜?! 간과했었 던 것일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바닷가에서 미카엔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말고 조금 더 시간을 갖은 뒤에 받아들일 걸 그랬다. 나는 아직 내가 여자 라는 사실에 대해 완벽히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물론 내가 라비스임을 부정하는 않고 인정한 상태이긴 하지만 인정하는 것과 적 응하는 것 하고는 또 달랐다. 나는 미카엔을 사랑하지만 그냥 사랑하는 것 뿐! 그 이상은 전혀 생각 해본 적이 없었다. 으음... 그렇다면 나는 지금 플라토닉 사랑을 하고 있 는 것일까? 아무튼... 나는 혼란스러움을 일단 접고는 왕비로서 정식으로 첫발을 내딛게 되는 오늘 하루를 시작했다. 몇몇 대신들과 귀족들을 알현하고 장미궁의 상급 시녀 시종을 임명하였는데, 이번에 만나게 되었던 나의 일행들을 측근으 로 두었다. 레니를 측근 시녀로 임명하고 아네샤와 에스라를 로히얀스에 세워지게 될 셀레네스 신전의 고위 신관으로 임명하였으며 루이안트는 나의 측근 보좌관으로 임명하고 에드는 측근 기사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잠깐 시간을 내어 후원의 구석진 곳으로 가 정령들과 재회를 하였는데, 울보에다 수다쟁이인 리엔시타의 극성스런 반응에 무척 애먹어야 했다. 그녀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아 나는 그녀를 열심히 달래주어야 했 던 것이다. 또한, 나는 무척이나 감격하고 흥분한 아멘시타를 토닥여 주어야 했고 날라리 정령 샤르의 반가워하면서도 짓궂게 건네는 재회의 농담에 대 꾸를 해주어야 했다. 물론 아젠샤르 역시 나에게 대단한 반응을 보였다. 평소 표정 없고 무뚝뚝한 그가 나에게 감동 비스무리한 표정을 보였는 데, 나는 그것만으로도 그가 충분히 나와의 재회를 감격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 저녁에는 왕비로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될 연회에 참석하 느라 바쁘게 보냈다. 연회가 개최되는 크리스털 궁에서 나는 아사벨라의 모습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는데, 그녀는 나의 소식을 미리 들었는지 그 다지 놀란 기색은 없었지만 의외로 그녀는 나를 보고는 반가워했다. “훗... 이제는 전하라고 불러야 하겠죠? 이제 전하께서는 기적의 왕비라고 불리워지시겠군요. 잘 돌아오셨어요. 전하께서는 제가 인정한 왕비이시니 까요.” 그녀는 나에게 이제 경어를 쓰고 있었다. 나에게 정중한 태도를 보이는 그녀를 보자 나는 기이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녀는 항상 나에게서 오만한 모습을 보였었는데... 지금은 정중한 태도로 나를 반기는 말까지 한다. “아사벨라, 오랜만이야. 나를 반겨주다니 너무 기쁜 걸?” “호호. 제가 전하를 반길 수밖에 없죠. 폐하께서는 전하를 잃으신 그동안 너무나 상심해 하셨거든요. 그렇게 상심해 하시는 폐하의 모습을 보고는 저는 깨달았죠. 폐하의 옆자리인 왕비 자리는 전하 외에는 그 누구도 앉 을 수 없구나! 말이죠. 그래서 왕비 자리에 대한 미련은 깨끗이 포기하고 전하께서 이렇게 부활하시길 기다렸답니다.” “부활하길 기다리고 있었다니... 아사벨라 그거 진심이야? 내가 부활하게 될 거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기는 힘들었을 텐데?” 그녀의 가벼운 어조에 나 역시 가벼운 어조로서 농담하듯이 물었다. 그 러자 그녀는 한족 입 끝을 살짝 말아 올리며 입을 열었다. “물론이죠, 전하. 아, 그래도 조금 아쉽기는 하군요. 전하께서 이렇게 돌아 오셨으니 이젠 왕위 계승권을 가질 후계자 어머니 자리마저 물 건너가 게 생겼군요.” “하하...” “하지만 아주 물 건너간 것은 아니죠. 왕위 계승권은 그래도 장자에게 유리하답니다. 호호. 과연 폐하의 장자는 누구한테서 나게 될까요?” “…….”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것 같다. 으으, 후계자라니... 나는 몸이 피곤하여 일찍 쉬어야 하겠다고 말하고는 장미 궁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마차를 타고 가던 도중, 나는 다시 훌륭한 왕비가 되기 위한 지 침 여섯 가지 항목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로히얀스는 보수적인 면이 강한 귀족과 왕실 사회라서 여자들의 신분 역 시 남편을 보필하고 자손을 낳는 것을 여인의 덕목으로 여기 듯 했다. 물론 그것은 왕비에게도 해당되어 아까와 같은 항목들이 훌륭한 왕비가 되기 위한 지침이 된 것 같았다. 왠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남자였던 내가 지금은 여자의 입장에서 뭔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장미 궁에 도착한 나는 몸을 씻고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시녀들 에게 일러 혹시라도 미카엔이 온다면 내가 몸이 안 좋아 일찍 잠들었다 고 말하라고 명했다. 지금의 나는 여섯 번째의 덕목이 가장 난감하다. 어제 밤은 막 여행을 마치고 왕성에 돌아온 나였기 때문에 무척 피곤하 였던 터라 미카엔은 나를 배려하여 계속 붙잡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 지만 오늘은... 내가 왕비로서 정식으로 맞게 되는 첫 번째 날 밤이다.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16-01-2002 23:42 Line : 170 Read : 2550 [21] 체인지[2부] 제5화 -진실 밝히기!- (1) -------------------------------------------------------------------------------- -------------------------------------------------------------------------------- Ip address : 211.208.73.23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진실 밝히기!) -1- 나도 모르게 깜빡 잠에 들었을 때였다. 문득 느껴지는 기척에 나는 잠이 깨어 눈을 뜨고는 창가에 서있는 미카엔의 모습을 보았다. 창가에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이 그의 모습이 비추고 있었다. 어렴풋하게 그의 은발이 고 운 달빛을 머금고 은은한 빛을 발했다. 그는 내가 잠시 잠든 사이에 침실로 들어온 모양이다. 시녀들이 분명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일찍 잠들었다고 말했었을 텐데, 굳이 나의 침실에 들어온 것은 대체 무슨 심리일까? 그러다 문득, 창밖으로 눈길을 주던 그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 눈을 감고 잠든 척하였다. 미카엔의 기척이 점 차 나에게로 다가왔다. 내가 누워있는 곳으로 다가온 미카엔은 침대에 걸터앉더니 나를 내려다보 는 듯 했다. 눈을 감고 있어도 그의 눈길이 느껴졌다. 아, 정말 잠든 척하 는 것도 무척 어렵다. 나는 숨을 고르게 내쉬려 노력하였다. 그래야 그가 눈치를 채지 않을 테니. “라비스, 눈을 떠.” “…….” 그가 나에게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식은땀이 났지만 계속 잠든 척을 하 였다. 눈을 뜨라니?! 내가 깨어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가 그냥 돌아가 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미카엔은 돌아가기는커녕 얼굴을 나에게 가까이 들이대었다. 그의 낮은 숨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들려왔다. 그의 숨결이 나의 얼굴을 간질였다. ‘어쩌지? 계속 자는 척을 해야 하나?’ 나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이 사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망설 이다가 눈을 뜨고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나는 미카엔에 의해 서 다시 도로 누워야 했다. 미카엔은 나의 양손을 침대에 묶어놓듯이 쥐 고는 나를 눕게 만든 것이다. 그는 나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도 나에게서 도망가고 싶은 건가? 라비스.” “놔 주세요.” “놔달라니? 넌 지금 네 자신의 위치에 대해 자각을 못하고 있는 것 같군. 넌 대체 나를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야 미카엔이라고 생각... 음, 로히얀스의 국왕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나는 그렇게 답하다가 그의 이마에 힘줄이 하나 돋는 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다가 다시 말을 바꾸었다. 미카엔은 지금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그의 정비로서 맞는 첫날밤에 몸 안 좋다고 뻥치고는 자 는 척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내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를 피하려 해서 그런 걸까? “난 너의 남편이다, 라비스. 남편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모르는 것은 아니 겠지?” “잘 알아요. 앗! 저기 창 밖 좀 봐요, 미카엔.” “뭐?” “보름달이 떴네요. 하하.” “…….” 그의 주위를 돌리려던 나의 어설픈 외침에 그가 속지 않자 나는 썰렁한 변명을 하며 겸연쩍게 웃어보였다. 그러자 그의 자수정 빛 눈동자는 못 말리겠다는 듯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피식 웃어 보이더니 입을 열어 나를 허탈하게 만드는 두 마디를 중얼거렸다. “네 말대로 보름달이 떴더군. 사랑스런 아내와 함께 보내기에는 정말 멋 진 밤이지.” “우에엑!! 싫어요~! 내가 어떻게 미카엔이랑 밤을 보낸다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외치자 미카엔의 가지런한 한쪽 눈썹이 꿈틀하고 치켜 올라 갔다. “나와 어떻게 밤을 보내냐고? 라비스, 방금 네 말은 내가 어떻게 해석해 야 하지? 수줍은 것이 아니라면 질색이라는 표현 같은데?” “아, 그게 아니라 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아직은 미카엔을 받아들일 수 가 없단 말이에요.” “날 받아들일 수가 없다니? 이유가 뭐지? 어떤 문제가 아직 남아있는 거 냐?” “그건...” “라비스, 날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마라! 네가 이렇게 날 거부하고 도망가 려 할 때마다 나는 기분이 상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말해봐! 내가 모르는 네 문제에 대해서... 그래야 내가 너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 까? 나는 그동안 너를 꽤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너를 이해해 왔다고 생각 했었지만 그것이 다가 아닌 것 같군.” “그, 그건...” 나는 망설였다. 그를 사랑하면서도 그를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이 유라... 그를 사랑하면서도 육체적으로는 그를 거부하는 나의 모순 된 감 정. 그에게 나의 비밀을 얘기해야만 할까, 내가 얘기하면 그는 나의 말을 과연 믿어줄까? 그리고 그가 나의 말을 믿어준다고 해도 만약 최악의 결과가 초 래하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너를 괴롭히고 있는 문제가 있다면 말해봐, 라비스. 혹시 결혼식장 에서 네가 말했었던 도현이라는 이름과 관계가 있는 것이냐?” 그의 말에 나는 흠칫했다. 내가 뭔가 고민하고 있을 내용에 그가 도현이라 는 이름과 연관지어서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너의 표정을 보니 내 짐작이 사실인 것 같군.” “아니요!” “그럼, 네가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에 나에게 하려던 말은 무엇이었는지 물어도 될까?” “네?” 마지막에 그에게 하려고 했던 말?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숨을 거두기 직 전에 뭔가 그에게 말하려고 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말의 내 용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뭔가 나에게서 무척 중요한 내용의 말을 그에 게 하려 했었던 것 같은데, 그것은 한순간에 번쩍하고 스쳐 지나가버린 기억처럼 다시는 기억할 수가 없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내가 그렇게 답하자 나를 바라보고 있던 미카엔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 다. “기억이 나지 않는 다라... 너는 그때, 나에게 기억해달라고 했다. 너는 라 비스가 아닌 도현이라고... 그리고 마지막에 뭔가 말을 하려고 했었지. 그 런데, 너는 지금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어. 네가 가진 고민으로 인해 나를 피하고 거부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잠시 말을 끊더니 나의 입술에 키스하기 위해 다시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얼굴을 돌려버렸다. 내가 또다시 피하는 모습을 보이자, 미카엔은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며 무감정하게 입을 열었는데... “나는 진실하지 못한 인간은 좋아하지 않는다. 오늘 네 모습은 나를 실망 시키게 하는 구나. 나를 믿지 못하여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면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던 네 감정역시 진실함이었는지 스스로 생각해 봐 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의 침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난 후, 나의 침 실에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찾아왔다. 아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런 상황이 닥치게 될 거라는 것을 간과하고 행동했던 나에게 화가 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무 책임한 모양이다. 나의 무책임한 행동에 상대가 얼마나 상처 받을지, 그 리고 그 여파로 나 역시 상처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오늘에서야 깨닫는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사랑하는 그 누군가보다는 항상 나를 더 사랑해 왔었다. 그것 때문에 내 자신을 버리지 못해 의식 분열이라는 것까지 앓 았던 적이 있었지 않았던가? 그런 내가 이제는 이도현으로서 살아온 그 기억으로 인한 거부감 때문에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라비스와 도현 사이의 방황이 아닌 그저 거부감 하나 때문에... 그를 사 랑함에도 불구하고...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18-01-2002 07:19 Line : 160 Read : 3134 [21] 체인지[2부] 제5화 -진실 밝히기!- (2) -------------------------------------------------------------------------------- -------------------------------------------------------------------------------- Ip address : 211.208.73.23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2- 미카엔이 그렇게 침실을 나간 후, 나는 미카엔의 말을 곱씹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가진 감정이 진실함이었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라니... 미카엔이 나 에게 한 말이 나를 너무 우울하게 한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창가 쪽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조금씩 새어 들어오 던 달빛이 그새 완전히 구름 속에 파묻히고 말았는지 나의 침실 안은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어둠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존재하고 있 었던 미카엔의 흔적을 지워갔다. 사방이 어둠으로 가리어져 있는 곳에 나 혼자 남아 있는 지금, 나는 이 세계 안에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드넓은 침실 안에 가득 차 있는 짙은 어둠이 나의 폐부 속으로 깊이 스미는 것 같다. 우울한 밤이다. 나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눈을 감았다. 이렇게 우울할 땐 행복한 꿈을 꾸고 싶다. 오늘은 셀레나의 꿈을 꿀 수 있을까? 꿈속에서의 나는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나는 거울 앞에 서있었는데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나의 모습이 퍽이나 순결해 보인다. “라비스님.” “루이스?”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는데 루이스 그녀가 나를 바라보 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결혼식을 올릴 무렵 야윈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 처럼 무척이나 초췌하고 무감정해 보였다. “루이스? 정말 루이스야?” 그녀의 모습에 나는 놀라며 말했다. 다시 그녀를 보게 된 것으로 인해 나 의 목소리는 감정의 기폭이 무척 커져 조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루이스 는 나의 이런 반응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지 감정 없는 어조로 나에게 차를 권하였다. “라비스님, 론티아 꽃잎 차랍니다. 식기 전에 드세요.” “론티아 꽃잎 차? 싫어! 왜 나에게 이걸 권하는 거지? 루이스, 왜 이걸 나 에게 권하는 거야?” 그녀가 나에게 차를 권하자 나는 격해진 어조로 그녀에게 외쳤다. 그녀는 왜 그때 나에게 독이 든 차를 권하였을까? 나는 그토록 그녀를 믿었는데... 챙그랑-! 그 순간, 루이스는 들고 있는 찻잔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러자, 자기로 만들어진 고급 찻잔은 요란한 음향을 내며 조각조각 나서 사방으로 튀 었다. 그와 함께 황금빛이 도는 론티아 꽃잎 차 역시 사방으로 튀며 바 닥을 적셨다. “흐흑, 라비스님.” “루이스, 왜 그래?” 루이스가 흐느끼자 나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하다가 멈칫하였다. 바닥에서 흐르던 론티아 꽃잎 차가 문득 그 색이 검붉게 변한 것이다. 그 검붉은 빛이 마치 죽은 핏빛과 같았다. 그것은 왠지 죽음을 떠올리 게 한다. “아악! 라비스님!” 그 핏물은 점점 양이 불어나서 루이스의 주위를 붉게 물들여놓기 시작했 다. 나는 겁에 질려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아악! 라비스님, 내가 라비스님을...” 루이스는 나의 이름을 외쳐대며 절규하였다. 그녀는 지금 무척 괴로워하 고 있는 것 같았다. 루이스 주위에 있는 핏물들이 점점 더 번져갔다. 그 것은 루이스가 서있는 곳을 붉게 물들이고 점차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루이스가 저토록 괴로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 는 뒷걸음질을 쳤다. 괴로워하고 있는 루이스를 구해야 하는데... 왜, 저 핏 물이 죽음을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두려워하는 걸까? “아아악!” “루이스!!” 루이스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외쳐보았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 다. 고통에 찬 루이스의 모습에 나는 눈물이 났다. 그 와중에서도 붉은 핏물은 점점 나에게로 번져 왔다. 나는 계속 뒷걸음 질은 치려했지만 루이스를 잠식해버린 그 붉은 핏물은 빠른 속도로 나 에게로 번져왔다. 마치 죽음의 손길이 나에게 그 손을 뻗는 듯 했다. “꺄아악!!” 나는 지독한 두려움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라비스!”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난 나는 눈을 깜빡이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을 확인했다. 내가 눈을 떴어도 현실에서 기다리는 것은 여전히 짙은 어둠뿐일까, 내심 두려움을 갖았는데 뜻밖에도 미카엔 이 나를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그는 아까 기분이 언짢은 채 가버렸었는데... “미카엔?” “그래...” 그런데 그가 지금 다시 이곳에 와있다니... 이것도 꿈인 것일까? “흑!” 나는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내 곁에 있다는 사 실에 안도감이 들기도 했지만, 방금 전 꿈속의 감정들이 계속 이어짐으 로 인해 나는 눈물이 나왔다. 미카엔은 손으로 나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나를 꼬옥 안고는 부드럽게 토닥였다. 아까 그는 차갑고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굉장히 자상하다. 이러니까, 내가 어린애가 된 기분이다. 그렇게 한참을 미카엔은 나를 안고 있었고 나는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그의 품은 정말 따스했고 편안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미카엔의 품은 꿈속에서 느꼈던 셀레나의 품 같다. 만약 내가 미카엔에게 그의 품은 엄마의 품 같다고 말한다면 그다지 기분 좋아하지는 않을 테지만. 아무튼, 그런 편안함 때문인지 나는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미카엔 이 왜 다시 여기에 왔는지 묻고 싶었지만 나는 미카엔의 알 수 없는 마 법에 걸리기라도 했는지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질문하 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었다. 그러다 나는 미카엔이 나에게 중얼거리는 말을 잠결에 들었다. “나는 왜 자꾸 잊게 되는지 모르겠다. 너는 어떤 모습으로든 이렇게 숨을 쉬어주고 존재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 너만 보면 너를 소유하고픈 욕심이 생겨. 훗... 지금 이 순간, 엔카루스가 너에게 그렇게 집착했던 것이 무리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 라비스, 나를 믿고 조금만 기대주었으면 한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다시 왔어. 아까 는 네가 나에게 맘을 열어주지 않는 것 같아 화가 났던 것뿐이니까.” 그날 나는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잠결에 내가 누군 가의 품으로 파고들면 그때마다 나를 쓰다듬어 주었던 것 같다.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20-01-2002 05:05 Line : 161 Read : 1498 [24] 체인지[2부] 제5화 -진실 밝히기!- (3) -------------------------------------------------------------------------------- -------------------------------------------------------------------------------- Ip address : 211.211.232.21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3- 기분 좋은 아침이다. 어제 밤 악몽 뒤에는 뭔가 좋은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내 손에 잡히고 만져지는 것도 부드럽고 좋은 향이 난다. 꽤 나 고급스런 향유일 듯한 향이 나의 코끝을 간질인다. 나는 여전히 잠에 취한 채 계속 손을 더듬었다. 뭔가 부드러운 실(?) 같 은 것이 만져지는데 꼭 비단실 같다. 나는 그것을 살짝 잡아당겨 보기도 하고 손가락에 휘감아보기도 했다. 그러다 그것에서 풍기는 향기를 좀더 맡아보기 위해 내 쪽으로 좀더 잡아당겼다. ‘이게 뭐지? 내 침대에 웬 비단실이?’ 나는 의아해하며 눈을 느리게 떠보았다. 그러자 나의 바로 옆에 잠들어 있는 미카엔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고요한 얼굴로 세상모르게 잠들어있었다. 내가 비단실로 착각했던 은사와 같은 그의 은빛 머리칼이 어지럽게 침 대 위에 흐트러져 있었다. 남자가 이렇게 화사한 모습으로 자고 있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뭐, 남자라고 자는 모습이 꼭 음침 하 라는 법은 없지만. 나는 몸을 일으켜서 잠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든 그의 모습을 보 는 것은 아주 오랜만인 듯 했다. 감긴 눈에 보이는 그의 은빛 속눈썹은 미적 안목만큼은 높아져있는 나의 눈에도 무지 예뻐 보인다. 게다가 드워프가 조각해 놓은 듯한 반듯하고 오똑한 콧날과 티 없는 피부 는 정말 하나의 예술품처럼 하루 종일 감상해 주고픈 마음이 들게 한다. 그나저나 미카엔이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것인지... 어제 밤 나를 달래주었 던 미카엔의 모습이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워낙 비몽사몽이었던 터라. 어제 밤의 일을 떠올리던 나는 미소를 살짝 지었다. 그에게 나는 많은 것 을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나는 그에게 그다지 해준 것이 없는데 말이다. 그런 미카엔인데... 그가 나에게 애정표현을 할 때마다 나는 왜 그렇게 거부하게 되는 것인지... 하아, 이젠 익숙해지고 적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흐음, 그러기 위해서는 그를 거부 없이 받아들이는 연습(?)을... 나는 그에게 고개를 조금 숙였다. 나의 황금빛 머리칼이 그를 간질여 그 가 깨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머리칼을 한데 모아 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조금 더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보았다. 그러다 나는 멈칫하였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 다시 그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그렇게 혼자 많이 망설이고 멈칫멈칫 하다가 나와 미카엔의 얼 굴 거리는 서로의 숨결이 맞닿을 수 있는 다소 가까운 거리가 되었다. ‘헉! 어느새 이렇게 그의 얼굴과 가까워지게 되었다니!’ 나는 문득 깨달은 상황에 기겁을 하며 다시 고개 쳐들고 그에게서 멀어 졌다. ‘아, 대체 내가 뭐하고 있는 짓인지.’ 그렇게 스스로의 행동에 민망해하며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키고는 침 대를 빠져나가려는데... “어?!” 갑자기 미카엔이 손을 뻗더니 나의 팔을 움켜잡았다. 이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아, 심장 떨어질 것 같다. “사랑스러운 부인. 목이 마른데 물 좀 갖다 주시겠소?” 미카엔은 은보라빛으로 빛나는 눈을 살짝 뜨고 누군가를 살살 녹일 듯 한 미소를 짓고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방금 막 일어난 듯 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다. 만약 그가 방금 전 나의 민망한 행동을 안다 면 그는 나를 얼마나 우스운 애로 알겠는가?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사랑스러운 부인이라니?! 미카엔, 아침부터 그런 닭살 호칭을 쓰다니! 으으. 어쨌거나 군소리 없이 물을 갖다 주는 요구를 들어주며 나는 그에게 입 을 열었다. “미카엔,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얼마든지.” “제 유모인 루이스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러자 미카엔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루이스는 네가 독을 당한 그날 이후 며칠 뒤 숨을 거두었어.” “루이스가... 어떻게 숨을 거두었죠?” 그에게 질문하고 있는 나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막상 그녀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나의 가슴은 무척이나 아파왔다. 나에게 독이든 차 를 건넨 그녀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죽음이 너무 가슴이 아팠다. 왜 그럴까? “그녀는 자살했다.” “자살이요?” 나의 질문에 무미건조하게 답하는 그의 어투는 왠지 차갑게 들렸다. 루 이스가 자살했다는 미카엔의 말에 나는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 며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라비스, 넌 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거지? 네 유모가 너를 해하였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알아요! 하지만... 눈물이 나와요. 아직도 나는 믿을 수가 없어요. 루이 스가 나를 해하였다는 것을... 뭔가 이유가 있을 거예요. 루이스는 저에 게 어머니와 같은 분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저를 딸처럼 여겼어요. 미카 엔... 어느 어머니가 축복받은 결혼식 날 딸에게 자신의 손으로 죽음을 주겠어요?” “라비스, 그녀는 너를 죽음으로 몰고 갔었다. 그런 그녀에게 뭔가 너를 해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해도 그녀는 용서받지 못한 죄를 지은 거야. 루이스는 그 죄 값을 스스로 치른 셈이지. 그녀가 정말 너를 사랑했다 면 그녀는 자신에게 어떤 곡절이 있든 간에 그것을 이겨냈어야 했다.” “냉정하시군요.” “냉정하다라... 라비스, 인간은 모두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 움직 이고 결정한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이 만약 본인이라면 그는 자신을 위해서 항상 뭔가를 결정하고 행동하지. 혹은 어떤 특정한 타인이 더욱 소중하다면 그는 그 타인을 위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내가 너를 소중 히 하여 너를 해한 그녀의 비참한 결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듯이...“ “…….” “...그리고 그녀에게 무슨 곡절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너를 해하였다는 것은 그녀에게 라비스인 너보다 더욱 소중한 뭔가가 있어 그것에 흔들 렸을 수도 있다는 거지. 물론 그녀는 너를 소중히 했겠지만 그녀에겐 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거야.” “더 중요한 것... 그것이 뭘까요?” “글쎄. 그것은 네가 알아내야 할 일인 것 같다. 마지막에 자신의 목숨 으로서 스스로의 죄 값을 치를 정도로 너를 소중히 했을 그녀가 어떤 이유로 너를 해하게 되었는지 라비스 네가 밝혀라. 일국의 왕비로서 그 리고 그녀가 딸처럼 여겼을 라비스로서 너는 감추어진 진실을 밝히고 네가 가진 가슴에 안은 상처를 치유하도록 해.” 미카엔은 그렇게 말하며 루이스에 대한 모든 일을 나에게 맡겼다. 그는 항상 자상하고 부드럽지만 어떻게 보면 냉정 하리 만큼 냉철하고 차갑 다. 실버 족속이 그렇듯 조금 양면적이랄까? 그나저나 미카엔이 한 말이 나의 뇌리에 깊이 남는다. 인간은 누구든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 움직이고 결정을 한 다라... 그 말이 사 실인 듯싶다. 인간은 어떤 면에서는 이기적인 존재. 나에게서는 가장 소중한 것이 뭘까? 나는 미카엔을 사랑하지만 내 자신 을 잃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많은 방황을 했었다. 그렇다면, 나에겐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있지만 결국 그것보다 더욱 중 요한 것은 내 자신인 모양이다. 나는 이기적인 걸까? 나를 해한 일에 괴로워하여 자신의 목숨으로서 그 죄 값을 스스로 치른 루이스의 가장 소중한 것은 뭘까? 그녀 자신이나 나보다 더욱 소중했을 그것은 과연 무엇인 걸까?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22-01-2002 19:55 Line : 271 Read : 2067 [25] 체인지[2부] 제5화 -진실 밝히기!- (4) -------------------------------------------------------------------------------- -------------------------------------------------------------------------------- Ip address : 211.211.232.21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4- 점심 무렵, 루이스에 대한 감추어진 진실을 밝히기 위해 나는 우선 루이스 가 쓰던 침실을 찾아갔다. 그녀의 침실은 내가 전에 비서관으로서 침실을 썼던 방의 바로 옆방이었다. 일단 그 방에 들어선 나는 화려하지 않는 기 본적인 가구만 있는 침실의 모습에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주인 없 는 이 침실이 왠지 쓸쓸한 기색이 도는 듯하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나는 그동안 루이스의 침실은 출입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때 내가 루이스에게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어쩌면 나는 루이스와 나 사 이의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지나간 일. 아무리 가슴 아파해도 되돌릴 수는 없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루이스가 혹시라도 썼을 일기장 같은 것을 찾아보았 다. 그러다 불현듯 프레야 왕비의 일기장이 머리에 스쳤다. 내가 결혼식 을 하기 위해 신전으로 떠나기 전 나는 그 일기장을 침대에 그대로 두고 서 침실을 나섰다. 그렇다면? 일기장은 예전 나의 침실에 남아있을 것이다. 나는 예전에 썼던 침실인 옆방으로 달려갔다.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누군가에 의해서 나의 침실은 정돈되었던 듯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나는 항상 일기장을 넣어 두었 던 수납장이나 침대 주변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일기장은 아무데도 없었 다. 왠지 허탈해지는 나였다. 나는 그것의 뒷내용을 아직 보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무척 아쉽기도 했지만 그것은 누군가가 보면 무척 곤란해지는 내 용의 일기장이었다. 일기장이 여기에 없다면 누군가가 그 일기장을 가지 고 간 것이 틀림없는 일일 텐데. ‘...누가 가져간 거지?’ 나는 그 일기장을 읽으려다가 미처 못 읽고 침실을 나왔을 때의 일을 떠 올렸다. 그때 나는 일기장의 글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다가 시녀인 ‘아나’ 가 들어오는 바람에 읽는 것을 미루고 그것을 덮어두었다. 그리고 결혼식 을 위한 신부 치장을 하고서 그대로 침실을 나섰던 걸로 기억한다. 아나는 루이스를 제외하고는 나의 침실을 자유로이 드나드는 시녀 중 하 나였다. 그녀는 루이스가 나에게 무심해진 것으로 인해 아침에 나를 깨우 는 무척 힘들고 고된 임무를 맡게 된 시녀였다. 그렇다면 그녀가 그 일기 장을 어디론가 치웠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나는 침실로 돌아가서 시녀를 시켜 아나를 불러들이게 했다. 곧 그 녀는 나의 침실을 찾았는데... “부르셨어요? 전하.” “아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예전 내가 쓰던 침실에서 오 래된 일기장 하나 보지 못했어?” “네? 이, 일기장이요?” 내가 묻는 말에 아나는 눈에 띄게 당황한다. 나는 가늘어진 눈으로 그녀 를 응시했다. 그녀가 저렇듯 침착하지 못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그녀 가 일기장을 봤을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그래, 일기장.” “보지 못했습니다. 전하.” “정말이야?” “네.” “아나, 내 눈을 보고 대답해! 정말이야?” 나의 눈길을 회피하며 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나 는 몸을 미세하게 떨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눈물이 글썽글썽 해지려 하고 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말하는 것이 두 려운 모양이다. “전하... 사, 사실은 일기장을 보았습니다.” “…….” “전하께서는 프레야 왕비 전하의 일기장을 찾고 계시는 거죠?” “맞아. 넌 그것을 봤구나.” “네.” “넌... 그 일기장으로 인해 어디까지의 내용을 알 수 있었지?” “제가 그 일기장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의 전하께서는 진짜 라비 스 크로시벨님이 아니시라는 것과 돌아가신 프레야 왕비 전하는 실버 드 래곤이시라는 것 그리고 셀레나님이 그 분의 절친한 친구 분이시고 또 다른 이름인 ‘크리스티나’ 로서 200여 년 전에도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 또 그 뒤의 내용은... 흐흑!” 처음에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답하려 애쓰던 아나는 자신의 감정 조절 에 실패했는지 결국 흐느끼는 소리를 내었다. 그녀의 그런 태도에 나 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뒤의 내용은?” “전하, 당신은 누구시죠? 당신의 영혼은 대체 누구인가요? 제가 알고 모 셨던 분이 원래 왕비 전하가 되셔야 할 라비스님이 아닌 다른 분이라는 것이 너무 혼란스러워요. “…….” “이젠 저를 죽이실 건가요?” “뭐? 내가 왜 아나를 죽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전 왕비 전하의 비밀을 알고 있잖아요. 전하께서는 진짜 라비스님이 아 닌 다른 분이라는 것을... 게다가 그 외에도 왕실의 많은 비밀을 저는 알 고 있어요. 폐하께서는 하프 드래곤이시며 배다른 형제까지 계시다는 걸 말예요.” 일기장의 내용으로는 미카엔에게는 배다른 형제가 있는 것으로 나온다. 인간 형제로는 예전 백합 궁 측실 소생인 두 왕자가 있었고 드래곤 핏 줄의 형제로서는 두 존재의 실버 드래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행방이 묘연하였고 미카엔 역시 그들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 모든 것은 감추어진 비밀. 아무튼 아나가 거기까지 말하였을 때였다. 나의 침대에서 뒹굴뒹굴 대 고 있던 한 마리의 조그만 실버 페르시아 품종의 고양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 고양이는 내가 무척이나 고양이를 좋아하는 줄로만 알고 있는 미카엔이 내가 왕성에 돌아온 기념으로 선물한 무척 비싼 고양이 었는데, 털빛이 거의 은빛이었던 터라 무척이나 아름답고 우아한 고양 이었다. 나는 그 고양이에게 미카엔이란 이름을 붙였다. 하하. 어쨌든, 그 고양이는 그렇게 벌떡 일으키더니 그 귀여운 생김새와는 어 울리지 않는 절도(?)있는 몸짓으로 -사실은 털이 길어 덥수룩하고 몸이 작아 절도 있기는커녕 앙증맞다- 나에게 전음을 보내왔다. [밖에 누군가가 있는 거 같아, 라비스.] 역시나 그 고양이의 몸 안에는 언제 와 있었는지 아멘시타가 들어와 있었다. 그는 지금 나에게 뭔가 경계하라는 충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나는 아나에게 뭔가 하려던 말을 멈추고는 기척을 죽이며 방문 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불시에 방문을 열어 젖혔는데 밖에는 썰렁하 게도 아무도 없었다. “흐음, 아멘시타! 너 나 똥개 훈련시키는 거지?!” 내가 그를 째려보며 그렇게 말하자 아멘시타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 내가 잘못 느꼈나? 근데, 라비스. 똥개 훈련시키다니? 내가 언 제?!] 이에 나는 아멘시타를 향해 도끼눈을 떠보였다. 그러자 아멘시타의 존 재에 대해서 모르고 있을 아나는 나의 이러한 행동이 무척이나 괴상해 보였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뭐라 말은 못하고 있었다. 한참 진지 한 분위기에 있다가 내가 갑자기 엉뚱한 행동을 한 셈이니. 잠시 잊고 있었던 아나의 존재를 깨달은 나는 그녀에게 겸연쩍은 미소 를 지어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나는 일단 그녀가 왕실 크나큰 비밀을 알게 되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나를 달래주어야 했다. “아나, 너는 내가 중앙 궁성에 비서관으로서 온 순간부터 나 가까이에 서 일해 왔잖아. 그만큼 나에 대해 잘 아는 네가 정말로 내가 그런 결 단을 내릴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부드러운 어조로 묻자 아나는 눈물이 글썽이는 눈을 깜빡이며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다 나의 부드러운 빛의 황금빛 눈동자에 불안정한 마음이 진정이 되었는지 차분해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 그동안 왕비 전하를 모셔왔던 나인데... 전하께서는 다른 귀족 분들 과는 많이 다르시며 무척 순수하시고 좋은 분이라는 것을 잠시 잊다니. 왕비 전하, 전하는 그럴 분이 아니세요. 전 다만 혼란스럽고 두려울 뿐 입니다.“ “그래, 그럴 테지. 그리고 내가 본래 라비스가 아닌 다른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숨기는 것은 나를 왕비로서 존경하고 사랑해주는 모든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되니까.“ “왕비 전하, 그런 말씀 마세요. 전하께서는 예전에 어떤 분이시었든 지금은 왕비이시고 폐하를 사랑하시잖아요. 전하는 제가 보아온 분들 중에서 가장 좋으신 분이에요. 저는 전하께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요.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마워, 아나.” 나의 말에 아나는 살짝 웃어보였다. “솔직히 처음 일기장의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는 혼란스러웠고 제가 전 하를 섬기는 그 마음도 흔들렸지만 이젠 아나는 괜찮아요. 그리고 걱정 마세요. 전 그 일기장을 태워버렸고 그 비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 거든요!” “헉! 그 일기장을 태워버렸다고? 그건 프레야 왕비 전하 일기장인데?” “돌아가신 프레야 왕비 전하의 일기장을 태우는 크게 잘못한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전 우둔해서 그것을 읽었을 때에는 무조건 이 엄청난 비 밀이 담긴 것을 태워야 한다고만 생각했어요. 물론 그 일기장을 읽는 열쇠는 ‘아나’ 와 ‘셀레나’ 라는 이름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고, 보통 사 람들은 그 일기장을 못 읽는 것 같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요. 누군 가가 일기장의 존재를 알아서 마법사가 그 일기장에 걸린 마법을 푼다 면 비밀은 새어나가고 왕실은 혼란스럽게 될 거예요. 왕비의 일기장을 읽는 열쇠가 따로 있었다는 것은 몰랐었다. 나는 그것 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기에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저절로 읽혀 지는 일기장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나’ 와 ‘셀레나’ 라는 이름 이 열쇠가 된다니... 나는 셀레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녀의 딸이라는 관계 밖에 없는데 어떻게 일기장을 읽을 수 있는지 궁금하 다. 나는 아나를 그저 평범한 소녀로 알고 있었는데 오늘 그녀의 생각과 말은 나를 조금 놀라게 한다. 의외로 생각이 깊은 소녀였던 것이다. “그래. 그나저나 우연이네? ‘실버 아나테스’ 라는 드래곤으로서의 프레 야 왕비 전하의 이름과 네 이름의 애칭이 서로 일치하니 말이야. 어쨌 든 고마워. 비밀을 지켜주어서...” “저로선 당연한 행동이에요. 전하.” 그렇게 아나와 나의 대화는 마무리 되었다. 아나는 프레야 왕비를 모시 고 있던 측근 시녀의 딸로서 꽤나 순박한 성격을 가진 소녀이지만 현명 하고 가끔은 당돌한 면을 가졌다. 게다가 자신을 약간 과소평가하는 단 점만 없으면 집안도 괜찮고 얼굴도 어느 정도 예쁘장했다. 왕실 측근 시녀로서는 적격인 조건을 가진 소녀랄까? 나는 아나를 내보내고 난 후, 루이스에 대한 일과 왕비의 일기장에 대 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문득 아나를 카이슨과 연결(?)해주면 무척이나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엉뚱한 방향으로 생각이 흐르고 말았다. 카이슨은 귀족 집안 자제에 능력 있는 엘리트인지라 레이디들 사이에 서는 일등 신랑감으로 꼽히고 있었던 터라, 아나가 마음에 들었던 나는 그와 아나를 연결해 주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는 침대로 다가갔다. 그 사이 아멘시타는 본체로 돌아가 있는 지, 아기 고양이는 침대 위에 서 갸르릉 거리고 있었다. “흠, 아멘시타가 빠져나가 있는 틈에 고양이 목욕이나 시킬까? 그는 씻 기는 걸 무지 싫어하니...” 결국 나는 고양이를 목욕시키기 위해 고양이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내 가 그렇게 손을 뻗자 괘씸하게도 이 고양이는 몸을 움찔해 보이더니 경 계의 눈빛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미카엔, 이리 온~” 나는 최대한 상냥한 어조로 고양이에게 말을 걸었건만 고양이는 무척 이나 도도한 눈빛을 해보였다. ‘저것이 감히 튕긴다 이거지?’ 나는 힘줄이 돋는 것을 느끼며 고양이에게 손을 다시 뻗었다. 그러자 고양이는 나를 피해 본격적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냐아옹~!! “앗! 거기 안서?!” 그러다 그때, 나의 침실 방문이 열렸다. “전하, 국왕 폐... 에구머니!” 방문 사이로 마드린의 얼굴이 보이는 순간 고양이는 자신의 살길인 탈출 구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뛰어들었고 마드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야! 미카엔, 너 거기 안서면 그 은색 털을 다 뽑아버릴 거야?” 고양이가 침실 밖으로 빠져나가자 더욱 고양이를 잡기 어렵겠다고 생각 되어 나도 모르게 흥분한 나는 그렇게 외치고 말았다. 그러자 마드린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모습을 해보였다. 내 말이 너무 거칠었던 걸까?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24-01-2002 06:17 Line : 167 Read : 2790 [26] 체인지[2부] 제5화 -진실 밝히기!- (5) -------------------------------------------------------------------------------- -------------------------------------------------------------------------------- Ip address : 211.211.232.21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5- “저, 전하! 폐하의 머리털을 다 뽑겠다니요?” “네? 난 고양이의 털을 뽑겠다고 한 건데...” 마드린이 기절할 듯이 놀라며 말하자 나는 갑작스레 바뀐 상황에 당황 하며 답하다 그녀의 뒤로 미카엔의 모습이 보이는 것을 보고 눈을 동 그랗게 떴다. 미카엔의 손에는 언제 잡혔는지 고양이가 매달려 발을 버 둥거리고 있었다. “음... 이 고양이의 이름이 미카엔인 모양이군.” “네, 폐하.” 나는 민망함을 감추며 그에게 답했다. 그러자 그는 지금 상황의 전말에 대해 파악을 했는지 근엄함으로 그의 웃음기 어린 기색을 감추고는 버 둥대는 고양이를 나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면서 입을 열었는데 그의 어조는 평소 편한 느낌이 아니라 국왕이 왕비에게 하는 격식이 갖추어져 있었다. 호칭도 라비스가 아닌 부인으 로서 바뀌어 있었다. 아마도 나와 둘만 있는 자리가 아닌 시녀장이 보 는 앞이라 그런 모양이다. “부인, 그대가 아끼는 귀여운 고양이에게 나의 이름을 붙인 것은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겠지? 그대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무 척 기쁘지만 그래도 털을 다 뽑는 것만큼은 자제해 주시는 것이 좋을 듯 하군.” 솔직히, 고양이에게 국왕의 이름을 붙이며 함부로 부르는 것은 국왕의 위신을 깎는 일이라 불경함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카엔은 시 녀 앞에서 한 나의 왕비답지 못한 그 행동을 부부간의 다정함으로서 무마시키고 자신의 위엄을 세웠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의 의도에 맞 추어 호응을 해야 할 듯 했다. “제가 폐하를 생각하여 고양이에게 그 이름을 붙인 것을 좋게 봐주시 고 기쁘게 생각하신다니 저 역시 기쁩니다. 그리고 존귀하신 폐하의 이 름을 가진 고양이의 털을 제가 감히 뽑을 턱이 있겠습니까?” 아아, 닭살이 돋는다. 하지만 왕실이란 것이 시녀들과 시종들의 눈과 귀 로 인하여 왕족들의 행동이 일거수일투족 관찰(?)되어지고 그로 인해 소 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왕족들은 언제나 신중해야 하고 위엄 있어야 했다. 어떻게 보면 꽤나 삭막한 곳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대가 나에게 가진 그 마음을 확인받을 수 있을까?” ‘윽! 미카엔 녀석. 지금 마드린 보는 앞에서 무슨 꿍꿍이인거지?’ 나는 마드린에게 눈길을 힐끗 주었다. 그러자 왠지 모르게 얼굴이 살짝 붉어져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자리를 피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심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나와 미카엔의 모습을 무척 흡족(?)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국왕 내외의 금실이 무척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국왕 내외의 금실이 좋아야 나라도 화평한 법! 만약 국왕이 왕비보다 는 측실을 더욱 총애한다면 왕비의 위신을 깎이고 분란이 생길 수도 있고 후계자 문제도 골치 아파지게 된다. 그러니 장미궁 시녀장으로서 마드린은 국왕 내외가 잉꼬부부가 되는 것 이 무엇보다 기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마드린이 있는 이 상황에서 나 는 미카엔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게 되는 것인데... 으으, 미카엔 녀석 정말 얍삽하다. 이런 기회를 이렇게 활용하다니! “물론입니다, 폐하.” 결국 나는 조신한 답변을 하며 약간 발끝을 들어 미카엔의 볼에 입술 을 가져가 가볍게 키스를 했다. 이 정도면 사랑하는 부인으로서 가진 마음이 확인이 될 테지. 그나저나, 방금의 키스는 비록 볼에다가 한 것이지만 내가 스스로 그에 게 키스를 하는 것은 처음이 된 듯했다. 무진장 닭살이 돋고 어색하다. 의외로 나의 감정은 거부감보다는 어색함과 쑥스러움이 더욱 강하게 들 었다. 도현으로서의 거부감은 그것에 가려지는 것 같다고나 할까? 내가 여자로서 인식을 하고 적응을 해가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앞으로 왕실에서는 한 가지 새로운 소문이 돌 듯 했다. 국왕 내외는 닭살 부부 라는... “저어... 폐하, 자리를 비켜드릴까요? 아니면 폐하께서 이곳을 찾으신 목적 그대로 식사 준비를 해드릴까요?” 그때 마드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녀의 팔뚝에는 닭살이 잔뜩 돋아 있었다. 흠, 닭살 분위기의 근원인 미카엔만 멀쩡하고 마드린과 나 는 이 분위기에 닭살이 돋으며 괴로워하고 있는 셈이다. “식사 준비를 하게, 마드린. 나는 부인과 점심을 같이 하러 온 것이니.” 미카엔은 그렇게 말하고는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말하기를... “부인, 다음번엔 그 수줍음을 극복하고 입술에 키스해주는 것이 어떨 까?” 으윽! 미카엔 녀석, 내가 진정으로 이대로 폭주하길 바라는 것인가? 미카엔이 중앙 궁성으로 돌아가고 난 후. 나는 몇몇 귀족들의 알현을 하고 몇몇 귀부인들과 알 수 없는 수다를 떨어야 했다. 그 후, 마드린에게 보고 있는 마법서을 뺏기고 대신 자수 교본을 보아야 했으며 향긋하고 은은한 맛의 차를 타는 법을 배워야 했다. 이것은 완전한 신부 수업이다. 이런 여성스러움의 미덕을 강조한 신부 수업들은 나를 아주 미치게 했다. 특히 자수 교본을 들고 있을 때는 나 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구들의 나열에 괴로워하다가 꾸벅 조는 경우 가 다반사였다. 그러면 어김없이 마드린의 잔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주특기인 가공할 만한 잔소리가 말이다. 훌륭한 왕비가 되는 일이 이토록 어렵고 힘겨운 일인 줄은 미처 몰랐다. 자고로 훌륭한 왕비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귀부인들과 여인들의 모범 을 보여야 한다니... 왕비라면 바느질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할 듯 했다. 그런데 프레야 왕비도 이런 자수와 귀부인들과의 수다를 즐겼었는지 의문이다. 아무튼, 나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마드린이 나를 이렇게 들들 볶을 줄은 몰랐는데... 흑! 이럴 땐 루이스 가 너무도 그리워진다. 나는 침실 베란다로 나가 플라이 마법을 써서 궁성의 지붕으로 날아간 다음 정령들을 불렀다. 그들에게 나는 루이스의 과거에 대해 조사해 오도록 명을 내렸고 그들은 나의 명령을 받고는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침실 안으로 들어가 아나를 불렀고 그녀에게 루이 스가 이상해지기 시작할 무렵에 대해 자세히 얘기를 들었다. 그녀의 얘기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루이스는 그 즈음에 말수가 없어지며 얼굴이 수척해져 갔다고 했었다. 그리고 가끔 뭔가를 부정하듯 고개를 가로 젓는 행동을 했다는데 이유 를 물어도 루이스는 답해주지 않았으며, 그때의 루이스는 뭔가 굉장히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다고 했다. 루이스는 무엇에 그렇게 혼란스러워하고 부정하고 있었던 걸까? 그때 루이스의 고통과 고민을 함께 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루이스에 대한 생각으로 또다시 우울해진 나는 아까 겨우 감추어두었 던 마법서 한권을 침대 속에서 꺼내들어 책을 읽었다. 그러다 밤이 깊 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카엔이 여기 침실로 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 다. 오늘도 그가 이곳에 올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다. 아까, 말 많고 눈 치 없던 시녀들 중 하나가 미카엔이 로터스 궁으로 갔을 지도 모른다 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흠...” 나는 침대 위에 자고 있는 아기 고양이 미카엔에게 눈길을 주었다. 왠지 기분이 기묘하다. 나는 가운데 손가락을 튕겨 꿀밤 때리듯이 자 고 있는 고양이의 머리를 툭 건드렸다. 아까 점심때의 일이 생각난 나의 심술궂은 행동이다. 카아옹~! 잘 자다가 느닷없이 머리를 맞은 고양이는 신경질적이 울음소리를 내 었다. 쬐그만게 성질이 제법 더럽다.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25-01-2002 17:41 Line : 188 Read : 1403 [27] 체인지[2부] 제5화 -진실 밝히기!- (6) -------------------------------------------------------------------------------- -------------------------------------------------------------------------------- Ip address : 211.58.129.2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6- 밤늦게까지 마법 공부를 하던 나는 그대로 마법서를 베개 삼아 침대 위에 서 잠들게 되었다. 그러다. “라비스, 일어나!” “우웅~ 5분만요! 마드린” 나는 웅얼대듯 말하고는 나를 깨우는 손길을 피해 돌아 누었다. “라비스! 그 5분만이라는 멘트 이제 좀 바꿀 때도 되지 않았어? 얼른 일어 나!” [라비스, 루이스에 대해 알아냈단 말이야.] “아휴~ 라비스를 깨우는 게 이렇게 힘들다니! 그동안 깨워왔었던 루이스의 고충이 짐작되는군.” “라비스를 효과적으로 깨울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없을까?” “리엔, 그냥 찬물을 한번 끼얹는 것이 어때?” “샤르! 넌 꼭 그렇게 무식한 방법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거야? 아젠 네가 한번 깨워봐.” 아까부터 나의 귓가에서 누군가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시끌벅적하다. 나는 침대 속으로 더욱 파고들다가 아젠샤르가 나에 게 하는 말에 문득 눈을 떴다. “라비스님, 루이스님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지금 일어나 세요.” 그다지 크지 않는 목소리로 말한 아젠샤르의 간단한 말이었지만 ‘루이스의 진실을 밝히고자’ 라는 문구에, 잠에 취해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식은 반응하여 금세 눈을 뜬 것이다. 나는 루이스의 감추어진 진실을 밝혀야만 했다. 그것이 나를 사랑해주고 아껴주었던 루이스에게 내가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나 였기에, 나는 눈을 뜨자마자 아젠샤르에게 물었다. “아젠, 루이스에 대해 뭔가 알아낸 거야?” “네, 라비스님. 어제 밤에 아멘시타와 리엔이 크로시벨가로 가서 그녀가 예전에 살던 곳을 알아내었습니다. 그래서 라센샤르님이 직접 인간의 모 습으로 그곳에 가셔서 루이스님의 과거를 대충 알아내셨습니다.” 그때 리엔시타가 끼어들었다. “라비스, 루이스는 크로시벨가에 들어오기 전에 로히얀스 수도에 있는 어 느 허름한 주택가에서 살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녀에게는 아주 어린 딸이 있었나봐. 근데 그 딸이 죽고 나서 괴로워했던 모양이야.” 루이스에게는 죽은 어린 딸이 있었다는 것. 나는 언젠가 루이스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예전엔 저에게도 젖먹이 딸이 있었는데, 크로시벨가에 들어오기 전에 는 생활이 무척 궁핍해서 끼니도 잇기가 무척 어려웠었죠! 결국은, 태어 났을 때부터 허약했던 제 딸은 제대로 못 먹었던 것과, 생활을 꾸려나가 야 했던 저의 소홀함으로 얼마 안가서 죽고 말았답니다.」 아, 나는 왜 그것을 생각 못하고 있었을까? 루이스에게는 그런 어두운 과거가 있었다는 것을... 미카엔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루이스가 나를 해한 것은 그녀에게 나보 다 더욱 소중한 뭔가가 있어 그것에 흔들렸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렇 다면 루이스에게는 가장 소중했던 것이 죽은 딸이 되는 것일까? 루이스가 그 소중한 존재로 인하여 흔들린 것과 그녀가 나를 해한 것은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지금 생각해 보니 미카엔의 말은 하나의 힌트 같다. 나는 머리를 굴리며 루이스의 소중한 존재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그녀가 왜 그 무렵에 뭔가를 부정하려 했으며 혼란스러워했는지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보았다. “라비스, 내 생각엔 말이야. 혹시 예전에 그 상황하고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예전의 그 상황이라니? 리엔.” “여기 왕성에 한참 황태자비 유령 소동이 있었을 때, 라비스 네가 부탁 해서 그 세리아인지 뭔지 하는 애가 죽은 일을 밝히기 위해 내가 걔 시 녀를 지켜보다가 흑마법에 걸린 것을 알아내었잖아? 솔직히 내가 정령의 눈으로 보아도 루이스는 너를 해할 사람은 아니었어. 그런데 그녀가 갑 자기 너를 해하였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잖아?” “아!” “뭔가 그 시녀의 경우와 비슷한 점이 없어?” “그러고 보니 루이스는 그 무렵에 무슨 악몽 같은 것을 꾼다고 했고 자 주 멍한 표정을 지었어. 얼굴도 야위어가고 표정도 없어지고... 설마?”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끼익! 그때, 침실의 방문이 열리자 정령들은 모두 후닥딱 자리를 피하였다. 안으 로 들어온 자는 마드린이었는데 그녀는 내가 깨어있는 것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하?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안색이 안 좋으시군요.” “마드린! 혹시 중앙궁성 서재에 흑마법서 같은 것이 있을까요?” 그러자 마드린은 해쓱한 얼굴을 해보였다. “전하! 흑, 흑마법이라니요? 이곳 서재에 흑마법서 같은 것이 있을 리 가 없지 않습니까? 설마 전하께서 어둠의 힘 따위에 관심...” 나는 거기까지만 들었다. 대충 옷을 갈아입은 나는 침실을 나서서 왕실 마법사들의 연구실로 달려갔다. 거기서 수석 마법사 킬린을 만난 나는 흑마법 중에서 사람의 의식을 지배하는 술수에 대해 질문을 했다. 그러자. “전하. 저는 흑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 마법에 대한 특 징에 대해서는 조금 알지요.” “그 특징이 무엇이죠?” “그 마법은 사람의 의식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것으로 세뇌와 약간 차이 가 있습니다. 그것은 시전자의 능력에 따라 혹은 마법의 걸림을 당하는 사람의 저항력에 따라 그 효과는 천차만별이죠. 저항력이 약한 자가 그 마법에 걸린다면 완벽히 그 의식을 지배당하게 되어 마법 시전자의 수족 이 됩니다. 그러면 자신의 의식은 영영 되찾을 수가 없게 되는 거죠. 이 흑마법은 마법이라기보다는 주술에 가깝습니다. 전하.” “그 마법은 어떤 방식으로 걸리게 되는 건가요?” “글쎄요. 그건 저도 정확한 방식은 잘 모르겠지만 흑마법이란 그것을 시 행하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해서는 희생자의 피가 재물로서 필요합니다. 의식 지배 마법 같은 경우에는 희생자의 피로서 시전자가 마법을 행합 니다. 그 시간대는 목표물의 의식이 약해져 있는 잠들어 있는 시간이 적 절하겠지요. 또한 재물만 있다면 어디서 시전하든 상관이 없어 누군가에 게 들킬 염려도 없지요. 그 마법은 목표물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약점이나 소중한 존재에 의해 점차 의식을 지배받게 되는 것입니다. 킬린의 말을 듣자 나는 루이스가 흑마법에 조종을 받았다는 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루이스는 나에게 악몽을 호소한 적이 있었다. 루이스 는 잠들어 있는 동안 흑마법에 계속 공격을 받아왔던 것이다. 그녀는 그 것을 이기려 노력했을 것이다. 본인은 그것이 흑마법이라 생각지 못했겠 지만. 나는 왕성의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루이스는 왕비를 살해한 죄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녀는 지하 감옥으로 갇혔을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간수의 얘기를 들었다. 루이스는 그날 이후, 매일 같이 피를 토하듯 통곡을 하였다고 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녀를 스스로 혀를 깨물 어 자살을 했었다고 했다. 나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루이스가 갇혀 있었다는 감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루이스가 갇혀 있던 감옥 안은 무척 어두웠으며 습하였고 서늘했다. 이런 곳에 루이스가 갇혀 있었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렇게 감옥의 벽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나는 벽에 뭔가 글씨 같은 것이 써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빛바래서 어두워진 붉은 빛깔의 글자였다. 아마도 피로 써진 듯 했다. 「괴롭다. 나는 사랑하는 존재를 내 손으로 죽이고 말았다. 나는 매일 같 이 환상을 보았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나의 딸을 비참하게 죽이는 끔 찍한 장면을... 딸의 영혼은 매일 나를 찾아와 괴롭혔다. 자신을 죽인 그 존재를 죽여 달라고...」 그 문구를 보고 침실로 돌아온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루이스에게 흑마법을 건 존재를 저주하며 루이스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곁에 있는 아멘시타가 낯설게 느껴지는 나의 모습에 놀랐는지 무척이나 걱정스런 눈을 해보였다. 그날 나는 다시 날이 저물 때까지 침실에서 내내 울었다. 그리고 루이스 에게 흑마법을 걸 만한 존재를 생각해 보았다. 솔직히 내가 알고 있는 흑마법사는 마리밖에 없었다. 그녀는 잠시 이곳 왕성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루이스하고도 몇 번의 부딪힘이 있었 다. 그 무렵에 마리는 루이스를 나를 제거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편인 목 표물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유령 소동과 세리아 독살 사건으로 나를 제거하고 왕비가 되려던 그녀가 결국은 나에게 그 검은 속이 발각되고 자이라스로 건너가 엔카루스와 손 을 잡았다가 전쟁으로 엔카루스가 죽자 마리는 남겨두었던 하나의 방편 으로 나를 제거한 것이다. “마리, 넌 꼭 내 손으로 처단할 거야. 루이스와 나에게 죽음과 지독한 고통 을 안겨준 너를 결코 용서하지 않아.”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02-02-2002 20:22 Line : 187 Read : 196 [28] 체인지[2부] 제6화 -드러나는 비밀- (1) -------------------------------------------------------------------------------- -------------------------------------------------------------------------------- Ip address : 211.208.75.16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드러나는 비밀) 첨벙. 필요이상으로 커다란 욕조 안에 채워진 목욕물... 그것에 나는 몸을 담그고 따뜻한 물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목욕을 할 때는 나는 시녀들의 시중을 받지 않는다. 그저 마드린이 받아놓은 목욕물로 나 혼자 목욕을 할 뿐. 흣... 그러고 보니, 라비스로서 처음으로 목욕을 하게 되었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그땐 얼마나 난감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젠 나의 몸을 봐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아마도 눈에 익숙해져서 그런 모양이다. 나는 욕조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향긋한 향이 은은하게 도는 따스한 물에 이렇게 나의 몸을 담그고 조용히 사색을 하니 마음이 평안해 진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이런 여유로움으로 기분을 푸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아까의 일이 떠오른다. 크로시벨가에서 왔던 시녀인 제인이 나에게 셀레나의 편지를 전했었는데, 그녀는 셀레나 가 죽기 전 13년 전에 자신의 어머니에게 그 편지를 맡겼었다고 했다. 셀레나는 내가 18살이 되는 7월경에 자신의 편지를 나에게 전하라는 말을 남겼었다고 했 는데 그녀가 왜 편지를 전하는 시기를 그렇게 정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셀레나의 편지를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편지는 비에 젖었는지 잉크가 모두 번져있었다. 오늘은 오전부터 한낮까지 비가 내렸는 데 그녀는 그 비에 젖었던 모양이다. 제인은 나에게 사죄를 하며 벌을 받기를 원하였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된 터라 나는 아쉬움을 감추며 그녀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편지를 당장 못 보는 것은 정말 아쉽지만 나중에 어떤 물건의 과거의 모습을 복원하여 환상으로 볼 수 있다는 마법을 배워서 편지를 읽으면 될 터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 목욕하는 것을 마친 나는 가운을 걸치고 욕실을 나왔다. 그리고 젖은 머 리칼을 말리며 빗기 위해 침실에 있는 거울 앞에 섰는데,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본 나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마드린이 가져다 놓았었던 이 가운은 무척이나 얇은 천으로 되어 있어 속이 조금 비치는데 다가 하늘거리기까지 해서 나의 몸 선이 드러나 무척이나 야릿한 분위기를 자아냈기 때문이 었다. ‘으, 민망해라~’ 게다가 물에 젖은 진한 황금빛 머리칼은 촛불의 조명을 받아 누굴 유혹할 듯한 고혹적인 빛으로 금속성의 빛을 발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혼을 쏙 빼놓을 듯했다. 나는 내가 가진 육체의 신비하고도 미스터리(?)한 아름다움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옷을 갈아입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움직이려는데 방문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 카엔이 왔음을 알리는 말이었다. 이에 나는 놀라며 방문 앞으로 후닥딱 달려갔다. 그리고 방문을 향해 외치기를. “폐하, 조금만 기다려요! 지금 옷 갈아입는 중이니까 절대 들어오면 안돼요!!” 퍽이나 여성스러움이 느껴지는 내용의 말을 여자답지 못하게 다소 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방문 밖에서 나의 격한 목소리와는 비례되는 미카엔의 느긋한 음성이 들려왔는데... “부인, 그대의 수줍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부부 사이에 굳이...” “절대, 절대 들어오면 안돼요!” 숙녀가 옷을 갈아입고 있다는데 굳이 들어오겠다는 것인가? 정말 미카엔 녀석... 이마에 힘줄 돋게 만든다. 어쨌든, 나는 허둥대며 수건으로 머리칼을 거칠게 털어 물기를 닦아내 고 갈아입을 옷을 찾았다. 만약 미카엔이 공간이동으로서 불쑥 나타났다면 지금의 민망하고도 야릿한 모습을 보여주 게 되었을 거다. 앞으로는 그에게 이곳 침실을 방문할 때는 공간이동보다 노크의 습관을 권장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잠시 후, 나는 조금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미카엔에게 들어와도 좋다는 말을 했다. 젖은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모습이었지만 상관없다. 아까 유혹할 듯한 느낌이 들 던 모습보다는 나을 테니. 미카엔은 침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한 나라의 고귀한 왕비의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나의 머리모양에 눈길을 잠시 주었다. 그는 평소와 같이 국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화려한 복장이나 간소한 평상복이 아닌 귀족 정 장을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고급스러우면서도 깔끔한 그 정장은 미카엔에게 무척 잘 어울 려서 핸섬한 귀족 청년 같았다. 그의 그런 모습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입을 열었다. “미카엔 어디 가세요?” “응, 사랑하는 라비스와 오랜만에 데이트나 할까 해서 귀족 차림을 했지. 왕성 주변에 있 는 고급 레스토랑을 귀족의 신분으로 예약했거든.” “그렇군요...” “...그런데, 그곳은 귀족의 우아한 격식을 따지는 곳이라서 라비스는 아마도 가장 아름다 운 드레스 차림에 화장을 해야만 할 걸?” “…….” “하하. 라비스, 그 표정은 뭐지?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아름다운 귀족 레이디의 모습으로 나오도록 해. 너무 오래 기다리게 만들지는 말고.” 미카엔은 나에게 그렇게 말하더니 침실을 나갔다.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드린을 비롯 한 시녀들을 불러들여야만 했다. 저녁을 먹기 위해서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해야 한 다지 않은가. 결혼식 때 신부 화장을 한 나의 모습을 보고 화장은 되도록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나였는 데 저녁이라는 것을 먹기 위해서 오늘 저녁에는 화장을 하게 생겼다. 마드린은 내가 치장을 부탁하자 이유를 묻더니 나의 말을 듣고는 아주 즐거운 표정이 되어 우아하고 화려한 드레스를 세심하게 골라왔다. 그리고는 국왕 폐하를 오래 기다리게 만들어 서는 안 된다며 시녀들을 무진장 다그쳤는데 나를 치장시키는 그녀의 모습은 퍽이나 열정적 이었다. 가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왜 이렇게 루이스의 모습이 그녀와 겹쳐 보이는 건지. 곧, 나는 고상하면서도 여성스러운 모습으로 차츰 꾸며져 갔다. 섬세하면서도 화사한 화장 에 소녀다운 우아한 머리 스타일, 화려한 드레스 그리고 보석 악세사리로 나의 치장은 마무 리 지어졌다. 여자는 왜 이렇게 외출을 하기 위한 준비단계가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며 나로서는 흉 내도 못 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걸까? 나는 이 모든 것이 참으로 피곤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하며 중앙 궁성을 나갔다. 중앙 궁성 앞 정원에서 산책 겸, 중신과 나라일과 관계되는 듯한 대화를 나누고 있던 미카 엔은 나를 보더니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미카엔의 옆에 있던 중신도 나를 감탄하듯 바라 보았다. 미카엔은 나에게 다가와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가실까요? 아름다운 레이디.” 주위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나와 미카엔에게 집중되었다. 왠지 쑥스럽다. 미카엔과 내가 간 곳은 왕성의 근처 부르주아 거리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그곳은 귀족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상당히 고급스럽고 화려한 레스토랑이었는데 그 품격이 상당히 높아보였다. 미카엔은 오늘 내가 루이스로 인하여 아침부터 오후까지 내리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를 마드 린에게 들은 모양이다. 그래서 오늘 왕성 밖으로의 외출은 그가 나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마련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우리는 마차에서 내려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려는데 공교롭게도 미카엔은 대신들 중 하나인 중년 귀족 한명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 귀족은 미카엔에게 말을 걸며 뭔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나는 아직까지는 정사에 대한 내용은 깊이 알지 못했던 터라 멀뚱히 서 있어야만 했다. 그러다 나는 한 마리의 고양이가 저만치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고 양이의 품종 역시 내가 키우고 있는 고양이인 미카엔과 닮은 실버 페르시아였다. ‘미카엔인가? 실버 페르시아 종은 흔한 게 아닌데... 왜 저 고양이가 저기에 있는 거지?’ 나는 그 고양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그러자 그 고양이는 냐앙~ 하고 한 번 울더니 나에게서 조금 달아나 보였다. 이에 나는 저 고양이에게 다가가는 것을 멈추고 그냥 갈까 망설였다. 냐아옹~ 내가 멈추자 고양이는 나를 향해 한 번 더 울며 나를 응시했고 나는 그 고양이에게 다시 다가갔다. 하지만 그 고양이는 나를 놀리려 함인지, 나의 손길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 다렸다가 얄밉게도 또 멀찍이 달아났다. 이번엔 오기가 생겨, 나는 미카엔을 닮은 그 고양이에게 다가가 잡으려 했다. 그때마다 고 양이는 조금씩 조금씩 달아났고 그러다 어느새 나는 레스토랑에서 조금 멀어지게 되었다. 괜히 고양이에게 한눈을 팔았다고 생각한 나는 다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그 때 익숙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야, 라비스.” 그 목소리를 들은 나는 섬뜩함을 느끼며 나에게 말을 걸은 소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흑빛 의 로브를 입고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나는 크게 떠진 눈으로 설마하며 그녀를 바라 보았다. 소녀는 손을 들더니 쓰고 있던 후드를 천천히 벗어보였다. 그러자 결이 좋아 보이는 백금 발이 물결치며 흘러나왔고 드러난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너는 마리?” * 그동안 4권 분량을 수정하는 노가다를 하느라.. 다음편 연재가 늦어졌습니다. 4권 수정은 부분적으로 내용도 바뀐 부분도 있는데.. 생각보다는 시간이 오래 걸 리는 군요.. 마감이 얼만 안남았는데...ㅜ.ㅜ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03-02-2002 04:03 Line : 152 Read : 2157 [29] 체인지[2부] 제6화 -드러나는 비밀- (2) -------------------------------------------------------------------------------- -------------------------------------------------------------------------------- Ip address : 211.208.75.16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나는 놀라움과 분노가 뒤섞인 음성으로 그녀의 이름을 내뱉었다. 그녀가 이곳 로히얀스에 와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그래. 나야. 나를 만나서 무척 불쾌한 모양이지? 하긴 나는 너의 행복한 생활에 방해꾼 이 될 지도 모를 테니 불쾌할 수도 있겠지.” “이곳 로히얀스엔 왜 나타난 거지?” “호호. 널 만나러 왔지. 넌 나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야.” “아니! 나 역시 너를 만나려 했어. 나와 루이스에게 지독한 고통을 안겨준 너를 응징하기 위해서지.” “호호. 그런가요? 존귀하신 왕비 전하. 하지만 이것을 알아두셔야지. 너를 해한 것은 네 유 모인 루이스이고 넌 이렇게 멀쩡하게 되살아나 왕비가 되어 달콤한 신혼 생활을 하고 있잖 아? 나는 너로 인해 죽은 엔카루스 때문에 매일같이 눈물로 너를 저주해야 하는데!” “뭐?” 조용한 어투지만 약간 악에 받친 듯한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엔카 루스의 일로 나에게 복수하려 했다는 것은 미처 생각 못한 일이었다. 나는 그저 나와 루이 스의 불행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가 엔카루스를 그 정도로 사랑했었던 건가? 마리는 키리아의 약물로 엔카루스를 좋아 하게 되었던 건데... “넌 네 의지에 의해서 엔카루스를 좋아한 것이 아니잖아?” 내가 마리에게 한 말은 그녀를 자극하는 말이 되고 말았다. “닥쳐! 난 진심으로 엔카루스를 사랑했어! 키리아에 의해서가 아니더라도 나는 그를 사랑 했을 거야. 네 감정을 욕되게 하지 마. 나는 네가 죽도록 미워. 네가 하는 사랑만 순결해? 엔카루스가 왜 너 따위를 사랑했는지 몰라. 차라리 네가 그 바보 같은 엔카루스의 맘을 받 아주었더라면 이 정도로 네가 증오스럽지 않았을 거야. 너는 그의 사랑을 이용했을 뿐, 파 멸로까지 이르게 만들었어. 그리고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어.” “그렇지 않아.” “,,,너는 그의 모든 것을 파멸시켰어. 남김없이! 그를 따르던 충직한 마법 기사단들도 자 살해버리거나 흩어져 버렸어. 자이라스도... 그런데 너는 마치 당연히 없어져야 할 것들을 없애는 것처럼 그렇게 그의 모든 것을 파멸시켰어.” “그렇지 않아. 나 역시 그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어. 그녀의 말을 부정하는 나의 목소리는 어느덧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나에 대한 그녀의 증 오가 느껴졌다. 엔카루스의 파멸... 그것은 분명 나로 인한 것이었다. 나를 사랑했던 그의 감정과 내 자신이 불행의 근원인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불행은 나 역시 가슴 아팠던 것인데, 어째서 운명은 이토록 어긋나서 마리와 나는 서로를 증오하게 되었고 엔카루스와 루이스는 이런 엇갈림으로 인해 운명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을까? 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마리는 그런 나를 보더니 근처에 있던 고양이를 안아 들 었다. 그리고는 평소 특유의 차분해진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 “라비스, 이번엔 내가 너를 파멸 시킬 거야. 난 너의 비밀을 알고 있거든. 뿐만 아니라 왕실의 다른 비밀도... 네 주위에 첩자를 심어나서 알게 된 거야. 네가 믿는 존재... 그들 중 하나야. 네가 고양이에게 미카엔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것도 알고 있지. 호호. 그래서 나도 거금을 들여 실버 페르시아 하나를 구입했어. 그럼 나중에 봐.” 마리는 그렇게 말하더니 후드를 다시 쓰고 유유히 사라져 갔다. 나는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 습을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의 비밀. 그녀가 나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내가 본래 라비스가 아닌 다른 영혼을 가진 라비스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믿는 존재들 중 하나가 그녀의 첩 자라는 것은 또 무슨 말일까? 현기증이 난다. 내가 믿는 존재들 중 하나... 나는 또 한번의 배신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인가? 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존재는 아멘시타 외에는 아나 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아나가 마리의 첩자가 된다는 말이 된다. 그렇게 착한 아나가 마리의 첩자일리는 없을 텐데 말이다. 마리가 만약 나의 비밀을 모두에게 밝히면 나는 어떻게 될까? 나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내가 그동안 라비스 행세를 하며 그들을 속여 왔다고 생각할 거다. 특히 미카엔은... 왕실은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고 나의 자리는 위태로워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입막음을 위해서 그리고 루이스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마리를 처단해야만 할까? 내가 믿었던 존재들 중 마리의 첩자라고 했던 존재를 찾아서 벌해야만 할까? 그래야 만 할까? 마리 역시 나로 인해 눈물과 증오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고 있는데... 내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불행이 되는 씨앗은 지워야 하는 걸까? “라비스!” 그때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미카엔이었다. 나는 얼른 눈물 자국을 지우고 그 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내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나에게 물었다. “라비스, 대체 여기서 혼자 뭐하고 있는 거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별 일 아니에요. 그냥... 루이스가 생각나서 잠시 눈물이 난 것뿐이에요.” 나는 그에게 마리에 대한 일을 감추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라비스로서의 나에게 집착을 갖기 시작했다. 이젠 그에게 내가 이도현임을 밝히는 것이 두려워진 것이다. 훗... 우습다. “정말 그것뿐이지? 라비스. 다른 일은 없는 거겠지?” “네.” 그날 저녁, 나는 여러 가지 복잡해진 심정으로 미카엔과 식사를 해야 했다. 미카엔은 우울 한 나의 모습을 보고는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평소보다 말을 많이 했는데, 그가 들려주는 얘기 중에는 어렸을 적 누군가를 좋아했던 내용마저 끼어있었다. 왠지 더욱 기분이 복잡 기이해지는 듯한 나였다. 어쨌든, 미카엔은 5살 때 백합 궁에 머물고 있던 아버지의 측실을 내심 좋아해서 -참 조숙 하기도 했다- 매일 그곳에 가서 놀았다고 했는데 어머니인 프레야 왕비가 그것을 못마땅하 게 여겨 어린 미카엔을 황태자궁에 마법 결계로 가둬 놓았다고 했다. 그런데, 미카엔은 5살이라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결계를 자신의 힘으로 깨뜨리고 또 백합 궁으로 가서 놀아 프레야 왕비를 경악하게 만들었다는 얘기였다. 물론, 나도 그 내용이 무척 경악스러웠긴 했다. 과연, 지금 말하고 있는 미카엔의 말이 사 실인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드래곤이 만들어 놓은 마법 결계를 5살 먹은 어린 꼬마가 깨 뜨렸다니... 그러다 나는 왕비의 일기장 내용을 떠올리고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포크를 떨 어뜨릴 뻔했다. 왕비의 일기장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오늘은 미카엔이 다섯 번째로 맞는 생일이다. 그 아이는 내가 인정한 인간 아이... 그것 으로 인해 미카엔이 드래곤으로서의 몇 가지 능력을 물려받게 되었지만, 나는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놀라곤 한다. 이제 다섯 살 먹은 저 조그만 몸 안에는 아직 각성되지 못한 엄청난 마력, 이 정도라면 사 정을 모르는 다른 드래곤들은 이 아이가 폴리모프한 드래곤이라 착각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 된다. 하지만,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우리들은 몇 백년이라는 기나긴 유년기를 보내고 저 정도의 마력을 갖게 되는데... 미카엔은 이제 다섯 살이다. 나는 미카엔을 황태자로 내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걸리는 건 지금 백합궁에 있는 국왕의 총애를 받는 측실 하나와 그녀의 두 왕자이다.」 미카엔이 그 당시의 일을 잘 기억하고 있다면 그는 전 백합 궁 소생인 두 왕자에 대해서도 기억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그런데 미카엔은 왜 사라진 두 배다른 형제에 대해 알고 있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그에게 물어볼까 했으나 물어보지 말아야 할 것을 섣불리 묻는 것이 아닐까 해서 그만 두었다. 어차피, 왕실이라면 자주 있는 뻔한 일일 테니 말이다. 프레야 왕비는 미카엔이 황태자가 되는 것에 방해되는 두 왕자를 제거했을 것이고 더불어 전 백합 궁 측실은 국왕의 총애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인해 방해 되어 제거했을 지도 모른다. 미카엔은 그 런 행동을 한 냉정한 어머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러고 보니, 미카엔은 백합 궁과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결 국은 백합 궁 측실로 그와의 인연을 시작했었으니까.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04-02-2002 18:07 Line : 174 Read : 483 [30] 체인지[2부] 제6화 -드러나는 비밀- (3) -------------------------------------------------------------------------------- -------------------------------------------------------------------------------- Ip address : 211.208.75.16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늦은 저녁, 왕성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집무실로 향하는 미카엔과 헤어지고 침실로 들어와 고양이 몸으로 들어온 아멘시타와 마리의 일을 상의했다. 일단 다른 정령들에게는 비밀로 한 채 말이다. 그는 나의 얘기를 듣더니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기 고양이라니... 그는 더욱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아멘시타, 나는 아나에게 일기장 내용을 누구에게 발설했는지 묻고 죄를 물어야 할까? 아 나가 나를 배신한 걸까?” [글쎄. 지금 상황으로는 아나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녀에게 그 일을 묻는 것은 아무래도 성급한 행동일 것 같아. 마리의 첩자는 그녀가 아닌 다른 존재일 수도 있어.] “왕비의 일기장 내용을 알고 있는 존재는 아나 밖에 없는 걸?” [물론 그렇지.] “그리고 나는 지금 라센샤르를 불러 마리를 처단해야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하지?” 나의 혼란 섞인 질문에 아멘시타는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나에게 입을 열었다. [라비스, 너 너무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아. 성급하게 한 가지만 생각하지 말고 넓게 생각 해. 마리가 무슨 이유로 너에게 와서 그런 말을 했는지 말이야. 그리고 네가 아나와 왕비의 일기장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던 때를 생각해 봐.] 성급하게 한 가지만 생각하지 말고 넓게 생각하라... 그의 충고에 나는 침착하게 마음을 가 라앉히고 천천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나와 내가 왕비의 일기장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을 때, 나는 그녀에게 질문한 적이 있었 다. 그녀가 일기장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나의 질문에 아나는 나에게 몇 가지를 답했다. 내가 진짜 라비스 크로시벨이 아니라는 것과 프레야 왕비가 드래곤이라는 것, 미카엔에게는 배다른 형제가 있으면 셀레나는 200년 전에 존재했던 크리스티나라는 것을 답했었다. 그리고 그때, 아멘시타는 나에게 누군가 밖에 있는 것 같다고 경고를 했었다. 아! 그렇다면? 누군가가 아나와 나의 대화를 엿들은 것이다. 물론 그 대화를 엿들은 존재가 마리의 첩자일 것이다. 하지만 마리는 나에게 믿는 존재들 중 하나가 첩자라고 했었는데... 그러면 대체 누가 첩자인 것일까? 내가 믿는 존재들 중 하나. 마음이 괴로워진다. 아직 아물지 않은 가슴 안의 상처가 다시 흠집이 나는 것 같다. “아멘시타, 너의 말이 맞는 것 같아. 누군가가 엿들었을 수도 있어. 그렇다면 누가 마리의 첩자일까? 내가 믿는 존재들 중 하나라고 했으니 분명 나의 측근 시녀들 중 하나일 텐데.” [음, 너의 측근 중 하나라면... 아무래도 레니가 가장 유력하지 않을까? 네가 예전에 레니 에 대해 얘기했던 것으로 판단하자면, 레니는 도둑 길드와 교류를 가졌었고 돈을 탐내며 손 버릇이 안 좋아. 그런 도둑 습성이 있는 애라면 기척을 죽이고 몰래 접근하고 사라지는 일 은 쉬운 일일 테지. 마리가 이 고양이의 이름이 미카엔이란 것도 알고 이 고양이를 닮은 실 버 페르시아 종으로 너를 유인했던 것을 보면 그녀는 너에 대한 많은 정보를 받고 있는 거 야. 물론 돈이 관련되어 있겠지. 그리고 또 한 가지를 보자면, 레니는 자이라스 출신이야.] “아!” [레니가 자이라스 출신이라면 전에 마리랑 접촉을 가진 상태였을 지도 모르잖아?] 그의 조리 있는 말에 무조건 아나만 의심한 것은 성급했던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아나는 그녀의 어머니가 이곳 측근 시녀 출신이라 마리랑 접촉을 가질 가능성도 희박 하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대체적으로 왕실 측근 시녀 시종 출신들은 비록 낮은 신분이지만 높은 자부심도 가지고 있 었고 폐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그들은 유능하지만 말이다. 그렇다 면 레니가 마리의 첩자인 셈이다. 나는 레니에 대해 분노가 느껴졌다. 그녀에게 또 한 번의 믿음을 주었건만 그녀는 결국은 돈이라는 것에 그 믿음을 팔아 버렸다. [라비스, 넌 레니를 처단할 거야?] 문득 아멘시타가 나에게 질문을 해왔다. “아, 모르겠어.” [어찌되었든, 잘 생각해. 어차피 레니 역시 돈에 이용당한 애이니. 마리가 왜 너에게 첩자 가 있다는 정보를 흘렸겠어? 마리 같은 여자는 레니가 너에게 처단되어도 아무 상관없을 거야. 그녀는 오히려 네가 믿음을 주었다고 생각한 존재를 처단하기를 바랄 걸?] 아멘시타는 내가 무조건 누군가를 처단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보다는 그보다 더 현명한 결정 을 내리길 바라는 것 같다. 레니 역시 내가 믿음을 주었던 존재. 친구라고까지 생각했던 존재이다. 그런 그녀를 내 손 으로 처단하게 된다면 나는 어쩌면 가슴에 또 하나의 상처를 갖게 될 것이다. 더 이상 그런 것은 싫다. [...그리고 라비스, 마리는 일단 라센샤르에게 감시하도록 맡기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마리 역시 인페르디아 전쟁을 통해서 네가 강한 정령을 부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텐데, 그럼에 도 불구하고 너를 직접 만나러 온 것을 보면 뭔가 뒤로 믿는 구석이 있을 거야. 우선 신중 하게 그녀를 감시하고 나서 행동하는 것이 나아.] “그래, 그래야 할 것 같아. 고마워, 아멘시타.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 나 너무 혼란스럽 고 초조했었는데...” 내가 그에게 감사의 말을 하자 아멘시타는 싱긋 웃어보였다. 고양이의 몸으로 있는 주제에 웃을 줄도 아는 여전히 재주도 좋은 나무 정령 아멘시타였다. 역시 그는 몇 백 년의 나이를 먹은 정령이라 그런 것일까? 다른 정령들에게서는 비교적 나 이가 어려 꼬맹이라 놀림 받고 감정의 기폭도 커서 가끔은 어린 애 같을 때도 있지만 그는 놀라울 정도로 현명함을 보일 때가 있었다. [가끔 힘들 때면 네 곁에는 너를 사랑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나는 있잖아, 네 가 정말 좋아. 라비스만이 아닌 도현으로서의 너를 말이야] “우웅... 나 눈물 나온다. 너에게마저도 도현이란 이름은 잊혀진 줄 알았는데. 너는 내가 아닌 라비스만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아멘시타와의 대화를 마친 나는 레니를 불러들였다. 아까의 초조하고 불안했던 감정 은 이제 가라앉아 평안해졌다. 나는 침착하게 레니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머리를 굴렸다. 레니는 나의 부름에 안으로 들어오더니 평소의 친근한 느낌이 드는 모습으로 나에게 입을 열 었다. “부르셨어요? 전하. 외출은 즐거우셨어요?” “응” “폐하는 정말 자상하신 것 같아요. 전하의 우울한 심기도 그런 로맨틱한 방법으로 달래주 시니 말이에요.” “그래, 폐하는 정말 좋으신 분이지. 레니, 나 너에게 할 말이 있어 불렀어.” “뭔데요?” 레니는 나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무겁게 입을 떼어 그녀에게 말했다. “예전에 네가 했던 말이 생각나. 세상은 우정이나 의리도 아닌 돈이라는 것에 모든 것이 움 직인다는 말. 그 말이 지금 나를 무척 슬프게 해.” “전하?” “레니, 돈이란 것을 위해 우정과 믿음을 버리면 너는 행복해지니?” 그제야, 내가 이러한 말을 하는 의도를 알아챈 그녀는 안색이 변하여 나의 앞에 무릎을 꿇어 보였다. 자신의 죄가 나에게 드러난 지금, 그녀는 두려운지 몸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배신한 자신의 잘못이 끝까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걸까? “전하! 용서하세요. 저는 그냥 협박을 받아서... 저도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왕비 전하가 주신 믿음을 돈으로 팔고 싶지는 않았어요. 저는 예전에 신전에 들어가기 전에 어떤 흑마녀의 댁에서 하녀로 잠깐 일했었는데 그 흑마녀가 이번에 저를 사주한 여자에요. 흑! 그녀는 저를 협박하기도 했고 또 많은 돈을 주기도 해서 그만 저도 모르게...” “레니, 만약 네가 협박을 받고 있다면 너는 그 사실을 나에게 말했어야 했어. 결국 너는 돈에 흔들린 거야.” “흑! 전하, 용서하세요. 다시는 그런 돈 따위에 흔들리지 않겠어요. 전하.” 레니는 엎드린 채 나의 발을 붙잡고 매달리듯이 울며 애원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나 역 시 가슴이 아파졌다. “여기 이 자리에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 레니. 나에 대한 믿음과 우정으로 너의 삶을 채울 것인지 아니면 재물에 너의 모든 것을 바칠 것인지... 만약 재물이라면 너는 여기서 떠나. 나는 너를 벌하지 않겠어.” “전하, 저는 떠나고 싶지 않아요. 다시 전하께서 기회를 주신다면 저는 저에게 남은 삶을 믿음과 우정으로 채울 거예요. 다시는 돈에 흔들리지 않을 게요. 흑흑!” “그래? 그러면 나에게 그 마음에 대한 증표를 보여줘. 나는 예전과 같은 평범한 소녀가 아 니야. 이젠 왕비라는 책임 무거운 자리에 있어. 그냥 이대로 나는 너를 믿기가 힘들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납장으로 가서 날이 잘 드는 단도를 하나 꺼내가 지고 왔다. 보석이 박힌 제법 고급스런 단도였다. 나는 레니에게 그 단도를 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레니, 이것으로 너의 새끼손가락 하나를 잘라. 그리고 너의 피 묻은 단도를 잘 간직하도 록 해. 만약 나중에 네가 또 재물에 흔들려 나의 믿음을 저버렸을 경우, 너는 그 단도로 벌 을 받아야 할 거야.”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04-02-2002 19:21 Line : 156 Read : 296 [31] 체인지[2부] 제6화 -드러나는 비밀- (4) -------------------------------------------------------------------------------- -------------------------------------------------------------------------------- Ip address : 211.208.75.16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내가 그 단도를 내주자 레니는 조금 겁에 질린 듯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나는 덧붙였다. “아직 늦지 않았어. 넌 지금이라도 그냥 나를 떠날 수 있어.” “흑! 싫어요, 저는 이제 갈 때도 없어요. 돈이 있어도 저는 갈 때가 없어요. 돈이 있어도 저는 행복하지 못할 거예요. 사실은 제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동경했던 존재는 왕비 전하이 시고 저를 처음으로 진심으로 대해 준 존재는 왕비 전하예요. 그냥 여기 있을 거예요.” 울먹이며 말하는 그녀의 어조는 약간 떼를 쓰는 듯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누군가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며 떼를 쓰는 듯한... 어쨌든 레니는 그렇게 나에게 남는 것을 선택했 다. 떠날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말이다. 나는 그녀가 그냥 갈 줄 알았는데... 레니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단도를 들었다. 하지만 레니는 나의 곁에 남기로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손가락을 자르는 일이 무척 망설여지는지 단도를 든 채 멈칫하고 겁에 질 린 모습을 해보였다. 그녀가 그렇게 망설이는 것은 당연했다. 자신의 손가락을 스스로 자른다는 것은 보통 독한 마음이 아닌 이상, 굳은 결의를 가지지 않는 이상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레니는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레니가 도중에 자신의 결심을 번복하고 돌아선다면 나는 그녀에게 갖았던 믿음들을 깨끗이 거둘 작정이었 다. 그것은 실망감과 함께 많은 상실감을 나에게 안겨줄 것이다. 레니가 겁을 집어먹은 눈으로 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나는 이 결정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 이 들었다. 그러다 그녀는 드디어 결심을 했는지... 레니는 눈을 감고 예리한 날의 단도를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향해 내리쳤다. 그 광경에 나 역시 눈을 감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짧은 비명을 지르고는 고통과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다는 공포를 이기지 못했는 지 그대로 피를 흘리며 기절을 하고 말았다. 나는 얼른 기절한 레니를 침대로 옮기고 아멘 시타를 불러 그녀를 치유하게 했다. 레니가 자신의 손가락을 자를 때 나는 가슴이 무척 아팠다. 그리고 내 스스로가 내린 레니 에 대한 독한 결정에 많이 후회하기도 했고 내 자신에게도 많이 놀라기도 했다. 내 자신도 내가 레니에게 그런 것을 요구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내가 왜 굳이 레니에게 이런 선택을 하도록 하게 했을까? 그냥 그녀가 재물을 선택하든 말 든 그녀를 처단하기 싫으면 그냥 떠나보내었으면 되었을 텐데. 아마도 내가 믿음을 준 존재에게 나 역시 그의 믿음을 되돌려 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것 은 또 다른 나의 이기심. 내가 믿는 존재들을 잃거나 떠나보내기는 싫다. 어쨌든, 왕비로서 그녀에게 내려야 할 배반에 대한 형벌은 사실상 그것은 작은 것이었기에 나는 그 점으로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렇게 레니에 대한 일을 마무리 짓고 나는 침실을 옮겼다. 장미 궁에 있는 왕비의 침실은 원래 한 개가 아닌 여러 개였기 때문에 나는 침실 하나를 하루 동안은 레니에게 내어주어도 무방했다. 나는 밤늦게야 잠에 들었다. 오늘도 미카엔은 나의 침실을 찾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라센샤르로부터 보고를 듣는 것으로 시작했다. 마리는 요즘 마족들과 접촉을 갖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원래 정령이라 해도 능력이 좋은 마법사나 마족의 근처에는 은밀하게 다가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나 바다의 정령 라센샤르는 정령들 중 최강의 능력을 가진 정령이었던 터라 자신의 기운을 드러내지 않고 완벽히 인간 행세를 하며 다가갈 수 있었다. 마리는 아마도 내가 그저 강한 정령을 부린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 라센샤르의 능력치는 정확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라센샤르의 강함은 고위 마족 한 명은 충분히 견제할 수 있을 정도이나 설마 정령의 힘이 그 정도일 거라고까지는 생각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나의 정령들이 자신을 찾아온다면 이런 은밀함이 아닌 정면으로 찾아올 것이 라 생각했는지 그녀는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했다. 어쨌든, 마리는 아멘시타의 말대로 믿는 구석이라는 것이 아마도 마족들인 모양이었다. 그 녀는 두 명의 고위 마족과 접촉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놀랍게도 키리아의 남동생들이었다. 마리가 어떻게 그들을 찾아내어 불러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그들에게 키리아를 죽 인 존재가 나라고 말해서 그들의 보복 심리를 부추기고 있는 듯했다. 으윽! 키리아와 똑같 은 마족이 두 명이나 더 있다니! 나로서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다. 그나저나, 키리아에게 남동생들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내가 책에서 본 바에 의하면 본래 마족들이란, 인간들처럼 부모 형제와 같은 가족 개념은 없 었다. 그들은 인간들처럼 사랑이라는 숭고한 것에 의해 번식(?)을 해나가는 족속들이 아니 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저 마계의 절대자에 의해 창조될 뿐이었는데 그때 함께 창조되고 함께 지내게 될 경우 그들은 형제인 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족이 누군가에게 죽었다고 해서 복 수심이 그다지 생기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약간의 미운 감정이 생길 테니 마음 내키면 어쩌 면 그들은 나를 죽이려 할지도 몰랐다. 저 둘의 고위 마족이 한꺼번에 덤빈다면 아무리 라센샤르가 있다 해도 나는 막아내지 못할 텐데. 결국은 미카엔에게 의지를 하게 될 것이다. 나는 다시 머리가 어지러워졌으나 라센샤르는 그들이 아직 나를 죽이고자하는 데에 그다지 열의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일단 더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마족들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인간계에서 머무는 것을 꺼리는 지라 그들이 마리를 도와 나를 제거하려 할지는 아직 미지수라고 했다. 어쨌든, 나는 라센샤르를 보내고 나서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마법서를 펼쳐 들었다. 어제 제 인이 가져온 셀레나의 편지를 읽기 위함이었다. 똑, 똑! 그때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웬 노크 소리? 나는 방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러자 침실 안으로 이미 들어온 미카엔이 문가에 기대어 서서 노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아마도 공간이동으로 이미 들어와 놓고는 뒤늦게 노크를 하는 듯했다. 어제 저녁, 내 가 노크를 권했던 일이 효과가 있긴 하는 것 같은데 그 방식이 조금 잘못된 것 같아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하. 라비스, 그 요염한 눈빛은 무엇이지?” “미카엔은 이게 요염한 눈빛으로 보여요?” “라비스는 어떤 눈으로 나를 바라보아도 나는 늘 유혹하는 눈빛처럼 느껴지는 걸 어쩌지?” “…….” 으으, 미카엔 녀석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닭살이고 느끼한 것인지. “라비스, 오늘 너에 대한 새로운 소문이 돌더군.” “무슨 소문이죠?” “흠... 라비스 네가 나의 측실이 되는 것이 끔찍하게 싫어서 수면제로 자살 소동을 피었다 는 내용과 네가 나와의 첫 대면 때 황태자궁에서 뛰어내린 이유는 첫사랑을 잊지 못해서 그 렇다는 내용이지. 워낙 너에 대한 소문에 시달려서 이젠 그런 소문을 들어도 면역이 생기는 모양이야. 예전 같았으면 크게 화낼 일이었는데.” 그의 말에 나는 얼굴에 핏기 사라지려는 것을 애써 감추며 그에게 물었다. “또 다른 내용은 없나요?” “있지. 그 첫사랑이 아스탄샤의 마법사들의 탑에 소속되어 있는데 네가 예전에 왕성에서 빠 져나가 아스탄샤로 간 것은 첫사랑을 만나러 가기 위함이라고 그러더군.” 아, 또 현기증이 나는 것 같다. 나는 비틀하며 몸을 일으키고는 미카엔에게 잠깐 실례하겠 다고 말하고서 레니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아직도 나의 침실에서 쉬고 있는 그녀에게 질문 을 했다. “레니, 너 마리에게 넘겨주었던 나에 대한 비밀이란 게 뭐야?” “아, 그건... 카이엔이라는 자와 관련된 과거의 일을 마리에게 알렸어요. 전하가 진짜 전 하가 아니라는 말도 엿듣긴 했었는데 그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레니는 또 내가 벌을 내릴까 두려웠는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나 는 그녀의 말에 허탈한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마리가 또 계산하지 못했던 점이 여기 있었다. 나는 워낙 평소에 스캔들이 많았던 터라 미카엔은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동안 나에 대한 헛소문을 꾸준히 열심히 내어준 미카엔을 사모하는 그 누군가에 게 나는 아마도 고마워해야 할 듯했다. 정작 사실에 근거하는 소문에는 이렇게 비켜가게 되니 말이다. 나의 비밀이 미카엔에게 알려 지게 되면 어쩌나 내심 많이 초조했었는데 일이 이런 식으로 풀리다니 나는 왠지 허탈한 기 분이 들었다.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09-02-2002 07:06 Line : 164 Read : 3472 [32] 체인지[2부] 제7화 -셀레나의 편지- (1) -------------------------------------------------------------------------------- -------------------------------------------------------------------------------- Ip address : 211.208.75.16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셀레나의 편지) 촘촘히 뜬 별들이 점점 빛을 내기 시작한 짙은 푸른빛의 하늘. 오늘 하루도 어느새 저물어 간다. 조금 전, 나는 마리를 감시하던 라센샤르의 보고를 받고는 기운 회복을 위해 그녀를 본체인 바다로 잠시 돌려보냈다. 그리고 정신없던 왕비로 서의 의무를 모두 마치고나서 지금은 침실에서 마법서를 읽고 있었다. 오늘은 마드린이 늘 잔소리하는 훌륭한 왕비로서의 덕목 외에도 내가 왕비의 신분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무척 많았었다. 아마도, 오후에 미 카엔이 나라일로 자이라스에 갔기 때문에 내가 그만큼 더 바빠졌던 것 이 아닐까 생각된다. 미카엔이 없는 지금은 내가 로히얀스의 주인이며 책임자가 되는 것이니 말이다. 어쨌든, 이제 조금 한가해진 나는 잉크가 번져 못 읽게 된 셀레나의 편지를 읽기 위해 여러 마법서를 뒤적이며 머리를 굴렸다. 지금 내가 익히고자 하는 것은 일루젼 계통의 약간 응용화 된 마법이다. 어떠한 물건의 과거의 모습을 일루젼으로서 잠시 엿보는 것이다. 몇 시간을 끙끙거리던 나는 결국 한 가지 스펠을 완성해 냈다. “드디어 완성했군. 그럼 이제 시전해 볼까?” 나는 긴장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셀레나의 편지를 앞에다 두고, 완 성한 스펠을 조심스레 캐스팅하여 시동어를 나직하게 외쳤다. 그러자 앞에 펼쳐 둔 편지가 뭔가 변화를 일으켰다. 셀레나의 편지에서 스치듯 빛을 발하는 듯하다가 이내 사라지더니 낡 은 종이의 편지지는 새 것처럼 그 모습이 바뀌었고 번져있던 글자가 원래의 모습이었을 형태로 바뀌었다. 이 현상은 셀레나의 편지에 과거의 모습인 일루젼이 잠시 덧씌워진 것 으로 인한 것이다. 나는 일단 편지를 읽었다. 「나의 가장 소중한 존재에게. 지금 나의 편지를 읽고 있을 그대가 여전히 아름답고 행복한 모습이기 를 바라며 펜을 듭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대가 행복해지는 것은 나의 소망이었으니까요. 아나테스의 일기장을 그대가 끝까지 읽었을지 모르겠군요. 그 일기장의 내용으로 그대가 뭔가 깨달았다면 두 번째 대리자의 희생은 비켜갈 수 있었을 겁니다. 희생은 첫 번째 대리자로서 족합니다.」 내가 거기까지 읽었을 때였다. 나의 마법력으로는 이 마법을 그다지 긴 시간 유지할 수는 없었는지 셀레나의 편지에 걸려있던 마법이 풀 려 다시 원상태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나는 다시 마법을 시전할까 했으나 지금은 무척 피곤하였기에, 결국 편지를 읽는 것은 내일 아침으로 미루고는 침실의 창을 통하여 플라 이 마법으로서 밖의 정원으로 나갔다. 머리를 식힐 겸 밤 산책을 하 기 위함이었다. 나는 장미 궁성 앞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원에는 새하얗고 탐 스런 백장미들이 가득 피어있었다. 프레야 왕비는 아마도 백장미를 무척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백장미들의 향을 맡으며 아까 읽었던 편지의 충격적인 내용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내가 프레야 왕비의 일기장을 끝까지 다 읽고 뭔가 깨닫는다면 두 번째 대리자의 희생을 막을 수 있을 거라는 구 절이 무척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희생했던 루이안트의 누나가 두 번째 대리자라 는 것일까? 첫 번째 대리자의 희생이란 말은 대체 무엇인 걸까? 혹 시, 본래 라비스를 지칭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지만 그녀는 자살을 했던 건데... 아무튼, 셀레나는 여신 셀레네스였으니... 셀레네스의 대리자란, 모 두 그녀와 닮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 듯했다. 그리고 그 대 리자들은 한 명이 아닌 두 명이나 존재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모두 죽음을 맞은 상태이고 그들의 죽음은 모두 나와 관련되어 있다. 본래 라비스의 죽음 후, 나는 그녀의 육체를 받게 되 었고 두 번째 대리자에게서는 소중한 생명을 받았다. 그렇다면, 셀레나는 무엇 때문에 나를 위해 이 모든 일을 예비했던 걸까? 그리고 내가 보지 못한 왕비의 일기장 마지막에 두 번째 대 리자의 희생을 막을 수 있는 뭔가 힌트가 존재해 있다면, 어째서 그 녀는 그 사실을 직접적인 방법이 아닌 암시로서 나에게 전해야 했을 까? 어쩌면, 나 역시 그녀의 대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대리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마지막 대리자. 나를 통하여 그녀는 부 활을 꾀하고 권능을 되찾으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망상에 가까운 추 측마저 든다. 그러다, 문득 나의 뒤쪽에서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왕비 전하이십니까?” 그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을 못 느꼈 는데, 내가 돌아본 쪽에는 긴 흑발머리의 젊은 남자가 내 가까이 다 가와 있었다. 그의 머리색이 은은한 달빛을 받아 약간 푸른빛으로 빛났다. 청 흑발 인 듯했다. 머리칼 빛깔만큼이나 차가운 이미지이지만 제법 고귀한 티 가 나는 그의 모습에, 나는 그의 정체를 물었다. “누구시죠? 차림을 보아하니 궁성 시종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돌아보며 묻자, 그는 나의 얼굴을 보고 약간 놀란 듯하다가 나 를 탐색하듯 계속 직시했다. 그러다 입을 열어 나에게 말했는데... “비록 능력과 계급이 낮았다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고위 마족인 키 리아가 인간에게 당했다고 하기에, 내심 궁금해져서 와보았더니 이 거 뜻하지 아니한 수확이로군.”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키리아라니? 그가 키리아의 얘 기를 꺼내는 것을 보니 그는 키리아의 남동생이라던 마족 중 하나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마족으로서 그다지 어둔 기운이 느껴지 지 않는다. 왕성 탐지 마법이나 론티아 정령마저도 그의 어둔 기운을 감지해 내 지못했던 것 같다. 그가 이렇게 무난히 왕성 깊숙이 침입한 것을 보면. 나를 해하러 왔을지 모르는 이 마족에게 두려움이 느껴졌지만, 나는 스스로의 두려움을 애써 누르고는 그에게 외쳤다. “넌 키리아의 보복을 하러 온 건가? 내가 키리아의 목숨을 앗았던 것 은 정당한 이유였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어.” “보복이라니? 네가 키리아를 죽이든 말든 상관없어. 어차피 나의 손에 서 떠나 인간계에 집착을 가졌던 아이. 이젠 필요 없지. 게다가, 이곳 에 버티고 있는 드래곤 녀석과 강한 능력을 가진 물의 정령을 건드리 고 싶지도 않고 말이야. 다만, 강한 능력을 가진 인간에 대한 호기심 이었다고 할까.”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에 나는 일단 안 심을 했다. 나에게 보복을 할 생각이 없다지 않은가? 근데, 저 마족 이 키리아가 자신의 손에 있었다고 말하다니... 그럼, 그는 키리아의 동생이 아니었던가? 그러다 이 마족이 미카엔과 라센샤르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 실을 깨닫고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에게 눈길을 주었다. 이 녀석은 내가 라센샤르를 통하여 감시하고 있었다는 것까지 알고 있 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 마족은 키리아보다 더 상위 계급의 마족? 어쨌든, 내가 놀란 기색을 보이자 그는 비릿한 웃음을 보이더니 다시 말 을 이었다. “...그러다, 방금 너를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지. 봉인과 망각의 세계에 서 있다 빠져나오더니 두뇌 회전이 조금 둔해진 것 같군, 셀레네스.”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오른 손을 들어보였다. 그의 손에서 어둠의 힘 으로 뭉쳐진 듯한 검은 구가 생겨났다. 그러자 아까는 못 느꼈던 짙은 어둠의 기운이 그에게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의 몸이 절로 떨려왔다. 지독한 두려움과 한기가 들게 하는 마족의 기운이었다. 나는 그에게 셀레네스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내가 셀레네스라 지레 단정하고는 나에게 공격부터 날려 왔다. 이런 비슷한 경우가 언제 한번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도 아사드라는 신족이 내가 셀레네스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나 를 공격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마족이... 나를 셀레나로 착각하는 아사드와 같은 인물이 여기에 또 하나 나타나 게 될 줄은 몰랐다. “라센샤르! 아젠! 샤...” 나는 강한 순위로 정령들의 이름을 외쳤다. 하지만 또 한명의 마족이 근처에 있었는지 검은 결계가 생기며 나의 목소리는 묻혀지고 말았다. 결국, 목숨을 위협받는 위기에 놓이게 되고 만 것이다. 파팟-! 암흑의 힘으로 뭉쳐진 파이어 볼과 같은 구는 나에게 날아왔고, 나는 스스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거의 초인적(?)이나 마찬가지인 안간힘 으로 실버 반지의 능력을 이끌어내어 빙계 실드를 쳤다. 하지만 어설픈 능력의 인간 마법사가 고위 마족을 당해낼 수는 없는 일. 곧, 나의 실드는 순식간에 얇아지더니 소멸 직전의 모습이 되었다. 이 러다, 나는 오늘 누군가의 착각으로 황당하게 생을 마감하게 생겼다. 이대로 죽어 저승에 가서 셀레나를 만약 만나게 되면 정말 따질 것이 많겠다고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곧 다가올 고통의 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적당한 시간이 지나도 나의 몸에는 아무런 고통도 없었기 에, 눈을 살짝 떴다. 나의 앞에는 누군가가 서서 마족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미카엔이 온 것인가? 나는 내 앞에 선 존재에 대해 무척 반가워하며 눈을 크게 떴지만 아쉽게도 나의 앞에서 마족의 공격을 가로막고 있는 자는 미카엔 이 아니었다. 그는 예전에 한번 마주침이 있었던 신족 아사드였다. “지스카! 감히 누구에게 손대는 것이냐?!” “오~ 아사드, 오랜만이군. 또 아덴의 충실한 개 노릇을 하러 온 것 인가? 이미 신족이 아닌 존재. 마계에서 그녀를 필요로 하든 말든 상관없지 않나?” “셀레네스는 지금이야 어쨌든 예전에는 고귀한 신족이었던 몸. 더 러운 마족의 손에 맡기게 할 수는 없다. 그녀는 신족이었던 그 이 름으로 깨끗하게 소멸 형을 받아야 한다!” 소멸 형?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사드와 지스카라는 마족의 대화. 대체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만은 또렷이 알 수 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 자기가 나를 죽이겠다고 싸우고 있는 중 인 것이다. 아, 이런 박복한 운명도 다 있단 말인가? 소녀를 가운데에 놓고는 젊은 남자 둘이 싸우기를, ‘셀레네스는 내가 죽이겠다!’ 라니. 물론 나는 셀레네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슬금슬금 뒷 걸음을 치며 그들에게서 멀어져 가는데... “어딜!” 지스카 말고 또 하나 있던 다른 마족이 아까 지스카가 썼던 비슷한 공격을 나에게 날렸다. 그러자 지스카와 대치되어 있던 아사드는 그 모습을 보더니, 그 마족의 날린 암흑의 힘을 소멸해 버렸다. 아마도 저 이름 모를 마족은 지스카와 아사드보다는 하급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불리하겠군.” 그러다 아사드는 두 명의 마족으로 인해 불리하다 싶었는지 내 쪽 으로 다가와 나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나는 놀라며 그를 뿌리치려 했으나 아사드는 '홀리 플레시!(Holy flash)' 하고 외쳐 눈부신 섬 광을 발하는 바람에 나는 눈을 감았다. 그의 몸에서 갑작스럽게 발 하는 섬광은 너무도 눈부셔서 나의 눈을 아프게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다지 공격력은 없는 듯했으나, 터져 나오듯이 발하는 그 의 성스런 섬광은 마족들의 시야를 방해하기에 충분했다. 어쨌든, 마족들은 주춤하는 듯했다. 그들은 어둠의 존재이니 더욱 빛에 약 할 것이다. 아사드는 그 틈을 이용해 공간이동을 하는 듯했다. 섬광이 사라지 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이미 왕성이 아닌 다른 낯선 곳에 와있었다. “여긴 어디죠? 왜들 나를 공격하는 거죠? 난 셀레네스가 아니라고 요! 날 다시 돌려 보내줘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셀레네스. 만약 다시 돌아간다면 당신은 마 족의 공격을 받게 될 테니. 어차피, 당신의 존재가 드러난 지금은 신족뿐만 아니라 마족의 표적이 되어있습니다. 셀레네스, 더 이상 당신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게 할 행동은 하지 마십시오.” “무슨 소리에요? 난 셀레네스가 아니에요! 지금 당신이 하는 말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사드는 미간을 좁히며 뭔가 생각하는 듯 심각해진 얼굴이 되더니 입을 열었다. “설마, 당신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봉인과 망각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것입니까? 그래서 아직 망각에서 깨어나지 못한 겁니까?” “망각이라니요? 내가 뭘 망각하고 있는데요?!” 그의 말에 나는 발끈하며 외쳤다. 하지만 아사드는 나의 발끈함과 이해 불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배려를 해주지 않은 채 계속 자신의 말만 했다. “아, 그럴 리가 없겠군요. 그곳은 셀레네스의 강한 의지에 의한 것 이 아닌 다른 존재의 의지로서는 결코 빠져나올 수 있는 곳. 전 어 리석게도 또 한번 속을 뻔했습니다. 지스카 역시 당신을 알아봤음에 도 불구하고...” 점점, 아사드가 말하는 내용은 미궁으로 빠지는 듯하다. 그와 함께, 나의 매끈한 이마는 점점 힘줄이 솟아오른다. “난 셀레네스가 아니라니까요!! 으윽, 답답해!” “당신의 존재가 드러난 이상, 곧 아덴의 명이 떨어지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을 소멸하라는 명을 받은 신족들이 인간계로 오게 될 것이고, 마계 역시 당신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키게 되겠죠.” “…….” “셀레네스, 그렇게 구차하게 생에 집착하며 이곳까지 다시 온 이유 가 무엇입니까? 혹시 인간으로서 당신이 접근한 그 존재. 그 실버 드래곤 때문인가요?” 나의 말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자신의 말만 하던 아사드는 말하는 도 중, 감정이 고취되었는지 조금 흥분한 듯했다. “이봐요! 대체, 당신은 나를 왜 셀레네스라 확신하는 거죠? 외모 때 문인가요? 내가 여신과 닮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 해도, 나는 그저 여신의 대리자일 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제가 한낱 인간인 대리자와 당신을 구별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아! 물론, 당신의 연기로 인해 잠시 혼란을 일으키기는 했 지만... 어쨌든, 지금 당신의 육체는 예전 여신이었던 셀레네스를 닮 은 모습을 한 인간의 육체이지만, 그 인간의 육체 역시 당신의 영 혼에 의해 물들어 예전의 고결한 셀레네스의 모습으로 조금 변색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확신을 하고 알아본 것이죠. 또한 지 스카 역시... 그의 말에 나는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예전에 루이스는 나에게 이런 말을 종종 했었다. 수면제 과다 복용 사건 직후, 나 의 모습은 갈수록 아름다워지고 빛을 발하는 것 같다고 말이다. 나 역시, 꾸미지 않아도 갈수록 아름다워지는 외모에 의문을 갖기 도 했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아름다워져 가는 이유가 내 영혼 에 의해 육체가 변색되어 그랬던 거라고? 나는 커다랗게 떠진 눈으로 아사드를 바라봤다. 그러다 나는 셀 레나의 편지를 마저 읽지 못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품속에 넣어 둔 셀레나의 편지를 꺼내들었다. 지금 나는 마법력이 부족했지만, 억지로 아까의 그 마법을 시전했 다. 잠시 후, 마법은 발동되었고 나는 그 뒷내용부터 읽기 시작했다. 「나는 첫 번째 대리자의 권능으로서 예지의 능력을 부여받았습니 다. 그 예지의 능력으로서 나는 미래의 많은 일들을 직감할 수 있 었지만 예지를 할 수 있는 모든 자들이 그러하듯이 나의 운명은 그 내용을 입 밖에 낼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그저 과거의 일만 말할 수 있는 운명. 아! 운명이라기보다는 세상의 이치이며 법칙이겠지요. 만약 그 법칙을 깬다면 나와 당신에게 주어 지는 것은 파멸입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대를 위해 그리고 나와 같은 운명을 가진 대리자들을 위해 누군가를 통하여 암시를 하고 비극을 피하게 하기 위해 뭔가를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 내가 거기까지 읽었을 때, 마법은 또 다시 풀려버렸다. 나는 그 자리 에 털썩 주저앉았다. 피곤한 몸으로 오늘 밤에만 마법을 세 번이나 써서 마법력이 고갈된 이유도 있었지만, 편지의 충격적인 내용으로 인해 나의 몸에서 힘이 빠져 나도 모르게 주저앉고 만 것이다. 그나저나, 셀레나가 여신인 줄만 알았는데 그녀가 여신의 첫 번째 대리자였다니... 그렇다면, 나는 대체 무엇인 거지? 그녀가 아멘시 타를 이용해 나를 이곳 세계로 이끌어 오게 한 것은 내가 셀레네 스여서 그렇다는 것인가? 나는 이제껏, 나의 영혼이 육체에 의해서 라비스로 변색되어 간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반대였었던 건가? *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명절도 잘 보내시구.............. 하핫...........................;;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12-02-2002 04:08 Line : 148 Read : 2325 [34] 체인지[2부] 제7화 -셀레나의 편지- (3) -------------------------------------------------------------------------------- -------------------------------------------------------------------------------- Ip address : 211.211.234.10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사드의 말대로 나는 셀레네스일 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분명, 셀레네스가 아닌데 나도 모르게 셀레 네스라고 인정하고만 걸까? 나의 몸이 떨려왔다. 아사드가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일 것이다. 이것은 전부 꿈일 것이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나쁜 자식! 나를 혼란스 럽게 만들다니! 나는 셀레네스가 아닌데, 내가 셀레네스임을 인정하 게 해서 나를 죽이려 하다니! 나쁜 자식! 내가 사랑했던 내 모습을 부정하게 만들다니!!” 나는 흥분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아사드는 살짝 찌푸린 얼굴로 눈을 날카롭게 떴다. “셀레네스!”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나는 당신들의 손에 죽지 않아. 내가 용납 못할 그런 황당한 이유는 내 죽음의 이유가 될 수 없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뒤를 돌아 어디론가 무작정 걸으려 했다. 그 러자 아사드는 나에게 성큼 다가와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아사드의 손길은 나에게 와서 닿지 못했다. 그의 손길은 중간에서 누군가에게 저지당한 것이다. “실버 드래곤?” 아사드가 자신을 저지한 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나 역시 아사드의 눈길을 따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름다운 은빛 머리칼에 짙어진 보랏빛 눈동자를 한 젊은 남자가 눈에 들어 왔다. 그는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은 고귀한 자. 인간들의 젊은 왕, 바로 미카엔이었다. 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소리 없이 나타난 미카엔은 나를 붙 잡으려던 아사드의 손길을 제지하며 그를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고귀한 신족께서 나의 부인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거지?” 미카엔의 어투가 마치, 거친 폭풍우가 몰아치기 직전의 잔잔함과도 같이 들렸다. 너무 고요해서 오히려 두렵게 느껴지는 분노. 그의 차가워진 음성은 한여름 밤인데도 불구하고 오한이 들게 했다. 아사드는 무척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무표정해져서 미카 엔에게 잡힌 팔을 빼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아덴을 모시는 신족으로서 셀레네스를 벌해야만 합니다.” 그가 하는 말의 내용에서 왠지 고지식한 그의 성격이 엿보인다. 자신의 의지는 그렇지 않더라도 아덴의 뜻이니 나를 벌하겠다는 듯한... 미카엔의 눈이 가늘어졌다. 방금 말한 아사드의 한마디로서 그 는 이 상황의 무엇을 파악해낸 걸까? “셀레네스를 벌해야 한다라... 라비스를 말하는 건가? 너희 신족 들은 라비스를 벌할 권리가 없다. 심지어 창조신 아덴일 지라 하더 라도." “아덴의 위대함에 도전하시는 겁니까?” “도전이라기보다는 그 위대함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뿐. 드 래곤은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미카엔은 당연하게 드래곤 행세를 했다. 그의 태도는 당당하다 못해 오만했다. 그리고 아사드 역시, 미카엔을 하프드래곤이 아 닌 실버 드래곤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 시리어 스 섬의 보석 드래곤도 미카엔을 성년을 맞은 지 얼마 안 되는 드래곤이라 박박 우긴 적이 있었다. “셀레네스가 나와 마족의 눈에 드러난 지금, 그녀는 곧 신족과 마족들의 표적이 될 겁니다. 셀레네스는 신족으로서 소멸 형을 받아야 하고 마족들 역시 그녀를 다른 목적으로 노리고 있으니. 내가 충고 하나 할까요? 당신이 아무리 최강 종족 드래곤이라 하 더라도 수많은 신족과 마족을 당해낼 수는 없을 겁니다. “라비스가 누구에게 드러났다는 거지? 너와 지금 왕성 근방에 있 는 두 명의 마족인 건가?” “……!” “그럼, 현재 라비스의 존재를 알고 있는 자는 너를 비롯한 셋?” 미카엔의 머리 굴리는 속도는 엄청 빠른 듯하다. 그는 아사드의 몇 마디 말로서 상황의 전말을 대충 파악하여, 내가 셀레네스라는 것을 아는 존재는 아사드와 두 명의 마족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 춘 것이다. 아무튼, 미카엔의 말에 아사드는 표정이 변하여 외쳤다. “설마, 나와 그 고위 마족을 제거할 생각입니까? 힘들 텐데?” 아사드의 말대로 상급에 속하는 신족과 마족을 셋이나 미카엔이 혼자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초조한 기색이 되어 미카엔 을 돕기 위해 라센샤르를 부르려 했다. 그러자 미카엔은 이런 나 의 기색을 알아챘는지 나에게 외쳤다. “라비스, 그만둬! 나 혼자 상대할 테니. 절대 나서지마!” “하지만 미카엔!” 그러나 미카엔은 더 이상 나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곧 바로 공격 마법들을 발동시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사드 역시 자신의 몸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하더니 뭔가 캐스팅하거나 시 동어 없이 미카엔에게 빛의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허공으로 높이 솟아올랐고 곧 까만 밤하늘에는 에메랄드 빛과 은빛이 서로 부딪히며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불꽃놀이라도 하는 것으로 착각할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아직 나는 상대도 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겐 라센샤르가 있었지만 그녀의 능력은 아사드나 지스카에게는 훨씬 못 미쳤다. 굳이 그녀의 능력치와 비슷한 존 재를 찾는다면 지스카와 함께 왔던 마족과 키리아 정도이다. 그렇게 초조한 마음으로 나는 저들의 싸움을 지켜보는데 갑자기 등 쪽에서 마족의 기운이 느껴졌다. 오싹함을 느끼며 내가 뒤를 돌아보자 지스카가 언제 나타났는지 마계로 통하는 차원의 문까 지 열어 놓고는 나를 붙잡았다. “우에에엑!! 이거 놔!” 나는 기겁하여 마계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참으로 여자다운(?) 비 명을 질렀다. 그리고는 실버 반지의 마력을 이끌어내어 빙계 실드 를 만들고는 최대한 버텼다. “라비스!!” “셀레네스!” 미카엔과 아사드가 각기 다른 호칭으로 나를 부르고는 내 쪽으로 쏜살같이 날아왔다. 아사드는 빛의 검을 들고, 미카엔은 마법을 걸 은 화려한 장검을 들고서 말이다. 그들은 아마도 멀리서 이 마족을 공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잘못했 다가 마족과 함께 내가 황천 행을 하게 될 테니. 그나저나, 아사드 는 그냥 장거리로 공격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도 마족에게 직접 공격을 하려는지 모르겠다. “헉!” 마침, 나의 실드를 소멸시키고 다시 나를 마계로 끌고 가려던 지스카 는 살벌하게 다가오는 두 남자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 들이 키는 소리를 냈다.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13-02-2002 12:22 Line : 175 Read : 1006 [35] 체인지[2부] 제7화 -셀레나의 편지- (4) -------------------------------------------------------------------------------- -------------------------------------------------------------------------------- Ip address : 211.211.234.10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지스카는 저 둘이 싸우는 동안 나를 낚아챌 생각이었던 것이다. 결국, 당황한 그는 저들 두 명은 당해내기가 어렵겠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붙잡는 것을 포기하고는 차원의 문을 통해 달아나려 했다. 아사드는 언제 책에서 본 바 있는 영혼을 소멸시킨다는 빛의 성검을 지스카에게 내려쳤다. 지스카는 검은빛의 방어 오라를 펼치며 그의 공 격을 막았고 미카엔은 다짜고짜 오더니 한손으로 나를 지스카에게서 낚아채고는 다른 손으로 지스카에게 검을 찔러 들어갔다.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들려왔다. 마법이 걸린 미카엔 의 검이 은빛 잔상을 남겼다. 이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 나 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미카엔은 나를 밀어내고는 지스카에게 공격을 가했는데 나의 눈은 그 장면 이후부터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저, 뭔가 번 쩍거리는 것만 눈에 들어왔을 뿐. 나는 아젠샤르를 불러내어 우선 실드로 보호 받았다. 지금 내가 어설 프게나마 보아하니 지스카는 자신의 몸을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힘겨운 듯했다. 신족과 드래곤의 능력을 가진 자가 한꺼번에 공격을 하니, 아무리 상급 고위 마족이라 해도 배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봐! 항복!! 항복하겠어. 왜 둘이 합공을 하는 거야?! 치사하게.” 지스카가 아사드와 미카엔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항복을 하자 그 들은 멈칫해 보였다. 그러자 에메랄드빛의 검과 은빛 화려한 검의 검신이 지스카의 목을 겨냥하고 교차하여 멈춘 모습이 되었다. 결국, 항복을 하던 순간 고고하던 고위 마족의 품위가 무너지고 말 았던 지스카는 두 검의 겨냥을 받은 채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을 하 고 있어야 했다. 아사드는 지스카가 공간이동으로서도 도망갈 수 없 도록 주변에 작은 결계를 친 뒤, 지스카에게 외쳤다. “치사한 것은 너다! 지스카. 나와 실버 드래곤이 한 눈을 팔고 있는 사이에 셀레네스를 마계로 데려가려 하지 않았나?” “훗! 셀레네스를 소멸시키러 온 주제에, 여태 미적거리다가 실버 드 래곤을 돕는 바보짓을 하는 멍청한 녀석! 설마 셀레네스에게 미련이 남은 것은 아닐 테지?” “그건 신족 셀레네스가 마족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일단 막기 위 해서다! 예전에는 신족이었던 존재가 마계에서 이용당한다는 것은 신족으로서 치욕이지.” “그래. 그래. 신족은 죽을 때도 명예스럽게 순결하게 소멸해야겠지.” 지스카는 아사드의 말을 비꼬았다. 그리고는 미카엔 쪽을 바라보 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봐, 드래곤. 항복했으니 이만 나를 놓아주시지?” “좋아, 놓아주지. 그 대신.” 미카엔은 지스카의 요구에 흔쾌히 답하는 듯하더니 뭔가 마법을 순 간적으로 발동시켰다. 그러자 빛이 번쩍하며 지스카는 앞으로 고꾸 라졌고 아사드는 의문이 담긴 눈빛으로 미카엔을 쏘아보았다. “충격을 줘서 기절시킨 것뿐이다, 신족 아사드.” 아사드의 눈길에 미카엔이 답했다. “당신은 마족을 제거할 생각이 아니었습니까?” “지금 나머지 한 마족이 자취를 감춘 상태이니 일단 이 마족을 잠 재우고 다른 마족을 찾아야 한다. 그가 마계로 가서 나의 부인이 셀레네스라는 말을 떠들어대기 전에. 아직 깊은 전후 사정은 모르 겠지만 아까 네가 한 말로 미루어보자면 라비스가 셀레네스라는 말 이 퍼지는 것만은 막아야 할 것 같더군.” “그 마족은 아마도 금방 마계로 가지 않을 겁니다. 셀레네스의 존재 를 아는 존재는 고위 등급을 가진 극소수라서 이 일의 자세한 사정 을 모르는 그는 우선 지스카를 구하려 할 겁니다.” “흠... 그렇다면, 그가 찾아오도록 이 마족을 계속 데리고 있는 것이 나을 것 같군. 이제 신족과의 일만 남은 건가?” 미카엔의 말에 아사드는 다시 공격을 하기 위한 포즈를 취해 보였다. 그러자 미카엔은 빙긋 웃어 보이더니 아사드에게 물었다. “서로 적대시하는 마족을 일단 제압했으니 우리의 싸움도 마무리 짓는 것이 좋겠지만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무엇입니까?” “라비스를 소멸시키겠다는 것은 너의 진심인가? 아까 막상 라비스 가 마계로 끌려가게 생기니 라비스를 부르는 외침이 나만큼이나 절실하더군. 많은 기회가 있었을 텐데 여태껏 망설인 것도 그렇고. 일단 몸이 피곤하니 왕성에서 너희들이 라비스를 셀레네스라 부 르는 이유나 들어볼까?” 미카엔은 그렇게 말하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자 아사드는 미 카엔에게 외쳤다. “실버 드래곤, 나는 셀레네스를 소멸하고자 하고 있는데 지금 그 태도는 나를 믿겠다는 겁니까? 마족의 일이 마무리 되면...” “물론, 너희 신족은 무척 고결하고 특히 너는 정당한 것에 목숨을 거는 성격인 듯하니, 일단 마족의 일을 마무리 짓고 나면 나와 당 당하게 맞선 후 라비스를 소멸시키고자 하겠지.” “…….” “...하지만 너는 내가 있는 한 라비스를 결코 소멸시키지 못할 거다.” 미카엔은 자신감인지 거만함인지 모를 태도로 아사드에게 말하고는 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그런 모습에 나는 망설이다 그에게 입을 열었다. “미카엔, 미안해요.” “라비스, 그 미안하다는 말은 나에게 뭔가를 숨기고 혼자 고민했었 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겠지?” “…….” “돌아가자, 라비스. 피곤해 보이는 구나.” 잠시 후, 미카엔과 아사드 그리고 나는 미카엔의 응접실에 와있었다. 지스카는 아사드가 신성의 힘으로서 만들어낸 어둠의 힘을 봉인하는 밧줄에 의해 묶여 있었고 우리는 쇼파에 앉아 시녀가 가져다 준 차 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니까, 라비스가 봉인과 망각의 세계를 빠져나온 여신 셀레 네스라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렇군. 라비스가 셀레네스 신전에서 살아 돌아왔을 때의 일과 그 녀가 강한 정령들을 너무 쉽게 부리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었긴 했었지. 하지만 그녀는 단지 정령과 미의 여신인 셀레네스와 깊은 관계가 있을 거라고만 짐작하고 있었는데.” 대충 설명을 들은 미카엔은 그렇게 말했고 아사드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나는 너무도 졸리고 피곤하면서도 그들의 대화를 경청하고 간혹 끼어들기도 하다가 결국은 졸고 말았는데, 미카엔은 그런 나 를 손으로 살며시 당겨 자신에게로 기대게 했다. 그 모습을 보았는지 아사드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셀레네스를 소멸하는 일에 조금 망설였던 이유는... 예전에 그녀를 우러러보고 경외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제는 망설이지 않습니다. 옳지 못했던 길로 빠져들었던 그녀를 위 해서라도 나는 그녀가 신족으로서 자부심을 지키게 하고 싶습니다.” “자부심이란 것이 소멸 형인가? 나는 알지 못하는 지나간 과거로서 그녀를 잃고 싶지 않다.” “...당신은 셀레네스를 무척 사랑하시는 모양이군요. 나는 인간계에서 존재하는 자들이 갖는 사랑이란 감정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건 너희들이 무척 삭막해서 그런 거지. 그런 점에서 너희들은 나 약한 인간들 보다 못한 거다.” 나의 머리를 쓰다듬는 미카엔의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그러다 미카엔의 말이 다시 들려왔는데... “아! 이런, 라비스의 잠잘 때 침 흘리는 버릇은 여전하군.” “…….” 나는 잠결에 거기까지만 듣고 미카엔에게 기대며 잠들었다.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19-02-2002 16:17 Line : 168 Read : 658 [36] 체인지[2부] 제7화 -셀레나의 편지- (5) -------------------------------------------------------------------------------- -------------------------------------------------------------------------------- Ip address : 211.211.234.206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나는 잠결에 거기까지만 듣고 미카엔에게 기대며 잠들었다. 그러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얼핏 들려와 나는 다시 깨어났다. “...어차피, 이번에 나와 그 녀석을 제거한다 하더라도 셀레네스의 존재는 언 젠가는 드러난다. 영원히 감출 수는 없지. 실버 드래곤, 그렇게 되면 너는 수 많은 마족들과 신족들을 어떻게 당해낼 생각이지?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 다는 건가? 드래곤 족속 중에 너 같은 로맨티스트가 다 있다니.” 지스카는 그 사이 의식이 들었는지, 미카엔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러다 내가 눈을 뜨자 그는 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는 여전히 봉인 밧줄 에 묶여있는 상태였다. “누군가가 그러더군. 태양을 오래 직시하고 바라보면 눈이 멀어버리듯이 셀 레네스의 미모 역시 그렇다고... 실버 드래곤 네 녀석은 그렇게 눈이 멀어버 린 불쌍한 녀석들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되는군. 훗~ 이렇게 바라보고 있으 니 나 역시 셀레네스의 미모로 인해 눈이 멀 것 같은데?” 지스카는 흑청색의 눈동자에 짓궂음을 드러내며 농담하듯이 가볍게 말했고 나는 표정을 살짝 구겼다. 그때. “블라인드!(Blind)" 미카엔은 힘줄 돋은 얼굴로 눈이 멀게 만드는 마법 시동어를 외쳤다. “욱! 무슨 짓이야? 실버 드래곤.” “안됐군. 라비스의 아름다움을 함부로 바라보다 정말 눈이 멀어버려서... 그리고 다시 말하는데, 라비스의 과거가 어찌되었든 지금 그녀는 그냥 라비스일 뿐이다. 더 이상 기억하지도 못하는 과거로서 그녀를 괴롭히지 마라.” 지스카에게 외치는 미카엔의 말, 나를 무척 찡하게 만든다. 그는 어쨌든, 지금의 나를 사랑해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분에 넘치는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광경을 왠지 복잡한 얼굴로 바라보는 아사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인간들이 가지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신족 아사드 는 지금 광경으로 무엇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알지 못하는 과거? 훗, 그래봤자 그녀가 셀레네스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기억은 지워졌어도 본질은 바뀌지 않지. 나는 신족을 경멸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나?” “…….” “그들은 너무 고고해. 그들은 고결함과 신족으로서의 자부심을 목숨처럼 여기지. 아까, 아사드가 하는 말을 들었지 않나? 더러운 마족에게 그 이 름을 더럽히게 될 바에는 깨끗하게 소멸되어야 한다고. 쿡, 아주 우스운 존재들이지. 그들은 이기적이고 자신들 밖에 모르는 존재야. 그런 존재인 셀레네스가 과연 실버 드래곤 네 녀석을 너처럼 사랑하고 있을지 궁금하 군.” 지스카의 말에 미카엔은 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아사드와 지스카 역시 나 에게 눈길을 주었다. 지스카의 기분 나쁜 미소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들의 눈길을 받으며 그동안 내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도현의 기억에 집착했던 나, 그로 인해 의식 분 열까지 일으키고 미카엔을 거부했던 나, 나는 이제까지 미카엔의 사랑과 내 자신 사이에서 많은 방황을 했고 갈팡질팡 했었다. 나는 스스로를 이기적이다 라고까지 생각했었다. 그런 나인데... “나는...” 흔들리는 어조로 입을 떼었다. 미카엔의 응접실 안은 침묵이 감돌았다. 저들은 뭔가 내가 하게 될 나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미카엔을 사랑해요.” 나의 말에 아사드의 얼굴에 놀라움의 기색이 스쳐갔다. 그의 놀라움은 나 의 이런 모습을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을 담고 있었다. “셀레네스, 네 자신보다 더 사랑하나? 사랑을 위해서 네 자신을 버릴 수 있나?” 다시 물어오는 지스카의 질문에 나는 미세하게 움찔해 보였다. 나를 잃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 그러다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지스카를 응시했다. 이 자는 지금 나를 시 험하고 있는 모양이다. 미카엔과 아사드가 보는 앞에서 나의 감정을 시험 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이지? 잠시 망설이던 나는 지스카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미카엔에게 다가갔다. 그 리고 그의 아름다운 자수정 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내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응접실의 창문을 통해 뭔가 빠르게 날아왔다. 너 무 빨라서 볼 수가 없었지만 언뜻 보기에 암기를 연상하게 만드는 작은 빛 줄기 형태의 마법인 것 같았다. 어쨌든, 그것의 하나는 지스카가 있는 곳으로 곧장 날아와 정확하게 묶여 있는 봉인 밧줄에 와서 그것을 끊었고 나머지들은 아사드와 미카엔 그리 고 내가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미카엔은 실드를 치며 나를 감싸듯 안았지만 그것은 너무도 빨라 그 중 한개는 미카엔의 팔을 뚫었다. “으윽!” 밧줄이 풀려 자유로워진 지스카는 이 기회를 타 근거리 공간이동을 하여 왕성 밖으로 빠져나갔고, 미카엔과 아사드는 마족들을 쫓아 밖으로 이동 했다. 나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창가로 가 밖에서 싸움이 시작된 저들을 바라 보았다. 아사드는 기습 공격을 했던 마족과 붙었고 미카엔은 지스카와 검 을 부딪치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미카엔은 지금 상처를 입어 아마도 불 리할 것이다. 결국, 플라이 마법으로서 나는 미카엔이 있는 곳까지 날아갔 다. 그러다. “큭!” 팔에 깊은 상처를 입어 검을 들고 있던 미카엔은 힘이 빠졌는지 지스카의 공격에 그만 검을 놓치고 말았다. 이에, 미카엔은 빙계 공격마법으로 지 스카를 공격했지만 지스카는 위태하게 실드로서 그 공격을 막으며 미카엔 에게 검을 내려쳤다. “안돼!” 나는 소리를 지르며 미카엔 앞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가까이 날아가기도 전에, 불행하게도 지스카가 휘두르는 암흑의 힘이 일렁이는 검 의 파장에 나는 타격을 입고 말았다. 그 공격력을 담은 파장은 이외로 넓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미카엔을 구한답시고 날아갔다가 상처를 입은 것이다. “꺄아악!” 지스카는 갑작스럽게 내가 나타나자 당황하며 얼른 검을 거두었지만 이미 나는 힘을 잃고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라비스!” 미카엔은 나의 이름을 외치며 나를 얼른 붙잡았다. 사색이 된 그의 얼굴 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나의 품에서 빠져나와 아래로 떨어지는 셀레나 의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미카엔에게 안긴 순간, 그것은 나에게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보기 위해 눈길을 주다가 잉크가 번져 마법이 아니면 읽지 못 했던 셀레나 편지의 글귀가 나의 눈에 또렷하게 들어왔다. 마법을 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기이한 현상이다. 나는 그것을 읽으려 했다. 하지만 너무 짧았던 순간이라 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마 지막 어구만을 읽을 수 있었다. 「대리자를 찾으세요. 각성한 대리자들이 모여야 권능이 살아나고 부활합 니다. 그들은 대리자이자 그림자 그리고 나누어진 권능의 조각.」 그리고 나는 미카엔의 품에서 의식을 잃었다. * 갈수록 글이......... 왠지 한숨이 나오는 군요.. 에휴.... 에휴.... 에헤..유.....ㅡㅡㅋ 아무튼 여기까지가 본편으로서는 4권 분량이 됩니다....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19-02-2002 16:19 Line : 194 Read : 619 [37] 체인지[2부] 외전Ⅲ-미카엔의 고뇌- (장미와 로터스) -------------------------------------------------------------------------------- -------------------------------------------------------------------------------- Ip address : 211.211.234.206 start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 진실 밝히기 부분.. 조금 수정한 것을 토대로 한 외전입니다. 외전Ⅲ -미카엔의 고뇌- (장미와 로터스) 달빛이 고운 깊은 밤이었다. 일부분만 켜둔 촛불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어우러져 어두워진 라 비스의 침실을 미약하게 밝히고 있었다. 미카엔은 지금 라비스와 함께 누운 침대 위에서 잠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 고 있었다. 하지만 라비스가 내는 쌔근거리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그의 신경을 자꾸 툭툭 건드렸다. 라비스는 지금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지만 미카엔은 아쉽게도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아까,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에 어린 혼란스러움과 거부의 기색을 보고 마음이 무거워진 그는 그냥 그대로 잠든 척을 했었는데 그녀는 그의 그런 모 습에 시무룩해진 모습을 보였다. 그러더니, 라비스는 침대에 눕자마자 아주 잘 자는 것이었다. 결국, 지금은 미 카엔만 괴로워진 상황이 되었다. 곁에 누운 사랑스러운 그녀는 그 존재함만 으로도 이렇듯 그를 끝없이 유혹하고 있는데 말이다. 미카엔 역시 인간이고 남자이거늘 그녀는 그러한 사실을 아주 깨끗이 무시해 버렸다. 그러다 라비스가 미카엔이 누운 반대 방향으로 데굴데굴 몸을 구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훗.” 미카엔은 그 모습을 보며 나직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동안 라비스와 같이 자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녀는 침대에서 구르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잠들어 있을 때의 그녀는 어김없이 고약한 잠버릇처럼 침대 위를 굴러다녔고, 깨어있을 때도 종종 침대 위에서 데굴데굴 몸을 굴렸다. 특히, 그녀는 몸에 이불을 돌돌 말고 몸을 굴렸다. 어떻게 보면, 무척 여자답 지 못한 그녀의 버릇 중 하나이지만 미카엔은 그런 그녀의 하나하나의 모습 도 모두 사랑스럽게 보였다. 순진무구한 아이 같은 모습을 지닌 순결한 소녀 같다고 할까? 사실, 라비스의 그런 모습을 그저 사랑스럽게만 연결시키는 그의 모습은 확 실히 병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러다 이번에 그녀는 미카엔이 누워있는 방향으로 몸을 한번 굴렸다. 그리 고는 그가 있는 곳까지 굴러오더니 그의 가슴에 머리를 콩 하고 박았다. “…….” 미카엔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잠든 그녀의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흐트러진 황금빛 머리칼에 가냘프다는 느낌마저 들게 하는 갸름한 얼굴선, 살짝 벌어진 붉은 장밋빛의 입술은 순결 하다 못해 고고해서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죄 의식을 느끼게 했다. 미카엔은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는 달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던 것 일까?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이 왠지 마음에 걸린다. 그녀는 뭔가 그에게 숨기고 있는 듯했고 그것으로 인해 그를 거부하는 듯했 으나 라비스는 쉽사리 그에게 기대오지 않았다. 그럴 때면, 미카엔은 그녀에 게 화가 나기도 했다. 미카엔은 몸을 반쯤 일으켜 한 손을 침대에 짚고 나머지 한 손을 라비스의 얼굴에 가져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고개를 좀더 숙였다. 그러자 그의 은발이 라비스의 얼굴을 살짝 간질이게 되었는데, 라비스는 간지러운 듯 조금 움찔 해보였다. 그는 그녀의 장밋빛 입술에 입을 맞추기 위해 더욱 가까이 갔다. 그 순간, 라비스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고 미카엔은 멈칫해보였다. 그녀가 얼굴을 찡 그리니 그로선 왠지 뜨끔하다. 그러다. “엣취!” “…….” 라비스는 재채기를 했다. 방금 그녀가 얼굴을 조금 찡그렸던 것은 재채기 가 나와서 그랬던 모양이다. 미카엔은 다시 그녀에게 입술을 가져갔다. 그 리고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아까 라비스는 미카엔에게 그가 달을 닮았다는 말을 했다. 고고하고 차가 우면서도 부드러운 은은한 아름다움을 내뿜는 달의 모습이 왠지 그와 닮 았다고... 라비스의 그 말에 미카엔은 그 반대로 라비스의 이미지를 갓 얼 굴을 내민 아침 햇살과 연관시켰다. 태양의 빛과 같이 화사하고 화려하며 눈을 찌를 듯한 아름다움이 라비스 와 닮았다. 오래도록 바라보면 이내 그 눈이 멀게 만들고 마는 그 아름다 움이 라비스와 닮았다. “으웅.” 라비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미카엔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 고 침대에서 나와 그의 침실로 돌아가려 했다. 이대로는 라비스의 향기에 취해 마음 편하게 잠들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그때. “루이스...” 라비스의 가냘픈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 다. 미카엔은 다시 그녀에게 다가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지금까지 잘만 자 던 그녀는 뭔가 안 좋은 꿈을 꾸기 시작했는지 안색이 안 좋아져 있었다. “라비스?” 미카엔은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으나 라비스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눈가에서 어느덧 투명한 눈물이 맺히는 듯했다. “흐흑.” “라비스!” 그녀는 금방 깨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는 뭔가 공포에 질린 듯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라비스!” 미카엔은 그녀를 흔들어 깨웠고 라비스는 눈을 떴다. 그녀가 눈을 뜨자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나왔다. “미카엔?” “그래.” 그날, 미카엔은 그녀의 유모 루이스에 대한 악몽을 꾼 듯한 라비스를 달래 주어야 했다. 자신이 믿어왔던 유모의 손에 의해 한번 목숨을 잃은 적이 있 던 라비스. 그녀의 가슴 안에는 뭔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을 것이 분명 했다. 미카엔은 그런 그녀의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 씻어낼 수 있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를 토닥이며 부드럽게 감싸 안은 채, 그녀와 정식 부부 로서 맞게 된 첫 번째 밤을 그렇게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미카엔은 저녁때 로터스 궁을 잠깐 방문했다. 아사벨라는 미카엔이 온다는 말을 시종에게서 미리 들었는지 매우 정성스럽게 치장을 하고 그를 맞았다. 그 모습에 왠지 미안해지는 미카엔이었다. 미카엔은 로터스 궁 정원이 바라보이는 테라스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았다. 정원에 있는 작은 호수에 화사하고 우아한 연꽃이 피어있었다. 지금은 연꽃 이 가장 아름다울 시기이다. 미카엔은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아사벨라.” “네?” 까만 눈동자를 애교 있게 뜨고는 미카엔에게 답하는 그녀의 모습은 확실히 라비스와 대조적이었다. 평소에는 그토록 차갑고 오만하기 그지없는데 미카 엔 앞에서만큼은 아사벨라는 애교 있는 측실이 되었다. 미카엔은 황태자의 신분으로 인해 왕실에 뜻에 따라 별생각 없이 그녀를 측실로 맞아들이고는 그녀에게 많은 상처를 준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 았다. 라비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사랑을 준 그녀였는데. “네가 원한다면 너를 묶고 있는 측실의 신분...” “폐하!” 아사벨라는 그의 말을 잘랐다. 그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챘기 때 문이었다. 미카엔이 그녀를 바라보자 아사벨라는 입을 열었다. “저는 폐하의 곁을 떠나지 않아요. 로히얀스의 왕실에 의해 제 가족을 잃었 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왜 폐하를 미워하지 못하는지 알아요? 언제나 무심 하신 폐하인데 원망을 하면서도 제가 왜 폐하만을 바라보는지 알아요?” “…….” “...그건 제가 폐하를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그 마음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요. 비록 폐하의 사랑을 받아내지 못했지만 저는 꼭 폐하에게 필요한 여자가 되겠어요.” 미카엔은 결의하듯 말하는 그녀를 고요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나직한 목소 리로 그녀에게 입을 열었는데... “아사벨라, 너는 그렇게 될 거다. 로히얀스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너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여자가 될 거다. 네가 궁극적으로 갈망하고 있는 것. 언젠가는 네 총명함이 그것을 이루게 할 거다.” 그의 말에 아사벨라는 눈물을 흘리던 눈을 동그랗게 떴고, 미카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흘린 눈물에 살짝 키스를 했다. 아사벨라가 궁극적으로 갈망하는 것. 미카엔과 로히얀스에 있어서 결코 없어 서는 안 될 존재가 될 것이라는 미카엔의 말은 과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걸까?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19-02-2002 16:22 Line : 228 Read : 581 [38] 체인지[2부] 외전Ⅳ -두 번째 대리자- -------------------------------------------------------------------------------- -------------------------------------------------------------------------------- Ip address : 211.211.234.206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외전Ⅳ -두 번째 대리자- 찰싹! 뺨을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소녀의 고개가 홱 돌려졌다. 소녀는 맞은 뺨에 떨리는 손을 살며시 가져갔고 자신을 때린 중년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루카스 아스칼리테였다. “아버지.” “여신관이 되겠다고? 그것도 신의 권능을 잃어버린 하찮은 셀레네스의 여 신관이 되겠다고?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흑! 아버지.” “운 좋게 들어온 공작가의 혼처도 마다하고 그런 쓸모없는 여신관이 되겠다 니... 클레아, 너는 우리 집안의 명예 따윈 안중에 없는 것이구나!” “저는 꼭 여신관이 되고 싶어요.” 클레아라고 불린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애처롭게 아버지에게 사정을 했다. “시끄럽다.” 루카스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그녀의 방에서 나갔다. 결국, 클레아는 주저 앉아 서럽게 흐느꼈다. 그녀는 너무도 여신관이 되고 싶은데 그녀의 완고한 아버지는 허락을 해주지 않는 것이다. “누나.” 그때,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을 한 앳된 소년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루이안트 아스칼리테. 그녀의 네 살 어린 남동생이자 아스칼리테 집안의 장 남이었다. 그는 언제 방안으로 들어왔는지 그렇게 클레아에게 말을 걸고 있 는 것이다. “훌쩍.” “누나, 너무 속상해 하지 마.” “루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니? 정말 여신관이 되고 싶은데... 얼굴도 모르는 그 누군가와 억지로 결혼하고 싶지 않은데.” 클레아의 말에 루이안트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여신관이 되고 싶어? 여신관의 길은 귀족 생활에 익숙해진 누나로 서는 무척 힘들고 고될 텐데.” “난 여신관이 되고 싶어. 고되어도 괜찮아. 셀레네스를 모실 수만 있다면. 난 매일같이 꿈을 꾸는 걸. 어쩌면, 셀레네스의 여신관이 되는 것이 나의 운명일 지도 몰라.” 솔직히, 클레아 아스칼리테는 그다지 뛰어나고 눈에 띄는 소녀가 아니었다. 평범한 갈색 머리칼에 평범한 외모였고, 다른 소녀들과 다를 바 없는 나약 하고 가녀린 소녀였다. 싶게 상처받고 눈물도 많은 그런 소녀 말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다른 소녀 들과는 다른 고결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셀레네스의 순결한 여신관 이 되는 것. 꿈속에서 종종 보게 되는 아름다운 셀레네스의 모습을 그녀는 매일같이 그리곤 했다. “그렇다면, 누나의 원대로 누나가 가진 신념대로 여신관이 돼. 그것이 누나 의 운명이라면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나는 누나가 여신관이 되어도 상관없어. 그것이 누나가 행복해지는 길이라면.” 루이안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의젓한 어조로 그의 누나를 다독이는 말을 했다. 그 역시, 클레아가 여신관이 되려는 그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는 없는 일이었지만 누나가 간절히 원하는 길이라면 그것이 이루어졌으면 하 는 마음이었다. 그러자 클레아는 눈물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정말? 너는 내가 여신관이 되어도 계속 누나로서 나를 사랑해 줄거니?” “응.” “고마워, 루이.” 그렇게 루이안트의 말에 마음의 힘을 얻은 그녀는 결국 셀레네스 신전으로 들어가 여신관이 되었다. 이에, 격노한 아버지는 그녀와 부녀의 인연을 끊 겠다며 클레아를 다시 보지 않으려 했고, 클레아는 가슴이 아팠지만 여신 셀레네스를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처음, 클레아가 견습 여신관이 되었을 때는 신전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무 척 힘이 들었었다. 금욕적인 생활에 견습신관으로서 고된 잡일, 귀족 출신 인 그녀에 대한 동료 여신관 소녀들의 따돌림, 그 모든 것은 그녀를 너무도 힘들게 했다. 그녀는 신전에 들어간 후로, 매일 같이 소리죽여 눈물을 흘렸고 가끔 찾아오 는 루이안트의 얼굴을 보는 낙에 하루하루를 살았다. 매일 셀레네스에게 기도를 올리며 그녀는 간절히 기원했다. 그녀 역시, 셀 레네스처럼 강한 여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했고 권능을 잃어버린 불운한 여신 셀레네스가 다시 이 땅에 돌아올 수 있기를 기원했다. 몇 백 년 전에 빛나던 그때의 영광처럼 말이다. 그렇게 몇 년을 셀레네스의 여신관으로서 지낸 클레아는 셀레네스의 권능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도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러다 그녀가 21살이 되던 해, 자이라스에는 뭔가 변화의 조짐이 일었다. 인페르디아 속국이었던 자이라스에 점차 독립의 기운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마법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과 흑마녀에 의한 강제적인 독립이었다. 자이라스의 힘없는 왕은 마법 기사단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고 대신 그들 중 한명이 왕이 되었다. 그리고 자이라스의 왕실과 모든 권력은 갑자기 나타난 그들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되기 시작했다. 자이라스 인들은 이런 변화에 속국에서 해방되었다는 반가움에 앞서 이유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클레아는 여느 때와 같이 셀레네스를 위한 성가를 부르며 신전 안을 청소하고 있었다. 셀레네스, 나의 여신 그 황금빛 권능으로 세상을 굽이 살피세요. 당신의 아름다움으로 어둠을 밝히고 당신의 자애로움으로 어루만져 주세요. 모든 자연의 존재들이 당신을 따르듯이 세상은 당신을 따릅니다. 클레아가 거기까지 불렀을 때였다. 몸에 뭔가 전율이 흐르는 듯하더니 그녀 의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물밀 듯이 짙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결국, 클레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신전 밖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달렸다. 자신의 그리움이 느껴지는 곳으로. 지나는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 이 기이한 감정은 무엇일까? 그녀가 어떤 여관으로 찾아갔을 때, 클레아는 마침내 그토록 자신이 만나길 원했던 그 존재를 볼 수가 있었다. 그 존재는 짙은 빛의 화려한 황금빛 머리칼에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 모습은 클레아가 가끔 꿈에서 보았던 여신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클레아는 그 소녀에게 왠지 다가갈 수가 없었고 그녀는 다시 신전으로 돌아오 고 말았다. 그날 밤, 클레아는 여신의 얼굴을 보았다는 생각에 들떠 잠을 이룰 수 없었고 그 감동에 눈물을 흘렸다. “셀레네스, 난 당신을 만났어요. 당신은 다시 돌아온 건가요? 나의기도 나의 염원이 이제 이루어졌군요. 나의 여신 셀레네스.” 그 후, 클레아의 모습은 어떠한 기적이 있었는지 점점 변해갔다. 셀레네스의 모습처럼 치렁치렁한 황금빛 머리칼에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모습 으로. 동료 신관들은 그런 클레아의 모습에 무척 놀라워했다. 그리고 그런 기이한 현상에 그녀들은 무척 궁금해 했지만 예전과는 달리 범 접할 수 없는 그녀의 고고한 모습에 제대로 캐어묻지 못했고 함부로 대하지 도 못했다. 그녀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여신을 모시듯 대하게 되었고 클레아는 점 점 셀레네스의 대리자로서의 권능을 갖게 되었다. 어떻게 이러한 현상이 일 어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클레아는 그렇게 모습이 변한 후, 동생 루이안트를 몇 번 만났다. 그는 변한 클레아의 모습에 무척 놀랐고 어색해 했다. 그런 그를 보며 클레아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고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여신관이 된 뒤로, 한번도 만나지 못한 부모님. 참으로 무정하다. 하지만 이 것은 클레아 자신에게 주어지고 정해졌던 운명... 그녀는 이미 겸허하게 받아 들였다. 그러다 자이라스에 인페르디아 전쟁이 터졌고 로히얀스에서 온 라비스 크로 시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 마법사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클레아는 그녀가 자신의 여신인 셀레네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클레아는 인페르디아 전쟁이 마무리 지어질 즈음에 루이안트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루이, 너는 앞으로 무엇을 위해 일하고 싶니?” “갑자기 그건 왜 물어?” “그냥...” “음, 나의 능력이 닿는다면 나는 왕실에 소속되어 보좌관으로 일하고 싶어.” “그래? 그러면 너는 로히얀스를 위해 일해 볼 생각 없니?” “응? 로히얀스?” 루이안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에게 물었다. 자신의 누나가 자이라스도 아닌 로히얀스를 위해 일할 생각이 없냐고 물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루이, 누나의 부탁을 들어 줄 수 없겠니? 로히얀스의 국왕과 왕비를 위해 일해 주렴.” “누나.” “부탁한다, 루이. 아, 누나는 이제 그만 가야하겠구나. 항상 건강해.” 클레아는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루이안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그와 헤어 졌다. 아마도, 루이안트는 그 인사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을 테 지만. 그렇게 동생과 헤어진 클레아는 라비스 크로시벨이 전쟁을 마치고 로히얀스로 돌아가는 행렬이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한번이라도 그녀의 모 습을 더 보기 위해 사람들 틈에서 라비스를 보려 했고, 그러다 그녀는 마차 안 에 있는 라비스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클레아는 멀리서도 그녀의 눈에서 놀라움이 스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라비스는 클레아를 다시 보려 함인지 마차에서 내렸고, 클레아는 얼른 자리를 피했다. 지금 셀레네스이자 라비스인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모른다면, 그녀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라비스는 조금 두리번거리다 이내 포기하고는 다시 마차를 타고 로히얀스 를 향해 가버렸고, 클레아는 라비스의 행렬이 지나간 자리를 한참도록 바라보았 다. “셀레네스, 우린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 음..... 솔직히 4권 분량은... 갠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앞으로는 정말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하는 라얀이 되겠습니다... 계속 이쁘게 봐주세요... 그럼 즐독..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04-03-2002 12:14 Line : 159 Read : 1915 [6] 체인지[2부] 제8화 -갈림길- (1) -------------------------------------------------------------------------------- -------------------------------------------------------------------------------- Ip address : 211.211.234.20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갈림길) -1- 내가 이곳 세계에 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는 크로시벨 가의 후원이 나의 시야 앞에 펼쳐져 있었다. 온통 초록빛의 그 모습은 초여름의 화창함으로 더욱 빛을 발하는 듯했다. 나는 열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조그만 폭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나의 작은 발이 레이스가 달린 치맛자락 끝으로 보였다. 초록빛의 싱그러운 잔디 위를 맨발로 디디는 백옥같이 하얀 조그만 발이 제법 귀엽다. 엄마를 쫓는 어린 아이의 발이다. 나는 어린 라비스가 되어 꿈을 꾸고 있는 것 이다. “라비스, 더 이상 엄마를 따라오지 마.” “엄마?” 셀레나의 말에 나는 멈칫하였다. 그녀의 한마디가 이상하게 나를 서글프게 했다. 눈부신 황금빛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셀레나는 이런 나를 안타까워 하는듯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발걸음을 돌려 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나에게 손을 가져와 살며시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엄마는 이제 라비스를 돌봐줄 수가 없어. 엄마는 이제 네가 행복을 찾도록 도 와줄 수가 없단다. 이젠 네 스스로 찾아야 해. 그리고 깨달아야 한다.” “히잉... 엄마.” “라비스, 저곳을 바라보겠니? 저 곳에 네가 꿈꾸고 추구할 의지가 있구나.” 그녀의 말에 나는 시선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나는 후원의 모습 외에 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어디요? 엄마.” “다시 한번 바라 보거라. 보이지 않니?” 그 순간, 나의 시야 앞에는 갑자기 은빛이 빛 무리들이 매섭게 몰아치기 시작 했다. 그와 함께 격렬한 빙계 계열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은 분노를 담은 듯 모든 것을 파괴할 듯하다. ‘미카엔?’ 그러다 미카엔이 나를 끌어안은 채, 자제력을 잃은 듯한 모습으로 빙계 공격 마법을 발동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잠시 의식을 잃어 셀레나에 대한 꿈을 꾸었던 모양이다. 미카엔의 주변에는 은빛 폭풍이 모든 것을 쓸어버릴 듯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번쩍거리는 섬광을 발하며 연속적으로 아이스 볼트(Ice Bolt)가 두 마족과 신족 아사드에게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세상에 온통 번쩍거리는 은빛으로 가득해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폐하! 이러다 왕성이 날아가겠습니다! 고정하시...” 왕실 수석 마법사 킬린은 두꺼운 실드로 스스로를 보호하며 가까스로 지척까지 다가와 외쳤다. 하지만 그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다시 멀찍이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왕실 마법사들과 함께 미카엔이 시전한 블리자드(Blizzard)가 왕성에 피 해 주는 것을 막기 위해 실드를 펼쳐야 했다. 킬린을 비롯한 왕실 인들은 빙계 파워 실드를 친 모습으로 얼음 폭풍을 일으키 며 블리자드와 아이스 볼트를 연달아 시전하는... 다시 말해, 한꺼번에 중급 이 상의 마법을 세 가지나 시전하고 있는 미카엔의 모습이 무척이나 무시무시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다 미카엔의 아이스 볼트 중 하나가 아까 기습을 했던 마족의 실드를 뚫 었다. 결국 그 마족의 실드는 소멸되었고 그는 순식간에 새하얗게 얼어붙고 말 았다. 그것을 본 지스카는 식은땀을 흘리는 듯했다. 아사드는 갑자기 분노와 함께 폭증한 미카엔의 마력에 당황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봐! 실버 드래곤, 나는 셀레네스를 다치게 할 생각이 없었다고! 셀레네스가 그런 것에 상처를 입을 줄은... 몰랐어!!” “실버 드래곤! 일단 셀레네스를 치유해야... 셀레네스가 마족에 의해 소멸 위 기를 맞는 것은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아사드의 말이 맞는 듯하다. 나는 아까 셀레나의 꿈으로 일단 정신이 들긴 했 지만, 지금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의식이 오락가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까 어둠의 힘에 타격을 입은 후로 나는 온몸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미카엔은 그제야 멈칫하는 듯했다. “그러면, 신족 아사드! 네가 라비스를 치유하라! 상급 신족들이 행하는 그 치유 신성력은 라비스를 말끔히 치유해낼 수 있을 테지?” 미카엔은 내가 상처를 입은 것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여전히 안 가시는지 그 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드래곤 피어의 기운이 묻어났다. 오락가락하는 정신을 붙들고 엷은 신음소리를 내며 괴로워하고 있던 나는 미 카엔의 드래곤 피어 영향에 가장 가깝게 영향을 받고 말았다. 그에게 안겨있 던 나는 가장 가까이 위치해 있던 존재였으니. “미... 카엔.” 결국 나는 미카엔을 원망하는 어조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의식의 끈을 놓아야 했다. 미카엔 녀석... 제발 내 생각 좀 해달란 말이야! 드래곤 피어라니! 항상 냉철하고 자제력 강한 모습의 미카엔은 이런데서 무너지는 것 같다. 왠지 샤르가 예전에 나에게 놀리듯 했던 말이 떠오른다. 모든지 완벽한 모습인 그의 유일한 약점은 ‘나’라고. “앗?! 라비스, 정신 들었어?” “…….” “라비스!” “…….”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흐른 듯하다. 나는 몸을 뒤척이며 눈을 뜨려 했다. 그러다 나의 손이 무언가에 힘껏 잡혀 있는 듯 움직여지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나는 힘껏 잡아 뺐다. 그래도 놓아지지 않는다. 이에 나는 괜스레 발끈함을 느 끼며 눈을 떠 보았다. 그러자 나의 손목을 꼬옥 붙들고 내가 누워있는 침대 맡 에서 엎드려 잠들어있는 미카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아름다운 은발이 침대 위에 흐트러진 모습으로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은 평소 그가 모여왔던 드래곤의 아들이자 국왕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왠지 평범 하고 순수해 보인다랄까? 하룻밤 사이 초췌해진 듯하다. 음... 미카엔을 하늘 같이 알고 있는 마드린이 이런 모습을 보면 약간 충격을 받을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항상 근엄하고 여유 있는 미카엔의 모습만을 보 아왔을 테니. 나는 미카엔의 팔을 살펴보았다. 어젯밤 그가 부상을 입었던 것이 떠올랐기 때 문이었다. 다행이도 미카엔은 어제 금세 팔을 치료한 듯 멀쩡해 보였다. 그의 소매부분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말이다. 나 역시 말끔히 치유된 듯하 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짧은 외침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 아사드가 근처 의자에서 앉은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 다. 그리고... 그 밑에는 고급 융단이 깔린 바닥 위에서 누워있는 흑발 남자가 있었다. “실버 드래곤, 셀레네스를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다고...” 그의 잠꼬대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기가 막힌다. 저 녀석은 나를 해치려 하 는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나를 두 번이나 죽일 뻔하고 마계로 잡아가려고 했던 녀석이 아닌가? 그런 녀석이 왕성 침실 바닥에 대자로 누워 잠꼬대를 하고 있다니. 왠지 그의 첫인상과 상당히 동떨어진 모습이다.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05-03-2002 00:31 Line : 162 Read : 987 [7] 체인지[2부] 제8화 -갈림길- (2) -------------------------------------------------------------------------------- -------------------------------------------------------------------------------- Ip address : 211.208.73.3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2- 그러다 침실에 중앙 궁성 소속임을 뜻하는 제복을 입은 시종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곳은 주앙 궁성에 있는 침실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아마도 미카엔이 잘 쓰지 않는 침실 중 하나인 듯하다. “폐, 폐하... 아, 아침... 식사를...” 왜 저렇듯 더듬는 것일까? 그 시종은 소매로 식은땀을 닦으며 의자에서 잠들다 깬 아사드와 바닥에 있는 지스카를 힐끔힐끔 보며 고하는 말을 했다. “알았다.” 시종의 방문에 역시 잠에 깬 미카엔이 그렇게 답하자 그는 재빠르게 방을 나갔 다. 그 모습을 무심하게 눈길을 주던 미카엔은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라비스, 이제 괜찮은 건가?” “네.” “아, 다행이군.” 나의 대답에 미카엔은 안심했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아사드와 지스카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무척 차갑고 오만해 보 이기도 했다. 마치 자신의 발밑에 있는 존재를 내려다 보는듯한 눈길이랄까? 지스카는 몸을 바로 하더니 미카엔에게 물었다. “어젯밤 셀레네스가 다쳤을 땐 인정사정없이 그냥 죽일 듯한 모습이더니... 어째서 나에게 절대자의 이름으로 맹세를 받아낸 거지?” “글쎄. 어제 기습 공격으로 나에게 상처를 입힌 그 마족이라면 모를까, 너 같 은 고위 마족은 제거하면 오히려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더군. 그래서 맹세를 받아낸 거지. 절대자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는 것은 마족들의 절대 계약(일명 피의 계약)만큼이나 절대적이라는 것을 들은 바가 있거든.” 미카엔이 답하자 지스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젯밤 미카엔은 지스카에게서 뭔가 맹세를 받아내었던 모양이다. 물론 위협에 의한 강제적으로서... 아마도 맹세의 내용은 나를 해치거나 나의 존재를 발설하지 말라는 것일 듯하다. “그렇게 자제력을 잃고 감정에 내맡기다가도 금세 그런 냉철한 모습을 보이 다니, 너희 실버 족속들은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정말인 듯 하군. 때론 감정에 충실한 듯하다가도 지나치게 냉정하고 이성적이지.” “그건 나도 느끼고 있는 바다.” 미카엔은 아사드에게 시선을 옮기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신족 아사드? 어젯밤, 이 마족이 네가 셀레네스라 알고 있는 라비스에게 한 가지 시험을 한 것을 너도 보았겠지?” 미카엔의 말에 아사드뿐만 아니라 나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 다. 어제 지스카는 미카엔에 대한 나의 감정을 시험했었다. 아무튼 미카엔은 평소 그의 특유의 여유가 담긴 미소를 아사드에게 지어보이더니 말을 이었다. “나는 네 얼굴에 담긴 혼란스러움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지. 어젯밤에 라비스의 행동이 네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많이 어긋나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필요하다면 너에게 기회를 주겠다. 라비스의 모습을 지켜보며 네가 가지고 있을 오해를 풀 기회를... 내가 너에게 이렇게 기회를 준 것은 라비스를 치유해준 대가다.” “당신이 준 기회를 받아들이지요. 당신 말대로 나는 지금 많이 흔들리고 있 으니까요. 그래서 그녀를 소멸시키는 것을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셀레네스가 신족임을 포기한 그녀의 의지가 실버 드래곤이 아닌 아덴의 권위 에 대항하기 위한 오만함이었다면 나는 그녀를 벌할 것입니다.” “그래. 하지만 일단 이곳에서는 셀레네스라는 이름 대신 ‘전하’ 라는 호칭을 써주었으면 좋겠군. 그리고 잠깐 자리를 비켜주겠나?” “그러죠.” 어떻게 보면, 아사드의 어투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척 정중하다. 그는 지스카나 미카엔과는 달리 지금까지 계속 경어를 쓰고 있었다. 그의 성격 탓인 걸까? 아니면 신족으로서의 특징 중 하나인 걸까? 하지만 경어를 쓰는 그의 모습은 정중하기는 해도 상대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 같은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아! 근데, 실버 드래곤! 너 몇 살이지? 처음에는 그저 성년을 갓 넘긴 드래곤 인 줄 알았는데 네 능력을 보아서는 적어도 4000년은 족히 살아온 것 같아.” 침실을 나가며 지스카는 미카엔에게 물었다. 4000년이라니? 그거 드래곤으로 서는 노인네 나이 아니던가? 하긴, 어젯밤 미카엔의 능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 했다. 같은 빙계 마법이라도 그 파괴력은 마스터 마법사라도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형태였으니. 어제 미카엔은 어떻게 그렇게 무서운 파괴력을 보일 수가 있었을까? 그의 능 력은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젊은 드래곤과 비슷한 수준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어쨌든, 미카엔은 지스카의 질문을 무시했고 그들은 침실 밖으로 나가 나와 미카엔 둘만 남게 되었다. 미카엔은 무척이나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더니 나에게 부드럽고 따뜻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화사하고도 감정이 듬뿍 담긴 듯한 미소는 나에게만 보여주는 거라는 것 을 나는 알고 있었다. “라비스, 가까이 와.” 그의 말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는 나를 끌어안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다음부턴 어젯밤과 같은 그런 어리석은 짓 하지 마라. 네가 나서지 않아도 되 었을 것을... 다시 너를 잃게 되는 악몽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 그나저나, 내가 실버 드래곤이 아닌 그저 인간이라는 것을 아사드가 알게 되면 그는 너를 다시 소멸하려 들 텐데.” “…….” 어젯밤 얼핏 기억으로 평소의 냉정함과 자제력을 잃어버렸던 미카엔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심 그에게 미안해졌던 나는 평소처럼 그의 품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지 않고 잠자코 있는데, 미카엔은 다시 입을 열었다. “라비스, 피 때문에 상의가 더러워져서 그런데 내가 갈아입을 옷을 직접 골라주 지 않겠어?” “네? 제, 제가요?” 그의 말에 동그래진 눈으로 반문했다. “그래. 사랑스러운 나의 부인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었으면 좋겠군. 이건 젊었을 적 나의 어머니도 아버지에게 종종 했던 일이야.” 헉! 상상이 안 간다. 얼음 같은 차가운 미모를 가진 프레야 왕비가 여느 부인 처럼 그런 일을 했다니! 나는 삐질거리며 식은땀을 흘리다 결국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로 인해 힘들었을 미카엔에게 내심 미안한 감정도 있으니 그 정도쯤 부인 노릇은 해줘야 할 듯하다. 결국 나는 어색한 몸짓으로 미카엔의 옷장을 뒤졌다. 이 침실은 미카엔의 침실 중 하나일 테니 그가 입는 옷이 있을 테다. 나는 간편해 보이는 실내복을 찾아내고는 그에게 가져갔다. “자요!” “고마워, 라비스.” 그에게 무뚝뚝하게 내밀자 미카엔은 누군가를 살살 녹일 듯한 부드럽고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나에게 답했다. 그리고는 내가 건네준 옷을 받아들기 전에 피에 물 들은 그의 상의를 벗는 것이었다. “미, 미카엔... 왜 옷을 벗고 그래요?” 그의 모습에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괜스레 놀라 버벅대며 외쳤다. 그러자 미 카엔은 나의 표정을 보더니 약간 짓궂은 웃음을 보이며 답했다. “라비스, 쑥스러운 건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는 우선 옷을 벗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거잖아? 아! 라비스, 이왕이면 옷을 직접 입...” “혼자 입어요!” 무척이나 민망해진 나는 옷을 던지듯 그에게 내주고는 침실을 나오고 말았다. 아! 정말 이게 무슨 민망한 모습이란 말인가? 설마 내가 진짜 미카엔의 태도에 부끄러워졌던 것은 아닐 테지? 나는 고개를 거칠게 흔들며 식당 쪽으로 향했다. * v체인지v 운영자님.. 4권 분량 삭제해 주세요..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06-03-2002 21:47 Line : 216 Read : 2127 [8] 체인지[2부] 제8화 -갈림길- (3) -------------------------------------------------------------------------------- -------------------------------------------------------------------------------- Ip address : 211.211.235.97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3- 국왕이 머무는 중앙 궁성은 왕성의 모든 궁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그곳에는 국왕을 위해 일하는 많은 왕실 인들이 머물고 있었는데, 이곳에 있는 침 실의 수만 해도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런 규모 큰 중앙 궁성 안에는 국왕이라는 한 존재에게 할애되는 공간이 무수했 다. 나는 그중 국왕만을 위해 마련된 식사를 위한 공간으로 향하는데, 누군가가 나의 뒤를 따라왔다. 그는 마족 지스카였다. “셀레네스, 잠깐 얘기 좀 할까?” “뭐지?” 나는 그를 돌아보며 경계 어린 어조로 물었다. “너 정말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아무리 힘이 봉인되고 기억을 망 각하게 된 후유증이라 하지만 너무 많이 변했군.” “뭐가 많이 변했다는 거지? 다시 말하지만 나는 셀레네스가 아니야. 설사 셀 레네스가 맞다 하더라도 지금의 나는 라비스 크로시벨일 뿐이야. 내가 알지도 못하는 과거로 인해서 지금의 내가 흔들리고 싶지 않아. 그러니 이제 그만 여기서 사라져 주시지?” “호오~ 방금 그 말투는 예전의 네 모습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는데?” 그의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 나 알아?” “물론, 잘 알지. 내가 워낙 발이 넓어서 웬만한 고위 신족하고는 안면이 있 거든. 예전 셀레네스로서의 네 모습에 대해서 말해줄까?” “됐어. 난 알고 싶지 않아. 나의 과거는 딱 한가지뿐이야. 도현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과거. 그 과거를 흔들리게 만드는 셀레네스로서의 과거는 안정하지 않아. 그러니 너는 나에 대한 것을 입 다물고 마계로 꺼져.” 나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온다. 내가 셀레네스이니 어쩌니 하는 저들에게 왠지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저들이 말하는 내용을 단 한 가지라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훗! 아깐 그 실버 드래곤 앞에서는 얌전한 모습이더니... 역시 그 오만한 신족이라는 존재들도 사랑이라는 것을 하는 모양이군. 너도 참 불쌍한 존재 야. 모두들 네가 아덴에게 대항하는 것에 실패하고 내쫓겼던 것으로 알고 있잖아? 실은, 셀레네스는 인간계의 실버 드래곤을 사랑해서 아덴에게 미 움 받아 내쫓겼는데 말이야.” “뭐?” 그의 말에 나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셀레네스인 내가 신계 에서 추방된 이유가 아덴에게 반항한 것이 아니라면 실버 드래곤이 된다라 니... 그렇다면, 셀레네스였던 나는 창조신인 아덴에게 반항했다가 쫓겨났다 는 얘기가 된다. 미카엔은 실버 드래곤이 아니니 말이다. 설마, 내가 그렇게 간 큰 존재일 리는 없을 텐데. 역시, 지스카가 말하는 내 용은 사실이라고 믿기에는 허무맹랑하다. “실버 드래곤 녀석이 일단 나와 아사드의 입을 다물게 만들기는 했지만, 언젠가는 네 존재는 드러날 수 있어. 만약 그렇게 된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거지? 수많은 신족과 마족을 드래곤 혼자서 당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 나? 네가 진정으로 실버 드래곤을 위한다면 너는 예전의 권능을 되찾는 게 좋아. 그래야 너와 네가 사랑하는 존재를 지킬 수 있을 걸? 아덴과 맞설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네 권능을 말이야.” 지스카는 그렇게 말하며 옷 속에서 뭔가를 꺼내들어 보였다. 그것은 어제 내가 떨어뜨린 셀레나의 편지였다. 그가 그것을 주울 줄은 생각 못했다. “내놔!” 나는 그에게서 편지를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지스카는 나의 손길을 피하며 교활한 느낌이 드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역시 마족이라 그런 걸까? 그가 나 에게 건네는 수작은 무척 교활해 보이고 구렁텅이로 빠뜨리기 위한 달콤한 유혹 같아 보였다. 마치 악마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인간들을 유혹하듯 말이다. 나에 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척하지만, 그들은 실상 검은 속을 가지고 있는 것처 럼. 하지만 강했던 나의 권능을 되찾는다는 것은 나의 마음을 흔들기에는 충 분했다. 그때, 아사드가 모습을 드러냈고 지스카는 편지를 다시 옷 속에 집어넣고는 나에게서 멀어졌다. 그런 그의 모습을 아사드는 의심 어린 눈초리로 쏘아 보았고 지스카는 시치미를 뗐다. 아사드와 지스카. 그들은 모두 나를 혼란케 하고 괴롭게 하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각자 빛과 어둠을 상징하는 상반된 존재라 그 둘은 서로를 견제하고 경계한다. 미카엔은 이들을 왕성에 잠시 그대로 남겨둔 이유가 어쩌면 따로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중앙 궁성의 국왕을 위한 식당에서 나를 비롯한 몇몇이 모여 자리를 했다. 미카엔은 킬린과 재무 대신, 그리고 재상을 불렀고 아사드와 지스카까지 불 러 함께 아침 식사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미카엔은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불편한 자리를 만들다니, 과연 음식들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의문이다. 나는 식당 홀 안에 있는 아주 기다란 식탁 위에 놓여져 있는 고풍스런 분 위기의 은촛대와 시녀 시종들이 나른 담백해 보이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요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옆에 자리한 미카엔을 힐끗 보았다. 미카엔은 국왕다운 위엄 있고도 권위적인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쳇! 이렇게 아침 식사 자리에 이들을 불러다 놓고 잔뜩 분위기를 잡고 있 다니. “모두들 식사를 하시오.” “예, 폐하.” 미카엔이 포크와 나이프를 들자 킬린을 비롯한 나머지 무리들이 모두 음식을 먹기 위한 도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예법에 조금은 무지한 듯한 지스카가 눈치를 보고 있다가 포크 대신 와인이 든 크리스털 잔부터 들었다. “폐하! 어제는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중앙 궁성의 일부 지붕과 벽을 폐하께 서 날려버리셨다는 것을 알고 계시겠죠?” 재무 대신은 어젯밤에 있었던 재정 손실에 대해 조심스럽게 언급을 했다. 저 들은 자신과 함께 자리한 지스카와 아사드가 어제 미카엔과 함께 소란을 피웠 던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것은 여기 와인을 마시고 있는 지스카가 모두 책임을 질 것이오. 왕성 보 수는 지스카에게 시키도록.” “푸웃!” 미카엔은 담담한 어조로 지스카를 끌어들였다. 그러자 고급 와인은 생전 처 음 마셔보는 듯 행복하게 와인을 들이키던 지스카는 순간, 입 안에 듬뿍 들 어있던 와인을 내뿜었다. 마족의 입 안에 들어있던 붉은 빛의 와인은 아주 멋진 광경을 연출하며 거의 모든 요리들을 가볍게 적셨다. 그의 입에서 발사된(?) 와인은 정말 아쉽게도 그 폭이 무척이나 넓었던 것이다. ‘앗! 이런, 아침 식사 날렸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요리들은 모두 지스카의 뿜어진 와인의 사정거리 안 에 들었던 터라 모두 마족의 침이 버무려지고 말아 나는 속으로 쓰린 외 침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카엔은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천천히 내려놓더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재상은 어젯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왕실 인들의 입단속을 시키 시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자 킬린이 그에게 말했다. “폐하, 식사는...” “입맛이 없어서 나는 이만 하겠으니, 이 자리를 마련한 나의 성의는 무시하 지 말고 모두 즐거운 식사가 되시오.” 미카엔은 미소를 살짝 머금더니 성의를 무시하지 말라는 말에 강세를 두어 은근한 명령조로 말했다. 그러자 킬린을 비롯한 이들은 모두 표정이 굳어 져 갔다. 저것은 대체 무슨 심보일까? 이런 자리에서도 미카엔의 짓궂음이 빛을 발하다니! “내가 왜 왕성 보수를...” 그때, 지스카가 콜록거리며 와인을 내뿜은 뒷수습을 대충 끝내고는 그렇게 외쳤다. 하지만 그는 미카엔의 차갑고도 많은 의미가 담긴 눈빛을 보더니 그의 외침은 수그러들어갔다. 방금 상황은 대체 뭘까? 미카엔의 눈빛에 고 위 마족이 찍소리도 못하다니? 그가 했다는 맹세의 내용이 궁금해진다. “라비스, 우리 아침 산책이나 할까?” 미카엔은 다시 화사한 얼굴이 되더니 나에게 속 좋은 소리를 했다. 그의 말 에 나는 자리에서 냉큼 일어섰다. 아침 식사야 어떻든, 마족의 침이 섞인 음식을 기분 좋게 먹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흠, 흠.” 저들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어쨌든, 국왕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으니 저들은 모두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사드가 포크를 든 채, 멈칫 멈칫하며 망설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저들 중, 아사드가 마족의 침이 섞인 음식을 먹는 것이 가장 끔찍 했을 거다. 긍지 높은 신족은 마족을 무척이나 더러운 족속으로 여기지 않 던가? 그나마, 킬린 무리들은 지스카가 마족이라는 것을 모르니 거리낌은 덜할 테다. 그나저나, 킬린은 8서클 마법사이면서도 지스카의 정체를 눈치 채지 못한 걸까? 나도 지스카를 처음 봤을 땐, 어둠의 기운을 전혀 느끼지 못했었지 만. 나는 식당을 나서자마자 미카엔에게 물었다. “미카엔, 지스카에게 무슨 맹세를 받아냈어요?” “음... 글쎄.” 미카엔은 어물쩍 넘어가는 답을 했다. “대답이 그게 뭐예요?” “아, 배고픈데 라비스는 뭐 음식할 줄 아는 거 있어? 갑자기 라비스가 해주는 음식이 먹고 싶어지는데?” “미안하지만, 저는 라면 밖에 못 끓여요.” “라면? 그건 무슨 요리지? 그거라도 남편을 위해서 해주면 안 될까?” “라면이 없는 걸요? 미카엔은 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군요.” “그럼, 오늘 아침은 네 키스로 하지. 라비스, 선택해! 나에게 키스를 할 건지 요리를 할 것인지.” “에엑! 미카엔, 아침 식사로 키스를 먹겠다는 건가요?”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20-03-2002 08:00 Line : 251 Read : 1468 [9] 체인지[2부] 제8화 -갈림길- (4) -------------------------------------------------------------------------------- -------------------------------------------------------------------------------- Ip address : 211.208.74.236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4- 저녁 무렵, 왕비로서의 임무를 간단하게 마친 나는 크리스털 궁성에서 열리는 국왕 주최 연회에 참석했다. 하지만 한여름의 다소 낭만적일 것 같은 밤에 열린 화려한 연회는 그다지 즐 기지 못하고 불편한 심사로 시간만 흘러가길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그 이유 는 연회에 꽤나 불편한 인물들이 참석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카엔 녀석,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다. 아사드와 지스카를 연회에 초대하다니! 뿐만 아니라, 그는 아사벨라와 이제는 이름마저 생소하게 들리는 첫 번째 측실 유리스까지 초대했다. 미카엔의 의도가 퍽이나 의심스럽다. 설마, 미카엔은 나를 해하려 했던 전과가 있는 저들과 또 다른 부인들과 함께 언밸런스하게 모인 팀원으로 친목도모를 하자는 의도는 아니겠지? “인간들의 연회라는 거... 꽤 눈이 즐거운 것이군. 안 그래? 셀레네스.” “그 셀레네스라는 이름은 그만 좀 부르지?” “알았어. 그럼 왕비 전하라 불러드리지.” 지스카는 내가 말을 걸어오는 귀족들을 피해 테라스로 나가 있자 슬그머니 따라붙어 그렇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다시 홀로 나갔다. 하지만 지스카는 계속 나를 따라왔고 나는 그에게 물었다. “넌 여기에 계속 머물며 나에게 권능을 되찾기를 권하는 목적이 뭐야?” “목적은 없어. 순수한 마음으로 나는 너에게 충고를 하는 거야. 어제 네 모 습을 보고 난 생각을 달리 한 거지. 나도 처음에는 네가 오만한 마음으로 아 덴에게 맞서다 내쫓겨 봉인당한 것으로 알았으니까.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야. 억울하지 않아? 셀레네스. 억울하게 빼앗긴 권능과 자리, 다시 되찾 고 싶지 않아?” 뭔가 유혹과도 같은 지스카의 설득이 다시 시작되었다. 나에게 하는 그의 설 득은 마치 어린 아이에게 사탕으로서 하는 달콤한 유혹 같아 보인다. 고위 신 족의 권능이라는 이름의 사탕이랄까? 그냥 비유를 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솔직히, 알지 못하는 과거라 해도 그것이 무척이나 억울한 사정을 가지고 있 다면 나로서는 기분이 썩 좋지 못하다. 하지만 나는 계속 부정했다. “난 권능이니 뭐니 그딴 거 관심 없어. 다시 말하지만, 나는 셀레네스가 아 닌 라비스일 뿐이야. 한 가지 기억과 한 가지 과거만 존재할 뿐이야. 그러 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마.”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아사드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본 나는 다른 곳으로 가는 척을 하며 아사드가 목에 걸고 있는 아덴을 상징하는 디바인 마크인 펜던트 모양 을 머릿속에다가 기억해 두었다. 그리고 궁성 밖에까지 나가서 눈에 안 띄는 적당한 곳에서 쭈그리고 않아 엿듣기 마법 스펠을 외우며 아까 보았던 아사드의 펜던트를 머릿속에 그렸 다. 엿듣기 마법은 작년 동대륙 전쟁이 있어 참전했었을 때, 제이크에게서 배웠던 엿보기 마법을 내가 응용한 마법이었다. 이 엿듣기 마법은 아무리 교묘하더라도 뛰어난 존재에게는 적용하기 힘들었 는데, 흑마법을 아는 지스카보다는 마법은 모르고 신성력을 사용하는 아사드 의 물건에 초점을 맞추면 들킬 염려는 줄어들 듯했다. 어쨌든, 나는 예전보다 조금은 늘은 마법력과 응용력으로서 최선을 다해 기 운을 죽이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지스카, 무슨 꿍꿍이지? 셀레네스에게 권능을 되찾기를 권하다니. 그녀를 부추길 생각마라.] [아사드, 너는 셀레네스가 억울하게 권능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믿지 않는 건 가? 하긴, 믿고 싶지는 않겠지. 만약, 셀레네스에게 억울함이 있다면 그것은 곧 아덴이 개인적인 미움으로 그녀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말이 되니까.] 지스카의 빈정대는 목소리가 작게 나의 귓가를 맴돌았다. 소리는 작게 들리 지만 음질은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듯하다. [물론, 나는 아직 셀레네스의 의지가 실버 드래곤이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다. 아니, 믿을 수가 없다. 나는 아덴을 모시는 자... 하지만 내가 한때나마 우러러 보았던 존재에게 혹시 있을지 모르는 사정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지켜볼 것이다. 셀레네스가 사랑한다는 존재와 그녀 의 모습을, 그녀의 진심을.] 아사드의 목소리는 잠시 끊어졌다. 그러다 이내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 는데 그의 어조는 좀더 단호하게 변해있었다. [...만약, 그녀의 의지가 정말 실버 드래곤이었고, 권능을 잃고 내쫒긴 이유에 억울함이 있다면 나는 그녀가 권능을 되찾지 않고 그냥 인간으로서 살았으면 한다. 그것 역시, 그녀가 원하는 일이기도 하지 않을까? 어쩌면, 다시 그녀의 존재를 알아채는 이들이 생길 수도 있겠지. 그렇게 되면, 그땐 내가 그녀를 돕겠다. 나 역시, 그녀를 소멸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그녀의 존재를 제일 먼 저 찾아내 나의 손으로 그녀를 소멸시키려 했던 것도, 다른 이들의 손에 그 녀의 소멸과 파멸을 맡기고 싶지 않았던 거니까.] 거기에서 그들의 대화를 끊겼다. 나는 마법을 거두며 잠시 생각했다. 지금 까지 그들은 무조건 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아군이 될 잠재 가능성이 있는 적이었다. 아사드는 지금 두 가지 길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 같다. 아덴의 수족으로서 그에게 끝까지 믿음을 갖고 충성을 해야 하는지, 나에 대한 잘못된 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사드가 나를 돕게 하기 위해서는 나의 의지는 실버 드래곤이라는 것을 믿 게끔 해야 할 듯했다. 그러면, 열심히 금실 좋은 부부 행세를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건데... 그렇게 혼자 쭈그려 앉아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누가 바람을 쐬기 위해 홀을 나온 듯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아사벨라였다. “왕비 전하? 거기서 뭐하고 계시는 거죠? 호위 기사나 측근 인들도 없이.” “아하하, 잠깐 바람 쐬며 사색 좀 하느라...”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호, 오늘은 웬일로 폐하께서 전하와 거리를 두시는지 모르겠군요. 이렇게 전하께서 홀로 밖에 계시게 하다니.” “거리를 두다니?” “오늘 연회에서는 폐하께서는 한번도 전하에게 말을 걸지 않으셨잖아요? 계 속 그 분의 눈길이 향하는 방향은 전하께서 계시는 곳으로 향하긴 한데, 전 하의 근처로는 다가가지 않으시더군요. 뭐랄까? 전하께 계속 신경을 두고 계 시는 듯한데, 가까이는 다가가지 않는 것 같다고 할까요? 혹시 두 분 싸우셨 어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잠시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다 느릿하게 입을 열 어 문득 깨달은 점을 그녀에게 말했다. “아사벨라의 눈은 항상 폐하를 향해 있나봐? 폐하께서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잘 아는 것 같아.” “그럼요. 그 분의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가 저에겐 커다란 의미가 되거든 요.” 그녀의 진심어린 듯한 대답에 나는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미카엔을 보아야 하는 아사벨라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 무척 아팠 을 것이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아사벨라는 그 감정을 결코 내색하지 않는 다. 미카엔에게 매달리거나 나에게 섣부른 질투의 감정을 내보이지도 않는 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모습은 바로 아사벨라와 같은 경우일 텐데, 나는 무엇 으로서 미카엔을 자신 있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전하, 한 가지 거래를 제시해도 될까요?” “거래?” 뜬금없는 아사벨라의 말에 나는 약간 커진 눈으로 그녀에게 반문했다. “전하는 요즘, 한 흑마녀에 대한 일로서 골머리를 앓고 있죠?” 흑마녀라면 마리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요즘 나는 라센샤르로 하여금 마 리를 지켜보게 하지 않았던가? 아사벨라의 말에 나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하자 그녀는 이런 나의 표정을 놓 치지 않고 보더니 빙긋 웃어보였다. “전 최근에 한 편지를 받았답니다, 전하. 그 편지는 한 가지 변수를 지니고 있죠. 그 편지에 대한 저의 선택으로 상황은 두 가지로 바뀔 수 있거든요. “그 두 가지 상황은 뭐지?” “첫 번째 상황은 제가 전하를 한 가지 면에서 견제할 수 있는 도구를 얻게 되는 것이고, 다른 상황은 제가 직접 전하의 적을 견제할 수 있는 도구가 되는 거죠.” 그녀는 나에게 뭔가 커다란 것을 제시하고 있었다. 나는 편지의 내용을 모 른다. 하지만 분명 마리가 아사벨라에게 보낸 편지임이 틀림없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아사벨라는 나를 견제할 도구를 얻기 되든가, 아니면 자신이 직접 나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라니. 그녀가 나에게 내미는 카드는 제법 당돌하다 못해 대범하게까지 느껴졌다. 역시 아사벨라인가? “넌 어떤 선택을 하고자 하지?” “전 어리석지 않답니다, 전하. 어떤 것이 저를 위한 선택인지 저는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저는 전하를 위해 그 흑마녀를 견제하는 도구가 되기로 이미 결심했어요. 이젠 전하께서 저와 거래를 하시는지에 대한 결정만 남았어요. 거래는 간단해요. 전하는 저에게 한 가지 약속만 해주시면 되거든요.” “네가 바라는 약속은 무엇인데?” 내가 묻자, 아사벨라는 약간 뜸을 들였다. “저는 왕비나 황태자비만이 갖는 공식적으로 정사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 그것을 원해요. 전하께서는 그 권한을 저에게 허락해주시면 돼요.” 그녀의 요구. 왠지 나는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미카엔과 관련된 일이나 혹은 후계자 문제에 대해 요구할 수도 있었는데. 어쨌든, 불쾌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다른 여자였으면 그런 요구는 불쾌했을지 도 모르겠지만 왠지 아사벨라는 불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일 부로 그녀에게 답하는 것을 뜸 들였다. 그러자 아사벨라는 나에게 덧붙였다. “전하는 이 거래에 대한 결정에 따라 믿을 만한 수족을 얻을 수 있고, 귀찮은 견제 대상을 얻을 수 있어요.” “아사벨라, 나를 협박하는 거야?” “설마, 제가 감히 전하를 협박할리야 있겠습니까? 다만 건방진 소녀 하나가 전하께 대범한 거래를 제시한 것뿐이죠.” 내가 표정을 감추고 왕비로서의 권위적인 어조로 그녀에게 묻자, 당당하던 아사벨라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자기 컨트롤에 능한 그 녀답게 이내 표정을 추스르더니, 정중하지만 약간 오만할 정도로 당당하게 느껴지는 답변을 했다. 나는 나직한 웃음을 터뜨리고는 아사벨라에게 말했다. “좋아! 거래를 받아들이겠어.” 미카엔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자기 컨트롤에 능하며 명확한 판단을 할 줄 아는 당당한 그녀라면, 로히얀스에 분명 이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아사벨 라 역시, 힘들던 시간이 있었던 그동안 성장을 한 것일까? 어차피 승산 없는 여자로서의 다툼 대신에 더 커다란 무언가에 도전하려 한다. 내가 엔카루스의 검을 그녀에게 건네주었을 때, 그녀가 다짐하듯 말 한 것이 생각난다. 「내 모습이 초라하지? 나에게 이제 남은 건 없으니깐! 그렇다고 날 동정할 생각은 말아. 난 초라하지 않아. 언젠가는 이곳 로히얀스에서 폐하 말고 누 구도 나를 무시하지 못하게 될 테니깐!」 그러고 보니, 오늘은 왠지 연회에 참석하고 있는 내내 아군을 만들지, 적을 만들지에 대한 일로 머리를 굴렸던 것 같다. 설마, 우연일 테지? 미카엔은 나와 떨어져 있어 지스카는 나에게 접근할 수 있었고, 아사드는 그 런 지스카를 감시하듯 다가와 권능을 되찾는 것에 대한 반론(?)을 펼칠 수 있었으며, 에드를 비롯한 측근 인을 동행하지 않은 나는 혼자 나와 엿듣기 마법을 시행하고, 아사벨라와 뜬금없는 거래를 했으니 말이다. 흠. 어쨌든, 나는 아사벨라에게 물었다. “근데. 흑마녀가 보낸 편지 내용은 뭐야?” “그녀의 편지는 이런 내용으로 시작해요. 자신이 사랑했던 엔카루스의 여동 생인 나에게 도움을 줄 테니, 손을 잡자고요. 호호.” “…….” 아사벨라는 내가 거래에 응한 것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웃음소리를 내며 나 에게 답했다. * 다음 연재가 조금 늦어졌네요.^^;; 연재 재개합니다.ㅡㅡ;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20-03-2002 12:29 Line : 136 Read : 1242 [10] 체인지[2부] 제8화 -갈림길- (5) -------------------------------------------------------------------------------- -------------------------------------------------------------------------------- Ip address : 211.208.74.236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5- 연회가 끝날 무렵까지, 나는 궁성 밖 정원에서 아사벨라가 했던 말들을 생각 해 보았다. 아사벨라의 말로서 마리의 편지를 대충 종합해 보자면, 마리는 엔카루스가 나 때문에 죽은 것을 들먹이며 함께 나를 제거하기를 제안했다. 아사벨라는 그런 마리를 거짓으로 협조하는 척을 하며 그녀를 견제할 생각 이라는데, 나는 일단 그녀를 믿어보기로 했다. 어쨌든, 연회가 끝날 무렵이 되어 귀족들이 돌아가는 조짐을 보이자 나는 크 리스털 궁성 연회장으로 다시 들어가려는데, 입구 바로 앞에서 누군가가 나를 잡았다. 그는 미카엔이었다. “라비스, 혼자 뭐하다 이제 들어가려는 거야?” “미카엔도 밖에 있었어요?” “라비스가 없으니 연회가 따분하더군. 그래서 크리스털 궁성의 후원을 거 닐고 있었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미카엔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더 니 답했다. 그의 답변에 동그랗게 떠진 나의 눈은 다시 가늘어진다. “정말 따분했어요? 미카엔은 오늘 제 모습을 모른 척 지켜보느라 따분하지 않았을 텐데요?” “아, 설마 라비스. 오늘 내가 말 안 걸어줬다고 삐친 것은 아닐 테지?” “미카엔, 제가 그런 걸로 삐칠 턱이...” 내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입구를 나오는 아사드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그 뒤로 지스카도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아, 아사드를 아군으로 만들자면 어 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 순간 나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래서 나는 마저 끝맺어야 하는 말을 엉겁결에 아무 생각 없이 내뱉고 말 았다. “...있잖아요.” 엥? ‘삐칠 턱이 있잖아요.’ 라는 말은 무슨 말이지? 나는 방금 내뱉은 말에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고개를 갸웃하는데, 미카엔은 미간을 좁히는 듯하더니 금세 표정이 펴지면서 나에게 말했다. “그럼, 라비스는 나에게 화가 나서 궁성 밖에 혼자 나와 있었던 건가?” 내가 삐쳤다는 것에 기뻐하는 미카엔인가? 근데, 내가 삐쳐서 궁성 밖에서 혼자 청승을 떨고 있었다는 그런 심각한 오해를 하다니. 당황한 나는 이 시점에 나타난 아사드와 지스카를 원망하며 망설이다가 일 단 미카엔에게는 답변을 해야 했기에, 저들의 시선을 의식한 더듬거리는 답변을 했다. “그, 그래요.” 그리고는 스스로의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뒤죽박죽 된 나의 속 마음을 모르는 저들은 내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는 거라 생각할 듯하다. “아, 말세인가? 신족들도 얼굴을 붉힐 줄 아네?” 역시나, 지스카는 혼잣말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우리를 지나쳤고 아사드는 나를 혼란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들의 모습에 나 는 미카엔처럼 공간이동이라는 것을 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카엔에게 다시 눈길을 주었다. 그는 나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짓궂음과는 다른 의미로 조금은 진지함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 연회 내내, 그의 손 안에서 놀아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 각을 해본다. “미카엔, 오늘 지스카와 아사드를 연회에 초대한 이유가 뭐죠?” “음, 저들과 친해져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지.” “그럼, 미카엔은 내내 저를 놀리고 있었다는 말이군요.” 가볍게 대꾸하는 미카엔의 말에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홱 몸을 돌려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걸었다. 솔직히 말하면, 미카엔이 나를 놀린 것이 맞 나? 하는 확신도 들지 않았지만 그의 태도는 왠지 기분이 나빴기에, 나는 미 카엔에게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으음, 그러고 보니 나 정말로 삐쳐 버린 건가? 정말 그렇다면, 오늘은 미카 엔에게 내가 삐친 최초의 날이지 않을까 싶다. 아휴~ 왠지 나답지 못한 것 같은데. 어쨌든, 장미 궁성 침실로 돌아온 나는 괜한 피곤함을 느끼며 씻고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잠을 청하려는데 베란다 쪽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방문도 아닌 난데없이 베란다 쪽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오다니. 분명 미카엔일 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역시 미카엔이 서있었 다. “미카엔, 베란다에서 한밤중에 노크하는 사람은 미카엔 밖에 없을 거예요.”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내가 라비스의 기분을 상하게 했으니, 그것을 풀 기회를 줘야 하잖아?” “…….” 미카엔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까, 내가 아사드와 지스카를 연회에 초대해 일부로 너와 떨어져 있었던 것은 그들이 너에게 갖는 태도를 눈여겨보기 위해서였어. 나를 실버 드래곤 이라 믿는 아사드는 지금의 네 모습을 보며 뭔가 흔들려하는 모습이거든. 그리고 지스카라는 녀석이 너에게 무슨 수작을 건네고 있는 지도 좀 눈여 겨 볼 겸 그랬지. 물론, 그 녀석은 아사드가 견제할 테니 큰 걱정은 하지 않겠지만.” 지금 미카엔의 말에 의하자면, 나뿐만 아니라 신족과 마족마저 그의 손 안 에서 놀아났다는 말이 된다. 대단한 녀석. 대단하기도 하지만 기분 나쁜 녀 석. “라비스, 오늘 내가 전격 마법을 좀더 빨리 시전할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줄까 하는데.” 또한, 내가 솔깃해 할 만한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그것을 이용할 줄 아는 미 카엔이라서 더욱 기분 나쁘다. 하지만 나의 표정은 이성과는 다르게 그만 헤벌쭉해지고 말았다. 내가 이렇게 단순한 녀석이던가? 이렇게 마법에 약 한 나라니. “흠, 좋아요. 미카엔.” 나는 최대한 못이긴 척 답했지만, 미카엔은 그런 나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 보았다. 어쨌든, 미카엔은 침실 안으로 들어왔고, 나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마법을 배우기 전에, 라비스는 약간의 대가를 감수하야 할 거야. 그것은 전격 마법을 배우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일이거든.” “그게 뭔데요?” 그의 말에 나는 열심히 마법을 배우기 위하여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그에게 반문했다.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30-03-2002 00:06 Line : 199 Read : 1538 [11] 체인지[2부] 제8화 -갈림길- (6) -------------------------------------------------------------------------------- -------------------------------------------------------------------------------- Ip address : 211.206.47.3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6- “그것은 라비스가 나에게서 아기를 만드는 마법을 배우는 거지.” 아기를 만드는 마법? 미카엔이 그 말을 내뱉은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얼어 붙고 말았다. 결국, 그에게서 가장 듣기 두려워하던 말을 듣고 만 것이다. 나의 머릿속은 사고 회로에 심한 충격을 입은 듯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미카엔은 그로서는 당연한 말을 한 것이지만, ‘이것은 아니다!’ 라는 생각 이 나를 어지럽게 했다. 남자의 생이 있었던 과거는 미카엔과의 사랑이 감정만이 아니라 표면적으로 확인되는 것을 금기처럼 인식하게 만들었다. ‘난 벌을 받고 있는 거야.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도록 신에게서 벌을 받고 있는 거야. 셀레네스로서 죄를 지었든, 도현으로서 남을 상처 입히는 죄를 지었든. 내가 사랑을 한다는 것은 하나의 금기가 되도록 지독한 벌을 받고 있는 거야.’ 그동안 나는 노력했다. 지금의 내 모습을 인정했으니 그것에 익숙해지기를. 익숙해지지 않으면 내가 미쳐버릴 테니. 그렇게 미카엔에 대한 감정과 알 수 없는 과거의 요인으로 인해 더욱 빠르 게 육체에 적응하고 동화된 나는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소동을 피웠지만- 거부감이라는 것, 역시 조금씩 사라져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 의 고질병처럼 문득 그 모습을 드러내 나를 혼란스럽게 하곤 했다. “미카엔은 나에게 셀레네스라는 알지 못했던 과거가 있는 것에 대해 신경 쓰이지 않아요? 왜 미카엔은 이렇듯 침착하고 흔들리는 않는 모습인 거죠?” “넌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내가 왜 신경을 써야하고 흔들려야 하지? 라비스라는 네 이름보다는 너의 눈빛을 더욱 사랑하고, 네 고운 목소리보다 는 네가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더 귀를 기울이고 싶듯이, 나의 눈은 이제 너의 육체가 아닌 너의 영혼을 바라보기 시작했는데?” 나의 안색이 조금 안 좋게 변하자, 미카엔은 근심어린 얼굴이 되더니 나의 질문에 진지하게 답했다. 아니, 진지하다 못해 결연하게까지 느껴졌다. “아...” “네가 지금 그것으로 인해 많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너는 너일 뿐이야. 내가 사랑하는 너의 본질은 그대로라는 거다.” 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감동하지 않고는 못 배길 진심어린 그의 말에 내 안에서 일기 시작한 혼란이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폭풍이 가라앉는 듯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을 침묵한 후, 나는 어색한 어조로 입을 열었 다. “고마워요, 미카엔.” “별말씀을.” 미카엔은 잠시 어두워졌던 얼굴 표정을 펴 보이며 빙긋 웃어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 역시 분위기를 전환할 겸, 약간 장난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미카엔, 저는요. 지금 한 가지 갈림길에 서있어요.” “그게 뭐지?” “그건 미카엔을 더 많이 아껴야 할까, 나를 더 많이 사랑해야 할까 하는 마음의 갈림길이죠. 하핫.” 내가 농담조로 그런 말을 하자, 미카엔은 은보랏빛 아름다운 눈을 가늘게 떴다. “라비스,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나를 더 많이 사랑해야지. 마드린이 말한 왕비의 미덕 생각 안나?” “훗, 그럼 저는 지스카의 말대로 미카엔을 더 위하는 마음을 가져야겠군 요.” “응?” 어느덧 진지함을 벗어나 다소 가벼워진 미카엔의 답변에 내가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던지자, 그의 가벼움은 잠시 멈칫하며 나에게 반문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하나의 의미 없는 농담처럼 무심한 듯 흘려보내 버렸다. “아! 미카엔. 전격 마법을 빨리 시전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면서요? 음, 미 카엔이 요구한 대가는 조금 가벼운 것으로 지불해드리죠. 그래도 가르쳐 줄 거죠? 처음부터 큰 것을 바라면 안 된다고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고요하게 느껴지는 몸짓으로 그에게 입술을 가져가 짧지만 나름대로 감정이 깃든 키스를 했다. 그나저 나, 처음부터 큰 것을 바라면 안 된다는 나의 논리는 미카엔으로서는 퍽이 나 억울할 듯하다. 그는 엄연히 나의 남편이니 말이다. 그러다, 미카엔은 나의 키스에 응하더니 대담하게도 목을 타고 내려와 나 의 하얀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다. 헉! 이 녀석, 드라큘라인가? 결국 그날 밤, 미카엔은 기분 좋은 듯이 나에게 전격 마법을 빠르게 시전할 수 있는 간단한 비결 한 마디를 남기고 침실을 나갔다. 그것은 너무나 간단 하고도 허무하며 기본적이기 짝이 없는 비결이었다. 그 비결의 내용을 말하 자면 이랬다. 「충분한 마력을 쌓아야 빠른 시전이 가능하다!」 하나의 진리와 같은 그 비결을 말하고는 내가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공간 이동으로서 바람처럼 사라진 그였으니, 속은 나만 바보가 된 셈이다. 그런데, 미카엔 녀석은 왜 나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는 것에 항상 미적지근한 태도만 보이는 걸까? 어쨌든, 오늘 교훈 한 가지는 얻은 것 같다. 그것은... ‘다음부터는 절대 요행을 바라지 말자!’ 이다. 다음날 오전, 나는 수도 로히아나에 셀레네스 신전이 건축되는 문제로 종교 계인 주요 인물들과 공식적인 자리를 갖게 되었다. 물론, 그 자리는 아덴의 화려한 신전 건축물 중 하나인 별관에서 마련되었다. 나는 신전으로 떠나기 전,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왕비로서의 공식적인 복색 을 갖추어 입고 장미 궁성을 나오다가 아사드와 마주쳤는데, 그는 일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입구에서 서있었다. “무슨 일이죠? 아사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전하.” 신족이라 인간들의 예법에는 익숙하지 않을 텐데도 그의 태도는 고상하고 정중했다. 그의 행동 하나 하나가 군더더기 없이 깨끗하게 느껴질 정도였 다. 나는 측근인과 수행인을 잠시 물러가게 하고는 그의 말을 들었다. “아덴의 신전으로 가서 만나게 될 아덴의 부수석 대신관을 조심하십시오. 그는 아덴의 대리자 중 하나입니다. 물론 그 자는 아덴과 연결된 끈이 그 다지 깊지 않는 듯하지만, 전하를 알아볼 수도 있습니다.” 아사드는 나에게 충고를 했다. 부수석 대신관이라면... 음, 다행히 나는 그 를 아직 만나본 적은 없었다. 대관식과 결혼식 때, 의식을 주관한 자는 수 석 대신관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그런 충고를 해주는 이유는 무엇이죠?”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아덴 다음으로 최고위 신족이었던 예전의 전하에 대한 마지막 예로서 기회를 부여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파란 (波瀾)은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겠죠.” 나에게 말하는 그의 말은 여전히 정중했지만 차가웠다. “내가 권능을 되찾는다는 것이 파란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인가요? 그래서 아사드는 처음에 나를 소멸시키려 했던 건가요? 그러다 나의 의지가 실버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는 나에 대한 마지막 예로서 인간으로 조용히 살 아갈 기회를 부여한다는 건가요?” 감정이 고조되어 그에게 그렇게 묻자, 아사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그런 모습에 나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다소 허탈한 기색의 웃음을 터뜨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사드, 당신은 자이라스에서부터 줄곧 나를 미행했고 이곳에 와서는 왕 성 근방에서 나를 지켜보았죠? 내가 셀레네스인지 확신을 갖기 위해. 그 래서 우연히 내가 지스카의 공격을 받게 되자 당신은 곧바로 나타나 나를 구할 수 있었던 거구요. 전 아사드에게 감사해야 하겠군요. 본의 아니게 아사드로부터 여러 번 도움을 받게 되었으니.” “…….” “아무튼, 충고 고마워요. 아사드.” 나는 무미건조해진 어조로 그에게 말하고는 홱 몸을 돌려 다시 궁성 안 으로 들어갔다. 어찌되었든, 그의 충고대로 아네샤 여신관과 보좌관 루이 안트를 나를 대신해 종교 공식 자리에 내보내야 할 듯했기 때문이었다. 침실 안으로 들어선 나는 괜한 두통에 머리를 식힐 겸, 잠시 의자에 앉아 몸을 쉬었다. 그러자 평소 나의 심기와 비위를 맞추는 것에 능숙함을 보이 는 레니가 다가와 나에게 재잘 되었다. 예전 마리와 관계된 불미스런 일이 있은 후, 그녀에 대한 나의 총애는 더 욱 확실해져 있었다. 레니 역시, 그녀답게 나의 총애를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며 왕성 생활을 해나가는 것은 물론이었다. 가끔, 장미 궁성 시녀들 이 왕비의 측근으로서 영향력이 커져 있는 그녀를 시기하는 듯하지만. “전하, 로터스 궁 시녀들은 전부 오만한 것 같아요. 오늘은 말이죠. 로터 스 궁 시녀장이...” 나는 레니의 재잘거림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내 버리며 조금 전 아사드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그와의 대화로서, 확실해진 한 가지는 셀 레네스로서의 권능은 무척이나 막강했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나는 지스 카가 나의 권능을 이용하고자 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가 나에게 권능을 되찾기를 부추기는 것은 뭔가 속셈이 있을 거라 생 각했었는데, 역시나 그는 내가 권능을 되찾는 것을 계기로 신계와 관련하 여 파란이 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하아,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 아사드의 충고대로 이대로 살아도 좋지만...’ 지스카가 했던 말들이 나를 자꾸 흔들리게 했다. 게다가, 셀레네스로서의 내가 신계 추방되어 권능을 잃게 된 사연도 궁금했다. 지금 나의 앞에 주어진 한 가지 갈림길... 나는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해야만 할까?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07-04-2002 08:04 Line : 148 Read : 2224 [12] 체인지[2부] 제9화 -소중함을 위한 선택- (1) -------------------------------------------------------------------------------- -------------------------------------------------------------------------------- Ip address : 211.206.47.3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소중함을 위한 선택) -1- 로히얀스 하늘에 떠있는 여름의 태양은 이제 그 열기가 절정에 달한 듯싶다. 한낮이 되자 찌는 듯한 더위는 다시 시작되었다. 오전에 참석했어야 할 종교계 인사들과의 자리는 루이안트와 아네샤를 대신 보내버린 터라, 왕비로서의 스케줄은 당분간 한가해졌다. 그래서 침실 안에 서 유유자적하게 책을 펼쳐들고는, 아젠샤르를 불러다가 시원한 바람을 일 으키게 했다. 이런 무더운 날이면, 언제나 에어컨 노릇인 단순 노동을 해야 하는 아젠샤르였다. “샤르, 넌 보기만 해도 덥게 느껴지니까 좀 떨어져 있는 것이 어때?” “내가 어때서?” “네 붉은 머리칼은 마치 불이 타오르고 있는 것 같이 보여서 무지 덥게 느 껴진단 말야!” 고양이의 모습으로서 들어와 있는 아멘시타와 에어컨 임무를 맡은 아젠샤르 가 나의 침실 안에 와있자, 리엔시타와 샤르 역시 덩달아 나의 침실에 머물 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러 왔다는 명목 아래, 하릴 없이 모두 모여 있는 것이다. 아무튼, 리엔시타가 샤르에게 면박을 주자 그는 발끈 했다. “아항! 그래? 그러면 너 진짜 불의 맛 좀 볼래?” 화르르. “꺅!” 심술이 난 샤르가 진짜로 불꽃을 일으키자 리엔시타는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샤르는 킥킥대며 웃음을 터뜨렸고, 이를 지켜보던 아멘시타는 고개 를 설레설레 저어보였다. 저 둘만 붙어있으면 조용할 날이 없으니, 정말 못 말린다는 태도였다. 나는 읽던 책을 천천히 덮었다. 아젠샤르가 일으키는 바람은 샤르의 불꽃 에 의해 데워져 아주 따뜻하기 그지없게 되어버렸다. 으으, 간만의 휴식 과도 같은 나의 독서를 방해하는 저들의 떠들썩함은 둘째 치고, 더운 여 름날 에어컨 바람을 히터로 만들다니 정말 열 받는다. “샤르, 리엔!” 결국, 눈을 번뜩이며 그들에게 외치는 나의 가시 돋친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고 리엔시타와 샤르는 움찔해야 했다. 샤르의 불꽃도 움찔하듯 꺼진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소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아젠샤 르는 꿋꿋이 자신의 임무만 이행했다. 저녁 무렵, 마리를 감시하고 있던 라센샤르가 보고를 위해 잠시 나를 찾 아왔다. 그녀의 보고로서, 나는 마리가 더 이상 지스카와 접촉을 갖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신, 마리는 로터스 궁 측실의 측근 시녀로부터 은밀하게 한 답변을 들은 모양이었다. “라비스, 그 흑마녀는 로터스 궁 측실로부터 손을 잡겠다는 답변을 들었 어요. 라비스가 원한다면, 나는 그 흑마녀를 제거할 수도 있어요. 이대로 두면, 분명 귀찮아질 겁니다.” “나도 알아요. 하지만 우선 더 지켜봐요.” 나는 라센샤르에게는 마리가 나의 독살을 꾸민 범인이라는 것을 굳이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예전에 라센샤르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받은 만큼 돌려준다고 했었다. 죽음은 죽음으로서. 나 역시, 마 리에게 되갚아주고 싶다. 그녀는 나에게서 소중한 존재를 앗아갔으니. 하지만 루이스의 처참한 죽음은 누가 되돌릴 수 있을까? 마리를 단죄 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만 정당화된 복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마리는 소중한 엔카루스를 파멸로 이끈 나를 증오하여 그와 같은 앙갚음을 한 것이니 말이다. 그 비극은 슬픈 엇갈림으로 인한 것. 하아, 누군가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이 가혹한 가해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해를 끼치려는 마리를 막기 위해 나는 궁여지책(窮餘 之策)으로 그녀를 견제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바보 같은 걸까? ‘...그래도 이번 일을 지켜봄으로서 아사벨라가 나에게 갖는 태도를 확 실히 알 수 있을 테니.' 어쨌든, 어젯밤 아사벨라가 마리와 거짓으로 손을 잡고 그녀를 견제하겠 다고 약속했던 대로 그녀들의 협력 관계는 이루어졌다. 그것이 정말로 거짓 협력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것으로 아사벨라와 마리 그리고 나의 기이한 삼각관계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거짓 동맹과 은밀한 협 력으로 서로를 견제하는 구조로 말이다. 라센샤르를 보낸 나는 아네샤 여신관을 침실 안으로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아네샤님, 아까 아덴 신전에서 참석했던 일은 잘되었나요?” “예, 전하. 국왕 폐하의 명도 있었으니, 각 종교계 모든 이들은 그에 따 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다만, 아덴을 모시는 분들은 로히아나에 셀레 네스 신전이 건축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로 아덴의 대신관님과 부 대신관님은 내일 오전에 폐하께 면담을 요청하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그게 정말인가요?” “예, 전하.” 아네샤의 말에 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놀라며 반문했다. 아사드의 말로는 아덴의 부수석 대신관은 아덴의 대리자라 했다. 그런데, 그 아덴의 대리 자가 왕성에 방문하게 되었다니. 나는 불안한 심정이 들었지만 이내 침착하게 감정을 다스렸다. 구태여 내가 불안해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었다. 아덴의 대리자인 그에게 만약 나의 존재가 알려진다면, 대리자와 연결되어 있는 창조신 아덴에게도 알려져 그를 비롯한 신족들에게 본격적으로 소멸 형이라는 명목으로 공 격을 받겠지만, 어차피 그 대리자는 나를 만나러 온다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와 마주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일단 아덴의 대리자 문제는 접어두고는 아네샤에게 침실로 부른 이유를 말했다. “아네샤님,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어요.” “무슨 부탁인가요?” “여신 셀레네스에 대한 자료와 경전을 사소한 것까지 모두 수집해서 저 에게 가져다주세요. 셀레네스 신전이 무난히 로히얀스에 정착하려면 아 무래도 왕비인 저부터 셀레네스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물론입니다, 전하.” 마족과 신족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휘둘리지 않으려면, 내가 모든 것에 명확히 꿰뚫고 있어야 할 듯하다. 그래서 나는 평소의 화사한 미소를 머금으며 셀레네스 신전 정착 문제를 핑계 삼아 아네샤에게 자연스럽 게 자료 요청을 했다. * 후..... 글을 쓰는 것이 무척 어렵군요... 평소에도 짧았지만... 오늘은 더욱 짧습니다.-_-; 용서하시와요..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12-04-2002 04:41 Line : 160 Read : 581 [13] 체인지[2부] 제9화 -소중함을 위한 선택- (2) -------------------------------------------------------------------------------- -------------------------------------------------------------------------------- Ip address : 211.206.47.3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2- 그녀를 내보낸 후, 나는 아덴의 대리자 문제를 의논할 겸 미카엔을 만나 기 위해 궁성을 나섰다. 마차를 탈까 했으나, 중앙 궁성까지 걷기로 했다. 수많은 별이 뜬 시각이라 조금 으슥하긴 했지만, 이런 한여름 밤에는 걸 으며 사색에 잠겨보는 것도 좋았다. 모기가 극성이면 문제이긴 하지만. 나의 뒤를 에드가 조용히 뒤따랐다. 나는 평소처럼 그를 의식하지 않고 거 닐었다. 가끔 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느껴졌지만 나는 장미 궁성의 정원에 흐드러지게 핀 백장미에 시선을 줄곧 주며 걸을 뿐이었다. 사실, 에드는 기사들로서는 명예스런 직위 중 하나인 나의 호위 기사에 있 지만, 나는 그가 공적인 자리 외에 나를 호위하는 것에 매이지 않도록 하 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에드는 그런 나의 의도를 거부하듯 조용히 호위 임무를 수행했다. “에드?” “예, 전하.” “에드는 이제 결혼해야 할 때이지 않아?” “…….” 에드는 나의 말에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는 평소에는 무뚝뚝한 기색이 도 는 무표정을 하고 있지만, 정작 감정의 스침이 있을 때에는 표정을 감추는 것에 무척 서툰 모습을 보였다. “에드는 아마 나보다 세 살 더 많지? 그러고 보니, 엔카루스 또래이네.” “그렇군요.” 에드는 약간 느리게 나의 말에 대꾸했다. 평소의 에드는 느린 어투가 아닌데... 나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바닥 쪽에 시선을 주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파. 전쟁 말이야. 나는 엔카루스의 시체조차 찾지 못했거든. 내가 발견한 것은 그의 검 뿐. 나 때문에 죽은 그를 로히얀스 땅에 묻어주지도 못했어.” “그것은 전하께서 자책하실 일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곳에 있지 말아야 할 나의 존재로 인한 인연의 엇갈림과 비극적인 운명의 파문인 걸. 하나의 낯선 운명이 끼어듦으로서 그 주위의 운명들이 모 두 영향 받는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전하는 자신이 이곳의 이방인이라 생각하시는 겁니 까?” 에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의 눈빛은 힐책하는 기색이 다분했다. 그 의 그런 눈빛을 볼 때면, 나는 가끔 햇갈려진다. 에드에게서 본래 라비스는 소중한 여동생이었는지, 사랑하는 여자였는지 말이다. 본래 라비스를 어렸을 적부터 지켜보아온 그일 테니, 뭔가 한 가지 감정이 자리 잡고 있을 거라 생 각될 뿐이었다. 그것은 사랑이겠지만 어떤 종류의 사랑인지는 모르겠다. “혹시 모르지. 내가 아니었으면, 에드가 사랑하는 소녀는 자살하지 않았을 운명이었을 지도...” 자조적인 나의 답변으로 에드와의 대화는 그렇게 끊겼다. 에드는 마지막에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정확히 깨닫지 못하는 듯하였으나, 그대로 침묵은 이 어졌다. 그나저나, 이곳에 있지 말아야 할 존재라... 아사드와 처음 마주쳤을 때, 그 가 나에게 그러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왠지 우울해진다. 어쨌든, 나는 미카엔을 만나 그에게 아덴의 대리자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그러자 그는 아덴의 신전으로 자신이 직접 가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아덴 신관이자 대리자는 왕성에 올 필요조차 없게 될 테니 말이다. 그리 고 미카엔의 말로는, 마족 지스카는 오늘 오후 즈음에 마계로 돌아갔다고 했다. 물론, 아사드 역시 왕성을 떠났다. 신경 쓰이는 마족 녀석도 돌아갔으 니 아사드도 왕성을 떠난 것일 거다. 그렇다면, 셀레네스 존재에 대한 문제는 대충 해결된 듯하다. 이로서, 나와 미카엔에게 놓여진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모든 것이 평안해진 것처 럼 보였다. 나는 미카엔과의 대화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장미 궁성으로 돌아가려 했 다. 그러자 미카엔은 그런 나를 붙잡듯이 나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라비스, 오늘 나와 함께 가야 할 곳이 있어.” “어디요?” 나는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반문했다. 이 늦은 시간에 가야 할 곳이 있다니.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또 다른 나의 집을 라비스에게 보여주고 싶거든. 오 늘 밤은 그곳에서 라비스와 함께 보낼까?” 결국, 나는 미카엔에게 이끌려 중앙 궁성에서 가장 깊숙이 위치해 있는 그 의 침실로 가게 되었다. 가야 할 곳이 있다면서, 왜 자신의 침실로 데려가 는지 의문스러웠지만 일단 그를 따라보았다. 구비 구비 미로 같은 궁성 복도를 지나 미카엔과 나는 한 침실 방문 앞에 도착했는데, 이 침실은 측근 시종이나 시녀도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지 방문 이 마법의 힘으로 잠겨 있었다. 미카엔은 방문을 열었고, 나의 손을 잡아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라이트!’ 하고 맑은 목소리로 외치자 방 안에 있던 모든 마법 조명들이 한꺼번에 빛을 발했다. 방 안에 환해지면서, 수많은 은빛 문양들이 새겨진 백색의 고급 벽지가 발라진 아름다운 침실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이 방에 그곳과 이어지는 마법진이 있지. 나는 그 마법진을 없앨 생각이지 만, 그러기 전에 라비스에게 보여주는 거야.” “왜 없애는데요?” 나는 물었지만 미카엔은 답하지 않았다. 그는 침실에서 다소 구석진 공간에 그려진 마법진으로 데려가더니 마법진을 시동시키는 듯한 주문 한 가지를 외웠다. 굉장히 복잡한 마법어인지라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잠시 후, 원형의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그려진 마법진은 은빛의 강렬한 빛을 발하면서 빙계열의 마나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미카엔은 나의 손을 붙잡 으며, 시동되는 마법진에 멍해져 있는 나에게 다소 얍삽해 보이는 짧은 키 스를 했다. 찰나의 기회도 놓치지 않는 미카엔인가? 아무튼, 그가 나에게서 입술을 떼었을 때, 그와 내가 서있는 곳은 화사하고 화려한 느낌의 침실에서 아늑해 보이는 동굴 안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동그래진 눈을 하자, 미카엔은 빙긋 웃는 얼굴이 되더니 귀족 신사의 예를 갖추어 고개 숙인 모습으로 나의 손등에 입을 맞추 었다. “실버족의 드래곤 레어에 발걸음을 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부인.” “미, 미카엔! 드래곤 레어라구요?! 여기가 미카엔의 또 다른 집이라는 건가 요? 프레야 왕비 전하에게서 물려받으신 건가요? 와아~ 멋지군요!” “하하, 멋지다니 다행이군.” “우와! 무지 넓어요. 예전에 봤던 보석 드래곤의 레어 만한가요? 헤헤, 맘 놓고 구경해도 되죠?” 너무도 신기하기도 했지만 드래곤의 레어라는 꿈같은 곳에 와있는 터라, 나는 마법사들의 탐구심과 더불어 동심(?)에 돌아가 촐싹대며 레어 라는 곳 을 활보했다. 성급하게 돌아다니지 말라는 미카엔의 충고하는 목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지만, 나는 깨끗이 무시했다. 레어는 드래곤의 손길이 스친 곳답게 습하지 않고 아늑했다. 나는 빌딩 한 채를 지을 수 있을 만한 공간의 커다란 통로를 지나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 렀는데, 눈앞에 거대한 무언가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는 기절할 듯 이 놀랐다. 그것은 소머리를 한 인간형의 몬스터였는데, 무식하게 생긴 배 틀 엑스를 들고 있었다. “으아아악!! 악?!” 놀란 나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조금은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것은 일루젼이었던 듯 미카엔이 다가오자 이내 사라졌고, 겁에 질린 기색이 완연한 나의 비명소리는 다소 무안함으로 끝을 맺어야 했다. “바보. 이렇게 덜렁대다니.” 미카엔은 나를 내려다보며 웃지도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12-04-2002 15:47 Line : 144 Read : 191 [14] 체인지[2부] 제9화 -소중함을 위한 선택- (3) -------------------------------------------------------------------------------- -------------------------------------------------------------------------------- Ip address : 211.206.47.3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3- “우, 방금 뭐였죠?” “여긴 낯선 침입자를 놀래게 만드는 몇 가지 마법이 걸려있거든.” “그, 그렇군요.” “이 레어는 추운 곳에 위치해 있어서 조금 추울 거야.” 미카엔은 자상한 어조로 그렇게 말하며 어느 한곳으로 가더니 두꺼워 보이는 모피 외투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직접 나에게 걸쳐주었다. 이러니까, 내가 어린애가 된 기분이다. “추운 곳이라고요? 여긴 겨울인가요?” “응, 항상 겨울이지. 여긴 동대륙하고는 무척 떨어진 백색 대륙이라 불리는 곳이야. 그 중 백색 평원인 이곳은 언제나 하얀 눈으로 모든 것이 뒤덮혀 있지.” “그렇다면, 여긴 극지방 중 하나이겠군요. 아까의 마법진이 우리를 이토록 먼 곳까지 옮겨다 놓은 건가요?” 나는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한순간에 수십 개의 나라와 바다를 넘어왔다면 실감이 나겠는가? “극지방이라기보다는 극지방에 가까운 곳이지.” 미카엔은 간단하게 답하면서 나를 레어 밖으로 데려갔다. 밖으로 나오자 나 의 시야 앞에는 온통 실크빛 백색이 가득 차게 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이 펼쳐진 평원은 순결해 보이는 고운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눈의 사막 같다고 할까? “미카엔의 어머니는 정말 아름다운 곳에서 살고 계셨군요.” “아름다운 곳이지. 너무도 차가워서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눈의 여왕의 모 습처럼. 아! 그리고 이곳에는 여신의 옷자락도 볼 수 있어.” “네?” 나는 후드가 달린 외투를 여미며 그에게 반문했다. 이 외투는 생각 외로 무 척 보온이 뛰어났다. 아마도 보호 마법이 걸려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곳의 칼 같은 추위를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몽롱한 듯이 평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영혼까지 얼어 붙은 듯한 차가운 바람이 이곳에 불고 있었다. 이 바람은 눈의 여왕의 어 루만짐 같다. 방금 쌓인 듯해 보이는 눈은 달빛과 별빛을 받아 마치 반짝 이는 은가루와 같았다. 이렇게 아름답고 순결할 수 있을까? 이곳은 마치 눈 의 여왕의 작은 손길 같아 보인다. 아름다운 그녀의 유혹이며, 그녀의 시릴 듯한 미모인 것이다. 그녀는 지금 쉽게 다가가지 못할 아름다움과 매력으로 서 누군가를 유혹하는 것이고, 이곳의 아름다움에 심취하게 되어버린 연약 한 인간은 마침내 그 영혼을 눈의 여왕에게 바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해보았다. “라비스?” 미카엔은 깊은 잠에 빠진 이를 깨우듯 나의 이름을 불렀다. 이에 나는 그에 게 작은 미소를 보여주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쌓인 눈도 만져보았다. 부 드럽지만 차가운 그 촉감은 나의 뼛속까지 전해졌다. 그래도, 한 여름의 더 위에 지쳐 있다가 이렇게 난데없이 새하얀 겨울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니, 나의 가슴은 들뜨게 되는 것 같다. 그 들뜬 마음은 나를 한없이 어린아이로 만들었지만 말이다. “미카엔, 받아요!” 나는 그사이 뭉친 눈 덩어리를 미카엔에게 던졌다. 그러자 나의 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던 그는 나의 기습에 그만 노출되고 말았다. 나의 눈 덩어리는 그에게 명중된 것이다. “라비스!” “푸하핫! 미카엔은 이런 눈싸움을 해본 적이 없을 것 같아요.” “맞아! 나의 유년시절은 왕이 되기 위한 것들인 딱딱함으로 가득 차 있으 니까. 하지만 라비스를 좀더 일찍 만났다면, 나는 눈싸움을 즐기는 소년의 기억을 가졌을 테지?” 미카엔은 나에게 복수하듯 눈을 뭉쳐 던졌다. 우우, 그가 뭉친 눈은 무척 컸다. 손 크다고 자랑하는 건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저런 귀엽지 않은 눈 덩어리를 무식하게 날리다니! 나는 눈을 번뜩이며 갈퀴로 모으듯 눈을 잔뜩 모았다. 그래서 눈을 무지막 지하게 커다랗게 뭉치자, 미카엔은 그런 나를 보며 못 말린다는 듯이 웃음 을 터뜨렸다. 그렇게 미카엔과 나는 다소 유치한 놀음에 빠져 있다가 문득 하늘을 바라 보았다. 흑단이 깔린 듯한 밤하늘은 은빛의 별 듯이 총총히 떠있었다. 마 치 그 모습은 달을 경외하여 옹기종기 모인 듯한 별의 모습 같았다. “여신의 옷자락이야.” 미카엔의 말대로 하늘에는 점점 짙어진 오로라가 신비한 빛으로 하늘에 걸쳐 있었다. 그제야 여신의 옷자락의 정체를 깨달은 나는 그 아름다운 모습에 감 탄했다. 백색과 노란빛의 어우러진 그것은 마치 두 빛줄기가 한곳으로 만나 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백색은 미카엔이며 노란빛은 나라는 황당한 생각을 해 보았다. “오로라군요. 저것은 새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오로라의 이름은 라틴어로 새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낸 나는 그렇게 말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 다시 레어 안으로 들어온 우리는 샤르를 불러 몸을 녹였 다. 샤르는 너울거리는 불꽃만 놔두고는 그대로 가버렸고, 나는 조용히 불을 쬐었다. 그러다 미카엔에게 눈길을 주고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미카엔, 언제까지 이 평온함이 계속되지 않을 거예요. 다시 모든 것이 평 안해진 듯한 이 고요는 폭풍의 눈이에요.” “뭐?” “나는 미카엔과 소중한 로히얀스에게 나의 존재로 인하여 해를 끼치게 될 까봐 두려워요. 저번에 제가 말했었죠? 저는 한 가지 갈림길에 서있다고... 이제 그 갈림길에 대한 선택을 해야 될 것 같아요.” “라비스, 그 말의 의미는 나를 위해 떠나겠다는 식의 어리석은 선택은 아니 겠지?” 차갑게 굳어지는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물론, 아니에요. 그저 미카엔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찾겠다는 거예요.” “나를 무엇으로부터 지키겠다는 거지?” “셀레네스라는 나의 과거로부터요.” 그 말의 끝으로 미카엔과 나는 더 이상 대화하지 않았다. 대신 무언의 대 화를 나누었던 것 같다. 타오르는 불꽃과 바닥에 깔려진 털이 풍성한 짐승의 가죽만큼이나 부드럽고 따뜻한 온기를 미카엔의 깊어진 은보랏빛 눈동자에 게서 느끼며, 나 역시 그와 마음으로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까 보았던 여신의 옷자락이라 불리는 오로라의 모습이 떠오른다. 두 가지 빛깔이 서로 합쳐지는 그 모습이... 의미 깊고 특별하며 뭔가 두려움이 느껴지는 그러한 밤이다. 미카엔과 내가 눈의 여왕의 땅에 오로라가 된 밤이라 할까?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13-04-2002 15:41 Line : 158 Read : 422 [15] 체인지[2부] 제9화 -소중함을 위한 선택- (4) -------------------------------------------------------------------------------- -------------------------------------------------------------------------------- Ip address : 211.206.47.3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4- 다음날 아침, 우리는 왕성으로 돌아왔다. 미카엔은 여느 때와 같이 중신들과의 조례로서 하루를 시작했고, 나는 장미 궁성에서 아사벨라의 알현을 받는 것으 로 시작했다. 아사벨라는 곧은 흑발을 길게 늘어뜨리고는 붉게 칠한 입술에 보석 악세사리를 치장한 모습으로서 나의 앞에 마주 앉았다. 엔카루스처럼 강한 인상을 가지고 있는 그녀이지만, 화려한 차림과 화장은 더욱 그녀를 오만하며 강렬하게 보이 게 만들었다. 사실, 그녀의 그런 화려한 차림은 상대를 압도하는데 많은 역할을 한다. 기선 제압방법에는 많은 다양한 수법이 있지만, 저렇듯 옷차림과 오만한 눈빛도 크 게 작용을 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것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런 사소한 것에 흔들린다면 나는 한 나라의 왕비로서 미카엔의 옆자리에 있을 자 격이 없을 것이다. “오늘 전하의 모습은 왠지 평소보다 더 여성스러워 보이시는 군요. 예전의 전 하 모습은 우아하고 아름다우시긴 하지만, 뭔가 겉도는 느낌이었거든요. 하지 만 오늘 아침의 전하 모습은 여성스러운 아름다움이 영혼에서부터 우러러 나 오는 것 같아요.” “그래?” 나에게서 어떤 내면의 변화를 감지했는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유심히 바 라보는 아사벨라이다. “아! 그리고 마리라는 그 흑마녀는 지금 로히아나에서 머물고 있어요. 그녀에 게 내린 수배령은 아직 유효한데, 무척 대담한 행동이지요. 어디에 숨어있는 지는 저도 몰라요. 하지만 곧, 그녀는 나에게 은밀한 방법으로 전하를 꺾을 계획을 넌지시 알려올 거예요.” “흐음,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아사벨라는 알고 있을 텐데?” 아사벨라의 측근 시녀가 마리와 직접적인 접촉을 했었다는 것을 라센샤르의 보고로서 들은 나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아사벨라는 미미하게 멈칫한 모습을 보였으나, 이내 동요 없는 표정으로 나에게 답했다. “그녀는 아직 섣불리 직접적인 접촉은 피하고 있어요. 그녀는 나의 오빠인 엔카루스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저까지 믿고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아무래도, 아사벨라를 전적으로 믿는 것은 무리인 모양이다. 그녀의 지금 발 언으로 인해, 나는 그녀의 태도가 나의 수족으로 완전히 돌아선 것이 아니라 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어쩌면, 아사벨라는 지금 두 마리 토끼를 다 잡 으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녀는 기묘한 삼각관계에서 가운 데 자리에 위치해 있는 셈이니 말이다. 아사벨라는 내가 뛰어난 마법사라고 소문이 났었다는 것을 잊은 것일까? 마 스터 마법사라면 별 특이한 능력으로 아사벨라의 거짓을 알아챌 수 있을 지 도 모른다는 가정이 생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사벨라가 욕심을 내는 것 은 내가 마리를 제압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주사위를 던진 것일 거다. “아사벨라, 나를 실망시키지 마. 나는 네 측근이 마리와 직적 접촉하여 답변 을 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나의 말에 아사벨라는 표정이 약간 흔들렸다. 그러다 표정이 점차 변하는 듯 하더니 그녀는 뜻밖에도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홋, 제가 걸려들었군요. 전하의 시험에 말이죠. 전하께서는 마리를 처단 하실 능력이 사실은 있었던 거죠? 결국, 저는 전하께 못 미친다는 건가요?” “글쎄.” “그렇다면, 이젠 전하와의 거래도 무효화가 되겠군요.” “아니, 아직 아사벨라에게는 기회가 있어. 마리에게 넌지시 말해. 지금 비밀 리에 엔카루스의 행방을 찾고 있다고. 사실, 엔카루스는 죽은 것이 아니라 실 종된 거라고.” 내가 그렇게 말하자, 초승달 모양으로 잘 다듬어진 아사벨라의 눈썹 한쪽 끝 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내심, 초조해지게 만드는 아사벨라의 반응이다. 왠지 길게 느껴지는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아사벨라는 나에게 입을 열었다. “제가 전하의 말대로 행동한다면, 전하는 저에게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나요?” “물론이야. 아사벨라, 네 간계(奸計)로서 무슨 수를 써서든 마리의 관심을 내 쪽이 아닌 엔카루스의 행방 쪽으로 돌려놔. 그러면 너는 네 꿈을 이룰 수 있 을 거야.” “전하께서는 제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요?” “물론! 넌 폐하 말고 로히얀스에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존재가 되는 거잖 아?” 아사벨라와의 알현이 끝난 후, 나는 한 시종에게서 미카엔이 지금 아덴 신전 으로 향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에 안심한 나는 아덴의 대리자에 대한 문제 는 아예 신경을 꺼버렸다. 그러다 오후 즈음, 여신관 아네샤가 장미 궁성을 다시 방문했다. 그녀는 여 신 셀레네스에 대한 자료를 잔뜩 가지고서, 마침 측근시녀들과 티타임 (Teatime)을 즐기고 있던 나를 찾았다. “아네샤님, 수고하셨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 걸요.” “괜찮다면, 같이 차를 마시겠어요?” 내가 그녀를 티타임 자리에 초대하는 말을 하자, 아네샤는 얼굴을 살짝 붉 히는 듯하더니 기쁜 마음으로 응했다. 그리고 가볍게 오가는 잡담에 동참 했는데, 문득 레니가 한 가지 화제를 꺼냈다. 그것은 예전에 여신의 미모를 가졌다는 크리스티나 아르젠에 대한 것이었다. “솔직히, 저는 궁금해요. 미를 숭상하는 사람들은 크리스티나가 여신의 미모 라며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갖은 찬사를 아끼지 않지만, 그녀의 미모는 왕 비님보다 더 빛을 발했을까요? 그러고 보니, 크리스티나와 왕비님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크리스티나도 예전에 왕비였었다고 했잖아요? 그로 인해, 그녀의 나라가 블랙 드래곤 때문에 휘청한 거구요.” “크리스티나는 대체 어떤 외모를 가졌을까?” 레니의 말에 나는 문득 한 가지가 궁금해져 그녀에게 묻자, 레니 대신 평소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아나가 입을 열어 답했다. “어떤 음유시인이 크리스티나를 묘사하며 지은 시를 읽은 적이 있었어요. 시 의 내용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어요. 크리스티나는 햇살 을 머금은 듯한 밝은 금발에 하늘빛 눈동자 그리고 꿀 같이 달콤한 미소를 가진 여인이라고요.” 밝은 금발에 하늘빛 눈동자... 그것은 셀레나의 모습과는 다르다. 그 시는 뭔 가 잘못 전해진 걸까? 그렇지 않다면, 크리스티나는 대리자가 되기 전의 모습 이었던 모양이다. 신의 대리자로서 각성한다는 것은 외모가 신의 모습과 근접 하게 변한다는 것인데, 크리스티나는 대리자가 되기 전에도 아름다웠나 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블랙 드래곤과 마주쳤을 때, 그가 나를 크리스티나로 착 각했었던 것이 떠오른다. 「얼굴은 그다지 닮은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너를 보고 ‘크리스’ 라고 생각했 는지 모르겠군. 네 이름이 뭐지?」 그 성질 더러운 블랙 드래곤이 나에게 했던 말이다. 사실, 크리스티나가 언 제 대리자로 각성하여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셀레나의 모습이 되었는지 나 도 예측할 수가 없다. 왕비의 일기장에 따르면, 200년 전 크리스티나와 아나테스 그리고 키리아, 메 르킨의 일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크리스티나와 친구인 실버 아나테스와는 언 제 즈음에 교분을 가졌으며, 마족 키리아와는 언제 얽히게 되었던 걸까? 키리 아가 나를 보면서도 셀레나의 딸이라는 것을 연관짓지 못한 것을 보면 그녀는 크리스티나가 대리자가 되기 전에 얽혔다가 인연이 끊어진 것일 지도 모르겠다. “우우... 레니, 나 머리에서 김이 나는 것 같지 않아?” 머리를 하도 굴려서 열을 받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레니에게 하소연하듯 이 말했다. 티타임 후, 나는 침실로 돌아가 아네샤가 가져온 자료들을 훑어보고 있다가 침실로 나를 잠시 찾아온 미카엔의 말을 들었다. “아덴의 부 대신관을 자이라스 공국(로히얀스 출신 아세룬 공작이 다스리게 되어 공국이 됨)의 수도에 있는 신전의 수석 대신관으로 임명해주고 일정 기 간 동안만 약간의 보조를 해주는 조건을 제시했어. 물론, 아덴의 신관들 중 에서 가장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던 부 대신관이 그 조건을 받아 들였지. 이것으로 라비스는 덜 불안해해도 될 거다. 그 아덴의 대리자이자 부 대신관 은 자이라스로 가게 된 것이니.”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16-04-2002 04:45 Line : 161 Read : 776 [16] 체인지[2부] 제9화 -소중함을 위한 선택- (5) -------------------------------------------------------------------------------- -------------------------------------------------------------------------------- Ip address : 211.206.47.3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5- 그날 밤, 마드린이 여러 가지 보고 사항이 있어 나의 침실로 들렀다. 마른 체구의 중년 여인인 마드린이 여느 때처럼 빈틈없어 보이는 눈빛과 범상치 않을 정도로 깐깐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는 이것저것 보고를 마쳤을 때, 나 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드린, 제가 훌륭한 왕비가 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신 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전하께서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다니 저로선 보람되고 기쁠 따름이군요.” “...그리고 저는 마드린의 청렴하고 곧은 성품을 존경하고 있죠.” “전하께서 그렇게 과찬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내가 평소답지 않게 뜬금없이 그녀를 치켜세우는 말을 하자, 마드린은 갸웃 하면서도 약간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마드린, 이거 아세요? 장미 궁성의 시녀장 직위를 맡고 계시는 마드린은 저의 대리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점을 마드린이 평소에 유념해주셨으면 좋 겠군요.” “전하, 그 말씀은...” “마드린에게 제 믿음을 주는 것이죠. 그와 함께, 마드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마드린도 다 아시리라 생각되지만, 보좌관 루이안트와 호위기사 에 드 그리고 아나와 레니는 내가 믿는 측근들이에요. 그들을 마드린이 잘 지켜 봐주셨으면 합니다. 왕비의 대리로서. 왕비의 대리라는 것이 어떤 소임인지 현명한 마드린은 잘 알고 계시겠지요? 또한 왕비의 대리는 그 권위에 있어 측실도 무시하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나의 의미 깊은 말에 마드린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심중을 헤아리듯 나의 황금빛 눈동자를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겠군요. 왕비의 대리는 왕비 전하의 부재 (不在) 시, 그 권위를 위임받을 수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아사벨라와 같은 측실도 무시하지 못한다는 거겠죠. 전하는 저에게 감당하지 못할 무거운 믿 음을 주시는 군요.” 마드린은 내가 왕비로서의 손길이 닿지 않는 부분이나 불가피한 부재 시에도 그 권위를 굳건히 세우고 싶어 한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그런 마드린이었 기에, 그녀는 내가 준 믿음에 대해서 넙죽 절하며 감사해 하는 대신, 나의 뜻 을 알겠노라고 답했다. 그렇게 마드린과의 대화를 끝으로 나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저물어 가는 오늘 하루에 대해 생각했다. 어느 때보다도 더욱 평범하게 느껴지는 오 늘 하루... 누군가의 대화와 약간의 부딪힘, 왕비로서의 일상 그것이 오늘 하 루 있었던 일들의 전부였던 것 같다. 심지어, 오늘은 미카엔조차 아까 잠시 들른 것 외에 줄곧 마주칠 겨를이 없었다. 재미없을 정도로 평범한 일상이다. 나는 침대에 들기 전에 창밖을 내다보았다. 은하수(銀河水)가 흐르는 까만 하 늘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왠지 고요하게 느껴졌다. 잔잔한 호수가 된 나 의 일상만큼이나 고요해 보였다. 짓궂은 운명의 신은 이런 고요함을 싫어한다. 고요함이 짙어져 마침내 자신의 짓궂음을 견딜 수 없게 될 때, 운명의 신은 돌을 던질 것이다. 잔잔한 호수에 파문이 일도록 말이다. 다음날 아침, 나는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서 승마를 했다. 아침잠이 많은 내가 운동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 부지런을 떨자 마드린은 놀랍다는 표정을 보였었 다. 어쨌든, 여름의 태양이 그 열기를 회복하기 전에 나는 승마전용 공간의 모든 코스를 돌고는 미카엔이 있는 중앙 궁성 쪽으로 말을 몰았다. 이왕 장미 궁 성을 나온 김에, 아침 식사는 그와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히히힝! 이 놈의 말이 내가 중앙 궁성 쪽으로 향하려 하자, 주인 말을 듣지 않고 고집 스럽게 버티기 시작했다. 이 녀석은 예전 내가 측실이었을 때, 한 번 실랑이 를 벌인 적이 있는 ‘조세핀’ 이라는 이름의 백마였다. 조세핀은 고집스러우며 주인을 알기를 우습게 아는 쓸데없이 도도한 말이었 는데, 겨우 길들여서 내가 타게 되었다. 하지만 가끔 발작하듯이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럴 땐 정말 패주고 싶다. “야! 빨랑 안가?! 백마 주제에 황소고집이네?” 히힝!! 나는 화가 나서 소리를 쳤지만, 조세핀은 히힝! 하고 한 번 대꾸해주고는 끄 덕도 하지 않았다. 평소 거만한 녀석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더욱 고집스러웠 다. 결국, 나는 조세핀을 포기하고는 아젠샤르를 불러 중앙 궁성 앞까지 날아 갔다. 그리고 궁성 입구에서 아젠샤르를 다시 돌려보내고는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한 호화 마차가 다가와 멈추었다. 누군가가 내리는 듯했지만, 귀족 중 하나 려니 생각하며 무심히 보아 넘길 뿐이었다. 나는 한 시종에게 미카엔이 지금 검술 연습 중이라는 말을 듣고는 우선 응 접실로 가서 미카엔이 오기를 기다렸다. 설마, 밥도 안 먹고 검술 연습하지 는 않을 테니 조금 기다리면 될 듯했다. 하지만 미카엔은 일정 시간이 지나 도 궁성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결국 나는 괜히 왔다는 생각을 하며 응접 실을 나와야 했다. “폐하께서는 지금 바쁘셔서 만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오늘 떠날 생각이기 때문에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할 겸 만나 뵙고 싶군요.” “죄송하지만 폐하의 오늘 일정으로서는 알현 시간을 내실 수가 없습니다. 기다리지 말고 그냥 가시는 것을 좋을 듯하군요.” “그렇습니까? 그럼 할 수 없군요.” 응접실을 나와 로비로 나오던 나는 미카엔의 측근 시종이 누군가와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시종과 실랑이를 벌이는 이는 젊은 남자인 듯했는데, 미카엔을 알현하러 온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는 아까 보았던 마차에서 내린 남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나저나, 미카엔의 측근 시종은 어째서 기다리겠다고 까지 말하는 저 남자의 알현 요청을 무조건 거절하는 걸까? 미카엔에게 묻지도 않고 말이다. 게다가 미카엔은 오전 중에는 그다지 바쁜 것도 아닌데 말이다. 호기심이 일은 나는 알현 요청을 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 가려 했다. 하지만, 측근 시종에게 모습이 가려져 있던 그 남자는 아쉬운 듯 몸을 돌리고는 터덜터덜 걸어 나가며 입고 있던 얇은 여행자 외투의 후드를 깊게 뒤집어썼다. 백색의 그 외투는 햇빛 차단에 유용할 듯했다. 나는 측근시종을 나무라기 위해 그에게 가까이 갔다. 그러자 시종은 나를 보 더니 얼굴색이 변했다. 그것을 본 나는 분명 시종이 자신의 잘못을 들켜서 당황하여 그런 것이라 짐작하고는 입을 열려 했으나, 그 시종은 엉뚱하게도 목소리를 낮춰 빠르게 말을 꺼냈다. “전하, 빨리 들어가십시오!” “네?” 그의 태도에 영문을 모르는 나는 갸웃했다. 조급한 듯 목소리 죽여가면서 나 에게 외치는 그 시종이 의아스러웠다. 그는 왕비인 나를 차마 등 떠밀지는 못하고 어디론가 빨리 들어가라고 경고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 궁성입구 를 나서서 막 마차에 오르려던 후드 쓴 남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 이 눈에 들어왔다. 이에 시종은 더욱 얼굴빛이 변하더니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시종 중 에서는 엘리트라 칭할 수 있는 국왕의 측근 시종이 저렇듯 경망스러운 행동 을 보인다는 것은 뭔가 사정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뭔가 불안감이 싹트는 것을 느끼고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몸을 돌 려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후드 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추시오!” * 눈이 침침... 비는 주룩주룩....@_@;;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라얀 Date : 16-04-2002 17:17 Line : 232 Read : 225 [17] 체인지[2부] 제9화 -소중함을 위한 선택- (6) -------------------------------------------------------------------------------- -------------------------------------------------------------------------------- Ip address : 211.206.47.3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6- 단순히, 멈추라는 그의 말 한마디는 마치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라는 되는 양, 발을 더 이상 바닥에서 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강한 명령조도 아닌 데다가 뚜렷이 두려움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그 말 한마디를 거 스를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굳어진 얼굴로 다가오는 그 후드 쓴 남자를 돌아보았다.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걷는 기품이나 느껴지는 분위기, 조금 치렁한 외투로 봐서 그는 고위 신관임을 나는 뒤늦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남자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나의 얼굴을 한참 살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불길한 추측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 왕성에서 일하시는 분인가요? 아니면 지체 높으신 귀족 레이디인가요?” “나는 로히얀스 국왕 폐하의 아내이자 왕비입니다. 그대는 누구이기에 폐하 께 알현 요청을 한 것이죠?” “아! 왕비 전하이십니까? 몰라 뵈어 무례를 했습니다. 저는 창조신 아덴을 모시고 있는...” “아덴의 부 대신관이신가요?” 창조신 아덴이라는 말에 나는 경솔하게도 그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 왕성을 출입할 정도의 신분이라면 그는 대신관이나 부 대신관이 될 듯했다. “맞습니다, 전하.” 그는 나에게 예를 갖추며 답했다. 나는 태연하게 그가 올리는 예를 받는 척 했지만, 실상, 그토록 피하고자 하던 아덴의 대리자가 바로 코앞에 있음을 알았으니 아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맥박이 빠르게 뛰고 호흡이 가 퍼지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태연한 척하며 얼른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그렇군요. 아! 저는 이만 가보아야 할 데가 있어서...” 아덴의 부 대신관이냐고 물어놓고는 가야 할 곳이 있다며 황급히 발길을 돌 리려는 나의 모습은 침착함을 가장했지만 약간 행동이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그 역시 나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마차가 있 는 곳으로 향했다. 이것으로 일단 셀레네스로서의 신분이 대리자를 통해 신 족에게 들키는 위기는 벗어난 듯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마차로 가던 그 남 자는 갑자기 멈칫해 보였다. 또다시 가슴이 덜컥한 나는 멈칫해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가라! 가라!’ 하며 효험도 없는 이상한 주문을 외웠다. 하지만 그 남자는 다시 내 쪽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하아, 이젠 마른 침을 꼴깍 삼키는 것도 어렵다. “어쩐지 많이 본 듯한 모습이더니...” “……?” “왕비 전하께서는 추방된 신족 셀레네스였군요.” “……!!” 결국 아덴의 대리자가 나를 알아보고 말았다. 아아, 일이 이렇게 되고 말다니! 그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했던 노력은 이런 우연한 마주침으로 인해 헛되이 돌아갔다. 이런 저주스런 우연이 다 있을까? 지금 생각하니, 방금 측근 시종 은 뭔가 미카엔에게 명을 받은 바 있어서 나와 마주치지 않게 하려 했던 모 양이었다. 하지만 일이 틀어지자 그는 미카엔에게 알리러 뛰어간 것일 거다. “저는 영광스럽게도 아덴의 감정과 의지 일부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의 대리자가 갖는 특권이지요. 그래서 저는 셀레네스가 지금 이곳에 있다 는 것은 불명예스런 이유로 아덴께 받은 심판을 거부한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한때 최고위 신족이었던 셀레네스에 대한 예로서 아 덴께 직접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소멸 형이죠.“ 그가 기도문 비슷한 말들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중얼거리는 내용은 알아들 을 수가 없지만, 그 기도문을 통해 시작된 변화에 나는 두려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으로 신성함이 강렬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보며, 나는 창조신 아덴이 나를 직접 심판하기 위해 강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대리자는 신의 그림자이자 권능의 조각들이지만 예비 된 그릇이기도 하다는 것을 셀레네스 자료를 통해서 나는 알고 있었다. 예비 된 그릇. 그것은 예비 된 육체를 말하기도 하지만 영혼을 말하기도 한다. 나의 두 번째 대리자가 나를 위해 희생하여 생명을 바친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아덴의 대리자는 자신이 모시는 신을 육체에 모시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권능이 깃든 오라가 발하기 시작했다. 나는 두려움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워지고 두려움으로 숨이 막힐 듯했다. 결국 나는 두려움이 너무 큰 나머지, 도망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아, 내가 이토록 나약하고 겁이 많은 존재였던가? 그것은 아니다. 가장 위대한 신족 아덴은 그 존재함만으로도 미약한 인간들에게 커다란 두려움과 경외심을 갖 게 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근본적으로 아덴이란 존재를 가슴깊이 두려워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내가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 었을 뿐. 나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이대로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기억 따위로 인 해 소멸 당하게 되는 것은 싫다. 너무 황당한 비극이다. “미카엔...” 절망스럽고 두려운 이 순간에 떠오르는 이름을 나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 다. 나는 미카엔이란 이름을 위기에서 벗어날 기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일까? 그때 빙계열 기운이 느껴진다고 생각된 순간, 누군가가 나의 팔목을 홱 낚아 챘다. 나는 다시 눈을 떠 나를 붙잡은 존재를 확인하려 했지만 그 존재는 나 를 빠르게 품에 묻어버렸다. 그래서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중앙 궁성 로비 에서 마법진이 있던 미카엔의 침실로 순식간에 바뀌는 주위의 모습이었다. “어째서 들키고 만 거지? 안았던 나를 풀어주고 화가 난 듯 외치는 그는 미카엔이었다. 정말 나에게 서 그의 존재는 기적이었나 보다. 미카엔은 나를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자신은 마법진 밖에 선 채 나를 마법진 중앙에 세웠다. “나는 너를 레어로 보내고 이 마법진을 없앨 거다. 그러면 아무리 잘난 창 조신이라도 너를 찾지 못할 거야!” “미카엔!”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네 권능을 찾아라, 라비스. 네가 대리자들을 찾아야만 권능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어. 지스카가 셀레나의 편지를 보여주었지.” “미카엔, 나만 이렇게 갈 수 없어요. 나 때문에 미카엔이 다치게 될 거예요!” “라비스, 셀레네스의 과거로부터 나를 지키고 싶다면 힘을 찾아.” 미카엔은 그렇게 말하고는 빠르게 의미모를 마법어를 외웠다. 그러자 마법진 은 저번처럼 눈부신 은빛으로 발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옷자락을 세게 붙 들며 나를 안타깝게 응시하고 있는 은보랏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양손으로 나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나에게 키스를 하기 위해 다가 왔다. 나는 눈물이 나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같이 가자는 말을 삼키고 눈을 감았으나, 그의 입술 촉감을 느끼기도 전에 마법진은 발동하여 나를 레어로 이동시켰다. 결국 그의 부드러운 손길만 나의 볼에 남은 것이다. “흑!”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법을 모르는 나는 다시 되돌아갈 방법도 없었다. 혹시 라도 내가 발동시킬 수 있을까 해서 살폈지만, 미카엔이 침실 안의 마법진을 금세 없앴는지 연결되어 있는 이곳의 마법진도 점차 흐려져 갔다. 미카엔이 무척이나 걱정되었지만, 별 수없는 나는 애만 탈 뿐이었다. 결국 나는 이틀 전, 이곳 레어에서 그에게 했던 말처럼 셀레네스 과거로 부 터 그를 지킬 힘을 찾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것은 내가 그를 위해서 하 고자 했던 선택이기도 했다. 나는 눈물을 닦고 벌떡 일어나 레어를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일단 레어 밖으로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법이 걸린 모피 외 투를 찾아낸 나는 그것을 걸치고 가방을 찾아내서 드래곤의 레어라면 의례히 있는 보석들을 주워 담았다. 지도나 그 밖의 용품들을 챙길 정신은 없었다. 그렇게 대충 짐을 꾸린 나는 레어를 나왔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레어에 걸린 일루젼 같은 것이 나타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레어를 나와 다시 한번 눈 쌓인 평원을 바라보게 되었다. 오늘 은 별이 보이고 오로라가 보이는 하늘대신, 태양과 솜털 구름이 보이는 푸른 하늘의 모습이 있었다. ‘미카엔을 지키기 위한 힘을 찾기 위해서는 대리자들을 찾아야 하는데... 그 들을 어디서 찾지?’ 나는 순간 암담해졌다. 일단 나오긴 나왔는데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는 그 들을 내가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인가? 결국, 나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이곳에서 헤매고 있는 동안, 아덴 이란 창조신이... 아니, 옹졸한 신족 녀석이 나를 소멸할 방법을 찾기 위해 미카엔에게 어떤 해를 끼칠 지도 몰랐다. 아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라센샤르!” 나는 바다의 정령을 불렀다. 곧, 그녀는 충실한 친구처럼 나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라비스,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죠?” “나... 길을 잃었어요. 미안하지만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미카엔이 알 수 있 도록 기운을 퍼트려 주겠어요? 그가 이곳에 찾아올 수 있도록. 그리고 라센 샤르는 돌아가세요. 명령입니다.” 나는 정령들에게 거의 쓰지 않는 명령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내가 명한 것을 거스를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라센샤르는 약간 의심을 품은 듯 한 얼굴이었지만 명령을 받은 터라 고개를 끄덕였다. “제 기운이 로히얀스까지 닿게 하려면 마나의 힘처럼 생명의 힘처럼 모든 곳에 퍼져있는 물의 힘을 사용해야 하겠군요. 하지만 저 혼자로는 부족해 요. 아젠샤르와 리엔시타의 도움이 필요하지요. 물론, 그 둘은 모두 나의 권속에 놓여있으니 내가 뭔가 하고자 하면 그들은 알아서 도울 겁니다. 그리고 다행히 이곳은 눈이 많이 쌓였어요. 저에겐 큰 힘이 됩니다. 라비 스,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나는 라비스의 정령이 되기로 한 존재입니다. 부탁을 들어드리지요. 나의 힘은 이곳 평원의 눈을 거쳐 바다를 거치고, 리엔시타의 도움으로 간혹 대륙에 내리는 빗줄기와 강줄 기를 거쳐서 나와 함께 존재하던 아젠샤르의 힘과 더불어 동대륙 로히얀 스에 이르게 될 겁니다.” 라센샤르는 조용히 말을 마치고는 곧바로 나의 명령을 수행했다. 그녀의 몸 이 투명한 푸른빛으로 변하면서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강한 정령의 기운 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힘으로 인해 새하얀 눈의 사막이자 눈 의 여왕의 순결한 품인 얼어붙은 평원은 수증기처럼 떠오르는 은빛의 반짝 임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작은 얼음 결정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나의 눈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운 은가루나 미세한 보석들처럼 보였다. 지금의 나는 너무도 슬펐지만, 라센샤르가 만들어낸 힘은 정말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기적. 아마도 나는 축복받은 존재인 모양이다. 기적들로 둘러싸여 이렇게 숨을 쉬고 있으니. 투명한 은빛으로 반짝이는 얼음 결정을 통하여 라센샤르의 기운이 더욱 확 대되어 멀리 퍼져나갔다. 그녀의 힘은 바다까지 이를 것이다. 그러면 라센 샤르의 기운의 원천이 되는 바다는 그녀의 힘을 더욱 짙게 하리라. 이 정도이면 셀레네스의 권능이 부활했다고 믿게 될 것이며 정령의 여신이 자신을 알린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라센샤르의 힘이 마침내 로히 얀스 왕성까지 이르렀을 때, 아덴은 내가 이곳 평원에서 자신을 알리고 있 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이토록 강한 정령의 힘은 셀레네스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위험은 다시 나에게로 옮겨지겠지. 이것이 내가 하는 선택... 나의 소중함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야. 미카엔은 말하겠지.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고 바보 같은 선택이라고.’ 아무리 뛰어난 미카엔이라도 마법진을 없앤 이상, 수십 개의 나라를 건넌 장거리 공간이동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아덴의 손길은 이곳에 금방 미칠 것이다.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Name : 라얀 Date : 26-04-2002 04:58 Line : 159 Read : 1050 [18] 체인지[2부] 제10화 -권능의 조각- (1) -------------------------------------------------------------------------------- Ip address : 211.206.47.3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권능의 조각) -1- 휘이이잉- 바람이 거칠게 불었다. 언뜻 보이던 푸른빛의 하늘은 갑자기 몰려온 두꺼운 구름들에 의해 잔뜩 흐려졌다. 하늘이 진동하는 듯했다. 바람은 더욱 거칠어 져 갔고, 그로 인해 평온하던 눈의 여왕의 순결함 품인 백색 평원은 점차 흠 집이 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하늘은 갑작스레 덮인 구름으로 어두워졌고 금방이라도 벼락이라도 내려칠 듯 번쩍거렸다. 나는 지금 보이고 있는 이 기이한 날씨변화로 인하여 이미 자연적인 법칙을 초월한 초자연적인 존재의 권능이 이곳에 미쳤다는 것을 직감할 수가 있었 다. 불안하고 두려워졌다. 아덴의 권능이 이곳에 닿은 지금, 나는 어떻게 되 는 걸까? 라센샤르를 보내고 난 터라, 혼자 남겨진 나는 애써 두려움을 밀어내고 침 착해지려 노력했다. “셀레네스?” “헉!” 등 뒤로 들려오는 한 목소리에 나는 몸이 굳어지고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껴야 했다. 나를 셀레네스라 부르는 이는 아덴일 거라 생각한 것이다. 나 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찰랑거리는 긴 청 흑발을 뒤로 묶은 모 습의 한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지스카?!” “맞아.” 마계로 돌아간 줄로만 알았던 그가 여기에 서있다니... 나의 커다란 눈은 휘 둥그레 하게 떠졌다. “넌 마계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나야 마계로 돌아가고 싶었지. 이곳 인간계는 질색이거든. 그나저나, 셀레네 스. 내가 왜 마계로 돌아가지 않았는지를 이곳에서 느긋하게 듣고 싶은 건가? 아니면, 아덴이 곧 손길을 뻗치기 전에 내가 너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 주기를 바라는 건가?” “무, 물론. 마계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면,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 주길 바 래.” 내가 얼떨결에 이곳을 벗어나기를 답하자, 지스카는 특유의 비릿한 미소를 지 어 보이더니, 나를 붙잡아 암흑 속성의 마나를 운용하여 공간이동을 시전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쿠르르 쾅- 순간 번쩍하더니 하늘을 가르는 듯한 굉음을 내며 번개 하나가 곧장 이곳으로 떨어져 내려왔다. 마치, 하늘의 분노가 나에게 떨어지는 듯했다. “이동!” 지스카는 ‘이동!’ 이라는 간단한 시동어를 외쳤고, 번개가 우리의 머리 위로 떨 어지기 직전에 마법은 시전되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나와 지스카는 번개에 맞 아 타죽게 될 뻔했지만, 다행히 우리는 장거리 공간이동을 하여 백색 평원을 벗어난 은백색의 눈이 덮인 어느 작은 마을로 이동해 오게 되었다. “아덴은 우리가 이동한 좌표를 금방 읽을 거야. 일단 어디 들어가서 몸을 숨겨 야겠어.” “혹시, 내가 끼고 있는 실버 반지의 기운을 추적하지는 않을까?” “글쎄, 그 반지의 기운은 네 남편이나 잘 알아볼 것 같은데? 그 반지는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기운을 내뿜지 않는 것 같아. 그저 반지의 주인만 그 기 운을 읽을 수 있고 추적할 수 있을 걸.” 지스카는 대충 답하며 입고 있던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쓰고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더니 서두는 기색으로 어느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결국 나는 그 를 따라가며 물었다. “분명, 미카엔은 네가 마계로 돌아갔다고 말했었는데?” “그랬겠지.” “그렇다면, 미카엔은 네가 마계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안단 말이야?” “그래,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지. 마계로 돌아간 척하고는 이곳에 와있으 라고.” “뭐? 그게 정말이야? 미카엔이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못 믿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지스카는 왠지 코웃음을 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못 믿겠으면 말든지. 그는 네가 권능을 되찾는 결심을 하면 소멸할 작정을 하고 있는 아사드를 따돌리고자 나에게 마계로 돌아간 척을 하라고 한 거야.” 그 대화를 끝으로 나는 일단 궁금증을 접고는 지스카를 따라 조금 걸어 작은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 상점은 아주 잡다한 물건들을 파는 곳이었는데, 지 스카는 나에게 돈을 요구하더니, 그것으로 이곳 마을의 전통적인 의복인 듯한 허름한 외투와 모자, 그 외에 잡다한 물품을 구입하였다. 그리고는 외투를 바 꾸어 입고 모자를 쓰더니, 나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했다. “으으, 이 외투는 너무 추워.” “잔말 말고 아침식사나 할 겸, 어디든 안으로 들어가자. 어쩌면, 아덴은 이 근처에 와있는 것일지도 몰라. 대리자의 육체를 하고서 말이지.” 지스카와 나는 식당으로 보이는 어느 건물로 들어갔고, 홀의 구석으로 자리를 잡았다. 식당의 홀 안은 제법 훈훈했다. 아주 독특하고도 특이한 이곳의 방식 으로 난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추위로 얼은 몸을 녹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지스카에게 다시 질문 했다. “너 미카엔에게 뭔가 맹세를 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뭐지?” “맹세가 뭐냐고?” 나의 질문에 지스카의 얼굴 표정은 갑자기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새삼 열이 받 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조심스러워졌으나 다행히 지스카는 나의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네가 권능을 되찾기 전까지 내가 실버 드래곤의 명령을 듣는다는 거였어. 마계의 절대자 이름으로 맹세를 했지! 실버 드래곤이 나에게 한 첫 번째 명 령이 뭔지 알아? 네 존재에 대해 함구하라는 거였어.” 맹세의 내용이 지스카가 미카엔의 명령을 듣는다는 거라니... 의외였다. 이렇 게 되면, 지스카는 미카엔의 수족이나 다름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사실, 마 족이 마계의 절대자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다는 것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예전 마족에 대한 책에서 본 내용에 의하면, 마족이 절대자의 이름으로 한 맹세를 어기면, 그의 생명은 하나의 숙명과도 같은 징벌로서 마계의 절대자 의 손에 저절로 되돌려지게 되어 있었다. 고위 마족들은 절대자의 손에서 창조되었으니 그 생명은 다시 절대자의 손으로 거두어지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곧 죽음인 셈이다. 인간계와는 너무도 다른, 마계에서의 원칙이며 순리이며 자연 법칙이었다. ‘그래서 지스카가 미카엔에게 꼼짝 못했던 건가? 맹세의 내용은 그저 나의 존재를 묵인하고 나를 해치지 않겠다는 내용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엄청난 희생을 요하는 맹세였잖아?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도 이런 맹세를 그냥 했 다는 것은...’ 나는 지스카에게 조금 떠보는 말을 해보았다. “지스카, 조금 솔직해지는 것이 어때? 그때, 나를 상처 입힌 것으로 인하여 폭주한 미카엔에게 자신이 당하게 생겼다 하더라도, 고위 마족으로서 굽힐 수 없는 자존심이란 것이 있었을 텐데?“ “아아, 순간의 다급함으로 어째서 절대자의 이름으로 그런 엄청난 맹세를 했 냐고 따져 묻는 건가? 그렇다면 이것만 말하지. 셀레네스, 너와 난 목적이 같 아. 그래서 기분은 무척 나쁘지만 고위 마족으로서의 자존심은 한 번 접었지.” 지스카는 더 이상 대꾸하기 귀찮다는 듯 그 어조는 약간 위압적이 되어 있었 다. 결국,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급사가 가져온 뜨거운 물이 담긴 잔 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하아, 그나저나 미카엔은 이렇게 나에게 위험이 닥칠 것을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던 걸까? 그는 내가 무사히 권능을 되찾을 수 있도록 미리 대비책을 예비 해 놓은 것 같다. 레어로 통하는 마법진을 비롯해서 지스카가 나를 돕도록 만 든 것까지 말이다. 대화가 떠오른다. “그런데 도현이의 운명의 상대는 대체 누구일까? 궁금해. 너, 솔직히 말해봐. 누구를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 없지?” “사랑? 사랑이야 많이 해봤는데? 하지만 그 사랑에 목숨을 걸어본 적은 없는 것 같아.” “흐응, 그래? 하긴, 넌 이제 19살이니 진짜 사랑을 못해봤을 수도 있겠네. 하지만 도현아, 이 누나가 충고하겠는데 너무 가벼운 것은 안좋아. 그리고 네가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들에게 기대감 같은 것도 주지 말고. 명심해. 그렇게 여자들에게 상처를 주다가는 언젠가 네가 상처를 받을 날이 올 거 야.” “웅~ 누나, 그건 너무 무서운 말인데? 하지만 걱정없어. 나중에 내 운명의 상대에게는 잘해줄 거니깐.” “야야~ 이도현! 그렇게 간단할까? 만약 네 운명의 상대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님 네가 그 운명의 상대를 사랑할 수 없는 위치에 있게 된다 면? 그것도 아님 넝게 상처받은 여자들이 너를 방해하며 물고 늘어진다면 어떻할래?” “에이~ 설마, 그런 불행한 일이 있을라구. 그리고 나는 운명의 상대 따위도 믿지 않으니깐 그냥 이대로 살래.” “잘났어, 이도현. 언젠가 설마가 사람을 잡을 날이 올지도 모른단 말이야!” 설마가 사람을 잡게 될 날... 결국, 나는 남자의 기억을 갖은 소녀가 되어 미 카엔을 사랑함으로서 운명의 상대를 사랑하기 어려운 위치에 놓이게 되었었 다. 그리고 나를 사랑한 엔카루스가 여러번 방해를 하지 않았던가? 나는 젖은 황금빛 눈을 들어 아사드를 응시했다. 아사드는 빛의 검을 든 손 을 미세하게 떨었다. 그의 표정은 평소처럼 무감각해 보이고 차가워 보였으 나, 미세하게 떠는 팔만큼은 그의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아사드가 쥐고 있는 검에 힘을 꽉 주었을때, 근방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사드님! 그 쪽에 셀레네스가 있습니까?” 이에 아사드는 흠칫하더니 잠시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체념하듯 다소 불안정한 목소리로 답변을 외쳤다. “이곳엔 아무도 없다!” “그럼, 저희는 숲의 남쪽 부근으로 가 셀레네스를 찾겠습니다!” 그렇게 신족 한 무리가 다른 쪽으로 사라지자, 아사드는 빛의 검을 내려놓 았다. 그리고 앞으로 한발짝 다가와 나에게 손을 가져갔다. 파앗- 순간, 강한 빛이 그의 손에 발했다. 그 빛은 공격력을 담고 있지 않았다. 그 것은 치유의 빛인 것이다. 아마도, 리커버리(Recovery)인 것 같았다. 동상에 걸린 듯한 나의 몸은 순식간에 치유되어 갔다. 참으로 대단한 능력이었다. “가십시오, 셀레네스. 저는 오늘 당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사드?” “당신은 1계급이었던 최고위 신족이었으니 원하고자 한다면...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의 분신인 대리자들의 존재를.” 의미를 무척이나 함축한 듯한 아사드의 말에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리고 돌아서서 아까 신족들이 간 방향의 반대쪽으로 걸었다. 그렇게 몇발짝 걷다가 뒤를 돌아 아사드를 바라보았다. “아사드, 오늘 내가 받았던 것... 결코 잊지 않을 거예요. 이로서 나는 아사드 에게 세 번째로 도움을 받았군요.”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그에게 말했다. 아사드는 언젠가 자신의 주인에게 해를 가할 지도 모르는 존재를 구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한번 나에게 도움을 주었 다. 그것은 아사드에게는 너무도 괴로운 일일 것이다. 나는 느낄 수 있을까? 나에게서 흩어져 간 조각들. 그림자 조각들이 모아지듯 분신들이 모여 하나가 되듯 흩어진 하나의 운명을 기억해낼 수 있을까? ...이로서 나는 행복해질까? [...대리자를 찾으세요. 각성한 대리자들이 모여야 권능이 살아나고 부활합니다. 그들은 대리자이자 그림자, 그리고 나누어진 권능의 조각] 한 목소리가 나의 귓가에서 맴돈다. 그 목소리는 너무도 그리운 느낌을 자아냈 다. 너무도 따뜻했다. “셀레나...”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때론 눈물 흘리며 원망을 하기도 했던, 나의 또 다른 어머니. 그리고 내가 사랑했을 영혼의 조각, 내가 잃어버린 운명의 파편. 셀레나의 이름을 중얼거린 순간, 나의 시야 앞에 어떤 풍경이 펼쳐졌다. 온갖 꽃이 만발한 봄의 끝자락에 파묻힌듯한 건물의 모습이 나의 눈에 들어왔는데, 그 것은 무척이나 익숙하게 느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이곳은 언젠가 내가 한 동안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나름대로 의미깊었던 시간을 보냈던... 서대륙 아스탄샤에 있는 마법사들의 탑이다. [라비스] “엄마?” 나를 부르는 셀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위를 계속 돌아보며 그녀를 찾았다. [라비스는 엄마 딸이지?] “엄마, 어디있어요? 나 힘들어요. 흑! 엄마.” [엄마는 라비스가 있어 늘 행복하단다. 클레아에게는 루이가 있듯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엄마.”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그 뒤로도 그녀를 애타게 불러봤지만 들려오는 것은 공허하게 느껴지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메아리일 뿐이었다. 그 메아리는 나와 셀레나가 있던 공간을 가볍게 일그러 뜨렸다. 나의 기억과 상념이 만들어낸 그 공간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왠지 상실감이 든다. 언젠가 느껴본 듯한 익숙한 상실감... “이봐! 눈 좀 뜨라고. 엄마는 그만 찾고.” “엄마...” “어휴~” 누군가가 나의 멱살을 거칠게 흔들어댔다. 거친 흔들림에 의해 머릿속까지 마구 흔들렸다. 으윽, 누가 나를 이렇게 무식하게 깨우는 거야? 이렇게 나 를 깨울 사람은 루이스 밖에 없는데... 나는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을 간신히 떠보았다. 그러자 나의 코앞에서 어른 거리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봐, 이제 정신이 들어?” 왠지 차가운 이미지가 덜해 보이는 듯하지만 서글서글하고 부드러운 눈매, 듣기 좋은 맑은 목소리, 게다가 이 말끔한 얼굴은 미카엔인데... 에? 미카엔?! 흐리멍텅하게 앞을 응시하던 나의 눈은 순간 동그랗게 떠졌다. 그러자 앞에서 나를 지켜보던 그 존재는 갑자기 내가 눈을 땡그랗게 뜨자 놀랐는지 조금 움 찔했다. 놀랄 것까지는 없는데 말이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실망한 기색이 다분한 눈빛을 했다. 자세히 뜯어보니, 나를 깨우던 존재는 시릴 정도로 눈부신 은발이 아니라 밤 갈색 머리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이도 미카엔보다는 어려보였다. 내가 그를 미카엔으로 착각했던 것은 그저 눈매가 약간 닮아 있었고 목소리 가 비슷해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아... 그래도 정말 많이 닮았다. 마치, 형제처럼. “뭐야? 그 잔뜩 실망한 눈빛은... 숲의 밖에서 정신을 잃고 있는 것을 주워다 돌봐주었더니.” ‘주, 주워다? 내가 물건인가, 길잃은 강아지인가? 주워다 돌봐주게?’ 그의 말 중에 다소 부적절한 단어가 들어가 있긴 했지만, 일단 나를 구해주었 다니 나는 감사의 말을 해야 할듯했다. “구해줘서 고마...” “근데, 왜 혼자의 몸으로 그곳에서 쓰러져 있었던 거지? 내가 발견하지 않았 으면 얼어죽을 뻔했다구.” “그, 그게...” “음...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아! 난 페르딘이라고 해. 직업은 여행가에 시인 이며 공상가이지. 하하.” “아하하. 나는 라비스.” 무척이나 쾌활한 청년이었다. 그리고 무척이나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나는 지금 무척이나 절망스러운 상황에 있는데, 왜 처음 보는 이 남자와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대화하고 있는 걸까? 그가 웃는 얼 굴을 하자 나도 엉겁결에 따라 웃는 얼굴이 되었다. 기묘하고도 우습다. 이 남자에게는 상대방을 최면걸 듯 웃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 걸까? “음... 이제, 마을 쪽으로 가야겠군. 너 깨어날 때까지 돌보느라 늦어버렸잖 아?” 페르딘은 그렇게 나를 탓하듯이 말하고는 피우고 있던 모닥불을 밟아서 끄 더니, 어느 방향을 향해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이에 나는 그를 쫓아가며 물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나로서는 성격 좋아보이는 여행가가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행가라고 했죠? 지금 어디를 향하는 중이죠?” “그냥, 좋은 곳! 너는 어디 갈 생각인데?” 그의 말에 나는 황당해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아까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항상 셀레나의 꿈을 꿀 때면, 나는 크로시벨가의 배경으로 꾸었다. 그런데 오늘 꿈은 뭔가 달랐다. 게다가 셀레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각성한 대리자들이 모여야 권능이 살아나고 부활한다라... ‘각성한 대리자들이 모여야 권능이 부활한다면... 헉! 그러고 보니, 첫 번째 대리자인 셀레나와 두 번째 대리자인 루이안트의 누나는 이미 세상에 없잖 아?’ 나는 그제야 생각해낸 내용에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 난 바보였던가? 이렇게 되면, 각성한 대리자들을 찾아도 모두 모일 수는 없게 된다. 나는 황금빛 고운 머리칼을 두 손으로 쥐어뜯었다. 그리고는 어떻하지, 어떻하 지? 중얼대며 입술을 깨물었다. 또다시 절망감이 드는 순간이다. 이런 나를 기이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페르딘의 눈길을 느껴졌지만, 신경쓰 지 않고 아사드가 나에게 했던 말을 생각했다. 그는 내가 원하고자 한다면 대리자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을 느끼는 방법따윈 모 른다. 그들을 직접 대면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에게 알 수 없 는 친밀감과 그리움을 느껴왔다. 「엄마는 라비스가 있어 늘 행복하단다. 클레아에게는 루이가 있듯이...」 선명하게 기억되는 셀레나의 꿈. 그녀가 마지막에 했던 그 말이 나의 뇌리에 더욱 깊게 남는다. 어쩌면, 이것이 열쇠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셀레나에게는 내가 있고, 클레아에게는 루이... 루이안트?’ 뭔가 깨달아진 나는 황금빛 눈동자를 커다랗게 떴다. 그러자 페르딘이 나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너 정말 표정이 풍부하구나? 그래도 제발 눈 좀 크게 뜨지마. 그렇게 혼자서 온갖 표정을 다 짓다가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니깐, 왠지 무서워.” “페르딘, 결정했어요. 나는 아스탄샤로 갈 거예요!” “헉! 아스탄샤? 거긴 엄청 먼 곳인데? 아까의 꿈이 의미 깊은 메시지를 담은 꿈이라면, 그 배경이 마법사들의 탑이 었던 것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일단 아스탄샤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미카엔이 걱정된다. 아마도 아덴은 지금까지는 미카엔에게 해를 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덴은 곧 잡힐 듯한 나를 추적하고 있을 테니 말이 다. 하지만 내가 어느 정도 아덴이 시야에 벗어나게 되면, 그는 나를 찾기 위해서 다시 미카엔에게 무슨 해를 가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또 한번 아덴을 유인해야 하는 걸까? 미카엔은 지금쯤, 나에 대한 걱정으로 애가 타고 있을 것이다. 가슴이 답답 해져 온다. -4- 눈의 여왕이 축복하듯 고운 빛의 눈꽃을 다시 우리 머리위로 뿌리기 시작 했다. 페르딘과 나는 그 차가운 아름다움에 몸을 내맡기며 앞으로 나아갔 다. 지독하게 느껴지던 추위는 진작에 무감각해져 있었지만, 나는 아늑하 고도 따뜻한 쉴 곳이 너무도 간절했다. 그 간절함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도현으로서 살던 세계에 대한 향수로 이 어졌다. 나는 제작년 겨울 이후로 먹어보지 못한 따끈한 호빵과 난방이 되 는 거실에서 아무 생각없이 보던 TV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힘들어질 때면, 늘 고질병이 도지듯 떠오르는 향수였다. 하지만 내가 그리워하고 있는 그것은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 나를 괴롭게 했다. 아사드의 말로는 내가 있던 곳은 봉인과 망각의 세계라 했었 다. 도현의 기억은 셀레네스로서의 긴 생애 중에서 떨어져 나간 단편적인 꿈에 불과할 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는 지독한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19년간 나를 키어온 한 세계, 철썩같이 믿고 있던 진실이 마음속에서 무너진 동시에 나의 믿음은 배신 당한 셈이 아니던가? 그것은 태양이 지고 나면 달이 뜬다는 우주의 원칙 마저 거짓일 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의심마저 들게 했다. 하지만, 그러한 운명의 파급에 대한 나의 흔들림은 금방 가라앉았다. 작년 에 내가 보였던 의식 분열증처럼, 깊은 영혼의 상처와 방황으로 자리매김 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내가 미카엔의 사랑을 믿으며 그를 의지하기 시작한 것이 이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황금빛 노을이 나의 눈앞에서 지고 있나 나는 노을과 함께 여행하고 있네 영원히 석양이 지지 않을 그곳으로... 수많은 바람들이 스쳐간 이 영혼 그 아름다움에 입을 맞추리 황금빛 파도가 나의 눈앞에서 넘실거리고 있나 나는 눈부심의 바다위를 여행하고 있네 영원히 석양이 지지 않을 그곳으로... 눈물과 그리움으로 젖은 이 영혼 마침내 사랑을 꿈꾸어 보리 페르딘은 백색대륙에서 오래도록 여행가의 삶을 살아온 듯, 익숙하게 앞을 나 아가며 노래까지 부르다가 문득 나에게 말을 걸었다. “라비스, 이곳 근방에 루벨튼 시가 있거든. 그곳에는 꽤 유명한 마법사가 살아. 아스탄샤로 가야 하는 급한 이유가 있다면 마법사의 이동 마법을 빌리는 것도 좋을 거야. 자금만 넉넉하다면 말이지. 엇?! 안색이 안좋네?” “아... 괜찮아요. 그런데 그 마법사...” 가픈 숨을 몰아쉬며 답하던 나는 말을 끝까지 마치지는 못했다. 조금 전부터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 주위 모습에 극심한 어지럼증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몸의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다. 도대체, 나의 육체는 이다지도 허약한 걸까? 내가 털썩 눈밭으로 쓰러지자, 페르딘은 놀라며 다가왔다. “앗!! 라비스? 이런! 얼굴이 불덩이네. 또 쓰러지다니, 미치겠군!”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동행인이 두 번째로 쓰러진 모습을 보는 페르딘으 로서는 투덜댈 만도 했다. 이로서 그에게 두 번 신세지게 된 나였으니... 홀 가분한 단신의 여행가였던 페르딘은 귀찮은 동행인을 만나게 된 셈이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여전히 몽롱한 듯 열에 들떠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나의 귓가에서 누군가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 소리로 보아, 한 명은 페르딘이고 다른 한명은 중년의 여인인 듯했다. “아주머니, 정말 감사합니다.” “호호, 환자가 있는 여행객을 내칠 수야 있나요? 그런데, 이 아가씨 무척 아름다운 분이군요. 인간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애인인가요?“ “아, 아닙니다. 동생입니다. 하하핫.” “...그런가요? 그런데 걱정이군요. 약물을 목구멍으로 넘기질 못하니, 누군 가가 억지로 먹여야 하는데... 지금 열이 심해서 이대로 방치되면 위험해지 거든요.” “헛! 그게 정말입니까?” “당신은 저 아가씨의 오빠가 되니 약을 먹이는 것은 알아서 하세요. 전 남 편이 오기 전에 저녁 준비나 해야 하겠군요. 묽은 수프를 끓여놓을 테니 아 가씨가 깨어나면 저를 부르도록 하세요.” “예, 감사합니다.” 중년의 여인은 방을 나간 듯 조용해졌다. 페르딘만 내가 누워있는 방에 남은 모양이었다. 곧, 그의 갈등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휴... 약을 어떻게 먹이지? 에잇~ 모르겠다.” 뭔가 결심을 한 듯 그의 기척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 체된 후, 그의 손이 나의 턱을 잡는 것이 느껴졌고, 그로 인해 나의 입술은 살짝 열렸다. 나의 턱은 잡은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왠지 그가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약을 먹이는 것뿐인데, 왜 손을 떨고 그러는 것일까? 혹시 수전증이 있나? 그는 더욱 다가왔는지, 낮은 숨결이 나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이쯤 되자, 상황이 궁금해진 나는 입술에 뭔가 부드러운 감촉이 스치려는 순간,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나의 코앞에서 표정을 찌푸리고 있던 페르딘의 얼굴이 보였다. 왠지 괴로워 보이는 얼굴이다. 꿀꺽. 페르딘의 목구멍에서 뭔가 꿀꺽 넘어가는 음향이 들려온다. 페르딘은 나를 먹이기 위한 약물을 입안에 가득 머금고 있다가, 내가 갑자기 눈을 뜨자 놀 라 자신이 삼켜버리고 만 것이다. 그의 표정이 찌푸려져 있었던 것은 약물이 무척이나 써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우으윽~ 써!” “풋!” 그 약물은 몸을 부들부들 떨게 만들고 그의 표정이 오만상으로 구겨질 만큼. 썼나 보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우습게 느껴졌던 나는 정신이 여전히 몽롱한 가운데에서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아, 불쌍한 페르딘이다. 나를 위해 어쩔 수없이 머금었다가 삼켜버린 저 약물이 얼마나 썼을까? 시간 맞추어 의식을 되찾길 잘했다. 그렇게 상황을 대충 때려 맞추어 해석한 나는 마음 깊이 안도를 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따뜻한 곳에서 잠시 쉬어서 그런지, 약을 먹지 않았어도 몸이 좋아져 있었다. 그동안 나는 급작스레 바뀐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쇠약 해져 있다가 열감기까지 겹쳤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회복이 빨라서 다행이었다. 나는 페르딘에게서 그간의 상황을 대충 들었다. 그는 쓰러진 나를 들쳐업고 걷다가 우연히 지나가는 짐마차를 만났었던 모양이었다. 그 짐마차를 몰고 있던 이는 근방에서 살고 있는 인심좋은 중년 부부인 큰아들이었고, 우리는 그들에게 운좋게 신세를 질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페르딘과 함께 아침 일찍 서두르며 렌체르 부부라 불리우는 그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러자 렌체르씨는 짧은 인연에 아쉬워하며 나를 큰며느리 감으로 탐을 내었는데, 이에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이미 결혼한 몸인을 밝 혀야 했다. 물론, 그들은 눈에 띄게 놀라며 실망한 표정을 지어보였고, 그 중에서 내색은 안했지만 페르딘이 가장 놀라워하는 눈치였었다. 렌체르 부부의 집을 나와 걸으며 자연스레 페르딘에게 말을 놓고 대화하다 가, 시릴 정도로 차갑지만 무척이나 상큼하게 느껴지는 아침 공기를 한껏 마셔보았다. 나의 영혼이 순백색으로 정화되는 느낌이다. “페르딘, 루벨튼 시까지만 나와 동행해 줄 수 있겠지? 여행에 드는 물적 부 담은 모두 내가 낼게. ” “이왕 도와주기로 한 거 끝까지 돕지 뭐. 나야 정해진 여행 목적지도 없는 떠돌이 시인이니.” 페르딘은 짧은 밤갈색 머리칼을 뒤로 넘겨보였다. 그 모습을 힐끗 보며, 나 는 페르딘이 백색 대륙 출신이 아닐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근데, 페르딘? 루벨튼에서 산다는 그 마법사는 정말 뛰어난 거겠지? 적 어도 6서클 이상은 되어야 할 텐데.“ 그 마법사의 마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6서클 정도만 된다면, 마력 4서클 인 내가 힘을 합쳐 어떻게든 마법진을 발동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 광활한 백색 대륙만 벗어난다면 나는 아멘시타를 조심스 럽게 불러 미카엔의 안위부터 확인할 것이다. ‘만약 미카엔이 없다면, 이세계에서 나의 존재 이유는 사라지겠지.’ 나는 길가에 쌓여있는 눈을 한움큼 쥐고는 손을 펴보였다. 그러자 은백색의 가루들은 나의 손아귀에서 조금씩 빠져나갔다. 아무런 의미없는 행동이지만, 나는 그것을 보며 왠지 가슴이 아프다고 생각했다.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와 쌓인 눈밖에 보이지 않은 이곳 백색 대륙... 그 차 가운 아름다움에 가슴이 설레이는 나는 이제 미카엔을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나 보다. -5- 까만 밤하늘이 투명해보인다는 표현은 할 수 없는 것일까? 맑게 갠 이곳의 하늘은 그 빛이 너무도 순수해 보여서 그저 흑단 같아 보인다는 것은 왠지 무심한 표현처럼 느껴진다. 페르딘과 함께 어느덧 루벨튼 근방에 위치한 어 느 숲에 이른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이며 어둠에 잠겨든 새하얀 세상이 내는 고요한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쯤 마드린은 갑자기 없어진 나의 행방에 얼마나 당황해 할까? 아마도 내가 사라진 일은 모두가 함구해야 할 일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나의 측근 몇몇은 행동의 제한을 받게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왕비의 갑작스런 부재는 왕실과 귀족들을 흔들리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왕실은 시끄러워 질 것이다. 미카엔은 아마도 나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 은 어쩌면 감시하고 있을 아덴의 무리에게 내가 있는 곳을 알려주게 되는 일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 그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로히얀스의 왕이지 않은가? 수많은 이들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자이다. 그만큼 고귀한 자이다. 신과 가깝다고 일컬어지는 드래곤의 피를 받은 자이며, 인간들 위에 우뚝서 있는 왕의 피를 이어받은 자이다. 그 고귀함에는 너무나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그 책임은 때론 가장 소중한 것도... 외면해야 할 때가 있다. 예전에 내가 아스탄샤로 도망쳤을 때 미카엔이 나의 행방을 찾았던 것처럼. 내가 마족의 독에 당했을때 왕위 계승자로서의 임무를 뒤로 하고 직접 나 와 함께 시리어스 섬을 찾았던 것처럼, 이제는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라비스!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갈 길 바쁘잖아?” “아! 응.” 페르딘은 나를 한번 재촉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앞장 서 걸었다. 오랜 떠 돌이 생활로 익숙해진 듯한 거침없는 몸짓으로 앞을 나아가는 페르딘이었다. 그 모습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가 페르딘을 만난 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페르딘으로 인해 두 번이 나 동사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고 힘겨운 백색 대륙 여행이 좀더 용이해진 점도 있지만,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의 쾌활함과 스스럼없는 태도에 금방 친근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게다가 왠지 미카엔을 떠올리게 하는 서글서 글한 눈매와 목소리에 나는 그가 정말 좋아졌다. 나를 대하는 그 유쾌함과 순수함도 정말 좋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그의 웃음과 노래와 사소한 대화에 마음이 비어있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페르딘이 없었으면 나는 이곳 땅에 묻히고 말았겠지? 내가 페르딘에게 받은 도움은 값진 재물로도 갚기 힘들 거야.” “아하하, 뭐 그럴 것까지... 내가 너를 구했던 것은, 넌 아직 죽을 수 없는 운명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운명? 페르딘도 운명을 믿나 보지?” “당연히 믿지. 운명이란 거 신들 조차도 그것에 휘둘린다고!” “…….” “하지만 누군가가 말하길, 자신의 강한 의지가 가끔은 운명이 될 때도 있 대.” 페르딘이 하는 말에 다시 한번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왕비의 일기장 에 있던 한 구절이었다. 「한 고귀한 존재의 강한 의지... 그 강한 의지가 곧 운명이 된다」 순간, 나는 뇌리 한구석에서 퍼즐의 일부분이 맞추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 지만 얽히고 얽힌 그 퍼즐의 내용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무엇을 깨달은지도 명확하지가 않았다. 다만, 알 수 없는 전율만 느낄 뿐이었다. “페르딘도 운명에 휘둘린 적이 있었어?” 시린 백색 대륙바람에 조금씩 날리는 황금빛 머리칼을 추스르며 그에게 묻 자, 대답은 아주 한참 뒤에 들려왔다. “나는 예전에 한번 운명의 싸움에서 진 적이 있었어.” “원망하나 보지?” “원망하진 않아. 하지만 가끔은 그 기억으로 인해 내 영혼이 더럽혀질 때가 있어.” 영혼이 더렵혀진다는 말은 즉, 증오의 마음으로 가득 채워진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을까? “페르딘, 나는 너와의 인연을 행운이라 생각해.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이 말을 왜 그에게 뜬금없이 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어떤 느낌이 불현듯 나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를 만난 건 행운이 되지만, 그는 나를 만난 것이 하나의 악연이 될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또다시 비극이 나의 곁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건가? 불안하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서 어설픈 예지의 능력이 눈을 뜨는 그런 것은 아 니겠지? 저번에는 잠시의 평화스러움을 폭풍의 눈이라 느낀 적도 있잖아?’ 나는 불길한 생각을 하며, 부드러운 곡선으로 치렁거리는 황금빛 머리칼 을 잡아뜯어 보였다. 페르딘은 그런 나를 보고는 작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정말이지, 아리따운 금발 아가씨가 내 마음을 마구 들쑤시는군. 라비스! 나 역시, 너와의 여행이 즐거워. 내가 너를 구하게 된 건 행운이라 생각해. 이번 기회에 내가 떠도는 영역을 백색 대륙 밖에까지 넓혀볼까?” “엇? 그럼 나와 계속 동행해주겠다는 말이야?” “음, 그럴 의향이 있다는 거지. 근데 너 말야, 나에게 너무 예쁜 모습을 보 이지 말아, 난 남편있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싶지 않아.” “그럼, 못생긴 모습도 보여줄게.” 페르딘의 장난스런 말에 나는 상당히 유치하게 답변하며, 눈꼬리와 입꼬리 를 두 손가락으로 잡아 쭈욱 늘려보였다. 미카엔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은 나의 우스꽝스런 모습이다. 음... 그러고 보니, 미카엔과 관계될 때는 나도 소녀다운 새침한 면을 아주 조금은 보이나 보다. “아하하하핫!!” 죽을 듯이 폭소를 터뜨리는 페르딘이다. 우리는 계속 말없이 숲을 걸었다. 걷는 동안, 많은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말이 없었고, 페르딘은 그런 나의 모습에 섣불리 말을 걸지 않았다. 그렇 게 한동안 걷는 동안, 루벨튼의 동쪽 외곽지역에서 살고 있는 유명하다는 그 마법사를 찾아가는 나의 의욕은 많이 꺾여 갔다. 시간이 지날 수록, 미카엔과 헤어졌던 시간이 길어질 수록 나는 점차 견디기 힘들어졌다. 미 카엔의 안위를 확신도 못한 채,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여행을 한다는 것 은 나의 영혼을 새카맣게 태우는 일이었다. 페르딘의 유쾌한 말을 듣는 것 도 더 이상 나를 달래지 못했다. 그저, 나를 사랑해주는 많은 이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무엇 때문에 이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 걸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만 든다. 셀레나의 소중했던 딸인 본래 라비스의 육체로 숨을 쉬고, 두 번째 대리자 인 루이안트 누나의 생명으로서 삶을 연장했던 나... 이제는, 아무런 상관 없는 페르딘마저 수도 없이 엇갈리고 삐꺽거리는 나의 운명선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 정령의 여신인 셀레네스는 자애의 여신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 라는 존재 는 많은 이들을 힘들게만 만들었다. 차라리 나 하나만 사라진다면. 나와 연 관되어 운명이 어긋났던 모든 이들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감정이 격해진 나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어느 방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앗! 라비스, 어디가?” “날 따라오지마! 페르딘.” 페르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어느 곳을 향해 심장이 터질 듯 숨이 거칠어질 때까지 뛰었다. 그러다, 페르딘을 따돌렸다고 생각되는 어느 곳에 멈추어서서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한 숨을 몰아쉬며 어느 나무의 줄기에 등 을 기댔다. “...차라리 마음편하게 죽는 것이 나아. 흑!” 너무도 힘든 이순간, 나는 흐느끼며 떠오르는 한 가지를 생각했다. 미카엔 이 이곳에서 나를 달래주게 될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환영이나마 그의 얼굴이 보고 싶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조 금 떨어진 곳에 나타난 인영이 기적처럼 나타났다. 나는 젖은 황금빛 눈을 깜빡였다. 나의 가슴은 작은 기대감과 환영 따위로 실망하고 싶지않은 거부감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새하얀 로브를 걸친 그 존재는 시리도록 화사한 은발과 조각하여 다듬어 놓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보고 싶어하던 그 얼굴은 약간 창백해 보였다. “미카엔?” 부끄럽게도 나의 목소리는 가녀리게 떨리고 있었다. 미카엔은 나에게 다가 오더니 끌어안고는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었던가? 라비스 네가 어디에 있어도 나의 영혼은 너를 느끼고, 나의 눈은 너를 찾아내고 말아. 울지마라, 라비스.” 그의 맑은 목소리는 환영의 것이라기엔, 너무도 생생했고 그리운 느낌을 자 아냈다. 나는 감정이 복받힌 나머지, 그의 깔끔한 로브에 눈물 콧물을 다 닦 다가, 나를 쫓아온 듯한 페르딘을 보았다. 미카엔에게 안겨있는 나를 보고 있 는 그의 눈은 무척이나 휘둥그레져 있었다. 6- 그러다 페르딘은 방금 전의 놀란 기색을 완전히 지운 표정을 하고는 약간은 어색한 듯하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제가 보기에는 두 사람의 영혼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찾고, 또 서로를 찾기 위해 숨을 쉬는 것 같군요.” 이제 그의 시선은 미카엔에게로 가있었다. 미카엔 역시 그런 페르딘에게 눈 길을 주었다. 격한 감정과 눈물의 재회 뒤에 이어지는 작은 마주침이다. 그 들의 시선이 맞닿은 순간, 미카엔의 부드러움과 페르딘의 유쾌함 따위는 사 라져 있었다.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숨을 잠시 멈추었다. 우리가 서있는 숲 도 숨을 멈추고 조금은 특별한 고요함을 만들어냈다. “당신은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 이로군. 영혼을 느끼고 죽음과 운명을 느 끼고 그것을 노래하지. 소중하다 생각했던 과거의 그 누구처럼.”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니 왠지 제가 대단하게 느껴지는 군요. 저는 그냥 떠돌이 시인일 뿐입니다.” 페르딘은 다시 유쾌해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유쾌함에는 마음이 비어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곧 그의 노랫소리가 우리들의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외로운 인연 끊기 놀이를 하고 있었지 그때 만난 아름답지만 슬픈 영혼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가온 인연이라 말하지만 사실은 내가 먼저 다가갔다네 행복한 인연 잇기 놀이를 할까 생각해 보았지 나에게 미소를 짓고 있는 순결한 영혼 나와의 인연을 행운이라 말하는 그 사소한 한 마디는 사실은 어리석은 자를 일깨우는 말이었다네.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은 인연 잃기를 두려워 하지 죽음을 생각하는 그리움에 젖은 한 영혼 숨을 쉬어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인가, 두려움으로 바라봤지만 사실은 서로를 찾는 영혼의 부름을 느낀 것이었다네. 페르딘의 노랫말, 그것은 그의 이야기였다. 나와 관계된 그의 이야기였다. 미카엔의 말대로 그는 정말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인 것일까? 영혼을 느끼고 죽음과 운명을 느끼는 것일까? 아까 나는 짧은 순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 었다. 나의 의지에 대해 절망을 느끼며 말이다. 그때, 페르딘은 뭔가 느끼고 는 나를 따라왔던 모양이다. 그리고 미카엔을 만난 나를 본 것이다. 그런데 페르딘은 왜 인연 끊기를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에게는 어떠한 영 혼의 상처가 있는 것일까?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은 분명 순수한 심성을 가 진 존재일 진데. 페르딘이 나에게 작별을 고해왔다. “라비스, 이젠 나의 도움이 필요없겠지? 너를 만나 즐거웠어. 방금 노래는 너에게 줄게. 부디 행복해지길.” “페르딘...” 아, 페르딘이 인연 끊기를 하려 하고 있다. 인연 끊기가 불행해지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법인 걸까? 미카엔은 페르딘의 노랫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 었던 듯 묵묵히 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페르딘? 라비스는 지금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의 도움이 필요해. 그녀는 지금 형제를 찾고 있어. 불가피하게 불운한 운명으로 헤어진 자신의 분신 이자 형제를...” 나는 미카엔이 영혼을 느낄 줄 아는 페르딘의 능력을 이용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 했다. 하지만 페르딘을 바라보는 미카엔의 감정 담긴 은보랏빛 눈 동자를 보자, 그러한 생각은 사라졌다. 「형제를 찾고 있어. 불가피하게 불운한 운명으로 헤어진 자신의 분신이자 형제를...」 왠지 형제란 단어가 나의 가슴 안에서 깊게 울렸다. 미카엔은 지금 하나의 구실로 페르딘을 어색하게 붙잡고 있는 것이다. 이에, 애써 밝음으로 가장 했던 페르딘의 거짓 표정은 점차 무너져 갔다.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 과거에 소중하다 생각했던 그 존재에 대한 그 마음 진심이었습니까?” 미카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페르딘의 눈에는 투명한 빛의 눈 물이 주룩 흘러나왔다. 그의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흐르기 시작한 그 눈물은 아무런 흐느낌도 없이 조용히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다. 남자가 저렇듯 우는 모습은 처음 본다. 여자가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 보다 더욱 애절했다. 그리고 너무 순수하고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게 느껴졌 다. 미카엔은 가만히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니, 정말 동생을 달래는 형 다워 보인다. 다음날 우리는 상티스 항구에 도착하여 서대륙으로 가는 배를 구하고 있 었다. 물론, 우리는 미카엔의 마법진으로서 이곳에 하루만에 오게 되었다. 능력 좋은 미카엔은 기이하게도 빙계열 속성이 아닌 암흑 속성의 마력을 사용했다. 빙계열은 감시받을 확률이 큰 터라, 그는 암흑 속성 마나를 운 용했던 것이다. 사실, 그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암흑 속성으로 공간 이동 마법진을 발동 시키는 것은 힘들었다. 그런데도, 그가 암흑계열 마력을 사용 가능했던 것 은 입고있는 로브가 마나 속성을 암흑 계열로 바꾸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 었다. 그것은 블랙 드래곤의 마법이 걸린 아티펙트였던 것이다. 미카엔의 말로는 프레야 왕비가 아는 블랙 드래곤에게서 받았던 것이라 했다. 그건 그렇고... 나는 어젯밤부터 머리에 쥐가 나도록 생각했던 내용들을 머릿속으로 정리 했다. 백합 궁성의 서재에는 측실의 거처 답지 않게 마법서와 드래곤에 관한 책 들이 무척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은 백합 궁 전 측실이 직접 모은 것일 거다. 왜 그녀는 그런 책들을 수집해야 했을까? 프레야 왕비는 왜 그 녀를 굳이 제거해야 했을까? 프레야 왕비가 백합궁 전 측실을 제거했던 이유에는 권력 다툼 차원인 국왕 의 총애와 왕자 말고도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가 혼자 열심히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미카엔은 페르딘에게 고개 를 돌리더니 말을 걸었다. “페르딘, 이제부터 나를 형이라 불러라!” “내가 왜 댁을 형이라 부릅니까?! 미카엔이라 부르도록 하죠. 하하핫!” 페르딘의 쾌활한(?) 답변은 미카엔의 이마에 힘줄 하나를 돋게 만들었다. 미카엔은 그동안 만나보지 못했던 동생이 이런 시건방진 모습을 가지고 있 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을 것이다. “...그럼, 네가 원하는 때에 나를 형이라 불러라. 네가 잃어버린 인연, 어머니 와 동생을 잃은 그 상처가 아물게 되는 그 순간에.” “…….” 페르딘은 말이 없었다. 체인지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Name : 라얀 Date : 28-05-2002 21:29 Line : 180 Read : 991 [25] 체인지[2부] 제10화 -권능의 조각- (7) -------------------------------------------------------------------------------- Ip address : 211.206.47.3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7- 잠시 무거운 침묵이 우리를 스쳐갔다. 그 침묵은 상티스 항구의 시끌벅쩍함 마저 고요함으로 가라앉게 만드는 듯했다. 페르딘이 잃어버린 인연... 미카엔 의 마지막 말은 페르딘 뿐만 아니라 나의 가슴 안에서도 작은 소용돌이가 되 었다. 인연 끊기를 하며 살아왔을 그가 흘린 눈물이 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 다. 나는 미카엔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미카엔, 페르딘을 동생이라 확신하는 건가요? 아주 어렸을 때 외에는 서로 얼굴도 본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알아보는 거죠?” “어쩌면 페르딘이 먼저 나를 알아보았을 거야. 나는 그가 영혼을 노래하 는 시인이란 것을 알아보았을 뿐, 페르딘이란 이름에 금방 확신을 못가 졌지. 사실 나는 정사를 직접 맡게 된 직후부터 비밀리에 줄곧 찾아왔어. 백합 궁의 전 측실과 그녀의 두 아들 행방을...” “페르딘은 정말 백합 궁성 전 측실의 아들이었군요. 저는 미카엔이 배 다른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 줄 알았어요. 왜 한번도 그러한 사실 을 말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미카엔은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건 라비스가 예전 백합 궁성의 숨겨진 일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으 면서도 나에게 말하지 않았던 이유와 같아. 라비스는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이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겠지?” “네.” “그들은 운명에 의해 순결한 영혼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야. 영 혼을 노래하기 위해 순결한 영혼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지. 만약 자신의 영혼이 더럽혀진다면 파멸하게 되어 버린다랄까. 그들은 모두 하 나의 운명으로 묶여 있다고 해. 그들이 느끼는 것을 노래로 불러야만 하 는 운명. 영혼을 노래하고 운명과 죽음을 노래하는 거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고난 능력으로 영혼을 노래하고 운명과 죽 음을 노래해야만 하는 운명. 영혼을 노래하는 특별한 음유시인. 순결하 지 못하면 파멸하고 마는... 그들의 삶은 왠지 너무 외로울 것 같다. ‘언젠가 미카엔과 페르딘은 형제로서 진정한 재회를 하겠지. 닫힌 마음을 열고 과거를 용서하며, 그들은 형제를 만난 감추어둔 기쁨을 맘껏 드러내 겠지.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부디 행복해지기를...’ 우리는 선착장 부근의 여관에서 투숙하며 하루를 보냈다. 고된 여행으로 몸과 마음이 지친 탓인지, 하루 동안의 짧은 휴식은 달콤한 꿈속을 헤매 고 있는 것처럼 너무도 평안하게 느껴졌다. 영원한 이별로서 위협하던 폭 풍도 잠시 우리에게서 비껴간 것만 같았다. 특별한 운명을 가진 우리 세사람은 백색 대륙의 도시 상티스에 머문 평범 한 이들 중 하나가 되어 유쾌한 인연 잇기를 했다. 지금 이 순간은, 로히 얀스의 왕족 신분과 불운한 과거, 확실치 못한 미래 따위는 우리의 뇌리에 잊혀졌다. “페르딘, 이 녀석 옷 좀 빨아입어라.” “윽, 그렇게 대놓고 무안 줄 건 뭡니까? 떠돌이 여행 생활을 하다보면 옷 을 빨 기회가 별로 없다구요!” “하하, 그런가? 이런! 내가 숙녀의 앞이란 것을 깜박하고 본의 아니게 페 르딘에게 무안을 주게 되었군.” “쳇!” 여관의 1층 홀 겸 식당인 이곳에 자리한 채, 독한 백색 대륙의 증류주를 주고 받으며 겉보기에 허울없는 모습을 보이는 두 사람이다. 아직 미카엔 을 한 번도 형이라 부르지 않으며 그저 여행 동료를 대하는 듯한 페르딘 이었지만 말이다. 미카엔은 국왕으로서의 근엄함과 딱딱함을 지우고 평범한 청년의 모습을 보였다. 그가 살아온 24년의 세월 동안, 이런 기회는 좀처럼 없었을 것이 다. 왕위 계승자였던 그가 어떻게 누구의 간섭도 없이 허름한 주점 안에 서 값싼 증류주를 마시며 허물없이 떠들 수 있겠는가? 엄격한 어머니 밑 에서 어릴 때부터 과중한 책임을 안고 살아왔던 미카엔은 어쩌면, 페르딘 처럼 외로운 생활을 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가 다섯 살 무렵에 페르딘의 어머니인 백합 궁 전 측실을 무척 좋아했었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가 10살 무렵에는, 어머니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 석양이 지는 백사장을 혼자 찾곤 했었 다는 말이 떠오른다. 드래곤도 풀지 못하는 마법이 걸렸다는 그 백사장에 서 미카엔은 치기 어린 마음으로 한 번쯤 어머니에 대해 원망의 감정을 품지 않았을까? 너무도 어렸지만 영민했을 어린 미카엔은, 자신의 어머니 손에 의해 소중 한 한 여인과 이복 동생들이 제거되었음을 깨닫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 렇지 않다면, 그가 정사를 직접 맡게 되자마자 백합 궁성 전 측실과 동생 들의 행방을 찾아 나설 리가 없다. ‘과거의 불운함이 기억에도 없는 이복 동생일 뿐인 페르딘과의 만남을 더 욱 소중하게 만드는 건가?’ 나는 테이블 밑으로 미카엔의 손을 살며시 맞잡았다. 그리고는 페르딘에 게 밝은 어투로 물었다. “페르딘,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은 운명과 죽음까지도 느낀다는 것이 정말 이야?” “하하, 라비스 설마 나한테 운명을 점 쳐달라는 요구를 하려는 것은 아니 겠지?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은 매 순간에 스치듯 지나가는 것을 느낄 뿐 이야. 내가 눈밭에 쓰러져 있는 너를 발견한 것도 문득 느껴지는 한 가지 에 이끌려 다가갔던 거지. 그것은 죽음. 죽음의 기운은 산 자를 유혹해. 산 자는 그것에 매혹되지.” “왠지 라비스의 영혼에 매혹되었다는 말을 애매하게 돌려말하는 것 같군, 페르딘.” 미카엔 역시, 나의 손을 꼬옥 잡으며 페르딘의 말에 마음에도 없는 트집 을 잡았다. “맘대로 생각하쇼! 미.카.엔.” “페르딘 이 녀석!” 나 외에는 누구도 감히 입에 담지 못하는 미카엔의 이름을 페르딘이 의도 적이고 천연덕스럽게 강조하며 발음하자, 미카엔의 한쪽 눈썹이 치켜올라 갔다. “하하. 그럼 정정하죠. 맘대로 생각하쇼, 라비스 남편?” “…….” “…….” 페르딘의 조금 유치한 장난으로 인해, 분위기는 조금 썰렁해졌다. 침체 되었다고 말해야 할까? 그날 저녁, 우리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여관 객실 에 놓여진 작고 허름한 침대에 누운 미카엔은 나를 끌어안아 자신의 품안 에 깊숙이 묻어버리며 나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막막하군. 아무런 단서도 없이 몇 명인지도 모를 대리자를 찾아야 한다 니.” “미안해요, 미카엔. 나 때문에 로히얀스의 국왕 자리를 비우게 되었군요.” “라비스, 네가 미안해 할 것은 없어. 덕분에 나는 페르딘도 만나고 오랜만 의 휴식도 취해보는 걸? 너는 나의 곁에만 있어주면 돼. 그것이 나의 이 기심이라 할지 라도.” 미카엔은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깝게 얼굴을 가져오더니, 간질 이듯 나의 입술을 건드렸다. 그리고 나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있던 그의 한쪽 손이 셔츠 안으로 들어와 맨살을 가볍게 스쳤다. 가슴 안에 오래 가둬두어 이미 터질 듯하게 자라난 감정을 부드러운 손길 로 담아내는 미카엔이었다. 그런 미카엔이건만, 그의 손길은 뭔가를 표현 해내기도 전에 멈칫해야만 했다. 아쉬움을 표현할 새도 없이, 그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블랙 드래곤의 아티펙트인 로브를 걸치고는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봤다. 무엇을 느낀 것일까? 휘이잉- 열린 창문 사이로 시린 바람이 몰아쳐 들어왔다. 어깨 위로 덮혀 있던 미 카엔의 은빛 머리칼은 아름다운 광택을 뿌리며 가볍게 날렸다. “화이어 에로우!(Fire Arrow)" 화르륵! “악?! 다짜고짜 무슨 짓이얏!” 화염 공격 마법 시동어를 외치는 그의 목소리에 잇달아 익숙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비명소리의 주인공은 난데없는 공격에 가벼운 타격을 입었는 지 화가 치민 듯했다. 하지만 미카엔은 그 존재의 분노 따윈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 그동안 감추어주었던 위엄을 담아 외쳤다. “라비스의 안위를 끝까지 책임짓지 못하고 마계로 도망친 것에 대한 대가다! 지스카.” ----------------------------------------------------------- 체인지[2부] 제10화 -권능의 조각- (8) -8- 창 밖에서 나던 바람소리도 이젠 수그러들었고 사방은 고요해졌다. 초라한 촛불 두 세 개가 자그맣게 춤을 추자, 지스카의 청 흑발이 차가운 빛을 발 했고, 미카엔에게 드리워진 음영은 조금씩 흔들렸다. 잠시의 흥분을 가라앉히듯 무겁게 공기가 내려앉았다. 미카엔이 자리한 의 자 등받이에 살짝 기대자, 기품 있는 그의 얼굴선이 오만하고도 날카로운 빛으로 더욱 뚜렷해지는 듯하다. 지스카는 그런 미카엔을 살기를 풀풀 날리며 노려보았다. 제법 살벌한 기 세다. 하지만 파이어 에로우에 그슬린 한쪽 소매가 스타일을 다소 구기고 있는 탓인지, 지스카의 모습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못했다. “...마계에 있던 나를 다시 소환한 이유가 뭐지?” 그의 깜짝(?) 출현은 미카엔의 소환에 의한 것인가? “엇갈린 서로의 이해를 해결해야하기 때문이지. 지스카, 너는 한동안 마 족과의 관계는 끊어야 될 거다. 그리고 우리와 행동을 따로 하며 아사드 와 접촉을 시도해라.” “네 녀석은 나를 죽일 작정이군. 결국은 나 혼자만 신족의 추격을 받으 라는 거잖아?! 내가 셀레네스와 함께 행동을 했었던 것을 이용해 미끼 가 되라는 거지?” 지스카가 잠시 참았던 분통을 터뜨리자 미카엔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 었다. “잘 아는군. 뭐, 원한다면 무사히 살아남는 방법을 알려주지.” “그게 뭐지?” “아사드를 이용해라. 그리고 마족의 근성인 네 교활함을 활용해라.” “크학! 실버 드래곤! 그걸 방법이라고 알려주는 거냐?!”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는 지스카였지만, 별다른 소득 없이 미카엔의 명령 대로 해야만 했다. 마족들이 하는 계약의 일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절 대자의 이름으로 한 맹세를 미카엔에게 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투덜거리다 결국은 창문으로 나서는 지스카를 지켜보던 나는 잠 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지스카, 셀레네스로서 나는 너와 어떤 인연을 맺었는지 알지 못해. 하지 만 미안하게 생각해. 그리고 고마워. 네 의도가 무엇이든, 이유가 어떤 것 이든 지스카는 나를 한 번 구해주었고 지금은 나 때문에 이렇게 힘들게 되었으니까. 지스카, 너는 당연히 무사하겠지?” 그러자 지스카는 나가려는 것을 멈추고 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푸른빛을 발하는 그의 흑요석과도 같은 눈동자가 의미모를 웃음을 짓는 듯 했다. “너희 신족들은 어떻게 하나 같이 다 똑같지? 네가 마족인 나를 걱정할 처지는 아닐 텐데? 나는 당연히 무사할 거다! 이래봬도, 마계 2계급 고위 마족이시거든. 큭큭, 나중에 너를 잡으러 올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 “지스카, 하나 같이 다 똑같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사드가 그렇거든. 보나마나 뻔해. 네가 지금 무사한건 아사드가 차마 소멸시키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불쌍한 녀석, 지금 한창 아덴에게 구박 받고 있겠네.” 지스카는 그렇게 말하고는 창문 밖으로 가볍게 몸을 날리더니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난 공간은 금세 차가운 바람만 남아 쏟아지는 고운 달빛 을 가득 머금었다. 나의 귓불과 양 볼은 금세 그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해 상기되는 것 같다. 미카엔은 찬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을 닫아버리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평 범한 차림새에도 지워지지 않는 고귀함... 미카엔이 한 나라의 국왕이라 는 사실을 나는 새삼 깨닫는다. 이렇게 허름한 여관 방안에 서있어도 그 는 로히얀스의 국왕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이 자리에 나를 위해 서있다. 나 때문에 국왕의 자리를 비우고 있다. 아직도, 많은 부분에 있어 미카엔에게 솔직하지 못한 나인데 말이다. 이 제라도 그와 많은 것을 나누어야 되지 않을까? “미카엔,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게 있어요.” “뭐지?”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무겁게 입술을 떼었다. 나를 바라보는 미카엔 은 진지했다. “미카엔은 지스카가 보여주었던 그 편지를 기억하고 계시겠죠? 그것을 쓴 이는 셀레나... 첫 번째 대리자이자 나의 어머니에요.” “…….” “그 편지는 셀레나가 13년 전에 나에게 쓴 유언이었어요. 그리고 미카엔 의 어머니인 프레야 왕비 전하는 셀레나와 오래 전부터 친분을 가져오셨 어요. 그것도 아주 오래 전에... 200여 년 전에 셀레나가 ‘크리스티나 아르 젠’ 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분이셨을 때부터요. 저는 얼마 전에 우 연히 발견한 프레야 왕비 전하의 일기장로서 모든 것을 알게 됐죠. 하지만 그것이 셀레나가 프레야 전하의 일기장을 통해 제 불행을 암시했던 거라는 것은 일찍 알아채지 못했고, 그로 인해 저는 소중한 것들을 잃게 되었어요.” 거기까지 말한 나는 미카엔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반응할지 초조한 마음이 들어 은 보랏빛 눈동자를 들여다보았지만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 미카엔은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블랙 드래곤의 아름다운 연인으로 유명한 크리스티나가 너의 첫 번째 대리자였고, 나의 어머니는 그녀와 블랙 드래곤하고도 관련되었 었다는 얘기로군.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이 아티펙트 로브는 그의 것이겠 고...” “그 아티펙트 로브의 본래 주인인 블랙 드래곤이 크리스티나의 연인이라 던 그 드래곤인 건가요?” “그래. 내 기억으로는 ‘메르킨’ 이라는 이름을 가진 드래곤이지. 어머니에 게서 얼핏 들은 적이 있어. 그런데 이렇게 인연이 얽혀있었는 줄은 몰랐 는걸.” 메르킨이라고? 나는 왕비의 일기장에서 이러한 이름을 본 적이 있다. 프 레야 왕비가 오래전의 일을 회상하던 그 구절. 「그러고 보니, 200여 년 전의 일이 생각난다. 그녀의 본래 이름인 크리 스티나와 메르킨, 키리아, 그리고 나의 일이.」 내가 황금빛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미카엔은 피식 웃어보였다. “아무래도, 메르킨이라는 드래곤을 만나봐야겠군. 그런데, 그 일기장이 라는 거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지?” “도서관에서요. 지금은 소실되고 말았지만요. 미안해요. 프레야 전하의 소중한 일기장인데...” 어머니의 유품이 될 일기장을 태워먹은 셈이라,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미카엔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미카엔은 화를 내는 기색이 없이 가 늘어진 눈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도서관이라... 어머니는 일기장을 도서관에다 두실 분이 아닌데... 뭔가 이유가 있을 듯하군.” “그리고 또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지금까지 미카엔을 받아들이는 걸 힘겨워 했던 이유, 작년에 의식 분열까지 앓으며 방황했던 이유는 봉인 과 망각의 세계라 칭하는 곳에서 제가 가졌던 한 가지 기억 때문이었 어요. 거짓이라 해도, 단편적인 꿈에 불과하다 해도 소중할 수밖에 없 는 기억... 저는 그러니까, 그게...” 내가 남자의 기억을 가졌었다는 말을 어떻게 쉽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에 나의 고백이 미카엔에게 마음의 짐이 된다면? 결국, 나는 한참 을 망설이다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런 나의 모습을 바라보던 미카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 다.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 라비스. 피곤할 텐데 이제 그만 자야지? 내가 재워줄까?” “윽, 됐어요. 혼자 잘 수 있어요. 저 잘게요.” “하하. 라비스, 지금 같은 경우에도 조금은 솔직해졌으면 좋겠는데.” 미카엔은 잘나가다가 갑자기 닭살 발언을 하는 경향이 있다. 미카엔의 이러한 페이스는 분위기 전환용인 걸까? 아무튼, 나는 뭔가 대단한 고해 성사를 하고난 듯한 기분으로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그러나 미카엔은 뭔가 깊은 생각을 하는 듯 오래도록 침대 근처의 의자에서 고요히 앉아 있었던 것 같다. * 계속 된 연재지연에 대해 변명은 별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책임감 상실한 작가에 대한 비난은 그냥 말없이 받겠습니다. 본의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어차피 제가 자초한 일이니까요.... -------------------------------------------------------- 체인지[2부] 제10화 -권능의 조각- (9) -9- 어느덧 말간 얼굴을 다시 드러내는 백색 대륙의 아침 태양... 순결한 아침의 손길은 이곳 허름한 여관 방안에도 어김없이 스쳐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희망을 생각해도 될까? 자꾸만 내 자신이 고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는 한 개의 물방울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그만두고 말이다. 더 이상의 비극은 없기를 바라며... 우리는 아침 일찍 서둘러 백색 대륙에서 서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섬나라 ‘루기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미카엔의 마법진으로서 이동할 수 있다면 편하겠지만, 공간 이동 좌표를 정확히 잡는 것이 어렵다는 이유로 일단 배를 타야 했다. 그나저나, 정말 이동 좌표를 잡는 것이 어려운 것인지 약간 의심이 든다. 어제 상티스 항구까지 이동해 올 때, 미카엔은 초행길 이었을 텐데도 정확히 좌표를 잡아 이동해오지 않았던가? 아무튼, 미카엔은 즐거운 여행길이라도 나선 듯 여유로워 보이는 태도로 배를 구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선장과 협상 보는 것까지 일사천리로 일 을 마쳤다. 선장은 날씨 문제를 핑계되며 출발 일을 모레로 잡았지만, 미 카엔은 당장 출발하는 것으로 우긴 것이다. 아니, 협박한 것이다. 물론, 협박에는 약간의 재물과 드래곤 피어가 사용되기도 했다. 결국, 루기아를 향하는 배는 본의 아니게 쾌속정(?)이 되어 예정보다 빨 리 항해를 시작했고, 우리는 그 배의 갑판 위에서 잠시 머물며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페르딘은 떠돌이 시인답게 아는 이야기도 많은 듯 백색 대륙에서 전해지는 전설 하나를 들려주었다. 백합 전설... 그 전설은 명칭만큼이나 아름다운 내용이 담겨 있었다. “라비스, 백색 대륙에는 언약의 숲이란 곳이 있어. 그곳에는 기이하게도 백합 향기가 은은하게 나거든. 침엽수로만 가득 찬 숲에서 백합 향기가 끊이지 않고 난다는 것은 참 기이한 일이지.” “왜 백합 향기가 나는 건데?” “그 백합 향기는 언약에 대한 증표거든. 그 언약이 정확히 어떠한 내용 을 담고 있는지는 음유시인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오래전에 어떤 여신이 연인에게 한 언약의 증표라는 거야.” 연인에게 한 언약의 증표라... 참으로 로맨틱한 전설이다. 그들은 행복 해졌을까? 페르딘의 이야기는 미카엔에게도 뭔가 감흥을 불러 일으켰 는지 잠시의 침묵을 만들어냈다. 그러다 그는 페르딘에게 말했다. “그 이야기... 어렸을 적, 네 어머니가 나에게 해주었던 이야기이군. 백 합 궁 측실이긴 했지만, 성품과 외모도 백합 같은 분이셨지.” 그러자 페르딘은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미묘한 분위기 변화에 나는 황금빛 눈을 깜빡이며 미카엔과 페르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바람이 차군요. 전 이만 선실로 들어가겠습니다.” 페르딘이 발걸음을 옮겼지만, 미카엔은 계속 말을 이었다. “넌 다시 왕성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을 테지?” 페르딘은 우뚝 멈추어 섰다. 하지만 미카엔을 돌아보지 않았다. “전 죽었다 깨어나도 로히얀스에는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라비스가 형 제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다시 떠돌이 생활을 할 거라고요. 저 같 이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은 로히얀스 왕성이 파멸을 향한 저주가 될 거 라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죠?” “…….” 가시가 돋친 말이다. 비록 내색은 안하지만, 페르딘의 가시는 미카엔에게 보이지 않은 생채기를 내었으리라. 페르딘이 가버리자, 선원들도 선실 안에 들어가 있어 갑판 위에는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미카엔은 세찬 바다 바람에 의해 거칠게 휘날리는 은 빛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는 미카엔을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밝 은 몸짓으로 바다의 어느 방향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미카엔, 저기 보세요. 온통 파랗죠? 벌써 백색 대륙이 안보여요. 아하하... 어라?” 그렇게 말하고는 혼자 어색하게 웃던 나는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는 바 다에서 한 차례의 파도가 소용돌이치며 자그맣게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카엔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솟구치는 소용돌이를 보며 나에게 기다려보라는 듯이 눈짓을 해보였다. 사람의 몸통만한 두께의 소용돌이는 우리가 서있는 높이만큼 다가와 솟 아오르더니 점차 사람의 형태로 변해갔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몸담고 있 는 본체에 직접 다가와 있는 나를 라센샤르가 알아보고는 모습을 드러 내는 것임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푸른 바다 빛의 젊은 여성 형상을 하고 나타난 라센샤르... 그녀에게서 평소 바다의 표정을 볼 수가 있었다. 깊고 근엄하며 모든 것을 포옹할 것만 같은 인자함, 그리고 아름다움. 그 안에는 거역할 수 없는 폭풍과 잔잔함이 갖는 부드러움이 동시에 들어있었다. “라비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미카엔님과 함께 무사히 계신 것을 보니 마음이 놓이는 군요. 여행하는 중인가요?” “네, 그래요. 라센샤르. 하지만 지금의 저는 누군가에게 위치를 발각되 지 말아야 할 상황에 있어요. 그래서 정령들을 함부로 불러들이지 못하 고 있죠. 부르는 것이 아닌, 이렇게 만나게 되는 것은 괜찮겠지만 그렇 지 않다면, 정령의 움직임까지 살피고 있는 그들에게 들키게 될 거예요.” “뭔가 위험한 상황에 있군요. 그대가 걱정됩니다.” “전 괜찮을 거예요. 하지만 라센샤르는 다른 정령들과 함께 저를 도와 주셨으면 해요.” “그게 무엇이죠?” 라센샤르의 염려하는 듯한 질문에 나는 정령들이 해주어야 할 일들을 말해주었다. 론티아 정령인 아멘시타에게는 로히얀스 왕성 정황을 살피 게 하고 나머지 정령들은 모두 본체로 돌아가 있도록 부탁했다. 혹시라 도, 왕성 근처에서 맴돌다가 신족들이 강한 정령이 몰려 있음을 수상하 게 여겨 나의 정령이라는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나를 잡기 위한 인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미카엔은 미리 써두고 있었던 듯 자신의 자필이 적힌 편지 하나를 라센 샤르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왕성에 있는 킬린에게 전해주기 를 부탁했다. 킬린의 답장은 자신에게 전할 필요 없다는 당부와 함께 말 이다. 아마도, 미카엔은 국왕으로서의 임무 한 가지를 수행하기 위해 라센 샤르에게 그러한 부탁을 하는 모양이다. 곧, 라센샤르는 사라졌고 파도 소리만 우리의 귓가를 고요히 때렸다. 미카엔은 따뜻한 눈빛을 하며 나의 귓가로 손을 가져왔다. “라비스, 앞으로 너와 나에게는 정말 힘든 일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 래도 너는 지금처럼 이겨나갈 수 있겠지?” “물론이죠. 저는 미카엔을 행복하게 해줄 거예요. 미카엔은 저 때문에 많이 힘들잖아요? 뿐만 아니라 저는 많은 이들을 불행하게 했어요. 이 젠 제가 그걸 갚아줄 차례에요.” 내가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하듯 말하자, 미카엔은 작게 미소를 지어보 였다.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인 것 같은데? 그리고 너로 인해 불행해졌다는 말은 하지 마라.” “네, 미카엔. 그런데 페르딘의 어머니이자 예전 백합 궁성 측실이라는 분 정말 백합처럼 아름다운 분이셨어요?” “그래, 그리고 페르딘처럼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이었지. 나는 아주 어렸 을 때 그녀의 아름다운 노래를 듣기 위해 자주 찾아갔었어.” 감히 짐작해본 건데,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이었던 페르딘의 어머니는 어떤 사연으로 파멸의 길을 걸었던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자신의 영혼이 더럽 혀지면 파멸해버린다는 운명을 가진 순결한 존재,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 어떤 기구한 사연이 있는 걸까? * 악!?!(그냥 하는 절규;) ------------------------------------------------------------- 체인지[2부] 제10화 -권능의 조각- (10) -10- 섬나라인 루기아로 향하는 항해는 이틀 동안 계속되었다. 바다 외에는 특별할 것이 없는 지루한 여행이었지만, 미카엔과 페르딘 사이에서는 미묘한 많은 부딪힘이 있었다. 섣불리 자신을 내보이지 않으며 서로에게 다가서지 않으려는 두 사람. 나는 그들의 부딪힘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다 저녁 무렵, 우리일행은 선원들의 식당 홀에서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게 되었다. 홀의 천장에는 초라한 느낌의 샹들리에가 규칙적으로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고, 우리에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미세한 춤을 추고 있었다. 뭔가 소극적이어 보이면서도 움찔움찔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듯한 몸놀림으로서. 거칠기 짝이 없는 선원들이었지만, 우리는 미카엔의 원만한 성격과 페르딘의 쾌활함 탓인지 무리 없이 어울렸다. 다만 공교로운 점이 있었다면, 술에 취한 그들이 가끔 보이는 저속함과 나에게만 집중된 술 먹이기와 노래 시키기였다. 미카엔은 선원들의 거친 언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거부감을 갖지 않는 듯하다가, 그들의 관심이 나에게 집중될 때면 이마에 힘줄이 돋곤 했다. 하지만 미카엔은 그런 불쾌감을 내색하는 대신, 부부는 한 몸이니 술도 함께 마신다는 억지 닭살 주장으로서 나에게 권해지는 독한 술들을 죄다 자신이 마셔버렸다. 선원들은 불이 쉽게 붙을 정도의 알콜 농도가 짙은 그 술을 스트레이트 잔으로 호기롭게 연거푸 마셔 넘기는 미카엔을 보며 감탄했고, 그 뒤를 이은 페르딘의 아름다운 노래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 단순한 계기로, 그 들은 부티 나고 얼굴 곱상한 우리에게 은연중에 갖고 있던 경계심을 허 물고 진정으로 어울렸다. 선상에서 술과 노래가 어우러진 뱃사람들의 낭만적인 밤이 그렇게 짙어 져가자, 미카엔과 페르딘 사이의 경직되어 있는 감정도 술기운과 선원들 의 거친 쾌활함과 바다의 너그러움으로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풀 어져 가는 듯했다. 그것을 보며, 나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상처가 쓸모없는 것이라면 미카엔과 페르딘은 과감히 깨뜨려 버릴 수 있으리라 낙관했다. 밤은 더욱 깊어져, 별빛의 아름다움과 술 그리고 바다에 취해있던 우리 는 각자의 선실로 향했다. 가던 도중, 미카엔은 페르딘에게 말했다. “페르딘, 로히얀스 왕성에는 나와 함께 돌아가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나는 기다릴 것이다.” 간단한 두 마디만 하고 미카엔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페르딘은 전 국 왕을 닮았을 듯한 서글서글한 갈색 눈으로 미카엔이 있던 자리를 잠시 응시하였다. 왠지 그의 눈에서 슬픔이 반짝이는 것 같다. 나의 착각일까? 그러다 페르딘은 나의 눈길을 느꼈는지, 돌아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나는 언젠가 시인의 이름을 운명에 내놓아야 될 것 같아, 라비스.” “응?” “나는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으로서의 자격을 이미 잃어버렸거든. 지금도 나는 추악한 생각을 해.” “페르딘?” 불길한 마음에 그를 바라봤지만, 페르딘은 더욱 밝은 표정을 지으며 웃음 까지 터뜨렸다. “하하. 왠지 기분이 좋군. 오늘은 바다를 노래해야만 될 것 같아. 라비 스, 그거 알아? 인간의 본래 고향은 바다야.” 페르딘은 그렇게만 말하고는 노래를 부르며 자신에게 배정된 선실로 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은 왠지 무거운 운명에 짓눌 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페르딘, 나는 행복해질 거야. 그러니까 너도 행복해야 해. 행복을 위해 서는 정해진 운명도 바꾸는 거야. 운명은 바꾸라고 있는 걸.’ 내가 왜 그를 보며 이러한 생각을 하는 걸까? 처음 이곳 세계에 오게 되 었을 때 운명을 원망하던 내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운명에 휘둘려 내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했었다. 바뀌어버린 운명에 자신을 맞 추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힘들어해야 했던가? 하지만 이제 와서 깨닫는 건, 처음부터 정해진 운명은 없다는 것이다. 운명이란 강한 의지의 결과물이다. 모두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 ‘...하지만 영혼을 노래하고 운명을 노래하는 시인이라면 다를 수도 있겠지. 페르딘,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이 네 의지인 거니?’ 동이 틀 무렵, 미카엔은 나를 깨웠다. 하지만, 나는 잠에 취해 뜻 모를 말을 웅얼거리며 더욱 침대 깊숙이 파고들 뿐이었다. “라비스, 일어나라.” “…….” “오늘은 일출을 보기 좋은 날이다. 라비스, 내가 모닝키스를 해주길 기다리는 것은 아니겠지?” 으윽, 왜 새벽부터 깨우는 것인지... 꼭 일출을 봐야만 하는 걸까? 나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러자 미카엔은 침대에 걸터앉아 나의 황금빛 머리칼을 살짝 쓰다듬더니 귓불에 가볍게 키스했다. 흠, 일어나야 할까? 하지만 달콤한 잠의 유혹을 이길 수 없었기에 여전히 미적거렸다. 이번에는 그가 나의 턱을 가볍게 잡고 입술에 부드러운 키스를 했다. ‘헉! 아무래도 일어나야겠다.’ 결국,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미카엔은 짓궂게 미소 지었다. 아무튼, 미카엔은 갑판 위의 어느 부분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 그곳 에서 태양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여전히 바다 바람은 매섭고 차가웠으 며 새벽별은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검푸른 바다와 미명의 하늘은 하나가 되어 우리처럼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에 덜 깨어 몽롱해 있던 나는 순간 정신이 맑게 개어지는 것 같았다. 새벽의 바다. 이제 세상의 하루를 경건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앗! 미카엔, 드디어 해가 올라오나 봐요!” 바다의 어느 한 부분이 밝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하자, 나도 모 르게 벅찬 마음이 되어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하지만 미카엔은 표정을 지 우고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말갛게 밤이 지워지고 있는 곳을 가만히 응시 했다. 짙게 드리워진 그의 은빛 머리칼에도 점차 화사한 빛이 물들어 갔 다. 미카엔은 나에게 이런 감동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그는 바다에서 보 는 태양을 좋아하는 것 같다. 결혼 전, 그는 나를 바닷가로 데려가 아름 다운 일몰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때는 나의 가슴 깊은 곳에 황금빛 일 몰이 새겨졌지만, 지금은 그 일몰의 장면이 일출이 되려 한다. 태양은 어느덧 절반 가까이 바다를 빠져나왔다. 마치, 태양이 바다에서 태어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미카엔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왠지 그의 손을 잡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기에... 그러다 태양이 황금빛 흔 적을 남기며 바다와 완전히 끊어졌을 때, 미카엔은 입을 열었다. “라비스, 사랑한다.” “…….”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은빛에 가까워진 보랏빛 눈동자가 나 를 향하고 있었다. “너를 사랑한다, 라비스.” 순간, 눈물 한 줄기가 나의 볼을 타고 흘렀다. 어? 왜 눈물이 나는 거지? 이상하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하지만 눈물은 그것으로 멈추 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모를 일이다. 눈물샘이 갑자기 고장 난 것일까? 미카엔이 나에게 마법이라도 건 것일까? 아마도 일출을 보고 난 감동의 후유증일 테지. 미카엔은 나의 눈물에 가만히 키스했다. * 권능의 조각 파트는 조금 길어질 것 같군요. 이렇게 긴 파트는 없었 는데..... 1부 환상의 섬을 찾아서! 11편이 가장 길었다죠..^^; 권능의 조각은 11편은 넘어갈 것 같군요.. 음.. 어쨌든, 재미없더라도 즐겁게(뭔가 강요하는 듯한;;) 체인지를 감상 하세요~ 평안한 휴일 밤이 되시길.....^^ ** 요즘은 글에 감정 담기가 힘들군요.. 몰입할 시간을 길게 잡을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일까요?ㅡㅜ ---------------------------------------------------------------------- 체인지[2부] 제10화 -권능의 조각- (11) -11- 그날 오후 늦게, 우리가 탄 배는 섬나라 루기아에 있는 항구에 닿을 내렸다. 우리는 짧은 여행이나마 함께 했던 선장, 선원들과 이별을 나눌 겸 선착장 부근에 여관을 잡아 잠시 쉬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미카엔은 적당 한 곳에서 공간 이동 마법진을 그려 좌표를 서대륙 쪽으로 지정하였다. 미카엔은 예전에 아스탄샤를 방문한 적이 있어 정확한 좌표로서 제법 이동 거리를 넓힐 수 있었다. 하지만 서대륙까지는 너무도 광대한 거리였던 터 라, 중간에 섬을 경유하여 이동해야 했다. 무리한 미카엔의 마력 소모 끝에, 드디어 서대륙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는 아스탄샤 국경 근방에 이른 우리는 청명하고 쾌청한 하늘의 아름다움을 만 끽했다. 이곳 역시, 로히얀스와 비슷한 기후로 계절상 여름이 거의 지난 초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카엔은 무척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다. 마력이 한계치까지 고갈된 듯 안 색까지 나빠져 있었다. 나는 무척 걱정되었지만 그를 위해 마땅히 해줄 일이 없었다. 그저, 스스로가 고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는 한 개의 물 방울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속으로 또 한번 되새길 뿐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미카엔의 수완으로 관문을 아무 탈 없이 통과했고 근방에 서 마차를 구해 블랙 드래곤이 산다는 루델린 산맥으로 향했다. 관문 근방 에서 여행자를 상대로 호객행위를 하던 그 마부는 처음엔 몬스터가 우글거 린다는 루델린 산맥으로 간다니까 질색을 하더니, 미카엔이 조금 더 얹어 준 돈을 받고는 만면에 희색을 띄었다. 미카엔은 마차에 타자마자 잠들어 버렸다. 고요히 감긴 눈으로 보이는 은 빛 속눈썹은 무척이나 길어보였다. 처음 와보는 서대륙의 모습에 색다른 감동을 받은 듯한 페르딘이 보이는 사물마다 감미로운 축복의 노래를 부 르자, 나 역시 기분 좋은 나른함에 빠져들어 갔다. 그러다 문득, 페르딘이 노래를 멈추고는 나에게 입을 열었다. “아까 관문에서부터 뭔가가 미행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희미하고 흐릿 한 영혼을 가진 존재가 느껴지는데…” “뭐, 정말?” 나는 몽롱함에 깨어나 굳어진 얼굴로 그렇게 외치며 창문으로 살짝 고개 를 내밀었다. 하지만 보이는 건, 푸른 하늘과 그 하늘을 바라보며 다가올 가을을 준비하는 나무들과 바위뿐이었다. 그러다 가까운 수풀에서 뭔가 움직거리더니 노루인지 사슴인지 모를 작은 동물이 튀어나왔다. 아직 어 린 새끼로 보이는 그것은 겁도 없이 마차의 뒤를 쫄래쫄래 뒤따라왔다. 마침, 길이 험한 탓에 마차가 조금 느리게 달리고 있었기에 그 동물은 무 리 없이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크고 까만 눈망울이 너무나 예 쁜 동물이다. 나는 다시 자리에 바로 앉으며 페르딘에게 말했다. “그냥 사슴이야. 페르딘이 희미하게 영혼을 느꼈던 것은 아마도 작은 동물 이라 그런 걸 거야. 미카엔도 별다른 이상한 점을 느끼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러자 페르딘은 피식 웃었다. “라비스, 너는 너무 미카엔을 신뢰하고 있는 것 같아. 비록 실버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미카엔도 인간이야. 극도의 피로는 아무리 날카로 운 사람이라도 가끔은 무뎌지게 만들 수 있거든.” “그럴 수도… 근데 페르딘, 프레야 왕비가 실버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물론 알고 있었지. 내가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이라는 것을 잊은 모양이 군. 측실이었던 나의 어머니도 그 여자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페르딘은 프레야 왕비를 그저 ‘그 여자’ 라 칭하며 가볍게 답했다. “...그렇다면 페르딘은 내 영혼도 보았겠네?” “음, 내가 쓰러져 있던 너에게 다가가게 된 것은 네 영혼에게서 특별한 아름다움을 느꼈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죽음에 이끌렸던 거야.” 나는 표정을 약간 굳혔다. 그러자 페르딘은 사심 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 을 덧붙였다. “하하, 라비스. 나는 시인이야. 시인은 노래를 할 뿐, 말은 하지 않아.” 시인은 노래를 할 뿐, 말은 하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잠시 갸웃했다. 페 르딘 녀석, 저렇게 은유적인 아리송한 말만 하다니! 누가 시인 아니랄까봐… 우리는 마차 안에서 두 번의 여명과 황혼을 보며 루델린 산맥을 향해 거 침없이 나아갔다. 그 이틀 동안, 들르는 마을마다 먹을 도시락를 사서 마 차에서 끼니를 대충 때우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페르딘의 방랑 기(?), 미카엔의 유년 시절, 그리고 마법사들의 탑에서 생활했던 나의 이 야기. 그렇게 얘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는 더욱 가까워졌고 각자 서로에 대한 보이지 않은 감정을 만들어냈다. 물론, 그 감정들은 모두 따스했다. 그러다 페르딘은 미카엔에게 한 가지 고백 비슷한 말을 했다. “미카엔, 저는 그동안 떠돌아다니면서 만났던 인연 중에 지금의 인연이 가장 아픕니다.” “어째서이지?” “그 인연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죠.” “…….” 페르딘이 말하는 그 인연이란, 나와 미카엔을 통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둘 중 누구를 한정하여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미카엔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짧은 마차 여행으로서 루델린에 가까워졌을 때, 우리는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마차를 다시 돌려보냈다. 미카엔은 마력으로서 블랙 드래곤 레어의 위치를 대충 탐지해보고는 곧바로 단거리 공간 이동 마법 을 시전했다. 마법진을 사용하지 않고 나와 페르딘까지 공간 이동을 시키 는 것이다. 미카엔이 간단하게 시동어를 외자, 검게 물들은 빛 무리가 그 의 주위를 거칠게 맴돌기 시작했다. 은빛 머리칼이 가볍게 날리고 그의 은 보랏빛 눈동자가 더욱 밝게 빛나는 순간, 빛 무리는 나와 페르딘을 감쌌고 그대로 공간 이동이 이루어졌다. 언제 보아도 경이롭고 신비로운 광경이다. 마법사라면 누구라도, 그의 마 법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느껴지는 그 아름다움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 길 것 같다. 곧, 빛이 걷혔고 나의 시야 앞에 익숙한 사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 은 내가 예전에 마법사들의 탑 소속 마법사들과 함께 몬스터 토벌하기 위 해 지나온 곳이다. 왠지 감회가 새로워 잠시 감상에 젖어있는데, 문득 거 대한 날개 짓 소리가 들리며 찢어지는 듯한 음향이 나의 귀를 때렸다. 쿠에엑- 캬아악- 위쪽을 바라보니, 와이번 두세 마리가 간만에 만난 먹이 감을 보고는 좋아 라하며 날아오고 있었다. 그 와이번 외에도 멀리 허공에는 수십 마리의 와 이번들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예전에 봤을 때보다 그 숫자가 더 늘은 듯 했다. 결국, 나와 페르딘은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 보니, 비명을 지 르는 스타일도 비슷하다. “으아악!” 미카엔은 잠시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듯 어느 한 방향을 노려보고 있다 가 뒤늦게 와이번에게 눈길을 주었다. 와이번이 금세 다가와 거대한 날개 를 퍼덕거리자 그의 백색 로브가 펄럭거리고 은빛 머리칼이 거칠게 휘날 렸다. 나는 와이번이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미카엔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위험하다고 외쳤다. 하지만 미카엔은 여전히 미동도 하 지 않은 채, 은 보랏빛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내며 날아오는 와이번을 똑바 로 바라보았다. 쿠에엑- 그 순간, 제일 앞에 날아오던 와이번의 몸짓이 갑자기 흐트러지는 듯하더 니 허둥대는 날개 짓으로 다시 위로 솟아 날아올랐다. 그렇게 되자, 뒤에 따라오던 와이번들은 서로 엉켜 난리법석이 되었다. 그렇게 와이번들이 요란스럽게 사라지자, 나는 놀랐던 가슴을 가라앉히고 미카엔에게 물었다. “미카엔, 어떻게 한 거예요?” “드래곤 피어를 썼지.” “네? 저는 아무 것도 못 느꼈는데요?” “그건 드래곤 피어가 저 와이번들에게만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라비스” “우와! 그럼 드래곤 피어를 미카엔이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가요?” 내가 존경스럽다는 눈을 빛내자, 미카엔은 가볍게 웃고는 답했다. “그런 셈이지. 흠, 이 근방에 메르킨의 레어가 있겠군. 집 주위에 침입자가 들어오면 그가 알아서 나타나겠지?” 그때, 페르딘이 불쑥 물었다. “레어? 미카엔, 도대체 어디로 데리고 온 겁니까?” “블랙 드래곤의 레어다, 페르딘.” “허억! 드, 드래곤 말입니까?” 하얗게 질렸던 페르딘의 얼굴에 더욱 핏기가 가시며 그는 더듬거리며 반문 했다. 왠지, 미안해진다. 그에게 미처 블랙 드래곤을 찾아간다는 말을 못했 던 것이다. ----------------------------------------------------------- 체인지[2부] 제10화 -권능의 조각- (12) -12 페르딘은 블랙 드래곤을 만난다는 사실에 긴장이 되었는지, 충격을 받았는 지 얼굴 표정이 굳은 채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나 역시, 긴장되기는 마 찬가지였다. 이번에도 그 드래곤이 다짜고짜 브레스를 뿜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메르킨’이라 불리는 그 드래곤은 나의 얼굴 을 알아볼 수도 있겠지만... 알아본다 하더라도, 성격 더러워 보이는 그가 친절하게 우리를 맞아 줄지는 의문이다. 사방은 고요했다. 멀리 떨어진 허공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와이번들의 날개 짓 음향과 포효소리만 바람에 실려 들려 올 뿐이었다. 미카엔은 아까부터 뭔가를 경계하는 듯한 얼굴이다. 주위에 서 일어나는 모든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사방을 훑어 보고는 했다. 나는 그러한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며 그의 뒤를 조용히 따라 걸었다. 블랙 드래곤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외출이라도 한 건가? 미카엔은 어느 한 방향을 향해 침묵을 지키며 걷다가 문득 페르딘에게 말 을 걸었다. “페르딘, 지금 네가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봐라.” “지금 제 영혼이 느끼고 있는 것은 가을을 머금기 시작한 바람과 나무들 의 숨소리, 우리를 지켜보는 보이지 않는 눈입니다.” “우리를 지켜보는 존재에 대해 말해봐라. 그는 드래곤인 건가?” “드래곤은 아닌 것 같군요. 블랙 드래곤이란 존재는 우리의 방문에 대해 무척이나 심드렁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은데요? 하하. 하지만, 관문에서 올 때부터 한 존재가 계속 신경이 거슬립니다. 혹시, 두 사람 누군가에게 쫓기 는 중입니까?” 페르딘의 말에 미카엔은 미간에 주름이 살짝 잡혔다. 그리고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 다시 말이 없어졌다. 그러다 그의 발걸음이 어느 지점에서 멈 칫했다. 가는 실바람에 그의 은빛 머리칼이 가볍게 스치는 것을 바라보며 걷다가, 나는 그제야 미카엔의 시선을 따라 정면에 눈길을 주었다. 그곳엔 작은 샘이 있었다. 제법 맑아 보이는 투명한 물이 고여 있고 그 옆에 커다 란 바위와 자유로이 가지를 뻗은 나이든 나무들이 서있었다. 그리고 한 남 자가 바위에 앉아 고인 물에 무심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아나테스?” 흑발의 그 남자는 우리를 돌아보지도 않고 뒷모습만 보이며 그렇게 말을 했다. 약간 낮은 울림을 가진 그의 목소리는 무감정하고 무기력하며 기계 적이었다. 마치, 예전에 영혼을 잃어버려 껍질만 남아 오래도록 저 바위에 앉아있었던 것 같이 말이다. 나는 1년 전에 봤었던 그의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떠올려보았다. 그때 와는 달리 지금은 심해 아래로 가라앉은 듯한 모습이다. “나는 아나테스의 아들, 미카엔이다.” 여전히 오만불손한 미카엔의 어투이다. 이런 면을 보자면, 미카엔은 그다 지 예의바른 청년은 아닌 것 같다. 평소에는, 무척이나 매너 있고 자상하 며 친절한 성격인데 때론 무척 차갑고 이렇듯 오만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정말 오묘한 성격이라 해야겠다. 남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우리에게 눈길을 주었다. 페르딘이 언급한 바대로, 그 흑발 남자의 표정은 정말 심드렁해 보였다. 크리스티나 아르젠 의 연인이자 포악한 군주 블랙 드래곤, 메르킨. 그는 미카엔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마치, 검술로 단련한 듯 단단하게 몸이 다져진 그는 키가 190센 티 정도 되어 보이는 장신이었다. 게다가, 얼굴은 저번에 봤을 때도 느꼈지 만 정말이지 무섭게 생겼다. 험악 하다기 보다는 그냥 무섭게 느껴지는 얼 굴인 것이다. “실버 드래곤인가? 아나테스와 많이 닮았군.” “나는 아내의 일로 크리스티나와 관련한 당신의 과거를 묻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미카엔 이곳을 찾은 이유를 말했건만 메르킨은 별다른 응수 없이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나를 알아본 듯, 지금까지 무감정하게 침식해있던 감정이 그의 눈동자 안에서 거칠게 일었다. 메르킨의 표정이 더욱 무섭게 변하자, 나는 움찔하며 미카엔의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약간 비틀어지듯 입술 선 한쪽 끝이 올라가는 모습이 무섭게 느껴졌던 것이다. 대체, 왜 나 를 보고는 인상을 쓰는 건지... 메르킨은 다시 미카엔에게 눈길을 주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내 것을 가지고 있군. 다시 돌려받아야겠다.” 돌려받는다니, 무엇을? 미카엔의 눈이 가늘어졌다. “돌려주어야 할 당신의 물건이 있다면 이 아티펙트 로브 밖에 없겠지. 원 한다면 다시 돌려주겠다.” 미카엔은 아티펙트 로브를 벗어 던져주자 메르킨은 순순히 받는 척하더 니, 갑자기 마법 시동어를 외쳤다. 그러자 아티펙트 로브에서 불이 붙어 확 타올랐다. 그 불길은 마치 한 마리의 피닉스와도 같은 모양으로 타올 라 곧 미카엔을 공격했다. 나는 갑작스런 뜨거운 불길에 팔로 얼굴을 가 리며 미카엔에게 애써 눈길을 주었다. 혹시, 그 공격에 미카엔이 상처라 도 입었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카엔은 나를 페르딘이 있 는 쪽으로 밀치고는 늘 가지고 다니던 장검을 날쌔게 꺼내들었다. 빙계 마력이 어려 있는 마법검이다. 화르륵- 미카엔은 장검으로 뜨거운 불길로 타오르며 달려드는 피닉스(?)를 대각선 으로 빠르게 내리그었다. 그러자 그것은 허무하게 두 조각이 나며 마법이 풀린 듯 불이 힘없이 꺼져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쓸만한 아티펙트 로 브였던 그것은 순식간에 타다 남은 천 조각으로 변모해버리고 만 것이다. “훗! 겨우 아티펙트에 의존하는 애송이였던 거냐?” “나는 지금 싸우고 싶지 않다! 메르킨.” 하지만 메르킨은 미카엔의 말을 무시하며 또다시 시동어를 외쳤다. 이번 에는 매직 에로우인 듯했다. 검게 물 들은 강한 빛 무리가 무척 넓은 거 리까지 영향을 주며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나는 황금빛 눈동자를 커다랗 게 뜨며 수십 수백의 매직 에로우가 허공에 드넓게 맺히는 것을 바라보 았다. 저러다 미카엔이 위험해질 터였다. 미카엔은 지금 빙계 마력을 사 용하지 않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카엔의 빙계 마력은 신족들의 탐지대상 중 하나다. 나는 메르킨에게 달려가 나름대로 방해해보려 했지만, 매직 에로우는 순 식간에 시전되어 거대한 소낙비처럼 미카엔에게 날아들었다. 미카엔은 마 법검으로 자신을 보호하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렇게 되자, 미카엔이 서 있던 곳으로 날아들어 바닥을 깊게 파이게 하고 수십 그루의 나무들이 쓰 러트리던 매직 에로우들은 허공으로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강한 빛이 번쩍거리며 그렇게 허공을 가득 메우다시피 하고 있자, 미카엔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무래도, 메르킨이 시전한 마법은 일반 매직 에로우 가 아니라 그것을 기초로 한 고급 마법인 모양이었다. 나는 메르킨이 미카엔을 죽게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나쁜 자식! 그만둬!” 그래서 메르킨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나의 주먹은 멋지게(?) 메르 킨의 얼굴을 때렸다. 하지만 그 결과는 한심할 정도로 형편없었다. 메르 킨의 얼굴은 살짝 옆으로 돌아갔을 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얄밉게도 메르킨은 하나도 안 아프다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 에게 눈길을 주었다. 결국 내 주먹만 아프고 민망해진 셈이다. 이 녀석은 드래곤이 아니라 터미네이터인 걸까? “라비스라고 했던가? 1년 전에 봤을 때도 이렇게 겁 없는 모습이었지. 그런데 정말 이상하군. 너를 보면 왜 크리스가 생각나는 거지? 너와 함 께 있는 애송이 실버 드래곤을 보며 오래전에 묻혀있던 분노를 느끼는 걸까?” 메르킨은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나의 멱살을 거칠게 잡았다. “윽! 이거 놔!” 나는 버둥거리며 발로 그의 정강이를 내려쳤다. 하지만, 메르킨은 끄떡도 안하며 나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나의 얼굴 을 감싸 쥐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나의 입술에 와 닿았다. 설마, 이 녀 석... 그때, 갑자기 주위의 공기가 급속도록 냉각되었다. 번쩍거리던 매직 에 로우들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주변을 가득 채우던 어둠계열 마력은 어느 순간 소멸되고 대신 빙계 마력이 증폭되는 것이다. 쐐에엑- 한 개의 굵은 아이스 에로우가 메르킨과 내 쪽으로 날아들었다. 이것을 본 메르킨은 코웃음을 치더니 실드 하나를 만들어냈다. 치익- 아이스 에로우로 인한 충격으로 메르킨이 만들어낸 실드가 심하게 일렁 거렸다. 그러자 메르킨의 표정은 약간 변했다. 미카엔의 아이스 에로우 는 여기서 소멸되지 않고 변형을 일으키더니 나사 모양으로 실드를 뚫 고 들어왔다. 그리고 나에게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은 채 메르킨에게만 공격을 가했다. 이처럼, 도중에도 시전자의 콘트롤이 완벽할 수 있는 빙 계 공격 마법은 처음 본다. 결국, 실드는 소멸되고 메르킨은 상처를 입 고 충격으로 뒤로 밀려나 쓰러지면서 붙잡고 있던 나를 놓았다. 그로 인 해, 나 역시 바닥에 쓰러져 굴러야 했다. 지척에서 차갑게 가라앉은 미카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만 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을 듯했다. “나를 이렇게 이성을 잃게 만들었어야 했나? 메르킨. 빙계 마력을 사용 하고 말았군.” -------------------------------------------------------- 체인지[2부] 제10화 -권능의 조각- (13) -13- 잠시 쓰러져 있던 메르킨은 제법 깊게 자리 잡은 상처 따윈 아랑곳하지 않 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상처에서 붉은 피가 배어나왔다. “건방지군, 실버 드래곤.” “나는 이곳을 곧 떠나야 한다, 메르킨. 그러기 전에 내 아내의 어머니가 되는 크리스티나 아르젠에 관한 얘기를 꼭 듣고 싶다.” 그러자 메르킨은 발걸음을 두어 번 옮겨 미카엔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저 계집이 어떻게 200여 년 전에 존재했던 크리스의 딸이 되는 거지?” “크리스티나는 13년 전까지만 해도 존재했다.” “뭐?” 그의 얼굴이 굳어지고 동공이 안보일 정도로 암흑뿐이던 눈동자가 순간 심하게 흔들렸다. 조금 전 미카엔의 공격에도 그다지 표정 변화를 보이 지 않던 그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크리스티나와 관련된 자그만 자극에 도 커다란 감정의 파장을 일으키는 것이다. 미카엔은 일단 메르킨을 크리스티나에 대한 대화로 이끌어내는 것에 성 공하자 냉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셀레나’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며 18년 전에 나의 아내 인 라비스를 낳았지.” “셀레나…” 메르킨은 그녀의 이름을 나직하게 읊조렸다. 오랫동안 가슴 안에 눌러왔 던 감정을 ‘셀레나’라는 이름에 담아 부르니, 그 이름은 ‘크리스티나’처럼 메르킨에게 있어 의미 있고 더없이 소중하며 아름다운 이름이 되었다. 하지만 그 이름 역시, 메르킨의 영혼을 괴롭게 만들기는 마찬가지인 모 양이었다. 감정의 폭풍에 휩싸인 메르킨의 얼굴에는 어느 순간 짙은 분 노가 어리기 시작했다. 고통과 분노에 찬 드래곤 피어가 무절제하게 드 러났다. 그 드래곤 피어에 영향 받아 지독한 공포를 느끼며 내가 까무러치려 하 자, 페르딘은 얼른 다가와 부축해주었다. 기이하게도, 페르딘은 드래곤 피어에 강한 면역(?)이라도 갖고 있는 듯 그것에 흔들리지 않고 나를 달래듯 공포에 조금씩 전염되는 이곳을 스치는 바람을 달래듯 나직하 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럽고 자장가처 럼 평온했다. 하지만 메르킨을 바라보고 있는 페르딘, 그의 얼굴은 왠 지 괴로워보였다. 공포로 인한 괴로움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으로 인 한 괴로움이었다. 어째서 그는 메르킨을 보며 그러한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페르딘의 품안에서 평안을 느끼며 메르킨의 드래곤 피어가 주는 공포에 조금씩 벗어났다. 이토록 신비하고 따뜻한 아름다운 노래를 인 간이 부를 수 있는 걸까. 이러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그는 얼마나 순 결한 영혼을 가진 것일까. 그러다 문득, 나는 페르딘의 노래에서 얼핏 울음소리와 같은 것을 느꼈다. 들은 것이 아니라 느낀 것이다. 영혼의 울음소리. 아니, 고통에 찬 슬픔에 공명하는 영혼의 울림을. 메르킨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금방이라도 피비린내가 날 것 같은 잔인함과 비열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페르딘의 노래 때문이었을까. 그 의 분노는 조금은 수그러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크크큭. 셀레나라고? 너희들이 나를 우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녀가 나를 끝까지 속여 왔었다는 거군. 그녀는 나를 떠나 절망의 늪에 빠뜨리는 것으로 부족해서 이제는 죽어서까지 내 영혼에 흠집을 내는 것인가!” “제 어머니가 무엇을 속였다는 거죠?!” 나는 그렇게 소리쳤지만, 메르킨은 나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그의 주 변에서 갑작스럽게 암흑 계열 마력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곳에 존재 하는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그의 모습은 진정한 위용을 드러내는 것이 다. 미카엔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우리에게 부유 마법을 걸어주고 는 다시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로 인해, 나와 페르딘은 미처 상황을 깨달을 새도 없이 미카엔이 걸어 준 부유 마법으로 메르킨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허공으로 솟아오르게 되 었다. 페르딘은 또 다시 나와 함께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갑작스럽게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다. 그저 속절없이 우리는 키가 큰 나무 가지에 몸이 긁혀가며 미카엔이 날아오른 곳까지 빠른 속도로 이끌려갈 뿐이었다. 그러다 나의 몸이 멈 추었을 때... 나는 미카엔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메르킨이 있는 곳으로 눈길을 주었다. 아까와는 달리 엄청난 존재감이 숨통을 죄어오듯 느껴졌다. 메르킨이 있던 자리엔 한 거대한 존재가 몇 그루의 나무들을 밟으며 대신 서있는 것이다. 우리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그것은 그 존재함만으로도 한순간에 우리를 하찮은 존재로 전락시켰다. 거대한 날 개와, 암흑의 비늘로 덮인 번쩍이는 피부, 도마뱀과도 얼핏 흡사해 보이 는 매혹적인 선을 가진 몸체, 그리고 긴 꼬리… 그의 존재는 공포였고, 두려움이었으며, 군림하는 아름다움이었다. 미카엔은 옆에 있는 페르딘에게 말을 걸었다. “메르킨의 본체로군. 페르딘, 너는 지금 죽음을 느끼고 있나?” “나는 죽음을 느낍니다, 미카엔.” 그러자 미카엔의 얼굴에서 초조한 빛이 스쳐갔다. “죽음의 기운이 이곳에 서려있다면, 나는 그것이 라비스를 노리고 있는 자에게 향하게 만들겠다.” 나를 노리고 있는 자라면 메르킨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아까 페르딘이 잠깐 언급했던 우리를 지켜보는 자인 걸까. 드래곤 본연의 모습으로 변한 메르킨은 자신의 심기를 건드린 자들을 쓸 어버리려는 듯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강산 브레스가 내뿜어져 나오자, 미카엔은 두꺼운 파워 실드를 만들어 나와 페르딘을 보 호하고는 자신만 빠져나갔다. 브레스를 피해 날아올라 미카엔은 빙계 마 력이 깃든 장검으로 메르킨의 얼굴을 겨냥하며 공기를 갈랐다. 하지만 미카엔의 장검은 파파팍- 작은 불꽃만 일으키며 메르킨에게 아무런 상처 를 주지 못했다. 메르킨은 앞발을 들어 미카엔을 내리쳤다. 커다랗고 육중한 몸체에 비해 제법 날렵한 몸짓을 보이는 그였다. 결국, 미카엔은 보호마법을 재빨리 시 전해 보았지만 그의 공격에 따른 타격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역시, 본체로 돌아간 드래곤과 인간의 몸으로 부딪히는 싸움에는 한계가 있었다. 우선, 육체 면에서 동등하지 못한 것이다. 미카엔의 입에서 울컥 피가 쏟 아져 나왔다. [실버 드래곤, 어째서 본체의 몸으로 싸우지 않는 거냐?!] “…….” 메르킨은 분노어린 음성으로 외쳤지만 미카엔은 답하지 않았다. 메르킨 은 미카엔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하프 드래곤이 드래곤 본연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할 수 있겠는가. 미카엔으로서는 그저 입가에 묻은 붉은 피를 쓰윽 닦아낼 뿐이었다. 그 러다 문득, 뭔가를 느낀 듯 뒤쪽 방향의 약간 떨어진 허공을 향해 날카 로워진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침, 페르딘도 뭔가 느껴졌는지 그곳에 시선을 주었다. 미카엔은 페르 딘의 움직임에 확신을 갖은듯 빠르게 단거리 이동 마법으로 시선을 두 었던 그 지점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장검의 날카로운 날을 세우며 허 공을 향해 주저 없이 내리쳤다. “아악!!”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미카엔의 검 끝에서 터져 나왔다. 나는 갑작스런 상황에 황금빛 눈을 커다랗게 떴다. 허공을 공격한 그의 검 날에서 붉은 피가 난데없이 흘러내리더니 어느 순간, 그 앞에 남자의 형체가 흐릿하 게 드러나는 것이다. 남자가 흘린 피는 새하얀 빛이 되어 흩어지고, 그 육체마저도 본래 속성인 듯한 빛으로 돌아가 사방에 흩어졌다. 그것은 한 신족의 죽음이었다. ----------------------------------------------------------- 체인지[2부] 제10화 -권능의 조각- (14) -14- 아스탄샤의 하늘은 어느덧 태양의 기운이 다하여 어둑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메르킨은 장작을 모아 바닥에 불을 지폈다. 그러자 우리가 임시의 거처로 머물고 있는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의 안은 제법 훈훈해졌고 밝아졌다. 아마도 이 오두막은 오래전에 숲지기나 사냥꾼이 살던 집인 듯했다. 우리는 메르킨의 도움으로 루델린 산맥을 벗어나 어느 숲에 와있었다. 곧, 신족들이 루델린 산맥 쪽으로 몰려올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곳을 재빨리 떠나야 했던 것이다. 미카엔의 말로는 아까 소멸시켰던 존재의 정체가 신족의 어세씬(Assassin)이라 불리는 은신隱身의 신이라 했다. 그 존재는 전투력은 별로이지만 영혼까지 완벽하게 숨길 수 있어, 웬 만해서는 그를 알아보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아까는 영혼을 노래 하는 시인인 페르딘에 의해 그의 위치가 발각되었었다. 아마도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능력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관문에서부터 뭔가 미행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메르킨은 조금 전에 잡아온 토끼를 장검에 꽂고서는 불에 굽기 시작 했다. 그러자 지글지글 기름이 끓으며 살이 노릇하게 익어 고소한 향 이 그윽하게 풍겼다. 나는 그것을 보며 침을 꼴깍 삼키는데, 페르딘은 토끼의 영혼을 위해 노래를 불러야겠다고 나서서 나의 웃음을 자아내 기도 했다.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꽃을 타오르는 것을 바라보던 미카엔은 문득 메르킨에게 말을 걸었다. “메르킨, 왜 갑자기 우리와 함께 나설 생각을 했던 거지?” “크리스티나, 그녀로 인해 더 이상 괴롭지 않기 위해서다. 만약에 내가 그녀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거라면 그것을 풀고 싶은 거다. 너 희는 내가 모르는 그녀의 마지막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하니까.” 그의 말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나는 두 분이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했던 것이라 생각해요.” “글쎄... 어쩌면 나는 애초에 사랑하지 말아야 할 존재를 사랑했었는지 모르겠군. 나는 오래 전부터 미카엔의 어머니가 되는 아나와 마족 키리 아와 함께 곧잘 인간의 세상을 여행했지. 그러다 우연하게 만난 크리스 티나를 첫눈에 사랑하게 되었어.” “키, 키리아라고 했나요?” 나의 질문에 메르킨은 고개를 끄덕였을 뿐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내가 그녀를 봤던 곳은 어느 허름한 마을의 축제에서였지. 나는 그녀 를 평범한 마을 소녀로만 생각했다. 그녀와 내 일행은 금방 친해졌고, 특히 그녀는 아나테스와 마음이 맞았던 것 같다. 키리아는 주로 나에 게만 많이 의지했고 다른 존재에겐 낯을 가렸으니까.” 나는 메르킨의 말을 끊고 또 다시 질문을 했다. “그러다 메르킨은 크리스티나가 그 나라의 왕비였다는 것을 알게 된 건가요? 그녀는 왕비 신분이면서 허름한 모습으로 마을에 한동안 머 물고 있었던 건가요?” “…….” 메르킨은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키리아는 미카엔의 어머니인 아나테스를 굉장히 증오하고 있었어요.” 그때, 페르딘이 뭔지 알겠다는 얼굴로 무릎을 탁 치며 끼어들었다. “아! 혹시 삼각관계가 아닐까? 키리아라는 여자는 메르킨을 좋아했던 거야. 메르킨은 크리스티나를 좋아했고, 아나테스는 그런 크리스티나 와 메르킨이 잘될 수 있도록 해주었겠지. 그래서 키리아는 아나테스 를 증오했던 것이 아닐까?” 페르딘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나와 페르딘 둘이서 죽이 맞아 척척 추리를 해나가자 묵묵히 듣고 있던 메르킨은 문득 웃음을 터뜨렸 다. 나는 그의 모습에 혹시 기분이 상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입을 다물고 그를 주시했다. “재미있는 친구이군.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이라 했던가? 아까 낮에 네 가 부른 노래는 잘 들었다. 너는 그 노래로서 내가 느끼고 있던 고통을 함께 했지.” 아... 그래서 아까 페르딘이 메르킨을 보며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메르킨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메르킨, 크리스티나는 메르킨을 사랑했을 거예요. 그리고 더없이 소중 했을 거예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그녀가 달콤한 미소와 밀어로 순수한 감정을 농락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한다는 거냐.” “메르킨은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그 마음을 믿지 못하는 건가요? 그녀가 메르킨을 떠나야만 했던 이유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던 거예요. 자신 의 소중한 것을 버리면서도 지켜야 했던 것이 있었던 거예요.” “그게 뭐였지?” 메르킨의 질문에 나는 얼른 답변하지 못하고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 리고 주저하다가 무겁게 입을 떼었다. “그건... 바로 나였어요.” 나의 대답과 함께 순간, 메르킨에게 흐르고 있던 시간은 그의 안에서 만 멈추어버린 듯했다. 그는 부동자세로 멈칫한 채 나를 응시했다. 지 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냐고 다그치는 듯한 눈길로, 촉촉이 젖어오 는 나의 황금빛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그의 침묵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려던 말을 계속 이었다. “나는 권능을 잃어버린 여신이었대요. 알지도 못했던 정령의 여신이 바로 나라는 거예요. 나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그대로 믿을 수밖 에 없었어요.” 나의 눈에서 뜨겁게 차오른 눈물이 마침내 아래로 흐르기 시작했다. 놀란 듯이 바라보는 페르딘의 눈길이 느껴졌다. 나를 안쓰럽게 바라 보는 미카엔의 시선도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 시선들을 털어내듯 고개를 흔들고는 말을 계속 이었다. “...나는 얼굴도 직접 보지 못했던 크리스티나였던 나의 어머니, 셀레 나를 무척 좋아했어요.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사로잡히면서도 원망도 많이 했어요. 그녀는... 그녀는 셀레나의 이름으로 다니엘 남작과 결혼 하여 내 영혼과 꼭 닮은 딸을 낳았거든요. 그녀가 왜 그래야만 했을 까요? 그녀의 딸이 왜 열일곱이 되던 해에 자살을 했던 걸까요?” 나는 지레 흥분하여 스스로가 무슨 소리인지도 모를 소리를 마구 외 치기 시작했다. 문득, 1년 전에 아스탄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아멘시타가 생명의 대가로 성장을 했었을 때, 나는 유체이탈을 한번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내 영혼을 보았던 정령들은 이도현이 아 니라 라비스의 모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때, 단순하게만 생 각했다. 나의 영혼이 라비스의 육체에 물들어서 그렇게 보였던 것이 라고... 메르킨은 듣기 괴로운 듯 나에게 소리쳤다. “그만해!” “그녀는 나의 첫 번째 대리자였기 때문이에요. 크리스티나는 대리자로 서 자각을 한 뒤, 메르킨을 떠나 금발머리와 금안의 셀레나가 되었던 거예요. 나는 느낄 수 있어요. 크리스티나는 그래도 메르킨을 계속 사랑 해왔다는 것을...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더 이상 크리스티나로서 메르킨 앞에 설 수가 없었어요.” 메르킨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홱 돌아서서 오두막을 나갔다. 나는 그 를 따라 나갔다. 그러다 문 앞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는 휘둥그 레진 눈으로 멈칫해야 했다. 온통 암흑의 별천지이던 바깥은 수십 수백 의 새하얀 빛 덩어리들로서 장관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새카만 하늘 을 드문드문 메우고 있는 그것은 오두막을 주변으로 해서 새하얗게 모 여들어 있었다. 나는 멍해진 얼굴로 눈을 한번 깜박였다. 그러다 가까이에 있는 빛 덩 어리에 눈길을 주었다. 그것은 예전에 본 새하얀 팅커벨처럼 손바닥만 한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나는 한참만에야 그것이 빛의 정령이라 는 것을 깨닫고는 뒤돌아서 미카엔을 불렀다. “미카엔! 큰일 났어요. 우리의 위치가 빛의 정령에 의해 노출되었어요!” 하지만 내가 미카엔에게 가기도 전에, 신족들은 벌써 와있었던 듯 홀리 미사일로 공격을 해오기 시작했다. “꺅!” 나는 무력하게 비명을 질렀다. 왜 이렇게 무력하게 비명만 질러야 하 는지, 내 자신을 저주하며 말이다. 미카엔은 어느새 다가왔는지 나에 게 손을 뻗어 홱 잡아당겼다. 그러자 내가 서있던 자리에 홀리 미사일 이 허무하게 쳐 박혔다가 공격의 의지를 잃은 무의미한 빛이 되어 어 둠 속으로 흩어졌다. -------------------------------------------------------------- 체인지[2부] 제10화 -권능의 조각- (15) Ip address : 211.37.33.57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15- 홀리 미사일을 시작으로 하여 신족들의 공격은 나에게 집중되기 시작 했다. 수십이 넘게 모인 듯한 그들은 마치 레이저로 내쏘아내는 듯한 강한 빛줄기 모양의 신성 공격으로 나를 공격했다. 암흑의 하늘에서 빛 으로 내리는 비가 나를 향해 쏟아지는 듯했다. 미카엔은 나를 안고 여 러 겹의 빙 계열 실드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미카엔이라도 혼자서 수십 에 이르는 신족들의 신성 공격을 막아내는 무리였는지, 무척 지쳐있었 던 탓이었는지 그의 실드는 이내 하나씩 깨어지기 시작했다. 오만할 정도로 고고하던 미카엔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스쳤다. 자신의 소중한 존재를 지켜내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 깊은 좌절이 드는 것 이다. 패배를 모르던 그는 자신의 능력에 처음으로 한계를 느끼고 있 는지도 모르겠다. 마력을 다 소진해가며 만든 미카엔의 실드가 모두 금세 깨어져버리자, 메르킨이 대신 나서서 우리 앞에 암흑 계열의 실드를 만들어주었다. 메르킨은 이 상황이 무척이나 못마땅한 듯 인상이 상당히 험악해져 있 었다. 그로서는 원하지 않는 일에 괜히 휘말려서 신족들과 적대하게 된 셈이었다. 나는 미카엔의 팔 안에서 신족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들 사이에 묻힌 아사드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표정은 냉담하리만큼 무표정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나를 도울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러다 페르딘이 오두막에서 나왔다. 난데없는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그로서는 섬뜩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신족들의 공격에 속수 무책이었을 것이다. 미카엔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까지 휘말리게 하 고 싶지 않았는지 이곳을 빠져나가라고 외쳤다. 하지만 페르딘은 고개 를 가로 저었다. 그는 상황의 전말이야 어찌되었는지 상세히 알 수가 없었지만, 미카엔과 내가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명백히 깨닫고 있을 터 였다. 그렇다고 해도, 아무런 전투력이 없는 페르딘이 무슨 도움이 되 겠는가. 문득, 페르딘이 신족의 시야 앞으로 나서더니 문득 목청을 가다듬고 노 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니! 이런 절박한 상황 앞에서 페르딘은 왜 난 데없이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아무리 그가 음유시인이라지만 이건 너 무 당혹스럽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당혹에도 불구하고 페르딘이 빚어 내는 고운 음색은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아까 낮에 들었던 노래는 따 스하고 부드러웠던 것에 비해 절박하고 긴박한 가운데 울려 퍼지는 지 금의 노래는 소름끼치도록 공허했다. 무엇일까. 나를 두렵게 하는 건 슬픈 영혼과 운명, 헤어짐 그 무엇도 아니리라 오래전에 버림받았던 루델린의 바위 사랑을 지키려는 자가 바위를 깨뜨리고 그 파편에 찍히며 나는 노래를 부르니 지켜보는 자는 파멸을 불러오리라 그러자 신족들은 한 인간일 뿐인 페르딘에게 시선을 주기 시작했다. 신 경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이곳의 공기는 어느 순간 느슨해져갔다. 무뎌지고 차분해졌다. 어지럽게 부유하던 것이 깊은 저 아래로 침전하 듯 가라앉았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릴 듯한 공허함이 이곳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페르딘의 노래는 계속되었다. 그의 음색은 어느 순간 못 견딜 정도로 간드러지고 부드러워졌다. 마치 끈질기면서도 다정한 애무에 감정에 복 받히게 하는 것처럼, 듣는 이로 하여금 감상적이고 몽환적이게 만들었 다. 그의 노래는 오페라의 가수가 아무런 도움 없이 드넓은 홀을 그의 목소리로 가득 채우는 것처럼 그렇게 모든 것을 포용하듯 울려 퍼졌다. 암흑뿐인 하늘에 신성한 빛을 빚어내는 이여, 내가 사랑한 이를 괴롭히지 마라 울고 웃으며 만들었을 행복을 왜 무너뜨리려 하는가 노래하며 쓰다듬어야 하리... 신족들은 어느새 알 수 없는 한 감정에 모두 젖어버린 듯 본래의 목적을 망각한 채 페르딘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참으로 기이하다. 이것은 일종 에 최면 효과라고 할 수 있을까. 신족들이 이런 것에 휘둘린다니 우습 기도 하다. 나는 이 상황을 보며 1년 전에 아젠샤르가 그의 노래로서 세 이렌들을 굴복시키던 장면을 떠올렸다. 이 순간만큼은 이곳 세계에 존재 하는 모든 음유시인과 아름다운 노래들은 그 어떤 것보다 위대하게 느껴 진다. 어느덧 신족들의 신성 공격이 느슨해졌고 점차 흐릿해졌다. 그 모습을 보며 페르딘이 우리에게 어서 피하라는 듯이 눈짓을 해 보이는 순간, 우리 앞에 익숙한 얼굴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마족 지스카였 다. “내가 나설 때인가? 끝장나는 줄 알고 조마조마했네.” 지스카는 진작 와있었으면서도 어느 한 장소에 기운을 죽이며 몸을 숨 기고 지켜보고 있었던 듯했다. 그는 신족의 추격이 닿을 수 없는 곳으 로 우리를 피신시키기 위한 한 방편으로 마계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기 시작했다. 신족이라면 아마도 자신과 상반되는 속성의 세계인 마계에 쉽게 발을 들여놓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 마계에선 신성력은 위축되고 마력이 팽배해진다. 그때! “감히 인간 따위가 우리를 우롱했던 것인가!” 한 신족의 분노에 찬 일갈이 체면에 걸린 이곳의 공기를 한순간에 깨어 놓았다. 그는 지스카의 암흑 기운을 문득 느끼고는 퍼뜩 제 정신을 찾 은 모양이었다. 나머지 신족들도 다시 정신을 추스르더니 마찬가지로 페르딘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그들은 미약한 인간에 의해 고결하고도 위대한 자신들의 자존심이 짓밟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미카엔이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신족들의 분노는 신성 공격으로 금 세 탈바꿈하여 페르딘에게 향했다. 노래하는 것 외에 다른 능력이 없 는 페르딘으로서는 어떻게 그들의 분노에 대항하겠는가. 그저 몸으로 그들의 분노를 받아낼 뿐이었다. 번쩍이는 섬광이 스치고 지나가자, 페르딘은 잔뜩 그슬린 몸으로 피를 흘리며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전격 계열의 신성 공격이었던가. 미카엔 은 핏기 사라진 얼굴로 그에게 달려가 품에 안았지만 페르딘의 상태 여부로 제대로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또다시 신족들의 저주스런 공격 이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미카엔은 아무런 방어 마법도 시전하지 않은 채 폐부를 찢는 듯한 외침을 그들에게 토해냈다. “네 이놈들!!”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페르딘은 왜 저렇게 쓰러져 있 는 거지? 미카엔은 왜 저토록 처절한 분노를 토해내고 있는 걸까? 나 는 그에게 달려갔다. 미카엔의 이름을 외치며... 저들을 원망하며... 나는 여기서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우리를 향하는 죽음을 가로막으며 섰다. 페르딘에게 일갈했던 그 신족을 아사드가 저지하고 나선 것이다. 아덴의 수족인 그 가 이번에는 신족들 앞에서 아덴의 의지를 거스르고 말았다. 신족은 더 욱 분노하며 아사드를 배반자로 몰아갔다. 분노로 젖은 자욱해진 피 비린내가 더욱 진동하는 가운데, 지스카는 마 계로 통하는 게이트를 마침내 열었다. 신족들은 우리가 이곳을 빠져나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들었지만 나는 피할 생각을 하지 않 았다. 그러자 지스카가 우악스럽게 나를 게이트로 끌어들였다. 나의 몸 은 곧 마계로 빨려 들어갔고, 더 이상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소름 돋는 기운이 전신을 타고 스물 스물 올라오는 마계의 어느 동굴 안. 지스카가 동굴 밖에 나가 있는 동안 메르킨과 미카엔 그리고 나는 페 르딘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페르딘은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 같은 가픈 숨을 몰아쉬며 미카엔에게 말했다. “...그런 슬픈 얼굴을... 안 어울립니다. 이것은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에 게... 주어지는 운명... 나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영혼을 더럽힌... 자의 파멸입니다... 하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이렇게... 불러보고 싶었습 니다... 형...” 힘겹게 붙어있던 페르딘의 숨은 거기서 멎었다. 하지만 그는 눈을 감 지 못했다. 미카엔이 떨리는 손으로 그의 눈을 감겨주자 그 안에 고였 던 눈물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의도적으로 부르던 ‘미카엔’이란 호칭을 버리고, 마지막에서야 안에다 꼭꼭 숨겨놓았던 마음을 드러내어 형이라 부른 페르딘의 유언에 미카엔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페르딘에게 다가온 죽음을 막을 능력이 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죽을 만큼 슬픈데도 말이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구석에 놓여진 검을 바라보았다. 그 것은 아사드의 빛의 검. 아까 게이트가 닫힐 때, 아사드가 놓친 검이 딸려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그때, 왜 아사드가 검을 놓쳤던 것일까.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모든 불행은 모두 나 때문이다. 미카엔이 이곳 마계 차가운 땅에 전 국왕이었던 아버지를 이어 동생마저 묻게 된 것도 나 때문이다.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빛의 검을 들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다시 모 든 것을 되돌리고 싶다. 내가 없는 이전처럼. 하지만 미카엔에게 주게 될 상처는 어쩐단 말인가. 나는 동굴 밖으로 나와 영혼마저 소멸시킨다는 빛의 검을 들어 나의 심장에 겨냥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의 팔목을 거칠게 잡으며 저지 하였다. 들고 있던 빛의 검을 떨어뜨리며 돌아보자, 얼음같이 차가워진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미카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손을 들어 나의 뺨을 때렸다. ‘짝!’ 하고 나의 고개가 돌아가고 맞 은 뺨은 붉게 물들었지만, 나는 어떤 아픔도 느낄 수가 없었다. 나보다 때린 그가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기에. “미카엔...” 두 개의 달이 뜬 마계의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다. ------------------------------------------------------------------------ 체인지[2부] 제10화 -권능의 조각- (16) Ip address : 218.238.165.8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16- 두 개의 달이 뜬 마계의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다. 그의 짙어진 눈동자 빛깔처럼. “너는 페르딘의 죽음을 헛되이 할 자격이 없다, 라비스.” 미카엔은 그 차가운 한마디를 내뱉고는 다시 동굴로 사라졌다. 그러한 그의 뒷모습에 나는 의미 없이 존재하는 돌기둥 마냥, 그 자리에 굳은 모습으로 서 있다가 아사드의 빛의 검을 다시 주웠다. 그리고 슬픈 듯 이 중얼거렸다. “페르딘, 네가 했던 말이 생각나... 누군가가 말하길, 자신의 강한 의지 가 가끔은 운명이 될 때도 있다고 했지. 그거 왕비의 일기장 구절이랑 비슷해.” -한 고귀한 존재의 강한 의지... 그 강한 의지가 곧 운명이 된다. 운명은 무엇이며 의지는 또 무엇인가. 이도현에서 라비스. 라비스에서 셀레네스. 나는 지금껏 뒤바뀐 운명인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뒤바뀐 운명이 아니라 스스로 바꾼 운명이란 다. ‘뒤바뀌다.’는 운명이고, ‘바꾸다.’는 의지였다. 나의 의지 말이다. 그런데, 나는 아무런 기억이 없다고 하여 스스로의 의지에 아무런 책임 을 짓지 않고 있다. 미카엔의 말이 옳다. 나는 페르딘의 죽음을 헛되이 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페르딘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나는 다시 일행이 있는 동굴 쪽으로 달려갔다. 미카엔은 벌써 동굴의 입구에서 페르딘을 화장하려 하고 있었다. 마계의 땅에 깃든 암흑 기 운이 페르딘의 순결한 육체를 침범하기 전에 화장하려는 것이다. 미카엔은 마물들이 시체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 주위에 결계를 치고는 페르딘의 얼굴을 오래도록 말없이 지켜보았다. 지스카와 메르킨도 제법 진지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얼마 후, 진홍 빛 불꽃이 페르딘의 시체 위로 화르르 타올랐다. 그 순간, 나는 헛바람 을 삼키며 잠시 숨을 쉬는 것을 멈추어야 했다. 타오르는 불꽃이 마치 미련을 가지고 잠시 이곳에 머문 페르딘의 영혼 처럼 보였던 것이다. 저토록 아름답게 타오르는 진홍빛 불꽃은 페르딘 의 넋이라 여겨졌다. 이미 차갑게 식은 육신을 야금야금 먹어가며 순간 의 생명을 환하게 밝히는 그것은 순결한 열정으로 가득 찬 페르딘의 생 전 모습과 너무도 닮은 것이다. 따스하고 아름다웠다. 원래 이렇게 아름다운 거니? 너만 이렇게 특별한 거니? 육체를 태우는 그 환한 불꽃은 마치 우리를 위로하는 따뜻한 미소인 것 같아 더욱 가슴이 미어졌다. 이렇듯 어둔 낯선 땅에서 다시 되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그의 영혼이건만, 살아생전의 그 순수하고 유쾌한 웃 음이 진홍빛 불꽃으로 화한 것만 같았다. 형, 그런 슬픈 눈은 하지 마... 울지 마, 라비스... 순결한 영혼으로서 삶을 살아야 했을 그를 괴롭히던 과거의 아픔은 검은 연기가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져버리고, 그의 순결함만이 타오르는 불꽃 으로 화하여 암흑뿐인 이곳에 빛을 뿌리고 있었다. ‘난 울지 않아, 페르딘. 이젠 삶을 포기하거나 않아. 살 거야. 슬펐던 것 만큼 행복하게 살 거야. 미안해... 미안해, 페르딘. 난 네 죽음을 헛되게 하려고 했었어. 내가 왜 그랬을까? 미카엔이 화를 냈던 건 당연한 거야...’ 지독한 슬픔과 절망이 누그러져 마침내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아름다운 열정으로, 순결함으로 타올라 어둠을 오래도록 따스하게 비추던 그의 영혼은 어느덧 영영 떠나가고 말았다. 붉은 빛은 다시 스 러지고 마계의 한기가 다시 느껴지고... 그렇게 페르딘의 육체는 영혼이 떠나가 한 줌의 재로 남은 것이다. 그러자 무언가에 꽉 막혀 있던 나의 눈물샘은 한없이 차올라 두 뺨을 적시기 시작했다. 안녕, 페르딘... 마계의 두개의 달 중에서 하나가 질 무렵이었다. 보랏빛 하늘은 이제 여느 밤하늘처럼 까맣게 드리워졌지만, 보석 알처럼 촘촘히 박힌 별들 이 없어 암흑뿐인 하늘은 다소 공허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동굴 안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모의에 들 어갔다. 미카엔은 개인적인 감정은 완전히 접고 나라 일을 보던 평소의 모습처럼 담담하면서도 진지했다. 메르킨은 여전히 제 3자 입장을 취하 고 있었고, 지스카는 중상모략이라도 꾀하는 듯 태도가 은근했다. 오히 려 그는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은 느낌마저도 들었다. “실버 드래곤, 다시 두 개의 달이 뜨면 어디를 좌표로 인간계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 생각이지?” “그걸 생각하기 전에, 지스카 너를 추궁하겠다. 아사드가 왜 빛의 검을 마계로 떨어뜨린 거지?” 그러자, 지스카는 씩 웃어보였다. 뭔가 미카엔이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한 것인가. “그건 말야. 언제나 아사드는 신족 입장에서 셀레네스를 도울 방법을 생각하기 때문이지. 신족 입장이란 것은 무엇인지 알아? 신족의 방식 으로 생각하며 신족의 긍지를 잃지 않으며 행동하는 것이지. 그렇기에, 아사드는 그가 생각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셀레네스를 도울 도구인 빛 의 검을 던져 준 셈이다. 셀레네스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 는 선택권을 손에 쥐어준 거야.” 그의 말에 미카엔은 단아한 외모를 살짝 찌푸렸다. 나는 벌떡 자리에 서 일어나 소리쳤다. “그렇지 않아!” “셀레네스, 너는 창조신 아덴을 어떤 존재라 생각하지? 그리고 마계 절대자는 어떤 존재라 생각해? 잠깐, 이해를 도울 겸 고위 마족들에 대한 설명을 해주지. 우리 마족은 고위와 하위 개념으로 마족의 존재 가 극명하게 갈라져. 본래 마계에서 거주하던 마족들은 어둔 잿빛 머 리칼에 칙칙한 피부를 가진 형편없고 못생긴 족속들이었지. 게다가 아주 멍청해. 그에 비해, 우리 고위 마족들은 3계급으로 나눠지지. 그 중 나는 2계급. 네가 알고 있는 키리아는 3계급이다.” “자, 잠깐.” 뜬금없는 마족 설명에 나는 말을 끊었다. 하지만 지스카는 상관하지 않 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메르킨은 그런 지스카를 의미모를 눈빛으로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었다. “...내 머리칼은 청 흑발이다. 그것은 곧 2계급 고위 마족임을 의미해. 바이올렛 빛을 머금은 흑발은 1계급. 키리아는 그냥 그런 흑발이었을 거야. 고위 마족은 그런 공통된 외모에 신족들처럼 뛰어난 능력을 가지 지. 또한, 하위 마족들은 이곳에서 저들끼리 알아서 번식하지만 우리는 마계 절대자에 의해 생명을 받거든. 그래서 우리는 형제처럼 서로 닮았 지만 형제애 따윈 없어. 가족애도 없지. 셀레네스, 같은 마족이면서 마 계 본래 거주자인 하위 마족들은 어째서 마계 절대자의 영향에서 독립 되고 이렇듯 완전히 구별되는지 궁금하지 않나?” 그의 말에, 나는 얼른 느껴지는 것이 없어 갸우뚱하는데 미카엔은 뭔가 눈치 챈 것이 있었는지 지스카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취하며 마법을 시 전했다. 그것은 누군가가 힘을 못 쓰도록 하는 봉쇄 마법 중 하나였다. 나는 갑작스런 상황에 눈을 크게 떴다. 미카엔은 잘 벼린 은빛의 검 날처럼 살의가 번뜩이는 표정으로 지스카 에게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너무 차분하여 폭풍의 한 가운데 있는 잔잔한 바다와 같았다. “지스카, 넌 누구냐?” “이봐, 실버 드래곤. 그렇게 경계할 것은 무엇이지? 난 셀레네스의 아군 이라고.” 지스카의 능청스런 말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가 저번에 신족의 홀리 미사일로 상처를 입고는 마계로 도망칠 때 스치듯 이렇게 말했다. ‘애석하군, 마계 절대자의 의지가 여기서 접히게 되다니.’ * 다음 편은 페르딘의 이야기를 쓴 외전을 하려고 했지만.. 페르딘의 감정이 잘 안 잡히는 군요.. 너무 오랫동안 체인지를 놓았던 탓입니다.. 그동안 중간고사와 레포트에 바쁘다가 이번에 지독한 감기에 걸려 또 다시 체인지가 늦어버렸습니다. 다음 주 동안은 멀리 여행을 갑니다. 일요일엔 서울에 가야 할 일이 있을 것 같고... 뭔가 굉장히 바쁜 것 같네요.. 그래서 오늘 체인지에 열중해야 할 듯 합니다.. 저는 이렇게 체인지 글 끝에 제 얘기를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감기 탓인지.. 주절주절 변명 겸으로 잘도 늘어놓는 군 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 ---------------------------------------------------------------- 체인지[2부] 제10화 -권능의 조각- (17) Ip address : 218.238.165.8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17- 지스카는 나에게 시선을 주며 말을 이었다. “셀레네스, 대리자는 무엇이라 생각하지?” “난...” “대리자는 신의 그림자이자 여러 얼굴들 중 하나이며 분신이지. 신의 의지는 대리자들 통해 인간들에게 반영되고 인간들의 염원은 신의 대 리자를 통해 전달돼. 그것은 신계와 인간계 사이에 성립된 원칙이야. 그러한 대리자들이 너에게 몇 명이 존재하는지 알고 있어? 창조신 아 덴의 대리자는 모두 몇 명일까? 대리자는 신과 인간인 스스로의 의지 가 맞물려 각성하게 된 자들을 이르지. 물론, 인간뿐이 아니라 엘프나 타 종족이 될 수도 있지만.” “…….” “...아덴은 어디든 존재하는 자야. 그는 곧 세계야. 그는 하나의 일정한 형태로 존재하는 자가 아닌 거지. 평범한 한 인간이 아덴이 될 수도 있 고 공기와 물이 아덴이 될 수 있는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렇다면 아덴은 내가 어디에 있든 다 알고 있단 말이야?” “쿡, 그럴 수도... 이곳 세계의 모든 존재는 아덴의 대리자가 될 수 있 는 자격을 가지고 있지. 각성하느냐, 마느냐가 관건이겠지만.” 그때, 미카엔이 끼어들었다. 그의 눈은 가늘어져 있었다. “그 말은 즉, 너 역시 아덴의 대리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로군. 본래 마계의 마족들은 마물에 가까운 존재였지만, 마계 절대자의 권능으로 신족들처럼 뛰어난 능력과 수려한 외모를 갖게 된 고위 마족들이 생겨 났다는 것은...” “맞아! 나는 아덴의 대리자이지. 그리고 마계 절대자는 아덴이다. 후후, 놀랐지? 마계의 하위 마족들 중 선택된 자는 모든 것의 절대 자인 아덴에 의해 은총을 받고 다시 새로운 생명을 받아. 그렇게 해서 고위 마족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생겨난 거야. 근본이 마물이 라 교활하고 어둔 습성을 가지고 있지만, 반면에 아름다움이 무엇 인지 선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깨닫는 존재이지. 그런 점에서 우리 고위 마족들은 인간들과 가장 닮은 존재들이야.” 지스카가 아덴의 대리자라니... 말도 안 된다. 그저 마족인줄 알았던 그가 신의 대리자라는 것은 충분히 모순적이다. 아무리, 마계 절대자 가 곧 아덴이라 하지만. 나는 경계하며 지스카에게 외쳤다. “너 같은 교활한 마족의 말을 어떻게 믿지? 이제 와서 그런 것들을 털어놓는 이유가 뭐야?” “셀레네스, 거짓말이란 인간의 전유물인 것을 잊은 모양이군. 우리는 교활함으로 인간을 이용할 때도 있지만, 거짓말은 안 해. 진실만을 말 하며 인간을 이용하지. 내가 이제 와서 이러한 얘기를 하는 것은 시험 의 끝에 너희들이 도달했기 때문이야.” “뭐?” 내가 반문했지만, 지스카는 빙긋빙긋 웃으며 괜히 뜸을 들였다. 왠지 성 질 돋우는 태도였다. 미카엔은 그런 지스카의 모습을 잠자코 보다가 굳 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덴이 우리를 시험했다? 아덴은 도대체 어떤 의지로 우리를 시험했던 건가? 그리고 페르딘의 죽음은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지?” “보상? 푸하하하.” 갑자기 지스카는 폭소를 터뜨렸다. 데굴데굴 구를 듯 정신없이 웃어댔 다. 우리로서는 지스카의 모습에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그러다 미카 엔은 지스카가 웃는 의미를 깨달았는지 허탈하게 피식 웃어보였다. 미 카엔마저 그런 모습을 보이자 나는 더욱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결국, 우리는 그토록 피하려던 존재와 줄곧 함께 여행을 했던 셈이군. 이건 창조신이라 해도, 너무하단 생각이 드는걸. 지스카! 아덴의 대리 자로서 우리에게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라.” 미카엔은 정말 허탈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다가 지스카를 쏘아보며 외 쳤다. 그러자 지스카는 웃음을 그치고 똑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나? 어차피, 너희들은 좋은 결말로서 시험의 끝에 도달한 것이니.” 시험이라니? 그럼, 정말로 페르딘이 아덴이었단 말인가? 아직 페르 딘의 죽음에 대한 슬픈 감정이 다 가시지도 않았는데, 이게 무슨 난데없는 소리란 말인가! 아덴이란 존재는 일정한 형태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며, 평범한 한 인 간이 그가 될 수도 있고 물과 공기마저 아덴이 될 수도 있는 거라면, 페르딘 역시 아덴의 한 모습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왜? 왜 창조신이 란 자는 그런 짓궂은 시험을 했던 걸까? 미카엔은 어렸을 적부터 오랫동안 멍에처럼 가슴 안에 담고 있던 어 둔 과거가 있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엄격한 어머니 아래 왕성에서 외로운 시간을 보냈었다. 한번쯤, 그는 자신에게 있었을 동 생에게 미안함과 더불어 애틋한 그리움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다 미카엔은 페르딘을 만나게 된 것이고, 그는 국왕에서 평범한 청년으로 돌아가 진정으로 허물없는 모습을 동생에게 보였었다. 그 리고 마지막엔 페르딘에게 그토록 원하던 ‘형’이라는 다정하기 짝이 없는 호칭을 들었다. 그것은 프레야 왕비에 의한 어둔 과거에 대한 동생의 용서였다. 비록, 아덴의 시험에 의한 일종에 환영 같은 인연 이라 할지라도, 미카엔은 그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라비스로서의 삶에서 운명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를 발견 했다. 그것은 미카엔과의 사랑이 운명도 타의도 아닌, 스스로의 의지 에 의한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라비스, 너는 느낄 수 있다고 했나? 크리스티나의 사랑은 변함없이 진실했다는 것을.”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메르킨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내가 그에게 눈길을 주자 메르킨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 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눈길은 나에게서 발견한 크리스티나를 향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녀는 나와 너무도 닮았으니까. 메르킨은 말을 이었다. “...나는 그 사랑을 의심했었다. 하지만 너를 보면, 그러한 생각은 누그 러지는군. 너와 실버 드래곤의 모습에서 나의 지난 사랑이 겹쳐 보이는 탓이겠지. 너희는 누가 보아도 진실 된 사랑을 하고 있거든.” 메르킨의 말에 나는 조금 쑥스러운 듯이 미소 지었다. 지스카는 아까 했던 질문을 미카엔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실버 드래곤, 다시 두 개의 달이 뜨면 어디를 좌표로 인간계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 생각이지?” “로히얀스 왕성이다.” “우와! 로히얀스 왕성이요?” ‘로히얀스 왕성’이라는 말에 새삼스레 반갑게 여겨져 목소리 높여 내가 반문하자, 미카엔은 빙긋 웃어 보이며 ‘당연하지.’ 하고 답했다. 그리고 는 그는 다시 지스카에게 시선을 주고 물었다. “그런데 신족들이 페르딘에게 공격할 때, 그들은 페르딘이 아덴의 현신 임을 알고 있었나?” “킥, 당연히 몰랐지. 아마도 그들은 나중에 아덴에게 된통 혼날 거야.” 역시, 인간이 부른 노래에 신족들이 최면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창조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군... 그러고 보니, 지스카 너도 나에게 된통 혼 좀 나야겠다.” 미카엔이 짐짓 엄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지금껏 여유롭게 있던 지스카는 ‘악!’소리를 내며 변명 아닌 변명으로 모든 것은 아덴의 의 지였다고 외쳐댔다. 잠시 후, 미카엔은 로히얀스 왕성 쪽으로 좌표를 잡고 지스카와 함께 게이트를 열었다. 그러면서, 그는 지스카에게 지나가듯 물었다. “아덴은 무엇 때문에 굳이 우리를 시험 했던 거지?” “그건... 셀레네스는 아덴이 각별히 총애하던 신족이었기 때문이지. 그렇 기에 신족이기를 포기하고 실버 드래곤을 택한 것이 무척 괘씸했지. 아 덴은 셀레네스의 진심을 알고 싶기도 했겠지만, 이런 식으로 벌을 주고 싶기도 했을 거야.” 그런 건가? 그런데 미카엔과 나는 오래전에도 인연을 맺고 있었던가? 미카엔은 실버 드래곤이 아니다. 나는 아직도 지금의 상황이 어안이 벙벙하고, 아덴의 시험에 좌절하기 도 하고 지독한 슬픔을 겪었다는 것에 화가 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는 감사하기도 하다. 창조신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는 인간이기도 하고 엘프이기도 하며, 혹 은 마족이기도 하다. 아주 가끔은 물이나 바람, 구름이 되어 우리를 지 켜보며 미소를 짓기도 한다. 그는 곧 이곳 세계인 것이다. 창조신의 소멸은 내가 사랑하게 된 이곳 세계의 소멸이 될 것이다. 다시 또 볼 수 있을까. 페르딘이 되어 잠시 동안 우리와 함께 한 창조신 아덴. 셀레네스로서 갖았을 아덴에 대한 기억이 문득 궁금해져 온다. * 너무 급진전인가요? 혹시 라비스처럼 어안이 벙벙하지 않나요? 길고 긴 권능의 조각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쳅터 제목이 영 아니군요. 너무 포괄적인 것 같기도 하고 핀트에도 벗어나 있군요. 제목을 시작 할 때 붙여놓으면 항상 이런 경우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 출간할 때 바꾸어야겠어요. 이 쳅터에서 페르딘의 죽음은 클라이막스였습니다. 사건의 정점이자 전환점이지요. 그러니 결말을 향해 빠르게 치닫는 수 밖에요(....) 머리가 아프군요.. 충분히 수정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올리고 나서 자정까지 또 뭔가를 열심히 써야 합니다. 글에 치어 사는 인생...... 행복하겠죠?^^ ------------------------------------------------------------------ 체인지[2부] 외전Ⅶ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 Ip address : 218.238.163.7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외전Ⅶ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 고대인들은 맑게 갠 하늘을 ‘아덴의 눈’이라 불렀다. 그들은 구름 한점 없이 청명한 날씨가 될 때면, 창조신 아덴의 시야가 여과 없이 인간계에 이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늘은 아덴의 눈이요, 바람은 아덴 의 입김이요, 땅은 아덴이 받히고 있는 손이었다. 인간계에 현존하고 있는 한 아덴의 대리자가 이렇게 말했다. ‘이곳 세 계의 존재는 곧 아덴의 존재이다. 세상 만물은 아덴의 육체이다. 다만 그의 권능이 유일하게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봉인과 망각 의 세계라 불리는 또 다른 세계라 한다.’ 봉인과 망각의 세계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다. 제대로 알고 있는 자도 없다. 다만, 짐작되어지는 것은 그곳 세계에 가게 되면 존재의 힘은 봉 인되어지고 모든 의지는 망각으로 흐려진다는 것이다. 종교계에 종사하 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러한 세계에 정령의 여신인 셀레네스가 봉 인되어 갇혔다고 한다. 아덴의 의지를 거스른 대가로 받은 벌이었다. 그 탓인지 그 후, 모든 곳에 존재하는 정령들은 타 존재에 대해 더욱 폐쇄적이게 되었다. 셀레네스 봉인에 대한 영향인 것이다. 정령들은 세 상에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경계심도 더욱 짙어졌다. 그로 인해, 마법사 외의 인간들은 정령들의 존재를 이야기 속에서나 등장하는 것으 로 믿게 되었고, 아예 정령들의 존재마저 까맣게 모르는 경우도 있게 되 었다. 보이지 않는 것에는 그다지 믿음을 갖지 않는 인간의 습성 탓이라 해야겠다. 백색 대륙의 언약의 숲이라 불리는 한 침엽수림. 새하얀 눈이 덮여 짙은 초록의 침엽수림은 회색빛 하늘 아래 화사한 은백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곳에서 심장만 얼어붙지 않는다면 백색대륙은 더없이 아름답고 매력적 일 듯하다. 눈이 섞인 회색빛 바람이 불자, 마침 언약의 숲을 지나던 인간의 무리가 옷깃을 여몄다. 극한의 날씨이다. 그러다 문득 그 일행 중에서 마지막으 로 걷던 한 남자가 뭔가 기이한 것을 발견한 듯 짧은 탄성소리를 내었다. 그는 이곳 언약의 숲에서 백합 전설로 유명한 겨울의 백합을 발견한 것 이다. 이렇듯 극한의 날씨에 새하얀 눈 속에 파묻혀 한 송이씩 피어난 다는 희귀한 겨울의 백합. 그 남자는 백색의 고고한 백합의 자태에 홀 려 다가가 가녀린 백합의 꽃잎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순결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싱싱하게 피어있던 겨울의 백합은 한 인간의 손길에 순식간에 시들어버렸다. 새하얗던 백합의 꽃잎이 까맣게 쪼그라 들어 버린 것이다. 그 남자는 당황하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미 시들어버린 겨울 의 백합을 다시 살려낼 방도는 없었다. 결국, 남자는 꺼림칙한 기분으 로 그곳에서 물러나 일행들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인간들의 무리가 사라지자, 겨울의 백합이 피어있던 그 자리에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름한 신관 복장을 한 남자였다. 그는 후 드를 머리끝까지 쓰고 있어서 외모가 어떠한지, 젊은지 나이가 들었는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정체불명의 그 신관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저런! 겨울의 백합의 또 다른 이름은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이라는 것 을 모르는 건가. 운명으로 순결한 영혼을 가진 이들은 한 번 더럽히게 되면 파멸하고 말지.” 신관은 시들어버린 겨울의 백합에 다가갔다. 긴 소매 끝에서 섬세한 아 름다움을 가진 그의 손이 드러났다. 그의 손이 백합의 꽃잎을 살짝 스 치자 새하얀 빛이 순간 번쩍했다. 그러자 겨울의 백합은 거짓말처럼 다 시 화사한 모습으로 활짝 피어났다. 후드 때문에 얼굴은 안보이지만, 신 관은 그 모습을 보며 자비로운 미소를 짓는 듯했다. 다시 피어난 겨울의 백합은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이라는 또 다른 이름처럼, 아름다운 노래가 울려 퍼지듯 고결하고 향긋한 그 향기로서 많은 존재의 영혼을 다시금 진동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그것으로 위안이 되지 않은 듯 조금은 침울한 듯해 보였다. “나는 무엇 때문에 네가 만들어낸 약속의 증표를 다시 되살려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셀레나, 네가 원한다면 나는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겨울의 백합은 ‘셀레나’ 라는 애칭으로 불린 여신 셀레네스가 만들어낸 약속의 증표였다. 그 약속은 아마도 셀레네스 자신이 언약의 숲을 다시 찾아오겠다는 내용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셀레네스가 이곳을 다시 찾는단 말인가. 그 증표로서 여름에나 피는 백합을 왜 침엽수로 가 득한 언약의 숲에서만 피어나게 했던 걸까. 그것은 그렇다 치고, 겨울의 백합의 또 다른 이름이 왜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인 것인가. 신관은 셀레네스와 관련된 아주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금발과 금안 의 아름다운 그녀는 눈물로 젖은 눈으로 그의 앞에 무릎 꿇고 말했었다. “아덴이시여! 언젠가 저를 용서해주실 줄은 믿어요. 내가 왜 이런 선 택을 했는지 이해해주실 날이 있을 거라 믿어요. 저는 증표의 이름을 영 혼을 노래하는 시인이라 붙일 겁니다.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들은 아덴께 서 가장 총애하던 인간들이었으니까요.” 신관의 상념은 가녀리게 떨리던 셀레네스의 목소리와 함께 금방 사그라 졌다.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위를 한번 쓱 훑어보았다. 그리고 무엇을 발 견한 듯 한 방향을 응시했다. 그렇게 그의 시선이 어느 한곳으로 고정되 자, 마치 영화의 화면이 서서히 다른 장면으로 바뀌어가듯 어느덧 주변의 모습은 언약의 숲을 벗어난 근방에 위치한 어느 숲 외곽으로 바뀌어 있었 고, 그가 서있는 곳도 그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공간 이동이 이루어진 것 이다. 그가 치렁한 옷자락을 새하얀 눈에 스치며 조금 걷자 창백한 얼굴로 눈 위 에 쓰러져 있는 금발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셀레네스... 아니, 라 비스였다. 그는 다가가 손을 라비스의 창백한 볼에 갖다대었다. 그녀의 뺨은 벌써 차 갑게 얼어있었고 숨은 거의 끊어질 듯 미약했다. 하지만 그의 손이 그녀에 게 닿은 순간, 그 뺨에는 화색이 조금씩 감돌기 시작했다. 그는 깊게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조금은 평범해 보이는 짧은 밤 갈색 머리칼이 드러나고, 눈매가 서글서글해 보이는 앳된 청년의 얼굴 이 드러났다. 그 얼굴은 미카엔의 동생 페르딘의 얼굴이었다. 그렇게 그의 얼굴이 드러난 순간, 그의 복장은 신관의 모습에서 어느덧 허름한 여행자 의 모습으로 변하여 있었다. 라비스와 만난 순간, 신관의 모습을 한 아덴 은 페르딘이 된 것이다. 기억과 말투와 성격까지 아덴의 의지로 완벽히 미 카엔의 동생인 페르딘이 된 것이다. 페르딘이 된 그는 그 자리에서 모닥불을 피고는 자신의 수하인 신족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결계를 쳤다. 그리고는 살아있다면 실제 페르딘이 그 랬을 순수하고 쾌활한 듯한 말투로 라비스를 깨우기 시작했다. “이봐! 일어나. 눈 좀 뜨라고. 엄마는 그만 찾고. 어휴~” 오랜 세월 동안 끊었던 라비스와의 인연을 그렇게 이은 아덴은 이러한 생 각을 했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모습인 페르딘과 자신은 왠지 모르게 닮 은 부분이 많은 것 같다고 말이다. 페르딘처럼 그 역시 인연을 잃는 것에 대해 의식적으로 두려움을 가졌던 것이다. 전능한 창조신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가 인연에 집착한다는 것 은 어이없는 일이지만 사실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아덴은 라비스와 함께 여행하는 동안 루벨튼으로 가는 길목인 언 약의 숲으로 그녀를 유도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는 그녀가 미카엔과 재회하지 못하길 바랐다. 그렇게 된다면, 그녀와 미카엔의 오래 된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 백합 향기가 나는 언약의 숲 에서 다시 만나 사랑을 이루자는 그들의 약속이... 그 약속을 서로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무의식 깊은 곳에 새겨져 있어, 그 들의 발길은 백합이 있는 곳으로 운명처럼 향할 것이다. 미카엔이 겨우 5살 때, 백합 궁성의 측실을 사랑했던 것처럼, 그들의 뿌리 깊은 약속은 어렴풋이 비슷한 상황만 되어도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결국, 라비스는 백합 궁성의 측실이 되었고 미카엔은 또 다시 백합 궁성 측실인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가. 하긴, 셀레네스의 약속은 굳이 겨울의 백합이 피어있는 언약의 숲을 가리 키는 것은 아닐 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재회 약속은 이미 이루어진 것일 지도 모르겠다. 로히얀스 왕성인 백합 궁성 앞에서 말이다. 언약의 숲을 향하던 중에, 백색 대륙의 시린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라비스 가 다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지독한 열감기가 겹쳐 그녀의 육체는 불 덩이가 되어갔다. 아덴은 그녀가 또 다시 쓰러지자, 하는 수없이 환영으로 서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외딴 인가를 만들어냈다. 빛의 정령들로서 렌체르 가족을 만들어내고 허름한 오두막까지 실제에 가까운 환영으로서 창조해냈 다. ‘창조’라면 창조신이 전문이지 않던가. 그녀의 열감기가 하루 만에 뚝딱 낫는다는 것은 조금 말도 안 되는 일이었 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런 식으로 환영을 이용하여 그녀의 병을 자연스 럽게 치유했다. 하지만 순진하게도, 라비스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 냥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할 뿐. 그렇게 그들이 언약의 숲에 들어섰을 무렵, 라비스는 점점 더 침울해져 갔 다. 자신의 연인을 지독히도 그리워하며 마침내 죽음마저 생각할 지경에 이르는 모습을 보며, 아덴은 문득 외로움을 느꼈다. 소중한 존재가 자신을 등질 때의 상실감이라 해야 할까. 그러면서도 가슴이 아픈 것은 어떤 감정 인지 알 수가 없다. 그녀가 신족임을 포기했을 때는 너무도 화가 나서 소 멸 형이니 뭐니, 외쳤는데... 막상 그녀가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두려움 마음까지 일고 있다. 그녀가 신족 으로서 세상에 태어난 그 순간부터 지켜보며 아껴왔기 때문인 걸까. 아덴은 언약의 숲을 지나며, 이대로 미카엔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녀를 신 계로 데려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의 의지 따위는 무시한 이러한 생각 은 정말 창조신답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가끔, 그답지 못하게 눈부 신 아름다움에 홀려 그녀를 바라보게 될 때도 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다 라비스가 격해진 마음으로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그곳에서 미카엔과 재회를 했을 때, 서로를 향한 그들의 모습이 놀랍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 지만,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감동이 일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창조한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을 그곳에서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 모든 것을 뛰어넘을만한 강한 의지를 발현시키는 근 원, 사랑이었다. 아름답고 고결하며 한없이 우아하던 그녀가 한 존재 앞에서 무너져 눈물 콧물을 흘리던 모습. 그때 아덴이 본 그녀의 영혼은 가장 아름다웠다. 그 리움, 애틋함, 애정, 그러한 감정들이 어우러져 기적으로 여겨질 정도로 아름답게 사방을 진동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 깊숙이 묻혀 때로는 부 정되고 의심되던 사랑의 감정이 그 순간에는 감쳐둔 얼굴을 남김없이 모두 드러냈다. 이곳 세계를 창조한 장본인이자 주인이면서도, 무엇이 가장 위대한지 깨닫지 못하고 그동안 사랑을 하는 셀레네스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이제 와서, 아덴이 이러한 사소한 진실을 깨닫게 된 것 은 인간의 육체의 모습을 하고 인간의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보게 된 것이 이 유였을 듯하다. 어쨌든, 그는 지금 페르딘이라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역할에 취 해, 자신이 만들어낸 환영에 취해 미카엔을 향한 페르딘으로서의 감정이 자 신도 모르게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어둔 과거로 인한 형에 대한 원망, 미움, 그러면서도 그리울 수밖에 없는 피를 나눈 형제애가 말이다. 아덴은 미카엔에게 페르딘으로서 한 가지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소중하다 생각했던 그 존재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었는지를... 물론, 미카엔 이 과거에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그 존재는 프레야 왕비에 의해 비극적인 파 멸을 겪은 페르딘의 어머니이다.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으로서 순결해야 할 그녀가 짧은 불꽃같은 사랑을 위해 삶의 자유를 버리고 왕의 측실이 되어 점차 타락해갈 수밖에 없었던 것. 프레야 왕비에게 감히 대항하며 권력 다 툼을 하고 페르딘을 왕의 후계자로 세우려 했던 것. 미카엔을 자신의 아들 처럼 사랑하면서도 추악하고 속물적인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그 녀를 몰아가던 왕실. 그녀의 파멸은 왕성에서 본래의 고향인 백색 대륙으로 내쫓기는 것으로 시작 되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이제 갓난아기였던 둘째 아들을 잃고, 몇 년 뒤 절 망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가 숨을 거두었다. 페르딘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로 히얀스 왕실에 대한 미움을 키우다가 고아가 되어 백색 대륙을 홀로 떠돌았을 것이다. 그러다 그 역시, 짧고도 가엽기 짝이 없는 인생을 마쳤을 것이다. 아덴은 지금 이 순간 그러한 페르딘이 되어 있는 것이다. 라비스가 사랑하는 미카엔에 대한 한 가지 시험으로서 일부로 그러한 페르딘이 된 것이다. 아덴은 내심 바랐다. 미카엔이 원망과 미움으로 얼어버린 페르딘이 된 자신 의 마음을 녹이지 못하기를... 하지만 미카엔은 형으로서 갖는 애정을 그에 게 보이며 진심으로 대했다. 동생의 죽음 앞에서는 진정으로 분노하기도 했 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페르딘이 된 아덴 스스로가 그들을 위해 희생을 하고 미카엔을 형이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진심으로... 어렸을 적부터 키워왔을 원망과 미움을 버리고 그리움만 그의 앞에 내보이며 진정으로 미카엔의 동생이 된 것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렇게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형... 이로서, 환영의 페르딘이 아닌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실제 페르딘의 영혼 도 어쩌면 그 얼어붙은 마음이 위로되었을 거라 생각된다. 미카엔 역시, 그 동안 풀지 못한 동생에 대한 사랑 그리고 죄책감을 어느 정도 보상받았으리 라 생각된다. 아덴, 그도... 아덴은 환영으로 이루어진 페르딘의 육체를 화장하는 그 자리에서 따스하고 아름다운 불꽃으로 화하여 미카엔과 라비스를 처음으로 축복해주었다. 그렇게 그들에게 축복을 함으로서 정작 아덴 자신도 축복을 받았다. 이제 더 이상 그는 이런 식의 헤어짐을 인연 잃는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 위의 본문 중에서 이곳 세계에서 영화라는 개념이 없을 텐데도 영화 의 한 장면이 바뀌는 것 같다..는 식의 표현을 쓴 것은 이 외전의 화자 는 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_- 지금 여행의 후유증으로 몸 상태가 상당히 안좋네요.. 4일 여행으로 북경에 갔다 왔거든요.... -------------------------------------------------------------------- 체인지[2부] 제11화 -진짜와 가짜- (1) Ip address : 218.238.163.17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진짜와 가짜) -1- 거대하고 웅장한 대리석 건물, 아덴의 신전 입구에 서서 고개를 들고 파 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솜털 같은 구름이 저렇듯 예쁘게 흐르고 있는 하늘은 정말로 이곳을 내다보고 있는 아덴의 눈일까. 나를 바라보던 페 르딘의 눈일까. 이곳 세계의 창조신인 아덴에 대한 이야기는 이곳 왕성에 잠시 머물게 된 지스카에게서 많이 듣게 되었다. 하늘은 아덴의 눈이며, 바람은 아덴 의 숨결, 이곳 땅은 그가 받히고 있는 손이라는 것까지. 이제 제법 기사의 몸가짐이 몸에 밴 에드는 호위 임무로 내 곁에 말없 이 머물고 있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전하, 이제 그만 신전 예배당 안으로 드시지요. 지금쯤 모두가 왕비 전하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에드는 오래전부터 나를 지켜보았지? 그때의 나는 어땠어?” 문득, 본래 라비스에 대해 궁금해진 나는 에드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뜬 금없는 질문을 했다. 그러자 에드는 내가 새삼스런 질문을 했다고 생각 하는 듯 잠시 망설이더니, 나를 지켜볼 때면 늘 그랬던 부드러운 눈빛 과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제가 전하를 처음 뵈었을 땐, 열 살이었습니다. 그때 제 눈에 비쳤던 전하는 아름답고 순수하셨죠. 저에게 곧잘 짓궂은 장난을 치셨지만...” 에드는 그렇게 말하며 그리움에 젖은 듯한 미소를 살짝 머금었다. 그러 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황금빛 눈동자에 스스로가 실례했다고 생각 했는지 금방 표정을 지워버렸다. “그때의 내 모습과 지금은 많이 다르지? 에드.” “저는 전하께서 달라지실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수면제로 자살 시도했었기 때문에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묻자 에드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의 후유증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저는 좀더 근원적인 이유로 하프 엘프인 카이엔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하께서 폐하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시고 그로 인해 행복을 찾으셔서 다행이 라 생각합니다. 성격도 변하시고, 외모 또한 너무 아름다워지셔서 때 론 가까이 다가가기 어렵게 만드는 뭔가에 가로막힌 듯한 느낌을 받 을 때도 있지만, 저는 이렇듯 전하의 행복하신 모습을 보는 것으로 족 합니다.” “에드는 의심해본 적 없어? 어렸을 적부터 라비스를 지켜보았다면서... 사람은 그렇게 갑자기 변하거나 하지 않아.” 잠시 눈을 내리깔고 있던 에드는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갈색 눈동자는 나의 의중을 짐작해보려는 듯 조심스러우면서도 날 카로워졌다. 그렇게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답변을 기다 리기 위해 마주 바라보았다. “저는 전하를 의심해본 적 없습니다.” “…….” “...얼마 전, 카이엔이 서대륙에서 로히얀스로 돌아와 있다고 들었습니 다.” “어? 그래?” 에드가 전해주는 소식에 나는 한때 마법사들의 탑에서 함께했던 동료 로서 반가워하며 반문했다. 에드는 그런 나의 표정을 평소답지 않게 유심히 살폈다. 잠시 후, 나는 아덴의 신전 예배당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나 최고의 신 아덴을 모시는 예배당답게 홀 안은 왕성안의 그것처럼 드넓고 화려 했다. 돔형의 천장은 크리스털로 만들어져 푸른 하늘이 보였고, 벽면은 유명한 화가의 작품인 벽화들로 꾸며져 있었다. 모서리와 벽면에 근접 해 있는 낮은 천장에는 수많은 고급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경건한 음을 내는 건반 악기가 이곳에 있는 공기와, 그 안에서 숨쉬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의 감정을 신성함으로 파르르 떨리게 했다. 천사와 같은 목소리의 소년 성가대가 그에 맞추어 길게 늘어지는 높은 음을 내 었다.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닌 그저 음을 내고 있었다. 내가 지정된 자 리에 착석을 하자, 웅성거리며 일어서있던 귀족들과 귀부인들도 자리에 앉았다. 내가 이렇듯 아덴에게 드리는 예배에 직첩 참석하게 된 이유는 미카엔 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덴을 모시는 종교를 아예 국교로 삼을 심산인 듯 왕비가 직접 한달에 한번 정도는 예배에 참석하게 한 것이다. 이로서, 왕실에 잘 보이기 노력하는 수많은 귀족들은 싫더라도 아덴의 신전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아덴을 모시는 신관 복장을 하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페르딘을 생각하다가, 지금쯤 나라 일과 씨름하고 있을 미카엔을 생각했다. 처음 마계에서 열은 게이트로 왕성에 도착했을 때, 미카엔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한 얼굴로 자신을 맞이하는 킬린의 모습에 무척 당황해야 했다. 킬린의 손에는 엄청난 서류더미가 쌓여있었던 것이다. 킬린에게 그동안 왕성의 일을 들어보니, 상황은 즉 이러했다. 나의 갑 작스런 실종은 휴가 겸으로 별장으로 지어진 외곽의 성으로 여행간 것 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충 사정을 아는 마드린과 몇몇 측근은 나의 실종을 극비에 부친 채, 발을 동동 구르며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 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미카엔의 부재는 킬린과 제시에 의해 일이 꾸며져 있었다. 미 카엔은 친구이자 측근 기사인 제시를 일루젼 마법을 써 자신으로 둔 갑을 시켜놓고는 킬린에게 직접 제시의 행동을 통제하며 간단한 나라 일을 처리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미카엔이 사전에 일 러준 여러 사항을 준수하며 한동안 진땀을 뺐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왕이 직접 결정해야 일이 생기면, 킬린은 이제껏 한번도 거론된 바 없 는 왕의 건강 문제를 들먹이며 일을 차일피일 미루어왔었을 것이다. 그 러던 중에 미카엔이 돌아온 것이니 킬린으로서는 그야말로 왕의 귀환이 감동의 도가니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킬린의 주름 살이 그새 더 많이 늘어있다. 그렇게 상념에 빠져있는데, 옆 자리로 아사벨라가 와 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화려한 차림새로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전하께서는 나날이 아름다워지시는군요. 전하께 들려드릴 소식이 있 어요.” “뭔데?” “마리가 행방불명되었어요. 아마도 그녀는 제 오빠를 찾아 나선 것 같 아요.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가 지금 실종된 오빠인 엔카루스를 비 밀리에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거든요. 처음엔 안 믿더니, 이젠 저와 타 협해서 전하를 제거하는 일보다는 엔카루스를 찾는 일이 더욱 중요해진 모양이에요.” 아사벨라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리는 지금쯤 살아있지도 않은 엔카루스 를 애타게 찾아다니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어쩌면, 자이 라스에 갔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다른 곳으로... “내가 없는 동안 아사벨라가 대신 왕비 역할을 했겠지?” 내가 묻자, 아사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거만하고 오만하기 짝 이 없었던 그녀의 표정이 순간 부드럽게 풀어졌다. 자신의 소중한 존재 를 생각하는 건가. “예전에 폐하께서는 저에게 약속하셨어요. 언젠가 로히얀스를 위해서도, 폐하를 위해서도 저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여자가 될 거라고요. 제가 궁극적으로 갈망하고 있는 것. 언젠가는 제 총명함으로 이루어질 거라 고 했어요.” 나는 진지한 얼굴로 그녀의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아사벨라는 깊은 상념에 잠긴 듯한 눈빛으로 계속 말을 잇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이루어졌지 뭐예요. 저는 로히얀스를 위해서도, 페하 를 위해서도 필요한 여자가 되었어요. 비록 며칠뿐인 짧은 기간이었지 만 말이에요. 폐하와 전하께서 안 계신 동안, 저는 그 빈자리를 보이지 않게 채웠지요. 아무도 모르게... 폐하와 전하께서 로히얀스에 계신 것 처럼 아무도 그 부재를 눈치 채지 못하도록 나라를 돌봤지요. 그것은 폐하께서 저에게 주신 일부분뿐인 책임이었지만, 저는 행복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답니다. 마치 제가 폐하만의 여자가 된 듯한... 그 순간만큼 은, 저는 폐하를 대신하여 나라를 돌보는 로히얀스의 왕비가 된 거죠.” 아사벨라는 잠시 말을 끊고는 나의 황금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자신 의 말을 거침없이 나에게 털어놓는 그녀는 늘 그랬던 것처럼 정말 당 당해보였다. “...하지만 연꽃의 계절은 짧답니다, 전하. 연꽃은 8월 경 즈음에 가장 아름답죠. 이젠 그 여름이 지나가버렸군요. 호호.” 연꽃이라면... 로터스. 아사벨라가 머무는 궁이 로터스 궁임을 나는 생각 해냈다. 8월에 가장 아름다운 연꽃이라... 왠지 그 연꽃이 좋아지려 한다. 나는 아사벨라에게 시선을 주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 역시, 열 여덟 즈음의 나이에 측실이 되어 자신의 남편을 짝사랑해야 했으니 결 코 행복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오빠인 엔카루스가 반정을 일 으키고 남편에 의해 그것이 진압되어 가족을 잃고 가문이 몰락했으니 어찌 원망이 없었을까. 모든 것의 근원인 내가 미웠을 것이다. 그리고 미카엔도 미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여느 여자처럼 보복과 질투의 늪에 빠져 불행으로 치닫게 되는 어리석음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거대한 왕성 안에서 늘 혼자였던 자신이 행복해지게 될 다른 길을 찾으며 꿈을 꿔왔다. 아사벨라가 나에게 다시 말을 걸어왔다. “전하, 전 어렸을 때에는 개미 한 마리 못 죽이는 소심한 성격이었어요.” “헉! 정말?” 내가 놀라며 묻자, 아사벨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놀라다니... 슬프군요. 저도 돌아가신 황태자비만큼 이나 여린 여자였다구요.” 아사벨라는 무의식적으로 황태자비를 들먹이며 말하다가 문득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의 그런 태도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아덴에게 드리는 예배를 비롯한 그날 하루 일정이 모두 끝났을 때, 로히얀스의 하늘은 어느덧 미세한 보석 알로서 장식된 흑단과도 같 이 물들어 있었다.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침실로 향했다. 미카엔은 아마도 바쁘다며 집무실이나 응접실에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마계 에서 돌아온 후, 미카엔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한번 그의 집무실을 찾아가볼까? 하지만 나의 방문은 그에게 방해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이 시각에 중앙 궁성까지 찾아가는 것 또한 피곤한 일 이라 나는 그만두었다. 오늘따라 마드린을 비롯한 레니, 아나와 같은 측근 시녀들이 장미 궁 침실 근방에 보이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기며, 나는 침실 문을 열 었는데 누군가가 나의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미 카엔이었다. 은사와 같은 그의 머리칼에 얼굴을 파묻고 잠들어 있는 또 다른 존재, 아기 고양이 미카엔. 그동안 많이 크긴 했지만, 여전히 아기 고양이라 불러야 할 만큼 몸집이 작았다. 훗, 역시 미카엔은 미카엔을 알아보는 건가. 나는 가까이 다가가 미카엔을 살짝 깨워보았다. 하지만 그는 피곤한 듯 꼼짝도 않고 곤하게 잘도 잤다. 고양이랑 같이 잠들어 있는 미카엔이라 니... 나는 미카엔이 귀엽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았다. “이건, 미청년이 아니라 미소년이야... 스물네 살 아저씨 맞나?”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는데, 문득 매끈한 미카엔의 이마에 힘줄이 자그맣 게 돋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나는 설마하며 다시 미카엔을 깨워보 았다. 하지만 미카엔은 여전히 새근거렸고, 나는 그의 얼굴 앞에 손을 한 번 더 휘저어보고는 침대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미카엔이 깊이 잠들어있다는 것에 안심을 하며, 옷장 앞으로 가 서 원피스형의 잠옷을 꺼냈다. 바지로 된 것은 마드린이 전부 압수해 가 버렸기 때문에 잠옷이라곤 이것밖에 없었다. 어느 것이나 내 물건들은 슬플 정도로 다 치렁치렁하다. 리본이며, 프릴이며... 나는 그동안 입고 있던 드레스를 벗었다. 입고 행동하기에는 참으로 불 편하게 만들어진 이 드레스는 입고 벗는 것에도 무척 불편했다. 시녀들 이 있을 때에는 늘 옷 갈아입는 것에 도움을 받았지만, 오늘은 다들 바 쁜지 피곤한지 아무도 없다. 코르셋까지 벗고는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옷을 추켜드는데 등 뒤 로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았다. 그러자 언제 깼는지 미카엔이 짓궂은 미 소를 머금고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악! 언제 깼어요?” “네가 깨울 때부터. 라비스, 그 잠옷 입지 말고 그냥 이 침대에서 같이 잤으면 하는데...” “…….” 미카엔의 발언은 금세 나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어, 내 팔뚝의 피부를 닭 의 피부로 변화시켰다. 부끄러워서인지(?), 놀라서인지, 아니면 자는 척 했던 미카엔에게 화가 난 것인지 나는 붉어진 얼굴로 입었던 드레스로 몸을 가리며 서있자, 미카엔은 한숨을 나직하게 쉬고는 내 쪽으로 다가 왔다. 나는 ‘헉!’ 하고 다시 한번 놀라고는 이 자리를 피할 곳을 생각하다가, 그만 앞에 있는 옷장으로 쏙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이러한 나의 행 동에 미카엔은 아마도 기가 막히고 황당했으리라 생각된다. 부인이 자 신의 남편이 다가온다고 그 앞에 있는 옷장으로 숨어버릴 거라고 누가 생각한단 말인가. 안에도 있는 옷장의 손잡이를 힘주어 잡고 있는데, 밖에서 미카엔의 목 소리가 들려왔다. “라비스, 어서 나와. 설마 옷장 안에서 밤을 보낼 생각은 아니겠지?” --------------------------------------------------------------- 체인지[2부] 제11화 -진짜와 가짜- (2) Ip address : 218.238.164.10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2- “아하하, 옷장 안도 생각보단 편한데요?”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응수한 나의 답변은 조금 어이없긴 했지만 거짓은 아니었다. 정말로 생각보다 옷장 안은 풍성한 드레스와 그 밖의 수많은 옷들을 걸어놓는 곳인 만큼 넓고 아늑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옷장 안이 편하다라... 나는 아무래도 별난 부인을 둔 것 같군.” 하긴 내가 생각해도 평범한 부인은 결코 못되는 것 같다. 나는 옷장 안 에 뭔가 걸칠 만한 것이 있는지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대충 시야를 밝힐 만한 그 어떠한 빛도 없었기 때문에 옷을 찾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게다가 옷을 찾아도 입는 것에 능숙하지 못한 나였기 때문에 여전히 난감하기만 했다. 그러다... 기쁘게도, 나는 나름대로의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이번 기회 에 투명화 마법을 써먹어보는 것이다. 나에게 투명화 마법을 건다면 미 카엔은 내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테니, 지금 속옷 차림을 하고 있다고 해도 아무런 걱정이 없다. 그리고 이렇게 실전 경험을 쌓는 것도 마법 사 지망생(?)으로서는 아주 중요한 일이지 않은가. 나는 그대로 스펠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4서클을 이룬 초 보 마법사인 나로서는 투명화 마법이 간단한 마법은 아니었지만 어쩌 겠는가. 마법은 하면서 느는 것이다. 나는 머리를 쥐어짜며 투명화 마 법의 원리를 머릿속에 그려냈다. 그리고 마력 운용에 맞추어 스펠을 완성해나갔다. 다행히, 투명화 마법의 캐스팅은 생각만큼 오래 걸리진 않았다. 만약 오래 걸렸다가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미카엔이 덜컥 옷장 안으로 공 간 이동해 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른 왕실 마법사들에 비하면 조금 굼뜬 캐스팅이긴 하나 그래도 제법 빠르게 캐스팅을 마쳤다. 한 동안 마법 공부를 안했음에도 녹슬지 않은 나의 마법 능력에 스스로 흡족해하며 나는 시동어를 외고는 당당히 옷장 문을 열었다. 미카엔은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안락의자에 앉고는 옷장 안에서 내 가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는 듯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옷장 문이 열리자 그의 표정은 약간 야릇하게 변했다. 그 야릇함이란, 정확히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왠지 애매하게 느껴졌다. “훗, 미카엔! 저 안 보이죠?” 나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재미있다는 듯이 신이나 말했다. 그리고는 조 금 전에 내가 옷장 앞에다 떨어뜨린 잠옷을 여유 있게 입었다. 얇은 실 크로 된 은백색 천은 부드럽고도 약간 서늘한 촉감으로 내 살갗을 스쳤 다. “쿡!” “……?” 미카엔이 문득 웃음을 터뜨리자 나는 갸웃했다. 혼자 한참을 웃던 그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내 쪽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한 나라의 왕비라기엔 너무 사랑스러운 숙녀인걸. 가까이 와, 라비스.” 가까이 다가오라는 그의 말은 거스르면 안 될 절대적인 명령도 아니었건 만, 나는 나도 모르게 그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새삼 생각되는 거지만, 때때로 그의 언어에는 상대를 거스를 수 없게 만드는 기이한 마법이 깃 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어쩌면 그는 드래곤의 피를 이은 존재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드래 곤의 모든 언어는 마법의 힘을 지녔다 하지 않던가. 스펠 없는 시동어 하나만으로 마법을 시전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품에 안고는 정확히 나의 입 술로 입을 가져왔다. 마치 나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인다는 듯한 태도였 다. 이 즈음, 나는 투명화 마법이 완전하지 못했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나는 한 가지 궁금증이 떠올라 지금 상황으로서는 다소 엉 뚱할 수밖에 없는 질문을 그에게 했다. “미카엔은 인간인가요? 드래곤인가요? 왜 미카엔만 특별한 거죠?” 그러자 나에게 키스하려던 그는 멈칫했다. “나도 늘 그게 궁금했지. 내가 아는 역사 안에선 특별한 하프 드래곤은 없었으니까. 나는 인간이라 말해야 하는 걸까. 드래곤이라 해야 하는 걸 까. 유년 시절의 나를 괴롭히던 문제이기도 했지.” “미카엔도 자아의 본질에 대한 문제로 고민했었던 거군요?” “그랬지. 어쩌면 그러한 문제는 나와 라비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스스로에게 한번쯤 던지는 질문일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미카엔은 인간이라 해야 될 것 같아요. 드래곤은 자아의 문 제에 대해 고민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거든요.” “예외인 특별한 드래곤도 있을 수 있겠지. 메르킨과 같은 괴짜 드래곤 이 있는 것처럼.” 미카엔은 지금 이 순간 자아 정체성에 대해 토론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지 대충 답하며 나의 입을 봉쇄하듯 입을 맞추었다. 그의 부드러운 입술과 따스한 숨결이 오래도록 나의 감각을 자극하자, 나를 지탱할 힘 이 다리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허리가 약간 뒤로 젖혀진 상태에서 내가 허물어지듯 무너지자 미카엔은 굳이 나를 받혀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나에게서 손을 예고 없이 놓았 을 땐, 그의 팔에 의지하고 있던 나는 ‘앗!’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언제 바뀌었는지 내가 뒤로 쓰러진 곳은 푹신한 침대 가 되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불행이라 해야 할지. 그 뒤부터 일어난 일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그저, 미카엔이 나의 잠 옷을 벗기려 하자 나는 ‘악!’ 소리를 냈던 것. 어느 순간, 침실 안에 있던 수십 개의 촛불이 마법으로 일어난 가벼운 바람에 일제히 꺼졌다는 것. 그날 밤 종일 미카엔은 어린애를 어르듯 나를 달래야 했다는 것. 하지만 우리는 그날 어렵게 진정한 부부가 되었다는 것만은 말할 수가 있다. 나는 고통스럽고 두렵기도 했다. 몇 번이고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육체 와 영혼과 운명까지 그동안 여자가 되어 숨을 쉬었지만, 이날 밤 보이지 않은 뿌리 깊은 그 본질마저도 나는 여자가 되었고 그것에 인정되었다. 내가 진정한 여자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 미카엔과의 합일이었던 것 이다. 그렇기에, 나는 많이도 두려워했던 거라 생각한다. 다음 날, 나는 중앙 궁성에 갔다가 칼린과 마주쳐 잠시 대화를 나누었 다. 그러던 중에, 우연하게 요즘 왕실 마법사들의 근황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그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왕실 마법사가 나도 아는 사람이라 고 말했다. 내가 누구냐고 묻자, 킬린은 그가 마법사들의 탑 출신인 하 프 엘프, 정령 마법사라 답했다. 그는 카이엔인 것이다. 사실상, 타국에서 일한 바 있는 마법사는 잘 채용하진 않지만 마법사 들의 탑 같은 경우는 예외라고 할 수 있었다. 마법사들의 탑 출신들이 워낙 엘리트인데다가 그들은 아스탄샤에 대한 소속감이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아스탄샤와 마법사들의 탑은 독립 적이고 개별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탓이었다. 마법사들의 탑은 능력만 뛰어나다면 각 나라에서 오는 모든 이를 다 받 아들였다. 그래서 마법사들의 탑은 다국적이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집 단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필요상에 의해, 아스탄샤와 공생 관계를 맺고 있지만 일단 마법사들의 탑을 빠져나온 마법사 같은 경우는 아스탄샤에 더 이상의 관심과 애정을 갖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킬린은 마법사라 그런지, 인간보다는 엘프들을 더 신임했다. 인 간들에 비해 엘프들은 간악한 꾀를 내거나 변절할 경우가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킬린은 절반이지만 엘프의 피를 이어받은 카이엔을 아주 흡족하게 여기는 듯했다. 그리하여, 나는 오후 늦게 응접실에서 카이엔을 만났다. 엘프의 피가 섞인 그답게 키는 꽤 훤칠했고 날렵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귀는 약간 뾰족한 듯했지만 엘프라 여겨질 만큼은 아니었고 머리색은 흑발에 가 까운 짙은 색이었다. 다만 이목구비는 아름다운 엘프의 외모처럼 제법 단정했다. “오랜만이네요, 카이엔.” “오랜만입니다, 전하. 그동안 더욱 아름다워지셨군요.” “하하, 그런가요? 그런데 갑자기 다시 로히얀스로 돌아올 생각을 하셨 어요?” 내가 궁금했던 것을 묻자, 카이엔의 짙은 녹색 빛 눈동자는 의아한 빛 을 띠었다. “왕실 부 수석 마법사 직책에도 계시는 왕비 전하께서 직접 시녀를 보 내 전갈하신 내용을 받고 로히얀스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만. 현재 로히 얀스 왕실은 우수한 정령 마법사를 비밀리에 영입하고 있는 중이라 하 더군요. 마침, 제가 전하와 인연이 닿은 적이 있었던 터라, 자연스럽게 영입 대상으로 되었던 거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랜 고민 끝 에 공식적으로 이곳 왕실 마법사로서 시험을 치른 겁니다.” “그, 그게... 정말인가요?” 까맣게 모르는 내용이라는 듯이 내가 놀란 기색을 해보이자, 카이엔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전하께서는 전혀 모르셨습니까?” “네, 그리고 나는 지금 왕실 부 수석 마법사 직책에 공식적으로 있지 않거든요? 내가 보냈다는 그 시녀는 어떻게 생겼죠?” “음, 백금발의 긴 머리칼에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전하 또래의 아름다 운 아가씨였습니다.” -------------------------------------------------------------------- 체인지[2부] 제11화 -진짜와 가짜- (3) Ip address : 218.238.163.17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3- “백 금발에 호박색 눈동자라구요? 혹시, 이름이 ‘마리’ 라고 하지 않던 가요?” “아닙니다. 그 아가씨는 자신을 레니라고 소개하더군요.” 레니라면 내가 아끼는 측근 시녀가 아니던가. 그녀는 한때 셀레네스의 견습 여 신관이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나와 로히얀스로 온 소녀였다. 자 이라스 출신으로, 마리와도 연관된 일이 있어 나에게 새끼손가락을 잘 려야 했던 적이 있는 소녀이다. 나는 그때의 순간이 떠오르자 문득 가슴이 아파져서 상념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가로 흔들어야 했다. 그때, 나는 냉혹하게도 새끼손가락을 잘랐던 그 단검을 그녀가 간직하도록 하게 했다. 만약에 또 다시 재물에 흔들려 그릇된 행동을 하게 된다면 그 단검으로 단죄할 것이라 말했었다. ‘레니, 그러한 가슴 아픈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겠지?’ 어쨌든, 레니가 내 측근 시녀임을 알고 있다면 그녀는 마리가 확실한 것 같다. 그런데 그녀는 왜 아스탄샤 마법사들의 탑까지 건너가 카이엔을 끌어들였던 걸까. 내가 카이엔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릴 거라 생각한 건 가. 그녀는 나를 괴롭히는 일을 아직까지 그만두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 다. 나는 침울해진 얼굴로 카이엔에게 나가보라 말했다. 그러자 그는 나에 게 할 말이 아직 남아있는 듯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가 이곳에 온 것은 뭔가 착오에 의한 것 같군요. 다시 아스탄샤로 돌아가겠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마법사들의 탑을 나와 바다를 건 너 이곳 먼 곳까지 온 그를 굳이 다시 되돌려 보낼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며 답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저는 카이엔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있는 수석 마법사 킬린을 별로 실망시키고 싶지 않군요. 하하. 다시 만나게 되서 반가웠어요. 카이엔과 같은 정령 마법사는 아주 희귀한 만큼, 로히얀 스 왕실은 귀한 인재를 얻은 셈이거든요.”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전하.” 카이엔은 딱딱하리만큼 깍듯한 예로서 답했다. 저녁 무렵, 서재 겸으로 쓰고 있는 응접실에서 에드를 기다리며 오랜만 에 마법서를 펼쳐들었다. 나를 호위 하는 것에만 매인 에드를 일반 왕실 기사로 편입시키고자 그를 부른 것이다. 분명, 그는 나의 명령에 불만을 토로하겠지만 그를 위해서는 이러한 처사가 최선이라 생각되었다. 그는 나와 관계된 일 외에 다른 일에는 좀처럼 관심을 갖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는 결혼도 해야 하고 차츰 생활의 안정이 필요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그는 카이 엔을 무척 경계하기까지도 했다. 예전에 카이엔 때문에 라비스가 자살 했던 탓에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상당히 곱지 않은 것이다. 나는 마법서를 읽으며 에드를 기다리다가 그만 피곤했는지 잠들고 말 았다. 그리고 생전 꿔본 적 없는 본래 라비스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 했다. 여전히 크로시벨 가를 배경으로 한 꿈속에서 나는 본래 라비스 가 되어 누군가에게 사랑 고백을 하고 있었다. 사랑 고백을 하는 동안, 촉촉하던 입술은 바싹 마르고 나의 가슴은 초 조함으로 새카맣게 타버릴 지경이었다. 감정의 설렘 따윈 느껴지지 않 고 있었다. 그저, 불안하고 괴롭기만 했다. 무언가에 대한 마음의 집착 이 극에 달한 것처럼, 나는 이 상황에 필사적인 마음이 되어 있었다. 만약, 여기서 거절당한다면 나는 죽게 되기라도 한다는 듯. 도대체, 누구에게 고백을 하기에 이토록 간절하단 말인가. 나는 황금빛 눈동자를 들어 고백하려는 대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카이 엔이었다. 나는 지금 본래 라비스가 되어 카이엔에게 고백을 하고 있 는 것이다. 나는 이 꿈이 단순한 꿈인 것인지, 실제 있었던 과거의 일 을 꿈으로 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카이엔의 짙은 녹색 빛깔 눈동자는 차가워 보일 정도로 무감정해 보였다. 이윽고, 나를 향해 말하는 그의 어투 역시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라비스님, 당신은 다니엘 남작님의 유일한 영애이십니다. 그 분의 뜻 을 저버릴 생각이십니까? 지금 라비스님이 하고 계신 행동은 그저 부 모님이 정해주신 정략결혼에 대한 반항심일 뿐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 습니다. 젊었을 적, 정해진 운명에 거스르고 싶어 하는 한때의 치기에 그렇게 약하신 모습을 보이시는 겁니까?? 그의 말은 마치 삶을 향한 나의 마지막 희망을 깨트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문득 죽고 싶다는 절망과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원망이 나 를 가득 채웠다. "정말… 냉정한 분이시군요, 카이엔! 언젠가는 이 순간을 후회할 날 이 올 거예요. 내가 흘렸던 눈물만큼, 당신도 눈물을 흘리게 될 거예요." 순간 울컥하여 나도 모르게 독기어린 말을 내뱉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식은땀을 닦으며 침대마냥 기다란 응접실의 쇼파에서 일어나는데, 누 군가가 곁에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미카엔이 었다. 그는 백색 셔츠에 짙은 갈색 바지 차림인 평범한 평상복을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고고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이 느껴졌다. “뭔가 괴로운 꿈을 꾼 듯하군, 라비스.” “언제 왔어요?” “조금 전에. 괴로운 표정으로 잠들어 있기에 깨울까 했지만 카이엔이 라는 이름이 궁금해지더군.” 미카엔은 내가 하는 잠꼬대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쯤 오해 를 하고 있다는 건데... 나는 그 오해를 풀어야 할 듯했다. 그런데 어떻 게 오해를 풀어야 한단 말인가. 단순히 개꿈을 꿨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상황이다. 예전에, 마리가 일부로 왕성에 퍼트렸던 소문을 미카엔도 기 억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카이엔에 대한 실연으로 자살 시도를 했었다는 이야기. 내가 측실 이었을 때, 미카엔에게서 도망쳐 아스탼샤 마법사들의 탑에 갔던 이유는 카이엔을 못 잊어 그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는 조금 와전된 이야기. 그 때, 미카엔은 그것을 늘 나돌았던 헛소문 중의 하나쯤으로 치부했었다. 그런데, 그 소문의 진위를 증명할 만한 내용의 잠꼬대를 방금 내가 했 으니 미카엔으로서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일은 본 래 라비스의 일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어떻게 어디서부터 설 명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막막해져서 나도 모르게 울상을 지었다. 그 러자 미카엔은 내 곁에 다가와 앉으며 귓가로 흘러내린 나의 금발에 손을 뻗어 파묻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라비스.” “제 꿈에 대해 미카엔은 아무 것도 묻지 않는 건가요?” 나의 말에, 미카엔은 짓궂은 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라비스는 내가 무엇을 묻길 바라는 거지? 질투에 휩싸인 남자가 되어, 최근에 카이엔이라는 인물을 왜 왕실 마법사로 불러들였냐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이것저것 따져 물어야 되나?” “그건...” “라비스는 처음부터 내 여자였고 앞으로도 그 사실은 변치 않을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 역시 나를 사랑하고 있는데, 그 외에 더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묻고 싶군.”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태도로 말하는 미카엔. 그 모습은 오만함이라 해 야 할까, 대책 없는 자신감이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진정한 사랑의 필수 요소인 굳건한 믿음이라 해야 할까. 그런 그의 앞에서는, 나는 모 든 것을 숨김없이 다 드러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과도 같은 의무감 마저 든다. 어떻게 보면, 미카엔이 고차원적인 수법으로 내가 모든 것 을 토설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도 들었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내가 그동안 묻어두었던 진실에 대해 말한 다면 미카엔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너무 불안했다. 하지만 나는 자신에 대한 비밀을 그에게 모두 털어놓고 싶어졌다. “사실...” 나는 망설이면서도 말의 서두를 꺼냈다. 미카엔은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 여름에 본래 라비스는 자살로 죽었어요. 다시 말해, 지금의 저 는 그때 카이엔을 사랑하던 라비스와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거죠. 육 체는 그대로인데 영혼이 바뀐 거랄까요. 그때 자살 사건으로 제 영혼 은 셀레나의 딸인 지금의 육체에 자리하게 된 거예요. 원래 미카엔의 측실이 되었어야 할 그녀는 이미 죽고 없어요.” 나는 일단 간단하게 말을 마쳤지만,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기가 겁이 났다. 그러다 묵묵히 있던 미카 엔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괜스레 놀라며 그를 올려다보았지 만, 미카엔은 어느새 돌아서서 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뭐야? 그냥 나가는 건가?’ 하지만 미카엔이 싸늘한 얼굴로 응접실의 문을 열자, 밖에 서있던 에드 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황금빛 눈동자는 동그랗게 떠졌다. 밖에 있던 존재가 에드임을 확인한 미카엔은 약간 표정이 풀어진 듯했지만, 여전히 딱딱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호위 기사인 직분으로 나와 왕비의 대화를 엿듣는다는 건 결코 가볍지 않은 죄가 될 거라는 것을 모르는 건가?” “죄송합니다, 폐하.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에드는 나의 부름으로 이곳에 왔다가 우연히 대화를 듣게 된 거겠지만, 별다른 변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미카엔에게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들 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늘 부드럽고 따뜻했던 에드의 눈은 백색 대 륙의 시린 바람보다 더욱 차갑고 냉랭하게 느껴졌다. ----------------------------------------------------------- [35] 체인지[2부] 제11화 -진짜와 가짜- (4) Ip address : 218.238.165.17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4- 나는 그러한 에드의 눈빛은 처음 대하는 터라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가 벌을 받게 되는 것을 막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미카엔 앞에 나서며 입을 열었다. “에드는 내가 이곳으로 불렀어요. 그가 대화를 엿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곳에 왔다가 우연히 대화를 듣게 되었을 뿐, 더 이상의 의미는 없을 거예요. 폐하, 이 일은 제 책임입니다.” 미카엔은 복잡해 보이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에드는 왕비의 직속 하에 있으니 이 일은 그대 뜻대로 결정하시오.” 그는 공식적인 어투로서 나에게 답하고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응접실을 나갔다. 그가 그렇게 나가버리자, 나는 더욱 불안해지고 초조해졌다. 적어도, 방금 내가 했던 진실 고백에 대한 반응 정도는 보이고 갔으면 좋으련만. 그는 에드를 나에게 맡기고 횅하니 나가버린 것이다. 나는 지금 그를 뒤따라가 묻고 싶었다. 그동안 그런 일을 말하지 않고 감추어두고 있었던 것에 화는 나지 않았는지, 조금이라도 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로 그는 내가 본래 라비스를 희생이라도 시켜 육체를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결국, 소리죽인 한숨을 내쉬며 에드를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냉기가 풀풀 나는 분위기인 듯했다. 이제, 에드에게 어떠한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는 걸까. 에드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라비스님은 그때 돌아가신 겁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망설이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자리에 서있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동안, 당신은 모두를 속이고 기만하며 라비스님의 행세를 하고 있었던 겁니까?” 그동안 믿고 있었던 것에 대한 배반감과 상실에 대한 슬픔을 내리누르며 도전적으로 물어오는 에드의 모습에 나는 문득 울고 싶어졌다. 그는 나에게 가짜 라비스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본래 라비스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남으로 인해서 그동안 받았던 사랑도 거짓으로 되돌아가는 걸까. 만약, 루이스도 살아있었다면 그녀 역시 에드와 같은 반응을 보였겠지. “미안해, 에드. 네가 지금 어떠한 심정이 되었는지 잘 알아. 나는 누구도 기만할 생각이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면 내 잘못이겠지. 에드, 너는 이제 나를 미워하는 거야?” “…….” 내가 묻자, 에드는 나의 질문 의도를 명확히 이해하고자 하기 위함인지 잠시 주춤한 태도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무 힘들 때 곁을 지켜주고, 내가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할 때는 충고도 해주고, 그렇게 때론 자상한 오빠처럼, 상냥한 친구처럼 나를 아껴주던 네가 고마웠어. 나도 에드가 정작 내가 아닌 본래 라비스를 위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소중히 대해주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에게 있어 이제 에드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는걸.” 그러자 나를 바라보던 차가운 에드의 눈빛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짧지만 그래도 나와 부딪히고 함께 보낸 시간이 에드를 누그러뜨렸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의 갈색 눈동자가 예전처럼 부드러운 빛을 띠는가 싶더니 이내 짙은 슬픔이 드리워졌다. “전하, 저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전하께서는 누군가를 기만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잠시 잊었습니다. 전하께서 라비스님의 육체로 있게 된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폐하께서는 전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계시니, 전하가 누구이시든 제가 상관할 일이 아니겠죠. 하지만 그동안 라비스님의 죽음을 깨닫지 못했던 제가 원망스럽고 어리석어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몇 년을 곁에서 라비스님의 유년 시절을 지켜보던 저였으니까요.” “에드...” “...그 분은 지독히도 혼자임을 두려워하던 분이죠. 그래서 누군가에게 어린애처럼 늘 집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떠나는 그 순간에도 아무도 그 분의 죽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라비스님을 사랑하던 그 누구도. 라비스님은 죽는 순간에도 외로웠을 겁니다.” 격해진 감정을 억지로 누르는 듯 나직하게 말하는 에드의 눈이 글썽해졌다. 눈빛은 다정하지만, 늘 무뚝뚝하고 말수적은 에드가 이렇게 감정적이 되어 눈물까지 보이는 모습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고 있는데, 에드는 문득 감정을 추스르더니 차분해진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그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가 당황스러웠다. “오늘 전하께서 저를 부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에드를 왕실 소속 에제크 기사단에 편입시킬까 해서.” “전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평소의 에드라면 극구 싫다고 했을 텐데. 언제고 왕비 호위 기사로 남아 있으려 했을 텐데. 에드는 별다른 이유도 묻지 않고 나의 뜻을 받아들이며 예를 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나가보겠다고 말하며 응접실을 나갔다.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니, 꼭 뭔가 일을 저지를 듯한 기색이었다. 불안한 마음이 들은 나는 플라이 마법을 써서 창문을 통해 궁성을 나와 아젠샤르를 불러냈다. 곧, 하늘빛 고운 머리칼을 가진 소년이 나타나자 나는 그에게 에드를 뒤따라 가보길 부탁했다. 늘 그랬듯이, 아젠샤르는 정중하고도 단정해 보이는 미소로서 응답하고는 바람으로 화하여 사라졌다가 잠시 후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담담한 어조로 나에게 보고를 했다. “그 분은 중앙 궁성의 왕성 마법사 연구실에 있는 카이엔이라는 마법사를 찾아갔더군요. 그 는 앞으로 나흘 후에,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목숨을 잃을 때까지 혈투를 벌이는... 그런 치명적인 방식의 결투를 그 마법사에게 신청했습니다.” 에드는 그답지 않게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카이엔에게 우격다짐으로 결투를 신청하고는 그대로 크로시벨 가 저택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나는 아멘시타에게 줄곧 에드의 동태를 살피게 했는데, 그는 그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본래 라비스의 옛날 물건들을 꺼내어 누구도 치러주지 못한 장례까지 준비했다. 나 역시, 그 부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가슴이 더욱 아파지고 미안해지기만 했다. ‘에드, 너는 정말 라비스를 사랑했구나. 왜 라비스는 너의 그러한 마음을 알아봐 주지 못했던 걸까?’ 다음날, 온갖 소문이 무성하기로 유명한 왕성 안은 나의 과거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퍼져있었다. 왕성 안의 사람들은 내가 카이엔을 불러들였을 거라고 수군거렸고, 에드가 카이엔에게 결투를 신청한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지레짐작을 했다. 마드린은 시녀들의 입방아를 통제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떠드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평소, 은연중에 미카엔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어오던 젊은 귀부인들이 물 만난 물고기마냥 부풀려 떠들어대는 것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참으로 울적해지는 나였다. 게다가, 어제 저녁 이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는 미카엔. 나는 그가 나를 찾아와 어제의 일에 대해 묻거나 어떠한 반응을 보여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국왕 집무로 바쁜 듯 소식조차 없었다. 한번은 내가 직접 중앙 궁성에서 그를 찾아 나서기도 했지만 누군가와 접견 중이라 하여 그와 만나는 것에 실패했다. 혹시, 그가 내가 한 고백으로 인해 일부로 나를 찾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들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화가 치밀기도 했다. 미카엔은 자신이 원할 때 내가 있는 곳을 너무나 쉽게 알아내어 찾아오지만, 나는 일일이 시종들에게 그의 행방을 물어 찾아야 하고 허탕을 쳐야 하니 왠지 심통이 나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카이엔을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우선은 아기 고양이 미카엔의 몸으로 들어와 있던 아멘시타에게 본래 라비스의 유년 시절에 대해 물었다. 아멘시타는 본래 라비스의 어린 시절 일을 거의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0년 전에 셀레나에 의해 크로시벨 가 후원에 심어져 줄곧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으니, 그녀의 유년 시절에 대해 모를 턱이 없었다. 아멘시타는 에드와 라비스가 처음 만났던 순간의 일이나 카이엔과의 일을 비롯한 사소한 사건들까지 망설임 없이 나에게 들려주었다. [라비스의 유년 시절은 유복했지만 외롭고 불행했어. 아마도, 그녀의 불행은 셀레나의 죽음으로 시작된 거라 할 수 있을 거야. 5살에 라비스를 아끼고 사랑하던 셀레나가 죽자, 아버지인 다니엘 남작은 냉정하고 무심한 전형적인 귀족 성격을 가진 이가 되었거든. 결국, 그녀가 의지할 곳은 유모인 루이스와 에드가 될 수밖에 없었지.] “왜 그렇게 성격이 변했는데? 원래는 부드러운 성격이었단 말이야?” 내가 묻자, 아멘시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내막까지는 몰라. 나는 그저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거나 시녀들의 얘기를 주워들었던 거니까.] “음, 그럼 본래 라비스의 유년 시절은 어떻게 불행했었는데?” [셀레나의 죽음과 아버지의 무심함으로 인해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 그 즈음, 라비스는 조금씩 자폐증세를 보이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라비스는 루이스를 비롯한 크로시벨 가 사람들의 각별한 관심으로 나이가 들수록 점차 밝아지는 것 같기도 했어. 물론, 특정한 존재에 대해 갖는 집착과 끝없이 애정에 목말라 하는 것은 쉽게 고쳐지질 않았지만.] “그 특정한 존재 중 하나는 카이엔도 들어있었던 거겠지? 그리고 그녀는 죽은 셀레나도 끝없이 그리워했을 거구.” [응. 그런데 죽은 라비스가 셀레나를 무척 그리워했을 거라는 것은 어떻게 안 거야?] “그녀가 갖았던 그 그리움과 앙금이 잠재적으로나마 나에게 남아있는 것 같아. 나는 본래 라비스가 되어 크로시벨 가 배경으로 셀레나의 꿈을 꾸곤 했거든. 그럴 때면, 아련한 그리움이 느껴지기도 해. 그리고 카이엔을 볼 때면, 왠지 모르게 언짢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마법사들의 탑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는데, 여전히 그러네.” 그러자 아멘시타는 청록 빛의 고양이 눈동자를 동그랗게 깜빡이며 놀랐다는 듯한 표정을 나름대로 지어보였다. 어쨌든, 아멘시타의 얘기로 판단해보면 본래 라비스는 죽은 셀레나를 몹시도 그리워하는 마더 콤플렉스인데다가 가끔씩 보이는 자폐증세 등의 정신적 문제로 성격이 다소 원만하지 못한 편이라 할 수 있었다. 또한 아멘시타는 말하길, 그녀는 감정이 최악으로 달해 있을 때는 고양이만 끌어안고 방에서 나오질 않는다고 했다. 그런 라비스를 옆에서 지켜보아야 하는 에드는 오죽 답답하고 안타까웠을까. 나는 아멘시타와 대화를 마친 후, 실버 반지를 빼서 침실 수납장 안에다가 넣고 측근 시녀들에게 내가 일찍 잠자리에 들 거라는 말을 일러두고는 중앙 궁성의 시녀로 분장을 했다. 이미 엉덩이를 덮는 치렁한 금발을 일루젼으로서 평범한 갈색 머리칼로 만들고는 얼굴과 목소리는 전형적인 로히얀스 풍의 소녀로서 적당히 예쁘장한 모습으로 둔갑을 시켰다. 물론, 얼굴 바꾸는 일루젼은 꽤 고난이도의 마법이라 나는 거울을 보며 마법서까지 뒤적거리면서 아주 오랫동안 끙끙거리고 있어야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흡족한 마음으로 장미 궁성을 나오는데 공교롭게도 입구로 들어오는 미카엔과 마주치게 되었다. 내내 코빼기도 안 비치던 그가 하필이면 지금 이곳에 나타날 것은 뭐란 말인가. 나는 괜히 놀라며 움찔해보였다. 그러자 미카엔은 어둠 속에서도 어김없이 빛을 발하는 부드러워 보이는 미소를 살짝 짓더니, 중앙 궁성 시녀의 복장을 하고 있는 나의 차림새를 눈으로 훑어보았다. 혹시 나를 알아봤나 싶어 그의 자수정 빛 눈동자를 바라보자, 미카엔은 나직한 어조로 나에게 물었다. “보아하니, 중앙 궁성 소속의 시녀인데 장미 궁성엔 무슨 용무이지?” 나는 어떻게 답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왕비 전하의 측근 시녀인 레니와 평소 친분이 있었던 터라, 그 친분을 쌓느라 제 소속을 잠시 이탈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폐하.” 그러자 미카엔은 문득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나에게 다시 질문했다. “이름이 뭐지?” “라... 아니, 라라입니다.” 순간, 습관적으로 라비스라 답하려던 나는 당황하며 얼른 말을 바꾸었다. 그런데 이름이 라라라니... 이름 역시, 당황스럽다. “라라? 음, 나는 지금 왕비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발걸음 했지만 왠지 마음이 바뀌는군. 네가 중앙 궁성 시녀로서 임무에 불성실했음을 용서받고 싶다면, 나와 함께 밤 산책을 하는 것은 어떠한가?” ‘헉! 지금 시녀를 꼬시고 있는 수작인가?’ 순간, 나는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시녀 직분을 행세하고 있고 상대는 이 나라의 왕이라는 것을 잊고는 나도 모르게 쏘아붙이는 말을 하고 말았다. “왕비 전하께서는 오늘 하루 종일 폐하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만 들어가 보시죠.” 그리고는 홱 돌아서서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그러자 뒤 쪽에서 미카엔이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내가 라비스라는 것을 눈치 챈 것인가, 하는 마음에 힐끗 뒤를 돌아보자 그는 별다른 행동 없이 그대로 궁성 입구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되자, 나는 그는 단순하게 시녀에게 짓궂은 장난을 친 것인지 내가 라비스임을 눈치 채고 장난을 친 것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결국, 찝찝한 기분이 되어 나는 아젠샤르를 불러 그의 도움을 받아 중성 궁성을 향했다. *요즘, 벼락치기의 시즌인가 봅니다. 수정이나 편집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올립니다. 그리고 본래 라비스의 꿈에 대한 지적을 해주신분.. 감사드려요. ------------------------------------------------------------------------ [36] 체인지[2부] 제11화 -진짜와 가짜- (5) *약간 수정 Ip address : 218.238.165.17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5- 어둠이 더욱 짙어져 있는 까만 밤하늘은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은하수가 흐르고 있었고, 실처럼 가느다란 초승달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한 예쁜 밤하늘 아래 서있는 고풍스런 궁성들의 모습은 역시 그림 동화책에 나올 법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중앙 궁성에 당도한 나는 왕실 마법사들의 연구실로 향했다.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가는 도중에는 다행히 중앙 궁성 사람들과는 그다지 많이 마주치지 않았다. 만약, 가다가 시녀장과 같은 인물과 마주쳤다면 나는 본의 아니게 시녀로서 자잘한 심부름 같은 일을 하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다른 왕실 인들에 비해, 왕실 마법사들은 항상 늦은 시각까지 연구실에 머물러 있는 터라 나는 카이엔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불러내자, 그는 로브를 입은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제법 수려하고 말끔한 그의 얼굴은 역시 엘프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 “누구십니까? 시녀 복장을 하고 있지만 마법사이시군요.” 비록 정령만을 다루는 정령 마법사이지만, 엘리트 집단이라 불리는 마법사들의 탑에 한동안 소속되어 있던 그답게 내가 일루젼 마법을 걸고 있음을 날카롭게 알아보았다. 나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미카엔 역시 내가 일루젼 마법을 걸고 있음을 알아보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보 같게도 나는 그 점을 간과해버렸다. 아무래도 나는 마법사가 될 자격이 부족한 모양이다. 나는 일단 일종의 속임수 일루젼인 목소리에 걸려있던 마법 한 가지만 풀었다. “이젠 제가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아! 왕비 전하시군요.” 나를 알아본 카이엔은 난처해진 듯한 얼굴로 답했다. “카이엔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아마도 에드님과 저의 결투 때문에 오신 거겠죠? 괜한 발걸음을 하셨군요. 하지만 이왕 오셨으니... 저를 따라오십시오.” 카이엔은 나를 자신이 묵고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그가 안내하는 대로, 침실과 연결된 간소한 응접실에 들어선 나는 그곳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가 내주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카이엔은 내가 앉은 맞은편에 위치한 의자에 조용히 자리했다. 촛대 위에서 초라하게 빛을 내는 촛불들을 응시하며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카이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이곳 로히얀스로 오게 된 것은 왕비 전하를 음해하려는 누군가의 의도에 의한 것이겠죠? 진작 그것을 눈치 챘더라면, 저는 이곳에 결코 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다시 아스탄샤로 돌아가겠어요? 에드와 카이엔이 하게 될 결투에서 어떠한 결과가 나오든 그것은 나로서는 못 견딜 비극이 될 거예요.” 그러자 그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전 아스탄샤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이미 에드의 결투를 받아들였으니까요.” “카이엔은 기사가 아니라 마법사에요. 결투를 피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요.” “전 명예를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프 엘프인 제가 명예를 지켜야 할 이유는 없죠. 다만...” “다만 뭐죠?” 카이엔은 잠시 뜸을 들이다 화제를 바꾸었다. “에드에게 얘기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저와의 불미스런 일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 것은 수면제를 과다 복용한 탓이라더군요. 훗... 전하를 슬프게 해드렸으니 이젠 벌을 받아야 할 때인 모양입니다.” 그의 말에 문득 어젯밤 꿈이 떠올랐다. 꿈속에서 사랑 고백을 하던 나는 독기 어린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었다. 내가 눈물을 흘렸던 만큼 카이엔도 눈물을 흘리게 될 거라고. “무슨 말씀이죠?” “말 그대로입니다. 만약에 결투에서 에드가 목숨을 잃을 경우, 전하께서는 진심으로 눈물을 보이십시오. 하지만 제가 목숨을 잃을 경우에는 ‘나를 그토록 슬프게 하더니 벌을 드디어 받았구나,’ 라고만 생각하십시오.” 카이엔은 농담하듯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나에게 이제 그만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하는 수없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질문했다. “카이엔은 그때 왜 나를 거절했던 거예요?” “그때, 저는 전하께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나는 마법사들의 탑에서 그와 잠시 함께 지냈지만 애인이 있어보이지는 않았었다. “그러면 왜 사랑하는 그 여인과 함께 있지 않고 줄곧 혼자인 거죠?” “제가 하는 사랑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기에 그렇다고 말해두죠.” 나는 더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그것으로 카이엔과의 대화는 끝이 났다. 결국, 카이엔과 에드의 결투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우울해하며 다시 장미 궁성으로 돌아왔다. 이번 일로 또 한번 소중한 존재를 잃게 된다면 그 슬픔은 어떻게 견뎌야 할까. 내가 궁성에 돌아와 일루젼 마법을 풀고 침실에 들어섰을 때는 미카엔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미한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가에 걸터앉아 그는 두꺼워 보이는 책을 읽고 있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란 게, 많은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풍부한 지식도 요하는 일이라 미카엔은 늦은 오후에 틈이 날 때면 이렇듯 책을 읽었다. 물론, 킬린과 체스를 두며 나랏일에 관계된 비밀스럽고 중요한 화제로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미카엔은 나를 보더니 책을 탁 덮고는 일어섰다. 아까부터 와서 줄곧 기다린 건가. 나는 그에게 말했다. “미카엔에게 있어 저는 진짜인가요? 가짜인가요? 에드와 루이스, 그 밖에 나를 사랑해준 모든 이들에게 있어 저는 가짜에요. 가짜 라비스인 거죠. 하지만 나는 미카엔에게 묻고 싶어요. 저는 미카엔의 대답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그에게 말하고 있는 나의 목소리가 가냘프게 떨렸다. 마치 어젯밤에 꿨던 꿈처럼 나는 지금 이 순간 사랑고백을 하는 본래 라비스의 심정이 된 것 같다. 나의 입술은 초조함으로 바짝 마르고, 극도의 불안감으로 괴로웠다. 이대로 내가 가짜라고 거짓이라고 미카엔이 대답한다면, 힘들게만 만드는 내가 싫어졌다거나 실망했다고 대답한다면, 나는 어떠한 심정이 될까. 처음 이곳 세계에 왔을 때, 나는 사랑하는 이에게 차여 자살했다는 라비스의 이야기를 루이스에게서 듣고는 무척이나 한심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 그녀가 느꼈을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라비스, 내가 처음 만나고 인연을 시작하여 사랑이라는 결실을 이룬 존재는 누구도 아닌 너다. 그러니 나에게 있어 너는 진짜인거지. 에드에게는 예전의 소녀가 진짜이듯이. 라비스, 네가 가진 고민은 무엇이지?” “고민이요?” “그 전에, 네가 메르킨에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셀레나는 다니엘 남작과 결혼하여 네 영혼과 똑같은 딸을 낳았다고. 그런데 그 딸이 왜 열일곱이 되던 해에 자살을 해야만 했었는지 자문하듯 묻더군.” “아!” 그때, 내가 흥분하며 두서없이 지껄여댔던 말을 미카엔이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나조차도, 내가 그때 그런 말을 했었던가? 하는 생각마저 드는데... “어젯밤에 네 고백을 듣고 많이 생각해봤다. 그때 네가 메르킨에게 했던 말과 연결시켜서 말이야. 내 짐작이지만, 너는 왠지 그녀의 자살마저도 자신 탓으로 여기는 것 같더군.” “…….” 정말 그랬다. 그때의 심정으로는 혹시, 셀레나가 나의 육체를 예비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일부로 자살을 하게 만드는 상황으로 몰아갔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존재는 내가 사랑하는 많은 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근원이라고 여기며 자책도 했다. 미카엔은 나의 황금빛 눈동자를 직시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언젠가 네 침실에서 셀레나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지. 너는 그녀와 무척 닮았더군.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 순결함까지. 그녀와 네가 그렇게 닮은 이유는 서로에게 있어 분신이었기 때문일 거다. 셀레나는 너의 분신이자 대리자이고, 너는 셀레나에게 있어 또 하나의 딸인 거지. 라비스, 너라면 자신의 딸을 일부로 불행한 상황으로 빠뜨리겠나? 신의 의지를 따르는 분신인 셀레나가 정말 그런 마음을 먹었으리라 생각하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미카엔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미카엔은 나를 믿어주는 군요. 나는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었어요.” 미카엔은 나의 본질적인 측면까지 신뢰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미카엔에게 있어 내가 진짜라고 말해준 답변보다 더욱 기쁘게 느껴졌다. 그리고 감동스러웠다. 물론, 그는 나를 일부로 감동시키기 위해 입에 발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구구절절이 옳은 말을 하며 나를 깨우친 것뿐이었다. 나는 어젯밤에 그가 그대로 응접실을 나간 뒤 계속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을 상기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미카엔은 혼란스럽지 않나요? 나 때문에 힘들지 않아요?” “물론, 힘들긴 해. 나는 참 복잡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어젯밤 절실히 느껴졌지.” 미카엔은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이에, 나 역시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미카엔, 내가 한 가지 예언할까요? 방금, 심상치 않은 예감이 팍하고 들었거든요.” “어떠한 예감인지 말씀해보시죠. 아름다운 나의 여신님.” “미카엔은 장차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왕이 될 거예요.” “하하, 이런 어쩌지? 나는 이미 훌륭한 왕인데.” 내가 갑자기 미카엔에게 예감이니 예언이니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농담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언제나 감정에 치우칠 일에도 차분하게 생각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사물을 볼 줄 아는 미카엔의 모습에 앞으로 로히얀스의 밝은 미래를 예감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지스카에게 로맨티스트라는 말까지 듣는 감정에 충실한 미카엔. 지극히 이성적이면서도 감정에 충실한 모습을 보면, 미카엔은 이상적인 인간형의 구현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아,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데... 이상적인 인간형의 구현이라니!’ 카이엔과 에드가 결투하기로 된 날의 아침이었다. 전날 밤부터 에드와 카이엔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설친 나는 얼마 잠을 자지 못하고 일찍 눈을 떴다. 푹신한 킹사이즈의 원형 침대 위에서 나는 습관적으로 이불을 말고 데굴데굴 구르기 위해 몸을 틀다가,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떴다. 조금 전에 나의 침실을 찾아온 듯, 그는 말끔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제는 무슨 용무가 있는지 늦게까지 측근들과 함께 중앙 궁성의 개인 응접실에서 머물던 그였다. “오늘은 일찍 일어나는군.” “에드와 카이엔의 결투가 있는 날이니까요. 미카엔, 그들의 결투를 왕의 명령으로 막을 수 없나요?” “아무리 왕이라 해도 그들의 결투까지 막을 권리는 없는 거다, 라비스.” 답답한 마음에 말을 꺼내보았지만 미카엔은 그렇게 답하며 나의 입술에 살짝 키스를 할뿐이었다. 그리고는 중신들과 조회가 있는 탓인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결국, 결투가 있는 시각인 정오가 다가오고 나는 그들이 결투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지정 장소에 나갔다. 그곳엔 이미 에제크 기사단의 부단장과 에드와 친분 있던 몇몇 기사들, 그리고 킬린이 자리에 나와 있었다. 곧, 정령을 부리는 능력뿐만 아니라 용병 출신답게 검술에도 능했던 카이엔과 기사인 에드는 예리하게 빛나는 장검을 들고 대치되었다. 누가 이기고 누가 목숨을 잃게 될지는 예측이 불가능했다. 둘 다, 예전엔 크로시벨 가의 경호원으로서 그 인연을 시작하여 지금은 왕실 기사와 마법사가 되어 이 자리에 대치되어 서있는 것이다. 이 두 존재의 사이에는 이미 죽고 없는 한 소녀가 존재했었다. 본래 라비스는 카이엔을 사랑하고 에드는 그런 라비스를 사랑하고. 그러한 기묘한 삼각관계 속에 카이엔과 에드의 갈등은 예전부터 심화되어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불가능한 일을 기도했다. 저들 모두 무사할 수 있기를. 어떠한 불행도 있지 않기를. ‘페르딘, 이곳에 너의 기적이 있었으면 좋겠어.’ 나는 한때 페르딘이라 불렀던 창조신 아덴을 생각했다. 그때, 에드의 장검으로 반사된 햇빛이 나의 눈을 부시게 했다. 나는 눈을 찡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가을의 하늘 위로 눈부신 태양이 떠있었다. ‘...하지만 저 둘 중에서 특히 에드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이 간사한 마음은 뭘까? 에드가 조금 더 소중하기 때문에?’ 카이엔이 에드에게 외쳤다. “에드! 이렇게 죽자 살자 결투를 하는 이유가 뭐냐? 내가 이곳 로히얀스까지 찾아왔다고 이렇게 성을 낸다는 것은 나로서는 섭섭하군. 우리는 같은 상대를 짝사랑을 하며 감히 못 올라갈 나무를 바라본 동료가 아니더냐!”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카이엔! 고귀한 분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라!” 에드가 분노하며 검을 들었다. 챙- 그리고 그것으로 결투가 시작되었다. 카이엔과 에드의 검은 불꽃을 튀기며 현란한 모습으로 부딪치기 시작했지만, 결투를 하는 저들 눈빛에는 뚜렷한 살기는 엿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심장은 조그맣게 오그라드는 듯했다. 결국, 나는 눈을 감았다. 에드는 죽은 라비스를 위해 싸운다지만, 카이엔은 무엇 때문에 이 결투를 하는 것일까. 그는 본래 라비스가 죽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지 않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저들의 기합소리, 날카로운 금속이 쉴 새 없이 부딪치는 음향이 한동안 들려왔다.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들려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고막을 찢는 듯한 파열음이 들리며 누군가가 아래로 무너졌다. 혹시, 그 파열음은 생명 끈이 뚝 끊기는 소리였던가.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카이엔이 한쪽 손으로 가슴을 쥐고 무릎을 반쯤 꿇은 모습으로 있었다. 거칠게 몰아쉬는 그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된 거야? 에드는 가만히 카이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은빛의 예리한 빛을 뿜던 에드의 검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순간, 카이엔이 했던 말이 문득 나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제가 목숨을 잃을 경우에는 ‘나를 그토록 슬프게 하더니 벌을 드디어 받았구나,’ 라고만 생각하십시오. *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혹시 소설을 쓰시는 분들 중에는 괴팍한 분들이 많은지..... 언젠가..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중에 나이든 괴팍한 소설가와 강아지 한 마리가 등장하는 게 있더랬죠..제목은 생각나지 않는군요... 문득, 그게 생각납니다. 왠지 제가 갈수록 괴팍해져 간다는 느낌이거든요. 몰입해서 체인지나 글을 쓰고 있는 중에는.. 누가 부르거나 전화라도 올 때면, -_-++++ 이런 표정이 되어버려요. 약간의 방해에도 혈압이 오르곤 한답니다. 잘 나가던 글의 흐름이 끊길 때만큼 스트레스 쌓이는 일도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글을 쓰는 동안에는 심지어 밥도 안 먹고 몇 시간을 내리 꼼짝 않고 자판을 칩니다. 하지만 제 주위 분들은 그런 제 심정을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 군요..ㅡㅜ 그냥.. 문득 하는 횡설수설이었습니다.-_-;; 덧- 또 수정 못했습니다.^^;;; 요즘은 밤을 새야 할 만큼 바쁘거든요.. -------------------------------------------------------------------------------- [37] 체인지[2부] 제12화 -미카엔의 비밀- (1) Ip address : 218.238.165.11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미카엔의 비밀) -1- 이제 완연한 가을인가. 황금빛으로 장식된 마차에서 내리며 나는 더욱 청명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을을 만끽했다. 그리고는 화사한 은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연보라색 드레스를 손끝으로 살짝 잡아 올리며 크리스 털 궁성의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아사벨라의 주최로 연회가 열렸다. 그녀는 이번에 왕실 관리가 된 것에 대한 자축 연회를 연 것이다. 국왕 직속이지만 하급 보좌관으 로서 얼마 전에 미카엔에 의해 임명되었다. 그래서 진심으로 그녀를 축 하해줄 겸, 나는 연회를 싫어하면서도 이 자리에 참석하기로 했다. 그 래야만 아사벨라의 초대에 대부분 응하지 않던 귀족들이나 귀부인들도 안면 바꾸고 모습을 보이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아사벨라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반갑게 맞았다. 늘 화려하기만 하던 그녀의 차림새가 조금은 소박해져 있었다. 미카엔과 내가 없는 왕실을 돌보던 여름날의 그 시간이 아사벨라의 심경에 어 떠한 변화를 준 듯하다. “아사벨라, 놀랐어. 네가 그러한 결정을 할 줄은...” “호호, 저도 제가 이러한 결정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어느 날 문 득, 밑바닥부터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삶을요. 제가 나이가 들어 철이 든 걸까요?” “측실 신분으로서는 처음에 무척 힘들 거야. 다른 보좌관들이 인정하 려 하지 않을 테니.” 그러자 아사벨라는 나의 염려어린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다 소 거만해 보이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전하, 저는 아사벨라 아모르입니다. 잊으셨나요? 아마도 전하께서 비 서관을 했었던 것보다 더 잘 해낼 걸요. 나중엔 폐하의 개인 보좌관이 되어있겠죠. 전하, 저는 몰락 귀족에다 측실 신분으로서 언제까지고 그 저 왕비 전하를 질투하고 해바라기처럼 마냥 폐하를 바라만 보며 살 수 없답니다. 비록 필요에 의해서라 하더라도 폐하께서 저를 직접 찾 도록 만들어야죠. 호호.” 그렇게 말하며 특유의 오만한 웃음을 터뜨리는 아사벨라. 역시나 그녀 의 지금 모습은 못 말릴 정도로 아사벨라답다는 생각이 든다. 저녁 무렵에는 장미 궁성의 구석에 위치한 외딴 조그만 방에서 여러 마법서와 로히얀스 역사서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내일이 나의 생일 이라며 수선을 피우는 마드린을 피해 피신하듯 이곳에 와 있는 것이다. 아마도, 미카엔 역시 내일이 생일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마드린이 그 토록 떠들어댔는데, 그가 모를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계속 가라 앉은 기분인 채로 책을 읽다가 카이엔과 에드가 결투하던 순간을 떠올 렸다. 카이엔은 무릎을 꿇은 모습으로 피를 흘리고 있었고, 에드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때. 나는 카이엔의 상태를 보기 위해 다가가려 했었다. 그러자 이러한 나의 움직임을 의식하고 있기라도 했던 듯, 그는 깊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곧 거꾸러질 듯한 자신의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서는 것이었다. 검을 잡고 있는 에드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에드는 결투에서 카이엔의 숨통을 끊겠다고 공언한 바 있었지만, 지금의 결과는 예상 밖이라고 생각하는 듯 충격에 휩싸인 얼굴이었다. 그러다 뭔가를 깨달은 듯, 그의 표정은 다시 분노로 일그러졌다. “내가 너를 이긴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겠군. 카이엔, 너는 끝까지 얄 미운 녀석이다.” 그리고는 에드는 그 자리를 박차듯 떠났고, 마지막 힘으로 힘겹게 서있 던 카이엔은 그대로 쓰러져 피로서 땅을 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나는 그 러한 카이엔에게 다가가지 않았었다. 벌을 받았구나, 라고만 생각하라던 카이엔의 말뜻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에드를 죽일 수가 없어서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 그런 결투를 끝 까지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던 카이엔. 나는 그를 이해하면서도 다 른 한편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킬린은 허둥지둥 쓰러진 카이엔에게 달려가 상태를 살폈다. 그러더니, 다가오려는 에제크의 부단장과 기사들이 다가오려는 것을 손짓으로 막 으며 결투의 결과를 선언하듯 외쳤다. “왕비 전하의 전 호위 기사이자 에제크 기사 단원인 에드와 왕실 정령 마법사 카이엔의 결투는 에드의 승이오. 카이엔은 방금 사망했소이다.” 그날 밤에 에드는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었다. 그 모습은 굉장히 슬픔에 잠긴 듯해 보이기도 했고, 괴로워 보이기도 했으며, 그 저 술에 취한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는 나를 찾아와 기사 작위를 내 놓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고향으로 떠나겠다고 말했다. 나는 침실에서 아무도 모르게 혼자 울다가 퉁퉁 붓게 된 눈을 애써 감추며 그에게 떠 나지 말 것을 부탁했다. 언제까지나 곁에서 있어줄 것만 같던 그가 이 렇듯 떠난다고 하니, 섭섭하고 서운한 맘이 어쩔 수 없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자 에드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오늘 저는 카이엔과의 결투를 제 생애의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있었습 니다. 크로시벨 가에서 그와 종종 대련을 할 때, 저는 그를 이겨본 적 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돌아가신 라비스님이 너무 가여웠고, 그 분을 돌아가시게 만든 카이엔을 용서할 수가 없었기에, 그를 죽이지 못 하면 내가 죽어야겠다는 심정으로 결투에 임했습니다. 둘 중에 누가 한 명이 죽어야만 끝나는 그런 결투를요...” 에드에게 저런 저돌적인 면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 는 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또 다른 상실감에 울적해져야 했다. 에드가 돌아가고 밤이 조금 더 깊어졌을 때, 킬린이 장미 궁성으로 나 를 찾아왔다. 이제껏 그가 직접 나를 찾아온 적은 없었던 지라 나는 의 아했지만, 그의 방문은 미카엔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음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전하, 카이엔은 아직 죽지 않았으니 눈물은 그만 거두시지요.” 백발이 제법 성성한 인자한 모습으로 빙그레 미소를 짓는 킬린. 나는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척하다가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까는...” “아까는 제가 일부로 거짓을 말했습니다. 물론, 그때 카이엔은 숨을 거 두기 직전이었습니다만, 재빨리 그의 숨이 끊어지기 전에 상태 보전 마 법을 걸었지요. 그를 되살릴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그의 의식과 육체에 흐르고 있는 시간을 반영구적으로 정지시킨 것입니다.” “그를 다시 되살릴 방법이 있나요?” 내가 묻자, 킬린의 이마에 있는 주름의 골이 더욱 깊게 파여졌다. “글쎄요. 만약 천년에 한 개가 열린다는 론티아 열매라도 있다면 살릴 수 있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론티아 열매라면, 일반인들 같은 경우는 평생을 구해도 얻기 어려웠고 값으로는 어마어마하게 비싼 물건이었지만, 나로서는 그 열매를 구하는 일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 니었다. 론티아 정령인 아멘시타에게 그 열매를 구하는 일을 맡기면 되 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카이엔을 살린다 하더라도, 이곳에선 그는 죽은 사람이니 다시 떠나야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어쨌든, 카이엔은 열매를 구할 때까지 잠자는 숲 속의 왕자라도 된 듯 깊은 잠에 빠져 중앙 궁성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침실 안에서 누워있게 되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나마 목숨을 잇고 있게 된 것은 내가 슬퍼할 것을 염려한 미카엔의 배려와 카이엔을 마음에 들어 한 킬린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 나를 괴롭히던 왕성을 떠돌던 소문은 그 반향이 달라졌다. 소문이 두 축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여전히 나를 시기하여 깎아내리려는 일부 무 리와 사실 카이엔과 에드는 일전에 나를 연모했던 이들 중 하나일 뿐이라 고 주장하는 무리로 갈라졌다. 그때, 결투에서 카이엔이 같은 상대를 짝 사랑하며 못 올라갈 나무를 바라본 동료가 아니냐고 했던 발언이 소문에 영향을 준 듯했다. 그리고 내가 카이엔의 죽음에 냉정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소문의 국면이 후자 측의 무리로 기울게 만드는 계기가 되게 만들 었다. 하지만 나를 헐뜯고자 하는 무리들에게 빌미를 주어 흔들리게 되는 왕 비가 되지 않기 위해, 나의 사소한 감정들은 희생해야 한다는 것은 왠지 서글프게 느껴졌다. 게다가 이제 나의 곁에는 루이스도 없고 에드도 떠 나고, 카이엔마저도 떠난다는 것. 본래 라비스와 연관되었던 인연들은 그렇게 하나 둘씩 떠나가는 것이 우울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상념을 털어내고 읽던 책을 덮었다. 지금쯤이면, 나를 찾아 헤매던 마드린도 지쳐있을 거라 생각되었다. 침실로 돌아가자, 분주할 줄 알았 던 측근 시녀들은 모두 조용했다. 그 중 측근 시녀인 레니는 나를 보자 마자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진 듯 흥분하며 떠들어댔다. “전하, 폐하께서요 크리스털 궁에서 열리게 될 왕비 전하의 생신을 축하 하는 연회를 최소하라고 말씀하셨답니다. 혹시, 폐하께서 무슨 노여워하 신 일이 있었나요?” “없는데?” 나의 대답에 레니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데, 역시나 측근 시녀인 아 나가 노크도 하는 듯 마는 듯하며 나의 침실로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얌전하던 아나가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이번에는 또 무슨 큰일인 걸까? “전하! 돌아가신 프레야 전하께서 나타나셨다고 왕성 안이 떠들썩해요. 그 런데 프레야 왕비님의 얼굴이 소녀처럼 젊어졌다고 그러네요.” 아나는 그녀답지 않게 나에게 다소 황당한 소식을 전했다. * 요즘 저 막나가는 것 같아요.... 몰라요.. 몰라.....-_- (뭐가 모르는데?) ------------------------------------------------------------------ [38] 체인지[2부] 제12화 -미카엔의 비밀- (2) Ip address : 218.238.163.2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2- 아나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중앙 궁성의 시녀 몇 명이 프레야 왕비라 일컬어지는 존재를 목격한 바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존재가 누군지 궁 금해졌으나 굳이 중앙 궁성으로 발걸음 하지는 않았다. 이 일은 미카 엔에게 직접 물어봐야할 듯한데, 그는 지금 왕성 안에 없었기 때문이 었다. 아까 오후 즈음에, 그는 호위 기사인 제시와 함께 로히얀스와 자이라스의 국경 근방으로 갔다. 아직까지도 어수선한 그곳의 모습을 친히 시찰하기 위해 떠난 것이다. 요즘 론티아 열매를 수소문하느라 분주한 아멘시타를 기다릴 겸, 나 는 장미 궁 앞에 나가 혼자서 정원을 거닐다가 카이엔과 에드가 결투 하던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그때, 창조신 아덴에게 한 가지 기적을 바랬었다. 그 두 사람 모두 무사할 수 있기를. 어떤 불행도 있지 않 기를. 그런데 그에게 바랐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염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카이엔은 아직 의식불명으로 상태보존 마법에 의지해 누워있 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두 사람 모두 무사하다. 정말 아덴이 나의 염 원을 듣고 이루어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나는 그러 한 아덴의 능력이라면 이곳에서는 공인과 망각의 세계라 지칭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아마도 도 현으로서 살았던 세계에 대한 향수가 아직 잊혀지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아멘시타의 기운을 느끼고는 근처에 서있는 나무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아름드리로 서있는 한 나무가 부 는 바람도 없이 가지를 흔들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아멘시타?” [으응, 라비스. 드디어 론티아 열매가 있는 곳을 알아냈어. 여기서 멀 리 떨어진 남쪽 나라에 정령의 숲이라는 곳이 있거든. 거기에 앞으로 한 달 후면 열매가 열릴 론티아 나무가 있어. 그 론티아 정령한테 열 매를 받기로 약속했어. 더 가까운 곳에 일주일이면 열릴 론티아가 있 었긴 하지만, 그곳 나라의 왕이 그 열매가 열리기를 학수고대하고 있 다 길래... 따오기가 미안하잖아. 한동안 본체에서 제대로 못 쉬었더니 피곤해. 나 이제 돌아갈게.]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 했지만 아멘시타는 이미 나무의 몸체에서 빠져나가고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의 줄기를 기대 듯이 감싸 안으며 중얼거렸다. “고마워, 아멘시타.” 거친 나무껍질에 맞닿은 나의 볼로 전해지는 한기를 느끼며 나는 생 각했다. 이제는 나의 의지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하더라도 이미 사랑하게 되어버린 이곳 세계와 이곳의 존재들을 포기할 수 없 을 것 같다고. 아니, 어쩌면 나는 이곳 세계와 그곳에 속한 존재들을 오래 전부터 사랑했을 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그것을 깨달은 것뿐. 새벽 즈음, 나는 자다가 일어나서 잠시 바람을 쐬기 위해 창밖 베란 다로 나갔다. 미카엔은 아마도 늦은 밤에 이곳 왕성에 도착했을 듯했 다. 나는 새벽 별이 뜬 하늘 아래 어둠에 잠겨 어스름하게 보이는 중 앙 궁 쪽을 바라보다가 문득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거대한 존재 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어둡고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중앙 궁에서 날아오른 것 처럼, 이곳 방향에서 북쪽 하늘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나는 급 하게 플라이 마법 스펠을 외워 허공 위로 날아올랐다. 그 존재를 더욱 잘 보기 위해서였다. 우아하게 날개 짓을 하며 사라져 가는 그 거대한 존재의 몸체에서 희 미하게나마 은빛이 반짝거렸다. 그 존재는 실버 드래곤이었다. 아니, 실버 드래곤처럼 보였다.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그 존재의 생 김새를 더욱 자세히 확인하려 했으나 그것은 몇 번의 날개 짓만으로 금세 사라져버렸다. ‘내가 본 것은 실버 드래곤이었을까? 그렇다면, 실버 드래곤이 왜 이곳 에 나타난 거지?’ 너무 짧은 순간이고 명확하지 않았던 터라 나는 헛것을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나의 생일이라고 분주할줄 알았던 장미 궁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원래 오늘은 본래 라비스의 생일 날짜였을 뿐이었던 터라, 그다지 기대도 하지 않았고 축하도 받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막상 이렇듯 조용하기만 하니 서운하기에 앞서 궁금하기도 하고 의아한 마음도 들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왕비로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귀족들의 알현을 받기도 하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는 티타임 시간을 혼자 차를 마시며 보내고 있는데 자작 부인이라는 젊은 귀부인은 나를 찾아와 이런 소리를 했다. “왕비 전하, 폐하께서 전하의 생신 축하 연회를 취소하셨다는 소문이 파다하답니다. 혹시, 폐하와 언짢은 일이 있으셨나요? 아니면, 그새 폐하의 열정이 식으셨나.” 그러면서 그녀는 조그맣고 화려한 부채를 괜히 파닥여 보이는 것이었 다. 나는 그 말에 기분이 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차분한 어조로 응수 했다. “자작 부인께서는 뭔가 잘못 알고 계신 듯하군요. 폐하께서 연회를 취 소했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제 측근 중 하나가 오늘을 생일로 잘못 알고는 연회를 여는 일을 추진했었는데 그것을 폐하께서 바로잡 으신 겁니다. 괜히 귀부인을 비롯한 많은 분께 혼란을 주었군요.” “어머, 그런가요? 호호호. 그렇군요. 전하에 대한 폐하의 사랑이 금방 식을 리가 없죠. 제가 잘못 알고 전하께 실례를 했어요. 용서하실 거죠?” 나의 말에 그녀는 얼굴색이 변하여 그렇게 대충 수습을 하고는 사라져 갔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져 한숨을 내쉬었다. 욱하는 마음에 거짓말을 해버린 것만 같아서였다. 조금 있으면, 자작 부인에게 했던 나의 말이 귀부인들 사이에서 퍼질 것이다. 그나저나, 왜 다들 나의 생일에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다. 미카엔이 연회를 취소 했다는 사소한 한 가지에 다들 민감하게 신경을 곤두세우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크로시벨 가에서조차도 생일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도 전해 오지 않았다. 마드린을 비롯한 측근 인들도 축하한다는 인사가 없었다. 이젠 의아하다 못해 쓸쓸해지기까지 하는 나였으나 굳이 그 이유를 물 어보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묻는다는 자체가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차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날 무렵, 미카엔은 여느 때처럼 말끔한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로 다정 한 어조로 함께 승마 가기를 제안했다. 그의 태도를 보아하니, 오늘이 나의 생일이라는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내 색하지 않고 그의 제안에 응했다. 나는 백마 조세핀을 타고 달렸다. 미카엔 역시 혈통이 좋은 백마를 탔 는데, 그 모습은 정말 동화책에 나오는 백마 탄 왕자님 같았고 화려한 마법 장검까지 차고 있어 늠름한 기사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승마에도 능숙해 빠르게 달릴 때면, 나는 발이 빠른 조세핀을 타고 있어도 헉헉대며 간신히 쫓아가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저조했던 터라, 그에게 처질 때면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죽자 살자 그를 제치기 위해 달렸는데, 미카엔은 이러한 나의 모습이 재미있는 지 일부로 달리는 속도를 더욱 빠르게 했던 것이다. 결국, 기진맥진 이 된 나는 달리는 그의 뒷모습에 매정함마저 느껴야 했다. 그러다 우리는 왕성 근방에 있는 언덕 위까지 오게 되었다. 왕성 근방 이라지만 제법 먼 거리였다. 적어도 300년 정도 묵었을 늙은 나무 한 그루가 서있는 언덕 위. 미카엔은 그곳에서 말을 모는 것을 멈추었다. 그래서 나 역시 달리는 것을 멈추고 말에서 내렸다. 여기까지 죽어라 달렸더니 온 몸이 땀에 젖었고 기운을 전부 써버려 탈진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미카엔은 약 오를 정도로 멀쩡한 모습이었다. 내가 체력이 허한 걸까, 아니면 미카엔이 비정상적으로 체력이 강한 걸까? 그는 드래곤의 능력을 가졌으니 아무래도 후자 쪽이겠다고 결론을 지었다. 나는 나무의 그늘에 앉아 쉬면서 저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왕성의 모습 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초록빛인 이름 모를 풀들과 가을꽃들이 드문드문 피어있는 이곳 언덕. 말을 타느라 흘린 땀을 가을바람이 식혀주자 기분 이 상쾌해졌다. 미카엔이 다가오자 나는 그의 얼굴을 외면했다. 그러자 그는 나의 옆에 털썩 앉으며 말을 걸어왔다. “오늘 라비스가 왜 기분이 상해 있는지 맞춰볼까?” “미카엔은 지금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이 재미있나요? 지금 놀리는 거죠?”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울컥하여 언성을 높이며 벌떡 일어섰다. 그가 일부로 나의 생일을 모른 척하며 승마를 하면서 나를 놀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괜히 그에게 휘둘린 것 같아서 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자 미카엔도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라비스를 놀린 것은 아니다. 아까 승마할 때는 기를 쓰고 나를 제치려 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그만...” 나의 눈이 도끼눈이 되자, 장난기 다분했던 미카엔의 얼굴은 움찔하듯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이제 그만 왕성에 돌아가야겠어요.” 내가 몸을 홱 돌리자 미카엔은 나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미카엔이 힘 조 절을 못하여 세게 잡아당겨졌던 터라, 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부딪쳐 윽! 소리를 내야 했다. “라비스, 너는 오늘 있을 연회를 내가 취소했던 것에 기분이 상해 있는 거겠지?” “그렇다기보다는 가까운 사람 그 누구도 오늘이 내 생일인지 모르는 것 처럼 행동하기에, 아니 굳이 생일 때문이 아니라 그냥 혼자가 된 것 같 아 기분이 쓸쓸해진 것뿐이에요.” 왠지 얼굴이 붉어졌다. 이렇듯 사소한 일에 토라졌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진 것이다. 내가 조금 더듬거리며 말하자 미카엔은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토닥였다. “이런, 내가 어제 마드린에게 일러둔 것이 너에게 전해지지 않은 건가? 오늘은 너의 생일이 아니니 연회를 취소하다고 말했었지. 그리고 나는 시종을 시켜 크로시벨 가에도 그 말을 전했었거든.”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오늘이 제 생일이 아니라니요?” “오늘은 예전의 그 소녀가 태어난 날일뿐이지. 나는 너의 진짜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었다. 음, 셀레네스로서의 생일은 아마도 아덴에게 직접 물어봐야 할까? 부인의 생일을 신에게 물어봐야 한다니 조금은 우습군.” 미카엔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색하게 웃음 짓는 그 모습에서 그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다. 육체의 생일과 영혼의 생일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은 참으로 복잡한 심정이 들게 만들 텐데도 말이다. 오늘 가졌던 서운함은 잊혀지고 따뜻한 감동이 느껴진다. 이곳에서 라비 스로 살면서 내 본질의 자아를 잃어버리게 될까봐 무척이나 두려워했었 던가. 지금 이 순간, 나의 진짜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다는 그 말은 내 본연의 자아가 이곳에서 뚜렷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날 밤에 나는 장미 궁에 머물지 않고 중앙 궁성에 있는 미카엔의 침 실에 머물며 그에게 체스 두는 법을 배웠다. 미카엔이 요령을 알려준 대로 말을 움직이며 나는 그동안 미처 묻지 못했던 것을 그에게 물었다. “미카엔, 왕성에서 프레야 왕비를 목격한 시녀들이 있다는데... 혹시 누 군가가 미카엔을 찾아오지 않았었나요?” ------------------------------------------------------------------ [39] 체인지[2부] 제12화 -미카엔의 비밀- (3) Ip address : 218.238.163.2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3- “누군가가 찾아오긴 했었지.” 미카엔은 방금 내가 움직인 말을 나이트(Knight) 말로서 먹어버리며 답변했다. “누가 찾아왔죠?” “실버 드래곤이다.” 그의 답변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그때 내가 봤던 존재가 실버 드래곤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실버 드래곤이요? 실버 드래곤이 왜 미카엔을 찾아오죠? 정말 프레야 왕비 전하께서 살아계신 건가요?” 그러자 미카엔은 체스 판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답변하는 것을 뜸 들 였다. 그러다 느릿하게 입을 열더니 말했다. “어머니께선 돌아가셨다. 나를 찾아온 존재는 어머니의 본체로서의 딸 이지. 그녀는 같은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은 또 다른 나의 형제인 셈이 다.” 미카엔의 말에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예전에, 읽었던 왕비 의 일기장에서 실버 아나테스의 본체로서의 자식들이 한 번 언급된 적 이 있었다. 그런데 그 존재가 미카엔을 무슨 일로 찾아왔던 걸까. 미카엔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녀는 단지 인간일 뿐인 내가 드래곤인 자신들을 제치고 어머니의 유품과 레어를 물려받은 문제에 대해 따지기 위해 왔더군. 그래서 나 는 대답했다. 나는 실버 아나테스의 첫 번째 아들이라고. 그러다 그 녀는 드래곤의 눈으로 보아도 내가 인간이 아닌 드래곤으로 보였는지 무척이나 혼란스러워하며 돌아갔다.” “그렇군요. 그녀는 오늘 새벽에 또 다시 찾아오지 않았었나요? 그녀는 미카엔의 말을 금방 믿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오늘 새벽? 그녀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는데... 그녀는 나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을 거다. 알려진 인간의 역사 안에서는 드래곤의 능력을 가 진 하프 드래곤 따윈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새벽에 봤던 것은 정말 헛것이었던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 가 그에게 방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미카엔은 축복받은 존재로군요. 미카엔은 인간이지만 드래 곤의 능력을 가졌잖아요.” “글쎄. 축복이라고만 생각하기에는 의구심이 들더군. 배우지도 않은 마 법을 거의 저절로 터득하고, 인간으로서는 벅찬 드래곤의 마력을 지니 고 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기 때문이지. 만약 내가 절반이나마 드래 곤의 피를 이어 받은 하프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있 었다면, 나는 드래곤이나 가질 만한 스스로의 마력을 이기지 못했을 거다.” 그의 말에 나는 황금빛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나는 그가 인간이면서 드래 곤의 능력을 가진 것은 축복이라는 단순한 생각만 했고 그것에 따르는 대가가 있을 거라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미카엔은 나를 보며 피식하고 한 번 웃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라비스가 그동안 자아 문제로 혼란스러워했던 것처럼, 나 역시 소년 시절에 혼자 고민해야 했던 날들이 있었지. 나는 인간인데, 어째서 다 른 인간들처럼 평범하지 못하고 그런 힘을 가지게 된 걸까, 하고 말이 야. 다른 이들은 나를 축복받은 존재라 말했지만 나는 스스로가 가진 힘에 대해 끊임없는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나의 어머 니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는 내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인간인가, 아니면 드래곤인가?” ‘나는 인간인가, 아니면 드래곤인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던 지는 그의 모습이 왠지 나의 가슴에 깊이 와 닿았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어보였 다. “라비스, 너를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오르는군. 나는 어렸을 적부터 특정한 상대도 없이 이상하리만큼 지독한 그리움에 휩싸이곤 했었는 데. 그렇게 나를 괴롭히던 그리움들은 모두 너에게 향하기 위해 존재 했던 모양이야.” 그의 말에 쑥스러워진다. 그래서 나는 잡고 있던 손을 괜히 슬며시 놓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미카엔이 인간이든 드래곤이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미카엔은 나에게 있어 미카엔이라는 것이 중요하죠. 나 역시, 미카엔 에게 있어 라비스잖아요?” 단순하기 짝이 없는 나의 논리임에도 불구하고 미카엔은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 오늘은 내가 라비스에게 위안을 얻는군.” 사실, 미카엔에게는 그렇게 말했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나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왕비 일기장에서 언급된 바 있는 내용을 보면, 프 레야 왕비 역시 미카엔을 보며 나와 같은 의문을 품었었다. 겨우 다섯 살 먹은 어린 미카엔이 프레야 왕비의 마법 결계를 뚫을 정도로 그 몸 안에는 엄청난 마력이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가 드래 곤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의 마력을 갖기 위해서는 몇 백 년의 유년기 를 지나야 했으니 프레야 왕비로서는 놀랍기도 하고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카엔은 정말 특별한 존재인 걸까, 아니면 그 누구도 모르는 비밀 이 존재하는 걸까? 다음날 오후에 나는 왕실 마법사들의 연구실에 들렀다. 예전에 이곳의 부 수석 마법사로서 잠시 있으면서 안면 트고 지냈던 몇몇 이들과 오 랜만에 안부나 나눌까 해서였다. 그리고 마법에 관심이 많다보니, 요즘 특별한 마법 도구나 마법 스펠이 개발된 것이 있나 하는 호기심도 작 용하긴 했다. 내가 몇몇 젊은 마법사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문득 킬린이 심각한 얼굴로 뛰어 들어오더니 입을 열었다. “왕비 전하, 왕성에 쳐진 결계 중에서 일부분이 뚫린 것 같습니다. 아 마도 침입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침입자라고요? 그 결계는 어떤 계열 마법에 의해 뚫린 거죠?” “흑 마법인 듯하더군요.” “킬린, 왕실 마법사들을 끌어 모아 결계를 다시 복구하고 왕성 주위에 수상한 존재가 있는지 알아보세요.” “예, 전하.” 나는 킬린에게 그렇게 명하고는 그대로 연구실을 뛰어나왔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불길한 생각에 카이엔이 누워있는 침실로 급히 향했다. 마 리의 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만약에 마리라면, 그녀는 라비스로서의 과거와 한번 인연이 엮인 적이 있는 카이엔을 죽이려 할지도 모른다. 카이엔이 있는 침실 문 앞에 이르니, 나의 예상은 적중한 듯 다소 구석 진 곳에 위치한 그곳의 방문은 열려 있었다. 간단한 마법으로 그 문을 잠가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그대로 그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침대만 달랑 있는 수수한 그 방안에는 어떤 시녀가 서있었다. 그녀는 이제 스물 하나 정도 먹어 보 이는 중앙 궁성의 시녀였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나는 경계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더니 얼 른 둘러대는 말을 했다. “그냥 청소하기 위해서 들어왔습니다, 전하.” 그러면서 뭔가를 뒤로 감추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여긴 허락 없이 들어올 수 없을 텐데? 뒤에 감춘 것은 뭐야?” 내가 뒤로 감춘 것을 보려고 하자 그녀는 나를 밀쳐냈다. 그리고는 침 대 쪽으로 달려가 지니고 있던 단검으로 고요히 누워있는 카이엔의 가 슴을 찌르려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서 소리쳤다. “안돼! 제발 그러지마! 마리.” 그러자 시녀는 멈칫하더니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공 허했다. 나는 그녀를 보며 계속 외쳤다. “마리! 그녀의 눈을 통해서 나를 보고 있다는 거 다 알아. 제발 이러지 마. 언제까지 불행을 만들 거야? 네가 조종하고 있는 시녀와 카이엔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들이잖아? 제발 그만둬. 네가 날 증오한다는 거 다 알아. 하지만 네가 엔카루스를 사랑했듯이, 나 역시 미카엔을 사랑 했다는 것은 왜 몰라주는 거야?” “…….” “내가 그렇게 밉니? 마리. 내가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 기 위해 자신의 행복도 헌신짝처럼 내버릴 만큼, 미운거야? 그러면 아 무 것도 얻어지는 것은 없는데 불행은 커지고 또 증오만 낳을 텐데. 왜 못 벗어나는 거야?” 시녀는 나에게 한 발짝 다가와 칼을 들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흘러 내렸다. “너는 나를 우롱했어. 잠시나마 엔카루스가 살아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갖게 해준 너에게 감사해야 할까? 미친 듯이 찾아다녔어. 이 세 상에 살아있지도 않은 그의 행방을. 이젠 나에겐 아주 것도 없어. 매일 나는 한 가지 생각만 해. 어떻게 하면 네가 괴로워질까. 나도 바보 같 다는 거 잘 알아. 하지만 이제 나는 증오 밖에 볼 줄 모르게 되었거든. 무엇을 해야 행복해지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는 생각할 수가 없어. 그저 죽고 죽이는 수밖에 없는 거 같아.” 마리의 아픔이 나에게 전해져 왔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나 역시, 그 녀가 미운데도 말이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렸다. 눈물뿐만 아니라 나의 입술에서는 흐느끼는 소리도 흐릿하게 새어나왔다. “미안해, 마리... ” 그냥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유야 어쨌든, 그녀는 사랑 하는 존재를 잃고 파멸로 치닫고 있는 것이었다. 이성적인 상황 판단 능력도 잃어버린 채, 눈앞에 증오만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녀가 칼을 치켜들었다. 치켜든 그녀의 칼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고 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공허하던 그녀의 눈은 문득 공포 의 빛이 스치고 있었다. 시녀를 조종하고 있는 마리의 흑 마술 위력이 흐려진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칼을 피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툭- 융단이 깔린 바닥 위로 뭔가 떨어지는 음향이 들려왔다. 나는 눈을 떠 서 부르르 몸을 떨고 있는 시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흰 자위를 보인 채 몸을 떨다가 이내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얼른 그녀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그녀는 기절해 있었다. 마리의 주술이 풀려 그 녀는 의식을 잃은 것이다. 나는 눈물을 닦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중앙 궁을 나와 리엔시타를 불 러냈다. 그녀에게 왕실 마법사들보다 먼저 마리의 행방을 찾도록 명령 했다. 아마도, 지금 마리는 왕성 근방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 라비스도 아닌, 마리에게 감정 이입이 되서 눈물 콧물 흘리며 자 판을 쳤습니다.-_-;(왠지 사이코틱한..;) 눈물을 흘릴 상황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코를 하도 풀어서, 코가 너무 아파요..ㅡㅜ ----------------------------------------------------------------- [40] 체인지[2부] 제12화 -미카엔의 비밀- (4) Ip address : 218.238.163.2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4- 왕성 안이 시끄러워졌다. 킬린은 거의 모든 왕실 마법사들을 풀어 성 안을 샅샅이 뒤지게 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경보 령이 내린 일부 왕실 기사들마저 왕성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리엔시타는 그녀만의 특기라 할 수 있는 기운 감추는 능력으로서 왕실 마법사들의 눈을 피해 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어수선해진 왕성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 다. 그러다 얼마쯤 지났을까. 왕성 안의 소란스러움은 더욱 커졌다. 이에 마음이 불안해진 나는 궁 밖으로 나가 시녀들을 시켜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 나의 명령을 받은 장미 궁 시녀는 사라졌다가 이내 돌아와 보고했다. “왕비 전하, 왕실 수석 마법사님께서 조금 전 왕성 근방에서 한 흑 마녀를 찾아냈답니다. 지금 왕실 마법사들이 그녀를 포위하기 위해 몰려갔다고 하는군요.” 그녀의 말에 나는 플라이 마법을 써서 장미 궁에 있는 나의 침실 창 문으로 날아올라갔다. 그리고 침실에서 아직까지 보관해두었던 왕실 마법사 로브를 꺼내 걸쳐 입고는 후드를 깊게 눌러 썼다. 아무래도, 리엔시타가 킬린보다는 한 발 늦은 모양이었다. 역시 수석 마법사인 걸까? 나는 평소 그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던 것 같다. 미카엔이 그를 신임하고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을 텐데도 말이다. 나는 외모에 일루젼을 걸 겨를도 없이 플라이 마법을 써서 왕실 마 법사들이 몰려갔다는 곳으로 날아갔다. 마법사들이 있는 곳은 생각 보다 왕성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바로 성벽 근처에 있는 수풀이 있는 쪽이었다. 마리는 주술을 쓸 때면, 항상 이렇듯 가까운 곳에서 머물었었나 보다. 이렇듯 위험부담이 큰 일인데도 불구하고 마리가 굳이 사건을 벌였던 것은 자신의 목숨쯤은 이미 포기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까이 오지 마! 이곳 왕비를 만나게 해줘!” 누군가가 발악하듯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존재는 마리였다. 갈 색 로브를 입고 높은 성벽 위에 올라 있었다. 왜 저기까지 올라 있 는지 모를 일이었다. 굉장히 높은 위치였다. “너 같은 죄인을 왕비 전하께서 만나실 이유가 없다! 너는 예전에 베 른 공작과 결탁했던 죄인이 아니더냐! 이번엔 무슨 목적으로 왕성의 결계를 뚫었나?” 성벽 아래에서 킬린이 그 존재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하지만 마리는 킬 린의 질문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궁지에 몰린 한 마 리의 가련한 쥐처럼 악에 받혀 외칠 뿐이었다. “이곳에서 뛰어내리겠어! 이곳 신성한 성벽이 악에 물든 피로 더럽혀 지길 원해? 어서 왕비를 데려와! 다가오지 마!” 마법사 하나가 몰래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마리는 날카롭고도 위협 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왠지 지금 마리의 모습을 보자니, 빌딩 위에 선 누군가가 자살 소동을 벌이는 것같이 느껴졌다. 나는 허공에 뜬 채로 우선 상황을 살폈다. 킬린을 비롯한 마법사들은 성벽 아래에서 마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법사들 뒤에는 왕실 기 사들이 몰려 있었다. 성벽 안쪽에도 일부 기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멀리 성벽에선 저격수가 있었다. 마리는 아마도 왕성 밖에 있다가 킬린에게 몰려 성벽까지 올라온 모양이었다. 이렇게 그녀의 위치가 킬린에게 쉽게 노출될 줄은 몰랐다. 아직, 킬린을 비롯한 마법사들과 마리는 나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 는지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 속에 서로에게 몰두할 뿐이었다. 성벽 안쪽에 있던 기사가 나를 발견하고는 뭐라 외치려 하자, 나는 얼른 검지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대어보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마리를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막막해진 것이다. 나는 왕비 신분의 특권으로 그녀를 구해야 하는 걸까? 그러다 뭔가 마법적 기운이 마리에게 다가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처음에 그것을 보며 갸우뚱하다가 이내 투명 마법을 건 어떤 존재 임을 깨닫고는 마리에게 외쳤다. “마리!” 나의 외침은 경솔한 것이었을까? 마리는 자신에게 다가온 존재를 깨 닫고는 지니고 있던 독이 묻은 단검을 꺼내 마법적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상대는 그 공격을 피하며 마리를 제압 하려 했다. 마리와 투명 마법을 건 존재는 몸싸움이 벌어졌고, 나는 불안한 마음에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다 마리의 단검에 상대는 상처를 입었는지 걸려있던 투명화 마법이 풀려 모습이 드러 났다. 그는 백색 로브를 입은 젊은 마법사였다. 그가 움켜쥔 복부에 는 붉은 피가 점점 번져가고 있었다. 안색이 창백해지다가 그의 몸 은 성벽 아래쪽으로 기울어졌다. 그에게 붙잡혀 있던 마리도 함께 기울어졌다. 그 모습에 나는 마리를 향한 분노가 다시 일었지만, 죄를 묻더라도 그녀를 죽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법사를 이어 아래 로 떨어져 내리는 그녀에게 재빨리 손을 뻗었다. 언젠가 얼굴을 마 주친 바 있던 그 마법사까지 나는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내가 구하고 있는 마리가 미웠다. 마리가 떨어져 내리던 반동으로 하마터면 그녀를 붙잡은 나까지 아 래로 떨어질 뻔했다. 마리를 붙잡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성벽의 돌 을 붙잡으며, 성벽의 난간에 허리를 걸쳤다. 마리를 붙잡은 팔이 빠 질 것만 같았다. 나의 팔에 의지해 아래쪽에서 매달린 마리는 쓰고 있던 후드가 벗겨져 얼굴이 드러났다. 탐스럽게 길던 그녀의 백 금발은 아주 짧게 볼 폼 없이 잘라져 있었다. 얼굴도 초췌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예전과 같은 호박색 눈동자로 나를 또렷하게 올려다보며 말했다. “왜 나를 구하는 거지? 라비스. 날 죽이고 싶지 않아?” “왜, 너는 이래야만 하는 거야? 왜 너와 엔카루스는 이렇게 자기 파멸 적인 사랑을 했던 거야?” 나는 원망하듯 물었다. 그러자 마리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했으니까.” “내가 정령을 부를게. 조금만 참아.” “그만둬! 이제 나에겐 희망도 없어. 내가 일으키려던 자이라스도 네 남편에게 꽁꽁 묶여버리고 말았지. 나는 너희들을 무너뜨릴 힘이 없 어. 나는 이렇게 죽어갈 거야. 내가 말했잖아? 그저 죽고 죽이는 수 밖에 없다고.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 거야.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 라비스. 그러면 다음에 다시 태어나 만나면, 너를 미워하지 않을게. 이 말을 하고 싶어서 너를 보겠다고 했어.” 마리를 그렇게 말하고는 힘에 부쳐 새하얗게 되어 붙잡고 있던 나의 손을 풀어냈다. 그리고 아래로, 저 까마득한 아래로 마리는 떨어져 내 렸다. 그 호박색 눈은 마지막까지 나를 향한 채. 마리는 마지막에 자신의 죽음으로서 나에게 가장 큰 고통과 슬픔을 안겨 주었다. 마리는 저 아래로 떨어져 하나의 주검이 될 때까지 그 녀의 이름을 외치며 눈물을 흘리는 나의 모습을 끝까지 놓치지 않았 다. 결국은 끝내 좌절되었지만 마리가 일으키려던 엔카루스의 자이라스. 이제 와서 깨닫는 건데, 미카엔이 자이라스 국경 근방으로 자주 시찰 을 나갔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름답고 예쁜 사랑을 하는 행복한 커플이 있다. 그리고 늘 외면당하는 힘겨운 사랑을 하는 슬픈 커플이 있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그 뒷면에는 그림자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 그림자도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며칠이 지났다.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고 그냥 지냈다. 요즘은 자주 정 령들과 놀았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면, 나는 스스로가 순수해지는 것 같았다. 내 영혼이 맑아지고 밝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가끔 왕 비 체통은 다 벗어던지고 그들과 함께 아이처럼 웃기도 하고 재잘거 리며 이야기도 나누었다. 나는 어쩌면 그들처럼 순수해지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순수한 마음 으로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며 살고 싶어졌나 보다. 미카엔 은 문득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정령들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나다워 보일 때가 있다고. 어느 날 정오, 나는 중앙 궁에서 있는 오찬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어 그곳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중앙 궁 입구에서 나는 시종의 도움을 받 아 타고 있던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려다 누군가 다 가오는 것을 느끼고는 그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내 쪽으로 다가오는 존재는 나와 같은 또래로 보이는 굉장히 아름다 운 소녀였다. 은빛의 길고 고운 머리칼에 은 보랏빛 눈동자, 백옥 같 은 피부, 언뜻 프레야 왕비의 신비스러울 정도로 차가운 이미지와 흡 사했지만 그녀는 더욱 발랄해 보이는 외모였다.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라보자, 그 소녀는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 다. “아름다운 분이로군요. 나는 미카엔을 만나러 왔어요.” * 체인지 2부 막바지 돌입입니다. 마음의 준비를 해주십시오...-_- --------------------------------------------------------------- [41] 체인지[2부] 제12화 -미카엔의 비밀- (5) Ip address : 218.238.164.57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5- 나는 미카엔을 찾아온 그 소녀를 귀빈 응접실로 안내하여 그곳에서 기 다리게 했다. 그녀가 정체를 굳이 말을 하지 않았어도, 나는 누군지 대 충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저런 은발에 은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존 재는 인간들로서는 아주 희귀했다. 미카엔은 중신들과 왕실 방문 손님 들과 함께하는 오찬에 참석해야 하기에 당장 소녀를 만나지 못했다. 나 역시 그 자리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꼭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 니었기에, 나는 그냥 이곳에서 미카엔이 오기 전까지 저 소녀와 대화 를 나누어봐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미카엔과 닮았군요. 혹시 실버 드래곤인가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 소녀는 의미 모를 잔잔한 미소를 띄 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나는 실버 아루나입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실버 반지에 힐끗 눈길을 주었지만 나는 그 눈길을 못 본척했다. 내가 바라본 아루나의 인상은 일단 상냥하고 품위 있어 보이는 소녀 였다. 드래곤이면서도 그다지 오만해 보이거나 하지 않은 것이다. 역 시, 실버족의 천성적인 품성답게 인간들에게 상냥하고 친절한 듯했다. 속마음이야 얼음처럼 냉정하기 이를 때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면에서 블랙 드래곤과는 아주 천지 차이였다. 어쨌든, 실버 아루나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소녀는 프레야 왕비의 본체 로서의 딸인 듯했다. “저는 미카엔의 부인이에요. 아루나님께서 왜 미카엔을 찾아오셨는지 대 충 짐작이 갑니다. 아마도 아나테스님의 유품 때문이겠죠? 아루나님은 미카엔이 그 분의 유품을 소유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네, 그래요. 그는 분명히 어머니의 마지막 유희에서 태어난 인간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그에게서 드래곤의 마력이 느껴진다 하더라도 나는 선 뜻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내 일족 중에도 그를 아는 존재가 없어요.” “아루나님이 선뜻 수긍을 못하시는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미카엔은 아 나테스님의 첫 번째 아들이 맞아요. 저는 한낱 인간일 뿐이라 잘은 모르 지만, 마법 분야를 공부해봐서 어느 정도는 압니다. 나이를 많이 먹은 드 래곤일수록 그네들이 종종 즐기는 유희에 권태를 느낀다고요. 그래서 그 들은 특별한 방식의 유희를 즐기거나 혹은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사실도 잊고 인간이나 그 밖에 존재로 반영구적으로 폴리모프하여 살아가기도 한다고 그러더군요. 아루나님, 왜 이 경우는 생각해보지 않는 거죠? 미 카엔은 지금 드래곤으로서 특별한 유희 중일 수도 있겠다는...” 나는 담담한 어조로 살짝 미소까지 지어가며 말했다. 겉으로는 그렇듯 얼 굴에 철판 깔고 태연하게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말도 안 되는 나의 거 짓말에 당혹감을 느꼈다. 나중에 미카엔이 오면 어떻게 수습할지 걱정이 다. 아루나는 나의 말에 찬찬히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러더니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조금 우습군요. 드래곤의 유희 한 방법으로 역시나 유희 중이신 어머니의 인간 아들을 행세한다는 것은...” “조금 이상한 방법이긴 하네요, 하하. 하지만 인간인 저로서는 드래곤 의 깊은 속마음이나 감쳐진 사정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죠.” 어디서 이런 상황에 적절한 상상력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일을 벌 이고 보는 성격이었던가. 드래곤을 상대로 이런 농간을 벌일 생각을 다 하다니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미카엔의 존재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던 아루나는 나의 농간에 더욱 자신의 생각에 자신이 없어진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아루나가 세상 경험이 그다지 없는 천살 정도 먹은 어린 드래곤일 거라 추측을 했다. 여러 면에서 완숙한 실버 드래곤은 이 정도의 간계에는 휘둘리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다 문득, 아루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미카엔을 만나지 않을 건가요?”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 듯하니 다음에 오겠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묻는 것을 잊었군요. 뭐라고 불러야 하죠?” “라비스라 부르세요.” “라비스. 당신에게 어울리는 이름이군요. 짧은 시간 즐거웠습니다.” 아루나의 인사를 듣자 하니, 실버 드래곤들은 모두 미카엔처럼 예법에도 밝고 매너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녁 무렵에는 중앙 궁에 위치한 언젠가 가본 적 있는 미카엔의 침실 로 향했다. 그곳은 프레야 왕비의 레어였던 곳으로 연결되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던 침실이었다. 미카엔은 그곳으로 오라는 말을 나에게 미리 해두었었다. 아마도 그는 예전에 지웠던 레어로 통하는 마법진을 며칠 새 다시 복구한 모양이었다. 시녀, 시종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마법으로서 문을 늘 잠가두던 그 침실 에 내가 들어서자 미카엔은 두꺼운 코트를 걸친 모습으로 마법진의 모 습을 확인하고 있다가 나를 반겼다. 그리고는 그곳에 가면 추울 거라며 내가 걸친 로브에 추위를 막아주는 보호 마법을 걸어주었다. 잠시 후, 그는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문자 들이 그려진 마법진에서 화사한 은빛이 발하였고, 마력들의 소용돌이로 나의 로브가 펄럭거리기 시작했다. 미카엔은 나의 손을 살짝 잡았다. 나 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은빛 머리칼이 조금씩 날렸다. 그래서 은색으로 빛나며 소용돌이 치고 있는 빙 계열 마력과 그는 마치 하나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문득, 이 마법진에서 혼자만 레어로 이동되었던 순간이 떠올라 나는 맞 잡은 그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러다 레어로의 이동이 이루어졌다. 순간 번쩍하던 은백색 빛이 사라지자 나는 그의 손을 놓았다. “미카엔, 이곳엔 왜 오자고 했어요?”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날 따라와.” 미카엔은 레어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를 뒤따라 걸었다. 그러다 레어의 거대한 입구에 이르니 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설원이 나의 눈앞에 펼쳐졌다.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소박한 통나무집이 하나 보인다는 것이었다. 내가 통나무집 쪽으로 눈길을 주자 미카엔이 말했다. “너와 나의 비밀의 별장이다. 급조된 거라 더욱 초라해 보이긴 해도 안은 제법 아늑하지.” 그러면서 빙긋 웃어보였다. “비밀의 별장이요?” “가끔은 왕과 왕비라는 신분을 벗어나 이곳에서 평범한 연인이 되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미카엔은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미카엔, 비밀의 별장에 들어가기 전에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요.” “어디지?” “예전에 페르딘이 말한 바 있던 언약의 숲에요. 문득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말하자, 미카엔은 언약의 숲으로 공간 이동마법을 시전하여 데려 가주었다. 짙은 초록에 은백색이 장식된 언약의 숲. 이곳도 이미 밤의 기운이 깊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와 미카엔은 잠시 숲으로 난 오솔길 을 걸었다. 한 차례 거세고 시린 바람이 우리를 훑고 지나갔다. 미카 엔이 보호 마법을 걸어주어 덜 추웠긴 했지만, 워낙 바람이 매서웠기 에 나는 눈을 감고 몸을 움츠렸다. 그러다 문득, 아주 희미한 백합 향이 나의 코를 자극하는 것이 느껴졌 다. 바람이 남기고 간 흔적이 달콤한 여운처럼 백합 향이 나는 것이다. 나는 눈을 떴다. “미카엔, 정말 백합 향이 나요. 그때 이곳에 와보았을 땐 느끼지 못했 는데... 페르딘이 말했던 백합 전설이라는 거 정말 있었던 일인가 봐요.” “향이 느껴진다는 것은 이 근방 어딘가에 겨울의 백합이라는 전설의 꽃 이 피어있는 것이겠군.” “와! 겨울의 백합이라는 것도 있나요? 정말 이곳에 그 전설의 꽃이 피어 있다는 건가요? 우리 한번 찾아봐요!” 나는 들떠서 앞서가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미카엔은 이런 나 의 모습에 피식 웃는 듯했다. 내가 너무 어린애 같았던 것은 아니겠지. 나는 향기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미약한 향이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점차 그것이 또렷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백합 향은 마치 ‘이곳으로 오 세요, 나는 이곳에 피어있어요.’ 하고 나의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나는 그것에 홀려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 십여 분을 걸었다. 사람들의 흔적 이 있던 오솔길을 벗어나 수많은 침엽수들을 제치고 걸었다. 미카엔이 숲 을 함부로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하다고 만류하긴 했지만, 나는 그 꽃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꽃을 미카엔에게 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나는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은백색 눈에 파묻혀 고고하게 한 송이 피어난 백합을 발견한 것이었다. “미카엔! 여기 백합이 있어요.” 그것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에 매료된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이 백합 앞에 있었지만, 은은하게 풍기던 백합 향은 조금도 짙어지지 않았다. 향은 이곳 근방에 드넓게 고루 퍼 져서 은은하게 감돌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아름다운 노래가 메아리 치듯 들려와 소리의 출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라비스, 그 꽃에 손대면 안돼.” “네?” 미카엔의 주의는 이미 때가 늦은 듯, 나의 손에는 꺾어진 겨울의 백합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나의 손에 의해 꺾였지만, 백합은 여전히 청초 하고도 아름다운 자태였다. 나는 코를 가까이 대어 백합 향을 맡아보 았다. 아까와는 달리 향이 짙어졌다. 이제는 멀리로만 퍼져있던 그 향 들이 모두 이곳으로 몰려와 백합 주위로만 감돌고 있는 듯이 말이다. 꽃을 들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고 있는 미카엔의 얼굴은 놀랍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가 잘못된 건가? “미카엔, 이 꽃 줄게요. 왠지 겨울의 백합은 미카엔에게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나는 방긋 웃어보였다. 미카엔은 아무런 말없이 내가 주는 꽃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순간, 나는 기이하게도 너무 기쁜 마음이 들었다. 와락 울음을 터뜨리고 싶어질 정도로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그에게 겨 울의 백합을 건네는 이 순간을 위해 내 자신이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오 기라도 했던 듯 말이다. 우리가 서있는 곳으로 다시 한번 백색 대륙의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 [42] 체인지[2부] -에필로그- Ip address : 218.238.164.57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에필로그) 청명한 하늘 아래 로히얀스 왕성의 모습은 언제보아도 위엄 있고 웅장하기 이를 데 없다. 고풍스러우면서도 그 화려함이란. 전통적인 귀족 사회, 왕실의 나라인 로히얀스의 모습이 하늘의 권위에 도전하는 듯한 왕성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과학 대신 마법이 발달한 이곳. 그러한 마법이 이곳 왕성에 밀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히얀스의 마법을 움직이고 주름잡는 왕실 마법사들, 그 마법사들에 의해 첨단적으로 겹겹이 걸려있는 왕성 보호 결계와 성문에서 중앙 궁까지 연결되어 있는 일종의 메시지 연락 마법들. 어떻게 보면 백열전구 같기도 하고 고대 중국에 존재했다는 야광주 같기도 한 수정 구슬 모양의 마법 조명. 이 모든 것은 꾸준한 마법사들의 연구에 의한 결과물들이다. 물론, 이러한 마법들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이들은 고위 귀족층이나 왕실에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국왕이 머물고 있는 중앙 궁은 그 명칭처럼 왕성의 중앙에 위치한 가장 화려하고 스케일이 큰 궁이다. 그곳에서 국왕의 모든 집무가 다 이루어지며 왕실 마법사들의 거처와 연구실, 주요 인물들의 거처가 모두 여기에 있다. 뿐만 아니라, 로히얀스에서 가장 보유 책이 많다고 알려진 도서관이 중앙 궁에 위치해 있었다. 물론, 하나의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국왕 개인 서재는 따로 있었다. 그리고 궁앙 궁의 부속 건물에는 시녀, 시종들이 머무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는 조금 계급이 낮은 왕실 관리들도 머물렀다. 그 근방에서는 왕실 기사들을 위한 연병장과 거처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 밖에 크고 작은 궁들이 이십여 개가 있었다. 그 궁들은 연회 목적으로 지어진 화려한 크리스털 궁을 제외한 왕실 직계 가족을 위한 궁이거나 측실의 위한 궁들이었다. 그러한 궁들 중에서 가장 크고 권위가 있다고 여겨지는 장미 궁의 정원으로 누군가가 지나갔다. 그는 새하얀 신관 복을 입고 후드를 깊이 눌러 쓰고 있었다. 장미 궁 정원에는 몇몇의 시녀들이 있었지만, 이 신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듯 저들끼리 재잘거리며 지나곤 했다. 신관 복장을 한 그는 지위가 높은지 낮은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렴풋이 풍겨오는 분위기가 굉장히 품위 있어 보였다. 그는 궁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을 끄는 존재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궁 앞에는 일곱 살 정도 먹은 소년이 자신보다는 열 살 이상이 많아 보이는 하늘빛 머리칼의 소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늘빛 소년은 바람의 정령인 듯했고 어린 소년은 은빛 머리칼에 자수정 빛 눈동자를 가진 굉장한 미소년이었다. 그는 평소 이렇듯 정령과도 가깝게 지내는 듯했다. 그가 다가가자, 이 두 소년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고개를 돌려 시선을 주었다. “누구시죠?” 낯선 신관에게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꽤 도전적으로 묻는 은발의 소년이었다. 그 모습에 신관은 특유의 것으로 보이는 경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하하, 귀여운 소년이군. 이름이 뭐지? 꼬마야.” 그러자 꼬마라 불린 은발의 소년은 울컥한 표정을 지었고, 곁에 있던 바람의 정령인 소년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그는 신중한 태도를 잃지 않으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관을 한 번 살핀 다음 조용한 어조로 은발 소년에게 충고했다. “전하, 이 분은 왕비 전하의 소중한 친구 분이십니다.” 그러자 은발 소년의 얼굴 표정은 금방 누그러졌다. 어머니의 소중한 분이란 말이 즉효약이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충고를 받아들여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소녀는 나름대로 근엄한 표정을 한껏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이곳 왕성에서 나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존재는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밖에 안 계신다. 아덴을 모시는 신관인 듯한데 무척 무례하다.” “하하하, 그렇군요. 왕자 전하 소인이 무례하였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폐하를 많이 닮으신 듯하군요.” “그런가? 나는 평소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음, 전하께서는 왕비 전하의 아름다움을 닮으셨습니다.” 그때, 궁 입구에서 왕비 측근 시녀가 나와 소년을 불렀다. “왕자 전하, 왕비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그러자 은발의 소년은 순간 표정이 활짝 펴지더니 함께 있던 정령과 신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궁 안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신관은 한동안 실소하다가 정령에게 눈길을 주었다. “언젠가 바람의 정령, 네 노래를 들은 적이 있지. 좋은 목소리를 가졌더군.” “저 역시, 라비스님께 얘기를 들은 바 있습니다. 아름다운 노래로서 자신의 목숨을 살린 한 소중한 친구가 있었다고요. 그래서 저는 그 분이 누군지 한 번쯤 만나고 싶었습니다. 저는 당신을 감히 만나 뵙기에는 미천한 바람의 정령일 뿐이지만, 그저 노래로서 가까이 다가가보고 싶었습니다.” “하하, 우리는 노래라는 한 가지로 오래 전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던 것 같군. 아젠샤르, 이 세상엔 미천한 것도 고귀한 것도 없어. 나와 너는 노래를 사랑하고 노래로서 세상을 사랑하는 존재일 뿐이야. 그저 한 개체의 존재일 뿐이지. 세상을 창조한 나 역시.” 신관은 쾌활하면서도 진지한 어조로 답변했다. 그러자 정령의 얼굴에는 미소가 언뜻 비쳤다. 다시 시간이 조금 지나, 신관은 어느덧 왕자 궁 앞에 서있었다. 그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지나는 왕실 인들은 신관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신관은 궁 앞에서 시녀들에게 떼를 쓰고 있는 조그만 소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 소녀 역시, 신관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눈부신 금발이 아름다운 이 소녀는 이제 다섯 살이 되어보였다. 하얀 얼굴에 곱실거리는 화려한 금발이 잘 어울리는 소녀였지만, 외모는 마냥 귀엽다는 느낌만 주었다. “엔카루스 오빠에게 데려다 줘! 마리는 오빠랑 놀 거야. 히잉.” 소녀는 아까 은발 소년의 여동생인 듯했다. 시녀는 떼를 쓰며 울어대는 소녀를 달래느라 여념이 없는 듯했다. 신관은 그 모습을 잠깐 지켜보다가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하늘 아래로 쏟아지는 화사한 햇살로 화하여 가볍게 왕성의 모든 벽들을 두루두루 비추다가 중앙 궁으로 나오는 한 흑발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웃음을 터뜨리며 같이 나온 동료에게 말했다. “이제야 폐하뿐만 아니라 여러 뻣뻣한 중신들도 제 능력을 인정하는 모양이에요. 이번 일로 제가 자작 작위를 받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거야 아사벨라 당신이 열심히 일한 덕분이죠. 당신처럼 독한 여자는 처음 봤어요. 당신의 몰락한 아모르 자작 가문이 다시 일어서는 건가요?” “호호호. 아니죠. 저는 조만간 아모르 백작이 될 거라구요. 훗, 모처럼 여가 시간이 생겼는데 꼬마 엔카루스를 보러 가야겠군요.” “하하, 왕자 전하께서는 꼬마라는 말을 무척 싫어하시던데. 그런데 아사벨라양은 왕자 전하를 무척 예뻐하시는 군요. 이름 때문인가요? 아니면 폐하의 빼닮은 외모 때문...” 그러다 농담을 건네던 동료는 그녀에게 한 방 얻어맞았다. 햇살로 화한 신관은 그 모습을 마지막 장면으로 기억하고는 왕성에서 조금 멀어졌다. 그 리고 장미 궁을 다시 한번 바라보며 잠시 미련의 마음을 가졌다. 신관은 고개를 돌려 북쪽에 있는 백색 대륙으로 시선을 주었다. 백색 대륙의 어느 지점을 생각하자, 그는 어느 새 그곳에 와있었다. 백색 대륙의 외딴 곳에 위치한 어느 초라한 묘. 그 묘의 비석에는 ‘페르딘, 이곳에서 잠들다.’ 하는 글이 써있었다. 이곳에는 미카엔의 이복 동생이었을 원래 페르딘의 육체가 묻혀 있었다. 영혼을 노래하는 시인. 그들은 창조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신관 자신과 닮았다. 그렇기에 그는 페르딘이라는 이 인물이 왠지 애착이 갔다. 아니, 어쩌면 그가 직접 페르딘이라는 인물이 되어 라비스와 함께 했었기에 더욱 애착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페르딘이 되어 있는 동안에는 페르딘이라는 가련한 인물을 이해했고, 함께 했던 라비스와 미카엔을 이해했고, 더 나아가서는 인간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햇살로 존재했던 신관은 다시 인간인 신관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는 그 묘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 먼지에 쌓인 비석을 어루만져 보았다. 깊게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스물 가량을 먹은 페르딘의 모습으로 신관의 얼굴이 드러났다. 후드를 벗는 순간, 그는 다시 한번 청년 페르딘이 된 것이다. 이곳에 잠든 페르딘은 겨우 십 몇 살 먹은 소년일 뿐이지만 말이다. 황금빛 노을이 나의 눈앞에서 지고 있나 나는 노을과 함께 여행하고 있네 영원히 석양이 지지 않을 그곳으로... 수많은 바람들이 스쳐간 이 영혼 그 아름다움에 입을 맞추리 황금빛 파도가 나의 눈앞에서 넘실거리고 있나 나는 눈부심의 바다 위를 여행하고 있네 영원히 석양이 지지 않을 그곳으로... 눈물과 그리움으로 젖은 이 영혼 마침내 사랑을 꿈꾸어 보리 백색 대륙의 어느 마을의 주점. 그곳에는 몇몇 지나는 상인들이 테이블에 자리하고는 독한 백색 대륙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에 취한 그들 중 한명이 문득 음유시인들이나 읊조리는 허황된 화제를 꺼냈다. 상인들은 그들 특성답게 생계에 관련된 얘기나 뭔가 효율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이다. “내가 얼마 전에 한 음유시인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말이야. 언약의 숲이라는 곳이 몇 년 전부터 왜 백합 향기가 안 나는 줄 알아?” 그의 서두에 동료 상인들은 저마다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알어.” “에이~ 그런 전설을 믿는 거야? 어떻게 이 추운 날에 여름이나 피는 백합 향이 나겠어.” “꽃이 시들었나 보지.” 그러자 상인은 답답하다는 듯이 언성을 높이며 입을 열었다. “아니야, 내가 몇 년 전에 직접 언약의 숲에 가서 백합 향을 맡아봤다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최근 몇 년 전부터는 어느 누구도 백합의 향기를 맡아봤다는 소리가 없어.” “어이, 어이! 쓸데없는 소리 말고 술이나 마셔. 아니, 벌써 취한 거야?” “이 사람, 또 백합 타령이네.” “그러게.” 그리하여, 처음 서두를 꺼냈던 상인은 아무도 자신의 얘기를 믿어주지 않자 억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백색 대륙 안에서 오래전부터 음유시인들에 의해 전해 내려오던 백합 전설. 몇 년 전부터인가는 언약의 숲에서 백합 향기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일로, 음유시인들은 각자의 상상력이 들어간 이야기들을 바삐 만들어냈다. 누구는 한 사악한 인간에 의해 겨울의 백합이 소멸했다고 하였고, 또 누구는 드디어 여신의 언약이 이루어져 겨울의 백합은 순결한 꽃의 정령으로 화했다는 아름다운 결말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들 누구도, 백합 전설이라는 것이 실제에 근거하는 일이었는지, 또 결말은 어떻게 났는지 알지 못했다. 백색 대륙인들에게 있어 백합 전설은 그대로 전설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꿈을 간직하고픈 몇몇 소수 사람들에게서는 사실이 어찌되었건 각자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형태로든 향기로운 이야기로 백합 전설은 남아있게 될 것이다. --------------------------------------------------------------------------------------------------------------------------------- [43] 라얀이 말하는 간단한 후기... Ip address : 218.238.164.57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체인지2부 후기> 이렇게 후기를 쓸 수 있게 되어서 무척 기쁩니다. 비록 만족스럽게 작품을 끝맺지는 못했지만, 그 마저도 할 수 없게 될까봐 저는 그동안 노심초사하며 불안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지난여름이 저에게 있어 가장 힘겨운 순간이었습니다. 아마도 삼 개월 동안은 글 한 줄도 써내지 못했던 같습니다. 자기모순과 자기비판으로 스스로를 무척 이나 괴롭혔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저는 장편을 쓴다는 것에 치를 떨기도 했 습니다. 그만큼, 어려운 5권 집필이었어요. 글뿐만 아니라 여러 상황이 그런 어려움을 더욱 어렵게 몰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식과도 같은 체인 지와 얼른 작별할 날만 꿈꾸고 있었던 것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체인지를 통하여 저는 그동안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너무나 진부한 말처럼 느 껴지지만, 꿈과 열정을 얻었고 많은 분들과의 소중한 인연을 얻었습니다. 그 인 연들을 제가 지켜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이것으로 저는 시원섭섭한(실은 무척 섭섭한) 기분을 감추고 사랑하는 미카엔과 라비스와 함께 마음의 쫑파티 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원하시는 분들은 얼마든지 동참하세요.^^ 출간 삭제는 앞으로 5일 후에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