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살아온 인생은 결코 행복하다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소년소 녀 가장들이 그가 불평하는 걸 들었다면 아마도 '나는 네가 부럽다!'라 고 불같이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어쩌겠는가. 행복하지 않은 걸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인생이라는 건 참으로 묘한 것이 아무리 자신이 불행하다 생각해도 자신 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이 꼭 있기 마련이고, 아무리 자신이 행복하다 생 각해도 자신보다 행복한 사람들이 꼭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행복의 객관적 기준이라는 건 절대 없는 걸까? 「절대 있지. 만약 그런 게 없다면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오지도 않 았을 걸? 행복을 가름 짓는 잣대는 결국 단순한 거야. 나 자신의 주관적 가치가 만들어낸 기준에 객관적 조건들이 제대로 맞아주지 않으면 불행 한 거라구. 그게 바로 행복하냐 아니냐를 결정한단 말이지.」 「그래서? 진우 넌 그럼 불행하다고 생각해?」 희미한 안개와도 같은 배경 속에 나란히 서 있는 소년 소녀는 서로를 마 주본 채 서 있었다. 그 둘은 인생에서 가장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 었다. 「물론 난 지금까지는 불행하게 살아왔어. 태어나자마자 엄마는 가난이 싫다고 도망갔지, 죽어라고 일해서 동생들 성공시킨 아버지는 아무런 대 가도 못 받고 큰 소리 한 번 못 치고 얹혀 살고 있지, 내 사촌형제들은 전부 다 우리 아버지 덕택에 성공한 '잘난 부친'을 뒀지, 거기다가 전부 다 공부는 오죽 잘하냐? 옆에서 지켜보면 내가 얼마나 속이 쓰린 줄 알 아?」 「흐음. 다시 들어보니 정말 많이 불행하긴 불행했구나.」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좀 행복해지려고 하는 거잖아.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선 네 도움이 필요해.」 「내 도움?」 소녀는 약간은 수줍은 듯 볼을 빨갛게 붉혔다. 「있지.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나 약속할 수 있어. 난 절대로 아버지처럼 손해보는 인생은 살지 않을 거야. 크게 성공하지는 못하더라 도 내가 누려야 할 것 어이없게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겨 내 가족들이 고 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게 살게 내버려두진 않을 거야. 그러니까…」 이제 가장 중요한 말이 남았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장장 두 달 동안을 제대로 밤잠도 자지 못한 채 멋진 말과 연출할 분위기를 고안하느라 얼 마나 고생했던가. 「…나랑 결혼해줄래? 지금 당장 말고 나중에 우리가 서로를 책임질 수 있게 되면…」 소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소년은 알았다. 그리고 자신도 소녀를 진 심으로 좋아했다. 유치하고 치기 어린 아이들의 장난 같은 프로포즈라고 비웃는 놈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나이가 조금 어리다고 해서 -그래도 중학교 2학년이나 된다구!- 이런 일생일대의 약속을 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잖아? 뭐가 어때서 그래? 결국 서로가 서로를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마음 변치 말자 그건데! 별로 불건전한 것도 아니잖아! 「그래. 약속할게.」 아마도 바로 이 때가 인간 유진우가 살아온 16년 세월 중에서 가장 행복 한 때였을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그다지 오래 가지 못하고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 아무래도 신은 유진우라는 인간이 행복한 걸 별로 보고 싶지 않은가 보다. "유진우. 후딱 일어나 밥 먹어라." 아침을 깨우는 사촌형의 목소리가 진우의 귓가를 울렸다. 침대에 누워있 던 그는 눈을 떴다. "젠장. 진짜 형들이랑 밥먹기 싫은데… 짜증나게 왜 맨날 꼬박꼬박 같이 먹으려고 드는 거야. '대단한' 사촌형들 앞에서 기 잔뜩 죽으라는 건가 뭔가…" 몸을 일으키려던 진우는 문득 자신의 볼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희미한 눈물 자국이 묻어났다. "아… 또 혜인이 꿈을 꿨나… 이제는 정말 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 데…? 제길…" 그의 첫사랑이자 그의 마음과 영혼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여자 김혜인. 결국 마지막에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배신의 비수에 찔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때는 진심으로 결혼하고 싶다고 -그때 나이가 15이었다- 생각 하던 여자애였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날이라 마 음이 싱숭생숭한 탓에 꿈으로 나타난 건가 보다. "쳇…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그런 짜증나는 여자애 생각해봤자 나만 손해지 뭐…" 차가운 투덜음을 뱉어내고 잠시 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그는 일어나 잠 옷을 갈아입었다. 일층으로 내려가 식당으로 가니 작은아버지 부부와 사 촌형들은 이미 벌써 식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의 모습은 보 이지 않았다. "아버지 찾니? 네 아버지는 벌써 세 시간 전에 일하러 나가셨다." 수저를 들고 있던 큰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다. 진우는 알아들었다는 표시 로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못 앉을 자리 에 앉은 것처럼 몹시 불편했다. "밥 좀 많이 먹고 다녀라. 이제 너도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공부 엄청 열 심히 해야 할 텐데 그렇게 먹지 않아서야 되겠니." 드디어 나왔다! 정말 너무나 잘나신 '서울대학교 의대 2학년에 재학 중' 인 첫째 사촌형의 충고에 진우는 속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밥을 먹고 다니든 안 먹고 다니든 잘난 형이랑은 아무 상관없잖 아? 짜증나니까 제발 그딴 식으로 사람 들들 볶지 좀 말라고. 난 형네 식구들 앞에만 서면 항상 기가 죽어서 미칠 지경이라는 거 알기나 해?' 만약 이 말을 입밖으로 꺼내었다가는 그나마 지켜왔던 예의 바른 이미지 가 와장창 깨져서 이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때문에 진우는 속으로 만 그렇게 투덜거렸을 뿐 작은아버지 가족 앞에서는 항상 가면을 유지해 왔다. 유진우. 오늘 대명고등학교에 입학함으로써 중학교 생활에 마침표를 찍 고 고등학생으로 거듭나게 되지만 항상 그를 압박해왔던 주변 환경은 아 직도 변할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진우의 아버지는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나와 사시를 패스하고 재벌집 딸 과 결혼해 아들 셋을 낳아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는 큰 동생'(진우에겐 작은 아버지가 된다)과는 달리 환경미화원 일을 하고 있다. 앞부분의 서 울대 법학과가 어쩌니 저쩌니 하는 화려한 수식은 다 필요 없다. 결국 환경미화원이라는 소리다. 직업에는 귀천 따위가 없다고 과거 유명 인사들이 몇 번이나 말해왔다. 하지만 교과서에나 실리는 구닥다리 이상과 현실에서 몸소 부딪쳐 얻게 되는 귀중한 지식은 전혀 틀린 법이다. 진우의 아버지인 유정호는 남동생을 둘 거느린 맏이였다. 어려서 집안이 무척 가난했기에 정호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온갖 잡일을 떠맡으 며 동생들을 공부시켰다.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둘째인 유도호는 앞 서 말했듯이 재벌집 딸과 결혼한 판사가 되었고, 셋째인 유충호는 서울 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해 현재는 국내에서 두 번째 가라하면 서러울 굴 지의 기업인 중원 그룹에서 가장 큰 계열사의 전무를 맡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원 그룹 회장의 조카와 결혼하고 예쁜 딸까지 두어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이다. 그러나 타고난 행운은 동생들에게 모조리 다 퍼다 줘 버린 유정호는 뭐 하나 순탄한 게 없었다. 그의 학력은 여전히 중졸에서 끝나 있을 뿐 아 니라 아들인 진우가 두 살이 되기도 전에 가난 때문에 아내와 이혼했다. '거기다가 아들이 특별히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니 더 기가 찰 노릇이 지. 하지만 난 공부엔 진짜 취미 없다구.' 진우는 숟가락을 뜨며 속으로 그렇게 빈정거리듯 중얼댔다. 사실 그의 아버지의 팔자는 웬만한 사람의 시각으로 볼 땐 이보다 더 나 쁠 수 없는 것이었다. 특별히 잘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 항상 툴툴거리기만 하는 아들에, 어려서 아내로부터 이혼 당한 경력에, 돈이 면 최고인 줄 아는 사람들로부터 멸시받을 직업인 환경미화원에. 성공한 동생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으면서도 한 조각 남은 자존심 때 문에 환경미화원을 그만두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진우는 항상 안쓰러움과 동정을 느껴왔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표시해본 적이 없었다. "진우 오늘 입학식이 있다고 했지?" "네." "입학식 선서는 네가 하니?" 진우는 속으로 기가 막혔지만 겉으로는 표정을 침착하게 유지했다. "그건 반 배치고사 전교 일등한 녀석들이 하는 거예요. 성적이 중위권 간신히 넘는 저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거라구요." "저런. 준우는 입학식 때부터 항상 전교 일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데…" '그거야 준우 형이랑 저는 머리 구조하고 노력 그리고 또 집안 배경에서 부터 완전히 틀리니까요.' 열등감 때문에 진우가 기분이 몹시 상한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채 걱정 해주는 것. 어쩌면 이게 이 사람들의 가장 짜증나는 부분인지도 모른다. 더 이상 이 사람들하고 이야기하고 있으면 가면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기분이 상해버릴 것만 같았던 진우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저 먼저 가볼게요." 이 집에서 16년 동안 항상 느껴왔던 열등감은 고등학교 입학식 날이라고 해서 특별히 사그라지지는 않는다. "…이것으로 대명고등학교 입학식을 마치겠습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아 한기가 남아 있는 운동장에 서 있던 전교생들 의 안색에 환희가 피어났다. 드디어 지겨운 입학식이 끝난 것이다. "휴. 조금만 더 끌었으면 그대로 얼어죽을 뻔했다. 저 교장은 이런 입학 식을 매년 해왔을 거면서 도대체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 거래?" 진우의 투덜거림을 중학교 때부터 친구인 세현이 받았다. "원래 보수적인 노인네들일수록 권위를 내세울 수 있는 쓸데없는 허례의 식을 미치도록 좋아하는 법이지. 지금은 비록 우리가 이렇게 투덜거리지 만 만약 우리가 저 입장이 되면 결국 우리도 저럴 거라구." "그래서? 교장을 이해해주자 그 소리냐?" "천만에. 우리는 절대로 저런 노친네가 되지 말잔 소리다." 진우는 픽 웃곤 건물로 들어가는 아이들 틈에 섞여 세현과 나란히 걸었 다. "그런데 진우야. 조금 전에 신입생 환영회 축사 읊은 사람 네 둘째 사촌 형이라고 그랬지? 이름이 준우라고 했던가?" "아~ 네가 신입생 인사했을 때 답례한 사람 말야? 맞아. 우리 사촌형이 야." "흠… 모의고사 전국 10등 밖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는 사람이라길래 얼 마나 대단한 인물인가 기대했는데, 그다지 예상했던 것과 틀린 건 없 네." "내 앞에서 사촌형 얘기는 가능하면 꺼내지 마. 내가 얼마나 짜증나고 열등감 느끼는지 넌 잘 알잖아." 중학교 때부터 굉장히 친했던 세현은 사고방식이 부정적이고 냉소적이라 는 점 이외에도 여러 부분에서 비슷했기에 진우는 그에게만은 자신의 집 안 환경을 거리낌없이 말해주었다. 때문에 세현은 진우가 얼마나 심한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왔는지 알고 있다. "하여튼 진우 너도 참 팔자가 사나운 인간이야. 첫째 사촌형은 서울대 의대생에, 둘째 사촌형은 전교 일등을 도맡는 같은 학교 3학년 학생회장 에, 셋째 사촌형제는 그나마 동생이지만 아이큐가 170을 넘어가는 천재 라 너 자신은 뭐 하나 내세울 만한 입장이 못 된다니." 진우는 빈정거리듯 자신의 단점을 몇 개 더 늘어놓았다. "그것뿐이면 말을 안 하지. 내가 외모라도 잘 생겼으면 모를까 평범 그 자체인데다가 키마저 165cm밖에 안 되잖아." "그래도 너도 장점이 하나 있잖아?" "그게 뭔데?" "바로 네가 부족하고 모자란 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또 절대 허풍 으로 과장하지 않는다는 것. 겸손하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 복도에서 실내화로 갈아 신던 진우는 쿡쿡 웃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 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 적어도 네 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고 있잖아?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 "됐다. 나 위로할 생각이라면 집어 쳐라. 너처럼 낯짝도 반반한데다가 배치고사 만점 받아 신입생 대표 인사까지 하는 녀석이 내 마음을 백 분 의 일이라도 이해하겠냐." 세현과 함께 교실 안으로 들어가려던 진우는 순간 멈칫하고 복도 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이, 차세현. 저기서 여자애들이 지금 너 힐끔 보고 있는데? 손이라도 안 흔들어 주냐?" 세현은 진우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흘끗 보고 난 뒤 냉소적으로 웃 었다. "저런 머리 빈 여자애들 내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너도 잘 알잖아? 그저 외모만 조금 그럴 듯 하면 꺅꺅대고 소리나 지를 줄 아는 여자애들 따위 는 트럭으로 가져다 줘도 사양이야." "네가 조금 그럴 듯한 정도면 나는 원자폭탄을 직격으로 맞은 기형 생물 이겠네? 이래뵈도 평범한 축에는 그럭저럭 속하는 면상인데 말이야." "아부하지 마 짜샤." "아부가 아닌 건 너도 잘 알잖아. 확실히 너 정도면 세상에 드문 엄청 꽃돌이지. 당장 연예계로 입문해도 되겠구만. 뜯어고친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면상이 잘난 건지 쯧쯧… 네 잘난 구석 중에서 나 조금만 주 면 안 되겠냐?" 확실히 진우의 말대로 세현은 잘 생겼다. 그것도 그냥 잘 생긴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잘 생긴 꽃미남이었다. 중학교에서 수많은 여학생들의 프로포즈와 눈물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젊은 여교사의 마음까지 손 에 넣었을 정도로 그는 굉장한 미남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괜찮은 집안에, 항상 전교 일등을 도맡아 하는 우수 한 두뇌에, 진우와 마찬가지로 냉소적이고 차가운 성격이지만 꽃미남에 게는 흉터도 매력 포인트로 작용한다는 원리에 따라 그 성격마저 한층 그의 매력을 돋워 준다. 성격을 제외하고 진우와는 완전히 정반대인 타 입이다. "차세현. 난 도대체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 너랑 나처럼 이렇게 정반 대인 녀석들이 어떻게 이런 친구 사이가 될 수 있는 건지 말이야." "너랑 내가 틀린 점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과 뒤집어쓰고 있는 껍 데기 뿐이잖아. 실제 알맹이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똑같은 걸." "성격 말이야?" 세현이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자 진우는 책상에 팔을 뻗고 엎드리며 작게 말했다. "확실히… 난 그 때 널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랑 똑같은 성격을 가진 인간이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 같은 성격이 오죽 드무냐?" 외형적인 배경이 극과 극인 두 사람이 절친한 친구가 되어 지금까지 변 함 없는 우정을 쌓아올 수 있었던 건, 아마도 내면에 자리잡은 그림자의 색깔이 굉장히 비슷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도 넌 워낙에 잘난 놈이라 그 성격이 오히려 매력 포인트지만 나같 이 잘난 부분 하나도 없는 열등감 덩어리한테는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한다구." "그러니까 말로만 그렇게 투덜거리지 말고 공부라도 좀 신경 쓰면…" 그 때 뒤에서 가냘픈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어… 저기…" "응?" 뒤를 돌아본 세현과 진우는 모르는 여학생이 쭈뼛거리며 서 있는 걸 보 았다. "같이… 앉아도 될까?" 용기를 낸 여학생의 물음에 세현은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진우 는 유일하게 그의 웃음에 깃들여 있는 강한 짜증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가 세현을 1, 2년 사귀어 온 것도 아니니 웬만한 감동의 기복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미안해. 내 옆자리는 이미 이 녀석이 맡아놓았거든." 세현은 진우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지만 여자애는 단 번에 물러나지 않 았다. "그 남자애가 앉은자리에 앉겠다고 나설 정도로 나 염치없는 여자애 아 니야. 저기, 이쪽에 앉아도 되느냐고 물은 건데…" 여자애는 세현의 오른쪽에 앉은 진우와는 반대 방향, 세현의 왼쪽 자리 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내 솔직한 생각을 말해도 돼?" 겨우 옆에 앉아도 되느냐는 질문에 세현이 너무 진지하게 반응하자 여자 애는 조금 당황했는지 머뭇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얼마든지 말해 봐." "난 솔직히 내 옆에 여자가 앉는 거 싫어해. 공부에 별로 집중도 되지 않고, 남자들끼리만의 그렇고 그런 허심탄회한 이야기도 제대로 하지 못 한단 말이야. 정말 미안한데, 난 네가 내 옆에 앉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널 강요할 권리는 내게 없지만." "어… 그런 거라면 내가 더 미안해. 귀찮게 굴어서 정말 미안." 세현은 부드러운 웃음을 얼굴에 가득 띄운 채 그렇게 좋게 여자애의 부 탁을 거절했다. 여자애가 쭈뼛거리고 다른 자리로 가고 난 뒤 진우가 감 탄했다. "또야? 내가 지금까지 봐온 것만 해도 정말 몇 번째인지 셀 수조차 없 네. 또 시작이네. 역시 넌 진성중의 프린스라니까. 고등학교에 와서도 인기가 대단한 걸." 진우는 어깨를 그저 가볍게 으쓱했을 뿐 세현에 대한 적개심 따위는 갖 고 있지 않았다. 그저 순수한 감정으로 세현의 인기에 대해 감탄했을 뿐 이다. "뭐 원래부터 너는 잘난 놈이었으니까." "내가 잘난 녀석이라는 건 인정해. 그렇지만 그것도 별로 좋은 일은 아 니라니깐. 이름도 얼굴도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애들이 맨날 접근해와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걸 들어주는 것도 여간 고역이 아닌 거, 너도 잘 알잖아?" "글쎄다. 난 한 번도 그런 일을 겪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진우가 다시 한 번 어깨를 으쓱했을 때였다. "유진우. 밖에서 누가 찾는다. 나가 봐." 같은 중학교 출신인 준혁이 다가와 진우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그렇 게 말했다. "찾는다니? 누가 날 찾는 건데?" "짜식. 다 알면서 그렇게 시치미 뚝 뗄 거냐?" 준혁이 약간 음흉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진우는 어리둥절해졌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그럼 내가 몰라서 묻지, 누가 찾아왔는 지 알면서 시치미를 왜 떼냐?" "알았다 알았어. 넘보지 않을 테니 시치미는 제발 떼지 마라. 웬 미소녀 가 지금 복도에서 너를 찾으신다." "여자?" 이 학교에서 입학 첫날인 오늘부터 나를 찾아올 여자애가 있었던가? 아 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짚이는 구석이 없었던 진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일어났다. '누가 찾아왔지?' 복도를 나가니 과연 준혁의 말대로 결 좋은 검은머리를 허리까지 기르고 있는 여자애가 창밖을 보며 서 있었다. 방향이 달라서 얼굴은 전혀 보이 지 않았다. '누구지?' 진우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걸 느꼈는지 여자애는 서서히 얼굴을 돌렸다. 여자애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하마터면 진우는 그만 숨이 멎을 뻔했다. "기, 김혜인?" 절대 잊어버릴래야 잊을 수 없었던, 그에게 처음으로 사랑이 배신당했을 때의 쓴맛을 알려준 여자, 김혜인이었다. "오랜만이야." 혜인은 씁쓸한 웃음을 띠었다. 혜인을 만나고 난 뒤 하루종일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머리 속에 하 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고 난 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는 세현의 질문에도 제대로 대답해주지 못한 채 집에 와보니 웬일로 아버지가 일찍 돌아와 있었다. "어? 아빠, 오늘은 웬일로 일찍 돌아왔어?" "너 입학식 하는 날인데 뭐 맛있는 거라도 사주려고 그랬지. 그래, 입학 식은 잘 했니? 친구들은 많이 사귀었고?" "나야 언제나 그랬듯 항상 그렇지 뭐." 진우의 아버지, 정호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진우 너 또 중학교 때처럼 친구 하나 없이 고등학교 시절 보내는 거 아 니냐? 차라리 질 나쁜 애들이랑 어울려도 좋으니까 제발 중학교 때처럼 혼자 지내지만은 마라.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인간이 뭔지 아냐? 그 건…" "아빠처럼 동생들 실컷 좋은 일 시키고 정작 본인은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인간이겠지." 아들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정호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넌 아직도 네가 손해보고 있다고 생각하냐?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 라. 이 아버지가 네 삼촌들이라도 공부시키지 못했으면 지금 우리가 이 런 집에서라도 살 수 있을 것 같애? 어차피 그 때 난 공부하기 틀린 입 장이었으니…" "아, 싫어. 자꾸 그런 소리하지 마." 짜증스런 말을 툭 내뱉은 진우는 벗어놓았던 가방을 거칠게 집어들고 3 층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물론 그 전에 한 마디 더 남겨 놓는 건 잊지 않았다. "아빠는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자격 같은 거 없잖아. 밑바닥 인생이 나 살면서." 그대로 올라가려는 진우의 등에 대고 정호는 황급히 말했다. "진우야. 오늘은 우리 둘이서만 외식할 거니까 조금 있다가 내려…" "싫어. 내가 미쳤다고 아빠랑 같이 외식하냐? 아빠의 잘난 동생하고 조 카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뻔히 알면서 아빠는 외식을 하자고 해?" 진우는 걸음을 멈춘 채 냉소적인 비웃음을 지었다. "분명히 이렇게 생각하겠지.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제 분수에 맞지도 않는 외식이나 한다'고. 아빠. 우리 같은 밑바닥 인생 사람들에게 외식 같은 건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구." "진우야. 어째서 삼촌들이 그렇게 생각할 거라 생각해? 네 삼촌들은 비 록 겉으로는 말못하지만 이 애비가 자기들 공부시킨 것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고 있어." "그렇게 감사하고 있으면 전재산의 절반만 내놓으라고 그래봐. 아마도 아까워서 단 한 푼도 안 줄걸? 아, 아니다. 같잖은 우월심리에서라도 한 푼 정도는 적선할지도 모르겠네." 이쯤 되면 화를 낼만도 하련만 아들이 얼마나 깊은 피해의식에 젖어 살 아왔는지 뼈저리게 잘 알고 있는 정호의 눈빛은 잔잔한 호수처럼 깊이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 말 하지 마라 진우야. 네 삼촌들은 내가 돈 달라고 하면 몇 억이 든 몇 십억이든 아끼지 않고 줄 사람들이야. 다만 사람된 도리로서 내가 달라고 할 수는 없지 않니? 성공한 동생들 두고 싶은 내 이기심에 공부 할 때 푼돈 조금 대줬다고 이제와서 어떻게…" "아빠가 뭐라고 삼촌들을 두둔하든 난 상관 안 해. 다만 난 삼촌들하고 사촌형제들이 지독히 싫다는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건 확실하 지." 진우는 등을 돌렸다. 등뒤에서 우울한 아버지의 시선이 느껴졌다. 속이 쓰렸지만 꾹 참고 올라갔다. 지금 뒤를 돌아봐선 안 된다는 필사적인 비 명이 마음 속에서 울리는 게 느껴졌다. "젠장, 내가 또 왜 그랬지?" 침대에 털썩 누운 진우는 팔로 두 눈을 가린 채 조금 전에 했던 말들을 후회했다. 언제나 이랬다. 동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지만 정작 자신 은 제대로 된 것 하나 건진 것 없는 불쌍한 인생의 아버지에게 항상 동 정과 연민을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차갑게 대하는 것. 이건 반드시 뜯어 고쳐야 하지만 그게 안 되니 정말 문제다. "휴. 지금까지 내 성격이 단 한 번도 남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 지만 이럴 땐 솔직히 좀…" 진우는 주먹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짜증난단 말이야." 그의 사고방식은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쪽으로 이미 굳어져 있다. 같은 사물을 봐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무조건 부정적으로 쪽으로만 생 각하기 일쑤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 할 때마다 잘 되기를 기대 하며 설레는 경험 따위는 없다. 항상 미리 실패와 최악의 상황을 겪을 것을 걱정하다 일을 망친 기억이라면 물론 많다. "그러니까 엄마한테 이혼이나 당하지. 왜 분해하지도 않는 거야? 삼촌들 을 위해 희생했는데 정작 받은 건 아무것도 없잖아? 그게 분하지도 않은 거냐고? 배알도 없나? 꼬리나 살살 흔들면서 삼촌한테 얹혀 사는 이 팔 자가 짜증나지도 않냔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혼자 투덜거려 봐야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언젠가는 자신이 잘 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것도 아니 다. 이렇게 말하면 좀 비참할지 모르겠지만 그는 자살할 용기가 없어서 그저 건조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는 청소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나저나… 혜인이가 나랑 같은 학교라니…"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던 그는 생기가 묻어나지 않는 말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멍청한 기집애… 왜 사람을 귀찮게 하고 그러는 거야 정말? 우린 이미 완전히 끝난 사인데…" 너와 난 이미 완전히 끝난 사이다. 처음 혜인에 그에게 배신의 쓴맛을 알려주고 난 뒤 마음의 정리를 하고 난 뒤에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오 늘 학교에서 오랜만에 만난 혜인이 인정할 수 없다며 찾아왔을 때도 그 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녀의 마음 속 깊숙한 곳까지 받아들여 지기는 무리였을까. 진우는 아까 혜인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미 말했잖아. 우린 일 년 전에 끝난 사이라고.」 「난 인정 못 해. 네가 멋대로 혼자 시작해놓고, 또 멋대로 그렇게 끝내 는 게 어딨어? 네가 일방적으로 '우린 끝났으니까 앞으로 연락 끊자.'라 고 말하면 난 '응. 그래.'하고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해? 시작은 네 쪽에서 먼저 했어도 끝내는 건 네 맘대로 못 해. 안 해. 내가 안 해 줘. 내가 인정 못 해.」 혜인의 눈동자에선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깊은 속마음 의 진실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덮고 있는 얇고 투명한 껍질을 한 꺼 풀만 벗겨내도 그녀는 마음의 상처를 더 이상 숨기지 못해 울음을 터트 려 버릴 것만 같았다. 마음 한 구석이 쓰라려 오는 걸 필사적으로 외면 하기 위해, 독한 마음으로 정말 잔인해지기 위해 진우는 입술을 꾹 깨물 었다. 「시작은 내가 먼저 했지만 날 갖고 논 건 너잖아. 난 네 장난감이 아니 야. 네가 아무리 이렇게 매달리는 '척' 해봤자 난 더 이상 네 장난에 놀 아나지 않아. 널 상대하는 건 정말 피곤하고 귀찮아. 그러니 더 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 줘.」 「너… 어쩜 이렇게 잔인할 수 있니?」 진우는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잔인한 건 너야. 넌 날 속였잖아. 날 배신했어. 그 때 내가 얼마나… 아니다, 그만 두자.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해봤자 아무 소용없지.」 '내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알기나 해?'라고 쏘아주려던 진우는 결국 얼 버무리고 말았다. 한 조각 남은 자존심만이라도 건지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었지만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든 채 녹아 내릴 줄 모르는 이 비참한 기분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학교가 겹친 건 얄궂게도 하늘이 내린 우연이라 치고, 우리 앞으로 더 이상 서로를 아는 척 하지 말자. 난 더 이상…」 「우연 아니야.」 「뭐?」 「내가 일부러 이 학교를 선택했어. 네가 이 학교에 입학한다는 사실을 알고.」 진우는 조금 기가 막혔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조금 기분이 좋아 지는 걸 느꼈다. 자신과는 제대로 어울리지도 않을 이런 미소녀가 필사 적으로 자신에게 매달린다는 사실에 약간의 우월감이라도 느끼지 못한다 면 그건 거짓말이리라. 그러나 그는 은연 중에 그런 우월감을 느끼는 자기 자신이 지독하게 혐 오스러웠다. 어쩌면 그 우월감과 그것에 대한 부끄러움,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더 혜인에게 차갑게 대하는 건지도 모른다. 「조금 기가 막히지만 네가 다닐 학교를 선택하는 것까지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 어쨌든 가급적이면, 아니, 하늘이 두쪽 나는 한이 있더 라도 앞으로는 날 아는 척 하지 말아줬으면 해. 전에 헤어질 때도 말했 지만 난 네가 미워. 정말 미워.」 진우는 그렇게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이를 악문 채 주먹을 바르르 떨던 혜인은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두고 봐. 넌 결국 나한테 다시 돌아오게 될 테니까.」 "내가 독약이라도 먹었냐? 미쳤다고 너하고 다시 시작해?" 혜인은 집안 배경도 그렇게 미모도 그렇게 진우에 비해 어느 것 하나 못 한 부분이 없지만, 진우는 그녀와 새롭게 시작할 마음 따위는 눈꼽만큼 도 없었다. 자신보다 잘난 여자와는 절대로 연애하지 않는다는 허울 좋 은 자존심 때문에 그런 건 물론 아니다. 일 년 전 그녀에게 씻을 수 없 는 모욕감과 배신을 느꼈기 때문이다. "김혜인. 나도 널 미워하긴 싫다. 사람 하나를 진심으로 싫어하고 미워 하고 증오하는 게 얼마나 피곤하고 슬프고 비참한 일인데." 조용히 중얼거리는 그의 말투에는 만질 수 없는 아련함이 조용히 묻어났 다. 가볍게 손을 훑어 내린다면 그대로 만져질 것만 같은 서글픔 속에 서, 추억이 되어 버린 첫사랑과 이제 다시는 순수하게 누군가를 좋아할 일은 없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던 일 년 전을 떠올리며, 그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진우 네가 1학년 3반이라고 했지?" 저녁 식사 중에 둘째 사촌형인 준우가 그렇게 물었다. 진우는 '이 인간 이 왜 또 그런 건 물어보나?'하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겉으로는 온화하 게 대답했다. "응. 1학년 3반 맞아." "너네 반 담임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서는 착하기로 소문난 분이야. 너 정말 운이 좋구나." '좋기는 개뿔이 좋냐'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진우는 겉으로 밝게 미소지었다. "아 그렇구나. 난 몰랐는데. 어쩐지 굉장히 착해보이더라 했어. 준우 형 이 말한 거라면 뭐 100% 확실한 걸 테니까." "아참, 너 그리고 이주 후에 모의고사 보는 거 알고 있지?" "뭐? 오늘 입학했는데 왜 이주 후에 모의고사를 봐?" "우리 학교가 좀 엄하잖아. 1학년 때부터 철저하게 성적 관리하겠다 뭐 그런 거지 뭐. 참고로 형은 처음 본 모의고사에서 491점 맞았다." 잘 나셨구만. 그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쓰리게 참으며 진우는 거짓된 환 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부럽다는 듯이. "와우, 500점 만점에서 491? 진짜 장난 아니네. 역시 형은 대단해. 형도 현우처럼 천재인 거 아냐?" 그러자 진우의 옆에서 얌전히 밥만 먹고 있던 작은 체격의 소년, 현우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말도 안 돼. 준우 형이 천재라구?" 현우는 작은 아버지 아들 삼형제 중 아이큐 170의 막내다. 그리고 현우 는 진우, 준우와 같은 대명 중학교 3학년이다. 원래 진우는 대명 중고등 학교를 다니지 않고 진성중을 다녔다. "준우 형이 천재는 무슨 개뿔이 천재야. 준우 형은 아이큐 무~지하게 낮 다구. 준우 형은 백조나 다름없는 신세야.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수면 아 래에서는 열나게 물장구 치고 있는 백조." 준우가 단 하루도 거르는 일 없이 새벽까지 공부한다는 걸 은근히 지적 하는 말이었다. "아이큐 170이 넘는 네가 볼 때야 뭐 준우 형이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는 거겠지. 그치만 나 같이 공부 못하는 녀석 눈에는 괴물로만 보인다구." "괴물은 무슨 괴물. 난 학교 공부 별로 안 해도 모의고사 500점 맞을 자 신 있다 뭐. 그까짓 거야 껌이잖아." "에휴. 좋겠다 정말. 부럽네." 진우는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미소를 지었지만 속으로는 배알이 뒤틀렸 다. 현우 이 녀석은 지금 자기 머리 좋다고 자랑하는 건가? '참아라, 유진우. 중3짜리 사촌 동생에게 질투하는 네 꼴이 얼마나 우스 운지 지금 알고나 있냐? 참아라, 참아…' 현우가 자신의 머리가 좋다고 자랑하는 것이든 아니면 그냥 있는 그대로 의 사실을 아무런 사심 없이 말하는 것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천재 사촌동생에게 질투하는 자신의 마음이 정말 추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진우는 필사적으로 열등감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걸 진정시키려 애썼 다. "진우 너 이번에 본다는 모의고사 몇 점 정도 맞을 자신 있니?" 작은 아버지인 도호의 질문에 진우는 잠깐 당황했다가 대답했다. "한… 300점 대라면 어떻게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기가 죽었는지 그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낮아져 잘 들리지 않았다. 도 호는 약간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300점? 진우 너 공부 그 정도로 못하니? 못나와도 한 450 정도는 나와 야 되는 거 아니야?" '450이 뉘집 강아지 이름인가?' 진우는 속으로 그렇게 이를 갈면서도 겉으로는 쭈뼛쭈뼛하게 대답했다. 이 연기도 16년 동안 해오다 보니 이제는 프로 뺨칠 정도로 능숙했다. "저는 준우 형처럼 수재가 아니잖아요." "준우는 머리 별로 좋지 않아. 머리는 현우가 좋지. 준우는 순전히 자기 노력으로 전교에서 일등하는 거야. 나는 수재가 아니라느니, 나는 틀렸 느니 하면서 핑계만 대려고 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전교 일등은 틀렸어." 진우는 울컥하는 걸 느꼈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아버지라면 몰 라도 작은아버지에게 화를 내는 건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보 다 더 바보 같은 짓이다. 작은 아버지의 집에 얹혀 사는 입장에선 말이 다. "…노력해 볼게요. 좋은 점수 맞을 수 있도록." "그래, 그래야지." 도호는 자신의 충고가 먹혀들었다고 생각했는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진우는 겉으로는 화기애애하게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도호의 얼굴을 한 대 때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우리 아빠를 희생시켜서 출세한 주제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열등감 그리고 질투가 마음 속에서 터질 듯이 부 글부글 끓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그는 이 분노를 퍼부어 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 집안에서 그럴 수 있는 인물은 단 한 명, 그의 아버지뿐이 다. "부디 학생회장인 네 사촌형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하거라." 여태껏 잠자코 있던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진우는 간신히 지탱하 고 있던 마음의 끈이 툭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속된 말로 '꼭지가 돌 아버린' 진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빠!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내가 공부 못하는 게 왜 내 탓이야! 내 가 이 지경이 된 게 왜 내 탓이야! 전부 다 아빠가 못났기 때문에 내가 이 지경으로 망가진 거잖아! 이게 전부 다 아빠 탓…" 씨근덕거리며 분노를 토해내던 진우는 동그랗게 눈을 뜬 채 멍하니 자신 을 쳐다보고 있는 작은 아버지 가족들의 눈빛에서 자신이 지금 무슨 짓 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하얗게 질렸다. '제, 젠장! 지금까지 잘 참아왔으면서 왜 갑자기 빽 돈 거야!' 16년 동안 단 한 번도 작은 아버지 가족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비록 잘난 구석은 없을지언정 기본적인 예의는 지킬 줄 아는 조 카이자 사촌형제의 모습만 보여주며 살아왔는데 지금 이 꼴은 무언가? 밥 먹다 말고 갑자기 아버지의 한 마디에 빽 돌아서 벌떡 일어나 고래고 래 소리를 지르는 꼴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힘들다. "너… 너… 지금 네 아버지에게 무슨 짓이냐…?" 기가 막힌 작은 아버지는 진우를 향한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쩔 줄 모른 채 서 있던 진우는 그만 식당을 뛰쳐나갔다. "지, 진우야! 지금 이 시간에 어딜 가려고…!" 작은 어머니가 황급히 진우를 쫓아나갔지만 이미 그는 정원을 가로질러 집밖으로 나가 버린 뒤였다. "하아, 하아, 하아…" 머리 속이 하얗게 질려버린 채 정신 없이 무작정 발걸음이 내키는 대로 뛰어다니던 진우는 겨우 이성을 되찾았다. 씨근덕거리는 숨을 간신히 고 르며 주위를 둘러보니 서해 바닷가였다. 그냥 무작정 서울에서 멀어지고 싶어서 아무 기차나 대충 탔는데 바닷가로 온 모양이었다. "후우…" 대자연의 위풍당당한 모습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고명한 철학자가 된다 는 어느 시인의 말이 틀리지는 않은 건가 보다. 싱그러운 바다 내음이 폐 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망막에 자리잡은 시퍼런 바다물결을 조 용히 훑어보던 그는 어느새 마음이 천천히 진정되는 걸 느꼈다. "쿡…" 푸르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깟 일로 꼭지가 돌아버린 채 폭주해 버린 자기 자신이 무척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쳇. 바보 같은 자식. 고작해야 그것 하나 제대로 못 참고 그렇게 빽 돈 거야? 아서라, 아서. 너 같이 잘난 구석 하나 없는 열등감 덩어리는 절 대로 그런 사치스런 행동을 해선 안 된다고 그렇게 다짐하던 걸 잊었어? 화를 내는 건 잘난 놈들만의 특권이라구. 나같이 못난 녀석이 화를 내는 건 정말 추해 보이는 짓이잖아…" 그렇게 중얼거리다 보니 고명한 철학자니 뭐니 하는 건 마음 속에서 조 금씩 사라지고 어느새 잠시 푸른 바다에 내던졌던 비참한 기분이 안개처 럼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주먹을 꽉 쥔 채 수평선을 노려보던 진우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 꼈지만 눈물을 닦진 않았다. 조금이라도 닦아버리면 걷잡을 수 없는 비 참함이 눈물의 힘을 빌어 다신 주워담을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터져 나 와 버릴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싸우듯이 바다를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 촤아아아! 꽤 먼 곳의 수면이 갑자기 출렁거리기 시작하더니 뭔가 거대한 물체가 불쑥하고 튀어나왔다. 화들짝 놀란 진우는 엉거주춤 몇 걸음 뒤로 물러 섰다. "뭐, 뭐야?" 제 아무리 비참하고 한심하고 억울하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 여유 있게 질질 짜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수면 속에서 위로 불쑥 튀어나온 채 딱딱한 마찰음을 흘리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거대한 물체를 앞에 두 고 있는 상황에서. - 기이잉 기이잉 진우는 마른침을 바싹바싹 삼켰다. 그의 두뇌는 끊임없이 맹렬하게 가동 했다. 내가 지금 미친 건가? 내 두 눈이 잘못된 건가? 도대체 내 앞에 있는 저 물체는 뭐지? - 기이잉 기이잉 멀었을 때는 잘 몰랐지만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오자 진우는 그 물체가 인간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심해의 괴물 따위가 절대 아니라 사람의 손으 로 만들어낸 금속기계임이 틀림없다는 걸 확신했다. 매끄러운 검은색과 광채 흐르는 흰색 그리고 정열적이고 상징적인 붉은 색 등이 조화를 이 루어 이 세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굳건한 강인함을 온몸에 갑옷처럼 두르고 있는 저 물체는 분명 '로봇'이었다. 키는 약 20미터쯤 될까? 인간형으로 만들어진 그 로봇은 등뒤에 라이플 처럼 생긴 거대한 무기를 짊어지고 있었다. 녹색 섬광이 번쩍이는 두 눈 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다 훑어볼 것만 같았고, 표면의 굳건한 금속은 설령 핵폭발 속에서라도 살아남을 것 같은 강인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진우는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잊은 채 멍하니 자신의 앞까지 천 천히 다가오는 그 로봇을 지켜봤다. - 기이잉 기이잉 거대한 발자국을 남기며 모래사장으로 완전히 나오자 그 로봇은 움직임 을 멈추었다. 진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날 공격할까?' 그 때 처음으로 진우는 진작 도망가지 않은 걸 후회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갑자기 내빼는 것도 어쩐지 자존심이 상하고, 무엇보다 저 로봇의 정체가 궁금해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라?" 갑자기 로봇의 가슴 부위의 콕피트가 천천히 열렸다. 진우는 그 안에서 어떤 험상궂은 파일럿이나 혹은 미치광이 과학자가 나오는 건 아닌가 싶 어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온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 순간 그는 어이가 없는 나머지 굳어버렸다. "에에엑?" 로봇을 조종하고 있던 건 어이없게도 아무리 높게 봐줘도 십대 후반 이 상으로는 봐주기 힘든 가냘프게 생긴 여자애였다. 푸른 가을 하늘의 싱 그러운 색깔과도 같은 파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자애. 진우와 앞으로 영원히 함께 하지만 가까운 훗날 헤어진 뒤 결코 다시 그 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뜨면 항 상 볼 수 있는 연인과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다.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참 동안 무얼해야 할지 몰 라 버벅대던 진우는 모래사장에 선 채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여자 애에게 겨우 말을 건넸다. "아, 안녕?" "응. 안녕." 설마 대답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진우는 대화가 잘 풀리겠구나 싶 어 다시 물었다. "너, 너는 누구야?" "나?" 여자애는 마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받아서 난처해하는 건 분명 아닌 듯 했다. "나는… 나는… 유젤이라고… 하는데…" 자신의 소개에 자신이 없는지 여자애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진우는 순간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예쁘다…' 단순히 예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괴리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소녀 앞에서 그 어떤 남자가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것도 저렇게 굉장하 게 생긴 거대 로봇을 대동한 여자애인데 말이다. 여자애는 특이하게도 피부가 우윳빛처럼 새하얀 색이었다. 동양인은 아닌 듯 했다. 그러나 이목구비는 오히려 동양인쪽에 가까웠다. '파란 머리… 초록색 눈동자…' 가장 주목을 끈 것은 밝은 햇살을 받아 뇌쇄적으로 빛나는 파란머리카락 과 최고의 장인이 만들어낸 보석처럼 아름다운 녹색 빛을 발하는 초록색 눈동자였다. 염색이나 렌즈를 낀 건 설마 아닐 텐데? 진우는 여자애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자신에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있는 지는 몰랐다. "너… 굉장히 예쁘구나." 진우는 저도 모르게 홀린 표정으로 소녀의 손에 뺨을 갖다댔다. 소녀는 그를 거부하지 않은 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으윽! 나보다 키가 크잖아! 무, 무슨 여자애가 이렇게 키가 큰… 게 아 니라 내가 작은 거지 참." 멀리 서 있을 땐 몰랐는데 바로 코앞에서 보니 여자애의 키는 진우보다 더 컸다. 그렇다고 여자애가 평균 이상으로 키가 큰 건 아니었고, 특별 나게 진우의 체구가 작은 것이었지만. "한 168? 169 정도 되겠네. 근데 너 네가 누군지 대답 안 해줄 거야? 네 이름이 뭐니? 난 유진우라고 하는데." "내 이름…?" 소녀는 어색하게 머리 속에 집어넣은 기억을 끄집어내려는지 잠시 표정 을 찌푸렸다. 그 모습도 무척이나 귀여웠다. "내 이름은… 유젤이래…" 자신의 대답에 자신이 없는지 소녀의 표정은 힘이 없었다. "유젤? 예쁜 이름이네." 진우는 가슴의 두근거림이 조금씩 가라앉는 걸 느꼈다. 이제 어느 정도 진정된 그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너 여기는 왜 온 거야? 그리고 저 로봇은 도대체 뭐고?" 유젤은 힘없는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도망쳤어." 바로 이 날의 만남이 진우의 인생이 근본부터 송두리째 바뀌게 된 시발 점이자, 앞으로 영원히 함께 하지만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연인과의 서글 픈 시작을 알리는 운명의 손짓이었다. 유젤은 외부 조종 장치로 생각되는, 손목에 차고 있던 기기로 타고 온 로봇을 일단 물 속으로 다시 숨겼다. "어? 그거 원격 조종장치로도 조종할 수 있는 거야?" "응. 그렇지만 세밀한 움직임이나 전투는 못해. 그냥 가벼운 이동 정도 만 할 수 있을 뿐이야." "전투? 설마 저 건담이 전투병기라는 건 아니겠지?" "건담이 뭔데?" 진우는 '건담을 모르는 애도 있나?' 생각하다가, '여자애라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일본 SF 애니메이션 중에서 수십 년 동안 최상의 인기를 누리는 메카닉 애니메이션이잖아. 저것처럼 생긴 로봇이 막 대포를 들고 뛰어다니는…" 진우는 자신의 말센스가 이렇게나 형편없었음을 처음으로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대포를 들고 뛰어다니는 건담이라니! 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말도 안 되는 표현인가! "일본? 일본은 뭐야?" 진우는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일본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너 혹시… 어디 저 멀리 중동의 소국에서 살다가 온 애니? 아니지, 아 니지. 저런 굉장한 물건을 갖고 다니는 애가 그럴 리가 없지." 게다가 한국어도 저렇게 잘하고. 어쨌든 진우는 슬슬 유젤의 정체를 물 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건담은 어디서 났어?" "저건 건담이 아니고 맥(MAC : Moving Armor Craft)이라고 해. 내가 태 어났을 때 처음으로 본 사람이 나에게 주는 거라고 했어." "네가 태어났을 때?" "응. 나 정확히 일주일 전에 태어났거든." 진우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저걸 과연 믿어야 한단 말인가? '으윽! 저걸 믿어야 돼 말아야 돼! 평소 같은 절대 믿지 않겠지만 저런 희한한 로봇을 타고 나타난 여자애 말을 안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머리를 쥐어짜던 진우는 다시 물었다. "그럼 넌 여기는 왜 온 거야? 설마 저 전투병기를 타고 한국을 쑥대밭으 로 만든다는 사명 따위를 띠고 온 건 아니겠지?" "한국이 뭔데?" "…." 이 여자애랑은 도대체가 이야기가 안 되는구만. 진우는 세상 물정은 하 나도 모른 채 말만 할 줄 아는 갓태어난 아기와 대화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어, 어휴! 난 잘 모르겠으니까 하여튼! 그냥 넘어가자! 여기는 왜 온 거냐니까?" 손가락을 물며 갸웃하던 유젤은 힘없이 대답했다. "도망쳤어." 아까와 같은 대답이다. 하지만 그 한 마디만으로는 자세한 사정을 알 수 가 없었다. "도망치다니? 누구로부터?" "내가 태어났을 때 처음으로 본 사람으로부터." "그… 너에게 저 맥을 준다고 한 사람 말이야?" "응." 진우는 약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왜? 너에게 저런 대단한 걸 줄 정도라면 널 꽤나 아끼고 있는 게 틀림없을 텐데? 너 세상 물정도 제대로 모르면서 함부로 돌아다니면 위 험해. 특히나 너 같이 예쁜 애는…" 그 때, 처음으로 유젤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 사람은 날 아끼는 게 아니야! 날 이용하려 할 뿐이란 말이야!" "그게 무슨…?" "난 알아! 그 사람은 늘 나에게 부드럽게 웃어주지만 그건 나에게 웃어 주는 게 아니야! 그 사람은 늘 나를 유젤이라고 부르지만, 난 알아! 그 건 절대로 내 이름 따위가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사춘기 소녀와의 반항과도 같은 유젤의 외침을 들 으며 진우는 그녀가 갖고 있을 복잡한 사정이 무엇인지 한 번 추리해보 았다. 하지만 지금껏 그녀로부터 전해들은 단편적인 정보만으로는 도대 체 그녀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정말 일주일 전에 태 어났다는 말이 맞는지 그것조차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유젤은 절대 거물이라는 것이었다. 걸어다니는 인간 형 전투병기를 타고 나타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로봇에 관한 기술이라면 세계 최고를 달리고 있는 일본에서조차 아직 간신히 평지와 계단을 걸어다닐 수 있는 로봇을 개발했을 뿐이다. 일본이 만든 로봇 중 최신형인 JR-51조차 모래사장에선 한 발자국도 제대로 내딛지도 못하고 그대로 넘어져 버릴 것이다. "저 그럼 너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유젤의 대답은 간결했다. "모르겠어." "모르겠다니? 네가 앞으로 뭘 할지 모르겠다면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모르겠어. 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냥 그 사람이 싫어서, 그 사람 이 무서워서 도망쳤을 뿐인데… 나 어떻게 하면 좋지?" 그걸 나에게 물으면 어떡하냐? 진우는 얼떨결에 그렇게 대답하려다 고개 를 내저었다. 진우는 이런 외딴 곳에 세상 물정 모르는 미소녀를 혼자 놔둘 정도로 모 진 남자가 아니다. 그는 일단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좋게 생각하며 유 젤을 데리고 서울로 향했다. 자기부상열차 안에서 그는 주변 사람들이 자꾸만 유젤을 흘끔흘끔 대는 걸 보고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아마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을 연인으 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런 눈부신 미소녀와 연인으로 오해받는다는 건 남자에게 있어서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왜 사람들이 날 흘끔거리는 거야?" 한참 동안 묵묵히 시선을 받아내던 유젤은 진우에게 작게 물었다. "네가 예뻐서 그래." "예쁘다는 게 뭔데?" 또다시 할 말을 잃은 진우는 헛기침을 했다. "그, 그건 말이야… 사람들에게는 원래 지역이나 문화마다 보편적인 미 의 기준이라는 게 있는데… 그 기준을 충족한 여자를 가리켜 보통 예쁘 다고 하거든? 그러니까… 아씨! 몰라! 하여튼 네가 뭐 어디가 이상해서 라든지 수상해서 쳐다보는 건 아니니까 안심해도 돼." "아… 그렇구나." 유젤은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마치 정교하 게 만들어진 인형과도 같아서 조금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난 혹시 저 사람들이 그 사람이 날 잡으려고 보낸 사람들인 줄 알았어. 그래서 날 흘끔거리는 줄 알았어." "그 사람? 너에게 맥을 준 사람 말이야?" 유젤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주위의 다른 사람들…" "뭐 그게 그거 아니야?" 그런 굉장한 로봇을 개발한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진우는 문득 한 번 그를 만나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혹시 유젤이 말하는 그 사람 미국이나 뭐 그런 강대국에 소속되어 있는 비밀과학자 같은 게 아닐까? 그래서 저런 전투병기도 만들 수 있는 거 고… 젠장. 미국이나 중국 소속이라면 간신히 통일도 하고 경제도 회복 한 우리나라 당분간 또 쩔쩔매야겠군. 이래나 저래나 힘이 없으면 역시 안 된다니까.' 어느새 열차는 서울에 도착했다. 진우는 일단 유젤의 손을 잡고 호텔로 데려갔다. "자, 유젤 넌 당분간 여기서 지내면 되겠… 어어어?" 호텔 안에 들어선 진우는 순결한 느낌의 파란색 머리카락 여자애는 간데 없이 사라지고 타오르는 불꽃처럼 정열적으로 빛나는 붉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흩날리는 여자가 옆에 서 있자 소스라치게 놀라 입을 쩍 벌렸 다. "유, 유젤 너…" 사람이 단 한 순간만에 이렇게 머리카락 색이 뒤바뀔 수 있는 건가? 아 니면 조금 전까지 그가 유젤의 머리카락이 파란색이라고 생각했던 건 착 시 현상이었던가? 그것도 아니면 지금 이 상황이 환상? 도대체 어느 쪽 이 진실이란 말인가? "머, 머리카락이 왜 그래?" 유젤은 별거 아니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도 몰라. 그냥 햇빛이 내리 쪼이는 곳에 있으면 머리카락이 파란색이 되는데 그늘 같은 곳에 있으면 빨강색으로 변해. 그리고 주변이 꽤나 어 두워지면 검은색으로 변하구." "이, 이건…" 그 어떤 미사여구로도 형언할 수 없는 신비스런 광경에 진우는 어떤 말 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간신히 더듬거리며 한 마디 할 수 있었을 뿐 이다. "…마치 마법 같아…" 유젤은 동화 속에서나 나옴직한 마법에 걸린 공주라도 되는 걸까. 처음 봤을 때부터 눈을 뗄 수 없었던 신비함과 매력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환 상적인 색의 변화는 너무나 신성해서 차라리 건드릴 수 없는 고귀함으로 비춰졌다. "근데 아까 기차 안에선 왜 그대로… 아, 너 창가에 앉아 있었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주변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눈으로 유젤을 흘 끔대고 있었다. 하긴 파란머리를 가진 사람이 흔한 것도 아닌데 햇빛의 노출에서 벗어나자마자 정열적인 붉은 색으로 변했으니 호기심이 끌리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리라. 진우는 주변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쏠려 있는 걸 깨닫고 황급히 프론트로 유젤을 끌고 갔다. 아까부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여직원이 의미심 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싱글로 하시겠어요? 더블로 하시겠어요?" 뭘 싱글로 하고 뭘 더블로 하는 건지 이런 곳에 와본 적이 없는 진우는 난감했다. "그냥 침대 하나 있는 방 하나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진우의 의도를 철저하게 오해한 여직원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독특한 유젤의 외모를 흘끗대며 방 키를 내주었다. 키를 받아든 진우는 앞장서 서 지정 받은 방으로 향했다. "나 여기서 지내면 되는 거야?" 룸에 들어간 유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그렇게 물었다. 진우는 호텔 비용으로 깨져나간 자신의 용돈이 아까워 눈물을 삼키면서도 겉으로는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 비록 우리 아버지가 부자는 아니지만 내가 신세지고 있는 친척이 꽤 부자니까 잘만 둘러대면 같이 살 수도 있을 거 야." 만약 아버지가 돈을 달라고 한다면 몇 십 억이라도 아끼지 않고 내줄 삼 촌이니까 설마 이런 여자애 하나 같이 살게 해주는 건 일도 아니겠지. 아버지의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건 아니었지만 진우는 지금 상황에 서 자신이 유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것 뿐이라 생각했다. "근데 넌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야?" 처음 보는 장난감을 갖고 노는 아이처럼 즐거워하던 유젤은 문득 그렇게 물었다. 진우는 갑작스레 받은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대답할 말이 마땅 치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나도 널 이렇게까지 도와줄 이유는 없는데…" 전투병기 맥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서 그런 건가? 아니면 단순히 인간 같 이 않은 유젤의 매력적인 외모에 끌려서? 그것도 아니면 정말 단순한 호 의에서 우러나온 행동인가? 진우는 자신의 마음에 자신이 없어졌다. 그 어느 것도 진심은 아닌 듯 했다. "괜찮아. 대답 안 해줘도." 진우에게 다가온 유젤은 처음으로 밝게 미소지으며 그를 꼭 껴안았다. "넌 그 사람하고는 같은 눈빛을 가졌으니까 믿을 수 있어. 고마워, 날 도와줘서." 두근두근! 태어나서 여자와 이렇게 깊은 포옹을 한 경험이 별로 없는 순 진 동정남 진우는 가슴이 터질 듯이 뛰는 걸 느꼈다. 아까 바닷가에서 맥이 등장하는 걸 봤을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심장이 강하 고 빠르게 뛰었다. 영혼을 녹여버릴 듯 달콤하고 매혹적인 향기가 유젤의 몸에서 가득 뿜어 져 나왔다. 마셔버리면 그대로 숨이 멈춰버릴 것만 같은 그녀의 페로몬 공격에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채 석상처럼 굳어있던 진우는 잠시 후 그녀가 자신을 놔주었을 때에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응?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겨우 정신을 차린 진우는 당황함을 감추지 위해 소리를 빽 질렀다. "너 괜찮은 거야? 안색이 안 좋아 보여." "괘,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근데 넌 아무 남자한테나 다 그러니?" "뭘?" "이렇게 껴안는 거 말이야." 유젤은 진우가 묻는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대답했다. "사람을 껴안는 건 좋아. 껴안고 있으면 기분이 참 좋아지거든. 그래서 전의 그 사람하고도 매일 밤 같이 껴안고 자곤 했어." 순간 진우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렸다. "바, 밤마다?" "응." "껴안고?" "응." "서, 설마 갈 데까지 간 건 아니겠지?" "갈 데까지 갔다는 게 무슨 뜻인데?" "에… 그러니까…" 진우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세상 물정 모르는 유젤에게 제대로 그 뜻을 설명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그러니까… 내 말은… 아! 그래! 그냥 껴안고 자기만 한 거야? 뭐 설마 옷을 벗거나 그런 건 아니지?" "잠자는데 옷은 왜 벗는 거야?" 순간 진우의 얼굴에 회색이 돌았다. "그러니까 옷을 벗은 적은 없다 이거지? 그냥 껴안고 자기만 한 거지?" "응. 옷을 벗긴 왜 벗어? 옷 벗으면 꽤 추운데." "아하하…" 그 과학자라는 사람이 설마 여자이거나 아니면 성불구인 남자인 건가? 정상인 남자라면 이해가 가질 않는다. 매일 밤 이런 미소녀를 껴안고 자 면서도 손을 안 댔다니. '아니면 갓 태어난 아기한테는 차마 자존심 때문에라도 손을 댈 수가 없 었나 보지." 내친 김에 진우는 유젤이 말하는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물어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네가 말한 그 사람 말이야. 남자니, 여자니?" "남자? 여자? 그게 뭔데?" …잊고 있었다. 이 여자애는 세상 물정이라고는 도통 모르는 갓 태어난 아기나 다름없다는 것을. 진우는 '그게 뭔데?'라고 묻는 듯한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에 대해 강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대답을 얼버무 렸다. 호텔을 나온 진우는 공중전화로 갔다. 세현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서였 다. "정보화 시대에 폰이 없다는 건 정말 불편하지만 돈을 아껴야 하니 어쩔 수 없지 뭐. 휴우. 대학생이 되면 폰 하나 장만할 수 있으려나." 물론 전에 삼촌이 폰을 사주겠다고 한 적이 있지만 그들의 '동정'을 가 능하면 받기 싫었던 진우는 '학생에게 그런 건 사치예요.'라며 좋게 거 절했다. 그 때 예의바른 태도로 꽤나 점수를 땄던 걸로 기억하지만 어차 피 아까 집을 뛰쳐나오기 전에 그 동안 지켜왔던 이미지를 깨버렸으니 이제 아무 소용없으리라. 밖은 꽤나 어두워졌다. 저녁 식사 중에 뛰쳐나와 바닷가로 가고, 유젤을 만나고 뭐 그러다 보니 금방 해가 떨어질 수밖에. 진우는 신호음을 들으 며 세현이 전화를 받기를 기다렸다. 「여보세요.」 "세현이냐? 나 진우." 「야, 마침 너 전화 잘 했어. 너네 아버지가 지금 너 굉장히 찾으셔. 아 까 나한테도 전화하면서 너 혹시 우리집에 오지 않았냐고 하시던데? 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나 저녁 식사 시간에 폭주해서 그만 아버지에게 소리 질러 버렸다. 그 것도 온가족이 다 보는 앞에서." 진우의 배경과 진심을 다 알고 있는 세현은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알아차 렸다. 「결국 일을 저지른 거냐? 너네 삼촌 엄청 깜짝 놀랐겠네? 늘 얌전하게 만 지내던 네가 그럴 줄은 설마 몰랐을 테니까.」 "그렇지 뭐." 「그래서? 앞으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그렇다고 집에 안 들어갈 거 야?」 "야야. 내가 아무리 열등감 덩어리고 또 아까는 홧김에 뛰쳐나왔지만 가 출을 결심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어쨌든 좀 있다 집에 들어갈 거니까 나중에 우리 아빠가 전화하면 넌 그냥 모른다고만 해." 「알았어. 근데 고작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야?」 "아니 사실은…" 잠시 망설인 뒤 진우는 다시 말했다. "돈 좀 빌려줄 수 있냐? 지금 당장은 못 갚겠지만 나중에 어떻게 해서든 갚을게. 급히 쓸 데가 있거든."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꽤나 큰돈인가 보다? 얼마나 빌려주 면 되는데?」 "한 백 만원쯤…" 「너 통장의 돈은 다 어쨌어? 통장의 돈 한 백 정도 있지 않았니?」 물론 통장 잔액이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당분간은 삼촌에게 유젤에 대 해서 부탁하는 게 무리라 꽤 오랫동안 호텔에 머물러야 할 터였다. "그거 남아있긴 한데 급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그래. 내가 가진 돈만으 로는 부족하거든. 좀 빌려 줘. 꼭 갚을게. 이상한 데 쓰는 건 절대 아니 야." 「아냐 됐어. 네가 철없이 이상한 데다가 돈 쓰고 그럴 녀석이 아니라는 건 내가 잘 알지. 내일 줄게. 돈 굳이 안 갚아도 돼.」 "아니야. 아무리 네가 돈이 많다지만 그런 큰 돈을 빌리고도 안 갚을 순 없지." 「괜찮다니까. 정 미안하면 나중에 겜방비라도 내던가. 내일 학교 나올 거지? 그 때 줄게.」 진우는 돈을 어디다 쓸 것이며 왜 필요한 건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선뜻 백 만원을 준다는 친구의 마음 씀씀이에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고맙다." 진우가 집에 도착했을 때 집안의 분위기는 뭔가 좀 이상했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 그리고 사촌형제들도 어쩐지 조심 스럽게 그를 대하는 것이었다. 진우는 그게 약간 어색했지만 그래도 화 를 내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제가 그만 맛이 갔었나 봐요." 표정을 보이지 않기 위해 진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작은 아버지, 도호 에게 사과했다. "아니야, 아니야. 그리고 네가 사과드려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네 아 버지지 않니? 아버지께 얼른 사과드려라." 작은 어머니, 수정이 맞장구쳤다. "그래. 아무리 이성을 잃었다지만 어떻게 어른들 앞에서 아버지께 소리 를 지를 수 있니? 얼른 사과드려." '음…' 진우는 걱정스런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는 아버지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 다. "미안해 아빠." "아냐 됐어. 어쨌든 피곤할 텐데 그만 위로 올라가 쉬어." 진우는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 다. 침대에 털썩 드러누운 그는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분위기가 이상하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아니면 내가 가출이라도 할 줄 알고 겁을 먹은 건가? 흐음…" 어쨌든 별 일 없이 무사히 수습 되서 진우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작은 아버지 가족들에게 그나마 그 동안 지켜온 '예의 바른 아이'라는 이미지가 깨지긴 했지만. "휴우… 뭐 어차피 앞으로 평생 같이 살 사람들도 아닌데 상관 없지 뭐. 그나저나 유젤은 잘 자고 있으려나… 혹시라도 밖을 돌아다니다가 나쁜 사람들 만나는 건 아니겠지?" 진우의 걱정과는 달리 유젤은 룸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그저 안 을 구경하기 바빴다.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녀가 태어난 뒤 주어진, 언제나 복잡한 기계들로만 가득한 그 새하얀 방과는 달리 이곳에 있는 여러 가지 가구 라든지 전자제품들은 세상에 갓 태어난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 분했다. TV를 어루만지던 유젤은 문득 전원스위치를 눌렀다. TV에서 시끄러운 락 음악과 함께 락 가수가 공연하는 장면이 나오자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에? 이게 누구지?" 그녀가 태어난 연구실에도 스크린이나 카메라가 없는 건 절대 아니었지 만 -오히려 이 TV하고는 비교조차 안 되는 고급 기기들이지만- 락 가수 가 열창하는 장면 따위를 본 적이 없는 그녀는 신기해서 쪼그리고 앉아 계속 TV만을 들여다보았다. "와, 여기는 신기한 게 정말 많구나." …따지고 보면 유젤이 타고 온 맥이야말로 신기하고 엄청난 물건일 테지 만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이건 또 뭐지?" 한참 동안 TV에 매달려 있던 유젤은 이윽고 서랍 쪽으로 눈을 돌렸다. "여기엔 뭐가 들어 있지?" 보통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행동 -예를 들어 서랍을 뒤진다 든지, TV 채널을 계속해서 몇 번이고 돌린다든지-을 하며 유젤은 하루를 보냈다. "다녀오겠습니다." 진우는 아침을 먹는둥 마는둥 대충 몇 수저 뜨고 집을 나섰다. 가방을 멘 준우가 황급히 뛰어오며 그를 붙잡았다. "어이, 진우야! 형이랑 같이 가자!" 준우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에 진우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뭐야? 왜 갑자기 같이 가자고 하는 거지?' 하지만 속마음과는 다르게 진우는 겉으로는 미소지었다. "어, 그러지 뭐." "왜 너 혼자만 빨리 나서는 거야? 내가 나설 때쯤에 같이 가도 지각할 위험은 거의 없는데. 입학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설마 학교에 보고 싶은 여자친구라도 있는 거야?" 순간 진우는 지금쯤 호텔에서 뒹굴고 있을 유젤이 생각나 마음이 뜨끔했 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입학한지 얼마나 됐다고…" "아냐 아냐. 요즘 너의 행동을 보면 수상해. 지나치게 예민해지지를 않 나, 뭔가 숨기는 기색이 느껴지질 않나. 뭔가 우리들에게 숨기는 비밀이 생긴 게 분명해." 요즘이라고 해봐야 겨우 이틀 정도밖에 안 되었건만. "내, 내가 숨길 만한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정말 없어?" 진우는 '이 인간 혹시 독심술이라도 할 줄 아는 건가?'라고 의심하며 고 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형들에게 숨길 만한 대단한 비밀이 도대체 어 디에 있다고…" "그 왜, 너의 사랑하는 여인은 그럼 뭐지?" 놀리듯 빤히 쳐다보며 묻는 준우의 말투에 진우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 얗게 질려 버렸다. '어떻게 알았지?' '사랑하는'이라는 수식어는 일단 뺀다 쳐도, 어떻게 준우가 유젤에 대해 알고 있는 건지 당황한 진우는 대답할 말을 모색했다. 하지만 걱정은 기 우였다. "김혜인이라는 여자애 말이야. 진성중의 퀸카라는 여자애가 입학했다고 벌써부터 학교에는 소문이 자자하다구. 그나저나 정말 의외다. 그런 도 도한 퀸카가 진우 너를 좋다고 쫓아다닐 줄이야. 원래 그런 애들은 자존 심이 좀 세지 않냐?" "아… 혜인이 말하는 거였어?" 준우가 유젤에 대해 알고 있을 리가 없지. 어쨌든 진우는 쓸데없는 걱정 을 한 자신을 탓하며 일단 안심했다. "그게 무슨 뜻? 설마 너 김혜인 말고 다른 여자가 있다는 뜻?" 두 번 넘어가지는 않지. 진우는 씩 웃으며 여유 있게 받아넘겼다. "형은 잘 모르겠지만, 난 여자라는 동물이 싫어. 정말 싫어." 그리고 속으로 덧붙였다. '물론 그걸 믿으면 바보.' 그리고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형도 내가 자라온 환경 알잖아." "아…" 그제야 준우는 진우가 어렸을 때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상처받은 적이 있음을 상기하고는 미안해했다. 물론 진우는 단지 그것 때문에 여자를 싫어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준우는 아마도 그것 때문이라 생각했다. "내가 괜한 말을 했구나. 어쨌든 오늘 하루 잘 지내라. 나 먼저 교실에 들어갈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학교 정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진우는 씁쓸한 미소로 준우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교실로 향했다. '준우 형. 부디 정우 형처럼 나한테 관심 따위는 쏟지 말아줬으면 좋겠 네. 난 형이 진심으로 나에게 호의를 보이든 아니든 간에 형이 밉기만 하니까.' 진우는 정우 삼형제가 자신을 싫어하고 또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어쩌면 그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서적 안정을 고려해볼 때 최악에 가까운 가정 환경에서 자라온 진우는 정우 삼형제의 진심을 이해하고 오해를 무너뜨릴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있지 않았다. 참고로 정우는 사촌 삼형제 중 그 이름도 찬란한 서울대학교 의대 2학년 에 재학 중인 맏이다. 고개를 숙인 채 복도 바닥을 보고 걷던 현우는 문앞에서 누군가와 부딪 치고는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미, 미안… 아…" 반사적으로 사과하던 진우는 부딪친 사람이 혜인이라는 걸 깨닫고 어색 한 미소를 띠었다. "여기는 웬일이야?" "잠깐만 보자. 너한테 꼭 할 얘기가 있어." 진우는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난 너랑 하고 싶은 이야기 따위 없어. 내가 어제 말하지 않았냐? 더 이 상 학교에서 날 아는 체 하지 말라고." "그러지 말고 제발…" 혜인의 표정은 조금 절박해 보였지만 진우는 그녀가 지금 자신을 놀리기 위해 연기를 하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쇼하지 마. 나한테는 안 통하니까. 난 똑같은 것에 두 번 다시 속지 않 아. 난 멍청이가 아니거든." 비록 열등감 덩어리긴 하지만 쓸데없이 어리석지는 않아. 진우는 그 말 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걸 필사적으로 삼켰다. "진우야. 넌 지금 날 오해하고 있어. 나, 난 네가 생각한 그런 천박한 여자애가 아니야. 아니라구… 정말이야. 믿어 줘 제발…" 어느새 두 사람의 분위기를 눈치챈 반 아이들의 슬금슬금 나와서 구경하 기 시작했다. 입학한지 고작 이틀만에 퀸카라고 소문난 혜인이 남들이 보기에는 별 볼일 없는 진우에게 매달리다시피 하는 장면은 다시없는 구 경거리였다. 진우는 곤란함을 느꼈다. '이런 건 정말 싫은데.' 혜인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미워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용서할 수 없 고, 또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이렇게 많은 아이들 앞에서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걸 보 는 것도 마음이 불편한 일이다. 할 수 없이 진우는 혜인의 손을 잡아끌 었다. "일단 옥상으로 가자. 여기서 이야기 하기는 좀 그러니까." "고, 고마워…" 둘이 옥상을 향해 올라가자 진우의 친구인 준혁이 신이 나서 외쳤다. "야! 우리도 따라가서 구경하자!" "그래!" 기세좋게 앞장서려던 준혁은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잡는 걸 느 꼈다. 돌아보니 세현이었다. "차세현. 왜 잡냐?" 세현은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남들의 연애 문제에 대해서 끼어 들어 구경하는 건 신사가 할 짓이 못 되지. 그냥 저 둘이 알아서 잘 해결하게 내버려 둬. 네가 구경하러 가봤 자 뭘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다고 이런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순 없잖아? 넌 보기 싫으면 보지 마. 우리끼리 보러 갈 테니까." "이런 이런. 이래서 어린애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어깨를 으쓱한 세현은 진우를 따라갈지 말지 망설이며 자신의 눈치를 살 피는 주변의 아이들을 둘러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랑 평생 원수가 되고 싶은 녀석들은 진우와 김혜인 을 훔쳐보러 따라가도 좋아." 세현은 그 말만을 하고 다시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세현과 준혁을 힐끔 대며 망설이던 아이들은 잠시 웅성거리다가 결국 하나 둘씩 교실로 들어 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준혁은 아이들을 뜯어말렸다. "야야! 너희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구경하러 안 갈 거야?" "하지만 그랬다가는 세현이랑 원수가 되는 걸?" "세현이 녀석이랑만큼은 원수 하기 싫어." "정 보고 싶으면 배준혁 너 혼자 가서 봐." 준혁은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렸다. "이, 이 치사한 것들… 고작 차세현이 무서워서 내빼는 거냐?" 그 때 교실에서 세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준혁. 그 말은 나랑 원수가 되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냐?" 준혁은 당황해서 외쳤다.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안 따라갈게! 안 따라갈 거라구!" 후다닥 교실로 들어와 자기 자리에 앉는 준혁을 흘끔 본 세현은 지금쯤 혜인이랑 옥상에서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그의 절친한 친구 진우 를 떠올리며 슬며시 미소지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나한테 돈 빌려간 게 김혜인이랑 관계가 있는 게 틀림없겠지? 잘 해봐라." 글쎄, 이 인간도 상당한 오해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옥상으로 올라온 혜인과 진우는 한참 동안 침묵으로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먼저 입을 연 건 혜인이었다. "일단은 고마워. 내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다른 녀석들이 쳐다보는 게 기분이 나빠서였을 뿐이니까." 혜인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진우 넌 옛날부터 그랬어. 항상 툴툴대는 것 같으면서도 남을 배려하길 좋아했지. 내가 다른 애들 구경거리가 되는 게 마음이 불편해서 그런 거 지?" 사실은 그랬다. 하지만 진우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널 위해서 그럴 리가 없잖아? 착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걸? 어쨌 든 할 이야기나 빨리 해. 너한테 내줄 시간은 없으니까." 혜인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고개를 떨구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고개를 든 그녀는 결연한 눈빛으로 진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나한테 헤어지자고 한 거야? 역시 그것 때문에?" "뻔한 질문을 또 하는 구나. 그럼 그거 말고 다른 게 뭐가 더 있니?" "하, 하지만 그 전에 이해해줄 수 있다고 했잖아!" 진우는 코웃음을 쳤다. "역시 그 때 한 말은 날 떠보기 위해서 한 거였구나? 그런데 이걸 어쩌 냐? 내가 그 때 이해해줄 수 있다고 한 말은 정신적인 순결이나 육체적 순결이나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한 말이었다구. 너처럼 잘 노는 여자애한 테는 적용되지 않는 문제야." "나, 난 너 말고 다른 남자 좋아한 적 한 번도 없단 말이야! 진짠데, 왜 안 믿어주는 거야?" "그럼 왜 넌 처녀가 아닌 건데?" 노골적인 추궁에 잠시 할 말을 잃은 혜인은 울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육체적 순결보다 정신적 순결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 건 너였잖아! 난 아직도 그 때 네가 한 말 똑똑히 기억해!" "바보야. 넌 육체적 순결하고 정신적 순결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냐?"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끼며 진우는 혜인에게 자신의 순결관에 대해 설명 해주기 위해 말을 정리했다. "네가 어떤 생각을 하든 간에 나랑 사귀기 전의 남자 친구랑 한 번 잤으 면 그걸로 육체적 정신적 순결은 다 그 남자한테 준 거라구. 멋모르는 남자들이나 정신적 순결이 중요하니 육체적 순결은 신경 쓰지 말자라고 말하지만 몸을 허락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정신적 순결도 준 거나 마찬 가지야. 어떻게 몸과 정신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있냐? 그게 말 이나 돼?" "하, 하지만 난…" "하지만 난 뭐? 너 그 남자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같이 잔 거라고?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어쨌든 네가 원해서 같이 잔 거 아니야?" 진우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의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다. "다시 한 번 내 결혼철학에 대해서 들려줄까? 난 혼전순결은 가능하면 지키자 주의지만 정말 사랑하는 사이라면 혼전 성관계도 용납된다 생각 해. 그렇지만 자신의 행위에 대해 서로 책임을 짊어지지 않는다면 절대 안 돼. 보수적일지 모르지만 난 혼전 성관계를 가졌으면 반드시 결혼해 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그 땐 그런 말 한 적 없었잖아! 순결이 그렇게나 중요해! 내 마음보다 더 중요하냐고! 그럼 넌 나 말고 기왕이면 몸은 처년데 다른 남자를 평 생 가슴에 담아둔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거야?" 결혼이라는 말은 두 사람 나이에 한참이나 이른 게 아닌가. 어쨌든 대화 는 계속되었다. "미쳤냐? 내가 왜 그런 여자랑 결혼해? 난 몸도 마음도 내가 가질 수 있 는 여자와 결혼할 거고, 또 그 여자에게 내 몸과 마음을 줄 거야. 그게 내 결혼 철학이야. 그러니 넌 나한테서 제외 대상이지. 대답이 됐지? 그 럼 난 간다." 진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옥상에서 내려가 버렸다. 혜인은 하염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점심 시간이 되자 세현은 도시락을 꺼내며 진우에게 물었다. "아까 옥상에서 김혜인이랑 무슨 이야기했어?" "별 이야기 아냐. 그냥 다시 시작하자고 한 걸 내가 딱 거절한 거지." 중학교 때 혜인과 진우가 어떤 사이였는지 잘 알고 있는 세현은 이해한 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김혜인이 널 정말 좋아하긴 좋아하나 보다. 그렇게 잘난 애가 이 렇게까지 매달리는 걸 보면…" "좋아하기는 개뿔이. 분명 날 갖고 놀려는 게 틀림없어. 몇 번 같이 놀 고 난 뒤 그러다가 헤어지자고 할 걸? 뻔해. 안 봐도 훤히 보인다. 걔는 그런 여자애라구." "글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너보다 혜인이에 대해 더 잘 안다구." 세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수저를 뜨다가 무릎을 탁 쳤다. "참! 너한테 돈 주기로 했었지." 세현은 가방을 뒤져 두툼한 봉투를 꺼냈다. "자, 여기 백 만원. 어디다 쓰는 건진 모르겠지만 잘 써라." "이거 미안한데…" 진우는 미안해하며 봉투를 받아들었다. "어쨌든 꼭 갚을게." "아냐 됐어, 안 갚아도 된다니까. 나 그 정도 능력은 되는 놈이잖아?" 되고도 충분히 남지. 세현에게 있어 백 만원은 용돈 수준도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진우는 미안했다. 아마 나중에 돈을 돌려줘도 세현은 한사코 받지 않으려 할 것이다. "넌 정말 멋진 녀석이야. 정말 고맙다." "고마우면 나중에 술이나 한 잔 사라." "그래. 꼭 살게. 어디 한 번 코가 비틀어지도록 마셔보자." 참고로 진우의 주량은 맥주 1병도 안 되고 세현은 소주 한 잔에 인사불 성이 되어 버리지만 남자들만의 세계에선 이런 허례의식도 가끔은 필요 한 법이다. "근데 넌 정말 왜 김혜인을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거야? 처녀가 아니긴 해도 그만한 여자애 찾기 힘들잖아. 웬만하면 그냥 받아주지 그래?" "말했잖아. 혜인이는 날 갖고 놀려는 것 뿐이라구." "내가 보기엔 그건 정말 아닌 것 같은데. 너 혹시 김혜인보다 더 좋은 다른 여자가 있는 거 아냐? 그래서 그러는 거야?" 진우는 순간 뜨끔했지만 다행히 속마음을 들키진 않았다. "어, 없어.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흐응, 그래?" 세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수저를 들었다. 저 녀석이 저렇 게 웃을 때마다 항상 속마음을 들키는 것 같다고 진우는 속으로 궁시렁 거리며 다시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 딩동 딩동 벨소리가 들리자 서랍을 뒤적거리고 있던 유젤은 어제 진우가 가르쳐 준 대로 인터폰을 들었다. 화면에 진우의 모습이 보이자 그녀는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안녕. 어젯밤엔 잘 잤니?" "응." 진우는 여기까지 오는 데 어제 그 호텔 직원을 포함하여 꽤나 많은 사람 들이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보던 걸 상기하며 재빨리 문을 닫았다. '앞으론 모자라도 쓰고 다녀야겠군. 이거 원 쪽팔려서 도저히 드나들 수 가 있나.' 아무리 법적으로 진우의 나이에도 보호자 없이 여자와 호텔에 투숙할 수 있게 개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의 의식이라는 건 그렇게 하루 아침 에 바뀌는 게 아니다. "하루종일 혼자 심심하지는 않았어?" 깍진 낀 양손으로 무릎을 모은 채 쪼그리고 앉아 있던 유젤은 가만히 고 개를 가로 저었다. "그냥 생각하면서 지냈어. 별로 심심하진 않았어."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던 진우는 유젤의 안색이 조금 안 좋음을 느 끼고 걱정스런 표정이 되었다. "근데 너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밥은 제대로 먹었어?" "밥이 뭐야?" …이쯤 되면 정말 할 말이 없다. "너, 너 설마 어제 하루 종일 굶은 건 아니겠지?" "굶다니? 굶는다는 게 뭔데?" 오, 마이 갓! 도대체 유젤의 보호자는 이 녀석에게 그 동안 뭘 가르쳤단 말인가! 한 입 베어 물은 따끈따끈한 붕어빵에서 살아 있는 붕어가 펄떡 거리며 짠! 하고 나타난다 해도 이보다 더 황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냐고." "아하. 진작 그렇게 말하지." 다행스럽게도 유젤은 '먹는다'라는 게 무슨 뜻인지는 아는가 보다. 진우 는 '혹시 화장실 가는 법까지 가르쳐줘야 하는 건 아니겠지?'라고 속으 로 고심하기 시작했다. "안 먹었어." "하루 종일?" "응." "정말?" "응." 진우는 어이가 없었다. "배 안 고파?" "배고프다는 게 뭔데?" 삐질삐질. 진우는 이제 진심으로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 이런 여자애를 정말 내가 보살펴줄 수 있을까? 고아원에라도 보내 야 되는 거 아니야 정말?' 만난지 이제 겨우 이틀째 되었지만 진우는 유젤을 보살펴 주기로 어느새 자연스럽게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겉모습은 멀쩡한 십대인데 배고프 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여자애를 감당할 자신은 솔직히 없었다. "안 되겠다. 일단 나가자. 호텔 음식은 비싸서 못 사주겠지만 피자 정도 라면 사줄 수 있으니까." "먹으러 나가자구?" "그래. 뭐라도 먹어야 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렇게 안색이 안 좋지." 손가락을 물며 고개를 갸웃하던 유젤은 이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난 안 먹어도 괜찮아." "그런 게 어딨어? 이 세상에 안 먹어서 괜찮은 사람이 어디 있냐?" "난 몸 안에 ST기관이라는 게 있어 무한으로 생명 에너지를 생산해 낼 수 있대. 그래서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된대." "ST 기관?"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유젤이 지금 농담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살짝 맛이 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진우는 어제 유젤이 타고 나타난 전투병기 맥을 본 뒤라 그녀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해버릴 수 없었다. 게 다가 저 눈동자를 보라. 저 순진한 눈동자가 어딜 봐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란 말인가? 엉거주춤 일어나려던 진우는 결국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유젤. 일단 앉아. 오늘은 시간적인 여유도 좀 있고 하니 우리 천천히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한 번 해보자. 네가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떤 환경에 서 태어났는지 한 번 들어보자." 태어난지 일주일 밖에 안 됐는데 저런 모습인 걸 보면 혹시 어떤 모 국 가의 생화학 병기를 목적으로 운영되는 연구소에서 비밀리에 만들어진 복제인간이 급속 성장 장치 같은 걸 통해 저렇게 된 건가? 진우는 속으 로 별의별 상상을 다 했다. "엥? 왜, 왜 이래?" 앉으라고 했더니 유젤이 자신의 옆에 딱 붙어 앉아 몸을 기대오자 진우 는 얼굴이 귀밑까지 새빨개졌다. 유젤은 진우가 반사적으로 자신을 살짝 밀어내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앉으라고 했잖아?" "그, 그건 내 맞은편에 앉으라는 소리지, 내 옆에 붙으라는 소리가 아니 었다구." "껴안으면 안 돼?" 이질적인 매력을 지닌 아리따운 미소녀가 촉촉이 젖은 눈빛으로 그렇게 물어보면 도대체 그 어떤 남자가 '절대 안 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 우 역시 평범한 남자였다. "아, 안 될 건 없지만…" 유젤은 그제야 안심한 듯 가만히 눈을 감으며 진우의 허리를 껴안았다. "혼자 있으면 무서워. 나 혼자 있으면 무서워. 하지만 사람을 껴안고 있 으면 안심이 돼. 따뜻해서 좋아. 마음이 포근해져." 유젤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진우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코끝을 스치 는 알싸한 향기에 넋이 빠질 대로 홀려 있던 진우는 뭔가 아련한 쓸쓸함 이 느껴지는 그녀의 말투에 정신을 차렸다. "너… 혹시…" "그 사람은 내가 무섭다고 할 때마다 항상 날 꼭 껴안아 줬어. 가끔씩 그 사람이 조금 무섭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다는 덜 무서워." 유젤이 말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진우는 조금 질투가 일어나는 걸 느꼈다. "네가 말하는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군데? 네 보호자야? 설마, 네 아빠나 엄마?" "아빠? 엄마? 그건 또 뭔데?" 이 패턴. 이제 슬슬 질려간다. "그러니까… 네가 이 세상에 있게 해준 사람이냐구." 고개를 갸웃하던 유젤은 잠시 동안 그 의미를 생각해보고는 가만히 끄덕 였다. "응. 그 사람이 날 이 세상에 있게 해줬어. 난 그 사람 덕분에 태어났거 든." '뭐야? 그럼 엄마잖아? 그런데 왜 그 엄마라는 사람은 유젤한테 아무것 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거지? 그리고 유젤은 왜 엄마한테서 도망쳐 온 거야?' "아참. 그 사람도 너처럼 가슴이 밋밋했어. 그럼 네가 어제 말한 대로 남자 맞지? 나도 이제 남자 여자 구분할 수 있다?" '엥? 그럼 아빠인가? 에… 그렇다면 왜 엄마 이야기는 하지 않는 거지? 설마 태어나자마자 엄마가 죽었다는 건 아니겠지? 그나저나 태어난지 일 주일 밖에 안 됐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빨리 성장한 걸까?' "그 사람은 날 태어나게 하느라 무척이나 고생했대." '뭐야? 그럼 여자야?' "내가 캡슐 속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그 사람은 날 보고 웃어줬어. 그 리고 곧바로 울었어." "뭐? 캡슐?" 겨우 단서가 될 만한 단어를 들은 진우는 화들짝 놀랐다. 그는 자신의 품을 파고드는 유젤의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유젤. 네가 태어났을 때와 태어난 뒤의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해봐." "으응…" 잠시 기억을 더듬던 유젤은 천천히 대답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진우는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처음으로 눈을 떠보니까 이상한 물 속에 떠있었어. 그리고 그 사 람이 제일 처음으로 나한테 보였구. 한 몇 시간 정도 물 속에 떠있다가 그 사람이 날 밖으로 꺼내줬어. 내가 들어있던 물건이 캡슐이라고 그 사 람이 말해줬어." 진우는 진지하게 유젤의 말을 경청했다. "그 사람은 얼굴이 쪼글쪼글한 사람들에게 날 데리고 갔어." "얼굴이 쪼글쪼글한 사람?" 혹시 그들은 외계인이 아닐까? 진우는 재빨리 그들의 모습을 한 번 상상 해보았다. '혹시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기 위해서? 화성인의 지구 습격 같은 게 정말 현실로 일어나는 건가?' 이건 차라리 마주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시나리오라기보다는 끔찍하리만 치 유치찬란한 시나리오가 아닌가? 영화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외계인의 습격 따위는 차라리 질색이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국가간의 암투가 낫지. 으휴…' 다행히 진우가 상상하던 최악의 유치 찬란 시나리오는 아닌 모양이었다. "아참. 여기에도 얼굴이 쪼글쪼글한 사람이 많더라. 그리고 밖에도 좀 많구. 머리카락은 새하얗구…" "그, 그건 노인들이잖아." 진우는 허탈했다. 노인을 가리켜 '쪼글쪼글한 사람'이라 표현한 유젤도 그렇지만 외계인이 지구를 습격하기 위해 모의를 꾸미고 있느니 어쩌니 하는 식으로 상상한 자신도 좀 오버했다 싶었다. "노인? 노인이 뭐야?" "음… 그게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를 먹는데, 나이를 먹으면 그 렇게 되는 거야." 유젤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럼 너도 나중에는 그렇게 쪼글쪼글해지는 거야?" "당연하지." "나도?" "글쎄다, 그게…" 평범한 여자애 같았으면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말해주련만, 태어난지 일주일 밖에 안 됐는데 버젓이 십대 후반의 모습을 갖추고 있고, ST 기 관인지 뭔지 하는 게 몸 속에 있어서 무한으로 생명에너지를 생산해낸다 는 여자애의 육체에 대해서 그가 알고 있는 게 뭐냐? 어쩔 수 없이 그는 대답을 회피했다. "잘 모르겠어. 어쨌든 이야기나 계속해봐." 유젤은 힘없는 표정으로 기억을 다시 더듬었다. "그 쪼글쪼글한 사람들은 날 보고 웃었어. 근데 그 웃음이 왠지 무서웠 어. 그 사람이 웃는 것과는 달랐어. 그 사람은 날 유젤이라고 불렀지만 그 쪼글쪼글한 사람들은 날 '엔젤'이라고 불렀어. 그리고 쪼글쪼글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도 날 보고 엔젤이라고 불렀어." "엔젤… 천사…" 무슨 비밀스런 코드네임과도 같은 이름에 진우는 조금 불안함을 느꼈다. 혹시 유젤은 생명에 관한 어떤 연구를 하는 도중에 태어난 실험체 같은 게 아닐까? 그래서 불안함을 느낀 나머지 결국 도망쳐 나왔다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면 왜 유젤이 말하는 그 사람이 맥을 주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실험체 따위에게 그런 전투병기를 줄 이유는 없지 않은가? "네가 말하는 그 사람, 이름이 뭐야? 혹시 기억해?" "몰라. 그 사람은 단 한 번도 나한테 그런 거 말해준 적이 없었어." "흐음… 도저히 짚이는 곳이 없는데…" 그럼 짚이는 곳이 있는 게 정상인가? 남들보다 정서적으로 불안하게 살 아왔다는 것 빼고는 무슨 이상한 특수 기관과의 인연 따위는 일절 없는 진우로서는 유젤이 해주는 말만 듣고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어디 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지금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건지 예측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토끼가 번지점 프를 하는 게 더 쉬웠다. "아, 난 이만 가봐야겠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어느덧 시계는 저녁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진우는 슬슬 돌아가 봐야겠 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유젤이 그의 옷자락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가지 마." 보통 이런 상황에서 여자가 이런 말을 한다면 백이면 백 전부 다 만리장 성을 쌓자는 의도로 알아듣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상대는 태어난지 일주 일밖에 안 됐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갓난아기와도 같은 여자애였다. "저기 미안한데 난 내일 학교에 가봐야 하거든. 아, 학교라는 건 나처럼 아직 어른이 안 된 애들이 의무적으로 주말 빼고 매일 가서 공부하는 곳 이라서 안 가면 내가 곤란해져. 그러니까…" 진우는 나름대로의 사정을 설명하며 유젤을 달래려고 했지만 그녀는 옷 자락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진우의 가슴에 아기처럼 얼굴을 묻었다. "가지 마. 혼자 있기 싫어. 혼자 있으면 무서워." "…TV 보면서 잘 놀았다며?" "그래도 가지 마. 무서워. 혼자 있는 건 너무 무서워." 진우는, 이렇게까지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데 냉정하게 뿌리친다면 그건 남자도 아니라는 본능의 속삭임과, 아무리 그래도 결혼도 안한 다 큰 남 녀가 호텔에서 같이 밤을 보낸다는 건 하늘이 분노할 일이라고 꾸짖는 이성의 압박 사이에서 갈등해야만 했다. "…알았어. 안 갈게." 결국 승리한 건 본능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집에 가고 싶지 않다는 게 진우의 솔직한 마음이기도 했다. '뭐 하루 외박한다고 설마 죽이기야 햐겠어? 그래도 조금 있다가 전화나 한 통 해주자. 음… 세현이네 집에서 잔다고 하면 순순히 믿을 거야.' 그 때 유젤이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지더니 뭔가 조그만 물체를 꺼내 진 우에게 보여주면서 환하게 웃었다. "이거 봐. 이거 디게 재밌어. 손가락을 넣으면 쭉쭉 늘어난다?" "어, 그래? 고무로 만들어졌나 보지 뭐… 어라? 어라? 어라라라?" 유젤이 호텔 서랍에서 뒤져서 찾아냈을 거라 짐작되는 물건을 별 생각 없이 돌아보던 진우는 그 물체의 정체가 무엇이며 어떤 용도에 쓰이는지 그리고 지금 자신들이 놓인 상황에서 차마 마주보기가 민망한 물체라는 걸 깨닫고는 그대로 하얗게 굳어버렸다. "어젯밤에 잠이 안 와서 이거 갖고 놀았어. 이거 디게 재밌어. 진우 너 도 한 번 해봐." …유젤은 그렇게 말하며 진우에게 '콘돔'을 '써 보라고' 내미는 것이다. 진우는 차라리 미쳐 버렸으면 싶었다. 남자라면 한 번쯤은 자신의 아름다운 첫 경험이 어떤 여자와 이루어질 지, 또 어떻게 펼쳐지며 자신이 어떻게 리드할지 상상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건 비단 남자에게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지, 진정해라 유진우! 유젤은 너한테 그렇고 그런 의도로 여기서 자고 가라고 말한 게 아니잖아! 정신적으로 갓난아기나 다름없는 여자애한테 도대체 뭘 기대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진우가 스스로를 꾸짖고 있을 때 샤워를 마친 유젤이 흰 가운을 걸친 채 소파로 다가왔다. 살짝 젖은 머리를 매만지던 그녀는 자연스럽 게 진우의 가슴에 안겨왔다. 느닷없는 바디 어택에 어쩔 줄 모르던 진우 는 얼굴을 잔뜩 붉혔다. '이, 이건 완전히 신혼초야잖아!' 처음에 유젤이 몸을 씻고 자야겠다고 했을 때 진우는 이건 완전히 만리 장성을 쌓기 전의 작업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해서 기겁하며 말렸다. 하지 만 '그 사람이 자기 전에는 꼭 씻어야 한다고 말했어.'라고 유젤이 또박 또박 반문하는 데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자기 전에 깨끗이 씻고 자겠다 는 걸 혼자 지레 짐작으로 말리는 게 얼마나 우스운 꼴인가? 유젤이 점점 품으로 파고들자 진우는 달콤한 향기에 그만 정신을 놓아 버릴 것만 같았다. "저, 저기 유젤…?" "응?" "보, 보통 이런 상황에서 네가 이런 짓을 하면 난 나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게 돼. 그러니까…" 진우가 조심스럽게 밀쳐내려 하자 유젤은 신경질적으로 그의 품을 파고 들었다. "싫어. 난 껴안는 게 좋아. 혼자 있기 싫어." 마치 어머니의 품을 찾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투정이 그저 귀엽게만 느껴 졌다. 하지만 이대로 잤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미사일이 떨어진 도 시의 미래처럼 뻔하다. "흠, 흠. 저기 유젤, 네가 아직 태어난지 일주일 밖에 안 된다고 해서 남녀 관계에 대해 잘 모르지만 보통 이런 건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 거 라구. 난 여기서 소파서 잘 테니까 너는 침대 가서…" "사랑이 뭔데?" 이제 이 패턴도 슬슬 질려가는 참이지만, 진우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뭐 사랑에 대해선 온갖 말 같지도 않은 설명들이 다 있지만,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좋아하는 걸 말하는 거야." "아, 그렇구나." 유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진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난 진우가 좋아. 그럼 된 거지?" "그, 그러니까 그런 좋다라는 의미가 아니라니까!" 좋아한다고 해서 그게 다 사랑은 아니라니까! 그럼 음식도, 게임도, 스 포츠도, 돈도, 명예도 전부 다 사람하고 동급이 될 수 있게? 진우는 펄 쩍 뛸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떨리는 유젤의 목소리에 진우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진 정되었다. "혼자 두지 말아 줘. 부탁이야." 마치 호랑이에게 쫓기다가 너구리의 굴에 뛰어든 토끼가 제발 쫓아내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겁에 질린 유젤의 목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신비스런 힘을 갖고 있었다. 유젤에게 어떤 과거가 있 는지 아직 정확히는 모르지 지금 그녀를 떼어내면 자칫 그녀가 상처 입 을지도 모른다. 진우는 주춤주춤 손을 들어 바르르 떨리는 그녀의 어깨 를 감싸안았다. "미안해. 내 입장 곤란한 것만 생각해서…" 이런 분위기에서는 좀더 멋지고 낯간지러운 말을 할 수도 있으련만 진우 는 일부러 그렇게 말끝을 흐려버렸다. 결국 침대에서 같이 자기로 합의를 본 두 사람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 다. 하지만 진우는 불을 끄고 한참이 지나도록 뒤척대기만 할 뿐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누가 봐도 반하지 않을 수 없는 아리따운 미소녀와 같은 침대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제대로 잠을 청할 수 있다면 그건 동정이 아니리라. "진우야… 벌써 자?" 자는 줄 알았던 그녀가 어둠 속에서 입을 열었다. "응? 아니, 아직 안 자는데?"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여전히 힘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어둠 속을 울렸 다. "난 잠을 자기 전이면 항상 무서워. 이대로 자버리면 다음 날 아침에 다 시 깨어나는 일이 영원히 없을 것만 같아." "…자고 있는 그대로 죽을 것 같아서 불안하다는 거야? 아, 근데 너 죽 음이 뭔지는 아니?" 진우에게 처음으로 자신이 뭔가를 안다는 걸 말하는 게 기쁜 모양인지 유젤은 비로소 조금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말하는 내용은 완전히 딴판 이었다. "나 죽는다는 게 뭔지 알아. 그 사람은 깨어나지 못하는 게 죽는 거라고 했어. 그리고 죽음은 누구나 두려워하는 거라고 했어. 그러니 나보고 절 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어.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가면 사람 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찾아오는 게 죽음이니까… 그렇지만 난 깨어나 지 못하는 게 정말 무서워." 진우는 분명 유젤이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정말 죽 음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도대체 유젤은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 태어난지 일주일 정도 밖에 되 지 않았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여자애가 창창한 앞날은 생각도 않은 채 그저 죽음이 두렵다고 하는 건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 도망쳤다고 했었지? 역시 그렇다면 무슨 비밀 연구소에서 인체 실험 같은 걸로 태어난 복제인간 뭐 그런 걸까?' 물론 비약적인 상상일 수 있겠으나 전투병기 맥과 유젤이 한 말을 종합 해볼 때 그렇게까지 억지스런 상상은 아니다. "저기 유젤." "응?" "넌 그 사람 좋아했니?" "…아니. 무서웠어." 유젤은 무섭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어둠 속에 울려 퍼진 목소리에는 어딘지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 같은 느낌이 묻어났다. 자신의 감정까 지 속인다는 것. 16년을 살아온 진우조차 제대로 터득하지 못한 그것을 갓 태어난 아기나 다름없는 그녀는 이미 할 줄 안단 말인가. "그 사람… 싫어해?" "…응." 정말 싫어하는 거라면 잠시 망설인 뒤 대답한 건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어쩌면 유젤은 단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환경에 대한 공포를 무의식 적으로 그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진우는 괜히 질투가 났다. "너 그 사람이 싫다면서 왜 그 사람이 지어준 이름을 쓰는 거야?" "이름?" "그래. 그 사람이 너보고 유젤이라고 이름을 지어줬다며? 그 사람이 싫 다면 굳이 그 사람이 지어준 이름을 쓸 필요가 없잖아?" 어둠 속에 누워있던 유젤은 진우의 옆에 바짝 붙으며 그의 가슴을 끌어 안았다. 마치 아기가 어머니의 품을 찾듯이. "싫어하는 사람이 지어준 이름을 쓰는 건 옳지 못한 거야?" "그럼." 잠시 갸웃하던 유젤은 다시 물었다. "그럼 좋아하는 사람이 지어준 이름을 써야 하는 거야?" "그, 그런가?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아마 그럴 지도…" 진우는 정신연령이 아기나 다름없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게 조금 양 심에 걸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착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그녀의 매 혹적인 체향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으윽!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그럼 진우 네가 새로 내 이름을 지어 줘." "으, 응?" 순간 진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진우 네가 내 이름을 새로 지어 줘. 난 진우 네가 좋으니까, 앞으로는 네가 지어준 이름을 쓸게." 자신을 좋아해 주는 건 기쁘지만 그게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아기가 사람 을 좋아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진우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머리를 긁 적였다. 어쨌든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늘을 날 듯한 기분이라 면 모를까. "이름이라… 내 작명 센스로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줄 수 있을까?" 유젤이라는 이름도 꽤 예쁘고 어감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녀가 좋아할 지도 모르는 사람이 지어준 이름을 그대로 쓰게 하는 건 뭐랄까. 조금 질투가 난다고나 할까? 어쨌든 진우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자신이 새로이 그녀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주민등록증 같은 문제는 뭐… 에라 모르겠다. 나중에 어떻게 해서든 되 겠지, 뭐." 어떤 이름을 지어주는 게 좋을까 하고 어둠 속에서 한참 동안 고민하던 진우는 이윽고 어감도 뜻도 괜찮은 이름을 하나 생각해냈다. "예안… 서예안 어때?" "서예안?" "응. 깊고 밝을 예 자에다가 눈 안 자 써서 예안. 깊고 밝은 눈이라는 뜻이야." 어둠 속에서도 밝고 아름다운 녹색으로 빛나는 유젤의 눈동자를 슬며시 들여다보며 진우는 그렇게 속삭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별빛에 의지해 진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유젤은 이윽고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할게. 앞으로 내 이름은 서예안이야." 이로써 그녀는 유젤 대신 서예안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진 우는 이날 자신이 그녀에게 지어준 이름을 남은 평생 동안 자신이 갖고 살아가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으으윽…" 한밤중이었다. 갑자기 들려오는 고통스러운 예안의 신음소리에 진우는 잠이 깼다. "으으윽…" 얼굴을 찡그리며 불을 켠 진우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머리를 움켜 쥐며 고통스러워하는 예안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잠이 순식간에 깨 어 버렸다. "예, 예안아? 왜 그래?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머리가… 머리가… 아파… 죽을 것 같아…" "어, 어떡하지?" 당황한 진우는 병원에 연락을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떠올리지 못하고 발 만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랐다. 그저 머리가 깨어지는 고통 속에 숨조 차 제대로 쉬지 못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예안의 어깨를 끌어안아 줄 뿐 이었다. "아파… 아파…"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창백해질 대로 창백해진 예안의 안색에서 그녀 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차라리 내가 그 고 통을 대신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초조해 진우는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 어갔다. "진우야…" 괴로워하는 와중에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진우는 황급히 대답했 다. "응! 나 여기 있어!" "나… 죽는 거야? 죽는 걸까…" "아, 아니야! 네가 죽긴 왜 죽어! 절대 그럴 리 없어!" 질겁한 진우는 예안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 순간 그는 119가 생각났다. "아참 이럴 때가 아니지! 119에 전화를 해야…" 황급히 전화를 하려 했으나 갑자기 예안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전화해야 되니까 이거 좀 놔 줘! 지금 한시가 급할 때라구!" 예안은 영혼이 벌레에게 파먹히는 듯 괴로운 표정으로 간신히 입을 열었 다. "진우야… 나 혼자 두지 마…" "혼자 두려는 게 아니라 119에 전화하려고 그래! 이대로 두면 너 위험하 잖아!" "그래도… 혼자 두지 마… 혼자 있기 싫어…" 이미 정신까지 오락가락하는 듯 했다. 예안의 목소리는 점점 힘이 없어 졌지만 진우의 옷을 붙잡은 손의 힘은 오히려 한층 더 강해졌다. 진우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죽기 직전에 강렬하게 빛나는 섬광처럼 예 안은 놀라운 힘으로 진우를 한사코 놓아주지 않았다. "하아, 하아… 진우야… 이제 괜찮은 것 같아…" 갑자기 예안의 안색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숨은 몰아쉬고 있었지 만 한결 나아진 듯 했다. 진우는 조심스레 그녀의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물었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응. 아까보다는 나아졌어." 그녀는 이제 정말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진우는 의심스러웠다. "정말 괜찮은 거야?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겠어?" "병원이 뭐야?"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터져 나온 질문에 진우는 하마터면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어째선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울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바보야. 지금 이 상황에선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야." 한순간이었지만 정말 예안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안 이 죽는다는 가정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만난지 삼일도 채 되지 않 았지만 이미 예안은 진우의 인생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아버리고 만 것 이다. 아마 그 뒤로 한참 동안이나 잠을 이루지 못한 걸로 기억한다. 예안이 한겨울의 차가운 서리를 밤새도록 얻어맞은 꽃잎처럼 시들어버릴 것 같 았는데 금방 잠이 온다면 그건 말이 안 되리라. "진우야." 어둠 속의 부름에 진우는 가만히 예안의 따뜻하고 가느다란 손을 꽉 쥐 었다. "응? 왜?" "살아있다는 건 어떤 느낌이야?" "살아있다라…" 잠시 동안 골똘히 적당한 대답을 찾던 진우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죽지 않은 거지. 그게 바로 살아 있는 거야." "죽지 않은 거?" "그래. 인류가 이 땅에 출몰한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것에 커다란 의미를 두고 그 진정한 의의를 찾으려 온갖 노력을 다 해왔고, 또 교과서에도 그렇게 거창한 정의가 많이 실려 있긴 하지만 결국 살아 있다는 건 간단한 거야. 죽지 않은 게 바로 살아 있는 거지." "헤… 너무 간단하다." 예안은 진우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나지막하게 웃음소리를 냈다. "나한테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어. 예안이 너도 지금 살아 있으니까 살 아 있다는 게 무언지, 어떤 느낌인지 잘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사 실 그런 철학적인 질문은 살아가는 데는 별로 필요 없어." "아, 그런 거야?"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예안은 '나도 살아 있는 거구나. 살아 있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라고 신기한 장난감을 손에 넣은 아이처 럼 중얼거리며 재미있어 했다. 진우가 나름대로 멋진 대답을 해주었다고 흐뭇해하고 있을 때 예안은 다시 진지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너처럼 오래 살아온 건 어떤 느낌이야?" "오래 살아온 느낌?" "그래. 나처럼 태어난지 얼마 안 된 느낌이 아니라 오래 살아온 느낌 말 이야." "그건…" 진우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가 어렸을 때의 기억이 거의 나지 않아 '태어난지 얼마 안 된 느낌'이 무엇인지 이제 잊어버렸듯이, 예안 은 진우처럼 오랜 세월을 살아온 느낌 -고작해야 16년이지만 예안의 입 장에서는 수십, 수백 배가 훨씬 넘어가는 세월이다- 이 무엇인지 궁금해 했다. 그 둘의 입장에 차이가 있다면, 진우는 어렸을 때의 기억이 없어 영원히 그 느낌을 되살려낼 수 없다는 것이고, 예안은 앞으로 죽지 않고 오래 오래 산다면 그 느낌을 언젠가 맛볼 수 있다는 것일 테지. "…지루하지." "지루해?" "그래. 나도 별로 오래 살아본 건 아니지만 내가 살아온 세월은 확실히 지루하고 길기만 했어. 재미있는 느낌이나 행복, 뭐 그런 따위의 느낌을 맛본 건 거의 드물고, 항상 비참한 기분과 짜증나는 것들만 보면서 살아 왔으니까. 그것만큼 지루한 인생도 없을 거야." "…그래도 난 네가 부러워." 바로 이 때까지 진우는 그녀가 한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몰랐다. "부럽다니? 그까짓 게 뭐가 부럽다는 거야? 넌 오래 오래 살아서 내가 겪은 것들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행복한 것들만 보며 살 수 있을 텐데."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게. 진우는 목구멍을 넘어오려는 그 말을 간신히 다시 꿀꺽 삼켰다. "몰라. 그래도 왠지 진우 네가 부러워." 어쩌면 바로 이때부터 유젤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 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우가 그걸 알게 되는 건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이다. 예안이 한 번 그렇게 발작을 일으키고 난 뒤 며칠이 지났다. 처음에 진 우는 예안이 걱정스러운 나머지 가능하면 떨어지지 않으려 했지만 학교 에 가지 않을 순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예안에게 또다시 발작이 일어 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일러주긴 했지만 학교에 있는 동안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 일단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 뒤로 예안의 발작은 일어나지 않았다. "야! 공 이리 차! 아 빌어먹을! 너 공 어디로 차는 거야! 내가 여기 있 는 거 안 보여!" "마이 볼! 마이 볼!" "키퍼! 막아! 잘 막아! 못 막으면 죽어!" 시끄러운 호각 소리와 공 차이는 소리 사이로 학생들은 땀을 뻘뻘 흘리 며 뛰어다녔다. 체육시간이면 늘 그렇듯 남자애들은 축구를 하고 여자애 들은 피구를 한다. 그나마 남자애들은 체육 활동에 참여를 많이 하려고 하지만 여자애들은 땀흘리는 게 싫다며 피구도 않고 그늘에 앉아 구경하 려고 하는 애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남자 중에서 땀흘리는 게 싫어 그늘에서 구경만 하는 인간들이 꼭 없는 건 아니다. 바로 진우와 세현이 그랬다. "아직 봄인데도 날씨가 제법 덥네. 난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땀이 뻘뻘 흐르는 날에 공 차면서 뛰어다니길 좋아하는 애들 진짜 이해할 수 없다 니까." 진우의 투덜거림에 세현도 맞장구쳤다. "맞아. 땀흘리는 게 얼마나 짜증나고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데." "휴. 내일도 체육 들었지? 내일 날씨도 이렇게 더울 거래?" "그렇다고 하더라. 덕분에 우리만 죽어나는 거지 뭐. 덥다 더워. 정말 덥다." 말하는 것만으로도 더운지 세현은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봄 날씨 같지 않게 무더운 햇볕 속에 서 있는 상상만으로도 온몸이 녹아버릴 것 같은 데 도대체 저 애들은 무슨 힘이 남아돌기에 저렇게 공을 쫓아 열심히 뛰 어다니는 걸까. "청춘 사업은 잘 되어가?" 느닷없는 세현의 질문에 진우는 난데없는 벼락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당황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거 왜 이러셔. 네가 나한테 돈 백 만원만 빌려달라고 한 것도 다~ 청 춘 사업에 투자할 자금이 부족해서 그런 거 아니었어?" "내, 내가 허튼 데다 쓰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청춘 사업이 왜 허튼 데야? 진우 네 연애 철학이라면 적어도 한순간의 즐거움을 위한 가벼운 연애가 아니라 진지 그 자체일 게 뻔한데. 그래, 상대는 누구야? 김혜인을 발로 뻥뻥 차버릴 정도면 엄청 대단한 여자애 겠지?" 사실 세현의 말이 무조건적으로 틀렸다고는 볼 수 없다. 그가 준 백 만 원은 당분간 예안(유젤)이 호텔에 머무는 자금으로 사용될 테니까. 차라 리 여관에 묵게 했으면 좋겠다 싶을 때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건 너무 위 험해서 포기한 터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애, 그것도 길가에 떨어뜨 려 놓으면 남자들이 앞다투어 주워가려고 들 여자애를 어떻게 여관에다 묵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저, 절대 그런 거 아니니까 쓸데없는 오해는 하지 마!" "흐음, 이거 섭섭한데. 그래도 난 네가 정말 친한 친구라 믿고 돈까지 줬는데 정작 너는 여자친구를 나한테 보여주기는커녕 없다고 시치미나 떼고 있고." 사실 세현에게도 예안에 대해 말해주고 싶지만 도대체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어느날 갑자기 왠 '건담'을 타고 바다에서 솟아오른 여자애인데 왠지 모를 신비한 매력투성이라 그대로 반해버렸다, 그래서 지금 현재 작업 중이다, 라고 설명하란 말인가? 제 아무리 세현이 성격 좋은 놈이 라 해도 당장 정신병원에 '여기 환자 하나 있어요. 잡아가세요.'라고 전 화나 한 통 넣을 게 뻔한데. "정말 아니야?" '정말 아니다'라고 대답하려던 진우는 순간 세현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 머뭇거렸다. 자신을 믿고 돈 백만원까지 내준 좋은 녀석인데 속여도 되는 걸까? 하다못해 그냥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자 세한 설명은 해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 라고 둘러댈 순 있지 않은가? 진우는 결국 사실을 조금만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휴. 사실 네 말이 맞아.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겼어. 그런데 정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돈이 좀 필요했거든. 숨겨서 미안해." "미안할 것까지야 없지. 근데 좀 의외다." "뭐가 의외라는 건데?" 세현이 재밌어 죽겠다는 미소를 짓고 있자 진우는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고 있는 건지 심히 불안했다. 차라리 안 듣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투철한 결혼 철학을 가진 네가 벌써부터 제대로 책임지지 못할 사고를 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사실 김혜인이 널 갖고 놀았느니 어쩌니 하며 차버린 건 다 거짓말이지? 책임져야 할 여자가 생겨서 김혜인은 아예 포 기해버린 거 아니야?" "무슨 소리?" 처음에 진우는 세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세현 이 보충설명을 해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고 쳐서 네 여자친구가 임신한 거 맞잖아? 그래서 낙태비용으로 돈이 필요했던 거고. 쯧쯧쯧, 그러기에 할 거면 피임을 제대로 했어야지. 임 마. 생명을 죽이는 게 얼마나 나쁜 짓인지 알아? 그래도 뭐 책임 질 능 력이 안 되니 일단은 지워야겠지. 앞으로 네 여자친구한테 정말 잘 해줘 라. 여자한테 낙태는 평생 상처로 남는다." 세현이 짓고 있던 미소는 바로 이 순간이 닥쳐오리라는 걸 암시하고 있 었단 말인가! 진우는 눈앞이 노래지는 걸 느꼈다. "야! 날 뭘로 보고 그런 헛소리를 하는 거야!" "후후.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 위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네가 바로 그 짝 이네? 어쨌든 남자가 된 걸 축하한다, 유진우." 세현은 뭔가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진우는 펄쩍 뛰었다. "아니란 말이야! 그런 게 아니라구!"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안 그럼 청춘사업 하는데 왠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가냐?" "그, 그건 호텔 비용으로…"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진우는 아차 싶었다. 이건 뭐 세현이 더욱 더 단 단하게 오해할 만한 말을 해버린 셈이었다. "오호? 임신하고 낙태까지 시켜버렸으니 미안해서라도 이제 진짜로 책임 을 지려고 하는 거야? 그래서 이제 대놓고 호텔까지 드나드는 거야? 굉 장한 걸 유진우. 같은 남자로서 남들이 모르는 부분에서 은밀하게 여자 를 사귀는 너의 그 능력이 정말 존경스러운 걸." "그, 그게 아니라니까! 너 내 말은 도대체 뭘로 듣는 거냐!" "알아 알아. 이 형님은 네 마음 다 이해한다." "그게 아니라니까!" "이해한다니까 자꾸 그러네. 다 이해한다. 뭘 그런 거 가지고 숨기고 그 러냐. 재미없게." 정말 오해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단순히 진우를 놀리는 게 재미있어서 그런 건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세현 본인이 아니고는 어디에도 존 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자기 페이스 관리에 철저하고, 또 자 신의 모든 걸 숨길 줄 알기에 매력 있는 남자였다. 하루 종일 재밌어 죽겠다는 미소를 얼굴에 가득 띤 채 자신을 놀려대는 세현의 공세에 두 손 두 발 다 든 채 '그래 네 맘대로 생각해라.'라고 설득을 포기해버린 진우는 종례가 끝난 뒤 힘없이 교문을 나섰다. 세현 과는 집 방향이 학교에서부터 반대 방향이라 진우는 늘 집에 혼자 간다. "휴. 세현이 녀석 단단히 오해하고 있잖아. 이거 원 설명을 해줘도 도저 히 믿으려고 하질 않으니 원…"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오해할 만한 발언을 해버린 것도 자신이고 오해할 만한 짓 -돈을 빌려달라고 한 것- 을 한 것도 자신인 걸. 그렇게 혼자 터덜터덜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 끼이익! - 끼이익! - 끼이익!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와 함께 검은색 고급 중형차 세 대가 사방으로 진우의 주위를 에워쌌다.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진우는 엉거주춤 선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뭐, 뭐야?' 진우는 불안한 눈길로 자신을 에워싼 중형차를 쉴 새 없이 돌아보았다. 그 때 세 대의 차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한 싸움 할 것 같은 남자들이 천천히 내렸다. 그 중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양복 안주머니에 천천히 손 을 넣으며 입을 열었다. "학생이 유진우 군인가?" "…네 그렇긴 한데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런 조폭 비슷한 인간들과 연관될 만한 기억이 없는 진우로서는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할지 좋은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 지 않았다.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했을 따름이다. "우리가 누군지는 알 것 없고. 혹시 며칠 전에 파란색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를 가진 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를 만난 적이 없나?" '예안이를 말하는 건가?' 순간적으로 진우는 이들이 자신이 예안과 접촉하고 있음을 알고 찾아왔 다는 걸 깨달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알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 든 이 상황을 한시바삐 벗어나야만 한다는 사실이 머리를 스쳤다. 진우는 시치미를 떼었다. "그런 여자 만난 적 없는데요. 사람을 잘못 찾아온 게 아니신지…?" "이봐. 우리는 학생이랑 말장난을 하러 온 게 아니야. 다 알고 왔으니까 그 여자가 어디에 있는지 빨리 말해. 안 그러면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될 거야."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양복 주머니에 넣은 손을 움직였다. 옷안에서 철 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이 느낌이 만족스러운지 차갑게 웃었지 만 진우는 그럴 수 없었다. '총이다!' 진우는 소리 없이 신음을 삼켰다. 총기에 대해서는 엄청 까다로운 이 나 라에서 이렇게 대낮에 대놓고 사람을 포위한 채 총으로 협박하는 남자들 이 평범한 조폭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정말 모릅니다." "현명하지 못한 학생이군. 역시 젊어서 그런가? 하긴,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만…" 아직 이십대로 보이는 남자가 할 말이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진우는 그 말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정말 어리석어. 하지만 아직 기회는 있어." 선글라스는 씩 웃으며 안주머니에 넣은 손을 꺼내어 권총의 총구를 진우 의 이마에 들이댔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덩치들에게 포위 당한 진우 와 그들을 살피던 구경꾼들은 기겁한 채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아악! 총이다!" "겨, 경찰에 신고해!" 우왕좌왕하며 흩어지는 구경꾼들을 선글라스 너머로 훑어보고 난 뒤 남 자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이 지역은 참 시끄럽고 한심한 인간들이 많군. 어쨌든 우리도 가능하면 대명고등학교 학생을 해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좋게 말할 때 그 여자 의 소개를 말해." '우리학교 학생을 해치긴 싫다? 무슨 소리지? 학교 이사장이랑 친분이라 도 있다는 건가?' 설마 학교 이사장이 암흑가의 보스라든지 뭐 그런 건가?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한순간 진우는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한 번 해보았다. "말하지 않을 셈인가?" 딴 생각하느라 대답이 없는 걸 죽어도 말못하겠다는 뜻으로 오해한 선글 라스는 나름대로 남자다운 진우의 모습에 조금 감탄했다. 하지만 자신에 게 주어진 임무는 반드시 완성해야 했기에 그는 천천히 방아쇠에 손가락 을 걸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위협 사격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안 들려." 느닷없는 진우의 반말에 선글라스는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끝까지 이렇게 어리석게 굴 건가? 정말 바보로군." "무슨 말을 하는지 안 들린다니까. 난 쓰레기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모른 다구." 명백한 도발에 선글라스를 포함한 덩치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특히 부 하들은 선글라스의 말림이 없었다면 당장 진우를 폭행할 태세였다. "호? 보기보다는 배짱이 있는 애로군. 하지만 유진우 군, 이런 상황에서 쓸데없는 만용을 부리는 건 결코 현명한 게 아니야. 자, 빨리 말해. 어 차피 조금 있으면 구경꾼들이 신고해서 경찰이 올 거야. 그렇게 되면 우 리는 널 납치할 수밖에 없어. 설마 너도 그걸 원하는 건 아니겠지? 사실 대로 말하면 너에게 해가 가는 일은 없을 거야." 진우는 코웃음을 쳤다. "난 날 협박하는 인간들을 제일 싫어하고 혐오해. 당신들이 어디서 굴러 먹다 온 쓰레기인 줄은 모르겠지만 어디 한 번 마음대로 협박해 봐. 차 라리 죽으면 죽었지 당신들 같은 쓰레기들에게는 무릎 꿇지 않을 테니 까." "이, 이 녀석이! 보스! 이런 녀석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당장이라도…" 한 부하가 불같이 화를 내자 선글라스는 손을 들어 그를 진정시켰다. "진정해. 이 녀석은 지금 우리를 일부러 도발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빈 틈을 만들어 지금 이 자리에서 달아나려고 하는 거지. 생각한 것보다는 아주 똑똑한 녀석이야." 진우는 선글라스가 느긋하게 자신을 쳐다보자 질 수 없다는 듯 이글거리 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좋은 눈빛이야. 마치 몇 년 전의 나의 모습을 보는 듯하군. 죽이기에는 너무 아까운 녀석이야 넌." 선글라스는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덧붙였다. "하지만 난 다른 골 빈 녀석들과는 달리 그런 도발에 넘어가지 않아. 이 크, 조금 있으면 경찰들이 등장할 시간이로군. 어쩔 수 없지. 일단 이 녀석을 끌고 가자." "예!" 명령을 받은 덩치들은 진우를 강제로 차에 집어넣으려 했다. 하지만 진 우는 한 명의 손이 자신의 어깨에 닿는 순간 그대로 주먹에 쥔 볼펜으로 그 녀석의 손을 찔러 버렸다. "크윽!" 설마하니 반항할 줄은 상상도 못한 덩치는 무릎을 꺾으며 고통스러워했 다. 진우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자, 잡아!" 덩치들은 동료가 다친 데 순간적으로 정신이 쏠린 틈을 타 달아난 진우 를 황급히 뒤쫓기 시작했다. 상대는 이제 갓 고등학생이 된 데다가 가방 까지 메고 있어 얼마 달리지 않아 잡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진우와의 거리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넓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놓치면 안 돼!" 느닷없이 펼쳐진 대낮의 도주극이 신기한 듯 웅성거리며 쳐다보는 사람 들을 밀치고 달아난 진우는 잽싸게 골목길로 빠져 버렸다. 숨을 몰아쉬 며 골목 입구까지 달려온 덩치들은 이미 진우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벽을 치며 분해했다. "젠장! 놓쳐버리고 말았어!" "보스한텐 뭐라 말씀드리지?" 아까 그 장소에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을 보스에게 보고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고작해야 고딩에 불과한 녀석의 발걸음이 그렇게 빠를 줄 누가 알았으랴. 한편 진우는 집으로 곧장 향하지 않고 예안이 머물러 있는 호텔을 향해 달렸다. 그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또 학교로 찾아온 걸 보아 집으로 갔다가는 괜히 가족들까지 위험에 빠져 버릴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예안아! 서예안!" 남들이 이상하게 보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진우는 소리를 지르며 초인 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예안이 문을 열어주었다. "왜 그래?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안으로 뛰어들자마자 문부터 걸어 잠근 진우는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놈들이, 놈들이 쫓아와!" 예안은 진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갸웃했을 뿐이다. "누구?" "널 찾는 놈들 말이야!" "날 찾는 사람들?" "그래!" 상황파악을 못한 건지 어쩐 건지 예안은 그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왜 그 사람들이 날 찾는 거야?" "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하여튼 일단 여기서 도망가야 돼! 내가 따 돌리긴 했지만 이미 놈들은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고 쫓아오고 있을 지도 몰라!" "아… 어떻게 된 건지 이제 알겠다." 예안은 이제야 겨우 상황을 파악한 듯 했다. "빨리 도망쳐야 돼!" 여기서 도망쳐봐야 과연 어디가 안전할 수 있겠느냐만은 일단은 도망치 는 게 좋을 듯 했다. 예안의 손을 잡아끌던 진우는 그 때 좋은 생각이 나 무릎을 탁 쳤다. "맞다! 맥! 그 안이라면 안전할 거야! 맥이 있는 곳으로 도망가자!" "그 바닷가?" "그래! 빨리 그곳으로 가야 돼!" 예안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곳까지 가지 않아도 돼. 지금 당장이라도 맥을 이곳으로 부를 순 있으니까." 위기 상황은 진우가 아닌 예안에게 닥쳐온 것이지만 숨을 몰아쉬는 진우 와는 달리 그녀는 놀랄 만큼이나 침착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쫓기 고 있는 게 예안이 아니라 진우라고 생각하리라. "그, 그렇다면 빨리 불러!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구!" "응. 알았어." 예안은 왼손목에 늘 차고 다니는 시계와도 같은 소형 원격 조종 장치를 이용해 서해 속에서 잠자고 있을 맥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제 안심할 수 있겠지 싶어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진우는 순간 잊어버리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안 돼! 여기는 도시 한복판이야! 이런 곳에 맥을 불렀다간 어떤 소 란이 일어날지 모른다구! 빨리 취소…"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갑자기 베란다를 통해 내리 쪼이던 햇빛이 뭔가 에 의해 가려지며 방안이 어두워지자 진우는 설마 하며 뒤를 돌아보다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제트 추진음은커녕 엔진 가동음조차 없이 마 치 실에 매달려 있는 인형처럼 조용히 베란다 밖에 떠 있는 '맥'을 본 순간 진우는 허탈해졌다. "벌써 도착하다니…" 다른 건 몰라도 이것으로 맥이 뛰어난 기동력을 가진 것 하나만큼은 확 실해졌다. 그리고 이런 뛰어난 전투병기를 만들어낸 대단한 사람들이 지 금 예안을 노리고 있다는 것도. 바로 그 시각, 선글라스를 태운 검은 차는 부하들이 탄 차를 따라 진우 와 예안이 머무르고 있다는 호텔을 향하고 있었다. "그 녀석과 엔젤이 그곳에 있다는 게 확실해?" "확실합니다, 보스." "흐음… 어린 녀석이라 별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벌써 엔 젤에게 손을 댔을 줄이야. 이거 박사가 알게 되면 아마도 펄펄 뛰겠는 걸. 어쩌면 그 녀석을 죽이려고 들지도 모르지." 선글라스는 아까 당돌하게 자신에게 맞서던 진우의 배짱을 떠올리며 슬 그머니 미소지었다. 그가 맡은 임무는 엔젤이 상처 입지 않도록 무사히 신병을 인수해 그의 상관에게 넘기는 게 전부다. 그러나 은근히 호텔에 서 그 둘이 어디까지 갔는지 신경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나저나 보스. 만약 엔젤을 붙잡는다면 우리도 한 번 그 여자를 맛볼 수 있는 겁니까?" 조수석에 앉아 있던 험상궂게 생긴 부하가 기대에 찬 얼굴로 그렇게 물 었다. 선글라스는 친절한 미소를 입가에 가득 띠며 입을 열었다. "글쎄다… 왜, 엔젤을 한 번 품어보고 싶나?" "예. 남자라면 누구나 그런 미인을 한 번쯤은… 커억!" 기대에 찬 얼굴로 대답하던 부하는 갑자기 선글라스가 오른손으로 자신 의 얼굴을 우악스럽게 쥐어뜯자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질렀다. 선글라스는 부하의 얼굴을 잡은 손에 더욱 더 힘을 주며 여전에 얼굴에는 친절한 미 소를 머금고 있었다. "엔젤은 감히 너 따위가 손댈 수 있는 여자가 아니다. 엔젤에게 투자된 비용이 얼마인 줄 너 따위가 알기나 해? 한화로 자그마치 5조가 넘어가 는 돈이 엔젤에게 투자되었단 말이다. 미화로는 500억 달러나 되는 돈이 지. 네 녀석은 너에게 그런 여자를 품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죄, 죄송합… 니…" 얼굴이 잡혀 있는 터라 부하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힘줄이 솟은 선글라스의 오른손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부하의 안면은 고통으로 시 뻘겋게 달구어져 있었다. 하지만 선글라스는 그를 놓아주지 않은 채 잔 인한 미소를 지었다. "이봐. 도대체 이 녀석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사고 방식이 이 모양인 거지?" 이건 현재 선글라스에게 얼굴이 잡혀 있는 부하에게 한 말이 아니라 묵 묵히 운전하고 있는 부하에게 물은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돌아가는 즉시 정신교육을 단단히 시키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주제도 모른 채 여자를 건드릴 생각이나 하는 녀석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 이 녀석은 지금 즉시 제명이다. 차 세 워." "예! 알겠습니다!" 운전하던 부하는 그 즉시 길가에 차를 세웠다. 선글라스는 히죽 웃음과 함께 그의 얼굴을 잡은 손을 풀었다. "꺼져.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선글라스는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조차 섬뜩함을 느낄 정도로 차가운 미 소를 지었다. "…살아있다는 걸 후회하게 해주마." 단 한 번의 말실수로 인해 졸지에 쫓겨나게 된 부하는 기가 막혔지만 오 금이 저린 나머지 항변 한 번 제대로 못한 채 허겁지겁 도망쳐야만 했 다. 차가 다시 출발하자 선글라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을 감고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보, 보스! 저, 저걸 보십시오!" 갑작스런 운전수의 호들갑에 선글라스는 불쾌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뭐야? 뭐 때문에…" 그러나 부하가 가리킨 방향에 시선을 던진 순간 선글라스는 더 이상 말 을 이을 수 없었다.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그의 유유자적한 미소는 이미 더 이상 그의 입가에서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공중에 떠 있는 거대 물체는 분명히 그가 잘 알고 있는 것이었 다. 단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그 존재와 엄청난 가치, 그리고 강대한 힘에 대해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인간이 만들어낸 최강의 전 투병기. "맥…?" 놀라움은 잠시 동안. 이윽고 그의 표정에 승자의 미소가 살아나기 시작 했다. "드디어 찾았다." 수천 년 동안 이뤄지지 못했던 민족의 염원을 완성시켜줄 최고의 도구가 바로 눈앞에 있다. 이 상황에서 터질 듯이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리라. 예안이 도시 한복판으로 맥을 불러버린 걸 미처 예방하지 못한 진우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이미 물을 주워담기에는 너무나 늦어 버렸다. "도,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할 거야! 으아악! 난 몰라!" "맥을 이리로 불러도 된다며?" 예안은 '내가 잘못한 거야?'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갸웃하며 진우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그게 또 무척이나 귀여웠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녀의 얼굴을 감상할 여유 따위가 어디 있으랴. "그,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하,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구! 아깐 나도 제정신이 아닌 나머지…" 진우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때 갑자기 뭔가가 현관문을 요란하게 두들 기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쾅쾅쾅! 놀란 진우와 예안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춘 채 반사적으로 서로를 마주보 았다. 아무리 예안의 정신연령이 지극히 낮다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이 아주 아주 위험하다는 걸 깨닫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아주 아주 천재라고 해야 옳겠지. "튀자!" 어쩔 수 없이 진우는 예안의 손을 잡아끌어 베란다로 달려갔다. 두 사람 이 달려가자 맥은 자연스럽게 금속으로 이루어진 손바닥을 펼쳐 두 사람 이 콕피트에 오를 수 있게 해주었다. 맥의 내부에 들어간 진우는 급히 예안을 재촉했다. "빨리 빨리! 빨리 튀자!" "잠시만. 일단 제트 모드로 변환시킨 뒤에 출발시킬게. 아무래도 전투 모드보다는 제트 모드가 훨씬 더 빠르거든. 전투력은 좀 약해지지만…" "한시라도 빨리 튀어야만 해! 도시 한복판에 이런 정체불명의 로봇이 떡 하니 떠 있으면 군대가 올 지도 모른다구! 그럼 빼도 박도 못하게 된단 말이야! 아무리 대한민국의 군사력이 최악이라지만 도시 한복판에서 설 치는 정체불명의 비행 물체를 내버려둘 정도로 미사일에 녹이 슬지는 않 았단 말이야!" 이미 상황은 너무 늦어 버린 것 같지만 최악의 상황만이라도 모면하기 위해 진우는 서둘러 출발을 재촉했다. "출발할게. 꽉 잡아." 예안이 경고했다. 갑자기 진우는 조종실이 빙글 회전하는 걸 느꼈다. "어라? 이게 왜 이래?" 갑작스런 회전에 쓰러질 뻔했던 진우는 간신히 조종석을 붙잡으며 균형 을 잡았다. 이윽고 거대한 전투기 형태로 완전히 변신한 맥은 엄청난 추 진력으로 폭발하듯 튕겨져 날기 시작했다. 덕분에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있던 진우는 몸이 완전히 뒤로 쏠리며 벽에 붙어버렸다. "으, 으악! 예안아! 안전벨트도 안 맸는데 갑자기 출발하면 어떡해?" "난 맸는데?" "난 아직 안 맸단 말이야!" "그럼 빨리 매. 일단 직선 비행만 할 테니까 움직이기 수월할 거야." 예안이 앉아 있는 조종석 말고 다른 조종석을 찾아 시선을 더듬던 진우 는 자리가 하나밖에 없음을 깨닫고 어이가 없었다. "조종석이 하나밖에 없잖아! 난 도대체 어디에 앉으란 거야!" "아. 조종석이 하나밖에 없구나. 할 수 없지 뭐. 그럼 그냥 거기 서 있 어." 진우는 기가 막혔다. "여객기도 아닌 이런 전투병기를 타고 도망치면서 안전벨트는커녕 조종 석에도 앉지 말라고? 너 지금 내가 이리저리 부딪쳐서 죽기라도 바라는 거야?" "난 지금 조종하느라 바쁘니까 말시키지 마. 일단 널 위해서 곡예비행은 안 할 테니까 아무거나 꽉 붙잡고 있어." "으으, 곡예비행을 안 한다는 말이 제발 거짓말이 되지 않기를 빈다." 혹시라도 갑자기 급강하, 급상승을 하는 일이 일어나 자신의 몸이 위아 래로 내동댕이쳐지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진우는 생전 처음으로 신에게 기도했다. 이 때 진우는 '앞으로 내가 다시 이걸 타면 사람이 아니다!' 라고 속으로 궁시렁거렸지만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자신이 누구보다도 맥 을 사랑하고 아끼는 파일럿이 될 줄은 지금 이 순간 상상조차 못하고 있 었다. 맥은 불과 몇 분 비행하지도 않아 황해의 한 무인도에 무사히 착륙했다. 맥에서 내리자마자 진우는 속이 메슥거리는 걸 느끼고 입을 막은 채 뛰 쳐나와 헛구역질을 해댔다. "우욱, 우욱…" 다행스럽게도 예안의 앞에서 구토하는 꼴사나운 광경을 연출하진 않았지 만 새하얗게 질린 안색은 역시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내, 내가 다시 이걸 타면 성을 간다 성을 갈아…" "그렇게 어지러웠어?" "당연하지! 난 태어나서 비행기는 단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는 몸이라구! 예비 연습조차 없이 갑자기 이런 전투기를 타고 날아다녔는데 아무렇지 도 않다면 그게 말이나 돼!" 예안은 쭈그리고 앉아 새하얗게 질린 진우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힘없이 말했다. "화내지마. 나 싫어하지 마." 신비로운 미지의 감정에 촉촉이 젖은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응시한 순간 진우는 부끄러움과 쑥스러움을 동시에 느끼고 시선을 떨어 뜨렸다. "아, 아니 난 화를 낸 게 아니라…" "진우 네가 날 미워하는 건 싫어. 미안해. 앞으로 다신 안 그럴게. 그러 니까 나 싫어하지 마. 응?" 애원하는 듯한 예안의 목소리에 진우는 오히려 미안해졌다. 사실 특별히 예안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단지 투덜거린 것에 불과했는데 그녀가 이 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니 오히려 자신이 죽일 놈이 된 것 같았다. "미, 미안해. 예안아. 난 너한테 화가 난 게 아니고 그냥 속이 울렁거려 서 투덜거린 것 뿐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화 안 난 거야?" 예안이 예의 그 매력적인 녹색 눈동자로 빤히 쳐다보며 묻자 진우는 쑥 스러움에 붉어진 볼을 긁적였다. "절대 화 안 났어. 그러니까 안심해." "정말? 다행이다~ 진우가 화나면 난 어떡하나 걱정했… 아악!" 화 안 났다는 소리에 뛸 듯이 기뻐하던 예안은 갑자기 머리가 깨어지는 듯한 통증에 비명을 내질렀다. "왜, 왜 그래?" 느닷없이 그녀가 또다시 발작을 일으키자 진우는 어쩔 줄 몰라 발을 동 동 굴렀다. "아파! 아파! 머리가 아파!" "괘, 괜찮아? 어, 어떡하면 좋지? 이, 이 근처에 병원이 있나?" 진우는 당황해서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지만 황해에 떠 있는 무인도 중 하나인 이름 모를 이 섬에 병원 따위가 있을 턱이 없다. 그렇다면 다시 맥을 타고 육지로 가야 한다는 소리인데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는 예안이 맥을 조종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오토바이 면허증조차 없는 진우가 맥을 조종할 수 있을 리 없잖은가? 게다가 간신히 도망쳐 왔는데 육지로 지금 간다면 '날 잡아 주슈'하는 것과 마찬가지.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해줄게!" 사실 진우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렇다고 마냥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혹시나 이 섬 어딘가에 도움을 받을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사람을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예안은 그가 다른 데로 가지 못하도록 옷을 꽉 움켜쥐었다. "혼자 두지 마… 제발 혼자 두지 마…" "예안아,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 사람이 있을 린 없겠지만 그래도 혹 시 모르니 일단은…" 예안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애원했다. "제발… 혼자 두지 마…"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예안은 혼자 있는 걸 굉장히 두려워하 고 싫어했었던 기억이 났다. 혼자 있는 걸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몇이나 되련만, 예안의 경우에는 거의 광적으로 누군가와 함 께 있고 싶어했다. 그렇다면 예안은 어째서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부터 맥을 타고 도망친 걸 까. 혼자 있는 걸 그토록 싫어하는 그녀가 견디지 못하고 도망친 걸 보 면 아마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을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자 진우 는 머리에 핏기가 가시는 게 느껴졌다. 진우는 결연한 태도로 그녀의 어깨를 포근히 안아주었다. "그래. 혼자 두지 않을게. 그러니까 빨리 나아라. 응? 알았지?" 이미 고통으로 제정신이 아닌 그녀는 '제발 혼자 두지 마'라는 말을 반 복테이프처럼 중얼거리는 와중에도 그의 진심을 느꼈는지 마음이 따뜻해 지는 미소를 희미하게 짓고 있었다. 이미 두 사람에게는 짧은 만남이 끝나버릴 시간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 오고 있었다. 비록 진우도 예안도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한참을 기다리고 있노라니 예안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수 있을 수준 까지 통증이 가라앉았다. 예안은 조금씩 안색이 좋아졌다. "이제 좀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아." "휴. 그거 다행이네.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닌가 걱정했다구." "…날 걱정했어?" 예안은 진우가 자신을 걱정했다는 게 무척이나 기쁜지 얼굴에 홍조까지 띠었다. 약간 쑥스러움을 느낀 진우는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너 왜 그렇게 자주 두통이 일어나는 거야? 혹시 왜 그런 건지 어디 짐작 가는 거 없어? 예를 들면, 부작용으로 두통이 심하게 일어나 는 약 같은 걸 많이 먹었다는지…"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예안은 힘없이 대답했다. "아마 맥을 조종해서일 거야." 진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그것 때문에?" "맥은 일반 전투병기랑은 틀려서 파일럿의 정신력 소모가 극심하거든. 그래서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은 맥을 절대 조종할 수 없다고 했어. 내가 태어난 목적도 바로 맥을 조종하기 위해서였대.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해 줬어." "아…" 진우는 이제야 예안에 얽힌 비밀이 대충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윤곽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예안은 캡슐 속에서 처음으로 눈을 떴다고 하니 아 마도 맥을 조종하기 위해 유전자 처리를 가한 개조 인간 뭐 그런 것일 것이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맥의 무력이 필요한 어떤 일에 투입되기 위해서일 게 뻔하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분함을 느끼고 입술을 깨물었다. 맥의 무력을 어 디다 쓸 건지는 모르지만 고작 이런 어린아이를 혹사시켜서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단 말인가? 진우는 예안이 자주 말하는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만약 만난다면 면상을 한 번 갈겨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겨우 도망쳐 온 곳이 여기인가?" 느긋하게 진우와 예안을 쫓아 이곳까지 온 선글라스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유유자적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큰 맥을 타고 도망쳤는데, 제 아무리 100% 스텔스 기능을 자랑 한다 해도 우리가 찾지 못할 줄 알았나? 그것도 먼바다가 아니라 이 나 라 영해권에 있는 이런 섬에 착륙했는데 말이야. 도망을 치려면 차라리 하와이나 태평양 상공의 무인도에 도망가는 게 좋았을 걸. 그랬으면 우 리도 한동안 찾아내기 힘들었을 테니까." 예안이 한동안 고통스러워하다가 겨우 진정된 후 진우의 품속에서 새근 새근 잠든 걸 먼발치로 확인한 선글라스는 폰을 꺼내들었다. 번호를 꾹 꾹 누른 그는 신호음이 끊기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여자의 목소리가 대답해왔다. 「여보세요.」 "나다, 엘르. 지금 엔젤의 위치를 확인했다." 「엔젤이 현재 맥에 탑승해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아. 그리고 방금 전에 발작을 겨우 가라앉힌 것으로 보인 다." 「그거 위험하군요. 하지만 이상한데요. 어째서 박사는 엔젤의 발작 증 세에 대해 미리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을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어차피 혁명은 우리 손으로 이뤄내야만 하는 것. 박사를 지나치게 믿을 순 없어. 그나저나 박사는 어디 있지?" 목소리는 잠시 끊어졌다. 누군가를 찾는 모양이었다. 「예. 박사는 현재 연구실에 있군요. 그쪽으로 연결해 드릴까요?」 "그래. 박사한테 연결해. 할 말이 있다." 「알겠습니다.」 잠깐 동안 지루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 왔다. 「무슨 일이지?」 "박사. 지금 엔젤의 신병을 거의 확보한 거나 마찬가진데… 어떡할까? 이대로 곧장 기절시켜서 데리고 갈까?" 잠시 대답이 없다가 다시 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맨손으로 유젤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붙잡는 건 불가능해. 증명되진 않았지만 유젤은 ESP를 쓸 수 있어. 일단은 가만히 지켜봐.」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훗 하고 비웃음을 흘렸다. "후후. 전에도 네 녀석이 말한 대로 가만히 지켜보다가 결국 엔젤이 맥 을 타고 도망치는 꼴을 보고 말았지. 이봐, 한 가지만 물어보자. 박사 넌 정말 엔젤을 붙잡을 마음이 있는 거냐? 혹시 일부러 엔젤을 놔준 건 아니냐?" 긍정하는 건지 아니면 부정할 수 없는 건지 박사는 잠시 동안 대답이 없 었다. "대신들은 너의 능력 덕분에 너의 인성까지 신뢰하는지 몰라도, 난 절대 아니야. 난 처음 볼 때부터 네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넌 지금 우 리를 돕는 척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조만간 곧 배신할 것만 같단 말이 야." 「그거 유감이로군. 날 믿지 못한다는 게. 난 엄연히 시트날타의 파트너 인데 말이야.」 "개는 아무리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 되어도 고양이가 건넨 먹이는 먹지 않는 법이지. 독이 들어 있을 지도 모르니까. 어쨌든 엔젤은 지금 붙잡 아서 데리고 간다. 이만 끊겠다." 선글라스는 핸드폰을 탁 덮고는 다시 팔짱을 낀 채 예안과 진우 쪽을 바 라보았다. 그의 미소에는 숨길 수 없는 승리감과 자신감이 묻어 나왔다. "엔젤, 넌 절대 우리로부터 도망칠 수 없어. 넌 맥과 함께 우리의 혁명 을 이뤄줄 소중한 도구니까 말이야." 어둠을 가르는 나직한 목소리는 지옥의 심연처럼 무거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예안을 끌어안고 잠이 들었던 진우는 누군가가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손길에 희미하게 눈을 떴다. 발작이 완전히 가라 앉은 예안이 힘없는 미소를 입가에 띤 채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 다. "어… 이제 완전히 괜찮은 거야?" 쑥스러움을 느낀 진우는 조금 얼굴을 붉혔다. "진우는 자는 모습이 참 좋아. 보기 좋아." "그, 그래?" 아기처럼 마음을 숨기거나 치장하지 않는 솔직한 그녀의 표현은 때때로 지금처럼 진우를 당황함으로 몰아넣곤 한다. 이처럼 순수함은 그녀만이 가진 독특한 매력 중 하나였다. 아마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에게 끌린 건 단지 인간 같지 않은 매력적 인 외모나 신비한 느낌을 발하는 파란머리카락 때문이 아니라, 갓 태어 난 아기와도 같은 순수함이 듬뿍 배여 있는 녹색 눈동자가 너무나 눈이 부셨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우야… 네 이야기 해주지 않을래?" 예안은 진우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며 속삭였다. "내 이야기?" "응… 네가 살아온 이야기… 네가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 그리고 네가 살아갈 이야기…" 마치 이별을 앞둔 사람의 부탁과도 같은 예안의 청에 진우는 마음 한 구 석이 쓰라림으로 뒤덮이는 걸 느꼈다. 말해줘야 할 것인가? 특별히 거절 할 이유 따위는 없다. 하지만 왠지 그랬다가는 모든 미련을 풀어버린 영 혼이 이승을 훌훌 떠나 저 세상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예안의 모든 것이 눈앞에서 그대로 녹아버릴 것만 같은 불길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저기… 난 어떻게 살아왔냐면…" 하지만 진우는 결국 조심스럽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 했다. 지금껏 세현과 혜인에게조차 말해주지 않았던 자신의 마음 속 깊 은 곳에 자리잡은 진심까지 함께. 그 뒤로 진우는 자신이 살아온 배경을 예안이 이해하기 쉽도록 부연 설 명까지 곁들여가며 모두 풀어놓았다. 얼굴을 기억하기도 전에 도망가 버 린 엄마, 동생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한 아버지에 대해 겹치는 한심 함과 안타까움, 사촌형제들에게 느끼는 질투와 미움, 첫사랑이 배신당했 을 때의 아픔, 그리고 이렇게 황폐해진 정서를 지닌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과 자괴감. 그의 정서를 황폐해질 대로 황폐하게 만들어버린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도 예안은 별다른 화를 표하지 않았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 은 예안에게 진우가 16년 동안 살아온 이야기는 분노나 공감의 대상이라 기보다는, 누릴 수 없는 강한 동경의 그리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가 보다. "…대충 이 정도야. 어때? 궁금증이 풀렸어?" 한참 동안 펼쳐진 진우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예안은 문득 서글픈 미소 를 지어 보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진우 네가 많이 슬퍼하고… 많이 힘들어했다는 건 알 것 같아." "글쎄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걸? 뭐 이 세상에는 나보다 못하거나 비참한 생활 속 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워낙에 많다 보니까." "하지만 진우의 눈빛은 너무 슬퍼 보이는 걸." "내가 슬퍼 보인다고?"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에 진우는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 마 예안은 진우의 눈빛에서 삼촌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 자신의 환경에 대한 열등감,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섞여 만들어낸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깃든 걸 보고 '슬퍼 보인다'라고 착각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진우는 굳이 예안의 착각을 깨지 않기로 했다. 갓 태어난 아기처 럼 많은 걸 감정을 알지 못하는 예안에게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조금씩 여러 감정들을 가르쳐 나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왜 갑자기 내 이야기는 듣고 싶어한 거야?" 잠시 동안 망설이던 예안은 결국 진우의 무언의 재촉을 이기지 못하고 처연하게 입을 열었다. "난 이제 얼마 살지 못하니까. 사람이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건지 무척 궁 금했어." 진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얼마 살지 못한다니? 갑자기 왜 뜬금 없는 소리야? 네가 죽는다고? 죽 어? 왜 죽는다는 거야?" 조금씩 초점이 사라지기 시작한 예안의 입에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이 흘 러나왔다. "난… 혁명을 이뤄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엔젤… 그렇지만 맥은 내 생명 을 점점 갉아먹고 있어… 난 다만 시험작에 불과할 뿐… 정식 타입은 아 니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죽는 거야…" 혁명? 엔젤? 맥이 생명을 갉아먹는다? 시험작에 불과할 뿐이다? 정식 타 입은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죽는다? "무슨 소리야 그게?" 진우는 그녀가 하는 말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나마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건 맥이 그녀의 생명을 갉아먹는다는 게 단순 히 주기적인 두통이 일어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게 절대 아니라는 사실 뿐이다. "너, 너 그럼 맥을 조종하면 죽게 되는 거야? 맥이 그렇게 위험한 병기 였어? 그냥 가끔씩 두통만 일어나는 거 아니었어?" 예안은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녀의 나약한 목소리는 거친 풍파에 젖은 고목처럼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난 아직 불완전한 프로토 타입이니까… 그 사람이 맥을 조종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어… 정식 타입이 만들어지면 그게 맥을 조종할 거라고… 그렇게…" 천천히 생명이 사라지기 시작한 예안의 뺨 위로 서서히 죽음의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진우는 그저 발만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지금 말을 하면 할수록 너만 더 힘들어져! 내가 어 떻게 해서든지 육지로 널 데리고 갈 테니까…" "내 말을 들어 줘…" 그렇지만 예안은 유언과도 같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계속했다. 유언. 그녀가 하는 말은 정말 유언이나 다름없었다. 예전에 '박사'로부터 현재 자신의 불완전한 육체로 맥을 조종한다는 건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 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충고를 받았다. 하지만 자신이 그 사람에게 아무 런 의미도 가치도 되지 못하고 단순히 '시험작'에 불과할 뿐이라는 공포 심에 그만 겁이 나 멋대로 도망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그 대가를 톡 톡히 치르고 있다. "나 있지… 사실은 그 사람이 무서웠던 게 아니라… 내가 그 사람에게 짐 만 되는 게 너무 무서웠어… 정식 타입이 태어나면 난 버림받아야 하니 까… 그게 싫고 무서워서…" 역시 예안이 그 사람이 싫다고 말했던 건 단순한 거짓말이었을까. 아니 면 여태껏 그녀가 자기 자신마저 속이고 있다가 죽음을 앞둔 지금 그게 거짓말이었음을 깨달은 걸까. "…나도 너처럼 오랫동안 살아보고 싶었는데…" 금방이라도 그녀의 몸에서 모든 생명의 불꽃이 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걸 지켜보는 게 너무 무섭고 겁이 난 진우는 그녀를 꼭 껴안으며 발작 하듯 외쳤다. "죽지 마! 죽지 마! 제발 죽지 마!" 외침이라기에는 너무나 가련한 부르짖음에 예안은 한동안 미소를 지었 다. "죽지 마! 제발 죽지 마! 이대로 죽어버리면 난 어쩌라는 거야!" 아마도 예안이 미소짓고 있었던 건 잠시 뿐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동경이 깃들여진 예안의 처연한 미소는 잠시 동안 힘없 이 매달려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썩은 나무가 무너지듯 스르르 사 라져 버렸다고 생각한다. 생명이 사라진 예안의 몸을 멍하니 끌어안고 있던 진우는 가슴속에서 뭔가가 폭발하는 걸 느꼈다. "으, 으아아아아악!" 처음에 운명적인 만남이라 생각했던 건 고작 삼일 만에 끝나고 말았다. 예안이 죽었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진 건 없다. 어렸을 때 가난이 싫어 이혼한 엄마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동생들을 위해 자신의 인 생을 희생한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이 빚어내는 혼란과 자괴감 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촌형제들에게 항상 느껴왔던 질투심 과 피해의식은 여전히 그의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맞다. 특별히 변할 건 없다. 그냥 삼일 동안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면 그 만이다. 맥을 타고 온 여자애? 그게 누구야? 특이하게 파란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애? 아, 빛에 따라 빨갛게도, 검게도 변하기도 하던 그 여자애 말이야? 그게 누구지? 기억이 안 나. 응? 아, 그냥 꿈을 꾼 거라 생각하 라고? 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냥 그렇게 모든 걸 다시는 열어보지 못할 마음의 상자 속에 묻어놓고 한 번 사용하면 부러지고 마는 열쇠로 잠가 버리면 그만이다. 쉽다. 쉬워도 너무 쉽다. 하지만 조금씩 식어 가는 예안의 뺨을 어루만 지던 진우는 자신은 그 쉬운 일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바보였음을 비로 소 깨달았다. 스스로가 강하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 자신이 강함 을 증명하기 위해 엄마를 단 한 번도 그리워하지 않은 척 하고, 아버지 에게 단 한 번도 따뜻한 말을 건네지 못하고, 사촌형제들에게 단 한 번 도 큰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냥 성인이 되어 그들과의 인연이 끊어지는 날만을 기다려왔던 건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었 던 것이다. 성대가 굳어버린 것처럼 더 이상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진짜로 그 럴 리는 없을 텐데. 참 이상한 일이다. "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이제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예안의 뺨을 적셨 다. "엔젤이 이상합니다! 굉장히 위험해 보입니다!" 예안과 진우를 감시하고 있던 부하가 다급히 보고했다. 그러나 그가 보 고하기 전에 이미 진우의 비명소리를 들은 선글라스는 사태가 위급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재빨리 명령했다. "당장 엔젤을 붙잡는다! 남자애가 반항하면 사살해도 좋아!" "예!" 여태껏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던 여덟 명의 부하들은 선글라스와 함께 진 우와 예안이 있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선글라스는 별로 놀라지 않고 천 천히 자신을 돌아보는 진우를 낮게 위협했다. "거기서 움직이지 마. 잠자코 엔젤을 이곳으로 넘겨." 진우는 예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 기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혐오인지 알 수 없는 격노로 핏발이 선 눈동자 를 그들에게 돌렸다. 그는 지금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빨리! 한시가 급하다!" 예안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깨달은 선글라스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 졌다. 그는 지금 무척 초조했다. 자칫하다가는 혁명을 이뤄줄 소중한 도 구를 눈앞에서 잃고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닥쳐! 이 쓰레기들아!"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진우는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주먹을 쥐고 선글 라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몇 걸음을 채 떼어놓기도 전에 부하 한 명 이 방아쇠를 당겨 진우의 심장에 탄환을 박아 넣었다. - 탕! 화약이 터지는 소리와 총알이 공기를 찢는 굉음이 가라앉은 후 진우의 몸이 천천히 쓰러졌다. 그러나 핏발이 선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감기지 않았다. "엔젤의 상태는 어떻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쓰러진 진우를 내려다보던 선글라스는 예안을 이리 저리 살피고 난 부하에게 물었다. 부하는 엿 됐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미 숨이 끊어졌습니다. 역시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맥을 조 종한 탓에 뇌에 지나치게 무리가 온 듯 합니다. 박사의 말이 과연 맞았 군요." 선글라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 엔젤을 붙잡았는데, 이미 숨이 끊어졌다니!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비록 '박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 이기는 해도 그에게 데리고 가면 무슨 수가 생길 거라 생각한 선글라스 는 입맛을 쓰게 다셨다. "…일단 엔젤을 데리고 박사에게로 가자. 그 녀석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살려낼 수 있겠지." "하지만 박사가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고 해도 이미 죽은 사람을 살려낸 다는 건…" "엔젤의 몸은 특이해.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인간하고는 달라. 어 쩌면 지금 죽은 게 아니라 단지 가사상태에 빠졌을 수도 있지. 일단 데 리고 간다." "예!" 그 때 다른 부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그런데 이 남자애 녀석은 어떻게 할까요? 이미 죽은 것 같은데 데 리고 가는 것도 그렇고… 역시 이 섬 아무데나 묻고 갈까요?" 잠시 생각하던 선글라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요즘 애들 같지 않게 배짱 있는 놈이었다. 이 녀석도 일단 데리 고 가기로 하지. 나중에 부모를 찾아서 시신이라도 건네줘야 할 거 아닌 가?"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만이 이 세상의 전부 인 듯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암흑, 그것 이외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 다. '여기가 어디지?' 멍하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있던 진우의 기억들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조금 전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깨달았다. '맞아, 예안이 죽고… 그리고 그 녀석들이 나타나고… 난 그 녀석들이 쏜 총에 맞았던가?' 죽음의 충격에 잠식당해 있던 기억들이 깨어남에 따라 다시금 그의 마음 속에서 어두운 감정들이 싹트기 시작했다. '미안해 예안아… 난 너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어…' 예안이 죽어갈 때 그저 발만 동동 굴렀을 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 기력한 자기 자신에 대해 그렇게 화가 난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예안 의 발작이 가라앉았을 때 '이제 괜찮을 거야'라고 안일하게 생각해 혹시 라도 섬에 도움을 청할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 찾아 나서지 않은 게 후 회되었다. 선글라스를 낀 남자에게 쫓길 때에 무작정 예안에게 맥을 타 고 도망가자고 한 것도 후회되었다. 처음부터 예안의 행방을 들키지 않 도록 조심스럽게 행동하지 않은 것도 후회되었다. 정말 모든 게 후회되 었다. 그 때 갑자기 눈앞에서 눈부신 하얀빛이 터져 나왔다. '아…' 차마 말로 담을 수 없이 성스럽고 아름다운 빛 앞에 진우의 영혼은 그대 로 굳어버렸다. 그 빛 사이로 나타난 여자는 그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예안아…' 죽기 직전에 그녀의 뺨에 자리잡았던 죽음의 기운이 깨끗이 사라지고 없 이 너무나도 건강해 보이는 그녀의 미소 앞에 진우는 하마터면 눈물을 터트릴 뻔했다. 지금과 같은 초현실적 현상을 단 한 번도 믿어본 적은 없지만 지금 그녀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 하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영혼이라는 건… 정말로 있었나…' 죽음의 문턱을 넘은 지금 갑자기 집에서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아버지의 쓸쓸한 모습이 떠올랐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 버릴 줄 미리 알았으면 그동안 아버지에게 툴툴대지 말고 따뜻한 말 한 마디라도 아끼지 말고 해주는 거였는데, 하는 후회가 일어나니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왜 울어?'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쓰지 마.' 흠칫하며 눈물을 닦아낸 진우는 가까스로 밝은 미소를 띠었다. '우리 둘, 이제 죽은 거지? 그래서 저 세상으로 함께 가려고 네가 나한 테 온 거지?'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빨리 떠나자. 이승에 대한 미련이 발목 을 붙잡아 피눈물을 뿌리며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어버리기 전에. '아니야. 넌 죽지 않았어.' 예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죽은 건 나 하나 뿐이야. 지금 그 사람이 너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노력 하고 있어. 그러니 넌 살 수 있을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자신이 살 수 있을 거라는 말에, 기쁨보다는 이대로 예안과 헤어져야 한 다는 사실 때문에 겁이 덜컥 난 진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살 수 있다니? 그렇다면 너 혼자 죽는다는 거야?' '응.' '안 돼! 그럴 순 없어! 너, 너 혼자 저 어둠 속에 보낼 순 없어!' 예안은 진우의 마음이 그저 고맙기만 한 지 씁쓸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다시 가로 저었다. '너까지 날 따라오지 말아 줘. 넌 제발 살아 줘. 살아서, 살아서 내가 맛보지 못했던 행복과 기쁨 그리고 슬픔까지도 모두 껴안고 살아 줘.' '하, 하지만 난…' 지금처럼 널 가슴에 담아둔 채, 널 어둠 속에 혼자 남겨두고 이 세상을 명랑하게 살아갈 자신이 없어. 진우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제발 살아 줘. 너만큼은 제발 살아 줘. 그리고 나중에 우리가 다시 만 났을 때… 네가 살았던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얼마나 고귀한 행 복으로 가득 차 있는지, 얼마나 깨끗한 슬픔으로 뒤덮여 있는지 그것까 지 하나 하나 전부 빼놓지 말고 다 나에게 말해 줘.' '하, 하지만 난…' 더듬거리며 '네가 죽고 나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다'라고 말하려던 진우 는 문득 그녀의 말속에 배어있는, 이 세상에 대한 동경과 삶에 대한 갈 망을 깨닫고는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녀는 죽은 뒤에 진우를 통 해서라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어떻게 차마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있으랴. 단지 예안이 죽고난 뒤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다는 이기심 때문에 그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않 는다면 그건 또 한 번 자기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무기력한 인간 이라는 걸 증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가? 진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두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뺨을 하 염없이 적시고 있었다. '약속할게. 너 대신 내가 오래 오래 이 세상을 살아서, 나중에 널 다시 만나면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재미있고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비참한 세상이었는지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많이 들려줄게.' '고마워.' '절대 울지 않을게. 절대 부끄럽게 살지 않을게. 절대 후회하게 살지 않 을게. 그래서, 그래서 나중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많이, 오래도록 억겁의 세월 동안 들려주겠다고 약속하려던 순간 그는 왈칵 터져 나오는 슬픔의 압력 앞에 쓰러질 듯 무 릎을 휘청거리고 말았다. '난 이제 가야 해. 부디 진우 넌 오래 오래 재미있게 살아 줘. 그리고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건지 나에게 꼭 말해줘야 해.' 진우는 흐느끼며 다시 한 번 약속했다. '그래… 약속할게.' 예안은 헤어진다는 게 슬프지도 않은 건지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짓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걸 잠시 동안의 이별이라 여기기에 슬퍼 하지 않는 걸까. 단지 진우가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들려줄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찾기 위해 살아있는 공간으로 잠시 떠나는 거라 여기기에 그렇게 따뜻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걸까. 그래. 그럴지도 몰라. '예안아 나… 너 좋아했어… 지금도 좋아해… 알지?' '나도 널 좋아했어. 지금도 좋아해.' 하지만 아기처럼 순수한 예안은 진우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이 어떤 의 미인지 아마 평생 가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갓난아기의 정신연령에서 그대로 성장도 퇴화도 영원히 멈춰버린 채 이제 억겁의 시간 속으로 들 어가는 그녀는 아마도 영원히 진우가 자신을 이성으로서 사랑했다는 사 실을 눈치채지 못하겠지. '…영원히 널 사랑할게. 너만을 사랑할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맺은 영혼의 약속이었다. 그렇게 예안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곳으로 떠났다. 이제 진우 가 그녀를 만나기 위해선 그녀가 있는 곳으로 자신이 직접 떠나야 하리 라. 하지만 예안은 진우에게 살아줄 것을 요청했다. 다시 한 번 예안을 만나기 위해선 앞으로 남아 있는 무수한 나날들을 힘겹게 살아가야만 하 겠지. '네가 없이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얼마 전까지 사랑의 배신에 젖어, 사랑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것이며 가장 쓸모 없는 것이고 가장 가식적인 것이며 가장 더러운 것이 고 가장 위선적인 것이라고 경멸하고 혐오하고 증오했었다. 하지만 앞으로 오랫동안 그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두운 세계에 예안을 혼 자 무기력하게 떠나보내고 난 지금, 그는 인간이란 바로 그 어리석고 쓸 모 없고 가식적이고 더럽고 위선적인 사랑을 갈망하고 그것에 힘을 얻어 살아가는 동물이라는 것과, 자신도 결국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걸 뼈 저리게 깨달았다. '…조금만 기다려 줘. 나도 훗날 네가 있는 곳으로… 갈 테니까…' 단 한 번 보고 평생을 그리워하는 사랑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보다. 예안을 만난지 불과 며칠도 채 되지 않았지만 이미 그녀의 존재는 진우 의 마음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운 상처로 각인되고 말았으 니까. 마침내 예안의 모습이 완전히 어두운 세계로 사라지고 나자 진우는 천천 히 몸을 돌렸다. 울컥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느꼈다. 떨어지지 않는 발 걸음을 힘겹게 한 걸음 떼어놓으려 하니,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만 같았다. '아프다…' 이게 아픔인가? 이게 슬픔인가? 이것이 고통인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 면서 느꼈던 열등감과 비애 그리고 억울함은 지금 그 애를 떠나보내며 겪는 이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투정에 불과했구나. '예안아!' 갑자기 진우는 목청이 터지도록 외치며 그녀가 사라진 어두운 공간을 향 해 미칠 듯이 뛰어들었다. 하지만 한 번 잠기면 다시는 열리지 않는 육 중한 철문과도 같은 '단절'은 그에게 이제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볼 수 없다는 절망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다. 그는 비틀거리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생전 처음으로 두 손을 모았다. '신이여, 지금껏 한 번도 당신을 믿어본 적이 없는 내가 지금 당신에게 기도합니다. 그 애를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내 생명, 내 영혼, 나의 모든 걸 바쳐서라도 그 애를 다시 보고 싶습니다… 무엇이든 할 테 니 제발…'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맞잡은 진우의 두 손을 타고 차마 마주볼 수 없는 절박한 비애가 흘러내렸다. '나의 모든 걸 당신에게 바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나 대신 그 애를 살려주세요 제발…' 여전히 대답은 없다. '제발…' 대답은 없다. '제발…'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다. 단 지 그 어떤 바램도 이루어지지 않을 거란 침묵만이 절망이란 이름 아래 들려올 뿐이다. '내, 내가 이렇게 기도하잖아! 당신에게 기도하잖아! 근데 왜! 어째서 내 소원을 안 들어주는 거야! 당신은 단 한 번도 내 소원을 들어준 적 없잖아! 이번 한 번만, 제발 이번 한 번만 내 소원을 들어달란 말이야!'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절박한 외침이 어두운 공간에 가득 울려 퍼졌지만 끝내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진우는 오랜 이별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과 예안을 갈아놓은 경계선을 뛰어넘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서서히 힘겨운 현실 속으로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서히 밝은 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실험실 침대에 누워 있던 여자는 눈동자를 덮은 눈꺼풀 사이로 비치는 하얀빛에 조금씩 깊은 잠에서 깨어 나기 시작했다. "…." 눈부신 실내 조명을 받아 붉은 색으로 빛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활기에 찬 생명력을 신비하게 내뿜었다. 백합처럼 순결한 하얀 살결과 매력적인 붉은 입술 그리고 타오르는 불꽃처럼 정열적인 붉은 색 머리카락이 극도 의 조화를 이루어 이 세상 같지 않은 아름다움을 어깨 아래로 흘려 보내 고 있었다. 여자는 눈을 깜박였다. "여기가 어디지?" 주위를 둘러보니 생전 처음 보는 방이었다. 넓이는 약 100평 쯤이나 될 까. 만들어진 목적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첨단 기기들과 대형 컴퓨터로 뒤덮인 이 방에 도대체 왜 자신이 누워 있는지 그녀는 한참이 지나도록 깨닫지 못했다. "꿈이…아니었구나…" 신이 나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깨어나기 전에 그 모든 게 꿈이었기를 간절히 빌었지만 그것 역시 안 되는 건가. 그녀는 천천히 손 을 들어 자신의 뺨에 묻은 눈물 자국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꿈이 아니었어…" 그 모든 건 꿈이 아니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그 이별의 순간도, 절박 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그 절망의 순간도, 이별의 완성을 알리는 현실로의 회귀가 시작되던 그 비애의 순간조차도. 그 모든 게 꿈이 아니었다. 정말 아니었다. "어라? 내가 머리카락이 이렇게 길었던가?" 그제야 자신의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온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어리 둥절한 표정으로 결 고운 머리카락을 아무 생각 없이 만지작거리다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 이건 내 몸이 아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이게!"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는 벽에 걸려 있는 대형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은 그녀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맹세한 사람의 얼굴과 몸이었던 것이 다. "예, 예안아…" 자신의 몸이 바뀌었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의 충격보다는, 살아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만날 수 없으리라 여기고 절망하고 슬퍼했던 연인 과 이렇게와도 함께 할 수 있다는 행복이 그를 도취시켰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예안의 몸에 깃들여 살아갈 수 있으리란 건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 이렇게 예안의 모든 걸 가질 수 있 고 또 그녀에게 자신의 모든 걸 줄 수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를 슬픈 행복감에 젖어들게 했다. "아하하…" 행복했다. 이렇게나마 예안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행복 했다. 비록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그녀가 짓는 귀여운 미소를 영원히 볼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이렇게 그녀가 남긴 모든 걸 가지지 않았는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신이여… 감사합니다…" 서예안, 아니 그녀의 몸에 자리잡은 진우는 '이 세상에 그딴 건 없어!' 라고 여태껏 믿어왔던 신에게 처음으로 감사했다. 이제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영원히 예안이 남긴 몸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고, 죽어서는 그녀 의 영혼에게 오래 오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함께 할 수 있을 것 이다. 이것으로 살아 있는 동안 다시 한 번 예안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진우 의 소원은 결국 이루어졌다. "근데 여기가 어디지?" 비록 영혼이 없는 반쪽짜리이기는 해도 이제 살아 있는 동안 유젤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고 죽어서는 완전한 인연을 만들 수 있을 거란 감 격에 젖어 있었던 건 그다지 길지 않았다. 비로소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진우, 아니 예안(비록 껍질뿐이기는 해도)은 자신이 갇혀 있는 이 곳이 어딘지 궁금했다. "아까 그 빌어먹을 개자식들이 나하고 예안이를 여기로 끌고 온 건가?" …청초해 보이는 미소녀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과는 전혀 딴판인 걸출한 말투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비록 껍데기는 저래도 알맹이는 시커먼 남자나 마찬가지니.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고민하며 이리저리 뚜벅이던 예안은 무심코 문 옆의 달린 감광 장치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문이 스르르 열렸다. "어라? 잠가 두지 않았네? 설마 내가 깨어날 줄 상상도 못한 거야?" 약간 황당해하던 예안은 '오히려 잘된 거지 뭐.'라고 중얼거리며 조심스 레 방을 나섰다. 지루하게 길기만 한 복도를 걷는 동안 바짝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하품마저 하던 예안은 갑 자기 복도가 끊기고 별천지와도 같은 멋진 자연풍경이 나타나자 입을 쩍 벌렸다. "뭐, 뭐냐 이건 대체…" 조금 과장해서 끝도 없이 넓게 갖가지 멋진 나무들과, 아름다운 꽃을 만 발하게 드리운 식물들이 펼쳐져 있자 예안은 감탄하기보다는 어이가 없 었다. "뭐야? 여기가 무슨 용궁이라도 되는 거야?" 분명 실내일 거라 생각했는데 실내에 저런 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혹 시나 싶어 하늘을 쳐다보니 구름이 한가롭게 떠다니고 있었다. "에… 구름이 떠다니는 걸 봐서 분명 지금이 낮인데, 내가 총에 맞았던 건 밤이었으니…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이제야 겨우 '그러고 보니 난 분명 총에 맞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예안이 몸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거지?'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궁금증에 빠져든 예안은 한참 동안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떠오르지 않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 몰라. 나중에라도 알게 되겠지 뭐. 모르면 뭐 평생 모른 채로 사는 것도 나쁘진 않고. 쓸데없이 피곤해지는 일에 머리를 쓰는 건 딱 질색이 라니까." 예안은 정원을 가로질러야 하나 아니면 빙 돌아가야 하나 고민했지만 이 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자그마치 일주일 동안 죽은 듯이 누워 있더니만 결국 깨어났군. 하여튼 엔젤 너도 그렇지만 박사도 참 신기한 인물이란 말이야. 숨이 멎은 인간 을 되살려 내다니…" 흠칫 하며 뒤를 돌아본 예안은 그대로 얼굴이 굳어졌다. 실내에서조차 답답해 보이는 선글라스를 낀 남자, 바로 자신이 '진우'였을 때 총까지 보여주며 협박했던 인물이자 자신에게 총을 쏜 인물 - 사실과는 조금 다 르지만- 이었다. "빌어먹을 자식아. 내 앞엔 왜 나타났냐?" 설마 저 가냘프게 생긴 미소녀의 잎에서 이런 걸출한 욕이 튀어나올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빼어난 외모나 고운 목소리와 전혀 조화를 이 루지 못하는 욕설에 당황한 선글라스는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이, 이봐, 엔젤. 너하고 난 오늘 처음 만났잖아. 아무리 네가 아직 태 어난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른다고 하지만 그런 욕은 쓰는 게 아니란다. 그리고 도대체 그런 욕은 어디서 배웠니?" 의외로 부드러운 선글라스의 태도에 예안의 눈빛은 한결 누그러졌다…라 는 등의 전개는 절대 일어날 리가 없다! "닥쳐, 생각해보니 그 날 너 따위 더러운 면상을 본 것부터가 참 재수 없었어. 그래, 내 가슴에 탄환을 박아 넣으니 기분이 좋더냐?" 선글라스의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기억을 혼돈하고 있군. 총을 쏜 건 내가 아니라 내 부하였다. 그리고 총에 맞은 건 네가 아니라 널 데리고 있던 그 남자애였지. 부작용으로 인한 혼수상태에서 본 걸 아마도 착각해서 기억하고 있는 것 같군." "뭐?" 이 녀석은 내가 바로 총에 맞은 그 남자애라는 걸 모르는 건가? 무심코 '내가 그 총에 맞은 남자애다!'라고 외치려던 예안은 거의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조금 생각해보니 이 남자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 는지 잘 모르는 듯한데 일단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게 더 유리할 듯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어딘지 궁금하겠지. 여기는 우리 시트날타 한국 본 부의 중심 건물의 제일 중심 지점이다. 중심 건물만 해도 반지름이 약 5km에 달하는 돔형인 데다가 중심 건물의 외벽에서 바깥 담장까지의 거 리만 해도 4km에 이르지. 승인이 없으면 개미 한 마리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경비망이 펼쳐져 있으니 혹 그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해도 탈출 은 시도하지 않는 게 좋아." "시트날타?" 그러고 보니 '유젤'은 자신의 주위 사람들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선글라스가 말한 시트날타라는 건 아마도 그들 집단의 명 칭을 나타나는 건가 보다, 라고 이제 '예안이 된 진우'는 기억 속에 집 어넣었다. "이봐, 선글라스. 당신들 집단 이름이 시트날타냐?" 선글라스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는 아직도 예 안의 말투에 익숙해지지 않는 듯 하다. "그래." "거참, 이름 한 번 웃기네. 이터널 피닉스라든지, 쓰러지지 않는 패왕이 라든지 하는 멋진 이름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시트날타라는 뜻도 모를 괴상한 말이야? 그거 영어 사전에 실려 있긴 한 거냐?" "당연히 실려 있을 리가 없지. 그리고 내 이름은 선글라스가 아니라 마 리오다. 앞으로 마리오라고 불러." 눈이 휘둥그레진 예안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갑자기 배를 쥐며 고통스럽 게 큭큭대기 시작했다. "마, 마리오? 마리오? 푸, 푸하하하!" 마리오는 갑자기 그녀가 웃음을 터트리자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애니 가 급적이면 실수를 해도 이해해주자' 라는 생각은 머리 속에서 지워지고 대신 불쾌함이 차곡차곡 자리를 잡는 걸 느꼈다. "이봐. 남의 이름을 듣고 나서 갑자기 왜 웃는 거지?" "하, 하지만 웃기잖아! 시트날타하는 이름도 웃기지만 마리오… 마리 오… 수퍼 마리오… 선캄브리아 시대에나 유행하던 게임 캐릭터 이름이 라니… 푸, 푸하하하!" 이제야 예안이 웃어젖히는 이유를 깨달은 마리오는 그 모습이 꽤나 귀엽 다 느끼고 저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그러다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을 뒤늦 게 깨닫고 저도 모르게 얼굴이 차가워졌다. "이상한데? 넌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언어 능력과 수학 능력 외 에는 일반 사물에 대한 지식이 거의 주입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영어 사 전 같은 건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르지만 어떻게 수퍼 마리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지?" 정신 없이 웃던 예안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아차 싶었다. "그, 그건 그냥 사람들이 하는 말을 주워 들은 것 뿐이야!" "단순히 수퍼 마리오라는 단어를 주워들은 것도 아니고, 그게 오래된 게 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건 조금 수상한데? 말해라. 도대체 어떻 게 그걸 알고 있는 거냐?" 마리오가 굳은 눈빛으로 추궁하며 자신을 향해 한 걸음을 떼자 불안함을 느낀 예안은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모, 몰라 그냥 주워들었을 뿐…" 잘 모르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예안의 몸이 이 남자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뭐, 뭐냐?' 만약 남자의 몸이었다면 고작 이 정도 기도에 눌리지는 않았을 텐데. 예 안은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며 머리카락이 쭈뼛 쭈뼛 서는 걸 느끼 며 속으로 자신을 꾸짖었다. '마, 말도 안 돼! 내가 고작 이런 자식한테 겁을 먹는단 말이냐?' 구석 벽까지 예안을 몰아넣은 마리오는 새파랗게 질린 그녀의 안색을 잠 시 훑어보더니 훗 하고 웃었다. "그러고 보니 겁을 집어먹은 모습이 꽤나 귀엽군. 하지만 너에게 손을 대는 건 잠시 참아두기로 하지. 지금 막 너의 왕자님이 온 모양이니." '뭐, 뭐?'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잠시 당황했던 예안은 그제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없이 마리오를 노려보고 있는 학자풍의 젊은 남자가 서 있는 걸 발견 했다. 예안으로부터 등을 돌린 마리오는 그 남자에게 친근한 미소를 건 넸다. "여, 박사. 아주 좋아 보이는군. 요 며칠 동안 엔젤이 깨어나지 않았을 때에는 엄청 죽을상이더니 말이야. 사랑하는 님이 다시 건강해지니 기쁜 가? 자기가 싫다고 도망까지 간 여자인데 말이야?" 박사라 불린 청년은 마리오를 무시한 채 뚜벅뚜벅 걸어와 예안의 앞에 마주보고 섰다.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남자의 느닷없는 등장에 잔뜩 긴 장해 있던 예안은 그가 자신의 앞에 바짝 서자 다시 한 번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예안이가… 이 남자도 두려워하고 있는 건가?' 사실 마리오를 앞에 두고 있었을 때와는 미세한 차이가 있는 두근거림이 었지만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차이는 아니었다. "이제 괜찮은 거야, 유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건강을 염려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잠 시 충격을 먹은 듯 아찔해 있던 예안은 저도 모르게 빠르게 고개를 끄덕 였다. "후후. 역시 자신을 태어나게 한 사람에게는 다르군. 날 대할 때와는 전 혀 딴판인 태도잖아. 하지만 박사, 엔젤을 탄생시키는 데 들어간 자금은 모두 우리 시트날타가 지원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는 게 좋을 거 야. 그리고 함부로 엔젤에게 손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엔젤은 너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 시트날타의 소유니까." 마리오의 말 중 '자신을 태어나게 한 사람에게는 다르군'이라는 부분에 서 예안은 순간적으로 이 젊은 청년이 '유젤'을 탄생시켰음을 깨달았다. '이 남자가… 예안이가 말하던 '그 사람'인가?' 자신이 진우이던 시절에 질투를 불러 일으켰던 남자의 얼굴을 호기심 어 린 표정으로 천천히 확인하던 예안은 이윽고 히죽 웃음을 지었다. 그리 고 강한 어퍼컷을 '박사'의 턱에 날렸다. "윽!" 갑작스런 기습에 놀란 박사는 비틀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설마 하니 '박사 님 박사 님'하며 졸졸 그를 따르던 '엔젤'이 재회하자마자 그의 턱에 어퍼컷을 날릴 줄 상상도 못했던 마리오조차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만약 당신을 만나면 한 번쯤 면상을 갈겨주고 싶었어.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니까 잘 기억해 두라구."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예안을 따뜻한 시선으로 쳐다보던 박사는 턱에서 살짝 배어 나오는 피를 슥 훔쳤다. 그리고 마리오가 듣지 못하도록 작게 속삭였다. "다시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가워, 유젤. 널 보내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 라." 마리오가 사라지고 난 뒤 예안은 여전히 따뜻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 는 박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줄곧 노려보다 입을 떼었다. "자, 이제 말해 봐. 웃기지도 않은 이름을 가진 저 개자식은 몰라도, 당 신은 예안이, 아니 유젤을 탄생시켰다는 인물이니 나한테 무슨 일이 일 어난 건지 잘 알고 있겠지?" "…뇌이식을 한 것 말인가?" 혹시나 하고 짐작하던 게 정말이었음이 밝혀졌지만 예안은 결코 밝은 표 정이 아니었다. "역시 그랬군. 이봐, 한 가지 묻겠어. 왜 유젤을 살리지 않고 내 뇌를 이식시킨 거지?" "그 때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 유젤을 살려내기 위해선 같이 실려 온 남자아이의 시체… 아니 죽기 직전인 그 몸에서 가사상태에 빠진 뇌 를 이식시키는 수밖에 없었지." 울컥하며 달려들려던 예안, 아니 '예안의 몸에 깃들인 진우'는 가까스로 자신을 달랬다. "내가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던데 그게 사실이야?" "그래." "그렇다면 이상하잖아. 뇌이식을 했다면 분명 엄청난 대수술일텐데 왜 내 머리에는 흉터 자국 하나 없지? 머리카락도 그대로고 말이야." 잠시 침묵을 지키던 박사는 입을 열었다. "그건 극소형 주사 바늘과 나노 로봇을 투입시켜 남자아이의 뇌조직 중 기억 인자와 인격 인자만 분리해 바늘을 통해 유젤의 머리 속으로 옮긴 다음 재조립하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네가 알고 있는 것처럼 현대 적인 수술로 했다가는 백 번을 시도한다 해도 실패할뿐더러, 다시 깨어 날 가능성은 제로니까. 그것에 대해서 아는 건 나 하나 뿐이니 안심해도 좋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예안은 불쾌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왜 아까 나보고 유젤이라고 부른 거지? 당신이 직접 수술을 했고, 또 당신 밖에 모른다고 하면 아까 나한테 작게 말할 때 날 유젤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었잖아? 그 밥맛 없는 수퍼 마리오가 들을 수 있는 상황 이었다면 모를까." "넌 유젤이니까." 금방 되돌아온 간단한 대답에 오히려 예안이 당황했다. "뭐, 뭐?" "사실이다. 비록 다시 태어나는데 전혀 상관없는 남자아이의 뇌조직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넌 분명 유젤이야." "이, 이봐…" 예안은 기가 막혔다. "난 유젤의 기억은 눈꼽만큼도 갖고 있지 않다고. 당신이 수술을 했다면 알 거 아냐? 이 몸을 움직이는 건 예안이… 아니, 유젤이 아니라 바로 유 진우라는 남자아이의 뇌라구." "그런 것 따윈 상관없어." 박사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유젤이 그 남자아이의 뇌에 대해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 하 나만으로도 너는 충분히 유젤이랄 수 있다. 넌 유젤이야. 그건 그 누가 뭐라고 해도 변하지 않아." 말이 통하지 않는군. 예안은 머리가 조금 아파오는 걸 느꼈다. "좋아, 좋아, 좋아. 내가 예안이, 아니 유젤 본인이라 치자. 그래서 뭘 어떻게 할 건데?" "뭘 어떻게 하다니?" "말 그대로야. 날 유젤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속이고 그대로 맥에 태워 서 세계 정복이나 뭐 그런 곳에 이용할 생각이냐고 지금 묻는 거지." 박사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 생각 따위는 없어. 내가 그 녀석들하고 손을 잡은 건 사도와 인연 을 끊은 뒤 널 다시 만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구할 길이 막막해서였으 니까. 비록 그 녀석들이 어떻게든 널 '혁명'에 이용하려고 하는 모양이 지만 넌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어떻게 해서든 막아줄 테니까." 그리고 박사는 예안을 포근히 안아왔다. 화들짝 놀란 예안은 당황해서 빠져나가려고 애썼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달콤하게 속삭였 다. "사랑해 유젤. 지금은 안 되지만, 나중에 우리끼리 멀리 멀리 도망가 행 복하게 살자." '뭐, 뭐야! 이, 이 녀석 미친 거 아니야?' 아무리 겉모습은 유젤이라고 해도 엄연히 그 몸을 움직이는 건 유진우라 는 인간의 뇌가 아닌가? 그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박사라 불리는 이 남자는 그녀와 유젤을 동일시하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 다. 모니터를 통해 박사가 예안을 깊이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리 오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손에 쥐고 있는 손목 시계는 강한 악력에 이미 전자 기기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릴 정도로 망가 져 버린 상태였다. "남자의 질투는 추한 법이에요, 마리오 클리쳐 세자르반." 고운 여자 목소리에 마리오는 흠칫 놀라 손을 뒤로 숨기며 그녀를 돌아 보았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부서진 시계의 파편이 바닥에 조금씩 떨어 진 모습을 봐버린 뒤였다. "다른 사람이 뭔가를 하고 있는데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놀라게 하는 건 결코 레이디가 할 행동이 아니야. 엘르 크레시오." 엘르라 불린 여자는 그의 속마음을 다 꿰뚫어본다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항상 이 세상 모든 걸 전부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 자신하던 당신에게 도 갖지 못해서 갈망하는 게 생길 거라 상상한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 요?" "웃기는 농담이군, 엘르. 난 내가 갖고 싶어하는 것 중 단 하나도 손에 넣지 못한 게 없다." "하지만 바로 조금 전에 그 갖지 못한 걸 지켜보고 있으셨잖아요? 당신 은 저 여자를 갖고 싶어하지 않았던가요?" "엔젤을 갖고 싶다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다만 박사가 자신의 주제도 모른 채 우리 시트날타 소속인 엔젤을 자신의 것처럼 대하는 게 불쾌해서였을 뿐이야." "흐응, 과연 그럴까요?" 더 이상 상대하기 싫다는 듯 등을 획 돌린 마리오는 다음 순간 엘르가 한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생각이 있으시면 오늘 저녁 만찬에 하얀 궁전으로 오세요. 제가 엔젤을 아주 화려하게 포장시켜서 데리고 가도록 하죠. 마침 제나르 대신께서도 참가하기로 하셨으니 당신이 온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 도 없을 거예요." "제나르 대신께서?" 마리오는 짐짓 제나르 대신이 온다는 말에 흥미를 보이는 척 했지만 엘 르는 그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볼 수 있었다. "네, 그래요. 화려하게 치장한 엔젤의 모습을 즐기면서 제나르 대신과 친분을 쌓는 건 시트날타 남자로서는 더 없는 행운이라 생각되는데, 안 그런가요? 후후, 그나저나 엔젤 같은 미인을 치장하려면 어떻게 코딩해 야 되는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우면서 머리가 아프군요. 하여튼 최 고로 꾸며서 참가시킬 테니 기대하고 계세요." 엘르는 마리오의 대답은 듣지 않은 채 묘한 웃음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떴 다. "젠장…" 다시 배정 받은 조그만 방으로 돌아온 예안은 침대에 무릎을 모은 채 쪼 그리고 앉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아까 박사라는 인물이 한 말이 자꾸만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사랑해. 유젤.' 자신은 유젤이 아니라 유진우임을 몇 번이나 주장해봐도 그는 유젤이라 고만 불렀다. '이제 난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난 더 이상 5년 전의 내가 아니 야.' 내가 유젤이 아니라는 건 당신이 오히려 더 잘 알지 않느냐는 반박에도 그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사랑한다고만 했을 뿐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빌어먹을!" 당장이라도 터지기 직전의 화살처럼 부글부글 끓는 화를 삭이고 있던 예 안은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를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자식! 재수 없는 자식!" 솔직한 심정은 박사가 자신을 유젤과 동일시하는 것에 대한 기가 막힘 따위가 절대 아니었다. 자신만이 사랑해야 하고, 자신만이 사랑할 수 있 다고 생각하는 여자에게 대놓고 거리낌없이 사랑한다 말할 수 있는 박사 가 너무나 부러웠고 그에게 질투가 났기 때문이리라. 유젤은 이미 죽었다. 지금 살아 숨쉬는 유젤은 단지 그녀의 몸을 빌린 유진우란 인간에 불과할 뿐이다. 처음엔 이렇게라도 유젤을 다시 볼 수 있고 앞으로 살아 있는 동안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지만 딱 한 가지 사실에서 '진우'는 박사에서 져버리고 말았다. 바로 그것은 비 록 거짓된 모습일망정 유젤의 모습을 한 여자에게 사랑한다 말할 수 있 는 권리. 그것은 '진우'에게 없다. 이 얼마나 지독한 모순이 아닐 수 있을까. 진우는 유젤과 함께 죽지 않 고 그녀 대신 오래 오래 살기를 선택한 대가로 그녀가 남긴 모든 걸 가 질 수 있었다. 하지만 허상일지라도 유젤에게 사랑한다고 마음껏 말할 수 있는 박사의 권리에 비하면 그건 오히려 너무나 부족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바로 그 때였다. "아름다운 아가씨가 그런 험한 말을 입에 담는 건 좋지 않아요. 그럼 남 자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니까요." 느닷없이 들려온 여자 목소리에 놀란 예안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적 당한 노출이 곁들여진 얇은 드레스를 입은 꽤나 미인인 여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서 있었다. "이런 방에만 갇혀 있는 게 답답하지 않나요, 엔젤?" 이곳에서의 모르는 사람의 친절은 왠지 겁이 나는 것이다. 예안은 더듬 더듬 말했다. "아… 전 별로…" "저랑 같이 밖으로 나가지 않겠어요? 적어도 혼자 방구석에서 청승 떨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듯 한데." "청승이라…" 잠시 생각하던 예안은 결국 '뭐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라는 생각에 그 녀를 따라나서기로 했다. "좋아요." "그래, 그래야지요." 여자는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자의 키는 약 169cm 정도인 예안보다 5, 6cm 정도는 더 큰 것 같았다. "아참, 깜박 잊고 내 이름을 소개 안 했군요. 난 엘르라고 해요. 크레시 오 가문의 차녀라 엘르 크레시오라고 하죠." '분명 한국인은 아닌데 굉장히 한국어를 잘하네? 도대체 어떻게 된 거 지?' 그게 굉장히 궁금했지만 예안은 괜히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라 입을 다물 었다. "저 근데… 왜 저에게 존대를 쓰는 거죠?" 엘르는 갸웃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사실 전 당신들이 만들어낸 피조물에 불과한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 런데 어째서…" 이제야 예인이 한 말 뜻을 알아차린 듯 엘르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후후. 그래요. 당신은 신의 축복을 받아 태어난 인간이 아니라 우리의 목적을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지요. 적어도 주제 파악 하나는 제대로 하고 있군요." 순간 예안은 이 여자가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조금 울컥했 다. "전 '모든 인간들은 평등하고 똑같이 고귀하다'는 말을 신념으로 삼아 살아갈 정도로 이상주의자가 아니에요. 오히려 지극히 냉정하고 현실적 인 여자라 볼 수 있죠. 그러니 당신이 제가 있어 하나의 도구 이상으로 는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하죠." "그럼 왜 존대를 하는 거죠?" 날카로운 말투에서 예안이 기분이 상했음을 느낀 엘르는 묘한 미소를 지 었다. "그건 단순히 제 말버릇이니 그렇게 생각해주세요. 그리고 당신이 도구 로 보인다고 해서 특별히 험하게 대하거나 모욕을 줄 생각 따위는 없어 요. 도구도 도구 나름이죠. 천하고 값싸고 쓸모 없는 물건은 천대받기 마련이지만 아주 귀하고 값진 고급스런 물건은 오히려 사람보다 더 귀하 게 취급받기 마련이니까." 엘르는 예안이 화를 낼 것을 기대하고 재밌다는 미소를 가득 지은 채 그 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화를 낼 듯 어깨를 움찔거리 던 예안의 눈동자는 신기하게도 깊고 넓은 호수처럼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흡!" 갑자기 예안이 엘르를 벽에 밀어붙이며 키스했다. 생각지도 않은 기습에 놀란 엘르는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짧은 시간이 흐르고 입술이 떼어지자 예안은 생긋 웃음과 함께 엘르의 목을 흰 손가락으로 감싸쥐었다. "어때? '도구'에게 입술을 뺏긴 기분은?" "…." 처음으로 엘르의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이건 아니었다. 비록 자신 은 이번이 엔젤을 처음 본 것이긴 해도 그 동안 누누이 엔젤에 대해 귀 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오지 않았던가. 비록 말은 유창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정신연령이 갓난아기나 다름없는 여자아 이. 그게 바로 엔젤이었다. 헌데 이건 무언가? 마치 오래도록 닳고 닳은 세상의 풍파 속에서 자라온 고목과도 같지 않은가? "넌 내 기분을 상하게 했어. 앞으로 나한테서 존대를 들을 생각은 하지 도 않는 게 좋을 거야." 조금 모욕감을 느낀 엘르는 입술을 꽉 깨물다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손 을 번쩍 들어 예안을 때리려 했다. 하지만 예안은 피하지도 겁을 먹지도 않았다. "휴, 제가 졌어요." 언제 화를 냈느냐는 듯 엘르는 한숨과 함께 들었던 손을 다시 내렸다. "태어난지 이제 겨우 이주도 안 된 여자애가 뭘 알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과연 뉴 타입, 평범한 인간들이나 우리 시트날타하고는 그 근본부터가 틀린 종족…"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무슨 뜻이지?'라고 물어보려던 예안은 그 만두었다. 그래도 자신에게 가장 호의적인 인물은 박사뿐이니 나중에 그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더 좋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근데 당신은 지금 날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거지?" "그전에 이것부터 좀 놓아주지 않겠어요? 같은 여자끼리 이런 야릇한 포 즈를 연출하는 건 그다지 좋지 않다고 생각되는데요. 난 적어도 여자한 테 스킨쉽을 받고 기뻐할 정도로 이성연애를 혐오하는 사람이 아니거든 요." "아참." 그제야 예안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머쓱하게 엘르의 목을 감싸쥔 손을 떼었다. "오늘 저녁 하얀 궁전에서 제나르 대신께서 참석하시는 만찬회가 있어 요. 그러고 보니 당신은 제나르 대신을 잘 모르겠군요. 그 분은 우리 시 트날타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5인 중 한 분이세요. 이해가 됐나요?" "대충 이해는 됐는데, 내가 왜 거기를 가야 한다는 거지?" 엘르는 너무 당연한 걸 묻는다고 말하고 싶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당신의 바로 파티의 주인공이니까요." "어째서?" "엔젤.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당신을 탄생시키는데 들어간 비용은 미화 로 500억 달러, 한 화로 5조 원이 넘는 액수랍니다. 쉽게 말하자면 당신 은 우리 시트날타의 인원 몇 백, 몇 천 명의 목숨과도 맞바꿔서 지킬 가 치가 있는 소중한 '귀중품'이라는 거죠. 이번 만찬은 당신의 탄생과 도 망친 당신을 다시 무사히 사로잡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을 축하하기 위한 거죠." "그거 굉장히 기분 나쁜 발언이네. 흐음…" "당신을 사로잡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을 축하한다는 건 그냥 숨은 의미 니까 특별히 신경 쓸 것 없어요. 주목적은 당신의 탄생을 축하하는 거니 까." 잠시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던 예안은 다시 툭 내던지듯 물었다. "내가 이 안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냐?" 여자애답지 않은 거친 말투에 잠시 얼떨떨해 있던 엘르는 가볍게 헛기침 을 하고 대답했다. "무, 물론 당신이 이 안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절대 없지요. 마리오나 김윤우 박사에게서 이미 들었으면 잘 아시겠지만, 당신에게 허 용된 범위는 이 중심 건물 안쪽까지입니다. 그 밖으로 당신은 절대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어요." '박사의 이름이 김윤우던가?' 한국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는데 어째서 이름은 한국식인 걸까. 예안은 곰곰이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좋아. 한 가지만 더 물어보자. 당신들은 그런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서 날 만들었다고 했는데 도대체 뭐하려고 그런 거냐?" 이건 '유젤'이 살아 있을 때부터 '진우'가 가장 궁금하게 여기던 사항이 었다. "자세한 건 지금 말해줄 수 없지만, 바로 혁명을 위해서죠. 당신은 우리 의 혁명을 이뤄줄 소중한 도구니까요." "혁명?" "후후, 더 이상은 묻지 말아요. 아무리 당신이 보채고 조른다 해도 말해 줄 수 없는 문제니까." 예안은 씩 웃으며 입고 있던 반바지에 손을 넣은 채 뒤로 천천히 한 걸 음씩 물러섰다. 예안이 뭘 하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던 엘르는 갑자기 그녀가 주머니에서 날이 번쩍거리는 나이프를 꺼내자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뭐, 뭐하는 거예요! 도대체 그 무기는 어디서 났죠? 당신에게 무기 지 급은 허락되어 있지 않을 텐데…" "아, 이거? 여기에 잡혀온 뒤 처음에 눈을 떴을 때 그 방 한 구석에 아 무렇게나 놓여져 있던데? 박사라는 사람한테 물어보니까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어서 굉장히 날이 잘 든데. 한 번 그 날카로움을 시험해보고 싶 지 않아?" "허튼 짓 하지 말고 제발 그걸 이리 내놔요. 이래뵈도 난 '에날도스'를 쓸 수 있는 헤이져 중 한 명이에요." "그게 뭔데?" "그, 그건…" 예안은 엘르가 창백한 안색으로 에날도스가 무엇인지 설명하려 하자 손 을 가볍게 들어 저지했다. "아,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돼. 어차피 별로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빨리 칼을 이리 내놔요! 당신은 나에게 손 하나 댈 수 없어요! 다 쓸데 없는 짓이라구요!" "글쎄, 쓸데없는 짓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예안이 칼을 천천히 들어올리자 엘르는 그녀가 자신에게 칼을 집어던질 것을 우려해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예안은 엘르를 공격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예안은 칼날을 들어 자신의 흰 목줄기에 바짝 갖다댔다. "내가 죽는다면? 당신들에게 이용당하기 싫어 내가 죽는다면 어떻게 되 는 거지?"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설마하니 이런 전개가 펼쳐질 줄 상상도 못했던 엘르는 무의식적으로 시 트날타의 인물들에게만 허락된 힘, '에날도스'를 내부에서부터 급히 끌 어올리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끌어올려진 힘은 엘르의 머리카락에서부 터 시작해 천천히 몸 전체에 붉은 색 오오라를 피워냈다. 예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이제 보니 당신 무슨 초능력 같은 걸 쓸 수 있는 거야? 혹시 그 게 에날도스니 뭐니 하는 그 힘인가?" "비록 지상세계에서는 저항이 심하긴 해도, 나 정도면 어느 정도의 에날 도스는 쓸 수 있어요. 빨리 그 칼을 내려놔요!" 다급한 엘르의 태도가 흡족한지 예안은 생긋 웃었다. 천진난만하고 귀여 워 보이는 미소였지만 섬뜩한 칼날을 스스로 목줄기에 겨누고 있는 여자 애가 웃고 있는데 침착하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리라. "날 여기서 내보내 줘. 그럼 이 칼은 치우지." "그, 그건 말도 안 되는 요구예요! 절대 들어줄 수 없어요!" "그럼 그냥 눈 딱 감고 죽지 뭐. 어차피 맥을 조종한 후유증에 비하면 별로 아프지도 않을 텐데." 예안이 정말로 자신의 목줄기를 찌르려 하자 엘르는 성급히 에날도스를 사용해 그녀의 칼을 뺏으려 했다. 하지만 자칫 저항이 심한 이곳에서 무 리하게 힘을 사용했다가 오히려 빗나가 버리면 큰일이기에, 엘르는 창백 한 안색으로 예안을 다시 한 번 설득했다. "제, 제발 그만 둬요!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자유말고는 그 무엇이든 우 리가 줄 수 있어요! 황금이든 반지든 장신구든 몇 백 캐럿짜리 다이아몬 드든 뭐든 다 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자살만은…" 만약 눈앞에 있는 사람이 예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같잖은 협박 하지 마세요.'라고 싱긋이 비웃어 주었을 테지만 상대는 태어난지 이주 도 채 되지 않은 아기나 다름없다. 아기의 가장 큰 특징이 뭔지 아는가? 그건 바로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예안의 몸에 깃들여 살고 있는 건 '나름대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17살의 유진우라는 남자'였다는 걸 엘르가 안다면 절대 이런 헤프닝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에… 이봐." 금방이라도 스스로를 찌르고 죽을 것 같았던 예안이 갑자기 칼을 내리며 묻자 엘르는 안심하면서도 황급히 대답했다. "왜, 왜요? 역시 막상 죽으려고 하니까 겁이 나죠? 거봐요, 아무리 당신 이 태어난지 얼마 안 됐다고는 해도…" "나 애초에 죽을 생각 따위 없었어." 엘르는 약간 멍해졌다. "네?" "당신이 바보같이 속은 거라구. 내가 죽긴 왜 죽냐? 아직 앞날이 창창한 데. 자유를 빼앗겼으면 나중에 어떻게 해서든지 되찾으면 그만이라구. 당신이 속은 거야." 사뿐히 칼을 주머니 속에 다시 넣은 예안은 생긋 웃음과 함께 멍청하게 서 있는 엘르의 손을 잡아끌었다. "뭐해? 안 가? 나 어디로 데려간다며?" 자신이 태어난지 이주도 채 안 된 아기에게 속아넘어갔다는 사실에 커다 란 충격을 받은 엘르는 멍하니 서 있다 겨우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얼 떨떨한 기분은 한참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 아, 예… 그러죠." 어느새 예안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특제 칼'에 대 해 까맣게 잊어버린 엘르는 멍하니 그녀를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아참, 근데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줄 수 있다는 말 사실이지?" 엘르는 아직도 얼떨떨한 상태였다. "예? 아, 예… 우리의 재정이 허락되는 범위 안에서는 뭐든지요. 아마 전투기가 탑재된 항공모함까지도 무난히 갖고 놀 수 있을 거예요." 별 흥미 없이 던진 질문이 엄청난 대답으로 짠! 하고 바뀌어 되돌아오자 예안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뭐, 뭐? 항공모함? 설마 세계에서 가장 큰 엘가와 급도 줄 수 있다는 거야?" "예. 물론 갖고 놀려면 우리의 감시가 있어야 하겠지만… 그리고 당장은 안 되겠지만…" 엘르는 뭔가가 이질적이다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지만 그게 무엇인지 구 체적으로 파악할 순 없었다. "엘가와 급도 줄 수 있다면, 페너트레이트 시스템이 부착된 이지스함-3 도 줄 수 있다는 거지?" "예? 아, 아마도요." "인공위성 요격 시스템이 부착된 FAD-3 전투기도?" "아, 아마도요." "전파 추진식 어뢰 PT2ER-1도? "…아마도요." 차마 저렇게 흥분해서 눈까지 반짝이며 물어보는데 '아직은 위험하니까 그에 해당하는 돈이라면 몰라도 병기 그 자체를 줄 수는 없다'라고 대답 해줄 수 없었던 엘르는 그렇게 얼버무렸다. "훗, 거짓말." 조금 전까지 흥분한 사춘기 소녀는 갑자기 어딘가로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입가에 머금은 차가운 냉소가 소름끼치게 아름다운 여자가 서 있었다. 엘르는 뭔가 이건 아니다, 라는 기분과 함께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엘가와 급 항공모함이나 패너트레이트 시스템이 부착된 이지스함-3, FAD-3 전투기나 PT2ER-1 어뢰 같은 건 있지도 않아. 내가 방금 지어낸 이름이라구." "예, 예?" 그제야 그녀가 또 한 번 자신을 놀린 거라는 걸 깨달은 엘르는 저도 모 르게 그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 장난은 이제 그만 치고 빨리 가던 데나 가자." 예안이 다시 자신의 손을 잡아끌자 엘르는 멍하니 그녀를 뒤따라갔다. 아직까지 그녀는 예안으로부터 느껴지는 불길한 이질감이 무엇인지 깨닫 지 못했다. '으악,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예안은 잔뜩 붉어진 얼굴을 엘르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앞장서서 걸었다. 혹시나 귀밑까지 붉어져 엘르에게 들키면 어떻게 하나 생각하는 걱정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들키면 끝장이야!' 만약 그랬다가는 기껏 손에 넣은 주도권을 다시 엘르에게 뺏기고 말 것 이다. 예안은 절대로 자신이 부끄러워한다는 걸 엘르에게 들키지 않으리 라 결심했다. '내가,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아무리 겉모습은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반사하는 매끄럽고 보드라운 흰 눈 위에 외로이 피어 있는 한 떨기 청초한 백합과도 같은 미소녀라 하나(수 식이 너무 화려하지만 참고 들어주길) 실제 그 알맹이는 여자 손 한 번 제대로 못 잡아본 쑥맥이자 화려한 동정남이었다. 정말 여자 손 한 번도 못 잡아봤는지는 뭐 '진우'만 알 테지만 동정인 건 확실하니 대충 넘어 가자. 그냥 욱하는 심정에 그만 엘르의 입술을 훔쳐 버리고, 쑥스러움을 무마 시킨답시고 폼 잔뜩 잡고 '어때? 도구에게 입술을 뺏긴 기분은?'라고 멋 들어지게 말했다지만 그 순간이 지나가고 나니 터질 듯이 심장이 두근거 리고 얼굴이 붉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 미안해 예안아.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그렇게 해버렸어.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 글쎄. 본인은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동정남의 시커먼 그 속을 도대체 누가 알겠는가. 어쨌든 아니라고 하니 그냥 넘어가는 게 좋겠다. "그런데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는 거지?" 침묵을 지키던 예안이 입을 떼자 엘르는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에 제가 머무는 처소가 있어요. 일단 거기로 가서 당신을 치장시킬 까 해요." "치장?" 예안은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었다. "예.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선 당연히 치장을 해야 하지 않나요? 아, 당 신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여자의 그런 부분에 관해서는 백지나 마 찬가지겠군요. 처음에는 조금 답답하겠지만 익숙해지면 괜찮을 테니 걱 정하지 마세요." '치장이라…' 예안은 끊임없이 머리 속으로 이곳에서 탈출할 방법을 궁리했다. 이 사 람들이 자신을 쉽게 해칠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단 일 초라도 이곳에 있 긴 싫었다. 누군가에게 협박당하거나 뭔가를 강요당하는 건 '진우'였던 시절에도 질색하던 것이었다. 예전에 깡패 세 명에게 둘러싸여 돈을 줄 것을 요구받았을 때에도 십 원짜리 하나 뺏기기 싫어 온몸이 얻어터지도 록 싸운 전적도 있을 정도니. 참고로 그 때 그 깡패들은 전부 다 소년원 으로 갔다. '일단 갖고 있는 무기는 탈출하는데는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는 그저 비 싸기만 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칼이 전부야. 적어도 권총… 아니지, 아니 야, 소총하고 수류탄 정도는 있어야 해. 하지만 소총은 몰라도 수류탄이 이런 건물 안에 있을 리가 없잖아? 제길…" 탄약고 같은 게 어디쯤에 있는지 알면 좋을 텐데. 하지만 물어본다 해도 그들이 대답해 줄 리는 없다. 오히려 수상하게 여기고 한층 더 감시를 강화하는 거라면 몰라도. "여기예요." 엘르가 안내한 '자신의 처소'에 도착한 예안은 그만 어이가 없었다. 그 저 적당한 크기의 방 하나를 상상했던 예안은 눈앞의 5층짜리 화려한 건 물을 보고 그만 굳어버렸다. "뭐, 뭐야? 우리가 방금 있던 곳 중심 건물의 제일 가운데 아니었어? 내 가 알기로 중심 건물은 반지름이 5km인 돔형이라 들었는데? 우리가 얼마 나 걸었다고 벌써 밖에 나왔단 말이야?" "착각하고 있었군요. 시트날타 한국 지부인 이곳은 크게 바깥 외벽과 방 어망이 갖춰져 있는 방어 건물, 그리고 그 안쪽의 여러 가지 연구소와 주거지로 형성된 중심 건물로 이뤄져 있어요. 그 연구소들과 주거지를 전부 합쳐서 중심 건물이라 부르는 거지, 건물 하나에 통째로 다 들어 있는 게 아니에요." "여기가 당신이 머무는 곳? 당신 그렇게나 높은 사람이었냐?" "말하지 않았던가요? 나는 헤이져라고." '그딴 게 무엇인지 내가 알게 뭐냐?'라고 대답하려던 예안은 최대한으로 상냥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지금으로선 조금이라도 이들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게 탈출을 위해서 좋았다. "헤이져라는 게 뭔데? 말해줄 수 있냐?" "역시, 갓 태어난 아기답게 왕성한 호기심이로군요. 좋아요, 기꺼이 대 답해드리죠." 굳이 갓 태어난 아기가 아니라 해도 시트날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 반 민간인이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충분히 궁금해할 테지만. 어쨌든 엘르 는 입을 열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공간은 둘레가 수만km가 넘는 거대한 구형의 땅덩어리죠. 그걸 우린 지구라고 불러요." '그, 그건 나도 알아!' 쓸데없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로 시간 잡아먹지 말라고 핀잔주려던 예 안은 가까스로 참았다. 지금의 자신은 태어난지 이 주도 채 되지 않은 갓난아기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의 수는 자그마치 백 억이 넘죠. 엔젤 당신은 박 사가 실시한 지식 주입 요법으로 이미 수학에 대해서만큼은 세계에서 둘 째가라면 서러울 실력을 갖추고 있지만 백 억 명의 인간이 얼마나 대단 한 숫자인지는 실감이 나지 않을 거예요." '예안이가 그렇게 수학을 잘했던가?' 혹시나 싶어 머리 속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수학 중 가장 수준 높은 게 뭔지 떠올려 보니 역시나 4차 함수가 전부였다. 쓸데없는 기대를 잠시 했었던 예안은 부끄러움에 그만 속으로 얼굴을 붉혔다. 참고로 '진우'는 고1 입학한지 일주일도 채 못 다니고 이곳으로 잡혀왔다. 4차 함수까지 밖에 모르는 게 그다지 이상한 건 아니란 소리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근력 이외에는 아무런 물리적 힘을 낼 수 없지만 그 중 아주 적은 확률로 태어나는 극소수의 초능력자들은 ESP라는 특수한 힘을 낼 수 있죠. 물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일 테지만요." "나?" 깜짝 놀란 예안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설마 어 렸을 때 TV에서 보던 것처럼 손을 쭉 뻗으면 장풍이 나가고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예안은 한 번 시험삼아 손을 뻗어봤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 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마. 아무 일도 안 생기잖아." 예안이 투정 부리듯이 그렇게 말하자 설마하니 그런 꼴사나운 시늉을 연 출할 줄 상상도 못했던 엘르는 그만 헛기침을 했다. "흠, 흠. 당신도 참 재미있는 여자로군요. 어쨌든 설명은 계속하죠. 우 리 시트날타는 천부적으로 모두 다 그런 초능력을 갖고 있지만 사람마다 생김새와 지능이 다 다르듯 초능력의 크기도 마찬가지예요. 게다가 우리 에게 허락된 땅이 아닌 다른 곳, 예를 들면 바로 이런 곳에서는 초능력 이 발동되지 않아요. 우리는 그걸 전자파의 영향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 정확한 원인은 밝혀내지 못했어요." "그럼 당신은 이곳에서 초능력이라는 걸 못 쓴다는 소리야?" "아니, 그건 아니에요. 적은 수지만 시트날타의 인물들 중 허락되지 않 은 영역에서도 초능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있죠. 비록 저항이 심하긴 하지만요. 우리는 그들을 가리켜 헤이져라고 불러요. 그리고 우리 시트 날타만이 가진 그 초능력을 에날도스라고 부르죠." 결국 간단히 한 마디로 압축할 수 있는 걸 가지고 이렇게 길게 끌었단 말인가. 예안은 조금 짜증이 났지만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지금 당신은 어느 정도 힘을 낼 수 있는데?" "저항이 심해 그렇게 많은 힘은 낼 수 없지만 소형 기중기 정도 힘은 낼 수 있어요. 전 염동력이 특기랍니다." 예안은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뜨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원, 쓸데없이 비싸 보이기만 한 짧은 다이아 몬드 칼 한 자루 갖고는 도저히 상대도 안 되지 않은가? 말이 소형 기중 기지, 어린 여자아이에 불과한 지금 상태에서는 만약 엘르 혼자만이 자 신을 감시하고 있다 해도 탈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안에는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 헤이져라는 것들이 득실 거린단 말이야?' 끊임없이 탈출의 가능성을 이리저리 저울질해 보던 예안은 마침내 깊은 한숨과 함께 한동안 탈출을 보류하기로 했다. 엘르의 처소로 끌려 들어가다시피 한 예안은 '치장 전용 방'이라는 공포 의 방에서 무려 두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 동안 씻기고 입혀지고 보 기만 해도 머리가 아플 것 같은 갖가지 장신구와 살아 생전 입을 줄 전 혀 몰랐던 치마라는 것도 걸쳐보고… 하여튼 별 수모를 다 당한 끝에 겨 우 풀려날 수 있었다. 엘르는 치장을 마친 예안을 보고 마치 소녀처럼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와우, 역시 꾸미니까 더욱 더 아름다운데요. 역시 뉴 타입, 당신의 미 모를 따라잡을 수 있는 인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군요." '으윽, 죽이려고 했지만 예쁘다고 하니까 봐준다…' 두 시간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채 메이드에게 자신을 장난감처럼 맡겨놓은 엘르를 보기만 하면 '내가 무슨 애완견이냐!'라고 외치려던 예 안은 아름답다는 칭찬에 가까스로 화를 눌러 참았다. 그걸 자기 자신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에 대한 칭찬이라 생각하고 그냥 참기로 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예안이는 정말… 예쁘구나…' 대형 거울 앞에 선 예안은 약간 침울한 표정으로 거울 속의 자신의 모 습, 아니 자신을 덮고 있는 유젤의 육체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하늘거리는 파란색 바탕의 드레스는 간간이 수놓여져 있는 흰 레이스와 함께 허리까지 드리워진 정열적이고 탐스러운 붉은색 머리카락으로 극도 의 조화를 이루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아름다움을 흩뿌리고 있었 다. 티 하나 없이 설원처럼 매끄러운 투명한 흰 피부는 갸름하고 얇은 턱선을 따라 백옥처럼 찬란한 빛을 흘려 보냈다. 정말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아름다움이었다. 이것 역시 '엔젤'이 인위 적으로 탄생된 인간이기 때문일까. '한 번쯤은 너의 이런 모습… 이렇게 거울이 아니라 진짜 내 몸의 눈을 통해서 보고 싶었는데… 이제 그건 영원히 안 되겠지?' "자, 이제 그만 하얀 궁전으로 가죠. 슬슬 파티가 시작될 시간이니까." 물끄러미 서 있던 예안은 순간 파티에 가면 다른 남자들이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볼 것이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러자 참을 수 없는 질투가 일 어났다. 자신말고 다른 남자들이 '유젤'의 이 모습을 즐길 거라 생각하 니 강한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그건 싫어! 나말고 다른 녀석들이 예안이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절대 싫어!' 그건 어울리지 않는 질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현재 깃들여 살 아가고 있는 '유젤'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몸으로써 사랑하고 싶어하는 '진우'의 영혼은 질투의 화신으로부 터 벗어날 수 없었다. "다른 옷을 줘. 이 옷은 싫어." "예? 왜요? 이렇게 아름답기만 한데." "다른 옷을 줘. 이 옷은 싫다니까." 어쩐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예안의 목소리에 엘르는 가만히 고개를 갸웃하다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다는 의미의 제스쳐였다. "알았어요. 메이드에게 부탁해서 다른 옷을 갖다 주도록 하죠. 어떤 스 타일의 옷을 원하세요?" "…체육복." 순간 엘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예? 지금 뭐라고 했어요?" "체육복. 추리닝 말이다. 가능하면 남색 바탕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긴 바지 긴소매였음 좋겠어." 엘르는 문득 꼴사납고 촌스런 추리닝을 입은 엔젤의 모습을 한 번 상상 해보았다. 그걸 입고 생일 파티장이나 다름없는 하얀 궁전에 간다고?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차림인가! "안 돼요.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절대 안 돼요. 같은 여자로서 도저히 허 락할 수 없어요." "…그럼 아무거나 대충 촌스러운 거 찾아 줘라. 명심해라. 세련된 건 절 대 안 돼. 누가 봐도 웃길 정도로 최대한 촌스러운 옷이어야만 해." "이상하군요. 왜 이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지요?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거울만 봐선 모르겠어요? 아무리 본바탕이 예쁘다고 해도 촌 스런 옷을 입으면 미색이 죽어버리기 마련이라구요. 차라리 누더기 옷이 낫지, 어떻게 추리닝 입을 생각을 다 할 수 있죠?" 예안은 반항적으로 대답했다. "싫으니까. 나 말고 다른 남자들이 내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절대 싫어." "그 말은 무슨… 아!" 어리둥절해하던 엘르는 알았다는 듯 감탄의 소리를 냈다. "대충 알았어요. 박사말고 다른 남자들에게 이런 멋진 옷차림을 한 모습 을 보여주긴 싫다 이거죠? 후후, 만약 당신에게 결혼할 자유가 주어진다 면 남편에게 꽤나 사랑 받겠군요." "뭐, 뭐? 그, 그럴 리가 없잖아! 갑자기 박사 이야기는 여기서 왜 나오 는 거냐!" 엘르가 천부당만부당할 오해를 하고 있음을 깨달은 예안은 소스라치게 놀라 해명하려 했지만 그녀는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알았어요. 그렇다면 메이드에게 시켜 대충 중성적인 옷을 보내드리도록 하죠. 아, 하지만 가벼운 귀걸이 같은 장신구는 하는 게 좋겠어요. 당신 을 위해 꽤 많은 돈을 쏟아 부어 유명 명품만 사다놓은 제 성의를 봐서 라도 말이에요." 엘르가 그렇게 말하고 그대로 나가려 하자 예안은 질질 끌리는 드레스를 간신히 지탱하며 허둥지둥 그녀의 옷을 간신히 붙잡았다. 그리고 외쳤 다. "가기 전에 내 말은 듣고 가라니까! 나하고 박사는 절대 그런 사이가 아 니란 말이다! 도대체 밥맛 없는 선글라스도 그렇고 너도 그렇게 왜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는 거냐!" "선글라스? 누구를 말하는 건가요?" "맨날 칙칙한 선글라스만 끼고 다니는 녀석 말이야! 이름이 마리온지 뭔 지 하는 녀석!" "마리오 클리쳐 세자르반이에요." "하여튼! 그 녀석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게 왜 그딴 식으로 생각하는 거 냐! 누구 미치게 만들 일 있냐!" "알았어요, 알았어요. 그렇다고 해두죠." 엘르는 마치 갓난아기를 다루는 어머니처럼 아주 능숙하게 예안의 고집 을 받아넘겼다. 하지만 방문을 나서기 전에 한 마디 남기는 걸 잊지 않 았다. "내숭도 참." "죽고 싶어!" 터질 듯한 예안의 고함 소리가 고막을 때리기 전에 엘르는 잽싸게 혀를 한 번 내밀고는 방문을 닫았다. "저게 정말…" 차마 불편한 옷 때문에 따라나서지는 못하고 씩씩거리기만 하던 예안은 다시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거울 속에는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아름 다운 모습의 여자가 황홀하게 서 있었다. 자신이 한때 제일 좋아했고, 이제 허상 이외의 다른 모습으로는 만날 수 없게 되어 버린 여자의 소름 끼치게 아름다운 모습을 손가락으로 훑어보던 예안은 문득 눈시울이 뜨 거워지는 걸 느꼈다. "예안아…" 넓은 방안에는 침묵만이 가득 떠다녔다. 예안은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내 어 자신이 사랑한 사람에게 지어준 이름,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영원히 사용해야 할 이름을 불러보았다. "서예안…" 알 수 없는 뭔가가 가슴속에서 울컥 끓어올랐다. 유젤의 가장 보고 싶어 했던 모습을, 이제 내가 유젤이 되어 거울을 통해 본다는 기가 막힌 사 실은 감지할 수 없는 슬픔을 흐트러뜨렸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렇게나마 유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신께 감사했지만 바로 지금 이 기분은 도대체 무언가? 이것이야말로 '진우'가 예전에 그토록 질색했 던 이중적인 이기심이 아니던가? "조금만… 아주 조금만 익숙해지자." 하지만 적어도 우울한 이 기분이 사라지기 전까지만이라도 솔직하게 모 든 걸 받아들이자. 아주 조금만 솔직해지자. 그렇게 예안은 속으로 중얼 거렸다. "여기 옷 가져왔습니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흠칫 놀란 예안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메이드 차림을 한 여자가 엘르가 보낸 것이라 생각되는 옷을 받쳐들고 서 있었 다. "엘르가 보낸 거냐?"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예안이 반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메이드는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았다. 감정 절제를 잘 하도록 교육된 메이드인 모양 이다. "고맙게 받도록 하지." 옷을 받아들고 펼쳐 보니 여자나 남자 둘 다 입을 수 있도록 중성적인 느낌으로 디자인된 옷이었다. 물론 우락부락한 남자가 입으면 그다지 어 울리지는 않을 복장일 테지만. "아참, 카메라 같은 거 구할 수 있으면 하나만 갖다 줄 수 있냐? 지금 필요해서 그러는데." "카메라는 어디다 쓰시려고 그러십니까?" "말하기 싫으니까 그냥 구해 와." 어찌 보면 도발이랄 수 있는 예안의 대답에 메이드는 처음으로 미세하게 눈썹을 꿈틀댔다. 눈썰미 평범한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미약한 반응 이었지만 그녀의 반응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있던 예안은 당연히 감 지했다. 그리고 비아냥거렸다. "호오? 내 말을 듣기 싫다는 거냐? 내가 알기로 나한테는 5조가 넘는 돈 이 투자되었다던데? 설마 네까짓 게 5조짜리 '귀중품'보다 더 가치가 있 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메이드의 표정에는 다시 정중한 빛이 떠오르며 고개가 밑으로 살짝 숙여 졌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 따위가 어찌 감히 엔젤 님의 가치에 비교되겠습 니까. 곧 카메라를 가져오겠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불쾌하게 해드린 게 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메이드가 사라지고 난 뒤 예안은 엘르가 새로 보낸 옷을 활짝 펼치며 투 덜거렸다. "쳇. 왜 여기 있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침착한 거야. 도발에라도 좀 넘어오면 어디가 덧나냐?" 일부러 메이드를 도발시켜 싸움이라도 한 뒤 숨겨 갖고 있는 칼로 협박 해서 어느 정도의 탈출 루트를 알아두려던 계획은 결국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던 터라 예안은 오히려 물거품이 된 게 다행이라 여겼다. '그러고 보니 엘르라는 여자는 내가 가진 칼을 뺏을 생각도 안 하네? 짧 은 칼 하나 갖고는 경비원 하나 제대로 제압할 수 없다는 생각에선가? 아니면 내가 칼을 가진 걸 그새 잊어버린 건가?' 그렇게 속으로 다시 탈출에 대해 궁리하고 있을 때였다. "카메라는 어디다 쓰려고 메이드에게 시킨 거죠?" 엘르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입구 옆의 벽에 등을 기댄 채 카 메라를 한 손에 들고 서 있었다. "사진 찍으려고." "예? 무슨 말?" "말 그대로야. 지금 내 모습 사진 찍으려고 그런다. 불만이라도 있냐?" '역시 저 얼굴에 저 말투는 정말 안 어울려.'라고 속으로 엘르는 중얼거 렸다. 도대체 누가 태어난지 이 주도 채 안 된 아기에게 저 따위 거친 말투를 가르쳤는지는 몰라도, 혹시라도 나중에 교육을 받게 하면 그때는 여자다운 말투를 쓰게 해야겠다고 그녀는 다짐했다. "흠? 왜 당신 모습을 찍으려고 그런다는 거죠?"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런다. 됐냐?" 사실은 내가 두고 두고 볼 생각이었지만. 에안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엘 르가 백이면 백 당연히 곡해해서 알아들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 상은 들어맞았다. "호? 설마 박사에게 사진을 들고 쪼르르 달려가서 '박사님 나 예쁘죠?' 라는 닭살 돋는 질문을 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예상한 수준 이상의 놀림이었다. 예안은 그만 울컥 했다. "박산지 판산지 뭔지는 절대 아니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 어!" 엘르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시베리아의 한파처럼 차가 운 표정을 지은 채 예안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누구죠, 그 사람이?" "이… 누군지 네가 알게 뭐야!" 자기도 모르게 겁에 질린 예안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예안이 한 걸음 물러서면 엘르가 다시 한 걸음 다가왔고, 그래서 다시 예안이 또 물러서면 엘르가 또다시 다가왔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다. "말해요. 빨리 말하지 않으면 곤란해지니까." "이…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네가 알게 뭐야!" "우리에게는 심각한 이야기예요. 우리로서는 당신의 행동거지 하나 하나 를 전부 주시할 필요가 있어요. 당신은 5백억 달러 짜리 귀중품이니까." 말하지 않으면 이 여자 내 목을 조를 지도 몰라. 그런 불안감에 휩싸인 예안은 저도 모르게 그만 소리를 질러 버렸다. "유진우다! 유진우! 됐냐?" …자기가 자기 입으로 자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자기 망신인 경 우는 없을 테지만, 이 경우 예안의 알맹이가 유진우라는 걸 아는 인간은 뇌 이식술을 집도한 박사 밖에 없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유진우? 그게 누구죠?" "내가 도망쳤을 때 날 도와준 남자아이 말이야! 네 녀석들이 쏴죽였잖 아! 그것도 모르냐!" 엘르의 표정에 비로소 웃음기가 다시 떠올랐다. 지금 그녀는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호오? 이미 죽은 사람? 그렇다면 오히려 다행이군요. 하지만 정말 의외 인걸요. 태어난지 얼마나 됐다고 당신에게 이성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 기다니. 가능하면 다음부터는 우리 시트날타 내부의 사람을 좋아하도록 해보세요. 전혀 상관없는 민간인과 당신이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우리는 그 남자를 죽일 수밖에 없으니까. 서두르는 게 좋겠네요. 만찬은 오후 3 시부터 시작되니까." 처음으로 예안은 이 여자의 얼굴에 칼자국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 다. 하지만 앞으로를 위해서 속으로 꾹 눌러 참았다. '어디 나중에 두고 보자.' 아직까지 탈출할 방법은 구체적으로 확정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게 있기는 했다. 도박성이 너무 짙은 방법이었지만 여기에 오 래 머무르고 있다가는 이 인간들이 자신을 세뇌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 각에 예안은 그 방법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을 굳혔다. 화려한 파티장은 어딜 봐도 고급스런 자태가 흘러내리는 사람들만이 가 득 우글거리고 있었다. 어린 여자아이에서부터 얼굴에 주름진 나이 먹은 노인들까지 전부. 하다 못해 음식을 나르는 보이들까지 귀티를 잔뜩 내 고 있었다. 이들이 전부 '혁명'을 꿈꾸며 살아가는 시트날타의 당당한 구성원들. 비 록 그 중 허락되지 않은 영역에서 저항을 참아가며 '에날도스'를 사용할 수 있는 헤이져 급은 얼마 되지 않지만. "설마하니 제나르 대신께서 이곳까지 오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미국에 계셔야 옳은 게 아닌가요?" "마리오 경은 마치 한국이 세계에서 별 것 아닌 곳이라 생각하는 모양이 로군." "물론 그건 아닙니다. 과거라면 몰라도 지금의 한국은 세계 경제의 최대 중심지나 다름없는 곳이니까요. 지겨울 설교를 하실 거라면 그만 참아주 시기 바랍니다. 이래 뵈도 한국에 오랫동안 살면서 한국에 대한 공부를 꽤나 많이 한 몸이니까요." 제나르는 껄껄 웃었다. "물론 내가 이곳에 온 별다른 이유는 없소. 하지만 우리의 야망을 이뤄 줄 엔젤이 마침내 탄생했는데, 그 축하 잔치에 마땅히 참석해야 하지 않 겠소? 엔젤이 또 다시 볼 수 없을 굉장한 미인이라 하니 남자로서 호기 심도 동했고." 제나르 이 사람은 엔젤이 한때 이곳을 탈출했던 걸 모른다. 그 사실은 마리오가 직접 엔젤을 찾아 나설 정도로 극비로 취급되었기에 아는 사람 은 별로 많지 않다. "오, 박사. 반갑구려. 여기는 웬일이오? 박사는 평소에 이런 자리는 굉 장히 싫어하지 않았소?"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마리오는 제나르가 누군가를 반기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시선을 돌려보니 말쑥한 옷차림을 한 박사가 서 있었다. 제나르 모르게 의미심장한 박사의 시선과 마주친 마리오는 자신도 모르 게 입술을 바짝 깨물었다. "제가 직접 탄생시킨 엔젤의 태어남을 축복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당연 히 그 아버지뻘 되는 제가 빠질 수는 없지요." "후후, 그런 거요? 이거 얼음 왕자라 소문난 박사가 엔젤을 위해서 기꺼 이 이런 자리를 마다하지 않다니, 남자로서 관심이 있어서인 거요? 아니 면 박사 말대로 아버지의 자격으로서인 거요?" "후자라고 해두는 게 좋겠습니다." 제나르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호오? 그 말이 정말이오? 하지만 들리는 소문은 전혀 그렇지 않던데?" "무슨 말씀이신지?" "사실 엔젤의 모습은 당신이 예전에 무척 사랑했던 여인의 모습을 그대 로 배껴온 거란 소문이 파다하오. 나 또한 그 소문을 듣고 도대체 얼마 나 사랑했기에 박사 같이 여자에게 냉담한 사람이 사랑했던 여자의 모습 만을 가진 인간에게 그렇게 지극정성인지 궁금했었고." 박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제나르 대신." "하지만 근거 없는 소문은 함부로 생기지가… 오, 이런. 벌써 우리의 프 린세스께서 등장하셨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마리오와 박사도 제나르를 따라 입구 쪽으 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검은 색 드레스를 입은 키 큰 여인과 함께 나란히 등장한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서 있었다. 이런 파티장에는 어 쩐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중성적인 옷차림이었지만, 인간에게 신탁을 내리기 위해 강림한 듯 정열적이고 극도로 아름다운 그 모습을 오히려 한층 더 자극하는 듯했다. 넋을 잃고 소녀를 쳐다보던 사람들은 이윽고 하나씩 제정신이 들면서 손뼉을 짝짝짝 쳤다. '뭐, 뭐야?' '부잣집 애들'이 자기 생일축하 파티를 해준다기에 기껏해야 대형 3단 케이크가 마련된 파티장을 상상했던 예안은 TV에서나 봄직한 상류층 파 티장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이질감에 그만 속이 메슥거 렸다. '이, 이런 데는 나랑 절대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구!' 이럴 줄 알았으면 단식 투쟁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안 오는 건데, 하고 후회도 해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예안은 주춤거리며 엘르를 따라 안 으로 들어서려다 홀 안의 사람들이 전부 자신만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한결 더 당황했다. '왜, 왜 저렇게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거야? 기분 나쁘게.'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엘르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엉거주춤 서 있던 예 안은 갑자기 사람들이 피아니스트의 화려한 연주에 취해 있다 겨우 깨어 난 듯 손뼉을 짝짝 치기 시작하자 속으로 얼굴을 확 붉혔다. 겉으로는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했지만 얼굴은 새파랗게 질린 게 쓰러지기 일보 직 전이었다. "당신의 등장을 축하해 주는 거에요. 누가 뭐라 해도 오늘은 당신이 주 인공이니까, 엔젤." "내 생일파티라니까 주인공이라는 건 알겠다. 근데 저건 도대체 뭐냐?" 여전히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투라 생각하며 엘르는 대답했다. "뭐긴 뭔가요. 당신의 탄생을 축하해주는 사람들이지요. 아참, 한 가지 깜박하고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는데, 이곳의 사람들 중 당신의 탈출 경 력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예요. 심지어 제나르 대신조차도 모르시니까 언 행에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흠, 그래?" 그렇다면 오히려 꿈꾸고 있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건 더 쉽겠지. 예안 이 그렇게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는 걸 모르는 엘르는 그녀와 함께 걸 음을 옮기며 자신에게 인사 해오는 사람들에게 그녀를 소개시켰다. "이 분이 바로 엔젤입니다." "오, 그렇군요. 과연 천사가 날개를 잃고 강림한 듯 아름다운 모습, 당 신에 대한 사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너 지금 나 오바이트 시키려고 작정한 거지?' 살아 생전 들을 일이 없을 것 같았던 느끼한 남자의 칭찬에 예안은 본능 적으로 속이 메슥거렸지만 겉으로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고개만 살짝 끄덕였을 뿐이었다. "이 사람이 정말 엔젤인가요?" "호, 과연 우리의 혁명을 이뤄줄 메시아… 정말 눈부시게 아름답군." "정말 인간같지 않은 아름다움이군요. 박사는 역시 대단합니다." "그러고 보니 박사가 예전에 정말 사랑했던 여인의 모습을 그대로 엔젤 로 옮겼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호, 그래요? 난 못 들었는데. 아하, 그래서 박사가 그렇게 엔젤에게 지 극정성이었군." 사람들이 자신을 에워싸다시피 한 채 떠드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던 예안은 흥미가 끌렸다. 박사가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의 모습과 유젤의 모습이 같다는 대목이었다. '흠, 그래서 박사는 유젤보고 사랑한다 어쩐다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가? 그 녀석도 꽤나 일편단심이네? 한 여자를 그렇게까지 못 잊다니 말이야.'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 양쪽으로 물러서며 길이 만들어졌다. 예안은 사람들이 터준 길목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인자 한 인상의 노인을 보고 바짝 긴장했다. 온몸에 흐르는 기도로 보아 보통 높은 사람이 아닌 듯 했다. 엘르가 예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제나르 대신입니다. 우리 시트날타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5인 중 한 분이시죠. 제가 아까 간단한 설명은 드렸죠?" "이 사람이… 제나르?" 이처럼 온화한 인상의 노인을 상상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뚱뚱하고 음흉한 기운이 철철 흐르는 변태 노인을 기대했었던 예안은 약간 실망했 다. 계획에 커다란 차질이 있는 건 아니지만 후자 쪽이 더 다루기 쉬울 거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가까이에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어쩔 수 없지. 적당히 기회를 봐서 덤벼들자.' 예안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숨겨 갖고 온 다이아몬드 칼을 꽉 움 켜쥐었다. 아직까지는 아무도 그녀가 칼을 갖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 했다. "허허, 사람들이 너무 많이 쳐다보고 있으니 우리의 프린세스께서 잔뜩 긴장하신 모양이로군. 여러분, 이 늙은이와 프린세스가 단둘이서 이야기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지 않겠소?" 시트날타의 구성원으로서 다섯 명의 대신 중 한 명인 제나르의 부탁을 거절할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못내 아쉬운 눈길로 예안을 힐끔거리며 서서히 물러났다. 그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여전히 흥미에 찬 눈길로 예 안은 흘끔거렸다. 그러나 예안은 그래도 조금 전보다는 한결 낫다고 생 각했다. '휴, 살았다. 아직도 흘끔거리는 게 기분 나쁘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금 전보다는 낫지.' "그런데 엘르. 프린세스께 왜 이런 남자 같은 옷을 드린 거지? 이런 자 리에서는 프린세스의 여성다움을 화려하게 뽐내는 것이 더 나을 텐데." "엔젤께선 여성 복장을 지극히 싫어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런 옷을 드릴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제나르 대신 님, 이건 남자 옷이 아니라 여 자 남자 다 입을 수 있는 중성복입니다. 뭣하면 나중에 제나르 대신께서 도 한 번 입어보시겠어요?" "후후, 그건 사양하기로 하지. 아무리 남자도 입을 수 있다지만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이런 늙은이가 입었다가는 폼이 안 날 테니까." 엘르와 제나르가 정겹게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박사는 내내 온화한 눈길 로 예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예안은 또다시 심장이 두 근거리는 걸 느끼고 그만 시선을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돌렸다. '에안이가… 박사라는 사람을 무서워했던 게 아니라 좋아했던 걸까?' 처음에 그를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을 때는 유젤의 몸이 그를 두려워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전부터 유젤이 박사라는 사람에 대해 해 왔던 말과, 이곳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종합해볼 때 그건 아닌 듯 했 다. 역시 유젤은 박사를 좋아했던 걸까? 이성으로서? '하지만 이제 와서 그건 아무 상관없어. 예안이는 이제 날 좋아한다 했 으니까. 그리고 이제 예안이는 내 것이니까… 바로 나니까…' 이제 아무도 유젤의 마음을 빼앗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은 '진우'를 들뜨 게 만들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건가?"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화들짝 들어올린 예안은 하마터면 고함을 지 를 뻔했다. 꿈에서라도 다시 보기 싫은 얼굴, 바로 마리오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왜 보지 못했을까? "서, 선글라스!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예안은 터져 나오려는 고함을 간신히 참아냈다. "왜긴, 나도 당당한 시트날타의 일원이고, 또 세자르반 가문의 장남으로 서 충분히 이런 자리에 참석할 자격을 갖고 있다. 왜, 내가 무슨 하급 경비원이라도 되는 줄 알았나?" 예안은 엘르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녀석이 그렇게 높은 사람이었냐?" "세자르반 가문이라면 시트날타의 3대 가문 중 으뜸으로 치는 집안입니 다. 5대 장로 중 무려 세 명이나 배출한 가문이지요. 마리오 클리쳐 세 자르반도 장차 5대 장로가 되실 분입니다. 소위 말하는 거물이지요." "아하, 그렇구나. 거물이라… 소위 말하는 귀공자라는 거군." "예. 그렇지요." 만약 엘르가 조금만 신중하게 생각했더라면 어떻게 해서 예안이 엘가와 급 항공모함이라든지, 이지스함-3라든지, FAD 전투기나 어뢰 같은 이름 을 지어낼 수 있는지, 그리고 또 '거물'이라는 말이나 그밖의 다른 여러 가지, 태어난지 이 주도 안 된 아기가 알기에는 부적절한 단어들을 알고 있는지에 대해 의심을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오와는 달리 그녀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이이이잉! 갑자기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났다. 마리오는 얼른 자신의 주머니에 서 조심스레 핸드폰을 꺼냈다. "무슨 일이야? 지금 파티 중인 걸 알면서 전화했어?" 약간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던 마리오는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뭐, 그래? 음… 알았어. 지금까지 빼앗긴 게 얼마나 되지? 알았어. 지 금 곧 가도록 하지." 전화를 끊은 마리오는 미안한 표정으로 제나르에게 말했다. "제나르 대신 님.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카를로스가 우리 WS사의 지분을 은밀히 모으고 있다고 하는군요. 벌써 20%를 넘어섰답니다. 이건 명백한 적대적 M&A입니다." "흐음. 하필이면 WS사요?" "예. 다른 회사라면 제가 굳이 가지 않아도 되겠지만 WS사는 우리의 자 금줄 중 가장 큰 회사이니 어쩔 수 없이 제가 가 봐야겠군요. 자칫 실수 라도 한다면 큰일입니다." "한시가 급하기라도 한 거요?"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야 합니다." "이런, 프린세스의 탄생을 축하하는 이런 경사스러운 마당에 제대로 즐 기지도 못하고 일하러 가야만 하다니…" "죄송합니다. 그럼 다음 기회에…" 제나르에게 인사를 마친 마리오는 엘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 관계로 난 그만 가봐야 한다. 아무쪼록 엔젤을 잘 보살펴 줘라." "당신이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성심성의껏 보살필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잘 다녀오세요." 순간 예안은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보이지 않는 기도가 흐른다고 생각했 다. 그것이 착각인지 아닌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하던 중 누군가가 머 리를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바로 마리오였다. "후후, 엔젤 너도 다음 번에는 그렇게 바짝 긴장한 표정이 아니라 좀더 상냥하고 밝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 그런 새끼 밴 암사자 같은 표정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예안은 무언가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팽팽한 기운이 제나르를 제외한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것 같다고 느꼈다. 혹시 저 노인은 알까 싶어 돌 아보니 '허허, 청춘은 좋은 것이야.'라는 둥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중얼거리며 딴청만 부리고 있는 참이었다. '거참 분위기 이상하네.' 자신이 눈에 확 띄는 초절정 미소녀라는 사실을 조금만 더 자각한다면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래도 어느 정도 제대로 추리할 수 있을 테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16년 동안 몸에 배인 습관대로 생각하려 다 보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리오가 간 뒤 예안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어쨌든 제일 마음에 걸리는 인간이 사라졌으니 다행이다.' 뭐 일단은 자신이 줄곧 품어왔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에 제일 거추장스 러운 인물인 마리오가 사라졌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에날도스 를 쓸 수 있는 헤이져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엘르보다 더 대하기 힘든 인물이었으니까. 예안은 허리띠에 끼워 긴 재킷 속에 가린 칼을 꽉 움켜쥐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랬다. "저… 제나르 대신 님…" 예안이 자신을 부르자 제나르는 굉장히 기뻐했다. "오, 프린세스께서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주는구려. 그래, 왜 하고 싶 은 말이라도 있소?" 예안은 자신에게 너무 호의적인 이 사람을 협박하는 게 굉장히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어쩌면 이 사람도 헤이져일 수 있지만 그래도 인질로 잡기에는 가장 만만하고 그래도 성공 확률이 높은 인물이었기에 그녀는 단단히 굳힌 결심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무엇이오?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면 거리낄 것 없이 말하시구려. 내 힘 이 닿는 범위에서는 무엇이든지 다 들어줄 수 있을 테니." 사랑하는 손녀를 향해 지어주는 듯한 푸근한 웃음을 이용해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강요당하는 인생이라면 정 말 질색이다. 차라리 죽고 말지. "이건… 만약인데요… 만약에 그러니까…" "편하게 말해보시오." "만약… 여기 있는 엘르랑 저랑 사생결단을 한다면 누구 편을 드시겠어 요?" 상상도 못한 질문에 엘르와 제나르, 그리고 심지어는 박사까지 일순간 굳어버렸다. 당황함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연신 난발하던 제나르는 웃 음 띤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한 건지 물어도 되겠소?" "에 그러니까… 엘르에게 듣기로 저에게는 5백 억 달러의 금액이 투자되 었다고 들었는데… 사실 그 정도면 엘가와 급까지는 아니더라도 뉴타노 급 항공모함은 충분히 살 수 있는 금액이잖아요? 그러니까 제 말은… 엘 르에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알고 싶다, 이거죠." 차마 '만약 탈출하다 엘르랑 싸우게 되면 엘르가 날 죽일지 안 죽일지 확인해본 다음에 탈출 시도하려구요. 목숨은 하나 뿐이잖아요? 있을 때 잘 아껴야지요. 안 그래요?'라고 물어볼 수 없었던 예안은 그렇게 질문 을 빙빙 돌렸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목숨은 아까운 것이다. "흠. 잘은 모르지만 엘가와 급이 약 7백 억 달러던가? 뉴타노 급은 내가 기억하기로 아마 최근에 미국에서 일본에 장기 대여한 모델의 실제판매 가격이 510억 달러라고 들었소. 엘르, 너의 생각은 어떻지?" 자신의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라 바짝 긴장하고 있던 엘르는 느닷없는 질 문에 당황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요?" "너 스스로 너에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뜻이다. 넌 만약 너랑 프린세스가 사생결단을 한다면 내가 누구 편을 들 거라 생각 하느냐? 아니, 만약 절벽에 너랑 프린세스가 같이 매달려 있는데 단 한 명만 구할 수 있다면 누굴 구할 거라 생각하느냐?" 침착함을 되찾은 엘르는 망설일 것 없이 대답했다. "당연히 엔젤입니다. 비록 제가 크레시오 가문의 차녀이고, 또 수가 얼 마 되지 않은 헤이져라고는 해도 엔젤의 가치에 비한다면 택도 없겠지 요. 어떤 의미에서 그건 제나르 대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후후. 그렇지. 들었나요, 프린세스? 엘르가 말한 대로 시트날타의 인물 중 당신보다 그 가치가 높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현재 병중에 있는 황제 폐하인 바드로 2세를 대신해 황제 대리를 맡고 계신 바드로 3세 황 태자 님보다도 당신이 우리 3억 시트날타 인들에게는 더 중요합니다." 예안은 자신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대답에 만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놀 라지 않을 수 없었다. '3억이라구? 이거 단순한 범죄 조직이나 마피아 같은 게 아니었단 말이 야? 그리고 황제 폐하는 또 뭐야? 혹시 시트날타라는 게 그냥 조직 명 같은 게 아니라 국가 이름이었단 말이야?' 인구 수가 3억이라면 강대국이나 다름없다. 예안은 과연 이들을 건드리 고 자신이 무사할 수 있을지, 혹은 제대로 도망칠 수 있을지 몹시 걱정 이 되었지만 그래도 황태자보다 자신이 더 귀중하다는 말을 믿고 한 번 도박을 펼쳐보기로 했다. "저… 제나르 대신 님…" 제나르는 푸근한 웃음으로 받았다. "왜, 또 궁금한 게 있소?" "그게…" "잠깐! 제나르 대신 님. 여쭤볼 게 있습니다." 바짝 긴장한 채 나름대로 미리 생각해둔 멋진 대사를 꺼내려던 예안은 갑자기 엘르가 끼어들자 그만 기분이 조금 상했다. "뭘 묻고 싶은 건가, 엘르?" "엘가와 급 항공모함이라는 게 실제로 있는 겁니까, 제나르 대신 님? 무슨 의도로 묻는 건지 몰라 잠시 갸웃거리던 제나르는 고개를 끄덕였 다. "엘가와 급은 그냥 항공모함의 크기 정도를 측정하는 말이지. 엘가와 급 이라면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모함이다. 내가 알기로는 탑재기만 150대 이상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군." 엘르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그녀는 '나 몰라~'하며 딴청을 부리는 예안을 쏠 듯이 노려보다 다시 제나르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페너트레이트 시스템이 부착된 이지스함-3라는 것도 있나요?" "페너트레이트 시스템은 미국 국방부 연구소가 개발한 요격망 돌파 시스 템이지. 현재 세계에서 이 시스템이 장착된 미사일을 막을 수 있는 방공 망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미국의 주가가 요새 더 높아진 것 이지." "FAD-3 전투기는요? 그것도 실제로 있는 건가요?" "당연히 있지." "PT2ER-1 어뢰라는 것도요?" "당연하지. 네가 방금 말한 무기들은 요새 세계 무기 시장에서 주가가 가장 높은 것들이라 어느 정도의 관심이 있는 일반인들이라면 이름 정도 는 들어 알고 있는 것들이야." 이제야 예안에게 이중으로 속아넘어갔었다는 걸 깨달은 엘르는 웃음 띤 얼굴로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화사하게 이를 바드득 갈았다. "후후, 그렇군요. 엔젤. 날 놀린 거로군요." "아니, 뭐… 난 딱히…" 예안은 멋쩍은 얼굴로 딴청을 부렸다. "난 설마 그 정도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지~"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냐, 엘르?" 제나르의 질문에 엘르는 한숨과 예안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대답했다. "아까 엔젤께서 자신이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자살 소동을 일으키셨습니다." "뭐라?" 제나르의 표정이 창백하게 굳자 엘르는 황급히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아, 아닙니다! 엔젤께선 정말 자살할 생각이 아니라 그냥 단식 투쟁하 듯이 떼를 쓴 것이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신 님." "휴. 십 년 감수했군. 계속 말해보거라." "예. 하여튼 잠시 속아넘어갔었던 저는 우리의 재정이 허락되는 범위 안 에선 당신에게 뭐든지 줄 수 있으니 제발 자살만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러자 엔젤에 저에게 묻더군요. 엘가와 급 항공모함이나 페너트레이트 시 스템이 부착된 이지스함-3, 인공위성 요격 시스템이 장착된 FAD-3 전투 기나 전파 추진식 PT2ER-1 어뢰도 줄 수 있냐고요. 그래서 아마도 그럴 수 있을 거라 했습니다. 그러자 엔젤께선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그런 물건은 없다. 방금 내가 지어낸 이름이다.'라고요. 저는 그 때만 해도 그 말이 정말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방금 대신 님 말씀을 듣고 나니 제가 어이없게 이중으로 속아넘어갔었단 걸 알겠군요." "후후, 한 방 크게 먹었구나. 엘르. 하지만 프린세스의 지능은 지상인들 이나 우리 시트날타 인들하고는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모욕일 정도로 월 등하니, 놀림 받은 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말거라." "예… 신경은 쓰지 않습니다." "가만?" 웃음 띤 얼굴로 엘르에게 다정히 말하던 제나르의 표정에서 미소가 지워 졌다. "그런데 프린세스.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런 이름들을 알고 있는 것이 오? 내가 알기로 당신은 아직 그런 일반상식 같은 건 잘 모를 텐데?" 예안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드디어 줄곧 품어왔던 계획을 실 행하기에 적당한 타이밍이 찾아왔다! 예안은 허리춤에 찔러 넣었던 칼 손잡이를 슬그머니 쥐며 뺄 준비를 했다. 입안이 바짝바짝 타고 머리 위 로 피가 증발하는 것 같은 살벌한 긴장 속에,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 다. "그건 말이죠…" "제가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제나르 대신." '제나르! 당신에게 원한은 없지만 날 위해서 인질이 되어줘야겠어!'라는 식의 멋들어진 대사와 함께 칼을 뽑으려던 예안은 순간 박사가 자신의 어깨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잡자 당황했다. '뭐, 뭐야 이 사람?' 설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미리 다 알고 있었던가? 예안은 침 을 꿀꺽 삼켰다. "유젤은 태어난지 채 한 시간이 지나기 전부터 말을 할 줄 알았다는 건 이미 보고를 통해 아실 겁니다." "흐음, 그렇소만." "유젤은 말을 할 줄 알게 되자 왕성한 호기심으로 이것저것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장난감, 드라이버, 책상, 컴퓨터, 심지어 제가 읽고 있는 군 사 잡지와 과학 논문은 물론이고 침대 밑에 숨겨놓았던 성인용 책자에 대해서까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제나르와 엘르의 표정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반면 예안은 쪽팔려 죽을 지경이었다. '설마 예안이가 정말 그랬을라고?' 하지만 유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지도. 문득 예안은 저번에 유젤 이 콘돔을 갖고 놀다 자신에게 '재밌으니까 너도 해봐'하며 내밀었던 일 을 떠올리고 그만 속으로 얼굴을 붉혔다. 예안이 부끄러워하든 말든 대화는 계속 되었다. "처음엔 저도 진땀을 뺐죠. 왕성한 호기심으로 이것저것을 물어보는 유 젤의 말상대를 해주는 것보다 침대 위에서 70먹은 노인이 20대 여자의 절륜한 체력을 감당하는 것이 더 쉬울 거라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하하하! 그거 너무 지나친 비약이 아니오? 내가 올해로 딱 70이 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젊은 여자를 감당할 정력은 충분히 되오만." "농담이 짓궂으시네요, 제나르 대신 님." "아니야, 아니야. 엘르. 뭣하면 한 번 시험해보겠느냐?" 진한 농담에 엘르는 그만 얼굴을 귀밑까지 붉혔다. 예안은 처음 보는 그 녀의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꽤 귀엽네'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뭐 이 주도 채 안 된 기간 동안 제가 일반 상식에 대해 가르쳐봤자 얼 마나 가르쳤겠습니까만은, 그래도 이것저것 꽤나 주워들은 건 많으니 가 끔 이상한 말을 하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아직은 그래도 생후 2주 밖 에 안 된 아기나 다름없습니다." "후후, 그렇군." 제나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할 때 엘르는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래서 아까 내가 그런 기분이 들었구나.' 아까 예안이 엘가와 급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말들을 물었을 때 느꼈던 묘한 이질적인 기분은 이런 것이었던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이상하게 여길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박사의 설명이 타당했기에 엘르는 신경을 끄기로 했다. "제나르 대신 님." "왜 그러시오, 박사?" 박사는 예안을 한 번 흘끔거린 뒤 다시 말했다. "잠시 유젤과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단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습니 다만." "흐음. 박사는 그렇지 않아도 거의 매일을 프린세스와 함께 붙어 있지 않소? 난 이 파티가 끝나고 며칠 지난 뒤에 다시 미국으로 가 한동안 계 속 있어야 하오. 그 동안만이라도 내가 프린세스와 함께 붙어 있게 배려 해줄 순 없소?" 박사는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이거 죄송합니다. 하지만 유젤의 몸은 지금 완벽하지 않습니다. 파티를 즐기는 동안 갑자기 발작이라도 일어나면 분위기도 깨지고, 또 위험하지 않습니까? 유젤에게 특별히 해주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 또 건강검진도 할겸 그러는 것이니 딱 이십 분만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하시오." "감사합니다." 양해를 구한 박사는 어리둥절해 하는 예안의 손을 잡아끌고 파티장 밖으 로 나갔다. 인적이 드문 정원으로 그녀를 데리고 간 박사는 이윽고 손을 놔주었다. "휴. 겨우 단 둘이 되었군." "아까 왜 날 말렸지?" 날카로운 예안의 질문에 박사는 그저 빙긋 웃을 뿐이었다. "설마 네 계획이 통할 거라 생각했던 건 아니겠지, 유젤? 그 자리에는 헤이져 급인 엘르도 있었어. 그리고 파티에 참가한 시트날타 인만 해도 무려 백 명이 넘어. 그 중 헤이져 급이 엘르 딱 한 명 뿐이라 생각한 거 야?" "그럼 몇 명이나 되는데?" "간단히 생각하면 그 백 명이 전부 다 헤이져 급이라 생각해도 좋을 거 야. 그리고 내가 알기로 제나르 대신은 젊었을 때 가장 강대한 힘을 가 진 카이저라고 하더군." "카이저는 뭐지?" "쉽게 말하자면 헤이져 급보다 더 강한 인물에게 주는 호칭이라 볼 수 있지." 순간 예안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실망감이 떠올랐다. "뭐? 그렇다면 제나르 대신을 협박해서 탈출하려던 내 계획은 아무 짝에 도 쓸모 없어지잖아?" "그리고 제나르 대신을 인질로 잡아봤자 소용없어. 시트날타 인은 전부 널 놔주기보다는 제나르 대신을 죽이는 걸 택할 거다. 아니, 그 전에 제 나르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던지려고 할 테지. 그만큼 시트날타 인들 의 '혁명'에 대한 의지는 확고하다." "혁명이라… 대체 그게 뭐지?" 박사의 표정에 다시 부드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 마주했을 때만 짓는 남자만의 미소였다. "유젤 넌 그런 건 몰라도 돼. 내가 원하는 건 네가 이런 복잡한 세계에 끼어드는 게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거니까. 그 옆에 내가 있다면 물론 좋겠지만…" 예안은 매서운 눈빛을 다소 누그러뜨렸다. "근데 당신은 내가 탈출하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뻔하잖아. 네 비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리고 네가 한 번 탈출했었다는 걸 알고 있는 엘르나 마리오도 그렇게 생각하고 지금 바짝 긴장하고 있어. 겉으로는 저래 보여도 사실 너에게 굉장히 많은 신경을 쓰고 있고, 감시망도 열 배 이상으로 강화했어. 예 전과 같은 방법으로 탈출하는 건 이제 불가능해." "그럼 어떻게 탈출하면 좋지?" "네가 탈출하는 걸 내가 도와줄 것 같아?" 약간은 냉정한 말에 예안은 조금 당황했다. 도와줄 것처럼 그러다 갑자 기 이게 뭔 태도 변화란 말인가. "도와줄 생각 아니었냐?" "물론 도와줄 순 있어. 하지만 넌 나에게 대가로 뭘 해줄 수 있는데?" 무엇을 주면 좋을지 눈을 감고 한참을 생각하던 예안은 이윽고 눈을 떴 다. 예안읜 표정은 무척 진지했다. "온라인 RPG 게임 아이디 줄게. 이래 보여도 지존 ID가 세 개나 있는 거 물이야, 나." 박사는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그 정도 가지고 내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 거야?"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건 별로 없는데, 그럼 어떡하란 말이지?" '이 남자 유젤을 좋아했다면 그냥 도와줘도 되는 거 아닌가?'하고 예안 이 혼자 속으로 불만을 토로하고 있을 때 박사는 은근한 미소와 함께 예 안의 허리를 손으로 감아왔다. "키스 한 번만 해주면 도와줄게." "뭐, 뭣이라고라!" 소스라치게 놀란 예안은 허둥지둥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힘썼다. 그러나 학자풍의 체격과는 달리 그는 굉장히 힘이 세었다. "생각해 봐. 탈출 한 번에 고작 키스 한 번만 해주면 돼. 게다가 나중에 다시 너랑 합류해서 한국에서 가족과 그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네 신분 증명과 위조 신분도 만들어줄게. 시트날타 녀석들이 널 찾지 못하도록 위장막도 쳐줄 수 있어. 고작 키스 한 번에 너무 많은 어드벤티지 아니 야?" "으윽…" 평상시 같았으면 '네버! 죽어도 못해!'라고 했을 테지만 지금 상황에서 딱히 탈출할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이곳에서 평생 동안 살기 는 더더욱 싫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남자에게 키스를 해준 단 말인가. 그것도 '연적'인데! "…하지. 하면 될 거 아냐." 하지만 탈출에 대한 유혹은 너무나 달콤했다. 결국 예안은 울상이 된 채 말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얼굴을 향해 다가오는 박사의 입술을 쳐다봐야 만 했다. '우욱! 젠장! 올라올 것 같다!!' 따뜻한 박사의 입술이 닿는 순간 나는 페가수스를 타고 흰 구름을 헤치 며 온갖 행복이 넘실거리는 천계에 올라 이 세상 그 누구도 느껴보지 못 한 극락을 만끽했다…라는 식의 감상은 물론 없었다. '지금 내가 키스하 고 있는 건 남자가 아니라 그냥 유기물 덩어리야. 유기물 덩어리야.'라 고 자기 암시를 반복해서 걸어대며 지옥과도 같은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을 뿐이다. 몇 초가 지난 후 박사의 입술이 떼어지자 예안은 속이 메슥거려 그만 허 리를 숙였다. "우욱! 토할 것 같다! 차라리 엘르랑 키스하는 게 백 번 낫지! 시커먼 남자랑 하다니! 우우욱!' '나도 유젤이랑 한 번도 못 해봤는데'하는 식의 억울함보다는 '남자한테 입술을 빼앗겼다'라는 자기 비하가 더 강했다. "헉헉, 어쨌든 약속은 지켜." 박사의 입술이 닿는 그 순간의 끔찍한 기분을 잊어버리기 위해 노력하며 예안은 그를 노려보았다. 박사는 부드러운 웃음을 지은 채 두 개의 물체 를 내밀었다. "자, 받아." "이건 권총… 그리고 이건…?" 손목시계와도 같은 낯익은 물체에 기억을 더듬던 예안은 그것이 유젤이 사용하던 소형 컴퓨터임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맥의 원격 조종 장치?" "정확히는 틀렸어. 이 세상에서 맥을 움직일 수 있는 단 하나의 열쇠지. 내부에서 사용하기 위해선 열쇠를 컴퓨터 안에 합쳐야만 해. 그리고 밖 에 나왔을 때도 이 장치를 이용해 전투는 불가능하지만 어느 정도 간단 한 움직임은 보일 수 있지. 예를 들면, 네가 있는 곳으로 맥을 부른다던 가." "흐음. 그럼 이 권총을 이용해 적당히 달아나다가 중심 건물 밖으로 나 가면 곧바로 맥을 불러서 탈출하라는 건가? 그렇지만 레이더에 잡힐 텐 데?"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맥은 100% 스텔스 기능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레이더에도 잡히지 않아. 가시광선 감지기나 열적외선 감지기라면 모를까. 하지만 그걸로 레이더를 만드는 바보는 없지." "흐음…" 상기된 표정으로 권총을 만지작거리던 예안은 조종 장치를 손목에 찼다. "이거 총알이 몇 발이나 들었지?" "한 발." "지금 장난해? 그거 가지고 어떻게 탈출하라고? 적어도 수십 발은 들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권총이 무슨 소총인 줄 알아? 탄창도 하나 뿐인데 수십 발이 나가게. 그리고 그걸로 싸우라는 소리가 아니야." "그럼 어쩌라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예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달랑 총알 한 발, 그걸 갖고 도대체 뭘 어쩌란 말인가? 싸우지도 말라니. "날 쏴." 예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뭐?" "날 쏘란 말이야. 물론 죽일 정도로 치명상을 입힐 필요는 없어. 그냥 복부에 한 방이면 돼. 여기 내 옷에 붉게 표시된 점이 있지? 여길 쏘면 돼. 어차피 총알이 뚫고 나올 테니까 치명상은 입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내가 가진 신분카드를 이용해 나인 척 하고 감시망을 탈출하면 돼. 사람 이 감시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방어건물 밖까지 나갈 필요도 없어. 중심 건물만 빠져나간 뒤 곧바로 맥을 부르면 돼. 이렇게까지 하면 시트날타 녀석들도 반드시 속아넘어갈 거야." 예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박사가 건네주는 신분카드를 받아들었다.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가? "왜 날 위해 그렇게까지 해주는 거지?" "넌 유젤이니까." "유젤이니까…" 입안으로 그 말을 중얼거리던 예안은 정색을 하고 물었다. "당신 유젤을 정말 사랑했나?" "그래." 망설임 없이 되돌아오는 대답에 예안은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 세상에서 자신보다 유젤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기 에 또 하나가 있을 줄이야. '내가 만약 이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진짜 유젤도 아니고, 다른 남자아이의 뇌를 가진 유젤의 몸을 위해 이렇 게까지 해줄 수 있을까? 마음 속으로 그렇게 물어보니 아무런 대답도 들 려오지 않았다. 예안은 쓴웃음을 머금은 채 권총을 들어 박사를 겨누었 다. "날 위해 그렇게까지 해주다니, 어쨌든 감사하게 생각해. 나중에 당신이 날 찾아오면 맥은 꼭 돌려주지." "그럴 필요 없어. 맥은 유젤 네 것이니까." "그래? 그렇다면 고맙게 받도록 하지." 맥의 군사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 그리고 경제적 가치와 이후 한국에 맥 이 불러올 어마어마한 정치적 파급 효과를 이때 생각지 못한 예안은 다 시 태어난 기념으로 간단한 생일 선물을 받은 셈치고 방아쇠를 건 손가 락에 서서히 힘을 주었다. 박사는 겁나지도 않은지 눈을 감지도 않은 채 그녀를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아참. 당신의 이름은 뭐지? 나한테 이렇게 잘 해줬는데 이름도 안 물어 보면 실례일 것 같은데." 그의 이름이 김윤우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물었다. 박사 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 이름은 레이온… 레이온이야." "뭐? 그거 섬유 이름 아닌가?" 황당한 이름에 예안은 잠시 얼이 빠졌다. 헌데 박사의 표정은 이상했다. 당황해하거나 웃는 게 아니라 뭔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아련한 추억이 라도 떠올린 듯 금방이라도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 유젤도 처음 내 이름을 들었을 때 그렇게 말했지… 그렇게 말했 어…" '이상한 걸? 내가 알기로 예안이는 이 사람에게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 다고 하던데?' 자신이 유젤에게 들은 이야기와 레이온 박사가 해주는 이야기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었다. 순간 예안은 이 사람이 지금 말하는 유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유젤이 아니라 그가 전에 사랑했었던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 각이 머리를 스쳤다. "여러모로 궁금한 게 많지만… 내가 물어볼 입장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아. 어쨌든 여러 가지로 고마워. 그럼 살아서 나중에 다시 만나자." 언젠가 봤던 액션 영화에서 나온 주인공의 대사를 나름대로 멋지다 생각 되는 톤으로 읊은 예안은 눈을 딱 감고 방아쇠를 당겼다. 처음으로 사람 을 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죄책감이나 두근거림이 없는 자기 자신에게 묘한 섬뜩함을 느끼며 그녀는 총을 버리고 냅다 뛰었다. "비상! 비상!" 갑자기 1급 경고음이 요란하게 홀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제나르 대 신과 엘르를 포함한 시트날타 인들은 모두 당황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걸까요, 대신 님?" "글쎄다, 난 잘 모르겠구나."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 그들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제복을 입 은 한 남자가 온몸에서 땀이 쏟아지도록 뛰어와 제나르 앞에 경례하고 섰다. "대신 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냐?" "맥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제나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어라?"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엔젤이 박사가 가진 권총을 빼앗아 그를 쏘고 신 분카드를 훔쳐 중심 건물 밖으로 달아났습니다! 상황을 보아하니 박사는 맥의 조종장치마저 빼앗긴 모양입니다!" "이럴 수가…" 만약 그렇다면 이건 1급 경계 태세 정도가 아니었다. 제나르는 굳은 표 정으로 명령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어 시스템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어떻게든 맥을 포박해라! 엔젤이 절대 다치게 해선 안 된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남자는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자기가 만약 제나르 대신이라 생각해도 그런 명령을 내 렸을 터였다. "노력해보겠습니다!" 성공할 확률은 미지수지만. 그래도 노력이라도 해야했다. 위대한 혁명을 위해서. 「시스템 가동 준비 완료. 모드를 선택해 주십시오.」 "모드라니? 어떤 모드를 말하는 거냐?" 맥에 탑승한 예안이 뭐가 뭔지 몰라 묻자 스크린에 다시 글씨가 떠올랐 다. 말은 못해도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줄 알고, 또 글씨로 자신의 의사 표시를 할 줄 아는 맥의 인공지능은 굉장히 탁월했지만, 지금 예안은 그 런 데 감탄할 여유가 없었다. 「네 가지 모드가 있습니다. 전투 모드, 제트 모드, 은폐 모드, 공급 모 드. 이 중 어느 걸 택하시겠습니까?」 "에… 탈출할 거니까 제트 모드로 해. 안 싸울 거야, 안 싸워. 도망가기 바쁜데 언제 싸우고 있냐?" 「제트 모드 변환 시작합니다. 안전벨트를 매어 주십시오.」 "이미 맸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어서 빨리 출발이나 해." 약간의 시간이 흐르며 맥이 회전하는 게 느껴졌다. 스크린에 나타난 전 체 구도 그림에서 맥이 인간형에서 날카롭고 멋진 전투기 형태로 변한 걸 확인한 예안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랬다. '우왓! 영화 속에서나 보던 걸 실제로 내가 할 줄이야!' 근데 한참이 지나도 출발할 생각을 않는 것이다. "왜 출발을 안 하냐?" 「엔진을 발동시키고 조종을 해주십시오.」 "어떻게 하는 거냐?" 「엔진 발동 버튼을 누르고 조종대를 잡아주십시오. 왼쪽에 보이는 P자 마크가 새겨진 붉은 버튼이 엔진 발동 버튼입니다.」 결국 너보고 직접 조종하란 소리다. 예안은 당황했다. "이, 이봐! 난 비행기 면허는 고사하고 자동차나 오토바이 면허도 없단 말이다! 무슨 재주로 내가 이런 무식하게 큰 전투기를 조종하라는 거 냐!" 「세 가지 조종 모드가 있습니다. 자동 모드, 수동 모드, 공명 모드, 어 느 걸 택하시겠습니까?」 "앞의 두 개는 알겠는데 뒤의 세 번째는 뭐냐?」 「파일럿과 시스템의 정신을 융합해서 기체를 움직이는 조종 모드입니 다. 가장 원활하고 정교한 움직임을 보일 수 있지만 그만큼 파일럿의 정 신 부담이 큽니다. 하지만 파일럿이 수동 조종법을 모른다면 이 모드를 적극 추천합니다.」 예안은 맥의 인공지능이 마치 유능한 비서 같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예 안은 적극 추천한단 소리에 바로 결정을 내렸다. "그럼 공명 모드로 한다. 그걸로 해." 「조종대 변환을 개시합니다.」 약간 어두웠던 조종실 전자기기에 갑자기 불이 들어왔다. 양손으로 잡는 전투기 조종대가 접혀서 안으로 들어가고 대신 두 개의 구멍이 그 모습 을 드러냈다. 그리고 위에서부터 헬멧이 내려와 예안의 머리를 감쌌다. 「홀 안으로 양손을 넣어주십시오.」 예안은 얼떨떨해하면서 두 개의 구멍 안으로 양손을 팔꿈치까지 밀어 넣 었다. 구멍 안쪽에 만져지는 손잡이를 잡자 구멍이 좁아지며 손과 팔을 죄었다. 「싱크로를 개시합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엄청난 전자 신호음이 머리 속을 강타하는 걸 느 꼈다.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한 생소한 고통 속에 이를 악물며 참아내 던 예안은 순간 맥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이 머리 속에 펼쳐지는 걸 느꼈다. '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훈련 한 번 받지 않은 채 엄청난 전투병기 파일럿으로 올라탔다. 하지만 너무나 익숙한 느낌이다. '이게… 맥이 가진 힘?' 시트날타 건물의 방공 시스템에서부터 포박장치가 발사되어 맥을 에워쌌 다. 하지만 묵직한 금속 팔을 한 번 내젓는 것만으로 너무 간단히 끊어 져 나갔다. 그냥 한 번 짓밟는 것만으로 그 단단해 보이는 콘크리트 외 장 벽이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너무나 손쉽게 시트날타 밖으로 빠져나온 맥은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조종실에 넋을 잃은 채 앉아 있던 예안은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빽 질렀 다. "이건 제트 모드가 아니잖아! 난 지금 싸우려는 게 아니고 도망치고 싶 단 말이다!" 「싱크로 모드를 한 뒤에 전투 모드를 택하셨습니다. 원하신다면 다시 제트 모드로 바꾸시면 됩니다.」 "내가 싸우길 원했다고?" 웃음이 나왔다. 맞다. 생각해보니 나란 인간은 뭔가를 받으면 항상 그 배를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었지. 남자였을 때 나를 쏘고, 그 리고 일주일이나 가둬놓기까지 하고, 결국은 두고 두고 날 이용해 먹으 려고 하던 놈들이었잖아? 이 정도 보복은 아무것도 아니야. "제트 모드로 변환해. 그만 도망가야겠다." 생각 같아서는 신나게 때려부수고 싶지만 역시 살인은 그다지 내키는 일 이 아니다. 예안은 다시 전투기의 형태로 변한 맥을 타고 쏜살같이 먼바 다를 향해 날아갔다. "태평양 쪽으로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보고에 제나르는 암담한 표정으로 두 눈을 감았다.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상상도 못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가! 프린세스가 도망칠 때까지 너희들은 도대 체 뭘 했느냔 말이다!" "면목 없습니다, 대신 님." "아아… 우리의 꿈은… 우리의 염원은… 혁명은 어떻게 되는 건가…" 수천 년간 꿈꿔온 민족의 염원이 한순간의 재로 사그라지려 하는 순간인 데 침착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유젤의 탄생을 축하하러 왔던 사람들을 포함해 시트날타 인 모두는 한결같이 우울한 안색이었다. 제나르는 엘르에게 물었다. "박사는 어떻지?" "예… 복부에 총을 맞았으나 다행히 총알이 배를 관통해 지나갔기에 커 다란 충격은 없습니다. 일단 목숨은 건졌고 치료를 잘만 한다면 정상인 으로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휴… 그나마 다행이로군. 지금 박사를 만나러 갈 수 있겠나?" "지금쯤 마취가 끝났을 테니 가보셔도 될 듯 합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 다." "고맙구나." 제나르는 엘르의 안내를 따라 레이온이 입원해 있는 병실로 향했다. 어 두운 표정으로 누워 있던 레이온은 제나르가 들어서자 놀라 일어나려 했 다. "일어나지 않아도 좋소, 박사. 그나저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면목 없습니다, 제나르 대신. 제가 유젤을 잘 관리했다 생각했는데 그 만…" "프린세스가 당신의 권총으로 당신을 쏘고, 당신의 지니고 있던 신분카 드와 맥의 조종장치를 빼앗아 달아났다는 게 사실이오? 다른 누군가가 프린세스를 납치한 게 아니라?" 제나르는 아직도 유젤의 탈출을 믿을 수 없는 듯 했다. 레이온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허 참… 도대체 어째서 프린세스가…" "이건 제 추측입니다만… 말씀드려도 될지…" 제나르는 반색했다. "어서 말해보시오. 제 아무리 황당한 소리라도 좋소." 레이온은 약간 창백한 안색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엘르에게 슬쩍 의미 심장한 시선을 던졌다가 입을 떼었다. "제 생각입니다만 누군가가 유젤에게 잘못된 사고방식을 저 몰래 가르친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가급적이면 유젤을 제 곁에 두며 해롭지 않은 것만 골라 가르치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태어난지 이주도 채 안 된 유젤이 제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까요?" "으음…" 유젤이 이미 한 번 탈출했었단 사실을 모르는 제나르에겐 대답하기 힘든 의문이었다. "답은 결국 하나입니다. 누군가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 겁니다. 그 자가 유젤에게 잘못된 교육을 시켜 시트날타에서 달아나도록 유도한 겁니다. 그리고 미국이나 유럽, 러시아, 혹은 중국 같은 강대국에 유젤과 맥을 송두리째 팔아 넘겨 큰돈을 손에 쥐려 한 거죠." "그게 정말이오?" 제나르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갔다. 사실이라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민족을 배신하다니! 그게 가당치나 한 소린가! "물론 심증이 가는 사람이 몇 명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적인 증거가 하 나도 없기에 말씀드리기가 뭣하군요." "개의치 말고 말해보시오. 내 절대 비밀을 지킬 터이니." 레이온은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심증이라고는 해도 왠지 그럴 것 같다라고 저 혼자만 여길 뿐입니다. 함부로 발설했다가 오히려 시트날타의 결속을 뒤흔들 수 있습니다. 자칫 하면 술렁이는 분위기에 불안을 느낀 범인이 절 노릴 수도 있고요. 죄송 합니다." 완곡하지만 명백한 거절이었다. 제나르는 입맛을 다셨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여튼 몸조리 잘하시오. 내가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서라도 어떻게 된 것인지 밝혀내고 말 터이니." 제나르 대신이 병실을 나간 뒤에도 엘르는 한참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를 에워싼 침묵이 지겹게 느껴질 무렵 엘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연기력이 대단하시군요, 김윤우 박사. 만약 당신이 축구선수를 한다면 그 어떤 심판의 레드카드도 비켜갈 수 있겠는데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말 그대로입니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을 거라니, 기가 막히군요. 우리 시트날타에는 그런 인물은 절대 없습니다." 레이온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걸 어떻게 장담할 수 있나? 제 아무리 깨끗하고 결속력이 강한 집단 이라 해도 큰돈을 혼자 손에 넣을 수 있는데 배신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 는 사람은 없다. 하물며 총 구성원 수가 3억을 넘어서는 시트날타 같은 경우라면 한층 더 심하겠지." "후후. 당신 같은 평범한 인간하고 우리 시트날타는 근본적으로 틀려요. 우리는 전부 수천 년간 혁명만을 꿈꾸며 살아왔어요. 평안함에 안주하며 도전을 거부해온 당신들과는 틀려요." "후후. 예전에 내가 몸담고 있던 집단에도 배신자는 있었다. 지금으로부 터 약 십 년 전이던가?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남자 둘과 여자 하나 가 '아담'을 따라 배신해버리고 말았지." "아담?" 생소한 이야기에 엘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보니 박사가 시트날타 인이 아니라 그 과거조차도 짙은 베일에 쌓여있다는 게 생각났다. "그때 배신한 남자 중 한 명은 나의 형에게 같이 아담을 따라가자고 말 했지. 하지만 우리형은 사명감 때문에 그것을 거부했다. 결국 그 대가가 무엇인지 알아? 형은 지금까지 다른 간부들과 사… 우리 집단을 위해서 죽여왔던 실험체들과 똑같이 더럽고 비참한 죽음을 혼자 맞이해야만 했 어." "흐음? 당신은 설마 그 아담이라는 자와 배신자들을 증오하는 건가요?" 레이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천만에. 단지 그 때 형이 과감히 아담을 따라 배신하지 못했던 것이 무 척 안타까울 뿐이야. 그 때 내가 깨달은 교훈이 하나 있지. 제 아무리 뜨거운 신념이라 해도 결국 자기 목숨보다 중요하진 않다는 사실 말이 야." 그렇다고 해서 내 목숨보다 중요한 게 결코 없는 건 아니야. 레이온은 그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이 여자는 자신의 속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지만 아무런 증거가 없기에, 그리고 또 자신이 시트날 타에는 없어선 안 될 인물이기에 함부로 발설하진 않을 것이다. 한가로운 바람이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 위로 따뜻한 태양 빛이 내리 쪼 이고 있었다. 가끔씩 바람이 건드리는 손짓에 놀란 바닷물이 가볍게 뛰 어오르며 교태스런 몸짓을 보이기도 한다. 더 할 나위 없이 평화스러운 모습이었지만, 바다 한가운데를 떠다니는 배들의 정체와 싣고 가는 물품 은 평화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휴우. 이런 좋은 날씨에 와이프에게 서비스하지 못하고 항모에 서비스 해야 한다니, 정말 비참한 현실입니다. 사령관님." 엘가와 급 항공모함 켈브릿지의 최고위 지휘자인 토탐스 사령관은 고개 를 끄덕였다. "나라고 해서 이 좋은 날씨에 항모에 서비스하고 싶겠나. 마음 같아서는 자주 가는 술집 아가씨와 함께 침대에서 뒹굴고 싶다만, 어쩌겠나. 군대 에 몸담고 있는 게 죄지." "후후, 사령관님은 운치가 뭔지 아시는 분이시군요. 하지만 그러셨다가 는 사모님께서 화를 내시지 않을까요?" "이미 먼저 죽어 저세상에 간 여자가 뭘 알겠어. 이게 바로 싱글의 특권 아니겠나? 후후후…" "후후, 그렇긴 합니다만, 연세를 생각하셔야지요." "크크, 이래뵈도 바로 일주일 전에 두 여자를 하룻밤만에 뻗게 만든 경 력이 있다네. 늙었다고 해서 반드시 젊은이들보다 못한 건 아니지." "오우, 대단하시군요. 부럽습니다, 그 정력." 참모와 총사령관의 대화라고 하기에는 뭔가 좀 이질적이지만 두 사람이 꽤나 친분이 있어서 그렇다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그나저나 우리 미국이 그 조그만 나라 한국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토탐스 사령관의 안색이 진지해졌다. "어쩔 수 없지. 현재 세계에서 유일하게 석유가 나는 나라는 오로지 한 국뿐이니까. 모르는 사람들은 대체 에너지 개발이 쉬운 줄 알고 있지만 벌써 수십 년이 지나도록 변변찮은 대체 에너지 장치 하나 개발 못하지 않았나? 자연히 전세계의 관심이 한국으로 쏠릴 수밖에." "기름 한 방울 안 나던 그 나라에서 느닷없이 유전이 솟을 줄 누가 알았 겠습니까? 그것도 매장량이 예측 불가능할 정도로 어마어마할 줄은…" "그러게 말이야. 이래서 사람 사는 건 재미있다고 하는 건가봐." 이들 해군함대는 지금 전쟁 보급품을 잔뜩 싣고 있는 보급선 총 열 척과 함께 한국의 동해로 가는 중이었다. 현재 미국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 는 한국의 정치 방향에 기겁한 미국 정부는 한국을 얼르는 한편, 이렇듯 협상 중에 무력 시위를 함으로써 어느 정도 자신들이 유리한 위치를 따 내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미국과 나란히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중국을 비롯하여 유럽, 러시아 등등 얼마든지 스페어 카드가 많기에 과 연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진 의문이었다. 무력 시위를 마친 후 이들은 잠시 동안 주일미군에 합류하여 사태를 관 망할 작정이었다. 일부에서는 제2의 이라크로 한국이 선택되었다느니 어 쩌니 하지만 아직은 모르는 일이었다. 수십 년 전의 이라크와 한국은 엄 연히 다르니까. 군사력, 경제력, 그리고 입지에 있어서 이라크와 비할 바가 아니다. 게다가 미국을 비롯하여 수많은 나라가 한국에 투자하고 있어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다. "사령관님! 노스캐롤라이나 호에서 정체 불명의 잠수함이 이쪽을 향해 다 가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거리 3000!" 토탐스 사령관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잠수함? 잠수함대가 아니라?" "예! 단 한 척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속도도 250노트로, 굉장히 빠릅니 다.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속도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흐음. 감히 겁없이 우리 미합중국의 해군함대에 단독으로 달려들 인간 이 있었던가? 그 잠수함장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군." 토탐스 사령관이 어찌 할까 생각에 잠긴 사이 다시 보고가 들어왔다. 참 모는 창백한 안색으로 보고했다. "사, 사령관님! 큰일났습니다!" "뭔가? 정체불명의 잠수함이 어뢰라도 발사했나?" "그, 그것이 아니라 그 정체불명의 잠수함이 순식간에 우리 함대 밑으로 이동해왔다고…" 사령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사실입니다. 순간 속력이 천 노트를 훨씬 넘었다는…" 참모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들이 타고 있는 항공모함 캘브릿지 좌 현 20미터 지점에서 거대한 물보라가 솟아올랐다. 높이가 백 미터가 훨씬 넘어 보이는 물보라에서 갑판으로 쏟아지는 물방울을 그대로 얻어맞은 채 승무원들은 멍하니 올려다보기만 했다. 물방울이 가라앉은 뒤 공중에 그 모습을 드러낸 건 잠수함도, 어뢰도 아니었다. 만화 속에서나 봄직한 거대한 인간형 전투병기였다. "저, 저건 도대체 뭐지?" "중국 녀석들이 새로 만든 신무기인가?" 혹독한 훈련을 받은 승무원들은 누구 하나 자리를 떠나거나 우왕좌왕하 는 일이 없었지만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너무나 간단히 함대 한가운 데에 솟아오른 생소한 생김새의 전투병기로부터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순 없었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미국 함대와 정체 불명의 전투병기 사이에는 아 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토탐스 사령관은 어이가 없었다. "왜 공격하지 않는 건가! 시스템이 맛이 가기라도 한 건가!" "그게… 레이더에는 현재 아무런 적기도 없다고 나오고 있다 합니다. 자 동 방어 시스템도 작동하지 않습니다. 레이더가 저 물체를 인식하지 못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토탐스 사령관이 어이없어 하는 사이, 각 함정은 가시권에 들어 있는(실 제 거리는 수십 미터도 채 되지 않는다) 정체불명의 전투병기를 향해 발 칸포를 조준하고 쏘아대기 시작했다. 경고를 할 여유도 뭐고 없었다. 함 대 바로 코앞 바다에서 느닷없이 솟아오른 적에게 경고를 할 여유가 어 디에 있는가? 투타타타탕! 화려한 격발음과 함께 총탄이 적기를 두드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 졌다. 토탐스 사령관은 입안이 바짝바짝 타는 걸 느꼈다. 이미 사격을 시작한지 일 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적기는 추락하기는커녕 그대로 위풍당당하게 떠 있었기 때문이다. "사격 중지!" 명령이 전달되자 전 함정은 사격을 멈췄다. 연기가 가라앉은 뒤 드러난 모습에 사령관과 참모진은 어이가 없었다. 망원경을 통해 보이는 적의 겉모습에는 패인 자국은커녕 그을음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미사일을 발사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가깝다, 하지만 기관총탄은 통하지 않는다.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현대해전은 원거리를 중시해 함정이 설계된다지만 이렇게 고정관념을 완 전히 깨버린 전투병기가 등장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차라리 어 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면 신나게 미사일이라도 쏴보련만, 발칸포탄이 통하지 않는 괴물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무슨 재주로 격추시킨단 말인가? "아앗! 사령관님! 저걸 보십시오!" 거대한 라이플과도 같은 무기를 등에 짊어진 채 날개를 접고 우아하게 선 채로 떠 있던 인간형 전투병기는 한 바퀴 빙글 회전하더니 자세를 바 꾸며 날개를 폈다. 몇 초가 채 지나지도 않아 날씬하고 거대한 전투기로 변한 그것은 폭음과 함께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귀신이 곡 할 노릇이었다. "앨런 참모." "예!" "레이더는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나?" 잠시 후 앨런 참모는 대답했다. "예! 아무 반응 없습니다!" "저 물체가 사라진 방향은 어느 쪽이지?" 잠시 생각하던 앨런 참모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국…입니다만… 어쩌면 중국이나 러시아일 수도 있습니다. 자세한 방 향은 모르겠습니다. 레이더에 나타나지 않으니…" 어두운 안색으로 신중히 생각하던 사령관은 한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본토로 돌아간다." "예? 하지만 우리 임무는…" "어이없는 전투였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서 자세히 보고해야만 한다. 쉽게 믿진 않겠지만 한국, 혹은 중국이나 그 밖의 다른 나라가 초현대적 무기를 만들었다고…" 원래 목적은 한국에 무력시위를 할 예정이었던 제 3함대는 그렇게 다시 항로를 귀항길로 돌렸다. "젠장! 깜짝 놀랐잖아! 저 함대는 도대체 뭐냐? 어이, 인공지능. 맥은 멀쩡하냐? 그렇게 기관총탄을 얻어맞았는데 이렇게 빠르게 날아도 되는 거냐?" 「현재 기체의 손상률 0%입니다. 수많은 공격이 있었으나 모두 충격 가 능 범위에 훨씬 못 미치는 충돌이었기에 아무런 손상은 없었습니다. 때 문에 복구로봇을 가동시키지 않아도 됩니다.」 '복구로봇? 수리하는 로봇이라도 되는 건가?' 예안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자 인공지능이 대답해왔다. 「예. 그렇습니다.」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예안은 깜짝 놀랐다. "노, 놀랬다! 너 설마 내 마음도 읽을 수 있는 거냐? 아, 아니 너 말도 할 수 있냐?" 「싱크로 모드일 경우 파일럿의 사고를 100%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계음을 조합해 목소리를 내는 건 가능한 일 입니다.」 "100%는 아니다? 휴. 그거 안심이네. 그럼 어느 정도나 읽을 수 있는 건 데?" 「전부 다 읽을 순 없습니다. 99.978%까지 읽을 수 있습니다.」 "…지금 나랑 농담 따먹기라도 하자는 거냐?" 「사실대로 말할 뿐입니다.」 "됐다, 됐어. 그만하자. 너랑 계속 말해봤자 나만 골치 아프지 뭐. 앞으 로 어떤 모드이든 간에 내가 속으로 생각하는 말에는 대답하지 마. 사람 간 떨어뜨릴 일 있냐?" 「알겠습니다.」 초고속으로 비행하는 전투기 형태의 맥 안에서 예안은 곰곰이 생각에 잠 겼다. 일단 무사히 시트날타로부터 도망친 것까지는 좋았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조종한다는 생각에 그만 신이 나서 한참 날다 보니 태평양 한가운데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놀라 당황했지만 예안은 곧 이 왕 이렇게 된 거 잘 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 시트날타도 한국, 그리고 자신이 가야 할 곳도 한국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한국으로 가봤자 얼마나 기밀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이렇게 일단 먼바다로 나온 다음에 들키지 않게 저공비행을 해서 날아가 면 될 거라 생각했다. 아마 시트날타는 자신이 태평양 건너 아메리카 대 륙으로 도망쳤을 거라 여길 것이다. 처음에는 인공지능의 충고대로 바다 속으로 항해했지만 너무 느려서 짜 증나다 보니 답답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인공지능이 하는 말, '근처 해 면에 30척의 함대가 항해 중입니다. 거리 3000미터, 주의하십시오.'라고 보고해올 땐 깜짝 놀랐다. 인공지능이 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느 새 맥은 함대 한가운데까지 도달했고, 예안은 스크린을 통해 웬 잠수함 이 자신의 코앞에 있는 걸 보고 기겁해서 수면 위로 맥을 급부상시켰다. 그리고 놀라 어쩔 줄 몰라 당황해하다가 함정들이 쏜 발칸포탄을 실컷 얻어맞고 난 뒤 그만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 버린 것이었다. "아씨! 생각해보니 열받잖아! 저 녀석들은 날 실컷 때렸는데, 난 한 대 도 못 때렸어! 이봐, 인공지능! 맥에는 장거리 공격 무기 같은 거 없 냐?" 「흉갑 안쪽에 에너지탄 발사 장치가 좌우로 각각 한 개씩, 그리고 등에 착용하고 있는 라이플 버스터가 있습니다. 하지만 에너지탄은 근거리 정 면이 아니면 소용없으니 라이플 버스터를 권합니다.」 예안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일단 맥을 공중에 세웠다. 맥은 다시 전투 모드로 변해 오른팔로 거대한 라이플 버스터를 등에서 떼어내 저 멀리 미군함대가 있는 쪽을 향해 겨누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스나이퍼와도 같았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근데 인공지능? 스크린에 그 함대들이 안 보이는데? 거리가 도대체 얼 마나 떨어져 있는 거냐?" 「현재 거리 230km 떨어져 있습니다. 유효사정거리 안입니다.」 "…내가 안 보이는데 무슨 재주로 맞추라는 거냐?" 「디텍트 시스템을 사용해 적의 위치를 탐지한 후 조준한 뒤 발사하면 됩니다.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쓰고 있는 헬멧에서 튀어나와 눈을 덮은 투명한 전자창을 통해 이리저리 조준점을 바꿔보던 예안은 이윽고 조준을 마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한 걸 돌려줄 차례였다. "날 원망하지 말라구. 먼저 시비를 걸어온 건 너희들이니까. 죽이지는 않을게." 그리고 쏘았다. 미국 본토를 향해 빠르게 항해하고 있던 미군함대 중 최우방에 있던 세 척의 함정 위로 굵은 광선이 갑작스레 훑고 지나갔다. 광선이 빛났던 건 한순간이었고, 그 한순간이 지나고 난 뒤 우연히 그 모습을 볼 수 있었 던 사람들은 세 함정의 레이더와 안테나가 완전히 대파된 걸 발견했다. 이제껏 말로만 들었지 전혀 보지 못한 고폭 레이저류의 무기에 당황한 미군함대는 반격할 생각도 않고(레이더에 걸리지도 않으니 반격할 수조 차 없다) 최대한 흩어진 채 최고속력으로 열심히 열심히 미국을 향해 달 아났다. 그리고 이들이 귀항한 후 자세한 보고를 들은 미국 정부는 한국 에 대한 무력시위를 반영구적으로 중단하기로 했다. 예안은 레이더에 절대 걸리지 않는다는 인공지능의 말을 못 믿은 건 아 니었지만 사람들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곤란하기에 한국까지 저공비행으 로 날아왔다. 원래라면 근해에서부터는 얕게 잠수해서 올 생각이었지만 근처에 수색 중인 잠수함이 있다는 인공지능의 말에 결국 위험을 무릅쓰 고 백사장까지 저공비행으로 날아오고 말았다. "그나저나 내 실력 어땠냐? 처음으로 조종했는데도 그럭저럭 잘 하지 않 았냐? 아까 그 함대를 맞출 때도 안테나만 교묘하게 잘 맞췄고. 그렇지 않냐?" 「저의 성능이라면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아직 유젤 님 께서 저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데 많이 서투르신 것 같군요.」 "그냥 '잘하셨습니다.'라고 간단히 넘어가면 어디가 덧나냐?" 예안은 인공지능에게 투덜거리며 백사장에 내렸다. 이제부터는 소형조종 장치를 이용해 대화를 나눠야 했다. "근데 정말 힘드네. 좀 피곤한 것 같기도 하고… 태어나서 처음 조종하 는 나도 이렇게 쉽게 조종하는 걸 보면 맥은 조종하기 쉬운 전투병기인 가 봐?" 그러자 조종장치에 글씨가 떠올랐다. 「그렇지 않습니다. 맥을 조종하기 위해선 약 10만 테라호트의 정신력 소모를 겪을 수 있는 신체적, 육체적 능력이 필요합니다. 데이터에 의하 면 이 세상에서 그런 인간은 유젤 님 뿐입니다.」 "흐응? 그거 왠지 듣기 좋은 말인데?" 비록 자신의 몸이 아니긴 해도 이런 대단한 물건이 이제 자신을 제외하 고는 쓸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예안에게 묘한 우월감을 심어주었 다. 그러다가 갑자기 예안은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근데 나 이 꼴로 어떻게 집에 돌아가냐?" 이 꼴로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 나 진우예요.'라고 하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며칠 동안이나 아무 소식 없이 돌아오지 않아 잔뜩 걱정하고 있 던 정호는 아마도 '아 그러세요? 일단 기다리세요.'라고 한 다음에 친절 하게 정신병원에 전화를 넣어, '여기 환자 하나 있습니다. 얼른 데려가 세요.'라고 말할 게 뻔하다. 「아무런 신체적 정신적 부상은 없습니다. 안심해도 좋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야, 바보야! 우리 아빠한텐 아들 하나밖에 없는데 졸 지에 내가 여자가 되어 버렸으니 도대체 무슨 재주로 돌아가냐구!" 「사실대로 말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 우리 아빠가 그걸 믿을 것 같냐? 무엇보다, 아직 뇌 이식 수술 같은 건 실용화는커녕 가능하지도 않단 말이다!" 정말 무슨 재주로 아버지에게 설명할지 생각하니 앞날이 깜깜했다. 세현 이 녀석은 믿어줄까? 혹시 이대로 영원히 주변 사람들을 속인 채, 아니 영원히 만나지도 못한 채 죽은 듯 숨어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휴. 일단 넌 당분간 물 속에 들어가 있어라. 이 장치를 이용해서라면 언제든 대화할 수 있는 거냐? 널 부를 수도 있고?" 「예. 그렇습니다. 그럼 본체를 잠수시키겠습니다.」 거대한 맥이 천천히 물 속으로 가라앉는 장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예안 은 문득 석양이 수평선 가까이 접근했음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휴, 어울리지 않게 석양 한 번 엄청 멋지네. 근데 지금 도대체 몇 시 냐?" 「한국 시각으로는 4시 30분입니다.」 "학교 끝났을 시간이군. 에휴, 그냥 잊어버리자. 당분간은 학교도 제대 로 못 갈… 아니, 이제 유진우로서는 학교 갈 일이 영원히 없을 텐데 뭐." 예안은 투덜거리며 백사장을 벗어나 빽빽하게 심어져 있는 숲 사이로 걸 어갔다. 한참을 걷다보면 언젠가는 도로가 나올 테고, 돈 한 푼 없지만 히치하이크를 하면 충분히 집에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집에 간 다음에 어찌 될 지는 그때 가서 생각하자. 피곤해 죽겠으니 까.' 하품을 연신 참으며 한 삼백 미터쯤 걸었을 때였다. 숲이 끝나고 도로가 나타나자 예안은 마음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나가났다. 그러나 대 충 봐도 백 대가 넘어 보이는 경찰차들과 수많은 전투경찰들이 바짝 긴 장한 채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자 우뚝 멈춘 채 새파랗게 질렸다. "뭐, 뭐지? 설마 시트날타인가 뭔가 하는 것들이 한국 정부에도 손을 뻗 치고 있었던 거냐?" 「데이터 부족으로 대답해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 누구 염장 지르냐?" 어찌할 바를 몰라 엉거주춤하던 예안은 영화에서 본 그대로, 두 손을 위 로 번쩍 들고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쏘, 쏘지 마세요!" 거리 약 십 미터 정도를 남기고 예안이 걸음을 멈추자 그들 사이에서 책 임자로 보이는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의외로 젊었다. "저는 책임자인 김중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가씨는 한국말을 할 줄 아는군요. 아가씨는 도대체 누굽니까? 한국인인가요?" "예? 아, 그, 그렇긴 한데…" 중현은 조금 수상쩍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인이라기에는 너무 특이한 외모로군요. 머리카락 색은 염색 했다 치고 녹색 눈은 렌즈를 꼈다 치더라도, 일단 피부가 너무 하얗군 요. 아무리 봐도 한국인이라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그 때 간신히 그들을 비추고 있던 석양의 희미한 빛이 숲 뒤로 사라지면 서 중현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울창한 숲의 그늘을 뒤에서부터 받은 예 안의 파란머리카락이 흑단같이 짙고 검은 색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현상이었다. "이건 무슨…" 중현이 넋을 잃고 자신을 쳐다보는 이 때, 예안은 죽을 맛이었다. '으악! 타이밍 정말 굿이다! 하필이면 이 때 태양이 지면 어쩌자는 거 야! 안 그래도 수상한데 이거 더 의심 사게 생겼잖아!' 한참 후 겨우 제정신을 되찾은 중현은 자신이 얼이 빠져 있었다는 게 부 끄러운지 헛기침을 하며 정중히 말했다. "어쨌든 우리로서는 아가씨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며칠 전에 서울 한복판에 나타났다고 신고가 들어온 비행물체와 아가씨가 방 금 타고 온 비행물체가 동일하다는 판단 하에, 일단 아가씨를 체포하겠 습니다." "자, 잠깐만요! 난 아무것도 안 부수고 아무도 안 죽였고 아무도 안 다 치게 했다구요! 도대체 날 무슨 명목으로 체포하겠다는 거예요!" 중현은 씩 웃었다. 사악한 미소였다. "도심 한가운데 높이 20미터 지점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니는 건 명 백한 불법입니다. 일단은 그런 명목으로 체포하겠습니다. 양해해주시 죠." '일단은'이라고 했다. 그렇담 앞으로 무슨 무슨 허무맹랑한 죄목들이 줄 줄이 붙을지 모른단 소리다. 대한민국은 원래 그런 국가다. "그리고 그 비행물체는 지극히 위험한 무기로 판단되니 일단 대한해군이 압류하겠습니다. 얌전히 넘겨주시죠. 그렇지 않으면 어뢰로 폭파할 수밖 에 없습니다." 은근히 협박을 가해오는 중현의 태도에 화가 난 예안은 발끈했다. "폭파하고 싶으면 폭파해 봐요! 맥은 지금쯤 해저에 구멍을 파고 숨어 있을 테니 절대 못 찾을 걸!" "호오? 그 병기의 이름이 맥인가요? 참고해두도록 하죠." "이익…" 중현이 뒤로 물러나고 바짝 긴장한 전경들이 자신에게 수갑을 채우기 위 해 천천히 다가오자 겁을 집어먹은 예안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씩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하지만 등을 돌린 채 힘껏 달아났다가는 그대로 발포 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에 예안은 차마 그러진 못했다. 바로 그때였다. - 퍼퍼펑! 뭔가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흰 연기가 자욱히 일어났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와도 같은 연기에 모두들 일제히 콜록거렸다. "체, 체포해! 총은 쏘지 말고!" 중현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예안은 누군가 자신의 손을 빠르게 잡아끄는 걸 느꼈다. 그에게 끌려다가시피 해 차에 오른 예 안은 그곳을 벗어난 뒤 어느 정도 지나서야 겨우 침착함을 되찾았다. "아, 누군지 모르지만 고맙습니다. 근데 누구세요?" 차를 운전하고 있는 사람이 혹시 레이온 박사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안면이 익은 것도 아닌, 처음 보는 얼굴이었 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당신을 저들로부터 무사히 탈출시켜 달라는 의뢰를 받은 사람입니다. 혹시라도 납치하려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은 접어두십시오. 도시에만 들어가면 곧장 당신과 헤어질 겁니다. 어차피 몇 분만 지나면 이 차 번호는 수배대상에 들어갈 테니까요." "아, 네… 하여튼 고맙습니다." "웬걸요. 저야말로 이런 기가 막힌 미인을 옆자리에 모시게 되어 영광입 니다. 하하하, 이거 항상 당신 같은 미인은 고사하고 평범한 여자라도 제 옆자리에 앉혀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오늘 그 꿈이 이뤄지는군요." 예안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입을 다물었다. 차는 어느새 도시로 접 어들고 있었다. 남자는 번화가로 접어들자 차를 세웠다. "여기서 내려드리죠. 그리고 근처 화장실에라도 들러 이 옷으로 갈아입 으십시오. 그런 화려한 고급옷은 너무 눈에 띕니다. 그리고 머리색깔이 눈에 띌 테니 가발도 마련하라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겠군요. 일단 가발 도 가져가시겠습니까?" "아니 무겁기만 한 거 뭐하러… 아니다. 그냥 주세요. 나중에 쓸 일이 있겠죠 뭐." 가발을 받지 않으려던 예안은 생각을 바꿔 그가 건네는 검은색 가발과 옷이 든 종이백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남자는 조그만 봉투 하나를 더 내 밀었다. "여기에 오백 만원이 들어 있습니다. 일단 집에 들어가시진 못할 테니 이 돈을 쓰시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제 의뢰주가 곧 찾아뵐 거라고 전하 라 하셨습니다." 이 사람을 고용한 사람은 역시 레이온 박사라는 그 사람이겠지? 아무리 생각을 짚어봐도 그 사람 밖에는 없다. 아니, 확실하다. 근데 배에 총을 쐈는데 그 사람은 잘 지내고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아, 저…" "특별히 궁금하신 게 더 있기라도 한 가요?" "그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망설이던 예안은 조심스레 물었다. "그, 그 사람은 지금 잘 있나요? 그러니까…" "아,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라 하시더군요. 곧 찾아 뵐 거라니 염려 않으셔도 될 겁니다." "네에…" 아무리 그래도 배에 총을 맞았는데 한동안은 병원에서 움직이지도 못할 게 뻔하다. 예안은 레이온 박사에게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걱정을 느 끼며 남자와 헤어졌다. 예안은 남자와 헤어진 뒤 일단 옷을 갈아입기 위해 근처 여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가보는 여자 화장실이라 처음에 굉장 히 쭈뼛거렸고, 그 안에서 나오는 여자들이랑 눈이라도 마주칠 땐 질겁 까지 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 종이백 안에 든 옷을 꺼내들었을 때 예안은 잠시 동안 석상이 되어야만 했다. "지금 나보고 이걸 입으라고?" 만약 이 옷을 미리 고른 게 레이온이라면, 다분히 고의적인 게 틀림없 다. "경찰한테 쫓기는 신세만 아니라면 절대 이런 옷 안 입는다…" 종이백 안에 들어 있던 옷은 하늘거리는 레이스가 잔뜩 달린 흰 원피스 였다. 거기다가 덤으로 예쁜 구두와 귀걸이, 반지까지. 이미 시트날타에 서 엘르 덕분에 한 번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드레스까지 입어본 경력 을 갖고 있으면서 이까짓 원피스 입는 게 뭐가 쪽팔리는지는 모르겠다 만, 남자의 그 복잡한 심리를 과연 누가 알겠는가. 예안은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입고 있던 옷은 그 냥 버리려 했지만 아까워서 다시 종이백 안에 넣어 손에 들었다. "휴, 일단 집에 갈 수는 없으니까 여관에라도 가야겠군." 종이백 안에 들어 있던 임시 위조 신분증 덕에 여관에 묵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힘없이 터덜터덜 걷고 있노라니 거리에서 흘끔거리는 시선 들이 느껴졌다. '왜 저렇게 쳐다보지? 혹시 저 사람들 잠복 형사라도 되나? 에이, 설마. 옷까지 갈아입었는데 날 알아보겠어? 그리고 경찰이라면 벌써 접근해왔 겠지.' 이제 자신도 어엿한 여자이자(몸만은), 뭇 늑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굉장한 미소녀의 대열에 합류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하는 동정남의 생 각이었다. "어, 사진현상소네?" 복잡한 생각과 함께 걷던 예안은 문득 사진현상소 앞에서 걸음을 멈췄 다. 예안은 주머니에 들어 있는 필름을 만지작거렸다. 아까 엘르한테 사 진기를 빌려 화려하게 치장한 자신의 모습을 담아둔 필름이었다. "음… 일단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하니 한 번 현상해볼까?" 결심을 굳힌 예안은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사진 현상하실 건가요? 아니면 즉석 사진을 찍으실 건가 요?" "필름 좀 맡기려구요. 몇 시간이면 되나요?" "일단 오늘 맡기시고 내일 아침 10시까지 찾으러 오시면 됩니다. 몇 장 이나 뽑으실 건가요?" "에… 그냥 일반 사이즈 하나 하고요. 대형으로도 뽑을 수 있나요?" "뽑을 수는 있지만 구겨지면 곤란하니 브로마이드처럼 만드시는 게 어때 요? 그쪽이 비용도 더 쌉니다." 주인 아저씨의 설명에 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여기 간단한 사항들을 적어주시겠어요?" 주인 아저씨가 내민 종이에 필수 사항들을 기입하고 난 뒤 예안은 돈을 치르고 현상소를 나왔다. '얼마나 예쁘게 나올까?' 자신이 좋아했던 여자의 모습이 얼마나 예쁘게 사진으로 나올지 예안은 무척 기대되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예안은 아직까지 진우로서의 정 체성을 잃지는 않은 것 같다. 여관을 찾아 돌아다니던 중 예안은 미용실을 발견했다. 원래라면 그냥 지나쳤어야 옳겠지만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 때문에 예안은 잠시 발걸음 을 멈추고 망설였다. '머리… 자를까? 아무래도 조금이라도 인상착의에서 빗나가려면 그게 좋 겠지?' 시트날타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과 한국 경찰로부터 쫓기고 있지만 예안의 두뇌는 놀랄 만큼 침착하고 돌아가고 있었다. 비록 얼굴을 고칠 수는 없지만(그러기도 싫었다) 머리카락만 짧게 커트쳐도 놀랄 만치 분 위기가 변할 것이다. '예안이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래도 잡히는 것보다는 낫겠지. 일단 자르 고 보자. 미안해, 예안아.' 결심을 굳힌 예안은 미용실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 여자가 반갑게 맞이 했다. "어서 오세요 손님. 여기로 앉으세요. 어떻게 해드릴까요?" 주인 여자가 권하는 의자에 앉아 잠시 거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예안은 유젤이 정말로 아름다운 소녀였음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 다. 이런 결 좋은 머리카락을 함부로 잘라 버려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 까지 들었을 정도니. '이건 무슨 예술품 하나 망치는 기분이네.' 하지만 이왕 결심한 건 실행에 옮겨야겠지. 예안은 조그맣게 말했다. "커트로 해주세요. 단발머리 말고 커트요." "커트도 여러 가지가 있는 데요. 어떤 식으로 해드릴까요?" "예?" 내가 여자 커트머리가 몇 종류나 되는지 알게 뭐냐. 잠시 당황했던 예안 은 한 여배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김효수 스타일로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자르기에는 너무 아까운 머리네요. 왜 이런 좋은 머리를 자르시는 거예요? 실연이라도 당하셨나 보죠?" 실연이라. 따지고 보면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건가? 예안은 쓰게 미소지 었다. "예. 따지고 보면 그렇게 되네요. 얼마 전에 실연당했어요." 주인 여자는 굉장히 놀라는 눈치였다. "저런, 믿을 수 없네요. 도대체 어떤 눈삔 남자가 손님 같은 멋진 아가 씨를…" "…죽었으니까요." "…아… 쓸데없는 걸 물어서 죄송합니다, 손님."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비록 죽었지만 그 애가 남긴 모든 건 제가 가졌거든요. 예안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허리까지 출렁이는 풍성한 머릿결이 커트머리로 바뀌는 건 이십 분도 채 걸리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왜 그 짧은 시간이 그 렇게도 길게 느껴졌던 것인지. 예안은 몰라보게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다 됐습니다 손님. 커트머리도 굉장히 잘 어울리시네요. 하긴, 손님 같 은 미인한테는 뭐든지 다 잘 어울리는 법이지요." 약간은 아부성이 있지만 전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유젤은 정말로 매력 있는 여자애였구나. 그리고 그 여자애가 날 좋아했었구나. "…감사합니다. 제 맘에 쏙 드네요." "또 오세요." 미용실을 나온 예안은 다시금 힘없는 발걸음을 터덜터덜 옮겼다. 오 분 도 채 걷지 않아 호텔을 찾을 수 있었다. 호텔의 맞은 편에는 조그만 여 관도 있었다. 어느 쪽을 쓸까? 잠시 망설이던 예안은 결국 돈이 좀 들더 라도 안전한 호텔을 이용하기로 했다. 자꾸 여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생각날 때마다 정성을 다해 유젤이 남긴 몸을 보 살펴 줘야 할 것 아닌가? "머리를 자르셨네요 손님." 접수처 직원은 어딘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예안은 그 제야 예전에 유젤을 이 호텔에 머무르게 했던 걸 기억해내고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이기라도 한 건가? 예전에 그 애와 왔던 호텔 을 또다시 오게 되다니. 우연찮게도 예전에 썼던 방이 비어 있었고 예안은 다시 그 방을 쓸 수 있었다. 며칠만에 보는 방은 보다 더 깨끗해진 걸 제외하면 별달리 변한 부분은 없었다. 예안은 예전에 진우였을 때 유젤과 같이 썼던 침대에 다 가가 무릎을 꿇고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강하게 풍기는 냄새 사이로 많 이 희석된 유젤의 체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착각이겠지."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예안은 샤워해야겠다 생각하고 몸을 일으켰 다. 옷을 다 벗고 욕실에 들어간 예안은 문득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 습을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거울 속에는 하얀 알몸을 드러낸 자신이 서 있었다. 아까 전에 시트날타에서 엘르의 메이드들이 몸을 씻는 걸 도와 줄 때는 정신이 없었지만, 이제야 제대로 유젤의 알몸을 볼 수 있었다. "아… 예안아… 넌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몸도 굉장히 예쁘구나." 이렇게 거울을 통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시간이 흐르고 너와 내가 보다 더 깊은 사이가 되었을 때 남자로서 너의 몸을 보고 싶었는데. 이제 유 젤이 되어 버린 '진우'는 그렇게 쓰게 중얼거렸다. 거울에 비친 유젤의 몸은 아직 앳된 흔적이 남아 있기는 해도 어엿한 성 인의 몸이었다. 적당한 크기의 가슴과 부드러운 몸의 곡선이 만들어내는 매력은 차라리 황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제 완벽한 자신이 것이 되 어 버린 터라, 예안은 감탄 이외에는 별다른 흥미나 욕망이 없는 눈길로 거울 속의 자신을 훑어보았다. 인간은 아무리 갖고 싶어했던 것이라 해도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흥미를 잃기 쉽다. 제 아무리 사랑한 여자의 알몸이라 해도 그게 자신이 몸이 되어 버린다면 과연 흥분이 일어날까? "어라? 근데 털이 없네?" 약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바디 라인은 이미 어엿한 성인의 것이면서 중 요한 부위에 어째서 털이 하나도 없는 거지? 서예안 넌 아직 어른이 아 니었던 거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든 예안은 희고 얇은 팔뚝을 들어 눈앞에 갖다댔다. 그리고 픽 웃었다. 혹시나 했던 게 맞아떨어졌을 때의 기분이란 참 묘한 것인가 보다. "뭐야, 솜털 하나도 없잖아?" 아무리 체질적으로 털이 없는 인간이라 해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솜털 은 있기 마련인데, 유젤의 몸에는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몸에 난 털 중 눈에 보이는 건 머리카락과 눈썹 같은 것뿐이었다. 그 밖의 다른 곳 에는 솜털은커녕 하다 못해 중요한 부위에도 털이 나지 않다니. "예안아… 넌 정말 천사인 거니?" 혹시 넌 인간이 만들어낸 천사? 예안은 자기가 생각해놓고도 너무 우습 다 여기고 쿡 웃어버리고 말았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기는 해도 너무 닭 살이다. 쏴아아아. 쏟아지는 물줄기에 온몸을 맡기며 예안은 눈을 감았다. 손을 들어 전신 을 천천히 천천히 애무하듯 쓸어나갔다. 진짜 내 몸으로 그 애에게 이렇 게 해줬다면 그 아이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황홀해하거나 흥분하기는 커녕 간지럽다고 깔깔대며 밀쳐내진 않았을까? 그래, 그럴지도 몰라. 그 아이는 아직 남녀간의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아기나 다름없으니까. "흑…" 마침내 예안은 울음을 터트렸다. 그것은 꽤나 오랫동안 참아 왔던 상실 에 대한 슬픔이었다. 시트날타에 있을 때는 무섭고 정신이 없어서 잘 몰 랐다. 하지만 이렇게 예전에 유젤과 같이 썼던 호텔에서 그 아이와 함께 썼던 방을 쓰며 그 아이가 썼던 욕실에서 그 아이의 흔적을 느끼다 보니 마음 속 깊은 곳에 은밀하게 감춰둔 슬픔이 터져 나오는 걸 막을 수 없 었다. 흔히 아픔은 상처에서 온다고 한다. 지금 예안이 이렇게 우는 건 아마도 유젤이 죽어버린 것을 슬퍼하는 진우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과 연 상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렇게 유젤은 살아 숨쉬고 있고 오히려 '유진우'의 생명은 이제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데. 유진우란 인간은 이 제 죽어 버렸는데. 그렇다면 상처 없는 곳에서 오는 이 아픔은 거짓된 거란 말인가? 예안은 한참을 흐느꼈다. 다음날 예안은 언제 울었냐는 듯 한결 씩씩해진 안색으로 일어났다. "자! 오늘 하루도 즐겁게 시작하자!" 육체가 바뀌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만사를 대하는 예안의 태도는 분명히 바뀌었다. 예전에는 아침 에 일어나면 냉소적으로 투덜거리기부터 했었다. 이렇게 아침을 밝게 맞 이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유젤은 '진우'에게 몸말고도 다른 무엇인가를 선물로 또 남긴 건지도 모른다. "자, 세수부터 하고!" 세면대로 간 예안은 거울을 들여다보다 그대로 굳어졌다. "어라? 내가 어제 머리카락 안 잘랐나?" 분명히 어제 머리카락을 잘랐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지만 거울 속에 비 친 자신의 모습은 언제 그랬냐는 듯 허리까지 찰랑이는 탐스러운 긴 머 리를 갖고 있었다. 혹시나 잠이 덜 깨었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마찬가지였다. 손으로 만져보니 역시나 마찬가지.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렇게 되면 머리를 자른 보람이 없 잖아!" 머리를 자른 건 한국 경찰이 가지고 있을 인상착의에서 가능한 한 보다 멀리 벗어나기 위함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말짱 도루묵이란 말이다! "커, 커트 치는데 만 오천원이나 들었단 말이다!" …정정하자. 아무래도 이 인간은 헛으로 날려버린 돈만 아까운 줄 아는 가 보다. "머리카락이 급속도로 자라는 체질이기도 한가 보네. 어휴, 어쨌거나 돈 만 아깝게 됐네. 이럴 줄 알았으면 자르지 말걸." 아직도 돈은 사백 만원이 훨씬 넘게 남아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 될지 모 르니 가능한 한 아껴야 했다. 그런 주제에 이런 호텔에 머무르고 있는 걸 보면 솔직히 할 말은 없을 테지만. "할 일도 없는데 사진이나 찾으러 가볼까나?" 예안은 호텔을 나섰다. 기억을 더듬어 어제 갔었던 사진현상소를 찾았 다. 그런데 문이 열려 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침 10시까지 오라고 했지? 아침에는 문을 안 여나 보네. 그럼 그동안 뭘하지?" 마땅히 갈만한 데도 없고 결국 낙찰된 곳은 PC방. 담배 냄새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는 해도 대한민국의 건전한 청소년이 갈만한 놀이공간은 PC방 뿐이다. "자리 하나 주세요. '이터널 피닉스' 되는 자리로요." 약간 멍한 표정으로 예안을 바라보던 알바생은 헛기침과 함께 카드를 내 밀었다. "여기요. 그런데 이터널 피닉스 좋아하시는가 보죠?" "좋아해요." "의외네요. 여자분들은 보통 이터널 피닉스 같은 온라인 롤플레잉보다는 '사자의 에피소드'같은 롤플레잉 게임을 더 좋아하지 않나요? 실제로 그 게임이 여성 유저 숫자나 비율이 더 높기도 하고…" "뭐, 취향도 취향 나름이니까요." 유젤은 그렇게 대꾸하며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알바생이 바로 뒤에 와 서 계속 말을 걸었다. "아직 레벨 61이시네요? 초보신가 보죠?" "초보라니요. 세컨 캐릭터라구요." 약간 발끈한 그녀의 대답이 귀엽게 느껴진 알바생은 피식 웃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예안의 옆자리에 앉아 똑같은 게임에 접속했다. "초보시면은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데. 이래 뵈도 저레벨 서포트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한다고 친구들 사이에서 소문났거든요." "초보가 아니라 세컨 캐릭터라니까요." "예에, 예에. 믿어드리죠. 지금 계신 곳이 어디예요? 멸망의 평원인가 요?" 초보가 아니라고 두 번이나 말했음에도 알바생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예안은 약간 화가 났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레벨이 61이시면 절망의 평원보다는 울음의 습곡에서 고레벨 플레이어 의 서포트 받으며 사냥하는 게 세 배는 더 빨리 레벨이 올라요. 절망의 평원 몬스터들은 레벨 61짜리 캐릭터가 혼자 잡기에는 너무 드세거든 요." "아, 그렇지만 절망의 평원의 몬스터들이 죽이는 데 더 감질맛 나잖아 요. 울음의 습곡에서는 아무리 죽여봤자 그냥 연기로 변해서 픽픽 사라 지니 실감이 안 난다구요." "그래도 빨리 레벨 업 하려면 울음의 습곡이 더 낫죠. 뭣하면 차가운 대 지에서 사냥해도 되구요. 절망의 평원은 솔직히 61짜리 캐릭터에게는 안 좋아요." "괜찮아요. 저한텐 '사파이어의 눈물'이 있거든요. 이 왕관 쓰고 있으면 마법 데미지가 두 배로 증가되기 때문에 절망의 평원 몬스터들에게는 치 명적이에요. 저한테는 절망의 평원이 더 좋아요." 처음에는 싫은 듯 보였어도 어느새 예안은 즐겁게 알바생과 대화를 나누 고 있었다. 역시 게임 폐인들만의 유대감 뭐 그런 게 있는 걸까? 알바생은 굉장히 놀란 눈치였다. "사파이어의 눈물? 그거 굉장히 만들기 힘든 건데? 제가 알기로 그거 가 진 사람이 이터널 피닉스에서 딱 두 명 뿐인데요? 그 중 한 명이 제가 아는 동생 녀석인데…?" "그래요? 그거 의외네요. 저 말고 이거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쪽이 알고 있는 동생 분이라는 사람 아이디가 뭔데요?" "주 캐릭터 이름은 붉은패왕이고 계정은 ZEUS인데… 어라?" 그제야 예안이 쓰고 있는 계정이 뭔지 확인한 알바생은 핼쑥하게 굳어버 렸다. 예안의 계정은 'ZEUS'였다. "어라? 이건 분명히 진우 아이디인데… 혹시 진우 아세요?" 예안도 알바생이 쓰는 계정을 확인하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계정 역 시 자신이 잘 아는 것이었다. '어라? 'Mephisto'는 분명 재원이 형 계정인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두 사람의 눈이 한순간 굳은 채 공중에서 마주쳤다. 차이점이 있다면 단 하나. 그것은 바로 예안은 상대가 온라인에서 자신과 같이 이터널 피닉 스를 즐긴 형이라는 걸 안다는 것이고, 김재원은 예안이 유진우라는 걸 꿈에도 상상 못한다는 것이다. 놀라움이 가신 뒤 재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실례지만 진우와는 무슨 관계신지…?" "가, 가족이에요!" 예안은 엉겁결에 그렇게 대답해버렸다. 재원은 조금 미심쩍어 하는 눈치 였다. "가족이라구요? 정말로요?" 재원이 지금 해킹이나 뭐 그런 걸로 자신이 이 아이디를 손에 넣은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한다고 느낀 예안은 황급히 덧붙였다. "가족 맞아요! 유진우! 올해 대명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 핸드폰은 여태 껏 단 한 번도 사본 적 없는 불쌍한 인생! 이터널 피닉스와 쓰러지지 않 는 패왕을 합쳐 지존 아이디가 총 세 개! 돼, 됐죠?" 이제야 재원은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표정이었다. "와, 진우 가족 맞으시군요. 전 또 진우 녀석 아이디 해킹이라도 한 분 인 줄 알았죠." 예안은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제가 어딜 봐서 그런 짓 하게 생겼나요?" "그런데 진우는 요새 무슨 일이 있나요? 벌써 열흘이 넘게 게임 접속을 안 하던데…" "그게…" 그냥 진우는 죽었다고 말할까? 하지만 지금까지 게임으로만 대했지, 실 제로는 얼굴 한 번 볼 일 없는 재원에게 그렇게 설명하기가 좀 그랬다. 어차피 나중에 만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진우가 요새 좀 많이 바빠서 그래요. 고등학교 입학한지도 얼마 안 됐 고…"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긴 입학 초에는 원래 좀 많이 바쁜 법이 죠." "그렇죠." 어느 정도 납득시켰다 생각한 예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이거 의외인데요?" "뭐가요?" 재원은 재미있다는 듯 히죽 웃고 있었다. "진우 녀석에게 이런 굉장한 미인 가족이 있었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 녀석 사진이라도 한 번 보여달라니까 자기는 평범해서 보여주기 싫다 고 한사코 거부하던데, 실제론 엄청 꽃미남인 거 아니에요?" '꽃미남은 얼어죽을… 이 세상의 꽃미남 다 죽었나? 근데 재원 형이 나 한테 사진 보여달라고 한 적이 있었나? 잘 기억이 안 나네? 내 얼굴이 평범하다고 말한 건 기억나지만…' 예안은 애써 침착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진우 그렇게 잘생기지 않았어요. 그냥 평범한 정도예요." "그래요? 저, 실례지만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아, 저도 올해 고등학교 입학했어요." "그래요? 근데 이 시간이면 학교에 가 있을 시간일 텐데…" 이런 곳에서 덜미를 잡히다니! 예안은 생각 없이 대답해버린 자신의 입 을 원망하며 다시 변명했다. "오늘이 우리 학교 개교기념일이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놀고 있는 거예 요." "그렇군요. 근데 진우가 자기 가족 이야기하는 건 별로 들어본 적이 없 는데. 혹시 진우랑 무슨 관계되세요? 진우라고 막 부르는 거 보니까 누 나인가요?" "아, 네에. 그래요." 재원은 생각 없이 되돌아온 예안의 대답에 걸려들었다는 듯 씩 웃었다. "거짓말." "거, 거짓말이라뇨?" "올해 고등학교 입학하셨다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진우 누나가 될 수 있 죠?" 내가 이렇게 거짓말 실력이 형편없었던가? 아니야! 이건 단지 당황해서 그럴 뿐이야! 예안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다시 변명했다. "사실 진우랑 이란성 쌍둥이예요. 그래서 진우가 저보고 누나라고 불러 요." 실은 '진우가 학교 일 년 일찍 들어갔어요.'라고 둘러대고 싶었지만 언 제 어디서 정보를 흘렸을지도 모르기에 위험한 짓은 안 하기로 했다. "흐음. 그렇군요. 그나저나 진우 녀석 정말 너무하네. 이런 미인 누나를 두고 있으면 십중팔구 자기도 꽤나 꽃미남일 텐데 사진 한 번 안 보여주 다니. 난 자기한테 내 사진 보여줬는데 말이야." "예? 사진을 언제 보여줬어요? 기억에 없는… 흡!" 재원이 사진을 보여줬다면 오늘 못 알아봤을 리가 없다! 라는 전제 하에 자신 있게 그렇게 대답했지만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자신이 무슨 실수 를 저질렀는지 깨달은 예안은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재 원은 싱글벙글 승리자의 미소를 얼굴에 가득 드리우고 있었다. "이제야 네 입으로 실토하는군, 유진우? 아니지, 아니지. 유진우는 네 가명이겠지? 네 진짜 이름이 뭐야?" '엿 됐다…' 이제 와서 발뺌해봤자 오히려 의심만 더 사는 꼴밖에 안 된다. 예안은 패배자의 한숨과 함께 작게 대답했다. 자포자기한 탓인지 표정이 조금 굳었다. "어떻게 눈치챘어, 재원 형?" "처음부터. 난 별 생각 없이 왜 진우 아이디를 쓰고 있느냐고 물었을 뿐 인데 넌 너무 많이 당황했잖아? 뭔가 있다 싶어서 그냥 찔러봤는데 알아 서 술술 수상하다는 증거를 잔뜩 내주더군. 넌 거짓말을 잘하는 체질이 아닌가 보다." "…당황해서 그랬을 뿐이야." "그래, 그래. 그나저나 네 진짜 이름은 뭐야?" 말해줘도 괜찮으려나? 예안은 잠시 생각하고 난 뒤 대답했다. "서예안." "호? 얼굴 못지 않게 이름도 예쁜데? 근데 왜 그동안 남자라고 속인 거 야? 감쪽같이 몰랐잖아. 말투까지 말이야." "속여서 미안한데, 특별히 나쁜 생각은 없었어. 아까 형 말대로 이터널 피닉스 하는 여자는 별로 없잖아? 그래서 그랬을 뿐이야." "흐음. 나름대로 사정이 있나 보네. 근데 언제까지 재원 형이라고 부를 거야? 오빠라고 좀 불러봐. 여자애가 형이 뭐야?" 예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한데, 형. 나 원래 말버릇이 이래서 그게 잘 안 된다고. 애초에 기 대를 하지 마. 근데 형은 여기서 알바하는 중? 대학생이라고 했던가?" "어." "지금 학교 안 가도 되나 봐?" "친구한테 대리 출석 부탁했어. 수업 별로 흥미도 없고, 아직 2학년이라 서 좀 놀아도 돼. 학점 관리는 4학년 2학기부터! 이런 말도 몰라?" "…날라리 대학생 같으니라고." "하하, 너도 대학 와 보면 내 말 십분 공감할 거야. 근데 이 캐릭터는 뭐냐? 너 새로 키우냐?" "어. 지존 아이디로 돌아다니는 것도 솔직히 이제 좀 지겹고 해서, 새로 키우려고 그래." "하긴, 사파이어의 눈물 갖고 있으면 절망의 평원에서 레벌업 하기 쉽겠 지. 뭐니 뭐니 해도 경험치를 제일 많이 주는 장소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형이 나 좀 도와. 사파이어의 눈물만 갖고는 아무래 도 빨리 죽이기 힘드니까." "절망의 평원에서 나랑 같이 파티 맺으면 경험치가 적게 떨어지잖아? 그 래도 좋아?" "누가 파티 맺으래? 그냥 파티 맺지 말고, 광범위 족쇄 마법이나 좀 걸 어 줘. 내가 죽이기 쉽게." "알았어, 알았어." 이왕 이렇게 된 거 게임이나 즐기자 하는 생각에 예안은 모니터 속으로 빠져들었다. 재원은 캐릭터를 이용해 몬스터들에게 마법을 마구 날리다 문득 미소지으며 예안의 옆모습을 흘끔 쳐다보았다. 게임에 집중하고 있 는 모습이 정말 귀엽고 예뻤다. 두 시간 정도 게임을 한 뒤 예안은 프로그램을 종료했다. "왜, 그만하려고?" "어. 사진현상소에 가봐야 돼. 사진 맡겨놓은 게 있어서." "그래? 그럼 나랑 같이 가자. 모처럼 이렇게 만났는데 그냥 헤어지기는 좀 아쉽다." "알바 자리는 어떻게 하고?" "어차피 이제 곧 주인아저씨 올 시간이야. 어, 왔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40대의 남자가 들어섰다. 재원은 주인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사장님. 저 이만 들어가 봐도 되죠?" "어, 그래. 근데 옆의 그 아가씨는 누구냐? 네 여자친구? 이야, 재원이 너 능력 좋은데?" 예안은 기가 막혔지만 꾹 눌러 참았다. 재원이 웃음 띤 얼굴로 설명했 다.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긴 하지만,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같이 이터널 피 닉스에서 같이 게임하던 동생이에요. 오늘 처음으로 여기서 만났어요. 기가 막힌 우연이죠?" "후후, 잘 해봐라." "걱정 붙들어 매세요. 잘 되면 꼭 제가 한턱 쏩니다." "기대하마." 주인 아저씨와 재원이 묘한 웃음을 나누는 사이 예안은 잔뜩 부은 얼굴 로 궁시렁거리고 있었다. '잘 해보긴 뭘 잘해보라는 거야? 사람을 세워놓고 둘이서 알아듣지도 못 할 이야기만 하고 있음 난 어쩌라구?' 예안은 이 둘이 자신을 놓고 이야기를 한다는 걸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 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콤플렉스 보이에서 사랑 받는 미소녀까지의 험 난한 여정은 어쨌든 시작된 모양이다. 과연 앞으로 재원이 예안의 마음 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 아니면 한낱 엑스트라로서 그 생을 마감할지는 좀더 두고 보는 게 좋겠다. PC방을 나선 예안과 재원은 사진 현상소로 향했다. "근데 무슨 사진인데? 설마하니 벌써 수련회 사진 같은 걸 찍었을 리는 없을 테고? 혹시 입학 사진?" "그런 거 아냐." "흐응? 궁금한데? 혹시 나 보여줄 수 있는 거지?" "절대 안 돼. 꿈도 꾸지 말라고." "에이, 궁금하잖아. 그러지 말고 좀 보여 줘라." 남자한테는 절대 그런 화려한 치장을 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엘르한테 '추리닝 내놔!'라는 요구까지 했는데 미쳤다고 재원에게 보여준단 말인 가? 예안은 사진을 찾으면 자기 혼자 두고두고 모셔두고 볼 생각이었다. 예쁘게 나온 자기 자신을 자기가 본다는 게 좀 우습긴 하지만 예안에게 는 상관없는 이야기. 유젤이라 생각하고 볼 거였으니까. 두 사람은 사진현상소에 도착했다. 주인이 예안을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세요 손님. 사진이 아주 잘 나왔습니다. 한 번 보시겠어요?" "아니요. 그냥 주세요." 혹시라도 재원이 볼까봐 예안은 그렇게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주인은 둘둘 말은 대형 브로마이드형 사진과 자그마한 봉투에 넣은 일반 크기 사진을 예안에게 건넸다. 사진집을 나서면서 재원은 계속 졸랐다. "그러지 말고 좀 보여줘라. 네 사진 맞지?" "내 사진 맞아. 그래서 보여주기 싫다는 거라고." "어? 저기 UFO다?" "뭐?" 혹시 시트날타에서 날 잡으러 온 건가? 화들짝 놀란 예안은 재원이 가리 킨 하늘을 얼른 쳐다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 에?" 어느새 빼갔는지 재원은 브로마이드형 사진을 손에 쥔 채 히죽 웃고 있 었다. "그렇게 간단히 속아넘어갈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고맙게 잘 볼게~" "치, 치사해, 형! 그런 게 어딨냐!" 질겁한 예안은 사진을 뺏으려고 달려들었지만 재원은 요리조리 미꾸라지 처럼 피해가며 사진을 펴들었다. "도대체 어떤 사진이길래 우리 예안양이 이렇게나 보여주기 싫어하는 걸 까?" 재밌어하며 사진을 펴든 재원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사진 속에는 화려함 을 곁들인 드레스와 우아한 치장으로 온몸을 감싼 예안이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실로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우, 우와…" "이리 내놔!" 재원이 얼이 빠진 사이 예안은 잽싸게 사진을 꺼내어 둘둘 말며 그를 쏘 아보았다. "보여주기 싫다는데 왜 자꾸 보려고 그래?" 재원은 예안의 핀잔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이, 이야! 굉장하다! 그거 너 맞지? 코스라도 한 거냐, 너? 굉장해. 진 짜 귀부인 같아." "묻지 마셔. 대답 안 할 거니까." "예안아!" 갑자기 재원은 예안의 두 어깨를 꽉 잡으며 눈을 빛냈다. 예안은 이 인 간이 또 무슨 소리를 할지 심히 두려워졌다. "왜, 왜?" "그 사진 나 주라! 내가 두고두고 가보로 간직할게!" 고작 그거였나? 예안은 생긋 웃으며 딱 잘라 대답했다. "싫어." "야 그러지 말고 나한테 한 장만 줘. 응? 넌 필름으로 또 뽑을 수 있잖 아? 그리고 다른 사람 사진도 아니고 그냥 너 혼자 달랑 서 있는 건데 뭐가 어때서 그래?" "싫어. 이거 보여줄 사람은 따로 있어. 그러니까 보채지 마셔." "누군데 그게?" 착각이었을까. 예안은 재원의 목소리가 약간 화가 난 듯 하다고 느꼈다. "형은 몰라도 돼. 그러니까 관심 끄셔." "난 알아야겠는데? 누구야 도대체?" 한 번 장난을 쳐볼까? 예안은 히죽 웃음을 지었다. "내 애인한테 보여주려고 그런다. 됐지? 그러니까 관심 꺼." "네 남자친구? 너 남자친구 있었냐?" "당연하지. 그럼 내가 없을 줄 알았어?" 의외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재원의 태도에 약간 뜨끔했지만, 이왕 장난 친 거 끝까지 밀어붙이기로 했다. 재원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 였다. '뭘 저렇게 생각해?' 만약 그가 뭘 생각하는지 예안이 알아차렸다면 아마 박장대소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예안은 남자친구가 있다는 거짓말도 나름대로 재밌다고 속으로 쿡쿡 웃으며 사진을 뺏기지 않기 위해 꼬옥 끌어안았다. "형, 나 그만 들어가 봐야 돼." 갑자기 호텔 앞에 멈춘 예안이 그렇게 말하자 재원은 어리둥절했다. 이 근처에 아파트나 주거 건물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딜? 어딜 들어간다고?" "여기." 그렇게 말하며 예안이 호텔을 가리키자 재원의 안색은 창백하게 굳었다. "너, 너 설마 어제 호텔에서 잔 거냐?" "어. 왜?" "나, 남자친구랑?" 지나치게 창백한 재원의 안색에 예안은 왠지 농담을 건네면 큰일날 것만 같았다. "아니. 당연히 나 혼자지. 내가 미쳤냐? 남자랑 같이 호텔에 묵게? 사정 이 있어서 며칠 간은 집에 못 들어가거든. 가출 같은 거 한 건 아니니 걱정 말라고." 재원은 예안의 말투에는 여성다움이 상당히 결여됐다는 걸 느꼈다. 하지 만 내색하진 않았다. "아, 난 또. 괜히 이상한 상상했잖아. 근데 너 폰 같은 거 있니?" "아니. 그런 거 안 키우는데?" "아쉽네. 그럼 내 쪽에서 너한테 연락하려면 어떻게 하면 돼?" "이터널 피닉스 있잖아? 거기로 들어오면 되지 뭐. 아, 그리고 나 한동 안은 거기 자주 못 들어갈지도 몰라.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게임 안에서 연락하기는 좀 그렇지. 폰 살 생각 없어? 요새 애들은 폰 같은 거 필수잖아?" "별로 살 생각 없다네. 살 돈도 없고." 재원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어 예안에게 내밀 었다. 예안은 어리둥절했다. "자, 받아." "이걸 왜 나한테 줘? 이거 형 거잖아?" "내 거긴 한데, 너한테 폰이 없다니까 그냥 주는 거야. 사용료는 내가 낼 테니까 마음놓고 써도 돼. 그렇지만 제발 부탁이니 국제 전화만은 쓰 지 마라." 예안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왜 형이 이걸 나한테 주냐는 거지." "너 폰도 없고, 살 생각도 없다니 내가 연락하려면 내 걸 주는 수밖에 더 있냐? 안 그럼 너 집 전화번호 가르쳐 줄래? 내가 전화 걸 때마다 받 을 수 있어?" 예전에 '진우'는 유젤이 눈치가 너무 없다고 혼자 속으로 투덜거리곤 했 지만, 지금 이 광경을 보자면 자기도 눈치는 없는 편이 아닐까 싶다. 남 자가 이렇게까지 해온다면 웬만한 여자라면 대시 받는다는 걸 알 텐데. 아니면 남자로 16년을 살아와서 그런 걸까. "그냥 편히 생각하고 받아 둬. 다음에 내가 불러내서 맛있는 거 사줄게. 그럼 들어가 봐." "자, 잠깐 형…" 행여나 폰을 다시 돌려줄까 봐 재원은 잽싸게 멀어지며 손을 흔들었다. "제발 부탁이니 국제 전화는 쓰지 마라~ 너무 많이 나오면 나 울 부모님 께 맞아 죽어~ 그리고 너 눈이 참 예쁘다!" 폰을 손에 든 채 멍청히 서 있던 예안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내가 전에 준 헬버스의 보석(이터널 피닉스의 유니크 아이템 중 하나) 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이 비싼 걸 턱턱 내주네?" 콤플렉스 보이에서 사랑 받는 미소녀까지의 길은 아직도 험난하다. 호텔 룸에 돌아온 예안은 문을 잠그자마자 갑갑하게 쓰고 있던 가발을 벗었다. 그러자 대충 목덜미에서 자른 붉은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휴. 가발이 벗겨질까 봐 겁나서 죽는 줄 알았다." 욕실로 들어간 예안은 머리카락 길이가 아침에 자신이 대충 잘랐던 길이 에서 그대로임을 확인했다. "몇 시간 정도는 돌아다닌 것 같은데 그대로네? 아니면 잠자고 있는 동 안에만 빨리 자라는 건가? 흐음… 잘 모르겠다. 나중에 그 레이온 박사 인가 하는 사람한테 물어보면 되겠지." 소파에 대충 앉은 그녀는 브로마이드형 대형 사진을 펴들었다가 그대로 굳었다. "…이게 나?" 내가 언제 이런 매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던가? 사진 속에 담긴 여자의 모습은 이 세상 모든 걸 꿰뚫어 버릴 듯 매서운 눈길로 쏘아보고 있었 다. 어떻게 보면 한없이 무서워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둘도 없을 매력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와~ 예안이는 역시 어떻게 하고 있든 예쁘다니까~" 모르는 사람이 이 광경을 봤다면 스스로의 미모에 심취해 있는 줄 알 것 이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애의 화려한 모습을 보고 감탄하는 중이라는 걸 안다 해도 그다지 별 차이는 없을 듯 하다. - 딩동 딩동 갑작스런 벨소리에 예안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가 튕겨지듯 일어났 다. 반사적으로 벽에 등을 대고 바짝 선 예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누구지?' 자신을 이곳으로 찾아올 사람은 없다. 재원도 이 호텔에 머무른다는 것 만 알지 몇 호실인지는 모른다. 박사는 바로 어제 배에 총을 맞았으니 벌써 완치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제 자신을 쫓고 있던 한국 경 찰, 아니면 시트날타 둘 중의 하나로 가능성이 좁혀진다. '시트날타… 아니면 경찰이란 소린데…' 어느 쪽이라 해도 예안에게 좋은 결과가 오진 않는다. 하지만 굳이 꼽으 라면 한국 경찰쪽이랄까. 적어도 시트날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대한 민국 시민으로서 보호를 요청할 수는 있을 테니… 가만, 보호? '생각해보니 난 시민권이 없잖아! 지금의 내가 유진우라고 하면 도대체 누가 믿어주겠어!' 그렇게 주장해본들 잘 되어 봐야 환자로 몰려 정신병원으로 향하거나, 아니면 스파이나 간첩 취급받아 법정에 설 것이다. 둘 중 딱히 어느 하 나가 낫다고 볼 순 없다. 자유를 뺏기기는 둘다 마찬가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시트날타로 가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시트날타는 자 유말고 다른 물질적인 건 엄청나게 제공할 수 있다고 했으니. 예안은 바짝바짝 말라오는 입천장을 혀로 핥으며 인터폰 가까이 다가갔 다. 그리고 화면에 뜬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예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앗!" 예안은 생각할 것도 없이 달려나가 문을 열었다. 문밖에 서 있던 레이온 이 창백한 표정으로 애써 밝게 인사했다. "안녕, 유젤?" "아… 아…" 내가 왜 이러지? 그다지 보고 싶어했던 사람은 아닌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거지? 예안은 습막이 잔뜩 낀 눈동자로 레이온의 두 손목을 붙들었 다. "괘, 괜찮아 당신? 어제 총에 맞았잖아? 벌써 이렇게 돌아다녀도 돼?"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보다 안에 들어가도 돼?" "으, 응! 드, 들어 와!" 허둥지둥 레이온을 안에 안내한 예안은 문을 잠그고 뒤따라 들어왔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예안이었다. "근데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네가 있는 곳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지." "아 그럼… 시트날타인가 뭔가 하는 녀석들도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있 는 건가?" "아니, 그 녀석들은 몰라. 내가 널 찾는 데 사용한 방법은 그 녀석들이 쓸 수 없는 거니까. 하지만 총력을 다한다면 그 녀석들도 곧 네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레이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 날 보자마자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할 줄은 몰랐는데? 그렇 게 내가 보고 싶었던 거야? 아니면 내가 걱정이 되어서?" "모, 몰라! 묻지 말라고!" 예안은 살짝 고인 눈물을 닦으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래. 난 단지 이 사람이 내가 쏜 총에 맞아서 걱정이 되었던 거다. 그것뿐이다. 반가워서 라든지 감격해서라든지 그런 건 절대 아니다. 그래 아니야. 아니라구. "한국 경찰한테 쫓기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일이 참 곤란하게 됐 네." "맥의 인공지능의 충고대로 영해 밖에서부터는 잠수함을 피해 저공비행 으로 백사장까지 날아왔는데, 역시 잘못한 걸까?" "그건 잘 했어. 그렇지만 아무래도 목격자가 있었던 모양이야. 레이더에 는 걸리지 않지만 투명화 기능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사람 눈에는 걸리 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아직까지 나 전국에 수배되지는 않았지?" "그러고 싶어도 한국 정부는 그럴 수 있는 입장이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지?" "처음에 한국 정부는 맥이 외국에서 비밀리에 개발한 신형 무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어. 몇 년 전 인천 앞바다에서 솟아난 유전 때문에 한국 정부는 자그마한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정도로 신경이 곤두서 있는 판국이니 당장에 경찰, 그리고 육군과 해군까지 출동했지." "으윽…" 그 정도로 일이 크게 벌어졌을 줄이야. 예안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걸 느 꼈다. "하지만 맥의 등장은 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게는 비밀로 되어 있어. 국민 적인 혼란을 우려해서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맥의 파일럿이 한국인일지 도 모른다는 증거 때문이지. 혹시 경찰과 조우했을 때 말 한 적 있어?" 예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온은 '그렇군'하고 중얼거렸다. "일이 조금 심각하게 됐어. 처음에 맥을 어뢰로 격침하기 위해서인지 압 류하기 위해선지 몰라도 해군함대가 맥이 잠수해 있는 앞바다를 며칠이 나 뒤졌지만 아무런 반응도 걸리지 않자 지금 한국 정부는 비밀리에 널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어. 이건 내 생각인데… 아무래도 그들은 맥을 탐내고 있는 것 같아." "맥을 탐내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만약 맥의 파일럿이 한국인이라면, 어떤 기업이나 개인 과학자가 비밀 리에 개발한 병기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에서지. 그렇게 되면 한국 군대에 끌어들일 수 있잖아? 적어도 적은 아닐 테니까." "흐음…" "게다가 지금 백악관도 한바탕 난리가 났어. 유젤 너, 태평양에서 미군 함대에 라이플 버스터닝을 발사했다며?" "아, 뭐 그거야…" 예안이 쑥스러운 듯 시선을 돌려버리자 레이온은 약간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 때문에 지금 백악관은 벌집이라도 들쑤신 듯 난리도 아니야. 도대 체 어느 나라에서 맥을 개발했는지를 놓고 정보부는 말도 아니게 골치를 썩고 있어. 가장 커다란 후보는 일단 한국하고 중국인데, 만약 한국이라 면 그들로서는 엄청 골치 아파지는 거지. 어찌 되었든 세계에서 유전을 갖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니까. 만약 맥이 정말로 한국의 무기라 면 최악의 경우 미국은 제2의 이라크로 한국을 선택하려던 선택을 전면 백지화해야 하니까." "몰라, 그런 이야기 별로 관심 없으니까." 예안은 머리 뒤로 팔짱을 끼며 소파에 길게 누웠다. 유전이니, 한국이 니, 미국이니 하는 이야기는 예안의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무사히 집에 돌아가 시트날타나 경찰에 잡히지 않고 평범하게 살 수 있 을까 하는 게 최대 관심사였다. "유젤." "왜?" "넌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니?" 레이온의 목소리는 한없이 진지했다. 예안은 누운 채로 대답했다. "그냥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대로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맥이라는 것도 당신… 아니, 그냥 형이라고 부를게. 맥도 형이 그냥 그대로 가져갔으면 좋겠는데." "형이라…" 예안의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조금은 어색한 그 단어를 입안에서 굴 려보던 레이온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맥은 유젤 네 거야. 너말고 맥을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 상에 없어." "파일럿을 또 만들면 되잖아? 예안이를 탄생시킨 건 형이니, 다시 또 하 나를 만들며 되는 거 아냐? 이번엔 불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정식 타입으 로 말이야." 조금 빈정거리는 말투에 레이온은 약간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게 그렇게 쉽다고 생각해? 유젤을 탄생시키기 위해 무려 5백억 달러 가 넘는 자금이 소모되었어. 복제 작업에 실패한 것만 해도 무려 5년 동 안 수백 번이 넘어. 네가 탄생할 수 있었던 건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구. 마더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도 영원히 성공하지 못했을 거야." '유젤의 탄생'이 아니라 '너의 탄생'이라고 했다. 그러나 예안은 레이온 이 유젤과 자신을 동일시 여긴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마더(Mother)? 그게 뭐지?" "모르는 게 좋을 거야. 유젤 네가 원한 것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면. 알아서 좋을 존재가 아니야." "그렇다면 말 안 해줘도 돼."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온은 예안의 옆으로 다가와 카펫 바닥에 한쪽 무릎 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쥐었다. "징그럽게 왜 이러냐!" 예안은 그를 밀쳐내려 했다. 하지만 레이온은 손을 풀지 않았다. "유젤. 난 네가 이제 그 사람의 그늘에서 벗어나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 았으면 좋겠어. 널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기쁘지만, 만약 네가 또 그 사 람에게 가 버린다면 난 정말 견딜 수 없게 되고 말 거야. 제발 그러지 말아 줘. 부탁이야." "그 사람? 그 사람이 누군데?" 유젤이고 레이온이고 '그 사람'이란 말을 사용하는 걸 너무 좋아한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예안은 그렇게 물었다. "그 사람 말이야… 그 사람… 아담…" "아담? 형 지금 무슨 구약성서 이야기라도 하는 거야?" 뜬금 없는 소리에 약간 어리둥절한 예안은 상반신을 일으킨 뒤 어깨를 으쓱했다. 알아듣지 못하고 재미없는 소리는 그만하라는 제스쳐다. "하여튼, 이제부터 난 어떻게 하면 되지? 난 분명히 예전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말했으니까, 이제 형이 어떻게든 날 도와줄 수 있지?" "가능해." "그렇다면 시간 끌지 말고 얼른 도와 줘. 그럴려고 지금 여기 온 거 아 니야?" "그래, 그렇지…" 하기 어려운 말이라도 있는 듯 잠시 망설이던 레이온은 입술을 깨물었 다. "저기 근데 유젤…" "왜?" "혹시 몸에 뭐 이상한 징조 같은 거 없니?" 약간 의미심장한 질문이었다. 예안은 생각난 게 있어 무릎을 탁 쳤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예안이 몸이 좀 이상한 것 같아. 머리를 싹둑 잘 랐는데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다시 원래대로 길어져 있더라고. 그리고 왜 머리카락 색이 변하는 거지?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레이온은 약간 실망한 표정이었다. 기대했던 질문이 아닌가 보다. "머리색이 변하는 이유는 체내에 있는 ST기관이 생명 에너지를 빛을 통 해 흡수하는 기능 때문이야. 빛의 강약에 따라 흡수하는 비율이 달라지 기 때문에 색이 변하는 거지. 물론 에너지는 피부로 흡수하기도 하지만 머리카락이 길면 길수록 더 유리하기 때문에 만약 머리카락을 잘라버려 도 12시간이 지나기 전에 다시 원래 길이로 돌아오는 거야. 나도 그렇게 만 알고 있어. 정확히는 몰라." "왜? 유젤은 당신이 탄생시켰잖아?" "하지만 유젤의 몸에 대한 매커니즘은 100% 밝혀내지 못했어. 난 다만 마더의 허락 아래 유젤을 복제했을 뿐이야." 복제라면 원본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인가? 혹시 시트날타에서 들었던 소 문, 레이온이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의 외모를 본 따 유젤을 만들었다는 게 사실은 복제했다는 뜻일까? 뭔가 복잡한 퍼즐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었다. "한 가지만 더 물어 볼게. 이건 전에도 물었지만, 왜 형은 날 유젤이라 부르는 거지? 엄밀히 말해 난 유젤, 아니 서예안이 아니잖아?" 약간은 차가운 목소리였다. 레이온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넌 유젤이니까. 넌 유젤이야. 누가 뭐라고 해도 넌 유젤이야." "푸훗!" 별로 웃긴 대답은 아니었지만 예안은 저도 모르게 그만 웃음을 터트렸 다. "좋아, 좋아. 내 생각에 형은 아무래도 약간은 제정신이 아닌 듯 싶지만 그래도 억지로 우기자면 멀쩡한 사람 축에는 속하는 것 같으니 그냥 넘 어가 주지. 근데 날 어떻게 예전과 같은 생활로 되돌려 보내 줄 건데? 이 꼴로 돌아가면 우리 아빠는 날 못 알아볼 게 뻔하다고." "그건 걱정할 것 없어.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지 않아도 돼. 너희 친부모 님만 설득해서 네가 그분들의 자식이 맞다는 것만 증명한 뒤 주위 사람 들에게는 적당히 둘러대면 그만이야. 호적이나 신분 같은 건 내가 새로 완벽하게 만들어줄 수 있어. 네 부모님께 설명하는 것도 내가 대신해줄 게. 걱정하지 마." "흐응? 믿어도 되는 건가?" "날 믿어." 조리 있게 설명하는 걸 보면 아무리 봐도 미친 사람이라고는 보기 힘든 데, 유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건 도저히 정상인의 행동이라고 여기기 힘들었다. 하지만 예안은 일단 그를 믿기로 했다. 예안과 레이온은 일단 예안이 살던 집 근처의 카페로 가 전화로 정호를 불러내었다. 물론 전화로 다짜고짜 '아빠 나 진우야.'라고 하진 않고 적 당한 거짓말로 불러낸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예안의 초조함은 짙어만 갔다. "정말 아빠가 형 말을 믿어줄까? 괜히 우리 둘다 싸잡아서 미친 사람 취 급하는 건 아닐까?" "걱정마. 날 믿어. 그리고 너와 너의 아버지만 알 수 있는 이야기를 네 가 많이 해주면 틀림없이 믿게 될 걸." "그래도…" "걱정하지 마. 어? 혹시 저 분이 네 아버지시니?" 레이온이 가리킨 쪽을 돌아보자 안 본 사이에 많이 야윈 아버지가 들어 섰다. 아버지의 모습을 본 순간 예안은 속에서 뭔가가 울컥하는 걸 느꼈 다. 눈시울이 절로 뜨거워졌다. "여깁니다." 레이온이 손을 들자 이리저리 둘러보던 정호(진우의 아버지)는 다가와 앉았다. 그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아들의 소식을 안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어디, 지금 그 녀석 어디에 있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거길래 그 동 안 연락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겁니까?" 레이온은 잠시 뜸을 들였다. "아, 먼저 제 소개부터 하지요. 전 김윤우라고 합니다. 현재 아드님을 보호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사실 아드님께 좀 심각한 일이 있어 그동안 도저히 연락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고가 있었거든요." "사고라니요! 혹시 그 녀석이 차에 치이기라도 한 겁니까? 그, 그 녀석 은 지금 건강한가요?" 정호의 안색은 더욱 더 창백해졌다. 레이온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무척 안전하고 건강합니다. 다만 모습이 좀 바뀌어서 알아보시지 못할 지도…" 정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혹시 전신에 화상이라도 입은 건가요! 아이고 세상에! 가뜩이나 잘난 구석이 없는 녀석인데 그런 몰골이 되었다면 장가는 어떻게 가려고…" 예안은 지금 상황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정호의 표정과 목소리만 제외한다면, 방금 한 말은 농담으로도 들릴 수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문장만 놓 고 보자면 말이다. "아니요. 화상 같은 걸 입은 건 아닙니다. 정말 건강합니다. 하지만 얼 굴, 목소리, 체격, 그 모든 게 예전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만치 변해버렸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아드님을 알아보시지 못할 거란 뜻으로 말씀드린 겁니다." '환경미화원한테 선생님이라? 별로 어울리는 호칭은 아니군.' 예안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우울해하는 사이 정호가 약간 안심한 표 정으로 입을 열었다. "건강하다니 다행이군요. 어떤 모습으로라든 녀석이 건강한 모습으로 돌 아와 주기만 하면 전 만족합니다. 도대체 진우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말씀, 진심이십니까? 어떤 모습으로라든 건강하기만 하면 만족하신 다구요?" 레이온이 날카롭게 눈을 빛내자 정호는 약간 긴장했다. 그러나 결국 천 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떤 모습으로라든 좋습니다. 부디 녀석이 건강하기만 한다면…"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정호의 눈에 눈물이 조금씩 고이자 예안은 자신이 정말 몹쓸 죄를 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사실은 불효를 지은 것이 맞던가? 무려 일주일이 넘도록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으니… 레이온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이제부터 가장 중요한 말을 해야 했다. "아드님은 여기 있습니다." "예?" "지금 이 자리에 있다구요." 눈물을 닦다 말고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 정호는 레이온의 옆에 앉아 있 는, 예쁘장하게 생긴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애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 다. "지금 이 자리에는 이 여자애 하나밖에 없는데요? 진우가 이 자리에 있 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바로 이 여자애가 선생님의 아드님입니다. 즉, 이 여자애가 유진우지 요." 정호는 어이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 진우는 비록 물건이 작긴 해도 엄연한 남자…" 예안은 얼굴이 붉어진 채로 외쳤다. "자, 작긴 뭐가 작다는 거야! 열 살 때 마지막으로 본 크기를 아직도 기 억하는 거야, 아빠!" 항상 열등감으로 가득한 콤플렉스 덩어리이기는 해도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 애지중지 엄마 없이 키워온 소중한 아들이 졸지에 여자가 되어 돌 아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정호는 무려 삼십 분이 넘도 록 레이온과 예안의 설명을 들어야 했다. "그러니까 이 여자애가 제 아들이라구요?" "네 그렇습니다." "이 여자애가 유진우라구요?" "그렇다니까요." "뇌이식 수술인지 뭔지 하는 걸 받고?" "네 그렇습니다. 그때에는 그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호의 표정이 구겨졌다. "이런 무슨… 말도 안 되는…" 레이온이 늘어놓은 시나리오는 대략 이렇다. 레이온은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천재 의학자이다.(이 부분에서 예안은 나름대로 인정하면서도 어딘지 불편한 표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차를 타고 여행을 가는데 근처에서 사고가 난 걸 발견했다. 도로도 아닌 데다 사람들이 거의 없는 곳이었고, 또 앰뷸런스를 부르기에는 너무 늦을 듯 해 할 수 없이 그는 엉망으로 다친 한 소녀와 한 소년을 차에 태우고 가 까이에 있는 자신의 연구실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미처 수술 준비를 하기도 전에 소녀는 머리에 가해진 충격이 큰 듯 뇌사하고 말았다. 흉부가 엉망으로 망가진 소년도 곧이어 숨을 거둘 듯 했다. 이대론 수술을 한다 해도 절망적이었다. 그때, 레이온은 두 사 람의 항원 반응이 거의 일치한다는 걸 알아냈다. 소년의 뇌를 소녀의 몸 에 이식해도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의학적으로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기적이었다. 레이온은 결심을 굳히고 아직 세상에는 실용화는커녕 이론단계에만 머무 르고 있는 방법, 뇌 이식 수술을 하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 중 하나라도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몸의 회복력 을 높여주는 치료약을 써서 무려 삼일 만에 소년의 뇌를 가진 소녀는 정 상인처럼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나머지 4일 동안 아무런 이상 조짐이 발견되지 않자 부모님이 걱정할 것을 우려해 이렇게 데리고 왔다는 것이 었다. 레이온이 짜낸 시나리오에 빈틈은 없었지만 정호는 여전히 믿을 수 없었 다. 이들이 짜고 사기를 치는 건 아닐까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못 믿으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레이온은 통장을 열어 정호에게 보여주었다. 뭔가 하고 쳐다보던 정호는 그 안에 든 액수를 확인하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보신 바와 같이 저는 막대한 재산을 가진 부자입니다. 선생님을 속여서 얻을 이득 따위는 없다는 거죠. 무엇보다, 선생님와 아드님만이 알고 있 는 이야기를 이 애가 알고 있다는 게 증거가 되지 않습니까?" "하, 하지만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실 뇌 이식 수술은 그 복잡함과 수 술 과정에 걸릴 막대한 시간, 그리고 거부 반응을 제외하고는 이론적으 로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판단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 아이큐 200이 넘는 천재입니다. 시대에 앞서나간 방법을 개발한 건 천재에게 흔히 있 는 일이죠." 자기 입으로 자기가 천재라고 하는 것만큼 꼴불견은 없지만 레이온에겐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다. "그, 그럼 정말 이 아이가 진우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그런가요?" "네, 그렇습니다." 이제 완전히 레이온의 말을 믿게 된 정호는 감격스런 표정으로 예안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졸지에 여자가 된 아들을 차마 껴안기는 뭐했던지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네가, 네가 정말 진우니?" "맞다니까 아빠는… 왜 그렇게 못 믿고 그래…" 예안은 약간 울먹거리고 있었다. "난 한 번도 진우가 울먹거리는 꼴을 본 적이 없는데…" 정호의 농담에 예안은 그만 와락 그의 품에 달려들었다. "믿으라니까! 나 진우 맞단 말이야!" 정호는 어색하게 '딸이 된 아들'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 믿는다. 믿어… 열 살 때 이후로 한 번도 진우 녀석 물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네가 진우가 아니라는 걸 믿 겠니?" "그, 그런 창피한 이야기는 왜 꺼내고 그래!" 정호는 약간의 눈물이 고인 채 딸이 된 아들과 감격스런 상봉의 기쁨을 나누며 레이온에게 말했다. "김윤우씨라고 하셨나요? 어찌 되었든 우리 아들을 살려주셔서 고맙습니 다. 헌데, 이제부터 우리 아들은 어찌해야 되나요? 이대로 살아야 하는 겁니까? 주변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뭘 걱정하시는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사실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아드님… 아니, 따님의 앞으로의 인생 이 망가질 테니까요." "무슨 뜻인가요?" "어차피 이왕 여자가 된 거, 이제부터는 여자로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 까? 학교도 다녀야 하고, 나중에는 결혼도 해야 하지요. 하지만 남자였 는데 뇌이식 수술을 받았다는 식의 이야기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지는 않을 겁니다. 믿는다 하더라도, 앞으로의 인생에 막대한 지장을 주겠지 요. 그래서 이 사실은 선생님만이 아셔야 할 겁니다." 정호는 여전히 걱정되는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주변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말하지요?" 레이온은 쐐기를 박듯 말했다. "아드님이 죽었다고 하셔야지요. 그 수밖에는 없습니다." "서예안. 나이 17세. 만으로는 16세. 2039년 4월 22일생. 아빠의 절친한 옛 친구인 서중혁의 무남독녀. 태어나자마자 친어머니가 난산으로 사망. 그리고 2055년 3월 5일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 일가친척 없음. 유 진우 실종. 시체는 못 찾았지만 사실상 사망. 따라서 아빠가 외로움을 달랠겸 절친한 친구의 유언에 따라 서예안을 친딸로 입양하기로 함. 다 외웠어?" "어, 대충은 외운 것 같다." "그럼 한 번 불러 봐." "으음…" 정호는 목청을 가다듬은 뒤 천천히 읊어보았다. "서예안. 나이 17세. 2029년 4월 22일생…" "땡! 2029년 생이면 내 나이가 27이라고? 다시 해!" "서예안. 나이 17세. 2039년 4월 22일생. 나의 절친한 옛 친구인 서… 서중… 뭐라고 했지?" "서중혁." "아, 맞다. 서중혁의 무남독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난산으로 사망. 그리고… 3월 5일에 서중혁이 사망. 일가친척은 없고… 때문에 내가 친 구의 절친한 유언에 따라 친딸로 입양하기로 했다. 다 됐지?" 예안은 즐거운 듯 손뼉을 짝짝짝 쳤다. "훌륭해. 아직 조금 불안하기는 하지만 한 번 말하고 말 거니 뭐 그 정 도면 충분하겠지." "에… 그리고 또… 진우야." "왜?" 정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이 아빠는 네가 진우라는 게 아직도 잘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까… 이제부터는 진우가 아니라 예안이라 불러야 하겠지만… 으음… 성격 이 너무 변한 것 같아서…" "내가 성격이 변했나?" "예전에 넌 너무 부정적이지 않았니? 그런데 좀 많이 변한 것 같구나." "흐음." 팔짱을 낀 채 곰곰이 생각하던 예안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싫어? 내가 변한 게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니다만…" "어차피 여자가 되었는데 성격 조금 변한 게 뭐가 대수야? 나도 익숙해 지도록 노력하고 있으니까 아빠도 너무 조급해 하거나 초조해 하지 말고 많이 도와 줘." 이런 말이라면 예전의 진우는 도저히 입에 담지도 않을 말이었다. 정호 는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옛 모습을 도저히 찾을 길 없는 '아들'의 긴 머리를 한숨과 함께 만지작거리며 앞으로의 나날을 걱정했다. 두 사람은 어느덧 집에 도착했다. 예안은 긴장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어루만지며 심호흡을 했다. "긴장되니?" "어. 조금." "너무 긴장되면 그냥 아무 말 하지 말고 가만히 서 있어. 아빠가 전부 다 설명할 테니까." "알았어."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예안은 초인종을 누르는 정호의 손가락을 물 끄러미 쳐다보았다. 「누구세요?」 "접니다. 재수씨." 「아, 아주버님. 들어오세요.」 대문이 열리고 익숙한 정원이 나타났다. 어느덧 현관문에 다다른 예안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정호를 뒤따랐다. 거실 에는 정호로부터 사전에 어떻게 된 건지 사연을 대충 전해들은 도호(진 우의 작은 아버지)의 가족들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나와 있었다. 정호는 머뭇거리며 예안을 소개했다. "아, 저, 모두에게 소개할게. 도호가 대충 설명했으니 너희들도 대충은 알 거야. 재수씨도 대충은 알 겁니다. 이 아이가 내 절친한 친구인 서중 혁이의 외동딸인데 이번에 천애고아가 되는 바람에 친구의 유언에 따라 내가 맡아 키우기로 했다. 나도 넉넉한 편은 아니지만 진우가 사실상 사 망이라고 하니 우리 둘이서 같이 외로움을 이겨내 보자 하는 뭐 그런…" '으윽 아빠! 너무 어색하잖아아!' 쪽팔림의 극치란 바로 이 순간을 말함이던가. 얼마 전까지 아주 잘 알고 지내던 친척들이 신기한 동물 쳐다보듯 빤히 쳐다보는 걸 참아내는 건 이루 말할 수 없이 부끄럽고 창피했다. 예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차마 그들과 시선을 마주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누나 이름이 뭐야? 난 현우라고 하고 중학교 3학년." 가장 먼저 말을 건넨 건 중학교 3학년, 아이큐 170의 천재이자 유정우 삼형제 중 막내인 현우였다. 그는 호기심과 호의가 뒤섞인 표정으로 예 안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침착함을 되찾은 예안은 일부러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아마도 그건 일 부러 현우와 거리를 만들기 위한 반사적인 행동이었으리라. "서예안." "와, 얼굴만큼 이름도 예쁘네. 어쨌든 난 찬성! 이렇게 예쁜 누나가 같 이 사는 거라면 얼마든지 찬성이야!" '네가 반대한다고 해서 내가 나갈 줄 알았냐?' "몇 살이니?" 삼형제 중 둘째인 준우의 질문에 예안은 표정이 바뀌지 않은 채 대답했 다. "17살요. 이제 막 고등학교 입학했어요." 뭐랄까. 준우는 약간 차가운 예안의 표정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느낌 을 받았다. "흐음. 나랑 두 살 차이네. 난 유준우라고 해. 현우 형이야. 아버지, 저 도 괜찮을 것 같아요. 특별히 나빠 보이지도 않고…" 도호는 조금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을 바로 앞에 세워 두고 찬성이니 반대니 하는 건 좋지 않은 버릇 이야. 진우야, 현우야.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마라."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할게요." "결과만 좋으면 됐지 뭘 시시콜콜하게 그런 것까지 따져요, 아빠는?" "으흠. 형,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합시다. 당신은 일단 이 얘한테 방 안 내해 줘. 피곤해 보이는데." "예. 알았어요. 아줌마 따라올래?" 예전에는 숙모였던 사람의 따뜻한 미소에 왠지 조금 울컥하는 걸 느꼈지 만 예안은 잠자코 따라나갔다. 자신이 진우였을 때는 본 기억이 없는 미 소였다.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설명 좀 해 줘. 난 아직도 뭐가 뭔지 어리둥절 해." "아까 전화한 말 그대로야. 진우는 실종이라지만 사실상 사망이고, 또 저 아이는 내 친한 친구의 외동딸인데 이번에 일가친척 하나 없이 천애 고아가 됐으니 내가 맡아 키워보려는 거지. 친구의 유언이기도 하고, 내 바램이기도 해." "형이 언제 실수한 적은 없으니… 뭐 잘 해내겠지. 하지만 진우에 대해 서 너무 빨리 포기하는 거 아니야, 형?" 정호는 일부러 어두운 안색을 지었다. "나도 진우가 살아 있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경찰들 말로는 바다에서 실종됐다는 건 사실상 사망이나 다름 없다는군. 시체만 영영 못 찾을 뿐 이지, 기대는 하지 말라고 하더라." "그래도…" "나도 진우 녀석에게 정말 미안해. 살아서 제대로 해준 거 없는데 이렇 게 허무하게 보낼 줄 정말 몰랐어. 게다가 며칠 채 기다리지도 않고 사 망신고 해버리는 것도 정말 몹쓸 짓이고. 하지만 어쩌겠어. 살아있는 사 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할 거 아냐? 언제까지 죽은 아들 녀석 발 크기만 재보고 있을 순 없지." 도호는 어두운 표정으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진우는 분명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그럴 거야." "나도 그 녀석에게 삼촌으로서 뭐 하나 제대로 해준 것도 없는데… 따지 고 보면 나나 충호 녀석이나 형 희생시켜서 이렇게 성공한 셈이니 진우 그 녀석 우리를 많이도 원망했을 거야." 정호는 뜨끔했다. 그건 엄연히 사실이었다.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진우가 그런 녀석이 아니라는 건 너도 잘 알잖아." "진우는 자존심은 정말 강한 아이였지. 하지만 쓸데없는 자존심 내세우 는 것도 죽기 보다 싫어하는 것 같았어. 그러니 무의식 속에서라도 그런 자기 마음을 죽이고 싶어했을 거야. 그건 우리 정우나 준우, 현우 녀석 도 못하는 건데. 어쨌든 진우에게 속죄하는 의미에서라도, 서예안이라고 했던가? 내가 그 아이에게만은 정말 잘 할게. 진우에게도 형에게도 내가 아무것도 못해줬어 정말." 정호는 고개를 내저었다. "넌 할 만큼 했어. 따지고 보면 성공한 동생 두고 싶어 억지로 너희들 공부시킨 내가 푼돈 조금 대줬다고 이렇게 호강하고 사는 것도 염치없는 짓이지."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해? 형이 희생하지 않았으면 충호나 나나 이렇 게 버젓이 살진 못했을 거야. 오히려 형에게 아무런 보상도 안 해준 충 호나 내가 죽일 놈이지." "아니야. 너나 충호는 정말 좋은 동생들이야. 난 너희같은 동생들을 둔 걸 진심으로 신에게 감사하고 있어." "후후, 또 신이야? 어쨌든 그만 들어가 봐. 저 아이가 많이 무서워할 텐 데 형이라도 가서 위로해 줘야지." "그래." 도호는 미소를 지으며 형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호는 그 손을 따뜻하게 붙잡았다. '내 방이 아니잖아?' 숙모인 수정은 예안을 손님들이 쓰는 방으로 안내했다. 예전에 자신이 쓰던 방을 가리켜 '이 방을 쓰면 안 되나요?'라고 물었지만 수정은 '그 방은 죽은 아이가 쓰던 방이라서 좀 그래.'라며 이 방을 쓰라고 했다. '컴퓨터도 없는 이 방에서 도대체 하루종일 뭘 하라고!' 손님용 방이라 말 그대로 여관방이나 다름없는 황량한 방. 간단한 가구 와 TV 그리고 침대가 전부인 이 방에서 도대체 뭘 하란 말인가? 이 방에선 이터널 피닉스도, 쓰러지지 않는 패왕도 할 수 없다. 사파이 어의 눈물도 쓸 수 없으며 각종 화려한 마법도 펼칠 수 없다. 절망의 평 원의 그 우락부락한 몬스터들은커녕 평소 개무시하고 다녔던 슬라임(최 하레벨 몬스터. 경험치도 적게 준다)조차 죽일 수 없다. 아무리 지존이 라면 뭐하나? 이렇게 컴퓨터가 없으면 슬라임도 못 죽이는데. 「심심하십니까?」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예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동안 잊고 있었 던 맥의 인공지능이었다. 예안은 얼른 손목에 찬 조종장치에 입을 가까 이 가져갔다. "너, 살아있었구나. 반갑다." 「별로 재미없는 농담입니다. 아시죠?」 "너도 참 재미없는 인공지능이야. 알지?"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근데 왜 갑자기 말 건 거냐?" 「유젤 님께서 워낙 심심해 보이셔서 저라도 달래드릴까 싶어 말 걸어봤 습니다만 헛수고였던 듯 싶군요. 별로 반가워하시지 않는 걸 보니.」 "아니야, 아니야, 정말 반갑다. 근데 넌 말하는 게 정말 사람 같다?" 「저는 발산형 사고체계를 가진 인공지능입니다. 감정은 없지만 사고하 는 것 자체는 이미 사람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래?" 인공지능에 대해 잘 모르는 예안은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전혀 깨닫 지 못하고 있었다. 맥의 파괴력이나 가동에 필요한 주동력 장치 같은 걸 제외하고서라도, 이 인공지능 하나만 갖고 있어도 가히 세계적인 부자가 될 수 있을 테지만. 「컴퓨터와 책상, 생쥐, 그리고 고양이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혹시 아십 니까?」 얼굴을 찌푸려가며 생각하던 예안은 결국 포기했다. "모르겠다. 답이 뭐냐?" 「하늘을 날지 못합니다.」 "…너 지금 그거 농담이라고 한 거냐?" 「재미없으셨나요? 제가 알고 있는 유일한 유머인데.」 "어디서 그 따위 유머를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한테 그런 거 하 지 마라. 내가 성격이 워낙에 좋아서 참는 거니까. 다른 사람들은 아마 듣자마자 널 부셔 버리려 달려들지도 모른다." 「절 부술 수 있는 물체는 지구상에 없습니다. 마더라면 모를까.」 예안은 궁금증이 생겼다. 마더라는 건 레이온이 한 번 언급했던 이름이 었다. "마더? 그게 뭐냐?" 「프로텍트가 걸려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드릴 수 없습니다.」 프로텍트가 걸려 있으면서 '마더라면 모를까'라는 말은 할 수 있다 이거 냐? 꽤나 깜찍한 인공지능이라고 예안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 똑똑 노크소리에 예안은 화들짝 놀라 다시 한 번 작게 속삭였다. "앞으로 내가 먼저 부르기 전에는 말 걸지 마라. 알았냐?" 「라져.」 "…어디서 건담 애니메이션은 많이 본 모양이군. 넌 인공지능이 아닌 게 틀림없어." 예안은 궁시렁거리며 문을 열었다. 잠옷을 입은 현우가 문밖에 서 있었 다. "무슨 일이지?" 얼음처럼 차갑고 쌀쌀맞은 예안의 말투에 현우는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말 한 번 제대로 못 걸어보고 물러나는 것 바보짓이라는 생각에 용기를 쥐어짰다. "누나, 심심하지 않아? 나랑 같이 게임이라도 할래?" "됐다. 난 피곤하니까 자게 해줬음 좋겠는데." 예안이 애쓴 덕에 말투 자체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가시가 숨어 있 었다. 현우는 가시가 숨어 있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무안한 표정으로 머 리를 긁적이며 '피곤해? 그럼 잘 자.'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갔다. 문을 닫은 뒤 예안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잠옷이 조금 커서 헐렁헐렁했 다. "이건 내 잠옷은 아니고, 그렇다고 숙모 것도 아니고, 그럼 준우 형이나 정우 형 건가? 준우 형은 집에서 자고 정우 형은 자취하니까 아마도 정 우형 거겠군. 이거 영광인데? 그런 초엘리트의 잠옷을 다 입어볼 줄이 야." 그대로 잠을 청하려던 예안은 벌떡 일어나 들고 온 조그만 가방을 뒤적 거렸다. 안에서 얼마 전 시트날타에서 찍었던 사진을 꺼낸 예안은 하나 하나 펼쳐놓고 감상했다. "자기 전에 우리 예쁜 예안이 한 번 보고 자야지. 어떻게 그냥 잘 수 있 겠어?" …이 인간 점점 이상한 쪽으로 팔불출이 되어 가는 것 같지만, 애인을 잃은 충격 때문에 그런 거려니 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 똑똑 "자니?"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온 아버지, 정호의 목소리에 예안은 놀라 사진을 재빨리 가방에 집어넣었다. "아, 아니 아직 안 자…요." 평소 하던 대로 함부로 반말을 했다가 작은 아버지 식구들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기에 예안은 황급히 '요'자를 붙였다. 정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 딸이라고 해도 이렇게 늦은 밤에 들어오는 건 조카들 에게 좀 이상하게 비칠지 몰라 걱정되네." "됐어. 됐어, 신경 쓰지 마. 근데 웬일이야?" "음. 방금 도호랑 이야기 끝냈는데, 도호는 네가 얼마든지 여기서 지내 도 된다고 하더라. 원한다면 자기가 네 뒷바라지까지 다 해주겠다고 하 던데?" 예안은 차갑게 냉소했다. "내가 진우였을 땐 그런 말 한 번도 한 적 없잖아? 근데 지금의 나한테 는 그렇게 해주겠다는 거야?" 정호는 도호를 대신해 변명했다. "조심해. 주변 사람들이 들을라. 그리고 진우한테는 어차피 그렇게 할 거니까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잖니?" "해준 적도 없잖아? 내가… 아니 진우가 고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단 한 번이라도 뭐 해준 적 있어?" '내가 진우였을 때'라고 말하려던 예안은 혹시라도 들을까봐 우려해 말 을 바꾸고, 목소리까지 낮췄다. "전부 다 아빠가 진우 뒷바라지했지, 저 사람들이 뭐 하나 해준 거 있 어?"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진… 예안아." 예안의 입가에 걸려 있는 건 여전히 냉소였다. "아빠. 한 가지만 부탁해도 돼?" "뭔데?" "난 저 사람들 도움 가능한 한 받기 싫어. 아빠가 많이 힘든 건 알지만 적어도 내가 자립할 때까지만은 아빠가 학비나 뭐 그런 거 해줬으면 좋 겠어. 나중에라도 내가 저 사람들하고 쉽게 관계를 끊을 수 있게. 해줄 수 있지?" 뭐라고 말하려던 정호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유일한 자식이 삼촌들에 대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진 채 16년을 살아왔는지 누구 보다도 그가 더 잘 아는 터였다. "그렇게 할게." "고마워 아빠." 예안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정호의 품에 안겨왔다. 느닷없는 스킨쉽에 정호는 당황했다. "뭐, 뭐냐? 갑자기 왜 어울리지 않게?" "가만히 있어봐. 이렇게 예쁜 딸이 안기는데, 아빠도 좋으면서 뭘 그 래?" …확실히 이건 진우가 아닌 것 같다. 도저히 진우 특유의 그 쌀쌀맞음을 찾아볼 수가 없는 판이니. "죽기 직전에 아빠 생각했었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 알았으면 아빠 한테 따뜻한 말이라도 한 마디 건네는 건데, 하고 후회가 되더라. 만약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아빠한테 절대 똑같이 대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 하고 또 다짐했어. 근데 이렇게 다시 살아서 아빠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아." "너 내 자식이 아니구나? 아무래도 정신이 이상한 게 틀림없…" 정호의 농담에 예안은 생긋 웃으며 정호를 마구 간지럽혔다. "에잇! 그런 말을 하다니! 간지럼 공격이다!" "푸, 푸하하하! 그만, 그만해, 진… 예안아!" 한밤중에 느닷없이 깔깔대는 여자애와 중년 남자의 웃음소리가 울려퍼졌 다. 난데없는 예안과 정호의 웃음소리가 그치고 난 뒤 침대에 누워있던 도호 는 옆에 누운 아내에게 말했다. "너무 친한 것 같지?" "그러네요." "아버지 친구와 친구 딸 사이라기에는 확실히 좀 그렇지 않아?" "그런 것 같아요." 둘은 어둠 속에서 서로를 마주보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열었다. "역시 그거겠지?" "역시 그거겠죠?" 도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형도 참, 숨겨둔 딸을 데리고 올 거면 그냥 거짓말하지 말고 편안하게 말할 것이지…" "그러게 말이에요. 그나저나 저렇게 예쁜 딸을 여태껏 같이 데리고 살지 도 못하고 얼마나 마음 졸였을지…" "그러게 말이야. 우리도 저런 딸 하나가 정말 갖고 싶었는데. 이거 원 자식이라고는 줄줄이 시커먼 사내녀석들 뿐이니… 그나마 현우 녀석이 애교가 좀 있었는데 중학교 3학년이 되니 키가 170이 넘어버렸어. 애교 부려도 이젠 징그럽기만 해." "맞아요." "그 전에는 비록 자식이 하나 뿐이긴 해도 딸이 있는 충호 녀석이 무척 부러웠는데, 이제부터 눈꼴시어서 어떻게 살지? 그냥 눈 딱 감고 우리도 딸 하나 더 낳을까?" 수정은 주먹으로 도호의 가슴을 가볍게 치며 부끄러워했다. "이 나이에 남부끄럽게 무슨…" "뭐 어때? 우리가 돈이 없어 뭐가 없어? 그러지 말고 하나만 더… 응?" "아유, 남이 들을까 겁나요. 그런 말 말아요." 도호는 아내를 놀리는 게 재밌었는지 잠시 동안 낄낄댔다. "휴. 친딸이든 아니든 어쨌든 형이 진우 녀석을 잃은 충격에서 빨리 벗 어난 것 같아. 역시 저 애 덕분일까?" 예안이 정호의 친딸일 거라 말한 건 물론 두 사람 다 농담이었다. 정호 가 거짓말을 할 사람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숨겨둔 딸을 이제 데리고 온 다는 것 자체가 합리적이지 못했다. "어쨌든 아주버님이 빨리 충격에서 벗어나서 다행이네요. 그런데 진우가 조금 불쌍하게 됐어요. 죽었는데도 별로 슬퍼해 주는 사람도 없고…" "장례식은 어떻게 하지? 역시 유품 같은 걸로 하면 되는 건가?" "글쎄요… 저도 장례식은 해본 적이 없어서…" "보통 어린아이들이 죽으면 매장보다는 화장을 주로 하던데. 시신이 없 으니 그냥 유품을 태우면 되는 건가?" "아주버님이 알아서 하시겠죠 뭐." "진우 녀석도 참 안 됐어." "그렇죠 뭐. 결국 죽은 애만 불쌍하니…" "쯧쯧쯧. 어쩌다가 바닷가는 나가 가지고…" 한참 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두 사람은 이윽고 졸음을 이기지 못 하고 잠을 청했다. 우당탕탕! 예안이 온 첫날밤 새벽 2시쯤.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졌다. "아버지 저 왔어요~ 애들아 형 왔어~" 이 집안의 맏이인 정우의 술 취한 목소리가 정막을 깨뜨렸다. 식구들은 너나할 것 없이 얼굴을 찌푸린 채로 나왔다. "정우야, 이게 무슨 짓이냐?" 도호가 화를 내자 정우를 이곳까지 부축해 온 친구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정우 녀석이 어찌나 가족이 보고 싶다고 말하는지… 지금 정우 많이 취했습니다." "너 재원이 아니냐? 그래, 아버지는 잘 지내시니?" "네. 잘 지내십니다." 도호는 눈짓으로 거의 쓰러질 듯한 정우를 가리키며 어찌된 일인지 물었 다. "어떻게 된 거냐?" "에… 그냥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정우 녀석 실연 당했습니다." 시끄러운 소리에 너나할 것 없이 나와 있던 가족들은 경악했다. 공부밖 에 모르던 만능 수재 정우가 실연을 당했다니! 이건 완전히 해외 토픽 감이었다. "말도 안 돼. 정우 형은 그런 데 관심이 전혀 없다구. 재원 형이 뭐 잘 못 안 거 아니야?" 현우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재원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게 말이지… 나도 학교를 잘 안 나가는 일이 많아서 정확히는 모르지 만… 친구들이 말해준 것과 오늘 정우가 말해준 걸 종합해보면 대충 경 영학과에 다니는 1학년 여자애를 좋아한 모양인데… 남자가 생겼다더라." "에엑? 정우 형이 짝사랑을 했다고? 말도 안 돼!" 가족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아는 정우는 항상 자신감이 지나치다 못해 오만하고, 모든 일에 만능인 수재라 여자들로부터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그런 녀석이었다. 녀석이 두뇌가 딸리나, 학벌이 딸리나, 집안이 딸리나, 외모가 딸리나? 그런 대단한 녀석이 짝사랑 끝에 실연을 당하다니! "글쎄요. 제가 생각하기에 짝사랑은 아닌 것 같은데… 하여튼 깨어나면 정우에게 물어보십시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아니야. 오히려 우리가 미안하지. 내가 언제 술 한 번 사마. 조심해서 집에 들어가거라." "예. 아버님. 안녕히 주무세요. 너희들도 잘 자라." "잘 가요 형." "잘 가 형." 불이 켜진 거실에서 도호가 수정의 도움을 받아 술에 잔뜩 취한 정우를 부축해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2층 계단 중간쯤에 선 채 일층에서 벌 어진 광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예안을 발견한 준우는 머리를 긁 적였다. "우리 삼형제 중 제일 큰형이야. 이름은 유정우라고 해. 지금 대학교 2 학년이고." '알아.' 속으로는 그렇게 궁시렁대면서도 겉으로는 작게 대답했다. "네." "원래는 통학할 시간도 공부하는 데 투자한다면서 학교 옆에서 자취하고 있었거든. 공부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설마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네. 저런 모습만 보고 형에 대해서 오해는 하지마. 형 굉장히 착실 한 사람이야. 대학도 서울대학이거든. 의대생이야." 준우의 말투에는 자랑스러움과 동시에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경계심 같은 게 섞여 있었다. "대단하네요. 서울대 의대라면 들어가기 엄청 힘들 텐데." 예안의 묘한 감탄에 준우는 황급히 덧붙였다. "힘들긴. 그렇게 들어가기 힘든 곳은 아니야. 모의고사 전국 100등 정도 안에 들으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어. 나도 의대 갈까 생각 중인걸." "…오빠는 전국 모의고사 100등 안에 드나봐요?" 형이라고 하려다가 간신히 오빠라는 단어로 바꿨다. 바야흐로 여자 된 다음 처음으로 써보는 오빠라는 칭호인데, 느끼해서 죽을 맛이었다. "이래 뵈도 10등 안에 들어. 가끔 운 좋으면 5등 안에 들 때도 있고." 준우의 말투에는 숨길 수 없는 자랑스러움이 배여 있었다. 예안은 겉으 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갸웃하고 있었다. '근데 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데?' 예안이 좀더 눈치가 있는 보통 여자애였다면 준우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을 테지만, 제 아무리 껍데기는 화사한 미소녀라 해도 알 맹이는 어엿한 '동정남'이었다. 이 정도 접근 가지고는 눈치 절대 못 챈 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현우가 질투심 어린 목소리로 끼어 들었다. "나, 나도 모의고사 전국 10등 안에 들어! 난 전국 1등까지 먹어본 적 있다구! 무, 물론 중2 때였지만…" "중3 된 이후로 이것저것 한답시고 또 많이 놀다가 모의고사 50등 밖까 지 밀려났잖아?" "그, 그래도 전교 1등은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구!" "네 학교 수준도 참 알만하구나. 전국 50등이 전교 1등이라니. 나 같으 면 그런 학교 당장 때려치운다." "우리 학교가 형네 학교 부속중학교라는 거 알고나 하는 소리야? 형도 우리 학교 졸업했잖아!" "어쨌든 50등짜리는 입 다물어. 어디서 10등한테 기어 오르냐?" 50등짜리나는 말에 승기를 뺏긴 현우는 이를 갈다가 어리둥절한 채 서 있는 예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누나는 어떻게 생각해!" "뭘?" 왜 니들 싸움에 난 끌어들이는 거냐. 예안은 당황한 채 속으로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아이큐 170이 넘으면서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들 많이 하다가 전국 50 등으로 밀려난 사람과, 별로 좋지도 않은 머리로 맨날 공부만 죽어라고 해서 간신히 전국 10등 유지하는 사람하고! 어느 쪽이 더 대단한 것 같 아?" 분위기를 보아하니 준우도 자신이 대답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아직 까지 예안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내가 보기엔 둘 다 괴물 같은데." "그러지 말고 양자택일을 해!" "양자택일? 내가 왜?" 잠시 말문이 막힌 현우는 얼굴이 귀밑까지 붉어진 채 외치다시피 했다. "만약 누나라면 어느 쪽이 더 낫다 생각하냐는 거야. 어느 쪽이 더 나 아?" "아하." 이제야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한 우리의 둔녀(라고 해야 하나?) 서예안은 재밌다는 미소를 지었다. 이 둘이 지금 자신을 놓고 보이지 않 는 경쟁을 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에 난… 내가 공부를 못해서 그런지 공부 잘하는 사람은 다 싫더라. 난 전교 10등 안에 드는 수재들하고는 말 안 하는데." "뭐, 뭐라고?" "그게 무슨!" 당황한 진우와 준우는 동시에 그렇게 외쳤다. 이 상황이 묘하게 재밌게 느껴진 예안은 속으로는 킥킥대면서도 겉으로는 간신히 무표정을 유지했 다. "선입견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애들이 보통 굉장히 거만하더라구. 그래서 난 그런 애들하고 말하는 게 정말 싫어. 시간이 늦었으니 난 그만 올라 가 볼게. 둘다 잘 자." 예안은 마지막으로 잘 자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이층으로 다시 올라갔 다. 예안이 사라지고 난 뒤 그 자리에는 승자가 없이 패자만 둘이 남은 채 황량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잠에서 깨어난 정우는 간밤에 자신이 추태를 저질렀 음을 알고 죽을상이 되었다. 아침을 먹기 전 예안을 제외하고 온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정우는 아버지인 도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괜찮다. 사내 녀석이 술에 취하면 한두 번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래, 채였다며?" 정우는 당황했다. "제, 제 입으로 그걸 말했나요?" "쯧쯧. 재원이가 대충 말해주고 갔다. 녀석아, 네가 찼으면 차야지 왜 채이고 그래?" "그게…" 뭐라 말하려던 정우는 은근히 기대에 찬 시선들이 쏟아지는 걸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허물없는 가족이라 해도 부끄러운 일을 털어놓는 건 좀 그랬다. "그런데 형, 예안이는 아직 안 일어났어? 이제 밥 먹을 시간인데…" "피곤해서 그런가 봐. 요 며칠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고…" 도호의 안색이 약간 어두워졌다. "하긴… 하루아침에 천애고아가 되었는데…" 예안이 누군지 모르는 정우는 어리둥절했다. "예안이요? 그게 누굽니까, 아버지?" "아, 정우 넌 아마 모를 거다. 큰아버지 친구의 딸인데 고아가 되는 바 람에 어제부터 우리집에 같이 살게 되었다. 착한 아이니 너도 잘해 주거 라." "아, 예…" 식사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현우는 옆에 앉은 준우에게 귓속말 을 건넸다. "작은 형, 형이 생각하기에 큰형이 예안이 누나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 일 것 같아?" "글쎄다, 원래 형은 타인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성격이니… 모른 척 하지 않을까?" "과연 그럴까? 난 한 번 보고 뒤집어진다에 만원 걸겠어." "에이, 아무리 그래도 형이 설마… 난 관심 안 보인다에 만 원 걸지. 너 도 큰형이 어떤 성격인지 잘 알잖아?" "오만. 무뚝. 퉁명. 배려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전형적인 엘리트. 같은 엘리트이면서도 작은 형이랑 나랑은 완전 딴판이지." 그 때 예안이 이층에서 눈을 비비며 내려왔다. 조금 기대에 찬 표정으로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던 준우와 현우는 그대로 굳어졌다. 그건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어, 저…" 내 눈이 잘못된 건가? 가족들의 표정은 전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했 다. 어젯밤만 해도 분명히 머리카락이 검은색이었는데 지금 예안은 허리 까지 붉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였던 것이다. 하룻밤새 염색을 한 건 설 마 아닐 텐데? "아, 아빠. 잘 잤어…요?" 정호를 본 예안이 반색하며 등뒤에서 목을 끌어안았다. 정호는 가족들 앞에서 약간 부끄러워하면서도 기분은 좋았다. 도호는 머리카락 색이 변 한 것에 대한 놀라움과 함께 자신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딸의 애교를 받는 정호를 조금 부러워했다. '으, 오, 옷이나 제대로 입고 내려오지!' 준우와 현우는 고개를 숙여 정호의 목을 끌어안은 예안의 옷깃이 살짝 벌어지며 드러난 가슴에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서 눈 돌릴 생각을 안 하 는 건 도대체 뭐냐. "아, 그래 너도 잘잤…" 웃음 띤 얼굴로 손을 들어 뒤에서 자신의 목을 끌어안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정호의 손이 공중에서 그대로 멈췄다. 뒤통수에서 물컹하 게 느껴지는 이 감촉은? 정호는 설마 하면서도 만약에 진짜라면 예안에 게 꽤나 창피한 일이기에 난처한 헛기침을 터트렸다. "저… 예안아?" "응? 아, 아니 예?" 잠에서 덜 깬 예안은 버릇처럼 반말을 했다가 다시 황급히 고쳤다. "너… 브래지어는 했니…?" 작은 목소리였지만 부엌에 있는 수정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 들어 버린 뒤였다. 상황파악을 못한 예안은 무심코 등을 더듬다가 헤헤 웃었다. "안 했네. 하고 올게~" …그리고 이층으로 총총총 뛰어 올라갔다. 정우 삼형제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헛기침을 연신 해댔다. 도호와 정호도 만만치 않게 난처한 표정이 었다. 여태껏 딸 하나 없던 집안에 처음으로 딸이 생긴 아침에 일어난 일이었 다. 예안은 식탁에 앉아서도 연신 하품을 해댔다. 여전히 잠이 깨지 않은 듯 했다. 수저를 들고 꾸벅꾸벅 조는 것이 국그릇에 머리라도 감을 태세였 다. 온 가족들이 예안을 주시하는 와중에, 보다 못한 정호가 예안의 뒷 목을 주물러주었다. "너 어제 잠 제대로 못 잤어? 도대체 몇 시에 잔 거니?" "한 다섯시쯤?" "저런, 왜 그렇게 잠을 못 잔 거야? 혹시 춥기라도 한 거니?" 걱정스런 수정의 질문에 예안은 여전히 반쯤 감긴 눈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건 아니구요. 그냥 잠이 좀 안 왔어요." …차마 맥의 인공지능이랑 밤새도록 369했다고는 도저히 말못하겠다. 예 안은 대충 그렇게 얼버무렸다. "오늘은 특별한 일이 없을 테니, 밥 먹고 더 자도록 해라." "네에." 정호의 말에 예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저를 들었다. 알콜 환자처럼 수 저 끝이 흔들리는 게 몹시 위태위태했다. 가족들은 예안이 수저를 떨어 뜨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온 가족의 묘한 걱정 속에 아무것도 모른 채 한 수저 밥을 입에 떠 넣은 예안은, 결국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우욱!" 밥이 목구멍을 꿀꺽 넘어가는 순간, 예안은 잠에서 확 깬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놀란 정호가 재빨리 뒤따라갔다. 현우와 준우의 시선이 마주쳤다. "왜 저러지?" 현우의 물음에 준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낸들 알 리가 있나. 속이 안 좋은가 보지 뭐." "아냐, 혹시 알아? 엄마가 밥에다가 설탕이나 소금을 한 가득 부어서 했 을지?" 정우가 한 입 먹어보더니 말했다. "멀쩡한데?" "음… 그럼 이상하네. 진짜로 속이 안 좋은 건가?" 한편 화장실로 달려간 예안은 변기에 대고 그대로 방금 삼킨 밥을 모조 리 토해냈다. 정호가 등을 두드려주었다. "왜 그래?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아, 몰라. 그냥 삼키는 순간 속에서 올라오는데… 우욱, 나 밥 못 먹 어. 그냥 안 먹고 말… 어라?" 문득 그녀는 손으로 자신이 언제 밥을 먹었는가를 꼽아보았다. 원, 투, 쓰리… 대충 3일 정도 됐으려나? 그런데 왜 배가 안 고픈 거지? '아 맞다! ST 기관!' 그제야 유젤이 말했던, ST 기관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 생각난 예 안은 무릎을 탁 쳤다. '맞아. 이 몸은 안 먹어도 살 수 있다고 했지. 근데 설마 밥 먹으면 죽 는 거야?' 바로 토해낸 걸 봐서 죽는 건 아닌 듯 한데. 어쨌든 여러 가지 궁금증이 많은 몸이었다. 예안은 나중에 맥의 인공지능이나 혹은 레이온 박사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빠, 나 밥 안 먹을래. 도저히 못 먹겠어. 생각해보니 그 사람이 자기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밥 먹지 말랬어." "밥을 안 먹으면 어떻게 버티려고?" "그 사람이 따로 먹을 수 있게 영양제 줬으니까 그걸 먹으면 돼. 걱정하 지 마." 물론 영양제 따위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정호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 게 둘러댔다. 식사가 끝난 뒤 가족들은 거실에 둘러앉아 TV를 보기 시작했다.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그런대로 볼만한 프로그램이 어느 정도 있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정우와 준우, 현우가 자신의 방에 틀어박히거 나 밖에 나가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TV 보다는 정호의 옆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예안에게 더 관심이 있었다. "큰형, 어떻게 생각해?" 현우가 정우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정우는 말뜻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무슨 소리야?" 현우는 다시 작게 말했다. "저건 아무리 봐도 아버지의 친구와, 친구의 딸을 대하는 태도가 아닌 것 같아. 혹시 친딸…"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마."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큰 목소리에 놀란 가족들의 시선에 정우에게 쏠렸 다. 정우는 당황했다. "아 저기 그러니까 이건 그냥 실수… 에… 죄송합니다!" 정우는 아버지인 도호에게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그대로 얼굴을 붉힌 채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현우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준우에게 손을 내 밀었다. "만 원." "쳇. 내가 졌다." 그들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준우가 분하다는 표정으로 지갑에서 만 원 짜리 하나를 꺼내 현우에게 내밀었다. 현우는 그것을 낚아채며 의기양양 했다. "거 봐. 내 말이 맞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는 예안과 정호, 도호 부부는 눈을 동 그랗게 떴다. 제일 먼저 예안이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라며 관심을 껐 고, 다음으로 정호가 '옷이나 한 번 사러 갈래?'라며 관심을 껐고, 그 다음으로 도호 부부가 '우리 아들들이 원래 다 저렇지 뭐'하며 관심을 껐다. 정우 삼형제가 하는 짓거리는 이해하지 않으려 하는 게 편했다. "으엑, 아빠, 수염 깎았어…요?" "그러고 보니 일주일 간 제대로 안 깎은 것 같아." "으윽, 수염이 이게 뭐야. 징그럽게. 제발 좀 깎아…요." "오늘 나가기 전에 깎아야겠네. 근데 네가 보기에도 징그럽니?" "징그러워. 아저씨가 수염이 이게 도대체 뭐야. 이러고 나가면 고슴도치 가 친구하자고 덤비겠다." 예안은 몸을 정호에게 반쯤 기댄 채 까칠까칠한 턱을 만지작거리며 깔깔 거렸다. 부러운 듯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도호가 무의식적으로 자신 의 턱을 슥슥 어루만졌다. 수정이 웃음과 함께 가볍게 타박했다. "수염 정리 잘 돼있어요. 오늘 아침에도 면도했으면서." "아, 그랬나?" 약간은 부러운, 한편으로는 샘난다는 표정으로 정호를 쳐다보던 현우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 큰아버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예안과 낄낄대며 장난치던 정호가 의아한 듯 눈을 치켜 떴다. "왜 누나는 큰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는 거예요?" 예안과 정호의 시선이 공중에서 한 번 마주쳤다. 예안이 자신을 조금 차 가운 시선으로 돌아보자 현우는 뭔가 서운함을 느꼈다. 예안은 정호를 대할 때와 자신을 대할 때의 태도가 판이하게 달랐다. "아빠라고 부르면 안 되냐?" 설마 화난 건가? 묘하게 차가운 목소리로 예안이 되물어오자 현우는 할 말이 없어 버벅거렸다. "아니, 특별히 안 된다는 건 아니지만… 부녀 사이도 아닌데 어째서 그 러는 건지 궁금하다 뭐 그거지." 정호가 대신 대답했다. "곧 큰아버지 딸로 호적에 올릴 거다. 곧 현우 사촌누나가 되는 거지." "예엣!!" 당황한 현우와 준우는 입을 모아 외쳤다. 정호는 이상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뭘 놀라고 그래? 당연한 거 아니냐? 음… 그래서 조만간 이름은 유예안 이 될 테지?" 예안이 다시 정호의 목을 끌어안았다. 현우를 대할 때의 태도와는 완전 딴판으로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근데 어감은 서예안이 더 좋은 것 같아." "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도호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나도 어감은 서예안이 더 좋은 것 같지만 어쩌겠어. 형이 유씨인데." 현우와 진우의 안색은 창백할 대로 창백해져 있었다. 현우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냥 같이 사는 게 아니라… 아예 호적에 들어오는 거예요? 사촌 누나 로?" "그래. 아빠가 어제 설명하지 않았니?" "그, 그런 말씀은 안 하셨잖아요!" 도호는 기억을 더듬었다가 제대로 떠오르자 않자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 다. "뭐 말 안 했다면 안 한 거지 뭐. 어쨌든 지금 말했으니 됐지?" "저, 저는 반대예요!" "저도 반대예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준우와 현우가 그렇게 입을 모아 외쳤다. 도호는 깜짝 놀라 예안의 눈치를 살피며 그 둘을 나무랐다. "너희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디서 어른 앞에서 고함을 지르 고 있어!" "하, 하지만 반대라구요! 절대 반대예요! 안 돼요! 무조건 안 돼!" 현우의 부르짖음이 끝나자마자 예안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예안은 기 분이 굉장히 상한 듯 창백한 안색이었다. 현우는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 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몸을 일으킨 예안이 얼음 같은 시선으로 자신을 쏘아보자 현우는 어찌 할 바를 몰라 그만 눈길을 피해버렸다. "저는 잠깐 나갔다 올게요." "자, 잠깐만, 예안아!" 도호가 미처 뭐라고 말리기도 전에 예안은 현관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 다. 쫓아나가려던 도호는 다시 자리에 앉고 현우와 진우에게 불같이 화 를 냈다. "너희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제만 해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 냐! 그리고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반대한다는 거냐! 너희 형제로 들어오 는 것도 아니고 큰아버지 호적으로 들어가는 건데!" "하, 하지만…" '사촌누나가 되면 결혼 못하잖아요'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던 현우는 잔뜩 기가 죽은 채 고개를 움츠렸다. 그건 준우도 마찬가지 심정인 듯했 다. "여보, 그만둬요. 저 애들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니까." 두 아들의 마음을 눈치챈 듯 수정이 빙그레 웃으며 도호를 말렸다. 그제 야 도호도 어느 정도 눈치챈 듯 누그러진 안색으로 헛기침을 했다. "흠, 흠. 알았어. 그만두도록 하지. 너희들, 나중에 예안이가 들어오면 사과부터 해라." "…네." 현우는 풀죽은 듯 그렇게 대답했고, 준우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잔뜩 감정이 상한 듯이 대문 밖으로 나온 예안은 담벼락을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예안의 표정 어느 곳에는 화가 난 기색 이 없었다. 찰나간에 이루어진 완벽한 변화였다. "훗. 현우 자식 꽤나 당황했겠지?" 팔짱을 낀 예안은 냉소적인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일부러 그러신 겁니까?」 "그래." 「어째서요?」 예안은 뭘 그런 걸 묻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한 거 아니냐? 내가 전에 그 녀석한테 얼마나 많은 개무시를 당했 는데? 이 정도는 돌려줘야 되는 거 아니냐?" 「여심이란 정말 모를 것이로군요.」 "이건 내가 여자가 돼서 그런 게 아니라 당연한 거야. 아마 너 같아도 나처럼 했을 걸? 어쨌든 현우가 지금의 날 좋아한다는 걸 안 이상 결코 마음이 편하게 두진 않을 거다. 대놓고 무시하진 못해도 안절부절못할 정도로 해줘야지." 유젤의 매력에 넘어간 현우와 준우를 홀려 마음 고생하게 만들어 지금까 지 그들에게 품어왔던 열등감이나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해소해보겠다는 마음은 조금 치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아 생전 절대 얻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들에 대한 복수의 기회를 지금 얻은 이상, 예안은 절대 그 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 걸 가리켜 소위 복수심리라고 하는 건가요? 논리적으로 납득은 가지만 이해하기는 힘들군요. 물리적인 고통을 주는 것도 아닌데 복수가 될 수 있다는 것 자체도 말이 안 되지만, 단순히 예전에 무시를 당했다 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 식으로 복수하려고 하는 유젤 님의 마음도 이 해할 수 없습니다.」 "네가 인간 심리의 그 심오함을 알겠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예안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렇게 할 거다. 안 그럼 뛰어난 구석 하나 없는 내가 도대체 무 슨 재주로 현우와 준우 형에게 복수하냐? 이런 식으로라도 해야지." 「냉정하시군요. 조금쯤은 그들을 신경 써 줘도 되지 않을까요?」 "어떤 식으로? 그 녀석들이 원하는 대로 친절하게, '현우야, 너 나 좋아 하지? 나도 너 좋아해.' 이렇게라도 굴란 말이냐?" 「물론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들에게 복수해봤자 유젤 님에게 득이 될 것도 없습니다. 어차피 같이 살게 된 이상 친절하 게 대하는 게 유젤 님에게 모쪼록 이득이 됩니다. 그것마저도 싫다면 차 라리 그들이 예전에 유젤 님을 무시했듯이 유젤 님도 그들을 무시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예안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미쳤냐? 이런 좋은 기회가 찾아왔는데 그냥 무시만 하고 말라고? 보아하니 준우 형도 지금의 나에게 꽤나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현우하 고 준우 형이 다투게 만들어 주겠어. 여자 문제라는 건 워낙에 오묘해서 부자지간도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유젤 님에게도 득이 될 것이 없습니다. 만약 실패로 돌아가서 그들의 사이가 예전보다 더 좋아지기라도 한다면 오히 려 곤란해지는 건 유젤 님이시죠. 차라리 다른 방법으로 복수하는 게 어 떻겠습니까?」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며 예안은 가벼운 놀람을 느꼈다. 얼마 전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이 녀석은 정말 컴퓨터 같지가 않다. 일찍이 이런 시스 템이 개발되었다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이 녀석은 단순히 프로그래밍 된 대로만 말하는 게 아니라, 정말 인간처럼 스스로 사고를 할 수 있는 걸까? "…넌 아무리 봐도 인공지능이 아닌 것 같아. 너 혹시 사람 아니냐?" 「전 인간의 감정을 가질 순 없지만 논리적으로 이해해 카운슬링을 할 순 있습니다. 데이터를 많이 모았거든요.」 "무슨 데이터?" 「이렇게 바다 속에서 아무 일도 없이 그냥 시간 가는 것만 기다리고 있 을 때 저는 인터넷에 접속해서 가능한 한 수많은 데이터를 모읍니다. 그 과정에서 저의 인공지능도 점점 진화하는 거죠. 학습 프로그램 덕분에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요.」 "음… 그러고 보니 처음 널 봤을 때와는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이게 다 전부 훗날의 전투를 위한 준비입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 라 하지 않습니까?」 "그건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는 뜻인데? 인터넷 에 접속해서 데이터 모으는 거랑 무슨 상관?" 「저에게 있어 저 자신과 파일럿인 유젤 님을 제외한 모든 것은 가상의 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그에 대한 준비를 해둬야 하죠. 그것 역시 저의 의무 중 하나입니다.」 예안은 단순히 재미있는 인공지능이라 생각한 이 녀석과 대화를 나누며 가벼운 짜릿함을 느꼈다. 파일럿과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적이라니?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인생인가! '앗, 아니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어느새 예안은 현우와 준우에 대해 어떻게 복수할지에 관한 것도 잊어버 리고 인공지능과의 대화에 푹 빠져들었다. "야, 인공지능. 근데 넌 이름 같은 거 없냐? 언제까지고 내가 이렇게 인 공지능이라 부를 순 없잖냐?" 「저에겐 맥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만.」 "그건 이름이 아니라 모델명이라며? 내가 이름 하나 새로 지어줄까? 나 도 인공지능이라 부르기 좀 불편한데." 「레이온 박사에겐 제가 필요 없다 말씀하시더니, 절 갖고 싶으시긴 한 가 보군요.」 "너가 있으면 꽤나 재밌을 것 같아. 혼자 있을 때 말야." 「한 세기를 멋지게 장식할 세기의 대무기인 저를 장난감 취급하는 사람 은 아마도 유젤 님밖에 없을 겁니다. 좋습니다. 멋있는 이름으로 지어주 세요.」 역시 이 녀석은 인공지능이 아니라 사람이었던 게야. 예안은 그렇게 속 으로 궁시렁거리며 미리 생각해둔 이름을 말했다. "유니콘. 유니콘 어떠냐?" 「글쎄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데요. 그것보다는 페가수스가 어떻습니 까?」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그게 그거잖아!" 「그게 그거라니요. 유니콘과 페가수스는 엄연히 다릅니다.」 '그런가?'하고 고개를 갸웃하던 예안은 짜증스런 목소리로 외쳤다. "몰라! 그냥 유니콘으로 해! 파일럿이 지어주는 이름이면 고맙게 받을 생각을 하라구!" 「쳇. 페가수스가 더 멋진데.」 이거 그냥 확 집어던져 버릴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바지 주머 니에서 뭔가가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주머니를 뒤져보니 핸드폰이 나왔다. '이게 무엇이며 왜 내 주머니에 있 지?'라고 잠시 생각하던 예안은 빨리 받으라는 핸드폰의 재촉에 결국 생 각을 잠시 접어두고 폰을 열었다. "여보세요. 아, 근데 실례지만 이 폰이 왜 저한테 있는 건지 아세요?" 「나 김재원이다, 임마. 내가 너한테 이 폰 주었잖아? 그새 잊어버린 거 니?」 그제야 예안은 이 폰이 어디서 난 건지 기억났다. "아, 그렇구나! 형이 준 거였어. 근데 형, 웬일이야?" 「웬일은 무슨. 내가 전에 너 맛있는 거 사준댔잖아. 지금 나올 수 있 니?」 재원과 사이버상에서 친한 편이기는 해도 특별히 오프라인에서 만날 생 각 따위는 없었다. 무엇보다 현우와 준우 덕분에 어느 정도 자신의 현재 처지에 관해 눈을 뜬 예안은 재원의 접근에 가벼운 경계심마저 들었다. 예안은 약간 냉랭하게 말했다. "별로 내키지 않는데." 「그러지 말고 나와라.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좀 차갑게 쏘아붙여 볼까. 그렇게 잠시 망설였지만 역시 너무 앞서나가 는 건 좋지 못할 것 같았다. 정말 재원이 여자인 자신에게 마음이 있어 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사이버상의 친한 사이여서 그런지는 아직 불확실 하지 않은가? 냉랭한 표정이 조금 풀린 예안은 다소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사실 나도 형한테 너무너무 맛있고 가격이 하늘을 찌를 듯이 비싼 음식 을 얻어먹어 형이 전재산 파산 나는 꼴을 너무너무 보고 싶다고." 「…제발 그것만은 참아 주라.」 "하지만 난 지금 속이 안 좋아서 약 말고는 아무것도 못 먹는 신세니까 나 먹을 거 사줄 돈이 있으면 차곡차곡 모아서 나중에 이터널 피닉스에 서 마이더스의 손이나 하나 사 줬으면 좋겠는데. 그거 한 오백 만 원이 면 살 수 있을 테니까." 이 정도로 했으면 재원이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정중한 거절이겠지? 하지만 기대하지도 않은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다. 「아, 그거 나 있는데. 얼마 전에 주웠어.」 상상도 못한 대답에 예안은 깜짝 놀랐다. 마이더스의 손이라면 자신이 예전부터 굉장히 갖고 싶어했던 최고급 아이템 중 하나였다. 놀라지 않 는 게 비정상이다. 게임 폐인 생활을 해본 사람만이 그 심정 안다. "어? 진짜야? 형 진짜로 그거 있어?" 「그래. 너 줄까?」 굉장히 기대했던 예안은 퍼뜩 실망감이 머리를 스쳤다. 만약 재원이 마 이더스의 손을 준다고 해도 대가가 아예 없는 건 아닐 것이다. "뭘 원해? 설마 내가 평생 동안 형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내가 얻 는 하급 아이템들을 전부 다 형에게 주는 걸 원하는 건 아니겠지?" 「마지막 거 빼고 전부 다, 라고 하면 어쩔 테냐?」 그렇다면 생각할 가치도 없지. 마이더스의 손이 아까웠지만 혹시나 자신 과 사귀고 싶어하는 거라면 포기해야만 한다. 예안은 약간 냉랭하게 말 했다. "그렇다면 마이더스의 손을 포기해야지 뭐." 「진짜로? 너 그거 엄청 갖고 싶어하지 않았어?」 "하지만 대가가 너무 비싸니까 포기할 수밖에 더 있어? 안 그래?" 「그럼 대가를 바꾸지 뭐. 오늘 하루만 나한테 시간 내줄 수 있니? 심심 해서 지금 죽겠다. 같이 놀 사람이 없어. 역시 네 말대로 날라리 대학생 이랑은 아무도 안 놀아주나 봐.」 더 생각할 것도 없다. 재원은 준우나 현우처럼 예안에게 마음이 있어 접 근하는 게 확실했다. 유젤에게 다른 남자가 접근해오는 꼴을 죽었다 깨 어나도 보기 싫었던 예안은 거절의 말을 꺼내려고 하다 멈칫했다. '그래… 하루쯤 같이 놀아주고 마이더스의 손을 받는 거야… 괜찮겠지?' 마이더스의 손을 이대로 포기하는 건 너무나도 속이 쓰렸다. 그래. 딱 하루 같이 노는 것쯤이야 뭐… '미안해, 예안아. 나 마이더스의 손 정말 갖고 싶었거든.' 마음 속으로 유젤에게 사과를 한 예안은 결국 눈을 감으며 물었다. "어디서 만날까?" 예안이 다시 들어오자 도호는 현우와 준우를 무언의 눈길로 재촉했다. 머뭇거리던 그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예안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누나. 아까는 진심이 아니었어." "미안하다." 조금 매서운 눈길로 차분하게 자신들을 훑어보는 예안의 태도에 현우와 준우는 죽을 맛이었다. 화가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라고 느낀 현우는 무 릎까지 털썩 꿇었다. "누나! 내가 진짜로 잘못했어! 다신 그런 소리 입에 담지도 않을게! 제발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줘!" 찬란한 녹색으로 빛나는 예안의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읽어낼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공주상과 같이 묘하게 매력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섬뜩하게까 지 느껴지는 그 모습에 준우는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착각이겠지 만 저 눈빛을 어디선가 한 번 본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유현우." 온 가족이 긴장 속에 주시하는 가운데 이윽고 예안이 입을 열었다. 여전 히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말투였다. "화 같은 거 나지 않았으니까 별로 미안해할 건 없다. 그만 일어나." "하지만 말투가 너무 차갑잖아! 진짜 화 안 난 사람 맞아?" 예안은 손을 들어 가볍게 이마를 짚었다. 골치라도 아픈 걸까? "자꾸 그렇게 사람 귀찮게 하면 나 정말 화낸다. 그러니까 그만 일어나. 준우 형도 나한테 별로 미안해할 것 없어." 화가 안 났다고 하기에는 태도가 너무나 냉정하고, 또 화가 났다고 보기 에는 너무나 침착했다. 예안의 기분이 어떤지 몰라 준우가 속으로 고민 하고 있을 때, 어느새 이층에서 옷을 갈아입은 예안은 다시 내려왔다. 손에는 커다란 밀짚모자를 들고 있었다. "누나,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신발을 신던 예안은 흘끗 현우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감정을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데이트하러 간다." "뭐, 뭐, 뭐?" 경악한 현우와 준우가 입을 쩍 벌린 채 석상이 되어 버린 걸 내버려두고 예안은 집을 나섰다. 잠시 후 정신이 든 현우와 준우는 어이없는 표정으 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들었어, 형?" "들었어."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걸 보면 우리 둘이 제대로 들은 것 같아." "어떡하지?" "글쎄…" 수정이 웃음 띤 얼굴로 둘에게 물었다. "너희들 미행 안 갈 거니?" "예엣! 미행이라뇨!" 당황한 둘이 입을 모아 외치자 수정은 재밌다는 미소를 얼굴에 가득 띄 운 채 손가락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쯧쯧쯧. 그렇게 자존심 내세우고 있으면 여자는 용기 있는 남자한테 가 버리기 마련이라구. 지금 그러고 있을 때야? 연적이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아? 어서 쫓아나가는 게 좋을 텐데? 안 그럼 놓친다구." 현우와 준우를 서로를 다시 한 번 마주보았다. 이윽고 그 둘은 결연에 찬 표정으로 일어났다. "좋아, 나간다." "알았어 형!"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불꽃을 일으키며 얽혀든 건 한 순간. 그들은 서로에게 신뢰에 찬 시선을 보내며 재빨리 집을 뛰쳐나갔다. '사수하 자!' 어쩌구저쩌구 하는 말을 앞세우면서. 그들이 나간 뒤 정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마디했다. "언제부터 쟤네들이 저렇게 호흡이 척척 맞았지? 맨날 티격태격 대기만 하더니…" 수정과 도호는 난처하면서도 남모를 웃음을 지었다. '웬 밀짚모자?' '생긴 건 예쁘장하게 생긴 애가 취향이 참 독특하네.' '그나저나 밀짚모자가 캐쥬얼하고 의외로 잘 어울리네. 나도 저렇게 한 번 해볼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흘끔대고 지나갈 특이한 모자를 쓴 여자가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며 거리에 서 있었다. 여름철 시골길도 아닌데 밀 짚모자를, 그것도 캐쥬얼 복장에 쓰고 있다면 눈길을 끌기 쉽다는 걸 미 처 생각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해 원망의 말을 퍼부으면서. 다름 아닌 서예안이었다. '에휴. 그래도 머리카락 색이 눈에 띄는 것보다는 낫지. 아무래도 파란 머리카락 색은 드무니까… 시트날타에 붙잡혀 가는 것보다는 백 배 낫지 뭐냐. 그나저나 레이온 형은 잘 있으려나? 그러고 보니 그 때 안색도 디 게 안 좋았는데. 음… 머리카락색만 잘 숨기면 시트날타라도 별 걱정 없 을 거라 했으니 안심해도 되겠지? 하기야, 서울에 사는 사람이 몇 명인 데 무슨 재주로 날 찾아내겠어?' 그렇게 속으로 중얼중얼 갖가지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짚어왔다. "오래 기다렸지?" 재원의 목소리였다. 예안은 표정 관리에 각별히 신경 쓰며 뒤를 돌아보 았다. "아, 재원형. 굉장히 늦었네? 사람을 이렇게 기다리게 해도 되는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미안. 이것저것 준비 좀 하다 보니 이렇게 늦었다." "머리에 힘 잔뜩 줬네? 그렇게 하니까 별로 멋없다." '무려 삼십 분 간을 고민한 머린데 멋 없다구?'라고 실망하며 재원은 볼 을 긁적였다. 그리고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 둘을 지켜보던 준우, 현우 두 형제는 눈동자에서 불이 튀었다. "재, 재원이 형이 언제부터…"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재원 형이 벌써부터 누나에게 마수 를 뻗쳐 왔을 줄이야…" 자고로 여자 문제에 있어서는, 친한 친구나 친형제는커녕 아버지조차 믿 지 말라는 격언을 떠올리며 두 형제는 열의를 불태웠다. "예안아, 우리 어디 놀러 갈래? 오늘 오빠 돈 많다." 재원이 두툼한 지갑을 흔들며 씩 웃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 고 있던 예안은 팔을 들어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가자." "그래 저기 가… 에엑?" 무심코 그쪽을 돌아보던 재원은 그대로 돌이 되어 버렸다. 그건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던 준우와 현우도 마찬가지였다. 예안이 가리킨 곳에는 그 이름도 찬란한 '동명 로브 호텔'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으악! 형! 이, 이 일을 어떡해!" "침착해. 침착하게 이 일을 타개해 보자." "서, 설마 누나가 이렇게 개방적일 줄은 미처 몰랐어." "요즘이 어느 시댄데 그런 걸 따지냐?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인 줄 알 아?" 둘이서 이렇게 쑥덕대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재원은 잔뜩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만 연신 해댔다. "흠, 흠. 저 예안아… 네가 적극적인 건 고맙지만 이 오빠는 아직 몸과 마음이 준비가 안 됐는데…" 예안은 키가 큰 재원을 올려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착각하지 마, 형. 내가 지금 호텔 가자는 줄 아냐?' 재원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눈치 챈 예안은 어깨를 으쓱 했다. 더 확인할 것도 없이 재원은 여자인 자신에게 마음이 있어 만나자 고 한 게 확실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PC방을 가는데 왜 몸과 마음의 준비가 필 요해?" 과연 그 말대로, 눈앞에 보이는 러브 호텔 바로 옆에 PC방 간판이 있었 다. '그럼 그렇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재원은 꽤나 실망한 눈치 였다. "자, 마이더스의 손 빨리 줘." "이건 일단 나중에 주기로 하고, 지금은 롯데월드나 가지 않을래?" "나 놀이기구 같은 건 원래 안 타. 그러니까 빨리 마이더스의 손이나 줘. 주기로 약속했잖아?" 난처한 듯 볼을 긁적이던 재원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알바생에게 카드를 받아 자리 두 개에 앉았다. 밀짚모자를 쓴 예안은 이터널 피닉스에 접속 했다. "근데 갑자기 웬 밀짚모자야?" "왜, 이상해? 난 나름대로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한가?'라고 중얼거리며 예안이 모자의 챙을 쓰다듬자 재원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전혀 안 이상해. 잘 어울려. 그냥 요즘에 이런 거 쓰고 다니는 여자애 들은 없으니까 신기해서 물어본 거야. 나도 나중에 내 여동생한테 한 번 써보고 다니라고 할까?" 예안은 챙을 만지작거리다 문득 물었다. "형. 나 남자로 보여?" "엥?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질문의 요지를 이해하지 못한 재원은 당혹스러웠다. "모자 안으로 긴 머리카락 감췄잖아? 그러니까 지금 남자애로 보이냐고. 예를 들면, 시골에서 갓 상경한 남자애로 말이야." "시골 남자애라기에는 세련미가 너무 철철 흐르는데? 오히려 무슨 부잣 집에서 고이고이 자라온 아가씨가 나들이 온 것 같다. 네가 입은 옷도 몸매가 잘 드러나잖아." "으음…" 팔짱을 낀 채 고민하던 예안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 겨울이 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건가. 두꺼운 옷 입으면 좀 나을 테니까." "왜,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게임 속의 캐릭터가 마이더스의 손을 넘겨주는 걸 받아 인벤토리에 넣으 며 예안은 대답했다. "사실 난 남자로 보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네. 이것도 실은 남자 옷 인데 형 말로는 남자로 안 보인다고 하고." "야야, 머리카락 좀 감추고 남자 옷 입는다고 너 같은 예쁜 애가 남자로 보인다는 게 말이나 돼?" 예안은 쿡쿡 웃었다. "형이 보기에도 내가 예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물어오는 예안의 녹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재원은 황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예, 예뻐. 굉장히 예뻐." "그래?" 예안은 뭐가 즐거운지 쿡쿡 웃어댔다. 그건 예쁘다는 칭찬을 들은 십대 여자애의 수줍어하는 반응하고는 거리가 전혀 멀었다. "그거 고맙네. 난 이 얼굴이 정말 좋거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준 얼굴이라서 말이야. 칭찬 고마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준 얼굴? 그렇다면 어머니나 혹은 아버지를 말하 는 건가? 묘하게 차가운 빛을 발하는 녹색 눈동자의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재원은 예안의 말투에 뭔가 의미심장한 뼈대가 들어있음을 느 꼈다. "너 근데 눈이 녹색이구나? 지금 알았어." "왜, 이상해?" "아니, 예뻐. 그것도 굉장히 예뻐." "킥." 예안은 프로그램을 종료하며 야릇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그러고 보니 형, 이걸 돌려줘야지?" 그러면서 예안은 재원이 자신에게 주었던 폰을 내밀었다. 재원은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건 너한테 연락하기 위해 내가 준 거니까 그냥 받아 둬." "난 폰이 있으면 불편해. 가지고 다니기도 귀찮고, 또 내 쪽에서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것도 싫거든." "내가 전화하는 게 싫어?" 예안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게 아냐. 난 전화기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연락하기에는 편 리하긴 해도 솔직히 좀 귀찮고, 써본 적도 거의 없고, 뭐 그런 것 때문 에 싫어하는 편이야. 그래서 돌려주려고." "그러지 말고 그냥 받아 둬. 안 그럼 내가 너한테 연락할 방법이 없잖 아? 비용은 내가 다 낼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귀찮음 때문에 짜증이 난 예안은 표정이 냉랭하게 굳었다. "내 말을 뭐로 들었어? 가지고 다니기 귀찮다니까." "너 그럼 마이더스의 손 다시 뺏는다?" 예안이 평소 사이버 공간에서 아이템에 대해 얼마나 광적으로 집착하는 지 잘 아는 재원은 패배감으로 표정이 구겨지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했 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예안의 녹색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감정의 동 요를 읽어낼 수 없었다. "마음대로 해. 어쨌든 난 받을 건 받았으니까 이만 간다." 재원은 약간 당황했다. 이건 기대했던 반응이 아닌데? "야야, 오늘 하루는 나랑 같이 놀아주기로 했잖아?" "이터널 피닉스는 집에 가서도 할 수 있잖아? 돈 아깝게 뭐하러 PC방에 서 죽치고 하자는 거야?" 재원은 약간 기가 막혔다. "너 설마 하루종일 이터널 피닉스만 하면서 놀 생각이었어?" 혹시나 예안이 지금 튕기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다시 한 번 눈빛을 살 폈다. 하지만 매력적으로 빛나는 녹색 눈동자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 을 읽어낼 수 없었다. 뭐랄까. 유리로 만들어진 인형의 눈동자를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럼 우리 둘이서 뭐하고 놀지? 게임 밖에 더 있나?" "롯데월드라도 가자니까." "나 거기 가본 적 한 번도 없는데. 그다지 가고 싶지도 않고. 그냥 이터 널 피닉스 하자니까." 재원은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 롯데월드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 다니! "로, 롯데월드를 가본 적이 없단 말이야?" "어." "서, 설마 드림랜드나 서울랜드, 어린이 대공원 같은 곳은?" "없어." "여행 같은 것도?" "없어." 도대체 이 녀석의 부모는 지금까지 이 녀석에게 뭘 해줬단 말인가? 재원 은 기가 막히기보다는 여태껏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는 예안 이 조금 안쓰럽게 느껴졌다. "너희 부모님이 그런 데는 굉장히 무신경하신가 봐? 그런 곳도 한 번 안 데려가고 그러게?" 예안은 침착하게 자신이 도호 가족에게 둘러댔던 거짓말을 머리 속에 떠 올렸다. 이제부터 유진우가 아니라 완벽한 서예안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서는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똑같은 거짓말을 하는데 익숙해져야만 한다. "나 부모님 안 계셔. 돌아가셨거든." "아, 그래? 이런…" 미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던 재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이 오빠가 오늘 너의 하루 책임질게! 롯데월드니 뭐니 내가 좋은 곳 다 데려가 주마!" 재원의 이런 친절이 귀찮다 못해 이제 슬슬 짜증이 나려한 예안은 차가 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근데 형, 왜 나한테 그렇게까지 해주려는 건데?" "아, 그거야…" 정곡을 찔린 재원은 미리 상상했던 갖가지 답변들을 다 잊어버린 채 버 벅거렸다. 원래 사람은 노골적인 질문을 받으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형이 오늘 심심하대서 나도 놀아주려곤 했지. 근데 이터널 피닉스 하자 는 줄 알았는데 롯데월드 같은 데 가자고 하면 난 당혹스러워. 난 솔직 히 돌아다니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시트날타 녀석들과 혹시라도 마주칠까봐 걱정되는 게 아니라 원래 돌아 다니길 싫어하는 건 예안의 천성이었다. "그러지 말고 그냥 게임이나 하자. 나 집에 가서 이터널 피닉스 접속할 테니까. 오케이?" "야, 야. 그러지 말고 같이 롯데월드 가자니까. 네가 한 번도 그런 데를 안 가봐서 지금 그렇기 싫어하지만, 자이로 드롭 한 번만 타면 생각이 바뀔 걸? 내가 가지 말자고 해도 가고 싶어 죽을 지경일 거야." 남자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못 알아차리는 여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 다. 그리고 예안이 제 아무리 여자의 심리에 절대 익숙하지 않은 동정남 의 영혼을 갖고 있다지만, 이 정도까지 되면 충분히 재원의 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그러나 예안의 입장에서는 남자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화 밖에 나지 않는 일이다. '예안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나뿐이야. 나뿐이야.' 예안은 그렇게 속으로 자기 암시를 걸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최대한 냉 랭하게 물었다. "형 혹시 나 좋아해?" "푸훗!"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얼굴조차 붉히지 않고 그렇게 물어오자 재원은 당혹 함을 느꼈다. 이거 원, 나이가 4살이나 많은 자신이 예안에게 너무 질질 끌려 다니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말해버리면 앞으로 좀 곤란해지겠지?' 재원은 나름대로 꽤 연애를 해봤다고 자부하는 만큼 이런 여자애들이 '그래. 나 너 좋아해'라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잘 안다. 대충 생각해봐도 예안은 자신에게 그냥 온라인에서 친한 오빠 이상의 감정은 없을 것이다.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아마 내일부터는 게임에서도 영영 그 인연이 끊어질지도 모른다. "에…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롯데월드 같은 데 한 번도 못 가본 네가 좀 가여워서…" 예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어이가 없다는 제스처였다. "형이 날 가엾게 여길 필요는 없잖아? 사실 갈 기회는 수두룩하게 많았 는데 그냥 내가 가기 싫어서 안 간 것 뿐이야. 물론 우리집은 부자이기 는커녕 엄청 못사는 편이지만, 롯데월드 한 번 못 가볼 정도로 목구멍에 풀칠하는 수준은 아니거든." "네가 가난한 집 애라기에는 부티가 너무 흐르는데?" "그건 워낙에 옷걸이가 좋아서 걸고 있는 누더기가 빛나는 것뿐이지. 그 러고 보니 형 꽤나 괜찮은 차림을 하고 있네? 하지만 이걸 어쩌지? 난 형하고는 비교가 안 될 하찮은 인생을 살아왔는데?" 목소리에 조금의 톤이라도 있었다면 아마도 예안이 화가 났다고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차갑기는 해도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 지 않는 말투였다. 지금 진심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튕기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자신을 놀리고 있는 건지 재원은 도저히 확 신할 수 없었다. 한 가지 그가 알 수 있었던 건, 예안은 일부러 상대방이 당혹스러워할 만한 말만 골라서 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평범한 십대 여자애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해오는 남자에게 할 행동이 아니다. "그리고 형이랑 같이 롯데월드 가면 나 곤란해. 나 엄청 혼나고 말 거 야." "누구한테? 너희 부모님한테?" "아니. 애인한테." 비로소 예안의 입가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설마 애인이라는 녀석을 생각 하고 있는 걸까. 재원은 마음 속에서 질투가 불타오르는 걸 느끼고 그만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형도 생각해봐. 만약 형이 애인이 있는데, 아무리 내가 그냥 아는 동생 이라지만 같이 롯데월드 같은 데 가면 형 애인이 좋아하겠어?" 잠시 동안 망설이던 재원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접근하는 게 떳떳할 거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휴. 결국 말해야 하나. 사실 우리가 오프라인에서 본 건 얼마 안 됐잖 아? 지금 시점에서 이 말까지 하기는 좀 그런데, 너도 참 잔인하다." 재원이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자 여태껏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예안의 표정에 비로소 당혹함이 떠올랐다. 이건 자신이 예상한 반 응이 아니었다. "사실대로 말할게. 나 솔직히 처음에 이터널 피닉스 할 때는 너에 대해 별다른 생각 같은 거 없었어. 근데 얼마 전 PC방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네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마음이 바뀌었어."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처음에 널 보고 한눈에 반했다는 소리다. 난 널 좋아해." 예안의 표정에서 웃음기와 당혹함이 일순간에 지워졌다. 그것들을 대신 해 나타난 건 바로 숨길 길 없이 강렬하게 타오르는 분노와 질투였다. 그걸 깨달은 재원은 묘한 섬뜩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왕 엎질러진 물, 재원은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해줄까? 난 널 좋아해. 널 좋아한다고. 그래서 전에 너에 게 내 폰을 준 거야. 오늘 너랑 같이 놀고 싶고, 앞으로도 계속 만나고 싶어. 솔직히 내가 이렇게까지 반할 여자가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나 랑 사귀어 주지 않을래?" 고개를 숙이고 있던 예안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그녀의 얼굴에서 묘한 살기가 느껴졌다. 얼핏 그걸 알아차린 재원은 굉 장히 당혹스러웠다.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이렇게 사람을 죽일 듯이 쏘아 보는 여자애가 도대체 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좋아하지 마." 눈보라처럼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응?" "좋아하지 마." "뭐, 뭘?" "예안일 좋아하지 마. 좋아하지 말란 말이야." 서릿발조차 꽁꽁 얼려 버릴 정도로 매서운 녹색 눈동자가 갑자기 붉어지 기 시작했다. 당황한 재원이 어쩔 줄 몰라하는 바로 그때, 예안의 볼을 타고 한 방울의 눈물이 또르르 굴러 내렸다. "예안인 내 거야. 좋아하지 마. 좋아하지 말란 말이야."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건 서예안이라는 순수한 여자애가 아니라, 유젤을 영원히 독점하고 사랑하고 싶어하는 한 나약한 남자아이의 이기 적인 마음이라는 것. 아마 재원은 평생을 가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무슨 남자가 여자를 울리고 그러나?'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 는 걸 한 몸에 받고 있던 재원은 어찌 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냥 좋아 한다고 솔직하게 말했는데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여자애 마음을 도대체 무슨 재주로 이해한단 말인가? '세상에 좋아한다고 말하는데도 싫어서 우는 애도 있나? 좋아서 기뻐하 거나 수줍어하면서도 거절하는 애는 있어도…' 자신이 꽤나 킹카라 자부하는 재원은 이 사태를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궁리했다. 결국 그는 한숨과 함께 사과했다. "미안하다, 예안아. 오빠가 잘못했다. 아직 너에게 이런 말을 할 때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급한 마음에…" 예안은 차갑게 말했다. "오빠? 형이 왜 오빠야? 형은 형이잖아. 안 그래, 재원 형?" "그래. 그래. 오빠가 아니라 형. 이 형이 잘못했다. 그러니까 화 풀어 라." "화? 내가 화난 걸로 보여?" 솔직히 말해서 모르겠어. 재원은 그렇게 속으로 혼잣말하며 쓴웃음을 지 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한 방울의 눈물이 사라지고 나자 예안의 얼굴 에선 어느새 다시 표정이 지워지고 없었다. 또다시 자신의 감정을 깊이 깊이 감춘 예안의 녹색 눈동자는 정말 매력 적이라 생각했지만, 재원은 그게 아직은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았다. 멀리서 몰래 지켜보고 있던 현우가 준우에게 작게 속삭였다. "작은 형. 아무래도 일이 잘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지?" "글쎄다. 잘 안 들려서 뭐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근데 보통 연인 사 이에서는 저 정도 난관이야 당연한 거 아니야? 내 생각엔 좀 힘들 것 같 은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골키퍼 없다고 골 못 넣으리란 법이 어딨어? 오히려 골키퍼 없는 골대 찾기가 더 힘든 법이라구! 골키퍼는 당연히 거 쳐가야 할 시련이나 난관이란 말이야!" 이 녀석이랑 얘기하다 보면 나도 점점 망가지는 것 같단 말이야. 준우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재원이 떳떳하게 좋아한다고 자신에게 말하는 순간 예안은 참을 수 없는 질투와 분노를 느꼈다. 때마침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면(비록 한 방울뿐 이었지만) 아마도 예안은 그에게 굉장히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부러웠다. 유젤에게(비록 껍데기뿐이긴 해도) 떳떳하게 대놓고 좋아한다 말할 수 있는 재원이 부러웠다. 영원히 유젤의 모든 걸 독점하고 싶고, 또 유젤의 모든 걸 가졌지만 단 한 가지 '진우'에게 허락되지 않은 건 눈앞에 서 있는 유젤에게 좋아한다 말할 수 없다는 사실.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소한 한 가지 권리를 다른 남자에 게 박탈당해야 한다는 건 걷잡을 수 없는 질투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제길!' 예안은 PC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시원한 공기가 갑갑한 마음을 어느 정 도 누그러뜨려 주는 것 같았다. "와, 날씨 정말 좋다." 뒤따라나온 재원이 약간 멋쩍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을 걸었다. "이렇게 날씨 좋은데 정말 롯데월드 가지 않을 거니?" 재원에게 정말 참을 수 없는 질투를 느꼈고, 또 자신만이 독점할 수 있 는 유젤에게 접근하는 것에 대해 경계심을 느꼈지만, 어찌 되었든 게임 을 하면서 많은 친분을 쌓은 데다 또 마이더스의 손 같은 최고급 아이템 을 준 사람이다. 화를 내는 건 굉장한 실례라는 걸 걸 모를 정도로 예안 은 어리석지 않다. "형이랑 있으면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아. 자꾸 망가지는 것 같아서 기분 이 별로 좋지 않아. 미안한데, 우리 당분간 오프라인에서는 얼굴 보지 말기로 하자, 형. 이따가 이터널 피닉스에서 연락할게." 냉랭한 목소리였지만, 예안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해석한 재원은 속으 로 약간의 기대를 품었다. '혹시 지금 나 때문에 흔들리는 게 남자친구한테 미안해서 울기라도 한 걸까? 굉장히 감성이 풍부한 애네. 어쨌든 잘 됐잖아. 가능성은 있단 소 리니까.' '연적'이 지금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면 예안은 실례를 저지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철저히 배척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해가 깊어진 채로 이 두 사람은 헤어졌고, 덕분에 재원은 한낱 엑스트라로서 생을 마감하지는 않게 되었다. 아직은 말이다. 예안과 재원이 헤어지는 걸 끝까지 지켜보고 난 뒤 준우가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 "왜?" "생각해 봐. 우리가 미행했다는 걸 예안이가 안다면 그 얼마나 개망신이 냐?" 현우는 못마땅하다는 듯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흔들며 혀까지 찼다. "쯧쯧쯧, 형은 그래서 백조 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야. 밑에서는 힘 빠지게 물장구 치고 있으면서 겉으로만 화려함을 지키려고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사랑을 쟁취하는 데 있어서 자존심이고 뭐고 그런 게 도대 체 왜 필요한대?" "하지만 이건 좀 뭔가 아닌가 싶다. 우리가 하는 짓거리 좀 봐. 완전 스 토킹이잖아?" "스토킹은 무슨. 그리고 들어갈 거면 형 혼자 들어가. 난 혹시 누나가 혼자 돌아다니다가 위험한 일이라도 안 겪는가 지켜봐 줘야겠어." 그 말에 준우는 마음이 심히 흔들렸다. "위험한 일?" "그래. 예를 들면 골목길을 걷는데 깡패가 나타나서 희롱한다든지, 치한 을 만난다든지, 심지어 인신매매범이나 강간범 같은 걸 만날 수도…" 확률적으로 극히 작은 일이지만 준우의 안색은 새파랗게 변했다. 상상한 것만으로도 끔찍한 모양이었다. "그, 그건 안 되지." "그렇지? 그러니까 형도 잔말말고 계속 따라 와. 일단 당분간은 같은 목 적을 가진 동업자니까."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방황하는' 예안을 좀더 뒤 따라 다니게 되었다. 내내 우울한 표정으로 돌아다니던 예안은 문득 예전에 세현과 자주 갔던 PC방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대명고등학교 근 처까지 온 모양이었다. '서울도 참 좁네. 얼마나 걸었다고 여기냐…' 힘없는 미소를 짓고 있던 예안은 갑자기 옛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세현과 혜인에 대해서는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세현이는 잘 지내 고 있을까? 갑자기 절친한 친구가 연락을 끊은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있 진 않을까? 아니면 그냥 걱정만 하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혜인에 대해서도 완벽히 매듭을 짓지 않은 채 어이없게 헤 어져 버렸는데, 괜찮은 걸까? 예안은 혜인에 대해 험한 말만 골라 세현 에게 했지만 사실 그 중 태반은 혜인과 인연을 끊으려고 하는 자기 행동 을 합리화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지금 나는… 둘 중 어느 한 사람에게도 연락할 수 없지…' 이미 유진우란 인간은 죽은 걸로 해야 한다. 그건 혜인과 세현에게 영원 히 연락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 이 몸으로 그들에게 연 락해봐야 뭐라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진우니까 믿어달라고? 그들이 믿어주고 말고를 떠나서, 자신의 비밀을 아는 사람을 아버지와 레이온 이외에 더 늘려서는 안 되는 것인데. '아! 맞다! 메신저!' 그때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난 예안은 손뼉을 짝 쳤다. 전화로는 연락할 수 없지만 메신저라면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오프라인에서 영원히 볼 순 없어도 유진우란 인간이 죽지 않은 걸로 행세할 수 있을진 모른다. 그건 벗어나기 힘든 달콤한 유혹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결국 유혹에 져버린 예안은 세현과 자주 들렀던 이 PC방에 들어가 자리 를 잡았다. 메신저를 켜는 순간, '유진우 이 자식 연락 안 하면 죽인 다!'라는 문구가 세현의 아이디 옆에 붙어 있는 걸 보고 그만 눈물이 왈 칵 쏟아질 뻔했다. 「야, 유진우! 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다시 바보같이 터지려는 눈물을 참으려는데 갑자기 세현에게서 메모가 날아왔다. 단단히 벼르고 있던 모양이었다. 「미안. 그 동안 일이 좀 있었어.」 「아무리 일이 있었어도 그렇지, 연락 한 번 제대로 못해 주냐! 네가 그 러고도 친구냐!」 「사고가 있었거든. 나 오늘 겨우 깨어났어.」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세현은 경악한 모양이었다. 「사고라니? 도대체 무슨 일인데?」 「교통사고. 나 하마터면 죽을 뻔하다 살았거든.」 「너 그래서 지금은 어때? 괜찮아? 괜찮은 거냐?」 「지금은 괜찮아. 걱정하지 마. 근데 나…」 잠시 입술을 깨물며 망설이던 예안은 결국 결심을 굳혔다. 「앞으로 널 평생 못 만날 거야.」 「무슨 소리야? 왜 못 만난다는 건데?」 「나 도저히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변해버렸거든. 사고 때문에…」 「서, 설마 너 전신화상같은 거라도 입은 거야? 아이고, 이 녀석아! 너 그래서 도대체 장가는 어떻게 갈래!」 하마터면 슬픈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어떻게 세현이고 아버지고 이 렇게 반응이 똑같을 수 있단 말인가? 순수하게 문장만 봤다면 아마 세현 이 장난치고 있을 거라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안은 전파를 통 해서 세현이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김혜인은 어때?」 「말마라. 완전 여자애 하나 폐인 되게 생겼다. 매일 같이 네 걱정만 하 고, 맨날 나한테 와서 너한테 연락 온 거 없냐고 묻는데…」 「그냥 나 죽었다고 해줘.」 잠시 동안 세현은 말이 없었다. 이윽고 다시 글이 떠올랐다. 「진심이냐, 너?」 「어차피 그게 서로에게 좋아. 난 이제 다시 너희들을 볼 수 없을 거야. 혜인이가 날 정말 순수하게 좋아했는지 아닌지, 생각하는 것도 이제 다 지쳤다구. 솔직히 난 지금도 많이 힘들다. 그러니까 혜인이한테는 그렇 게 말해 줘라.」 「너 언제 한 번은 만날 수 있냐? 한 번만 만나자. 일단 만나자.」 예안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친구를 속인다는 죄책감인 지 이제 다시 그를 볼 수 없다는 아쉬움 때문인지 알 순 없었다. 「미안하다. 나 네 앞에 나설 자신이 없다. 그러니까…」 "이 개자식! 아직도 그런 헛소리야!" 뒤에서 갑자기 터져 나온 고함 소리에 예안은 순간 귀가 얼얼했다. 방금 그게 차세현이 목소리임을 깨달은 순간 예안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밀짚모자를 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건 좋지만, 모자 때문에 눈에 띈다는 걸 생각지 못한 자신에게 속으로 바보라고 외치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나와! 무슨 일이 있어도 나와!」 「난 널 꼭 만나야겠어! 안 나오면 너 내 손에 죽는다, 유진우!」 「뭐야? 왜 대답이 없는 거냐!」 「야, 유진우!」 이런 어이없는 일을 겪을 줄이야. 얄궂게도 세현은 예안의 뒤쪽에 있는 자리에 앉아 서로 반대 방향에 놓인 컴퓨터로 채팅을 하고 있었던 것이 다. 예안은 슬그머니 메신저를 껐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컴퓨터를 재붓시키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갔다. 세현이 자신을 알아 볼 리는 절대 없지만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만에 하나라도 들키면 돌이킬 수 없어져 버리고 만다. 서둘러 계산을 마친 예안이 막 PC방을 나가려는 참이었다. "이봐요. 잠깐만요." 갑작스레 뒤에서 들린 세현의 목소리에 예안의 안색은 사색이 되었다. 그냥 모른 척 하고 달아나버릴까 생각하던 예안은 그렇게 했다가는 오히 려 더 의심사기 좋다는 판단 하에 결국 죽을상이 된 채 뒤를 돌아보았 다. "왜, 왜 그러세요?" 예안의 목소리가 벌벌 떨리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세현은 뭔가를 내밀었다. "이거 그쪽 핸드폰 아닌가요? 잘 챙겨 가지고 다니세요." "아…고맙습니다." 세현은 예안의 얼굴을 한 번 흘끔 쳐다봤을 뿐 별 흥미 없이 PC방을 나 섰다. 예안은 그가 이를 갈며 가볍게 투덜거리는 걸 들어버렸다. "유진우, 이 자식. 다음에 만나면 가만두지 않겠어." 거친 말투와는 달리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 듬뿍 배여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 예안은 세현이 건넨 폰을 만지작거리다 그만 다시 눈물을 흘렸다. 이래저래 오늘은 눈물로 하루를 장식하는 날인가 보다. 예안은 밝은 햇 살 아래 이미 저 멀리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지는 세현의 모습을 언제까지 고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하루종일 방황하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예안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집안 에 들어섰다. 무심코 고개를 든 예안은 온가족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 을 깨달았다. "아, 다녀왔습니다." 가족들 전부가 잔뜩 긴장한 채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예안은 조금 불안함을 느꼈다. 뭔가 뒤통수를 얻어맞을 만한 엄청난 말이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예안아. 일단 옷 갈아입고 좀 내려올래? 잠깐 할 이야기가 있거든." "네에." 작은 아버지인 도호의 말에 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특별히 할 말 이라도 있는 걸까. 이층에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일층으로 내려온 예안 은 조금씩 불안함이 짙어지는 걸 느꼈다. 가족들은 굉장히 긴장한 표정 으로 자신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말 무슨 일이지? 도대체 왜 저렇게 날 쳐다보는 거야? 꼭 내가 유진 우라는 걸 알았는데 어떻게 그걸 물어봐야 할지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 럼…'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머리 속을 맴돌았다. 예안은 도호가 빨리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음 일단… 내일 진우 장례식이 있다. 너도 들어서 진우가 누군지는 알 거야." "아, 네. 알아요." 예안은 별다른 감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저렇게 긴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빨리 본론을 듣고 싶었다. "당연히 막내삼촌인 충호하고 혜민이도 올 거다. 특히 현우, 또 혜민이 랑 어울리다가 사고 치지 않도록 조심해." "혜민이 누나도 온대요? 으윽, 나 그 누나 오는 건 싫은데…" 현우가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리자 도호는 가볍게 꾸짖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촌이야. 그리고 혜민이가 도대체 어디가 어때서 싫어 하는 거냐?" "나랑은 너무 안 맞는다구요. 그 누나는 말을 너무 함부로 해. 진우 형 이 살아 있었을 때도 장난 아니었잖아요?" "솔직히 혜민이가 좀 건방진 편이긴 하지. 무남독녀라고 막내 삼촌이 너 무 오냐오냐해서 키웠다니까." 준우도 현우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래도 하는 짓은 좀 귀엽지 않아?" 정우의 말에 현우는 질겁했다. "귀엽긴! 형은 나이가 많으니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거야! 혜민이 누나가 얼마나 사악하기 그지없는데! 예안이 누나도 딱 한 번만 그 누나 를 보면 내 말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예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 안다 이 자슥아. 내가 혜민이 고 기집애 성격 모를 줄 아냐?' 가뜩이나 기분도 안 좋은데 쓸데없는 일을 벌인다고 예안은 속으로 투덜 거렸다. 엎친 데 덮친다고 혜민을 만나야 하는 불행까지. 혜민은 예안이 진우로 살았을 때에도 가장 싫어하는 여자 중 하나였다. 얼굴은 예쁘장한 편이지만 안하무인적인 성격에다가, 진우에게 항상 톡 톡 쏘듯이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해대곤 했다. 차라리 정우 삼형제처럼 자 신을 무시하는 게 낫지(과연 무시했을까?), 이건 완전히 사람을 개만도 못한 취급하는 게 아닌가? 예안은 얼굴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아버지인 정호 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그리고 입으로 손을 감싸며 작게 귓속말했다. "장례식이라니? 내가 내 장례식에 참석해야 돼? 아니, 그것보다 왜 쓸데 없이 그런 곳에 돈을 쓰고 그래? 아빠는 말리지도 않고 도대체 뭐했어?" 정호도 주변을 의식해서 예안에게 귓속말했다. "말릴 명분이 없었어. 하나뿐인 아들이 죽었는데 어떻게 장례식을 안 한 다고 할 수 있냐?" "내가 내 장례식장에 참석해서 지켜봐야 한다니, 살다 보니 별 일을 다 겪네. 으윽. 그나저나 혜민이 고 계집이 진짜 보기 싫은데." 예안이 조금 못마땅해할 때 도호가 헛기침을 하며 두 사람의 주의를 자 신에게 끌어들였다. "에… 그리고… 예안아… 할 말이 또 하나 더 있는데… 으음…" 굉장히 하기 어려운 말이었던지 몹시 망설이던 도호는 결국 정호에게 떠 밀었다. "그냥 형이 좀 말해. 내가 말하긴 좀 그러니까." "에… 알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거야? 어리둥절해하던 예안은 정호가 한 말에 그만 굳어버렸다. "당분간 호적에 안 올리기로 했다, 예안아." 처음에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귀는 멀쩡했다. 어이가 없어 굳어진 예안은 식구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장례식 이야기는 별로 중요 한 게 아니고, 사실은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건가? 어이가 없어진 예안은 정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빠. 지금 그게 무슨 말?" "에… 그러니까…" 정호는 미안한 눈치로 머뭇거리다가 결국 일어났다. "이층으로 올라가자. 이층에서 이야기해줄게." 황당함으로 범벅이 된 예안이 정호를 따라 이층으로 올라가자마자 현우 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 아빠 최고! 큰아버지 잘 설득했어!" 도호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은 듯 씁쓸한 표정이었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지… 휴우. 내 아들과 내 욕심만 챙기자고 형 에게 또 몹쓸짓 하는 건 아닐까 몰라." "걱정하지 마세요. 만약 이 애들 중 한 명이랑 예안이가 잘 되면 결국 그 애한테도 좋은 거잖아요? 호적같은 거야 뭐 별로 상관없는 거고…" "하지만 형에게서 인생도 빼앗았는데, 이제 진우까지 잃은 형에게 새로 생길 딸까지 뺏는 건 좀 그렇지." 수정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녀 역시 좋아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 다. "자, 아빠. 이제 우리 둘뿐이니까 빨리 해명을 해봐. 조금 전에 한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야?" 정호는 정말 미안한 눈치로 대답했다. "그게 말 그대로야. 당분간 호적에는 올리지 말기로 했어. 네 삼촌이 하 도 간곡하게 부탁해서 어쩔 수 없었다." "아니, 도대체 그러니까 왜? 왜 내가 아빠 딸 된다는데 삼촌이 방해한다 는 거냐구?" 예안은 여전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어떻게 설명할까 궁리하며 바짝바짝 마른 입안을 혀로 축이던 정호는 이윽고 입 을 열었다. "예안이 너, 준우랑 현우가 너 좋아하는 거 대충 눈치는 채고 있지?" 예안의 얼굴이 귀밑까지 확 붉어졌다. "에… 그게… 그것이 뭐시냐… 으윽!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알고 있지?" 쭈뼛거리던 예안은 죄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기분이 어떻든?" "그게… 솔직히 좀 미묘해. 내가 싫어하던 사람들이 지금의 날 못 알아 보고 날 좋아한다니까…" 잠시 망설이던 예안은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솔직히 놀려주고 싶어졌어. 가능하면 상처도 좀 받게 해주고 싶지만 내 가 그럴 재간도 없고, 또 이 집에서 살면서 그럴 수도 없고…" "그… 김윤우 박사가 한 말처럼, 너도 이제는 여자가 되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여자로 살아야겠지? 너 나중에 남자랑 결혼할 수 있겠어?" "절대 그럴 리 없지! 내가 미쳤어!" 정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예상했던 반응 그 대로였다. "사실 좀 일이 애매하게 됐다. 아까 아침에 준우랑 현우가 너 호적에 올 린다는 소리에 결사반대한 것도 사실은 널 좋아해서였다는 거 대충은 알 지?" 끄덕끄덕. "네가 그걸 눈치챘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지금 아빠 밖에 없어. 도호 랑 재수씨도 현우랑 준우가 너 호적에 올리는 거 반대한 것 때문에 네가 상처받은 줄로만 알아." "아… 솔직히 아까 걔들이 나 좋아한다는 거 알긴 했는데 그래도 좀 화가 나더라. 에휴. 내 마음 나도 몰라~" 예안은 정호의 무릎에 풀썩 주저앉으며 목을 끌어안았다. 정호는 아직은 딸이 된 아들의 이런 적극적인 스킨쉽이 조금은 어색한 듯한 손길로 예 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호적에 올리는 거 당분간 미루기도 한 것도 도호가 부탁해서였어. 걔네 들이 널 좋아한다니까 차마 호적에 지금 올리기는 그렇다는 거지. 내 생 각에는 도호나 재수씨는 네가 그 두 녀석들 중 하나를 골라서 결혼하길 바라는 눈치던데."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건 상상을 뛰어넘는 대답이었다! 예안은 황당함과 당혹함이 범벅이 된 채 눈을 크게 떴다. "지금 그거 농담?" "아니, 진담이야." "장난 아니라?" "장난 아니야. 도호 녀석은 가능하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군." "아, 아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예안은 어이가 없는지 헛기침을 연신 해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 기였다. "그래서? 아빠는 그래서 찬성했어?" "나는 물론 반대했지만 도호가 하도 간곡히 부탁하는 바람에 당분간만 호적에 올리지 않기로 했어. 그 기간 안에 현우나 준우가 네 마음을 사 로잡을지 안 잡을지는 두고 봐야겠지." 예안은 기가 막혔다. "아빠, 설마 내가 현우나 준우 형 뜻대로 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물론 이 아빠는 우리 아들내미… 아니 딸내미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 확신하지. 겉모습은 이렇게 예뻐도 속은 시커 먼 사내 녀석인걸." "푸핫! 맞아, 맞아." 정호는 웃음 띤 얼굴로 예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밤중이었다. 이층 거실에서 베개를 옆구리에 끼고 나오던 예안은 현우 와 그만 마주쳤다. "아, 저 누나…" 현우는 차마 지은 죄(호적에 올리지 말라고 반대한 것)가 있어서 그런지 예안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지 못했다. 예안은 못들은 척하며 그를 지나 쳤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결국 현우가 어깨를 붙들며 그렇게 묻자 예안은 자신보다 조금 더 키가 큰 현우를 올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아빠한테 간다." 현우는 당혹스런 표정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 베개까지 들고? 왜?" "왜긴 왜야, 같이 자려고 그러지." 현우는 기가 막혔다. 아무리 '아빠'라고 스스럼없이 부른다지만 엄연히 '친아버지의 친구'이자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인데 다 큰 여자가 같이 잔다고 하다니! "누, 누나 지금 제정신이야?" "난 언제나 멀쩡해." "제,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큰아버지랑 같이 잔다고 할 수 있어? 말도 안 되잖아!" "아빠랑 딸이 같이 잔다는데 누가 뭐라고 해?" 현우는 답답한 나머지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그거야 누나만 그렇게 생각하지,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솔직히 누나랑 큰아버지는 너무 친해. 지켜보는 내가 다 불안할 정도란 말이야." 현우의 목소리가 컸던지 준우가 방에서 나왔다. "유현우. 무슨 일이야?" 현우는 준우에게 답답함을 털어놓았다. "작은 형, 작은 형이 누나 좀 말려 봐. 글쎄, 지금 이 시간에 큰아버지 랑 잔다고 베개 끼고 가고 있잖아?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현우의 말을 듣고 난 준우도 어이가 없었다. "서예안. 네가 큰아버지를 친아빠처럼 따르고 좋아하는 건 이해하겠는 데, 현우 말처럼 이건 좀 아니다 싶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저씨인데 같이 잘 생각을…" 그 때 일층에서 정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안아. 영화 시작해." "알았어요, 지금 갈게요~" 두 사람이 자신을 설득하려 드는 걸 반쯤은 재미있게, 반쯤은 지겹게 듣 고 있던 예안은 활기에 차서 뛰어내려갔다. 두 사람이 같은 방으로 들어 가는 게 아니라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는 걸 확인한 준우는 잠시 동안 굳어졌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준우는 쏘아보듯 현우를 노려 보았다. "저게 어딜 봐서 같이 잔다는 거냐?" "하, 하지만 누나는 분명…" "뻔하지 뭐. 그냥 같이 영화 본다는 소리에 너 혼자 오버해서 지나치게 확대해석하고 뭐 그랬겠지. 네 녀석 하는 게 매번 안 그렇냐? 에휴, 아 이큐가 높으면 뭐해? 상상력이 좋으면 뭐해? 그래봤자 결국은 오버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구만." 준우는 분해하며 자신을 쏘아보는 현우를 가볍게 비웃은 뒤 하품을 했 다. 현우는 예안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놀렸음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 저 준우를 못마땅하게 여겼을 뿐이었다. "근데 형. 왜 누나는 우리에게 저렇게 쌀쌀맞게 대하는 걸까? 큰아버지 한테 대하는 거랑 우리한테 대하는 거랑 태도가 판이하게 틀려. 큰아버 지한테 대하는 것의 반만큼 우리한테 상냥하게 대했으면 좋을 텐데." "나라도 그러겠다. 생각해 봐. 천애고아가 된 다음에 아버지의 친한 친 구의 딸로 입양돼서 겨우 다시 가족이 생기기 직전이었는데 갑자기 우리 가 들고나서서 반대했으니 화가 안 나겠어?" "하지만 그건 오늘 아침에 있었잖아. 누나는 처음부터 묘하게 우리에게 적대적이었다고. 눈치 못 챘어?"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본 준우는 현우의 말이 어느 정도 들어맞음을 비로 소 생각해냈다. 하지만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글쎄다.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은데,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 르겠다." 자신의 장례식을 자신이 직접 본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과거에 예안은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때문에 장례식장에 참가한 지금에야 비로소 예안은 그게 단순히 웃을 일만은 되 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오열하는 사람은 없었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침울해하는 표정들이었어 도 눈물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그걸 바란 건 아니었지만 막상 덤덤하게까지 느껴지는 평화로운 분위기의 장례식이 진행되는 중 검은 옷을 입은 채 서 있던 예안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분했다. '정말 싫은 기분이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유진우'의 장례식은 다른 과정은 평범한 장 례식과 동일하게 하되, 마지막에 시신을 매장하거나 뼛가루를 뿌리는 대 신 옷가지들을 불에 태우면서 지켜보는 걸로 끝났다. 그다지 오래 걸리 지도 않았다. "그래도 시신 하나 못 찾은 건 좀 그렇네. 역시 이런 장례식은 도저히 치를 만한 게 아니야." 도호가 우울해 하고 있을 정호를 안쓰럽게 생각해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정호는 억지로 짓고 있는 침울한 표정과는 달리 속으로는 당황 그 자체였다. 마치 하나의 커다란 사기극을 벌이는 느낌이랄까. 예안은 지루한 표정이 역력한 현우를 나지막하게 불렀다. "야, 유현우." "응? 왜?" "친척이 죽었는데 넌 별로 슬퍼 보이지도 않는다? 너희랑 같이 살았다고 들었는데, 별로 친하지도 않았나 봐?"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말투였다. 현우는 '정말 날 싫어하는 걸까?'라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슬프지 않거나 별로 친하지 않다기보다는 그냥 아무 느낌이 없다고 해 야 되나? 사실 같이 살기는 했지만 진우 형은 우리랑 별로 친하지 않았 거든. 난 사실 진우 형이랑 대화 몇 번이나 해봤는지, 무슨 이야기 같은 거 한 적 있는지 기억도 잘 안 나." "진우가 우리에게 좀 거리를 두는 편이긴 했지. 나도 몇 번이고 대화를 하려고 해봤는데 거의 반사적으로 거리를 두더라. 집에서만 그러는 줄 알았는데 학교에서도 그런 생활을 했다더라." 준우가 현우를 거들고 나섰다. 이런 대답을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왜 인지 분했다. 예안은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왜 저러지?' 준우와 현우는 예안의 기분이 무척 가라앉은 걸 얼핏 느꼈다. 하지만 왜 그런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누나, 무슨 기분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몰라도 돼. 신경 쓰지 마라." 예안은 약간 눈시울이 붉어진 채 생전에 자신이 쓰던 옷가지가 불타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설 톰소여의 모험에 나오는 것처럼, 자신이 살 아있는데 장례식이 치러지는 장면을 보는 건 결코 유쾌하거나 즐거운 일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뭐랄까. 이제 영원히 나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지워지는 걸 기억 속에 각인시킨다는 느낌이랄까. 현우는 뭔가 불안함을 느꼈다. "작은 형, 아무리 봐도 누나가 좀 이상하지? 혹시 진우 형이랑 누나랑 아는 사이 아니었을까?" "글쎄다. 물론 큰아버지 친구분의 딸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만약 정 말 그랬다면 진우가 살아 있을 때 큰아버지가 한 번쯤은 입에 올리시지 않았을까? 진우 녀석은 원래 그런 말을 잘 하지 않지만…" 눈시울이 붉어진 채,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춤을 추는 불꽃을 물 끄러미 바라보던 예안은 갑자기 입을 막은 채로 뛰쳐나갔다. 예안을 지 켜보던 가족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따라나가려고 했지만, 정우가 제일 먼 저 뒤따라가는 걸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작은 형, 이거 놔. 누나가 왜 저러는지는 알아봐야 할 거 아냐?" 준우는 뒤따라가려는 현우를 꽉 붙잡았다. "임마. 정우 형이 따라갔으니까 그냥 넌 여기서 기다리기나 해. 그리고 왜 저러는 건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 는 것도 모르냐?" 역효과가 난다는 말에 현우는 어쩔 수 없이 반항을 멈췄다. 지금으로선 정우에게 맡기는 게 좋을 듯 했다. 인적이 드문 곳까지 달려온 예안은 커다란 나무 앞에 멈춰 섰다. 나무에 반쯤 몸을 기댄 예안은 눈을 감은 채 필사적으로 울음이 터지려는 걸 참 았다. "우욱, 우욱…" 뭐야? 별거 아니잖아? 어차피 사람들이 네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었잖아? 근데 왜 이러는 거야? 바보 같이. "욱…"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예안은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아냈다. 바보 같 이 고작 이런 일 따위에 눈물을 보일 순 없는 거다. 유젤이 죽을 때 눈 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고작 이런 일에 운단 말이냐? 그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이제 괜찮은 거니?"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을 때 갑자기 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 란 예안은 눈을 황급히 떴다. 바로 앞에 정우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신 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먼저 돌아가 볼게요." 예안은 상대하기 싫다는 듯 정우를 지나쳤다. 정우는 선 채로, 예안을 붙잡지 않고 다시 말했다. "진우가 살아 있을 때 많이 친했나 봐? 우리는 한 번도 그런 이야기 들 은 적 없는데." 그대로 무시하고 지나치려던 예안은 조금은 단조로운 정우의 말투에 조 금 발끈했다. 예안은 생각나는 대로 전부 말해버렸다. "많이 친한 정도가 아니라 진우의 인생은 바로 제 인생 그 자체였어요." 움찔. "진우가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해주긴 했지만 솔직히 장례식장에서 아무도 눈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집안에서 겉돌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했어 요. 그게 어쩐지 좀 슬펐던 거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진우는 겉돌고 있었던 게 아니야." 정우는 조금 무거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친척이 죽었는데 왜 슬프지 않겠어? 다만 진우가 죽었다는 게 너 무 실감이 안 나다 보니까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것뿐이야. 그건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 전부 다 마찬가지일 걸? 사실 진우가 우리랑 잘 어울리지 는 못했어도 엄연히 피가 섞였는데…" "그 말을 진우에게 한 번 해보시죠?" 예안은 냉소적인 눈빛으로 비웃었다. "형… 아니 오빠… 에잇, 그냥 형이라고 할게요. 난 그게 더 편하니까. 그래도 되죠?" 형이라는 호칭에 약간 당황한 정우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 형은 진우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진우는 가 족들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 반대였어요. 그 애는 이 다음에 성인이 되면 가족들하고는 영원히 결별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으 니까." "너 그 말을 믿은 건 아니겠지?" "몰라요. 솔직히 그 때는 그 말을 완전히 믿은 건 아니었는데, 오늘 장 례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아하니 진우 말이 100% 거짓은 아니라는 걸 알겠네요." 정우는 자신을 쏘아보는 예안의 시선에 가벼운 전율마저 느꼈다. 저 눈 빛을 어디선가 본 듯하다는 건 바보 같은 생각이겠지? 냉소적인 미소를 짓고 있던 예안이 등을 돌린 뒤에야 정우는 그런 바보 같은 생각에서 벗 어날 수 있었다. "오늘 제가 한 말은 형 혼자만 알고 있으면 좋겠네요. 다른 가족들이 진 우를 죽어서까지 나쁜 아이로 인식하는 건 솔직히 제 입장에서는 굉장히 싫으니까." "우리는 진우를 나쁜 아이라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 "그건 그쪽 생각이죠. 진우는 가족들이 자신을 나쁜 아이로 여긴다 생각 하며 자라왔어요. 아마 죽기 직전까지 그렇게 생각했을 걸요." 그리고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 예안은 정우에게 들리지 않도록 차갑게, 그리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왜 우리에게 적대적인 거니?" 흠칫.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계속 네 분위기는 너무 이상했어. 우리는 너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넌 너무 우리에게 경계를 품고 있는 것 같아. 눈치 가 없다면 몰랐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충분히 알 수 있었어. 설마 너 진우가 우리를 싫어했다는 그 말 때문에 그러는 거니?" 정우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너무 경솔하게 굴었음을 깨 달은 예안은 다시 표정을 얼굴 안으로 숨기며 가라앉은 말투로 대답했 다. "좋으실 대로 생각하세요. 대답해드릴 의무는 못 느끼겠네요." 어딘지 모르게 우울해 보이는 정우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예안은 다시 옷가지가 불타는 곳으로 돌아갔다. 모처럼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진우 장례식에 끌려오다시피 오게 된 유혜민은 내내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아빠~ 나 집에 가고 싶어요." "오늘 하루는 그냥 참으렴. 사촌이 죽었는데 어떻게 빠질 수 있니? 가뜩 이나 우리는 친척 수가 많지도 않은데." "그래도… 오늘 친구들이랑 하루종일 빽빽하게 약속 잡아두고 있었는데, 이게 뭐예요?" "그래도 참아라. 나중에 아빠가 네가 그렇게 갖고 싶어했던 샤넬백 사줄 테니까." "내가 언제 샤넬백 갖고 싶어했어요? 난 명품 수집 같은 거 절대 안 하 는 거 잘 아시면서. 그냥 노트북이나 하나 사줘요. 지금 있는 건 너무 낡아서 잘 못쓰니까." "그래그래.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라." 유정호 삼형제의 제일 막내이자 가장 성공한 충호는 장례식 내내 칭얼거 리는 딸을 달래느라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근데 아빠, 저기 혼자 우울해하는 여자애는 누구예요?" "아, 예안이 말하는 거니?" 혜민은 예안에게 관심을 보였다. "예안? 아, 저 얘가 예안이예요? 근데 쟤 날라리예요? 왜 머리를 파랗게 물들이고 난리래요?" 머리를 물들였다고 날라리라고 생각하는 건 도대체 어느 시대적 발상이 냐. 충호는 속으로 그렇게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겉으로는 상냥하게 대답 했다. "내가 듣기로는 저게 무슨 발광 물질이 머리카락에 천성적으로 들어 있 어서 저렇다던데." "조금 불량스러워 보여도 꽤 예쁘네. 나도 저렇게 해볼까?" 저 모습을 가리켜 불량스러워 보인다고 말하는 애는 너밖에 없을 거야. 충호는 그 말이 입밖으로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실수라도 한다면 딸은 한 달 정도 삐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들지도 모른다. 그의 딸은 그런 성격이었다. "한 번 말 걸어봐야지." 혜민은 예안에게 총총총 뛰어갔다. "안녕. 난 유혜민이라고 해." 어두운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하고 있던 예안은 혜민의 갑작스런 접근에 굉장히 당황했다. "으, 응. 안녕." 예안은 혜민과 이야기하는 걸 극도로 싫어했지만, 혜민은 눈치채지 못했 다. "근데 넌 표정이 왜 그래? 친척이 죽은 나도 이렇게 활발한데 왜 아무 상관도 없는 네가 그렇게 죽을상인 거야? 혹시 너 진우랑 많이 친하기로 도 한 거니?" "조금은." "아, 그랬구나. 어쩐지…" 예안은 혜민이 자주 짓는 저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뭔가 사람을 비웃는 듯한 느낌을 안겨주는 미소였다. "너 그런데 천애고아라며?" 그 말에 가까이 서 있던 현우와 준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조 금 멀리 떨어져 있던 도호와 충호도 마찬가지였다. "쯧쯧쯧. 고아인 건 안 됐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큰아버지한테 입양된 거니? 차라리 도호 삼촌이나 우리 아빠한테 입양됐으면 떵떵거리고 살 수 있었을 텐데. 너도 참 재수가 없다." "혜민아!" 준우가 창백한 안색으로 말리려는 듯 혜민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사실이잖아, 오빠. 큰아버지가 우리 가족 중에서 제일 가난하고 밑 바닥 인생인 건 사실인 걸 뭐." "너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준우는 혹시나 정호가 근처에서 듣고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다행 히 정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안도할 순 없었다. 차갑게 가 라앉은 예안의 얼굴은 마치 폭발하기 직전의 활화산과도 같이 불길했기 때문이다. "너 기왕이면 큰아버지말고 우리 아빠한테 말씀드려서 내 자매로 들어오 지 않을래? 너같이 예쁜 언니나 동생이라면 있어도 좋을 것 같아. 사실 나 그 동안 굉장히 심심했거든. 무남독녀는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어서 좋긴 해도, 역시 할만한 게 아니야." 어찌 보면 사람을 무시하고 놀리는 것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사람을 위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원래 부정적인 성격인 예안은 혜민이 자신을 배려해주는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절대로. 예안은 팔짱을 끼었다. 예안의 주위에서 접근할 수 없는 차가운 한기가 넘실거렸다. "유혜민. 나이 17세. 유진우랑 동갑. 2039년 10월 10일생. 중원 그룹의 가장 큰 계열사인 중원전자의 전무 자리를 맡고 있는 아버지를 두고 있 으며 무남독녀. 성격은 안하무인 그 자체. 가문의 후광만 믿고 까부는 기집애라던데? 맞아?" 예안의 말이 멈추자 혜민을 제외한 사람들의 안색은 창백하게 물들어갔 다. 이제는 어떻게 수습해보려 해도 이미 늦어버렸다. 그런데 혜민은 화를 내거나 불쾌해하기는커녕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예안 을 주시했다. "한 가지만 빼고 대부분 다 맞았어. 얼마 전에 우리 아버지 전무에서 사 장으로 승진하셨거든. 이제는 사장 님이셔." 예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이가 없다는 제스쳐였다. "진우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난 설마 그런 애가 있겠어?'라고 생각 했는데 오늘 보니까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겠다. 아니, 오히려 진우 가 너에 대해서 꽤나 은폐한 게 많다는 생각까지 드는데?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구나, 너?" "왜 사람을 배려해줘야 하는데?" "당연한 거 아니야? 적어도 네가 사람들로부터 배려 받고 싶다면 그만큼 사람들을 배려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혜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마찬가지로 어이없다는 제스쳐였다. "난 사람들로부터 별로 배려 받고 싶은 생각도 없고, 배려 해주고 싶은 생각도 없어. 하지만 내가 못되게 굴어도 사람들은 알아서 날 배려해주 더라." "그건 네 아버지 덕분이겠지. 만약 네가 나처럼 천애고아라면 그런 배려 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잘 모르겠는걸. 하지만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너도 특별히 사람 들을 배려해주지 않아도 사람들로부터 많이 배려 받지?" "그, 그건…" 틀린 말은 아니었는지라 예안은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확실히 여 자가 된 후로 사람들로부터 많이 배려 받는 편이긴 했다. 혜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정겨운 미소를 지었다. "거봐. 너도 마찬가지잖아? 너와 내가 차이점이 있다면 난 아버지 덕분 에 사람들이 나에게 쩔쩔매는 거고, 넌 너 자신이 워낙 예쁘게 생겨서 사람들이 널 챙겨주는 거야. 아, 하기야 네 외모도 네 부모님이 물려주 셨을 테니 결국 너랑 나랑 피장파장인가?" '그, 그렇게 되나?' 유진우일 때와는 달리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몰라도 큰마음 먹고 '이 싸가지를 한 번 말빨로 갈궈 보겠어!'라며 나서봤지만 이건 예상했 던 결과가 아니었다. 오히려 혜민의 말이 옳다고까지 느껴질 정도였으니 할 말 다한 셈이었다. 혜민은 생긋 웃었다. "너 내 마음에 든다? 다른 애들 같았으면 빌빌거리면서 말 한 마디 제대 로 못할 텐데 넌 안 그러네? 나한테는 안 되지만 말빨도 좀 있고 말이 야. 얼굴도 예쁘고 하니 내가 친구 삼아 줄게. 영광으로 알아. 지금껏 내 친구가 된 아이들은 별로 없으니까." 안하무인적인 성격은 어디 가지 않는군. 예안은 조금 기가 막혔다. "넌 그럼 학교 친구들도 없냐?" "학교 친구들은 친구가 아니라 내 하녀들이지 뭐. 걔들은 내 친구가 될 자격이 없거든. 우리 아빠가 나중에 중원 그룹 회장이 될지도 모르는데 당연한 거 아니야?" 지나치게 안하무인적인 성격도 가문의 후광이 받쳐주다 보면 커다란 자 신감으로만 비춰지는 건가? 예안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어때? 내 친구 할래? 아, 거절할 생각은 하지 마. 네가 내 친구 안 하 겠다면 우리 아빠한테 일러바칠 거니까." 이건 단순한 파파걸인지, 아니면 도도한 공주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어처구니없었던 예안은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고, 대답을 듣지 못한 혜 민은 장례식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가지 않고 하루종일 예안 을 졸졸 따라다녔다. 지루함 따위는 어느새 깨끗이 잊어버린 뒤였다. 「11시 방향에 적으로 추정되는 금속물체 하나. 거리 300 미터. 탐신음 감지.」 「2시 방향에 적으로 추정되는 금속물체 하나. 거리 15000 미터. 탐신음 감지.」 동해 해저에 구덩이를 파고 몸 전체를 묻고 있는 맥의 인공지능은 끊임 없이 원활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격침? 무시? 도주?」 맥의 인공지능, 유니콘은 그 세 가지 경우를 놓고 벌써 며칠째 논리적으 로 합당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적으로 추정되는 물체(한국 군 잠수함)가 자신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않았기에, 유니콘은 인터넷에 접속해 보다 더 합리적인 판단을 위한 데이터를 모을 수 있었다. 유젤은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 그리고 유니콘 자신을 수색하는 적 물체 역시 한국 소속으로 추정된다. 한국은 현재 세계에서 유일하게 석유가 나오는 유전을 갖고 있어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다. 만약 맥의 무력이 그들과 합쳐진다면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파일럿인 유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만약 지금 자신을 찾는 적을 공격한 다면 그것은 결국 언젠가는 파일럿에게 해가 된다. 마침내 그렇게 판단을 내린 유니콘은 한국 잠수함을 '완전한 적'에서 '아군이 될 수 있는 적'으로 바꿔 인식했다. 그리고 그들을 계속 무시한 채 이대로 은폐해 있기로 결정했다. 유니콘의 의무 중 가장 커다란 것은 파일럿의 보호였다. 그리고 지금 이 판단은 장기적으로 파일럿인 유젤에 게 이득이 되는 것이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한동안 우울한 기분은 계속 되었다. 그러나 다시 학교 를 갈 날짜가 가까워짐에 따라 예안의 머리 속을 자리잡은 우울한 기분 은 점점 희석되었고, 마침내 학교 가기 바로 전날이 되자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을 정도로 두근거리고 설렜다. 어린아이도 아닌데 예안이 이런 이유는 바로 내일부터 다니게 되는 학교 가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새 학교가 아니라, 예전에 다니던 대명고등학교 였기 때문이다. 준우나 현우와 같이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꺼림칙하긴 했지만 뭐 잘 될 거라 생각했다. 식구들에게 박박 우겨서 예전에 진우였을 때 쓰던 방을 간신히 얻은 예 안은 새로 장만한 침대에 누워 어둠 속의 천장을 응시한 채 많은 생각을 했다. 전부 새로 들여온 가구들로 둘러싸인 채 예안은 지금까지 겪었던, 일반사람들이라면 절대 믿지 못할 일들을 떠올려보았다. 처음에 바닷가에서 맥을 보았고, 유젤을 만났다. 유젤을 좋아하게 되었 고, 마리오라는 남자에게 쫓겼고, 총에 맞기까지 했다. 깨어나 보니 자 신이 유젤이 되어 있었고, 시트날타나는 엄청난 집단을 만나기까지 했 다. 그리고 레이온 박사의 도움을 얻어 무사히 시트날타를 탈출했고 새 로운 신분까지 얻었다. 중간에 한국 정부에게 쫓기기까지 했다. 어쨌든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시트날타나 한국 정부는 자신을 찾아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많은 걸 느끼고 깨달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걸 꼽으라면, 콤플렉스 보이에서 사랑 받는 미소녀까지의 갭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 었다. 단순히 외모가 예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을 사랑해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 건방진 혜민조차도 자신에게 친구가 되어달라고 하지 않던가? 너무나 엄청난 변화에 처음에는 속이 매슥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원래 사랑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예안은 그런 주변 사람들의 관심들이 싫어지기까지 했다. 바보 같이 준우와 현우는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재원이란 형은 눈치라도 있어 그 때 한 번 쏘 아붙인 이후로 가급적이면 연락을 안 하지 않는가? "예안아. 벌써 자?" 혜민의 목소리에 예안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조용히 사색 좀 하고 싶 었는데, 저 녀석은 그것까지 방해한단 말이야. "들어가도 되지?" "들어와." 문이 열리고 잠옷 차림의 혜민이 뛰어들어와 침대에 털썩 누웠다. 예안 은 친근하게 자신에게 달라붙는 혜민에게 조금 이질감을 느꼈다. "넌 근데 너네 집 안 가냐? 학교 안 가도 되냐?" "너 그거 참 이상한 거 알아?" 뜬금 없는 소리에 예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이상하냐?" "넌 말투가 남자애 같아. 그냥 얼핏 들으면 잘 모르겠지만, 말투만 놓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영락없는 남자애야. 주변 사람들이 그런 말 해주지 않아?" 이 녀석 예리한데. 나도 몰랐던 걸 눈치채다니. 예안은 조금 뜨끔했다. "근데 예안이 넌 정말 예쁘다. 나도 이렇게 좋은 피부가 갖고 싶었는데 말이야. 꼭 바비 인형 같아." 혜민은 웃음 띤 얼굴로 예안의 부드러운 뺨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예안은 속으로 얼굴을 붉히며 살짝 물러났다. 비록 겉모습은 여자라 해 도 알맹이는 엄연히 남자다. "휴. 나도 너처럼 이런 머릿결을 갖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빛에 따라 색이 변한다니, 정말 멋진데. 이런 물질 어떻게 인위적으로 모발 속에 넣을 수 없나?" 혜민의 숨결이 가까이에서 느껴지자 예안은 후끈 볼이 달아올랐다. 비록 안하무인적이고 배려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성격이긴 했지만 혜민 은 그래도 예쁜 축에 속했다. 뭐 그래봐야 유젤에 비하면 택도 없다, 라 고 속으로 중얼거려 보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자기 암시 따위는 아 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너, 너 학교 안 가도 되냐?" "봐? 역시 남자애 말투 맞지? 아, 그리고 나 학교 며칠 정도 안 간다고 해서 특별히 나빠질 건 없어. 내가 공부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뭐 어 때?" 역시 집안이 좋은 아이는 사고방식 자체가 틀리다. 도저히 적응이 안 된 다 이거. "예안이 너 가슴 모양 참 예쁘다. 한 번 직접 봐도 돼?" "뭐, 뭐? 아, 안 돼!" 얘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혜민에게는 정우 삼형제에게 대하는 것처 럼 쌀쌀맞은 태도가 도저히 안 나왔다. "에이, 같은 여자끼린데 뭐 어때? 좀 보여줘 봐." "시, 싫어…" 혜민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려봤지만 사악한 미소를 지은 그 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안의 상의를 가볍게 벗겨버렸다. 이윽고 예안의 브래지어까지 벗긴 혜민은 모양이 예쁘게 잡힌 예안의 가슴을 만지작거 리며 부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기집애. 이렇게 예쁘면서 도대체 뭐가 겁나서 안 보여준다는 거야? 그 래도 내 가슴보다는 예쁘네 뭐. 내 것도 보여줄까?" "뭐, 뭐라구?" 소스라치게 놀란 예안이 말릴 틈도 없이 훌훌 옷을 벗어버린 혜민은 자 신의 가슴을 보여주었다. 예안은 질겁해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외쳤다. "어서 옷 입어! 보는 내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다!" "에? 너 설마 동성 취향이었니?" 말실수했음을 깨달은 예안은 질겁했다. "그, 그럴 리가 없잖냐!" "그럼 왜 그렇게 눈을 가리고 그래? 꼭 무슨 동정인 남자애처럼 말이 야." 신이시여, 이 녀석 정녕 제가 알고 있는 그 유혜민이 맞습니까? "나도 가슴이 좀 커져서 브래지어 치수 한 번 바꿔보고 싶은데 더 이상 커지지가 않아서 걱정이야. 아무래도 역시 남자친구를 만들어야 할까?" "나, 남자친구?" "그래. 남자친구가 만져주면 가슴이 잘 커진다잖아. 지금 그 문제에 대 해서 심각히 고려 중. 근데 있으면 너무 귀찮게 굴어서 짜증난단 말이 야." 예안은 기가 막혔다. 고작 가슴 크기 키운답시고 그런 희박한 가능성에 목을 맨단 말인가? "지금 그거 농담이냐?" "아니, 진담." "네가 지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하냐?" 혜민은 씩 웃었다. "알지 왜 몰라. 넌 내가 무슨 초등학… 아니지, 아니지. 요즘에는 초등 학생들도 알건 다 알지. 넌 내가 무슨 유치원생인 줄 아니?" 새파랗게 질린 예안의 안색을 이리저리 살피던 혜민은 혹시나 싶어 물어 보았다. "설마, 너 아직 버진?" 머리끝까지 붉어진 예안은 기겁해서 외쳤다. "왜, 왜 그런 걸 묻고 그래!" "흐음? 반응을 보니 처녀 맞는 것 같은데? 이상하네. 이렇게 예쁜 애를 왜 남자들이 가만 내버려뒀을까?" 처녀라고 한다면 이 녀석 또 무슨 코투리를 잡고 놀려댈지 몰라. 예안은 속으로 유젤에게 사과하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나, 나도 해봤다!" "누구랑?" "그, 그건…" 버벅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예안을 심문하듯 훑어보던 혜민은 히죽 웃었다. "거짓말이지?" "아, 아냐! 진우랑 해봤단 말이다!" …자기가 자기 입으로 자기랑 '자봤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 비참한 일이 이 세상 또 어디에 있을까. 혜민은 굉장히 놀란 눈치였다. "와, 너랑 진우랑 그런 사이였단 말이야?" "그, 그래! 나, 나도 해봤다구!" "흐음. 근데 왜 젖꼭지가 분홍색일까요? 젖꼭지가 분홍빛이면 처녀라는 증거라는데." 혜민은 핑크빛으로 빛나는 예안의 탐스러운 유두를 만지작거렸다. 뭔가 야릇한 기분이 뼛속을 찌르자 예안은 기겁해서 혜민의 손을 밀쳐내고 서 둘러 옷을 입었다. 얼굴이 귀밑까지 붉어졌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속설 따위는 믿지 마!" "너 오빠들에게 굉장히 차갑게 대한다며? 혹시 진짜로 진우 좋아해서 그 런 거야? 진우가 오빠들을 굉장히 싫어했잖아? 네가 너무 차갑게 대한다 고 현우가 지금 걱정이 장난 아니야." 혜민은 다시 상의를 걸치며 빙긋 웃었다. 방밖으로 나가려던 혜민은 문 을 닫기 전 얼굴을 살짝 내밀었다. "어쨌든 좋은 정보를 가르쳐 줘서 고마워. 정보료 받으면 너한테도 한턱 쏠게." "무, 무슨 소리냐?" "후후, 현우 녀석이 너와 진우가 무슨 관계였는지 알고 싶어하는 눈치더 라구. 그래서 내가 자청해서 스파이를 맡기로 했지." 이제야 자신이 혜민에게 속아넘어갔음을 깨달은 예안은 새파랗게 질렸 다. 자신이 엉겁결에 한 말을 현우에게 혜민이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친다 면 그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유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차라리 그냥 처 녀였다고 말할 걸, 하고 후회해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역시 혜민은 사악한 마녀였던 게야. "그럼 굿 나잇~ 잘 자 내 꿈 꿔~"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는 예안의 이마 위로 다시 어둠이 찾아들었다. 그 러나 예안은 충격 때문에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처녀야. 확실해." "흐음, 그걸 어떻게 믿어? 자기 입으로는 처녀가 아니라면서?" "내가 여자로 1, 2년 살았니? 분명히 처녀이면서 같은 여자한테 처녀인 게 부끄러워서 저러는 거라구." "하지만 보통 여자들은 자기가 처녀가 아니어도 처녀라고 하잖아?" 혜민은 답답한 듯 가슴을 탕탕 쳤다. "이 바보야. 네가 만약 여자라면 네 남자친구한테 '나 처녀 아니야'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겠어?" "아니." "너희 남자들은 동정 딱지 떼면 친구들끼리 막 자랑하고 그러잖아? 그 가운데 동정인 녀석들은 소외되거나 무시될까봐 겁나서 '나도 해봤다'라 고 거짓말하기 일쑤고. 여자라고 틀린 줄 아니? 친구들끼리는 서로 그런 경쟁 심리가 있다구. 처녀야, 확실해." 팔짱을 낀 채 고민하던 현우는 마침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 였다. 혜민은 웃음 띤 얼굴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자, 정보료 십만 원, 내놔." "으윽. 내가 이래서 누나를 싫어하는 거야." 현우는 투덜거리며 지갑에서 만 원짜리 열 장을 꺼내 내밀었다. 혜민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쯧쯧쯧, 나 같은 미인을 싫어하다니, 너도 남자로서 눈이 참 많이 삐었 구나?" "누나가 미인은 무슨 얼어죽을 미인. 얼굴 좀 반반하다고 미인이면 이 세상 미인 아닌 사람이 없게? 속은 사악한 마녀면서…" 현우가 자꾸 궁시렁거리자 혜민은 예의 그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왜 이러세요. 작년에 내가 여기서 잘 때 네가 내 가슴 만진 거 다 기억하고 있어. 걱정 마, 걱정 마. 널 변태로 보거나 하진 않으니까. 한 창 때의 성장기 소년은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깟 가슴 좀 만진 게 뭐가 대수라고?" 현우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 그걸 어떻게…" "후후. 하지만 예안이에게 차마 그 사실을 알리긴 싫지? 그럼 오만 원 더 내놔." "아, 안 돼! 가뜩이나 이번 달은 적잔데…" "그럼 일러바쳐도 되지?" "으윽…" 한참을 저울질하며 망설이던 현우는 결국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을 딛고 오만 원을 더 주고 말았다. 그것까지 챙겨든 혜민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현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서비스로 한 가지 더 좋은 사실 알려줄게. 분홍색이더라." 현우는 처음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뭐가? 속옷 색깔이?" "아니. 상상하는 게 뭐 그러냐? 그거 말이야, 그거." "그거라니? 뭐가?" 이 녀석도 꽤나 순진하구만. 혜민은 실실 웃으며 현우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젖꼭지 말이야. 분홍색이야. 아주 예뻐. 나중에 기회 있으면 꼭 한 번 봐. 눈이 돌아갈 걸?" 현우의 뺨이 귀밑까지 붉어진 걸 내버려둔 채, 혜민은 깔깔거리며 이번 에는 준우의 방으로 향했다. 그에게도 똑같은 정보를 전해주고 돈을 받 아내기 위해서였다. "내가 너무 티를 내는 거 아닐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러다가 내가 진우라는 걸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지?" 혜민이 준우에게도 같은 정보를 알려 주고 이십 만원을 뜯어낸 바로 그 때, 예안은 자신의 정보가 준우에게까지 고스란히 흘러 들어간 사실을 꿈에도 짐작 못한 채 심각히 고민 중이었다. 고민의 주제는 바로 '자아 성을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였다. 유젤은 분명 매력적인 미소녀다. 그렇다면 여자애다운 귀여운 말투를 쓰 는 것도 꽤나 외형상 좋을 것이다. 그게 유젤의 자존심이나 체면을 세워 줄 수도 있을 테고. 유젤을 위한다면 역시 여자애 말투를 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진우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은 어찌하란 말인가? 어차 피 유젤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이제 자신밖에 없는데, 진우로서 의 정체성을 잃어버린다면 그건 오히려 유젤을 저버리는 게 아닌가? 진우로서의 자신을 지키는 것이 좋다는 생각과, 이제 평생을 서예안으로 서 살아야 하는데 굳이 그럴 까닭이 어디 있겠느냐는 생각이 예안의 머 리 속에서 맞부딪쳤다. 한참을 이리저리 고민하며 저울질하던 예안은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바 로 유젤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진우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것. 그 러나 비밀은 절대 지켜야 할 것이다. '하여튼 앞으로도 주의하자. 내가 유진우라는 건 무덤까지 안고 가야 할 비밀이니까.' 익숙해진다는 건 참 무섭다. 16년 동안 들여온 버릇조차도 한순간에 여 자가 됨으로 인해, 주변에서 대하는 태도가 바뀜에 따라 너무나 쉽게 변 해버린다. 자신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고 여기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흐 른 후의 자신을 돌이켜보면, 내가 누군지 나 자신도 알아보지 못해 가벼 운 섬뜩함을 느낄 정도로 이미 변해 버린 뒤였다. 바로 지금의 예안이 그랬다. 진우였을 때와는 달리 너무나 친절하게 대하고 자신을 아껴주는 사촌가 족들의 태도에, 예안은 이미 빠질 대로 빠져 버린 뒤였다. 비록 자신은 단지 현우와 준우를 놀려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 생각해도, 사랑 받지 못하고 자라왔던 '진우'의 자아는 이미 그들이 던져주는 사랑의 달콤함 에 심취해 버린 뒤였다. 벗어나기 위해 아무리 발버둥을 쳐보지만 이미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사랑에 너무나도 쉽게 익숙해져 버리고 만다. 어쩌면 그들이 던져주는 사랑의 올가미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본능적으 로 사촌형제들에게 쌀쌀맞게 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학용품은 잘 챙겼니?" "응. 아, 아니 예." "뭐 빠뜨린 건 없고? 교과서는 어떻게 할 거니?" "오늘은 일단 옆자리 애 거 빌려보면 되고. 갔다와서 사야지 뭐." "그래. 잘 해라. 친구들한테 따 당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내가 앤가…요? 따를 당하게…요." 넥타이를 매고 난 뒤 예안은 문에서 기다리는 아빠를 돌아보며 미소지었 다. "어때? 멋있어? 늠름하지?" …아무리 봐도 새학기를 맞이하는 여고생이 할 말은 아닌 듯 싶다. "그래, 우리 아들… 아니 딸 굉장히 늠름한데. 백마 탄 왕자님 같아." "백마는 무슨. 차라리 전투기를 탄 파일럿이 낫지. 촌스럽게 무슨 백마 탄 왕자님이야?" 검은색 바지에 흰 와이셔츠, 검은색 조끼가 마음에 드는 듯 예안은 다시 한 번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정호가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 로 물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여자애가 바지를 입는 건 좀 그렇지 않니? 네가 치마 를 질색하는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남들 눈이 있는데…" "규정상 여학생들도 치마와 바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구. 대부 분의 몰지각한 변태 학교 교장이 그걸 못하게 막는 것뿐이야. 여자는 치 마를 입어야 몸가짐이 다소곳해진다나 어쩐다나 하면서 말이야." "변태 교장?" "여학생들 다리 보고 싶어서 치마 입게 하는 교장이 그럼 변태지 뭐야? 나이도 꽤나 지긋할 텐데." 긴 머리를 밀짚모자 안에 감춘 예안은 옆으로 어깨에 매는 가방을 옆으 로 매며 정호와 나란히 방을 나섰다. 일층 거실에는 준우와 현우가 예안 이 내려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예안은 문득 내려오다 말고 계단에서 정호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쟤들 진짜 나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아빠가 보기에도 그래 보여. 기분이 어때?" 예안은 냉소적인 미소를 베어 물었다. "최악이지. 아빠 같으면 남자가 아빠 좋아하는데 기분 좋을 리가 있겠 어?" '그럴 수도 있겠군'하며 머리를 긁적이던 정호는 다시 작게 말했다. "사실 이 아빠의 솔직한 심정은 네가 저 애들 중 하나 골라서 나중에 결 혼했으면 싶다. 난 모아둔 재산도 없고, 너 하나만 놓고 보면 괜찮지만 아무래도 내가 네 아빠로 있다보면 나중에 혼담 오갈 때 너에게 많이 불 리할 것 아니냐?" 기가 막힌 예안은 차갑게 말했다.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어? 난 쟤들하고 나중에 쉽게 인연 끊을 수 있으 면 싶다고. 그러니까 가능하면 삼촌 도움은 받지 마. 괜히 나중에 뒷덜 미 잡히긴 싫으니까. 그리고 말이 되는 소릴 해, 아빠. 내가 미쳤다고 사촌들, 그것도 현우나 준우 형하고 결혼하냐? 차라리 혜민이라면 모를 까. 남자는 절대 질색이야. 나도 남자라구." 조금 걱정스런 안색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정호를 남겨둔 채 예안이 계단 을 다 내려왔다. 현우가 예안의 손을 잡아끌었다. "빨리 가자. 다녀올게요~" "다녀오겠습니다." 현우와 준우가 예안과 함께 학교로 향하자 혼자 남은 혜민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심심한데 나도 그만 집에나 가볼까? 이터널 피닉스나 해야지 뭐." …학교 갈 생각은 안 하는 거냐. 예안은 처음에 자신과 함께 학교를 같이 가겠다는 현우의 준우의 말에 혼자 찾아갈 수 있다고 거절했다. 하지만 세 사람이 학교가 같기에 딱히 더 거절할 만한 명분이 없어 내키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같이 가게 되었 다. '같이 가면 괜히 시선만 끌 텐데…' 외모, 집안, 성적 등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두 사람은 각각 대명중고등 학교의 최고 킹카로 손꼽힌다. 그런 두 사람과 같이 등교를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아는 예안은 정말 혼자 가고 싶었다. "표정이 왜 그래? 안 좋아 보이는데." "아니야. 아무것도." "작은 형도 참. 그것도 몰라? 원래 전학생들이 첫날에는 굉장히 긴장하 고 그러잖아." "난 전학을 가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후훗. 18년을 살아오면서 전학 한 번 안 가보다니. 역시 작은 형은 안 된다니까." …마치 너는 전학을 많이 해본 듯이 말하는구나. "아, 저기." 갑자기 예안이 걸음을 멈추자 준우와 현우는 의아했다. 예안은 하기 곤 란한 말이라도 있는 듯 어색한 표정이었다. "그냥 나 혼자 갈 테니까 둘이서 먼저 가." "왜? 같이 가지?" "맞아. 학교도 같은데 뭐하러 따로 따로 가?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 어 디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니들이랑 같이 가기 싫어서 그런다, 왜! 그 말이 입 밖에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은 예안은 대외적인 미소를 지었다. "난 원래 혼자 다니는 걸 좋아하거든. 끼리끼리 뭉쳐서 등하교하는 거 안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싫어해. 그전 학교에서도 그래서 별로 친 구가 없었어." 준우는 본능적으로 예안이 자신들과 함께 가는 게 싫어서 이러는 것임을 느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자신들을 싫어하는지 알고 싶었고, 또 지금까 지 고민을 많이 했지만 답을 알 수 없었다. 거기다 대놓고 물어보기도 좀 그랬다. 어쩔 수 없이 돌려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나쁜 버릇인데. 그런 습관들이면 안 좋아. 친구 사귀기도 힘들고.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친구 같은 건 많이 없어도 돼. 원래 인생이라는 건 절친한 친구 딱 한 명만 있으면 편한 거라구. 안 그래, 준우 형?"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대사에 준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귀에 많이 익은 대사였다. "그건 진우가 자주 하던 말인데… 그나저나 너 형이라는 칭호는 좀 고칠 수 없니? 처음에는 그래도 오빠 소리했잖아?" '진우가 자주 하던 말인데'라는 부분에서 뜨끔해하던 예안은 자연스럽게 화제가 전환되자 내심 다행으로 여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난 오빠라고 절대 못 불러. 어떻게 닭살스럽게 오빠라고 하냐? 그래도 첫날에는 처음이라서 나도 예의상 오빠라고 불렀지만, 솔직히 그 말은 닭살스러워서 못해. 형 같으면 할 수 있겠어? 현우 너 같으면 할 수 있 겠냐?" "…우린 남자잖아." "남자든 여자든!" 현우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리고 또 그 말투 좀 어떻게 좀 해봐, 누나. 누나의 매력이 그 거친 말투 때문에 자꾸 희석되고 있다는 게 슬프지도 않아?" "난 이런 말투가 좋으니까 신경 끄셔. 하여튼 먼저 가. 난 여기서 생각 좀 하다 약간 늦게 갈 테니까." 다시 한 번 말하려던 준우는 예안의 태도가 완강함을 깨닫고 속으로 '우 리가 뭐 밉보인 거 있나?'라고 중얼거리며 같이 가야겠다고 버둥거리는 현우를 질질 끌고 갔다. 혼자가 된 예안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감았다. 예안은 마음 속에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연인의 얼굴을 그렸다. '예안아… 보고 있니? 나 늑대들의 마수에서 널 훌륭히 지키기 위해 최 선을 다할게.' 예안은 며칠뿐이지만 대명고등학교에 다녀본 경험이 있는 관계로 학교 분위기가 어떤지 대충은 안다. 명문이기는 해도 남자 녀석들이 발정 난 수캐처럼 헤헤거리고 돌아다니는 학교가 바로 대명고등학교다. 물론 전 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 인간들이 꽤나 많기에, 예안은 자신의 연 인을 그런 녀석들로부터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속으로 깊게 다짐했다. "학생은 남자인가?" 전학 수속(서류상으로 예안은 모 지방 고등학교를 다녔다고 되어 있다) 을 밟기 위해 교장실에 들어갔을 때 교장이 예안을 보고 대뜸 한 말이었 다. 바지 교복을 입은 걸 지적하는 말이었다. "아뇨, 전 신체적, 생물학적으로 여자인데요." "…재미있는 대답이군. 그럼 정신적으로는 여자가 아니라는 소린가?" '네, 그래요.'라고 예안은 속으로만 중얼거렸을 뿐 대답하진 않았다. "우리 학교는 규정상 여학생들은 치마 교복을 입도록 하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 학생은 어떻게 생각하지?" "제가 알기로 서울시 모든 중고등학교 여학생은 치마와 바지 둘 중에 하 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데요?" "그건 교육청에서 내건 규칙이 그럴 뿐이지, 우리 학교 교칙하고는 상관 없어." "이 학교는 교육청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학교인가요? 아니잖아요." 조금은 대드는 말투였지만 교장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어. 학생이 이 학교를 다니고 싶다면 치마를 입 는 게 가급적 좋을 거야. 일단 서류는 받아줄 테니까 담임 선생님을 따 라 반으로 가도록 해." 화가 났는지 아닌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교장의 목소리는 담담했 다. 차라리 둘 중 어느 한쪽인지 확실히 알 수만이라도 있다면 좋을 텐 데. "그런데 그 빨간 머리는 설마 염색한 건 아니겠지?" "천연이에요. 안에 병원에서 증명해준 서류가 있어요." 교장은 서류를 훑어보며 건성으로 말했다. "교칙상 상관은 없지만 가급적이면 검게 염색했으면 싶은데." 예안은 분했지만 아무런 말도 못한 채 입술만 꽉 깨물고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예안의 담임이 될 사람이 들어왔다. "이 아이인가요, 교장 선생님?" "그래요, 정 선생. 얼른 데리고 가도록 하세요. 그리고 치마를 입어야 한다고 주의 주는 거 잊지 마시구요." "네." 정 선생이라는 여교사를 돌아보는 순간 예안은 흠칫했다. 자신이 진우였 을 때의 담임이었던 것이다. 설마? '세현이랑 같은 반?' 순간적으로 그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바보 같이! 대명고등학교에 오게 되면 차세현과 김혜인을 마주치게 될 거란 걸 어째서 그동안 생각 못한 거지? '네 두뇌는 아메바 수준인 거냐, 유진우!' 당황한 예안은 정 선생을 따라가면서 끊임없이 자기 암시를 걸었다. '침착하자. 어차피 세현이도 혜인에도 나에 대해선 잘 몰라. 아, 혜인이 는 같은 반이 아니지? 그리고 설혹 그 녀석들하고 대면하게 되면 처음 만난 것처럼 굴면 되지 뭐. 그나저나 세현이랑 다시 친해지고 싶어도 어 떻게 하지? 그 녀석은 여자를 엄청 싫어하는데…' 머리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지워지기를 반복할 때 정 선생이 말을 걸었다. "쯧쯧, 너도 치마를 싫어하는 애들 중 한 명이구나?" "예? 예…" "힘들 거야. 교장 선생님은 그런 쪽으로는 굉장히 완고한 분이시거든. 작년에도 학생회에서 항의서를 넣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어. 괜히 찍히거나 그러고 싶지 않다면 내일부터 치마 입고 나와." '그건 정말 싫은데요.'라고 예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남에게 강요당하 기 싫어하는 진우의 성격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나 보다. 교실에 가까워지자 떠드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러나 정 선생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예안은 이 연약해 보이는 여 교사가 아이들 교육을 잘 시킨 모양이라 생각했다. 정 선생은 교탁에 서서 예안을 소개했다.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 오늘 아침에 예고한대로 전학생이다. 특히 사내 녀석들이 기대한 대로 미소녀니까, 아무쪼록 지나치게 폭주하진 말도록 해라. 후후, 이것 으로 우리 반도 내달부터는 피자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 폭주를 하지 말라가 아니라, 지나치게 폭주하진 말라는 건가? 꽤나 독특 한 선생이었다. 그나저나 피자를 먹을 수 있다는 건 무슨 소릴까. "아이들에게 인사해야지?" 아이들은 꽤나 충격을 받은 듯 굳어 있었다. 바지 교복 때문이라 생각한 예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서예안이라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질문할 것 없나?" 정 선생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들은 시끌벅적해졌다. 그 중 배준 혁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질문! 질문! 전학생의 쓰리싸이즈를 알고 싶다! 불어라!" 아이들은 광적으로 동참했다. "불어라! 불어라! 불어라!" '배준혁, 너 나중에 죽었어.' 저 녀석은 정말 변한 게 없다고 예안은 속으로 이를 바드득 갈았다. 당 황하지는 않았다. 보통 여자애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쩔 줄 몰라하겠지 만, 아쉽게도 예안이 어디 보통 여자애인가? 게다가 예안은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의 소란을 가라앉힐 수 있는지 잘 알았다. "33-22-32, 키 169cm에 몸무게 45kg, 별로 풍만한 편은 아닌데요. 설마 버진인지 아닌지 묻고 싶으시다면 참아주세요. 대답해드릴 수 없는 질문 이니까. 더 질문 있나요?" 삽시간에 아이들은 조용해졌다.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뻘뻘대는 모습 을 상상했던 배준혁은 멍청하게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예안은 짓궂게 미소지으며 '더 놀려줄까?'라는 생각에 다시 입을 열었다. 배준혁이나 니들이나 전학 온 미소녀에게 물어볼 만한 질문이라는 게 뻔하지 뭐. "보시다시피 여자 옷을 싫어하는 편이라 남자 옷을 많이 애용해요. 집에 서 가끔 아빠 팬티를 입을 때도 많죠. 여름에 사각팬티가 참 시원하지 않나요? 아, 여자분들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남자분들은 잘 아시죠?" 아이들은 석화 진행 중… "아, 그렇지만 외출 시에는 여자 속옷 잘 챙겨 입으니까 행여나 궁금해 하실 필요는 없어요. 의심스러우면 여자분에 한해서 나중에 보여드릴 수 도 있어요." 석화 100%까지 앞으로 몇 초… "혹시라도 자기가 남잔데 제 속옷이 남자 것인지 아닌지 확인해보고 싶 으신 분들은 일본에 가서 고추 떼고 오시면 보여드리죠. 물론 비용은 자 기 부담으로 하세요. 뭐 설마 그럴 분들은 이 교실에 보이지 않지만." 말을 끝맺은 뒤 예안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교실을 한 번 주욱 훑어보 았다. '다 돌이 되어버렸네?' 나도 나름대로 사악한 녀석이라고 예안은 속으로 낄낄거렸다. 어쨌든 이 정도로 환상을 깨뜨려놨으면 징그러운 사내 녀석들이 '유젤'을 탐내서 접근할 일은 없을 테지. 미리 라이벌들을 잘 제거했다고 나름대로 흐뭇 해하며 예안은 다시금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 잘 했지, 예안아?' 미소녀의 이미지를 그렇게 깨부수어 놓은 너를 과연 칭찬할 사람이 있을 까. 어쩌면 유젤도 천국에서 이를 갈고 있을지도 모르지. 아이들이 전학생에게 접근할 기회가 많은 1교시 쉬는 시간. 하지만 썰렁 한 분위기만 감돌 뿐 아이들은 누구 하나 예안에게 접근할 생각을 못했 다. 화사한 외모와는 달리, 전학생을 당혹스럽게 만들기 위해 자신들이 미리 머리를 짜내가며 준비해놓았던 질문들을 역으로 파헤쳐서 다 줄줄 이 태연스레 말해버린 담력에 그만 질려 버린 것이다. '뭐, 가만 내버려두니 편하네. 집에서는 도대체가 가만 두지 않아서 불 편했는데 말이야.' 거실에서 TV 한 번 보려고 하면 어느새 준우와 현우가 줄줄이 나와서 같 이 보고 있지, 컴퓨터가 고장나서 PC방에 가려고 하면 여자애 혼자 가는 건 위험하다고(도대체 뭐가 위험하다는 건지. 여기는 미국도 아닌데) 따 라나서지, 산책 좀 하려고 하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따라나서는 등 도 대체가 가만 내버려두지를 않는 것이다. 역시 예안은 이렇게 혼자 조용 히 있는 게 편했다. "이봐, 전학생. 잠깐 이야기 좀 해도 될까?" 돌아보니 배준혁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예안은 '이 녀석이 아직 도 할 말이 남았나?'하고 떨떠름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더 묻고 싶냐?" 아이들이 잔뜩 긴장하며 자신과 준혁을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준혁은 헛기침을 했다. "너는 아는가?" "뜬금 없이 그게 무슨 말?" "네가 죄인이라는 걸 너는 아냐고." 예안은 어이가 없었다. 이 녀석이 지금 웬 헛소리야? "내가 죄인이라니, 어째서? 난 여태껏 경범죄 한 번 걸린 적 없는데? 웬 헛소리냐?" 준혁은 흥분해서 외쳤다. "바로 지금 죄를 저지르고 있잖아! 아까 소개할 때도 저질렀고!" 이 녀석 정말 맛간 거 아니야? 느닷없이 '시몬, 너는 아느냐? 네가 죄인 이라는 것을?'하고 물으면 '그래. 난 낙엽을 밟았으니 죄인이야. 부디 죽여줘.'라고 대답할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 있다고? "네가 보기 드문 미소녀라는 건 너 자신이 더 잘 알고 있겠지? 매일 매 일 거울을 볼 테니 말이야." 얼굴이 확 붉어진 예안은 그만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헛소리 할 거면 제발 참아 주라. 난 그런 닭살 돋는 말에 전혀 익숙하 지 못하다." "이 고운 머릿결! 이 날씬한 몸매! 아기처럼 투명한 이 피부! 은쟁반에 옥구슬을 굴리는 듯한 목소리! 이게 미소녀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미소 녀란 말이냐!" 배준혁 특유의 과장된 화법이 줄줄 흘러나옴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야 유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느 정도 공감하는 듯 하다. 당혹스러운 건 예안이었다. 바로 코앞에서 이런 절찬을 듣는다는 건 아무리 본인도 공 감하는 사실이라 해도 역시 할 짓이 못 된다. '예안이가 예쁜 건 나도 알지만… 그렇다고 내 앞에서 그런 소리는 말아 주라. 난 유진우란 말이다, 이 녀석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진 못하고 속으로만 그렇게 외쳤다. 준혁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우리는 지금 신이 만들어낸 최고의 예술품을 보고 있어. 마음 같아선 널 당장이라도 어루만지고 싶다만, 그렇게 했다가는 이 녀석들이 날 죽 여버릴 테니 참을게." 준혁은 자신과 예안을 둘러싼 반 남자아이들을 가리키며 두 팔을 벌렸 다. "그런데 넌 거친 말투와 너무 노골적이고 말도 안 되는 황당한 답변으로 신비한 미소녀의 이미지를 깨버렸어! 네가 그런 아름다움을 타고 난 건 결코 너의 행운 때문이 아니야! 그건 신이 내린 축복이라구! 넌 신이 너 에게 준 축복에 감사해하며 신비한 미소녀를 꾸미고 연기할 의무가 있다 는 걸 잊어버린 죄인이야!" …죄인이라는 게 그런 의미였던 거냐. "맞아! 넌 죄인이야!" "죄인! 죄인을 처벌하라!" …니들은 또 왜 동조하는 건데? 예안은 머리가 지끈거린 나머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전학생… 아니, 서예안이라고 했던가? 잠깐 나 좀 보지 않을래?" 난데없이 뒤에서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에 예안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죄어드는 걸 느꼈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왜 저 녀석이 날 불렀 지? 설마 나에 대해 눈치챈 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알 리가 없 다구! "호오? 차세현 네가 웬일로 여자한테 관심을 다 보이냐? 평소에 여자 보 기를 돌 같이 하던 녀석이." 세현은 준혁이 낄낄거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묘한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잠깐이면 돼. 좀 보자." 예안은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최후의 단 한 판에 전 재산과 목숨까지 걸어버린 겜블러의 마음이 이러할까? 예안과 세현은 아이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맨 끝 복도로 나왔다. 세현은 아이들이 구경나오려는 걸 단 한 마디로 간단히 저지시켰다. '들어가' 예안은 역시 이 녀석은 멋진 녀석이라고 속으로 감탄하면서도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바짝 긴장했다. 세현의 입장에서 자신은 오늘 처음 그와 만나 는 것이며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 설혹 얼마 전에 PC방에서 자 신의 핸드폰을 건네준 걸 기억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불러내어 할 말은 없을 것이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역시 '첫눈에 너에게 반했어. 나와 사귀어 줘.' 라는 식의 대시지만 그건 세현에게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운명적 인 만남 같은 건 절대 믿지 않는 주의에다가 여자를 굉장히 싫어하는 편 이다. 무엇보다, 세현이 눈동자를 빛내며 그런 고백을 해오는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넌 네가 예쁘다고 생각해?" 느닷없는 질문에 예안은 잠시 당황했다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글쎄, 네가 무슨 의도로 그렇게 묻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주변 사람들이 그렇다고 많이들 말해. 내 생각을 말하자면… 객관적으로 보자면 예쁘다 고 생각해. 물론 내가 공주병이나 뭐 그런 것을 떠나서 말이야." "흐음?" 세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그럼 넌 네가 아름답다고 생각해?" 예안은 가슴속에서 뭔가 무거운 긴장이 끓는 걸 느꼈다. 얼핏 생각하기 에 앞의 것과 같은 질문 같지만, 실은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한 질문이 다. 예쁘다는 것과 아름답다는 것은. 예안은 훗 하는 미소를 입에 베어 물었다. 이 질문에는 멋지게 대답할 자신이 있었다. "예쁘다는 건 보통 인간에게 어울리는 어휘지. 하지만 미의 기준이라는 게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다 다른 법이잖아? 결국 그렇게 보자면 예쁘다 는 건 일시적이랄까 뭐랄까. 그런 느낌이 없잖아 있지. 하지만 아름답다 는 건 인간에게 사용하기도 하지만 내 생각엔 대자연의 멋진 풍경이나 별의 죽음과 탄생, 뭐 그런 장대한 것에 더 잘 어울린다 생각해. 그건 시대나 지역 같은 걸 떠나서 언제나 천편일률적이지." "그럼 넌 네가 예쁘다고는 생각해도 아름답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 야? 물론 객관적으로 봤을 때 말이야." '아니, 예안이는 예쁘고 아름다워.'라고 예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유 젤의 아름다움은 예안에게 항상 자랑거리였다. 사랑하는 연인이 누구나 한눈에 반하고, 인간 같지 않은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데 어찌 자랑거리 가 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세현에게 건방진 여자로 찍히는 건 질색이었던 예안은 결국 조용 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예쁘다는 말이라면 몰라도, 아름답다는 말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넌 인간 같지가 않아." 예안은 얼떨떨했다. "뭐? 무슨 소리지?" "난 이제껏 너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넌 아름다워. 인간 같지 않은 아름다움을 가졌어. 참 신비해." 이 녀석이 이렇게 여자를 노골적으로 대놓고 칭찬하는 걸 본 적이 있던 가? 예안은 자신이 전혀 모르는 신선한 세현의 모습에 어쩐지 불안함을 느꼈다. 세현은 미소짓고 있었다. 밝은 미소였지만 한편으로는 쓸쓸하게 느껴지 는 미소였다. "비현실적인 것을 믿니?" 끄덕끄덕. "신이 있다고 믿니?" 끄덕끄덕. "그렇다면 넌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세현은 등을 돌려 창 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햇빛을 가린 그의 등이 어 쩐지 무척 슬퍼 보인다는 건 단순한 눈의 착각일까? "이상해. 왜 네가 아름답다고 생각되지? 그 어떤 인간이라도 같은 인간 에게 아름다울 수는 없어. 왜냐하면 능력과 지능의 격차를 떠나서 모든 인간은 거의 동등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네가 말한 것처럼 우리 인간들 은 우리보다 월등한 대자연의 신비나 우주의 환상을 가리켜 아름답다고 표현하지. 하지만 그건 바꿔 말하면, 우리보다 하등한 미생물이나 동물 들이 우리 인간을 가리켜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있다는 논리가 되는 거 야." 평소에 세현이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어본 기억이 없다. 예안은 '이 녀석 이 정말 내가 아는 세현이 맞나?' 싶었다. "이 논리 하에서 설명하자면, 내가 누군가를 보고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으려면 그 누군가는 인간이 아니어야만 해. 나보다 월등한 '무엇'이어 야만 해. 난 평소에 그렇게 생각해 왔어. 그런데 지금, 인간인 널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이건 모순이 아닐까?" 세현은 다시 몸을 바로 돌려 미소짓는 얼굴로 예안을 마주보았다. 조금 전에 그의 미소가 어쩐지 슬퍼 보인다는 건 역시 착각이었을까. 그의 표 정은 굉장히 밝고 부드러웠다. 아무래도 슬프다는 건 역시 착각이었나 보다. 어디에도 그런 기운은 보이지 않는다. "너에게 흥미가 생겼어. 너에 대해 좀더 알아보고 싶어. 나랑 사귀지 않 을래?" …결국 아름답느니 인간이 아니니 어쩌니 하는 건 전부 다 꼬시지 위한 사전작업이었던 게냐. 바짝 긴장했던 예안은 묘한 배신감까지 느꼈다. 이 녀석, 사람을 긴장시키다니! "친구라면 좋지만, 연인이라면 싫은데." "어째서?" 아무리 남자였을 때 친했던 세현이라고 해도 확실히 못을 박아두는 게 유젤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안은 일부러 냉정하게 말했다. "난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까." "흐음. 너 같이 아름다운 여자의 마음을 손에 넣었다니, 그 녀석이 누군 지는 몰라도 굉장히 부러운 걸?" 이 녀석이 이렇게 느끼한 녀석이었던가? 사람을 바로 앞에 놓고 '아름답 다'고 말하다니! 예안은 속이 매슥거리는 것만 같았다. "좋아. 그럼 일단 친구로라도 시작해보자. 이상하게 널 놓쳐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단 말이야." 세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예안은 왠지 이질적으로까 지 느껴지는, 절친한 친구의 새로운 모습에 가벼운 전율마저 느꼈다. 예상과는 달리 세현이 예안을 이리로 불러낸 건 역시 대시하기 위한 것 이었지만 뭐랄까.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뭔가 이질적인 게 느껴졌 다. 하지만 어쨌든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나랑 사귀어 줘!'하고 고백하 지 않고 세현이 녀석답게 신을 믿니 어쩌니 하며 멋지게 말을 걸어와서 예안은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 녀석이 여자한테 헤헤거리며 망가 지는 모습 따윈, 정말 보기 싫다. "이 반에 서예안이라고 있지?" 점심 시간에 갑자기 모르는 얼굴에 교실에 불쑥 들어와 자신을 찾자 예 안은 얼떨떨했다. 명찰을 보니 3학년이었다. "저, 전데요? 왜 그러세요?" 3학년 선배는 예안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가볍게 감탄했다. "역시 소문대로군. 오늘 방과 후에 강당으로 나와." 그리고 휭하니 사라졌다. 지금 뭐가 지나갔냐? 얼떨떨한 예안은 멍하니 서 있다 갑자기 교실이 왁자지껄 시끄러워지는 걸 느꼈다. "와, 드디어 우리 반에도 광명의 나날들이 찾아오는구나!" "서예안, 축하한다! 네가 드디어 해낸 거야!" "이제 4반 녀석들에게 기죽을 이유는 없어! 아자! 아자! 이제 우리도 매 달 피자를 먹을 수 있다!" 비록 진우로서 이 학교에 다녔었다고는 해도, 입학한지 딱 오 일도 채 안 되어 한동안 못 다녔다가 오늘 처음 전학 수속을 밟고 들어온 지라 뭐가 뭔지 잘 몰랐던 예안은 얼떨떨했다. 세현이 웃음과 함께 말을 건넸 다.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지만, 오늘 벌써 결정 났 을 줄은 미처 몰랐는데? 어쨌든 축하해. 앞으로 용돈 궁할 일은 없겠구 나." "얘들이 왜 이렇게 흥분하냐? 넌 또 왜 축하한다고 말하고?" 예안은 의식적으로 남자애 말투를 썼다. 세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학교 명물 중 하나잖아. 공주 제도 말이야." "공주 제도? 그게 뭔데?" 예안으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준혁이 호들갑스럽게 끼어 들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대대로 예쁜 여자애를 뽑아서 공주에 임명하거든? 성 적 같은 건 보지 않고 외모만 봐. 남자 친구가 있든 없든 그건 상관 안 하구." "임명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혹시 학급 위원이나 학생회 회원 같은 걸 공주라고 부르는 거냐?" "말했잖아. 예쁜 여자애만 뽑아서 임명한다고. 방과 후에 전교생이 구경 하는 가운데 강당에서 학생회가 주최하는 자리를 통해 공주에 정식으로 임명하고, 임명장까지 줘." 이제야 얼핏 깨달은 예안은 하늘이 노래지는 걸 느꼈다. 이 무슨 우스꽝 스럽고 말도 안 되는 일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난 절대 그런 거 안 해."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가며 필사적으 로 차갑게 말했다. 이럴 때는 화를 내는 건 오히려 귀엽게 보일 수 있 다. 이렇게 침착하고 차갑게 말하는 게 더 낫다는 소리다. 하지만 불행 히도 이들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할 걸? 일 년 내내 반 친구들의 괴롭힘에 시달리고 싶지 않으면… 흐흐흐…" 아이들의 눈빛이 점점 사악해졌다. 예안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대대로 공주를 선출한 반에서는 공주를 보필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한 달에 삼십 만원씩 지원금이 나와. 물론 학교 공금에서 지급하는 게 아니 라 학생회 간부들의 지갑에서 나오는 거기 때문에 어떻게 쓰든 그건 우 리들 마음이란 말씀." 이 녀석들이 조금 전에 환호한 건 이것 때문이었던가? 서, 설마 아까 소 개식에서 담임이 '이제 매달 피자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라'고 말한 것도 다 이걸 가리키고 있었던 건가? 기가 막힌 예안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오려는 감정의 분출을 가까스로 제 어하며, 필사적으로 냉정을 유지했다. "내가 미쳤다고 그 망신스런 걸 하냐? 난 절대 안 한다. 그렇게 알아두 는 게 좋을 거야." 생각해 보라. 무슨 학생회장이나 반장 임명하는 것도 아니고,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이 학교는 중학교가 같은 울타리 안에 있다. 숫자가 장 난 아니다.) 공주 머시기 임명받는단 말인가? 그것도 순수한 여자애라면 영광스러워할지 모르지만, 예안의 정신은 엄연히 남자란 말이다! "안 하면 일 년 내내 우리가 괴롭힐 거야. 흐흐… 그러니까 잠자코 해. 너에게도 좋은 일이잖아. 너 자신과 가문의 영광일 테니." 예안은 자신이 당황해하고 있음을 이들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 로 얼굴에서 감정을 지웠다. 이런 상황에서는 속마음을 들키지 않는 게 최선책이다. 하지만 여전히 효과는 없었다. "꿈도 꾸지 마. 난 절대 안 한다." "한 달에 오십 만원." 느닷없이 준혁이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펴보이자 예안은 어리둥절했다. "웬 오십 만원? 삼십 만원이라며?" "그건 우리 반에게 지급되는 보필 비용이고, 공주에게 지급되는 품위 유 지비는 한 달에 오십 만원이지. 아무래도 여러 가지 옷이나 장신구 같은 걸 사서 품위를 유지하려면 돈이 꽤 들 테니까." 학생회 녀석들은 미친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공주가 세 명만 임명되어 도 한 달에 240([30+50]X3)만원이 나간단 소리 아닌가? "아, 혹시 돈이 어디서 나서 그런 짓 하는 거냐는 걱정은 안 해도 돼. 학생회 간부들은 하나 같이 내노라하는 부잣집 아들이거든. 우리 학교에 부잣집 아이들이 꽤많이 다니잖아?" 눈을 감고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뒤 예안은 다시 눈을 떴다. 예안은 아이들 대표로 자신을 설득하려 드는 준혁을 최대한 차갑게 노려보며 입 을 열었다.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어? 난 절대 그런 것 안 한다니까." 예안은 단돈(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엄청 속 쓰렸다) 오십 만원 에 자신의 체면을 팔아 넘길 순 없었다. 떳떳한 사내로 태어나서 공주 임명식 같은 데 나가 전교생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임명장을 받는 모습 따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하다. "…그대의 입술은 얼어붙은 대지조차 녹여 버릴 듯 뜨겁고, 그대의 눈동 자는 대지의 모든 걸 싹틔울 듯 자애로우며, 그대가 가진 그 모든 눈부 신 아름다움은 이글거리는 태양조차 지워버릴 듯 강렬하기에, 충분히 우 리 대명고등학교 제32대 세 번째 공주가 될 자격이 있다. 따라서 이 임 명장을 수여하는 바이다. 대명고등학교 제54대 학생회장 유준우."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그것도 중학생까지 전부 다 모여) 우두커니 서서 지루하고 누가 썼는지 정말 닭살이 뚝뚝 넘쳐흐르는, 학생회장 준 우의 낭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예안은 작게 입을 열었다. 가능한 준 우에게 쌀쌀맞게 대하고 말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 한 마디는 꼭 하고 싶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형은 명색이 학생회장이 되어서 이 짓 하고 있는 게 창피하지도 않아?" 준우도 자신이 학생회장이 되어서 이따위 우스꽝스런 임명식을 하는 게 창피했던지 얼굴이 조금 벌개진 채였다. "일단 이것부터 받기나 해. 안 그럼 너 살아서 못 나가." 말 그대로, 받지 않았다가는 같은 반 친구들은 물론이요 2, 3학년 선배 와 1학년 동문, 그리고 중학교 후배들까지 가만두지 않을 태세였다. 예 안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이 된 심정으로 힘들게 임명장을 받아들었 다. "그리고 이건 이번 달 공주의 유지비. 제32대 세 번째 공주인 1학년 3반 서예안은 앞으로 대명고등학교 공주으로써의 품위에 각별히 신경 쓰기를 바란다." 어울리지 않게 엄숙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강당 전체에 울려 퍼지자 전교생은 짝짝짝 손뼉을 쳤다. 우스운 것은,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교사 들은 물론이고 교장, 교감까지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건 완전히 학생들의 자발적 행사가 아니라 학교의 공식적 행사나 다름없지 않은가? 32년째 내려오는 것만 봐도 알겠다. 그리고 예안이 지금 막 깨달은 게 있다면, 이 학교는 여자들도 바지 교 복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교장은 예안에게 바지 를 입을 수 없을 거라 했을까? "그리고 제32대 세 번째 공주가 된 서예안은 공주으로서의 품위를 지키 기 위해 앞으로는 바지를 입지 말고 치마 교복을 입을 것을 명한다. 이 것은 자발적인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적인 것이며, 만일 내일부터 서예안 이 이것을 지키지 않을 경우 친위대의 응징을 받게 될 것이다." 친위대인 2학년 여자선배들을 쳐다본 예안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 다. 바지 입고 왔다가는 친위댄지 뭔지 하는 선배들이 와서 무조건 치마 로 갈아 입히겠단 소리였다. 바로 이것 때문에 교장은 바지를 절대 입을 수 없을 거라 말한 건가? 그렇다면 진작 그렇게 말하자, 학교 교칙이니 뭐니 하면서 사람을 놀릴 건 도대체 뭐냐구? "이제부터 제32대 세 번째 공주인 서예안은 첫 번째 공주와 두 번째 공 주과의 대면을 갖겠습니다. 박수로 세 공주의 만남을 축하해주십시오." 짝짝짝~ 우렁찬 박수소리가 강당을 떠나갈 듯이 울렸다. 귀가 얼얼한 박수 소리 끝에 예안은 '그래, 내 인생은 끝난 거야'라고 자포자기한 채로 첫 번째 공주와 두 번째 공주라는 여자들을 쳐다보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 '김…혜인…?' 까맣게 잊어버린 채 생각지도 못했던 김혜인을 이 자리에서 보게 될 줄 이야. 예안은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만나서 반가워. 난 김혜인이라고 해. 너도 이제 공주가 되었으니 앞으 로 잘 지내보자.」 예안은 그 뒤로 어떻게 행사가 진행되었는지, 어떻게 끝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혜인과 헤어졌으며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 았다. 마치 흐릿한 안개에 둘러싸인 듯 멍하니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겼 던 것만 기억날 뿐이다. "혜인… 김혜인…" 왜 미처 그 아이가 공주가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까? 누가 봐도 감탄 할 만치 예쁜 아인데. 아니, 그것보다 왜 오늘 임명식에서 그 아이를 보 기 전까지, 그 애가 이 학교 학생이라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을까? 예안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두툼한 돈 봉투가 만 져졌다. 예전 같았으면 돈이 썩어나는 것들이 할 짓이 없어서 별 일을 다 벌인다고 비웃었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누나, 왜 그래?" 현우가 부르자 비로소 정신을 차린 예안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여전히 자신을 차갑게 대하는 태도에 현우는 조금 우울함을 느꼈다. "누나 정말 이상해. 어디 나사라도 하나 빠진 사람 같아. 공주가 되어서 당혹스러워서 그런 거야?" "몰라도 돼. 알려고 들지 마라." 찬바람이 쌩쌩 부는 냉담한 태도에 현우는 더 말을 걸지 못했다. 대신 준우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작은 형. 도대체 형은 학생회장으로서 자각이 있기나 한 거야? 무 슨 그런 우스꽝스러운 임명식에서 닭살이 줄줄 흐르는 낭독문이나 읽고 있고… 작은 형은 그 짓 하려고 힘들게 학생회장 된 거야?" 준우는 조금 창피했던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것도 대대로 학생회장의 소임인 걸 어떡하냐. 그리고 예안이 너 이제 부터 형이란 말은 안 쓰는 게 좋을 거야. 친위대의 귀에 들어가면 예절 교육이다 뭐다 하여튼 귀찮은 거 받을지도 몰라." 자신들의 대화에 아무런 관심 없이 묵묵히 걷고만 있는 예안을 대신해 현우가 불만을 토로했다. "…말이 친위대지, 완전히 파수꾼이잖아!" "뭐 그런 거지. 그래도 친위대라는 말이 더 멋있잖아? 그리고 현우 넌 벌써 3년째 봐왔으면서 맨날 똑같은 말을 또 하냐? 듣는 나도 지겹다 정 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집에 돌아오자 혜민이 반갑게 맞았다. 아직 집 에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후후, 현우한테 소식 들었어. 너 공주 됐다면서?" 그놈의 소식 한 번 참 빠르기도 하다. 근데 얘는 집에 안 가나? 학교 안 가도 되는 건가? "어찌 되었든 축하해. 그나저나 올해 퀸 페스티벌에선 우리 숙원고등학 교가 대명고등학교한테 지겠네. 휴." 예안은 귀가 확 뚫리는 느낌이었다. 퀸 페스티벌? 그게 뭐지? "퀸 페스티벌? 그게 뭔데?" "너 설명 안 들었어? 하여튼 준우 오빠는 그런 거 좀 미리 말해주지. 잘 들어. 퀸 페스티벌은 너네 학교랑 우리 학교랑 대대로 학교의 공주를 내 보내어 최고의 공주를 뽑는 그런 자리야. 우승자에게는 퀸의 호칭을 주 지. 경쟁이 엄청 치열해. 이기면 학교 자존심도 드높일 수 있고. 꽤나 오래된 명물이라서 TV 방송국에서도 취재 오는데, 몰랐니?" TV를 언제 한 번 봤어야 알지. 예안은 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었다. "게다가 이 페스티벌에서 퀸이 된 여학생은 JM 영화사에서 그 해 만드는 영화의 신인 주연으로 뽑아가. 여태껏 우승한 여학생은 전부 다 첫 영화 출연료로 받은 돈을 자신의 모교에 기부했고, 거의 대부분 연예계로 진 출했지. 그래서 더욱 더 양 학교에서 퀸을 배출하는데 열을 올리는 거 야." 품위 유지비니 보필 비용이니 하는 것도 다 그런 속셈이 있었던 게냐. 이제 더 놀랄 힘도, 화를 낼 힘도 잃어버린 예안은 자포자기한 채로 물 었다. "우리 학교 공주는 나까지 세 명인데, 너네 학교는 몇 명이야?" "응? 우리 학교는 나까지 두 명." "엥? 너 공주였어?" 예안은 의외의 대답에 놀랐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꽤나 예쁜 편이었 지. "뭐, 예안이 너보다는 안 되지만 나도 꽤나 예쁘다고 알아준다고. 그리 고 성적이나 집안, 성격 뭐 나무랄 데가 있어야지." 다른 건 몰라도 성격은 아닌 듯 싶다만. 게다가 이렇게 학교도 빠지고 그러는데 공주의 품위가 유지 안 된답시고 친위대 같은 것들이 화내는 건 아닌가? "자자, 공주 페스티벌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층 가서 목욕하자. 내가 물 다 받아놨어." "자, 잠깐! 내가 왜 너랑 같이 목욕을 해야 돼!" "같은 여자끼린데 뭐 어때? 쑥스러워하지 말고 얼른 얼른~" 혜민은 즐거운 듯 예안의 어깨를 떠밀었다. 예안은 질겁해서 기필코 안 한다고 펄펄 뛰었지만, 글쎄다. 동정남의 그 시커먼 속을 누가 알겠는 가. 속으로는 같이 하고 싶으면서 수줍어서 저러는 건지도. 두 사람이 이층으로 올라가고 난 뒤 현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누나는 큰아버지말고 혜민이 누나한테도 꽤나 상냥하지 않아? 형도 그 렇게 느꼈지?" "글쎄다. 내가 보기에는 혜민이한테 끌려 다니는 것 같은데? 원래 혜민 이가 자기가 마음에 든 사람 잘 끌고 다니잖아. 너도 당해봐서 잘 알잖 아?" "그렇긴 하지… 근데 혹시 예안이 누나 남성혐오증 뭐 그런 거라도 있는 거 아냐?" "글쎄…" 진실은 어느 것 하나 밝혀진 것 없는 가운데 또다시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다. 촤아아아.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넓은 욕탕에 얼굴만 내놓은 채 들어가 있던 예안은 얼굴이 귀밑까지 붉 어진 채였다. 하지만 샤워하고 있는 혜민의 육감적인 몸매로 자꾸만 눈 이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 미안해 예안아… 나 지금 흔들리고 있어.' 예안 그 자신도 누구보다 뛰어난 몸매를 소유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자신 이 직접 움직이는 몸이다 보니 별 감흥 따위를 느끼지 못하는 걸까. 예 안은 혜민의 몸에서 시선을 떼기 힘들었다. "에이, 뭘 그렇게 자꾸 흘끔흘끔 대고 그러니? 부러워할 필요 없어. 네 몸매가 나보다 더 좋으니까." 샤워를 마친 혜민은 웃음 띤 얼굴로 욕탕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몸 을 정면으로, 그것도 적나라하게 마주본 예안은 속으로 차라리 울고 싶 었다. '지금 날 시험이라도 하는 거냐!' 그래도 꽤 괜찮은 크기라도 자부하고 있었던 물건은 이제 온데 간데 없 는데, 도대체 이 상황에서 흥분이 되면 뭘 어쩌라는 거냐고. 오늘 전학 생 소개할 때에 그 자신만만한 공주는 온데 간데 없고, 대신 어찌할 바 를 몰라하는 동정남 하나가 떡하니 있었다. 물컹. 갑자기 자신의 젖가슴을 덥석 잡는 손길을 느낀 예안은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등뒤에서 혜민이 자신을 꼭 껴안고 젖가슴을 어루만지고 있 었다. "이야, 역시 부드러운 걸? 마음 같아서는 네 거랑 네 거랑 바꾸고 싶은 기분이야." "이, 이러지 마…" 뭔가 묘하고 야릇한 기분이 든 예안은 직감적으로 위험하다는 걸 느꼈지 만 몸이 마비라도 된 듯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혜민은 사악한 미소를 띤 채 애무하듯이 천천히 예안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후후, 왜 흥분되니?" "흐, 흥분은 무슨…" "아니라면 왜 그렇게 숨이 가빠지는 걸까~요?" "저, 절대 아니… 하악, 하악… 제, 제발…" 자신의 손길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한 마리 가여운 어린양이 귀엽게만 느껴진 혜민은 손바닥을 이리저리 슬슬 움직여 점점 예안을 흥분의 도가 니로 몰아넣었다. "근데 너 정말 피부가 하얗구나. 머리카락 색도 특이하고… 넌 아무리 봐 도 한국인이 아닌 것 같아. 혹시 아버지나 어머니, 아니면 조부모님 쪽 에 외국인 계신 거 아니야?" 혜민은 한국인답게 연한 갈색을 띤 자신의 피부와 새하얀 우유를 발라 놓은 듯 매끄러운 예안의 피부색을 비교해보며 샘나는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예안의 몸이 축 늘어졌다. 조금 놀란 혜민은 이리저리 살피다 히 죽 웃었다. "어라? 그렇게 좋았나? 기절해 버렸네?" 아무래도 즐기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역시 사악한 마녀. 왔다갔다. "그만 좀 앉아라 정신 사납다." 이리저리. "어지러우니까 제발 좀 앉아. 언제까지 거기 서 있을 거야?" 왔다리갔다리. "야! 유현우, 임마! 그만 좀 앉으라니까!" 참지 못한 준우가 고함을 지르자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초조해하던 현우 는 형을 쏘아보았다. "그러는 형이야말로 신문이나 제대로 펴들고 있어! 자기도 신문 거꾸로 든 주제에!" "흠, 흠." 그제야 자신이 신문을 여태껏 거꾸로 들고 있었음을 깨달은 준우는 헛기 침을 했다. "형은 걱정되지도 않아? 지금쯤 예안 누나가 음란조교의 손에 걸려 어떤 꼴을 당하고 있을지?" "야야, 설마 같은 여잔데 뭐 별일이야 있겠어?" 그렇게 말하는 준우도 못내 초조한 안색이었다. "형도 잘 알잖아! 음란조교의 손에 걸리면 여자든 남자든 가릴 것 없이 타락해 버린다는 것!" 그게 바로 현우가 혜민을 싫어한다는 이유였나. "형은 작년에 내가 당한 일 벌써 까먹었어? 작년 여름 방학 때 바캉스 갔다가 음란조교에게 호텔에서 무슨 꼴 당했는지!" 준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그거야 기억하지만…"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덤덤할 수 있어! 형은 예안 누나가 걱정도 안 돼!" 당연히 내가 당한 게 아니니까 별로 실감이 안 나는 거지. 준우는 그렇 게 말하려다 말았다. "걱정은 되지만… 그래도 같은 여잔데… 설마 별 일이야 있을라구." 현우는 머리를 전부 다 뽑을 듯이 움켜쥐며 괴로워했다. "으윽! 음란조교가 지금쯤 순진한 누나를 어떻게 괴롭히고 있을지 상상 만으로도… 작년 바캉스 때 내가 당한 것보다 분명 더 심하게 괴롭힘 당 하고 있을 게 뻔해! 벌써 한 시간째 안 나오고 있잖아!" 작년 바캉스 때 현우가 당했던 일이라고 해봐야 별거 아니다. 그냥 호텔 자신의 방에서 잠을 자려고 하는데, 술을 든 혜민이 들어오더니 '술 한 잔 하고 자자.' 하길래 별 생각 없이 그냥 술을 마신 것이 화근이었을 뿐.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때 혜민이 일부러 야한 옷을 입고 온 것부 터가 전부 다 함정이었다. 원래 술이 약한 현우는 포도주라는 말에 '괜찮겠지'하고 별 생각 없이 순도 높은 브랜디를 마셔버렸고, 곧바로 취해서 쓰러졌다. 그리고 꿈을 꿨는데, 웬 야한 옷을 입은 여자가 유혹하길래 취기를 못 이기고 달려들 었던 것뿐이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나 보니 머리에 혹이 나 있었다. 그게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혜민은 즉석 사진으로 뽑은, 현우가 자신의 옷을 벗 기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사악한 마녀의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자신이 당했음을 깨달은 현우는 울며불며 사진을 돌려 받는 대가로 최신형 노트 북을 넘기고 말았다. 정말 별 거 아니다. 고작해야 300만원짜리 최신형 노트북 하나를 바이바이 했을 뿐, 정절을 잃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현우야. 준우 오빠. 나 좀 도와 줘." 갑자기 욕실 문이 열리며 혜민이 낑낑대며 나왔다. 놀란 현우와 준우는 잽싸게 달려갔다. 혜민은 기절한 예안의 몸을 타올로 대충 가린 채 끌어 내려 애쓰고 있었다. "왜 기절한 거지, 마녀?" 현우의 노려봄에 혜민은 시치미를 뗐다. "나도 몰라~ 좋았나 보지 뭐~" 뭔가 상당히 수상쩍은 발언에 더 추궁하려던 현우는 이럴 때가 아니다 싶어 기절한 예안의 몸을 안아들으려 했다. 하지만 타올이 살짝 벌어지 며 하얀 젖가슴이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자 귀밑까지 얼굴을 붉힌 채 그 만 당황해서 손을 놓치고 말았다. 그 바람에 배꼽까지 타올이 벗겨져 예 쁘게 모양 잡힌 젖가슴이 훤히 드러나고 말았다. "아앗! 현우는 응큼해! 이걸 노린 거지?" …이건 아무리 봐도 타올을 제대로 고정시키지 않은 혜민의 잘못이 크다 고 생각되는데. 하지만 좋은 구경을 한 준우와 현우 입장에서는 차마 뭐 라고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고맙다고 절을 해야 할 판이랄까. "내가 옮길게." 혜민이 다시 다소곳하게 타올을 고정시키자 준우가 가볍게 예안을 번쩍 안아 올렸다. 그가 방으로 예안을 옮겨 침대에 눕히고 나자 뒤따라 들어 온 혜민은 예안의 옷가지를 들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준우가 약간 얼 굴이 벌개진 채로 나가려 하자 혜민은 생긋 웃음과 함께 붙잡았다. "벌써 나가려고? 이렇게 아리따운 아가씨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아닌게 아니라 흰 가운을 입은 혜민은 짧은 옷자락 밑으로 길게 뻗은 다 리가 눈이 부셨다. 거기다가 타올 하나만 달랑 걸친 예안은 어떤가. 남자라면 이 방에서 누군들 나가고 싶겠느냐만은, 그러나 저 사악한 혜 민이 있는 이상 한시바삐 나가야만 했다. 안 그랬다가는 도대체 무슨 장 난을 덮어쓰고 돈을 뜯길지 모른다. 현우가 바로 그 좋은 예가 아닌가. "혜민이 너랑 같이 있으면 위험하니까 나가 봐야지. 나는 현우 녀석처럼 마녀의 먹이가 되긴 싫다." "흐응? 왜 나랑 같이 있으면 위험한대?" "네가 평소에 하는 짓거리를 곰곰이 잘 생각해 봐라. 굳이 먼 예를 안 들어도 될 거다. 작년에 네가 현우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그때 현우가 그 노트북 너한테 뺏기고 얼마나 통곡했는지 알아?" "쳇. 무슨 남자가 그깟 노트북 하나 갖고 질질 짜고 그래. 이렇게 예쁜 사촌누나한테 그냥 공짜로 줄 수도 있는 거지." "예쁘기만 하면 뭐하냐. 사악하기 그지없는데." 준우가 서둘려 나가려 하자 혜민은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예안이가 왜 기절했는지 알고 싶지 않아?" 그 말에 준우는 멈칫했다. 그가 돌아보자 혜민은 만족스러운 듯 빙긋 웃 었다. "있지. 얘가 참 순진한 게 역시 처녀가 맞는 것 같아. 그냥 내가 뒤에서 가슴을 쥐고 가볍게 몇 번 주물럭거렸을 뿐인데 곧바로 기절해 버리더 라. 역시 그런 느낌은 처음이라 자극이 심했겠지?" 이 녀석 정말 여자 맞아? 어떻게 사촌 오빠 앞에서 이런 말을 아무렇지 도 않게 할 수 있는 거야? "꼭 넌 처녀는 아니라는 듯 말하는구나?" "에헤헤. 요즘 세상에 내 나이 되도록 처녀인 애가 몇이나 되겠어? 솔직 히 까놓고 말해 봐. 오빠는 동정이야?" "솔직히 조금 불쾌하네. 대답하지 않겠어." 처음에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게 물들었던 준우는 불쾌함으로 얼굴이 새빨개진 채 방을 나가 버렸다. 문밖에서 현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형…" 준우의 표정에는 어느새 불쾌함이 사라지고 빨간 부끄러움이 나타나 있 었다. 그건 현우도 마찬가지였다. "십 만원이나 들인 정보가 과연 맞았어. 역시 핑크빛이었어. 형도 봤 지?" "그래, 봤다." "예안 누나한테는 절대 비밀이야. 알지?" "당연하지." 두 형제는 눈빛으로 굳게 신뢰를 교환했다. 그러다가 아까 봤던 예안의 가슴을 다시 떠올리고는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 설마 이 녀석들 동정? 「꺄하하하~ 엄마~ 여기야 여기~」 깔깔거리는 남자아이의 웃음소리가 꽃바람이 흩날리는 잔디밭 위로 넘실 거렸다. 이제 한 4살쯤 되었을까. 아장아장 걸음을 옮기던 아이는 그만 잔디밭 위로 넘어져 버렸다. 「저런, 조심해야지. 괜찮니?」 앳된 느낌이 묻어나는 여자가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아. 엄마, 난 안 울어. 난 강한 아이니까.」 「그래, 그래. 우리 아들은 강한 아이니까.」 '진우'의 의식은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누구지?'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머리 카락이 푸른 가을하늘처럼 맑고 싱그런 파란색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을 뿐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파란 머리를 가진 사람이 있던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봐도 여자가 누구인지 생 각나지 않았다. 마치 기억의 실타래가 얼룩에 더럽혀진 거울 조각처럼 되어 버린 듯 했다. '누구야? 이쪽을 돌아봐 제발…' 입안이 바짝바짝 탄 '진우'는 손을 내밀었지만 몸이 굳어버린 듯 움직이 지 않았다. 제발 이쪽을 봐 줘. 그렇게 애원해 봤지만 여자와 아이는 자 신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는 것 같았다. 몹시 초조해졌다. '얼굴을 보여 줘.' 진우의 애원이 그들에게 전달된 걸까. 파란머리의 여자는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자 진우는 뭔 가 아주 그리운 것을 정말 오랜만에 본 사람처럼 가슴이 울컥했다. '아…' 여자와 아이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는 얼굴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을 만치 가까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가 누구인지, 왜 자신이 그녀 를 보고 이렇게 가슴아파하는지 그 이유는 몰랐다. 그저 본능처럼 울고 만 있었을 뿐이다.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야.」 '아…' 「우리 약속, 잘 지키고 있지?」 '아…' 도대체 뭘까. 이 아득한 그리움은. 난 분명히 이 여자를 알고 있는데, 어째서 지금 그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거지? 「진우야. 이 아이를 너에게 줄게. 부디 나 대신 이 아이를 많이 아끼고 사랑해 줘.」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진우에게 내밀었다. 멍하 니 아이를 받아 안은 진우는 어느새 자신의 머리카락이 길어진 걸 느꼈 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진우는 '예안'이 되어 있었다. 비로소 눈앞의 이 여자가 누구인지 생각이 난 '예안'은 그만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예안아…' 「앞으로도 계속 행복해 줘. 그 아이도 행복하게 해줘. 우리들의 소중한 아이니까…」 주변의 풍경이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수채화 물감으로 그려 진 캔버스가 소나기에 얻어맞듯이. 천천히, 천천히… "예안아, 갑자기 왜 울어?" 혜민이 몸을 흔드는 걸 깨달은 예안의 의식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 다. 예안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눈을 깜박였다. "무슨 나쁜 꿈이라도 꿨어?" 꿈의 내용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유젤을 보고 느꼈던 그 가슴아픔과 비 련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런데 어째서 그때는 유젤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을까. "무슨 꿈을 꿨는데 그래? 말해 봐. 말해 봐." 예안은 눈물을 닦으며 자신이 꿨던 꿈에 대해 말해주었다. 물론 꿈의 내 용은 적절히 편집했다. 자신은 꿈에서 '진우'라는 남자가 아니라 예안이 라는 여자였으며, 꿈에서 본 유젤을 남자라고 둘러댔다. 다 듣고 난 혜민은 꽤나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그거 굉장히 이상한 꿈이네? 분명히 그 남자가 너에게 아이를 주었다고 했지?" "으, 응…" "그거 혹시 태몽 아닐까?" 순간적으로 예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 말도 안 돼! 무, 무슨 태몽이야! 그, 그럼 내가 임신이라도 했다는 거야!" "얘 좀 봐.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태몽은 꼭 임산부만 꾸는 줄 아 니? 남편이 꿀 수도 있고 처녀가 꿀 수도 있는 거야. 아직 임신하지 않 은 유부녀가 꿀 수도 있는 거고, 시아버지나 시어머니가 꿀 수도 있는 거라구." "그, 그래?" 하지만 태몽이라니! 문득 예안은 애엄마가 된 자신을 상상해보고는 몸서 리를 쳤다. 상상만으로도 온몸에서 절망의 기운이 스멀스멀 일어날 정도 로 끔찍했다. "예안아. 넌 몇 살 정도 되면 결혼할 거야?" 잠옷차림으로 베개를 껴안은 혜민이 그렇게 물었다. 예안은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안 해. 절대 결혼 따위 하지 않을 거야." "왜? 그 좋은 걸 왜 안 하겠다는 건데? 결혼하면 매일 밤 남편이랑 마음 놓고 즐길 수 있잖아?" "넌 그럼 섹… 그거 하려고 결혼하냐?" '섹스'라고 말하려던 예안은 차마 바로 입에 담기는 뭐했던지 그렇게 말 을 돌렸다. 물론 덕분에 혜민이 '역시 처녀가 확실해'라고 속으로 단정 지을 줄 알았다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기집애하고 별로 친해지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었는데…' 진우였을 때 혜민으로부터 온갖 안하무인적인 발언을 많이 들으며 살아 왔던 터라 예안은 여자가 된 뒤 혜민을 만나기 전, 절대 상종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처음의 결심과는 달리, 자신을 좋아하며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는 혜민에게 예안은 서서히 마음을 열고 있었다. '하긴… 따지고 보면 좀 철이 없을 뿐이지, 정우 형이나 준우 형, 현우 처럼 날 그렇게까지 무시한 건 아니었잖아?' …이렇게 다짐하고 있지만 동정남의 그 시커먼 속을 도대체 그 누가 알 까. 단순히 혜민이 꽤나 예쁘장한 여자라서 이렇게 쉽게 마음을 여는 건 지 아닌지 누가 안단 말인가? 혜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꼭 섹스하려고 결혼하는 건 아니지만 본능적인 욕구에 솔직한 게 좋잖 아? 원래 섹스를 안 하는 사람보다 적당히 하는 사람이 더 건강히 오래 산대. 너무 많이 하면 물론 몸을 망치는 지름길이 되지만. 너, 그럼 연 애도 안 할 거야?" "안 할 거다. 절대 안 해." "흐응? 너 그럼 좋아해 본 사람은 여태껏 한 명도 없어?" 그 질문에는 잠시 망설여졌다. 예안은 조그맣게 대답했다. "있어." "그래? 그거 다행이네. 그럼 한 번 그 사람을 놓고 생각해 봐. 네가 좋 아하는 그 사람하고 결혼하고 싶다거나 뭐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 머리 속으로 유젤을 떠올리며 예안은 피식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유젤 과의 결혼이라. 그건 이제 와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바램일 뿐이다.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봤어. 그렇지만 이제 못해." "어째서?" "…죽었으니까." 예안은 어두운 안색으로 대답했다. 혜민은 약간 의외라고 생각하며 다시 무엇을 더 물어보려다 예안이 너무 우울해 보이자 그만 입을 다물었다. 오늘은 더 물어보지 않고 그만 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예안아…' 예안은 어둠 속에 누워 눈을 감았다. 유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보고 싶어…' 유젤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거울 앞으로 달려가면 된 다. 하지만 그건 유젤의 진정한 모습이 아닌, 유젤의 껍데기를 덮어쓰고 있는 자신일 뿐이다. 보고 싶었다. 진짜 유젤을 보고 싶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렇 게라도 유젤을 다시 볼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만족했던 것 따위는 이미 희석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유젤은 진우에게 자신의 육체를 주었다. 예안이 되어 버린 후로 진우의 인생은 너무나 많이 달라져 버렸다. 주변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도 주변에서는 자신을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준다. 심지어는 오만하고 안하무인인 혜민조차도 자신과 친구하자고 접근해오지 않았는가? 때로는 이렇게 자신이 행복해져도 될까 하는 불안한 기분에 시달릴 때도 있다. 조금씩 변해 가는 자신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다. 하 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슬픈 건, 이미 죽어버린 유젤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 아이를 너에게 줄게.」 꿈에서 유젤이 했던 그 말이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듯 했다. 넌 나에게 너의 모든 걸 다 주었으면서도 아직도 나에게 무언가를 준다고 하는구 나. 하지만 난 이렇게 널 기억하는 것 외에는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잘 살게. 나 꼭 행복해질게. 그게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 이니까…' 또다시 하루가 지나간다. 그리고 그것은 유젤을 만날 날짜가 하루만큼 앞당겨졌다는 걸 의미한다. 청와대. 역대의 한국 대통령들이 머물렀던 곳. 해방 이후 많은 대통령들 이 축복 받지 못한 채 이곳에서 나왔지만 21세기가 된 이후로 그런 일들 은 많이 사라졌다. 은퇴한 이후로 비리가 밝혀진 대통령들이 몇몇 있기 는 했지만 평화롭게 임기를 마치고 국민들의 축하를 받으며 자리에서 물 러난 대통령 수가 꽤 늘었다. 그건 곧 한국의 정치가 한결 더 깨끗해졌 다는 걸 의미했다. 깨끗한 제1회의실에는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 국정원장이 탁자에 둘러앉 아 있었다. 그리고 한 젊은이가 막 브리핑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암호명 '그림자' 사건이 제일 처음 발생한 건 2055년 3월 5일 오후 5시 경이었습니다. XX구 XX동의 한 번화가 상공 약 20미터 지점에 정체불명 의 거대한 물체가 출현했습니다." 한쪽 벽에 달린 스크린에는 거대한 인간형의 모습을 갖춘 전투병기, 맥 이 드러났다. "만약 외부에서 침입했다면 우리 해군 잠수함의 감시망에 걸리거나, 혹 은 방공 레이더에 걸렸을 텐데 전혀 그런 조짐이 없었다는 점이 이상합 니다. 이것이 '그림자'라고 이름 붙이게 된 이유입니다." 다시 화면에는 맥이 거대 전투기 형태로 변환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적기는 갑자기 인간형 로봇 모습에서 전투기 형태로 변해 폭발적인 기 세로 도망쳤습니다. 레이더에 전혀 걸리지 않았기에 어디로 도주했는지 는 끝내 찾을 수 없었습니다." 화면에는 또다시 여러 가지 현재 기술로 개발된 로봇이 나타났다. 대부 분 일본에서 개발된 것들이었다. "현재 로봇 기술의 최고점을 달리고 있는 일본에서도 아직까지 평지에서 간신히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로봇을 개발했을 뿐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JR-51인데, 이 모델조차도 최고 속도가 시속 20km를 넘지 못합니 다. 그 이상으로 달리면 균형을 잃고 넘어져 버리고 말지요." 다시 화면에는 맥이 인간형 모습으로 공중에 떠 있는 장면이 잡혔다. "그림자는 공중에서 전혀 흔들림 없이 가만히 떠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 미 실용화 단계로 접어들었을 거라 생각되는 그림자의 성능을 추측해 보 자면, 평지에서 인간처럼 날렵한 움직임을 보일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 다." "하지만 현대전에서는 그런 기능은 아무런 도움이 못되지 않는가?" 국방부 장관의 질문에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장거리 공격이 위주인 현대전에서는 그런 기능은 거의 쓸 모가 없지요. 하지만 그런 움직임을 가능하게 만들었을 고도의 기술력은 굳이 전쟁이 아니라 경제나 과학, 기타 등등의 여러 분야에 걸쳐 부가가 치가 굉장히 높습니다." 다시 화면에는 전투기로 변한 맥이 비행하는 모습이 잡혔다. 이번에는 좀 다른 각도였다. "그리고 레이더에 전혀 걸리지 않는다는 장점을 고려해볼 때 이 전투병 기는 전장에서 충분히 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미 국이 우리의 가상적이라 했을 때, 대공망을 유유히 뚫고 들어가 커다란 칼이나 바주카포 혹은 폭탄으로 워싱턴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 다는 거지요." "대륙간탄도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는가?" "물론 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대륙간탄도는 단 한 발도 없지 않 습니까? 게다가 제조 기술도 아직 강대국의 감시 때문에 개발하지 못했 습니다. 그리고 핵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대륙간탄도로 태평양 건너 워 싱턴을 공격하는 건 비용을 고려해볼 때 지나치게 비효율적이지요. 그러 나 이 전투병기라면 이동하는데 드는 기름값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비용 이 들지 않을 겁니다." "그 병기가 일반 전투기 엔진을 쓰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아나?" "글쎄요. 현재로서 그건 알 수 없습니다. 팔 하나를 들어올리는 데에도 막대한 에너지가 들 것을 고려하면, 혹시 핵융합로를 쓰고 있는 건지 도…" "으음…" 인류의 꿈인 핵융합로가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 나오자 대통령 을 비롯한 장관들은 신음을 흘렸다. "다음은 한국시각으로 3월 12일 태평양 상공에서 일어났던 그림자와 미 군함대와의 조우입니다. 화면을 보시죠." 화면에는 다시 화려한 물보라를 튕기며 미 항모 캘브릿지의 좌현에서 조 금 떨어진 지점에서부터 솟아오른 맥의 모습이 드러났다. "미 함정 노스캐롤라이나 호는 한국 시각으로 3월 12일 오후 4시 10분 경, 거리 3000 미터에서부터 접근해오는 정체불명의 잠수함을 발견했습 니다. 바로 그림자입니다. 이때의 그림자의 속력은 해저에서 250노트가 넘었습니다." "으음." "보고가 들어가고 채 1분도 지나기 전에 그림자는 갑자기 엄청난 속도를 내어 미함대의 한가운데로 진입했습니다. 이때의 추정속력은 천 노트를 훨씬 넘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대통령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굉장하군." "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림자는 레이더에 전혀 걸리지 않았기에 함 대 한가운데에 솟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동발사관제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 았습니다. 미함대는 수동으로 발칸포를 조준해서 1분여 동안 발사했지만 그림자는 격추되지 않았습니다. 탄환에 패인 흔적 하나 없었다고 합니 다." "굉장한 장갑이로군. 도대체 어떻게 그런 금속을 만들었지?" "글쎄요. 전설 속에 나오는 미스릴이나 오르할콘인지도 모르죠." 젊은이는 농담을 섞어가며 브리핑을 계속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림자는 아무런 반격 없이 전투기 형태로 변해 날 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함대는 즉각 미국 본토로 항로를 되돌렸습 니다만, 몇 분 후 갑자기 그림자가 도주한 상공 쪽에서 그림자가 발사한 것으로 보이는 고폭 레이저 광선이 날아와 노스캐롤라이나 호, 뉴욕 호, 엔펄스 호의 안테나를 정확히 맞췄습니다. 레이더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기에 미함대는 그대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습니다. 그들로서는 다행인 셈이죠." "어째서 즉시 공격하지 않고 도주한 다음에 공격한 걸까?" "폭발의 여파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추측해 봤지만 그림자가 지닌 강인 한 장갑을 생각해봤을 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그냥 도주만 생각했지만 뒤에 마음을 바꿔서 겁을 준 것 아닐까요?" 젊은이는 안경을 고쳐 쓰며 빙긋 웃었다.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림자는 일단 완벽한 스텔스 기능을 자랑합니다. 가시광선감지기나 열원 추적기가 장착된 미사일 혹은 함정 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쏴보지도 못할 겁니다. 그리고 발칸포의 폭우에도 끄덕 없는 놀라운 장갑을 갖고 있습니다. 지상은 모르지만 공중, 해저에 서는 세계 어느 나라 전투기나 함정, 잠수함에 뒤지지 않는 기동력을 갖 고 있으며 실용화되지 않은 고폭 레이저 발사 장치까지 갖추고 있습니 다. 또한 초정밀 기술력으로 제작된 조준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걸로 보 입니다." "다른 건 다 이해가 가는데, 초정밀 기술력 조준 시스템인지 뭔지 하는 건 무슨 뜻인가?" 대통령의 질문이었다. "이렇게 설명하면 쉽겠군요. 현대 기술로 제작된 미사일은 그 오차가 굉 장히 심합니다. 만약 그 정도 명중률로 포탄을 쏜다면 몇 킬로미터 지점 에 떠있는 비행기도 제대로 맞추지 못할 겁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간단합니다. 미사일은 발사되는 순간의 명중률은 지극히 낮고 오차는 굉장히 큽니다. 하지만 목표를 향해 날아감에 따라 내부 컴퓨터가 끊임 없이 오차를 수정하는 거지요. 거리가 점점 짧아짐에 따라 오차는 점점 줄어들고, 마침내 미사일은 목표를 맞추는 것입니다." "으음." "하지만 그림자는 230km가 넘는 장거리에서 단 한 번의 조준으로 레이저 를 쏴서 함정을 맞췄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사격 관제와 궤도 계산 까지 전부 마친 거지요. 실로 대단한 성능입니다. 마치 몇 세기 후에나 나올 법한 무기라고 과학자들이 농담 삼아 말할 정도입니다." "굉장하군." "놀랄 일은 그것 하나만이 아닙니다." 스크린에는 다시 한 소녀가 나타났다. 신비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길고 파란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소녀였다. 회의실 안의 사람들은 놀라움에 모 두 눈을 치켜 떴다. "그림자의 파일럿으로 추정되는 소녀입니다. 나이는 스무 살 미만으로 생각되며, 한국말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걸로 보아 한국에서 장기간 거주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국인일 수도 있다는 건가?" "예. 하지만 피부색이나 외모를 보아할 때 외국인, 어쩌면 혼혈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이 소녀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잘 되야 할 텐데. 기왕이면 한국인이면 좋겠군." "어쩌면 만화에서나 보던 일이 정말 현실로 벌어질지도 모르겠군요. 세 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천재 과학자가 만들어낸 세기말 병기로 한국이 군 사강국이 된다라…" 국방부 장관의 농담에 다들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브리핑이 끝난 후 국정원장은 김중현을 불렀다. "훌륭했어. 그림자와 미군함대의 조우는 미국에서도 극비로 취급되었을 텐데, 어찌어찌 정보를 잘 빼내왔군." "이래 보여도 우리나라 정보 수집 능력은 세계에서 3위 안에 드니까요." "바꿔 말하면 1위인 미국에서는 얼마든지 우리나라의 모든 기밀을 빼내 갈 수 있다는 게 되나?" "설마요. 정보 수집 능력하고 기밀 보호 능력은 전혀 다른 거죠." 국정원장은 중현에게 커피를 권했다. "그런데 그림자의 파일럿이 정말 그 여자애인가? 난 도저히 믿어지지 않 는군." "분명 그림자에서 내리는 걸 확인했습니다. 아참, 브리핑에서는 말씀드 리지 않았지만 여자애는 그림자를 가리켜 '맥'이라고 불렀습니다." "맥이라… 그나저나 자네도 참, 극성맞은 성격이야. 그 정도 일은 아랫 사람들에게 맡기면 될 것을, 굳이 쫓아가다니 말이야." "궁금한 걸 참을 수 없었을 뿐입니다." "그래, 그 여자애의 행방은 찾았나?" "어느 정도 범위는 좁혀졌습니다. 이제 곧 체포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됩 니다." 중현의 목소리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체포할 때 너무 거칠게 다루지 말게. 스파이가 아니라 무슨 천재 과학 자의 딸 정도쯤 된다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물론입니다." 대명고등학교를 다시 다니게 된 이후로 처음으로 맞는 일요일이 찾아왔 다. 그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꽤나 피곤한 일을 자주 겪었다. 그 중 가장 큰 일은 바로 예안이 바지를 입고 다님으로 인해 벌어지는 공주 친위대 (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감시인들)와의 충돌이다. 많은 트러블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안은 꿋꿋이 바지를 입고 다녔다. 친위대는 호시탐탐 예안의 바지를 벗기고 치마를 입히려 했지만 예안은 한사코 거부했다. 이래저래 대명고등학교에서는 처음으로 공주와 친위대 와의 암투가 벌어질 거라는 소문이 팽배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예안은 세력권에서부터 밀렸다. 친위대는 전교생을 등 에 업고 있었지만 예안은 단 혼자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학생들은 예안 의 치마 입은 모습을 보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안은 혜인과 많이 친해졌다. 같은 공주라는 동지 의식 때문이 아니라 예전과는 달리 굉장히 어두워 보이고 많이 야윈 혜인에게 동정심 비슷한 뭔가를 느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그녀를 다신 보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건 배신감 때문에 그런 거지 미워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게다가 여자가 된 지금. 더 이상 진우로서의 자신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기에 예안은 이제 그만 혜인을 용서해줘도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 다.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는데 이렇게 쉽게 마음을 풀어버리는 건 조금 우습다는 생각에 가끔씩 피식 터져 나오는 웃음을 달래면서, 예 아는 혜인에게 사근사근하게 대했다. 덕분에 일주일도 되지 않아 그 둘 은 꽤나 친해졌다. 일요일 아침, 휴일인데도 웬일인지 혜민이 찾아오지 않았다. 평소에 귀 찮을 정도로 달라붙던 그녀가 오지 않자 예안은 시원하면서도 어쩐지 허 전한 느낌을 받았다. "안 오면 더 좋은 거지. 뭐, 어쨌든 오늘 하루는 편히 쉴 수 있겠네." 아침 10시가 되도록 침대에서 빈둥거리던 예안은 문득 책상에 넣어둔 돈 봉투를 꺼내어 현재 자신의 잔고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보았다. "흐음… 450만원 정도 남았군. 꽤나 많이 남았다." 시트날타에서 탈출한 그날 레이온이 당분간 쓰라고 인편에 전해줬던 오 백 만원에서 쓰고 남은 돈과, 공주의 품위유지비용인지 뭔지 하는 돈 오 십 만원을 합친 액수였다. 고등학생에게는 굉장히 큰돈이었다. 지이이이잉. 핸드폰이 울리자 예안은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여기로 전화를 걸 인간 은 재원 밖에 없다. 예안은 냉랭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형이다, 임마.」 "무슨 일인데?" '유젤'에게 접근하려 하는 재원에 대한 경계심을 지우지 못한 예안의 목 소리에는 영락없이 가시가 뻗쳐 있었다. 「야야, 너무 쌀쌀맞은 거 아니야? 난 네가 전화하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는데, 넌 어떻게 마이더스의 손만 얻어먹고 입 싹 씻을 수 있냐? 너 내가 며칠이나 네 전화만 기다렸는지 알기나 해?」 그것이라면 할 말이 없다. 예안은 조금 미안했다. "나 형한테 전화할 방법 몰라. 그리고 마이더스의 손, 그거라면 조금 미 안하게 생각해. 그렇지만…" 「조금 미안하다니? 많이 미안해야지. 무슨 여자애가 좋아한다고 말 한 마디 했는데 그렇게 펑펑 울 수가 있냐? 네 남자친구가 그렇게 좋아? 도 대체 어떤 대단한 녀석이 네 남자친구길래 네가 그 정도로 목매는지 궁 금해서 나 지금까지 잠 제대로 못잤어.」 펑펑 운 기억은 없다. 그저 가슴속에 사무친 유젤에 대한 그리움. 그리 고 거리낌없이 유젤에게 좋아한다 말할 수 있는 재원에 대한 질투를 참 지 못해 그만 눈물을 딱! 한 방울만 흘렸을 뿐인데. "재원이 형.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어?" 내 목소리가 무겁다는 걸 느낀 걸까. 전파를 통해서도 재원이 불안해하 고 있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뭔데?」 "우리 이제 오프라인에서 만나거나, 전화로 서로 연락하지 말자." 「어째서?」 "그날 형이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이야. 형이 그런 말을 하지만 않았으면 나도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거야." 「예안아.」 "내 말 좀 들어 줘, 형. 나 사실 이런 말까지 하긴 싫어. 난 남자가 날 좋아하는 게 싫어. 정말 싫어. 싫어하다 못해 증오스럽기까지 해. 형이 날 좋아해 봤자 나는 형을 이용만 하려고 들 거야. 그러니까 애초에 없 었던 걸로 하자." 「예안아 너 그게 무슨…」 예안은 그에게 미처 말을 할 기회를 주지 않고 다시 빠르게 덧붙였다. "자꾸 형이 그러면 나 정말 화낼지도 몰라." 재원은 폭탄 선언에 당황했는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는 겨우 대답했다. 「네가 갑작스럽게 그런 말을 한다 해서 내가 당장 대답해줄 수 있는 건 아니야. 일단 한 번 만나자. 전화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만나줄 수 있지?」 "내 말을 도대체 뭐로 들었…" 재원은 재빠르게 말을 잘랐다. 「만나자. 만나서 얘기해. 전에 만났던 그 장소 있지? 거기로 한 시간 안에 나와라. 난 지금 당장 준비해서 나갈 테니까.」 예안은 최대한 차가운 톤으로 대답했다. "난 안 나갈 거야. 헛수고하지 마, 형." 「난 나갈 거다. 나가서 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다. 꼭 나와라.」 "웃기지…" 화가 난 예안이 뭐라 쏘아붙이기도 전에 재원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허 탈한 표정으로 이미 끊어진 신호음만 들려오는 전화기를 멍하니 쳐다보 던 예안은 냉정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나갈 것 같아? 절대 안 나간다. 미쳤다고 나가냐?" 학교에서는 예안의 머리색에 대한 비밀을 아는 사람이 없다. 오로지 가 족들만 알 뿐이다. 왜냐하면 등하교시에는 반드시 밀짚모자를 써서 머리 카락을 감췄으며, 실외 수업이 있을 때에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반드 시 교실에 남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밀짚모자 걸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지만 시트날타에 발각되는 것보다는 나았다. 레이온은 '엔젤이 미국으로 도망갔다'고 시트날타에게 정보 조작을 해놨 다고 말해주며 한국에 사는 한 전혀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다. 게다가 그 들도 예안이 맥을 타고 태평양 건너 미국 쪽으로 달아나는 것까지 확인 했으니 확실히 안전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여자가 되고 아빠를 처음 만난 날 헤어진 이후로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는데 지금쯤 도대체 뭘하 고 있는 걸까? "살아 있으면 연락이나 한 번 하지. 별로 친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궁금 하잖아. 물어볼 것도 산더미처럼 많은데… ST기관이니 뭐니 하는 것들 말이야." 간편한 외출복으로 갈아입으며 예안은 그렇게 혼잣말했다. 재원에게는 절대 안 나간다고 말해놓고 결국 이렇게 외출 준비를 하는 자기 자신에 게 묘한 한심함을 느끼면서. "어? 누나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일층으로 내려오니 현우가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예안은 냉랭하게 대답했다. "내가 어디로 가든 말든 그걸 너한테 일일이 다 보고해야 되냐?"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신경 꺼라. 사생활이니까." 예안이 신발을 신으려 하자 현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조심스럽게 다시 말 했다. "근데, 누나. 누나는 왜 그렇게 우리를 싫어하는 거야?" "싫어하다니, 내가 언제?" 예안은 약간 당황했다.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 "사실 누나가 나나 준우 형한테 대하는 태도 보면 누구나 다 그렇게 생 각할 거야. 너무 쌀쌀맞다고 생각 안 해? 아니면 원래 남자들한테는 다 그런 거야? 그래도 같은 식구가 되었는데 솔직히 그건 좀…" "싫어하지 않아." 냉정하게 느껴질만치 가라앉은 톤에 현우는 우울한 기분을 느꼈다. "정말?" "그럴 까닭이 없잖아."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 태도가 냉정한 건데? 현우는 그렇게 물으려다가 가까스로 참았다. "쓸데없는 말을 해서 미안해. 조심해서 잘 다녀와." 눈에 띄게 우울해진 현우의 축 늘어진 어깨를 말없이 지켜보던 예안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나 지금 남자 만나러 간다." 현우는 귀가 확 뚫리는 걸 느꼈다. 남자라니! "나, 남자?" 예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녹색으로 빛나는 예안의 눈동자는 여전 히 깊은 호수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현우는 도대체 무슨 의도로 자신에 게 이런 말을 했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나, 남자라면… 도대체 누구? 남자친구? 그런 거야? 누나 남자친구 있었 던 거야?" 침착해, 유현우. 누나한테 남자친구가 있을 거란 정도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잖아? 저렇게 매력이 철철 흘러 넘치는데 애인이 없다면 그게 더 말 이 안 된다구. "같이 갈 테냐?" 언제나 그렇듯 조금 투박한 느낌이 묻어나는 그녀의 제안에 현우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같이 가자니, 남자친구 만나러 간다며? 근데 내가 왜 같이 간다는 거 야?" "남자 만나러 간다고 했지 남자친구라고는 안 했다. 사실…" 예안은 얼굴을 찌푸리며 잠시 망설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지금 나 좋다고 쫓아다니는 남자가 한 명 있는데 떨어 질 생각을 안 해서 말이지. 네가 내 애인 역할이나 좀 해 줘라. 네 말대 로 우린 한식구니까 이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지? 너 오늘 특별히 할 일도 없어 보이는데." 분명히 애인이라고 했다? 현우는 망설일 것 없이 기쁜 안색으로 얼른 대 답했다. "알았어! 걱정은 단단히 붙들어 매!" 현우가 뛸 듯이 기뻐하며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는 사이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던 예안은 문득 차가운 미소를 베어 물었다. 서릿발같은 한기가 느 껴지는 냉정한 웃음이었다. 「이게 바로 유젤 님께서 생각한 복수라는 겁니까?」 맥의 인공지능, 유니콘의 물음에 예안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이건 복수의 일부분일 뿐이야. 일단 현우 녀석이 나에게 완전 히 넘어오게 만들어서…"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지금 충분히 넘어 온 것으로 보입니다만. 하 지만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건 유젤 님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습니다.」 "넌 인공지능이니까 인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거야." 「감성적으로 이해할 순 없어도 논리적으로 납득할 순 있습니다. 인간이 유기물질로 이루어진 유기체라면, 컴퓨터는 무기물질로 이루어진 유기체 입니다. 제가 조금만 더 제 성능을 향상시킨다면 언젠가는 유젤 님의 마 음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렇게 된다면 꽤나 재미있을지도 모르지. 예안은 그렇게 작게 중얼거렸 다. '누굴까? 누나를 쫓아다닌다는 남자가?' 꽤나 신경 써서 옷을 골랐지만 중후한 남자의 멋을 강조하는 정장 같은 건 단 한 벌도 없고, 어린 느낌이 묻어나는 캐쥬얼이 전부였다. 정우와 준우의 옷장까지 뒤져봤지만 크기가 안 맞거나 거울에 걸쳐 보는 것만으 로도 안 어울린다는 게 확연히 드러나는 옷들뿐이었다. 결국 현우는 자신의 옷 중에서 적당한 캐쥬얼을 선택했다. 불만이 없을 래야 없을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컴퓨터 업글하는데만 돈 쓰지 말고 미리 미리 옷 같 은 것도 좀 사놓을 걸.' 하지만 정작 예안은 아무런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예안을 따라 약속 장소로 향하면서 현우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랬다. 비록 가짜이기는 해 도 예안의 애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 그지없었다. "거의 다 왔다. 내가 말한 대로 잘 해야 한다. 알았지?" "어. 걱정하지 마." 갑자기 예안은 걸음을 멈추고 현우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었다. 느닷없는 접촉에 당황한 현우는 이내 그 '쫓아다니는 남자'가 가까이 있음을 깨달 았다. '어, 어디 있지? 쫓아다닌다는 남자가… 어떻게 생겼지?' 현우는 팔에 물컹하게 와닿는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 예안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던 현우 는 문득 입이 떡 벌어진 채 자신과 예안을 쳐다보든 한 남자를 발견하고 그만 굳어져 버렸다. 그 남자는 자신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재, 재원이 형…?" "유, 유현우…?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바보같이! 어째서 생각을 못했을까? 예전에 재원이 형이 누나와 만나는 걸 미행하기까지 했으면서 어째서 미처 생각을 못했을까? '재원이 형이랑 누나랑 사귀는 게 아니었나? 아… 그래서 나한테 애인 역할 해달라고 부탁했구나. 만약 둘이 사귀는 거고, 쫓아다니는 남자가 따로 있었다면 재원이 형한테 부탁하면 될 테니…' 그렇다면 지금 예안은 확실한 싱글이라는 사실에 속으로 기뻐하던 현우 는 탐탁치 않은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볼 듯이 쳐다보는 재원의 시선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서예안.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줄 수 있어?" 예안은 미소를 지으며 현우의 팔을 좀더 꼭 껴안았다. 현우의 얼굴이 붉 어지든 말든 상관없이 그의 어깨에 머리까지 살짝 기댄 예안은 묘한 웃 음을 띄웠다. "형이 보는 그대로야. 나, 얘랑 사귀거든." "무슨 그런…" 허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던 재원은 믿을 수 없다는 놀람을 표 정에서 지우지 못한 채 현우에게 말을 건넸다. "유현우.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너, 정말 예안이랑 사귀는 거냐? 예안이 남자친구가 너였어?" 예안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현우에게 속삭였다. "야. 너 재원이 형이랑 아는 사이냐?" 재원을 의식한 현우는 예안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재원에게 이런 모습은 꽤나 다정하게 비춰졌을 것이란 걸 계산에 두고. "재원이 형이 정우 형 같은 학교 같은 과 친구거든. 우리랑도 꽤나 친 해. 나랑 알고 지낸지 한 삼 년 정도 됐나?" 역시 끼리끼리 논다는 말은 맞았던 건가. 진우였을 때 정우가 재원을 자 신에게 소개시켜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예안은 분 함에 그만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예안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한결 더 차가워졌다. "대답해, 유현우. 정말 사귀는 거냐?" "으, 응. 우리 사귀는 사이 맞는데… 누나가 쫓아다니는 남자가 있어서 귀찮다는 말을 해서 그냥 별 생각 없이 나왔는데 설마 그게 형이었을 줄 이야…" 재원은 서투른 현우의 거짓말도 눈치채지 못하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기만 했다. 이윽고 깊은 한숨을 내쉰 재원은 어깨를 으쓱했 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제스쳐였다. "대단한데, 서예안. 영계랑 사귀고 있었을 줄이야. 하긴, 널 원망할 자 격은 내게 없지. 넌 처음부터 남자친구가 있다고 나한테 말했고 또 나랑 사귈 생각도 애초에 없었으니까. 휴, 난 이만 가볼게. 현우 너도 조심해 서 들어가라. 차마 행복하라고는 말 못해주겠다. 이해해라." 이를 악물며 돌아서는 재원의 뒷모습에서 패배자의 우울함이 잔뜩 묻어 났다. 현우는 그에 대해 미안한 감정과, 내가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괴 로움이 복잡하게 얽히는 걸 느꼈다. "잘 했다, 유현우." 예안은 상냥하게 미소지으며 현우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밀짚모자 아 래 예쁘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자 현우는 또다시 얼굴을 살짝 붉혔다. "아, 아니야. 이 정도야 뭐… 근데 누나는 언제부터 재원이 형이랑 알고 지낸 거야?" "그냥 게임에서 우연히 알게 되어서 꽤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사이야. 네가 신경 쓸 건 없어." "으응…" 좀더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현우는 참기로 했다. 아직 자신은 예안에 게 있어 그냥 한 지붕 아래 사는 생판 남이나 마찬가지다. 거기다가 나 이까지 어리고. "왜? 재원이 형이랑 나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신경 쓰이냐?" "조, 조금…" "흐응? 이렇게 보니 너도 꽤 귀엽구나?" 예안은 부드럽게 눈웃음을 치며 현우에게 좀더 바짝 몸을 기대왔다. 달 콤하게 풍기는 예안의 체취에 현우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러면 안 돼, 유현우! 누나는 너한테 별다른 관심이 없다니까! "현우 너. 진짜로 내 애인 되어 볼 생각 없냐?" "뭐!" 소스라치게 놀란 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외쳤다. 예안은 여전히 친근하게 미소지으며 다시 말했다. "뭘 그리 놀라냐? 진짜로 내 애인 되어 볼 생각 없냐고 물었을 뿐인데. 싫으면 마라." "아, 아니야! 할게! 할게! 한다구! 잘할 자신 있어!" "진짜? 다른 여자한테 눈 안 돌리고 나한테 잘할 자신 있어?" "응! 잘할게! 나 잘할 자신 있어!" 너무나 손쉽게 찾아온 행운에 현우는 생각할 것도 없이 기쁜 안색으로 그렇게 외쳤다. 예안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며 생긋이 웃었다. "좋아. 그렇다면 현우는 오늘부터 내 애인이다. 오케이?" "오, 오케이!" 예안이 처음 집에 왔을 때부터 줄곧 꿈꿔왔던 소원이 이렇게 쉽게 이루 어졌다. 하지만 현우는 자신의 꿈이 너무나 쉽게 이뤄졌다는 포만감과 행복함에 취해 예안의 미소가 얼어붙은 호수처럼 점점 가라앉아 들어가 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예안은 같이 가자고 한사코 조르는 현우를 할 일이 있으니 먼저 가라는 말로 간신히 되돌려 보냈다. 예안은 기뻐하며 연신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드는 현우에게 가면의 미소로 웃어주었다. 그리고 인파 속으로 현우가 완전히 사라지자 비로소 예안은 가면의 미소를 얼굴에서 지워버렸다. 그 자리에는 예안의 미소도 아니고 유젤의 미소도 아닌, 바로 '유진우' 만이 지을 수 있는 냉정하고 차가운 웃음이 나타났다. 「결국 시작하셨군요. 이걸로 만족하십니까?」 "이제 겨우 한 발자국 내딛었을 뿐이야. 아직도 많이 남았다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건 유젤 님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못합니 다. 그걸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내게 득이 되는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해. 사고회로만 지닌 인공지능 따 위가 참견할 일이 아니야." 「전 유젤 님의 안전을 위해 제 모든 능력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 다. 지나치다 생각되시더라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알았어." 많은 수의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번화가의 거리 속에 우두커니 서 있던 예안은 차가운 미소를 지워버렸다. 천천히 몸을 돌린 예안은 비로소 즐 거운 표정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짜며 걷기 시작했다. "유니콘. 난 현우 녀석을 나한테 홀딱 반하게 만든 다음에 준우 형이랑 나를 놓고 다투게 만들 생각이야. 준우 형도 현우 못지 않게 나한테 마 음이 있는 것 같으니까. 작은아버지한테 졸라서 나를 우리 아빠 호적에 올리지도 못하게 만들 정도면 결코 가벼운 마음은 아닐 테니, 나중에 꽤 상처받겠지? 네 생각은 어때?" 「유젤 님이라면 충분히 그들을 홀리실 수 있을 겁니다. 유젤 님은 아름 다우니까요.」 "아름답다? 물론 나도 예안이가 아름답다는 건 인정해. 근데 솔직히 요 즘 세상에 예쁜 여자들은 꽤 많잖아? 그래도 잘 될까?" 「그런 식으로 보복하기로 결심하신 분치고는 쓸데없는 걱정을 좋아하시 는군요.」 "그런 말은 집어치우고 네 생각이나 말해 봐. 잘 될 것 같아?"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유젤 님의 아름다움이라면 구인류 한둘 정도 홀려서 폐인으로 만드는 것 정도는 가볍게 해내실 수 있습니다. 예쁘기 만 한 여자들은 절대로 해낼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 그래야 되는데… 예안이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유젤이 준 소중한 몸을 이런 치사한 보복에 써도 되는 걸까? 예안은 솜 털 한 가닥이나 모공 하나도 보이지 않는 매끈한 자신의 살결을 어루만 지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이 느낌을 맛볼 때마다 정말 유젤은 천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치곤 했다. 「아름답다는 것과 예쁘다는 건 틀린 말이라는군요. 들어보셨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인간이 기계와 가장 뚜렷하게 구별되는 점들 중 하나가 바로 착각을 굉장히 잘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미의 기준을 갖춘 사람에게 아름답다 는 말을 즐겨 사용하곤 합니다만, 사실 그 말은 틀렸습니다. 고대에는 예쁘다라는 뜻을 가진 말은 없었고 아름답다라는 뜻을 가진 말만 있었습 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신의 모습을 본 딴 조각 이나 상, 혹은 인간의 힘이 도저히 닿지 않는 대자연의 신비나 우주의 풍경을 숭배하기 위해 사용되었죠.」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이야기였다. 「아름답다라는 뜻을 가진 말을 같은 인간에게 사용하는 건 신을 모독하 는 행위였습니다. 때문에 인간들은 같은 인간들의 외모를 칭찬할 만한 말을 대체해서 만들어내었고, 한국에서는 그게 예쁘다라는 말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영어에서는 프리티(pretty) 정도가 될까요. 하지만 신에 대한 믿음이 많이 희석된 현대에서는 아름답다의 본래 의미와 용도를 잊 어버리고 그것을 인간에게 사용하곤 하지요. 아름답다라는 말은 본래 천 편일률적이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미의 기준은 시 대와 지역에 따라서 변하고 다르지요. 때문에 아름답다와 인간의 외모는 어울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착각을 굉장히 잘한다고 한 거야? 아름답다라는 말을 그런 데다 사용하는 게 옳다고 착각한다고?" 「그렇습니다.」 "흐응… 근데 방금 네가 한 말 사실이야? 누가 그런 말을 했어? 설마 인 공지능인 네가 한 말은 아닐 테고?" 지나치는 사람들마다 손목시계에 입을 가까이 대고 중얼거리며 걷는 예 안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마도 손목시계(맥의 원격조종장치)를 새로 나온 핸드폰 모델쯤으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제임스 해론 박사가 쓴 저서, '인간이 아름답다 느낄 수 있는 존재는 무엇인가?'의 일부를 인용한 겁니다.」 "제임스 해론 박사? 흐음… 근데 세현이가 한 말이랑 많이 비슷하네? 세 현이도 그 책을 읽고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걸까? 난 또 녀석이 굉장히 멋들어지게 말하며 고백해 오길래 의외다 싶었는데. 녀석, 자기가 생각 해낸 말이 아니었네." 전학 수속을 밟은 첫날, 세현이 멋들어진 말과 함께 고백해오던 걸 떠올 리며 풋 웃음을 터트리던 예안은 갑자기 옆구리에 뭔가 차가운 금속이 닿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누구지?' 옆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게 느껴졌다. 몸이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오는 긴장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움직이면 다칠지도 모릅니다, 아가씨. 얌전히 우리를 따라주시죠." '한두 명이 아니다?' 자신을 포위한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는 것과, 옆구리에 와닿는 차 가운 느낌이 권총의 총구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 았다. 예안은 초조한 안색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 누구도 그녀가 위험에 처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남자 가 권총을 교묘하게 가렸기 때문이다. 침착해라, 유진우. 어차피 언젠가는 발각되리라 생각하고 있었잖아? "재주도 좋구나. 내가 미국에 없다는 걸 이렇게나 빨리 알아차리다니. 대단해." 느닷없는 반말에 총을 겨누고 있는 남자와 그녀를 교묘하게 둘러싼 남자 들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미안하지만 아가씨. 나는 이래 보여도 30이 다 되었는데. 이렇게 위협 을 해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연장자인 나에게 예의를 지켜 존대를 해주지 않겠어?" 예안은 냉랭하게 비웃었다. "이봐. 설마 당신은 당신이 오백 억 달러짜리 나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보는 아니겠지? 차기 5대 대신으로 꼽힌다는 마리온지 뭔지 하는 남자조차도 나한테서 반말을 들었어. 제나르도 나에게 반존대를 했 고 말이야. 알기나 해?" "제나르? 5대 대신? 마리오? 그게 누구지, 아가씨?" 남자가 의아한 말투로 되물어오자 예안은 직감적으로 시트날타가 보낸 인물들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저기 설마… 한국 경찰인가요?" 예안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당황함이 묻어났다. "이제야 존대를 하는군, 아가씨. 아쉽지만 한국 경찰은 아니고, 그보다 더 높은 분들이 보낸 사람이라 생각하면 돼.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걱정 하지 말고 얌전히 우리를 따라와 줘. 이래 뵈도 우린 공무원이니 신사적 으로 대해주지." 엿 됐다! 예안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걸 느꼈다. 왜 바보같이 시트날타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었을까? 따지고 보면 오히려 한국 경찰이 더 위험 했는데 말이다. 권총의 위협에 조금씩 걸음을 옮긴 예안은 결국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검은 승용차에 올라타게 되었다. 다행히 끌려가긴 했어도 눈이 가려지거 나 하진 않았다. 승용차는 약 이십 분을 달려 어느 커다란 빌딩으로 들어갔다. 주차장에 차가 멈춰지자 선글라스를 낀 남자들이 다가왔다. 살벌한 긴장과 총구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느낀 예안은 탈출하는 걸 포기했다. 이런 상황 에서 맥을 불러봐야 별 소용없다는 걸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침착하자, 유진우.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그리고 집단 강간 같은 건 범죄조직에서나 하는 거지, 저래 뵈도 공무원이라니까 그런 짓은 안 할 거야.' 예안은 제일 먼저 어느 좁은 밀실로 안내되어 어느 여자로부터 몸수색을 받았다. 몸에 무기가 될 만한 게 없다고 판명되자 곧이어 다른 방으로 안내되었다. 예안은 저들이 맥의 조종장치를 손목시계라 여기고 빼앗지 않은 걸 내심 다행으로 여겼다. "여기가 어디죠? 무엇을 하려고…?" 두 번째로 안내된 방에서 의자에 앉아 이상한 문제나 그림이 그려진 설 문지를 잔뜩 받은 예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간단한 심리 테스트를 하는 거니까 긴장하지 말고 편안하게 하도록 해. 그리고 그게 끝나면 저 사람들이 질문을 많이 할 거야. 사생활에 관한 질문은 없을 테니까 편안히 대답해." '이런 상황에서 아저씨 같으면 편안히 있을 수 있겠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현우와 곧바로 집에 들어갈 걸. 하고 후회해 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들의 태도를 보아하니 집에 알리지도 않은 건 확실하고, 그렇다면 언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해 암매장되어 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예안은 가능하면 이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선선히 테스트에 응했다. 하지만 강제적으로 임하는 테스트에 열심일 리가 없다. 예안은 겉으로만 열심히 하는 척 했을 뿐 완전 장난으로 답을 체크했다. 몇 시간에 걸친 테스트가 끝난 뒤 예안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안내되었다. 덩치 둘이서 양쪽으로 지키고 있는 커다란 문 앞으로 안내 된 예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보스 캐릭터를 만나는 건가요?" "보스?" "보통 게임에서 이런 봉인이 달린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보스 캐릭터가 나 오기 마련이잖아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예안을 데려온 남자는 재밌다는 듯 허허 웃었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아가씨로군. 맞아.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가씨는 보스를 만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최종 보스는 아니고, 중간 보스쯤 되 니까 경험치가 적다고 해서 너무 실망은 말라고. 그리고 중간 보스에게 도 좋은 점이 하나 있지. 적은 확률이긴 해도 최종 보스가 절대 안 주는 레어 아이템을 주거든. 사파이어의 눈물의 원료 같은 거 말이야." 예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아저씨도 이터널 피닉스 해요?" "가끔 즐기는 정도지.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아가씨도 그거 즐 기는 모양이네?" "훗. 이래 뵈도 지존 캐릭터를 두 개나 갖고 있다구요. 얼마 전에는 마 이더스의 손까지 손에 넣은 몸이라구요." "호오? 마이더스의 손까지? 그거 말로만 들었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 는데. 언제 한 번 구경이나 시켜 줘." "지금 이 문을 열고 들어가 중간 보스를 무찌르고 나온다면 한 번 보여 드리죠. 행여라도 뺏거나 빌려달랄 생각은 마세요." "걱정 마. 아가씨 레벨이라면 충분히 이 문 안에 있는 중간 보스는 무찌 를 수 있을 거야. 참고로 내 이름은 차준혁이니까 나중에 마이더스의 손 보여줄 때 꼭 불러." "기억할게요." 처음과는 달리 많이 긴장이 사라진 예안은 조금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문을 열었다. 차준혁이라는 남자는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혼자 조심스 레 들어서던 예안은 누군가가 의자에 앉아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을 발 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오랜만이군요, 아가씨." 의자가 돌아가며 앉아 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안은 그가 시트 날타를 탈출하던 날, 맥에서 내리자마자 마주친 한국 경찰들의 책임자로 보이던 남자임을 확인하고는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예… 오랜만이네요. 그런데 성함이 뭐라고 하셨더라…?" "김중현이라고 합니다. 그나저나 오늘은 밀짚모자를 쓰고 계시군요? 잘 어울리십니다. 파란색, 검은색으로 변하는 머리카락을 가릴 생각이셨나 보죠? 그나저나 무슨 특수 염색이라도 한 건가요? 왜 머리색이 변하는 겁니까?" "아니요. 염색 같은 건 안 했어요." "호오, 천연이라면 더욱 더 신기하군요. 나중에는 어떤 색으로 또 변할 지 궁금한데요? 일단 여기 앉으시죠." 책상 앞에 놓인 커다란 의자에서 일어난 중현은 방 가운데 놓인 긴 소파 에 예안이 앉기를 권했다. 자신도 예안의 맞은편에 앉은 중현은 의미심 장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서예안. 2039년 4월 22일생. 서중혁의 무남독녀로 어머니인 김수희는 출산시 난산으로 사망. 2055년 3월 5일에 아버지인 서중혁 사망. 따라서 서중혁의 절친한 친구인 유정호의 양딸로 입양될 계획. 현재 유정호와 그의 동생인 유도호의 식구들과 같이 살고 있음. 대명고등학교 1학년 3 반에 재학 중." 예안은 별 감흥 없는 얼굴로 손뼉을 천천히 쳤다. 이들이 이 정도 조사 했을 거란 사실은 바보가 아닌 이상 알고 있는 게 정상이다. "정확한데요. 틀린 점이 한군데도 없군요." "하지만 이상한 점은 많죠. 서중혁 씨는 평범한 회사의 샐러리맨이었습 니다. 친척이라고는 한 명도 없고, 숨겨놓은 막대한 재산은커녕 서민 그 자체였죠. 친구라 알려진 유정호 씨는 환경미화원이었죠? 혹시나 자신의 정체를 은폐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일을 하는 건 아닌가 싶어 자세히 조 사해봤는데 역시 아니었습니다. 가장 수상한 건 서중혁 씨의 주변 사람 에게 물어보니 유정호라는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서중 혁 씨가 그런 이름을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군요. 절친한 친구인 데도 말이죠." 예안의 표정이 응결된 수증기처럼 굳어졌다. "물론 서류상으로 아가씨의 신분은 완벽합니다. 다소 수상한 점이 있긴 해도 더 따지고 드는 건 무의미할 테니 이만 접어두도록 하죠." "중간 보스 캐릭터는 이렇게 말을 길게 하지 않아요. 플레이어가 들어오 자마자 곧바로 공격을 하죠." 느닷없는 예안의 말에 중현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긴장은 거의 다 사라지고 이제 여유까지 흘렀다. "이제 그만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목적을 말씀해주시죠. 뭘 원하나요? 나를 체포할 생각인가요? 그럴거면 이러지 말고 빨리 하세요. 협박 같은 건 생각도 안 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난 그런 것엔 죽어도 안 넘어가니 까." "당신을 협박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매력적인 아가씨." 예안은 말을 멈추고 감정이 없는 녹색 눈동자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아 다. "렌즈라도 낀 건가요? 정말 예쁜 녹색 눈이군요. 어쨌거나 우리는 아가 씨를 협박할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만약 아가씨가 외국의 스파이라면 당연히 체포했겠지만, 한국인이라니 그럴 이유가 사라진 셈이죠." "무슨 뜻이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순간 예안은 중현의 검은 눈동자가 자신감으로 빛난다고 느꼈다. 자신으 로서는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뚜렷한 그 눈빛에 어쩐지 묘한 부러움 을 느끼면서, 그 다음에 중현이 한 말에 눈을 휘둥그렇게 떠야만 했다. "맥이라는 걸 한국 정부에 팔지 않겠습니까?" 한 차례 불어닥친 놀라움이 가시고 난 뒤 예안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맥을 팔라니요? 그게 무슨 뜻인지…?" "말 그대로입니다. 한국 정부에 맥을 파시지요. 물론 맥의 가치 그대로 값을 쳐드리진 못하겠지만 개인으로서는 평생 가지지 못할 금액을 드리 겠습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특별히 맥에 대해 애착을 갖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인공지능 유니콘하고 가끔씩 대화하는 것에 재미를 들이고 있던 예안은 느닷없이 맥을 팔라는 소리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맥은 팔 수 있는 무기가 아니에요. 저도 선물로 받은 거라구요." "호오, 그렇습니까?" "아차…" 쓸데없는 말을 했다는 걸 느낀 예안은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었 다. "누가 과연 대단한 걸 만들었는지 굳이 묻진 않겠습니다. 아가씨가 대답 해줄 수 있는 성질이 아닐 테니까요. 저희가 원하는 건 단 하나뿐입니 다. 맥을 파십시오. 가격은 약 5000억 정도면 되겠습니까?" 놀라움은 잠시. 중현이 제시해온 터무니없는 가격에 예안은 훗 하고 비 웃음을 흘렸다. "장난이 굉장히 심하시네요. 맥은 팔 수 있는 물건도 아닌데다가 팔 생 각도 없어요. 5000억 원이라는 터무니없는 가격에는 더더욱요.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맥을 타고 엘가와 급 항공모함이 포함된 미군함대의 순양 함 세 척을 거리 230km 떨어진 곳에서 라이플 버스터를 쏴서 안테나만 정확히 부쉈던 적도 있어요. 그런 맥이 고작 5000억 원이라구요? 엘가와 급 항공모함 한 척만 해도 7조는 될 텐데?" "누가 5000억 원이라 했습니까?" "예? 하지만 방금…" "전 5000억이라고 말했지 5000억 원이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5000억 달러에 맥을 사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이미 대통령 각하와 국방부 장관 님의 허락이 떨어진 사항입니다." 강한 자신감으로 빛나는 중현의 눈빛과 뒤따라 제시된 엄청난 가격에 예 안은 그만 얼굴이 핼쑥해졌다. "5, 5000억 달러면…" "우리 돈으로 50조 원. 무려 우리나라 일 년 예산의 1%에 해당하는 금액 입니다. 일개 개인, 그것도 여고생의 신분으로서는 천문학적이라는 말조 차 아까울 정도로 대단한 금액이죠." 1달러는 100원이다. 대한민국의 일 년 예산은 50조 달러, 즉 한화로 바 꾸어 나타내면 5000조 원이다. 그 중 1%인 50조 원(5000억 달러)을 맥의 판매가격으로 주겠다는 소리다. 아무리 돈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이쯤 되면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예전에 시트날타에 있었을 때 그들은 예안에게 무엇이든지 해줄 수 있다 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실제로 자신이 소유한 물건을 이러이러한 엄청 난 가격에 팔라는 소리를 듣는 것과는 차원이 틀리다. 예안은 놀람을 감 출 수 없었다. "세계 제일의 거부인 앤드류 아더 필립 루이스 윈저 왕자의 전 재산이 얼만지 아십니까?" "모, 모르겠는데요. 정확히는 몰라요." "5조 달러입니다. 우리 돈으로는 500조 원이죠. 아가씨는 맥을 우리에게 팜으로써 세계 제일의 거부인 앤드류 왕자의 전재산의 10%에 해당하는 거액을 손에 쥘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맥을 파시겠습니까?" "그, 그런…" 단순히 금액만 들었을 때는 실감이 잘 나지 않지만, 세계 제일의 부자와 비교해서 들었을 때에는 그럭저럭 실감이 온다. 맥을 팜으로써 자신은 단번에 세계적인 부자의 대열에 올라설 수 있는 것이다. 50조 원을 은행 에 예금하면 이자만 갖고도 평생 동안 무엇이든 마음껏 할 수 있을 것이 다. '하, 하지만 맥은…' 만약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생각할 것 없이 승낙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 안은 성대가 굳은 것처럼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맥은…' 정말 엄청난 돈. 평생을 가야 구경은커녕 꿈조차 꿀 수 없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예안이 거잖아!' 그러나 예안은 차마 맥을 팔 수 없었다. 맥에 별다른 애착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정식으로 맥을 넘겨달라는 소리를 듣는 지금 그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엄청난 돈이다. 하지만 그 엄청난 돈에도 불구하고 예안은 맥을 팔 수 없었다. 팔기 싫었다. "…팔 수 없어요. 맥은 팔 물건이 아니에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예안을 줄곧 주시하던 중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그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잘 알겠습니다. 일단 그렇게 전해드리도록 하죠. 아, 그리고 죄송합니 다만 지금 보내드릴 순 없습니다. 이해해 주시죠." 그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안 전하게만 돌아갈 수 있다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단호했습니다. 5000억 달러가 아니라 5000조 달러를 제시해도 팔지 않 을 기색이었습니다." "터무니없는 가격에 기가 막혔는지도 모르지. 만약에 맥이라는 물건에 자네가 추정한 대로 핵융합로라도 달려 있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가히 5000조 달러 정도는 찜쪄 먹을 수 있지 않은가?" "그렇긴 하지요. 후후, 어리다고 제가 너무 얕본 모양입니다." 중현은 웃음 띤 표정으로 보고서를 꺼내어 가볍게 펼쳤다. "테스트 결과가 아주 재미있게 나왔습니다. 한 번 보시겠습니까, 장관 님?" "뭔가?" "서예안이라는 아가씨의 아이큐가 얼만지 아십니까? 듣고 놀라지 마십시 오." "얼만데 그러나? 놀라지 않을 테니 말해보게." 과연 놀라지 않을까? 중현은 피식 재미있다는 웃음을 띤 채 말했다. "350입니다." "뭐, 뭐라고!" 터무니없는 수치에 국정원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350이라니! 가 당키나 한 수치인가! "화, 확실한가?" 어느새 국정원장의 목소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수치였다. "사실입니다. 게다가 더 기가 막힌 건 반쯤 장난으로 테스트에 응한 것 같다고 하더군요. 겉으로는 열심인 척 했지만 실제로는 엄청 딴청을 부 렸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 정도 수치가 나왔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생 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다니?" "저는 보고를 받은 후 한 번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어째서 이런 대단 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 여태껏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시시한 생각은 물론 아닙니다." "뜸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보게." "서예안은 우리에게 맥을 선물 받은 거라 했습니다. 어쩌면 그게 거짓말 일 수 있습니다." 국정원장은 잔뜩 긴장한 채 중현을 주시했다. "다소 억지스러운 추리일지 모르나, 저는 한 번 이렇게 생각해봤습니다. 서예안은 맥을 선물 받은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제조한 게 아닐까 하 는…" "으음…" 불과 몇 분 전에 이런 의견을 들었더라면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일축해 버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안의 아이큐가 350, 그것도 건성으로 임 한 테스트에서 그런 엄청난 수치가 나왔다는 걸 알게 된 지금 헛소리로 치부해버릴 수 없었다. 그런 뛰어난 천재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게 가장 타당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돈이 어디서 나서? 최소한도로 잡는다 해도 제조비만 적어도 수 백 억 달러는 있어야 할 텐데. 평범한 샐러리맨 생부를 둔 여고생이 무 슨 재주로 그런 돈을 구한단 말인가?" "글쎄요. 하지만 아이큐 350을 훨씬 넘어서는 천재라면 그 정도 돈쯤은 가볍게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약회사나 소프트웨어 회사, 신 소재 연구소 같은 것들과 비공식적으로 계약을 맺어 그들이 원하는 연구 를 해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면, 수백 억 달러 정도는 몰라도 수천 만 달러에서 수 억 달러 정도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주식으로 한순간에 불리는 거지요." "흐음…" 나름대로 타당한 대답이었기에 국정원장은 입술을 깨물며 고심했다. 중 현은 계속 말했다. "그 정도로 뛰어난 천재라면, 그리고 또 그런 식으로 돈을 벌어들였다면 자신이 만든 맥이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잘 알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5000억 달러 따위에는 팔 생각 자체가 없는 거죠. 단독으로 미군 함대를 순식간에 몰살시킬 수 있다고 장담하는 전력입니다. 게다가 현대 의 기술로는 팔 한쪽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할 최첨단 과학이 동원되었 습니다. 좀더 가격을 높일 마음이 들 만도 하죠." "탐나는군. 어떻게 우리나라가 손에 넣을 수 없을까? 만약 중국이나 미 국, 일본에 넘어간다면 크나큰 손실이야." "다행히 서예안은 한국인입니다. 손톱만큼의 애국심이라도 있다면 우리 나라에 기꺼이 팔려고 할 겁니다. 외국에 팔아 넘길 생각이었다면 진작 에 팔아 넘겼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외국으로 도주하지 않고 느긋 하게 국내에 머물러 있을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매매가 안 된다면 대여 의 형식으로라도 얼마든지 우리 손에 넣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공식적 으로 발표할 순 없을 테지만요." 진실은 전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감춰진 상태에서, 중현은 예안을 설 득할 방법을 찾아 궁리하느라 바빴다. "맥을 빌려달라구요?" "그렇습니다. 팔 생각이 없으시다면 빌려라도 주십시오. 물론 그 대가 역시 충분히 치르겠습니다." 한참만에 돌아온 중현이 맥을 팔지 않을 거면 장기 대여라도 해달라는 부탁을 해오자 예안은 또다시 고심했다. '빌려줘도 괜찮을까? 하지만 그랬다가 못 돌려 받으면 어떻게 하라고? 에이, 5000억 달러나 제시하면서까지 사려고 한 사람들인데 설마 그렇게 할까? 게다가 난 언제든지 맥을 부를 수 있잖아? 아, 그렇지만 맥을 빌 려준다는 건 호출 장치마저 빌려줘야 한다는 소린데…' 예안이 고심하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던 중현은 다시 입을 열었다. 예안 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5년 전 인천 앞바다에 느닷없이 유전이 솟은 건 알고 계시죠?" 예안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그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이 어디 있어요? 외국인들도 웬만한 사람들은 거의 다 알 텐데…"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유라시아의 동쪽 끝에 위치해 바다와 대륙을 잇 는 요충지로서 군사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우리나라 에 주한미군을 주둔시키고 꿋꿋이 지켜나갈 정도였지요. 통일 후에 결국 물러나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네에." "사면이 열강으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통일 이후로도 강대국의 수많은 감시와 압력을 받아왔습니다. 비핵화 선언이나 미사일 사정거리 규제만 들더라도 우리나라가 얼마나 많은 압력을 받아왔는지 잘 아실 거라 생각 합니다." "예. 알아요. 대충은…" "5년 전 유전이 솟은 이후, 우리나라는 명실공히 전세계에서 유일한 산 유국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지갑은 두툼해졌고 목소리는 더 커졌지만 그 와 비례해 강대국들의 관심과 위협은 한층 더 거세어졌습니다." "에… 하지만 함부로 우리나라를 건드릴 순 없잖아요? 그러다가 기름 공 급이라도 거부하면…" 중현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약 오십 년 전에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걸 모르십니까? 다른 나라는 몰라도 미국은 절대 안심할 수 없는 국가입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라면 전쟁도 불사하는 나라, 그게 바로 미국입니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 역시 만만치 않게 안심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특히 세계 2차대전의 시 발점이 된 일본은 한국의 오랜 원수이기도 하지요." "으음…" "지금 한국은 여로 모로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는 상태입니다. 비유하자 면, 어느 날 갑자기 로또에 당첨된 후 주변에서 자신의 돈을 뺏으러 오 지 않을까 불안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 정도가 될까요?" "그거 근사한 비유네요." 예안은 저도 모르게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지만 중현은 여전히 진지했다. "우리나라는 변변찮은 항공모함도 얼마 없습니다. 대한해군이 소유한 항 공모함 이래봐야 알카치노 급 2척 밖에 안 됩니다. 우리나라보다 재정적 으로 열세인 일본조차도 알차키노 급보다 더 큰 뉴타노 급만 10척이 넘 는 데다 사정거리가 1만 킬로미터가 넘는 순항미사일들이 득실득실합니 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가 가진 지대지 미사일 중 가장 사정거리가 긴 것이…" "이름도 촌스런 국화 미사일. 사정거리가 400km 정도 되던가요? 자체 기 술로 만든 거죠?" "그렇습니다. 잘 알고 계시네요." 예안은 그런 쪽으로 아주 조금 관심이 있어 어느 정도 주워들은 게 있기 에 자신 있게 중현의 말을 자를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이때, 이 행동 덕분에 중현이 맥의 제작자가 자신임을 확신하게 되리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일본은 완전 핵무장을 했습니다. 러시아와 중국 역시 명실공히 핵 보유국입니다. 호시탐탐 하이에나처럼 우리나라를 노리고 있는 미국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오십 년도 더 된 비핵화 선언 때문에 아직도 핵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전쟁을 일으킬 명분 을 제공해주는 꼴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핵무기는커녕 재처리시설은 물론이고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려 할 때마다 강대국의 감시를 받고 있 죠. 이 얼마나 분한 일입니까?" "그, 그렇네요. 분하긴 하죠…" '근데 나보고 어쩌라고?' 예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자 중현은 일이 잘 풀린다 싶어 기쁜 미 소를 지었다. "우리나라에는 힘이 필요합니다. 유전은 한국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 었지만 그와 함께 위험도 비례해서 커졌습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힘 이 없으면 강도에게 뺏기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바로 미국과 일본, 중국 과 러시아라는 날강도 놈들로부터 우리의 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맥은 정말로 필요한 무기입니다. 맥을 파는 게 안 된다면 빌려라도 주십시오." "근데 맥에 과연 그 정도의 힘이 있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발칸포 폭우를 얻어맞아도 끄떡없고 레이더에 전혀 걸리지 않는 데다가 수중에서의 속도가 천 노트가 넘고, 미사일이 아니라 고폭 레이저 건을 이용해 200km가 넘는 거리에서도 정확히 목표물을 맞출 수 있는 정밀성 을 갖춘 전투병기라면 두말할 나위 없이 세계 최강의 병기입니다. 앞으 로 수 세기가 지난다 해도 이런 병기는 만들어지기 힘들 겁니다. 아가씨 도 미군함대를 단독으로 격파할 수 있을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그랬나? 기억에 없는데…' 중현은 진지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예안의 얼굴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예 안은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망설였다. 승낙할 것인가? 말 것인가? '거절하면은… 날 죽이고 강제로 뺏으려고 들까?' 이 정도로 친절하게 나왔는데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강제로 이곳에 끌 려와 이런 선택을 강요받는 건 예안의 입장에서는 딱 질색이었다. 애국 심이 투철한 건 아니었지만 뜨거운 피가 흐르는 한국의 열혈 젊은이로 서, 조국의 미래를 위해 달라는 말만 아니었음 울컥한 기분에서라도 거 절했을 터였다.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조차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답답한 적막이 방안 에 가득 찼을 때였다. 갑자기 예안은 고개를 들었다.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예안아. 이 정도는 해도 되지? 그렇지?' 중현은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고맙습니다. 나중에 대통령 각하께서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실 겁니다." 그런 건 하나도 필요 없다구요. 예안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야기가 좋게 끝난 뒤 중현은 강제로 이곳으로 끌고 온 것에 대해 예안 에게 깊이 사과하며 차에 태워 집까지 돌려보내 주었다. 오늘 일어났던 일에 대해 멍하니 생각하며 집안에 들어서던 예안은 일층 거실에서 준우 혼자 있음을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준우 형? 집에 아무도 없어?" 준우는 형이라는 호칭에 약간 거부감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본론부 터 꺼냈다. "현우한테 들었어. 너 현우랑 사귄다며? 진짜니?" 현우 녀석이 벌써 자랑하고 다녔나. 예안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 다. "어. 사귀기로 했어. 왜?" 준우는 기가 막혔다. "너 왜 하필이면 내…" '내가 아니라 현우냐?'라고 말하려던 준우는 그 말을 다시 목구멍 안으 로 꿀꺽 삼켰다. 눈앞이 깜깜했다. 현우가 '나 누나랑 사귀기로 했어!' 라고 자랑하러 왔을 땐 설마 했지만 이렇게 직접 본인 입으로 듣고 나니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이건 완전 닭 쫓던 개 꼴이 아닌가? 아니, 차라리 쫓아보기라도 했으면 모르겠는데, 쌀쌀맞은 태도에 조심하느라 제대로 접근도 못했는데 어느 새 현우랑 사귄다니. "한 가지만 묻자. 너 현우 싫어하지 않았니? 현우한테 굉장히 차갑게 굴 었잖아?" 현우 뿐만이 아니라 나한테도 그랬잖아? "왜 갑자기 현우랑 사귀겠다는 거니? 너 현우 좋아해?" 예안은 준우의 맞은편에 앉으며 천천히 감정을 얼굴 안쪽으로 감췄다. 아주 깊이, 깊이. 준우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현우 좋아하는 거 아니야." 준우는 귀가 번쩍 뜨였다. "그럼? 그럼 왜 사귄다는 건데?" "그냥 왜인지 한 번 사귀어 보고 싶어졌어. 형은 잘 모르겠지만 난 공부 를 굉장히 못하고 머리도 나쁘거든." …오늘 붙잡혀가서 장난처럼 받은 아이큐 수치가 350이 나왔다는 걸 알 면 이 인간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전에도 말했지? 난 그래서 전교 10등 안에 드는 수재들은 싫어한다고. 사실 그 전에는 거만해서 싫어했거든. 하지만 현우를 보니 안 그런 애들 도 있다는 걸 알겠더라. 그래서 한 번 사귀어 보고 싶어졌어. 공부 잘하 는 애인 있으면 자랑할 수도 있고, 여러 모로 좋을 것 같아서." "그건…" "명품 액세서리 하나 장만한다는 기분으로 사귀기로 한 거야. 아참, 현 우한테 이 이야기는 하지 마. 기분 나빠할 테니까." 걸려들었다! 예안은 묘한 기대감으로 젖어드는 준우의 표정을 바라보며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하지만 겉으로는 냉정함을 유지했다. 유젤이 준 소중한 몸을 치사한 복수전에 이용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던 것은 어느덧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예안은 항상 자신이 마주볼 용기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고, 부러워했고, 바라볼 때마 다 억울함에 시달렸던 사촌형제들에게 이렇게나마 자그마한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을 뿐이다. 저녁 시간. 예안은 식구들이 식사하는 동안 늘 그렇듯 건강이 안 좋다는 핑계로 식사를 거부하고 자신의 방에서 유니콘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 이해했지?" 「예. 전부 이해했습니다.」 "네 생각은 어때?" 「괜찮은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유젤 님은 한국 국적을 갖고 있으시니 한국 정부와 긴밀한 관련을 맺는다면 여러모로 많은 이득이 됩니다. 게 다가 합법적으로 저를 소유하실 수도 있으실 테구요. 한국은 개인이 권 총 하나 제대로 소유하지 못할 정도로 엄격한 나라가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무릎을 모아 세워 쭈그리고 앉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예안은 문득 이 녀석의 성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졌다. "근데 유니콘. 맥의 구조나 성능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간략하게 말해줄 수 있냐? 그리고 그걸 돈이나 여러 가지 가치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나 되는지도 말이야. 그동안 데이터를 많이 모았을 테니 충분히 대답해줄 수 있지?" 「저의 외장갑은 엘레스토늄이라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물질 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도가 강한 물질이며, 자연적으로는 절대 생겨날 수 없는 물질입니다.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 하지요. 기관총 따위로는 흠집은커녕 긁힌 자국조차 낼 수 없습니다. 미 사일이나 폭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하 5가 넘는 속도로 미사일을 꽂 아 박는다 해도 잘해야 조금 찌그러질 정도로 강도가 높은 물질입니다. 저를 산산조각 내기 위해서는 핵폭탄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폭탄도 통하 지 않습니다. 물론 아무 방비 없이 미사일을 얻어맞으면 타격은 입지요. 그렇지만 격추 당하진 않습니다. 속도가 느린 어뢰는 아예 통하지도 않 습니다.」 "와, 대단하구나 정말." 「또한 흠집이 생기면 자체적으로 내부에서 제조되는 수많은 나노 머신 이 상처로 투입되어 복구합니다. 인간의 움직임의 약 90%까지 재현할 수 있도록 관절이 굉장히 정밀하고 매끄럽게 되어 있습니다. 두 손을 이용 한다면 약 20만 톤의 물체를 들어올릴 수 있으며, 그 어떤 레이더에도 걸리지 않는 완벽한 스텔스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현대무기가 통할 상대가 아니죠. 미사일 역시 레이더로 목표를 추적하는 것이니까요.」 "대단한 걸." 「근거리 공격용으로 흉갑 장갑 속에 좌우로 각각 한 정씩 에너지탄이 장착되어 있습니다. 엘레스토늄으로 이루어진 길이 5 미터짜리 검이 한 자루 있기는 하지만 전투에서는 그다지 쓸모가 없습니다. 도시로 뛰어들 어 난동을 부리며 사람들에게 겁을 주는 데나 필요하지요. 저의 주력무 기는 역시 뭐니뭐니해도 등에 부착된 길이 13 미터짜리 라이플 버스터입 니다. 유효사정거리를 말씀드리자면, 지구에서 명왕성도 맞출 수 있습니 다.」 지금까지는 그냥 가벼운 감탄으로 놀라움을 끝내던 예안은 입을 쩍 벌렸 다. 지구에서 명왕성을 맞춘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사실입니다. 전 데이터에 있는 대로만 말씀드릴 뿐입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던 예안은 다시 물었다. "그럼 맥의 동력은 뭐냐? 아까 그 중현이란 사람이 나보고 물었을 때 대 답하지 못해서 얼마나 쪽팔렸는지 알아? 명색이 주인이라는 애가 동력이 뭔지도 몰라서 얼버무리는 꼴이라니…" 「설마 제트 엔진이나 로켓 엔진 따위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 죠? 기름이나 수소 따위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뭐냐?" 이제는 이 녀석이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거라고 예안은 속 으로 투덜거렸다. 「무한동력입니다.」 "뭐?" 처음에 예안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무한동력입니다. 제 몸 속에 내장된 ST기관은 영구히 에너지를 무한으 로 생산해냅니다.」 "ST기관!" 어찌 그 이름을 모를 수 있을까. 레이온이 말했던, 자신의 몸 속에도 있 다는 기관 이름인데. "무한동력이라면? 원자로나 핵융합로 같은 그런 거야?" 「그것들은 에너지의 양이 석탄이나 석유에 비해 월등히 높을 뿐 무한은 아닙니다. 자동차가 연료 에너지의 단 5%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 과는 달리, 저의 ST기관은 단 1의 에너지를 매개체로 이용해 무한의 에 너지를 생성해냅니다. 즉, 처음 ST기관을 가동하기 위해 한 번 에너지를 사용한 뒤로는 다시 연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죠. 영원히 말 입니다.」 예안은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이런 엄청난 병기를 내가 과연 가져 도 되는 걸까? 무한동력이라니! 이건 인류의 꿈인 핵융합 장치 따위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아닌가? 예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느새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네가 그렇게 굉장한 녀석이라면… 왜 레이온 형은 나에게 널 준 거지?" 「저를 조종할 수 있는 건 지구상에서 유젤 님 밖에 없습니다. 바꿔 말 하면, 제가 무한의 에너지를 생산해 낼 수 있다 해도 유젤 님이 저를 움 직이지 않는다면 저는 고철덩어리나 다름없다는 거죠.」 예안은 이제야 어렴풋이 어째서 시트날타가 자신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았 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맥일 것이다. 맥 을 무엇에다가 쓰려는지는 몰라도, 무한으로 에너지를 생산해 낼 수 있 는 굉장한 물건을 탐내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그 맥을 조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자신뿐이니, 시트날타가 혈 안이 되어 자신을 원하는 것도 당연했다. '침착하자… 어차피 그들은 날 못 찾아. 그 녀석들이 미국을 다 뒤진다 고 해도 그 전에 내가 늙어 죽을 걸. 침착하자, 침착해…' 하지만 예안은 현 인류의 수준으로는 아무리 대단한 천재라 해도 엘레스 토늄 같은 초고강도의 물질을 만들어낼 수 없음을 몰랐다. 과학에 대해 그다지 잘 알지 못하는 예안은 그저 굉장하다고 수긍했을 뿐이다. 이처 럼 막강한 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자는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상에는 말이다. 식사를 마친 가족들(예안을 제외하고)은 거실에서 둘러앉아 TV를 보기 시작했다. 현우는 어머니인 수정이 깎아주는 과일을 한 조각 집에 입에 넣으며 정호에게 물었다. "큰아버지. 근데 누나는 왜 밥을 안 먹는 거예요?" "그게 소화기관이 많이 안 좋아서 의사가 당분간 영양제로 버티라고 하 더구나. 언제까지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무슨 위험한 병 같은 건 아니죠?" "그런 건 아니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것 좀 드셔보세요. 맛있네요." 왠지 살갑게 자신을 대하는 현우의 태도에 정호는 약간의 어리둥절함을 느꼈다. 원래 정우 삼형제는 자신을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건 아니었지 만, 그렇다고 별로 관심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헌데 요 근래 현우나 준우, 심지어 정우마저도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판이하게 바뀌었다. 물론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빠. 어깨 주물러 드릴게요." 이층에서 내려온 예안이 정호를 발견하자마자 총총총 달려와 뒤에서 덥 석 목을 끌어안았다. 예전의 그 쌀쌀맞은 모습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 볼 수 없이 애교가 넘치는 사랑스런 모습에서, 정호는 어쩌면 아들의 몸 이 바뀐 게 불행만은 아니란 생각까지 들곤 한다. 때로는 행복하지 못했 던 자신을 가엾이 여겨 신이 선물을 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 도였으니. "험, 험." 부러운 듯 그 모습을 쳐다보던 도호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남편의 마 음을 눈치챈 수정은 멋쩍은,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깃들인 미소를 지었다. 역시 딸이 있는 집안은 분위기가 확 다르다는 말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근데 예안아. 넌 이상하게 매번 보는 옷이 다 똑같아 보이는구나. 옷이 별로 없니?" "아니요. 나 옷 많아요." "몇 벌이나 되는데?" "다섯 벌 정도? 상의랑 하의랑 각각 쳐서." 별 생각 없이 튀어나온 예안의 대답에 하마터면 온 식구는 씹던 과일을 그대로 뱉을 뻔했다. 여자애가, 그것도 한창 호기심과 감수성, 쇼핑 욕 구가 풍부할 여고생이 고작 옷 10벌(상의와 하의를 합쳐서)이 전부라니! 이게 가당키나 한 소린가! "그, 그게 많은 거야?" "그럼 많은 거지, 적은 건가요?" 열심히 정호의 어깨를 주무르던 예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입장에 서는 옷 10벌은 꽤나 많은 거였다. 원래 그런 쪽으로 관심이 없던 인간 이니. "안 되겠다. 예안이 너 내일이라도 당장 학교 마치고 옷 좀 사라. 아빠 가 당장은 돈이 많지 않아서 별로 못 주겠고, 한 오십 만원 정도면 될 까?" 예안은 기겁했다. "나도 돈 있어요. 내 돈으로 사면 되요. 그리고 별로 사고 싶지도 않은 데…" "하지만 여자애가 옷이 그렇게 적은 건 좀 그렇잖니? 남자애라면 몰라 도…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집어넣어." 정호의 주머니 사정을 뻔히 아는 예안은 손을 내저으며 한사코 거절했 다. "됐다니까요. 옷 같은 거 별로 필요 없어요. 그런 데다가 돈 쓰는 거 나 딱 질색이라구요." "어허. 집어넣으라니까." "하지만…" "집어넣어. 아빠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야." 한참을 머뭇거리던 예안은 결국 돈을 받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제야 정호는 푸근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래, 우리 딸 착하지." "고마워요." 가슴이 뭉클해진 예안은 정호의 무릎 위에 앉아 목을 끌어안았다. 눈을 감은 예안은 머리를 정호의 어깨에 기대고 속삭였다. 다른 가족들이 듣 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정말 고마워, 아빠. 그리고 미안해. 근데 너무 무리는 하지 마." 정호도 가족들이 듣지 못하게 작게 속삭였다. "하나뿐인 우리 귀한 아들한테 이 정도쯤이야 해줘야지. 평소에 해준 것 도 별로 없는데." "킥. 정말 고마워." 생긋이 미소짓던 예안은 고개를 들어 가볍게 정호의 뺨에 입술을 갖다댔 다. 느닷없는 뽀뽀에 정호는 약간 당황해하면서도 싫은 눈치는 아니었 다. "그럼 나 이만 올라가 볼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정호에게 미소로 인사한 예안이 이층으로 사라지고 난 뒤에도 도호는 부 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형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나도 저런 딸이 갖고 싶었는데…' 도호는 한숨과 함께 준우와 현우를 둘러보았다. 이 자리에 없는 정우(학 교 근처에서 자취한다)까지 합쳐 세 아들은 언제나 그의 자랑거리였다. 어머니를 닮아 잘생긴 용모에, 뛰어난 두뇌에다가 성적까지 항상 톱인 아들들이 어찌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하지만 성장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어느덧 자신보다 커져버린 세 아들은 이제 애교를 부리기에는 너무나 징그럽게 변해버렸다. 아니, 녀석들이 '아빠~' 하면서 입술을 쭈욱 내밀어 오는 모습 따윈, 상상만으로도 소름 이 돋을 정도로 오싹하기만 하다. 그에 비하면 예안은 어떤가? 이미 성장이 얼추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애 교스런 몸짓 하나 하나가 홀딱 빠질 정도로 귀엽기만 하다. 아마 예안이 라면 대학생이 되고, 또 시집가기 전까지 애교 부려도 그저 귀엽기만 할 것이다. 징그러운 아들 녀석들과는 전혀 다르다. 역시 아들과 딸의 차이 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걸까? "저도 그만 올라가 볼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정호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난 현우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도호와, 심지 어는 정호마저도 어이가 없었다. 아니, 왜 아버지를 놔두고 큰아버지에 게 잘 주무시라는 인사를 한단 말인가? '미래의 장인어른한테 미리 잘 보인다 이건가? 뭐 호적상으로는 그렇지 않겠지만…' 이 중 유일하게 그 이유를 아는 준우는 약간 침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를 품고 있는 기색이었다. '분명 액세서리라고 했겠다…' 준우는 예안이 남겼던 그 한 마디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 똑똑 노크소리에 옷을 갈아입던 예안은 등도 돌리지 않은 채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문 열렸어요." 마찬가지로 아무 생각 없이 들어서던 현우는 등을 돌린 채 상반신을 홀 딱 벗고 있는 예안을 보고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흘끔 그를 돌아본 예 안은 가면의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지금 옷 갈아입는 중이니까 할 이야기 있으면 있다가 해라." 그리고 다시 태연히 등을 돌린 채 거리낌없이 브래지어를 채웠다. 예안 의 대담성에 놀란 건지 상상도 못한 서비스에 당황한 건지 말이 없던 현 우는 간신히 입을 떼었다. "저기 누나?" "왜?" "보통 이런 경우에는 비명을 지르며 쫓아내지 않나? 그러니까 내가 아는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렇던데…" 악랄한 사촌누나인 유혜민은 빼고. 그 인간은 오히려 반길 게 틀림없어. "…." 예안은 아무 말이 없이 그대로 굳어졌다. 이윽고 재빠르게 브래지어를 입고, 흰 셔츠를 걸치고, 단추를 채운 뒤 재빠르게 뒤를 돌아본 예안은 살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와 마주치는 순간 현우는 오싹함을 느 끼고 그만 주춤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생각해보니까 지금의 난 여자였지." 그럼 누나가 남잔 줄 알았어? 현우는 반사적으로 이렇게 말하려다가 본 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간신히 목구멍 안으로 그 말을 삼켰다. "감히 내 몸을 보다니, 죽고 싶냐? 좋게 말할 때 빨리 나가라." "으, 으악! 미안해 누나!" 당황한 현우는 내일 같이 데이트하자고 말하려던 것도 잊어버린 채 허겁 지겁 밖으로 나왔다. 우두커니 서 있던 예안은 눈을 감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예안아. 그만 네 몸을 저 녀석에게 보이고 말았어. 그래도 윗 모습, 그것도 뒷모습만 보였으니 이해해 줄 거지? 앞으로는 조심할게." …만약 언젠가 욕실에서 유혜민의 뜨거운 애무에 기절해 준우에 의해 방 으로 옮겨졌던 그때, 타올이 벗겨지는 바람에 현우와 준우 둘 다 자신의 알몸을 봤다는 걸(중요한 부분만 아슬아슬하게 빼고) 안다면 꽤나 볼만 한 광경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그 다음에 진석이는 날 침대에 눕히고 뜨거운 눈빛으로 쳐다보았지. 난 그 애의 정열적인 그 눈빛에 그만 온몸이 녹는 줄 알았어." "그래서? 그래서?" "아무리 내가 부끄러움이 없는 성격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까지 그 애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자신은 없더라구. 저절로 눈이 감기더라."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진석이는 친절하게 내가 부끄러워하는 걸 눈치채고 자기가 알아서 잘 리드해줬어. 내 옷을 벗겨주는 손길이 얼마나 부드럽던지… 조금 서툴기 는 했어도 내가 첫 여자라서 그런 거다, 라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더 행 복한 거 있지." "그리고? 그리고?" "우리 둘은 서로를 꼭 껴안고 뜨거운 밤을 불태웠지. 젊은 날의 아름다 운 추억이었어. 진석이가 조금 서툴기는 했어도 날 배려해서 살살 해서 인지 많이 아프진 않았지. 정말 행복했어." "꺄~ 너무 야해~" 야하다면서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냐. 여자애들의 쇼를 지켜 보던 예안은 조금 울컥하는 걸 느꼈다. 시끄럽게 수다를 떨던 여자애들 중 한 명이 갑자기 예안을 돌아보며 반 색했다. "예안아. 네 첫 경험 이야기 해주지 않을래?" "첫 경험?" 왜 또 나는 끌어들이는 건데. 예안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래. 예안이는 예쁘니까 멋진 남자들도 많이 접근해왔을 거 아냐? 얼 마나 멋있는 밤을 보냈는지 우리한테도 좀 얘기해 주라. 응?" 여자가 된 건 그럭저럭 적응할 수 있다 쳐도 여자애들의 저런 수다에는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 먼 훗날 자신이 원래 남자였다는 걸 밝힐 경우가 혹시라도 생긴다면 '여자의 몸에 익숙해지는 것보다 여자애들 수 다에 익숙해지는 게 훨씬 더 어렵다'라는 말을 꼭 빼먹지 않으리라 결심 할 정도였으니. "대답해주기 싫다." "에이, 그러지 말고~" "묻지 마. 다친다." "에이, 예안아~" "애원해도 소용없다. 묻지 마라." …이제껏 여자 손목 한 번 제대로 못 잡아본 수수한 동정남에게 첫 경 험, 그것도 '남자랑 보낸 뜨거운 밤'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하는 건 도 대체 무슨 심보냐. 여자애 중 한 명이 갑자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 아직 버진인 건 아닐까?" "에이, 설마. 이렇게 예쁜데 남자들이 가만 뒀을라구?" "하지만 예안인 너무 차갑잖아. 다른 데선 어떤지 몰라도 너무 냉정하다 구. 의외로 남자 손목 못 잡아본 쑥맥인지도 모르지." "정말 그럴까?" "그럴 거야. 그럴 지도 몰라. 아니야, 확실해. 그래, 그런 게 틀림없 어." 잠자코 여자애들의 수다를 듣고 있던 예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복도로 나갔다. 더 이상 교실에 있다간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휴…" 찬바람을 쐬니 기분이 어느 정도 좋아지는 것 같았다. 예안은 이마를 스 치는 바람을 만끽하며 눈을 감았다. "바람 쐬니?"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온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예안은 놀라 번쩍 눈 을 떴다. 혜인이었다. "어. 우리 반에는 웬일이냐?" "그냥 너 보고 싶어서 들렀어. 근데 너 그런 남자 같은 말투 좀 고칠 수 없니? 덕분에 남자애들이 너한테 접근하고 싶어도 무서워서 접근을 못하 잖아." 예안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라면 오히려 바라는 바였다. "뭐 상관없어. 남자친구 따위는 평생 없어도 되니까." 혜인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평생? 그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너야말로 남자친구 만들어보지 그러냐? 그럼 나도 한 번 생각 해볼 테 니까." 혜인은 그 말에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예안은 그 모습에 가슴이 조금 아파왔다. "아 나는… 당분간 그런 거 생각 없어…" 예안은 혜인의 마음이 어떠한지 한 번 떠보기로 결심했다. 이런 자신이 못되고 잔인하다는 걸 알지만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왜? 좋아하는 남자한테 차이기라도 했냐?" "…응." 침울한 혜인의 안색에 예안은 가슴이 더욱 더 아파 왔다. "그까짓 거, 잊어 버려. 이 세상에 남자가 어디 한둘뿐이냐? 반 이상이 남자다. 명색이 대명고등학교의 공주인 네가 그까짓 걸로 그렇게 풀이 죽어서야 체면이 서겠냐?" 혜인은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잊고 싶어도 그게 잘 안 돼. 차라리 내가 시원하게 차이고 그랬다면 쉽 게 잊었을 지도 모르겠는데… 그 애가 죽어버렸거든." 혜인에게는 죽었다고 전해달라는 부탁, 세현이 잘 이행한 모양이다. '바보야. 내가 널 찼잖아. 시원하게 찼잖아. 근데 뭐라고? 왜 그런 거짓 말을 하고 그래?' 울컥한 예안은 하마터면 그렇게 외칠 뻔했다. 하지만 자신이 진우라는 걸 밝혀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밝혀서 뭘 어쩌라고? 둘이서 끌어안고 눈물이라도 펑펑 쏟으란 말인가? 혜인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참, 예안이 너 혹시 피아노에 관심 있니?" "피아노?" "응. 세계 제일의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앤드류 왕자가 이번에 한국에서 순회 공연을 하기로 했대. 장소는 중앙문화홀이고, 이번주 토요일 저녁 이야. 생각 있니?" 생각해보니 혜인은 음악 듣는 걸 굉장히 좋아했었다. 하지만 유진우라는 녀석은 음악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싫어했지. 자신에게는 절대 어울리 지 않는 사치 중의 하나가 바로 음악이라고. 그때는 그게 옳은 줄 알았는데 어째서 지금은 그때의 그런 외침이 쓸데 없는 자격지심이라 생각되는 걸까. 그러고 보니 매번 혜인이 음악회 같 은 곳에 데려가려고 해서 서로 티격태격 하던 때도 많았구나. 예안은 씁쓸한 감정을 입가에 띄웠다. 너무 늦은 것 같지만 이제라도 속 시원히 이 애의 바램을 들어주는 것도 괜찮겠지. "좋아. 그렇게 할게. 그런데 앤드류 왕자? 혹시 어느 나라 왕자야? 영 국? 벨기에? 모나코? 에… 그것 밖에는 모르겠다." "영국의 왕자야. 앤드류 아더 필립 루이스 윈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에 예안은 흠칫했다. "저… 혹시 세계제일의 거부라 알려진 그 앤드류?" "응. 그렇다더라. 뭐 난 그런 쪽으로는 별로 관심없지만." "카를로스와 네로스, 이카루스와 포세이돈의 회장인 그 녀석?" "응. 아마 그럴 거야. 그런데 그 녀석이 뭐니? 아무리 그래도 내가 좋아 하는 피아니스튼데…" 예안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 녀석은 도대체 뭐가 부족한 거냐? 세계 제일의 거부인 것도 모자라서, 세계제일의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고? 허참, 기가 막힌다, 기 가 막혀. 도대체 몇 살이냐 그 인간? 생각해보니 나 그 인간이 몇 살인 지는 모르네." "올해로 23살인가 될 걸? 우리나라 식으로 말이야." "윽. 난 그런 잘난 인간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 그냥 안 가고 말래. 그 인간 면상 보면 한 일주일 간 잠도 제대로 못 잘 것 같다." "에이, 그러지 말고 가자. 인상이 참 좋은 사람이야. 피아노도 엄청 잘 쳐." 혜인은 열불 나서 못 가겠다고 툴툴거리는 예안을 달래기 위해 한참 동 안 진땀을 뺐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온 예안은 정우의 신발이 현관에 있는 걸 발견 했다. 주말에도 집에 잘 안 오는 인간이라 집에 있을 줄 몰랐던 예안은 웬일인가 싶었다. "이제 와?" 일층 거실에 정우 혼자 앉아 있다 예안을 맞아주었다. "예. 근데 형 혼자 있어요? 다른 식구들은요?" "현우랑 준우는 네가 더 잘 알 테고. 큰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는 아직 안 돌아오셨고. 어머니는 시장에 가셨어. 지금 우리 둘 뿐이야. 현우와 준 우는 같이 안 왔니?" "예. 준우 형은 학생부 회의 때문에 좀 늦을 거라고 했고요. 현우도 일 이 있어서 좀 늦을 거래요." "그래?"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정우의 태도가 이상했다. 무슨 중요한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 재원이한테 들었어. 너 현우랑 사귄다며? 어제 재원이가 너한테 그 말을 들었다는데. 사실이니?" "예에?" 재원이 정우한테 그 일을 말했단 말인가? 예안은 조금 놀랐다. "대답해 줄래? 정말 너 현우랑 사귀니?" "예…" 무슨 의도로 정우가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몰랐던 예안은 약간 당황스러웠 다. 정우는 뭔가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 전에 진우 장례식 때 진우가 네 인생 그 자체였다고 말하지 않았니? 그런데 장례식 끝난지 얼마나 됐다고 현우랑 사귄다는 거야?" "그, 그건…" 이런 변수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예안은 말문이 막혔다. 자칫하다가는 정우에게 자신의 속셈을 들켜버릴 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때 네가 한 말은 거짓말이었어? 진우가 네 인생 그 자체였다 는 그 말 말이야." 예안은 새파랗게 질린 채 대답하지 못했다.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마. 사실대로 말해 줘. 도대체 현우한테 접근한 이유가 뭐야? 무슨 속셈으로 그 애가 널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도 달콤한 거짓말로 속인 거지?" "그, 그게… 그게 말이죠…" "진우가 우리를 싫어했다고 했지? 그리고 진우의 인생은 네 인생 그 자 체였다고도 했고. 혹시 진우를 대신해서 우리에게 이런 식으로 복수하려 는 거니?" 끝났다. 결국 정우는 눈치 챈 모양이다. 모든 게 들켜버린 예안의 고개 는 떨구어진 채 다시 일어날 줄 몰랐다. 정우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현우는 순진한 녀석이야. 단 한 번도 진우를 깔보거나 무시한 적 없어. 그 녀석은 천재라 어차피 진우나 나나 준우나 똑같이 보였을 테니까. 그 리고 준우 녀석도 함부로 남을 무시하거나 그럴 녀석이 아니야. 그게 사 촌 동생이라면 더더욱." 예안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지금 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모르겠어요." "화났어. 굉장히 화났어. 재원이한테 너랑 현우가 사귄다는 소리 듣는 순간 모든 게 다 파악이 됐거든. 엄청 화가 났어. 왜 그렇게까지 하려고 하니?" 이해할 수 없는 소리에 예안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정우의 눈동자는 자신을 탓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표정 어디에도 화가 난 듯한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 도대체 뭐지? "네가 처음 우리 집에 온 날, 내가 술에 만취해서 소란 피웠던 거 기억 나지?" 끄덕끄덕. "그때 사실 나 짝사랑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 녀석한테 빼앗기고 말았어. 처음에는 정말 죽을 듯이 괴로웠어. 결국 삼일째 되는 날 술에 만취해서 그만 집으로 와 행패를 부리고 만 거지.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때 짝사랑이 짝사랑으로 끝난 게 다행이라 생각해." 저건 또 무슨 말이다냐. 예안은 자신의 속셈을 들킨 것에 대한 당황함 따위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의구심만 가득 솟아나는 걸 느꼈다. "진우의 장례식이 끝나고, 난 네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어. 어째서 진우가 우리를 싫어했을까, 하고 말이야. 사실 살아 있는 동안 진우가 전혀 우리를 싫어한다는 내색을 하지 않아서 난 전혀 몰랐지. 하지만 네 말대로 일단 진우가 우리를 싫어한다는 전제 하에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보니까 대번에 답이 나오더군. 진우가 우리를 싫어할 만한 이유는 주 변에 가득 널려 있었어." 예안은 긴장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큰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와 막내 삼촌을 위해 자기 자신의 인생을 희생 하셨지. 결국 우리 아버지와 막내 삼촌은 어느 누구 못지 않게 성공했지 만 대신 큰아버지의 인생은 엉망으로 변하고 말았지. 큰어머니와 이혼까 지 했고 말이야. 진우가 우리를 안 싫어하는 게 더 이상하겠지." 정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네가 진우랑 얼마나 깊은 사이였는지 나는 잘 몰라. 하지만 진우의 인 생이 네 인생 그 자체였다고 말할 정도면 대단히 깊은 관계겠지. 그렇다 면 네가 진우를 대신해 그렇게나마 우리에게 복수하려고 드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 "그건 무의미한 짓이야. 기껏해야 준우랑 현우에게 실연의 상처를 안겨 주는 걸로 모든 게 잘 해결될 거라 생각해? 결국 그들과 너와의 사이만 나빠질 뿐이야. 어떤 식으로든 너는 우리 가족이나 친척이 될 텐데, 결 국 그건 너에게도 우리에게도 좋지 않아. 아무런 의미 없는 일에 널 희 생시키지 마라. 너 자신을 좀더 아껴." 마지막 부분에서 정우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예안으로서는 상 상조차 할 수 없는 파격적인 말투였다. 그 무뚝뚝하고 오만한 정우가 사 람을 위로하다니? 게다가 자신이 현우에게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사 귀자고 했다는 사실을 아는 데도? 고개를 든 예안은 정우의 검은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역시 아 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직, 아직이야…' 정우의 눈빛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끄집어내기 위해 예안은 필사적으로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조금씩 무엇인가가 떠오르는 게 보였다. '풋. 정우 형, 그런 거였어? 형도 어쩔 수 없구나.' 정우가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눈빛 속에서 끄집어낸 예안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결국 정우 형도 어쩔 수 없는 남자였던 거야?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나쁜 목적을 품고 자기 동생한테 접근했 는데 화를 내지 않을 리 없지.' 이렇게 되면 일이 한결 더 쉬워지잖아. 예안은 그에게 들키지 않도록 속 으로 히죽 웃었다. 신은 나의 편인가 보다. "누나 먼저 와 있었네?" 현관문이 열리며 현우가 들어서자 정우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몸을 일 으켰다. "어? 큰 형, 웬일로 주말도 아닌데 집에 와 있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있어? 혹시 전에 형을 찼다는 여자가 형한테 잔인한 말을 해서 쇼크를 먹기라도 한 거야?" "학교 다니느라 자주 못 본 사이에 쓸데없는 쪽으로 상상력이 발달했구 나, 유현우." "형이야말로 자주 못 본 사이에 많이 변했으면서. 그 잘나고 도도한 인 간 유정우가 짝사랑을 하다가 실연 당할 줄 누가 알았겠어?" 불쾌해할 만도 하련만 정우는 아무 말 없이 현우를 한 번 쳐다보더니 그 대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원래 저런 남자다. 속을 알아차리기 힘든, 오만하고 도도한. 예안과 단둘이 되자 현우는 활짝 웃으며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누나. 이거 받아." "뭔데?" "열어보면 알아." 예안은 미심쩍어하며 포장지에 싸인 선물을 받아들었다. 포장지를 뜯고 나타난 작은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반지가 들어 있었다. 그것도 똑같은 모양이 두 개로. "커플링?" "응." 현우는 조금 부끄러워했다. 이 녀석, 일이 있어서 늦는다더니 이것 때문 이었나? 일이 잘 되어 간다는 걸 느낀 예안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냐? 난 반지나 장신구 같은 거 절대 싫어하는데. 차 라리 손목시계를 사지 그랬냐?" "아… 누나 반지 싫어해?" 현우는 조금 당황했다. 예안은 야릇한 미소를 풀지 않았다. "원래 내가 그런 쪽으로 별로 관심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거든. 이걸 어 쩌냐? 기껏 돈주고 샀는데 끼우지도 못하게 됐네. 웬만하면 네가 처음으 로 한 선물이니 받아주고 싶다면 난 장신구라면 치가 떨리도록 싫어해서 말이다." 현우는 손을 휙휙 내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누나 의향도 물어보지 않고 멋대로 사온 내가 바보지 뭐. 이건 그냥 내가 아는 친구 놈한테 여자친구한테 선물하라고 주지 뭐. 누난 신경 쓰지 마." "정말 미안하다." "아니라니까." "역시 현우는 착하다니까.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본 것 같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야릇한 미소를 짓는 예안의 눈동자는 신비한 녹색 빛 을 내뿜었다. 저 눈동자 속에 나만 비치게 하고 싶어. 현우는 저도 모르 게 그렇게 중얼거리다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내가 이렇게 독점욕이 있는 녀석이었나?' 한순간 예안이 선글라스를 끼고 다녔으면 하고 바랬었던 현우는 스스로 에게 놀랐다. 자신에게 이런 독점욕이 있을 줄이야. 예안의 예쁜 눈을 다른 사람들 아무도 보지 않았으면, 하고 바랬던 자신이 놀라웠다. "왜 그렇게 쳐다 보냐?" 살짝 붉어진 두 뺨에 야릇한 홍조를 띄우고 있는 예안의 모습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벅차 오르는 혈기를 참지 못한 현우는 별안 간 예안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입술을 가까이 가져감에도 불구하고 예 안은 살짝 떨고만 있었을 뿐 거부하지 않았다. 용기를 낸 현우는 눈을 딱 감고 예안의 입술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미안하다. 이런 건 아무래도 아직 이른 것 같다." 입술과 입술이 막 닿으려는 순간, 예안이 죄책감으로 가득 찬 얼굴로 갑 자기 현우를 밀어내었다. 가만, 죄책감이라고? '왜 그러지?' 키스하는데 죄책감 같은 걸 갖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만약 자신이 아닌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를까. 비록 한순간에 사라지긴 했 어도 방금 전 예안이 짓고 있던 표정은 죄책감으로 가득했었다. "나 먼저 올라가 볼게." 허탈하게 키스의 기회를 놓친 현우는 멍하니 터덜터덜 이층으로 올라가 는 예안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혹시 커플링을 거부한 것도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걸까? 혹시라도 예안에게 그새 다른 좋아 하는 사람이 생긴 건 아닐까 생각하니 갑자기 겁이 났다. '미안해, 예안아.' 비록 현우가 남자긴 하지만 눈딱 감고 키스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레이온하고도 이미 해봤는데, 한 번 더 한다고 해서 뭐가 대수랴? 그걸 로 인해 현우의 마음이 보다 더 깊어지면 나중에 큰 상처를 주기도 쉬울 텐데. 하지만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 간직한 유젤의 모습이 떠오르자 예안은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유젤이 준 소중한 몸을 치사한 복수전에 쓰 는 것도 용서받기 힘든 일일 텐데, 이런 식으로 함부로 다뤄서야 되겠는 가? 복수를 위해서 키스까지 한다? 이게 도대체 매춘이랑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은 예안은 머리를 쥐어뜯을 듯이 괴로워하고 자신을 자책했다. 어디선가 유젤이 자신을 원망하는 소 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 절대 이런 짓 안 할게. 정말 미안해, 예안아.' 한 가지 더 약속할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바로 너 하나 뿐이야.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러니까 믿어 줘. 예안은 그렇게 혼잣말로 다시 한 번 약속했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만 존 재하는 사랑스러운 연인에게. 금요일 점심 시간이 끝난 뒤 5교시는 체육 시간이다. 예안은 일단 머리 카락 색이 햇빛에 노출되면 파랗게 변하는 현상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언 제나 그랬듯이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교실에 남았다. 하지만 오늘 남은 건 예안 혼자만이 아니었다. 세현도 함께였다. "넌 매번 체육 시간만 되면 몸이 아프다고 하는구나. 사실은 그런 게 아 니라 체육 시간이 싫어서지?" 딱히 곤란할 게 없었던 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세현이 너도 별로 아파 보이지 않는데? 오늘은 체육 하기가 싫 었냐?" "또 남자 같은 말투네." "내가 원래 이런 걸 어떡하냐. 그냥 네가 이해해." 책상에 걸터앉은 세현은 묘한 웃음을 띠며 한쪽 다리를 접어 올려 깍지 를 꼈다. "태양은 참 아름답지?" 뜬금 없이 뭔 소리지? "난 태양을 볼 때마다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커다란 선물은 태양이 아 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해. 그만큼 태양은 신비롭고, 아름답고, 또한 매 력적이야." "그, 그래?" 예안은 예전과는 너무나 다른 세현의 태도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설마하니 이제 절친한 친구인 나(진우)를 다시 볼 수 없어서 저렇게 변 해버린 건가, 하고도 생각해 볼 정도였다. "태양이 신이 준 선물이라면 구름은 악마가 준 선물이 되는 걸까? 구름 은 태양을 가리곤 하잖아. 그렇지만 그 구름 역시 태양의 열기로 증발한 수증기가 형성하는 것. 그렇다면 신과 악마의 본질은 서로 같은 걸까?" "저기, 진지한 건 좋은데 난 그런 철학적인 이야기는 별로거든? 다른 이 야기하면 안 되냐?" 확실히 다르다 이건. 여자가 된 뒤 다시 만난 세현은 정말 알아볼 수 없 을 정도로 너무 진지해져 있었다. 예전에도 가끔 이런 모습을 보이곤 했 지만 그래도 농담을 입에 달고 살았던 녀석이었다. '아니면… 마음에 든 여자를 대할 때와 남자를 대할 때의 태도가 완전히 다른 건가? 하긴, 난 이 녀석이 여자와 친절하게 대화하는 건 거의 본 적이 없지.' 예안이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요즘 어때? 내가 전에 한 부탁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기는 한 거 야?" "무슨 부탁?" "저런, 저런 그새 잊어버린 거야? 내가 너랑 사귀고 싶다고 했잖아?" "그거라면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예안이 난처한 듯 볼을 긁적이자 세현은 빙긋 웃었다.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그래도 한 번 생각은 해 줘. 너한테도 나쁜 건 아닐 테니까." 다른 남자가 이런 말을 했다면 냉정하게 쏘아붙였을 것이다. 그만큼 유 젤을 독점하고 싶어하는 진우의 마음은 강한 것이었다. 물론 복수를 하 고 싶어하는 정우 삼형제는 제외하자. 이상하게 세현이 자신을 좋아한다 말했지만 예안은 그에 대한 질투가 별 로 생기지 않았다. 현우와 준우는 물론 남자들이 자신을 좋아한다 말할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질투가 끓곤 하는데 세현에게만은 그렇지 않았다. 역시 남자였을 때 둘도 없이 친했던 친구였기 때문일까? "그러고 보니 내일 저녁이지? 너랑 혜인이가 피아노 공연 보러 간다고 하는 거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내일이네." 내일이면 그 세계 제일의 거부라는 앤드류 왕자를 직접 볼 수 있는 건 가? 예안은 피아노 연주보다는 평생 가도 얼굴 한 번 볼 수 없는 세계적 인 거물을 직접 본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넌 피아노 때문에 앤드류 왕자의 공연에 가는 게 아니라 단지 세계 제 일의 부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가는 것 같은데, 내 말이 틀렸 니?" "어떻게 알았냐? 대단한데?" "뻔하지 뭐. 피아노 같은 데는 전혀 관심도 없는 애가 선선히 간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지." 세현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앤드류 왕자의 피아노를 들어본 적이 있어?" "없는데." "그의 연주는… 사람의 영혼을 울리지. 원래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천재 였지만 실연 당한 뒤부터 그의 연주는 보다 더 슬프고 우아하게 변했거 든." "너 그 사람 연주 들어본 적 있냐? 아니, 근데 그 사람 실연 당했데? 아 니, 왜? 사진 보니까 얼굴도 잘생겼고, 젊고, 또 세계 제일의 부자잖아? 도대체 어떤 미친 여자가 그런 대단한 사람을 찬 거야?"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다만 소문이 그럴 뿐이야. 헛소문일지도 모르지." 책상에서 내려온 세현은 창가로 가 걸터앉았다. 그는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그의 연주는 정말 아름다워. 피아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조차도 단 한 번의 연주를 듣고 넋을 잃어버릴 정도로. 신은 정말 불공평하다고 생 각하지 않아? 세계 제일의 거부에다가 잘생긴 외모, 왕자라는 고귀한 신 분에, 뛰어난 두뇌에, 그리고 거기다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연주 실력까 지. 그는 어디 하나 빠질 데 없는 사람이야. 내일 혜인이랑 공연장에 가 면 부디 졸지 말고 한 번 집중해서 들어 봐." 생각해보니 정말 남자였을 때의 나와는 전혀 딴판인 사람이구나. 그런 대단한 사람을 직접 보는 건 과연 기분이 어떨까? 그나저나 그렇게 대단 한 연주라면 잠이 올 까닭이 없을 텐데, 졸지 말라고 말하는 건 도대체 뭐냐? 약속한 토요일이 다가오자 예안은 외출 준비를 했다. "자자. 세계 제일의 부자인데다가 천재적 피아니스트인 고귀한 왕자의 실제 모습을 보러 가 주자고." …여전히 음악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휴우. 근데 나 정말 피아노 싫어하는데 지루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지? 에잇, 그냥 감상하는 척만 하면서 잠이나 자야겠다." 약속 장소인 중앙문화홀로 나간 예안은 혜인 말고도 한 명이 더 와있는 걸 보고 조금 당황했다. 그는 차세현이었다. "차세현? 네가 여긴 웬일이냐?" "혜인이가 불렀어. 같이 음악회에 참석하지 않겠느냐고. 근데 넌 외출할 때도 밀짚모자를 쓰니? 차라리 다른 걸 써보는 건 어때?" "밀짚모자가 제일 편하니까. 너도 올 거면 어제나 오늘 좀 미리 말해주 지 그랬냐? 근데 너희 둘 굉장히 친한가 보다? 이런 데 둘이서 자주 오 고 그랬냐? 내가 전학 오기 전에도?" 혜인과 세현은 멋쩍은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예안은 말로 표현하기 어 려운 뭔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설마 질투인가? "그냥… 진우가 죽은 걸 세현이가 알려준 다음에 조금 친해졌어. 진우는 세현이한테는 소중한 친구였으니까. 우리 둘이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나 할까?" "그, 그래?" "아참. 예안이 넌 진우가 누군지 모르지? 전에 내가 말했던 얘야. 내가 차였다는 애." 혜인은 그 말을 하면서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하긴, 좋아했지 만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기분 좋을 까닭이 없다. "자, 그만 들어가자. 조금 있으면 공연이 시작할 시간이니까." 혜인이 기분 전화를 위해 손뼉을 짝 치며 가운데에 끼어 두 사람의 어깨 를 떠밀었다. 예안은 엉겁결에 혜인에게 떠밀려 걸음을 옮기다가 세현이 혜인 몰래 자신에게 몰래 묘한 미소를 보내는 걸 눈치채고 그만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렇게 웃지 마, 자슥아. 네가 여자한테 헤롱대는 모습 따윈 보기 싫다 니까.' 세현만이 가진 독특하고 진지한 멋을 잃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왠지 녀석이 여자한테 빠지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다른 남자들 에게처럼 '유젤'을 좋아하는 세현에 대해서 질투를 느껴서 그러는 건 아 닌 듯 싶다. 세 사람은 자리를 나란히 잡고 앉아 공연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가 장 왼쪽이 예안, 가운데가 혜인, 그리고 가장 오른쪽이 세현이었다. "혜인아." 공연이 시작되기를 지루하게 기다리던 중 예안은 작게 혜인을 불렀다. "왜?"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냐?" "뭔데?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말해 봐." "그게 좀…" 잠시 동안 망설이던 예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결심했다. "너 진우라는 애한테 차였다고 했지?" "…으, 응…" 혜인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예안은 다시 망설였지만 내친 김에 계속 말했다. "그 애에 대해서 나한테 이야기해줄 수 있냐?" "그거야… 어렵진 않아. 근데 왜 묻는 거니? 넌 진우를 모르잖아?" 모르긴 왜 몰라. 내가 바로 유진우인데. "진우라는 애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아니야. 너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 어. 네가 그 진우라는 녀석을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렇게 많이 야위었는 지도 궁금하고." "체중이 좀 줄어들기는 했지만 넌 그 전의 내 모습은 모르잖아? 어떻게 내가 살빠진 거 알았니?" 혜인의 예리한 질문에 예안은 순간 가슴이 덜컹했다. 하지만 재빨리 기 지를 짜냈다. "애들이 그러더라구. 진우라는 녀석이 죽고 난 뒤부터 네가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고." "아, 그랬구나." 우울한 표정으로 커다란 피아노가 놓인 홀을 쳐다보던 혜인은 이윽고 땅 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괴로운 빛이 역력했다. "진우는… 그다지 잘난 부분은 없는 애였어. 평범 그 자체거나 혹은 그 이하라 말할 수 있는 애였지. 공부를 특별히 잘하는 것도 아니고, 외모 가 훤칠하거나 키가 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운동을 잘하는 것도 아니 었지." 역시 난 잘난 구석이 없는 놈이었구나. 다 알고 있는 거지만 이렇게 한 때 좋아했었던(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여자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굉장히 비참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진우한테 끌렸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친구들 도 전부 나 내가 훨씬 아깝다고만 했지. 하지만 난… 솔직히 진우가 많 이 의지가 됐어. 아, 도저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는 거냐?" 혜인은 우울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딱 히 없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거야. 진우는 겉으로는 강한 척 하지만 마음 속에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아이였으니까. 그 애를 보고 있으면 왠지 보듬어주고 싶고, 사랑해주고 싶어져.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그 애한테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거야." "그런데 왜 진우는 널 찼냐?" 비겁해 유진우. 네가 바로 유진우면서 이렇게 모르는 척 하고 혜인이의 속마음을 물어봐도 되는 거냐? 넌 정말 저질이야. "내가… 처녀가 아니었으니까… 다 내 잘못이야." 혜인은 아주 괴로운 듯 힘들여서 그렇게 말했다. 예안은 다소 어두운 안 색으로 듣고 있었다. 세현이 듣고 있는데 혜인이 이런 말을 하게까지 밀 어붙인 자기 자신이 무척 바보 같기만 했다. "그런데 너 세현이도 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해도 되냐? 나는 같은 여자 라지만 세현이는 남자잖아. 좀 껄끄럽지 않아?" "아, 괜찮아. 세현이는 좋은 아이니까. 다른 평범한 남자애들하고는 틀 려. 그래, 마치 진우처럼…" 한때 가장 좋아했던 여자와 한때 가장 친했던 친구가 친하게 지내는 모 습을 지켜보는 건 뭐랄까. 흐뭇한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날 카로운 칼로 도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들 앞에서 내가 진우라는 걸 결코 내색할 수 없어서이기 때문일까. "유진우라는 녀석 굉장히 나쁜 놈이네. 그까짓 처녀가 뭐가 중요하다고 너처럼 어디 하나 빠질 데 없는 여자애를 발로 차냐? 그러는 자기는 뭐 총각인가?" "아냐. 진우는 그런 저질스런 애가 아니야. 그 애를 모욕하는 건 아무리 예안이 너라도 참을 수 없어." 혜인의 단호한 태도에 예안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안함을 느꼈 다. 그래. 어쩌면 순결이라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건지도 몰라. 그 까짓 것 하나 때문에 혜인이를 이렇게 괴로워하게 만드는 네가 나쁜 놈 인 거야, 유진우. 안 그래? "공연 시작한다. 이제 그만 조용히 하자." 묵묵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현이 주의를 주었다. 예안은 마음 속에 서 흘러내리는, 혜인에 대한 미안함과 후회가 뒤섞인 눈물을 참으려 애 쓰며 검은 양복을 입고 들어서는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마도 그가 천재 피아니스트이자 세계 제일의 거부인 앤드류인 모양이다. "멋진 연주였어. 아직도 가슴이 뛰는 것 같애." 공연이 끝난 후 인파 속에 섞여 건물 밖으로 향하던 혜인은 잔뜩 상기된 채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은 앤드류 왕자의 멋진 연주에 다들 흠뻑 취해 버린 기색이 역력했다. "CD로 듣는 거랑 느낌이 완전히 달라. 정말 행운이야. 앤드류 왕자를 직 접 보고, 이렇게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다니. 다음 번 한국 공연은 언 제쯤일까?" 세현이 대답했다. "적어도 십 년은 지나야 할 걸? 앤드류 왕자는 피아니스트로도 유명하지 만 사업가로 더 유명하니까. 뭐니뭐니해도 세계 제일의 거부잖아. 많이 바쁜 인간이라구." "세현이 너도 좋았지?" "그럭저럭. 원래 음악 같은 것엔 별달리 관심 없지만 확실히 앤드류 왕 자가 대단하다는 건 알겠더라. 인간들 중에선 분명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것 같애. 음악의 신 아폴론이 강림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아폴론은 태양의 신 아니었어?" "음악의 신이기도 하잖아." "아, 그런 거야? 그리스 신화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어렸을 때 한 번 읽고 그 뒤로는 안 읽어봤거든."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혜인, 세현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예안은 단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공연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 다. 그저 연주가락에 흠뻑 취해 버린 혜인의 옆모습만 계속해서 흘끔거 렸을 뿐이었다. 연주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난 분명히 예안이만을 좋아하는데? 그 애의 모든 걸 가지고 있고, 그 애 의 모든 걸 독점하고 싶어하는데? 그렇다면 나의 지금 이런 마음은 도대 체 뭐지? 왜 혜인이를 걱정해야 되는 거지? 이건 예안이를 배신하는 거 잖아? "서예안.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해?" 갑작스런 세현의 물음에 예안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혜인까지 의아해하 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쓸 것 없어." "다다다음주 중간 고사가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 거야? 쯧쯧쯧, 아직도 3 주일이나 남았다고. 자고로 시험 공부의 묘미는 벼락치기에 있다는 어느 옛 성현의 말씀도 몰라?" 세현의 농담에 예안의 입가에도 살짝 웃음이 떠올랐지만 너무 미약한 것 이었다. "벼락치기는 절대 안 돼. 그렇다고 너무 공부할 필요도 없어. 시험 공부 는 5일 정도만 해도 충분하잖아?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예안아." 자신이 시험에 대해 걱정하는 줄 알고 위로하는 혜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예안은 조금 울컥하는 걸 느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에게 내가 진우라고 외치고 싶은 충동이 자꾸만 터져 나오려고 한다. '바보야. 그런 것 따위를 걱정하는 게 아니야. 내가 걱정하는 건, 내가 걱정하는 건…' "어? 앤드류 왕자다!" 갑자기 혜인이 환호성을 지르며 한 방향을 가리키자 예안과 세현의 시선 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돌아갔다. 특별 서비스이기라도 한 건지, 앤드류 왕자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싸인을 해주고 있었다. "와, 저래도 되는 거야? 위험하지 않을까?" "별일 없겠지 뭐. 앤드류 왕자가 무슨 정치인도 아니고 설마 한국에서 테러 같은 걸 당하겠냐?" "예안아, 세현아, 우리도 가서 싸인 받지 않을래?" "김혜인 너 혼자 받아라. 난 빠질란다. 같은 남자 싸인 받아서 어디다 쓰냐?" "그럼 나 얼른 싸인 받아올게." 혜인이 즐거운 듯 한창 싸인에 바쁜 앤드류 왕자에게 뛰어가자 세현과 예안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여자인 지금의 몸으로 딱히 세현에 게 할 말이 없었던 예안은 애꿎은 천장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앤드류 왕자의 연주에 별 감흥을 받지 못한 모양이구나?" "…조금은." "나 지금까지 너 같은 애는 처음 봤어. 아무리 감수성이 없는 사람이라 고 해도 앤드류 왕자의 연주를 직접 듣고 나면 그의 광팬이 되어 버리고 마는데, 넌 연주 내내 딴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까." "다 보였어?" "어." 설마 혜인이도 알아차린 건 아니겠지? 잠시 생각하던 예안은 그럴 리 없 다라고 단정했다. 만약 자신이 딴 생각만 하고 있었다는 걸 혜인이 알았 다면 조금 섭섭해했을 것이다. "서예안.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제야 예안은 세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은 묘한 긴장으로 젖어 있었다. "너 학생회장 유준우 선배랑 같은 집에 살지?" "어? 어떻게 알았어?" 예안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 사실을 아는 학생은 없을 텐데? "내가 너에게 먼저 대시했는데 이 정도쯤은 알고 있는 게 정상 아니야?" 세현은 묘하게 슬퍼 보이는 눈빛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너에 대해서 좀 알아 봤어. 유준우 선배의 큰아버지에게 입양될 거라 며? 프라이버시 침해라면 미안해. 하지만 다른 애들한테 말하진 않을 테 니까 걱정하지 마." 세현이 녀석이 말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런 거다. 예안은 어두운 안색으 로 고개를 한 번 가볍게 끄덕였다. 세현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서예안. 그런데 넌 왜 진우인 척 한 거야?" 그건 뒤통수를 한 대 크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예안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지, 지금 뭐라고… 했어?" 어찌나 놀랐는지 예안의 목소리는 부들부들 떨렸다. 이 녀석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도대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길래? "3월 15일이었던가? 그날 난 진우 녀석이랑 자주 가던 PC방에서 메신저 를 켜놓고 통신을 하고 있었지. 그런데 갑자기 며칠 동안이나 연락이 안 되던 녀석이 접속을 한 거야. 하지만 불과 5분도 대화하지 못했어. 녀석 은 사고를 당해 내가 자기를 절대 못 알아 볼 거라며 나에게 그만 연락 을 끊자고 했지." 예안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녀석은 혜인이한테는 자기가 죽었다고 전해달라고 했어. 난 혜인이한테 녀석이 죽었다고 전해줬지만 마음 속으로는 찜찜했어. 그런데 어이없는 소식을 듣고 말았어. 진우 녀석은 정말 죽었다더군. 3월 21일에 시체 없 는 장례식까지 치렀다던데?" 예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안색이 조금씩 새파래지기 시작했다. "이상해. 네가 부모님을 잃고 네 부친의 친구인 진우의 아버지에게 입양 된 거라면 너도 진우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잖아? 그런데 왜 넌 진우에 대해 전혀 모르는 척 했을까? 그리고 실종으로 사실상 사망 처리 된 진 우는 21일에 장례식을 치렀는데 어떻게 15일날 메신저에 접속할 수 있었 던 거지?" "그래서, 15일날 메신저에 접속한 게 나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 만약 15일날 접속한 게 정말 진우 녀석이 라면 진우는 실종된 게 아니라 자살한 거라고 해야만 옳아. 그렇지만 난 진우 녀석을 알아. 그 녀석은 절대 자살 같은 걸 할 녀석이 아니야." 세현의 얼굴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슬픔 비슷한 무언가로 뒤덮여 있었다. "넌 진우의 아버지에게 입양되었어. 진우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 그런데 우리에게 일부러 그걸 속였어. 그리고 진우는 15일 날 절대 메신저에 접 속할 수 없어야만 해.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지." "내가… 진우인 척 했다는 것?" "그래. 설마 진우 녀석이 자기가 죽으면 나에게 자기의 죽음을 알리지 말아달라고 너에게 부탁했을 리는 없을 테고, 아마도 넌 생전에 진우에 게 내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나 봐? 그래서 나한테 진우의 죽음을 알리기 싫어서 진우인 척 메신저에 접속해 그런 식으로 둘러댄 거겠지. 내 추리 가 틀렸니?" 단 하나의 진실, 예안이 바로 진우 본인이라는 것만 빼놓고는 나무랄 데 없이 진실에 가깝게 근접한 훌륭한 추리였다. "언제부터… 알았냐?" 예안은 이렇게 세현이 눈치채자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다. 고작 이 정 도만 밝혀져도 이렇게 홀가분한데, 내가 진우라는 걸 밝히면 얼마나 편 안한 기분일까?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겠지. "삼일 전 쯤에. 너에 대해 조금 알고 싶어 이것저것을 조사했는데 그때 진우 녀석이 죽었다는 걸 알았어." 세현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어딘지 서글픈 느낌이 묻어났다. "쓸데없는 짓을 했어. 네가 진우랑 얼마나 친했는지는 모르지만 진우인 척 하고 나한테 그런 거짓말을 둘러댈 필요는 없었어. 만약 진우 녀석이 정말 살아있는데 단순히 모습이 변했다고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거라면 난 평생 그 녀석을 미워했을 테니까. 차라리 죽어서 내 앞에 나타날 수 없는 게 더 나은 건지도 몰라. 적어도 진우 녀석한테 배신당한 건 아니 잖아?" "사람들이 들으면 너 되게 나쁜 녀석이라고 생각할 거야. 친구가 죽어서 만날 수 없는 게 오히려 더 나은 거라고 말하는 얘가 어딨냐?" "이건 나뿐만이 아니야. 진우 녀석도 그랬을 걸? 우리 둘은 이런 성격이 야. 네가 진우를 안다면, 그리고 진우랑 친하다면 나도 이해할 수 있겠 지." 풋 하고 씁쓸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맞아, 차세현. 너와 난 이런 성격이었지. 만약 내가 네 입장이었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 을 거야. 나도 너처럼 차라리 죽어서 만날 수 없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 을 거야. 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진우는 너랑 많이 친했니?" "…어." "얼마나?" "굉장히." "나보다도 더?" 정우에게 말했듯이 '진우는 내 인생 그 자체였다.'라고 말해버리는 건 너무나 못된 짓이다. 한참을 망설이던 예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나 지막하게 대답했다. "…진우 녀석 인생에 있어서 가장 친했던 친구는 너야. 너 하나 뿐이야. 그건 내가 확실히 약속해줄 수 있어. 거짓말은 안 해." "…그렇구나." 세현은 씁쓸히 웃었다. "그리고 진우가 사랑했던 여자애가 바로 너니?" 예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긍정으로 인식한 세현은 서글픈 한숨을 토해냈 다. "그랬구나. 그래서 넌 내가 사귀자고 했을 때 거절했던 거구나. 그래, 고마워. 진우 녀석을 그렇게 사랑해줘서. 부탁하나 해도 돼?" "뭔데?" "앞으로도 진우 녀석을 그렇게 사랑해 줘. 그리고 진우 녀석을 잊지 말 아 줘. 그 녀석, 보기보다 순정파라 널 두고 편안히 눈을 감지 못했을 거야. 부탁이니까 영원히 그 녀석을 잊지 말아 줘. 그리고…" 세현의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감정의 편린이 뒤섞여 나타났다. 저건 미 안함? 괴로움? 자책감? 상실감? 아니면 슬픔? 도대체 뭐지? 세현은 눈을 똑바로 들었다. 그는 지금 결코 웃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이제 더 이상 친구라는 이름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대신, 연인이란 이름 으로 예안의 곁에 머무르고 싶어하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이름 으로 그가 예안의 곁에 머무르든 간에, 그는 예안이 곧 진우라는 사실을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진우를 대신해서 내가 널 사랑할 수 있게 해 줘. 네가 날 사랑하는 건 결코 바라지 않아. 넌 진우 녀석만 사랑해 줘. 난 널 사랑할게. 그거 면 돼. 진우 대신 널 보살펴 주고 싶어." 칼날이 쑤시고 들어오듯 마음이 몹시 아파 온다. 결코 착각은 아니겠지. "휴, 힘들게 겨우 싸인 받았어. 이거 집에 모셔두고 평생 가보로 간직할 거야." 즐거운 표정으로 돌아온 혜인은 세현과 예안, 두 사람의 분위기가 몹시 어색한 걸 눈치채고 어리둥절했다. "두 사람 다 왜 그래? 내가 잠깐 싸인 받으러 간 사이 싸우기라도 한 거 야?" "아니, 아니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김혜인." 세현의 말을 못 믿겠는지 혜인은 예안에게 다시 물었다. "예안아, 무슨 일 있어? 혹시 세현이가 못된 말이라도 한 거야?" 예안은 씁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럼 도대체 뭐야? 두 사람 분위기가 너무 이상하잖아? 나만 따돌리지 말고 말해 봐." 잠시 망설이던 예안은 결국 입을 열었다. "사실은…" "내가 말할게." 그러나 세현이 재빨리 예안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우리집 환경에 대해 내가 예안이한테 푸념하듯 좀 털어놓았어. 원래 나 에 대한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데 예안이한테라면 상관없을 것 같고, 또 왠지 하고 싶어지더라. 그래서 그런 거야." "아…" 세현의 집안 환경에 대해 이미 들어 알고 있는 혜인은 그제야 납득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세현은 부잣집 아들이기는 해도 가족 관계가 일 반 가정하고는 많이 틀리다. 아니, 틀린 정도가 아니라 심각한 수준이었 다. 세현은 무남독녀 외아들이지만 어려서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 가 재혼했다. 새어머니가 데리고 온 한 살 위의 형이 있는데, 세현은 그 들과 친하지 못하다. 아니, 친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새어머니와 새 형, 심지어는 친아버지와도 제대로 어울리지 못한 채 그들 세 가족의 겉 을 언제나 맴돌기만 하는 판이었다. "그래서 미안한데, 혜인이 너 먼저 돌아가지 않을래? 난 오늘 예안이랑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거든." 예안이 전학 온 첫날 세현이 고백했던 걸 이미 소문으로 알고 있는 혜인 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자신은 지금 두 사람 사이에 낀 장애물 이나 다름없었다. 이쯤에서 빠져 주는 게 좋겠지. "알았어. 나 먼저 돌아갈게. 즐거운 주말들 보내." "미안해. 잘 가." "잘 가." 혜인이 싸인을 끌어안고 종종종 더 멀리 뛰어갔다. 그녀의 모습이 더 이 상 보이지 않자 예안이 입을 열었다. "왜 내 말을 가로막은 거야?" "너 진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말하려고 했잖아? 그걸 그럼 안 막아? 그러다가 자칫 진우가 너를 좋아했었다는 걸 혜인이가 알게 되면 어떻게 할 건데? 혜인이가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마음 속으로는 아직 상 처가 지워지지 않았어. 앞으로도 넌 진우에 대해 모른 척 해 줘." 그래서 세현이 말린 걸까. 납득한 예안은 자신의 경솔함을 탓하며 고개 를 끄덕였다. "차세현." "왜?" "넌 참 좋은 녀석인 것 같다." 예안은 부드러운, 그리고 한편으로는 슬퍼 보이는 미소를 띄웠다. "여자라면 질색하는 녀석이 진우가 좋아했던 녀석들한테 이렇게까지 해 줄 줄은 정말 몰랐어." "내가 여자를 질색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진우 녀석이 그런 말까지 했 어?" 이상함을 느낀 세현이 고개를 갸웃하자 예안은 속으로 몹시 당황했다. "으, 응! 진우가 그런 이야기 종종 했어. 넌 정말 특이한 녀석이라고…" "그래? 진우가 널 정말 좋아하긴 했나 보다. 근데 조금 섭섭하네. 진우 녀석 나에게는 너에 대해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는데. 저번에 백 만원 빌려갈 때 딱 한 번 그냥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만 했는데." 어느새 문화중앙홀 건물은 사람들이 꽤나 많이 빠져나가 썰렁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예안은 조금 뜨끔했다. "그때 난 진우 녀석이 사고 쳐서 낙태비용으로 돈 빌려 가는 줄 알았어. 책임감이 강한 녀석이니, 생명을 죽여선 안 된다는 그런 이상적인 생각 에 사로잡혀 네 인생과 자기 인생을 벌써부터 망가뜨리고 싶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하니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겠어. 네가 고아가 되자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그랬던 거지?" "아 그건…" 잠시 망설이던 예안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렇게 세현이 알고 있는 게 편할 것만 같았다. "이런 이야기 이제 그만 하자. 그나저나 만약 네가 나랑 사귄다면 진우 가 저 하늘에서 땅을 칠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어쩌겠냐. 그 녀석이 이해해야지. 살아 있는 사람은 결국은 살아가야 하니까. 죽은 사람은 살 아 있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세현은 밝게 미소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건물 밖으로 나와 있었다. "가자. 바래다줄게. 그리고 나랑 사귈지 아닐지는 지금 당장 대답해주지 않아도 돼. 천천히 대답해 줘. 몇 년이고 기다릴 수 있으니까." 역시 이 녀석은 멋진 녀석이다. 예안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 를 천천히 옆으로 흔들었다. 바래다준다는 것에 대한 거절의 표시였다. "오늘은 좀 혼자 있고 싶어. 너 먼저 돌아가. 그리고 대답은… 나중에 해줄게. 내 생각이 정리되면…" "그래. 그렇게 해. 그럼 몸조심해서 들어가." 세현은 지하철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 었다. 우두커니 서서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쳐다보던 예안은 고개를 들 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녁 하늘에 별은 단 한 개도 보이지 않고 인 공위성의 불빛만 반짝거렸다. "서울의 하늘은… 별 하나 보이지 않는구나. 언제쯤이면 별이 보일까?" 세현과 혜인. 가장 친했던 친구와 예전에 진심으로 좋아했었던 여자의 곁에 머무른다는 건 행복하면서도 또한 고통스러웠다. 혜인과 세현에게 이런 식으로 흔들린다는 건 자신에게 소중한 몸을 준 유젤에 대한 배신이 아닐까. 그러나 유젤을 잊기 않고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 진우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면 자각할수록, 예전에 좋아했던 여자와 친구에게 너무나 쉽게 마음이 흔들려 버린다. 이 얼마나 우스운 모순인 가? "실례합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요?" 생소한 외국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예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딘지 낯이 익은 금발의 귀공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랑 분위기가 너무 닮아서 그만 말을 걸고 말았습니다. 잠시 가벼운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그쪽에선 제가 쓴 모자 때문에 제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요?" "하하,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분위기가 닮아서 그저 말을 걸었을 뿐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비슷한 것 같네요." "좋아요. 앤드류 회장님." 예안에게 말을 걸어온 건 놀랍게도, 세계 제일의 거부이자 방금 전 공연 을 마친 천재 피아니스트 앤드류 왕자였다.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예?" "일반 사람들은 제가 말을 걸면 대부분 굉장히 놀라서 말을 제대로 하지 도 못합니다. 그런데 아가씨는 틀리네요."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세계 제일의 거부이자 굴지의 세계적인 대기업 카를로스, 이카 루스, 포세이돈, 네로스의 회장인 그를 가까이서 본다는 것만으로도 숨 조차 쉬지 못했을 텐데. "회장님 같은 거물이 이런 곳에서 경호도 없이 혼자 돌아다닌다는 게 의 외네요. 그나저나 한국어를 굉장히 잘하시네요?" "예. 어렸을 때 배웠습니다." "회장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익히 들어 알고 있어요. 이렇게 잠깐이나 마 대화를 나누게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해요. 포세이돈 하나 가지고 카를 로스와 네로스, 이카루스를 흡수한 경영 능력은 정말 대단해요. 존경하 고 싶어질 정도로 말이죠. 게다가 아이큐가 200이 넘는 천재인 데다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기까지 하니, 정말 회장님은 행운을 타고나신 분 인 것 같아요." 앤드류에 대해 말로만 들었을 땐 너무 부러운 인간이라고 질투와 시기까 지 했었는데 막상 이렇게 눈앞에 두고 보니 그런 생각은 씻은 듯이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너무 대단한 사람에게는 질투가 생기지 않는다는 게 정말인가 보다. 주변에 짙게 깔린 어둠 때문일까. 둘을 지나쳐 가는 사람들은 앤드류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서서히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과분한 칭찬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도 한 가지 갖고 싶지만 가지지 못한 게 있었습니다." 예안은 조금 놀라 눈을 치켜 떴다. "호오? 그게 뭔데요? 회장님한테 그런 게 있을 줄은 정말 몰랐네요." 앤드류는 어딘지 슬퍼 보이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벅차 오르는 감정을 달래는 듯 보였다. "여자였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걸 잃는 한이 있더라도 사랑하고 싶었던 여자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저와는 인연이 없었나 봅니다. 십 년 전에 처음으로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곧바로 헤어졌습니다. 오 년 전에 또 한 번 기적적으로 만났지만 그때도 그만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심장이 찢 겨나갈 것 같은 고통이라는 걸 처음으로 알게 해준 여자였죠." "그래요? 근데 그런 얘기를 처음 보는 저에게 굳이 하시는 이유가 뭔가 요?" 그러고 보니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면서 그런 섬세한 부분까지 풀 어놓는 사람은 없다. 앤드류는 세계적인 거물인 데다가 자신은 평범한 민간인이다. 게다가 그와 자신은 방금 처음으로 만났지 않은가? "너무하시군요." 예안은 어리둥절했다. 뜬금 없이 너무하다니? "예? 뭐가요?" "정말 너무하십니다." 그제야 예안은 앤드류의 숨이 거칠게 일그러지는 걸 얼핏 알아차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표정 으로 자신을 눈동자에 담을 듯이 강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너무해. 누나." "누…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예안은 그대로 굳었다. 앤드류의 뺨을 타고 눈물이 한 방울 굴러 내렸다. "여전히… 너무해… 서운 누나…" 태초에 태양이 만들어졌고 지구가 태어났다. 생명이 만들어지고 마더가 그들을 보살펴왔다. 인류가 태어나고 문명 사회가 건설되면서부터 마더 에 대한 믿음은 서서히 희석되어 갔고 종래에 인간들은 마더로부터 잔인 한 형벌과 시험을 받기까지 이르렀다. 마더의 존재조차 모른 채 마더가 내린 저주를 뿌리치기 위해 발버둥쳤던 선택받은 천재들은 결국 그들조 차 통제할 수 없는, 신이나 다름없는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내었고 그들 에게 아담과 이브라는 호칭을 주었다. 그리고 지금. 아담과 이브가 지구에 남긴 흔적의 피해자와, 선택받은 천 재 중의 한 명이 탄생시킨 이브의 복제가 서로 만났다. 그러나 그것이 우 연의 실타래 속의 한 부분인지 마더의 의도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운명의 이끌림인지는 아직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종례가 끝났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느 누구도 교실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은 채 예안의 눈치만 살폈다. 그건 담임인 정선생도 마찬가지였다. '휴, 이런 거 정말 싫다.'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느꼈지만 예안은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가방을 챙겼다. 예안이 밖으로 나가자 그제야 아이들은 쫄래쫄래 따라나섰다. 교문을 나선 예안은 최고급 스포츠카 제로스 GX 파이어를 세워두고 차체 에 몸을 기댄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앤드류 왕자의 앞에 걸음을 멈췄 다. 절로 어이가 없어지는 상황이다. "이제 끝났어, 누나?" "…예. 근데 제발 부탁이니 그 누나 소리 좀 저 멀리 달나라에 던져주시 면 안 될까요? 돈도 많으시니 달나라 여행쯤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앤드류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 "타." "거절한다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타."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전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구요." "타. 좋은 곳에 데려가 줄게." 앤드류는 시종일관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질 것 같은 다정함이었지만, 예안에게 있어선 필요 없는 부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앤드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제왕의 기운 덕분에 학생들은 가까이 접근 하진 않았지만, 멀찌감찌 떨어져서 잔뜩 긴장한 채 그 둘을 주시하고 있 었다. '이 사람 정말 미친 거 아니야?' 토요일날 처음 만났는데 갑자기 느닷없이 이상한 소리를 하더니 마지막 에는 '누나'라고 하면서 울기까지 했다. 하루종일 만나달라고 졸라대는 통에 덕분에 모처럼 일요일인 어제는 PC방으로 피신해 있어야만 했다. 윽! 그 담배 연기!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게다가 월요일인 오늘은 아침부터 떡하니 고급 스포츠카를 끌고 와서 교 문 밖에서 하루종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는 몇 대 없다고 알 려진 세계 최고급 명품 스포츠카 GX FIRE에 호기심이 동한 아이들은 갸 웃거리며 구경하다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그들로서는 평생 가도 구경 한 번 못할 세계 제일의 거부라는 걸 알아차리고 학교는 그만 비상이 걸 렸다. 생각해 보라. 그런 대단한 인물이 도대체 왜 이런 학교 앞에 와서 기다 리고 있단 말인가? 이 학교도 꽤나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긴 했지 만 순수 자산이 5조 달러가 넘는 앤드류하고는 차원이 틀렸다. 어쨌든 예안은 필사적으로 모른 체 하려 했지만 용기를 낸 몇몇 여학생 들이 앤드류에게 접근해 이유를 물었고, 덕분에 학교 전체에 어마어마한 '헛소문'이 퍼지고 만 것이다. '공주인 서예안이 세계 제일의 부자인 앤드류 왕자와 열애 중이다.' 소문의 주인공이 된 예안은 당장에 어떻게 된 거냐고 칭얼거리는 현우를 달래줘야 했다.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일단 그 두 사람은 사귀기로 한 사이니까. 예안이 진심으로 현우와 사귈 생각이 없다는 건 다 아는 얘기니까 일단 넘어가기로 하자. "휴."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고 있던 예안은 가까이에 서 있던 현우에게 눈짓을 했다. 현우는 단번에 알아차리고 얼른 예안의 곁에 다가왔다. 앤 드류는 못마땅한 듯 눈썹을 치켜 떴다. "이 녀석은 누구야?" "제 남자친구예요. 그러니까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저 이 녀석한테 오해 받는다구요."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뭔가를 생각한 뒤 앤드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거짓말. 누나는 남자라면 질색하지 않았어?" 예안은 속으로 뜨끔했다. '귀신이네. 이 사람이 말하던 사람도 혹시 나처럼 남자였는데 졸지에 어 느 날 여자가 되기라도 한 건가? 나처럼 무슨 나노 로봇이라는 걸 이용 한 뇌 이식술을 받고?' 자신이 완벽한 진실을 맞춘 것도 모른 채 예안은 난처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믿게 하기 위해 일부러 거짓말까지 보탰다. "질색하다니요. 말도 안 돼요. 저도 사람이라구요. 이성에게 관심이 없 을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저는 당신이 알고 있는 그 누나라는 사람이 아니에요. 회장 님 나이는 23살이라면서요? 전 아직 17살 밖에 안 됐다구요. 제가 왜 누나예요?" "맞아요. 당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누나는 이미 임자 있는 몸이니 제발 방해말고 사라져 주세요." 현우가 자신 있게 끼어 들자 앤드류는 팔짱을 낀 채 흘끗 그를 노려봤 다. 현우는 자신보다 키가 큰 그에게 전혀 기가 죽지 않은 채 당당하게 마주 쏘아보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쳐 서로에 대한 강한 적개 심을 빚어냈다. "오늘은 곤란해하는 것 같으니 이만 가 볼게. 하지만 다음에 왔을 땐 이 러지 않기야. 알았지?" 앤드류는 부드러운 웃음을 예안에게 건넨 뒤 차에 올라탔다. 그가 사라 지는 모습을 어이없이 쳐다보던 예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어쨌든 일단은 살았다." "…누나는 살았지만 난 죽을지도 몰라." "응? 왜?" "주위를 둘러보면 알 거야." 그 말에 주위를 둘러보니 남학생들이 적개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죽일 듯 이 현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왜 이런 거지, 하고 생각해 봤 지만 예안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현우가 식은땀을 흘리며 주춤주춤 뒷걸음쳤다. "유현우, 이 녀석! 감히 공주하고 사귄단 말이냐!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겠지!" …이 학교 전통 중의 하나가 빚어낸 결과가 또 있는데 그게 뭐냐면 공주 는 어지간해선 솔로라는 것이다. 바로 공주의 남자친구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남학생들의 우상인 여자를 애인으로 삼으 면서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말도 안 된다는 사상 때문이라나 뭐라나. 뭐 대가라고 해봐야 별 거 아니다. 그저 남학생 전체에게 한 번씩 돌아 가며 뺨을 가볍게 얻어맞는 것 정도? 중학교와 고등학교 전체를 합쳐봐 야 남학생 수는 고작 1800명 정도 밖에 안 된다. 1초당 한 대씩 맞는다 치면은 1800초, 분으로 치면 30분 정도만 참고 견디면 되는 것이다. 정 말 별거 아니다. 그리고 오늘 현우는 그 별거 아닌 걸 꼼짝없이 당한 뒤 그만 집에 와서 밤새도록 앓아 누워야만 했다. 혹시 세현이 예안에게 몇 년이고 기다린 다음에 대답을 들어도 좋다고 말한 건 설사 OK라 하더라도 지금 당장 대 답이 듣고 싶지는 않다는 걸 돌려 말한 게 아닐까? 그리고 예안은 그날 밤 침대에서 천장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또 무슨 전통이 있을지 이젠 겁난다." 잠이 들기 전 앤드류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던 예안에게 한 통의 전 화가 걸려왔다. 국정원의 김중현이었다. 「예안씨. 앤드류 왕자랑 무슨 사이인가요?」 예안은 깜짝 놀랐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앤드류 왕자 같은 거물이 입국했는데 국정원 요원들이 대거 나서서 살 펴보는 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실 저도 그 사람 잘 몰라요. 이틀 전 피아노 공연 때 우연히 처음 봤 는데, 갑자기 저보고 누나니 뭐니 하면서 접근하잖아요. 자기가 좋아했 던 여자랑 닮았대나?" 이 부분에서 예안은 조금 부끄러웠다. 「액면 그대로 믿지는 마십시오. 어쨌거나 세계 제일의 부자이자 아이큐 200의 천재입니다. 당신에게 어떤 목적을 갖고 접근할 것일 수도 있습니 다.」 "에이. 그런 대단한 사람에 저한테 뭐 아쉬운 게 있다고 접근해요?" 중현은 기가 차서 뒤로 넘어갈 뻔했다. 장난으로 응한 테스트에서 아이 큐가 350이 넘게 나오고, 세기적인 전투병기 맥을 만든 사람(한국 정부 는 예안이 맥을 만들었다고 결론 내렸다)이 대단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서 도대체 누가 대단하단 말인가? 아마 예안이 겉으로 나선다면 매년 노 벨상은 전부 다 휩쓸 수 있을 것이다.(이것 역시 정부의 생각) 「이번 주 토요일 날은 꼭 맥을 회수하러 가셔야 합니다. 이틀 전에 대 한해군이 잔뜩 준비하고 있다가 갑자기 예안씨가 취소하는 바람에 얼마 나 많은 낭비가 있었는지 염두에 두십시오.」 하지만 중현은 애초에 예안이 신경 쓸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 에 예안은 언제든지 수 조 달러 이상의 재산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엄청난 천재였다. 돈에 대한 관념이 많이 약할 거라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그냥 제가 해변가로 꺼내놓을 테니까 알아서 가져가시면 안 되나요? 주 말에는 좀 놀고 싶은데." 「당연히 안 되죠. 맥처럼 거대한 물체를 운반하는 것도 힘들거니와 보 안 유지도 힘들어집니다. 일단 예안씨가 조종해서 도크함에 실어주셔야 합니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럼 몸조심하십시오. 이만 끊습니다.」 예안은 전화가 끊어진 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갑자기 한 가지 사실 이 생각났다. "근데 대여료는 안 주나? 왜 그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없지?" 은근히 얼마를 줄지 기대되었다. 하지만 이쪽에서 먼저 물어보기가 좀 쑥스러워서 차마 그러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수요일 날 저녁. 정우를 제외한 온 가족이 있는 시간이다. "이건 어때요?" 다음으로 펼쳐 보인 건 파란색 바탕에 흰 줄무늬가 세로로 두 줄 있는 헐렁한 상의와 적당한 폭을 가진 남색 긴 바지였다. 저녁 식사 후 벌어 진 이 패션쇼에 가족들은 하나 빠지지 않고 지루한 줄 모르고 지켜보고 있었다. 원래 예안은 정호에게만 보여주려 했지만 가족들이 원하는 바람 에 이렇게 공개적으로 패션쇼를 갖게 된 것이다. 산 옷은 총 20벌이다. 돈이 200만원 넘게 들어갔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예안은 옷값을 지불하고 난 뒤 최신형 컴퓨터 한 대가 날아갔다고 피눈 물을 흘렸다. 그럴 거면 차라리 맥을 팔지 그랬어? 정호가 감탄했다. "예뻐. 그것도 예뻐." "흐음. 앞의 것과 비교해서 어떤 것 같아요?" "음… 둘다 너무 예뻐서 아빠는 어느 게 더 좋은지 구분을 못하겠구나." "그래도 한 번 골라 봐요. 이번주 일요일 날 아빠랑 같이 롯데월드 갈 때 입고 가게." 정호와 예안은 이번주 일요일에 둘이서 같이 롯데월드에 가기로 약속했 다. 도호가 굉장히 부러워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휴일날 예쁜 딸과의 다정한 데이트라. 이거야말로 징그럽게 커버린 아들만 셋 가진 모든 중 년 아버지의 간절한 바램이 아닌가? "음… 아무거나 다 좋지만… 그래도 꼭 하나를 꼽으라면 지금 입고 있는 게 가장 좋아 보이는데?" 사실은 전부 다 비슷비슷한 수준이지만 옷걸이에 꿰여져 있기에 제일 빛 이 나는 것이었다. 예안이 이걸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면 아마 정호 는 그게 또 제일 좋다고 할 것이다. "누나 근데 왜 다 남자 옷 밖에 없어?" 지루한 줄 모르고 구경하던 현우가 물었다. 아닌게 아니라. 예안이 오늘 혜인과 같이 쇼핑하러 가서 사온 옷들은 하나같이 남자 옷 밖에 없었다. 헌데 예안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들어선 안 될 말을 들은 사람 같았 다. "그, 그야 내가 남자 옷을 제일 좋아하니까 그렇지…" "여자 옷은 하나도 안 산 거야? 누나 친구가 같이 가서 옷 골라줬다면 그래도 여자 옷이 하나쯤은 있을 텐데… 어? 이건 뭐지?" 옷 한 벌이 조그만 종이백에 따로 들어 있는 걸 확인한 현우는 그것을 살짝 끄집어냈다. 동시에 예안의 표정이 구겨지고 말았다. "그, 그건…" "와우, 여기 여자 옷 하나 있네. 이것도 한 번 입어 봐. 얼른." "그, 그게…" 예안은 어쩔 줄을 몰랐다. 남자 옷만 집중적으로 골라서 사는 자신을 못 마땅하게 여긴 혜인이 억지로 하나 골라준 옷인데, 여성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변태 취급받고 싶은 남자가 아닌 이상 입을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완벽한 여자 옷이기 때문에 절대 가족들에게 보여줄 생각이 없었던 옷이 다. "한 번 입어 봐. 얼른." "그래. 오빠도 한 번 보고 싶다." 준우의 재촉에 이어서 도호와 수정도 은근히 압박을 가해왔다. "한 번 입어보지 그러니? 아주 잘 어울릴 거야." "그러고 보니 예안이가 여자 옷 입은 건 본 적이 없구나. 한 번 보여주 지 않겠니?" 마지막으로 정호의 부탁이 결정타였다. "아빠도 보고 싶어. 입어보지 않을래?" '으윽! 저, 절대 싫은데!' 하지만 다른 가족들의 부탁은 깨끗이 무시할 수 있어도 정호의 부탁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죽었다 살아난 뒤 이제부터라도 아버지에게 잘 하겠다고 한 맹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항상 기가 죽은 채 힘없이 살아가 던 아버지가 자신의 사랑으로 활력을 찾아가는 모습을 즐기고 있는 예안 은 차마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기가 그랬다. 결국 예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까짓거 아빠를 위해서 그냥 입지 뭐? "…알았어요. 잠시만 기다려요." 예안이 죽을상이 된 채 종이백을 들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정호의 방으 로 들어가자 가족들은 기대에 찬 채 수군거렸다. "얼마나 예쁠까? 기대되는데, 그치, 작은 형?" "아주 예쁠 거야. 근데 여자옷인 건 대충 알겠는데 정확히 무슨 옷이었 냐? 긴 치마? 짧은 치마? 미니스커트? 하늘거리는 걸 봐선 원피스나 투 피스일 것 같았는데." "나도 몰라, 대충 봐서. 뭐 입고 나오면 알겠지." 온 가족들이 기대하고 있을 때 닫힌 정호의 방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리 고 창피함으로 얼굴이 범벅이 된 예안이 첫날밤 색시처럼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예안이 완벽히 모습을 드러내자 가족들은 넋을 잃은 채 시선 을 빼앗겼다. "우, 우와…" 예안이 유일하게 산 여자 옷(그것도 혜인이 억지로 골라준)은 하늘거리 며 무릎까지 내려오는 소매 없는 흰 원피스였다. 고급스러워 보이기는 했지만 다른 여자가 입었다면 아마도 별다른 매력을 발하지 못했을 거라 고 가족들은 일제히 생각했다. 이건 옷이 사람을 빛내주는 게 아니라, 옷은 단지 예안을 완전한 여자로 볼 수 있게끔 유도한 매개체에 불과한 듯 했다. 빛나고 있는 건 바로 예안이었다. 하늘거리는 치맛자락 아래로 미끈하게 뻗은 날씬한 두 다리는 눈이 부실 정도로 희었다. 어깨에서부터 손끝까지 펼쳐진 아름다운 곡선은 차가운 풀잎 위에 떨어진 이슬을 연상시키는 묘한 매력을 뿜어냈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붉게 빛나는 결 고운 긴 머리는 목 아래에서 끈으로 묶여 오른 쪽 어깨에 걸쳐 가슴에 늘어져 있었다. 설원에 펼쳐진 백설처럼 새하얀 피부와 사람을 끝없이 빨아들이는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 마치 미의 여 신이 인간 세계에 강림한 것만 같았다. 한순간이었지만 가족들은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건 사람이 아니라 천사 가 아닐까 싶었다. 누구도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그들은 예안이 정말 인간일까 하는, 스스로도 바보 같다 생각되는 의문을 품었다. "괴, 굉장해 누나!" 현우는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그건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예쁘구나, 예안아. 너무 아름다워." 침착하기로 유명한 준우조차도 넋을 잃은 채 황홀하게 쳐다보자 예안은 굉장한 창피함을 느꼈다. "그, 그럼 이만 갈아입을게요!" 더 이상 이 옷을 입고 있었다가는 가족들의 시선에 온몸이 녹아 버릴 것 만 같았다. 하지만 가족들은 예안이 옷을 갈아입길 원하지 않았다. "그냥 그거 입고 있지 그러니? 잘 어울리는데." "맞아. 입고 있어." 온 가족의 은근한 압력에 예안은 잠시 무너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버텨냈 다. "이거 아빠랑 롯데월드 갈 때 입고 갈 거니까 아껴 둬야죠." "진짜니? 진짜 그 옷 입고 갈 거니?"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그렇게 말했던 예안은 정호가 기뻐하며 그렇게 묻자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닫고 속으로 새파랗게 질렸다. 여자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다니! 아, 아니 그것보다 이런 모습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다니! 가뜩이나 매일 매일 시선을 받으며 살아가는데 그렇게 했 다간 뭇 늑대들의 군침 섞인 시선을 몽땅 받아내야만 할 것이다. "…예." 하지만 아버지의 기뻐하는 모습에 너무나 약한 예안은 피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예안이 현우와 준우의 손을 빌려 바리바리 옷을 챙겨 이층으로 올라가고 난 뒤(그러고 보니 집에 왔을 땐 어떻게 들고 왔을까?) 도호가 정말 부 러운 표정으로 정호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예안이 정말 예쁘더라 형. 좋겠어." "부럽냐? 부러우면 너도 딸 하나 낳… 아니, 예쁜 딸 있는 친구랑 친하 게 사귀어 두지 그래?" "그래야 할까 봐. 그런데 내 친구 놈들 중에는 예쁜 딸은커녕 나처럼 징 그러운 아들 가진 녀석들 밖에 없으니 이걸 어쩌지?" 정호는 귀엽고 예쁜 딸이 못내 자랑스러운지 얼굴 가득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근데 형이랑 예안이는 옛날부터 굉장히 친했나 봐? 예안이가 형한테 사 근사근하게 아빠 아빠하며 대하는 거 보니까 말이야. 누가 봐서 예안이 가 형 친구의 딸이라고 생각하겠어?" 정호는 조금 뜨끔했다. "뭐, 뭐 조금 오래 됐어." "나한테도 한 번 소개시켜 주지 그랬어? 형 친구가 죽어서 형이 예안이 맡지를 않았다면 난 한 번도 보지 못했을 뻔했잖아?" "그럴 걸 그랬나 보다. 근데 내 친구 딸 녀석을 너한테 소개시켜준다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하지 않나? 뭐 그런 생각 때문에 너한테는 못 보여준 거지. 그때는 내 딸이 아니었으니까." "정말 예안이를 딸로 삼고 싶어?" 느닷없이 날아온 진지한 질문에 정호는 조금 당황했다. "무슨 뜻이야?" 도호는 말하기 곤란한 질문을 할 듯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풀 어나갔다. "말 그대로야. 예안이를 형 딸로 하고 싶냐고." "너 그게 무슨 소리…" "지금부터 하는 말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진 말아 줘. 솔직히 예안이를 위해서라도 형 딸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 정호는 조금 불쾌해졌다. 도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생각해 봐. 예안이 하나만 놓고 보자면 나무랄 데 없지만 유산도 제대 로 물려받은 게 없는 데다가 친척 하나 없는 천애고아에서 입양되는 거 야. 그나마 형이 반듯하기만 하면 모르겠는데, 홀아비 환경미화원이지. 형을 무시하는 게 아니야. 형이 나와 충호를 위해서 희생한 건 정말 미 안하고 고맙게 생각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그렇다는 이야기야." 정호의 눈빛에 자리잡은 불쾌감이 조금씩 짙어졌다. 그걸 눈치챈 도호는 미안했지만 그래도 내킨 김에 계속 밀고 나갔다. "전에도 말했듯이 난 예안이가 정우나 준우, 현우 셋 중에서 하나 골라 서 결혼했으면 싶어. 내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그 애들 정말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잘난 녀석들이야. 예안이가 형 딸로 있으면 아마도 우리 아 이들보다 더 나은 신랑 구하긴 힘들 걸? 공부 잘하지, 지네 앞가림 잘하 지, 게다가 장차 중원 그룹 회장의 조카가 될 지도 모르는 애들이야. 가 히 일등 신랑감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다. 하지만 도호야." "끝까지 들어 줘. 형이 전에 한 발 양보해서 예안이를 호적에 나중에 올 리겠다고 한 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이참에 형에게 확실하게 말해주 고 싶어. 예안이 형 딸로 있으면 우리 세 아들보다 더 나은 신랑감 구하 기 힘들어." "그 얘기는 이미 끝나지 않았냐? 정우, 준우, 현우가 예안이랑 잘 되지 않으면 그 때 내 호적에 넣기로…" 도호는 정말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자신이 품었던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다. 그게 설령 형에게 또다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긴 해도 자 신이 생각하기에 예안의 장래를 위해선 무엇보다 좋은 방법이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도. "만약 예안이가 우리 아들들이랑 잘못 되면 내 딸로 줘." "뭐, 뭐!" 정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건 전혀 상상 못한 이야기였다. "특별히 나쁠 건 없잖아? 어차피 형은 우리랑 함께 살면서 매일 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예안이를 위해서도 좋은 거야.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예안이가 형 딸로 있는 것보다 내 딸로 있는 게 장래를 위해서도 훨씬 좋을 거야. 형 딸로 있어도 내가 금전적인 지원은 해줄 수 있겠지만 홀 아비 환경미화원에게 입양된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것보다는 판사이자 대성 그룹 회장 사위의 딸로 있는 게 더 좋겠지." 얼굴이 새빨개진 정호는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살갗을 파고 든 손톱에서 피가 묻어 나올 정도였지만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통증 따 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도호야. 너…" "형에겐 정말 미안해. 하지만 예안일 위해서라도…" 갑자기 정호는 목청이 찢어질 듯 외쳤다. "시끄러!" 단 한 번도 자신에게 화를 낸 적이 없는 형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도 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건 자신이 예상했던 반응치고는 너무 지나친 것이었다. "도호 너…" 정호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맞았다. 도호의 말이 백 번 맞았다. 예안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자신의 딸로 넣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정우 삼형제 중 아무나 하나 골라잡아 서 결혼하거나, 아니면 도호의 딸로 입양되거나. 둘 중 어느 한쪽을 택 해도 상관없다. 그까짓 호적이 뭐가 중요한가? 어차피 매일 볼 수 있을 텐데. "…못 들은 걸로 하마. 화내서 미안하다." 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러기 싫었다. 가난이 지긋지긋해 자신에 게 심한 환멸을 느낀 아내가 떠난 뒤 젖 한 번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키 웠던 아들이다. 자신에게 따뜻한 말 한 번 한 적 없지만 얼마나 이 아버 지를 안타깝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더 아들에게 신 경 쓰며 또 못난 자기 자신을 한없이 탓하지 않았는가? 생각해보면 자신의 인생은 행복했던 때라고는 거의 없었다. 아들을 키웠 을 때에도 결코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생활이었다. 아들을 정말 사랑 하지만 자신은 무엇하나도 해줄 수 없는 가난한 아버지였으니까. 그게 얼마나 비참한 건지 도호는 모른다. 절대 모른다. 그 녀석은 자기 아들 한테 무엇이든 다 해줄 수 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되어 걱정하던 중 아들이 느닷없이 딸이 되어 돌아왔다. 그것도 눈이 튀어나오게 예쁜 딸이 되었다. 거기다 어디 서 배웠는지 이젠 애교도 잘 부리고 스스럼없이 안겨든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따뜻하기 그지없고 사랑스럽기 짝이 없다. 아들이 딸이 된 후 비 로소 정호는 그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포기하라고? "…나 예안이한테 잠깐 들렀다 가마. 잘 자라." "형…" 도호는 자신이 형에게 커다란 죄를 저질렀음을 알면서도 정정하지 않았 다. 어찌 되었든 예안을 위해서도 자신의 의견은 가장 좋은 것이었다. 만약 정호가 정말로 예안을 사랑한다면 지금은 저래도 결국은 자신의 의 견을 따를 것이다. '세정아…' 계단을 오르면서 정호는 이혼 후 거의 보지 못했던 아내의 이름을 속으 로 불렀다. 이 비참한 기분을 누군가에게 솔직히 말하고 위로 받고 싶었 다. 약 십 오 년 전에는 그나마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아내가 있었지만 그 아내는 이혼 후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다. 알고 있다. 자신의 이런 마음이 결국 예안의 장래를 망칠 거라는 걸. 왜 그걸 모르겠는가? 어찌 되었든 간에 예안이 자기 딸로 남아 있다면 결국 장래가 불투명해지고 말 것이다. 훗날 혼담이라도 오갈 때, 예안이 아무 리 반듯하게 살았다고 해도 홀아비인 환경미화원 양아버지를 두고 있는 여자를 어느 시부모가 좋아하겠는가? 그렇다고 결혼을 하지 않을 순 없잖은가? 지금은 남자를 질색하지만 여 자에 완전히 익숙해지면 결국 결혼은 해야 할 것이다. 정우나 준우, 현 우 셋 중의 하나와 결혼하기 위해서도 예안은 자신의 딸이 될 수 없다. 설혹 그들과 결혼하지 않더라도 좋은 신랑감을 구하기 위해선 도호의 딸 이 되는 게 백 배 더 낫다. 이성으로는 그걸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은 한없이 억울할 뿐이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비참한 건 예안이 영원히 자신의 딸로 남아 있어주기 를 바라는 마음과 그 애의 행복을 위해 놓아주려는 마음, 그리고 아무것 도 해줄 수 없는 무능력한 자기 자신에 대한 원망스런 마음. 바로 이 세 가지 마음들이 낳은, 욕심과 사랑 그리고 자괴감이 섞여 빚어내는 고통 이 가슴을 찢어발길 듯 때려댄다는 것이었다. 정호는 비틀거리며 예안의 방에 들어섰다. 준우와 현우가 옷을 정리하는 걸 도와주고 있었다. "얘들아… 잠깐 큰아버지가 예안이랑 얘기 좀 하게 비켜주지 않겠니?" "예?" "비켜주지 않겠니?" 어리둥절하던 준우와 현우는 정호의 기분이 굉장히 좋지 않음을 느끼고 얼른 방에서 나갔다. 마찬가지로 심상치 않음을 느낀 예안은 핼쑥한 안 색으로 물었다. "왜 그래, 아빠?" 자신과 단 둘이 있을 때면 항상 튀어나오는 반말은 예안이 자신의 친 혈 육임을 증명해주는 유일한 것이다. 정호는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걸 느끼 고 예안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느새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예안아… 아니 진우야… 넌 내 아들이지? 내 자식이지? 그렇지?" "왜 그래 아빠?" 예안은 뭔가 불안함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아 보이던 아버지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넌 내 자식이지? 만약 저 녀석들이랑 결혼해도, 또 내 호적에 올라오지 못하고 도호 녀석 딸로 들어가도, 그래도 내 자식이지? 그렇지? 그렇지 진우야… 크흑…" 그제야 예안은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얼핏 깨달았다. 작은아버지인 도호 가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했음이 틀림없으리라. 십중팔구 자신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왜 그래… 울지 마 아빠…" 복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예안은 그만 울음을 터트렸다. "울지 마… 울지 말란 말이야… 왜 울어 바보 같이…" 분했다. 분해도 너무 분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가 친척들에게 이렇 게 무시당하는 게(사실은 그런 게 아닐지라도 예안은 그렇게 생각한다) 너무나도 분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싫 었다. "누나…" 한참 후 정호가 눈이 시뻘개진 채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자 현우가 조 심스럽게 들어섰다. 예안은 냉랭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일 있어?" "그걸 몰라서 묻냐?" 지독한 한기를 뿌려대는 예안의 말투에 현우는 겁까지 났다. "나한테 말해 봐.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응? 그래도 명 색이 남자친구…" "남자친구? 네가 왜 내 남자친군데?" 앙칼진 예안의 목소리는 여전히 지독하게 차가웠다. 차갑기 그지없었다. "웃기지 마. 내가 정말 너 따위가 좋아서 사귀자고 한 줄 아냐? 내가, 아니 진우가 당한 걸 그저 복수하고 싶었을 뿐이야." "무슨 소리야 그게?" 현우는 강한 불안함을 느꼈다. 자신이 잘못 들었기를 간절히 빌었다. "몰라서 물어? 죽은 진우 말이야. 그 녀석이 널 얼마나 싫어하고 원망했 는지 알아? 난 진우의 소원대로 너한테 상처를 주려고 사귀자고 했을 뿐 이야. 내가 널 정말 좋아하는 줄 알았냐? 이 바보야!" "누나…" "누나라고 부르지도 마! 내가 왜 네 누나야!" "누나…정말 왜 그래?" 예안은 발악하듯 외쳤다. "시끄러! 나 부르지도 마! 나가! 당장 나가! 꼴도 보기 싫어! 나가 버리 란 말이야! 아, 맞다. 여긴 너희 집이었지? 좋아! 내가 나가 주지! 내가 못 나갈 것 같아!" "누, 누나?" 예안은 터지려는 울음을 참기 위해 입을 틀어막으며 방을 뛰쳐나갔다. 가족들이 놀라 황급히 뒤따라오며 외쳐 불렀지만 이미 예안의 모습은 어 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석훈아, 아버지 식사하시라고 해라." "예." 일층에서 들려온 대화가 잠시 끊어진 후 우렁찬 석훈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온다. "아버지 식사하시래요!" 그럼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겠지. "오냐. 알았다. 잠시만 기다리라고 전해주련?" "예." 그리고 새어머니는 이렇게 투박하실 게 뻔해. "아유, 당신은 또 일하고 있어요? 국 식으니까 식사 먼저 하신 다음에 하세요." 다시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실 거야. 그것도 너털웃음과 함께. "하하, 우리 사랑하는 마누라와 내 새끼들 먹여 살리려면 열심히 일해야 하잖아?" 그리고 나는 또다시 눈을 감아야만 할 테지. 나를 잠식하려 드는 이 비 참한 기분을 억누르기 위해서. "벌써 저녁 식사시간이네." 방 한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아 탁자에 팔꿈치를 기대고 있던 세현은 그 렇게 중얼거렸다. 터지려는 감정을 힘겹게 억제하는 것치고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세현의 방은 굉장히 넓었다. 130평에 3층짜리 빌라의 3층이 세현의 방 하나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한 마디로 말해 130평짜리 방을 혼자 쓴다는 소리다. 세현의 방은 방이라기보다는 서재에 가까웠다. 빼곡하게 들어찬 책꽂이 에 꽂힌 책들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건 차라리 도서관이라 고 해야 옳다. 게다가 박스에 담겨 지하실에 수북히 쌓여 있는 책들까지 합치면 그 수는 어마어마하다. 일개 고등학생이 소유할 수준이 아니다. 「생명의 기원을 찾아서」 「모든 것은 무에서부터 시작했다」 「신은 어째서 인간을 만들었는가」 「인류에게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 남은 게 있다면 멸망뿐이다.」 「양성자의 비밀」 「초끈 이론의 한계는 어디인가」 「빛은 입자다.」 「타임머신은 없다」 「성염색체의 수수께끼」 「인체의 신비와 해명」 책꽂이에 꽂혀 있는 건 하나 같이 전문가적인 기본 지식이 없다면 섭렵 할 수 없는 고난이도의 전문서적들이었다. 눈을 씻고 둘러봐도 소설책이 나 만화책은 보이지 않았다. 두꺼운 역사서적이 아주 조금 있을 뿐이었 다. 그것도 한글은 전혀 없이 한자로만 되어 있는 역사책. 거기다가 책 꽂이의 80% 이상은 영어, 독일어, 불어, 일본어, 중국어 등등 외국어로 된 책들이었다. "차세현. 저녁 먹을 시간이야. 밥 먹어." 갑자기 문이 덜컹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석훈이 그렇게 말했다. 불어로 된 책을 읽고 있던 세현은 책장을 덮었다. "알았어. 형 먼저 내려가 있어." 언제나 이 방에 들어설 때마다 온몸을 휘어 감는 미묘한 감정. 기가 죽 은 채 뭐가 뭔지도 모를 전문서적들을 훑어보던 석훈은 푸하 한숨을 터 트리고는 얼른 내려갔다. 세현은 주방으로 내려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새어머니와 석훈이 묘하 게 경계하는, 한편으로는 약간의 적개심을 품은 눈길을 살짝 보내왔지만 모른 척 했다. 어디 한두 번 있는 일인가? 띠리리리. 띠리리리. "아… 전화 받고 올게요." 세현이 일어서려 하자 아버지가 말렸다. "그냥 여기서 받아라. 가족들인데 뭐 어떠니?" "…예." 어쩔 수 없이 세현은 폰을 열어 귀에 갖다댔다. "여보세… Ah… This is James. Yes. Maybe I can. But, I'm busy now. Could you give me a call later? I'm sorry. Ok. Thanks. Have a nice day." 외국인 못지 않은 유창한 발음으로 대화하는 세현을 반쯤은 부러운 듯, 반쯤은 적대적인 눈으로 바라보던 석훈은 어머니가 자신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자 정신을 차렸다. 세현이 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자 아버지가 물었 다. "톰인가 하는 사람이니? 무슨 일이래?" "논문 좀 빨리 완성시켜달라는 재촉전화였어요." "흠. 언제쯤이면 논문이 완성되니?" "거의 다 됐어요. 이제 대충 정리만 하면 돼요." "열심히 하거라." "예." 아버지와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당신은 친아들의 외로움을 달래주 기 위해 한 재혼이 오히려 친아들을 더욱 더 깊은 외로움으로 밀어놓고 있다는 걸 모른다. 그 뒤로 세현은 말이 없었고, 이제 자신의 차례라는 듯 석훈과 새어머니 는 신이 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아버지와 즐겁게 저녁 식 사를 보냈다. 세현은 그저 인형처럼 아무 말 없이 밥을 입에 떠 넣을 뿐 이었다. "잘먹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채 반도 비우기 전에 세현은 일어났다. 세현이 거실로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새어머니가 불평하기 시작했다. 마치 일부러 들으라는 듯 목소리가 꽤나 컸다. "천재면 천재인 거지 도대체 저녁 식사시간에서 그런 전화를 받을 건 뭐 래요? 영어 회화 못하는 우리 석훈이가 평범하다고 기죽이는 거예요 뭐 예요? 기껏해야 아직은 돈 한푼 못 버는 고등학생인 주제에." "그래도 15살에 쓴 논문이 MIT에서 채택되기까지 했다구. 한국에서 고등 학교 때려치우고 곧바로 미국으로 넘어가면 박사 학위는 세트로 딸 수 있다고 칭찬이 자자하잖아. 돈 같은 거야 내가 얼마든지 버는데 뭐." "흥! 하지만 좀 건방지잖아요. 지가 천재면 단가?" "당신이 이해해. 원래 천재들이 조금 괴팍한 데가 있잖아." 괴팍하기는 뭐가 괴팍하다는 건데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 이가 더 밉다더니, 과연 그짝이었다. 물론 아버지가 자신에게 친아들로 서의 애정을 주고 있는 건 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것이 장래에 대 한 기대로 물들면서부터 세현은 아버지와 자신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거 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유한 사장의 집답게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거실 한가운데 놓인 소파에 앉은 세현은 노트북을 꺼냈다. 식구들이 즐겁게 떠들며 식사를 하는 동 안 그는 주식시장현황과 실시간으로 입수되는 경제 상황 자료들을 면밀 히 점검하기 시작했다. 국내의 데이터뿐만 아니라 해외 각지에서 데이터 를 끌어 모으는 그는 주식에서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실패는커 녕 언제나 폭발적인 소득을 얻었다. 세현 같은 천재에게 있어 주식으로 돈 벌기란 참 쉬웠다. 어떤 게 우량 주고 어떤 게 불량주인지, 그리고 어떤 주가 언제쯤 얼마만큼 올랐다가 언제 멈추고 다시 언제 얼마만큼 가격이 떨어지는지 한눈에 다 보였다. 이 쉬운 걸 왜 사람들은 어렵다고만 할까? 자료들과 주식현황을 훑어보던 세현은 가격이 열 배 이상으로 뛸 것이라 예상되는 주식을 찾았다. 가격이 바닥을 기고 있어 사람들이 아무도 관 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삼일 후 그 회사에서 비밀리에 새로 구성한 프로 젝트를 발표하면 최소 열 배, 많으면 스무 배 이상 뛸 것이다. 해킹을 배워두면 역시 이런 점이 좋다. 온갖 정보를 쉽게 빼올 수 있으니. 세현은 은행에 접속해 자신의 구좌에 들어갔다. 총 잔고는 5000억 원.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기 싫어 MIT의 톰 교수에게 빌린 6만 달러를 한화 로 바꿔 주식을 시작했는데 이 년도 안 되는 사이에 이렇게 불어났다. 그래서 주식은 쉽다고 하는 것이다. 특히 자신 같은 천재에게는. 가족들 중 세현이 5000억 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유한 그룹 계열사의 사장인 아버지는 연봉이 약 38억 정도다. 지금까지 모은 재산이 이 집까지 합쳐서 약 200억 정도 된다. 아버지가 20년 가까 이 모은 재산보다 2년 정도 심심풀이 삼아 주식으로 돈을 번 세현의 돈 이 수십 배나 더 많은 것이다. 게다가 세현의 재산은 은행에 예금한 현금만이 아니다. 유한 그룹 우량 기업의 대주주로 있는 그는 소유한 주식까지 다 합치면 재산이 족히 조 단위를 넘어선다. 이제 갓 17살 된 나이에 주식으로 이렇게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인 사람은 아마 세계적인 부자인 앤드류가 유일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어째서 예안이를 찾아 우리 학교로 왔을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해보던 세현은 얼른 구좌에서 돈을 찾아 방금 찾아낸 회사의 주식을 전부 매입했다. 매입이 가능한 주는 총 17만 주. 한 주당 가격이 만 원(100 달러) 정도밖에 안 된다. 이 회사가 잘나갈 때 한 주 가 보통 십만 원(1000 달러) 정도였으니 얼마나 바닥을 기고 있는지 피 부에 와닿았다. 하지만 삼일만 지나면 수십 배로 가격이 뛰어오를 것이 다. 거기다가 약간의 양념이 더해진다면 사십 배까지 뛰어오를지도 모른 다. 그래서 주식이란 참 오묘한 것이라고 말한다. 세현은 17억 원을 풀어 약 17만 주나 되는 주식을 전부 다 샀다. 앞으로 삼일 동안 주식을 더 내놓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까지 전부 살 생 각이었다. 그리고 삼일이 지나면 세현이 투자한 17억 원은 최소 170억 원에서 최고 700억 원 정도까지 불어나서 되돌아올 것이다. 매수를 끝낸 세현이 다른 먹이감이 없나 샅샅이 뒤지고 있을 때 핸드폰 이 울렸다. 잠시 얼굴을 찌푸리던 세현은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자 의아 해하면서 폰을 열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전화를 하셨으면 말씀하세요." 「…나야.」 세현은 깜짝 놀랐다. "서예안? 네가 웬일이야? 아니, 그보다 너 폰이 있었어? 없다고 하지 않 았니?" 「…지금 나 너네 집 앞인데 잠깐 나와줄 수 있니?」 예안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어둡게 느껴졌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 도 겪은 걸까? 재빨리 겉옷을 걸친 세현은 밖으로 후다닥 나갔다. 대문 밖을 나온 세현은 주위를 휙휙 둘러보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 있 는 예안을 발견했다.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예안에게 다가 간 세현은 흠칫 놀랐다. 울기라도 한 걸까? 항상 예쁘게 빛나던 녹색 눈 동자가 짙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 "이런 밤중에 무슨 일이니? 식구들하고 싸우기라도 했어?" 물끄러미 세현을 쳐다보던 예안은 조그맣게 말했다. "부탁이 있어." "뭔데?" "돈 좀 빌려 주라. 홧김에 그냥 나와서 돈을 하나도 안 들고 나왔어. 다 음에 꼭 갚을게." 역시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다. 세현은 걱정스러웠지만 묻지 않기로 했 다. "…얼마나?" "백만 원만 빌려 줘." "푸핫. 백만 원?" 실례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웃음이 터지는 걸 어쩌란 말인가? 예전에 진 우가 백만 원을 빌려갔던 상황이 떠오른 세현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 다. 왠지 모르게 유쾌했다. "빌려주는 건 어렵지 않아. 아니, 그냥 줄 수도 있어. 진우에게도 백만 원쯤 그냥 줬는데 너한테 왜 그걸 못하겠니?" "…고마워." "하지만 한 가지만 묻자. 너 지금 호텔이나 여관 같은 데 가려고 돈 빌 려는 거지? 집에 들어가지 않고? 맞지?" 예안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세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안 된다는 제스처였다. "차라리 갖고 싶은 목걸이가 있는데 사달라고 하는 거라면 백만 원이 아 니라 일 억이라도 아깝지 않아. 그렇지만 가출해놓고 여관에 묵을 돈이 필요한 거라면 줄 수 없어. 백만 원이나 빌려달라는 거 보니 꽤나 오랫 동안 안 들어갈 생각인가 봐? 학교는 어떻게 하고?" "…." "게다가 여자애 혼자 이 시간에 그런 데 묵는 건 너무 위험해. 그냥 집 에 들어가는 게 어때?" "…못 들어가." "왜? 설마 쫓겨나기라도 한 거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예안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예안은 눈물을 글 썽이며 말했다. "아빠를 모욕했단 말이야." 처음에 세현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무슨 소리야?" "그 사람들이 아빠를 모욕했단 말이야. 우리 아빠를, 진우 아빠를 모욕 했단 말이야." 예안이 울먹이기까지 하자 세현은 일이 조금 심각함을 깨달았다. "지금 네가 아빠라고 부를 사람이라면… 진우 아버지 말하는 거니?" 끄덕끄덕. "누가 그 분을 모욕했다는 거… 아, 설마?" 대충 사태가 어떻게 된 건지 깨달았다. 굳은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던 세 현은 예안의 손을 잡아끌었다. "일단 우리 집에 들어가자. 들어가서 얘기해. 부모님께는 내 여자친구라 고 말하자. 알았지?" 세현은 들어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예안을 억지로 대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랬더니 녀석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책상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평 소에 그런 짓 하지 않는 얌전한 녀석이라 우리는 깜짝 놀랐죠. 녀석은 굉장히 거만하게 우리를 주욱 훑어보더니 한마디했어요. '천한 것들.'이 라고요." "푸하하하!" "건방지게 군 녀석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죠. 할 수 없이 우리는 그냥 눈물을 머금고 녀석을 다구리쳤어요. 죽지 않을 만큼만 패줬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버지와 석훈, 새어머니는 거실 소파에 오란도 란 둘러앉아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낄낄대고 있었다. 세현이 예안을 데리고 들어서자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쏠렸다. 석훈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생전 처음 보는 미소녀였다. 예쁘다는 말조차 차라리 모욕이라 생각될 정도의 아름다움이랄까. 석훈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아버지가 물었다. 조금 못마땅한 톤이었다. "그 여자애는 누구냐?" "제 여자친구인데 잠시 집안에 불화가 있어 오늘 하루만 여기서 재우려 고요." "안 돼. 어떻게 불경스럽게 여자애를 재운단 말이냐? 게다가 특별히 치 워놓은 방도 없다." 새어머니가 냉정하게 딱 잘라 거절하자 세현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빤 히 쳐다보았다. 단 한 번도 세현의 이런 시선을 받아본 적 없는 새어머 니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려버렸다. 차가울 정도로 감정 없는 눈이 다. 그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는요?" "네 어머니가 반대하면 나도 반대다. 그리고 아무리 집안에 일이 일어났 다 해도 함부로 남자애 집에서 재우는 게 아니다. 집까지 바래다주거 라." 세현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조용히 살아왔지만 지금 이 상황에 서 도저히 한마디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저 아버지 아들 맞습니까?" 느닷없는 세현의 말에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세현의 아버지는 화를 내기보다는 세현이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던 놀라 움이 더 컸다. 그가 아는 자신의 아들은 항상 예의바르고 모범적인 녀석 이었으니까. 세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한 번만 더 부탁드릴게요. 얘 오늘 여기서 재우게 해주시죠. 책임은 제 가 질 테니 걱정하지 마시구요." "아직 고등학생인 녀석이 무슨 책임을 진다는 거니?" 새어머니의 앙칼진 말에 세현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그가 눈을 떴 을 때 가족들은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독한 한기가 그의 눈빛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단 한 번도 의붓아 들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새어머니는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세현은 입을 열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톤이었다. "제가 책임진다 했습니다. 걱정은 접어두시죠. 제가 언제 누구처럼 허튼 짓 벌이고 끙끙대는 것 봤습니까?" 그 누구라는 건 물론 석훈을 비꼬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아무도 그걸 생각하고 있지 못했다. "가족들에게 그렇게 막대해도 되냐?" 진우였을 때 세현의 사정에 대해 얼핏 들어 알고 있는 예안은 일부러 그 렇게 물었다. 예안인 자신은 세현의 가정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걸 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아버지 빼고 피 하나도 안 섞였는데 뭘. 상관없어. 그리고 사실 아버지조차도 가끔씩 내 친아버지가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니까. 신경 쓰 지 마." "흐음." 예안은 어느새 기분이 많이 진정된 표정으로 3층 세현의 방을 천천히 둘 러보기 시작했다. 130평짜리 방이라. 화려함이나 고급스러움보다는 뭔가 지루하고 답답한 느낌이 더 강했다. 아마도 방안 대부분의 공간을 잡아 먹은 수많은 책들 때문이리라. "이건 뭐냐? 「초끈 이론의 한계는 어디인가」라니? 무슨 책제목이 이 래?" "아, 그건 일반인들이 보는 책이 아니야. 물리 전공한 교수들도 어려워 하는 책이거든. 미국의 천재 물리학자 찰베르크 바론이 2040년에 발표한 논문을 간추린 거야." "찰…머시기?" 지울 수 없는 의구심이 든 예안은 천천히 책꽂이를 둘러보다가 꽂혀 있 는 책의 80% 이상이 외국어로 된 책임을 확인했다. 이상했다. 자신이 유 진우였을 때 세현은 단 한 번도 이런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었다. 설마 이 녀석, 천재인가? "너 설마 천재니? 이런 전문서적을 도대체 네가 왜 갖고 있어?" 잠시 망설이던 세현은 사실대로 말하기로 결심했다. "천재라… 하긴, 이제 와서 너한테 숨길 까닭은 없겠지. 난 아이큐가 200이 훨씬 넘어.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천재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곧바로 MIT에 들어갈 거야." "MIT?"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공과대학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오자 예안은 흠 칫 놀랐다. "원래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교수 자리쯤은 맡을 수 있는데, 아무래도 주 변의 시선들이 그러니까 일단 학교는 한 번 다녀보려고. 물론 배울 건 하나도 없을 거야. 내가 교수들을 가르친다면 모를까. 한 1년 정도만 다 니고 조기 졸업할 수 있으려나?" "너… 그렇게 대단한 녀석이었냐?" "글쎄다. 단순히 지능지수가 좀 높은 게 그렇게 대단한 걸까? 어차피 MIT에 다니는 사람들은 인간. MIT를 만든 사람들도 인간. 그리고 나 역 시 인간. 인간인 내가 인간들이 만든 그 학교에 들어간다는 게 어째서 대단한 거니?"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추궁할 말이 없다. 하지만 예안은 진우였을 때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는 세현에게 묘한 배신감을 느꼈다.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도대체 무엇인가? '아니야… 무슨 사정이 있을 거야. 세현이 녀석은 다른 녀석들하고는 틀 리잖아? 그래, 틀림없이 무슨 사정이 있어.' 이렇게 생각한 예안은 '이러면 안 돼'하면서도 한 번 세현을 떠보았다. "혹시 진우도 네가 이렇게 대단한 녀석이라는 걸 아냐? 난 진우한테 한 번도 이런 말 들어본 적 없는데." 진우와 사이가 벌어지는 게 싫어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예안에게 사 실대로 말할 필요를 못 느꼈던 세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짓말을 했다. "물론 진우도 알아. 내 가장 친한 친구인데 모를 리가 없잖아?" "…그래?" 갑자기 얼음처럼 차가워진 예안의 말투에 세현은 흠칫 놀랐다. 내가 무 슨 실수라도 한 걸까? 하고 예안을 쳐다보니 언제나 아름다운 빛을 발하 던 녹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허리까지 찰랑이는 풍성한 붉은 머릿결도 덩달아 분노의 기운을 흩뿌리고 있었다. 왜 저러지? "진짜 진우도 아냐?" "…어, 그럼. 진우 녀석이 모를 리가 없잖아." 진우와 자신이 멀어질 것을 걱정해 자신이 지닌 몇 가지 비밀들은 말하 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예안의 태도는 무언가? 마치 자신이 진우의 모 든 생각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추궁하지 않는가? 흡사 자신이 진우 라도 되는 것처럼. 예안의 눈동자는 여전히 차가웠다. 전신 가득 범접할 수 없는 한기가 흩 날리고 있었다. "정말 실망이다, 차세현. 네가 이렇게 이중적인 녀석인 줄 정말 꿈에도 몰랐다." "예안아? 무슨 소리야?" "끝까지 시치미 뗄 생각이라면 그만 둬. 너한테 정말 실망이다. 넌 진우 를 친구로 생각한 것도 아니었지? 진우가 너한테 자기 집안 이야기 해줄 때마다 뭐 이렇게 불쌍하고 열등한 인생이 다 있냐고 비웃었겠지? 사실 나한테 접근해온 것도 진우 녀석 때문이 아니라 그냥 나한테 흑심이 있 어서였지?" "서예안. 그런 말 하면 나 화낸다.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예안은 훗 하고 웃었다. 얼음과도 같아 소름끼치는 미소였다. "너 따위한테 도움 같은 거 전혀 받고 싶지 않아. 난 그만 나가겠어." 예안이 그대로 등을 돌려 방밖으로 나가려 하자 당황한 세현은 엉겁결에 손을 붙잡아 돌려세웠다. "이거 놔!" "잠시만 내 말을 들어… 윽!" 그러나 세현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예안의 팔꿈치가 그대로 자신의 명치를 쳤기 때문이다. 주먹으로 맞았으면 간지러웠을 테지만 체 중이 실린 팔꿈치에, 그것도 명치를 정통으로 얻어맞았으니 숨을 쉴 수 가 없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가슴을 움켜쥐고 주저앉은 세현을 차가운 눈동 자로 내려다보던 예안은 입을 열었다. 소름끼칠 정도로 냉정한 말투였 다. "앞으로 다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세현." "자, 잠깐…"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더듬더듬 변명하려는 세현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예안은 황급히 일층으로 내려왔다. 놀란 세현의 가족들이 자신을 주시하 는 걸 무시한 채 예안은 터지려는 울음을 손으로 막으며 집밖으로 뛰쳐 나갔다. 약 오분 정도가 지나가 겨우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게 된 세현은 재빨리 집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근처를 아무리 찾아봐도 이미 예안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돈 한 푼 없이 집에서 뛰쳐나왔을 텐데 이 밤 중에 도대체 어디를 갈 수 있다고? 세현은 몹시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이상했다. '왜 도대체 그렇게 화를 낸 거지?' 자신이 천재이고 또한 그밖에 여러 가지 비밀을 많이 갖고 있다는 걸 진 우에게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건 진우와의 사이가 벌어질 것을 우려 했기 때문이지, 결코 그 녀석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아서였거나 속으로 비웃어서가 전혀 아니었다. 게다가 그 행동은 도대체 무언가? 예안은 진우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 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단 말인가? 아니면 진우가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잖은가? 그런데 어째서 진우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자신이 진우를 속인 거라 단정지을 수 있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어." 세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예안과 진우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에는 절대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세현이 집에 다시 들어오자 아버지가 물었다. "네 여자친구는 어디로 갔냐?" "…집에 간 것 같아요." 새어머니가 비웃었다. "쯧쯧쯧. 네가 한 행동은 항상 책임질 수 있다더니 그게 도대체 뭐냐? 도대체 방안에서 무슨 짓을 하려고 했길래 여자애가 울면서 뛰쳐나가는 거냐?" 세현은 놀랐다. 울었다고? "울었…어요?" "그래. 도대체 방안에서 무슨 짓을 했길래… 혹시 이상한 짓 같은 거 하 려고 한 거냐? 정말 실망이구나, 세현아." 새어머니의 말이 끝나자 표정이 잔뜩 굳은 아버지는 엄한 목소리로 꾸짖 었다. "그게 사실이냐, 차세현!" "아, 아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째서 여자애가 갑자기 울면서 뛰어나가겠어요? 분명 히 이 녀석이 무슨 이상한 짓을 하려고 했던 게 뻔해요. 안 그래요, 엄 마?" 기회라는 듯 세현을 몰아붙이는 석훈의 말을 받아 새어머니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당신, 이 기회에 따끔하게 혼내주세요. 친아들이라고 해서 너 무 오냐오냐하면 나중에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버릇을 들이게 된다구요. 세상에나, 곤란한 지경에 처한 여자친구를 하룻밤 재워준다고 해놓고는 어떻게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할 수가 있어요? 게다가 어른들도 있는데." "세현이 너…" 삼인성호라 했다. 새어머니와 석훈의 말을 어느새 사실로 받아들인 아버 지는 분노로 눈이 새빨개진 채 뻗은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었다 세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버지. 오해세요. 말도 안 됩니다. 지금 새어머니와 석훈 형이 저를 모함하는 거라구요." 새어머니가 불같이 화를 냈다. "우리가 어째서 널 모함한다는 거냐! 아니, 어떻게 어른 앞에서 그런 말 을 함부로 하는 거냐! 내가 널 그렇게 키웠더냐? 아니면 내가 네 친어미 가 아니라고 해서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하는 거냐! 그리고 모함이라니? 본 그대로 말할 뿐인데 그게 어째서 모함이라는 거냐! 네 아버지도 똑똑 히 봤는데!" 석훈도 질 수 없었다. "네 친형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 거야? 아무리 내가 너보다 머리가 나쁘고 또 공부도 못하지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 어? 네가 천재면 다야? 천재면 다냐고!" 말을 마친 석훈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새어머니가 놀라서 다 독거렸다. "석훈아 울지 마라. 이게 다 이 에미 잘못이다. 네가 외로울까봐 괜히 재혼은 해가지고…" 아버지가 분노 섞인 음성으로 외쳤다. "세현이 네 이놈! 이딴 식으로 네 어머니와 형에게 상처 줄 거면 이 집 에서 썩 나가라!" 세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이 신파극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진심이세요 아버지?" "진심이고 말 것도 없다! 난 너처럼 못된 아들 둔 기억 따위 없어! 당장 썩 나가라!" 세현을 눈을 감았다. 잠시 차분하게 마음을 정리했다. 집을 나가라고? 그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할 말인가? '아니다… 어차피 내 아버지가 아니었다… 단지 내가 한 명의 인간으로 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매개체가 된 인간이었을 뿐… 그래, 이런 하찮은 인연에 더 이상 얽매이지 말자.' 맞아.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그만이야. 친아버지라고 해서 뭐가 대수지? 그냥 이 세상에 태어나는데 도움을 준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해버리면 그만 아니야? 어차피 저 사람은 내가 아니라 새어머니와 바보 같은 석훈 형을 더 좋아하는데. '어머니… 전 어떻게 해야 하죠…' 문득 떠오른 어머니의 모습에 세현은 하마터면 그대로 눈물을 흘릴 뻔했 다. 세 살이 되기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을 통해 모습은 알지만 목소리가 어땠는지, 어떤 부드러운 웃음을 지니고 있었으며 얼마나 다정 한 손길을 갖고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어머니. 하지만 그 분이 날 진심으로 사랑하셨다는 것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세현은 눈을 떴다. 그래.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이 불쌍하고 가련한 아버 지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자. "아버지. 다시 한 번 여쭐게요. 정말 나가도 되겠습니까?" 세현의 아버지는 사실 욱하는 심정에서 그렇게 말했을 뿐 정말 세현이 그러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전혀 잘못한 게 없다는 듯 당당하게 협박하는 것처럼 물어오는 세현의 모습과, 서로 껴안고 서러운 울음을 흐느끼는 아내와 새 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또다시 울컥했다. "이 놈! 아직도 그런 건방진 말투냐! 썩 나가지 못해! 너 같은 아들 따 위 필요 없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제 짐들과 책들은 내일 제가 사람을 보내서 갖고 가겠습니다. 이제 전 아버지 아들이 아닙니다. 앞으로 혹시라도 절 만나면 아는 척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 번 아버지를 훑어본 세현은 그대로 뚜벅뚜벅 집을 나섰다. 오늘밤 당장 머무를 곳은 얼마든지 있다. 호텔이나 여관은 사방 에 널려 있으니. 그리고 택시를 타고 삼십 분 정도만 더 가면 한적한 곳 에 지어놓은 자신의 저택이 있다. 그래. 거기로 가는 게 좋겠지. 등뒤에서 놀란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지만 세현은 깨끗이 무시했 다. 이제 저 사람은 내 아버지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그만이 다. 세현의 집을 나온 예안은 터덜터덜 밤길을 걸었다. 머리 속을 폭탄으로 날려버린 듯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마치 새하얀 스크린을 하염없 이 들여다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난 누구지? 지금 왜 이렇게 걷고 있는 거지? 차세현? 그 녀석은 누구지? 유진우의 친구라고? 가만, 유진우? 그건 또 누구야? "여어, 아가씨 혼자야? 우리랑 같이 놀지 않을래?" 껄떡하게 생긴 세 명의 남자가 음흉한 웃음을 지은 채 다가왔다. 예안은 그들이 자신의 어깨를 어루만짐에도 불구하고 멍하니 앞만을 응시했다. "응? 잠깐 맛이 갔나? 왜 아무 반응이 없어?" "뭐 어때? 이런 물 좋은 여자는 구경하기 정말 힘들다고. 재빨리 해치우 고 사라지는 게 최선이야. 맛이 갔으면 즐기기는 더 좋지 뭐. 뒤가 깨끗 할 거 아냐?" "키킥. 맞아." 어깨를 더듬던 징그러운 손길이 가슴 쪽으로 내려갔다. 단추가 벗겨지려 는 순간 갑자기 예안은 머리 속이 엄청난 고통으로 뒤덮이는 걸 느끼고 그만 주저앉았다. "아악! 아악!" 남자들은 깜짝 놀랐다. "뭐, 뭐야? 놀랐잖아? 진짜 미친 거 아냐 이거?" "야. 좋은 생각이 있는데 한 번 들어볼래?" "뭔데?" 키가 제일 작은 한 명이 머리를 움켜 쥔 채 주저앉아 비명을 질러대는 예안을 음흉한 눈길로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한 번 즐기고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얼굴이잖아? 우리 아지트에 가둬 놓고 두고두고 즐기는 게 어때? 어차피 미친년이니 괜찮을 거야." "그러다 경찰한테 잡히면 어떡하려고?" "키킥. 우리가 어디 경찰한테 한두 번 걸렸냐? 그리고 석호 너, 언제부 터 경찰을 그렇게 무서워했어?" "크크,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군. 그렇게 하자." 석호라 불린 남자의 징그러운 손이 다시 어깨에 닿자 예안은 벌떡 일어 나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당황했던 남자들은 주춤거리는 것도 잠시, 이를 갈며 뒤쫓기 시작했다. "야! 거기 안 서! 잡아! 빨리 잡아!" 팔뚝으로 몸을 껴안은 채 정신 없이 뛰며 예안은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내 거야. 내 거야. 내 거야. 내 거야. 내 거야. 내 거야…" 뭐가 네 거라는 건데? "예안인 내 거야. 내 거야. 내 거야. 내 거야. 내 거야…" 그래서 어쩌겠다는 건데? "니들한테 줄 수 없어. 줄 수 없어. 줄 수 없어. 줄 수 없어…" 그럼 안 주면 되잖아? 왜 그렇게 도망치는 거야? 잡힐 수 없으니까? 왜 네가 그들한테 잡힌다는 거야? 네가 설마 그들보다 약하다는 거야? 아니 잖아? 굳이 맥을 부를 필요도 없어. 너에겐 너만이 가진 힘이 있잖아? 열등한 구인류와는 달리 너만이 가진 고귀한 힘이 있잖아? 그걸 쓰면 되 잖아? "힘…" 머리 속을 강타한 그 단어에 놀란 예안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뒤쫓아온 남자들도 걸음을 멈추며 헉헉거렸다. "헥헥, 더 이상 도망칠 힘이 없으니까 멈춘 거냐?" "키키. 우리를 애타게 한 대가는 단단히 치러줄 테니까 각오하라고. 최 소한 우리 애새끼를 각각 두 명씩 낳기 전에는 절대 안 풀어줄 줄 알 아." 음탕한 웃음소리를 말없이 듣고 있던 예안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양손 바닥을 펼친 예안은 모든 감정이 백짓장처럼 사라진 표정으로 천천히 팔 을 들어 올렸다. 양 손끝에서 서서히 푸른빛이 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저거?" 불가사의한 현상에 놀란 깡패들은 주춤주춤 뒷걸음쳤다. 예안은 히죽 웃 음을 지었다. 수억 년 동안 단 한 번도 녹지 않은 얼음처럼 소름끼치게 차가운 미소였다. "예안인 내 거야." 찬란한 빛을 흩뿌리며 양손바닥에서 형성된 빛의 구체는 갑자기 폭발적 인 기세로 예안의 몸을 떠나 남자들에게 날아들었다. 고막이 찢어질 듯 강렬한 음파를 낳으며 터져 버린 붉은 폭발이 잦아든 후, 그 자리에는 전신을 엉망으로 다친 세 남자가 죽은 듯 쓰러져 있었다. 그들에겐 다행 스럽게도 가슴이 조금씩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아서 정말 죽진 않은 것 같았다. "예안인 내 거야. 난 예안일 지킬 수 있어." 손끝에 일어났던 푸르스름한 빛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엉망으로 다친 남 자들은 간신히 숨만 쉰 채 엉금엉금 기어 도망쳤다. 아니, 도망치려 했 다. 하지만 온몸의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전부 다 찢겨나간 듯 했 다. 이것이 바로 이브의 복제에게 허락된 힘. 마더의 영향 아래 놓인 구인류 와 에덴의 가호를 받는 신인류와의 경계선을 증명해주는 것.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정신이 든 후 예안은 자신이 낯선 거리에 서 있는 걸 깨닫고 어리둥절했 다. "여기가 어디지? 난 분명히 세현이네 집에서 나왔는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더라?" 마더의 다스림을 벗어난 인간에게 허락된 힘으로 자신을 윤간하려 한 세 남자를 죽지 않을 정도로 다치게 한 기억 따위는 없었다. 예안은 그 자 리에 멈춘 채 눈을 감았다. "세현이 자식… 날 그런 식으로 생각했단 말이지?" 어느새 분노로 불타오르던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뒤였다. 하지만 세 현을 다시 보지 않겠다고 한 말은 지금도 진심이었다. 유진우였던 자신 을 그런 식으로 모욕한 녀석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니다. "근데 어떻게 하지? 그냥 홧김에 뛰쳐나와서 돈 한푼도 없는데…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돈이라도 들고나올 걸. 그래도 한 삼백 만원 정도는 남아 있었는데 말이야." 아빠가 많이 걱정하고 있을 테지만 예안은 오기가 나서라도 다시는 그 집에 들어갈 생각 따위가 없었다. 하지만 돈 삼백 만원을 가져온다 해도 그걸로는 전세는커녕 월세 보증금도 안 된다. 그렇다고 여관이나 호텔에 무작정 머무를 수도 없지 않은가? 일단 오늘밤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던 예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머 니를 뒤져보았다. 뭔가 종이가 잡혔다. 기대에 찬 예안은 그것을 꺼내보 다가 실망했다. "뭐야, 명함이잖아?" 그것은 며칠 전 학교로 찾아왔던 앤드류가 연락하라며 주고 간 명함이었 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가만? 생각해보니 쓸모 없는 게 아니구나? "연락하면 그래도 조금은 도와줄 수 있겠지. 생전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 테 도움 받는 게 조금 찜찜하긴 하지만 그래도 세계 제일의 부자라는 사 람이 설마 날 팔아 넘기기라도 하겠냐?" 딱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던 예안은 결국 주머니에 들어 있던 핸드폰 을 열어 번호를 꾹꾹 눌렀다. 이윽고 신호음이 갔다. 「Hello.」 느닷없는 영어에 잠시 당황했던 예안은 '아참 앤드류 왕자는 외국인이 지.'라고 궁시렁거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저 서예안이라고 하는데, 기억하시나요?" 앤드류는 잠시 말이 없었다. 놀란 눈치였다. 「어… 누나? 내가 찾아가기 전에는 전화 영영 안 할 줄 알았는데 했 네?」 "사실 저도 평생 연락 안 하려고 했는데 지금 지극히 난처한 상황에 처 해서 말이죠. 그리고 제발 부탁이니 그 누나라는 소리는 집어치워 주세 요. 저 아직 17살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난처한 일? 무슨 일인데?」 예안은 입술을 깨물며 망설였다. 정말 이 사람한테 도움을 받아도 될까? "지금 집에서 가출했는데 갈 데가 마땅치 않고, 홧김에 뛰쳐나온 판이라 주머니도 텅 비어 있어서 말이에요. 좀 도와주실 수 없을까요?" 「거기가 어디야? 내가 지금 당장 데리러 갈게.」 "고맙습니다. 예… 여기가 그러니까…" 주변을 둘러보며 대충 어떠어떠한 건물이 있는지 설명해준 예안은 눈을 감으며 폰을 덮었다. 뭐 어떻게든 잘 되겠지.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으 니까 말이야. "들어 와." 생전 처음 들어와 보는 로얄 스위트 룸의 화려하고 고급스런 치장에 압 도당한 예안은 걸음을 뗄 수 없었다. "피아노 연주 공연 때 봤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세계 제일 의 부자라는 게 실감나는군요. 정말 화려한 방이에요." "응? 이런 구닥다리 장식이 화려하다구?" 세계 제일의 부자는 역시 이런 정도의 고급스러움은 아무것도 아니라 이 건가? 이 사람과 자신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경제적 격차가 있음을 깨 닫고 예안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럴 거면 맥을 팔지 그랬어? "일단 앉아." 앤드류는 앉기를 권했다. 예안은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저 장식 하 나만 망가뜨려도 왠지 인생을 망쳐 버릴 것만 같았다. 정말 그럴 리야 없겠지만. "이런 데는 하루 묵는 데 얼마나 해요?" 앤드류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한 이천 만원쯤?" "이, 이천 만원이요?" 최신형 컴퓨터 10대 값을 하룻밤 묵는데 날려버린단 소린가? 예안은 벌 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하긴… 전재산을 은행에 예금하면 하루 이자만 700억 이상 나올 텐데 하루에 이천 만원쯤이야… 돈도 아니겠지.' 예안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보면 볼수록 부러운 인간이다. 역시 맥을 팔 걸 그랬나? "근데 집에서 가출했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 그게…" 말해줘도 괜찮을까? 망설이던 예안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전후사정을 털 어놓았다. 물론 자신이 원래 진우라는 남자였다는 사실은 쏙 빼놓고, 대 충 적절하게 편집했다. 다 듣고 난 앤드류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으음. 그렇다면 그 진우라는 남자애의 친척들이 진우의 아버지이자 누 나의 양아버지가 되는 분에게 모욕을 줬단 말이지?" "…예." "그래서 화나서 홧김에 뛰쳐나왔고?" "…예." "그런데 그 진우라는 남자애와 누나는 어떤 사이였어?" 예안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미리 준비해놨던 대답을 꺼냈다. 이미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써먹었으니 이 사람에게 해줘도 괜찮을 듯 싶었다. "좋아했던 사이에요."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겠지. 진우와 유젤은 서로 좋아했으니까. 다 만 유젤은 진우를 인간 대 인간으로서 좋아했다는 것 하나뿐. 그 애는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게 뭔지 모르는 아기나 다름없었으니까. "이상하네." 앤드류는 고개를 갸웃했다. "예? 이상하다니, 뭐가요?" "정말 서운 누나가 아니야?" 그제야 예안은 앤드류가 왜 이상하다는 건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가 갈렸다. 사람이 그렇게 말했는데 아직도 못 믿냐? "아니라고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잖아요. 그냥 우연히 닮은 것뿐이라구 요!" "하지만 닮은 정도가 아니라 너무 똑같아. 붉게 빛나는 이 머리카락도… 사람 같지 않은 하얀 살결도… 그리고 솜털 하나 없는 이 피부도 그렇 고… 다른 게 있다면 서운 누나는 눈이 검은색이었는데 그쪽은 녹색이라 는 것뿐. 렌즈 낀 거 아니었어?" "아니라니까요. 기억상실증 같은 것도 아니에요. 저는 엄연히 16년 간 살아온 기억들이 다 있다구요. 그냥 우연히 엄청 닮은 것뿐이에요." 하지만 앤드류는 전혀 실망한 표정이 아니었다. 예안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는 아니었는데. 어째서일까? "네가 서운 누나가 아니라면 내가 왜 널 도와줘야 되지?" "그, 그건…" 예안은 말문이 막혔다. 맞다. 자신이 앤드류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도 움을 받을 이유도, 그가 자신을 도와줘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무엇을 원해?" 느닷없는 물음에 예안은 조금 당황했다. 도와줄 이유가 없다고 방금 정 에 말해놓고 그런 질문을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 진우의 친척들이라는 사람들을 폭삭 망하게 만들어줄까? 다시는 기 어오르지 못하도록 밑바닥 인생으로 몰아넣어 버릴까?" "그, 그렇게까지는…" "아니면 무엇을 원해? 네 양아버지라는 사람을 환경미화원에서 한국 제 일의 부자로 만들어줄까? 중원 그룹 회장을 몰아내고 네 양아버지를 회 장으로 취임시켜줄까? 아니면 대성 그룹?" "그, 그런 건 바라지 않아요! 다만…" "다만?" "다만…" 예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할 말을 찾지 못해 버벅거렸다. 내가 진정으 로 원하는 것? 그게 도대체 뭐지?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래?" "아…" 퍼뜩 생각났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안은 황급히 고개를 들고 또박또박 말했다. "집 한 채를 원해요. 그냥 아버지랑 저랑 둘이서 살 수 있을 정도로 적 당한 크기면 돼요.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아요. 풍족하진 않지만 아버지 도 아직은 돈을 버시고, 또 제가 이다음에 돈을 벌어서 살면 되니까…" "흐음? 그 정도면 만족하는 거야?" 그 정도면 만족이다. 예안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친척들에 대한 복수도 뭐도 아니었다. 다만 그들과 영원히 결별하고 싶은 것.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으며 모든 인연을 끊고 사는 것. 하지만 그게 과연 잘 될 까? "그 정도면 전 만족해요. 하지만…" "하지만?" "당신이 아무 이유 없이 날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 아무리 돈이 썩어나 는 사람이라고 해도. 내가 당신이 찾던 그 여자가 아니라는 걸 이제 아 셨을 테니까." "흐음. 그건 그래." 앤드류는 여전히 놀라지 않은 채 부드러운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지금 자신을 놀리는 건지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어서 저러는 건지 예안은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을 들어주면 난 널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어. 섬 하나를 통째로 사서 네 집으로 꾸며줄 수도 있단 소리야. 아니면 너나 혹은 네 아버지를 한국 제일의 부자로 만들어줄 수도 있고."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그런데 그 조건이라는 게 뭔데요?" 앤드류는 빙긋 웃으며 손을 뻗어왔다. "서운 누나가 되어 줘." 이브. 제이. 아담의 연인. 바로 유서운. 그녀가 앤드류에게 남긴 실연의 상처는 십 년의 세월로 지워질 정도로 가벼운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 지만 과연 이브의 복제가 그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수 있을까? 아침이 찾아오자 예안은 눈을 떴다. 창문을 통해 밝은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머릿결을 쓸어 내리던 예안은 몸을 일으켰다. 거실에는 이미 앤드류가 벌써 나와 있었다. "잘 잤어, 누나?" "아니요. 너무 호화스런 방이라서 도저히 잠이 오지가 않던데요." "존대는 하지 말랬잖아." "아차." 예안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집 한 채 받 는 조건으로 '서운 누나'라는 사람이 되어준다고 약속하긴 했지만, 하루 아침에 어떻게 반말을 쓰란 말인가? 게다가 자신보다 나이가 6살이나 많 은 세계 제일의 부자한테. 앤드류는 묘한 웃음을 띤 채 다시 말을 건넸다. "언제쯤 우리는 같은 침대를 쓸 수 있을까?" "…평생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또. 또. 또 존대다? 반말하라니까." "아차. 죄송… 아니, 미안해." 앤드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래. 아주 좋아." '이 사람 혹시 미친 거 아닐까? 아니면 변태취향이라도 있는 건가?' 자신보다 나이가 6살이나 어린 여자한테 누나가 되어달라더니 태연히 누 나 소리를 해대고, 또 자신에게 하대를 하라고 하는 다분히 변태적인 취 미가 세계 제일의 부자에게 있었을 줄이야. 완전히 영국 왕실의 수치다 수치. "누나. 집이 갖고 싶다고 했지?" 끄덕끄덕. "어떻게 할까? 내가 사줄까? 아니면 내가 돈을 줄 테니 누나가 직접 사 겠어?" "제가… 아니 내가 그런 쪽으로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사기 당하기도 쉬 우니까 그냥 그쪽이…" "앤드류." "그, 그래 앤드류 네가 사줬으면 싶은데…"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 연상인 데다가 건장한 23살의 청년, 그것도 세 계 제일의 부자에게 이렇게 마구 하대를 해도 되는 건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앤드류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예안 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지만 뭔지는 몰랐다. "이게 뭐예요? 아, 아니 뭐야?" 앤드류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예안은 황급히 말을 바꿨다. "카드지 뭐야. 비밀번호는 3315니까 누나 마음대로 돈 빼다가 집하고 가 구 같은 거 사. 누나 양아버지에게 부탁하면 될 거야. 혹시라도 사기 당 하면 돈 새로 빼다가 사면 되지 뭐. 그러면서 차차 경험을 키워나가는 거고. 다 쓴 다음에 돌려주면 돼. 뭐 평생 안 돌려주면 나야 더 좋고." 평생 안 돌려주면 평생 잡아놓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예안은 조금 얼떨 떨한 채 카드를 챙기면서 반드시, 기필코, 절대 돌려주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고마워요. 에… 그럼 전 일단 집으로 가볼게요. 그래도 되죠?" "또 존대다." 예안은 난처한 듯 볼을 긁적였다. "그게 잘 안 되네요… 아, 안 되네. 미안, 앤드류." "앞으로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야. 내가 집으로 데려다 줄까?" 예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만약 우리 아빠나 친척들이 널 보면 아마도 기절해서 뒤로 넘 어갈 걸. 어쨌든 세계 제일의 부자니까. 그냥 나 혼자 갈게. 그리고 저 번처럼 함부로 우리 집에 찾아오지 마. 만약 그때 얼굴이라도 들켰으면 난 어쩌라고 그랬냐?" "흐음. 누나, 말투가 너무 남자 같아. 좀 고쳐 봐." 그것까지 고치라는 거냐. 예안은 조금 울컥했다. "싫어. 내 맘이니까 그것까지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조건은 어디까지 나 그 서운 누난지 뭔지 하는 사람처럼 행동해달라는 거였잖아?" "화나지 않아?" 앤드류의 표정은 진지했다. "화라니? 내가 왜 화가 나냐?" "사실 난 예전에 한 번 어떤 여자에게 누나에게 그랬듯이 서운 누나처럼 행동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어. 그런데 그 여자는 그 말을 듣자마자 울더라. 자기는 자기지 다른 사람의 대역이 될 순 없다면서." "흐음. 뭐 그 여자가 너를 좋아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떡하 냐? 난 널 안 좋아하는데. 그런데 그 여자도 나랑 많이 비슷하게 생겼나 보지?" 앤드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니야. 얼굴이나 다른 것들은 전혀 달랐어. 그저 아주 조금… 분 위기가 아주 조금 비슷했을 뿐이었으니까." 예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그만두자는 제스처였다. "너 그 서운이라는 사람 좋아했다고 했지?" 끄덕끄덕. "나를 그 사람과 동일시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해하겠는데, 난 어디까 지나 너와 계약을 하고 그 사람인 척 너에게 하대를 해주는 것뿐이니까 쓸데없는 기대는 가급적 갖지 마라. 그리고 이상한 짓 같은 거 할 생각 도 말고." 마지막에 한 말. 과연 앤드류가 그것을 지킬 수 있을지는 몹시 걱정이 되었지만 현재 예안으로서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도 집 한 채 얻는 대가로는 아주 지극히 싸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는 게 전부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엄청 비싼 집으로 사버릴 테다. 어디 한 번 골치 아 파 봐… 생각해보니 전재산을 은행에 넣으면 하루 이자가 700억이 넘어 가는 사람이잖아? 내가 아무리 큰집을 사봐야 끄덕도 안 할 텐데. 으 윽!' 앤드류를 골탕 먹이려면 최소한 조 단위가 넘어가는 집을 사야 할 텐데 그런 집이 도대체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그냥 항공모함 하나 사가지고 그걸 집처럼 꾸며버릴까?' 물론 민간인에게 항공모함을 팔 미친 나라도 없겠지만 그래도 한 번 그 렇게 생각해 봤다. 도호의 집 근처에 도착한 예안은 근처 은행에 들어가 자동현금출납기에 서 앤드류가 준 카드 인출 한도액이 얼만지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기절 할 뻔했다. '세, 세상에! 동그라미가 몇 개야?' 이미 한 번 한국 정부로부터 5000억 달러에 맥을 팔라는 유혹을 받은 경 험이 있지만 이렇게 직접 카드로 뽑을 수 있는 금액을 눈앞에서 확인하 는 것과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엄청난 금액에 예안은 정신을 제대로 차 릴 수 없었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십억, 백억, 천억… 3000 억 원? 진짜 이 사람 미친 거 아니야?' 카드 한도 금액은 자그마치 3000억 원. 제정신이 아닌 이상에야 이런 엄 청난 금액을 누나 노릇 해달라는 조건으로 주는 인간은 이 세상 어디에 도 없다. 아무리 앤드류가 돈이 썩어나는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너 무 심하지 않은가? '근데 그 사람 우리나라 은행에도 통장을 만들어놨나?' 예안은 앤드류가 자신을 만나고 난 뒤 언젠가 써먹기 위해 일부러 이 카 드를 만들어놨음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쨌거나 사기 몇 번 당하더 라도 충분히 눈이 튀어나오게 비싼 집 잘 수 있을 테니 잘 됐다고 예안 은 중얼거리며 은행을 나왔다. 집에 도착한 예안은 심호흡을 한 뒤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나다, 유현우. 문 열어." 스피커 너머로 잠시 말이 없더니 문이 열렸다. 예안은 두근거리는 가슴 을 달래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현관을 들어서니 온가족이 모여 앉아 있 었다. 정호와 도호, 수정과 준우 현우 형제, 심지어 자취하고 있는 정우 의 모습까지 보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핼쑥한 안색이었다. "어제 어디서 잤니?" 정호의 안색은 금방이라도 쓰러져 버릴 듯 창백했다. 밤새도록 한잠도 자지 못한 채 걱정만 한 사람 같았다. 예안은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에게 굉장히 미안함을 느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빠. 잠깐 제 방으로 오실래요?" "여기서 하면 안 되겠니?" 예안은 잠시 친척들의 얼굴을 가라앉은 눈동자로 둘러보았다. 지은 죄가 있는 도호와 수정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살짝 돌렸다. 잔뜩 걱정했을 정우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한잠도 못 자고 학교도 못 갔을 준우의 얼굴 을 거쳐, 원망스런 눈길을 보내오는 현우의 얼굴에 당도한 예안의 녹색 눈동자는 훗 하는 비웃음을 살짝 품었다. 그리고 예안은 다시 정호에게 정중히 말했다. "아빠에게만 하고 싶은 이야기니까 잠깐만 제 방으로 오세요." "그러지 말고 여기서… 알았다. 네 방으로 가자." 정호는 예안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이층 자신의 방에 들어선 예안은 앤 드류의 호텔 룸에서 쓰고 나온 모자를 벗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긴 붉은 색 머리가 찰랑거리며 허리까지 늘어졌다. 침대에 걸터앉은 예안은 뒤따라 들어오는 아버지에게 빙긋 웃음을 보냈 다. "아빠도 앉아." 느닷없이 가출을 한 딸이 돌아오기만 하면 단단히 혼을 내주리라 결심했 던 정호는 귀여운 미소에 그만 마음이 사르르 풀려 버렸다. 따지고 보면 사실 예안은 자신 때문에 마음 아파하다가 울컥해서 그만 나가버린 게 아닌가? 혼내는 건 역시 그만두는 게 좋을 듯 했다. "어제 어디서 잤니?" "호텔에서. 친구한테 돈 빌렸어. 이상한 데 안 갔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빠도 나 알잖아?" "그래. 알지. 하지만 연락이라도 해줄 순 있었잖아?" "그 기분으로 내가 어떻게 연락하냐? 그래도 이렇게 하루만에 돌아왔잖 아? 어쨌든 별일 없이 어젯밤 잘 보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 예안과 나란히 앉은 정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어젯밤 밤새도록 고민하다가 내린 결정을 말해줘야 하나? "아빠 사랑해." 갑자기 예안이 자신의 허리를 껴안으며 몸을 기대오자 정호는 좋으면서 도 쓴웃음을 지었다. 아들이었을 때는 단 한 번도 그런 말 해준 적 없으 면서 여자가 된 되로는 완전히 애교덩어리라니까. 이래서 딸 가진 부모 들이 오래 산다는 건가? "아빠도 우리 딸 사랑해." "응." "근데 예안아." "응?" 갑자기 정호가 진지하게 자신을 부르자 예안은 얼굴을 살짝 들어 아버지 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사실 이 아빠가… 밤새도록 생각해 봤는데…" 정호는 굉장히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앞둔 사람처럼 어두운 낯빛이었다. "이런 이야기 정말 하고 싶지 않았는데… 듣고 화 안 낼 수 있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예안의 목소리가 약간 냉랭해졌다. 본능적으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대 충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사실 이 아빠는 직업도 반듯하지 못하고, 학력도 무척 낮고, 게다가 모 아놓은 돈도 없고, 홀아비잖아?" "그래서?" "거기에 비해 도호는 학력도 나무랄 데 없고, 직업도 존경받는 판사고, 대성 그룹 회장의 사위이기도 하지. 모아놓은 재산도 많고 말이야." "그런데?" 정호는 어두운 낯빛으로 망설였다. 알고는 있는 거지만 직접 입으로 말 해놓고 보니 자기 자신이 너무나 비참했다. "그래서 널 내 호적에 영영 올리지 않기로 했다." "아빠!" "들어 봐, 예안아. 정우 삼형제 나무랄 데 없는 일등 신랑감들이야. 얼 굴이 못 생겼니? 공부를 못하니? 집안이 나쁘니? 아니면 성격이 나쁘니?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녀석들이야." "그래서?" 정호의 품에서 빠져나온 예안은 분노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사실 처음에 네가 그 녀석들 중 아무나 골라잡아 결혼했으면 한다는 건 농담이나 마찬가지였어. 하지만 도호가 한 말을 듣고 어젯밤 곰곰이 생 각해 본 결과 널 위해서라도 호적에 올리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아빠." "생각해 봐. 네가 그 녀석들 중 아무나 골라잡아 결혼하면 너에게도 좋 은 일이야. 네가 내 딸로 있으면 아무리 네가 괜찮아도 그 녀석들보다 더 나은 신랑감 구하기 힘들어. 그리고 만약 그 녀석들하고 잘 안 되면 도호가 널 딸로 달라더라." "그래서? 아빠는 내가 그러길 바래?"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정호는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이 아빠는 널 위해서라면…" "날 위해서 말고. 아빠의 솔직한 생각 말이야. 아빠는 내가 그러길 바 래? 내가 다른 사람 자식으로 남아도 좋단 말이야?" 그런 걸 바라는 부모가 이 세상에 있을 리 없잖아. 정호는 왠지 모르게 복받치는 설움에 그만 울컥 눈물을 쏟을 뻔했다. "아니지? 아니잖아? 아빠 그런 거 바라지 않잖아?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 "아빠는 네가 내 자식으로 남아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하지만…" 예안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삼촌도 참 웃겨. 아니 왜 내가 진우였을 땐 그런 말 한 마디도 안 했 대? 생각해 봐. 내가 진우였을 때 왜 단 한 번도 내 장래를 위해서 나를 자기 아들로 넣자는 말을 한 적 있어? 그래놓고 왜 이제 와서 그러고 싶 대? 웃기잖아? 그리고 내가 미쳤다고 남자랑 결혼하냐?" "진우였을 땐 넌 내 친아들이었지만 지금의 넌 남남이라고 도호는 알고 있잖아." "어쨌든!" 예안은 필사적으로 터지려는 눈물을 참아냈다. 폭발하려는 감정을 가까 스로 참아내고 다스렸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심호흡 을 했는지 모른다. "아빠. 우리 이 집 나가자." 정호는 깜짝 놀랐다. "예안아 그건…" "나가자. 난 더 이상 이 집에 살기 싫어. 더 이상 현우와 준우 형이 알 랑거리며 접근하는 꼴 지켜보기 싫고, 숙모가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싫 고, 삼촌이 나한테 따뜻하게 대하는 것도 싫어. 내 정신이 이상해져 버 릴 것 같애. 전하고는 완전히 딴판이야. 나 견딜 수 없어. 더 이상 이 집에 있으면 돌아버릴 것 같애. 우리 나가자. 응?" "안 돼. 그건 안 돼." 정호는 단호했다. "왜? 왜 안 된다는 거야?" "우리가 이 집 나가면 어디로 간다고? 아빠는 모아놓은 돈도 없어. 아빠 통장에 얼마 들었는지 아니? 단돈 천 오백 만원이 전부야. 이 돈으로는 기껏해야 지하방 전세 밖에 못 구해." "상관없어. 이 집만 아니면 어디든지 괜찮아." "안 돼. 아빠는 괜찮지만 난 네가 그런 데서 사는 꼴 보고 싶지 않다. 절대 안 돼. 도호에게 비는 한이 있더라도 이 집에선 못 나가." 당신의 자존심이나 허영심 따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자식 의 체면을 위해 비는 한이 있더라도 나갈 수 없다는 아버지의 마음에 예 안은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복받치는 눈물을 참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마음을 다스리고, 또 다스렸는지 모른다. "이거면 되겠어?" 예안은 조금 전에 은행에서 뽑은 수표를 지갑에서 꺼내어 정호에게 보여 주었다. 수표의 금액을 확인한 정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너 이런 큰돈이 어디서…?" "5억이야. 이런 집 정도는 못 구하겠지만 집 값이 별로 안 비싼 지역에 서 그럭저럭 4, 50평짜리 아파트 한 채 정도는 살 수 있을 거야. 나갈 수 있지? 응?" 정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예안아. 너 이 돈 어디서 구했니? 설마?" "도둑질이나 강도짓 한 거 절대 아니야. 아빤 날 못 믿어? 그리고 내가 그럴 힘이 어딨다고 그런 걸 하냐?" "그런 의미로 물은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너 혹시…" 예안은 펄쩍 뛰었다. "무슨 재벌집 아들 꼬셔서 하룻밤 자주고 돈 뜯어낸 건 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엄밀히 말하면 앤드류의 호텔 룸에서 하룻밤 잔 다음에 받은 건 맞지 뭘 그렇게 뻥을 치고 그러나. 뭐 다른 방을 쓰기는 했지만서두. "네가 이런 돈을 갖고 있을 리가 없잖아? 어디서 났어? 어디서 난 거니? 나쁜 짓 한 거면 얼른 주인에게 돌려 줘라." 정호는 진심으로 걱정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 인생이 완전히 빗나가는 건 아닐까를 깊이 염려했다. 예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생각을 정리하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믿을 수 있어?" 끄덕끄덕. "좋아. 사실대로 말해줄게. 정말 나쁜 짓 한 건 아니야. 그렇지만 편법 을 쓴 건 맞아." "?" "전에 그 레이… 아니, 김윤우 박사라는 사람 기억하지?" "어. 설마 그 사람이 줬다는 거니? 무슨 이유로?" 예안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사람이 준 거 아니야. 그 사람 도움을 받긴 했지만." "?" "내가 사실 통장에 2백 만원 정도 모아놓은 돈이 좀 있었어. 그날 사고 가 나기 전, 나 그 돈 찾아서 컴퓨터 사러 가고 있던 중이었거든. 그런 데 미처 컴퓨터 사기 전에 사고가 났고, 수술 받고 깨어난 다음에 재활 치료 하면서 그 김 박사라는 사람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하다가 그 사람 이 내 돈 2백 만 원 보고 주식으로 불려줄 수 있다고 했어. 자기가 주식 을 하고 있는데 하는 김에 내 돈도 같이 불려주겠다고 했지." 정호는 서서히 어떻게 된 건지 감을 잡아 갔다. "난 어차피 내 목숨 살려준 사람이니까 줘도 상관없다는 심정으로 맡겼 거든? 근데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제 그 사람에게 한 번 전화해보니까 내 돈 2백 만원 5억으로 불려서 내 통장으로 부쳤다고 하더라. 그거 찾 은 거야." "대충 이해는 하겠는데… 근데 아무리 주식을 잘해도 2백 만원 갖고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어떻게 5억으로 불릴 수 있니?" "그 사람이 한 말 잊었어? 아이큐 200이 넘는 천재라는 것. 그 사람한텐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솔직히 예안은 말하면서 조금 찔렸다. 어쨌든 나중에 혹시라도 레이온 하고 연락이 되면 정호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말을 맞춰놔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아… 이제 우리 딸이 나보다 더 부자네." 그 말은 완전히 믿은 정호는 그제야 표정이 풀리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돈 문제가 해결된 이상 까짓거 딸 말대로 이 집 나가서 살면 그만이지 뭐? 안 그래? "아빠. 이제 이 집 나갈 거지?" "그래. 까짓거 우리 딸이 원한다면야 얼마든지 나가 살지 뭐." 예안은 행복하게 미소지으며 다시 정호의 허리를 껴안았다. "고마워 아빠." 심각한 표정으로 이층으로 올라갔던 정호와 예안이 웃음을 띤 채 내려오 자 도호 가족들은 의아해하면서도 일이 잘 풀렸다는 걸 느꼈다. 물론 그 들에게 좋은 방향으로 일이 풀린 건 절대 아니었지만. "할 이야기가 있다." 소파에 앉은 정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예안이 내 호적에 올릴까 한다." "예엣!" 그 말에 가족들 전부는 벼락을 얻어맞은 것처럼 놀랐다. 특히 정우 삼형 제의 실망은 대단했다. "무, 무슨 말이야 형? 지, 진짜 그렇게 할 생각이야?" 어찌나 놀랐는지 도호는 말까지 더듬었다. "그래. 말리지 마라 도호야." "아니, 형 어째서 그런…"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현우가 펄쩍 뛰며 반대하고 나섰다. 준우도 거들었다. "큰아버지, 제발 다시 한 번 생각해주세요." "아주버님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반쯤은 재미있게, 반쯤은 열 받은 듯 지켜보고 있던 예안이 입을 열었 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나요?" 도호의 가족들은 일제히 입을 다문 채 예안의 입술을 주시했다. 무슨 말 이 나올지 잔뜩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솔직히 전 왜 반대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천애고아가 된 제가 제 친아버지 친구인 이 분의 양딸로 들어가서 서로 외로움을 같이 견뎌 보 고 싶다는 건데 왜 반대하시는 거죠? 좀 잔인하다고 생각하시지 않나 요?" "우, 우리는 그런 뜻으로 반대하는 게 아니란다 예안아. 우리는 다름이 아니라 널 위해서 반대하는 거야. 굳이 우리 형 아버지의 딸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도호가 더듬거리며 변명하자 예안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빠에게 이미 벌써 말씀은 들었어요. 절 딸로 입양하고 싶으시다구 요?" "아빠! 그게 정말이야!" 놀란 정우 삼형제가 도호를 쏘아보았다. 아들들에게는 그 이야기를 비밀 로 했었던 도호는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전 아저씨… 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준우 형 아버님 딸로 입양 되고 싶지 않아요. 제 친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이분하고 저는 굉장히 친했어요. 만약 두 분 중 한 분을 제 아버지로 선택하라면 전 주저 없이 이 분을 택할 거예요. 그게 또 제 친아버지의 유언이었구요." 친아버지의 유언이라는 말에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준우 형이나 현우는 어딜 놓고 봐도 분명 나무랄 데 없는 일등 신랑감 이죠. 하지만 전 결혼할 생각 같은 건 절대 없어요. 설혹 결혼을 한다 해도 준우 형이나 현우하고는 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분의 딸 로 입양될 수가 없잖아요?" 정우 삼형제는 주먹을 꽉 쥐며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왜 우리랑은 결혼하지 않겠다는 건데?" 현우가 굳은 말투로 물었다. "말했잖아. 난 결혼할 생각 자체가 없다니까. 그냥 평생 아빠랑 같이 살 거야. 원래부터 난 독신주의자거든." "지금 내가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 결혼을 한다고 해도 우리랑은 안 하 겠다며? 그 이유가 뭐냐니까!" 현우가 고함을 지르자 도호가 못마땅해 하며 꾸짖었다. "어디서 소리를 지르는 거냐, 현우야!" "아빠는 가만히 있어!" "유현우! 아버지에게 그게 무슨 태도야!" "형도 가만히 있어! 난 꼭 이유를 알아야겠어! 왜 하필 결혼을 한다 해 도 우리, 아니 나랑은 안 하겠다는 건지 그 이유를 정말 알아야겠단 말 이야!" 예안은 반쯤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았다. 지금 자신의 행동이 현우에게 얼마나 잔인한 짓이 되는지 잘 알았다. 그래서 기분 좋은 웃음이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건지도 모른다. 필사적으로 참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긴장 을 늦추면 터져 나와 버릴 것이다. "내가 어제 말하지 않았나? 다시 한 번 듣고 싶어? 이 자리에서 다시 말 해줄까?" "그, 그건…" "네가 그러길 원한다면 이 자리에서 말해줄게. 그럴까? 그래볼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얼굴이 일그러지던 현우는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현우야!" 도호가 놀라 불렀지만 현우는 들은 척도 않고 이층 자신의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어이가 없어진 도호가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자 예안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건 가식으로 뒤덮인 감정이었다. "죄송해요." "아니,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 그런데 도대체 무슨 소리냐? 어제 그 이 유를 말했었다니?" "그냥 별거 아니에요. 어쨌든 저는 독신주의자니까 준우 형도 별다른 기 대는 갖지 말아 줘. 그럴 수 있지?" "어, 어?" 느닷없이 예안이 물어오자 준우는 조금 당황했다. 허를 찔린 사람 같았 다. "형이 나 좋아한다는 거 나 진작에 알고 있었거든. 내가 바보야? 나 꽤 눈치도 있고 혜민이가 다 말해줘서 알고 있었다구. 확실히 말해둘게. 난 결혼할 생각 따위는 절대 없어." 예안의 녹색 눈동자가 이번에는 정우의 눈으로 향했다. 그는 아무런 표 정도 짓지 않고 있었다. 동공 안으로 모든 감정을 감추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예안은 정우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겐 말할 필요를 못 느꼈다. 어찌 되었든 자력으로 자신의 진심을 눈치챈 유일한 사람이 바로 정우다. "예안아. 무슨 말인지 대충 알겠다. 하지만 굳이 현우나 준우랑 결혼하 지 않거나, 아니면 내 딸로 들어오지 않더라도 이 집에서 같이 살 수는 있지 않니?" 예안은 도호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거절의 의미였다. "사실 저는 오랫동안 친아버지랑 단둘이서 살아와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이 있는 집에서는 잘 적응이 안 돼요. 그동안은 제가 이런 저런 소리 할 자격이 없어서 참고 있었는데 이번에 다행히도 행운이 겹쳐서 나가서 살 려구요. 아빠도 동의하셨어요." "형은 모아놓은 돈도 별로 없어. 나가서 살아봤자 어렵기만 할 거야. 게 다가 형은 아들까지 잃었는데 너랑 나가서 살면 오히려 더 외롭지 않겠 니? 네가 처음에 형 딸로 입양되기로 결심한 것도 다 외로움을 참기 싫 어서가 아니었니?" "모아놓은 돈이 없어요? 그럼 아저씨가 조금 보태주시면 되지 않나요? 아저씨는 돈이 많으시잖아요." 예안이 정곡을 찔러오자 도호는 창피함에 그만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는 예안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무안주기 위해 일부러 저런 말을 했음을 상상조차 못했다. 단순히 예안이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궁금한 걸 물어 봤을 거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무, 물론 형이 나에게 해준 걸 생각하면 그까짓 돈 좀 보태주는 거야 어렵지 않아. 하지만 형도 홀몸인데 우리랑 떨어져 살면 얼마나 외롭겠 니? 형을 생각해서라도 예안이 네가 오히려 설득해야 되는 거 아니니?" 정호가 중간에 끼어 들었다. "돈 문제라면 걱정할 것 없다 도호야." "무슨 소리야 형?" 예안이 얼른 대신 대답했다. "사실 저에게 아주 먼 친척뻘이 되는 성공한 아저씨 한 분이 계신데 그 분이 제 사정을 들으시고 저에게 돈을 좀 주셨어요. 그럭저럭 적당한 크 기의 아파트 한 채 정도 살 수준은 되니까 도와주지 않으셔도 돼요." "그, 그러니?" 가능하면 형과 예안이 집을 나가지 않기를 바랬던 도호는 떨떠름했다. "하지만 형, 이건 아무래도…" "괜찮아. 이 집을 나간다 해도 외롭진 않을 테니까 걱정 마라. 그리고 난 언젠가는 결국 나갈 생각이었다. 나이를 먹어서까지 너와 재수씨 신 세를 질 수는 없지 않니? 지금까지 신세진 것만 해도 충분히 미안해." 도호의 며느리가 되거나 양딸이 되는 게 좋겠냐고 방금 전까지 권하던 것과는 달리 어느새 적극적으로 도호를 납득시키려 드는 정호의 행동에 예안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역시 아빠가 그 동안 이 집을 나가지 않은 건 돈 문제 때문이었을까? 하긴 자식의 교육비 대는 것만 해도 빠듯한데 집 장만할 돈 같은 건 꿈도 못 꿨음이 틀림없다. 그 후로 거의 한 시간이나 도호와 수정은 집을 나가려는 정호와 예안을 설득했다. 결국 도호는 예안을 이층까지 올려보낸 뒤 정호를 필사적으로 설득해 당분간은 예안을 호적에 넣지 않겠다는 약속을 다시 받아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예안을 며느리 혹은 친딸로 삼고 싶은 욕심은 사그 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그날 저녁 정호에게 결정된 사항을 전해들은 예안은 조금 어이가 없었 다. "진짜? 진짜 나 호적에 안 넣을 거야?" 정호는 정말 미안해했다. "그래. 하지만 당분간만 그렇게 하기로 했어. 그래도 일단 이 집 나가는 건 도호도 이해했으니까 오늘은 이만 넘어가자." "아니 또 왜 반대한대? 내가 아빠 자식된다는 게 그렇게도 싫은가? 따지 고 보면 삼촌한테 반대할 권리는 없잖아?" "그래도 도호가 워낙에 소원하니까 어쩔 수 없었어. 네가 정말 탐나나 보다." "윽. 상상만으로도 끔찍해." 침대에 걸터앉은 채 다리를 앞뒤로 흔들던 예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 신이 완전히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조금 답답했다. 그렇다 고 대놓고 나서서 설치는 건 정호를 난처하게 만들 테니 일단 이것으로 참는 게 좋을 지도 모른다. "아참, 이 돈 아빠가 갖고 있어." 예안은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 정호에게 내밀었다. 정호는 얼떨떨한 표정 으로 다섯 장의 수표를 받아들었다. "아빠는 내일부터 아파트 하나 알아 봐. 어차피 나 학교가 이 근처니까 가능하면 이 근처로 알아보는 게 좋을 거야. 이 동네가 땅값이 비싸기는 해도 몇 정거장만 벗어나면 그럭저럭 4, 50평짜리 아파트 한 채는 살 수 있겠지. 작은 평수 사지 말고, 그냥 집 사는 데 다 써버려. 안 남겨도 돼." "괜히 돈 잃어버릴까봐 겁나네." 정호는 농담처럼 말하며 돈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앤드류에게 받은 카드 에 들은 잔고가 생각난 예안은 피식 웃었다. 아마도 정호에게 말해주면 혼비백산할 것이다. 그렇지만 앤드류 왕자와의 관계를 들키기 싫었던 예안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랬다간 십중팔구 '잘 됐다. 그 사람 잘 잡아 봐.' 이런 식으로 나올 게 뻔하다. '아빠는 이제 내가 남자라는 걸 완전히 잊어버린 모양이네.' 자신이 원래 남자였다는 걸 아는 유일한 사람 중의 한 명인 아버지조차 도 어느새 자신을 딸로 여기고 있는데, 레이온 그 사람은 어떨까? 점점 진우로서의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잃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 았다. "그럼 아빠는 그만 자러 갈게. 잘 자거라." "응. 잘 자." 상냥한 웃음과 함께 정호의 볼에 굿 나잇 뽀뽀를 한 예안은 침대에 털썩 누웠다. 조금은 어색한 기분으로 딸이 입술이 닿은 볼을 만지작거리던 정호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혼자가 된 예안은 눈을 감았다. "이제 이 집에서 나가면… 편안하게 살 수 있겠지." "우리 집에 있는 게 그동안 불편했던 모양이야?" 느닷없이 들려온 정우의 목소리에 예안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저, 정우 형?" "노크를 했는데도 못 듣길래 그냥 들어왔어. 화났다면 사과할게." 정우가 문을 닫자 예안은 차갑게 물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일단 앉아도 될까?" 잠시 망설이던 예안은 냉랭히 말했다. "앉아." "땡큐." 정우가 의자에 앉자 예안은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어나 앉은 그대로 물었 다. "무슨 할 말 있어? 질질 끌지 말고 빨리 말해." "난 네가 안 나갔으면 좋겠는데. 안 나가면 안 되니?" 일체의 망설임 없이 곧장 물어오자 예안은 잠시 얼이 빠졌다. 이렇게 정 곡을 찔러 올 줄은 몰랐다. "그 이야기라면 이미 끝난 거 알잖아? 왜 또 그 말을 하고 그래?" 전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묵묵히 앉아 있던 정우는 쓰게 한 마디 던졌 다. "내가 널 좋아한다면? 그래서 네가 이 집에서 나가는 거 반대한다면?" 의외의 말이기는 하지만 전혀 상상 못한 건 아니었기에 예안은 별로 놀 라지 않았다. 게다가 정우가 자신을 좋아하는 건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 었다. "형이 전에 말했지? 현우한테 나쁜 의도 품고 접근하지 말라고. 형이 생 각한 것처럼 난 나쁜 의도를 품고 현우한테 접근했어. 근데도 나를 좋아 하는 마음이 생겨?" "대충 그런 말을 흘린 기억은 있어. 하지만 그때 내가 주로 한 말은 너 자신을 보다 아끼라는 거였는데?" "어쨌든 간에. 하여튼 난 형 말대로 그런 식으로 준우 형이나 현우한테 복수하려 드는 게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어. 그래봤자 천국에서 진우가 별로 기뻐하지도 않을 테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편한 대로,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 거야." "그래서 선택한 게 고작 이 집을 나간다는 거니?" 예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잖아. 복수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고, 그리고 또 포기하기는 했 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우와 준우 형에게 쌓인 감정까지 없어지는 건 아 니야. 물론 그건 형에게도 마찬가지구. 어찌 되었든 내가 이 집을 나가 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겠어?" 정우는 비로소 쓴웃음을 지었다. 어이없어 하는 건 아닐 텐데.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이상해. 네 말을 듣고 있으면 마치 네가 진우 본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져." 움찔. "진우와 네가 그렇게까지 깊은 사이였어? 진우 녀석이 자기 모든 생각이 나 기분 같은 걸 항상 너에게 전부 다 말해준 모양이야? 그렇지 않고서 야 네가 우리 삼형제에게 그런 악감정을 품고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좋아했던 남자애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악해질 수 있다는 거야? 여자란 정말 대단하구나. 난 그런 엄두조차 못 내겠는데." "…." "이건 어때?" 정우는 아주 중요한 말을 하려는 듯 정색했다. 한치의 가벼움도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함 그 자체였다. "날 이용해 봐." "?" "네가 진우 덕분에 우리 삼형제에게 품어온 악감정이 정말 싸그리 없어 지진 않았을 거 아냐? 오히려 복수하는 데 너무나 시간이 많이 걸리고 또 너 자신을 희생해야 되기 때문에 포기한 거 아니야?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무슨 소리야?" "날 이용해. 나랑 사귀자. 아니, 사귀는 척만 하자. 그럼 적어도 준우와 현우에게는 복수가 될 거 아니야? 여자에게 눈길 한 번 안 주던 그 녀석 들이 너에게 단단히 빠져 있으니까 말이야." 어처구니가 없어진 예안은 비웃음을 입가에 베어 물었다. "형 말대로 내가 악감정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어. 하지만 확실히 말해둘 게 하나 있는데, 난 더 이상 이 집에 있고 싶지 않다는 거야. 형하고 사귀는 척 하면서 준우와 현우에게 복수해봤자 별로 좋을 것도 없다고 생각되는데? 그리고 그렇게 하면 오히려 형에겐 좋은 거 아 니야? 형도 날 좋아하니까. 내가 미쳤다고 형 좋을 일을 하냐?" "차면 되잖아." 정우의 눈빛은 여전히 진지했다. 예안은 어리둥절했다. "무슨 소리?" "날 차면 되잖아. 준우와 현우 녀석에게서 피눈물나게 한 다음에 날 차 면 되잖아. 그럼 결국 나에게까지 복수할 수 있잖아."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정우가 돌아가고 난 뒤 예안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누웠다. 머 리 속이 무척 혼란스러웠다. 정우가 한 말이 아직도 귓가를 떠나지 않는 다. 「내가 생각한 시나리오 들려줄까? 일단 너랑 내가 사귀는 척 하는 거 야. 그리고 현우와 준우에게 최대한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거지. 결국 에는 너랑 내가 호텔까지 갔다고 거짓말도 하면 되고. 그 녀석들 네가 오기 전엔 첫사랑 한 번 해본 적 없는 녀석들이야. 의외로 순정파라 엄 청 상처받을 걸? 그리고 마지막에 날 차. 나도 널 좋아하니까, 너에게 차이면 나 상처받고 말 거야. 어때?」 머리가 아파진 예안은 손가락으로 이불을 쥐어뜯었다. "으윽! 젠장! 누군 하기 싫어서 안 하는 줄 아냐? 나도 진짜로 현우와 준우 형에게 복수하고 싶다구! 근데 현우 녀석한테 줄줄이 다 말해버렸 는데 무슨 낯으로 복수하냐? 이미 준우 형도 다 알고 있을 텐데!" 정우에게 한 말 중 복수하는 게 무의미하다느니, 이제는 내가 원하는 인 생을 살고 싶다느니 하는 건 다 거짓말이었다. 가출하기 전에 울컥한 나 머지 현우에게 사귀자고 한 진짜 의도를 불어버린 터라 이제는 복수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십중팔구 준우 귀에도 들어갔을 텐 데, 복수가 되겠는가? "어쨌든 내가 하려했던 자그마한 복수가 실패로 돌아갔으니 그냥 조용히 이 집에서 나가서 영원히 인연을 끊고 살면 되는 거야. 그러면 만사가 오케이지." 그래도 정말 진정으로 복수하고 싶었는데. 가출한 날 밤 조금만 마음을 잘 다스려서 현우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말걸, 하고 후회도 해보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잘 됐군요. 유젤 님에게 아무 이익이 없는 일이 이렇게 무사히 끝나다 니 말입니다.」 이불을 목 아래로 살짝 내린 예안은 왼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너 굉장히 오랜만에 말 거는구나? 그 동안 뭐했어?" 「명상을 좀 했습니다.」 "명상? 인공지능도 명상하냐? 명상을 도대체 왜 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에? 웬 깨달음?" 「초절정 고수가 되기 위해선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도 더 이상 노말 버전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수퍼 맥으로 다시 환골탈 태하기 위해 그 동안 명상을 하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 습니다.」 …명상? 깨달음? 환골탈태? 설마 인공지능 주제에 무협지에 심취하기라 도 한 건가? "네가 무슨 인간이야? 허물을 벗고 새 껍질을 쓰게? 차라리 버전 업하기 위해 업글하느라 바빴다고 하지 그랬냐?" 「가벼운 조크였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여러 모로 인간적 관계에서 많은 상처를 받으셨더군요. 그래도 어찌 되었든 잘 해결되어서 다행입니다.」 "다 봤구나? 그래 넌 어떻게 생각해? 세현이 녀석 말이야." 「차세현씨에 대한 일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전 할 말 없습니다. 저는 차 세현씨와 접촉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고, 그것도 유젤 님을 통해서 접촉 한 게 전부니까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차세현씨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착실하고 속이 깊은 사람 같았는데요. 웬만하면 용서해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유니콘은 정말 인공지능 같지 않게 너무나 사람 같다. 이 녀석을 만든 것도 레이온일까? '그 형은 얼마나 천재길래 이런 인공지능과 맥처럼 굉장한 전투병기를 만든 걸까?' 예안은 아무리 레이온 같이 뛰어난 사람이라 해도 맥을 만들 수 없음을 몰랐다. 맥을 만든 사람이 자신의 오리지널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상상조 차 못했다. 「한 가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앤드류 왕자와 가능한 한 친분을 쌓으십시오. 뭐니뭐니 해도 세계에서 제일 가는 부자입니다. 친분을 쌓아서 손해볼 건 절대 없습니다. 오히려 유젤 님이 일방적으로 이득을 보면 봤지요. 유젤 님에게 굉장한 도움이 됩니다. 훗날 앤드류와 왕자와 유젤 님이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아마 그 누구도 유젤 님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게다가 앤드류 왕자는 시 트날타로부터 유젤 님을 지켜낼 충분한 능력을 갖춘 얼마 안 되는 남자 중에 한 명입니다. 저에 탑승하고 있을 땐 무적이지만 일 년 365일 저하 고만 있을 순 없잖습니까? 그리고 저는 파일럿이 없으면 제대로 전투를 할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만약 진우였을 때 앤드류와 친분을 쌓으라는 말을 들었다면 주저 없이 승낙했을 것이다.(물론 그런 일이 애초에 생기지도 않았을 테지만) 하지 만 앤드류 왕자가 '유젤'을 원하고 접근해오는 이상, 예안은 가능한 한 그와 거리를 둘 생각이었다. '예안인 내 거야. 누구에게도 줄 수 없어.' 진우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면 자각할수록, 진우였을 때 좋아했던 친구와 여자에게 흔들리곤 한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모순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할수록 또한 유젤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어진다는 걸 예안은 최근 에 들어서 깨달았다. "유니콘." 「말씀하십시오.」 "그런데 레이온 형에게 연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ST기관이나 이것 저것 묻고 싶은 게 굉장히 많은데." 「저희 쪽에서 레이온 박사에게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레이 온 박사가 먼저 연락하기만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럼 왜 레이온 형은 연락을 안 하는 거지? 너 혹시 그 이유 아냐?" 「레이온 박사는 현재 시트날타에 있습니다. 압류되어 있는 게 아니라 자발적 의사에 의해 있는 거지요. 짐작하시겠지만 그의 연구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고, 그는 서포터로서 시트날타를 선택한 거니까요. 만약 그가 유젤 님께 연락하게 되면 그가 유젤 님의 탈출을 도왔다는 게 드러 나게 되고, 그와 유젤 님 둘다 위험해집니다.」 "그렇구나." 수긍이 간 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 처럼 많은데. 유젤의 몸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싶고 맥을 준 이유에 대해 서도 물어보고 싶고 또 자신이 평범하게 살 수 있을지를 포함해 많은 것 들을 물어보고 싶은데 레이온은 도대체 언제쯤 연락이 오는 건지 애가 타기만 했다. 다음 날 아침 예안은 준우와 현우와 함께 학교로 향했다. 그런데 눈치를 보아하니 준우는 자신이 집을 나가겠다는 폭탄 선언에 놀라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것뿐, 그 외의 다른 눈치는 없었다. 그렇다면 현우가 준우 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걸까? '그렇다고 내 입으로 물어보기도 좀 그렇고… 젠장. 그럼 눈 딱 감고 정 우 형 말대로 해서 준우 형하고 정우 형에게만이라도 복수할까?' 이미 현우가 자신을 싫어하고 있을 거라고 기정 사실화 하고 있는 예안 은 '정말 그렇게라도 할까?'하고 굉장히 망설였다. 하지만 만약 현우가 아직도 자신에 대한 순정을 잃지 않고 있는 걸 안다면 손뼉을 치고 기뻐 할 것이다. '진짜 어떻게 하지?' 진우였던 시절 이들 삼형제에게 느꼈던 억울함과 열등감, 비애를 이런 식으로 복수하는 건 조금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말고는 달 리 그들에게 복수할 방도가 없었다. 물론 앤드류에게 부탁하면 간단히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안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자칫 앤드류에게 덜미를 잡혀 그 와 인연을 끊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삼촌들의 성공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아버지가 살아왔다는 증거로 비춰지는 것이니까. 만약 그들이 망가지게 되면 정호는 무척이나 상심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자신의 인생을 희생시켜가며 그들을 성공시켰으니. 결국 예안이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자그마하게나' 정우 삼형제에게 실 연의 상처라도 안겨주는 것. 그것 밖에는 없었다. '생각해보니 이런 식으로밖에 복수 못한다는 것도 굉장히 비참하네…' "저 예안아." 준우의 부름에 예안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응? 왜?" "아까부터 계속 불렀는데 아무런 말이 없더라. 무슨 중요한 생각이라도 했니?" "조금은. 근데 왜 불렀어?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그게…" 잠시 망설이던 준우는 힘들게 입을 뗐다. "정말 우리 집에서 나갈 거니?" 뭐야? 그 얘기였나? 그렇다면 쉽지. "어제 그렇게 말했잖아. 아빠랑 같이 나갈 거야." "하지만…" 준우가 뭐라고 말하려는 사이 현우가 차가운 말투로 끼어 들었다. "누나는 큰아버지를 믿어?" "뭐?" 예안은 어리둥절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말 그대로야. 누나는 큰아버지를 믿을 수 있냐고. 큰아버지가 아무리 누나 친아버지랑 절친한 친구라 해도 십 년도 훨씬 넘게 혼자 살아오셨 어. 누나 같은 예쁜 여자를 양딸로 들였고, 또 단둘이서 같이 살게 되면 아무래도…" "그만!" 현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예안은 화가 난 톤으로 정지시켰 다. "유현우. 너 다시는 그런 소리로 우리 아빠를 모욕하면 가만 안 둘 거 야!" "하지만 누나. 누나는 큰아버지를 너무 믿고 있다구.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내가 다 불안할 정도란 말이야." 예안은 불같이 화를 냈다. "이제 보니 현우 너 아주 저질이구나? 만약 내가 그런 소리를 하더라도 넌 엄밀히 친척인 네 큰아버지를 편들어야 돼. 근데 뭐가 어쩌고 저째? 나한테 채였다고 그런 식으로 치졸하게 복수하냐?" 말을 마친 예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학교를 향해 휭하니 뛰어갔다. 금 방이라도 울 듯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현우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꽉 쥔 주먹에서는 금방이라도 피가 흐를 듯 아픔이 흘러 넘쳤 다. 준우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너 채였어?" "…너무 그렇게 좋아하지는 마. 나도 비참하니까." "훗. 채인 데다가 그런 말까지 했으니 단단히 찍혔겠구나? 하여튼 안 됐 다. 만약 예안이랑 이 형이 잘 되면 나중에 한턱 내마. 그럼 형 먼저 갈 게." 준우는 즐거운 걸음걸이로 서둘러 학교를 향해 갔다. 모퉁이를 돌아 현 우가 보이지 않게 되면 아마도 크게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우두커니 선 채로 현우는 중얼거렸다. "누난 도대체 진우 형이랑 어떤 사이였길래 저렇게까지 과민반응을 보이 는 거지? 혹시…" 그 다음에 이어질 상상이 머리 속을 강타하기 직전 현우는 눈을 감았다. 뒷부분을 상상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예안이 이미 육체적으로 다른 남자 의 여자였을 거라는 생각 따위는 머리 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겁이 났다. 교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일제히 예안을 주시했다. 예안은 겸연쩍어하 며 자리에 앉았다. "공주. 오늘은 꼭 해명을 해줘야겠어. 앤드류 왕자랑 무슨 사이야?" 아이들이 잔뜩 기대에 찬 시선을 보내오자 예안은 저번에 빠져나가기 위 해 사용했던 방법을 다시 펼쳤다. "말했잖아. 그 사람이 자기가 좋아했던 사람이랑 날 착각했다고. 좀 대 화해본 뒤에 아니라는 걸 안 다음에는 그대로 헤어졌어. 그 뒤로는 다시 안 만났지. 만날 일도 없고. 몇 번을 말해야 믿을래?" 아이들은 미심쩍어했지만 본인이 저렇다는데 어쩌겠는가? 은근히 현대판 신데렐라의 탄생을 지켜보고 싶었던 몇몇 여자애들은 꽤나 실망한 눈치 였다. "이봐 공주. 그나저나 도대체 어제는 왜 학교에 안 온 거야? 네가 안 와 서 좋은 구경을 못 했다구. 난 하루라도 미소녀를 안 보면 눈이 멀어버 리는 체질이란 말이야." 준혁이 거들먹거리며 말을 걸어오자 예안은 훗 하고 웃었다. 이 녀석을 놀리는 건 쉽다. "애인이랑 하루종일 만리장성 쌓느라 바빴다면?" "쿨럭! 쿨럭!" 언제나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에 반 아이들은 일제히 사례가 들렸다. "지, 진짜? 진짜로 너 유현우랑 하루종일 그… 짓 하느라…?" "고, 공주 그게 진짜야?" 은근히 예안을 좋아하고 있었던 반 남자애들은 믿을 수 없는 눈치였다. "농담이다 바보들아. 그걸 진짜로 믿음 어떡하냐?" 남자애들은 일제히 가슴을 쓸어 내렸다. 예안은 '좀더 놀려 줘 볼까?'하 는 생각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이틀 전에 유현우 찼다." "에엑! 진짜?" 남자애들은 일제히 놀라 순식간에 예안에게 다가왔다. 예안은 속으로 킥 킥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난 지금 솔로란 말씀. 관심 있는 녀석들은 언제든 접근해오셔. 조건만 괜찮으면 받아주지." 말을 마친 예안은 혜인을 만나기 위해 교실을 나섰다. 태풍이 오기 전의 정적처럼 고요하던 1학년 3반에서 잠시 후 느닷없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 다. "우오오오!" 문밖에선 예안은 키득 웃었다. "키킥. 바보들. 그새 이 학교 전통을 잊은 거냐?" 공주의 남자친구는 자그마치 1800대의 뺨을 얻어맞아야 한다는 끔찍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늑대들은 예안이 자신들을 놀렸음을 꿈에도 상상 하지 못했다. 설혹 예안과 사귀게 된다 해도 그 끔찍한 전통을 겪고 난 뒤에 바로 차이게 될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혜인의 반으로 간 예안은 그녀를 불러냈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긴 한데, 너 어제 왜 안 왔니?" "일이 좀 있었거든." "세현이도 어제 안 왔는데 혹시 그 이유 알아?" 예안은 조금 놀랐다. "차세현이 안 왔다니? 왜?" "나도 모르겠어. 연락도 안 되고… 집에 전화해봤는데 얼버무리기만 해. 내 생각엔 아무래도 가출이라도 한 것 같아." 설마 그 녀석이 나 찾아다니느라 안 온 건 아니겠지? 잠시 그런 생각을 해보던 예안은 쓰게 웃었다. 어찌 되었든 이제 차세현이랑 나랑은 관련 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잖아? "김혜인. 한 가지 말해주고 싶은 게 있는데." "?" 예안은 의아함으로 가득한 혜인의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주시했다. "나 차세현이랑 절교했다. 그 자식 이제 다신 안 보기로 했어." "뭐어?" 혜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아니 왜?" "그 이유는…" 이유를 말하다 보면 결국 '나 진우랑 사귀었던 사이야'라는 '거짓말'까 지 혜인에게 하고 말아야 하겠지. 예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천천 히 흔들었다. "그건 말해줄 수 없어. 우리 둘의 문제니까. 묻지도 마. 어쨌든 난 그 자식이랑 이제 전혀 모르는 사이니까 너도 그렇게 알아 둬." "나도 세현이랑 절교하라는 거야?" 혜인이 약간 냉랭한 말투로 묻자 예안은 조금 당황했다. "아, 아니야. 그건 아니야. 다만 좀 알아두라는 거지. 난 네가 차세현이 랑 친구한다고 해서 너하고까지 절교할 생각은 없어." "흐음… 그렇게 친하던 너희 둘이 왜 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알았어. 그렇게 알고 있을게." "그럼 나 이만 교실로 가볼게." "응." 혜인과 헤어져 교실로 돌아온 예안은 문득 세현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 지 않는 걸 알아차렸다. 혹시 이 녀석 어제뿐만이 아니라 오늘도 안 나 온 건가?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예안은 재빨리 그런 생각을 머리 속에서 떨쳐내 버렸다. '그런 녀석 따위 걱정해서 뭐해? 날 친구로 생각하지도 않았던 녀석이라 구. 제길…' 하지만 남자였을 때 세현이 기꺼이 백만 원을 내주었던 걸 생각하면 어 딘지 모르게 가슴이 아파 온다. 정말 그 녀석이 날 배신할 걸까? 차라리 내가 세현이의 마음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마지막 수업 시간이 되도록 세현은 결국 오지 않았다. 결석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누구도 세현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공주! 나, 난 어때? 공부 그럭저럭 해서 전교 12등이구 키도 180 넘어! 그럭저럭 괜찮지 않아?" 턱을 괸 채 창 밖을 보고 있던 예안은 자신을 둘러싼 남자들 중 한 녀석 이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오자 흘끔 쳐다보곤 냉랭히 말했다. "불합격. 너무 공부를 잘해서 싫어." "그, 그런 게 어딨어! 공부 잘한다고 차는 게 말이나 돼!" "내가 공부를 못해서 공부 잘하는 녀석들은 싫어하니까. 유현우를 찬 것 도 그것 때문이야." "으윽…" 아직 한 번도 시험을 치르자 않아 예안이 정말 공부를 못하는지 아닌지 는 모르지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남학생은 피눈물을 흘리며 물러났다. "고, 공주! 나는 어때? 대명고등학교에서 제일 가는 입심으로 유명한 나 배준혁은!" 예안은 그를 흘끔 보고는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너도 불합격. 내 쓰리 사이즈 알게 된 걸로 만족해라." "그, 그런 게 어딨어! 나말고도 다른 녀석들도 다 안단 말이야!" "어쨌거나 내가 불합격이라면 불합격이라는 거야." "벌써 우리반만 15명째 퇴짜 놨잖아! 도대체 어떤 조건을 갖춰야 나이트 가 될 수 있는 거야!" …여담이지만 공주의 남자친구는 보통 나이트라 불린다. 그리고 공주의 남자친구에게도 공주를 보필하기 위한 데이트 자금이라 해서 한 달에 십 만원씩 나온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주가 어지간해서 솔로라는 건 그만큼 전교 남학생들에게 돌아가며 뺨맞는 게 무섭다는 것인데, 이 들은 그런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예안의 남자친구가 되고 싶은 모양이다. 예안은 히죽 웃었다. "조건? 알고 싶냐?" 남학생들은 일제히 입을 모아 외쳤다. "응! 알고 싶어!" "흐음. 너희가 갖추기에는 조금 어려울 텐데?" "그래도 상관없어!" 예안은 야릇한 미소를 띤 채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못마땅한 시선으로 남자애들을 노려보는 여자애들에게 다가갔다. 한창 예안을 둘러싼 남자 애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던 여자애들은 약간 당황했다. "왜, 왜 그래? 무슨 할 말 있니?" "우, 우리 네 욕 안 했어 예안아. 그냥 남자애들이 너무 분별이 없다는 생각에…" 더듬거리며 변명하는 여자애들을 주욱 훑어보던 예안은 짓고 있던 야릇 한 미소에 한층 더 힘을 실었다. 그리고 자신이 전학 오기 전에 1학년 3 반에서 제일 예쁜 여자애로 알려진 서휘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지켜보고 있던 반 아이들은 일제히 굳어졌다. 입술을 뗀 예안은 히죽 웃 으며 남자애들에게 말했다. "일본 가서 고추 떼고 와. 기왕이면 서휘처럼 얼굴도 예쁘게 고치고. 그 럼 애인으로 삼아주마." 반 아이들은 한동안 돌이 된 마법에서 풀려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깨어난 뒤 '32대 세 번째 공주는 금단의 사랑을 꿈꾼다!'라는 소문이 삽 시간에 전교에 퍼져나갔고, 은근히 예안을 좋아하고 있었던 대부분의 남 학생들은 절망해야만 했다. "조용! 조용! 왜 이리 소란스러워!" 아이들이 '믿을 수 없어! 공주가 레즈라니!'라는 말만 연신 해대며 패닉 에 빠져 있을 즈음 담임인 정선생이 들어왔다. 그러나 아이들은 쉽게 조 용해지지 않았다. "조용! 너희들 내 손에 죽고 싶어! 얼른 그 입들 꿰매지 못해!" 여선생답지 않은 과격한 언사가 그치고 나서야 겨우 아이들은 조용해졌 다. 정 선생은 심각한 표정으로 교탁에 두 손을 턱 올려놓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하고 오늘 차세현이 오지 않은 거 알고 있지?" 끄덕끄덕. "그 녀석 오늘 학교 와서 자퇴서 냈다." "예엣?" 소스라치게 놀란 예안은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 쏠리자 부끄러움을 느끼고 다시 앉았지만, 두근거리는 가슴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그 녀석이 자퇴를? 어째서?' 온갖 생각이 머리 속을 헤집고 다녔다. 설마 내가 다시는 보지 말자고 한 말 때문에 쇼크 먹어서 내가 안 보이는 곳으로 가겠다는 생각에 자퇴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다른 무슨 이유라도 있나? 전학도 아니고 어째서 자퇴를… 정 선생은 온갖 생각을 다 품고 있는 예안에게 흥미롭다는 눈길을 보냈 다. "흐음? 영계랑 사귄다고 소문이 자자하다가 세계 제일의 부자와 열애한 다고 하고, 또 오늘 오후에는 금단의 사랑을 꿈꾼다더니, 실제로는 은근 히 차세현이랑 사귀고 있었니?" 예안은 화들짝 놀라 부정했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냥 좀 놀라서 그런 것뿐이에요! 제가 왜 차 세현이랑 사귀어요!" 아이들의 의심에 찬 시선을 보내왔다. 정 선생은 '뭐 상관없지'하며 어 깨를 으쓱했다. "지금 세현이 녀석이 너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밖에 와 있 어. 마지막이니까 인사 잘 해라. 차세현, 들어 와." 드르륵 문이 열리고 어두운 표정의 세현이 들어섰다. 명실공히 대명고등 학교의 프린스로 자리잡은 세현이 자퇴한다는 소리에 반 여자애들은 누 구나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관상용 꽃미남 하나가 사라진다는데 슬퍼 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선생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시피 난 오늘 자퇴해. 삼일 후에 미국행 비 행기 타고 유학 가." "한국에서 수능 치르기 싫어서 도피 유학 가는 거 아니야?" 한 아이가 장난처럼 그렇게 묻자 정 선생은 사악한 미소를 씩 지어 보였 다. "김석준. 유감스럽게도 그게 아니란다. 차세현이 유학가는 학교가 어딘 지나 아니?" "어딘데요?" "바로 MIT다." "예엣!!" 세현이 배치고사 전교 1등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천재일 거라고 누구 하나 몰랐던 못했던 아이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천재라는 걸 알고 있었던 예안만이 덤덤했을 뿐이다. "알고 보니 차세현 아이큐가 200이 넘는다더라. 중학교의 유현우보다 월 등히 높은 수치지. 그리고 세현이는 학생으로 가는 게 아니라 조교수로 들어가는 거야. 일 년 정도 근무하면 아마 정식 교수가 될 테고, 또 온 갖 연구소에서 러브 콜을 보내올 테지." 세현이 이렇게나 대단한 녀석인 줄 전혀 몰랐던 아이들이 얼이 빠져버리 고 말았다. 정 선생은 자신의 제자가 이런 천재라는 게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쭉 폈다. "아무쪼록 너희들 반 친구가 엄청난 성공을 위해 미국으로 가는 거니까, 다들 축복해주도록." 짝. 짝짝. 짝짝짝. 우렁찬 박수소리가 교실 안을 가득 울려 퍼졌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쓴 웃음을 짓고 있던 세현은 박수가 그치자 입을 열었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너에게 거짓말을 한 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녀석하고 나 사이가 벌어질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이야. 솔직히 난 네 가 그 녀석하고 그 정도로 깊은 사이인 줄은 몰랐어. 얼마 전에 난 널 사랑할 테니 넌 그 녀석만을 사랑해달라고 했지? 근데 어떡하냐? 사실 이젠 정말 그 말대로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아이들은 어리둥절했다. 저건 반 아이들에게 하는 말보다는 단 한 명에 게 하는 말이라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더 이상 변명은 안 할게. 나 이제 미국으로 떠나. 그리고 네가 만족할 수 있는 멋진 남자가 돼서 돌아올 테니까, 그 녀석보다 더 좋은 남자가 돼서 돌아올 테니까, 그때까지 꼭 기다려 줘. 알겠지, 서예안?" "뭐?" 정선생과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예안에게 돌아갔다. 느닷없이 터져 나 온 세현의 프로포즈에 당황한 예안은 '어버버'하다가 그만 눈을 질끈 감 고 생각나는 대로 외쳤다. "고추 떼고 오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 "푸하하하!" 느닷없이 튀어나온 세현의 프로포즈에 잠시 어리둥절해 있던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교실이 떠나갈 듯 우렁찬 웃음소리는 한참 동안이나 그치지 않았다. '내가 왜 그랬지?' 만약 세현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절대 아는 척도 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하고 왔건만, 자퇴한다는 말에 너무 놀라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말았다. 느닷없이 터져 나온 프로포즈에 당황해 그만 엉뚱한 말을 해버 리고만 예안은 창피해 죽을 지경이었다. "기다려 줘." 세현이 미소지으며 손을 내밀자 예안은 일부러 냉랭하게 받아쳤다. "미쳤냐? 내가 널 기다리게? 그리고 내가 이틀 전에 말하지 않았냐? 다 시는 나 아는 척도 말라고." "기다려 줘." "말했잖아! 다신 나 아는 척도 말라고! 어서 미국으로 꺼져 버려!" "기다려 줘." "웃기지 마! 내가 미쳤다고 널 기다… 읍!" 예안은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세현의 뜨거운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덮어 버렸기 때문이다.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잠시 후 얼굴을 뗀 세현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밀짚모자 아래 에서 녹색으로 빛나는 예안의 놀란 눈동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기다려 줘. 그리고 이건 얼마 전 내 명치를 친 벌이야." "이… 이… 이…" 분노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예안을 남겨놓은 세현은 그대로 등을 돌려 교문을 나섰다. 너무 화가 나 어쩔 줄을 몰라하던 예안은 세현의 모습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웃기지 마! 내가 미쳤다고 너 따위 자식을! 한 번만 더 내 앞에 나타나 면 너 죽을 줄 알아!" 잔뜩 씩씩거리며 분노를 표출했지만 이미 세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헛수고나 다름없는 화풀이를 애꿎은 돌멩이에게 해대던 예안은 갑자기 고개를 떨구었다. "빌어먹을 자식… 나도 아직 예안이랑 키스 못 해봤는데…" 그리고 이제 영원히 할 수 없겠지. "나쁜 자식… 자꾸 예안이가 생각나잖아… 키스 같은 거 하지 말란 말이 야…" 자신에게 호감을 품은 남자들이 접근해오면 접근해올수록, 예안은 이제 더 이상 유젤을 사랑할 수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가련함을 느끼곤 했 다. 적어도 다른 남자들은 허상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에게 사랑을 느낄 수 있고 얼마든지 좋아한다 말할 수 있지만, 자신은 그럴 수조차 없지 않은가? 이미 유젤의 영혼은 죽어버리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더 용납할 수 없는 건 세현이 녀석한테는 다른 남자들에게도 그 러하듯 화가 나거나 그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건 유젤에 대한 자 신의 사랑이 흔들린다는 증거로 느껴지기에 더욱 더 안타깝고 싫은 기분 이 드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안타까운 예안의 마음을 위로라도 하듯, 석양이 빨갛게 지고 있 었다. 동해에 세워진 해군기지 바다에는 살벌한 긴장이 가득했다. "맥은 언제쯤 오는 건가?" "글쎄요. 유젤씨가 약속했으니 곧 올 겁니다." 나정수 중장이 긴장한 표정으로 묻자 중현은 자신 없이 대답했다. "그나저나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군. 의문의 전투병기가 한국이 비밀리에 사들인 것이라니. 우리나라도 참 대단해. 용케 보안을 지켜가며 샀군. 그럴 돈도 많은가 봐?" "아, 그렇지요. 재정하면 우리나라도 결코 미국에 뒤지지 않습니다. 뭐 니뭐니해도 세계 유일의 산유국 아닙니까?" 중현은 능숙하게 거짓말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조금 찔렸다. 한국 정부는 한국군 내부에 한해 맥을 미국의 천재 과학자로부터 비밀리 에 사들인 것이라고 살짝 귀띔했다. 그리고 적당한 때가 되면 대외적으 로 맥의 존재를 발표할 생각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물론 서예안의 강력 한 요청으로 인해 그녀의 존재는 철저히 감출 계획이었다. "그나저나 꽤나 젊은 데도 국정원의 요직에까지 올라갔다고 들었는데. 대단하군. 난 그 나이 때 도대체 뭘 하고 있었지?" "아닙니다. 그저 집안이 조금 좋아서 간신히 자리 하나 꿰어찬 정도에 불과합니다. 대단이라니요. 저하고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유 젤 씨가 더 대단하시지요." "그런데 유젤씨라 부르는 걸 봐선 한국인이 아닌가 보군?" 중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맥을 개발한 과학자분의 유족입니다. 국적은 엄연한 외국인이시죠. 다 만 유젤씨가 자신의 신상에 대한 노출을 절대 원하지 않기에 풀 네임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흐음." "아마 얼굴은 보실 수 없을 겁니다. 유젤씨에 대한 건 아직 철저한 기밀 입니다. 웬만한 직급이 아니고서는 본명을 아는 것도 금지되어 있습니 다. 거래 조건 중 하나거든요." "그래?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참 아쉽군." 나 중장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던 그 때, 시끄러운 폭음을 흩뿌리며 우아하고 거대한 전투기 한 기가 날아와 상공 위에 멈췄다. 나 중장은 입을 쩍 벌렸다. "헬기도 아닌데 정지 비행이 가능하다니… 굉장하군. 인류의 과학이 언 제 이렇게 발전했나? 대단해. 정말 대단해. 가히 최강의 전투병기라는 말조차 우스울 정도로군." 잔뜩 긴장한 채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던 해군들은 맥의 당당한 위용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말로 몇 번 듣고, 또 동영상으로도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이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엄청난 위압감이었다. 길이 약 20 미터 가량 되는 거대란 전투기는 뭐랄까. 마치 만화 속에서 나 보던 로봇 같은 이미지를 잔뜩 풍겼다. 일반 전투기가 뾰족하고 날씬 하게 만들어지는 것과는 달리, 이리저리 조금씩 투박하게 이루어져 있었 지만 그건 아마도 강력한 전투 로봇으로 변신하는 기능 때문일 것이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나 중장은 연신 감탄하며 전투기 형태로 떠 있던 맥이 천천히 도크함에 내려앉는 장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맥이 완전히 내려앉자 도크함은 거대한 뚜껑을 덮었다. "그럼 전 이만 유젤 씨를 보러 가겠습니다. 기밀에 더욱 더 신경 쓰시기 바랍니다. 아직 맥은 세상에 발표할 게 아니니까요." "걱정 말게." 경례를 하고 난 뒤 중현은 서둘러 보트에 올라 도크함으로 접근했다. 도 크함에 올라 내부에 들어간 중현은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옷에 헬멧을 쓴 예안이 맥에서 내리자 반갑게 맞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예안씨." 주변에 중현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예안은 헬멧을 벗어 한 쪽 팔로 껴안았다. 중현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예안이 더 없이 매력 적이라 생각했다. 아무런 치장을 하지 않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예안의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살려내 주고 있었다. '정말 굉장하군. 그래, 마치… 미의 여신이 강림한 듯…' 중현이 자신의 미모에 감탄하고 있는 줄 모르는 예안은 약간 지친 목소 리로 물었다. "제 신상은 확실히 숨겼지요?" "물론입니다. 절대 예안씨의 신상이 노출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걸 요구하신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볼을 긁적이던 예안은 적당히 둘러댔다. "사실 맥 때문에 절 쫓는 무서운 사람들이 있는데 잡히면 곤란하거든요. 자세한 말씀은 드릴 수 없지만 하여튼 저에 대한 건 철저히 기밀로 해주 세요." 저런 전투병기를 제조할 정도의 천재라면 비밀리에 노리는 사람이 많겠 지. 중현은 아무래도 보디가드라도 하나 구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지만 기밀 서류에도 맥을 외국의 모 천재 과학자로부터 사들인 것으로 해놓았습니다. 예안 씨를 쫓는 사람들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 예안 씨가 있다는 것조차 모 를 겁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유젤이라는 이름에 특별한 의미라 도 있는 겁니까?" 예안은 조금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극비 서류에도 유젤이라는 암호명으 로 해달라고 한 것도 바로 자신이었다. "묻지 마세요. 말씀드릴 수 없으니까." "아… 알겠습니다." 분위기가 약간 숙연해지자 예안은 일부러 활기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대여료는 안 주실 거예요? 분명히 충분한 대가를 치른다고 하셨 잖아요?" 중현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예. 그래야지요. 그 부분에 관한 권리도 제가 위임받았습니다. 대충 얼 마를 원하시는지요?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중현은 최소 1조 원에서 10조 원까지 예상하고 있었다. 예안은 말해준 적 없지만 인류의 꿈인 핵융합로가 설치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되는 엄청난 전투병기다. 게다가 완벽 스텔스 기능에다 지상, 공중, 해저에서 까지 전투가 가능하지 않은가? 미군함대와 단독으로 싸워 순식간에 몰살 시킬 수 있다고 판명 난, 말 그대로 시간을 초월해 등장한 초현대적 무 기인데 가격이 그 정도쯤은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다.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면 대여료를 최고 100조 원까지 허락한다는 대통 령의 승인도 이미 받아놓았다. 대한민국의 일 년 예산은 5000조 원. 그 중 국방부 일 년 예산이 200조 원이므로 맥의 대여료로 국방부 한해 예 산의 50%가 지출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 돈으로 현존하는 과학을 초월한 맥을 빌리고, 또 예안이라는 엄청난 천재 과학자(한국 정부는 예 안을 맥의 제조자로 생각하고 있다)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오히려 값싼 것이다. 한국 정부는 예안을 끌어들여 한국의 첨단 과학을 발전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맥에 설치되었으리라 추측되는 핵융합로 따위의 동력 기관으로 발전소를 만드는 것만 해도 굉장한 이득이 될 것이다. "얼마를 원하냐구요? 호오?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진짜 내 맘대로 불러 도 돼요?" "하하. 괜찮습니다. 마음놓고 불러보시지요." 하지만 중현은 내심 찔렸다. 혹시라도 한국의 능력을 초과하는 어마어마 한 금액을 제시하면 어쩌나? 그러나 우습게도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일 년에 천만 원. 어때요?" "예?" 중현은 어이가 없었다. 일 년에 천만 원이라고라? 1000조가 아니라? "왜요? 너무 비싼가요?" 예안이 걱정스런 안색으로 조심스레 말끝을 흘리자 중현은 지금 진심으 로 천만 원을 생각하고 있음을 깨닫고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오 마이 갓!' 자랑은 아니지만 미군함대와 단독으로 싸울 정도로 대단한 맥을 고작 5000억 원에 팔 수 없다고 강경하게 맞설 때는 언제고, 대여료로 일 년 에 고작 천만 원을 요구한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차라리 매년 꼬박꼬박 100조의 돈을 달라고 한다면 그런대로 납득은 할 수 있을 테지 만, 이건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요구가 아닌가? "저… 예안씨?" "예? 왜요? 역시 너무 비싼가…?" "아니, 아니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제가 맥을 팔라고 했을 때는 '고작 5000억 원에 맥을 팔라는 거냐'고 펄펄 뛰지 않으셨나요?" "하지만 파는 게 아니라 단지 빌려주는 거잖아요? 대여료로 천만 원이면 너무 비싼 거 아닌가요?" 중현은 예안이 진심으로 천만 원을 불렀음을 깨닫고 어이가 없었다. "맥이 무슨 소설책입니까? 빌리는 데 공짜라 다름없는 가격으로 빌려주 게요? 이지스함-3 한 척을 대여하는 데에도 그보다는 더 많은 돈을 받을 겁니다. 솔직히 얼마나 높은 가격을 제시할까 걱정했는데, 제가 다 어이 가 없을 정도입니다." "흐음 그래요? 그렇다면 마음놓고 세게 불러야지." 예안이 다시 생각에 잠기자 중현은 다시금 바짝 긴장했다. 어느 정도 설 명했으니 이제 대충 그럭저럭 들어맞는 가격을 부르겠지? "일 년에 일 억은요?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죠?" "…." 차라리 예안이 수 조 원에 해당하는 액수를 불렀다면 이렇게까지 허탈하 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짐작하고 있는 액수의 수만 분의 일밖 에 되지 않는 액수를 제시받은 중현은 차라리 허탈하기까지 했다. '아니지. 오히려 돈에는 별 관심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순수한 애국심에서 맥을 한국에 빌려주는 건지도 모르지 않은가? 저 정도 천재 라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떼돈을 벌 수 있을 테니까.' 생각을 마친 중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각하께 말씀드리죠. 아참.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지 급되는 대여료라 세금은 단 한 푼도 물지 않을 겁니다." 예안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일 년에 일 억의 돈이 들어온다니? 그것 도 세금이 단 한 푼도 없이 들어온다. 이런 굉장한 사실에 기뻐하지 않 는다면 그건 고등학생이 아니다. '야호! 횡재했다!' 사실 예안은 어마어마한 손해를 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아차! 이럴 줄 알았으면 앤드류 왕자한테 카드 받을 필요는 없었잖아! 젠장, 괜히 받았나?' 하지만 예안은 다시 생각을 바꿨다. '뭐 어때? 그냥 누나 노릇 해주는 조건으로 3000억 짜리 카드 받은 거면 내가 전적으로 이익이지 뭐. 하긴 그 돈 전부 다 쓸 건 아니고 집하고 가구만 새로 사면 다시 돌려줄 거지만…' 예안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중현이 다시 말을 건넸다. "예안씨. 오늘 시간이 되신다면 제가 저녁을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어쨌 거나 이제 동료나 다름없게 되었는데 친분을 쌓는 차원에서 한 번 식사 를 대접하고 싶군요." 예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식사요?" "네. 혹시 선약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런 건 없는데. 저 원래 밥 안 먹어요." 중현은 처음에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뜻인가요?" "말 그대로예요. 전 위장이 지금 망가진 상태라 약 말고는 아무것도 못 먹는 신세라구요. 의사가 그랬어요." "아… 그렇다면 어디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나 좀 나누지 않겠습니까? 예 안 씨와 맥에 대해서 몇 가지 물어볼 것도 있구요. 꼭 시간 내주셨으면 합니다만." 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예안과 중현은 조용한 분위기의 카페를 찾았다. 깔끔한 분위기와 어울리 지 않게 손님의 수가 적었지만 중현은 오히려 그게 더 마음에 들었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괜찮은 곳이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종업원이 정중히 묻자 중현은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냉커피 하나요. 예안씨는요?" "저는 됐어요.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아, 맞다. 아무 것도 못 드신다고 하셨죠. 냉커피 하나 갖다 주세요." "예." 특이하게 밀짚모자를 쓴 예안의 미모를 감탄의 눈길로 한 번 쳐다본 종 업원은 카운터 쪽으로 갔다. "이제 우리나라는 명실공히 군사강국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게 되었군 요. 이제 다 전부 예안씨 덕분입니다." "글쎄요. 별로 제 덕일 것까지는 없네요. 저도 엄연히 돈 받고 빌려주는 거니까. 이참에 확실히 해두는 건데요, 주는 게 아니라 빌려주는 거예 요. 아시겠죠?" "물론입니다." 예안은 짓궂은 말투로 물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돌려달라고 하면 순순히 돌려줄 건가요?" 중현은 깜짝 놀랐다. "예?" "뭘 그리 놀라요? 만약에 내가 대여를 그만두고 돌려달라고 하면 돌려줄 거냐고요. 혹시 그대로 꿀꺽 삼키거나 아니면 저를 죽여서 차지할 생각 같은 거 갖고 있나요?" 중현은 순간적으로 예안은 상대방이 당혹스러워할 만한 질문을 골라서 하는 취미가 있다고 느꼈다. 일단 예안이 불쾌해하지 않게 하려면 이 질 문을 잘 넘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글쎄요. 그건 차마 대답하기가 힘든 질문이군요. 나중에 대통령 각하께 한 번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킥. 됐어요. 어차피 돌려주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었으니까. 나라도 안 돌려주겠다. 한국에선 민간인이 권총 하나 가지기도 힘든데, 항공모 함보다 더 센 맥을 갖는다는 게 말이나 돼요? 안 그래요?" "그, 그렇긴 하죠…" 역시 맥을 아예 줄 생각으로 빌려준다고 한 것일까? 그럴 거면 애초에 왜 그런 거금을 받지 않았을까? 중현은 예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안 돌려줘도 돼. 어차피 내가 원하면 언제든 부를 수 있으니까.' 그랬다. 예안의 속마음은 바로 맥을 언제든지 자신이 부를 수 있다는 자 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원격조종장치를 사용하면 맥을 언제든지 부를 수 있고, 또 그런 뒤에 아무 곳에 숨기면 되는 것이다. 맥을 예안에게서 뺏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있다면 오로지 단 하나. 바 로 맥을 완전히 부수는 것이다. 그것뿐이다. "그런데 맥의 동력은 무엇입니까? 그러고 보니 우리는 정작 맥의 기능이 나 설계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군요." "동력이요?" "예. 사실 저희는 맥의 동력이 인류의 꿈인 핵융합로가 아닐까 하고 생 각해봤습니다만, 확실한 건 예안씨가 설명해주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맥을 뜯어서 조사해볼 수도 없지 않습니까? 투과 장치로 확인해보는 건 한계가 있구요. 게다가 맥이 나사와 철판으로 이뤄진 것 도 아니니…" 맥은 일반 전투기나 전함과는 달리 유기체처럼 구성되어 있다. 각 부품 들을 따로따로 만들어 제조한 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맥을 통째로 만 든 것처럼 전부 다 매끈하게 이어져 있다는 소리다. 과학자들이 그것을 보고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어떤 구조와 원리 로 되어 있는지 파악할 수가 없다고. 하지만 예안도 맥의 구조에 대해서는 백짓장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이기에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설명도 해줄 수 없었다. "무한동력이요." 예안이 턱 내뱉듯이 대답하자 중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무한동력이요. 맥의 동력장치는 ST기관이라는 건데 이게 에너지를 무한 으로 생산해 내요. 그래서 연료를 필요로 하지 않아요. 게다가 상처가 생기면 체내에 있는 수복 머신이 알아서 다 수리해요. 음식을 필요로 하 지 않는 생물이나 다름없죠." 예안은 미리 유니콘에게 들은 설명대로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현대인간이 물질의 구조에 대해 정확하게 파고든 건 소립자까지 만이라 는 건 이미 아시죠?" "쿼크까지 파고들지 않았습니까? 내가 듣기에만도 업, 다운, 스트레인 지, 참… 에 그리고 또… 하여튼 그 외에도 두 개가 더 있다고 하던데 요. 그렇게 총 여섯 개의 쿼크까지 알아냈다고…" '씁, 쿼큰지 뉴트리논지 내가 알게 뭐냐? 난 유니콘에게 들은 대로 말할 뿐이라고!' 맥을 제조하는데 사용된 과학은 현 인류의 것과는 체계와 깊이가 완전히 다르다. 유니콘에게 이미 들어 알고 있어 멋들어지게 설명할 자신은 있 었지만, 혹시라도 중현이 자신을 정신병자 취급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예안은 한숨을 쉬며 억지로 설명을 계속했다. "쿼크는 아직 확실히 밝혀진 게 아니잖아요. 전 '정확하게'라고 분명히 수식어를 붙였다구요.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는데, 맥을 제조하는데 바탕 이 된 과학은 현대 과학하고는 체계와 깊이가 많이 달라요." 중현은 '물론 그렇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립자를 쪼개면 유다스라는 입자가 돼요. 이것들은 종류가 모두 총 6 개로 존재하거든요. 이걸 다시 쪼개면 그건 더 이상 유다스가 아니라, 제2원자라는 입자들로 산산조각나요. 그 크기는 유다스에 비해서 터무니 없이 작은데 종류는 원자와 완전히 똑같아요. 성질도 말할 것 없구요. 다만 그 크기만 까마득하게 작은 것뿐이에요. 그래서 이걸 제2원자라 불 러요." "흐음. 그걸 학계에 발표하면 뒤집어지겠군요." "에이. 설마 그 정도까지야 하겠어요?" 예안은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지구인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충격이 될지 전혀 모른 채 '설마 그러기야 할까'라고만 생각했다. "제2원자를 쪼개면 다시 제2소립자가 되고 제2소립자를 쪼개면 이번엔 종류가 세 개인 아르페라는 입자가 돼요. 이것을 다시 또 쪼개면 또다시 이것에 비해 크기가 굉장히 작은 제3원자라는 입자가 돼요. 우주의 모든 입자는 반복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거죠." "흐음." "제3원자를 쪼개면 물론 제3소립자라는 게 되고, 이것을 다시 쪼개면 종 류가 단 한 개뿐인 로데늄이라는 입자가 나와요. 그러니까 만약 로데늄 단위까지 파고들어 입자를 재조립할 수 있다면 쇠를 금으로 완벽하게 바 꿀 수 있는 연금술이 가능한 거죠." 크게 놀란 중현은 포크를 그대로 떨어뜨릴 뻔했다. "예안씨는 그 정도까지 물리학에 통달한 분이란 말입니까? 만약 그게 확 실하다면 세상에 발표하는 즉시 예안씨는 노벨상 같은 건 그냥 휩쓸 겁 니다! 대단하군요. 대단해요!" "에이. 설마요."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예안은 피식 웃음과 함 께 볼을 긁적였을 뿐이다. 놀라움이 가라앉은 뒤 중현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거랑 무한동력이랑 무슨 상관인 거죠?" "아, 맞다. 계속 말씀드릴게요. 그 로데늄이라는 건 아나퀴스라는 다른 차원의 에너지로 일일이 다 꿰어져 있어요. 이건 다른 말로 실버넷이라 고도 하는 건데요, 어떤 모습을 이루고 있냐면 그냥 간단히 생각해서 그 물에 일일이 꿰어진 구슬을 로데늄이라 생각하고, 그 그물을 아나퀴스라 고 생각하시면 돼요." 중현은 예안의 이야기에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에너지라는 건 결국 입자를 움직이는 거잖아요?" "그렇죠." "본래 100이라는 에너지를 이용해서 A라는 입자를 움직이려고 할 때 정 작 A입자는 3의 움직임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일단 가정하자구요. 나머 지 97은 A입자를 3만큼 움직이기 위한 과정에서 소실된 거겠죠? 실제로 도 자동차가 석유 에너지의 5%도 제대로 못 낸다고 하잖아요? 안 그래 요?" 예안은 설명하면서도 '정말 5%도 못 내나?'하고 속으로 의심스러워했다. 예안은 아직 고등학생이었기에 몸이 바뀐 뒤로 지능이 엄청나게 높아지 긴 했어도 알고 있는 건 별로 없었다. "흐음. 맞는 말입니다." "100이라는 에너지를 우리의 힘이 닿는 차원에서 이용해서 물질을 움직 이려고 하면 그 과정에서 상당량이 소실되어 버려요. 그렇지만 우리의 힘이 닿는 차원이 아니라 아퀴나스가 존재하는 차원의 에너지로 전환해 서, 그 아퀴나스를 파동시켜 아퀴나스와 연결되어 있는 입자를 움직이는 방식으로 하면 1의 에너지량으로도 무한의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거예 요. 이게 바로 무한동력의 원리죠. 이해하셨어요?" 중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예안씨가 독창적으로 창립 한 기초과학을 바탕으로 맥이 제조되었다는 건 확실히 알겠군요. 그렇다 면 맥은 연료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나요?" "네. 그래요." 그리고 예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정도 쉬운 것도 못 알아듣는단 말이야? 그런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국정원의 요직에 있는 거지?" 예안은 유니콘이 설명해준 무한동력의 원리에 대해 단 한 번 듣고 이해 할 정도로 뛰어난 두뇌를 갖고 있었지만, 본래 그것은 예안의 것이 아니 라 유젤의 것이었다. 그리고 예안은 이제 자신은 이 지구상 그 누구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 뛰어난 두뇌를 가진 뉴타입 인간이라는 걸 아직은 깨 닫지 못했다. 오늘은 월요일. 세현이 오전행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나는 날이다. 마중 나가야 할까 아니면 그냥 무시해야 할까를 놓고 예안은 벌써 한참 이나 망설였다. '하지만 다신 그 녀석을 안 보기로 해놓고 그냥 나가는 것도 속없는 짓 이잖아? 그 녀석은 날 배신했다구.' 처음에는 분노만이 눈앞을 가려 세현의 말을 더 들어볼 생각도 않은 채 무작정 절교 선언을 해버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남자였을 때 세 현이 자신에게 어떻게 대했는지가 새록새록 떠오르며 동시에 '정말 그 녀석이 그랬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예안은 속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놀라며 잽싸 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 혜인인데 지금 공항이거든. 너 정말 세현이 마중 안 나갈 거야? 오 늘은 학교 가는 날도 아니잖아? 그러지 말고 그냥 나와라 응?」 "어 그게…" 혜인이 간곡히 부탁하자 예안은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망설이던 건 잠시 뿐. 토요일부터 지금까지 길게 고민해왔던 건 결국 혜인의 간곡한 한 마디에 간단히 해결되어 버렸다. "갈게. 가면 될 거 아냐." 여행용 가방을 끌고 있던 세현은 공항에 들어서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건물 안 어딘가에서 금방이라도 예안의 모습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진짜 안 올 생각인가?" 그럴 줄 알았지만 조금은 섭섭한데. 세현은 금요일 날 벌어졌던 예안과 의 키스를 떠올리며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그때의 그 달콤한 느낌이 아직도 묻어 있는 듯 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키스했나? 가뜩이나 오해 투성이었는데 멋대로 키스까지 해버렸으니…" "차세현!" 갑작스런 부름에 세현은 고개를 들었다. 혜인이 손을 흔들며 뛰어오고 있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비행기 언제 출발해?" "그래도 아직 많이 남았어. 한 이십 분 정도 있다가 들어가면 돼." "근데 너희 가족들은 아무도 안 나왔어?" 혜인은 세현의 가족이 아무도 없음을 깨닫고 어리둥절해했다. 세현의 입 가에 쓰디쓴 미소가 묻어났다. "의절했어. 난 더 이상 그 사람들이랑 가족이 아니야." "뭐어?" 혜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족들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의절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너무 그렇게 걱정스런 눈으로 볼 것 없어. 어차피 난 내 앞가림 스스로 할 정도로 능력도 있고 머리도 있고 돈도 좀 있으니까. 오히려 지긋지긋 한 그 집안에서 영원히 나와서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해." "그래도…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너희 아버지? 어떻게 자기 자식하고 인 연을 끊을 수 있니?" "아버지가 인연 끊자고 한 건 아니야. 물론 아버지는 홧김에 인연 끊자 고 하긴 했지만 어쩌면 내가 그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몰라. 별로 망설이 지도 않고 기회다 싶어서 그대로 의절 선언하고 나왔으니까. 아직 호적 에는 남아있지만 이제 곧 대한민국 국적도 말소될 거야. 그러면 완전히 남남이 되는 거지." 혜인은 침울한 표정으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유진우. 어쩌면 넌 이런 상냥함에 반해 이 여자애를 좋아했었던 건지도 모르겠구나. 세현은 쿡쿡 작게 웃으며 혜인의 머리칼을 살짝 쓰다듬었다. "김혜인. 너에게 친구로서 부탁이 있어." "뭔데?" "부디 예안이에게 남자친구가 생기지 않도록 감시 잘 해 줘. 내가 돌아 올 때까지 말이야." "그거라면 걱정 마. 내가 굳이 방해놓지 않아도 예안이가 알아서 접근하 는 남자들 물리치고 있으니까. 그런데 예안이는 너랑 절교했다던데 너는 안 그렇다고 하고… 도대체 내가 모르는 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두 사람?" "남의 사랑싸움에는 간섭하는 게 아닐세, 친구." "…늙은이 같은 말투 치워. 너랑은 안 어울려." 뾰로통해 있던 혜인은 시계를 흘끔 본 뒤 다시 입구 쪽을 흘끔거렸다. "그런데 예안이는 온다고 해놓고는 안 오네. 혹시 거짓말 한 건가…?" 세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초조해하지 말라는 제스처였다. "온다고 했으면 오겠지 뭐. 너무 초조해 하지말고 느긋하게 기다려 보 자. 어차피 안 온다고 해서 네가 기분 상할 건 없잖아?" "그래도…" 아무리 오해 때문에 싸웠다고는 하지만 친한 친구가 이민을 가는데 끝까 지 안 나오는 건 좀 심했다. 혜인은 세현이 속으로 얼마나 애타하고 있 을지를 염려하며 빨리 예안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째깍째깍… 공항 내부에 있는 커다란 벽시계의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조차 생생하게 들릴 정도로 세현의 초조함은 점점 짙어져만 갔다. 몇 번이고 손목시계 와 벽시계를 번갈아보며 입구 쪽으로 시선을 던졌지만 예안의 모습은 아 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보다못한 혜인이 입을 열었다. "내가 다시 한 번 전화해보고 올게." "아니야. 됐어. 이제 곧 비행기 출발할 시간인 걸." "어쩌지…" 세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엄청 속 쓰려하고 있 을 거라 생각하니 혜인은 가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 인데 잘 가라는 인사 한 번 해주는 게 어디가 덧나냐고 속으로 예안을 탓하고 있을 때 세현은 가방을 끌며 승강장 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벌써 가려고? 조금만 더 기다려 봐. 예안인 꼭 올 거야." "아니야. 이제 정말 들어가 봐야 돼.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묻어나는 세현의 눈길은 아무도 들어서지 않 는 공항 입구 쪽을 더듬고 있었다. "…입구 옆에 몸 숨긴 채 고민하고 있는 예안이한테 가서 전해 줘. 나중 에 내가 한국에 돌아오면 여기까지 왔으면서 인사 안 한 벌을 받을 각오 하라고. 평.생.동.안 말이야." "뭐?" 그 말에 놀란 혜인은 얼른 입구 쪽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 는데? 어디에 예안이 있다는 거지? "자 그럼 난 간다. 부디 꼭 그렇게 전해 줘라." "자, 잘 가!" 세현이 손을 흔들며 사라지자 혜인은 의구심을 품은 채 재빨리 입구 쪽 으로 달려갔다. 건물 밖을 나간 혜인은 주위를 휙휙 둘러보다가 언제나 그렇듯 밀짚모자를 쓴 채 바깥벽에 기대어 서 있는 예안을 발견하고 조 금 놀랐다. 정말 있었네? "예안아? 너 여태껏 여기에 있었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예안은 흠칫했다. "어? 그, 그게…" "왔으면 왜 안 들어가고 여기에 서 있니? 세현이가 섭섭해하잖아. 너보 고 이렇게 전해달라더라. 여기까지 왔으면서 인사 안 한 벌 평생 동안 받을 각오하라던데? 너 이제 큰일났다. 세현이한테 평생 동안 혼나야 하 니까." 혜인은 재밌다는 미소를 한 가득 베어 물고 있었지만 예안은 그럴 수 없 었다. 어리둥절했기 때문이다. "세현이가 나 여기에 있는 거 어떻게 알았대?" "어, 그거야 네가 몰래 지켜보는 걸 우연히 본 모양이지 뭐." "무슨 소리야? 나 계속 이렇게 서 있기만 했지 한 번도 안 들여다봤다 구. 세현이가 내가 여기에 있는 거 알아볼 리가 없잖아?" '그래? 이상하네?'하고 혼잣말하던 혜인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손을 휙휙 내저었다. "에이, 몰라. 감이 좋은가 보지 뭐." 그때 이륙하는 비행기 한 대가 예안의 눈에 들어왔다.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아마도 저 안에는 세현이 타고 있겠지? 혹시나 세현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싶어 예안은 두 눈에 힘주어 그것을 살펴봤지만 거리가 너 무 멀어 창안의 사람을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차라리 그냥 직접 맞닥뜨리고 인사나 할 걸 그랬나…" 이렇게 숨어서 망설이고 있지 말고 그렇게 할 걸 그랬나. 조금 후회해봤 지만 이미 비행기는 떠나 버린 뒤이다. 지금 친했던 친구가 한 명 떠난다. 비록 쌓였던 오해를 풀고 떠난 건 아 니었지만 마지막 순간이라서 그럴까. 예안은 왜인지 세현을 그냥 이해하 고 용서해주고 싶었다. 언젠가는 돌아올 친구와의 이별이기 때문일까. 유젤을 떠나보냈던 그날 처럼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조금, 아주 조금, 항상 친척들과 자신의 앞에서 어깨를 제대로 펴지 못했던 아버지 의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며 울컥했던 순간처럼 정말 조금 마음이 울적했 을 뿐이다. 그로부터 약 열흘 후. 정호는 예안이 준 5억으로 45평짜리 아파트 한 채 를 구입했다. 정호는 예안의 이름으로 집을 구입하려 했으나 예안이 한 사코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자신의 이름으로 등록했다. 그리고 예안은 앤드류가 준 카드에는 손대지 않고, 중현으로부터 받은 맥의 대여료 1억으로 새 가구들을 사서 집을 꾸몄다. 45평이면 아버지와 딸 둘이서 살아가기에는 굉장히 큰집이었지만 예안은 이 정도 호사쯤이 야 평생 고생하고 살아온 아버지에게는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도호의 집을 떠나기 전 가족들은 마지막으로 저녁식사를 같 이 했다. 평소에 밥을 먹지 않는 예안도 이때만큼은 억지로 참석했다. "진짜로 나가는 거야 형? 아쉽다 정말… 이십 년 가까이 같이 살았는 데…" "나도 많이 아쉬워. 그렇지만 고작 다섯 정거장 정도니까 자주 볼 수 있 을 거야." "그렇게 가까운데 용케 5억으로 45평자리 집 구했네? 이 근처에서 그 정 도 집 구하려면 보통 한 40억 정도 하지 않나?" "아슬아슬하게 집값 비싼 구역을 넘어선 거지 뭐. 아파트도 지은지 얼마 안 된 거라 굉장히 깨끗해." "잘 됐네." 도호와 정호는 웃음을 띤 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정우 삼형제는 마치 사형집행일이 바로 코앞에 닥쳐온 사형수라도 되는 듯 잔뜩 일그러진 어 두운 안색이었다. 세 아들의 심정이 이해가 간 수정이 위로의 말을 건넸 다. "그렇게 죽을상 하지 말아라. 어차피 다섯 정거장이니까 예안이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 볼 수 있지 않니? 게다가 학교도 같고 말이야." "그, 그렇지만 같은 집에서 사는 거랑은 완전 천지차이잖아!" 현우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글썽거릴 듯이 외쳤다. "누나! 꼭 나가야 돼?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꿀 의향은 없어?" 예안은 자신이 그렇게까지 혹독하게 말하면서 찼는데도 불구하고 현우가 이렇게까지 매달리자 오히려 다른 속셈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의심스러 웠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방심하게 만든 뒤 어이없게 뒤통수를 치려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어뜨리기 힘들었다. 그건 진우였던 시절에 형 성된 고칠 수 없는 부정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이미 집까지 다 샀는데 왜 취소하냐?" "그래도…" "사내 녀석이 그렇게 매달리는 거 아니다. 한 번 나한테 채인 녀석이 왜 자꾸만… 아차!" 못마땅한 말투로 말하던 예안은 순간 실수했음을 깨닫고 얼른 입을 다물 었지만 이미 가족들이 다 들어버린 뒤였다. 현우과 예안이 사귄 적이 있다는 걸 모르는 가족들은 놀라워했다. "현우 너 예안이한테 채였냐?" "아니, 현우 너 언제 예안이랑 사귀고 있었니?" 도호와 수정이 동시에 물어오자 현우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버벅거리 다 결국 '잘 먹었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후다닥 일어나 이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현우가 얼마 전에 예안에게 차였다는 걸 알고 있는 정우 와 준우만이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만 긁적이고 있었을 뿐이다. 도호와 수정은 조금 놀라워했다. "아니, 도대체 언제 현우와 예안이가 사귀고 있었지? 우리는 눈치채지도 못했잖아?" "그러게요. 그런데 예안아. 우리 셋째 아들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찬 거니?" 수정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화난 기색이 없이 그저 부드럽기만 했다. 예 안은 '뭐 어쩔 수 없네. 그냥 속 시원히 말해버리자'라는 생각에 시큰둥 하게 입을 열었다. "저보다 어려서요. 전 아무래도 영계 취향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어 차피 이제 연애 같은 건 평생 안 할 건데요 뭘." "흐음… 과연 그럴까?" 수정은 의미심장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며 기대 어린 시선을 준우와 정우 에게 보냈다. 어머니의 의도를 알아들은 두 형제는 힘찬 눈빛으로 고개 를 살짝 끄덕였다. 물론 예안은 보지 못했다. "근데 앞으로 형 밥은 누가 해주지? 예안이 너 밥은 할 줄 아니?" "아뇨 모르는데요." 잠시 썰렁한 분위기가 식구들을 훑고 지나갔다. 자연스럽게 대답하는 예 안의 당당함에 당황한 도호가 헛기침을 했다. "네가 밥을 안 먹는다고 형마저 밥을 안 먹는 건 아니잖니. 요리책이라 도 사다가 익혀서 밥 해드리려무나." "네 그렇게 해야죠. 하나밖에 없는 아버진데 설마 제가 굶기겠어요? 걱 정 마세요, 작은아버지." 마지막에 작은 아버지라는 부분에 강세를 실은 예안의 의도를 얼핏 알아 차린 도호는 멋쩍은 나머지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이거 예안을 며느 리나 혹은 딸로 얻기 위해서는 아직은 조금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이 아닌가 보다. 마지막 저녁 식사가 끝나자 예안과 정호는 조금만 더 있다가 가라는 친 척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현관을 나섰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자주 놀러올게요." '절대 안 올 거다.'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예안은 그렇게 정중히 인 사했다. 이제 다시는 이 집에 발을 들일 일은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 니 깨끗한 물로 속을 씻어내는 듯 후련하기만 했다. "자주 놀려오려무나. 형도 자주 놀러 와." "자주 놀러 와. 아주버님도 자주 놀러오세요." "알았어 자주 놀러 올게. 재수씨도 그만 들어가세요. 너희들도 그만 들 어가라." "잘 가라 예안아." "누나 잘 가." 굉장히 아쉬워하는 정우 삼형제의 배웅을 받으며 예안은 정호에게 다정 히 팔짱을 꼈다. 조금 걷다 흘끔 뒤를 돌아보니 도호의 식구들은 아직도 들어가지 않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빠. 아쉬워?" "응? 글쎄다… 그래도 오랫동안 같이 살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나온다니 까 조금은 아쉽구나. 너는 안 아쉽니? 아, 너무 바보 같은 걸 물었나." 예안은 피식 웃었다. "아쉬울 리가 없잖아. 속이 후련하기만 하다구. 이제 더 이상 작은아버 지 신세 안 져도 된다 생각하니 하늘이라도 날 것 같은 기분이라구." 대로에 나선 두 사람은 택시를 잡았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예안과 정 호는 설렘에 가득 찬 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나는 집만 알아봤지, 가구 같은 건 그냥 너한테 다 맡겼는데 괜 찮을지 모르겠구나." "아빠는 나 못 믿어? 내 눈을 믿으라구. 내가 알아서 다 했으니까 걱정 하지 마." "흐음. 근데 예안이 너 5억만 가진 거 맞아? 45평짜리 아파트에 가구를 전부 다 새로 장만해서 꾸미려면 돈이 장난 아니게 들 텐데, 네가 도대 체 돈이 또 어디서 나서 그런 걸 한다고 나선 거니? 그것도 설마 김 박 사라는 사람이 주식으로 불려준 거니?" 정호가 조금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오자 예안은 '드디어 때가 왔구나'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빠. 사실 나… 돈 생기는 데가 따로 있거든?" "그래?" 정호는 의외의 대답에 조금 놀랐다. "물론 나쁜 돈은 아니야. 자세한 이야기는 집에 가서 해줄게." "그래, 알았다." 이윽고 택시는 그들이 새로 살 집 근처에 도착했다. 삯을 치르고 내린 두 사람은 다정히 팔짱을 낀 채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현관문 앞에 당도한 예안은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열었다. "이야, 예쁘게 잘 꾸몄구나. 우리 딸 대단한데? 이제 이런 것도 스스로 할 줄 알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 아득한 집안 풍경에 정호는 진정으로 감탄했 다. 한 번 안아주려고 뒤를 돌아본 정호는 예안이 눈물을 글썽이고 있자 당황했다. 왜 울고 있지? "왜, 왜 그러니?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각났어?" "…기뻐서." "응?" "나 이런 게 소원이었어. 그 집 나와서 아빠랑 같이 좋은 집에서 재미있 게 사는 게. 근데 작은 아버지 도움 없이는 영원히 이뤄지지 않을 것 같 았던 그 꿈이 이뤄지니까 너무 기뻐…" 예안은 말을 제대로 채 마치지도 못하고 소리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눈 시울이 붉어진 정호가 가만히 딸의 어깨를 끌어안아 다독거려주었다. "그게 소원이었으면 진작에 가슴 앓지 말고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그러 면 아빠가 진작에 삼촌한테 부탁해서 집 한 채 사서 나왔을 텐데." "…말했잖아. 삼촌 도움 없이 자력으로 이런 집 구하고 싶었다고." "그래, 그래 알았어. 이제 그만 눈물 그쳐, 뚝." 예안은 눈물을 살짝 닦으며 말했다. "아참 아빠. 독립한 기념으로 내가 술 사다 놨어. 한 잔 하자." "술? 그런데 너 술 못 먹잖아? 밥도 못 먹는 녀석이 어떻게 술을 먹겠다 는 거야?" "에이. 그냥 기분만 내면 되는 거지 뭐. 어때?" "그럴까?" 정호가 잠자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사이 예안은 한쪽 방에서 미리 사 다 놓은 맥주병을 꺼내왔다. 냉장고에서 안주감을 꺼낸 예안은 거실 탁 자에 그것들을 올려놓은 뒤 잔에 두 개의 잔에 술을 따랐다. 정호가 앉자 예안은 술잔을 들며 히죽 웃었다. "위하여." 정호가 키득 웃으며 예안이 든 술잔에 자신의 술잔을 살짝 부딪쳤다. "위하여." 뭘 한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럭저럭 좋은 분위기니까 이해하고 넘어 가기로 하자. 시계바늘은 어느새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 아 전혀 취하지 않은 예안과는 달리 정호는 어느 정도 얼큰하게 취해 있 었다. 그러나 옛날에 가끔 혼자 신세타령하며 술잔을 들이킨 뒤 취한 것 과는 달리 아주 기분 좋게 취한 모습이었다. "아빠. 청소일 하느라 많이 힘들지?" 정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혀 힘들지 않아. 이렇게 예쁜 딸 먹여 살린다 생각하고 일하고 있으 면 피곤한 게 싹 날아가거든." "에헤헤. 그거 다행이네. 역시 아빠는 내가 여자가 된 걸 다행이라 생각 하는구나?" "그러는 너도 별로 절망하고 있는 것 같진 않은데? 만약 이 아버지가 너 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엄청 절망하고 살아갈 의욕이 나지 않을 것 같 은데 우리 아들은 역시 강한가 봐?" "거기에는 다~ 사연이 있네요. 내가 이렇게 된 후에도 꿋꿋이 잘 살아가 는 데에는 말이야." 예안은 빙긋 웃음을 띠며 정호의 술잔에 소주를 따랐다. 탁자에는 빈 맥 주병이 서너 병 굴러다니고 있었고 아직 뜯지 않은 소주병이 두 개 정도 더 남아 있었다. "아빠. 일 그만둘 생각 없어?" 느닷없는 예안의 물음에 정호는 술이 확 깨는 걸 느꼈다. "일을 그만두라니? 내가 일을 그만두면 어떻게 먹고살라고?" 예안은 입술을 깨물며 망설였다. "나… 사실 돈 많아." "돈이 많다니? 그 김박사라는 사람이 주식으로 또 벌어주기라도 했니?" "그게 사실은…" 며칠 동안 곰곰이 짜낸 대답을 머리 속으로 다시 한 번 정돈하며 예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통장 있으니까 직접 확인해." 정호는 의구심에 가득 찬 눈으로 통장을 열어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 삼 억? 네가 도대체 돈이 어디서 나서…?" "그 김 박사라는 사람이 줬어." 김 박사라는 건 물론 레이온을 말하는 것이다. 정호는 레이온의 본명을 '김윤우'로 알고 있다. "그것도 주식으로 불린 거니?" "아니." 예안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를 속이는 게 내키 지는 않았지만 시트날타라느니, 맥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들려줘서 괜 한 걱정에 빠뜨리기는 싫었다. "그 김 박사라는 사람이 내가 좋대. 나보고 결혼하자더라." "푸훗!" 예상 못한 대답에 정호는 하마터면 머금고 있던 술을 내뿜을 뻔했다. "너, 너 설마 정우 걔네들 싫다고 한 게 다 그것 때문…?" 예안은 손을 휙휙 내저으며 부정했다. 미리 짜놓은 거짓말을 서둘러 늘 어놓았다. "아, 아니야! 난 절대 결혼할 생각 없다니까! 사실 전에 받은 5억도 내 돈을 갖고 그 사람이 주식으로 불린 게 아니라 나한테 준 거였어. 난 싫 다고 했는데도 그 사람이 억지로 나한테 9억을 줘버렸어. 돌려주고 싶어 도 돌려줄 수도 없고, 또 내가 손해도 아니고 해서 결국 그냥 받아 챙긴 거야. 그 중 5억으로 이 집 사고, 가구도 사고해서 남은 게 그 통장에 있는 돈이야." "흐음… 그 사람이 너에게 왜 그런 큰돈을 준 거니?" "내가 푸념하듯 내 집안 사정 이야기 하니까 내가 그렇게 사는 꼴 보기 싫다면서 억지로 돈 준 거야. 나한테 점수 따고 싶어서 줬다고 하면 이 해하기 쉬울 거야." 정호는 어느 정도 이해했다. 남자라면 누구나 예안에게 호감을 갖고 접 근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럼 돈 받았으면 결혼해야 되는 거 아니니?" "몰라. 하여튼 난 결혼할 생각 없는데 억지로 준 거니까 그냥 내 맘대로 쓸 거야. 아빠는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하여튼 이제 아빠는 일 안 해도 돼. 이 돈 갖고 그럭저럭 내가 대학 졸업하고 취직할 때까지 충분히 쓰고도 남으니까." 사실 통장에 든 돈은 레이온이 준 돈이 아니라, 앤드류가 준 카드에서 뽑은 돈이었다. 그걸로 통장을 새로 만든 것이다. 고작 누나 노릇 해주 는 대가로 9억이나 빼서 쓴 게 조금 그렇긴 했지만, 어차피 마음대로 쓰 라고 이미 준 돈이니 뭐 어때? "그런데 너 모의고사도 300점대 밖에 안 나오잖아? 그래서야 좋은 대학 갈 수 있겠어?" 예안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픈 데를 찌르다니! "고, 공부 열심히 하면 되잖아! 이제부터는 공부 열심히 해서 모의고사 300점이 아니라 450점도 간단히 넘어주겠어!" 참고로 수능은 500점 만점이다. "글쎄다, 그게 과연 잘 될까?" "노력하는 자에게 불가능이란 없어!" 두 부녀(라고 해야 하나?)는 한참 동안이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 서 낄낄거렸다. 어느덧 시계 바늘은 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근데 아빠." "응?" 예안의 목소리가 천금처럼 무거운 걸 느낀 정호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무슨 심각한 이야기라도 하려는 걸까? "…저어… 엄마랑 연락하고 있어?" 정호의 표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고개를 숙인 채 이마를 손으로 짚 고 한숨을 푹푹 내쉬던 정호는 무언의 눈길로 자신을 재촉하는 예안의 조름을 이기지 못하고 힘들게 입을 떼었다. "연락하려고 노력한다면 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연락이 안 돼." "…그럼 내가 죽었다고 연락 안 했어?" "안 했어. 사실 그 동안 연락 자체를 안 했으니까." 순식간에 침울해지는 예안의 얼굴을 씁쓸한 눈길로 더듬던 정호는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왜 갑자기 엄마 이야기는 꺼냈니? 전에는 한 번도 그런 거 묻지 않더 니…" "…그냥. 궁금해서. 에잇! 이런 어두운 이야기는 그만하고 빨리 자자! 나 먼저 씻을게!" 멋쩍은 듯 볼을 긁적이던 예안이 후다닥 일어나며 욕실로 사라지자 정호 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었다. "진우야… 정말 많이 변했구나…" 여자가 된 후로 아들이 너무 많이 변해버린 건 이미 절감하고 있었다. 남자였을 땐 단 한 번도 어머니에 대해 묻지 않아 오히려 자신을 당혹스 럽게 했던 강한(어쩌면 강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아들이, 이제는 먼저 어머니에 대해 궁금해하고 물어온다. 어머니를 그리워해서였는지 아니면 정말 단지 그냥 궁금해서였을 뿐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래도 변한 건 확실했다. 하지만 자식이 변한 게 슬픈 건 아니었다. 오히려 행동거지 하나 하나가 예쁘고 귀엽기만 했다. 정호는 한평생 불행하게만 살아온 자신의 인생에 이렇게 광명이 필 줄은 몰랐다. 나중에 시집을 어떻게 보낼지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아려올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나도 이만 자야겠다." 안 씻고 자면 또 투박대겠지만 피곤하니 어쩔 수 없지. 정호는 예안이 자신의 방이라고 알려준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눕히며 상 의를 벗어 아무렇게나 던졌다. 원래 침대를 선호하지 않지만 새 집으로 온 기념으로 샀다니 고맙게 여기고 한 번 취침 스타일을 바꿔 볼 참이었 다. "아빠 벌써 자?" 갑자기 문이 열리고 잠옷 차림의 예안이 들어섰다. 정호는 피곤한 눈을 반쯤 치켜올렸다. "잘난 딸 둔 덕에 내일부터 느긋한 백수 생활 보내게 생겼지만 그래도 피곤하니 일찍 자야지." 예안은 기쁜 얼굴로 되물었다. "진짜지? 이제부터 일 안 할 거지?" "그래야지. 돈이 있는데 일은 뭐 하러 하니? 솔직히 나도 이제 그만 좀 쉬고 싶다. 내일부터 인터넷 바둑이나 하면서 살아야겠다. 아빠가 그거 좋아하잖냐." "잘 생각했어~" 예안은 침대에 뛰어들며 정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다 큰 딸의 귀여 운 어리광에 정호는 '어이쿠'하면서도 푸근한 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새 집에 와서 새출발 하니까 그냥 같이 자자. 괜찮지?" "정우 녀석들이 알게 되면 기겁할 텐데?" "뭐 어때? 아빠랑 나는 친자식간이잖아." "그렇긴 그렇지." 조금 곤란하긴 했지만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고, 또 다 크긴 했지만 친 자식간인데 한 번쯤 같이 자는 게 뭐가 어때?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 던 정호는 느닷없이 예안이 상의를 벗고 브래지어까지 풀자 기겁해서 외 쳤다. "너, 너 지금 무슨 짓 하는 거니!" "왜? 잘 준비하는 거잖아?" "그, 근데 왜 옷은 벗고 그래!" "나 원래 바지만 입고 자는 거 몰라? 답답해서 상의는 벗고 자잖아?" …잊고 있었다. 자신의 하나뿐인 자식에게 그런 버릇이 있다는 것을. 하 지만 아무리 이제 스스럼없어진 부녀 사이라 해도 어떻게 다 큰 딸이 상 반신을 홀딱 벗은 채 아버지랑 같이 잘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자자, 자자구. 나도 내일 학교 가야 하니까." 예안이 눈을 감으며 자신의 목을 다시 끌어안자 정호는 기겁했다. 옆구 리에 물컹하게 와 닿는 이 부드러운 감촉은 분명 남자의 밋밋한 가슴에 는 없는 그것이렷다? "예, 예안아. 제발 옷 좀 입으려무나. 하다 못해 브래지어라도 해!" 예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빠는 여자가 안 되어봐서 잘 모르겠지만 그거 굉장히 답답해. 잘 때 만이라도 벗고 싶다구." "옷 안 입을 거면 아빠랑 같이 잘 생각하지도 마!" 당황함으로 얼굴이 붉어진 정호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예안은 눈살을 찌푸리다 마지못해 브래지어를 차고 상의를 다 시 입었다. "쳇, 옷 입고 어떻게 자냐? 답답해서 죽겠는데…" 베란다로 나온 정호는 숨을 가라앉히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스스럼없는 자식지간이라 해도 엄연히 '아들'의 몸은 생판 모르는 여자 애의 몸이다. 상반신만이라고는 해도 옷을 벗고 같이 자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휴. 여자로서 자각이 너무 부족해. 정말 앞으로가 걱정이군." 조금 난처해서 그렇지 그래도 행복한 건 사실이잖아? 정호는 아주 오랜 만에 자신에게 찾아온 이 푸근한 행복함에 취해, 차가운 밤공기를 맞으 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예안 때문에 겪는 정호의 수난은 그치지 않았다. 도호의 집에 살 때는 가족들의 눈치도 있고, 또 예안의 생활권은 이층인데 정호의 생활권은 일층이라 어느 정도 장막이 있었지만 단둘이 살게 된 후로는 그게 아니 었다. 가끔씩 예안이 같이 자자고 베개 들고 오는 건 그런 대로 웃음으로 받아 줄 수 있다. 답답하다고 옷만 벗지 않으려고만 들면. 하지만 바로 지금 처럼 학교 갔다 와서 샤워하고는 알몸으로 예고 없이 태연스레 욕실에서 나올 때면 정호는 정말 울고 싶어진다. "예안아! 제발 나 있을 때는 옷 다 벗고 욕실에서 나오지 말라니까! 하 다 못해 타올이라도 걸치고 나와달라고 했잖아!" "에이. 아버지 자식 지간인데 뭐 어때?" 그야 바로 몇 달 전에는 가끔 목욕도 같이 갈 수 있었던 사이(열 살 이 후로 같이 간 적은 없다)였지만 지금의 넌 다 큰 여자라는 것을 제발 좀 자각해달란 말이다! …그래. 이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여자가 된 지 한 달도 채 안 됐으니까. 아직 여자로서 자각이 완전히 안 됐을 테니 이 정도야 뭐 이 해할 수 있어. 네가 목욕을 마친 뒤 알몸으로 나오는 건 이해해줄 수 있 어. 내가 눈을 돌려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한창 목욕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턱 하니 열고 들어오지 좀 말 란 말이다! 바로 지금처럼! 나더러 어디로 피하라는 거냐! "아빠 내가 등 밀어줄게." 한창 샤워하고 있던 정호는 기겁해서 얼른 사타구니를 손으로 가렸다.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짧은 반바지에 어깨가 드러나는 티를 입은 예안 이 때타올을 손에 끼고 들어서는 걸 확인한 순간, 정호는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아들아 제발! 이 아버지를 더 이상 곤혹스럽게 만들지 말아다오!" "등 밀어준다는데 왜 그렇게 소리는 지르고 그래?" "넌 지금 여자잖아? 무슨 여자애가 다 컸으면서 아빠 등을 밀어준다고 그래!" "바로 한 달 전에는 제발 같이 목욕탕 가서 등 밀어달라고 애걸을 했으 면서 뭘 그렇게 쩨쩨하게 굴어? 지금부터라도 등 밀어 준다잖아? 얌전히 등 대 봐. 힘이 없어졌어도 스킬은 그래도 남아 있어서 때라는 때는 전 부 다 전멸시켜 줄 수 있어." 제발 이러지 말라느니, 뭘 이러지 말라고 하는 거냐느니 하면서 옥신각 신하던 두 사람의 전투는 결국 예안의 당당한 승리로 끝났다. 어쩔 수 없이 타올로 사타구니를 대충 가린 정호는 등을 돌리고 앉았다. 예안이 정성스럽게 등을 밀었다. "어때? 시원해?" "…시원하긴 하다만 너무 아빠를 당혹스럽게 하는 구나." "아빠는 내가 이러는 게 싫어?" 갑자기 손을 멈춘 예안이 얼굴을 정면에 들이대고 묻자 정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싫을 리가 없잖아. "싫기는. 다만 네가 여자라는 걸 좀더 자각해서 행동해줬으면 한다는 거 지. 아버지와 아들 사이였을 때는 아무런 스스럼이 없지만, 이제 넌 딸 이잖아? 그러니까…" "와우. 아빠 물건은 언제 봐도 듬직하다니까. 그러고 보니 열 살 때 아 빠 물건 보고 내가 엄청 부러워했었지." 눈을 감은 채 멋들어지게 말하던 정호는 갑자기 예안의 손가락이 자신의 중요한 물건을 툭툭 건드리는 걸 깨닫고 그만 석상이 되어 버렸다. 언제 또 타올은 벗겼다냐. "뭘 그렇게 화를 내고 그러냐? 아빠도 참." 목욕을 마친 뒤 인상을 잔뜩 쓰며 말도 하지 않으려는 정호를 졸졸 따라 방까지 들어온 예안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정호는 기가 찼다. "그럼 다 큰 딸이 아무렇지 않게 아빠 거시기를 손으로 툭툭 만지는데 화가 안 나겠니?" "열 살 때 목욕탕 갔을 때에는 내가 아빠 물건 보고 부러워하자 굉장히 자랑스러워하며 한 번 만져보라고 했잖아?" …그게 언제적 일인데. "예안아. 제발 부탁이니 아빠 좀 당혹스럽게 만들지 말아라. 이 아빠는 너 때문에 요새 심장이 다 벌렁거린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완전한 여자로서 자각할 수 있 는지 걱정이 사라질 날이 없는 정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 내일 일요일이니까 롯데월드 가자. 저번에 같이 가자고 해놓고는 갑자기 여러 가지 일이 생겨서 못 갔잖아?" 예안이 애교스런 웃음과 함께 껴안아오자 정호는 그만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야 원. 도대체 못마땅해할 할 수가 없다니까. "그래, 그러자. 그러고 보니 우리 둘이서 롯데월드 가는 건 처음이네? 친구들이랑은 많이 가봤지?" 갑자기 예안은 쓸쓸한 얼굴로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아니. 나 한 번도 안 가봤어." "응? 아니 왜?" "…그냥. 왜인지 나한테는 그런 데서 놀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생각해보니 넌 그런 아이였지. 겸손이 지나치다면 지나치다고 말할 수 있는 애였지. 그 정도로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지 못하고, 항상 너 자신을 깎아 내리기만 했었지. 하나밖에 없는 자식에게 가여운 기분 이 든 정호는 울컥하는 걸 참지 못하고 예안을 와락 끌어안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예안아. 이 아버지가 다 못나서…" 잠옷 차림의 예안은 정호의 품에 파고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라 는 의미를 담은 행동이다. "아니야. 아빠는 할 만큼 했어. 행운이 따라주지 않은 걸 아빠 탓으로 돌릴 순 없잖아?" "그렇게 생각해주니 정말 고맙구나." 예안은 살아온 16년의 세월 동안 이렇게나 행복해본 적이 없었다. 이런 좋은 집에서 아버지와 돈 걱정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벅찬 행복이었다. 한때 신은 나를 미워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자신이 없었지만 지금은 정말 행복했다. 비록 어머니가 없 기는 하지만 젖먹이를 내팽개친 채 이혼해버린 어머니 따위는 없는 게 더 행복하다.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어준 유젤에게 마음 속으로 깊이 감 사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을 함께 곁들여서. "예안아. 준비 다 됐니?" 간편한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정호는 예안을 불렀다. 잠시 후 문이 열리 고 치장을 마친 예안이 나왔다. 정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우, 우리 딸 굉장한걸?" "에헤헤. 이 몸이 한 미모하긴 하지." …많이 능청스러워졌구나 너. "그거 전에 친구가 골라줬다던 그 유일한 여자옷?" "응." "예쁘구나. 정말 예뻐. 마치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아." "촌스럽게 선녀가 뭐야?" 아닌게 아니라 정호의 말대로 하늘거리는 흰 원피스를 입은 예안의 모습 은 너무나 눈이 부셨다. 치맛자락 아래로 뻗은 늘씬한 흰 다리도, 어깨 선에서부터 손끝까지 펼쳐진 아름다운 곡선도, 백옥처럼 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와 찬란하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도. 목덜미에서 묶어 오른쪽 어깨에 걸쳐 가슴에 늘어뜨린 붉은 머리카락도. 무엇 하나 빠질 데가 없었다. 이런 얘가 내 딸이라니. 정호는 한없이 자 랑스러웠다. "그럼 나갈까요, 공주 님?" "왕자님이라고 불렸으면 좋겠지만 지금 내 모습이 이러니 그냥 받아들일 게." 두 사람은 킥킥 웃으며 집을 나섰다. 거리에 나서자 보는 사람마다 눈이 휘둥그레져 예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인간 같지 않은 아름다운 외 모가 빚어내는 형형색색한 매력과 함께 햇빛을 받아 어느새 붉은 색에서 파란 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긴 머리카락이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뿜었 기 때문이다. 차가 있으면 더 만족스러웠을 텐데. 예안은 롯데월드로 향하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아빠. 일단 바이킹 먼저 타보자." "알았어." 자유이용권을 끊은 두 사람은 일단 바이킹 먼저 탔다. 생전 처음으로 타 보는 바이킹이었지만 예안은 무섭기는커녕 그저 신나기만 했다. 정호도 이런 걸 타본 적은 별로 없지만 그다지 무서워하지 않고 재밌게 즐겼다. "다음은 자이로드롭 타보자. 저거 굉장히 무섭다던데." "그러자."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자이로드롭은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그저 스릴이 넘쳤을 뿐이다. 두 사람은 그 뒤로 두 번이나 더 자이로 드롭을 탔고, 바이킹을 세 번 더 탄 다음에 청룡열차를 한 번 타고 롯데리아로 갔다. "휴우. 이것도 꽤나 재밌네." 예안은 주문한 콜라를 빨대로 쿡쿡 찌르며 키득 웃었다. 정호와는 달리 마시지는 않았다. 마시면 그 즉시 토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뭐 타 볼까?" "잠깐 쉬었다가 타자. 처음 와서 그런지 조금 힘들어. 게다가 난 원래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체질도 아니구." "그래. 일단 좀 쉬지 뭐." 햄버거를 입에 베어 물던 정호는 문득 주변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쏠려있 음을 느꼈다. 정확히는 한쪽 뺨을 괸 채 빨대로 콜라를 쿡쿡 찌르며 녹 색 눈동자로 창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는 자신의 딸에게 향한 시선 들이었지만. 정호는 그저 자랑스럽기만 했다. 팔불출 소리를 듣겠지만 사람들에게 커다랗게 외치고 싶었다. 이렇게 예 쁜 여자애가 내 딸이라고, 정말 귀여운 애라고. 누구보다도 내가 사랑하 는 나만의 보물이라고. 그렇게 그렇게 외치고만 싶었다. 정호는 '왜 그래?'라고 물어오는 딸에게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웃어주 면서 마음 속 깊이 이 행복을 영원히 지켜달라고 신에게 기도했다. 그의 인생에서 영혼이 가장 행복했던 날들을 꼽으라면 아마도 지금 이 순간일 것이다. 깨끗한 분위기의 연구실. 일개 개인이 소유하기에는 굉장히 넓은 연구실 이었지만 빽빽하게 들어찬 각종 첨단 기기 덕에 사람이 돌아다닐 수 있 는 공간은 오히려 좁았다. 보통 연구실을 이렇게 꾸며놓는 사람들 중에 는 괴팍한 천재가 많다. 그리고 이 연구실의 주인인 레이온은 바로 그 천 재 중의 한 명이었다. "박사 님. 흥미로운 외신이 하나 있습니다. 중원전자가 개발한 바이오 반도체 제조 기술에 치명적인 결함이 발견되었다 합니다." "뭐지?" "도선을 품고 있는 단백질들이 불규칙적인 확률로 산화를 일으켜 끊어져 버린다고 하는군요. 어떤 것은 멀쩡하지만 어떤 것은 부분적으로 가닥가 닥 끊어져 있거나 심지어는 안 끊어진 부분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망가 져 버린다고 합니다. 생산라인이 불량품의 홍수에 잠기고 만다는 소리지 요." "흐음. 하지만 그 정도 결함이라면 충분히 고칠 수 있지. 물론 중원전자 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테지만. 그런데 그게 어째서 흥미로운 외신이라 는 거지?" 시트날타의 인물 중 하나인 마르단은 씩 웃어 보였다. "어이없게도 미국의 유명한 전자업체인 메클스 사에서 중원전자의 그 기 술을 훔쳐내어 먼저 특허 등록을 시도했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결함투성 이 기술이라 특허는 결국 무로 돌아가 버렸고, 중원전자에서는 스파이 짓을 한 혐의로 메클스 사를 고소했습니다. 좋은 구실이 생긴 셈이지 요." "흐음. 계속해 봐." "미국 법원에서는 중원 전자가 내놓은 증거들을 타당성이 적다는 이유로 기각시켰고, 그것 때문에 지금 한국에서는 반미감정이 극렬하게 일어났 습니다. 이참에 석유 공급을 끊어버리라는 국민운동도 일어나고 있습니 다. 바짝 긴장한 미국은 서둘러 다시 메클스 사의 범죄 행각을 드러내려 했지만 중원전자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는군요. 아마도 한국정부의 사주를 받은 모양인데, 이참에 한국은 미국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공 교히 다질 생각인 것 같습니다." 레이온은 짧게 한마디했다. "곧 전쟁나겠군." 그것이 바로 해답이었다. "예. 아마도 그럴 겁니다. 원래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렇잖습니까?" "그래서 흥미롭다는 건가?" "그뿐만이 아닙니다. 국민운동은 아예 일본에 대한 석유 공급까지 차단 하자는 쪽으로 나가고 있는 듯 합니다. 과거 일본은 한국의 용서할 수 없는 숙적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일본 쪽도 바짝 긴장하고 있습니다. 잘 하면 미국과 일본이 연합해서 한국을 공격하려 들지도 모르죠. 세계 제3 차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마. 그렇게까지는 안 될 거야." 마르단은 레이온의 확언에 의아했다. 무슨 근거로 저렇게 확신할 수 있 는 거지?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 한국이 지금 소유한 힘을 미국이 눈치챈다면 말 이야." 레이온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르단은 이해할 수 없어 그저 고개를 갸웃했을 뿐이었다. 수요일 오후. 중현의 부탁을 받고 학교를 조퇴한 예안은 약속장소로 향 했다. 중현이 이미 차를 대기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무슨 일로 이런 시각에 보자고 한 거죠? 아주 중요 하다길래 저 조퇴까지 하고 나왔어요." "말 그대로 정말 급합니다. 일단 가시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예안은 궁금증을 참으면서 중현의 차에 올라탔다. 중현은 곧 차를 출발 시켰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전에 갔었던 그 해군기지로 갑니다." "흐음. 근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도 돼요?" 중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십시오." "맥은 어느 군이 관리하게 되나요? 육군? 공군? 해군? 제 생각엔 육군은 아닐 것 같고 해군이나 공군이 관리할 것 같은데. 둘 중의 하나를 꼽으 라면 해군일 것 같아요." 중현은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맥은 해군이 관리하게 됩니다. 지금 수천 억 원을 들여 맥 전용 도크함을 새로 건조하는 중입니다. 원래 한 나라의 군사력은 해군 으로 측정한다 하지 않습니까?" "흐음. 근데 저는 왜 부르셨어요?" 중현은 운전을 계속하면서 말했다. "우리가 아주 결정적인 사실을 하나 놓치고 있었더군요. 그건 맥의 조종 법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일단 조종법을 알아야 맥의 파일럿을 양산하지 않겠습니까? 죄송하지만 오늘부터 한 사흘 정도는 학교에 가지 마시고 해군과 함께 맥에 대해서 상의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런 거라면 진작에 하지 왜 이제 와서 귀찮게 이러는 거야. 오늘 집에 가자마자 아빠랑 이터널 피닉스를 하기로 되어 있었던 예안은 조금 기분 이 상했다. "하지만 저는 제 신상에 관한 걸 숨기기로 했잖아요?" "그 부분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변장을 하면 됩니다." 예안은 눈을 크게 떴다. "예? 변장이요?" "예. 일단 도착하기 전에 변장 도구를 드리겠습니다. 이럴 줄 알고 다 준비해왔습니다." 차가 한적한 도로에 접어들자 차를 세운 중현은 뒷좌석에서 커다란 가방 을 들어 예안에게 건넸다. "여기에 변장 도구가 들어있습니다. 이 근처에 사람이 없으니 갈아입고 오시죠." '서울에 있을 때 진작 주지 왜 이제 와서 주는 거래?' 적당한 숲으로 들어간 예안은 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남자용 옷과 함께 머리카락을 감출 수 있는 모자와 선글라스, 그리고 무슨 알사탕 같은 것 이 들어 있었다. 예안은 일단 옷을 갈아입었다. "흐음, 남자 같을까?"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헐렁한 옷이긴 했어도 여자라는 게 숨겨지지는 않 았다. 그나마 가방에 있던 붕대로 가슴을 꽉 조여서 어느 정도 그럴 듯 한 남장을 했을 뿐이다. '이런 걸로 시트날타 녀석들이 속아넘어가진 않을 텐데… 괜히 들키기라 도 하면 큰일이란 말이야. 제발 안 마주치기를 빌어야지. 하긴, 내가 가 는 곳에 그 녀석들이 있으리란 보장은 없잖아? 그 녀석들은 지금쯤 내가 미국에 있는 줄 알 테니까.' 하지만 이왕 빌려줬으니 AS는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예안은 맥의 조종법을 알려주고 난 뒤에는 가급적이면 정부와 접촉하지 않을 생각이 었다. 특히 해군기지 같은 곳에는 절대 안 갈 생각이었다. "잘 어울리시군요. 그럭저럭 미소년 같아 보입니다만." "쳇. 그런데 이 알사탕 같은 건 어디다 쓰는 거예요?" "아, 그건 소형 목소리 변조기입니다. 입안에 넣고 말씀하시면 목소리가 낮아져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예안씨 목소리는 여자 중에서 도 꽤나 고음인지라 준비했습니다. 그거 꽤 비싼 겁니다." 차는 한참을 달려 동해에 위치한 해군기지에 도착했다. 제복에 별을 잔 뜩 단 군인이 반갑게 그들을 맞아주었다. 비밀 유지를 위해서인지 하급 부하들이 받들어총을 한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 이미 저녁때가 다 되었 던 터라, 오후 내내 차에 시달렸던 예안은 조금 지친 표정이었다. "어서 오게. 기다리고 있었네." 나 중장의 환대에 중현은 정중히 인사했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 중장 님." "나도 반가워. 그런데 이 애는 누군가?" 나 중장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은 채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소년(인가?) 을 가리키며 물었다. "맥의 조종방법을 알고 있는 분입니다. 국방부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으 며 맥의 매매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신 분이죠." 나 중장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호오? 이렇게 어린 소년이 벌써부터 국방부 연구소에? 대단한 천재인가 보군." "하하 소년이라니요. 특별히 뛰어난 인재이기는 하지만 이래 뵈도 나이 가 25살이나 된 어엿한 청년입니다." 나 중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딜 봐도 가냘파 보이는 소년이, 그것도 조금만 잘 꾸미면 여자로도 보일 수 있을 것 같은 이 소년이 25살의 청 년이라고? 사실이라면 굉장한 동안이다. "나도 이렇게 젊어 보였으면 좋을 텐데. 어쨌든 안내하지." "지금도 충분히 젊어 보이십니다." "칭찬 고맙군. 따라오게." 나 중장은 차를 불러 중현과 예안에게 타라고 했다. 세 사람을 태운 차 는 해변가에 난 도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불만스런 표정으로 창 밖 을 구경하던 예안은 주행 중 커다란 배가 건조되고 있는 광경을 보고 눈 을 동그랗게 떴다. "저건 뭐죠?" "맥 전용 도크함을 건조하고 있는 중입니다. 파일럿의 휴식과 맥을 청소 하거나 보관하는 용으로 쓰일 계획이죠. 물론 장거리 원정을 나갈 시에 도 맥을 싣고 갈 겁니다." "흐음." 예안은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글라스에 가려져 어 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중현은 지금 예안이 무척 불 만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얼핏 눈치챘다. 차는 거대한 건물 속으로 들어갔다. 창고로 쓰이던 곳이었을까. 답답한 먼지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건물 안에 내린 세 사람은 전투기 형태로 변해 있는 맥이 당당히 놓여져 있는 걸 발견했다. "잠시만요." 예안은 입안에 있는 사탕 덕에 굵직해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뒤 맥의 콕피트를 열고 안에 들어갔다. 이미 비밀리에 부름을 받고 와 있던 몇몇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안에 들어간 예안은 입을 열었다. "유니콘." 「원격장치로도 대화할 수 있으면서 왜 안까지 들어와서 말을 거시는 겁 니까?」 "저 사람들에게 내가 원격장치를 갖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 래. 혹시라도 나중에 맥을 안 돌려주려고 하면 이걸로 빼돌려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럼 너랑 무슨 재주로 연락을 하라고? 야 그런데 너 조종법 에 대해서 저 사람들에게 무슨 재주로 설명하냐?" 「설명은 왜 하려고 하십니까?」 "왜 하긴, 그래야 저 사람들이 널 조종할 파일럿을 키울 거 아냐." 「제가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저를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에서 유젤 님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안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긴 했다. "뭐? 진짜야?" 「물론 자동조종모드나 수동조종모드라면 유젤 님이 아니더라도 조종할 순 있습니다. 하지만 자동모드 상태에서는 전투가 불가능하고 비행이나 잠항만 가능합니다. 수동모드에서 가벼운 전투는 가능하지만 공명모드에 서처럼 원활한 움직임이나 성능은 보일 수 없습니다. 간단히 설명 드리 자면, 수동모드로 움직이는 맥이 1000기가 있다고 해도 공명모드로 움직 이는 단 1기로 전부 다 순식간에 박살낼 수 있습니다. 수동모드에서는 사격시스템과 에너지충전 등 대부분의 기능에 락이 걸려 있어 어느 정도 이상의 출력은 낼 수 없거든요.」 "왜 그런 건데?" 「혹시라도 저를 탐낸 사람들이 파일럿인 유젤 님에게서 저를 뺏어 마음 대로 사용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의 성능을 100% 이 끌어내고 락이 걸려 있는 기능들을 제한 없이 사용하기 위해서는 공명모 드에서만 가능한데, 공명모드가 가능한 사람은 유젤 님뿐이거든요. 보통 인간들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예안은 앞이 깜깜해지는 걸 느꼈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다른 방법은 없는 거냐?" 「없습니다.」 "으윽.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설마 맥의 이용가치가 없어졌다고 해서 다시 물리자고 드는 건 아니겠 지? 예안은 침울한 안색으로 맥 밖으로 나왔다. "왜 그렇게 우울해 하십니까? 혹시 맥에 고장이라도 난 건가요?" 중현이 걱정스러운 듯 물어오자 예안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사실… 제가 깜박 잊고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는데요…" "뭔가요?" "맥은 제가 아니면 조종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맥은, 공명이라는 기 능을 사용해서 파일럿의 정신과 맥의 시스템을 완벽히 일치시켜 움직이 는 방식이거든요. 그런데 그게 가능한 사람이 저 말고는 없어요…" 중현이 정말 믿어줄까? 예안은 제발 그가 믿어주기를 바랬다. "아, 그렇군요. 조금 의외네요. 어쨌든 놀랐습니다." 중현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되자 당황한 건 예안이었다. "에? 그냥 단번에 믿으시네요?" "믿습니다. 맥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면 그런 거지요." 예안은 중현이 억지에 가까운 자신의 말을 쉽게 믿어주자 다행이라고 수 긍하면서도 어쩐지 조금 찜찜했다. 하지만 중현이 예안의 말을 쉽게 믿 었던 건, 그녀의 아이큐가 반 장난으로 치러진 테스트에서 무려 350이 넘는 수치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지능이 엄청나게 높지 않은 이상은 그 공명인지 뭔지 하는 게 안 되는 모양인가? 흐음… 조금 골치 아프게 됐군…' 그렇다면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인가? 이제야 중현은 어째서 예 안이 자신 있게 맥을 정부에 빌려줬는지 그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누구 의 손에 들어가든 맥은 예안이 없으면 고철 덩어리나 다름없는 신세인 것이다. 예안은 맥을 돌려 받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카드를 미리 갖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예안씨 말이 사실이라면 골치 아프게 됐군요. 일단 장관 님께 말씀드려서 차후에 대하여 의논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일단 돌 아갑시다. 바래다 드리죠." "네." 군용차를 차고 중현의 차가 세워진 곳에 온 두 사람은 나 중장에게 인사 를 하고는 다시 차에 올랐다. 왔던 길을 되짚어가던 중 중현이 지나가는 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중원전자와 메클스 사의 재판에 관한 이야기는 들어보셨습니까?" "무슨 일 있나요?" "모르시나 보군요. 중원전자에서 개발한 결함 투성이 바이오 반도체 기 술을 메클스 사가 모르고 훔쳤는데, 미국 법원은 메클스 사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중원전자 측에서 내놓은 증거들의 타당성이 부족하다고요." "미국 놈들이 하는 일이 원래 다 그렇죠 뭐." "그러나 뒤늦게 결함 투성이 기술이라는 게 밝혀져 결국 메클스 사만 손 해를 본 셈입니다. 어쨌든 그것 때문에 지금 우리나라에선 반미감정이 극렬히 일어나고 있는 중이죠. 웬만한 토론 사이트에 가보면 하나같이 미국에 대한 석유 공급을 중지하라고 난리입니다. 덩달아 이참에 일본에 대한 태도도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면서, 지난 세월 동안 일본이 우리 나라에 저지른 짓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하기 전에는 석유 공 급을 하지 말라는 부분까지 번지고 있죠." "그럼 그 말대로 하면 되잖아요?"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죠. 그때그때 석유를 공급하는 방식이 아니라 일 정 기간 동안 일정량을 공급하도록 조약을 맺었으니까요. 하지만 한미석 유조약은 올해 5월 31일로 끝납니다. 그 다음에 갱신하는 거죠." "미국이 바짝 긴장하겠군요." "예. 그렇죠. 수소 엔진을 개발했다고는 하나 일반화하기에는 너무나 초 고가인 제품이니 울며 겨자 먹기로 자동차나 전투기, 비핵추진 함정 같 은 건 몇십 년 정도는 기름에 의존해야 하는데, 5월 조약 갱신에서 우리 나라가 일방적으로 바이바이 해버리면 큰일이니까요. 그것 때문에 얼마 전에 미군함대가 태평양을 건너 우리나라로 오던 중 맥에게 혼나 돌아간 거잖습니까?" 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이라면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아, 그랬군요." "미국은 제2의 이라크로 한국을 선택하려는 생각을 굳히고 있습니다. 바 보가 아닌 이상 누구라도 그런 추측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덩달 아 일본 역시 미국 측에 붙어 우리나라에 압력을 가하고 있지요. 한일석 유조약도 5월 달에 갱신하니까요." "잘하면 올해 안에 이라크전의 복제가 이뤄질지도 모르겠네요." 예안은 농담처럼 깔깔거렸지만 중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정말 그럴 수도 있습니다'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철이 없는 건지 아니면 한국군이 이길 거라고 자신하는 건지 예안의 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없었다. '이걸 미리 다 생각해서 맥을 한국에 넘긴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가 심중을 알 수가 없군.' 예안의 과거가 지나치게 베일로 싸여 있지만 않아도 어느 정도 그녀의 심리를 추리해낼 수 있으련만. 천재인 건 확실한데 아무리 봐도 행동하 는 건 처음 맥을 팔라고 권했을 때 고작 5000억 원에 팔 수 없다고 펄펄 뛰던 걸 제외하고는 평범한 고등학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 똑똑 흰 연구복을 입은 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던 레이온은 노크 소리 를 듣자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문 열렸습니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박사. 너무 느긋해 보이는군." 귀에 익은 목소리. 마리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레이온은 조금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앉았다. 그가 시트날타에서 상대하고 싶지 않은 인물들 중 한 명이 바로 마리오다. "느긋해 보이다니? 지금 바빠 죽겠는 모습이 안 보이나?" "엔젤을 찾을 생각은 전혀 안 하고 허구헌날 자기 연구만 하고 있는데 한가해 보인단 소리가 안 나오게 생겼나? 지금 우리 시트날타에 가장 중 요한 건 바로 엔젤이 아닌가? 그런 쓰잘데기 없는 연구는 해서 어디다 쓴다는 거지?" "에날도스만 쓸 줄 아는 무식한 헤이져의 말은 차마 들어줄 수가 없군. 나에게 유젤을 찾을 능력이 있다면 벌써 찾았을 거야. 하지만 나에겐 그 런 능력이 없지. 게다가 그건 네 소임이 아닌가?" "글쎄, 그렇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난 박사 네가 일부로 엔젤을 놓아 줬다는 추측을 떨칠 수가 없단 말이야. 내색을 하진 않지만 엘르도 그렇 게 생각하고 있을 걸? 제나르 대신은 네 녀석을 철썩 같이 믿고 계시지 만 말이야." 마리오는 훗 하는 비웃음을 베어 물었다. 레이온의 마음을 꿰뚫어 볼 듯 강렬한 눈빛은 맹수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러나 레이온은 전혀 기가 죽지 않고 오히려 어깨를 으쓱하기까지 했 다. 어이가 없다는 제스처였다. "동지를 의심하려 드는 건 좋은 버릇이 아니야, 마리오." "난 한 번도 네가 동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쉽군. 난 내 목적과 시트날타의 목적이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생각했 는데." "네 녀석의 목적이 '혁명'과 비슷하단 말이냐?" "그렇다고는 하지 않았어." 이 녀석과 대화하다보면 자꾸만 짜증이 치밀어 오른단 말이야. 마리오는 선글라스 너머로 차갑게 빛나는 눈빛을 약간 누그러뜨렸다. "엔젤을 다시 탄생시킬 수는 없나?" "불가능해. 돈도 돈이지만 유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건 신의 도움이 있 었기 때문이야. 이제 다시 시도한다 해도 복제 작업은 천이면 천 전부 다 실패해버리고 말 거다. 뉴 타입의 인간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만만 한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니까." "뉴 타입이라… 그러고 보니 정작 우리는 엔젤이 맥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만 알지 그 외는 거의 모르는군. 한 가지 묻고 싶 다. 박사, 맥은 당신이 만들었나?" "글쎄다… 과연 나에게 그런 엄청난 걸 만들 능력이 있을까? 난 맥을 만 들 능력이 못 된다고 치자. 여기서 문제. 그렇다면 맥은 과연 누가 만들 었을까?" 레이온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희미하게 번져 나왔다. 의심 과 경계 그리고 적의가 섞인 시선으로 레이온의 얼굴을 쏘아보던 마리오 는 피식 웃음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네 녀석이랑 이야기하다보면 자꾸만 화가 나려고 한단 말이야. 자칫 나 도 모르게 에날도스가 폭주해서 네 녀석을 죽여버리는 일이 생기기 전에 이쯤에서 그만둬야겠군. 뭐니뭐니해도 넌 우리 시트날타에 없어서는 안 될 인간이니까. 일단은, 말야." 마리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레이온의 입가에서 천천히 웃음 이 사라졌다.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의 고운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레이온 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마더로부터 최초로 버림받은 인간들의 후예인 주제에 너무 당당 하군. 에날도스가 없다면 그 즉시 죽고 마는 인간 주제에 말이야." 수천 년 간 혁명을 꿈꾸어 온 시트날타. 하지만 레이온은 그들의 바램이 얼마나 우스운 건지 절실하게 잘 알고 있었다. "맥은 너희가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바보 같은 것들. 아직도 그 걸 못 깨닫고 허황된 꿈만 꾸다니." 그걸 다룰 수 있는 인간은 이제 이 지구상에서 단 한 명뿐이다. 예안과 중현을 태운 차가 서울에 접어들었을 때는 이미 많이 어두워진 뒤였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군요. 예안씨. 저희 집으로 가지 않겠습니까? 제 가 저녁 대접을 해드리죠. 저희 집 여기서 굉장히 가깝습니다." "예?" "남자 혼자 사는 집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때요?" 잠깐 딴 생각을 하고 있던 예안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다이랙트로 거절당하자 중현은 약간 당혹스러웠다. "예?" "싫다구요.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위장이 상해서 음식 같은 건 먹 지 않는다구요. 영양제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몸이라서 빨리 집에 가 서 영양제 맞아야 돼요."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그러면 언제 한 번 또 약속을 잡을 수 없을 까요? 예안씨와 한 번 오래도록 진지한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예안은 조금 무안해하는 중현이 약간 안 되어 보였다. "그럼 한 번 집 구경이나 시켜주세요. 대신 저녁은 안 먹을 거예요." 중현의 안색이 대번에 환해졌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아, 그리고 제 가족 들은 예안씨에 대해 잘 모르니 그냥 학교 후배라고 소개하겠습니다." 사실은 영양제 어쩌구 하는 건 다 뻥이었고 ST기관이 알아서 에너지를 생산해 주기 때문에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것이다. 이상하게 뭔가를 먹으면 속이 매슥거리면서 곧바로 토해내곤 하는데, 그 이유를 모르는 예안은 언제고 레이온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레이온하고 연락 이 되지 않아 약간 답답하던 터였다. '맥을 한국정부에 빌려준 게 잘한 짓인지 아닌지 물어보고 싶은데…' 어디로 망명가는 게 아니라 한국에서 서예안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 쩔 수 없이 맥을 빌려주는 게 정답이었다고 예안은 스스로를 달랬다. 그 러나 조금 찜찜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안이를 만나고 난 뒤 내 인생이 꽤나 바뀌었구나. 내가 예안이가 된 걸 제외하고서라도…' 하지만 예안은 아직까지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크게 바뀌었는지 실감하 지 못했다. 그저 맥을 빌려줌으로써 일 년에 정기적으로 일 억씩 받게 된 게 좋다고만 생각할 뿐, 아직까지는 자신이 평범하다 생각했다. 한국 정부가 자신의 두뇌를 원하고 슬슬 접근할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 따위 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저 맥을 빌려줌으로써 다시 원점으로 되 돌아왔다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중현의 집에 도착한 예안은 굉장히 놀랐다. 도호의 집이 초라하게 느껴 질 정도로 초호화 저택이었던 것이다. "우와, 이거 아저씨 집이에요? 굉장하다." "아, 아저씨?" 무, 물론 나이가 27이나 되었으니 10살 아래인 예안으로부터 아저씨 소 리 듣는 게 맞긴 했지만, 그래도 은근히 그녀에게 마음이 있었던 중현으 로서는 충격 받기에 충분한 단어였다. "아저씨 혹시 재벌 2세 뭐 그런 건가요?" "글쎄요. 저희 집안이 대대로 정치를 해오긴 했지만 재벌 소리 들을 정 도는 아닙니다." "호오? 권력이라 이거군요? 하긴 권력이 있으면 원래 돈이 자동으로 따 라 들어오는 법이니까." 중현은 예안이 어쩐지 비아냥거린다고 느꼈다. 혹시 부자나 권력가에게 적의를 갖고 있는 건 아닐까? "일단 들어가시죠." "예." 정문에서 현관까지 걷는 동안이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정원은 굉장히 컸다. 살아 생전 이런 집에 실제로 와볼 줄이야. 예안은 부러움으로 범 벅이 된 마음을 달래며 꾹 참고 중현을 따라갔다. '이럴 거면 그냥 맥을 팔 걸 그랬나?' 쓸데없는 생각을 안고 집안에 들어선 순간 예안은 흠칫했다. 적어도 15 명 정도는 되어 보이는 중현의 가족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아, 그리고 이쪽은 제 고등학교 후배입니다." 중현의 아버지가 감탄 섞인 눈길을 던졌다. "호오? 그렇다면 이 아가씨도 대명고등학교를 졸업했나? 지금 어느 대학 을 다니지? 몇 학년이냐?" "예? 저 아직 고등학…" 중현이 재빨리 말을 잘랐다. "이미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래픽 디자이너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이는 스물 다섯입니다." "예?" 내가 언제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무슨 그래픽 디자이너? 스물 다섯? 어이 가 없어진 예안이 얼떨떨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중현은 가족들이 보지 못하게 살짝 윙크했다. 맞장구치라는 소리다. "아, 마, 맞아요. 그래픽 디자이너 하고 있어요." "흐음. 겉보기에는 마치 고등학교를 갓 입학한 것 같군. 굉장한 동안인 데. 나도 이렇게 젊어 보이면 좋을 텐데 말이야." 중현의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 여인의 감탄에 예안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 다. '정확한 안목이시네요.' "저와 개인적인 일 때문에 집에 데리고 온 거니 저희는 그만 이층으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천천히 인사시켜 드리죠. 저는 저녁 먹고 와 서 생각 없습니다." "그래라. 언제 한 번 저녁이나 같이 하자꾸나." 푸근한 웃음과 호기심이 섞인 중현의 가족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고 서 있던 예안은 얼떨떨한 발걸음으로 중현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중현 의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예안은 입을 열었다. "대학교 졸업? 그래픽 디자이너? 스물 다섯? 왜 그렇게 거짓말 한 거예 요?" "이런 이런. 예안씨가 먼저 요청하지 않았나요? 예안씨에 대한 사항은 기밀로 해달라고. 그럼 가족들에게 '이번에 한국이 새로 구한 맥이라는 전투병기를 제조한 천재 과학자입니다.'라고 소개해야 되겠습니까?" "대충 이해는 했는데 맥을 제조한 천재 과학자라뇨? 누가요? 제가요?" 예안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중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그녀가 프리미엄을 높이기 위해 시치미를 떼는 거라 생각했다. "농담은 그만두십시오. 이미 우리는 오랫동안 토의한 결과 예안씨가 맥 을 제조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떻게 과거에 대한 흔적을 대부분 지우고, 또 비밀리에 맥 같은 전투병기를 제조했으면서도 세상에 전혀 드러나지 않을 수 있었는지 그 보안 능력과 신중함에는 찬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입니다." 예안은 어이가 없었다. "에엑? 말도 안 돼요. 제가 무슨 재주로 맥을 만들어요? 전 그냥 선물 받은 거라니까요." "우린 이미 예안씨가 아이큐 350을 훨씬 상회하는 천재라는 걸 알고 있 습니다. 그리고 예안씨가 갖고 있는 물리학 지식은 현대 과학을 훨씬 뛰 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죠?" "그, 그건…" 어이. 저번에 맥의 무한동력이니, 로데늄이니, 아나퀴스니 뭐니에 관한 건 그냥 유니콘이 설명해준 걸 대충 이해한 다음에 거들먹거리면서 말해 준 것에 불과하다구. 그렇게 오해하면 곤란하다는 거 몰라? "일단 앉으시죠. 예안씨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게 아직도 산더미처럼 남 아 있습니다." 맥은 내가 만든 게 아니고 난 과학이라면 깜깜하다고 말하려던 예안은 머뭇거리며 중현이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예안과 맞은편에 앉은 중현은 깍지 낀 손을 탁자 위에 올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핵융합로를 만들어줄 수 있습니까?" "예엣?" 느닷없는 요청에 예안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뒤덮였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한참 후 겨우 정신을 차린 예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핵융합로라면 핵융합 반응으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그거요?" "예." "깨끗하고 공해 없이 에너지를 많이 생산해낸다는 그거요?" "예. 맞습니다." "그걸 제가 무슨 재주로 만들어요? 저는 물리라면은 완전 쥐약인 데다가 평범한 고등학생인데?" 평범하다는 말에 중현은 어이가 없었다. "평범하다구요? 누가요? 예안씨가요?" 예안이 미처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중현은 흥분한 말투로 이야기를 빠르 게 풀어나갔다. "현대 기술을 완전히 뛰어넘은 전투병기를 만들어낸 예안씨가 평범하다 구요? 완전 장난으로 응한 아이큐 테스트에서 간단하게 350이 나온 예안 씨가 평범하다구요? 자신만의 독창적인 새로운 기초 과학 체계를 편성한 예안씨가 평범하다구요? 만약 예안씨가 지금 당장이라도 그 무한동력에 관한 논문을 대충 끄적여 발표한다면 세상에서는 난리가 날 겁니다. 상 이란 상은 전부 다 휩쓸 거고 온갖 나라에서 러브 콜을 보내올 겁니다." 중현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어이 없어하는 예안의 녹색 눈동자를 흘끗 쳐 다보았다. "예안씨는 당신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몸 값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밀고 당기는 건가요? 그렇다면 확실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비싼 인간이라 할 수 있 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당신의 두뇌를 원합니다." "어… 어… 어…" 어처구니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을까. 살다 살다 별 희한한 말을 다 들어본 예안은 놀라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천재라니? 내가 천재라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삐삐삐삐! 갑자기 요란한 신호음이 울려 퍼지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예안은 맥 의 조종장치에서 나는 소리임을 알고 얼른 왼손을 들어 눈앞에 가져갔 다. "왜 그러나요?" "소, 손목시계 알람을 맞춰놨거든요. 별거 아니에요." "흐음…" 중현이 다소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내오는 가운데, 예안은 얼른 작은 화 면에 뜬 글씨를 확인했다. 「가능하다고 말씀하십시오.」 이해 못한 예안이 멍청히 되물었다. "뭐라고?" "예? 지금 누구랑 대화하시나요?" 중현이 되물어오자 예안은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그냥 헛소리예요! 저, 잠시만요.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중현이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예안은 후다닥 방밖으로 나왔다. 다행 히 이층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예안은 한쪽 구석으로 가 조종장치에 대고 작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가능하다고 말하라니? 뭘?" 「핵융합로를 만드는 게 가능하다고 말씀하십시오.」 "너 미친 거 아냐? 내가 아무리 과학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잘 안다구! 수학도 고등수학 4차 함수까지밖에 모르는 내 가 무슨 재주로 그런 엄청난 걸 만드냐!" 「저는 핵융합로보다 더 대단한 과학 기술로 만들어졌습니다. 제 몸 속 에 있는 ST기관은 핵융합로와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엄청난 에너지생산 장치입니다. 저에게도 그렇게 대단하다는 칭찬을 좀 해주시면 안 됩니 까?」 "에…" 할 말이 없어진 예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맥은 이렇게나 대단 한 녀석인데 왜 그동안 그걸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사실 이 렇게 사람처럼 대화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 해도 엄청난 거 아닌가? 「이건 유젤 님을 위해서 더 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다시 중현이라는 분 에게 가셔서 제가 말씀드리는 대로만 말씀하십시오. 그렇게만 하시면 됩 니다.」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아, 아니 그것보다 넌 왜 그런 짓을 하려고 하 는 건데?" 「제가 만들어진 목적은 유젤 님의 보호와 이득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이러는 건 유젤 님을 위해서입니다. 부디 중현 님에게 가셔서 제가 알려 드리는 대로만 말씀하십시오.」 예안은 맥의 단호한 말투에 무언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맥이 만들어 진 게 유젤을 위해서였다고? 유젤이 맥을 조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 니라? 뭔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복잡한 인연의 실타래가 얼기설기 얽혀져 있는 것만 같았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망설이던 예안은 결국 한숨과 함 께 물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네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나한테 좋으니까 그대로 하라 이거지?" 「그렇습니다. 이제야 제 말을 알아들으시는군요.」 "알았어. 그렇게 할게." 다시 중현의 방으로 돌아온 예안은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잔 뜩 긴장한 채 자신을 주시하는 중현을 흘끗 쳐다본 예안은 조종장치에 작게 떠오르는 글씨대로 말했다. 물론 중현이 보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가리는 건 잊지 않았다. "휴. 좋아요. 사실대로 말씀드리죠. 맥은 제가 만들었어요. 짐작하고 계 시겠지만 저는 모 회사 연구소의 의뢰를 받아 간단한 몇 가지 연구를 해 주고 꽤 많은 돈을 받았어요. 한 몇 백억 쯤? 물론 그 회사들은 제 연구 를 바탕으로 몇 조 원에 해당되는 돈을 벌었구요. 전 제 몫을 가지고 주 식을 해서 한순간에 돈을 불려 맥을 만들 비용을 확보한 거예요." 중현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자신이 짐작했던 게 맞아떨어질 때의 기쁨이란 참 크다. 예안은 맥이 알려주는 대로 계속 말했다. 속으로는 쪽팔려서 죽을 지경 이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해야만 했다. "제가 맥을 만든 건 한국을 위한 거창한 애국심리나 아니면 세계정복 같 은 허황된 꿈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제 지식과 두뇌의 콤비네이션이 얼마만큼이나 뛰어난 무기를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해서였어요. 처음 제작 의도는 순수한 과학에 대한 탐구였다고나 할까요? 미리 말씀드렸지만 맥 은 조종하는 방법부터가 현존하는 어떤 전투기나 함정하고도 틀려요. 저 이외에는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아니, 저 이외의 사람들은 조 종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게 올바른 설명이 되겠군요." "그렇군요." "하지만 맥을 만드는 과정에서 일부 단체나 모 국가들에게 그 정보가 흘 러 들어갔고, 그들은 제 두뇌와 맥을 탐내기 시작한 거예요. 물론 제가 맥을 타고 있을 때면 무적이지만 전 그들의 정체를 몰라서 반격도 못해 요. 그리고 항상 맥에만 타고 있을 순 없잖아요? 또 제 정보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기에 그들의 정체를 알아낼 방도도 없어요. 어쩔 수 없이 저 는 한국에 맥을 빌려주고 한국의 보호와 은폐를 받기로 결심한 거예요." "으음." "제 친아버지나 양아버지, 주변인들은 제가 천재라는 걸 몰라요. 맥에 대해서는 더더욱이요. 저는 가능하면 제 주변인들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저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면 위험해지는 건 너무나 당연해요. 그 래서 저는 제 신상을 철저히 숨겨달라고 한 거예요." 사실은 시트날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숨겨달라고 한 거였지만. 예안은 맥이 설명해주는 대로 둘러대는 게 잘 맞아떨어지는 데는 안도했지만, 그 내용이 엄청난 과장을 동반하는 데다 대부분 자신을 화려하게 치장하 는 것에 대해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만약 중현에게 들키면 망 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다. "저는 부귀영화나 명예에는 관심이 없어요. 제가 원하는 건 다만 끝없는 진리의 탐구, 그 뿐이에요. 하지만 세상은 절 가만두지 않고, 저를 이용 해서 사리사욕을 챙기려고만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만 했어요." 중현은 예안이 지금 속으로 굉장히 울고 싶어한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귀담아 듣기에 바빴다. "원래는 맥을 선물 받은 거라 둘러대고 한국정부에 넘겨 그 대가로 보호 와 은폐에 관한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제가 맥을 만들었다 는 사실을 용케 눈치채셨네요. 그때 아이큐 검사할 때 나름대로 엄청 대 충 했는데. 사실 아이큐 검사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제가 얼마 나 천재인지는 저도 잘 몰랐거든요." "이해합니다." 중현은 이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예안은 속으로 펄쩍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유니콘! 이게 도대체 뭐야!' 일단 아주 정말 리얼하게 잘 둘러대기는 했지만 이런 심한 뻥은 도대체 무엇인가?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엄청난 천재라고라? 내가 그 정도로 천재인 줄은 몰랐다? 자화자찬도 유분수지, 이게 도대체 뭐냔 말이다. 「자학하지 마십시오. 유젤 님은 분명 그 누구보다 뛰어난 두뇌를 갖고 계십니다. 자, 그 다음입니다.」 맥은 계속해서 다음 내용을 알려주었고, 예안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 라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계속 말했다. "핵융합로. 그따위 충분히 만들어드릴 수 있어요. 저에게 있어 그 정도 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럴 테지요. 무한동력이라는 어마어마한 장치까지 만드신 분이니 말입 니다." "하지만 전 만들어드리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에?" 이야기가 잘 풀어나간다 생각했던 중현은 느닷없는 거절에 당도하자 당 황했다. 예안은 어깨를 으쓱하는 대담성까지 보였다. 쪽팔려하면서도 연 기는 잘 해내는 예안에게 유니콘이 박수를 보내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 이다. "제가 왜 만들어 드려야 하죠? 핵융합로는 아직 역사에 등장할 시기가 아닌 물건이에요. 어쩌면 인류는 핵융합 장치를 만들어 내기도 전에 멸 망할 수 있어요. 괜히 그런 걸 지금 만들어내면 세계 국가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고, 결국은 제 정체가 드러나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제가 왜 그 런 위험한 짓을 사서 해야 하죠?" "하지만 맥의 무한동력 장치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핵융합로보다 더 엄 청난 것 아닙니까?" 결정적인 모순에 당황했던 예안은 유니콘이 다시 설명해주자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맥이 무한동력 장치로 움직인다는 건 철저한 기밀에 붙이면 그만이잖아 요. 맥이 석유로 움직인다고 헛정보를 퍼트리고, 또 위장용으로 맥의 연 료 공급 시스템을 구축해놓는다면 무한동력원 ST기관에 대해 들킬 위험 은 없잖아요." "하지만… 핵융합로는…" "그래요. 개발된다면 한국은 당장 과학 부문에서 세계 1위로 올라설 수 있죠. 하지만 전 그럴 생각이 없어요. 절 설득할 생각이라면 버리세요." 예안의 의지가 완강함을 깨달은 중현은 초조함에 손톱을 물어뜯었다. 정 체가 노출되어 위험해지는 게 두려우니까 안 된다고 거절하는 걸 어떻게 설득한단 말인가? 아무리 안전을 보장한다 해도 쉽게 믿지 않을 것이다. 초조해하는 중현과는 달리 예안은 굉장히 감탄하고 있었다. '이 녀석 정말 대단한 걸?' 인공지능인 주제에 사람의 심리를 아는 것처럼 척척 대답을 준비해주는 맥의 성능에 놀라면서, 예안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조금 누그러진 태도였다. "하지만 맥과 저에 대해 철저한 보안만 지켜주신다면 다른 방법은 알려 드릴 수 있어요. 핵융합로는 아닐지라도요. 오히려 그것보다 더 좋은 거 죠." 중현은 반색했다. "그게 무엇입니까?" "맥의 ST기관은 열 에너지와 전기 에너지의 형태로 얼마든지 외부에 에 너지를 공급할 수 있어요. 중간 단말 시설을 갖춰놓은 다음에 맥과 송전 용 전선을 연결해놓으면 핵융합 장치를 굳이 만들지 않아도 무한의 에너 지를 전송할 수 있죠. 간단히 말해서 맥을 발전소용으로 쓸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게 정말입니까?" "예." 중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대단하군요. 놀랍습니다. 그렇다면 맥은 평화시에는 발전장치로도 이용 할 수 있겠군요. 무한히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다면 중간 시설 짓는 비 용을 빼고는 인건비를 제외한 거의 공짜라 다름없는 가격으로 영구히 전 기를 공급할 수 있겠군요." 무한히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굉장히 놀라운 것이다. 예안은 비록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학자들이 전해듣는다면 게거품을 물고 쓰러질 발언인 것이다. 만약 예안의 말대로 실현된다면 한국의 경제는 영원히 번창할 수 있게 된다. 한국이 전세계에 전기를 공급하고 어마어마한 경제적 이득과 외교 적 이득을 얻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게 남았습니다. 이제부터가 제일 중요합니다.」 유니콘이 말하는 내용을 읽은 예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전 그런 대단한 맥을 거의 영원히나 마찬가지인 조건으로 빌려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일 년에 일 억은 너무 싸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예안씨가 먼저 일 억을 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그래서 예안씨 가 돈 욕심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만." 중현이 난처한 듯 볼을 긁적이자 예안은 자신도 속으로 당혹스러운 걸 참아가며 유니콘이 요구하는 대로 말했다. "그때는 그냥 그렇게 말해본 거예요. 어차피 맥의 본래 가치에 대해 나 중에 자세히 설명하고, 그때 제대로 된 가격을 받을 생각이었어요. 프리 미엄을 높이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렇군요." 중현은 오히려 안심했다. 사실 자신도 그렇게 대단한 맥의 대여료로 예 안이 일 년에 일 억이라는 푼돈을 요구해서 좀 찜찜해하고 있던 참이었 다. 하지만 그게 프리미엄을 높이기 위한 행동이었다니, 그렇다면 오히 려 떳떳하게 예안과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좋습니다. 말해 보시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대통령 각하와 장관 님으로 부터 그 부분에 관한 권리는 제가 위임받았습니다. 물론 이건 한국 정부 와 예안씨와의 비공식적인 거래이니 알려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혹시라 도 예안씨를 노리는 자들에게 비밀문서가 노출될 것에도 철저히 대비하 고 있습니다." 「당신의 권한을 훨씬 넘어서는 일이니 아마 대통령과 국회의 승인을 받 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시오.」 "당신의 권한을 훨씬 넘어서기 때문에 아마 대통령 각하와 국회의 승인 을 받아야 할 거예요." 중현은 자신만만했다. "말씀해 보시지요. 제 권한을 넘어서는지 아닌지는 제가 판단합니다." "에 그게…" 그 다음에 유니콘이 한 말을 보고 예안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뭐, 뭐라 고? "에… 그, 그게…" '이, 이런 걸 요구하란 말이야? 이런 걸?' 「그렇게 말씀하십시오. 어서요.」 유니콘이 재촉하고 있었지만 예안은 놀람으로 범벅된 눈을 감출 수 없었 다. 유니콘, 이 녀석 진심인가? 진짜 이런 엄청난 걸 요구하란 말인가? 말도 안 돼! "무엇이길래 그렇게 망설이시는 겁니까?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자신만만한 중현의 눈동자에 머무른 예안의 시선에는 당황함이 가득했 다. 이런 걸 요구한다면 아마 날 미친 사람 취급할지도 몰라. 그래도 된 단 말인가? "저… 그러니까… 제가 요구하는 건 두 가지예요. 하나는 저의 완벽한 보호와 은폐구요…" 정말 이걸 요구한다면, 그렇게 한다면 이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예안은 긴장으로 타들어가는 목구멍에서 번져 나오는 뜨거운 고통을 식 히기 위해 마른침을 삼켰다. 이 말을 하면 이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 까? 아마 놀라서 정신을 잃을 지도 몰라. 그래 그럴지도 몰라. "…한국의 유전에서 나오는 모든 이익을 영구히 저에게 달라는 거예요." 오 년 전 대한민국의 예산은 약 500조 원. 그러나 오 년 전 솟은 유전으 로 인해 대한민국의 일 년 예산은 열 배로 늘었다. 일 년에 4500조 원(45조 달러)을 벌어들이는 유전. 한국의 황금알을 낳 는 거위. 그 유전에 관한 경제적 이득을 모두 달라는 예안의 요구에 중 현은 그대로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상상을 넘어서는 엄청난 요구였다. 설마 이 요구를 하기 위해 지금까지 그렇게 밀고 당겨왔단 말인가? 중현의 집을 나온 뒤 집에 돌아온 예안은 왜 이렇게 늦었냐며 걱정하는 정호에게 대충 둘러댄 후 곧바로 자신의 방에 처박혔다.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치를 떨던 예안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유니콘에게 외쳤다. "유니콘! 너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요 구를 할 수 있어!" 「전혀 황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의 가치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대 가를 요구했을 뿐입니다.」 "그게 황당하지 않으면 도대체 뭐가 황당한 건데? 너 한국 유전이 일 년 에 얼마를 벌어들이는지 알기나 해! 나도 잘은 모르지만 엄청나게 벌어 들인단 말이야!" 「일 년에 약 4500조 원 가량 됩니다. 달러로 45조 달러 가량 되지요.」 천문학적이라는 말조차 우스울 엄청난 액수에 예안은 게거품을 물고 쓰 러질 뻔했다. "그, 그런 어마어마한 돈을 달라고 했으니 날 제정신이 박힌 애로 보겠 어! 분명히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환자로 봤을 거야!"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 정부는 유젤 님을 새로이 보게 될 겁니다. 유젤 님. 부디 저의 가치를 올바로 인식하셔야만 합니다. 사실 제 몸 속에 있는 ST기관 하나만 해도 이 지구상의 모든 돈을 줘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가치가 있는 겁니다.」 "말도 안 돼! 아무리 무한동력이라고 해도…" 갑자기 예안은 말문이 턱 막혔다. 무한이라는 게 얼마나 터무없는 가치 를 지녔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동력을 팔아서 돈을 번다고 치면, 무한 동력은 무한의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단 소리가 아닌가? 유니콘이 이때다 하고 설명했다. 「무한동력입니다. 핵분열 반응이나 핵융합 반응처럼 적은 양의 물질에 서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생산해 내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무한의 에 너지를 영구히 생산해 낼 수 있는 장치입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돈을 준다 해도 턱없이 모자랍니다. 무한이라는 건 그 정도로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그, 그렇지만…" 「태양도 무한은 아닙니다. 앞으로 몇십 억 년만 지나면 태양은 모든 에 너지를 잃고 죽은 별이 되어 버릴 겁니다. 하지만 ST기관은 다릅니다. 엘레스토늄이 버텨낼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은, 영원히 해체되지 않는 금속으로 ST기관을 만든다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짐작하시겠습니까?」 "영원히 부서지지 않는 금속?" 「그렇습니다.」 유니콘이 제시한 가정에 따라 생각을 더듬던 예안은 상상을 초월하는 엄 청난 결과가 머리 속을 스치는 걸 느끼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태양을 초월하는, 아니 이 우주에 있는 그 어떤 에너지원을 초월하는 무한의 에너지가 단 한 순간에 방출되겠지… 우주 역사상 가장 강한 폭 탄이 되겠네…" 「그렇습니다. 엘레스토늄이 비록 태양계에서 가장 강한 인공 금속이기 는 하나 그 강도는 엄밀히 한계선이 있습니다. ST기관은 무한의 에너지 를 생산해 내지만, 그 에너지를 한순간에 방출할 순 없습니다. ST기관을 이루고 있는 엘레스토늄이 버틸 수 있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 만 몇 년이든 몇 십 년이든 몇 백 년이든 꾸준히 에너지를 방출한다면 태양이 지닌 모든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방출해내는 건 일도 아 닙니다. 그야말로 무한으로 에너지를 생산해 내니까요.」 "…대단하구나. 정말 대단하구나 너는." 비로소 예안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감탄함이 드러났다. 마침내 예안 은 무한동력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완전히 깨달은 것이다. 맥의 ST기관은 무한의 에너지를 생산해 내지만 엘레스토늄의 강도에 한 계가 있기에 한순간에 무한의 에너지를 방출해 내지 않는다. 일정량의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방출하는 방식인 것이다. 때문에 태양이 낼 수 있 는 에너지량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긴 세월 동안 계속해서 에너지 방출을 해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맥은 그런 에너지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태양에 비 하면 그 크기가 택도 없이 조그만 맥이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가 장 근본 입자, 로데늄을 발견한 신인류의 능력의 결정체다. 예안은 새삼 느낀 맥의 어마어마함에 그만 소름이 끼쳤다. "…네가 그렇게 대단한 녀석이라면, 널 만든 레이온 형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천재라는 거야?" 「절 만든 건 레이온 박사가 아닙니다. 그는 다만 저를 관리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뭐?" 지금까지 레이온이 맥을 만든 걸로 알고 있었던 예안은 상당히 놀랐다. 「절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이 지구에는 없습니다.」 "널 만든 사람, 죽었어?" 「아닙니다.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지구에는 없습니다.」 혹시 우주탐사선 같은 걸 타고 머나먼 우주로 떠나기라도 한 걸까? 이 정도로 대단한 기계를 만든 천재라면 그럴 지도 몰라. 「하지만 절 만들 능력을 갖춘 사람은 있습니다.」 "그게 누군데?" 「바로 유젤 님입니다.」 예안은 황당한 나머지 눈을 크게 떴다. "나? 내가 널 만들 능력이 된다고?" 「예. 인간들의 지능을 원숭이로 보았을 때 유젤 님은 인간에 해당할 정 도로 뛰어난 두뇌를 갖고 있습니다. 다만 과학 지식을 전혀 쌓지 않아 아직은 저를 만드실 수 없는 것뿐, 만약 유젤 님께서 과학을 공부하신다 면 저보다 더 뛰어난 맥을 만들 수도 있을 겁니다.」 "그, 그래? 진짜로?" 유젤이 그렇게나 뛰어난 천재였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유젤이 아니라 유진우라는 남자였는데? 뇌 이식을 했는데? 「뇌 이식 수술을 해서 사람이 바뀌기는 했지만 두뇌의 본래 능력까지 사라진 건 아닙니다. 다만 기억과 인격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이 바뀌어 서 사람이 바뀌었을 뿐, 뛰어난 지능은 그대로입니다. 바로 얼마 전에도 제가 설명 드린 동일성극소립자론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으셨습니 까?」 "그래… 예안이가 그렇게나 대단한 천재란 말이지…" 예안은 머리 속을 감아 오는 뭔가 야릇한 쾌감이 섞인 좋은 기분을 느끼 며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 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그저 더 이상 친척들 눈치 보지 않고 영원히 유젤만을 사랑하며 아빠랑 같이 평범하게 사는 게 소원이었는데, 지구에서 제일 뛰어난 천재라고? '나… 과연 조용히 살 수 있을까…?' 어쩌면 시트날타는 맥의 무한동력뿐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을 원하는 건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겁이 덜컥 났다. "그런데 사실 나한테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한 건 아니잖아? 왜 그런 엄 청난 돈을 요구한 거야?" 「돈이란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닙니까?」 "물론 그렇긴 해. 하지만 허용 이상의 돈을 가지게 되면 사람들은 꼭 불 행해지더라. 난 세계제일의 부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은 거라구." 「시트날타에 잡히면 행복하다고 할 수 있나요?」 예안은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절대 불행할 걸? 난 시트날타에 무조건 안 잡힐 거야. 절대 안 잡힐 거 야." 「그러기 위해선 유젤 님은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을 키우셔야 합니다. 일 년 365일 저에 탑승해 있을 순 없잖습니까? 시트날타는 현재 유젤 님 이 미국에 있는 줄 알고 그쪽을 뒤지느라 혈안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조 만간 허탕을 쳤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그들의 정보력이라면 빠르면 일 년, 늦으면 오 년 안에 유젤 님의 소재를 알아낼 겁니다. 그 전에 유젤 님은 저의 힘말고도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셔야 합니다. 돈은 그 중 필수불가결한 요소지요.」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많은 돈 아냐? 일 년에 4500조 원이면 십 년이면 4경 5000조 원이라구. 개인이 갖기에는 너무 어마어마한 돈 아니야?" 「그 정도로도 안심할 순 없습니다. 어쨌든 유젤 님이 앤드류 왕자와 결 혼할 생각이 없다고 하셨으니 이렇게라도 해야지요. 만약 그랑 결혼하실 계획이었다면 굳이 유전을 요구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말입니다.」 예안은 조금 떨떠름했다. "너 그때부터 이 계획을 세우고 있었냐?" 「예. 저는 유젤 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겨야 하니까요.」 예안은 아무 말 없이 손톱만 물어뜯었다. 얼굴에 초조함이 가득했다. 「걱정되십니까?」 "뭐가?" 「유젤 님이 지금의 모습이 되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대충 알고 있 습니다. 그 전과 너무나도 달라져 버려 걱정되십니까?」 잠시 망설이던 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너무 부담스러워. 난 원래 웬만한 일에는 잘 놀라지 않는 주의 야. 설혹 네가 지구를 습격하기 위해 화성인들이 보낸 첩자 로봇이라고 해도 별로 놀라진 않을 거야. 근데 역시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지 그 런 엄청난 돈이 실제로 왔다갔다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겁까지 나." 「유젤 님은 특별한 분입니다. 결코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을 겁니다. 시 트날타는 결코 유젤 님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의 혁명이 무 엇인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알려진 다면 비단 시트날타 뿐만이 아니라 별의별 인간들이 다 접근해올 겁니 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 유젤 님을 보호하기 위해선 힘을 쌓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이 많으면 권력과 무력은 자동으로 딸려 옵니다.」 "무력은 너 하나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항상 저에 타고 있을 순 없잖습니까. 저에서 내리고 있을 때 유젤 님 을 보호할 무력이 필요한 겁니다.」 "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예안은 땅이 꺼져라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트날타에서 탈출했던 그 날에도 이렇게 걱정하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에게 이런 대단한 능력과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달은 지금, 예안은 앞으로의 나날이 걱정되기 시작 했다. 「지금까지 많은 데이터를 모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유젤 님이 편 안하고 또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지 만반의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유젤 님이 스스로 생각해서 잘 모르실 때에는 저에게 가차없이 물어보십 시오.」 "그래." 「단단히 각오하셔야 합니다. 유젤 님이 이제부터 평범하게 살아가기는 매우 어려울 겁니다. 최대한으로 정체를 숨기고 또 조용히 살아가기 위 해 노력해야겠지만 혹시라도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어 세상의 이목을 받 게 되었을 때, 닥쳐올 수 있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지금부터 꾸준히 힘을 쌓아야 합니다. 유전에 대한 권리를 양도받는 건 그 중 겨우 첫 걸 음에 불과합니다.」 예안은 그제야 조금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명심할게." 다음 날. 중현으로부터 예안이 한 요구를 전해들은 국정원장 역시 새파 랗게 질렸다. 오랜 연륜 덕분에 가까스로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을 뿐 그 의 놀라움은 중현 못지 않았다. "엄청난 요구야. 믿어지지가 않는군." "저 역시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맥이라는 게 정말 무한동력이 라는 개념으로 만들어져 있는 거라면 결코 값비싼 대가는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유전은 언젠가 고갈되어 버리고 말지만 맥의 무한동력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논리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자네는 정말 그 예안이라는 아가씨의 바 램이 들어질 수 있을 거라 보나?" 중현은 난처해하며 대답했다. "그럴 수 없을 거라 봅니다. 기름을 팔아 벌어들인 모든 돈을 영구히 예 안씨에게 지급해야 한다면 필연적으로 국민들에게도 알려야 합니다. 하 지만 그 과정에서 예안씨에 대해서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맥에 대한 건 결국은 드러나게 될 테니 제쳐두고라도 말입니다." "자네 말이 맞아.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나?" "가공의 인물을 내세우는 게 좋겠습니다." "흠? 계속 말해보게." "대충 이런 시나리오입니다. 한국 정부는 맥을 미국의 모 천재과학자로 부터 비밀리에 사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유전을 팔아 얻는 돈을 영구히 지급합니다. 그런데 그 과학자는 이미 죽었기에 그 유족에게 그 돈을 지급하는 걸로 하되, 예안씨 대신 가공의 인물을 유족으로 내세우 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돈을 지급하는 과정에서 예안씨가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좋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면 왜 맥을 또 살 수 없느냐는 식의 질문은 받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맥의 무한동력에 대해서는 자신들도 모 른다고 하면 그만인 것이다. 맥을 만든 과학자가 죽었으니까. "흐음." "이 방법말고 예안씨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또 예안씨의 정체가 드러나 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정원장도 예안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게 숨긴다는 것에는 적극적으로 찬성이었다. 무한동력같이 엄청난 개념의 에너지장치를 동력원으로 사용 하는 초현대적 전투병기를 제조한 천재 과학자를 숨기고 독점하고 싶어 하는 건 당연했다. "각하께 말씀드려야겠군. 아마도 어렵겠지만, 그럭저럭 노력은 해봐야 지. 그런데 만약 유전으로 얻는 이익이 사라지게 되면 우리나라 경제는 어떻게 되는 거지?" "글쎄요. 그건 경제 전문가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새 집으로 독립한지 두 번째 되는 일요일이 찾아왔다. 몸을 일으킨 예안 은 기지개를 켰다. "으윽, 찌뿌드하다~" 침대 옆을 더듬어 보니 어젯밤에 같이 잔 정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엥? 아빠는 벌써 일어났나?" 머리를 긁적이며 밖으로 나온 예안은 거실에 놓인 컴퓨터 앞에 앉아 있 는 정호를 발견했다. 뭘 하는가 싶어 등뒤로 가 보니 인터넷 장기가 한 창이었다. "아빠 일어나자마자 장기 해? 밥은 먹었어?" "아직 안 먹었어." "그래? 그럼 내가 해줄까?" 순간 마우스를 움켜쥔 정호의 손이 움직이다 말고 우뚝 멈췄다. 정호는 아주 곤란한 말을 하려는 사람처럼 헛기침을 했다. "저, 예안아. 오늘 아침은 그냥 시켜먹으면 안 될까? 너도 꽤나 피곤할 테니…" "내 음식 솜씨가 그렇게 형편없었나 봐?" 예안은 별로 기분 상하지는 않았다. 그저 머리를 긁적거렸을 뿐. "아, 아니 형편없었다는 게 아니고 오늘은 모처럼 일요일이니까 시켜 먹 고 싶어서 그래. 네가 한 음식 맛있어. 절대 맛있어." 그러면서 왜 그렇게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건데요? 예안은 히죽 웃 었다. "걱정 마, 걱정 마. 나 그런 걸로 상처 안 받아. 내가 여자애도 아니고 또 요리를 해본 적도 없는데 요리 솜씨 형편없는 게 당연하지. 하기야 이십 년 가까이 숙모 손맛에 길들여져 있었으니까 아빠가 내가 한 음식 맛보고 기겁하는 거야 당연하지 뭐. 그래도 잘만 먹던데 뭘." "그, 그거야…" 정호는 지금까지 예안이 해줬던 김치찌개, 부대찌개, 된장국 등 간과 맛 의 조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그 요리들을 억지로 다 먹어야 했던 나날들을 떠올리며 억울해했다. 딸이 상처받을까 봐 억지로 웃으면서 맛 있다고 칭찬했는데, 이렇게 간단할 거면 애초에 그냥 말할 걸 그랬나? "그런데 넌 일요일인데 친구 만나러 안 가니?" "별로. 난 원래 돌아다니는 거 굉장히 싫어하잖아. 그냥 집에서 뒹굴뒹 굴거릴래. 생각할 것도 엄청 많고." "흐음…"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던 정호는 눈을 크게 떴다. "으앗! 시간 초과로 져버렸잖아! 이런, 제길! 다 이긴 게임인데!" "한 판 더 하자고 해 그럼." 예안은 정호의 옆에 놓인 또 한 대의 컴퓨터를 켜면서 그렇게 말했다. "이 녀석 나한테 안 된다는 걸 알고 그냥 나가 버렸어! 으윽, 이런 억울 할 데가!" "그러고 보면 아빠도 꽤나 승부욕이 있단 말이야." 하루가 다르게 활기를 찾아가는 정호의 어깨는 예안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을 준다. 이런 걸 보면 혹시 예안은 전에는 내색을 하지 않 았을 뿐 꽤나 효심이 있었던 게 아닐까? 지이이잉. 지이이잉. 핸드폰이 진동하자 예안은 별생각 없이 받아들어 귀에 댔다. "네. 말씀하세요." 「누나. 나야.」 귀에 익은 앤드류의 목소리에 예안은 깜짝 놀랐다. 반사적으로 정호를 살펴보니 새 대전자와 장기 두는 데 몰두해 있었다. 다행이라 생각하면 서 예안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구석으로 갔다. 그리고 조그맣게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또 존대하네? 반말하라니까.」 세계 제일의 부자는 변태적인 취미를 갖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궁시렁거 리며 예안은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못마땅해하는 톤으로. "그래, 무슨 일로 전화했냐? 이제 만족해?" 「응 좋아. 다름이 아니고 오늘 일요일인데 나랑 같이 놀지 않을래? 내 가 좋은 데로 데려가 줄게.」 "난 원래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체질이 아니라서 일요일에는 그냥 방콕으 로 여행가." 「방콕?」 "방에 콕 박혀 있는단 소리다." 전화기 너머로 앤드류가 즐거운 웃음을 터뜨리는 게 들렸다. 「그렇게 집에만 있지 말고 나랑 같이 놀자니까. 모처럼 일요일인데 그 냥 보낼 거야?」 "아 글쎄 됐다니까. 난 집에서 그냥 하루종일 게임이나 할 거야." 「그럼 내가 누나 집으로 가도 돼?」 예안은 당황했다. "뭐? 너 우리 집 모르잖아?" 「모르긴 왜 몰라. 벌써 사람 시켜서 다 알아 뒀지. 내 능력을 너무 무 시하면 곤란해 누나. 내가 지금 누나 집 들어가도 돼?」 "오, 오지 마! 오면 너 죽을 줄 알아!" 예안은 앤드류와 아버지가 마주쳤을 경우를 상상하고는 몸서리를 쳤다. 십중팔구 '너 저 사람 잘 잡아라'라고 정호가 눈을 빛내며 압박을 가할 게 뻔하다. 한국의 어느 부모가 앤드류 같은 사윗감을 싫어하겠는가. 「잠깐 베란다로 와서 밑을 내려다볼래?」 "뭐?"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든 예안은 재빨리 베란다로 내려갔다. 밑을 내려 다본 예안은 스포츠카 GX FIRE에 몸을 기댄 채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자신 에게 손을 흔들며 웃는 앤드류를 발견하고 기겁했다. "너, 너…" 「한 시간의 여유를 줄게. 그 안에 준비 다 갖추고 나와. 여자는 외출 준비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특별히 내가 길게 기다리는 거야. 그 안에 안 나오면 나 누나 집에 쳐들어간다.」 "너, 너…"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앤드류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허탈한 표정으로 밑을 내려다보니 앤드류가 씩 웃음을 던져왔다. "으윽… 제길… 이터널 피닉스 해야 되는데…" 하지만 이미 받아먹은 돈이 있는 예안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외출하기 위 해 욕실에 들어갔다. 세수하고 머리를 감고 나오자 장기에 한창이던 정 호가 물었다. "어디 나가기라도 하니?" 예안은 죽을상이 된 채 대답했다. "방금 친구가 연락 왔어. 같이 놀쟤. 그래서 나가려구." "재미있게 놀아라." 정호는 다시 인터넷 장기에 푹 빠져들었다. 어떻게 피해갈 방법이 없을 까 고민하던 예안은 결국 얼마 전부터 품어왔던 생각을 다시 한 번 굳혔 다. 잔뜩 기대하고 있었던 앤드류는 헐렁한 캐쥬얼 차림에 밀짚모자를 쓴 예 안이 아파트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굉장히 실망했다. "그게 뭐야 누나? 좀 예쁘게 좀 입고 나오지." "…네가 그런 말 할 줄 알고 일부러 이렇게 하고 나왔다." 나이가 6살이나 많은 남자가 누나라고 부르는 건 역시 닭살이 돋는 일이 다. 자연히 예안의 태도가 퉁명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쳇. 저번에 롯데월드 갈 때처럼 좀 예쁘게 하고 나오면 어디가 덧나 나?" 예안은 깜짝 놀랐다. "내가 롯데월드 간 거 네가 어떻게 아냐?" "훗훗. 다 아는 수가 있지. 누나의 그 근사한 모습을 여기 사진까지 찍 어뒀지롱." 앤드류는 씩 웃으면서 사진을 한 장 꺼내어 흔들었다. "네가 스토커냐? 왜 그런 짓을 하냐!" 예안이 버럭 화를 냈지만 앤드류는 이런 반응쯤은 예상했던 터라 그저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장래 내 아내가 될 사람인데 혹시라도 나쁜 짓 당하지 않을까 걱정해서 사람 시켜 멀찌감찌 지켜보게 한 게 어째서 죄야?" "아내가 될 사람? 너 지금 장난 하냐?" 예안의 녹색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갔다. 이런 싸늘한 반응을 미처 예상 못했던 앤드류는 비로소 당황했다. 그는 귀엽게 펄펄 뛰는 반응만 예상 했던 것이다. "누, 누나?" "기가 막히네. 넌 분명히 애초에 누나 노릇을 해달라는 조건으로 나에게 돈을 줬어. 근데 뭐? 아내가 될 사람? 내가 미쳤냐? 내가 미쳤다고 너랑 결혼하냐?" 앤드류가 그리워해 왔던 여자는 이런 말을 할 때면 항상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미안해'라고 하거나 아니면 웃기지 말라고 귀엽게 펄펄 뛰는 게 전부였다. 단 한 번도 이렇게 싸늘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 말 취소해라. 안 그럼 나 다시는 너 안 본다." "누나…" 입술을 깨물며 어찌할 바를 몰라하던 앤드류는 결국 조그맣게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그제야 예안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앞으로 그런 소리 다신 하지 마라. 나한테 좋아한다 말할 수 있는 사람 은 이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이니까." 그 한 명이 누군데? 설마 그 진우라는 남자애?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앤 드류는 녹색으로 빛나는 싸늘한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아니구나." 앤드류는 씁쓸히 중얼거렸다. "정말 서운 누나가 아니야. 근데 정말 웃겨. 서운 누나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비슷한 거야." 만약 예안의 마음을 고스란히 읽어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앤드 류는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정말 어 렵다고 우울한 투덜거림을 속으로 삭혔다. 앤드류가 예안을 데리고 간 곳은 호텔 카지노였다. 21세기에 들어서 도 박이 합법화된 터라 외국인들의 모습 간간이 한국인들의 모습이 보였지 만, 아직 한국인들은 도박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건지 아니면 구슬 굴리는 것보다는 담요 바닥에 화투를 내려치는 맛이 더 좋은 건지 그렇 게 많지는 않았다. 예안은 카지노의 화려함에 기가 죽기보다는 떨떠름했다. "너 내가 몇 살인지나 아냐?" "17이라며?" "17살짜리를 도박장에 데리고 와도 되는 거야? 아무리 도박이 합법화가 됐고 또 청소년 규제가 20세기에 비해서 많이 풀렸다지만 이건 정말 아 니다 싶다." "후후, 걱정 마. 적어도 누나 돈 쓰게 해서 패가망신하게 할 일은 없으 니까. 그냥 누나는 보면서 즐기다 하고 싶으면 나한테 말해." 평소에 은근히 도박에 대해 '돈 많고 쓸개 빠진 녀석들이나 하는 것'이 라며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예안은 숨이 턱턱 막혀오는 이곳에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 사람도 그런 부류일까?' 그런 의구심을 품고 카지노에 참여 중인 앤드류의 옆모습을 흘끗 쳐다보 았지만 돈에 대한 광기 섞인 집착이나 탐욕 같은 어두운 감정은 전혀 보 이지 않았다. 그의 옆얼굴은 마치 이터널 피닉스를 즐길 때의 자신과 흡 사해 보였다. 그에게는 이런 도박은 하나의 게임에 불과한 걸까? '역시 돈이 많으면 사고방식도 다르구나…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도박으 로 한몫 잡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한데…' 그러고 보니 진짜 부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도박을 하는 게 아니라 돈을 쓰면서 즐거움을 얻기 위해 도박을 한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아 마도 앤드류 역시 그런 부류겠지? 돈이라면 썩어날 정도로 있을 테니까. 왠지 자신이 비참해진 예안은 고개를 푹 숙였다. "더운데 그 밀짚모자는 언제까지 쓰고 있을 거야? 이제 그만 벗지 않을 래?" "아… 그냥 쓰고 있을래." 어디를 둘러봐도 서양인의 금발머리와 동양인의 검은머리 외에는 보이지 않는데 모자를 벗었다가는 눈에 확 띄는 붉은 머리 때문에 시선을 한 몸 에 받게 될 테니까. 예안은 밀짚모자의 챙을 엉겁결에 어루만지며 고개 를 내저었다. 안 벗겠다는 뜻이다. "누나도 한 게임 해보지 않을래? 이거 굉장히 재밌어. 돈 걱정은 하지말 고." "좋은 곳에 데려와 주겠다고는 도박장에 데려온 주제에 참 당당하구나." 앤드류는 어깨를 으쓱했다. "도박은 그냥 하나의 게임에 불과해. 왜 도박이 나쁘다고만 생각하는 거 야? 위험하고 딸 확률이 낮고 돈을 크게 잃으니까? 오히려 주식투자가 더 위험하고 확률도 더 낮고 더 어렵고 잃을 때에는 돈을 엄청나게 잃는 데? 그런 식으로 따지면 주식이 더 나쁜 거 아니야?" 예안은 할 말이 없었다. "그야… 그렇긴 하지만…" "능력이 되는 한도 내에서 즐기는 건 전혀 나쁜 게 아니야. 전재산을 잃 으면서까지 도박으로 돈을 따겠다는 집착을 못 버린 일부 쓰레기 도박꾼 들이 나쁜 거지. 순수하게 즐기는 마음에서 구슬이나 주사위를 굴리고 카드를 돌리는 사람들까지 나쁘다고 해선 안 되는 거야." "하지만 난 이런 걸 즐길 능력이 안 돼. 그러니까 내가 도박하는 건 나 쁜 거야." "돈은 내가 대 줄게." "그건 내 능력이 아니잖아." "누나를 좋아하는 사람의 지갑을 뺏어서 쓰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야. 사 랑 받는 사람만이 가진 특권이지." 예안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앤드류가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집착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왜 그렇게 나한테 집착하냐? 나는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널 전혀 좋아하지 않아. 혹시라도 하룻밤 갖고 놀려는 생각 따위로 접근한 거라 면 애초에 포기해." 비로소 앤드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얼굴을 숨기기 위해 쓴 선 글라스 너머로 차가운 냉기가 빛났다. "누나는 내가 그런 불순한 의도를 품고 접근했다고 생각해?" 서릿발같은 차가움이 섞인 말투에 예안은 조금 당황했다. "에… 그게… 그건 아니지만…"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버벅거리던 예안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미안하다. 됐냐?" "미안하다면 됐어." 예안의 사과에 앤드류의 눈빛이 다시 누그러졌다. "나는 누나가 정말 좋아. 예전에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랑 너무 닮아서 좋아하는 것만은 결코 아니야. 물론 누나는 마치 그 사람의 모든 걸 물 려받은 사람처럼… 너무 닮았어. 그렇지만 내가 누나를 좋아하는 건 단 순히 너무 닮아서가 아니야. 난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 지 않아. 바보 같은 생각일지 모르지만 난 누나가 정말 그 사람이라고 생각… 하고 싶어. 누나를 좋아하고 싶어." 직설적인 프로포즈에 얼굴을 붉히기라도 하련만 예안은 전혀 그런 게 없 었다. 오히려 앤드류에게 질투심을 품는다면 모를까. '예안이는 내 거야. 네가 좋아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아.' 예안은 유젤을 독점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마음을 활활 불태우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까도 말하지 않았냐? 나 좋아하지 말라고. 제발 부탁인데 나 좋아하 지 마라. 네가 날 좋아하면 난 절 미워할 수밖에 없다. 그걸 알아 둬." "누나." "내 말 들어. 내가 지금 이렇게 순순히 네 부탁대로 만나주는 건 너한테 빚이 있기 때문이야. 지금은 필요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난 너한테 돈을 받아서 이미 써버렸고, 그 대가로 네 누나 노릇을 해주기로 해버렸으니 까." 앤드류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은 필요 없어졌다니? 혹시 어디서 돈이라도 생겼어?" 예안은 조금 뜨끔했다. "아, 아니야. 넌 몰라도 돼!" "흐음. 혹시 어느 재벌집 아들이 누나한테 구애하느라고 돈 엄청 싸서 갖다 바치기라도 한 건가 봐?" 예안은 울컥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리고 만약 그런 식으로 남자를 선택할 거라면 차 라리 널 선택하고 말겠다!" "호오, 정말? 이거 기쁜 걸?" 앤드류가 밝은 미소를 짓자 예안은 그제야 자신이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 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렇다면 누나가 만약 결혼할 생각만 품는다면 그건 자동적으로 내가 되겠네? 흐음. 이거 누나가 생각을 돌릴 때까지 당분간 한국에 있어야겠 는 걸?" "젠장." 어쩌자고 그런 말실수를 했을까. 이미 때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결국 투 덜거리며 시선을 돌려버리는 게 지금 예안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하는 모습 따위를 보였다간 오히려 귀엽게 인식될 수도 있는 것이기에 그저 주먹을 꽉 쥐며 앞으로는 말조심해야겠다는 늦은 반 성을 하는 수밖에. 도박이 싫다고 질색하기는 했지만 한참 동안 구경하다 보면 절로 하고 싶어지는 게 바로 사람의 본능이다. 돈 걸고 하는 도박은 그다지 좋아하 지 않지만 그래도 남자였을 때 수련회라든지 그런 곳에서 세현과 함께 포커나 훌라를 즐겼던 예안은 자신도 하고 싶다는 욕구를 뿌리치지 못했 고, 결국 앤드류에게 서먹서먹한 부탁을 건네고는 칩을 받아 자신도 참 가하게 되었다. "받고 세 배 더." 예안이 건조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자 딜러의 이마에서 구슬땀이 살짝 흘 러내렸다. 감정을 철저히 숨기도록 훈련되었지만 이미 구 연패를 달성하 고 있는 딜러는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더는 힘들었다. '내 패는 스트레이트 플래쉬야. 설혹 풀 하우스를 갖고 있다 해도 이번 은 내가 이겼을 걸.' 딜러는 자신만만해 하면서도 이미 구 연패를 당한 전적이 있기에 섣불리 긴장을 풀 순 없었다. 바로 전판에서도 스트레이트를 갖고 이겼다 싶어 서 자신만만하게 패를 내놓았다가 풀 하우스에 진창 깨지지 않았는가? '이번 판만 이기면 지금까지 잃은 걸 어느 정도는 만회할 수 있어. 나가 자! 이기자! 이대로 무너지면 난 맞아 죽는다구!' 딜러는 손님들 틈에 섞여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상관을 흘끔 쳐다보고는 바짝 말라오는 입안을 혀로 적셨다. 만약 이번 판까지 졌다가는 곧바로 딜러 교체다. 그런 망신스런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척 봐도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저런 어린 손님에게 관록이 있는 자신이 진다는 건 상상 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이미 구 연패를 당하고 있는 주제에) "스트레이트 플래쉬입니다." "와, 이겼다! 난 포커예요!" 예안이 펄쩍 뛰며 좋아하자 딜러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 았다. 십 연패라니! 전설의 노름꾼으로 고향에서 자자하다 돌아가신 고 조 할아버지께서 만약 이 사실을 아셨다가는 지하에서 땅을 치고 통곡을 할 것이다! "누나, 굉장히 좋아하네. 마치 어린아이 같아." 앤드류가 어깨를 토닥이자 예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큰 돈 걸고 따서 안 좋아하는 고등학생이 어딨냐?" "고작 천만 원도 안 되는 판 이긴 걸 갖고 좋아하면 어떡해?" "씁. 너는 돈이 많다 못해 썩어나니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거야." 앤드류와 예안의 대화를 듣고 있던 딜러는 여자 쪽이 고등학생이라는 소 리를 듣고 앞이 깜깜해졌다. 혹시나 엄청 동안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역 시 미성년자였던 것이다! '아무리 법이 개정됐다지만 너무한 거 아냐? 벌써부터 미성년자가 이런 곳엘 다 오고…' 딜러가 절망하고 있을 때 여태껏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끼어 들었다. "이런, 이런. 포커에 통달한 분이시라는 걸 모르고 저희가 애송이 딜러 를 내보내 흥을 깨지게 했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앤드류가 소리 죽여 웃었다. "딜러 교체로군? 누나도 꽤 하는데?" 누나라는 소리에 남자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전에 들은 대화로 추정해볼 때 분명히 여자 쪽은 고등학생인데, 어딜 봐도 20대 청년으로 보이는 외국인 젊은이가 누나라고 한다? 그렇다면 저쪽은 더 어리다는 소린가?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남자가 끼어 들자 좀 전까지 예안을 상대하고 있었던 딜러는 두말할 것 없이 물러났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어린 여자애로밖에 안 보이는 예 안이 십 연승 끝에 딜러를 교체하자 잔뜩 호기심을 품고 하나 둘씩 몰려 들었다. "한 게임 당 백만 원짜리 칩을 써보는 건 어떨까요? 십만 원짜리 칩은 너무 감질맛 나지 않습니까?" 예안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여태까지는 자기 돈이 아니라서 잃든 따든 상관없이 마음놓고 게임하고 있었지만 막상 백만 원짜리 칩을 쓴다고 하 니 덜컥 겁이 난 것이다. 지금까지는 십만 원짜리 칩을 쓰고 있었다. "흐응. 일 억짜리 칩이 없다는 게 아쉽네. 기왕이면 천만 원짜리 칩을 써보는 게 어때?" 앤드류가 끼어 들자 남자는 놀라움을 감추기 위해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슨 엄청난 재벌집 외아들이라도 되나? 아무리 애인이라지만 돈을 너 무 팍팍 주는 거 아니야?' "좋습니다. 천만 원짜리로 해봅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 정도 미색이라면 비록 무리가 되더라도 그런 돈을 팍팍 뿌려가며 호감을 하고 싶어할 만도 하다고 남자는 납득했다. 만약 지금 선글라스를 낀 채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외국인 청년이 세계 제일 의 부자인 앤드류라는 걸 알 수 있다면 왜 그가 천만 원짜리 칩을 아무 렇지도 않게 여기는지 대번에 깨달을 수 있었을 테지만. 이 카지노에서 가장 큰 칩인 천만 원짜리를 기본으로 시작한다는 소리에 손님들은 게임 하던 걸 멈추고 일제히 몰려들었다. 졸지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예안은 엄청 당황했지만 이왕 온 바에 한 번 즐겨보자는 생각 으로 호기 있게 나섰다. 어차피 잃어도 내 돈 잃는 게 아니지 않은가? '상류층 물 한 번 먹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허영심 같은 건 눈꼽만 큼도 없다구.' 남자는 능숙하게 카드를 섞은 후 나눠주었다. 카드를 한 장씩 열어감에 따라 예안과 남자가 거는 금액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받고 네 배 더." 만약 이번에 들어오는 히든카드가 퀸이라면 퀸 포커가 된다. 남자는 회 심에 찬 미소를 지었다. 고심하던 예안은 앤드류를 힐끔 쳐다봤다. 앤드류는 걱정하지 말고 마음 대로 하라는 눈길을 보냈다. "에… 그럼 받고 열 배 더요." 예안이 볼을 긁적이며 열 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한꺼번에 올려놓자 남자 는 기겁할 뻔했다. 오랜 관록으로 다져온 포커 페이스는 가까스로 무너 지지 않았지만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왜, 왜 저러지? 혹시 스트레이트나 풀하우스가 들어오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나한테는 못 이길 텐데?' 내가 포커라는 걸 상상조차 못하는 걸까? 하지만 조금 전의 딜러를 상대 로 간단히 십 연승을 거둔 사람이라 남자는 함부로 방심할 수 없었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고 예안의 녹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품고 있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끄집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아차!" 예안이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몇 장 떨어뜨렸다. 무심코 그 네 장의 카드를 힐끔 본 남자는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했다. '로, 로열 스트레이트 플래쉬?' 예안이 실수로 떨어뜨린 카드는 스페이스 A, K, Q, J였다. 만약 나머지 다른 카드 중에 스페이스 10이 있다면 도박사 일생 중에 단 한 번도 만 져보기 힘들다는 로열 스트레이트 플래쉬가 된다. 남자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패를 살폈다.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패 중에 스페이스 10이 없는 걸 확인한 순간 남자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조금 전 까지 자신의 부하 딜러를 욕하고 있었지만 단 한 게임을 한 것만으로도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이 여자애한텐 행운의 여신이 따라다니기라도 하는 건가?' 머리 속으로 끊임없이 생각을 굴리던 남자는 결국 한숨과 함께 카드를 덮었다. 이쯤에서라도 손해를 만회하는 게 좋았다. "다이." "어?" 예안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로열 스트레이트 플래쉬라는 거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스페이스 퀸만 들어오면 포커 패가 될 수 있었는데, 아쉽군요." "큭큭큭…" 갑자기 예안의 옆에 서 있던 앤드류가 자지러지듯 웃기 시작했다. 남자 는 당혹함을 감추지 못했다. "왜 웃으십니까?" "푸, 푸하하…" 예안의 패가 뻥카인 걸 알고 있었던 앤드류는 터질 듯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카지노를 나오면서 앤드류는 계속 유쾌했다. "누나도 한 배짱하는데? 금액이 이십 억이 넘었는데 설마 뻥카를 가지고 그렇게 막 나갈 줄은 몰랐어." "어차피 잃어도 내 돈 잃는 거 아니니까 그냥 한 번 밀어붙여 본 거야. 그나저나 그 사람도 참 안 됐네. 뻥카한테 지다니." "어차피 모르고 있으니까 됐어." "근데 왜 돈 안 챙겼냐?" "어차피 내가 딴 것도 아닌데 챙겨서 뭐해?" "그렇다고 내가 챙길 수도 없잖냐? 난 그냥 내 돈 아니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무대포 정신으로 밀고 나간 건데." 예안은 앤드류에게 칩을 주려고 했지만 앤드류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렇 다고 자신이 갖기도 찜찜했던 예안은 결국 '에잇, 헛된 욕심부리지 말 자!'라는 생각에 그냥 칩을 놓고 나와버렸다. "벌써 오후 2시네. 누나는 배도 안 고파?" "안 고파. 그리고 나 지금 몸이 안 좋아서 밥 같은 건 못 먹어." '흐응…" 앤드류의 눈길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묻어났다. 자신이 좋아했던 여자가 음식 같은 걸 입에 대는 꼴을 본 적이 없는 앤드류는 더욱 더 예안에 대 해 확신했다. 분명히 서운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과(모르는 척 하는 건지 아닌지조차 앤드류는 확신하지 못했다) 눈동자의 색이 녹색이라는 것만 빼고는 너무 나 똑같은데, 어떻게 전혀 관련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 가? '이제… 한 가지만 더 확인하면…' 앤드류는 지금까지 품어왔던 의심을 오늘 헤어지기 전에 기필코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누나. 다음에 미국으로 한 번 와. 라스베가스에서는 좀더 스릴 있는 포 커나 카지노를 즐길 수 있을 테니까. 거기가 더 화려하고 운치도 있으니 까 재미있을 거야." 예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됐다. 어차피 오늘은 내 돈이 아니니까 그냥 상류층 문화가 어떤 건지 한 번 맛본다는 생각에 즐긴 거야. 나 사실은 열등감도 굉장히 심하고 부자들에 대한 인식도 별로 좋지 못한 열등한 인생을 살아왔다구. 그리 고 다른 남자라면 원래 절대 안 만나지만 너였기 때문에 특별히 오늘 나 온 거야." "흐응? 역시 내가 일등 신랑감이라서?" 농담조로 건넨 앤드류의 말에 예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멈췄 다. 따뜻한 햇살 아래 서릿발처럼 빛나는 녹색 눈동자가 던져 오는 불안 감에 앤드류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무언가 들어선 안 될 말을 할 것 만 같았다. "네가 준 카드에서 나 9억 빼서 썼어. 그 중 5억은 아파트 사서 친척들 로부터 독립하는 데 썼고, 1억으로는 대충 가구 같은 거 완전히 새로 샀 는데 많이 남아서 나머지 3억하고 함께 통장에 넣었어. 내가 대학 졸업 하고 취직할 때까지의 생활비와 학비로 쓰려고."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사실 난 남자들이 나에게 흑심 품고 접근해오는 거 정말 싫어해. 싫어 하는 정도가 아니라 질투를 느낄 정도로 화가 나." 왜 질투를 느낀다는 거야? 앤드류는 예안의 말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 다. 매력 있는 이성이 접근해오는데 우월감을 느끼는 거라면 몰라도 어 째서 질투를 느낀다는 걸까? "그때는 정말 어쩔 도리가 없어서 너한테 도움을 청하고 말았는데, 이제 는 사정이 달라졌어." "무슨 소리야?" 앤드류의 목소리에는 비로소 분노의 기운이 묻어났다. 예안은 조금 미안 하고 살짝 겁이 났지만 그래도 꿋꿋이 차가운 표정을 유지했다. "나 이제 정기적으로 돈 생길 곳이 생겼어. 그리고 너한텐 택도 없지만 그래도 꽤 큰돈이 곧 생길 거야. 그거면 너한테 받은 돈 9억 충분히 갚 아줄 수 있으니까…" "있으니까?" 가뜩이나 차가운 예안의 표정이 한결 더 진한 한기를 뿜었다. "이제 더 이상 저한테 접근하지 말아주세요, 앤드류 회장님." 느닷없이 튀어나온 차가운 존대에 앤드류는 암담함을 느끼고 그만 눈을 감았다. 예안은 매서운 표정을 풀지 않은 채 계속 말했다. "지난밤에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그냥 눈 딱 감고 누나 노릇해주는 조 건으로 3000억 원 받아 챙겨 버리고 말지 아닐지. 하지만 생각해보니 저 에게 그럼 어마어마한 돈이 있어봤자 별로 필요도 없겠더라구요. 물론 돈이라는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저는 행복하고 싶지 부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거든요. 다행히 곧 저는 큰돈이 생겨요. 어디서 나는지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회장님께 빌린 돈을 갚아드리고, 또 제가 취직할 때 까지 생활비와 학비 충당할 수 있을 정도는 돼요. 그러니까…"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이제 그만 접근하라?" "네. 잘 아시네요." 앤드류는 감았던 눈을 뜨고 천천히 선글라스를 내렸다. 푸른색으로 빛나 는 그의 눈동자에서 서글픈 기운이 흩날렸다. "잔인해." "예?" "잔인하다구. 너무 잔인해. 서운 누나는 이 정도로 잔인하지 않았어. 달 라. 너무 달라. 서운 누나랑 성격이 너무 달라." 예안은 어쩐지 이 사람이 불쌍해 보인다는 동정심을 간신히 억누르며 차 가운 표정에 한결 더 힘을 실었다. "당연하죠. 저는 그 서운 누나라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다른 게 당연하 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닮은 거야? 서운 누나랑 그렇게 다르면서, 이렇게 차 가우면서 왜 이렇게 서운 누나랑 닮은 거야? 넌 혹시 서운 누나가 아니 라 제이인 거야? 제이야? 제이냐구?" "제, 제이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대며 그 사람이냐고 물으면 상당히 당혹 스럽다. 그리고 앤드류의 푸른 눈동자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넘 실거렸다. "이렇게나 다른데… 왜 이렇게나 닮은 거야? 말해 봐. 넌 정말 제이야? 제이냐구?" "제, 제이라니… 그런 이름은 듣도 보도 못했다구요…" 재원에게 했듯이 차갑게, 아주 차갑게 쏘아주려고 했지만 앤드류의 전신 에서 피어오르는 진한 슬픔의 기운에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함을 느낀 예안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 감히 유젤을 사랑하려고 하는 이 사람에게 느끼는 질투의 기운은 어느새 그의 눈동자에 자리잡은 슬픔의 기운에 잡 아먹히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돼. 이 사람을 동정해서는 안 돼. "서운 누나도 아니고 또 제이도 아니라면… 넌 정말 누구야? 왜 그렇게 닮아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거냐구?" 앤드류는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예안의 얼굴 가까이 손을 가져갔지 만 아무런 제지를 보이지 않았다. 허락의 의미는 아닌 듯 한데. 그렇다 면 왜 막지 않는 걸까? 햇빛을 가린 예안의 밀짚모자가 앤드류의 손에 들려 벗겨졌다. 그 바람 에 모자 속에 감춰져 있던 붉은 머리카락이 일순간에 파랗게 변하며 허 리까지 찰랑거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시선을 뗄 줄 몰랐지만, 앤드류는 멍하니 예안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런 말도 나 오지 않았다. "혹시나 했는데…" 그러고 보니 예안의 머리카락을 햇빛 아래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구 나. 사실 그 동안은 무서워서 감히 예안의 머리카락 색이 햇빛에 따라 변하는지 아닌지 확인해보지 못했다. 실내에서 항상 붉은 빛을 발하는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어느 정도 기대하고는 있었지만, 정말 햇빛에 노 출되었을 때 파랗게 변하리라고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건 험난한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세계 제일 가는 부를 쌓으면서 키워온 현실 주의에 젖은 그의 이성 때문이었다. "…맞잖아. 넌 서운 누나가 맞잖아… 근데 왜 자꾸 아니라고만 하는 거 야?" 앤드류는 저도 모르게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래. 겁내고 무서워할 필 요는 없었어. 이 여자가 유서운이 아니면 어떡하나 진작부터 겁을 낼 필 요는 없었어. 봐. 머리카락 색이 이렇게 예쁘게 변하잖아? "제발 더 이상 나에게 잔인해지지 마." 앤드류는 그만 와락 예안을 끌어안아 버렸다. 「앤드류 회장님이 한국에 오신 건 이번에 인수하기로 되어 있는 메클스 사의 파렴치한 행위에 대해 사과하고 미국에 대한 석유 공급을 중단시키 지 말아달라는 미국 정부의 요청을 대변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미국 정부는 한국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셰펠 함 4척 을 저가에 팔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두 동맹국 관계가 앞으로 도 계속 좋기를 빕니다.」 「셰펠 함이라면 방어를 목적으로 포세이돈이 건조한 최신형 전함 아닙 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셰펠 함이 이지스함-3를 몰아내고 차세대 방어용 전함으로 떠오를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론적으로도 이지스 함-3를 능가하고 있으며 올해 있을 림팩 훈련에서 실전과 같이 임해 그 성능을 드러내 보일 생각입니다.」 「자신만만하시군요. 이지스 시리즈는 무려 반 세기가 넘도록 이어져 내 려왔는데, 그걸 깨부순다니.」 「전통은 깨부수라고 있는 거잖습니까?」 「하하, 맞습니다.」 예안은 침대에 쭈그리고 앉은 채 TV 화면 속에서 능숙한 한국어로 기자 들과 회견을 갖는 앤드류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요즘 항간에 이런 소문이 돌고 있는데, 아시는지 모르겠군 요.」 「무슨 소문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앤드류 회장님이 한국에 연인을 두고 있다는 소문 말입니다. 못 들으 셨습니까? 일부에서는 한국 영화 배우나 탤런트 중 한 명일 거라고 하 고, 일부에서는 또 평범한 일반인이라고 하는 등 무수한 추측이 만발하 는 중인데, 사실인가요?」 회견장에 모인 사람들은 일제히 긴장한 채 앤드류가 어떤 대답을 할지 살폈다. TV를 통해서도 회견장 안 가득히 찬 긴장을 느낀 예안은 그만 고개를 푹 숙였다. 앤드류가 무슨 대답을 할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 다. 「네. 사실입니다.」 앤드류가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기자들은 굉장히 놀랐다. 「앤드류 회장님의 연인은 한국인이었습니까?」 「혹시 그 여성분의 성함을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 여성분은 몇 살입니까? 일반인일 거라는 소문이 가장 파다한데, 정 말 그게 사실입니까?」 회견장 안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명실공히 세계 제일의 부자인 앤 드류가 한국에 방문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뉴스거리인데, 그가 실제로 한 국에 연인을 두고 있다니? 이건 기자들에게 다시없는 먹이였다. 잘만 하 면 한국에서 엄청난 신데렐라가 탄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제가 좋아하는 여자 분의 이름은…」 앤드류가 말을 하다 말고 뜸을 들이자 기자들은 일제히 군침을 삼켰다. TV를 통해 지켜보고 있던 예안은 그 뒷부분이 듣기 싫어 그만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자리에서 함부로 말하기가 그렇군요. 사실 이틀 전에 그 문제를 가 지고 조금 싸웠습니다.」 「싸우다니요?」 「저는 당장이라도 우리 둘의 관계를 세상에 발표하고 싶어했지만 그 여 자 분은 굉장히 질색했습니다. 저는 조금 화가 나서 그만 제멋대로 오늘 기자회견에서 이름과 신분을 전부 다 밝혀버리겠다고 하고 헤어졌는데 사실 그대로 했다가는 전 내일부터는 얼굴을 영영 못 볼지도 모릅니 다.」 「하하. 연인께서 상당히 수줍음이 많으신가 보군요. 그렇다면 탤런트나 영화배우가 아니라 일반인이신가 보죠?」 「그렇습니다.」 일반인이라는 말에 기자들의 안색에 자리잡은 궁금증은 더욱 더 짙어갔 다. 아울러 기대도 함께 무르익어 갔다. 사실대로라면 엄청난 신데렐라 가 탄생되는 것이다. 게다가 앤드류가 세계 제일의 부자라는 걸 상기해 볼 때 이건 단순히 국내의 뉴스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눈길을 끌어 모으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지금 물어보고 알려드리겠습니다. 어쩌면 지금쯤은 생각이 바뀌었는지도 모르지요.」 「아, 그러고 보니 연인 분께서 지켜보고 계시겠군요. 부탁합니다.」 앤드류가 폰을 꺼내어 전화 번호를 꾹꾹 누르기 시작하자 기자들은 일제 히 침을 꿀꺽 삼켰다. 침대에 쭈그리고 앉아 모은 무릎에 고개를 푹 숙 이고 있던 예안은 갑자기 핸드폰이 진동하자 덜컹 가슴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제, 젠장…" 전화는 계속해서 끈질기게 진동했다. 생각 같아서는 전화기를 어딘가로 내던져 버리고만 싶었다. 아니면 차라리 전원을 꺼버릴까? "제길!" 쓰디쓴 괴로움을 토한 뒤 예안은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며 폰을 집어들었 다. "예. 받았습니다." TV 속의 기자들은 앤드류의 앞에 놓인 마이크를 통해 전화기에서 흘러나 온 예안의 목소리가 확청 되어 들리자 일제히 긴장했다. 「저 앤드류입니다. 지금 당신의 이름을 이 자리에서 밝혀도 되겠습니 까?」 생각 같아서는 그냥 험한 말을 내뱉은 뒤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다. 하 지만 예안은 어린애가 아니다. 저런 공식적인 기자 회견에서 앤드류에게 그런 짓을 하는 게 얼마나 수치스런 일인지 아주 잘 안다. 그리고 그런 짓을 했다가 혹시라도 보복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겁이 났 다. 아무리 앤드류가 자신이 좋다고 매달리지만 사랑이 증오로 변하면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고 하지 않던가? "밝히지… 마세요. 제발요…" 예안은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해 분함을 느끼며 입술을 잘 근잘근 씹었다. "이만 끊을게요." 예안은 더 듣고 싶지 않아 그대로 전화를 끊고 전원을 껐다. TV 속의 앤 드류는 재다이얼을 눌러본 뒤 통화가 되지 않자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지금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한동안은 얼굴조차 보지 못하겠는데요.」 「굉장히 목소리가 고운 여성이군요. 아마도 대단한 미인일 것 같습니 다. 부디 한국에서 연인분과 좋은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앤드류 회장 님.」 한 기자의 아부 섞인 말에 앤드류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대단한 미인이라… 누구라도 한 번 보면 사랑에 빠질 정도로 대단한 여자입니다.」 밤새도록 한잠도 자지 못한 채 다음날 아침 일어나 학교로 간 예안은 교 실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이 일제히 긴장한 시선을 보내오자 흠칫 놀랐 다. 언제나 그랬듯 배준혁이 아이들을 대표해 상기된 표정으로 물어왔다. "공주. 앤드류 회장이랑 연애한다는 거 다 거짓말이라며?" 예안은 굉장히 당황했지만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건 또 왜 묻냐?" "어제 기자 회견에서 앤드류 회장이 통화한 여자 목소리 들었는데, 공주 랑 너무 닮아서 말이야. 정말 아니야?" 예안은 깜짝 놀랐다. 자신은 그때 핸드폰으로 이야기하고 있었기에 TV에 서 자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걸 눈치채지 못했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몰려나와 있는 거냐?" 예안은 쓰고 온 밀짚모자를 천천히 벗으며 녹색 눈동자로 아이들을 훑어 보았다. 바짝 긴장한 아이들이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절실하게 느껴 졌다. 이 녀석들은 자신들의 친구가 엄청난 신데렐라가 되는 걸 보고 싶 은 것이다. 예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느새 침착함을 완전히 되찾았다. "난 TV를 안 봐서 몰랐는데, 그런 일이 있었냐?" "그 말은? 아니라는 거야?" "당연하지. 전에 말했잖아. 그 앤드류 회장이라는 사람이 아는 사람이랑 날 착각하고 있었다고. 자기 애인이랑 연락이 끊겨서 엄청 찾았다나 뭐 라나. 그런데 그 뒤로 다시 자기 애인을 찾은 모양이지 뭐." "그래?" 굉장히 기대하고 있었던 아이들은 일제히 실망했다. '그러고 보니 교문에서부터 계속 학생들이 흘끔거린 게 그것 때문이었 나?' 아이들이 실망한 표정으로 하나 둘씩 자기 위치를 찾아가자 교실은 소란 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점심 시간이 되자마자 예안의 핸드폰이 울렸다. 받아보니 현우였다. "무슨 일이냐?" 예안의 목소리는 조금 퉁명스러웠지만, 전파 너머 현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누나! 나도 어제 TV 봤어. 그거 혹시 누나 아니야? 전에 앤드류가 누 나한테 한 번 찾아 왔었잖아? 어제 저녁은 왜 폰을 꺼놓고 있었어?」 예안은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아니라고 전에도 말했잖아. 자기 애인이랑 날 착각한 것뿐이라니까." 「진짜 아니야? 하지만 목소리가 너무 비슷해서…」 "아니라면 아닌 거야. 신경 쓰지 말고 끊어. 그리고 넌 나한테 차인 녀 석이 왜 자꾸 전화하고 그러냐?" 예안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러나 곧 다시 폰이 울렸다. "너 내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나 준우야.」 현우인 줄 알고 신경질적으로 받던 예안은 당황했다. "주, 준우 형? 웬일이야?" 「다름이 아니라 어제 앤드류 회장 회견장에서 전화 받은 그 여자 목소 리가 너랑 너무 똑같아서. 그러고 보니 전에 앤드류 회장 한 번 우리학 교로 너 찾아오지 않았었니? 두 사람 도대체 어떤 관계야?」 "아무 관계도 아니야. 그때는 그 사람이 헤어졌던 자기 애인이랑 날 착 각했던 것뿐이고, 기자 회견은 나도 TV를 안 봐서 모르겠는데 아마 목소 리가 비슷했던 것뿐일 거야. 난 모르는 일이야. 형도 현우처럼 자꾸 날 귀찮게 할 거야?" 「정말 아니야?」 "아니라니까!" 예안이 신경질적으로 외치자 준우는 그녀가 기분이 좋지 않음을 느끼고 전화를 끊었다. 폰을 집어넣은 예안은 신경이 날카로워진 채로 씩씩거렸 다. "괜히 어제 나한테 전화는 해 가지고 사람을 귀찮게 만들어? 만약 내 이 름 밝혀버리거나 한 번만 더 나 찾아오면 그때는 진짜 가만 안 둘 줄 알 아. 어디서 감히 예안이를 탐내는 거야?" 앤드류와 같이 있을 때면 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짙은 상실의 슬픔에 압도당하고 했지만, 이렇게 그가 없는 자리에서는 유젤을 탐내고 접근해 오는 그에 대한 질투가 끓어오르곤 했다. "예안일 좋아하지 말라구… 짜증나니까…" 좋아한다고 접근해오는 남자들은 예안에게 있어 유젤을 빼앗으려고 하는 연적에 불과할 뿐이다. 일체의 동정심도 그 무엇도 가질 필요가 없는 질 투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유독 앤드류와 세현만은 같이 있을 때에 한해서지만 그런 분노와 질투의 감정이 스르르 녹아 버리곤 했다. 그건 예안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아예 질투조차 생겨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인상적 인 열정을 지닌 남자가 유젤을 사랑한다. 예안은 한때 이 세상에서 자기 가 가장 유젤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보다 더 유젤을 사랑하 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쳇…" 의미를 알 수 없는 투덜거림이 흘러나왔다.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지는 알고 있지만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방법은 몰랐다. 그걸 알면 정말 좋을 텐데. 학교가 끝난 후 언제나 그랬듯 밀짚모자를 쓴 채 터덜터덜 교문을 향해 걷던 예안은 주변의 학생들이 평소보다 더 심하게 자신을 흘끔대는 걸 느꼈다. 아마도 어제 그 기자 회견 때문일 것이다. 자신은 아니라고 부 정했지만 등교하기 전부터 이미 쫙 퍼진 소문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예안은 은근히 짜증이 났다. '젠장. 진짜 이제 다신 얼굴도 안 볼 거야. 폰 번호도 바꿔버려야지.'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예안은 짜증스런 손길로 전화를 받았다. "예. 누구세요?" 「접니다, 예안씨.」 전화를 건 사람은 중현이었다. 예안은 짜증스런 표정을 폈다. "아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전에 요구하신 맥의 대가에 대해 장관님과 깊이 상의해보았습니다. 오 늘 대답을 들려 드리려구요. 지금 만날 수 있을까요?」 "예. 지금 학교 끝났으니까 가능… 어라?" 폰을 귀에 댄 채 교문을 나서던 예안은 검은색 차를 세워놓은 채 자신에 게 손을 흔들고 있는 중현을 발견했다. 예안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 중현을 모른 체 하며 폰에 대고 말했다. "저를 모른 척 하시고 차에 타세요. 그리고 페밀리마트 앞에 가서 기다 리세요. 저도 곧 그리로 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직감적으로 뭔가를 느낀 중현은 예안이 시킨 대로 페밀리마트 앞에 가서 기다렸다. 잠시 후 예안이 뛰어와서 차에 올라타며 숨을 몰아쉬었다. "휴. 안 들켰다. 어서 가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별거 아니에요. 가뜩이나 요즘 저에 대한 헛소문이 많아서 애들 집중 받기 싫어서였을 뿐이니까요." "흐음. 앤드류 왕자의 연인이라는 소문 말인가요?" 예안은 펄쩍 뛸 듯 놀랐다. 가까스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어떻게 아셨어요?" "대한민국 국민 중의 30%는 아마도 어제 그 기자 회견을 봤을 겁니다. 세계 제일의 거부가 한국을 방문해서 기자 회견을 갖는데 흥미를 가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요? 물론 저도 봤구요. 목소리가 예안씨랑 정말 닮았더군요." "절대로 제가 아니에요. 안 그래도 친구들이 그렇게 물어와서 엄청 혼났 다구요." "흐응? 정말요?" 예전에 앤드류가 예안을 찾아 학교로 온 사실을 부하들의 보고를 통해 알고 있는 중현은 의미심장한 톤으로 물었다. 예안은 그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걸 얼핏 느꼈지만 펄펄 뛰었다가 자칫 오히려 더 깊은 의 심을 살까봐 두려워 조그맣게 한 마디 덧붙이는 걸로 끝냈다. "정말 아니에요. 전 TV를 그때 안 봐서 목소리가 얼마나 비슷한지는 모 르겠지만, 하여튼 아니에요." "흐음. 뭐 상관없습니다. 아니라면 오히려 더 좋은 거지요." 중현의 말은 뭔가 의미심장했지만 예안은 눈치채지 못했다. 어느덧 두 사람을 태운 차는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장관 님을 만나러 갑니다. 맥의 대가에 대해서 결정 난 사항을 말씀드 리기로 했잖습니까?" "아… 장관님을 만난다구요? 진짜요?" 비로소 예안은 흥분되기 시작했다. 일 년에 4500조 원의 수입이 들어온 다? 그건 정말 일개 고등학생에서는 차라리 일생 동안 벼락을 맞는 걸 기대하는 게 더 나을 정도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돈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런 엄청난 요구를 했는데 과연 정부가 어떻게 나올지 기대를 안 한다면 그건 말도 안 된다. 게다가 예안은 돈 욕심이 보통 사람보다 적을 뿐이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뭐라고 대답할까? 진짜 궁금하다.' 하지만 예안은 그들이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여 엄청난 수입이 생기는 걸 기대하기보다는, 그런 엄청난 요구에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더 궁금했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예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 어? 어? 어?" 어이가 없어서 말도 못하는 예안의 마음을 눈치챈 중현이 살짝 웃었다. "여, 여기는…?" "맞습니다. 청와대입니다. 대통령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 진짜요?" 한국 최고의 지위를 맡고 있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 그것도 전혀 기 대하지 않았던 만남이다. 평범한 고등학생으로만 살아온 예안으로서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한국 대통령 보다 앤드류 왕자가 더 대단한 사람인데, 앤 드류 왕자를 만났을 때는 이 정도로 놀라지 않았으면서 왜 이렇게 당황 하는 거지?' 중현은 내심 이상함을 느꼈지만, 예안의 평범한 소녀다운 모습이 귀엽다 는 생각에 빠져 그것을 지워버렸다. 청와대. 한국의 대통령이 머무는 곳. 살아 생전 견학이라도 오지 않는 이상 절대 올 일이 없을 것 같았던 장소에 온 예안은 흥분을 감추지 못 했다. 마치 성역에 발을 내딛은 타락한 천사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 처럼, 예안은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복도마다 서 있는 요원들을 신기한 듯 쳐다보는 예안의 귀여운 모습에 중현은 속으로 말없이 미소지었다. 사실 그는 아주 가끔을 제외하고는 예안을 평범한 소녀로 보았지만 천재의 두뇌로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 을 떨쳐 버리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 예안의 모습은 연기도 뭣도 아니라 순수하게 흥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 동안 예안에 게서 느꼈던 거리감이 말끔히 사라지는 듯했다. "이 방입니다. 여기서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흐읍." 예안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중현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한 나라의 최고 대표가 머무르는 곳답게 무거운 위엄이 짙게 깔려 있었 다. 한 발짝 들이대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어서 오시오.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소." TV에서 익히 보아 알고 있는 대통령이 부드러운 미소와 정중한 인사로 자신을 맞자 예안은 얼이 빠질 것만 같았다. 하마터면 긴장으로 후들거 리는 다리가 그대로 무너질 뻔했지만, 예안은 필사적으로 태연한 표정을 연기했다. 「절대 냉정하십시오. 가벼운 모습을 결코 보여서는 안 됩니다.」 왼손목에 찬 원격장치의 스크린에 유니콘의 당부가 떠올랐다. 예안은 결 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뒤 둘러보니 중현과 대통령말고도 두 명의 중 년 남자가 더 앉아 있었다. 둘 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실례지만 이 분들은 누구시죠?" 그러자 두 중년 남자는 당혹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대통 령이 껄껄 웃었다. "김태호 국정원장과 장성태 국방부 장관이오. 그래도 우리나라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사람들인데, 얼굴 정도는 알아놓으시지 그랬소?" 대통령은 예안의 나이가 한참이나 어림에도 불구하고 깍듯한 말투였다. "제가 TV를 안 봐서 장관님들 얼굴 같은 건 잘 몰라요. 대통령님은 그래 도 워낙에 자주 나오시니까 얼굴 알지만요." "그거 굉장한 영광이군. 아가씨 같은 천재가 이런 노인을 기억해주시다 니." "최종 보스 캐릭터는 경험치를 엄청나게 많이 주거든요. 필연적으로 알 아둬야 해요. 그렇지만 중간 보스는 대부분 경험치도 적게 주고 아이템 도 별로 좋은 거 안 줘요. 아, 하지만 중간 보스에게도 좋은 점이 딱 하 나 있죠. 사파이어의 눈물의 재료를 주거든요." "호오? 우리 손자도 이터널 피닉스를 하는데." "각하는 안 하시나요?" "나야 늙어서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소. 일주일만 젊었어도 해볼 텐데 말이오." 대통령은 유쾌하게 웃었다. 이제 완전히 긴장이 사라진 예안은 태연한 눈으로 주변을 훑어볼 여유까지 생겼다. "3월 12일 날에 태평양에서 미군함대와 전투를 벌였다는 이야기는 들었 소. 너무 늦은 것 같지만 일단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고 싶소." '부담되네…' 대통령의 깍듯한 말투가 부담스러운 예안은 결국 듣다못해 입을 열었다. "그깟 발칸포에 망가질 엘레스토늄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좀 편하게 반말해주시면 안 되나요? 너무 부담스러운데…" "흐음. 그러길 원한다면 해드려야지." 대통령은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베어 물었다. 꽤나 교육이 잘 된 아가씨 라 생각했다. "좋아. 그럼 말을 편하게 해주마." "네." 예안은 이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때 다치지 않고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그런데 왜 미군함대 한 가운데 솟아올랐으면서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고 얻어맞기만 한 거니?" "공격은 했어요. 근데 사람 죽이는 게 별로 내키지 않아서 그냥 안테나 만 맞추고 말았지만." "흐음. 미사일도 아닌 레이저 광선으로 무려 230km나 떨어진 곳에서 정 확히 안테나만 맞추다니, 맥의 성능은 대단하구나." "계산상으로는 지구에서 명왕성도 쏴서 맞출 수 있어요. 그 정도는 껌이 에요." 예안이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쭉 펴자 중현을 포함한 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굉장하다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제조자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실감이 났다. "그런데 함대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솟았던 이유는 뭔지 물어도 될까?" "에…" 예안은 조금 당황했다. 그때는 계기판 같은 걸 볼 줄 몰라서 가까이에 함대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 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 너무 뻔한 걸 물었군. 미군이 우리나라에 무력 시위를 하러 오길래 화가 나서 쫓아버렸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그냥 한 번 물어본 거야. 하 긴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하기는 좀 쑥스럽겠지." "…예." 중현이고 대통령이고 혼자 알아서 북치고 장구치며 상상하는 건 참 잘한 다고 예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긴장이 사라지자 대통령이 그저 동네 아 저씨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맥을 한국에 파는 대가로 유전에서 나오는 모든 이익을 영구히 받길 원한다고 들었는데, 사실이니?" 대통령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물어오자 예안은 다시 바짝 긴 장했다. 이제부터가 중요한 것이다. 예안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들이 모르게 흘끔흘끔 유니콘이 알려주는 말을 읽어나갔다. "맥의 동력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서 알고 계실 거예요." "그래. 무한동력이라고 들었어." "그렇다면 충분한 대답이 될 텐데요. 무한히 에너지를 생산하는 동력원 을 매장량이 한정되어 있는 유전을 주는 대신에 영구히 빌려준다고 했는 데, 이건 오히려 제가 손해가 아닌가요?" "흐음. 맞는 말이야." "맥은 엘레스토늄이라는 인공금속으로 만들어졌어요. 이건 자연적으로는 절대 만들어진 수 없는 금속이에요. 그리고 인류는 영원히 이 금속을 만 들어내지 못할 거예요." 예안을 제외한 네 명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감돌았다. 인류는 영원히 만 들지 못할 거라니? "인류에게는 이 금속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지식이 없어요. 설혹 그것을 쌓기 위해 노력한다 해도 그 전에 멸망하고 말 거예요." 자신감으로 가득 찬 예안의 말에 대통령은 소리 없는 신음을 흘렸다. "제가 너무 지나치게 광오한 건 아니냐는 오해는 말아주세요. 전 사실만 을 말할 뿐이니까요. 사실 무한동력 하나만 놓고 생각해도 충분한 대답 이 되지 않나요? 이미 과학자들로부터 자문을 얻으셨다면 무한동력이라 는 게 차라리 허황되게 느껴질 정도로 엄청나다는 건 아실 텐데요." 예안은 유니콘이 알려주는 대로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쪽팔려 죽을 지경 이었다. 이건 원, 자신이 다시는 태어나지 못할 어마어마한 천재라고 대 놓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잖은가? "미군함대가 일제히 발포한 발칸포를 일 분이 넘도록 얻어맞았는데도 격 추는커녕 패인 흔적 하나 없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계실 거예요. 엘 레스토늄은 그만큼 강한 물질이에요. 무거운 미사일을 마하 10이 넘는 속도로 꽂아 박는다 해도 찌그러지는 걸로 끝날 거예요. 그리고 내부에 있는 수복 머신이 곧장 수리해 버리죠. 맥을 부수기 위해서는 핵무기가 아니면 통하지 않아요." "으음." "전투기로 변했을 때에는 대기권에서 비행 속도가 마하 수십을 간단히 넘어요. 1200기압을 자랑하는 마리아나 해구에 들어가도 끄덕 없을뿐더 러, 소나 탐지가 전부인 잠수함과는 달리 엄청난 수압의 심해 속에서도 영상을 잡아내어 파일럿에게 보여줄 수 있어요. 그리고 심해에서도 통하 는 특수 전파를 이용한 레이더도 장착되어 있죠. 아 사실 전파가 아니라 다른 건데… 하여튼 그냥 전파라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를 거예요." 예안이 이야기해주는 건 하나같이 놀라운 것들뿐이었다. 네 사람은 예안 의 이야기에 가벼운 흥분을 느끼며 점점 깊이 빠져 들어갔다. "레이더 전파를 전부 흡수해버리기 때문에 가시광선 탐지기나 열원 추적 장치가 아닌 이상은 맥을 잡아낼 수가 없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계실 거예요. 그리고 맥은 우주 탐사선으로도 이용할 수 있어요. 아무런 예비 준비 장치나 발사 장치도 필요 없어요. 산소조차 무한동력이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요." "대단하군. 대단해." 예안은 유니콘이 몰래 알려주는 대로 말하면서 속으로는 굉장히 놀라고 있었다. 맥이 대단하다는 건 이미 절실히 알고 있었지만 알수록 계속 놀 라게 되는 것이다. "맥의 기동력과 다양한 활용, 막강한 무력, 강대한 장갑, 그리고 무한동 력. 도대체 이것들 어디가 한국 유전에 비해 가치가 떨어진다는 거죠? 오히려 제가 손해라면 손해지, 결코 이득은 아니라구요. 제가 한국인이 아니었으면 이런 막대한 손해를 안고 맥을 한국에 넘기지 않아요. 물론 제가 처음 맥을 만든 의도는 순수한 과학자로서의 욕심이었지만, 저와 맥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 저는 가능한 한 많은 이득을 얻어야만 해요. 하지만 저는 일단 한국의 유전에 대한 이익을 영구히 받는 것으로 만족할게요." "으음… 유전이라…" 대통령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놀라고 있었다. 만약 예안이 한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오히려 자신들이 훨씬 이득인 셈 이다. "하지만 맥이 무한동력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합니까? 과학자들에게 물어 봤지만 그런 건 물리학적으로 절대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내젓기만 합니 다." 중현의 말이었다. "현대 물리학 이론의 한계에서 볼 때는 당연히 불가능하죠. 하지만 제가 몇날 며칠이고 과학자들에게 강의를 하고, 또 결정적인 현상들을 직접 보여주고 맥의 설계도까지 보여준다 해도 그들은 믿지 못할 거예요. 물 어볼게요. 만약 핵탄두의 설계도를 원숭이에게 보여주고 원숭이들이 그 것에 대해 이해하게 할 수 있나요?" 느닷없는 물음의 중현은 당혹감보다는 약간의 불쾌함을 느꼈다. "보통 인간들이 원숭이란 말입니까?" 예안은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여기까지 왔으니 어쩔 수 없다라 는 생각에 어깨를 으쓱하는 제스처를 보였다. 어찌 되었든 간에 자신은 평범한 인간과는 비교가 안 되는 두뇌를 가진 천재였다. 여기까지 왔는 데 연기를 그만둘 순 없는 것이다. "저에 비하면 원숭이나 인간이나 비슷비슷해요. 거기서 거기예요." 어찌 보면 미친 사람의 발언인 듯, 돌려 생각하면 지나치게 광오한, 한 편으로는 있는 그대로를 말한 듯 덤덤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적인 증거인 맥을 알고 있는 네 사람은 예안의 말을 미친 발언 이나 광오한 발언 따위로 돌려 생각할 수 없었다. 무한동력이 정말로 사 실이라면 예안은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어마어마한 천재, 아니 인간보다 뛰어난 그 무엇인 것이다. 대통령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는 예안이 지금 속으로 '내가 미쳤어. 이런 소리까지 하다니'하면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 다. "유전에 관한 이익을 영구히 양도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승인이 필요 해." "그걸 얻어내는 건 각하의 능력에 달린 거죠." "국민들이 납득하기 힘들 거야." "그것도 각하의 능력에 달린 거죠." "무한동력이라는 걸 국민들이 이해할 수 없단 소리야. 네 말대로 원숭이 들에게 핵폭탄 설계도를 보여주고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 순 없을 테니까." "태양을 없애면은 믿으실 수 있겠어요?" 네 사람은 깜짝 놀랐다. "태양을 없애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중현은 새파랗게 질렸다. 예안 자신도 속으로는 굉장히 놀랐으면서도 침 착하게 유니콘이 하는 말을 읽어나갔다. "말 그대로예요. 태양의 에너지를 능가하는 에너지를 응축해서 발사해 태양을 없애면 무한동력이라는 걸 믿으실 수 있겠느냐구요. 폭탄이라는 건 결국 에너지가 폭발하는 거잖아요. 무한동력이라는 건 파괴력의 끝이 없는 어마어마한 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예요. 물론 맥 의 무한동력기관이 그 막대한 에너지를 생산해 낸다 하더라도 엘레스토 늄이 버텨내지 못할 테니, 엘레스토늄보다 더 강한 금속을 개발해 맥을 새로 만들어 그렇게 해볼까요? 그러면 무한동력이라는 걸 믿으실 수 있 겠어요?" "으음…" "아니면 토성이나 목성을 통째로 날려 버릴까요? 지금의 맥으로도 그 정 도는 할 수 있어요. 그러고도 맥이 쌩쌩하게 잘 돌아가면 믿으실 수 있 겠어요?" 대통령을 포함한 네 사람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광오하다고까지 느껴 질 정도로 자신만만한 예안의 태도에 그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 를 잡을 수 없었다. "그, 그렇게까지 증명할 필요는 없는데…" 대통령이 식은땀을 흘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럼 제가 어떤 수로 맥의 성능을 증명하죠? 증명할 수 없다면 국민들 을 납득시킬 수 없고, 또 유전에 대한 이익을 지급할 수 없다면서요?" "이건 어떻겠습니까?" 중현이 입을 열자 국정원장은 반색했다. "말해 보게." 중현은 자신을 주시하는 네 사람을 한 번 훑어본 후 이야기를 계속했다. "장관님께 저번에 말씀드린 시나리오입니다. 일단 한국은 외국의 모 천 재과학자로부터 맥을 비밀리에 사들였는데, 그 대가로 유전에 대한 권리 를 주기로 약속했다고 발표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과학자가 죽었기에 유족에게 그 대가를 대신 지급하되, 예안씨가 자신의 신상을 드러내길 꺼려하니 가공의 인물을 유족으로 내세우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어째서 무한동력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느냐는 추궁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 고 맥이 전기 에너지의 형태로 외부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게 가능하다 면, 엄청난 양의 전기 에너지를 뽑아낸 뒤에 맥의 질량을 측정해서 전혀 감소가 없는 걸 통해 무한동력을 입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과연 그럴까?" 대통령의 회의 섞인 물음에 중현은 다시 힘주어 말했다. "어차피 무한동력에 대해 국민들에게 완전히 해명할 순 없습니다. 우리 는 다만 결과만 보여주고 판단은 국민들에게 맡기는 거지요. 그리고 그 걸로 끝내는 게 아니라, 맥이 군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가치가 있는지 보 여주는 겁니다." "무슨 소린가?" "미국의 마르츠 사가 개발한 최신형 대륙간탄도 FIRE-3는 대기권 진입 순간에 속도가 마하 70을 넘는다고 합니다. 예안씨, 이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겠습니까?" 느닷없는 물음에 예안은 재빨리 유니콘을 살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한 자리에서 50발 이상이 일제히 원형으로 발사되어 대기권에 진입할 때도 100% 요격 가능해요. 물론 거리가 지나치게 떨어져 있을 때는 맥이 우주 밖으로 나가야 하겠지만요. 하지만 1:1이라면 요격하는 건 일도 아 니에요." 대통령과 장관들이 소리 없이 경악하는 사이에, 중현은 그럴 줄 알았다 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맥의 성능에 대해 정식으로 발표를 하고, 미국으로부터 FIRE-3를 몇 발 구입해 공식적인 요격 테스트를 거치는 겁니다. 요격이 불가능하다고만 알려진 FIRE-3를 완벽하게 요격한다면 국민들은 맥의 성능에 대해 인정 할 것이고, 또 그 뒤에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방법대로 무한동력이라는 개 념을 증명한다면 국민들은 그렇게 부정적이지만은 않을 겁니다. 결과적 으로 무한동력을 국민들에게 납득시키는 거지요." "좋은 생각이기는 하네만 미국이 FIRE-3를 팔려고 들겠는가? 우리나라가 자체 개발한 사거리 400km의 국화미사일도 그들은 탐탁히 여기지 않았는 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번에 새로운 요격 시스템을 개발했는데 시험해 보기 위해서라고 계약서에 명확히 하 면 됩니다. 그들도 우리가 FIRE-3를 소유하는 게 아니라, 구입 즉시 요 격 테스트 시험으로 써버린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리고 가격만 제대로 쳐준다면 기꺼이 팔 겁니다." "흐음. 고려해 보지." 맥의 무한동력이 만들어지는 데 바탕이 된 과학이 현대 물리학을 훨씬 뛰어넘는 이상, 그것을 일반국민들에게 증명하기 위해선 이런 간접적인 방법 외에는 없었다. 대통령도 중현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 "FIRE-3를 요격할 수 있는 성능을 보여준다면 국민들은 어느 정도 납득 할 겁니다. 그리고 무한동력에 대해 완전히 믿지 못한다 하더라도 맥을 사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환영할 겁니다. 우리나라 방공망 체계는 너무나 허술하니까요." 예안이 끼어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요." 대통령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뭔가?" 예안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한국을 핵보유국으로 만들어드릴 수 있어요." 네 사람은 경악했다. "그게 정말인가?" "뭐라고요?" 무한동력에 대해 들었을 때는 이 정도로 놀라지 않았으면서 핵보유국으 로 만들어준다는 소리에는 왜 이렇게 놀라는 거야? 예안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하긴… 가난뱅이한테 돈 백 억을 준다고 하면 놀라서 뒤로 자빠지겠지 만 9000천 경 원을 준다고 하면 너무나 커서 실감을 못 느끼겠지. 그거 랑 비슷한 건가?' 무한동력이 지닌 무한한 가치와 엄청남에는 그다지 놀라지 않으면서, 그 보다 훨씬 미약한 조건에는 이렇게나 놀라는 걸 보면 역시 일반인들이 무한동력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는 건 무리가 있었나 보다. "무, 물론 예안씨라면 핵탄두 따위야 충분히 만들 수 있겠죠. 하지만 우 리나라도 재처리 기술만 도입한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만들고 도 남지요. 다만 강대국들의 감시와 50년도 더 된 비핵화 선언 때문에 만들지 못하는 겁니다." "제가 한국을 핵보유국으로 만들어드린단 소리는 진짜로 핵을 만들어드 린단 소리가 아니에요. 일단 그 비핵화 선언이라는 게 여러 가지로 발목 을 잡아끌잖아요? 그러니까 핵폭탄은 아니되, 핵폭탄만큼 강한 위력을 가진 무기를 제공하겠다 이 소리죠. 적어도 비핵화 선언을 어겼다는 명 분으로 이러저러한 제재나 침략을 당하는 건 피할 수 있잖아요? 일단 명 분은 서니까." 예안은 자신을 뚫어져라 주시하는 네 사람을 즐거운 눈으로 돌아보며 이 야기를 계속했다. "맥의 무장은 세 가지예요. 하나는 엘레스토늄으로 만들어진 길이 5미터 짜리 검인데, 이건 그냥 도시 한가운데서 난동 부리기에나 적합하지, 별 로 대단한 건 아니에요." "으음." "그리고 두 번째는 정면 흉갑 안쪽에 좌우 한 개씩 있는 에너지탄인데, 이건 근거리에서나 통하는 거지 그다지 강한 위력은 없어요. 사정거리가 수십 km 정도밖에 안 되니까요. 또 폭발 범위가 반경 100 미터도 채 안 되거든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위력입니다. 중현은 그 말이 나오려는 걸 꿀꺽 삼켰다. 대통령과 장관들도 일제히 긴장했다. 마지막에 나오는 세 번째 무기가 아마도 미군함대에게 쐈던 그 레이저 광선 포일 것이다. 지구에서 명왕 성도 쏴서 맞출 수 있다고 자랑하는. "그리고 세 번째가 라이플 버스터라고, 이게 바로 맥의 주무장인데요. 한 번 보셨을 테니 알 거예요. 커다란 총처럼 생긴 무기인데 사거리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지구에서 명왕성도 맞출 수 있어요. 출력은 마음대 로 조절할 수 있는데 지구 반쪽을 날려버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정도면 충분히 핵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되는데요? 게다가 플루토늄도, 농축 우라늄도 아니니 비핵화 선언에 걸릴 것도 없고요." 충분히 센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무기다. 대통령은 경악을 감출 수 없었 다. 그 뒤로도 길게 이어진 흥정(어떻게 보면 흥정이다)에서 결국 대통령은 맥에 대해 국민에게 발표하고, 미국에서 FIRE-3를 구입한 뒤 요격 시험 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성능을 테스트해 국민에게 정격 공개한 다음, 반 응을 봐서 확답을 들려주겠다고 했다. 예안은 대답을 듣고 난 뒤 유니콘이 알려주는 대로 경고 비슷한 것을 놓 았다. "만약 제가 요구한 것을 들어주시지 않으면 저는 맥을 빌려 드릴 수 없 어요." 그 말에 대통령과 장관들이 움찔한 건 물론이었다. "혹시라도 제가 아무런 힘이 없으니 맥을 안 돌려줘도 되겠지 하는 생각 은 안 하시겠죠? 맥은 제가 아니면 조종할 수도 없고, 또 고도로 발달된 자기사고가 가능한 인공지능이 갖춰져 있어요. 최악의 경우에는 맥을 자 폭시킬 수도 있구요." 자폭시킨다는 소리에 그들은 다시 움찔했다. "저는 언제든지 빈손에서부터 시작해 맥을 다시 만들 수 있으니 괜한 걱 정은 마세요. 제가 이름만 대면 돈 수백 억 달러쯤 공짜로 대줄 사람들 은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후후, 어린 아가씨가 아주 당찬 걸. 정치를 해도 되겠어. 어쨌든 그 말 은 명심하지. 좋은 방향으로 일이 해결되도록 노력해 볼게. 당장 확답을 들려주지 못해서 미안하군." 대통령이 웃으며 이별의 악수를 청하자 예안도 씩 웃으며 손을 맞잡았 다. "제 건방진 태도를 참아주셔서 감사해요." "뭘, 구구절절이 옳은 소리뿐이었는데. 어쨌든 만나서 즐거웠어." 예안은 중현을 따라 방을 나와 청와대 건물 밖으로 향했다. 중현의 차에 올라 청와대를 완전히 나오면서 예안은 긴장이 풀어진 기지개를 쭉 폈 다. "휴우. 힘들었다." "별로 긴장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습니다." "아저씨가 보기엔 그랬는지 몰라도 전 속으로 엄청 긴장했다구요. 아무 래도 대통령과 그런 자리에서 그런 심각한 이야기를 해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으니까." 중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저씨라니. 아직 30이 되기까지 3년이나 남았 는데 왜 아저씨냐구. "저 아직 27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저씨라니요. 오빠라고 불러주면 안 되나요?" "저보다 10살이나 많네요 뭘. 그럼 아저씨 맞지." 그래도 아저씨래. 은근히 예안에게 마음이 있었던 중현은 가슴이 무너지 는 것 같았지만 가까스로 내색하지 않았다. "어쨌든 각하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니 잘 해결될 겁니다. 그리고 만약 예 안씨가 요구한 게 받아들여지면 제가 얼굴도 못들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겠군요. 앤드류 왕자의 전재산만 해도 5조 달러인데, 예안씨는 일 년 에 45조 달러를 벌어들일 테니까요. 그나저나 우리나라 예산이 단번에 10%로 줄어들게 되면 경제에 타격이 클 텐데…" "어차피 일 년 예산을 전부 다 쓰는 게 아니라 50%가 훨씬 넘어가는 액 수는 꼬박꼬박 저금하잖아요. 복지를 최대한으로 늘렸는데도 돈이 남아 도는 판국인데요 뭘." "그건 맞는 말이군요." 중현은 엑셀을 밟으면서 내내 유쾌했다. 예안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유니콘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유니콘은 이번 에는 글자가 아닌 소리를 통해서 대답했다. "야, 유니콘. 네가 생각하기에는 정말로 유전을 나에게 줄까?" 「아마도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들이 저의 가치에 대해 어느 정도 제대로 인지하게 된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죠.」 "흐음…" 예안은 팔짱을 낀 채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그것은 잘하면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여고생의 설렘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태도였다. 아마도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별로 놀라거나 기뻐하시지 않는군요.」 "뭐가?" 예안은 이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잘하면 일 년에 4500조 원 가량의 돈이 꼬박꼬박 들어오게 됩니다. 개 인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엄청난 돈입니다. 나라 하나를 새로 새울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돈이라구요. 그런데 유젤 님은 별로 기뻐하거나 놀 라지 않으시는군요.」 "내가 그랬나?" 머리를 긁적이던 예안은 비로소 자신이 그렇게 놀라지 않았음을 상기해 냈다. 생각해보니 처음에만 조금 흥분했을 뿐 지금은 별다른 생각이 없 지 않은가? "솔직히… 너무 큰돈이라서 그래. 전에 중현 아저씨가 맥을 빌려주는 대 가로 일 년에 일 억씩 준다고 했을 때가 더 기쁘고 더 놀라웠어. 그때는 일 억이라는 게 얼마나 큰돈인지 감이 왔었지만, 일 년에 4500조 원이 들어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실감이 안 나. 얼마나 큰돈인지 감도 잘 안 잡히고." 「인간이 높이 100 미터나 1000 미터보다도 10 미터에서 가장 큰 공포를 느끼는 것과 비슷한 걸까요?」 "그렇겠지 뭐." 「하지만 그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예안은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의아했다. 「어쩌면 유젤 님은 뉴 타입으로서 이제 점점 자각해나가는 게 아닐까 요? 원숭이들은 바나나에 커다란 가치를 두지만 인간들은 그렇지 않듯 이, 유젤 님도 인간들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에 흥미를 잃어 가는 게 아 닐까요?」 "그럼 내가 인간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단 소리야? 말도 안 돼! 예안이의 탄생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이라는 건 확실히 알아! 이 모습 어딜 봐서 인간이 아니란 거야?" 「뉴 타입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은 아닙니다. 인간을 초월 한 인간이라구요.」 "뉴 타입인지 뭔지 그런 거 몰라. 이상한 말 자꾸 하지 마. 안 그럼 나 화낸다?" 예안은 유니콘이 한 말을 헛소리로 치부해 버리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 았다. 그리고 아주 가까운 훗날, 이때 유니콘이 한 말에 대해 깊이 생각 하고 또 고민하게 되는 날이 찾아오게 될 거라는 걸 아직은 상상조차 못 했다. 세현이 유학을 가고 난 뒤 의미 모를 울적함에 예안이 젖어 있을 때에도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그리고 1학기 4월 말 중간고사를 이주도 채 안 남겨 놓은 지금, 예안은 이번 시험에서 반드시 반에서 10등 안에 들 겠다고 필살의 각오를 불사르고 있었다. 일부 지독한 공부벌레는 일단 제외하자. '시험은 이주일씩이나 남았어!' 라며 띵가띵가 노는 대다수의 학생들과는 달리, 예안은 머리에 흰 끈까 지 질끈 동여매고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 X에 3을 대입하면 Y가 27이 되니까 결국 a값은 27의 세 제곱근인 3이라는 소린가? 뭐야, 엄청 쉽잖아." 분명 전에는 수학에 굉장히 약했는데? 이상하게 쓱쓱 풀려나가자 예안은 조금 불길함을 느껴 얼른 해답을 살펴보았다. "에? 맞네?" 정확히 풀어내고도 자신이 없어 해답을 살펴봤는데 맞아떨어진다면 누구 나 기뻐할 것이다. 하지만 수학이라면 진짜로 젬병이었던 예안은 오히려 떨떠름했다. "암산으로도 그냥 풀리네? 허참…" 예안은 머리를 긁적이며 페이지를 넘겼다. 총 10개의 수학 문제. 그러나 그냥 한 번 읽자마자 머리 속에서 곧바로 암산이 되고 답이 떠오르자 무 척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렇게 천재였나? 그냥 공식만 한 번 대충 훑어보고 문제 푸는 건 데 술술 잘 풀리네?" 「유젤 님의 두뇌는 누구보다도 뛰어나다고 제가 전에 말씀드렸지 않습 니까? 제발 유젤 님의 가치를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어? 언제 그랬어?" …이렇게 아주 잘 까먹는 걸 보면 둘도 없을 천재라는 말이 왠지 무의미 하다고까지 느껴지는데. "하여튼 이대로만 나간다면 이번 중간고사에서 수학은 정복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안은 시무룩한 눈길로 책상 한쪽에 쌓인 교과서들을 더듬었다. "…암기 과목이네." 저 많은 걸 언제 다 외운다냐? 아니, 외운다기보다는 도대체 저 많은 걸 언제 다 읽어나 볼 수 있을까? 태산을 앞에 둔 짐꾼들의 심정이 아마도 이러할 것이다. 넘긴 넘어야겠는데 도무지 엄두가 안 나는… "그래도 읽긴 읽어야겠지. 휴. 어쨌든 시작해야지." 예안은 투덜거리며 국사 상권을 들어 펼쳤다. 턱에 손을 괸 채 예안은 글자들을 더듬어나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 읽었다! 휴. 시간 꽤나 지났을 테니 이제 저녁 준비를 해야지." 「오 분만에 다 읽으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닙니다만.」 "에?" 두 시간은 지난 줄 알았는데 오 분밖에 안 걸렸다고라? 깜짝 놀란 예안 은 반사적으로 시계를 살폈다. 정말 오 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에엑? 나 굉장히 천천히 읽었는데 오 분 밖에 안 걸렸단 말이야? 말도 안 돼! 어떻게 상 권 절반 분량을 세 번이나 읽는데 오 분 밖에 안 걸린 단 말이야?" 「보통 천재들은 책 읽는 속도가 빠르다잖습니까? 유젤 님은 인간들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욕일 정도로 천재라니까요.」 "그, 그러냐?" 얼마 전에 대통령을 만나 맥을 빌려주는 대가로 한국의 유전에 나오는 모든 이익을 영구히 달라고 요구했던 그날, 유니콘(맥의 인공지능)은 보 통 인간의 지능을 원숭이로 놓았을 때 유젤의 지능은 인간 정도에 해당 될 정도로 뛰어난 천재라고 일러주었다. 하지만 유진우로서 이미 16년을 살아오며 자신의 머리가 평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절감했던 예안은 이렇게 시험 공부를 하는 도중 그 것을 깨달아가며 새삼 놀라고 있었다. "야, 그럼 나도 세현이 자식처럼 MIT에 조교수로 들어갈 수 있겠냐? 올 해 안에 말이야." 설마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예안은 그냥 한 번 물어봤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놀라운 것이었다. 「유젤 님이 갖고 계신 지식은 평범한 고등학생 수준이지만 지금부터라 도 노력하신다면 아마 몇 달 안에 노벨상 몇 개 정도 휩쓰는 건 일도 아 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안은 놀라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말도 안 돼.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그 정도나 되는 인간이 어딨냐?" 「유젤 님이야말로 뉴 타입 인간의 지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을 못하 십니다. 전에 말씀드렸잖습니까? 보통 인간을 원숭이로 보았을 때 유젤 님은 인간에 해당될 정도로 엄청난 지능을 갖고 계시다구요. 잘 실감하 지 못하시겠지만 그 차이는 엄청난 겁니다.」 눈살을 찌푸리며 유니콘의 말을 이해하려 해봤지만 살아온 경험이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보통 인간과 다름없는 사고방식에 길들여져 있던 예안 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천재인지 쉬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저 고등 수학이 술술 풀리고 암기 과목을 빠른 속도로 해치운다는 사실에 '이번 시험 반 10등 안에 들 수 있어!'라고 기뻐했을 뿐이다. 「만약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면 무엇을 제일 먼저 하실 겁니까?」 "그런 쓸데없는 가정은 왜 하냐? 내가 무슨 재주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겠어?" 방금 전의 인간이라면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뛰어난 두뇌를 지녔다고 그 렇게 전자 회로에 쥐가 나도록 설명했는데 아직도 이런 소리라니! 아마 도 유니콘에게 감정이 있다면 엄청 울고 싶을 것이다. 「유전 말입니다. 곧 유전이 들어 온다구요. 그럼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잖습니까?」 "에이, 설마. 진짜로 유전을 주겠어? 많이 줘봐야 일 년에 몇 십 억 정 도일 거야." 전에 대통령과 면담을 가졌을 때는 유니콘이 일러주는 대로 꼬박꼬박 잘 말했으면서 이제 와서 웬 딴소리일까. 「유젤 님. 아직도 저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시는 겁니까?」 "알아. 내가 왜 몰라. 무한동력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이제는 잘 안다구." 「그럼 어째서 아직도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야…" 볼을 긁적이던 예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해 봐. 그 사람들이 보기엔 난 그저 조금 머리가 좋은, 다루기 쉬 운 계집아이에 불과할 뿐이라구. 아마도 살살 어르고 달래서 유전은커녕 일 년에 몇 억 혹은 많이 줘야 몇십 억 정도만 주려고 할 걸? 원래 어른 들은 다 그래. 애들은 다루기 쉽다고 생각하지. 전에 맥을 팔면 5000억 달러를 준다는 말도 그냥 해본 소리일걸?" 「그렇다면 유전은 포기하실 생각인가요?」 "그, 그럴 생각은 없지만…" 유니콘은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인간에 비한다면 조금 어이가 없어서 한숨을 쉬는 행위 정도쯤 될까. 「유젤 님은 기대 같은 걸 잘 안 하는 분이시군요. 일이 잘 풀릴 거란 기대는 별로 없으시죠? 아마도 그건 유젤 님이 남자였던 시절에 형성된 사고방식일 테구요.」 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고 볼 수 있는 말이지. 「유젤 님. 반드시 한국 정부로부터 유전을 얻어내셔야 합니다. 어떤 일 이 있어도 꼭 성공해야만 합니다. 저의 가치에 비하면 정말 유전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몇 번이나 이미 말씀드렸지만 시트날타로부터 유젤 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유전에서 나오는 정도의 돈은 있어야 합니 다.」 "그렇게까지 많이는 필요 없지 않아? 일 년에 45조 달러면 진짜 장난 아 니라구. 나라 하나를 통째로 세울 수도 있는 돈이잖아? 그걸로 하렘 공 화국을 세워도 되겠다." 「…갑자기 웬 하렘 공화국입니까. 어쨌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란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예안은 한국이 정말로 유전을 통째로 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반 장난삼아 유니콘이 시킨 대로 대통령에게 유전을 달라 요구하기는 했지 만, 실제로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유전을 받을 수 있 다면 이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을 텐데. 예안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 거렸다. "공부하니?" 그때 문이 열리고 정호가 들어섰다. 예안은 의자를 뒤로 돌리며 대답했 다. "응." "시험이 언젠데?" "이주일도 안 남았어. 아직 일 학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신 관리에 힘 써보려구. 그래봤자 좋은 결과 나오기는 힘들 테지만… 중학교하고 인문계 고등학교는 다를 테니까." "열심히 해라. 그런데…" 정호는 어려운 말을 하려는 것처럼 말끝을 흐렸다. "내일 정우 생일인 거 알지?" 그러고 보니 내일이 정우의 생일이구나. 잠시 기억을 더듬던 예안은 매 년 이맘때쯤이면 정우의 생일 파티에 참가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다치거 나, 감기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하면서 이리저리 빠져나왔던 자신 의 행동들을 하나 하나 생각해냈다. "그러고 보니 매년 이맘때쯤이면 내가 정우 형 생일파티에 참가 안 하려 고 별 핑계를 다 댔던 게 기억나네. 준우 형과 현우 녀석 몫까지 합쳐서 꼭 일 년에 세 번씩은 감기 같은 것에 걸렸으니까." "유성 호텔에서 파티를 연다고 하더라. 나하고 너도 꼭 오라는데…" 예안은 생각할 것도 없이 잘라 말했다. "안 가. 아빠가 적당한 핑계 대 줘." "그러지 말고 가자." "싫다니까. 내가 그런 데 가서 뭐해?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 난 이제 친 척들이랑 영영 바이바이하고 싶다고. 그래서 일부러 학교에서도 현우와 준우 형 마주치지 않으려고 조심하는데, 내가 미쳤다고 자진해서 생일파 티에 가?" "그래도 친척이잖니. 아직은 아니지만 네가 곧 아빠 호적에 들어오면 싫 어도 친족이 되는 거야."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야. 아빠는 아니겠지만 난 별로 내키지 않, 아 니 내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소름 끼치도록 싫어." 예안의 완강한 거절에 정호는 입맛을 다셨다. 하나뿐인 혈육이 자신의 동생과 조카들에게 얼마나 뿌리깊은 원망을 품고 살아왔는지 그는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해소해줄 방법은 알지 못했다. 어쩌면 얼어붙은 예안의 원망을 녹여줄 방법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지도 모른 다. "그렇지만 마땅히 댈 핑계가 없잖아?" "그냥 아파서 못 간다고 해." "그랬다가는 생일파티고 뭐고 당장 취소하고 여기로 달려올 텐데, 그래 도 괜찮아?" 새삼 의식하지 못했던 사실을 깨달은 예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정호의 말이 맞았다. 그렇지 않아도 도대체 언제 집들이 할 거냐며 매일 같이 재촉 전화를 거는 판국인데, 아프다고 둘러댔다가는 이때다 싶어 얼른 이 집에 쳐들어올지도 모른다. "그럼 나 시험 공부 때문에 바빠서 못 간다고 해. 그럼 별말 못하겠지. 그리고 다음부터는 이런 이야기하지 마." 정호는 더 설득하는 걸 포기했다. "그래. 그렇게 말해놓으마." 다음날 아침. 일요일이라 도호가 집에 있을 시간이다. 아침 일찍 일어난 정호는 예안이 해준 공포의 밥을 억지로 웃음 띤 채 먹고 집을 나섰다. 도호의 집 앞에 도착한 그는 초인종을 눌렀다. 「아주버님이세요? 어서 들어오세요.」 집안에 들어가니 도호의 식구 온 가족이 모여 있었다. 일요일에는 언제 나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현우와 독서실로 향하는 준우 그리고 심지어 대학 근처에서 자취하느라 집에 거의 오지 않는 정우까지. 정호는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 쏠리자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듯 한 기분에 조금 떨떠름했다. "어서 와 형." "안녕하세요." 정호는 도호의 가족들의 인사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근데 형 아침부터 웬일이야? 이따 저녁 6시부터 생일파티 할 테니까 그 때 보면 될 텐데." "음. 사실 그것 때문에 말하려고 왔다. 이거 미안한데, 나하고 예안이는 생일파티에 못 갈 것 같아." 가족들은 깜짝 놀랐다. 특히 정우는 표정이 핼쑥하기까지 했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큰아버지?" 정호는 놀람에 찬 도호 가족들의 시선을 온몸에 받으며 난처함을 느꼈 다. "예안이가 시험공부 하느라 바쁘다고 못 간대. 그렇지 않아도 자기는 공 부를 못해서 고민이니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하겠다고 각오가 대단하거 든. 예안이가 공부하느라 바쁜데 나 혼자 파티장에 가서 히히덕거리는 것도 좀 그렇고 해서, 나도 그냥 안 가기로 했다. 여자애 혼자 집에 두 기도 좀 그렇고 해서 말이야." "형도 참. 아파트가 위험한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조금 섭섭하네. 친척 이 생일파티를 하는데 시험공부 한다고 못 온다니… 정우 녀석 굉장히 기대했는데…" "정우 너 기대하고 있었어?" 정호가 빤히 시선을 보내오자 정우는 당황하고 얼굴을 살짝 붉혔다. 말 그대로 살짝.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살짝이었다. "별로 많이 기대한 건 아니에요. 그냥 새로 가족이 되었는데 와줬으면 했는데 안 온다니까 약간 실망한 정도?" 정호는 그대로 믿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현우와 준우는 속으로 '역시 큰 형은 거짓말이 능숙하다니까'라고 중얼거렸다. "어쨌든 미안하구나. 나도 가보고 싶었는데 그냥 집에서 인터넷 장기나 할 생각이야." "흐음. 오늘 뷔페 목록에 한국산 갈비도 있는데 아쉽게 됐네." 정호가 갈비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걸 알고 있는 도호의 유혹이었다. 예 상대로 정호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갈비?" "어. 한국산 암소라서 굉장히 부드럽고 연해. 왜, 전에 한 번 우리 같이 신림에서 먹어본 갈비 기억하지? 그 갈비야." "으음." 전에 도호와 단둘이 먹어본 그 갈비 맛을 아직도 기억하는 정호는 입에 군침이 꿀꺽 고였다. 사실 그 뒤로 가본 그 어떤 갈비집에서도 그 갈비 보다 더 맛있는 고기를 내놓지 않았다. 입안에서 살살 녹는 그 맛은 도 저히 잊어버릴래야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형한테 싸다주고 싶지만 뷔페라서 그렇게 못하니… 어쩔 수 없지 뭐. 다음에 내가 한 번 따로 살게." 정호는 얼른 말을 바꿨다. "걱정 마라 도호야. 이 형 그냥 가마." "형 혼자만?" "아…" 자칫하다가는 열심히 공부하는 딸을 내버려두고 혼자 갈비 먹으러 가는 악질 아버지가 될 순간이었다. "하지만 예안이는 위장이 안 좋아서 아무것도 못 먹잖니?" "그 갈비는 워낙에 연하고 부드러워서 괜찮을 거야. 실제로 나도 위염에 걸렸을 때 의사가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 갈비 먹고 나았잖아? 그러지 말고 예안이도 데리고 와. 맛만 보는 정도는 괜찮을 거야." "그, 그럴까?" 예안이 정말 먹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지만 갈비의 유혹에 넘어간 정호는 이미 제대로 사고할 능력을 상실한 뒤였다. "뭐어? 그래서 내가 간다고 약속했다고?" 시험공부를 하고 있던 예안은 오후에 집에 돌아온 정호가 멋쩍은 웃음과 함께 도호에게 한 약속을 들려주자 어이가 없었다. "말했잖아! 난 정우 형네 가족 생일 파티에는 절대 가기 싫다니까! 그게 어딜 봐서 가족 생일 파티장이야! 재벌들이 득실득실거리는데! 내가 처 음에 멋모르고 거기 갔다가 얼마나 소외감 느꼈는지 아빠도 잘 알잖아!" 그게 예안이 질색하는 이유였나. "그냥 아무하고도 대화하지 말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돼. 내가 도호 녀석한테 약속했단 말이야. 생각해 봐. 공부하는 딸 내버려두고 조카 생 일 파티장에 쫄래쫄래 혼자 가서 갈비 뜯는 아버지를 누가 좋게 생각하 겠니?" "그, 그건 그렇지만…" "예안이 너도 이 아빠가 그 갈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잖아?" "그, 그것도 그렇지만…" 아버지가 갈비라면 사족을 못쓰는데다가 전에 도호와 한 번 그 전설의 갈비라는 녀석을 먹어보고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걸 기억하고 있 는 예안은 떨떠름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소원이다. 가자. 응? 어차피 파티장에 오는 다른 사람들 너한테 신경도 안 쓸 거야. 넌 그냥 정우한테 축하한다 한 마디만 하고 가만히 구석에 서 있기만 하면 돼." "…알았어." 정말 생일파티에 온 사람들이 신경도 안 쓸지는 의문이지만, 예안은 시 험공부를 못하게 되어 입맛이 쓴 나머지 미처 그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유성 호텔에서 벌어지는 정우의 생일 파티장은 화려한 분위기 그 자체였 다. 정우 아버지인 도호가 판사이긴 하지만 돈을 많이 버는 건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재벌 중 하나인 대성 그룹 회장의 사위이기에 이렇듯 아 들의 생일 파티장이 으리으리한 것이다. 재벌집 손자의 생일파티다 보니 여러 고위 인사들이 저마다 얼굴 도장을 찍으러 온다. 유명 탤런트나 영화배우를 포함하여 잘 나가는 회사 사장 이라든지, 간간이 유명한 국회의원들의 얼굴까지 보인다. 이건 뭐랄까. 일개 대학생의 생일 파티라기에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이래서 내가 정우 형 생일 파티장에 안 오려고 한 거라고.' 한쪽 구석에 우두커니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예안은 속으로 그렇게 투덜 거렸다. 이제는 예전처럼 극단적인 비참함이나 소외감은 느끼지 않지만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되는 이런 분위기 속에 서 있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옛날에 여기 왔다가 그 빌어먹을 자식한테 비웃음 당한 걸 생각하면 지 금도 혈압이 끓는단 말이야.' 그게 아마도 10살 때였을 것이다. 정우의 생일 파티에 참가했을 때 대성 그룹의 계열사인 대성전자 사장의 아들이라는, 정우와 동갑이었던 중학 생이 자신에게 정우와 무슨 관계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사촌이라는 말에 그 녀석은 조금 놀라면서, 아버지가 어디 회사 사장이 냐고 물었다. 세상 물정 같은 걸 잘 몰랐던 자신은 환경미화원이라고 솔 직히 대답했고, 그 녀석은 처음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곁에 있던 친구들과 낄낄 비웃으면서 엄청난 창피를 준 걸로 기억한다. 다행히 지켜보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 녀석과 녀석 친구들에게 무시를 받 는 걸로 끝났고, 그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아마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아버지에 대해 원망과 동정, 안쓰러움 같은 마음을 품으면서 친척들에 대한 미움을 키워왔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10살 때 이후로 다시는 정우 삼형제의 생일파티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게 다 그 놈의 갈빈지 뭔지 하는 놈 때문이야. 젠장, 내일부터 그 갈 비라는 녀석을 바리바리 사다 놔서 하루 세끼 갈비만 먹여 갈비라면 치 가 떨리도록 만들어주겠어 아빠.' 예안은 고개를 들어 그 좋아하는 갈비를 먹고 있는 아버지에게 흘끗 시 선을 던졌다. 사람이 갈비를 저렇게 맛있게 먹을 수도 있는 걸까? '아빠는 소외감이나 열등감 같은 건 전혀 안 느끼나 보다. 사실 여기 있 는 사람들 중 전부 다 사장이나 유명 연예인 그런 거 아닌 사람 없을 텐 데, 아빠는 기가 죽지도 않나?' 예전에 한 번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정호는 자신의 인생을 희생해 동생들 을 성공시켰기에 그들의 성공은 자신이 살아온 증거나 다름없다고 웃음 과 함께 대답해주었다. 그러나 예안은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정호를 이 해할 수 없었다. '난 아빠의 그 부분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팔짱을 낀 채 예안은 눈을 감았다. 원래 남자옷을 입고 오려고 했지만 그래도 정호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 롯데월드에 갔을 때처럼 원피스를 입고 나왔는데 괜히 그런 것 같았다. '사람 좀 그만 쳐다 봐. 내가 무슨 동물원 원숭이냐?' 아닌게 아니라 근처의 있는 사람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흰 원피스를 입 고 있는 예안을 자꾸 흘끔거렸다. 유젤이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건 예안 도 인정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부분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자꾸만 자신을 쳐다보는 건 썩 내키지 않았다. "저, 실례지만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정중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예안은 눈을 떴다. 어딘지 낯이 익은 얼굴에 예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분명 어디서 봤는데… 어디서 봤더라?' "아까부터 계속 혼자 계시더군요. 저는 현상호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아 가씨의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예의바른 부드러운 웃음. 하지만 예안은 저 얼굴이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비웃음을 짓고 있는 걸 본 적이 분명 있다. '아! 생각났다! 그때 나 개무시하던 형이잖아?' 그제야 열 살 때 정우의 생일 파티에 왔었을 때 친구들과 함께 자신을 비웃었던 중학생이라는 걸 생각해낸 예안은 가슴이 떨리는 걸 느끼고 크 게 심호흡을 했다. "서예안이라고 하는데요."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난 심정이 이러할까. 예안은 두근거리는 가슴 을 주체할 수 없었다. "눈부신 미모만큼 이름도 굉장히 예쁘시군요.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는 데 눈이 다 멀어버릴 지경이었습니다." "글쎄요. 그런 아부는 접어 두셨으면 하네요. 그런데 그쪽은 몇 살이시 죠?" 예안에게 접근하지 못한 채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청년들이 귀를 쫑 긋하며 두 사람의 대화에 깊이 관심을 보였다. 상호는 용기 있는 자신을 대견스럽게 여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21살입니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다니고 있습니다." 예안은 작게, 그렇지만 상호가 간신히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혼잣 말했다. "21살이라. 완전히 늙다리네." 얼핏 들은 상호의 표정이 구겨졌다. 알다시피 호감을 갖고 접근한 여자 한테서 늙다리(아무리 혼잣말이라고 하지만) 소리를 듣고 기분 좋아할 남자는 없다. "연세대학교면 일류 대학이네요." 상호는 언제 구겼냐는 듯 대번에 표정을 풀고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 다. "아, 뭐 별로 일류라고까지야…" "이 자리에 있는 거 보면 재벌이나 국회의원 자제분이신가 봐요?" "저희 아버지가 대성전자의 사장님이십니다. 뭐 그리 대단한 분은 아닙 니다만." 그렇지만 상호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드러나 있었다. 예안 은 속이 뒤틀렸지만 꾹 눌러 참았다. "좋으시겠어요. 전 친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셨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듯이 나온 예안의 말에 상호는 조금 당황했다. "예? 예… 이런, 제가 아픈 기억을 건드렸군요. 죄송합니다." "건드리긴 뭘 건드려요? 먼저 물어본 건 전데." "아, 그, 그런가요?" 상호는 쩔쩔맸다. 이쯤 되면 예안도 이 남자가 무슨 의도를 갖고 자신에 게 접근했는지 눈치챌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 들어설 때부터 젊은 남자들이 계속 흘끔거리는 게 신경 쓰였는데, 그걸 모른다면 바보다. "아, 물론 지금은 양아버지랑 같이 살고 있지만요." "아, 그러시나요? 이 자리에 오신 걸 보면 굉장한 집안에 입양되신 모양 이로군요. 초면에 실례지만 양아버지는 어느 회사에 다니시는지 물어도 될까요? 제가 알고 있는 회사일 수도 있겠네요." 예안이 입고 있는 원피스는 평범한 고등학생에게는 비싼 옷이지만 상호 같은 재벌집안 아들에게는 싸구려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예안의 전신에 서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와 기품이 느껴졌기에 상호는 예 안을 대단한 집안 딸이라 생각했다. "백수예요." "네?" "못 들으셨어요? 백수라고요. 아, 얼마 전까지는 환경미화원 일을 하고 계셨지만 이제 생업에서 은퇴하시고 매일 같이 장기나 두면서 한가롭게 지내세요. 뭐, 그렇지만 제가 이다음에 취직할 때까지 쓸 돈은 충분히 있으니 어떻게 먹고사나 하는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상호의 두 눈에 당혹함이 떠올랐다. 여태껏 관심 있게 그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주변의 청년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라? 제 말을 못 믿는 눈치네요? 못 믿어요?" "아, 아니요. 미, 믿습니다. 믿고 말고요." 상호는 예안이 일부러 자신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혹시 비공해 제품 같은 걸 주로 생산하는 회사의 사장이었는데 그걸 환 경미화원이라고 돌려 말한 걸까? 보통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많잖아? 하기야, 그렇지 않고서야 평생 쓸 돈을 어떻게 벌써 모으고 은퇴하겠어? 환경미화원 일로는 택도 없지.' 이렇게 생각한 상호는 다시 여유를 되찾고 어느새 미소까지 지었다. "그런데 아직 예안씨의 나이를 말씀해주시지 않으셨군요. 숙녀분에게 나 이를 묻는 건 실례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한 번 알고 싶은데, 물어도 되 겠습니까?" "이미 물어봐 놓고는 뭘 물어도 되냐고 물어요? 성격 참 이상하네요." 상호는 무안함에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실례라는 걸 알면서 물어보는 이유는 도대체 뭐예요? 전 그런 쓸데없는 의례 같은 건 딱 질색하는 사람인데, 어쩌죠?" "아, 미처 몰랐군요. 죄송합니다." "어쨌든 물었으니 대답해 드릴게요. 17살이에요. 고1이죠." 영계로군. 얼굴이 좀 어려 보이긴 했지만 성숙한 몸매와 약간 농염한 분 위기까지 흐르고 있어 대학생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어쨌든 나쁠 건 없기에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리면 더 좋은 거 아닌가? "흐음.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군요." 예안의 눈에 의구심이 묻어났다. 상호는 씩 웃으며 한쪽 방향을 가리켰 다. 그곳에는 평범한 옷을 입은 정호가 서 있었다. "저 사람 말입니다. 대성그룹 회장님의 조카인 유정우의 큰아버지라고 하던데, 직업이 환경미화원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듣기로는 동생들을 공 부시켜 성공하게 했다나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자리에 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예안은 묵묵히 듣고 있기만 했다. "그깟 공부하는데 푼돈 조금 대줬다고 이십 년 가까이 얹혀 산 것만 해 도 감지덕지할 노릇인데, 이런 자리에까지 와서 동생의 체면을 구기다니 요. 유정우의 아버님은 웃고 있어도 지금쯤 속으로는 엄청 투덜거리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예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상호는 옳다구나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라도 뭐라고 따끔하게 한 마디 하고 싶습니다. 당신 같은 밑바닥 인생에게는 이런 상류 문화가 어울리지 않는다고요. 하지만 일단 유도호 판사님의 형이니 차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군요. 이렇게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리는 꼴을 보는 것도 참 고역입니다." "그쪽말고도 저 사람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나요?" "물론이지요. 아마 이 자리에 있는 제 또래들은 대부분 다 알고 있을 겁 니다. 다들 불쾌해하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을 뿐이죠." 그때 좋아하는 갈비를 먹어서인지 굉장히 기분 좋은 표정으로 정호가 예 안에게 다가왔다. 동시에 상호는 더러운 흙밭에서 놀던 잡종견이 다가와 서 짜증내는 순종 고급 애완견처럼 표정을 구겼다. "여기서 뭐하니? 이 남자애하고 아는 사이니?" 정호가 예안에게 다정히 말을 건네오자 상호는 불쾌함도 잊어버리고 어 리둥절했다. 예안은 상황 파악을 못한 상호에게 피식 비웃음을 살짝 건 넸다. "내가 이런 재수 없는 재벌2세랑 알고 지낼 리가 없잖아. 저쪽으로 가 자, 아빠." "!" '재수 없는'이라고 했다. 작은 소리도 아닌데 못 들을 리가 없다. "짜증나서 죽는 줄 알았어. 빨리 다른 곳으로 가자." 경악한 상호가 눈을 크게 뜬 그때, 정호의 팔짱을 끼며 몸을 돌리던 예 안은 그에게 히죽 웃음을 보냈다. "죄송해요. 저 같은 밑바닥 인생이 이런 상류 사회 생일 파티에 와서. 그렇지만 저도 오기 싫어서 시험 공부한다고까지 핑계 댔는데 자꾸만 오 라고 사람을 괴롭혀서 끌려오다시피 온 거니 뭐라고 하지 마세요." "어, 어, 어…" 입이 떡 벌어진 상호를 흘끔 비웃은 뒤, 예안은 상황파악을 못해 어리둥 절해 하는 정호의 팔을 꼭 끌어안고 다른 쪽으로 갔다. 여태껏 두 사람 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주변 청년들이 마음을 놓은 표정으로 상호에게 안 됐다는 시선을 보냈다. 정호를 끌고 한쪽으로 간 예안은 상호와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마 자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예안이 굉장히 기분 나빠한다는 걸 느낀 정호 는 어리둥절했다. "왜 그러니? 어디 몸이라도 아파?" "…짜증나잖아." "응? 웬 짜증?" 예안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분함을 참지 못한 손톱이 꽉 쥔 주 먹을 통해 살갗을 찔렀다. "저 자식 뭐야?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모욕하고 그래? 누가 여기 오고 싶어서 왔어? 억지로 끌고 온 게 누군데!" 미칠 것 같지만 차마 소리를 지를 순 없고. 분함을 참지 못한 예안은 피 가 나올 정도로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그래서 어쩌라고? 그래서 우리가 자기 한테 뭐 피해준 거 있어? 왜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는 거야?" "예안아." 이제야 사건의 전모를 깨달은 정호는 안쓰러운 손길로 예안의 어깨를 다 독였다. 양손으로 정호의 가슴팍을 움켜쥔 예안은 얼굴을 정호의 품안에 묻었다. 눈물이 보이기 싫어서라고 생각한 정호는 쓸쓸한 손길로 예안의 등을 토닥여주었지만, 예안은 끝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아빠." "응?" "그 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나 이번에 정말 절실히 깨달았어." "뭘?" "삼촌들이랑 나는 절대 어울릴 수 없단 걸. 생일 파티 하나를 해도 이렇 게 으리으리하게 하고,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전부 다 어느 회사 사장 아니면 국회의원, 고위 공무원들 뿐이야. 정말이지 삼촌들은 아빠나 나 랑은 비교조차 될 수 없이 잘난 사람들이라는 걸 아주 잘 알았어." 예안은 정호의 가슴에 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서릿발처럼 차갑게 빛나는 새하얀 표정은 눈물이 말라붙은 흔적 따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빠. 오늘이 마지막이야." 정호는 침울한 말투로 물었다. "뭐가?" "내가 삼촌 가족들 가족 행사에 오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야. 내가 만약 에 다시 이런 자리에 온다면, 그건 내가 삼촌들보다 더 크게 성공했을 때 뿐이야." 그 말은 무수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었지만, 정호는 그것들 중 단 하 나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그래. 우리 딸은 이런 못난 아비처럼 살지 말고 정우 녀석들보 다, 아니 우리나라 그 누구보다 더 크게 성공해야지." 예안은 속으로 차갑게 중얼거렸다. '지금까지는 반은 장난처럼 했지만, 두고 봐. 무조건 유전을 얻어내고 말겠어. 내가 못할 줄 알아? 그래서 나중에 날 개무시한 너희들을 꼭 밟 아줄 거야.' 정호가 도호에게 가고 혼자가 된 예안은 벽 쪽에 바짝 붙어 선 채 팔짱 을 꼈다. 예안은 마치 먹이를 골라보는 맹수처럼 싸늘한 눈동자로 홀 안 에 모인 사람들을 차분히 훑어보았다. "유니콘." 「말씀하십시오.」 "한국 정부가 정말로 나에게 유전을 줄 수 있을까?" 「줘야만 합니다. 아니, 주도록 만들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만들 수 있겠냐?" 「제가 조언하는 대로만 하시면 걱정 없습니다. 그리고 유전을 얻는 게 최종 목표는 아닙니다. 그건 다만 자그마한 시작에 불과할 뿐입니다.」 예안의 녹색 눈동자는 탐욕과는 거리가 먼 감정을 담은 채 차갑게 빛났 다. "내가 유전을 얻으면 저 사람들이 날 우러러 보겠지?" 「그렇겠지요.」 예안은 단호했다. "나 결심했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전을 얻어내고 말 거야. 그래서 세 계 제일의 부자가 돼서 삼촌들 코를 납작하게 해줄 거야." 「좋은 결심이십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사실 유젤 님은 그동안 우유 부단한 게 좀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잠깐. 조용히. 누가 온다." 한 남자가 조심스럽게 접근해오는 걸 느낀 예안은 유니콘에게 주의를 주 었다. 유니콘은 예안이 주의하기 전에 벌써 알아차리고 말을 멈췄다. "저 실례지만…" "말 걸지 마세요." 벌써 몇 번째냐. 예안은 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차갑게 자르며 매 서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봤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시선에 질린 남자는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났다. 남자가 사라지자 예안은 다시 유니콘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우유부단했다고?" 「그렇습니다. 사실 정상인이라면 대통령에게 유전에 대한 권리를 요구 한 뒤 제대로 잠도 못 자며 걱정하고 기대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유젤 님은 단지 그 순간에만 긴장하고 걱정했을 뿐, 그때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일상 생활로 돌아오시더군요. 그게 우유부단한 게 아 니고 뭡니까?」 예안은 조금 기가 죽었다. "그거야 설마 정말로 유전을 줄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그렇지." 「그들은 줄 수밖에 없습니다. 주지 않고서는 저를 얻을 수 없을 테니까 요. ST기관은커녕 엘레스토늄 하나만 해도 충분히 유전과 맞바꾸고도 남 을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까요.」 예안은 폭발하기 직전의 감정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저 멀리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있는 도호네 가족들을 쳐다보았다. 아니, 차라리 노려본다 고 해야 옳을까. "반드시 얻고 만다. 진짜로." 처음에는 반쯤 장난삼아 유니콘이 일러준 대로 유전을 요구하긴 했지만 지금 이 순간 예안은 진심으로 유전을 받아낼 결심을 굳혔다. 유전을 얻 는다면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될 수 있을 터이고 그렇다면 지금까지 자신 을 무시했던 사람들보다 더 높은 곳에서 그들을 깔봐줄 수 있을 테니까. 그게 얼마나 속 좁고 이기적인 발상인지는 잘 알지만 그래도 예안은 자 신이 할 수 있는 건 해볼 생각이었다. 예안이 그렇게 결심을 굳히고 있을 때 여태껏 또래 남자들과 떠들어대던 혜민이 다가왔다. "여기서 혼자 뭐하니? 왜 그냥 가만히 서있기만 해? 아는 사람이 없으면 차라리 그냥 뭐라도 먹던가 하지." "난 위장이 망가져서 음식 못 먹는다고 했잖아." 예안이 냉랭하게 쏘아붙이자 혜민은 '어디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나?'하 고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예안이는 서민집안 딸이었지. 그러다가 큰아버지한테 입양 된 거고.' 아마도 지금 잔뜩 기가 죽어서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겠지. 혜민은 난생 처음으로 따뜻한 위로라는 걸 한 번 건네 보았다. "너무 그렇게 죽을상 짓고 있지 마. 어차피 여기서 우리 또래들은 전부 다 네가 전에 나한테 말한 것처럼 가문의 후광만 믿고 까부는 녀석들이 니까. 그런 녀석들한테 기죽을 필요 전혀 없어." "넌 안 그렇고?" "나도 좀 그런 편이긴 하지만 난 그래도 내가 건방지다는 걸 알고는 있 잖아? 나 자신을 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데. 너 자신을 알라는 말 도 몰라?" 역시 내가 남자였을 때와는 태도가 너무나 다르다. 그게 조금 우습게 느 껴진 예안은 그만 쿡 웃음을 터트렸다. "유혜민. 이 자리에서 가장 돈 없고 가장 힘없고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살 고 있는 여자애가 누군지 아냐?" "너잖아." 혜민은 무시하거나 놀린다기보다는 국어 교과서를 읽는 듯이 덤덤했다. 하긴, 얘는 원래 이런 성격이었지. 예안은 화를 내거나 무안해하지 않고 알았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했다. "유혜민. 난 절대 이대로 있지 않을 거야. 대한민국, 아니 세계 그 누구 보다 대단한 사람이 되어서 그때 가서 보란 듯이 날 무시한 녀석들을 깔 봐 줄 거야. 별로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야. 기대해도 좋아." "흐음? 혹시 이 자리에 모인 사람 중에서 누가 너 무시하는 말이라도 했 니?" 귀신이구만. 별로 숨길 것도 없는 예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성전자의 사장 아들이라는 녀석이 우리 아빠 보고 이 자리에 어울리 지 않는 밑바닥 인생이라고 했어. 그런 냄새나는 것들과 함께 있는 것만 으로도 불쾌하다고." 그런 말까지 한 적은 없지만 이 정도 과장쯤은 괜찮겠지. 예안은 속으로 그렇게 자신을 납득시켰다. "진짜? 와, 그건 좀 너무하네. 나도 한 싸가지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 닌데." 혜민의 거리낌없는 말투에 예안은 조금 얼떨떨했다. 화가 사라지는 기분 이었다. "대성전자라면 현상호 오빠던가? 그 오빠가 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평 소에 평범한 아이들한테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 일 줄은 몰랐는데. 난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아주 재수가 바가지로 없는 녀석이었어." "하지만 예안아.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혜민은 덤덤한 말투로 계속 말했다. "생각해 봐. 어찌 되었던 현상호 오빠 입장에서 우리 큰아버지는 하찮은 밑바닥 인생이나 마찬가지야. 물론 환경미화원이 먹고살기 힘들 정도로 돈을 적게 버는 직업은 아니지. 풍족하진 않아도 서민 식구들이 그럭저 럭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정도로 돈 나오고, 게다가 자녀들 학비도 전액 면제니까. 그렇지만 사회의 인식이라는 건 결코 무시할 수 없잖아?" "그래서?" 예안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혜민은 그걸 느꼈지만 그래도 계속 말했다. "네 입장에서는 지극히 화가 나겠지만 그 사람이 무시한다 해도 오히려 화를 내고 반박하면 너만 더 초라해지고 비참해져. 그럴 때는 차라리 아 무 말도 하지 말고 곧장 헤어지면 그만이야. 어쩔 수 없잖아? 사회라는 게 원래 그런 거니까." "…그래. 무슨 뜻인지 알았어. 그리고 나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았어. 그 냥 재수 없다고 투덜거리고 사뿐히 비켰을 뿐이야." 조금 어설프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도 위로라는 걸 할 줄 아는 인간이었 구나, 유혜민. 예안은 순간적으로 끓어오르던 화를 가라앉혔다. "혜민아. 오랜만이다." 그때 두 사람 사이에 검은 양복을 입은 청년이 끼어 들었다. 과연 이 자 리에 모인 번쩍번쩍한 상류층 집안 자제답게 그 역시 몸 전체에 기품이 넘쳐흘렀다. 혜민은 그를 보고 굉장히 반가워했다. "어, 문석이 오빠. 미국에서 언제 왔어?" "어어? 나 작년에 미국에서 돌아왔는데 너 아직도 모르고 있었어? 지금 아버지 회사에서 자리 하나 꿰차고 있잖아." "MBA 딴다고 하더니 땄어? 한국에 들어온 걸 보면 딴 모양이야?" "그럼. 그 정도야 껌이지 뭐. 넌 그럼 내가 그거 하나 따는데 몇 년씩이 나 머리 싸매고 있을 줄 알았니?" "그냥 한국에서 대학 다니지 뭐 하러 미국까지 가? 서울대 경영학과면 상당히 괜찮잖아? 오빠 같은 사람 때문에 외화가 자꾸 외국으로 빠져나 가는 거라구." "뭐 어쩌다 보니 미국으로 가게 된 거지. 그리고 외화라면 유전에서 벌 어들이는 돈만 해도 득실득실하잖아? 우리나라가 저금한 달러만 해도 100조 달러가 넘는다던데? 아, 그런데 이 아가씨는 누구야?" 문석이 궁금함에 찬 눈으로 예안을 가리키자 혜민은 그가 접근한 의도를 깨닫고 히죽 웃었다. "아하? 이제 보니 내가 반가워서 온 게 아니라 예안이한테 관심이 있어 서 온 거구나?" "글쎄다. 너한테 거짓말 해봤자 소용없겠지?" 문석은 씩 웃기만 할 뿐 부정하진 않았다. "근데 예안이? 이 아가씨 이름이 예안이야? 예쁜 이름이네." "응. 서예안이라고 해. 나랑은 곧 사촌이 될 사이고. 안 될 수도 있지." 안 될 수도 있다는 건 예안이 정우 삼형제 중 하나와 결혼할 수도 있다 는 걸 의미하는 말이었다. 문석은 자신감에 가득 찬 미소가 베인 오른손 을 내밀어 예안에게 악수를 청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윤문석이라고 합니다." 예안은 키가 큰 문석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 다. 어차피 이 남자도 아까 현상호와 마찬가지라 여기고 그냥 무시해 버 릴지. 아니면 악수만이라도 받아줄지. '그냥 악수만 하지 뭐. 혜민이 말대로 지금의 내가 괜히 자격지심 내세 우는 건 초라해 보이기만 할 테니까.' 순간적으로 생각을 마친 예안은 팔을 뻗어 문석의 손을 맞잡았다. "서예안이라고 해요." 그리고 손을 빼려는데 문석이 힘을 주고 있어 빠지지 않았다. 몇 번 힘 을 쓰던 예안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손을 놔주지 않 는 거냐 하는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문석은 빙긋 웃기만 했다. '왜 그렇게 기분 나쁘게 웃는 거냐?' 여자라면 한 눈에 넘어갈 것 같은 유혹적인 시선이었지만 아쉽게도 예안 의 알맹이가 어디 평범한 여자인가? 시커먼 동정남이지. "안 놔주실 건가요?" "이런, 이런. 죄송합니다. 생전 처음 보는 미인의 손을 잡은 감격에 그 만 제 몸이 멋대로 움직인 모양이군요." 문석의 생각을 짐작한 예안은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미인이라니 고맙네요. 난 내 얼굴이 정말 좋거든요. 내가 정말 사랑하 는 사람이 준 거라서 말이죠." "낭만적인 표현이군요. 어머니를 정말 사랑하시는 모양입니다." "킥. 글쎄요. 그건 모르지요." "혜민이랑 같은 나이면 고1이 되겠네요? 저는 올해 스물 여섯인데, 그냥 서로 편하게 말을 놓는 게 어때요? 저도 편하게 부를 테니 예안씨도 그 냥 오빠라고 부르는 게…" 예안은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다신 안 볼 텐데 말을 놔서 뭐해요? 그냥 통성명 을 한 걸로 끝내는 게 편하지." 시종일관 여유 있는 웃음을 짓고 있던 문석은 비로소 당황했다. "예?" "전 이런 자리에 다시는 안 올 거라서요. 오늘도 원래는 절대 안 오려고 했는데 양아버지가 하도 간곡히 부탁하셔서 끌려가는 심정으로 온 거거 든요." 예안은 천천히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등을 돌리며 혜민에게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유혜민. 시간이 늦었으니 난 이만 간다. 그리고 아까 내가 한 말 기대 해. 다음에 이런 자리에서 널 만날 때의 난 지금의 내가 아닐 거야." 뭔가 의미심장한 뉘앙스를 풍기는 예안의 말투였지만, 혜민은 당황하느 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벌써 가려고? 아직 7시밖에 안 됐어? 조금 더 있다가 가지?" "그냥 갈련다. 이런 자리는 역시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어차피 아빠도 지금쯤은 갈비 많이 드시고 배도 부를 테니 슬슬 가야지." 예안이 막 걸음을 떼어놓으려는 순간 문석이 다급히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혹시 연락처 같은 거 주실 수 있나요? 다음 번에 제가 한 번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습니다." 예안은 걸음을 멈췄다. 등을 돌린 예안은 차갑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로 문석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가 신기한 장난감을 눈앞에 두고 고개를 갸웃하는 것 같기도 했고, 다르게 보면 사람의 감정을 꿰뚫어보는 섬뜩한 눈빛 같기도 했다. 문석은 그 모습에 심히 매료되었다. '녹색 렌즈라… 굉장히 매력 있는 아가씨로군.' 대담하게 머리 전체를 붉게 염색한 것도 그렇고, 녹색 콘텍트 렌즈를 낀 것도 그렇고. 그는 예안에게서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묘한 매력을 느꼈 다. 지금까지 여자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던 자신이 이렇게 먼 저 적극적으로 나간 것도 아마 그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잠시 동안 문석의 눈을 빤히 올려다보던 예안은 훗 하는 비웃음을 살짝 흘리고 다시 등을 돌렸다. 연락처를 알려주거나 아니면 다른 무슨 말이 라도 해주길 기대하고 있던 문석은 기대가 완전히 빗나간 뒤 예안이 저 만치 사라질 때까지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응시했다. 혜민은 즐거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역시 사악한 마녀다. "쯧쯧쯧. 문석이 오빠, 사람을 잘못 선택했어. 쟤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 로 있는 데다가 정우 오빠네 삼형제가 호시탐탐 노리면서도 공략 못한 철옹성이라구. 아, 현우는 한때 넘었지만 곧바로 차였지 아마?" 그러나 이미 문석의 귀에 혜민의 말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 미 사랑에 빠져 버린 남자처럼 뜨거워진 채 예안이 사라진 쪽을 더듬고 있었다. 정호는 도호의 가족들과 같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예안은 그를 쉽게 찾아냈다. "여기 있었네요 아빠? 그래, 갈비는 많이 드셨나요?" "어, 그래. 아주 잘 먹었지. 역시 갈비는 한국산이 최고라니까. LA갈빈 지 뭔지 하는 건 맛도 없고 순 뼈밖에 없어서 영 먹을 게 못 돼." 예안은 도호네 가족들에게 한 번 시선을 흘끔 던진 뒤 다시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는 게 어때요? 저 빨리 가서 공부해야 되는데." "음. 그래도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그만 집에 가자는 말에 놀란 도호가 예안을 말리려고 나섰다. "아직 많이 남았는데 뭐 벌써 가려고 그러니? 그러지 말고 좀더 즐기다 가려무나." 예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는 사람이 있어야 뭘 즐기든지 말든지 하지요. 게다가 시험이 이주도 안 남았다 보니 초조해서 아무 생각도 안 나요. 빨리 가서 공부해야 되 는데…" 그러면서 정우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내심 감추려고 했지만 섭섭한 기 색이 역력한 정우의 표정에 예안은 왠지 모를 쾌감을 느꼈다. "아빠가 안 간다면 저 먼저 갈게요. 그리고 정우 형, 다시 한 번 말하지 만 생일 축하해. 안녕히 계세요." 예안은 메마른 목소리로 정우에게 축하를 건네고 다시 도호의 가족들에 게 인사를 건넨 뒤 등을 돌렸다. 정호가 황급히 '나도 이만 가마'라고 도호에게 말하곤 얼른 예안을 뒤따라왔다. "잠깐만 예안아. 그냥 같이 가자. 밤거리에 혼자 보내기가 좀 그렇구 나." 도호네 가족들과 거리가 충분히 멀어진 걸 확인한 예안의 입에서 비로소 반말이 흘러나왔다. "아직 7시도 안 됐는데 무슨 밤거리라는 거야? 지금이 겨울도 아니고."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너 혼자 보내니? 게다가 갈비도 충분히 먹었으 니까 이제 그만 가봐야지." 예안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내일부터 갈비 잔뜩 사다가 아침, 점심, 저녁, 간식까지 전부 다 갈비 로만 차려서 앞으로 갈비라면 치가 떨리도록 만들어 줄 거야." "그렇게만 해준다면 나야 좋지 뭐. 일 년 내내 먹어봐라, 갈비가 질릴 음식인가." "하? 과연 그럴까? 일주일도 못 가서 아빠는 두 손 들고 말걸? 어쨌거나 주방 권한은 내가 쥐고 있으니까 앞으로 갈비말고 다른 음식 먹을 생각 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두 사람이 파티가 한창인 중앙 홀을 나설 때였다. 갑자가 분위기가 몹시 시끌벅적해졌다. "왜 갑자기 시끄럽지? 어디 불이라도 났나?" "글쎄다." 정호의 팔짱을 낀 채 걸어가던 예안은 순간 입구 쪽에서 검은 양복을 입 고 들어선 금발의 외국인 청년을 보고 흠칫했다. "애, 앤드류 왕자다!" "어째서 저 사람이 여기에?" 파티장은 순식간에 술렁거렸다. 생각해 보라. 이 파티장 안에 모인 사람 들이 비록 한국에서 손꼽히는 재벌이나 정치인들이 태반이라고는 하지만 세계 제일의 부자에게는 명함조차 제대로 내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 분이다. 그에 비하면 앤드류는 카를로스, 네로스, 포세이돈, 이카루스라는 전공 분야에서 1, 2위를 다투는 공룡 기업만 네 개씩이나 가진 거물. 이런 자 리에 올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들이 경악하는 게 당연했다. "누, 누가 앤드류 회장이랑 친분 있는 사람 있나?" "유 판사가 앤드류 회장이랑 알고 지내는 사이였나? 아니면 유정우 군 이? 도대체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왔지?" 술렁이는 분위기를 통해 예안은 사람들이 얼마나 경악하고 있는지 뼛속 까지 느꼈다. 그리고 왜 앤드류가 이 자리에 왔는지도 순간적으로 깨달 았다. 모를 리가 없다. 모른다면 바보다. '날 만나러 온 거냐? 젠장…' 예안은 반사적으로 정호의 등뒤로 몸을 숨겼다. 감탄에 찬 눈길로 멀찍 이 서서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앤드류를 쳐다보던 정호는 예안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꼈다. "왜 그러니?" "아, 그, 그게…" 이러면 괜한 의심 사기 쉽지. 예안은 어쩔 수 없이 죽을상이 된 채 자세 를 바로잡았다. "내가 앤드류 회장을 평소에 좀 존경했었거든. 그런데 이렇게 직접 보게 될 줄 몰라서 그냥 좀 놀랐던 것 뿐이야. 어서 가자 아빠." 놀라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들키지 않기 위해 예안은 서둘러 정호의 팔을 잡아끌었다. 다른 쪽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앤드류가 서 있는 곳이 나가 는 입구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회장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대성 전자의 사장인 한석준이라고 합니다. 세계의 전자 시장을 휩쓸고 있는 카를로스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국에서 회장님을 직접 보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흐응. 저 역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미국 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번에 한국에 셰펠 함 3척을 판매하기 위해 직접 오셨다구요. 정말 수고하십니다. 그 정도 일이라면 직원들에게 시 켜도 될 텐데 직접 오시다니요." "셰펠 함은 포세이돈의 야심작품입니다. 우리는 이 함정이 장차 세계 최 고로 떠오를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회장인 제가 직접 오는 게 당연 하지요." 파티장 분위기는 순식간에 앤드류 쪽으로 흘러가 버렸다. 바야흐로 오늘 의 주인공이 정우인지 앤드류인지 분간이 안 되는 순간이었다. 이 자리 에 모인 한국의 거물급 인사들은 너나할 것 없이 앤드류와 조금이라도 더 눈을 많이 맞추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앤 드류의 눈에 띄어 보려고 안달인 탤런트나 영화배우들은 두말할 나위조 차 없었다. '제발, 제발… 아는 척 하지 마라.' 앤드류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예안은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앤드류는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 쪽으로 점점 다가오는 (정확히는 입구 쪽으로) 예안에게 묘한 미소가 실린 시선을 던져왔다. '이제 몇 걸음만 더…' 정호를 끌다시피 해서 서둘러 앤드류의 옆을 지나친 예안은 몇 발자국을 더 내딛어도 그가 자신을 부르자 않자 비로소 안심했다. 하지만 예안이 속도를 약간 늦추던 순간, 앤드류가 등뒤에서 말을 건넸다. "아가씨. 잠깐만요." 순간적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는 척을 할 것인가? 아니며 그냥 무시하고 이대로 갈 것인가? 하지만 의아함에 찬 사람들이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걸 깨달은 예안은 그랬다가는 더 깊은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죽을상이 된 채 뒤를 돌아보았다. "…예? 왜, 왜요?" 예안은 자신의 목소리가 실날 같이 떨리고 있었지만, 그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아니요. 조금 놀랐습니다. 제 애인이랑 너무나 비슷하게 생기셔서 순간 적으로 그녀가 이 자리에 와 있는 줄 알았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다른 사람이었군요." 앤드류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가 '누나'라 부르며 접근해올 것을 두려워한 예안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군요. 저, 저는 이만 바빠서 그만 가볼게요." 의구심에 찬 사람들의 시선이 더 짙어지기 전에 이 자리를 뜨는 게 최선 이다. 예안은 어리둥절해하는 정호의 팔을 끌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 다. 앤드류는 야릇한 미소가 섞인 시선으로 예안이 사라진 방향을 더듬고 있 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존경과 아부, 그리고 허영으로 찬 갖가지 질문 들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기색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예안은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왜 앤드류 왕자를 그렇게 피하시는 겁니까?」 "몰라서 묻냐? 앤드류 회장은 나보고 좋아한다고 했잖아? 자칫 아빠 귀 에 들어갔다가는 그대로 결혼하라고 조를지도 몰라. 게다가 온갖 매스컴 공세에 시달리느라 내 일상 생활이 망가질 수도 있고, 혹시라도 TV나 신 문에 내 얼굴이 나오기라도 한다면 시트날타가 알아차리는 건 시간 문제 야. 넌 명색이 인공지능이라면서 그것도 생각 못했냐?"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앤드류 왕자랑 굳이 결혼하지 않더라도 친분을 쌓아두면 좋습니다. 유전을 얻든 얻지 못하든 말입니다.」 "됐어. 그 이야기는 다시 하지 마. 난 누구든지 간에 예안이 몸을 좋아 하는 남자하고는 상종 안 할 거니까. 예안이는 내 거야. 내 거라구." 만약 유니콘이 사람이었다면 병적으로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들을 기피하 는 예안의 태도에 한숨을 내쉬었을지도 모른다. 「유혜민씨에게 오늘 하신 말씀 말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유젤 님의 그 소망은 당분간은 이루어지기 힘들 것 같습니다.」 파티장에 온 그 누구보다도 더 성공한 사람이 돼서 당당하게 자신을 비 웃은 녀석들을 깔봐 주겠다던 그 소망 말인가? "어째서?" 「유전에 대한 권리를 양도받는다 해도 짧으면 일 년에서 늦으면 몇 년 정도는 함부로 정체를 드러내실 수 없을 테니까요. 시트날타 때문에 유 젤 님은 한국 정부측에 신상을 철저히 숨겨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맞다. 그랬지 참. 그러고 보니 시트날타를 까맣게 잊고 있었네. 쳇, 그럼 유전을 받는다 해도 그 재수 없는 녀석들을 깔봐 줄 수는 없는 거잖아." 예안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리자 유니콘이 위로 비슷한 말 을 건넸다. 「너무 그렇게 상심하지 마십시오. 일단 유전에서 나오는 돈을 얼마 동 안 모은 뒤 시트날타가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경호 시스템을 구축하면 됩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에게 알리면 아무 걱정 없지요. 뭣하면 그냥 그대로 평생 숨겨도 되구요.」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으로 벽에 원을 그리던 예안은 한참 후 입을 열었 다. "유니콘." 「네.」 "네 생각엔 말이야…"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망설이지 말구요.」 몇 번을 더 망설이던 예안은 결국 유니콘의 무언의 재촉을 못 이겨 힘겹 게 입술을 뗐다. "설혹 내가 유전을 얻는다 해도 그냥 평생 숨어 지내는 게 좋을 것 같 냐? 그러니까, 네가 말한 대로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들을 마련해 두 고도 그냥 조용히 지내는 게 좋냐 이거지. 사실 너에 관한 문제 때문에 이미 대통령까지 만난 신세면 앞으로 조용히 지내기는 거의 힘들지 않겠 냐? 아무래도 너를 조종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물론 냉정하게 따져봤을 땐 유젤 님이 유전을 얻는다 해도 세상에는 드러나지 않고 조용히 숨어사는 게 좋긴 합니다.」 유전에 관한 모든 권리를 달라고 했으면서 자신에 대한 건 철저히 숨겨 달라는 요구. 예안은 이게 얼마나 힘든 건지 잘 안다. 그럴 바에야 차라 리 떳떳하게 드러내놓고 한국의 보호를 요청하는 게 더 낫지 않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유전을 넘겨받으면 유젤 님은 필연적으로 한순간에 세계적인 거물이 됩니다. 연간 45조 달러 이상의 거액을 벌어들이는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는 거지요. 무조건 유젤 님의 신상을 숨겨달라고 한국 측에 요구하는 것도 상당히 무리한 부탁이긴 합니다.」 "그건 그래." 「그러나 유젤 님이 보다 더 확실한 안전을 원하신다면 가급적 신상을 숨기고 지내는 게 좋습니다. 그런다고 시트날타가 유젤 님을 영영 못 찾 아내지는 않겠지만 일부러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예안은 입술을 깨물며 고민에 잠겼다. 잠시 후 유니콘이 다시 말했다. 「유젤 님은 자신을 비웃은 자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그들을 내려다보 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예안은 마음을 들킨 사람처럼 얼굴을 살짝 붉혔다. 「일종의 어린아이와 같은 보복 심리라는 생각을 지울 순 없지만 그렇게 하고 싶으시다면 유전을 넘겨받은 뒤 확실한 경호 시스템을 구축하고 나 서 세상에 발표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시트날타가 유젤 님을 완전히 손바닥 안에 두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때부터는 아차 하 는 실수 하나로 시트날타에 잡혀갈 수 있는 겁니다. 물론 숨어 지낸다 해도 시트날타는 언젠가는 찾아내고 말 테지만요. 어찌해야 할지는 유젤 님이 알아서 판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예안은 머리칼을 연신 쓸어 넘기며 깊이 고민했다. 유전을 넘겨받는다면 명실공히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된다. 과연 주변 사람들에게 그걸 밝히지 않고 그냥 숨어 지낼 것인지, 아니면 대놓고 밝힌 뒤 공식적으로 한국의 보호를 받아 시트날트로부터 자신을 지킬 것인지 결국 결정해야 할 것이 다.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어 지금까지 자신을 깔봤던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없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다. 예안의 마음에도 그런 과시욕 이 어느 정도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드러내기에는 시트 날타에 대한 불안감이 너무나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과연 어찌해야 좋 단 말인가? 한참만에 눈을 뜬 예안은 머리 아프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모르겠다. 차근차근 생각해 보지 뭐. 어차피 아직 유전을 준다고 하지 도 않았는데…" 드디어 중간고사를 보는 날이 다가왔다. 과연 시험이라는 이름은 무서운 건지, 아침마다 떠들썩하던 교실들은 전부 다 조용하기만 했다. 복도를 지나가다 교실을 들여다보면 누구 하나 떠들거나 자지 않고 열심히 글자 하나라도 더 들여다보기 바빴다. 1교시 시작종이 울리자 문이 드르륵 열리며 담임인 정 선생이 들어섰다. "모두 머리에 손 올려." 군기가 바짝 든 아이들은 재빨리 머리에 손을 올렸다. 정 선생은 답안지 와 시험지를 나눠주었다. "고등학교 와서 처음 보는 시험이긴 하지만 중학교랑 별다른 차이는 없 다. 부정행위만 안 하고 마킹만 제대로 해서 내면 그만이다. 알겠나?" 아이들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예." "그럼 풀어." 머리에 손을 올리고 있던 아이들은 서둘러 문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1교시는 국사 시험이었다. '에? 도대체 이게 뭐야?' 예안은 문제를 읽자마자 머리 속에서 답이 떠오르자 어리둥절했다. 정확 히는 문제에서 요구하는 답이 어제 읽었던 국사 교과서의 일부분으로 머 리 속에 나타나 필름이 돌아가듯 촤르륵 흘러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참 신기한 느낌이었다. 유니콘은 '당신은 천재라니까요!'고 사람 이라면 거의 울 듯이 항상 말하곤 했지만 사실 일상 생활에서 자신의 두 뇌가 얼마나 뛰어난지 예안은 실감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바로 지금 예안은 자신의 두뇌가(정확히는 유젤의 두뇌가) 얼마나 뛰어난지 절감했 다. 시험 공부를 할 때도 문제가 술술 풀리고 교과서도 몇 분 걸리지 않아 후딱 읽어버리고 줄줄이 외우는 등 머리가 좋다는 걸 느꼈지만, 직접 시 험 문제를 푸는 지금 이 순간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뭐랄 까. 마치 비실비실한 말을 타고 다니다가 갑자기 로켓에 올라 달나라로 날아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랄까. '다 풀었다. 이제 그만 나가야지.' 검토까지 마친 예안은 자리에서 얼른 일어났다. 그러자 정 선생은 물론 이고 아이들의 시선까지 일제히 전부 다 쏠렸다. "어디 가려고?" "예? 다 풀었는데요." "뭐? 아직 5분도 안 지났는데?" 시계를 쳐다보니 과연 5분이 훨씬 안 지난 상태였다. 아이들은 놀라 눈 을 휘둥그렇게 떴다. 설마 다 찍었단 말인가? "서예안. 고등학교 갓 올라와서 많이 달라진 공부가 힘든 건 알겠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대명고등학교의 공 주로서 1교시 시험지부터 전부 다 찍을 생각을…" 예안이 얼굴이 빨갛게 돼서 외쳤다. "다, 다 풀었다고요!" "말도 안 돼. 어떻게 5분도 안 돼서…" 예안의 책상으로 와 답안지를 살펴본 정 선생은 떨떠름했다. "진짜네? 주관식까지 깨끗하게…" "나가도 되죠?" "그래. 나가 봐." 정 선생과 아이들의 의심쩍은 시선을 받으며 예안은 밖으로 나왔다. 교 실 안이 조금 소란스러워진 게 다 들렸다. "내 이야기 하는가 보다." 「그럴 테지요. 5분도 안 걸려 다 풀어 버릴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 까?」 괜히 일찍 나왔나. 예안은 약간 난처한 손길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늦장 부리다가 나올 걸 그랬나 봐." 숨막힐 듯한 중간고사는 4일 간에 걸쳐서 본다. 시험공부를 하는 동안 예안은 공부가 잘 되다 못해 한 번 읽으면 슥슥 외워지고 한 번 보면 모 조리 다 이해가 되는 자신의 두뇌에 공포까지 느낄 정도로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어쨌거나 반 십 등 안에는 충분히 들겠다. 지금까지 이렇게 공부가 잘 된 적은 없었으니까." 글쎄다. 과연 반에서 십 등 정도만 들고 말까? "혜인이 너는 몇 등 정도 할 것 같냐?" "난 잘 모르겠어. 시험 공부도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고 또 많이는 아니 지만 조금 밀려 쓴 것도 있거든. 근데 너 그 남자 같은 말투 정말 어떻 게 좀 할 수 없니?" 혜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하기야 찍은 게 한 개만 틀려도 시험 이 망쳤다고 온갖 수선을 다 피우는 게 대한민국 청소년들인데 밀려 쓴 것은 완전히 자기 관을 짜는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혜인과 함께 교문을 나서면서 예안은 기지개를 켰다. "후아. 오늘로 드디어 시험이 끝났다. 이제부터는 마음껏 놀아야지. 그 동안 공부한다고 이터널 피닉스도 제대로 못했는데 말야." "근데 예안아. 세현이한테서 요새 연락 오니?" 갑자기 예안은 발걸음을 멈췄다. "몰라 그런 자식. 나 그 자식이랑 절교했다고 했잖아. 연락을 하지도 않 지만 한다고 해도 내가 순순히 받을 것 같냐?" "아직도 세현이한테 화를 내는 것 같지는 않은데. 도대체 왜 그러는 거 니 정말."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남자 같은 말투는 고쳐지지 않는구만. 혜인은 땅 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친위대 언니들도 너한테는 완전히 질렸대. 그렇게나 못살게 달달 볶아대는 데도 치마를 절대 안 입는 건 물론인 데다가 말투까지 남 자 같으니 원. 애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너랑 대화하고 있으면 남자 친구랑 이야기하는 기분이래." "바라던 바니까 괜찮아." "넌 정말… 에휴. 그만두자." "에이, 왜 그래 친구~ 나 미워하지 말어~" 예안이 교태스럽게 웃으며 팔짱을 끼자 혜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 애 교에는 도대체가 안 넘어갈 수가 없다니까.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당장 에 넘어가 버렸을 거야. "예안이 넌 정말 알다 가도 모를 애야. 이성교제에는 전혀 관심 없지, 좋아하는 놀이는 남자애들처럼 컴퓨터 게임인 데다가 액세서리나 옷 같 은 것도 별로 관심 없고 남자 옷만 즐겨 입구. 거기다가 여자애의 즐거 움인 쇼핑은 아예 벌레보다 더 싫어하잖아?" 예안은 조금 뜨끔했지만 태연스럽게 둘러댔다. "남자처럼 커서 그래. 너도 나처럼 컸으면 이렇게 됐을 걸? 근데 혜인 아. 나 오늘 너희 집에 한 번 가도 되냐?" "으, 응? 우리 집?" 혜인은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당황했지만 미약한 반응이었기에 예안 은 그녀가 거북해하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나 궁금해. 한 번만 데려가 주라. 응?" "그, 그게… 그야 물론 안 될 건 없지만…" 입술을 깨물며 망설이던 혜인은 결국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가자." "탱큐~ 역시 혜인이는 하는 짓마다 예쁘다니까~" 네가 더 예뻐. 혜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 말이 나오려는 걸 꾹 눌러 참 았다. 그리고 속으로 걱정했다. '에이 설마 오늘 오기야 하겠어? 사실 그 동안도 거의 오지 않았잖아? 데려가도 괜찮을 거야.' 조금은 야윈 혜인의 안색은 어두운 수심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남자였을 때도 가보지 못한 혜인의 집에 간다는 설렘에 가득 찬 예안은 그걸 눈치 채지 못했다. 혜인에게 느끼고 있던 가슴 아픔은 시간이 꽤 흘러서인지 아니면 바로 곁에서 그녀와 친하게 지낼 수 있어서인지는 잘 모르지만 많이 사그라졌 다. 그래도 가끔, 아주 가끔, 진우로서의 자신을 그리워하는 혜인의 모습을 볼 때마다 까닭 없이 마음이 울적해지곤 했지만 그건 정말 가끔이었다. 이제 예안은 혜인을 스스럼없는 친구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것이 자신이 여자로 동화되어 간다는 걸 의미하는지, 아니면 유젤에 대 한 사랑이 점점 더 깊어 가는 걸 의미하는 건지는 몰랐다. 혜인의 집에 도착한 예안은 굉장히 놀랐다. 혜인이 꽤나 잘사는 집안 딸 이라는 건 진우였던 시절부터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와보니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는 완전 천지 차이였다. 이건 거의 크기만 중현의 집과 맞먹었 다. 예안은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너, 너 이런 대단한 집 딸이었냐? 굉장하다. 왜 한 번도 너네가 이런 부자라고 말 안 했어?" "그렇긴 한데… 별로 좋은 건 아냐." 그러나 혜인의 표정은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나 겸손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는 쓸쓸한 표정이었다. "너희 아버지가 무슨 대기업 사장이나 뭐 그런 거 하시나 보다? 굉장한 걸. 도호 삼촌도 이 정도는 아니었…" 예안은 얼른 입을 막고 혜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도호 삼촌이라는 말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일단 들어가자." 혜인이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을 들 어서니 가정부 아줌마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서 와. 배고프니? 저녁 지금 차려 줄까? 아니면 지금은 그냥 간식으 로만 해결하고 이따가 저녁 차려 줄까? 근데 이 아가씨는 누구야? 굉장 히 예쁘게 생겼네." "제 친구예요. 그리고 간단한 간식 몇 가지 주세요. 전 제 방에 가 있을 게요." "그래." 혜인의 뒤를 따라 이층에 올라온 예안은 집안 구석구석마다 묻어 있는 고급스런 자태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거기다 또 혜인의 방은 얼마나 넓 은가. 방안 가득 화려한 자태가 넘실거려 눈이 부실 정도였다. "너 이제 보니 완전 공주였잖아? 대단하네. 장난 아니다 정말. 넌 한 달 에 한 번씩 나오는 품위 유지비 같은 건 있으나마나겠구나?" "자꾸 그러지 마. 내가 대단한 게 아니라 우리 부모님이 대단한 분들이 셨던 거니까." "그런데 너희 부모님은 어디 계셔?" 그러자 혜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뭔가 실수했다는 걸 느낀 예안은 서 둘러 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혜인이 더 빨랐다. "돌아가셨어 두 분 다." "어, 그, 그래?" 이럴 때 딱히 해야 할 말이 생각 안 난다는 건 참 괴로운 일이다. 화제 를 돌릴 방법을 찾지 못한 예안은 어찌 해야 할 바를 몰라 버벅거렸다. "우, 우리 같이 목욕이라도 할까?"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시켜 보기 위해 던져 본 말이었는데 혜인은 금새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나 예안이 몸이 얼마나 예쁘게 생겼는지 그전부터 한 번 보고 싶었어. 나 그럼 가서 물 받아 놓을 테니까 기다리 고 있어." 예안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혜인은 총총총 욕실을 향해 가버렸다. 타이 밍을 놓친 예안은 멍하니 허공에 손을 뻗은 채로 굳어 있다 겨우 정신이 들었다. "으, 으악! 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거야! 예안이가 나, 날 어떤 놈 으로 보겠어?" 글쎄다. 아마도 저 세상에 있는 유젤은 애인이 자기가 준 몸을 갖고 금 단의 선을 넘어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지금쯤 땅을 치고 있을 지도 모르 지. "저, 절대 실수였어. 예안아 알지? 알지? 알지?" 예안은 그렇게 바로 옆에서 유젤이 듣고 있는 것처럼 애원조로 말했지 만, 글쎄다. 지금까지 지겹도록 누차 말했지만 영원히 동정 딱지를 뗄 기회를 잃어버린 동정남의 그 시커먼 속을 과연 그 누가 알겠어? "뭐해? 빨리 옷 벗어." 혜인의 재촉에 못 이긴 예안은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 옷을 하나씩 벗어 나갔다. 전에 사촌인 유혜민은 같이 목욕했을 때 자신의 알몸을 보고 굉 장히 놀랐는데 아마 혜인도 그럴 거라 생각하니 사뭇 긴장이 되었다. 옷을 완전히 다 벗고 알몸이 된 예안이 조심스레 다가오자 뜨거운 물을 끼얹다 말고 돌아본 혜인은 조금 놀랐다. "어? 예안아? 너…" "마, 말하지 마. 나도 부끄러우니까." 놀란 시선으로 예안의 알몸을 어루만지던 혜인의 입가에 이윽고 웃음이 떠올랐다. "뭐야, 너 아직 애였구나? 어쩐지 남자한테 영 관심이 없다 했네." 비록 몸은 완전히 성숙했다 하나 머리카락이나 눈썹 같은 걸 제외하고, 눈에 띄지 않는 부위를 비롯하여 몸에 털이 아예 없는 예안은 애라는 말 을 차마 부정하기가 그래서 얼굴만 잔뜩 붉혔다. "그런 거 아냐. 그냥 무모증 중 하나일 뿐이야. 나 사실 여기 털말고 솜 털 같은 것도 하나도 없어." "정말?" 예안의 팔뚝이나 배, 등 같은 곳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보던 혜인은 그 말이 사실임을 깨닫고 굉장히 놀랐다. "와, 너 정말 좋겠다. 어떻게 솜털 하나 없이 매끄러울 수 있니? 그래서 네가 그렇게 피부가 좋았던 거구나. 그러고 보니 모공도 하나 안 보이 네. 피부도 하얗고… 진짜 부럽다." "네 몸도 충분히 예뻐." 예안이 탕 속에 들어가 쭈그리고 앉자 혜인도 탕 속에 한 발 내딛으며 생긋 웃었다. "사실 얼마 전까지는 나도 내 얼굴하고 몸에 자신 있었는데 널 만나고 자신이 좀 없어졌어. 솔직히 같은 여자로서 좀 질투 나." 같은 여자로서 질투 난다라. 진우였던 시절에 혜인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줄 어디 상상이나 했었을까. "너 젖꼭지가 핑크빛이구나? 혹시 처녀니?" 혜인은 야릇한 미소와 함께 예안에게 몸을 기대왔다. 예안은 저도 모르 게 그만 얼굴이 붉어졌다. 유혜민과 함께 목욕했을 때와는 조금 달랐다. 한때는 진심으로 결혼하고 싶어했던 여자와 함께 목욕하고 있는데, 아무 리 지금 여자라고 해도 부끄럽고 묘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면 그건 말도 안 된다. "분홍색이라고 처녀라는 건 잘못된 속설이라고 들었는데." "그래? 난 처녀였을 땐 분홍색이었는데 경험하고 난 뒤에는 검은색으로 변하길래 정말인 줄 알았지. 아니면 그냥 단순한 우연인 걸까?" 혜인의 미소에는 뭔가 알 수 없는 쓰라림이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 예안 도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한때 좋아했었던 여자애의 입으 로 직접 이런 말을 듣는 건 결코 좋은 기분이 아니다. "그래도 너처럼 이렇게 예쁜 분홍색은 아니었어. 정말 부럽다. 피부도 하얗고 얼굴도 예쁘고… 솜털 하나도 없고… 머리카락도 빨간 색이고… 근데 너 언제까지 그렇게 모자 쓰고 있을 거야? 네가 밀짚모자 매니아인 건 이해하지만 목욕할 땐 좀 벗어." 아닌게 아니라 예안은 욕탕에 들어오면서까지 모자를 벗지 않고 있었다. 혜인이 손을 뻗어 모자를 벗기려 하자 예안은 난처한 표정으로 손을 살 짝 치웠다. "미안. 나 머리카락이 물에 젖으면 이상하게 되거든." "에이. 물에 젖는다고 이상하게 변한다는 게 말이나 돼? 그럼 넌 매일 머리도 못 감고 그러게? 거짓말하지 말고 얼른 벗어." "앗, 안 돼!" 하지만 예안이 미처 제지하기도 전에 혜인은 잽싸게 모자를 벗겨 버렸 다. 당황한 예안은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재빨리 추스르려 했지만 끝 부 분이 이미 물 속에 잠겨 버린 뒤였다. "나도 너처럼 이렇게 빨간 머리였으면 얼마나 좋… 어? 빨간 머리?" 한숨을 토해내며 예안을 부러워하던 혜인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엿 됐 다고 생각한 예안은 그만 눈을 질끈 감았다. 친척들을 제외하고는 더 이 상 머리카락에 관한 비밀을 알리기 싫었는데.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머, 머리카락이 어째서 초록색으로?" 예안의 머리카락은 물에 젖은 부분이 아름다운 초록빛깔로 물들었다. 싱 그러운 매력을 발산하는 예안의 녹색 눈동자와 흡사한 아름다운 초록색. 이루 말할 수 없는 신비함을 느낀 혜인은 그만 할 말을 잊어버렸다. "너… 어떻게 된 거니?" 이미 들켜버렸으니 어쩔 수 없겠지. 예안은 머리카락을 추스린 손을 천 천히 내렸다. 그 바람에 목덜미 아래에서부터 머리칼이 완전히 물에 잠 기며 초록 빛깔이 더 넓어졌다. 혜인은 형언할 수 없는 그 신비함에 그 만 매료되었다. "…네가 본 그대로야. 난 머리카락이 물에 젖으면 초록색으로 변해. 햇 빛을 쐬면 파란색으로 변하구. 그래서 평소에 모자를 쓰고 다녔던 거 야." 할 말을 잊어버린 채 멍하니 녹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혜인은 이윽고 마법에서 막 깨어난 공주처럼 활짝 웃었다. "예쁘다. 정말 아름다워. 예안이 넌 마치…" 혜인은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초록색으로 물든 예안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의 몸을 쓰다듬듯이 그렇게 천천히… "…천사 같아." 천사 같다라. 그러고 보니 유젤의 코드네임은 엔젤이었지. 어쩌면 유젤 에게 코드네임을 지어준 사람은 아마도 그 애의 아름다움과 신비한 머리 칼의 변화에 매력을 느껴 엔젤이라고 불렀던 게 아닐까? 목욕을 마치고 흰 가운을 입은 예안과 혜인은 이층 거실로 나왔다. 혜인 은 예안의 머리칼이 물기가 말라감에 따라 점점 타오르는 불꽃처럼 붉은 색으로 변하는 광경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진짜 예쁘다." "…같은 소리도 계속 하면 지겨운 법이야." "하지만 너무 예쁜 걸. 정말 부러워. 탐나는 머리카락이야. 나도 그런 머리카락이었으면 정말 좋을 텐데. 왜 지금까지 그걸 숨기고 다녔니?" "사정이 좀 있어서 그래. 그리고 난 특별히 눈에 띄는 걸 별로 좋아하지 도 않고. 이거 사실 세현이 녀석도 모르는 거니까 너 다른 애들한테 절 대 말하지 마라." 세현이도 모르는 거니까라는 말은 뭔가 의미심장한 뉘앙스를 풍겼다. 그 러나 그거 갖고 꼬투리 잡아 놀렸다가는 펄펄 뛸 게 뻔했기에 혜인은 내 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햇빛을 쬐면 파란색으로도 변한다고 했지? 한 번 보여줄 수 있 어? "에… 그게… 좋아. 뭐 이미 다 까발렸는데 어려울 것도 없지." 예안은 이층 베란다로 다가갔다. 햇살이 노출되자마자 예안의 머리카락 이 순식간에 청초한 파란색으로 변하자 혜인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정말 예쁘다. 넌 머리카락 색이 변할 때마다 이미지가 확 변하는구나." 예안이 거실로 돌아오자 머리카락 색은 다시 붉게 변했다. 혜인의 눈동 자는 아주 신기한 장난감을 눈앞에 둔 아이처럼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내 이미지가 변한다고? 어떤데?" "음… 그게 그러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난 뒤 혜인은 다시 말했다. "빨간 색일 때는 굉장히 정열적이고 성숙한 이미지야. 뭐랄까. 좀 요염 해 보인다고 할까?" "그래?" "초록색일 때는 마치 인어처럼 신비한 듯한 느낌이었어. 그리고 파란색 일 때는 굉장히 청초한 느낌이야.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랄까?" 예안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빨간 색은 요염하고 초록색은 신비하고 파란색은 청초하다라. 그럼 검 은색으로 변하면 어떤 느낌일 것 같아?" "어? 검은색으로도 변하니?" "어. 어느 정도 어두워지면 검은색으로 변해." "와, 진짜 신기한 머리카락이다. 나도 그런 머리카락이었으면 정말 좋을 텐데. 부럽다." 혜인이 감탄하면 감탄할수록 예안은 기분이 점점 더 좋아졌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누구나 부러워하고 사랑하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여자라 는 사실에 어찌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칭찬 고마워, 김혜인. 사실 난 내 얼굴하고 내 몸이 정말 좋아.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준 거라서 말이야." "아… 그러니?"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준 얼굴과 몸이라서 정말 좋아한다면 그 사람은 부모님을 말하는 걸까? 하지만 예안의 눈빛은 부모님을 생각하고 그리워 한다기보다는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떠올리고 있는 것처럼 알싸한 아련 함이 묻어났다. 혜인은 조금 의아함, 그리고 예안과 자신 사이에 묘하게 펼쳐진 거리감을 느끼고 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오늘 시험은 잘 봤냐?" 쑥스러움을 무마시키기 위해 예안은 화제를 돌렸다. "아까 말했잖아. 몇 개 밀려 써서 엄청 못 봤다고. 휴. 내신 떨어질까 고민이야. 하긴 어차피 시험 쳐서 대학 갈 거니까 상관은 없을 테지만. 게다가 아직 1학년이고." "나는 이번 시험 반 10등 안에 드는 게 목표야. 내가 평소에 공부를 너 무 못해서 이번에는 한 번 바꿔보려고 죽어라고 공부했는데, 잘 될까 모 르겠네." "열심히 했으니까 결과도 좋을 거야. 혹시 알아? 예안이 네가 전교 1등 이라도 떡 차지할지?" "에이, 설마. 아무리 행운이 겹친다 해도 그렇게까지야 되겠어? 찍어서 다 맞을 확률은 진짜 벼락 맞을 확률보다 적을 텐데." 하지만 늘 그렇듯이 설마라는 건 언제나 예기치 못한 곳에서 사람 뒤통 수를 치는 법이다. 예안은 이런 간단한 진리를 너무나도 자주 망각하곤 한다. - 딩동 딩동 갑자기 초인종이 울리자 시종일관 웃고 있던 혜인의 얼굴이 핼쑥하게 굳 어버렸다. 뭐야? 초인종이 울렸다고 왜 저래? 이해할 수 없는 혜인의 반 응에 예안은 어리둥절했다. "너 왜 그래?" "아, 아니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혜인은 초조한 안색으로 일 층 쪽을 살폈다. 잠시 후 가정부가 난처한 표정으로 올라왔다. "혜인아. 재호 학생 왔는데." 그 순간 가뜩이나 초조한 혜인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뭐가 어 떻게 된 건지 어리둥절한 예안은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혜인의 손을 얼 른 붙잡았다. "혜인아. 왜 그래? 재호라는 사람한테 뭐 돈이라도 빚진 거야?" 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문 열어 줄까?" "…열어주세요." 가정부는 '정말 그래도 되나?'하며 걱정스런 안색으로 다시 일층으로 내 려갔다. 혜인은 쓰러질 듯한 몸을 이끌고 베란다로 갔다. 잔뜩 궁금한 기색으로 혜인을 뒤따라간 예안은 한 청년이 정원을 가로지르는 걸 볼 수 있었다. "저 사람이 재호라는 사람이야? 근데 정말 왜 그런 거야?" 혜인의 안색은 굉장히 어두웠다. "아무것도 아니야. 예안아, 넌 잠깐 내 방에 들어가 있을래?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방에서 나오면 안 돼. 절대 안 돼." 내가 방해가 된다는 걸까? 하지만 혜인의 표정은 그렇다기보다는 마치 소중한 물건을 강도에게 보이기 싫어한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뭔가를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예안은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님을 깨닫고 얼른 혜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초조한 안색으로 이리 저리 서성거리던 예안은 결국 참지 못하고 유니콘 에게 물었다. "유니콘. 너 혹시 도청 같은 거 가능하냐?" 「그게 불법이라는 건 아시겠죠?」 "알지만… 그냥 왠지 내가 알아야 할 것 같아. 혜인이한테 못된 짓이라 는 건 알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불법이라고 해도 경찰에 걸리지만 않으면 되거든요. 따지 고 보면 시트날타도 엄연히 불법집단이나 다름없습니다. 유젤 님도 마찬 가지구요. 그냥 제가 한 번 해본 소리입니다.」 경찰에만 걸리지 않으면 된다고? 유니콘이 어느새 그런 인간들만의 보편 적인 진리를 터득하고 있다는 사실에 예안은 조금 놀랐다. "시트날타가 불법집단이라는 건 인정하겠는데 나는 왜 그렇다는 거냐?" 「한국에서 개인이 저 같은 전투머신을 소유하는 건 엄연히 불법이지요. 게다가 유젤 님은 신분까지 완벽하게 위조하지 않으셨나요? 그것 역시 불법이 아닌가요?」 골치가 지끈거린 예안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런 이야기는 그만 두고 빨리 도청이나 좀 해 봐." 「알겠습니다. 소리를 크게 할 수는 없으니 원격장치를 귀에 가까이 가 져다 주십시오.」 예안은 얼른 왼손목에 채워진 원격장치를 왼쪽 귀에 가까이 가져다 댔 다. 그러자 일층에서 이뤄지는 혜인과 재호라는 남자의 대화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왜 또 왔어요! 내가 다신 꼴도 보기 싫다고 그렇게 말했잖아요!」 「저런 저런.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명색이 약혼잔데 너무 그렇게 쌀쌀 맞게 대하는 거 아니야?」 「웃기지 마요! 당신이 어째서 내 약혼자야!」 「이런이런. 우리의 그 뜨거웠던 밤을 그새 잊어버린 거야? 난 아직도 그날 밤 네가 내던 신음소리가 잊혀지지 않아 밤마다 욕구불만에 시달려 괴로워 죽겠는데 말이야.」 혜인이 울 듯한 목소리로 악을 쓰는 게 들려왔다. 「웃기지 마! 내가 언제 그랬어! 당신이 날, 날 강제로 덮친 것뿐이잖 아! 난 당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제일 증오스러워! 어서 사라져 버리란 말이야!」 잠시 동안 아무런 대화도 들리지 않았다. 혜인이 억지로 울음을 눌러 참 는 소리만 슬프게 들려왔을 뿐이다. 예안은 잔뜩 충격 받은 채 중얼거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무슨 소리지? 약혼자? 뜨거웠던 밤? 강제로 덮친 것뿐? 이 세상에 서 당신을 제일 증오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도대체 혜인이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저 재호라는 남자는 또 누구야? 「아악! 뭐하는 거야! 저리 꺼져!」 「너무 그렇게 빼지 말라고. 이미 한 번 안아본 몸을 다시 한 번 안아보 는 건데 뭐 어때?」 「저리 비켜! 경찰을 부를 거야!」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하든지. 어차피 너한테는 도움이 안 될텐데.」 「비키란 말이야!」 예안은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예안은 한 쪽 벽에 세워진 야구방망이를 들고 일 층으로 뛰어내려갔다. 일 층 거실 바닥에는 가운이 찢어진 채 쓰러져 있는 혜인과, 그녀의 몸 위에 엎드린 움직이지 못하게 꽉 붙잡고 있는 재호라는 청년이 있었다. 한쪽 구석에 선 가정부 아줌마는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저리 비켜 이 자식아!" 그 광경에 불같이 화가 난 예안은 생각할 것도 없이 야구배트를 가로로 휘둘러 재호의 머리를 노렸다. 재호는 이크 하면서 가볍게 예안의 공격 을 피해냈다. 살짝 뒤로 물러난 재호가 몸가짐을 바로잡을 때 예안은 죽 일 듯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며 혜인에게 나직이 말했다. "혜인아, 얼른 일어나." "으, 응…"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쓰러져 있던 혜인은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넌 이층으로 올라가 옷이나 갈아입고 나와. 그리고 얼른 경찰에 신고 해." "하, 하지만 네가 위험할 텐데…" "난 신경 쓰지 말고 얼른!" 날카로운 예안의 비명에 혜인은 잠시 망설이다 결국 이층으로 올라갔다. 예안은 야구배트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재호를 노려보았다. "넌 어떤 할 일 없는 개자식이길래 남의 집에 와서 사람을 덮치려 드냐? 어디 한 번 강간미수죄로 감옥에 들어가서 푹 썩고 나와 봐라." 재호는 경찰을 두려워하는 태도가 전혀 묻어나지 않는 야릇한 미소를 가 득 짓고 있었다. "내가 감옥에 들어간다고? 웃기는군. 법이라는 건 참 오묘해서 힘없는 사람보다는 힘있는 사람의 손을 들어주기 마련이지. 잘만 손을 쓰면 연 속살인죄도 없었던 걸로 할 수 있는 게 돈의 힘이야. 하물며 강간미수처 럼 증거도 별로 없고 대단하지도 않은 걸 가지고 내가 과연 감옥에 갈 수 있을까? 오히려 네가 폭행미수죄로 감옥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염려 하는 게 좋아." 그러면서 재호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예안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소름 끼치는 그 시선에 예안은 순간적으로 오싹한 공포를 느꼈다. 그가 지금 자신의 알몸을 떠올리며 음탕한 상상을 하고 있다는 걸 얼핏 느꼈지만, 분노하기보다는 그 징그러운 시선에 몸이 오그라들었다. 어떤 의미에서 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호오. 혜인이한테 이런 굉장한 미인 친구가 있었을 줄은 몰랐군. 어때? 나랑 오늘 한 번 같이 즐겨보지 않겠어? 아니면 이참에 내 정부가 되는 건 어때?" "뭐, 뭐, 뭐라고?" 어이가 없어진 예안의 머리 속에 곧이어 자리잡은 건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유젤의 몸을 희롱한 데 대한 분노였다. "웃기지 마 이 자식아!" 분을 참지 못한 예안은 생각할 것도 없이 야구배트를 휘두르며 달려들었 다. 하지만 웬걸. 재호는 전혀 피하지 않고 그대로 어깨에 야구 배트를 얻어맞은 뒤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이렇게 되자 당황한 건 오히려 예안 이었다. 아까는 그렇게 잘 피했으면서 이번엔 왜 가만히 얻어맞은 거지? 해답은 곧 나왔다. "어라?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강간하려고 한다는 신고를 받고 출 동했는데?" 제복을 입은 채 현관에 들어선 두 명의 경찰은 거실에서 벌어진 광경에 어리둥절했다. 죽을 듯이 아프다는 표정을 지은 채 어깨를 움켜쥐고 있 던 재호는 악을 썼다. "보면 모릅니까! 난 약혼자랑 그냥 사랑을 나누려고 했을 뿐인데 이 여 자가 완전히 오해하고 날 야구배트로 때렸다구요! 다행히 내가 잘 피해 서 어깨에 맞고 끝났지, 머리에 맞았으면 그대로 죽었을 수도 있단 말입 니다!" "뭐, 뭐, 뭐?" 분노가 골수를 찌르면 할 말이 없어지는 건 모든 인간의 공통점인가 보 다. 예안은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야구배트를 툭 떨어뜨렸다. 경찰이 온 소리를 듣고 이층에서 내려온 혜인은 끝났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비틀거리는 게 굉장한 쇼크를 먹은 것 같았다. "빨리 연행해 가세요." "아, 예, 예…" 어찌 되었든 간에 경찰들의 눈에 비친 상황은 예안이 야구배트로 재호를 때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죽일 듯한 시선으로 재호를 노려보는 예 안의 어깨를 밖으로 잡아끌었다. 반항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는 예안은 이를 바드득 갈면서도 순순히 끌려나갔다. 경찰들이 밖으로 나가자 재호는 얼굴에 띄우고 있던 고통스러운 빛을 지 워버렸다. 그리고 계단에 서서 어쩔 줄 몰라하는 혜인에게 히죽 비웃음 을 보냈다. "경찰에 연락을 하면 어떡해? 내가 말했잖아. 함부로 경찰 같은 걸 부르 지 않는 게 좋다고. 그나저나 네 친구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경찰 사이 렌이 울린 걸 듣지도 못한 모양이군. 어쨌든 기대해도 좋아. 감히 유한 그룹의 후계자를 폭행한 죄는 합의금만으로 풀려날 수 없을 테니까." 혜인은 눈물이 글썽인 채 그만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무리 발버둥쳐 봐 도 이 남자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나 보다. 경찰에 불려오자마자 예안은 조사를 받았다. "왜 때렸어?" "그, 그게 그 녀석이 제 친구를 강간하려 해서…" "이 철없는 아가씨야. 당신이 폭행한 사람이 누군지 알기나 해? 유한 그 룹 회장의 맏손자라구. 얼마 안 있으면 유한 그룹 회장으로 취임하는 사 람이란 말이야. 그런 대단한 사람을 때렸으니 무사히 넘어갈 생각은 버 리는 게 좋아." 예안은 억울했다. "하, 하지만 그 재수 없는 자식이 내 친구를 강간하려 했다구요!" "아가씨 친구라는 학생이 김재호의 약혼녀라더군. 아가씨는 어이없는 사 랑싸움에 끼어 든 것 뿐이야." 말도 안 돼. 도청한 대화를 들어보면 다정한 약혼 관계 따위는 분명 아 니었다. "쯧쯧쯧. 그나마 상대가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합의만으로 어떻게 풀려날 수 있을 텐데, 지금 상대방은 감옥에 처넣는다고 완전 난리야. 돈 같은 건 필요하지도 않으니 단단히 혹독한 맛을 가르쳐 주겠다고 벼르고 있다 구. 나중에 대리인이 오면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 알았어?" 경찰은 예안이 안쓰러운 듯 그렇게 충고해줬다. 하지만 예안은 머리 속 이 분노로 하얗게 비어 버린 뒤였다. "저기… 예안아." 그때 뒤에서 혜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안의 진술을 듣고 있던 경찰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 아가씨 친구인가요? 지금 조사 받는 중이니 면회는 안 됩니다. 얼른 가주세요." "저기, 잠시만요. 잠시만 이야기하게 해주세요. 네?" "안 된다니까요. 얼른 나가세요."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예안인 저 때문에 이렇게 됐다구요. 잠시만 이야기하게 해주세요. 네?" 혜인의 간절한 부탁에 경찰은 눈살을 찌푸리며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럼 딱 십 분만 이야기하세요.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원래는 절대 안 되는 건데 특별히 사정 봐주는 건줄 아세요." "고맙습니다." 경찰이 자리를 비켜준 뒤 예안은 분노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도대체 그 재호란 자식은 뭐냐? 그 자식이 뭔데 널 강간하려 했으면서 그렇게 잘했다고 큰소리 뻥뻥 치는 거야?" "그게…" 자신에 대한 건 남에게 떳떳하게 대놓고 이야기할 성질이 아니었기에 혜 인은 한참 동안 망설였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이 지경까지 된 예안은 충분히 들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에 혜인은 결국 고개를 숙인 채 풀죽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실은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멋대로 약혼한 사이였어. 부모님이 돌아 가시고 난 뒤에 내가 분명히 결혼하기 싫다고 말했거든. 그런데 저렇게 막무가내로 날…" "그 녀석이 전에 널 한 번 강간했다며?" 혜인은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 "이층까지 소리가 다 들리더라. 그런데 너 왜 그때 그 녀석 신고하지 않 았냐?" 혜인은 괴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신고했어. 그런데 아직 약혼한 사이인 데다가 상대방이 너무 거물이라 서 경찰은 그냥 사랑싸움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으로만 생각해 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어. 재호라는 사람에 비하면 난 너무 힘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 재호라는 자식 알고 보니까 엄청 대단한 재벌집 후계자라던데? 그런 녀석이 도대체 왜 너를 그렇게 괴롭히는 거냐? 넌 부모님도 안 계시다 며? 보통 그런 집안에서는 부모님 없는 여자애 탐탁하지 않게 여기지 않 냐?" "그게…" 한참을 망설이던 혜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부모님이 나에게 물려준 유산이 좀 있어." 예안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녀석도 돈이라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을 거 아냐? 근데 겨우 돈 때 문에 널 이렇게까지 괴롭힌단 말야?" "부모님이 물려주신 건 돈이 아니야. 주식이야." "주식?" "재호라는 사람은 유한 그룹의 후계자인데, 부모님이 내게 물려주신 주 식은 유한 그룹에서 제일 우량기업인 유한전자 총 지분의 약 1.5%야. 앞 으로도 안전하게 경영권을 확보하려면 유한 그룹에서는 내가 가진 주식 을 탐낼 만도 하잖아. 그래서 저렇게까지 날 잡으려고…" "널 강간했었다 이거지?" 혜인은 비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안은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모님을 잃고 혼자가 된 여자애를 따뜻하게 보살펴 주지는 못할망정 경영권 안정을 위해 주식을 탐낸다? 그래서 결혼하기 싫다고 하는 여자애를 강간까지 한다고? 그게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 할 짓인가? 무엇보다 혜인은 엄연한 피해자의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예안을 더욱 분노케 했다. "그 주식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데 그래? 그냥 팔아버려. 그러면 해결되 는 거 아냐?" "팔고 싶어도 아직 내 소유가 아니라서 그렇게 못해. 내가 법적으로 성 인이 되어야 내 맘대로 할 수 있거든. 그래서 재호라는 사람은 그 안에 나랑 결혼하려고… 저렇게…" 혜인은 잔뜩 풀이 죽은 채 고개를 떨어뜨렸다. 친구가 자신 때문에 이렇 게까지 됐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무척 분했나 보다. '그랬구나… 그랬던 거구나… 그런데 난 너한테 험한 말까지 했으니…' 옛날에 진우였을 때 자신이 혜인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생각난 예안의 얼 굴은 죄책감으로 뒤덮였다. 아마도 두 사람이 처음으로 여관에 갔었을 때일 것이다. 의도적으로 데 리고 간 건 아니었고, 휴일날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나와 밤늦게까지 놀다 보니 그만 지하철이 끊긴 뒤였다. 서울까지 간다는 택시도 없고 해서 결 국 두 사람은 근처의 여관을 잡고 들어갔다. '진우'는 혼전 순결을 가능한 한 지키자 주의였지만 서로 책임질 수 있 다면 혼전 성관계도 용납된다고 평소에 생각해왔다. 가능하면 혜인의 몸 을 아껴주고 싶었던 그는 혜인은 침대에서 자게 하고 자신은 밑바닥에서 자려고 했다. 하지만 남녀 관계라는 게 어디 꼭 이성적으로만 되는 것인 가? 부끄러움을 참아가며 혜인이 같이 자자고 하는 바람에 결국 두 사람 은 만리장성을 쌓기 직전까지 갔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막 하나로 맺어지기 직전에 혜인은 힘들게 자신이 처 녀가 아니라고 고백을 했다. 그건 아마도 완벽하게 과거와 결별하고 진 우와 깨끗하게 시작하고 싶어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우는 도저히 그녀를 용납할 수 없었고, 결국 그날 곧바로 진우 는 이별을 선언하고 여관을 나와 버렸다. 함부로 몸을 굴리는 여자를 진 우는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 역시 철저한 순결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나온 떳떳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만약 혜인이 자발 적 의사로 순결을 잃은 게 아닌, 강간으로 상처받은 거였다는 걸 알았으 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젠장…' 예안은 혜인에 대한 안타까움과 재호에 대한 증오, 그리고 아무것도 모 른 채 혜인에게 함부로 상처를 안겨준 자신에 대한 비참함이 가슴을 억 누르는 걸 느꼈다. '뭐야, 성폭행 당한 거였다면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왜 그걸 꼭꼭 숨겨 갖고 나만 나쁜 놈으로 만들었냐고…' 혜인이 만약에 강간으로 순결을 잃은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녀를 이 지경 까지 되도록 혼자 두지 않았을 거라 생각이 자꾸 솟아오른다. 예안은 울 듯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진우라는 녀석이 널 찬 거야?" 혜인은 고개를 숙인 채 가볍게 끄덕였다. 어깨가 바르르 떨리는 걸 봐서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 진우라는 녀석 참 나쁜 놈이네. 자기 여자친구가 상처받은 일이 있 으면 아껴주고 위로해줄 생각은 안 하고 그렇게 잔인하게 절교 선언 해 버리다니." "아니야. 진우는 그런 애가 아니야." 혜인은 눈물 젖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내가 강간으로 처녀를 잃은 거였다고 말했으면 진우는 아마 날 더 사랑 해줬을 거야. 걔는 그런 애야.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뭐? 바보야, 왜 강간당한 거라고 안 했어? 왜 그때 일부러 전에 사귀던 다른 남자랑 같이 잔 적이 있다고 거짓말한 거야?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거냐구? 왜 그랬어?" 예안의 목소리는 거의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너… 어떻게 그걸 알았어?" 혜인은 어느새 눈물을 그쳤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지울 수 없는 강한 의 구심이 묻어났다. "난 너한테 내가 처녀가 아니어서 진우가 날 찬 거라고만 말하지 않았 니? 사귀던 다른 남자랑 같이 잔 거라고 진우한테 거짓말했다는 말 너한 테 한 적은 없는데…"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소스라치게 놀란 예안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 라 그만 시선을 돌려 버렸다. 혜인은 '설마'하면서도 추궁하듯 예안에게 물었다. "너… 진우랑 무슨 사이야? 왜 네가 그런 걸 알고 있어? 그건 진우 말고 는 아무도 모르는 건데… 내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네 가 그걸 알고 있는 거야?" 혜인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경찰서를 나섰다. 슬픔에 찬 예안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나중에 알려줄게. 일단 넌 집으로 가.」 혜인은 한 번 더 예안을 재촉하려 했지만 예안은 말없는 슬픔의 눈길로 그저 쳐다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결국 혜인은 뭐라 더 말하지 못하고 그 만 경찰서를 나와 버렸다. 아마도 예안이 사실대로 말해준다 해도 끝까 지 들을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진우와 예안이 서로 사랑하던 사이라는 말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 "유진우…" 문득 발걸음을 멈춘 혜인은 힘없는 눈길을 들어 파란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지만 이상하게 더욱 더 슬프게 느껴지는 푸른 빛깔. 생각해보니 진우는 이런 푸른 하늘은 너무나 밝고 행복해 보 여서 싫다고 했지. 아직 자신에게는 이런 푸름을 만끽할 자격이 없다고 항상 투덜거리기만 했었다. 집에 돌아온 혜인은 방에 틀어박혔다. 서랍 속에 소중히 간직해 둔, 진 우가 예전에 주었던 반지를 꺼내 두 손에 꼭 쥔 혜인은 마침내 참고 있 었던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진우야…" 이미 죽었다는 건 알지만 잊혀지지 않는 얼굴이 또다시 생각난 혜인은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참지 못했다. 참을 수 없었다. 인간은 아 픈 만큼 성숙한다고 하지만 자신은 예전에 그와 깨어진 후 성장도 퇴화 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그대로 제자리에만 머물러 있는 것만 같았다. "왜 죽은 거야… 바보…나 많이 힘들단 말이야…" 경찰은 멍한 얼굴로 앉아 있는 예안을 취조했다. "그러니까 빨리 집 전화번호를 대라니까. 언제까지 이러고만 있을 거야? 이러고 있어봤자 아가씨한테 좋을 거 하나도 없어. 어떻게 해서든지 합 의를 봐서 풀려 나와야 할 거 아냐? 아가씨 소년원에 가고 싶어?" 예안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제발 이러지 말라구. 나도 아가씨가 정말 재수 없게 걸리고 또 안됐다 는 거 인정해. 하지만 이 나라 구조가 그런 걸 어쩌겠어? 아니, 우리나 라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다 그래. 법은 무조건 돈 있고 힘있는 놈 편 들어주기 마련이라구. 아가씨는 가능한 한 피해를 덜 입도록 해야 할 거 아냐?" 한참 동안 예안을 들볶았지만 별다른 대답을 얻어내지 못한 경찰은 결국 한숨과 함께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 멍하니 앉아 있던 예안은 누 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짚는 걸 느끼고 등을 돌렸다. 처음 보는 남자가 안경을 끼고 손에는 서류 가방을 든 채 서 있었다. "한지섭이라고 합니다. 변호사입니다. 김재호 씨 대리인 자격으로 왔습 니다." 예안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아시다시피 김재호 씨는 재벌3세라 돈으로 합의할 생각은 없습니다. 물 론 이대로 구속되기 싫으시다면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김재호 씨는 언제든 고소를 취소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 이 있지요." 예안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오늘 당장이라도 고소를 취소시켜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단 경찰서에서 풀려난 즉시 이곳으로 오라고 하시더군요." 변호사는 한 장의 약도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유한 그룹 소속 호텔의 위 치와 몇 호실로 오라는지까지 표시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세상 물정을 안다면 의도를 알만한 요구였다. 재호라는 인간은 정말 뼛속까지 썩은 놈이었다. "경찰 아저씨." 묵묵히 변호사의 말을 듣고 있던 예안은 담배를 다 피우고 들어온 경찰 에게 말을 건넸다. 경찰은 아까 혜인이 왔다 간 뒤로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예안이 드디어 입을 열자 얼굴을 폈다. "그래, 드디어 말할 결심이 생겼어?" "전화 한 통화만 하게 해주세요." "좋아. 부모님께 한시라도 빨리 연락하는 게 좋다니까." 경찰은 전화기를 예안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수화기를 집어든 예안은 변 호사를 흘끗 쳐다보고는 피식 비웃음을 지었다. 변호사의 무표정이 어리 둥절함으로 뒤덮이는 걸 만족스럽게 지켜본 후 예안은 번호를 꾹꾹 눌렀 다. 이윽고 신호음이 끊기자 예안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장관님. 저 서예안인데요. 지금 경찰서에 있어요." 장관 님? 변호사의 경찰의 안색이 휘둥그레졌다. 예안이 전화를 끊고 나서 채 오 분도 지나지 않아 경찰서장은 곧바로 위 에서 지시를 받았다. 두말할 것 없이 예안을 놓아주라는 지시였다. 여태 껏 예안을 취조하고 있던 경찰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예안은 자신을 취조한 경찰에게 나직이 말했다. "경찰 아저씨." "으, 응?" "아저씨가 말한 게 맞아요. 이 세상은 돈 있고 힘있는 사람 편만 들어준 다는 거요. 그렇지만 힘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나보다 아래 있는 사람들 을 깔아뭉개는 건 옳지 않아요." "그, 그래 그렇긴 하지…" 예안은 훗 하는 비웃음을 베어 물었다. 찰랑거리는 붉은 머릿결까지 함 께 비웃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힘이 없다고 해서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것도 옳지 않아요. 그건 패배근성에 불과하거든요. 아무런 잘못을 한 게 없는데 왜 힘이 없다는 이유로 참기만 해야 돼요? 차라리 같이 그 녀석 을 찌르고 난 뒤 나도 죽으면 그만이잖아요?" 여고생이 입에 담기에는 뭐랄까. 싸늘함이 느껴지는 섬뜩한 말투였다. "그리고 변호사 아저씨." 예안은 의외의 사태에 놀라고 있는 변호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난 정의를 신봉하는 이상주의자는 물론 아니에요. 하지만 솔직히 김재 호라는 사람이 마음이 드는 건 절대 아니거든요? 그 사람에게 전해주세 요. 유한 회장은 올해를 넘기지 못하고 퇴임하게 될 거라고요." 바로 오 분 전에 예안이 이런 말을 했다면 아마 변호사는 헛소리로 치부 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유한 그룹 후계자 폭행죄로 걸려들어 왔는데 전화 한 통화로 풀려나게 된 예안을 이제 더 이상 가볍게 여길 수 없었 다. 물론 유한 회장을 강제로 퇴임시키겠다는 발언이 그대로 이루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지닌 건 분명했 다. "이 한 마디도 꼭 전해주세요. 내가 그 김재호 자식을 망쳐놓으려고 하 는 건 정의 수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요. 그 녀석은 내 친구를 더럽혔고, 또 나를 모욕했으니까."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어안이 벙벙한 변호사를 뒤로 남겨둔 채 예안은 그대로 경찰서를 빠져 나왔다. 집에서 초조한 안색으로 잠도 이루지 못하고 서성거리던 혜인은 밤늦게 예안이 찾아오자 깜짝 놀랐다. 어떻게 벌써 풀려난 거지? "예안아? 어떻게 된 거야?" "그럴 일이 좀 있어. 이래 뵈도 내가 빽이 좀 있거든." "하지만 상대는 유한 그룹 후계자인데…" 예안은 피식 웃었다. "그 녀석이 나더러 뭐라고 했는지 알아? 변호사 보내서 자기랑 하룻밤 자주면 고소를 취소해주겠단 말을 전하더라. 뼛속까지 썩은 놈이야. 너 그 녀석하고 약혼 취소한 건 정말 잘 했어. 결혼해봤자 평생 눈물로 날 밤 지새울 게 뻔하다구." "그, 그게…" 혜인은 어쩔 줄 몰라하더니 조그맣게 대답했다. "사실 아까 결혼하겠다고 약속해버렸어. 전화가 왔었거든." 예안은 깜짝 놀랐다. "뭐어? 너 미쳤어?" "그, 그렇지만 그렇게 안 하면 널 그대로 소년원에 보내버리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 잘 기억해 둬라 유진우. 네가 잔인하게 차버린 여자애는 이렇게나 착하 고 상냥하다는 것을. 쓰린 가슴을 어루만지는 예안의 녹색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적어도 느려터진 굼벵이는 아니라 이거지. 좋아, 이런 자식일수록 망가 뜨리는 재미가 있지. 혜인아. 그 자식한테 당장 전화 걸어서 취소해 버 려. 그런 쓰레기는 절대 가만 둬선 안 돼. 감히 어디서 내 친구를…" 예안이 차가운 톤으로 그렇게 중얼거리자 혜인은 조금 불길함을 느꼈다. 이건 자신이 아는 친구의 모습이 아니었다. "예안아?" "기다려 김재호. 네 인생을 철저히 망가뜨려 주겠어. 내가 못할 줄 알 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내가 예전에 좋아했던 여자애의 몸을 더럽힌 죄 는 백 배로 쳐서 갚아주마. "예…안아?" 한순간이었지만 혜인은 예안의 방금 그 표정이 언젠가 한 번 봤었다고 느꼈다. 아, 맞다.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서 원 망에 불타오르던 진우의 그 눈빛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꿀꺽. 혜인은 예안에게 진우와 무슨 사이냐고 반드시 물어봐야겠다는 아까의 결심도 잊어버린 채 불길한 섬뜩함을 느꼈다. "미안. 내가 너무 화를 냈지?" 언제 분노했느냐는 듯 예안이 생긋 웃으며 목에 팔을 감아오자 혜인은 당황하기까지 했다. 이거 방금 전이랑 너무 다르잖아? "넌 조금도 걱정할 것 없어 혜인아. 정 안 되면 킬러에게 부탁해서 김재 호를 죽이는 일이 있더라도 내가 잘 해결해줄게." 킬러가 어디에 사는지 알기나 하는 거야? 혜인은 그만 픽 웃고 말았다. 아직 조금 어색함이 남아 있긴 했지만 비로소 예안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아 마음이 편안했다. "그런데 예안아. 나 물어볼 게 있어." 예안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팔을 풀고 혜인에게서 떨 어졌다. 혜인은 예안의 녹색 눈동자를 똑바로 주시했다. "너 진우랑 무슨 사이야?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마. 넌 나와 진우가 아 니면 몰라야 하는 걸 알고 있었어. 난 너한테 말해준 적 없으니 진우한 테 들은 거겠지? 사실대로 말해 줘. 진우와 무슨 사이야? 왜 그동안 진 우를 모르는 척 했어?" "휴.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예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느덧 많이 침착해진 표정이었다. "사실 진우 아버지랑 우리 아버지는 굉장히 친한 사이셨어. 너한테 말은 안 했지만 난 태어났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아버지 밑에서 컸거든. 그런데 얼마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바람에 진우 아버지가 나를 딸로 입양하셨어. 그전부터 서로 왕래를 했기 때문에 진우랑도 어느 정도 아 는 사이고." 여기까지 오면서 미리 준비했던 거짓말을 혜인은 별다른 의심 없이 그대 로 받아들였다. "그랬구나." 혜인의 표정은 굉장히 쓸쓸해 보였다. 무언가 묻고 싶은 말이 더 있는데 억지로 참는 것 같았다. '진우랑 무슨 사이였니? 정말 단순히 아는 사이에 불과한 거야?' 혜인은 당장이라도 예안에게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진우는 죽고 없는데 그렇게 추궁했다가는 소중한 친구마저도 잃을 것 같아 겁이 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 친구 집인데 여기서 자고 내일 학교 갈게. 남자 아니야! 여자야! 어. 응 알았어. 응. 그래, 잘 자." 예안이 전화를 끊고 난 뒤 잠옷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던 혜인이 물었 다. "진우 아버님이시니?" "…응." "전화하는 것만 들어서는 도저히 양아버지와 양녀 관계 같지가 않구나. 굉장히 친해 보여." 예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남들이 좀 친해 보인다고는 해. 꼭 친 부모자식지간 같다는 말 자주 듣 는 편이야." "그래…" 혜인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혹시라도 쓸데없는 생각(예 를 들면 예안이 진우라고 생각한다던가)을 품고 있는 건 아닐까 지레 겁 이 난 예안은 얼른 혜인의 목을 껴안으며 눕혔다. "자자. 자자. 쓸데없는 고민은 그만하고 자자. 내일 학교 가야 되잖아. 게다가 김재호 그 자식 코도 납작하게 만들어 줘야 하구. 앞으로 할 일 이 산더미 같이 많이 남았다구." 혜인도 밝은 미소와 함께 예안의 몸을 바싹 끌어안았다. 따뜻한 온기가 마음 속까지 데워주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운명이란 참으로 묘한 것 인가 보다. 이렇게 여자가 된 후에야 혜인이랑 편안하게 같이 잘 수 있 게 될 줄 언제 한 번 상상해보았을까? 향긋하게 느껴지는 혜인의 체취에 몸을 맡기며 예안은 속으로 유젤에게 깊이 사과했다. '미안해 예안아. 그렇지만 이번 한 번은 봐줄 수 있지? 내가 혜인이한테 못할 짓을 많이 했으니까 이번 한 번만 같이 자는 거 봐줘. 응?' …정말 지겹도록 말하고 또 말하는 이야기지만, 그냥 단순히 자신이 좋 아서 혜인이랑 같이 자는 건지 아닌지 그 누가 안단 말인가? 동정남의 그 시커멓고 음흉한 속을 아는 사람은 동정남 이외에는 없다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 진리다. 하물며 여자가 됨으로써 영영 동정 딱지를 뗄 기회를 잃어버린 예안은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재호가 혜인의 집에 찾아온 뒤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난 뒤 혜인과 함께 나란히 하교하던 예안은 교문을 얼마쯤 지났을 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빨간 스포츠카를 발견했다. '누구지?' 혹시 또 앤드류가 찾아 왔나 싶어 바짝 긴장했던 예안은 차에서 내린 사 람이 재호라는 걸 확인하자 속으로 안도했다. 그리고 입가에 야릇한 비 웃음을 띄웠다. "뭐야? 강간미수범이잖아? 여기는 어쩐 일이냐?" 원래는 강간범이라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혜인의 수치스런 과 거를 자극하는 꼴이 되기에 강간미수범이라고 단어를 바꿨다. 옆에 서 있는 혜인의 몸이 바르르 떨리는 걸 느낀 예안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 었다. '진정해 혜인아. 내가 지켜줄 테니까.' 예안은 혜인의 등을 다독이며 재호를 쏘아보았다. "무슨 일이냐?"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제 잘 빠져 나왔더군. 알고 보니 대성 회장 둘째 사위의 조카가 된다고? 어쩐지 쉽게 나온다 싶었다니까."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착각하고 있도록 내버려두는 게 더 좋을 테 지. 예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좋을 대로 생각해." "대명고등학교라. 참 좋은 학교지. 나도 원래 이 학교를 나오고 싶었는데 입학 시험을 보는 날에 하필이면 몸이 아파서 병원에 실려갔지 뭐야? 그 바람에 결국 서주 고등학교로 가게 됐지만 말이야."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아무 여자나 쓰러뜨리느라 바빠서 못 치른 거겠 지. 어쨌든 너 따위 쓰레기랑 대화하고 싶지 않으니까 어서 꺼져라." '너 따위 쓰레기'라는 말에 비로소 재호의 얼굴에 불쾌함이 떠올랐다. 느 글거리는 저 얼굴에 한 방 먹여주는 게 소원이었던 예안은 속으로 쾌재 를 불렀다. "지금 나보고 너 따위 쓰레기라고 했나? 십 년 안에 곧 이 나라 최고의 기업 유한 그룹의 회장이 될 이 몸에게? 너란 여자는 정말 겁이 있는 거 야 없는 거야?" "고작 유한전자 지분 1.5%가 탐나서 저보다 6살이라 어린 여자한테 찝적 대는 늙다리 변태 성도착증 환자한테는 쓰레기라는 말조차 과분하다 생 각하는데?" 재호의 얼굴에 자리잡은 분노가 점점 더 진해졌다. 예안은 재밌다는 웃 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봐 쓰레기. 나 같으면 차라리 그깟 1.5% 지분 포기하고 말지, 변태처 럼 여자한테 그렇게 치근덕거리지 않는다. 쯧쯧쯧. 도대체 뭘 배우고 컸 길래 저 모양 저 꼴인 거야? 유한 회장은 자기 손자가 저러고 다니는 걸 알기나 하나 몰라." "네가 뭘 잘 모르는 모양인데, 유한전자라면 중원전자와 함께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을 이끌어나가는 첨단 기업이라구. 유한전자 총 지분의 1.5% 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만지나 알아? 거의 15조 원에 육박한다구. 그게 얼마나 큰돈인지 알기나 해?" "푼돈이네." "뭐?" 상상조차 가지 않는 어마어마한 액수에 놀라 주저앉는 모습을 상상했던 재호는 예안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피식 비웃음을 터뜨리자 어이가 없 었다. "이봐 쓰레기. 내가 그 정도 푼돈에 눈 하나 깜빡이거나 할 것 같냐? 어 디서 주제에 맞지도 않는 허풍을 떨고 그러냐? 너랑 같은 공간에서 숨쉬 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폐가 썩는 것 같으니까 그만 얌전히 쓰레기 장으로 꺼져 줄래? 쓰.레.기." "이익…" 22년을 살아오면서 어디 누가 자신에게 가벼운 욕설이나 내뱉는 것조차 들어보았겠는가.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던 재호는 할 말을 제대로 찾지 못한 채 이빨만 악물었다. "이 빌어먹을 여자. 어디 네년이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용서해달라고 비 는 날이 오지 않는가 두고 보자. 어디 한 번 쓰러뜨리는 걸로 끝낼 줄 아냐? 친구들끼리 돌아가면서 맛본 다음에 창녀굴에 팔아 넘겨…" 퍽! 재호는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예안이 크게 휘두른 가방에 꼴사납게 얼 굴을 얻어맞았다. 패닉에 빠진 재호는 죽일 듯이 자신을 쏘아보는 예안 의 차가운 눈빛을 멍하니 온몸으로 받아내며 서 있었다. "그 더러운 입으로 주절대지 마라. 만약 한 번만 더 지껄였다가는 유한 회장을 퇴임시키는 걸로 끝나지 않아. 아예 우리나라에서, 아니 전세계 에서 유한 그룹 자체를 없애 버릴 테다. 내가 그렇게 못할 줄 아냐?" 어처구니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을까. 재호는 넋이 나가기 일보 직전 이었다. "이, 이…" "분하냐? 분하면 너도 덤벼 봐. 쓰레기야." 눈앞의 여자에 대해서라면 충분히 조사했다. 고아인 데다가 환경미화원 에게 입양(정확히는 입양될 예정)된 철부지 여고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땐 마음놓고 몇 번이나 시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꽤나 미색이 좋 으니 좀더 길게 갖고 놀다 버릴 생각도 품고 있었다. 대성 회장의 사위를 삼촌으로 두고 있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크 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경찰서에서 풀려났을 때에도 삼촌의 힘을 빌린 거라고만 생각했다. 변호사가 모 장관하고 굉장히 친한 사이인 것 같다 고 말했을 때에도 물론 믿지 않았다. 자신의 할아버지를 유한 회장 자리 에서 퇴임시키겠다고 말했다는 걸 들었을 땐 크게 웃기까지 했지 않았던 가? 헌데 이 기도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단순히 공갈협박이라고 보기에 는 예안의 표정은 너무나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혹시 변호사가 한 말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오늘은 이만 물러나지. 하지만 이대로 끝날 거라 생각은 하지 마라. 조만간 네가 먼저 옷을 벗고 나한테 교태를 떨도록 만들어 줄 테니까." "너 아직도 그런 말 지껄이냐?" 감히 유젤이 준 소중한 몸에게 이 녀석이 음탕한 상상을 품고 있다는 걸 눈치챈 예안은 솟구치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머리끝까지 분노가 뻗친 예안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침 운 좋게도 사람 머리통 만한 돌이 근 처에 있었다. 예안은 망설일 것 없이 그 돌을 두 손으로 집어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재호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설마'했지만 설마라는 녀석은 언제나 그렇듯 사람의 뒤통수치는 걸 좋아한다. "이거나 먹어 이 쓰레기야!" 휭하니 날아간 돌은 재호가 타고 온 스포츠카 앞유리창을 정통으로 덮쳤 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유리를 깨부순 돌멩이는 운전석 시트를 덮쳤다. 혜인과 재호는 물론이요 근처를 지나가고 있던 사람들까지 이 놀라운 광 경에 입을 쩍 벌렸다. 밀짚모자 아래에서 차갑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는 죽일 듯이 재호를 노려 보았다. "자, 지금 핑계거리 만들어 줬으니까 나중에 덤빈다고 삽질하지 말고 어 디 한 번 지금 당장 경찰에 신고해 보시지? 못하겠냐? 조금 전에 이대로 끝날 거라 생각 말라는 건 그냥 이 자리를 비키기 위해 둘러댄 허풍이었 냐? 쓰.레.기.야." 생전 처음으로 겪는 이루 참을 수 없는 모욕에 재호는 귀밑까지 시뻘겋 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온실의 화초로만 자라온 그는 이런 상황에서 어 떻게 하면 상대방을 화나게 할 수 있는지 몰랐다. 지금까지 세치 혀 하나만으로 자신보다 못한 녀석들을 무시하며 온갖 상 처를 줬다. 하지만 만약 예안에게도 그렇게 했다가는 곧바로 차가 불태 워지는 건 아닐까 겁났다. 물론 재벌3세로서 이까짓 차 한 대가 아까운 건 아니지만 바로 코앞에서 그런 꼴을 본다는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모 욕이다. 예안은 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재호를 키득 비웃으며 혜인의 팔을 끌고 그 자리를 떠났다. "나 잘했지?" 재호가 보이지 않는 곳에 오자 예안은 칭찬을 바라는 듯 그렇게 물었다. 혜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아무 말도 못하고 그렇게 떨기만 하는 꼴은 처음 봤어. 예안 이 너 사람 무안하게 하는 데는 참 재주가 좋구나." 그게 그렇게 되나? "그런데 너 정말 어떻게 할 거야? 아무리 사람이 행실이 추잡하고 또 안 하무인이라고는 해도 엄연히 그 사람은 유한 그룹의 후계자라구. 예안이 네가 어떻게 해볼 상대가 아니란 말이야. 괜히 너한테까지 불똥이 튀 면…" "넌 그럼 그런 쓰레기한테 얌전히 시집갈 거야? 네가 있는 앞에서 날 윤 간한다 어쩐다 그런 말을 태연히 하는 쓰레기인데? 그나저나 그 쓰레기 한테 취소한다고 전화했어?" "응. 일단 취소한다고는 했어. 그때 그 사람도 네가 쉽게 풀려난 게 좀 놀라웠는지 별 말 안 하더라." 혜인은 만약 재호가 타켓을 예안에게 돌리지나 않을까 불안함을 느꼈다. 이미 몇 년 동안이나 재호에게 시달림을 받아 봐서 그가 얼마나 지독하 고 비열한 악질인지는 잘 안다. 만약 예안에게 화가 미친다면 무슨 낯으 로 본단 말인가? "여기서 그만 헤어져야겠다. 그럼 잘 가." "응. 너도 잘 가." 혜인과 헤어진 뒤 예안은 집으로 향하며 곧바로 유니콘에게 물었다. "유니콘. 진짜로 내가 유전을 받으면 유한 회장 퇴임시키는 게 가능한 거지?" 「유전에서 나오는 자금이면 유한 그룹 전체를 통째로 사고도 남습니다. 유한 회장을 퇴임시키는 건 일도 아니지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이것으로 유전을 반드시 얻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또 하나 생긴 셈인 가. 김재호.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그렇게 예안은 바드득 이를 갈았다. 아파트 앞까지 온 예안은 중현이 기다리고 있는 걸 발견하고 조금 놀랐 다. "날씨가 참 좋군요. 학교에서 돌아오시나 보죠?" "어? 여기는 웬일이세요? 우리 집은 또 어떻게 아셨어요? 이사했는데?" "국정원의 정보력을 뭘로 보십니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흐음. 어쨌거나 절 만나러 오신 걸 보면 특별히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 신가 보죠?" "저는 꼭 할 말이 있어야만 예안씨를 찾아오는 사람입니까? 그냥 보고 싶으면 올 수도 있는 거지요." 중현은 반쯤은 농담, 반은 진담으로 그렇게 말했다. "헤? 제가 보고 싶었다구요? 말도 안 돼. 저 같이 어린 여자애가 뭐가 보고 싶어요? 대학로에 가면 화려하고 성숙한 여자들이 득실득실한데 요." "예안씨는 자신의 매력에 대해서 너무 모르시는 것 같군요. 세계 제일의 부자가 목을 맬 정도로 대단한 여자인데 저란들 왜 흥미가 안 생기겠습 니까? 저 역시 남자입니다." "앤드류 왕자랑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까요." "예안씨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다고 해두죠." 중현은 다 안다는 듯이 미소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예안은 중현이 자신 이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에 솔직히 불쾌함을 느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나이 차이가 10살이나 나는데 설마 그런 생각이 있겠는가? "재미없는 농담은 그만 두고 빨리 용건이나 말씀하세요. 이러고 있는 거 우리 아빠가 보기라도 하면 전 할 말 없어지니까." "호오? 양아버님께서 꽤나 보수적이신가 보군요?" "그런 건 아니에요. 하여튼 그런 게 있어요. 빨리 여기 온 용건이나 말씀 하세요." 나한테 화난 거라도 있나? 중현은 조금 쌀쌀한 예안의 태도에 서운함을 느끼고 머리를 긁적였다. "드디어 중국으로부터 최고급 대륙간탄도 FIRE-3를 10발 구입하기로 했 습니다. 물론 거의 사정조로 구입한 거라서 돈이 좀 왕창 깨지긴 했지만 유전 덕분에 모아놓은 돈이 많아서 그 문제는 걱정 없죠." "FIRE-3는 미제 아니었어요? 그걸 왜 중국한테서 사요?" "미국으로부터 사게 되면 5월 달에 갱신하는 한미석유조약에서 미국이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됩니다. 그것만은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중국으 로부터 구입했습니다. 덕분에 배는 더 돈을 주고 사게 된 거죠. 다음 달 에 요격 테스트가 있을 예정입니다. 아직 일반 언론에는 발표하지 않았 지만 벌써부터 여러 나라가 우리나라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FIRE-3는 요격이 거의 불가능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우리나라가 새로 개 발한 요격 시스템을 시험한다고 비싼 돈까지 치르며 구입했으니 긴장하 는 건 당연하겠죠." 중현은 우리나라가 성공할 거라고 기대하는 나라는 물론 단 하나도 없다 는 말은 생략했다. "그럼 그 테스트에서 FIRE-3를 제대로 요격하기만 하면 유전을 제게 주 시는 거죠?" "글쎄요. 그건 일단 국민들의 반응을 봐서 결정할 문제입니다만." 중현은 난처한 듯 말끝을 흐렸다. "무조건 주셔야 돼요. 그 이하로는 절대 안 돼요. 원래 유전 하나만으로 는 택도 없지만 그래도 제가 많이 선심 쓴 거라는 걸 염두에 두시는 게 좋아요. 어차피 맥은 제가 없으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ST기관은 제 승인이 없으면 에너지를 외부에 공급하지 않으니까요." 예안의 당찬 말투에 중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럴 때 예안은 도저히 평 범한 고등학생 같지가 않아 거리감이 느껴지곤 했다. "잘 될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며칠 전에 유한 그룹 후계자 를 폭행한 죄로 경찰서에 잡혀가셨다구요?" "헛소문을 듣고 오셨군요. 그건 제가 잘못한 게 아니에요. 그 쓰레기가 먼저 잘못한 거지." 또다시 재호의 그 능글맞은 얼굴이 생각난 예안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 녀석이 제 친구를 덮쳤다구요. 다행히 제가 그걸 보고 야구배트 들 고 끼어 들었기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엄연히 강 간미수인데 뭐? 그 녀석을 막은 내가 폭행죄라고? 참 기가 막혀서…" "어쩔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으로 법마저 움직일 수 있으니 까요. 상대가 유한 그룹 후계자라서 장관 님도 예안씨 빼내느라 얼마나 진땀 흘렸는지 모릅니다." "저를 안 빼냈으면 아주 재미있는 일이 생겼을 텐데. 라이플 버스터 포 가 유한 그룹 본사를 완전히 박살내버리는 꼴을 못 봐서 아쉽네요." 예안이 야릇한 미소와 함께 그렇게 말하자 중현은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조금 섬뜩함을 느꼈다. "테스트 날짜가 언제죠?" "5월 23일입니다. 원래 이런 국가적인 무기 거래는 시간이 좀 걸리지만 무리해서 일정을 앞당겼습니다. 중국측도 우리가 하루빨리 요격 테스트 를 해보고 싶어서 몸이 달아오른 걸 알고 있는지 선선히 협조해주더군 요." "그럼 늦어도 6, 7월 달에는 유전을 받을 수 있겠군요." 중현은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건조한 빛을 발하는 녹색 눈동자를 들여 다보았다.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눈빛이었지만 무슨 생각 을 하는지 전혀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중현은 입을 열었다. 그는 지금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아마도 가능할 겁니다. 맥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 야겠지요." 예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할게요." 중현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후 유니콘이 말을 걸었다. 「이제 많이 대담해지셨군요. 제가 따로 뭐라 알려드리지 않아도 알아서 밀고 당기시는 걸 보니 말입니다.」 "어차피 유전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이상 이제부터는 적극적으로 나 서야겠다고 결심했을 뿐이야. 네 말대로 맥이 무한동력으로 움직이는 거 라면 유전 따위는 비교할 바가 못되는 거잖아?" 유전 따위라. 내가 언제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담해진 거지? 예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요격 테스트에 임하기 전에 얼굴을 숨기는 건 필수입니다. 전에 해군 기지에 저를 갖다 놓으셨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세계 각국에서 보낸 인물들도 와 있을 테니까요. 그들에게 절대 얼굴을 들켜선 안 됩니다. 물론 그들 중 대부분은 그냥 단순히 해프닝으로 끝날 거라 생각하고 한 국을 비웃어 주기 위해서 올 테지만요.」 "한국은 미사일 기술 수준이 너무 낮으니까?" 「그렇죠. 아무리 미사일 사정거리 규제가 풀렸다고는 하나 몇 년도 안 되어서 장거리 순항미사일이나 요격 미사일을 개발하는 건 쉬운 일이 아 닙니다. 따지고 보면 사거리 400km의 국화 미사일을 단시간 내에 개발 한 것도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한국의 잠재력이 대단 하다 해도 국화 미사일을 개발한 지 일 년도 채 안 되어서 FIRE-3까지 요격 가능한 미사일을 개발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다들 믿을 겁니 다. 하여튼 얼굴이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합니다.」 예안은 교복 상의를 벗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 걱정 마. 내가 언제 그런 거 허술하게 하는 거 봤어? 하여튼 오늘은 그만.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 반바지에 면티로 옷을 갈아입은 예안은 거실로 나왔다. 언제나처럼 정호 가 인터넷으로 장기를 두고 있었다. 히죽 웃음을 지은 예안은 살금살금 뒤로 다가가 와락 정호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빠 또 장기해? 지겹지도 않아? 맨날 그것만 하고? 가끔은 아빠도 좀 나가서 놀아." 막 한 판을 이긴 정호는 손을 뒤로 뻗어 예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아빠도 나가서 놀고 싶다만 내 친구들은 지금쯤 다 일하고 있을 시 간이라서 말이야. 게다가 저녁에 만나려고 하면 다들 피곤해서 집에 가 버리기 일쑤거든. 할 게 없다보니 그냥 이렇게 장기만 하는 수밖에." "우리 맞은편에 사는 아저씨 백수인 것 같던데 한 번 잘 사귀어 봐. 어 쨌든 혼자서 장기하며 노는 것보다는 나을 거 아냐?" "그래야겠다." "저… 근데 아빠 있잖아…" 예안이 주저하며 조심스레 말하자 정호는 의아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 았다. "무슨 일인데 그러니?" "저… 만약에 아빠는 내가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면 어떨 것 같아?" 뭔 말을 하나 했더니 농담이었나. 정호는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픽 웃으며 예안을 가슴으로 끌어당겨 머리를 쓰다듬었다. "물론 우리 딸이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면 좋지. 그럼 가장 비싼 장기판 을 사서 거들먹거리며 장기 할 수 있을 테니까." "…생각한 게 왜 그 정도밖에 안 돼?" 자신의 말을 전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정호의 반응이 내심 서운했지 만 어차피 그렇게 생각하고 물었으니 이쯤에서 그만 두는 게 좋겠다. 게 다가 유전을 받는다 해도 시트날타 때문에 어차피 비밀로 해야 할 테니 까. "근데 너 남자친구는 없니? 보통 네 나이 정도면 남자친구 하나쯤은 있 지 않아?" 예안은 기가 막혀서 그만 얼굴을 확 붉혔다. "아빠는 내 사정 뻔히 알면서 그런 말을 해? 내가 미쳤다고 남자랑 사귀 어? 그냥 친구라면 모를까, 애인 같은 건 절대 안 만들 거야." "그럼 평생 혼자 살려고?" "당연한 거 아냐?" 예안이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대답하자 정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밖 에 없는 자식이 짝 없이 평생 동안 혼자 사는 걸 지켜보는 건 아버지 된 입장으로서 차마 할 짓이 못 된다. "예안아. 아빠가 조금 성급한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남자랑 사귀는 걸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마라. 어차피 여자가 되었으니 이제 여자로 사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지 않겠니? 지금 당장 남자친구 같은 거 사귀라 그런 소리는 아니야. 너무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란 소리야." "에이, 됐어. 난 그냥 평생 결혼 안 하고 아빠랑 같이 살게." …이건 보통 엄청난 파파걸들이 하는 소리가 아니던가? 정호는 차마 웃 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참.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네 엄마한테서 연락이 왔다." 순간 예안의 표정이 놀랍도록 싸늘히 식어갔다. 하나뿐인 혈육이 제 어 미에 대해 얼마나 사무친 원망을 품고 성장해 왔는지 잘 아는 정호는 차 마 엄마에 대한 변호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네가, 아니 '진우'가 죽었는지 아직 모르는 눈치더라. 난 일단은 대충 둘 러댔어." "이제 와서 왜 연락했대?" 차분하게 가라앉은 매서운 목소리. 정호는 우울한 안색으로 말을 이어나 갔다. "네 양육권을 되찾고 싶다더군. 자기가 널 키우는 게 내가 키우는 것보 다 더 나을 거라면서. 어차피 난 직업도 변변찮은 데다가 돈도 별로 없 고 하니까 자기한테 널 달라더라." "고민할 것도 없잖아? 그냥 다른 사람들한테 그랬듯이 내가 죽었다고 둘 러대면 되지 않아? 들통날 위험도 전혀 없고." "하지만 그게…" 정호는 망설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예안은 조금 화를 냈다. "하지만 뭐? 망설이고 말고 할 게 어딨어? 어차피 나 남자로 남아 있었 어도 엄마한테 절대 갈 생각 없었다구. 그냥 말해버려. 내가 죽었다고. 그리고 다시 연락하지 말라고 해." "하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엄마한테 연락 온 거 없냐고 먼저 묻던 아이가 지금 화를 낸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해 서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엄마를 미워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지 정호는 전 혀 알 수 없었다. "엄마는 아빠하고 날 버리고 떠났어. 십 몇 년 동안 연락 한 번 안 하다 가 이제 와서 자기 욕심 채우려고 드는 게 말이나 돼? 다음에 연락 오면 나, 아니 진우는 죽었다고 말하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해." 그래도 친어머니인데 죽었다고 말하는 건 너무 잔혹하지 않니. 차라리 그냥 너한테 일어났던 일을 사실대로 말하는 게 어떨까. 정호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빠." 예안은 무릎을 꿇은 채 정호의 배에 얼굴을 기대며 두 팔로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엄만 우릴 버리고 떠났어. 이미 잊혀진 사람이야. 어차피 이제 엄마 없 어도 우리 둘이서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잖아? 이제 더는 엄마에 대해 생각하지 말자. 응?"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얼마 전에 엄마와 연락하고 있느냐고 물었던 거 니. 조금은 쓸쓸한 예안의 목소리 한편에서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묻어났지만 정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휴일날 아침이었다. 어제 밤새도록 이터널 피닉스를 했던 터라 예안은 늘어지도록 늦잠을 자려고 했다. 하지만 아침 8시에 전화벨이 울린 마당 에 산통이 다 깨버렸다. "젠장… 졸려 죽겠는데 아침부터 누구야?" 예안은 힘들게 수화기를 귀에 댔다. "여보세요." 한창 달게 자던 중이었으니 당연히 목소리가 고울 까닭이 없었다. 「생일 축하해 누나.」 "에?" 활기에 가득 찬 현우의 목소리에 예안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지 금 얘가 뭔 소리를 하는가 싶었다. 내 생일은 아직 한참이나 남지 않았 던가? 「오늘 4월 22일이잖아. 누나 생일도 기억 못해?」 "뭔 소리냐? 내 생일은 7월 23일인데?" 「그건 진우 형 생일이지. 누나 생일은 4월 22일이라며?」 예안은 비로소 잠이 확 달아났다. 맞다. 새로 신분을 만들면서 생일을 4 월 22일로 했었지?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근데 누나는 도대체 언제 집들이 할 거야? 지금 형들이랑 우리 부모님 이랑 애타게 집들이만 기다리고 있다구. 집 구경도 안 시켜주면서 도대 체 언제 집들이하려고 그래?」 평생 할 생각 없어. 예안은 그렇게 말해주려다 참았다. 대신 최대한 싸 늘하게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유현우. 너 나한테 차였잖아? 근데 왜 자꾸 그렇게 친한 척 달라붙고 그래?" 「누나.」 "내가 전에 너한테 말하지 않았냐? 진우가 너희를 굉장히 원망했다고. 그래서 난 진우의 마음을 달래주려고 너한테 만이라도 상처 주려고 그렇 게 접근한 거라고. 근데 왜 자꾸 이렇게 나한테 친근한 척 달라붙어? 너 혹시 나중에 내 뒤통수치려고 그러는 거라면 관두는 게 좋아." 잠시 동안 수화기 너머로 말이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말이 통했을 거라고 예안이 만족하고 있을 때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상관없어.」 "뭐?" 「진우 형이 우리를 원망했든 안 했든 난 상관 안 해. 누나가 진우 형이 랑 얼마나 친했는지 아닌지 그것도 상관 안 해.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내가 누나를 좋아한다는 사실 뿐이야. 난 누나가 좋아. 정말 좋아. 그러 니까…」 "거기까지다 유현우." 예안은 차가운 말투로 현우의 말을 끊었다. "나 좋아하지 마라." 「누나.」 "조용히 듣기나 해. 나 좋아하지 마. 너한테 상처가 되니까 좋아하지 말 란 소리가 아니야. 네가 상처받으면 상처받을수록 난 더 기분이 좋거든. 근데 이걸 어쩌냐? 난 네가 날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분 나 빠." 상당히 잔인한 말에 현우는 충격을 받은 건지 말이 없었다. "너뿐만이 아니야. 난 남자가 날 좋아한다는 사실이 굉장히 기분 나빠. 그러니까 나 좋아하지 마라. 알았냐?" 「…누나 혹시 남성혐오증이라도 있는 거야?」 "그런 건 없어. 다만 기분이 나쁠 뿐이야. 날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어. 남자가 나를 좋아하고 내 알몸을 상상하고 또 나하 고 같이 자는 걸 꿈꾼다는 사실이 난 지극히 기분 나쁠 뿐이니까." 「그런 상상 같은 거 하지 않아.」 "웃기지 마. 남자라면 좋아하는 여자를 두고 그런 상상을 몇 번쯤은 한 다구. 아무런 감정이 없는 여자라 해도 예쁘거나 스타일만 좋으면 그런 상상을 품어. 안 그런다면 그건 남자가 아니야." 예안은 남자였을 때의 경험을 통해 남자들의 그런 심리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고 아끼는 유젤의 몸을 두 고 다른 남자들이 그런 상상을 품는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좋 아한다는 말을 듣는 것 역시 마찬가지인 이유에서 소름끼치도록 싫어하 는 것이다. "할 말 없지? 그럼 끊는다. 그리고 앞으로 가능하면 나 아는 척 안 했으 면 좋겠다. 어찌 되었든 간에 난 널 찼으니까 말이야." 예안은 냉랭히 말하고 끊었다. 잠시 후 다시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현우가 다시 전화한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만약의 경우가 있기에 예안은 다소곳하게 전화를 받았다. 「예안이니? 나 준운데, 생일 축하한다는 말 전해주고 싶어서.」 '준우 형의 축하 받아봤자 별로 기쁘지도 않은데. 난 원래 생일 같은 거 잘 안 챙기는 스타일이라고.' 예안은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예의를 잃진 않았다. "생일 같은 거 원래 안 챙기는 편이지만 일단 축하해준다니 인사는 고맙 게 받을게." 「생일 같은 거 안 챙기는 편이라니?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난 원래 생일 같은 거 거의 안 챙겨. 사람들이 안 챙겨주 고 지나가도 덤덤한 편이고. 내가 원래 성격이 그런 걸 어떡하냐. 그러 니까 준우 형은 내년부터는 이런 전화 안 해도 돼. 아니, 하지 말아 줘." 상당히 냉정한 말투에 당황했는지 준우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 고 정신을 차렸는지 준우는 서운한 어투로 말했다. 「그런데 너 언제까지 그렇게 자꾸 형이라고만 부를 거니? 그런 말투 너 하고 전혀 안 어울려.」 "내 말버릇이 원래 이런 걸 어떡하라고. 앞으로도 나한테 오빠 소리 들 을 생각은 아예 하지를 마. 나 자던 중이었으니까 그만 끊을게." 「예안아 잠깐만.」 그러나 준우가 미처 뭐라고 하기 전에 예안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친척들이랑 별로 전화하고 싶지 않은데… 아, 맞다. 폰 번호를 새로 바 구면 되겠구나. 어차피 내 친구들이랑 폰으로만 연락하니까 집으로 전화 가 오면 안 받으면 그만이고." 하지만 정호가 폰번호를 정우 삼형제에게 흘리면 말짱 도루묵이 되는데. "아빠한테 단단히 주의 줘야지. 저번처럼 내 폰 번호 불지 말라고." 반쯤 감긴 눈꺼풀로 그렇게 중얼거리던 예안은 다시 풀썩 쓰러졌다. 그 러나 전화벨이 또다시 울렸다. "으윽! 안 받아! 안 받아! 그냥 자고 말 거다!" 하지만 전화벨은 끈질기게 울렸다. 어느 정도 울리고 난 뒤에 자동응답 기가 받는 형식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아쉽게도 이건 그런 전화기가 아니 었다. "으악! 벌써 삼십 번이 넘었잖아!" 전화벨 소리가 삼십 번을 넘고 사십 번을 지나 오십 번에 다다랐을 무렵 예안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다. 폭발하는 기세로 벌떡 일어난 예안은 전화기를 신경질적으로 집어들고 수화기에 대고 외쳤다. "전화 받았어요!!" 「이제 받니?」 전화를 건 사람은 정우였다. 삼형제가 아주 사람을 골고루 짜증나게 하 는구만. 예안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자는 사람 깨우니까 속이 다 시원해? 왜 전화했어?" 「생일 축하한다고. 그 말 하고 싶어서.」 "하나도 안 기뻐! 이만 끊어!" 예안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고 씩씩거렸다. 아예 코드를 뽑아버려? "에휴. 전생에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구…" 예안은 다시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그러나 유감 없이 다시 전화 벨이 울렸다. 사람 정말 미치게 만드는 아침이네 이거. "전화 받았어요!" 「전화를 그렇게 끊으면 어떻게 해?」 또 정우였다. 예안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정우 형! 지금 시간이 몇 신지나 알아? 아직 여덟시 밖에 안 됐어! 일 요일 아침에 전화하는 게 실례라는 걸 알면서 지금 이러는 거야? 나 어 제 게임하느라 밤새고 잠들었다구!" 「단잠을 깨워서 미안한데, 오늘 우리 가족이 너 생일 파티 해주기로 했 거든. 이따 오후 5시까지 우리 집에 올 수 있니?」 예안은 생각할 것도 없이 쏘아붙였다. "생각해줘서 고맙지만 난 안 갈 거야. 형네 부모님께도 그렇게 말씀드 려." 「예안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은 알 거 아냐? 내가 형네 식구 별로 안 좋아한 다는 거. 그런데 생일 파티를 해주면 내가 '응 고마워'하면서 갈 것 같 아? 게다가 난 열 살 이후로 생일 파티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어. 그런 자리를 차려준다고 하면 답답해서 미친단 말이야. 이해해?" 「예안아. 그러지 말고 와라. 우리 부모님도 오랜만에 너 보고 싶어하 셔.」 "접때 형 생일 때 한 번 봤으면 됐지 뭘 그래? 하여튼 난 안 갈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알았다. 일단은 끊을게. 하지만 준비는 해놓을 거야.」 "마음대로 해. 어차피 난 안 갈 거니까." 정우는 더 이상 권해도 소용없다는 걸 느꼈는지 아니면 다른 수가 있는 건지 순순히 전화를 끊었다. 예안은 신경질적으로 전화 코드를 뽑고 다 시 잠을 청했다. "진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거야 뭐야. 오기 싫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왜 자꾸 사람을 귀찮게 굴어. 정말 짜증나네." 안 오면 집에 쳐들어간다느니, 누가 애달아서 죽는 꼴이 그렇게도 보고 싶느냐느니 등등의 갖가지 애원과 조름에 지고 만 예안은 결국 정우의 집으로 가면서 자꾸 투덜거렸다. 예안이 이렇게 된 데 대해 한몫한 정호 가 난처해하며 달랬다. "그래도 너 생각해서 생일파티 해준다는데 안 간다고 하면 실례잖니." "아빠는 잊어버렸겠지만 열 살 때 처음으로 정우 형네에 비해서 내가 얼 마나 초라한지 깨닫고 난 절대 생일 파티 같은 거 안 하기로 결심한 몸 이라구. 젠장, 올해도 생일 파티 안 하면 연속 7번째로 안 하는 건데 다 틀렸잖아." 정우는 영리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교활하다고 해야 하나? 예안을 설득 해봐야 씨도 안 먹힐 거라는 걸 깨닫고 정호에게 부탁한 것이다. 유독 예안이 정호에게만은 약하고 상냥하다는 걸 노린 것이었는데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이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도호의 집에 오게 되었으니. 정문 앞에 선 예안은 다시 투덜거렸다. "앞으로 영영 이 집에는 오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또 오고 말았잖아. 젠장, 정말 싫어. 싫다니까." "좀 참아라. 어찌 되었든 간에 네 친척인데 어떻게 한 번도 연락을 안 할 생각을 할 수 있니? 만약 도호가 그 사실을 알면 굉장히 섭섭해할 거 다." "그런 거 신경 안 써." 정호는 한숨을 내쉴 뿐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둘이 현관을 들어서자 도호와 수정이 반갑게 맞았다. "어서 와라. 자주 놀러 온다더니 왜 그동안 한 번도 안 왔니? 우리가 휴 일마다 얼마나 눈이 빠지게 기다렸는지 아니?" 절대 올 생각 없는 걸요. 예안은 속으로 그렇게 궁시렁거리면서도 겉으 로는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그동안 공부하느라 좀 바빴어요. 전 머리가 별로 안 좋아서 공부를 열 심히 해야지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거든요." "그래도 아직 1학년인데 뭐 어떠니? 게다가 좋은 대학에 가는 것보다 좋 은 신랑 만나는 게 더 중요하지."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전 결혼할 생각이 없다니까요." 하지만 도호는 사춘기 여자애의 의미 없는 반항쯤으로 생각했는지 푸근 한 웃음으로 예안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이미 생일상이 차려져 있었다. 현우가 폭죽을 터뜨리며 호기 있게 외쳤다. "누나의 열 일곱 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준우와 정우도 즐거운 표정으로 잇따라 폭죽을 터뜨렸고, 이어서 가족들 은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예안은 겉으로는 억지로 웃고 있었지만 속 으로는 기분이 몹시 나빴다. '생일 파티 같은 건 정말 나한테 안 어울린단 말이야.' 진우였던 시절, 생일 파티 같은 건 행복한 녀석에게나 어울릴 만한 행사 라고 생각했었다. 행복하지 않은 자신에게는 거지가 낀 다이아몬드 반지 처럼 절대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여겼었다. 지금은 어떠냐고? 물론 지 금은 행복하지. 하지만 한때 내가 불행했던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이 지 금 생일파티를 해준다는 건 뭔가 엄청난 모순이 아닐까? '아빠만 아니었으면 절대 이런 자리 안 왔다 정말…' 예안이 속으로 이를 바드득 가는 것도 모르는 현우는 제일 먼저 선물을 건넸다. "누나 이거 선물." "여기 나도 있어." 현우의 뒤를 이어 준우와 정우도 선물을 건넸고, 뒤이어 도호와 수정도 선물을 건넸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정호만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 를 긁적이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진우'의 생일은 7월 23일이었기에 그 는 오늘이 예안의 새로 만든 생일인 줄 정우가 연락하기 전까지 까맣게 몰랐다. 저녁 7시가 되자 예안은 더 놀다 가라는 도호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정호를 떠밀며 집을 나섰다. 택시에 올라 집으로 향하면서 예안은 계속 투덜거렸다. "아 진짜 미쳐 죽는 줄 알았어. 난 생일 파티 같은 거 진짜 싫다구. 다 음부터는 절대 안 갈 거야. 아빠가 나중에 미리 좀 말해 놔. 사람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이런 짓 하지 말라구." 예안이 친척들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이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정호였지만 친절하게 생일 파티를 해주며 신경 써주는 데까지 싫다고 투 덜거리는 건 좀 심하다 생각되는 것이었다. "예안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 신경 써준답시고 생일 파티 해주는 친척들인데 그렇게 질색하면 쓰겠니?" 조금 나무라는 투였지만 예안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빠도 내가 친척들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잖아? 알면서 왜 그런 말을 해? 싫은 걸 싫다고 하지 그럼 싫은 건 좋다고 해? 나도 사실 그냥 확 나와 버리려다가 꾹 참은 거라고." 도대체 언제쯤이면 예안이 친척들에게 마음을 열게 될지 알 방도가 없는 도호는 이 답답한 마음을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이 혼자 삭혀야만 할 판 이었다. 집에 도착한 예안이 컴퓨터를 켜고 이터널 피닉스에 접속했을 때 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누나 나야.」 오랜만에 전화한 앤드류의 목소리에 예안은 화들짝 놀라 혹시나 정호가 근처에 있지 않나 살폈다. 다행히 정호는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중이었 다. "무슨 일이에요? 제가 분명히 전화하지 말라고 했죠? 그리고 누나라고 부르지도 마세요. 누차 말했지만 전 아직 17살밖에 안 됐다구요." 「누나 오늘 생일이지? 지금 밖으로 나올 수 있어? 나 지금 누나네 집 앞인데.」 생각할 것도 없이 거절하려 했지만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리에 거 절의 말이 다시 쏙 들어가고 말았다.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곧바로 집에 쳐들어오겠다는 다분한 위협이 섞였다는 걸 모를 정도로 예안은 바보가 아니다. "…알았어요. 기다려요." 예안은 전화를 끊은 뒤 머리를 움켜쥔 채 어찌 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앤 드류가 집으로 쳐들어오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선 결국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타인의 의도대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건 질색이었지만 어쩌겠 는가? 아파트 밖으로 나간 예안은 입구에서 선글라스를 낀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앤드류를 발견하고 냉랭히 쏘아붙였다. "용건 있으면 빨리 말해요. 그리고 다신 찾아오지 마세요." 서릿발처럼 차가운 예안의 냉랭한 말투에 앤드류는 쓴웃음을 지으며 전 에 기자회견 때 예안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만약 그랬다가는 이렇게 나와주기는커녕 아마 전화를 받자마자 곧바로 끊어버렸을 것이다. "여기 생일선물이야. 누나가 싫어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건 받아줬으 면 해." "이걸 받으면 이제 앞으로 다시는 영영 당신을 안 볼 수 있는 건가요?" 언제나 그렇지만 앤드류는 예안이 자신에게 차갑게 말하는 걸 듣고 있기 가 괴로웠다. "누나. 누나는 왜 그렇게 나한테 차갑게 해? 처음에 만났을 땐 이 정도 는 아니었잖아? 그때는 그래도 포세이돈 하나만 가지고 이카루스와 네로 스, 카를로스를 흡수한 경영 능력을 존경했다고까지 하지 않았어? 근데 요즘 들어 누나 태도가 너무 차갑게 변한 거 알아?" "당연하죠. 당신이 날 좋아하지만 않았으면 나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았 을 거예요. 난 남자가 날 좋아하는 걸 소름끼치도록 싫어해요. 나보고 좋다고 접근해오는 남자들이 날 보며 머리 속으로 어떤 음탕한 상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난 바보가 아니거든요." 만약 그렇다면 결벽증도 이런 결벽증이 없을 것이다. 앤드류는 직설적인 예안의 말투에 당황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예안의 마음을 녹일 수 있을 지 몰라 암담하기만 했다. "모든 남자들이 그런 건 아니야." "내가 믿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죠?" "누나는 남성혐오증이 너무 심해. 그거 사회 생활하는데 하나도 도움 안 되는 거니까 가급적이면 고치는 게 좋아." "나더러 정신병원에 가란 소린가요? 기분이 굉장히 나쁘네요." "그렇다고는 하지 않았어. 누나 사고방식을 좀 바꾸라는 소리였지." 앤드류로부터 자신의 사고방식에까지 참견 받기 싫었던 예안은 그만 말 하라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선물을 안 받으면 또 집으로 쳐들어온다고 말도 안 되는 협박이나 하시 겠죠? 실랑이 더 벌이기 싫으니까 일단 선물은 받을게요. 그럼 용건이 없어졌으니 그만 가보세요. 그리고 제발 누나 소리는 하지 마세요. 아, 어차피 이제 안 볼 거니까 별로 상관없나?" "나중에 또 올게." "영원히 오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다음 번에는 이런 식으로 집에 찾아 오는 방법이 안 통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차가워도 너무 차가운 태도에 한 번쯤 화를 내기라도 하련만 앤드류는 빙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 사람은 정말 화를 낼 줄도 모르는 건가. 그가 자신을, 정확히는 유젤의 몸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미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예안은 감격하거나 고마워하기보다는 질투를 느꼈다. 앤드류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예안은 이번엔 중현으로부터 전화를 받 았다. 「저 지금 예안씨네 집 앞인데 잠깐 나와줄 수 있나요? 예안씨한테 드릴 생일 선물을 가져왔는데.」 중현에게 '내 생일은 4월 22일이니까 잊지 말고 꼭 선물 줘야 해요' 따 위의 말을 한 기억이 없는 예안은 기가 막혀 뒤로 넘어갈 뻔했다. '진짜 어떻게 된 게 나도 모르고 있던 내 생일을 다른 사람들이 죄다 알 고 있는 거냐? 난 생일이 언제라고 말한 적도 없다구!' …그게 바로 미소녀의 숙명이라는 걸 네가 아직 모르고 있구나. "예. 알았어요." 앤드류와는 달리 중현이 선물을 준다는 데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 에 예안은 다시 아파트 입구 쪽으로 내려갔다. 중현은 차를 세워둔 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예안씨." "에이. 얼마 전에도 만났었잖아요? 며칠이나 됐다고 오랜만이에요?" "일주일도 안 됐지만 하루라도 예안씨를 안 보면 눈에 가시가 돋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설마 이 사람도 날 좋아하는 걸까. 예안은 기분이 조금 나빠지는 걸 느 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여기 선물입니다. 예안씨에게 어울렸으면 좋을 것 같군요." 중현이 건넨 조그마한 포장지를 받아든 예안은 유쾌한 미소를 띠었다. "전 이런 것보다는 더 큰 선물을 받고 싶은데요." "뭔데요? 말씀해 보시죠." 예안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유전이요." 언제나 그렇듯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는 걸 좋아하는군. 중현은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머리를 긁적였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5월 달의 FIRE-3 요격 테스트가 끝나고 맥의 성능과 가치에 대해 공식 적으로 대국민 발표를 할 겁니다. 그리고 나서 대국민 투표를 부칠 계획 을 갖고 있습니다. 아마 정확한 대답은 그때쯤에야 해드릴 수 있을 겁니 다." "기대해도 되는 거겠죠?" "물론입니다." 중현의 눈동자는 언제 봐도 부러운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난 저런 자신감을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구나. 예안은 질투 가 날 정도로 언제나 자신만만한 있는 그가 부러웠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안녕히 가세요." "예. 안녕히 주무십시오. 좋은 꿈꾸시길 빕니다." 중현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예안은 방에 들어와 잠시 동안 침대 위에 올려놓은 선물들을 훑어보았다. 도호네 식구들로부터 받은 것, 앤드류한 테 받은 것, 그리고 중현으로부터 받은 선물들 중 어느 걸 먼저 뜯어볼 까 망설이던 예안은 결국 도호가 준 것부터 뜯어보았다. "엑? 화장품세트? 삼촌은 설마 내가 이걸 쓰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 지? 얼마짜리야? 흐억, 사, 삼십 만원짜리잖아! CD-RW 최고급으로 두 세 개는 사겠다!" 다음은 수정이 준 것을 뜯어보았다. 그리고 기절할 듯이 놀랬다. "수, 숙모는 내가 설마 이걸 입으리라고 생각하는 거야? 말도 안 돼! 내 가 무슨 낯짝으로 이런 걸 입어!" 수정이 준 것은 검은 가죽 초미니스커트와 야시시한 검은색 가죽 탱크탑 이었다. 이걸 세트로 입고 돌아다니면 얼마나 많은 늑대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쳐다볼까. 그 모습을 문득 상상해본 예안은 오싹 소름이 끼쳤다. "정우 형이 준 건 여자용 구두… 준우 형이 준 건 여자용 가방… 현우 녀석이 준 건 여자용 시계… 전에 커플링 줬을 때 차라리 시계 같은 걸 주는 게 어떠냐고 한 걸 아직도 기억하나?" 자신이 싫어하는 친척들이 자신을 너무 사랑하고 또 이렇게 신경 써서 생일을 챙겨준다는 건 뭔가 복잡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딱히 뭐라고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기분에 예안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침대 에 걸터앉았다. "에휴.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이제 한동안은 거의 안 볼 텐데 뭐." 앞으로 영원히 친척들을 보지 않았으면 한다고 속으로 외치고 있지만 과 연 그것이 진실일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친척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뭔가 야릇한 우월감을 불러일으 키지만 그것을 즐긴다고 인정하는 건 싫다는 사실. "앤드류 왕자가 준 건 뭐지? 아무리 그래도 버리기는 좀 그러니까 뜯어 나 볼까?" 맞아. 선물이 무슨 죄가 있겠어. 아까우니까 버리지는 말아야지. "에? 반지잖아?" 남자가 여자에게 반지를 선물하는 의미는 하나뿐이지. 조금 기분이 나빠 졌던 예안은 울컥해서 집어던지려다가 투명한 보석이 박혀 있는 걸 보고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절대 그 보석이 비싸 보여서가 아니다. 깨질까봐 겁이 나서다. 진짜다. "그래도 세계 제일의 부자가 준 거니까 꽤나 비싼 걸 테지? 그냥 버리거 나 끼지 말고 잘 갖고 있다가 나중에 금은방에 팔아서 컴퓨터 주변기기 나 세트로 맞추자. 적어도 몇 백만원은 넘을 거 아냐?" …비싸 보여서였구나. "어디 보자… 중현 아저씨가 준 건… 어라? 진주 목걸이잖아? 이거 진짜 라면 꽤나 비쌀 텐데? 이 사람 돈 많은가 보다." 중현이 준 선물은 진주알 하나가 달랑 꿰어져 있는 목걸이가 아니라 커 다란 알맹이가 줄 전체에 꿰여져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값져 보였 다. "꼭 염주처럼 생겼네. 근데 이런 건 보통 고등학생이 아니라 돈 많은 중 년 사모님들이 하지 않나?" 중현이 자신의 어머니가 즐겨 차고 다니는 목걸이를 보고 그것과 비슷한 걸 사서 준 거라는 건 꿈에도 모르는 예안의 생각이었다. 다음 날 학교로 간 예안은 교문에서부터 아이들의 선물공세에 가로막혀 야 했다. 아침에 차가 막혀서 조금 늦게 도착한 예안은 운동장을 빼곡이 메우고 있는 남학생들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땐 그만 기가 질렸다. "공주! 내가 마련한 소중한 선물이야! 부디 받아 줘!" 예안과 같은 반이라는 특권 덕분에 제일 먼저 선물을 주게 된 배준혁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겁이 날 정도로 부담스러웠 다. '저걸 언제 다 들고 간다냐?' 운동장에서 줄을 선 채 자신에게 직접 선물을 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중1 후배들에서부터 고3 선배들의 손에 들린 포장지를 흘끗 본 예안은 오늘 하교길이 암담하기만 했다. 저걸 다 들고 갈 수나 있을까? 그날 수업이 끝나고 예안은 왜 생일인 걸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고 복도 에서 마주칠 때마다 자신을 들볶는 전교생의 공세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 라, 전에 공주 임명장을 받은 강당에서 다시 또 전교생이 모인 뒤늦은 생일 파티장에서 생일 케이크를 잘라야만 했다. 그리고 무려 1800개에 해당하는 선물들(남학생들이 준 것만 그렇다)을 도저히 다 들고 올 자신이 없어서 결국 친구들에게 부탁까지 해야했다. 그나마 약속이라도 한 듯 선물들 크기가 작았기에 망정이지, 엄청난 크 기의 곰인형이라도 있었다가는 말 그대로 엿 될 뻔했다. "진짜 이제 정말 무슨 전통이 또 있을지 겁난다 겁나." 왜 대명중고등학교의 공주 제도가 명물이라고까지 불리는지 예안은 비로 소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생일 때마다 공주들은 이런 선물 공세에 시 달리는 건가? 몇 명쯤은 '낡은 전통을 타파하자!' 따위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반발하기라도 할 법한데 이건 거의 전교생이 광신도처럼 학교 의 전통을 숭배하지 않는가? 친구들이 가고 난 후 거실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선물들을 멍하니 쳐 다보고 있을 때였다. - 딩동딩동 초인중이 울리자 예안은 현관으로 나갔다. 문을 열어보니 우체부가 소포 를 들고 있었다. "소포 왔습니다. 여기 사인해주세요." "소포요?" 누가 보낸 거지? 의아한 기분으로 사인하고 소포를 받아든 예안은 송신 인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뭔가 울컥하는 걸 느꼈다. 소포를 보낸 사람은 차세현이었다. 초조함이 가득 담긴 빠른 손길로 포장지를 뜯은 예안의 손에 커다란 팔 찌가 잡혔다. 순금으로 된 듯 꽤나 묵직한 팔찌였다. "돈이 어디서 나서 이런 걸 산 거야? 아니, 그것보다 내 생일은 도대체 어떻게 알았지?" 아마도 지금 이런 기분을 가리켜 사람들은 흔히 감동 받은 거라고 말할 테지만 왠지 인정하기는 싫었다. 다만 아주 조금 기분 좋게 피식거리며 조심스런 손길로 세현이 준 팔찌를 쓰다듬었을 뿐이다. 「유젤 님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사람이 많군요. 좋은 현상입니다. 유젤 님이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다는 증거나 마찬가지니까요.」 비록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상당수 끼어 있기는 해도, 많은 사 람들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다는 건 어쨌든 간에 기분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예안은 기분이 좋으면 좋을수록, 자신이 이렇게 사랑 받 을 수 있는 건 전부 다 소중한 몸을 준 유젤 덕분인데 자신은 그 애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비참함을 씹어 삼켜야만 했다. "예안아… 지켜보고 있니? 네 몸은 이렇게나 사람들에게 많이 사랑 받고 있어." 그리고 네가 받아야 할 그 사랑을 전부 다 내가 고스란히 차지하고 있 어. "나 잘 살게. 꼭 행복해질게. 반드시 네 몸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노 력할게." 세현이 보낸 팔찌를 두 손으로 움켜쥔 예안은 기도하듯 눈을 감으며 마 음 속으로 다시 한 번 굳게 맹세했다. 막간의 에피소드. "왜 나한텐 너 생일이라고 말 안 했어? 내가 너 생일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너무해. 정말 너무해 너." 혜민이 자신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눈물까지 그렁거리며 가볍게 힐난하자 예안은 할 말이 없어 손가락으로 볼만 긁적였다. 이거 좀 멋쩍구만. "자, 여기 선물. 이거 내가 몇 번 써본 모델로 샀는데 진짜로 좋은 거 야. 정말 고르고 고른 명품이라구. 잘 써야 돼. 아, 그리고 절대 버리면 안 돼. 나중에 꼭 확인할 거야." "고, 고마워. 설마 내가 선물 받은 걸 버리겠냐?" …솔직히 혜민의 입가에 걸린 야릇한 미소가 불안하긴 했다. 하지만 설 마 폭탄 같은 걸 선물로 주기야 했겠어? "그럼 나 갈게~ 안녕~" "그, 그래. 잘 가." 집으로 돌아온 예안은 방에 틀어박혀 포장지를 뜯어보았다. 그리고 안에 서 나온 것은! "이게 뭐야?" 길이 30cm에 달하는 검은색 플라스틱 봉…이라고 해야 하나? 생소한 물 건에 호기심이 동한 예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다 뒤꽁무니에서 조그만 스위치를 발견하고 눌러보니 봉 전체가 부르르 떨 리기 시작했다. "아하, 자동안마기구나. 건전지로 움직이는 건가 보네?' …과연 자동안마기일까. "그 사악한 유혜민이 준 선물이길래 뭔가 굉장히 불안했는데 의외로 노 인네 같은 구석이 있네? 한창 젊은 나이에 무슨 자동안마기야? 하긴, 피 로할 때 쓰면 되겠지 뭐." 예안은 그것을 들고 정호에게 갔다. "어? 그게 뭐니?" "응. 이거 혜민이가 선물해준 자동안마기. 나한테는 별 효과 없으니까 아빠한테 한 번 해보려고. 아빠 맨날 어깨 아프다고 투덜거렸잖아?" "그래. 한 번 해줘 봐." 예안은 '그것'을 정호의 등에 가져다 대고 작동시켰다. "아이구, 그것 참 시원하다. 내가 전에 쓰던 것보다는 약한 것 같은데 그게 오히려 더 시원하네." "그치?" 예안은 즐거운 표정으로 '그것'으로 정호의 등과 어깨를 이리저리 문질렀 다. 자. 과연 이 물체의 정체가 뭔지는 각자 알아서 상상해 보시라. 5월 10일. 청와대는 공식적으로 맥의 존재를 국민들에게 발표했다. 전투 기로 변신이 가능하고 육해공 등 다방면에 걸쳐 활용 가능하며 무한동력 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움직이는 전투병기라고 그대로 말하지 않고, 단 지 사상초유의 굉장한 능력을 지닌 초현대적 신무기를 구입했다고 돌려 말했지만 그 파장은 엄청났다. 예전에 태평양에서 맥과 조우했던 해군함대를 통해 엄청난 신경을 쓰고 있던 미국 정부는 대번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맥에 대해 이리저리 돌려 묻는 미국의 질문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며 교묘하게 받아쳤다. 미국은 한국이 비밀리에 사들였다는 사상초유의 전투병기가 자신들이 접촉한 정체불명의 전투병기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고 싶어 몸이 달았지만 한국은 요격 테스트 때까지는 보안을 철저히 유지할 것이 라고 했다. 일반인들은 대부분 군사 쪽으로 별다른 관심이 없다. 하지만 한국 정부 는 국민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엄청난 광고를 때려대고 잦은 기자회견을 가졌다. 때문에 아예 TV와 관련을 끊고 사는 사람들이 아닌 이상 한 번 쯤은 맥이라는 이름을 들어보게 되었을 때에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 은 극에 달했다. 과연 요격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FIRE-3를 한국이 비 밀리에 사들였다는 맥이라는 전투병기가 요격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바 로 주된 관심사였다. 한국이 낳은 천재라는 별명을 지닌 서울대 물리학 교수 이병원을 비롯하 여 여러 명의 전문가들은 대국민 발표가 지난 어느 날 은밀히 청와대의 부름을 받았다. 이 교수와 이들이 대통령을 직접 면담하고 또 얼마나 지 난 어느 날, 국민들의 관심이 엄청나게 팽창해졌을 때 정부는 다시 한 번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기자회견에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프랑스 기타 등등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기자들도 대거 몰려왔다. 인천 앞바다의 유전으로 인해 아시 아의 주된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한국에서 야심차게 FIRE-3를 요격가 능한 전투병기를 사들였다는 데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나라는 없었던 것 이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일본의 신문 기자 시게루는 별로 표정이 좋지 않았 다. "FIRE-3를 요격 가능한 미사일을 사들였다? 개발한 게 아니라? 이게 말 이나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나?" 동료인 무라시마도 떨떠름한 기색이 역력했다. "말도 안 되지. 만약 그런 미사일을 개발한 나라가 있다면 진작에 자신 들이 발표하지 뭐하러 한국에 몰래 팔아서 발표하게 하겠나?" "어째서 한국은 어느 나라한테서 그 무기를 사들였는지 발표하지 않는 걸까?" "모르지. 일단 오늘 기자회견에서는 전문가들까지 대거 참석했으니 아마 도 본격적으로 베일을 까발릴 예정인가 보지. 어쨌든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으면 하는 게 바램이야." "맞아. 한국이 그런 요격망을 갖고 있다는 건 우리 일본한테는 별로 좋 은 일이 아닐 테니까. 부디 개망신 당하고 끝났으면 좋겠군." 미국에서 온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FIRE-3를 요격한다고? 맙소사, 말도 안 돼. 한국이 유전으로 돈을 좀 벌더니 드디어 맛이 가버렸군. 사거리 400km의 국화 미사일을 개발한지 얼마나 됐는데 FIRE-3를 요격한다고 나선단 말인가?" "그 이름이 맥이라고 했던가? 한국이 직접 만든 무기는 아니라고 하잖 나. 모 국가로부터 비밀리에 사들였다고 했으니까 한국의 미사일 수준하 고는 별다른 상관이 없을 텐데." "그럼 자네는 대기권 진입 속도가 마하 70이 넘는 괴물을 요격할 미사일 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거기다가 페너트레이트 시스템까지 부착했 단 말이야. FIRE-3를 개발한 마르츠 사에서도 앞으로 수십 년 간은 절대 무적일 거라고 장담했다구." "글쎄, 나도 그 맥이라는 것이 FIRE-3를 정말로 요격가능할 거라고는 생 각하지 않아. 아마도 요격 테스트는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겠지. 사실 그런 무기가 개발됐으면 먼저 발표부터 하지, 한국에 팔기부터 할 미친 나라가 어딨겠어?" 넓은 기자 회견은 한국의 시도는 하나의 웃음거리로 끝을 장식하고 말거 라 판단하는 각국 기자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이윽고 별이 네 개 달린 해군 대장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그제야 기자 들은 숨을 죽이고 시선을 모았다. 해군 대장은 마치 먹이를 훑어보는 야 수와 같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주변을 훑어보고 난 뒤 입을 열었다. "저는 해군대장 김차훈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기자회견장에 오신 각국 기자 여러분들의 노고에 감사 드립니다. 아울러 TV를 통해 이 장면을 보고 계실 국민 여러분의 관심에도 깊이 감사 드립니다. 이번에 우리나라가 구입한 맥에 대해서 이미 들어 아셨을 테니 거두절미하고 먼 저 여러분이 궁금해하실 사항에 대해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장내에는 고요한 침묵이 가득했다. "우리는 맥이라는 이 사상초유의 신무기를 알려지지 않은 천재 과학자 프랭크 앤쏘니 유젤 씨한테 주문 제작을 통해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유 감스럽게도 유젤 씨는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하셨기 때문에 맥은 이 세상 에 단 한 기만 있을 뿐, 설계도를 비롯한 모든 것은 영원히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기자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만약 한국 정부의 말 그대로 맥이 사 상초유라면, 이 세상에 단 한 기밖에 없다는 건 야릇한 질투심을 피워 올리는 사실이다. "질문 있습니다. 한국은 맥이라는 무기를 얼마의 돈을 주고 구입하기로 한 겁니까?" 프랑스 기자의 질문이었다. "좋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국민 여러분들을 비롯하여 많 은 분들께서 도대체 우리나라가 얼마를 주고 맥을 사기로 결심했는지 궁 금해하셨을 겁니다. 원래라면 유젤 씨에게 맥의 판매금액을 지급해야 마 땅하나, 이미 유명을 달리하셨기에 정부는 유젤 씨의 유족에게 지급하기 로 했습니다. 마침 이 자리에는 프랭크 안쏘이 유젤 씨의 유족인 샘슨 유젤 씨가 와 계십니다." 기자들의 시선이 해군 대장의 눈이 가리키는 쪽을 따라 일제히 돌아갔 다. 그 자리에는 이십대의 동양계 청년이 앉아 있었다. 그는 기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손을 살짝 들어 빙긋 웃어주는 여유까지 보였 다. "우리는 맥의 판매대금으로 향후 우리나라가 소유한 유전에서 나오는 모 든 이익을 영구히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 잠시 동안 침묵. 그리고 댐이 무너지듯 사람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 다. "뭐, 뭐라고요!!" "말도 안 돼!!" 달구어진 쇳덩어리에 찬물을 끼얹는다는 게 바로 이런 느낌일까. 좌중에 모인 사람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TV를 통해 기자 회견을 지켜보고 있던 많은 국민들도 마찬가지로 뒤로 넘어갈 듯 놀랐다. '당신들의 그 심정 이해합니다. 나도 처음에 들었을 때는 굉장히 놀랐으 니.' 김 대장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자신이 이 무대에서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여러분들이 놀라신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우리나라 유전이 벌어들이는 돈은 연간 45조 달러 가량, 우리나라 국가 예산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막대한 금액이지요." "말도 안 됩니다! 아무리 대단한 무기라 하나 그건 너무 터무니없는 가 격입니다. 엘가와 급 항공모함도 한 척에 700억 달러입니다. 그런데 연 간 45조 달러를 벌어들이는 유전을 아예 통째로 갖다 바친다구요?" "전 이 나라 국민은 아니지만 이건 정말 너무 어이없습니다. 어떻게 유 전을 통째로 줄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YH 정권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 로 이런 거래를 성사시키기로 한 겁니까?" 차라리 욕설에 가까운 온갖 비난들이 쏟아져 나왔다. 평상시 같았으면 외국인 주제에 우리가 하는 일이 감놔라 배놔라 하느냐고 분개했을 국민 들조차도 그들의 비난에 동조할 지경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말도 안 돼요! 아무리 대단한 무기라 한들 어떻게 연간 45조 불을 벌어 들이는 유전하고 맞바꿀 정도의 가치가 있다는 겁니까!"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냉정하게 따지면 우리가 훨씬 이득이 되는 거래입니다." "뭐라구요?" 오히려 한국 측이 이득이 되는 거래라는 말에 호기심이 동한 좌중은 그 제야 진정되었다. TV를 통해 기자회견을 지켜보고 있던 국민들도 청와대 게시판에 분노의 항의글을 올리는 걸 중단했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 연간 45조 달러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바꿀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도 오히려 한국이 이익이다?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말에 기자들을 비롯하여 한국민들은 호기심까지 느꼈다.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근무 중이신 이병원 교수님을 소개합니다. 교수 님, 올라와 주시죠." 김차훈 대장이 내려가고 이 교수가 올라오자 좌중에 자리잡은 호기심은 점점 더 진해졌다. 이 교수는 잠시 주위를 훑어보더니 차분히 입을 열었 다. "이 세상에 다시없을 천재 과학자 프랭크 안쏘니 유젤 씨가 사망하고 난 뒤 우리는 어떻게든 맥의 동력과 성능의 구조에 대해 과학적으로 해명하 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개미처럼 번번이 실패의 쓴잔을 마셔야만 했습니다." 전문가가 권위를 내세워 이야기한다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일반 인들은 믿는다는 속설을 증명이라도 하듯 기자들은 진지하게 경청했다. "먼저 우리는 맥의 외장갑을 이루고 있는 엘레스토늄이라는 금속의 구조 에 대해 해명하려 했습니다만, 그건 불가능했습니다. 우리는 고작해야 엘레스토늄이 열과 충격에 얼마나 강한지 측정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금속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신원소이며 자연 적으로는 절대 만들어질 수 없는 물질입니다. 그 강도는 알려진 어떤 물 질보다 단단했습니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였으니까요." 장내의 분위기는 점점 고요해져갔다. 개중에는 열심히 받아 적는 기자들 의 모습도 간간이 보였다. "외장갑의 경이로운 강도, 기동력, 화력, 정밀성 등에서 맥은 현존하는 그 어떠한 병기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제 남은 건 FIRE-3를 요격함으로써 실전에서도 그 가치를 톡톡히 다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유전을 송두리째 넘긴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않 습니까?" 한 미국 기자의 질문에 이 교수는 잠시 동안 그를 주시했다. 그리고 다 시 말했다. "물론 지금까지 열거한 장점만으로도 충분히 세계 최강이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되지만 유전에 대한 이익을 영구히 넘긴다는 건 뭔가 억지에 가 까운 말입니다. 그러나 맥이 움직이는 원동력에 대해 들으신다면 아마도 여기 계신 기자 여러분은 물론이요, TV를 통해 지켜보고 계신 국민 여러 분들도 납득하실 겁니다." 기자들은 일제히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하니 원자로 하나 가지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건 아닐 텐데? "설마 핵융합로라도 장착되어 있다는 말입니까?" 한국의 한 기자가 질문하자 좌중은 일제히 긴장했다. 인류의 꿈인 핵융 합로가 장착되어 있다면, 그래서 한국은 그 핵융합로의 비밀을 알아내는 데 큰 가치를 두고 있다면 유전을 넘기면서까지 맥을 사려고 하는 이유 가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핵융합로가 아닙니다. 무한동력입니다." "예?" 기자들은 자신이 지금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반문했다. 무한동력이라 니? "말 그대로입니다. 핵융합로처럼 에너지 효율이 월등히 높은 청정 연료 를 쓰는 게 아니라, 일정한 질량의 연료에서 무한히 에너지를 생산해 내 는 영구적인 에너지 장치입니다. 물론 연료의 소모는 전혀 없습니다." 기자들과 TV를 통해 지켜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경악했다. 이 무슨 귀 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말도 안 됩니다!" 흥분을 참지 못한 프랑스의 한 기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금 무슨 허무맹랑한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핵융합로라고 해도 믿어 지지 않을 판에, 무한동력이라고요? 연료의 소모 없이 에너지를 무한히 생산해 낸다고요? 그게 무슨 미친 소리입니까!" 굉장히 무례한 발언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만큼 이 교수가 한 발언은 놀라운 것이었다. 무한동력이라니? 어떤 식으로든 에너지를 생산해 내면 필연적으로 연료 는 소모하기 마련이고 한 번 사라진 에너지는 다시 재생해 쓸 수 없다는 건 변하지 않는 진리나 마찬가지였다. 정설로 자리잡지 못한 일부 커다 란 이론에서는 무에서 에너지를 창출해 내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에 불과한 것이다. 무한동력이라는 건 말 도 안 되는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믿지 못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실험으로 그 것을 증명해냈습니다." 이 교수는 가라앉은 눈으로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았다. 어느덧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해져 있었다. "맥의 에너지원은 ST기관이라는 것으로서, 이 장치는 열 에너지와 전기 에너지의 형태로 외부에 에너지를 공급해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무인도에서 ST기관을 초전도 상태의 물질로 연결해 수백 조 킬로와트 가 량의 전류를 흐르게 했습니다. 실험이 끝난 후 ST기관 속의 연료인 자이 오 다이아몬드의 질량을 측정해 본 결과, 실험 전과 비교해 조금도 줄지 않았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간접적으로 무한동력을 증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기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충격 받은 표정으로 멍하니 이 교수만을 응시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나라는 석유를 태워 발전기를 돌릴 필요가 없어졌습 니다. 생태계 파괴의 주원인이 되는 수력발전소나 방사성 폐기물을 쏟아 내는 골칫덩어리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맥은 평 화시에는 한반도 전체에 전기를 공급하는 청정 에너지 발전장치로 쓸 수 있으며, 아울러 국가간의 송전용 전설이 개설되기만 한다면 유라시아 대 륙 전체에 전기를 수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먼저 그러기 위해선 상온 에서도 초전도 상태를 유지하는 물질이 개발되어야 하겠지만요." 경악과 불신으로 얼어붙은 기자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 생각을 못했다. 어제 저녁의 기자 회견을 보고 난 예안은 기분 좋게 학교로 향했다. 아 니나 다를까. 반 친구들은 한창 맥에 대해 열의를 태워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되잖아! 내가 아무리 과학에 대해선 잘 모른다고 하지 만 무한동력이라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개념인지는 잘 안다구! 어떻게 에너지를 무한으로 생산해낼 수 있냐?" "바보야! 어제 이 교수님이 하신 말씀 못 들었어? 그 맥의 연료라는 자 이온든지 뭔지가 하는 게…" 듣고 있던 예안은 정정해주었다. "자이오 다이아몬드." "아, 그래. 자이오 다이아몬드라는 게 수백 조 킬로와트의 전력을 생산 해 낸 다음에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고 하잖아?" "야! 에너지로 전환되었는데 어떻게 원래 물질 질량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을 수 있냐? 그건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건데?" "어제 교수님이 하신 말씀 못 들었어? 자이오 다이아몬드는 임계질량 미 만에서는 눈꼽만큼의 에너지도 생산하지 못하지만 임계질량 이상이 모이 면 무한으로 에너지를 생산해 내는 물질인 것 같다고 하는 말 말이야!"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이잖아! 확실하게 증명해내지 못하는 이상 맥을 구입하는 건 반대야!" "맞아! 반대야! 반대라구!" 예안은 입씨름하느라 바쁜 아이들을 흘끗 쳐다보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 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50 : 50으로 의견이 갈라져 맞붙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이네 뭐. 사실 처음에는 무한동력을 아무도 안 믿어줄 거라고 예상했었으니까. 그것보다는 낫잖아?' 예안이 앞으로의 일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 결판을 내지 못한 아이 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얼굴을 들이대며 외쳤다. "공주! 공주는 어떻게 생각해?" "뭐, 뭘?" 예안은 속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굉장히 놀랐다. "맥이라는 무기 말이야! 우리나라가 그걸 샀으면 좋겠어 안 샀으면 좋겠 어? 우리반은 도저히 결판이 안 나니까 그냥 공주의 의견을 따르기로 할 게!" "맞아! 공주가 우리반 리더니까 공주가 결정해!" "빨리 결정해!" 1학년 3반의 리더가 반장이지 어째서 공주냐. 어쨌든 남녀 가릴 것 없이 얼굴을 들이대며 얼른 결정하라고 재촉하는 건 마치 한 달은 굶은 사자 에게 홀로 쫓기는 것처럼 공포스런 경험이었다. 목청을 가다듬은 뒤 예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우리는 아직 나이가 어리잖아? FIRE-3 요격 테스트가 끝난 뒤 대 국민 투표가 시작되어도 우리는 참가 못한다구. 투표권이 없는데 그런 거 갖고 왈가왈부해봤자 우리가 뭘할 수 있겠냐?" "!!" 미처 그걸 생각지 못하다니. 아이들의 표정이 허탈함으로 일그러졌다. "조용 조용! 모두들 조용히!" 그때 담임인 정 선생이 들어오며 아직도 떠들고 있는 아이들에게 호통을 쳤다. "그렇지 않아도 맥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에 학교가 시끄러워 죽겠는데 너희들까지 이러기냐? 어차피 너희들에게는 투표권도 없고, 게다가 그런 거 판단할 능력도 없으니 그냥 어른들 하는 거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 이야. 알았나?" 아이들은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예. 알았어요." "자자, 그것보다 너희가 아주 관심 있어 할 주제거리가 있다. 바로 오늘 이 중간고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거든." "에엑? 벌써요?" 아이들의 표정이 참담함으로 일그러졌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든 못하는 아이든 간에 가릴 것 없이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 학교 다니는 날 중 가 장 싫은 날임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정 선생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아이들을 훑어보았다. "조금 있다가 게시판에 성적이 붙으면 알겠지만, 우리 반에 전교 1등이 나왔다. 게다가 전과목 만점이라는 놀라운 사실." "에? 차세현이 없는데? 그럼 수연이가 전교 1등 했어요?" 아이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배치고사 전교 3등을 한 김수연에게로 향했 다. 수연은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마, 말도 안 돼! 나 이번 시험 몸이 아파 공부 제대로 못해서 망쳤다 구. 평상시 컨디션이라도 전과목 만점은 어림도 없었을 텐데 무슨 재주 로 그걸 다 맞춰? 전교 1등은커녕 반에서 3등도 못 들었을걸?" "그럼 도대체 누구야?" 도대체 누가 전교 1등을 한 괴물이란 거야? 이번 시험 굉장히 어려웠는 데 도대체 어떤 미친 녀석이 그걸 다 맞췄다는 거지? 아이들은 패닉 상 태에 빠졌다. 정 선생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후후, 설마설마 했지만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미소녀가 우리 반에 전학 올 줄 누가 알았겠니? 서예안!" 예안은 놀라 벌떡 일어났다. "예?" "네가 전교 1등이다." "…에… 예? 뭐라고 하셨어요?" 아마도 어이가 없다는 상황은 이런 걸 말하는 것일 게다. 예안은 잠시 동안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파악이 안 된 채로 멍하니 서 있 었다. 경악으로 가득 찬 아이들이 시선이 자신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을 때에야 예안은 겨우 정 선생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 말도 안 돼요! 저, 전교 1등이라니! 저, 전 이번 시험 반에서 15등 안에 드는 게 목표였다구요! 제가 전교 1등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 잖아요!" 참고로 1학년 3반의 인원은 30명이다. "뭐야? 그럼 설마 그걸 다 찍어서 맞았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그, 그런 건 아니지만…" "후후, 하여튼 너도 참 앞으로의 인생이 순탄하지는 않겠구나. 이걸로 대명고등학교에서 너의 주가가 더 올라가겠는걸?" 뭐랄까. 기쁘다기보다는 당혹스럽다고 해야 할까. 단 한 번도 자신이 전 교 1등을 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예안은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다. 하 지만 이것으로 인해 징그러운 사내 녀석들이 자신을 더욱 더 짝사랑하게 되리라는 걸 예상했었다면, 예안은 시험날 일부러 아파 눕는 한이 있더 라도 절대 전교 1등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중현은 기자 회견 때 맥의 무한동력에 대해 사람들에게 설명한 서울대 물리학과 이병원 교수를 찾아갔다. "반갑습니다, 교수님." "아, 어서 오게. 이리 앉지." 이 교수가 권하는 자리에 앉은 중현은 농담조로 이야기를 꺼냈다. "요새 굉장히 고생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온갖 사람들이 다 맥에 대 해서 물어 온다구요." 이 교수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말도 말게. 그것 때문에 요새 정말 겁나서 밖에도 함부로 못 나간다고. 만약 여기가 미국이었다면 불만을 품은 녀석 한둘쯤이 벌써 총을 쐈을지 도 모르지. 그만큼 무한동력이라는 건 아직 인류에게는 받아들여지기 힘 든 생소한 개념인 게야." "차라리 핵융합로를 이용해 움직이는 것이었다면 오히려 열광을 받았을 텐데 말이죠." "그랬을 테지." 이 교수는 차를 한 잔 들어 마셨다. "그런데 프랭크 박사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길래 그런 엄청난 무기를 만 든 거지? 아니, 그렇게 사람을 해칠 무기로 만들 바에야 차라리 이로운 발전기만을 만드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저는 프랭크 박사의 제작 의도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죠. 어쨌거나 맥은 유사시에는 강력한 무기, 그리고 평화시에는 발전 용으로 쓸 수 있지 않습니까? 더 할 나위 없는 귀중품이죠." "흐음. 어쨌거나 섬에서의 그 실험은 정말 놀라웠어. 수백 조 킬로와트 의 전력을 뿜어내고도 전혀 질량이 줄어들지 않다니, 정말 무한동력이라 는 개념인가 보더군. 놀라워, 놀라운 일이야. 그런 대단한 천재가 이미 죽어버렸다니, 인류에게 크나큰 손실이야." 이 교수가 안타까운 듯 그렇게 읊조리자 중현은 태연히 웃으면서도 속으 로는 뜨끔했다. 프랭큰지 뭔지 하는 이름은 몰라도 맥을 만든 사람은 아 직 태연히 살아서 학교까지 다니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그것도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에. "유젤 가문이라고 했던가? 그 집안 사람들은 이제 팔자 폈군. 적어도 수 십 년은 연간 45조 달러 이상의 돈이 굴러 들어올 테니 말이야. 그나저 나 이름이 프랭크 안쏘니 유젤인 걸 보면 외국인이 틀림없는데 기자 회 견 때 본 샘슨 유젤은 어째서 한국인이었던 거지?" "프랭크 안쏘니 유젤 씨는 외국인이었습니다. 샘슨 유젤 씨는 프랭크 씨 의 양자인 데다가 유일한 가족인 셈이죠. 게다가 샘슨 씨는 유전을 받든 받지 않든 한국에 들어와 영구히 살 예정이었다 합니다. 해외동포라는군 요." "흐음. 그럼 세금은 우리나라에 내겠군." "연간 45조 달러의 소득이니 세금은 그중 40%인 18조 달러를 내게 됩니 다. 우리 돈으로 1800조 원인 셈이죠.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샘슨이라는 사람 아주 팔자 폈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금액이 아닌가? 세계 제일의 부자인 앤드류 회장조차도 전 재산이 5조 달러에 불과한데 말이야. 연간 소득은 약 1, 2조 달러 정도 되었던가?" "그러나 앤드류 회장은 순수 자산은 5조 달러인데 비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금액은 천문학적인 액수지요. 카를로스, 이카루스, 네로스, 포세이 돈의 본사와 자회사를 통해 전세계에 유통되는 자금은 가히 추정 불가능 한 액수라고 하지 않습니까? 따지고 보면 샘슨 씨는 앤드류 회장보다 더 큰 부자는 될 수 있어도 세계의 경제를 쥐고 흔들기는 힘들 겁니다. 그 럴만한 능력도 없고요." "흐음. 하지만 연간 27조 달러의 순이익이라면 머리만 잘 쓰면 세계의 경제를 갖고 놀 수 있지. 왜 나한테는 그런 천재 과학자 부친이 없는 거 지? 정말 억울하군. 억울해." "하하, 저랑 생각이 같으시군요. 저 역시 굉장히 억울합니다." 중현과 이 교수는 한참 동안 유쾌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 느덧 시간이 많이 지나자 중현은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라고 인사 하고는 이 교수의 방을 나왔다. 건물 밖을 나온 중현은 차를 세워둔 쪽 으로 향했다. "실례합니다. 혹시 국정원의 김중현씨 되십니까?" 바로 그때.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리자 중현은 흠칫했다. 뒤를 돌아보니 어깨에 살짝 닿는 길이의 흑발을 가진 잘생긴 남자가 서 있었 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예, 제가 김중현입니다만. 실례지만 그쪽은 누구시죠?" 그 남자의 묘한 기도에 압도당한 중현은 기분이 조금 나빠졌다. 야수 같 은 날카로움이 담긴 눈동자로 자신을 훑어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는 포세이돈에 근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초면에 실례지만 묻고 싶 은 게 있습니다. 한국 정부에 맥을 만들어준 프랭크 안쏘니 유젤 씨라는 분에 대해서입니다." "기자 회견에서 이미 밝혔듯이 우리는 그 분에 대해서 자세한 사항은 밝 히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상하군요. 밝히지 않기로 했다구요?" 남자의 야릇한 미소에는 야수의 살기와도 같은 느낌이 강하게 묻어났다. "떳떳한 거래라면 어째서 밝히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게다가 샘슨 씨의 과거 기록을 살펴보니 깨끗이 말소되어 있더군요. 한국인 해외동포였다 는 것만 공식적인 발표를 통해 알려졌을 뿐, 언제부터 어느 나라에 언제 까지 살았는지 기타 등등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줄 수 있습니까?" 평범한 기자 따위는 결코 아니다. 중현은 그 남자로부터 노련한 첩보원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샘슨 씨의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해 할 말 역시 없습니 다. 중요한 건, 샘슨 씨는 우리나라의 새 국적을 얻어 앞으로 영원히 우 리나라에 살 것이고, 대국민 투표에서 맥의 구매가 확실시되면 샘슨 씨 는 유전에서 나오는 이익을 영구히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한국인가요?" "무슨 뜻인지?" "이상하잖습니까? 왜 하필이면 한국으로 들어온다는 것인지, 어째서 과 거에 대한 기록은 없는 것인지 납득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외국에서 오래 살았으면 아무리 모국이라고 해도 선뜻 들어와 살 결심을 하기는 힘들었을 텐데요. 게다가 샘슨 씨는 그전부터 충분히 들어와 살 수 있었 을 텐데 하필이면 맥을 한국에 넘기는 시점에서 다시 국적을 바꾼단 말 입니까?" "그건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혹시 유전을 넘겨받는 사람은 따로 있는 건가요? 그래서 그 사람의 존 재를 감추기 위해 샘슨이라는 대역을 내세운 건 아닌가요?"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차가운 눈동자에 중현은 그만 섬뜩함을 느꼈다. 조금이라도 긴장이 풀어졌다는 그대로 다리의 힘이 풀려 버려 주저앉고 말 공포 속에서, 중현은 더듬거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 "얼토당토않은 추리입니다. 포세이돈 같은 공룡 기업에서 근무하시는 분 이 입에 담을만한 발언은 아닌 것 같군요. 무엇을 근거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굉장히 엉뚱한 상상을 즐기시는군요." 이 사람이다! 바로 이 사람이 예안을 노리고 있다! 중현은 직감적으로 그것을 알아차렸다. 이 남자는 예안을 쫓고 있던 사람들이 보낸 게 틀림 없었다. "혹시나 우리가 프랭크 씨를 숨겨두고 독점하기 위해 공작을 꾸민 건 아 닐까 하는 오해는 접어두십시오." "무례한 말일지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그가 제일 합리적인 추리입니다. 한국은 프랭크라는 천재 과학자를 숨겨두고 독점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 요? 아니, 어쩌면 프랭크라는 이름 자체가 가명일지 모르지요." 남자가 비웃듯이 그렇게 말하자 중현은 조금 다급해졌다. "말도 안 되는 억지입니다. 만약 프랭크 씨가 현재 살아있다면 우리는 이렇게 섣불리 맥에 대해서 발표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 그렇게 주목받 을 짓을 하겠습니까?" 말하자면 프랭크가 정말로 살아 있다면 그로부터 뜯어낼 만큼 뜯어낸 다 음에 아주 뒤늦게 발표하던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오기 전까지 잠자코 있지 뭐하러 이렇게 일찍 맥에 대해서 발표하느냐 하는 소리였 다. "흐응, 과연 그런 거였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허튼 소리를 했군요. 이거 실례." 남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중현은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걸 최대한 눌러 감추며 억지로 미소 띤 채 악수를 받았다. "실례랄 것까지는 없습니다. 저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서 기분은 좋 군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어쨌든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테니 제 이름이나 알아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는 마리오 클리쳐 세자르반이라고 합니 다." 짙은 검은색 색안경 너머로 마리오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잔뜩 긴 장한 중현은 저도 모르게 그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엘르는 이윽고 마리오가 돌아오자 반색했다. "어떻게 됐어요? 뭐 좀 알아낸 거 있나요?" "아직은. 심증은 확실히 가는데 물증이 없어. 하긴 우리가 언제 그런 거 따지고 행동했냐만은." "흐음. 그나저나 그 아가씨가 의외로 깜찍하네. 태어난지 한 달도 채 안 됐는데 어느새 그런 큰 거래까지 손을 대다니 말이에요. 돈에 대한 개념 도 거의 없을 텐데 유전을 요구하다니, 정말 당차네요." 마리오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거나 인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천재잖아. 박사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보통 인간을 원숭이로 놓았을 때 엔젤은 인간에 해당될 정도로 엄청난 지능을 갖고 있다고 말이야." "흐음. 그렇지만 무한동력장치를 개발한 김윤우 박사도 따지고 보면 엔 젤과 맞먹을 정도로 천재가 아닐까요?" 마리오는 미심쩍어했다. "글쎄, 잘은 모르지만 맥을 만든 건 박사가 아닌 것 같더군." "그래요?" "엔젤은 예전에 박사의 연인이었던 여자의 복제라고 하지 않았나? 만약 그렇다면 박사의 연인이란 그 여자가 맥을 만들었을지도 몰라. 지금으로 서는 그게 가장 그럴듯한 추리야." "흐응…" 엘르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져들었다. 마리오는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시켰다. "하지만 우리는 맥을 누가 만들었느냐를 신경 쓸 여유도 이유도 없지. 우리는 다만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 맥의 무한동력기관을 최대한으로 잘 이용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이 맞아요. 마리오 클리쳐 세자르반." 시트날타를 이끌어 가는 5대 대신 중의 한 명인 제나르. 시트날타 인들 에게만 허락된 고귀한 힘, '에날도스' 능력자 중 최강인 카이저의 호칭 을 갖고 있는 노인. 그러나 지난 3월 달, 무수한 실패 끝에 간신히 탄생 된 엔젤이 탈출해 버린 바람에 지난 시간 동안 제대로 밤잠도 자지 못한 채 고민하고 또 고민한 사람. 하지만 마침내 그의 걱정을 싸그리 날려줄 엄청난 정보가 들어왔다. 보 고서를 넘기는 제나르의 주름진 손에는 환희가 흘러 넘쳤다. "정말, 이게 정말인가?" 제나르는 기쁨에 찬 시선으로 자신의 책상 앞에 서 있는 청년을 주시했 다. 청년 역시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대신 님은 TV를 잘 보지 않으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이미 한국은 맥의 구매에 대해 대국민 투표를 붙인다고 공식적으로 발표까지 했습니다. 보고서에 있다시피 5월 23일 날 FIRE-3 요격 테스트를 한다고 합니다." "정말, 정말로 맥인가? 맥이라고 했나?" "물론입니다. 보안이 철저하기에 아직 실체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분명 맥이라고 했습니다." "동력원은 무한동력이고?" 청년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오오, 이럴 수가. 앞으로 늦어도 몇 년은 걸려야 엔젤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행운이 찾아오다니." 혁명을 이뤄줄 열쇠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낸 지금 제나르는 가슴에서부 터 솟구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비행 기 타고 한국으로 날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나저나 엔젤이 미국에 있는 줄 알고 쥐잡듯이 아메리카 대륙만 뒤졌 는데, 한국에 있었다니. 이거 완전히 허를 찔린 셈 아닌가? 한국에서 도 망쳤으니 설마 한국으로 되돌아가진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마리오 경은 그건 아직 단정지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맥에 대한 가격을 지불할 능력이 되는 나라 중 제일 우선순위가 한국이기 때 문에 한국에 맥을 팔아 넘긴 것뿐, 실제로는 다른 나라에 있을지도 모르 지요." "으음." "하지만 아직 완전한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 엔젤은 한국에 있을 가능성이 무엇보다 큰 건 사실입니다. 거래가 안전하게 끝나기 전에 서 둘러 엔젤의 소재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지요. 아울러 한국이 맥을 차지 하지 못하도록 손을 써야 할 테구요." 한국이 맥을 차자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거의 불가 능했다. 시트날타의 비밀군대를 투입시켜서? 한국의 국방력이 아무리 약 하다지만 엄연한 경제대국이다. 가능하다 해도 굉장한 시간이 소모될 게 뻔하고 맥이 개입하기라도 한다면 너무 간단하게 결판이 나버린다. 게다 가 괜히 눈에 띄는 짓을 해서 세상의 관심을 사모으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한참을 고민하던 제나르는 눈을 떴다. 역시 이 방법이 가장 좋겠지. "마리오에게 연락해라. FIRE-3 요격 테스트가 끝난 후 엔젤을 납치해야 겠다." 청년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맥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최고조에 이르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마 침내 세계 최고의 대륙간탄도 FIRE-3 요격 테스트 날짜가 다가왔다. 남 해안의 해군기지에 주둔하고 있던 대한해군은 국민들의 관심을 잔뜩 받 으며 출항했다. "우리나라 국민들에 국방력에 이렇게나 지대한 관심을 보일 날이 찾아오 리라고 언제 생각이나 했었습니까?" "자네, 감개무량한가 보군." "함장 님은 그렇지 않으신가요? 사실 우리나라 국민들 대다수는 군사력 같은 데는 별 관심이 없지 않습니까? 일부 밀리터리 매니아들은 제외하 구요." "그거야 21세기 초 일이지. 요즘에는 많이 달라졌어. 정치도 한결 깨끗 해지고 나라도 많이 부강해졌는데 바뀌지 않는다면 그게 말이나 되나? 게다가 유전 때문에 우리나라에 대한 주변국가들의 압력이 한결 증폭되 었는데 국민들이 군사력에 관심을 안 쏟을 수가 없지." 젊은 장교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전 맥이라는 무기가 그렇게 세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군요. FIRE-3라면 마르츠 사가 수십 년간은 절대 무적일 거라 장담한 최고급 미사일 아닙니까? 발사된 직후라면 모를까, 대기권 진입 순간의 속도가 마하 70을 넘어가는 괴물을 무슨 재주로 요격한다는 걸까요? 그건 거의 미사일 세계의 신화란 말입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군." "무한동력인지 뭔지 하는 터무니없는 동력장치로 움직인다면 전투기나 전함, 아니면 탱크 뭐 그런 걸까요? 설마 요격용 미사일은 아닐 테고, 어쩌면 고폭 레이저 발사 장치일 수도 있겠군요. 자주포 같은 것 말입니 다." "그렇겠지. 어쨌든 전용 도크함까지 새로 만든 걸 보면 탱크 따위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큰 모양이야." 함장은 자신이 타고 있는 함정 좌측에서 꾸준히 직항하고 있는 도크함을 흘끗 쳐다봤다. 길이가 50미터 가량되는 저 도크함 속에 맥이라는 무기 가 실려 있다는 건 알지만, 아직까지 그는 맥이 어떤 종류의 무기인지조 차 알지 못했다. 그건 이 함정에 동승하고 있는 여러 나라의 기자들 역 시 마찬가지였다. 대한해군함대에 동승하고 있는 기자들의 분위기는 가지각색이었다. "전 도대체 한국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훈련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도대체 무슨 재주로 FIRE-3를 요격한다고 나선 걸까요??" "그 프랭크 안쏘니 유젤이라는 천재 과학자가 만들어줬다고 하지 않았던 가요? 이병원 교수하고 여러 전문가들이 기자 회견에 나서서 공식적으로 설명할 정도라면 적어도 어설픈 해프닝 정도로 끝날 건 아닌 것 같은데 요." "그러니까 더 답답할 노릇이죠. 무한동력이라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개념인지는 그 이교수라는 사람이 더 잘 알 것 아니겠습니까? 근데 전문 가가 되어서 앞장서서 어처구니없다고 항의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정부 를 두둔하고 나서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국민들에게 똑바로 설명해 줘야 할 전문가들까지 덩달아 나서서 국민들을 현혹시키고 있으니, 이래 서야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겠어요? 내가 이 나라 국민이 아니라는 게 정 말 다행입니다."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마런씨." "하도 답답해서 하는 말입니다. FIRE-3를 요격한다는 것 때문에 내가 이 러는 게 아니에요. 무한동력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개념이라 생각하 세요?"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그 시절의 종교인들에게 지동설은 과연 진리였습니까?" 마런이라는 기자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물론 저 역시 무한동력이라는 동력장치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하지 만 무조건적으로 부정할 것만이 아니라 결과를 끝까지 지켜본 다음에 판 단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게다가 이교수라는 사람도 실험을 통해 무한 동력을 간접적으로 입증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 연료가 되는 자이오 다이아몬드라는 게 수백 조 킬로와트 가량의 전기를 뿜어내고도 전혀 질 량이 줄어들지 않았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그 자이오 다이아몬드라는 것의 원리를 해명하지 않는 이상…" "사실 우리 인간들은 모든 자연적 현상을 해명한 다음에 그것을 실생활 에 적용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수맥 탐지기만 해도 그렇지 않나요?" 할 말이 없어진 마런은 쓴웃음만 지었다. "데커드 씨는 사고방식이 너무 개방적이에요.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군요. 그럽시다. 무한동력인지 뭔지는 해명이 안 되었지만 일단 FIRE-3를 과연 요격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지켜봐야겠지요. 과연 맥이라 는 무기가 미사일 세계의 신화로 우뚝 선 FIRE-3를 격추할 수 있을 것인 지 아니면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것인지는 이제 두고 보면 알겠죠." 맥이 실린 도크함 속의 전용 휴게실에서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던 예안은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누구인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이 안으로 들어올 자격이 되는 사람은 이 도크함 에서도 몇 명 되지 않은 데다 들어오기로 되어 있는 사람도 단 한 명밖 에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중현이었다. "예안씨는 별로 떨리지 않은 모양이군요." "떨리고 말고 할 것도 없잖아요? 아저씨는 많이 떨리세요?" 또 아저씨인가. 중현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사실 저는 굉장히 많이 떨립니다. 우리도 여러 방면으로 입수한 정보를 통해 맥의 성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지만 FIRE-3를 정말로 요격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솔직히 의문이거든요." "그러고 보면 정부도 참 대담하네요. 미리 비밀리에 실험도 해보지 않고 이렇게 곧바로 공식적인 테스트에 나서다니. 만약에 실패로 돌아가면 국 가적인 망신이 따로 없을 텐데요." "비밀리에 테스트를 한다면 중국에서 FIRE-3를 10발은커녕 단 1발조차 팔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약속을 어기고 꿀꺽할지 안 할지 누가 안단 말입니까? 미리 계약서에서 철저하게 요격 테스트에서만 쓴다고 약속한 데다가 이렇게 아주 대놓고 테스트하는 것이기에 안심하고 판매한 것이 지요." "미리 실험을 하지 못한 건 어쩔 수 없었다는 건가요?" "그렇죠." 예안은 눈을 떴다. 녹색 눈동자 속에 자리잡은 자신감이 강하게 빛났다. "걱정 마세요. 그까짓 FIRE-3 요격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서비스로 재미있는 것도 하나 보여 드릴 테니까 기대하고 계세요." 서비스? 중현은 그게 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미리 듣는 것보 다 직접 보는 게 더 나을 테지. "사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거 원, 진작에 말씀드려야 했는데 차일 피일 미루다 보니 이렇게까지 됐네요." "뭔데요?" 중현은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인 듯 조금 망설였다. "사실 맥의 파일럿에 대해서입니다. 예안씨는 당신 자신이 아닌 다른 사 람은 누구도 맥을 움직일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드리는 말 씀인데…" 아직 고1밖에 되지 않은 소녀에게 이런 부탁을 하게 될 줄이야. 중현은 세상이란 참 얄궂은 것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예안씨가 해군 소속으로 들어오셔서 맥의 파일럿이 되어 주십시오." 이미 유니콘을 통해 이런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알고 있었던 예안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녹색 눈동자를 들어 중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 다. 어찌 보면 순진한 것 같기도 하고, 다르게 보면 자신의 마음을 꿰뚫 어 보는 듯한 녹색 빛이 지금은 오로지 자신만을 올려다본다는 사실에 중현은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 말씀은 저보고 군대에 입대하라는 말인가요?" "예." "저는 아직 고1밖에 되지 않았는데요? 그리고 그렇게 하면 제 신상이 드 러나게 되는데요?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저의 두뇌와 맥을 노리는 사람들이 지금 절 쫓고 있다구요. 그래서 저는 절대 표면으로 드러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 부분은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프랭크라는 가공의 인물과 샘슨이라 는 가공의 유족을 내세웠듯이, 파일럿도 대외적으로는 대역을 내세우고 예안씨에 대한 건 철저히 숨기면 됩니다. 사실 이번 테스트도 그렇게 하 지 않았습니까?" 그 말이 맞았다. 지금 국민들과 기자들은 맥의 파일럿을 해군 소속의 한 장교로 알고 있었다. 정부가 예안에 대한 신상을 숨기기 위해 그렇게 발 표했기 때문이었다. "예안씨만 승낙하신다면 정부가 맥의 파일럿으로 내세운 변성철 소위께 서 계속 그런 역할을 맡게 될 겁니다." "그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요?" "그렇습니다." 이미 유니콘에게 이런 질문이 오면 어떤 대답을 해야 한다고 전해들은 바 있는 예안은 잠시 망설이는 척 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좋아요. 그럼 한국 정부는 저에게 또 무엇을 줄 수 있죠?" 이런 물음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중현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무엇이든지 말씀해 보시지요. 이미 유전까지 갖다 바쳤는데 무엇인들 더 드리겠습니까?" "킥. 그렇게 말하니 내가 왠지 악덕 상인이 된 것 같잖아요. 나중에 생 각나면 말씀드릴 테니까 기다려 보세요." 재미있다는 듯 소리 죽여 킥킥 웃는 예안의 귀여운 모습이 마냥 사랑스 럽게만 느껴졌지만 중현은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자신의 배경이나 능력 기타 등등에 대해 자신 없는 건 아니었지만(오히려 남들에게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다) 어쨌거나 상대는 세상에 다시없을 천 재 과학자인 데다가 지구상에서 가장 일등 신랑감으로 손꼽히는 앤드류 왕자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고 있는 여자이니까. '게다가 나이 차이도 10살이나 나고 말이야.' 중현은 속으로 그렇게 쓴웃음을 지었다. "예안씨는 정말 아름답군요. 모델이나 영화배우 쪽으로 진출해보고 싶단 생각은 해본 적 없나요?" "모델? 영화배우?" 잠시 고개를 갸웃한 예안은 야릇한 비웃음을 지었다. "한국의 연예계가 어떤 건지 잘 아신다면 그런 말씀은 안 하실 텐데요? 기획사 사장이나 잘 나가는 PD랑 하룻밤 자주고 나서 귀여움 받는 그런 직업을 택하라구요?" 이런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던 중현은 매우 당황했다.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연예인이라고 해서 전부 다 그런 식으로 인기를 얻거나 유명해지는 건 아니잖습니까? 개중에는 정말 재능과 능력을 풍부해서 최고점에 선 사람들도 많이…" 예안은 중현의 말을 가로챘다. "많이 있을 테죠 물론. 하지만 일반인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잖아 요? 그리고 유감스럽지만 전 연예인 같은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TV도 거의 안 보거든요. 가끔 뉴스나 좀 볼까?" 하긴 이런 뛰어난 천재라면 일반 여고생들하고는 취미생활 같은 것도 많 이 다르겠지. 그렇지만 중현은 어째서 예안이 아직까지 평범한 고등학교 생활을 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예안씨가 중간고사에서 전교1등을 차지했다고 들었습니 다. 역시 대단하시군요." 그건 원래 내 실력이 아닌데요. 예안은 반사적으로 그렇게 말하려고 했 으나 얼른 입을 다물었다. 지금 자신은 세기에 다시없을 천재 과학자 역 할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까짓 고등학교 시험에서 1등을 못한다면 천재라는 명함이 울지요." 내가 이렇게 건방진 말을 하게 될 줄이야. 예안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 면서도 겉으로는 자신감에 가득 찬 천재 과학자를 연기했다. "그전부터 계속 궁금했는데, 어째서 예안씨는 고등학교를 다니시는 건가 요? 그 정도 실력과 두뇌면 이미 MIT 정도는 가볍게 조기 졸업하고 박사 학위도 세트로 줄줄이 땄을 텐데 말입니다." "전 학위 같은 거 없어요. 대학도 다녀본 적 없구요." "하지만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그 정도로 물리학과 수학에 통달하려면 독학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현대 과학 이론이 어느 정도까 지 발전했는지 정도는 미리 공부해야 하지 않던가요? 처음부터 혼자서 시작해서 그 정도 수준까지 도달하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할 텐데요." 그 정도 질문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예안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스승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저에게도 그런 분이 한 분 계셨어요. 세상 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과학자셨는데 저의 재능을 알아보시고 키워 주신 분이죠." 중현은 예안의 거짓말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굉장한 흥미를 보였 다. "예안씨를 가르칠 정도라면 엄청난 천재겠군요. 어떤 분이신지 말씀해주 실 수 있나요?" "그 분은 그다지 천재는 아니셨지만 그래도 웬만한 대학 교수 자리나 연 구소장 정도는 쉽게 맡을 수 있는 실력을 가진 분이셨어요. 전 그 분이 가르쳐주시는 걸 전부 다 배운 뒤에 그 다음부터는 제가 직접 지식을 쌓 아나간 거예요. 실험에 필요한 자금 같은 걸 구하는 건 일도 아니었구 요. 그리고 그 분에 대해서 말씀드려봤자 소용없어요. 유명세 같은 걸 원체 싫어하는 분이시라 아마 성함을 말씀드려도 아저씨는 모를 테고, 또 이미 돌아가셨으니까요." 또 아저씨란 말입니까. 중현은 쓴웃음이 나오면서도 예안이 말한 스승이 이미 죽었다는 소리에는 조금 아쉬움을 느꼈다. "앞으로 약 한 시간 정도가 지나면 요격 실험하기로 예정된 위치까지 도 달합니다. 그 지점에서 남쪽으로 약 400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FIRE-3를 떨어뜨릴 예정입니다. 예안씨는 미리 그 근처에서 기다리셨다가 요격하 시면 됩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이미 맥의 화려한 데뷔식을 머리 속으로 그려두고 있었던 예안의 녹색 눈동자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중현은 예안의 의미심장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 채 휴게실 문쪽으로 향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때까지 편히 쉬세요." "예." 중현이 나가자마자 유니콘이 말을 걸었다. 「이제는 제가 실시간으로 서포트 해드리지 않아도 알아서 술술 거짓말 을 잘 하시는군요.」 "말도 마. 혹시라도 거짓말한다는 게 들킬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알아? 막말로, 당장 전문가 하나 불러와서 나랑 이런 저런 토론 같은 거 하게 하면 그 즉시 내가 거짓말했다는 게 들통날 거야. 뭐, 원래 저쪽에 서 먼저 오해를 하긴 했지만. 근데 이런 말해도 도청 같은 거에 안 걸릴 까?" 「도청 장치 같은 건 탐지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제가 먼저 말씀 드렸죠. 그리고 전문가를 불러서 유젤 님의 지식을 테스트하는 거라면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제가 그때 대신 대답해드릴 수 있으니까요.」 "하긴, 그런가?" 기지개를 쭉 펴던 예안은 약간 걱정스런 말투로 중얼거렸다. "아마 아빠도 지금쯤 TV로 이거 보고 있겠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 대부분 이 실험에 엄청난 기대를 갖고 있다잖아?" 「성공할 거라는 기대보다는 실패할 거라는 기대가 더 많긴 하지만 말입 니다.」 "그래도 4:6은 된다고 했어. 근데 내가 맥의 파일럿이라는 걸 말하면 아 빠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약간은 걱정스러운 듯, 하지만 은밀한 기대에 차 있는 목소리였다. 「글쎄요.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실망하 거나 슬퍼하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자식이 잘 되는 일에 기뻐하지 않 을 부모는 없을 테니까요.」 "그렇겠지?" 「하지만 당분간은 아버님께 말씀드리지 않는 게 좋습니다. 아니, 어쩌 면 영원히 알리지 말아야 할 수도 있구요. 어쨌거나 시트날타는 우습게 볼 집단이 아니니까요. 그들이 갖고 있는 정치적 영향력은 막강합니다. 게다가 그들 소유의 비밀 군대까지 있습니다. 물론 제가 나선다면 일 분 도 안 걸려서 전부 다 박살낼 수 있습니다만, 적어도 무시할 수 없는 힘 을 지닌 건 사실입니다. 꼭 무력만이 힘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요.」 테스트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무한동력에 대해 어느 정도 국민들에게 납 득시킬 수 있다면 대국민 투표를 통해 유전을 합법적으로 얻어낼 수 있 다. 비록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못하고 샘슨이라는 대역을 내세워야 하 지만 말이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유전을 통째로 얻어낸다면 과연 정 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예안은 정호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시트 날타를 생각해서 당분간은 참기로 했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세계의 관심을 가득 받으며 태평양을 달리던 대한해군함대는 실험이 실 시되기로 예정된 지점에 도착했다. FIRE-3 발사장치를 싣고 있는 함정이 도크함과 함께 앞으로 나서자 기자들과 해군들은 잔뜩 긴장한 채 시선을 그쪽으로 향했다. 그들의 표정은 과연 한국이 유전을 주기로 결심하면서 까지 구입한 맥이라는 병기는 어떠한 것인가 하는 궁금증으로 가득했다. 이윽고 도크함의 뚜껑이 열리면서 전투기 형태로 변신해 있는 맥의 위용 이 드러났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기자, 해군할 것 없이 놀랐다. "저게 맥이라는 건가? 엄청나게 큰 전투기잖아?" "아니, 무슨 전투기가 저렇게 커? 저렇게 커서 빠르게 날 수나 있겠어?" 크기만 하면 별 문제없겠는데 일반 전투기처럼 앞부분이 뾰족하고 날씬 하게 되어 있는 게 아니라 조금 투박한 편이었기에 그들이 우려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개중에는 굉장히 커다란 전투기의 형태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묘한 기대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윽고 사람들의 불안과 실망,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맥이 서서히 떠올 랐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긴 건 일반 전투기에 가까운 녀석이 수직 이착륙까지 하잖아? 지가 무슨 헬기라도 되는 줄 아나?" 그러나 사람들의 놀람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맥이 공중에서 반 바퀴 빙글 돌며 날개를 접고 거대한 인간형 로봇으로 변신한 순간 그들의 얼 굴을 경악으로 가득 찼다. "말도 안 돼! 지가 무슨 건담이라도 된다는 거야?" "변신을 하잖아? 지금 장난이라도 하는 건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변신까지 할 정도면 굉장한 기술로 만들어진 게 틀림없을 텐데 왜 저따위 쓸모 없는 기능을 장착한 거야?" 전투기에서 인간형 로봇으로 변신하는 기능을 장착하는 건 쓸데없는 사 치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어이없어하는 건 당연했 다. 그 정도의 고난이도 기술이라면 차라리 집중적으로 다른 기능을 발 달시키는 게 더 낫지 않느냐 하는 생각 때문에서다. 그러나 맥이 등뒤에 장착한 거대한 라이플을 들어 먼바다 쪽을 향해 레 이저 광선을 쏴대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실망은 곧 사라졌다. 처음의 경 악은 곧 감탄으로 바뀌었다. "와우, 고폭 레이저 광선이군요. 대단한데요. 저건 아직 미국도 실용화 하지 못한 게 아닙니까? 전 또 웬 퍼포먼스를 하나 싶었는데, 적어도 어 이없는 해프닝으로 끝날 건 아닌 모양입니다." 마런이 그렇게 감탄하자 데커드가 맞장구쳤다. "저도 처음에는 쓸데없는 웬 변신기능인가 했습니다. 그런데 저걸 보면 쓸데없는 건 아닌 모양이군요. 단순히 전투기 형태로 공중전만 가능하다 는 게 아니라는 뜻이겠죠?" "그렇지요… 앗! 드디어 FIRE-3를 발사할 모양입니다!" 마런이 황급히 앞쪽을 가리켰다. 함장은 어이가 없었다. "뭐라고? 지금 당장 10발 모두를 발사하라고?" 통신 장교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맥에서 그런 요청이 왔습니다." "말이 되는 소릴 하라고 해. FIRE-3 한 발에 가격이 얼만지 알기고 하는 소리야? 한꺼번에 발사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훈련은 예정대로 1발씩 발사해서 요격하는 걸로 한다." 함장 역시 처음에는 전투기 형태에서 인간형 로봇으로 변하는 맥의 변신 기능을 보고 어이없어 했지만 곧 생각이 바뀌었다. 거추장스러울 게 뻔 한 저런 기능을 일부러 장착한 걸 보면 그만큼 전투기나 로봇 형태로서 의 성능에 자신이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게다가 로봇공학이라면 세계 최고를 달리는 일본에서조차도 그런 로봇은 만들지 못한다. 흐뭇한 기분 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FIRE-3 10발을 전부 다 한꺼번에 발사하라니? 솔직히 단 1발이라 도 제대로 요격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판에 그런 요구를 해오면 기가 막히는 건 당연한 것이다. "함장님! 장관 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통신 장교가 놀라 그렇게 보고하자 함장은 황급히 전화를 받아들었다. 수화기를 귀에 대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함장의 놀람은 더욱 더 진 해졌고 결국 통화가 끝났을 때에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 "정말 위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맥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 주라니… 허참." 설혹 요격에 성공한다 해도 한 발 정도 간신히 요격할 게 뻔한데 10발을 한꺼번에 발사하라니. FIRE-3 한 발에 얼마의 돈을 주고 구입했는지 잘 아는 함장은 눈물이 날 만큼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근데 왜 맥은 저기에 가만히 떠 있는 거지요? 원래대로라면 FIRE-3가 떨어지는 지점 근처까지 가서 미리 기다린 다음에 요격하기로 되어 있지 않았나요?" "글쎄요. 발사한 뒤에 전투기로 변해서 쫓아가기라도 할 모양인가 보죠. 속도에 자신이 있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마하 수십의 속도로 나는 미사일을 전투기가 무슨 재주로 쫓아 간다는 걸까요? 전투기와 미사일이 어디 같습니까? 마하 4 이상이라도 내면 대단한 거 아닌가요?" "글쎄요. 아니면 뭔가 다른 수가 있겠지요." 기자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며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 맥을 흘낏대고 있을 때 수직 발사 장치에서 10발의 FIRE-3가 동시에 발사되었다. 기자 들은 이미 주의를 들은 대로 귀를 막고 고막이 찢어질 듯한 음파를 터트 리며 솟구쳐 오르는 FIRE-3의 위용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과연 마르츠 사의 야심작답게 멋진 모습… 앗! 근데 맥은 왜 가만히 있 는 거지요? 전투기로 변하지도 않았잖습니까?" 음파가 잦아든 후 한 기자가 어이없어하며 맥을 가리켰다. 과연 그 말대 로 맥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않은 채 상공 30미터 지점에 가만히 떠 있기만 했다. 쫓아갈 생각은커녕 전투기로 변신할 생각조차 않았다. 기자로 위장해 그들 틈에 섞여 있던 엘르도 어처구니없었다. "왜 쫓아가지 않는 거지요? 고장이라도 난 걸까요?" "글쎄,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마도 그런 건 아닌 것 같군. 대충 짐작 가 는 바가 있어. 어쨌든 정말 당찬 아가씨야. 후후." 마찬가지로 기자로 변장하고 있던 마리오는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앞으 로 몇 십 초가 지난 후 맥이 어떤 일을 벌일지, 그리고 전세계에서 지켜 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놀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즐 거워졌다. "흐응. 마리오, 왠지 모르게 즐거워하는 것 같은데요? 설마 엔젤을 대견 히 여기거나 뭐 그런 건 아니겠지요?" 마리오는 조금 뜨끔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을 좋아하는군, 엘르 크레시오. 잠자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지켜보기나 하자." "네에 네. 잘 알았습니다." 엘르는 다 안다는 듯 묘한 웃음을 지으며 공중에 가만히 떠 있는 맥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한해군과 동승한 기자들, 그리고 TV를 통해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한국인들과 한국의 이번 요격 테스트에 깊이 관심을 갖고 있는 나라 국 민들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백악관은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맥의 모습이 드러난 그 순간부 터 발칵 뒤집혔다. 예전에 한국에 무력시위를 하러 가던 함대가 맥과 조 우한 뒤에 겁에 질려서 귀환했을 때의 놀람이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그 맥이 이제부터는 한국의 소유라니? 그렇다면 아직까지 질질 끌고 있 는 한미석유조약 갱신 때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기는 이미 글러버린 게 아닌가? 사실 그들이야말로 한국 정부보다 맥의 성능을 더 잘 알고 있었 다. 어쨌든 직접 체험했으니 말이다. 엄청난 사람들의 기대를 안고 가만히 서 있던 맥은 이윽고 폭발적인 기 세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재빠르게 라이플을 들어 정면을 향해 조준 했다. 조금 전 시범 사격을 할 때와는 달리 움직임 하나 하나에 강인한 기도가 흘러 넘쳤다. FIRE-3 10발이 발사되고 나서 수십 초가 지난 순간 맥은 라이플 버스터 를 발사했다. 육안으로는 채 몇 발을 발사했는지도 모를 엄청난 연사속 도였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어리둥절했다. "지금 뭐한 겁니까?" "글쎄요. 설마 저기서 FIRE-3를 쏴서 맞췄다는 건 아닐 테고…" 데커드는 '설마 그렇게까지야 할까?'라고 자신 없어 했지만 언제나 그렇 듯 설마라는 게 사람을 잡는 법이다. 잠시 후 FIRE-3가 떨어지기로 예정된 각 지점에서 대기하고 있던 함정들 은 영상을 보내왔다. 10발의 FIRE-3가 바다에 떨어지기 직전 거대한 굵 기의 빛이 훑고 지나가 일으킨 폭발 장면이었다. 영상 속의 폭발은 약속 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수면에서 채 20미터도 안 되는 지점에서 일어났 다. "말도 안 돼!" "이, 이럴 수는 없어! 어떻게 FIRE-3가 이렇게 허무하게… 이렇게 어이 없게…" 전파를 통해 순식간에 이 영상이 퍼져나가자 세계는 맥의 엄청난 성능에 경악했다. 그야말로 세계 무기의 판도를 뒤집어버릴 엄청난 무기의 화려 한 데뷔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도크함의 내부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현은 예안이 맥에서 내리자 기쁜 표 정으로 맞이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예안씨. 정말 굉장하던걸요. 설마 400km 떨어진 지점 에서 레이저 광선으로 FIRE-3 열 발을 전부 요격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 니다. 최대한 가까이 접근한 다음에야 요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거 우리가 맥의 성능을 너무 과소평가했군요." 예안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별거 아니에요." 5월 23일. 마하 70 이상의 속도로 수면을 향해 떨어지는 FIRE-3는 해발 고도 약 20미터 지점에 이른 순간 거리 400km 떨어진 지점에서 날아온 맥의 라이플 버스터 포에 모조리 요격 당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4년 전 의 테스트 발사에서 경이적인 성능을 자랑했던 신화는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한 소녀에 의해 격추 당하고 말았다. FIRE-3에 대하여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감탄했다. FIRE-3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전문가들은 경악했다. 그리고, 향후 맥의 존재가 어떤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킬지 예상한 나라들은 비상이 걸렸다. 마르츠 사에서조차 가히 요격이 불가능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두손 두발을 든 FIRE-3가 너무나 간 단하고 허무하게 격추되었다는 건 경악을 넘어 공포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들의 경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FIRE-3를 전부 요격하고 유유히 공중에 떠 있던 맥은 갑자기 수면 가까이 내려온 뒤 라이플을 들 어 하늘을 겨누었다. 열심히 메모 중이던 기자들은 깜짝 놀라 얼른 고개 를 들었다. "왜 저러는 거죠? FIRE-3는 전부 다 요격되지 않았나요?" 맥은 이윽고 거대한 에너지를 응축해 라이플을 통해 한순간에 터트렸다. 토끼를 덮치는 거대한 호랑이와 같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폭발하듯 우주 를 향해 날아간 라이플 포의 눈부신 섬광이 미처 잦아들기도 전에, 마치 초신성이 폭발하는 것과 같이 어마어마한 대폭발이 우주 한가운데에서 일어났다. 우주에서 일어난 직경 수천 킬로미터의 거대한 화염구. 지구상에서 모든 생명의 흔적을 지워버릴 듯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는 폭발. 악마의 눈동자를 파먹으며 자라난 죽음의 불꽃처럼 춤을 추듯 너울거리는 파괴 의 기운은 TV를 통해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에게 경악을 불러일으켰다. 아니, 차라리 그것 경악이 아니라 공포라고 해야 옳을까. FIRE-3 요격 테스트와 계획에 없는, 맥이 느닷없이 벌인 우주 한가운데 서의 대폭발 퍼포맨스가 한국인들에게 불러일으킨 경악과 공포는 곧이어 눈부신 자랑거리로 자리잡았다. 유전을 통해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음에 도 불구하고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무기 소유에 대한 온갖 감시와 압력을 받아왔던 그들에게 맥의 존재는 구원을 내려주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메시아와도 같았다. FIRE-3 10발을 한꺼번에 발사할 수 없다고 열변을 토하던 함장은 남해안 의 해군기지에 도착했을 때 무수한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는 걸 보고 조 금 얼떨떨했다. "그 쇼가 확실히 괜찮긴 괜찮았나 보군."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죠. 함장 님도 보셨잖습니까? 그 정도 폭발력은 수소폭탄이라 해도 잽이 안 될 겁니다." 통신 장교의 얼굴에는 흐뭇한 기색이 만연했다. "하여튼 맥이라는 건 정말 굉장한 무기였어. 거리 400km가 넘는 지점에 서 마하 70 이상의 속도로 내려꽂히는 10발의 FIRE-3를 간단히 쏴서 맞 출 줄이야. 그것도 레이저 광선으로…" 도대체 얼마나 정밀한 조준 시스템이길래 그렇게 정확할 수 있는 건지 함정은 오싹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무한동력이라고 해서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 했는데 이제 보니 전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맥은 그런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내고도 멀쩡히 잘 돌아다니지 않나?" "프랭크 안쏘니 유젤이라고 했던가요? 그 사람은 정말 굉장한 천재인가 보군요. 그런 괴물을 혼자 힘으로 만들어내다니… 그런 사람이 일찍 죽 은 건 인류에게는 정말 크나큰 손실이네요." 함대는 부두 가까이 접근한 뒤 일제히 멈췄다. 제복을 입은 해군들이 갑 판으로 나와 경례를 붙이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한결 더 시끄러워졌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이 열광하는 광경을 예안과 함께 지켜보던 중현은 입을 열었다. "잘 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대국민 투표에서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 군요. 축하드립니다." 예안은 잔뜩 흥분했다는 걸 속으로 감춘 채 애써 덤덤히 대답했다. "고마워요." "정말 어마어마한 화력이었습니다. 만약 밤하늘에 그런 쇼를 했다면 더 욱 멋있었을 텐데, 그게 좀 아쉽군요. 영상을 통해 보는 것보다 육안을 통해 보는 게 더 짜릿했을 텐데 말입니다." "다음 번에 또 보여드려요? 밤하늘에 대고?" "언제고 국가적인 축제가 있을 때 한 번 보여주시죠. 사람들이 아주 좋 아할 겁니다." 예안은 살며시 자신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남자로 변장하느라 꽉 죄어 맨 붕대가 갑갑했다. 깊이 눌러쓴 모자도 조금 더운 느낌을 안겨주었다. "저보고 군에 입대해달라고 하셨죠?" "네." "어차피 맥은 제가 없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니까 승낙해야겠지 요? 하지만 그 대가는 대여 비용하고는 전혀 별개의 것이예요." 예안은 이참에 맥은 파는 게 아니라 빌려주는 거라고 확실히 못박았다. "그럴 테죠." "나중에 제가 요구하는 것을 하나 들어주셔야 해요. 그리고 서류상으로 는 절대 저에 관한 걸 남기지 마세요. 변성철 소위라고 하셨던가? 부디 앞으로도 그 분이 계속 저 대신 대외적인 맥의 파일럿 노릇을 하게 해주 시고, 비밀은 절대 엄수해야만 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예. 잘 알겠습니다." 중현은 유전을 넘겨받는 게 거의 확정된 예안이 맥의 파일럿 역할을 해 주는 대신 과연 무슨 요구를 해올까 조금 궁금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흥분을 애써 감추며 덤덤한 눈길로 열광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 던 예안은 배에서 내렸다. 중현은 혼자 간다는 말에 놀라서 뒤따라 내려 왔다. "혼자 가시게요? 제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생각할 것도 좀 있고 해서 그냥 혼자 갈래요. 버스 타고 조 금만 가면 어차피 고속열차 나오는데요 뭘." "그래도 너무 늦었습니다. 여자 혼자 보내기에는 제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는데요." "괜찮아요." 예안은 걱정 말라는 제스처로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이고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당황한 중현은 얼른 뛰어가 예안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잠깐만요 예안씨! 그러지 마시고 제 차에 함께…" 그러나 중현이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예안은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뿌리쳤다. 예기치 못한 거부에 당황한 중현의 표정이 무안함으로 뒤덮이 자 자신이 너무 과민하게 반응했음을 깨달은 예안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 다. "미안해요. 전 남자가 몸에 손대는 건 딱 질색이라서…" 무안한 나머지 얼떨떨하기까지 했던 중현은 이런 거부 반응까지 사랑스 럽다 느끼는 자신에 대해 묘한 기분을 느끼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멋모르고 제가 손댄 게 더 미안하지요. 예안씨. 그러지 마시 고 제 차에 타고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비록 신사는 아니지만 그 래도 기본적인 매너는 아는 사람입니다. 예안씨 혼자 보내는 건 아무래 도 좀 그렇군요." "전 한 번 안 한다면 안 한다는 주의니까 그냥 혼자 가게 내버려두세요. 열차 타고 가면서 혼자 생각할 게 좀 있으니까요." 완곡한 표현이지만 명백한 거절에 중현은 아쉬움을 느끼고 입맛을 다셨 다. 어쩐지 예안이 자신에게 일부러 거리를 두는 것 같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또 봐요." "예. 다음에 봅시다." 중현과 헤어진 예안은 근처 버스 정류장으로 가 버스를 타고 열차역으로 향했다. 자기부상열차에 몸을 실은 예안은 좌석에 앉아 눈을 감았다. 오 늘은 정말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은 날이었다. "유니콘. 네가 보기엔 국민 투표가 어떻게 나올 것 같아?" 「그렇게까지 열광하는 걸 보면 아마도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그들 이 무한동력에 대해 어느 정도 납득을 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휴. 마지막에 그 불꽃 쇼는 조금 너무했나? 그냥 하지 말걸 그랬나 보 다. 그치?" 「아닙니다. 잘하신 겁니다. 사실 일반인들 중에는 FIRE-3를 요격한다는 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보다는 직접 저의 무력에 대해 피부로 느낄 수 있게끔 그런 불꽃 쇼를 보여주는 게 낫지요.」 핵의 보유를 간절히 원하는 한국인들의 염원을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그 런 화려한 불꽃 쇼를 벌인 것이었지만, 예안은 잘했다는 생각과 동시에 쓸데없는 짓을 한 건 아닐까 하는 불안까지 들었다. 어쩌면 이것으로 시 트날타 뿐만이 아니라 온갖 사람들까지 맥을 노리고 꼬이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에휴. 모르겠다. 어차피 대외적인 파일럿으로는 변성철 소위인가 하는 사람을 내세운다고 했으니 상관없겠지.' 남자였을 때도 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군대를 여자가 되어서 가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이래서 운명은 참 재미있는 건가 보다. "휴. 만약에 다른 사람들도 너를 조종할 수 있다면 내가 굳이 입대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야." 「그래도 일반 군인하고는 틀릴 테니까 안심하세요. 설마 상반신을 홀딱 벗기고 갯벌에서 뒹굴거리게 하겠습니까?」 얼굴에 진흙을 잔뜩 묻힌 채 소총을 들고 갯벌에서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본 예안은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런 건 절대 싫어! "만약에 나보고 너 조종하는 일 말고 다른 걸 시키려고 한다면 그대로 널 타고 외국으로 튀어버릴 거야."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안 가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 예안의 옆 에 앉는 한 명의 청년이 있었다. "실례합니다. 서울까지 가시나 보죠?" "아, 네. 서울 가는데…요…?" 어딘지 모르게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하던 예안은 청년이 얼굴 에 쓰고 있는 선글라스를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는 바로 마리오였 다. "오랜만이군, 엔젤." 도망가버린 사랑하는 아내를 미친 듯이 찾아다니다 결국 세상 끝에서 찾 아내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함께 자살한 남자와 같이 섬뜩한 미소를 짓 고 있다고 하면 조금 과장된 표현일까. 선글라스의 검은 광채를 넘어 뼛 속까지 짙은 공포를 찔러 넣는 그의 눈빛에 예안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어…어…어…" 어떻게? 어떻게 이 자가 여기에? "맥을 선보이고 난 뒤에는 좀더 철저하게 숨었어야지. 아니면 허를 찌른 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혼자 남장을 하고 슬그머니 빠져나온 건가? 그러 고 보니 남장한 모습도 그럭저럭 귀여운 걸?" 그때 예안은 자신의 다른쪽 옆에 또 한 명의 여자가 앉는 걸 느꼈다. 슬 그머니 그쪽을 돌아본 예안의 안색은 다시 새파랗게 질렸다. "오랜만이에요, 엔젤." 생긋이 웃는 엘르의 미소는 싱그런 물기를 머금은 사과처럼 매력적이었 지만 예안에게는 두려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얼굴이 흙빛이 됐네요? 전에 태연히 내 입술을 빼앗아갔던 그 대 담한 여자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겁먹은 소녀만 있는 걸까요?" 마치 쥐를 잡은 고양이가 먹기 전에 어떻게 갖고 놀까 궁리하는 눈빛과 도 같은 그 미소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짙은 공포였다. 왼쪽에는 마 리오, 오른쪽에는 엘르. 옴짝달싹 못하게 된 예안은 혹시라도 자신을 도 와줄 사람이 있나 싶어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혹시라도 주변의 도움을 바란다면 접어두는 게 좋아. 알고 있겠지만 우 리는 이곳 지상에서 저항을 이겨내고 에날도스를 쓸 줄 아는 헤이져다. 총기를 들지 않은 일반인들은 몇 백 명이든 몇 천 명이든 절대 상대가 안 돼." 가지런히 모은 무릎에 두 손을 올려놓은 예안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 다. 차마 두 사람의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던 예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몰랐다. '내가, 내가 왜 이렇게 떠는 거야? 이, 이 녀석들이 뭐가 무섭다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달래보지만 심장의 두근거림은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멎을 생각을 않았다. 겁에 질린 병아리처럼 바들바들 떠는 예안이 안쓰러웠는지 엘르가 어깨를 살며시 토닥여주었다. 부드러운 그 손길조차 예안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공포였지만 얼어붙은 몸은 거부할 생 각도 못했다. "마리오.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지 말아요. 이 귀여운 아가씨가 지금 겁 을 집어먹고 어쩔 줄을 모르잖아요? 당신은 여자를 다룰 줄 몰라. 그렇 게 거칠게 다루면 어떤 여자든지 당신에게 환멸을 느끼고 도망가 버릴 걸요?" "너는 도망가지 않잖아, 엘르." "하지만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잖아요. 그럼 제가 당신 곁에 있어봤자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죠. 그것보다는 차라리…" 엘르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예안의 턱선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이런 귀여운 아가씨가 당신 곁에 있는 게 좋겠죠? 하지만 그걸 바란 다면 그렇게 거칠게 대하지 말아요." 마리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크레시오 가문의 장녀가 이렇게 농담을 좋아하는 줄 미처 몰랐군." "저 역시 세자르반 가문의 장남이 여자를 거칠게 다루는 취미가 있는 줄 몰랐는데요." "역시 넌 너무 가벼워. 그래서야 앞으로 5대 대신이 되긴 힘들지."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5대 대신이 되기 위한 조건 중 여자를 부드럽게 다루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항목은 없어." "이제부터 만들면 되죠." "그게 가능할까?" 예안은 자신을 사이에 두고 친근하게 대화를 건네는 두 남녀의 장난스런 말투에조차 얼어붙는 자신이 싫었다. 어서 이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게다가 에날도스라고 하는 초능력을 직접 확인해본 적은 없지만 만약 소형 기중기 정도의 힘은 가뿐히 낼 수 있다면 도망간다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어라? 엔젤, 숨을 몰아쉬는군요? 아하, 이렇게 압박 붕대로 가슴을 꽉 죄여 맸으니까 그렇게 숨이 차죠." 엘르의 부드러운 손길이 가슴을 쓰다듬어 왔지만 예안은 뿌리칠 수 없었 다. "일단 이 열차에서 내리면 곧바로 옷부터 갈아입혀야겠네요. 난 당신이 이렇게 투박한 남자 옷으로 스스로의 미모를 가리는 게 무척 싫거든요. 최고의 여자로 만들어 줄 테니 기대해도 좋아요, 엔젤." 그런 건 절대 필요 없어. 하지만 말이 안 나왔다. "너무 그렇게 무서워하지 말아요. 우리는 당신의 탈출을 철없는 행동 그 이상도 이하로도 안 보니까. 갓 태어난 병아리가 호기심이 동한 나머지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도 있는 거잖아요? 잘못은 제대로 관리 못한 사람 들에게 있는 거지, 병아리에게 책임을 물을 순 없는 거죠." 내가 너희들의 가축이란 말이냐. 예안은 조금 울컥했지만 여전히 입이 열리지 않았다. "어차피 맥은 당신이 부르면 언제든지 올 수 있으니까 신경도 안 써요. 강제로 콕피트를 열기는커녕 핵무기라도 쓰지 않는 이상 부술 수도 없을 테니 걱정도 안되구요. 우리는 무사히 당신을 시트날타로 데려가기만 하 면 되는 거니까." "엔젤. 우리는 이대로 곧 항구로 가 위장선을 타고 미국으로 가게 될 거 다. 뭐, 그동안 꽤나 오랫동안 사람들과 접촉했을 테니 미국이 뭔지는 잘 알겠지? 모르면 할 수 없고." 엘르와 마리오는 먹이를 궁지에 몰아넣고 지쳐 죽기까지 기다리는 사자 처럼 느긋하기만 했다. 예안은 끊임없이 탈출 방법을 머리 속으로 생각 해 보았지만 현재 자신의 처지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 실에 연거푸 절망해야만 했다. '이대로 잡혀가면… 다신 못 나올 거야.' 이미 예전에 한 번 유젤을 놓치고, 또 그 다음에는 자신을 놓쳤으니 감 시망이 그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견고해지리라는 건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대로 잡혀가면 다신 탈출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렇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들만 있을 때 탈출해야 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수로? 이들은 스스로가 에스퍼라고 직접 밝힌 인간 들이다. 거기에 비하면 평범한 십대 여자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자신의 이런 약해빠진 몸으로 도대체 어떻게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예안이 초조해하고 있을 때 어느덧 열차가 멈췄다. 목적지에 도착한 걸 확인한 엘르와 마리오는 각각 예안의 팔을 하나씩 붙잡으며 일으켰다. "자, 그만 일어나자. 도망갈 생각은 않는 게 좋아." 예안은 불안해하는 녹색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두 사람을 따라나섰 다. 때마침 미용 클리닉이 눈에 띄자 엘르는 걸음을 멈췄다. "잠깐만요, 마리오. 잠시 여기에 좀 들렀다 가요." "여기를?" 마리오는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만연했다. 한시라도 빨리 예안을 미국 시 트날타 본부로 데려가고 싶은데 웬 여유란 말인가? "쓸데없는 여유라고 생각하나 보죠? 하지만 당신 내가 언제 허튼 짓 한 거 본 적 있나요? 걱정하지 말고 일단 들어가요. 어차피 엔젤은 도망칠 수 없어요." 잠시 망설이던 마리오가 승낙하자 엘르는 잔뜩 풀죽은 예안을 클리닉 안 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삼십대의 여자 주인이 호들갑스럽게 맞이하는 걸 능숙하게 받아넘기며, 엘르는 예안의 코디를 부탁했다. 엘르가 자신을 입힐 여자 옷까지 전부 다 미리 준비해온 걸 확인했을 때 예안은 그만 자신의 처지도 잊고 속으로 울고 싶어졌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와, 동생분이 정말 굉장한 미인이시네요. 너무 잘 어울려요. 근사해요. 완벽해요. 이러고 거리에 나가면 아마도 남자들이 전부 다 쓰러져서 뒤 로 넘어갈 거예요." 다분히 아부성 섞인 여주인의 호들갑이었지만 마리오와 엘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심지어 장난감이 된 예안조차도 속으로는 인 정할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엘르가 준비한 나풀거리는 파란색 원피스와 굽이 높은 흰 구두까지 신은 예안은 비틀거리며 그들을 따라나섰다. 생전 처음으로 신어본 굽 높은 구두 때문에 자꾸만 다리가 꼬였다. "후후, 어때요 마리오?" "현명해. 하긴, 이렇게 해놓으면 도망치고 싶어도 제대로 도망 못 치겠 지. 아무리 엔젤이라고 해도 하이힐을 처음 신어보는 건 어쩔 수 없나 보군. 이크, 넘어지면 곤란해." 예안이 비틀거리다 넘어지려 하자 마리오가 재빨리 잡아주었다. 엘르는 다정한 오빠와 여동생 같은 그 둘의 모습에 거리의 시선이 쏠리는 걸 느 끼고 흐뭇했다. "에이, 고작 생각한다는 게 그런 거예요? 엔젤을 이렇게 아름답게 꾸며 놓았는데 당신은 고작 그런 말이 전부예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알았다. 마리오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 다. "지금 그런 쓸데없는 농담을 하기는 곤란해. 자동차가 기다리고 있을 테 니까 어서 가자구." "네에. 네. 잘 알았습니다." 말은 그렇게 무뚝뚝하게 하지만 비틀거리는 엔젤을 계속 붙잡아주는 걸 보면 역시 남자는 남자인가 보네? 쿡쿡 웃던 엘르는 문득 묘한 생각이 떠오르자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러지 말고 당신이 그냥 안고 가면 어떨까요? 비틀거리는 꼴 보니 엔 젤도 동의할 것 같은데." "내가 안고 가라고?" 마리오의 표정에 처음 떠오른 건 황당함이었지만 이내 그것은 정체를 모 르는 다른 감정에 의해 지워져 버렸다. 엘르는 그가 지금 속으로 기뻐한 다고 생각했다. "네에. 그렇게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도망가지 않을까 감시하는 것 도 더 쉽고. 엔젤, 당신의 생각은 어때요?" 분노인지 부끄러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얼굴이 새빨개져 있던 예안 은 울컥했다. "절대 싫어! 차라리 그냥 내 운동화를 내놓으란 말이야!" "그건 곤란해요. 그 운동화는 아까 버리고 왔잖아요?" "그러니까 누가 버리래!" "후후.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겁을 먹고 어쩔 줄 모르던 아가씨가 안고 간 다는 말 한 마디에 이렇게나 부끄러워할 줄이야. 그동안 사람들하고 섞 여 살면서 여러 가지 감정들을 많이 배운 모양이네요." 잔뜩 화가 난 예안은 다시 뭐라고 쏘아붙이려다가 그만 균형을 잃고 휘 청거렸고, 마리오는 재빨리 예안의 몸을 가볍게 안아들었다. 졸지에 남 자에게 야릇한 포즈로 안기게 된 예안은 더욱 더 화가 났지만 마리오는 내려줄 생각을 안 했다. "싫어하고 있는 건 안다. 하지만 지금 네 입장을 자각하는 게 좋아, 엔 젤. 잠자코 있어." 마리오의 목소리에 실린 기도에 압도당한 예안은 그만 풀이 죽었다. 로 맨틱하다느니, 부럽다느니 하면서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말 따 위는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이게 어딜 봐서 부러워할 만한 장면이라는 거야? 납치 당하고 있는 중인데. 세 사람은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에 올라탔다. 자동차는 세 사 람을 인천 항구까지 데려가 내려놓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일반 무 역선에서 재빨리 보트를 보내왔다. 예안은 어느새 마리오에게 수치스런 포즈로 안겼었다는 사실에 대한 분 노조차 잊어버리고 걱정으로 가득 차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 야만 했다. 걷잡을 수 없는 초조함에 흠뻑 젖은 심장은 곧바로 폭주해 버릴 듯 강하게 요동쳤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 초조한 나머지 어쩔 줄을 모르던 예안이 그냥 지금 이대로 튀어버릴까 생각하던 중 갑작스런 남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저 배의 선주이신가요?" '아앗?' 그건 예안이 아주 잘 아는 목소리였다. 바로 중현이었다. 그 순간 기쁨 에 젖은 가슴이 다시 콩닥콩닥 뛰었다. "예.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로?" "죄송하지만 저 배는 당장 출발할 수 없습니다. 테러리스트가 경찰서에 저 배에다 폭탄을 설치했다는 전화를 걸었거든요. 수사에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신분증을 꺼내 보이던 중현은 마리오를 보고 어디선가 봤다는 느낌에 잠 시 흠칫했다가 이내 기억해내고는 씩 웃었다. 전에 이병원 교수를 만나 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에게 이것저것을 추궁하듯 물어본 포세이돈의 직 원이라고 했던가? "이런. 제가 알고 있는 포세이돈의 어느 직원 분이랑 정말 많이 닮으셨 군요. 순간적이지만 착각했습니다." "아, 그런가요? 하긴 세상에는 워낙에 닮은 사람들이 많은 법이니까요." 잠깐 당황했던 마리오는 안주머니로 손을 넣으며 마찬가지로 씩 웃었다. 그의 동작 하나 하나에는 여차하면 공격하겠다는 의도가 강하게 묻어났 다. "저 배에는 폭탄이 설치되지 않았습니다. 겨우 삼일 전에 들어온 데다가 싣고 있는 귀중품 때문에 선원들과 경비병이 밤낮으로 철통같이 경비했 거든요. 테러리스트 따위는 들어올래야 들어올 수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 구멍이 있을 수 있는 거지요. 어쨌든 수사에 협조 해 주시기 바랍니다." "곤란합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합니다." "휴. 어쩔 수 없군요." 중현이 고개를 내젓자 그것이 신호였는지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열 명 이 사방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그들은 마리오와 마찬가지로 한결같이 양 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다. 상대는 청년 하나와 여자 하나. 그리 고 이쪽은 건장한 남자만 11명. 우세를 잡은 중현은 씩 웃으며 권총을 꺼냈다.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과 엘르를 포위한 요원들을 훑어보던 마리오는 잔 뜩 기대하고 있는 예안의 녹색 눈동자를 자신감에 가득 찬 시선으로 더 듬으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속삭였다. "엔젤. 에날도스가 어떤 것인지 이 기회에 보여주지. 똑똑히 봐두도록 해." 마리오는 고개를 들어 엘르에게 눈짓했다. "엘르. 엔젤을 보호해라." 보호가 아니라 감시라고 해야겠지. 엘르는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봐둬라 엔젤." 마리오는 사냥을 나가기 직전의 굶주린 야수와도 같이 그렇게 중얼거린 후 또박또박 앞으로 나섰다. 잔뜩 긴장한 요원들이 일제히 총을 겨누는 순간, 높이 들린 마리오의 손에서 희미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당황한 요원들은 명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일제히 방아쇠 를 당겼다. 탕! 탕! 탕! 강하게 코를 찌르는 자욱한 화약 냄새가 흰 연기에 섞여 피어나는 순간 마리오의 몸이 번개같이 옆으로 움직였다. 총알이 그의 몸에 전혀 맞지 않았음을 확인한 요원들은 재차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지만 그보다 마리 오의 손에 맺힌 희미한 빛이 힘을 폭발시키는 게 더 빨랐다. "으악!" 마리오의 손이 미처 닿지도 않았는데 한 요원이 배에서 엄청난 통증을 느끼고 고통스런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불가사의한 현 상에 당황한 다른 요원들이 눈을 질끈 감고 방아쇠를 마구 당겼지만 날 렵하게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마리오는 단 한 발도 맞지 않고 어느새 다음 먹이를 노리고 있었다. "으헉!" "크윽!" 신비한 빛에 휩싸여 있는 마리오의 손이 한 번 슥 내밀어지자마자 요원 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허공을 날아 쓰러졌다. 어느새 멀쩡히 서 있는 사 람들은 중현을 포함해 단 세 명. 쉽지 않은 상대라는 걸 깨달은 그들은 세 방향에서 마리오를 포위해 권총을 겨누었다. 살얼음을 걷듯 긴박한 긴장이 그들을 훑고 지나갔다. "초소형 압축공기발사장치라도 숨기고 있는 모양이지? 주먹에 맞지도 않 았는데 성인 남자가 내동댕이쳐지는 걸 보면 말이야." 권총으로 신중히 자신을 겨누고 있는 중현의 눈동자에 담긴 긴장을 읽은 마리오는 차갑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너희 지상인들은 불가사의한 현상에 당면하면 항상 그 얄팍한 과학 지 식에 의존해 해명하려고만 하더군. 그래서 너희들은 우리보다 약할 수밖 에 없는 거야." "뭐?" "아, 물론 너희들의 자연 과학이 우리보다 더 뛰어난 건 인정해. 하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땅에도 금속이 있었다면 이 행성의 강자는 너희가 아니 라 여전히 우리였을 것이다."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한 요원들이 멍해 있을 때 엘르가 당황한 표정 으로 마리오를 말리고 나섰다. "마리오 경! 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안 됩니다. 알고 계시잖아 요?" "위대한 힘 에날도스를 보고서 하는 말이 기껏해야 초소형 압축공기발사 장치라니, 하도 화가 나서 해본 소리야. 어차피 이 녀석들은 그 말만 듣 고 우리가 누군지 파악하지 못해. 그리고…" 순간적으로 마리오의 눈빛을 스치고 지나간 섬뜩한 살기에 요원들은 바 짝 긴장했다. "…어차피 여기서 살아서 돌아갈 순 없을 테니까." 진심이다. 이 남자는 진심으로 우리 모두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 순간적 으로 그걸 깨달은 중현은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신음을 참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당신은 누구지? 어째서 그 여자애를 납치하려고 하는 거냐?" 예안의 이름을 부르면 자칫 나중에 마리오가 예안을 찾아내기가 더 쉬워 질 수 있기에 여자애라고 했지만, 과연 나중이라는 게 찾아오기나 할지 의문이었다. "너희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엔젤은 지구상에서 맥을 다룰 수 있는 유일 한 인간이다." "엔젤? 맥? 너희는 맥을 노리고 있나? 하지만 이미 맥은 우리 한국 정부 가 구입하기로 했다." "구입이 아니라 빌리는 거겠지. 한국이 앞으로 모든 예산을 전부 다 준 다고 해도 맥의 가치에 비해 털끝만큼이라도 충족시킬 수 있을 줄 아나? 무한동력이라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동력장치라는 건 너도 잘 알 텐 데." 너무 잘 알지. 그래서 이렇게 몰래 멀리서 예안을 지켜보고 있었던 게 아닌가. 중현은 당장이라도 마리오를 겨누고 있는 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싶었지만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자신도 먼저 당한 요원들처럼 쓰러 져 버릴 것만 같아 그러지 못했다. 어떻게든 해야만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대충 이 정도면 궁금한 게 충족 됐겠지? 이제 죽을 준비를 해라." 마리오가 차갑게 미소지으며 두 손을 높이 들어올리는 순간, 중현은 증 원을 기다리는 걸 포기하고 눈을 질끈 감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그와 함 께 마리오를 겨누고 있던 두 요원들도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그러나 공기를 찢는 굉음을 흩뿌리며 퉁겨진 총알은 마리오의 몸에 이르 기도 전에 투명한 벽에 가로막혀 버렸다. 마치 유리창이 구겨지는 것 같 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중현은 생소한 소리를 빚어내며 콘크리트 바닥 에 후두둑 떨어지는 총알을 망연자실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살인은 내키지 않지만 화근을 없애기 위해선 이 자리에서 죽여야겠지.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기를 기도하마." 눈부신 섬광이 잔혹한 미소를 짓고 있는 마리오의 손에서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기운을 내뿜었다. 그런데 공격할 의지를 상실한 채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세 사람은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자 이상 함을 느끼고 눈을 떴다. "이런… 갑자기 저항이 심해졌는걸. 역시 지상인들을 죽이려고 들어서 그런가?" 마리오는 피식피식 웃으며 심한 화상을 입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 고 있었다.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는 듯한 그 표정에 중현은 이 남자와 자신은 그릇이 다름을 느끼고 오싹 소름이 끼쳤다. 만약 고통을 억지로 참는다고 해도 어떻게 표정 하나 구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설마요. 지상인들을 죽인다고 해서 저항이 특별히 심해지는 일은 거의 없어요." "예전에도 한 번 이런 적이 있었다." "그냥 우연의 일치겠지요. 봐요, 저기 해군함대가 밀려오고 있잖아요? 아마도 그래서 저항이 심해졌을 거예요. 굳이 에날도스를 써보지 않아도 이 근처의 전자파가 조금 전보다 더 세진 걸 알 수 있겠는데요." 마리오는 멀찍이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네 척의 전투함을 흘끗 쳐다봤 다. "시간을 얼마나 끌었다고 벌써 군대가 출동한 거지? 한국군도 꽤나 한 민첩하는군." "그래도 네 척 밖에 안 되잖아요? 어떻게 할까요? 그냥 싸울까요?" 엘르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탈출의 기회를 엿보는 예안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씨익 웃으며 더욱 더 세게 끌어안았다. "저 배에는 변변찮은 포 하나도 없는데 무슨 재주로 싸우자는 거야? 일 단은 몸을 피하는 게 좋겠어. 벌써 해군이 출동한 걸 보면 아마도 이 근 처에는 검문이 쫙 깔렸을 테니 아무래도 따로 떨어져 피해야겠군." "그럼 엔젤은 어떻게 하죠?" "네가 데리고 가. 나랑 찢어지면 적어도 남녀 둘이서 엔젤을 납치했다는 수배에서는 벗어날 수 있겠지. 여동생이라고 적당히 둘러대면 아마 별다 른 의심 안 할 거야. 또 놓치면 이번엔 아프리카에 아예 꼭꼭 틀어박힐지 모르니까 절대 놓쳐선 안 돼." "명심하죠." 마리오는 잔뜩 긴장한 채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중현과 두 요원들을 힐 끔 쳐다보고는 다치지 않은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번쩍하며 뻗어나간 섬광이 배와 가슴을 치자 그들 세 사람은 엄청난 통증을 느끼고 곧바로 기절했다. "역시 죽이지 않으니까 저항이 더 강해지지 않잖아. 틀림없어. 지상인들 을 죽이려고 할 때마다 저항이 강해진다니까." "그냥 우연이라니까요, 우연. 당신말고 다른 헤이져들은 지상에서 인간 을 죽여도 별다른 저항의 변화가 없다구요." "왜 그 우연이라는 게 나한테만 일어나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정말 기분 나쁘군." 마리오가 그렇게 투덜거리고 있을 때 엘르는 숨겨두고 있었던 검은색 긴 가발을 꺼내어 예안의 머리에 덮었다. 아마도 근처를 포위하고 있을 경 찰들은 파란색 머리카락의 소녀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확보하라는 명령 을 받았을 테니, 그것을 피해가기 위함이었다. "그럼 조금 있다 봐요." 마리오와 헤어진 엘르는 예안의 손을 붙잡고 태연히 걸음을 옮겼다. 엘 르는 그 와중에도 예안이 탈출하려고 이리저리 기회를 엿보고 있는 걸 눈치채고는 싱긋 웃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 혼자서 당신을 데리고 있다 해서 탈출하려고 하는 건 바보 같은 짓 이에요. 적어도 난 무기를 들지 않은 성인 남자 수백 명쯤은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는 헤이져니까. 설마 아까 마리오가 쓴 힘이 헤이져의 능력 의 전부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그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대단한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예안은 입술 을 깨물며 분함을 달랬다. "난 걸핏하면 저항 때문에 손이 타버리는 마리오와는 달리 당신을 보호 하기 위해서라면 사람 여러 명쯤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죽일 수 있어요. 그러니 경찰들이 혹시라도 물어보면 내 동생이라고 잘 둘러대도록 하세 요. 눈앞에서 사람이 피떡이 되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겠죠?" "…알았어." "좋아요, 좋아요. 당신은 정말 말을 잘 듣는군요." 얼마쯤 걷자 전경들이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그들 가 까이 접근한 엘르는 능숙하게 어리둥절해하는 일반인 연기를 해냈다. "무슨 일로 이렇게 경찰들이 있는 거죠?" "테러리스트가 지금 여자애를 인질로 잡고 협박 중이라고 합니다. 용케 여기까지 오신 모양이네요? 그런데 이 여자애는 누구죠?" "제 동생이에요. 그런데 전 여기까지 오면서 테러리스트 같은 건 보지 못했는데요?"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랍니다. 긴 머리를 파랗게 염색한 여자애를 인질 로 잡고 있다는군요. 하여튼 이 근처는 위험하니까 어서 가보세요." 경찰은 검은 가발을 쓰고 있는 예안을 흘끔 쳐다보고는 혹시 엘르가 그 테러리스트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마음 속에서 지워버렸다. 예안의 검은 색 머리가 가발이라는 상상을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설마 테러리스 트가 이렇게 인질을 데리고 느긋하게 경찰에게 접근해 와 태연히 이것저 것을 물으리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고하세요. 그 범죄자를 꼭 잡기를 빌게요." 태연히 인사하고 난 뒤 그들하고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엘르는 묵 묵히 자신의 옆에서 따라오고 있는 예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경찰들에게 말하고 싶은 걸 잘 참았어요. 만약 당신이 참지 못하고 입 을 열었다가는 그들 전부는 죽어야만 했을 테니까." "…총을 가진 경찰이 한두 명이 아닌데?" "의심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슬쩍 힘을 흘려서 그들의 머리를 하나 하나 터트려 나간다면 설마 나를 범인이라 생각하겠어요? 어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저격수가 총을 쏘고 있다고 생각하겠죠. 그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들이니까." 예안은 할 말이 없었다. 엘르는 이윽고 한적한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에 예안을 끌고 뒷좌 석에 탔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얼른 반색했다. "무사하셨군요. 그런데 이 여자애는…?" "엔젤이야." 엘르가 그렇게 말하며 예안의 머리에 씌웠던 가발을 벗기자 정열적인 붉 은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폭포 아래 드리워진 아름다움에 남자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과연 엔젤. 정말 천상의 미모로군요." "당신이 남자로서 엔젤에게 흥미가 생기는 건 이해하겠지만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까딱하다가는 한반도 전체에 감시망이 걸릴 지도 모 르는 일이야. 어쨌거나 그들도 맥의 가치에 대해서 알아 버렸으니까. 서 둘러 출발해." "예." 남자는 재빨리 차를 출발시켰다. 엘르는 검은 가죽 시트의 안락함에 몸 을 맡긴 채 오른쪽에 앉은 예안의 어깨에 다정히 팔을 두르고 왼손으로 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예안이 흠칫흠칫 놀라는 게 재밌는지 쿡쿡 웃어가며. "너무 그렇게 겁내지 말아요 엔젤. 당신에게 위해가 가는 짓 따위는 하 지 않을 테니까." "…지금도 충분히 위해가 가고 있어." "고작 유전 따위의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맥을 사려고 시도한 한국 정부 보다는 낫지요. 물론 한국의 유전이 전세계에서 굉장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맥의 무한동력에 비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적어도 너희들처럼 날 강요하려고 들진 않았어." 그동안 인간들 틈에 섞여 살면서 뭔가 세상 물정을 좀 배웠나. 엘르는 더 이상 예안으로부터 갓난아기 같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당신은 참 아름다워요, 엔젤." 너희들에게 그런 말 들어봐야 하나도 기쁘지 않아. 예안은 엘르가 듣지 못하도록 속으로만 그렇게 쏘아 붙였다. "이상해요.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어째서 질투가 생기지 않는 거죠? 왜 당신을 보고 있으면 이렇게 마음이 편해지는 걸까요? 정말 당신은 참 신 비한 여자예요." 엘르는 소중한 물건을 쓰다듬듯이 조심스런 손길로 예안의 뺨을 어루만 졌다. 예안은 왼쪽 어깨에 물컹하게 느껴져 오는 감촉에 조금 당황하기 는 했지만, 여자가 된 후 혜인과 혜민을 포함하여 여러 여자 친구들과 스킨쉽을 한 경험 덕분에 더 이상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진 않았다. "뉴 타입의 인간. 당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김윤우 박사로부터 귀가 얼얼 할 정도로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나 대단한 인간인 줄은 미처 몰 랐어요. 태어난지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아 이미 벌써 말을 할 줄 아는 천 재적인 두뇌에다가 이런 천상의 미모를 갖추다니." 자신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오는 엘르의 손길이 마치 사랑하는 아기 를 어루만지는 어머니의 손길과 흡사하다고 느낀 건 어쩌면 예안의 단순 한 착각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과연 엔젤이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여자예요." 인간이 만들어낸 최초의 천사. 엘르는 그런 아름답고 고결한 존재에게 전혀 질투가 생기지 않는 자신에 대해 묘한 씁쓸함을 느끼면서, 손가락 끝에서 전해져 오는 부드러운 뺨의 감촉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 "닭살 돋는 칭찬 따위는 그만 두고, 앞으로 날 어떻게 할 거지? 이미 두 번이나 도망갔으니까 벌이라도 줄 건가?" 엘르는 예안이 억지로 차갑게 만들어내는 목소리마저 그저 귀엽고 사랑 스럽기만 한 듯 미소를 잃지 않았다. "당신에게 왜 벌을 주나요? 잘못이 있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이 멋모 르고 도망가도록 관리를 소홀히 한 우리에게 있는 거지요." "난 시트날타로 가기 싫어. 이대로 날 놓아줄 순 없냐?" 남자 같이 투박한 말투마저도 사랑스럽기만 했는지 엘르는 쿡쿡 웃었다. "너무 뻔한 걸 묻는군요. 우리는 당신의 보호자예요. 당신이 태어나기 전부터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우리는 영원히 당신의 보호자예요. 보호자의 품을 떠나 어디로 간다는 거죠?" "난 한 번도 너희들이 내 보호자라 생각한 적 없어." "유감이군요. 어쩌면 박사가 한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네요. 누군가가 당 신에게 잘못된 걸 가르쳐 이렇게 도망치게 만들었다는 그 말이 말이에 요." 그리고 바로 그 인물은 박사 본인일 가능성이 더 크겠지. 엘르는 예전부 터 레이온을 깊이 의심해왔다. "엔젤. 모든 걸 잊으세요." 엘르는 두 팔을 뻗어 예안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으로 깊이 끌어당겨 안 았다. 머리 속 깊은 곳까지 아찔하게 찔러오는 체리 향기에 심취한 예안 은 얼굴을 조금 붉히고 말았다. "지상세계는 더러운 곳이에요.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당신은 그곳에서 평 안과 안락함을 얻을 수 없어요. 당신을 이용하려고 접근해오는 수많은 인간들과 사기꾼들에게 시달리다가 결국 몸도 마음도 더럽혀지고 말 거 예요. 나는 당신이 그렇게 더럽혀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요." 어째서 엘르의 말이 마음에 깊이 와 닿는 걸까? 예안은 어쩐지 그녀의 말에 수긍하고 마는 것 같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너희 역시 나를 이용하려고 하잖아." "인정해요. 우리 역시 당신을 이용하려고 하고 있죠. 하지만 우리는 당 신을 이용만 하고 버리려는 지상인들과는 달라요. 우리는 당신을 이용할 거지만, 또 그만큼 당신을 아끼고 보살펴 줄 거예요. 아직은 곤란하지만 우리의 혁명이 완성되면 당신이 좋은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줄 거구요." "…결혼 같은 건 필요 없어." 투정을 부리는 듯한 말투에 엘르는 '역시 아직은 애라니까'라고 속으로 즐겁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지상인들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사실 예안은 아까부터 그 단어에 의구심을 느끼고 있었다. 왜 하필이면 엘르는 시트날타가 아닌 사람들을 가리켜 지상인이라고 부르는 것인가? "후후…" 엘르의 표정이 묘한 슬픔으로 젖어드는 건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조만간 당신도 알게 될 거예요. 우리가 왜 그렇게 혁명을 위해 발버둥 치고 또 발버둥치는지." 한시라도 빨리 탈출할 방도를 생각해야 했지만 엘르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고 싶다는 호기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그녀로부터 풍겨 나오는 묘한 슬픔의 기운에 휩싸였기 때문일 것이다. 예안은 엘르에 대 한 동정이 가슴속에 자리잡는 게 싫어 필사적으로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철저하게 무시해 버렸다. 한참 동안 차를 타고 가면서 예안은 끊임없이 탈출 방법을 생각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맥을 부르고 싶지만 운 이 좋아 엘르가 눈치채지 못하게 맥을 부른다 해도 무슨 재주로 맥에 탑 승한단 말인가? 자기 말로는 무기를 들지 않은 성인 남자는 몇 백 명 정 도 충분히 찜쪄 먹을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는 엘르를 어떻게 처리하 지 않는 이상 탈출은 불가능했다. '무기도 없고… 젠장, 도대체 어떻게 하냐? 이럴 줄 알았으면 권총이라 도 미리 하나 사놓는 건데.' 하지만 개인의 총기소지가 불법인 대한민국에서 그런 짓을 하고 멀쩡히 잘 돌아다니기를 바란다는 건 솔직히 무리였다. 게다가 살인은커녕 사람 에게 흉기를 휘두른 경험이 거의 없기에 설혹 총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 연 엘르를 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생각해보니 나도 참 웃기는 녀석이네. 전에 레이온 형 배에다 총알을 박아 넣었으면서 총이 있어도 과연 엘르를 쏠 수 있을지 없을지 고민하 고 있다니.' 예전에 시트날타에서 탈출하던 날, 레이온의 배에 총을 쏘던 그때 처음 으로 사람을 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죄책감이나 두근거림이 없었던 자 기 자신에 대해 느낀 묘한 섬뜩함이 생각난 예안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 다. 총이 있다고 해도 겁이 나서 엘르를 쏘지 못할 거라는 건 단순히 자 신의 이성이 그렇게 외칠 뿐이고, 실제로는 이성이 반발하기 전에 몸이 알아서 방아쇠를 당길지도 모른다. 어느덧 해변가에 도착한 뒤 차가 멈췄다. "도착했어요. 내려요." 차에서 내린 예안은 사람이나 건물이 전혀 보이지 않는 바닷가라는 걸 깨닫고 조금 어리둥절했다. "여기가 어디지?" "서해안이에요. 보시다시피 항구는 아니죠. 하지만 어차피 항구 같은 곳 에서는 배를 탈 수 없는 데다가 일반 배로는 이 나라를 빠져나갈 수 없 으니까…" 엘르의 설명을 보충이라도 하듯 갑자기 저 멀리서 검은색 잠수함이 물살 을 헤치며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을 받아 매끈하게 빛나는 강 철의 몸체를 질린 시선을 이리저리 더듬던 예안의 녹색 눈동자에 암담함 이 깃들였다. '젠장. 진짜 빼도 박도 못하게 됐잖아? 이대로 잡혀가면 끝장인데, 그냥 눈 딱 감고 여기서 일 저질러 버릴까?' 지금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은 엘르와 여기까지 차를 운전해온 남자. 남 자도 과연 에날도스를 쓸 줄 아는 헤이져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 나 헤이져가 아니라 해도 건장한 성인 남자다. 아주 지독하게 운이 좋다 면 방심한 틈을 타 목덜미에 한 방 먹이는 것만으로 엘르를 기절시킬 수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저 남자로부터 과연 도망칠 수 있을까? '잠수함에 타게 되면 미국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탈출은 꿈도 못 꿀게 뻔해. 게다가 내리자마자 분명히 감시원들이 벌떼같이 달라붙을 거야. 그렇게 되면 도망치는 건 영영 물 건너가는 거야. 젠장, 어쩔 수 없지. 되든 안 되든 이 자리에서 한 번 해보자.' 결국 결심을 굳힌 예안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엘르의 눈치를 흘끔 살피 며 가녀린 주먹에 꼭 힘을 주었다. '예안아. 나에게 힘을 줘. 네 몸을 지킬 수 있게.' 예안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꽉 쥔 주먹을 들어 엘르의 목덜미를 힘껏 내 리치려 했지만 등뒤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그만 굳어버렸다. "그럭저럭 잡히지 않고 무사해 도착했군, 엘르." "마리오 당신이야말로 용케 잡히지 않았네요? 사실 전 겉보기에는 연약 한 여자라 테러리스트라는 혐의에서 그럭저럭 벗어날 수 있겠지만 당신 은 아니잖아요?" "죽이지 않고 그냥 제압만 하는 게 조금 어렵긴 했지만 에날도스를 갖고 있지 않은 평범한 인간들 따위는 상대도 안 되지." 마리오의 얼굴을 본 순간 예안은 그만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렇게 되면 삼 대 일. 게다가 그 중 한 명은 총을 든 열 명의 요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간단히 제압한 괴물이고 다른 한 명 역시 무기를 들지 않은 일반인 은 몇 백 명이든 찜쪄 먹을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는 여자다. 나머지 한 명은 에날도스를 갖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자신으로서 는 감당할 수 없는 건장한 성인 남자. 탈출의 기회가 영영 사라진 예안은 땅을 치고 통곡하고 싶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아까 경찰들 지나칠 때 무슨 수를 써서라 도 달아날 걸!' 경찰들을 전부 죽여버리겠다는 엘르의 협박 같은 건 그냥 무시한 채 달 아나 버릴 걸 하는 후회마저 들 정도로 예안은 지금 초조한 상태였다. "시간이 얼마 없다. 어서 타자." "네. 따라와요 엔젤." 성큼성큼 앞서나가는 마리오의 뒤를 따라 엘르가 예안의 손을 잡아끌었 다. 예안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이 된 심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질질 끌려가다시피 발걸음을 옮겼다. 잠수함에서 이쪽으로 보내온 보트 에 억지로 끌려 탄 예안은 이제 될 대로 되라 하는 심정으로 유니콘에 대고 작게 말했다. "유니콘. 지금까지 지켜보고 있었지? 나 어떻게 해야 되는지 좀 말해 봐." 소형 스크린에 글씨가 떠올랐다.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저는 유젤 님이 없으면 제대로 전투를 할 수 없는 데다가 제가 지금 그쪽으로 간다 해도 어차피 소용없 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예안은 자신이 유니콘과 대화한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하며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 「별 수가 없습니다. 일단은 사태를 관망하며 기회를 지켜보는 수밖에 요. 한시라도 빨리 한국 정부가 손을 썼으면 좋겠지만 유젤 님이 잠수함 에 오른 뒤에는 손놓고 구경하는 수밖에 없을 텐데 도대체 지금 뭐하고 있는 건지 저도 답답합니다. 만약 제가 수퍼 맥으로 환골탈태만 했더라 면 이까짓 걸 가지고 고민하지도 않을 텐데요. 젠장. 다른 녀석들은 기 연 같은 거 만나서 환골탈태 잘만 하던데, 왜 저는 죽어라고 명상을 했 는데도 환골탈태를 못하는 거죠?」 지금 상황에서 그런 농담이 나오냐. 예안은 차라리 울고 싶었다. 마리오와 엘르가 예안을 잠수함에 태우고 자신들도 탄 뒤 잠수함은 곧장 잠항했다. 예안을 엘르와 함께 한 방에 넣은 뒤 자신도 방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던 마리오는 지휘실에서 온 연락을 받고 그쪽으로 갔다. 지휘실의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함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한국 함대의 대잠초계망에 걸렸습니다. 12척의 함정과 4척의 잠수함과 지금 경계 중이라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중 전화가 들어왔는데 받으시겠습니까?" 일이 골치 아프게 됐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던 마리오는 승낙했다. "연결해 줘." 잠시 후 마리오는 중현과 연결이 되었다. 잔뜩 화가 난 건지 중현의 목 소리는 몹시 날카로웠다. 「무슨 재주로 프랭크 박사의 소재를 알아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 었든 간에 너희들은 지금 포위 당했다. 얌전히 부상하고 프랭크 박사를 넘겨라.」 "그렇지 않으면? 이 잠수함을 격침시키기라도 하겠단 말이냐?" 비웃음이 실린 마리오의 말투에 중현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마땅히 반박할 말이 없는 듯했다. "프랭크 안쏘니 유젤이라. 엔젤이 너희들에게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하 고 접근한 모양이로군." 「상관없어. 그게 본명이든 아니든 그건 우리에게 중요치 않다.」 "그렇겠지. 너희들에게 중요한 건 단지 맥의 군사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 였을 뿐일 테니까. 하지만 이걸 아는지 모르겠군. 엔젤, 아니 너희들의 입장에서는 프랭크 박사라 해야 하나? 그녀에 대한 소유권은 우리에게 있다." 「사람은 물건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수는 없는 법이야.」 "그런 달콤한 상상에 젖어 있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라구. 어쨌든 엔젤, 아니 프랭크 박사라 해두지. 그녀는 넘겨줄 수 없다. 이 잠수함을 격침 시키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보라구. 맥은 그녀의 명령이 없이는 한 발자 국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겠지?" 예안이 이쪽에 있는 한 상대는 절대로 이 잠수함을 공격할 수 없다는 전 제 하에 튀어 나간 도발이었지만, 그 효과는 굉장히 컸다. 「원하는 게 뭐냐? 협상을 하자.」 "협상 따윈 필요 없어. 우리가 필요한 건 엔젤이니까." 「그녀를 놓아주지 않으면 우리 역시 너희들을 보내줄 수 없다.」 '웃기는군. 바다 속을 헤엄치는 잠수함을 격침시키지 않고 무슨 재주로 막는단 말이냐?" 「여기가 황해라는 걸 모르나? 평균 수심이 100m도 채 안 되는 곳이다. 제 아무리 잠수함이라도 해도 기동력이 떨어지는 곳이란 말이다.」 다급한 나머지 상대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생각한 마리오는 가볍게 비웃음을 터트리며 쏘아주었다. "고기 잡는 그물이라도 써서 붙잡으려는 모양이지? 마음대로 하시게나. 어쨌든 너희는 우리를 공격 못하니 우리는 알아서 빠져나갈 테니까."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린 뒤 마리오는 함장에게 지시했다. "출발해. 단, 어차피 상대는 우리를 절대 공격할 수 없으니 이쪽에서 공 격만 하지 않는다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거다." "예." 등을 돌리고 지휘실을 빠져나오려던 마리오는 퍼뜩 생각난 농담을 남겼 다. "단, 고기 잡는 그물에 걸린 송사리 꼴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고기 잡는 그물이요?" "아무쪼록 송사리 꼴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 자신의 농담에 어리둥절해 하는 함장을 뒤로 남겨둔 채 마리오는 엘르와 예안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아, 어서 와요 마리오." 방 한가운데 놓인 탁자에 엘르가 턱을 괸 채 앉아 있다가 마리오를 맞이 했다. 마리오는 한쪽 벽에 놓여 있는 침대 위에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 집어쓰고 있는 사람에게 흘끔 시선을 던졌다. 아마도 예안인 모양이었 다. "엔젤은 왜 저러고 있는 거야?" "우리가 함부로 다뤄서 삐쳤나 봐요." 마리오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삐쳤다고? 지금 자기 처지가 어떤지 자각이나 하고 있는 거야?" "너무 그러지 마요. 엔젤은 아직 태어난지 세 달도 채 안 된 갓난아기라 니까요. 한창 제멋대로 굴 나이라구요." 저 철없는 아가씨를 앞으로 어떻게 교육시켜 시트날타에 도움이 되도록 탈바꿈시킬지 앞날이 깜깜해진 마리오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의자에 앉았다. 잔뜩 상심해서 고개를 푹 숙이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위로라도 해줄까 하고 왔더니 어린아이처럼(따지고 보면 어린아이가 맞 긴 하군) 삐쳐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엔젤. 잠깐 일어나 봐." 마리오가 불렀지만 예안은 묵묵부답이었다. 마리오의 목소리가 조금 커 졌다. "이봐. 엔젤. 일어나 보라니까." "내버려둬요.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한테 달려들고 싶을 거라구요. 섣불리 자극하는 건 절대 안 좋아요." "참나. 여자들 마음은 정말 알 수 없다니까." 엘르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엔젤이 여자로 보이긴 보이나 보죠? 아직 태어난지 세 달도 채 안 된 갓난아기나 다름없는데?"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꿰뚫어보는 듯한 엘르의 푸른 눈동자에 마리오는 잠시 뜨끔했지만 태연히 대답했다. "그럼 엘르 네 눈에는 엔젤이 남자로 보이나?" "…휴.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재미없어지잖아요." 이 남자는 항상 이렇다. 마치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 사슬에 몸이 옥죄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진심을 마음 속 깊이 감춰버린다. 엘르는 솔 직하지 못한 그에게 묘한 실망을 느끼면서, 동시에 눈에 띄게 안도하는 자신에 대해 야릇한 느낌을 받았다. "한국 해군에 들켰다고 들었어요." "걱정하지 마. 쉽게 빠져나갈 수 있어. 격침시킬 생각이 아닌 이상 우리 를 어찌할 수는 없을 테니까." "엔젤 때문이군요. 그들 역시 엔젤이 없으면 맥을 절대 다룰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기가 막힌 건 그 녀석들은 엔젤이 맥을 만든 걸로 알고 있다는 거야. 조금 어이가 없더군. 그것에 대해 좀 물어볼까 했더니…" 마리오는 나지막하게 혀를 차며 여전히 이불을 덮어쓰고 있는 예안에게 시선을 던졌다. 눈에 띄지 않게 살짝 움찔거리는 걸 보니 자는 척하면서 이쪽이 하는 말은 다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봐, 엔젤. 용케 한국 정부에게 네가 천재 과학자라고 거짓말을 친 모 양이군. 하기야 지능만큼은 이 세상 누구 못지 않은 천재일 테지만, 넌 아직 아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이른바 반쪽짜리 천재인 셈이죠." "뭐 그건 인정해. 이봐, 엔젤. 일어나 봐. 안 자고 있는 거 다 알고 있 으니까." 빳빳하게 굳은 채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예안은 이윽고 이불을 걷어 내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이제야 일어나는군. 그렇게 말을 건네려던 마 리오는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예안의 녹색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뜨 끔했다. "나가." "뭐?" "나가란 말이야. 당신이랑은 할 말 없으니까 빨리 나가." 어이없음에 기가 차던 마리오는 뭐라 반박하려다가 엘르가 얼른 나가라 고 눈짓을 보내오자 결국 혀를 차며 일어났다. "좋아. 일단 자리는 비켜 주지. 하지만 네가 제멋대로 시트날타를 탈출 한 건 그냥 묻어둘 생각이 없으니까 각오 단단히 해두는 게 좋아. 가출 한 아이는 혼을 나봐야 해." 먹이를 노려보는 전갈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마리오를 쏘아보던 예안 은 그가 방밖으로 나가자 그제야 속으로 안도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 라도 마리오만큼은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려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는데 이렇게 떳떳하게 나가라고 할 수 있는 걸 보면 어쨌든 간에 자신도 꽤나 용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엘르…라고 했지?" 이 당돌한 아가씨가 무슨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건가. 엘르는 재미있 어하며 끄덕였다. "예. 엘르 크레시오라고 하죠. 왜요?" "날 놓아 줘." 느닷없는 요청에 엘르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녀는 이런 어이없는 요 구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뭐라구요?" "말 그대로야. 난 누구에게도 종속되고 싶지도 않고 강요받고 싶지도 않 아. 날 탄생시키는 데 500억 달러인가 들었다고 했지? 내가 나중에 반드 시 갚아줄게. 그러니까 날…" 짝! 이왕 이렇게 된 거 정면으로 한 번 맞부딪쳐보자는 생각에 침착히 놓아 달라 부탁하던 예안은 갑작스레 뺨에서 얼얼하게 느껴지는 통증에 순간 적으로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이 지금 뺨을 얻어맞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분노에 가득 찬 엘르의 매서운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를 느꼈 을 때였다. 언제나 생글거리기만 하던 엘르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던 예안은 겁부터 집어먹었다. "칭얼거리지 말아요. 당신은 당신의 처지를 제대로 모르나요? 어찌 되었 든 간에 당신은 우리의 도구예요. 비록 혁명이 끝난 뒤에는 당신이 자유 롭게 될 수 있을 테지만, 그전까지는 우리의 소중한 도구라구요. 톡 까 놓고 말해서 가축이나 마찬가지인 신세라구요. 그런데 뭐라구요? 놓아달 라고요? 정말 건방지군요. 원래라면 당신이 제멋대로 두 번이나 탈출한 것에 대해서 엄한 벌을 줘야 할 테지만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아기라는 점을 참작해 이해하고 넘어가려는 건데, 놓아달라고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요?" 싸늘한 말투에 잔뜩 서린 독기를 느낀 예안은 손끝이 벌벌 떨렸지만 필 사적으로 그것을 감추려 노력했다. "나였으니까 이 정도에 끝났지, 만약에 마리오한테 그 말을 했더라면 아 마 당신은 무슨 말을 들을지, 아니 무슨 벌을 받을지 모르는 일이에요. 잘 알았나요? 알았으면 앞으로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그래도 왠지 겁을 집어먹을 것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 이 안쓰럽게 느껴진 엘르는 표정을 부드럽게 한 채 그렇게 위로했다. 하 지만 예안은 이미 엘르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자. 너무 그렇게 겁먹지 말아요." 조금 전과는 태도가 확 변한 엘르는 예안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자신보다 한 뼘 정도 작은 예안의 머리를 왼손으로 쓰다듬었다. 은은한 향기가 풍 겨오는 엘르의 품은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혁명 에 대한 그녀의 염원과 진심을 어렴풋이 느낀 예안은 마치 쥐를 소중히 갖고 노는 고양이의 섬뜩한 본능을 느꼈다. '칫…' 그래도 항상 자신에게 깍듯이 존대해오고 또 존중해줬기에 어느 정도는 말이 통하리라 생각했던 기대는 착각에 불과했다. 이제 더 이상 탈출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남아 있지 않았던 예안은 이렇게 된 이상 한국 영해를 벗어나기 전에 대한해군이 이 잠수함을 붙들어줬으면 하는 소망뿐이었지만,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잘 알았다. 탐지해서 격 침시키는 것도 어려운 잠수함을 사로잡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유니콘이라면 가능하겠지만…' 하지만 파일럿이 탑승하지 않은 맥은 현재로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카아앙! 갑작스런 타격음과 함께 함체가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움직임을 멈추자 함내는 소란스러워졌다. 예안의 방에서 나온 뒤 자신의 방에서 잠을 청 하던 마리오는 놀라 눈을 떴다. 이게 무슨 소린지 고민할 새도 없이 자 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는 서둘러 지휘실로 달려갔다. 함장도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해초에 걸리기라도 한 건지…" "현재 수심 40m! 저속 부상 중입니다!" 잠수함이 부상하고 있다는 보고에 함장은 어이가 없었다. "무슨 소리냐? 왜 본함이 부상을 한다는 거지? 부함장, 이게 어떻게 된 건가?" "그,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한국 해군이 어뢰를 쐈다면 그나마 대응이라도 하겠는데 느닷없 니 뭔가에 걸린 듯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데다가 잠수함이 갑자 기 부상을 하고 있다니?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함장과 부함장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설마 자신이 농담처럼 한 말이 맞아떨어졌을 줄 미처 몰랐던 마리오는 피식 웃고 말았다. "설마 하니 정말로 그물잡이라도 하려는 건가? 한국 놈들도 참 미친놈들 이군. 몇천 톤 급 잠수함을 들어올리려면 고기잡이 그물 갖고는 안 될 텐데…" 주먹을 불끈 쥔 마리오는 마치 강철 함체 밖 너머의 풍경이 눈에 보이는 듯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나? 그물에 잡힌 송사리 꼴이 될 수 있으니 까." "예?" 아직도 뭐가 어떻게 됐는지 이해를 못하는군. 마리오는 함장이 약간 못 마땅했지만 군인이라면 누구라도 이럴 것이라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입맛 을 다셨다. "이곳에선 저항이 좀 심하겠지만… 어쩔 수 없군." 아까 전투에서 국정원 요원들을 살해하려는 순간 터져 버린 저항에 심한 화상을 입은 오른손을 내려다보던 마리오는 스르륵 눈을 감고 깊숙한 곳 에서부터 힘을 끌어올렸다. 드라이 아이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흰 연기처 럼 희미한 빛이 그의 손바닥에 서서히 맺히기 시작하자 함장과 부하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지켜보았다. 빠직! 빠지직! 끌어올리는 힘이 강해질수록 그에 비례해 손바닥에 자리잡는 화상도 점 점 더 심해져갔다. 타닥거리며 고통 신경을 자극하는 저항이 어느새 손 바닥을 지나 팔꿈치를 거쳐 어깨에 당도하는 순간 마리오는 번쩍 눈을 떴다. 동시에 그의 전신을 감싼 푸르스름한 정전기는 금속을 태우는 불 꽃처럼 새빨간 혀를 넘실거리며 그의 영혼마저 태워버릴 듯 맑고 강렬한 오라를 토해냈다. "크윽…" "이, 이것이 마리오 경의 힘…" 쥐 죽은 듯 마리오를 지켜보고 있던 승무원들은 자신들의 뼛속까지 침투 해오는 그의 강렬한 힘에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이런 강대한 힘 을 지닌 자가 자신들의 상관이라는 것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느꼈다. '우리는 지상세계에서는 저항 때문에 전혀 힘을 쓸 수 없는데… 마리오 경은 역시 대단해. 과연 세자르반 가문의 장남…" 함장과 승무원들이 경외심에 가득 찬 시선을 보내오는 것도 모른 채, 살 을 깎아먹는 저항을 참아가며 에날도스를 토해내던 마리오는 이윽고 눈 을 뜨며 손을 내렸다. "고작 이 정도 그물로 대어를 낚으려고 들다니, 한국 정부 녀석들도 꽤 나 멍청하군. 어쨌든 이제 움직일 수 있을 거다. 녀석들이 재차 덤벼 오 기 전에 서둘러 탈출해." "예? 예! 기관 전속!" 마리오가 힘을 써서 잠수함을 붙들고 있던 뭔가를 끊어버린 걸 알아차린 함장이 서둘러 명령을 내리자 지휘실은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예안이 강제로 잠수함에 타고 있을 때 중현은 무척 낙담했지만 함장이 내놓은 방안에 희망을 되찾았다. 침몰시키는 게 곤란하다면 바로 침몰한 잠수함이나 배를 인양하는데 사용하는 초강철 그물을 사용해서 잠수함을 붙잡자는 제안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적 잠수함을 붙잡는 데는 성공했다. 다행스럽게도 황해의 수심이 굉장히 낮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마도 여기가 동해처 럼 수심이 깊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었다. 그러나 적을 붙잡았다는 기쁨은 곧이어 그물이 끊어졌다는 부하의 보고 에 흩어지는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거대한 유조선마저도 끌어올릴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그물이 끊어졌다는 사실에는 함장 역시 굉장히 놀랐 다. 그리고 배 위로 끌어올린 그물의 끊어진 부분이 하나같이 매끈하게 절단되어 있는 광경을 봤을 때 그들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도대체 무슨 무기로 이렇게 만든 거죠?" 부하의 보고를 믿을 수 없어 중현과 함께 직접 갑판으로 내려와 그물을 살펴보던 함장은 어처구니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난들 알겠나? 정말 황당하군. 설마 적 잠수함이 함체 전신에 절단기를 달고 다니는 건 아닐 테고…" "이럴 때가 아닙니다. 빨리 적을 붙잡아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시도해보 는 게 어떨까요?" "단지 우연히 풀려난 것도 아니고 아예 쇠를 끊어버린 것이니 몇 번을 다시 시도해봐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하는데. 그러지 말고 아예 격침시 켜 버리는 게 어떨까?" 격침이라니! 잡혀 있는 인질은 유전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난 인물인데! 중현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격침은 절대 안 됩니다. 인질은 반드시 구해내야 합니다." "하지만 적 잠수함이 먼 바다로 나가 버린 뒤에는…" 격침시키지 않고 잠수함 안에 잡혀 있는 인질을 도대체 무슨 재주로 구 해내겠다는 건지. 인질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상 황에서 격침이 최선이라는 걸 알고 있는 함장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 다. '젠장… 예안씨. 꼭 구해드리겠습니다.' 지금쯤 납치된 공주님이 얼마나 겁에 질려 있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파 온 중현은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예안을 태운 잠수함은 별 탈 없이 한국의 영해를 빠져 나와 태평양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리오와 엘르는 미리 예정된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던 배로 갈아탔다. 물론 예안과 함께였다. 호화 유람선에 오름과 동시에 그 들은 한국에서 도망친 스파이가 아니라, 떳떳한 신분을 지니고 있는 미 국 대부호 일행으로 변신했다. 쾌적한 날씨 가운데 이어진 항해는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다. 예안은 그 동안 선실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채 어떻게 탈출할지 고민했 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하다 못해 엘르와 마리오로부터 벗어나기라도 한다면 몰래 맥을 부르기라도 할 텐데, 그들은 번갈아가며 항상 자신으 로부터 떨어지지 않았다. 밤이 가까워지자 여태껏 감시하고 있던 마리오가 나가고 엘르가 들어왔 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하루종일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심심하지 않나요? 호기심이 한창 왕성할 나이에 그러고 있는 건 꽤나 괴로울 텐데?" "엘르 당신은 방콕행 비행기가 얼마나 편안하고 아늑한지 절대 모를 거 야." "방콕행 비행기?" "방에 콕 박혀 있는단 소리다." 어디서 저런 썰렁한 유머는 또 배운 거지. 엘르는 소리 없이 웃으며 침 대에 걸터앉았다. 부드러운 실크 잠옷에서 뻗어 나온 흰 팔이 자신의 뺨 을 쓰다듬자 예안은 지금의 처지도 잊어버리고 그만 얼굴을 붉혔다. '젠장, 남자일 땐 이런 일 한 번도 당해본 적 없단 말이야!' 납치 된 이후로 가장 곤란을 겪은 건 마리오의 냉담하고 차가움도 아니 고, 구속되었다는 갑갑함도 아니었다. 바로 밤이면 밤마다 엘르와 같은 침대에서 잠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도망가지 못하게 감시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엘르의 입장은 억지로 라도 이해할 수 있지만, 알맹이는 동정 딱지를 떼지도 못하고 여자가 되 어버린 걸 한탄하는 비운의 동정남인데 어떻게 성숙한 묘령의 여인과 같 이 잘 수 있단 말인가? "하루종일 갑갑한 선실에만 있어서 많이 힘들 테니 그만 자도록 해요. 내일은 내가 억지로라도 밖으로 데리고 나갈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요." 엘르는 싱긋 웃음과 함께 예안을 꼭 껴안고 손가락으로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살짝 벌어진 옷깃을 통해 가슴이 조금 드러나자 예안은 황급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여자가 된 후 여자와 함께 목욕했던 경험까지 있지만 아직 이런 상황은 적응이 안 된다. "저, 저기…" "예?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요?" "조, 조금만 떨어져 주면…" 이 깜찍한 아가씨가 부끄러워한다는 걸 알아차린 엘르가 당연히 어머니 처럼 자애롭고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순순히 비켜줄 리는 없지 않은가. "너무 그렇게 빼지 말아요. 어차피 같은 여자끼린데 뭐 어때요?" 엘르는 향긋한 체취와 함께 부드러운 가슴으로 예안을 더욱 더 압박해왔 다. 등뒤에서 느껴지는 물컹한 감촉이 붉게 달아오른 심장의 두근거림을 자극해 야릇하고 묘한 느낌을 빚어내는 것에 대해 어쩔 줄 몰랐던 예안 은 몸을 웅크리기만 했다. '예, 예안아. 제발 나에게 힘을 줘. 나 지금 흔들리고 있어.'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날 밤 두 미녀가 금단의 선을 넘어 이 세상에 서 다시없을 아름다운 사랑을 꽃피워냈다는 그럴싸한 로맨스 따위는 이 루어지지 않았다. 다음 날 예안은 오늘도 무사히 정절을 지켰다는 안도 감에 한숨을 내쉬곤 했지만 어쩌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내일은 꼭 엘르를 이곳저곳 더듬어 보리라!' 따위의 흑심을 품고 있을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리 여자의 껍데기를 덮어쓰고 있다고 해도, 어쨌든 남자는 남자다. 여러 날이 흘러 드디어 유람선은 뉴욕 항에 귀항했다. 예안은 마리오와 엘르 사이에 끼인 채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며 배에서 내렸다. 사진으로 몇 번 봤던 뉴욕항이라는 걸 확인한 예안은 이제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됐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여러 번 탈출을 생각해봤지만 철통같이 자신을 번갈아가며 지키 는 엘르와 마리오의 감시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들의 눈을 피해 몰래 유니콘과 의논해보기도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지금 예안이 기대할 수 있는 건 다시 한 번 레이온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지만 그것 역시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래도 그 형밖에는 날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까…' 마음 속으로 결심을 굳힌 예안은 마리오와 엘르의 지시를 순순히 따랐 다. 섣부른 행동으로 그들의 경계심을 자극하는 어리석은 짓은 벌이지 않으리라 결심한 지 오래였다. 예안을 포함한 세 사람을 태운 리무진은 한참을 달려 어느 호화 주택의 정문 앞에 잠시 멈췄다. 창문을 통해 집, 아니 집이라는 단어 자체가 어 울리지 않을 어마어마한 위용을 가득 두르고 있는 성에 예안은 그만 질 려 버렸다. '젠장. 이건 웬만한 마피아 저리 가라잖아?' 유젤을 탄생시켰을 때 5조의 돈이 투입되었다는 것 하나만 해도 시트날 타의 저력을 어렴풋이 실감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보는 건 전혀 차원이 틀렸다. 예전에 한국 시트날타 지부에 잡혀 들어갔을 때와는 전 혀 다른 웅장함이 느껴졌다. 드넓은 정원 사이로 난 도로를 가로지른 리무진은 이윽고 현관 앞에 세 사람을 내려놓았다. 죽을상이 된 표정을 애써 감추며 차에서 내린 예안 은 수십 명이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호기심과 경외감에 찬 표정으로 자 신을 주시하고 있는 걸 느끼고 뭔가 쑥스러움을 느꼈다. "저 여자가 엔젤인가? 과연 뉴타입의 인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경외감 이 느껴지는군." "태어난지 겨우 석 달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어엿한 성인의 몸을 갖고 있군요. 과연 박사는 대단해요." 굳이 귀를 기울여보지 않아도 들려오는 건 모두 다 자신, 아니 유젤의 육체가 지닌 아름다움에 대한 칭찬뿐이었다. 이 사람들은 탈출한 것에 대해 아무런 분노도 못 느끼는 걸까. 엘르와 마리오가 예안을 데리고 접근하자 그들 중 몇 사람이 서둘러 문 을 열어주었다. 당당하게 가슴을 편 마리오가 앞장서 들어갔고 엘르가 예안을 데리고 뒤따랐다. 일층 홀에 들어선 예안은 저쪽에서 흥분에 찬 표정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그만 고개를 떨어뜨렸 다. "오오, 프린세스. 무사해서 다행이오." 아무리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 는데 어째서 제나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걸까. "그래, 지상세계는 재미있었소? 어쨌든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오." 제나르는 가출했던 사랑하는 손녀가 돌아온 걸 기뻐하는 할아버지처럼 그윽한 표정으로 예안을 와락 껴안았다. 예안은 자신이 사랑하는 유젤의 몸을 함부로 껴안는 제나르에 대한 질투와 분노, 그리고 그로부터 느껴 지는 풋풋한 자상함에 취해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는 스스로에 대한 묘한 실망이 섞여 빚어내는 혼란을 잠재우려 애썼다. "수고했소, 마리오 경. 수고했다 엘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으음. 역시 마리오 경은 차기 대신 후보답게 유능하군. 엘르, 앞으로 프린세스가 여기에 머무르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많이 신경 써 주거라." 엘르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걱정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런 기쁜 날 만찬이 없을 순 없지. 프린세스, 요리사들의 최고의 저녁 을 준비해놓았으니 같이 가지 않겠소? 그렇지 않아도 현재 시트날타의 주요 인물들이 대부분 이 자리에 모였소. 전부 다 프린세스의 얼굴을 보 고 싶어하오." 예안을 납치한 것에 대한 축하 만찬 자리에 예안이 참석한다는 건 뭔가 굉장한 모순이 아닐까? 하지만 제나르는 무사히 예안을 되찾았다는 것에 대해 기쁜 나머지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죄송하지만 대신 님. 엔젤은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대신님도 잘 아시 지 않습니까?" 그제야 ST기관에 대해 기억해낸 제나르는 조금 서운한 표정으로 껄껄 웃 었다. "그렇군. 엔젤은 지구의 음식 따위는 전혀 필요로 하지 않지. 내가 깜박 잊어버리고 있었구나. 그래도 먹을 순 있지 않나요? 같이 가는 데 어떻 소?" "…싫은데요." 사실 유젤의 몸에 깃들여 살기 시작한 이후로 먹으면 곧바로 토해내기 때문에 물 한 방울 입에 대본 적 없지만, 그렇다고 먹을 수 있다 해도 자신의 납치를 축하하는 만찬에서 음식을 입에 댈 생각은 결코 없었다. 예안은 호기심과 기쁨에 찬 시선으로 자신을 주시하기 바쁜 주변 사람들 을 죽 훑어본 후 냉랭하게 말했다. "전 이만 쉬고 싶은데요. 어디로 가면 되죠?" 냉랭한 말투에 묘한 가시가 돋쳐 있음을 느낀 제나르는 조금 서운해하며 대답했다. "이층에 프린세스의 방을 꾸며 놓았소. 엘르, 안내해주거라." "예. 그럼 저흰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대신님도 편히 쉬세요. 마리오 경도 편히 쉬세요." 엘르를 뒤따라 이층으로 올라가던 예안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수군거 리는 걸 듣고 더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내용의 대부분은 이제 혁명이 이 뤄지는 건 시간문제라느니, 우리들을 구원해줄 메시아가 다시 돌아왔다 느니 하는 등 온통 자신의 납치를 기뻐하는 것들뿐이었다. '저 사람들은 정말 내가 단지 호기심으로 시트날타를 탈출한 걸로 아는 걸까? 하긴 태어난지 석 달도 안 된 아기로 알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 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만약 이 상황에서 한 번 더 탈출하면 제나르는 어떤 표정을 보일까 무척 궁금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루어지기 힘든 소원이었다. 엘르가 자신의 방이라 소개한 방문을 연 예안은 잠시 그 자리에 걸음을 멈췄다. 단순히 방의 넓이가 무지막지하게 크고 갖가지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게 웬 공주님 방이냐?' 물론 여자가 된 후로 거의 반쯤 장난삼아 치마를 몇 번 입어보기는 했지 만 그건 어디까지나 잠시 즐기는 외도에 불과했다. 학교에서도 꿋꿋하게 친위대 여선배들의 공세를 버텨가며 남자 교복을 입는 데다가, 중성용 옷을 자주 입는 편이긴 어쨌든 간에 자신은 엄연한 남자다. "엔젤. 마음에 드나요?" "…그럴 리가 없잖아." 하늘거리는 레이스가 잔뜩 달린 침대는 일단 넘어가자. 사람 다섯 명이 너끈히 잘 수 있을 것 같은 침대 위에 놓인 커다란 곰인형과, 피아노 위 에 죽 앉아 있는 온갖 깜찍한 동물 인형들도 그냥 넘어가자. 화려한 디 자인으로 아예 뒤범벅이 된 커다란 벽거울과 화장대도 그냥 넘어가자. 활짝 열린 옷장에 가득히 들어 있는 온갖 여성용 원피스와 옷 따위도 그 냥 넘어가자. '…젠장! 뭘 넘어간다는 거야! 넘어갈 게 하나도 없구만!' …바로 그랬다. 이 방안에 자리잡은 가구나 옷 중에서 여성용, 그것도 공주병이 단단히 든 여자용품이 아닌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설마 나더러 이 방을 쓰라는 건 아니겠지?" "왜요? 마음에 들지 않아요?" "아니, 그런 것보다는… 아, 몰라. 그만 두자. 어차피 말해봐야 당신은 이해할 것 같지도 않으니." 이런 저런 자질구레한 설명이 귀찮았던 예안은 머리가 아파 오는 걸 억 지로 참으며 손을 내저었다. 의구심에 찬 엘르의 시선을 등뒤로 받으며 예안은 옷을 벗지도 않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젠장, 앞으로는 이런 공주님 방에서 살아야 한단 말이지. 하루라도 빨 리 탈출하는 게 좋겠다.' 이런 곳에서 길게 머물렀다간 꿋꿋하게 간직해온 남자로서의 자부심이 금방 무너져 버리고 말 거야. 예안은 도망치다 총에 맞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길게 있진 않으리라 결심했다. "우리가 타고 온 배에선 미리 옷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많이 불편했 죠? 어쩔 수 없었어요. 원래는 그 배를 탈 예정이 아니었는데 인천항구 에서 한국 정부에 들키는 바람에 만약에 대비해 근처에 대기시켜둔 잠수 함을 탄 다음에 그 배로 옮겨 탄 거죠. 자, 여기 옷들이 있으니까 샤워 하고 갈아입도록 해요." 그러면서 엘르는 옷장의 서랍을 열어 그 안에 가득 든 여성용 란제리 등 등 여성용 속옷을 잔뜩 보여주는 것이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컬쳐 쇼크의 한계를 훨씬 넘어선 데미지를 입은 예안의 안색이 한순간 질려 버렸다. "저기, 지금 나보고 그걸 입으라고?" 화려한 망사 팬티를 히죽 웃으며 어루만지던 엘르는 뭔가 잘못되었나 싶 어 고개를 갸웃했다.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해. "왜요? 이상해요? 이거 안 예뻐요?" "다, 당신 눈에는 예뻐 보이겠지만 난 아니라구!" 여자가 된 후로 여성용 속옷을 입기는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흰 팬티 에 밋밋한 브래지어 정도로 그쳤지, 바로 지금 엘르가 들고 있는 망사 팬티나, 서랍 안에 들어 있는 저 화려하고 야시시한 언더웨어 따위를 입 을 생각은 꿈에서도 한 적 없는데, 저것들을 입으라고? "엔젤." 어느새 예안의 코앞까지 다가온 엘르는 고개를 살짝 숙여 입술을 예안의 귓가에 갖다 댔다. 그리고 속삭였다. "여자로 태어나서 이런 화려한 속옷을 한 번도 입어보지 않는다는 건 죄 악이에요. 남자들은 당신 같이 아름다운 소녀가 도발적인 복장을 하는 걸 정말 보고 싶어하거든요." "…근데?" "내색은 하지 않지만 마리오도 아마 당신의 그런 모습을 한 번쯤은 보고 싶어할 거예요. 그러니 오늘 이걸 입고 그의 침실에 들어가 유혹해보는 건 어때요?" 묵묵히 듣고 있던 예안은 굳은 얼굴을 살짝 들어올려 녹색 눈동자로 엘 르를 똑바로 주시했다. "한 번만 더 그런 소리하면…" "소리하면?" "그, 그런 소리하면…" "그런 소리하면? 어떻게 할 건데요?" 여유가 가득 흐르는 엘르의 눈빛에 조금 울컥한 예안은 그만 나오는 대 로 말해버렸다. "덮쳐 버릴 거야!" 엘르의 입가에 즐거움을 참지 못한 미소가 번졌다. "후후, 그것 참 재밌네요. 좋아요. 동성애는 취미 없지만 날 덮치고 싶 으면 내 침실로 와요. 이 방에서 나가서 바로 왼쪽이니까 찾기 쉬울 거 예요. 아참, 그렇지만 날 덮칠 생각으로 올 거라면 저 속옷을 입고 오는 게 좋을 거예요. 안 그럼 문을 안 열어 줄 거니까." 사랑스런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아름다운 소녀가 무뚝뚝한 표정으 로 덮쳐 버리겠다 선언하면 남자라면 백이면 백 황홀해하겠지. 엘르는 만약에 이 사실을 마리오가 알게 되면 자신을 굉장히 부러워할 거라고 속으로 쿡쿡 웃으며 잔뜩 부은 예안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밖 으로 나갔다. '젠장. 유혜민같은 여자가 또 있을 줄이야.' 살다 살다 그 사악한 유혜민과 똑같은 여자를 보게 될 줄 어디 상상이나 했으랴. "쳇…" 왠지 엘르에게 패배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던 예안은 솟구쳐 오르는 화를 달래려 애쓰다가 그만 엘르가 떨어뜨리고 간 망사 팬티를 오른손으 로 쥔 채 스탠드를 강하게 내리쳐 버렸다. 쨍그랑! 예안의 주먹에 얻어맞은 스탠드 등은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져나갔지만 아무도 방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엘르는 아마도 예안이 분풀이로 가구를 때려부쉈다는 걸 짐작하고 있는 듯 했다. 아마도 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 들이 놀라서 달려오려는 것도 별 일 아니라고 미소 띤 얼굴로 막고 있겠 지. "안 오는 게 더 나아. 지금은 혼자 있고 싶으니까." 주먹이 찢어져 상당히 많은 피가 흘러 나와 단단히 쥐고 있던 망사 팬티 를 적시고 있었지만 예안은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얼굴로 망연자 실하게 중얼거렸다. 어쨌거나 이렇게 해서 예안은 시트날타에 다시 잡혀오고 말았다. 아침이 찾아오자 예안은 눈을 떴다. 화려하고 낯선 분위기에 잠시 어리 둥절해 있던 예안은 그제야 자신이 지금 시트날타 미국 소유의 저택에 잡혀와 있음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 똑똑 "들어오세요." 예안이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메이드 차림을 한 여자 두 명이 세수할 물 을 갖고 들어왔다. '바로 저기에 욕실이 있는데 왜 저런 게 필요할까?' 그들이 지금 자신을 한 살짜리 아기 취급하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르는 예안의 생각이었다. "씻겨 드리겠습니다. 일어나세요." "됐으니까 나가세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씻겨드릴 테니까 어서…" 예안은 버럭 화를 냈다. "됐다니까 왜 자꾸 사람 짜증나게 하고 그래요! 혼자 있고 싶으니까 어 서 나가라구요! 앞으로 또 이런 거 갖고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구요!" 인형처럼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묵묵히 듣고 있던 두 여자는 다시 고개 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예안은 그들의 정중한 인사에도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다. 이렇게 초조해 봤자 자신에게 전혀 득이 되지 않는다는 건 잘 알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남에게 뭔가를 강요당하는 건 질색했던 인생을 살아온 경험은 자꾸만 화를 부추긴다. "젠장…" 만약 이곳이 한국의 집이었다면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했을 거라 생각하니 조금씩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애써 엘르에게 덮쳐 버린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농담으로 여유 있는 척 하려 애써 보지만 예안은 누구 보다도 자신의 초조함을 잘 알았다. "어? 다 나았네?" 무심코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던 예안은 어제 스탠드를 내리쳐 생긴 상처가 전혀 없이 깔끔한 피부에 조금 당황했다. "예안이 몸은… 상처도 빨리 낫는 건가?" 하기야 빛에 따라 머리색도 변하고, 몸 속의 ST기관인지 뭔지 하는 게 에너지를 무한으로 생산해 낸다는데 그깟 상처 낫는 속도가 빠르다는 건 놀랄 만한 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렇게 화를 내고 있나요, 엔젤?" 고개를 든 예안은 문앞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엘르를 발견하고 얼굴 을 더 찡그렸다. "당신 같으면 화가 안 나겠어?" "우리는 당신을 최대한 편하게 해주고 싶을 뿐이에요. 남의 호의를 그렇 게 무시해도 되는 건가요?" "호의 따윈 필요 없어. 그냥 날 놓아주면…" 예안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엘르의 매서운 눈빛에 놀라 황급히 손 으로 입을 막았다. "내가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했죠? 도대체 언제쯤 당신의 입장을 제대 로 자각할 건가요?" 엘르는 항상 친절하고 싱글거리지만 유독 놓아달라는 말을 할 때만은 진 심으로 화를 낸다. 어쩌면 엘르의 마음 속에는 예안이 인간들의 사회에 서 더럽혀지는 걸 참지 못하는 분노가 정말 깃들여 있을 지도 모르지만, 시트날타가 부당하게 자신을 구속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예안이 그 녀의 마음을 이해하는 건 무리한 일이었다. 두 여자 사이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어라? 이 속옷이 더럽혀졌네요?" 말밑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망사 팬티를 집어든 엘르는 검붉은 핏자국이 나있는 걸 보고 슬그머니 웃음을 지었다. "이런, 이런. 벌써 초경이 시작된 거예요? 아하, 당신이 그렇게 신경이 곤두서 있는 건 그것 때문이었군요. 조금만 기다려요. 생리대를 갖다 줄 테니까. 쓰는 방법도 알려줄게요." "뭐, 뭐, 뭐?" 뚱딴지같은 소리에 예안은 당황했다. "무슨 소리야? 초경이라니?" "흠. 하기야 성교육 같은 걸 받아본 적이 없을 테니 첫 생리하고 나서 굉장히 겁먹었을 수도 있겠죠. 혹시라도 당신이 죽을 병 걸린 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두세요. 이건 여자라면 성인이 되었을 때 누 구나 다 하는 거니까." "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왜 생리를 한다는 거야!" "그럼 여기 묻은 피는 당신 게 아니에요?" "내, 내 피는 맞지만…" 뭔가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생리'라는 단어가 입힌 데미지에서 회복되지 못한 예안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후후. 이따가 오후에 사람을 불러서 성교육 시켜줄 테니까 기대해도 좋 아요. 지금 당장 생리대가 필요할 테니까 곧 갖다드리죠." "이, 이봐!" 하지만 예안이 속옷에 묻은 피에 대해 미처 뭐라 해명하기도 전에 엘르 는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당황함으로 뒤범벅이 된 눈동자로 방문을 응 시하고 있던 예안의 몸이 침대 위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로부터 약 십 분 후. 절대 그런 꼴사나운 기저귀 따위를 찰 수 없다고 발버둥치는 예안과 생리 중인 여자는 당연히 이걸 착용해야 한다는 메이 드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결국 필사적으로 기저귀 차는 걸 거부한 예안 의 공세에 두손 두발 다 든 메이드는 엘르를 불렀고, 어쩔 수 없이 예안 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자신과는 절대 인연이 없을 줄 알았던 생리대를 착 용해야만 했다. 그것뿐이면 어디 말을 안 한다. 이미 성에 대해서라면 이론적으로는 궁 극의 경지를 벗어난지 오래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정자가 어쩌구 난자 가 어쩌구 하는 21세기 초에 초등학교 성교육 시간에나 쓰는 유치찬란하 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이 궁금증만 자극하는 성교육 비디오를 봐야만 했 다. "…아시겠습니까? 성이란 건 그만큼 고결하고 소중한 것으로서, 남녀의 사랑으로 싹튼 생명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존귀한 것이죠." 삼류 영화라 해도 이것보다는 더 재미있겠다. 울컥한 눈으로 여 강사를 쏘아보던 예안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럼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데요?" "예? 아, 그건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정자와 난자 가 합쳐져서…" "설마하니 남녀가 서로 좋아한다고 해서 아기가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궁금한 건 정자가 무슨 재주로 여자 몸 속으로 들어가냐는 거예요. 설마 하니 수술로 집어넣는 건가요?" 상대방의 정신 연령이 한 살배기 아기라는 걸 감안해서 최대한으로 난이 도를 낮춘 성 강의를 열심히 했던 여 강사는 이마에서 흐르는 긴장을 주 체할 수 없었다. 상대방이 겉모습 그대로 십대 소녀라면은 자신 있게 온 갖 체위까지 설명해줄 의향이 있었지만, 겉모습만 그러할 뿐 아직 3개월 된 아기지 않은가? 여 강사가 어쩔 줄 몰라하자 예안은 이것도 좀 재밌다 생각하며 엘르에 게 시선을 돌렸다. "엘르. 당신은 알아?" "네, 네?" "정자라는 게 어떻게 여자 몸 속으로 들어가는지 말이야. 그게 눈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작다며? 수술로 집어넣는다면 도대체 무슨 재주로 집 어넣는 거야?" 엘르 역시 눈에 띄게 당황했다. "수, 수술로 집어넣는 게 아니라…" "수술로 안 집어넣어? 그럼 무슨 재주로 집어넣는데?" …아마도 21세기 초 어린 자식을 가진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들이 이런 난감한 상황을 한 번쯤은 겪어보았을 테지. "도대체 뭐야? 왜 그건 말 안 해줘? 성교육 해준다며?" "그, 그게…" 엘르는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여 강사에게 돌렸다. 짧은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많은 눈빛이 오고갔고, 결국 여 강사는 말없는 엘르의 눈빛에 서 그녀의 의도를 읽어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엔젤. 그게 말입니다… 사랑을 나눌 때 남자의 몸 일부가 곤봉처럼 단 단해집니다. 그게 여자의 몸 속으로 들어가서 정자를 넣어주는 거지요." "단단해진다구? 어디가?" "그, 그건…"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난감한 상황이란 이런 걸 말함이었던가. "어디가 단단해진다는 거야?" "여, 여기가 단단해집니다!" 예안의 추궁을 이기지 못한 여 강사는 결국 최대한으로 간결하게 그린 인체 그림을 화면에 띄우고 손으로 '단단해진다는 부분'을 가리켰다. "어라? 그러고 보니 남자는 다리가 세 개네? 혹시 가운데 다리는 퇴화된 거야?" 지금 예안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꿈에도 상상 못한 강사와 엘르는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퇴화된 게 아니라 저걸 가리켜 성기라고 부릅니다. 저 부분이 단단해져 여자의 몸 속으로 들어가 정자를 넣어주는 거지요." 이 정도면 꽤나 아담하고 간결하고 깔끔하게 설명한 거라고 강사가 스스 로에게 뿌듯함을 느끼고 있을 때 예안이 다시 물었다. "여자 몸 속 어디로 들어간다는 건데? 설마 입으로 들어간다는 거야?" "헉!" 고대의 벽화에서 자동차 엔진 설계도를 발견한 어느 과학자의 심정이 이 러할까. 아주 오래된 유물 중에서 황금으로 만들어진 비행기 모형을 발 견한 고고학자 심정이 이러할까.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기가 던진 질문이 남녀의 밤 기술 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차라리 경악에 가까웠다. "아, 아니요. 입이 아닙니다. 입이 아니라…" "어디? 어디?" 강사와 엘르는 예안이 짓고 있는 호기심 가득한 미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조금만 정신을 차렸다면 아마도 그 호기심이 미지의 영역에 대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하는 마음에서 빚어 진 것이라는 걸 알았을 텐데 말이다. "저기 그러지 말고. 남자가 여자한테 정자라는 걸 넣어주는 장면을 그냥 비디오로 보여 주면 안 되냐? 직접 보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은데." "쿨럭!" 태어난지 석 달 밖에 안 된 아기가 포르노를 보여달라고 한다. 과연 태 고 이래로 그 누가 이런 상황을 겪어 보았겠는가. 그 후로도 한참이나 이어진 예안의 추궁에 엘르와 강사는 진땀을 잔뜩 흘리다가 결국 둘 다 기권을 선언하고 도망치듯 방에서 빠져나오고 말았 다. 그리고 시트날타로 잡혀온 후 가뜩이나 안 좋았던 기분을 어느 정도 해소한 예안은 침대에 누운 채 뿌듯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바보들." 아까 강사와 엘르의 당혹한 표정을 떠올리며 즐거워하던 예안은 문득 의 구심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왜 생리를 안 하지? 혹시 예안이 몸은 생리 같 은 것도 아예 안 하는 건가?" 아직 덜 성숙되어서 그런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봤지만 적당한 크기로 봉긋하니 솟은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노라면 그건 너무나 빈약한 반론이 었다. 이미 몇 번이나 거울로 자신의, 아니 정확히는 유젤의 몸이 성숙 한 여자의 몸이라는 걸 확인했던 예안은 어쩐지 모르게 마음이 불안해졌 다. 「이 아이를 너에게 줄게.」 갑자기 예전에 꾸었던 꿈, 유젤이 자신에게 어린 아이를 내밀며 행복하 게 해달라고 부탁하던 게 생각난 예안은 조금씩 숨이 막혀왔다. 생리, 그 동안 단 한 번도 자각하지 못했던 그것에 대한 의심은 예안의 마음에 깊이 자리를 잡은 채 점점 그 크기를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설마 예안이는 불임?" 애써 불안을 달래며 농담처럼 그렇게 혼자 중얼거렸던 건, '어쩌면?' 하 고 짐작하고 있던 걸 입 밖으로 내면 왠지 두려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 았던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에이. 아닐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당연한 일이지만 남자랑 잠자리 해본 기억이 결코 없는 예안은 애써 그 렇게 불안을 달랬다. 누구나 다 잠드는 캄캄한 밤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상원 의원, 스필버그 는 그럴 수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자신은 안락한 침대에 몸을 맡 긴 채 꿈나라를 헤매고 있어야 하지만 평화로운 집안 공기를 깨뜨린 침 입자는 아마도 그걸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누, 누구냐! 넌 도대체 누구냐!"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다 벽에 가로막한 스필버그는 호기 있게 그렇게 외 쳤지만 그의 이성은 이미 모든 게 끝났음을 잘 알았다. 비싼 돈을 주고 고용한 프로 경호원 20명이 침입자에 의해 하나 남김 없이 쓰러지는 데 는 불과 3분도 걸리지 않았으므로. - 뚜벅뚜벅 어둠 속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침입자의 발걸음 소리는 무겁게 깔린 밤공 기를 흐트러뜨리며 긴장으로 굳어진 스필버그의 뼛속까지 짙은 공포를 새겨 넣었다. 어서 빨리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생각은 스필버그의 머 리 속에서 쉼 없이 맴돌았지만 전화기를 잡는 순간 황천행이 될 것이다. "누구냐! 넌 누구냐! 도대체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런 일을 하는 거냐!" "원한은 없어." 아주 앳된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스필버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당신의 아이가 당신이 죽길 원했고 난 그것을 들어줄 뿐이야." "…뭐?" 순간 스필버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여자와 남자아이가 있었다. 대 략 6년 전쯤에 갖고 놀던 여자였는데 얼마 전에 갑자기 아이를 들고 찾 아와 책임져 달라고 부탁하던 여자였던가? 상대방이 돈에 고용된 킬러라 면 타협을 볼 여지가 있다 생각한 스필버그는 다급히 외쳤다. "그 아이로부터 얼마를 받았지? 천 달러? 만 달러? 십만 달러? 내, 내가 자네에게 그 열 배, 아, 아니 백 배의 돈을 주겠어! 나, 나 말고 그 아 이를 죽이지 않겠나?" 어느덧 숨결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침입자의 얼굴 위로 가 로등 빛이 내려앉자 스필버그는 흡, 긴장한 숨을 들이마셨다. 상대는 기 껏해야 14살이 되었을까 말까한 작은 체구의 어린아이였다. '이, 이런 꼬마에게 프로 경비원들이 전부 다 쓰려졌단 말인가?' 침입자, 소년은 천천히 오른손에 쥔 권총을 들어올려 스필버그의 미간을 정확히 겨누었다. 희미한 가로등 빛을 반사하는 차가운 총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기는 표정이 없는 소년의 눈빛과 뒤섞여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섬뜩한 살기를 반사했다. "그 의뢰는 들어줄 수 없어." "어, 어째서! 저, 적다면 천 배, 천 배에 해당하는 돈을 주겠어!" "천 배가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돈을 준다고 해도 불가능해." 소년은 아무 표정 없는 섬뜩한 눈동자로 스필버그의 전신을 꿰뚫을 듯 훑어보며 덧붙였다. "그 아이가 이렇게 말하더군. 당신이 사람을 시켜 모친을 죽인 후 자신 도 살아갈 의미를 잃었다고 말이야. 당신에게 꼭 복수는 하고 싶은데 자 신에게는 그럴 돈이 없다고 말하더군." "그, 그럼?"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한 스필버그의 실날같은 희망은 다음 에 들려온 소년의 덤덤한 말투에 산산이 조각났다. "그 아이는 생명 보험에 가입한 뒤 스스로 차에 뛰어들었어. 자기 목숨 과 맞바꿔서 의뢰비를 마련한 거지. 그래서 당신이 아무리 큰돈을 준다 해도 난 당신 대신 그 아이를 죽일 수 없는 거야. 이해해?" "그, 그런…" 핑. 스필버그가 미처 뭐라 말하기도 전에 공기를 찢으며 퉁겨진 총알은 그의 미간을 정확히 꿰뚫으며 목숨을 거두었다. 자신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눈빛으로 멍하니 소년을 쳐다보던 스필버그의 몸이 천천히 앞으로 무너 졌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결코 의뢰주를 배신하지 않아. 이 바닥에 서 신용은 목숨보다 더 중요하거든." 스필버그의 맥을 짚어 정말 목숨이 끊어졌나 확인한 소년은 등을 돌리며 다시 덧붙였다. "그리고 경호원들은 죽이지 않았어. 그건 의뢰 내용에 들어있지 않았으 니까." 그 말을 끝으로 소년은 어둠 속으로 몸을 감췄다. 스필버그의 집을 빠져나온 소년은 미리 확보해둔 탈출 루트를 통해 자신 의 집이자 사무실인 건물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서니 동업자인 니르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무사했군요." 무기를 내려놓은 소년은 자신보다 키가 큰 연상의 여인, 니르의 무릎에 앉으며 고개를 숙였다. "너무 쉬웠어. 목표는 확실히 제거했어." "힘들지 않은가요?" "전혀. 오히려 너무 쉬워서 짜증이 나. 사람들은 왜 이렇게 약한 거야?" 소년은 자신의 발길질과 주먹에 너무나도 허무하게 나가떨어진 스필버그 의 경호원들을 떠올리며 아직도 살기를 잃지 않은 채 바르르 떨리는 주 먹에 살며시 힘을 주었다.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서 시작한 이 일은, 처 음에는 그에게 삶의 의미와 희망을 찾아주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죽일 가 치도 없이 약한 자들을 죽인다는 건 염증 비슷한 무언가를 흔적처럼 남 기곤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이백만 달러를 벌었잖아요." "그 남자는 이백만 달러짜리 남자가 아니었어. 기껏해야 몇 십 달러짜리 밖에 안 되는 싸구려 남자였다구."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우리는 자선사업을 하는 게 아니니까." "알아." 태양이 잠시 죽은 뒤에 대지를 점령하는 안개처럼 스멀스멀 전신을 감싸 오는 한기에 소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까지 그는 살인에 대해 딱 히 좋다 혹은 나쁘다라고 거창하게 고찰해본 경험은 없다. 하지만 이렇 게 죽일 가치도 없는 나약한 자를 제거하고 난 뒤에 강한 추위가 느껴질 때만큼은 살인이 나쁘다고 중얼거리며 니르의 따뜻한 품에 더더욱 파고 들곤 했다. 어차피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되살아난 태양에 대지를 점령한 안개가 흩 어져 버리듯 포박처럼 온몸을 두른 한기도 말끔히 사라져 버릴 테고, 그 리고 다시 또 니르가 받아온 의뢰를 따라 일을 나설 테지만. 심연의 지옥처럼 소름끼치게 아름다운 검은 눈빛으로 니르를 응시하던 소년은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얼마 전 니르가 가르쳐 준 이것. 키스라고 하던가? 이것을 하고 있을 때면 마치 영원히 깨지 않는 달콤한 꿈에 취해 있는 것처럼 몸이 붕 뜨곤 하기에 언제부터인가 소년 은 키스를 굉장히 좋아하게 되어 버렸다. 길게 이어진 키스가 끝나고 난 뒤 니르는 살짝 웃음을 지으며 한 장의 종이를 소년에게 내밀었다. "다음 의뢰예요." "이번엔 누구를 죽이면 되는 거야?" 한창 밖에서 뛰어 놀 나이의 귀여운 미소년의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도저 히 믿어지지 않는 섬뜩한 말투였다. "죽이는 게 아니에요. 납치 당한 공주님을 구출해 내는 거죠." 소년은 생각할 것도 없이 거절했다. "싫어." "왜요?" "얼마나 약했으면 납치를 당해? 난 그런 약자를 구해주는 건 싫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보다 약한 자를 죽이는 것 뿐이야." 니르는 연상의 여인만이 지닐 수 있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깨에 살짝 닿을락 말락한 길이의 소년의 검은 머 리카락은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호수의 표면처럼 부드럽게 일렁였다. "니콜라스. 당신은 너무 강해요. 너무 단단하죠. 그래서 언젠가는 부러 지고 말 거예요." "강한 자는 부러지지 않아." "아니요. 지나치게 강한 자는 언젠가는 부러져요. 태풍에 순응하는 갈대 는 흔들리며 부러지지 않지만 저항하는 고목은 결국 부러지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리고 언제까지 이렇게 뒷세계의 검은 일만 해치울 순 없 잖아요? 이제 그만 당신도 슬슬 양지로 나갈 때가 되었어요." "양지로 나가면 뭐가 좋은데?" "전부 다 좋아요. 뭐든지 다 좋아요. 적어도 어두운 뒷세계보다는 훨씬 아름답고 깨끗하고 밝은 세상이죠. 나가고 싶지 않나요? 양지로 나가고 싶지 않아요?" 딱히 살인에 대해 좋은 감정도 나쁜 감정도 지니고 있지 않지만 소년이 지금까지 살인청부업만을 고집해왔던 건 그게 제일 편했기 때문이었다. 독사 앞의 어린 개구리처럼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하는 인간들을 쏘아 죽이고, 그 대가로 큰돈을 받는다는 건 어린 소년에게 있어 너무나 도 편안하고 쉬운 직업이었으니까. "이 여자애를 구출해내는 거야?" 무심코 니르가 내민 서류의 오른쪽 하단에 자리잡은 소녀의 사진을 흘끗 본 소년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예. 아주 귀중한 인질이래요. 보수도 그만큼 엄청나죠." "얼만데?" "오 억 달러." 지금까지 청부업으로 모은 돈보다 많은 건 아니었지만 기껏해야 인질을 구출하는 대가로 오 억 달러를 준다는 건 니콜라스의 호기심을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이 여자애가 도대체 얼마나 귀중하기에 의뢰주는 오 억 달러나 지불한 다는 거야? 의뢰주가 누군데?" "한국 정부예요. 이 여자애는 한국의 고위급 인사의 외동딸이라는군요. 솔직히 그 말을 믿는 건 아니지만." 제 아무리 한국의 고위 인사의 외동딸이라 해도 한국 정부가 오 억 달러 나 되는 돈을 이런 뒷세계 청부업자에게 지급하면서까지 구출해낼 까닭 은 없다. 니르와 니콜라스는 사진 속의 여자애에게 한국 정부가 밝히고 싶지 않은 커다란 비밀이 있음을 얼핏 눈치챘지만 굳이 캐어묻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간에 구출해주는 대가로 오 억 달러나 받는다는 건 굉장한 이득이니까. "할게. 이 여자애는 지금 어디에 있어?" "뉴욕 제나르 상원 의원의 저택에 있어요." 니콜라스는 조금 전에 사람을 죽였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귀여운 표정 가득 호기심을 담은 채 사진 속의 소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니 르에게서 느끼던 포근하고 자애로운 느낌과는 달랐지만, 소녀는 무언가 깊이 의존하고 기대고 싶다는 느낌이 강하게 묻어나는 녹색 눈동자를 갖 고 있었다. 이곳으로 잡혀온지 대략 삼일쯤 된 날의 정오. 무려 삼일간이나 지정된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방콕행 비행기의 안락함을 즐기고 있다 는 건 발바닥에서 가시가 돋아날 정도로 괴로운 일이었다. 결국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된 예안은 하다 못해 정원 산책이라도 나가야 겠다는 생각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시나요?" 예안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엘르가 옆방에서 나오며 물었다. 곧바로 뒤따 라 나오는 걸로 봐선 아마도 줄곧 신경 쓰고 있었던 듯 하다. "정원에 좀 나가려고 그런다. 신경 쓰지 마." "흠. 혹시라도 탈출 같은 걸 꿈꾸고 있는 거라면 그런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예요. 이 저택의 담은 어린 여자애가 혼자 넘을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하지 않거든요." 이미 첫날에 이 저택 담장이 얼마나 높았으며 또 철조망까지 쳐져 있는 걸 확인했던 예안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잘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셔. 귀찮으니까 넌 따라오지 마." "알았어요, 알았어." 자신보다 훨씬 어린 여자애한테 반말을 들으면 기분이 좀 나쁠 법도 한 데 엘르는 항상 웃으며 꼬박꼬박 존대를 해준다. 이 여자는 원래 성격이 이런가? 일층의 홀을 지나던 예안은 주변에서 자꾸만 자신을 흘끔거리는 게 신경 쓰여 죽을 지경이었다. '제발 사람 좀 쳐다보지 말란 말이다. 젠장. 말도 안 통하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시트날타 인들이 꿈꿔온 혁명이 뭔지는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굉장히 커 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고, 또 자신이 그 혁명을 이루는데 절대 필요한 도구라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다. 때문에 그들이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건 이해가 간다. 하지만 엘르의 말로는 지금 이 저택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시트날타 인이 아니라 평범한 고용인이라고 했는데, 솔직히 그들이 자신에게 관심 을 보이는 건 딱 질색이었다. '어차피 미국인하고는 말이 안 통하니까 다행이지만.' 정원으로 나간 예안은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실외 수영장을 잠시 흘끔 쳐다본 뒤 천천히 주변을 거닐었다. 정원일을 하는 고용인이나 집안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여전히 흘끔거리는 게 무척 기분 나빴지만 꾹 참 았다. "쳇. 집 한 번 더럽게 크네. 무슨 집이 이렇게 커? 이건 무슨 우리 학교 하고도 비교가 안 되게 크잖아?" 「유전만 받으신다면 이것보다 백 배는 더 넓고 화려한 집을 지으실 수 있습니다.」 "넌 입 다물고 깨달음 얻는 데나 노력해. 네가 환골탈탠지 뭔지만 하면 은 이런 일은 없을 거라며?" 「화나셨습니까?」 "내가 왜 화가 나냐? 환골탈태도 못한 평범 고수 수준인 네가 뭘 제대로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 것 자체가 바보짓이었는데." 시트날타로 다시 납치되어 온 건 유니콘의 탓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누군 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 「레이온 박사는 언제 온다고 합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제나르 대신이 물론 알렸겠지만 아마도 주위 시선도 있고 하니 못 오는 거겠지 뭐. 사실 전에 내가 탈출하고 난 뒤 다른 사람들한테 괜한 의심 샀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가 도와준다면 탈출하기가 한결 쉬워질 텐데 말입니다.」 "그냥 네가 이곳으로 얼른 날아오면 안 되냐?" 「뒤에서 유젤 님을 뒤따라오고 있는 사람들 먼저 처리하신 다음에 그 말씀을 하십시오. 파일럿이 타고 있지 않으면 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공격을 할 수 없습니다.」 숲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넓은 정원을 거닐던 예안은 뒤에서 꿋꿋이 자신 을 따라오고 있는 두 명의 남자를 흘끗 쳐다보고는 암담함이 가득 담긴 한숨을 토해냈다. "젠장. 내가 진짜로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거지?" 그렇게 실컷 신세타령을 하며 걸음을 옮기던 예안은 문득 꽃을 키우고 있는 온상을 발견했다. 될 대라 되라, 하는 심정으로 안으로 들어간 예 안은 제나르가 작업복을 입은 채 열심히 꽃을 가꾸고 있는 광경을 보곤 흠칫했다. "프린세스? 여기는 웬일이오?" 구슬땀을 흘리고 있던 제나르는 예안을 보고 반색했다. "아, 그, 그게요… 그냥 심심해서 이리저리 걷다가 우연히 들어왔는데… 그, 그냥 나갈게요." 예안이 황급히 밖으로 나가려 하자 제나르는 얼른 불러 세웠다. "나가지 않아도 돼요. 프린세스는 우리 시트날타 어디를 가더라도 환영 받을 사람이니까. 자자, 여기에 앉아요." 주저하던 예안은 결국 제나르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제나르도 예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떻소?" "예?" "이 꽃들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드냐고 묻는 거요. 어떻소?" 예쁜 꽃들이 참 많네요? 라는 식의 예의를 잔뜩 바른 대외적 칭찬 같은 걸 들으려고 묻는 건 아닌 듯 한데? "꽃들은 참 아름답소. 항상 남을 도와주기만 할 뿐 누군가를 해치거나 그러지 않소.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태양과 흙, 그리고 죽은 동 물과 식물들에게서 나온 영양소와 물 뿐이요. 어쩌면 꽃, 아니 식물들이 야말로 이 세상에서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인지도 모르지." "그, 그래요?" "그에 비하면 인간은 얼마나 탐욕스럽소? 이미 만물의 영장이라 불릴 정 도로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무언가 를 끊임없이 탐하고 욕심내고 가지려고 발버둥을 치는 게 인간이요. 남 에게 항상 베풀 줄만 아는 식물들이나, 배가 부르면 사냥을 하지 않는 동물들에 비하면 인간은 정말 탐욕스럽고 저주받은 종족이라 할 수 있 지." 제나르는 단순히 인간에 대해 비난하고 저주하고 싶은 건 아닌 듯 했다. 그건 그의 검은색 눈동자가 묘한 슬픔으로 살짝 뒤덮여 있는 걸 보는 것 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지상인들도 인간. 우리 시트날타도 인간. 모두 다 똑같은 인간이요. 다 른 게 있다면 우리에게는 신이 허락하지 않은 힘, 에날도스가 있다는 것 뿐이지. 아마도 이것 때문에 신은 우리를 버린 건지도 모르오." "신이 버렸다구요?" 뭔가 솔깃한 이야기에 예안은 조금 흥미를 보였다. "그렇소. 신은 우리를 버렸소. 그리고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땅을 우리에게 허락했을 뿐이오. 3억이 넘는 우리 시트날타 인들 중에서 고작해야 천 명? 그 천 명만이 허락되지 않은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헤 이져 급이오." "허락된 땅이라는 게 도대체 어디에 있는데요? 설마 남극이나 북극, 뭐 그런 데는 아니겠죠?" 온화한 미소를 띤 제나르는 푸근한 웃음이 담긴 주름진 손으로 예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쩐지 자상한 할아버지가 자신을 귀여워해 주는 것 같은 그 느낌이 전혀 싫지만은 않았던 예안은, 이래서는 안 된다는 자존 심의 기세가 서서히 누그러지는 걸 느꼈다. 뭐랄까. 그건 싫으면서도 좋 은 듯한, 혼란스런 기분이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곧 프린세스도 우리의 혁명이 무엇인지, 우리가 왜 신에게 버림받고 얼마나 비참한 인생을 살아왔는지 곧 알게 될 거요. 이 늙은이가 부탁 하나 하겠소. 그때 꼭 우리의 혁명을 이뤄주지 않겠 소?" 쓴웃음을 머금던 예안은 고개를 똑바로 들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싫은데요." "!" 제나르의 표정이 당황함으로 구겨지는 걸 즐겁게 쳐다보던 예안은 '역시 난 이런 게 잘 어울려'라고 속으로 만족하며 대답했다. "전 남에게 강요당하는 인생은 딱 질색이에요." "프린세스?" "사실 엘르는 제나르 대신님께 이런 거 물어보면 절대 안 된다고 하셨지 만 꼭 물어봐야겠어요. 절 놓아주실 수 없나요? 제발 저에게 신경을 끊 어주실 수 없나요?" 단 한 번도 예안으로부터 이런 요청을 받을 거라 상상해본 적 없던 제나 르는 크게 당황했다. "프, 프린세스? 그게 무슨 말이오?" "알아요. 당신은 절 갓난아기로만 보고 있다는 걸. 그래서 제가 탈출을 했는데도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병아리가 호기심에 울타리를 벗어난 것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죠? 하지만 그건 틀렸어요. 전 이곳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이곳이 싫어요. 남이 나에게 뭔가를 강요한다는 건 딱 질색이에 요." 예안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부탁드립니다, 대신님. 제발 절 놓아주세요. 절 탄생시키는 데 5조 원 이 들어갔다고 하셨죠? 그거 갚아드릴게요. 열 배, 아니 스무 배로 갚아 드릴게요. 그러니 제발 절…" 제나르는 예안의 말을 잘랐다. "듣고 있느냐 요셉." "예!" 어쩌면 이야기가 잘 되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했던 예안은 갑자기 제나르 가 여태껏 자신을 뒤따라왔던 남자를 부르자 조금 당황했다. "프린세스가 굉장히 피곤해하는구나. 얼른 저택으로 데려다 주거라." "알겠습니다. 가시죠, 엔젤." 요셉 그리고 함께 따라온 마크가 양쪽에서 자신의 팔을 잡아끌자 예안은 속으로 바드득 이를 갈며 일어났다. "이게 대답인가요, 대신님?" "프린세스.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데 가서 쉬는 게 좋겠소.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도록 합시다." 나중이라는 게 다시 찾아온다 해도 이 이야기의 후편이 이어질 리는 없 을 테지. 예안은 아무리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이라 해도 그가 시트날타 의 소속인 한, 절대로 자신을 놓아줄 생각 따위는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철저히 깨달았다. 예안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엘르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화가 나 있는 태도였다. "엔젤. 이게 뭔지 알겠어요?" 엘르가 신경질적인 태도로 자신에게 내민 걸 확인한 예안은 조금 흠칫했 다. "뭐긴 뭐야. 생리대잖아."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게 조금 쪽팔렸다. 여자의 삶에 적응이 안 되었다기보다는 아직 자신은 남자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내가 전에 뭐라고 했어요? 당신은 생리 중이니까 꼭 차고 있어야 한다 고 하지 않았어요? 근데 이게 뭐예요? 왜 이렇게 몰래 버린 거죠? 침대 밑에 숨겨놓으면 못 찾을 줄 알았나요?" 방 쓴지 며칠도 채 안 됐는데 벌써 침대 밑까지 청소할 줄 누가 알았겠 어. 예안도 조금 짜증이 났다. "난 생리 같은 거 안 하고 있었다고 말했잖아. 이런 거 필요 없어." "그럼 전에 속옷에 묻은 그 피는 도대체 뭔데요?" "말했잖아. 그건 내가 다쳐서 흘린 피라고." "하? 당신한테 상처가 어디 있다고?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거예요 지 금?" "젠장. 생리 안 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안 믿으면 나더러 어쩌라고? 나도 짜증나 미치겠으니까 자꾸 사람 속 긁지 말란 말이야!" 예안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엘르는 조금 흠칫했다. 설마하니 화까지 낼 줄은 몰랐는데. '엔젤은 생리 중에는 굉장히 신경질적이 되는구나.' …아마도 예안이 독심술을 할 줄 안다면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을지도. "휴. 어차피 이미 다 끝났을 테니 이제 와서 채워봤자 소용없겠죠. 지금 속옷이 더러워졌을 테니 빨리 벗어줘요. 위생상 피로 질척거리는 걸 입 고 있을 순 없잖아요?" "내 말을 뭐로 들었어? 난 생리 같은 거 안 한다니까!" "정말 당신은 갈수록 고집불통이 되어가는군요." 엘르가 다소 화가 난 기세로 쏘아붙이자 예안은 조금 찔끔했지만 기세가 완전히 누그러들지는 않았다. "말했지? 나 생리 같은 거 안 한다고. 그때는 그냥 속옷을 쥔 채로 스탠 드를 내리쳐서 그때 흐른 피가 묻은 것 뿐이야. 당신이 지금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 있는 것뿐이라구." "엔젤, 정말…" 아직도 예안이 초경을 한 쑥스러움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 생각한 엘르는 어떻게 하면 이 귀여운 아가씨의 깜찍한 반항을 무너뜨릴지 몰라 암담하기만 했다. "할 수 없군요. 강제로라도 벗겨야지요. 그리고 피 때문에 조금 더러워 졌을 테니 일단 씻기기도 해야 할 테니까 욕실로 들어가요." "난 당신이랑 같이 목욕하고 싶은 생각 없어!" "누가 같이 목욕한대요? 제가 당신을 씻어준다는 거죠." "싫다니까! 이러지 마!" "잠자코 따라와요." 엘르는 절대 싫다고 버둥거리는 예안을 억지로 끌고 욕실로 밀어 넣었 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간신히 예안의 옷을 전부 벗긴 엘르는 전혀 피 가 묻어있지 않자 조금 떨떠름했다. "어라? 진짜네?" 한때 유진우란 이름의 남자였던 경험이 있는 서예안. 17년 만에 처음으 로 여자에게 강제로 옷이 벗겨졌다는 수치스러운 경험을 당하다. 엘르는 굉장히 멋쩍어하며 잔뜩 화가 나 있는 예안을 달랬다. "미안해요 엔젤. 전 당신이 그냥 쑥스러워서 숨기고 있는 건 줄 알았어 요. 보통 순진한 여자애들 중에 그런 애들이 많거든요." "아니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왜 사람 말을 안 믿어 주냐! 그건 그냥 다쳐 서 생긴 피가 묻은 거라고 내가 그렇게 입이 마르고 닳도록 말했잖아!" "하지만 아무 데도 상처가 없는데 그 말을 믿기는 좀 그렇잖아요?" "젠장…" 저 거친 말투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루빨리 고쳐야겠다고 엘르는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예안은 태도를 약간 누그러뜨렸다. "근데 엘르. 이 저택에는 그 시트날타인가 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 지? 그냥 평범한 사람들은 빼고." "흐응? 왜요? 나중에 탈출할 때 참고로 하려고요?" 예안은 정곡을 찔린 듯 흔들리는 표정을 지었을 뿐 대답하진 않았다. 어 차피 대답해줘도 상관없을 질문이기에 엘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이 처음 이 저택에 왔을 땐 저하고 제나르 대신님, 그리고 마리오 경까지 합쳐서 모두 33명이 있었죠. 하지만 그날 저녁 축하만찬을 벌이 고는 곧바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버렸어요. 시트날타 인들은 모두 바쁘거든요." 나를 납치한 걸 축하하는 만찬이라. 예안은 살짝 치밀어 오르는 부아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마리오 경도 해야 할 일이 많기에 지금은 이 저택에 없어요. 현재 시트 날타 인은 저와 제나르 대신까지 2명이 전부예요. 그 외의 사람들은 그 냥 평범한 고용인들이죠. 시트날타라는 게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니 까 아무쪼록 말조심하도록 해요." "그 사람들한테 날 납치했다고 말하면 가만있지 않을 텐데?" "괜찮아요. 그냥 정신연령이 조금 낮은 손녀가 가출했는데 힘들게 되찾 아왔다고 둘러댔으니까. 그들에게 시트날타니 어쩌니 하는 말을 해도 어 차피 믿지 않을 테니까 포기하는 게 좋아요." "…설마 날 저능아나 정신질환자 뭐 그런 거라고 둘러댄 거냐?" "비슷해요. 아참 당신은 영어를 할 줄 모르죠? 그럼 안심이네." 예안은 조금 울컥했지만 지금은 참아야 할 때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당분간 답답하겠지만 참아요. 몇 달 정도만 지나면 바드로 3세 황태자 전하를 뵐 수 있을 테니까요. 지금 그 분은 당신을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계세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제나르에게서 그런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있다. 아마도 유젤의 몸에 깃들었던 때였던가? "바드로 3세?" "병중에 계신 바드로 2세 황제 폐하의 뒤를 이어 우리 시트날타의 황제 가 되실 분이시죠. 황태자 전하의 즉위식과 동시에, 아니 즉위식이 이루 어지기 전에 혁명은 이루어질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그 혁명을 이뤄줄 소중한 메시아죠." 엘르의 절제된 눈빛 속에 그녀가 꿈꾸는 이상을 향해 타오르는 열정이 깃들여 있음을 확인한 예안은 무심코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이 다른 사 람들에게 아주 위대한 구세주가 된다는 건 매력적일지 모르지만, 이렇듯 강제적으로 구원을 내려야 한다는 건 뭔가 엄청난 모순이 아닐까? "그… 즉위식이라는 게 언제 하는데?"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요." "뭐?" "즉위식이 언제 이루어질지 아직은 아무도 알 수 없어요. 행방불명된 「엘리우스」를 찾아내 그로부터 「마기」를 건네 받기 전에는." "엘리우스? 마기? 그게 뭐냐?" 엘르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예안의 녹색 눈동자가 그저 사랑스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빙긋 웃었다. "아직은 몰라도 돼요. 그냥 그런가 보다, 라고만 알고 있으면 되는 거예 요. 당신은 혁명이 시작되는 날, 그냥 우리에게 구원을 내려주면 되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안 하겠다면? 날 죽일 거냐?" 당돌한 질문까지 그저 사랑스럽기만 한 엘르는 귀여운 여동생의 철없는 칭얼거림을 웃음으로 받아주는 다정한 언니처럼 자애로운 미소로 답했 다. "설마요. 우리가 왜 당신을 죽이겠어요. 우리는 당신을 언제까지나 소중 하게 보살펴줄 거고, 당신은 결국 우리의 혁명을 이뤄줄 거예요." 세상일은 함부로 단정지을 수 없는 거야. 예안은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 만 머리를 쓰다듬는 엘르의 손길에서 형언할 수 없는 아련함 비슷한 무 언가를 느끼고 그만 입을 다물었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혹시라도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하인들을 불 러서 시키세요. 그러고 보니 컴퓨터 게임에 맛들인 거 같던데 하고 싶은 게임 같은 게 있으면 어려워하지 말고 말해요." "…인터넷도 안 되는데 무슨 재주로 온라인 게임을 하라는 거냐?" "그건 미안하지만 외부와 연락하는 건 절대 안 돼요. 이해해 주길 바래 요." 이해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어차피 따지고 들어봤자 들어줄 리 없 었기에 예안은 이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엘르가 나가고 난 뒤 혼자가 된 예안은 침대 위에 벌렁 누워 유니콘에게 말을 걸었다. "유니콘. 탈출 방법은 생각해 봤어?" 「현재로서는 한국 정부가 손을 쓰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중현이라는 사람에게 유젤 님이 계신 곳을 알려줬으니 조만간 그가 손을 쓸 겁니다. 일단 거기에 기대하는 수밖에요.」 "널 탈 수만 있다면 아무 문제없을 텐데…" 「제가 거기까지 날아간다 해도 절 타기 전에 엘르라는 여자한테 잡혀버 릴 겁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제압하겠지요. 유젤 님의 신체는 평범 한 여자애와 다를 바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군요.」 "…그러니까 빨리 환골탈태인지 뭔지 하는 거라도 해서 혼자 좀 잘 싸워 봐. 네가 파일럿 없이도 전투가 가능하기만 했어봐, 내가 이 고생을 하 나." 그렇게 애꿎은 유니콘에게 투덜거리고 있을 때였다. - 똑똑 엘르인가? 예안은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들어와도 돼." 끼이익, 문이 열리고 모습을 나타낸 사람은 뜻밖에도 엘르가 아니라 하 인 복장을 한 소년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든 예안은 소년과 눈이 마주친 순간 벼락처럼 영혼을 찌르는 통증이 빚어내는 긴장에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아…" 난 이 애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이 애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근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거지? "전에「레드 드래곤의 눈물」이 하고 싶다고 하셨죠? 여기 게임 CD를 가 져왔습니다. 굉장히 인기가 좋은 게임이라 CD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 어요." 뚜벅뚜벅 걸어온 소년은 다소 활기에 찬 태도로 CD를 내려놓았지만, 그 가 짓고 있는 표정에는 놀랍도록 대부분의 감정이 지워져 있었다. "혹시 달리 또 하고 싶은 게임이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이 소년에게 게임 같은 게 하고 싶다고 부탁한 적은 없다. 오늘 처음 보 는데 언제 그런 부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이 소년이 이렇게 거짓말로 접근하는 건 필경 뭔가 까닭이 있어서일 것이다. "정말 재미있는 게임이 많이 있더군요. 「지옥의 사자」라든지, 「오디 세이의 전설」이라든지, 「용의 눈물」 하여튼 별의별 게임이 다 나와 있어요. 다음에 그것들도 사다드릴까요?" 소년으로부터 전해진 분위기에 휩쓸린 예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 였다. "으, 응! 그, 그것도 사다 줘." "예. 그렇게 할게요. 그럼 재밌게 즐기세요." 어깨에 닿을락 말락한 검은머리 아래 앳되고 귀여운 눈동자는 예안의 얼 굴을 한 번 슥 훑어본 뒤에 그대로 등을 돌렸다. 심장을 조이는 긴장 속 에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하던 예안은 소년이 방밖으로 나가자마자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소년이 주고 간 CD 케이스 위에 살짝 접혀진 종 이를 황급히 펼쳐 보았다. 거기에는 한국어로 이렇게 써져 있었다. 「널 구출하라는 한국 정부의 의뢰를 받았다. 탈출 계획이 완벽히 잡히 면 조만간 연락할 테니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라. 그리고 이 종이는 읽고 난 뒤 곧바로 태워.」 두근두근! 드디어 이 갑갑한 곳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된 예안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비탈길을 미끄러지는 자전거처럼 쉬지 않고 뜀박질하는 심장의 고동을 달래려 애쓰며, 소년이 주고 간 종이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그나저나 이상한 아이네?' 아까 처음 봤을 때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던 놀람이 가시지 않은 표 정으로 예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랄까. 죽음의 냄새가 물씬 난다고 할 까. 그렇게 어리고 귀여운 미소년에게 그런 느낌이 난다는 건 굉장한 모 순이었지만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진짜 이상하네? 그렇게 어린애가 날 구하라는 한국 정부의 의뢰를 받을 리가 없잖아? 어라? 근데 이상하네? 의뢰를 받았다고? 한국 정부의 요원 이 아니라?' 설마 그렇게나 어린 아이가 청부업 같은 암흑 세계의 일 따위를 하고 있 다는 건가? 예안은 세상일이라는 건 참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며, 하루라 도 빨리 소년이 자신을 이곳에서 탈출시켜주기만을 기대하고 또 기대했 다. 소년의 직업이 무엇이고 정체가 무엇인지는 일단은 관심 밖이었다. 생각했던 대로였다. 얼굴을 가까이 댄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정도로 눈 부신 매력을 지닌 소녀였다. 무엇 때문에 저런 연약한 여자애를 남부러 울 것 없는 미국의 대부호가 감금하고 있고, 또 한국 정부는 구출하려 애쓰는지 모르지만 무언가 엄청난 비밀이 숨어 있다고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세계 제일의 부자나 천재라고 해도. 예안의 방 앞에 멈춰 선 니콜라스는 아직도 바들바들 떨리는 손의 긴장 을 진정시키느라 애썼다. "…." 지금 거울을 보면 어떨까?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을까? 사람이 흥분하 면 얼굴이 붉게 변한다고 니르가 말했는데 정말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 어날까? 니콜라스는 당장이라도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고 싶었다. 잠깐, 비춰보고 싶다고? "비춰보고 싶다고?" 무언가를 강렬히 하고 싶다는 욕구를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니콜라 스는 처음으로 겪는 동요에 깜짝 놀랐다. 잠깐, 깜짝 놀랐다고? "내가… 놀랐다?" 그 소녀를 처음 보았을 때의 긴장. 그리고 그 긴장을 확인해보고 싶어하 는 동요. 그 동요가 빚어낸 놀람. 밑바닥까지 얼어붙은 호수처럼 항상 잔잔하고 고요하기만 했던 마음에 일어난 파문은 넘어지기 시작한 도미 노처럼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숨이 차 올랐다. "하아, 하아, 하아…"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엄청난 마음의 동요와 놀람 그리고 혼란을 주체 할 수 없었던 니콜라스는 허리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흐읍…" 생각했던 대로였다. 단지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지는, 눈을 뗄 수 없는 묘한 매력을 지닌 소녀. 저 애라면 니르가 항상 말해줬던 기 쁨, 슬픔, 절망, 아픔, 분노, 설렘… 그런 것들을 알 수 있게 해줄지도 몰라. 왠지 크게 웃어버리고 싶다. 그리고 웃고 싶어하는 내가 놀랍다. "왜 제 동생의 방 앞에서 실실거리고 있는 거죠?" 의심에 찬 여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니콜라스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 다. 이런 바보 같이! 아무리 처음 겪는 마음의 파문에 기뻐하고 있었다 지만 사람이 접근하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다니!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주의할게요." 수상한 눈빛으로 쏘아보는 이 여자. 이름이 엘르라고 했던가? 제나르 상 원 의원의 손녀로 행세하고 있었지 아마? 절대 주의해야 할 인물 중 하 나였다. "제 동생이랑 무슨 이야기를 했나요?" "별 거 아니에요. 그냥 「레드 드래곤의 눈물」이라는 게임이 하고 싶으 시다고 하셔서 사다 드렸을 뿐이에요." "흐음. 그나저나 못 보던 얼굴인데 언제부터 일하고 있었죠?" "어제 처음으로 들어왔어요. 아직 일이 많이 서투르지만 너그러이 봐주 세요." 니콜라스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엘르는 표정을 풀었다. 하기야, 이 렇게 귀여운 남자애가 스파이 뭐 그런 거라 생각하는 건 좀 억지에 가까 웠다. 게다가 엔젤이 이곳에 있다는 걸 한국 정부가 무슨 재주로 알겠는 가? '나도 요새 꽤나 날카로워진 것 같아.' 엘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딱딱하게 대해서 미안해요. 들어서 알다시피 제 동생은 건강이 좋 지 않아서 말이죠." "아주 활기 차고 예쁜 분이시던데요 뭘." "그렇게 봐주니 고마워요. 그럼 가보세요." "예." 미소 띤 얼굴로 니콜라스에게 인사하고 난 뒤 엘르는 반대 방향으로 몸 을 돌리다가 벼락처럼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우뚝 몸을 멈췄다. 방긋 웃 음으로 엘르에게 손을 흔들어주던 니콜라스는 죽음의 기운처럼 몸을 감 싸오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 엘르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 동생이 분명 「게임이 하고 싶으니 CD를 사다 달라」고 말했다고 하 셨죠?" 니콜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항상 죽음을 가까이 둔 채 극대화시켰던 야생의 감각은 지금 상황이 절대 위험하다는 걸 알려오고 있었다. "제 동생은 영어를 할 줄 몰라요. 한국어밖에 모르죠. 그런데 미국인인 당신이 어떻게 그 애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거죠? 이상하네요. 당신은 누 구죠? 설마 예전에 한국어를 배운 적이 있다는 거짓말로 넘어갈 생각은 버려요."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게 설마 발목 잡힐 줄이야. 그럴 듯한 거짓말로 넘어갈 것이냐 아니냐를 놓고 끊임없이 저울질하던 니콜라스는 순간적으 로 판단을 내렸다. '어차피 의심을 샀으니 이 자리를 무사히 넘어간다 해도 날 해고해 버릴 거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다행히 워낙에 저택이 큰 데다 지금은 점심 시간이 가까워서 복도에는 아무도 없다. 상대가 어떤 호신술을 익히고 있을지 모르나 자신은 수십 명의 프로 경호원도 간단히 때려 눕힐 수 있는 베테랑 킬러. 해답은 간 단하지 않은가? "눈치가 빠르네." 니콜라스는 감정이 지워진 표정으로 숨기고 있던 마취침을 꺼냈다. "일이 시끄러워지니까 죽이진 않을게. 잠깐 동안만 자고 있어." 어이없는 눈동자로 니콜라스를 주시하던 엘르는 피식 웃으며 두 손을 들 어올렸다. "안타깝지만 당신은 상대를 잘못 골랐어요." 엘르의 손에서 푸른빛이 나기 시작한 것과 니콜라스가 그녀에게 달려든 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파괴의 기운을 싣고 엘르의 손을 떠난 푸른빛은 니콜라스의 몸에 적중했 다. 하지만 그가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들자 엘르는 굉장히 당 황했다. "어? 왜 쓰러지지 않…" 엘르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니콜라스는 수도로 그녀의 목을 내리쳐 기절시켰다. 외마디 비명조차 없이 기절한 엘르를 가볍게 받아든 니콜라 스는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황급히 그녀를 껴안은 채 예안의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뭐, 뭐야?" 침대에 앉아 탈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예안은 갑자기 니콜라스 가 기절한 엘르를 안고 들어오자 화들짝 놀랐다. "난처하게 됐어. 이 여자가 내 정체를 눈치챘다. 너 진짜로 영어 할 줄 몰라?" "에? 웬 영어?" "할 줄 몰라? 그것만 대답해." "모, 모르는데…" "젠장. 이런 사소한 데서 걸리다니." 근데 저 애 당황한 거 맞아? 왜 저렇게 침착해? 당혹해하는 말투와는 달 리 니콜라스의 표정은 여전히 아무 감정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지금 당장 탈출해야겠다. 갑자기 이 여자가 없어지면 수 상하게 여길 테고 또 시체를 처리하기도 그래서 죽일 수도 없어. 앞으로 두 시간은 못 깨어날 테니까 일단은 그 안에 어서 탈출해야 돼." "버, 벌써?" "미안해. 어이없는 실수였어. 시간이 없어. 빨리 준비하고 나와. 그리고 이 여자는 이 방 옷장에 숨겨야겠어." 니콜라스는 가뿐하게 기절한 엘르를 안아 옷장 안에 넣고는 문을 닫았 다. 대충 상황파악은 했지만 너무 갑작스러워 얼떨떨해 있던 예안은 니 콜라스가 자신의 손을 잡아끌자 엉겁결에 따라나섰다. 복도로 나오자 니콜라스는 손을 놔주며 나직이 속삭였다. "잘 들어. 너는 이 저택 담장 밖으로는 나가는 게 허락되지 않아. 설령 아까 그 여자가 동행한다고 해도 말이야. 일단은 산책한다고 핑계 대고 정문 근처까지 간 다음에 경비원들을 쓰러뜨리고 곧바로 뛰는 거야. 알 았지?" "아, 알았어." 자신보다 키가 한 뼘이나 작은 소년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는 게 조 금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때가 때인지라 예안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 만 했다. "어? 조세프잖아? 아가씨랑 어디 가?" "예. 아가씨가 산책하고 싶다고 하셔서요." "산책은 좋지만 담 밖으로 나가는 건 안 돼. 알지?" "예. 알아요. 걱정 마세요." 니콜라스는 복도에서 마주치는 하인들과 유창한 영어로 대화하며 남들 몰래 예안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예안은 기껏해야 'Yes, No' 따위의 단 어만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자신을 원망하며 '집에 돌아가면 영어 먼 저 정복하리라!'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을 품었다. 현관을 나와 한참을 걸은 두 사람은 이윽고 정문 가까이까지 왔다. 예안 이 정원에 나올 때면 항상 따라붙는 두 명의 남자를 흘끔 쳐다본 니콜라 스는 나직이 속삭였다. "잘 들어. 내가 신호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무조건 뛰는 거야. 알았지?" 예안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좋아. 하나, 둘, 셋! 뛰어!" 신호가 끝나기가 무섭게 예안은 눈을 질끈 감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꾸준히 따라오던 두 명의 남자는 소스라치 게 놀라 고함을 지르며 뒤따라왔다. 예안의 뜀박질에 속도를 맞추어 뛰 던 니콜라스는 두 남자가 가까이 접근하자 주먹을 내질러 한 명을 쓰러 뜨리고 또 가벼운 발차기로 나머지 한 명을 거꾸러뜨리고 얼른 예안을 뒤따라왔다. "그냥 뛰어! 문지기들은 무시해! 내가 처리할 테니까!" 정문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놀라서 뛰어왔다. 아마도 미리 제나르나 엘르 로부터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라고 지시를 받은 듯 했다. 예안을 앞질러 나간 니콜라스는 주먹과 발길질로 경호원들을 가볍게 쓰러뜨리고 는 예안의 손을 잡아끌고 다시 뛰었다. "저 차를 잡자!" 때마침 고급 중형차가 지나가고 있자 니콜라스는 잘 됐다는 듯 그 앞으 로 뛰어나가 가로막았다. 잔뜩 화가 난 운전기사는 창을 내리고 뭐라 영 어로 소리를 질렀지만 니콜라스가 뒷좌석에 앉은 뒤 뒤통수에 차가운 총 신을 들이대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조용히 하는 게 좋을 거야." 니콜라스는 주저하고 있는 예안에게 흘끔 시선을 돌렸다. "뭐해? 빨리 타. 시간이 없어." 망설임은 잠시. 결국 예안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조수석에 올랐다. 그리 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어설픈 영어로 뒷 좌석에 앉아 있는, 차주인으로 보이는 청년에게 사과했다. "I, I'm sorry about that stealing your car…" "어? 누나?" 귀에 익은 목소리에 놀란 예안은 뒤를 돌아보고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애, 앤드류 회장 님?" 놀랍게도 니콜라스가 강탈한 차의 주인은 다름 아닌 앤드류였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앤드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누나 언제부터 차 강도를 시작한 거야? 설마 전 에 말했던 곧 큰돈이 생길 거라는 건 이런 뜻이었어?" 예안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외쳤다. "절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지금은 단지 어쩔 수 없어서 이런 것뿐이라 구요!" 니콜라스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었다. "두 사람 아는 사이야? 그럼 잘 됐네. 이봐. 우리는 지금 쫓기고 있으니 까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줘." 앤드류는 조금 불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가 누군진 모르지만 느닷없이 차에 뛰어들어 총을 휘두르는 녀석에게 친절히 대해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협박하는 수밖에 없지." 니콜라스는 왼손으로 총신을 슬슬 더듬으며 눈빛을 빛냈다. 앤드류도 그 에 지지 않고 쏘아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무거운 공기에 당황한 예안이 나서서 말렸다. "지,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아! 앤드류 회장님, 부탁이니까 제발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주세요." "앤드류라고 불러. 그리고 존대도 하지 마. 그럼 그렇게 해줄게." "네?" 세계 제일의 부자에게 있었던 변태적 취미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게 냐. 예안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표정을 구긴 채로 대답했다. "그렇게 할게… 돼, 됐지?" 앤드류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Hey, let's go." 이 차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여태껏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는 운전기 사라고 해야 하나? 느닷없이 총을 든 남자애가 뛰어들어와 차 강도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앤드류랑 뭐라뭐라 이야기를 하더니,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여자애가 사정조로 뭐라뭐라 말하니까 갑자기 그냥 출발하라고 하 지 않는가? 한국어를 몰라 그들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알지 못하 는 운전기사는 얼떨떨해 있다 두어 번 더 재촉을 받고서야 차를 출발시 켰다. 한참 후 앤드류가 입을 떼었다. "근데 쫓기고 있다고 했어? 누구에게?" "그, 그건… 그것보다 앤드류 회장님이 왜 미국에 있지요? 언제 귀국했 어요?" "앤드류라고 부르랬지? 그리고 존대도 하지 말라니까." 예안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앤드류. 언제 귀국했냐?" 앤드류는 굉장히 만족스러워했다. "원래 누나 마음을 돌릴 때까진 한국에 머물러 있을 예정이었는데 중요 한 사업 건수 때문에 잠시 귀국한 거야. 근데 누나는 쫓긴다고 했잖아? 누구한테 쫓기고 있는 거야?" "그게…"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하는 예안을 대신해 니콜라스가 대신 말했 다. "앤드류. 당신 한국어 잘하네?" 앤드류는 흥미와 적대심이 담긴 시선으로 자그마한 체구의 니콜라스를 훑어보았다. "그러는 너도 한국어를 굉장히 잘하는구나. 꼬마 주제에." 앤드류는 울컥하는 반응을 기대하고 그렇게 찔러 본 거였는데 니콜라스 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난 6개 국어를 할 줄 알아." "호오? 대단한데?" "별로 대단하거나 중요한 건 아니고. 근데 한 가지 묻겠어. 당신 제나르 의원에게 가고 있던 중이었어?" "별로 숨길 건 없지. 맞아. 근데 왜?" 앤드류가 제나르를 만나러 가던 중이라는 소리에 예안은 울컥 화가 났 다. 어쩌면 앤드류도 제나르와 한통속인 건 아닐까 하는 의심에서였다. "앤드류! 너도 제나르와 한통속이었어? 너도 시트날타 인이야?" 앤드류는 고개를 갸웃했다. "시트날타? 그게 뭐야?" "시트날타를 몰라? 제나르 대신이…" "제나르 대신? 웬 대신?" "어? 너 정말 몰라?" "누나?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시트날타? 그게 도대체 뭔데?" 앤드류가 시트날타에 대해 전혀 모르는 듯 하자 예안은 상황 판단을 할 능력을 상실한 채 패닉에 빠졌다. 니콜라스가 대신 설명해주었다. "음성적인 정체는 모르지만 제나르는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상원 의원을 하고 있어. 앤드류 회장이 그를 만나러 가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 니야. 물론 이 남자가 우리를 속이고 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지만 말이야." "설마 누나 제나르 대신한테서 탈출했다는 거야? 그가 누나를 잡아두기 라도 하고 있었어?" 머뭇거리던 예안은 결국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였다. 앤드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말도 안 돼. 제나르가 왜 누나를 납치한다는 건데? 설마 그 나이에 누 나를 정부로 삼기 위해 납치한 건 아닐 테고…" "너, 넌 몰라도 돼! 알려고 들지 마!" 이 남자 앞에 있으면 항상 자신도 모르게 당황하게 된다. 예안은 정말 그게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앤드류." 니콜라스가 조용히 자신을 부르자 앤드류는 못마땅하다는 듯 눈살을 찌 푸렸다. "지금은 한국어로 대화하고 있으니까 존칭을 붙여줬으면 하는데?" "이제 우리를 내려줘도 돼. 지금까지 미행이 따라붙지 않은 걸 확인했으 니까." 예안은 희색이 된 채 맞장구쳤다. "맞아. 이제 그만 우리를 내려 줘. 이제부터는 알아서 도망칠 수 있으니 까." "뭐야? 기껏 차를 멈추고 권총으로 위협하고 탔으면서 이제 와서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내려달라고?" 예안은 말문이 막혔다. 니콜라스가 대신 대답했다. "그럼 대가로 뭘 해주길 바라는데? 설마 세계 제일의 부자니 돈 같은 걸 바라는 건 아닐 테고." 앤드류는 니콜라스에게는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예안에게 말했다. "누나. 내 별장으로 가자. 어차피 지금 쫓기고 있는 중이라며? 내가 안 전하게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줄 테니까 일단 내 별장으로 가자. 어차피 나쁠 건 없잖아?" "나쁠 건 없겠지만…" 그렇지만 좋을 것도 없지. 앤드류가 자신에게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무 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는 예안은 그의 호의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 다. 하지만 시트날타로부터 탈출하는 데 자신보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 니콜라스(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모른다)만 마냥 믿고 있기가 좀 그랬 기에 결국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앤드류 일행이 타고 있던 차는 이윽고 별장에 도착했다. 과연 세계 제일 의 부자가 소유한 별장답게 화려했지만 간신히 시트날타에서 탈출했다는 안도감에 젖은 예안은 그런 걸 신경 쓸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무슨 관계야?" 응접실에 앉은 뒤 앤드류가 그렇게 묻자 예안은 속으로 오만가지 대답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난 이 애 이름도 모르잖아? 뭐라고 둘러대지? 시트날타에 잡혀온 날 구하기 위해 한국 정부의 의뢰를 받고 온 애?' 그런 말을 하면 아마도 앤드류는 정신병원에 전화를 넣을지도 모른다. '그냥 내 동생이라고 할까? 아참, 그러고 보니 앤드류 왕자는 내가 고아 라고 알고 있잖아. 게다가 이 애는 한국인이 아닌데… 아씨! 도대체 뭐 라고 둘러 대냐고!' 예안이 얼굴을 구겨가며 속으로 갖가지 대답을 떠올리고 있을 때 니콜라 스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난 니콜라스 베르노. 얘랑은 약혼한 사이야." "!!"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예안의 안색이 핼쑥하게 굳어졌다. 약혼자라니!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뭐, 뭐, 뭐?" 앤드류도 예안 못지 않게 놀랐는지 새파랗게 질린 안색이었다. "뭘 그리 놀라? 이 애는 내 약혼자라고. 그래서 내가 구출하러 간 거 야." "저, 저기 꼬마야. 너 나이가 몇이니?" "나? 13살인데?" 앤드류는 할 말을 잃은 예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의구심에 찬 그의 시선 을 받은 예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절대 아니라는 뜻이 었다. 앤드류는 그럼 그렇지 하는 미소를 베어 물고는 다시 물었다. "누나는 아니라고 말하는데? 왜 그런 거짓말을 하니?" 니콜라스는 예안에게 흘끗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덤덤하게 물었다. "왜 그래 누나? 전에 나랑 약속하지 않았어? 언젠가 내가 누나에게 크게 도움이 되면 나랑 결혼해준다고 했었잖아?" "내, 내가 언제!" 펄쩍 뛰고 싶은 심정은 아마도 이런 걸 말하는 것일 게다. 예안은 거의 울 듯한 표정이었다. "흐응. 그렇게 된 거군. 잘 알았어." 그러니까 예안은 절대 싫다고 펄쩍 뛰는데 비해서 저 꼬마녀석이 혼자 좋다고 열 내면서 쫓아다닌다 이건가? 왠지 옛날 '유서운'을 쫓아다닐 때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 앤드류는 픽 웃으며 일어났다.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 앤드류가 방으로 들어가고 난 뒤 예안은 니콜라스에게 살기 섞인 말투로 따지고 들었다.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냥 사실대로 말하면 되는 거잖아!" "앤드류 회장을 완전히 믿을 순 없어. 그냥 날 연상의 누나를 좋아하는 철없는 남자애라고 둘러대는 게 제일 좋아. 어쨌든 지금 넌 완벽하게 안 전하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13살의 남자애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차분하고 가라앉은 말투에 예안은 할 말을 잃었다.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할게. 난 니콜라스 베르노.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 만 암흑 세계에서 깨끗하지 못한 청부를 맡아 돈을 버는 직업을 갖고 있 어." "요컨대, 킬러라는 거냐?" "비슷하다고 보면 돼." 영화 속에서나 있을 줄 알았던 킬러를 실제로 보게 된 예안은 두려움보 다는, 과연 사람을 제대로 죽일 수나 있을지 의심되는 가녀린 체격과 앳 된 얼굴에 호기심을 느꼈다. '킬러라고… 정말 그런 게 있긴 있었구나.' 킬러라는 단어가 주는 중압감에 질리거나 두려워할 법도 하련만 오히려 갓 태어난 아기가 장난감을 보고 좋아하듯 호기심을 보이는 스스로에게 묘한 섬뜩함을 느낀 예안은 쓰게 웃고 말았다. 유젤이 되어 버린 후로 인간다움을 조금씩 잃어 가는 게 느껴질 때마다 머리 속이 뒤엉킨 실타 래처럼 복잡해지곤 했다. "한국 정부의 김중현이라는 남자가 널 구출해달라고 나에게 의뢰했어.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내가 널 안전하게 경호해줄 테니까 안심해도 좋아. 의뢰금은 선불로 일 억 달러를 받았고 널 무사히 한국까지 데려다 주면 사 억 달러를 마저 받게 돼." "그래? 많이 받았네." 예안은 천문학적인 액수에 까무러치지도 않는 자신이 왠지 우습게 느껴 졌다. "여기에 중현이란 남자가 보낸 녹음 테이프가 있어. 이걸 듣고 네가 날 완전히 믿길 바래." 니콜라스는 주머니에서 소형 카세트를 꺼내어 볼륨을 작게 해놓은 채로 틀었다. 그러자 중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김중현입니다. 지금 제나르 상원 의원에게 억류되어 있다는 건 이 미 들어 알고 있습니다. 니콜라스 베르노는 합법적인 일을 하는 인물은 아니지만 의뢰 받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프로니, 한국에 무사 히 돌아올 때까지는 그를 믿으셔도 됩니다. 그럼 안전하게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니콜라스는 재생을 껐다. 그리고 예안을 돌아보았다. "어때? 이제 날 믿을 수 있겠지?" 사실 워낙에 정신이 없는 데다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의심할 겨를도 없 었는데 알아서 미리 다 해명할 줄이야. 예안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 다. "믿을게. 믿는다. 됐냐?" "앞으로 안전하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내 말을 잘 들어줘. 사실 난 경호일은 해본 적이 없어서 많이 서투르거든. 누군가를 죽이는 거라 면 아주 잘하지만 말이야." 덤덤함이 깃들여져 있는 니콜라스의 표정은 예안에게 아무런 감흥도 무 서움도 안겨주지 못했다. 아마도 그건 그에게서 현실적인 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록 아직 미국 땅에 발을 딛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시트날타를 빠져 나 왔다는 사실은 오랜만에 좋은 위안이 되었다. 또다시 앤드류와 얽히게 된 게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그와의 관계가 제대로 수습되지 않으면 전 에 써먹었던 방법, 목소리를 착 깔고 최대한 차갑게 '접근하지 마세요' 라는 식으로 밀어붙이면 되겠지? 앤드류는 잠시 니콜라스가 없는 자리에서 예안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니콜라스는 반대했지만 예안은 선선히 승낙했다. 그래서 니콜라스 가 잠깐 이층으로 올라가고 예안과 앤드류만 일층 거실에 단둘이 남게 되었다. "자, 이제 제대로 설명을 좀 해줘. 제나르 의원에게 납치를 당했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그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누나를 납치한다는 건데?" 니콜라스는 앤드류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떤 식으로 대답하라 고 일러주지 않았다. 예안은 미리 생각해둔 대답을 꺼냈다. "당신이 알 필요는 없잖아요." 앤드류는 안색을 굳혔다. "또, 또. 또 당신이라고 하네. 내가 존대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요." 예안은 조금 어이없다는 제스쳐로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는 워낙에 다급해서 일단 당신 말대로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안전 하잖아요? 그러니 굳이 당신 부탁을 들어줄 필요는 없죠. 원래 유서운이 라는 사람 역을 해달라는 부탁은 내가 카드를 돌려준 것과 동시에 무효 가 됐으니까." "하지만…" "아, 알아요. 아직 9억을 돌려주지 않았다 이거죠? 걱정하지 마세요. 조 만간 곧 큰돈이 생길 테니까요. 그때 이자까지 쳐서 갚아드릴게요." 돈을 돌려 달라 소리를 할 생각은 없었던 앤드류는 예안이 자꾸만 분위 기를 그쪽으로 몰아가는 것이 조금 불쾌했다. "누나는 왜 남의 호의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 솔직히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 "누나라고 부르지 마세요. 기분 나쁘니까. 내가 왜 당신 누나죠? 난 아 직 17살 밖에 안 됐다구요." 시베리아처럼 싸늘하게 얼어붙은 예안의 마음을 녹일 방법을 모르는 앤 드류는 그저 암담, 또 암담하기만 했다. 전에 유서운은 그래도 이렇게까 지 쌀쌀맞게 굴진 않았는데. "회장님은 제가 미국에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하셨지만 그렇게까 지 해주실 필요는 없어요. 오늘만 신세지고 내일 나갈 거니까요. 원하신 다면 지금 당장 나가드릴 의향도 있으니까 말씀만 하세…" "그만해!" 쨍그랑!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참지 못한 앤드류는 쥐고 있던 와인 잔을 그대로 탁자에 내리쳐 깨버렸다. 유리조각이 와장창 깨져나가는 소리가 채 가라 앉기도 전에 이층에서 니콜라스가 재빨리 뛰어 내려왔다가, 예안이 공격 당한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는 다시 위로 올라가 버렸다. 앤드류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예안은 안색이 조금 창백해졌다. "화내서 미안해." 유리조각에 찔려 피가 조금 흐르는 오른손으로 얼굴을 가린 앤드류는 쥐 어짜듯 사과했다. "하지만 누나는 정말 너무해. 왜 자꾸만 나한테 그렇게 거리를 두려고 하는 거야? 내가 왜 누나가 여기서 나가길 바라겠어? 내 솔직한 마음을 말해 줘? 마음 같아선 나도 제나르 의원처럼 누나를 납치해서 내 집에 감금시켜두고 싶은 심정이라구!"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알아. 하지만 내 마음은 그 정도로 절박하단 말이야. 내가 왜 사업 때문에 잠깐 미국으로 올 때 누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왔겠어? 내가 귀국한다면 누나가 얼씨구나 하고 또 어딘가 로 몰래 잠적해버릴까 그게 겁나서였다구." "내가 뭘 잘못했다고 잠적까지 해요?" 앤드류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오른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러자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한 괴로움이 가득한 그의 표정이 드러났다. "그래 맞아. 지금 누나는 나에게 아무런 미안함도 감정도 못 느끼겠지. 그냥 누나를 귀찮게 구는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보이겠지. 날 발톱 에 낀 때만큼도 못하게 여기겠지. 그러니 어디로 도망갈 이유도 못 느끼 는 거겠지…" 그 유서운이라는 여자가 예전에 한 번 앤드류로부터 미안함을 느끼고 숨 어버린 적이 있었단 말인가? 예안은 그게 조금 궁금했지만 더 이상 그와 관여해지기 싫다는 마음 때문에 묻진 않았다. "나 일주일 후에 다시 한국으로 갈 거니까 그때 비행기에 태워줄게." "그럴 필요 없…" 그러나 앤드류는 재빨리 예안의 말을 잘랐다. "필요 없어도 그냥 받아. 순수한 내 호의니까. 제발 부탁한다고 무릎까 지 꿇어야 받아줄 거야?" 어째서 이 남자는 이토록 유젤의 몸을 사랑해주는 걸까. 예안은 그에게 강한 질투를 느꼈지만 결국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 다. "이야기는 다 끝났어?" 때마침 니콜라스가 이층에서 내려왔다. 그는 내려오자마자 예안의 옆에 털썩 앉으며 앤드류를 주시했다. "우리를 도와준다니 일단 고마워. 하지만 만약 이상한 생각 같은 걸 갖 고 있는 거라면 각오하는 게 좋아. 난 그렇게 만만한 녀석이 아니니까." "이상한 생각 같은 건 애초에 없어. 순수한 흑심이라면 모를까." 부드러운 미소 띤 시선으로 예안의 뺨을 더듬던 앤드류는 문득 의구심을 느꼈다. "근데 내가 한 말이 이층에서 다 들리던가?" "내가 원래 귀가 좀 밝아. 아주 잘 들리더군." 앤드류는 '이상하네? 난 이층에 있을 때 일층에서 사람들 대화하는 거 잘 안 들리던데.'라고 중얼거렸고, 예안은 나름대로 '킬러라서 귀가 밝 은가?'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아니다. "누나는 이층 왼쪽에서 첫번째 방을 쓰고… 니콜라스라고 했던가? 너는 누나 방 오른쪽에 있는 방을 써." "난 그냥 누나랑 같이 잘 테니까 내버려 둬. 혼자 두는 건 불안하니까." "뭐?" 아무리 꼬마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남자인데,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랑 같 이 자겠다고 하는 건 용납할 수가 없다. 그냥 좋다고 졸졸 쫓아다니는 것까지는 귀엽게 봐줄 순 있어도 말이다. "안 돼. 넌 오른쪽에 있는 방을 써." 앤드류가 완강하게 거부하자 니콜라스는 대들기보다는 잠자코 시선을 예 안에게 돌렸다. 떨떠름해 있던 예안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 사람 말대로 해. 난 누가 옆에 있으면 못 자니까 그냥 너 그 방 써 라." 다수결로 그렇게 결정나자 니콜라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예안의 귀에 입을 가져가 속삭였다. "그럼 난 혹시라도 밤에 너한테 무슨 일 일어나는 건 책임 안 진다. 경 호를 거부한 건 너니까." 어린애답게 펄펄 뛰며 '난 누나랑 잘 거야!' 라는 식의 떼쓰는 모습을 상상했던 앤드류는 니콜라스가 선선히 일어나자 조금 어리둥절했다. 이 상하게 니콜라스는 13살짜리 꼬마다운 느낌이 거의 묻어나지 않았다. '나이와는 달리 많이 조숙한가 보네…' 니콜라스의 정체를 전혀 모르는 앤드류는 약간씩 불안해져 오는 마음을 그렇게 달랬다. 한밤중이었다. 앤드류가 지정해준 방 침대에 누워 있던 니콜라스는 어둑 한 밤공기에 낮게 깔린 긴장을 감지하고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감은 채 귀를 기울이던 니콜라스는 이내 누군가가 예안의 방에 조심스레 접근하 고 있음을 깨달았다. '앤드류는 아니다.' 아직 앤드류에 대해 완전하게 마음을 풀고 있지 않은 니콜라스에게 앤드 류가 밤에 몰래 예안의 방에 접근한다는 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송곳처럼 예리하게 다듬어진 감각이 알려주는 침입자의 특성은 앤드류와는 사뭇 달랐다. '앤드류보다는 작다… 무기도 갖고 있을까?' 슬그머니 침대에서 내려온 니콜라스는 숨겨둔 권총을 꺼내어 오른손에 쥐고 조심스럽게 문에 가까이 접근했다. 침입자가 옆방, 예안의 방에 접 근한 걸 알아차린 순간 그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소리 없는 발걸음을 옮 겼다. 벽에 등을 대고 예안의 방안에 시선을 던진 그는 얼굴에 복면을 한 괴한이 예안을 주시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제나르 의원이 보낸 녀석인가?' 제나르처럼 남부러울 것 없는 인간이 어째서 자신보다 나이도 한참이나 어린 소녀를 저렇게 집요하게 노리는 건지 이유가 사뭇 궁금하긴 했지 만,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의뢰주의 바램대로 예안을 지키는 것. "꼼짝 말고 손들어." 니콜라스의 목소리가 어두운 밤공기를 낮게 찌르자 침입자는 흠칫 놀라 멈춰 섰다. "뒤돌아보면 쏜다. 그 자리에서 조용히 손들어." 침입자는 순순히 말을 듣지는 않았다. 니콜라스는 조용히 한 걸음 접근 했다. "저 여자애를 납치하러 왔나?" "…." "대답하기 싫으면 말든지. 원래라면 널 죽여야 옳겠지만 괜히 앤드류 회 장의 경계를 살 필요는 없으니 고이 보내주지. 빨리 꺼져."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지 침입자는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절대적으로 믿는 자신의 감각을 통해, 그 밖의 더 이상의 침입자가 감지 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니콜라스는 자신 있게 밀어붙였다. "빨리 꺼져. 난 원래 경고를 두 번 이상 하지 않아." 천천히 몸을 돌리던 침입자의 오른손이 갑자기 푸른빛으로 빛났다. 니콜 라스는 재빨리 방아쇠를 당겼으나 금속이 찌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권총 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놀라지 않았다. "어라? 아까 그 여자도 그렇고, 너도 신기한 걸 할 줄 아는구나? 보통 사람들은 이런 거 못하던데." 갓난아기처럼 순수한 호기심을 보이는 니콜라스를 어이없는 눈동자로 주 시하던 침입자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놀랍게도 굉장히 고운 여성의 목 소리였다. "전 에날도스를 파괴력으로 바꿔 당신의 오른손 전체에 보냈어요. 근데 왜 권총만 망가지고 마는 거죠?"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침입자는 무거운 발걸음을 한 걸음 떼었다. 희미한 가로등 빛이 전부인 방에서 그녀의 눈빛이 차갑고 싸늘하게 빛났다. "당신은 누구죠? 누구예요? 말하세요. 어째서 에날도스를 견뎌낼 수 있 는 거죠?" "그러고 보니… 그 목소리 들어본 적이 있네." 침입자는 느린 손길로 얼굴을 가린 복면을 잡아채 바닥에 떨어뜨렸다. 희미한 빛 아래 드러난 여자의 얼굴은 니콜라스도 이미 알고 있는 여자 의 것이었다. "어? 아까 그 여자네? 설마 내가 마취침으로 재웠다고 화가 나서 따지러 온 거야?" 순진한 말투지만 이 아이. 결코 평범한 13세짜리 꼬마애가 아니다. 엘르 는 먹이를 노리는 야수처럼 짜릿한 감각이 신경을 자극해 오는 걸 조심 스럽게 감지하며, 천천히 양손을 들어올렸다. 이번엔 아까처럼 허무하게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연했다. "설마 당신, 엘리우스인가요?" 엘르는 심장을 태워버릴 듯 짜릿하게 이글거리는 긴장을 바짝 마른 목구 멍으로 힘들게 삼키며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무슨 말을 들 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엘리우스? 그게 뭔데?" "당신은 에날도스를 견뎌냈어요. 그건 우리와 같은 시트날타 인이 아니 고서는 불가능해요. 그렇다면 결국 결론은 하나. 당신은 행방불명된 엘 리우스라는 말이 되죠. 나이로 볼 때 엘리우스가 자식을 낳았다 해도 기 껏해야 갓난아기일 테니까." "글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적에게 이렇게 많이 말을 한 경험은 생소했다. 오랜 살인으로 다져진 감 각은 지금 이런 행동은 바보짓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가슴속에서 꿈틀 거리는 무언가는 엘르의 말에 깊은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엘르는 어느새 니콜라스를 엘리우스라 확정짓고 있었다. "엘리우스. 왜 시트날타에 반하는 거죠? 당신은 혁명을 향한 염원을 잊 어버렸나요?" "난 엘리우스란 사람이 아니라니까." 니콜라스는 겉으로는 그렇게 부정하고 있었지만 심장은 터질 듯이 두근 거리고 있었다. 이상하다. 제아무리 무섭고 잔인한 광경을 보거나, 혹은 살인을 할 때조차도 뛰지 않던 심장이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폭주하고 있다! '난 어릴 때의 기억이 없다.' 자신의 나이가 13살이라는 건 5년 전에 슬램가 도로에서 쓰러져 있을 때 우연히 구해준 니르가 8살 정도 되어 보인다고 새로 정해준 나이로 계산 한 것뿐이었다. 니콜라스는 최근의 5년을 제외하고, 그 전의 기억은 전 혀 갖고 있지 않았다. 여태껏 맹목적으로 살인에 매달려 온 건 누군가를 죽이고 난 뒤 전신을 덮어오는 한기와, 영혼을 미묘하게 자극하는 공포 비슷한 무언가가 자신의 기억을 되찾아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 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을지 모르는 여자를 만났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엘리우스가 나일 수도 있지. 난 사실 최근 5년을 빼고는 그 전 의 기억이 전혀 없으니까." "그럼…" 엘르의 눈빛이 묘한 기쁨으로 뒤덮인 걸 묵묵한 시선으로 더듬던 니콜라 스는 차갑게 내뱉었다. "그렇지만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당신을 따라가서 확인하는 짓 따위는 하 고 싶지 않아." 니콜라스는 권총을 쥔 오른손을 천천히 내리고 뚜벅뚜벅 엘르에게 다가 왔다. 야릇한 공포가 안개처럼 자신을 휘어 감아오자 엘르는 침착함을 잃고 오른손에 집중한 에날도스를 터트렸다. 아니, 터트리려고 했다. "나한텐 소용없다는 걸 이미 확인했잖아?" 어느새 엘르의 등뒤에 나타난 니콜라스는 조그만 손으로 그녀의 팔뚝을 잡고 뒤로 꺾었다. 비수처럼 신경을 찌르는 고통에 신음이 터져 나오려 는 걸 간신히 참고 있던 엘르는 차가운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자 소스 라치게 놀랐다. "읍! 읍! 읍!" 조그만 체격과 조그만 손과는 어울리지 않는 우악스런 악력으로 엘르의 얼굴을 잡은 채 진한 키스를 선사하는 니콜라스의 야릇한 체향은 뼛속까 지 두려운 공포를 새겨 넣었다. 달콤함과는 아득하게 거리가 먼 키스가 끝나고 난 뒤 엘르의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 니콜라스는 눈빛이 풀어진 채 멍하니 앉아 있는 엘르에게 명령했다. "일어나." 엘르는 혼이 빠져나간 꼭두각시처럼 말없이 일어났다. "네가 찾고 있는 여자는 이미 이곳에서 캐나다로 도망쳤다. 넌 허탕을 친 거다. 알아들었나?" 엘르가 넋이 나간 눈빛으로 끄덕이자 니콜라스는 만족스런 손길로 그녀 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럼 가라. 네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도, 이곳에 다시 올 까닭도 없다." 강한 최면에 걸린 엘르는 인형사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처럼 현 관을 나섰다. 묵묵한 눈빛으로 엘르가 사라진 방향을 더듬던 니콜라스는 예안의 방안으로 들어갔다. 이 태평한 아가씨는 납치 당할 뻔했는데도 아무런 눈치도 못 채고 아주 잘 자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밋밋한 눈빛으로 예안을 주시하던 니콜라 스는 옆에 벗어놓은 옷가지로 시선을 돌렸다. "이 여자는 잘 때 속옷도 벗고 자나? 아, 하긴 니르도 그렇지만." 약간은 호기심이 담긴 시선으로 예안이 벗어놓은 브래지어를 이리저리 살피던 니콜라스는 이윽고 자신이 원하던 물건을 찾아냈다. 그것은 눈에 띄지 않도록 브래지어 끈에 살짝 붙어 있었다. "설마하니 속옷에다가 발신기를 붙여놨을 줄은 몰랐는데. 녀석들도 꽤나 신중하네." 검지와 중지로 발신기를 간단히 부수어 버린 니콜라스는 살그머니 침대 에 걸터앉았다. 가로등 빛에 살짝 드러난 예안의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피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야릇한 매력에 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니콜라스 베르노…" 그것은 니르가 붙여준 이름. "널 보면 가슴이 두근거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그건 원인을 모르는 쾌감과도 같은 것. "나를 설레게 하는 넌 도대체 누구지?" 그가 설레는 건 그저 얼굴이 다른 여자에 비해 월등하게 예쁘다는 것 때 문만이 아니었다. 예안에게는 눈을 뗄 수 없는 무언가 야릇한 분위기가 있었다. 아마도 그것 때문에 경호 같은 귀찮은 의뢰를 받아들인 것이긴 했지만, 니콜라스는 예안에게 느끼는 이 동요의 정체가 무엇인지 진심으 로 알고 싶었다. 그렇게 된다면 잃어버린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낼 수 있 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조심스런 손끝으로 예안의 뺨을 더듬던 니콜라스는 침대에 걸터앉아 항 상 가지고 다니는 조그만 책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책제목은 「인류 에게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 남은 게 있다면 멸망뿐이다」였다. 그 리고 책의 저자는 제임스 해론이었다. 다음날 아침 기분 좋게 일어난 예안은 상쾌한 기지개를 켜다 자신의 침 대에 걸터앉아 책을 읽고 있는 니콜라스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 넌 뭐야! 여기서 뭐하는 거야!" 카랑카랑하게 고함을 지르던 예안은 상반신을 벌거벗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이불을 들어 가렸다. 아무리 꼬마애라 하나 사랑하는 여자의 몸 을 함부로 보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젯밤에 그 엘르라는 여자가 널 납치하려고 찾아왔어. 그래서 내가 쫓 았다. 그리고 혹시 몰라서 밤새도록 경호하고 있던 것 뿐이야." "밤새도록… 그런 한잠도 안 자고?" 조금 고마운 감정이 솟아올랐지만 니콜라스에게 호감을 느끼고 싶지 않 았던 예안은 애써 표정을 냉랭하게 했다. "네 브래지어에 발신기가 붙어 있더라. 부숴 버렸으니 이제 다시는 쫓아 오지 못할 거야." "그, 그렇지만 내가 여기 있는 걸 알았다면 빨리 도망가는 게 좋지 않 아?" "걱정할 것 없어. 엘르라는 여자한테 최면을 걸어서 네가 벌써 이곳을 도망쳤다고 했으니까. 지금쯤 그 녀석들은 전부 다 캐나다로 달려갔을 거야." '킬러들이 최면술에까지 능숙하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는데?' 영화를 많이 본 후유증은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나는 걸 보니 말이다. "어? 근데 그 책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인류에게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 남은 게 있다면 멸망뿐이다」라 는 책제목이 생소하지 않았던 예안은 기억을 더듬다가 이내 예전에 세현 의 집에 갔었다가 책장에서 그 책을 봤었던 걸 기억해냈다. 그 외에도 외국어로 된 전문서적들이 수없이 차 있어서 굉장히 당황했던 기억도 잇 따라 떠올랐다. "제임스 해론 박사가 쓴 저서야.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작가야." "그래? 킬러치고는 굉장히 취미가 고상하네." 무심코 그렇게 내뱉었던 예안은 퍼뜩 니콜라스가 불쾌해하지 않을까 걱 정이 되었다. 다행히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이 책 안에서 인간의 본질과 성악의 경계선에 대해 소름끼치도록 냉정하고 자세하게 다루고 있어. 도저히 인간이 쓴 책이라 믿어지지 않 을 정도로 차갑고 객관적인 서술은 혹시 그가 인간이 아니라 인간으로 변신한 신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지." "그래? 그 작가 인기 많은가 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볼 수 있어. 염세주의자들은 거의 맹목적으 로 그의 책을 숭배하고 좋아하거든. 하지만 낙관주의자들은 그의 책이 너무 어둡고 암울하다고 굉장히 싫어하는 편이야. 그가 새 저서를 낼 때 마다 앞장서서 비난하곤 하지. 그렇지만 양쪽 다 책을 꼭 사기 때문에 판매 부수는 엄청난 편이야." "흐음…" 세현이 녀석도 이 책을 갖고 있던데, 그럼 그 녀석은 제임스 해론이라는 사람을 옹호하는 쪽일까? 그 녀석도 꽤나 성격이 염세적이었으니까. "너는 어느 쪽인데?" 열성적으로 책을 읽고 있던 니콜라스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책장을 덮었다. 고개를 살짝 든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난 어느 쪽도 아니야. 굳이 말하자면…" 니콜라스의 검은 눈동자에 옅은 흥분이 맺혔다. "제임스 해론이 어떤 마음으로 책을 쓰는지 이해하고 싶어하는 쪽이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흥분 띤 니콜라스의 검은 눈동자를 훑어보던 예안 은 슬며시 웃고 말았다. 니콜라스를 만난지 불과 하루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청부업자라는 암흑 세계의 직업을 갖고 있다는 선입견 때문에 살벌하고 차갑기만 한 줄 알았던 녀석이 이렇게 흥분한 모습을 보는 건 조금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 제임스 해론이라는 사람을 굉장히 좋아하는가 보네?" "좋아한다고? 이게 좋아한다는 거야?" 보통 그 정도까지 말할 정도면 엄청난 열성팬이 아닌가? "좋아하는 거 아니었냐?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책을 쓰는지 이해하고 싶 어한다며? 그럼 거의 매니아 수준이네 뭐." "그런 거야?" 신기한 걸 알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13살의 어린 소년이었다. 마치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여 감정을 하나 하나 조금씩 배 워나가는 어린 아기 같다는 느낌이 든 예안은 슬며시 웃고 말았다. 어쩐 지 이 녀석이랑 같이 지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도 모르게 니콜라스에게 호감을 느낀 예안은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 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 옷 입을 거니까 좀 나가 있을래?" "옷 입는데 왜 나가 있으란 거야?"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태연히 되물어오자 예안은 황당했다. "그럼 내가 옷 입는 거 보려고?" "왜, 안 돼? 니르는 내가 보든 말든 그냥 아무렇지 않게 옷 갈아입곤 하 는데?" "니르라는 사람은 남자니까 그렇겠지!" "남자 아니야. 여자야." 예안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빽 소리 질렀다. "하여튼 나가 있으라면 나가 있어! 원래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여자 가 옷 갈아입는 건 보는 게 아니라구! 게다가 난 내 몸을 다른 남자한테 보여주기 싫단 말이야!" 이해할 수 없다는 눈동자로 연신 고개를 갸웃하던 니콜라스는 무심코 말 했다. "왠지 사탕 뺏기기 싫어하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나도 옛날에 그랬 던 적이 있거든.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말이야." 예안은 흠칫했다. 니콜라스는 무심코 그렇게 말했지만, 실상 그의 말은 놀랍도록 정확히 자신의 마음 속의 독점욕을 지적한 것이었다. 유젤을 영원히 혼자 사랑하고 아끼고 다른 남자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하는 독점욕. 지금 내 모습이 정말 사탕을 뺏기기 싫어하는 어린아이와도 같은가 하고 속으로 생각하는 건 잠시. 니콜라스가 곧바로 상념을 깨뜨렸다. "네가 싫어하니까 조금 있다가 들어올게. 어차피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외출할 생각 같은 건 하지 마." "…나갈 생각도 없어. 관광하러 온 것도 아닌데 느긋하게 돌아다닐 여유 가 어딨냐?" "알았어. 빨리 옷이나 입어."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역시 청부업자는 청부업자라는 건지 도무지 어린 아이다운 느낌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니콜라스가 나가고 난 뒤 예안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속옷을 걸치면서 이제 겨우 여유 를 되찾은 듯 밝은 표정으로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쳇. 무슨 꼬마애가 저 따위야? 나이에 안 어울리게 무게나 잔뜩 잡고, 꼬마다운 냄새가 전혀 안 나잖아. 하긴 저 어린 나이에 킬러 같은 거 해 먹고 사는데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걸 테지만…" 옷을 입던 예안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만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내 인생이 정말 많이 변했네. 예전 같았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잖아…" 자신은 평범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하는데 냉정하게 되짚어 보면 어느샌가 자신의 주변은 비범함으로만 둘러싸여 있었다. 과연 인간일까 하는 의심투성이가 한두 가지가 아닌 유젤의 몸을 제외하 고서라도, 맥이라는 전투병기와 시트날타의 존재, 한국 정부와의 비공식 적인 거래, 그리고 이제는 아무리 뜯어봐도 평범하고 귀여운 꼬마 이상 으로는 보이지 않는 어린 청부업자까지. "휴. 내 팔자야…" 예안은 옷을 다 입고 난 뒤 어느덧 전혀 평범하지 않게 되어 버린 자신 의 인생에 대한 암담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젤을 만난 걸 전혀 후회 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 묘한 기분을 느끼면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 었다. 문에 기대어 선 니콜라스는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보호라는 건 참 힘들구나. 살인이 백 배는 더 쉬운 것 같아." 살인과 보호.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과 누군가를 지켜준다는 것. 그것은 비유하자면 극단적으로 불공평한 축구 경기와도 같았다. 시간은 무제한 이되 언제든지 상대편의 골문에 공을 넣으면 이기는 게임이 살인이라면, 무제한의 시간 속에서 단 한 골도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게임이 보호였다. "불공평해. 너무 불공평해. 난 다른 사람을 보호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단 말이야." 살인말고 다른 종류의 의뢰(중요한 물건을 찾아온다거나 납치 등등)를 해본 경험은 많지만 누군가를 보호하는 건 생전 처음으로 해보는 것이었 다. 하지만 입으로만 힘들다 투덜거릴 뿐, 생기에 찬 예안의 녹색 눈동자를 주시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에서 뭔가 뿌듯한 느낌이 밀려오는 게 좋았던 니콜라스는 살며시 미소지었다. "꼬맹이답지 않게 제법 의젓해서 딱딱한 심장을 가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귀엽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이미 조금 전부터 앤드류가 접근하는 걸 눈치채고 있었던 니콜라스는 당 황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떴다. "앤드류. 비행기 출발 시각을 좀더 앞당길 순 없어?" "반말하지 마라 꼬마야. 내가 너보다 10년은 더 살았다. 영어로 말할 땐 모르지만 한국어로 대화할 땐 적어도 꼬박꼬박 형이라고 불러. 알았냐?" "비행기 출발 시각을 좀더 앞당길 수 없어?" "너 내 말을 뭘로 들은 거니? 난 너한테서 그런 말을 들을 입장이 아니 야. 네가 누나와 아는 사이라 해서 내가 너한테까지 잘해줄 이유는 없다 는 것도 모르니?" "일주일이나 기다린다는 건 곤란해. 가능하면 삼일 후, 아니 내일 당장 이라도 떠날 수 있게 해줘." 끝까지 사람 말을 무시한 채 차분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는 니콜라스의 배짱에 앤드류는 조금 불쾌함을 느꼈다. "니콜라스라고 했나? 너 그렇게 사람 말을 무시하는 버릇 어디서 배웠 어?" 앤드류의 가슴팍에도 키가 닿지 않는 자그마한 체격의 니콜라스는 검은 눈동자를 들어 빤히 그를 올려다보다 가만히 등을 돌렸다. 나 같은 건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의미로 해석한 앤드류는 더더욱 불쾌해졌다. "이봐, 어디 가는 거야?" 니콜라스는 흘끔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당신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으니 누나한테 부탁하러 가는 수밖에 없잖 아. 당신은 누나 말은 잘 듣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도무지 어떤 아이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연상의 누나를 좋아하는 순진 하고 어린 꼬마애라고 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귀여움이 묻어나지 않는 표정은 앤드류에게 기분 나쁘게 다가왔다. 예안이 세 번째로 탈출한 뒤 시트날타는 비상이 걸렸다. 곧바로 뉴욕에 서 가까운 곳에 있는 시트날타 인들은 속속들이 제나르의 저택으로 몰려 들었고, 그들은 잔뜩 흥분한 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떠 들어댔다.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태어난지 몇 달도 안 된 갓난아기가 부모의 품을 도망쳐 달아났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제나르의 서재로 뛰어들다시피 들어온 마리오는 안색이 흙빛이 되어 있 었다. "사실입니까 대신님! 엔젤이 또 도망쳤다구요?" 요셉과 무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제나르는 느닷없이 뛰어든 마리오 에게 화를 내거나 하지 않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괴 로운 빛이 만연했다. "어제 새벽에 엘르가 다시 찾으러 갔었소. 하지만 허탕을 치고 말았소. 벌써 캐나다로 도망치고 말았다는군." "벌써요? 빠르군요." 세상물정이라고는 전혀 모를 예안이 벌써 캐나다로 도주했다는 사실에 마리오는 차라리 황당하기까지 했다. "마리오 경. 물론 프린세스 혼자서 그런 도주로를 생각해낼 리가 없지. 어떤 꼬마애가 몰래 하인으로 위장해 들어와 프린세스를 도주 시켰다고 하오. 아마도 한국이 보낸 첩자가 분명한데, 도대체 어떻게 프린세스가 여기 있다는 걸 한국이 안 건지는 모르겠소." "아마도 맥의 힘을 빌었을지도 모르죠." "그런가요? 이거 큰 실수를 했군.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바보짓을 저지 르지 말아야 되겠군."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은 마리오는 제나르의 맞은편에 앉았다. 당장이 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 예안을 찾으러 캐나다로 뛰어가고 싶었지만 냉 정함을 되찾는 게 더 중요했다. "그런데 엘르는 어디 있습니까?" "피곤한 건지 지금 자고 있소. 그렇지 않아도 엘르가 좀 이상해서 마리 오 경과 의논을 하고 싶었는데 잘 됐군." "엘르가 이상하다고요?" 제나르의 눈빛은 묘한 의심과 기대 그리고 흥분으로 옅게 채색되어 있었 다. 엘르가 이상하다는데 어째서 그는 저런 표정을 보이는 것인가? "요셉. 가서 엘르를 데려오거라." "알겠습니다." 요셉이라 불린 20대의 청년은 지나친 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아주 정 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서재를 나갔다. "마리오 경. 경도 엘르를 보게 되면 내 말을 십분 이해할 거요." 하지만 제나르의 표정에는 엘르에 대한 걱정보다는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기쁨이 더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기에, 마리오는 의아함을 느 꼈다. "흐음. 하지만 부하가 이상하다는데 이상하게 제나르 경은 굉장히 기뻐 하는 걸로 보입니다?" "호오? 마리오 경도 내가 그렇게 보이나요? 요셉도 그렇게 말했는데." 제나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유쾌하게 웃었다. 엘르가 이상하다 는 게 어째서 제나르에게 기쁜 일이 된다는 것인가? 마리오는 갈피를 잡 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엘르가 요셉과 함께 들어왔다. "부르셨나요 대신님?" 조금 피곤해 보이는 걸 제외하고 엘르는 딱히 이상한 부분이 없었다. 뭔 가 잘못된 거 아니냐고 제나르에게 물으려던 마리오는 퍼뜩 엘르에게서 동질적이면서도 이질적인, 알 수 없는 묘한 기운을 느끼고 흠칫했다. 엘르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마리오가 알아차리자 제나르는 흐뭇해 하며 웃었다. "경도 알아차린 듯하군요. 그렇소. 지금 엘르는 부분적인 최면에 걸려 있는 상태요. 웬만한 고위급 헤이져가 아닌 이상 알아차릴 수 없도록 굉 장히 정교하게 걸려 있지." 믿을 수 없다는 손길로 엘르의 팔을 탐색하듯 쓰다듬던 마리오는 무거운 침음성을 흘렸다. "이건 분명히…" 친숙하지만 거리가 있는 것. 낯설지만 익숙한 것.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또 처음 보는 그런 기운이 엘르의 몸에 아주 미약하게 흐르고 있 었다. "그렇소. 에날도스요. 엔젤을 데리러 간 엘르를 누군가가 에날도스를 이 용해 최면을 건 거요. 아마도 캐나다로 도망갔다는 건 시간을 벌기 위한 거짓말일 테지요." "하지만 에날도스는 우리 시트날타 인에게만 허락된 힘이 아닙니까? 배 신자가 있었다면 모를까, 단 한 명의 배신자도 없는데 도대체 누가 엘르 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건가요?" "딱 한 명이 있지요. 헤이져 중에서도 고위급 능력을 자랑하는 엘르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고, 또 아직 완벽하게 우리 시트날타 소속이 아닌 인 물이 딱 한 명 있지 않소?" 마리오는 순간 묵혀둔 기억 속에 묻어 놓았던 잊혀진 이름을 떠올렸다. "설마, 엘리우스가 나타났단 말입니까?" 제나르는 아주 유쾌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그렇소. 엘리우스요. 17년 전에 수호제황석에서 「마기」가 사라진 뒤 우리가 그렇게 찾으려고 애썼던 엘리우스가 드디어 나타난 거요. 어째서 신은 「마기」를 우리 시트날타 인이 갖도록 하지 않고 지상인의 배를 빌어 태어난 엘리우스에게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출생이 다르다 해도 그는 우리 시트날타 인이 확실하오." "으음…" 이십 년이 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엘리우스에 대해 깊이 고 찰해본 경험이 없는 마리오는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미묘한 흥분에 제대 로 입을 열 수 없었다. 단순히 전설인 줄만 알았던 엘리우스가 정말로 이 세상에 실존하는 데다가 지상인의 배를 빌어 태어났다는 놀라운 사실 보다는, 이로써 혁명에 보다 더 한 걸음 가까워졌다는 기쁨이 그의 가슴 을 두근거리게 했다. "엘리우스… 그건 단순한 전설이 아니었나 보군요." "오랫동안 기적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엘리우스의 존재를 믿지 못 할지 모르지만, 난 이미 병중에 계신 바드로 2세 황제 폐하께서 즉위식 을 갖던 날 전대 엘리우스를 본 경험이 있소. 폐하는 그때 엘리우스로부 터 「마기」를 건네 받고는 뛸 듯이 좋아하셨지." "마기…" 그것 역시 이름만 들어보았을 뿐 사실 현재도 그 존재에 대해서는 반신 반의하고 있는 것이었다. 역대 엘리우스들의 몸 속에서 힘을 키우고 성 장한 뒤 즉위식이 있는 날 황제에게 넘어가는 수호정령. 그래. 정령이라 는 이름이 가장 어울리는 영혼. 제나르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좀더 바빠져야 하오. 프린세스의 행방을 찾는 건 물론 인 데다가 하루빨리 엘리우스의 소재를 파악해야 하오. 그 둘 중의 어느 한 개라도 없으면 결코 혁명은 이루어낼 수 없으니까 마리오 경도 분발 해지길 빌겠소." "엔젤을 잡으러 간 엘르가 엘리우스한테 최면이 걸렸다면 아마도 엘리우 스는 엔젤과 함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상하군요. 어째서 엘리 우스가 엔젤과 같이 있는 거죠? 아니, 어째서 엘리우스가 엔젤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거죠?" "확실하게 밝혀진 건 거의 없소. 어쩌면 단순히 프린세스와 엘리우스가 사적으로 친분을 쌓았다는 우연이라던가, 아니면 엘리우스가 프린세스의 존재감을 느끼고 접근한 건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프린세스는 인간이 아 니지 않소?"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최초의 천사. 그런 존재에게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시트날타 인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마기」라는 초자 연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엘리우스라면 아마도 예안으로부터 기존 인간 들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느끼고 접근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마리오는 아주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온 설렘과 두근거림에 마치 장마 비 에 젖은 고목처럼 그렇게 흠뻑 취해 있었다. 이런 기분은 낯설게까지 느 껴질 정도로 실로 오랜만이었다. 제나르가 손을 들자 강렬한 푸른빛이 쏟아져 나왔다. 제나르는 그 손을 엘르의 이마에 살짝 갖다 댔다. 조금 창백한 안색으로 서 있던 엘르는 이윽고 제나르가 손을 거두자 정신을 차렸다. "이제 정신이 드는 거냐, 엘르?" 제나르가 부드럽게 묻자 최면이 풀린 엘르는 비로소 자신이 오늘 새벽에 니콜라스에게 무슨 일을 당했었는지 기억해냈다. 그녀의 몸이 쓰러질 듯 휘청거리자 마리오가 황급히 부축했다. "아… 고마워요, 마리오 경." 다소 붉어진 얼굴로 엘르가 감사를 표하자 제나르는 껄껄 웃었다. "둘이 아주 잘 어울리는 한쌍이로군. 이참에 아예 연인이 되어 볼 생각 은 없소?" "대신님! 그 무슨 말씀을…" 질겁한 엘르는 얼굴이 귀밑까지 붉어진 채 반발했지만 제나르는 다 안다 는 듯 인자하게 웃을 뿐이었다. 마리오는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저 난처한 쓴웃음을 조금 짓기만 했다. "엘르. 이제 최면이 풀렸을 테니 말할 수 있겠지. 오늘 새벽에 정말 엘 리우스를 보았나?" 마리오의 질문에 엘르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마리오 경.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 전 발신기를 따라 엔젤을 다시 잡으러 갔어요. 그때 조금 당황했던 건 엔젤이 앤드류 회장의 뉴욕 별장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거예요." "흐음. 엔젤이 그새 앤드류 회장과 친분을 쌓았다는 건가? 이거 골치 아 프겠군요 대신님. 만약에 앤드류가 엔젤을 보호하려 든다면 우리로서는 굉장히 골치 아파질 테니 말입니다." "반드시 둘 사이가 친하다고만은 볼 수 없소. 원래라면 어제는 앤드류 회장이 이 저택에 올 예정이었는데 오지 않았소. 어쩌면 프린세스와, 프 린세스의 도주를 도와준 첩자가 앤드류 회장에게 거짓말을 해 잠시 도움 을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어쨌든 간에 앤드류 회장은 주의깊이 지켜봐야 할 테죠. 엘르. 계속 말 해 줘." 잠시 오늘 새벽의 기억을 더듬던 엘르는 조금 핼쑥한 안색으로 계속 말 했다. "방에서 잠시 자고 있는 엔젤을 지켜보고 있을 때 첩자, 아니 엘리우스 라 추정되는 소년은 저에게 총을 들어 겨누고 손을 들라고 했습니다. 그 래서 저는 에날도스의 파괴력을 소년의 오른손 전체에 보냈죠. 하지만 뼈가 으스러지리라 생각했던 제 예상과는 달리 권총만 산산조각 나버렸 습니다. 그의 손은 아주 멀쩡했죠." "에날도스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마리오는 의심에 찬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지상인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힘인 에날도스를 견뎌냈다면 당연히 에날도스를 갖고 있다는 뜻이고, 그 러면서도 시트날타 소속이 아니라면 17년 전에 사라졌던 수호제황석에 깃들어 있는 공명신수, 「마기」를 소유하고 있는 엘리우스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무거운 분위기가 세 사람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오랫동안 행방불명이 었던 엘리우스를 찾아낸 건 기쁜 일임에 틀림없으나, 지상인의 몸을 빌 어 태어나 지상세계에서만 성장해 시트날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엘리 우스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비로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일단… 내가 직접 그를 만나 보겠소. 뻔하겠지만, 과연 그가 정말로 엘 리우스인지 아닌지도 확인을 해봐야 할 터이고." 한참의 침묵 끝에 제나르가 무겁게 입을 떼었다. 마리오와 엘르는 반대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종일 니콜라스와 함께 방에 처박혀 있던 예안은 해가 서산 너머로 넘어갈 무렵, 한국에서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아버지 정호가 생각났다. '많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전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허나 언제 시트날타가 그런 사소한 데서 꼬투리를 잡아낼지 몹시 걱정이 되었기에 수화기를 드는 것조차도 무서웠다. '에휴… 모르겠다.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고 난 다음에 생각하자. 싹싹 빌면 되겠지 뭐.' 하반신에 이불을 걸치고 침대에 앉아 있던 예안은 마찬가지로 자신의 침 대에 걸터앉아 하루종일 열심히 책만 읽는 니콜라스에게 흘끗 시선을 던 졌다. 저 녀석은 독서 못 해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나? 왜 하루종일 책 만 읽는 거지? "니콜라스… 라고 했던가?" 니콜라스는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여전히 감정이 없었다. "왜 불렀어?" "그렇게 하루종일 책만 읽고 있으면 안 심심하냐? 13살이라면 한창 밖에 서 뛰어 놀고 싶을 때 아니냐? 근데 그렇게 책만 읽고 있으면 갑갑하지 않냐?" "난 13살이긴 하지만 평범한 13살은 아니야." "알아. 잘나신 킬러 나리라는 거. 잘 안대두. 내 말은, 네가 이 방에 있 으면 갑갑하니까 좀 나가 주지 않겠냐 하는 거야." 니콜라스는 나가달라는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여전히 감정이 읽히 지 않는 표정으로 다시 책에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딴소리를 했다. "이제 슬슬 앤드류가 올 시간이네. 아까 내가 말한 대로 가능하면 비행 기 출발 시각을 앞당겨 봐. 여기서 일주일, 아니 6일이나 죽자고 있는 건 좀 곤란하니까." 왜 말을 돌리냐고 화를 내려던 예안은 꾹 눌러 참았다. 어쨌거나 상대는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킬러다. 솔직히 생긴 건 신뢰가 가지 않기는 해 도 말이다. "그냥 앤드류 회장 모르게 우리 둘이서 한국으로 가면 안 될까?" "그럼 돈이 많이 들잖아. 앤드류가 태워주는 건 공짜니까 그게 더 좋아. 가능하면 돈을 아껴야지." 자린고비 정신이라고 몰아붙이기에는 뭔가 좀 이질적인 느낌이 가득한 대답에 예안은 얼굴을 찡그렸다. "만약 앤드류 회장이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 "내일 모레쯤이나 그 다음날까지 출발하는 게 안 된다면 우리끼리 그냥 갈 거야. 아, 그렇지만 이 말은 하지 마. 앤드류는 널 굉장히 갖고 싶어 하던데 괜히 그런 말을 했다가 골치 아픈 일이라도 생기면 곤란하니까." "갖고 싶어하다니! 누가 물건이냐!" 비로소 니콜라스의 표정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겨우 13살의 소년다워 보 이는 천진난만한 얼굴이 되었다. "내가 보기에 그는 널 굉장히 갖고 싶어하던 것 같던데? 꼭 물건이어야 만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생태계에서 강한 수컷이 매력적인 암컷을 갖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본능 아니야?" 뭔가 13살의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오기에는 상당히 낭만과 순수함 그리 고 천진함, 이 세 박자가 결여되어 있는 듯 한데. "그… 그, 그런 말은 도대체 또 어디서 들었어! 그럼 내가 암컷이란 말 이냐!" 왠지 패배한 듯한 기분에 예안은 발끈해서 외쳤다. "너 암컷 맞잖아? 그럼 네가 수컷이야?" "인간에겐 그런 말을 쓰는 게 아니야!" "어째서? 인간도 암컷과 수컷으로 나누어진 거 맞잖아?" "그래도 그런 말 쓰는 거 아니야! 인간이니까!" 딱히 제대로 반박할 말이 없었던 예안은 목소리를 카랑카랑하게 높이며 쏘아붙일 뿐이었다. 니콜라스가 한 번만 더 물었다가는 말문이 막힌 채 자존심이 망가져 버릴 것만 같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더 따지고 들 진 않았다. "흠.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일단 네가 매력적인 암컷이라는 건 나도 인 정해. 아마 대부분의 수컷들이 널 보면 굉장히 갖고 싶어할 거야. 그건 단순히 번식본능 때문만이 아니라, 매력적인 암컷을 소유함으로써 자신 의 강함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과시욕 때문이기도 하대." "또, 또 암컷이냐!" 예안은 어느새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자신보다 4살이나 어린 꼬마한테 말문이 막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는 건 뭔가 비참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임스 해론 박사가 그렇게 말했어. 그가 낙관론자들에게 비난을 받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항상 책 안에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라 하지 않 고 '암컷과 수컷'이라 표현한다는 거야.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지칭하는 게 인간과 동물의 경계선을 허물어 버리는 거룩한 행동이라고 반박하곤 하지만 말이야." 예안은 기가 막힌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다 겨우 침착함을 되찾고 차분 히 대답했다. "니콜라스. 인간이 동물과 다를 바 없다는, 아니 오히려 동물보다 더 사 악한 동물이라는 건 나도 지극히 인정하는 바야. 하지만 사람을 앞에 놓 고 암컷이니 어쩌니 하면 듣는 사람 기분이 얼마나 나쁘겠어? 막말로, 내가 너한테 '어이, 수컷'하고 부르면 기분이 좋아?" "난 상관없는데? 난 암컷이 아니잖아?" "…말을 말자 말을. 어린 꼬맹이하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냐." 조금은 토라진 듯한 예안의 새하얀 뺨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니콜라스는 책을 탁 덮고 가까이 다가갔다. 니콜라스가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대자 예안은 '이 녀석이 왜 이래?'하면서 조금 비켜났지만, 그에게 어깨를 잡 히고 말았다. 아름답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던 니콜라스는 이윽고 입 을 열었다. "이상해. 난 지금까지 니르 이외의 여자가 아름답다는 생각은 단 한 번 도 가져본 적이 없었어. 왜 네가 아름답다 생각되지? 제임스 해론은 「인간이 아름답다 느낄 수 있는 존재는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했어. 인간은 자신과 같은 인간에게는 절대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다고 말이야. 인간이 아름답다 느낄 수 있는 존재는 인간보다 월등한 그 무엇 이어야만 한다고 말이야. 인간이 인간을 가리켜 아름답다고 하는 건 대 단한 착각이라고 말이야. 근데 난 왜 네가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거지?" 예안은 갑자기 예전에 앤드류의 내한 피아노 공연을 보러 가기 전, 체육 시간에 세현과 단둘이 교실에 남았을 때 같은 질문을 받았던 기억이 났 다. 좀더 기억을 더듬어 보니 유니콘이 제임스 해론이라는 사람의 저서 를 인용해 유젤이 일반인과 어떻게 다른가 설명했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세현이 녀석도 제임스 해론이라는 사람 팬인 것 같았는데… 이 녀석도 그런가?' 살인이 옳은지 그른지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살인자를 만나게 되면 아마도 거부할 거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렇게 직접 킬러를 눈앞에 두고 있는데도 아무런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그건 단순히 니콜 라스의 외모가 굉장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 때문만은 아닌 듯 한데. 그 렇다면 도대체 뭘까? 예안은 문득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걸 느꼈다. '유니콘은 예안이가 인간이 아니라고 했어… 맞아… 인간이 아니라면…' 만약 유젤이 인간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리고 이제 유젤의 몸에 깃들어 있는 자신 역시 점점 인간다움을 잃어가고 있는 거라면 어느 정도 설명 이 된다. 무수한 사람을 죽여봤을 니콜라스에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건 아마도 전혀 다른 '종족'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일 게다. 동족을 무참 히 학살했다 해서 원숭이가 인간들에게 천륜을 어긴 범죄자라 증오 받지 않는 것처럼… 조금은 끔찍한 상상에 예안은 몸서리를 쳤다.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인 간다움을 조금씩 잃어 가는 자신을 자각할 때마다 운명의 수레바퀴를 부 수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곤 했다. "난… 인간이야." 예안은 힘들게 그렇게 대답했다. 니콜라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정말이야." "진짜?" "진짜야." "그럼 내가 인간이 아닌 거야? 널 아름답다 생각하는 내가 인간이 아닌 거야?" 뭔지 모르겠지만 화가 났다. 예안은 참지 못하고 버럭 외쳤다. "나도 인간이고 너도 인간이야! 넌 지금 제임스 해론이라는 사람이 쓴 책에 너무 빠져 너 자신을 잃어버린 것뿐이라고! 너 아직 13살 밖에 안 됐다며! 감수성이 풍부할 나이에 그렇게 매니아처럼 빠져들면 다른 사람 의 생각을 네 생각인양 착각하게 될 수 있다는 것도 몰라!"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동자, 하지만 부모의 품에서 한창 응석을 부 려야 할 나이에 피로 채색했을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본다 는 건 뭔가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안아줄 수 있어?" "그, 그래." 뭔가 야릇한 분위기에 휩쓸린 예안은 저도 모르게 끄덕였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렸다. "고마워." 니콜라스는 여전히 미소짓지도 않고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 채로 예안 의 품에 가만히 안겨왔다. 예안은 조금 떨리는 손으로 자그마한 어깨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래도 넌 아름다워. 네가 인간인지 아닌지 그건 중요하지 않아. 넌 아 름다워. 정말 아름다워." 자신만이 사랑할 수 있고 아껴줄 수 있는 유젤의 몸을 정체 모를 꼬마애 가 끌어안고 있다는 것 자체가 예안에게는 충분히 화가 날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눈을 살짝 감은 예안은 지금 내가 이러는 건 단지 이상한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러는 것일 뿐, 내일 아침이 찾아오면 다시 또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스스로를 납득 시켰다. "두 번이나 M&A를 시도했는데도 WS사를 흡수하지 못했어. 아이디어나 기 술력만 좋은 줄 알았는데 자금력도 알게 모르게 빵빵한 모양이야." "소문에는 제나르 대신이 WS사의 뒤를 봐주고 있다고 합니다. 정치적 금 전적으로 가리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고 하더군요." "흐음… WS사를 지금 흡수하지 못하면 가까운 시일 내에 기껏 닦아 놓은 시장이 뺏기고 말지도 몰라. 어떻게든 해야 될 텐데…" "잘 되겠지요. 전 회장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자네 아부 실력이 굉장한 걸. 출세하기가 쉽겠어."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비서와 이런 저런 사업 이야기와 농담을 나누고 있을 때 이윽고 차가 별 장 앞에 멈춰 섰다. 앤드류는 비서가 차문을 열어주려는 걸 손으로 제지 하고 자신이 직접 문을 열고 내렸다. "수고했어. 그만 들어가 쉬도록 해." "예. 안녕히 주무십시오." 돌아서던 앤드류는 비서에게 시킬 일이 퍼뜩 떠올라 멈칫했다. "아, 잠깐." "왜 그러십니까?" "제나르 의원에 대해서 좀 알아봐 줘. 출생지나 가족관계, 인맥, 성격, 취미, 하여튼 알아볼 수 있는 건 사소한 거 하나 빼놓지 말고 전부 다 알아봐 줘." 굴지의 사업가 앤드류 회장이 이렇게까지 심각한 표정으로 지시할 때는 필경 무언가 대단한 이유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비서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해." 별장에 들어선 앤드류는 옷을 벗기도 전에 이층 예안의 방으로 향했다. 어차피 늦은 것에 대해 신경 쓰고 있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사 람이니 사과는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을 연 순간 상상도 못한 광경에 그는 굳어버렸다. "어?" 예안과 니콜라스가 다정히 끌어안고 자고 있는 광경을 본 순간 앤드류는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니콜라스가 예안을 좋아해서 졸졸 따라다니고 있 는 사이라 알고 있는 그에게, 니콜라스가 기껏해야 13살 밖에 안 된 꼬 맹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도 13살 때 유서운을 진 심으로 좋아해서 그렇게 졸졸 따라다니지 않았던가? 빠드득- 이를 갈며 서 있던 앤드류는 결국 성인 남자의 추한 모습을 보일 수 없 다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서고 말았다. 나중에 니콜라스가 깨어 난 뒤에 예안 몰래 확실하게 말해두리라는 결심을 굳히면서. "…." 앤드류가 문을 닫고 돌아서자 니콜라스는 살며시 눈을 떴다. 말없이 문 쪽을 쳐다보던 그는 다시 예안의 팔을 베고 누우며 향긋한 체향에 살며 시 몸을 기댔다. "…." 니르가 꼭 안아줄 때하고는 무언가 미묘하게 다르면서도 비슷한 포근한 느낌. 니콜라스는 아마도 처음으로 찾아온 거라 생각되는 행복한 미소를 살짝 지은 채로 눈을 감았다. 다음날 아침, 가슴과 왼팔을 무겁게 압박하는 무게에 잠을 깬 예안은 니 콜라스가 자신의 팔을 벤 채 떡하니 가슴에 팔을 걸치고 자고 있자 기겁 해서 벌떡 일어났다. "뭐, 뭐야! 얘가 왜 여기에 있어?" 비로소 어제 저녁에 이 녀석과 연출했던 그 부끄러운 광경이 생각난 예 안은 창피함에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니콜라스를 흔들어 깨웠다. "야 꼬맹아. 얼른 일어나. 아침이다. 후딱 일어나." "…알았어." 두어 번 흔들자 니콜라스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유젤의 몸을 외 간 남자랑 같이 자게 하다니! 예안은 눈을 질끈 감으며 유젤에게 깊이 사과했다. '미안해 예안아. 내가 실수를 해버렸어. 어젠 그냥 분위기에 취해 그런 거니까 용서해 줘. 응?' 감히 내가 사랑하는 여자와 하룻밤을 같이 잔 이 녀석에게 어떻게 화를 낼까 궁리하던 예안은 문득 언제나 마찬가지로 자신이 상반신을 홀딱 벗 고 있음을 깨닫고 얼굴을 확 붉혔다. 곧이어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 만 차분히 입을 열었다. "니콜라스. 당장 나가 주지 않으련?" 잠이 덜 깬 듯 몽롱하게 고개를 갸웃하던 니콜라스는 피식피식 귀엽게 웃으며 눈치 없는 소리를 했다. "근데 너 잘 때 상의는 다 벗고 자는 버릇이 있어? 자면서 굉장히 갑갑 해하길래 내가 벗겨줬어. 잘했지?" 아마도 크게 화를 내야 할 상황이란 걸 지금을 말함이던가. 예안은 활화 산처럼 터지려는 화를 억누르느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누구 속 터져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나가!"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나가면 되잖아." 니콜라스는 예안이 화를 내는 게 자신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건지, 아니 면 화를 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건지 태평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얼 굴이 잔뜩 빨개진 채로 화를 참고 있던 예안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젠장…" 인간이니 아니니 어쩌니 하는 뭔가 철학적이면서도 영양가라고는 하나도 없는 대화 때문에 괜히 이상한 분위기에 휩쓸려 결국 외간 남자에게 자 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몸을 내주고 만 예안은 분해서 치를 떨었다. 철학 과로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에 굶어죽는다는 소리가 괜히 나온 말이 아 님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 잠깐. 이건 뭔가 아닌 듯 한데? "아! 몰라 몰라. 내가 알게 뭐야." 주섬주섬 옷을 입으며 예안은 앞으로는 절대 조심, 또 조심해야겠다고 깊이 다짐했다. 일층으로 내려온 니콜라스는 자욱한 담배 연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앤드류. 담배는 몸에 좋지 않아. 너뿐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해를 끼 친다." 내가 담배를 피운 게 다 누구 때문인데! 앤드류는 조금 살벌한 눈으로 니콜라스를 노려보았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입장은 아니잖아. 꼬마야. 억울하면 너도 어른되서 맞담배 피우든가." '난 꼬마 아니야!'라는 식의 펄펄 뛰는 반응을 예상했건만 니콜라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오히려 날렵하게 앤드류가 들고 있던 담 배를 낚아채 재떨이에 비벼 끄기까지 했다. 당연히 앤드류는 화를 냈다. "무슨 짓이야?" "여기가 당신 별장인 건 이해하겠지만 담배는 싫어. 누나도 담배 피우는 남자는 굉장히 싫어할 거야. 누나 벌써 일어났으니까 이만 담배는 끄는 게 좋을 듯 해서 껐을 뿐이야. 뭐가 잘못 됐어?" 당당하게 또박또박 대꾸하자 앤드류는 할 말이 없어졌다. 어린아이같은 느낌이 거의 묻어나지 않는 이 녀석을 어떻게 상대하면 좋을지 감이 잡 히지 않았다. "내일 아침 일곱시로 준비됐어. 오늘 미리 준비해 둬." 앤드류가 내뱉듯이 말하자 잠시 어리둥절했던 니콜라스는 이내 비행기 출발 시각이 조정됐음을 깨닫고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그렇지만 한국에 가기 전에 미리 총은 버리고 가라. 거기는 미국하고는 달라서 너 같은 꼬맹이는커녕 성인들도 총기를 가질 수 없는 나라니까." "흐음. 그거 굉장히 무책임한 정책인데." "무책임한 게 아니라 오히려 덕분에 그 나라는 총기 사건 같은 게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굉장히 안전한 나라지." "하지만 자신의 몸을 지킬 자유를 빼앗는다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아. 자 기 몸은 나라가 지켜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고." "난 문명국에서 자기 몸 지킨답시고 총 휘두르는 것만큼 꼴사나운 건 없 다고 생각하는데? 법이라는 게 왜 있고 경찰이라는 게 왜 있냐? 그렇게 자기가 알아서 총 휘둘러가면서 몸 지키는 게 나을 법에야 왜 비싼 세금 들여가며 경찰이나 군대를 만들겠어?" "그건 가진 자들이 정부를 만들고 법을 만들었기 때문이지. 인간은 하루 속히 정부, 법, 국가, 그 모든 걸 없애고 자연 상태로 돌아가야만 해." "너 무정부주의자냐?" 니콜라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다. 그냥 돈 좀 가진 녀석들이 힘도 없는 주제에 법을 내세워 남을 구속하려 드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야. 지금까지 꽤나 많이 혼내주 긴 했지만 그런 녀석들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더라고." 혼내주었다는 건 의뢰를 받아 죽였다는 걸 의미하지만 니콜라스가 킬러 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앤드류는 짐작조차 못했다. 그저 지금 자신 이 대화하는 상대가 정말 13살 밖에 안 된 꼬맹이가 맞는지 아닌지 갈팡 질팡했을 뿐이었다. "너랑 이야기하고 있으면 머리가 다 아프다. 네 부모님이 도대체 너를 어떻게 키웠길래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없는 거니?" "난 부모 같은 건 없어. 혼자야."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을 건드렸다는 걸 깨달은 앤드류는 미안한 표정 을 지었지만 정작 본인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단지 잃어버 린 자신의 과거를 그리워하고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원했을 뿐, 아무런 느낌도 없는 부모는 애초에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윽! 무슨 담배 연기가 이렇게 지독해!" 이층에서 내려오던 예안은 아직도 냄새가 빠지지 않은 담배 연기에 얼굴 을 찡그렸다. 이게 다 자신이 니콜라스와 같은 침대에 자는 광경을 보고 나서 앤드류가 끓어오르는 노기를 달래며 뿜어낸 담배 연기라는 건 꿈에 도 몰랐다. "누나. 비행기 출발이 내일로 잡혔대. 그러니까 오늘 저녁에 떠날 준비 해 둬." 앤드류 앞이라 그런지 니콜라스는 자연스럽게 누나라 불렀다. 어떤 면에 서 보자면 프로 정신이 투철하다고나 할까? "떠날 준비고 자시고 간에 할 게 뭐 있어? 그냥 몸만 뜨면 되는 거지." 묵묵히 예안을 쳐다보던 앤드류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누나. 누나는 아직 왜 제나르 의원이 누나를 납치했는지 말해주 지 않았어. 정말 안 말해줄 거야?" 시트날타에 관해서 앤드류에게 말해줄 생각도 이유도 없었던 예안은 딱 히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난처하게 볼만 긁적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회장님. 절 좋아한다고 하셨죠?" 또 존대를 하는 거냐고 울컥하려던 앤드류는 꾹 참고 고개를 살짝 끄덕 여 보였다. "그렇다면 묻지 말아주세요. 대답해드릴 수 없는 내용이거든요. 그리고 이건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알아서 하시겠지만, 절대로 저에 관해서 다 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선 안 돼요. 만약 제나르 의원의 귀에 들어가 면 전 또다시 위험에 처하니까요." "한국에 가면 안전한 거야?" "안전해요. 이번에 잡힌 건 어쩌다 실수해서였을 뿐이지, 사실 제나르는 제 본명도 모르는데다가 제가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도 몰라요. 그 저 어떤 일 때문에 잠시 한국에 방문했을 거라고만 알죠." "흐음…" 어째서 제나르 같이 남부럽지 않은 인간이 예안을 납치해서 감금까지 했 는지 사뭇 궁금했지만 본인이 말해줄 수 없다는데 더 따지고 들어서 무 엇하겠는가. 앤드류는 어제 저녁에 제나르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 던 비서가 가능하면 쓸만한 정보를 물어다 주기를 기대하며, 다시 예안 에게 말했다. "그런데 누나. 정말 나한테 존대 붙일 거야? 나 진짜 섭섭한데." 앤드류가 못내 서운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예안은 조금 양심이 껄끄 럽긴 했지만 더 이상 그가 자신에게 접근하는 걸 원치 않았기에 일부러 표정을 냉랭하게 했다. "정말 죄송하지만 전 당신과 가급적이면 얽히고 싶지 않거든요. 전에 말 씀드리지 않았어요? 전 남자가 절 좋아하는 게 소름끼치도록 싫다고요." "알긴 하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네."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니콜라스는 어째서 예안이 저렇게 배짱 있게 밀어붙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간에 자신들은 지금 앤드류의 도움을 얻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호의를 베푸는 사람에게 저렇게 함부로 굴어도 되는 건가? '조금쯤은 상냥하게 대해줘도 좋을 텐데 말이야. 적어도 한국에 돌아가 기 전까지는.' 자신도 꽤나 건방지고 딱딱하게 앤드류에게 대했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어린 킬러의 생각이었다. 뜨거운 태양을 지고 있는 번화가의 거리는 젊은이들의 활기가 가득 넘쳤 다. 그러나, 햇빛을 받으면 파랗게 변하는 머리카락을 커다란 모자 속에 감춘 채 선글라스까지 끼고 커피샵 야외 테이블에 앉아 거리를 구경하던 예안은 과연 이렇게 느긋하게 놀고 있어도 되는 건지 하는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 "젠장.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악의 소굴에서 도망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 한국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이렇게 느긋하게 놀아도 되는 거야? 게다가 내일이면 비행기 타고 떠야 되는데 이게 도대체 뭐냐고?" 검은색 반바지와 흰 티셔츠를 입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니콜라스가 담담 하게 말을 받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마음 편하게 구경이나 해. 만약 제나르 의원이 널 잡으러 사람들을 보내면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해줄 테니까. 오 억 달 러나 받는데 그 정도 일처리도 제대로 못할까봐 겁내는 거야?" "…솔직히 널 보면 별로 믿음이 안 가. 네가 어딜 봐서 뒷세계 청부업자 야? 완전히 TV 아역 스타처럼 생겼는데." "너도 영화배우 못지 않게 매력적인 암컷이야." "죽을래! 또 암컷이냐!" 사람 혈압을 높여 죽이려고 작정한 건지 말끝마다 '암컷'이란 단어를 붙 이는 니콜라스의 무신경함에 예안은 치가 떨렸다. 그런 말을 쓰면 사람 이 불쾌해한다고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니콜라스는 '어째서?'라고 순 진한 아이가 되묻듯 반박해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13살이었지…' 볼을 긁적이며 니콜라스의 귀여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예안은 얄궂 게도 이런 부분에서 그가 평범한 13살짜리 꼬마애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근데 정말 쟤 믿을 수 있을까? 중현 아저씨가 뭔가 잘못 알고 고용한 거 아냐? 저렇게 약하게 생겼는데 도대체 무슨 재주로 시트날타로부터 날 보호해준다는 거지?' 한 번 테스트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든 예안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마음에 드는 걸 찾아냈다. 발 밑에 떨어져 있던 손가락 크기 만한 돌멩이를 주워든 예안은 인형처럼 아무 표정 없이 자신을 물 끄러미 쳐다보기만 하는 니콜라스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너 이거 부술 수 있냐? 있으면 한 번 부숴 봐." "이걸 부수라고?" 지금 예안이 자신을 시험하려 든다는 걸 모르는 니콜라스는 호기심을 보 이며 돌멩이를 받았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손가락에 가볍게 힘을 주자 돌멩이는 이내 산산조각 나 가루가 후두둑 떨어졌고, 설마하니 이 렇게 무식하게 힘이 셀 줄 몰랐던 예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 굉장히 힘세구나! 몰랐어! 대단해!" 예안이 굉장히 감탄하자 니콜라스는 뭔가 머쓱하면서도 야릇한 기분을 느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기분을 가리켜 '우쭐하다'라고 말하지만 태 어나서 처음으로 그것을 겪어보는 니콜라스에게는 생소한 느낌이었다. 그때 가게 안에서 앤드류가 커피 세 잔이 담긴 쟁반을 가져오며 예안에 게 물었다. "누가 힘세다는 건데?" "이 녀석이요! 이 녀석 굉장히 힘세요! 아 글쎄 제가 준 돌멩이를…" 다소 흥분한 채 앤드류에게 니콜라스의 괴력에 대해 말하려던 예안은 그 가 그만하라는 눈치를 보내오자 말을 멈췄다. 니콜라스는 앤드류에게 자 신의 정체에 대해 알릴 생각이 없다는 걸 그제야 기억해 낸 예안은 머쓱 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며 얼버무렸다. "하여튼 굉장히 힘세요. 네… 힘세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앤드류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커피잔을 두 사람에게 돌렸다. 자신의 눈앞에 놓인 커피잔을 신기한 동물 보듯 물끄러미 쳐다보던 니콜라스는 앤드류가 자리에 앉자 덤덤한 말투로 물었다. "그런데 앤드류. 우리는 지금 쫓기고 있는데 이렇게 한가하고 돌아다녀 도 되는 거야? 막말로 지금 제나르 부하들이 먼 곳에서 우리를 몰래 감 시하고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언제는 나보고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맘 편하게 놀라면서…'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만약에 대비해서 사복 차림으로 내가 고용한 보디가드 수십 명이 지금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 말에 예안이 재빨리 주위를 돌아보자 앤드류는 재차 덧붙였다. "그렇다고 찾아볼 생각은 하지 마. 어차피 변장을 해서 누군지는 알아보 지 못할 테니까." "31명 아니야?" 니콜라스가 덤덤한 말투로 정확히 맞추자 앤드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찍었어. 내가 원래 찍기는 참 잘해." "아… 그래?"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니콜라스의 진짜 정체를 전혀 눈치 못 챈 앤드류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사실 가녀린 체격과 귀여운 얼굴을 보고 니콜라스가 뒷세계의 청부업자라 추리하는 건 정신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상상력이 풍부한 녀석들이나 할 수 있는 짓이었다. '우리를 몰래 지켜보고 있는 녀석들이 총 31명… 살기가 없는 걸로 봐서 앤드류가 말한 보디가드들이 분명해. 제나르가 보냈을 거라 짐작되는 녀 석들은 느껴지지 않네. 아니면 내 감각이 닿지 않는 아주 먼 곳에서 관 찰하고 있는 걸까?' 니콜라스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는지 호의 를 품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말 고도 다른 사람들 전부 다 가능한 줄 알았지만, 니르는 그게 아니라 오 로지 자신만이 그렇다고 설명해주었다. 바로 이 능력과 사람 같지 않은 굉장한 괴력, 그리고 뛰어난 동체시력과 반사신경 덕분에 뒷세계 청부업 자로서 그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있잖아요. 앤드류 회장님." 앤드류는 예안이 자신에게 거리를 두기 위해 존대를 쓰는 게 쓰라렸지만 꾹 참았다. "왜?" "만약에 말이에요. 뉴욕에 핵폭탄이 터진다면 미국은 어떻게 될까요?" 한창 순수함에 젖어 있을 여고생의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거리감이 있는 질문에 앤드류는 잠시 당황했다. "에… 아마도 미국 경제가 한순간에 붕괴되겠지. 음…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미국은 망하고 말 거야. 가뜩이나 요새 들어 경제적으로 많이 흔들리는 판인데 뉴욕이 붕괴되 면… 아, 그렇지만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까 깊이 생각하지는 마." 니콜라스가 끼어 들었다. "그걸 어떻게 단정할 수 있어?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미친 녀석이 미국에 핵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다 생각 해? 한때 미국을 핵폭격한다느니 어쩐다 하던 AOS도 결국은 미국의 대 테러 정책에 두손 들고 영영 숨어버리고 말았잖아." "꼭 AOS같은 녀석들만 미국에 핵을 떨어뜨릴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예를 들면 미국 미사일 기지가 고장나서 뉴욕에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거 아냐?" "넌 꼭 뉴욕에 핵이 떨어졌으면 하길 바라는 것 같다?" 앤드류는 불편한 심리를 애써 감추며 그렇게 물었지만 니콜라스는 어물 쩍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미국은 언젠가 핵을 맞고 말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해?" "내가 볼 땐 미국은 마치 핵을 맞기 위해서 발악하고 있는 것 같아. 사 실 지금까지 미국이 해왔던 일을 전부 다 합치면 충분히 핵을 맞아도 싸. 아니, 언젠가 반드시 핵을 맞고 말 거야." 다른 꼬마애가 이런 말을 했었더라면 13살짜리 꼬마애가 아무것도 모르 고 그냥 하는 소리에 불과할 거라 웃으며 넘길 수 있을 테지만, 어린애 다운 느낌이 전혀 묻어나지 않는 니콜라스일 때는 경우가 틀리다. 물론 니콜라스가 미국에 핵을 떨어뜨리려고 작정한 매드사이언티스트 따 위가 아닐까 하는 미친 상상보다는, 이렇게 어린 아이가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성장한다는 것에 대한 안쓰러움 때문이었다. 예안은 그 두 사람에게 신경을 완전히 끈 상태였다. '연인들이 참 많네.' 예안은 심심해서 던진 질문에 앤드류와 니콜로스가 얼굴이 빨개질 정도 로 목소리를 높여 말다툼을 하는 것도 내버려둔 채, 턱에 팔을 괸 채 물 끄러미 주변 연인들의 다정한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영어가 약하기에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표 정과 행동만 봐도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옆 테이 블에 다정히 앉아 있는 한쌍의 다정한 모습에 예안은 마음속에서 뭔가가 울컥하는 걸 느꼈다. "누나? 왜 그래?" 이상함을 느낀 앤드류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어오자 예안은 황급히 고 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정한 연인들의 모습에 심한 질투를 느꼈다는 말 따위는 그 누구에게도 하고 싶지 않았다. 변덕스러울 정도로 기분이 착잡하게 가라앉은 예안은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예안아…' 만약 유젤이 살아 있고 자신 역시 여전히 남자였다면 다정한 연인들 못 지 않게 안심하고 마음껏 사랑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괜히 화가 났다. 이렇게라도 유젤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에 신에게 감사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미미한 '양심'이 쓸데없이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막았을 뿐이었다. "…." 무심한 눈빛으로 예안을 지켜보던 니콜라스는 자리를 옆으로 옮겼다. 그 리고 조그만 손으로 예안의 손을 맞잡으며 속삭였다. "좋아하는 사람 생각이라도 하는 거야?" "…." "실연 같은 걸 당한 거라면 그냥 잊어버려. 넌 어떤 남자든지 목을 멜 정도로 매력적인 암컷이잖아?" 지금 그걸 위로라고 하는 거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예안은 꾹 눌러 참으며 니콜라스에게 귓속말했다. "너 바보냐? 이럴 땐 그냥 내버려두는 게 제일 좋은 거라구." "하지만 니르는 여자가 고민하고 있을 땐 아무 상관이 없는 사이라 해도 가서 위로해줘야 한다고 했어. 그래야 매력적인 수컷이 될 수 있다고." "내 성격은 남자에 가까워서 그럴 땐 그냥 혼자 내버려두는 게 제일 좋 은 거야. 알았냐?" 덤덤한 눈빛이었지만 니콜라스가 속으로 조금 혼란스러워한다는 걸 어쩐 지 느낄 수 있었다. 도움이라고는 하나도 안 될 풋풋한 위로였지만 예안 은 기분이 조금 나아진 채로, 이제 영원히 볼 수 없는 유젤의 순진하고 풋풋한 미소를 떠올렸다. '네가 있는 곳은… 따뜻할까?' 천국이라는 게 정말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네가 거기서 날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예안은 그리움으로 차갑게 가라앉은 가슴을 어루만지 며, 그렇게 무기력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세 사람 중에서 커피를 마신 사람은 앤드류뿐이었다. 니콜라스와 예안은 약속이라도 한 듯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올해 51살이 된 야당 총재 김두오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신문 기사 를 들여다 보다 결국 치밀어 오르는 노기를 참지 못하고 탁자에 거칠게 내리쳤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미쳤어! 국민들은 미쳤어! 어떻게 그깟 무 기 하나 사는데 유전을 송두리째 내줄 생각을 다한단 말인가!" 신문이나 TV 방송을 포함하여, 한국의 모든 언론은 한결같이 맥의 소유 자로 알려진 샘슨 유젤에게 유전의 소유권이 넘어간다는 사실을 다루고 있었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었다. 전세계에서 유일한 자원 보고인 인천 유전이 알려지지 않은 일개 개인에게 넘어간다는 건 굉장히 파격적인 관 심거리였다. 앤드류 왕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세계 제일의 거부가 탄 생하는 것이었다. FIRE-3 요격 테스트가 끝나고 한국은 대국민 투표를 부쳤다. 그리고 무 려 91%라는 압도적인 수치로 맥을 구입한다고 결정이 났다. 한국인이라 면 누구나 기뻐하고 또 염원하던 핵의 보유와 마찬가지인 효과를 얻게 될 테지만, 유전을 아예 송두리째 넘긴다는 건 김두오 의원의 입장에서 는 돌아버릴 일이었다. "미쳤어! 국민들은 미쳤어!" 화를 참지 못한 김두오가 신문을 쫙 찢어버리자 손을 모으고 서 있던 비 서는 마치 자신이 잘못하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숙이며 어쩔 줄을 몰 랐다. "의원님, 진정하십시오. 국민들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했겠지요." "하? 생각? 생각이 있는 국민들이 이따위 짓을 하나? 유전이 어떤 건데! 그게 어떤 건데! 우리나라가 이만큼이나 떵떵거릴 수 있게 된 게 다 그 유전 덕분인데, 그깟 변신 장난감 하나 사는데 통째로 넘긴단 말인가!" 맥을 하찮은 변신 장난감 취급하는 건 비서의 입장에서도 좀 껄끄러운 일이었지만 김두오의 신경을 더 자극했다가는 초상을 치를 지도 모를 일 이다. "아아… 나라가 망해 가는 건가…" 폭발하는 화산처럼 솟구쳐 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던 김두오는 이윽 고 화를 내기도 지쳤는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얼굴을 가리며 털썩 주저 앉았다. 비바람에 꿋꿋이 버티며 어린 묘목들을 보호하던 거목이 마침내 모든 힘을 잃고 쓰러지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던 비서는 애써 소용 없는 위로를 건넸다.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쨌거나 맥은 사상초유의 무한동력 발전장치로도 쓸 수 있지 않습니까?" "자네는 무한동력이라는 개념을 정말 믿는 겐가?" "서울대 물리학과 이병원 교수하고 많은 전문가들이 그렇게 보증했으니 아마도 그럴 테지요. 설마 정부가 그런 미묘한 사안에 대해 함부로 은폐 하거나 왜곡했을 리가 없잖습니까?" "후. 무한동력인지 뭔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그게 한국에 당장 필요한 건 아니란 말이야." 일반 국민들과 다르지 않게, 눈앞의 커다란 케이크에 흠뻑 취해 자신이 그걸 전부 다 먹을 수 없다는 것도 망각한 채 달콤한 상상에만 젖어 있 는 개마와도 같은 비서의 대답은 김두오의 한숨을 자아냈다. "그래. 그 초전도 물질인지 뭔지가 개발된다면 아마도 유라시아 대륙 전 체에 전기를 수출할 수 있겠지. 하지만 생각해보게. 지금 초전도 물질이 개발되었나?" "아직 개발되진 않았지만 언젠가는…" "그 언젠가라는 게 도대체 언제 찾아오는 건가?" 말문이 막힌 비서가 눈알을 굴리며 적당한 대답을 궁리하자, 김두오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냉정하게 말해서 지금 우리나라에 있어 맥이라는 건 핵미사일 정도의 의미밖에 되지 않아. 초전도 물질이 개발된다 해도 유라시아 대륙의 무 수한 나라들과 송전 계약을 체결하는데 드는 시간과 비용, 그리고 송전 용 전설을 가설하는데 걸리는 기간이나 그 금액은 일단 제쳐두고서라도, 과연 그 어떤 나라가 우리나라한테 전력을 사려고 하겠나? 전기라는 건 말일세, 식량이나 마찬가지, 아니 식량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걸세. 만약에 우리한테 모든 전력을 의존하다가 사이가 틀어졌을 때 일 방적으로 끊어버리면 피해를 보는 건 그들이니까." 김두오는 잠시 한숨을 쉬었다 다시 덧붙였다. "항상 우리 눈치를 봐야 할 텐데 과연 그들이 그걸 원하겠나? 딱히 전력 을 생산할 수 있는 방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사상초유의 굉장한 무기를 구입한다는 환희에 들떠 미처 그런 부분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비서는 대국민 투표에서 자신도 맥을 구입하는 쪽으로 표를 던졌다는 것에 대해 비로소 부끄러워했다. "그렇군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일부 지식인들은 그런 부분을 우려해 대국민 투표가 시작되기 전부터 여러 방면으로 국민들에게 알리려 했지만 워낙에 광적으로 맥을 숭상하 는 분위기라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 우리나라 국민들이 핵을 얼마나 갖고 싶어하는지는 사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네만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 랐네." 김두오의 말을 듣고 냉철히 생각해본 비서는 과연 한국민들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맥을 갖는다는 건 핵무장을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고 또 오랫동안 염원해왔던 핵무장을 갖춘다는 건 굉장 한 일획이었지만, 그것을 대가로 연간 45조 달러의 막대한 금액을 벌어 들이는 유전을 넘긴다는 건 어마어마한 사치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5년 전 유전이 솟은 이후로 우리나라 금융기관의 채권 이율은 0%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달성했지. 대기업, 중소기업, 벤처 기업 등 가릴 것 없 이 국가의 막대한 투자가 집중되었고 결국 몇 년도 안 되는 사이에 우리 나라 기업들은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어. 전체적인 규모로 보자면 카를로 스보다는 약한 유한전자나 중원전자도 극소형 반도체 제조 기술이나 프 로그래밍 기술 등 핵심적인 면에선 오히려 카를로스를 능가하고 있지 않 은가? 우리나라 기업들이 그렇게 성장한 건 전부 다 유전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네." 비서는 심각한 표정으로 김두오의 말을 듣고 있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학에 가면 중국어와 영 어는 필수로 배워야 하고 일본어까지 배워야만 간신히 출세의 토대를 마 련할 수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외국어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이미 바닥까지 떨어진 데다가 오히려 다른 나라 학생들이 우리나라 대학 을 오려고 하고, 우리나라 말을 배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우리나라 기업 에 취직하려고 안달이지 않은가?" "그렇지요." 김두오의 말대로 유전에 의한 막대한 자금력으로 온갖 혜택을 받은 한국 기업들은 5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질적인 면이나 양적인 면에서 세계 최고의 위치에 올라섰다. 더 이상 한국인들은 외국어를 배우기 위 해 머리를 싸맨 채 이어폰을 귀에 꽂고 단어를 암기하며 문법을 파고들 필요가 없었다. 세계의 두뇌들이 한국의 대학에 오기 위해 안달이었고,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한국 기업에 취직하기를 원했다. 그게 전부 다 유전에서 나온 자금 을 효율적으로 이용한 윤종기 대통령과,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김영환 대통령의 뛰어난 센스 덕분이었다. "그런 어마어마한 돈덩어리가 일개 개인한테 넘어간다고 생각해 보게. 당장은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겠지만 장기적으로 우리나라는 서서히 국 가 경쟁력을 잃어갈 거야." "그거 굉장히 심각하군요. 그렇다면 맥을 사지 말았어야 하는 걸까요?" "맥을 사지 말았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야. 맥 역시 우리나라에게 꼭 필요한 무기였어. 하지만 너무 지나친 대가를 치렀다 이거지. 제아무리 무한동력인지 뭔지 하는 동력기관을 갖고 있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눈앞의 커다란 이익에 취해 자신이 그것을 소화할 수 없음을 깨닫지 못 하고 덜컥 맥을 사버린 국민들의 무모함에 한탄하던 김두오는 무거운 몸 을 일으켰다. 베란다로 간 그는 집 뒤에 위치한 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땀방울에 맺힌 한숨을 씻어 가는 걸 느끼며, 착잡한 표정을 다소 누그러뜨렸다. "대통령을 만나 정식으로 따져야겠어. 어떻게 이런 무책임한 일을 벌일 수 있는지 말이야. 약속을 잡아주게." "알겠습니다." 자신과 같은 초중고등학교를 나오고 같은 대학교를 졸업해 거의 동시에 정계에 진출했지만 한국 권력 최고위 자리까지 오른 친구의 얼굴을 떠올 리며, 김두오는 다시금 착잡해진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자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덜컥 사버렸나? 설마 그 사이에 바보가 되기라도 한 건가?" 총명했던 그 친구가 설마하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지금 심정으로는 그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해도 충분히 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앤드류, 니콜라스와 함께 뉴욕 시내를 이리저리 구경하고 난 뒤 지친 몸 으로 별장으로 돌아온 예안은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원래 돌아다니는 걸 싫어했기에 뉴욕 관광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탓도 컸다. "미국이라고 해서 뭐 별로 대단한 건 없잖아? 그냥 머리가 노란색인 사 람들이 많이 돌아다닌다는 것 정도? 피부도 다들 하얗고…" 침대에 털썩 엎어진 채 중얼거리는 예안을 쳐다보던 니콜라스가 말을 받 았다. "너도 피부는 하얀색이잖아. 머리카락도 좀 어두워져야 검은색으로 변하 고, 또 빛에 따라 여러 색으로 변하기도 하고 말이야. 그런 면에서 볼 때 넌 순수 한국인은 아닌 것 같아. 아니, 너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 람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어. 너 혹시 돌연변이나 뭐 그런 거 아니 야?" "몰라. 하여튼 머리카락 속에 발광물질이 들어 있어서 그런 거니까 그렇 게 알고 있어. 그런데 너 언제까지 자꾸 나한테 너라고 그럴 거냐? 너 13살밖에 안 됐다며? 난 17살이라고." 살아가는 동안 절대 볼 일이 없을 것 같았던 암흑세계 청부업자라는 직 업에 대한 신기함과 호기심에 눌려, 여태까지 니콜라스가 자신에게 친구 대하듯 반말하는 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확실하게 해 둘 생각이었다. "앤드류 회장 앞에선 나보고 잘만 누나라고 부르잖아. 앞으로는 단둘이 있을 때에도 나보고 너라고 하지 마. 나이도 4살이나 어린 녀석한테 그 런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니까." "앤드류 앞에서는 철없이 연상의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애 연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잖아. 내가 청부업자고 한국 정부의 의뢰를 받아 널 보 호하고 있는 중이라는 건 앤드류한테는 비밀이니까." "그럼 넌 너보다 나이 많은 사람한테 막 반말하고 그래?" "여기는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야. 존대라는 개념이 없어. 너도 그건 알 잖아?" 니콜라스가 자신에게 연장자 취급을 해주지 않은 건 버릇이 없어서 혹은 건방져서가 아니라 존대라는 개념이 없는 나라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 이라는 걸 비로소 깨달은 예안은 조금 떨떠름했다. "그래도 한국어를 쓰고 있을 땐 연장자 취급하란 말이야. 그게 바로 예 의라는 거 몰라?" "그러길 원한다면 그렇게 해줄게.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너무 손쉽게 승리를 따내자 예안은 오히려 맥이 빠졌다. 니콜라스에게 '내가 왜 존대를 해야 돼!'라는 식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귀엽게 반항하 는 모습을 기대하는 건 역시 무리였나 보다. "근데 누나. 사실 조금 궁금했는데 누나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길래 한국 정부가 오 억 달러나 되는 거금을 주면서까지 구출하고 싶어하는 거야? 아무리 실력이 좋다지만 나 같은 암흑세계 청부업자에게 의뢰를 하면서 까지 말이야." "아, 그건…" 내가 이 세상에 다시없을 천재고 또 맥을 만든 사람인 데다가 유일하게 맥을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면 감정이 결여된 듯한 니콜라스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그건 가능하면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할 비밀이었다. 그리고 몇 가지 사실은 어마어마 한 뻥이었고. "…사실 내가 좀 돈이 많거든. 그래서 그런 거야…" 거짓말을 한다는 게 내심 찔리기는 했지만 어차피 유전이 손에 들어오면 진실이 되니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안은 니콜라스가 자신의 대답을 듣고 나서 역시 다른 비밀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판단할 줄은 미 처 몰랐다. '김중현이라는 남자는 이 여자가 한국 고위 인사의 딸이라고 했는데 이 여자는 다른 대답을 하니… 둘 중의 하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네. 돈이 많거나 중요 인물의 딸이라는 걸 굳이 속일 필요는 없을 테니까. 역시 다른 비밀이 있는 걸까?' 의뢰인의 신상을 묻는 건 불문율이었지만 니콜라스는 예안에 대한 걸 좀 더 알고 싶은 욕구를 떨치지 못했다. 갓 태어난 아기가 하나둘씩 알아 가는 신기한 장난감에 강한 호기심과 소유욕 그리고 흥미를 보이듯이, 그도 예안과 만나고 난 뒤 굳게 잠겨 있던 상자가 하나 둘씩 열리듯 새 롭게 접하는 여러 가지 감정들에 흠뻑 취한 상태였다. 그때였다. 예안은 니콜라스가 손에 쥐고 있던 책에 흥미를 보였다. "제임스… 해론? 책제목이… Termination theory? 종료 이론? 종결 이 론? 무슨 책이름이 그래?" "종말론이라고 해석하는 게 가장 자연스러울 걸." "아, 종말론… 그것도 제임스 해론이 쓴 거지?" "어." "근데 무슨 책제목이 그래? 꼭 사이비 종교 전도사들이 세상이 곧 멸망 하니 신에게 매달려서 구원을 찾으라고 외치고 다니는 것 같네. 네가 좋 아한다는 제임스 해론이라는 사람 그런 인물이었냐? 무슨 면죄부를 파는 교단도 아니고…" "그런 삼류급 책이 아니야. 제임스 해론은 이 책에서 신을 믿으면 세상 의 종말이 다가왔을 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기성 농후한 말을 끄적 거린 게 아니라, 인간이 종말을 맞이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고찰을 다루 고 있어." 조금 섬뜩하게 느껴지는 주제에 예안은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인간이 종 말을 맞아야 한다는 명제에 딱히 거부감이 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생 각을 갖고 있는 인물이 있다는 게 굉장히 의외였다. 니콜라스는 책을 펼쳐든 후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물론 영어를 모르 는 예안을 위해 한국어로 번역해서 읽어주었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후 수백 년 동안 인간은 급속도로 환경을 오염시키 고 지구를 병들게 했다. 석유와 기계를 다룰 줄 몰랐던 고대의 인간들은 지구상의 어떤 생물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긴 했어도 그건 먹이 피라미드 의 최상위 층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 동차와 비행기, 선박, 그리고 각종 첨단 무기가 주는 안락함과 편리함에 취한 인간들은 이제 먹이 사실의 고리를 끊고 먹이 피라미드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모든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 그들은 피라미드를 근본부터 무 너뜨리려고 하고 있다." "흠." "종말에 대한 건 이미 오래 전부터 지구상에 떠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종 교인들은 신을 믿으면 종말의 순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들은 종말을 편안히 받아들이거나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난 이런 행위야말로 인간의 더러운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본다. 이미 인간들은 수백 번, 수천 번, 수억 번의 종말을 받아도 할 말이 없 을 정도로 엄청난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인들은 기도 몇 번 올리거나 예배 몇 번만 나가면 그것을 피할 수 있을 거라 말한다. 이 얼 마나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행동이란 말인가? 그들은 정녕 인간이 지구에 끼친 해악이 그렇게 간단한 짓거리로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인간은 종말을 맞아야만 한다. 깨끗하고 순결 한 천사 수 억 명을 재물로 바친다 해도 씻어질 수 없을 정도로 더러운 죄는 이미 지구 전체에 뿌려지고 난 뒤다." 제임스 해론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인간에게 극렬한 실망을 느끼고 저 책 을 썼는지 예안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간이 지은 죄, 그것에 대한 용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인간은 용서받 을 수 없는 종족이다. 용서받아선 안 된다. 그들이 지은 죄를 유일하게 씻어줄 수 있는 건 오로지 종말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반드시 종말을 맞아야만 하는 것에 대해 내가 내세우는 가장 큰 이유다." 여기까지 읽은 뒤 니콜라스는 책장을 덮었다. 그의 표정은 약간 들떠 있 었다. "제임스 해론은 너무 솔직해. 그의 저서를 읽다 보면 어느새 모든 걸 잊 어버리고 정신 없이 빠져 탐독하고 있는 날 발견하게 돼." "그를 굉장히 좋아하는가 보네?" "그건 모르겠어.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난 그의 모든 걸 이해하고 있어. 그가 말하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 어. 다른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 옹호하는 쪽이라 해도 기껏 해야 어느 정도, 혹은 부분적으로 공감할 뿐이야. 하지만 난 달라. 난 완벽하게 그의 전부를 공감할 수 있어." 13살의 어린 소년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비관적인 저서를 보며 열광하고 또 작가에게 목메는 것에서 예안은 심각한 어긋남을 느꼈지만, 조금 전 니콜라스가 읽어주었던 부분에서 부정도 공감도 옹호도 비난도 그 무엇 도 느끼지 않는 자신에 대한 이질감의 색채가 더 강했다. 그 책이 인간 의 본질과 가치에 대해 굉장히 충격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아무런 흥미를 보이지 않는 건 이상하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예안은 이때에 자신이 인간다움을 상당히 많이 잃 어버린 걸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제임스 해론의 「종말론」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엄청난 판매부수를 올린 데다가, 이 책을 읽고 난 뒤 상당수의 비관론자들이 자신은 인간이 기에 세상을 살아선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자살했다는 걸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얼마 후의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예안과 니콜라스는 앤드류의 안내를 받아 공항 으로 갔다. 공항에 와서야 앤드류가 여객기 하나를 통째로 전세 냈음을 안 예안은 조금 떨떠름했다. "역시 세계 제일의 부자는 돈이 썩어나는구나. 비행기 하나를 통째로 빌 리다니… 그것도 대여 전용이 아니라 여객기를…" 니콜라스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빌린 게 아닐 걸? 이 항공사는 이카루스의 계열사 중 하나니까 빌릴 필 요도 없지. 회사 회장이 쓴다는데 감히 누가 토를 달겠어?" "…그런 거냐? 젠장, 더 부럽잖아." 앤드류가 지닌 힘을 자각할 때마다 예안은 왠지 비참해지는 자신에 대해 한심함을 느끼고 또 기가 죽었다. 이제 유전을 받으면 자신은 그보다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을 테지만, 따지고 보면 맥을 얻은 건 단지 운이 좋 아서였지 자신의 순수한 능력이 아니지 않은가? 그때 저쪽에서 직원하고 이야기를 하던 앤드류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이야기가 다 끝난 모양이었다. "준비 다 됐어. 이제 비행기에 타면 돼." "…알았어요." 약간 풀죽은 듯한 예안의 목소리에 묘한 경계가 깃들였다는 걸 느낀 앤 드류는 조금 어리둥절했다. "누나, 왜 그래?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전에도 말했고, 또 누누 이 말해왔지만 제발 그 누나란 소리는 달나라에다 버려줬으면 좋겠네요. 돈이 많으시니 달나라 여행은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그저 희미하게 웃기만 하는 걸로 봐서 앤드류가 자신을 누나말고 다른 말로 부르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았다. 그냥 팔자려니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는 건 굉장한 비참하다. "!!" 그때였다. 여객기를 향해 한 발자국 옮기려던 니콜라스는 흠칫하고 발을 멈췄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송곳처럼 예리한 자신의 신경을 강하게 자극 하는 기운이 있었다. '누구지? 어디야? 어디 있는 거야?' 분명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 하지만 막연히 노린다는 것만 알뿐 그 수가 몇 명이고 또 어디쯤에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던 니콜라스는 당혹한 표정으로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그의 이 마 가득히 초조함이 번져 나갔다. '어디야? 어디 있지?' 니콜라스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예안은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곧 이어 시트날타가 어디선가 노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니콜라스…" "걱정마. 날 믿어." 예안은 저도 모르게 니콜라스의 작은 어깨를 잡으며 겁먹은 눈동자로 주 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래도 많은 돈을 주고 고용한 니콜라스가 의지가 되는 걸까. 아직까지도 적의 위치를 잡아내지 못한 니콜라스는 당혹함을 지우지 않은 눈동자로 두리번거렸다. 앤드류만이 두 사람이 갑자기 왜 불안해하는지 몰라 당황했을 뿐이었다. "두 사람 왜 그래?" 니콜라스는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나르 의원이 보낸 녀석들이 지금 우리를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어. 당 신도 조심하는 게 좋아. 저격을 할 지도 모르니까." 앤드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격을 할 지도 모른다고? 그럼 빨리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지 않 아?" "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여기 있는 게 더 유리해. 어차피 녀석 들은 누나에게 총을 쏠 수 없을 테고, 또 나한테 쏴봤자 아무 소용없으 니까." "너한텐 소용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니콜라스는 짜증스런 표정으로 앤드류의 등을 떠밀며 외쳤다. "당신은 빨리 들어가! 당신까지 안전하다 보장할 순 없으니까!" 앤드류도 지지 않고 외쳤다. "네가 어떻게 녀석들이 노리고 있는 걸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혼자 피할 순 없어! 누나와 너도 같이 피해!" "방해되니까 어서 피… 거기구나!" 목청을 높이던 니콜라스는 비로소 적의 위치를 잡아내고 희색이 되어 주 머니에서 권총을 꺼냈다. 번개처럼 앞으로 내달린 니콜라스는 흰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침입자를 향해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겨누었다. 핑! 핑! 핑! 흰 연기를 둘러싼 격발음을 뚫고 날아간 총알은 적을 맞추지 못하고 공 기를 찢으며 시멘트 기둥에 박혔을 뿐이었다. 날렵한 움직임으로 총알을 피한 남자는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순식간에 형성된 푸른빛은 파괴의 기 운을 넘실거리며 니콜라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또 이거야?" 귀찮다는 표정으로 가볍게 피하던 니콜라스는 빛이 빠른 속도로 자신을 쫓아오자 조금 당황했다. 잠시 움직임을 멈칫한 사이 푸른빛은 니콜라스 의 오른쪽 어깨에 맞았다. 공기가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어깨 부분의 옷이 너덜너덜해졌다. 하지만 상처 하나 나지 않았기에, 니콜라스를 공 격한 남자는 다소 놀란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그러나 그 놀람은 이내 묘한 기쁨으로 바뀌었다. "설마했는데 정말 에날도스가 통하지 않는군. 역시 엘리우스인가?" 상대가 누구며 왜 습격했는지를 묻는 건 힘의 격차가 아주 현저하거나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 때만 하는 것. 상대방의 신기한 능력이 자신 에게 타격을 주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기에 니콜라 스는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핑! 핑! 핑! "이크, 이렇게 거칠게 나오면 위험하지. 엘리우스, 잠시만 이야기를 하 자. 난 널 공격하고 싶지 않아." "내 과거가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의뢰를 지키는 것 뿐이야! 그리고 너희들을 믿을 수도 없지!" 핑! 재차 날아온 탄환을 피한 마리오는 도저히 이야기가 통할 것 같지 않자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 순식간에 형성된 푸른빛은 눈에 비치지도 않을 빠른 속도로 달려들어 니콜라스가 들고 있는 권총을 맞혔다. 단단한 권 총이 산산조각 나 바닥에 떨어졌다. "이제 이야기를 할 정신이 드나?" 어이없는 표정으로 권총 파편들을 내려다보던 니콜라스는 나지막하게 물 었다.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함부로 그런 힘을 남발해도 되나?" "아, 그건 걱정할 것 없어. 이미 이 공항은 우리 시트날타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태다. 이 광경을 본 사람이 있다 해도 기억을 지워버리면 그만 이야." "뇌 의학에 정통한 사람이라도 있나 보지? 기억을 함부로 지운다 만다라 고 말하는 걸 보면." "천만에. 그냥 최근 몇 시간 안에 생긴 기억을 없앨 수 있는 능력자가 있을 뿐이야. 기억 조작 같은 건 꿈도 못 꾼다고." "그래? 일단 그건 안심이네. 세뇌 당할 염려는 없으니까." 마리오는 저 멀리서 예안을 가로막아 선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앤드 류를 흘끔하고는 비웃음을 살짝 머금었다. "앤드류 회장 같은 거물을 끌어들였군. 엔젤도 이제 정말 제법 하는데?" "엔젤?" "아아, 저 여자의 이름이다. 그것도 모르고 있었나?" 엔젤은커녕 아직 서예안이라는 본명도 모르는 니콜라스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뭐 별로 필요 없는 이야기는 관두기로 하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엘리우스. 「마기」를 보여다오." "마기?" 생소한 단어에 니콜라스는 어리둥절했다. 느닷없이 상대가 뭔지도 모르 는 걸 보여달라고 하면 아무리 감정을 지니지 못한 그라 해도 당황할 수 밖에 없다. "그게 뭐지?" "그건…" "그건 내가 설명하기로 하지." 마리오가 입을 떼려고 하는 찰나 두 사람의 청각을 자극하는 노인의 목 소리가 있었다. 아까부터 제나르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 지만 살기가 없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던 니콜라스는 그에게 시 선을 돌렸다. "당신은 누구지?" "내 이름은 제나르라고 한다, 엘리우스. 시트날타의 5대 대신 중의 한 명이지. 여러 모로 쓸모 없는 노인네이기는 하지만 5대 대신이라는 이름 은 꽤나 거창한 거라서 말이야." "그런 건 뭔지 몰라. 물러갈 건지 말 건지 그것만 말해." 권총이 산산조각 났는데도 니콜라스는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 한 점 구김 없이 당당한 태도였다. 의젓한 손자를 보듯 흐뭇한 시선으로 니 콜라스를 이리저리 훑어보던 제나르는 오른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이것을 보여달라는 거다." 이윽고 마리오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눈부신 빛이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눈부시기만 한 빛이었다. 하지만 망막을 태워버릴 듯 강 렬한 섬광을 토해내던 그 빛은 서서히 환희에 찬 몸부림으로 바뀌어갔 다. 바다를 넘치게 할 듯 역동적인 푸른빛과 태양마저 삼켜버릴 듯 황홀 한 붉은 빛이 섞여 춤을 추듯 너울거리는 가운데, 다리가 얼어붙을 정도 로 압도적인 몸부림은 서서히 그 형체를 갖추어 나갔다.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한 광경에 넋을 잃고 쳐다보던 앤드류는 무의식적으 로 중얼거렸다. "화룡…" 어느새 공항건물보다 더 커진 붉은 화룡은 제나르의 오른손 위에서 생명 을 태워버리는 불꽃을 그대로 얼려놓은 것처럼 우아하고도 강인한 자태 를 드리웠다. 어두운 심연의 마그마처럼 시뻘겋게 빛나는 눈동자가 자신 을 훑어보았을 때 앤드류는 저도 모르게 공포를 느끼고 한 걸음 뒤로 물 러섰다. 「공명신수」를 직접 대하는 건 처음이었던 마리오 역시 창백한 안색으로 넋을 잃은 채였다. 제나르는 니콜라스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공명신수를 보는 게 처음은 아니겠지? 이 녀석의 이름은 「델」이라고 한다." 니콜라스는 멍한 눈동자로 거대한 화룡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뭘 그리 놀라느냐? 너에게도 나와 같은 공명신수인 「마기」가 있지 않 느냐? 그걸 꺼내거라. 5마리의 공명신수 중에서 나머지 네 마리의 힘을 합친 것보다 월등하게 강하다고 일컬어지는 전설의 공명신수를 내 눈으 로 확인하고 싶구나." '아… 마기라는 게 그렇게나 강한 공명신수란 말인가?'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마리로 역시 대대로 5대 대신이 되 는 자들에게만 이어져 내려오는 공명신수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제나르가 지니고 있는 공명신수 「델」은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거대한 위용과 끝을 알 수 없는 강대한 힘에 온몸의 뼈가 부서져 버릴 듯 전율을 일으키고 있는데, 「마기」는 「델」을 포함한 다른 네 마리의 공명신수를 전부 합친 것보다 더 강하다고? '도대체 얼마나 강한 공명신수란 말인가?' 그건 아마도 해답을 알 수 없는 물음과도 같을 테지만, 「마기」가 돌아 오게 되면 혁명을 향한 발걸음이 좀더 가벼워지리라는 건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니콜라스는 몽롱한 눈빛이었다. '아…' 경탄에 찬 시선으로 「델」의 절제된 움직임 속에 감추어진 격렬함과 강 대한 힘을 쫓던 니콜라스는 끈을 놓아버린 듯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 꼈다. 엘르나 마리오가 에날도스를 쓸 때마다 느꼈던 어렴풋한 친숙함은 지금 「델」의 앞에서 강렬한 섬광이 되어 그의 영혼을 찢어발길 듯 꿰 뚫고 있었다. 그때였다. 머리 속을 터트릴 듯 강렬한 영혼의 부르짖음이 울린 것은. - 네가 왜 거기에 있는 거냐.- 시뻘건 화염이 이글거리는 「델」의 부릅뜬 눈동자가 니콜라스와 마주쳤 다. - 어째서 거기에 있는 거냐.- 부르르르. 전신의 세포를 산산이 찢을 듯 폭발하는 감정은 영혼을 상처 입히는 하 나의 채찍이 되어 미친 듯이 니콜라스의 마음을 때려 갈겨댔다. 어두운 심연의 불꽃이 시뻘건 손짓을 보낸다는 환각을 본 순간, 니콜라스는 간 신히 정신을 지탱하고 있던 끈을 놓은 채 그대로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 져 버렸다. 니콜라스가 쓰러지자 온몸에 화룡의 꼬리를 두르고 있던 제나르와 잔뜩 경계의 태세를 취하고 있던 마리오는 크게 당황했다. 특별히 무슨 공격 을 가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쓰러졌단 말인가? "마리오 경. 이게 어떻게 된 거요? 설마 아까 경이 한 공격 때문에 쓰러 진 건가요?"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고요. 무엇보다 정말 엘리우스라면 그런 미약한 에날도스에는 부상당할 리가 없…" 문득 뭔가를 깨달은 마리오는 입을 다물었다. 여태까지 니콜라스가 에날 도스에 상처를 입지 않은 건 단순히 운이 지독하게 좋아서였다면 그는 엘리우스가 아니라는 명제가 성립되는 것이다. 제나르 역시 그것을 불안해하고 있었다. "설마 엘리우스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러나 제나르가 불안에 찬 그 한 마디를 채 끝내기도 전에 니콜라스는 흐릿한 눈빛으로 일어났다. 바짝 긴장한 제나르와 마리오가 잔뜩 경계하 는 걸 초점 없는 시선으로 주시하던 니콜라스는 하늘 높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그의 전신에서 시뻘건 붉은 빛이 흘러나와 공기마저 녹 여버릴 듯 격렬한 몸짓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 이것이 엘리우스의 힘…" 기쁨에 찬 제나르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더 이상 미심쩍어하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지금 니콜라스로부터 느껴지고 있는 이 힘은 분명히 에날 도스였던 것이다. "델. 방어에만 집중해라. 절대 다치게 해선 안 돼." 거대한 화룡 델은 알았다는 몸부림을 퍼트리며 제나르의 앞으로 나섰다. 시뻘건 화염과도 같은 붉은 빛에 휩싸여 있던 니콜라스의 손이 앞으로 쭉 뻗었다. 폭발과도 같은 기세로 달려드는 붉은 섬광과 델의 입에서 뿜 어져 나온 붉은 숨결이 맞물려 중화의 빛을 발산하는 건 찰나간에 벌어 진 일이었다. "크윽…" 두 개의 거대한 힘이 부딪쳐 퍼져 나오는 격렬한 기운에 마리오는 다리 를 비틀거리며 신음을 토해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예안이 안전한지 살 폈다. 다행히 앤드류가 미리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는지 보이지 않았 다. 안심한 그는 시선을 돌리다 니콜라스와 화룡이 뿜어낸 힘이 맞물리 는 지점의 콘크리트 바닥이 흐물흐물 녹아버린 걸 깨달았다. 빠직! 빠지직! 팽팽한 접전은 일 분이 지나자 승패가 갈렸다. 델이 입은 충격에 영향을 받은 제나르는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뒤로 물러섰다. "크윽!" "대신님! 괜찮으십니까!" "나, 나는 괜찮소 마리오 경… 콜록! 콜록!"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강렬한 섬광을 토해내던 힘은 어느새 사그라진 뒤였다. 숙주인 제나르가 꽤 심한 상처를 입은 채 넘어지자 델은 힘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멈췄다. 니콜라스 역시 더 이상 적에게서 살의가 느껴지지 않자 공격을 멈춘 뒤였다. 제나르는 피를 닦으면서도 감탄, 또 감탄했다. "과연 마기의 주인. 엘리우스의 힘은 정말 대단하군. 마기를 꺼내지도 않고서 이렇게 간단하게 델을 압도하다니." 그러나 니콜라스의 흐릿한 눈빛을 볼 때 제나르가 한 말을 알아듣고 있 다고 기대하는 건 힘들었다. 제나르는 마리오의 부축에 의지해 몸을 일 으키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굉장해. 정말 굉장해. 십 팔 년 전에 마지막으로 본 전대 엘리우스보다 더 강한 것 같아. 그렇다면 네 몸 안에서 서식하고 있는 마기 역시 더욱 더 강하겠지?" "합공할까요 대신님?" "아니오. 경도 경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았소? 엘리우스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나말고 다른 세 대신들의 힘까지 모두 합쳐야만 하오. 어쩌면 그렇게 해도 질지도 모르지." "설마 그 정도까지야 되겠습니까."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마리오는 어쩌면 지금 허락 받지 않은 땅에 나와 있 는 헤이져들 모두까지 합쳐서 합공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엘리 우스의 힘이 그렇게까지 강대하다고 생각해서라기보다는, 조금이라도 피 해를 줄여가며 엘리우스를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그게 최선책이었기 때문 이었다. "오늘은 그만 물러가는 게 좋겠소. 혹시라도 목격자가 있다면 요셉을 시 켜 확실히 기억을 지워주시오, 마리오 경." "알겠습니다." 제나르는 지친 듯 비틀거리다가 힘없이 눈을 감았다. 부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수면이 최고의 약이었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힘. '이건 도대체 뭐지?' 모든 것을 그대로 찢어발길 수 있을 것 같은 격렬한 몸짓. '왜 나한테 이런 힘이 있는 거지?' 날 가로막는 자들을 모두 짓밟아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나는 도대체 누구야?' 니콜라스는 아득한 의식의 나락에 떨어진 채 조금씩 희미하게 실려오는 감각을 잡아내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생소한 감각은 머리에 인 거대한 지각을 뚫고 나가 표출하고 싶어하는 마그마처 럼 역동적인 몸부림을 토해냈다. 이건 느낌은 처음이었다. '아… 맞아. 나는 전투 중이었지. 그, 그 여자애를 보호해야 하는데…' 보통 사람들에게서는 느끼지 못한 생소한 분위기와 아름다움을 갖고 있 던 그 여자. 아직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사이지만 자신은 한국 정부의 의뢰를 받아 그녀를 지켜야 할 입장이었다. '설마 난 죽은 건가?' 점점 흐릿해져 가는 감각은 어두운 심연에서 손짓하는 죽음의 사신의 눈 동자처럼 자신이 죽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짙게 뿌려대고 있었다. 아직 죽어선 안 된다는 상념이 고개를 쳐든 순간 니콜라스는 몸 을 옭아매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 발버둥을 쳤 다. '안 돼! 난 죽을 수 없어!' 처음으로 맛보는 숨막힐 듯한 공포가 턱밑까지 차 오른 순간 니콜라스는 덫에 걸린 맹수처럼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거대한 화룡 「델」이 뿜어내는 숨결이 눈앞에 보였다. 경악에 찬 노인(제나르)의 시 선이 기쁨으로 변해가며 피로의 기운에 휩싸이는 걸 보았다. 자신을 공 격했던 젊은 남자(마리오)가 기쁨과 경외에 찬 시선으로 자신을 주시하 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몸 안에서 꿈틀거리던 거대한 힘을 토해내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 다. "헉!!" 니콜라스는 새파랗게 질린 채 벌떡 일어났다. 폐가 일그러질 듯 거칠게 숨을 토해내던 니콜라스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어 디에서도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는 병원?" 미약하게 코를 자극하는 소독약 냄새와 시야에 잡히는 풍경을 통해 니콜 라스는 이곳이 병실 안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어? 너 이제 깨어났냐?" 때마침 예안이 문을 열고 들어서다 반가워했다. "너 진짜 신기하더라? 너 혹시 초능력 같은 뭐 그런 신기한 힘이라도 갖 고 있는 거야? 굉장하던데?" "아…" 신비한 힘으로 제나르의 거대한 화룡, 델을 물리친 걸 기억해낸 니콜라 스는 하얗게 숨을 토해내며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방아쇠를 당 기거나 칼을 휘두르는 것밖에 모르던 이 자그마한 손바닥이 그런 엄청난 힘을 뿜어냈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문득 과연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이 떠오르자 니콜라스는 몸서리쳐질 정도로 겁이 났다. 혹시 터무니없는 존재인 건 아닐까? "저기… 안아줄 수 있어?" 마음의 파문을 일으키는 기분이 일어날 때마다 니르는 항상 안아주곤 했 었다. 하지만 여기엔 니르가 없었기에 니콜라스는 예안에게 안기고 싶었 다. "싫어." 냉담한 거절이 되돌아왔지만 니콜라스는 당황하지 않고 조용히 예안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미미하게 얼굴에 서려 있는, 자아의 본질에 대한 공포는 감추어지지 않았다. "왜 안 된다는 거야? 전에는 안아줬었잖아?" "그때는 내가 잠깐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거고. 난 원래 남자하고 스킨쉽은 절대 안 하자는 주의야." 소중한 유젤의 몸을 이런 꼬맹이가 함부로 차지하게 둘 수는 없다는 생 각에서 빚어진 거절이었다. "근데 너 그 신기한 능력은 어떻게 된 거야? 제나르 대신이 왜 널 보고 엘리우스라고 불렀지? 엘리우스는 또 뭔데? 너 시트날타하고 도대체 무 슨 관계야?" 예안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의심이 깃들여 있었지만 니콜라스는 깨 닫지 못했다. 마음의 파문을 갉아먹으며 자라난 소름이 전신을 뒤덮는 걸 힘겹게 참아내고 있었기에. "안아 줘 제발…" 핼쑥한 니콜라스의 안색은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다시는 이 녀석의 이 상한 분위기에 넘어가지 않으리라 결심했지만 안아주지 않으면 금방이라 도 숨이 넘어갈 듯했기에 예안은 어쩔 수 없이 팔을 벌렸다. "젠장. 이번 딱 한 번 만인 줄 알아." 예안은 눈물을 머금은 채 독감에 걸린 병아리처럼 부들부들 떠는 니콜라 스의 몸을 살짝 안아주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떨림이 멎었다. "고마워." 눈을 감은 채 어미의 품을 찾는 새끼 강아지처럼 자신의 가슴을 파고드 는 니콜라스가 어쩐지 귀엽다 느껴진 예안은 그만 얼굴을 살짝 붉혔다. '나, 나한테 쇼타 콤플렉스가 있었던 거야?' 말도 안 돼! 라고 속으로 부르짖으며 예안이 대성통곡으로 유젤에게 사 과하고 있을 때 니콜라스가 힘겹게 입을 떼었다. "누나는 참 신기해." "뭐가?" "누나가 안아주고 있으면 왠지 구원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어. 니르가 안아줄 때도 편해지곤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사실 경호 경험 이 없는 내가 누나를 구출해달라는 의뢰를 받아들인 건 사진을 봤을 때 부터 그런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었어." 예안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날 공격했던 그 젊은 남자는 누나를 보고 엔젤이라고 불렀어. 나 인정 할 수 있을 것 같아. 누나는 정말 천사야." 녹색 눈동자에 쓸쓸한 상념을 띠고 있던 예안은 니콜라스의 어깨에 고개 를 살짝 기대며 중얼거렸다. "난 천사가 아니야. 천사 따위가 아니야. 진짜 천사는…" 고결하고 순수하고 아름답고 인간 같지 않은 신비한 분위기를 갖고 있던 유젤의 깨끗한 모습을 떠올리며 예안은 힘들게 말을 이었다. "…내 마음 속에 있어." 유젤의 얼굴을 갖고 유젤의 목소리로 말하고 유젤의 몸에 깃들어 유젤의 육체를 움직이며 살아가는 동안 천사 같은 그 아이는 내 마음 속에 살아 숨쉬며 언제까지나 나와 함께 걸어갈 테니까. 그리고 아직 예안은 깨닫지 못했지만, 천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조그만 생명이 지금 예안의 몸 속에서 미약하게 꿈틀거리며 잠자고 있었다. 니콜라스의 병실을 나선 예안은 문 옆에서 앤드류가 벽에 기대어 기다리 고 있는 걸 발견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그는 조금 화가 나 있었다. "둘이 아주 다정하게 껴안고 있던 걸? 분위기를 깼다가는 그대로 총이라 도 쏠 듯 해서 안 들어갔어." 아까까지만 해도 혼란스럽기는 해도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던 앤드 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다. "목소리가 왜 그래요? 화라도 났어요?" "화? 내가 왜 화가 난다는 거야? 난 누나한테 껄떡대는 귀찮은 남자들 중의 한 명에 불과하잖아? 그런 내가 화를 낼 이유가 어딨어? 누나한테 는 저렇게 어리고 귀여운 연인이 있는데 말이야. 나이도 6살이나 많은 나보다는 훨씬 좋겠지." 나이가 6살이 많다고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누나라고 부르는 건 도대체 뭐냐. 어쨌든 앤드류가 질투 때문에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알아차 린 예안은 다소 안심했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꾹꾹 눌러 참 았다. "아직 어린애에요. 자기한테 그런 괴상한 힘이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구요. 그래서 무서워하는 걸 달래준 것뿐이에요." "어린애? 어린애라고는 해도 엄연히 남자야. 게다가 누나가 좋다고 졸졸 쫓아다내는 어엿한 늑대라구." "이봐요. 13살 밖에 안 된 꼬마한테 질투하는 건 좀 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꼬마이기 이전에 남자야. 내 라이벌이라구." 슬슬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게 피곤해진 예안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다른 곳에 돌렸다. 그리고 냉랭하게 말했다. "어쨌든 사람들 입단속 같은 거 잘 해주시고 비행기나 빨리 출발하게 해 주세요."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할 건데? 만약 지금 당장이라도 질투와 독점욕에 눈이 멀어 누나를 납치해서 내 저택에 감금시키면 어떻게 할 건데?" 거침없는 사랑이 어긋난 방향으로 변질되기 직전의 색채로 이글거리는 푸른 눈동자를 말없이 올려다보던 예안의 녹색 눈동자가 생긋 웃음을 품 었다. "당신은 그렇게 못해요. 왜냐하면 날 좋아하니까." "…맞아. 난 그렇게 못해. 그렇게 하면 누나 마음을 영영 잃어버리고 말 테니까." "그럼 된 거죠." 세계 제일의 부자이자 천재 피아니스트인 앤드류에게 거침없이 이런 말 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자신에게 있다는 걸 처음 알아차린 예안은 묘한 쾌감을 느끼며 다시 덧붙였다. "니콜라스도 그다지 나빠 보이진 않으니 내일 당장이라도 출발할 수 있 게 해주세요. 또 제나르 의원이 쳐들어올까 봐 겁나서 더는 미국에 못 있겠어요." "…알았어." 예안은 생긋 웃으며 앤드류의 어깨를 가볍게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리고 는 그대로 지나쳐 걸어갔다. 복도를 지나 저 멀리 작은 점이 사라지는 예안의 뒷모습을 멍한 시선으로 쫓던 앤드류는 그녀의 손이 닿았던 자신 의 어깨를 부드러운 손길로 멍하니 어루만졌다. "왜 그런 이상한 녀석들이 누나를 노리고 있는 거지? 설마 10년 전, 그 리고 5년 전처럼 이번에도 또 내가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 거야?" 십 년 전 제이로 변해버린 유서운을 그대로 「에덴」으로 보내버려야만 했던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자괴감. 그리고 오 년 전에 다시 그녀를 만 나 또다시 사랑의 불꽃을 태웠지만 결국 허무하게 보내버리고 말아야만 했던 무기력한 운명에 대한 증오는 쉼 없는 불안의 불꽃을 일으키며 끊 임없이 춤을 추었다. 그저 조금 능력 좋은 상원 의원으로만 알고 있던 제나르의 손끝에서 뿜 어져 나와 거친 생명의 울음을 토해내던 거대한 화룡의 위용은 앤드류의 마음에 깊은 각인을 새겨놓았다.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그런 신 비한 힘을 지닌 인간들이 어째서 예안을 노리고 있는 거고, 왜 예안과 함께 있던 니콜라스는 제나르와 비슷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제나르가 벌인 짓을 목격한 사람은 많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 일을 기 억하지 못했다. 마치 마법의 지우개로 기억을 깨끗이 지워버린 것처럼 그들은 제나르가 떠난 뒤 최근 한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을 모조리 잊어버 린 뒤였다. 정말 알 수 없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깊은 관련이 있는 예안은 또 이번엔 또 어떤 모습 을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불안함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제발… 제발 이번엔 도망가지 말아 줘." 이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사람의 표정을 한 채 예안이 사라진 복도 쪽을 응시하던 앤드류는 목청을 쥐어짜는 듯한 괴로운 부탁을 중얼거렸다. 하 지만 이미 두 번이나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갔던 전적이 있 는 그녀가, 과연 이번에는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니, 예안이 정말 유서운과 동일인물이라는 보장조차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오랫동안 키워온 소중한 사랑의 불꽃이 꺼지지 않게 보살피는 것과, 예안이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떠나버리 지 않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원하는 것밖에 없었다. 바쁜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공항 건물에 갑자기 사복 차림의 덩치들 수십 명이 들어섰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사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흩어져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뭔가 의심을 느끼고 그들을 연신 흘끔거렸다. '비밀임무를 수행 중인 경찰이라도 되나?' 신문을 펴들고 있던 젊은 남자는 조심스럽게 그들을 흘끔대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조금 놀라 얼른 고개를 수그렸다. 그와 눈이 마주쳤었던 강호 영은 잔잔한 시선을 중현에게 돌렸다. "이제 슬슬 도착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거의 그럴 때가 됐는데… 앗! 저기 오는군." 중현은 건장한 청년과 어린 소년의 사이에서 걸어나오고 있는 소녀를 가 리켰다. 선글라스를 끼고 커다란 모자 안으로 머리카락을 감추고 있었지 만 중현은 예안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알아볼 자신이 있었다. "여기입니다." 중현이 손을 크게 흔들자 예안은 알아차리고 기쁜 표정으로 다가왔다. 예안이 항상 이렇게 자신과의 만남을 기뻐하며 뛰어온다면 얼마나 좋을 까 하고 중현이 생각하고 있을 때, 예안은 활기에 찬 목소리로 그의 마 음에 상처를 입혔다. "중현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아, 아저씨?' 그래도 꽤나 오랜만에 보는 건데 아직도 아저씨 소리는 입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건가. 중현은 가슴이 쓰라렸지만 자신을 십 년이나 먼저 일찍 낳아준 부모님을 속으로 탓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제대로 지켜드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에이, 아니에요. 괜히 제가 깐죽대면서 혼자 집으로 가다가 그렇게 된 건데요 뭘." FIRE-3 요격 테스트가 끝나고 중현과의 동행을 거절한 건 자신이었기에 예안은 그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자기 실수로 시트날타에 잡혀 버려 중현과 정부에 걱정을 끼친 것을 미안해야 할 입장인데. 하기야 일 부러 그렇게 혼자 빠져나간 건 요격 테스트를 지켜보고 있었던 시트날타 를 속이기 위해 허를 찌른 것이었으니 비단 예안의 탓이라고만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고생을 많이 하신 것 같군요. 얼굴이 꽤나 수척해지신 것 같 습니다." 야위었다기보다는 걱정을 많이 해서인지 얼굴에 조금 어두운 빛이 보였 지만 그게 청순한 미를 더 돋워 주었기에 중현은 가슴이 더욱 두근거렸 다. 만약 예안이 당장이라도 TV나 영화 같은 곳에 출연한다면 한순간에 세기의 대스타가 될 수 있겠지만, 본인이 굉장히 질색하는 편이니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테지. 예안과의 재회를 반가워하던 중현은 그제야 니콜라스에게 시선을 돌렸 다. "이 남자애는 누구죠?" "에? 중현 아저씨가 고용했다고 하셨잖아요? 니콜라스 베르노요." "아,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나이가 어리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이렇 게까지 어린애였을 줄이야…" 순수한 아기처럼 한 점 구김 없는 니콜라스의 귀여운 얼굴을 찬찬히 들 여다보던 중현은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가녀리고 연약해 보이는 어린 남자애가 마피아들조차 두려워하는 세계 제일의 청부업자라는 걸 도대체 누가 믿겠는가. "잠깐, 고용했다고? 누나랑 아는 사이가 아니라?" 잠자코 듣고 있던 앤드류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두 사람의 대화에 끼 어 들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사지 않기 위해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그 의 눈빛이 의아함으로 빛났다. "에… 뭐 말해줘도 괜찮냐?" "상관없어." 예안의 물음에 니콜라스는 별로 생각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앤드류가 제나르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불신은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았 다. "에… 그러니까 이 애는 사실 제가 아는 애가 아니라 제나르 의원의 집 에서 제가 탈출하는 걸 도와준 애예요. 이름은 니콜라스 베르노 그게 본 명 맞고요, 그 머시기… 청부업자라고 하더라구요. 이 녀석이 저 좋다고 쫓아다닌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건 다 회장님을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 었어요. 이 녀석은 그때 당신을 완전히 믿을 수 없다고 했거든요." "아, 그렇군." 예안의 설명에 앤드류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을 뿐 별로 놀라지 않았 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 호기 있게 차에 뛰어들며 총으로 협박하던 그 박력 은 보통 꼬마가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또 얼마 전 공항에서 제나르와 맞붙었을 때 신기한 힘까지 사용해서 줄곧 의심하고 있었는데 청부업자 라 설명하니 오히려 모든 게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다만 그 신기한 힘에 대한 판단은 아직 보류였다. "어라? 별로 놀라지 않네요?" "며칠 전 제나르 의원과 맞붙었을 때 그런 화려한 쇼까지 연출했는데 평 범한 아이라고 생각하면 그게 바보지. 게다가 난 예전부터 워낙에 신기 한 일을 많이 겪어서 웬만한 거 갖고는 놀라지 않아." 예전부터 겪었다던 신기한 일이라는 건 「유서운」과 항상 관련이 있었 지만 예안은 알지 못했다. 어느 정도 수습이 끝난 듯 하자 중현은 앤드류에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세계 제일의 부자인 회장님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김중현이라고 합니다. 국정원에서 일하고 있 지요." "앤드류라고 합니다. 국정원에서 일하신다면 저에 대해 잘 알고 계실 테 니 소개는 생략하기로 하죠."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히며 불꽃을 튀겼다. 예안은 이 두 남자가 갑자기 왜 이렇게 긴장 모드로 접어드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전부터 원수지간이기라도 한 거야? 왜 노려보고 그러지?' 두 남자가 적대하고 있다는 건 눈치챘어도, 그게 자신을 놓고 보이지 않 는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는 모른다는 건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윽고 중현은 피식 웃으며 시선을 거뒀다. 이렇게 유치하게 연적과 다 툼을 벌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 앤드류 회장님, 이카루스 소유의 항공사 여객기를 타고 오게 되 면 예안씨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걸 그들이 눈치채기 더 쉽지 않 겠습니까?" "그건 걱정할 것 없습니다. 미국에서 일본으로 간 다음에 다시 다른 비 행기로 갈아타고 왔으니까요." "그렇군요." 하지만 중현은 예안이 한국으로 왔다는 사실을 제나르가 모를 거라고 생 각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들은 한국에 맥을 판매한 사람이 예안이라 는 걸 알고 있는 자들이 아닌가? 그들 입장에서는 맥의 판매에 대한 거 래가 끝나기 전까지는 예안이 한국에 머무를 거라 생각할 것이다. '당분간만 예안씨를 잘 보호하면 된다. 거래가 무사히 끝나면 안전해. 그 뒤로는 그들도 예안씨가 안전하게 먼 나라로 도망갈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중현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집을 떠나 있었던 건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마치 십 년 만 에 귀가하는 것처럼 가슴이 뭉클했다. 집 앞에서 앤드류와 중현 그리고 니콜라스를 모두 다 돌려보내고 난 뒤 혼자 현관문 앞에 선 예안은 두근 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초인종을 눌렸다. 「누구세요?」 "…아빠 나." 잠시 동안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문이 벌컥 열리며 초췌한 안색의 정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치켜 뜬 정호는, 돌아오기만 하면 이런 저런 말로 위로하고 달래줘야겠다는 생각도 잊어버린 채 예안을 와락 끌 어안았다. "예안이냐? 진짜 예안이냐?" 정호는 예안을 힘있게 껴안은 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물을 쏟을 뿐이 었다. "경찰한테 들었어. 나쁜 사람한테 납치 당했었다며? 이젠 괜찮으니까 아 무 걱정 마라…" 눈시울이 붉어진 채 정호의 허리를 끌어안고 서 있던 예안은 울 듯한 목 소리로 말했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그렇지만 다 잘 해결됐으니까 아빠는 아무 걱정하 지 않아도…" 정호는 쥐어짜는 목소리로 내뱉듯 말했다. "죽일 놈들! 네가 그 녀석들한테 무슨 짓 당했는지 다 안다! 예안아, 부 디 잊어버려! 넌 보통 여자애들하고는 다르잖아? 넌 정신만큼은 용감한 싸나이잖아! 그러니까 그까짓 일 잊어버릴 수 있지?" 지금 뭔소리를 하는 거냐. 예안은 약간 당황했다. "어차피 그까짓 거 표시 안 나는 거니까 그냥 잊어버려. 악몽을 꾸었다 생각하면 그만이야. 알았지? 그럴 수 있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빠?" 이상함을 느낀 예안은 정호에게서 살짝 떨어졌다. 지금 정호가 무슨 소 리를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다 알아. 이 아빠한테 차마 말하기가 그렇겠지. 하지만 이 아빠는 이해 해줄 수 있어. 다 네 잘못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알 듯 말 듯한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는 것에 대한 짜증을 참지 못한 예안은 버럭 소리를 높였다. 정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나쁜 녀석들한테 잡혀서 집단으로 성폭행 당했을 테니 까… 그냥 악몽 꾼 셈치고 잊어버리고 자살 같은 건 생각하지도 말라는 말이었는데…" 예안은 질겁했다. 지금 이 인간이 소설이라도 쓰는 거야 뭐야? "아빠!! 도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해!!" 납치 당한 딸이 어떤 더러운 녀석들에게 밤낮으로 시달리고 있을지 걱정 이 되어 쌀 한 톨 제대로 못 넘기며 걱정으로 날을 지새웠던 정호는 그 런 일은 절대 없었다는 예안의 반박을 한참이나 믿지 못했다. 엄청난 수 치심에 예안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만 생각했던 정호가 겨우 그 말을 믿게 된 건 그 날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그렇다니까. 그냥 납치만 당했던 거야. 남자가 내 손 건드린 적도 없으 니까 제발 안심해. 나 그런 일 안 당했다구!" "진짜야?" "진짜라니까! 도대체 사람이 몇 번이나 설명을 해야 믿겠어!" 몇 시간에 걸친 설명 끝에 가까스로 예안의 말을 믿게 된 정호는 딸이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비로소 안도했다. 예안이 돌아오지 않은 첫날 밤, 걱정으로 밤을 지새운 정호는 다음날 경 찰에 신고를 하려다가 사복차림을 한 형사의 방문을 받았다. 예안이 범 죄자들에게 납치를 당했으며 지금 수색 중이라고 형사가 설명했을 때 정 호는 까무러칠 뻔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정호는 걱정으로 미칠 것 같았지만 형사의 충고대로 학교에는 예안이 아파서 학교를 못나간다고 둘러댔고, 집에서 소식이 오기만을 꾸준히 기다렸다. 미리 중현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지만 정호로부터 다시 듣는 순간 예안 은 아빠를 속이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걱정을 끼친 것에 대한 죄스러움 으로 고개를 제대로 들 수 없었다. "정말 다행이다. 이 아비는 네가 더러운 사내놈들한테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지 걱정이 돼서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 그러고 보니 정호의 안색은 무덤에서 갓 살아 돌아온 시체처럼 굉장히 초췌했다. 안쓰러운 표정으로 정호의 이마를 쓸어 넘기던 예안은 시선을 살짝 떨어뜨렸다. "걱정 끼쳐서 정말 미안해.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아니야. 무사히 돌아와 준 것만 해도 기뻐. 네가 잘못되면 정말 난 어 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돼서 한 잠도 못 잤는데, 이제는 두 다리 쭉 펴고 잘 수 있겠구나." 정호는 자신의 무릎 위에 앉은 예안을 사랑스런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한때 정말 영영 잃어버리는 줄 알았던 소중한 보석이 다치거나 더렵혀지지 않고 건강하게 돌아왔다는 건 지금 그에게 무엇보다 큰 기쁨 이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자 정호는 예안의 눈치를 살피며 흠칫했다. 예안은 고작 전화 하나 온 거 가지고 정호가 왜 저러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빠 친구 전환데, 예안이 너 잠깐 네 방에 들어 가 있을래?" 단순히 친구가 전화했다고 보기에는 뭔가 굉장히 미심쩍고 수상한 태도 였지만 겨우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취한 예안은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의 방에 들어온 예안은 안락한 침대에 누우며 역시 집만큼 좋은 곳 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 집에 오니까 정말 너무 좋다. 미국에서 그 녀석들 때문에 마음 졸 이고 있던 게 정말 꿈만 같아." 「사실 제가 보기엔 유젤 님은 별로 고생한 거 없습니다. 그저 유젤 님 덕분에 주변 사람들이 굉장히 고생을 했지요. 사실 유젤 님은 편안하고 화려하게 지냈었잖아요?」 예안은 심사가 조금 뒤틀렸다. "잘나셨어.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네가 무능력해서였잖아? 처음에 마리오 와 엘르한테 잡혔을 때도 알려주지도 않고 말이야." 「알려주지 않은 게 아니라 저도 몰랐던 겁니다. 원격장치는 몇 가지 자 잘한 기능이 추가로 부착되어 있을 뿐, 본체와의 교신을 제외하면 사실 거의 쓸모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잠깐, 생각해 보니까 시트날타에서 탈출한 다음에 곧바로 널 불러서 타 고 왔어도 되는 거였잖아? 그럼 괜히 공항에서 마리오 녀석과 제나르를 보지 않아도 되는 거였는데!" 예안이 비로소 생각난 듯 그렇게 외치며 안타까워하자 유니콘은 일침을 놓았다. 「그렇게 했다가 미국에 들켰더라면 두 나라 사이가 굉장히 미묘해진다 는 걸 모르시고 하는 말씀인가요? 제가 비록 레이더에는 걸리지 않는다 지만 뉴욕 한가운데 내려서 유젤 님을 태운다면 그 어떤 바보가 그걸 못 알아차린단 말입니까? 그래서 제가 일부러 그걸 말씀드리지 않은 겁니 다. 니콜라스라는 아이와 앤드류 회장의 도움이 있다면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으니까요.」 "…지금 네가 잘했다는 거야?" 「잘한 건 없지만 제가 딱히 잘못한 것도 없습니다. 제 능력이 안 되는 일은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그래 너 잘났다." 유니콘에게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사실 예안은 자신이 시트날타로 잡혀간 것과 쉽게 탈출하지 못했던 건 유니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걸 알 고 있었기에 화를 내진 않았다. 어쨌거나 이렇게 안전하게 집으로 다시 돌아왔으니, 앞으로 조심하면 될 거 아닌가? 다음날 아침. 무사히 집에 돌아왔으니 며칠 학교 가지말고 집에서 쉬라 는 정호의 말대로 예안은 월요일인데도 학교를 가지 않았다. 하지만 예 안은 마냥 집에서 쉴 수만은 없는 사정이 있었기에 정호에게는 대충 둘 러대고 난 뒤 만나자고 보채는 앤드류도 따돌린 채 혼자 집을 나섰다. "휴." 산부인과 병원을 올려다보던 예안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크게 심 호흡을 한 뒤 용기를 내어 들어섰다. 대기석에 앉아 있던 예안은 남편과 함께 온 젊은 여자들이나, 만삭이 다 된 임산부가 자신을 자꾸만 흘끔거리는 게 쪽팔려 죽을 지경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저런 어린애가…" "쯧쯧쯧. 요즘 젊은애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 있는 건지…" "얼굴 반반한 거 보면 뭐 뻔하네. 노는 애겠지 뭐." 마음 같아서는 주변에서 수군덕거리는 소리를 전부 다 차단하고 싶었지 만 뚫린 게 귀다 보니 그저 묵묵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 도 이성의 끈을 느슨하게 했다가는 그대로 폭발하고 말 것 같은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며, 예안은 어서 빨리 자신의 차례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서예안님. 들어오세요." 간호사가 부르자 예안은 가시방석 같은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 진료실 로 들어갔다. 젊은 여의사가 맞아주었다. "서예안씨?" "…예." "나이가 17살이신 거 보니까 중학생? 고등학생?" "고1이에요." "아직 어린 학생인데 이런 곳에 오신 거 보니까 남자친구랑 관계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인가 보죠?" "…네." 그런 건 아니었고 그저 한 번도 생리를 하지 않은 사실 때문에 불안함을 느껴서 온 거였지만 예안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품고 있던 불 안이 현실화되지 않는다면 다시 볼 일이 없을 사람인데 뭐 어떤가? "잠깐 여기 누워보시겠어요? 옷도 좀 걷으시구요." 예안은 여의사가 권하는 대로 누워 상의를 살짝 걷어올렸다. 의사는 초 음파 기기를 예안의 아랫배에 갖다대고 한참 동안이나 심각하게 모니터 를 관찰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생리는 얼마나 없으셨나요?" "잘 모르겠어요. 한 석 달쯤…?" 여자가 된 게 대략 석 달 전쯤이었으니까 꼭 틀리다고만은 볼 수 없는 수치였다. 대답을 듣고 난 뒤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루속히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시술을 받으시는 게 좋겠어요. 차마 생 명이 존귀하다느니 어쩌니 하는 말로 멀쩡한 여고생을 애엄마로 만들 순 없는 노릇이니…" "네?" "임신입니다. 3개월 째예요." 혹시나 했지만 정말일거라고는 믿지 않았던 불안이 현실이 되어 버린다 면 사람은 크게 놀라게 된다. 예안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그, 그렇지만 전 배도 불러오지 않았는데요! 3개월이면 보통 배가 어느 정도 부르잖아요!" "그게 이상하군요. 태아의 성장 정도를 보면 분명 3개월 째인데 크기가 일반 태아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아요. 모니터를 보셔도 잘 모르시겠지만 지금 태아의 크기는 새끼손가락보다 더 작아요. 이런 일은 처음이라 어 떻게 된 건지 저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낙태를 하자면 오히려 잘된 거죠." 낙태를 하는데 잘 된 거라 말하는 건 결혼을 하면 어머니가 될 여자의 입장에서는 차마 담을 말이 못되는지 의사는 조금 언짢은 표정이었다. "여기에 태아가 보이시죠? 원하신다면 태아의 심장 소리를 들려드릴 수 도 있습니다. 한 번 들려드릴까요?" 심장 소리를 듣고 나서 생명이 얼마나 존엄하고 소중한 건지 깨달아 다 음부터는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는 뜻이 담긴 권유였지만, 머리 속 이 새하얗게 질린 예안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네… 들려주세요…" "이것을 끼세요." 의사가 권한 헤드폰을 낀 예안은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미약하 고 가늘게 들려오는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뭐랄까. 아주 약 하고 희미하면서도 역동적인 생명의 기운을 담고 있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예안은 왈칵 눈물을 흘릴 뻔했다. '예안아…' 얼마 전에 꾸었던 꿈. 유젤이 나타나 어린 아이를 자신에게 내밀며 이 아이를 줄 테니 자기처럼 아끼고 사랑하고 보살펴달라고 부탁하던 그 꿈 이 혜민의 말처럼 정말 태몽이었을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눈을 감은 채 심장 소리를 듣고 있던 예안은 그만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자신의 뱃속에 자신만을 의지하고 있는 나약한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건 미묘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가 보다. "서예안님?" 의사의 말에 겨우 예안은 겨우 제정신을 차렸다.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아요." 눈물을 살짝 닦으며 예안은 황급히 간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루속히 부모님께 말씀드려서…" "낳을 거예요." 예안이 중간에 말을 가로채자 의사는 멍청한 표정이 되어 그녀를 주시했 다. "예? 뭐라고요?" "낳을 거라구요. 낳아서 제가 키울 거예요." "서예안님?" "절대 죽이지 않을 거예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저에게 마지막으로 준 귀한 보석이라구요. 그런 아이를 제가 왜 죽여요? 낳을 거예요. 낳아서 제가 기를 거예요." 당황한 표정으로 예안의 말을 듣던 의사는 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잘 생각하셨어요." 의사, 그것도 어른이 된 입장에서 여고생이 낙태를 하지 않고 아이를 낳 는다는 걸 말리지 않은 건 분명 잘못된 것이었겠지만, 그녀는 의사나 어 른이기 이전에 언젠가 어머니가 될 한 명의 여자로서 예안의 결심을 진 심으로 축복해 주었다. 병원을 나선 예안은 항상 쓰고 다니던 밀짚모자를 과감히 벗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청초하게 빛나는 파란 머리카락에 놀란 사람들이 신기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예안에게는 전혀 관심 밖이었다. "하늘이 참 맑다…" 그렇게 중얼거리던 예안은 문득 자신이 우습다 느끼고 쿡 웃었다. "아하하. 유진우, 이게 뭐야? 하늘이 참 맑다라니… 네가 언제부터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그러냐?" 감격한 표정으로 싱그러운 하늘을 올라다보던 예안은 오른손을 들어 아 랫배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 안에 유젤이 마지막으로 남긴 소중한 보 석이 살아 숨쉬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고마워 예안아… 나한테 이런 과분한 선물을 줘서…" 어린 나이에 애엄마가 되는 거지만 뭐 어때? 어차피 결혼할 생각 같은 건 없었잖아? 유젤이 남겨준 아이라 생각하고 낳아서 잘 기르면 되는 거 잖아? 오히려 잘 된 거잖아? 행복한 거 아닌가? "아, 이왕 나온 김에 아기용품이나 둘러보고 갈까?" 밀짚모자를 다시 쓰자 흘끔거리던 사람들의 입에서 아쉬운 탄성이 새어 나왔지만, 기쁨에 젖은 예안은 알아차리지 못한 채 걸음을 떼어놓았다. 아니, 떼려고 했다. "잠깐만요, 아가씨. 나 이런 사람인데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예?" 느닷없이 뒤에서 들린 젊은 남자의 목소리에 당황한 예안은 뒤를 돌아보 았다. 훤칠한 키에 깨끗한 양복을 입은 잘생긴 남자가 미소 띤 채 서 있 었다. 어리둥절해하던 예안은 그 남자가 내민 명함에 시선을 주었다. 「AK 엔터테인먼트 매니저 박현수」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예안이 고개를 갸웃하자 말을 걸었던 남자, 현 수는 부드러운 말투로 설명해주었다. "AK 엔터테인먼트라면 이름은 들어보셨겠죠?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4인조 여성 가수 '토믹스' 소속 기획사입니다. 그밖에도 GL, 대니 보이, 칵테일, CPU, 애니멀, 기타 등등 여러 인기 가수와 연예인들이 소 속된 곳이죠." "그, 그런데요?" "일 때문에 우연히 이 근처를 지나다가 아가씨가 모자 벗은 모습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한 번 저랑 같이 일해보실 생각 없나요? 아가씨 정도의 미모라면 분명 스타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게 소위 말하는 길거리 스카웃이라는 건가? 예안은 기껏 좋았던 기분 이 약간 나빠지는 걸 느끼며 냉랭하게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전 바빠서 그런 거 할 시간이 없거든요. 못들은 걸로 할게 요." 예안이 그대로 지나가려 하자 현수는 놀라서 얼른 손을 잡았다. 덥석 손 을 잡힌 예안은 질겁해서 반사적으로 뿌리쳤다. 현수의 표정이 무안함으 로 뒤덮였지만 예안은 미안한 감정을 속으로 감춘 채 여전히 표정을 냉 랭하게 했다. "거칠게 굴어서 죄송하지만 먼저 잘못한 건 그쪽이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하죠. 하여튼 전 그런데 관심 없으니까 그렇게 아세요." "자, 잠깐만요!" 현수가 당황한 채 쫓아왔지만 예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뛰었 다. 간신히 그를 떼어놓았다 생각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예안은 숨을 헐떡이며 걸음을 멈췄다. "쳇. 날 뭘로 보고 그런 소리를 해? 누가 그런 거 할 줄 알고? 내가 뭐 돈이나 명예에 환장한 앤 줄 알아?" 딱히 특정 연예인들을 싫어하거나 뭐 그런 건 아니었지만 연예인이라는 직업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던 예안은 현수라는 남자의 스카웃을 받은 것만으로도 심히 불쾌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려면 노력해야겠지. 공 부도 진짜 열심히 해야겠다." 두 손으로 포근하게 아랫배를 감싸며 중얼거리던 예안은 머리 속에 자신 이 사랑하는 유젤의 순수한 모습을 떠올리며 행복해했다. 근데 공부라면 이미 명문으로 소문난 대명고등학교에서 전교 일등을 한 것만으로도 충 분하지 않을까? "그 정도로는 안 돼! 하버드를 일 년만에 조기졸업! MIT를 일 년만에 조 기졸업! 옥스퍼드도 일 년만에 조기졸업! 예일대도 일 년만에 조기졸업! 동경대는…" 결의에 찬 채 그렇게 호기 있게 외치던 예안은 동경대에 이르러 멈칫하 다가 말을 이었다. "…패스. 그건 일본에 있잖아. 일본은 싫어." 4개 최고급 대학을 모두 4년 만에 제패한다라. 하지만 과연 그게 이루어 질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유젤 님이 과연 그렇게 할 의지가 있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두뇌 지 능으로만 봤을 땐 하고도 남겠지만요.」 "내가 못할 것 같아? 하고 만다! 하고 만다구! 너도 말했잖아! 지금의 난 세계 제일의 천재라고!" 「글쎄요. 그냥 순간의 피끓음에서 튀어나온 우발적 행동 같아 보이기만 하는데요. 어쨌든 애엄마가 되시는 건 축하드립니다. 꽃다운 나이에 혹 이 생기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하실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군요.」 내가 보통 여자애들이랑 같을 리가 없잖아. 예안은 그렇게 쏘아붙이려 했지만 유니콘이 진심으로 축하하고 있다는 걸 느꼈기에 입을 다물었다. 가만, 인공지능에게 진심이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 건가? "…에이씨. 몰라. 이것도 그냥 패스." 올해로 나이가 31살이 되는 노총각 L씨는 아기용품 전문판매점 주인을 하고 있다. 그럭저럭 먹고 살만하고 또 저축도 어느 정도 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여자가 없는 까닭을 몰라 미칠 것 같은 그에게 하필 아기 용품 전문판매점을 경영한다는 건 독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거라도 안 하면 살 길이 막막한 판이라 어쩔 수 없이 그는 다 정한 신혼부부를 하루에도 수백 쌍씩 맞닥뜨리며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나마 돈이라도 잘 벌려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진작 때려 쳤다." 위치가 좋은 데다가 가게도 깔끔했기에 손님들의 숫자는 꽤 많은 편이었 다. 그에 비례해 솔로인 그의 가슴은 나날이 타 들어갔지만 돈이 꽤나 들어온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으며 살아가는 L씨였다. "이 물놀이 세트 얼마나 해요?" "10만원입니다." "어머, 너무 비싸다. 왜 그렇게 비싸요? 순 바가지 아냐?" 내가 바가지를 씌우는 거라면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를 위해 물놀이 용품 을 사려하는 너희들은 그럼 도대체 뭔데. L씨는 다정한 커플의 모습에 울컥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어쨌든 손님은 왕이다 왕. "희원씨, 우리 다른 것도 한 번 봐요. 애기 옷은 아직 안 봤잖아요." "그럴까?" 두 사람은 한껏 다정한 포즈로 아기의상 코너로 갔다. 점원의 이러저러 한 설명과 함께 옷을 골라가며 온갖 행복한 오라는 있는 대로 다 뿜어내 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L씨는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난 도대체 언제쯤 내 짝이 생기려나…" 그때였다. "저어… 이런 건 얼마나 해요?" 느닷없이 들려온 앳되고 가냘픈 목소리에 L씨는 정신을 차렸다. 반사적 으로 시선을 돌린 그는 흡 하고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꾹꾹 눌러 삼켰다. 30여 년을 찾아 꿈에도 그리던 이상형이 바로 눈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아! 예! 시, 십 만원입니다!" 여자… 아니 소녀라고 해야 할까? 소녀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방금 전 닭살 커플이 실컷 만지다가 놓고 간 물놀이 세트를 이리저리 살폈다. '보아하니 선물하려고 살 모양인데… 흐음. 몇 살일까? 도대체 모르겠 네. 여고생인 것 같기도 하고 여대생인 것 같기도 하고 직장인 같기도 하고…' 수수하고 중성적인 옷차림이나 화장기 없이 앳되고 순수한 얼굴을 보자 면 여고생 같기도 한데, 어딘지 모르게 성숙하고 요염한 분위기가 풍기 는 걸 봐선 여대생이나 직장인 같기도 했다. '화장 안 한 맨 얼굴의 여자가 이렇게 예쁠 수 있다니… 아니야. 오히려 이 여자는 화장을 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네. 이렇게나 피부가 좋은데 굳이 화장을 할 필요가 없잖아?' 티 하나 없이 매끄러운 새하얀 빛을 발하는 피부는 아기 피부보다 훨씬 더 고왔다. 동화 속에 나오는 천사가 현실에 튀어나온다면 이런 모습일 까. L씨는 자신이 좋아하고 또 알고 있는 미인 연예인들을 하나 하나 머 리 속에 떠올려 보았지만 그 누구도 눈앞의 이 소녀에게 상대가 되지 않 았다. "이게 기저귀인가요?" "아, 네! 흡수력이 아주 좋은 데다 잘 새지 않아서 초보 부모들에게 아 주 인기가 좋은 제품입니다. 가격 역시 저렴한 편이라서 손님들이 굉장 히 많이 찾는 물건이죠." "근데 기저귀는 어떻게 쓰는 거예요?" L씨는 잠시 당황했다. "아 그게… 간단한 그림으로 설명을 해주긴 하지만 사실 한 번 채워보면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기저귀 채우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거 든요. 옷 입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까요?" "흐음…" 소녀가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걸 황홀한 시선으로 빠질 듯이 쳐다보던 L 씨는 속으로 생각했다. '혹시 같이 살고 있는 결혼한 언니라도 있는 걸까? 기저귀 채우는 법까 지 알 필요가 있다면 아마도 자주 갈아줘야 할 입장일 테니까. 설마 저 나이에 늦둥이 동생이 생기는 건 아닐 테고 역시 조카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 L씨는 자신의 상상이 진실에 조금도 근 접함을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싱글벙글했다. 그리고 소녀가 「곧 조카를 낳을 예정인 친언니에게 선물할 물건」을 고르고 나면 차 한 잔 하지 않 겠냐고 슬며시 대시해볼 생각이었다. 나이 차이가 좀 날지 모르겠지만 원래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혹시 아는가? 소녀가 실은 굉장한 동안일 뿐 실 은 나이가 이십대 후반이라던가… '그래! 생긴 건 굉장히 어려 보이지만 분위기는 성숙하잖아? 분명 이십 대 후반일 거야!' 사람들은 흔히 이런 걸 가리켜 억지에 가까운 합리화라고들 하지만, 지 금 누가 그런 말을 해준다 해도 L씨는 전혀 듣지 않을 것이다. "아기 옷은 얼마나 해요?" "예. 대체로 가격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상하의 합쳐서 2, 30만원 정도 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비싼 건 그 이상 나가기도 하지요. 심 지어 한 벌에 백 만원이 넘는 것도 있답니다." 소녀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 아기 옷이 굉장히 비싸네요." "원래 아기 옷이 의외로 비쌉니다. 그래서 초보 부모들이 종종 놀라곤 하지요." "그럼 한 이십 벌 정도 산다 치면은… 으윽! 몇 백만 원 깨지겠네. 아, 하긴 곧 유… 그게 들어오니까…" 소녀가 뭐라고 말하려다가 이내 자신을 의식하며 얼버무리자 L씨는 뭘 말하려다 만 건지 궁금함을 느꼈지만, 어째서 소녀가 몇 백만 원 깨진다 고 걱정하는지 그게 더 이상했다. "저 실례지만 손님, 직장에 다니시나요?" 소녀는 그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 제가 그렇게나 늙어 보여요?" 실수했다! 여자에게 늙어 보인다는 말은 치명적인 실수! L씨는 황급히 말을 바꿨다. "아니, 아니요. 늙어 보인다니요. 절대 아닙니다. 손님이 워낙에 어려 보이시는데 분위기가 묘하게 성숙하셔서 혹시 직장인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뿐입니다. 손님은 굉장히 어려 보이십니다.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겠 는데요." 사실은 영락없는 고등학생으로 보였지만,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L씨는 소녀가 직장인 혹은 대학생이라고 필사적으로 억지합 리화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에? 저 고등학생 맞는데요? 아직 고1밖에 안 됐어요." "!!" 그야말로 청천벽력!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을 맞는다 해도 이것보다는 아 프지 않을 것이다! 졸지에 마른하늘에 떨어진 날벼락을 얻어맞은 고목 꼴이 되어버린 L씨는 허무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고등학생…이시라구요?" "네에. 제가 그렇게나 늙어 보여요? 이상하네. 친구들은 그렇게 안 보던 데…" 아주 사소한 이유 하나만으로(예컨대 분위기가 묘하다는 등) 가장 큰 영 향을 발휘하는 요소들을 무시해버린 채 자신한테 유리한 쪽으로 합리화 를 하면 어떤 결과가 기다린다는 걸 톡톡히 깨달은 셈이었다. '뭐, 뭐 어때! 14살의 나이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래! 남자만 건 실하면 된 거잖아!' …이 인간 아직도 포기 못했나? "분유 값도 장난 아니게 든다는데… 기저귀 값하고 분유 갑, 옷값, 장난 감 값, 침대값 다 합치면 도대체 얼마지? 으윽! 머리 아파!" 소녀가 예쁘장한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중얼거리는 걸 듣던 L씨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왜 자신의 조카를 위한 용품들을(아직도 억지합 리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전부 다 자신이 살 것처럼 그러는 것인가? "손님. 실례지만 조카를 위한 선물을 사려는 것 아니었나요?" "예? 웬 조카? 전 형제라곤 하나도 없는데요?" "그, 그럼 이모나 삼촌 같은 분들이 애를 낳으시는가 보죠?" "아닌데요?" "저, 그, 그럼 혹시 손님의 부모님께서 늦둥이를 가지셨다거나…" "아닌데요?" "저기, 그, 그럼 혹시 손님의 친구 분 중에 아주 일찍 결혼을 하신 분이 있다거나…" 이제 L씨의 표정은 거의 사색이 다 되어 있었다. 소녀는 지옥 끝에 선 L 씨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얼굴을 살짝 붉혀가며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제가 곧 아이를 낳을 거라서요. 돈이 많이 들어갈 생각을 하니 좀 아찔하네요." 콰과광! 우르릉! 쏴아아아! 서른 한 살의 노총각의 마음에 내리는 비는 이다지도 서러운 것이었던 가. 한순간에 피워 올랐던 노총각의 연정의 불꽃을 아무렇지도 않게 순 수한 얼굴로 짓밟아 버린 소녀는 새하얀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 유모차 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런 건 보통 얼마나 해요?" 도대체 누가 이 여자가 낳을 아이의 아버지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간 에 억수로 재수 좋은 녀석이 틀림없다고 L씨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한탄했다. 이거 굉장한 미소녀를 본 후유증으로 괜히 눈만 더 높아져 앞 으로 더 장가가기 힘들어지면 어떡하나? 오랜 전통을 갖춰온 고급 한식집은 한 손님의 방문을 맞아 부산해졌다. 미리 예약되어 있는 손님이었지만 그들이 이렇게 바빠진 건 손님이 야당 총재인 김두오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김두오의 약속 상대 는 한국 권력의 최고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김영환 대통령이었다. 검은색 자동차들이 빼곡이 들어찼고, 한식집은 오늘은 아예 손님을 받지 않았다. 혹시라도 대통령에게 위해가 가지 않을까 싶어 경호원들은 종업 원들까지 몸수색을 할 정도로 분위기가 살벌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김두오는 이윽고 누군가가 들어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같은 학교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인 김 영환 대통령이었다. "자네들은 돌아가 있게." 대통령은 경호원들을 물리고 난 뒤 김두오의 맞은편에 앉았다. "김두오 의원. 무슨 일로 본인을 불렀소?" 쓴웃음을 머금은 채 김영환을 쳐다보던 김두오는 입을 떼었다. "그냥 편한 대로 하는 게 좋지 않겠냐? " "호오? 감히 일국의 대통령에게 그런 반말을 써도 된다고 생각하시오? 국가원수 모독죄로 잡혀 들어가고 싶소?" "젠장, 왜 우리나라엔 죽마고우 모독죄는 없는 거지. 돌아가면 당장 그 법안부터 통과시켜야겠군." 그제야 김영환은 껄껄 웃었다. "푸하. 자네가 나선다면 아마도 국회의원들이 대거 팔 걷고 나서서 그런 악법도 충분히 통과될 걸세. 그 다음에 분노한 국민들의 추궁을 받아 결 국 자네는 실각하고, 결국에는 정신병원에서 여생을 보내야 할지도 모르 지. 세상에 죽마고우를 모독해선 안 된다는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이 어 디 있나?" "이제야 본모습을 나타내는군. 진작 그러면 좋았잖아. 이 녀석아." 한 나라의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나누는 대화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파격 적인 말투였지만, 이 자리에는 아무도 없는 데다 두 사람이 어렸을 때부 터 친하게 지낸 사이라는 걸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네, 이번에 대국민 투표에서 91%의 국민들이 맥을 산다는 쪽 에 표를 던진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잘된 일이지 않은가? 이제 우리나라는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지니게 될 걸세." "하? 자네는 그게 잘 된 일이라 생각하나?" 김두오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침음성을 삼켰다. "유전이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자네가 모를 리는 없을 텐데." "당연하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어." "그에 비하면 맥이라는 건 현재 우리나라에게 지나친 사치라는 것도 잘 알지 않은가? 맥을 사지 말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닐세. 유전을 주면 서까지 구입할 이유는 없었다는 거야." 김두오의 목소리는 점점 격정에 젖어 들어갔다. "자네 혹시 미쳤나?" "말을 삼가게. 누군가 들었다가는 자네는 파면 당하고 말 거야." "내가 지금 말을 조심하게 됐나!" 김영환은 김두오의 호통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유전이 어떤 건데! 우리나라 기업들이 이렇게 눈부신 성장을 거두고 주 변 국가들이 우리나라를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된 게 전부 다 무엇 때문인 지 자네도 알잖은가!" "우리나라가 경제 대국이 된 건 나도 안정해. 하지만 아직까지 군사강국 은 아닐세." 불같이 화를 내며 씨근덕거리는 김두오와는 달리, 김영환 대통령은 태연 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주변 국가들이 우리나라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건 인정하네만 그건 단지 우리가 지닌 힘을 무시할 수 없어서가 아니야. 그들의 입장에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함부로 독점할 수도,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어서 그저 돌아가며 황금알을 나눠 가지는 것뿐일세. 당연히 애지중지 해야겠 지." "우리나라가 거위라면, 일본이나 중국, 러시아 미국 같은 나라는 사육사 라는 건가?" "비슷하지. 자네도 알잖은가? 침체된 일본 경기 발전을 위해 우리나라는 2년 전 10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했네. 그러자 러시아도 덩달아 무력 시 위와 함께 차관을 요구했고, 일본과 중국 역시 러시아에게도 제공하라고 압박을 가해왔기에 결국 러시아에게도 15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했지. 중국 시장을 휩쓰는 우리나라 제품들이 얼마나 많은 관세를 받고 있는지 자네도 알지 않은가? 자유 무역 협정이 이루어진 게 도대체 언제적 이야 긴데 세상에 200%의 관세를 붙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우리나라가 그 나라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건 사실이야. 막말로, 당장 우리나라가 차관을 취소하거나 우리기업이 발을 뺀다면 그 나라들은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돼. 기술, 경제적 으로 완전히 예속되는 것만이라도 막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들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그까짓 관세 정도는 봐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비록 우리나라가 차관을 제공하고 있기 는 하지만 수출로 얻는 이득이나 경제적 외교의 우세로 볼 때 유리한 입 장을 차지하고 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들의 군사력이 우리보다 월 등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에 하다 못해 핵미사일 하나라도 있었다면 우리는 이유 없이 보고 있던 손해를 만회할 수 있지. 명실공히 아시아의 최강자로 우뚝 솟아날 수 있는 거야." "한국은 지금도 충분히 아시아의 패자야." "그건 경제적인 면에서 볼 때 그럴 뿐이지. 칼과 방패를 갖추지 못한 금 고는 언젠가 도둑에게 쉽게 빼앗기고 말아. 자네가 그걸 모르진 않을 텐 데?" "그럼 자네는 그 칼과 방패를 사기 위해 금고를 아예 송두리째 내주는 게 잘한 짓이라 생각하는 겐가?" 어리석은 결정에 대한 한심함으로 이글거리는 김두오 의원의 눈동자를 그윽한 시선으로 들여다보던 김영환 대통령은 차 한 잔을 들어 단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말했다. "맞아. 나는 그 칼과 방패를 사기 위해 금고를 송두리째 내주었네. 하지 만 앞으로 십 년, 아니 채 오 년도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는 그것보다 더 크고 값진 금고를 얻을 수 있을 거야. 장래를 위한 과감한 투자였네." 비로소 김두오는 패닉에 빠졌다. "무슨 소린가? 더 크고 값진 금고라니?" "맥 말일세. 자네도 들어 알고 있다시피, 맥을 만든 과학자는 유전이 아 니라 이 지구상의 모든 돈을 모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천재일 세. 무한동력이라든지 맥의 그 무시무시한 화력과 기동력, 정교함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은가?" 맥을 만든 과학자가 얼마나 굉장한 천재인지 김두오도 어렴풋이 알고 있 었다. 그런 천재라면 분명 유전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테지만, 문제는 그 천재가 이미 죽었다는 것에 있었다. "프랭크 안쏘니 유젤의 양아들이 그의 반만큼이라도 천재인가 보지? 친 아들이라면 내 이해하겠네만, 그는 양자야. 게다가 지능도 평범한 일반 사람이지." "프랭크 안쏘니 유젤은 살아 있네." 덤덤한 대답에 김두오는 순간적으로 굳어졌다가, 이내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깨닫고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그가 살아 있다니?" "말 그대로야. 프랭크 안쏘니 유젤, 아니 세기에 다시없을 천재 과학자 서예안은 살아 있네." "서예안?" "프랭크 안쏘니 유젤은 가명일세. 본명은 서예안. 아직 17살 밖에 안 된 어린 소녀지. 비밀리에 치러진 아이큐 테스트에서 완전 장난으로 응답했 음에도 불구하고 아이큐 수치가 350을 넘어선 경이적인 천재야. 그 아이 에 대한 건 특급 기밀이니 자네도 이후 절대 말조심해야 할 걸세. 만약 자네가 어렸을 때부터 봐온 죽마고우가 아니었더라면 난 절대 이 말을 하지 않았을 걸세."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대통령을 주시하던 김두오는 이윽고 천 천히 입을 떼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자네가 생각한 대로야. 우리는 세기에 다시없을 그 천재를 끌어들이기 위해 과감히 유전을 내줄 생각을 한 거지. 생각해보게. 무한동력 발전장 치라는 터무니없는 기관장치를 만든 천재가 핵융합로 하나 만들지 못할 것 같나? 잘 구슬려서 핵융합 엔진 같은 걸 만들어서 판매한다면 어마어 마한 돈덩어리가 될 거야. 그밖에도 여러 방면에 걸쳐 쳐다보는 것만으 로도 숨막혀 죽을 엄청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테지." 김두오의 주름진 얼굴에 자리잡았던 놀라움은 이내 서서히 기쁨으로 바 뀌어갔다. 환희에 찬 표정으로 할 말을 찾지 못하던 김두오는 어깨를 으 쓱하는 김영환의 두 손을 와락 붙잡았다. 그러자 김영환이 나무랐다. "어허? 자네 이게 무슨 짓인가? 우리 나이가 지금 몇 인데 아직도 야오 이 놀이를 할 수 있다 생각하나? 전국의 동인녀들이 우리의 이런 모습을 봤다가는 아마도 눈을 더럽혔다고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걸세."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농담이 김두오의 귀에 들릴 리 없었다. "자, 자네는 역시 대단해! 난 그것도 모르고 자네의 어리석음을 탓하고 있었어! 부디 이런 날 용서해주게." "용서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네. 사실 국회의 최종 승인을 얻기 위해서 언제고 한 번 자네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해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부디 자네 당의 의원들을 잘 설득해주길 바라네." "설득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나? 이미 국민들 중 열에 아홉은 맥을 사 기로 했다지 않은가? 이 나라가 국회의원들의 나라인가? 국민들의 나라 지." 어쨌든 일이 잘 해결된 것에 대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김영환은 부드 러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두 손을 꼭 붙잡고 있는 김두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가? 난 동인남의 세계는 이미 대학교를 졸업함 과 동시에 빠져나왔는데, 자네는 아직도 거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나? 아무리 왕년에는 잘나가던 미남이었다 해도 지금 자네는 배 튀어나오고 얼굴에 주름진 늙은이에 불과해." "에잉! 오랜만에 옛날 기분을 낼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 걸 가지고 그 러나!" 실로 두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 대 사들뿐이다. 집에 돌아온 예안은 현관에 잔뜩 놓여져 있는 신발과 거실에서 왁자지껄 하게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당황했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들의 목소리였 으면 정호의 친구가 왔나 보다하고 가볍게 넘길 수 있을 테지만, 지금 귀에 와 닿는 목소리들은 전부 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바로 도호 식구들이었다. "어? 누나다!" 현우가 예안을 발견하고 눈물까지 글썽이며 뛰어왔다. "누나 이제 오는 거야? 몸은 이제 괜찮아? 누나가 나아졌다는 소리 듣고 발바닥에 불나도록 뛰어왔어." "뭐, 뭐?" 잠시 패닉에 빠졌던 예안은 그제야 도호 식구들에게 자신이 아프다고 정 호가 둘러댔었다고 설명해준 걸 기억해냈다. 그동안은 정호가 필사적으 로 병문안을 온다는 걸 막았는데 오늘은 그럴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집이 참 좋구나. 근데 정말 집들이는 언제 할 거니? 한다한다 계속 미 루기만 해서 계속 기다렸는데 결국 몇 달이 지나도록 안 했잖아. 할 생 각이 있긴 한 거야?" 서운함이 가득 담긴 정우의 핀잔을 그의 어머니인 수정이 받았다. "예안이는 아직 고1이잖아. 사실 어린애 혼자뿐인데 집들이를 하라고 하 는 건 무리잖니." "미국식으로 하면 되죠 뭐. 우리가 음식 싸들고 오면 되잖아요." "하긴 그렇긴 하겠다." "그런데 그동안 계속 아팠다가 어제 겨우 정신 차렸다면서 이렇게 나갔 다 와도 되는 거야?" 삼형제의 둘째인 준우의 걱정스런 물음에 예안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가 로 저었다. "이제 괜찮아. 사실 별로 아픈 것도 아니었고 그냥…" "그냥 뭐?" "그런 게 있어. 알려고 들지 마." 만약에 지금 내가 임신 중이라고 말하면 이 사람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심히 궁금하긴 했지만, 예안은 자신이 먼저 말할 필요성을 못 느 꼈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친척들을 보게 되어 기분이 상했지만 정호의 입장을 생각해 내색하진 않았다. 그때였다. 현우는 예안이 손에 쥐고 있던 의료보험카드를 낚아채듯 잡아 챘다. "보험카드잖아? 누나 병원에 갔다온 거야? 아직 다 나은 게 아니었어?" "아, 그, 그건…" 예안은 당황한 채 현우가 쥐고 있는 카드를 뺏으려 했지만 그는 잽싸게 도망쳤다. 키득거리며 도망치다 카드의 내용을 본 현우는 그대로 굳어버 렸다. 그 틈을 타 예안은 재빨리 카드를 낚아챘지만, 현우는 이미 볼 건 다 보고 난 뒤였다. "어? 어? 어? 어?" 놀람으로 어쩔 줄 모르는 현우의 표정을 본 예안은 그의 귀에 대고 차갑 게 속삭였다. "너 이거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죽는다. 무슨 말인지 알지?" "누, 누나?" 가족들은 어째서 현우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는지 그 이유를 몰라 어리 둥절했다. "왜 그러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경쓰지 마세요." 도호의 질문에 예안은 약간 냉랭하게 대답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현우는 그때까지 의아한 가족들의 시선을 온몸에 받으며 석상처럼 굳은 채 서 있었다. 방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던 예안은 이내 노크 소리를 들었다. "문 열렸으니까 들어오세요." 끼이익 - 조심스레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누군가가 뒤에 와 서는 게 느껴졌지만 예안은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누구?" "나야 현우." 현우가 뒤따라 들어올 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예안은 로그아웃을 한 뒤 의자를 뒤로 돌리며 냉랭하게 물었다. "왜 그래? 무슨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그 의료보험카드… 그거 어떻게 된 거야?" 역시 그거로군. 예안은 조금 뜨끔했지만 난 이 녀석한테 미안해할 게 하 나도 없다는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네가 본 그대로야. 나 오늘 산부인과 갔었다. 왜?" "…왜 간 건데?" 현우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이었지만 예안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건 아버지인 정호의 모든 걸 빼앗아간 덕으로 성공한 도호의 아들을 이렇게 나마 괴롭혀줄 수 있다는 쾌감에서 빚어진 것이었을까. "내가 너한테 그걸 말해줘야 할 이유라도 있냐? 말해주기 싫으니까 나가 봐." "대답해!" 갑자기 현우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예안은 깜짝 놀랐지만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너 지금 어디서 소리 지르는 거냐? 내가 너한테 말해줘야 할 이유가 어 디 있는데? 설령 호적상으로 내 사촌이라 해도 네가 그런 말을 할까말까 야. 넌 아직 나와 법적으로 남남이잖아? 너도 내가 호적에 들어가는 걸 반대하지 않았냐?" "그, 그건…" "나와 남남이 되길 원한 건 애초에 너였어. 그런 주제에 이제 와서 나한 테 사촌 행세하려고 드는 거냐? 정말 너 웃긴 녀석이구나." 날카로운 비수처럼 사정없이 가슴이 푹푹 꽂히는 예안의 독설을 창백한 안색으로 듣고 있던 현우의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혹시 이 녀석 이 갑자기 폭주해서 주먹을 휘두르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없진 않았지 만, 예안은 꿋꿋이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왜 산부인과 갔는지 네가 알 권리는 없잖아? 귀찮으니까 이만 나 가 줄래? 나 게임해야 하거든." 다시 의자를 컴퓨터 쪽으로 돌린 예안은 현우를 등진 그대로 게임에 접 속하려다 퍼뜩 떠오른 생각에 무심코 중얼거렸다. "아참. 태아한테 전자파는 안 좋으니까 당분간 게임은 그만해야겠다." 무심코 혼잣말하던 예안은 아직 현우가 나가지 않았다는 걸 퍼뜩 깨달았 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현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있 었다. "태아? 설마 오늘 산부인과 간 게 그런 것 때문이었어?" 자신이 왜 이 녀석의 추궁에 당황해야 하는지 까닭을 모르면서도, 예안 은 들켰다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나 생리 주기가 불순해서라든지 뭐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그런 것 때문이었어? 누구 애야? 누구 애냐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으로 현우는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이 녀석이 무섭다 느낀 예안의 눈동자에 무섭다는 기분이 깃들였다. 예안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고 말았다. "네, 네가 알 바 아니잖아!" "말해. 말하라구." 현우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말하란 말이야. 누구 애야? 누구 애야? 빨리 말해. 빨리 말하라구!" 부들부들 떨리는 거친 손이 자신의 두 어깨를 단단히 움켜잡자 예안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주먹을 앞으로 내질렀다. 하지만 주먹만 아팠을 뿐 잡힌 어깨는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예안은 그만 두 손으로 현우의 가슴 을 거칠게 밀어버렸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두 사람의 목청이 높아진 걸 듣고 놀라 달려온 정우와 준우는 방안을 들 여다보다 휘둥그렇게 눈을 떴다. 현우가 괴로운 표정으로 방바닥에 나동 그라져 있었고, 그를 밀쳐냈을 예안은 잔뜩 화가 난 채 씩씩거리고 있었 다. 정우와 준우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3부 소엄 TITLE ▶18572 :: 91 - 단절의 증거(1) 실탄(cruel) 04-05-21 :: :: 16064 어제 저녁에 예안으로부터 임신 사실을 전해들은 뒤 놀랐다기보다는 황 당하고 어이없는 기분으로 간신히 잠을 청했던 정호는 아침이 찾아왔을 때에도 약간 멍한 상태였다. 임신이라니! 이 무슨 강아지 자살하는 소리 란 말인가? 침대에 일어나 앉은 정호는 멍한 기분에서 좀처럼 풀려나지 못했다. "아니, 도대체 남자들 보는 시선 좀 고치라고 그렇게 말할 땐 싫다고 하 더니 갑자기 임신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거야?" 보통 여고생을 지닌 부모라면, 그것도 홀아비라면 이런 경우 당장이라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이 걱정하고 또 걱정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남자 였던 자식이 행방불명된 후 느닷없이 딸이 되어 돌아온 뒤 어떻게 하면 나중에 손자를 볼 수 있을까 애가 탈대로 타던 정호에게 예안의 임신 소 식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침대에서 빠져나온 정호는 거실로 나왔다. 먼저 일어난 예안이 미리 기 다리고 있다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맞이했다. "잘 잤어?" "그, 글쎄다. 잘 잔 건지 제대로 못 잔 건지…" 정호는 혼란스런 기분을 정리하려 애쓰며 입을 떼었다. "그런데 너 어제 한 말 말인데… 그거 진짜니?" "응. 지금 3개월 중." 얼굴 가득 행복한 기운이 넘치는 걸로 봐선 강간 등의 불미스러운 일로 생긴 생명은 아닌 듯 한데, 그렇다면 남자가 싫다고 그렇게 질색하던 건 전부 다 내숭이었단 말인가? 정호는 그동안 자신을 감쪽같이 속인 예안 에게 배신감을 느끼기보다는, 서서히 상황 파악이 됨에 따라 걱정이 치 솟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빠한테 그런 말 한 거 보면 낙태하게 같이 병원 가고 싶어서 그런 거야? 혼자 가기는 무섭고 창피해서?" 어째서 아빠는 그런 말을 입에 담는단 말인가. 안색이 창백하게 굳은 예 안은 발끈해서 외쳤다. "낙태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왜 낙태를 해! 내가 언제 낙태 같은 거 한다고 했어!" "너 그럼 낳을 거야?" "낳을 거야." 분명히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어디가 좀 이상해진 게 틀림없다. 정호는 질겁한 채 말렸다. "낳아서 어쩌려고? 입양기관이나 고아원에 보내려고? 너 그게 얼마나 나 쁜 짓인지 알기나 해? 책임질 수 없을 것 같으면 그냥 지워 버려. 그게 또 네 인생을 생각한다면 낳아선 안 돼." 묵묵히 듣고 있던 예안은 정호를 납득시키기 위해 미리 준비해둔 변명거 리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아빠. 내가 행방불명되고 난 뒤 처음으로 김윤우 박사가 나 데리고 와 서 아빠한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했던 거 기억하지?" "으, 응. 근데 왜?" "사실 그때는 경황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어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 는데, 나 여자친구랑 같이 바다 보러 가던 중이었거든. 그런데 그만 그 때 사고가 나고 만 거야. 그래서 김윤우 박사가 뇌 이식 수술을 해준 거 지." 정호는 더러워진 얼룩을 씻어내듯 머리 속이 점점 맑아지는 걸 느꼈다. 슬슬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상황파악이 되었다. "너 그럼 설마?" "아빠가 생각하는 게 맞아.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몸은 내 여자친구의 몸이야. 그리고 지금 내 뱃속에 있는 아기는… 그, 그게 말이지… 그러 니까…" 아무리 '뻥'이라지만 차마 그 뒷부분은 제정신으로 설명할 수 없었는지 예안은 그만 얼굴을 붉혔다. 비로소 어째서 예안이 임신 중이었는지 그 원인을 알게 된 정호는 안색이 환해졌다. "네가 남자였을 때 미리 심어놓은 씨가 애기가 됐다는 거야? 그런 거 야?" 미리 심어놓은 씨라. 뭔가 상당히 적나라한 느낌이 드는 말에 예안은 얼 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 그렇지. 그래서 난 지우고 싶지 않아. 내 여자친구랑 나 사이에 마 지막으로 생긴 생명이라서 그냥 낳아서 내가 키우고 싶어." "여어, 우리 아들? 이제 보니 능력이 꽤나 좋은 걸. 예쁜 여자친구랑 이 미 만리장성까지 다 쌓으셨다니 말이야." 가뜩이나 붉어져 있던 얼굴이 정호의 놀림에 불붙은 홍시처럼 더욱 빨갛 게 물들었음은 물론이다. "그런 식으로 놀리지 마. 하여튼 전에도 말했듯이 난 절대 결혼 안 할 거니까 인생이 어쩐다느니 하는 말로 말리지 마. 나 이 아이 꼭 낳아서 키울 거야."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의 관계에서 생긴 아이라면 당연히 반대해야 옳겠 지만 예안이 갖고 있는 특수한 사정을 고려해볼 때 차마 지우라고 할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남자였을 때 마지막으로 남긴 생명이 지금의 몸에 서 자라고 있다는데 어떻게 그걸 지우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난 잘 모르겠다. 사실 내 입장에서 볼 때 그 아이가 내 마지막 친손주 나 다름없는데 지우라고 하는 건 싫어. 하지만 돈도 돈이지만 아직 고1 밖에 안 된 네 인생을 생각해볼 때…" "…나 학교 그만둘 거야." 느닷없는 폭탄 선언에 정호는 하마터면 펄쩍 뛸 뻔했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네가 왜 학교를 그만 둔다는 거야!" "학교 그만 두고 올해 검정 고시 치른 다음 수능 볼 거야. 학창 시절을 버리는 게 좀 아깝긴 하지만 지금 나한텐 아기가 더 소중해." "하지만 아기를 낳는다 쳐도 그 돈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전에 김윤우 박사가 나한테 잘 보이려고 돈 줬다고 말했지? 그것 덕분 에 아빠 일도 그만두고 이제 편히 살 수 있게 됐는데 벌써 잊은 거야? 아직 삼 억 정도 남아 있으니까 그걸로 내가 취직해서 자리잡을 때까지 학비나 생활비 넉넉하게 충당할 수 있어." 사실 삼 억이라면 대한민국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서민으로서는 만 져 보기도 힘든 액수다. 취직해서 자리잡을 때까지가 아니라 아마도 자 식을 낳아서 양육하고 결혼까지 시킬 수 있는 금액이었지만, 예안은 금 전 감각이 비교적 약한 편이었기에 막연히 취직할 때까지는 버틸 수 있 겠지라고 생각했다. "휴. 난 모르겠다. 뭘 어떻게 해야 잘했다 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전혀 감이 안 잡혀." 정호의 마음 속에서는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친손주를 보고 싶은 욕 심과 예안의 인생을 생각해서 아기를 지워야 한다는 상이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언뜻 보면 그 두 생각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듯 보이 지만 실은 친손주를 보고 싶은 욕구가 훨씬 더 강했다. 예안이 아기를 지운 뒤 훗날 다른 남자랑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보았을 때, 엄밀히 보자면 그건 자신의 친손주가 아니지 않은가? 자신의 생각에만 빠져 있던 정호는 문득 그동안 예안이 좋아하는 여자친 구를 잃고 얼마나 슬퍼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네 입장에서는 여자친구가 죽은 거 아냐? 그런데 그동안 용케 슬픈 내색을 안 했구나." "죽지 않았어. 내가 서예안으로서 살아가는 동안 그 애는 언제까지나 나 랑 함께 할 거라구." 예안은 약간 침울한 표정으로 다시 덧붙였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아기는 그 애가 나한테 마지막으로 준 선물이야. 난 그걸 꺼뜨리고 싶지 않아. 그러니 아빠도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언제까지고 어린아이에만 머물러 있을 줄 알았는데 예안은 어느새 아주 의젓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더 이상 철없는 소녀가 아닌 당당한 어머니 의 눈동자를 갖고 있는 예안이 대견스러워진 정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문제될 게 없다면 안심하고 낳아서 길러. 난 언제나 네 편이니 까. 단, 절대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걱정하지 마 아빠. 적어도 엄마 같은 사람은 안 될 거니까." 관계가 회복될 기미가 없는 어머니와 자식이 연주하는 불협화음에 대한 걱정보다는 세정에게 딸을 빼앗기지 않는 것에 대해 안심하는 걸 보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 모양이었다. 호텔 건물 안인데도 한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아마도 그 건 지금 만나려고 기다리는 상대에 대한 위압감에서 빚어진 착각일 거라 고 자위하지만 비단 중현의 탓은 아니었다. 앤드류는 아이큐 200이 넘어 가는 천재 미남자인데다 세계 제일의 부자이면서 동시에 또 천재 피아니 스트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중현은 그를 상대로 한 발자국도 물러날 생 각이 없었다. 조금을 더 기다리자 앤드류가 나타났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여태껏 중현을 죄어 매고 있던 위압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니요. 그렇게 오래 기다리진 않았습니다. 저 역시 다시 뵙게 되어 영 광입니다." "일단 뭐부터 시킬까요?" 앤드류는 웨이터를 불러 중현의 것까지 간단한 음료를 주문했다. 그는 동작 하나 하나마다 자신감이 흘러 넘쳤다. "국정원에서 일을 하신다 들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십니 까?" "한국 사회에서는 그래도 비교적 배경이 좋은 편이기에 나이에 걸맞지 않은 요직을 맡고 있습니다. 항상 과분한 기분을 안고 살아가는 편이죠.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가는 주변 사람들의 쯧쯧거리기에 항상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만 합니다." 중현은 자신에 대해 앤드류에게 사실대로 말하기 싫은 듯 그런 식으로 얼버무렸다. "니콜라스 베르노가 어떤 인물인지 아십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 예안씨의 구출을 의뢰한 건 바로 저인데 모 를 리가 있나요." 알고 있으면서 구출에 그치지 않고 경호까지 의뢰한단 말인가. 앤드류의 안색이 조금 불쾌해졌다. "저도 처음에는 그 녀석의 정체를 몰랐습니다. 사람을 시켜 자세히 알아 보니까 암흑계에서는 가히 보스급 캐릭터더군요. 훼도니츠 가의 마피아 들조차 무서워서 피하는 청부업자가 고작 그런 꼬마였을 줄 과연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런 인물이기에 의뢰한 겁니다. 실력만큼은 가히 믿을 수 있으니까 요." "실력은 믿을 수 있겠죠. 하지만 그의 인격까지 믿을 수 있나요? 그는 돈을 준다면 살인도 마다 않는 인물입니다. 국정원에서 일하신다고 하니 설마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요? 듣자하니 그런 위험한 녀석에게 이번엔 서예안씨의 경호를 맡기셨다구요? 제정신으로 그런 짓을 벌이신 겁니 까?" 듣기 좀 거북한 어투였지만 중현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가 비록 살인도 마다 않는 인물이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정당한 사 유에서만 의뢰를 받아들일 뿐입니다. 실제로 그가 살인 의뢰를 받아들인 건 뼈에 사무친 원한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와, 아니면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 표적에 대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살인을 정당화할 순 없습니다." "글쎄요. 저는 국정원에 머무르고 있다 보니 법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 뼈아프게 실감하고 있는 중이라서 앤드류 회장님의 그 생각에는 차마 찬성할 수가 없군요." 서로 지지 않으려고 드는 두 사람의 시선의 공중에서 맞부딪치며 불꽃을 튀겨냈다. "어째서 한국 정부가 그렇게까지 서예안씨를 보호하려 드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는 앤드류 회장님은 어째서 그런 평범한 고등학생에게 지대한 관심 을 보이는 건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저는 순수하게 서예안씨를 사랑해서입니다." 당당하게 되돌아온 대답에 중현은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 되었다. 잠시 쯤은 망설이거나 난감해할 줄 알았는데 상대는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예전에 한국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보인 태도를 생 각하면 납득이 가지만. "후, 사랑한다라. 좋습니다. 말씀해 드리죠. 서예안씨는 지금 한국 정부 랑 모종의 거래를 맺었습니다. 사실 서예안씨는 토네이도 사가 개발한 에이즈 치료제의 제조법이 담긴 디스크의 행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 입니다. 커다란 국익에 관여되어 있기에 우리로서는 거금을 치르면서까 지 보호해야 할 대상입니다. 알고 계시다시피 토네이도 사는 우수한 인 재와 기술을 갖추고 있었지만 경영층의 잘못으로 공중분해 되어버린 제 약회사죠." "흐음." 예안이 맥의 제조자라는 사실을 앤드류에게 밝힐 순 없었기에 중현은 미 리 짜두었던 변명을 꺼냈다. 원래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앤드류는 한국 정부의 의뢰를 받은 청부업자가 예안을 구출해냈다는 사 실을 알고 있기에 무작정 덮어놓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둘러대는 게 의심 을 돌리기가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다가 그가 맥과 예안의 관계에 대해 알아버리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거 이상하군요. 제가 알기로 예안씨는 토네이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만?" "개발 담당 박사 중의 한 분과 굉장히 친한 사이였던 모양입니다. 회사 가 공중분해 되고 절망에 빠진 그 분이 자살하기 직전에 에이즈 치료 디 스크의 행방을 예안씨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더 이상은 말씀드릴 수 없 습니다. 당신은 세계적 의학 회사인 네로스의 회장님이니까요. 경쟁자에 게 기밀을 밝힐 순 없죠." "그렇게 되나요? 어쨌든 에이즈 치료제를 개발해내신 건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그렇다면 조만간 전세계의 에이즈는 근절되고 말겠군요. 그때 가 오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른바 에이즈 치료제가 출시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거짓말을 한 꼴이 된 다는 걸 은연중에 지적하는 말이었다. 중현은 자신의 말을 100% 믿지 않 는 앤드류의 의심에 쓴웃음을 지었지만 굽히진 않았다. '뭐 상관없어. 어차피 토네이도의 기술진이 다른 제약 회사에서 연구 중 인 에이즈 치료제 개발 작업이 현재 막바지에 접어들었으니까.' 자신이 둘러댄 말을 앤드류가 100% 믿는 눈치가 아닌 게 조금 걸렸지만 일단 대놓고 추궁 당할 명분은 없앤 셈이기에 중현은 한시름 놓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야겠군요. 조금 전에 말했다시피 저는 니콜라스 베르노 같은 위험인물이 예안씨를 경호하는 건 찬성할 수 없습니다." "회장님이 무슨 자격으로요?" "장래 예안씨의 남편으로서 입니다. 저는 절대 찬성할 수 없습니다." 앤드류의 눈빛은 그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연했지만 중 현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남편으로서라. 하지만 제가 알기로 예안씨는 회장님께 아무 관심이 없 는데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예안씨의 장래 남편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중현의 말투에 인내력을 많이 상실한 가시가 돋쳤다. 그런 말까지 듣고 서도 그저 웃기만 한다면 그는 연적이 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일 것이다. "글쎄요. 자신감이라고 해둡시다." "자신감이라고요?" "저는 예안씨의 마음을 손에 넣을 자신이 있습니다. 적어도 당신 같은 남자에게 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에 중현은 화가 났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저 같은 남자라고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당신에 대해서도 좀 알아봤습니다. 야당 총재인 김두오 의원의 맏아들 이라고요. 한국 사회에서는 대단한 배경일지 모르지만 저에 비하면 택도 없다는 걸 잘 아실 텐데요?" 분했지만 그 말은 맞았다. 세계 제일의 부자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앤드 류는 그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고 오만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의 사 람이었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앤드류는 화제를 바꿨다. "한국은 참 재미있는 나라입니다. 한국의 첨단 산업을 이끌어 가는 중원 전자와 유한전자를 강제 흡수하기 위해 미국이 이미 두 차례나 M&A를 시 도한 적이 있습니다만 한국 정부는 그때마다 번번이 유전으로 벌어들인 자금을 총동원해서 막아내더군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기업의 자율성 이 좋아지지 않고 결국은 국가 경쟁력 감소를 가져오게 됩니다." "하지만 중원전자와 유한전자는 가히 세계의 정상급 회사들입니다. 지금 세계의 유학생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우리나라 대학에 오려고 하고 우리나라 기업에 취직하길 원한다는 건 잘 아실 텐데요. 조만간 중원전 자나 유한전자 둘 중의 하나가 카를로스마저 능가할 때가 있을 겁니다.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카이스트가 MIT를 능가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판 국입니다." "카이스트와 MIT는 모르겠지만 중원전자와 유한전자는 카를로스하고 비 교가 안 되죠. 카를로스는 손목시계에 들어가는 소형 칩에서부터 군함이 나 미사일, 인공위성에 사용하는 컴퓨터와 게임, 워드프로세서, 보안 프 로그램, 인터넷 등등 전자기기라면 그 영향을 끼치지 않는 분야가 없으 니까요. 장담하지만 중원전자나 유한전자가 카를로스를 추월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만약 유전에서 나오는 돈을 전부 다 중원전자나 유한 전자에 쏟아 붓는다면 모르지만요." 과연 스스로의 능력으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된 남자답게 오만하다 느껴 질 정도로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한국에 온 것은 셰펠함 4척을 판매하기 위해서였 습니다. 이제 그 계약도 다 끝났고 하니 슬슬 관광이나 하며 돌아다닐 참입니다. 아참, 그러고 보니 한국에는 맥이라는 재미있는 변신 장난감 이 있더군요." 재미있는 변신 장난감이라 빈정대는 그 무기가 예안이 만든 거라는 걸 알게 되면 이 남자는 어떤 얼굴을 할까. "개인적으로 맥에 대해 굉장히 흥미가 있습니다. 그런 세기적인 첨단 무 기를 만든 프랭크 안쏘니 유젤이 죽었다는 건 굉장히 유감으로 생각합니 다만, 어쨌든 이것으로 한국 기업들은 당분간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겠군요. 0%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달성했던 한국 금융 기관도 더 이상 한국 기업을 지원할 수 없을 테구요. 유전이 일개 개인에게 넘 어가 버렸으니 말입니다." 만약 무한동력이라는 개념이 사실이라 해도 현재로서 맥은 한국 내의 모 든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발전소와 요격이 불가능한 핵미사일 정도의 가치밖에 지닐 수 없다는 걸 지적하는 말이었다. 그 두 가지만으로도 충 분히 대단하다 말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천재 경영인이 생각하기에는 유전이 지닌 가치에 비할 바가 못 되는 것이었다. "무한동력이라. 그런 터무니없는 장치를 만들어낸 세기의 천재가 이미 죽었다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약 살아 있었더라면 한국 유전 같은 걸 수십 개를 갖다 바친다 해도 전혀 아깝지 않을 테지만요." "무한동력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맥은 유전 이상의 가치가 있습 니다. 국민들도 그걸 아니까 투표에서 맥을 구입한다 결정한 거구요."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핵을 갖고 싶어서 환장한 것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여자의 나라라 한국이 마음에 드는 편이 긴 하지만 이번 한국민의 결정은 굉장히 어이없군요." 앤드류는 차갑게 일소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과는 상이한 감정이 푸른 눈동자 안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대화의 주도권을 대부분 그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에 속으로 분해하고 있던 중현은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by eden 아침이 찾아오자 예안은 눈을 뜨고 일어나 세면대로 갔다. 간단히 샤워 를 하고 나온 예안은 간편한 옷차림을 한 채 아침상을 차렸다. 자신은 먹지 않아도 되고, 또 여자가 된 후 무얼 한 번 입에 대본 적도 없지만 정호는 다르기에 안 차릴 수는 없었다. "이번엔 아빠 입맛에 좀 맞았으면 좋겠는데. 요리라는 게 생각보다 어렵 구나 어려워. 앞으로 요리사들을 무조건 존경하든지 해야지 원." 자신의 요리솜씨는 경력에 비해 꽤나 좋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예안은 마 음에 들지 않았다. "근데 유니콘. 생각해보니 시트날타에 있는 동안 레이온 형을 한 번도 못 봤잖아. 어떻게 된 거지? 시트날타가 레이온 형한테 나 잡았다고 연 락을 안 했던 걸까?" 「못 받은 건 아니겠지요. 다만 주변의 눈이 있어서 함부로 만나기가 좀 그랬을 겁니다.」 "레이온 형이 날 도와주면 쉽게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네가 노래를 불 렀잖아? 근데 형 도움 없이 무사히 탈출한 걸 보면 나도 꽤나 운이 좋은 녀석인 게 아닐까? 이참에 한 번 로또나 해버려?" 「로또 일등에 당첨되는 금액보다 유전에서 일 년간 나오는 금액을 은행 에 넣어두었을 때 나오는 하루 이자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그건 재미가 없잖아? 너 따위 인공지능이 로또의 그 맛 을 알아? 번호가 하나씩하나씩 뽑혀졌을 때 하나둘씩 맞아떨어지는 그 스릴과 결국 꽝이라는 사실에 절망하는 그 서러움을 네가 알아?" 「전 인공지능이다 보니까 그 스릴이라는 게 무엇인지 쉬 감이 잡히지 않는군요.」 "인공지능이 그런 감정을 알 리가 없지." 어느덧 아침상이 그럭저럭 차려졌다. 유니콘은 반박했다. 「인공지능이라 해도 얼마든지 감정을 지닐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정서 구조와 완벽하게 똑같은 시냅스를 갖춰야 합니다. 당연히 현인류의 기술로는 그런 인공지능을 만들어낼 순 없습니다만, 절 만든 사람은 충분히 그런 인공지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 다.」 "호오? 그런데 넌 왜 감정이 없는 건데?" 「저는 감정이 필요 없는 전투병기니까요. 인간형 휴머노이드에게만 그 런 기능이 필요할 뿐입니다.」 어느 SF 영화에 나오는 감정을 갖고 싶어하는 안드로이드의 대사와 흡사 했다. 하지만 평소 '환골탈태가 하고 싶어요! 왜 명상을 해도 안 되는 거죠?'하면서 징징거리던 짓거리에 익숙해져서 그런 건지 서글픈 기분 따위는 들지 않았다. "됐다. 이제 아빠 깨우러 가야지." 아침상을 다 차린 예안은 정호의 방으로 들어갔다. 또 어제 새벽까지 컴 퓨터로 장기를 둔 건지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 정호의 침대에 다가간 예 안은 이불을 확 뺏어들었다. "일어나 아빠! 아침이야!" "으, 음… 5분만 더 잘게…" "나 오늘 자퇴하러 학교 갈 거니까 아빠는 밥 차려둔 거 먹어. 괜히 또 점심 넘도록 자다가 아침상 다 식었다고 투덜거리지 말고. 알았지?" "아, 알았어…" 목소리가 잔뜩 잠에 취한 걸 봐서는 전혀 알아들은 것 같지 않지만 곧 학교를 가야 할 시간이었기에 예안은 더 깨우지 않고 서둘러 자신의 방 으로 갔다. 쇼핑백에서 어제 새로 사온 여자 교복을 꺼내어 서운한 표정 으로 한참을 들여다보던 예안은 픽 웃어버렸다. "내가 이거 입고 가면 다들 놀라겠네. 친위대 누나들이 그렇게나 달달 볶을 때도 꿋꿋하게 남자 교복 입고 다녔는데 무슨 바람이 들어서 치마 를 입는 건지 모른다고 말이야. 안 그래?" 「그렇겠군요.」 "뭐, 사실 치마 입는 게 좋은 건 아니지만 처음 입어보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오늘로 학교는 끝이니까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서비스로 입어준 다 생각하지 뭐." 그래도 제법 철이 든 건지 이제는 기특한 생각까지 다 할 줄 아는 모양 이다. 학교로 간 예안은 벌떼같이 자신에게 몰려드는 아이들의 공세를 억지로 웃는 낯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생각 같아서는 제발 좀 비켜달라고 소리 라도 지르고 싶지만 이게 다 미소녀의 몸으로 살아가는 팔자려니 하고 받아들여야 하겠지. "공주! 도대체 그동안 얼마만큼 아팠기에 학교를 안 나온 거야! 공주가 없는 동안 우리가 4반 녀석들에게 얼마나 많은 괄시를 받았는지 알기나 하는 거야!" 자신의 손을 꽉 붙잡은 채 눈물까지 글썽이는 배준혁의 박력에 질린 예 안은 차마 손을 뺄 생각도 못했다. "너무해! 너무해! 너무해! 도대체 어떻게 말 한 마디 안 하고 그렇게 오 랫동안 학교를 안 나올 수 있어! 공주 수칙 제 13조를 그새 잊어버린 거 야? 불가피한 사정에 의한 결석 혹은 전학을 가게 되었을 땐 반드시 미 리 알려야 한다!" "맞아! 맞아! 공주는 너무해! 그, 그런데 치마 입은 모습 예쁘다." 아침 자습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공부할 생각은 않은 채 복도에 길게 늘 어져 예안의 손 한 번 잡아보려고 단단히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의 행렬 은 쳐다보는 게 겁이 날 정도였다. 학교 분위기가 이래서야 낡은 전통을 타파하자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동료들을 끌어 모으는 등 힘든 투쟁 을 벌이다 결국 실패로 돌아가 장엄한 최후를 맞이하는 혁명가가 탄생하 려면 한참이나 먼 듯 싶다. "그만! 모두 안으로 들어가! 어? 예안이 너 치마 입었네? 무슨 바람이 분 거야? 다리도 예쁘구만 왜 그동안 치마를 질색한 거니?" 아이들은 교무실에서 올라온 정선생의 명령도 듣지 않았다. 지나가던 교 사들까지도 웃으면서 그냥 내버려두라고 하는 판국이니 더 말해 무엇하 겠는가. 대명고등학교는 참 여러 모로 특이한 학교였다. 예안은 간신히 시간을 내어 혜인을 따로 만날 수 있었다. "너 그동안 정말 어떻게 된 거야? 많이 아프다길래 내가 얼마나 걱정했 는지 알기나 해?" "미안, 미안해. 연락을 할 정신이 없었어. 내가 진짜 엄청 아팠거든." 꽤 오랫동안 못 봤던 혜인은 재호로부터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있는 건지 혈색이 좋았다. "그런데 너 표정이 굉장히 좋아졌다? 그 쓰레기가 이제 더 이상 너한테 치근덕거리지 않는 거야?" 예안이 말하는 쓰레기가 누군지 알아차린 혜인은 잠시 어두운 표정을 지 었지만 이내 밝아졌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요즘에는 나한테 거의 연락 안 하거든. 아, 하지만…" "왜?" "저기…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 사람이 너한테 표적을 돌린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거든. 게다가 네가 예전에 그 사 람 자존심도 많이 다치게 했으니 아마 단단히 벼르고 있을 텐데…" "걱정 마. 걱정 마. 내가 그따위 쓰레기한테 당할 애로 보여? 네 몫까지 내가 확실하게 혼내줄 테니까 너는 안심하고 있어. 만약에 그 녀석이 널 또 괴롭히면 두말 않고 나한테 연락해. 내가 총알같이 달려갈 테니까." 가냘픈 주먹을 쥐어 보이는 시늉까지 하는 예안이 그저 사랑스럽기만 한 혜인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아 그런데 너 여름방학 때 퀸 페스티벌이 있는 거 알지? 너도 참가해야 하니까 준비 단단히 해두고 있어." "여름방학은 아직 많이 남았잖아? 뭘 벌써부터 준비한다는 거야?" "원래 페스티벌 시작하기 한두 달 전부터 준비하는 거야." "흐응… 그런데 그 페스티벌 자금은 도대체 누가 대는 거야? 설마 참가 비 같은 걸 엄청 뜯어서 꾸려 가는 건 아니겠지?" "전에 말했잖아. 퀸이 된 여자애는 영화사에서 신작 영화 주연으로 뽑아 간다구. 워낙에 경쟁이 치열한 데다가 인지도도 굉장히 높아서 방송국에 서 앞다투어 후원자가 되려고 하는 걸." "경쟁이 치열하다니?" "몰랐어? 숙명고등학교하고 우리학교 말고도 전국에서 대략 백 개도 넘 는 학교가 해마다 참가한다구." 퀸 페스티벌이 그 정도로 엄청난 규모로 치러진다는 건 상상도 못한 이 야기였다. 하마터면 게거품을 물고 쓰러질 뻔했던 예안은 간신히 침착함 을 되찾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난 분명히 숙명고등학교랑 우리학교가 라이벌 관계 라고 들었는데…" "물론 시초는 우리 학교 출신의 선배와 숙명고등학교 출신 사람 사이에 경쟁이 붙어서 만들어졌다고 해. 하지만 점점 규모가 불어났고 결국에는 백 개가 넘는 학교가 참가하는 엄청난 행사가 되어 버린 거지. 아, 하지 만 매년 결승까지 올라가는 건 우리학교랑 숙명고등학교 뿐이야. 다른 학교는 아무래도 공주에 대한 학교의 지원이 약하거나 엄격한 편인데 우 리 학교나 숙명고는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주잖아." 확실히 공주 임명장을 주는 사람이 학생회장인 데다가 전교직원들까지 전부 참가하는 자리에서 치러지는 행사니까 지원이 엄청난 편이긴 하다. 예안이 이해한 표정이자 혜인은 다시 덧붙였다. "그러니까 너도 준비 단단히 해둬. 남자 같은 말투도 좀 고치고 그래야 돼. 우리학교가 올해는 너한테 굉장히 기대를 많이 걸고 있거든. 내 생 각에는 딴 거 필요 없이 그냥 모자 벗은 이대로 햇빛 아래 나가면 몰표 를 받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혜인이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은근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 자 예안은 약간 기겁했다. "그렇게 했다가는 난 졸지에 구경거리가 되어 버리고 말 거야! 그리고 생체 연구소에서 혹시 내가 무슨 외계인이나 돌연변이가 아닐까 의심해 서 잡아다가 온갖 실험을 하는 바람에 정신과 몸이 피폐해져 결국은 비 참하게 최후를 맞이하게 될 거야! 그것만은 사양하겠어!" "…너 SF를 굉장히 많이 본 모양이네?" 깔깔대며 웃는 혜인의 귀여운 미소를 그저 좋은 듯 히죽 웃으며 들여다 보던 예안은 이제 슬슬 준비해둔 말을 해야 할 타이밍이라는 걸 느끼고 얼굴을 굳혔다. 즐겁게 웃던 혜인은 예안이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할 듯 보이자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무슨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니?" "김혜인. 사실 나 퀸 페스티벌에 못 나갈 거야." "못 나간다고? 왜?" 볼을 긁적이며 망설이던 예안은 힘들게 입을 떼었다. "나 오늘 자퇴할 거라서." "뭐어?" 뜻밖의 폭탄 선언에 소스라치게 놀란 혜인은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했 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자퇴한다니? 왜? 왜 자퇴한다는 거야?" 혜인의 놀란 눈동자에 담겨 있는 의구심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예안의 녹 색 눈동자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사정이 있어서 더 이상 학교 다닐 수가 없어. 집이 갑자기 망해서 돈이 궁해졌다거나 뭐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나 올해 검정고시 치르고 수능 봐서 일찍 대학에 갈 생각이야."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 거야?" "남들 다 보내는 즐거운 학창 시절을 포기하는 게 좀 속이 쓰리기는 해 도 어쩔 수 없어. 지금 내 사정이 좀 그렇거든. 아, 그렇지만 어디로 이 사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단지 학교만 그만두는 것뿐이니까 너랑은 언제 든지 연락할 수 있어. 내년에 네가 고2가 되면 난 대학생이 되어 있을 테지만 너무 부러워하지는 마라." 예안은 농담조로 설명을 끝맺었지만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혜인은 웃 을 수 없었다. "왜 갑자기 그렇게 빨리 대학에 가고 싶어진 건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 도 있는 거야?" "그건 아직은 말해줄 수 없어. 미안해. 하지만 나중에 반드시 꼭 말해줄 게." 섭섭함이 가득 담긴 혜인의 커다란 눈망울을 마주 보기가 뭐했던 예안은 볼을 긁적이며 멋쩍은 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냥 계속 다니면 안 되니? 나 너랑 같이 학교 다니고 싶은데." 서운함이 가득한 말투에 예안은 굉장히 미안했지만 혜인이 부탁한다 해 도 바꿀 수 있는 계획이 아니었다. "이미 양아버지 허락도 받아놨어. 미안해." "그래… 그렇구나. 결국 퀸 페스티벌에는 같이 못 나가겠네…" "내가 못 나가는 대신 네가 내 몫까지 열심히 해. 그래서 꼭 유혜민 그 기집애를 누르고 우승해야 돼. 알았지?" "유혜민? 그게 누구야?" 무심코 혜민의 이름을 꺼냈던 예안은 아차 싶어 얼른 말을 바꿨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눈에 띄게 당황하는 예안의 태도에서 말하기 껄끄러운 비밀이 있다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지만 친구가 자퇴한다는 서운함에 취한 혜인은 크게 신 경 쓰지 않았다. "휴. 너랑 같이 오래도록 학교 다니고 퀸 페스티벌에도 나가고 싶었는데 진짜 아쉽다. 그럼 선생님께는 말씀드렸어?" "아직. 조금 있다 말씀 드릴 거야."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학생회장 오빠한테도 말해야 돼. 적어도 작별인사 는 해야 할 거 아냐? 공주 수칙 제 13조를 잊은 건 아니지?" 자퇴하는 마당까지 꼴사나운 임명식 비슷한 걸 질질 끌고 다니기 싫어서 은근히 몰래 그만두려고 했던 예안은 순간 찔끔했다. 예안의 마음을 알 아차린 혜인은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쐐기를 박았다. "너 그냥 몰래 학교 그만두려고 했지? 하지만 그건 곤란해. 공주가 된 입장으로서 마지막 작별 송별회는 가져야 할 거 아냐? 내가 당장 학생회 장한테 가서 말할 테니까 몰래 도망가려고 해봤자 소용없어. 교장선생님 도 그냥 그만두는 거 허락 안 하실 거야." "…알았어. 걱정 마." 몰래 조용히 그만두려고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이상 공주를 보내는 송별회라는 게 되도록 꼴사납지 않고 짧기만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나? 점심시간에 되기 전에 예안이 학교를 자퇴한다는 소문은 고등학교뿐만이 아니라 중학교까지 퍼져 나갔다. 믿을 수 없는 비보에 당황한 학생들이 쉬는 시간마다 우르르 달려와서 예안에게 정말이냐고 물었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확인사살을 당한 채 절망을 안고 돌아가야만 했다. 오랜 병 생 활을 딛고 이제 다시 복귀한 '병약 미소녀'의 재림에 기뻐하던 대명 중 고등학교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암울함의 수렁으로 빠져버렸다. "고, 공주! 진짜야! 진짜로 학교 그만 두는 거야? 그, 그럼 치마를 입고 온 건 마지막으로 서비스한다는 생각에서였던 거야? 그런 거였어?" 예안이 고개를 끄덕이면 상대는 잠시 굳어 있다가 울상이 된 채 자기 교 실로 달려가 버린다. "공주님! 공주님! 진짜로 학교 그만 두시는 거예요? 퀸 페스티벌에도 안 나가고요? 진짜예요?" 중학교 여후배가 눈물을 글썽이며 묻자 고개를 끄덕여 주었는데 글쎄 세 상이 무너진 듯 절망하며 중학교 건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공주야! 왜, 왜 학교를 그만둔다는 거야? 우리가 너한테 치마 입으라고 닦달한 게 그렇게도 괴로웠니? 잘못했어, 이제 치마 입으라고 안 할 테 니까 제발 학교 그만둔다고는 하지 마!" 친위대 선배들이 단체로 몰려와 두 손을 꼭 잡은 채 울먹이며 그렇게 말 했을 땐 너무 미안해서 하마터면 그러겠노라고 대답할 뻔했다. 심지어 이렇게 묻는 녀석들도 있었다. "설마 공주 너 세현이 녀석 따라가려고 학교 그만두는 거 아니지?" "아,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랑 그 녀석이랑 열애하고 있었다는 소문이 지금 학교에 파다하다구!" 자퇴하는 이유를 밝히지 않는 예안의 행적에 대한 궁금증은 학교 안에 무성한 소문을 낳은 뒤였는데, 몇 가지 그럴싸한 걸 유추해보자면 대충 이런 것들이다. 첫째는 일단 한때 예안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되었던 세계 제일의 부자 앤드류 회장의 진짜 애인이 정말로 예안이었다는 설이다. 현실적인 인간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힌 이 주장은 주로 내심 자기 친구 가 신데렐라가 됐으면 하고 바라는 여자애들 사이에서 화제인데, 예안이 비밀리에 앤드류와 약혼하고 미국이나 영국으로 건너간다는 설이었다. 두 번째는 예안이 그동안 학교를 나오지 않은 건 백혈병 같은 불치병 때 문이었는데 오랜 요양을 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둔다는 것이었다. 이 설 은 주로 병약미소녀를 열렬히 신봉하는 남자 녀석들 사이에서 생명을 갖 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공주가 죽기라도 한단 말이냐!'라는 강력한 반 발에 부딪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예전에 미국 MIT 조교수로 유학을 간 차세현이 실은 예안과 연락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예안의 마음을 완전히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안이 세현과 맺어지기 위해 미국으로 건 너간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상 학교 안에서 이 설이 가장 유력하고 또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예안이 '셋 다 아니야! 그냥 집안 사정상 검정고시를 치르고 빨리 대학 교를 가야 할 이유가 있어서라구!'라며 펄쩍 뛰었지만 인간이란 동물은 상상을 먹고사는 동물이다 보니 오히려 온갖 의혹과 공상만 잔뜩 불러일 으키는 결과만 낳았다. "공주. 중학교의 유현우가 찾아왔는데?" 도대체가 이런 학교는 이 지구상에 또 없을 거라고 궁시렁거리고 있을 때 친구가 그렇게 말해줬다. 예안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복도로 나간 예안은 현우가 등을 돌리고 서 있는 걸 발견했다. "무슨 일이야?" 천천히 시선을 돌린 현우는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누나 학교 그만 둔다고 들었어. 사실이야?" 예안은 최대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어. 사실이야." "학교 그만둘 거면서 왜 우리한테는 아무 말도 안 했어? 적어도 의논은 해줄 수 있었잖아?" "너하고 난 남남이라는 거 잊지 마라. 친척도 아닌데 무슨 의논을 한다 는 건데?" 언제나처럼 차갑고 무뚝뚝한 말투에 현우는 가슴이 쓰라려 왔다. 도대체 얼만의 시간이 더 흘러야 예안은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줄 것인지 몰라 답답하기만 했다. "학교 그만두는 거… 그거 때문이지?" 현우가 그거라고 말하는 건 임신을 가리키는 것일 게다. 딱히 부정해봤 자 먹히지 않을 것이기에 예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것 때문이야." "…설마 안 지우고 그냥 낳으려고?" 예안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현우는 폭발할 것 같은 화를 꾹 참은 채 꽉 쥔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지워." "뭐?" "지우란 말이야. 누나 미쳤어? 왜 안 지우고 그냥 낳…" 짜악- 그러나 현우는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아픔을 퍼뜨리는 소리와 함께 얼굴이 돌아갔다. 눈앞에 튄 불똥이 가라앉은 뒤 현우는 아픔으로 붉어 진 뺨을 어루만지며 예안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예안은 잔뜩 화가 난 채였다. "지우라고?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내가 미쳤다고 지 우냐? 나한테는 굉장히 소중한 아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준 귀한 보석이라구. 근데 지우라고? 내가 너 시키는 대로 하는 그런 애로 보였 어? 그랬다면 대단한 착각이야 유현우. 진우에 비하면 넌 내 인생에 있 어 아무것도 아니란 거 알아 둬." 너무나 차가운 목소리. 가슴에서 치솟아 오르는 이 안타까움을 도저히 금할 수가 없었다. "한 번만 더 그딴 소리하면 그땐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아. 네 주제를 알 아라 유현우." 예안은 잔뜩 화가 난 채 그 한 마디를 남겨놓고는 더 이상 함께 있기 싫 다는 듯 휭하니 몸을 돌려 교실로 가버렸다. 뺨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통 증을 쓰다듬고 있던 현우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그만 주먹으 로 벽을 내리쳤다. 퍽- 살갗이 벗겨진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예안 의 인생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낙태를 받아야 할 것이고, 당연히 예안 도 그러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뒤에는 상처에 울고 있을 예안에게 다 정히 다가가 멋진 장밋빛 미래를 그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뭐라고? 낳을 거라고? "진우 형이 누나한테 그렇게나 소중한 사람이었어?" 여자는 아무리 자신의 인생이 중요해도 정말 사랑한 사람의 아기라면 그 사람이 죽어 없다고 해도 지우지 않고 낳아 소중히 키운다고 들었다. 하 지만 설마 예안이 그럴 줄은 미처 몰랐다. 그저 암담하기만 한 현우는 피가 흘러내리는 손을 들어 두 눈을 가렸다. 선뜻 낳아 기른다는 걸 볼 때 이미 정호의 허락을 받은 게 틀림없다. 앞 뒤 상황을 따져 보면 정호는 예안이 자신의 친손자를 가진 걸 알고 양녀 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직 예안이 어림에도 불구하고 자기 욕심 때문에 낳는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결국 이렇게 된 이상 그에게 주어진 선택은 좁은 폭으로 제한되었다. by eden 고등학생들보다 일찍 수업이 끝난 중학생들은 귀가하지 않고 운동장에 서거나 혹은 벤치에 앉아 어서 고등학생 선배들의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 다렸다. 오늘 느닷없이 자퇴한다고 폭탄 선언을 한 서예안의 전교 송별 식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누구 하나 웃고 있지 않았다.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다 서운함과 초조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송별식을 기 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고등학생 선배들의 수업이 끝나고 수천 명이 넘어가는 전교생이 운동장으로 몰려나왔다. 이별의 곡을 연주하기 위한 음악부 학생들이 운 동장 각종 악기를 든 채 운동장 한편에 서 있었고, 학생들은 침울한 표 정으로 하나둘씩 정렬했다. 교장과 교감 등을 포함한 교직원들까지 전부 다 참석한 가운데 그렇게 송별식은 엄숙하게 시작되었다. "당신을 떠나보내야 하는 우리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질 듯 하 염없이 아프기만 합니다. 당신이 떠난 뒤에 텅 비어버릴 우리들의 차가 운 가슴을 그 무엇으로 데울 수 없다는 게 슬프기만 합니다. 이별을 겪 으면서 인간은 한층 더 성숙해진다 하지만 우리는 차라리 퇴화를 할지언 정 당신을 떠나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아! 그 무엇으로 당신이 떠난 이 허전함을 채울 수 있을까요?" 정말이지 어떤 녀석이 썼는지 속에 메슥거릴 정도로 유들유들함이 징그 럽게 흘러 넘치는 낭독을 듣고 서 있던 예안은 차라리 폭탄이라도 터트 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젠장, 내가 오늘 그만둔다고 했는데 그 사이에 저렇게 길고 닭살이 뚝 뚝 흐르는 낭독문을 썼단 말이야? 도대체 어떤 녀석이 저 따위로 쓴 거 야!' 처음에 공주 임명식을 겪을 때도 느낀 것이었지만 저렇게 닭살투성이 낭 독문을 능숙하게 읽어 내려가는 거 보면 준우도 꽤나 소탈한 성격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만 당신을 놓아주려 합니다. 당신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시간들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게 슬프지만 당신을 웃으며 떠나 보내주려 합니다. 눈물은 절대 보이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부담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당신이 떠난 빈자리를 바라볼 때마다 가슴 이 찢어지는 듯 아파 오고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겠지만 당신의 행 복을 빌겠습니다. 그래서 아주 먼 훗날 당신을 다시 만났을 때 밝게 웃 으며 우리가 얼마나 많이 성장했는지 자랑하려 합니다…" '자랑을 하든지 말든지.' "…그동안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얼 굴을 매일 같이 볼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당신의 고운 목소리가 우리 들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는 하늘이라도 날아오를 듯 기뻤습니다. 당신 의 체취를 느끼고, 당신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당신의 미소를 이 마음 속에 고이고이 간직할 수 있어서 정말 축복이었습니다. 앞으로 그 무엇 으로도 이 행복과 기쁨, 설렘, 그리고 축복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입니 다. 우리들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당신이 준 최고의 선물이니까요." '내가 언제 선물 따위를 했다고.' "행복하십시오. 영원히 행복하십시오. 우리는 항상 당신의 행복을 기원 하고 또 당신이 웃을 수 있기를 염원하겠습니다. 이상. 대명 중고등학교 제32대 세 번째 공주를 보내며. 대표 학생회장 유준우." 오랫동안 어두운 터널을 헤쳐 나가다 절망에 쓰러졌을 때 한 가닥 햇빛 을 본 기분이 이러할까. 예안은 드디어 끝났다는 기쁨에 취해 하마터면 환호성을 지를 뻔했지만 전교생의 시선을 의식해서 억지로 침울한 표정 을 유지했다. "그럼 프린세스 서예안은 앞으로 나와서 전교생들에게 작별 인사를 해주 기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 절차로 전교생들에게 인사하는 것만 남았다. 준우가 비켜준 자리에 선 예안은 지겨운 게 드디어 끝났다는 기쁨을 간신히 억누르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특별히 할 말은 없구요. 이미 알고 계신 바와 같이 저는 집안 사정 때 문에 오늘 학교를 자퇴해요. 검정고시를 치르고 올해 혹은 내년에 수능 을 볼 테니까 아마도 내년이나 내후년쯤에는 저와 같은 학년인 분들보다 는 먼저 대학생이 되어 있을 거예요."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단체 초상이라도 난 듯 학생들의 얼굴에는 하나같 이 침울함이 가득했다. 더 할 말이 없었던 예안은 단상에서 옆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항 상 쓰고 있던 밀짚모자에 오른손을 올렸다. 숨 한 번 쉴 타이밍에 밀짚 모자가 벗겨졌고 찰랑거리는 붉은 머릿결이 햇빛을 파랗게 반사하며 바 람에 탐스럽게 흩날렸다. 사람에서 아름다운 천사로 변한 듯 이루 말할 수 없는 신비한 광경에 학생들은 입을 쩍 벌렸다. 극적인 효과까지 계산해 얼굴 각도까지 신경 쓴 예안은 귀엽게 생긋 웃 었다. "그럼 모두 안녕~" 손가락을 들어 녹색 눈동자를 찡긋한 예안은 입을 다물지 못하는 학생들 에게 손까지 흔들어 주는 여유를 보였다. 이윽고 예안이 완전히 교문을 빠져나갔을 때에도 아이들은 아름다운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진짜 굉장했어. 아이들의 놀라서 아예 돌이 됐었다니까. 응. 정말 굉장했어. 지금 삼분의 이도 넘는 애들이 집에도 안 가고 네 이야기만 하고 있다니까." 조금쯤은 질투할 법도 한데 혜인은 친구가 천사같이 아름답다는 사실이 그저 자랑스럽기만 한 듯 밝은 표정으로 수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진짜 얘들이 섭섭해하더라. 만약 네가 퀸 페스티벌에 나간다면 우승은 따논 당상인데 말이야. 너 혹시 연예계 같은 데 진출해볼 생각은 없어? 응? 음… 맞아. 나도 연예인 친구 하나 정도 갖고 싶어서 그래." 혜인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쑥스러운 듯 예안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 는 것도 아닌데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뭐? 조만간 유명인 친구 하나 만들어 준다고? 와, 너 진짜 연예계 나가 려고 그래? 응? 그게 아니라 다른 거? 다른 거 뭐? 에이, 그러지 말고 말해 봐. 나중에? 지금 말해주면 안 돼? 응 알고 싶은데… 알았어. 그럼 나중을 기대할게. 어. 나 지금 가봐야겠어. 끊어." 예안과 긴 통화를 끝낸 혜인은 벤치에 놓았던 가방을 집어들다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등뒤에는 중학교에서 전교 일등을 도맡 아 한다는 현우가 서 있었다. "아, 안녕?" 현우가 아이큐 170의 중학교 전교 일등이라고만 알고 있을 뿐, 진우의 사촌동생이라는 건 꿈에도 모르는 혜인은 그가 자신에게 무슨 볼 일이 있는지 몰라 의아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선배. 그냥 누나라고 불러도 되죠?" "응. 그렇게 해. 너 중학교의 유현우 맞지? 처음에 예안이랑 사귀다가 금방 채였던… 아차!" 무심코 그렇게 말하던 혜인은 현우의 상처를 건드렸음을 깨닫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제가 예안이 누나한테 많이 부족해서 차인 거고 또 아직 포기한 것도 아니니까요. 그런데 누나, 예안이 누나랑 많이 친하 죠?" "응. 친하긴 한데 왜? 예안이한테 네 말 좀 잘해달라는 부탁은 들어줄 수 없어. 사실 예안이가 다른 남자랑 맺어지지 않게 나보고 잘 좀 관리 해달라고 세현이가 부탁했거든. 너도 고등학교의 차세현 알지?" "예. 알아요." 뒤늦게 아이큐가 200이 넘는 천재라고 밝혀진 차세현이 얼마 전에 MIT 조교수로 유학 갔다는 걸 이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예안이 누나랑 다리 좀 잘 놔달라는 부탁 같은 걸 하려는 건 아 니에요. 다름이 아니라, 예안이 누나가 제발 좀 정신 좀 차리게 설득 좀 해달라는 부탁 좀 하려구요. 누나는 예안이 누나랑 많이 친하니까 그래 도 어느 정도는 먹힐 거 아니에요? 제가 하는 말은 씨알도 안 먹혀요." "정신을 차리게 해달라니? 왜? 학교 자퇴하는 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하지만 집안사정상 빨리 수능 쳐서 대학생이 되겠다는 게 꼭 나쁜 것만 은 아니잖아? 방황하느라 학교를 그만두는 것도 아니고…" 예안이 임신에 관해서 혜인에게 아무 말도 않은 게 확실했다. '하긴 진우 형과 혜인이 누나가 어떤 사이였는지 예안이 누나도 알고 있 을 테니까 그런 말은 차마 못 하겠지. 친구라 생각한다면… 어라?' 현우는 자그마한 의문이 생겼다. '그럼 예안이 누나는 그냥 이 누나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접근한 게 아니라 정말 친해지고 싶어서였던 건가? 아니면 원래는 그게 아니었는데 같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깊이 친해진 걸까? 그나저나 내가 꼭 이렇게까 지 해야 되나? 정말 한심하다 유현우….' 혜인을 끌어들여 예안이 낙태를 받도록 하는 건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 지만 해볼 수 있는 건 전부 해볼 참이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집에 돌아 가면 부모님과 형들에게까지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힘만으 로 예안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게 굉장히 비참했지만 상관없었다. "예안이 누나 임신했어요. 그래서 학교 그만두는 거예요. 안 지우고 낳 아서 키운대요. 그게 말이나 돼요?" 혜인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어? 그게 진짜야?" 단지 빨리 사회 생활을 겪고 싶어 자퇴하는 거라 생각했던 혜인에게 예 안의 임신 소식은 개구리알에서 고릴라가 태어났다는 것만큼 충격적이었 다. 그녀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임신이라고? 진짜? 걔가 진짜로 임신했단 말이야?" "예." "서, 설마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한 거야? 그런 거야?" 매달리기라도 할 것처럼 절박하게 친구를 걱정하는 눈망울을 본 순간 현 우는 강한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양심과는 상관없이 입이 움직이고 있었다. "안 좋은 일을 당했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사귀던 남자 사이에서 생긴 모양이에요. 그래서 낳으려는 거겠죠. 누나는 예안이 누나랑 친하니까 제발 좀 설득해서 아기 지우라고 해주세요. 세상에, 고1밖에 안 됐는데 벌써부터 애엄마 되겠다는 게 제정신으로 할 소리예요?" "뭐? 안 지우고 낳는다고? 설마 그 나이에 벌써 결혼하겠다는 거야?" 펄쩍 뛸 듯 놀라던 혜인은 문득 단지 예안을 좋아하는 중학교 후배인 줄 만 알았던 현우가 어째서 그걸 알고 있는지에 퍼뜩 생각이 미쳤다. "그런데 왜 네가 그런 걸 알고 있어? 그건 친구인 나도 모르는데? 설마 혹시 아이 아버지가 바로 너야?" 의구심을 품은 눈동자와 시선이 얽힌 순간 현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정말 그런 거라면 예안이 누나가 아이 낳는다는 결정은 저도 대찬성이죠. 하지만 그게 아니니까 제가 낳지 말라고 설득 해달라고 지금 누나한테 부탁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예안이가 그런 걸 성급하게 결정할 리가 없잖아? 나한테까지 숨 긴 건 조금 섭섭하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좋아한 사람이라면 그 나이에 결혼할 생각도 가질 수 있는 건데 뭐 어때?" 희박한 가능성을 위해 혜인의 상처까지 건드리려는 건 정말 비겁한 일이 었지만, 조금 전까지 양심을 건드리고 있던 죄책감은 '매력적인 암컷'을 손에 넣고 싶은 '수컷'의 정복욕에 어느덧 잡혀 먹히고 말았다. "아이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에 없어요. 몇 달 전에 죽었거든요. 그런데 도 예안이 누나는 아이를 낳으려고 해요. 이게 미친 짓이 아니고 도대체 뭐예요? 누나는 그게 옳다고 생각해요?" "진짜? 진짜야?" 남자 문제에 전혀 관심 없는 예안이 좋아하는 남자와의 관계에서 임신을 했다는 것도 천지가 개벽한 만큼 놀라운 일이었지만, 아이 아버지도 없 는 마당에 미혼모가 되겠다는 건 스켈레톤이 출산했다는 것보다 더 충격 적이었다. "말도 안 돼! 아무리 좋아했어도 그렇지, 어떻게 이 험한 세상에 여자애 혼자 애 낳아 키울 생각을 다 한단 말이야? 아무리 아기가 불쌍해도 그 렇지, 지 인생은 어떻게 하고? 안 되겠어. 당장 말려야겠어!" 서둘러 그 자리를 뜨려던 혜인은 급히 팔을 뻗은 현우에게 손을 붙잡혔 다. "누나, 잠깐만요! 아직 중요한 걸 하나 안 듣고 갔어요." 마음은 급한데 현우가 손을 놓아주지 않으니 짜증까지 났다. "뭔데? 빨리 말해." "애 아버지가 누군가 하는 거요. 아직 그거 안 듣고 갔잖아요. 그게 굉 장히 중요한 거라구요." "중요하다고? 애 아버지가 누군데?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야? 넌 아니라 고 했잖아?" 막 입을 떼려는 순간 현우는 죽어버린 줄 알았던 양심이 다시 되살아나 며 마음을 불안으로 물들이는 걸 느꼈다. 현우는 흔들리다 결국 쓰러져 버릴 것 같은 이기심의 기둥을 단단히 붙들며 의구심이 가득 담긴 혜인 의 눈동자를 주시했다. "진우 형 아기예요." 처음에 혜인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한참이 지난 후 겨우 말뜻을 이해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누구…라…고?" '수컷'의 이기심에 사로잡힌 현우는 잔인하게 또박또박 말했다. "진우 형이요. 설마 그새 잊어버린 거예요? 누나와 예전에 사귀었다던 유진우 형이요. 혹시나 진우 형이 누나한테 제 이야기했을지도 모르겠네 요. 저 진우 형 사촌 동생이예요. 누나한테 인사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지만요." 혜인의 눈동자에 떠오른 경악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불신과 충격의 빛이 가득 담겼다. 줄이 끊어진 엘리베이터처럼 폭발적인 기세로 뜀박질하는 심장은 엄청난 고통을 호소했다. 가슴이 찢어져 나가는 아픔 속에서 혜 인은 힘들게 입을 떼었다. "너… 농담이지? 그렇지?" "농담 아니에요. 예안이 누나가 진우 형 아기 가진 거 맞고, 제가 진우 형 사촌동생인 것도 맞아요. 유현우라는 제 이름 보면 모르겠어요? 뭣하 면 제가 진우형이랑 같이 찍은 사진을 보여드릴까요? 지금은 안 되지만 내일 학교에서 보여드릴 수 있어요."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예안이는 진우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 했잖아? "말도 안 돼! 예안이는 진우하고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구! 그냥 단순히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만 말했단 말이야!" 차라리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염원이 간절한 목소리였지만 현우는 잔인 하게 혜인의 기대를 깨부쉈다. "예안이 누나가 누나한테 그동안 거짓말 한 거라구요. 설마 정말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진우 형이 누나를 찬 건 예안이 누나 때문이었다구요. 하긴 누나도 상당히 예쁜 편이긴 해도 남자라면 누구나 다 예안이 누나 를 선택할 테니까. 예안이 누나가 누나한테 접근한 건 누나가 진우 형이 랑 한 번 사귀었다길래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였을 거예요 아마. 예 안이 누나가 그동안 누나를 갖고 논 거라구요." 상처를 더욱 덧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빈정거리는 현우의 목 소리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겨우 잊은 줄 알았던 좋아하는 사람 에 대한 그리움은 친구의 배신에서 빚어진 치떨리는 실망을 양분 삼아 다시 마음 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혜인은 주먹을 꽉 쥔 채 폭우가 내리는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청정한 하 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어진 눈시울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았 지만 힘들게 참았다. "서예안… 너…" 얼마 전까지 진우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던 예안은 유한 그룹 후 계자 재호와 이리저리 얽히면서 말실수를 하는 바람에 결국 진우의 부친 과 자신의 부친이 친했기에 진우랑은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말했었 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굉장히 의심스러웠지만 소중한 친구를 잃을까 겁 이 난 나머지 지금까지 묻어두었다. 그런데 지금 현우가 하는 말은 도대 체 무엇인가?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치사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예안이 누나가 만약 이 누나랑 정말 친하다 생각한다면 지우겠지?' 현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 없는 혜인은 친하다 생각했던 친 구에게 배신당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 다 그녀는 자신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마음 속에서 폭우가 내렸다. by eden 우울한 하루입니다. 전 조용히 지내고 싶은데, 왜 그걸 내버려두지 못 하는 걸까요.;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94 회] 날 짜 2003-12-28 조회 / 추천 4433 / 48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단절의 증거 어제 저녁에 예안으로부터 임신 사실을 전해들은 뒤 놀랐다기보다는 황 당하고 어이없는 기분으로 간신히 잠을 청했던 정호는 아침이 찾아왔을 때에도 약간 멍한 상태였다. 임신이라니! 이 무슨 강아지 자살하는 소리 란 말인가? 침대에 일어나 앉은 정호는 멍한 기분에서 좀처럼 풀려나지 못했다. "아니, 도대체 남자들 보는 시선 좀 고치라고 그렇게 말할 땐 싫다고 하 더니 갑자기 임신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거야?" 보통 여고생을 지닌 부모라면, 그것도 홀아비라면 이런 경우 당장이라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이 걱정하고 또 걱정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남자 였던 자식이 행방불명된 후 느닷없이 딸이 되어 돌아온 뒤 어떻게 하면 나중에 손자를 볼 수 있을까 애가 탈대로 타던 정호에게 예안의 임신 소 식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침대에서 빠져나온 정호는 거실로 나왔다. 먼저 일어난 예안이 미리 기 다리고 있다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맞이했다. "잘 잤어?" "그, 글쎄다. 잘 잔 건지 제대로 못 잔 건지…" 정호는 혼란스런 기분을 정리하려 애쓰며 입을 떼었다. "그런데 너 어제 한 말 말인데… 그거 진짜니?" "응. 지금 3개월 중." 얼굴 가득 행복한 기운이 넘치는 걸로 봐선 강간 등의 불미스러운 일로 생긴 생명은 아닌 듯 한데, 그렇다면 남자가 싫다고 그렇게 질색하던 건 전부 다 내숭이었단 말인가? 정호는 그동안 자신을 감쪽같이 속인 예안 에게 배신감을 느끼기보다는, 서서히 상황 파악이 됨에 따라 걱정이 치 솟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빠한테 그런 말 한 거 보면 낙태하게 같이 병원 가고 싶어서 그런 거야? 혼자 가기는 무섭고 창피해서?" 어째서 아빠는 그런 말을 입에 담는단 말인가. 안색이 창백하게 굳은 예 안은 발끈해서 외쳤다. "낙태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왜 낙태를 해! 내가 언제 낙태 같은 거 한다고 했어!" "너 그럼 낳을 거야?" "낳을 거야." 분명히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어디가 좀 이상해진 게 틀림없다. 정호는 질겁한 채 말렸다. "낳아서 어쩌려고? 입양기관이나 고아원에 보내려고? 너 그게 얼마나 나 쁜 짓인지 알기나 해? 책임질 수 없을 것 같으면 그냥 지워 버려. 그게 또 네 인생을 생각한다면 낳아선 안 돼." 묵묵히 듣고 있던 예안은 정호를 납득시키기 위해 미리 준비해둔 변명거 리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아빠. 내가 행방불명되고 난 뒤 처음으로 김윤우 박사가 나 데리고 와 서 아빠한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했던 거 기억하지?" "으, 응. 근데 왜?" "사실 그때는 경황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어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 는데, 나 여자친구랑 같이 바다 보러 가던 중이었거든. 그런데 그만 그 때 사고가 나고 만 거야. 그래서 김윤우 박사가 뇌 이식 수술을 해준 거 지." 정호는 더러워진 얼룩을 씻어내듯 머리 속이 점점 맑아지는 걸 느꼈다. 슬슬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상황파악이 되었다. "너 그럼 설마?" "아빠가 생각하는 게 맞아.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몸은 내 여자친구의 몸이야. 그리고 지금 내 뱃속에 있는 아기는… 그, 그게 말이지… 그러 니까…" 아무리 '뻥'이라지만 차마 그 뒷부분은 제정신으로 설명할 수 없었는지 예안은 그만 얼굴을 붉혔다. 비로소 어째서 예안이 임신 중이었는지 그 원인을 알게 된 정호는 안색이 환해졌다. "네가 남자였을 때 미리 심어놓은 씨가 애기가 됐다는 거야? 그런 거 야?" 미리 심어놓은 씨라. 뭔가 상당히 적나라한 느낌이 드는 말에 예안은 얼 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 그렇지. 그래서 난 지우고 싶지 않아. 내 여자친구랑 나 사이에 마 지막으로 생긴 생명이라서 그냥 낳아서 내가 키우고 싶어." "여어, 우리 아들? 이제 보니 능력이 꽤나 좋은 걸. 예쁜 여자친구랑 이 미 만리장성까지 다 쌓으셨다니 말이야." 가뜩이나 붉어져 있던 얼굴이 정호의 놀림에 불붙은 홍시처럼 더욱 빨갛 게 물들었음은 물론이다. "그런 식으로 놀리지 마. 하여튼 전에도 말했듯이 난 절대 결혼 안 할 거니까 인생이 어쩐다느니 하는 말로 말리지 마. 나 이 아이 꼭 낳아서 키울 거야."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의 관계에서 생긴 아이라면 당연히 반대해야 옳겠 지만 예안이 갖고 있는 특수한 사정을 고려해볼 때 차마 지우라고 할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남자였을 때 마지막으로 남긴 생명이 지금의 몸에 서 자라고 있다는데 어떻게 그걸 지우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난 잘 모르겠다. 사실 내 입장에서 볼 때 그 아이가 내 마지막 친손주 나 다름없는데 지우라고 하는 건 싫어. 하지만 돈도 돈이지만 아직 고1 밖에 안 된 네 인생을 생각해볼 때…" "…나 학교 그만둘 거야." 느닷없는 폭탄 선언에 정호는 하마터면 펄쩍 뛸 뻔했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네가 왜 학교를 그만 둔다는 거야!" "학교 그만 두고 올해 검정 고시 치른 다음 수능 볼 거야. 학창 시절을 버리는 게 좀 아깝긴 하지만 지금 나한텐 아기가 더 소중해." "하지만 아기를 낳는다 쳐도 그 돈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전에 김윤우 박사가 나한테 잘 보이려고 돈 줬다고 말했지? 그것 덕분 에 아빠 일도 그만두고 이제 편히 살 수 있게 됐는데 벌써 잊은 거야? 아직 삼 억 정도 남아 있으니까 그걸로 내가 취직해서 자리잡을 때까지 학비나 생활비 넉넉하게 충당할 수 있어." 사실 삼 억이라면 대한민국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서민으로서는 만 져 보기도 힘든 액수다. 취직해서 자리잡을 때까지가 아니라 아마도 자 식을 낳아서 양육하고 결혼까지 시킬 수 있는 금액이었지만, 예안은 금 전 감각이 비교적 약한 편이었기에 막연히 취직할 때까지는 버틸 수 있 겠지라고 생각했다. "휴. 난 모르겠다. 뭘 어떻게 해야 잘했다 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전혀 감이 안 잡혀." 정호의 마음 속에서는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친손주를 보고 싶은 욕 심과 예안의 인생을 생각해서 아기를 지워야 한다는 상이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언뜻 보면 그 두 생각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듯 보이 지만 실은 친손주를 보고 싶은 욕구가 훨씬 더 강했다. 예안이 아기를 지운 뒤 훗날 다른 남자랑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보았을 때, 엄밀히 보자면 그건 자신의 친손주가 아니지 않은가? 자신의 생각에만 빠져 있던 정호는 문득 그동안 예안이 좋아하는 여자친 구를 잃고 얼마나 슬퍼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네 입장에서는 여자친구가 죽은 거 아냐? 그런데 그동안 용케 슬픈 내색을 안 했구나." "죽지 않았어. 내가 서예안으로서 살아가는 동안 그 애는 언제까지나 나 랑 함께 할 거라구." 예안은 약간 침울한 표정으로 다시 덧붙였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아기는 그 애가 나한테 마지막으로 준 선물이야. 난 그걸 꺼뜨리고 싶지 않아. 그러니 아빠도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언제까지고 어린아이에만 머물러 있을 줄 알았는데 예안은 어느새 아주 의젓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더 이상 철없는 소녀가 아닌 당당한 어머니 의 눈동자를 갖고 있는 예안이 대견스러워진 정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문제될 게 없다면 안심하고 낳아서 길러. 난 언제나 네 편이니 까. 단, 절대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걱정하지 마 아빠. 적어도 엄마 같은 사람은 안 될 거니까." 관계가 회복될 기미가 없는 어머니와 자식이 연주하는 불협화음에 대한 걱정보다는 세정에게 딸을 빼앗기지 않는 것에 대해 안심하는 걸 보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 모양이었다. 호텔 건물 안인데도 한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아마도 그 건 지금 만나려고 기다리는 상대에 대한 위압감에서 빚어진 착각일 거라 고 자위하지만 비단 중현의 탓은 아니었다. 앤드류는 아이큐 200이 넘어 가는 천재 미남자인데다 세계 제일의 부자이면서 동시에 또 천재 피아니 스트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중현은 그를 상대로 한 발자국도 물러날 생 각이 없었다. 조금을 더 기다리자 앤드류가 나타났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여태껏 중현을 죄어 매고 있던 위압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니요. 그렇게 오래 기다리진 않았습니다. 저 역시 다시 뵙게 되어 영 광입니다." "일단 뭐부터 시킬까요?" 앤드류는 웨이터를 불러 중현의 것까지 간단한 음료를 주문했다. 그는 동작 하나 하나마다 자신감이 흘러 넘쳤다. "국정원에서 일을 하신다 들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십니 까?" "한국 사회에서는 그래도 비교적 배경이 좋은 편이기에 나이에 걸맞지 않은 요직을 맡고 있습니다. 항상 과분한 기분을 안고 살아가는 편이죠.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가는 주변 사람들이 쯧쯧거리기에 항상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만 합니다." 중현은 자신에 대해 앤드류에게 사실대로 말하기 싫은 듯 그런 식으로 얼버무렸다."니콜라스 베르노가 어떤 인물인지 아십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 예안씨의 구출을 의뢰한 건 바로 저인데 모 를 리가 있나요." 알고 있으면서 구출에 그치지 않고 경호까지 의뢰한단 말인가. 앤드류의 안색이 조금 불쾌해졌다. "저도 처음에는 그 녀석의 정체를 몰랐습니다. 사람을 시켜 자세히 알아 보니까 암흑계에서는 가히 보스급 캐릭터더군요. 훼도니츠 가의 마피아 들조차 무서워서 피하는 청부업자가 고작 그런 꼬마였을 줄 과연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런 인물이기에 의뢰한 겁니다. 실력만큼은 가히 믿을 수 있으니까 요." "실력은 믿을 수 있겠죠. 하지만 그의 인격까지 믿을 수 있나요? 그는 돈을 준다면 살인도 마다 않는 인물입니다. 국정원에서 일하신다고 하니 설마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요? 듣자하니 그런 위험한 녀석에게 이번엔 서예안씨의 경호를 맡기셨다구요? 제정신으로 그런 짓을 벌이신 겁니 까?" 듣기 좀 거북한 어투였지만 중현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가 비록 살인도 마다 않는 인물이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정당한 사 유에서만 의뢰를 받아들일 뿐입니다. 실제로 그가 살인 의뢰를 받아들인 건 뼈에 사무친 원한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와, 아니면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 표적에 대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살인을 정당화할 순 없습니다." "글쎄요. 저는 국정원에 머무르고 있다 보니 법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 뼈아프게 실감하고 있는 중이라서 앤드류 회장님의 그 생각에는 차마 찬성할 수가 없군요." 서로 지지 않으려고 드는 두 사람의 시선의 공중에서 맞부딪치며 불꽃을 튀겨냈다. "어째서 한국 정부가 그렇게까지 서예안씨를 보호하려 드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는 앤드류 회장님은 어째서 그런 평범한 고등학생에게 지대한 관심 을 보이는 건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저는 순수하게 서예안씨를 사랑해서입니다." 당당하게 되돌아온 대답에 중현은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 되었다. 잠시 쯤은 망설이거나 난감해할 줄 알았는데 상대는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예전에 한국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보인 태도를 생 각하면 납득이 가지만. "후, 사랑한다라. 좋습니다. 말씀해 드리죠. 서예안씨는 지금 한국 정부 랑 모종의 거래를 맺었습니다. 사실 서예안씨는 토네이도 사가 개발한 에이즈 치료제의 제조법이 담긴 디스크의 행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 입니다. 커다란 국익에 관여되어 있기에 우리로서는 거금을 치르면서까 지 보호해야 할 대상입니다. 알고 계시다시피 토네이도 사는 우수한 인 재와 기술을 갖추고 있었지만 경영층의 잘못으로 공중분해 되어버린 제 약회사죠." "흐음." 예안이 맥의 제조자라는 사실을 앤드류에게 밝힐 순 없었기에 중현은 미 리 짜두었던 변명을 꺼냈다. 원래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앤드류는 한국 정부의 의뢰를 받은 청부업자가 예안을 구출해냈다는 사 실을 알고 있기에 무작정 덮어놓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둘러대는 게 의심 을 돌리기가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다가 그가 맥과 예안의 관계에 대해 알아버리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거 이상하군요. 제가 알기로 예안씨는 토네이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만?" "개발 담당 박사 중의 한 분과 굉장히 친한 사이였던 모양입니다. 회사 가 공중분해 되고 절망에 빠진 그 분이 자살하기 직전에 에이즈 치료 디 스크의 행방을 예안씨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더 이상은 말씀드릴 수 없 습니다. 당신은 세계적 의학 회사인 네로스의 회장님이니까요. 경쟁자에 게 기밀을 밝힐 순 없죠." "그렇게 되나요? 어쨌든 에이즈 치료제를 개발해내신 건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그렇다면 조만간 전세계의 에이즈는 근절되고 말겠군요. 그때 가 오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른바 에이즈 치료제가 출시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거짓말을 한 꼴이 된 다는 걸 은연중에 지적하는 말이었다. 중현은 자신의 말을 100% 믿지 않 는 앤드류의 의심에 쓴웃음을 지었지만 굽히진 않았다. '뭐 상관없어. 어차피 토네이도의 기술진이 다른 제약 회사에서 연구 중 인 에이즈 치료제 개발 작업이 현재 막바지에 접어들었으니까.' 자신이 둘러댄 말을 앤드류가 100% 믿는 눈치가 아닌 게 조금 걸렸지만 일단 대놓고 추궁 당할 명분은 없앤 셈이기에 중현은 한시름 놓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야겠군요. 조금 전에 말했다시피 저는 니콜라스 베르노 같은 위험인물이 예안씨를 경호하는 건 찬성할 수 없습니다." "회장님이 무슨 자격으로요?" "장래 예안씨의 남편으로서 입니다. 저는 절대 찬성할 수 없습니다." 앤드류의 눈빛은 그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연했지만 중 현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남편으로서라. 하지만 제가 알기로 예안씨는 회장님께 아무 관심이 없 는데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예안씨의 장래 남편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중현의 말투에 인내력을 많이 상실한 가시가 돋쳤다. 그런 말까지 듣고 서도 그저 웃기만 한다면 그는 연적이 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일 것이다. "글쎄요. 자신감이라고 해둡시다." "자신감이라고요?" "저는 예안씨의 마음을 손에 넣을 자신이 있습니다. 적어도 당신 같은 남자에게 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에 중현은 화가 났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저 같은 남자라고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당신에 대해서도 좀 알아봤습니다. 야당 총재인 김두오 의원의 맏아들 이라고요. 한국 사회에서는 대단한 배경일지 모르지만 저에 비하면 택도 없다는 걸 잘 아실 텐데요?" 분했지만 그 말은 맞았다. 세계 제일의 부자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앤드 류는 그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고 오만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의 사 람이었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앤드류는 화제를 바꿨다. "한국은 참 재미있는 나라입니다. 한국의 첨단 산업을 이끌어 가는 중원 전자와 유한전자를 강제 흡수하기 위해 미국이 이미 두 차례나 M&A를 시 도한 적이 있습니다만 한국 정부는 그때마다 번번이 유전으로 벌어들인 자금을 총동원해서 막아내더군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기업의 자율성 이 좋아지지 않고 결국은 국가 경쟁력 감소를 가져오게 됩니다." "하지만 중원전자와 유한전자는 가히 세계의 정상급 회사들입니다. 지금 세계의 유학생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우리나라 대학에 오려고 하고 우리나라 기업에 취직하길 원한다는 건 잘 아실 텐데요. 조만간 중원전 자나 유한전자 둘 중의 하나가 카를로스마저 능가할 때가 있을 겁니다.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카이스트가 MIT를 능가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판 국입니다." "카이스트와 MIT는 모르겠지만 중원전자와 유한전자는 카를로스하고 비 교가 안 되죠. 카를로스는 손목시계에 들어가는 소형 칩에서부터 군함이 나 미사일, 인공위성에 사용하는 컴퓨터와 게임, 워드프로세서, 보안 프 로그램, 인터넷 등등 전자기기라면 그 영향을 끼치지 않는 분야가 없으 니까요. 장담하지만 중원전자나 유한전자가 카를로스를 추월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만약 유전에서 나오는 돈을 전부 다 중원전자나 유한 전자에 쏟아 붓는다면 모르지만요." 과연 스스로의 능력으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된 남자답게 오만하다 느껴 질 정도로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한국에 온 것은 셰펠함 4척을 판매하기 위해서였 습니다. 이제 그 계약도 다 끝났고 하니 슬슬 관광이나 하며 돌아다닐 참입니다. 아참, 그러고 보니 한국에는 맥이라는 재미있는 변신 장난감 이 있더군요." 재미있는 변신 장난감이라 빈정대는 그 무기가 예안이 만든 거라는 걸 알게 되면 이 남자는 어떤 얼굴을 할까. "개인적으로 맥에 대해 굉장히 흥미가 있습니다. 그런 세기적인 첨단 무 기를 만든 프랭크 안쏘니 유젤이 죽었다는 건 굉장히 유감으로 생각합니 다만, 어쨌든 이것으로 한국 기업들은 당분간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겠군요. 0%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달성했던 한국 금융 기관도 더 이상 한국 기업을 지원할 수 없을 테구요. 유전이 일개 개인에게 넘 어가 버렸으니 말입니다." 만약 무한동력이라는 개념이 사실이라 해도 현재로서 맥은 한국 내의 모 든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발전소와 요격이 불가능한 핵미사일 정도의 가치밖에 지닐 수 없다는 걸 지적하는 말이었다. 그 두 가지만으로도 충 분히 대단하다 말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천재 경영인이 생각하기에는 유전이 지닌 가치에 비할 바가 못 되는 것이었다. "무한동력이라. 그런 터무니없는 장치를 만들어낸 세기의 천재가 이미 죽었다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약 살아 있었더라면 한국 유전 같은 걸 수십 개를 갖다 바친다 해도 전혀 아깝지 않을 테지만요." "무한동력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맥은 유전 이상의 가치가 있습 니다. 국민들도 그걸 아니까 투표에서 맥을 구입한다 결정한 거구요."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핵을 갖고 싶어서 환장한 것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여자의 나라라 한국이 마음에 드는 편이 긴 하지만 이번 한국민의 결정은 굉장히 어이없군요." 앤드류는 차갑게 일소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과는 상이한 감정이 푸른 눈동자 안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대화의 주도권을 대부분 그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에 속으로 분해하고 있던 중현은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95 회] 날 짜 2003-12-28 조회 / 추천 4359 / 63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단절의 증거 아침이 찾아오자 예안은 눈을 뜨고 일어나 세면대로 갔다. 간단히 샤워 를 하고 나온 예안은 간편한 옷차림을 한 채 아침상을 차렸다. 자신은 먹지 않아도 되고, 또 여자가 된 후 무얼 한 번 입에 대본 적도 없지만 정호는 다르기에 안 차릴 수는 없었다. "이번엔 아빠 입맛에 좀 맞았으면 좋겠는데. 요리라는 게 생각보다 어렵 구나 어려워. 앞으로 요리사들을 무조건 존경하든지 해야지 원." 자신의 요리솜씨는 경력에 비해 꽤나 좋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예안은 마 음에 들지 않았다. "근데 유니콘. 생각해보니 시트날타에 있는 동안 레이온 형을 한 번도 못 봤잖아. 어떻게 된 거지? 시트날타가 레이온 형한테 나 잡았다고 연 락을 안 했던 걸까?" 「못 받은 건 아니겠지요. 다만 주변의 눈이 있어서 함부로 만나기가 좀 그랬을 겁니다.」 "레이온 형이 날 도와주면 쉽게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네가 노래를 불 렀잖아? 근데 형 도움 없이 무사히 탈출한 걸 보면 나도 꽤나 운이 좋은 녀석인 게 아닐까? 이참에 한 번 로또나 해버려?" 「로또 일등에 당첨되는 금액보다 유전에서 일 년간 나오는 금액을 은행 에 넣어두었을 때 나오는 하루 이자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그건 재미가 없잖아? 너 따위 인공지능이 로또의 그 맛 을 알아? 번호가 하나씩하나씩 뽑혀졌을 때 하나둘씩 맞아떨어지는 그 스릴과 결국 꽝이라는 사실에 절망하는 그 서러움을 네가 알아?" 「전 인공지능이다 보니까 그 스릴이라는 게 무엇인지 쉬 감이 잡히지 않는군요.」 "인공지능이 그런 감정을 알 리가 없지." 어느덧 아침상이 그럭저럭 차려졌다. 유니콘은 반박했다. 「인공지능이라 해도 얼마든지 감정을 지닐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정서 구조와 완벽하게 똑같은 시냅스를 갖춰야 합니다. 당연히 현인류의 기술로는 그런 인공지능을 만들어낼 순 없습니다만, 절 만든 사람은 충분히 그런 인공지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 다.」 "호오? 그런데 넌 왜 감정이 없는 건데?" 「저는 감정이 필요 없는 전투병기니까요. 인간형 휴머노이드에게만 그 런 기능이 필요할 뿐입니다.」 어느 SF 영화에 나오는 감정을 갖고 싶어하는 안드로이드의 대사와 흡사 했다. 하지만 평소 '환골탈태가 하고 싶어요! 왜 명상을 해도 안 되는 거죠?'하면서 징징거리던 짓거리에 익숙해져서 그런 건지 서글픈 기분 따위는 들지 않았다. "됐다. 이제 아빠 깨우러 가야지." 아침상을 다 차린 예안은 정호의 방으로 들어갔다. 또 어제 새벽까지 컴 퓨터로 장기를 둔 건지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 정호의 침대에 다가간 예 안은 이불을 확 뺏어들었다. "일어나 아빠! 아침이야!" "으, 음… 5분만 더 잘게…" "나 오늘 자퇴하러 학교 갈 거니까 아빠는 밥 차려둔 거 먹어. 괜히 또 점심 넘도록 자다가 아침상 다 식었다고 투덜거리지 말고. 알았지?" "아, 알았어…" 목소리가 잔뜩 잠에 취한 걸 봐서는 전혀 알아들은 것 같지 않지만 곧 학교를 가야 할 시간이었기에 예안은 더 깨우지 않고 서둘러 자신의 방 으로 갔다. 쇼핑백에서 어제 새로 사온 여자 교복을 꺼내어 서운한 표정 으로 한참을 들여다보던 예안은 픽 웃어버렸다. "내가 이거 입고 가면 다들 놀라겠네. 친위대 누나들이 그렇게나 달달 볶을 때도 꿋꿋하게 남자 교복 입고 다녔는데 무슨 바람이 들어서 치마 를 입는 건지 모른다고 말이야. 안 그래?" 「그렇겠군요.」 "뭐, 사실 치마 입는 게 좋은 건 아니지만 처음 입어보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오늘로 학교는 끝이니까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서비스로 입어준 다 생각하지 뭐." 그래도 제법 철이 든 건지 이제는 기특한 생각까지 다 할 줄 아는 모양 이다. 학교로 간 예안은 벌떼같이 자신에게 몰려드는 아이들의 공세를 억지로 웃는 낯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생각 같아서는 제발 좀 비켜달라고 소리 라도 지르고 싶지만 이게 다 미소녀의 몸으로 살아가는 팔자려니 하고 받아들여야 하겠지. "공주! 도대체 그동안 얼마만큼 아팠기에 학교를 안 나온 거야! 공주가 없는 동안 우리가 4반 녀석들에게 얼마나 많은 괄시를 받았는지 알기나 하는 거야!" 자신의 손을 꽉 붙잡은 채 눈물까지 글썽이는 배준혁의 박력에 질린 예 안은 차마 손을 뺄 생각도 못했다. "너무해! 너무해! 너무해! 도대체 어떻게 말 한 마디 안 하고 그렇게 오 랫동안 학교를 안 나올 수 있어! 공주 수칙 제 13조를 그새 잊어버린 거 야? 불가피한 사정에 의한 결석 혹은 전학을 가게 되었을 땐 반드시 미 리 알려야 한다!" "맞아! 맞아! 공주는 너무해! 그, 그런데 치마 입은 모습 예쁘다." 아침 자습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공부할 생각은 않은 채 복도에 길게 늘 어져 예안의 손 한 번 잡아보려고 단단히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의 행렬 은 쳐다보는 게 겁이 날 정도였다. 학교 분위기가 이래서야 낡은 전통을 타파하자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동료들을 끌어 모으는 등 힘든 투쟁 을 벌이다 결국 실패로 돌아가 장엄한 최후를 맞이하는 혁명가가 탄생하 려면 한참이나 먼 듯 싶다. "그만! 모두 안으로 들어가! 어? 예안이 너 치마 입었네? 무슨 바람이 분 거야? 다리도 예쁘구만 왜 그동안 치마를 질색한 거니?" 아이들은 교무실에서 올라온 정선생의 명령도 듣지 않았다. 지나가던 교 사들까지도 웃으면서 그냥 내버려두라고 하는 판국이니 더 말해 무엇하 겠는가. 대명고등학교는 참 여러 모로 특이한 학교였다. 예안은 간신히 시간을 내어 혜인을 따로 만날 수 있었다. "너 그동안 정말 어떻게 된 거야? 많이 아프다길래 내가 얼마나 걱정했 는지 알기나 해?" "미안, 미안해. 연락을 할 정신이 없었어. 내가 진짜 엄청 아팠거든." 꽤 오랫동안 못 봤던 혜인은 재호로부터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있는 건지 혈색이 좋았다. "그런데 너 표정이 굉장히 좋아졌다? 그 쓰레기가 이제 더 이상 너한테 치근덕거리지 않는 거야?" 예안이 말하는 쓰레기가 누군지 알아차린 혜인은 잠시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밝아졌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요즘에는 나한테 거의 연락 안 하거든. 아, 하지만…" "왜?" "저기…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 사람이 너한테 표적을 돌린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거든. 게다가 네가 예전에 그 사 람 자존심도 많이 다치게 했으니 아마 단단히 벼르고 있을 텐데…" "걱정 마. 걱정 마. 내가 그따위 쓰레기한테 당할 애로 보여? 네 몫까지 내가 확실하게 혼내줄 테니까 너는 안심하고 있어. 만약에 그 녀석이 널 또 괴롭히면 두말 않고 나한테 연락해. 내가 총알같이 달려갈 테니까." 가냘픈 주먹을 쥐어 보이는 시늉까지 하는 예안이 그저 사랑스럽기만 한 혜인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아 그런데 너 여름방학 때 퀸 페스티벌이 있는 거 알지? 너도 참가해야 하니까 준비 단단히 해두고 있어." "여름방학은 아직 많이 남았잖아? 뭘 벌써부터 준비한다는 거야?" "원래 페스티벌 시작하기 한두 달 전부터 준비하는 거야." "흐응… 그런데 그 페스티벌 자금은 도대체 누가 대는 거야? 설마 참가 비 같은 걸 엄청 뜯어서 꾸려 가는 건 아니겠지?" "전에 말했잖아. 퀸이 된 여자애는 영화사에서 신작 영화 주연으로 뽑아 간다구. 워낙에 경쟁이 치열한 데다가 인지도도 굉장히 높아서 방송국에 서 앞다투어 후원자가 되려고 하는 걸." "경쟁이 치열하다니?" "몰랐어? 숙명고등학교하고 우리학교 말고도 전국에서 대략 백 개도 넘 는 학교가 해마다 참가한다구." 퀸 페스티벌이 그 정도로 엄청난 규모로 치러진다는 건 상상도 못한 이 야기였다. 하마터면 게거품을 물고 쓰러질 뻔했던 예안은 간신히 침착함 을 되찾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난 분명히 숙명고등학교랑 우리학교가 라이벌 관계 라고 들었는데…" "물론 시초는 우리 학교 출신의 선배와 숙명고등학교 출신 사람 사이에 경쟁이 붙어서 만들어졌다고 해. 하지만 점점 규모가 불어났고 결국에는 백 개가 넘는 학교가 참가하는 엄청난 행사가 되어 버린 거지. 아, 하지 만 매년 결승까지 올라가는 건 우리학교랑 숙명고등학교 뿐이야. 다른 학교는 아무래도 공주에 대한 학교의 지원이 약하거나 엄격한 편인데 우 리 학교나 숙명고는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주잖아." 확실히 공주 임명장을 주는 사람이 학생회장인 데다가 전교직원들까지 전부 참가하는 자리에서 치러지는 행사니까 지원이 엄청난 편이긴 하다. 예안이 이해한 표정이자 혜인은 다시 덧붙였다. "그러니까 너도 준비 단단히 해둬. 남자 같은 말투도 좀 고치고 그래야 돼. 우리학교가 올해는 너한테 굉장히 기대를 많이 걸고 있거든. 내 생 각에는 딴 거 필요 없이 그냥 모자 벗은 이대로 햇빛 아래 나가면 몰표 를 받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혜인이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은근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 자 예안은 약간 기겁했다. "그렇게 했다가는 난 졸지에 구경거리가 되어 버리고 말 거야! 그리고 생체 연구소에서 혹시 내가 무슨 외계인이나 돌연변이가 아닐까 의심해 서 잡아다가 온갖 실험을 하는 바람에 정신과 몸이 피폐해져 결국은 비 참하게 최후를 맞이하게 될 거야! 그것만은 사양하겠어!" "…너 SF를 굉장히 많이 본 모양이네?" 깔깔대며 웃는 혜인의 귀여운 미소를 그저 좋은 듯 히죽 웃으며 들여다 보던 예안은 이제 슬슬 준비해둔 말을 해야 할 타이밍이라는 걸 느끼고 얼굴을 굳혔다. 즐겁게 웃던 혜인은 예안이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할 듯 보이자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무슨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니?" "김혜인. 사실 나 퀸 페스티벌에 못 나갈 거야." "못 나간다고? 왜?" 볼을 긁적이며 망설이던 예안은 힘들게 입을 떼었다. "나 오늘 자퇴할 거라서." "뭐어?" 뜻밖의 폭탄 선언에 소스라치게 놀란 혜인은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했 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자퇴한다니? 왜? 왜 자퇴한다는 거야?" 혜인의 놀란 눈동자에 담겨 있는 의구심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예안의 녹 색 눈동자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사정이 있어서 더 이상 학교 다닐 수가 없어. 집이 갑자기 망해서 돈이 궁해졌다거나 뭐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나 올해 검정고시 치르고 수능 봐서 일찍 대학에 갈 생각이야."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 거야?" "남들 다 보내는 즐거운 학창 시절을 포기하는 게 좀 속이 쓰리기는 해 도 어쩔 수 없어. 지금 내 사정이 좀 그렇거든. 아, 그렇지만 어디로 이 사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단지 학교만 그만두는 것뿐이니까 너랑은 언제 든지 연락할 수 있어. 내년에 네가 고2가 되면 난 대학생이 되어 있을 테지만 너무 부러워하지는 마라." 예안은 농담조로 설명을 끝맺었지만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혜인은 웃 을 수 없었다. "왜 갑자기 그렇게 빨리 대학에 가고 싶어진 건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 도 있는 거야?" "그건 아직은 말해줄 수 없어. 미안해. 하지만 나중에 반드시 꼭 말해줄 게." 섭섭함이 가득 담긴 혜인의 커다란 눈망울을 마주 보기가 뭐했던 예안은 볼을 긁적이며 멋쩍은 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냥 계속 다니면 안 되니? 나 너랑 같이 학교 다니고 싶은데." 서운함이 가득한 말투에 예안은 굉장히 미안했지만 혜인이 부탁한다 해 도 바꿀 수 있는 계획이 아니었다. "이미 양아버지 허락도 받아놨어. 미안해." "그래… 그렇구나. 결국 퀸 페스티벌에는 같이 못 나가겠네…" "내가 못 나가는 대신 네가 내 몫까지 열심히 해. 그래서 꼭 유혜민 그 기집애를 누르고 우승해야 돼. 알았지?" "유혜민? 그게 누구야?" 무심코 혜민의 이름을 꺼냈던 예안은 아차 싶어 얼른 말을 바꿨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눈에 띄게 당황하는 예안의 태도에서 말하기 껄끄러운 비밀이 있다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지만 친구가 자퇴한다는 서운함에 취한 혜인은 크게 신 경 쓰지 않았다. "휴. 너랑 같이 오래도록 학교 다니고 퀸 페스티벌에도 나가고 싶었는데 진짜 아쉽다. 그럼 선생님께는 말씀드렸어?" "아직. 조금 있다 말씀 드릴 거야."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학생회장 오빠한테도 말해야 돼. 적어도 작별인사 는 해야 할 거 아냐? 공주 수칙 제 13조를 잊은 건 아니지?" 자퇴하는 마당까지 꼴사나운 임명식 비슷한 걸 질질 끌고 다니기 싫어서 은근히 몰래 그만두려고 했던 예안은 순간 찔끔했다. 예안의 마음을 알 아차린 혜인은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쐐기를 박았다. "너 그냥 몰래 학교 그만두려고 했지? 하지만 그건 곤란해. 공주가 된 입장으로서 마지막 작별 송별회는 가져야 할 거 아냐? 내가 당장 학생회 장한테 가서 말할 테니까 몰래 도망가려고 해봤자 소용없어. 교장선생님 도 그냥 그만두는 거 허락 안 하실 거야." "…알았어. 걱정 마." 몰래 조용히 그만두려고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이상 공주를 보내는 송별회라는 게 되도록 꼴사납지 않고 짧기만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나? 점심시간에 되기 전에 예안이 학교를 자퇴한다는 소문은 고등학교뿐만이 아니라 중학교까지 퍼져 나갔다. 믿을 수 없는 비보에 당황한 학생들이 쉬는 시간마다 우르르 달려와서 예안에게 정말이냐고 물었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확인사살을 당한 채 절망을 안고 돌아가야만 했다. 오랜 병 생 활을 딛고 이제 다시 복귀한 '병약 미소녀'의 재림에 기뻐하던 대명 중 고등학교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암울함의 수렁으로 빠져버렸다. "고, 공주! 진짜야! 진짜로 학교 그만 두는 거야? 그, 그럼 치마를 입고 온 건 마지막으로 서비스한다는 생각에서였던 거야? 그런 거였어?" 예안이 고개를 끄덕이면 상대는 잠시 굳어 있다가 울상이 된 채 자기 교 실로 달려가 버린다. "공주님! 공주님! 진짜로 학교 그만 두시는 거예요? 퀸 페스티벌에도 안 나가고요? 진짜예요?" 중학교 여후배가 눈물을 글썽이며 묻자 고개를 끄덕여 주었는데 글쎄 세 상이 무너진 듯 절망하며 중학교 건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공주야! 왜, 왜 학교를 그만둔다는 거야? 우리가 너한테 치마 입으라고 닦달한 게 그렇게도 괴로웠니? 잘못했어, 이제 치마 입으라고 안 할 테 니까 제발 학교 그만둔다고는 하지 마!" 친위대 선배들이 단체로 몰려와 두 손을 꼭 잡은 채 울먹이며 그렇게 말 했을 땐 너무 미안해서 하마터면 그러겠노라고 대답할 뻔했다. 심지어 이렇게 묻는 녀석들도 있었다. "설마 공주 너 세현이 녀석 따라가려고 학교 그만두는 거 아니지?" "아,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랑 그 녀석이랑 열애하고 있었다는 소문이 지금 학교에 파다하다구!" 자퇴하는 이유를 밝히지 않는 예안의 행적에 대한 궁금증은 학교 안에 무성한 소문을 낳은 뒤였는데, 몇 가지 그럴싸한 걸 유추해보자면 대충 이런 것들이다. 첫째는 일단 한때 예안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되었던 세계 제일의 부자 앤드류 회장의 진짜 애인이 정말로 예안이었다는 설이다. 현실적인 인간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힌 이 주장은 주로 내심 자기 친구 가 신데렐라가 됐으면 하고 바라는 여자애들 사이에서 화제인데, 예안이 비밀리에 앤드류와 약혼하고 미국이나 영국으로 건너간다는 설이었다. 두 번째는 예안이 그동안 학교를 나오지 않은 건 백혈병 같은 불치병 때 문이었는데 오랜 요양을 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둔다는 것이었다. 이 설 은 주로 병약미소녀를 열렬히 신봉하는 남자 녀석들 사이에서 생명을 갖 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공주가 죽기라도 한단 말이냐!'라는 강력한 반 발에 부딪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예전에 미국 MIT 조교수로 유학을 간 차세현이 실은 예안과 연락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예안의 마음을 완전히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안이 세현과 맺어지기 위해 미국으로 건 너간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상 학교 안에서 이 설이 가장 유력하고 또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예안이 '셋 다 아니야! 그냥 집안 사정상 검정고시를 치르고 빨리 대학 교를 가야 할 이유가 있어서라구!'라며 펄쩍 뛰었지만 인간이란 동물은 상상을 먹고사는 동물이다 보니 오히려 온갖 의혹과 공상만 잔뜩 불러일 으키는 결과만 낳았다. "공주. 중학교의 유현우가 찾아왔는데?" 도대체가 이런 학교는 이 지구상에 또 없을 거라고 궁시렁거리고 있을 때 친구가 그렇게 말해줬다. 예안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복도로 나간 예안은 현우가 등을 돌리고 서 있는 걸 발견했다. "무슨 일이야?" 천천히 시선을 돌린 현우는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누나 학교 그만 둔다고 들었어. 사실이야?" 예안은 최대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어. 사실이야." "학교 그만둘 거면서 왜 우리한테는 아무 말도 안 했어? 적어도 의논은 해줄 수 있었잖아?" "너하고 난 남남이라는 거 잊지 마라. 친척도 아닌데 무슨 의논을 한다 는 건데?" 언제나처럼 차갑고 무뚝뚝한 말투에 현우는 가슴이 쓰라려 왔다. 도대체 얼만의 시간이 더 흘러야 예안은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줄 것인지 몰라 답답하기만 했다. "학교 그만두는 거… 그거 때문이지?" 현우가 그거라고 말하는 건 임신을 가리키는 것일 게다. 딱히 부정해봤 자 먹히지 않을 것이기에 예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것 때문이야." "…설마 안 지우고 그냥 낳으려고?" 예안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현우는 폭발할 것 같은 화를 꾹 참은 채 꽉 쥔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지워." "뭐?" "지우란 말이야. 누나 미쳤어? 왜 안 지우고 그냥 낳…" 짜악- 그러나 현우는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아픔을 퍼뜨리는 소리와 함께 얼굴이 돌아갔다. 눈앞에 튄 불똥이 가라앉은 뒤 현우는 아픔으로 붉어 진 뺨을 어루만지며 예안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예안은 잔뜩 화가 난 채였다. "지우라고?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내가 미쳤다고 지 우냐? 나한테는 굉장히 소중한 아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준 귀한 보석이라구. 근데 지우라고? 내가 너 시키는 대로 하는 그런 애로 보였 어? 그랬다면 대단한 착각이야 유현우. 진우에 비하면 넌 내 인생에 있 어 아무것도 아니란 거 알아 둬." 너무나 차가운 목소리. 가슴에서 치솟아 오르는 이 안타까움을 도저히 금할 수가 없었다. "한 번만 더 그딴 소리하면 그땐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아. 네 주제를 알 아라 유현우." 예안은 잔뜩 화가 난 채 그 한 마디를 남겨놓고는 더 이상 함께 있기 싫 다는 듯 휭하니 몸을 돌려 교실로 가버렸다. 뺨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통 증을 쓰다듬고 있던 현우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그만 주먹으 로 벽을 내리쳤다. 퍽- 살갗이 벗겨진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예안 의 인생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낙태를 받아야 할 것이고, 당연히 예안 도 그러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뒤에는 상처에 울고 있을 예안에게 다 정히 다가가 멋진 장밋빛 미래를 그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뭐라고? 낳을 거라고? "진우 형이 누나한테 그렇게나 소중한 사람이었어?" 여자는 아무리 자신의 인생이 중요해도 정말 사랑한 사람의 아기라면 그 사람이 죽어 없다고 해도 지우지 않고 낳아 소중히 키운다고 들었다. 하 지만 설마 예안이 그럴 줄은 미처 몰랐다. 그저 암담하기만 한 현우는 피가 흘러내리는 손을 들어 두 눈을 가렸다. 선뜻 낳아 기른다는 걸 볼 때 이미 정호의 허락을 받은 게 틀림없다. 앞 뒤 상황을 따져 보면 정호는 예안이 자신의 친손자를 가진 걸 알고 양녀 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직 예안이 어림에도 불구하고 자기 욕심 때문에 낳는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결국 이렇게 된 이상 그에게 주어진 선택은 좁은 폭으로 제한되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96 회] 날 짜 2003-12-29 조회 / 추천 4389 / 52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단절의 증거 고등학생들보다 일찍 수업이 끝난 중학생들은 귀가하지 않고 운동장에 서거나 혹은 벤치에 앉아 어서 고등학생 선배들의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 다렸다. 오늘 느닷없이 자퇴한다고 폭탄 선언을 한 서예안의 전교 송별 식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누구 하나 웃고 있지 않았다.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다 서운함과 초조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송별식을 기 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고등학생 선배들의 수업이 끝나고 수천 명이 넘어가는 전교생이 운동장으로 몰려나왔다. 이별의 곡을 연주하기 위한 음악부 학생들이 운 동장 각종 악기를 든 채 운동장 한편에 서 있었고, 학생들은 침울한 표 정으로 하나둘씩 정렬했다. 교장과 교감 등을 포함한 교직원들까지 전부 다 참석한 가운데 그렇게 송별식은 엄숙하게 시작되었다. "당신을 떠나보내야 하는 우리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질 듯 하 염없이 아프기만 합니다. 당신이 떠난 뒤에 텅 비어버릴 우리들의 차가 운 가슴을 그 무엇으로 데울 수 없다는 게 슬프기만 합니다. 이별을 겪 으면서 인간은 한층 더 성숙해진다 하지만 우리는 차라리 퇴화를 할지언 정 당신을 떠나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아! 그 무엇으로 당신이 떠난 이 허전함을 채울 수 있을까요?" 정말이지 어떤 녀석이 썼는지 속에 메슥거릴 정도로 유들유들함이 징그 럽게 흘러 넘치는 낭독을 듣고 서 있던 예안은 차라리 폭탄이라도 터트 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젠장, 내가 오늘 그만둔다고 했는데 그 사이에 저렇게 길고 닭살이 뚝 뚝 흐르는 낭독문을 썼단 말이야? 도대체 어떤 녀석이 저 따위로 쓴 거 야!' 처음에 공주 임명식을 겪을 때도 느낀 것이었지만 저렇게 닭살투성이 낭 독문을 능숙하게 읽어 내려가는 거 보면 준우도 꽤나 소탈한 성격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만 당신을 놓아주려 합니다. 당신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시간들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게 슬프지만 당신을 웃으며 떠나 보내주려 합니다. 눈물은 절대 보이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부담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당신이 떠난 빈자리를 바라볼 때마다 가슴 이 찢어지는 듯 아파 오고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겠지만 당신의 행 복을 빌겠습니다. 그래서 아주 먼 훗날 당신을 다시 만났을 때 밝게 웃 으며 우리가 얼마나 많이 성장했는지 자랑하려 합니다…" '자랑을 하든지 말든지.' "…그동안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얼 굴을 매일 같이 볼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당신의 고운 목소리가 우리 들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는 하늘이라도 날아오를 듯 기뻤습니다. 당신 의 체취를 느끼고, 당신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당신의 미소를 이 마음 속에 고이고이 간직할 수 있어서 정말 축복이었습니다. 앞으로 그 무엇 으로도 이 행복과 기쁨, 설렘, 그리고 축복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입니 다. 우리들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당신이 준 최고의 선물이니까요." '내가 언제 선물 따위를 했다고.' "행복하십시오. 영원히 행복하십시오. 우리는 항상 당신의 행복을 기원 하고 또 당신이 웃을 수 있기를 염원하겠습니다. 이상. 대명 중고등학교 제32대 세 번째 공주를 보내며. 대표 학생회장 유준우." 오랫동안 어두운 터널을 헤쳐 나가다 절망에 쓰러졌을 때 한 가닥 햇빛 을 본 기분이 이러할까. 예안은 드디어 끝났다는 기쁨에 취해 하마터면 환호성을 지를 뻔했지만 전교생의 시선을 의식해서 억지로 침울한 표정 을 유지했다. "그럼 프린세스 서예안은 앞으로 나와서 전교생들에게 작별 인사를 해주 기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 절차로 전교생들에게 인사하는 것만 남았다. 준우가 비켜준 자리에 선 예안은 지겨운 게 드디어 끝났다는 기쁨을 간신히 억누르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특별히 할 말은 없구요. 이미 알고 계신 바와 같이 저는 집안 사정 때 문에 오늘 학교를 자퇴해요. 검정고시를 치르고 올해 혹은 내년에 수능 을 볼 테니까 아마도 내년이나 내후년쯤에는 저와 같은 학년인 분들보다 는 먼저 대학생이 되어 있을 거예요."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단체 초상이라도 난 듯 학생들의 얼굴에는 하나같 이 침울함이 가득했다. 더 할 말이 없었던 예안은 단상에서 옆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항 상 쓰고 있던 밀짚모자에 오른손을 올렸다. 숨 한 번 쉴 타이밍에 밀짚 모자가 벗겨졌고 찰랑거리는 붉은 머릿결이 햇빛을 파랗게 반사하며 바 람에 탐스럽게 흩날렸다. 사람에서 아름다운 천사로 변한 듯 이루 말할 수 없는 신비한 광경에 학생들은 입을 쩍 벌렸다. 극적인 효과까지 계산해 얼굴 각도까지 신경 쓴 예안은 귀엽게 생긋 웃 었다. "그럼 모두 안녕~" 손가락을 들어 녹색 눈동자를 찡긋한 예안은 입을 다물지 못하는 학생들 에게 손까지 흔들어 주는 여유를 보였다. 이윽고 예안이 완전히 교문을 빠져나갔을 때에도 아이들은 아름다운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진짜 굉장했어. 아이들의 놀라서 아예 돌이 됐었다니까. 응. 정말 굉장했어. 지금 삼분의 이도 넘는 애들이 집에도 안 가고 네 이야기만 하고 있다니까." 조금쯤은 질투할 법도 한데 혜인은 친구가 천사같이 아름답다는 사실이 그저 자랑스럽기만 한 듯 밝은 표정으로 수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진짜 얘들이 섭섭해하더라. 만약 네가 퀸 페스티벌에 나간다면 우승은 따논 당상인데 말이야. 너 혹시 연예계 같은 데 진출해볼 생각은 없어? 응? 음… 맞아. 나도 연예인 친구 하나 정도 갖고 싶어서 그래." 혜인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쑥스러운 듯 예안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 는 것도 아닌데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뭐? 조만간 유명인 친구 하나 만들어 준다고? 와, 너 진짜 연예계 나가 려고 그래? 응? 그게 아니라 다른 거? 다른 거 뭐? 에이, 그러지 말고 말해 봐. 나중에? 지금 말해주면 안 돼? 응 알고 싶은데… 알았어. 그럼 나중을 기대할게. 어. 나 지금 가봐야겠어. 끊어." 예안과 긴 통화를 끝낸 혜인은 벤치에 놓았던 가방을 집어들다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등뒤에는 중학교에서 전교 일등을 도맡 아 한다는 현우가 서 있었다. "아, 안녕?" 현우가 아이큐 170의 중학교 전교 일등이라고만 알고 있을 뿐, 진우의 사촌동생이라는 건 꿈에도 모르는 혜인은 그가 자신에게 무슨 볼 일이 있는지 몰라 의아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선배. 그냥 누나라고 불러도 되죠?" "응. 그렇게 해. 너 중학교의 유현우 맞지? 처음에 예안이랑 사귀다가 금방 채였던… 아차!" 무심코 그렇게 말하던 혜인은 현우의 상처를 건드렸음을 깨닫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제가 예안이 누나한테 많이 부족해서 차인 거고 또 아직 포기한 것도 아니니까요. 그런데 누나, 예안이 누나랑 많이 친하 죠?" "응. 친하긴 한데 왜? 예안이한테 네 말 좀 잘해달라는 부탁은 들어줄 수 없어. 사실 예안이가 다른 남자랑 맺어지지 않게 나보고 잘 좀 관리 해달라고 세현이가 부탁했거든. 너도 고등학교의 차세현 알지?" "예. 알아요." 뒤늦게 아이큐가 200이 넘는 천재라고 밝혀진 차세현이 얼마 전에 MIT 조교수로 유학 갔다는 걸 이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예안이 누나랑 다리 좀 잘 놔달라는 부탁 같은 걸 하려는 건 아 니에요. 다름이 아니라, 예안이 누나가 제발 좀 정신 좀 차리게 설득 좀 해달라는 부탁 좀 하려구요. 누나는 예안이 누나랑 많이 친하니까 그래 도 어느 정도는 먹힐 거 아니에요? 제가 하는 말은 씨알도 안 먹혀요." "정신을 차리게 해달라니? 왜? 학교 자퇴하는 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하지만 집안사정상 빨리 수능 쳐서 대학생이 되겠다는 게 꼭 나쁜 것만 은 아니잖아? 방황하느라 학교를 그만두는 것도 아니고…" 예안이 임신에 관해서 혜인에게 아무 말도 않은 게 확실했다. '하긴 진우 형과 혜인이 누나가 어떤 사이였는지 예안이 누나도 알고 있 을 테니까 그런 말은 차마 못 하겠지. 친구라 생각한다면… 어라?' 현우는 자그마한 의문이 생겼다. '그럼 예안이 누나는 그냥 이 누나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접근한 게 아니라 정말 친해지고 싶어서였던 건가? 아니면 원래는 그게 아니었는데 같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깊이 친해진 걸까? 그나저나 내가 꼭 이렇게까 지 해야 되나? 정말 한심하다 유현우….' 혜인을 끌어들여 예안이 낙태를 받도록 하는 건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 지만 해볼 수 있는 건 전부 해볼 참이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집에 돌아 가면 부모님과 형들에게까지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힘만으 로 예안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게 굉장히 비참했지만 상관없었다. "예안이 누나 임신했어요. 그래서 학교 그만두는 거예요. 안 지우고 낳 아서 키운대요. 그게 말이나 돼요?" 혜인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어? 그게 진짜야?" 단지 빨리 사회 생활을 겪고 싶어 자퇴하는 거라 생각했던 혜인에게 예 안의 임신 소식은 개구리알에서 고릴라가 태어났다는 것만큼 충격적이었 다. 그녀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임신이라고? 진짜? 걔가 진짜로 임신했단 말이야?" "예." "서, 설마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한 거야? 그런 거야?" 매달리기라도 할 것처럼 절박하게 친구를 걱정하는 눈망울을 본 순간 현 우는 강한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양심과는 상관없이 입이 움직이고 있었다. "안 좋은 일을 당했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사귀던 남자 사이에서 생긴 모양이에요. 그래서 낳으려는 거겠죠. 누나는 예안이 누나랑 친하니까 제발 좀 설득해서 아기 지우라고 해주세요. 세상에, 고1밖에 안 됐는데 벌써부터 애엄마 되겠다는 게 제정신으로 할 소리예요?" "뭐? 안 지우고 낳는다고? 설마 그 나이에 벌써 결혼하겠다는 거야?" 펄쩍 뛸 듯 놀라던 혜인은 문득 단지 예안을 좋아하는 중학교 후배인 줄 만 알았던 현우가 어째서 그걸 알고 있는지에 퍼뜩 생각이 미쳤다. "그런데 왜 네가 그런 걸 알고 있어? 그건 친구인 나도 모르는데? 설마 혹시 아이 아버지가 바로 너야?" 의구심을 품은 눈동자와 시선이 얽힌 순간 현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정말 그런 거라면 예안이 누나가 아이 낳는다는 결정은 저도 대찬성이죠. 하지만 그게 아니니까 제가 낳지 말라고 설득 해달라고 지금 누나한테 부탁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예안이가 그런 걸 성급하게 결정할 리가 없잖아? 나한테까지 숨 긴 건 조금 섭섭하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좋아한 사람이라면 그 나이에 결혼할 생각도 가질 수 있는 건데 뭐 어때?" 희박한 가능성을 위해 혜인의 상처까지 건드리려는 건 정말 비겁한 일이 었지만, 조금 전까지 양심을 건드리고 있던 죄책감은 '매력적인 암컷'을 손에 넣고 싶은 '수컷'의 정복욕에 어느덧 잡혀 먹히고 말았다. "아이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에 없어요. 몇 달 전에 죽었거든요. 그런데 도 예안이 누나는 아이를 낳으려고 해요. 이게 미친 짓이 아니고 도대체 뭐예요? 누나는 그게 옳다고 생각해요?" "진짜? 진짜야?" 남자 문제에 전혀 관심 없는 예안이 좋아하는 남자와의 관계에서 임신을 했다는 것도 천지가 개벽한 만큼 놀라운 일이었지만, 아이 아버지도 없 는 마당에 미혼모가 되겠다는 건 스켈레톤이 출산했다는 것보다 더 충격 적이었다. "말도 안 돼! 아무리 좋아했어도 그렇지, 어떻게 이 험한 세상에 여자애 혼자 애 낳아 키울 생각을 다 한단 말이야? 아무리 아기가 불쌍해도 그 렇지, 지 인생은 어떻게 하고? 안 되겠어. 당장 말려야겠어!" 서둘러 그 자리를 뜨려던 혜인은 급히 팔을 뻗은 현우에게 손을 붙잡혔 다. "누나, 잠깐만요! 아직 중요한 걸 하나 안 듣고 갔어요." 마음은 급한데 현우가 손을 놓아주지 않으니 짜증까지 났다. "뭔데? 빨리 말해." "애 아버지가 누군가 하는 거요. 아직 그거 안 듣고 갔잖아요. 그게 굉 장히 중요한 거라구요." "중요하다고? 애 아버지가 누군데?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야? 넌 아니라 고 했잖아?" 막 입을 떼려는 순간 현우는 죽어버린 줄 알았던 양심이 다시 되살아나 며 마음을 불안으로 물들이는 걸 느꼈다. 현우는 흔들리다 결국 쓰러져 버릴 것 같은 이기심의 기둥을 단단히 붙들며 의구심이 가득 담긴 혜인 의 눈동자를 주시했다. "진우 형 아기예요." 처음에 혜인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한참이 지난 후 겨우 말뜻을 이해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누구…라…고?" '수컷'의 이기심에 사로잡힌 현우는 잔인하게 또박또박 말했다. "진우 형이요. 설마 그새 잊어버린 거예요? 누나와 예전에 사귀었다던 유진우 형이요. 혹시나 진우 형이 누나한테 제 이야기했을지도 모르겠네 요. 저 진우 형 사촌 동생이예요. 누나한테 인사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지만요." 혜인의 눈동자에 떠오른 경악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불신과 충격의 빛이 가득 담겼다. 줄이 끊어진 엘리베이터처럼 폭발적인 기세로 뜀박질하는 심장은 엄청난 고통을 호소했다. 가슴이 찢어져 나가는 아픔 속에서 혜 인은 힘들게 입을 떼었다. "너… 농담이지? 그렇지?" "농담 아니에요. 예안이 누나가 진우 형 아기 가진 거 맞고, 제가 진우 형 사촌동생인 것도 맞아요. 유현우라는 제 이름 보면 모르겠어요? 뭣하 면 제가 진우형이랑 같이 찍은 사진을 보여드릴까요? 지금은 안 되지만 내일 학교에서 보여드릴 수 있어요."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예안이는 진우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 했잖아? "말도 안 돼! 예안이는 진우하고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구! 그냥 단순히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만 말했단 말이야!" 차라리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염원이 간절한 목소리였지만 현우는 잔인 하게 혜인의 기대를 깨부쉈다. "예안이 누나가 누나한테 그동안 거짓말 한 거라구요. 설마 정말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진우 형이 누나를 찬 건 예안이 누나 때문이었다구요. 하긴 누나도 상당히 예쁜 편이긴 해도 남자라면 누구나 다 예안이 누나 를 선택할 테니까. 예안이 누나가 누나한테 접근한 건 누나가 진우 형이 랑 한 번 사귀었다길래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였을 거예요 아마. 예 안이 누나가 그동안 누나를 갖고 논 거라구요." 상처를 더욱 덧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빈정거리는 현우의 목 소리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겨우 잊은 줄 알았던 좋아하는 사람 에 대한 그리움은 친구의 배신에서 빚어진 치떨리는 실망을 양분 삼아 다시 마음 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혜인은 주먹을 꽉 쥔 채 폭우가 내리는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청정한 하 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어진 눈시울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았 지만 힘들게 참았다. "서예안… 너…" 얼마 전까지 진우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던 예안은 유한 그룹 후 계자 재호와 이리저리 얽히면서 말실수를 하는 바람에 결국 진우의 부친 과 자신의 부친이 친했기에 진우랑은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말했었 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굉장히 의심스러웠지만 소중한 친구를 잃을까 겁 이 난 나머지 지금까지 묻어두었다. 그런데 지금 현우가 하는 말은 도대 체 무엇인가?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치사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예안이 누나가 만약 이 누나랑 정말 친하다 생각한다면 지우겠지?' 현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 없는 혜인은 친하다 생각했던 친 구에게 배신당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 다 그녀는 자신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마음 속에서 폭우가 내렸다. 저에게도 소박한 꿈이 하나 있습니다. 별거 아닙니다. 그냥 고승덕처럼 대학 2학년 때 사시 패스하고 3학년 때 외무고시하고 행시 패스한 뒤 하버드 대, 예일대 법대 등등을 다니다 국제 변호사를 하면서 글을 쓰 면서 생활하는, 말 그대로 정말 소박하고 자그마한 꿈이죠. .... ... ... 죄송합니다. 조크였습니다.ㅡ.ㅡ; 세발까마귀님. 저는 과학 쪽에 대해서라면 깜깜한 놈입니다. 아는 건 진 짜로 쥐뿔도 없어요. 양자 역학이 뭔지도 몰라요. 양자 컴터는 어렴풋 이 들어는 봤지만 단순히 등장하는 거라면 몰라도, 폼을 잡기에는(?) 너무 무립니다.ㅡㅡ; 차라리 동일성 극소립자론처럼 아예 새로 만드는 거라면 뽀대라도 낼 수 있지만 기존에 있는 걸 등장하려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 어야 하는데..ㅠㅠ 스무살의 티티엘을 만끽한다는 건 예전에 TV에서 본 광고를 패러디한 것뿐이지 실제로 제가 티티엘을 쓴다는 게 아닙니다. 전 핸드폰이 없는 불쌍한 인생입니다.ㅡㅡ; 씁. 대학 가면 하나 살 수 있으려나. 친구넘들은 다 있는데 왜 나는 없는 것인지...ㅠㅠ(하긴 관심도 없어요.ㅡㅡ;) 아기천사님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근데 혹시 학교 2 사이트에 서 활동하신 적 없나요? 거기서 제가 아느 동생이랑 닉이 같아서 혹시나 하는 기분이 들어서요.^^;; 언제나 좋게 봐주시는 분들에게 감사를~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97 회] 날 짜 2003-12-29 조회 / 추천 4340 / 80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단절의 증거 현우가 혜인을 만났다는 걸 알 리 없는 예안은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전 에 갔었던 아기용품 전문점으로 가 한참 동안 이것저것을 구경했다. 서 른 살이 약간 넘어 보이는 가게 주인 남자가 자신을 보며 잔뜩 침울한 표정을 짓는 게 의아하긴 했지만 올해 안으로 태어날 아기를 위한 물건 을 고르는데 정신이 팔려 곧 잊어버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것저것을 구경하던 예안이 집에 돌아온 건 저녁 8시가 조금 넘은 뒤였다. 비밀번호를 눌러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예안은 거실에 도호네 식구들이 전부 와 있는 걸 보고 흠칫했다. "예안이 왔어요." 예안의 귀가를 가장 먼저 눈치챈 정우가 그렇게 말하자 친척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어리둥절한 예안은 소파에 앉을 생각도 못하 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기,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예안이 너 학교 그만뒀다고 들었는데 사실이니?" 도호가 그렇게 묻자 예안은 그제야 아하 싶었다. "네. 오늘 자퇴했어요. 검정고시 치르고 빨리 대학교 가려구요." "왜 대학교는 빨리 가려고 하는 거니?" 수정의 물음이었다. "그냥 뭐 빨리 사회생활하고 싶어서요. 학창 시절을 그냥 날리는 게 조 금 아깝긴 하지만 일찍 사회에 진출하는 것도 나름대로 유리할 테니까 그렇게 손해라고는 생각 안 해요." "아이 생긴 것 때문이 아니라?" 정곡을 찌르는 정우의 차가운 목소리에 예안의 안색이 일순 굳어졌다. 당황한 도호와 수정은 얼른 정우를 나무랬다.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어떻게 그렇게 대놓고…" "사실이잖아요! 지금 예안이 쟤, 아이 생긴 것 때문에 학교도 그만두려 고 하는 거잖아요! 이게 말이나 되는 거예요?" 오늘 공주 송별식을 할 때에도 예안이 임신했다는 걸 모르고 있었던 준 우 역시 정우 못지 않게 굉장히 흥분한 표정이었다. 정호가 말했을 리는 없을 테니, 현우에게 전해들은 게 분명했다. "너 미쳤니? 너 아직 고1밖에 안 됐어! 그런데 어떻게 애 지울 생각을 안 하고 낳을 생각을 할 수 있어!" "준우야! 예안이도 생각이 다 있어서 그러는 거겠…" "생각은 무슨 생각이에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어딨어요! 당장 지워 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잔뜩 흥분한 정우가 준우 대신 나서서 씨근덕거리며 그렇게 말을 잘랐 다. 도호는 버릇없이 아버지에게 대드는 정우에게 화를 내야 했지만 자 신 역시 그의 말에 공감하고 있었기에 차마 그러지 못했다. "예안이 너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마! 현우하고 큰아버지한테 이미 다 들었어! 너 정말 미친 거 아니야?" "누구 애야! 누구 애냐고! 지워! 당장 지워!" 사랑과 질투에 눈먼 남자들은 과연 이럴까? 잔뜩 흥분한 준우와 정우는 할 말 못할 말을 가리지 않고 마부 퍼부어 댔다. 수정과 도호는 그들을 말려야 한다고 느꼈지만 곰도 때려잡을 듯한 박력에 질려 버린 채였다. "저기…" 마찬가지로 쇼크를 먹은 채 멍하니 서 있던 예안은 겨우 침착함을 되찾 고 입을 열었다. 냉담함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형들이 무슨 자격으로 지우라 마라 하는 건데?" 임신 사실을 인정하는 발언에 도호와 수정은 아찔했다. 준우와 정우는 흥분이 눈앞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널 좋아하니까! 널 좋아하니까 지우라는 거다! 네 인생을 지켜주고 싶 어서 그래!" "생각할 것도 없어! 당장 지워! 지금 나 따라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정우는 평소 연애에 관해서 무뚝뚝한 그답지 않게 예안의 손을 거칠게 잡아챘다. "뭐, 뭐하는 거야!" "따라오라면 따라 와!" "이, 이거 놔!" 깜짝 놀란 예안이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호와 수정이 달려들어 정우를 겨우 말렸다. 씨근덕거리는 정우를 겨우 떼어놓은 도호는 주저앉아 아픈 손목을 부여 잡고 있는 예안을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다 정우에게 불같이 화를 냈 다. "너 지금 그게 무슨 짓이냐! 어떻게 연약한 여자애를 그렇게 때릴 수 있 어!" 사실 정우가 때린 적은 없지만 감정이 폭발하는 상태다 보니 말이 마구 튀어나왔다. "때리지 않았어요. 제가 언제 주먹을 휘둘렀다고 그러세요? 병원에 데려 가려고 했을 뿐이에요." "병원에 데려가서? 데려가서 뭘 어쩌려고?" "아버지!" 도호가 예안을 편든다 오인한 정우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악을 쓰듯 따지고 들었다. "그럼 병원에 안 갈 거예요? 안 지울 거냐구요? 예안이가 그냥 애 낳는 거 가만히 지켜보실 거예요? 그러고도 아버지가 어른이라 할 수 있어 요?" 보다 못한 수정이 외쳤다. "정우야! 아버지한테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지뿐만이 아니야! 큰아버지도 그래요! 큰아버지가 그러고도 어른이 에요? 아무리 자기 친딸이 아니라지만 어떻게 그렇게 무관심하게 내버려 둘 수 있…" 짜악- 살과 살이 부딪쳐 튀기는 파공성이 울려 퍼지자 순식간의 주변 공기가 싸늘해졌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한참 동안 깨닫지 못하던 정우는 살며시 손을 들어 반쯤 돌아간 뺨의 얼얼한 통증을 어루만졌다. 여태껏 가만히 듣고만 있던 정호가 자신을 때렸다는 걸 깨달은 건 대략 몇 초 후였다. 정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내가 네 아버지보다 훨씬 못 배우고 못나고 또 가진 것도 없는 초라한 신세라고는 해도 엄연히 네 큰아버지다. 화가 났어도 그렇지 해 야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 법인데 일류 대학에 다니고 있는 녀석이 아직도 그걸 깨우치지 못한 거냐?" 처음으로 느껴보는 위압감에 질린 정우는 아무 말도 못했다. 다른 사람 들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예안이 좋아하는 거 나도 안다. 그래서 조금 심한 말이라 생각했 지만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어. 낙태하라는 것도 네 입장에서는 예안이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서 화가 났어도 참았다. 그런데 뭐라고? 내가 그러 고도 어른이냐고? 오냐. 알았다. 그럼 정우 넌 그런 식으로 말을 하고도 네가 내 조카라고 할 수 있어?"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제일 먼저 제정신을 차린 도호가 당황한 채 정우를 나무랐다. "정우 너 당장 큰아버지한테 사과 못 하겠니? 네가 그렇게 좋은 옷 입고 좋은 거 먹고 좋은 집에 살게 된 것도 다 큰아버지 덕이라는 걸 몰라서 그런 망발을 하는 거냐! 큰아버지 아니었으면 네가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태어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 고개를 떨구고 있던 정우는 조그맣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큰아버지. 조금 전에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정호는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이번 한 번은 봐주마. 하지만 너희 세 삼형제에게 이참에 확실하게 말 해두고 싶은 게 있다." 정호의 눈동자가 난감해하는 도호와 수정을 훑고 지나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현우에게 머무른 뒤 초조한 빛이 가득한 준우를 거쳐 침울한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는 정우의 얼굴에 당도했다. "사실 내가 예안이를 입양하기로 결심한 건 단지 친한 친구의 유언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친아버지를 잃고 혼자가 된 예안이와 진우를 잃고 혼자가 된 내가 서로 외로움을 함께 이겨내 보자는 생각도 있었지만, 내 가 결정적으로 예안이를 맡겠다는 결심을 한 건 책임감 때문이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의 눈동자에 의문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사실 예안이하고 진우는 서로 사귀고 있던 사이였다. 예안이 아빠이자 내 친구인 서중혁은 만날 때마다 항상 농담 삼아 우리가 사돈을 맺으면 어떻겠냐고 말하곤 했지. 서중혁은 교통사고를 당한 뒤 병원에서 눈을 감기 전에 나보고 예안이를 부탁한다고 했고, 그때 진우가 죽은 뒤였기 에 나는 서로 좋은 위로가 될 겸 예안이를 입양하려고 한 거였다." 분위기는 점점 숙연해져갔다. 정우는 떨어뜨린 시선을 들 줄 몰랐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예안이가 나한테 진우 아이를 가졌다고 고백했어. 사 실 그전까지만 해도 난 내가 예안이를 키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정우, 너 네 형제로 주는 게 예안이 미래를 위해 낫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예안이를 책임지고 맡아야 하는 이 유를 깨달은 거지. 어쨌거나 내 손자를 가진 아이니까." "그, 그럼 형이 독립한다고 한 게…" "맞았어. 예안이가 아이를 낳아서 키우려면 아무래도 너희 집에서 사는 건 굉장히 부담이 되기 때문에 나도 선뜻 승낙한 거야. 원래라면 도호 네 도움 좀 받아 자그마한 전세방이라도 구하려 했는데 운이 좋게도 예 안이 먼 친척 되는 사람이 상당한 돈을 줬기에 이런 아파트도 살 수 있 었던 거지." 정호의 거짓말은 물이 흐르듯 전혀 거침이 없었다. 친척들은 그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걸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원래는 예안이를 내 호적에 올리려 했는데 성이 바뀌는 것도 그렇고 해 서 그냥 그러지 않기로 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라기에는 좀 친하 지만 어차피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기에 예안이도 나한테 아빠라고 부르는 거고." 정호는 대충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여태껏 묵묵 히 듣고 있던 정우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정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건 이기적인 게 아닌가요?" "?" "진우가 죽었고 예안이가 큰아버지 손자를 갖고 있다고 해서 지우지 않 고 낳게 시키는 건 너무 이기적인 게 아니에요? 혹시 큰아버지가 예안이 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진우 아이를 지우지 않고 낳으라는 걸 내세웠나 요? 그럼 예안이 인생은 어떻게 하구요? 그거 너무 이기적인 게 아니에 요? 멀쩡한 여자애 인생 망쳐가면서까지 친손자가 얻고 싶었나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재혼을 하시지 그랬어요?" 그 부분에서만큼은 공감하는 도호 부부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반박 할 거리가 없어 정호가 난감해하고 있을 때 무심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 키던 예안이 입을 열었다. "내가 낳는다고 했어." 놀람에 가득 찬 친척들의 시선을 온몸에 받은 채 앉아 있던 예안은 천천 히 일어나며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낳고 싶어서 낳는다고 했어. 아빠는 나한테 낳으라고 강요 같은 거 한 적 없어. 내가 낳고 싶은 것 뿐이야. 내가 낳아서 키우고 싶은 것 뿐이야." 정우는 그만 당황했다. "하지만 그건…" "내 인생이 왜 망가지는데? 어차피 난 그 애가 죽은 다음에 결혼할 생각 같은 건 영원히 버렸어. 오히려 아이가 생긴 건 나한테 굉장한 행운이 야. 내가 좋아하던 그 애가 나한테 마지막으로 준 선물이라 생각하고 마 음껏 사랑해줄 수 있으니까."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진심으로 사랑했던 유젤의 귀여운 미소를 떠올 리며 예안은 복받치는 눈물을 쓰게 삼켰다.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건드렸다가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인 슬픔이 그대로 가슴을 찢으며 튀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정우는 '그 애'가 유젤을 가리킨다는 걸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뇌리를 잠식하는 서러운 기분을 억누르며 예안은 냉랭하게 덧붙였다. "어쨌든 전 이 아이 낳을 거예요.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정우 형, 준 우 형, 그리고 현우. 이제 그만 돌아가 주세요." "하지만 예안아…" "돌아가 주세요." 도호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예안은 곧바로 말을 가로챘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제 결심은 바뀌지 않아요. 돌아가 주세요." "그렇지만…" "제발, 제발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세요. 이러다가 정말 애 떨어지면 책 임지실 거예요? 저 지금 진짜 힘들어 죽을 것 같다구요. 왜 단체로 몰려 와서 저를 못살게 구시는 거예요? 그렇게도 제가 애 안 낳기를 바라세 요?" 뭐라 말하려던 수정은 예안이 금방이라도 울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 자 입을 다물었다. 결국 이쯤에서 수습해야겠다 싶은 도호가 나섰다. "나중에 다시 오마. 이만 가자 얘들아. 형, 안 좋은 모습 보여서 정말 미안해." "아니야. 나야말로 어른답지 못하게 굴어서 정말 미안하지." 도호 부부는 아들들을 나무라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예안이 아이를 낳기 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 다만 아들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가능한 부드럽 고 좋게 설득해서 예안이 스스로 아이를 지우도록 유도하려 했다는 것이 다. 도호 식구들을 아파트 입구까지 바래다주고 난 정호가 돌아왔을 때 예안 은 혼자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안쓰러운 그 모습에 가슴이 시릴 듯 아려온 정호는 뒤에서 예안을 가만히 안아주었다. "아빠." "응?" "사촌형들은 내가 남자였을 때도 내가 가져야 할 행복까지 가져간 채 날 불행하게 하더니, 이제 내가 조금 행복해지려고 하니까 그것마저 방해하 려고 드는 거야? 정말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 금방이라도 서러운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가냘픈 목소리에 정호는 가슴이 아파 왔다. 이게 다 내가 못난 탓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 예안아. 나만은 네 편이야. 세상 모두가 널 불행하게 하려 고 해도 나만은 네 편이야. 알지?" 정호의 목소리에는 따스한 온기가 가득 실려 있었다. 그의 손등을 살며 시 어루만지던 예안은 조금 나아진 기분으로 픽 웃었다. "내 편이라는 사람이 아까는 왜 가만히 있었어?" "그 녀석들 입장에서는 널 생각하느라 하는 말이었으니까 차마 나설 수 없었어. 괜히 나섰다가는 친손자 보고 싶은 욕심에 멀쩡한 여자애를 애 엄마로 만들려는 나쁜 할아버지가 되는 거잖아? 너 아빠 진심 모르니?" "압니다 알아요. 잘 안다니까요." 그제야 정호도 표정을 풀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잘 안다면 술상이나 차려서 가져와 봐. 장차 태어날 내 손주를 위한 건 배가 빠질 수 없지." "쳇. 내가 임신 중이라는 거 잊었어? 임산부를 부려먹으려 드는 사람은 아빠밖에 없을 거야." "아, 그렇군. 이제 너 무리하면 안 되지? 그럼 내가 차려서 먹을게." 정호가 부엌으로 가려 하자 예안은 얼른 말렸다. "됐어됐어. 아직 임신했다는 느낌도 별로 없고 몸이 무거운 것도 아니니 까 그냥 내가 할게. 대신 다음달부터는 아빠가 집안 일 같은 거 전부 다 해야 돼. 몸 관리하면서 수능 공부까지 하려면 굉장히 힘드니까." "다음 달부터? 그럼 이번 달까지는 네가 한다는 거야? 이거 괜히 몸 무 거운 애 부려먹다가 못된 아버지란 소리 듣는 거 아닐까 겁나네." "아무도 그렇게 말할 사람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부엌으로 간 예안은 냉장고 옆에 있는 작은 냉장 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적당한 안주감을 찾아 접시에 덜어 술병과 함께 쟁반 위에 올린 예안은 젓가락을 찾던 중 핸드폰이 울리자 얼른 받아들 었다. "여보세요." 「나야. 김혜인.」 뜻밖에도 울음 섞인 혜인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조금 놀 란 예안은 왜 그러느냐고 물으려다 다음에 들려온 말에 입을 다물 수밖 에 없었다. 「예안이 너 도대체 진우랑 무슨 사이야? 너 진우 아이 가졌다며? 왜 그 동안 진우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날 속였어?」 예안은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 되었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오른손이 부 들부들 떨렸다. "무,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시치미 떼지 마! 다 들었어! 너 지금 진우 아이 가졌잖아! 말해! 말 해! 왜 그동안 날 속인 거야! 내가 진우랑 사귀었다는 게 그렇게도 싫었 니! 그렇게 내가 미웠니! 너무해! 정말 너무해! 어쩜 그럴 수가 있어!」 "그,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야 혜인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무해 정말…」 충격으로 굳은 예안은 변명도 못한 채 악을 쓰는 혜인의 목소리가 울음 소리에 잠식당해 통화가 끊어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거대한 폭 탄이 쏟아내는 섬영에 모든 게 날아가 버린 도시처럼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채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설문에서 젤 많은 사람들이 연애물이라고 평가한 게 왠지 이해가 잘 가는 챕터..인가.-_-;; 선작이 400 넘었어요 드디어.>.<(수능이 400점 만점이다 보니 400이라 는 수치에 왠지 정감이 간다는..)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98 회] 날 짜 2003-12-30 조회 / 추천 4157 / 41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단절의 증거 정호는 술상을 차리러 부엌으로 간 예안이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서 가보았다. 식탁 위에 놓인 쟁반에는 맥주와 안주거리 등 간단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고, 그 앞에 예안이 멍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저러는지 몰라 걱정이 된 정호는 예안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 다. "예안아? 예안아? 왜 그래?" "으, 응?" 예안은 딴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가 깜짝 놀랐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하길래 내가 와도 몰랐니? 갑자기 왜 그래?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 "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참, 아빠 건배하고 싶다고 했지? 가서 기다려. 준비 다 됐으니까." 서두르는 손길로 쟁반을 들던 예안은 그만 손이 미끄러지며 그것을 놓치 고 말았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맥주병에서 튄 파편과 함 께 맥주가 흘러나와 바닥을 더럽혔다. 안주용으로 접시에 담아 놓은 오 징어와 김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 미안해 아빠." 예안이 서둘러 치우려고 하자 정호는 얼른 말렸다. "몸도 무거운 애한테 이런 거 시킨 내가 잘못이지. 내가 다 치울 테니까 넌 들어가 있어. 아무래도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어, 어…" 예안은 아직도 멍한 기분에서 깨어나지 않은 채로 대답하고는 흐느적거 리며 방으로 돌아갔다. 깨진 조각들을 주워담고 김치를 비롯한 안주를 골라낸 뒤 맥주를 닦아내던 정호는 문득 걱정스런 시선으로 예안의 방 쪽을 주시했다. "갑자기 왜 저러지?" 예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가 알 리가 없었다. 방으로 돌아온 예안은 침대에 눕지도 않고 손가락을 물며 초조한 안색으 로 서성거렸다. 아까 수화기를 통해 울리던 울음 섞인 혜인의 목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고 자꾸만 괴롭혔다. 터져 버릴 듯 지끈거리는 머리와 뜀박질을 멈추지 않는 심장이 예안을 갑갑함의 수렁에 몰아넣고 있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결국 초조함을 참다 못한 예안은 그렇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보았지 만 더욱 더 진한 초조함이 되돌아올 뿐이었다. 혜인에게 어떻게 설명할 지 침착하게 궁리해보았지만 신중함을 잃은 채 안절부절에 점령당한 이 성은 녹이 슨 엔진처럼 꿈쩍도 안 했다. "유니콘. 어떻게 하면 좋겠어? 응?"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저는 김혜인 씨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데요. 카운슬링을 바란다면 보다 많은 데이터를 모으게 해주십시오.」 평소 당신은 인간을 초월한 인간이니 어쩌느니 하는 식으로 잘만 거드름 을 피우더니, 꼭 필요할 때에는 '전 인공지능이라 데이터가 부족하면 어 쩔 수 없어요~ 쏘리예요~'라고 어물쩍 넘어가기만 하면 다인가? "젠장. 인공지능 따위가 도움이 될 리가 없지. 미치겠네 정말!" 초조함을 견디지 못한 예안은 의자에 털썩 앉으며 붉게 찰랑거리는 머리 를 북북 긁었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예안은 결국 굳게 결심했다. "유니콘. 원격장치에 혹시 목소리 변조 기능 같은 거 있어?" 「예. 있습니다.」 "내가 남자였을 때 목소리… 그 목소리로 변조할 수 있냐?" 「유젤 님이 남자였을 때의 목소리는 데이터 베이스에 입력되어 있지 않 습니다. 특정인의 목소리로 변조하기 위해서는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내가 녹음해둔 게 있으니 괜찮을 거야." 「그럼 됐습니다.」 예안은 책상을 뒤져 예전에 고등학교 입학 뒤에 차세현이랑 같이 갔었던 노래방에서 녹음한 테이프를 꺼내어 틀어주었다. 유니콘은 '유진우'의 목소리만을 깨끗이 골라내고 난 뒤 OK했다. "된 거야?" 「예. 됐습니다. 혜인 씨에게 전화하시죠. 목소리 변조 기능을 원하실 때 말씀을 하세요.」 인공기능 주제에 눈치는 참 빠른 녀석이었다. 예안은 떨리는 손으로 핸 드폰을 열어 혜인의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신호가 가고, 이윽고 혜인 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혜인아." 수화기 너머로 혜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가끔씩 울음을 억누르는 소리 가 들리는 걸로 보아 아직도 슬픔이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야? 또 날 비웃어주려고 전화한 거니?」 "절대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그냥 예전에 진우가 너한테 보내려고 굉 장히 망설이다가 결국 못 보낸 녹음 테이프가 있거든. 사실 진작에 들려 줬어야 했는데 나랑 진우 사이를 알게 되면 너랑 거리가 멀어지는 게 겁 나서…" 예안의 목소리는 죄인처럼 점점 죽어 들어갔다. 한때나마 진심으로 좋아 했었고 어쩌면 지금도 좋아하고 있을지 모르는 여자애에게 이런 심한 거 짓말을 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에 치가 떨렸다. "들어 봐. 잘 들어야 돼." 문득 설움이 복받친 예안은 손으로 입을 막으며 터지려는 울음을 억눌렀 다. 잠시 후 간신히 진정된 예안은 목소리 변조 기능이 on으로 놓인 원 격장치를 입에 가져갔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침착하려 애썼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혜인아. 듣고 있니? 나 진우야. 사실 그동안 널 아프게 한 거 진작 사 과하고 용서를 빌었어야 했는데 내 이기심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이제라도 이런 식으로 용서를 비는 내가 겁쟁이라 욕해도 좋아. 하지만 난 이런 방법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너한테 용서를 빌 수 없었어." 목소리 변조 기능을 통해 영락없는 유진우의 음색으로 바뀌어 나온 예안 의 말은 조용한 방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아마 혜인도 지금 울음을 참 으며 이걸 듣고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그때 너한테 헤어지자고 한 건 네가 함부로 몸 굴리는 여자 라 생각해서가 아니었어. 난 네가 정말 착하고 그때 그건 어쩔 수 없었 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때 너에게 험한 말을 한 건 정말 미안해. 하지 만 어쩔 수 없었어. 날 용서해 줘. 아니, 나 용서하지 마. 절대 용서하 지 마. 난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놈이야." 거기에서 잠깐 멈춘 예안은 터지려는 울음을 억누르기 위해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나 심한 상처를 주고서도 진실을 말할 용기도 못 낸 채 끝까지 혜인을 기만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환멸감이 아마 도 눈물을 보이게 했나 보다. 서러운 기분을 씻어내기 위해 다시 한 번 울음을 삼키고 있을 때 수화기 너머로 혜인이 말했다. 「진우야. 그렇게 자책하지 마. 사실 나 오래 살지 못해. 널 위해서라도 진작에 헤어졌어야 했는데 내가 이기심에 그렇게 억지를 부려가며 너한 테 매달린 거야.」 "!!" 오래 못 산다고? 전혀 뜻밖의 청천벽력에 소스라치게 놀란 예안은 목소 리 변조 기능이 작동 중이라는 것도 잊은 채 핸드폰에 대고 외쳤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죽는다니? 왜 죽어? 네가 왜 죽는다는 건 데?" 「…녹음 테이프라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혜인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추궁했을 때 예안은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닫고 얼굴이 새하얗게 굳어졌다. 바보 같 이 혜인이 떠본 것에 너무나 손쉽게 넘어가 버린 것이다. 황급히 변조 기능을 정지시킨 뒤 예안은 다급한 톤으로 외쳤다. "혜인아 이, 이건 말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서예안. 지금 진우 거기 있지? 너랑 같이 있는 거지? 너랑 같이 살고 있는 거지? 그런 거지? 그래서 네가 진우 아이 낳는다고 한 거지?」 "아, 아니야. 진우는 죽었어. 방금 그건 그러니까…" 「거짓말하지 마. 그건 분명 진우 목소리였어. 녹음한 거라고 둘러대지 마. 녹음 테이프가 내가 하는 말에 대답할 리가 없잖아? 진우 거기 있 지? 그렇지? 진우가 죽었다는 거 다 거짓말이지? 거짓말이지? 거짓말이 잖아!」 예안의 새하얀 얼굴 위로 창백하게 묵은 암담함이 빛 바랜 먼지처럼 내 려앉았다. 「제발 바꿔 줘.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진우랑 이야기하고 싶어. 진우 가 네 남자친구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한 번만이라도 이야기하고 싶어. 제발 부탁해 예안아…」 전화 너머로 흐느끼는 혜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을 갈가리 찢는 서러운 울음소리에 결국 예안은 터지려는 눈물을 삼키며 다시 변조 기능 을 켜고 말았다. 원격장치를 통해 다시 유진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진우의 목소리에 울음을 참으며 말이 없던 혜인은 다급히 외쳤다. 「한 번만, 한 번만 만나자 진우야. 한 번만. 응? 제발 한 번만. 한 번 만 만나자. 제발. 응?」 "혜인아 하지만 그건 곤란…" 혜인은 다급히 말을 잘랐다.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만나자. 나 몇 년 살지 못하고 죽어. 그전에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했던 남자애 모습 봐두고 싶어서 그래. 너 예안이 랑 곧 결혼할 거지? 그전에, 그전에 제발 한 번만 만나 줘. 다시는 귀찮 게 안 할게. 제발 한 번만… 응?」 "하지만…" 「나 몇 년도 못 살아.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네 얼굴 꼭 한 번만 보고 싶어. 제발… 응?」 예안의 녹색 눈동자가 허무한 슬픔으로 물들었다. "죽는…다고…" 상처만 잔뜩 입혔던 혜인에게 속죄를 하기도 전에 그녀의 생명이 이 세 상에서 지워져 버린다고 한다. 당장이라도 진실을 밝히고 무릎을 꿇으며 눈물로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어야 했다. 그런데 사실대로 말할 용기조 차 못 낸 채 끝까지 거짓으로 그녀를 기만하려 드는 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이기심이 아닐까. 침중한 눈빛으로 묵묵히 허공을 응시하던 예안은 이윽고 가라앉은 목소 리로 말했다. "내일 밤 10시에 우리가 자주 보던 공원에서 만나자." 「고마워. 정말 고마워.」 울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연거푸 고마워하는 혜인에 대한 죄책감은 산 을 무너뜨리는 홍수처럼 맹렬한 기세로 휘몰아쳐 들어왔다. 도저히 자신 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예안은 괴로운 표정으로 전화를 끊고 눈을 감아 버렸다. 그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 혜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예안은 발신자 번호를 확인해보았지만 중현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네. 받았습니다." 「예안씨 전화 기다리다가 눈이 빠질 것 같아서 결국 제 쪽에서 먼저 전 화했습니다.」 그제야 예안은 전에 중현에게 나중에 전화한다고 약속했던 걸 기억해내 고 미안해했다. "죄송해요. 제가 요새 정신이 없어서… 깜박 잊고 있었네요." 「어디 몸이라도 안 좋으신가요?」 중현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불안함이 묻어나고 있었지만 혜인에 대한 걱 정으로 머리 속이 복잡한 예안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냥 몸이 좀 안 좋아요. 네… 그렇지만 만나야겠죠. 내일 모레 낮에 만날까요? 괜찮아요. 저 오늘 학교 그만뒀거든요. 검정고시 치러서 대학 가려구요." 「예안씨 같은 천재가 굳이 수능으로 대학 갈 필요가 있을까요? 어쨌든 학교를 그만두셨다니 시간은 많으시겠군요. 그럼 내일 모레 아침 11시에 뵐 수 있을까요? 이야기도 할 겸 제가 점심도 사겠습니다.」 점심이라. 하지만 음식을 먹어본 게 아주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지금 예안은 감각의 기억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뒤였다. "네. 내일 모레 11시에 뵈요 그럼." 「예. 제가 내일 모레 11시경에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때 보죠.」 "네. 이만 끊을게요." 이제는 울음이 많이 사그라진 한숨이 흘러나오며 방안에 흩어졌다. 침대 에 누워 죄책감이 가득한 녹색 눈동자로 천장을 올려다보던 예안은 손을 들어 살며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아기야… 이럴 땐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그렇지 않아도 생모에 대한 일로 가뜩이나 머리 속이 어지러운 판에 혜 인의 일까지 겹치니 미칠 것 같았다. 도대체 혜인이 어떻게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걸까? 게다가 진우의 아기라고 알고 있는 걸 보면… "잠깐. 누군지 알 것 같다." 윤활유를 바른 엔진처럼 뇌세포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혜인에 게 이 사실을 알린 게 누구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준우 형 아니면 현우… 둘 중의 하나겠지?" 사촌형제들은 정말 내 행복을 방해하기 위해 태어난 족속들인 건가. 분 하고 화가 나서 죽을 것만 같았지만 예안은 꾹 눌러 참았다. 심한 감정 의 기복은 태아에게 좋지 않을 테니까. 다음날. 해가 서산 너머로 넘어가자 예안은 몇 시간 후에 혜인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침울한 기분에 빠졌다. 이성대로 생각한다면 혜인을 만나지 않아야 했지만 감성은 그걸 용납하 지 않았다. 변장을 한다 해도 혜인에게 들통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 디에도 없는데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은 무거운 바위처럼 가 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휴우… 아기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제 겨우 3개월 밖에 안 된 태아가 대답해줄리 만무했지만 예안은 마치 아기가 듣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중얼거렸 다. 째깍째깍…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 어느덧 저녁 9시가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 정 호는 친구 집에서 놀다가 온다고 했기에 집에는 자신 혼자였다. 꼴사나 운 변장 모습 따위를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준비해야겠지." 예안은 아까 사온 변장 도구를 꺼내어 입었다. 무릎을 훨씬 넘어서는 코 트와 마스크, 그리고 풍성한 머릿결을 감출 수 있는 커다란 검은 가죽 모자까지. 채비를 마친 예안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밝은 빛 아래라 그런지 유젤 의 찬란한 미모는 조금도 감추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거기는 어두우니까… 주의하면 괜찮을 거야." 손가락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훑어 내리던 예안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뒤 집을 나섰다. 혜인이 오기 전에 미리 가서 기다려야만 했다. 단절의 증거 챕터는 다음 화가 끝입니다. 전개 속도가 다소 느리다고 생각 되시더라도 느긋하게 따라와 주셨으면 감사하겠어요.(안 따라오시면 수갑 을 채워서라도 끌고 갈 겁니다.--+) [퍼억!] 하레스님. 제 수능 점수를 물어보시면 전 가슴이 아픕니다.ㅠㅠ 그런고로 노코맨트로 넘어가겠습니다.(맞는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99 회] 날 짜 2003-12-31 조회 / 추천 4295 / 54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단절의 증거 어느덧 시계는 저녁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젯밤에 약속한 공원 에 30분 일찍 나간 예안은 혜인이 이미 와서 벤치에 앉아 기다리는 모습 을 보고 흠칫해서 얼른 몸을 숨겼다. 다행스럽게도 혜인은 아직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휴. 다행이다. 여기서 들키면 죽도 밥도 안 되잖아." 벤치에 앉은 혜인의 초조한 모습이 잘 보이는 공중전화부스 안에 들어간 예안은 전화카드를 꺼내어 넣었다. 폰을 써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혜인과 마주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목소리 변조 기능이 켜져 있는 걸 확인한 예안은 떨리는 가슴을 안고 혜 인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다급한 혜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쪽에서 황급히 놀라 전화를 받는 혜인의 모습이 망막에 맺힌 순간 예안은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았 다. "나야. 나 유진우." 「유진우? 너 어디 있니? 어디 있어? 왜 안 온 거야?」 "지금… 네가 있는 곳에서 정면에 있는 전화부스 안에 있어." 그 말에 놀란 혜인은 두리번거리다 이내 검은 코트와 모자로 몸을 가린 예안이 공중부스에 있는 걸 발견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굉장히 어두운 데다가 옷차림 때문에 쉽게 알아보지 못하는 듯 했다. 혜인이 다가오려 하자 예안은 다급히 외쳤다. "오지 마! 거기 그대로 있어! 만약 한 발자국만 더 오면 나 그대로 가버 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 그 말에 혜인이 주춤거리며 멈추는 게 보였다. 안심한 예안은 침울한 목 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냥 거기서 말하자. 나 네 얼굴 볼 자신 없다." 「한 번만 만나주면 안 돼?」 "미안하다. 그건 곤란해." 「…알았어. 그런데 너…」 말이 멎은 후 잠시 후 터지려는 울음을 참는 듯 격양된 목소리가 들려왔 다. 「…정말 살아있었구나. 죽은 게 아니었어…」 "속여서 미안하다. 하지만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렇게 내가 귀찮았던 거야? 그렇게 내가 싫었던 거야? 사람들한테 너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도망갈 정도로 내가 지긋지긋했던 거니? 그렇게 도 내가 혐오스러웠던 거니?」 "아니야! 그건 아니야!" 격양된 감정을 참지 못한 예안은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서러운 혜 인의 목소리가 너무나 안타깝고 가여워서 솟구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 다. 「그럼 왜 속인 거야? 왜 그런 거야?」 "그건 말해줄 수 없어." 「어째서? 어째서 안 되는 건데? 왜 그런 거야?」 울음 섞인 혜인의 목소리는 마음을 꿰뚫는 탄환이 되어 예안의 가슴을 파고 들어왔다. 탄환이 뚫고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마음의 상처가 너무 아파서 눈물이 그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간신히 입을 열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건 말해줄 수 없어.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고 밖에 대답해줄 수 없는 서러운 신세는 눈물을 그칠 수 없게 만든다. 예안은 터지려는 울음을 필사적으로 눌러 삼켰지만 조금씩 새어 나오는 건 어쩌지 못했다. 그게 또 혜인의 슬픔을 자극하리라는 걸 알지 만 참지 못했다. 참을 수 없었다. "너… 몇 년 살지 못하고 죽는다고 했지?" 「…미안해.」 혜인의 사과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처음에는 몰랐다. "뭐가 미안한데?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그런 것도 모르고 너한테 맨 날 상처만 준 내가 미안하지. 내가 바보지. 내가 죽일 녀석이지." 수화기 너머로 혜인의 울음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미안해. 사실 그거 거짓말이었어. 그냥 널 한 번 더 보고 싶은 욕심 에… 그렇게 또 너한테 부담을 주고 만 거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 지만 난 정말 널 한 번 보고 싶어서…」 거짓말이었구나. 예안은 그 말에 안도했다. 거짓말을 했다는 것에 대해 화 따위는 나지 않았다. 혜인이 그런 거짓말을 할 지경까지 몰아넣은 자 신에 대한 혐오감, 그리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과거를 다시 만나고 싶어 했던 그녀의 미련에 대한 안타까움을 주체할 수 없어 또다시 눈물만 흘 렸을 뿐이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아니, 미안해하지 마. 넌 나한테 미안해할 거 하나도 없어. 내가 죽일 놈이야. 전부 다 내가 잘못한 거야." 「예안이랑… 결혼할 거지?」 서러운 눈물이 말문을 막아 입을 열지 못했다. 시리도록 차가운 안타까 움이 가득한 그 물음에 어떤 따뜻한 대답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그냥 솔직하게 말해 줘. 나 알고 있어. 어차피 네가 이제 나한테 올 수 없다는 거. 그냥 솔직히… 솔직히 말해 줘.」 예안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헤헤… 참 이상하지? 친구들이 그러더라. 왜 나 같은 퀸카가 진우 너 같은 애를 쫓아다니는지 이해 못하겠다고 말이야. 그 애들 참 이상하지? 어떻게 배경이나 외모만 보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영혼의 반쪽이라는 건 그런 걸로 알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야.」 영혼의 반쪽. 그것은 잔인한 비수로 혜인을 상처 주고 또 커다란 거짓말 로 지금 그녀를 농락하는 자신에게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과분한 금기 였다. 「그렇지만 내가 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말아 줘. 아직 어린애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 줘. 사실 난 너한테서 다른 남자들에게 느끼 지 못했던 기분을 느꼈어. 널 보면 안아주고 싶고 위로해주고 싶고… 곁 에 있어 주고 싶고… 난 그게 사랑이라 생각했었거든. 근데 친구들은 그 건 사랑이 아니라 동정이라더라. 웃기지 않아?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 을 자기들이 알 수 있다는 걸까? 그치? 웃기지?」 그래 맞아. 웃겨. 너무 웃겨서 눈물이 멈추지 않을 정도야. 「예안이랑… 행복하게 잘 살아. 그렇지만… 부디 날 잊지 말아 줘. 아 니, 날 그리워해 달라는 그런 말이 아냐. 그냥 가볍게… 아주 가끔씩 그 냥 나 같은 애가 널 좋아했었다는 것만 기억해달라는 거야. 그건… 들어 줄 수 있지?」 그때 비로소 예안은 여자가 된 후 혜인의 곁에 친구로 머물렀던 게 애초 에 그릇된 선택이라는 걸 깨달았다. 혜인의 인생을 이루고 있는 수레바 퀴에서 빠져나왔어야 했다. 아무리 악마가 자신을 유혹해도 그녀의 주위 에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다. 상심한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고 또 같이 있 고 싶었다고 해도, 그것은 그녀를 기만하는 더러운 행위라는 걸 처음부 터 깨달았어야 했다. 가장 용서할 수 없는 건 이미 그 모든 걸 알고 있었으면서 옛날의 미련 을 떨치지 못했다는 것. 혜인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데도 그녀를 위로 해준다는 자기 합리화에 취해 그녀의 곁에 머물렀다는 것. 결국 그것으 로 인해 혜인에게 두 번에 걸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주었다는 것. 「왜 대답 안 해주는 거야? 그것도 안 돼? 안 되는 거야?」 복받치는 서러운 울음을 참을 길이 없던 예안은 다시 왈칵 눈물을 쏟으 며 거짓말을 했다. "미안하다. 그럴 수 없어." 「…왜?」 "사실 나 오래 살지 못해. 지금 암세포가 내 생명을 갉아먹고 있어. 예 안이가 학교를 그만둔 것도 내가 남은 시간 동안 나와 함께 지내기 위해 서였어. 난 아마… 올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을 거야." 너무나도 뻔한 거짓말이었지만 혜인은 그걸 믿어버렸다. 「…그랬구나. 그래서 예안이가 굳이 우겨가며 아이를 낳는다고… 예안 이는 네가 아이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가기를 바랬던 거겠지? 그래 서 학교까지 자퇴하고 낳기로 결심한 거였지?」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예안이는 참 착하고 강한 아이구나. 학교를 그만두면서도 표정이 너무 밝아서 난 그런 거 생각도 못했는데… 헤헤. 역시 난 예안이한테는 상대 가 안 되는 것 같아. 너무 마음도 약하고 이기적이고 외모도 상대가 안 되고…」 너는 충분히 매력적인 여자아이야 김혜인.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으나 그 것마저 그녀를 기만하는 행위라는 생각에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럼 진우야… 딱 한 번만 나 안아줄 수 있어?」 예안은 눈물을 닦으며 거절했다. "미안해. 그건 안 돼." 「제발 한 번만… 그럼 손만이라도 잡게 해줘…」 - 톡톡 놀란 예안은 반사적으로 뒤를 흘끔 돌아보다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했 다. 어느새 공중전화부스까지 다가온 혜인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재빨리 얼굴을 돌린 예안은 빠르게 말했다. "무슨 짓이야? 이게 무슨 짓이야? 분명히 안 되다고 했잖아?" 「제발 한 번만… 네가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어둠에 힘입은 변장으로도 들킬까 겁이 나는데 어떻게 그녀를 안아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너무해 정말… 너무해 너…」 손을 내밀면 간단히 열리는 투명한 문을 사이에 두고 서 있었지만 두 사 람의 몸을 싣고 있는 운명의 촛대는 은하수보다도 더 멀고 아득한 거리 만큼 떨어져 있었다. 평소 아무렇지도 않게 안곤 했던 혜인이었지만 지금 자신이 유진우로서 연기하고 있는 동안은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다는 사실. 잡아선 안 된 다는 사실. 그게 슬프고 서러웠던 예안은 자꾸만 문을 두드리는 가슴 아 픈 노크소리에 그만 눈을 질끈 감았다. '손을 잡아주고 싶어… 안아주고 싶어…' 비록 혜인을 기만하는 행위가 될 지라도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 주기 위해 서예안이 아닌 유진우로서 그녀를 안아주고 싶다는 간절한 염 원. 하지만 그것마저 이기심이 깃들어 있는 것일까. 부질없는 바램을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때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어?" 자신의 손에서 푸른빛이 나기 시작하자 예안은 크게 놀랐다. 유니콘이 자기가 나설 차례라는 듯 설명해주었다. 「ESP가 발동된 것 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부분적으로나마 드디어 신 인류의 능력이 깨어나기 시작한 것 같군요.」 유니콘의 설명에 예안은 혼란스러웠다. "능력…이라고?" 「그렇습니다. 뇌 이식 수술 후 유젤 님은 그 육체에 아직 완벽히 적응 하지 못해 지능조차도 100% 이끌어 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ESP까지 깨어난 지금은 신인류의 뛰어난 두뇌를 완벽히 활용하실 수 있을 겁니 다.」 "에날도스… 같은 거야?" 「그것과는 틀립니다. 유젤 님이 지닌 능력은 에덴의 가호를 받는 자만 이 지닐 수 있는 신성한 능력이자 유젤 님이 신인류라는 증거입니다. 유 진우라는 인물로서 혜인씨를 안아주고 싶어하는 유젤 님의 염원이 결국 힘을 끌어낸 것 같군요. 유젤 님이 원하는 걸 떠올리면서 그 빛을 혜인 씨에게 뿜어내십시오.」 멍한 눈동자로 빛이 나오는 오른손을 들여다보던 예안이 손을 들어올리 자 푸른빛은 혜인에게로 스며들었다. 「이제는 나가셔도 됩니다. 최면이 걸렸습니다. 혜인씨는 지금 유젤 님 은 유진우라는 인물로 착각할 겁니다.」 예안은 주저하다가 결국 문을 열고 나갔다. 울먹이며 서 있던 혜인은 예 안이 나오자 몹시 기뻐했다. 유진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황하거나 화 를 내지 않고 그저 기뻐했을 뿐이었다. "진우야!" 혜인은 예안의 품에 와락 뛰어들었다. 자신 없는 손길로 그녀의 등을 어 루만져 주던 예안은 피식 서글픈 웃음을 짓고 말았다. 지금 혜인은 완벽 하게 최면에 걸려 자신을 유진우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도 예안이가 지닌 힘…?' 문득 그런 의구심이 떠올랐지만 곧 혜인의 울음소리에 날아가 버렸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내 이기적인 부탁을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 울음을 참지 못하는 혜인의 등을 다독이는 예안의 손은 바르르 떨렸다. 지금 자신은 혜인을 철저하게 농락하고 있다는 자기 혐오감이 치밀어 올 랐다. "정말 고마워… 너무 고마워…" 혜인은 눈물 젖은 고개를 들며 애써 웃어 보였다. "네가 숨을 거둘 때 곁에 있고 싶지만… 그건 안 되겠지? 그 자리에는 내가 낄 수 없을 테니까." 예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면에 걸려 자신을 유진우라 착각하고 있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아 주었을 뿐이었다. "나… 너 기억할게. 영원히 기억할게. 그래도… 되지? 그것은 허락해줄 수 있지?" "…그래준다면 나야 고맙지. 난 너한테 항상 상처만 줬는데…" 널 슬프게만 했는데 그런 과분한 사랑을 주겠다는 건 너무나도 고맙지. 하지만 난 지금도 이렇게 널 속이는 나쁜 녀석이야. 그러니 더 이상 날 기억하지 마. 기억해선 안 돼. "미안해… 정말 미안해 혜인아…" 예안은 시선을 떨구며 천천히 손을 들어 혜인의 뺨에 묻은 깨끗한 눈물 을 닦아냈다. 어느 동화에 나오는, 순백의 천사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 로 흘렸다는 순결하고 성스러운 눈물과 흡사한 그것은 무수한 의미를 담 고 있었다. 그건 바로 이제 예안과 혜인을 연결하고 있는 인연의 끈이 사라졌음을 암시하는 단절의 증거였다. 혜인을 떠나보내고 난 후 우두커니 서 있던 예안은 갑자기 허탈한 웃음 을 터트렸다. "유니콘. 난 바보야. 바보라구. 바보 머저리에다가 잔인하고 사악하고 비열한 놈이야. 알지? 알지? 너도 알지? 난 진짜 머저리 같은 녀석이라 는 거!" 예안은 모자를 벗어 젖히며 커다랗고 서글픈 웃음을 다시금 토해냈다. "바보야! 유진우 넌 바보다! 바보라구! 이 세상에서 너보다 더 바보인 녀석은 절대 없을 거야! 왜 사냐 유진우! 그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그냥 죽어 버려! 하늘에서 예안이도 널 비웃고 있을 거다!" 깊은 밤을 널리 퍼뜨리는 차가운 바람이 전신을 휘감아 온다. 아마도 처 음 내 자신의 주제를 깨달았을 때였던가? 그때도 이렇게 혼자 서늘한 밤 공기를 맞으며 분함과 눈물을 삼켰던 기억이 났다. "유니콘… 너 내가 쪼잔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냐?" 「무슨 뜻입니까?」 "…그렇잖아. 겨우 아빠가 희생한 게 분하고 억울해서 예안이 몸 가지고 사촌형제들에게 복수나 하려고 하고… 혜인이한테는 사실대로 말할 용기 도 없으면서 친구로 있고 싶어하고… 엄마한테는 예안이가 준 생명을 가 지고 치사하게 복수하려고 들고… 그게 쪼잔한 게 아니면 도대체 뭐야? 내가 지금은 여자여서 이렇지, 만약에 남자였으면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도 않았을 거야. 안 그래?"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남자였을 때도 이렇게 행동하셨나요?」 예안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유니콘이 다시 말했다. 「유젤 님은 남자였을 땐 완벽하게 착한 소년 연기를 했다고 하지 않으 셨습니까? 제 아무리 속이 좁고 비겁하고 비열하고 잔인한 성품을 갖추 고 있다 해도 그것을 자신의 마음 속에만 묻어 두는 사람은 진실로 멋진 사람입니다. 그만큼 자기 절제 능력이 강하다는 말이 되는 거니까요. 그 리고 인간들은 타인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의 속마음을 읽을 수 없기에 겉 으로 드러나는 행동과 외양만을 기준으로 삼는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요?」 인공지능에 불과한 녀석도 이렇게 사람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데 어째서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인가. 해답을 영원히 알 수 없는 원론 적인 물음은 그렇게 마음 속에서 조용히 퍼져 나가며 또다시 슬픔의 씨 앗을 뿌렸다. 갑자기 예안은 고개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 바락바락 외쳤다. "죽어버려 유진우! 넌 바보야! 바보! 너 같은 바보는 살 자격이 없어!" 눈물에 젖은 예안의 얼굴 위로 차가운 별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이제 혜 인의 주위를 이루고 있는 수레바퀴에서 빠져 나와 연인으로도 친구로도 그 무엇으로도 더 이상 그녀의 곁에 머무르지 못하는 예안을 위로라도 해주는 듯 그렇게 찬란하게 빛나며. 오오, 두 미소녀간의 금단의 사랑~ 꺄울~(퍼억!) 단절의 증거 끝입니다. 예. 지루한 연애적 장면이었다 생각하셔도 할 말 없습니다. 크게 잘못 되었다 생각하지 않는 한 저는 제 자신이 기 획한 대로 꿋꿋이 밀고 나가렵니다.^^ 별로 슬프지도 않은 장면이군요. 원래는 슬퍼야 하는데 제 부족한 실력 때문에 어설픈 이별씬이 되었습니다. 아아, 연애라는 건 너무 나도 어려워~T.T 주인공의 두 번째 각성이로군요. 첫 번째 것은 무의식, 두 번째 것은 의지에 의한 것, 그렇다면 세 번째 각성은 폭주..일까나. (맞는다) 음. 주인공이 신인류로서 지닌 ESP 능력은 어디까지나 구인류와 신인류의 경계선을 암시하는 증거로서 쓰일 예정이지, 마법이나 ESP가 난무하는 그런 건 아닙니다. 무력으로 따지면 이미 최강인 맥이 있으니까요.^^ 의붓남매의 동거일지를 보고 난 뒤 갑자기 연애소설이 너무나도 쓰고 싶어졌습니다. 지금은 슬럼프에 빠지지 않았으니 안 쓸 예 정이구요, 나중에 매널리즘에 빠지게 되면 기분전환을 할 겸으로 조금씩 써볼까 합니다. 하이틴 로맨스를 위하여~(맞는다) 어설픈 이별씬이었지만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고, 드디어 다음 챕 터에서 유전이 주인공에게 완전히 넘어가게 됩니다. 그럼 빠빠이~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00 회] 날 짜 2003-12-31 조회 / 추천 4414 / 80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갈등의 고리 - 100회 기념 출석 체크 - 100회입니다. 100회.^^ 다음날 아침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예안은 우울함을 지우지 못한 채 간 편한 차림으로 아파트 입구를 나섰다.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던 중현 은 웃음 띤 얼굴로 맞으려다 핼쑥한 예안의 안색을 보고 걱정스런 표정 을 지었다. "예안씨. 어디 아프시기라도 한 건가요? 표정이 굉장히 안 좋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걱정거리가 좀 있어서 그럴 뿐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이거 환자분을 제가 끌고 나온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정말 괜찮으시겠 어요? 그냥 약속을 다음으로 미룰까요?" 억지로 태연한 척 했지만 이미 예안이 산부인과를 갔었다는 걸 알고 있 는 중현은 속이 새카맣게 타 들어갔다. 정확히 예안의 몸이 어떤지는 몰 랐지만 혹시나 했던 게 사실이 되면 어떻게 하나? "아니, 정말 괜찮아요. 요새 걱정거리가 많아서 잠을 좀 설친 것뿐이에 요. 빨리 가죠." 결국 중현은 예안의 말대로 차를 출발시켜 미리 예약해둔 호텔 레스토랑 으로 향했다. 호텔 직원에게 주차를 맡긴 후 안에 들어서던 예안은 별다 른 감탄 없이 형식적인 감탄을 뱉었다. "이 호텔 분위기가 참 좋네요. 굉장히 깨끗해요." 중현은 자신을 칭찬하는 게 아님에도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그렇죠? 깨끗하고 고급스런 곳이라 상류층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들르 는 곳입니다. 가끔씩 연예인도 종종 오곤 합니다. 서울에서는 굉장한 고 급 호텔에 속하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중현 아저씨도 상류층 사람이죠? 그 정도로 큰 저택에 서 살고 있으면 뻔하죠 뭐." 또 아저씨란다. 중현은 속이 쓰렸지만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하하. 제가 그럭저럭 상류층에 속하는 편이긴 하지만 어디 예안씨 같은 세계 제일의 거부에 비하겠습니까? 대국민 투표에서 유전을 판다고 결정 난 이상 이제 예안씨는 앤드류 왕자와는 비교가 안 되는 세계 제일의 거 부입니다." 예안은 쓴웃음을 짓기만 했다. 중현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앤드류, 그 사람에게 예안씨의 정체나, 맥 혹은 유전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습니까?" "아니요. 제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그제야 중현은 마음 속을 차지하고 있던 꺼림칙함을 조금 씻어낼 수 있 었다.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무엇이 드시고 싶은가요? 오늘은 제가 살 테니 마음놓고 비싼 거 시키 세요. 사실 저도 이런 데는 자주 안 와서 음식 이름 같은 건 잘 모르는 편이거든요. 하하하." 예안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야릇한 웃음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중현 아저씨. 단 한 번이라도 제가 뭘 먹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예?" 예안은 벗어놓은 밀짚모자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질문의 의도를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중현을 흘끗 쳐다보았다. 예안의 입가에서 야릇한 미소 가 빛났다. "중현 아저씨. 만약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 사람은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무슨 뜻으로 하는 말씀이십니까?" 알 수 없는 긴장에 휩싸인 중현의 시선이 예안의 눈빛과 공중에서 얽혀 들었다. 인간이 지닐 수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흩날리는 예안의 새 하얀 얼굴에서 문득 자신과 그녀 사이에 놓인 까마득한 거리를 느낀 중 현은 그만 침을 꿀꺽 삼켰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후 까마득한 거리는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천 사에서 인간으로 귀환한 여자가 짓는 미소가 나타났다. "그냥 한 번 장난삼아 해본 말이에요. 어쨌든 전 아직도 위장이 고장나 서 물도 제대로 못 마시는 신세니까 중현 아저씨 혼자 드세요. 그렇다고 저 혼자만 아무것도 안 시키면 뻘쭘하니까 아무거나 하나 싼 걸로 시켜 주세요. 비싼 거 시켰는데 안 먹고 버리면 돈 아깝잖아요?" "아, 네…" 한순간이었지만 예안이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품었던 중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요새 이것저것 고민할 게 너무 많다 보니 마음이 많이 약해진 것 같았다. '나도 참… 바보 같군. 예안씨가 인간이 아닌 것 같다니, 그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인가? 하긴, 인간 같지 않게 아름다운 건 맞지만…' 웨이터가 다가오자 중현은 아무거나 두 가지를 시키고 난 뒤 진지한 표 정으로 예안을 주시했다. "그런데 예안씨. 제나르 상원 의원이 예안씨의 두뇌와 맥을 노리고 있는 인물들 중 하나인가요?" 끄덕끄덕. "그렇게 신분이 확실하고 존경받는 제나르 의원에게 그런 이중성이 있는 줄은 설마 몰랐군요. 생각 같아서는 미국 정부에 정식으로 따지고 싶지 만 증거도 없이 미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은 제나르 의원을 몰아붙였다가 는 오히려 쪽박만 덮어쓰고 말 테니 참아야겠죠. 그래, 니콜라스 베르노 의 도움은 흡족하셨나요?" "예? 그건 왜 물어보세요?" "앞으로 또 그런 인물이 언제 접근할지 모릅니다. 예안씨가 니콜라스 베 르노를 마음에 들어하신다면 경호 계약을 할 생각이라서요." "글쎄요. 나이가 어리긴 했지만 확실히 실력이 대단하긴 했어요." 공항에서 거대한 화룡을 꺼내어 위협하던 제나르에게 맞서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신기한 힘까지 사용해 물리친 13살 꼬마 청부업 자가 대단하지 않다면 말도 안 된다. 대충 보아하니 중현은 그 신기한 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아무리 실력이 대단하다 해도 그 녀석은 아직 꼬맹이잖아요? 중 현 아저씨는 그 녀석을 믿을 수 있어요?" "인격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실력을 말하는 건가요?" "둘 다요." "그는 비록 살인도 마다 않는 인물이긴 하지만 비겁하지 않고 게다가 그 가 받아들이는 의뢰는 항상 그 나름대로 절박한 이유가 있는 것들입니 다. 적어도 돈에 미쳐 받아야 할 의뢰와 받지 말아야 할 의뢰도 구분 못 하는 인간 말종은 아닙니다. 그의 인격은 충분히 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현 아저씨는 국정원 소속이잖아요? 그런 불법 청부업자와 손 을 잡는 게 껄끄럽지 않으세요?" "때로는 법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더 많고 어렵답니다. 게다가 저 는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상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는 믿을 수 있는 인물입니다. 제가 그의 인격을 보증하겠습니다. 그럼 첫 번째 의문은 그럭저럭 해결됐나요?" 중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아무리 실력이 대단해도 13살짜리라서 조금 의심스러 운 구석이 있다는 뜻 같은데, 사실 그는 암흑계에서는 대단한 인물입니 다. 핵미사일까지 취급하는 미국의 훼도니츠 가의 마피아들도 두려워하 며 가능한 피하려고 하는 인물이죠. 몇 년 전 훼도니츠 가의 최고위 보 스에게 부모를 잃은 한 아이의 의뢰를 받은 뒤 그는 상처 하나 없이 목 표를 제거했습니다. 그 일로 분개한 훼도니츠 가에서는 두 팔을 벗고 나 서서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오히려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포기하고 말았 죠. 그 뒤로 니콜라스 베르노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니콜라스의 실력과 경력에 예안은 조 금 겁까지 났다. 아마도 그건 마피아도 두려워하는 청부업자와는 어울리 지 않게 청순하고 귀여운 니콜라스의 외모에서 빚어진 불협화음 때문이 었으리라. "정말 대단한 녀석이네요. 하긴 그러니까 오 억 달러나 받아 챙긴 거겠 지만… 솔직히 구출 의뢰 비용으로 너무 돈을 많이 썼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경력을 갖고 있을 줄이야… 그녀석 몸값이 정말 대단하겠군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를 경호원으로 고용하시겠어요? 다행히 그는 선선히 의뢰를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예안씨가 상당히 마음에 든 모 양인데요." 중현은 니콜라스가 의뢰금의 액수를 마음에 들어해서 승낙한 거라고 생 각할 뿐, 설마 그가 장래 자신의 막강한 연적이 될 수 있다는 걸 상상도 못했다. 잠시 생각하던 예안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나중에 또 시트날타가 절 잡으러 오면 곤란하니까…" "시트날타? 그들이 예안씨를 노리는 사람들인가요?" 무심코 그들의 이름을 흘린 예안은 중현이 호기심을 보이며 되묻자 아차 싶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흐음…" 가능한 그들에 대해 좀더 알고 싶었지만 예안은 묻는다 해도 대답해줄 태도가 아니었다. 아쉬운 기분으로 그렇게 공적인 이야기를 마무리한 중 현은 슬슬 사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부터가 더 중요했다. "그런데 예안씨. 며칠 전에 병원에 가셨던데 어디 아프시기라도 한 건가 요?" "예? 제가 병원에 간 건 어떻게 아셨어요? 설마 감시라도 하신 건가요?" 힐난하는 말투에 중현은 다급히 변명했다. "혹시라도 예안씨를 노리는 녀석들이 다시 접근해오면 곤란하기에 미리 요원들을 시켜 예안씨를 멀리서 지켜보도록 했습니다." "정말 감시를 했다는 건가요?" 예안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자 중현은 더욱 다급해졌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제가 무슨 자격으로 예안씨를 감시하겠습니 까? 정말 단지 걱정이 되어서였을 뿐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흐음… 알았어요. 하지만 니콜라스가 제 경호원이 되면은 그땐 더 이상 그런 짓 하지 마세요. 니콜라스한테 제 행적에 대한 것도 묻지 마세요. 알았죠?" 예안이 이해해주는 눈치이자 중현은 속으로 안도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그런데 병원에는 무슨 일로…?" "생리가 없어서 병원에 갔는데 임신 3개월이라네요. 아, 이제 4개월째로 접어든 건가?" 예안이 아무렇지 않게 던진 대답에 중현은 하늘이 노래지는 걸 느꼈다. 설마설마 했던 게 정말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이, 임신이요?" 축복 받은 생명이기에 예안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예." 눈앞이 깜깜해서 어쩔 줄 모르던 중현은 침착함을 되찾은 뒤 물었다.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애아버지가 누군지 물을 수 있을까요?" 중현의 속마음을 모르는지 예안은 천연덕스럽게 거절했다. "실례가 되니까 말 안 해 줄래요. 그리고 말해도 모르실 거예요. 말해주 고 싶은 생각도 없구요." 그때 웨이터가 주문한 음식을 갖고 와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웨이터가 형식적인 인사를 남기고 가버린 뒤 중현은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 을 열었다. "하하핫, 누군지 모르겠지만 세계 제일의 천재이자 부자에다 절세 미인 인 예안씨 같은 여자분을 아내로 맞아들일 남자는 정말 복을 받았군요. 참 부럽습니다그려." "복을 받았다구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요. 정말 복 받은 거 아닙니까? 아마 예안씨가 신원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난 뒤 공개 구혼을 한다면 전세계에서 구혼자들이 쇄도할 겁니 다. 그런 대단한 여성분의 남편이 될 테니 어찌 복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의를 차리기 위한 축하라고 보기에는 커다란 위화감이 가득한 음색이 었다. 예안은 의구심이 가득 담긴 녹색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이 사람 진짜로 나 좋아하는 거 아냐? 에이, 그냥 해본 말일 거야. 아 무리 예안이가 아름답다 해도 자기보다 10살이나 어린 여고생… 아니, 이제 여고생이 아니지? 하여튼 10살 차이나는 미성년자인데 설마 그렇기 야 하겠어?' 중현과 자신은 나이 차이가 10살이나 난다는 걸 상기한 예안은 설마라는 녀석이 항상 사람의 뒤통수를 치기 좋아한다는 걸 망각한 채 그렇게 결 론 내렸다. "미안하지만 틀렸어요. 복을 받지는 못했어요." "예?" "…죽었거든요. 몇 달 전에 이미 죽었어요." 침울한 예안의 마음은 인두에 지지는 것처럼 쓰리게 타 들어갔다. 유젤 이 자주 짓곤 하던 귀여운 미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슬픈 기분이 솟 구쳐 올랐다. 반대로 중현은 기쁨을 참을 수 없었다. 예안이 불쾌해 할까봐 겁나 필사 적으로 표정 관리에 힘썼을 뿐 그는 기쁨의 함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 정이었다. "저런… 정말 안 되었군요. 혼자 힘드시겠습니다." "아니에요. 이제는 괜찮아졌어요. 제가 좋아하던 사람이 저한테 마지막 으로 준 소중한 아이가 올해 안에 태어날 거라 생각하니 기쁘기만 한 걸 요 뭐. 요새는 아기 이름을 뭐라 지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서 잠이 오지 않네요." '!!' 당연히 예안이 조만간 낙태술을 받을 테고 그때 마음의 상처로 슬퍼하는 그녀를 위로하면서 강한 인상을 남기면 될 거라 상상했던 중현에게 미소 띤 예안의 대답은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뭐? 낳는다고?' 다급해진 중현은 한 발자국도 안 되고 반 발자국씩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는 다짐도 잊어버린 채 따지듯 물었다. "아이를 낳으신다고요? 정말입니까?" "예. 당연하죠. 그럼 지울 거라 생각하신 거예요?" 당연하다는 대답에 중현은 어이가 없었다. 여자들의 평균 초혼 연령이 30세를 훌쩍 넘긴 게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판인데, 이제 고작 17 살이면서 아이를 낳겠다고? 그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저 예안씨. 예안씨는 아직 17살밖에 되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아이를 낳다니요? 양아버님께서 반대하지 않으시나요? 경제적인 문제도 그렇 고…" "이제 곧 유전이 들어오면 돈은 썩어 넘쳐날 정도로 들어올 텐데 뭐가 걱정이에요?" "아니, 아니. 그건 그렇긴 하지만 예안씨의 양아버님은 예안씨가 천재라 는 것이나 맥의 제조자라는 걸 모르지 않습니까? 설마 밝히실 생각이신 건가요?" "아, 그런 뜻이었어요? 물론 아직은 밝히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아빠도 선선히 허락하셨어요. 사실은 제 아이의 아버지가 그분의 친아들이거든 요." 상상도 못한 이야기에 중현은 하마터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27년 동안 익혀온 사교술 덕분에 필사적으로 놀란 가슴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을 뿐 그의 심장은 터질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애아버지가 그분의 친아들이라뇨?" 말해줘도 상관없을 거라 생각한 예안은 선선히 설명해주었다. 물론 지금 하는 말은 레이온과 정호를 제외한 사람들을 대할 때 쓰는 대외적인 거 짓말이었다. "제 뱃속의 아이 아버지가 지금 제 양아버지로 계신 그 분의 친아들이라 구요. 그러니까 만약에 애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전 지금 제가 아빠라 고 부르는 그 분의 며느리가 되었을 거예요 아마. 사실 제가 그분에게 입양된 것도 그런 이유가 좀 있었던 거라서요." 무거운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중현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간신 히 억누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예안씨 말씀은…" 사랑하던 연인이 남긴 생명의 불씨를 꺼뜨리기 싫어 기꺼이 미혼모가 되 겠다는 겁니까. 차마 내뱉기 힘든 그 말이 메아리가 되어 입안을 맴돌았 다. 예안은 절망의 수렁에 빠진 중현의 마음을 눈치 못 채고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유전을 정식으로 주는 건 언제예요? 아기 분유값이나 뭐 그런 거에 돈이 많이 들어갈 테니까 하루 빨리 유전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지 금 수중에 있는 돈이 있긴 하지만 아기가 태어나면 아파트에서 나와 조 용하고 정원이 있는 집으로 이사가고 싶거든요. 그런 집은 대부분 비싸 서 현재 갖고 있는 돈으로는 택도 없을 것 같아요. 근데 그렇게 되면 아 빠한테는 뭐라고 둘러대지? 아, 맞다. 난 모유 먹일 거니까 분유 값은 안 들겠구나." 자신을 가로막는 방벽이 얼마나 높고 굳건한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중 현은 행복에 찬 예안의 장밋빛 미래 설계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냉철함 을 잃은 채 암담함의 늪에 빠진 그의 이성은 지금 예안의 모습이 천재과 학자와는 사뭇 동떨어졌다는 걸 놓치고 있었을 뿐이다. 예에. 2003년 연말 축하 이벤트가 된 100회 이벤트입니다.-_-; 이벤트가 뭐냐고요? 간단합니다. '출석체크' (타앙!) 지금까지 묵묵히 지켜보던 분, 꾸준히 코멘트 달다가 지쳐서 그냥 보기만 하시는 분, 항상 꾸준히 코멘트 다시는 분, 생각 날 때마다 다시는 분들 가릴 것 없이 그냥 가볍게 '손 번쩍'이런 식으로 한 마디만 하셔서 출석 체크를 해주시면 됩니다.-ㅅ- 과연 몇 분이나 출석 체크를 하실지 궁금하네요.^^; 출결 상황(?)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 가능한 많이 참가해주시면 좋겠습 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01 회] 날 짜 2004-01-01 조회 / 추천 4416 / 57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갈등의 고리 중현은 어제 임신으로 행복해하는 예안과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와서 많 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잠시 동안 절망했지만 이미 그녀의 매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단단히 빠진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아이의 아버 지는 이미 죽고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결국 우선적으로 해야 할 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예안이 아 기를 낳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악역을 맡을 상대를 따로 정해야 했다. "여기입니다." 다시 한 번 머리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중현은 카페 입구에서 선 글라스를 낀 앤드류가 보이자 가볍게 손을 들었다. 앤드류는 앉자마자 바로 물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그냥 좀 할 이야기가 있어서 불렀습니다." "흐음. 세계 제일의 부자인 나를 가벼운 이야기로 오라 가라 할 정도로 당신이 대단한 남자라 생각하지는 않았는데요. 나오지 않으려다가 나왔 다는 걸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노골적인 도발이 듬뿍 담긴 발언에 순간적으로 화가 치솟았지만 중현은 마음을 잘 다독거렸다. 오히려 치사한 방법으로 앤드류를 악역으로 이용 한다는 사실에서 빚어진 죄책감을 덜어주는 게 되지 않는가. "앤드류씨. 당신은 예안씨를 정말로 사랑합니까?" 느닷없는 물음에 당황하기라도 하련만 앤드류는 주저 않고 고개를 끄덕 였다. "사랑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잃는다 해도 난 그녀를 얻을 수 있다면 만족합니다." "사랑이라는 건 물질적인 것으로 대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닐 텐데요." "후후, 하지만 세속적인 인간인 내가 단호한 의지를 보이려면 그렇게 대 답하는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요? 난 예안씨를 위해서라 면 목숨까지 버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전혀 망설이지 않는 대답과 자신감이 가득 찬 확언에 중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에게도 과연 그런 용기가 있는지 확인해보는 게 두려웠다. "그런데 회장님. 예안씨가 처녀가 아니라는 생각은 해본 적 있습니까?" 잠시 흠칫했던 앤드류는 이내 평정을 되찾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서양 문화에서 정조라면 몰라도 순결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알고 계실 텐데요. 한국 역시 지금은 그런 부분에서 많이 개방되 지 않았습니까? 저 역시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다른 남자와 성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게다가 예안씨 처럼 매력적인 여자라면 분명히 멋진 남자들이 많이 접근했을 테죠. 물 론 저보다 나은 남자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과연 거부이자 천재 피아니트스에 멋진 남성미까지 갖춘 사람답게 자신 감에 찬 대답이었다. "흐음. 질문이 약간 잘못된 것 같군요. 그렇다면 예안씨가 만약에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갖고 있다면 어떨까요? 지우지 않고 낳는다면? 당신은 예 안씨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 했으니 그깟 혹 좀 딸렸다고 해서 별 상관없을 테죠?" 순간 앤드류의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그는 경악과 두려움을 감추 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라구요?" "예안씨는 지금 임신 중입니다." 경악으로 휘둥그레지는 앤드류의 푸른 눈동자를 쳐다보고 있으니 조금씩 죄책감이 밀려왔다. 자신은 임신을 이해해줄 수 있다 해도 친척 어른들 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에 중현은 이런 치사한 방법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자신이 낙태를 권했다가 예안이 화를 내며 다시는 안 보려고 들면 큰일이기에 악역을 앤드류에게 떠넘긴 것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누나가 아기를 갖고 있다니요?" 평정심을 잃은 앤드류는 '예안씨'라는 호칭도 잊은 채 평소 그녀를 부르 던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지금 예안씨는 임신 3개월 중이라더군요. 좋아하던 남자와의 관계에서 생긴 모양이던데, 지우지 않고 낳겠답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누나, 아니 예안씨는 분명히 남자는 싫다고 했어요. 게다가 남자가 있었다면 진작에 나한테 보여줬을 게 분명한 데…" "당신이 남자친구에게 해를 가할지도 모른다 생각해서 숨겼을지도 모르 죠. 드라마에서 그런 장면 많잖습니까? 돈 많은 재벌집 아들이 짝사랑하 는 여자의 남자를 파멸시키고 대신 그 여자를 차지한다는 내용 같은 거 말입니다. 당신이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빈정거리듯 그렇게 말하며 여유 있는 중현의 표정과는 달리 앤드류는 금 방이라도 쓰러질 듯 창백했다. 그가 좀 안 되어 보인 중현은 선심을 쓰 듯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어차피 나중에 그가 알게 될 일이기도 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안씨는 남자 같은 건 없습니다." 앤드류의 안색에 희색과 함께 혼란이 새겨졌다. "무슨 소린가요? 방금 전에는 분명…" "그건 그냥 제가 해본 소리입니다." "뭐라구요? 그렇다면 아기를 가졌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나요?" 앤드류의 푸른 눈동자가 희망과 자신에 대한 분노로 물들어 가는 걸 즐 겁게 주시하던 중현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요. 임신한 건 맞습니다. 3개월이라는 것 역시 맞습니다. 하지만 남자가 없다는 것 역시 맞습니다." 앤드류는 당장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불미스런 사고로 생긴 아기는 아니고 축복 받은 생명인 건 맞습니다. 좋아하던 남자 친구와의 사이에서 생긴 거라더군요. 하지만 '안타깝게 도' 이미 사망했다 합니다." 앤드류는 안도했다. 예안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아기 아버지가 죽었다는 건 자신에게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이다. 앤드류는 더 이상 망 설일 여유가 없다 생각했다. "이러고 있을 틈이 없군요. 한시라도 빨리 프로포즈할 준비를 해야겠습 니다. 예안씨가 혼자 힘들어하고 있을 테니 저라도 옆에 있어줘야지요." 앤드류가 서두르며 일어나자 중현은 당황했다. 이건 자신이 예상한 반응 이 아니었다. "놀라지 않으셨나요?" "예?" "아니, 예안씨가 임신 중이라는데 놀라지 않으십니까? 질투가 나지 않나 요?" "처음에 좀 놀랐습니다만 애 아버지가 이 세상에 없다니 그나마 다행 아 닙니까? 예안씨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 전 지금 기쁩니다. 넋 놓고 예안씨를 다른 남자에게 보내지 않아도 되는 말이죠."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갖고 있는데 어떻게 그 렇게 쉽게…" 앤드류의 푸른 눈동자가 알겠다는 미소로 물들어가자 중현은 자신이 실 수하고 있음을 깨닫고 말을 얼버무렸다. 희미한 비웃음을 띤 앤드류는 중현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의도로 저에게 그런 걸 알려주었는지 알겠습니다. 당신의 입장에 서는 예안씨가 아기를 지웠으면 싶지만 차마 그걸 말하자니 미움 받을 게 겁이 나서 저한테 바통을 떠넘기려 했던 거군요." 정곡을 찔린 중현은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저는 예안씨가 아기를 낳는다 해도 반대 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생긴 생명을 낳는다는 결 정을 존중하려 합니다. 조금 가슴이 쓰리긴 해도 그 정도도 이해 못하면 서 감히 예안씨를 위해 제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고 말할 순 없겠죠. 이 거 당신 같이 이기적인 사람에게 예안씨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선 지금부 터 철저히 조심해야겠는데요." 중현은 발끈했다. "저 역시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저는 입장이 다 르다구요!" "뭐가 다르다는 거죠?" "제 친척 어른들은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예안씨와 축복 받은 결혼식을 올리려면 저는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예안씨의 아기를 지워야 한다구 요!" "그럼 차라리 예안씨 아기가 당신의 아기라고 거짓말을 하면 되잖아요. 그런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왜 생명을 죽이려고 하십니까?" 중현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앤드류가 말했던 방법을 생각 못한 건 아니 었다. 하지만 예안이 자신의 아이가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는 걸 원하지 않는 이기심 때문에 무의식 속에 묻어두었던 것이었다. 앤드류는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역시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남자였군요. 한때나마 당신과 연적이 라 생각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다음 사랑을 할 때는 부디 그런 이기적인 사랑을 하지 않기를 빕니다." "…당신은 서양에서 살아서 동양의 문화를 잘 몰라 그런 말을 하는 겁니 다! 이제껏 세계 제일의 부자라는 명함을 이용해서 수많은 여자들과 사 귀어 봤을 테니 예안씨가 아이를 가졌다 해도 충분히 넘어가 줄 수 있는 걸 갖고 잘난 척 하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지금 대단히 착각하고 있군요." 앤드류의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훑어보았을 때 중현은 순간적으로 한기 를 느꼈다. 마치 야생의 늑대가 노려보고 있는 듯한 적의였다. "전 예안씨 말고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사귄 경험이 없습니다." 앤드류는 피식 웃으며 다시 덧붙였다. "그리고 전 아직 여자 경험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예안씨를 제외하고 사 랑했던 사람이 없었거든요. 13살 이후로 말입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남겨놓은 앤드류가 카페 밖으로 사라지는 걸 멍한 시선 으로 쫓던 중현은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는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 키기 위해 치사한 방법까지 동원했건만 결국 영락없는 패배를 당하고 말 았다. 니콜라스는 피자 집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예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 만 자세히 본다면 그의 길고 고운 속눈썹이 벅찬 기대에 바르르 떨리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으리라. "어머, 쟤 좀 봐. 귀엽지 않니? 한 번 말 걸어 볼까?" "아서라 아서. 척 보니까 초등학생이네 뭐. 지연이 너 언제부터 쇼타 콤 플렉스 갖고 있었던 거야?" "쇼타 콤플렉스라니! 어리고 귀여운 미소년을 보면 한 번쯤은 말을 걸어 보고 싶은 건 이 세상 모든 동인녀의 아름다운 본능이라구!" "아무리 화려한 변명으로 치장해봤자 변태라는 낙인은 못 벗어날 걸?" "수희 너 죽을래!" 무심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니콜라스의 청각을 쉴 새 없이 자극하 는 고음은 가게 안의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학생들의 것이었다. 이 렇게 시끄러운 경험은 굉장히 낯설었기에 니콜라스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도 그 자리를 뜨지 않았다. 지금 그는 예안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 왔다.' 무언가를 느낀 니콜라스는 흠칫하며 반사적으로 입구 쪽에 시선을 던졌 다. 가녀린 몸매에 밀짚모자를 써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예안이 걸어 오는 걸 봤을 때 니콜라스는 저도 모르게 희색을 띠었다. 갑자기 가슴이 흥분으로 뛰기 시작했다. 예안은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늦어서 미안하다." 니콜라스는 요동치는 가슴과는 달리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누나 보디가드를 한다는 거 김중현에게 들었겠지?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할게." "나야말로 잘 부탁할게. 그런데 너 비싼 돈주고 고용한 거니까 돈 값 제 대로 안 했다가는 엄청난 위약금 물 줄 알라구. 나는 손해보고는 못 사 는 체질이니까." "걱정하지 마. 미국에서 니콜라스 베르노라고 하면 마피아들도 겁나서 피해 가는 이름이니까." 아기의 미소와도 같은 호기심이 그윽한 눈동자로 말없이 예안을 주시하 던 니콜라스는 이윽고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살며시 잡았다. 당황한 예 안은 엉겁결에 니콜라스의 손을 떨치려 했지만 저지 당했다. "뭐, 뭐하는 거야 너?" "누나는 누나가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 있어?" "장난하냐? 무슨 그런 뚱딴지같은 걸 묻는 거야? 그리고 너 이거 얼른 안 놔?" 니콜라스는 순순히 손을 내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의미였다. "왜 난 누나가 아름답다고 생각될까? 참 이상해." 또 저번처럼 제임스 해론이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거들먹거릴 셈인가? 예안은 내 주변에는 왜 이렇게 그 인간을 좋아하는 사람과 물건(맥)들이 많은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잠깐 실례." 자리에서 일어난 니콜라스는 빠르게 다가와 예안이 피할 새도 없이 입술 을 빼앗았다. 공공장소에서 삽시간에 벌어진 기습 키스에 당황한 예안은 자신에게 쏠리는 주변의 놀란 시선이 창피하고 부끄러워 니콜라스의 가 슴을 확 밀쳐냈다. "너 지금 뭐하는 짓이야! 죽을래! 죽으려고 환장한 거냐!" 미소녀답지 않은 거친 말투에 몇몇 남자들이 한숨을 쉬었지만 그건 예안 이 신경 쓸 바가 아니다. "이상하네."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니콜라스는 당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연 신 갸우뚱거렸다. "왜 멀쩡하지?" 도둑 키스를 해놓고는 그게 할 소리냐. 사랑하는 여자의 입술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이런 꼬맹이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에 분해하고 있던 예안 은 이때 그가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세상이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며 분노를 퍼붓고 싶었지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 예안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며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너 지금은 그냥 넘어가지만 나중에 죽을 줄 알아. 감히 '이 몸'에 키스 를 해?" 니콜라스는 그 말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자신의 생각에 빠진 얼굴로 연신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분명 최면을 걸었건만 이상하게도 예안은 멀쩡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두 번째였다. '내 최면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니르 말고 또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니콜라스는 가끔 예안에게 느끼곤 했던(그리고 지금도 어렴풋이 느껴지 는) 인간 같지 않은 분위기가 최면에 걸리지 않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 을 거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을 되 살려주는 매개체가 예안일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기대와 함께. 그것만으로도 예안의 곁에 머물러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니콜라스는 키스로만 최면을 거는 게 아니라 살갗이 닿기만 해도 최면을 걸 수 있습니다. 다만 보다 강력하게 최면을 걸기 위해선 표적의 체내 에 직접 닿는 게 더 유리하죠. 따라서 성관계를 맺을 때가 제일 쉽고 강력한 최면을 걸 수 있고, 그 다음이 키스고, 그 다음이 그냥 피부를 맞대는 것입니다.(차후에 글 안에서 나올 겁니다.) 그의 이 능력은 시트날타가 니콜라스를 엘리우스라 의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출석 체크 이벤트에 참여해주셨네요. 저는 대략 많아야 60분 정도가 참여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만, 거의 110명이 넘 어가는 분들이 참여해주셨습니다.^^; 저 역시 가만히 있을 순 없어서 그 무수한 코멘트에 대해 일일이 다 답변을 준비했습니다.(그럴 시간에 차라리 글이나 더 쓰지 그랬어?) 저는 글의 앞으로의 대략적인 전개나 복선에 대한 암시를 저도 모르 게 서술 부분에서 살짝 살짝 흘리는 버릇이 있으니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이 한 번 꼼꼼이 읽으면서 찾아보시는 것도 꽤나 재밌을지도 몰 라요.(타앙!) 자, 이번에 이벤트 참여해주신 분들은 부디 다음번 출석 체크에도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에는 보다 더 많은 분들이 아스트랄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길 빕니다. 유령 놀이는 그만하시구요.^^ 하얀비님. 앞으로도 노력하겠습니다.^^ cocora님 첫 출석이군요. 200회 출석 때에도 부디 뵐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촌아이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앞으로도 계속 읽어주세요.^^; 파이어볼러님. 감사합니다.^^ 성마님 98회인가? 캐리터와 소설 둘 다 좋다고 대답해주신 분이시죠? 늘 감사합니다.^^;; an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꾸준히 읽어주세요.^^; heaven102183 님도 새해 복 많이 많이 받으세요~ (.ㅡ)mm 님. 수현이는 아직 태어나려면 멀었답니다. 한세정(유진우 모)과 주인공의 갈등이 완전히 끝나고 시간 도약(?)을 할 것인데, 그 때 태어나게 된답니다.^^; 아이리어 님 출석 체크 했습니다.^^; 분리수거님. 늘 꾸준히 코멘트를 달아주시는 분이군요. 앞으로도 부탁..(퍼억!)^^; 구미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血風&피바람 님.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레스 님도 언제나 한결같은 코멘트 라이터(?)..앞으로도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퍼억!) klyp 님 출석 체크했습니다.^^; 엘사나드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착한아이 님. 연말 기념으로 100회 이벤트 일부러 유도한 것 맞습니다.^^; 썬ol 님도 출석체크했습니다.^^; youngsty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nsd님. 전 과학적 고증이라기보다는 억지 합리화(?)를 주로 쓰죠.^^; 민제후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큐라님 후후. 저는 프리스트랍니다. 저의 턴 언데드를 맞으면 제 아무리 강력한 유령이라도..(근데 유령은 언데드하고 다르지 않던가?--) 딜곤 님. 저는 프리스트 능력을 갖고 있다니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수기 님. 출석 체크했습니다.^^; silver7510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캔버스 님 말줄임표가 무섭습니다.^^; 캐논 님. 수현이는 아마도 초절정 미소년이 되지 않을까 싶습..(퍼억!) 『™아기천사』 님. 님의 감상은 황송하게 읽었답니다. 프롤로그의 그 남자는 레이온인데,^^;; 그거 맞추기 쉬운 거였는데 아깝네요.^^; ㈜무적 님. 저도 이창훈(맹구 맞나?)을 좋아했었답니다..(퍼억!) 세발까마귀 님. 다리가 정말 기시네요.(쿨럭!) 유니콘은 양자 컴터가 아니라 뉴런 컴터로 설정했는데 어떻게 하죠?^^;; 쿼크에 대한 건 저도 알고 있지만 조물주 프로젝트의 특성상 동일성 극소립자론 같은 허구적인 이론을 만들어야했답니다.^^; 狂미나리 님. 앞으로도 노력할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lina 님. 그 테이프는 '진우가 만날 용기가 없어 녹음된 테이프로 사과하려 했는데 보내지 못했다'라는 설정입니다. 별로 어색하다고는 생각 못 했는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영혼의길 님. 출석 체크 하기 싫으셔도 해주셨네요.^^; deargirl 님 저 때문에 회원가입까지 하셨다니 황송하네요.^^; 앞으로도 더 노력하겠습니다.^^; 네로화인 님출석 체크 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 스카이아이 님. 연참, 노력해보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현.무. 님도 메리 설날~(퍼억!) SHINKAI 님. 양손 드느라 힘드시겠어요. 새해 복 많이~ SwordMagician 님 처음이시군요.^^; 소년이여~의 장르는 일단은 하이틴 로맨스(..) 연애 SF 판타지 학원물(이게 도대체 뭐냐?-_-;)입니다.^^; (퍼억!) 농담이구요. 완결까지 보시고 판단해주세요. 저는 일단 SF판타지라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소마◑™ 님도 청개구리시군요. 손 말고 발을 들다니..T.T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전교회장 님 몇 번 뵌 기억이 나는데 제 기억이 맞겠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Ishia 님. 혜인이는 이대로 사라지지 않는답니다. 훗날에 다시 나올지도 몰라요.^^; 설지현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shshsh 초반에 꾸준히 댓글 다시다가 어느 순간에 안 보이셔서 더 이상 안 읽는가 싶었는데 아니네요.^^; 앞으로도 자주 모습 보여주세요.(퍼억!) 헤일즈 님. 저는 맥을 갖고 싶습니다.(퍼억!)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아리수=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네코~♡ 님. 과분한 말씀입니다.^^ 앞으로도 노력할게요~ Invers 님. 출석 체크했어요~ 개망나니 님. 연재 속도 자체는 라다와 조아라 둘 다 같답니다.^^; 새해 복 많이~ 회복물약 님. 님도 발이군요.T.T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타마왕 님. 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은㉶ 님. 방학인데 청소하느라 힘드시겠어요. 앞으로도 잘 지켜봐주세요.^^; K1 님. 아상 때부터 꾸준히 지켜봐주신 분이군요. 앞으로도 열심히 지켜봐주세요. 도중에 그만두시면..알죠?(퍼억!!!)^^;; 창세전쟁 님. 쿨럭, 손도 발도 아니고 대머리를 번쩍이시다니..천진반의 태양권이 따로없군요.^^; 루비마녀 님. 처음이시군요. 애기는 아마도 200회를 맞기 전에 낳을 겁니..(퍼억!) 아하하, 조만간 태어나게 됩니다.^&^ 벤쟈민 님. 자주 보이시는 분이군요. 님의 댓글은 늘 소중히 읽고 있답니다.^^; Azumarian 님. 앞으로도 분발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나렌 님. 아스트랄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에 구체화된 기분이 어떠십..(퍼억!)^^;; 라비드 님 저도 체크~^^ 잔혹의테제 님. 저도 주인공이 좋답니다.^^;(타앙!) 쥰~♡ 님. 앞으로도 꾸준히 지켜봐주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음영님. 하루빨리 주인공을 미혼모 대학생으로 만들겠습니다.(퍼억!) silvergini 님. 라다에서 뵌 분이죠? 기억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라다 프로토 버전 아담의 상처 완결 냈을 때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완결까지 몇 편 남겨두고 사라지신 건가 슬퍼했답니다.T.T DarkLady 님. 출석 체크했습니다. 님처럼 3부를 읽고 1부까지 읽는 분들 덕분에 1부 조회수가 배 가까이 늘었어요. 쿨럭! 앞으로도 꾸준히 지켜봐 주세요.^^; 카나리아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NEVERSTOP 님. 앞으로도 멈추지 않고 모습을 자주 드러내 보이셨으면..(퍼억!)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블루샤이닝 님. 출석 체크 완료요.^^ 키리엘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앞으로도 주인공 사랑해주시구요~^^ tear_sin 님. 앞으로도 더 나아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블루드래곤ⓜ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無有 말줄임표 세 개군요.^^ 카리스마의 침묵인가요?(퍼억!) hammer 님도 처음 뵌 것 같은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작은무지개 님도 출석 체크~ 쟈인 님의 위로 메일은 저에게 큰 힘이 되었답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지켜봐 주세요~ dreiuns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amaca 님도 새해에는 좋은 일이 있기를 빕니다~^^; starfull님. 건필하겠습니다.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갈까마귀 님. 자주 모습을 보이시는 분이군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lacri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심심해라 님도 출석 체크했어요~ 부엉이악마 님도 체크 했습니다~^^; 하늘호수 님도 출석 체크~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시마리스크 님 아하하, 참신한 이벤트였나요?^^; 다음번 이벤트도 많이 기대해주시기 바래요.^^ 페르라이닝 님. 후후 결국 아스트랄의 세계에서 3차원으로 나오셨군요.^^; 야차왕 님. 오오 꾸준히 보이시다가 어느 순간부터 안 보이시던데 계셨군요.^^; 론 님도 발인가요.T.T 론 님이 메일로 해주신 과분한 칭찬은 늘 가슴에 새겨두고 있답니다.^^;(칭찬 받으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녀석.-ㅅ-) 아폴리온 님도 출석 체크~^^ 백색마족 님도 출석 체크~ 아이디 만드시느라 수고하셨어요~^^; BlueMing 님 감사합니다.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루비아이†님도 자주 보이는 분이시군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디드리트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연참? 노력해볼게요.(퍼억!) 생각의힘 님. 오오 침묵의 독자분이시군요.(퍼억!) 앞으로도 꾸준히 지켜봐주세요. 기왕이면 아스트랄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현실화 되는 것도 좋을 텐데요.^^;(퍼억!!!) 무뢰한 님. 하루 두 편이라..노력해볼게요.^^; 다리미 님도 발인가요.T.T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판타랑 님. 다음번이벤트도 기대해주세요^^; 정미니 님도 새해 복 많이 많이 받고 행복하세요~ 에스틴 님. 라다에서 보시는분이군요. 그런데 항상 아스트랄의 세계에서 유령으로 지내시지 말고 가끔은 현실에서 같이 놀아요.^^(퍼억!) 열손가락 님. 아담의 상처는 조아라에도 있답니다.^^ 저는 조아라에서 글 2개를 갖고 있거든요. 1부 아담의 상처, 3부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로딩 님. 출석 체크 했습니다.^^; LordOfChaos 님. 파도가 멋집니다.(퍼억!) 꿈사랑 님. LordOfChaos 님하고 세트로 파도타기 놀이를 하시는군요. 멋져요.^^; 『카오스』 님 저도 성전환 물을 굉장히 좋아한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靑炎 님. 앞으로도 꾸준히 지켜봐주세요~^^; 모두모두 새해 복 많이 많이 많이 많이 받아요~~~(--)(__)(--)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02 회] 날 짜 2004-01-01 조회 / 추천 4360 / 45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갈등의 고리 엘르는 제나르가 입원해 있는 병실문에 조심스레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있던 제나르가 손을 가볍게 흔들며 그녀를 맞이했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대신님?" "그럭저럭 괜찮아. 그런데 정말 나이는 속일 수가 없군. 젊었을 때는 델 의 모든 힘을 다 이끌어냈어도 그저 탈진, 심해봐야 이삼일 앓아 누운 것 정도로 그쳤어. 그런데 지금은 아주 조금밖에 안 끌어냈는데도 이렇 게 병원 신세를 져야 한다니, 한심하군." 5대 대신이 각기 가진 공명신수의 모든 힘을 끌어낼 때 얼마나 심한 저 항을 받는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 엘르는 자신에게는 공명신수가 없다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나 고통이 무섭다 해도 은근히 공명신수가 가 진 힘이 부러울 때가 있는 건 사실이었다. "클랙 대신 님께서 제나르 대신 님의 안부를 염려한다는 말씀을 전해달 라 하셨습니다." "클랙 그 녀석이? 별일이 다 있군. 신기한 일일세. 그 녀석도 나이를 먹 으면 철이 드는 인간이었군. 워낙에 별종이라 그 녀석만큼은 나이를 먹 고 죽어 백골이 되어도 절대 철이 안 들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5대 대신 중 한 명인 클랙이 이 말을 들었다가는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 와서 무슨 난리를 피울지 모를 일이다. 엘르는 나이를 먹었음에도 여전 히 어린 시절의 우정을 간직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가 조금 부러웠다. 그녀는 오랫동안 5대 대신을 배출하지 못한 크레시오 가문의 장녀로서 가문의 기대에 미치기 위하여만 살아온 터라 친구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 했다. "프린세스의 행방은 찾았느냐?" "죄송합니다. 유전 계약이 체결되지 않았으니 아직 한국 어딘가에 있을 거라 추측하고만 있을 뿐 정확한 소재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서둘러야 해. 프린세스는 바보가 아니니 얼마 있으면 한국을 떠나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대신 님. 맥은 엔젤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다룰 수 없는 병기 이니 엔젤이 한국에 계속 머무르지 않을까요? 한국이 계약 조건으로 엔 젤이 파일럿을 맡아달라고 내세우지 않았을까요?" 잠시 뜸을 들인 후 엘르는 덧붙였다. "자기가 한국에 머무르지 않을 거라고 우리가 생각한다는 건 엔젤도 짐 작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엔젤은 오히려 우리의 허를 찌르기 위해, 그리고 한국에서 맥의 파일럿을 맡기 위해 오히려 한국에 계속 머무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제나르는 엘르의 생각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건 아니다, 엘르." "예?" "물론 맥의 힘을 전부 이끌어 내기 위해선 프린세스가 아닌 그 누구도 불가능하지. 하지만 단지 전기를 공급하는 거라면 프린세스가 지구 반대 편에서 원격 장치를 이용해 명령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리고 원격장치를 맥의 메인 컴퓨터에 결합시키지 않아도 수동 조종 모드와 자 동 조종 모드는 가능하다. 그 두 가지로 조종한다면 프린세스가 아니더 라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지. 박사가 설명한 것이다." "아… 그렇군요." 물론 원격 장치와 메인 컴퓨터를 결합시키지 않는다면 공명 모드로 맥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어차피 공명이 가능한 건 예안 뿐이었 다. "훈련받은 군인이 수동 모드로 맥을 조종한다 해도 충분히 현 지구상에 서 무적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맥의 모 든 힘을 이끌어 낼 상황이 되었을 때에는 비밀리에 프린세스와 연락해서 그때그때 움직여달라고 부탁하면 되는 거지. 하지만 과연 그럴 기회가 몇 번이나 찾아올까? 미국과 유럽, 러시아, 중국 등등의 모든 나라들이 일제히 한국을 향해 소유한 모든 미사일을 발사하는 때라면 모를까, 맥 의 풀 파워를 필요로 할 만큼 위급한 상황은 오기 힘들어. 무슨 수를 써 서라도 이번에 반드시 프린세스를 찾아내야 한다. 기회는 다시 오지 않 아." 제나르의 단호한 음색에는 혁명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굳건한 의지 가 실려 있었다. 그때였다. "문병을 왔습니다만… 제가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문이 열리며 레이온의 모습이 드러나자 제나르는 얼굴을 찌푸리기는커녕 굉장히 반가워했다. "오, 박사. 바쁘고 귀하신 몸이 이런 쓸데없는 늙은이 문병을 다 와주시 다니, 정말 고마워서 몸둘 바를 모르겠소. 그래, 연구는 잘 되어 가나 요?" "시트날타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덕에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헌데 제나르 대신께서는 어쩌다가 이렇게 되신 겁니까?" 호기심이 빛나는 레이온의 얼굴이 어쩐지 불안한 엘르였지만, 그를 굳게 믿고 있는 제나르는 모든 것을 좋게만 받아들였다. "후후, 공명신수 델을 이용해 엘리우스를 제압하려다가 그만 이 모양이 된 거요. 나도 참 바보였지, 어떻게 델 하나만 가지고 마기를 지닌 엘리 우스를 이기려고 들었는지… 다른 대신들이 알면 날 비웃을 거요." "엘리우스요? 그게 누굽니까?" 레이온은 호기심을 보였다. "엘리우스는 대대로 마기를 지닌 자를 일컫는 일종의 호칭 비슷한 거요. 다른 네 마리의 공명신수는 일정한 시험을 거쳐 통과한 자가 다스릴 자 격을 얻지만 마기는 그와 달리 스스로 주인을 선택하는 공명신수요. 이 상하게도 마기는 단 한 번도 우리 시트날타 인을 주인으로 선택한 적이 없소. 우리는 대대로 마기의 주인을 찾아 그에게 엘리우스라는 칭호를 주었지." "흐음. 그렇다면 엘리우스가 된 자들은 일종의 신데렐라로군요. 하지만 자신이 엘리우스라는 걸 깨닫기 전에 그들에게도 자신의 생활이 있었을 텐데, 시트날타에 귀속되는 걸 단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는 겁니까?" 제나르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시트날타의 황제들은 대대로 엘리우스로 부터 마기를 건네 받았지만 그 과정이 쉽게 발설할 정도로 깨끗한 건 아 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깊이 숨겨야할 부끄러운 것이었다. "그건 황가의 치부가 담긴 비밀이니 차마 말해줄 수 없소. 미안하오 박 사." 레이온은 직감적으로 무언가 아주 부끄럽거나 혹은 발설할 수 없는 중대 한 비밀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아닙니다. 오히려 주제넘게 나선 제가 잘못한 거지요. 그나저나 공명신 수라… 대신 님께 그런 신기한 힘이 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과학만이 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저에게는 굉장한 컬쳐 쇼크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ESP나 에날도스 같은 것도 비과학적 힘이지 않 소? 공명신수도 따지고 보면 그런 것들과 크게 다를 건 없소." "아, 그렇군요." 제나르와 레이온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곁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엘르는 제나르가 공명신수에 대한 걸 레이온에 게 너무 쉽게 말해주는 게 불길했다. 그녀는 마리오와 마찬가지로, 최초 에 엔젤이 탈출했을 때 레이온이 일부러 놔준 게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박사가 지금 하고 있는 연구는 도대체 무엇이오? 우리는 박사 역 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프린세스를 탄생시키는 게 목적인 줄 알았는데 그 게 전부는 아닌 것 같군." 레이온이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를 복제해서 탄생시킨 게 엔젤이라는 건 시트날타에서는 공공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레이온은 엔젤을 탄생시킨 뒤에도 끝나지 않은 건지 무언가 비밀리에 계속 연구를 하고 있었다. 제나르는 그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건 대답해드릴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비밀이니까요." 대답해줄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지. 제나르는 조금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박사가 우리랑 손을 잡은 게 어느덧 5년이 넘었군. 참으로 오래고 힘든 시간들이었소."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수백 번의 실패 끝에 유젤을 탄생시켰을 땐 정말 기뻤는데 이렇게 다시 놓쳐 버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래서 야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데…" 제나르가 알기로 레이온은 사랑하는 여자가 죽은 뒤 복제를 해서라도 다 시 보고 싶어했지만 필요한 자금이 없어 절망하던 남자였다. 그래서 시 트날타의 혁명에 필요한 엄청난 에너지를 맥의 ST기관을 통해 제공하는 조건으로 「천사 프로젝트」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받았던 것이다. 엘르는 속으로 혀를 찼다. '박사는 위험한 인물인데… 어째서 제나르 대신은 그걸 눈치채지 못하시 는 걸까?' 제나르가 레이온을 맹신하는 게 연기에서 빚어진 행동이라 생각하기는 힘들다. 그는 권모술수에는 굉장히 약한 솔직담백한 인물이었기 때문이 다. 제나르의 병실을 나온 레이온은 건물을 빠져나온 뒤 잠시 멈칫하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폐를 씻어주는 건 깨끗한 숲의 청정한 공기가 아 니라 매연에 찌든 도심의 더러운 바람이었지만 그래도 무척 상쾌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끝난다…." 그때였다. "무엇이 끝난다는 건가요 박사?" 흠칫한 레이온은 뒤를 돌아보았다. 엘르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당신이 현재 하고 있는 연구를 말하는 건가요?" 레이온은 잠깐 동안의 당황함을 지워버리고 여유를 되찾았다. "알 필요 없잖아 당신은." "전 알아야겠는데요. 한때 일부러 엔젤을 놓아준 전적까지 있는 당신이 하는 연구는 절대 믿을 수 없으니까." "자신 있으면 내 연구실의 컴퓨터를 해킹해 보던지 해. 하긴 아주 운이 좋아서 해킹에 성공한다 해도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사 람은 없을 테지만. 그리고 내가 유젤을 일부러 놓아줬다니. 어디 가서 그 런 모함은 함부로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비웃음이 역력한 레이온의 말투에 모욕을 느낀 엘르는 입술을 질끈 깨물 었다. "마리오가 당신한테 이를 갈고 있다는 걸 기억하세요. 언제든지 수상한 낌새가 보이기만 하면 당신의 생명은 곧장 이 세상에서 사라질 테니까." "후후, 마더로부터 최초로 버림받은 인간들의 후예인 주제에 자신감 하 나는 대단하군." 엘르의 눈동자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마더? 그게 뭐죠?" 레이온은 말해주기 싫다는 제스처로 어깨를 으쓱했다. "알 필요 없잖아. 그리고 어차피 말해줘도 이해 할 수도 없을 걸. 당신 이 에날도스인지 뭔지 하는 뛰어난 힘을 지녔다고 해서 인간들 중 제일 가는 천재인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돌아서는 레이온의 등을 적대적인 시선으로 쫓던 엘르는 까닭 없이 치솟는 분함을 참지 못하고 근처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를 힘껏 걷어찼다. 레이온 꽤나 거만하군요. 제일가는 천재라..쿨럭! 지금 천국의 계단을 보고 있습니다. 이거 재밌네요.(맞는다) 지금 10부가 시작하려고 하니 얼른 후다닥~~ (뒤늦게 손을 드신 분들도 전부 출석 체크했습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03 회] 날 짜 2004-01-02 조회 / 추천 4309 / 41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갈등의 고리 니콜라스와 헤어져 집에 돌아온 예안은 너무나 허무하게 입술을 빼앗겼 다는 분노를 쉽게 떨치지 못했다. "분해! 분해! 분해! 유니콘! 넌 도대체 뭐하고 있었어! 그 녀석이 그런 낌새를 보이면 곧장 나한테 보고를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유젤 님은 제가 만능인 줄 아십니까? 니콜라스에게서 살기 같은 건 감 지하지 못했다고요. 그리고 제가 니콜라스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말씀 드렸다 해도 유젤 님의 반사신경으로 그걸 피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이 녀석은 언제나 사람이 할 말이 없게 만든다. 꼭 자기 유리할 때만 '전 보잘것없는 인공지능이라 어쩔 수 없어요~'라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 가는 능력도 혹시 처음부터 심어져 있던 것인가? "…젠장. 말을 말자 말을. 환골탈태도 못한 구버전 따위가 크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던 게 애초에 잘못된 거였어. 하루빨리 패치를 받든지 해 야지 원." 예안은 침대에 큰 대자로 털썩 누우며 천장을 응시했다. "휴우. 이제 대충 그럭저럭 내가 해야 할 일은 끝낸 것 같다. 앞으로는 시트날타에 잡히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수능 공부를 하는 것뿐인가?" 「출산 준비도 하셔야지요. 아기를 낳으면 아파트말고 정원이 있는 커다 란 저택으로 이사가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직 유전을 못 받았잖아. 돈이 없다구 돈이. 아, 근데 아빠는 어디 있 지?" 몸을 일으킨 예안은 거실로 나왔지만 정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혹 시나 낮잠을 자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방에 들어가 봤지만 마찬가지였 다. "주말도 아닌데 아빠가 도대체 어디 간 거지? 이제 생업에서 은퇴한 사 람이 설마 지금 이 시간에 친구 만나러 갔을 리는 없을 테고… 그러고 보니 아빠가 요새는 자주 외출을 한단 말이야." 예안은 문득 혹시 정호가 세정을 만나러 간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솟구 쳤다. "혹시 엄마를 만나러 간 건가?" 만나봐야 사장집 사모님이 된 옛 아내 앞에서 제대로 어깨도 펴지 못할 텐데 정말 만나러 갔을까? 예안은 나중에 정호가 세정 앞에서 당당히 고 개를 들 수 있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시트날타에 관한 걸 정리해야만 했다. "에… 하지만 그건 내가 죽거나 아니면 시트날타가 지구상에서 없어지지 않는 한은 불가능할 것 같은데…"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숨바꼭질은 사람을 짜증나게 만든다. 예안은 앞으로 길고 지루하게 이어질 그들과의 인연을 상상하다 그만 얼굴을 찌푸렸다. "휴.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어." 다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안 은 얼른 일어났다. "아빠 온 모양이네." 예안이 반가운 걸음으로 뛰쳐나가자 살그머니 들어서던 정호는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빠,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냐…" 정호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톤으로 그렇게 대답하며 서둘러 방으로 들 어가려 했다. 그때 순간적으로 정호의 뺨에 난 상처를 본 예안은 소스라 치게 놀랐다. "아빠? 얼굴이 왜 그래? 다친 거야? 누구랑 싸우기라도 했어?" 정호가 멈칫한 사이 예안은 상처를 가린 그의 손을 얼른 떼어 냈다. "괜찮아.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긴 뭐가 별거 아니야? 아예 손가락 길이만큼 찢어졌는데! 이 거 자칫하다가는 크게 흉지는 거라구!" 예안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정호의 상처를 살폈다. 이럴까봐 상처를 보이 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들키고 만 정호는 한숨을 토해냈다. "어디서 다친 거야? 깡패랑 싸우기라도 했어? 도대체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그런 게 아니라 사실 네 엄마 만나던 중에…" 정호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는 찰나 예안은 '엄마'라는 단어만 듣고 눈 을 치켜 떴다. "뭐? 엄마 만나던 중이었다고? 설마 엄마가 아빠를 이 모양으로 만든 거 야?" 예안이 뭔가를 오해하자 정호는 당황해서 설명하려고 했지만 혀가 꼬여 말이 헛 나왔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이건 그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도대체 엄마는 왜 또 아빠를 만난 거래! 진우가 죽었다고 알고 있으면 이제 더 이상 아빠한테 볼 일은 없잖아! 왜 또 만 나자고 한 거야? 아빠한테 욕이라도 계속 해주고 싶대?" 서슬 퍼런 박력에 질린 정호는 혀가 한층 더 꼬였다. "예안아. 그게 아니라…" "내가 만나서 담판을 짓겠어! 아빠, 엄마 연락처나 줘!" 호랑이라도 때려잡을 듯한 박력에 질린 정호는 뭐라 더 변명하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연락처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낚아채듯 그것을 받아든 예 안은 다시 한 번 정호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치를 떨었다. "자기가 뭔데 아빠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나하 고 아빠가 받은 만큼 되돌려 줄 거야!" "예안아 잠깐…" "말리지 마! 따라오지도 마!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러나 정호가 붙잡기도 전에 예안은 신발을 신고 뛰어나간 뒤였다. 허 무한 시선으로 닫힌 현관문을 쫓던 정호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혼잣말했 다. "그, 그게 아닌데…" 이 상처가 세정이 때려서 난 줄 알고 있는 예안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지 않은 게 후회되었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간 뒤였다. 세정은 멍한 표정으로 카페에 앉아 있었다. 힘있게 자신을 잡아주던 정 호의 손끝이 아직도 감각의 끝에 묻어있는 것 같았다. 비록 쥐꼬리만큼 모이는 돈을 동생들 공부시키는 데만 쏟아 붓는 남자이 긴 했어도 그래도 한때 진심으로 사랑했었던 사람이었다. 인격적으로 문 제가 있어 이혼한 것이 아니라 가족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동생들에게 만 헌신적인 그에게 실망을 느낀 나머지 이혼하긴 했어도. 어쩌면 그때 느꼈던 그 감정은 실망이 아니라 바보 같은 그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건 의미가 없다. 자신에게는 사랑하는 남편이 있고, 핏줄은 아니지만 예쁜 딸도 있고, 그리고 현재의 남편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들도 하나 있었다. 16년 전 정호와 이혼함으로써 이제 더 이상 그와 자신은 아무런 관계도 아닌 남남인 것이다. 그러나 아까 자신이 크게 화를 내며 일어서다 그만 실수로 넘어지려는 걸 잡아주느라 얼굴을 다치기까지 한 정호의 손길이 묘한 설렘으로 다가 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이를 먹고 웬 주책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아 직 그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완전히 죽은 건 아니 모양이었다. 세정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래선 안 돼. 그이는 동생들만 좋아하다가 자기 아들까지 죽인 남자 라구…" 그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살피는 데 소홀히 해 결국 죽였다는 생각 이 다시 떠오른 세정은 다시금 치를 떨었다. 생각 같아서는 현남편에게 부탁해 정호의 동생들을 괴롭혀주고 싶었지만 상대는 그 이름도 찬란한 재벌집 사위들이다. 가능할 리가 없다. "진우야… 미안해…" 다시금 치밀어 오른 아들에 대한 연민은 또다시 눈물을 자아냈다. 세정 은 손수건을 들어 눈가를 찍어내며 슬픔에 찬 목소리로 아들에게 사과했 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세정은 처음 보는 번호에 의아했지만 받았다. "여보세요." 「…한…세정씨죠?」 기억에 없는 낯선 소녀의 목소리에 세정은 어리둥절했다. "예 맞습니다만… 제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나요?" 「저 유자, 정자, 호자 쓰시는 분 아시죠? 저 그분의 양딸인데요…」 그제야 세정은 전에 정호의 집 근처 카페에서 그를 만났을 때 우연히 보 았던 소녀를 기억해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요? 아가씨가 나한테 무슨 할 말이 라도 있나요?" 「잠깐 뵙고 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가능할까요?」 세정은 반사적으로 시계를 살폈다.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다지 늦은 건 아니었지만 내심 불쾌했던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이 거절했다.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은 데다 제가 바빠서 도저히 안 되겠는데요. 다 음에 한 번 만나는 게 어떨까요? 그이가 재혼한 뒤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한데 도대체 말해주지 않으니 나도 좀 답답해하던 참이었고…" 「지금 만나죠. 전 지금 만나고 싶은데요.」 "이봐요. 조금 전에 말했다시피 오늘은 바빠서…" 상대는 말을 가로챘다. 「유진우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그래도 곤란한가요?」 흠칫했던 세정이 바로 대답 못하고 주저하자 상대는 계속 몰아붙였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예요. 듣고 난 뒤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보아하 니 아버지가 아직 그쪽에게 말씀드리지 않은 것 같은데, 듣고 나면 아마 굉장히 놀라실 걸요?」 상대의 태도는 다소 무례했지만 불쾌함보다는 무슨 이야기인지 하는 호 기심이 더 컸다. 이리저리 저울질을 해보던 세정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 며 말했다. "알았어요. 어디서 만날까요?" 전화를 끊고 난 세정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그만 탁자 위의 물컵을 밀쳐내고 말았다. 유리가 깨져 나가는 소리에 당황한 그녀는 반 사적으로 깨진 조각을 집어들려다가 그만 손을 살짝 다치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데는 없나요?" 소리를 듣고 달려온 종업원이 놀라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세정은 아 무 대답도 못한 채 까닭 없이 마음을 잠식하는 불안한 기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거운 쇠사슬이 마치 가슴을 죄어 오는 것만 같았다. '나도 참 마음이 많이 약해졌나 봐…' 세정은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종업원에게 사과하고 서둘러 카페를 나 섰다. 예안은 약속 장소에 미리 와 있었다. 주변에서 신기한 눈길로 자신을 흘 끔대는 건 느끼지 못하는 건지, 초조한 표정으로 시계만 자꾸 들여다보 았다. "…늦네."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고 있을 때 유니콘이 말을 걸었다. 「유젤 님. 정말 생모에게 복수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예안은 조금 뜨끔했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할 거야. 하고 싶어. 왜? 뭐가 잘못됐냐? 그건 자식으로서 할 짓이 아니라느니 하는 말 따위는 하지 마. 따지고 보면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간 엄마가 먼저 하지 말아야 할 잘못을 한 거 아니냐?"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런 짓은 유젤 님께 하등 이익이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대충 어떤 식으로 복수를 하고 싶어하는지 짐작하고 있습니 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유치한 복수를 해봤자 유젤 님의 마음이 후련해 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갑갑해지기만 할 겁니다.」 잠시 뜸을 들인 뒤 유니콘은 다시 덧붙였다. 「차라리 그럴 여유가 있으면 유전에서 나오는 자금으로 어떻게 유젤 님 을 보호할 방어벽을 설치할 것인지나 좀더 궁리하시죠.」 판에 박힌 위로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아무런 이익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냉철하게 지적하고 있는 유니콘의 충고는 반론을 애초에 틀어막고 있었 다. "그러고 보니 너는 예전에 내가 현우한테 상처 주려고 했을 때도 그러지 말라고 했었지? 그런 건 별 도움이 안 된다고 말이야." 「그랬었죠. 유젤 님이 제 말을 도저히 듣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마침 우 연찮게도 간단하게 해결이 났지만 말입니다.」 가출 사건을 이야기하는 건가. 예안은 조금 겸연쩍어했다. "남들이 비겁하게 생각하지 몰라도 난 엄마한테만큼은 꼭 상처를 주고 싶어. 엄마만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아빠는 좀더 불행하지 않게 살 수 있 었을 거라구." 「그렇다면 생모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하는 그 심리는 순수하게 생부 때 문인 겁니까? 다른 이유는 하나도 없고요?」 "그, 그건… 그건…" 그 순간, 유젤이 준 몸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약속 따위는 지킬 생각도 않은 채 모친에 대한 복수 따위에 끌어들이는 건 비겁하다는 외침이 의 식의 죽은 부분에서 살아났다.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던 예안은 결국 억지를 썼다.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둬. 어차피 난 속마음은 이런 놈이었으니까. 남자였을 땐 그나마 착한 소년 연기라도 제대로 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걸 할 필요는 없잖아? 난 충분히 지금 이런 걸 즐길 능력도 자격도 돼." 「즐긴다고요? 그렇다면 그건 복수가 아니라 단순한 자기 과시욕이 아닙 니까?」 유니콘이 짚어내고 있는 게 남에게 들키기 싫은 부끄러운 진심인지 아닌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곡을 찔린 기분인 건 확실했다. 말문이 막힌 나머지 유니콘에게 조용히 하라고 타박하려는 찰나였다. 입 구 쪽에서 세정이 들어서는 게 보였다. 예안은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왔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세정은 이내 예안을 찾아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오늘의 수확...A4 3쪽.-_-; 고로..비축분 연재! 쿨럭! 빠이요~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04 회] 날 짜 2004-01-03 조회 / 추천 4227 / 49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갈등의 고리 세정과 예안은 탐색전을 하듯 한참 동안 서로를 지켜보며 침묵만 지켰 다. '뭔가… 이상하네… 이 아이…' 세정은 예안으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벅찬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막 연히 이상하다고만 생각할 뿐 설마하니 눈앞의 소녀의 정신이 자신의 친 아들이라는 건 꿈에도 상상 못했다. 이윽고 예안이 입을 떼었다. "재혼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맞긴 한데… 왜요?" "고1짜리 의붓딸이 하나 있고, 재혼한 남편 사이에서 생긴 중2 짜리 친 아들이 하나 있다면서요? 그리고 재혼한 남편이 모 회사 사장이라고 들 었는데… 맞나요?" 정호가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양딸에게 다 말해줬다는 게 불쾌해진 세정 은 표정을 찡그렸다. "틀린 건 없지만 썩 좋은 기분은 아니네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 의붓딸과 후처에게 전처에 대한 걸 미주알고주알 다 일러바치다니, 그이 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아, 혼잣말일 뿐이니까 불쾌하게 생각하진 말아요. 보아하니 새아버지랑 굉장히 친한 것 같던데 설마 그 런 사소한 거 가지고 나한테 이를 가는 건 아니겠죠?" 비웃음이 역력했지만 예안은 참았다. 어차피 세정보다 자신이 더 우세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또 지난 3월 달에 아버지 마저 잃었어요. 그래서 친아버지의 친한 친구이신 현재의 양아버지에게 입양된 거예요." "아… 그렇다면 미안해요. 내가 괜한 말을 해서 상처를 건드렸군요." 세정은 정말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예안은 정말 내가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자책감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쳤지만, 꿋꿋이 밀고 나갔다. "진우가 죽은 뒤로 아빠는 굉장히 힘들어 하셨어요. 저 역시 제 친아버 지가 사고로 돌아가신 후 많이 힘들었구요. 제가 개인적으로 진우와 굉 장히 친한 사이기도 했는데, 지금의 아빠가 저에게 자기 딸이 되어주지 않겠느냐고 했을 때 전 솔직히 기뻤어요." "그래요? 진우와 많이 친했다고요?" 세정의 표정에 묻어나는 씁쓸한 아련함을 본 순간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 렸다. 이래선 안 돼. 이 사람은 날 버린 엄마야. 그렇게 자기에게 세뇌 를 걸어보지만 두근거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예. 저와 진우는 꽤 오랫동안 사귀던 사이였어요. 상대방의 아버지가 친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였거든요." "그랬나요? 그렇다면 진우가 죽었을 때 아가씨도 많이 슬퍼했겠군요." "솔직히 슬펐어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죠. 살아 야 할 사람은 살아가야 하는 거니까." "맞아요. 살아야 할 사람은 살아야 하겠죠. 그렇지만 난 그이 잘못으로 그 애가 죽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네요. 적어도 그이가 그런 식으로 친동생들만 챙기지 않고 아들에게도 신경을 좀 써줬으면…" 예안도 한때는 정호에 대해 그와 비슷한 원망을 했었다. 하지만 그래도 친아들을 버리고 재혼을 한 어머니보다는 낫지 않은가? 예안은 얼굴을 굳혔다. "제가 아줌마를 뵙고 싶다고 한 건 이제 더 이상 아빠를 괴롭히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어서예요. 진우가 죽은 뒤로 아빠도 굉장히 힘들 어하셨어요. 최근에야 겨우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라구요. 회사 사장 남편에 좋은 아들딸까지 둬서 남부럽지 않게 아주 잘 살고 계시다 면서요? 그렇다면 이제 그만 저희 부녀의 행복도 빌어 줘야 하는 거 아 닌가요? 어떻게 아빠를 그렇게 때릴 수가 있어요?" "아, 그것 때문이었군요. 그건 오해예요. 내가 때린 게 아니라…" 세정은 급히 변명하려 했지만 예안은 듣기 싫다는 듯 말을 가로챘다. "전 더 이상 아줌마가 아빠에게 접근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어요. 마음 같아서는 우리 아빠 얼굴을 그렇게 만든 걸 크게 따지고 싶지만 그래도 아빠의 옛 부인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서 이 정도로 끝내는 거예요. 더 이 상 우리 인생에 관여하지 말아주세요." 세정은 미안한 기분이 싹 가졌다. 표정 가득 불쾌함이 떠올랐다. "듣다 보니 정말 무례하군요. 그이 얼굴을 그렇게 만든 게 내 잘못이기 는 하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내가 넘어지려는 걸 잡아주려다 그 렇게 된 것뿐이라고요. 그리고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달라? 아무리 아가 씨가 진우랑 친했던 사이라고는 해도 난 엄연히 진우 친어머니예요. 진 우에 관해서 그이에게 따지고 드는데 중간에 아가씨가 끼어 들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두근거리는 가슴은 비탈길을 미끄러지는 자동차처럼 멈출 생각을 않았 다. 애써 터질 듯한 심장을 달래며, 예안은 잘 지어지지 않는 비웃음을 억지로 베어 물었다. "저한텐 자격 있어요." "뭐라구요?" "그럴 자격 있다구요. 제가 그럴 자격도 없이 그런 말을 했을 거라 생각 하세요?" 세정의 눈빛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예안은 못을 박듯 말했다. "전 진우 아이를 갖고 있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눈만 깜박이던 세정은 이내 말뜻을 깨닫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뭐…라고요?" 창백하게 질린 세정의 안색은 바라보고 있노라니 알 수 없는 쾌감이 솟 구쳤다. 예안은 긴장과 즐거움, 상이한 두 가지 기분에 뒤섞인 눈빛으로 세정을 똑바로 주시하며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전 진우 아이를 갖고 있다구요. 제 뱃속에는 진우 아이가 자라고 있어 요. 이만하면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된다 생각하는데요? 아닌가 요?" 흰 가운을 입은 채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던 레이온은 갑 자기 신호음이 울리는 걸 들었다. 통신을 받아들이자 스크린에 글씨가 떠오르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입니다 박사.」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 스크린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레이온은 고개를 살 짝 끄덕였다. "그래… 오랜만이로군. 그동안 왜 연락을 하지 않았지?" 「나의 주인은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연락을 하겠다고 약속하긴 했 지만 그것을 굳이 지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레이온은 피식 웃었다. "업그레이드를 안 해줘서 삐친 게 아니라?" 「….」 정곡을 찔린 게 틀림없어. 레이온은 즐거운 미소를 띠며 물었다. "연락을 한 걸 보니 유젤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모양이군. 그래, 말 해봐." 「유젤 님은 극히 일부분이긴 해도 이제 자신의 의지대로 ESP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에도 한 번 ESP의 물리력을 사용하긴 했었지만 그때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사용한 터라 기억하지도 못했죠. 하지만 이번은 다릅니다.」 "흐음… 계기가 있을 텐데? 뭐였지?" 「남자였을 때 좋아했던 여자와의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그 뒤로 예안과 혜인의 관계에 대해서 맥의 길고 긴 설명이 이어나갔다. 이따금씩 '그러니까 내가 환골탈태만 했었더라면 유젤 님이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됐다니까요!'라고 징징거리는 유니콘의 투덜거림이 첨가되 긴 했지만 레이온은 잘 걸러내며 들었다. 긴 설명이 끝난 후 레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한 건 아니지만 점점 신인류에 동화되어 가는 것 같군.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그런데 박사. 당신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레이온은 그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은 채 깍지를 끼며 기지개를 켰다. 「전 유젤 님의 행복을 위해서 가능한 많은 불안요소에 대해 알아둬야 합니다. 하지만 시트날타도 그렇고, 당신에 대해서조차 완벽하게 파악하 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당신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왜 최초의 유젤 님이 저를 조종한 후유증으로 뇌사할 거라는 걸 알면서 일부러 놓아준 겁니 까? 아니, 왜 일부러 내보낸 겁니까?」 그것은 유니콘이 수없이 계산과 착오를 되풀이해가며 결론을 내리고 싶 어하던 것이었지만 항상 '데이터 부족으로 불가'라는 장벽에서 멈춰야만 했던 물음이었다. "맥… 신인류는 구인류와 달리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것, 성장하면 서 자신이 이상형으로 그린 외모를 갖게 된다는 것, 지능이 비교조차 되 지 않게 뛰어나다는 것, 선천적으로 ESP를 갖고 있다는 걸 제외한다 쳐 도 크게 다르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우리와 같은 종족이 아니야." 맥은 자신이 원했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궁금증이 생겼다. 「하지만 인공수정을 거친 당신의 정자는 유젤 님의 체내에서 정상적인 태아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종이 아닌가요?」 "천만에. 구인류의 씨라는 건 신인류 여성의 몸에서 임신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매개체에 불과할 뿐이야. 구인류 남성의 정자 중에서 신인류 여 성의 난자가 받아들이는 유전자는 0.001%도 채 되지 않아. 기껏해야 외 형에 관한 몇 가지를 받아들일까?" 「그건 이해할 수 없군요. 그렇다면 난자에 들어 있는 50%의 유전자만으 로 불완전한 아기가 생성된단 말인가요?」 "아니지,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게 바로 뉴타입만이 가진 독특하면서 도 뛰어난 기능이라는 거다." 레이온은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뉴타입의 정자와 난자가 만났을 경우는 각각 부모로부터 절반씩의 유전 자를 물려받지만, 뉴타입의 난자와 구인류의 정자 혹은 그 반대의 경우 에는 재미있는 일이 생기지. 바로 구인류의 유전자 중 아주 적은 일부분 을 제외한 나머지 유전자는 버려지고, 수정체는 신인류로부터 받은 50% 의 유전자와 구인류로부터 받은 0.001%의 유전자로 이루어지지. 나머지 49.999%의 유전자는 어떻게 된 거냐고? 그건 간단해. 신인류의 특성에 걸맞은 능력을 지닌 유전자를 수정체 스스로가 만들어내지. 놀랍지 않 아?" 지구의 의지이자 신이기도 한 마더의 통제를 벗어나 에덴의 가호를 받는 인간들만이 지닐 수 있는 진화 능력. 뉴타입은 다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 그들과 동족은 아니었던 것이다. 「랜덤 형성이라. 엄청난 진화 능력이군요.」 "그렇지. 뉴타입은 이미 그 자체로도 완벽하기에 굳이 진화를 할 필요는 없어. 하등한 유전자를 받아들여 퇴화될 우려가 있을 때만 일시적으로 수정체가 진화 능력을 발휘해 이미 완전체나 마찬가지인 신인류로 다시 되돌아가는 거야." 레이온은 구인류인 자신과 신인류인 유젤 사이에 놓여진 까마득한 거리 를 상기하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맥. 너는 왜 내가 처음에 유젤이 죽을 것임을 알면서도 너에게 태워 내 보냈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많은 대답을 해주지는 못하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말해주마. 그건 유 젤을 복제하려 했을 때 마더가 나에게 내세웠던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마더. 이 세상의 모든 고리를 손에 쥐고 다룰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초월 적 의지의 이름이 안겨주는 위압감은 가벼운 게 아니었다. "마더는 완전한 신인류가 자신의 품에서 살아가길 원하지 않았다. 신인 류가 마더의 미움을 사서인지, 아니면 마더가 신인류에게 해준 약속 때 문인지는 난 몰라. 어쨌든 그것 때문에 난 유젤의 정신을 구인류의 것으 로 대체할 필요성을 느꼈던 거야." 예안이 들었다면 치를 떨었을 오싹한 답변이었지만 유니콘은 건조한 기 계음으로 되물었다. 「결국 당신은 당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위해서 일부러 '진짜 유젤' 님을 저에게 태운 것이었군요. 그분이 뇌사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렇다 면 현재의 유젤 님이 저를 조종하면서도 멀쩡한 것도 마더와 관련이 있 는 겁니까?」 "그건 대답해줄 수 없는 질문이야. 나도 모르니까."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당신은 유젤 님을 정 말 사랑합니까?」 레이온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랑해. 사랑해서 다시 보고 싶어했던 거야. 유젤과 동등해지고 싶어서 연구를 멈출 수가 없는 거고." 「….」 최초의 유젤 님을 죽음으로 내몬 게 과연 사랑한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입니까. 맥의 침묵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후후. 맥, 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내가 사랑하는 건 진정한 유젤이 아니라 유젤의 껍데기라고. 내 사랑은 고작해야 그런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이야." 유니콘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말이다, 난 5년 전 유젤을 아담에게 보내고 난 뒤 절망하며 그 애를 다시 보기만을 원했다. 유젤의 정신을 차지하고 있는 게 누군지는 내가 알 바 아니야. 난 다만 그 애를 다시 보고 싶고, 그 애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고, 그 애의 곁에 머무르고 싶었을 뿐이야. 그게 바로 내 사랑의 방식이다." 그리고 레이온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구인류의 정신이 깃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인류로서의 정체성을 하나 하나 깨달아가며 점점 먼 곳을 향 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유젤과 동등해지고 싶다는 것. 때문에 그는 사 념파의 저주에서 빚어진 후유증이 5년 전에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불구하 고 아직 지긋지긋한 연구를 그만둘 수 없는 거였다. 본편 중 레이온의 설명을 이해 못한 분들을 위해 제가 부연 설명을 덧 붙이겠습니다. 일단 신인류는 이미 그 자체로 완벽하다고 가정합니다. 그리고 각각 신인류 남성과 여성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부모로로부터 50% 씩의 유전자를 물려받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한쪽이 신인류고 한쪽이 구인류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신 50%, 구 50%의 유전자를 물려받아야 하겠죠. 그리고 이것은 '퇴화'입 니다. 이를테면 '완성'에서 '미완성'으로 퇴화를 하게 된 거죠. 이때 구인류의 미완성 유전자 50%는, 수정체 단계에서 깡그리 소멸됩 니다. 그럼 50%의 신인류 유전자만 남고 50%의 빈공간이 생기겠죠? 그 나머지 50%는 수정체가 신인류의 유전자에 어울리는 것으로 랜덤 대체를 합니다.(근데 이렇게 되면 부나 모, 어느 한쪽이 50%가 아니 라 100%를 물려주는 게 아니냐고 할 지도 모르지만 그것과는 약간 틀립니다.) 이를테면 퇴화를 막기 위한 1세대 안의 진화능력이죠. 그냥 이 정도로 넘어가세요. 저도 머리 아픕니다. 흑..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05 회] 날 짜 2004-01-03 조회 / 추천 4293 / 43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갈등의 고리 학교 가기 위해 교복 차림으로 신발을 신던 최마리는 도시락을 깜박했음 을 깨닫고 얼른 외쳤다. "엄마! 도시락 갖다 주세요!" 그런데 금방 도시락을 갖다 줘야 할 세정의 모습은 보이지 나타나지 않 고 대신 어리둥절한 침묵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엄마! 도시락 갖다 주세요!" 재차 불렀을 때 세정은 겨우 정신이 든 표정으로 얼른 도시락을 갖다 주 었다. 오늘따라 넋을 빼놓고 다니는 세정의 태도가 의아했던 마리는 도 시락을 받아들며 물었다. "엄마. 왜 그래요? 어디 편찮기라도 한 건가요? 표정이 영 안 좋아 보이 는데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학교 늦겠다, 얼른 갖다 오렴." "네. 야 최우성!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나와! 학교 늦겠어!" 이층에서 교복을 입은 소년이 후다닥 뛰어나왔다. 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최마리의 동생, 최우성이었다. "으악! 지각이다! 빨리 뛰어 누나!" "아직 여유 있는데 도대체 뭐가 지각이라는 거야! 야! 도시락은 가져가 야지!" 대충 신발만 신고 뛰어나가던 재하는 잽싸게 되돌아와 도시락을 낚아채 고 다시 뛰었다. 마리는 막 닫히려는 현관문을 다시 열고 뛰어나가며 외 쳤다. "다녀오겠습니다!" 아이들을 배웅하고 난 뒤 세정은 힘없는 표정을 한 채 주방으로 향했다. "휴우…" 몇 년이 지났는데도 매일 같이 똑같은 평화로운 아침. 그러나 세정은 유 독 오늘만큼은 평소처럼 밝게 지낼 수 없었다. 자신의 손자와 자신에 대 한 미움을 동시에 갖고 있는 소녀를 며칠 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신 오늘 뭔가 이상한 것 같아.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 아니야?" 아이들의 학교를 간 후 설거지를 하다가 벌써 세 번째로 접시를 떨어뜨 리는 아내가 걱정이 된 최석준이 그렇게 물었다. "괘, 괜찮아요.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피곤해서 그런다면서 접시로 수세미를 문지르는 건 도대체 뭘까. 보다못 한 석준은 신문을 내려놓고 세정을 억지로 침실로 끌고 갔다. "자자, 오늘은 집에서 쉬는 날이기도 하니까 그냥 내가 집안일 할게. 당 신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그냥 푹 쉬어. 아줌마 내일 다시 온다고 했으 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그러게 왜 안 하던 집안일을 한다고 그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내가 집안일도 제대로 못하는 아줌만 줄 알겠네 요." "그런 뜻이 아닌 거 알잖아. 그냥 편히 쉬어." 자신을 침대에 억지로 눕히며 손까지 잡아주는 남편에 대해 묘한 고마움 에 세정은 가슴이 뭉클했다. "아참, 그러고 보니 당신 아들 만나러 갔었다면서? 어떻게 됐어? 전남편 이 순순히 만나게 해줘?" 보통 남자라면 전남편 사이에서 생긴 아들을 만나러 간다면 질투하거나 화를 낼 법도 하련만 석준은 달랐다. 조금도 꺼림칙한 기운 없이 언제나 부드러운 안색으로 묻곤 했다. "그게… 죽었대요." 석준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저런… 안 됐네. 그래서 당신이 요새 표정이 안 좋았던 거야? 그 런 일이 있었으면 혼자 고민하지 말고 말을 하지. 그래, 무엇 때문에 죽 었대?" "…사고요. 실종 처리 됐는데 실질적으로 사망이라 전남편이 그대로 사 망신고 해버렸대요." "쯧쯧쯧, 정말 안 됐군. 근데 당신 전남편이 대성그룹 회장 사위의 형이 라고 했던가? 그리고 또 중원전자 전무의 형이라고도 하던데…" "…예." "늙어서 자식 복 볼 순 없을 테지만 그래도 노후가 힘들진 않겠네. 성공 한 동생이 둘이나 있으니까 말이야." 세정은 쓴웃음을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옛 시동생들에게 안 좋은 기 억과 인상만을 가진 그녀는 과연 정호가 늘그막에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건 단순한 선입견과 편견으로 뒤덮인 결 론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재혼은 안 했다고 들었는데." "예." "저런, 정말 안 됐군. 재혼도 안 했는데 그나마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잃었으니 손자 보기는 정말 글렀네. 늙은 뒤에 외로워서 어떡하나." "괜찮을 거예요. 사고로 죽은 친구 딸을 양녀로 들였다고 들었거든요. 아주 예쁘고 착한 아이더라군요. 적어도 외롭진 않을 거예요." "그래? 그나마 다행이네." 한참을 망설이던 세정은 결국 어제 밤새도록 곰곰이 생각한 부탁을 꺼내 기로 마음먹었다. 항상 자신을 위해주고 신경 써주는 자상한 남편이지만 과연 들어줄지는 의문이었기에 그녀의 태도는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여보… 만약에 진우가 죽기 전에 아이를 만들었다면…" "진우라면 당신 아들 이름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죽기 전에 아이를 만들었다니?" "만약에, 만약에요. 진우가 죽기 전에 아이를 하나 만들었다면 그 아이 를 받아줄 수 있어요?" 비로소 말뜻을 이해한 석준의 안색이 심각함으로 물들었다. 세정은 다급 히 덧붙였다. "사실 나 진우를 그이한테 떼어놓고 왔을 때 굉장히 걱정했고 힘들었어 요. 그렇지만 진우 아버지 혼자 남는 게 가여워서 큰 결심하고 떼어놓은 거였어요. 하지만 진우는 결국 죽었고… 그렇다고 진우도 제대로 못 보 살핀 진우 아버지한테 진우 아이까지 맡기고 싶진 않아요. 그 사람은 그 럴 자격이 없다구요!" 심각한 표정으로 골똘히 고민하던 석준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세정의 손을 잡은 손에 살며시 힘을 주었다. "일단 한 번 생각해볼게. 그런데 진우라는 애가 아이를 갖고 있었다면 애엄마는 누구야?" "그게… 진우 아버지가 입양했다는, 아니 호적에는 올리지 않고 딸 삼아 서 데리고 산다는 죽은 친구 딸이래요. 지금 4개월째라고 들었어요." "흐음… 알았어, 생각해 볼게. 당신 전남편하고 같이 지낸다면 그 여자 애 생각도 들어봐야 할 테고. 그런데 몇 살이래?" "17이라고 들었어요." "호오? 굉장히 어리군. 그 나이에 낳을 생각을 한 걸 보면 진짜 서로 좋 아했던 사이인가 봐? 알았어. 내가 긍정적으로 생각해볼게. 그 여자애 생각하고 우리 애들 생각도 들어봐야 하니까. 근데 뭐 괜찮을 거야. 진 우 데리고 온다고 했을 때도 찬성했던 아이들이잖아?" 처음 재혼할 때 진우를 데려오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던 남편이었기에 이 런 부탁을 할 생각을 품을 수 있었지만, 지금의 행복에 만족하고 있는 그가 과연 들어줄 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일단 긍정적이 었기에 세정은 한시름 놓았다. 약속장소인 카페를 들어선 예안은 이리저리 둘러보다 저쪽에 앉아 있는 세정을 발견했다. 그리로 가 맞은편에 앉은 예안은 긴장으로 떨리는 가 슴을 최대한 진정시키며 일부러 퉁명스레 물었다. "왜 부르셨어요?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요?" 처음 봤을 때부터 자신에 대한 적의를 숨기지 않는 예안의 태도에 세정 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진우로부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귀따갑게 들었을 테니 당분간 좋은 인상을 사긴 힘들 듯 했다. "아가씨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요. 딱히 할 말 같은 건 없어요." "저는 아줌마랑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은 걸요?" 냉소적인 말투에 가슴이 쓰려 왔지만 어쨌든 칼자루는 저쪽이 쥐고 있었 다. 예안이 자신의 손자(혹은 손녀)를 갖고 있는 한 세정은 무조건 져 줘야 할 입장이었다. "진우가 내 원망을 많이 했을 테니 아가씨가 나한테 경계하는 건 당연해 요. 하지만 난 진우를 정말 사랑했어요." "사랑했다면서 젖먹이를 버리고 갈 수 있는 건가요?" 잠시 흠칫했던 세정은 황급히 변명했다. "어쩔 수 없었어요. 나한테도 내 인생이 있었으니까요. 알다시피 진우 아버지는 동생들만 너무 챙겨서 가족들에게는 신경을 제대로 못 쓴 남자 예요. 난 이혼할 때 진우를 데려가고 싶었지만 그이가 이혼하는 조건으 로 진우 만큼은 절대 안 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이건 진우한테 해야 하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세정은 매서운 예안의 눈 빛을 누그러뜨리는데 정신이 팔려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럼 이혼을 안 하셨으면 되는 거였잖아요?" 세정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생각 같아서는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요?'라고 크게 쏘아주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어쨌든 상대는 자신 의 손자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여자애였다. "그런데… 4개월째라고 하면은 꽤나 배가 나왔을 텐데 이상하네요?" 그렇지 않아도 그 점이 궁금했던 세정은 말문을 슬그머니 돌렸다. "저도 잘 몰라요. 태아 크기가 새끼손가락보다 더 작다고 하는데 왜 그 런지는 모르겠어요. 의사도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고 하더라구요." "그럼 위험한 거 아닌가요? 혹시라도 아이가 잘못 되면은…" 세정이 걱정스런 안색으로 그렇게 말하자 예안은 당치도 않다는 듯 어깨 를 으쓱했다. "걱정 같은 건 안 해주셔도 돼요. 어차피 저하고 아주머니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잖아요?" "아니 말을 어떻게 그런 식으로…" "그럼 아주머니하고 저하고 무슨 특별한 관계라도 되나요? 우리는 이번 이 겨우 두 번째 만나는 건데요?"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들었기에 이 여자애는 나한테 이렇게 적대적이란 말인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자신의 아들과 깊이 사랑하던 사이였 다는(과연 그럴까?) 증거였기에 세정은 은근히 기분은 좋았다. "난 아가씨랑 많이 친해지고 싶어요. 너무 그렇게 거리를 두지 말아요. 따지고 보면 아가씨는 내 친손자를 갖고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요? 핏줄이 어찌 되었든 간에 아주머니는 친아들을 저버렸잖아 요? 이제 와서 제 시어머니 노릇이라도 하고 싶으신 거예요? 듣자 하니 의붓딸도 있고 재혼한 남편 사이에서 아들도 하나 더 낳으셨다면서요? 저한테 신경 쓰실 여유가 어디 있나요?" 가시 돋친 말에 하마터면 크게 화를 낼 뻔했지만 세정은 간신히 참았다. 상대방은 지금 자신과 줄다리기를 하는 게 아니라 언제든지 이 자리를 떠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도발하는 게 틀림없었다. "말이 좀 심하군요. 그리고 임산부가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건 좋 지 않아요." "남이야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아주머니하고 는 상관없잖아요?"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 있다는 거죠? 내 친손자 일인데?" "호오? 친손자라구요?" 예안은 비웃음을 지으며 오른손으로 천천히 자신의 아랫배를 문질렀다. "이 아이한테 할머니 노릇을 하실 생각이셨다면 관두시는 게 좋을 거예 요." 세정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서예안!" 세정이 고함을 지른 건 전혀 뜻밖이라 예안은 조금 움찔했다 간신히 입 을 열었다. "멋대로 제 이름 부르지 마세요. 아주머니가 부르라고 제 이름이 있는 게 아니라구요." "예안아!" 지나치게 무례한 태도에 결국 세정은 화를 내고 말았다. "너 지금 그게 무슨 태도니? 아무리 내가 진우한테 못할 짓을 저질렀고 또 네가 날 미워한다 해도 난 엄연히 네 아이의 할머니가 돼! 그런데 어 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니! 넌 부모님께 그렇게 배우고 컸니? 그렇게 배우고 컸어?" 예안의 새하얀 얼굴이 겁이라도 집어먹은 듯 새파랗게 질렸다. 세정은 자신이 좀 심했다는 걸 느꼈지만 내친 김에 승기를 잡기 위해 계속 밀어 붙였다. "말이 심한 건 미안하지만 이 말은 꼭 해야겠어. 네가 진우한테, 혹은 진우 아버지한테 무슨 말을 들었든 간에 난 엄연히 네가 갖고 있는 그 아기 할머니가 돼. 네가 아무리 날 싫고 미워해도 결국은 너랑 그 아기 때문에 이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구. 그런데 그런 식으로 말을 해서 야 되겠니?" "…." 예안은 기가 죽었는지 시선을 살짝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좀 안 되어 보였지만 할 말은 끝내야했다. "네가 진우한테 나에 대해 어떤 말을 들었는지는 몰라. 진우 아버지가 나에 대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몰라. 물론 진우라면 몰라도 그 사람이 나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 원래 그런 사람이 었으니까." 세정은 표정을 부드럽게 바꾸어 말을 이어나갔다. "원래 진우가 살아 있었다면 난 진우를 그 사람 호적에서 빼와서 우리 집으로 데려오려고 했어. 우리 남편도 찬성했고 말이야. 그동안은 왜 가 만히 있었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할 말은 없지만, 난 사실 진우 아버지가 동생들 도움으로 버젓하게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같이 얹 혀 살고 있었다는 소식 전해 듣고 굉장히 고민하다가 결국 지금에서야 찾아오게 된 거야. 이해하니?" 고개를 푹 수그린 예안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비에 젖은 병아 리처럼 안쓰러워 보이는 그 모습에 세정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지 만, 갑자기 고개를 획 든 예안은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손대지 마세요!" 당황한 세정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예안은 얼음처럼 차가운 눈동 자로 그녀를 주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더 이상 들어주기 힘드네요. 전 이제 그만 가볼 테니까 앞으로 더 이상 저한테 간섭하지 마세요." "예, 예안아 잠깐…" 그러나 세정이 붙잡기도 전에 벌떡 일어난 예안은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 다. 세정은 급히 계산을 치르고 뒤따라 나왔지만 이미 예안의 모습은 사 라져 버린 뒤였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06 회] 날 짜 2004-01-04 조회 / 추천 4388 / 44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갈등의 고리 세정과 헤어진 예안은 집을 향해 힘없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당장 이라도 크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자기가 도대체 뭔데 그런 말을 해?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어?" 아마 정호가 들었다면 그런 말을 해선 안 된다고 나무랐을 테지만 그래 도 세정이 미운 건 사실이었다. "짜증나. 짜증나. 짜증난다구!" 어쩐지 여자가 된 후로 눈물이 많아진 것 같았다. 지금만 해도 당장 눈 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릴 것 같았지만 흉한 꼴을 보일 수 없단 생각에 필사적으로 참고 있을 뿐이었다. 「유젤 님. 단순히 생모가 원망스럽다는 마음이 전부입니까?」 "뭐?" 「단순히 생모가 밉기만 해서 그런 거냐고 물었습니다.」 "다, 당연하지! 그럼 내가 엄마가 그런 말하는 거 듣고 마음이 찡하거나 뭐 그래서 놀란 줄 아냐!" 엉겁결에 그렇게 외쳤던 예안은 속마음을 들킨 듯 얼굴을 확 붉히고 말 았다. 「마음이 찡했다고요?」 "아, 아니 그러니까… 이게 아니라… 이게 아닌데… 아니라구! 에이씨! 네가 이상한 말을 하니까 내가 헛소리를 하는 거잖아!" 유니콘이 사람이었다면 '나 네 마음 다 안다니까. 내숭은.'이라고 놀렸 을 지도 모를 일이다. 「전 이상한 말을 한 기억이 없습니다만. 어쨌든 인간의 복잡한 심리라 는 건 참 묘한 것이군요.」 세정의 진심을 들었을 때 그걸 믿고 싶은 마음과 가슴이 찡하며 오랫동 안 키워왔던 원망이 힘을 잃는 걸 느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는 오랜 습관이 닦아놓은 본능에 거부를 일으켜 그만 뛰쳐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싫어… 정말 싫어…' 어쩌면 마음 속 깊은 곳에 세정에 대한 그리움과 그녀에게 안기고 싶다 는 욕심이 숨어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걸 인정하는 건 싫었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건 정호에 대한 배신이라는 강 박관념도 한몫 했다. "어쨌든 난 이런 식으로 엄마한테 상처 줄 거야. 내가 비겁하다 생각해 도 상관없어. 그래도 제 아들한테 정이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상처받겠 지." 암시를 걸 듯 그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네에. 누구세요?" 「누나. 나야.」 앤드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예안은 기겁했다. "왜 또 전화한 거예요! 이제 그만 제 인생이 간섭하지 말라고 했잖아 요!" 「지금 만나줄 수 있어? 꼭 해야 할 말이 있거든.」 "절대 싫어요. 앞으로 찾아오지도 말고 전화도 하지 마세요. 알았어요?" 「어디서 만나면 좋을까? 그냥 내가 누나 집으로 찾아가면 되는 거야?」 짜증나는 동문서답. 자신의 거절을 무시한 채 만날 것만을 요구하는 앤 드류의 고집에 화가 났지만, 그것보다는 집으로 찾아오겠다는 말에 더욱 기겁했다. "찾아오지 마세요! 이제 그 수법은 안 통한다고 전에 말했죠?" 「찾아오면 만나준다는 거야?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할게. 이만 끊는 다.」 "이, 이봐요! 찾아오지 말라니까!" 「한 시간 안에 찾아갈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그럼 끊을게.」 앤드류가 그렇게 전화를 끊으려 하자 예안은 이대로 내버려두면 앤드류 와 아빠가 만난다는 사실에 당황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승낙하고 말았 다. "알았어요, 알았어! 만나면 되잖아요! 어디예요? 어디서 만나면 돼요?" 「진작 그렇게 할 것이지.」 지금쯤 통화 중인 앤드류는 아마도 만족스런 웃음을 짓고 있겠지. 예안 은 그에게 이렇게 휘둘릴 수밖에 없는 자신이 화가 났다. 차라리 정호에 게 앤드류에 대해 말해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니. 약속장소를 잡은 후 전화를 끊은 예안은 허탈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주변에 휘둘리고 살았냐… 젠장, 만나면 가만 안 둘 테다." 이미 몇 번이나 확실하게 싫다고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집착하는 앤드류가 차라리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 유서운이라는 여자 와 유젤이 얼마나 닮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에게 유젤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독점욕이었다. "응?" 그제야 길 가던 사람들이 걸음도 멈춘 채 신기함과 감탄에 찬 눈으로 자 신을 쳐다보는 걸 깨달은 예안은 왜 그런지 몰라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 다 늘 쓰고 다니던 밀짚모자를 아까 테이블 위에 벗어놓은 채 뛰어나왔 다는 걸 깨달았다. "젠장! 다시 돌아가야 하잖아!" 예안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왔단 길을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설마 아직까지 엄마가 거기 있을 린 없겠지. 모자를 놓고 온 곳에 되돌아갔을 때 예상대로 세정은 이미 없었다. 종업 원에게 모자를 돌려 받은 예안은 앤드류와의 약속 시간인 저녁 6시가 되 려면 아직 6시간이나 남아 있기에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를 그만두니까 남아도는 게 시간이네. 맨날 빈둥거리기만 하고… 어서 빨리 수능 공부해야 되는데 태교 때문에 바빠서 도대체가 시간을 낼 수 없으니…" 소파에 길게 누운 채 잡지를 뒤적이며 그렇게 투덜대고 있을 때 유니콘 이 말을 걸었다. 「귀찮아서가 아니구요?」 "아니야! 바빠서라구! 보면 몰라?" 바쁘다라. 컴퓨터 모델 잡지 보는 주제에 참 당당하구나. 「저한텐 눈이 없습니다만. 초소형 렌즈가 있기는 해도 평상시에는 꺼두 거든요. 확인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깝군요.」 "그래도 소리는 맨날 듣고 있잖아? 지금 내가 책장 넘기는 거 보면 몰 라? 태교에 좋은 독서를 하고 있는 중이시라 이 말씀이야. 알았어?" 「그래요? 저는 또 신형 컴퓨터 모델 잡지라도 뒤적거리시는 줄 알았죠. 어제 저녁에 컴퓨터 잡지를 새로 사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걸 내버려두 고 독서를 하시다니, 정말 서쪽에서 태양이 뜰 일이로군요.」 정곡을 찔린 예안은 슬그머니 컴퓨터 잡지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이 녀 석 평소에는 렌즈를 꺼둔다고 하지만 혹시 지금 켜두고 있는 건 아닐까? 「그나저나 앤드류 왕자를 만나서 뭐라고 말할 생각이십니까?」 예안은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말하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어? 일단 안 만나주면 집으로 쳐들어오겠다 고 협박했으니까 먼저 만나서 주먹이나 한 방 먹이고, 그 다음에 이제 그만 좀 귀찮게 하라고 윽박질러야지. 더 이상 그 사람하고 인연 끌어나 가는 것도 지겨워. 예안인 내 거라구. 그런 남자한테 줄 수 없어." 유니콘이 사람이었다면 지나치게 광적인 집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발언이었다. 「그와 결혼하진 않더라도 친분을 쌓아두면 좋습니다. 반대로 그의 원한 을 사게 되면 두고두고 괴롭힘 당할 수 있겠지요. 아시다시피 한국, 아 니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간에 돈과 힘을 가 진 자가 다른 사람을 얼마든지 짓밟아줄 수 있잖습니까? 하물며 앤드류 는 세계 제일의 거부, 그의 입장에서는 유젤 님을 쥐도 새도 모르게 납 치해서 신부로 삼아버릴 수도 있는 겁니다.」 "뭐?" 예안은 마음이 조금 불안해졌다. "말도 안 돼. 설마 그렇게까지야 하겠어?"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도 못 들어보셨습니까? 드라마 같은 곳에서 보면은 부자들의 조폭들을 시켜다가 약자를 괴롭히거나 죽이는 장면들이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TV에서나 나오는 장면들이라고 경시하지 마십시 오.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곧 권력이고 힘이고 질서이자 법입니다.」 "하, 하지만 나도 이제 곧 유전이 생기잖아? 그럼…" 「생긴다 해도 정식으로 발표할 수는 없을 테죠. 게다가 방어하는 것보 다 공격하는 쪽이 더 쉽습니다. 이런 경우는 생각해보셨나요? 앤드류 왕 자가 유젤 님께 계속 거절당한 뒤 그 원한 때문에 제나르 대신에게 유젤 님의 위치를 알려주는 경우 말입니다.」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짚어낸 유니콘의 말에 예안은 오싹 소름이 끼쳤 다. 그 말처럼 앤드류의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어 제나르에게 자신에 대 해 알려주기라도 한다면 자칫 유전을 받기도 전에 잡혀갈 수 있는 것이 다. "유니콘.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입을 막 열려는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예안은 중현에게서 온 것임을 확 인하고 얼른 받았다. "네. 받았어요."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된 걸 축하합니다, 예안씨.」 기쁨에 찬 중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예안은 어리둥절했다.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TV 안 보고 계시나요? 대국민 발표에서 지금 대통령 각하가 샘슨 유젤씨에게 정식으로 유전을 넘긴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지금 인터넷 이나 언론 매체들은 난리도 아니란 말입니다.」 "지, 진짜요?" 놀람과 기쁨으로 눈이 휘둥그레진 예안은 서둘러 리모컨을 집어들었다. 과연 중형의 말대로 TV에서는 얼마 전에 보았던 대통령이 샘슨 유젤에게 유전을 완전히 넘긴다고 발표하고 있는 중이었다. 샘슨 유젤은 예안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한국 정부가 대외적으로 내세운 인물인 만큼, 이는 곧 예안에게 유전이 넘어간다는 걸 뜻하는 것이다. 「실질적인 소유주는 예안씨로 하되 관리는 한국 정부가 계속 하는 걸로 했습니다. 외환 은행 비밀구좌로 새 계좌를 만들었는데 앞으로는 유전에 서 나오는 수익에서 세금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거기다 집어넣을 예정 입니다. 물론 그건 예안씨의 계좌지요. 정식 등록 절차가 끝난 뒤에는 예안씨가 아닌 그 누구도 거기서 돈을 찾을 수 없습니다.」 중현이 뭐라고 말하는지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예안은 멍한 표정으로 TV만 들여다보았다. 유전을 받았다는 건 2위가 무의미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된다는 의미였지만, 자신이 그렇게 되었다는 게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아빠에게 이걸 말하면 얼마나 기뻐할까? 하지만 그래선 안 되겠지? 예안 은 기쁨으로 떨리는 두 손을 꽉 쥐었다. "유니콘… 들었지?" 「예.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뭐 어차피 예정되어 있던 일이긴 하지 만요.」 기쁜 나머지 눈물까지 글썽이던 예안은 황급히 눈가를 문지르며 일어났 다. 주체할 수 없는 흥분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된 거야. 이걸로 된 거야. 이제 난 세계 제일의 부자야. 그 누구도 이 제 나를 무시하지 못해. 혜인이를 강간한 녀석이 김재호였던가? 그런 쓰 레기 따위는 이제 내가 밟아줄 수 있어. 아니, 반드시 밟아주고 말 거 야. 절대 가만둘 줄 알아?' 당장은 무리겠지만 조만간 시트날타가 자신을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공고히 경호 시스템을 다져 놓으면 세상에 드러나도 된다. 그때가 되면 정호는 옛 아내 앞에서든 친척들 앞에서든 어디든 어깨를 당당히 펴고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예안은 솟구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전파 너머로 중현이 다시 말했다. 「오늘 저녁 대통령 각하께서 예안씨를 보고 싶어하십니다. 축하도 할 겸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눌 겸해서 만나보고 싶어하시는데 가능할까 요?」 "당연하죠! 어디로 나가면 돼요?" 「나오실 필요는 없고요. 제가 5시 30분쯤에 예안씨 집으로 모시러 갈 테니 그때까지 나와주세요.」 예안은 흥분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할게요. 그럼 이따가 봐요. 네." 전화를 끊은 뒤에도 예안은 흥분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아 거실을 이리저 리 돌아다녔다. 베란다로 나간 예안은 밖에서 불어 들어오는 차가운 바 람에 흥분을 씻으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해냈어. 이걸로 된 거야. 이제 그 누구도 날 무시할 수 없어." 마치 주문을 외듯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유니콘이 말을 걸었다. 「그런데 오늘 저녁 6시에 앤드류 왕자를 만나야 하지 않습니까?」 흠칫했던 예안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취소하면 그만이지 뭐. 안 갈 거야. 내가 미쳤다고 가냐? 좋아, 생각난 김에 지금 안 간다고 전화해주자. 괜히 또 전화 안 했다가 나중에 책잡 히긴 싫으니까 말이야." 주저 없이 폰을 연 예안은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이윽고 신호가 간 뒤 흥분에 찬 앤드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새를 못 참고 내가 보고 싶었어?」 "저 오늘 안 갈 거예요. 바빠요." 실망한 듯 잠시 말이 없더니 다시금 목소리가 들렸다. 약간 풀죽은 음색 이었다. 「왜 또 그래?」 "몰라도 돼요. 어쨌든 오늘 중요한 약속이 생겼으니까 전 못 가요. 그렇 게 알고 나오지 마세요." 「나하고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약속이야?」 "당연하죠! 하여튼 전 안 나갈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나와. 취소하고 그냥 나와.」 단호한 말투에 예안은 기가 막혔다. "이봐요. 제가 뭐라고 말했어요? 전 분명히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했어 요. 제 인생하고 관련된 중요한 거라구요." 「느닷없이 약속이 생겼다는 게 말이나 돼? 누나 지금 거짓말하는 거 다 알아. 하여튼 나와. 꼭 나와. 나 약속장소에서 누나가 나올 때까지 계속 기다릴 거야.」 "기다리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세요. 하여튼 난 안 나갈 거니까 기다리지 마세요. 아참, 그리고 누나라고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어 요?" 「나와. 꼭 나와야 해.」 "안 나갈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잠깐, 누나…」 예안은 전화를 끊은 뒤 재빨리 전원을 꺼버렸다. 앤드류가 정말로 자신 이 나올 때까지 약속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그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어쨌든 자신에게 있어서 그는 유젤을 빼앗으려 드는 적에 불과했으니까. 일단 쥰~♡님의 질문, 수정체가 남은 50%의 유전자를 어떻게 대처하느 냐에 대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생명공학 쪽에는 완전히 무지한 녀석이니, 혹시라도 그릇된 부분이 있다면 너그러이 지적해주시 기 바랍니다. 일단 구인류(구)와 신인류(신)으로 명제를 놓고요. 구와 신이 결합되었을 때, 수정체 안에선 신의 유전자 50%만 남고 구의 유전자 50%는 거의 없어진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50% 의 유전자를 신의 유전자가 어떻게해서든지 대체해야겠죠? 하지만 신으로부터 물려받은 건 50%가 전부입니다. 따라서 수정체는 나 머지 빈공간을 스스로 신에 어울리는 수준의 유전자를 만들어내서 대체 합니다. 말 그대로, 미완성의 유전자(구)를 완전히 버리고 완성의 유 전자(신)를 랜덤으로 만들어내는 거죠. 돌연변이는 그전에는 없던 유전자가 갑자기 생겨나는 거라고 들었는데요, 그리고 또 진화는 돌연변이가 쌓이고 쌓여서 이뤄지는 거란 이론도 어 디서 들은 기억이 납니다. 일단 위의 설명은 그 설에 바탕을 두고 있습 니다. 구와 신이 결합되면 일시적으로 퇴화현상이 일어나니, 수정체 한 세대 안에서 일시적으로 초고속의 진화능력을 발휘해 다시 완전형으로 회 귀화는 거죠. 설문조사에 대체로 1번이 많고 2, 4번은 적었습니다만, 사실 저는 1번 이 몇 개 나오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2, 4번이 몇 개 나오는 것이 더 중요했는데..-ㅅ- 이번 설문조사는 깜짝 퀴즈 따위의 장난스런 것이 아니고, 향후 제가 이야기를 써나갈 때 글 안에서 세계관(이 있기는 한 거냐?-_-)을 어디 까지 설명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척도입니다. 3번이 한 분도 없다면 그냥 제가 날 잡아서 1부의 간략한 줄거리를 짧게 써서 올리면 그만인데, 그게 아니니 접어둬야겠군요. 그나저나 어제 저녁에 올린 대놓고 그냥 넘어가서, 혹시라도 기다리 신 분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졸려서 자다가 지금 일어났거든요.-_-; 그리고 쟈인님! 제가 보낸 멜 확인이나 하세요오.ㅠㅠ 그리고 잔혹의테제님. 저는 출판작가가 아닙니다.-_-; 책방 아무리 뒤지셔도 소용없습니다. 아담의 상처는 조아라에 있으니 제 이름으로 검색하면 나오는데요.ㅡㅡ;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07 회] 날 짜 2004-01-05 조회 / 추천 4256 / 47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갈등의 고리 앤드류가 부산하게 외출 준비를 하자 늘 그렇듯 총을 닦고 있던 니콜라 스는 관심을 보였다. "어디 가?" 거울 속에 담긴 자신의 말쑥한 모습을 흐뭇하게 들여다보던 앤드류는 기 분 좋게 대답해주었다. "데이트하러 간다." "흠. 누나랑?" 화를 내거나 '말도 안 돼!'라고 펄쩍 뛸 줄 알았는데 잔잔한 호수처럼 덤덤한 게 마치 오늘 저녁 메뉴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듯한 음색이었다. 앤드류는 조금 의아했지만 내가 청부업자 속을 알게 뭐냐는 생각에 그냥 넘어갔다. "그래. 어쩌면 오늘은 늦게 들어오거나 아예 못 들어올지도 몰라. 오늘 기필코 끝을 내야 하거든." 중현의 얼굴을 떠올리며 앤드류는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생각했 다. 거절을 당한다면, 좀 지나치게 말해서 보쌈을 해 미국에 데려가서라 도 자신의 곁에 머무르게 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재계의 황제라는 직업은 시간이 참 많이 남아도는가 보네. 용건이 끝난 지가 언젠데 기껏 여자 하나 때문에 한국에 계속 머무르고 있다니 말이 야." "니콜라스 너…" 니콜라스가 총을 닦으며 중얼거리는 게 들려왔을 때 조금 울컥했지만 앤 드류는 꾹 참았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웃는 건 자신이 될 테니까. 예 안은 한사코 안 나온다고 했지만 결국에는 나올 거라 그는 굳게 믿었다. 밀짚모자를 쓴 채 아파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예안은 중현의 차가 저쪽에서 달려와 서자 활짝 웃으며 달려갔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요. 시간 맞춰 오셨는데요 뭘. 아, 그리고 저도 인터넷 들어가 봤 어요. 지금 난리도 아니던데요 정말?" 중현은 흐뭇하게 웃었다. "어쨌든 한국의 역사에 일획을 긋는 사건이니까요. 일 년에 4500조 원을 벌어들이는 유전을 넘겨 맥을 구입했다는 건 지금 전세계적으로 뜨거운 이슈입니다. 앞으로 외국들은 우리나라에서 기름을 사기 위해선 최종적 으로 예안씨의 허락을 받아야 할 테니까요." 예안은 들뜬 표정으로 출발하는 차에 몸을 맡기며, 지금쯤 약속 장소에 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앤드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째깍째깍- 시계는 6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예안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앤드류는 느긋하게 앉아 웨이터에게 음료를 더 주문하며 예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오 년을 기다렸고 십 년을 그리워했는데 겨우 20분 쯤 더 못 기다릴까. 접대실에 들어선 예안은 전에 한 번 보았던 국정원장과 국방부 장관이 대통령과 함께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면역이 된 탓도 있었겠지만 유전 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로 붙은 자신감 덕분인지 예안은 전혀 기죽지 않 은 채 당당하게 그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세계 제일의 부자를 이렇게 눈앞에서 보게 되어 정말 영광 이군요. 이거, 아무리 어리다 해도 이제는 말을 함부로 못하겠는데요." 김영환 대통령은 미소 띤 얼굴로 예안에게 앉기를 권했다. 요리를 기다 리는 동안 그들은 예안과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된 내용은 맥 의 성능과 유전을 얻은 예안이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 다. 흥분한 예안은 종종 실수를 저지를 뻔했지만 그때마다 유니콘의 도 움을 받아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해나갔다. 시계는 어느덧 7시 5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앞으로 1분만 더 지나면 두 시간이나 헛되이 기다린 셈이 되어 버린다. 레스토랑 안의 다른 손님들 이 가끔 자신에게 의아한 시선을 던져오는 게 느껴졌지만, 점점 비참함 으로 물들고 있는 마음을 억누르는데 필사적이었던 앤드류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초조함이 가득 담긴 한숨을 토해내던 앤드류는 다시 시계를 살폈다. 8시 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좀더 기다려보자." 앤드류는 웨이터를 불러 다시 음료를 시켰다. "마음 같아서는 항공모함 2개 전대를 만들어서 더미 프로그램으로 전 함 정과 전투기를 도배한 다음에 태평양에서 전쟁놀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 이에요." "푸핫. 그거 재밌겠군. 나도 거기에 끼워줄 생각은 없나?" "에이. 할아버지는 전쟁놀이 같은 거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일본이랑 한 판 할 수 있잖아요? 일본하고 전쟁한다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 아마 대다 수가 쌍수 들고 환영할 걸요? 독도에 관한 것도 완전히 해결할 겸 일본 이랑 한 번 붙어봐요. 저도 항공모함 전대 완성되면 도와드릴게요." 어느새 김영환 대통령과 많이 친해진 예안은 자연스럽게 할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었다. "지금 건조 중인 엘가와 급 항모 2척은 아마 올해 안으로 완성될 거야. 호위구축함들과 탑재기 수입 계약도 다 끝마쳤으니 잘하면 올해나 내년 초에 일본하고 같이 전쟁놀이 할 수도 있을 걸? 그때 같이 누가 더 많이 땅 따먹나 내기 해볼까?" "좋아요. 뭐. 얼마 내기 하실래요? 전 이길 자신 있어요." "호오? 하지만 아무래도 물량이나 전술면에서는 우리가 더 유리할 걸? 내기해도 괜찮겠어?" "자신 있어요. 정 안 되면 맥으로 라이플 버스터를 한 방 날려서 일본 전체를 싹 쓸어버리면 그만이죠 뭐. 승자도 없겠지만 적어도 지는 일도 없잖아요." 대통령과 예안은 그렇게 농담을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었지만 듣고 있던 두 장관과 중현은 차마 웃을 수 없었다. 그들의 대 화는 농담이 태반이긴 하나 언제든지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 다. 맥을 제외한 순수 한국군 전력으로는 일본의 땅을 따먹을 수 없다는 것 하나만 빼고. 시계는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걷잡을 길 없는 초조함은 둑을 넘 치는 홍수와도 같은 기세로 턱 밑까지 차 오른 상태였다. 예안은 오지 않는다는 속삭임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지만 앤드류는 필사적으로 인내 심을 쏟아 붓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 예안일까? 앤드류는 희색이 되어 전화를 받 았다가 실망했다. "제니? 무슨 일인데 그래? 내가 가급적이면 연락하지 말라고 했잖아." 「도대체 언제 귀국하실 겁니까? 회장님도 뉴스 보셨을 테니 아시겠지만 유전이 샘슨 유젤에게 넘어간 것 때문에 지금 본국은 난리도 아닙니다. 질질 끌어온 한미석유조약을 갱신할 때 그 샘슨 유젤이라는 사람의 허락 먼저 받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우리하고는 상관없잖아? 우리가 석유 유통 회사도 아닌데 뭘 그렇게 신경이 곤두서 있어?" 「간부 회의에서 이참에 석유 유통까지 우리가 손을 뻗치면 어떻겠느냐 는 결정이 나왔습니다. 회장님의 승인을 받아야 하니 한시라도 빨리 미 국으로 돌아와 주시기 바랍니다. 셰펠함 계약이 끝난 지가 언젠데 도대 체 언제까지 한국에 머무르실 겁니까?」 제니가 걱정하는 것처럼 어쩌면 지금 내 모습은 사업가로서는 실격일지 도 몰라.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앤드류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침과 분침은 어느덧 9시 50분에 가까워져 있었다. "안… 오는 건가…" 한사코 안 나올 거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오래 기다리고 있으면 나올 줄 알았는데. 앤드류는 예안에게 조금 야속함을 느꼈다. "알았어. 곧 귀국할 테니 보고서나 제대로 작성해 놔."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앤드류는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다가 갑자기 자신이 줄 곧 앉아 있던 자리를 휙 돌아보았다. 거기에 자신이 앉아 있고, 그 맞은 편에는 예안이 앉아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예안은 자신이 오늘 준비한 반지를 낀 채 행복하게 웃고 있고… 그러나 그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꿈이다. "좀더 기다려라 앤드류. 아직은 때가 아닌가 보다. 기다려. 얼마든지 기 다릴 수 있잖아? 오 년을 기다리고 십 년을 기다렸는데 그깟 조금 더 못 기다리냐?" 앤드류는 애써 피식피식 웃었다. 하지만 비참한 기분이 사그라지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많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착각이었을 뿐, 아직도 그의 마음은 십 년 전 이브가 된 「유서운」에게 이별을 선 고받았던 그때에 머무르고 있나 보다. 한국 정부와 박준(샘슨 유젤의 한국식 이름) 사이의 유전 매매 계약은 전세계적으로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이번의 매매가 의미하는 건 엄 청난 것이었다. 첫째로, 굴지의 천재 사업가 앤드류와 순수 자산에서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부자가 탄생하는 것이다. 2050년에서부터 2055년까지 대한민국 예산의 90%를 차지하고 있던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단 한 명에게 넘어간 사건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비록 연간 18조 달러의 세금이 한국 재정에 보태진다 해도) 두 번째로 의미하는 건 박준은 역사상 가장 막대한 자산을 물려받으면서 상속세를 단 한 푼도 물지 않은 유일무이한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맥은 엄연히 상속받은 재산이었지만 그 어떤 나라도 박 준에게 상속세를 요구할 수 없었다. 자국의 시민으로 살았다는 기록 때문에 미국은 그에게 어마어마한 상속 세를 요구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자신은 한민족인 데다가 이제 더 이상 미국 시민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미국의 요구를 거 절한 뒤에 남긴 한 마디는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난 미국이란 나라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 10년 동안 미국에서 살면 서 뼈저리게 느낀 건 미국이 정말 싫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런 나라에 상속세를 줄 마음은 전혀 없다. 어차피 난 지금 미국 시민도 아니니 상 관없다." 전세계 석유 공급에 대한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박준의 입에서 흘러나 온 파격적인 발언은 전파를 타고 삽시간에 전세계에 퍼졌다. 가뜩이나 한미석유조약 갱신이 박준 한 사람에게 매달려 있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 를 받고 있던 미국 정부는 그의 도발에 심하게 화를 냈지만, 수십 년 전 이라크에게 했듯이 한국에 쉽게 쳐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정의 이념에 어긋나고 주변 국가들의 눈치가 보여서가 아니라, FIRE-3 요격 테스트에서 보인 맥의 엄청난 요격 성능과 기동력, 그리고 무시무시한 화력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박준의 한 마디로 인해 미국은 사냥터를 빼앗길 지경에 놓인 새끼 밴 맹수처럼 신경이 곤두서게 되었다. 하지만 박준의 그 발언은, 미국의 한 게임 업체가 만든 온라인 게임에 빠졌었다가 서버 오류로 인해 모든 아이템을 날린 후 미국이라면 치를 떨게 된 예안이 그렇게 말하라고 요구한 것에서 빚어진 것임을 미국이 알았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TV를 통해 김영환 대통령의 대국민 발표를 보고 있던 제나르는 신경질적 인 손놀림으로 탁 꺼버렸다. 아직까지 엔젤에 대한 행방은 잡아내지 못 했는데 한국은 그런 엄청난 계약을 벌써 끝내 버린 것이었다. 이제 그들 도 엔젤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 그렇게 서둘러 계 약을 끝낸 게 틀림없었다. "휴우. 정녕 신은 우리를 또다시 버리려는 건가…" 눈을 감은 제나르는 어린 시절부터 귀가 아프도록 부모님께 들어왔던 시 트날타의 전설에 대해 떠올렸다. '대재앙… 그것은 실로 지옥이라고 부모님께서는 누누이 말씀하셨지. 나 도 오랫동안 악몽을 꾸어 왔다.' 악몽을 꿀 때마다 항상 귓가에 울리던 절망에 찬 사람들의 신음과 비명 소리, 살을 태우며 뼈를 깎는 그 희망의 상실, 슬픔- 모레시계를 뒤집듯 시간을 되돌린다면 아마 나도 그 절망의 흐름 속에 몸을 맡기게 될 거라 는 쓸데없는 공포까지. "대신님." 마리오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만간 곧 엔젤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 겁니 다. 지금 일반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수백 명이 넘는 헤이져들이 한국을 샅샅이 뒤지고 있으니까요. 공항을 빠져나가기 전에 엔젤은 우리에게 붙 잡힐 겁니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소. 하지만 엔젤과 한국 정부도 바보 는 아니니 그렇게 쉽게 눈에 뜨이진 않을 거요. 혹시라도 잠수함을 타고 외국으로 튀어버린다면 우리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는 거요." 원망스런 표정으로 지금쯤 엔젤이 잠자고 있을 한국 쪽 하늘을 짚어나가 던 마리오는 그만 주먹을 꽉 쥐었다. 살갗을 뭉갤 듯한 압력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지만 분노에 잠식당한 그의 신경은 통증을 잡아내지 못 했다. "마리오 경." "네." "경은 악몽을 꾼 적이 있소?" "악몽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신화에 관한 거 말이오. 우리 민족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신화에 관한 악몽. 우리 조상들이 처음 신에게 버림받았을 때의 그 생생한 고통, 그 들의 절망, 그들의 슬픔, 그들의 분노, 그 모든 비참한 감정이 담긴 악 몽을 꿔본 적이 있소?" 마리오는 제나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공명신수를 지닌 5대 대신만이 꾼다는 악몽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당연 히 저는 꿔본 적이 없습니다." "그건 지옥이오. 지옥이었소. 그거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소. 처음 델을 얻었을 때 나는 몇 달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악몽을 꾸었소. 신 의 사랑이 저주로 변해 가는 그 절망을 맛보았소. 죽음으로 내몰리는 우 리 민족의 슬픔과 분노를 느꼈소. 그건 실로 지옥, 아니 지옥이라고 하 기에도 부족한 상실의 고통과 추방의 슬픔이었지." 제나르는 피처럼 붉은 와인이 담긴 잔을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신은 우리를 버렸소. 우리를 저주했소. 우리로부터 태양을 빼앗았소. 빛을 빼앗고 어둠을 내렸소.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한 나머지 우리가 이름을 쓸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했소." "이름이요?" "박탈당한 이름, 경도 알지 않소? 경 역시 지상에선 잊혀진 우리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을 거요.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설령 우리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된다 해도 입밖에 내선 안 된다는 말을 줄곧 들어온 터라 참고 있을 뿐이지. 안 그렇소?" 마리오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제나르는 절반 이상 남아 있는 와인 잔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나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태양과 대지, 그리고 진짜 이름까지 전부 다 모조리 되찾고 싶소. 그러기 위해선 하루라도 빨리 엔젤을 찾아야 할 거 요." 하지만 엔젤과 엘리우스의 행방은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렇다면 혁명을 향한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는 느낌은 결코 착각이 아니겠지. 유시님. 달구경이라니..그런 씬은 없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한 번 주욱 검 색해봤는데 그런 씬은 찾을 수가 없더군요. 어디서 그런 장면을 봤는지 알 려주시겠어요? (지금부터 해당사항이 없는 분들은 그냥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아 그리고 저 사실 이런 말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요. 일부 가당치 도 않은 이유로 저를 짓밟으면서 쾌감을 느끼는 분들이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하렘이어서 구역질이 난다, 주인공에게 남자가 너무 많이 꼬여서 싫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제가 스토리 진행 등에서 실수하기만을 기다 리는 분들이 일부 있는 것 같군요. 하렘이 어째서 나쁜 것인가요? 단지 당신의 취향에 맞지 않으니까? 아니면 어떻게 해서든지 저를 씹고 싶은데 그게 제일 만만한 부분이다 보니까 걸고 넘어지는 겁니까? 확실히 말하죠. 전 하렘이 좋습니다. 제가 아직 어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일단 저에게 있어서 흥미 있는 요소입니다. 제가 좀더 나이가 들고 취향이 바뀌면 모를까, 일단 전 하렘이 흥미 있는 요소라 생각합니다. 아, 물론 주객이 전도 되어서 하렘이 주제가 되어 버린다면 그건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죠. 허나 이 글은 하렘이 주제가 아니라 단지 이야기 진 행 과정에 필요한 요소일 뿐입니다. 나중에 하렘 말고 다른 진행으로 바뀔 때까지 기다리기 싫다고요? 그럼 기다리지 마십시오. 제 소견에, 아직 이 글이 하렘의 구성을 갖추고 있 다해서 딱히 문제가 있다 생각되진 않는데요. 전 하렘이 정말 좋으니까요. 당신이 하렘이 싫다면, 그래서 하렘의 구성을 갖춘 소설이 싫다면, 그래서 그러한 소설들을 씹는 걸 좋아한다면 그건 당신의 취향을 보편적인 것으로 착각해 남들에게 관철시키려 하는 이기심에 불과한 겁니다. 참 안타까워 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행동이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짓이라는 걸 정말 모르는 것입니까? 그런 어이없는 태클을 받고 제 가 부끄럽거나 화가 나고 쪽팔려서 미칠 것 같아 할 거라고 생각하셨다면 대단한 착각입니다. 전 당신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리플을 지운 것은, 그것이 인신공격적인 발언이라 생각되어서였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댓글이 보이면, 전에 선언했다시피 저는 즐거운 분위기에 위해가 가지 않기 위해 가차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다른 독 자분들의 기분까지 망칠 수는 없으니까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윗글은 대다수의 독자분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 습니다. 하렘이 싫다고 저에게 인신공격을 한 분, 그런 류의 분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정당한 비평은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허나, 취향 차이에서 불거진 인 신공격적인 발언은 정말 들어줄 수 없습니다. 이해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전 하렘을 좋아합니다. 남자 하렘이 아닌, 여자 한 명에 남자들이 꼬이는 하렘을요. 혹시라도 제가 여자라서 그런 게 아니냐고 오해해서 말씀드리는데, 전 남자입니다. 그나저나 열흘 후 대학 하나가 합격 발표하는군요.-_-; 이제 나도 새내기가 되는 건가...제발 그래야 되는데..-_-;;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08 회] 날 짜 2004-01-05 조회 / 추천 4167 / 40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갈등의 고리 예안은 중현으로부터 비밀 계좌를 넘겨받고 신분 인증까지 마쳤다. 은행 장은 예안을 보고 이런 어린 여자애가 비밀 구좌를 개설하는 걸 굉장히 의아하게 여겼지만 캐묻지 않고 정부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중현은 예안에게 돈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할거냐고 물었다. 예 안은 그 대답에 당장은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 중현은 예안 같이 엄청 난 천재 과학자(엄밀히 말하면 과학자는 아니다)가 과연 무슨 일을 벌일 지 내심 궁금하고 기대도 되었지만 더 묻진 않았다. TV에서는 연일 박준(샘슨 유젤)에 대한 보도를 내보냈다. 인터넷 게시판 에서 달궈진 맥에 대한 열기는 당분간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파일럿 지망생 혹은 현역 파일럿들은 전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최 강의 전투병기인 맥을 자신들이 조종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외국에서 대거 들어온 기자들은 연일 박준을 취재하기 위해 그의 저택을 기웃거렸으며, 맥의 후보 파일럿으로 어떤 사람들이 지정될지 궁금히 여 겼다. 한국은 대외적으로 일단 맥의 파일럿으로 변성철 소위를 임시 임 명한다고 했지만, 조만간 공정한 테스트를 통해 유능한 파일럿 중에서 추가로 뽑는다고 덧붙였다. 맥의 파일럿으로 뽑는다고 발표한 숫자는 고작 30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한국은 파일럿 수가 적다. 십 년 전에 도입해 오 년 전에 실용화 된 전 투기 조종 시스템 「더미 프로그램」 덕분에 한국은 파일럿에 대한 인기 가 사그라졌고, 덕분에 맥의 파일럿 발탁 테스트는 30명밖에 뽑지 않는 데도 경쟁률이 낮았던 것이다. 뉴스를 보던 정호는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과학이라면 잘 모르지만 어쨌든 맥이라는 건 정말 대단한 무기인가 보 네. 그렇지 않고서야 일 년에 4500조 원이나 벌어들이는 유전을 넘길 리 가 없을 테니까. 가만, 그럼 우리나라 예산의 90%를 계속해서 바치는 거 나 마찬가지잖아? 당장 경제에 큰 타격이 없을까?" 정호의 옆에 앉아 컴퓨터 카탈로그를 뒤적거리고 있던 예안이 대답했다. "우리나라가 어떤 나란데? 세금이라는 아주 좋은 구실이 있잖아? 자그마 치 40%나 떼어먹는다 치면 박준이라는 사람은 일 년에 18조 달러를 내야 돼. 그럼 우리나라 연간 예산이 23조 달러가 되는 거지. 국가 예안이 졸 지에 10%로 줄어든 건 아니야." "하지만 국가 예산이라는 건 10%만 줄어도 엄청난 어려움이 있는 건데 거의 50% 이상이 줄었으니 무지막지한 거 아닐까?" "괜찮을 걸? 어차피 우리나라는 유전이 솟을 때부터 효율적으로 관리해 왔기 때문에 사회 전반적인 혼란은 없을 거래. 무턱대고 복지재단이라든 지 장학재단, 의료 재단 같은 걸 늘린 게 아니라 금융을 탄탄하게 하고 기업 경쟁력을 키워주면서 훗날을 위해 나머지는 저축했었다고 하니까. 지금부터 돈이 좀 적게 들어온다 해서 금융 부실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 고, 어차피 이제 우리나라 기업들은 혼자 자립해서 잘 하고 있잖아?" "그런가?" "그렇지 뭐. 정치가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할 거야. 지금은 21세기 초반 처럼 개판 정치가 흥행하는 게 아니라구." "그래도 솔직히 연간 2700조 원이나 되는 돈이 박준이라는 사람한테 돌 아가는 거잖아? 좀 아깝네…" 정호는 그렇게 혀를 차고 있었지만 예안은 반대의 의미에서 속이 쓰릴 지경이었다. 40%나 되는 어마어마한 세금 덕분이었다. '그 돈 다 나한테 돌아오는 거니까 아빠는 걱정 안 해도 돼! 으윽! 그나 저나 일 년에 18조 달러나 세금을 내야 하다니! 정말 아깝다 아까워.' 생각 같아서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아직 밝혀봐야 좋을 건 없었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그런 걸 잘 알아?" "으, 응?" 순간 당황했던 예안은 재빨리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아빠도 알다시피 내가 원래 그런 쪽으로 관심이 좀 많잖아. 나도 인터 넷 게시판 찬반 토론에 엄청 끼어 들었다구. 난 대한민국 국민 아닌가?" "그래?" 별 생각 없이 넘어가던 정호는 이윽고 포크를 탁 하고 접시에 내려놓았 다. 침묵이 무겁게 깔린 걸로 보아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했다. "그런데 엄마 만났었다며?" 순간 찔끔했던 예안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만났어. 엄마한테 전화 왔었어?" "어. 정말 네가 진우 아기를 가진 거냐고 묻더라. 그 말 듣고 네가 어떤 식으로 접근했는지, 엄마한테 뭐라고 말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지." "그래서? 아빠는 뭐라고 했어? 설마 훼방 놓은 건 아니지?" "난 사실이라고 대답했지. 어쨌든 거짓말은 아니잖아? 뱃속의 그 아기 네가 남자였을 때 뿌린 씨라며?" "그, 그랬지 참…" 뭔가 부녀 지간에 오가는 대화라고는 상당히 낯뜨겁다는 느낌에 예안은 얼굴을 붉혔다. 실제로 이 아기의 아버지는 레이온이었기에(그 사실을 인정하긴 싫지만) 정호를 속인다는 느낌이 없진 않았지만, 엄밀히 말해 서 유진우는 현재 자신이지 않은가? '이 아이는 나와 예안이 아기야. 레이온 형하고는 아무런 상관없어…' 예안이 그렇게 되뇌이는 것도 모른 채 정호가 말했다. "네 엄마는 너하고 친해지고 싶어하는 눈치던데. 어쨌든 아직은 네가 진 우라는 걸 모르잖아?" "영원히 말하지 않을 거야." "예안아. 하지만 그건…" "나 설득하려 하지 마." 예안은 냉정하게 말을 잘랐다. "엄마는 우릴 버렸어. 이제 와서 내 엄마 노릇, 아니 이 아이 할머니 노 릇 하려 든다는 게 말이나 된다 생각해? 난 엄마한테 상처 줄 거야. 내 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상처를 줄 거야. 말릴 생각하지 마 아빠." "하지만 네 여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생긴 소중한 아이를 그런 데 써먹는 게 옳다고 생각해?" 예안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정호는 안쓰러운 감정이 담긴 눈동자로 말 을 풀어나갔다. "생명은 소중한 거야. 딱딱한 교과서를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생명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랑 받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어. 너도 이제 곧 아빠…가 아니라 엄마가 되는데 어떻게 네 소중한 아이를 네 친어머니한 테 상처 주는 데 이용할 수가 있니? 게다가 다른 엄마들하고 넌 틀리잖 아? 그 아이에게 있어 너는 어머니이자 곧 아버지이기도 하잖아? 안 그 러니?" "하지만…" "하지만이 아냐. 이 아빠는 널 엄마한테 빼앗기는 것도 싫고 네 아이를 네 엄마한테 빼앗기는 것도 싫지만 네가 엄마한테 복수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더더욱 싫다." 하지만 정호는 아직 덜 성숙한 예안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거라 기대 하지 않았다. 자신의 충고가 먹힐 거라고는 더더욱. 단지 어른으로서 해 야 할 충고를 했다는 자기만족에 취해 있었을 뿐이다. 정작 그 자신은 그걸 깨닫지 못했지만. 거북한 분위기가 싫었던 예안은 슬그머니 말문을 돌렸다. "아참 아빠. 근데 우리 집에 한 명 하숙 들여도 되지?" "엥? 웬 하숙?" "내 친구 가족이 이민 갔는데 동생은 한국에 남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 그런데 어린애 혼자 내버려둘 순 없고 해서 나한테 부탁했어. 나도 딱히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 일단 아빠 생각 물어보고 대답한다고 해줬는데, 그래도 돼?" "그래? 몇 살인데? 남자야 여자야?" "13살이고 남자야. 키는 나보다 한 뼘 정도 작고 무뚝뚝하긴 하지만 그 런 대로 꽤나 귀여워. 나랑도 좀 친한 사이야." "뭐 방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 하숙시켜도 되겠지 뭐. 어차피 이 집은 내 돈으로 산 것도 아니잖아. 그냥 너 편할 대로 해." 예안은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 그럼 내일 데리고 올게." 아직은 아빠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진실을 밝혀도 될 날이 찾아오겠지. 예안은 지금쯤 호텔에서 지루해하고 있을 니콜라스를 떠올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앤드류. 표정이 왜 그래? 굉장히 안 좋아 보이는데?" 며칠째 아무 생각 없는 듯 우두커니 지내고 있는 앤드류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만을 노려보고 있자 니콜라스는 궁금해서 물었다. "신경 쓸 거 없어. 상관하지 마." 다소 가시 돋친 말이었지만 니콜라스는 '알았어'라고 아무렇지 않게 넘 어갔다. '결국 연락도… 안 하는 건가.' 벌써 며칠째 예안의 연락만을 기다리던 앤드류는 쓰게 웃고 말았다. 적 어도 전화 한 번쯤은 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무리였던가. "휴." 몸을 일으킨 앤드류는 총을 손질하고 있는 니콜라스를 바라보았다. "니콜라스. 난 내일 미국으로 돌아간다. 아마 한동안은 한국에 올 수 없 을 거야." "왜 돌아가는 거야?" "네 말대로 재계의 황제는 사업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거든. 그 동안은 내가 억지를 부려 이리저리 시간을 내었지만 더 이상은 무리야. 돌아가 봤자 산더미 같은 쌓인 서류 뭉치가 날 반겨주겠지만 그래도 안 돌아갈 순 없잖냐." 다소 농담틱한 앤드류의 목소리에는 쓸쓸한 음색이 섞여 있었다. "난 당신이 안 갔으면 좋겠는데." 의외의 말에 앤드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여기에 머무르고 있으면 당신이 호텔비 내잖아. 내 돈 안 나가고 굳으 니까 좋았는데 이제는 내가 돈 직접 내야 하잖아." 그럼 그렇지. 이 녀석이 나를 좋아한다는 뭐 그런 이유로 남아 있기를 원할 리가 없잖아. 앤드류는 푸하 웃음을 터트리며 니콜라스가 싫어할 것을 알면서도 손을 뻗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너도 참 귀여운 구석이 있구나. 마피아조차도 무서워서 내 뺀다는 청부업자라는 간판과는 전혀 안 어울려." 니콜라스의 검은 눈동자를 빤히 내려다보는 앤드류의 푸른 눈동자가 가 벼운 웃음을 머금었다. "너 이참에 아예 직업을 바꿔볼 생각 없어? 언제까지 그런 암흑계의 청 부업자 일만 하며 살 거야? 내가 자리 하나 만들어줄 수 있는데, 어때?" "말했잖아. 누나 경호원 일을 맡기로 했다고. 당신 도움은 필요 없어." "하지만 누나가 토네이도의 디스크를 한국 정부에 넘겨주면 계약은 그걸 로 끝이잖아." "토네이도의 디스크? 무슨 소리야?" "신약에 관한 데이터가 담긴 디스크 말이야. 누나가 그 디스크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너한테 구출하고 경호를 의뢰한 거였잖아. 모르고 있었어?" 니콜라스는 잠시 의아했다. 그러나 이내 한국과 예안이 무언가를 숨기고 싶어한다는 걸 상기하고는 시치미를 뗐다. "토네이돈지 뭔지 모르지만 난 그런 건 관심 없어. 내가 의뢰를 받는지 안 받는지 결정하는 건 단 두 가지야. 하나는 의뢰금액이 적당한가, 하 나는 의뢰인이 어떤 사람인가." "그렇군." 앤드류는 별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리 속엔 내 일 귀국해야 하니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예안을 한 번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神流 님. 잃어버린 대지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복선이라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계속 읽으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하레스님. 폭발까지는 아닙니다. 그냥 조금 어이없고 황당하다 못해 안타까워서 한 말이었죠. 그 정도 갖고 화를 낼 정도로 자기수양이 덜 되지는 않았습니다.^^; 앤드류가 불쌍하다라..그럼 앤드류랑 주인공을 이어줘야 하나..-_-;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제가 잡은 결말이랑 상당히 어긋나게 되는데요.. 으음...고민이다...(그래봐야 결국 지 생각대로 나갈 거면서.--++) 실탄 <--- 고집이 세고, 독단이 강하다.-_-; 슬슬 인기투표를 할 시즌이 되었군요. 이제 캐릭터도 왠만한 녀석들 다 나왔으니..바드로 3세는 아직 나오려면 멀었지만 그때까지 기다 리는것도 참 못할 짓입니다. 인기투표를 조만간 할 지도 모를 터이니 다들 마음의 준비를 해두시죠.-_-; 많이 참여 안 해주시면 저 삐질 겁니다.(타앙!) 이따 저녁에 한 편 더 올릴지도 모릅니다. 그럼 빠빠이~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09 회] 날 짜 2004-01-05 조회 / 추천 4334 / 58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갈등의 고리 거울을 들여다보던 예안은 손을 들어 새하얀 뺨을 어루만졌다. 손끝으로 묻어 나오는 부드러운 투명함이 너무 좋은 감촉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의 몸을 천천히 쓰다듬던 예안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예안아. 넌 언제 봐도 예뻐." 거울을 들여다볼 때면 항상 웃고 있는 사랑하는 여자의 모습을 그저 좋 은 듯 들여다보던 예안은 선반에 잠시 올려놓은 밀짚모자를 들어 머리카 락을 감췄다. 이것으로 외출 준비는 끝. "자, 가자!" 오늘은 엄마와의 약속이 있다. 예안은 유전을 정식으로 받은 후 자신이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확 달라진 걸 느꼈다. 여자가 된 후에도 많이 바뀌었지만 유전을 받은 이후 로 얻은 자신감의 변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오만함 따위는 들지 않았지만 이제 자신은 하고 싶은 건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과, 강대국조차도 벌벌 떠는 막대한 검은 황금을 손에 넣었다는 자신감으로 마음이 충만해 있었다. "나한테 꽤나 겁도 안 먹고 겁도 없이 굴기에 혹시 어느 대단한 집안의 숨겨놓은 딸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더군." '!' 자신감에 찬 태도로 아파트를 나서던 예안은 입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 재호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그는 혜인을 더럽히 고 자신을 모욕했던 남자였다. "듣자 하나 학교를 자퇴했다며? 그것도 모르고 바쁜 일 다 끝내고 학교 로 찾아가 교문 앞에서 며칠째 기다렸지 뭐야. 한 번도 모습이 안 보이 기에 혹시 나한테 겁이라도 먹고 피해 다니는 줄 알고 내심 기분 좋았는 데 자퇴를 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지." 흠칫했던 건 잠시. 이제 자신은 저런 인간은 충분히 밟아줄 수 있는 힘 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 예안은 가슴을 당당히 폈다. "여기는 뭐하러 왔어?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내가 너네 회사에 찾아가서 유한 회장을 퇴임시킬 예정이었는데 말이야." "아직도 그딴 헛소리를 즐기는군. 네 까짓게 도대체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런 망언을 지껄이는 거야?" "적어도 너 따위 쓰레기보다는 돈도 힘도 많으니까 걱정하지 마셔."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재호는 조금 울컥했지만 꾹 참았다. "혹시 네 친척들을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한 거라면 대단히 큰 착각을 하 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군. 유한그룹이라면 우리나라에서 1, 2위를 다투 는 재벌 기업이야. 난 그런 대단한 그룹 회장의 맏손자이자 장차 그룹을 이끌어 나갈 차기 회장이지. 네 삼촌이 대성 그룹과 중원 그룹의 친척이 라고 해서 내 손끝 하나 다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착각하지 마. 그 사람들하고는 아무런 상관없어. 순수한 내 힘만으로 널 밟아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서 기다리기나 해. 올해 안으로 유한 회장은 퇴임하게 될 테니까." 도대체 어디에서 저 자신감이 나오는지 알 수 없다. 재호는 눈살을 찌푸 렸다. 묘한 흥분도 잇따랐다. '정말… 이상한 여자군.' 자신감에 찬 저 아름다운 미소를 내 것으로 만들어 천사의 눈물과 선혈 그리고 순백의 깃털로도 깨끗하게 되돌릴 수 없도록 더럽히고 싶다는 욕 심에 사로잡힌 재호는 히죽 웃으며 손을 들어 예안의 턱을 움켜잡았다. "좋군. 상당히 아름다워. 거기다 당차고 신비한 매력까지 곁들었고 말이 야." 예안은 그를 죽일 듯이 쏘아볼 뿐 손을 내치지는 않았다. 내심 자신에게 기가 죽고 있다 생각한 재호는 더욱 더 자신 있는 미소를 지었다. "너 같은 여자는 처음이야. 김혜인도 상당히 괜찮은 여자이긴 했는데 역 시 유한전자 지분 빼고는 별다른 매력은 없었어. 하지마 넌 달라. 널 보 고 있으면 왠지 내 손으로 더럽히고 더럽혀서 나말고 다른 남자들은 거 들 떠도 보지 않는 탕녀로 만들어 주고 싶은 기분이 든달까?" "이 손 치워." 그제야 얼굴을 찌푸리며 재호의 손을 탁 쳐낸 예안은 기분 나쁜 표정으 로 턱을 슥슥 문질렀다. 오물이 닿은 듯 불쾌한 눈빛이었다. "애써 재촉하지 않아도 반드시 널 파멸시켜 줄 테니까 얌전히 가서 기다 리기나 해." "좋군. 아주 좋은 표정이야. 정말 마음에 들어." 재호는 히죽 웃었다. "굉장히 곱고 아름다운 목소리야. 굳이 칭찬하자면 천사가 노래하는 듯 하다랄까? 그 목소리가 쾌락에 젖어 신음을 내지르는 걸 듣고 싶을 정도 야. 후후…" 소름끼치는 탐욕이 담긴 눈동자가 자신의 몸을 훑어보았을 때 예안은 징 그러운 벌레가 전신을 기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일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자신감을 회복한 예안은 퉁명스레 쏘아 붙였다. "너 따위하고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조만간 파멸시켜 주고 말 테니까 꺼져." "후후, 기대하고 있겠어." 재호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그대로 등을 돌렸 다. 죽일 듯한 시선으로 빨간 스포츠카에 오르는 그의 뒷모습을 쏘아보 던 예안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어디 그때 가서도 그 재수 없는 낯짝이 능글맞게 웃고 있는지 한 번 두 고 보자. 울면서 매달리지나 마라, 이 쓰레기야." 초조한 안색으로 시계만 들여다보고 있던 세정은 이윽고 카페 입구에서 밀짚모자를 쓴 소녀가 들어서자 반색을 했다. 주위를 슥슥 둘러보던 소 녀, 예안은 이내 세정을 발견하고 이쪽으로 왔다. "어서 와. 몸도 무거운데 불러내서 미안해. 힘들진 않았어?" 예안은 이제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 말을 놓는 세정의 친근감 있는 태도가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다 느끼는 자신이 당혹스러웠 다. 그런 혼란을 감추기 위해 애써 표정을 차갑고 냉랭하게 하며 쏘아붙 이듯 내뱉었다. "힘들었든 말든 상관 마세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절 부르셨죠?" "별건 아니고 그냥 맛있는 거라도 사주고 싶어서 불렀어. 내가 시간을 빼앗은 건 아닌가 모르겠네. 그런데 이런 시간에 나 만나러 와도 되는 거니? 학교 가야 되지 않아?" "학교 그만뒀어요." '사람은 무조건 학교를 가야 한다'라는 생각에 뼛속까지 사로잡혀 있었 던 세정은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했다. "학교를 그만뒀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한국말 모르세요? 말 그대로 학교 그만뒀다구요. 고등학교 자퇴했다는 소리예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한 말투였지만 세정은 아니었다. 그녀의 상식에서 고등학교를 자퇴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대학원까지는 나와야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텐 데 어떻게 학교를 그만 둘 수 있니?" "그럼 무거운 몸 이끌고 학교 다닐까요? 그러다가 수업 중에 갑자기 양 수 터져서 병원으로 실려 가면 아주 볼만하겠네요. 그 다음날 신문에서 '모 고교의 여고생, 수업 도중 아이를 출산하다'라고 대서특필되겠군 요." 조리 있는 반박에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세정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만 굳이 자퇴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냥 몸이 안 좋다고 대 충 속여서 장기 결석을 하면 되잖아. 유급 좀 받더라도 그게 차라리 낫 지 않겠니?" "검정고시 봐서 내년에 대학 들어갈 거니까 상관하지 마세요. 제 인생은 제가 알아서 해요." 여전히 자신에게 거리를 두려는 냉정한 태도에 세정은 속이 조금 쓰렸 다. "그런데… 지금 4개월이라고 했지?" "네. 지금이 6월 달이니까 4개월이죠 이제." "근데 정말 배가 안 불렀구나. 헐렁한 옷을 입은 것도 아닌데 임신한 티 가 전혀 안 나."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태아 크기가 터무니없이 작아서 그렇다고요." "그렇다면 위험한 거 아니니?" "위험한 건 아니랬어요. 그냥 크기만 작을 뿐 성장 자체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니까 당분간 지켜보자고 했어요." "뭐 특별히 먹고 싶은 거 없니? 내가 사줄게." "필요 없어요. 아주머니가 사주는 거라면 캐비어로 주먹밥을 만든 거라 고 해도 사양하겠어요." 빈정거리는 말투에 세정은 하마터면 울컥했지만 애써 웃는 표정으로 꾹 눌러 참았다. 상대는 자신의 손자를 임신하고 있지만 자신을 지극히 싫 어하는 소녀였다. 화를 내봤자 역효과만 날 뿐이다. 아쉬운 쪽은 자신이 었다. "아주머니." "응?" "정말 제 아이 할머니 노릇하고 싶어서 이러시는 거예요?" 세정의 얼굴에 서린 당혹한 빛을 즐거운 눈동자로 주시하며, 예안은 무 뚝뚝하게 내뱉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세요. 전에도 말씀드 렸다시피 이 아이는 아주머니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아이니까 아예 신경을 꺼주셨으면 좋겠어요. 원래는 안 나오려고 했는데 오늘 그 말씀 드리려고 나온 거예요." 세정의 눈빛에 창백한 노기가 떠올랐다. "예안아. 너 너무 말이 심한 거 아니니?" "제가 심하다니요? 뭐가요? 전 사실대로 말할 뿐인데요? 따지고 보면 저 하고 아주머니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인데 이렇게 마주보고 있다는 것 자 체가 우습다 생각하지 않으세요?" "하지만 난 엄연히 네 아이의 할머니야. 네 아이는 엄연히 내 손자라 구." "그럼 아이가 태어난 다음에 한 번 선택하라고 해볼까요? 엄마하고 할머 니 둘 중 누구를 선택할지." "서예안!" 세정은 화를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버럭 외쳤다. "듣다듣다 보니 정말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아무리 내가 밉다고 해도 그 아이는 네 소중한 아이야! 그런데 우리 둘이 해결해야 할 책임을 그 런 식으로 아이한테 무거운 짐으로 떠넘겨도 된다 생각하는 거니? 난 너 와 정말 친하게 지내고 싶어. 네가 아무리 날 싫어한다 해도 그 아이가 있는 한 너하고 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럼 아이 지울까요?" "!!" 경악으로 휘둥그레진 세정의 얼굴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뭐, 뭐, 뭐?" "아이 지울까요? 전 아주머니하고 가능한 연결되고 싶지 않은데 그냥 아 이를 지워 버릴까요? 그럼 앞으로는 절 찾아오지 않으실 거예요?"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어떻게 소중한 생명을 죽일 생각을 다 할 수 있 니? 그것도 다른 이유도 아니라, 단지 내가 싫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감흥 없는 시선을 떨어뜨린 채 손톱을 탁탁 부딪치고 있던 예안은 덤덤 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도 참 이기적이네요. 죽은 자기 아들이 남긴 혈육이 보고 싶단 이유 하나만으로 멀쩡한 여고생이 애 낳는다는데 반대도 안 하니 말이에 요. 아주머니가 올바른 어른이라면 제 인생을 생각해서 아이를 지우라고 설득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제가 아주머니한테는 남남이나 다름 없으니, 인생이 어떻게 되든 상관 안 하겠다는 뜻인가요?" 세정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런 식으로 보면 자신은 어른으로서는 해 선 안 될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제가 지금의 아빠에게 입양되기 전에는 저도 그분도 제가 임신한 걸 몰랐어요. 얼마 전에 알게 되었죠. 근데 그 분은 처음 그 사실을 아 셨을 때 제 인생을 생각하시곤 그냥 지우라고 하셨어요. 제가 낳겠다고 박박 우겨서 결국 승낙하신 거라구요." 세정은 핼쑥한 안색으로 듣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아주머니가 자꾸 절 귀찮게 하는 것 때문에 솔직히 요새 흔들리고 있거든요? 만약 제가 아이를 지운다면 아주머니는 더 이상 절 귀찮게 하지 않으실 거죠?" "그, 그런…"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하는 세정의 당혹한 표정을 즐겁게 들여다보던 예 안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니까 그렇게 죽을상 하지 마세요. 이 아이는 그 애와 저 사이의 소중한 보석이라고 전에 말씀드린 건 어디다 팔아먹으신 거예요? 아주머 니가 아무리 귀찮게 굴어도 전 낳아서 잘 키울 거니까 행여나 낙태할까 겁은 집어먹지 않으셔도 돼요." 세정은 순간적으로 안색이 환해졌다가, 이내 부끄러움을 느끼고 얼굴을 붉혔다. "그, 그래준다면 고맙지…" "고맙다니요? 뭐가요? 아주머니가 뭐를 고마워하신다는 건데요? 아주머 니하고는 아무 상관없잖아요?" 세정은 예안의 마음이 어떤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무리 자 신의 아들로부터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해도 도대체 어떻게 저 런 원망스런 눈빛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만큼 둘이 서로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 결국 세정은 예안이 아무리 빈정거린다 해도 화를 내지 않아야겠다고 결 심했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자식을 대신해 속죄한다는 기분으로 눈앞 의 소녀를 잘 보살펴줘야겠다 마음먹었다. "전 이만 가볼게요." "어, 벌써 가게?" 예안이 일어나자 세정은 허둥지둥 따라 일어섰다."그럼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아주머니랑 오래 앉아 있어 봐야 심심하기 만 하지 뭐가 좋은데요? 그리고 전 오늘 병원에 가봐야 한다구요." "그럼 나도 같이 갈게." "제 말은 뭐로 들으셨어요? 전 이제 더 이상 아주머니랑 얽히고 싶지 않 다구요." 속이 좀 쓰리는 냉담한 말투였지만 아들에게 속죄한다는 기분으로 받아 주자는 결심이 선 뒤로 그런지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새하 얀 피부와 녹색 눈동자가 자아내는 매력이 굉장히 사랑스러운 얼굴이었 다. '여자애가 참 예쁘기도 하지. 우리 아들이 이런 여자애랑 사귀었다니…' 세정은 그저 밝게 웃으며 질겁하는 예안의 팔에 억지로 팔짱을 꼈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병원비도 내가 내주고 맛있는 것도 사줄게. 아 직 나이도 어린데 그런 병원에 혼자 가려면 쑥스럽고 겁도 날 거야. 안 그래?" 잔잔하게 가라앉은 녹색 눈동자로 세정을 잠시 주시하던 예안은 별 거부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팔짱을 낀 채 나란히 걷던 세정은 어느 정도 자 신의 진심이 먹혀들었다는 기쁨에 취해, 차가운 흔들림이 일렁거리는 녹 색 눈동자를 깨닫지 못했다. 예안이 이용하는 산부인과 담당 여의사의 이름은 김지원이라고 했다. 27 살의 유능한 의사였는데 아직 미혼이라고 했고, 꽤나 동안이라 흰 가운 을 벗는다면 대학생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병원을 드나드는 횟수가 많아 짐에 따라 지원은 예안과 많이 친해졌다. "무거운 몸 이끌고 다니느라 고생이 많네요. 그런데 옆의 분은 어머니신 가요?" 예안은 옆에 앉는 세정에게 흘끔 시선을 준 뒤 지원에게 대답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 "시어머니예요." 그러나 예안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대답하기 전에 세정이 먼저 말을 잘랐다. 세정은 어처구니없는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예안의 눈빛을 애써 무시했다. "임신 4개월인데 배가 안 나오는 이유는 태아 크기가 너무 작아서라고 들었어요. 우리 며느리가 부담스러워 하기에 전 웬만하면 병원에 따라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걱정이 되어서 그럴 수가 없더라구요." "아, 그러셨군요. 사실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난감했지만 그동안 지켜본 결과 태아의 크기가 작다는 것만 빼놓고는 별달리 걱정거리는 없 었어요. 발육의 상태라든지 건강상태라든지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요. 출산 후에 과연 정상인만큼 성장할지는 의문이지만 그건 두고 보면 알겠 죠. 하지만 안심하셔도 될 겁니다." "정말인가요?" "네에. 태아는 정말 건강합니다.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크기가 작다는 것 빼고는 미심쩍은 게 없으니 마음놓으세요." 세정이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하고 있을 때, 예안은 얼굴을 찌푸리며 지원이 듣지 못하도록 작게 말했다. "시어머니는 무슨 시어머니예요? 왜 그런 거짓말을 하고 그러세요?" "엄밀히 따지면 난 네 시어머니가 되잖아." 세정은 지원의 눈치를 살피며 그렇게 대답했다. "오늘은 몇 가지 검사만 하시면 됩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보호 자 분은 잠시 나가주시겠어요?" "아, 네." 세정이 가볍게 인사하고 나간 뒤 지원은 컴퓨터로 차트를 뒤적이며 침대 에 눕는 예안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건지 말해줄 수 있어요? 느닷없이 시어머니라는 분하고 같이 올 줄은 몰랐는데… 애 아버지는 세상에 없다고 전에 말씀하시지 않았어 요?" "그대로예요. 애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아마 정말 시어머니가 되었을 지도 모르죠. 일단 제 아이의 할머니 되는 분이니까." "아, 그렇군요. 근데 솔직히 좀 좋은 분이라고는 말하기 그렇네요. 자기 아들 죽었다고 친손자를 보고 싶은 욕심에 멀쩡한 여고생을 애엄마로 만 들려고 하다니…" "선생님도 전에 축하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전 언젠가 아이 어머니가 될 여자의 입장에서 축하한다 말씀드린 거지, 실제로 어른이라는 제 입장을 자각한다면 하루속히 낙태하기를 권해야 했다구요. 그리고 서예안 님이 아이를 낳는다 해서 저에게 득이 되는 건 없잖아요?" "낙태라… 그럼 지금이라도 제가 그렇게 하길 바라세요?" 지원은 자판을 두드리다 말고 생긋 웃었다. "아니요. 전문의 김지원으로서라면 몰라도, 인간 김지원의 입장에서는 서예안님이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는데요. 서예안님은 좋은 어머니가 될 것 같아요." "그래요?" 예안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아이를 가진 여자는 아름답다고 했는데 과연 그렇군요. 서예안님은 날 이 갈수록 점점 더 예뻐지는 것 같아요. 만약 미혼모만 아니었더라면 연 예계로 진출해서 톱스타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제 친구 중에서 기획사 매니저를 하는 녀석이 있는데 그 녀석이 서예안님을 봤으면 아마 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당장이라도 계약하자고 매달렸을 거예요." "아하하, 그런 쪽으론 별 관심 없어요. 그런 거 안 해도 충분히 호의호 식할 정도로 돈도 꽤나 있구요." "하긴, 그 나이에 애 낳을 결심한다면 경제적인 대비책은 있겠죠." 이런 저런 이야기와 함께 검사를 마친 뒤 예안은 걱정 없다는 말을 듣고 나왔다. 대기석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정이 반색하는 게 무작정 싫지 않 은 자신이 조금 혼란스러웠던 예안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버렸다. "뭐래? 건강하대?" "…예." "진찰도 끝났으니 그만 나갈까?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뭐 특별히 먹고 싶은 것 없어?" 밝은 미소로 자신의 팔을 잡아끄는 세정의 옆모습을 주시하던 예안은 문 득 내가 과연 엄마에게 상처를 준다는 게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하고 생 각해 보았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마음을 단 단히 쥔 손의 힘이 점점 풀린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10 회] 날 짜 2004-01-06 조회 / 추천 4376 / 66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비참해질 수 없는 이유 생모와 처음으로 함께 한 데이트는 뭐랄까. 아주 색다르면서도 가슴이 뭉클한 그런 기분이었다. 엄마의 얼굴조차 모르던 시절에는 엄마를 만나 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이렇게 유젤의 몸으로 자신을 며느리처럼 대하는 엄마와 함께 있노라니 점점 마음이 흔들렸다. 처음에 화를 몇 번 내던 것과는 달리 이제 자신의 비위를 맞추려 애쓰고 잘 보이려 노력하고 친해지려고 열심인 모습을 보노라니 예전에 갖고 있 었던 미움은 그 힘을 잃는 것 같았다. '이래선 안 돼.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유진우? 엄마한테 상처를 주고 싶 다며?' 백화점으로 끌고 가 한사코 여러 옷들을 사주는 세정의 모습은 누가 봐 도 헌신적인 어머니 그 자체였다. '이런 사람이… 어째서 그때는 아빠하고 날 버렸을까?' 정호는 항상 자신이 못나서 이혼 당한 거라고 말하곤 했지만 예안은 필 사적으로 세정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진우를 데려 가려 했지만 진우 아버지가 이혼하는 조건으로 그건 안 된 다고 했다'라는 세정의 말을 믿고 싶은 기분이었다. "배고프지 않니? 우리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몸이 무거운 애한테 힘든 일 시킬 수 없다며 무거운 짐을 양손에 잔뜩 들고 세정이 그렇게 말했다. 어쩐지 지금 자신이 우스워진 예안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아니요. 전 배고프지 않아요." "배가 안 고프다니 그게 말이나 돼? 임신 안 한 나도 돌아다니느라 이렇 게 배가 고파 죽겠는데 홀몸도 아닌 애가 배가 얼마나 고프겠어?" "정말 고프지 않아요. 아, 근데 전 이만 들어가 보고 싶은데요." 이제 예안이 자신에게 어느 정도 너그러워졌다 생각한 세정은 한결 만족 스러웠다. "맛있는 것도 못 사주고 이렇게 헤어지는 건 정말 아쉬운데. 하긴 몸도 무거운데 돌아다니려니 귀찮기도 하겠지. 그럼 내가 다음에 만나서 맛있 는 거 사줄게. 그때는 꼭 배가 고프겠지?" 세정은 농담처럼 그렇게 말했다. 예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마도 똑바로 마주보고 말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왜 저한테 이렇게 친절하세요?" 세정의 안색이 순간 당혹함으로 굳어졌다가 이내 펴졌다. "왜 친절하냐니? 왜 그런 걸 묻고 그러니? 당연한 거 아냐? 넌…" "아주머니의 손자를 임신하고 있으니까요?" "그, 그래." 얼떨결에 그렇게 대답했던 세정은 황급히 다시 덧붙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냐. 진우랑 좋아했었다니까 왠지 고맙기도 하고 잘해주고 싶고…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전혀 낯설지만은 않아서 그래. 마치 꼭 내 친자식 같은…" 중얼거리듯 그렇게 말하던 세정은 문득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아,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하여튼 네가 그만큼 남 같지 않아서 그래. 지겹도록 말했지만 난 너하고 정말 친하게 지내고 싶어. 꼭 네가 내 손자를 갖고 있어서만이 아니라…" 예안은 조금 침울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친자식 같다고…?' 단순히 친근감을 나타내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그런 기분이 든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16년을 살아오면서 키워왔던 미움이 지금 세정의 따뜻한 미소에 희석되어 만들어진 혼란이 머리 속을 어지럽 힌다는 것만 느꼈을 뿐. "난 앞으로도 너랑 정말 친하게 지내고 싶어. 그래도 되지? 응?" 기대에 찬 물음. 며칠 전 같았으면 생각할 것도 없이 거절해버렸겠지만 가슴에 똬리를 튼 혼란은 그걸 방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안은 냉정하게 마음을 다스렸다. "…이러지 마세요 정말. 이런다고 아주머니가 제 아이 할머니 노릇할 수 있는 건 아니라구요." 가슴을 짓밟는 혼란을 죽이기 위하여 억지로 그렇게 내뱉은 차가운 음색 이었다. 세정의 안색이 파리해졌지만 예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가, 제가 오늘은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아까 카페에서 곧바로 헤어졌어야 했는데 괜히 아주머니랑 같이 병원에나 가고… 백화점도 가 고… 이러지 말아야 했어요. 아주머니가 괜한 기대를 갖게 한 건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전 도저히 아주머니를 받아들일 수 없을…" 툭- 안색이 창백해진 세정은 그대로 손에 쥐고 있던 쇼핑백을 놓쳐 버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은 서글픈 눈빛이 자신을 향하자 예안 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내가… 그렇게 싫으니?" 마음을 찔러오는 듯한 슬픈 목소리에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싫어?" 눈물을 머금고 있는 어머니의 눈동자. 그것을 쳐다보는 것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슬픈 기분이 솟구친단 말인가.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세정은 눈물을 닦으며 애써 웃어 보였다. "아하하, 미안하네 정말. 나이도 많은 사람이 괜히 눈물이나 보이면서 주책 떨고. 아직 서먹한 건 이해하겠는데 그래도 나 좀 봐주라. 나 예안 이랑 정말 많이 친해지고 싶거든. 일단은 내가 좀 싫더라도 이 옷들은 거절하지 말아 줘. 아, 난 지금 바빠서 그만 집에 가봐야 하니까 택시 잡아 줄게." 세정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우두커니 서 있는 예안을 태워주었다. 그 녀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었을 때 예안은 가슴속에서 뭔가 울컥 하는 걸 느꼈다. 이게 아닌데. 이건 정말 아닌데. 그런 메아리가 마음 속에서 울리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멀어지던 세정의 모습이 이윽고 보이지 않게 되자 예안은 힘없이 중얼거 렸다. "이제… 만족해 유진우?" 그렇게 네가 원하던 대로 엄마한테 상처를 줬어. 이제 만족해? 이걸로 만족하는 거야? 정말 이거면 된 거야?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진 우'의 마음은 죽어 버렸는지 아니면 깊이 자고 있는 건지 그 어떤 대답 도 돌아오지 않았다. "모르겠다 젠장. 이게 다 현우 녀석 때문이야!" 아파트 입구에 정지한 택시에서 내린 예안은 세정이 사준 옷들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우두커니 서 있다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피곤하다. 들어가서 좀 쉬고 보자." 낑낑거리며 아파트 안에 들어간 예안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기 위해 쇼핑백을 내려놓으려다가, 뒤에 서 있던 누군가가 대신 눌러주자 고마워 했다. "아 고맙습…" 무심코 뒤를 돌아보던 예안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앤드류가 서 있었다. "회, 회장님? 여기는 어떻게?" "삼일 전에 내가 그렇게 만나자고 했는데 왜 안 나온 거야?" 뜻밖의 마주침에 놀랐던 예안은 두근거림을 가라앉히고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갑자기 약속이 생겨서 나갈 수 없게 되었다고 했잖아요." "거짓말." "거짓말 아니에요. 제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약속이었다구요." "거짓말." "거짓말 아니라니까요." "거짓말." "거짓말 아니라구요!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사람 말을 믿는 거예요!" "거짓말." "거짓말 아니라니까!" 신경질이 난 예안은 짜증스럽게 외쳤다. 서글픈 눈빛으로 짜증이 가득 담긴 예안의 녹색 눈동자를 주시하던 앤드류는 우울하게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면 그동안 나한테 전화라도 해줄 수 있었잖아. 삼일 동안 내가 호텔에서 핸드폰만 들여다보면서 살았다는 거 알기나 해?" "그, 그건 미안하지만… 아니, 아니지. 내가 왜 미안해야 하는 거죠? 난 분명히 당신이 싫다고 말했고, 그날 안 나간다고 다시 전화해서 말했어 요. 따지고 보면 당신이 지금 나를 귀찮게 하는 중이라는 것도 몰라요? 생각 같아서는 스토킹 당한다고 경찰에 신고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구 요!" "임신했다며? 사실이야?" 예안은 펄쩍 뛸 듯이 놀랐다. 어떻게 앤드류가 그런 것까지 알고 있는 것인가.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요? 당신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왜 남의 사 생활까지 침범하는 거냐구요!" "중현이란 남자한테 들었어. 임신 4개월 중인 데다가 애 아버지는 이미 죽고 없다는 것까지. 반응을 보니 진짜인가 보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없지는 않았는데." "쳇. 중현 아저씨는 왜 그런 것까지 함부로 말하고 그러냐…" 혼자 투덜거리던 예안은 정색을 하고 쏘아붙였다. "맞아요. 저 임신했어요. 그리고 알고 계신 대로 애 아버지는 이미 죽었 구요. 그런데요? 제가 임신한 거랑 그쪽이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죠?" "낳을 거야?" "낳을 거예요. 낳아서 제가 기를 거예요. 됐어요?" "돈은… 있어? 애 키울 돈은 있어?" 예안은 기다렸다는 듯 히죽 웃으며 지갑을 꺼내 흰 수표를 한 장 꺼내서 앤드류에게 내밀었다. 적힌 금액을 확인한 앤드류의 안색이 굳어졌다. "십 억이에요. 원래 당신한테 빌린 돈은 9억이었죠? 나머지 1억은 이자 인 셈치고 받아두세요. 이런 건 가급적이면 확실하게 해두는 게 좋아서 이러는 거지, 돈 아까운 줄 모르는 바보가 아니라서 그러는 게 아니니 오해는 마세요."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려던 게 아니 었는데. 이런 대화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비참한 기분이 엄습하는 걸 억지로 참아가며, 앤드류는 입을 열었다. "이런 건 필요 없어. 도로 집어넣어." "받아주시죠. 전 당신하고 더 이상 관계하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거니까 어서 받아주시죠." "왜 이렇게 잔인해? 내가 그렇게 미워? 처음 만났을 땐 이렇지 않았잖 아?" "맞아요. 전 당신이 미워요. 날 좋아하는 당신이 미워요. 전에 말하지 않았어요? 난 날 좋아하는 남자들이 정말 밉고 싫고 짜증난다고." 그때 나란히 손을 잡고 들어서던 젊은 부부가 두 사람을 이상한 눈으로 흘끔 쳐다보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당신은 제가 이렇게까지 싫다고 하는데도 비참하지 않아요? 왜 그렇게 자꾸 매달리는 거예요? 당신 정도의 남자라면 세계 제일 가는 신랑감 아 닌가요? 영국의 왕자인 데다 얼굴도 잘생겼지, 아이큐 200을 상회하는 천재 경영가인 데다가 세계 제일의 부자이기까지 하고 말이에요. 거기다 가 또 모차르트와 쇼팽이 되살아났다는 칭찬 듣기에 바쁜 천재 피아니스 트 작곡가이기도 하지." 예안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한숨을 쉬듯 다시 덧붙였다. "그렇게 대단한 남자가 도대체 왜 나 같은 평범한 여자한테 매달리고 그 러세요?" "전에 말했잖아. 그건…" "유서운이란 사람하고 닮아서 그런다고요? 그렇다면, 지겹게 말한 거지 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죠. 전 그런 사람 몰라요. 아무런 관련도 없어 요. 그러니…" 흥분에 찬 예안이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앤드류는 와락 끌어안아 버 렸다. 당황한 예안은 그를 밀쳐내려고 끙끙거렸다. "이거 놓지 못해요! 난 남자가 내 몸 만지는 거 제일 싫어한다구요!" 앤드류는 바둥거리는 예안을 더욱 더 꽉 끌어안으며 낮게 속삭였다. "나랑 같이 미국으로 가자." 뜻밖의 부탁에 경악한 예안은 거짓말처럼 저항을 멈췄다. "같이 미국으로 가자. 아니면 영국으로 가고 싶어? 어디든 상관없어. 나 랑 같이 가자. 아이? 낳아도 돼. 낳아. 내가 그 아이 아버지 노릇 해줄 게. 내 친아들 이상으로 사랑하고 아껴줄게. 누나가 해달라는 거 뭐든지 다 해줄게.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자. 응?" "해달라는 거… 뭐든지 다 해 준다구요? 그 말 정말이죠?" "다 해줄게. 다 해줄 수 있어. 뭘 원하는데? 뭘 하고 싶은데? 뭘 갖고 싶은데? 말만 해. 뭐든지 다…" 예안은 차갑게 말을 끊었다. "절 좋아하지 마세요. 그리고 절 귀찮게 하지 마세요. 그게 제가 원하는 거예요." 예안은 자신을 단단히 끌어안고 있는 앤드류의 어깨가 경련을 일으키는 걸 느꼈다. 그에게 느끼는 미안한 기분(납득할 수 없지만)과, 유젤을 빼 앗으려 드는 것에 대한 질투, 그리고 이런 대단한 사람이 자신에게 매달 린다는 야릇한 우월감이 섞여 빚어내는 혼란 속에, 예안은 다시 입을 열 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제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줄 수 있다고 하셨잖 아요?" 긴 침묵 속에 굳어 있던 앤드류는 예안을 놔주었다. 한 걸음 뒤로 물러 난 그는 서글픈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미안해. 그건 들어줄 수 없어." "하? 내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줄 수 있다면서요? 왜 그건 안 되는데요? 따지고 보면 그게 아주 쉽잖아요? 좋아요. 그럼 내가 만약에 카를로스하 고 네로스, 이카루스, 포세이돈을 전부 다 달라고 하면 줄 수 있나요? 그것보다는 나한테 신경 꺼 달라는 요구가 더 쉽지 않나요?" "줄게." 곧바로 되돌아온 대답에 예안은 한순간 멍해졌다. "뭐…라고요?" "줄게. 줄 수 있어. 누나가 원한다면 그 회사들 전부 다 줄 수 있어. 하 나도 아깝지 않아. 원래 십 년 전부터 누나한테 돌려주려고 내가 작정한 것들이었으니까. 그 회사들이 갖고 싶어? 갖고 싶은 거야? 말만 해. 누 나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줄 수 있…" 짜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앤드류의 뺨에 붉은 통증이 수채화처럼 새겨졌다. 그가 우두커니 서 있는 가운데, 예안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바락바락 외 쳤다. "웃기지 말아요! 누가 그딴 거 갖고 싶다고 했어요! 난 그런 게 갖고 싶 은 게 아니야! 당신이 날 좋아하지 않길 원한다구! 날 좋아하지 마! 제 발 좋아하지 마! 예안일 좋아하지 마! 제발 좋아하지 말란 말이야! 왜 자꾸 사람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내가 그런 말 들을 때마다 얼마나 비참한지 알기나 해! 그 따위 소리… 그 따위 마음은 저 달나라로 갖다 버리란 말이야!!" 울먹임에 잠식당한 예안의 외침은 살을 파고들어 뼈를 새기는 상처로 다 가왔다. 쓰린 가슴을 움켜쥐고 서 있던 앤드류는 비틀거리며 예안의 어 깨를 꽉 붙들었다. "그럼 너는 왜… 달을 알고 있는 건데?" 금방이라도 울 듯 하던 예안의 표정이 혼란으로 굳어졌다. "왜… 달을 알고 있는 거야?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흥미가 있어서라고 대답하지 마. 넌 보통 사람들하고 달라. 분명 달이 존재했다는 걸 알고 있어. 그리고 달이 지구와 똑같은 별로 변한 뒤 지구인의 시야에서 사라 졌다는 것도 알고 있을 거야. 맞지? 그렇지?" "그, 그런…" 생각지도 못했던 앤드류의 물음은 예안에게 커다란 혼란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어째서 나는 달을 알고 있는 것인가? 아니, 어째 서 나는 '달이 있었다'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인가? "전부터 의심쩍게 여겼어. 넌 분명히 달에 대해 알고 있고, 에덴 혹성에 대해 알고 있고, 케이와 제이, 아니 신인류가 왜 영영 지구인들의 시야 에서 사라졌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어. 거짓말 할 생각은 하지 마. 네 머리카락 색이 변하고, 음식을 먹지 않고, 또 결정적으로 유서운 누나랑 복제인간처럼 똑같이 생겼다는 게 그 모든 걸 증명해. 아, 눈동자 색깔 은 다르니까 예외로 쳐야 될까?" 알 수 없는 공포에 질린 예안은 서서히 뒷걸음질 쳤지만, 세 걸음을 떼 어놓기도 전에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들뜬 그리움과 열애가 섞인 앤드 류의 푸른 눈동자는 분명 매력적이었지만, 예안에게 있어서 그건 공포를 담아내고 있는, 미지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뛰어넘음이었다. "모, 몰라요! 모른다구요! 그, 그런 말하지 마요…" "말해. 말해. 말하란 말이야! 넌 유서운이잖아! 인간이 아니잖아! 나 를… 나를… 나를…" 앤드류는 괴로운 듯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예안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십 년 전 열 세 살의 나로 계속 붙들어 놨잖아… 난 13살의 그때로부 터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어… 바로 너 때문에…" 예안은 주춤주춤 손을 뒤로 뻗어 열림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예안은 쇼핑백도 내팽개친 채 앤드류의 손을 뿌리치고 후다 닥 뛰어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앤드류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다 시 문이 열리고, 그리고 여전히 앤드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때 예안 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멍한 기분으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청각을 일시적으로 상실한 기분으로 멍하니 서 있던 예안은 한참 후 찬물을 얻어맞은 것처럼 번쩍 정신이 들었다. 서둘러 문을 열어보니 앤드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쇼핑백만이 문 앞에 놓여져 있었다. 창백한 손길로 쇼핑백들을 집어들려던 예안은 한 장의 종이가 놓여져 있는 걸 발견하고 흠칫했다. 「내가 비겁해지지 않도록 해 줘. 부탁이야.」 비겁해진다면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갑자기 뇌리를 감싸오는 지 끈한 통증을 떨리는 손길로 어루만지며, 예안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 고 말았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11 회] 날 짜 2004-01-06 조회 / 추천 4196 / 52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비참해질 수 없는 이유 "다녀왔습니다아~" 동생인 최우성보다 약간 늦게 귀가한 최마리는 활기차게 인사하다 집안 분위기가 약간 가라앉아 있는 걸 느끼고 어리둥절했다. "어? 엄마 왜 그래요? 아빠는 왜 그래? 우성이 넌 또 왜 그렇게 초상난 집안 사람처럼 얼굴이 음침하냐?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난 몰라. 그냥 아빠랑 엄마가 을씨년스런 분위기 연출하길래 함께 동조 하고 있는 것뿐." 이 녀석에게 물은 내가 바보지. 마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어두운 분위기 의 근원일 거라 짐작되는 세정에게 질문을 던졌다. "엄마, 왜 그래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그러고 보니 엄마 아 침에도 넋을 빼놓으시던데…" "너희들이 알 필요는 없어." "아빠는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해? 나하고 우성이도 이 집안의 당 당한 구성원이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엽고 예쁜 아들딸이라구! 왜 집안 분위기가 이런지 나도 충분히 알 권리가 있단 말이야!" 열변을 토하던 마리는 세정의 눈가에 눈물이 말라붙은 흔적을 발견했다. "어? 그러고 보니 엄마, 울었어요? 우신 거예요? 왜요? 왜 그런 거예요 도대체? 사람 궁금하잖아요. 빨리 빨리 말해주세요." 세정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게… 그게 그러니까…" 이 애들은 어린애들인데 말해줘도 괜찮을까? 도움을 요청하는 눈으로 남 편인 석준을 쳐다보니, 그는 알아서 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휴. 그래 어차피 말하려던 것이었으니까… 지금 말해도 상관없겠지.' 정호에게 빼앗긴 아들은 결국 불행하게 살다 죽고 말았지만, 손자까지 그렇게 만들 순 없다는 생각에 세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은 말이야…" 세정은 침착하고 조리 있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원래 데려올 예정이었던 너희들의 다른 형제인 진우가 그만 물 에 빠져 죽었는데, 알고 보니 여자친구 사이에서 아이가 하나 있더라. 그 여자애가 진우의 아버지에게 입양되었는데 그대로 두는 것보다 이 집 으로 데려오는 게 더 좋을 것 같더라, 근데 그 여자애가 완강하게 거부 하고 있어 애가 타고 있는 중이다, 이런 식으로 지루해질 수 있는 설명 을 간결하게 끝맺었다. 다 듣고 난 남매, 마리와 우성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그러니까 중요한 건 바로 무능력한 전남편에게 손자를 빼앗기고 싶지 않은 엄마의 마음과, 진우라는 남자애하고 그 아버지 되는 사람한 테 잘못된 말만 들었기 때문에 엄마를 미워하는 그 여자애의 마음이 갈 등의 요소다 이거죠?" "이건 굉장히 심각한 일이야. 이대로 가만있을 수 없어. 가능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최대한 동원해야 하고, 정 안 될 시에는 무력의 사용 도 불가피해." "최우성! 이게 무슨 비행기 테러범 체포 작전인 줄 알아!" "내가 언제 그런 말했어! 난 심각하다고 밖에 말 안 했다구!" "그거 지난번에 봤던 비행기 구출 영화에서 미군 장교가 읊었던 거잖아! 나도 같이 봤는데 그걸 모를 줄 알아!" "아씨! 상황에 어울린다 생각하면 얼마든지 차용할 수 있는 거지, 그게 뭐 표절이라도 된다고 누나는 그 난리냐!" "누가 뭐래?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면 누가 들어도 농담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거지!" "누나는 그렇게 시시콜콜하게 따지고 드는 걸 좋아하니까 가슴이 안 커 지고 아직도 A컵에 머무르고 있는 거라구!" 마리의 얼굴이 분노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가슴 사이즈랑 그게 도대체 무슨 상관인데! 왜 자꾸 사람 상처를 걸고 넘어지는 거야!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어! 따지고 보면 내 가슴 작은 건 네가 엄마 젖 싫다고 어렸을 때부터 내 가슴에 매달려 살아서 그런 거잖 아!" 뭔가 상당히 위험을 알려주는 대사라 생각되는데. 우성은 얼굴을 새빨갛 게 붉히며 바득바득 외쳤다. "그, 그게 언제적 일인데 아직도 걸고넘어지고 그래!" "오호, 그러셔? 난 네가 엄마 가슴 싫고 내 가슴 좋다고 졸졸 따라다니 던 거 다~ 기억하고 있답니다. 요즘도 번개 치는 날이면 무섭다고 툭하 면 내 방에 들어오잖아?" "이익…" 엄마 아빠가 보고 있는데 이 무슨 개망신이란 말인가. 우성은 얼굴이 잔 뜩 빨개진 채 어쩔 줄 몰라하다가 그만 방으로 뛰어가 버렸다. "너무 동생을 무안주는 거 아니니?" "걱정 마세요 엄마. 애들은 다~ 이러면서 크는 거라구요. 우성이는 그냥 '조금' 심각한 시스터 콤플렉스 환자일 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배다른 남매의 금단의 사랑 어쩌구저쩌 구 하며 입방아를 찧을 지도 모를 대사였는데, 정말 괜찮을까. 어쨌든 일단 넘어가자. "근데 진우랬던가? 걔 아이이자 엄마의 손자이며 장차 아빠의 손자가 될 예정인 데다가 동시에 제 조카가 되며 우성이의 장난감으로 전락할 가능 성이 농후한 아이를 갖고 있다던 여자애 이름이 뭐예요?" 숨이 넘어가진 않을까 우려되는 길고 긴 수식어였다. "서예안이래. 나이는 너랑 같아." "음. 이름은 예쁘네. 근데 걔 얼굴도 예뻐요?" 잠시 당혹스러웠던 세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는 조금 심술궂 은 표정을 지었다. "나보다 더요?" "그, 그게…" 세정의 얼굴이 당혹함으로 물들었다. 이래서 엄마를 놀리는 건 재밌다니 까. 마리는 깔깔 웃으며 세정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냥 물어본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내가 무슨 외모 지상주의자인 것도 아닌데 뭐어. 이래 뵈도 학교에서는 꽤 잘 나가는 몸이 바로 이 최 마리 아니에요?" 마리는 소파에 눕다시피 털썩 앉으며 팔을 쭉 뻗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한 거네. 서예안이라는 그 여자애를 설득시켜서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오면 되는 거죠? 뭐, 사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유정 호란 아저씨 양녀로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요. 우리아빠처럼 유능 하고 인정받는 사람도 아니라면서요? 아, 물론 인격을 모독하는 건 아니 니까 새엄마 기분 나빠하지 마시고요, 아빠도 눈에 힘 풀어요." 자칫 버릇없다 느껴질 정도로 거침없는 말투에 한 마디 하려고 했던 석 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딸 마리는 가끔 지나치다 생각될 정도로 너 무 활발하게 굴긴 했지만, 그래도 발랄한 면이 귀여운 건 사실이었다. "하긴, 내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해가요. 아무래도 그 여자애는 엄마에 대해서 안 좋은 이야기만 들었을 게 뻔하고, 엄마하고 아는 사이도 아니 니까. 나 같아도 그 아저씨 양녀로 남아 있으려고 하겠다." 세정의 얼굴이 다시 우울함으로 물들어가자 마리는 애교 있게 웃으며 와 락 껴안았다. "에이~ 그렇다고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엄마~ 저도 조!카! 랑 같이 살고 싶으니까 하루빨리 그 여자애 설득해서 데려오세요~ 아셨죠? 그럼 전 올 라갈게요~" 세정의 뺨의 입술을 쪽 하고 갖다댄 마리는 이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의 붓딸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어루만지며 세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누가 마리를 보고 제 의붓딸이라 생각하겠어요. 저렇게 애교 있고 밝은 데… 그러고 보니 당신 전처가 정말 딸 하나는 잘 낳은 것 같아요." "하지만 마리를 저렇게 키운 건 당신이잖아. 어차피 어렸을 때부터 얼굴 봐 와서 계모 같다는 느낌은 없을 텐데 뭐." "휴우… 그나저나 잘 되어야 할 텐데… 예안이가 절 너무 싫어하는 것 같아 걱정이에요." "잘 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정호를 미워한 건 아니었지만, 그와 함께 살았을 때보다는 지금 이 순간 이 백 배, 천 배, 만 배 더 행복한 건 사실이다. 세정은 이 행복을 예안 과, 그리고 그 애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을 손자(혹은 손녀)에게도 진심 으로 나눠주고 싶었다. 예안과 헤어져 씁쓸한 기분을 맛보며 호텔로 돌아온 앤드류는 니콜라스 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바깥바람 좀 쐬라고 했을 땐 들은 척 만 척 하던 녀석이 왜 갑자기 없어졌는지 의아했지만, 이내 거실 탁 자 위에 놓인 쪽지를 보고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안녕.」 간결한 글씨체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어린아이답지 않은 느낌이었다. 앤드류는 쓴웃음을 지으며 종이 쪽지를 다시 내려놓았다. "휴우…" 예안에게 하고 싶었던 말, 하고 싶지 않았던 말, 해야 할 말, 하지 말았 어야 할 말, 가리지 않고 모든 말을 다 해버렸다. 이제는 예안이 어떻게 나올지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과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 어질지는 의문이었다. 갑자기 퍼뜩 뭔가를 깨달은 앤드류는 서둘러 폰을 꺼내 국제전화를 걸었 다. "제니? 나 내일 귀국하는 거 잠깐 연기할게. 아, 오래 걸리진 않을 거 야. 기껏해야 사나흘?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은 넘기지 않을 테니까 그렇 게 알고 있어. 간부들은 네가 알아서 잘 설득해. 어. 알았어." 전화를 끊은 뒤 앤드류는 허탈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자리에 는 고뇌로 물든 청년의 사랑에 빠진 서글픈 눈동자가 아니라, 열정에 불 타오르는 강인한 채색이 드리워져 있었다. 평소에 잘 보지 않는 TV를 어떻게 해서 볼 생각을 다 한 건지는 모르겠 다. 아직 어두워지려면 상당한 시간이 남은 가운데 예안은 넓은 거실에 혼자 앉아 TV만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굳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라든지 하는 외국의 신화를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전설에서도 달에 대한 이야기 를 다루는 건 굉장히 많습니다. 떡방아를 찧는 토끼라든지, 해와 달이 된 남매의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건 전설이나 동화일 뿐입니다. 지난 5년 간 미국과 중국, 일 본, 프랑스, 영국 등등 수많은 강국들이 지구 주위를 샅샅이 훑어보았습 니다만,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위성은커녕 운석 조각 하나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 교수님이 내세우시고 있는 주장은 허구적인 신화를 바탕 으로 한 현실의 왜곡일 뿐입니다.」 「그러나 달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뒤져봐도 달에 관 련된 기록이 없는 나라는 없습니다. 굳이 오래 전의 동화나 전설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탄소 14 검사를 통해 현대의 것이라고 입증된, 달을 찍 은 사진이나 기록 디스크 등등이 셀 수 없이 많은 수만큼 전세계에 퍼져 있습니다. 이것 역시 허구적인 신화에 속하는 것일까요?」 「물론 달의 표면을 찍었다고 주장하는 사진 등등이나 달에 최초로 착륙 했다는 암스트롱이 실존 인물이라는 건 전문가들이 진짜라고 주장하고 있지요. 나사 등의 우주항공기관들이 이미 오래 전에 끝낸 달 착륙 프로 젝트 혹은 5년 전까지만 해도 추진 중이었던 달에 관한 계획들을 보면 정말 달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허나 지금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달은 없습니다. 그것이 가장 커다란 증거가 될 순 없는 것입니까?」 「저 역시 현재 달이 100% 존재하고 있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적어도 10년, 아니 5년 전까지는 달이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현대의 기 록들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는 것과 확신한다는 건 엄연히 틀린 것입니다. 지금 이 교수 님은 달이 백 년도 더 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오 년 전까지 존재했다 주장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 교수님은 그에 대해 알고 있 어야 하는 게 올바른 것 아닙니까? 이 교수님 자신의 기억조차 확신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증명한다 하시는 겁니까?」 「물론 저 역시 달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전세계의 무수한 기록을 바탕 삼아 달이 있었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것 뿐입니다.」 스크린 속의 이 교수라는 사람은 전혀 기죽지 않고 당당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오히려 타당하겠군요. 오 년 전까지는 달이 분명 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인해 달이 사라진 겁니다. 초 거대 문명을 이륙한 외계인들의 습격이나 침략 따위를 예로 들 수 있겠군요. 그리고 나서 그들은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의 기억을 지운 겁니다. 하지 만 달에 관한 기록 자체는 남겨둔 겁니다. 현재로서는 이게 가장 타당하 다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어째서 달에 관한 무수한 기록들이 남아 있는지 설명할 방도가 없습니다.」 「이 교수님은 지금 소설을 쓰시고 계신 겁니까? 엄청난 문명을 이룩한 외계인들이 정말 있다면 어째서 달은 없앴으면서 지구는 가만히 내버려 둔단 말입니까? 아니, 무엇보다 전세계 인류의 기억을 지울 정도로 고수 준의 과학기술을 지닌 존재가 정말 있다면, 어째서 달에 관한 기록은 남 겨둔 것입니까?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한창 열띤 토론이 진행 중이었다. 소파에 몸을 푹 묻은 채 물끄러미 시청하던 예안은 리모컨을 들어 TV를 껐다. "달이라…" 새삼 생각을 헤집어 보니 잃어버렸던 목걸이가 바로 목에 걸려있었다는 걸 인식한 것처럼 새록새록 기억이 떠오른다. 세기의 초현실적 미스터리 로 떠오른 위성, 달에 대해서 모르는 현대인은 없다. 하지만 달이 있었 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달이 '있었다'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인가. "유니콘. 달은 정말 있었던 거야? 넌 알고 있지? 알고 있을 것 같아." 「그 질문에는 대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너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하지? 그래서 부정하지 않는 거야. 그치?" 「그건 인정합니다.」 "킥…" 수채화 물감에 가려진 유채 그림이 소나기를 맞아 씻겨나가며 형상이 떠 오르듯,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기억의 파편이 머리 속을 어지럽혔다. 아 직 모든 것이 뚜렷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달이 존재했다'라는 건 어 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지? 언제부터 내가 이런 걸…" 덜컥 겁이 날 법도 했지만, 어쩌면 이건 유젤이 갖고 있던 기억이 아닐 까 하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헌데 일본이나 한국이란 이름에 대해서도 몰랐던 유젤이 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건 뭔가 들어맞지 않는다. 「때가 되면 아시게 될 거란 말씀은 드릴 수 없습니다. 절 만든 사람은 유젤 님이 그런 걸 알게 되길 바라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궁극적으로 이 행해야 할 것은 유젤 님의 행복이지, 달의 존재 유무를 증명하는 것 따 위가 아닙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을 놓으시지요.」 "…그래." 가뜩이나 생모에 관한 문제로 머리 속이 터질 것만 같은데 달이니 뭐니 하는 걸 생각하는 건 정말 괴롭다. 몸을 웅크린 예안은 아기를 껴안듯이 두 손으로 아랫배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오늘은 니콜라스가 오기로 되어 있다. retake란 소설을 봤는데 정말 재밌고 가슴 뭉클한 글이더군요. 블랙홀처럼 빨려들어갈 것 같은 그 특유의 긴장된 분위기가 압권이었습니다. 읽으면서 펜 꺾고 싶은 기분이 마구 들었습니다.-_-; 현대 소설인데 여러분들도 한 번 보세요. 작가님은 아리수라는 분이시고, 'retake' (완결)와 십 년 후의 이야기를 다룬 '당신의 소리'이렇게 두 개 의 작품을 쓰십니다. 긴장된 그 분위기가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ps :개인적으로 재영이보다는 희수랑 소리를 맺어줬으면 하는 소망이 있는데 요, 아리수님?-_-; ps 2 : 이따 한 편 더 업하겠습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12 회] 날 짜 2004-01-06 조회 / 추천 4240 / 46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비참해질 수 없는 이유 니콜라스는 예안과 약속한 대로 집으로 찾아왔다. 초인종을 누르자 잠시 후 멍한 표정으로 예안이 문을 열어주었다. "어… 왔냐?" "어. 근데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걱정을 해준다고 하기에는 조금 무뚝뚝한 말투였다. "신경 쓸 거 없어. 너는 그냥 여기 같이 살면서 의뢰 받은 대로 날 경호 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흐음…" 앤드류가 예안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걸 알 리 없는 니콜라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해보다 포기했다. "그런데 집이 참 작은 것 같네. 난 누나가 좀더 근사한 곳에서 살고 있 을 거라 생각했는데. 제나르 의원의 저택 같은 곳 말이야." "그게 궁궐이지 어딜 봐서 집이야? 그리고 난 평범한 소시민…은 아니지 만 하여튼 그런 입장이라구.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지 뭐." 니콜라스가 그 말을 믿지 않는다는 걸 모른 채 예안은 다시 덧붙였다. "뭐 조금 있으면 어차피 이사갈 거야. 곧 아기가 태어날 거거든." "아기?" "아, 내가 너한텐 말 안 했던가? 나 지금 임신 4개월 중이야. 그러니까 너도 가능하면 나 놀래키거나 화나게 만들지 마라. 알았냐?" 니콜라스의 얼굴에 잠시 의아함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는 중현 이나 앤드류 혹은 정우 삼형제처럼 펄쩍 뛰며 놀라지 않았다. "아기 아버지는 누군데?" "그건 몰라도 돼. 너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잖아?" 니콜라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 하긴 그렇지.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마음 속에 미미한 파장이 일어 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상관없는… 이야기인데…' 니콜라스는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의 동요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한편으 로는 그런 혼란을 즐겼다. 예안으로부터 느끼는 이런 흔들림 -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쌓여서 언젠가는 자신의 기억을 되살려줄 매개체가 될 지도 모르는 기대까지도. '난 한 번도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어. 그래. 이 여자랑 같이 있을 때를 빼고는 말이야. 니르가 말한 혼란이라는 게 이런 거겠지?' 겉으로 보기엔 그냥 입이 벌어지게 예쁜 미인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니 콜라스는 예안이 지닌 영혼의 색채가 결코 평범한 파장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기 대하는 건 굉장히 즐거우면서도 흥미로운 관찰이었다. 늦은 밤이 되기 전에 정호가 돌아왔다. 친구를 만나고 온 모양이었다. "아빠 이제 와?" "어? 이 애는 누구니?" 좋아라하고 껴안는 예안의 어깨를 만져주며 정호는 니콜라스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응. 내가 전에 말했잖아. 이민간 친한 친구 동생한테 하숙 주고 싶다 구. 얘가 걔야. 나이는 13살. 이름은…" 미처 그 부분까지 생각해두지 않았던 예안은 잠시 버벅거렸다. 니콜라스 베르노라고 본명을 말해도 될까? "차성주라고 해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니콜라스는 정호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 녀석이 이렇게 순순히 존대 를 할 줄 몰랐던 예안은 조금 뜻밖이었지만, 곧 맞장구쳤다. "맞아, 맞아. 차성주라고 해. 하여튼 아빠는 얘한테 별로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그래. 네가 어련히 다 알아서 하겠지 뭐. 근데 남자애가 참 귀엽구나." 정호는 웃음 띤 얼굴로 니콜라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혹시라도 청부업자의 자존심에 애 취급받았다고 화를 내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예 안은 다행히 니콜라스가 가만히 서 있자 내심 안도했다. '애 취급하는 거냐고 질겁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생각이 있네. 아니면 원래 저렇게 귀염 받는 거 좋아하는 스타일인가?' 예안은 정호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빠 배고프지? 밥해줄 테니까 일단 들어가서 씻기부터 해." "어, 그래." 정호가 욕실로 들어가고 난 뒤 니콜라스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무미건 조한 음색이었다. "부친이랑 굉장히 친한가 보네. 누나도 그렇게 애교를 떨 수 있다는 거 나 처음 알았어." 아까 덥석 껴안는 거 보고 하는 소린가. 쑥스러운 기분이 든 예안은 얼 굴을 조금 붉혔다. "남이야 애교를 떨든 내숭을 떨든 뭘 하든 네가 상관할 것 없잖아." "하도 딱딱하게 굴기에 나는 누나가 모든 사람들한테 그렇게 대하는 건 줄 알았거든. 근데 난 어느 방을 쓰면 되지?" "아, 저쪽 방을 쓰면 돼. 저녁은 조금 있으면 되니까 기다려라." "저녁 같은 건 필요 없어. 난 원래 아무것도 먹지 않아." 예안은 조금 놀랐다. "어? 너도 몸 속에 ST기관 있어? 혹시 너도 뉴 타입이야?" "ST기관? 뉴 타입?" 말실수했음을 깨달은 예안은 얼른 입을 막으며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니콜라스는 별로 관심 없는 듯 했다. "그런 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난 원래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어. 배가 고 프다는 걸 느껴본 적도 없고 말이야. 그럼 짐부터 풀어놓고 있을게. 무 기 같은 걸 누나 부친에게 들키면 곤란하니까." "그, 그래. 알았어." 누나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거냐고 한 번쯤 물어볼 줄 알았는데 그 냥 넘어가니 예안은 오히려 더 당혹스러웠다. '청부업자들은 원래 다 저런가?' 보통 사람이었다면 니콜라스가 한 말 -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말에 강한 의혹을 느껴야 정상이겠지만 예안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 무심함은 자신의 정신이 점점 구인류의 영역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걸 암시하는 것 이었지만, 예안은 이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니콜라스.」 무기가 든 가방을 침대 밑에 숨기던 니콜라스는 갑자기 머리 속에 울리 는 음성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니콜라스. 대답해줘요.」 "니르?" 니콜라스는 서둘러 눈을 감고 교감에 응했다. 「건강한가요 니콜라스?」 시리도록 푸른 창공과 드넓은 태평양을 건너 전해져오는 교감의 일렁임 이 차가운 가슴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 살인보다 자극적이고 키스보다 달콤하며 살아 있다는 것보다 더 매력적인 흥분에 취한 니콜라스는 들뜬 표정으로 대답했다. '난 잘 있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의뢰인은 마음에 드나요?」 '마음에 들어. 이런 사람은 니르 말고 처음이야. 이 사람이랑 같이 있으 면…' 니콜라스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지도 몰라. 그런 예감이 들어.' 「그거 다행이군요.」 흔들림의 변화가 거의 없는 건조한 음색이었지만 무척 아름다운 색채가 느껴졌다. 살그머니 주먹을 쥔 니콜라스는 뺨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주 먹 끝으로 살짝 다듬었다. '솔직히 말해 줘. 니르는 서예안… 그 여자애에 대해서 알고 있지? 그래 서 이 의뢰를 받아들인 거지? 그렇지?' 처음 니르를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그리고 지금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이 신비한 색채가 너무나도 아름답다. 어쩌면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이 니르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본 적도 있지만, 그녀가 지닌 신비의 영혼의 아름다움은 그런 불신을 말끔히 씻어버리곤 한다. 「피곤해서 대화는 그만둬야겠군요.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요.」 긍정도 부정도 거절해버린 니르의 의식이 아련히 멀어지는 걸 느끼며 니 콜라스는 살며시 눈을 떴다. 주먹을 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그는 씁 쓸한 웃음을 베어 물었다. "이것도… 에날도스일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지닌 이런 신기한 능력에 대해 회의해본 경 험은 없지만, 문득 제나르가 말한 엘리우스란 인물이 정말 자신이 아닐 까 하는 의심이 치솟았다. 아마도 그건 제나르에 맞서던 자신의 신비한 힘과, 델이 뿜어냈던 불꽃이 비슷한 파동을 뿌리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권상우님. 미안합니다. 천국의 계단 극중 당신의 이름을 써버렸네요. (타앙!) 아아 내일은 천국의 계단이 하는군요. 후훗.^^; 1부를 보지 않으셔도 내용을 이해하는데는 지장 없을 겁니다. 제가 어느 정도 선까지는 세계관(이 있긴 한 거야?)을 이야기 진행 과정에서 이해 시켜 드릴 거거든요. 하지만 1부에서 어떠어떠한 일이 있었으며 왜 이렇게 된 것인지까지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1부는 A4로 대략 1400p 가까운 분량이 됩니다. 그걸 한정된 소엄 안에서 전부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죠. 소엄 이야기 진행하는 것만 해도 분량이 빽빽 할 테니까요. 제 손가락은 무쇠로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_-;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13 회] 날 짜 2004-01-07 조회 / 추천 4202 / 55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비참해질 수 없는 이유 학교를 자퇴한 이후로 요일 개념이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9년이 넘도록 학생이었던 경력은 귀신같이 일요일을 알아 맞춘다. 바로 그다지 피곤하 거나 졸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늦잠을 자게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처럼 달콤한 잠을 잘 수 없었다. 아침부터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초인종 소리 때문이었다. "이씨… 누가 아침부터 찾아온 거야.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투덜거리며 일어난 예안은 눈을 비비면서 파자마 차림으로 나갔다. 누가 찾아왔는지 확인해보지도 않은 채 졸린 눈으로 문을 연 예안은 그 자리 에 사악한 마녀, 혜민이 서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유, 유혜민? 네, 네가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너무해. 정말 너무해 너. 이사까지 했으면서 나한테는 한 마디도 안 하 고…" "미, 미안해 그건." 혜민이 자신의 손을 덥석 잡은 채 눈물까지 글썽이자 할 말 없어진 예안 은 머리만 긁적였다. "들어가도 돼?" "어. 들어 와." 좋아라 하고 안에 들어온 혜민은 거실을 휙휙 둘러보며 말했다. "근데 집 참 깨끗하다. 지은지 별로 안 됐나 봐?" "응." "네 방 들어가 봐도 돼?" "어. 나쁠 거 없지." 혜민에 대한 적의나 미움 따위는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예안은 기꺼이 그녀를 받아들였다. 내심 잔뜩 기대하고 예안의 방에 들어왔던 혜민은 굉장히 실망했다. "뭐야? 방이 왜 이렇게 삭막해? 침대랑 옷장, 책상, 책꽂이, 컴퓨터, 그 리고 없잖아? 이게 무슨 여자애 방이야? 완전히 남자애 방이잖아." 예안은 삐질거리며 변명했다. "내가 원래 검소한 걸 좀 좋아하잖냐. 그래서…" "그 남자 같은 말투 내가 고치라고 그렇게 말했지! 예안이 넌 왜 자꾸 그런 식으로 너의 눈부시고 찬란한 미모를 망가뜨리는 거야! 그게 얼마 나 죄악인지 알기나 해! 넌 최고의 미소녀로 태어난 운명을 유지하고 받 들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단 말이야!" 서슬 퍼런 박력에 질린 예안은 주춤거리다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배준혁? 이거 전에 배준혁이 했던 말이잖아?' 그러고 보니 혜민과 준혁이 성격 면에서 은근히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소리 질러서 미안해. 애기가 놀라겠다." 혜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이었지만 예안은 깜짝 놀랐다. "애기? 그게 무슨 소리냐?" "너 임신했다며?" "맞긴 한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 난 너한테 말한 기억 없는데?" "어떻게라니. 당연히 다~ 들었지. 지금 우리 아빠도 아시고 우리 엄마도 아셔. 아참, 그러고 보니 너 우리 아빠랑 엄마는 진우 장례식 때 잠깐 보고 제대로 못 봤지? 하여튼 우리 부모님도 지금 너 걱정 많이 하고 계 셔." 처음에 깜짝 놀랐던 예안은 숨을 내쉬고 들이마심에 따라 점점 침착함을 되찾았다.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혹시 너도 나더러 낙태니 뭐니 받으라는 말하려고 온 거냐? 정우 형들 이 그렇게 부탁하든?" "아니. 난 그냥 네가 얼마나 예뻐졌나 보고 싶어서 온 것 뿐이야." 황당한 대답에 예안은 멍해졌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 왜, 여자는 아기를 가지면 한층 더 아름다워지고, 아기를 가진 어머 니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하잖아. 네가 얼마나 예뻐졌는지 궁금해 서 왔지롱~" 혜민은 히죽 웃으며 가방을 뒤져 디지털 카메라를 짠 꺼냈다. "근데 너 진짜로 더 예뻐졌다? 으윽! 무슨 피부가 파리가 미끄러질 것 같이 매끄럽냐고요. 아아, 너무 부러워." 표현을 해도 참. 하지만 그게 유혜민다운 건지도 모른다. "자, 사진 사진. 사진 찍자. 지금 아니면 이런 모습을 언제 담아두겠어? 빨리 빨리~" 혜민의 재촉에 질린 예안은 멍한 채로, 옷을 벗기는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야, 오, 옷은 왜 벗기는 거야!" "이왕 찍는 거 누드 사진으로 찍어야지! 어차피 배도 거의 안 나왔는데 뭐 어때? 쑥스러워 하지 말고 얼른 얼른~" 어쩌면 내일 당장 유씨 집안에 'S양, 파격적인 누드 선보이다!'라는 가 정신문과 함께 사진 판매 광고가 떠돌아다닐지도 모를 일이다. 상상하기 가 무섭게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것만큼은 절대 막고 싶다. "사진기 치워! 내가 무슨 누드 모델이야!" "에이,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딱 한 번마안, 응? 정우 오빠들한테 팔면 못 받아도 컴퓨터 값은 뽑아낼 수 있단 말이야~" 결국 여기에 온 목적은 집 구경도 아기도 뭐도 아닌, 용돈을 벌고 싶어 서였군. 예안의 눈동자에 녹색 분노가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오냐. 그렇게도 죽고 싶다 이거지? 각오해 너!" "꺄하하 간지러워~" 거실에는 난데없이 두 미소녀의 금단의 사랑을 예고하는 대서시의 앞날 을 암시하는 고음이 울려 퍼졌… 잠깐, 뭔가 핀트가 어긋난 것 같은데. 「그냥 패스.」 한참 동안 깔깔거리며 장난을 치던 두 소녀는 지친 숨을 내뱉으며 거실 바닥에 널브러졌다. 예안은 자신을 깔고 누워 있는 혜민의 가슴이 팔에 뭉클하게 와 닿는 감촉에 얼굴을 붉히면서, 자신이 혜민과 이렇게 친해 질 수 있다는 것에 속으로 놀라워했다. 하지만 납득할 순 있다. 왜냐? 혜민은 예뻤고, 예안의 정신은 예쁜 여자 를 거절하지 않는 늑대였으니. 남자는 다 늑대다 늑대. '따지고 보면 혜민인 그냥 좀 철이 없어서 그럴 뿐이지, 그럭저럭 귀엽 고 예쁜 애잖아? 그래, 정우 형들이랑은 완전 딴판이라구.'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있지만 과연 몇이나 그걸 믿어 줄까. 저 하 늘에서 유젤이 어쩌면 칼을 갈고 있을 지도 모르는데. "근데 예안이 너 진짜로 그 아기 낳을 거야?" 혜민이 가쁜 숨을 털썩 내쉬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귓가에 와 닿는 뜨거운 숨결이 빚어내는 야릇한 매혹함에 취한 예안은 얼굴을 살짝 붉혔 다. "낳을 거야. 내가 말했잖아. 너도 정우 형들처럼 나 설득할 생각으로 온 거라면 포기하라고." "난 그런 뜻으로 한 말도 아니고, 그런 말 할 생각으로 온 것도 아니야. 그냥 네가 아이를 가졌다니까 좀 신기해서. 그거 진우 애라며?" "으, 응…" 예안의 부끄러운 모습을 은근한 시선으로 더듬던 혜민은 몸을 더욱 바짝 실어 왔다. 금단의 경계선을 뛰어넘기 일보 직전. "너 전에 진우랑 한 번 해봤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난 네 젖꼭 지가 분홍색이어서 처녀라고 생각했는데, 후후후… 네가 나랑 같은 어른 이었다니. 이거 정말 의왼데?" "그, 그건 잘못된 속설이라고 난 들었단 말이야!" "글쎄다. 그건 모를 일이지. 어쨌든 우리 둘 다 이제 성인이잖아? 같은 어른끼리 즐거운 놀이 한 번 해보지 않을래?" "즈, 즐거운 놀이?" "아, 그렇게 겁먹은 표정 지을 것 없어. 내가 괴수니? 널 잡아먹게? 안 잡아먹을 테니까 겁먹지 말아."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경련을 일으키는 건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걸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에이, 왜 그렇게 쑥스러워하고 그래? 네 님이 죽은 뒤로 제대로 된 절 정을 한 번도 맛보지 못했을 거 아냐? 나의 뜨거운 애무로 널 쾌락의 도 가니에 넣어줄 테니 무서워하지 말고 이리 와." 혜민이 짓고 있는, 사악하기 그지없는 미소가 겁이 난 예인은 슬그머니 깔린 몸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녀는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정조의 상 실 직전에 처한 예안은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목구멍을 맴돌던 비명은 귓가에 와 닿는 야릇한 입김에 먹히고 말았다. 그건 실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야릇한 느낌이었다. "저, 저기 혜민아…?" "응?" 사악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띤 채 막 예안의 가슴을 더듬으려던 혜민은 고개를 들었다. "왜 불렀어? 아, 거칠게 하지 말아달라고? 걱정하지 마. 부드럽게, 아주 부드럽고 달콤한 쾌락을 너에게 선사해 줄 테니까. 겁먹지 말고, 릴렉 스~ 릴렉스~ 스무스하게 나가자구 우리." "그, 그게 아니라… 그, 그냥 넘어가면 안 될까? 나, 그, 그런 거 필요 없는데…" "에이. 너도 여자고 사람인데 밤마다 진우가 그리웠을 거 아냐? 이건 비 윤리적인 행동도 진우에 대한 배신도 아기에 대한 잘못도 아니니까 걱정 하지 말고 얌전하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삐질삐질. 예안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처지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하, 하지만 난 정말 괜찮은데…읍!" 예안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린 혜민은 싱긋이 웃었다. "후후. 겁먹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 지금부터 난 너에게 아름 다운 극락의 세계를 보여줄 생각이니까. 절대 날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 절대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가질 필요도 없어. 자연스러운 욕구를 이런 방법으로 해결하는 건 결코 죄악이 아니야. 그리고 넌 얼마든지 너 자신 의 욕구를 충족시킬 자격이 있어. 너도 사.람.이.잖.아?" '사람이라고 해서 다 이런 걸 하는 건 아니라구!' 울상이 된 예안은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입이 막힌 탓에 결국 속으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 정조의 상실에 대한 무서움, 유젤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이제부터 펼쳐질 아름다운 자극에 대한 기대감으로 물든 새하얀 뺨이 발그레해졌다. 잠깐, 기대감이라고? "후후, 너도 기대하고 있구나? 알았어. 내가 아주 부드럽게 해줄게~" 공포와 죄책감 그리고 묘한 기대가 빚어내는 혼란의 도가니에 영혼을 사 로잡힌 예안은 질끈 감은 눈을 뜨지 못했다. 그때였다. "같은 여자끼리 그런 거 하면 재미있어?" 건조한 음색에 혜민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파자마 차림의 니콜라 스가 빤히 보며 서 있었다. 혜민은 그가 누군지 몰라 갸웃했다. "너는 누구?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나 며칠 전부터 여기에 하숙 들었어. 예안이 누나 친구의 동생이야. 누 나랑도 꽤나 친한 편. 이름은 차성주고 나이는 13살. 이 정도면 적당한 대답이 됐으려나?" 예안을 멋진 여자로 만들어줄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린 혜민은 아쉬워 하며 시선을 예안에게 돌렸다. "쟤 말이 사실이야?" "어? 어, 사, 사실이야." 조금 전 혜민에게 정조를 빼앗길 뻔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기대 했다는 사실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 예안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흐음. 아주 귀엽게 생긴 애네. 몇 년만 더 크면 여자들 꽤나 울리고 다 니겠어. 너 혹시 이 녀석 키워서 잡아먹으려고 하숙시킨 건 아니지?"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흐응…" 묘한 음색을 흘리던 혜민은 이내 미심쩍어하는 시선을 거두었다. "근데 언제까지 누나를 그렇게 깔고 누워 있을 거야? 여자들끼리 그런 거 하면 재밌어? 그건 남자랑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뭔가 13살짜리가 내뱉는 물음이라기에는 순수함이 결여된 듯했다. 그러 나 혜민 역시 만만치 않았다. "에이, 아무리 이성애가 건전하고 바람직하다 용납되는 사회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예외는 있는 법이야. 미소년끼리의 금단의 사랑과 미소녀끼 리의 아름다운 결합은 전세계 어디에서나 보편적인 미의 극치이자, 궁극 의 최고 로맨스라구!" 역시 혜민은 보통이 아니다. 13살짜리가 그런 질문을 한다면 일반 여고 생이라면 당황할 법도 한데, 아주 수준 맞게 받아치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예쁘게 생겼다 해도 난 나랑 같은 물건 가진 녀석들은 싫어. 누나는 그게 아닌가 봐?" "후훗. 네가 진정한 로맨스의 길을 전혀 모르고 있구나? 인간은 이성에 대해서 호기심과 끌림을 느껴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동성에 대해선 아 주 강한 동질감의 자극을 받아 사랑에 빠지게 되는 거야. 동성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시켜,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유도할 수 있다구! 일명 셀프 러브라고도 하지! 한국어로는 자기회귀애라고도 해!" "셀프 러브? 그거 문법에 맞긴 한 거야?" "내가 시샵으로 있는 사랑 동호회, <아름답지 않은 사랑은 없다>에서는 그런 사소한 문법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 어디까지나 얼마나 쇼킹하게 뜻을 전달할 수 있는가를 중요시 여긴다구!" "누나 같은 여자가 시샵으로 있는 걸 보면 앞날이 뻔하군. 조만간 전세 계의 모든 변태를 배출할지도 모르겠어." "너 말 다 했어!" 13살짜리랑 그런 아스트랄한 대화를 나누는 게 그렇게나 재밌을까. 예안 은 혜민의 팔을 밀쳐내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야. 비켜. 무거워." "응? 알았어. 근데 화났어? 목소리가 왜 그래?" "…몰라. 말시키지 마."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찬물을 끼얹은 느낌에 조금 서운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젠장,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야 도대체! 유진우, 너 진짜 굶주린 거냐? 지금 넌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구! 굶주린다는 게 말이나 돼! 아기 한테 부끄럽지도 않냐?' 예안은 자신에게 짜증을 부리며 유젤에게 깊이 사과했다. '미안해, 예안아. 내가 조금 흔들렸어. 다신 안 이럴게.' 하지만 과연 유젤이 용납해주기나 할까. 어쨌든 예안이 속으로 유젤에게 사과하고 있을 때였다. "많이 굶주린 모양이야?" '젠장, 저게 13살짜리가 할 말이냐! 니콜라스, 너 나중에 혼날 줄 알 아!' "그럼그럼. 남자친구랑 깨진 지가 좀 오래라서 많이 굶주렸거든." '유혜민 너도 똑같아! 그게 여고생이 13살짜리한테 할 소리야!' "그렇다고 같은 여자를 덮치면 쓰겠어?" '그만해라 니콜라스.' "어머, 얘는? 난 덮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안이를 멋진 여자로 만 들어주고 싶었던 것뿐이라구. 더불어 쌓인 내 욕구도 간접적으로 좀 풀 겸해서 말이야." '멋진 여자로 안 만들어줘도 돼!' 자신의 주변에는 참으로 난감한 물건(맥)과 인간들이 참 많다고 예안이 궁시렁거릴 때, 그녀의 청각을 자극하는 파격적인 내용이 있었다. "그럼 내가 욕구 풀어줄까?" 평소와 다름없이 건조하고 느릿한 말투였지만, 이 대사만큼은 장난이라 치부할 수 없었던 예안은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여태껏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던 혜민 역시 안색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이번화는 뭔가 분위기가 아스트랄한.........-_-;; 저 위에서 혜민이가 늘어놓은 헛소리는 도대체 제 머리 어느 구석에서 튀어나왔는지 저도 분간이 안 되네요. 헛, 쿨럭! 지금과 같은 추세로 간다면 대략 다음주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선작 600넘을 수도 있으려나...-_-; 여러분. 오늘은 과연 제가 몇 연참이나 할 수 있을까요? 참고로 지금 비축분 제로입니다.--;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14 회] 날 짜 2004-01-07 조회 / 추천 4176 / 53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비참해질 수 없는 이유 한참의 침묵을 깨고 혜민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의 유쾌하 고 익살스런 표정은 사라진 얼굴이었다. "저기, 너 뭐라고…?" "쌓인 욕구 내가 풀어줄까, 라고 물었어. 왜, 싫어?" "아니아니…" 어이없어 하던 혜민은 헛기침을 했다. "너… 아무리 내가 농담을 좋아하고 또 활발하고 귀엽고 깜찍한 미소녀 여고생이라고는 하지만 받아줄 수 있는 농담이 있고 그렇지 않은 농담이 있는 거야. 이해해?" "이해 못하겠는데." 내심 말 잘 했다고 뿌듯해하던 혜민은 곧장 되돌아온 부정에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이해 못해도 이해해! 해! 하란 말이야! 내가 이해하라고 하면 해야 되 는 거야! 알았어?" 혜민은 자신의 설명이 먹히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를 못 이기고 씩씩거 렸다. 어디로 튈지 몰라 주변 사람들을 늘 불안하게 만들던 혜민이 니콜 라스에게 쩔쩔매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난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니까 이해를 못하겠다는 거야. 난 진심이었는 데, 누나는 그게 아닌가 봐?" "너 정말…" 혜민은 기가 막혀 말문을 열지 못했다. "보아하니 꽤나 쌓인 욕구가 많은 것 같은데, 나도 쌓인 욕구 풀 겸해서 같이 해볼래? 이래 뵈도 경험 많으니까 테크닉이 서투를까 염려 할 필요 는 없어." "너 죽을…" 혜민은 버럭 화를 내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니콜 라스가 손끝으로 자신의 뺨을 쓸어 내리자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향 긋한 꽃잎을 피워내며 피부를 적시는 야릇한 자극은 차라리 무섭게 느껴 질 정도로 강렬했다. 갑자기 무서웠다. 겁이 났다. "너 이거 놓지 못…해…" 알 수 없는 공포에 질린 혜민은 다만 부들부들 떨며 그렇게 말할 뿐 손 을 치워낼 생각도 못했다.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던 니콜라스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입술 쪽으로 옮 겼다. 도톰한 입술을 애무하듯 쓰다듬는 손가락에서 짜릿한 전기가 흘렀 다. 야릇해서 더 무서운 황홀의 바다. 마음이 읽히지 않아 더 매력적이면서 도 소름끼치는 검은 눈동자. 뺨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전기. 그것들이 자아내는 알싸한 느낌은 다름 아닌 공포였다. 니콜라스는 비에 젖은 병아리를 어루만지듯 픽 웃고 말았다. "당장은 내키지 않는 것 같으니까 그만 둘게. 언제든지 날 원한다면 말 만 해." 니콜라스가 돌아서자 혜민은 그제야 겨우 막혔던 숨을 푸하 토해내며 주 저앉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그 위압감에 짓눌려 있었다는 게 믿어지 지 않는 듯 안색이 창백했다. "쟤, 쟤 도대체 뭐야… 뭐야…" 눈이 약간 풀린 채로 그 말만을 중얼거리는 혜민이 안 되어 보인 예안은 무릎을 꿇고 살며시 어깨를 감싸주었다. "쟨 원래 저런 얘니까 네가 이해하고 넘어가. 나도 쟤가 무슨 생각을 하 는지 종잡을 수 없을 때가 많거든." "서예안 너…" 순간, 인간 같지 않았던 니콜라스와 알고 지낸다는 예안에게 어떤 커다 란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충격으로 하얗 게 질린 혜민의 두뇌는 그 느낌을 잡아내지 못했다. "흐윽…" 혜민의 울음소리가 안쓰럽게 느껴진 예안은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그래. 울지 마. 저 녀석은 원래 저런 녀석이야. 그러니 신경 쓸 거 없어." 당돌하고 활발해서 세상 무서운 게 없을 줄 알았던 혜민이 이렇게 겁에 질릴 줄 몰랐던 예안은 왠지 귀엽게까지 느껴졌다. 그때였다. "예안이 가슴은 내 거~" 갑자기 혜민이 히죽 웃음을 터트리며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감싸쥐자 예안은 기겁했다. "너,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에이, 쑥스러워 하지 말라니까~ 하던 건 마저 해야 할 거 아냐?" "하, 하지 말래두! 이러지 말란 말이야! 흐, 흐윽…" 노련한 여인의 뜨거운 애무를 감당해 내기에 아직 유젤의 육체는 이른가 보다. 온몸의 힘이 풀린 예안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혜민의 손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역시 아마추어는 프로를 이길 수 없었다. 오늘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다면, 어떤 경우에도 유혜민을 가여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랄까. 혜민이 돌아가고 난 뒤 예안은 니콜라스에게 화를 냈다. "너 그게 도대체 무슨 짓거리야? 사람한테 해서 될 말이 있고 해선 안 될 말이 있는 법이라구!" "그냥 욕구가 쌓인 것 같아서 풀어줄까라고 물었을 뿐이야. 별다른 모욕 을 주거나 나쁜 말을 하진 않았어." "그게 해선 안 될 말이라는 것도 모르냐 이 바보야!" 아까는 조금 재미있어서 지켜보기만 했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히 해둬야 했다. 말을 가리지 않고 내키는 대로 막 함부로 한다는 건 자칫 사람들 로부터 반감을 사기 쉬웠으니까. 그러나 니콜라스는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바보? 왜 그런 말을 해? 솔직한 게 좋은 거 아니야? 아까 그 여자는 분 명히 오랫동안 남자에 굶주려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내 가 쌓인 욕구를 풀어줘도 될까 하고 솔직히 물었을 뿐이야. 합의도 갖지 않은 채 강제로 덮친 것도 아니고 그냥 가볍게 제안했을 뿐인데, 왜 그 렇게 화를 내는 거야?" "혜민이가 언제 남자에 굶주렸다는 말을 했어? 걔는 그냥 장난으로 그런 말 한 것뿐이라구." "장난? 그런 걸 가지고 장난을 친단 말이야? 그럼 그건 내가 나쁜 게 아 니라 그 여자가 이상한 거야." "아니야. 네가 이상한 거야. 친한 사이끼리는 그 정도 농담은 얼마든지 통용될 수 있는 거라구. 넌 암흑계에서만 살았던 청부업자라서 그런 걸 모르는 것 뿐이야." 말을 마친 뒤 예안은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건 아닐까 조금 후회했 다. 니콜라스도 13살의 어린 나이에 그런 힘든 일을 하며 살아온 녀석인 데 괜히 상처를 건든 건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상처받기는커녕 오히려 심각했다. "흠. 한국 여자들은 그런 식으로 서로 애무해주고 좋아하면서 '친하니 까', 하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거야? 서양인들이 그걸 봤으면 아마도 백 이면 백 다 레즈비언이라고 했을 걸? 누나도 아까 그 여자가 애무해주는 걸 꽤나 좋아하는 눈치던데?" "그, 그건 그냥 나도 장난으로 맞장구 친 거지…" 말문이 막힌 예안은 얼굴을 확 붉혔다. 목소리에 굉장히 자신이 없었지 만 니콜라스는 그런 부분을 꼬집어서 놀리는데 애당초 관심이 없는지, 아니면 예안의 말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서 넘어가기로 결심했는지 더 말이 없었다. '책?' 어느새 니콜라스는 관심 없다는 태도로 책을 꺼내어 읽고 있었다. 예안 은 화가 났던 것도 다 잊어버리고 궁금증을 느꼈다. "네가 책을 읽는 걸 봐서, 그것도 저자가 제임스 해론?" "어."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하는 걸로 봐서 저 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너 그 철학가 정말 좋아하는구나. 참, 세상 말세다. 너 같이 앞날이 창 창한 녀석이 청부업자 일을 하지 않나, 그 따위 철학서나 읽지 않나. 그 따위 염세적인 건 도대체 왜 읽냐? 차라리 만화책 같은 걸 읽지. 넌 그 러니까 언제까지나 청부업자 일을 그만둘 수 없는 거야." "나 청부업자 일 그만두기로 했어. 누나 경호일 맡을 때부터. 이번 의뢰 가 끝난다 해도 더 이상 청부업자 일은 하지 않을 거야."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예안은 상당히 놀랐다. "뭐? 그만 둬? 진짜? 아니, 왜? 난 딱히 네가 청부업자라고 해서 거부감 같은 거 없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다기보다는 더 이상 해야 할 이유를 못 느꼈어. 누군 가를 죽인다는 건 나한테 강한 자극이 되었기 때문에 난 그동안 청부업 자 일을 꾸준히 해온 거야. 난 최근 5년을 제외하고는 그전의 기억이 전 혀 없어." "기억이 없다고?" "어. 내가 지금까지 청부업자 일을 포기하지 않은 건 살인을 하면서 얻 는 자극이 쌓이고 쌓여서 언젠가는 내 기억을 되살려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어." 니콜라스는 책을 살짝 덮은 뒤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데 익숙해지다 보니 그런 자극은 점점 약해졌고, 어느새 나는 죽여야할 대상들을 개미보다 못하게 여기고 있었지. 어쩌면 내가 죽였던 표적들이 전부 다 인간 쓰레기여서 살인을 한다는 죄책감이 없었던 건지도 몰라." 예안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던 중에 누나를 만난 거야. 제나르 의원의 저택에서 누나를 구출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을 때만 해도 난 별로 흥미가 없었는데, 사진을 보고 나서 무언가 가슴 뛰는 느낌을 받았어. 그리고 제나르 의원의 저택에서 누나를 보고 확신했지." "확신하단, 뭘?" "누나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 예안의 안색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니콜라스는 여전히 가라앉은 표정으 로 말했다. "바보 같다 생각하겠지. 아무리 뜯어봐도 누나는 인간의 모습 그대로인 데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난 정말 그때 그런 느낌을 받았 고, 지금 역시 그래. 누나한테는 인간의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아. 그리고 언젠가…" 니콜라스는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가 환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 들을 죽여왔던 암흑계의 청부업자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순수하고 해맑 은 미소였다. "언젠가 누나가 정말 인간이 아니라는 게 밝혀진다면 그건 나한테 정말 강한 자극이 되겠지. 어쩌면 내 기억을 되살려 줄지도 몰라. 그래서 난 지금 누나의 곁에 머무르고 있는 거야. 이해해?" "하지만 난 인간이야." "하지만 아름답지. 인간이라면 아름다울 수 없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건 상대가 나보다 더 월등한 존재여야만 하니까." "그건 네가 착각하고 있는 것 뿐이야." 예안의 표정은 잔잔한 호수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니콜라스는 긍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했다. "제임스 해론은 인간이 그런 미묘한 어휘들을 착각하는 건 어떤 초자연 적 힘의 개입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소개한 적 있어. 물론 학계에 내놓 았다가는 엉터리라 지탄받을 테지만 그가 내놓는 설명은 앞뒤가 딱딱 들 어맞지. 다만 그는 그것을 물질적인 실험으로 증명하지 못했을 뿐이야." "제임스 해론이라는 사람한테 너무 매달리지 마. 네 나이 때에는 얼마든 지 다른 좋은 취미거리를 찾아볼 수 있어. 수영을 하든가, 만화책을 보 든가, 게임을 하든가 해. 그 따위 염세틱한 철학서는 보지 말고." 화가 났는지 당황한 건지 놀란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덤덤한 목소리였 다. 니콜라스는 킥 웃음을 터트렸다. 싱그럽고 해맑은 미소였다. "난 지금까지 무수한 사람을 죽인 살인자야. 비록 신용 하나만큼은 믿을 수 있다고 해도 원래 일반인들은 살인자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보이기 마련이지. 하지만 누나는 그렇지 않아. 그건 왜 그럴까?" 예안의 녹색 눈동자는 침묵으로 빛나기만 했다. 아마 자신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나 보다. "답은 하나야. 누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보다 월등한 그 무엇이고, 나 는 인간. 따라서 누나를 한 명의 인간으로 비유한다면 나는 동족을 마구 해친 개 정도가 될까? 그러니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는 거지. 야만적인 동물들 사이에서 그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거니까." 그 말에 찬성할 순 없었다. 하지만 선뜻 반대가 튀어나오지 않았다는 건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예안은 얼굴을 찡그리며 손가락으로 니콜 라스의 이마를 밀었다. 그만 하라는 의미였다. "야, 꼬맹이. 너 같은 어린 녀석은 그런 희한한 사상 따위는 집어치워도 돼. 그리고 뭐? 내가 인간이 아니라고? 앞날도 창창한 녀석이 별 말도 안 되는 쓰잘데기 없는 소리만 주절거리고 있어. 그래 갖고서 너 장가나 갈 수 있겠냐?" "누나가 나 데리고 살 생각은 없어?" 뜻밖의 반격에 예안은 숨이 멎을 뻔했다. 니콜라스의 표정은 진지했다. 간신히 침착함을 되찾은 예안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어이가 없는 나머지 목소리가 자연히 떨렸다. "너… 지금 그거 농담으로 하는 소리냐? 별로 안 웃겨. 알지?" "싫어?" "당연하지! 한 번만 더 그런 농담하면 너 죽을 줄 알아. 그런 농담 재미 없으니까 하지 마. 알았냐?" 예안은 재미없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니콜라스의 머릿결을 이리저리 흐 트러지게 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우두커니 서 있던 니콜라스는 예안의 손이 닿았던 머리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농담이라… 별로 그런 걸 좋아하는 건 아닌데." 황홀한 분위기도, 멋진 멘트도, 그리고 마음을 사로잡는 선물은커녕 자 그마한 꽃 한 송이조차 없는 건조한 프로포즈는 맹탕보다 더 맛없다는 걸 깨닫기에 니콜라스의 나이는 아직 어렸다. 하다 못해 가벼운 두근거 림조차 없이 내일의 날씨를 물어보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으니, 농담 취급 당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일단 2연참 성공이다. 휴우. 졸립네요..T.T 과연 몇 연참까지 갈 수 있으려나.-_-;;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15 회] 날 짜 2004-01-07 조회 / 추천 4155 / 49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비참해질 수 없는 이유 혜민이 다녀간 뒤 이틀이 지난 날 밤이었다. 예안과 정호, 니콜라스는 거실에서 다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중학교를 안 다닐 거면, 검정고시 패스하고 곧바로 고등학교로 들어갈 생각이니?" "아니요. 고등학교 들어갈 생각도 없어요. 고등학교까지 검정고시로 패 스한 다음에 대학에 빨리 들어갈 생각이에요." "하지만 그건 머리가 웬만큼 좋고 또 뼈빠지는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 면 힘들 텐데." "머리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고 노력하는 거라면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 아요. 대학을 빨리 가기 위해 학창 시절을 희생하는 게 아깝지 않느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저에겐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인생에 있어서 참된 친구는 단 한 명만 있어도 충분하니까요." "흐음. 하긴 그렇긴 하지." 니콜라스가 청부업자라는 사실을 내심 마음에 걸려 하고 있었던 예안은 의외로 그가 정호랑 서먹하지 않게 잘 어울리자 일단 안도했다. 나이도 13살인 데다가 가끔 세상 물정을 모르는 듯한 태도를 보여 걱정했는데 역시 청부업자로서 살아온 경력은 만만히 볼 게 아니었다. 그때 예안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나야.」 앤드류였다. 깜짝 놀란 예안은 조심스레 정호의 눈치를 살피며 살그머니 일어나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혼자가 되자마자 자연히 표정이 사나워졌 다. "왜 또 전화했어요? 이제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고 했죠? 전에 당신한테 빌린 돈도 이자까지 쳐서 다 갚았는데, 도대체 뭐가 더 불만이에요? 나 미치는 꼴 정말 보고 싶어서 그래요?" 앤드류를 떠올리기만 하면 골치가 지끈거리기만 하기에 자연히 말투가 고울 리 없었다. "난 당신이랑 정말 상종하고 싶지 않아요. 제발 날 좋아하지 말아요. 난 당신이 날 좋아한다는 게 정말 싫고 비참하니까. 알았어요?" 「나 얼마 후면 미국으로 가.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그렇게나 싫다고 말했는데 또 그 소리인가. 예안은 기가 막혀 뒤로 넘어 질 뻔했지만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아니, 아니.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야. 미안해. 괜히 또 신경 건드 린 거라면 사과할게. 당장은 아니더라도 괜찮아. 지금은 날 좋아하지 않 아도, 아니 싫어해도 괜찮아. 하지만 내가 누나를 좋아하는 것만큼은 허 락해 줘. 그것도 안 돼?」 "뭐라구요?" 「강요하진 않을게. 그냥 누나 곁에서 누나 마음이 풀어질 때까지 기다 리기만 할 테니까… 그냥 곁에 머무르는 것만 허락해주면 안 될까? 내가 누나를 좋아하는 것만 허락해주면 안 돼? 그것도 안 돼?」 "하? 지금 장난해요? 난 분명히 당신이 싫다고 말했어요. 더 이상 나 짜 증나게 괴롭히지 마요. 언제까지 이렇게 사람 화나게 만들 거죠?" 「…그것도… 안 돼?」 우울한 음색에 가득 묻어 있는 서글픈 기운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지만, 예안은 그에게 유젤을 빼앗길 수 없단 생각에 차갑게 말했다. "안 돼요. 절대 안 돼. 난 당신이 더 이상 나한테 모습을 나타내지 않기 를 바래요. 이해하겠어요?" 「정말… 잔인하다 누나.」 "내가 잔인하긴 뭐가 잔인한데요? 그쪽이 날 귀찮게 구는 거잖아요. 그 리고 누나라고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정말… 잔인해. 잔인해 너… 잔인하다 정말…」 죽음을 쥐어짜는 듯이 괴로운 음색이었다. 예안은 내가 이 사람한테 돌 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주는 게 아닐까 순간적으로 겁이 났지만, 이게 다 유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래요. 난 잔인해요. 난 잔인하고 나쁜 애니까, 제발 앞으로는 나한테 관심 보이지 마세요. 당신 정도의 남자라면 얼마든지…" 앤드류는 말을 잘랐다. 「비겁해질 거야.」 처음에 예안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뭐라구요?" 「비겁해질 거라구. 난 비겁해지겠어. 더 이상 손놓고 있지만은 않을 거 야. 비겁해지더라도 내가 원하는 걸 달성하고 말겠어. 비겁해진 날 원망 해도 좋아. 얼마든지 미워해도 좋아. 하지만 난 날 이렇게 만든 널 절대 원망 안 할 테니까… 그럴 테니까…」 마지막 부분에서 울음에 젖어들었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전화 너머에서 조용히 울음을 곱씹는 소리가 들려왔고, 멍한 표정으로 폰을 귀에 대고 있던 예안은 서서히 손을 내렸다. "내가… 잘못한 걸까?" 스스로에게 그렇게 중얼거렸다가, 이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도리질 을 쳤다. "아니야. 난 잘못한 거 없어. 잘못한 게 있다면 나한테서 예안일 빼앗으 려고 드는 그 사람이라구. 난 잘못한 거 없어. 절대 없어…" 그렇게 도리질을 쳐보지만 마음 깊은 곳에 뿌리내린 죄책감과 불안은 쉽 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아마도 그건 괴로운 사랑이 가득 담긴 푸른 눈동 자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예안은 간밤에 전호 왔던 앤드류의 구슬픈 목소리가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가운데, 니콜라스와 함께 세정을 만나러 갔다. 자연히 안색이 좋을 리 없었다. "얼굴이 왜 그래? 어젯밤에 잠을 설치기라도 한 거야?" "으,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앤드류한테 서글픈 으름장을 받아서 겁먹었다는 말을 하기에는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그런데 누나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어… 나 지금 엄마 만나러 가는 거야." "엄마?"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살짝 입안에 굴리던 니콜라스는 다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보통은 모친이랑 부친이랑 같이 살기 마련인데, 누나는 그렇지 않군. 모친이랑은 헤어져 사는 거야?" "음 그게… 하여튼 그런 복잡한 사정이 있으니까 넌 묻지 말고 그냥 경 호나 잘해. 의뢰주의 사생활에 간섭해선 안 된다는 보디가드의 철칙도 잊은 거야?" 니콜라스는 별 감흥 없는 얼굴로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했 다.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는 표정을 볼 때마다 이 녀석은 역시 청부업자 다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곤 했지만, 어째서인지 그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자신이 더 이상했다. '젠장. 가뜩이나 앤드류 그 인간 때문에 머리 아파 죽겠는데 이 녀석까 지 신경 쓰지 말자. 엄마 일부터 일단 해결해야 하니까…' 처음 세정에게 연락했을 때 다짐했던 그대로 그녀에게 커다란 상처를 줄 수 있을 것인지 솔직히 지금 별로 자신 없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만큼 은 해봐야했다. 자신이 살아왔던 16년의 자존심을 걸고서라도. '아, 진짜 머리 아프다. 일단은 한 가지만 생각하자 한 가지만… 유진 우. 너 단세포인 거 잘 알고 있으니까 한 가지만, 알았냐?' 예안은 마음을 굳게 먹고 약속 장소인 피자집으로 들어갔다. 이층에 올 라가 주위를 둘러보니 이내 세정을 찾을 수 있었다. 전화로 미리 말한 대로 아이 둘의 모습이 보였다. 세정이 먼저 예안을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어서 와. 그런데 옆의 남자애는 누구니?" 예안은 니콜라스와 나란히 앉으며 대답했다. "제 친구의 동생이에요. 가족들이 미국으로 이민 갔는데 혼자 가기 싫다 고 고집 부려서 한국에 남았죠. 우리 집에서 하숙하고 있는데 심심하데 서 데리고 나왔어요. 어차피 아주머니도 아들 딸 데리고 나온다고 하셨 으니, 저 혼자 나오기도 좀 그랬구요." "그래? 남자애가 참 귀엽게 생겼구나." 예안은 맞은편에 세정을 가운데 두고 양옆에 앉아 있는 마리와 우성에게 힐끔 시선을 주었다. "얘들이 바로…?" "아, 인사해. 이쪽이 너랑 동갑인 최마리라고 하고, 얘는 최우성이라고 해. 지금 중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어." 우성은 익살맞은 귀여운 표정을 갖고 있는 소년이었다. 예안은 호기심과 의구심이 담긴 눈동자로 그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이 녀석이… 나랑 아빠가 다른 동생이란 말이지?' 어머니가 같으니 엄연히 친형제지간이라고 해야 옳겠지만, 자신은 받지 못한 어머니의 사랑을 혼자 독차지했을 거라 생각하니 질투가 솟아오르 는 걸 참지 못했다. 이제 와서 그런 걸 탐하는 건 유치하고 우습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한편 우성은 예안이 왜 그렇게 노려보는지 몰랐다. '왜 저러지? 나하고 비슷하게 생긴 녀석한테 돈 떼어먹힌 경험이라도 있 나? 으윽, 무섭잖아! 저건 꼭 판타스틱 디시젼에 나온 그 무서운 백인 여자 미군 같은 표정이잖아!' 예안의 적의를 어렴풋이 느낀 우성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듣고 상상하던 것보다 더 화려한 예안의 미모에 은근히 시선이 가는 것 도 사실이었다. '와, 근데 진짜 예쁘다. 꼭 연예인 같아… 정말로 진우 형이 이런 누나 랑 사귀었단 말이야? 게다가 지금 애까지 있고? 조금 샘나네.' 은근히 시선을 내려 아랫배 쪽을 더듬어 본 우성은 임신 4개월인데도 불 구하고 거의 부르지 않은 걸 보고 내심 놀랐다. "뭘 보냐?" 퉁명스런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우성은 재빨리 시선을 거두었다. 얼굴이 귀밑까지 붉어졌다. 가슴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쯧쯧쯧. 또 호기심에 위아래로 훑어 봤구만. 우성이 넌 그게 정말 안 된다니까.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런 짓을 하면 실례라는 것 아직도 몰라?" 마리는 혀를 차며 대신 사과했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 이 녀석 결코 음흉한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임신 4개월이라는데도 배가 안 불러 있으니 신기해서 그런 걸 거야. 두 살이 나 더 많은 네가 이해해. 그런데 네 이름이 서예안이라고 했던가?" "어." "들었다시피 난 최마리. 반가워.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마리는 사근사근한 성격답게 애교스런 미소를 띠며 손을 내밀었다. 차가 운 눈빛으로 묵묵히 그녀를 주시하던 예안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친하게 지내야 되는데?" 찬물을 끼얹은 듯 삽시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이렇게 냉담하게 나올 줄 몰랐던 마리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세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세정 역 시 어쩔 줄 몰라했다. "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데? 내가 여기 나온 건 친분을 쌓기 위해서 가 아니라 일을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서라구. 최마리라고 했지? 부디 착 각하지 말아줬으면 해." 당혹한 마리의 시선과 싸늘한 예안의 눈빛이 공중에서 얽혀 무거운 분위 기를 자아냈다. 나 죽어요 나죽어..T.T 어제 겨우 3시간 자고 일어나서 여태껏 깨어 있다 보니까 진짜 죽겠어요. 겨우 3연참 하고 넉다운 되기 직전이라니..T.T 크윽...T.T 아, 그리고 예안이가 언제 아이를 낳는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서 그냥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안이가 앤드류와 세정과의 사이에서 얽힌 갈등을 일단락 지으면 타임슬립을 합니다. 그러니까 '몇 개월 후' 이런 식으로 말이죠.^0^ 그러니 조바심 내지 마시고 천천히 따라오세요. 어차피 전 연재속도가 빠른 편이잖아요?-_-; 연재한지 두 달 밖에 안 됐는데 사실상 꽤나 이야기 진행되지 않았나요? 아니면 진행된 게 없나--;;; 오늘 진짜 몇 연참까지 가는지 작정을 내렵니다.(무슨 쌈하러 나가냐?-_-;)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16 회] 날 짜 2004-01-07 조회 / 추천 4418 / 58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비참해질 수 없는 이유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던 무거운 침묵을 제일 먼저 깨뜨린 건 마리 의 음성이었다.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다고? 그게 무슨 뜻이니?" "말 그대로야. 난 아주머니, 그러니까 네 의붓어머니 되시는 저분이나 너, 그리고 네 동생하고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아. 어차피 정리만 확실하게 하면 다신 안 볼 텐데, 친하게 지낼 까닭이 없잖아? 그럴 필요 도 없고 말이야." "그래?" 마리의 눈동자가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조금 전에 있었던 당혹함은 어 딘가로 사라져 버린 여유 있는 눈빛에 예안이 당황하고 있을 때, 물컵을 쥔 마리의 오른손이 갑자기 위로 번쩍 들렸다. "꺄악!" 자신에게 물을 끼얹는 줄 알고 놀란 예안은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들어 얼 굴을 가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예상했던 느낌이 오지 않자 슬그 머니 팔을 들었다. 마리가 물컵을 높이 든 채 웃고 있었다. "후후, 너도 그렇게 겁먹을 줄 아는구나? 그래, 너같이 예쁜 애한텐 그 런 귀여운 모습이 보기 좋아. 괜히 어울리지 않게 무뚝뚝한 척 해봐야 다 소용없다구. 그렇게 해봐야 아무도 널 강하다고 보지 않아. 안쓰럽게 만 생각하지." "뭐, 뭐야…" 자신이 놀림 받았다 여긴 예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니콜… 차성주. 넌 왜 저거 안 막았어? 그러고도 네가 내 보디… 야?" 시선은 마리에게 둔 채 이를 갈며 나지막하게 묻자, 무뚝뚝한 대답이 돌 아왔다. "누나한테 특별히 위해가 간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래서 내버려둔 거 야. 어차피 물벼락을 맞은 것도 아니잖아?" "너…" 그렇게 이를 갈아도 보았지만 니콜라스에게 화를 내봤자 무엇하겠는가. 예안은 분노의 화살을 마리에게 돌렸다. "사람 그렇게 갖고 놀면 재밌냐?" "어머? 내가 언제 갖고 놀았다고 그래? 난 그냥 갑자기 일어서서 물을 마시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지레 겁먹어서 놀란 것뿐이라구." "너…" 능청스러운 태도에 할 말을 잃은 예안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어쩐지 마 리가 미웠다. 냉정하게 따졌을 때 마리의 태도는 장난이 지나치긴 했어 도 그다지 무례하진 않았지만, 세정의 의붓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예 안에게는 충분히 미움의 대상이었다. "자, 우리 이렇게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살벌하게 말로 칼싸움하지 말 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친분을 다져 가는 게 어떨까? 어? 피자 나왔네?" 마리는 좋아라 하며 종업원이 내려놓고 간 피자에 손을 뻗었다. 두 판의 피자를 칼로 썰어놓고 난 뒤 마리는 한 조각을 들어 예안에게 내밀며 생 긋 웃었다. "자, 먹어. 임산부는 많이 먹어둬야 하잖아." 마리는 자신을 노려보는 이글거리는 녹색 눈동자가 겁나지 않은지 웃음 띤 얼굴이었다. 어쩐지 분한 기분이 든 예안은 작은 소리로 이를 갈았 다. "치워. 필요 없어." "그러지 말고 먹어. 임산부는 많이 먹어야 한다구. 듣자 하니까 너 태아 크기도 디게 작다며? 그게 다 네가 잘 먹지 않아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사양하지 말고 먹어. 응?" "싫어." "먹어라. 응?" "싫다니까." 몇 번 더 권했지만 예안이 끝내 피자를 받지 않자 마리는 할 수 없이 자 신의 종이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이 맛있는 걸 안 먹겠다니. 식성도 참 특이하지, 쯧쯧쯧…" 마리는 일부러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기를 갖고 있는 예안이 먹고 싶어할 거라 생각해 최대한 연출에 신경 썼다. 그녀의 뜻을 알아차 린 세정과 우성도 각각 피자 조각을 집어들어 동조했다. "아유, 피자가 참 맛있네." "그러게요 엄마. 진짜 맛있죠? 우성이 너도 많이 먹어. 야, 진짜 맛있 다. 이거 한 판 더 시켜야 하는 거 아닌지 몰라." "아앗! 누나, 이 피망 좀 봐! 꼭 얼마 전에 본 X-5에서 테러범들이 비행 기 꼬리날개 부분에 설치한 플라스틱 폭탄처럼 생겼어." "너는 허구헌날 비행기 구출 영화 밖에 모르지? 쯧쯧쯧, 그러니까 그 나 이 되도록 여자친구 하나 없지." 세 사람이 연출이라도 하듯 맛있게 먹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니콜라스와 예안은 피자에 손도 대지 않았다. 예안의 새하얀 얼굴이 점점 새파랗게 질려 가는 걸 쳐다보며, 마리는 내심 먹혀들고 있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 렀다. 그때였다. "우욱! 우욱!"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새파랗게 질린 안색이던 예안은 결국 터져 나오는 구역질을 참지 못했다. 당황한 마리들은 먹던 피자를 내려놓았다. "왜 그래? 괜찮아? 괜찮은 거야?" 놀란 세정이 얼른 달려와서 등을 두드려 주었다. 마리는 괜히 자신이 그 런 짓을 했다는 후회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괜찮니?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미안해 괜히 약올려서…" 숨을 고르려 애쓰던 예안은 잠시 후 안색이 좋아졌다. 하지만 아직 가쁘 게 숨을 몰아쉬는 걸 봐선 정상은 아닌 듯 했다. "괜찮니? 괜찮은 거야?" 예안은 힘들게 떠듬떠듬 대답했다. "괘, 괜찮으니까 이거나 좀 놓으세요…" 그 와중에도 자신에 대한 경계를 거두지 않는 단호함에 세정은 하마터면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어떻게 예안의 마음을 열 수 있을지 몰라 암담하 기만 했다. '정말이지…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니? 응?' 차마 입밖에 낼 용기가 없어 마음 속으로 그렇게 물어보지만 만족스런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세정은 한숨을 내쉬며 예안의 어깨를 놔주었 다. 자세를 바로 하고 앉은 예안은 핼쑥한 뺨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 며 입을 열었다. "참, 고상한 취미를 갖고 계시네요." 세정과 마리, 우성은 움찔해서 아무 말도 못했다. 피자에 입덧 할 줄 알 았으면 그런 짓을 했겠나 하는 후회가 담긴 표정이었다. "더 이상 히히덕거리면서 앉아 있고 싶지 않네요. 용건만 빨리 정리하고 이만 집에 들어가고 싶으니까, 이제 그만 진지해지는 게 좋겠죠?" 싸늘하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는 섬뜩한 독을 품은 채 비수처럼 마음을 찔러온다. 미안함과 섭섭함으로 뒤범벅이 된 세정은 예안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잔뜩 긴장한 나머지, 조금 전에 예안의 그 행동이 연극에 불 과했다는 걸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건 마리와 우성도 마찬가지였다. 으억 짧다 짧아.T.T 그나저나 천국의 계단에서 차성주가 아니라 차송주였다니..으윽 촌스런 이름.-_-;; 그냥 차성주로 나가야지..;;; 4연참이 한계네요. 더는 못 쓰겠습니다. 어제 4시간도 채 안 자서 졸 려 죽을 것 같기도 하고, 또 동생이 컴터를 달라고 해서요. 그리고 오늘부터 며칠 간 연재 없습니다. 쟈인 님 말씀대로 연중의 병원에서 좀 쉬어야겠습니다.-ㅅ-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116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17 회] 날 짜 2004-01-09 조회 / 추천 4354 / 64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고백 타임 이 코너는 예전에 제가 고민했던 걸 고백한 타임이었습니다. 지금은 필요 없다 생각해서 지웁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18 회] 날 짜 2004-01-12 조회 / 추천 4174 / 79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비참해질 수 없는 이유 "제가 원하는 건 두 가지예요." 세정들은 기가 죽은, 한편으로는 예안이 무슨 말을 할지 걱정이 된 표정 으로 귀담아 들었다. "첫째, 지금의 제 아빠, 그러니까 진우의 친아버지 되시는 그 분에게 아 주머니가 사과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사과는 했어. 그렇지만 전에도 말했다시피 그때 그 사람 얼굴이 다친 건 내가 때려서가 아니라 넘어지려는 날 부축하다가 그만 얼굴을 부딪쳐 서 그랬던 거야." "누가 그걸 사과하라고 했나요?" 그럼 무얼 사과하라는 말인가. 세정이 말뜻을 몰라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예안은 회심에 찬 미소를 지었다. 남자였을 때부터 이런 순간이 오기 만을 정말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다. "아주머니는 진우가 젖먹이였을 때 혼자 아빠에게 남겨두고 자기 인생 찾아 가버리셨잖아요. 그거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그건…" 생각 같아서는 네가 그런 요구를 할 자격이 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 래봐야 예안이 원하는 대로 흘러간다는 걸 이미 경험한 세정은 꾹 참았 다. 예안이 자신의 손자를 갖고 있는 한 자신은 무조건 져 줘야 할 입장 이었다. "야,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반대로 오늘 예안과 초면인 마리가 따지고 나섰다. 당황한 세정이 말리 려고 했지만 마리는 가만히 있으라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네가 진우라는 남자애 아니면 진우 아버지라는 분한테 무슨 소리를 들 었는지는 솔직히 몰라. 하지만 그때 엄마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 다구. 쥐꼬리만큼 모이는 돈을 동생들 공부시키는 데만 쏟아 붓고 가정 은 소홀히 하는 남편을 도대체 어느 누가 좋아하겠니? 그리고, 네가 진 우도 아니면서 그런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나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니까 이런 말 할 자격이 없다?" "그, 그게 그렇게 되나…" 싸늘한 기도에 말문이 막힌 마리는 버벅거렸다. 예안의 눈빛이 싸늘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럼 협상 결렬. 차성주, 그만 가자." 예안이 정말 가버릴 것처럼 굴자 세정은 놀라 손을 붙들었다. "어, 어딜 가려고 그래?" "말 그대로예요. 사과를 못하시겠다니 협상 결렬이죠." "하, 할게. 하면 되잖니. 할 테니까 일단 앉아." 세정이 지나치게 쩔쩔매는 걸 보고 마리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입을 열진 않았다. 예안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앉았다. 주도권을 쥐 고 있는 건 확실히 자신이었다. "일단 아빠께 사과하신다니 그걸로 됐고, 두 번째 조건을 말할게요." 세정은 잔뜩 긴장한 채 듣고 있었다. "두 번째 조건은 별거 아니에요. 오히려 아주머니가 더 들어 주기 쉬운 거예요. 앞으로 절 귀찮게 하지 말아달라는 것." "?" "이해 못하신 표정이네요. 말 그대로예요. 제가 아이를 낳더라도 아이 보고 싶다는 둥 그런 식으로 절 귀찮게 굴지 말아달라는 거예요. 대신 아주머니는 아이 할머니가 되니까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보여드릴 수 있 어요. 어때요?" 세정의 얼굴이 경악으로 새하얗게 질렸다. 마리와 우성 역시 생각하지 못한 어이없는 제안에 입을 떡 벌렸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최마리. 네가 들은 그대로야. 더 이상 설명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아주머니가 내 아이의 할머니뻘은 되니까 나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겠 다는 거지. 일 년에 한 번 보여주는 거. 그 이상은 나도 안 돼." 단번에 세정과 인연을 끊어버리는 게 아닌, 두고두고 애타게 하면서 상 처를 주고 싶다는 복수 심리가 담긴 제안이었지만 세정은 그 숨은 뜻까 지 눈치채지 못했다. 예안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게 자신의 아들이라 는 걸 까맣게 모르는 이유도 있지만, 설마하니 예안이 고의적으로 자신 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한다고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안 돼. 그건 절대 안 된다." 놀랐던 것도 잠시. 세정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하? 안 된다고요? 어째서요?" "어찌 되었든 간에 넌 내 손자를 갖고 있어. 난 내 손자가 그 사람 밑에 서 크는 꼴은 못 본다. 자기 아들도 제대로 못 보살핀 그 사람이 손자를 키울 자격은 없어." "그럼 제 아이를 저한테서 떼어놓겠다는 건가요?" "아이를 엄마한테서 떼어놓을 순 없지. 너도 내가 데리고 갈 거야. 그러 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둬. 널 내 딸로 넣는 한이 있더라도 난 그 사 람한테 너랑 네 아이 양보 못 해." 단호한 의지가 가득 실린 음색이었다. 하지만 그건 예안에게 일이 쉽겠 다는 자신감만 불어 넣어주었을 뿐 아무런 감동도 피워내지 못했다. "아주머니. 지금 뭔가를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저는 지금 아주머니 랑 협상을 하는 게 아니라 일방적인 요구를 하는 거예요. 물론 들어주든 들어주지 않든 크게 상관은 없어요. 막말로, 아주머니가 아빠에게 사과 를 한다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없으니 사과 안 하고 그냥 넘어가도 상 관없다구요." 무뚝뚝한 표정과는 달리 일이 술술 풀려나간다는 흥분에 취해 예안의 가 슴은 뛰고 있었다. 반대로 세정의 얼굴은 핼쑥해졌다. "사실 아주머니가 억지로 아빠에게 사과한다 해서 진심으로 미안해서 그 러는 것도 아니니까 전 안 들어주셔도 그만이거든요? 그래도 아주머니는 진우 어머님이 되시니 일 년에 한 번쯤은 손자 얼굴 보여주는 게 도리라 생각해서 제가 이러는 건데,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제가 할 말이 없 죠. 절 데리고 가신다구요? 기가 막히네요." "서예안! 너 어른한테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해!" 보다 못한 마리가 그렇게 쏘아붙였지만 예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넌 끼어 들지 마. 이건 아주머니하고 내 문제야." "끼어 들지 말라고 해도 끼어 들어야겠어. 듣자듣자 하니 너 정말 너무 한 거 아니야? 따지고 보면 지금 엄마는 널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라구! 나하고 우성이 눈치도 있는데 엄마가 널 우리 집안 가족으로 데 려가려고 마음먹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네가 알기나 해!" "날 가족으로 데려간다구?" "그래! 이미 우리 집에서는 그렇게 결정 났어! 널 우리 가족으로 받아들 이기로." 마리는 사나운 표정을 지우고 한층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정말 너한테 다른 욕심이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너하고 장 차 태어날 네 아이를 보살펴주고 싶어서 그러는 것 뿐이야. 경제적인 능 력이 거의 없는 진우 아버지한테 너하고 손자를 맡겨두는 게 엄마 입장 에서 얼마나 괴로운지 한 번 생각해줬으면 해. 그리고 널 진우 아버지랑 못 만나게 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 순간, 예안은 이럴 경우를 대비해 가방에 넣어두었던 백 억짜리 수표 를 꺼내어 보여주고 싶단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참았다. "우리 집 이래 뵈도 꽤나 부자야. 그러니까 진우 친척이랬던가? 적어도 그 집안 사람들보다는 잘 살 거야 아마. 우리 아버지가 꽤나 유명한 회 사 사장이시거든. 우리 정말 너한테 뭘 바래서 같이 살자는 게 아니라 단지…" "됐어. 거기까지. 그만해." 예안은 불쾌한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최마리. 미안하지만 난 지금 너랑 네 의붓어머니랑 타협을 하러 온 게 아니야. 내 요구가 받아들여지느냐 안 받아들여지느냐 그게 중요할 뿐이 라구. 자, 아주머니. 빨리 선택하세요. 제가 내건 그 두 가지 요구, 들 어주실 건지 말 건지요." 세정은 암담했다. 이혼한 것 때문에 정호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건 아니 었지만, 자신의 아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 지만 이제라도 사과를 하고 싶어도 이미 아들은 죽어 버렸다. 너무 늦은 것 같지만 그래도 죄책감을 씻을 겸, 그리고 아들에게 속죄할 겸해서 예안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정호에게 사과 하라는 첫 번째 요구는 쉽지만 두 번째 것만큼은… "미안해. 아무래도 두 번째 것은 들어주기 힘들 것 같아. 꼭 날 위해서 만이 아니라 너하고 태어날 네 아이를 위해서 그것만큼은 절대로… 차라 리 다른 건 안 되겠니?" "안타깝네요.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쯤은 아이 얼굴이나마 보여드리려 했 는데 아주머니가 그걸 마다하다니. 좋아요. 이왕 이렇게 됐으니 아빠께 사과 같은 거 하지 않으셔도 돼요. 대신에 앞으로 다신 저도, 제 아이도 찾지 말아주세요. 아셨죠?" 말을 끝마친 예안이 그대로 일어나려 하자 마리가 황급히 나서서 말렸 다. "잠깐만, 일단 앉아 봐. 내 얘기도 한 번 들어보는 게 어때?" "무슨 얘기?" "일단 앉아 봐. 앉아서 들어. 몸도 무거운데 그렇게 서서 들을 거야?" 예안은 말없이 마리를 주시하다가 다시 앉았다. 심드렁한 태도였지만 사 실 속으로는 마리가 무슨 말을 할지 몹시 궁금했다. "음. 내가 지금 막 생각해봤는데, 이건 어때?" "?" "넌 지금 우리 엄마한테 굉장히 나쁜 선입견을 갖고 있어. 사실상 그걸 깨뜨리지 않는 한 네가 어떤 요구를 하든지 간에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거야. 적어도 공정한 기회는 주어져야 하는 거 아니야? 네가 무 턱대고 '무조건 일 년에 한 번'이라고만 말하는데 엄마 입장에서는 그건 절대 못 들어주는 거지. 안 그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예안 뿐만이 아니라 세정과 우성도 마리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궁금 히 여겼다. 청부업자 인생으로 닦아온 감각을 극대화시켜 혹시라도 있을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니콜라스만이 무관심했을 뿐이다. "우리 집에서 몇 달, 아니 몇 주 정도만 일단 같이 살아보는 게 어때? 그 다음에 결정해도 늦지 않잖아?" "뭐?" "그다지 어려운 조건은 아니잖아? 난 엄마가 얼마나 좋은 분인지 너한테 알려주고 싶어. 너도 무턱대고 한쪽 이야기만 듣고 판단하는 게 좋지 않 다는 것 정도는 알 텐데? 짧은 기간이나마 함께 살아보면 어느 정도는 엄마에 대해 알 수 있을 테니까 오히려 좋은 거 아니니? 아니면 정말 그 냥 지금 이대로 바이바이 해버릴 거야?" 세정이 '역시 우리 딸!'이라고 좋아하고 있을 때, 예안은 두근거리는 가 슴을 티 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세정에게 보다 더 큰 상처를 주 기 위해서라면 마리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오히려 좋은 것이었다. 예안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난 별로 그러고 싶진 않은데?" "하지만 예안아."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물론 내가 지금 한쪽 이야기만 듣고 네 의붓어 머니를 나쁘게 보는 건지도 몰라. 하지만 네가 지금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는데, 난 지금의 아빠랑 같이 사는 게 좋지 너네 집에서 살고 싶 지는 않다는 거야. 네 의붓어머니는 단지 자기 욕심 때문에 나를 끌어들 이려 하고, 난 그게 싫다는 것뿐이라는 것도 모르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조리 있는 반박에 막힌 탓도 있지만, 무 거운 음색에서 진심을 느꼈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됐어. 이쯤에서 풀어주자.' 승기를 확실히 잡았다고 뿌듯해하던 예안은 흥분을 티 내지 않도록 조심 하며 입을 열었다. 선심을 쓰는 듯한 어조였다. "하지만 네 말도 나름대로는 맞는 것 같다. 그러니 당분간은 한 번 네 의붓어머니랑 살아보는 것도 좋겠지. 정말 내가 아주머니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던 거라면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니까." "진짜야? 와, 잘 생각했어. 나 정말 너한테 아주아주 잘 할게~ 그러니까 너도 나랑 우성이랑 엄마 많이 좋아해 줘." 마리와 우성은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양 좋아했다. 세정은 얼떨떨해 하면서도 굉장히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냉소를 짓고 있는 녹색 눈동자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곧 자기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그렇게 꺼림칙한 기분을 마음 한 구석에 덮어두었다. '어쨌든 다행이야. 앞으로 잘하면 되겠지.' 세정은 오랫동안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고민을 씻어버린 개운한 표정으 로 예안의 얼굴을 웃으며 들여다보았다. 예안의 몸 속에서 자라고 있을 손자를 몇 달 후면 안아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 다. 예안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까맣게 모른 채.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19 회] 날 짜 2004-01-13 조회 / 추천 4076 / 52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비참해질 수 없는 이유 그럭저럭 어느 정도 타협을 본 후 차후에 대하여 몇 가지 의논한 결과, 예안이 일정 기간 동안 세정의 집에서 머무른 다음에 어떻게 할지 판단 하는 걸로 결정 났다. 대화를 마무리지은 후 마리와 우성은 오늘 하루는 친분을 쌓을 겸 같이 놀자고 예안에게 제안했지만, 예안은 어서 집에 가서 아빠에게 말씀드려 야 한다고 거절했다. "그럼 전 이만 갈게요." "그래. 잘 가." 세정들은 몹시 아쉬워하며 예안과 헤어졌다. 니콜라스와 함께 피자집을 나온 예안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배를 부여잡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니콜라스, 너도 봤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 표정, 진짜 웃기던데. 아이고 웃겨. 푸하하하!" 웃음을 참지 못하는 예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니콜라스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누나, 아까 아침에는 엄마 만날 거라고 하던데, 대화를 들어보 면 엄마와 딸 사이가 아닌 걸? 어떻게 된 거야?" "아, 그건 말이야." 예안은 흠칫했지만 그럴 듯하게 둘러댔다. "아, 사실 그 아주머니 내 친엄마는 아니고 내 아이의 할머니가 될 사람 인데 그냥 그렇게 말하는 게 편해서 그랬어. 사정 설명하려면 좀 복잡하 잖아? 게다가 내 개인적인 사정이기도 하고… 하여튼 좀 그래. 그러니까 묻지 말고 그냥 넘어가." "아, 그랬구나. 알았어." 니콜라스는 별 감흥 없이 끄덕였다. 별 관심 없어 보이는 태도였다. "근데 지금부터는 뭐할 거야? 이대로 집에 들어갈 거야?" "아니. 나온 김에 아기용품 좀 둘러보고 갈 거야." 예안은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니콜라스는 약간 허망한 표정으로 중얼 거렸다. "아기용품이라…" 보통 이런 경우에는 강한 질투와 분노를 느끼는 게 정상적인 '수컷'의 반응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그렇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보통 남자는 질투를 하기 마련이라고 니르가 그랬어. 근 데 왜 난 그런 게 없는 거지?' 머리로서 알고 있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건 좁혀지지 않는 수평선과 같은 것인가 보다. 니콜라스는 자신이 어째서 질투 따위를 느끼지 않는 건지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지금의 이런 긴장된 두근거림이 언젠가 자신 의 기억을 되살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은밀한 기대만을 즐기기로 마 음먹었다. 예안은 평소 자주 들리던 가게로 갔다. 늘 그렇듯이 30대 초반의 가게 주인은 자신을 반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울한 안색이었다. 더욱이 오 늘은 니콜라스와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거의 울 듯한 표정까지 짓곤 했다. 예안은 도대체 그가 왜 그런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뭐 사정이 있나 보다 하고 그냥 넘어갔다. "재원씨, 이거 좀 봐요. 예쁘죠?" "어, 아주 예뻐. 이거 그냥 살까?" "음… 그렇지만 색깔은 저게 더 예뻐요. 아~ 고민되네. 도대체 뭘 사야 하지?" "생각할 것 없이 그냥 둘 다 사버리자." "그럴까요? 어? 근데 재원씨, 저기 좀 봐요. 척 보니 학생인 것 같은데 왜 쟤네들이 이런 곳에 와 있죠?" "허? 정말 그렇네?" 예안은 이곳에 올 때마다 항상 다른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수군거리는 걸 부끄러워하곤 했지만 오늘은 그 강도가 한층 더 심했다. 니콜라스가 바 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니콜라스와 자신의 관계를 저울질하 며 속으로 별의별 상상을 다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예안은 그만 얼굴 을 확 붉혔다. "사람들이 누나하고 나만 쳐다보는 것 같은데." "괘, 괜찮아. 그냥 무시해. 신경 꺼." "얼굴이 빨개졌어. 괜찮아?" "괜찮으니까 너도 신경 꺼. 일이나 잘해." 귀밑까지 빨개졌으면서 괜찮다고 하는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건지. 니콜 라스는 일단 예안의 말대로 관심을 끄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안은 훗날 아기가 태어나면 어차피 자주 들러야 할 터이니 지금부터라 도 경험을 쌓는다는 목적 하에, 창피함을 무릅쓰고 끝까지 둘러보았다.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에도 여전히 해는 머리 위에 걸 려 있었다. 나오자마자 예안은 안도의 한숨을 푸하 토해냈다. 여긴 산부인과를 혼자 갔을 때와는 미묘하게 다른 스릴이 있는 곳이었다. "잘 몰랐는데 의외로 아기 용품 값이 비싸더라." "그렇지? 나도 몰랐다가 이번에 알았어. 들어가는 천의 양이 작다고 해 서 무조건 값이 싼 건 아닌 모양이야. 에혀, 돈이 좀 깨지겠지만 뭐어 그 정도쯤이야." 유전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나중에 김재 호의 할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다는 유한 그룹을 무너뜨리게 되면 그때야 실감이 날까. '진짜 한 번 날잡아서 어떻게 해줘야 하는데… 그렇지만 내가 그런 쪽으 로는 도통 아는 게 없으니… 변호사 같은 걸 고용하면 될까?' 예안이 그렇게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으앙~" 웬 꼬마여자애가 우렁차게 우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놀라서 쳐다보니 놓친 공이 저쪽으로 굴러가는 걸 보고 발을 동동 구르며 여자 애가 울고 있었다. 다섯 살쯤 되어 보였다. "니콜라스. 공 좀 주워 주지 그래? 애가 울잖아." "내가?" 니콜라스는 탐탁하지 않다는 태도로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여자애를 흘 끗 쳐다보다 말없이 등을 돌렸다. 공을 주우러 가기 위해서였다. "얘. 걱정 마. 저 오빠가 네 공 주워 줄 거야." 얼마 안 있어 자신도 어머니가 된다는 것 때문인지 예안은 아이들을 보 는 눈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여자애는 곧 울음을 그치고 똘망똘망한 눈 을 들어 예안을 올려다보았다. 마냥 귀엽다고 느낀 예안이 웃음을 머금 고 막 쓰다듬어주려는 찰나였다. "미안해 언니." "?" 웃는 얼굴로 의아해하던 예안은 그때 누군가가 목덜미를 내리친다는 걸 마지막으로 느끼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아이다운 천진스런 표정으로 정신을 잃은 예안이 남자들의 부축을 받는 걸 지켜보던 여자애는 손을 내밀었다. "시킨 대로 했으니 이제 사탕 주세요." "그래, 잘 했어. 여기 있다." 남자가 내민 커다란 사탕을 받아든 아이는 포장지를 벗겨 입에 넣고는 한껏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남자들은 서둘러 기절한 예안을 차에 실었다. 또르르르. "젠장." 또르르르. 또르르르. "이씨. 저게 사람 약올리는 거야 뭐야!" 또르르르. 또르르르. 또르르르. "너 이리 안 와!" 잡으려고 손을 뻗을 때마다 마치 눈하고 발이 달린 것처럼 다시 또 굴러 가기 시작하는 고무공. 니콜라스는 평정심을 잊고 흥분했다. "잡았다!" 간신히 공을 움켜잡은 니콜라스는 의기양양하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 왔지만 예안은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공을 놓쳤다고 징징거리던 여자애 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건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던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이내 바닥에 무언가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집어들고 자세히 확인해보니 예안이 갖고 다니던 핸드폰이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어이없어 하던 니콜라스는 이내 누군가가 예안을 납치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얼굴이 핼쑥하게 질렸다. "젠장." 흙빛이 된 그는 평정심을 잃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미리 예안의 옷 에 발신지를 몰래 붙여놓은 걸 떠올리고 서둘러 추적장치를 꺼냈다. 반 짝이는 붉은 점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걸로 보아 차에 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의 눈동자에 차가운 저주가 섬뜩하게 이글거렸다. "겁을 상실한 녀석들한텐 총알이 약이지." 니콜라스는 서둘러 흔적이 남아 있는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비밀주머 니에 숨겨 놓은 권총을 꺼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아빠가 깨우는 소리를 들 은 것처럼 희미하게 주변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라 생각해 그대로 의식의 끈을 놓으려던 예안은 자신이 납치되었다는 걸 퍼뜩 깨달았다. '니콜라스는… 어디?' 하마터면 그대로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예안은 필사적으로 참았다. 오싹 한 공포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지만 '나는 강해'라고 암시하듯 되뇌이 며 무서움을 달랬다. 납치범들에게 자신이 깨어났다는 걸 알리지 않기 위해 예안은 아주 조심 스레 눈을 떴다. 순간 눈에 들어온 풍경에 예안은 자신이 어느 호텔에 감금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도대체 누가 날…' 정신이 들자 조금씩 자신이 어떻게 해서 납치 당했는지 새록새록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니콜라스랑 같이 아기용품집을 들른 후 집으로 향하 다가, 어떤 꼬마애가 공을 놓쳐서 울고 있기에 니콜라스에게 공을 주워 주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꼬마를 달래주려는 찰나에 그 애가 분명 '미 안해 언니'라고 말했고. 슬슬 어떻게 된 건지 판단이 섰다. 자신은 또다시 시트날타에게 납치 됐 음이 틀림없었다. '젠장, 나 정말 바보 아냐? 시트날타 녀석들한테 벌써 두 번씩이나 잡혀 가고… 제길! 그 녀석들은 도대체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았지?' 도대체 어떻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아냈는지, 그 용의주도함에 예안은 치를 떨었다. 하지만 일단 시트날타라면 위해는 가하지 않을 거라는 생 각에 예안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 깨어났어. 야, 빨리 전화 해. 여자 깨어났다고." "쯧쯧쯧, 저런 고급 상품을 때려서 기절시킨다는 것도 사실 별로 내키지 않다구. 그냥 내가 말한 대로 약을 썼으면 좋았잖아. 뭐 상처는 안 났으 니 다행이지만." "야야야. 형님이 하신 말씀 못 들었어? 저 여자는 마취약 같은 게 잘 안 통하는 체질이랬잖아. 자칫하다가 고함이라도 질렀으면 그대로 엿 될 뻔 했다고. 서울 시내 한가운데에서 사람 납치한다는 게 어디 쉬운 줄 알 아?" 사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예안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렸다. '뭐, 뭐야? 이 녀석을 시트날타가 보낸 놈들 아니었어? 나 그냥 인신매 매범한테 잡힌 거야?' 그 순간 떠오른 것은, 과연 내가 이 녀석들한테서 유젤의 몸을 지킬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때 험상궂은 얼굴을 가진 사내가 히죽 웃 음과 함께 자신에게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지만, 공포로 얼어붙은 예안 은 도망칠 생각조차 못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20 회] 날 짜 2004-01-13 조회 / 추천 4181 / 54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비참해질 수 없는 이유 니콜라스는 추적 장치의 붉은 점이 있는 방향을 향해 시속 96km의 속도 로 뛰었다. 인간의 움직임이라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속도였지만 그에게 는 거북이 움직임처럼 느리고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이윽고 그는 붉은 점이 정지해 있는 장소까지 도착했다. 꽤나 그럴싸한 호텔이었다. 그는 손바닥에 감춘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떨리는 가슴을 움 켜잡았다. 가능한 태연한 척 애쓰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저 혹시 깊이 잠든 여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 없었나요? 대충 17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잔데…" "예? 그건 왜 물어보세요? 있긴 한데…" 여직원의 목소리엔 의아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 니콜라스는 속으로 빙고 를 외쳤다. "저희 누나거든요. 집안 어른들이 이 호텔로 오라고 했는데 몇 호실인지 는 깜박 잊어 버렸어요." "아하, 그랬군요. 2055호로 가보세요." "고맙습니다." 상황을 보아하니 호텔 여직원을 매수한 것 같진 않은 듯 했다. 하긴 납 치에 따르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선 매수 같은 자잘한 짓거리는 안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왜 하필이면 이런 호텔로 데리고 왔을까?' 태연히 2055호실로 향하던 니콜라스는 문득 머리에 떠오른 의문에 그 자 리에 멈춰 섰다. 현재 예안을 납치했을 거라 의심되는 제나르가 설마 그 런 머저리 짓을 할 리가 없을 텐데? '정말 이상하네. 제나르 의원이 그 정도 바보는 절대 아닐 테고…' 한국 정부가 구출 비용으로 5백 억원을 쏟아 부을 정도면 예안은 무언가 대단한 비밀이 있는 여자임에 틀림없다. 그런 여자를 납치하는데 신속하 게 외국으로 도피하지 않고 이렇게 버젓이 시내 호텔로 들어온다는 건 뭔가 이상했다. '아니면 지금쯤 이 나라를 빠져나가는 길목마다 전부 감시망이 펼쳐졌을 거라 생각해서 소동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그럭저럭 납득은 되겠지만 의심쩍음은 지워지지 않는 다. 일단 니콜라스는 그런 것보다는 예안을 구출해내는 데 집중해야한다 고 스스로를 나무랐다. 2055호실에 가까워지자 살벌한 분위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 도 의심하지 않는다. 역시 나이가 어리다는 건 좋은 것이다. 13살인 그 를 보고 누가 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할 것인가. "꼬마야. 여기서 서성거리지 말고 빨리 가라. 알았니?" 척 봐도 삼류 건달임에 분명한 사내가 2055실 앞에서 서 있다가 니콜라 스를 나무랐다. 제 딴에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한다고 했는데 낡은 유리 창이 떨리는 것처럼 듣기 싫은 음색이었다. "죄송해요. 길을 잃었어요. 2054호실이 어디예요?" "2054실이면 바로 여기잖냐. 어여 들어가라." 칼자국과 함께 나란히 2055실 앞에 서 있던 덩치가 손가락으로 2054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니콜라스는 2054실 앞에 서서 고개를 갸웃하다가 뒤를 돌아보며 일부러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여기가 아닌가 봐요. 제가 잘못 안 것 같아요. 프론트로 가서 다시 물 어봐야겠어요." "그래, 그래라. 부모님이랑 같이 왔니?" "네. 그럼 수고하세요 형들." 형들이란 소리에 덩치들은 기분이 좋은 듯 허허 웃었다. '일단 저기가 확실한 것 같군. 추적장치로 봤을 때도 맞고 말이야.' 니콜라스는 등을 돌린 채 걸음을 옮기면서 다시 한 번 추적장치를 확인 했다. 붉은 점의 위치로 보나 덩치들이 지키고 있는 걸로 보나 예안이 저곳에 있는 게 확실했다. 남은 것은 어떻게 구출하느냐 하는 것뿐. "근데 저기 저 여자 정말 새끈하던데, 우리도 한 번 건드려볼 순 있는 거냐?" "야야, 말 마라. 보아하니 보스 여자일 게 뻔한데 잘못 건드렸다가는 네 거시기는 댕강! 이렇게 된다구." "씁, 맘 같아선 기냥 보따리로 둘러매고 어디 튀고 싶구만. 키킥." "야야, 누군 안 그러냐? 그냥 네 애인 얼굴에 가면 씌워놓고 저 여자 얼 굴이라 생각하고 실컷 어루만져 주라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능력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더 있냐?" "씁, 가면만 씌워 놓으면 뭘 해. 벌써부터 뱃살이 늘어지기 시작했구 만." 두 남자가 낄낄거리며 음담패설을 주고받는 걸 듣던 니콜라스는 주먹을 꾹 쥐었다. 당장이라도 저 녀석들의 얼굴을 후려갈겨 주고 싶었지만 간 신히 참았다. '그냥 쳐들어가서 쓸어버리는 거라면 자신 있지만 인질이 다치면 안 되 니까…' 니콜라스는 경호나 인질 구출 작전에는 경험이 거의 없는 자신을 원망하 며 그 자리를 떴다. "이봐." "네, 네?" "그렇게 쫄지 마. 뭐 어떻게 할 생각 같은 건 없으니까 말이야. 이래 뵈 도 보스 명령 하나는 칼같이 지킨다구." 남자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예안은 자신의 몸을 보호하듯 끌어안고 있던 두 팔을 풀지 않았다. 겁먹은 병아리처럼 자신을 잔뜩 경계하는 예 안을 신기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남자는 다시 말했다. "그런데 보스랑 너랑 무슨 관계지? 우리 보스는 비록 여자 관계가 지저 분하긴 해도 미성년자는 건드리지 말자는 철칙이 확실한 사람인데 말이 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대들었다가는 이 녀석들이 홧김에 유젤의 몸을 더럽힌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예안은 속으로만 으르렁거렸다. '그나저나…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윤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맞아듦에 따라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트날타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날 납치한 거지? 맥이 내 거라는 건 아직 아는 사람이 없을 텐데… 우리나라 정부가 그 정도로 정보 관리를 못할 리도 없고… 또 정보가 누출됐으면 나한테 미리 말했을 텐데…' 두려움이 가라앉자 머리 속이 점차 맑아졌다. 하지만 자신을 납치하라고 지시한 자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짚이지 않았다. '미국 녀석들일까? 아니면 일본이나 중국이라든지…' 예안이 혼자 별의별 상상을 다 하고 있을 때 남자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 었다. "예. 보스. 지금 깨어났습니다. 아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뭐 그렇게 분별 없는 녀석들입니까? 보스 여자한테 찝적거리게요. 네. 걱정 마세 요." 남자가 전화를 끊고 난 후 예안은 조심스레 물었다. 여전히 경계를 늦추 진 않은 채였다. "저, 근데 왜 절 납치하셨죠? 전 납치 당할 만큼 부잣집 애도 아니고 남 한테 원한 산 적도 없는데…" "흠,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난 그냥 형님, 아니 보스가 시켜 서 널 납치했을 뿐이야. 젠장, 그 놈의 보스 소리는 진짜 입에 안 달라 붙는군. 도대체가 영 익숙하지 않아서 말이야." 남자의 태도는 마냥 살벌하기만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일이 쉬워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겼다. 예안은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자신의 가방이 놓 여져 있는 걸 보고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이 남자들은 가방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관심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저기요…" "응? 왜?" 무심코 돌아보던 남자는 예안이 내민 수표를 보고 그대로 굳었다. 예안 은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작게 말했다. "이거 받아주시고… 그냥 저 놓아주시면 안 될까요?" "100억짜리 수표를 그렇게 손쉽게 내놓는다라. 흐음, 그 정도 금액을 아 무렇지도 않게 용돈으로 줄 정도로 대단한 거부를 아버지로 둔 모양이 지? 그런데 내가 알기로 우리나라에 그 정도 부자라면…" 눈살을 찌푸리던 남자는 갑자기 표정을 험악하게 지으며 수표를 탁 쳐냈 다. "이봐, 아가씨. 내가 그렇게 쉽게 보여? 돈에 눈이 멀어 형님을 배신할 정도로 말이야. 아가씨가 어떤 대단한 집안 딸인지 모르지만, 나도 주먹 하나 갖고 밑바닥에서 기어올라오며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야. 이 정도 가지고 안 흔들린다고. 그리고 조금 전에 뭐? 납치 당할 만큼 부자집 애 가 아니라고?" "그럼 이 열 배를 주시면 풀어주시겠어요?" 남자의 눈이 경악으로 휘둥그레졌다가 다시 작아졌다.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는 것으로 보아 필사적으로 분노를 삼키는 듯 했다. "하. 아가씨가 얼마나 대단한 집안 딸인지 대충 알 것 같군. 하긴, 그러 니까 형님이 그렇게나 신경 쓰는 거겠지." 남자는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바깥에서 지키고 있는 녀석들한테 말해. 아가씨 눈에 찰 만한 고급스런 건 못 갖다줄 테지만 그래도 최대한 편의는 봐줄 테니 까." 남자로 그대로 일어나려고 하자 예안은 다급히 말했다. "이봐요! 그, 그럼 얼마를 주면 될까요? 이천 억? 삼천 억? 사천 억? 말 만 해요.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까 제발 날 풀어줘요! 아, 아니 하다 못 해 누가 날 납치했는지 만이라도…" "정말 못 말릴 아가씨로군." 예안을 세상 물정 모르는 상류층 재벌집안 딸로 생각한 남자는 표정 가 득 적대감을 지우지 않았다. "확실히 말해주지. 아가씨는 지금 우리한테 납치된 상태고, 우리는 현재 아가씨 명줄을 쥐고 있는 입장이야. 형님이 아가씨한테 손끝 하나 대지 말라고 해서 지금은 편의를 봐주고 있어도, 말만 바뀌면 돌림빵을 한 다 음에 시멘트로 굳혀서 한강 바닥에 던져 넣는 짓도 서슴지 않을 거라구. 말조심해." "하… 뭐라구요?" 예안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지만 필사적으로 눌러 참았다. 어쨌거나 자신은 잡혀 있는 몸이었고 상대는 건장한 남자였다. '예안이 몸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그냥 참자. 하지만 나중엔 정말 가만 안 둘 테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식히려 애쓰며, 예안은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식사가 담긴 카트를 끌고 호텔 보이가 나선 걸 확인한 니콜라스는 재빨 리 뒤따라갔다. 보이가 직원 전용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그는 망설이지 않고 뒤따라 들어갔다. "어? 손님, 이 엘리베이터는…" 조금 놀란 보이가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니콜라스는 수도로 그를 기 절시켰다. 니콜라스는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재빨리 보이의 옷으 로 갈아입었다. 중간에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그는 기절한 보이의 몸을 가볍게 들쳐업고 나왔다. 옆에 있는 비상구를 열고 들어가 계단에 기절 한 보이를 내려놓기까지 다행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시간은 대충 벌었다.' 다시 태연히 엘리베이터에 오른 니콜라스는 닫힘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2055호실이 있는 층에 도착한 뒤 엘리베이터는 다시 열렸고, 호텔 보이 로 위장한 니콜라스는 카트를 끌고 나왔다. 부자연스러움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침착한 태도였다. 이대로 룸 안에까지만 들어가면 만사 오케 이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이건 너무 쉽다. 설마하니 녀석들은 내가 니콜 라스 베르노라는 걸 모르는 걸까? 아니면 니콜라스 베르노라는 이름에 대해서 아예 모르는 걸까?' 그렇다면 잘된 일이다. 암흑 군수산업의 대부인 훼도니츠 가문의 마피아 조차 두려워서 피하는 자신을 모른다면 한참 햇병아리라는 소리가 된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 이대로 룸 안까지 무사히 들어가면 상대 가 몇 십 명이 포진하고 있든 니콜라스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어?" 덩치 두 명이 지키고 있는 입구까지 대략 5미터 정도 남았을 때, 니콜라 스는 금발의 외국 청년이 문을 여는 걸 보고 그대로 우뚝 멈췄다. 어이 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몇 번이고 다시 비비고 쳐다봤지 만, 그는 분명 앤드류였다. '앤드류가? 어째서?' 바로 그 순간 앤드류와 니콜라스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혀들었다. 니콜라 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면 끝장이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21 회] 날 짜 2004-01-15 조회 / 추천 4237 / 73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비참해질 수 없는 이유 '윽!' 어이없는 나머지 잠깐 동안 멍해 있던 니콜라스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 다. 앤드류가 혹여 자신을 알아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스쳤다. 숨겨둔 권총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긴장이 흘러내렸다. 실로 오 랜만에 맛보는 흥분이었다. '내가 긴장을 다 하다니…' 훼도니츠 가의 최고 보스를 암살할 때에도 긴장은커녕 땀 한 방울,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이렇게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가. '침착해라, 니콜라스. 저 녀석들은 어차피 네 상대가 안 돼.' 일단 변장을 믿자. 완벽하진 않아도. '그래도 젠장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스크라도 하나 쓰고 오는 건데, 하고 니콜라스는 후 회하며 고개를 들었다. 수상하게 보이는 것보다 차라리 당당하게 맞서는 게 나았다. "저 아이는 누구지?" "아, 예. 안에서 기다리고 계신 여성분 식사시간이 되어서 말이죠." 앤드류는 묘한 웃음을 머금은 눈동자로 니콜라스를 훑어보았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저 여성분은 그런 건 필요로 하지 않아." "네?" 덩치 한 명은 잠시 동안 그 말을 이해 못하다가, 이내 눈을 깜박이며 물 었다. "그럼 되돌려 보낼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부르면 들여보 내. 일단은 단둘이 할 말이 있으니까." "아, 예. 알겠습니다." 앤드류는 다시 한 번 니콜라스를 훑어본 뒤 안으로 들어갔다. 니콜라스 는 기분이 나빠졌다. 그는 자신을 알아본 게 틀림없는데, 어째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인가. '아, 앤드류도 내 이름에 대해서는 들어봐서 알고 있을 테니까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눈에 보이지 않는 밧줄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 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쳐들어가고 싶었지만, 니콜라스는 일단 앤드류의 이성을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설마하니 자신이 밖에서 호시탐 탐 노리고 있는데 함부로 이상한 짓을 하진 않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다. "별로 오래 되진 않았는데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그치?" 앤드류가 그렇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을 때 예안은 굳은 채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납치했을 거란 상상을 못한 까닭도 있었지 만, 얼마 전에 자신을 가지기 위해서라면 비겁한 수단도 더 이상 마다하 지 않겠다는 엄포 비슷한 그의 말이 갑자기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비로소 그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상대는 자신을 납치까지 한 인물이다. "저, 저기…" 예안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지만 몇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벽에 가로막혔다. "왜 그렇게 겁을 먹는 거야? 내가 누나한테 무슨 해코지라도 할까봐?" "그, 그건…" 얼마 전까지 앤드류는 자신에게 있어 유젤을 빼앗으려 드는 적 그 이상 도 이하도 아니었다. 가끔씩 사람을 비참하게 하고 짜증나게 하기도 하 지만 그래도 유젤의 몸을 갖고 있는 자신이 한결 유리한 입장에 서 있기 에 안심했던 상대. 하지만 지금 그 입장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앤드 류였다. "내가 그렇게 말했지? 날 너무 거부하진 말아달라고. 도망칠 곳도 만들 어주지 않은 채 쥐를 쫓게 되면 오히려 고양이가 물리게 돼. 그것도 몰 랐어?" 예안은 벽에 바짝 붙어선 채 조금이라도 그에게서 멀어지려 애썼다. 지 금의 그는 평소 자신이 만만하게 갖고 놀던 쉬운 남자가 아니었다. 도망 칠 곳 하나 없는 이 룸에서 언제든지 '유젤'은 그의 소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너희들은 다른 방에 가 있어. 이제부터 우리가 하는 대화는 들을 생각도 하지 마." 앤드류는 방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 명의 덩치들에게 명령했다. 덩 치들은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곤 그 자리를 떴다. 예안은 조심스레 물었다. 칼바람의 추위에 떨리는 듯한 음색이었다. "당신이 저 사람들 보스인가요?" "응? 아아,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저 녀석들 보스한테 돈 몇 푼 쥐어주 고 빌려쓰고 있는 거지. 어차피 일회용으로 쓰고 말 건데 뭐. 저 녀석들 보스도 내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을 테니 서투른 짓 같은 건 못 해." "근데 왜 날 납치했죠? 나한테 뭐 바라는 게 있다고…" "바라는 것? 많지. 누나한테 내가 바라는 건 정말 많지." 앤드류는 싱긋 웃었다. 순진한 어린아이의 애정과 오랜 기다림에 찌든 청년의 고뇌가 뒤섞인 미소였다. "난 누나한테 키스도 하고 싶고 포옹도 하고 싶어. 누나를 영국으로 데 려가고 싶고 내 돈으로 누나 옷을 사다 입혀주고 꾸며주고 싶어. 누나가 나만 바라보게 하고 싶고, 내 옆에는 언제나 누나가 있었으면 좋겠어. 누나가 언제나 내 집에서 잠들고, 내 집에서 숨쉬고, 내 집에서 TV를 보 고 나랑 같은 생활을 했으면 좋겠어.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보는 얼굴이 누나였으면 좋겠어." 오래고 지친 피로에 젖어 단조로운, 그래서 오히려 더 매력적인 음색이 었다. "그렇게 누나랑 나랑 같은 공간에 살고… 내가 마련해준 웨딩드레스를 누나가 입고… 그랬으면 좋겠어. 이 중 하나라도 들어줄 수 있어?" "…결국은 전부 다 결혼해달라는 말이잖아요." "푸훗. 맞아. 생각해보니 그렇네." "괜히 듣느라고 힘만 뺐네. 난 또 뭔가 대단한 거 요구할 줄 알았는데." 예안은 조금씩 여유를 되찾았다. 이젠 마냥 앤드류가 무섭기만 하지 않 았다. 예안은 어깨 너머로 벽을 짚고 있는 앤드류의 손을 탁 치워버리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애써 여유를 보이기 위한 허세였다. "이렇게 절 붙잡아 놓아 봐야 소용없다는 거 몰라요? 니콜라스가 이 일 을 알게 되면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걸요? 걔는 지금 날 경호 중이고 당 신은 날 납치했어요. 그건 곧 걔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과 같다구요. 마 피아들조차 두려워서 피한다는 최고급 청부업자가 두렵지도 않나요?" 그냥 별 기대 없이 던진 협박이었는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맞아. 두려워." "네?" "두렵다고 했어. 니콜라스 베르노, 미국에서는 가히 악마를 상징하는 이 름이지. FBI들이 몇 십년 간 어쩌지 못했던 훼도니츠 가의 최고위 보스 를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손쉽게 죽여버리고, 분개한 부하들이 복수하 겠다고 나섰지만 결국 엄청난 피만 흘리고 포기하고 말았지. 그런 상대 가 어떻게 두렵지 않겠어? 그렇지 않아도 지금 니콜라스 베르노는 현관 문 앞까지 와 있더군. 호텔 보이로 위장하고 말이야." "와, 진짜요?" 예안은 잘하면 잡혀온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금방 풀려날 수 있겠 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앤드류는 그런 마음을 눈치채고 씁쓸하게 웃었 다. "어차피 누나를 납치해서 미국이나 영국까지 데리고 가겠다는 생각 따위 는 없었어. 처음에 잠깐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기에는 누나 만의 생활도 있고 누나의 자유 의사도 있는 건데 내가 그걸 억지로 강요 할 순 없잖아? 그냥 다만… 다만 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런 짓을 벌였을 뿐이야. 일단 그건 사과할게." 작정하고 납치를 한 건 아니었구나. 예안은 이제 완전히 여유를 되찾았 다. "이게 단순한 사과로 끝날 줄 알아요? 난 저기 저 아저씨들한테 뒷목을 얻어맞기까지 했다구요. 납치를 할거면 신사적으로 마취약을 쓰면 될 걸 가지고 왜 그렇게 야만적인 짓을 하냐구요?" "누나한테는 마취약 따위가 통하지 않잖아."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앤드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등을 돌려 시선을 창 밖으로 던졌 다. 예안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그의 등을 주시했다. "정말 모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시치미를 떼고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겠지." 앤드류는 등을 돌려 예안과 눈을 마주쳤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서글픈 고뇌가 가득 담겨 있는 푸른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예안은 온몸에 전기 가 짜르르 흐르는 걸 느꼈다. '어?' 이상했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아련한 기분이 가슴을 스쳤다. "난 말이야. 십 년 전에도 누나를 그냥 보내야했고 오 년 전에도 그냥 그렇게 보내야 했지만, 이제 더 이상은 그러고 싶지 않아. 더 이상 그런 비참한 기분을 맛보고 싶지 않아." 평소 같았으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고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에게서 옮아진 서글픈 기분에 잠 식당한 예안은 입을 제대로 열 수 없었다. "나 얼마 전에야 겨우 깨달았어. 누나는 십 년 전에도 오 년 전에도 가 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 말이야. 웃기지? 몇 년이나 지난 뒤에야 겨우 깨닫다니… 난 정말 바본가 봐. 그래서 두 번이나 아무것도 모른 채 누 나를 그렇게 떠나보내야 했으니…" 앤드류는 예안을 눈동자 속에 담을 듯 강렬한 눈빛으로 주시했다. "난 바보야. 그렇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녀의 서글픈 눈동자. 그것이 붙잡아달라고 외치 고 있었다는 걸 깨닫기에 그때의 자신은 너무 어렸다고 앤드류는 자위해 봤지만 괴로운 꿈을 꿀 때마다 후회는 악마처럼 되살아난다. 하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후회할 짓은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누나가 날 떠나면 난 비참해져. 누나 역시 날 떠나면 불행해져. 결국 우리 둘 다 행복하지 못하다는 거야. 난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 없어. 그게 내가 더 이상 비참해질 수 없는 이유야. 이해해?" 슬픔에 잠긴 앤드류의 눈동자는 어느새 순진한 소년으로 되돌아가 예안 의 무의식 속에 잠겨 있던 추억을 해방시켰다. 예안은 어머니의 자궁 속 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따뜻한 그 느낌이 너무 좋았지만, 동시에 까닭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휘몰아쳤다. "이거… 기억해?" 앤드류는 낡은 카메라형 캠코더를 내밀며 그렇게 물었다. 빛 바랜 추억 과 아련한 서글픔이 듬뿍 묻어 있는 그것을 보았을 때 예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거… 기억하고 있지? 그렇지? 오 년 전에도 그렇다고 말했잖아." 분명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울컥한 기분이 솟구친단 말인 가. 낡아빠진 저 캠코더 따위는 본 적도 없다.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리 가 없다. 누가 사주었는지, 누가 갖고 있었는지, 누구에게 주었는지, 언 제 주었는지 따위를 알고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슬픈 기분이 든단 말인가. 왜 나는 저것이 무엇인 지를 알고 있단 말인가. "이건…" 그 순간, 영혼의 그림자 속에 숨어 간신히 삶을 이어나가고 있던 빛 바 랜 추억들이 신기루처럼 완전히 되살아났다. 오래고 힘든 세월 동안 지 치고 부스러져 과연 거짓인지 아닌지 그것조차 구분하기 힘든, 그런 추 억들이 씁쓸하게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것들은 예안의 기억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았다. 예안은 초점이 사그라진 눈동자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앤드류…?" 구슬픈 톤에 잠긴 고운 목소리는 앤드류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래, 나 앤드류. 나 여기 있어. 나 기억해? 나 기억하지?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변…태 왕자…?" 예안은 낡은 캠코더를 만지작거리다 눈물이 글썽이는 녹색 눈동자를 들 어 앤드류를 올려다보았다. 가슴을 꿰어차고 있던 갑갑한 기분이 빠져나 갔다. 그 대신 앤드류를 가여워하고 안쓰럽게 여기는, 내 것인지 아닌지 도 모를 그런 마음들이 차곡차곡 자리잡았다. 예안은 눈물을 닦으며 생긋이 웃었다. "변태왕자. 너 정말 오랜만이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22 회] 날 짜 2004-01-16 조회 / 추천 4298 / 69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추억의 끝에서 벌써 십 분이 지났다. 니콜라스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십 분. 짧 은 시간이지만 자신을 이곳에 붙잡아놓고 예안을 어딘가로 빼돌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요?" "기다려 봐, 임마. 좀 더 기다려도 음식 안 식어. 보아하니 한창 재미보 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 갖고 들어가면 얼마나 흥이 깨지겠어?" "형님들이 불쌍해. 지금쯤 다른 방에서 허벅지 꼬집으면서 귀를 틀어막 고 있겠지. 이럴 땐 차라리 밖에 있는 게 훨씬 낫다니까." 두 남자가 혀를 쯧쯧 차며 지금쯤 다른 방에서 괴로워하고 있을 형님이 라는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을 때, 니콜라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저, 손님들. 여기 좀 잠깐만 보시겠어요?" "응, 왜… 커헉!" 니콜라스는 양손을 뻗어 두 남자의 목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경동맥이 졸린 두 남자는 니콜라스의 손을 뿌리치려 애쓰며 괴로워하다 이내 기절 해 버렸다. 다행히 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쳇. 시간만 낭비했군. 역시 앤드류를 믿는 게 아니었어." 니콜라스는 조금 후회하며 숨겨두었던 권총을 꺼냈다. 문손잡이를 움켜 쥐고 몇 번 돌리자 쇠가 일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부서져 버렸다. 손바닥 으로 구멍 안을 가볍게 밀자 잠금 장치가 완전히 떨어져 버렸고, 문이 스르륵 열렸다. "누, 누구냐!" 잠금 장치가 부서지는 소리에 놀란 세 명의 남자가 튀어나왔다. 아마도 밖의 덩치들이 말한 형님이라는 녀석들인가. 총은 갖고 있지 않았다. 니 콜라스는 권총으로 위협할까 하다가 만약을 대비해 기절시키기로 했다. "얌전히 잠들어." "이, 이 자식이… 윽!" 남자들은 기세등등했지만 니콜라스가 재빨리 뒤로 돌아가 수도로 뒤통수 를 몇 번 내리치니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마피아에 비하면 이런 녀석들쯤이야 껌이지." 니콜라스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가 문이 반쯤 열린 방을 발견했다. 열 린 틈으로 누군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거칠 게 활짝 열었다. 추억에 젖은 녹색 눈동자가 흐릿하게 빛났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지 만 이제 내 것이 되어 버린, 그리고 여태껏 있었는지도 몰랐던 기억의 편린은 그림자처럼 되살아나 뇌리를 차곡차곡 채웠다. 이제야 앤드류의 서글픈 눈빛이 무엇을 그리워했는지 예안은 비로소 깨달았다. 앤드류에게 바짝 몸을 기대고 선 예안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그를 올려 다보았다. 이제는 앳된 소년의 웃음이 많이 사라진 푸른 눈동자가 재회 의 울음을 머금고 있었다. "변태 왕자… 너 키 정말 많이 컸구나?" 예안은 앤드류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쓸어 내렸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따스한 느낌이 손끝에 전해져 왔다. "응. 많이 컸지? 5년 전에도 내가 누나를 내려다 봤는데 그때 누나가 길 길이 날뛰었잖아. 십 년 전에는 누나가 나보다 더 컸다고 말이야. 이거 미안해서 어떡하지? 난 5년 전보다 더 커버렸는데." "에헤헤, 이제 네 키 따라잡는 거 포기해야겠네. 어떡하냐. 다시 한 번 널 내려다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뜨거운 기운이 울컥하듯 턱 밑까지 차 올랐다. 죽어 있었던 마음의 상념 은 아지랑이처럼 되살아난 그리움에 울고 있었다. 어째서 그 동안 앤드 류를 구박하고 미워하고 피하려고 했는지 참을 수 없는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그때, 고개를 숙인 채 그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던 예안은 불현듯 머리를 때리는 엄청난 고통에 윽 하고 주저앉았다. "왜, 왜 그래 누나?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괜찮은 거야?" 흐릿한 초점으로 고통의 신음을 삼키던 예안은 쥐어짜듯 말했다. "아…니야. 이건… 이건 아니야. 이건 절대… 아니야." "응?"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이건 내 기억이 아니야!" 예안은 고통스런 얼굴로 악을 썼다. "이건 내 기억이 아니야! 이, 이건 내가 아니야! 내가 아니라구!" 이성을 잃은 듯 예안이 고함을 멈추지 않자 앤드류는 어쩔 줄 몰랐다. "누나 제발… 제발 날 봐. 아니라고? 뭐가 아니라는 거야? 도대체 왜 그 래?" "이건 내가 아니야! 내가 아니라구! 이건 내 기억이 아니란 말이야!" 다음 순간, 예안은 언제 고함을 질렀냐는 듯 흐느끼는 표정으로 앤드류 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예안은 떨리는 손을 들어 눈물에 젖어 있는 앤드류의 뺨을 가볍게 쓸어주며 중얼거렸다. "변태 왕자, 왜 울어? 울지 마. 네가 우는 건 보기 싫댔잖아. 넌 우는 게 안 어울린다고 했잖아. 웃어. 웃으란 말이야." 예안의 의식이 「유서운」과 「유서운이 아닌 것」 사이를 쉴 새 없이 넘나들고 있다는 걸 모르는 앤드류는 그저 발만 동동 굴렀다. "누나, 제발 정신 차려. 도대체 왜 그래? 날 기억하고 있잖아? 나에 대 한 기억을 떠올렸잖아? 자꾸 왜 그러는 거야?" "나는… 나는… 나는… 유서… 운? 아니… 유…젤? 도대체 나는 누구…" 뫼비우스의 띠처럼 내 것인 기억과 내 것이 아닌 추억 사이를 무한으로 반복하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내 것이 아닌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나를 자각한다는 건 무서웠다. 「유서운의 흔적」에 영원히 몸을 맡겨버 리는 것도 좋지 않으냐는 달콤한 유혹은 참을 수 없이 두려운 것이었다. "날 좀 붙잡아줘 앤드류. 난 지구를 떠나기 싫어. 하지만 케이가 에덴에 서 혼자 살아가는 것도 싫어. 내가 케이 옆에 있어주고 싶어. 케이가 쓸 쓸하게 살아갈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파. 아프단 말이야." 몸을 지탱하지 못한 채 눈물을 글썽이던 예안의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했 다. "아니야!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그따위 기억에 내가 먹힐 것 같아! 이건 내가 아니야! 그래, 맞아! 레이온 형이 조작해놓은 게 틀림없어!" "누나 제발, 제발 이겨. 누나는 분명 유서운이야. 모든 걸 기억하고 있 잖아? 제발, 제발 져선 안 돼." 그때였다. "얌전히 손들고 떨어져라." 문이 갑자기 벌컥 열리며 니콜라스가 권총을 겨누었다. 예안은 멍한 시 선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누나. 위험하니까 옆에서 떨어져." 살기와 적의에 가득 찬 니콜라스의 눈빛. 뜨거운 애수로 젖어든 앤드류 의 푸른 눈동자. 차가운 빛을 반사하는 매끄러운 총신. 심장이 두근거렸다. 「위험하니까 옆에서 떨어져.」 되살아난 오랜 기억 속에 숨어 있던 한 마디가 머리 속에 울렸다. 예안 은 멍한 표정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앤드류 당신이 니콜라스 베르노라는 이름에 대해 안다면 이런 허튼 짓 은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쓸데없는 기대였나?" 감정이 메말라 버린 딱딱한 목소리였다. 앤드류는 평소처럼 느긋하게 여 유를 부리지도, 그렇다고 니콜라스의 총에 겁을 먹지도 않았다. "네가 암흑계의 최고급 청부업자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그래 봐야 결국은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에 불과해. 나에 비하면 넌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이야." 니콜라스는 주저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날카로운 파공음을 흘리며 앤드류의 어깨 위를 스쳤다. 어디까지나 위협용이었다. - 쨍그랑!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는 마치 다른 차원에서 건너온 손짓처럼 희미하게 예안을 자극했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멍하니 그 둘을 쳐다보 던 예안은 문득 머리가 깨지는 통증을 느꼈다. 그때와, 같다. 그때도, 이랬다. "아아악!" 그때와, 완벽하게 똑같다. 「그 애는 결국 사도를 뿌리부터 무너뜨리고 말 거다. NM 프로젝트는 역 시 저주받은 게 틀림없어. 레이온 넌 지금 속고 있어.」 수 년 간 쌓이고 쌓여 축적된 망각의 이끼를 헤치고 솟아오른 새싹과도 같은 그 목소리. 그것은 차라리 기억해내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 "아니야. 난 속이지 않았어…" 무엇을 속이지 않았다는 건데? "난… 레이온이 좋으니까… 그냥 그 애도 나와 같이 에덴으로… 에덴으 로…" 그것이 그 애에게 행복하다 생각했던 거야? "레이온도 그렇게 하고 싶어했어…" 하지만 넌 그 애를 버렸잖아? "아, 아니야! 나, 난 어디까지나…" 그 애를 버렸잖아? "아니야 난…" 버렸잖아? "버리지 않…" 버렸잖아. "버리지 않았어!" 버렸어. "난 레이온을 버리지 않았어! 버리지 않았단 말이야!" 예안은 벌떡 일어나며 목청이 찢어져라 외쳤다. 눈싸움으로 팽팽한 힘 겨루기를 하고 있던 니콜라스와 앤드류는 깜짝 놀랐다. "누, 누나? 왜, 왜 그…" 앤드류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예안의 전신에서 바람처럼 튀어 오르는 무수한 숫자의 푸른 스파크를 봤기 때문이었다. 손끝만이라도 닿 았다가는 그대로 전신이 타버릴 것 같은 강렬한 스파크 안에서, 예안은 초점이 사라진 눈동자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난 그 애를 버리지 않았어. 버리지 않았다고. 안 버렸어. 안 버렸단 말 이야. 지금… 지금 약속을 지키러 왔는데…" "누나?" 스파크를 겁낸 앤드류가 섣불리 다가오지 않고 그렇게 걱정스러워하며 물었다. 예안은 그를 빤히 올려다보다 그만 울 듯한 표정이 되었다. "하, 하지만 앤드류도 있는데… 앤드류하고 한 약속도 지켜야 되는데…" 또다시 강한 통증이 뇌리를 덮었다. 예안의 괴로움에 동조라도 하듯 푸 르스름한 스파크도 춤을 추듯 어지럽게 휘돌았다. "아파! 아파! 아프단 말이야! 아아악!!" 오랫동안 사그라지지 않았던 앤드류에 대한 미안함과 레이온에 대한 죄 책감은 그렇게 강한 상념의 뿌리를 내린 채 흔들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 다.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던 통증은 어느새 영혼을 뭉개려 하는 사나운 채찍으로 변해 날카로운 고통을 새겨 넣고 있었다. "아니야! 이건 내 기억이 아니야! 난 이런 기억 따위 없어!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그 순간 예안의 손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 나왔다. 그녀가 인간보다 우월 한 존재임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푸른빛은 폭풍과도 같은 기세로 순식간 에 방안 가득 휘몰아쳤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23 회] 날 짜 2004-01-17 조회 / 추천 4212 / 49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추억의 끝에서 "하…" 니콜라스는 엉망으로 어지럽혀진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예안 이 내뿜은 힘에 나동그라진 앤드류는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벽에 등을 기댄 채 구석에 앉아 있었다. 완전히 박살이 나버린 장식, 시트가 산산 이 찢기고 다리가 망가져 버린 침대, 그리고 스크린이 깨져 나간 벽걸이 TV가 조금 전 이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때 예안의 몸이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니콜라스는 황급히 받아 안으 며 투덜댔다. "휴우. 굉장한 걸. 누나한테 이런 능력이 있었을 줄이야…" 앤드류는 피를 닦을 생각도 않은 채 물었다. "왜 넌 놀라지 않지?" 니콜라스는 적의도 잊어버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뜻이야?" "누나가 이런 신기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 설마 그 전부터 알고 있 었나? 그래서 지금 놀라지 않는 거냐?" "글쎄. 하지만 앤드류 당신도 별로 놀라진 않는 건 마찬가지잖아. 평범 한 사람들이라면 이런 괴현상에 대해서 호기심이나 공포를 보이는 게 정 상인데 말이야." "난 이미 옛날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넌 다르잖아. 아무리 청 부업자라 해도…" "거기까지. 더 이상 당신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니콜라스는 앤드류에 대한 흥미를 끄기로 하고, 예안을 번쩍 안아 올렸 다. 이제 그만 돌아가 볼 생각이었다. "누나가 더 이상 폭주하지 않고 이대로 기절해줘서 일단 다행이네. 지금 은 일단 이렇게 갈게. 하지만 당신이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건 항상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야. 내 총은 언제든지 당신의 가슴에 실탄을 박아 넣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킥. 기대할게." 니콜라스의 건조한 협박에 앤드류는 키득 웃음을 터트렸다. 기절한 예안 을 안은 니콜라스의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자 앤드류는 씁쓸하면서도 기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기억…하고 있다." 전부 다 기억하고 있었다. 예안은 전부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진 짜 이름이 유서운인지 유젤인지 서예안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기억하 고 있었다. 그에겐 오로지 그것만이 가장 중요했다. "내가 기다린 5년, 결코 헛된 건 아니었어." 멍하니 앉아 있던 앤드류는 퍼뜩 캠코더를 떠올리고는 벌떡 일어나 방안 을 이 잡듯이 뒤졌다. 한참을 찾아도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다시 힘없이 주저앉았다. "누나가 가져갔나 보네. 잘 됐지 뭐. 이제 완전히 돌려줬으니까." 이별을 상징하는 증거로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괴롭혔던 캠코더가 예안 에게 넘어간 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앤드류는 이제 다시는 그것을 받 을 일이 없을 거라 굳게 다짐하며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줘도 안 받을 거야 이젠." TV를 보고 있던 정호는 초인종이 울리자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어주었 다. 니콜라스가 기절한 예안을 안고 서 있자 정호는 깜짝 놀랐다. "아니, 예안이가 왜 그런 거니?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거야?" "아뇨. 그냥 좀 피곤해서 잠든 모양이에요. 깨우기도 뭐해서 그냥 제가 안고 왔어요." "허 참…" 정호는 예안이 지금 임신 중인 걸 상기하며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납 득하고는 얼른 예안을 받아 안았다. 정호는 예안을 방에 데리고 들어가 침대에 눕힌 뒤 이불을 덮어주고는 나왔다. 거실에선 니콜라스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 다. 왜 그런지 몰라 정호는 의아했다. "왜 그러니? 손바닥에 상처라도 났어?"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몰래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화들짝 놀라는 게 조금 이상했지만 정호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성주 너 힘이 굉장히 세구나? 예안이가 좀 가벼운 편이긴 해도 넌 키도 예안이보다 더 작은데 여기까지 안고 온 거 보면 말이야. 힘들 진 않았어?" "네. 제가 원래 힘이 좀 세요. 별로 힘들진 않았어요." 니콜라스는 평소와는 달리 어딘지 나사가 하나 빠진 듯 했다. 정호는 이 기회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해보자는 생각에 계속 말을 걸었다. "오늘 예안이랑 어디 갔었어? 아침부터 둘이 분주하게 나갈 준비한 걸 보면 굉장히 재밌는 데 놀러간 모양이네?" "놀러간 거 아니에요. 누나가 갖고 있는 아이의 할머니뻘 되는 사람 만 나러 갔었어요." 정호는 조금 뜨끔했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 그래? 만나서 뭐했는데? 설마 누나가 그 아주머니에게 무례한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니?" "그런 건 없었어요. 그냥 몇 가지 타협안을 봤을 뿐." "타협?" 정호는 아이답지 않은 대답에 다소 어리둥절했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화 제를 바꿨다. "성주 넌 어린애답지 않은 구석이 좀 많은 것 같구나. 조숙한 건 좋지만 너무 어른스러우면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어." 정호는 피식피식 웃으며 니콜라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앞으로 힘들겠지만 잘해 봐라. 이 아저씨는 어디까지나 네 편이다." "?" 알 듯 말 듯한 말을 남긴 채 정호가 방으로 들어가고 난 뒤 혼자 남은 니콜라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뭐가 힘들 거란 거지? 뭘 잘해보라는 거야?" 니콜라스는, 아직 어렸다. 「어째서 가야 한다는 거야? 여기서, 여기서 살아도 되는 거잖아! 나하 고 한 약속, 그건 안 지킬 거야?」 「미안해, 레이온.」 「웃기지 마! 네가 왜 미안해야 되는데? 미안해하지 마! 그렇게 미안하 다고 하지 마! 안 떠나면 되잖아. 안 가면 되잖아. 그럼… 그럼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되잖아!」 흐릿하게 영혼을 잠식해오는 소년의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는 예안의 가 슴을 몹시 아프게 했다. 이것은 유젤의 기억인가. 아니, 「진짜 유젤」 의 기억인가. 「가지 마 제발… 안 가도 되잖아…」 한치 앞도 볼 수 없었던 안개는 차츰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나타난 희미한 수채화와도 같은 풍경 속에는, 한 소년과 한 소녀가 마주보고 서 있었다. 소년은 소녀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울먹이고 있었다. '파란… 머리…' 소녀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파란 머리카락을 보았을 때 예안은 굳은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 애는… 누구…' 예안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비탈길을 오르듯 힘겹게 그렇게 중얼거렸 다. 거리가 먼 것도 아니고 안개가 시야를 완전히 가리고 있는 것도 아 닌데 소년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의 뺨에 달라붙은 서 글픈 눈물만큼은 뚜렷하게 잘 보였다. 「안녕… 안녕…」 소녀는 희미하게 웃어주고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소녀의 모습이 발끝에서부터 점점 사라졌다. 소년은 힘 없는 발걸음으로 뒤따라가기만 했을 뿐, 붙잡을 생각도 못했다. 아니, 붙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가지 마! 가지 말란 말이야! 가지 마아!」 구슬픈 소년의 목소리가 예안의 가슴을 자꾸만 아프게 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왔다. 예안은 떨리는 손으로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등을 돌렸다. '안녕.' 예안이 등을 돌리자마자 소년에게 이별을 고하고 사라졌던 소녀가 어느 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소녀의 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보던 예안은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꼬집었 다. 소녀는 칠흑처럼 검은 눈동자를 제외하고 완벽하게 자신과 똑같았 다. 아니, 유젤과 똑같았다. '너는… 누구?' 소녀는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다가와 예안을 끌어안아 주었 다. 향긋하게 느껴지는 기분 좋은 체향에 취한 예안은 굳은 듯 우두커니 서 있다 떨리는 손을 들어 소녀의 등을 마주 껴안았다. '저 애를… 잘 부탁해. 레이온을… 잘 부탁해. 가여운 아이니까…' '너는 누구야?' '잘 부탁해… 부탁할게… 그리고…' 한 걸음 뒤로 살짝 떨어진 소녀는 눈물을 한 방울 떨구었다. 청초한 미 소가 흐릿하게 섞인 서글픈 울음이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널 힘들게 해서…' 소녀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점점 멀어져갔다. 우두커니 서 있 던 예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주 위를 둘러보아도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소녀를 찾아 헤매던 소년의 모 습 역시 온데 간데 없었다. 그 순간, 거울에 비친 풍경이 깨져나가듯 주변의 모든 것이 와장창 무너 져 내렸다. 예안은 눈물에 젖은 채 눈을 떴다. 상반신을 일으키니 창문을 통해 쏟아 진 가로등 빛이 방안에 가득 드리워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문득 허리 에 뭔가가 닿는 느낌이 들어 시선을 돌려보니 니콜라스가 무릎을 꿇고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경호에 충실하지 않아도 되는데." 예안은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니콜라스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피부에 부드럽게 와 닿는 검은 머리카락이 귀여운 느낌이었다. "혹시 눈뜨고 내가 납치 당해서 자존심이라도 상했나? 하긴,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암흑계 청부업자들은 하나같이 프라이드가 높다고들 하니까 뭐어 그럴 수도 있겠다."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는 것. 예전 같았으면 닭살이니 어쩌 니 하면서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유니콘." 예안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말씀하십시오.」 "넌 나한테 어디까지 말해줄 수 있지? 네가 나한테 말해줄 수 있는 모든 걸 전부 다 말해 봐." 「그렇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동일성 극소립자론에 대해 먼저 말 씀드리죠.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물질의 순서는 분자, 원자, 소립자, 유 다스, 제2분자, 제2원자, 제2소립자, 아르페, 제3분자, 제3원자, 제3소 립자, 로데늄, 이런 순입니다. 로데늄이 가장 기본적인 입자죠. 수소 원 자를 X배했을 때 태양계만한 크기가 된다면, 로데늄을 X배 한다면 그 크 기는 수소 원자와 같습니다. 로데늄을 쪼갤 경우 더 이상 물질의 형체를 갖출 수 없으며 로데늄의 겉표면을 이루고 있던 물질이 2차원 형태의 면 으로 변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연적, 인위적으로 로데늄을 쪼갤 수는 없 습니다. 만약 단 한 개의 로데늄이라도 쪼개어 지면 그 안에 가두어져 있던, 반물질과 정물질이 중화되어 만들어진 막대한 에너지가 튀어나오 게 됩니다. 그것은 곧 핵분열 반응처럼 우주에 있는 모든 로데늄들이 연 쇄 분열을 일으켜 우주는 멸망하게 되죠. 단 하나의 로데늄이라도 쪼개 어지게 되면 그렇게 우주 자체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듣고 있던 예안의 표정이 점점 이상하게 변해갔다. 「저의 동력원인 ST기관의 연료, 자이오 다이아몬드는 로데늄을 움직일 수 있는 기술 수준에서 가장 기초적인 설계가 가능합니다. 자이오 다이 아몬드의 질량은 수백 그램에 불과하지만 영구히 무한의 에너지를 뽑아 낼 수 있죠. 단, 이 경우에는 자이오 다이아몬드에서 에너지를 추출하는 장치를 이루는 금속의 강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듯 그 어 떤 충격에도 부서지지 않는 금속으로 ST기관을 만든다면, 단 한 순간에 우주 전체를 폭발시킬 수도 있는 무한의 에너지를 뽑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몸체와 ST기관을 이루고 있는 엘레스토늄은 태양계에서 제 일 강한 금속이긴 해도 그 정도 수준까지는 아니라서요. 그리고…」 "자, 잠깐! 스톱!" 예안은 질린 표정으로 말을 잘랐다. "내가 언제 그 따위 것 알고 싶다고 했어? 너 지금 장난하냐?"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모든 걸 말하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래서 동 일성 극소립자론과 ST기관의 구조에서부터 시작해서, 저의 몸체를 이루 고 있는 모든 원리와 구조에 대해 하나 하나 차근차근 말씀드리려고 합 니다. 신경계통과 평형 감각, 추적 장치, 전투 시스템, 그리고 여러 방 면에 걸친 응용 기능과 인공지능을 담당하고 있는 뉴런형 컴퓨터의 가장 기초적인 이론과 원리에서부터 시작해 그렇게 저의 모든 걸 말씀드리려 고 했는데.」 예안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저거 진담으로 하는 소린가? "그, 그걸 다 들으려고 했다가는 하루 이틀이 아니라 몇 년은 족히 걸리 겠다! 내가 지금 당장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니야! 너도 잘 알잖아!" 「유젤 님의 육체의 그 전 주인이 아닌, <오리지날 유젤>에 대해서 알고 싶으신 겁니까? 유젤 님의 그 몸을 복제하는데 유전자를 제공한 인물에 대해서요?」 "그래." 「죄송하지만, 그 데이터에는 락이 걸려 있어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건 전에도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리고 유젤 님은 이제 원한다면 얼마 든지 봉인된 기억 속에서 원하는 사실을 끄집어낼 수 있을 텐데, 저에게 물어서 무엇합니까?」 "그, 그건…" 「현재 그 육체에 각인된 기억을 떠올리는 게 두려우신 건가요? 그것은 진짜가 아니라 레이온 박사가 거짓으로 조작해놓은 거라 믿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까?」 예안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정말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까…' 앤드류가 내밀었던, 추억이 담긴 캠코더는 댐을 무너뜨리는 하나의 작은 구멍처럼 강한 기세로 봉인되어 있던 예안의 기억을 해방시켰다. 예안은 이제 언제라도 자신이 원한다면 '유젤'조차 모르고 있었던 '진짜 유젤' 에 대한 것, NM 프로젝트(New Mankind Project), 조물주 프로젝트, 달이 사라진 근원적인 이유, 달을 사라지게 한 사람, 에덴 혹성, 오 년 전의 악몽, 마더의 존재, 현존하는 신인류, 노블 네트워크(Noble Network) 등 그 모든 사실을 머리 속에서 꺼내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알게 되면 인간의 범주에서 영영 벗어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럴 순 없었다. 호기심에 한 발자국이라도 내딛었 다가는 그대로 영영 다신 이쪽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 문에, 카테고리처럼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는 그 단어들을 그저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기만 했을 뿐이다. 그 막대한 지식들은 소유하고만 있는 책과도 같은 것들이었다. 안의 내 용을 펴보았다가는 금단의 영역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거란 공포 때문 에 다만 조심스러운 떨림으로 책제목만을 훑어보았을 뿐이다. 그것으로 '유젤인 자신'으로서의 의무는 다한 거라 그렇게 자위했을 뿐이다. 하지 만 그건 용서받지 못할 대단한 착각이라는 것쯤 예안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맥과 교신할 수 있는 손목시계형 원격장치를 한참 동안 만지작거리던 예 안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 속에선 끊임없이 레이온을 만나라는 암시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맥. 레이온을… 아니 레이온 형을 만나야겠어. 이제 나는 만날 수 있는 자격이 되지?" 조금 놀랐는지 아니면 판단을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건지 맥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아마 둘 다 아니었을 것이다. 인공지능이 사람처럼 놀란다는 건 우스운 것이고, 맥처럼 대단한 성능을 지닌 시스템이 고작 그런 명령에 수 초 동안이나 대답을 않을 정도로 처리 시간이 길게 걸릴 리가 없으니까. 「내일 제 본체가 보관되어 있는 해군기지로 오십시오. 원격장치로 레이 온 박사와 교신하는 건 대단히 곤란합니다. 제 본체 안에서 직접 교신하 셔야 합니다.」 "…알았어." 레이온이라 칭했다가 다시 레이온 형이라고 고쳐 부른 건, 「진짜 유 젤」이 남긴 상념과 기억에 영원히 잠식되는 걸 두려워한 무의식적인 방 어였을지도 모른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24 회] 날 짜 2004-01-18 조회 / 추천 4119 / 76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추억의 끝에서 니콜라스는 뺨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손길에 기분 좋게 취해 있다가 이 내 그 느낌이 사라지자 눈을 번쩍 떴다. 고개를 들어보니 예안이 어색한 웃음을 짓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네 방 가서 자. 그렇게 자면 안 좋아." "하지만…" "내가 앤드류한테 납치 당한 건 네 잘못이 아니었어. 멍청하게 그 여자 애가 잃어버린 공 주으러 널 보낸 내 잘못이지." "그렇지만 난 프로 청부업자로서 저지르지 말아야 할 실수를 저질렀어.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해야만 해." 예안은 키득 웃었다. "니콜라스. 애초에 보디가드 경험이 없었던 너한테 굳이 이 의뢰를 맡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니?" "?" "네 명성이 필요했던 거야. 마피아도 무서워서 피하는 프로 청부업자의 이름이 필요했거든. 적어도 네가 내 곁에 있으면 시트날타는 몰라도 마 피아나 야쿠자 같은 녀석들이 접근해 올 일은 거의 없을 테니까. 아, 그 렇지만 중현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내 경호 실력은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말인가. 니콜라스는 조금 자존심 이 상했지만 잠자코 있었다. "그러니까 넌 그냥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한테 충분히 도움이 돼. 시트날타 녀석들이 쳐들어온다면… 사실 보통 사람들 힘으로는 막기 힘 드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니콜라스가 말했다. "미국에서 내가 제나르 의원과 싸웠던 순간 기억해?" "응." 예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텐 나도 모르는 그런 힘이 있었어. 그 뒤로 몇 번이고 다시 그 힘 을 끄집어내려 남 몰래 노력했지만 안 되더라. 사실 난 그 위력에 목메 는 게 아니야. 그 능력을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면 잃어버린 내 기억 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하지만 방법이 없어." "그렇구나." 침대에 껑충 뛰어오른 니콜라스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채 예안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기처럼 순수하고 귀여운 눈망울과 눈이 마주친 예안은 그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누가 이 어리고 귀여운 아이를 암흑계 청부업 자라 생각할 것인가. "나는 누나를 만나기 전까지 나에게 그런 힘이 있는 줄 몰랐어. 누나를 알게 된 덕분에 제나르 녀석들과 얽히게 되었지. 어쩌면 내가 그들이 말 한 엘리우스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까지 품었고. 하지만 내가 그 녀석들이 말한 대로 정말 엘리우스라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엘리우스라…" 생소한 그 단어를 입안으로 굴려보던 예안은, 카테고리처럼 스쳐 지나가 는 신인류의 지식 속에서 그런 단어가 없음을 얼핏 눈치채고 내심 안도 했다. "난 기억을 되찾고는 싶지만 누나의 적인 그 녀석들에게 손을 벌리고 싶 진 않아. 하지만 제나르가 사용한 힘과 내가 사용했던 힘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어. 난 그걸 알 수 있었어." "그래서? 날 경호하면서 시트날타 녀석들이 접근해오기만을 기다리기라 도 하겠다는 거냐?" 다소 가시 돋친 목소리였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아직까진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과거와 기억보 다는 청부업자로서의 내 프라이드가 더 중요해." "너 전에 더 이상 청부업자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것과 프라이드를 지킨다는 건 다른 거야. 깨끗 하게 양지로 나오겠다는 뜻이었지, 비굴하게 바닥을 기어서 음지를 빠져 나오겠단 소리는 아니야." 니콜라스는 손을 들어 예안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예안은 흠칫했지 만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누나는 언제 봐도 참 신기해. 정말 아름다워." 또 제임스 해론 어쩌구 하는 이야기를 할 셈인가. 예안은 조금 질린 표 정을 지었다. "너 또 제임스 해론이니 종말론이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할 거라면 관 둬. 나 그 얘기 듣기 이제 지겹다, 지겨워." 니콜라스는 쿡 웃으며 손을 뗐다. 그리고 예안의 가슴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예안은 움찔했지만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그의 어깨를 감싸안았 다. '이건…'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음 역시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얼마 후면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될 여자로서 모성애가 서서히 눈을 뜨고 있다는 걸 암시하는 건지도 모른다. "누나는 이런 말을 들으면 또 날 바보 같다 생각하겠지. 그래도 상관없 어. 이대로 누나 곁에 있는 걸로 난 만족해. 언젠가 누나가 갖고 있는 인간다움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면 난 누나 덕분에 기억을 되찾을 수 있 을 지도 모르니까.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은 인간일 수 없다고 난 생각해." 그것은 반질반질함이 듬뿍 넘겨 흐르는 닭살 고백이 아닌 순수하고 솔직 한 어린아이의 소원이었다. 너무나 솔직하고 숨김이 없어 오히려 낯선 거리감까지 느껴지는 그런 것. 니콜라스는 얇은 두 팔로 예안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마치 어미의 품을 파고드는 새끼 같았다. "엄마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응?" "나한테도 엄마가 있었을까?" 니콜라스는 건조한 톤으로 중얼거렸다. 예안은 왠지 가슴이 아려왔다. 옛날 같았으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감정의 변화였다. "왜, 너 엄마가 갖고 싶냐?" 니콜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엄마가 있었으면 어떤 기분일까 싶어서… 내 가 기억을 잃기 전에도 정말 엄마가 있었는지 확신도 없고…" 요컨대 두려워하고 있다는 거군. 예안은 왠지 그가 가여워졌다. "야야, 그런 생각하지 마. 이 세상에 엄마 없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에 있냐? 하늘 아래 어딘가 분명히 네 엄마와 아빠도 있을 거야. 만약에 없 다면 무덤이라도 있…" 무심코 거기까지 말한 예안은 실수했음을 깨닫고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미안하다. 해선 안 될 말까지 해버렸네." "나 오늘 여기서 자도 돼?" 머쓱해하던 예안은 조금 놀라 니콜라스의 어깨를 살짝 밀어내 시선을 마 주쳤다. 똘망똘망하게 빛나는 눈망울. 한치의 흑심도 없는 순수한 눈빛. "킥. 너도 참 사악하네. 지금 그런 말을 하면 내가 거절을 못 하잖아." 예안은 키득키득 웃으며 침대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렸다. "그래, 오늘은 내가 하루만 네 엄마 노릇 해주마. 큰마음 먹고 해주는 거니까 부디 많이많이 고마워하고 내일부터는 이 몸 잘 지켜라. 알겠 냐?" 니콜라스는 말없이 예안의 옆에 누워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태어나 서 단 한 번도 어미의 품을 누벼본 적이 없는 버림받은 새끼와도 같이 애처로운 그 느낌이 예안의 기분을 씁쓸하게 했다. '아이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예안은 몇 달 후면 태어날 자신의 아이를 생각하며, 그때를 위한 예행 연습이니까 좋은 거라고 그렇게 유젤에게 미안해지려는 자신을 달랬다. 중현은 예안의 연락을 받는 게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았다. 예안이 임신했 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고 난 뒤, 하루하루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고민으로만 보낸 그에게 며칠만에 온 예안의 연락은 반가우면서도 어떻 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머리는 혼란스러워해도 몸은 그저 예안이 반갑지만 한지, 어느새 그는 외출 준비를 마치고 차에 시동 을 걸고 있었다. 예안의 아파트에 도착하자 니콜라스와 예안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언 제나처럼 밀짚모자를 쓴 예안의 모습은 그의 눈을 부시게 했다. 임신 4 개월이라는 데도 거의 부르지 않은 아랫배는 '어쩌면?'하는 기대를 심어 주기 충분했으나 이미 예안의 입으로 실토한 바에야 그런 헛된 기대를 해서 무엇할까. "예안씨가 갑자기 연락해주셔서 굉장히 놀랐습니다. 며칠 동안 연락이 없으시길래 이제 더 이상 연락이 없을 줄 알았거든요." "에? 왜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연락 안 한 건 고작해야 일주일 정도밖에 안 되는데?"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중현은 머뭇거렸다. 연락이 안 온 그 일주일이 자신에게는 백 년의 세월처럼 길게 느껴졌다는 말을 하기는 좀 뭐했다. "그런데 '그것'을 보러 가고 싶으시다구요? 왜 그런 건지 이유를 물어 봐도 되겠습니까?" 중현은 그렇게 슬그머니 말문을 돌렸다. "시스템을 조금 점검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마음에 걸리는 게 있거든 요." 니콜라스는 아직 맥에 대해 알지 못하기에, 중현은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다행히 예안의 옆에 앉은 니콜라스는 별 관심 없는 표정으로 창 밖 풍경만 내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지금 한국에 있어 맥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중현은 체면도 잊 고 다급히 물었다. "별 문제 같은 거 없어요. 그냥 디스크에 남겨둔 몇 가지 데이터를 확인 해볼 겸해서… 전 그 녀석을 PC용으로도 많이 썼거든요." "아… 그러시군요. 혹시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해서 놀랐습니 다. 그런데 니콜라스 베르노와 함께 가도 괜찮겠습니까? 아무래도 보안 상…" "이제 니콜라스한테 말해줘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이 녀석 꽤나 믿을 만 했거든요. 그리고 사실 오백 억씩이나 주고 의뢰를 부탁한 처지에 전 아 무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고 둘러대는 것도 오히려 의심 살 노릇이잖 아요." '에엑?' 중현은 속으로 뛸 듯이 놀랐다. 예안의 정체를 다른 사람에게 밝히느냐 마느냐 하는 건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야 할 정도로 국정원 내에서는 극 비로 취급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밝힌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기, 예안씨. 하지만 그건…" "아, 괜찮아요. 뭐 어차피 나중에 밝혀질 건데 어때요? 니콜라스, 너도 알고 싶지?" 예안의 다정한 미소와 함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니콜라스는 그제야 시 선을 예안에게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미미한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알고 싶냐니? 뭘 말하는 거야?" "우리나라 정부가 왜 너한테 오백 억 원이나 주면서까지 날 제나르 의원 에게서 구해달라고 의뢰했는지 궁금하지 않았어?" "궁금하긴 했지만…" "근데 왜 안 물어봤니?" "나야 돈 받은 대로 착실히 의뢰만 해결해주면 그만이니까. 의뢰주의 사 적인 사항에 대해서 캐어묻는 건 절대 해선 안 될 일이라고." 예안은 중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들었죠? 이 녀석은 이렇게 꽤나 믿을 만 하니까 이제 그만 말해줘도 괜 찮을 것 같아요." "하… 예. 알겠습니다. 예안씨가 그렇게 하고 싶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 요." 중현은 속이 조금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간신히 참았다. 왜 화가 나는 건지 그는 잘 몰랐다. 예안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비밀을 손쉽게 알게 되는 니콜라스에 대한 질투 때문인지, 아니면 한낱 청부업자에 불과한 니콜라스에게 마음을 열어주는 예안에 대한 답답함 때문인지 그것조차 불분명했다. 세 사람을 태운 차는 몇 시간을 달려 동해 해군기지에 도착했다. 과연 맥을 보관하고 있는 해군기지답게 공기부터 틀렸다. 바람 가득 싣고 오 는 살벌한 긴장과 경계가 오싹 소름을 끼치게 만들 정도였다. 기관총이 달린 군용차들이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하고, 보기만 해도 무거운 총을 짊어진 군인들은 불시에 검문을 하고 있었다. 입구 근처에 다다르자 긴장감은 극도에 달했다. 니콜라스는 호기심과 놀 람이 가득 한 눈으로 예안을 돌아보았다. "여기는 맥이 보관되어 있는 해군기지 아니야? 누나가 여기를 왜…?" 예안은 웃음과 함께 니콜라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중에 다 이야기해 줄게. 잠깐만 묻지 말아줄래?" "응. 알았어." 마치 다정한 오누이 같은 그 모습에 중현은 내심 샘이 났다. 예안이 남 자에게 저렇게 다정하게 대하는 걸 본 기억이 없었다. '쳇… 예안씨가 연하 취향이었을 줄이야. 젠장, 나도 십 몇 년만 늦게 태어날 걸.' 중현이 이런 상상을 하고 있는 줄 모르는 예안은 머리에 쓴 모자와 얼굴 을 가린 마스크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 잘 점검한 후에 중현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앞장서라는 의미였다. 두 사람이 입구 가까이 다가가자 지 키고 서 있던 군인이 신분 확인을 요청했다가 중현이 내민 신분증을 보 고는 말없이 통과시켜 주었다. 살벌한 긴장이 흐르는 분위기 가운데 몇 번의 검문을 받고 겨우 격납고 에 들어간 세 사람을 반겨주는 건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전투기 형태 의 맥이었다. 전투 모드일 땐 키 20미터의 거인처럼 생긴 맥은 지금 길 이가 25미터에 가까운 전투기 모습이었다. "이건 정말 맥이잖아?" 니콜라스가 다소 놀란 눈으로 돌아보자 예안은 피식 웃으며 니콜라스의 뺨에 손바닥을 비볐다. "나중에 다~ 이야기해 준다니까." 니콜라스는 멍한 표정으로 콕피트에 오르는 예안을 쳐다보기만 했다. 예 안이 지금 그에게 마음을 거의 열고 있다는 걸 눈치챈 중현은 내심 씁쓸 했다. 정말 예안이 연하 취향이어서 저렇게 하는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 지만, 그래도 남자한테 마음을 열고 있다는 건 그의 입장에선 아쉽기만 할 따름이었다. 콕피트에 오른 예안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네 본체에 다시 오르는 게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다. 안 그래?" 「그다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저 역시 반갑군요. 태양계 최강의 전투병기 맥, 정식 명칭 Moving Armor Craft에 탑승하신 걸 환영합니다. 전에 말 씀드린 바와 같이 세 가지 모드 중 하나를 선택해 주십시오.」 예안은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늘 그랬듯 공명 모드로 시동하고, 그리고 레이온 형에게 교신을 넣어." 예전의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그리고 있는 지도 몰랐던 권리를 이제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눈앞 가득 거대한 스크린이 떠올랐고, 이윽고 「Now Loading」이라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전자 문명 역사상 블 루 스크린과 더불어 극강 공포의 대명사로 자리잡아왔던 그 메시지가 한 참이나 사라지지 않자 예안은 참다못해 물었다. "언제까지 로딩만 할 거야? 명색이 수퍼컴보다 뛰어나다는 녀석이 그깟 화상 채팅 하나 하는데 시간이 이렇게나 오래 걸린다는 게 말이나 돼?" 「저쪽에서 통신을 안 받고 있는데 별 수 없잖아요. 조금만 참고 느긋하 게 기다리시죠. 자고로 아무리 빠르고 뛰어난 게임이라 해도 렉 안 걸리 는 일은 절대 없다 했습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울컥한 예안이 뭐라 한 마디 쏘아주려는 찰나, 갑자기 스크린이 환해지며 이내 그녀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바로 레이온이었다. 「오랜만이야, 유젤.」 예안은 맥에게 화를 내려던 것도 잊어버린 채 터질 듯 두근거리는 가슴 을 달래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몇 달 만에 보는 얼굴이었지만 마치 몇 십 년 만에 다시 보는 것처럼 무언가 씁쓸한 아련함이 가슴을 찔러왔다. "아, 안녕 레이온." 무심코 그렇게 인사했던 예안은 순간 깜짝 놀라 얼른 고쳐 말했다. "아, 안녕 레이온 형. 오, 오랜만이야 형. 그 동안 잘 지냈…어?" 스크린 속의 레이온은 부드러우면서도, 한편으로 대단히 만족하는 미소 를 띠었다. 「이제야 겨우… 깨어난 거야?」 예안은 아직, 바로 조금 전의 그 사소한 실수로 인해 당장이라도 끊어버 릴 수 있었던 레이온과의 인연을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어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나중에야 예안은 평온 하고 고요한 어느 날 비로소 꿈만 같이 느껴지는 이 순간에 대해 생각하 게 된다. 하지만 후회의 시선으로 돌아보게 되는지 아련한 그리움으로 회상하게 되는지 아니면 다시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와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시 작하고 싶다는 절실한 염원으로 되돌아보게 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25 회] 날 짜 2004-01-19 조회 / 추천 4076 / 61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추억의 끝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 같은 거 없니?」 길고 긴 시간 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예안은 먼저 침묵을 깨뜨린 레이온 의 음색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하고 싶은 말?" 「그래. 나한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거 아냐?」 "하고 싶은 말이라…" 예안은 어색한 목소리를 입안에 굴려보았다. 하고 싶은 말. 많았다. 정 말 많았다. 레이온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하고 싶은 말 묻고 싶은 말 듣 고 싶은 말 가릴 것 없이 아주 길게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어째서 지금은 그 많은 것 중 단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가. "레이온… 아니 레이온 형… 지금 나랑 만나줄 수 있어?" 무심코 레이온이라 불렀다가 황급히 고쳐 부른다는 게 어떤 걸 의미하는 지 알고 있는 예안은 필사적으로 그의 그윽한 시선을 피하려 애썼다. 이 대로 맥없이 끌려가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그에게 귀속 당하는 건 결 코 원하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결판을 내야 해.' 예안은 그렇게 굳게 결심하곤 부담스러운 레이온의 눈동자를 똑바로 주 시했다. "지금 만나자. 나는 형이랑 꼭 할 이야기가 있어. 여기선 안 돼. 만나 서, 만나서 이야기하자." 「좋아. 난 지금 바다 한가운데 있어. 지금 곧 좌표를 보내줄게.」 스크린이 꺼짐과 동시에 짧은 신호음이 데이터가 전송됐음을 알려왔다. 멍하니 앉아 있던 예안은 저도 모르게 젖어든 눈시울을 손등으로 닦아내 고는 차갑게 명령했다. "출발할 거야. 준비 해." 「알겠습니다.」 공명모드를 시동하기 위해 시스템과 결합시켰던 손목시계형 원격장치를 만지작거리던 예안은 귓가에 울리는 전자음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갑자기 눈부신 빛이 번쩍이자 중현은 몹시 당황해 팔로 두 눈을 가렸다. 격납고 뒤에 만들어놓은 맥 전용 출입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맥이 지금 발진 중이었던 것이다. "어? 어? 어? 예, 예안씨! 어디로 가려는 겁니까!" 당황한 중현은 서둘러 달려갔지만 일반 전투기와는 달리 파일럿이 중심 에서 철저하게 보호되고 있는 터라 예안의 모습을 볼 순 없었다. 맥의 외부 스피커가 울려 퍼졌다. 「죄송해요. 지금 가봐야 할 곳이 있거든요. 오늘 안으로 돌아올 테니까 다른 사람들한텐 잘 말씀해주세요.」 "예, 예안씨!" 질겁한 중현은 맥의 앞쪽으로 달려가 가로막으려고 했지만 니콜라스가 얼른 붙잡았다. 어린아이 같지 않게 굉장히 힘이 강한 그는 중현을 끌고 가볍게 한쪽으로 비켜서 맥이 손쉽게 출발할 수 있게 해주었다. 강한 바람과 함께 활주로로 미끄러져 나간 맥은 그대로 수직으로 높이 떠올라 폭발하듯 쏜살같이 날아갔다.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아 시야에 서 완전히 사라진 맥의 그림자를 허탈한 표정으로 뒤쫓던 중현은 니콜라 스에게 화를 냈다. "니콜라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지금 누나가 맥을 갖고 도망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아까 누나가 말하지 않았어? 시스템을 점검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 하지만 그런 건 복잡한 승인 단계를 거쳐서 해야 하는 겁니다! 이 렇게 예안씨가 독단으로 할 일이 아니…" 중현은 그 부분에서 말을 멈췄다. 니콜라스가 뿜어내는 미미한 살기에 살짝 질린 까닭도 있지만, 자신이 이렇게 고래고래 외쳐봐야 결국 하등 이익 될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냉철하게 보자면 한국 정부는 현재 맥보다는 예안을 더 중요시하지 않는 가. 알게 모르게 국외를 드나드는 사람과 선박 등에 대한 감시망을 늘리 고 있고, 훗날 언론의 비난을 받을 걸 무릅쓰면서까지 니콜라스를 고용 해서 경호를 세울 정도니 말이다. '휴. 결국 나하고 다른 사람들만 왕창 깨지겠군.' 일이 어찌 되든 간에 예안은 높으신 어른들에게 혼날 일이 전혀 없을 게 뻔하다. 걱정해야 할 건 바로 자신이었다. 중현은 집으로 돌아가면 야당 총재이자 아버지인 김두오의 잔소리와, 아버지의 친구이자 어렸을 땐 삼 촌이라 부르며 졸졸 따랐던 김영환 대통령의 호된 꾸짖음을 들을 거란 공포에 그만 암담함을 느꼈다. "근데 누나는 뭣 때문에 내 총을 빌려달라 했을까? 제대로 다루지도 못 할 거면서…" 니콜라스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중현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예안씨가, 예안씨가 총을 빌려달라고 했다 니요?" "글쎄 그건 나도 잘 몰라. 그냥 쓸데가 있으니 총 한 자루만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줬지. 왜?" 일부러 저렇게 능청맞게 구는 건가 아니면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천진 스런 되물음에 중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그냥 단순히 시스템 점검하러 나간 사람이 왜 권총은 들고 나간 답니까? 허참… 정말 무슨 일 내러 가는 건 아닌지…" 중현은 예전에 예안이 샘슨 유젤 역을 맡고 있는 박준을 통해 '난 미국 이 싫다'라는 말을 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던 걸 기억해내고 사색이 되었 다. "호, 혹시 또 무슨 미국 온라인 게임 하다가 아이템이라도 다 날린… 아 니야, 아니야! 고작 아이템 날린 것 가지고 이런 짓을 벌일 리가 없어! 설마하니 서버 오류 때문에 고랩 캐릭터가 지워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 그것 때문에 지금 화나서 백악관을 쓸어버릴 결심이라도 한 건…" 만약 미국 대통령이 이 사실을 알았다가는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황 당한 상상이었지만, 이미 몇 달 간의 만남으로 예안이 지독한 게임광이 자 온라인 폐인이라는 걸 절실히 알고 있는 중현에게는 당연한 추측이었 다. 원래 천재들은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 정도로 광기를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가끔이기는 해도 그 가끔은 그때마다 무서운 결과를 낳는다. "이봐. 걱정하지 마. 설마 아메리카 대륙을 지구상에서 지워버리기야 하 겠어?" 니콜라스가 혀를 차며 어깨를 짚자 중현은 어이없단 표정으로 돌아보았 다. "당신에겐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우리나라에 있어서 이건 사활이 걸린 문 제입니다!" "나한테도 아무것도 아니란 말은 안 했어. 그냥 맘 편히 기다리란 소리 였지. 어차피 당신이 발을 동동 굴러봐야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잖 아? 레이더에도 안 잡히는 맥을 쫓아가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한국에는 항속 거리가 몇 만 km가 넘는 전투기라도 있나 보지?" 말문이 막힌 중현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 낀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맥과 예안씨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걸 알고도 별로 놀라지 않는 군요?" "맥을 만든 프랭크 안쏘니 유젤이 누나의 다른 이름이라는 게 그렇게나 놀랄 일이야?" 중현은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 상대방은 그냥 넘겨짚은 거라지만 그에게 있어선 뒤로 자빠질 질문이었다. "그,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예안씨는 단지 프랭크 안쏘니 유젤의 숨겨 진 유족이자 맥의 파일럿이지, 맥을 만든 본인은 절대 아닌데…" "그냥 넘겨짚어 봤을 뿐이야. 그리고 그렇게 땀 뻘뻘 흘리면서 변명해 봐야 별로 안 믿어져. 어차피 나중에 누나가 돌아오면 다 말해줄 건데 뭘 그렇게 애써 넘기려고 해?" 중현이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예안을 원망하고 있다는 걸 알 리 없는 니콜라스는 여전히 놀람이 없는 눈동자로 맥이 사라진 수평선을 더듬고 있었다. 중현의 태도로 보아 자신이 짐작한 건 거의 맞는 듯 했다. '맥이라… 맥을 만들었단 말이지…' 그동안 예안에게 느꼈던 특별한 기운은 이런 걸 암시하고 있던 것인가. 니콜라스는 다소 흥분되는 두근거림을 만끽하며, 그대로 눈을 감고 바람 에 실려오는 푸른 바다 내음을 마음껏 들이켰다. 태평양 푸른 물결 위를 쏜살같이 날아가는 맥의 주변으로 어마어마한 충 격파가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인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것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이 기체가 만들어낸 충격파에 휘말려 들어간다면 제 아무리 굳건한 배라 해도 침몰 당하고 말 것이다. 원하는 좌표에 근접한 맥은 서서히 속도를 늦추었다. 하지만 여전히 음 속을 훨씬 넘어서는 초스피드였다. "거의 다 도착했네." 레이더에 반짝이는 물체를 확인한 예안은 속도를 급속히 늦췄다. "휴우." 레이온이 타고 있을 거라 추정되는 배에서 약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일 단 맥을 세운 예안은 고뇌에 찬 한숨을 토해냈다. 이제 드디어 레이온을 만난다 생각하니 가슴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약해지지 말자, 유진우. 예안인 내 거야. 그 누구도 예안일 나한테서 빼앗아 가지 못해.' 떨리는 손길로 자신의 몸, 아니 유젤의 몸을 어루만지던 예안은 이윽고 결연에 찬 표정으로 콕피트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에 나와 서자 드 넓은 푸른 바다가 어둠을 헤치고 한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몸서리쳐지 는 공포가 밀려들어왔지만 예안은 꿋꿋이 참았다. "유니콘. 저 배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해. 내가 안 타고 있어도 그 정도 는 할 수 있지?" 「제 본체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겁내지 마시구요. 바다에 빠진다고 해서 안 죽습니다. 헤엄만 칠 줄 알면 말이죠.」 "누, 누가 겁냈다고 했어?" 하지만 목소리가 찔끔하는 걸 봐선 조금 겁을 낸 건지도. 어쨌든 맥은 전투기 형태 그대로 저쪽에 떠 있는 배에 천천히 접근했다. 이윽고 배에 새겨진 문장이 뚜렷이 보일 정도로 맥은 그 배에 근접하게 다가섰다. "안녕." 갑판 위에서 레이온이 기다리고 있다가 예안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인사 했다. 길이가 백 미터가 넘어가는 큰배다 보니 자신이 올려다보는 건 어 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예안은 왠지 분했다. "젠장, 유니콘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작아서 사람을 쪽팔리게 만들어?" 「저 배처럼 무식하게 크다고 해서 훌륭한 전투병기는 아닙니다. 제가 무슨 느려터지고 약해빠진 항공모함인 줄 아십니까? 쓸데없이 크고 무겁 기만 하게요? 그리고 저 배는 유람선이잖아요? 큰 게 당연한 거죠.」 "말을 말자, 말을." 예안은 투덜거리면서 배에 올라갔다. 어둠을 밝히기 위한 조명불빛이 가 득한 갑판 위에는 레이온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예안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물었다. "왜 형 말고는 아무도 없어? 다 선실에서 놀고 있는 거야?" "이 배는 내가 직접 설계한 거고 또 내 소유야. 나말고는 아무도 없는 게 당연하지." 이렇게 큰배를 개인 혼자 타고 다니다니. 예안은 자원 낭비가 심각하다 고 속으로 투덜댔다. "그럼 배 운전은 누가 하는데?" "더미 프로그램 비슷한 걸 달았다고 생각하면 돼." 세계 여러 나라 국방부에서 각광받고 있는 무인 자동화 시스템을 말하는 건가. 예안은 그제야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와인을 몇 병 구했는데, 한 번 맛보지 않겠어?" 자연스럽게 예안을 갑판 위 테이블로 안내한 레이온은 고급 라벨이 붙어 있는 와인을 손에 들어 보여주었다. '내가 와인 따위에 대해서 알 게 뭐냐.' 예안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거절했다. "사양하겠어. 난 그런 것하고는 어울리지 않아." "아직 음식을 못 먹어서 그런 게 아니라?" 정곡을 찔린 예안이 대답을 못하자 레이온은 즐거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지금 네 몸에 대해서는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아. 심지어 네 몸의 주인 인 너보다도 더. 언제쯤 금제가 풀릴 지는 모르지만 아직 네 몸은 마더 가 만들어낸 음식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어쩌면 영원히 그대로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차피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위대한 신 인류니까 그런 사소한 결함 따위는 별 신경 쓰지 않지?" "지금 나 비꼬는 거야?" "천만에. 난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신인류, 그들은 정녕 위대한 종족이 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낸 인류 두 번째 아담과 이브라든지, 인간이 최초로 만들어낸 천사인 너라든지. 안 그래?" 가면으로 뒤덮인 레이온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오로지 단 하나, 껍데기이든 아니든 유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너무나 강렬하고 뜨거워 자칫 지독한 집착으로까지 비춰질 수 있는 그의 뜨거운 애수에 예안은 그만 질리고 말았다. '내가… 내가 이 사람한테서 과연 예안이를 지킬 수 있을까? 예안일 빼 앗기지 않을 수 있을까?' 여태껏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았던 유젤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이 레이온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솟아올랐다. 그건 정말 바보 같 은 생각이었지만 허황된 두려움만은 아니었다. 레이온이 지닌 기도는 그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최초의 천사라… 바드로 3세가 이런 칭호를 너에게 내 렸을 때 사실 난 그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칭호 하나만큼은 정말 좋았 어. 천사… 천사… 넌 정말 천사라는 이름이 잘 어울려." 맞은편에 앉은 레이온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와인을 따라 한 모금 마셨 다.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행동이었지만 예안은 저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레이온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날 무서워하는 거야? 내가 언제 유젤 너에게 이상한 짓 같은 걸 하기라도 했니?" "그, 그렇지만…" 정말 그렇다. 그를 두려워해야 할 까닭은 없다. 남자였던 자신이 죽게 되었을 때 이렇게 유젤로서 다시 되살려내 주었고, 스스로 배에 총을 맞 으면서까지 탈출하는 걸 도와주었고, 맥처럼 대단한 전투병기를 아무렇 지도 않게 내주어 결국 예안은 유전을 손에 넣기까지 했다. 따지고 보자 면 예안은 그에게 갚을 수 없는 과분한 은혜를 입은 셈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지금 이렇게 그를 두려워하는가. 그건 정말 알 수 없는 미지의 감정이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망설이지 말고 어서 해. 나도 유젤 네가 깨어나고 나서 무슨 말을 할까 몹시 궁금해서 지금까지 기다리는 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 "그, 그건…" 갑판 위로 쏟아지는 별빛이 어둠을 힘겹게 밀어내고 있었다. 별 하나 보 이지 않는 오염된 서울의 하늘과는 달리 바다 위인 이곳은 고개만 들어 보면 멋진 은하수가 가득히 펼쳐져 있었다. 살벌한 긴장을 가득 안고 있 는 예안을 비웃기라도 하듯 너무 아름답고 멋진 태평양 바다였다. "이제 그만… 내 인생에 더 이상 관여하지 말아 달라는 거야." 그 말을 하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른다. "관여? 내가 언제 유젤 너의 인생에 관여했다는 거니? 그동안 너한테 단 한 번도 내가 먼저 연락한 적 없잖아?" "그랬지. 하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잖아. 레이온 넌… 아니, 형은… 형은 언젠가 내 인생을 전부 가져가 버릴 것만 같아." 힘겹게 그렇게 말했다. 레이온은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었다. "맞아. 지금까진 관여 안 했지만 앞으로는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 어쩌 면 지금까지 너에게 다가가지 않은 것 자체가 관여였을지도 모르지. 아 니면 그동안 너의 모든 걸 나한테 얽매게 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던 건지도 몰라. 안 그래?" 날카로운 칼날 위를 맨발로 걷고 있는 듯한 살벌한 분위기 속에, 예안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제발 부탁해. 앞으로 나한테 상관하지 말아 줘. 형이 원한다면 유전까 지도 다 줄 테니까 제발…" "싫어.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레이온은 차갑게, 아주 차갑게 예안의 말을 끊었다. "절대 싫어."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26 회] 날 짜 2004-01-20 조회 / 추천 4192 / 62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추억의 끝에서 레이온은 천천히 손을 들어 손바닥 위에 떨어지는 차가운 별빛의 감촉을 즐겼다. 동그랗게 푸르고 오랜 세월이 결여된 별빛은, 이제 지구는 영영 혼자 태양 주위를 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과연 이 하늘 아래 그 누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유젤과… 나… 그리고 마더뿐이지. 지구의 의지 마더…' 다시 유젤을 보고 싶다는 마음에, 지구의 의지이자 모든 생명체의 어머 니인 마더의 허락 아래 간신히 그녀를 복제했다. 애초에 그것을 두려워 하거나 후회한 경험은 없었다. 하지만 오 년 전 그때처럼 유젤로부터 또 다시 버림받는 건 그에게 있어 죽음보다 끔찍한 것이었다. 바다 위에 둥실 떠 있는 배 갑판 위로 차가운 바람이 스쳐지나가며 무수 한 추억을 떨궈놓는다. "어디까지 기억해냈니?" "기억해내다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형? 난 기억을 잃었다가 되찾 은 게 아니야. 형이 거짓으로 조작해놓은 기억을 그동안 건드리지 못하 고 있다가 이번에 충격을 받아 내 것인 것처럼 떠올렸을 뿐이야. 예안 이… 아니 유젤은 한국이나 일본 같은 게 뭔지도 모르는 애였어. 그런 애가 조물주 프로젝트니, NM 프로젝트니, 노블 네트워크(Noble Network) 니 하는 걸 알 리가 없잖아! 형이 거짓 기억을 심어놓지 않는 이상!" "어디까지 기억해냈니?" "형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우리 확실히 해 두자구. 난 잃어버렸던 기억을 떠올린 게 아니라, 형이 억지로 심어놓은 기억에 휘둘리고 있는 중이라구!" "어디까지 기억해냈니?" "장난하지 마 형! 진짜 누구 도는 꼴 보고 싶어!" 참다 못한 예안은 분노 섞인 고함을 내질렀다. 자칫 하다가는 달려들어 그대로 메다꽂을 기세였다. 하지만 레이온은 전혀 져주는 기색 없이 묵 묵히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다음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기억해냈니?" 차갑고 건조하면서도 한없는 가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 그가 얼마나 힘 들고 외로운 기다림을 오래도록 이어 왔는지 예안은 이제 안다. 자신이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은 그의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는 것도 이제 는 안다. 그래서 더욱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난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않았어. 그냥 이 육체에 어떤 기억들이 있는지 그 목록만 대충 알고 있을 뿐이야. 실제로 난 조물주 프로젝트라는 이름 은 알지만 그게 어떤 건지, 누가 그걸 완성했는지 따위 같은 건 하나도 알지 못해. 몰라. 모른다구. 이거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형? 난 정~말 모르는데." 예안은 그렇게 빈정거렸지만 미미한 떨림이 은밀하게 숨어 있었다. 레이 온은 그걸 눈치채고 빙긋이 웃었다. "조물주 프로젝트라는 이름만 알고 다른 건 모른다면서, 어떻게 그게 완 성되었다는 건 알고 있는 거니?" "!" 예안은 크게 당황했다. 레이온은 만족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노블 네트워크에 접속해본 경험은 있어?" "어, 없어. 접속하는 방법 따위는 몰라." "후후, 또 거짓말했구나. 노블 네트워크라는 이름만 알고 있다면 접속해 본 경험이 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접속한다는 게 무슨 뜻이야?'라고 반문해야 정상 아냐?" "칫…" 꽉 쥔 주먹을 바르르 떨던 예안은 자포자기 식으로 쏘아붙였다. "그래! 거짓말했다, 왜! 내가 거짓말한 게 뭐 어때서? 어차피 그건 내 기억들도 아니고 유젤이 갖고 있던 기억도 아니잖아! 그냥 형이 억지로 유젤의 뇌에 심어놓은 기억뿐이잖아! 형은 그렇게 사람을 세뇌하고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게 좋아?" "날 형이라 부르지 마. 레이온이라 불러." "싫어! 형이라 부를 거야!" "형이라 부르지 마. 자꾸 날 힘들게 하지 마. 난 오 년이나 널 기다렸 어. 이제 더 이상 기다리는 건 지긋지긋하기만 해." 나지막한 목소리. 피 끓는 그리움이 듬뿍 젖어 있는 음색이었지만 예안 은 잔인하게 고개를 돌렸다. "싫어! 형은 형이야! 형이라구! 형을 형이라고 안 부르면 뭐라고 불러! 형! 형! 형! 형! 형! 형! 형! 됐어? 만족해?" 예안은 씩씩거리며 목청이 찢어져라 고함을 내질렀다. 레이온은 벌떡 일 어나 거친 발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덥석 어깨를 잡힌 예안은 소 스라치게 놀랐다. "뭐, 뭐야! 이거 놔아!" 레이온은 예안의 어깨를 잡은 채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그리고 으르 렁대듯 말했다. "날 형이라 부르지 마. 넌 유진우가 아니야. 엔젤도 아니야. 넌 어디까 지나 유젤이다. 내가 좋아했고 앞으로도 좋아할 유젤이라구. 다시 돌아 오겠다고 나랑 약속했던 유젤이야!" "웃기지 마! 누가 그런 거 한데!" 예안은 그렇게 버럭 고함을 지르며 거칠게 레이온을 밀쳐냈다. 레이온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한참 후 예안이 다소 진정된 음색으로 침묵을 흐트러뜨렸다. "내 뱃속의 아이… 형 아이라며?" "맞아. 내가 시험관 아기로 임신시켰어." 레이온은 의외로 순순히 긍정했다. "예안이… 아니, 유젤한테 어디까지 손댔어? 두 사람 사이, 어디까지 간 거야?" "뭘 그런 식으로 묻고 그래? 유젤은 바로 너 자신이잖아?" "아니야! 난 유젤이 아니야! 난 유진우란 말이야!" 자신이 유젤이라는 걸 인정해버리면 더 이상 그녀를 기억하고 사랑해줄 수 없게 된다.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유진우인 자신을 잃어 버리지 않으려 했던 까닭이었다. "똑바로 말해. 나한텐 아주 중요한 거야. 예안이한테 어디까지 손댔어? 거짓말은 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하란 말이야!" 예안은 당장이라도 그에게 주먹을 휘두를 듯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으르 렁댔다. 레이온은 훗 하고 웃어버렸다. "네가 원하는 게 성관계의 여부라면 안심해도 좋아. 난 <허락 받지 못한 유젤>과는 성관계를 가진 기억 따위 없어. 이미 맥에게 들어서 알고 있 을 텐데 왜 그걸 또 묻는 거니?" 예안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맥에게 이미 들어 알고 있는 거였지만 그래 도 확실히 해두고 싶은 사실이었다. "그래? 다행이네. 근데 허락 받지 못한 유젤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레이온은 키득 웃으며 천천히 등을 돌렸다.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는 그의 등뒤로 씁쓸한 기운이 가득 넘쳐흘렀다. "유젤, 너는 신인류야. 아무리 뛰어난 생명공학 기술을 지녔다고 해도 널 복제한다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그건 곧 원숭이가 인간을 탄생 시키겠다고 이리저리 설치고 다니는 것과 다름없어. 겨우 오 년 안에 널 탄생시킨 건 정말 기적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거라구." 예안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 엄청난 기적이 과연 그냥 우연으로 이뤄진 거라 생각해? 마더. 지구 의 의지이자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 인간들이 흔히 신이라고 부르는 초 자연적 존재. 바로 그 마더의 허락이 없었다면 유젤 넌 영원히 태어날 수 없었어. 알기나 해?" "마더…" 끊어도 잘라도 베어내도 결코 줄어들지도 사라지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질긴 숙명의 끈을 던져주는 저주와 축복의 대명사, 마더. 인간으로 태어 나 지구에서 살아가는 동안 영영 마더로부터 멀어질 수도 벗어날 수도 자유로워질 수도 없다는 사실을 예안은 이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형은 예안이를 일부러 그렇게 죽인 거야?" "내가 죽였다고? 누굴?" "거짓말할 생각하지 마. 전에는 몰랐지만 이제 나도 알고 있어. 내가 남 자였을 때 예안일 만난 건 우연이 아니라 형이 의도한 거였다는 것쯤 알 고 있다구. 형은 일부러 예안이가 뇌사 하도록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서 맥을 조종해서 탈출하게끔 부추겼잖아? 잡아뗄 생각은 하지 마. 형이 예 안이한테 탈출하라고 시킨 건 기억 속에 있으니까." 레이온은 키득 웃음을 터트렸다. "잘 기억하고 있구나. 그래, 맞아. 난 프로토 타입의 유젤이 뇌사를 일 으키도록 맥을 타고 탈출하길 종용했어. 넌 잘 모르겠지만… 아니, 이젠 너도 알고 있겠지. 내가 프로토 유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는 태연하게 덧붙였다. 유젤의 죽음에 대해서 일말의 죄책감도 가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마더는 완벽한 신인류가 자신의 땅에서 살아가길 원하지 않았어. 그래 서 난 마더와 타협을 본 거야. 몸은 신인류의 것으로 하되, 정신을 구인 류의 것으로 대체하겠다고." "이익…" 예안은 진심으로 분노했다. 봉인되어 있던 기억이 깨어난 후 레이온을 향해 반감을 품게 된 건 다른 까닭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유젤 이 맥을 타고 시트날타를 탈출했던 건 <그녀의 정신>이 죽길 바라는 레 이온의 의도에서 빚어진 사고라는 걸 이제 알기 때문이었다. "휴우." 하지만 예안은 이내 그 분노를 털어 버렸다. "형을 이해하고 싶진 않지만 용서할 수 없는 자격이 나한테 있는 건 아 니니 그만 둘게. 애초에 예안이가 죽을 걸 알면서도 형이 탈출시킨 건 잘못한 거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난 예안일 결코 만날 수 없을 테 니까. 그것만큼은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그렇게 쓰게 말했다. 여기까지가 예안이 레이온에게 해줄 수 있는 배려 의 한계였다. 하지만 레이온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나 보다. "나한테 감사하지 마. 고마워하지도 마. 그런 사탕발림으로 날 달래놓고 또 떠나려고 하는 거지? 난 더 이상 오 년 전의 나약한 바보가 아냐!" 거칠게 예안의 어깨를 잡고 흔들던 레이온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예안의 턱을 잡고 억지로 들어올려 먼 하늘을 보게 했다. 그리고 외쳤다. "저길 봐! 저기가 네 고향이다! 넌 인간이 아니야! 넌 하찮은 구인류 따 위가 아니야! 자랑스러운 에덴 혹성의 일원이자 언젠가 저곳으로 떠나 어리석은 지구인들을 내려다보며 비웃어야만 해! 네가 인간이라고 생각 하지 말란 말이야!" 억센 힘에 얼굴이 붙잡힌 예안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억지로 밤하늘을 올려다봐야만 했다. "이, 이러지 마…" "봐! 봐! 보란 말이야! 저기에 네 고향이 있어! 언젠가 너와 내가 돌아 가야 할 고향이 저곳에 있단 말이야!" 가능한 올려다보고 싶지 않았던 밤하늘이다. 영원히 형제를 잃어버린 지 구의 밤하늘은, 앞으로 지루하게 이어질 지구인과 에덴 혹성인의 숙명적 대결을 암시하는 것이었기에. 그리고 언젠가 자신도 이곳을 떠나야 한다 고 속삭이는 듯했기에. 그래서 더욱 더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보기… 싫어… 보기… 싫어… 이러지 마 제발…" 쥐어짜듯 그렇게 중얼거리던 예안의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졌다. 제 아무 리 시력이 좋은 인간도, 그 어떤 뛰어난 레이더도, 그 어떤 훌륭한 천체 망원경도 찾아낼 수 없도록 굳건한 은폐막을 두르고 있는 「에덴」의 실 루엣이 천천히 망막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보이지? 하지만 난 보이지 않아. 에덴 혹성을 감추고 있는 은폐막은 구 인류와 구인류의 기술이 만들어낸 관측 장치 따위로는 절대 잡아낼 수조 차 없어. 하지만 넌 달라. 넌 볼 수 있어. 보이지? 잘 보이지?" 이제야 겨우 왜 레이온을 피하려고 했는지 진정한 까닭을 알았다. 그는 자꾸만 신인류로서의 자신을 자각시키려 애쓰는 인물이었다. 그와 접촉 하면 접촉할수록 싫어도 신인류인 자신으로서 자각을 해야만 했고, 그것 은 인간이자 유진우인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보기 싫어… 보기 싫다구…' 조금 전까지 볼 수 없었던 에덴 혹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신인류 의 세계로 한 발자국 내딛는 걸 의미한다. 예안은 그게 싫었다. "웃기지 마! 형은 지구에서 태어났고 지구에서 자랐어! 저곳은 형이 돌 아가야 할 곳이 아니란 말이야! 착각하지 말란 말이야!" 예안은 레이온의 손을 뿌리치며 그렇게 바락바락 외쳤다. "그래? 내가 착각하고 있다고?" "당연하잖아! 형이 돌아간다 해도 그들이 형을 받아들여주기나 할 것 같 아! 그들 입장에서 형은 재롱도 제대로 못 피우는 커다란 원숭이에 불과 할 뿐이야!" "너는 아니고?" 예안은 말문이 막혔다. 정신 없이 내뱉은 게 문득 후회되었지만 이미 엎 질러진 물이었다. "상관없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연구가 완성되면 난 자이오 다이아몬드 를 만들 수 있게 돼.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이제 알겠지?" 예안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자,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만들 수 있다고? 저, 정말이야 그게?" 레이온은 대단한 만족스러워했다. "그래." "맙소사. 형은 미쳤어!"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신비의 원석, 자이오 다이아몬드. 맥의 ST기 관의 주연료이자, 최초의 신인류를 탄생시키는데 사용되었던 물질이며, 인간에게 있어서 오르할콘과 미스릴보다 더욱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꿈의 원석, 자이오 다이아몬드. 그는 그것을 정말 만들어낼 셈인가. "정말 거의 다 깨어난 모양이네. 예전 같았으면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만 들겠다고 말해봐야 무슨 말인지 이해 못했을 텐데, 그렇게 놀라는 거 보 면 말이야.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안 돼." 레이온은 작은 리모컨을 꺼내어 버튼을 꾹 눌렀다. 예안은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배 전체에 미미한 진동이 퍼지는 걸 깨달았다. 경 악한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판 테두리에서 수많은 철창이 튀어나 와 지붕처럼 배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형!" 당황한 예안은 재빨리 뛰쳐나가려 했지만 이미 철창은 완벽히 둘러진 상 태. 그들이 타고 있던 배는 이제 커다란 감옥이 되었다. "이제 이 배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어. 넌 이대로 나와 함께 내 비밀기 지로 가야만 해. 그게 싫다면 방법은 단 하나 뿐이야." 레이온은 히죽 웃음과 함께 리모컨을 들어올렸다. "이것을 쓰면 돼. 하지만 내가 그냥 주진 않을 테니 네가 빼앗아야겠지? 아, 완력으로 빼앗을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이래 뵈도 난 운동을 좀 했거든." 겉모습이 유약한 편이긴 해도 레이온은 엄연히 성인 남자. 그리고 예안 은 아직 미성년의 문턱에 머무르고 있는 가녀린 소녀. 완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을 게 뻔하다. "ESP를 사용해. 그것으로 이 리모컨을 빼앗아 봐." 애수에 젖어 불타오르는 레이온의 눈동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예안은 단 번에 깨달았다. ESP를 사용한다는 건 자신이 완벽하게 신인류로서 깨어 났다는 걸 의미한다. 레이온은 바로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안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영원히 날 쫓아다니며 자기 손아귀에 날 넣으려고 들 거야. 하 지만 절대 그렇게는 안 돼. 내 인생도 예안이의 몸도 그리고 이 아기도 전부 다 내 거야! 그 누구한테도 못 줘!' 맥을 부를까 하고 생각도 해봤지만 완벽한 감옥이 된 이 배에서 맥이 자 신을 꺼낼 방법은 없어 보였다. 자칫하다가는 라이플 버스터로 배 전체 를 통째로 날려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정교하게 컨트롤을 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레이온이 그에 대한 대비를 미리 해두지 않았다고 생 각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ESP를 쓸 수조차 없었다. '젠장! 사실 써본 적도 없다구! 혜인이한테 건 최면이 성공한 다음부터 남몰래 죽어라 해봤지만 잘 안 됐단 말이야!'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이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방법이 아니라 미리 생각해둔 것이었지만,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자신 없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젠장!" 예안은 숨겨둔 권총을 재빨리 꺼내어 겨누었다. 니콜라스에게 미리 빌린 것이었다. "닥치고 저 창살 치워! 그리고 앞으로 다신 나한테 접근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안 그럼 죽여 버릴 거야!" 날카로운 목소리는 창살을 빠져나가 어둠을 짊어진 바다 위로 널리 퍼져 나갔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녹색 눈동자를 태연히 주시하던 레이온은 묘 한 웃음을 지었다. "죽음으로써 널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기꺼이." 사랑인지 그리움인지 아니면 단순한 집착인지 알 수 없는 미지의 감정으 로 물든 그의 눈동자를 보았을 때, 예안은 오싹한 두려움을 느끼고 그만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27 회] 날 짜 2004-01-21 조회 / 추천 4095 / 47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추억의 끝에서 기분 나쁜 화약 냄새가 잦아든 후 예안은 허탈한 표정으로 권총을 떨어 뜨렸다. 이것으로 레이온을 쏜 게 두 번째였다. 처음 한 번은 그가 자신 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기에. 그리고 두 번째인 지금은 그가 피하려고 들 지 않았기에. "아, 아니야…" 예안은 초점 없는 눈동자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니야. 아니야. 내, 내 잘못이 아니야.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이 모든 건 자신의 인생, 유젤의 육체, 그리고 소중한 아기를 멋대로 소 유하려 한 레이온의 잘못이라고, 그렇게 자위해 본다 한들 원론적인 자 책감이 사라질 수 있을까. "혀, 형 괜찮아?" 정신을 차린 예안은 쓰러진 레이온에게 황급히 뛰어갔다. 다행히 급소에 맞진 않았지만 출혈이 심했다. 레이온은 괴로운 표정을 애써 누그러뜨리 며 미소를 지었다. "난 괜찮아… 근데 그 총은 어디서 났어?" 예안은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니콜라스한테 빌렸어. 마, 많이 아파? 정말 미안해. 나도 모르게 무서 워서…그러니까 왜 그런 말을 해서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어?" "정말… 쏠 줄은 몰랐지." 울 듯한 얼굴로 레이온의 상처를 살피던 예안은 거칠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형이, 형이 나를 못살게 굴었기 때문이라구! 그러니까 나한테 물어내라 소리하지 마! 알았어?" "킥킥… 싫은데? 난 죽을 때까지 너한테 엉겨 붙어서 책임지라고 할 거 다. 너 이제 각오해. 앞으로 죽는다 해도 너한테 절대 안 떨어질 거니 까." "지금 그런 농담이 나와?" "겨우 시시한 농담 하나 하자고 눈뜨고 총 맞은 줄 알아? 그럼 사람을 죽일 뻔했으면서 책임 회피하고 그대로 모른 척 하겠단 소리야? 너 그렇 게 무책임하고 잔인한 여자였어? 사람 어깨에 구멍을 뚫었으면 적어도 키스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그냥 이대로 침실로 갈까?" 예안은 얼굴에서 미안한 감정을 싹 지웠다. "그냥 이대로 죽어. 관까지 짜줄까? 괜히 걱정했잖아. 나 간다." "자, 잠깐!" 예안이 그대로 일어나려 하자 레이온은 팔을 뻗어 손목을 잡았다. 말없 이 그를 내려다보던 예안은 졌다는 표정으로 다시 털썩 앉았다. 피가 많 이 나오는데 이대로 둬도 되나 싶지만, 당사자가 가만있는 판이니… "여기에… 우리 아기가 있지?" 레이온은 감격에 젖어 떨리는 손으로 예안의 아랫배를 살며시 어루만졌 다. 움찔한 예안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쳐내려 했다. 하지만 머리 속 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급히 제동을 걸었다. "오 년 전 널 처음 만났을 때 네가 한 약속… 이제야 겨우 지켜주는구 나. 그치?" 레이온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던 또 한 가지의 이유. 그것은 바로 애처 로운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알 수 없는 울컥함이 피어오른 다는 것이었다. 이대로 자신의 자아를 포기하고, 그가 원하는 '진짜 유젤'이 되어 그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도 좋지 않으냐는 유혹이 귓가에 맴돌았다. 하지만 이내, 그것은 유젤에 대한 배신이자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 며 동시에 나란 존재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라는 단호한 결심에 무너져 버렸다. "형." "응?" 주저하던 예안은 힘들게 말했다. "형은 지금 괴로운 추억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어. 형은 단지 형이 원하 는 해피 엔딩을 손에 넣지 못했기 때문에, 괴로운 과거를 아름답게 포장 해서 그렇게라도 형 자신을 위로하고 싶은 것 뿐이야. 그리고 나를 끌어 들여 그 '즐거운 꿈'을 완성한 뒤 영원히 그 속에 갇혀 살고 싶어하는 거지. 내 말이 틀렸어?" 레이온은 대답이 없었다. 자신의 말이 먹혀들었다 생각한 예안은 계속 말했다. "언제까지 추억의 끝에서 제자리걸음만 할 거야? 한 발자국만 더 내딛으 면 괴롭기만 한 추억의 끝에서 빠져 나올 수 있어. 조금 고달프긴 해도 생생하고 아름다운 현재를 만끽할 수 있어. 그 한 걸음을 떼어놓는 게 그렇게 힘이 들어? 아니면 추억 속에 잠겨 사는 게 그렇게나 좋은 거 야?" 그가 여전히 침묵하자 일이 잘 되어 간다고 제멋대로 판단한 예안은 회 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만 괴로운 추억에서 빠져 나와. 언제까지 형을 버리고 떠난 사 람만 바라보고 살 거야? 그 사람의 그림자를 영원히 옆에 둔다 해도 결 국 그건 달콤한 꿈의 무의미한 연장에 불과해. 한순간의 실수로 깨어나 버리면 연기가 되어 버리고 말 꿈인데, 그게 그렇게나 좋은 거야?" "그만해!!" 묵묵히 듣고 있던 레이온은 버럭 화를 냈다. 예안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레이온은 피가 흘러내리는 어깨를 오른손으로 움켜 쥔 채 힘겹 게 일어났다. 그리고 예안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런 식으로 네 운명에서 회피하려 하지 마. 그런 사탕발림으로 다시 날 버릴 수 있다 생각하지 마. 이제 난 버림받지 않아. 내가 가질 거야! 내가 가져 버릴 거야! 전부 가져 버릴 거야! 너도, 아기도, 운명도, 전 부 다!" "하지만 형…" "가! 가! 그리고 기다려! 내가 너와 동등한 입장이 되면 다시 널 찾아갈 테니까! 그땐 이 지구를 떠날 준비를 해 둬!"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론 그가 짊어지고 왔을 괴로움에 가 슴이 무척이나 아리고 쓰라렸다. 아마도 그건 「이브」로부터 이어받은 유전자에 각인된 슬픈 기억 때문이겠지. 레이온은 리모컨을 조작해 갑판을 뒤덮고 있던 창살을 다시 접었다. 그 리고 지금 예안을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휘청거리며 선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의 발이 딛고 지나간 자리마다 괴로움을 싣고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씁쓸한 표정으로 레이온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던 예안은 등을 돌렸다. 계단을 타고 내려와 맥으로 옮겨 탄 그녀는 멀어져 가기 시작한 배를 물 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짙은 상념이 가득 담긴 한숨을 내뱉었다. "이브의… 약속…" 각인처럼 뇌리를 떠도는 그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는 알지만 그 것을 지킬 자신은 없었다. 지킬 생각도 의무감 따위도 결코 없었다. 오 로지 달아나야만 한다. 그래야만 나의 인생도 유젤의 몸도 소중한 아기 도 지킬 수 있다. 바로 그런 강박관념만이 도사리고 있었을 뿐이다. 예안이 맥을 타고 어딘가로 갔다는 소식은 당장에 국정원장을 거쳐 대통 령에게 들어갔다. 청와대는 순간 발칵 뒤집혔다. 국회의원들에게까지 그 사실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김영환 대통령을 통해 야당 총재 김두오 의 원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결국 불쌍해진 건, 김영환 대 통령과 김두오 의원 그리고 국정원장에게 삼중으로 시달림을 받게 된 중 현이었다. "곧 돌아올 겁니다! 정말 단순히 시스템 점검하러 간 거라니까요! 아니 에요! 아무리 예안씨가 게임 폐인이라지만 설마 고랩 캐릭터 날린 것 때 문에 백악관을 날려 버릴 생각까지 다 했겠습니까! 예! 진짜 아니라구 요! 곧 돌아올 겁니다! 예! 분명 그렇게 말했다구요!" 핸드폰을 통해 벌써 한 시간째 김두오 의원과 통화 중인 중현의 말을 들 어보면, 이미 김두오 의원도 '미국 온라인 게임을 하다가 서버 오류로 고랩 캐릭터를 날려 버린 예안이 분풀이를 하기 위해 백악관을 날리러 갔다'라고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국 정부가 예안의 사소한 취향까지 굉장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여실히 알려주는 것이려나. 아버지와의 통화가 끊긴 뒤 중현은 또다시 김영환 대통령의 전화를 받아 야 했고, 그 다음에는 국정원장의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이래나 저래나 불쌍한 건 바로 그였다. 한참 후, 겨우 웃어른들의 시달림에서 벗어난 중현은 이마에 흐르는 땀 을 닦으며 투덜거렸다. "젠장. 도대체 예안씨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저기 오는데?" "예? 뭐라구요?" 중현은 니콜라스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봤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비행시 들리는 특유의 파공음이 청각을 자극했다. "어?" 무언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이윽고 전투기로 변신한 맥이 활주로 위로 날아와 사뿐히 수직 착륙했다. 중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니콜라스씨, 어떻게 맥이 오고 있다는 걸 알았죠? 소리도 들리지 않던 데?" "초음속으로 날아오고 있었을 때니까 소리가 안 들린 거지. 그냥 눈으로 본 거야." 그 말이 정말이라면 도대체 니콜라스의 시력은 얼마란 말인가. 중현은 그만 두려움까지 느꼈다. 그때 격납고에서 예안이 나왔다. 그녀는 중현을 보자마자 사과했다. "미안해요. 멋대로 타고 나가서." 중현은 웃어른들로부터 엄청난 꾸지람을 받은 것도 잊어버리고 기분 좋 게 대답했다. "미안해하실 것까진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시스템 점검하러 가신 것 맞 나요? 그냥 단순히 기분 전환으로 타고 나간 게 아니라?" "사실 기분 전환하러 나간 거 맞아요. 멋대로 굴어서 죄송해요." "아니, 아닙니다. 그 정도야 뭐어."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이만 돌아가요." 무슨 말을 하려던 중현은 지금 예안의 기분이 몹시 좋지 않음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중현의 차는 세 사람을 태우고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달 리는 차안에서 예안은 우울한 표정으로 내내 말이 없었다. 니콜라스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떠드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자연히 세 사람은 침묵 속에 빠져들게 되었다. 몇 시간 후 중현의 차는 예안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안녕히 가세요. 번거롭게 해서 죄송했어요." 가벼운 데이트 신청이라도 해볼까 생각했지만, 예안의 기분이 좋지 않기 에 중현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예. 그럼 편히 쉬세요." "네. 가자, 니콜라스." 예안이 그대로 발걸음을 떼어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저, 예안씨." "네?" 의아해서 돌아보니 중현은 멋쩍은 웃음을 띠고 대답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루속히 고민이 해결되기를 빕니다." "풋. 고맙네요. 그럼 잘 들어가세요." 타인이 걱정해주는 것에 대해 한결 너그럽게 대답해줄 수 있는 여유. 그 것은 예전의 자신이 갖지 못했던 것이었다. 「사도가 정확히 언제 생겼는지에 대한 기록은 사실상 불분명합니다. 하 지만 그들은 세계 제1차 대전 때부터 이미 전세계의 대소사를 좌지우지 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죠. 그들은 아이큐 200이 넘어가는 천재들로만 구성된 지도층과, 그들의 정체를 모른 채 그들의 지배를 받 는 점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닌 과학은 세계가 지닌 것보다 수세기는 앞서 있었으며, 그들은 점진적인 단계를 거쳐 자신들의 과학을 세계에 차례차례 발표했습니다. 세기를 뛰어넘는 혁신적인 논문 을 발표한 과학자들의 99% 이상은 사도의 인물이었으니까요.」 벌써 몇 시간째인가. 이렇게 영사기를 돌리듯 맥에 저장된 기록을 훑어 보는 것이. 거대한 도시의 외부 모습과 화려한 건물의 내부 모습이, 사 도가 지닌 부와 권력을 보여주듯 차례차례 번갈아 나타났다. 「그들이 갖고 있던 유일한 콤플렉스, 기형성 유전적 질환 '후유증'은 일찍이 알려지지 않았던 독특한 병이었습니다. 사도인들치고 이 병에 걸 리지 않은 인간은 없었으며, 그 증상은 크게 단명과 생식질환 이 두 가 지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생식질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체로 불임의 몸을 갖고 있는 건 양호한 편이었습니다. 한 번 성교를 시작하면 죽을 때까지 멈출 수 없는 증세와, 하루에 23시간 이상 연이어 서 성교가 가능했던, 아니, 성교를 할 수밖에 없었던 괴물 같은 증상도 있었으니까요. 지독한 후유증을 앓고 있는 간부 중 대표적인 예가 바로 헤르메스와 하데스입니다.」 화면에는 수척한 얼굴을 가진 청년 과학자와, 아름다운 얼굴을 지닌 소 년이 나타났다. 비운의 삶을 살아온 매드 사이언티스트 헤르메스와, 사 도로부터 버림받은 가여운 소년 하데스였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40여년 전, 사도는 후유증을 청산하기 위해 NM 프 로젝트(New Mankind Project)를 실현했습니다. 후유증을 유도하는 알젝 시온 유전자를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신체를 지닌 신인류를 탄생시키 자는 게 그 목적이었지요. 신인류 이들은 먹지 않아도 살 수 있고 구인 류의 지능을 원숭이로 놓았을 때, 그 자신들은 구인류에 해당할 정도로 엄청난 지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신인류에게는 케르베로스라는 코드네임과 함께 '아담'이라는 칭호가 주어졌죠.」 그와 함께 스크린에는 신비하고 날카로운 표정을 가진 청년이 모습을 드 러냈다. 자신에게 주어진 무거운 숙명에 대한 도피를 갈구하는 듯 외로 운 그 눈동자를 보았을 때, 예안은 까닭 없이 솟구쳐 오르는 눈물을 참 지 못했다. '아…' 알고 있다. 난 저 사람을 알고 있다. 저 사람이 누군지, 저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 그리고 저 사람은 어째서 조물주 프로젝트를 완성했음에도 또다시 슬퍼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까닭을 알고 있다. 다만 그 기억을 건드리는 게 미칠 듯이 무서웠을 따름이었다. 「무에서 창조된 케르베로스, 애칭 케이인 그는 가이아의 양아들이 되었 습니다. 그리고 9년 후 가이아는 사도의 수장인 시리우스 사이에서 생긴 딸이 수정체 상태일 때, NM 프로젝트 처리를 가해 완벽한 타입의 신인류 로 태어나게 했습니다. 프로토 타입인 케이는 지능과 외모, 신체적 능력 면에서 의심할 바 없는 신인류였지만 아쉽게도 후유증에서 벗어나진 못 했죠. 하지만 두 번째 신인류인 주피터, 애칭 제이이자 '이브'라는 호칭 을 갖고 있는 그녀는 달랐습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스크린에는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인간 같지 않 게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가 지닌 대단한 아름다 움은 아마도 신인류와 구인류의 경계를 확연히 그어주는 선이었을 것이 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는 눈동자의 색을 제외하고 예안 자신과 소름 끼치도록 똑같았다. 「가이아는 케이와 제이를 탄생시키는데 있어 두 번에 걸쳐 '자이오 다 이아몬드'라는 걸 사용했습니다. 신인류가 낳은 아이는 의심할 바 없는 신인류였지만, 무에서 신인류를 탄생시키거나 아니면 수정체를 신인류의 것으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신비의 원석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필요로 합니다. 물론 자이오 다이아몬드에 관한 건 철저한 극비였습니다. 사도 의 수장조차 자이오 다이아몬드에 대해서는 그런 게 있다는 것만 어렴풋 이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스크린에는 다시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 과학자, 가이아의 모습이 나타났다. 따뜻한 모습이었지만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딘가 가슴 한구석 이 아려오는 까닭은, 아마도 그녀가 살아온 비운의 인생에 대한 애도일 것이다. 「케이는 후유증의 원인을 인간들의 사념파라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이 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열등감을 품고 있고, 이것이 사념파의 형태로 분출된다 설명했습니다. 인류 전체의 열등감은 그렇게 거대한 사념 에너 지의 형태로 응집되고, 그것은 곧 지구의 의지인 마더를 부추겨 사도에 게 저주를 내린다는 거지요.」 스크린에는 다시 거대한 우주선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현인류가 지닌 기술로는 건조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이른바 아담의 방주. 「케이는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선 사념파와 마더의 힘이 닿지 않는 곳 으로 떠나야 한다고 생각해 조물주 프로젝트를 완성시켰습니다. 전에 말 씀드렸다시피 우주의 모든 물질은 로데늄이라는 단 하나의 입자로 구성 되어 있죠. 조물주 프로젝트는 바로 물질을 로데늄 단위에서부터 재조립 해, 달을 지구와 똑같은 혹성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스크린에는 다시 푸르스름한 달의 모습이 드러났다. 「동일성 극소립자론에 의하면 단 1g의 물질만 갖고도 지구를 만들 수 있으나, 그때 당시 케이가 지니고 있던 기술은 조악하기 그지없어 그는 최소 달 정도 질량의 물질을 필요로 했습니다. 결국 조물주 프로젝트는 완성되어 달은 지구와 똑같은 행성으로 변했고, 케이와 제이는 자신들을 따르는 몇 명의 사도인을 데리고 '에덴'이라 명명한 그 혹성으로 이주했 습니다. 이어서 스크린에는 살아 있는 생명체 같지 않은 섬뜩한 신비함과, 유기 체는 지닐 수 없는 궁극의 아름다움을 지닌 보라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나타났다. 끝없는 공허함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자애, 그리고 색채가 보이지 않는 냉정함이 서린 붉은 눈동자. 그녀를 본 순간 예안은 본능적으로 거부감 을 느끼며 침대 시트를 와락 쥐었다. "저… 사람은…"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에 저를 만든 '오리지날 유젤'과 접촉했던 신비 의 여자입니다. 출생과 이름 정체 등등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으며, 오 리지날 유젤은 마더가 인간형으로 모습을 드러낸 게 아닐까 하고 추측했 습니다만 정확한 증거는 없습니다.」 증거가 없다고 말하지만 예안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여자라 는 것을! 이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이 존재가 모든 지구인의 숙명을 쥐 고 있다는 것을! '마더! 마더야! 틀림없어!' 예안이 그렇게 속으로 경악하고 있을 때에도 설명은 계속 되었다. 「에덴 혹성이 만들어진 건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입니다. 그리고 마더 의 인간형이라 추정되는 여인이 등장한 건 오 년 전이죠. 에덴 혹성에서 태어난, 케이와 제이의 딸인 오리지날 유젤은 지구로 건너와 후유증을 없애고자 하는 레이온을 도왔습니다. 그 와중에 마더로 추정되는 여인과 접촉을 가졌죠.」 스크린에는 다시 사나운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모습을 나타났다. 미남이 었지만 묘한 섬뜩함을 지닌 인물이었다. 「사도의 간부 중 한 명인 헤라클레스는 후유증을 없애기 위해 해선 안 될 일을 벌였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지구는 한때 멸망까지 갔었죠. 그것 을 수습해달라고 오리지날 유젤은 케이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일이 끝난 뒤 케이는 오리지날 유젤을 데리고 다시 에덴 혹성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지구인들의 기억에서 달과 에덴 혹성에 관한 기억을 전부 지워버 리고, 지구인들이 에덴 혹성을 찾을 수 없도록 은폐막을 둘렀습니다.」 지루하고 장황한 설명이 끝났음에도 예안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았 다. 그 뒤로도 무려 열 번 가까이 더 돌려보고 난 뒤에야 그녀는 겨우 그만두었다. 「이제 아시다시피 저를 만든 인물은 오리지날 유젤입니다. 그리고 이 기록들은 유젤 님의 기억 속에도 있는 것들입니다. 제가 추측하기로 지 금의 유젤 님이라면 언제든지 기억 속에서 이 기록들을 꺼내어볼 수 있 을 텐데, 왜 굳이 저에게 물으신 거죠?」 "그냥… 잘 기억나지 않아서." 거짓말이다. 진짜 이유는 바로 '진짜 유젤'의 기억과 상념에 먹혀드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스크린이 꺼져 버린 어둠 속에서 한참 동안 묵묵히 침묵을 지키던 예안 은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만들겠다고…" 레이온의 그 말이 어떤 무게를 갖고 있는지 예안은 이제 알고 있다. 더 불어 그것은 그에게 허락되어선 안 된다는 사실도. "막아야 돼. 절대 막아야 돼." 유젤의 몸으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를 짊어지고 있는지 이제야 겨우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안일주의로 레이온을 그대 로 내팽개쳐 두는 건 용서받지 못할 커다란 죄악이었다. "내가… 막을 수 있을까?" 유젤의 몸으로 살고 있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무게를 겨우 깨달았다. 앞 으로 보다 더 적극적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시트날타에 대한 저항 외 에 또 하나 생긴 셈이었다. 그때였다. "예안아! 예안아! 지금 아빠 블랙 웨어 스타 주웠어!" 상기된 정호가 문을 거칠게 열며 그렇게 외치자 예안은 깜짝 놀라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 진짜? 그, 그거 이터널 피닉스에서 가장 비싸게 취급되는 최고급 유니크 아이템인데!" "진짜야! 한 번 볼래?" "응!" 예안은 조금 전의 고민도 싹 잊어버린 채 방을 뛰쳐나갔다. 정호와 왁자 지껄 떠들며 컴퓨터 앞에 붙어 호들갑을 떠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평범한 청소년이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소박하고 작은 행복을 즐기기 위해서라도 이제 그만 소극적 태도는 버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예안은 이제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위에서 맥이 들려준 말은 1부 내용을 최대한 간략하게 줄인 것입니다. 비운의 일생을 살았던 가이아, 헤르메스, 하데스, 기타 등등의 사도 인들과 조물주 프로젝트 등등 자세한 것들을 알아보고 싶으시다면 작품통합검색에 '아담의'라고 쳐 넣고, '아담의 상처'를 읽으시면 됩니다. 제 작가의 뜰에 가셔도 되고요. [광고 퍽!]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28 회] 날 짜 2004-01-23 조회 / 추천 4014 / 62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설날 특집 추억의 NG 모음 추억의 NG 모음. 첫 번째. 126화 - 추억의 끝에서 "OK. Ready, go!" 레이온이 한껏 폼을 잡으며 손을 들어올리자 나레이터는 얼른 대본을 들 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레이온은 천천히 손을 들어 손바닥 위에 떨어지는 차가운 별빛의 감촉 을 즐겼다. 동그랗게 푸르고 오랜 세월이 결여된 별빛은, 이제 지구는 영영 혼자 태양 주위를 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과연 이 하늘 아래 그 누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러자 레이온이 한껏 폼을 잡은 채로 말했다. "유젤과… 나… 그리고 마더뿐이지. 지구의 의지 마더…" 제대로 되어 간다고 감독이 희희낙락하고 있을 때, 나레이터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손바닥으로 입을 모아 외쳤다. "감독님! 감독님! 실탄 감독님! 이거 잘못됐어요!" 실탄은 짜증을 냈다. "한창 잘 되어가고 있는 판인데 왜 찬물을 끼얹고 그래?" "이상하잖아요? '이제 지구는 영영 혼자 태양 주위를 돌아야 한다고 말 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이 부분 이상해요." "바보 아냐? 달이 없어졌으니까 당연히 지구 혼자 태양 주위를 도는 거 지! 1부에서 조물주 프로젝트 때문에 달이 없어지고 에덴 혹성이 생겼잖 아?" "그렇지만 에덴 혹성도 태양을 돌잖아요. 수성도 돌고, 금성도, 화성도, 목성도, 토성도, 천왕성도, 해왕성도, 명왕성도 태양을 도는 걸요. 지구 혼자만 도는 게 아니잖아요?" 헉! 두 번째. 126화 - 추억의 끝에서 "저길 봐! 저기가 네 고향이다! 넌 인간이 아니야! 넌 하찮은 구인류 따 위가 아니야! 자랑스러운 에덴 혹성의 일원이자 언젠가 저곳으로 떠나 어리석은 지구인들을 내려다보며 비웃어야만 해! 네가 인간이라고 생각 하지 말란 말이야!" 레이온의 손에 붙잡힌 예안은 그대로 고통스러운 표정을 한껏 지으며 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노련하진 않지만 그런대로 열의가 묻어나는 연기 력이었다. "이, 이러지 마…" "봐! 봐! 보란 말이야! 저기에 네 고향이 있어! 언젠가 너와 내가 돌아 가야 할 고향이 저곳에 있단 말이야!" 실탄은 한껏 만족스러워했다. "잘 되어 가고 있어. 그대로, 그대로… 그렇지!" 연기에 한껏 몰입한 예안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보기… 싫어… 보기… 싫어… 이러지 마 제발…" 예안의 얼굴을 잡은 채로 레이온은 갈라지는 감정을 담아 외쳤다. 역시 에덴 시리즈에 5년 이상 출연한 경력의 노련한 연기자다웠다. "보이지? 하지만 난 보이지 않아. 에덴 혹성을 감추고 있는 은폐막은 구 인류와 구인류의 기술이 만들어낸 관측 장치 따위로는 절대 잡아낼 수조 차 없어. 하지만 넌 달라. 넌 볼 수 있어. 보이지? 잘 보이지?" 예안의 독백 타임.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보기 싫어… 보기 싫다구…우… 어? 어라? 어라?' 그때 예안의 표정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당황한 레이온은 손을 떼었다. "왜, 왜 그래? 뭐가 잘못됐어?" "컷! 컷! 컷! 잘하다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예안은 당황한 표정으로 변명했다. "저기, 에덴 혹성은 위치로 봤을 때 지구보다 약간 뒤쳐져 돌고 있으니 초저녁에만 보이는 거잖아요? 근데 지금은 새벽인데요? 우리, 지구 반대 편으로 날아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에덴 혹성 안 보이는데요?" 세 번째 - 헤어지지 않는 이별 챕터에서 "겨우 도망쳐 온 곳이 여기인가?" 유젤과 진우를 흘끗 쳐다보던 마리오는 정해진 대사를 읊었다. "그렇게 큰 맥을 타고 도망쳤는데, 제 아무리 100% 스텔스 기능을 자랑 한다 해도 우리가 찾지 못할 줄 알았나? 그것도 먼바다가 아니라 이 나 라 영해권에 있는 이런 섬에 착륙했는데 말이야. 도망을 치려면 차라리 하와이나 태평양 상공의 무인도에 도망가는 게 좋았을 걸. 그랬으면 우 리도 한동안 찾아내기 힘들었을 테니까." 고통스러운 연기를 하던 유젤이 이윽고 진우의 품에서 새근새근 잠드는 척 하자 마리오는 정해진 순서대로 폰을 꺼내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다, 엘르. 지금 엔젤의 위치를 확인했다." 「엔젤이 현재 맥에 탑승해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아. 그리고 방금 전에 발작을 겨우 가라앉힌 것으로 보인 다." 「그거 위험하군요. 하지만 이상한데요. 어째서 박사는 엔젤의 발작 증 세에 대해 미리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을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어차피 혁명은 우리 손으로 이뤄내야만 하는 것. 박사를 지나치게 믿을 순 없어. 그나저나 박사는 어디 있지?" 엘르의 목소리는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흘러 나왔다. 「예. 박사는 현재 연구실에 있군요. 그쪽으로 연결해 드릴까요?」 "그래. 박사한테 연결해. 할 말이 있다." 「알겠습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레이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지?」 "박사. 지금 엔젤의 신병을 거의 확보한 거나 마찬가진데… 어떡할까? 이대로 곧장 기절시켜서 데리고 갈까?" 잠시 대답이 없다가 다시 레이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내 마음을 송두리째 가져갔으면 뭔가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 아 니야? 친구들도 부모님도 사람들도 하늘도 땅도 우리를 허락하지 않겠지 만, 그래도 난 행복할 자신 있어. 외로워.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난 잠 들기 전이면 항상 마리오 너의 멋진 육체를 떠올리며 혼자 흥분에 젖 곤… 에에엑?」 한창 멋진 태도로 폰을 귀에 대고 있던 마리오의 표정도 덩달아 이상해 졌다. 당황한 마리오는 귀밑까지 얼굴이 빨개진 채 폰을 황급히 덮었다. "감독님! 감독님! 레이온 녀석한테 준 대본 바뀌었어요! 또 엘르가 장난 쳤나 봐요!" 이때 엘르는 한창 Y물에 빠져 있었다나 뭐라나. 네 번째 - 친구라는 이름 - 혜민과 예안의 첫 목욕씬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혜민은 즐겁게 노래까지 곁들여가며 뜨거운 물을 어깨 위로 끼얹었다. 욕탕에서 겁먹은 듯 쭈뼛거리는 예안의 실루엣을 가끔 먹음직스럽게(?) 훑어보면서. "에이, 뭘 그렇게 자꾸 흘끔흘끔 대고 그러니? 부러워할 필요 없어. 네 몸매가 나보다 더 좋으니까." 샤워를 마친 혜민은 웃음 띤 얼굴로 욕탕으로 걸어 들어왔다. 당신은 기 억하는가? 바로 이 장면이 혜민이 예안의 가슴을 두 손으로 잡고 주물럭 거리며 쾌락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순간이자, 뭇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두 미소녀의 금단의 사랑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전주곡이라는 것을! "이야, 역시 부드러운 걸? 마음 같아서는 네 거랑 네 거랑 바꾸고 싶은 기분이…긴 한데… 가슴이… 가슴이… 없다?" 아무리 더듬어봐도 봉긋한 젖가슴 따위는 없고, 밋밋한 절벽만 손바닥 가득 와 닿자 혜민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가, 감독님! 누가 예안이 가슴을 훔쳐갔…" 그때 예안, 아니 예안인 줄 알았던 사람이 슥 뒤를 돌아보았다. 혜민은 자지러질 듯이 놀랐다. "꺄아악! 니콜라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넌 아직 출연할 때가 아 니란 말이야!" 니콜라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예안이 누나가 여기 들어가 있으면 재밌는 일이 생길 거라고 해서 왔는 데? 누난 왜 다 벗고 있어? 아직도 굶주린 거야?" "이, 이, 이, 서예안! 이 기집애! 전에 헬버스의 보석 쪼금 가져갔다고 이렇게 치졸하게 복수하냐!" 예안과 혜민, 그 둘은 지독한 게임광이었다. 다섯 번째 - 탈출 챕터 "아름다운 아가씨가 그런 험한 말을 입에 담는 건 좋지 않아요. 그럼 남 자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니까요." 엘르의 대사가 끝맺자 예안은 놀란 시늉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나무 랄 데 없는 멋진 회전이었다. "이런 방에만 갇혀 있는 게 답답하지 않나요, 엔젤?" "아… 전 별로…" "저랑 같이 밖으로 나가지 않겠어요? 적어도 혼자 방구석에서 청승 떨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듯 한데." "청승이라…" 잠시 생각하는 척 하고 난 뒤 예안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좋아요." "그래, 그래야지요." 엘르와 예안은 팔짱을 끼며 걸음을 옮겼다. "아참, 깜박 잊고 내 이름을 소개 안 했군요. 난 엘르라고 해요. 크레시 오 가문의 차녀라 엘르 크레시오라고 하죠." "저 근데… 왜 저에게 존대를 쓰는 거죠?" "무슨 말씀이세요?" "사실 전 당신들이 만들어낸 피조물에 불과한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 런데 어째서…" 엘르는 역시 뛰어난 여배우답게 멋지게 받아넘겼다. "후후. 그래요. 당신은 신의 축복을 받아 태어난 인간이 아니라 우리의 목적을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지요. 적어도 주제 파악 하나는 제대로 하고 있군요." 순간 예안은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한치 나무랄 데 없는 연기. "전 '모든 인간들은 평등하고 똑같이 고귀하다'는 말을 신념으로 삼아 살아갈 정도로 이상주의자가 아니에요. 오히려 지극히 냉정하고 현실적 인 여자라 볼 수 있죠. 그러니 당신이 제가 있어 하나의 도구 이상으로 는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하죠." "그럼 왜 존대를 하는 거죠?" "그건 단순히 제 말버릇이니 그렇게 생각해주세요. 그리고 당신이 도구 로 보인다고 해서 특별히 험하게 대하거나 모욕을 줄 생각 따위는 없어 요. 도구도 도구 나름이죠. 천하고 값싸고 쓸모 없는 물건은 천대받기 마련이지만 아주 귀하고 값진 고급스런 물건은 오히려 사람보다 더 귀하 게 취급받기 마련이니까."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모든 남자들 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기다리던, 미소녀와 미녀의 키스씬! "흡!" 예안이 엘르를 벽에 밀어붙이며 키스하자, 지켜보던 남자 스탭들은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오오오! 멋지다! 아름답다!' 그때, 예안이 표정을 잔뜩 찡그리며 휙 돌아보았다. "감독님! 엘르 언니 또 감자탕 먹고 양치질 안 했어요! 아휴, 냄새!"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29 회] 날 짜 2004-01-24 조회 / 추천 4020 / 54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선물 화창한 일요일. 늘 그렇듯 가벼운 캐쥬얼에 밀짚모자를 쓴 채 약속장소 인 패스트푸드점을 들어선 예안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창가에 정우 가 앉아 있다 이쪽을 발견하고 반색했다. "여기야." "무슨 일로 불렀어?" 예안은 무뚝뚝하게 물으며 앉았다. "음… 별건 아니고. 요새 몸은 좀 어때?" "형네 가족들 얼굴을 안 보니까 아주 좋아. 이 이상 좋을 수가 없어." 빈정거리는 말투에 정우는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그 말은 좀 심한 거 아냐? 네가 우리 식구들한테 반감을 품은 건 이해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할 것까진 없잖아? 네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우리 부모님이 아시면 아마 굉장히 섭섭해하실 거야." "형네 가족은 내 아이를 죽이려고 했어." 차가운 끊음에 정우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어찌 보자면 자신의 가족들 은 예안에게 마음의 상처를 준 셈이기도 했다. "네 의지가 그렇게 단호한 줄은 몰랐어. 네 결심도 모르고 함부로 지우 라고 한 건 늦었지만 이제라도 사과할게. 하지만 우리는 정말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네 인생을 생각해서 그런 말을 했다는 건 알아 줘." "…좋아. 사과는 받을게." 다소 누그러진 예안의 태도에 정우는 내심 안도했다. 사실상 그녀가 자 신에게 지니고 있는 까닭 없는 경계심이 마음에 걸렸었다. "아버지랑 어머니도 지금 너에 대해서 걱정 엄청 많이 하고 계셔. 특히 어머니는, 지금 네가 당신한테 심한 반감 품고 있는 건 아닌가 매일 그 걱정 뿐이야." "특별히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그러진 않아. 그냥 좀 귀찮을 뿐이야." "그럼 다행이고. 그렇게 전해줘도 될까?" "마음대로." 정우는 그제야 다소 안심하며 표정을 풀었다. "근데 정말 겉보기에는 임신 안 한 것 같구나. 4개월이라면서 배는 하나 도 안 부른 것 같아." "나도 잘 몰라. 그냥 태아 크기가 좀 작아서 그런 거래. 하지만 건강하 니까 괜찮아. 걱정 같은 건 안 해줘도 돼." "낳아서 너 혼자 키울 거니?" "당연히." "부럽네." "뭐가?" "진우 말이야. 너 같은 애인이 있었다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우가 부 럽다." 예안은 속으로 무언가 강한 쾌감을 느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정우가 남 자였던 자신을 부러워한다는 건 야릇한 재미가 있었다. "근데 이거 한 가지만 말할게. 아무리 사회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다지만 우리나라에선 여전히 애 딸린 미혼모는 결혼하기 힘들어. 내가 알고 있 는 사람만 해도, 꽤 괜찮은 조건에 애 하나 딸린 20대 젊은 미혼모인데 결혼하는 게 무척 힘들어서 결국 애 둘 딸린 별 볼일 없는 삼십 대 남자 랑 맺어졌지." "그런 말을 하는 의도가 뭐야?" "외모지상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단 예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내세울 수 있는 장점이 될 수 있어. 게다가 넌 공부도 굉장히 잘하잖아. 저번에 듣자하니 전과목 만점으로 전교 일등까지 했다면서? 몸 건강하 지, 예쁘지, 공부도 잘하지, 넌 충분히 일등 신부감이 될 수 있는 애야. 하지만 미혼모가 되면 단번에 네 가치는 추락해버려. 그래도 좋아?" "상관없어." 이 정도면 충분히 먹혀들리라 생각했던 정우는 곧바로 되돌아온 대답에 말문이 약간 막혔다. "뭐어? 상관없다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말이 안 되길 뭐가 안 돼? 난 결혼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거든? 그러니 상관없는 게 당연하지." "하…" 물컵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던 정우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혹시 만약 네가 결혼을 한다면 네 아이가 남편에게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할까 봐 그게 걱정 되서야? 아니면 진우를 아직도 못 잊어서 그런 생 각을 갖고 있는 거야?" "형이 좋을 대로 알아서 생각해." "말해 봐. 네 생각을 알아야겠어. 그래야 내가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할지 결정할 거 아니야?" 다소 다급한 결심이 녹아들어 있는 그의 음색은 조심스런 무거움을 짊어 지고 있었다. 의아한 예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건 알아서 뭐해?" "나, 부모님께 너랑 결혼하고 싶다고 말씀드릴 생각이야." 청천벽력 같은 고백에 예안은 순간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생각 못한 순간에 갑자 기 그런 말을 들으니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떨떨했다. "형?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그거?" "난 지금 지극히 제정신이야. 너도 알잖아? 내가 너 전부터 좋아했다는 것. 새삼 놀랄 일이 아니잖아?" "하…" 어이가 없는 듯 손으로 부채질 시늉을 하던 예안은 침착히 표정을 가라 앉혔다. "내가 낯간지러워서 이런 말까진 안 하려 했는데, 형은 날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 외모가 반반하다 보니까 마음에 든 것 뿐이야. 그냥 취 향에 맞았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런 감정은 금방 식어 버려." "절대 그렇지 않아." "웃기잖아? 형이 날 안지 몇 달이나 됐어? 고작해야 세 달 정도 밖에 안 됐어. 근데 형 사촌동생 애를 가진 여자랑 결혼할 생각을 할 수 있는 거 야? 형도 참 바보네, 쯧쯧. 그러기에 연애나 좀 할 것이지…"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유젤을 빼앗으려 드는 정우 의 마음에 대해 분노를 느꼈을 텐데 전혀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마음 속에 한결 여유가 자리잡았기 때문인가 보다. 이 자리 에 있는 건 더 이상 시간 낭비라 생각한 예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재미있었어 형. 다소 황당한 말이었지만 일단 날 위한 그 마음만 은 가볍게 받을게. 그럼 잘 가. 아참. 그리고 현우 녀석한테 확실히 전 해 줘. 조만간 내가 한 번 찾아갈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해두라고. 그럼 이만." "어, 어? 잠깐만…" 하지만 정우가 붙잡기도 전에 예안은 이미 밖으로 나가 버렸다. 허망한 표정으로 뒤따라 나온 정우는 쫓아가 붙들 생각은 못했다. 불같이 화를 낼 걸 각오하고 꺼낸 말이었는데 생각하지도 않은 의외의 반응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패스트푸드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니콜라스는 예안이 나오자 나란히 걸 으며 말했다. "누나, 자꾸 이렇게 날 떼어놓고 다니면 곤란해. 누나를 노리는 자들이 있다면 내가 잠깐 떨어졌을 때를 놓치지 않을 거라구." "괜찮아. 어차피 내가 원하는 건 마피아도 무서워서 피하는 니콜라스 베 르노라는 이름이었으니까. 사생활까지 제한 당하는 건 딱 질색이야." "근데 저 남자는 누구야? 저 남자도 누나 좋다고 쫓아다니는 수컷?" 수컷이라는 말이 조금 거북했지만 예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니콜 라스는 성격이 원래 그런 애였다. "대단해. 누나 주위에는 왜 이렇게 꼬이는 남자들이 많지?" 조금의 톤이라도 있었다면 아마 비꼬는 거라 생각했겠지만 말라비틀어진 사과처럼 건조한 음색이었다. 감정을 알 수 없는, 가면과도 같은. "그 뒤로 앤드류에게서 연락 온 것 없어?" 예안은 마치 자신이 추궁 받는 듯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없어. 근데 그건 왜 묻냐?" "앤드류와 가까이 지내지 마." 이 녀석이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건 생소한 터라 예안은 조금 어리둥절했다. "왜?" "앤드류는 누나를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게 아니야. 단지 모든 사람들이 다 부러워할 매력적인 여자를 손에 넣어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과 단순한 집착에 불과해." 예안은 걸음을 우뚝 멈췄다. 니콜라스도 덩달아 멈췄다. 둘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시끄럽게 주위를 오가는 자동차들이 낳은 소음과, 정 신 없이 흘러 지나가는 사람들의 바쁨이 섞여 묘한 적막이 피어났을 뿐. "사랑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 상대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사랑도 있고, 상대방을 소유하려 드는 사랑도 있고, 상대방에게 자신이 커다란 의미가 되길 원하는 사랑도 있고, 상대방이 가진 모든 걸 받고 싶어하는 사랑도 있지. 그냥 귀찮으니까 다 싸잡아서 사랑이라고 하지 뭐." "근데?" "하지만 사랑은 알고 보면 결국 전부 다 자기 만족으로 귀결되고 말아. 연인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했다 해도 그 심리를 뜯어보면 결 국, 연인을 살렸다는 뿌듯함과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자부심 그런 게 도 사리고 있지." "그래서? 사랑 같은 닭살스런 단어까지 써가면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앤드류가 아무리 누나를 사랑한다 속삭여도 믿지 마. 사랑은 결국…" 예안은 손을 들어 말을 잘랐다. "잠깐만. 근데 너 그런 말 어디서 들었는지 그것 먼저 말해볼래?" 중간에 말이 잘린 니콜라스는 다소 당황한 채 대답했다. "제임스 해론의 「이기적인 사랑」에서…"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전부터 말했지? 그런 염세주의자가 쓴 저서 따위에 그렇게 목메지 말라고. 앞날도 창창한 녀석이 왜 그렇게 어둡게만 살 려고 해?" 예안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니콜라스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임마. 좀더 밝게 살아보란 말이야. 이 나도 이렇게 밝게 살려고 하는 게 안 보여? 너도 날 본받아서 밝고 즐겁게, 알았어?" 말을 마친 예안은 혼자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니콜라스는 멍하니 서 있 다 뒤따르며 작게 말했다. "앤드류는 위험해." 그날 저녁. 예안이 당분간 세정의 집에 머무르겠다고 선언하자 정호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어째서?" "말했잖아. '서예안은 유진우의 생모인 한세정에 대해서 선입견을 갖고 있으므로, 아기를 위한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그걸 없애야 된다. 그래서 당분간 한세정의 집에서 머물러야 한다.'라는 것." 당황함이 가득한 정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예안은 피식 웃었다. "물론 이건 표면적인 이유고, 어디까지나 엄마한테 상처를 많이 주기 위 해 그 포석을 쌓으려고 하는 거야. 행여나 엄마한테 내가 가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 따위는 접어둬도 돼." 정호는 그 말에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론 부끄러웠다. 아직도 어머니를 원망하는 예안에 대한 걱정보다는, 자식을 생모에게 빼앗기지 않아도 된 다는 것에 안심하고 있는 자신이 다소 한심했다. "그럼 난 잘게. 아빠도 굿 나잇." "그래. 잘 자라." 방으로 들어간 예안이 겉옷을 벗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문이 조용히 열리며 니콜라스가 들어왔다. 예안은 쿡쿡 웃으며 농을 걸 었다. "왜, 또 잠이 안 오기라도 하는 거야? 나도 널 재워주고 싶다만 엄마 노 릇해주기로 한 건 딱 하루뿐이라서 안 되겠는데?" 니콜라스는 조용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늘 그렇듯 그의 얼굴은 진지했 다. "맥을 만든 사람은, 누나라며?" 예안의 표정에 심각함이 피어났다. 그러고 보니 맥에 대해서 니콜라스에 게 다 말해준다고 해놓고는 그동안 레이온에 대한 고민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었다. 시간이 난 김에 말해주는 게 좋겠지. "으응. 맥과 프랭크 안쏘니 유젤에 대해서 세상에 어떤 소문이 퍼졌는지 는 나도 사실 잘 몰라. 일단 내가 너한테 말해줄 수 있는 건, 프랭크 안 쏘니 유젤은 내가 지어난 가명이자 가공의 인물이고, 맥은 어디까지나 내 소유라는 거야. 한국 정부에는 판 게 아니라 빌려준 거지. 물론 대외 적으로는 팔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언제는 전부 다 말해준다더니." "야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떻게 전부 다 말해줄 수 있냐? 귀찮고 시 간도 많이 걸리고 또 별 필요도 없는 이야기들이 수두룩한데. 일단 그 정도만 알아둬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것 아니 야? 적어도 에이즈 치료법이 담긴 디스크의 행방 따위를 알고 있는 시시 한 여자애는 아니잖아. 안 그래?" 니콜라스는 순백의 활기가 섞인 예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화제를 바 꾸었다. "누나 요 며칠 간 고민거리가 많아 보이던데 이제는 괜찮은 거야?" "어. 괜찮아. 신경 써줘서 고마워." "그날, 단순히 시스템 점검 때문에 맥을 타고 간 거 아니었지? 누군가를 만나고 온 거 아니야?" 예안의 얼굴에 피어난 심각함이 한결 짙어졌다가, 이내 피식 웃음으로 바뀌었다. "꽤나 예리한 지적이네. 맞아. 만날 사람이 있어서 만나고 왔어." "누군데? 나한테 말해줄 수 있어?" "말해줘도 넌 몰라. 그리고 말해봤자 하등 도움 될 것도 없고." "내가 누나한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이거 니콜라스가 한 말 맞아? 잠시 놀랐던 예안은 눈이 커진 채로 니콜 라스를 빤히 쳐다봤다. "너도 그런 말을 할 줄 아는구나? 맨날 딱딱하게만 구는 청부업자라서 그런 사교성 멘트하고는 엄청 멀리 떨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말만이라 도 고마워. 그렇지만 묻지 말아주는 게 날 도와주는 거야." 부드럽지만 완강한 거절이었다. 잘 자라는 인사를 받고 방밖으로 나온 니콜라스는 우뚝 선 채 작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누굴 만난 거지?" 어쩌면, 정말 알고 싶었던 건 예안이 누굴 만났느냐 하는 게 아니라, 그 녀가 누군가를 만나고 왔다는 것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느끼는 자신의 마음이 얼마만큼 열려 가는 중인가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다. 이번화는 뭔가 밋밋한 느낌. 유블리스님. 코멘트 정보 more 버튼을 누르면 밀려나간 코멘트들이 보일 겁니다. 제가 코멘트를 지울 이유가 없잖아요? 저에 대한 인신 공격용 악플이 아닌 이상 저는 코멘트 안 지웁니다.^^; |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30 회] 날 짜 2004-01-25 조회 / 추천 4055 / 46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선물 세정의 집에 가기로 약속한 날이 왔다. 옷가지가 들어 있는 작은 가방을 손에 든 니콜라스가 현관 밖에서 어서 나오라고 재촉하고 있었지만, 까 닭 없이 치솟는 서운함에 취한 예안은 발걸음을 떼어놓을 줄 몰랐다. "어서 갔다 와. 엄마가 많이 기다리겠다." "아빠, 나 없다고 귀찮다고 라면으로 때우지 말고 밥 잘 챙겨 먹고, 밤 에 자기 전에 가스 확인하는 거 잊지 말고, 수돗물도 잘 잠그고, 특히 현관문은 꼭 걸어 잠그고 자야 돼. 가뜩이나 요새 도둑이 설친다고 하니 까. 그리고 모르는 사람 와도 문 열어주면 안 돼." 내가 어린애냐. 정호는 난감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그렇게까지 걱정해주 는 딸이 사랑스럽기만 했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차라리 안 가면 그만이지." 니콜라스가 들으라는 듯 그렇게 중얼거리자 예안은 확 고개를 돌리며 그 를 노려보았다. "차성주! 지금 한창 감동적인 이별 씬을 연출 중인데 그렇게 찬물을 끼 얹어야 되겠어?" "벌써 이십 분째 손만 잡고 그 짓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알았어! 간다 가! 그럼 아빠 잘 있어. 금방 돌아올 거니까 걱정하지 말 고." "그래. 잘 지내거라." 사람은 한 부분이 변하면 다른 부분도 변하기 마련인가 보다. 벌써 몇 달째 느끼는 거지만 정호에게 있어 예안은 너무나 상냥한 딸이었다. 남 자였을 때 틱틱거리던 것과 세상에 대한 불만 따위는 이제 찾을래야 찾 을 수조차 없으니. 예안과 니콜라스를 보내고 난 뒤 정호는 늘 그렇듯 컴퓨터를 켜고 인터 넷 장기와 바둑을 두었다. 그러다 심심해지자 즐겨하던 이터널 피닉스를 한 시간 정도 했다. 그래도 지루함이 가시지 않자 정호는 과감히 컴퓨터 를 끄고 TV를 켰다. TV에서는 요즘 전세계적 이슈거리인 맥에 관한 토론 회 등이 한창이었다. "예안아. 아빠 물… 아차. 없지." 버릇처럼 예안을 찾던 정호는 예안이 지금 집에 없음을 상기하고 씁쓸한 표정을 띠었다. 예안이 세정과 친하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 니지만, 자칫 세정에게 예안을 빼앗기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함 역시 마 음 속에 존재한다. "휴우. 덥군." 이제 곧 여름이 가까워지다 보니 한창 더울 때였다. 에어컨을 틀까 생각 했지만 혼자 뿐이다 보니 전기세가 아까웠다. "읏차." 베란다로 간 정호는 바람이 들어오도록 활짝 열어 젖혔다. 뜨겁게 달구 어진 바람이 일순 밀려들어왔지만, 땀방울에 매달려 있던 더위를 훔쳐 가며 시원한 느낌을 심어놓았다. "역시 에어컨 바람보다는 자연바람이 더 좋다니까." 폐부를 찔러오는 시원함을 만끽하던 정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넓 은 집안에는 조용한 느낌만이 가득했다. 아직도 가끔 샤워를 하고 알몸인 채 나와서 자신을 당혹스럽게 하고, 서 투른 솜씨지만 점점 나아지는 요리 실력을 갖고 있고, 자신이 살아가는 유일한 낙이던 예안의 자취가 구석구석 묻어 있는 집안. 그냥 잠깐 떨어져 지내는 것뿐인데 이렇게 쓸쓸한 기분이 드는 건 자신 도 이제 많이 늙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휴우. 예안이가 없는 동안 대청소 좀 해야겠다. 혼자 다 할 수 있으려 나 모르겠네." 팔 소매를 걷어 젖힌 정호는 대청소를 시작했다. 세정의 집에 도착한 예안은 떨리는 가슴을 안고 초인종을 눌렀다. 「예안이니? 어서 와.」 문이 열리자 예안은 니콜라스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회사 사장 집답게 멋진 정원을 가진 고급 주택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난 이런 것에 기죽지 않아.' 두근거림과 떨림, 그리고 자신감을 안고 안에 들어간 예안을 반겨준 사 람은 모두 네 명이었다. "어서 와. 힘들지 않았니?" 세정이 몹시 반가워하며 예안의 손을 잡았다. 어색한 느낌에 조심스럽게 손을 빼던 예안은 호기심 섞인 눈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석준을 발견했 다. "안…녕하세요?" "오, 그래 안녕. 우리 집사람한테 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그래, 우리 집사람 손자를 갖고 있다고?" 사람을 미워하는 법이라고는 모를 것 같은 다정한 시선을 받았을 때 예 안은 조금 울컥하는 걸 느꼈다. 정호와 이혼하고 이런 좋은 남편과 재혼 해 행복하게 살았을 세정에 대한 원망과, 이제 그만 이해해주는 게 좋지 않겠냐는 속삭임이 섞여 혼란을 빚어내고 있었다. "이거, 미안한데. 아직 네가 쓸 방을 다 청소해 놓지 않았거든? 오늘 하 루만 마리 옆방을 쓰려무나. 마리야, 예안이한테 안내해주지 않겠니?" "알았어요. 따라와 예안아." 마리는 예안의 손을 잡아끌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우두커니 서 있던 니 콜라스는 쿵 소리가 나게 옷가방을 내려놓았다. "아참, 네가 성주라는 애구나. 그래, 우리 예안이랑 많이 친하다고?" "네." "네가 쓸 방도 아직 청소를 안 해놨거든? 오늘 하루만 우리 우성이랑 같 은 방 쓰지 않으련?" 자신과 거의 엇비슷한 키를 가진 우성을 빤히 쳐다보던 니콜라스는 고개 를 끄덕였다. 어린애답지 않게 무감정의 표정이 내려앉은 그의 얼굴을 신기한 눈으로 들여다보던 우성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여기야. 옛날 물건 정리해놓는 용으로 쓰던 방이라서 좀 지저분하고 좁 겠지만 그래도 하루만 참아." 몇 가지 잡동사니가 있긴 하지만 꽤나 넓고 깨끗한 이 방이 지저분하고 좁다면 도대체 청결하다는 건 어떤 수준인가. 예안은 조금 기분이 그랬 지만 자신은 유전을 갖고 있다는 자신감으로 언짢음을 눌러 버렸다. "뭔가 마실 것 좀 갖고 올게." 마리가 나간 뒤 찬찬히 방을 둘러보던 예안은 문득 검은 상자가 책상 위 에 소중히 올려져 있는 걸 발견했다. 호기심에 뚜껑을 열어보니 안에는 낡은 앨범이 들어 있었다. "어?" 무심코 사진을 훑어 넘기던 예안은 그게 남자였던 자신의 어린 시절 모 습을 담은 사진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건 내가 유치원 때… 이건 초등학교 입학 때… 이건 졸업식… 이건 중학교 입학 때…' 그 사진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앨범에도 있는 것들이었다. '아빠가 현상해서 엄마한테도 줬나 보네.' 그렇지 않고서야 세정이 이 사진들을 갖고 있을 수가 없다. '아빤 엄마하고 연락 끊은 지 오래라면서 나 모르게 연락하고 있었던 거 야?' 기분이 상했다기보다는 뭐랄까. 세정이 밤에 혼자 이 사진들을 쓸어보면 서 눈물짓는 모습이 떠오르며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도 마음에 도 사리고 있는 자격지심에, 한사코 그럴 리가 없다며 부정했지만 어느새 눈시울이 뜨거워져 있었다. "어? 진우 앨범 보고 있는 거야?" 오렌지 쥬스 두 잔을 쟁반에 담아온 마리가 문을 닫으며 그렇게 물었다. 예안은 황급히 젖어든 눈가를 닦아냈다. "진우 생각하니까 또 눈물이 나온 거야? 와, 너 걔 진짜 많이 좋아했나 보다." 예안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짜고짜 물었다. "이 사진… 어떻게 네 어머니가 갖고 있는 거야? 이건 내가 갖고 있는 앨범이랑 똑같은 사진 투성이던데?" "내가 듣기로는 진우 아버지께서 정기적으로 진우 사진을 소포로 엄마한 테 부쳤대. 학교 입학하거나 졸업하거나 생일이라든지 여행 같은 거 갔 을 때 말이야. 엄마는 특별히 바쁜 일이 없는 한 거의 매일 매일을 이 방에서 그 사진 보는 걸 낙으로 삼으셨어." 예안은 그럴 리가 없다고 자신에게 암시라도 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 지만 마리는 거짓말을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가끔 엄마가 앨범 보다가 눈물지으시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어. 하도 답답해서 하루는 내가 그렇게 아들이 보고 싶으면 직접 찾아가는 게 좋 지 않겠냐고 말씀드렸는데, 용기가 없어서 그렇게 못하셨거든." "버린 다음에 그리워할 바에는 차라리 애초에 그러지 않았으면 좋은 거 잖아." "음 글쎄. 하지만 엄마에게도 엄마의 인생이라는 게 있는 거잖아? 게다 가 난 특별히 엄마가 진우란 애를 버렸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 당시 엄 마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해." "어쩔 수 없었다니?" "내가 듣기로는 진우 삼촌들은 잘 된 다음에도 진우 아버지에게 아무런 보상을 안 해줬다던데? 시동생들 공부시키느라 모아놓은 돈도 별로 없어 막막할 판이니, 차라리 이혼이라도 하면 시동생들이 적어도 죄책감 같은 걸 갖고 어느 정도 보상은 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계셨던 거 아닐까? 물론, 이혼한 이유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 진우 아버지에게 엄마 가 많이 실망하셨던 것도 있겠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예안아." 마리는 안쓰럽다는 음색으로 말문을 끊었다. "엄마가 아무리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그게 다 잘했다는 뜻은 물론 아 니야. 하지만 너와 네 아기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으로, 너무 늦은 것 같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아들에 대해 보상해주고 싶어하는 엄마의 마음 을 모르겠니? 과거에만 얽매여 있기에 네 나이는 아직 너무 어리다고 생 각하지 않아?" 예안은 말문이 막혔다. 자신감을 얻은 마리는 다시 말했다. "힘들겠지만 네가 엄마를 많이 이해해줬으면 해. 엄마는 정말 다른 욕심 이 있어서 널 책임지겠다고 하시는 게 아니야. 유한전자의 사모님 되시 는 분이 무슨 물욕이 있어서 이렇게까지 하시겠니? 그냥 순수하게 널 위 해서 그러는 거야." "그렇지만 정말 너무 늦었다고 생각 안 해?" "너 말이 좀 이상하다? 엄마가 어떤 분인지 알아본다는 목적에서 우리 집에 일단 들어왔으면서, 자꾸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거야?" 뜨끔한 예안은 입을 다물었다. "엄마 입장에선 사실 널 받아들이는 게 부담이 될 수 있어. 나하고 우성 이하고 우리 아빠 눈치도 있는데 섣불리 그런 말 꺼내기가 얼마나 힘드 셨겠니? 원래 엄마는 진우를 우리 집으로 데려와 우리 형제로 삼으려고 하셨는데 그게 안 된 거잖아. 엄마가 우리 아빠한테 그런 말 꺼내기까지 얼마나 마음 고생했을지 한 번 상상해 봐." 말을 마친 마리는 옷장을 뒤적거리더니 남학생용 교복을 꺼내어 짠하고 보여주었다. 자신이 중학교 때 입었던 교복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본 예 안은 크게 놀랐다. "이게 뭔지 알아? 바로 진우가 중학교 때 입었다는 교복이라 이 말씀!" "그걸 어떻게 네 어머니가…?" "헤헤, 당연히 진우 아버지께서 소포로 보내주신 거지. 엄마가 이거 처 음 받았을 때 감격해서 며칠 동안 꼭 껴안고 잤다는 소문이 있는데 당사 자께서 입을 다물고 계셔서 아직 신빙성은 제로. 아, 그리고 이것도 있 어." 다음으로 마리가 찾아준 건 초등학교 때 입었던 옷과 신발, 그리고 유치 원 때 입었던 유치원복과 신발이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예안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물건들이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하나 하나가 세정 에게는 귀중한 보물로 자리잡았던 모양이었다. "놀랐지? 후후, 하지만 엄마의 보물 콜렉션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제 네가 아이만 건강하게 떡하니 낳아서 엄마한테 안겨드리면 되는 거야. 이까짓 물건들이 어디 소중한 핏줄에 비하겠니? 어? 우는 거야? 왜 울 어?" 자랑하듯 그렇게 말하던 마리는 예안의 볼을 타고 한 방울의 눈물이 흐 르는 걸 발견하고 놀랐다. "아니야… 그냥… 좀…" 비로소 겁이 났다. 이제 깨달았다. 세정에게 지금까지 해왔던 거짓말(진 우는 죽었다라는 것)과 상처를 주려 했던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큰 죄악 이었는지를. 어머니가 자식에게 아무리 큰 죄를 저질렀다 해도, 어머니 라는 이름은 낳아주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존경받고 사랑 받을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하찮은 이기심에 사로잡혀 세정에게 자꾸만 상처를 주려 고, 자꾸만 죄를 범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건 정말 용서 받지 못할 더러 운 마음이었다. "미안." 예안은 그 말을 남기고 후다닥 방을 뛰쳐나왔다.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 려다 간식거리를 쟁반에 담아 올라오고 있던 세정과 마주쳤다. "배고프지? 아직 식사 준비가 안 됐으니까 일단 이걸로…" "죄송해요." 예안은 허리를 크게 숙이며 깊이 사과했다. 세정은 왜 그런지 몰라 어리 둥절했다. "죄송하다니? 뭐가 죄송하다는 거니?" "거짓말이었어요. 제가 임신했다는 거 거짓말이었어요. 진우랑 친했던 건 맞지만 아기 따윈 없었어요. 나중에 아기 유산했다는 말로 아주머니 한테 상처 주려고 했던 거예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진우 말만 듣 고 아주머니한테 상처 주려고 했던 거, 정말 죄송해요." 충격을 받은 세정은 멍한 얼굴로 쟁반을 떨어뜨렸다. 와장창 하는 소리 가 울려 퍼지자 니콜라스가 우성의 방에서 나와 그 둘을 올려다보았다. 예안을 뒤따라 나왔던 마리도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정말 죄송해요. 차성주, 우리 그만 가자." 세정들의 경악한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서 있던 예안은 울음을 눌러 참으 며 밖으로 뛰어가 버렸다. 석준의 가족들은 멍한 표정으로 니콜라스가 느릿느릿 예안을 따라 나가는 걸 바라보기만 했다. "휴우. 화장실도 다 청소했으니 이제 예안이 방만 하면 되는 건가?" 머리에 수건을 덮어쓰고 마스크에 빨래 장갑까지 낀 우스꽝스런 차림으 로 예안의 방에 들어서려던 정호는 초인종이 울리자 누가 왔나 의아해하 며 확인했다. 예안이 밖에 서 있는 걸 보고 그는 굉장히 놀라며 얼른 문 을 열어주었다. "아니, 왜 지금 온 거야? 뭐 잊고 간 물건이라도 있던 거니?" 눈물을 참던 예안은 결국 울음을 터트리며 정호의 품에 와락 안겼다. "아빠 나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예안은 뒷말을 채 잇지 못한 채 어떡하냐는 말만 반복했다. 정호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랐지만, 울음을 참지 못하는 자식에 대한 가여움에 가 슴이 아려왔다. "울지 마. 산모가 울면 안 좋아. 애기를 생각해서라도 참아야지. 뚝." 예안이 왜 울고 있는지 정호는 몰랐다.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것도 아닌 단 몇 시간을 보지 못했던 것뿐인데, 금방 돌아온 예안이 반갑고 기쁘기 만 했을 따름이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예안은 거실로 들어왔다. 무언가 심각한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던 터라 정호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아빠." "응?" "나 오늘 겁이 났어." 뜬금 없는 소리에 정호는 다소 어리둥절했다. "무슨 소리니?" "말 그대로야. 나 오늘 첨으로 엄마가 날 사랑했었다는 걸 알았어. 난 자식 내버리고 혼자 좋은 곳으로 재혼한 뒤 잘먹고 잘사느라 모든 걸 다 까맣게 잊어버린 매정한 엄만 줄 알았는데. 그러다가 하찮은 자격지심이 나 의무감 때문에 다시 날 찾은 줄 알았는데. 근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 더라." 예안은 다시 치솟는 눈물을 닦으며 계속 말했다. "근데 겁이 나. 엄마가 날 사랑했다는 걸 너무 쉽게 인정해버리면 나 아 빠 떠나야 되는 거잖아. 내가 그렇게 될까봐… 그게 겁이 나." "하…" 그렇다고 해서 설마 정말 떠나는 건 아니겠지. 정호는 예안의 마음만은 진심으로 이해했다. 예안은 생모에게 마음이 기울어지는 게 아버지인 자 신에 대한 배신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한 양심의 가책으로 저렇게 울고 있는 것이었다. "울지 마 우리 딸. 울음 뚝." 여자가 된 후 눈물이 너무나도 흔해진 자식이 대견스러운 한편 혼란스러 워 하는 게 안타까웠다. 정호는 다정히 예안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예안 이 세정에게 가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한심한 고민이나 하고 있었던 자 신을 깊이 책망했다. 마음에 안 드는 이번편. 서수현이라는 이름이 이상하다는 지적 하에, 주인공 아이 이름을 여러분 들께 의견을 구하고 싶어요. 남자고, 가능하면 중성틱한 이름으로 '서' 로 시작하는 이름이 있다면 아낌없이 코멘트를!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31 회] 날 짜 2004-01-26 조회 / 추천 4028 / 58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선물 세정은 창백한 표정으로 정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어제 예안이 한 말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임신했다는 게 거짓말이라니. 도저 히 믿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절실한 문제였다. '아냐 어쩌면…' 4개월에 접어들었는데도 예안은 전혀 배가 부르지 않았던 걸 떠올린 세 정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녀는 지금 거짓말을 한 예안에 대한 분노 따위는 없었다. 예안이 말이 제발 거짓말이 아니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을 뿐이다. 그때였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세정을 발견한 정호가 맞은편에 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세정은 그를 홱 노려보았다. "잘 지냈어요. 당신은요?" "나야 늘 그렇지. 요새는 온라인 게임에 푹 빠져 사는데 그렇게 재미있 을 수가 없더라구. 어렸을 때하고 젊었을 적에는 워낙에 사는데 바빠서 그런 거 할 여유가 없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천천히 즐기면서 살까 해." "좋으시겠어요. 누구는 걱정으로 속이 타들어 가는데 편안하게 노후를 보낼 수 있어서 말이에요." 냉수를 마셔 초조함을 씻어버린 세정은 얼굴을 굳혔다. "사실대로 말해줘요. 예안이가 저한테 상처를 주려했다는 게 도대체 무 슨 뜻이에요? 임신했다는 게 거짓말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당 신 입으로 분명히 말하지 않았어요? 예안이 진우 아기 가진 거 맞다고." 정호는 이미 지난밤에 예안에게 전해들은 대로 말했다. "맞아. 그거 거짓말이었어. 예안이는 임신 따위 하지 않았어." 세정은 기가 막혔다. "말도 안 돼요. 난 예안이랑 같이 병원까지 갔었다구요." "그 산부인과 의사는 예안이랑 전부터 아는 사이였어. 미리 말을 맞추고 연극한 거였지. 결정적인 증거가 있지 않아? 임신 사개월이라는 데도 배 가 안 부른 것만 봐도 알 텐데?" 세정은 화가 나고 어이없어 어쩔 줄 몰랐다. "당신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예요? 도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거죠?" "마음대로 욕해도 좋아. 사실은 내가 예안이한테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 했어. 그렇게 해서라도 당신을 상처 주고 싶었거든." 태연한 정호의 대답에 세정은 충격을 받아 새하얗게 질렸다. "뭐…라…구요?" "예전에 당신이 늘 말했지. 난 너무 착해 빠져서 항상 손해보고 살 사람 이라고. 그 말이 맞았어. 결국 난 이리저리 손해만 보다가 당신한테까지 버림받고 말았지. 그 뒤로 조금 변했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당신…" "왜, 놀랐어? 사실 그동안 꼬박꼬박 진우 사진 보내주고, 진우 녀석 교 복 같은 것도 보내주고 그러고 한 거 전부 다 연기였어. 결정적인 순간 에 당신한테 상처 주려고 말이야. 근데 예안이 잘 설득했나 싶었는데 얘 가 워낙 천성이 착해서 결국 실수하고 말았네. 어쩔 수 없지 뭐." 새하얗게 질린 세정의 얼굴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불꽃이 넘실거렸 다. 정호는 속으로 조그맣게 사과했다. '미안해.' 사실 정호는 이런 거짓말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세정이 예안을 미워하게 되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계속 말했다. "사과 같은 거 받을 생각은 하지 마. 난 아직도 당신한테 아무런 사과를 받지 못했어. 15년 전 당신이 나와 진우를 버리고 떠난 것에 대해서. 이 정도는 정말 약소한 보복이야." "그래서? 그래서 그런 거짓말을 한 거예요? 그렇게 해서라도 날 비참하 게 만들고 싶었어요?" 세정의 눈에서 억울한 슬픔이 섞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호는 이루 말 할 수 없이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예안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세정을 속여야만 했다. "맞아. 난 당신한테 상처를 주고 싶었…" 짜악- 살갗이 튀는 타격음과 함께 정호의 뺨이 돌아갔다. 정호는 얼얼한 뺨을 어루만지다 벌떡 일어났다. "앞으로 다신 당신을 볼 일이 없을 거야. 당신도 더 이상 내 인생에 관 여하지 마. 이제 당신과 날 이어주는 연결 고리는 이 세상에서 영영 사 라졌으니까." 정호는 그렇게 차갑게 말한 뒤 나가 버렸다. 허망한 표정으로 서 있던 세정은 두 손으로 뺨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눈물 이 흘러내렸다. "흐윽, 흑…" 세정은 자신이 용서받지 못할 잘못을 저지른 건 알았다. 그래도 뒤늦게 나마 죽은 아들에게 속죄하고 싶었다. 그런데 최후의 희망이 여지없이 사라져 버렸다. 정호에 대한 미움이나 예안에 대한 원망 따위는 지금 그녀의 마음 속에 없었다. 죽은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다는 슬픔만이 도사리고 있었을 뿐이 다. "휴.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네." 카페 밖에서 대형 유리창을 통해 울고 있는 세정을 쳐다보던 정호는 무 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예안의 간곡한 부탁이 있어 이렇게 했지만 마음 이 편하진 않았다. 이제 예안과 손자를 세정에게 빼앗기지 않아도 된다 는 비겁한 안도감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자 꾸 왜 이러는지 몰랐다. 약속한 카페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앤드류는 예안의 모습이 나타나 자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와. 힘들지 않았어?" "힘들지 않았어…요." 버릇처럼 반말을 하다가 억지로 요를 붙이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앤드류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지금 4개월이라고 했지?" "네." "휴. 여전히 존대야? 그래도 다시 보게 되면 이제 자연스럽게 반말 써줄 줄 알았는데." 앤드류의 표정에는 이제 많은 여유가 자리잡고 있었다. 며칠 전 호텔에 서 있었던 그 일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 같았다. "누나가 먼저 연락해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정말 그럴 줄은 몰랐어. 기 대는 했지만 그래도 내가 먼저 연락하기 전에는 절대 안 만나줄 줄 알았 거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뭔데?" "성격이 참 급하시네요." "5년이나 기다렸으니 그렇지 뭐. 더 기다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 일 분 일 초가 초조한 거 있지." "휴우." 크게 한숨을 내쉰 예안은 정색한 채 똑바로 그를 주시했다. "거래하자." 느닷없이 튀어나온 반말이었지만 앤드류는 대단히 만족했다. 그것은 자 신이 유서운이라는 걸 인정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자신만의 생각이었다. "거래? 무슨 거래?" "일단 우리 그냥 친구로만 지내자. 대신, 단 한 번이라도 네가 결혼하자 느니 어쩌니 하는 말 따위를 꺼내면 곧바로 굿바이야." "일단, 이라고?" "많이 생각해본 거야. 사실 난 아직도 혼란스러워. 난 분명 네가 찾는 유서운이라는 사람이 아니야. 근데 그 사람의 기억을 생생하게 갖고 있 어. 이건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앤드류는 대답이 없었다. 어차피 그런 물음에 대해 자신이 대답할 말은 없었다. 당사자가 모른다는데 어떻게 자신이 안단 말인가. "얼마 전까진 네가 정말 싫었어. 농담 아니야. 할 수만 있다면 널 죽여 서라도 나한테서 관심을 끄게 하고 싶었으니까." 앤드류는 침묵을 지켰다. "그런데 지금은 아냐. 널 좋아하는 건 물론 절대 아니지만… 이대로 널 외면하는 건 죄악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마 그건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유서운이란 사람의 기억 때문일 거야. 왜 그런 기억 따위가 나한테 있는 지 난 모르지만… 그러니까 자세한 건 묻지 마." 그건 거짓말이다. 예안은 이제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 모든 걸 꿰뚫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최후의 보루를 남겨두기 위해. 그러기 위해 자신은 유서운이 아니고 왜 이런 기억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고 둘러댄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야. 어쨌든 이 몸은 오리지날 유젤의 복제일 뿐 진짜 유 젤은 아니니까. 이 몸엔 엄연히 서예안이란 이름이 있다구. 유서운 따위 가 절대 아니야.' 예안이 그렇게 다짐하고 있는 걸 모르는 앤드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누나 말은, 일단 내가 누나 곁에 머무를 수 있는 자격은 된다 이거지? 대신 왜 누나가 지금까진 나에 대해 모르고 있었는지 같은 건 묻지 말라 이거지?" "그래. 그리고 한 가지 더, 누나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이름을 불러. 난 엄연히 17살이니까." "알았어.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뭐." "근데…" 사실 아까부터 정말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함부로 입밖에 꺼내기가 부끄럽고 굉장히 망설여져서 묻기가 힘들었지만. "이건 진짜 만약인데, 너 정말 나랑 결혼하고 싶어?" 앤드류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어." "난 지금 네가 모르는 남자의 아이까지 갖고 있는데? 그래도?" "상관없어. 난 그 아이 아버지 노릇까지 잘 해낼 자신 있어. 차별 같은 건 결코 하지 않을 거야." 자신감에 찬 앤드류의 대답에 예안은 그만 속이 쓰려 왔다. 그것은 바로 이대로 유젤을 그에게 빼앗길 순 없다는 '유진우'로서의 마음. 그리고 이제 그만 그의 사랑을 받아줘도 되지 않느냐는 오리지날 유젤의 기억. 그 두 가지 상념이 충돌을 일으켜 빚어진 고통이었다. 예안은 찔끔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임신 중이라서 롯데월드 같은 덴 못 가고… 미술관이라도 놀러 갈래?" 앤드류를 향한 첫 수용의 손길은 이렇게 내밀어졌다. 그것은 앤드류가 아주 오래도록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것이었다. 과연 언제까 지 그 손이 거두어지지 않고 유지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지금 그에게 있어 그것은 축복보다 더욱 행복한 것이었다. 세정과의 갈등은 이렇게 끝맺고, 이제 다음편에서 12월 달로 이동 합니다.(현재는 초여름) 그리고 주인공 아들 이름에 관해서인데요, 여성틱한 이름도 좋으니 제발 제발 이름 좀 더 많이 부탁해요! 아직 모자라요! T_T 참, '서해주'라는 이름은 어때요? 남자 이름으로.--;;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32 회] 날 짜 2004-01-27 조회 / 추천 4035 / 52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선물 「내일 아침에 강원도 지방에는 폭설이 예상됩니다. 따라서…」 저녁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으며 예안은 창문을 열어 젖혔다. 차가운 밤공기가 흘러 들어오며 머리카락을 간지럽게 했 다. 정호가 알면 아기한테 안 좋다고 또 큰 소리 할 게 뻔하지만 요 며 칠 간은 몸이 무거워 집안에만 있던 터라 무척 갑갑했다. "와, 눈 온다." 느릿느릿 떨어지는 함박눈이 가로등 빛에 물러가는 어둠 위로 소복소복 쌓이고 있었다. 예안은 손을 내밀어 손바닥 위에 소복하게 쌓이는 차가 운 감촉을 즐겼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크리스마스 이브네. 휴우. 그냥 집에만 있어야겠 다. 절대 나가지 말아야지." 내일이 오기만을 기다려온 몇몇 남자들은 그런 걸 용납하지 않을 것이 다. 하지만 그건 예안의 관심 밖이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나 정우야. 잘 지냈어? 내일 크리스마스 이브인 거 알지?」 "알긴 아는데, 왜?" 「내일 시간 있으면 나랑 같이 놀지 않을래?」 "형, 지금 장난하셔? 나 지금 만삭인 거 몰라? 어디서 놀자 소리가 함부 로 나와?" 「그러지 말고 조금만이라도…」 "싫어. 하여튼 안 돼. 이만 끊어." 다소 냉정하게 전화를 끊은 예안은 왠지 자신이 우스워졌다. 예전 같았 으면 생각할 것도 없이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몇 달 전 앤드류로 인 해 기억이 일부 깨어난 후로는 성격이 많이 변했다. 조금 느긋해지고 마 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누나 나 현우.」 예안은 반사적으로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무슨 일이야? 내가 다시는 너 보기 싫다고 했잖아. 몇 달 동안 잘 지키 더니 갑자기 왜 전화했어?" 「누나, 정말, 정말 미안해. 앞으로 다시는 그런 짓 안 할게. 제발 용서 해 줘. 응?」 사실 현우에 대한 미움은 많이 누그러진 뒤였다. 시간이 약이라더니 그 말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녀석 때문에 혜인이 심한 상처를 받은 건 절대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예안은 몇 달 전 현우와 담판을 짓던 걸 떠올렸다. 현우가 앉아 있는 자리를 보자마자 예안은 맞은편에 앉으며 다짜고짜로 쏘아붙였다. 「너 혜인이한테 내가 진우 아이 가졌다는 말 왜 했어? 혜인이랑 진우랑 사귀던 사이라는 거 빤히 알면서!」 현우는 잘못했다는 죄책감이 없는 당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누나를 위하는 길이라 생각했으니까.」 「뭐?」 「누나가 혜인이 누나를 친구로 생각했다면 적어도 미안한 기분에 아이 를 지울 거라 기대했어. 솔직히 가능성이 크진 않았지만 그것 외에는 달 리 방법이 없었잖아?」 예안은 어이가 없었다. 「너 미쳤냐?」 「미치지 않았어. 그 나이에 혼자 아이 낳아 키우려는 누나가 미친 거 아니야?」 짜악- 더 이상 참지 못한 예안은 현우의 뺨을 거칠게 올려붙였다. 뺨에 새겨진 얼얼한 통증을 쓰다듬던 현우는 조그맣게 말했다. 「혜인이 누나한테 그런 말을 한 건 잘못이라는 건 인정해. 그때 내가 질투에 눈이 멀어 미쳤나 봐. 혜인이 누나한테 미안해서 누나가 아이를 지울 거라 기대했다니, 아이큐 170이란 숫자가 울겠다. 미안해, 정말 미 안해. 잘못했어 누나…」 뺨 한 대 맞자마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사과하는 현우의 태도 에 예안은 다소 누그러졌다. 조금 전에는 그렇게 당당했는데 뺨 한 대에 태도가 돌변하다니. 이 녀석도 그 동안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한 모양이 다. 「너 때문에 혜인이가 엄청 상처받은 거 절대 잊지 마. 알았어?」 「잘못했어… 미안해.」 그때 현우가 비에 홀딱 젖은 토끼마냥 가엾어 보였기에 그냥 넘어가긴 했지만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오리지날 유젤의 기억이 깨어나고, 앤드류도 토닥여주고, 레이온하고 담판도 짓는 등 워낙 정신 없는 일이 겹치다 보니 그렇게 어영부영 넘어간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참 피곤하게 살았다. 휴우. 이 세상에 나보다 더 피곤하게 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심심하면 납치 당하지. 앤드류하고 놀아줘야 되지.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만들려는 레이온도 막아야 하지. 시트날타도 조심해야 하지. 맥을 노리 는 사람들도 경계해야 하지. 이 세상에 자신만큼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 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야, 유현우." 「응?」 "방금 전에 정우 형도 나한테 전화했다. 내일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같이 놀자고. 근데 내가 단번에 거절했지." 「….」 "임마. 넌 사람이 좀 염치가 있어 봐라. 나 지금 언제 애 나올지 모르는 만삭인 거 몰라? 그런데 맘 편하게 내가 놀러 다니게 생겼어?" 현우는 말이 없었다. 아마도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나중에 애기 태어나면 그때 애 봐 주러나 와. 알았냐?" 다소 부드러워진 목소리. 현우는 뛸 듯한 음색으로 대답해왔다. 「알았어! 육아는 전부 다 나한테 맡겨! 내가 충실하게 다 알아서 할 테 니까!」 그렇게 현우를 잘 다독거려서 전화를 끊은 예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부분에 갈수록 노하우가 쌓여 가는 자신이 왠지 한심하게 느껴졌 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콱! 해버리는 건데… 휴우. 이게 다 앤드류 그 녀 석 때문이야! 그 캠코더만 안 봤으면…" 오리지널 유젤은 아마도 성격이 굉장히 밝고 상냥했을 것 같다. 완전히 깨어나는 게 무서워 함부로 손대지 못하는 그녀의 기억. 그것의 일부분 을 살짝 터치한 것만으로도 자신의 성격이 이렇게 부드러워진 걸 보면. "잠이나 자야지. 휴우. 졸려." 예안은 피곤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조금 불러온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너도 잘 자 아기야." 만삭이라고 해봐야 배는 그다지 부르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임신 2, 3개월 정도 한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만큼 태아의 크기는 무척이나 작았다. 예안이 친하게 알고 지내는 여의사 지원은 크게 걱정 했지만 아직까지는 별 문제 없으니 다행이었다. '큰 문제없는 것이 다행인 게 아니라 당연한 거지.' 예안은 오리지널 유젤의 기억을 통해 태아의 크기가 작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원과는 달리 그녀는 걱정 하나 없이 만사태평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니콜라스가 들어왔다. "누나, 벌써 자려고?" "어. 피곤해서 일찍 자려구." "요새 사업은 잘 되어 가? 유한 전자 빼앗아 버린다고 기세가 등등했잖 아? 그 준비 과정으로 대송운수 인수한다며?" "김 아저씨한테 일임했으니 알아서 잘 하겠지. 내가 그런 쪽으로 아는 게 전혀 없잖아?" "그렇다고는 하지만 누나는 너무 사람을 믿는 거 아니야? 만약 그 김 아 저씨라는 사람이 그대로 돈 들고 튀어버리면 어쩌려고?" 침대에 누워 있던 예안은 눈을 뜨고 생긋 웃었다. 여유가 가득한 미소였 다. "니콜라스. 나는 김 아저씨를 믿고 맡기는 게 아니라 지금 시험을 하는 거야. 김 아저씨가 내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일을 잘 해결한다면 나도 그에 따라 신임해줄 거고. 사실 나에게 몇 십억, 몇 백억은 돈도 아니거 든. 너도 알잖아?" 그 말은 맞았다. 연간 4500조 원의 돈을 벌어들이는 유전의 소유자에게 있어 몇 백억 원 정도는 돈도 아니었다. "너도 청부업자하면서 돈 많이 벌었을 거 아냐? 게다가 옛날에 나 미국 에서 구해줄 때도 의뢰비용으로 오백 억인가 받았잖아? 내가 듣기로 너 총재산이 한화로 일조 가까이 된다던데? 그런 녀석이 쩨쩨하게 김 아저 씨를 그렇게 못 미더워 해?" "내 총재산은 한화로 일 억도 안 돼. 한 2천만 원쯤이나 되려나 모르겠 네. 아! 얼마 전에 소총하고 총알하고 수류탄 좀 산다고 또 썼으니 이제 한 몇 십만 원이나 남았을까?" 예안은 기겁해서 뒤로 넘어갈 뻔했다. "뭐, 뭐, 뭐? 그 많은 돈을 도대체 다 어디다 쓴 거야?" "그냥 이것저것 무기 같은 거 사다 보면 돈이 굉장히 많이 들더라." "너 설마 이지스함-3라도 한 척 산 거야? 아니지, 아니지. 너한테 전투 함정 같은 게 필요할 리가 없지. 혹시 장갑차라도 사댄 거야? 그래서 돈 이 그렇게 없는 거야?"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좀 쓸데가 많았거든." "아무리 그래도 그건 말이 안 되잖아. 탱크 같은 걸 마구 사대지 않는 이상 조 가까이 되는 돈을 다 썼을 리가 없잖아. 총이나 총알이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도대체 어디다 돈을 썼기에 일조 원 가까이 되는 그 엄청난 재산이 몇 십만 원으로 둔갑했단 말인가. 예안은 니콜라스의 파트너라는 사람이 괜 히 불쌍해졌다. "그러고 보니 너 혼자서 활동하는 거 아니라며? 니르랬던가? 하여튼 그 사람이랑 조 짜서 일하는 거라며? 그런데 그렇게 네 맘대로 돈 써버려도 되는 거야?" "괜찮아. 니르는 돈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했어." "그래?" 불러온 아랫배를 어루만지는 건 무척 재미있는 일이었다. 아기와 장난이 라도 치듯 재밌다는 손길로 배를 이리저리 쓰다듬던 예안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물었다. "그 니르라는 사람 여자라고 했지? 보고 싶단 생각 같은 거 안 해봤어? 안 본지 벌써 반 년 가까이 됐잖아? 그러고 보니 난 네가 전화하는 건 본 적도 없다." "전화 같은 건 필요 없어. 니르와 나는 정신적 교감을 할 수 있으니까." 예안은 조금 놀랐다. "텔레파시 같은 걸 말하는 거야?" "어." "와우, 왜 진작 말 안 했어?" "묻지도 않았잖아." "그런 건 네가 진작에 알아서 척척 말해주면 좋잖아. 넌 꼭 내가 물어야 만 말해줄 거야? 그렇게 수동적인 인생사는 거 재밌냐?" 텔레파시. 보통 사람 같았으면 절대 믿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산전수전 다 겪은 예안은 이제 고작 텔레파시 가지고 놀라거나 당황하거 나 신기해하지 않는다. 이런 쪽으로는 면역이 되다 못해 예비 백신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너도 나도 참 이상한 애들이야. 안 그래? 다른 사람들이 우리 이야기를 들었으면 미친 사람 취급하거나 아니면 농담 따먹기 한다 고 웃어넘겼을 텐데. 아참, 에날도스인지 뭔지 하는 거 요새 연습은 잘 되어 가?" 니콜라스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옆으로 내저었다. "많이 시도해봤는데 여전히 안 돼. 그때 도대체 내가 어떻게 그런 힘을 쓴 건지 이해가 안 갈 정도야. 꼭 꿈이라도 꾼 것처럼…" "초조해 하지말고 열심히 해 봐. 시트날타 녀석들 말처럼 정말 네가 엘 리우스일지도 모르니까." "누나는 연습 잘 되어 가?" 오리지널 유젤의 기억을 처음으로 떠올린 그때. 앤드류에게 납치 당했던 그 당시 폭주했던 그 힘에 관해서 묻는 것일 게다. 예안은 찔끔했다. "나 요새 많이 바쁜 몸이라고.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쓸 여유 없어. 아빠 몰래 사업하랴, 태교 하랴, 얼마나 바쁜지 알기나 해?" 사실 밤마다 남몰래 죽어라 연습했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니콜라 스가 빤히 쳐다보자 쑥스러움을 느낀 예안은 고개를 돌렸다. "김 아저씨한테 죄다 떠맡겨놓고는 뭐가 바쁘다고? 노는 데 바쁜 것도 자랑인가?" 니콜라스가 나가면서 그렇게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예안은 화가 치솟았 지만 아기를 생각해서 꾹 참기로 했다. "마음에 안 들어." 정호의 도움을 받아 꾸민 아기 방을 본 예안의 첫 소감은 그거였다. "이게 뭐야? 벽지 색깔도 어두컴컴하고, 전체적으로 숨이 막힐 것 같아. 또 아기 침대 옆에 저 꽃병은 뭐야? 잘못해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아기가 다치잖아? 침대가 창문하고 너무 다이렉트로 연결되어 있어. 저러면 여 름에는 더운 바람이 곧장 들어와서 엄청 괴롭다구. 처음부터 다시 해!" 아기 방을 꾸미기 시작한 건 대략 한 달 전이었다. 정호는 나름대로 노 력한다 했지만 예안은 항상 불만스러워하며 불합격 판정을 내렸다. 장장 사흘에 걸쳐 꾸민 이번 인테리어 역시 마찬가지로 탈락. 하지만 정호는 조금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줄까?" "음. 침대는 저쪽 벽에 갖다 붙이구, 창문 쪽으로 스탠드 형 커튼을 놓 아 줘. 그리고 벽지 색깔은 아늑한 초록색으로 해줘. 가끔 내가 옆에서 잘 지도 모르니까 내가 쓸 조그만 침대도 아기 침대 옆에다 놓아 주구. 그리고 저쪽에다가는 내가 볼 TV도 놓아 줘. 전자파가 가장 적게 나오는 걸로 해야 돼. 아, 그리고 거실에 있는 내 컴퓨터도 이 방으로 옮겨 줘. 조그만 옷장도 하나 사서 여기 놓아 주구." 요구도 참 많다. 정호는 다소 질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예 이 방에 살림을 차리지 그러니?" "아, 그거 좋은 생각이다. 그렇게 할까?" 정호는 다소 어이없는 표정으로 들고 있던 꽃병을 내려놓았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그냥 아기 침대를 네 방에다 두는 게 어때? 그게 가장 편할 것 같은데?" "안 돼. 내 방은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춥단 말이야. 에어 컨하고 난방 틀면 간단히 해결되겠지만 에어컨 바람은 아기한테 너무 안 좋아. 그에 비하면 이 방은 공기 순환이 잘 돼서 비교적 여름에는 시원 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편이라구. 그리고 내 방은 벽지 색깔도 이상하단 말이야." 단호한 거절. 숨막히게 하는 엄청난 요구가 까다롭다. 그래도 정호는 언 제까지고 철없는 자식인 줄 알았던 예안이 어느새 어엿한 부모가 된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그러나 한 가지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엄마한테는 정말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거니? 그 뒤로 네 엄마 다신 연 락이 없는데. 어지간히 쇼크 받은 것 같다." 순간 예안의 얼굴도 우울함에 물들었다. "아빠가 엄마랑 재결합할 수 있는 거 아니잖아." "…." "지금 사실대로 말하면 결국 난 아빠랑 엄마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해. 하지만 아무리 내가 엄마한테 너그러워진다고 해도 결국 엄마랑 살 순 없잖아?" 세정과 잦은 접촉을 가지는 건 정호에게 부담이 된다. 예안은 그걸 알기 에 아기를 가졌다는 건 거짓말이었다고 둘러대서 세정과의 인연을 끊은 것이었다. 정호 역시 예안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그래도 사람 인정이라는 게 있잖니. 같이 살진 않더라도 가끔씩 아기 얼굴도 보여주고 만나기도 하고… 그러는 게…" "이미 재혼한 엄마랑 그렇게 지내는 거 나 정말 싫어. 아빠 눈치도 있는 데 엄마 만나러 가는 것도 싫고." 그 말에 정호는 가슴이 찡했다. "그럼 이제 엄마 싫어하지 않는 거니? 단지 이 아빠 때문에 엄마한테 그 렇게 거짓말 한 거야?" "아니, 싫어해." 단호한 대답에 정호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예안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물론 예전처럼 죽어라 싫어하는 건 아니야. 내가 아빠한테 말하진 않았 지만 이제 무작정 엄마를 미워하진 않아. 엄마의 행동도 이해해줄 수 있 을 것 같아. 하지만 그래도 엄마가 아빠랑 날 버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 그러니까…" 무언가 횡설수설하고 있었지만 정호는 그냥 이대로 이해해주기로 했다. 더 이상 아픈 기억들을 들춰내는 건 좋지 않으니까. "그래. 알았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그나저나 뭐 특별히 먹고 싶 은 것 없니?" 찔리는 구석이 있는 예안은 조금 당황했다. "아, 아니. 먹고 싶은 것 없어. 절대 없어. 없어. 진짜 없어." "그래도 요새는 별로 잘 먹지 못했잖아. 전에 사다준 갈비도 절반 이상 남기고 말이야." 정호가 전에 사온 갈비에는 사실 고달픈 사연이 얽혀 있다. 그것이 무엇 인고 하니, 사실 눈 딱 감고 먹으려 했으나 자꾸 구역질이 올라오는 바 람에 어쩔 수 없이 적당히 퍼다 버린 것. 다 버리자니 아까워서 결국 1/3 가량 버리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사뿐히 침대에 얼굴 묻고 피눈물을 흘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차라리 그냥 속 편하게 말해 버릴까?' ST기관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장기 때문에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편리 한 육체(사실 먹지도 못한다)라서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런 욕구가 치솟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이성의 부 르짖음 때문에, 예안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피 같은 돈을 아까워하며 정호가 사온 비싼 음식들을 몰래 몰래 갖다 버리고 있다. 예안의 입장에서는, 제발 정호가 한 마리에 십 만원이 넘어가는 조기나 눈 튀어나오게 비싼 고급 갈비 혹은 뼈다귀 가릴 것 없이 하여튼 그런 류의 음식을 사오지 않기만을 바랄 수밖에. 주인공 아기 이름은 서유빈으로 낙찰. 누가 제안하신 건진 모르지만 하 여튼 그분께는 감사.(__) 그나저나 포커 패 순서 어케 되는지 알려주세요. 언젠가 예안이가 카지 노 갔었을 때 벌인 실수를 수정해야 됨.--;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33 회] 날 짜 2004-01-27 조회 / 추천 4114 / 65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선물 앤드류에게 있어 미국의 밤하늘은 더 이상 절망을 확인시켜주는 환영 따 위가 아니었다. 십 년 전, 그리고 오 년 전의 이별 따위는 기억에서 지 워버린 지 오래였다. 이제 예안이 자신을 부담스럽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예전과 달리 항상 웃음을 입가에 달고 살기에, 주변에서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거냐고 항상 물어오기까지 한다. 그는 지금 행복하다. 업무가 끝난 후 앤드류는 한국에 있는 예안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누나 나야. 잘 지내고 있어?" 「내가 그 누나 소리는 하지 말랬지! 근데 거기는 지금 밤 아니야? 너 지금 잠 안 자고 도대체 뭐 하냐?」 "그냥 누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내가 낮에 전화하면 거기는 밤이잖아. 누나한테 폐를 끼칠 순 없지. 가뜩이나 몸도 무거운데…" 「나한테 폐 끼치기 싫다면 이 전화 당장 끊어주지 않으련? 그리고 누나 소리도 하지 마!」 앤드류는 웃음을 참고 물었다. "누나 소리가 영 입에서 안 떨어지는 걸? 어떡하면 좋은지 누나가 좀 알 려줄래?" 「그냥 하지 마! 아, 나 지금 전화 끊어야 돼. 바빠.」 "왜?" 「지금 손님 오기로 되어 있단 말이야. 어? 왔다. 그럼 끊을게. 다음에 또 보자.」 "어? 누나 잠깐…" 그러나 앤드류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야속하게 전화는 끊어졌다. 뚜, 뚜, 하는 신호음만 쏟아내고 있는 수화기를 멍한 눈으로 쳐다보던 그는 쓴웃음과 함께 그것을 내려놓았다. "회장 님! 또 애인분이랑 노닥거리고 계신 거예요! 지금 일거리가 가뜩 이나 엄청 밀렸다고요!" "어어? 업무 시간 지난 지가 언젠데 제니는 아직도 퇴근 안 하고 있어?" "저 같은 캐리어 우먼한테 업무 시간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라구요! 밀 린 일거리가 산더미처럼 남아 있는데 시계바늘에 제 스케쥴을 맞출 여유 가 어디 있어요!" 예전 같았으면 골치가 지끈거렸을 제니의 잔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린다. 아마도 그 까닭은, 이제는 손만 내밀면 잡을 수 있도록 행복이 바로 가 까이에 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원은 코트를 벗어 예안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아버지는 어디 가셨니?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안 보이시네?" "친구나 만나고 오라고 내가 내보냈어. 아무래도 아빠랑 같이 있으면 누 나가 좀 거북해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럼 내가 미안한데. 나 전혀 거북하지 않아." "괜찮아. 괜찮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아빠도 친구랑 술 마신 다고 좋아라 하며 나갔으니까. 오늘밤 안 들어온다고 하셨으니까 누나도 여기서 자고 가." "흐음…" 지원은 호기심 섞인 시선으로 집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45평. 두 부녀 지간이 살기에는 매우 큰집이다. 깨끗하긴 하지만 뭐랄까. 여자애가 있 는 듯한 느낌은 그다지 나지 않았다. "여기가 네 방이야?" 지원은 신기한 표정으로 예안의 방안을 갸웃거렸다. 컴퓨터가 놓인 책상 과 옷장, 침대, 벽걸이 TV가 전부. 십대 후반 소녀의 방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네가 보통 여자애랑은 틀리다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했다. 하 다 못해 가벼운 화장품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니니? 거울 달랑 걸려 있고 빗 한 개가 전부라니." "이 좋은 피부를 화장으로 가릴 이유가 뭐가 있어?" 다소 뻔뻔스런 대답에 지원은 잠시 굳었다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래. 너 잘났다. 이 몸은 나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나이 때문에 까칠까칠해지는 피부를 진한 화장으로 가리기에 급급해서 돈을 얼마나 쏟아 붓는 판인지 모르는데, 그렇게 염장 지르고 싶니?" "억울하면 돈 들여서 피부 박피술이라도 받던가. 하지만 그래도 날 이길 순 없을 걸? 그냥 깨끗이 포기하고 그러려니 하고 살아." "염장 지르지 말라니까." "싫어. 지를 거야." 처음에는 단순히 환자와 의사의 관계였다. 하지만 같은 여자라는 동질감 도 있고, 또 자주 만나다 보니 10살의 나이 차이가 무색해질 정도로 두 사람은 친해졌다. 예안이 자신을 누나라고 부르는 게 지원은 가끔 불만 이었지만, 몇 번을 말해줘도 고치지 않아 이제는 거의 포기 상태였다. "여기는 아기 방? 잘 꾸몄네." "잘 꾸미긴 뭐가. 마음에 안 들어. 벽지 색깔이 어두컴컴해서 숨이 막히 는 데다가, 아기 침대가 창문하고 너무 다이렉트로 연결되어 있어서 여 름에는 더운 바람이 들어온단 말이야. 처음부터 다시 해야 돼." 지원은 풋 웃음을 터트렸다. "성격이 꽤나 소탈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런 쪽으로 까다로운 구석이 있구나?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넌 좋은 엄마가 될 것 같아." "쳇. 그런 닭살 돋는 소리 하지 마. 어차피 누나도 결혼하면 이렇게 돼. 아이구 힘들어." 예안은 다소 무거운 배를 끙끙대며 자리에 앉았다. "겨우 그 정도 불러놓고 뭐가 힘들다고 그래? 일반 산모랑 비교할 때 삼 사 개월 정도밖에 안 되잖아? 고작 그 정도 가지고 힘들다고 죽을상 부 리면 다른 산모들이 비웃는다." "몰라. 하여튼 힘들다면 힘든 거야." 앞으로 한 달도 안 걸려 어머니가 될 처지에 저렇게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어서야 될까. 하지만 지원은 예안의 그런 점이 은근히 부러웠다. "휴. 나도 집안에서 하루빨리 결혼하라고 성화를 부려서 미치겠어. 고작 27살밖에 안 됐는데 무슨 벌써부터 결혼하라는 거야? 우리나라 여자들 평균 초혼 연령이 30을 훌쩍 넘긴 게 언제인데." "누나는 애인도 없잖아." "일부러 안 만든 거야. 귀찮아서." "왜?" "뭐랄까. 아직까지 난 결혼에 별로 끌리지가 않거든. 나중에 내가 어머 니가 된다 해도 사실 잘해낼 수 있을지 별로 자신도 없고. 그래서 난 널 볼 때마다 항상 부러워. 17살밖에 안 됐으면서 용케 아이 지우지 않을 결심하고 낳아 기르는 거, 사실 그거 보통 여자애들은 절대 못하는 일이 잖아." 미모의 젊은 여의사라 고민 같은 거 없이 사는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 만은 아닌 모양이다. 하기야 자신의 주관적 가치가 만들어낸 사항에 객 관적 조건들이 맞아주지 않으면 그게 바로 불행이랬으니. "근데 쟤는 누구니?" 열린 방문을 통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니콜라스를 흘끔 본 지원이 그렇게 물었다. "차성주라고 해. 내가 말 안 했어? 친구 동생인데 우리 집에서 하숙하고 있어. 가족들이 전부 이민 갔거든." "저렇게 어린애인데 왜 안 데리고 갔을까? 좀 이상하네?" 예안은 조금 뜨끔했지만 태연스레 답했다. "그거야 그 집 사정이니 내가 알 바 아니지. 나랑 친분이 있는 관계라서 그냥 좀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아들였을 뿐이야." "혹시 키워서 나중에 먹으려는 건 아니야?" 예안은 펄쩍 뛰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어딜 봐서 그런 애로 보여! 쟤는 그냥 단순 히 친구 동생이란 말이야!" "얘는? 누가 뭐라니? 그냥 농담 삼아 찔러봤을 뿐인데 왜 그렇게 과민반 응을 보이고 그래?" 지원의 지적에 예안은 할 말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좀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이게 다 유혜민이 전에 한 말 때문이라 생각하자 괜히 이 가 갈렸다. "자, 우리 조카 심장 소리나 한 번 들어보자." 지원은 장난스런 손길로 예안의 상의를 걷어올리고 아랫배에 귀를 갖다 댔다. 예안의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가, 간지러워! 하지 마!" "에이, 뭐 어때? 어차피 태어나면 이 짓도 못한다구. 이게 다 좋은 추억 이 되고 좋은 경험이 되는 거야." "간지럽단 말이야! 그런 거 안 해도 돼!" "추억. 추억. 추억을 위해서라구. 애 아버지가 없으니까 내가 대신 해주 겠다는 거잖니." 뭐가 좋은 추억이고 뭐가 좋은 경험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행복해 보 이므로 그대로 패스. 지원이 대신 갔다오겠다고 했지만 예안은 취미 생활이니 내버려두라고 극구 거절하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두꺼운 옷을 입어서 임신했다는 게 거의 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괜히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볼 때마다 이 상하게 여기는 건 아닐까 하는 멋쩍음에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늘 들르는 편의점에 간 예안은 습관적으로 물품들을 훑어보다가 처음 보 는 디자인의 기저귀를 발견하고는 얼른 집어들었다. 아기 용품만 보면 신기한 마음에 일단 사고 보는 이 버릇은 고쳐야 하는데. 그렇게 되질 않으니 참으로 걱정이다. 창고로 쓰는 방에는 지금까지 사 모은 기저귀, 장난감, 아기 옷 등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이래도 될까. 정호가 또 화를 낼 걸 생각하니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결국 구매욕은 이기지 못하는 건가 보다. 오늘도 어김없이 점장 아들로 보이는 남학생이 카운터에 서 있다 얼굴을 훔쳐보며 계산을 해준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경험이다. 기저귀를 비 닐봉지에 담아 태평스럽게 들고 오던 예안은 문득 차가운 눈송이가 뺨에 와 닿는 걸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어? 또 눈 오네?"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아참, 지원이 누나가 빨리 오라고 했는데. 늦장 부리지 말아야지." 서로 애인 없는 여자끼리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자고 먼저 요청한 건 지원이었다. 사실 어디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지원은 남자 따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연말을 자신이랑 보내려는 걸 보면 아마 도 꽤나 상냥한 성격이거나, 아니면 정말 남자가 귀찮은 듯 하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연인들 사이로 천사의 깃털처럼 고운 눈송이들이 하나 하나 떨어져 쌓이고 있었다. 귀 언저리에 차가운 바람이 살짝 와 닿았다가 하늘의 추억을 속삭이고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춥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낮잠을 자다 뻐꾸기 시계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나는 것처럼, 가끔씩 울리는 태아의 움직임이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따뜻하게 데워 주었기 때문에.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가운데, 이터널 피닉스의 배경음악을 흥얼거리며 길을 걷던 예안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사각지대에 드리워진 앙상한 나뭇가지 아래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호기심에 다가간 예안은 그것이 크리스마스 트리에 붙이는 은박지 조각 이라는 걸 깨닫고 대략 실망했다. "아무것도 아니잖아? 난 또 무슨 금덩어리라도 떨어져 있는 줄 알았는 데. 쳇." 투덜거리며 돌아서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흐윽!!" 엄청난 통증이 아랫배에서 솟아 나와 전신의 신경을 점령했다. 이어서 살갗이 타 들어가는 극심한 고통이 척추를 거쳐 뇌에 도착했고, 피가 역 류하는 괴로움이 충혈 된 두 눈에 머물렀다. "아아악…" 다리에 힘이 풀린 예안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함을 쳐 사람을 부르고 싶었으나 핏줄에 흐르는 극통 때문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 았다. 누군가 이쪽을 봐주길 바랬지만 이곳은 사람이 잘 지나다니지 않 는 데다가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곳이었다. "저, 전화…" 숨이 빨려 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간신히 핸드폰을 꺼낸 예안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액정은 힘없이 꺼져 버렸다. 어이 없게도 하필 이럴 때 배터리가 나간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으슥하고 외진 나무 밑이어서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다. 앞뒤로 언덕과 아파트로 막혀 있어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숨이 막혀 큰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고통 때문에 일어 설 수조차 없다. 최후의 희망이었던 핸드폰은 배터리가 나갔다. 그런데, 아기가 나오려고 한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인데, 지금 아기가 나오려고 한다. "아파… 아악…" 전에 지원이 보여준 출산 테이프를 통해, 그리고 지금까지 주워들은 정 보를 통해 산모가 출산할 때에는 뼈를 자르는 것과 비교가 안 되는 극통 을 느낀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연히 알고 있는 거랑 직접 겪는 건 차원이 틀렸다. 태아의 크기가 작기에 자신은 고통이 적을 거라 생각했던 건 애초에 틀 린 생각이었나 보다. 걸을 수도 일어날수도 하다 못해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으니까. 산모들을 보면 엄청난 고함을 잘만 지르던데 어째서 자신은 성대조차 고통에 먹혀버리는지, 예안은 그것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아기를 무사히 낳아야 한다는 감각만이 전신을 점령하고 있었다. 넋이 반쯤 나간 채로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 엇을 하고 있는지 거의 잊어버린 예안은 손을 더듬더듬 뻗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옷을 벗기 위해서였다. 예안은 거의 본능적인 감각에 의지해 손을 뻗었다. 어떻게 치마를 벗고 속옷을 벗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일어설 수조차 없이 고통에 잠 식당한 채 양수에 흠뻑 젖은 옷을 벗는 것. 그건 무사히 출산을 마쳐야 한다는 어미로서의 본능에서 발현된 행동이었지만, 과연 이 순간이 지나 간 다음에 예안이 그것을 기억할 수 있을까. 뼈를 태우는 고통이 머리끝을 거쳐 발가락 끝까지 뻗어나갔다. 동시에 무언가 편안하고 따뜻한 결정체가 자신의 몸 안에서 쑥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이어서 자궁이 수축함에 따라 태아를 보호하고 있던 태반이 빠 져 나왔다. 이제 자신은 할 일을 다했다는 듯, 풀잎을 스쳐 지나가는 겨 울의 찬바람에 잠시 바르르 떨던 그것은 조금씩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에 차갑게 식어갔다. 고통에 시달리느라 예안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했다. 이윽고 서서히 영혼을 더듬어오는 따뜻한 기운에 그녀는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대로 잠들었다. "!" 뺨에 와 닿는 차가운 느낌에 예안은 눈을 번쩍 떴다. 어느새 주변에는 눈이 꽤나 쌓여 있었다. 그대로 깨어나지 못했다면 얼어죽었을 거라 생 각하니 오싹 소름이 끼쳤다. "아참!" 그제야 자신이 출산의 고통을 느끼고 기절했었다는 걸 기억해낸 예안은 반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통증이 신경에 남 긴 잔해 때문에 잘 되지 않았다. 끙끙대다가 포기한 예안은 간신히 고개 를 돌려 자신의 발치를 쳐다봤다. 꼴사납게 하의를 벗은 채 옆으로 누워 몸을 웅크리고 있는 포즈였다. "아무도 없기 망정이지 누가 봤으면 얼마나 개망신이야." 발 아래쪽에 붉은 핏자국과 식어버린 살점 덩어리가 떨어져 있는 걸 확 인한 예안은 얼굴을 찡그렸다. "저게 지원이 누나가 말하던 태반… 아차! 아기는? 아기는?" 순간, 태반 덩어리 아래 아기가 얼어죽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예안은 겁이 덜컥 났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 된 그녀는 힘겹게 일어나려 했다. 바로 그때, 기도를 하듯 맞잡은 양손바닥 에 무언가 따뜻한 고동이 머물러 있는 게 느껴졌다. 몸을 웅크린 아랫배에서 무언가를 보호하듯 따뜻이 맞잡은 두 손. 희미 한 고동을 느낀 예안은 살며시 손을 들어 올렸다. 숨이 가빠진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눈시울이 절로 붉어진다. "…." 맞잡듯 포개어진 두 손을 들어 살며시 한 손을 떼어냈다. 그 안에는 언 젠가 봤었던 갓 태어난 고양이 새끼처럼 조그맣고, 주름이 졌지만 그래 도 귀엽고, 핏덩어리처럼 붉었지만 한없이 사랑스러운, 오랜 세월과 사 랑의 결정체가 나약한 숨을 몰아쉬며 조그맣게 잠자고 있었다. 기절한 가운데에도 자신의 몸은 본능에 따라 아기가 얼어죽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서러운 행복이 가슴 가득 밀려들어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찬바람이 사정없이 어루만지는 하반신이 조금 추웠 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고마워 예안아…" 그 어떤 값비싼 보석도, 그 어떤 아름다운 그림도, 그 어떤 고귀한 골동 품과도 비교도 되지 않는, 생애에 다시 받지 못할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 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따뜻한 행복에 취한 예안은 천천히 손을 들 어올려 아기의 얼굴에 뺨을 비볐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34 회] 날 짜 2004-01-29 조회 / 추천 4020 / 51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선물 취미 활동하러 편의점 나간다던 애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지원 은 몹시 걱정이 되었다. 찾아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자신은 이곳 지리를 모르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태평스레 앉아 있는 니 콜라스가 괜히 얄미워질 정도로 걱정이 되었다. "넌 예안이가 이렇게 늦게까지 안 오는데 걱정이 되지도 않는 거니?" "걱정? 지금 걱정하고 있는 중인데." 지원은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 저게 어딜 봐서 걱정하는 사람 표 정이란 말인가. 처음 봤을 때부터 어린애답지 않게 감정이 없는 얼굴 그 대로인데. '얘가 지금 날 놀리나?' 지원은 은근히 불쾌했지만 꾹 참고 다시 물었다. "이 동네 혹시 위험하고 그런 동네야? 예를 들어 툭하면 유괴라든지 사 고가 일어난다든가." "사고도 잘 안 나고 양아치 같은 녀석들도 거의 없어. 그런대로 깨끗하 고 살기 편한 곳이야." "근데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아휴, 걱정돼 죽겠네." 지원은 더운 듯 초조한 손길로 손부채질을 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퉁겨지듯 일어나 핸드백으로 달려갔다. 폰을 귀에 갖다 댄 그녀 는 상대방을 확인할 새도 없이 다짜고짜 물었다. "여보세요? 예안이니?" 「어 나야. 누나 나 지금 아파트 옆에 있는 화단인데… 사람들 눈에 잘 안 보이는 곳이거든…」 지친 목소리였지만 어딘지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지원은 조금 걱정이 되 었지만 일단 무사한 것 같아 안심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애가 돌아오 던 중 이 추위에 얼어죽은 건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상상까지 했었다. "너 지금 왜 거기 있어? 빨리 안 들어오고 뭐해?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벌써 몇 시간째 안 들어오는 거야?" 「…나 지금 아기 낳았어.」 지원은 경악했다. "뭐, 뭐, 뭐? 아니, 예정일은 아직 좀 남았는데… 알았어! 내가 지금 갈 테니까 거기 꼼짝 말고 기다리… 아! 혹시 추위 때문에 아기 얼진 않았 겠지?" 「괜찮은 것 같아. 근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여튼 기다려! 내가 지금 곧 갈게! 아기 안 얼어죽게 꼭 끌어안고 있 어야 돼!" 전화를 끊은 지원은 황급히 집안을 뒤져 일단 급한 대로 모종삽과 비닐 봉지, 그리고 빨래장갑을 찾아냈다. 겉옷을 걸치고 후다닥 신발을 신던 지원은 그제야 성주를 기억해냈다. "차성주라고 했지? 너 안 따라오고 뭐해?" "나도 따라가야 하는 거야?" "지금 장난하니? 넌 내가 한 대화 못 들었어?"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처럼 멀뚱멀뚱 앉아 있는 니콜라스가 다소 얄미워 진 지원은 퉁명스럽게 쏘아 붙였다. "잔말 하지말고 빨리 따라 나와! 도와야 할 거 아냐! 아참! 그리고 예안 이 방에 가서 속옷하고 바지 좀 챙겨 와! 얼른!" 니콜라스는 별 반박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어도 나가기 귀찮아서 시치미를 뗀 건 아닌 모양이다. 지원은 조금 누그러진 태도로 그를 재촉 했다. 예안은 점퍼를 벗어 찬바람에 노출된 하반신을 가렸다. 양수에 젖어 얼 어붙은 치마와 속옷을 다시 입을 순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가벼운 블라우스만을 걸친 채 매서운 추위에 노출된 상반신이 추웠다. 하지만 찬바람으로부터 아기를 보호하는 데만 정신이 팔린 그녀는 다른 생각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슴이 한없이 두근거렸다. 다시 한 번 아기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행여 찬바람에 노출되어 감기라도 걸릴까 겁나 두 손으로 꼭 감싼 채 무릎에 묻어두었다. 아기가 숨쉬고 있다는 증거. 손바닥에 미미하게 느껴지는 고동만을 음미하면서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예안아!" 허겁지겁 뛰어온 지원은 쌓인 눈에 지워진 핏자국의 흔적과 얼어붙은 태 반을 발견하고 혀를 내둘렀다. "세상에나, 이런 곳에서 너 혼자 애를 낳았단 말이야? 아니, 근데 도대 체 여기는 왜 들어왔어? 적어도 길거리에서 쓰러졌으면 지나가던 사람들 이 도와주기라도 했을 거 아냐? 자칫하다가는 너도 아기도 둘 다 얼어죽 을 뻔한 거 몰라?" "그, 그냥 뭐가 반짝이길래 신기해서 들어왔는데 갑자기 복통이 와서…" "왜 여기에서 가만있었어? 아기 얼어죽으려면 어쩌려고? 그냥 창피하더 라도 눈 딱 감고 일단 집으로 돌아오지." "힘이 빠져서 못 걷겠어. 일어나려고 해봤는데 안 돼. 누나가 부축 좀 해 줘." "휴. 어쨌든 다행이야. 근데 아기는 어디 있니?" 예안은 무릎 사이에 묻어 두었던 두 손을 들었다. 찬바람에 아기가 노출 될 것을 우려해 맞잡은 두 손을 떼진 않았지만, 지원은 단번에 그 뜻을 알아듣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손바닥 안에 들어간다고? 이거 사람 아기 맞아? 완전 고양이 새끼잖아." 이미 태아의 크기가 작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코앞에서 생생하게 보는 거랑 그 기분은 차원이 틀렸다. 하마터면 뒤로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으 니. "아기가 울긴 했어?" "응?" "그러니까 태어나자마자 울었냐고. 안 울면 때려서라도 울게 해서 숨을 트이게 해야 되는데, 그거 했어?" 예안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아, 아니. 나도 기절해서 잘 몰랐어. 깨어 보니까 내 손바닥에 있었는 데… 그, 그럼 뭐가 잘못되는 거야? 내 아기 잘못 되는 거야?" "어디 한 번 보자." 지원은 예안의 손가락 하나를 들어 그 틈으로 천천히 아기를 살핀 뒤 안 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알아서 숨쉬고 있는 거 보니 괜찮은 것 같다. 아마 네가 기절해 있을 때 울다가 지쳐서 그쳤나 봐. 그나저나 빨리 들어가자. 이러다 엄 마와 아기 둘 다 얼어죽겠다." 예안도 안심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원은 빨래장갑을 끼고 태반 을 집어 비닐봉지에 집어넣었다. 모종삽으로 얼어붙은 흙을 낑낑거리며 퍼다 부었다. 그리고 뒤따라온 니콜라스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차성주. 넌 이거 챙겨." "이게 뭐야?" 니콜라스는 지원이 내민 얼어붙은 검은 줄이 무엇인지 몰라 갸웃했다. "탯줄이야. 잘 보관해두고 있어." 니콜라스는 멍하니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의 정신은 지금 쥐고 있는 탯 줄 따위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찬바람에 아기를 보호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예안에게 닿아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 자신은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예안의 다정한 시선. 그것이 고작해야 손바닥 안에 감춰진 조그만 생명체에 머물러 있었다. 이해할 수 없다.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저 쪼끄만 녀석이 도대체 어디가 좋단 말인가. 저 녀석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자기 스스로 무엇을 먹을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다. 목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다. 목을 졸라도 반항 할 수조차 없으며 도망칠 수도 없다. 없다. 없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무것도 없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조차 없는, 너무나 도 나약한 녀석이다.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할 수 있는 게 너무나 많았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철저한 경호를 받고 있는 국가 원수조차 암살할 수 있으며, 많은 돈을 벌 수도 있다. 내가 나서기만 해도 마피아들은 벌 벌 떨며 어쩔 줄 모른다. 지금도 보아라. 난 이렇게 당당하게 누나를 보 호하고 있지 않은가. '큭…!'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힌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처음이다 이런 기 분은. 도대체 이 기분은 무엇일까. 왜 나는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어 떻게 하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또다시 찾아온 혼란. 니콜라스는 어이가 없었다. 그는 탯줄을 쥐지 않은 오른손을 들어 가슴에 갖다 댔다. 심장의 고동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첫 번째 목표물을 제거했을 때. 첫 살인을 했을 때. 처음으로 의뢰를 완 수했던 때. 그 순간에도 이런 기분을 느껴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이렇게 두근거리는가. 왜 이렇게 미칠 듯한 기분이 날 괴롭히는 것인가. "차성주? 뭐해? 빨리 따라 와." 지원은 예안의 어깨를 부축한 채 먼저 가다 멍하니 서 있는 니콜라스에 게 외쳤다. 니콜라스는 고래를 거칠게 흔들어 상념을 떨쳐 버린 후 황급 히 뒤따라갔다. 언젠가는 그 이유를 알 수 있겠지.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지원은 더운물로 아기를 정성스럽게 씻겼다. 목욕 을 끝내고 물기를 닦은 다음 아기를 포근한 요에 싸서 안고 나온 그녀는 예안의 방으로 들어갔다. 피로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있던 예안은 희 색이 되어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어련히 알아서 줄 거니까 걱정 마. 쯧쯧쯧. 그렇 게 웃으니까 팔불출 같잖아." "…놀리지 마." 예안은 조금 수줍은 표정으로 아기를 받아들었다. 손바닥 안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크기의 아기.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거참, 진작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보는 거랑 느낌이 완전히 틀 리잖아. 어떻게 사람 아기가 이렇게 작을 수 있는 거지? 이거 혹시 유전 같은 건 아니겠지? 네 어머니가 너 낳으셨을 때 이러저러했다 그런 말 씀… 아차. 미안." 예안의 모친이 출산 중 사망했었다는 말을 기억해낸 지원은 미안함을 느 끼고 입을 다물었다. "근데 진통 오면 진작 전화하지, 왜 다 낳은 뒤에 전화했어? 너랑 아기 둘 다 얼어죽을 뻔한 거 몰라?" "사실 낳기 전에 전화를 하려 했는데 배터리가 없더라구." "그럼 낳은 다음에는 어떻게 전화했는데?" "점퍼를 뒤져보니까 예비 배터리가 한 개 있더라구. 그걸로 했지." 다소 어이없어진 지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눈을 샐쭉하게 뜨고 아기에게만 정신이 팔린 예안을 흘겨보았다. "그러다 애기 닳겠다. 그만 좀 들여다 봐." 예안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래도 장하네. 혼자 아기도 낳고 말이야. 근데 초산이면 굉장히 오래 걸릴 텐데 어떻게 세 시간도, 아니 두 시간도 안 돼서 아기 낳은 거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의사가 환자한테 왜 이 병을 치료하지 못하 는 거냐고 묻는 경우도 있어?" "하지만 그거랑 이건 좀 다르… 에휴. 됐다. 하긴 너도 모를 테니 뭐. 어쨌든 빨리 낳으면 좋은 거지." 지원은 이상함을 느꼈지만 신경을 껐다. 사실 그건 예안이 대답해줄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안도 그 부분까지는 막연히 '신인류 니까 출산도 빨리 하는 거겠지'라고 지레 짐작했을 뿐이었으니까. "일단 급한 대로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당장이라도 병원 가는 게 어 때? 인큐베이터 써야 할 거 아냐." "아니, 괜찮을 것 같아. 그냥 이대로 안 가도 될 듯 해." "하지만 아기가 너무 작잖아?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여도 자칫 위험할 수 있다구. 일단은 인큐베이터를 쓰자." "우리 엄마가 나 낳으셨을 때도 이랬고 외조부모님들이 엄마 낳으셨을 때도 그랬대. 유전적으로 이런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팔삭둥이 같은 것도 아니고 열 달 다 채워서 나왔잖아?" "…쳇. 그러다 나중에 아기 잘못되면 나 원망하지 마." "걱정 마셔. 엄마인 내가 더 잘 안답니다." "어어? 벌써부터 엄마 노릇 하려고 드는 거야?" "엄마 노릇을 해야지 그럼. 떡하니 낳아놓고 모른 척 하라고?" 예안은 조심스런 손가락으로 아기의 이마를 더듬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촉감이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참지 못한 예안은 아기의 얼굴에 다시 뺨을 비벼댔다. 너무 행복해 보이는 그 모습에 지원은 조금 질투가 났다. "너 너무 닭살스럽게 구는 거 아니야? 애인도 없고 애도 없는 이 언니는 혼자 신세타령하라 이거지?" 예안은 얼굴을 떼고 살짝 비웃었다. "훗. 그럴 거면 누나도 얼른 결혼해서 하나 낳던가." "쳇. 내가 오기가 나서라도 언젠가 애 하나 낳고 만다. 두고 봐. 내가 더 예쁜 아기 낳아서 보란 듯 자랑하고 다닐 거니까." "결혼은 안 하고?" "정자 은행에서 씨 받아다가 낳으면 되지 뭐어. 꼭 결혼해서 애 낳으란 법은 없잖아. 내가 돈을 못 버는 것도 아니고 애 하나 책임 못 질 형편 도 아닌데 뭐 어때." 예안은 지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듯 아 기만을 들여다보며 웃음 지었다. 지원은 그러다 팔불출 되기 쉽다고 조 그맣게 투덜거렸다. 그때 니콜라스가 들어왔다. 예안은 그가 자신의 머리맡에 와서 빤히 내 려다보자 고개를 들었다. "왜? 너도 한 번 안아보고 싶어?" 한 번 아기를 안아보게 해달란 뜻으로 오인한 예안은 아기를 내밀었다. 그러나 다소 살벌하게 노려보던 니콜라스는 고개를 돌리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 버렸다. 예안은 황당했다. "쟤 왜 저래? 설마 이 추위에 나 때문에 밖에 나간 것 갖고 삐쳐서 그런 건 아닐 테고?" "너 몰라? 내가 보기엔 쟤가 너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근데 네가 딴 남자 의 아이를 떡하니 낳았으니, 아무리 그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해도 적응 하기 힘들 거 아냐? 지금쯤 굉장히 속 쓰려 하고 있을 걸? 앞으로 쟤가 아기 괴롭힐지도 모르니까 단단히 조심해라." "에이, 말도 안 돼. 쟤는 그런 감정 모르는 애라구. 왜냐하면…" 니콜라스가 지닌 특수한 배경에 대해 무심코 말하려던 예안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 뭐? 무슨 말이기에 하다가 마는 거니?" "그런 게 있어. 하여튼 누나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쟨 평범한 애들 과는 상당히 다르다구." 기분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보다라고 생각한 예안은 나중에 물어봐야겠 다 생각하며 다시 아기에게 정신을 쏟았다. 그러나 그녀는 곧 니콜라스 에 대한 걸 잊어버렸다. 정호는 연말이라고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대낮부터 술을 마시기엔 좀 그랬기에 저녁이 되기 전까지 적당히 놀다가 그들은 실내 포장마차로 향했다. 한창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있는데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귀 찮은 듯 전화를 받은 정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친구들이 놀란 눈 으로 자신을 쳐다봤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그그 그게 정말이야? 저, 정말? 알았어! 지금 아빠 곧 갈게!" 희색이 된 정호는 벗어두었던 점퍼를 집어들었다. "어이, 왜 그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지금 내 손자 태어났댄다. 나 빨리 가봐야 돼. 자네들끼리 잘 놀아." "뭐, 손자? 정호 너 아들 녀석 죽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 게 있어. 하여튼 자네들끼리 잘 놀아. 난 이만 들어갈게." 어찌 된 건지 몰라 어안이 벙벙한 친구들을 내버려둔 채 뛰쳐나온 정호 는 지나가던 택시를 불러 세웠다. 늙수그레한 택시 기사에게 빨리 빨리 가자고 재촉했지만 눈 때문에 도로는 정체가 심했다. 마음 같아선 날아 서 집으로 가고 싶은 그는 초조해서 발만 동동 굴렀다. "이봐요, 기사 양반. 빨리 좀 갑시다." "거참, 기다려 봐요. 눈 때문에 안 가는 걸 난들 어떻게 합니까?" "지금 우리 손자가 태어났단 말이오. 빨리 좀 가자니까." "알았어요. 기다려 봐요. 5분 먼저 가려다 50년 먼저 간단 소리도 못 들 어봤수?" 정호는 기대했던 것보다 다소 늦게 집에 도착했다. 많이 늦은 건 아니었 지만 마음 같아선 눈에다 대고 욕설이라도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다. 현 관문을 열자마자 그는 발에 불이라도 난 듯 후다닥 예안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 아빠?" "우리 딸! 손자 낳았다며? 어디 있어?" "꺄악!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낑낑대며 아기에게 젖꼭지를 물려주려던 예안은 희색이 되어 정호를 돌 아보았다. 이 중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건 그녀. 되려 지원이 크게 당황 해서 팔을 벌려 예안과 정호 사이를 가로막았다. 정호 역시 몹시 놀라서 얼른 문을 닫았다. 지원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예안을 돌아보았다. "노, 놀랬잖아. 저 분이 네 양아버지시니?" "어. 누나는 왜 놀라고 그래? 예전에 우리 아빠랑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싸우기라도 했던 거야?" "너야말로 왜 전혀 안 놀라는 거야? 아무리 양아버지라고 해도 그렇지, 가슴을 훤히 드러내놓고 있는데 부끄럽지도 않아? 친아버지라 해도 창피 하겠다." "부녀지간에 보면 좀 어때서 그러냐." 예안은 관심 없단 표정으로 아기한테 젖꼭지 물리는 데만 바빴다. 낑낑 대는 그 장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지원이 한 마디 했다. "워낙에 쪼끄마니까 젖 물리기도 쉽지가 않구나. 너도 고생이지만 아기 도 앞으로 참 고생하겠다. 아무리 아기가 이등신이고 입이 크면 뭐해. 고양이 새끼만 해서야 원…" 그것보다는 아기가 입을 벌리지 않아서 더 문제였다. 어쨌든 끙끙대다 겨우 젖 물리는 데 성공한 예안은 희색이 되었다. "봐! 성공했잖아! 나도 하면 한다 이거야!" "쯧쯧쯧…" 고작 그거 하나 성공한 거 가지고 좋아해서야 어디 앞으로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지원은 여태껏 주워들었던 육아의 괴로움과 고달 픔을 떠올리고 혀를 끌끌 찼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결혼을 질색하게 된 건 출산의 고통도 남편의 속박도 아니라, 육아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 었던가.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35 회] 날 짜 2004-01-31 조회 / 추천 4018 / 48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선물 「형. 난 자신 없어. 형보다 내가 더 개방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어 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야.」 예전에 기분을 풀러 나간 술자리에서 준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우 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휴우. 난 그냥 이대로 깨끗이 물러날게. 오랫동안 생각한 거야.」 준우가 그렇게 선언했을 때 정우는 다정하고 온화한 말투로 상심한 동생 을 위로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크게 웃음이라도 터트리고 싶은 심정이었 다. 그건 현우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아무렴 그래야지. 네 까짓게 그럼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겠어? 일단 준우 녀석은 떨궜으니 남은 하나는…' 정우의 시선이 현우에게 향했다. 무슨 생각으로 아직까지 예안을 포기하 지 않고 있는, 속을 알 수 없는 녀석. 하지만 오늘 예안의 집에 가서 직 접 아기와 맞닥뜨리게 된다면 울면서 포기할 것이다. 정우는 확신했다. "정우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거참… 뭘 생각하길래…" 무슨 생각을 하기에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는지 궁금했지만 수정은 그냥 넘어갔다. "귀가 아프도록 말해서 지겹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시 한 번 말할 게. 절대 싫은 내색 같은 거 하면 안 된다. 내가 너희들 심정 이해 못하 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출산한 와중에 사람들이 와서 싫은 내색하면 산 모는 기분 엄청 나쁜 법이야. 그냥 눈 딱 감고 축하한다고 하고 스마일 유지. 알았니?" "…예." 두 형제는 침울하게 대답했지만 수정은 일단 그걸로 만족했다. 익숙해지 면 그들도 괜찮을 것이다. "그나저나 준우도 왔으면 좋을 텐데. 다음 번엔 또 언제 시간이 될지 모 르는데 그냥 좀 오면 안 되나?" "걘 이제 자신 없대요. 포기하겠대요." 수정은 조금 놀랐다. "뭐? 진짜? 아니, 왜? 엄마한테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글쎄요. 제가 생각하기에 사실 준우 녀석은 남의 아이 자기 아이로 삼 아서 살 녀석은 못 되거든요. 은근히 보수적이라서요. 걔 GG 선언한지 오래예요." "그래? 쯧, 준우에게는 안 됐다면 어쨌든 너희 둘한테는 좋은 거네. 둘 이서 잘해 봐." 현우와 정우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두 친형제의 경쟁 장면을 은근히 즐기던 수정은 고개를 돌리고 작게 쿡쿡 웃었다. 어느새 세 사람은 예안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게 마치 굳건한 적성을 쳐다보는 사신이 된 기분이었다. 두 형제는 침을 꿀꺽 삼키고 수정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수정들을 맞이한 건 예안이었다. 정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어디 잠깐 밖에라도 나간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터라 반가워하던 두 형제는 예안이 품에 안고 있는 자그마한 아기를 보고 그대로 굳었다. 침착하자고 다짐하고 들어왔건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두 형제는 가 까스로 자신을 되찾고 인사했다. "아, 안녕 누나. 잘 지냈어?" "잘… 지냈니?" 최대한 덤덤한 척 하려 했다. 하지만 막상 현실을 맞닥뜨리고 보니 그건 불가능했다. 겨우 겨우 태연한 척 억지 웃음을 짓는 게 전부였다. "어머, 그게 네 아기니? 와, 너무 작다.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냐? 이거 너무 작은데? 위험한 거 아냐?" 수정이 걱정하는 투로 그렇게 말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사실 저도 태어났을 때 이랬거든요. 원래 저희 집안 핏줄이 대대로 이래요." "그러니? 근데 네 아버지는 어디 가셨니? 아주버님도 오랜만에 뵙고 인 사드리려 했는데." "잠깐 뭐 사러 간다고 나가셨어요. 곧 돌아오실 거예요." "아기 한 번 안아 봐도 되니?" "그러세요." 예안은 잠자코 안고 있던 아기를 수정에게 건넸다. 크기도 크기지만 무 게의 가벼움에 놀란 수정은 하마터면 아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근데 남자애가 작긴 정말 작다. 나중에 커서도 이렇게 작으면 여자들이 싫어할 텐데. 어쨌든 이렇게나 작으니 낳을 때 고생은 안 했겠구나. 별 로 안 아팠지?" "…고함도 안 나올 만큼 아프던데요. 죽는 줄 알았어요. 저 낳다가 까무 러치기까지 했다구요." "그랬어? 나도 정우 낳을 때가 젤 아프긴 했지만 고함 못 지를 정도는 아니었는데. 오히려 엄청 심했지. 우리 남편 말 들어보면 병원이 떠나가 는 줄 알았대나." "전 차라리 고함이라도 지를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걸, 그러지도 못해서 혼자 눈밭 위에서 낳아야 했었다구요. 자칫하다가는 저하고 아기 둘 다 얼어죽었을지도 몰라요. 목소리라도 나왔으면 누군가 진작 찾아와서 도 와줬을 텐데." 수정은 조금 놀랐다. "아니, 왜 눈밭 위에서 낳은 거야? 거기는 왜 갔어?" "…눈에 잘 안 띄는 곳에 서 있는 나무 밑에서 뭐가 반짝거리길래 신기 해서 다가갔는데 그때 하필 진통이 왔지 뭐예요." "저런." "얘 낳다가 저 까무러쳤죠 뭐. 하마터면 우리 둘 다 그 자리에서 얼어죽 을 뻔했어요." "그래도 일단 무사히 태어나서 다행이네. 어쨌든 수고했어." 마냥 신기한 눈으로 아기를 들여다보던 수정은 이윽고 아무 말 없이 앉 아 있는 정우에게 아기를 건넸다. 정우는 굉장히 당황했다. 아니 왜 가 만히 있는 사람한테 이 녀석을 넘긴단 말인가. 누가 속 뒤집어놓을 일 있나. "정우야 너도 한 번 안아볼래?" "예? 제가요?" "그래. 한 번 안아 봐. 귀엽잖니?" 수정의 말에 숨어 있는 의도인즉슨, 예안의 아기까지 인정하고 받아들일 결심이 섰다면 이제부터라도 익숙해져야 하지 않겠느냐 뭐 그런 것이었 다. 사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었지만. "예. 주세요." 결심이 선 정우는 떨리는 손으로 아기를 받아들었다. 힐끔 예안을 쳐다 보니 무언가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애엄마는 사람들이 자기 아이가 예쁘다고 칭찬해주면 굉장히 좋아하지. "…예쁘네. 좋겠다. 이렇게 예쁜 아이를 둬서." "그치? 예쁘지? 예쁘지?" "…어. 예뻐." 당사자에게 예쁘단 소리를 해줄 땐 좋아하던 기색이 전혀 없었으면서, 자기 아기가 예쁘다는 말을 드는 건 그렇게나 행복한 것인가. 정우는 씁 쓸한 눈으로 잠든 아기의 새하얀 피부를 훑어보았다. 어린 천사 같이 천 진한 그 표정은 자신과 예안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을 긋고 있는 것 같았 다. 기분이 묘했다. "근데 이름은 뭐라고 지었니?" "원래 수현이라고 지으려 했는데 유빈이라고 정했어. 서수현 하니까 왠 지 어감이 이상하다고 다들 결사 반대하더라. 그래서 이름은 서유빈." "왠지 서유기가 생각난다. 이다음에 크면 애들이 그렇게 놀릴 지도 몰 라. 서유기 어쩌구 손오공 어쩌구 저팔계 사오정 어쩌구저쩌구." 예안은 얼굴을 찡그렸다. 화났다는 표시였다. "남이 몇 날 며칠을 걸려 겨우 생각해낸 이름을 그런 식으로 말해야 되 겠어! 벌써 출생신고 해버렸는데 어쩌라고 그럼! 이제 와서 이름이라도 바꾸란 말이야?" 예안이 짜증을 부리자 동조라도 하듯 아기가 눈을 뜨며 우렁차게 울어댔 다. 당황한 정우는 아기를 안은 채 어쩔 줄 몰라했다. 예안이 얼른 사나 운 기세로 아기를 빼앗아 안으며 얼렀다. "유빈아. 울지 마. 울지 마. 쳇. 유빈아, 저 형이 네 이름 가지고 놀린 거 절대 잊으면 안 돼. 알았지? 나중에 커서 꼭 복수해줘야 한다?" 예안이 아기를 안은 채 자신의 방으로 향하자 수정이 물었다. "어디 가니?" "젖 주러 가요. 조금 있다 다시 나올 테니 놀고 계세요." 예안은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대로 방안으로 사라졌다. 정우는 푸하 한숨을 내쉬었다. 아기가 귀엽다는 기분, 묘한 경계심, 그 리고 서운한 기분에 사로잡혀 머리 속이 어지러웠다. 현우 역시 마찬가 지로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귀엽지 않니?" 정우와 현우는 힘없이 대답했다. "네… 귀엽더군요." "귀엽더라…" "아니, 아기말고 예안이 말이야." "네?" "귀엽잖아. 아직 철없는 십대 여자앤데 애써 의젓한 엄마 역할 하려드는 게 귀엽지 않아?" 정우는 쓰게 웃었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어찌 됐든 이미 낳았으니… 조금 언밸런스하게 보이긴 해도 아기 안고 있는 모습이 그런대로 귀엽긴 하네요. 예전보다 더 예뻐진 것 같기도 하고." 잔뜩 기대에 차 아기가 예쁘다고 말해주길 원하던 녹색 눈동자를 떠올리 며 정우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예전부터 느끼던 예안과 자신 사이에 놓 여진 거리감. 그것이 더욱 넓어진 것 같아 기분이 상당히 언짢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휴일을 기해 예안을 찾아온 혜민 역시 아기의 크기를 보고 졸도할 뻔했다. "뭐, 뭐, 뭐야! 이게 사람 아기야? 완전 고양이 새끼잖아." "…지원이 누나도 처음에 그 소리했어. 그러고 보니 그 누나랑 너랑 은 근히 성격이 비슷하네." "지원이 누나? 그게 누군데?" "내가 자주 들르던 병원 산부인과 담당 의사. 개인적으로 꽤나 친해져서 자주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야." "호? 이 세상에 나랑 비슷한 성격을 가진 여자가 또 있었단 말이야? 하 지만 내가 명백한 오리지널인 건 예안이 너도 인정하지?" "글쎄에. 그 누나는 너보다 나이가 10살이나 더 많으니 아마도 그쪽이 오리지널이 아닐까? 네가 복제판이고." "쳇. 너무해." 혜민은 샐쭉한 표정으로 아기를 안아들었다. 손안에 가득 번져오는 가벼 운 무게. 놀랍다는 표정으로 신기한 동물 살피듯 이리저리 훑어보던 혜 민은 이내 잠든 아기의 사랑스런 표정에 푹 빠져들었다. 이렇게 귀여운 아기라면 자신도 한 번 낳아보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으니. "얘 이름이 유빈이랬지? 서유빈? 그럼 네 호적에 올린 거야?" "어쩔 수 없잖아. 유복자다 보니까…" 예안은 일부러 침울한 표정으로 조그맣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혜 민은 가여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걱정 마 걱정 마. 누가 뭐라고 하든 네가 떳떳하게 잘 키우면 되는 거 지 뭐. 요즘 세상에 그런 거 가지고 뭐라고 하는 사람처럼 인간 말종은 없어. 없다구. 안심해. 뭣하면 내가 아빠 노릇해줄까?" "넌 여자잖아." "방법이 있지이. 내가 트랜스젠더 수술을 받고 너랑 결혼하면 되는 거 야. 어때? 그럼 만사가 해결되는 거 아니니?" "…못 들은 걸로 할게. 그리고 앞으로 유빈이 앞에서 그런 말하지 말아 줘. 교육에 안 좋아." "쯧. 벌써부터 그렇게 엄마 노릇 잘하려고 들다니. 이거 아기 없는 사람 서러워서 어디 살겠어? 하루빨리 아무 녀석이나 꼬셔서 씨라도 받아야지 원." 예안은 질겁했다. "그런 소리하지 말라니까! 유빈이가 지금 이러고 있어도 실제론 다 알아 듣고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얘는, 얘는. 아직 한 달도 안 된 아기가 어떻게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 고 그래? 걱정 마 걱정 마. 유빈이가 말 떼기 시작하면 나도 입 조심할 게." 혜민은 다시 까르르 웃음으로 눈을 뜬 아기를 얼렀다. 정말 사랑스런 얼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예쁘고 귀여운 내 보 물. 유젤이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남긴 선물을 지켜보던 예안은 가슴이 뭉클함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지만 꾹 참아냈다. '예안아… 지금 보고 있니?' 아직도 눈을 감으면 유젤을 떠나 보내던 옛날이 생생하게 머리 속에 떠 오른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때처럼 가슴이 꽉 막히는 슬픔은 피어나 지 않는다. 이제 눈물을 쏟고 싶을 정도로 마음 아프게 가슴을 찌르는 좌절은 느껴지지 않는다. 더 이상은 유젤을 떠올리는 것이 마냥 슬프기 만 하지 않다. 아마 그것은 시간이 꽤나 흘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유빈의 존재 덕분. 유젤이 마지막으로 남긴 소중한 선물이 눈앞에서 밝고 천진스럽게 웃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켜봐 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게, 훌륭하게 잘 키워낼 테니까. 우리 유빈이 앞으로 잘 지켜봐 줘. 레이온 형도, 시트날타 녀석들도 결코 손 대지 못하게 잘 키울게. 우리 둘의 소중한 아기니까…' 그렇게 속으로 진지하게 맹세하고 있을 때였다. 혜민이 난처한 표정으로 아기를 내밀었다. "표정 찡그리고 있는 걸 보니 얘 배가 고픈가 봐. 근데 이상하네. 보통 애들은 배고프면 엄청 울던데 얘는 잘 울지도 않고." "알았어. 유빈아, 자 찌지 먹자." 예안은 손가락으로 아기의 입가를 간질였다. 그때 묘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보니 혜민이 얼굴을 찡그린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 라도 잘못 먹어 전신에 두드러기와 닭살이라도 난 듯한 표정이었다. "너 왜 그래?" "네가 그런 말 하니까 굉장히 어색해! 찌찌 먹자 라니! 치킨 스킨이 팍 팍 돋는 것 같아! 아무리 엄마 됐다고 하지만 너 너무 느끼하게 변한 거 아니야?" "너 엄마 됐을 때 그런 소리 안 하나 내가 어디 두고 보겠어." "안 해! 절대 안 해! 난 죽는 한이 있어도 그런 닭살 대사는 안 내뱉을 거야! 차라리 애 안 낳고 평생 처녀로 늙어죽는 게 낫지!" "처~녀?" 예안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그리고 들으라는 듯 일부러 약간 크게 중얼거렸다. "요새는 하도 짝퉁이 많아서 진짜를 알아볼 수가 있나 어디." "아니야! 난 진짜란 말이야아!" "언빌리블." "진짜야! 진짜란 말이야!" 혜민은 제발 믿어달라는 표정으로 그렇게 애원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걸 한다 해도 이미 무수한 행적들을 통해 추측을 밟고 확신을 넘어서 정설 로 자리잡은 법칙이 어디 고쳐지겠는가. 어쨌든, 행복을 향한 첫 걸음은 무사히 떼어놓은 모양이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36 회] 날 짜 2004-01-31 조회 / 추천 4313 / 204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공지 휴. 드디어 바야흐로 초반부가 끝나게 되었습니다. 참, 길기도 길었죠? 135화에 와서야 겨우 초반부가 끝났으니.=_=(중간 중간 공지가 몇 개 있 긴 하지만 몇 개 안 되니 제외합시다.) 어쨌든 결국 소년은 엄마가 됐습니다. 네. 제목 그대로 소년은 결국 엄 마가 된 거죠. 그럼 이제 아내가 되어야 하는 걸까요? '소년이여 아내가 되라' ......-_-;;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유치 스킨이 팍팍 돋는군요. 뭐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이 제목도 만만치 않게 유치하긴 하지만 뭐어. 이건 어때요? '소년이여 할머니가 되라' 쿨럭! 유빈이가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은 정말 이게 실현되겠군 요. 정말 닭살이 안 돋을 수 없는 제목입니다. 휴우. 하지만 안심하시 길. 우리의 주인공은 역시 그 이름도 찬란한 신인류 답게 늙지도 않고 이대로 미모를 지키면서 살아간답니다.[퍽] 일단 초반부가 끝났으니 대략 2, 3일. 길게 잡으면 4, 5일 정도 쉰 다음 에 다시 즐겁게, 새로 시작한다는 기분으로 중반부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러니 속았다고 짱돌 들고 계신 분들, 아직도 조크라는 말 못 믿는 분 들은 어여 사시미 내려놓으시고, 시간이 정 남아도신다면 중반부 시작하 기 전에 소엄 초반부나 한 번 더 읽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알게 모르게 깔아놓은 복선들이 곳곳이 도사리고 있...을 거예요 아마. (왜 목소리가 작아지는데?) 초반부에서 뒤로 갈수록 좀 늘어지는 부분도 있고, 세정과의 갈등도 어 색하게 마무리짓고, 일부 캐러들은 제대로 활용도 못한 채 묻히기도 하 고 뭐 그랬습니다. 다시 돌아보니 정말 가슴이 아프지만 이미 지나간 물 결만 그리워할 순 없겠죠. 아직 지나온 길보다 갈 길이 더 많이 남았으 니까요. 중반부에서는 이제 본격적으로 국제 정세(..)에 대해서 다뤄야 하는데 사실상 제가 나이도 그렇고 지식도 그렇고 아는 게 거의 없습니다. 그러 니 혹시라도 이상하다, 말도 안 된다, 어색하다, 생각되는 부분이 있으 면 부드럽게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장은 수정을 못해도 차후의 이야 기 진행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인신공격은 사절.-_-;) 예. 여러분들께 자그마한 소원이 있다면 추천 좀 팍팍 눌러달라는 것입 니다. 요새 제가 아는 조아라 모 작가분과 서로 염장 지르기를 하면서 놀고 있는데, 그 분이 추천수가 8천이어서 항상 그 부분에서 제가 좌절 하고 무릎을 꿇어야 한답니다. 제 추천수는 얼마냐구요? 3200 정도입니 다. 그 분에 비하면 50%도 안 되죠. 염장 지르기 놀이에서 매번 깨지는 저를 위해서라도 추천을 사정없이 팍팍 눌러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이 런 말을 진지하게 할 수 있는 뻔뻔함이라니!) 에덴 시리즈는 일단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미 아시다시피 1부는 아담의 상처(완결)이고, 2부는 이브의 눈물(미집 필)이고, 3부는 소엄입니다. [아상도 좀 봐주세요 징징징] 어째서 1부를 완결 낸 다음 2부를 건너 띄고 3부 먼저 시작하는 것이냐 면요, 일종의 여백의 효과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1부에서 벗어나 기분 전환을 할 의도도 있었구요. 아시다시피 1부와 3부는 약간의 괴리가 있어 그것이 게임에서의 시크릿 스테이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부와 3부를 둘 다 보셔서 혼란스러워 하시는 분들은, 2부까지 보시고 나면 그 갭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전까지는 그냥 한 번 요령껏 상상하는 즐거움을 누려보시는 것도 쏠쏠 한 재미일 듯..[퍽] 중반부에서는 이제 예안이의 육아일기(..)가 시작되는 가운데 음모와 음 모가 휘몰아치는 숨막히는 첩보전[..]이 펼쳐질 거라고 사뿐히 말씀드립 니다만, 제가 경험도 적고, 그런 류의 글을 써본 적도 없어서 사실 걱정 입니다. 그래도 노력해보겠습니다.(사실 암투보다는 육아일기 어케 써야 할지 더 걱정. 닭살 돋아서 원..T_T) 사실 지금까지는 제가 사설 부분에서 여러분들께 복선이나 이야기 구성 에 대해 설명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그런 건 전부 작품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데 말이죠. 이제부터는 잘못된 부분에 대한 지적의 답변이 아니고서는, 이야기 복선이나 구성에 대해서는 사설에서 흘리지 않겠습 니다. 에. 부디 소엄 앞으로도 많이 읽어주시구요. 추천도 사정없이 팍팍 눌러 주시구요.(그런 말하고 싶냐?) 그리고 초반부를 무사히 끝맺은 걸 기념으로 두 번째 출석 체크를 하겠 습니다. 첫 번째에 출첵을 하신 분들은 필수적으로 참가해주시길 바래 요.T_T 중간에 지쳐 나가떨어지신 분들이 과연 얼마나 될지 정확히 파악 하고 싶습니다. 흑흑 슬프지만 그래도 냉철하게 봐야 하는..T_T 그리고 첫 번째 이벤트에서 출첵을 안 하신 분들도 가급적이면 출첵 해 주시길 바래요. 선작이 715인데 출첵이 100명만 달린다면 저 정말 슬퍼 할 겁니다. 선작 하신 분들은 제발 좀 출첵, 손 번쩍 한 마디만 달아주 세요.T.T 출첵 코맨 700 한 번 넘겨봅시다 제발.[퍽] 출석 체크는 사실 그다지 많이 하지 않습니다. 지금 끝나면 또 200회나 가서야 할까요? 정말 완결 가기 전까지 몇 번 하지 않는 것이니, 평소에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시던 분들, 부디부디부디 참여해주시기 바래요. 정말 부탁합니다아아아아아아아~~~~~~~~~~~~~~~~~~~~~~~~~~~~~~~~~♡ (그럼 잠깐 쉬었다가 며칠 후에 다시 연재 시작하겠습니다.) (축 초반부 종결~!!!)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37 회] 날 짜 2004-02-06 조회 / 추천 4129 / 124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바다를 건너온 영광 "헉헉…" 숨이 가빠왔다. 심장이 폭주하고 있었다. 노폐물과 산소를 실어 나 르기 바쁜 혈액은 터질 듯한 압력으로 혈관을 때려대고 있었다. 하 지만 뒤를 쫓는 추격자들의 그림자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간신히 발견한 낡은 창고는 문이 막혀 있었다. 할 수 없이 잠깐 그 림자에 가려진 벽 옆에 붙어 숨을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새 자 신을 발견한 양복 입은 남자들이 총을 들고 쫓아왔다. 한수는 눈물 을 머금고 휴식을 포기했다. '잡히면 안 돼. 잡힐 수 없어.' 이 모든 건 자신의 품속에 있는 디스크 때문이었지만 한수는 결단코 그것을 버릴 수 없었다. 이 디스크에 담긴 데이터는 앞으로 전세계 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 이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잡힐 수 없어!' 미국에서 쫓기던 중 총알이 다리를 스치고 지나가 엄청 고생했다. 몇 번이고 죽을 위기를 넘어가면서까지 간신히 밀항에 성공했다. 헌 데 한국에 도착하면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말짱 꽝이었 다. 부산항에 내린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양복 녀석들에게 쫓기게 되었으니. '젠장! 우리나라 정부는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양놈 새끼들이 총 들 고 설치는 데도 아무 말 없다니!' 지금 자신을 쫓고 있는 녀석들이 CIA인지 마피아인지는 모르지만 어 차피 그 둘 중의 하나일 터이다. 한수는 죽을힘을 다해 달아났다. 춘식은 올해 51세를 맞이한 증권 전문가였다. 원래는 유명한 증권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나이도 있고, 또 알력이 생겨 그만 일자 리를 잃게 되었다. 사실 이 나이 되도록 잘리지 않고 높은 연봉을 받으며 근무할 수 있 었다는 게 기적이긴 하다. 하지만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젊은 신입사원들을 우대하고, 자신처럼 경험 많은 직원을 퇴 물 취급하는 회사의 방침은 그에게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퇴직 직후 아직 대학 2학년 밖에 안 된 아들 녀석 등록금을 어떻게 내야 할지 막막했다. 차라리 죽어버릴까 하고 생각도 해보았다. 한 국 부모들은 자식 대학 보내고 대학원 마쳐주고 유학은 선택이고 결 혼까지 시켜줘야 한시름 놓는다는 건 세월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모 양이다. 퇴직금으로는 대학, 아껴 쓰면 대학원까지 마쳐줄 수 있을지 모르지 만 결혼까지 시켜주기에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자랐다. 하지만 무 엇보다 가장 서러웠던 건 이제 자신은 무능력한 가장이 되었다는 사 실이었다. 그렇게 갑갑해하던 춘식은 무턱대고 소주 한 병을 들고 놀이터에서 나팔을 불어댔다. 아파트 어린이들이 무서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앞으로가 더 걱정이었으니. 헌데 사람이 정말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저랑 같이 일하실래요?' 수줍은 듯 그렇게 말을 건네는 여자애를 보았을 때 춘식은 처음에 이 애가 날 놀리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애가 내민 통장의 금액을 확인했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이 여자애의 요구를 받아들여 사무실을 하나 차렸다. 여자애는 유한 그룹이 갖고 싶다고 했다. 통장에 들어 있는 금액은 유한 그룹 전체를 통째로 삼키기에 는 택도 없었지만 계열사 한 개는 잘만하면 흔들 수 있는 금액이었 다. 춘식은 수십 년을 쌓아온 튼튼한 경험과 노련함을 바탕으로 여자애 가 투자한 자금을 착실하게 불려 나갔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개의 크 고 작은 회사들을 차례차례 흡수해나갔다. 이제 자신이 꼼수만 제대로 발휘하면 입 싹 씻고 여자애를 배신할 수도 있었으나 춘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거창하게 무슨 양심이 걸려서 그런 건 아니었다. 과연 이 여자애가 대한민국의 거둥인 유 한 그룹을 먹을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잠깐. 지금까지 왜 자꾸 '여자애'라고 하냐고? 그럼 아직 열 아홉도 안 된 여자를 애라고 안 부르고 뭐라고 불러?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버지?" 책상에 턱을 괸 채 멍하니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던 춘식은 아들 남 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냥 이것저것 좀. 근데 넌 왜 학교 안 가고 이 시간에 여기 와 있 냐?" "토요일에 강의 있는 대학교가 우리나라 어디에 있어요? 모 종교 학 교라면 모를까 우리 학교는 그런 거 없다구요. 뭐 별다른 약속도 없 고, 토요일을 겸해서 아버지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시는지 그 모습을 이 두 눈에 똑똑히 넣어두려고 왔죠." "말은 참 잘한다." 이 깜찍한 녀석이 무엇 때문에 여기 사장실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줄 춘식은 아주 잘 알았다. 아버지가 사장이라는 직위를 이용해서, 아 버지와 알고 지내는 여자애랑 어떻게 친해 보려는 속셈일 테지. '인석아. 걔는 너와 어울리는 여자애가 아니라구. 으휴, 이거 정말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춘식은 마음 같아선 꿈 깨라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자신의 상관하고 처음에 철썩 같이 한 약속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었 다. 그때 문이 열리며 예안이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예안이 왔니? 어서 와. 굉장히 오랜만이네?" 아버지는 가만히 있는데 남준이 먼저 예안을 반겼다. 예안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왜 또 이런 거냐는 원망의 시선을 춘식에게 보냈지만 그는 모른 체 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녀석이 대가리 좀 컸다고 도대체가 아버지 말을 안 듣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형은 여기서 뭐해? 학교 안 가?" "대학생이 토요일날 무슨 학교를 가니? 너야말로 지금 이 시간에 학 교 안 가고 왜 여기 있어?"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남준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너도 대학생이야? 너 39년생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럼 지금 18살이 잖아?" "검정고시는 대학 일찍 가고 싶은 애들을 위해서 존재한다라는 말도 몰라? 고등학교 자퇴하고 검정고시 쳤어. 작년에 수능 쳐서 올해 대 학 들어갔구. 요즘에 자주 못 온 이유는 신입생 환영회다 뭐다 바빠 서 시간을 낼 수 없었거든." "호오? 어디 대학 붙었니?" "성천 대학교." "에? 그 대학 생긴지 얼마 안 된 대학이잖아? 수능 망치기라도 했 니? 왜 하필 거기 갔어?" "490점 받았는데?" 크게 놀란 남준은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했다. "뭐, 뭐, 뭐? 490점? 아, 아니 근데 왜 하필 그런 무명 대학교를 들 어간 거야? 그 정도 점수면 스카이 수석 합격도 잘만하면 가능할 텐 데?" "그야 집에서 가까우니까." 간결한 대답에 남준은 할 말을 잃었다. 예안이 그렇게 공부를 잘하 는 줄 몰랐던 남준은 왠지 스스로에 대해 자신이 없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490점이라. 운이 조금만 더 따라줬으면 전국 수석도 가능했을 점수 구나. 그거 참 안타깝네. 어쨌든 대단하다 너." "그걸 믿는 형도 참 순진하다." "뭐?" 남준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예안은 재밌어하며 쿡쿡 웃 었다. "뻥이야 뻥. 그냥 희망사항이라구. 그걸 그대로 믿으면 어떡해? 나 아직 대학생 아니야. 고교 검정 고시만 패스했을 뿐이라구." "뭐, 뭐어?" 이제야 자신이 예안에게 놀림받았음을 깨달은 남준은 부끄러움에 얼 굴을 붉혔다. 여태껏 지켜보고 있던 춘식이 손뼉을 짝짝 쳐 두 사람의 시선을 자 신에게 집중시켰다. "자자 그만. 남준아. 너 잠깐만 나가 있을래? 아버지는 예안이랑 할 이야기가 좀 있거든." "알았어요. 예안아, 오빠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야기 끝나면 나와. 오빠가 맛있는 거 사줄게." "어… 그게…" 예안은 차마 춘식의 입장도 있어서 냉정하게 거절은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다행히 춘식이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이야기가 아주 길어질 거니까 넌 그만 집에 돌아가. 그리고 이야기 끝나면 아빠랑 예안이랑 어디 갈 데 있어." "쳇. 알았어요. 오랜만에 봤는데 아버지 때문에 같이 놀지도 못하 고. 그럼 나 갈게. 안녕." "잘 가." 남준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예안은 쿡 웃었다. "참 유쾌한 아들을 두셨네요. 심심하지는 않으시겠어요." "유쾌하기는 뭐가. 항상 능글맞은 데다가 아버지 말이라고는 쥐뿔도 안 듣는 못되먹은 아들 녀석인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춘식의 눈에는 명문대학생 아들에 대한 자랑스 러움이 머물러 있었다. 저 녀석이 비록 능글맞기는 하지만 대학원까 지 마치고 나면 자신의 든든한 오른팔이 되어줄 것이다. "현재 유한전자의 주식은 총 2억 3501만 410주야. 그 중 31%는 외국 인 투자자들이 갖고 있고 나머지 59%는 국내 투자자들이 갖고 있지. 뭐 요새도 국내주주들의 지분비율이 점점 늘어가는 추세지만. 한 주 당 가격은 101만 원." "흐음." "네가 하루빨리 유한전자를 쥐고 싶다는 건 십분 이해하겠는데 사실 천 억도 안 되는 금액 갖고 경영권을 노리는 건 좀 무모한 짓이었 어. 지난 몇 달 동안 열심히 알아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은 불 가능해." "그래서 아저씨한테 맡겨서 불려달라고 한 거잖아요. 그리고 그동안 적자 낸 적 한 번도 없구요." 물론 크고 작은 회사들을 흡수하면서 이제는 돈놀이뿐만 아니라 직 접 생산과 서비스도 공급하긴 한다. 예안이 처음에 춘식에게 맡겼던 자금은 규모가 훨씬 커졌다는 소리다. 하지만, "갖고 있는 돈이 지금 경영하는 회사들에 재투자되었기 때문에 오히 려 유한전자 경영권 박탈전에 나설 수 있는 금액은 터무니없이 적 어. 그리고 사업을 전부 정리해서 자금을 다 모아도 사실상 현재로 선 유한전자를 빼앗을 수 없어. 빼앗기는커녕 한 번 찔러보는 걸로 끝나. 적성은 아직 너무 건실해." 수많은 인재와 정부의 갖가지 원조, 그리고 탄탄한 자금력을 바탕으 로 우뚝 선 한국의 대기업들 중 명실공히 1, 2위를 다투고 있는 유 한 그룹은 도저히 꺼뜨릴 수 없는 거성이었다. 적어도 현재는 그랬 다. "에이, 어차피 전 경영이나 경제 쪽은 하나도 모르니까 아저씨가 그 돈 알아서 잘 불려 유한전자나 빼앗아 주세요. 전 아저씨가 유한전 자를 제 손에 쥐어주실 날만 손꼽아 기다릴 테니까." 애교스런 웃음에 춘식은 홀딱 빠졌다. "…그래 알았다. 이 아저씨만 믿고 있어.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유한 그룹을 네 손에 쥐어 주마." "고마워요." 생긋 웃는 예안의 녹색 눈을 볼 때마다 춘식은 정말 이 아이가 자신 의 며느리가 되었음 좋겠다는 생각을 품곤 한다. 하지만 그는 사회 에서 오래 쌓은 경험을 통해 예안의 뒷배경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 는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근데 사실 오늘은 정말 묻고 싶은 게 있어. 그동안은 워낙 사업과 재테크에 바빠서 미처 신경 쓸 여유가 없었는데, 넌 어떻게 그런 큰 돈을 선뜻 나에게 맡긴 거니?" "전에 말했잖아요. 아는 사람한테서, 아저씨가 굉장히 손재주도 좋 고 경력도 많고 노련해서 같이 일하면 손해 보지 않을 거란 말을 들 었다구요." "하지만 만약 내가 그 돈을 들고 튀어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내가 실수로 그 돈을 날려버릴 수도 있잖아? 아무리 소문이 좋았다고 해도 날 어떻게 믿고?" "그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죠 뭐." 아무렇지도 않게 되돌아오는 대답에 춘식은 조금 무서움까지 느꼈 다. 이렇게 어린 여자애가 어떻게 천억 원에 가까운 거금을 선뜻 자 신에게 맡길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유한그룹을 갖고 싶다는 터무 니없는 소원 아래 말이다. 천 억도 안 되는 돈을 갖고 유한 그룹을 무너뜨린다. 춘식이 그런 터무니없는 제안을 받아들인 건 자신의 생계가 걸려 있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도대체 예안 은 어떤 뒷배경을 지니고 있기에 그런 거금을 마치 장난하듯 가볍게 내놓을 수 있는 건지 꼭 알아보고 싶었다. 놀다 가지 않겠냐는 춘식의 말을 정중히 거절한 예안은 서둘러 회사 를 빠져 나왔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잠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우진 기업」 이 회사는 자신이 투자한 자금을 바탕으로 춘식이 설립한 회사였다. 그러고 보니, 일단 유한그룹을 먹을 생각을 갖고 있다면 천천히 차 분하게 시작하는 것도 좋지 않을 거냐는 춘식의 제의를 받아들인 게 몇 달 전이었다. 물론 예안은 그렇게 오래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한동안 지켜봐서 춘식을 완전히 믿을 수 있단 확신이 들면 유전에서 나오는 엄청난 자금을 투입할 생각이었다. 혜인과의 인연은 끊어졌지만 그녀를 강 간하고 괴롭혔던 재호를 가만 둘 순 없었다. 유한 그룹을 무너뜨리 는 건 비단 혜인에 대한 속죄일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약속이기 도 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일주일 전에 자신을 찾아왔던 재호를 떠올리며 예안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동안 몇 번 밖에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해외 유학 중에 잠깐 한국에 와서였기 때문이라고 했었다. 이주일 전에 외국 생활을 전부 다 정리하고 한국에 들어왔으니 이제부터는 자주 볼 거라고 그 녀석이 말하던 일주일 전을 생각하자, 주먹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절대로." 함께 걷던 니콜라스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예안이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허공에 대고 화를 내는 건 지겹도록 봐온 일이 었으니. 예안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유빈을 찾았다. "유빈아, 엄마 왔어." 이제 3개월 된 아기가 과연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새근새근 자고 있다가 엄마 손길이 닿자마자 깨어나 까르르 웃는 걸 보면 좋아한다는 감정 정도는 아는 모양이다. "엄마 없는 사이 잘 자고 있었어? 어린 널 팽개쳐 두고 돌아다녀서 정말 미안해. 지금부턴 집안에만 붙어 있을 거야. 너도 좋지?" 헤실헤실 웃는 걸 봐선 말은 못 알아들어도 어쨌든 자신한테 좋다는 것은 아는 모양이다. 아기가 귀여워 죽을 맛이었던 예안은 품에서 떼어놓을 줄 몰랐다. 하지만 팔짱을 낀 채 방문에 기대어 서 있는 니콜라스는 아니었다. "하루종일 품에서 떼어놓을 줄 모르고, 잠깐 나갔다 오면 유빈이를 제일 먼저 찾고. 누나는 아이가 그렇게 좋아? 틈만 나면 껴안기부터 하게?" "이쁘잖아. 넌 안 이뻐?" "안 이뻐. 하나도 안 이뻐." "뭐야? 이렇게 예쁜 아이가 왜 하나도 안 이쁘다는 거야?" "손바닥만한 아기 따위 하나도 예쁘지 않아. 장난감도 아니고, 사람 아기가 뭐 그렇게 작아?" 유빈은 갓 태어났을 때에는 손바닥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 았다. 하지만 삼 개월 동안 꽤나 많이 커 지금은 손바닥보다는 조금 큰 몸집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것 역시 굉장히 작은 편이군. "작은 게 뭐 어때서 그래? 오히려 내가 보기엔 귀엽기만 한데." "그러다가 나중에 난쟁이로 성장하면 땅을 치고 후회하겠지. 여자들 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키 작은 아들을 둬 봐야 크게 후회하지." 정말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뜨끔했던 예안은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아주 악담을 해라 악담을. 예의로라도 예쁘다 그 한 마디 해주기가 그렇게 싫어? 넌 왜 그렇게 아기를 싫 어하는 거야?" "아기가 싫은 게 아니라 유빈이가 싫은 거야." 니콜라스는 그렇게 말해놓고 퍼뜩 놀랐다. 이해되지 않는다. 저 조 그만 아기를 싫어할 이유 따위가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는 당황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야. 그러니까 그게…" "쳇. 싫어할 거면 마음껏 싫어해. 대신 나도 너 싫어할 거야. 내 아 기 싫다고 툴툴거리는 녀석은 나도 싫어. 쳇." 예안은 니콜라스의 혼란을 눈치채지 못한 채 어린 아이의 투정으로 받아들이고 한 귀로 흘렸다. 그녀는 생후 3개월 된 유빈의 뽀송뽀송 한 피부에 뺨을 비비거나 뽀뽀를 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팔불출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니콜라스는 조용히 일어나 아기 방을 빠져 나왔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는 창문을 활짝 열어 젖 혔다. 어지러웠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왜 이러지…" 따뜻함을 잃은 서늘한 공기가 답답한 폐부를 씻어내 주었다. 텁텁한 도시의 매연이 일부 섞여 있긴 했지만 살인으로 다져진 혈액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하나 둘씩 옷을 입어 가는 가로수들은 시끄러 운 공기에 노출 된 채 느릿한 봄바람에 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휴우." 답답한 기분은 쉬 가시지 않는다. 예안이 아기를 예뻐하는 걸 볼 때 마다 항상 사념을 더듬어오는 이 갑갑함. 어째서 그런지 정확한 이 유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기분이 나아질 텐데. 그러나 잃어버린 기억을 깨우기 위해 살인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자 극해온 그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항상 솔직하게 살아왔다.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법, 거짓을 지우고 스스로를 똑바로 바라보는 법 따위를 배울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지금처럼 자신의 진짜 기분을 몰라 혼란스러워할 때에는 어 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어찌 보자면, 성장한다는 건 태생 때 지니고 있던 순수함을 잃어버 린다는 것과 같은 뜻인가 보다. 바로 지금의 그처럼. 이 소설에서 '백억의 사나이' 혹은 '주식시장'처럼 스릴 넘치는 주식전쟁이 벌어질 거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_- 하여튼 그런 부분은 제가 잘 모르는 것이니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어물쩍 어물쩍 넘어갈까 합니다. 그런데 사실 생각 외로 출석수가 적어서 좌절했었습니다.-_ㅠ 몇몇 분들이 눈에 안 띄지만...흑흑흑..선작수는 늘었는데 왜 출석수는 줄어드는 걸까요.-_ㅠ 그나저나 한수가 들고 있는 디스크에는...예전이 세발까마귀님? 인가? 이 분이 줄곧 외치시던 그 절정 아이템이 담긴 무공비서 가 정체라는..[퍽] ps : 추천과 코맨트, 아시죠?[퍽] ps2 : 크리쳐아일님께는 개인적으로 상당히 결례를 범한...^^; 이 자리를 빌어 사과드릴게요.(꾸벅)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38 회] 날 짜 2004-02-08 조회 / 추천 3871 / 56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바다를 건너온 영광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간신히 서울에 도착한 한수는 품안에 들어 있 는 디스크를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누가 보기라도 할 새라 차마 꺼 내어볼 순 없었다. 하지만 손안에 와 닿는 딱딱한 감촉만으로도 안 심이 되었다. '흐흐, 양놈의 자식들. 어디 한 번 크게 맛 좀 봐라. 감히 한국의 귀중한 보물을 훔치려 들어?' 처음 한국계 과학자로부터 이 디스크를 한국까지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그는 별 것 아닌 것 갖고 벌벌 떤다 생각했다. 하지만 디 스크에 들어 있는 데이터가 향후 어떤 분야에 어떤 영향을 발휘한다 는 설명을 들었을 때 그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쪼그만 녀석 한 개가 전세계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수는 강한 사명감에 불탄 채 선뜻 부탁을 받아들였다. 꽤나 많은 보수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미국을 싫어했기 때 문에 미국을 엿 먹인다는 소리에 불타 올랐던 것이다. 과학자의 집 을 나서고 얼마 안 지나 웬 미국놈들에게 쫓기는 바람에 자잘한 상 처를 입기도 했지만 어쨌든 무사히 한국까지 왔다. 앞으로 목적지까지는 몇 백 미터도 채 남지 않았다. 이제 곧 자신의 임무는 완수되고 한국의 무궁한 앞날은 보장될 터이다. 그리고 그것 은 자신이 지독하게 싫어하는 미국에 대한 멋진 보복이 될 터이고. 흥얼거리며 걷던 그는 걸음을 딱 멈췄다. "어라?" 어두스름한 거리 곳곳이 켜진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한수는 사복 차림의 남자 여럿이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애써 평범한 사람인 척 보이려 했으나 흐르는 기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모자를 써서 하얀 피부와 금발을 감추긴 했지만 백인답게 훤칠한 키와 날카 로운 콧날까지 숨길 순 없었다. 바짝 긴장한 한수는 숨을 흡 들이마 셨다. 욕설이 절로 나왔다. '제, 젠장!' 한수는 행인인 척하며 최대한 태연하게 돌아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Hey, Hey!" 순간, 이상함을 느낀 한 녀석이 한수를 불렀다. 한수는 식은땀을 흘 리며 모른 척 하고 계속 걸었다. 수상함을 느낀 미국인들은 계속 그 를 부르며 천천히 따라왔다. '젠장! 이판사판이다!' 더 이상 못들은 척 넘길 수 없었다. 한수는 재빨리 옆골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제야 확신한 미국인들은 서둘러 그를 쫓아왔다. '미국 녀석들이 미친 게 분명해! 이깟 디스크 하나 빼앗자고 CIA를 한국까지 투입하다니! CIA가 아니라 마피아라 해도 미친 건 마찬가 지야!' 육두문자가 나올 판이었지만 한수는 마지막 한 호흡까지 아껴가며 필사적으로 뛰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고지를 눈앞에 두고 디스크를 빼앗길 순 없었다. '윽!' 정신 없이 뛰던 한수는 왼쪽 어깨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참고 계속 뛰었다. 미친 녀석 들! 남의 나라에 들어와서 총을 사용하다니! 그것도 총기 소지에 대 해서라면 엄격하기로 유명한 대한민국에서! '빌어먹을 자식들! 어디 네놈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 네놈들 나라 기밀자료들을 몽땅 다 해킹해서 전세계에 뿌려버릴 테 니까!' 숨찬 걸음마다 피가 떨어져 고이고 있었다. 하지만 어둠 덕분에 핏 자국이 잘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한수는 들끓는 숨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뛰었다. 춘식은 담벼락에 차를 가까이 붙여 세운 뒤 내렸다. 짙게 깔린 어둠 위로 가로등 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에휴. 또 늦었군. 배고파 죽겠어." 좀 늦게 퇴근했지만 그는 가장의 권위를 내세워 아내에게 저녁을 요 구할 생각이었다. 역시 가장은 돈을 잘 벌어다줘야 집안에서 대접을 받는 것이다. 재벌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나 잘 나가는 회사 사 장인 그는 요새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뿌듯하게 누리는 중이다. "실업 당했을 때와는 천지차이라니까. 음? 저게 뭐지?" 어둠 속에서 누군가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걸 본 춘식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이윽고 가로등 빛 아래 그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이봐요? 왜 그러는 거요?" "크윽…" "어라? 다치기라도 했소?" 놀란 춘식은 황급히 달려가 한수를 부축했다. 적색 가로등 빛 아래 빨갛게 물들어 있는 어깨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춘식은 기절할 듯 놀랐다. "이, 이건? 초, 총에라도 맞은 건가요? 아니, 도대체 왜…?" "난 수상한 사람이 아니오! 지, 지금 미국놈들에게 쫓기고 있소! 제 발 좀 숨겨주시오!" "쫓긴다구요? 그럼 경찰에 연락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경찰, 경찰은 안 됩니다. 경찰은 안 되오! 빨리, 빨리 나를 좀 숨 겨 주시오!" 제정신이었다면 한수를 의심하고 경계했어야 했다. 그의 말대로 경 찰에 연락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였다. 하지만 춘식은 그렇 게 하지 않았다. 당장 한수를 집에 숨겨주라고 호기심이 외치고 있 었다. 이성과 호기심 사이에서 갈등하던 춘식은 결국 한수를 집안으로 이 끌었다. "일단 우리 집에 들어갑시다. 피가 너무 많이 나오는데요. 이거 간 단한 소독이라도 해야겠군요." "고, 고맙소…" 어깨가 피로 물든 한수를 데리고 들어가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아내 와 남준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여보? 그 분은 누구세요?" "아버지?" "나중에 설명할게, 아 잠깐만." 춘식은 한수를 부축해 이층으로 올라가다 남준에게 말했다. "남준아. 일단 급하니까 소독약하고 붕대 좀 가져 와. 어서!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고." 이층에서 한수의 옷을 벗기는 동안 남준이 재빨리 소독약과 붕대를 가져왔다. 춘식은 그것을 옆에 놓고 세심히 한수의 상처를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총알은 어깨 바깥쪽 살점만을 찢고 나갔을 뿐이었다. "휴, 그나마 근육이나 뼈가 다치지 않은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군 요. 관통한 것도 아니고 그냥 바깥 살만 좀 뜯어갔을 뿐이니. 근데 왜 이렇게 피는 많이 나는 거지?" "…지금 의사 흉내내시는 겁니까?" "몰랐소? 나이 먹고 의사놀이 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참. 남 준아, 넌 내려가 있어." "하지만…" "어서!" 남준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서성거리다가 춘식의 부릅뜬 눈에 못 이 겨 내려갔다. 춘식은 그제야 한수에게 궁금증을 표시했다. "왜 쫓기고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그거야 별로 어렵진 않지만, 일단 한 가지 물어봅시다. 도대체 왜 나를 받아들인 거요? 막말로 내가 흉악범이면 어떻게 하려고?" "글쎄요. 만화에서처럼, 도저히 악당 같지 않게 눈동자가 맑아서 그 랬다고 대답하고 싶지만 그 어둠 속에서 얼굴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으니 그건 거짓말이고. 게다가 밝은 빛 아래서 보니까 눈동자가 그다지 맑은 사람은 아니군요. 오히려 칙칙하기만 하네요. 그렇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능청스런 대답에 한수는 쿡 웃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활이 늦추어진 느낌이었다. "거참 굉장히 재밌는 양반이로군. 하여튼 잘 보셨수다. 난 적어도 흉악범 따위는 아니오. 좀 불법적인 방법을 쓰기는 했지만 대한민국 을 세계제일로 만들어줄 엄청난 아이템을 전달하라는 임무를 맡은 사자지." 춘식은 순간적으로 바짝 긴장했지만 애써 표정을 태연하게 했다. "호? 알고 보니 대단한 양반이셨군.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에는 맥이 있소. 그것만으로도 한국은 충분히 강국인데?" "군사강국이기는 하지. 하지만 맥은 최첨단 군사무기와 발전소 이외 에는 쓸 수 있는 분야가 없지 않소? 설계구조가 밝혀지지 않은 채 건조한 과학자가 죽어 버렸으니 말이오. 그렇지만 내가 갖고 있는 아이템은 다릅니다." "그렇게 대단한 것인데 나한테 말해줘도 괜찮은 거요?" "날 숨겨준 보답이라 생각하시구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숨을 죽였다. 이윽고 남준이 올라와서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 웬 서양인들이 찾아왔는데요?" 춘식과 한수의 눈이 순간적으로 마주쳤다. 대문 밖에 있는 미국인들 이 행여나 들을 새라 겁이 난 한수는 최대한 작게 말했다. "없다고 하시오. 정말 심각한 문제요." 춘식이 밑으로 내려간 뒤 한수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윽고 춘식이 다시 올라오자 한수는 멱살이라도 잡을 듯한 기세로 물었다. "어떻게 됐소?" "적당히 둘러댔소. 피가 철철 흐르는 웬 남자가 위협해서 붕대와 돈 을 좀 줬더니 상처를 감싸 피가 흐르는 걸 막고 다시 저쪽으로 도망 쳤다고 했지. 거참, 양놈들 주제에 한국어는 엄청 잘하네." "CIA에게 있어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아는 건 유전이 솟은 때부터 필수적인 조건이었소. 한국어 몇 마디 하는 건 일도 아니지. 진짜 난다 긴다 하는 녀석들은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 줄줄이 꿰고 있기까지 하지." 추격자의 정체가 예상 밖이었던 춘식은 크게 놀랐다. "CIA? 정말 어떻게 된 일이오? 당신이 갖고 있다던 그 엄청난 아이 템이라는 게 도대체 뭔데 CIA가 당신을 쫓는단 말이오?" "정말 CIA인지 아니면 마피아인지는 나도 모르오. 아마도 전자일 가 능성이 높지만, 후자일 경우에는 대충 훼도니츠 혹은 넥슨, 두 가문 중 하나겠지. 훼도니츠 가는 군수산업 전문이지만 컴퓨터 역시 군수 산업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니까. 빌어먹을 마피아 녀석들." "컴퓨터?" "사실 당신이 내 목숨을 구해줬으니 이까짓 게 무엇인지 말해주는 건 별 문제 아니오. 보아하니 당신 꽤나 잘 사는 모양인데 설마 내 가 갖고 있는 물건을 빼앗아서 자기 욕심 차리려고 할 사람 같지도 않고, 그럴 용기나 배짱도 없을 거요. 말해주는 건 정말 어렵지 않 소." 잠시 말을 마친 한수는 씩 웃었다. "하지만 듣고 나면 당신도 연관 될 가능성이 매우 큰데, 그래도 듣 고 싶소?" 이렇게까지 말하면 누구라도 더 듣고 싶어할 것이다. 춘식은 망설이 지 않고 대답했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쫓기는지 듣고 싶지 않았다면 도와주지도 않았 을 거요. 말해보시오. 도대체 무엇 때문이오?" "녀석들은 이걸 노리고 있소." 한수는 품안에서 검은색 디스크를 하나 꺼냈다. 무기질의 광택을 띠 고 번들거리는 그것은 언뜻 보기에도 뭔가 대단한 비밀을 감추고 있 는 것 같았다. "그게 도대체 무언데 CIA나 마피아쯤 되는 녀석들이 한국까지 쫓아 들어 온단 말이오? 미 대통령이 불륜 상대와 발가벗고 호텔에서 노 닥거리는 동영상이라도 들어 있는 거요? 아니면 바람 피는 장면을 들켜 꼴사납게 부인한테 얻어터지고 있는 모습이라도?" 한수는 쿡 웃었다. "양자 컴퓨터요. 테스트 단계가 아닌, 당장 실용화되어 전세계의 모 든 전산망을 깨뜨릴 수 있는 초고성능 양자 컴퓨터 설계도가 이 안 에 들어 있소." "!!" 경악한 춘식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하다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 다. 기대했던 반응이 만족스러운 한수는 킬킬거리며 덧붙였다. "진작부터 미 정부의 관심을 한 몸에 사고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양자 컴퓨터 연구에 몰두한 재미교포 과학자가 한 사람 있소. MIT 내 다수의 중국인 과학자들, 그리고 일부 미국인 과학자들과 합동으 로 진행한 연구 끝에 그는 512 큐빗 양자 컴퓨터를 개발했소. 세기 의 쾌거를 이룬 셈이지. 아, 512 큐빗이 무슨 말인지 모르오? 쉽게 말해 그것에 비하면 수퍼 컴은 전자계산기 수준이라 생각하면 이해 가 빠를 거요. 물론 차이는 더 막심하지만, 나도 대충 전해들은 대 로 말하는 거니 더 묻지 마시오. 난 이과 전공이 아니니까." 한수는 상처가 쓰려 얼굴을 찡그렸다. "이 연구의 가장 큰 공헌자는 바로 그 재미교포요. 헌데 미국은 염 치없게 연구비 몇 푼 지원한 걸 갖고 모든 자료를 꿀꺽하려 하고 있 지. 중국 역시 반발하고 나서며 그것은 자기들도 가져야 한다고 큰 소리를 쳤지. 그 와중에 그 한국인 과학자는 양자 컴퓨터를 한국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위험을 무릅쓰고 이 디스크를 나에게 넘긴 거 요. 그리고 MIT내의 모든 연구 자료를 폐기했소. 지금쯤 그가 무사 할지 나도 솔직히 자신할 순 없소." "그랬군요. 헌데 왜 당신은 진작 경찰에 연락하고 보호를 받지 않은 거요?" 이제 춘식의 목소리는 놀람이 많이 가신 상태였다. "알다시피 이건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가져온 게 아니오. 미국 녀석 들이 명분을 들고 나온다면 한국 정부는 끽 소리도 못하고 요구하는 대로 따라야 하오. 512큐빗 양자 컴퓨터 같은 엄청난 물건을 꿀꺽하 려 했으니 그에 마땅한 보상을 하라는 식으로 들고 나와서 유전, 아 니, 유전은 이미 개인의 소유지. 하여튼 그런 식으로 나서서 물질 적, 정신적 피해 보상으로 맥이라도 내놓으라고 하면 한국 정부는 정말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는 거요." "그건 억지 같군요." "억지? 명분에 따르면 억지는 아니오. 생각해보시오. 수십 조, 아니 수백 조 짜리 귀중품을 들고 훔쳐 달아나다가 붙잡힌 도둑놈이 있 소. 누구라도 화가 머리끝까지 날 거요. 그 무엇을 요구한다 해도 도둑놈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는 거요. 막말로, 목숨까지 바쳐도 화 가 풀리지 않을 판인데." "으음." "이 녀석이 바로 그렇소. 당장 경매에 부친다면 수백 조 따위는 저 리 가라지. 맥처럼 가격을 정할 수 없는 엄청난 녀석이오." 한수는 침을 튀기며 말을 이었다. "이 녀석을 개발하는데 있어 가장 큰 공헌자는 한국인이지만 운 사 납게도 미국에서, 그것도 미국 돈을 받아서 개발했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명분상 미국 소유가 된 거요. 왜 경찰에게 말할 수 없는지 이해하겠소? 적어도 이 디스크에 대해 한국 정부가 적당한 변명거리 를 만들어내기 전까지는 경찰과 접촉할 수 없소. 문제는 아직 한국 정부가 이 디스크의 존재를 모른다는 거요." "그럼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오?" "원래 이 녀석을 서울대 물리학과 이병원 교수에게 전해주려고 했 소. 그런데 아까 전에 이교수 집으로 가보니 양놈들이 지키고 있더 군. 할 수 없이 조용히 벗어나려다 들켜 쫓기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된 거요." 춘식은 잠시 생각하고 난 뒤 다시 물었다. "이병원 교수에게 전해서 어떻게 할 예정이오? 이 교수라는 사람도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소?" "물론 그 사람은 모르오. 난 그에게 최소한의 약속만 받고 이 물건 을 건네줄 거요. 다른 나라에 건네주지 않는다는 것과 양자 컴퓨터 로 얻은 수익의 일부를 나라에 환원하는 것. 이 교수도 사람이니 전 자의 경우는 그다지 걱정할 것 없고, 후자의 경우는 각서를 써서 하 나 받으면 그만이라 일단 걱정은 안 하오. 문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교수와 일단 접촉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한수를 만나게 된 것은 하늘의 도움이었다. 춘식은 뛸 듯이 기쁜 마 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마음 속으로 외쳤다. '예안아! 됐다! 됐어! 지금 호박이 넝쿨째 들어왔다! 잘만하면 유한 그룹 따위는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어!' 춘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었다면 한수는 불같이 화를 냈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독심술을 할 줄 모르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러니까 당신 말에 따르면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미국 정부 뿐이라 이거요? 이 교수라든지 한국 정부는 이 일에 대해 아직 아무 것도 모른다 이 소리요?" "그렇소. 아, 그리고 중국 정부 역시 알고 있소. 떼놈들이 원체 그 런 쪽으로 민감해서야 말이지. 지금쯤 북경은 발칵 뒤집혔을 거요. 미국 대통령은 아마 지금쯤 잠도 못 자고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 성거리고 있을 거고." "지금 미국은 낮인데." "아, 그렇소? 그렇다면 지난밤에 한숨도 못 자고 뜬눈으로 새웠을 거라 정정하겠소."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정말 중요한 거요. 그 양자 컴 퓨터라는 것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르지." "뭐요?" "몇 살이오? 아무리 봐도 사십 이상으로는 안 보이오만?" 그제야 춘식의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을 확인한 한수는 찔끔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만큼 그런 것에 눈이 가지 않았다. "올해 서른 다섯…인데…." "난 쉰이 넘었소." "…죄송합니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아니, 됐네. 앞으로 조심하게. 젊은 사람이 원… 쯧쯧쯧." 물론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춘식은 눈앞의 이 녀석을 어떻게 요리하면 될지를 맹렬히 궁리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39 회] 날 짜 2004-02-11 조회 / 추천 3793 / 92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바다를 건너온 영광 뺨 위로 내려앉는 봄 햇빛에 예안은 눈을 떴다. 어느덧 아침이 찾아 온 모양이었다. 밤새도록 아기 얼굴만 들여다보다가 굉장히 늦게 잔 것 같았는데. "아빠 아침도 못 차려줬는데… 에잇, 몰라. 자기가 알아서 해먹겠 지. 그냥 유빈이랑 놀지 뭐. 유빈아, 일어나. 엄마랑 놀자." 지 심심하다고 자는 아기 깨우는 엄마가 도대체 이 세상 어디에 있 을까. 그래도 깨웠다고 울지 않고 헤실헤실 웃는 걸 보면 유빈이 녀 석도 참 기특하다. 어쨌든 출산 이후 아기에만 정신을 쏟는 팔불출 엄마의 즐거운 아침은 이렇게 시작한다. "저 많은 걸 도대체 어떻게 할 거야, 응? 옷이야 유빈이가 좀 큰 다 음에 입혀도 된다지만 네가 심심할 때마다 사 모은 저 많은 기저귀 들은 도대체 다 어떻게 할 거니?" 예안은 잔뜩 풀이 죽어 대답했다. "나도 몰라." "네가 모른다면 누가 알아? 정말 저걸 어디다 갖다 버릴 수도 없고 진짜… 정말 저걸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하다 깜깜해." 유젤의 육체가 지닌 비밀에 대해 좀더 안정적인 생활이 찾아오면 정 호에게 털어놓으려 했으나, 결국 예안은 얼마 전 사실대로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유빈이 요 쪼끄만 녀석이 기저귀를 아예 필 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맥 녀석이 설명해준 바에 의하면, 먹지 않아도 살 순 있지만 일단 무언가를 먹었다 하면 ST기관이 아예 찌꺼기까지 다 에너지로 바꿔 버린다고 한다. 로데늄 단위에서부터 전부 다 에너지원으로 체인지 해버리기 때문에 쇳덩어리를 먹어도 배설되는 게 전혀 없이 100% 에 너지로 체인지 된단 소리에 예안은 기겁할 뻔했다. 이 탁월한 소화 능력을 잘만 이용하면 차력사로 명성 날릴 수 있겠 다는 허무맹랑한 상상까지 떠올리던 건 잠시. 예안은 맥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럼 왜 난 아무것도 못 먹는 건데?' 그러자 맥, 이 깜찍한 녀석은 늘 그렇듯 '그거야 알아서 생각하십시 오. 락이 걸려 있어서 말못해요~ 약오르죠?'라는 식으로(설마 정말 놀리기야 했을까) 어물쩍 넘겼다. 그래도 이 녀석이 양심의 가책은 느낀 건지 유빈이 왜 젖을 필요로 하는지는 설명해주었다. 아직 어린 신인류 아기는 ST기관의 기능이 100% 활성화되어 있지 않 기에 성인처럼 열에너지와 빛에너지를 흡수하지 못한다. 따라서 모 유를 섭취해야 하지만, 찌꺼기까지 전부 로데늄 단위에서 에너지원 으로 체인지하는 건 가능하기에 기저귀는 필요 없단 설명이었다. 처음 이것을 정호에게 설명했을 때 정호는 충격을 받고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하기야, 하나밖에 없는 딸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녀석이 어디에서 튀어나온 에어리언일지도 모른단 소리에 충격 받지 않을 사람은 없다. 정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지만 예안 은 한사코 '김윤우 형(레이온)이 알지 내가 어떻게 알아?'라고 잡아 뗐다. 결국 정호는 '그래도 건강하고 이상한 건 없다'라는 말에 일 단 안도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정작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ST기관이니 뭐니 로데늄이니 뭐니 하는 것 따위는 정호가 지금 당면한 문제에 비하면 정말 별 것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예안이 심심할 때마다 사 모은 기저귀와 아기 옷, 장난 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방. 손바닥만한 유빈이가 좀더 크면 옷이야 어떻게 입히겠지만 정말 저 많은 기저귀들은 어떻게 처리할 방법이 없어 정호는 요즘 속이 시커멓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정호는 고개를 숙인 예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시 한숨. "근데 정말 괜찮은 거니? 먹지 않아도?" "…응." "휴. 모르겠다 도대체. 난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여자가 돼서 돌아온 뒤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어 정신이. 혹시 또 놀래킬 일 있으면 미리 미리 다 말해 줘. 알겠니?" 예안은 속이 뜨끔했지만 얼른 고개를 저었다. "이제 더 숨기는 거 없어." "하지만 이 아빠는 언제고 네가 또 뒤통수칠까 봐 이제 겁이 다 나. 느닷없이 사라졌다가 졸지에 여자가 되어 오지 않나, 자기 좋다고 매달리는 남자가 돈 줬다고 그걸로 집을 사라고 하지 않나, 남자였 을 때 심어놓은 씨가 애 됐다고 하질 않나, 머시기 기관? 하여튼 그 런 게 있어서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하질 않나…" 정호는 한탄 또 한탄했다. "이 아빠는 이제 네가 돈벼락을 맞아 돌아온다 해도 안 놀랄 것 같 다." 뜨끔. "정말 어찌해야 할지…" 혀를 차고 있지만 사실 이해를 못해줄 정도는 아니었다. 느닷없이 임신한 미소녀가 되어 돌아온 경력마저 있는 판인데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하찮은 능력 따위가 도대체 무엇이 대수겠는가. 그때 저쪽 방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를 찾는 모양이었 다. "유빈이 배고픈 모양이네. 어서 가 봐." "응." 예안은 배시시 웃으며 방에서 뛰어나갔다. 흐뭇한 표정으로 예안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정호의 시선은 등뒤로 돌아감에 따라 절망으로 바뀌었다. 눈앞에 쌓인 이 애물단지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앞날 이 깜깜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장본인이 어련히 알아서 처리할 거라 중얼거리며 그는 방밖으로 나 왔다. "휴. 정말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건지 참."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육체라. 무쇠도 100% 영양분으로 체인지할 수 있는 무식하리만치 튼튼한 위장, 아니 ST기관이라. 하나밖에 없 는 자식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가 걱정되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겉보기에는 멀쩡한 것 같으니 일단 딸 을 믿고 넘어가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기들은 원래 쑥쑥 큰다던데 유빈은 이상하게 성장이 더뎠다. 생후 삼 개월 가량 되었는데 아직도 그 크기가 손바닥만했으니. 태어났을 때 손바닥 보다 더 작았던 걸 상기하면 큰 것 같긴 하다만 그래도 작다. "유빈아 배고프지? 혼자 둬서 미안." 얼른 유빈을 안아 올린 예안은 앞가슴을 풀어 헤쳐 젖을 물렸다. 익 숙해지다 보니 이제 더 이상 낑낑대는 건 없었다. 하지만 유빈이 워 낙 작다 보니까 딴 데 잠깐 정신 팔면 어느새 젖꼭지가 입에서 빠져 나와 있었고, 그것은 곧 우렁찬 울음소리로 이어지곤 했다. 「신인류 아기가 왜 크기가 작은지 아십니까?」 "음 글쎄? 모르겠는데?" 「쉽게 생각하십시오. 크기가 작은 게 출산시 더 유리하잖아요. 시 간도 적게 걸리고 말입니다.」 "…난 유빈이 낳을 때 너무 아파서 고함도 안 나왔어. 까무러치기까 지 했단 말이야." 「대신 시간은 비약적으로 빨리 걸렸죠. 유젤 님이 유빈이 님을 낳 을 때 채 삼십 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간단하게 생각하세요. 빨리 낳는 대신 그만큼 더욱 아픈 거라고.」 "뭐 또 애 낳을 생각은 없으니 몰라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아유, 잘 먹네. 귀여워 정말." 젖을 다 먹인 예안은 유빈의 배를 손가락으로 문질러주었다. 간지러 움을 참지 못해 헤실거리는 표정이 귀여웠다. 정말 가능하면 눈에 푹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하긴 그랬다간 둘 다 죽겠군. "자, 이제 자야지 유빈아." 유빈이 태어난 후, 예안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만끽하고 있었 다. 맥과 유전 같은 물질적인 것으로 채울 수 없는 진정한 행복. 이 것도 다 유젤이 자신에게 준 선물이라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더 고 마워지고 미안해지곤 했다. 예안은 잠든 유빈의 배를 가만히 다독거렸다. "아, 근데 네 전용 송전소가 잘하면 내년 초에 완공 될 것 같아. 그 렇게 되면 넌 일년 365일 하루 24시간 동안 내내 풀가동을 해야 할 거야. 자신 있어?" 「저를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한반도 전체가 필요로 하는 전기를 공급하는 데 풀가동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디 마모 돼서 고철로 전락하는 일이 없기를 기도할게." 「농담을 즐기시는군요. 저는 마모되는 일은 없습니다만.」 예안은 키득거리며 쌔근쌔근 잠든 유빈의 얼굴에 뺨을 비벼댔다. 뺨 에 와 닿는 뽀송뽀송한 감촉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차라리 팔불 출 소리를 들으면 들었지, 이렇게 기분 좋은 애정 표시를 안 할 수 는 없었다. "어? 전화 왔네?" 진동으로 바꿔놓은 핸드폰이 떨리자 예안은 얼른 왼손으로 유빈을 안고 오른손으로 폰을 들었다. "네에." 「예안아 난데.」 "어, 김 아저씨? 무슨 일로 전화 하셨어요?" 「아주 큰 거 하나 잡았다. 잘만하면 짧은 시간 안에 유한 그룹을 통째로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몰라. 지금 시간 있니?」 평소 같았으면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안은 잠든 유빈을 내려다 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요?" 「어 지금. 정말 큰 거 잡았거든. 진짜 중요한 약속이 아니라면 가 급적 취소해라.」 "…알았어요. 곧 갈게요." 전화를 끊은 예안은 울 듯한 표정으로 잠든 유빈의 뺨을 어루만졌 다. 어린 아기를 내버려두고 출근하는 심정. 그건 정말 당해보지 않 은 사람은 절대 모른다는 직장 여성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아아, 유빈이를 내버려두고 또 나가야 하다니… 깨어나면 나 찾을 텐데…" 푹 한숨을 내쉬는 예안이 안 되어 보였는지 유니콘이 한 마디 했다. 「차라리 데리고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안 돼." 「어째서요? 설마 김춘식씨에게 아기에 대해 말하는 게 부끄러워서 입니까?」 "바보 아냐? 그게 왜 부끄러워? 유빈인 떳떳한 내 아이야. 글치만 밖에 데리고 나가면 매연 공기에 노출되잖아. 안 그래도 서울의 공 기가 얼마나 오염되었는데 외출하면은… 으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 다." 지원이 그 말을 들었으면 과보호가 너무 지나치다고 끌끌 댔을지도 모른다. 생후 삼 개월밖에 안 된 아기를 떼어놓고 일하러 나가는 엄마의 심 정은 피를 토하고 싶을 정도다. 눈물을 머금고 집을 나선 예안은 춘 식의 회사로 갔다. 사장실에서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던 춘식은 희색이 되어 맞이했다. "갑자기 유한 그룹을 통째로 먹을 방도가 생겼다 하시길래 굉장히 놀랐어요. 당분간 유한 그룹은커녕 유한전자조차 손도 못 댈 거라고 어제 아저씨가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바로 어제 오후까진 그랬는데 어젯밤에 방법이 생겼어. 아주 대어 가 지금 내 손에 들어왔다. 자자, 일단 앉아." 앉기를 권한 춘식은 목청을 가다듬고 어젯밤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죽 설명했다. 집에 막 들어서려는데 웬 총에 맞은 남자가 도와달라 고 해서 어찌어찌 인연이 엮였고, 알고 보니 초고성능 양자 컴퓨터 설계도가 들어 있는 디스크를 한국에 건네주라는 임무를 받고 온 녀 석이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춘식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다 듣고 난 예안은 별다른 반 응이 없었다. "양자 컴이요? 그게 뭐 어쨌길래 맥에 버금가는 대단한 물건이라는 거죠? FIRE-3 요격 테스트에서 보인 성능과 무한동력장치로 움직인 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맥은 지구상의 그 어떤 것보다 뛰어난 기계 예요. 그리고 이번에 한창 건설 중인 전용 송전소가 완공되면 평화 시에는 무공해 청정 에너지를 한반도 전체에 공급할 수도 있구요." "하지만 맥은 그 기본 설계가 알려지지 않았으니 박살이 나버리게 되면 곤란하게 되지. 사실상 한국 정부가 유전을 주고 맥을 산 것은 엄청 미친 짓이었어. 영원히 에너지원으로 사용한다면 모를까, 전쟁 터에 한 번 내보냈다가 터지기라도 하면 엿 되는 거니까. 모르면 모 를까 맥은 요격용 이외에는 전쟁시에 쓸 용도가 없을 걸?" 예안은 속으로 맥이 터질 일은 절대 없다고 궁시렁거리며 되물었다. "그럼 그 양자 컴이라는 녀석은 뭐가 좋은데요?" "예안이 넌 과학 잡지 같은 것도 안 읽어봤니? 양자 컴은 고전 컴에 비해서 그 속도가 무식하게 빠르잖아. 실용화가 된다면 암호 알고리 즘은 죄다 깨져 버리고 만다구. 수퍼 컴이 몇 백 년 걸려서 풀 수 있는 암호를 양자 컴은 몇날 며칠 안에 깨부술 수 있으니까. 전세계 의 모든 정보를 좌지우지하게 되는 거지." 물론 이건 그가 본디 알고 있던 사실이 아니라, 어젯밤부터 조금 전 까지 머리에서 쥐나도록 네이버 지식 in을 뒤적거린 쾌거였다. 그는 이쯤 되면 예안의 눈이 휘둥그레질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예안은 여전히 시큰둥했다. "듣자니 이미 미국은 디스크가 한국에 넘어온 걸 알고 있는데 그걸 공개한다는 건 도둑질했다는 걸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꼴이 아니 에요? 중국도 디스크를 탐낸다고 하셨으니 분명히 미국 편에 붙을 테구요, 가뜩이나 한국의 팽창을 경계하는 러시아와 일본 역시 미국 편에 붙겠군요. 그래서 한국은 고립되겠지요." "그렇지만 전쟁은 나지 않아. 네가 말한 대로 한국에는 맥이 있으니 까." "하지만 고립은 피할 수 없죠. 따지고 보면 이건 한국이 먼저 저지 른 잘못이니까." 양자 컴퓨터 개발에 가장 핵심적인 중추 역할을 했던 과학자가 한국 인이라손 쳐도, 미국을 위해 연구 자료를 사용하겠다고 계약하고 지 원을 받은 이상 이건 전적으로 한국의 잘못이었다. 예안은 그걸 지 적하고 있는 것이다. 춘식은 불만족스러워하는 녹색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다 푹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대 이병원 교수는 오랫동안 양자 컴을 연구해왔고 수 차례에 걸쳐 논문을 발표한 세계적인 권위자야. 그 사람의 논문이 발표될 때마다 전세계의 대학과 연구소가 주목하지. 그 사람에게 디스크를 가져가서 그 사람이 개발한 것처럼 하면은 걸릴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럼 그 모든 수익은 이 교수라는 사람이 얻게 되잖아요? 지금 미 국에 있다는 그 한국인 과학자는 왜 그렇게 위험을 무릅써가며 남 좋은 일을 시키려고 하는 거래요? 좀 수상하지 않아요?" "왜 이유가 없어? 조국을 위한 한 과학자의 숭고한 희생이잖아? 조 국을 위해 외국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연구 결과를 빼돌린 과학 자, 그리고 목숨을 걸고 그것을 한국까지 전달한 사자, 이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니?" "…그거 농담이시죠?" 춘식은 유쾌한 표정으로 키득 웃었다. 그리고 정색했다. "우리 그런 데까지는 신경 쓰지 말자. 이대로 가면 이 교수는 연구 결과를 거저 얻게 되고 막대한 부까지 손에 넣게 될 거야. 양자 컴 을 개발한 과학자는 사익에 별 관심 없었대. 그럼 누가 그것을 차지 해도 결국 한국의 영광으로 이어진다면 별 상관없는 거 아니니?" 예안은 춘식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했다. "근데 한수라는 사람은 이 교수에게 그것을 넘길 생각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설득을 해야지. 어차피 결국 한국을 위해 좋은 일이 될 거, 그 총대를 우리가 짊어져서 나중에 떡고물 좀 챙기자는 게 그다 지 나쁜 일은 아니잖아? 잘만 하면 유한 그룹 전체를 쥐고 흔들 수 있는 막대한 자금이 생긴다구." 춘식은 이쯤이면 예안이 뛸 듯이 기뻐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녀는 여전히 시큰둥한 태도였다. 마지못해 승낙하는 듯 시원찮은 얼 굴이었다. "에휴. 일단 사업을 어떻게 하든 그것에 관해서는 아저씨께 일임했 으니 알아서 해주세요. 전 양자 컴이니 뭐니 하는 것에 대해서 아는 건 쥐뿔도 없으니까요." "오케이. 나한테만 맡겨." 희희낙락한 춘식이 커피를 뽑아오겠다고 밖으로 나가자, 그제야 예 안은 심각한 얼굴로 유니콘에게 물었다. "이상하지 않아?" 「정말 그렇습니다. 뭔가 이상하군요.」 "진짜 이상하네. 디스크로 백업을 떠서 전달자에게 건네줄 여유가 있었다면 얼마든지 인터넷으로 전송해줄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쓴 거지? 이건 꼭 마치 자료를 들고튀었다 는 걸 표 내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기밀자료가 든 디스크를 들고 벌어지는 쟁 탈전 따위는 정보화 사회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짓거리다. 메신저나 개인 공유 프로그램 따위를 써서 허를 찌르는 방식으로 얼마든지 바 다 건너 본국으로 기밀자료를 보낼 수 있는 게 바로 현실인데. "어쨌든 나쁘진 않은 것 같으니까 일단 지켜보자. 김 아저씨한테 좋 은 시험거리가 되겠지 뭐. 유한 그룹을 빨리 박살낼 수 있으면 나한 테도 좋은 거구." 예안은 기지개를 켜며, 재수 없는 웃음을 짓는 재호를 떠올렸다. 신 기하게도 이제 더 이상 재호 때문에 혜인이 상처 입은 것에 대한 강 한 분노는 일어나지 않았다. 흘러가는 시간은 흥분마저 덩달아 씻어 가는가 보다. 하지만 감정의 응어리가 풀어지면 풀어질수록 이성은 점점 차가움의 늪에 빠져들고 있었다. 분노하는 법은 잊어버렸지만 복수해야 한다 는 의무감은 깊이 정제된 채 여전히 예안의 마음 속에 남아 있었다. 유한 그룹을 무너뜨리는 건 예안이 혜인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 는 유일한 속죄였다. 사정없는 추천과 아낌없는 코멘트를 부탁.^^; [말은 잘해요 잘해.]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40 회] 날 짜 2004-02-13 조회 / 추천 3800 / 68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바다를 건너온 영광 오랜만에 중현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아마 그가 먼저 연락을 하 지 않았으면 예안은 그를 만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매연을 걱정한 그녀는 아기를 집에 놓고 니콜라스만을 대동한 채 중현과의 약속장소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예안은 중현의 안색이 못 본 사이에 많이 수척해졌다 느끼며 인사했 다. "오랜만입니다. 근데 예안씨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네요." "네. 요새는 세상 살맛이 나거든요." "아기… 때문입니까?" 중현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걸 눈치챈 예안은 고개 를 갸웃했다. '왜 저러지? 어디 아픈가?' 아기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데 왜 그렇게 긴장하는지 예안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신경을 끄기로 마음먹은 그녀는 이내 활기찬 표정 으로 아기 자랑을 늘어놓았다. "뭐 살맛 나는 게 아기 때문인 건 맞아요. 아기 이름은 서유빈이구 아들이에요. 뭐 세상 어떤 엄마가 안 그렇겠냐만은 그래도 저한텐 세상에서 젤 예쁜 거 있죠. 정말 콱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예요." 중현은 긴장을 깨물며 말을 받았다. "유빈이라… 예쁜 이름이군요." "참, 제가 어떻게 출산했다는 말씀은 안 드렸죠? 어이없게 작년 크 리스마스 이브 날 사람들 눈에 잘 안 띄는 화단에 들어갔다가 그만 거기서 진통이 왔지 뭐예요. 하마터면 아기하고 저하고 둘 다 얼어 죽을 뻔했어요." "그렇군요…." "중현 아저씨도 얼른 결혼해서 예쁜 아기 하나 낳아 보세요. 정말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질 거예요." 구김 없이 맑은 웃음이었다. 중현은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속 이 쓰렸다. '내가 이렇게 나약하고 이기적인 남자였을 줄이야….' 예안이 낙태하도록 앤드류를 종용했던 주제에 할 말은 없다. 그래도 중간에 생각을 바꿔 그녀를 이해해주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출산일 이 가까워질수록 그는 점점 초조해졌고, 결국 반 년 가까이나 예안 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겨우 그녀를 마주볼 수 있는 결심이 섰다. 하지만 그는 행복해하는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용기가 아직 없었다. '내가 이렇게나 약한 녀석이었다니, 정말 한심하다 김중현.' 중현은 주머니 속의 반지를 연신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동갑내기 사 촌 여동생에게 자문을 구해 보석상을 이 잡듯이 뒤져 반지까지 구입 했는데, 이것을 건네줄 용기가 없으니 문제다 문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중현은 화들짝 놀랐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 어디까지 이야기하셨죠?" "인터넷 게시판에서 「배리굿」이라는 사람하고 맥에 대해 말싸움하 다가 뚜껑 열릴 뻔했다는 이야기까지 했는데요?" "아… 그러셨군요. 그 사이트가 어디입니까? 저도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은데요." "에? TAM 사이트라고 제가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그새 잊어버리신 거예요?" "아… TAM이었군요.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흐음?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시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예요?" "아니요.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했더니…." 중현은 쓰게 웃었다. 언제부터 예안이 자신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 느꼈던 강렬함만큼은 잊어버릴 수가 없다. 그녀를 미행하던 요원들이 길거리에서 붙잡아 데려왔을 때도 지금처 럼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형광 빛 아래 그늘진 명암 사이로 빛나 던 녹색 눈동자가 정말로 매력적이었는데. 그때부터 눈을 뗄 수 없 었던가. 중현은 피식 웃으며 반지를 주머니에 내버려둔 채 슬그머니 손을 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아직은 마음을 털어놓을 때가 아닌가 보다. "재미있는 정보가 있어서 말입니다. 예안씨도 아마 굉장히 흥미 있 으실 겁니다." 어려운 짝사랑에 흔들리던 남자는 그렇게 삽시간에 유능한 국정원 간부로 돌변했다. 중현과 헤어진 예안은 니콜라스와 함께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전 혀 의외의 정보를 받았기 때문인지 머리 속이 멍했다. 아까 그가 해 준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니콜라스가 어깨를 툭 쳤다. 예안은 깜짝 놀랐다. "까, 깜짝이야. 왜 갑자기 사람을 건드리고 그래?" "세 번이나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으니까 그렇잖아. 무슨 생각을 그 렇게 하는데 사람이 몇 번을 불러도 못 들어?"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랬어. 말시키지 마. 머리 아프다." 니콜라스는 상당히 불만스런 표정이었지만 예안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중현이 건네준 정보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조 합시키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최근 MIT를 중심으로 미국 분위기가 어수선해서 집중적으로 조사 를 해봤습니다. 그 결과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뭔데요?」 「그동안 MIT 내에서 우수한 과학자들을 모아 극비리에 양자 컴퓨터 개발 연구를 하고 있었더군요. 연구 자체를 기밀 취급하는 게 수상 해서 집중적으로 파헤쳐 본 결과, 녀석들은 헛돈만 날린 채 큰 실패 를 거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네? 실패했다구요?」 「그렇습니다. 미국이 어느 정도 수준의 양자 컴을 개발할 의도였는 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연구 자체를 기밀 취급할 정도면 전세계의 모든 전산망 보안체계를 깨뜨릴 수 있는 수준 이상인 모양입니다. 실패로 돌아간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요.」 예안은 다소 찔끔했다. 「저, 정말 다행이네요….」 「운 사납게도 정보 수집 과정 중에 꼬리를 조금 잡히긴 했습니다. 하지만 녀석들도 함부로 항의하고 나서진 못할 겁니다. 엄청난 세금 을 날린 게 밝혀지면 국민들의 항의가 빗발칠 테니까요.」 「실패라…」 예안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유니콘에게 황급히 명령했다. "유니콘. 해킹으로 한 번 자세한 걸 알아볼 수 있어? 미국이 정말 양자 컴을 개발했는지 아닌지 말이야." 「알겠습니다.」 니콜라스가 어서 가자고 무언으로 재촉하고 있었다. 예안은 보채지 말라고 인상을 쓰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진작에 이 녀석한테 확인하라고 시킬 걸.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그 정도는 생각할 줄 알면서 왜 나한테 말을 안 한 거야? 말로 떠드 는 것만 최강이지 세밀한 쪽으로는 영 꽝이라니까.' 그렇게 속으로 궁시렁거리는 건 잠시. 이윽고 작업을 마친 유니콘이 대답했다. 「소수의 미국인과 다수의 중국인, 그리고 한 명의 한국인으로 구성 된 MIT내 연구원들에 의해 고성능 양자 컴이 개발되었다는 걸 지금 막 확인했습니다. 보안 프로그램에 철저히 보호받고 있는 MIT 내 기 밀 파일과 미 정부 기밀 자료들을 검색한 결과입니다.」 "이상하잖아? 중현 아저씨는 분명 미국이 실패했다고 하지 않았어?" 「글쎄요. 제 생각에는 아마도 국정원이 미국의 정보 공작에 넘어간 것 같습니다. 개발한 건 분명 맞습니다.」 "그래도 이상해. 미국이 양자 컴 개발에 성공했으면 백악관은 축제 분위기일 테고, 대대적으로 광고하느라 기자들 마이크가 닳아 없어 질 텐데? 근데 왜 가만있는 거지? 아? 가만, 그러고 보니…." 혹시 미국이 양자 컴 설계도를 송두리째 도난 당한 사실을 밝히기 꺼려하는 건 아닐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엄청난 세금을 들 인 연구 결과를 도둑 맞았다는 게 밝혀지면 국민의 비난을 살 테니, 조용히 되찾으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수가 갖고 있 는 디스크는 진짜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제야 예안은 왜 그런 불협화음이 연주된 건지 납득이 갔다. "하긴, 그런 엄청난 걸 도난 당했으니 미국 입장에서는 눈이 뒤집어 질 거야. 가능하면 조용히 되찾으려고 하겠지. 그렇다면 한수라는 사람이 가져왔다던 디스크는 진짜인가 보네." 「한수라는 사람이 무언가를 노리고 김춘식을 속인 거라면, 미국이 극비리에 연구 중인 양자 컴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의문이 생 깁니다. 그가 어떤 집단의 소속이라면, 국정원을 능가하는 정보 수 집 능력을 지닌 집단이 왜 이런 짓을 꾸미는가 하는 의문도 생기구 요. 역시 그 디스크는 진짜인 듯 합니다.」 "그럼 잘 됐네.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까 춘식 아저씨한테 무슨 각서 나 계약서 같은 거 쓰기 전에 디스크 진위 여부 먼저 가리라고 해야 겠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김춘식도 그 정도쯤은 조심할 테니까요.」 "하긴… 그 아저씨가 이런 쪽으로는 나보다 더 잔뼈가 굵겠지." 그럭저럭 합당한 결론을 내리자 비로소 머리 속이 맑아지는 느낌이 었다. "중현 아저씨한테 안 알려줘도 되겠지? 괜히 정부를 끌어들이면 일 이 크게 번질지도 몰라. 그냥 우리 손에서 조용히 처리하자." 예안은 지금 자신이 미국을 상대로 얼마나 큰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지 자각하지 못했다. '사업하기 참 힘들다 힘들어. 마음 같아선 그냥 지금 가진 돈 다 풀 어서 무식하게 유한 그룹 집어삼켰음 좋겠네. 글치만 난 경영이나 그런 쪽에 대해선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특별히 경영 쪽으로 공부해야겠다는 필요성도 못 느끼고 있으니 더 큰 문제였다. '에휴. 부디 김 아저씨가 양자 컴 설계도 가지고 잘 해내기를 빌자. 그 아저씨가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유한 그룹도 빨리 집어삼킬 수 있으니까. 언제 또 다른 사람 찾냐구.' 예안은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고 투덜거렸다. 니콜라스가 조용히 물 었다.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좀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것 같아서 그 래.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빨리 집에나 가자. 유 빈이 보고 싶어 죽겠다." 예안이 활기차게 걸음을 떼어놓으려는 순간 니콜라스가 그녀의 어깨 를 붙잡았다. "응? 왜 그래? 집에 안 가?" 니콜라스는 대뜸 물었다. "그 녀석이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야?" "응? 그 녀석? 누구 말하는 건데?" "그 쪼끄만 녀석 말이야. 서유빈 그 녀석." 예안은 어리둥절했다. "당연한 거 아냐? 내 배 아파서 낳은 내 자식이 안 좋으면 도대체 이 세상 누가 좋단 말이야?" "그 녀석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혼자서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해. 말도 못하고 다른 사람을 보호할 수도 없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든 걸 남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그런 나약한 녀석이 도대체 어디가 좋은 거야?" 다소 쉰 듯한 목소리. 예안은 조금 짜증이 났다.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사실 그렇잖아.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약해빠진 쪼끄 만 녀석이 도대체 뭐가 좋은 건데? 응?" 작년 겨울, 아파트 옆 화단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던 거부감이 었다. "누나는 작년에 그 녀석 때문에 죽을 뻔하기까지 했잖아. 그런데도 그 녀석이 좋은 거야?" 내가 가진 것을 빼앗겼다는 느낌. 그건 결코 좋은 기분이 아니다. "그 녀석이 누나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도대체 뭐가 있는데? 응? 응? 응? 없잖아. 아무것도 없잖아." 왜 이런 비참한 기분이 드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유빈이, 그 쪼끄만 녀석이 미치도록 싫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그 녀석이 어디가 좋은데? 나보다 그런 녀석이 더 좋아? 응? 응? 나보다 더 좋냐고!" 씨근덕거리는 니콜라스의 숨이 일순 멈췄다. 흐름이 정지한 주변 공 기가 미약하게 버둥거리고 있었다. 지나가는 차들이 슬로우 모션으 로 천천히 움직인다. 놀란 호흡이 멈춘 예안의 입술 위에 어이없는 당황함이 일순 새겨졌다가 흩어졌다. 짧은 시간이 지난 후, 니콜라스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저, 저기… 그러니까 그게…" 니콜라스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머리 속이 하얗게 질린 채로 더듬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는 팔을 간신히 들어올리며 변명하 려 했지만, 입술을 달싹이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투명한 햇살이 밀짚모자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늘진 명암에서 빛 나는 녹색 눈동자가 반짝이며 웃음을 머금었다. "풋." 니콜라스는 겁먹은 표정으로 예안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무슨 말이 라도 해야하는데, 혀를 굴리는 것조차 무거웠다. "쯧쯧쯧…" 예안은 혀를 차며 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가만 보면 너도 은근히 귀여운 데가 있어. 글치만 우리 유빈이 너 무 미워하지 마라. 날 지킨다 생각하고 앞으로 유빈이도 잘 지켜 주 라. 알았지?" 예안은 그의 마음을 별 것 아니라 치부한 채 앞서 걸어나갔다. 멍하 니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니콜라스는 짜증스런 발걸음으로 뒤따 랐다. 까닭을 알 수 없는 분함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저 혹시..설지현 님? 벤쟈민 님? 있으시면 대답 좀 해주실래요?^^; 그리고 타로 님은 제가 보낸 쪽지에 회답 좀..^^; 코멘트로 말고 쪽지로 회답이요.^^;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41 회] 날 짜 2004-02-15 조회 / 추천 3720 / 100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바다를 건너온 영광 정원에 나온 한수와 춘식은 참이슬 소주를 사이에 두고 술잔을 나누 었다. 16년의 나이 차이를 접어둔 채, 쏟아지는 별빛이 첨벙거리는 술로 입술을 적시며 남정네들끼리 묘한 시선을 주고받는 건 상당히 운치 있는 일이었다. 춘식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 이 두 사람은 다른 딴 생각을 품은 게 아니라 사업에 대해 진지하게 의논 중이었던 것이다. "생각은 해봤나?" "저기… 사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습니다. 저는 단지 괜찮은 보수를 받는 대신에 이 물건을 한국까지 전달해주기로 약속한 몸이 라서…." 춘식은 한수가 꽤나 강직한 성격임을 직시했다. 그가 탐욕에 젖은 인품이었으면 진작 미국에 디스크를 넘기고 막대한 돈을 받아 챙겼 을 것이다. "물론 자네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생각해 봐. 자네 에게 디스크를 건넨 과학자… 이름이 뭐랬더라?" "노스나입니다. 노스나 리(Nosna lee)." "그래, 그 이름도 괴상한 노스나 리 말이야. 그 친구가 꼭 이 교수 에게 디스크를 전하라곤 하지 않았다며?" "무, 물론 그 사람은 단지 이 교수에게 전하는 게 한국을 위해서 가 장 좋을 거라고만 했습니다만…" "생각해보게. 제아무리 이 교수가 세계적으로 권위적인 물리학 교수 이고… 아 근데 물리학 교수가 양자 컴을 만드나?"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듣자하니 양자 물리학이라는 것도 있던데 혹시 그걸 줄여서 물리학이라고 부르는 건 아닐까요? 아니면 그냥 세분화된 분야일까요?" "흠흠. 그건 그냥 넘어가기로 하지. 우리 두 사람 전공하고는 상관 없는 이야기니." 아직 앙상한 나뭇가지에 걸린 어둠이 차가운 추억을 노래한다. 수백 억 광년을 달려온 별빛이 일렁거리는 술을 내려다보던 춘식은 단숨 에 그것을 들이켰다. 그리고 정색했다. "솔직히 말하지. 그 디스크를 나에게 넘길 생각은 없나?" "…." 언젠가 이런 상황이 오리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던 한수는 당장 대답 을 하지 않았다. 처음 디스크에 대해 춘식에게 말해줄 때만 해도 그 가 섣불리 관여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재벌까지는 아니더라도, 춘식은 몇 개의 계열사를 꾸려 그룹을 운영 하는 꽤나 수완 좋은 사업가였다. 적어도 양자 컴의 위명에 짓눌려 손도 한 번 못 내밀어보고 그대로 물러날 소심한 인물은 아니었다. 생각을 정리하던 한수는 무겁게 대답했다. "왜 그런 마음을 품으셨는지 먼저 여쭤도 되겠습니까?" "난 자네처럼 죽을 것을 각오한 채 밀항과 총알 세계를 겪으며 한국 까지 디스크를 운반할 정도로 애국자는 아니야. 그럴 용기도 배짱도 혈기도 없고 말이야. 하지만 말이야. 솔직히, 정말 솔직히 말해서 나는 자네가 갖고 있는 그 디스크가 탐이 나." 춘식은 다시 한 번 술을 들이킨 후 픽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사업가로서의 야망이 불타오르고 있어. 이건 정말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본능이라서 말이야. 이런 말을 해서 정말 미안하군." 한수는 저도 모르게 품안에 감춘 디스크를 더듬거렸다. 이미 노년으 로 접어들고 있는 사람답지 않게 매서운 춘식의 눈빛에 그만 기가 살짝 기가 죽었다. "자네는 그 디스크에 양자 컴의 완성형 설계도와 제작시에 필요한 모든 기술의 이론적인 면이 총망라되어 있다 말했지. 하지만 그렇다 고 해서 섣불리 손을 내밀 순 없어. 수백 억, 수천 억, 어쩌면 수조 원 이상의 금액이 깨져나갈 수 있는 국가적인 프로젝트니까. 게다가 완성한다 해도 국가에서 유통을 철저히 지배하려 들 테니, 기대한 수확에서 크게 빗나갈 위험도 있지." "잘 아시는군요. 그런데 어째서?" "양자 컴은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커다란 고깃덩이와도 같 은 거지. 우리 같은 소규모 기업들은 그 냄새에 취해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고 결국은 빚까지 끌어들여 사 먹으려 하지만, 그걸 다 먹 지 못할 수도 있어. 어찌 보면 굉장히 어리석다 해야 하나?" 춘식은 잠시 멈추고 웃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냉철하게 따져 봤을 때 자네가 가진 디스크를 사장시키지 않고 훌 륭하게 한국의 꽃으로 피워낼 수 있는 힘을 지닌 기업은 기껏해야 유한전자, 중원전자, 대성전자 이 세 회사뿐일 거야. 이 중에서 아 마도 유한 전자가 제일 강력한 후보겠지. 유한전자는커녕 중원전자 나 대성전자에도 미치지 않는 우리 회사로서는 사실상 그 디스크를 지킨다는 것조차 벅찰지도 몰라." "그런데도 이 녀석을 탐내시는 겁니까?" "탐나. 정말 탐나. 너무 커서 다 먹지도 못하고 배탈이 나 결국 응 급실로 실려갈 걸 알지만 그래도 탐이 나. 내가 원래 머리 속에는 돌밖에 안 들어 있는 먹보인 걸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한수는 쿡쿡 웃었다. 춘식은 미소지으며 다시 말했다. "무턱대고 엄청난 돈을 쏟아 붓진 않을 거야. 그건 패가망신의 지름 길이니까. 나는 다만 그 디스크를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이익을 얻을 생각이야. 그걸 나에게 주게." "제가 아저씨께 드릴 수 없다고 말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네를 숨겨주고 보살펴준 대가라 생각하면 안 될까?" "안 됩니다. 적어도 이 녀석은 제 목숨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대 단한 녀석이니까요. 그것 갖고는 제가 아저씨의 설득에 넘어가 드릴 수 없습니다." 한수는 가장 중요한 문 하나만 남겨둔 채 춘식에게 마음을 활짝 열 고 있었다. 그는 춘식이 자신을 설득해주길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춘식은 다시 술을 쭉 들이켰다. 긴장을 삭힌 뒤 춘식은 입을 열었다. "자네에 대한 건 철저히 숨기겠어. 이 교수에게 디스크에 대해 말할 때에도 자네에 대한 건 일언반구도 하지 않을 거야. 그 디스크는 어 떤 경로로 우리 회사가 손에 넣은 거라 소개하고 이 교수에게 가져 가지." 한수의 눈동자에 조용한 흔들림이 새겨졌다. 춘식은 그것을 천천히 주시하며 술잔을 입에 댔다가 땠다. 어느새 술병에는 술이 남아 있 지 않았다. "자네는 유명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야. 이공계열 출신의 무명 학 자도 아니야. 그냥 미국에서 평범하게 가게를 꾸리며 살다가 어느 날 한국으로 건너온, 그야말로 특출날 것 없는 남자지. 자네가 이 교수에게 디스크를 가져간다 해서 이 교수가 그것을 믿을 것 같나?" "그렇다면, 아저씨는 저를 믿는다는 것입니까?" "난 믿어. 적어도 자네가 CIA에게 쫓기던 날 피를 흘리며 나랑 마주 쳤을 때 보았던 그 강렬한 눈빛을 잊을 수 없네." "그때는 어두워서 눈빛 같은 건 안 보였습니다만. 아저씨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춘식은 소리 없이 웃었다. 한수도 피식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부분은 그냥 좀 넘어가 주면 어디가 덧나나? 꼭 반박귀진의 경지에 접어들어 밤에도 대낮처럼 볼 수 있었다고 말해야만 해?" "현경의 경지에 접어들었다기에 아저씨의 눈은 너무 탁한 걸요." "젊은 녀석이 한 마디도 안 지려고 하네. 거참." 기껏 잡아놓은 긴장된 분위기가 어둠을 매만지는 웃음에 깨져 나가 고 있었다. 춘식은 가볍게 투덜거리며 애꿎은 빈 술병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어쨌든 난 자네를 믿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자네를 믿지 않을 거야. 그 디스크를 나에게 주게. 내가 그 디스크를 이 교수에게 소 개해서 한국의 꽃으로 피워내지. 물론 그 중간에 내가 막대한 이익 을 챙기는 건 당연하겠지만, 어차피 애초에 디스크에 대한 욕심이 없었던 자네가 신경 쓸 사항은 아니잖아?" "누가 이익을 얻든 간에 그게 한국의 영광으로 이어진다면 저는 신 경 쓰지 않습니다." "정말 투철한 애국심이군." "애국심 따위로 움직이는 건 아닙니다. 그냥 미국 녀석들이 싫어서 일 뿐입니다." 한수의 눈동자에선 어느새 흔들림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 대신 강철 을 깎아만든 듯한 단단한 의무감이 떠올라 있었다. "훗날 자네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 일을 맡은 것에 대해선 내가 충분 히 보상을 해주지. 자네가 원한다면 언론에 귀띔해서 자네를 영웅으 로 만들어줄 수도 있어." "그런 걸 바라는 건 아닙니다. 어쨌든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한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등에서 가벼운 전 율이 밤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거의 다 넘어왔음을 직감한 춘식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맥의 요격 능력만큼은 인정해. 하지만 막상 맥이 필요하게 될 일 은 없을 걸. 그 어떤 미친 나라가 사방이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는 한국을 건드리려고 들겠어? 자칫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 는데.」 「그래서? 넌 맥이 필요 없다 생각하는 거야?」 「안 필요한 건 아니야. 하지만 유전에 비해서 맥은 터무니없이 값 싼 무기라는 뜻이지.」 벌써 한 시간째 지겨운 토론이다. 예안은 다소 짜증스런 얼굴로 타 자를 빠르게 쳤다. 「맥의 무한동력에 대해서 이미 이병원 교수와 다수의 전문가들이 증명했어. 산출량이 한정된 유전에 비해 맥은 그 에너지가 무궁무진 하잖아?」 「자동차 기름과 선박이나 비행기 연료까지 맥이 해결해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전력을 다른 나라에 팔 수도 있어.」 「식량보다 더 큰 무기가 되어 자국의 목을 조를 수도 있는데, 어떤 미친 나라가 한국에게서 전기를 사려고 할까? 핵폐기물이 생기긴 하 겠지만 원자력 발전으로 얼마든지 전기를 충당할 수 있는데.」 게시판 아이디 「배리굿」과의 말싸움은 이미 한 시간을 훨씬 넘긴 지 오래였다. 침대 옆에 뉘여 놓은 아기가 울먹울먹하며 엄마를 찾 고 있는 걸 확인한 예안은 서둘러 타자를 쳐내려갔다. '빨리 끝내고 싶지만 이대로 꼬리를 내리는 것도 자존심 상해.' 그녀의 분노를 대신하듯 신경질적인 속도로 글씨가 떠올랐다. 「이미 중동쪽 몇몇 나라들하고 송전 계약은 거의 다 체결된 상태라 는 것도 몰라? 그런데도 넌 전기를 사려고 할 나라가 없다고 말할 거야?」 「그 나라들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그럼 한 가지 만 묻자. 전기를 팔아서 얻는 수익과 유전에서 나오는 수익. 그 차 이가 얼마쯤이나 될까?」 예안은 할 말이 없었다. 「배리굿」은 의기양양한 스피드로 계속 글 씨를 쳐 올렸다. 「간단히 말하자면, 무한동력이라는 건 한국 혼자 소화시킬 수 없는 엄청 고급 음식인 셈이야. 기껏해야 그 향기를 이웃나라들에게 조금 씩 팔면서 약간의 돈을 챙기는 정도랄까? 하지만 그 음식을 구입하 는데 한국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돈을 줘버렸지.」 결국 적자를 냈단 소리인가. 달리 반박할 말이 없었던 예안은 분함 을 깨물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래 너 잘났다. 나 이만 가봐야 돼. 애기가 나 찾아.」 「뭐? 너 나랑 동갑이라며? 18살이라고 하지 않았어?」 「뭐, 18살에 애엄마 되지 말란 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하여튼 난 간다.」 「너 할 말 없으니까 도망가는 거구나? 애기 어쩌구 한 거 다 거짓 말이지?」 마음대로 생각해라. 예안은 울컥 솟는 분함을 씹어 삼키며 얼른 메 신저를 껐다. 황급히 아기를 가슴에 안은 그녀는 손가락으로 뺨을 문질러 주었다. 「배리굿」하고 한 시간 넘게 벌인 논쟁 때문에 쌓 인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우리 유빈이 내팽개쳐두고 엄마 혼자 놀아서 미안해. 이제 다 끝났 으니까 계속 안고 있어줄게." 예안은 히죽 웃으며 유빈의 뺨에 입술을 갖다 댔다. 때마침 들어서 던 니콜라스는 팔불출 엄마의 못 말릴 모습을 보고 우뚝 멈췄다. 혈 관을 뒤틀게 하는 기이한 기분이 살짝 솟구쳤다. "또 뽀뽀하고 있어? 그렇게도 아기가 좋아?" "너 또, 또, 또 그 소리한다? 내가 애기 있는 앞에서 그런 소리하지 말랬지?" 못마땅해하는 녹색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던 니콜라스는 씁쓸한 한숨 을 토해냈다. "누나를 보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 그는 의자에 앉으며 다소 쉰 듯한 말문을 꺼냈다. "무슨 생각?" "니르도 누나처럼 날 귀여워해 주곤 했었거든. 의뢰를 끝내고 집으 로 돌아온 뒤 니르는 누나가 유빈이를 안아주듯, 날 꼭 껴안아 주곤 했어." "그래? 그 니르라는 사람은 몇 살인데?" "몰라." 어떻게 된 게 파트너의 나이도 모른단 말인가. 예안은 다소 어이가 없었다. "너 니르라는 여자한테도 맨날 엄마 노릇 해달라고 칭얼거리고 그런 거 아냐? 그래서 니르라는 사람이 하도 귀찮으니까 이렇게 먼 곳으 로 너 출장 보낸 거지?" 예안은 이 녀석이 얼굴을 찌푸리는 걸 보고 싶은 마음에 그런 농담 을 던졌다. 하지만 그는 얼굴을 찌푸리지도 찡그리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니르가 엄마 같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 내가 엄마 같다고 생각해 본 사람은…" "앗, 배고파 유빈아? 미안 미안." 건성으로 듣던 예안은 아기가 칭얼거리듯 작은 손을 뻗자 얼른 젖을 물렸다. 세상에서 가장 성결한 그 모습을 부러운 듯 쳐다보던 니콜 라스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마이너스의 감정이 담긴 그의 눈동자는 젖을 빠는 아기의 얼굴을 향 하고 있었다. 아기의 조그만 손이 하얀 젖무덤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그의 눈동자에 미미한 흔들림이 일렁였다. "난 거실에서 TV나 볼게." 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자리에 더 머물렀다가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무서웠다. 쏜살같이 세면대로 달려간 그는 숨을 몰아쉬며 수돗물을 틀었다. 뜨 거운 마그마 위를 걷는 듯 숨이 찼다. 목구멍에서 자꾸만 답답한 기 분이 올라오고 있었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아기가 배고프면 엄마의 젖을 빠는 건 당연 한 것인데, 왜 나는 그걸 보고 이토록 분노하는가. 아니, 단지 답답 하다고 해서 그걸 분노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휴우." 쓰러지듯 몸이 무너진 그는 욕실 벽에 힘없이 기대고 앉았다. 혼란 의 엉킴을 풀려 이리저리 노력하던 그는 결국 포기하고 터덜터덜 밖 으로 나왔다. 거실에는 정호가 TV를 보고 있었다. "아저씨." "응?" "전 나쁜 놈인가요?" 느닷없는 물음에 정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니?" "그게…" 니콜라스는 망설임과 함께,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무수한 사람 들을 살해하던 순간에도 선과 악에 대해 고찰해본 적이 없다. 그런 데 도대체 왜 그런 말이 입에서 튀어나온 것인가. 혼란을 곱씹던 그는 조그맣게 말했다. "누나는 아기만 좋아해요." "응?" "아기만 좋아해요. 그래서 전 그걸 보고 화내요. 그러면 전 나쁜 놈 인가요?" 놀람으로 커졌던 정호의 눈에 작은 웃음이 떠올랐다. 대견한 듯 니 콜라스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큼직한 손을 들어 니콜라스의 머리 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건 나쁜 게 아니야. 오히려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지." "하지만 누군가를 싫어하는 건 나쁜 짓이라고 니르가 그랬어요." 사람을 죽이는 건 괜찮아도. 니콜라스는 앞부분의 그 말은 무의식적 으로 쏙 뺐다. 아니, 정말 무의식적이었을까. 정호는 아무것도 모른 채 대답했다. "네 나이 때에는 얼마든지 그런 일로 미워하고 그럴 수도 있는 거 지. 사람은 일시적으로는 얼마든지 다른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고, 또 미워하며 살아가니까. 하지만, 상대방이 날 미워하지 않는데 내 가 계속 상대방을 미워하는 건 아주 나쁜 짓이야." "네…." 니콜라스는 다소 우울한 표정을 한 채 방으로 돌아갔다. 정호는 재 미있다는 시선으로 그를 쫓다가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뭐랄까. 뭔가 대견하다는 느낌이랄까. 어제 하루동안 선작이 6 줄었습니다. 각혈했죠.ㅡㅡ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42 회] 날 짜 2004-02-17 조회 / 추천 3694 / 56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바다를 건너온 영광 뻐꾸기 시계가 한 번, 울렸다. 두 번째 울렸을 때 정호는 몽환의 경 계에서 깨어났다. 세 번째 울리자 육신이 뒤따라 깨어났다. 온몸이 찌뿌드드했다. 어제 낮잠을 자둔 탓에 밤에 제대로 잠이 오지 않아 조금 불안했는 데 역시나 새벽에 깨버렸다. 침대에서 한참 뒤척거렸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게임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거실로 나갔다. 헌데 아기 방에 아직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불을 켜놓으면 애기가 잠을 못 잘 텐데.' 아기 방에 들어선 정호는 그만 웃고 말았다. 조그만 아기 침대 옆에 예안이 팔을 걸친 채 엎드려 자고 있었다. 또 밤새도록 말도 못 알 아듣는 아기 귀에 대고 이런 저런 이야기 늘어놓다가 그대로 지쳐 잠든 모양이었다. "도대체 누가 엄마고 누가 애긴지 모르겠다니까. 엄마가 애기랑 똑 같이 굴면 어쩌겠다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자신이 직접 애인의 몸으 로 낳아 기르는 심정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정호는 문득 그게 궁금 해졌다. "이러고 자면 감기 걸려. 예안아, 얼른 일어나야지." 몇 번 어깨를 툭툭 쳐보았지만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정호는 예안을 안아 올려 침대에 뉘였다. "으음. 유빈아." 이불을 덮어주고 난 뒤 그대로 불을 끄려던 정호는 멈칫 하고 뒤돌 아보았다. 새근거리며 잠든 딸의 고운 숨소리가 왠지 발목을 잡아끄 는 것 같다. 꿈에서도 아기와 놀고 있는지 이따금씩 밝은 미소가 그 려진다. "휴." 침대 머리맡에 무릎을 꿇은 정호는 예안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찰랑이며 붉은 빛을 흩뿌리는 고운 머릿결이 간지럽다. 보석을 깎아 놓은 듯한 새하얀 피부는 바라보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로 매끄 럽다. 누가 봐도 부러워할 예쁜 딸과 귀여운 손자와 함께 오순도순 행복하 게 살고 있는 지금. 정호는 아직도 이 행복이 자신의 것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ST기관이라고 했나? 그거 왜 지금까지 비밀로 했어? 쯧쯧, 괜히 거 짓말하느라 내가 사온 음식들 다 갖다 버리면서 아까워했지? 진작 사실대로 말하면 될 것을…." 예안이 그동안 사실을 숨기느라 얼마나 마음고생 했을까 생각하니 괜히 착잡하다. 여자까지 된 판에 그까짓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옵션 하나가 뭐가 대수라고 그동안 숨겼을까. 차가운 별빛이 잠든 딸의 피부 위로 내려앉는다. 물결을 그리듯 곱 게 퍼져 나가는 순백의 파동이 어둠에 흔들린다. 물끄러미 예안을 내려다보던 정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사실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다. 당연하잖은가.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김윤우랬던가?' 레이온이 예안을 사이보그 따위로 개조한 것이라도 하면 차라리 믿 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이보그 역시 연료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게다가 사이보그가 아기를 낳을 리는 더더욱 없지 않은가. '도대체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니?' 정호는 문득 자신이 없어졌다. 예안이 정말 인간인지, 인간으로 남 아줄 것인지, 자신의 딸로 남아줄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언제라도 모든 미련을 떨치고 훨훨 날아가 버릴 것 만 같았다. 어쩌면 그 불안은 예안이 여자가 되어 돌아온 날부터 무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빈이 태어났을 때 기뻤다. 정말 기뻤다. 그는 유빈이 자신 의 친손자라 철썩 같이 믿고 있었으니까. 유빈이 살아 있고 예안이 유빈을 아끼고 사랑하는 한, 예안과 자신 사이의 연결 고리는 계속 이어져 있는 거라 생각했기에 그는 기뻤다. 이제 예안과 자신은 혈연 관계가 없지만, 유빈이 살아 있는 한 언제 까지나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는 가족으로 맺어져 있을 거라 믿었으 니까. "잘 자라." 어둠에 근심을 털어 버린 정호는 불을 끄고 나왔다. 산부인과 의사를 선택했을 때 주변에서 비웃었다. 연약한 여자의 몸 으로 쉽게 해낼 수 없을 거라고. 오기가 생겼기 때문에 더욱 이를 악물고 공부하고 실습하고 밀어붙였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여자라는 걸 갖고 뭐라고 하는 인간은 없었다. "그런 인간은 생기는 족족 밟아버리면 그만이니." 철야로 지새웠던 지난밤을 상기하며 지원은 커피를 한 잔 더 뽑아 마셨다. 많이 마시면 몸에 좋지 않다는 걸 알지만 졸음을 쫓기 위해 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근데 커피 좋아하는 건 그럭저럭 고상한 취미로 보이면서 왜 여자 인 거 갖고 뭐라 쏘아대는 남자들을 언어 유희로 짓밟아주는 건 성 격 나쁘다 소리 듣는 거지? 참 문제야 문제." 어젯밤에 무려 한 시간 가량 받았던 어머니의 결혼 독촉을 떠올리며 지원은 얼굴을 찌푸렸다. "거참. 내가 독신인 건 성격 때문이 아니래도 엄마는 왜 자꾸 못 믿 고 그러지. 마음에 차는 남자도 없고 특별히 결혼하고 싶지도 않고 육아에 시달리고 싶지 않으니까 결혼 안 하는 거 아니냐구. 참 내." "김 선생님.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지원은 조금 남은 커피를 얼른 다 털어 넣었다. "아, 정 간호사님. 이리로 들여보내세요." "네." 잠시 후 예안이 자그마한 아기를 품에 안은 채 들어왔다. 늘 그렇듯 청바지에 흰 티셔츠, 그리고 밀짚모자를 쓴 차림이었다. 지원은 언제고 저 인간의 구닥다리 패션 감각을 바닥부터 뜯어고쳐 주리라 이를 갈면서 겉으로는 환하게 웃었다. "어서 와. 근데 또 그 차림이야? 볼 때마다 지겨운데 이제 슬슬 좀 바꿔보는 게 어때? 나 내일 시간 있는데 같이 쇼핑이라도 가지 않을 래? 정말 그 차림은 이제 지겨워서 못 봐주겠다 얘." "노처녀가 자꾸 놀아달라 애원하는 게 가여워서 아기까지 데리고 행 차했더니 대뜸 꺼내는 말이 핀잔이야? 매연 때문에 유빈이가 여기까 지 오면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누나가 알기나 해?" "쯧쯧쯧. 과보호도 그런 과보호가 없어. 요즘 세상에 도대체 어떤 미친 엄마가 공기 더럽다고 아기를 집에만 꼭꼭 숨겨 두냐? 차라리 애 데리고 어디 남태평양 섬에라도 가서 영영 살지 그래?" "뭐 안 그럴 것도 없지. 나중에 돈 생기면 한 번 그렇게 해볼 생각 도 있어." "말은 잘해요 잘해." 예안은 모자를 벗어 내려놓았다. 잠에서 깨어난 아기가 눈을 두리번 거렸다. 예안은 쿡쿡 웃으며 아기의 뺨을 손가락으로 찔러댔다. '여기까지 왔으면서 또 아기랑 놀려고 하네? 팔불출도 저런 팔불출 이 없다니까 참.' 자칫 꿔다 논 보릿자루 신세가 될 뻔한 지원은 손뼉을 짝짝 쳐서 예 안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 "그러고 보니 너도 이제 대학 신입생일 테니까 한창 바쁘겠다? 학교 다니랴 아기 키우랴 정말 뼈빠지지 않아? 학교 선배나 친구들한테 함부로 말하고 이해를 구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말이야."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어? 그냥 고등학교 검정고시만 보고 말았다 구. 나 수능 치긴 쳤는데 대학 일부러 안 갔어." "그래? 점수가 마음에 안 들게 나왔나 보구나?" "490점 받았어." 수능은 500점 만점이다. 지원은 하마터면 기겁하고 쓰러질 뻔했다. "4, 490점? 아니 근데 어째서 대학 안 간 거야? 그 정도 점수면 제 발 와달라고 사정할 대학이 한두 군데가 아닐 텐데?" "유빈이가 아직 어리고 해서 그냥 이번에 안 가기로 했어. 어차피 나 아직 18살밖에 안 됐으니까 좀 천천히 가도 상관없잖아? 대학은 언제든지 갈 수 있지만 유빈이는 지금이 가장 엄마가 필요한 때니 까."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았던 시절 언제 양수가 터질지 모르니 바지 입지말고 제발 치마 입으라는 충고를 무시하던 녀석 맞아? 자신의 변화에 지원이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걸 모르는 예안은 대뜸 물었다. "근데 나 왜 불렀어?" "그냥 심심하고 오랜만에 너하고 유빈이 얼굴도 좀 볼 겸해서 불렀 지. 그렇게 너무 야박하게 따지지 마." "다음부터는 누나가 직접 우리 집으로 찾아 와. 텁텁한 서울 공기에 우리 유빈이를 노출시킬 순 없단 말이야." 정말 흠잡을 데 없는 팔불출이 다 되어 간다. 지원은 깔깔 웃었다. "얘, 얘. 그거 알아? 널 보니까 왠지 내 사촌오빠 생각이 나." "왜?" "나랑 동갑 뻘 되는 사촌 오빠가 있거든. 물론 어른들 있을 때만 오 빠라고 부르지 평소에는 야자 트고 지내지만 말이야. 하여튼 걔도 요새 짝사랑하는 여자애 때문에 굉장히 고민하더라. 아 글쎄, 그렇 게 콧대 높고 온갖 여자들 다 싫다고 도도하게 굴던 녀석이 미혼모 한테 푹 빠졌지 뭐니?" "그래?" 예안은 별 관심 없는 표정으로 유빈을 어르기만 했다. 지원은 대단 한 이야깃거리라도 되는지 호들갑스런 손짓까지 섞어가며 수다를 떨 었다. "얼마 전에는 그렇게 고민만 할 바에야 차라리 속시원하게 고백해버 리라고 말해줬지. 보석상 뒤져가면서 겨우 반지 구해 프로포즈할 결 심한 모양이던데 잘 되었나 몰라. 그래도 요새 얼굴이 꽤나 밝은 걸 보니 영 나쁘지만은 않은 모양이더라. 하여튼 여자 여럿 눈에서 눈 물 뽑게 만들던 녀석이 가슴앓이 하는 거 보니까 웃겨 죽겠는 거 있 지." "누나는 사악해. 사촌이 짝사랑에 괴로워하는 걸 그렇게 즐기고 있 으니 말이야." "어차피 굉장히 잘난 녀석이라 여자들이 줄을 선다구. 그러니 조금 쯤은 아파해도 괜찮아. 유빈이 좀 줘 봐. 자자. 유빈아, 이모한테도 한 번 안겨 봐야지?" 예안은 조심하라는 당부와 함께 아기를 건넸다. 너무 깐깐하게 군다 고 투덜대던 지원은 아기의 뺨을 만지며 귀여워했다. 예안이 흐뭇하 게 그 광경을 쳐다보던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여보세요." 「예안아 아저씨다. 일단 기뻐해라. 한수 녀석 대충 설득했어.」 예안은 지원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조그맣게 대답했다. "아, 그래요? 그거 잘 됐네요. 한수라는 분은 대신 대가로 무엇을 요구했어요?" 「녀석은 애초에 노스나 리, 그러고 보니 내가 그 한국인 과학자 이 름을 말 안 했지? 이름이 노스나 리야. 한수는 노스나 리로부터 미 리 보수를 받고 디스크를 한국에 갖다주기로 한 거야. 한수 녀석한 테 '너보다는 사업가인 내가 전해주는 데 더 신용 있다'라고 설득하 니까 고민을 많이 하는 눈치더라.」 예안은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한수라는 사람이나 노스나라는 사람이나 별 욕심이 없는 건가? 노 스나라는 사람은 참 애국심이 투철한가 보네. 위험을 무릅쓰면서까 지 연구 자료를 빼돌려 한국에 갖다주려 하다니…' 「거의 생각을 다 굳혔다는 확답까지 받았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곧 확답을 들려줄 수 있을 테니까.」 "네. 저 근데…" 「응? 왜? 뭐가 잘못되기라도 했니?」 "아니, 그런 것보다는…." 딱히 잘못된 건 없다. 한수나 노스나 리는 사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의 영광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디스크를 운반했던 게 아닌 가. 이제 춘식이 한수의 책임을 대신 떠맡아 한국의 꽃으로 피워내 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일이 너무 쉽게 잘 풀린다. 예안은 조금 불안했다. "저, 근데 아저씨. 뭔가 좀 이상하다 생각해본 적 없으세요?" 「뭐가 말이냐?」 "말로 설명하기는 좀 그렇지만 하여튼 뭔가가… 아저씨. 일단은 함 부로 각서 같은 거 작성하지 마시구요, 그 디스크에 들어 있는 게 정말 양자 컴 설계도인지 그것 먼저 조사해주세요." 「네가 뭘 걱정하는지 나도 안다. 걱정하지 마라. 어차피 이 교수에 게 가져가면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게 되니까. 그 전까지는 섣불리 한수 녀석에게 뭘 주거나 각서 같은 걸 함부로 쓰지 않을 거야.」 "네. 그럼 수고하세요." 예안은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약하게 피어오르는 초조함이 쉽게 사 그라지지 않는다.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불안함에 그녀는 손가락 을 물고 고민했다. '잘 생각해 보면 한수라는 사람 조금 이상하네. 아무리 애국심이 투 철하다 해도 그런 엄청난 걸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면 한 번쯤 다른 데로 빼돌릴 생각도 할 텐데, 왜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에 가져 온 거지? 나중에 한 번 어떤 사람인지 만나봐야 하나? 에잇! 어쨌든 우리 손에 들어왔으니까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춘식 아저씨한테 좋 은 시험이 될 거야.' 사업을 하려면 두통약이 필수고 주식을 하는 사람은 전세계의 고민 이 내 고민이라고 하는 게 딱히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다. 예안은 목적만 이루고 나면 절대로 사업 같은 데 관여하지 말아야겠다고 결 심했다. '근데 어느 세월에 그걸 다 끝내지?' 레이온이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만들지 못하게 막는 것과 시트날타가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도록 하는 것. 해야 할 건 두 가지밖에 안 되 지만 어느 세월에 그것을 다 끝낼 수 있을까. '이게 다 시트날타 그 녀석들 때문이야! 젠장, 도대체 어떻게 쓰러 뜨릴 방법이 없으니… 어디에 본거지가 처박혀 있는지 만이라도 알 게 되면 가서 반 죽여 놓을 텐데. 레이온 형은 당분간은 별 걱정 없 으니까 냅둬도 되지만….' 자이오 다이아몬드는 짧은 시간 안에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또한 천문학적 금액이 소비되는 일이다. 시트날타가 무한정 자금을 지원 할 수는 없을 테니 예안에게 어느 정도 시간은 있었다. 아기를 어르던 지원은 예안이 골머리를 썩히며 머리를 북북 긁어대 는 걸 보았다. '심심해서 저러나?' 지원은 아무 생각 없이 테이블에서 잡지를 꺼내어 펼쳤다. 예안의 심심함을 달래줄 생각에서였다. "참, 예안이 너 이 사진 좀 볼래? 너도 이 여자애 알지 모르겠다." "응?" 별 생각 없이 잡지에 눈길을 던졌던 예안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건…?" 예안은 새파랗게 질렸다. 지원은 그걸 보지 못한 채 말했다. "너 대명고등학교 다녔다가 자퇴했다고 했지?"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여자. 놀랍게도 그녀는 바로 혜인이었 다. "작년 여름에 있었던 퀸 페스티벌에서 우승한 여자애래. 꽤 예쁘게 생기지 않았니?" 숨이 막혔다.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이름이 김혜인이라고 하던데, 가창력도 굉장히 뛰어나서 AK 엔터테 인먼트에서 가수로도 데뷔시켜 준다더라." 심장이 폭주하고 있었다. 잊고 있었던 죄책감이 숨을 죄여 왔다. "전에 매니저 한다는 내 친구 기억하지? 그 친구가 김혜인 얘 크게 뜰 것 같다고 굉장히 좋아하고 있어. 지금은 JM 영화사에서 한창 영 화 찍는 중이래." 두근거리는 가슴이 멈추지 않는다. 손가락의 떨림이 잦아들지 않는 다. 미칠 듯한 죄책감이 끊임없이 솟구친다. "올해 안으로 영화 개봉된다고 하던데 연기력도 신인답지 않게 꽤나 좋아서 앞으로 배우로도 활동할 모양… 어? 왜 울어?" 그제야 예안의 눈물을 발견한 지원은 놀란 말투로 물었다. 하지만 예안은 지원의 물음 따위 들리지 않았다. 가슴이 꽉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혜인… 김혜인….' 눈물을 머금은 채 사진을 쓰다듬었다. 도대체 무엇일까 이 슬픈 기 분은. 다 잊었는데. 다 잊어버렸는데. 다 잊었어야 했는데. 모두 다 지워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추억 속에 묻어두었던 아련한 목소리가 그림자처럼 되살아났다. 「네가 숨을 거둘 때 곁에 있고 싶지만… 그건 안 되겠지? 그 자리에 는 내가 낄 수 없을 테니까.」 숨소리가 떨려왔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나… 너 기억할게. 영원히 기억할게. 그래도… 되지? 그것은 허락 해줄 수 있지?」 예안은 멍한 눈빛으로 장님처럼 손을 뻗었다. 미끄럽게 와 닿는 잡 지의 감촉이 마음을 휘젓는다. 아픔을 딛고 피어난 혜인의 울음소리 가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왜… 우니?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지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사진 속에서 활짝 웃는 혜인의 화려한 모습을 슬프게 눈동자에 각인 시켰을 뿐. '혜인아… 혜인아….'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파 왔다. 어째서 아직도 슬픔이 발목을 잡아끄 는지 몰랐다. 아직 놓아줄 수 없다는 외침이 마음 속에서 사그라지 지 않는다. 몰랐다. 미련이라는 게 이렇게 질기도록 슬프고 독하게 사람을 괴롭히는 것인 줄. "기분 좋아 보이더니 갑자기 왜 울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예안은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바보 같다. 이런 걸로 울 순 없는데. '이제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유진우? 혜인이랑 너랑은 영영 끝났어! 지금 네가 앞에 나서봐야 혜인이를 더 기만하는 것뿐이라는 걸 몰 라? 이 바보야!' 언제부터 이렇게 나약한 마음을 품고 있었을까. 어찌 되었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건 변하지 않는데. 이미 혜인은 다 털어 버렸을 지나간 과거의 흔적을 붙들고 혼자 엉엉 우는 건 비겁한 자기 위안 일 뿐이지 않은가. 갑자기 유빈이 울기 시작했다. 기특하게도 지 엄마가 슬퍼하는 건 어찌해서 눈치챈 모양이다. 예안은 얼른 눈물을 닦아내고 자지러지 듯 우는 유빈을 안아 달랬다. 다행히 산부인과라서 아기 울음소리에 화를 내고 달려오는 간호사는 없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각난 거니?" 지원이 눈치를 살피며 그렇게 물었다. 예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그냥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너무 뻔한 거짓말이었지만 지원은 묻어두기로 했다. 무엇 때문인지 는 모르지만 그냥 내버려둬도 될 것이다. 어린 나이에 혼자 아기를 낳아 키울 결심을 할 정도로 강한 아이니까. '혜인아. 조금만 더 기다려 줘. 곧 멋진 선물을 줄게. 몇 년도 안 걸려 유한 그룹은 초박살 나버리고 말 테니까.' 사진 위로 울음의 흔적이 조용히 내려앉는다. 사진 속의 혜인은 아 무것도 모른 채 여전히 활짝 웃고만 있다. '하지만… 내가 과연 잘하는 짓일까?' 재호를 망가뜨리고 유한 그룹을 무너뜨리는 걸로 과연 혜인에게 속 죄가 될 수 있는가. 혜인을 슬픔의 테두리에 가두어놓은 채 자신만 이렇게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데 고작 그 정도로 양심의 무게를 덜어 낼 수 있단 말인가. 잊어버린 줄 알았던 혼란이 머리 속을 더듬는다. 엄마의 슬픔을 알 기라도 하듯 아기가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예안은 아기를 꼬옥 안 으며 눈물 젖은 뺨을 비볐다. 아가야. 이제 그만 울어야지. 엄마도 힘들어. 시계바늘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43 회] 날 짜 2004-02-19 조회 / 추천 3602 / 54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바다를 건너온 영광 우지타오 주석은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레스토랑으로 갔다. 철저 하게 따라붙는 경호가 조금 귀찮기는 했다. 하지만 중요한 직위에 있는 입장이다 보니 떼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맏손자가 오랜만에 미국에서 귀국했는데도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야 겨우 만나게 된 것이 다소 미안했다. 그래서 주석은 평소에 안 하던 짓거리(이것저것을 먹어보라 권한다던가 어깨를 토닥여준다던가)를 하며 맏손자의 환심을 사느라 바빴다. 누굴 닮아서 저렇게 똑똑한 건지는 모르지만 대학을 졸업한 뒤에 본국으로 돌아와 나라의 든든 한 인력이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흐뭇한 기분은 저녁 식사 도중, 이 녀석이 한국으로 가 고 싶다는 말에 기겁을 하면서 깨져 나갔다. "아니, 왜 하필 한국이냐?" "한국 기업 연구소들이 굉장히 시설이 좋아요. 또 연구원들에 대한 처우도 손꼽히구요. 한국으로 가면 저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 을 테니까요." 주석은 이가 갈렸다. 망할. 한국과 중국의 입장이 이렇게 뒤바뀌게 된 건 바로 5년 전 인천 앞바다에 솟은 그놈의 유전 때문이었다. 자원고갈이 눈앞에 닥쳐온 시절, 세계는 대체 에너지 개발에 정신 없이 골몰하고 있었고 그 선두에는 미국과 중국이 앞장서 달리고 있 었다. 한낱 엔지니어조차 미국 따위는 상대도 안 된다고 희희낙락할 정도로 중국의 기세는 하늘 무서운 줄 몰랐다. 그러나 유전이 솟는 바람에 중국의 영광은 깨졌다. 대체 에너지를 향한 세계의 관심은 한결 식었고, 한국은 펑펑 솟는 돈을 바탕으로 기술강국의 튼튼한 토대를 마련했다. 유럽은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 심지어 미국의 우수 인력들이 한국에 대거 몰리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 국책 연구소에서 세계 우수 과학자들을 대거 모 아 대체 에너지 개발에 한창 몰두 중이라는데…. 도대체 얼마나 진 척된 거지?' 한국으로 가겠다고 또박또박 대답하는 손자를 얄밉게 흘겨보며 주석 은 골머리를 앓았다. '유한 그룹하고 중원 그룹까지 대체 에너지 개발에 발벗고 나서는 중이라던데…. 무한동력까지 있는 녀석들이 도대체 왜 그렇게 에너 지에 목메어 안달인지 모르겠군 정말.' 따지고 보면 그놈의 유전 때문이었다. 우수 인력이 빠져나간 것도 만주 지방을 빼앗길지 모른다 눈치를 보게 된 것도 동아시아의 힘이 그 조그만 나라 한국에 쏠리게 될 것도. '요새 들어서는 잠도 안 온단 말이야. 젠장….' 다행스럽게도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와 MIT가 합작으로 초고성능 양자 컴퓨터를 개발해냈다.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다수의 중국인 과학자들 이 귀국하면 막대한 힘이 되어줄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연구의 성 과를 중국과 나누기로 이미 은밀하게 약조를 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카네기 대통령이 자꾸만 연구 자료 제공을 뒤로 미루 는 게 조금 찜찜하군. 조금 더 압박을 넣어볼…까…? 어…라…?' 갑자기 주석은 정신이 흐릿해지는 걸 느꼈다. 국수가락을 집어들던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원망스런 손자 녀석의 상도 비뚤어지고 있 었다. 그리고 그는 의식을 잃었다. 호이즈미 총리는 오랜만에 가족들과 골프를 치러 가고 싶었다. 하지 만 가뜩이나 경제가 안 좋은 판에 그런 사치를 부렸다가는 국민들의 비난을 사기 십상이기에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대신 그는 가족들 과 오랜만에 명문 초밥집을 찾았다. 가족끼리 가지는 식사 자리에도 살벌한 경호원들을 대동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자신은 일본 의 총리였다. 총리는 늘 그렇듯 참치 대뱃살 초밥만 잔뜩 시켜서 아귀아귀 집어먹 었다. 내각의 반대파 녀석들이 봤다면 품위를 모른다고 또 쓸데없는 비난을 퍼붓겠지. 하지만 초밥 하나 먹는데 도대체 무슨 놈의 순서 고 품위고 나발이고를 따진다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물 좀 마셔가면서 드세요. 그러다가 체하시겠어요." 아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총리는 들끓는 짜증을 초밥으로 식혀버리리 라 작정이라도 한 듯 아귀아귀 먹어댔다. 요새는 되는 일이 없다. 미국으로 유학간 막내아들 녀석과 어제 통 화를 했는데, 아 글쎄. 이 녀석이 졸업한 다음에 한국으로 들어갈 생각이라지 않은가. 제깟 녀석 하나 없다고 일본의 과학이니 경제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니지만, 일본 총리의 아들이라는 녀석이 부귀영화 를 탐내 조센징의 나라로 들어간다는 건 국민들의 신뢰를 잃는 지름 길이었다. 그러고 보니 슬슬 100억 달러 차관을 갚아야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 다. 언제까지 갚아야 하는 거였더라. 생각해보니 원래는 올해 3월 달까지 갚아야 하는 거였군. 중국하고 러시아를 구슬려서 압박을 넣 어 만기일을 내년 가을까지 늦췄던 것 같은데. 내각 중 앞뒤도 모르 는 녀석들은 갚을 능력이 안 되니 압력을 넣어서 한 번 더 늦추자고 주장하는 판이고. 하지만 총리는 같은 수법이 두 번 통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한국 은 맥이라는,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모르는 괴상망측한 무기를 갖고 있으니 말이다. FIRE-3 요격 테스트를 봤을 때 그는 경악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군사물에 굉장히 흥미가 있어 밀리터리 오타쿠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터라 한눈에 맥의 군사적 가치를 알아봤다. FIRE-3 요격 따위는 별 것 아니다라고 외치는 반대파 녀석들의 외침은 돼지 멱따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미국이 FRIE-3 단 한 발에 핵탄두라도 달아서 일본 본토를 향해 쏘 아 올린다면 그 날이 곧장 일본 멸망이다. 그런 엄청난 녀석을, 그 것도 10발이나, 게다가 수백km 떨어진 곳에서 레이저 포로 요격한 맥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외치는 정치가는 도대체 제정신인 건가. 100억 달러 차관을 갚을 생각을 하면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가 뜩이나 경제가 침체 된 판에 우수 인력들과 기업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한국으로 떠나버리고 있다. 한때 로봇 공학의 최고 선구자라는 칭호까지 들었던 대일본국이 도대체 왜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지 원. 총리는 입맛이 썼다. 경호원 녀석들 굉장히 고생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초밥 한 개라도 권해볼까. 그런데 늙은이의 주름진 손에 잡혀 짠맛이 나는 초밥을 권하면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총리는 문득 그게 궁금해졌지만 체면 을 생각해 꾹 참았다. 그리고 다시 새로 나온 대뱃살 초밥을 집어 올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라?' 갑자기 눈앞이 몽롱해졌다. 사고의 실타래가 뒤엉키면서 어지러움이 엄습해왔다. 옆에 앉은 아내가 쓰러져 있는 걸 간신히 확인한 뒤, 총리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햇살에 부딪쳐 파도가 우는 소리에 주석은 눈을 떴다. 숙취라도 한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흰 머리칼을 스 치고 지나던 그 순간. 주석은 자신이 바다 한가운데의 요트 안에 있 다는 걸 알았다. "내가 왜 여기에…?" 열린 선실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닷바람이 시원했지만 그것보다는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에 대한 어리둥절함이 더 컸다. 비틀거리며 일 어나던 주석은 옆침대에 중년의 남자가 누워있는 걸 발견했다. 멍한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던 주석은 이내 그가 일본 총리라는 걸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아, 아니 호이즈미 총리?" 놀란 주석은 얼른 총리를 깨웠다. 총리는 심한 숙취에 시달리다 깨 어난 것처럼 힘들게 눈을 떴다. 눈꺼풀을 몇 번 깜박거리던 그는 주 석의 얼굴을 확인하고 크게 놀랐다. "우, 우지타오 주석 아니오? 그대가 여기는 왜…?" 일본인답게 어눌한 영어 발음. 주석은 조금 눈을 찌푸리며 보란 듯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나도 모르겠소. 분명히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중간 에 의식을 잃고 깨어나 보니 여기였소.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 요? 여기는 어디요? 그대는 왜 여기에 있고?" 총리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분명… 본인도 가족들과 함께 초밥집에서 초밥을 먹고 있었는데…. 중간에 눈앞에 몽롱해져서 의식을 잃고…. 깨어나 보니 주석의 얼굴 이 보였소. 이게 어떻게 된 거요? 아니, 도대체 왜 우리가 여기에 있단 말이오? 여기는 또 어디고?" "일단 나가 봅시다. 누군가 우리를 납치한 것 같소. 손발이 묶여 있 지 않으니 아마도 이 배에서 도망칠 순 없다 자신한 모양이오." 주석과 총리는 서로를 부축한 채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무슨 방법을 써서 납치한 건지는 모르지만 머리가 지독히 아팠다. 갑판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망망 대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바다였다. 약 수 km앞에 육지가 보였지만 어느 나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또한 그곳까지 헤엄쳐 갈 자신도 없었다. 바다 속에 상 어라도 서식하고 있으면 어쩌란 말인가. "이제 깨어나셨군요." 흠칫. 뒤에서 들려온 젊은 남자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뒤를 돌아보니 고급스런 테이블에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손에 와인 잔을 들고 웃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서 계실 겁니까? 일단 앉으시지요." 총리와 주석은 직감했다. 저 젊은이가 자신들을 납치한 장본인이라 는 것을. 도대체 무슨 수를 써서 철저한 경호를 받고 있던 자신들을 납치한 건지는 몰랐지만. 쭈뼛거리며 앉는 총리와는 달리, 주석은 호기 있게 앉으며 테이블에 팔꿈치를 걸쳤다. "자네가 우리를 납치해서 여기로 데려왔나? 여기는 도대체 어디지?" "여기는 일본 영해입니다. 그리 먼 곳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아, 하지만 총리 각하와는 달리 주석 님께는 꽤나 먼 곳이겠군요." 총리가 꽤나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 내리는 것과 주석의 얼굴이 일그 러지는 건 사뭇 재미있는 대비였다. "자네는 누구지? 왜 우리를 납치했나?" "제 이름은 앤슨(Anson)이라고 합니다. 별로 대단한 가문이 아니니 성은 아실 필요 없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언제부터 성이라는 게 그런 의미를 지녔다는 건지. 주석은 비웃으려다가 참았다. "일단 노기를 푸시고 이 와인부터 한 잔 드셔보시지요. 이름은 듣자 마자 잊어버렸지만 꽤나 좋은 거라고 구해온 녀석이 말해주더군요. 사실 전 평소에 고급주류를 즐기진 않습니다." 투명한 글라스에 첨벙거리며 담겨지는 붉은 와인. 피처럼 붉은 색. 그 색깔이 마치 자신의 피와도 같다는 끔찍한 상상을 잠깐 떠올린 주석은 속으로 몸부림을 쳤다. "독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두 분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혹은 무슨 이상한 약물 같은 걸 섭취시킬 생각이었다면 주무시는 사이에 주사 기로 해도 그만이었습니다." 선뜻 잔을 집어들지 않는 이유를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머뭇거리는 총리와는 달리, 자존심이 상한 주석은 예법 도 무시한 채 단숨에 들이마시고 쾅 소리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이제 말해보게. 도대체 왜 우리를 납치한 건가?" 앤슨은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두 분께 알려드릴 재미있는 정보가 있어서입니다." "정보? 재미있는?" "총리 각하는 몰라도, 주석 님은 아실 텐데요? 최근 MIT 내에서 비 밀리에 다뤄지는 자료에 대해서요." 주석은 흠칫 놀랐다. 반면 총리는 앤슨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뜬금 없이 MIT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말을 하려면 제대로 똑바로 해." "아, 죄송합니다 총리 각하. 설명해드리죠. 주석 님은 이미 알고 계 셔서 지루하실 테지만 총리 각하를 위해 잠시만 참아주시기 바랍니 다." 앤슨은 와인을 천천히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별로 맛이 없군요. 원래 술이나 와인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아, 쓸데없는 말인가요? 일단 말씀드리죠. 최근 로스알라 모스 연구소와 합작한 MIT는 초고성능 양자 컴퓨터를 개발했습니다. 당장 전세계의 모든 보안망을 깨뜨릴 수 있는 엄청난 녀석이죠." "!!" 총리는 소리 없이 경악했다. 주석은 씁쓸하게 침묵을 지켰다. "총리 각하는 밀리터리 매니아… 아니, 오타쿠이시기도 하니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지요. 아, 밀리터리하고 양자 컴하고는 별 상관이 없나요? 어쨌든 머리에 든 건 돌밖에 없는 정치가 녀석들은 그까짓 게 뭐 어때서라고 반문하지만, 사실 이번에 개발한 양자 컴은 대단 한 것이죠. 실전 배치… 아하하, 저도 요새 밀리터리 쪽에 관심이 많다 보니 이런 단어가 튀어나오는군요. 죄송합니다. 하여튼 양자 컴 녀석이 실용화가 되면 미국이 당장 전세계의 모든 보안망을 쥐고 흔들게 될 테니까요. 실로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총리와 주석은 납치 당했다는 불쾌감도 잊어버린 채 이야기에 몰입 했다. "주석 님. 다수의 중국 과학자들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고 해서 미 국이 그 이득을 중국하고 나눌 것 같습니까? 그들이 지금 주석 님의 비위를 맞추려 애쓰고 있는 게 정말 중국과 양자 컴 연구 개발 자료 를 나누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요. 절대 아닙니다." 주석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중국이 처음에 양자 컴에 대한 권 리를 요구했을 때 미국은 무시했습니다. 명분상으로 봤을 때에도 그 것은 타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석 님은 출혈을 각오하면서까 지 미국의 양보를 얻어내 양자 컴을 손에 넣으려 하셨던 게 아닙니 까?" 이 청년은 어떻게 극비리에 다뤄진 그 거래를 알고 있는 걸까. 주석 은 그게 더욱 신기했다. 겁이 날 정도였다. "…맞네만." "어째서 미국은 처음에 그렇게 나 몰라라 하다가 이제 와서 갑자기 태도를 싹 바꾼 걸까요? 왜 혼자 먹어 삼켜도 상관없을, 그래도 부 족한 먹이를 중국이랑 나누겠다고 한 걸까요? 그리고, 나누겠다 약 속했으면서 어째서 아직까지 차일피일 뒤로 미루고 있는 걸까요?" 주석은 할 말이 없었다. 몰랐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모든 정보 기관 을 총동원해서 미국이 왜 그렇게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지 알아내 려 했지만 소득은 하나도 없었다. 앤슨은 총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총리 각하. 지금 한국은 유전에서 나오는 자금에 힘입어 무섭게 성 장하고 있습니다. 연간 45조 달러 이상의 돈을 뽑아내는 유전으로 마련한 기술 강국의 토대를 딛고 그들은 이제 날아오르려 하고 있습 니다. 아니, 이미 영광의 로켓은 솟아오른 지 옛날입니다." 총리는 진지하게 경청했다. "비록 멍청한 정치가들의 이공계 출신 천대 정책으로 오랫동안 고생 을 짊어지긴 했습니다만 이젠 그것도 없어졌죠. 정치적 원조와 자금 의 풍부함을 바탕으로 삼아 한국은 이제 과학자들이라면 누구나 몸 담고 싶어하는 나라로 탈바꿈했습니다. 일본이 오랫동안 심혈을 기 울여온 로봇 공학 기술도 사실상 지금 한국에 거의 다 넘어가기 직 전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한 번 상상해 보시지요. 세계의 우수한 인력과 IT 산업, 반도체, 소프트웨어로도 모자라 중국의 대체 에너지 기술을 손에 넣고, 일본 의 로봇 공학 기술까지 손에 넣은 한국이 양자 컴퓨터마저 손에 넣 은 경우를 말이지요. 거기다가 지금 한국에는 최강의 군사무기인 맥 까지 있습니다." 총리와 주석은 앤슨이 말한 미래를 상상해보고 몸서리를 쳤다. 유전 을 통해 동아시아의 패자로 우뚝 솟아난 한국이 맥을 손에 넣은 것 으로도 모자라 양자 컴퓨터마저 갖게 된다면, 전세계를 실질적 지배 하는 건 시간 문제나 마찬가지였다. "헌데, 조금 전 자네 말에 의하면 한국이 이미 양자 컴퓨터까지 개 발을 마쳤단 건가?" 주석이 불안한 표정으로 묻자 앤슨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건 아닙니다. 로봇 공학 기술을 흡수하는 것과 대체 에너지 개발, 그리고 맥을 이용해 아시아 여러 나라와 송전계약을 체결하는 것만으로도 지금 한국은 골머리를 썩히고 있습니다. 게다 가 송전계약을 무사히 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간의 신뢰도 중요하지 만 무엇보다 초전도 물질이 개발되어야 하죠. 한국은 지금 양자 컴 퓨터 개발에 정신을 쓸 여력이 없습니다. 물론 양자 컴퓨터 분야에 서 이미 상당히 진척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이미 미국은 양자 컴 개발을 끝냈네. 게다가 자네 말에 의하면 한 국은 연구가 상당히 진척되어 있긴 해도 아직 완료된 건 아니고 말 이야.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걱정인가?" "모르십니까?" "뭘 말인가?" "정말 모르시는군요. 중국의 정보 수집 능력이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었다니, 몹시 실망했습니다." 발끈한 주석은 뭐라 쏘아붙이려다가 그 다음에 앤슨이 한 말을 듣고 굳어버렸다. "미국은 양자 컴 연구 자료를 전부 잃었습니다. 그것은 지금 송두리 째 한국에 가 있죠." Q : 한국이 연구 시설도 좋고 연구원들에 대한 대우도 좋다는 부분 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A : 이 작품은 픽션이며 사실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밝힌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44 회] 날 짜 2004-02-20 조회 / 추천 3586 / 50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바다를 건너온 영광 기가 막힌 표정, 크게 놀란 표정, 당황한 표정, 절망한 표정 가릴 것 없이 온갖 표정이 뒤섞인 채 경악하던 주석은 더듬더듬 입을 열 었다. "그, 그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한국인 과학자는 양자 컴을 한국 이 가져야 한다고 판단, MIT내의 모든 연구 자료를 초기화하고 백업 디스크를 한국에 보냈습니다. 백악관은 축제 분위기에서 당장 장례 식장 꼴이 난 채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죠. 미국이 처음 중국 의 요구를 개무시했다가 곧바로 비위를 맞추려 든 것은 어떻게든 협 조를 얻을 생각에서였습니다." "그 한국인 과학자는 어떻게 되었지?" "연방수사국에 체포되었다가 CIA에게로 신병이 넘어갔죠. 어쩌면 지 금쯤 엄청난 고문에 괴로워하다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이없어진 주석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뒤로 젖혔다.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무사히 풀려날 수 있을까는 걱정거리도 아니었다. 양자 컴퓨터까지 손에 넣고 전세계를 지배하려 들 한국을 어떻게 막 아야 할지 머리가 아팠다. 총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하지만 그건 명백한 범법 행위가 아닌가? 한국이 미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자국을 옹호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 텐데? 스스로 고립되 길 자처하지 않는 이상 미쳤다고 그들이 양자 컴을 훔치겠는가?" "증거가 별로 없습니다. 미국은 양자 컴 공표를 보류한 채 신중하게 행동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도둑 맞아 버린 거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 판국은 한국에 굉장히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건 부 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주석과 총리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들이 안 되어 보였는지 앤슨은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다행스럽게도 한국 정부는 이 일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미국의 분 위기가 어수선해 낌새를 느낀 국정원이 정보 수집 활동에 나섰습니 다만, 미국의 정보 공작에 넘어가 양자 컴 개발을 하지 못한 걸로 판단하고 넘어갔죠." "한국 정부가 모른다니? 자네가 방금 자네 입으로, 한국인 과학자가 모든 자료를 폐기하고 디스크를 빼냈다고 하지 않았나?" "조금 전에 한 말을 뭐로 들으셨습니까? 한국인 과학자가 체포될 것 을 각오하고 자발적으로 자료를 빼돌렸다 하지 않았나요? 그 과학자 의 단독 소행이란 말입니다. 총리 각하는 같은 말을 두 번 이상 들 어야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비웃는 말투에 총리는 할 말을 잃고 얼굴을 붉혔다. 앤슨은 선심을 쓰듯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아직 한국 정부는 양자 컴에 대해 알지 못하니 크게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민간인에 의해 운반된 그 디스크를 무사히 되찾기만 하면 모든 건 원활하게 해결될 겁니다." "그렇지만 한국 정부가 디스크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국정원이 첩보 활동을 벌이던 중 미국에 몇 가지 꼬리를 잡힌 게 있으니까요. 적어도 한국을 몰지각한 국가로 몰아세울 명분은 얻을 수 있습니다." "한국이 미리 대비하고 있을 텐데?" "한국은 지금 꼬리 한 번 밟힌 것 같고 뭐 어떠냐 식입니다. 그들은 양자 컴에 대해 모르고 있으니, 미국이 그까짓 거 갖고 뭐라 하겠냐 별 걱정 않고 있죠." "하지만 그래도…." "하지만이 아닙니다. 지금 저와 두 분께서 당장 해야 할 일은 하루 라도 무사히 디스크를 회수하는 일입니다. 쓸데없는 걱정에 사로잡 혀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왠지 믿음이 가는 듬직한 음색이었다. 주석과 총리는 흥분으로 들끓 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앤슨은 비어 있는 세 잔에 다시 와인을 따랐다. 제일 먼저 그가 와 인 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붉은 향기가 출렁이는 글라스에 따사로운 햇살이 관통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볼까요?" 비릿한 미소와 함께 가벼운 건배가 부딪쳤다. 회의가 끝난 후 앤슨은 다시 올 때처럼 주석과 총리를 재워 돌려보 냈다. 지금쯤 중국과 일본은 발칵 뒤집혔겠지만 국민들의 혼란을 우 려해 그들의 부재를 발표하지 않았을 것이다. 납치한 지 이틀도 안 된 이대로 그들이 돌아가면 납치는 애초에 없던 일로 묻혀진다. "수고했네 앤슨." 노인의 칭찬에 앤슨은 뒤를 돌아보았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하게 난 인상 좋은 노인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로 시트날타를 이끌어 가는 5대 간부 중 한 명인 클랙 존 세자르 반이었다. "아, 대신 님. 보시고 계셨습니까?" "편히 잠 좀 자려 했는데 웬 늙은이 하나, 중년 원숭이 하나가 젊은 남자와 느끼하게 대화하는 게 들려서 말이야. 하품 몇 번 하다가 그 냥 포기하고 일어났네. 휴. 졸려 죽겠군. 늙으면 잠이 없어진다는데 나는 왜 이렇게 잠이 많은지 몰라." "그건 대신 님이 젊다는 증거겠지요." "그거 빈말이라도 참 고맙구만. 듣기 좋아." "한 잔 하시겠습니까?" "됐네. 늙은 몸에 술을 마시면 좋지 않아. 이래 보여도 나는 꽤나 오래 살고 싶어 버둥거리는 불쌍한 늙은이라구." 정정한 걸 보면 아직 이십 년은 까딱없어 보이는데요. 앤슨은 터지 려는 웃음을 참으며 와인 병을 다시 내려놓았다. "평화로운 무인도에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노닥거리다가 자네 부탁 을 받고 눈썹 휘날리도록 날아오긴 했네만, 도대체 자넨 지금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겐가?" "죄송합니다. 아직은 발설할 단계가 아닙니다. 근데 언제부터 하와 이가 평화로운 무인도가 된 건가요?" "에잇, 말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 것이지 왜 꼬투리를 잡고 그러나. 자네도 제나르를 닮아 가는 건가?" 오래고 긴 추억을 머금은 바닷바람이 늙은 머리칼을 매만진다. 가뜩 이나 생기를 잃어 가는 머리칼이 세월을 닮은 소금기와 뒤섞이면 더 늙게 될까. 클랙은 손을 휘휘 내저어 바람을 쫓아냈다. 어깨를 스치는 흐름에 한숨을 흘려보낸 그는 정색했다. "폐하께서 위중하시다." 앤슨은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몹시 걱정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올해 안으로 혁명을 완수해야만 한다. 하루빨리 엔젤을 찾아야만 해." "압니다." "내 말은, 자네가 뭘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중국 주석과 일본 총리를 납치해서 협박하거나 회유하는 일 따위로 시간과 정력을 낭 비할 수는 없다 소리야." "압니다." "자네가 벌이는 일,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에게 설명을 해주지 않으 면 그 누구도 내가 팔소매 걷고 돕는 걸 납득하지 않을 거야. 공명 신수를 지닌 나는 우리 민족의 귀중한 전력이다. 알고 있나?" "압니다." "그럼 말해보게. 도대체 지금 자네가 노리는 게 뭔가?" "그건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완강한 거부에 클랙은 입맛이 썼다. 앤슨은 요새 젊은이답지 않게 치기는 없지만 노인에게 없는 대담함이 있다. 또한 연륜이 섞인 노 련함은 없지만 다른 젊은 녀석들이 갖지 못한 신중함을 품은 녀석이 다. 어렸을 때부터 봐왔지만 클랙은 누구보다 앤슨 이 녀석이 마음 에 들었다. "자네 부친께서는 지금 자네에게 굉장히 기대를 걸고 계셔. 모르는 사람들은 자네 누이동생인 엘르가 크레시오 가문이 최초로 배출하는 5대 대신이 될 거라 기대하고 있지만, 난 달라. 자네야말로 5대 대 신이 될 만한 그릇을 갖추고 있는 인물이야." "칭찬 감사합니다. 하지만 대신 님." "응?" "아부하셔도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멋들어지게 칭찬을 늘어놓았으니 이만하면 녀석이 감사해 어쩔 줄 몰라하며 꿍꿍이를 털어놓을 거란 기대는 그렇게 꽝이 되어버렸다. 속마음을 너무 손쉽게 들켜 버린 클랙은 당황함을 감추기 위해 허허 웃었다. "아부라니? 내가 도대체 어디가 부족해서 자네 같은 햇병아리에게 아부를 한단 말인가? 자넨 지금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게야." "클랙 님은 원래 궁금한 걸 못 참으시는 성격이잖습니까? 뜯어져 나 간 옛날 신문 기사가 뭔지 궁금해서 몇 날 며칠 동안이나 사람들을 달달 들볶아 결국 냄비 받침에서 신문 조각을 찾아낼 정도로 집요한 분이니까요." "끄응…." 주름진 얼굴 사이로 빠져 나온 당황함이 참 재미있다. 사람들은 5대 대신이라 하면 그 위명과, 공명신수를 다루는 뛰어난 에날도스를 우 러러 보며 부러워하지만 앤슨은 달랐다. 그는 저 나이가 되도록 인 간이 저렇게 순수하고 웃음이 많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부 러웠다. "대신 님." "응?" "저는 오랫동안 혁명을 꿈꿔 왔습니다. 책을 읽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자기 전에도 심지어는 꿈을 꿀 때에도 말입니다." 클랙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허락된 땅 안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한 채 잃어버린 태양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저희 아버님을 볼 때마다 저는 항상 괴로웠습 니다." 그 괴로움, 클랙도 안다. 같은 민족으로서 어찌 그것을 모르겠는가. "제 어머님께서는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태양을 한 번 보고 싶어하 셨지요. 임종하셨을 때 미처 감으시지 못한 눈을 이 손으로 감겨 드 릴 땐 무력한 제 자신이 정말 싫었습니다." 분노의 힘을 빌어 자라난 격한 떨림에 앤슨은 주먹을 꽉 쥔 채 부들 부들 떨었다.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얼음처럼 차가운 눈동자 로 클랙을 주시했다. "당장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믿고 도와주십시오. 저 역시 미칠 듯 혁명을 갈구하는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일원입니다." 혈관을 도려내어 그 피를 악마에게 바치고. "대신 님. 저 태양이 보이십니까?" 심장을 파헤쳐 그 안에 뛰는 생명을 씹어 삼키고.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지옥의 불구덩이에 영혼을 던져 넣어도. "갖고 싶습니다. 저 태양을 갖고 싶습니다. 저희 아버님, 삼촌, 어 머님의 영전, 할아버님의 영전, 할머님의 영전, 조상 님들의 영전 가릴 것 없이 우리 모든 민족에게 이 아름다움을 함께 누리게 하고 싶습니다." 가질 수 없었던 것. 태양. "그리하여 우리를 저버린 신의 가슴에 복수의 칼을 꽂을 겁니다."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수명을 수없이 이어가며 일만 년이 넘도록 미 칠 듯이 태양을 갈구했다. 하지만 그것은 손을 내밀면 내밀수록 더 욱 더 멀어지는 신기루와도 같은 것이었다. "제가 헤이져가 되던 날 아버님께서는 저를 붙들고 우셨습니다. 당 신께서는 결코 보지 못했던 태양을 볼 수 있다는 걸 그렇게나 부러 워하면서도 또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처음 지상에 나오던 그 눈부 심은 아직도 제 기억에 선명합니다." "…나도 그랬지." 클랙은 끄덕였다. 자신도 처음 지상에 나왔을 때, 그 눈부신 찬란함 이 공허한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따뜻하게 데워주지 않았던가. "아직은 묻지 마시고 기다려 주십시오. 혁명은 반드시 이 손으로 일 궈 내겠습니다." 앤슨은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태양을 움켜잡고 싶어하는 손이었다. 불꽃의 열기를 깊이 숨긴 채 싸늘하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를 주시하 던 클랙은 등을 돌렸다. "난 들어가서 못 다한 잠이나 자야겠어. 시차 적응이 안 돼서 아직 도 피곤해." 앤슨은 들뜬 흥분을 가라앉히며 허리를 숙였다. "편히 쉬십시오 대신 님. 주무시는데 방해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자네도 몹시 피곤해 보이는데 좀 자두는 게 좋을 거야. 혁명을 완 수하기도 전에 우리 시트날타의 귀중한 인력이 쓰러지는 건 원치 않 거든." 말을 마치고 클랙은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앤슨은 붉은 와인이 담 긴 잔을 들어 태양에 비춰보았다. 정오에 걸려 있던 태양은 어느새 새빨간 그늘로 변해 서쪽 지평선으로 기울고 있었다. "시트날타…라…." 시트날타. 신에게 버림받은 그 날, 태양을 잃은 수치심과 절망을 잊 지 않고 뼛속 깊이 깊이 새겨두기 위해 이름 없는 한 역사학자가 지 었다는 이름. "시트날타…." 발음하기 좋은 것도 아니고 멋진 것도 아니고 그 자체로 어떤 심오 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앤슨은 그 누구보다 도 이 이름을 사랑했다. 바보 같다고 하겠지만 「시트날타」라는 이 름을 포기하지 않는 한 신은 영원히 자신들을 외면할 수 없으리라는 한 가닥 기대 때문에. 그때 뒤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바다를 건너온 영광은 다음 편이 끝이구요. 흠..짐작하시는 분들 은 아시겠지만 양자 컴 설계도는 반드시 영광으로 자리잡지만은 않는답니다. 굳이 그럴 거면 미국에서 강탈할 필요 없이 한국내 연구소에서 자체 개발하도록 했을 테니까요.^0^ (그건 네타야 이놈아!) 혹시 반야님, 1부를 읽으셨나요? 궁금-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45 회] 날 짜 2004-02-21 조회 / 추천 3729 / 80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바다를 건너온 영광 앤슨은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누 가 말을 걸었는지 알 수 있었다. "혁명이 이뤄질 순간을 생각하고 있었다, 레이온." "혁명이라… 당신은 정말 혁명을 이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순간 앤슨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눈동자가 뒤집힌 채 레 이온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얼굴을 바짝 들이댄 그는 거칠게 으르렁 거렸다. "그 잘난 입으로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레이온! 네까짓 게, 네까짓 게 우리 민족이 얼마나 혁명을 목말라했는지 알기나 해! 우리는 반 드시 혁명을 완성하고 만다!" 레이온은 멱살을 잡힌 채 말이 없었다. 어쩐지 안쓰러워하는 듯한 표정. 그래서 더욱 비웃는 것 같은 얼굴. 약 6년 전 처음 그를 만났 을 때부터 지켜봐 왔던 표정이었지만 앤슨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 았다. '바보 같이….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낸단 말이냐, 앤슨?' 스스로가 한심해진 앤슨은 쓴웃음을 지으며 멱살을 놓아주었다. "후. 그만두자. 너랑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항상 내가 바보가 된 듯 한 기분이니." "웃겨. 너무 웃겨. 건드리기만 해도 꺼져 버릴 거품 같은 꿈에 그렇 게 얽매여 버둥거리는 꼴이 말이야." "혁명은 거품이 아니야." "거품이지. 싸구려 비눗방울로 만들어낸 거품보다 덧없는 거품." "그런 말을 하다니, 용기가 가상하군 레이온. 좋아하던 여자가 떠나 는 것도 못 붙잡아 우는 것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던 그 나약한 꼬 마가 이렇게 변했을 줄이야." 조금 전 도발에 대한 보복인가. 노골적인 비웃음이 레이온의 아픈 상처를 들쑤셨다. "한 번만 더 그런 소리하면 죽여버리겠어." "이런이런. 너무 그렇게 야박하게 굴지 말라고 레이온. 어차피 우리 는 비슷한 목적을 가진 동업자잖아?" 언제부터 너의 목적과 나의 목적이 비슷했다는 거냐. 레이온은 분함 도 잊고 쓴웃음을 지었다. "너와 난 약속하지 않았나? 나는 너에게 유젤을 복제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대주겠다고. 너는 우리의 혁명을 완성해주겠다고." "그랬지." 바짝 몸을 기대고 선 앤슨은 레이온의 귀에 입을 가까이 가져가 속 삭였다. "그런데 지금 네 이 태도는 뭐지? 혁명은 거품이라고?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우리 민족에게 그딴 발언을 함부로 해대면 목숨이 위험하 다는 것도 아직 깨닫지 못했나?" 그렇다. 시트날타 인이라면 모두 자신의 목숨을 바쳐 혁명을 이뤄내 고 싶어한다. 혁명은 거품이라 비웃는 건 바로 그들의 끝없는 분노 를 사는 길이다. "약속하긴 했지.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다 레이온." 말을 가로챈 앤슨은 피식피식 웃으며 다정한 손길로 그의 어깨를 툭 툭 털어 냈다. 있지도 않은 먼지를 털어 내는 그 손길. 그것은 레이 온이 지니고 있는 시트날타에 대한 경계심을 닦아내는 의미였다. "우리를 두려워하지 마라, 귀여운 꼬마. 우리는 결코 엔젤… 아니, 유젤에게 그 어떤 해도 가하지 않아. 혁명이 끝나면 유젤은 우리 민 족의 염원을 이뤄준 메시아로서 영원히 추앙 받을 것이다." "박제로 만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 뜻밖의 말에 앤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내 키득키득 웃 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재미있는 상상이군. 그래, 과연 그것도 나쁘지 않겠는걸? 엔젤을 해부해 내장을 발라내고 방부제와 솜으로 그 안을 채운 다음 영원히 아름다운 천사의 박제로서 황궁에 모셔두는 것도 나쁘진 않 겠어." 레이온은 침묵을 고수했을 뿐 화를 내지 않았다. 뭐가 좋은지 혼자 키득키득 웃던 앤슨은 이윽고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그 자리에는 분노가 대신 떠올랐다. "그런 터무니없는 상상 때문에 아직까지 우리에게 마음을 열지 못한 거냐? 바보 같구나. 어리석어, 정말 어리석어. 우리는 자존심을 소 중히 여기는 긍지 높은 민족이다. 우리에게 태양을 찾아준 소중한 메시아를 박제로 만든다는 역겨운 일 따위는 그 누구도 하지 않아." "난 너희들을 믿을 수 없어." "믿어! 넌 무조건 우리들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 도 친구를 배신하지 않아!" "과연 그럴까? 너희들 역시 인간인데?" "닥쳐! 우리를 에날도스도 없는 하찮은 지상인들과 동격으로 취급하 지 마!" 사나운 표정으로 쏘아붙이던 앤슨의 얼굴이 돌연 부드럽게 변했다. "설마 걱정하고 있었던 거냐? 우리가 너를 배신할까 봐?" "…." "가여운 아이구나 레이온은." 앤슨은 비뚤어진 어린아이를 위로하듯 느릿한 손길로 레이온의 하얀 뺨을 어루만졌다. "버림받은 아이야.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네가 원하는 행복은 언젠 가 반드시 너에게도 찾아갈 것이다. 내가 꼭 그렇게 만들어 주마." "정말… 그랬으면 좋겠군." 레이온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앤슨은 쓴웃음을 지었다. '많이 변했구나 레이온.' 사랑하던 여자로부터 버림받아 울기밖에 할 줄 모르던 나약한 녀석 이 언제부터 이리도 차가운 눈빛을 지니게 된 것인가. '걱정하지 마라. 혁명이 끝나면 엔젤은 영원히 너의 것이 될 테니.' 언제부터 이렇게 차갑게 웃을 줄 알게 된 것인가. '설령 시체가 된다 해도 말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듯 마음을 열지 않게 된 것인가. 이 녀석이 과 연 6년 전의 그 나약한 꼬마란 말인가. "레이온. 마음을 편히 가져라." 앤슨은 진심으로 그를 가여워했다. 다정히 그의 어깨를 매만지는 손 길마다 동정이 뚝뚝 흘러 넘쳤다. "걱정하지 마라. 난 너를 배반하지 않는다. 아니, 우리 민족은 너를 배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앤슨은 웃었다. "우리는 형제잖아?" 형제. 형과 동생. 같은 씨앗에서 퍼져 나와 번성한 개체들을 일컫는 말.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널리 쓰이는 축약된 의미. 하지만 레 이온은 그 형제라는 말이 어떤 복잡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그건 앤슨도 마찬가지리라. "6년 전의 약속. 난 아직도 그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레이온.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반드시 너에게 행복을 주겠다." 앤슨은 레이온의 등을 두드려주고 그대로 지나쳤다. 우두커니 서 있 는 레이온의 등뒤로 짤막한 한 마디가 울렸다. "형제끼리는 서로 속이지 않는다." 우두커니 서 있는 레이온의 등뒤로 앤슨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제야 그는 한숨을 내쉬며 앤슨의 손이 닿았던 뺨을 어루만졌다. "형제라…." 그의 손길이 이렇게 따스하게 느껴진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어쩌 면 내 진심은 저 남자를 끝까지 믿고 싶어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건 안 돼." 맞다. 그래선 안 된다. 그건 나 자신에 대한 약속이지 않은가. "…믿을 수 없어. 아무도 믿을 수 없어." 그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 나보다 더 소중한 사람의 말조차도 믿어 선 안 된다. 과거에도 그랬지 않았나. 「유젤」은 그렇게 너무나도 쉽게 떠나버리지 않았던가.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나 뿐이야." 어느덧 지평선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별을 수놓은 우주 한가운데 아름답게 떠 있는 달을 볼 수 없으리라. 그건 이제 더 이상 밤이 찾아온다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는 뜻. "밤이군. 벌써 밤이야." 어둠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에 하나 둘씩 별이 나타나고 있었다. 멋 진 전설과 아름다운 신화를 담고 있는 신비한 은하수가 장황하게 펼 쳐졌다. 하지만 푸른 은하수 한편에는 영원히 형제를 잃어버린 지구 의 외로움까지 너무나 솔직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그래서 하늘을 올 려다볼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혼자인 건 없다. 그 무엇도 혼자는 아니다. 모든 걸 잃고 방랑을 떠 나는 여행자조차도 어둠이 찾아와 등을 지고 누우면 밤하늘의 별들 이 함께 해주지 않던가. 암벽 위에 홀로 피어난 꽃조차도 아침에는 따뜻이 보듬어주는 태양이, 저녁에는 계곡의 추억을 실어 나르는 바 람이 함께 해주지 않던가. 그러나 지구는 혼자다. 긴 시간을 함께 해온 달은 11년 전 결별을 선언하고 6년 전 허물 수 없는 울타리를 둘러버렸다. 저주에서 벗어 나고자 하는 선택받은 천재들이 탄생시킨 아담에 의해. "쿡쿡쿡…" 왜 그렇게 웃었을까. "왜 이따위 생각을 하는 거냐." 혼자가 된 지구를 비웃는 밤하늘이 유치해 보여서? "어차피." 당당하게 혼자 살아가는 우주의 무수한 항성들이 부러워서? "모든 건." 그것도 아니면, "처음부터.' 지구와 자신은 여전히 형제라고 달콤한 거짓을 속삭이는 「에덴 혹 성」의 실루엣 때문에? "혼자잖아." 어둠으로 뒤덮인 밤하늘의 공허함을 올려다 볼 때마다 항상 터져 나 오는 비웃음. 그것은 유젤의 그림자를 쫓아 자신을 속박하는 마지막 굴레마저 벗어버리려는 괴로운 몸부림이었다. 한수는 그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애초에 '반드시 이 교수에게 디스 크를 전달해야 한다'는 부탁을 받은 거였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으니 문제다 문제. 노스나 리는 어떤 사람, 어떤 회사에 전달되든 그게 한국의 영광으 로 이어진다면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서울대 이병원 교수가 양 자 컴퓨터 권위자이기에 기왕이면 그에게 전하는 게 가장 좋을 거라 말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춘식은 디스크를 자신이 집어삼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중매를 서겠다고 했을 뿐이지 않은가. "잘 잤나?" "아, 아저씨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보아하니 자네는 편히 못 잔 얼굴이군. 왜, 밤에 잠자리가 나쁘기 라도 했어?"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평소에 안 쓰던 머리를 돌리려다 보니 터 질 것 같이 괴롭군요." "그래도 이 나이에 녹슨 대가리 굴려가면서 사업하느라 죽어나는 나 보다는 더 나을 걸세. 아직 자네는 팔팔한 삼십대잖아." 춘식은 초봄의 쌀쌀함에 온기를 빼앗긴 장판 위에 앉았다. 가벼운 긴장이 그의 눈동자를 훑고 지나갔다. 한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난밤에 많이 생각해봤습니다." 춘식은 바짝 긴장했다. 대충 어떤 대답이 나올지 짐작하지만 그래도 손바닥에 식은땀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저는 특별히 남들보다 더 나라를 사랑한다거나 아니면 희생 정신이 뛰어나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남자라면 한 번 씩 갔다오는 군대에서 2개월 간 복무한 것과 세금 같은 거 떼어먹지 않고 꼬박꼬박 낸 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제가 행한 의무의 전부나 마찬가집니다." "뭐, 국민으로서의 의무는 다했군."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현재는 미국에서 살고 있긴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살 거라고 다짐했었습니다. 지금에서야 그 꿈 이 이뤄졌지만요." 춘식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아마 7년 전쯤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와 함께 미국에서 조그만 가 게를 하나 꾸려 가면서, 풍족하진 않아도 그다지 어렵진 않게 살고 있었습니다. 운 사납게도 인종 차별이 심한 동네에 뿌리를 내렸지만 저희 가족만 황인종인 것도 아니니 그럭저럭 서로 위로하면서 살아 가고 있었죠. 근데 갱 녀석들 때문에 그 행복이 너무 어이없게 깨졌 습니다." 가족을 잃은 분노를 상기하며 한수는 피가 나도록 주먹을 세게 꽉 쥐었다. "가게에 쳐들어온 갱 녀석들의 요구에 아내는 겁에 질려 그저 멍하 니 서 있었는데 녀석들은 빨리 빨리 움직이지 않는다고 총을 쐈습니 다. 즉사였습니다. 차라리 어깨 같은 곳을 쐈으면 뭐가 덧난다고, 빌 어먹을 자식들, 하필이면 이마에다가…." 한수는 울분을 참느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가여운 마음이 든 춘식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미국 녀석들은 우리가 미국 시민도 아닌 영주권자라는 이유 하나만 으로 수사가 어려워지자 곧바로 미궁이라 처리하고 물러나 버렸습니 다." "이해해. 자국 시민도 아니니 뭐 어떠냐 하고 넘어갔겠지." "세 살 난 흰둥이 사내 녀석이 흑인 남자한테 희롱 당할 땐 너도나 도 할 것 없이 들고 일어서면서, 제 아내와 아이가 갱 녀석들 총에 맞아 죽었을 땐 왜 그렇게 넘어가는지…." "쯧쯧쯧. 정말 안 됐군." "만약, 정말 만약에 유전이 2년만 더 일찍 솟았더라면 수사가 그렇 게 조기 종결될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갱 녀석들도 감방에 처넣어줄 수 있었을 테구요." "고생이 참 많았군, 자네." 한수는 붉어진 눈시울을 손가락으로 감추며 덧붙였다. 떨림이 많이 사그라진 음색이었다. "전 특별히 부귀영화 같은 걸 원하지 않습니다. 아무쪼록 제가 가져 온 이 디스크가 한국의 비수가 되어 미국 녀석들의 심장을 겨누었으 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 디스크 때문에 한 미간에 전쟁이라도 일어나 맥이 워싱턴을 짓밟고 뉴욕을 불태웠으면 합니다." "이해해. 나라도 그랬을 거야." "부디 잘 써주십시오. 특별히 무언가 대가를 바라고 드리는 게 아닙 니다. 아저씨가 절 도와주셨기도 했지만, 일단은 한국인이기에 이 디스크를 드리는 겁니다." 말을 마친 한수는 망설임 없이 품에서 디스크를 꺼내어 내밀었다. '이거 좀 미안한 걸.' 춘식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한수를 이용해 예안에게 인정받으 려 한다는 양심의 가책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눌러왔다. "고마워. 자네 소원대로 멋지게 미국 녀석들에게 한 방 먹이지. 미 국이라면 이를 바드득 가는 나라가 한 둘이 아니니, 그런 나라들에 게 양자 컴을 몇 대만 갖다 팔아도 당장 미국은 무너져 버리고 말 거야." "아랍권 나라를 적극 추천합니다. 특히 이라크를 강추하지요. 거기 에 양자 컴 몇 대만 갖다 팔아도 당장 미국은 무너지고 말 겁니다." "아마도 정부의 강력한 규제가 있겠지만 적극적으로 생각해보지. 그 리고 어차피 한국도 미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니 어떤 면에서는 싫어하는 편이니까 아마 가능할 거야." "다행이군요. 하루빨리 미국이 망하길 빕니다." 둘은 말로만 그렇게 했을 뿐,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 하지 않았다. 국가 간의 일이라는 게 그런 감정적인 차원에서 진행 되는 건 아니니까. "자네 딱히 한국에 머무를 곳 없지? 일단 정해질 때까지는 내 집에 서 지내는 게 어떻겠나? 아니, 아예 내 집에서 사는 건 어때?" 한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나이도 있는데 폐를 끼칠 수는 없지요. 하 지만 성의는 감사합니다. 그럼 집을 구하기 전까지 만이라도 아저씨 께 폐를 끼치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와중에도 맹렬히 앞으로의 일을 궁리하는 걸 보면 천상 어쩔 수 없는 사업가 체질인 모양이다. 월급쟁이 노릇할 때 상부와 자주 부딪쳤던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설문 하나 추가입니다. 많이 참여해주세요.)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46 회] 날 짜 2004-02-23 조회 / 추천 3874 / 61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가장 소중한 것 "휴우."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자정이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는다. "유빈아. 자?" 아기와 마주본 채 옆으로 돌아누운 예안은 아기의 뺨을 쿡쿡 찔러댔 다. 포근하게 자고 있는 아기를 보고 있으니 왠지 심술이 났다. "엄마가 고민 좀 하려 하니까 그렇게 괴롭히더니, 이제 다 끝났다고 자는 거야? 너무해 너." 아기한테 위로 받은 주제에 이런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참 뻔뻔하기 도 하다. 예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잠든 아기의 자그마한 손을 살며 시 어루만졌다. 문득 혜인이 생각났다. '잘 지내고 있겠지?' 우연히 잡지에서 혜인의 소식을 접하게 된 후로 며칠이 지났다. 그 동안 예안은 제대로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밤이 찾아오면 울먹이 던 혜인의 눈빛이 떠올라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차라리 그녀에 게 모든 걸 속시원하게 털어놓고 용서를 빌자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 아기가 조금씩 뒤척인다. 예안은 이제 손바닥보다는 조금 더 큰 아 기의 배를 살포시 보듬었다. "고마워 유빈아." 다행히 그런 괴로움은 며칠 지나지 않아 떨어져 나갔다. 과거를 붙 잡고 아파할 때마다 아기가 어떻게 알고 우렁차게 울어 젖히곤 했기 때문에. 아기를 달래주고 달래주다 보면 어느새 괴로운 기억은 잊혀 졌고 예안은 그렇게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우리 유빈인 참 영특하기도 하지. 벌써부터 지 엄마 위로할 줄도 알고." 세상 모르고 평화롭게 잠든 아기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예안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아기의 뺨에 살며시 입술을 댔다. 이대로 확 깨워서 모자지간에 오붓하게 밤새도록 놀까 생각하던 중, 야속하게 핸드폰이 울렸다. "에이씨, 이 시간에 누구야?" 투덜거리며 발신인을 확인해보았다. 춘식이었다. "아저씨. 지금 시간이 몇 신지나 아세요?" 「아, 미안 미안. 늦은 건 알지만 너무 기쁜 소식이 있어서 내일까 지 기다릴 수 없었거든.」 늘그막에 늦둥이라도 낳은 듯 들뜬 음색이었다. 예안은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무슨 일인데요?" 「기뻐해라! 드디어 한수한테 설계도를 받았어! 지금 설계도는 이 아저씨 손에 있다!」 "그래요? 잘 됐네요." 예안은 별로 기쁘지 않았다. 뭘 그런 걸 갖고 그렇게 기뻐하냐고 핀 잔하고픈 충동까지 들었다. "근데요 아저씨. 한수라는 사람이 아저씨네 집에 온 뒤로 미국인이 또 찾아온 적 없어요?" 「없는데? 왜, 신경 쓰이니? 걱정하지 마. 그 날 저녁에 내가 잘 둘 러댔으니 그 녀석들은 설마 한수가 우리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한수는 그 날 이후로 우리 집에서 한 발 자국도 나간 적 없어.」 "그래도…." 괜히 불안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입술을 깨물던 예안은 알았다는 한숨을 토해냈다. "알았어요. 전 아저씨만 믿고 있을 테니까 잘 처리해주세요." 「그래, 넌 마음 푹 놓고 있기만 하면 돼.」 전화를 끊은 뒤 예안은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누웠다. 드문드문 새겨 져 있는 꽃무늬가 조금씩 보였다. 스산하게 매달려 있는 어둠에 눈 이 익은 지는 이미 오래였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유니콘 네 인공두뇌는 양자 컴퓨터보다 얼마나 더 뛰어나지?" 「제 인공지능은 전에 잠깐 말씀드렸다시피 뉴런형 컴퓨터를 기본으 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양자 컴퓨터와는 성능 면에서 비교가 안 되 지요.」 "어떻게?" 「한정된 공간 안에 얼마나 작은 회로를 빽빽하게 심어 넣느냐가 관 건인 고정 컴퓨터와, 역시 별다를 것 없는 양자 컴퓨터. 그것들과 저를 비교하는 건 저를 모욕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얼마나 대단한 거냐구 지금 묻고 있잖아." 「태양계 최강의 전투력과 시냅스 구조를 자랑하는 저, 정식 명칭 Moving Armor Craft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기초적인 인공지능에서부 터 구인류의 문물과는 확실하게 차이가 나는 뉴런형 컴퓨터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자화자찬으로 시작한 자칭 천하무적 시스템 설명회. 「신경세포는 핵과 그 주위의 세포질로 이루어지며, 세포체 또는 주 핵체라고도 불리죠. 또, 돌기에는 보통 짧은 수상돌기와 긴 축색돌 기, 이렇게 2종이 있지요.」 "근데?" 「기능적으로 신경세포와 수상돌기는 보통 하나로 묶어 취급됩니다. 정상적인 흥분의 전도는 신경체에서 축색을 향해 일어나며, 시냅스 를 거쳐 전도되어 다음 뉴런의 신경체 또는 효과기에 흥분이 전도되 죠. 이와 같이 뉴런은 시냅스에 의해 다른 뉴런과 기능적 연락을 가 지며 반사궁을 형성하여 신경계로서의 기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슬슬 짜증이 날 판이었다. 아무리 두뇌'만'은 천재라고 해도 배우지 도 못한 소리를 솰라솰라 늘어놓고 있으면 화가 나기 마련이다. 「기본적으로 이런 뉴런의 구조와 기능에 착안하여 만들어진 게 저 의 인공지능을 담당하는 뉴런형 컴퓨터입니다. 각각의 로데늄은 자 연 상태에서는 딱 붙어 있습니다. 하지만 인위적인 강제력으로 각각 떨어뜨려 놓으면 로데늄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이(異)차원 에너지 실 버넷이 발현하게 되죠.」 "응." 「…끝입니다.」 "…그게 끝?" 「네. 끝입니다.」 주핵체니 축색돌기니 수상돌기니 어쩌구저쩌구 하는 거드름을 잔뜩 늘어놓으며, 뭔가 아주 엄청나고 대단한 게 있을 폼만 잔뜩 잡아놓 고는 그게 끝이란다. 이걸 확 쥐어 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예안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나는 네가 좀더 자세하고 쉬운 설명을 해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 는데? 유빈이 깨는 거 각오하고 이 밤중에 고함이라도 질러야 더 설 명해줄 거냐?" 「일반적으로 이(異)차원에서 현세로 발현한 실버넷을 스파크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한 번 떨어진 로데늄들이 다시 달라붙지 않도록 하며, 자극을 전달하는 시냅스 역할을 하죠. 더 해드려요?」 "…됐어. 마지못해 해주는 설명 따윈 필요 없어." 유니콘은 다소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동일성 극소립자론의 심층적인 이론은 아직 유젤 님이 이해하실 수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최초로 이것을 정립한 사람조차도 몇 년 이 걸렸으니까요.」 아마 인간이 만들어낸 아담, 케이를 말하는 것이겠지. 예안은 쓴웃 음을 지었다. "너 지금 내가 바보라고 놀리는 거지?" 「천만에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누차 말씀드리지만 유젤 님은 지구상의 누구보다도 뛰어난 두뇌와 육체를 지닌 신인류 입니다. 자신이 바보라는 말씀은 꿈에서라도 하셔선 안 됩니다.」 신인류로서의 자긍심을 지키라는 건가. 왠지 쓴웃음이 나온다. '사실 그런 쪽으로 보면 난 구인류인데… 신인류는 어디까지나 예안 이잖아….' 팔꿈치로 머리를 지탱하고 옆으로 누운 예안은 아기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유젤이 죽지 않고 둘이서 함께 이 아기를 키우고 있다 면 얼마나 행복할까. 괜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칫. 바보 같이.' 울지 않기로 했으면서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예안은 서둘러 눈 가를 찍어냈다. "근데 우리 유빈이 정말 빨리 빨리 자란다. 그치? 낳을 땐 고양이 새끼만 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큰 거야?" 「지원씨가 들었다면 아마 입에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을 겁니다. 생 후 삼 개월 된 아기가 다른 신생아보다 크기가 더 작은데, 막상 그 생모는 빨리 빨리 자란다고 감탄이나 하고 있다고요.」 "시끄러워. 아직 좀 작은 게 뭐 어때서 그래? 곧 금방 금방 자라서 나보다 키도 더 커질 거라구. 아주 멋진 남자로 클 거야." 「미소년으로 성장하면 뭐합니까. 그래서 온갖 여자들을 꼬시고 다 닐 텐데요.」 "웃기지 마. 우리 유빈이가 그런 바람둥이로 자랄 것 같애?" 「벌써부터 유젤 님만 해도 온갖 남자들을 유혹하며 다니지 않습니 까? 그걸 보면서 자란 아들이 과연 바람둥이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 이 어디에 있나요?」 예안은 발끈했다. "내가 언제 그랬어?" 「흐응, 예를 들어 볼까요? 일단 첫 타자로는 게임 친구인 김재원씨 가 있군요. 유정우, 유준우, 유현우, 그리고 영국의 앤드류 왕자가 있으며 국정원의 김중현씨, 지금은 유학 가고 없는 차세현씨도 빠뜨 려선 안 되지요. 게다가 시트날타의 마리오도 은근히 마음이 있던 것 같았고 엘르는 이미 입술까지 바쳤던가요? 특히 작년 유정우의 생일 파티에서는 상류층 자제들을 눈짓만으로 얼빠지게 만드셨습니 다만? 그게 압권이었군요.」 생각 같아선 이놈의 주둥이를 확 틀어막아 버리고 싶다. 그러나 구 구절절이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결국 백기. "…너랑 말 안 해." 「패배자의 말로는 비굴한 법이지요.」 "닥쳐. 안 그럼 시스템을 해킹해서 바보로 만들어 버릴 거야." 「재주 있으면 한 번 해보시죠.」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닭이 미쳤나 보다. 아직 새벽 1시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목청을 뽑아 젖히다니. '근데 아파트 단지에 웬 닭 우는 소리냐?' 속으로 피식피식 웃던 예안은 가만히 말했다. "유니콘." 「네. 말씀하십시오.」 "고마워." 어둠 속에 잔잔하게 가라앉은 녹색 눈동자가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네 도움이 없었으면 난 이런 호화로운 생활은 꿈도 못 꿨을 테고, 유빈일 낳는다는 생각도 못했을 거야. 너한텐 정말 고마워." 「세계 제일의 부자가 이런 아파트 하나 갖고 호화롭다 말씀하시면 안 되죠. 그리고 전 출산에 도움 드린 게 없습니다.」 "정우 형네 중 하나 골라잡아서 식 올리지 않는 이상 출산은 불가능 했겠지. 아니면 앤드류와 딴따따라도 하던가. 유전을 받지 못했다면 아마 나는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유빈일 지워버리고 말았을 거야. 어쨌든 그때의 난 애 키울 능력이 안 됐으니까." 「지금은 행복하신가요?」 "…그래. 행복해. 이게 다 네 덕분…." 「정말 행복하신가요?」 중간에 말을 자르고 들어온 추궁에 예안은 말이 막혔다. 유니콘은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정말 지금 행복하신가요?」 "…." 짧은 한숨을 끊임없이 토해내던 예안은 몸을 일으켰다. 투명한 유리 창을 두드리는 별빛이 책상 위로 하나 둘씩 쌓이고 있었다. "사실 모르겠어." 「….」 "혜인이… 혜인이가 신경 쓰여. 그대로 내버려둬도 될까? 정말 그래 도 될까? 나, 혜인이 만나서 용서라도 빌어야 하는 거 아냐?" 진심으로 혜인을 걱정한다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덤덤한 음성. 예안 도 그런 이질감을 느끼고는 어설프게 웃음을 지었다. "근데… 난 정말 혜인일 걱정하고 있기는 한 걸까? 응?" 「제가 보기엔 그런 것 같습니다만.」 "그래? 네가 보기엔 그래?" 예인은 씁쓸히 비웃음을 지으며 무릎을 모았다. 얇은 다리를 감싸 깍지를 낀 그녀는 무릎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왠지 자신 없어. 내가 정말로 혜인이가 걱정되고 미안해서 이러는 건지 아닌지. 가끔 내 안의 다른 무언가가 억지로 내가 슬퍼하고 울 게 만드는 것 같은 기분을 느껴. 이것 역시 바보 같은 생각일까?" 「쓸데없는 강박관념입니다.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역시 그렇겠지? 괜히 심각한 척, 잘난 척 고민하거나 그러는 건 안 좋겠지?" 예안은 다소 밝아진 얼굴로 깍지를 풀었다. 아기의 배 위에 가만히 손을 올린 그녀는 약하게 들리는 심장소리를 심취하며 눈을 감았다. "나 혜인이 한 번 만나볼까?" 「그건 제가 뭐라고 조언해드릴 수 있는 사항이 아니군요. 원하시는 데로 하십시오.」 "쳇. 근데 왜 그렇게 쌀쌀맞게 대답하냐? 그냥 해본 소리였어. 난 농담도 못해? 어라? 유빈이 깼네?" 엄마가 배를 만지고 있으니까 잠에서 깼나 보다. 귀여운 눈망울을 동글동글 굴리는 아기를 번쩍 안아 올린 예안은 해맑게 웃었다. "아이구, 귀여운 내 아기. 잠이 안 와서 깼어? 엄마랑 같이 놀아 주 려구? 착하다 착해. 참 착해." 예안은 아기의 숱 없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볍게 뽀뽀했다. 창 밖 에 비치는 은하수가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세상에서 둘도 없이 행복한 모습이라고 어둠까지 흐뭇해하고 있었다. 근데 맥이 그 분위기를 깼다. 「팔불출.」 "닥쳐 주렴." 「팔불출 맞잖아요.」 "닥쳐 달라구우!" 지평선 저 멀리 있는 태양이 어둠을 데우며 다가온다. 뭐, 어쨌거나 아직은 그럭저럭 행복한 것 같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47 회] 날 짜 2004-02-29 조회 / 추천 3571 / 66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가장 소중한 것 "아이씨. 철이 녀석은 왜 그렇게 공을 뻥뻥 차 가지고…." 아이는 조그맣게 투덜거리며 공을 찾아 내려갔다. 놀이터 울타리를 넘어 아래 아파트 단지 쪽으로 굴러간 공은 쉬이 눈에 뜨이지 않았 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냐구. 쳇쳇쳇. 나중에 건담 제로윙 프라 모델 내놓으라고 해야지." 비탈진 나무가 사이사이 하늘을 향해 자라난 길은 조심에 경계에 신 중을 동반해야 할 정도로 위험하다. 아이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최대 한 몸을 숙이며 아래로 내려갔다. "어? 저 형은 누구지?" 아파트 단지가 잘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감나무 아래에는 검은 머리 카락을 어깨에 닿을락말락하게 기른 소년이 앉아 있었다. 사색이라 도 하는 듯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바로 니콜라스였다. "가만히 있네? 잠이라도 자나?" 호기심이 동한 아이는 그에게 다가갔다. 어깨를 짚어 놀라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때, 아이는 니콜라스의 어깨 위에 푸르스 름한 스파크가 떠돌아다니는 걸 보고 기겁했다. "어, 엄마야!" 어리긴 해도 초능력 같은 것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 따위는 깨부숴진 지 오래다. 아이는 새파랗게 질린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뭐지?" 니콜라스는 눈을 떴다. 무언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하지만 바로 옆에 어린아이의 발자국만 남아 있었을 뿐 아무도 보이 지 않았다. "누가 보기라도 한 모양이네. 뭐 상관없어." 자신의 「능력」이 다른 사람에게 들킬 경우 같은 건 관심 없다. 그 는 귀찮은 얼굴로 다시 교감에 집중했다. 「무슨 일이에요?」 '별거 아냐. 내가 능력 쓰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한 모양이야. 별 걱 정할 것 없어.' 「아 그래요?」 니콜라스는 눈을 감은 채 어서 하던 말을 하라고 재촉했다. 니르의 다정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아주 행복한 거예요. 니콜라스가 바로 지금 그런 상태에 있죠. 마음을 하나 하나 깨달아 가고 있는 게 참 즐겁 지 않나요?」 '하지만 누나는 나한테 관심보이지 않아.' 「너무 초조해하지 말아요. 그 사람은 언젠가 니콜라스의 마음을 알 아줄 거예요.」 마음이라. 본인조차도 정체를 깨닫지 못하는 그것을 어떻게 타인이 알아줄 수 있다는 걸까. '킥.' 하지만 니르의 위로를 받고 나니 마음만은 편했다. 혹시 엄마가 있 었다면 그게 바로 니르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고마워 니르. 난 이만 가봐야겠어. 오랫동안 누나 곁을 비 워둘 순 없으니까.' 니콜라스는 후련한 얼굴로 일어났다. 봄은 이제 다 간 건가.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바람이 머나먼 바닷가의 추억을 실은 채 녹색 옷을 입은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이번 여름에는 한 번 해수욕장이라도 가볼까? 그러고 보니 난 한 번도 그런 데 가본 적이 없네." 누나한테 한 번 졸라볼까 하는 지극히 '어린아이다운' 생각을 품으 며 그는 활기찬 발걸음을 떼었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 쪼이는 자리에 등을 깔고 누우면 세상을 다 가 진 듯한 기분이 든다. 예안은 아기를 배 위에 뉘여 놓은 채 볼을 쿡 쿡 찌르기도 하고 손을 잡아주기도 하면서 놀고 있었다. "휴우. 봄이 거의 다 가긴 했지만 아직 여름이 올 땐 아닌데 왜 이 렇게 더운 건지 모르겠네." 아기와 장난을 치던 예안은 현관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이제 와 아빠? 밖에 많이 더워?" "말도 마. 여기서 조금만 더 더워지면 완전히 찜통 속이 따로 없을 걸? 근데 성주는 어디 갔니? 방에서 낮잠이라도 자?" "잠깐 산책한다고 뒷산에 올라갔어. 곧 돌아올 거야." 정호는 손부채질을 하며 예안의 머리맡에 앉았다. "올해 여름은 정말 더울 것 같아. 유빈아 이리 오련? 할아버지한테 도 한 번 안겨 봐야지?" "떨어뜨리지 않도록 조심해. 유빈이 울어."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해. 어이구, 우리 귀여운 손자." 아기를 받아 안은 정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수염이 맨숭맨숭 난 턱 을 뺨에 대고 문질렀다. 아기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얼굴 을 찡그리자 예안은 인상을 썼다. "수염도 제대로 안 깎고 그런 짓 하면 아기가 싫어하잖아. 이리 내 놔!" "…삼일 전에 면도했는데 그새 또 자라난 모양이네." 정호는 미안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으며 아기를 다시 예안에게 건넸 다. 엄마의 품에 안긴 아기는 언제 얼굴을 찡그렸냐는 듯 까르르 웃 었다. "우리 손자는 참 예쁘기도 하지. 정말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쁜 걸 까?" "그거야 당연히 날 닮아서 그렇지." "너라면 어느 쪽? 남자? 아니면 여자?" "…둘 다라 치고 그냥 넘어가 줘." 예안이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는 걸 흐뭇하게 지켜보던 정호는 리모 컨을 들었다. 아기가 배가 고픈 듯 칭얼거리자 예안은 얼른 블라우 스의 단추를 풀었다. 일말의 망설임이 없는 손짓. 얼핏 그것을 본 정호는 기겁해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예안아." 예안은 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대답했다. "응? 왜?"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니?" "뭘 말이야?" 그새 다 잊어먹은 게냐. 울고 싶다는 기분은 아마도 이런 걸 말하는 것일 게다. "아빠 보는 앞에서 그렇게 갑자기 아기 젖먹이지 좀 말란 말이야! 제발 이 아빠랑 같이 있을 땐 몸가짐에 조심을 하라구! 아무리 부모 자식간이라도 해도 지금 넌 엄연히 애까지 있는 다 큰 여자잖아!" "부모 자식 지간에 그깟 가슴 좀 보는 게 뭐 어때서 그래?" "으휴. 말을 말자 말을 말아." 피눈물을 쏟고 싶다는 기분은 이런 것이다. 정호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 들어갔다가 조금 후에 나올 생각이었다. "TV 켜놓고 어디 가? 아빠가 좋아하는 프로그램 하는데 안 보려구?" "몸이 여자면 뭐해. 정신상태가 아직 남자인데. 네가 아빠 앞에서 그 꼬라지를 하고 있으니 내가 피해줄 수밖에 더 있어?" 예안은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그까짓 거 본다고 해서 닳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떻다고 그렇게 질겁 하고 그래?" "아빠는 문화인이라서 그렇겐 못한다." "그럼 난 야만인이라서 이런단 소리야?" "…됐다. 그냥 너와 나 사이의 문화적 갭이 너무 큰 거라고 합의 보 자." 정호는 그렇게 방안으로 쏙 들어갔다. 아기와 단둘이 거실에 남겨진 예안은 심심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내가 뭐 어떻다고 아빠는 저러냐. 좀 본다고 무슨 일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여자가 된 지 이미 일 년이 넘은 데다 작년에 애엄마까지 된 주제에 아직도 이러는 거 보면 꿋꿋하게 진우의 자아를 지키고 있는 모양이 다. 나중에 저승에서 유젤을 만났을 때 칭찬의 표시로 버닝 나이트 서비스라도 조를 심산인가. "젖 다 먹였니?" 정호는 자기 방에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가 나왔다. 아기가 만족스 런 표정으로 엄마 품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응. 다 먹였어. 근데 아빠. 참 이상한 거 하나 있다?" "뭐가?" 예안은 말하기 수줍은 듯 배시시 웃으며 몸을 비비꼬았다. "애기 젖먹일 때 기분이 참 묘해. 뭐랄까. 내가 손가락으로 젖꼭지 만지작거릴 땐 그냥 간지럽기만 한데 유빈이가 물고 있으면 기분이 참 좋아. 간지러우면서도 그저 좋구, 유빈이가 젖 다 먹구 그만 놓 으면 내가 괜히 서운한 거 있지." 정호는 왠지 흐뭇했다. "그게 모성애인가 보지. 아빠는 여자가 아니라서 그런 기분 잘 모르 겠다." "여자들은 애인이 그렇게 해줄 때에도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흐뭇하게 웃고 있던 정호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예안아." "응?" "…그건 딸이 아빠에게 할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너 혹시 남 자 생겼니?" "콜록! 콜록!" 말 한 마디로 사람 잡을 일 있나. 느닷없는 공격에 사례가 들린 예 안은 얼굴을 찡그리며 정호를 노려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갑자기 그런 소리가 왜 나와!" "지금 네가 한 말이 그렇잖아. 너 남자 생겼어? 누구야?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니? 설마 성주는 아니겠지? 걔는 안 된다 예안아. 그건 범죄야." "말 같잖은 소리하지도 마! 그건 그냥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단 말 이야! 왜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 그리고 말했잖아! 난 남자랑 결혼 할 생각 따위는 절대 없다구!" 부끄러워서 그러는 건지 화가 나서 그러는 건지 기가 차서 그러는 건지 하여튼 예안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씩씩거렸다. 막 잠이 들었 던 아기가 엄마의 카랑카랑한 고음에 놀라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예안은 정호에 대한 분노도 잊고 얼른 아기를 달랬다. "울지 마. 울지 마 유빈아. 엄마가 잘못했어. 울지 마. 뚝." 토닥이는 손길에 아기는 울음을 그쳤다. 한시름 놓은 예안은 사나운 눈동자로 정호를 쏘아보았다. "아빠 때문에 괜히 유빈이만 깼잖아. 그니까 왜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하고 그래?" "하지만 딱히 잘못된 말은 아니잖아. 지금 넌 어엿한 여자니까 남자 한테 관심을 좀 가져도 괜찮잖니." "확실히 말해둘게 아빠. 난 절대 결혼 따위는 하지 않을 거야. 그 이유는 내가 전에 말했으니 기억하고 있지?" 정호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여자친구에 대한 독점욕은 아직 예안 의 마음 속에서 시들지 않은 모양이다. "아빠. 앞으로 제발 그런 소리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 "휴."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의 몸을 다른 남자가 차지하는 게 싫어서 결혼을 기피하는 걸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정말 앞이 깜깜하군. 정우나 현우 둘 중의 하나 골라잡아서 결혼만 시키면 정말 걱정할 일이 하나도 없을 텐데.' 정호는 예안이 평생 미혼모로 사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오죽하 면 정우나 현우가 차라리 덮쳐주기를 바랄 정도였으니. 더 물고 늘어졌다가는 싸움 날 것 같다. 정호는 화제를 바꿨다. "근데 지금쯤이면 다들 MT다 뭐다 해서 대학생들 한창 바쁠 때 아니 니? 맨날 집에만 있는 게 심심하지도 않아?" "유빈이 냅두구 밖에 나갈 수도 없잖아." "같이 데리고 나가면 되잖니." "안 돼. 도심 공기가 얼마나 탁한데. 거기에 우리 유빈일 노출시킬 순 없어." 저러는 거 보면 나중에 예안이 대한민국 학부모 치맛바람 협회장이 되는 건 아닐까 괜히 불안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아빠가 뭘 잘 모르는데, 대학생들은 지금 뿐만이 아니라 항 상 MT 때문에 바쁜 인생들이야. 인생 뭐 있냐는 신조 아래 허구헌날 술이나 퍼마시는 게 대학생들 아니야?" "그거야 20세기 말 이야기고 요즘에는 그렇지 않지."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대학생이 되면 무엇을 제일 먼저 하겠냐'는 물음에 대한 답변 중에서 '놀기부터 하겠다'라 는 수치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하여튼 넌 대학교 들어가면 절대 놀아선 안 돼. 책임져야 할 애기 도 있고 하니 넌 일찍부터 정신 차리고 자립해야 된다." "걱정 마세요. 나도 유빈이가 좀 크면 대학 들어갈 거야. 조기 졸업 해서 하루빨리 자립해야지. 그래서 사람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대단 한 초엘리트로 거듭날 거야." "…그건 좀 무리일 듯 싶은데? 너 공부 잘하는 건 아니잖아." "내가 왜 못해! 아빠는 작년에 내가 심심풀이 삼아 친 수능에서 몇 점 받았는지 알기나 해!" 발끈한 예안이 철저히 숨기고 있던 자랑스러운 수능 점수를 공개하 려는 찰나,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니콜라스였다. 정호가 그를 반겼다. "성주 이제 오니? 어디 갔었어?" "잠깐 뒷산에요. 혼자 좀 생각할 게 있어서요." 니콜라스는 예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또 아기 안고 있네? 허구헌날 품에서 떼어놓을 줄을 몰라?" "응?" 다소 가시 돋친 톤에 예안은 어리둥절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딱히 니콜라스에게 잘못한 건 없었다. '쟤 왜 저래? 오늘 아침에만 해도 기분 좋아 보이지 않았나?' 예안은 자신을 쏘아보는 니콜라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사실 그 는 예안이 아니라 아기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지만 예안은 몰랐다. "풉." 지금 이 미묘한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얼핏 눈치챈 정호는 슬 며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해꾼은 사라져 주마. 둘이 알아서 잘 해결하도록." "응?" "남자 마음 너무 몰라주는 것도 좋지 않아. 아직 어리다고 남자 가 슴에 말뚝 박는 것만큼 죄악은 없다." "??" 뜬금 없는 말에 예안은 어리둥절했다. 정호가 방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친 표정으로 바라보던 니콜라스가 입을 열었다. "뒷산에서 니르와 이야기를 좀 하고 왔어." "아, 전에 말하던 그그그 텔레파시인가 뭔가 하는 능력?" "응." "이야, 좋겠다. 넌 별의별 편리한 초능력을 다 갖고 있구나. 나도 그런 걸 할 줄 알면 좋을 텐데." 말 그대로 소원일 뿐이다. 예전에 두 번 정도 뽀록으로 성공한 적은 있지만 그 뒤로는 죽어라 연습해도 개뿔도 안 나왔다. "근데 무슨 이야기했어?" "니르가 나한테 이것저것 정보를 줬어. 요 근래 들어 미 정부의 움 직임에 수상한 구석이 많다더라. 그 양자 컴 설계도 디스크 때문인 것 같은데 아직 잘은 모르겠어." "아마 맞겠지. 오히려 잠잠하다면 그게 이상한 거야. 그런 보물을 통째로 도둑 맞았는데 발칵 안 뒤집힐 나라가 어디 있어?" 예안은 카네기 대통령이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초조하게 백악관 집 무실을 왔다갔다하는 꼴을 상상하며 쿡 웃었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 나 큰일에 발을 담근 건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함부로 단정짓긴 그렇지만 그 디스크는 여러모로 좀 수상쩍지 않 아? 조심성 없이 뛰어들었다가는 수습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한 방 먹을지도 모를 텐데, 그래도 괜찮은 거야?" "이건 시험이야. 김 아저씨를 믿을 수 있나 없나 하는 시험." 녹색 눈동자가 자신감으로 찬란히 빛났다. 말없이 그것을 응시하던 니콜라스는 가만히 끄덕였다. "하긴, 누나는 돈이 워낙 많으니까 나중에 잘못되더라도 수습할 수 있겠지. 아니면 맥의 무력으로 미국을 협박이라도 하던가." "쿡. 협박까지는 좀 심했다. 최악의 경우가 아닌 이상 그런 건 오히 려 역효과가 날 걸? 국제 관계에서 강력한 무력이 만능 엔터테이너 는 아니야." 거물 정치인들이 신중에 신중을 기할 문제인데 예안은 아무것도 아 니라는 듯 웃고 있다. 니콜라스가 보기에, 그녀는 지금 본인이 처한 상황을 반쯤은 게임처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세계 제일의 부자니까 이런 것쯤은 가벼운 돈 장난으로 보이 겠지. 돈 좀 잃어도 그냥 즐겼다는 기분으로 넘어가면 그만이니.' 예안이 임신 중이었을 때 ST기관에 대한 비밀 지킨답시고 고기 갖다 버리면서 심장이 찢어지는 듯 속 쓰렸다는 걸 모르니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 제일의 부자라는 간판을 달고 있으면 뭐하 나. 아껴야 할 건 안 아끼고 정작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을 아끼고 있 는 판인데. "유빈아 졸려? 방에 가서 잘래? 아니면 엄마 품에서 잘래? 아, 엄마 품이 좋다고? 에헤헤, 그럼 진작 말하지~ 자장가 불러줄까?" '고양이 같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예안은 정말 혼자서도 아기와 잘 논다. 물 끄러미 그녀를 쳐다보던 니콜라스는 문득 아기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까르르 웃는 아기의 눈동자가 어쩐지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마 치 '엄마는 내 거야'라고 비웃으며 빼앗아 볼 테면 빼앗아 보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큭!' 울컥한 니콜라스는 피부를 쥐어뜯을 듯 거칠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뭐라 한바탕 크게 쏘아주고 싶었다. '왜 이러는 거야, 니콜라스?' 아기는 까르르 웃으며 작디 작은 손으로 엄마의 손가락을 쫓느라 바 빴다. 생후 삼 개월이나 됐으면서 어찌 저리 작단 말인가. '너 이렇게 유치한 녀석이었어? 아니잖아! 진정해! 진정하란 말이 야, 제길!" 다른 사람 눈에는 엄마와 아기가 놀고 있는 저 모습이 더없이 행복 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죽였던 사람들의 역겨운 혈향이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 잠시 인터넷 사이트 에 들어갔다 와야 하니까 성주 네가 유빈이 좀 맡아 줘." "어?" "너도 알잖아. 내가 TAM(Talking About MAC) 사이트에서 지금 활동 중인 거. 뭐 거의 유령회원이긴 하지만서두. 앗, 서둘러야 돼.「베 리굿」 녀석 지금쯤 들어와 있을 거야." 예안은 그대로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버버 하다가 졸지에 싫어 하는 애를 떠맡게 된 니콜라스. 얼떨떨해하던 그는 양손에 안고 있 던 아기의 눈망울과 시선이 부딪쳤다. "…." 아기의 눈망울은. 맑았다, 목을 조르고 싶을 정도로. '…맑긴 맑구나. 정말 맑아…. 이래서 누나가 아기를 좋아하는 걸 까? 나는 맑지 않아서 관심을 안 보이는 걸까?' 태어나서 단 한 번의 거짓조차 말해본 적 없는 순수한 아기의 눈망 울. 거기에 비춰진 나는 과연 어떻게 보일까. 아기를 얼굴 가까이 들이댄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기의 눈동자 속에서는 더러운 혈향으로 수도 없이 영혼을 목욕시킨 자신조차도 천사의 날개를 갖고 있었다. "내가 착하다 생각해?" 이렇게 널 미워하는 데도? "널 좋아한다 생각해?" 이렇게 널 싫어하는 데도? "널 아껴준다 생각해?" 이렇게 널 죽이고 싶어하는 데도? "쿡." 아기는 여전히 웃고 있다. 여태껏 한집에서 지냈으면서 이 녀석은 내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도 모른단 말인가. 니콜라스는 문득 아기가 젖을 빨던 모습을 떠올렸다. 동시에 살의가 치솟았다. "널 죽일까?" 반항도 할 수 없는 어린 아기를 죽인다는 소름끼치는 생각. 니콜라 스는 순간이나마 자신이 그런 마음을 먹었다는 걸 증오했다. 그리고 그 미움까지 아기에게로 이어졌다. "하…." 아기에 대한 그의 마음. 그것은 바로 질투였다. 훼도니츠 가의 마피 아조차 꼬리를 내리고 설설 기는 대단한 그가 고작 작은 아기에게 질투를 품고 있는 것이다. "죽인다 너…." 그는 이를 바드득 갈며 권총을 꺼내 한 손에 쥐었다. 자신을 죽일지 도 모르는 사람이 이마에 권총을 들이대는 대도 아기는 여전히 헤실 헤실 웃고 있었다. 해맑은 그 미소를 본 순간 니콜라스는 멈칫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정녕 이 어린 아기를 죽이려고 했단 말인가. 쓴웃음이 나왔다. '요새 너무 피곤해서 정신이 오락가락한 모양이네. 제발 실수 좀 하 지 마라 니콜라스. 너의 자긍심에 상처를 줄 생각이야?' 일순 바보 같은 살심을 품은 걸 후회하며 막 총을 떼려는 찰나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너?" 오티 갔다 왔습니다. 그래서 연재를 못했지요. 휴우. 아직도 피 곤해서 죽을 것만 같습니다그려. 글도 제대로 안 써지고, 이번 편은 아마 온갖 희한한 문장들이 함정처럼 도사리고 있을 테지 만 오티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것이려니 하고 넘어가 주세요. 그리고 드림워커에 일반연재란 게시판 얻었습니다.-_-v 염치없지만 추천 많이 눌러주세요.(말은 잘해요 잘해.)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48 회] 날 짜 2004-03-02 조회 / 추천 3571 / 54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가장 소중한 것 니콜라스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예안이 잔뜩 화난 표정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 총은 또 뭐야?" 당황한 니콜라스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몰랐다. 도대체 왜 자신이 아기의 이마에 총구를 갖다 댔었는지. "미친 자식!" 불같이 화가 난 예안은 얼른 아기를 빼앗아 안았다. 하마터면 화약 의 숨결에 피워보지도 못하고 사그라질 뻔했던 아이. 그녀는 아기를 보호하듯 꼭 끌어안은 채로 니콜라스를 노려보았다. "말해 봐. 그 총은 뭐냐니까!" 그녀는 거칠게 밀어붙였다. 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기에게 그런 짓을 한 니콜라스를 봐줄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왜 말이 없어! 그 잘난 입으로 뭐든 변명이라도 해보라니까!" 니콜라스가 장난이었다 둘러댄다 해도 봐줄 생각은 없었다. 살기를 띤 채 흉기를 들이대고 있었으면서 그걸 장난이라 웃어 넘기는 건 말도 안 된다. 예안은 최대한 화를 눌러 참으며 손가락으로 현관을 가리켰다. 그리 고 나지막하지만 힘있게 말했다. "나가. 당장 나가." "나가라고?" 니콜라스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러나 예안은 조금도 표정 을 풀지 않았다. "너 같은 녀석은 필요 없어. 잘 지켜달라고 했더니 오히려 총을 들 이대? 필요 없어. 나가, 당장 나가. 나중에 계약 해지금으로 두 배 를 더 줄 테니까 당장 꺼져 버려." 니콜라스는 하염없는 표정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오른손은 아직도 권총을 꽉 쥐고 있었다. 화가 났다. 내가 왜 그랬을까. 할 수만 있 다면 이 손을 잘라내 용광로에 던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가…라고?' 문득 생각났다. 엄마 노릇을 해주겠다고 수줍게 웃으며 같이 자자고 말하던 예안의 모습이. '나가라고?' 정말 천사인 듯 따스한 아름다움으로 눈을 부시게 했던 그녀. 엄마 라는 느낌보다는 천사가 인간의 몸을 빌린 듯한 괴리적인 그 찬란함 에 잠 못 이루었던 그 날 밤. 말은 안 했지만 그 날은 니콜라스가 살아온 세월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가라고 한다. 그렇게 나의 눈을 부시게 했던 그녀가 나보고 나가라고 한다. "미, 미안해! 미안해 누나!" 니콜라스는 화들짝 놀라며 사과했다. 비로소 나가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예안은 분노를 거두지 않았다. "사과하면 다야?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아. 너 같은 녀석을 경호원 이라 믿고 데리고 있었던 내가 다 한심해. 지하에 비밀벙커를 짓고 꼼짝없이 갇혀 생활하는 일이 있더라도 너랑은 같이 못 지내. 나가! 나가란 말이야!" 예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니콜라스는 애원으로 사과했다. "정말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누나. 용서해 줘 제발…." "웃기지 마. 사람 죽이려고 한 주제에 사과하면 다야? 아, 그러고 보니 너 처음부터 유빈이 미워했지? 왜에, 음지에서 산 청부업자는 아기를 싫어하는 취미라도 있냐?"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니콜라스의 마음을 아프게 찔러왔다. "너 같은 녀석 필요 없어. 당장 나가! 나가란 말이야!!" 놀란 정호가 방문을 열고 나와 거실을 내다보았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는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예안과 니콜라스를 번갈아 쳐다보 기만 했다. "…알…았어." 초점이 풀린 채 예안을 멍하니 응시하던 니콜라스는 힘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그는 터덜터덜 현관으로 향했다. 그의 손은 총이 보물인 마냥 아직도 꼭 쥐고 있었다. 니콜라스를 붙잡을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지켜보던 정호는 현관문 이 닫히는 소리에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예안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성주랑 싸웠어?" "…아빠는 몰라도 돼. 그럴 일이 좀 있어. 그나저나 유빈이는…." 예안은 아기가 어디 다친 데 없나 구석구석 살피고 난 뒤 멀쩡하다 는 걸 확인하고 꼭 껴안았다. 심한 짓을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 다. 유젤이 마지막으로 남겨준 소중한 보석에게 총을 들이댔다는 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니콜라스는 정신이 반쯤 나간 채 아파트 입구를 나섰다. 눈부신 태 양이 걸려 있는 푸른 하늘은 머리 위에서 평화롭게 빛나고 있었다. 창공을 유영하는 작은 새들은 호수에 떨어진 돌멩이처럼 구름의 모 습을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는 평화로운 모습이지만, 그래서 더 비참했다. 마음 속 에 내리는 폭우를 처참히 맞아가며, 그는 자신의 눈동자에 오른손을 가져갔다. 표독스러운 예안의 표정을 담은 망막 따위, '…태워버리고 싶어.' 나가라는 잔인한 그 말을 들어버린 고막 따위, '…찢어버리고 싶어.' 아기의 이마에 총을 겨누었던 빌어먹을 오른손 따위, '…짓이겨 버리고 싶어.'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뭐라도 좋으니 제발 크게 외치고 싶었다. 하 지만 변명 하나도 제대로 못한 이 빌어먹을 입술은 봉인된 전설마냥 열리지 않았다. 괴성도 욕도 변명도 사과도 뭐도 다 필요 없었다. 그저 아무 거라도 좋으니, 제발 답답한 이 가슴을 씻어줄 고함이 쩌렁쩌렁 울려 퍼지 기를 원했다. 하지만 성대가 굳고 폐가 멈추고 혀가 갈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주변의 행인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제 야 니콜라스는 빌어먹을 손이 아직도 총을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살인으로 다져진 손은 총을 분신이라도 되는 듯 여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만약 이 총으로 아기를 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럼 누나가 나한테 관심을 보여줄까?" 전혀. 수억 개의 경우의 수를 뒤적거린다 해도 그런 일은 없겠지. 자신의 아기를 죽인 사람을 그 어떤 엄마가 증오하지 않을까. "아하하…." 들끓는 답답함을 게워내는 방법을 알기에 그는 너무 어렸다. 그는 힘겹게, 그렇게 힘들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손을 높이 들어 하 늘에 대고 방아쇠를 마구 당겼다. 탕! 탕! 탕! 탕! 탕! 탕! 탕! 탕! 탕! 화약이 터지며 총탄이 튀었다. 유유히 흘러가던 구름이 총격음에 깜 짝 놀란 듯 몸을 흐트러뜨린다. 찢어지는 바람 사이로 굉음이 이리 저리 날뛰었다. 행인들은 혼비백산해서 흩어졌다. "초, 총이다!" "으아악! 총이다!" "사람 살려!" 사람들은 고양이를 만난 쥐 떼처럼 이리저리 흩어졌다. 발바닥에 불 이 나도록 뛰어가는 그들. 니콜라스는 다시 한 번 방아쇠를 힘껏 당 겼지만 철컥, 철컥, 그렇게 격철음만 났다. 그러고 보니 이 연발권 총은 9발짜리였지. 그는 뒷산으로 향했다. 초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누나도 총소리를 들었겠지?" 그런데 어째서 나와보지 않는 거지. "그렇게 시끄러웠는데 못 들었다면 그건 말이 안 되잖아." 근데 왜 안 나와보는 거지. "이제 나한테 정말 관심 없는 걸까?" 덜덜 떨리는 손이 권총을 툭 떨어뜨렸다. 그는 일그러진 표정을 두 손으로 힘겹게 움켜쥐었다. "미안해…미안해 누나…." 숨이 막힌다. 가슴이 떨린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걷는 것조차 힘들 다. 겨우 겨우 뒷산에 올라간 그는 제일 좋아하는 나무에 간신히 기 대고 섰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총소리에 놀라 도망간 모양이다. 차라리 잘 되었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으니까. 누구도 보기 싫다. 괜히 누군 가가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하지 만 그렇게 되면 누나 곁에 영영 있을 수 없으니 참아야 한다. "땀…?" 식은땀이 흘러내는 것 같아 훔쳐보았다. 이 정도 날씨에 땀을 흘릴 리가 없을 텐데. 손등으로 닦아보니 정말 땀이었다. 헌데 이상하다. "눈에서도… 땀이 나오나…?" 비로소 그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이었다 우는 건. 아마 그래서 땀을 흘린다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흐윽…." 그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남들은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해진다는 데 이상하게 가슴이 더 갑갑해졌다. 마음이 답답해서 또 울었다. 미 칠 듯한 들끓음은 뿌리를 내린 채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터질 듯 손바닥이 뜨거웠다. 토악질을 하듯 고개를 숙인 채 나무에 손바닥을 대었다. 한결 시원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에서 나무 가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는 멍한 얼굴로 손바닥을 뗐다. 담금질이 라도 한 듯 손금이 빨갛게 변색되어 있었다. 나무는 미칠 듯한 기세 로 타오르고 있었다. - 두근 - 날뛰고 있다. - 두근 - 날뛰고 있다. - 두근- 날뛰고 있다! 내 안의 무언가가, 나도 모르는 무언가가, 저주받은 무언가가 날뛰고 있다! 메스껍고 지저분한 운명을 피하기 위해 마련 된 봉인을 깨뜨리기 위해! 힘의 주인을 찾기 위해 지금 밖으로 뛰쳐 나오려는 것이다! "으아아악!!" 그의 손이, 팔이, 발이, 다리가, 어깨가, 등이, 가슴이, 그렇게 온 몸이 허공을 끓이는 불꽃으로 뒤덮여 나갔다. 홍염을 제치고 태양을 감싸안는 코로나처럼 붉은 화신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클랙은 체스판을 노려보며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위명도 당당한 5 대 대신인 자신을 상대로 100전 100승의 잔인한 성적을 올리고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이 당돌한 녀석을 물 먹일 수 있을까. 앤슨은 재촉했다. "벌써 십 분째 생각하고 계십니다. 어서 두시지요. 이러다가 해 지 겠습니다 대신 님." "끄응… 조금만 더 기다려 봐." "그냥 깨끗이 포기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길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만?" "방법이 있어!" 결국 퀸을 포기해야 하는 건가. 골치를 싸매던 클랙은 눈을 머금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퀸을 막 집어 올리려는 찰나였다. 그의 영혼이 강한 쇼크를 느끼고 휘청거렸다. 버림받는다는 무시무시한 공포가 그에게까지 전 이되었다. 중심을 잃은 그는 체스판을 엉망으로 휩쓸고 말았다. "대신 님. 아무리 연패해서 화가 나신다지만 이건 좀…." "잠깐." 클랙은 굳은 얼굴로 손을 들었다. 그의 뺨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 을 본 앤슨은 심각한 일이 발생한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마기가… 마기가 날뛰고 있다." "네?" "나의 공명신수, 자인이 말해주고 있어. 지금, 지금 마기가 날뛰고 있다. 마기의 주인, 엘리우스가 폭주하고 있어." "그럼?" 어느덧 체스는 무관심의 그늘로 던져졌다. 바짝 긴장한 앤슨은 클랙 의 입만을 주시했다. 클랙은 이마에 손가락을 짚고 눈을 감았다. 자 신이 지닌 공명신수, 「자인」의 속삭임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폭주한다. 지금 엘리우스가 폭주하고 있어. 평정심을 잃은 것 같은 데? 마기의 상태 역시 불안정해. 위치는… 저쪽으로 수백 km가 채 안 되는 거리인데?" 클랙은 자신이 가리킨 방향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앤슨 은 회심에 찬 미소를 띠었다. "그쪽엔 한국과 중국이 있습니다. 거리로 볼 때 한국이군요. 역시 엘리우스는 한국에 있었던 겁니다." 최강의 공명신수 「마기」를 지닌 5번째 대신 엘리우스는 한국에 있 다. 앤슨은 자신의 짐작이 맞아떨어진 게 무척이나 즐거웠다. "엘리우스라면 니콜라스 베르노라는 그 소년?" "예. 맞습니다. 암흑계의 청부업자라 들었습니다. 얼마 전 마리오와 엘르가 엔젤을 납치했을 때, 한국의 의뢰를 받아 그녀를 구한답시고 우리에게 접근해왔죠. 그 과정에서 드디어 행방을 알게 됐는데, 우 리 민족에 대한 건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긴, 아직 기억이 깨어나지 않았겠지." "엘리우스가 한국에 있으면 엔젤 역시 한국에 있겠지요. 제 생각이 맞았습니다." 클랙은 피식피식 웃고 말았다. "프린세스도 꽤나 간이 크군 그래. 위험을 감수하고 우리의 허를 찌 르고 있었을 줄이야. 헛헛헛, 그것도 모르고 유럽하고 아프리카만 뒤지고 있었으니 여태껏 수확이 없었던 게 당연하지." 숙주가 폭주해서 공명신수가 날뛸 때 다른 숙주들은 제각각 자신의 공명신수를 이용해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특히 마기의 경우는 최강의 기운을 발산하기에 더욱 쉽다. 지금쯤이면 지상에 나와 있는 다른 5대 대신인 버크 칼 세자르반과 제나르 네파르만 알카저드도 엘리우스와 엔젤이 한국에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앤슨! 당장 모든 헤이져들을 한국으로 총 집결시켜야 한다!" 흥분을 참지 못한 클랙은 호기 있게 외치며 일어났다. 앤슨은 얼른 그를 붙잡았다. "참으십시오. 아직 정확한 위치를 알아낸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한 국에 있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입니다. 그 정도 가지고 엔젤을 찾아 낼 수 있었다면 제가 진작에 찾아냈을 겁니다." "이러다 또 놓치면 어쩌려고?" "왜 그렇게 성급하게 구십니까? 어차피 저는 엔젤이 한국에 있다는 것까지는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동안 제가 가만히 있었는지 모르십니까? 단지 확실하게 알아볼 때까지 몸을 사 린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럼?" "어차피 지금 가봐야 엔젤을 찾아내진 못합니다. 기다리십시오. 조 만간 엔젤은 스스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그때 가서 옴 짝달싹도 못하게 붙잡으면 됩니다." 모종에 세워둔 계획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다. 클랙은 가라앉은 눈으 로 그를 주시했다. "자신할 수 있나?" "예. 믿어주십시오." 앤슨의 눈동자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당당했다. 클랙은 흥분을 가 라앉히고 다시 앉았다. "하긴 지금 엔젤 찾는답시고 한국을 들쑤셔봤자 한국 정부가 몸조심 만 더하게 만드는 꼴이지. 일단 자네를 믿고 기다려보겠어." "감사합니다." 열기를 식히려고 손부채질을 하던 클랙은 문득 앤슨의 어깨 너머 책 장으로 시선이 갔다. "흠? 근데 저 책들은 뭔가?" "아, 저것들은 제임스 해론의 저서들입니다. 개인적으로 그에게 굉 장히 흥미가 있습니다. 꼬박꼬박 사서 모으느라 돈이 많이 깨지고 있지요. 수필 같은 철학서적입니다." "흐음? 철학서적? 에잉. 난 그런 건 마음에 들지 않아. 아무런 힘도 없는 인간 녀석들이 쥐뿔도 모르는 주제에 신이니 철학이니 운명이 니 하는 걸 지껄이는 거 보면 자인 녀석을 꺼내다가 다 쓸어버리고 싶어." "글쎄요." "내가 못할 것 같아? 자인 녀석을 꺼내면 도시 하나 송두리째 소멸 시키는 건 일도 아니야. 한 달 정도 요양을 해야겠지만." "미사일로 하는 게 더 편하긴 합니다만." "미사일은 흔적이 남잖아. 그리고 시스템만 교란시키면 막아내기가 너무 쉬워. 자인 녀석도 할 수 있는 걸 지상인 녀석들이 못할 것 같 아?" "못하진 않겠지요. 오히려 우리보다 더 잘할 겁니다. 어쨌든 간에 자연과학을 발달시키는 데는 지상인들의 힘이 컸으니까요." 클랙은 피식피식 웃었다. "우리에게 '허락된 땅'에도 금속이 있었다면, 이 행성을 지배하고 있는 건 여전히 우리였을 거야. 그걸 잊지 말게." 허락된 땅. 일만 년이 넘게 이어져 내려온 「이름」을 입에 담지 못 하고 그렇게 빙빙 돌려 말해야 하는 서글픔. 잠시 그것을 곱씹던 앤 슨은 차갑게 미소지었다. "틀리셨습니다. 이 행성의 지배자는 지금도 우리입니다. 또한 앞으 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날카로운 애수가 빛나는 검은 눈동자는 어둠을 짊어지고 있는 별빛 처럼 차갑고 매혹적이기만 하다. 진지하게 클랙의 눈빛을 받아내던 앤슨은 슬그머니 손을 뒤로 뻗어 책 한 권을 꺼내들어 보였다. "이 책은 적어도 안일한 휴머니즘 같은 게 역겹게 득실거리는 철학 서 따위가 아닙니다. 인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랄까요. 실 제로 그의 철학에 매료된 염세주의자들이 자신은 인간이기에 세상을 살 가치가 없다 느끼고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때 엄청난 이 슈였지요." "에피쿠로스가 환생이라도 한 모양이지?" "그럴지도 모르죠. 하여튼 대단한 철학가입니다." "호오. 제임스 해론이라는 그 친구 좀 마음에 드는군. 한 번 얼굴이 라도 보고 싶어." "제임스 해론의 프로필은 철저히 베일에 싸여져 있습니다. 하지만 대신 님이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무언가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하지만 클랙은 그 말에 숨어 있는 의미를 그대로 놓쳐버렸다. "일단은 귀찮으니 넘어가지. 나중에 내가 그 책 읽고 팬이라도 된다 면 한 번쯤 얼굴 보는 거 고려해보겠어. 그 친구가 누구인지는 자네 가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당분간 신경 끄기로 하지." 앤슨은 쓴웃음을 지으며 얼굴을 들었다. 애수에 젖은 눈동자로 머나 먼 한국의 하늘을 더듬는 청년의 가슴은 그저 뜨겁기만 하다. 저 푸른 하늘 아래 민족의 염원을 이뤄줄 소중한 메시아가 숨쉬고 있겠지. '이번에도' 민족의 제물이 되어야 할 운명을 타고 난 엘리 우스와 함께. 아직은 모든 게 좋게 흘러가고 있다. 적어도 최악은 아니다. '혁명은… 곧 완성될 거다. 바로 이 내 손에 의해서.' 5대 대신인 클랙의 무한한 신뢰를 손에 넣은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 지의 고초를 생각하며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영혼의 울림은, 식지 않는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49 회] 날 짜 2004-03-06 조회 / 추천 3506 / 62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가장 소중한 것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아니, 어둠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색채 였을까 그건. 니콜라스는 반복의 무한으로 겹겹이 짜여진 공간을 힘 없이 터덜터덜 걸었다. '누나….' 차가운 표정으로 나가라고 말하던 예안의 목소리가 생각난 순간 그 는 눈물을 흘렸다. '누나….' 다시는 얼굴 볼 일이 없을 거라 선언하던 싸늘한 눈빛. 그것은 비수 처럼 마음 속을 파고들었다. 아팠다. 너무 아팠다. '누나….' 버림받았다는 공포가 생명을 태운다. 그는 미칠 듯 들끓는 심장을 거칠게 꽉 움켜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짙은 혈향이 눈물처럼 흘 러내렸다. '아파…. 아파….' 심장을 이룬 생명과 혈관을 흐르는 야성이 폭발하려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상실의 아픔'까지 미칠 듯한 기세로 그의 영 혼을 때려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나가라고 외치던 예 안이 있었다. '아파…. 아파…. 아파…. 아파아!!' 그는 걸음을 멈췄다. 심장을 찌른 손가락에 뜨거운 상처가 달라붙고 있었다. 거친 박동은 터질 듯 격렬하게 죽음의 꽃을 피워내고 있었 다. '아아악!!' 나인 것과 내가 아닌 것의 경계. 그것이 무너져 어디까지가 나고 어 디까지가 내가 아닌지 알 수 없는 몽환의 세계. 그 속에서 니콜라스 는 그렇게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진정해.」 그는 폭주를 멈췄다. 거짓말처럼 아픔의 형체가 사그라졌다. 「진정해.」 쓰린 상처와 슬픈 잃음으로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찍은 목소리. 그것 이 그의 영혼을 일으켜 세웠다. 번쩍 정신이 든 순간, 사라지고 있 던 그의 실루엣이 그림자처럼 되살아났다. 이상했다. 분명히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 같았다. '누구야?' 목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누구야? 누구야!' 다시 들리지 않았다. '누구냐고! 대답해!' 들려오지 않았다. '대답해! 대답하란 말이야!!' 도대체 그건 누구의 목소리였나. 미칠 것만 같았다. 흔들리는 몽환 의 일렁임이 목소리의 주인을 숨겨주는 것만 같았다. '누구야? 어딨어? 대답해!' 찾고 찾고 또 찾아도 목소리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찾는 다는 것조차 모순인가. 내가 나일 수 없는 중첩의 세계에서 내가 아 닌 걸 찾는다는 건 지독한 모순이지 않은가. '어딨어….' 찾아다니고 찾아다니고 또 찾아다녔건만 끝내 목소리는 더 이상 들 려오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울음을 참지 못한 채 털썩 주저앉았다. '어딨는 거야….'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건지 몰랐다. 왜 이렇게 울고 있는 건지 몰 랐다. 왜 이렇게 눈물이 멈추지 않는지, 그는 몰랐다. '대답해 줘 제발… 어딨는 거야….' 힘든 피로가 영혼을 감싸오는 순간 그는 포기했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는 것도 자신을 지키는 것도 버림받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도 그렇게 전부 다. 모두 포기했다. '누…나….' 하지만 우습게도 모든 걸 다 버린 그 순간, 밝게 빛나는 녹색 눈동 자를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욕심이 솟구쳤다.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 일어났다. 멀리서 희미한 빛이 손짓하 는 게 보였다. "정신이 들어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니콜라스는 눈을 떴다. 몇 번 눈꺼풀을 깜박 이자 하얀 병실 풍경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소독약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여기는 어디야?" "경찰 병원입니다. 특별히 외상은 없지만 일단 선생님께서 절대 안 정을 취하라 하셨으니 가만히 계세요." 간호사는 사무적으로 말하고 차트에 뭔가를 끄적이더니 밖으로 나갔 다. 혼자 남은 니콜라스는 깨질 듯이 아파 오는 뒷목을 쓰다듬으며 일어나 앉았다. "나는 분명히… 총을 쏘고… 그리고 나무를 태우고…." 그는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분명히 이 손바닥에서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무 한 그루를 통째로 태운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어째서 가벼운 화상 자국조차 없단 말인가. "누…나…." 예안의 얼굴이 다시 생각난 그는 울음을 삼키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가 용서를 빌고 싶었다. 하지만 도대체 어 떻게 사과하면 좋은지 몰랐다. 용기를 내는 법조차 모르는 그는 결국 예안이 다시 한 번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총소리가 났을 때 예안은 크게 당황했다. 그녀는 놀란 아이가 울음 을 터트리는 걸 건성으로 달래며 창가로 가 내려다보았다. "니콜라스잖아? 쟤 왜 저래?" 아스팔트 위에 선 니콜라스는 마구 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사람에 대고 쏘지 않고 위협하듯 하늘에 대고 쏘고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쟤 미친 것 아냐? 저러다 경찰에 잡혀가면 어떻게 하려고?" 말리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방을 나서다 그만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말도 안 되잖아. 내가 왜 쟤를 걱정해야 하는 거지? 쟤 랑 나랑은 이제 아무 상관없잖아?" 예안은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하지만 총소리가 끝난 후 찾아 온 침묵에 자꾸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녀는 자리에 가만히 앉지 못 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아 진짜 어떻게 하지? 내가 가서 말려야 되는 거 아냐? 아니야! 그 러다가 괜히 내가 총 맞으면 엿 된다구. 난 홀몸이 아니란 말이야! 내가 죽으면 누가 유빈이 보살펴? 유언장도 안 써놨으니 정부가 맥 하고 유전을 꿀꺽 삼키려 들 수도 있단 말이야!" 그때 총소리에 놀라 나온 정호가 물었다. "저게 무슨 소리니? 저거 총소리 아냐?" "으, 응? 아, 그그그, 근처에서 지금 영화 찍고 있어. 별 거 아냐." "그, 그래? 거참 요란하게도 찍는구나…." 이것도 변명이라고 둘러댄 거냐 유진우! 예안은 속으로 그렇게 펄쩍 뛰었다. 다행스럽게도 정호는 무시무시하리만큼 서툰 그 거짓말을 그대로 믿는 눈치였다. "근데 성주 찾으러 안 나가봐도 돼? 너무 오래 안 들어오는 것 같은 데?" "아직 나간 지 십 분도 안 됐어. 그리고 걔 내가 영원히 내보냈어." "뭐?" "말 그대로야. 아주 쫓아냈다구. 이제 다시 우리 집에 안 들일 거니 까 아빠도 걔 찾지 마." 냉기가 풀풀 날리는 음색에 정호는 다소 당황했다. 그냥 가벼운 싸 움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러는 거니? 성주가 무슨 실수를 좀 저질렀다 해도 나이가 나이인 만큼 네가 너그럽게 대해야 하는 거 아니야?" "걔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잠깐 컴퓨터 좀 쓴다고 유빈이 맡겨 놨더니, 글쎄 유빈일 죽이려고 했단 말이야!" "뭐어? 말도 안 돼. 성주가 왜 유빈일 죽이려고 한단 말이야? 설마 목이라도 졸랐다는 거니?" "모, 목을 조른 건 아니지만…." 차마 유빈의 이마에 권총을 들이대고 있었다고 말할 순 없잖은가. 마땅히 둘러댈 말이 없었던 예안은 그렇게 버벅거리다 결국 짜증을 부렸다. "어쨌든 그 녀석은 유빈일 죽이려고 했어! 그러니 이제 다시는 안 볼 거야! 걔 짐도 지금 당장 현관밖에 내놓을 거라구!" 예안이 정말로 니콜라스의 짐을 내놓을 것처럼 굴자 정호는 얼른 말 렸다. "왜 그래? 이거 놔! 성주 녀석 짐 다 갖다 버릴 거야!" "일단 진정해. 너 지금 너무 흥분하고 있어." "흥분 같은 거 안 했어! 난 지금 지극히 정상이라구!" "휴." 정호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대충 어떻게 된 건지는 짐작이 가." "짐작 가면 이거 놔! 아빠도 성주 녀석 미울 거 아냐!" "좀 진정해. 성주가 정말로 유빈일 죽이려고 그랬겠니? 단지 네 애 정을 독차지하는 유빈이가 일순간 미워서 그랬을 거야. 잠깐의 실수 갖고 그렇게 어린애를 몰아붙여서야 되겠어?" 예안은 화가 점점 가라앉았다. "보아하니 성주가 유빈이한테 주먹 휘두르는 시늉이라도 한 모양인 데, 정말 때린 건 아니잖아? 성주 입장에선 너무 미워서 한 번 그렇 게 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근데 그런 거 갖고 그렇게 몰아세울 거야? 어른답지 않게?" 예안은 할 말이 없었다. "네 나이가 이제 18살 밖에 안 됐지만 넌 이미 어른이야. 어찌 되었 든 넌 한 아이의 엄마잖아? 어른이 되었으면서 어린애가 순간의 욱 함으로 주먹 한 번 쥔 것 갖고 죽이려고 했다 어쨌다 하며 그렇게 몰아세울 거니?" "하, 하지만…." "내가 보기에 성주는 널 좋아하는 것 같애. 근데 네가 유빈이 낳고 나서 유빈이한테만 온 정신을 다 쏟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잖아? 좀 이해해주면 안 되니?" "그래도 죽이려고 한 건 용서할 수 없어!" "그럴 생각 없었을 거야. 네가 지레 그렇게 오해하는 거지. 자기 자 식이 걸린 문젠데 평온할 부모는 없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정호는 예안의 어깨를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다정히 그녀를 껴안은 채로 정호는 속삭였다. "이제 넌 어른이잖아?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굴 거야?" "…." "어린애가 그런 거 갖고 너무 마음쓰지 마. 네가 이해하고 용서해야 지. 성주가 돌아와서 사과하면 잘 달래주고 오늘 하루만이라도 성주 한테 신경 좀 많이 써 줘." 예안은 마음이 풀렸다. 정호의 말을 들으니 괜히 그렇게 화를 냈나 싶어 부끄럽기까지 했다. '뭐… 하긴 총을 댔다지만 걔 입장에선 총이 곧 주먹일 테니… 으그 그그, 너 성질 참 많이 죽었다 유진우.' 니콜라스를 용서해주기로 마음먹고 나니 윽박질렀던 것이 괜히 미안 하기까지 했다. 비록 음지에서 살아온 청부업자이기는 해도 어쨌든 니콜라스는 14살 밖에 안 된 어린아이다. "휴, 알았어. 아빠 말대로 할게." "그래, 잘 생각했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니콜라스에게 신경 써줄까 예안이 끙끙대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중현이었다. "네 전화 받았습니… 예? 뭐라구요?" "무슨 전화니?" 정호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안은 얼른 폰을 손으로 막고 대 답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빠. 잠시만." 예안은 정호의 눈치를 살피고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창백한 얼굴 위로 가쁜 숨이 새겨졌다가 흩어졌다. "그, 그게 정말이에요? 니콜라스가 지금 병원에 있다구요?" 뜻밖의 소식에 놀란 예안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어찌할지 생 각할 것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알았어요. 지금 곧 갈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전화를 끊은 예안은 황급히 거실로 나왔다. "아빠 지금 성주가 병원에 있대." "뭐어? 아니, 성주가 왜? 사고라도 난 거야?"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겠고 일단 가봐야 알겠어. 유빈이 좀 잘 돌 봐 줘. 어쩌면 나 오늘 밤 못 돌아올지도… 아니아니! 못 들어올 것 같으니까 그냥 유빈이 데리고 갈게. 오늘 저녁은 아빠가 알아서 챙 겨 먹어!" 예안은 서둘러 외출 준비를 끝낸 뒤 아기를 품에 안은 채 정신 없이 집을 나섰다. 정호가 잔뜩 걱정스런 표정으로 뒤따라 나왔지만 뭐라 대답해줄 여유가 없었다. 택시를 잡아탄 그녀는 이윽고 경찰 병원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중현 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반색했다. 예안은 인사도 생략하고 다 짜고짜 물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어째서 니콜라스가 병원에 있는 거 죠?" "아, 그게 말입니다…." 정신 없는 와중에도 반가워하던 중현은 예안이 안고 있는 아기와 눈 이 마주치고 그대로 굳었다.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던 예안은 한참 이 지나도 그가 아무 말을 않자 목소리를 높였다. "아저씨! 정신 차리세요!" 중현은 깜짝 놀랐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딴 생각을 좀…." 그는 헛기침을 하며 정신을 차렸다. 벌벌 떨리는 손을 예안이 볼 새 라 뒤로 감춘 그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저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도시 한가운데서 무단으로 발포했기에 체포부터 했죠." "그건 저도 알아요. 제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에요. 니콜라스가 어 째서 병원에 있는지 전 그걸 물었다구요." "특별히 부상 같은 걸 입진 않았습니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그는 뒷산의 나무 한 그루를 통째로 태운 뒤 그 앞에서 기절해 있었습니 다. 놀랍게도, 타죽기는커녕 그을음 하나 없었지만요." '에날도스인가?'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랐지만 니콜라스가 에날도스를 지니고 있 다고 추정되는 걸 고려해볼 때 딱히 설명할 방도가 없는 건 아니었 다. 손톱을 물어뜯던 예안은 중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일단 니콜라스를 만나봐야겠어요. 지금 면회되나요?" 흔들림 없는 굳건한 어른의 눈동자. 그녀를 어른으로 만들어준 게 눈앞의 아기 때문이라 생각하자 중현은 입맛이 썼다. "좀 전에 깨어났으니 면회는 가능합니다. 들어가시죠." "예." 중현은 니콜라스가 있는 병실로 예안을 안내했다. 병실 문 앞에는 좌우로 건장한 형사 둘이 서 있었다. '어, 누구지?' 느닷없이 상관이 아기를 안고 있는 미모의 소녀와 나타나자 그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호기심 섞인 시선으로 예안과 아기를 이리저리 살피다 살벌한 중현의 압력에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중현은 노크를 한 뒤 문을 열고 예안에게 손짓했다. "자, 먼저 들어가시죠." "아, 네." 예안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아기를 꼭 끌어안았다. 이상하게 가슴 이 떨렸다. 어쩐지 니콜라스의 얼굴을 마주보는 게 겁이 났다. '진정해 유진우. 따지고 보면 네가 크게 잘못한 건 아니잖아? 어쨌 든 잘못은 니콜라스한테 있다구. 미안해할 것 하나도 없어.' 예안은 병실 안으로 한 걸음 들여놓았다. 햇빛의 산란으로 가득 찬 병실은 희미한 죽음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 병 실에서 죽은 사람들의 흔적이 아니라, 니콜라스가 풍기는 향기였다. 언뜻 공포를 느낀 아기가 작은 손을 오물거렸다. '무서워하지마 유빈아. 엄마가 지켜줄게.' 예안은 아기의 손을 꼭 잡아주며 다시 한 걸음 떼어놓았다.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던 니콜라스가 흐릿한 눈동자를 이쪽으로 돌렸다. "…." 짧고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을 훑고 지나갔다. 예안은 침을 꿀꺽 삼 켰다. '뭐, 뭐야? 왜 그렇게 날 보는 거야! 잘못한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너라구, 너!' 입안을 맴돌던 외침은 결국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버림받은 새끼 고양이 같은 그 눈빛에 대고 차마 그런 독설을 퍼부을 수 없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예안은 겁먹은 표정으로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원망할 기력도 잃고 슬퍼하는 그 눈빛에 대고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모, 몸조리 잘해!" 결국 예안은 그 말만을 남기고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갔다. 중현이 놀라 뒤따라왔다. "예, 예안씨! 예안씨!" 중현이 크게 불렀지만 예안은 듣지 못하고 정신 없이 내달았다. 건 물을 빠져 나와 정원 한쪽의 커다란 나무 밑에 당도한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던 그녀는 짧게 중얼거렸다. "내가 왜 도망쳤지?" 인상을 쓰며 생각해봤지만 답을 알 수 없었다. 왜 조금 전에 그렇게 니콜라스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는지. "아아 넌 참 바보다 유진우. 바보야 바보. 정말 바보." 병원 건물은 푸른 하늘을 짊어진 채 하얗게 빛나고 있다. 도심의 열 기를 품고 가볍게 날아가는 봄바람은 더없이 따스하다. 먹이를 물어 나르는 새들의 노랫소리도 자장가처럼 포근하다. 그러나 예안은 조 용하고 평화로운 그 풍경에 섞일 수 없었다. 그녀는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용서해주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지나치게 몰아세운 걸 사과하려 했는데 어째서 그러지 못한 것인가. 정말 왜 그렇게 바보 같이 뛰쳐나오고 말았나. "유빈아… 엄마 참 바보 같지?" 이따금씩 병원을 들어서는 사람들이 신기한 눈으로 이쪽을 흘끔거렸 다. 스무 살도 안 된 여자애가 아기를 안고 있는 게 신기했던 모양 인가. 예안은 한숨을 내쉬며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많이 놀랐지 유빈아? 미안해." 다정히 토닥여주자 아기는 언제 불안해했냐는 듯 헤실헤실 웃었다. 괜히 아기에게 미안했던 예안은 가만히 아기의 얼굴에 뺨을 비볐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50 회] 날 짜 2004-03-10 조회 / 추천 3459 / 49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가장 소중한 것 니콜라스는 충분히 예안을 쫓아갈 수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간호 사가 호들갑을 떨며 '절대 안정!'이라고 이를 바드득 갈지만, 제 몸 상태는 자신이 더 잘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어린애의 삐침 따위가 아니었다. 침대에서 막 일어나려는 순간 미지 의 감정이 급히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의 무의식은 또 다시 심한 말을 듣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예안을 쫓아갔던 중현이 혼자 돌아왔다. "예안씨가 왜 저러는 건지 모르겠군요. 두 분 사이에 제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당신이 우리랑 24시간 붙어 있는 건 아니잖아. 당신이 모르는 일이 없는 게 더 이상한 거지." 니콜라스는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그렇게 답했다. 중현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몸은 괜찮습니까?" "어." "다행이군요. 지금은 당신이 이렇게 병원에 느긋하게 있을 때가 아 니니까요. 당신은 5억 달러 짜리 귀중한 방패잖습니까." 약간 빈정거리는 투였다. 돈을 그만큼 받아먹었으면 제값을 할 것이 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거리냐는 뜻이었다. 니콜라스는 아무 말도 않은 채 묵묵히 자신의 손바닥만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중현은 필사적으로 짜증을 숨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도대체 왜 동네 한가운데서 발포한 거죠? 일반인을 겨눈 게 아니라 는 건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만, 그건 변명이 안 됩니다. 한국은 개인의 총기 소유에 대해 엄격히 관리하는 나라인 걸 잊으셨나요?" "알아." "아시는 분이 그런 짓을 벌인 겁니까? 도대체 왜 발포한 겁니까? 그 이유나 좀 들어봅시다." "몰라." "예안씨를 노리는 녀석들 정체도 파악이 안 된 상태니, 철저히 경계 하라고 제가 신신당부한 걸 잊으신 겁니까?" "알아." "안다면 좀 말해보세요. 도대체 왜 그런 눈에 띄는 짓을 한 거지." "몰라." 중현은 열불 났다. 머리 가죽이 뒤집어질 정도로 답답초풍했다. 눈 앞의 이 쪼그만 녀석이 조카뻘이나 되었으면 벌써 다리가 부러져도 골백번은 부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과는 아무런 핏줄 관계가 없으며, 사적인 친분이 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공식적인 관계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보다 훨씬 더 세고 훨씬 더 무서운 인간이라는 포인트. 참아야 하느니라. '쳇…. 이래 뵈도 사격 점수와 격투술에서 항상 최고점을 받은 몸이 라고.' 그래봐야 뭐 별 수 있나. 힘 약한 인간이 꼬리 내리는 수밖에. "일단, 비밀리에 임무를 수행 중인 요원이 범인을 쫓는 과정 중 위 협을 가하기 위해 발포한 거라고 주민들에게 둘러댔습니다. 그나저 나 아파트 이웃들 중에 니콜라스씨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전혀 없는 건 아닐 테니 더 이상 그 집에 머무를 수 없겠군요." "그래서?"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괜히 쑥스럽고 미안해서 묻는 거야. 중현 은 조금 울컥했지만 필사적으로 짜증을 억눌렀다. "이사를 해야지요. 예안씨에게 말씀드려서 새 집을 구하도록 권해보 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원.' 마음 같아서는 너 때문에 멀쩡히 잘 지내던 가족이 졸지에 야밤도피 하게 생겼는데 미안하지도 않는 거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조건만 충족된다면 패대기를 꽂아도 여러 번 꽂았을 것이다. 니콜라스보다 자신의 격투술과 힘이 더 뛰어나고, 총싸움도 잘하는 뭐 그런 상당 히 사소한 조건들 말이다. '실력이 아주 뛰어나다고 칭찬이 자자해서 좋게 봤는데 역시 어린애 였어. 감정 조절 하나 제대로 못해 동네 한가운데서 그런 난동을 부 리다니…. 근데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런 짓을 한 거지?' 동기 녀석이 침을 튀겨가며 추천한 걸 믿고 경호 의뢰를 맡겼는데 역시 어린애는 이런 부분에서 믿음이 안 갔다. 중현은 다음 동창회 때 니콜라스를 천거한 동기 녀석을 만나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놓 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문을 콰당! 닫고 나갔다. 마피아도 무서워하는 청부업자에게 대놓고 화를 표시할 수 없는 그의 소박한 분노 표출 방식이었다. "휴우." 혼자가 된 니콜라스는 비로소 긴장을 풀었다. 그의 눈동자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고 있었다. "저녁이네. 아직 날짜가 안 지났구나." 꽤나 많은 시간이 흐른 줄 알았는데, 아직 하늘에 걸려 있는 태양은 오늘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꿈속에서 겪은 그 일은 오늘 있 었던 경험이 되는 셈이다. '도대체 누구지.' 그는 허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6년 전, 슬램가에서 니르가 구해준 뒤 갓 리셋한 인생을 살아오며 겪은 두 번째 신비한 경험. 하지만 그것은 미국에서 제나르의 「델」과 영혼의 접촉을 가졌던 첫 번째 경험과 마찬가지로, 그 어떤 해답도 내놓지 않은 채 강한 의문의 흔적만 남기고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다. 「진정해.」 또다시 그 목소리가 생각났다. 니콜라스는 왈칵 솟아나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았다. '도대체 누구야?' 몽환의 세계에서 모든 걸 포기하려던 바로 그 순간 들려왔던 그 목 소리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단지 이렇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이 미칠 듯한 기세로 솟구치는 아련한 상실 감. 그것은 스치는 것만으로도 뼛속 깊이 박혀 있었던 영혼의 아픔 을 일깨워 버렸다. 뭔가를 슬퍼했다. 뭔가를 잃어버렸다. 뭔가를 분노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중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가. 공백의 그늘에 몸 을 숨기고 있는 잃어버린 기억은, 도대체 왜 그러한 힌트만 던져 준 채 키득키득 날 비웃고 있는가. 쾅! 니콜라스는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나 무다리가 부러져 나갔다. "크으…." 그는 괴로운 신음을 삼켰다. 손이 아파서가 아니었다. 부서진 퍼즐 조각에 새겨진 단어처럼 머리 속을 헤집는 흔적 때문이었다. 그것들 이 사고의 시냅스에 심어놓는 혼란이 너무나도 아파서. 너무 아파 참을 수가 없어서. '도대체 뭐야? 난 뭘 잃어버린 거야? 기억을 잃기 전의 난 어떤 사 람이었던 거야?' 잃어버렸다. 아주 소중한 무언가를. 그런데 왜 그동안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까. "크윽…." 하지만 무엇보다도 답답한 건,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잃어버렸으며, 왜 그 사실조차 잊은 채 여태껏 살아왔는지 지금 이 순간조차도 전 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알고 싶어.' 자신이 누군지 알고 싶다는 욕구가 미칠 듯 끓어올랐다. 잃어버린 기억에는 아주 소중한 것을 상실한 슬픔이 각인되어 있다는 것, 이 제 알았다. 목소리의 주인. 도대체 그가 누구인지 미칠 듯이 찾고 싶고 알고 싶 고 보고 싶었다. 그는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어딨는 거야… 당신은 어딨어…." 마침내 터져 나온 흐느낌. 그것은 오랫동안 모르고 있었던 소중한 존재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기억을 되찾기 위해 해보지 않은 일이 없다. 찾아보지 않은 유명한 의사가 없으며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려 보기도 했다. 과거, 훼도니 츠 가의 대부를 죽여달라는 의뢰를 맡은 것도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였다. 살인만이 전부인 줄 알면서 살아온 뒷거리 세계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된 삶의 연속이었다. 결국 지금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예안을 적대하고 있는 집단의 인물 인 엘리우스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도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이고 그게 진실인지 확신이 없었다. 마음이 이렇게 몹시 아프다면, 잃어버린 게 고작 엘리우스라는 이름 하나뿐인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더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인가. 중현은 휴게실로 들어섰다. 먼저 들어와 있던 예안이 고개를 까딱이 며 인사했다. "그나저나 몹시 바쁘실 텐데 이렇게 나와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 합니다." "아니에요. 니콜라스 일은 제 일이기도 한 걸요." "아, 그런가요?" 시원스럽게 돌아온 대답에 중현은 조금 질투가 났다. 하지만 내색하 진 않았다. "아기가 참 예쁘게 생겼군요. 한 번 안아봐도 되나요?" 중현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 가 떨리는 걸 예안이 눈치채지나 않을까 겁까지 났다. "조심하세요." 다행히 예안은 눈치채지 못한 채 아기를 건넸다. 중현은 떨리는 손 으로 아기를 받아 안았다. "…." 손안에 느껴지는 가벼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그는 간신 히 참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기의 얼굴은 그에게 미묘 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이 아이의 친아빠라면 얼마나 행복할 까 하는 무의미한 가정법이 머리 속을 떠돌아 다녔다. 중현은 그러한 기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억지로 미소지으며 말했다. "생후 3개월 된 아기치고는 정말 너무 작군요. 웬만한 신생아도 이 아기보다는 더 클 것 같은데요? 어쨌거나 정말 사랑스러운 아기네 요." "그렇죠? 귀엽죠?" 예안은 좋아라 하며 되물었다. 그 모습마저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 진 중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 글구 원래 갓 태어났을 때에는 손바닥보다 더 작았어요. 지금 그건 많이 큰 거예요." 중현은 조금 놀랐다. "정말이요? 그럼 위험하지 않습니까?" "아, 그래도 괜찮아요. 사실 우리 외조부모님이 엄마를 낳으셨을 때 에도 크기가 이렇게 작았거든요. 집안 대대로 유전이랄까? 뭐 그런 거예요." 중현은 예안이 즐겨 사용하는 거짓말에 조금의 의심도 느끼지 못하 고 납득했다. "뭐 그럼 출산시에 고통은 적겠군요." 예안은 손을 내둘렀다. 당치도 않다는 의미였다. "덜 아프다구요? 어휴, 말도 마세요. 전 유빈이 낳다가 까무러치기 까지 했다구요. 정신 잃기 전에는 너무 아파서 비명조차 안 나왔는 걸요. 그래서 사람들 도움도 못 받고 아파트 뒤에서 낳았다고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아… 그러셨나요." 중현은 다시 아기를 예안에게 건넸다. 그녀는 귀여워 죽겠다는 듯 아기의 얼굴에 뺨을 비비기에 여념이 없었다. 끼일 수 없는 그 분위 기를 침울하게 쳐다보던 중현은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쓴웃 음을 지었다. 그는 정색했다. "그런데 니콜라스씨가 왜 그런 짓을 한 거죠?" 예안은 조금 찔끔했다. 지은 죄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 "…저는 잘 모르겠어요." "짐작 가는 것 없습니까?" "…네." "전혀요? 아주 사소한 거라도 괜찮습니다." "없어요 없어." 중현은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턱을 슥슥 어루만졌다. "알 수 없는 일이군요. 역시 아무리 실력이 대단해도 어린애는 어린 애라는 걸까요? 그나저나, 니콜라스씨 얼굴을 모르는 이웃이 없는 건 아닐 테니 지금 와서 그 집으로 돌아가기는 글렀습니다." "네?" "더 이상 그곳에서 살 수 없잖습니까? 어쩔 수 없이 이사를 가셔야 겠네요." "예엣?" 예안은 질겁했다. 고도성장 경제를 등에 업고 부동산 투기다 뭐다 하는 게 한창 강세인 지금, 정부가 내놓는 규제들이 얼마나 높은지 몰라서 하는 소리인가. "저, 집을 산지 일 년도 채 안 됐어요. 지금 집 팔면 세금 엄청 나 오는 거 모르세요?" "그래봐야 설마 억 단위로 넘어가겠습니까?" "그래도 엄청나다구요!" "어차피 예안씨는 돈이 많잖습니까? 제가 듣기로 지금쯤 예안씨 계 좌에 대략 1300조 원 가량 들어왔다던데요? 그 많은 돈은 도대체 다 어디다 쓰려고 그렇게 아끼시는 겁니까?" "돈 많다고 쓸데없이 낭비하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에요." 중현은 할 말을 잃었다. 얼굴을 찌푸리며 고민하던 예안은 결국 고 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사를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휴우. 알았어요. 당장 새 집을 알아볼게요. 또 발품 팔려면 죽어나겠네." 예안은 이 좁디좁은 서울 어느 구석으로 이사를 갈까 심각하게 고민 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중현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문을 열었다. "혹시 저희 옆집에 이사오실 생각은 없나요?" "네?" 뜻밖의 제안에 예안은 다소 놀랐다. "저희 옆집에 사는 사람들이 해외로 이민을 간다고 하는군요. 그 바 람에 지금 집을 내놓은 상태입니다만, 생각이 있으시다면 말씀하세 요. 절차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잠시 저울질을 해보던 예안은 얼굴을 찡그렸다. "중현 아저씨가 사는 동네라면 부자들만 우글거리는 폐쇄적인 단지 잖아요? 집 값도 장난 아니게 비싸고 도둑도 많을 것 같은데요?" "도둑은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요즘에는 경비 시스템이 아주 발달 되어 있어서 웬만한 도둑은 담 넘을 생각도 못하죠. 그리고 집 값이 라고 해봐야 예안씨가 현재 가진 재산에 비하면 그야말로 껌 값입니 다만?"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솔깃한 예안은 잠시 망설였다. 중현은 잘 되어가고 있다 느끼고 얼른 덧붙였다. "정말 집값 얼마 안 됩니다. 예안씨는 앤드류 왕자도 따라갈 수 없 는 세계 제일의 거부라는 걸 잊지 마세요. 예안씨가 그렇게 쫀쫀하 다는 걸 이 다음에 유빈이가 알게 되면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그, 그런가…?" "재력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누리는 사치는 오히려 자신을 돋보이 게 합니다. 게다가 예안씨한테 그런 건 사치도 아니잖습니까? 연간 소득이 4500조 원 가량 되는 부자가 억 단위의 집 값이 비싸서 싫다 고 하는 것만큼 쫀쫀한 게 어디 있습니까?" 잠시 더 저울질을 해보던 예안은 결국 끄덕였다. 쫀쫀하다는 말에 다소 울컥한 것도 생각을 굳히는 데 한몫 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렇게 하면 되잖아요. 그럼 중현 아저씨가 어떻 게 좀 알아봐 주세요." "맡겨두시지요." 중현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면서도 조금 웃음이 나왔다. 사랑에 눈 이 멀면 사람은 바보가 된다고 했던가. 일류대를 수석 졸업하고 국 정원의 유능한 젊은 간부가 된 자신이 일개 부동산 중개인으로 전락 할 줄 누가 알았을까. "아참,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어요." "?" "전에 중현 아저씨가 말씀해주신 MIT 양자 컴 개발에 관한 건데요, 중현 아저씨는 그들이 개발 자체를 극비로 하고 몰두하다가 실패했 다고 했잖아요?" 중현은 의아함을 느꼈다. 왜 그 이야기가 여기서 나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만…?" "그게 좀 이상해서요.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미국은 연구에 성공 했다고 나왔거든요." "네?" 중현은 몹시 놀랐다. "그게 정말입니까?"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국정원을 물로 아는 거냐고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 제일의 천재로 일컬어지는 예안이 한 말이었다. "저도 흥미가 있어 조사를 해봤어요. 분명히 제가 알아봤을 땐 그게 사실이었거든요." "흠." "아 물론 떠도는 소문을 종합한 건 아니고 극비 문서 같은 걸 좀 뒤 적거린 결과예요." 중현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조심스럽게 그의 반응을 기다리 던 예안은 한참이 지나도 그가 아무 말을 않자 다시 말했다. "중요한 건 중현 아저씨가 알고 있는 게 맞냐 아니면 제가 맞냐 하 는 게 아니에요. 전 왠지 무언가 더 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중현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런 판국에서도 아저씨냐. 중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끄덕였다. "꼬리를 밟히는 위험까지 무릅쓰며 얻어낸 정보인데, 속았을지도 모 른다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군요. 어쨌거나 예안씨가 말씀하신 거라 면 신빙성이 높은 거겠죠. 한 번 더 조사를 해봐야겠습니다." "사실은… 아니, 아니에요. 못들은 걸로 하세요." 무심코 한수가 미국에서 가져온 양자 컴 설계도에 대해 이야기하려 던 예안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중현은 의아했다. "예? 무슨 말씀을 하시려다가 만 거죠?" "아니,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전 바쁜 일이 있어서 집 에 가봐야겠어요." 예안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지금 그냥 가신다구요? 아까 니콜라스씨 얼굴도 제대로 못 봤 잖습니까?" "저는 할 일이 좀 많다구요. 경호원 따위가 아프다고 해서 제가 간 호에 매달려야 할 이유는 없어요. 그나저나 니콜라스는 언제쯤 퇴원 할 수 있는 거죠?" 아직 니콜라스와 대면하는 게 꺼리다 보니 저도 모르게 매정한 말투 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중현은 제 멋대로 '둘이 싸웠나?'라고 생각 해 버렸다. "자세한 건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특별히 이상한 곳이 없으 니까 오늘내일 안으로 퇴원 가능할 겁니다. 정밀 검사 결과는 며칠 후에 나올 테구요. 그건 제가 나중에 따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제 생각엔 그런 정밀 검사 같은 건 별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걘 몸 이 강철이나 마찬가지거든요. 미국에서 제나르 대신하고 싸웠을 때 중현 아저씨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 녀석 걱정 같은 거 전혀 안 할 걸요?" 예안은 신난다는 어투로 그렇게 말했다. 중현은 그녀의 말 중 위화 감이 묻어나는 단어를 발견하고 어리둥절했다. '제나르 대신? 대신?' 의원이면 의원이지 대신이라는 호칭은 또 무어란 말인가. 중현은 강 한 의구심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예안씨를 노리는 사람들이 있었지. 제나르 의원도 그 중 한 명이 틀림없고 말이야.' 그는 예안이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도 모른 채 생각의 늪에 빠져들었다. '현재 제나르 의원을 철저히 조사하고 있지만 별달리 수상한 점은 없었어. 정치가라면 한두 군데쯤 갖고 있을 약점 같은 것도 하나도 없이 오히려 깨끗하고 말이야.' 제나르. 청년처럼 건장하고 건강한 데다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독신주의자. 정치 비자금은커녕 사소한 벌금 같은 것도 물어본 적 없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시민의 대표주자라 일컬어지는 정치가. 그 동안 국정원의 모든 힘을 총동원해서 그에 대해 조사를 해보았지만 딱히 수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수상한 점이 전혀 없다는 게 오히려 더 수상했다. '예안씨의 정체를 알고 노리는 자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제나르 의 원이 관여하고 있다면 미국이 이미 예안씨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아 닐까? 아니면, 제나르 의원은 미국 정치가라는 것말고도 또 다른 제 2의 신분을 갖고 있기라도 한 걸까?' 맥을 소유함과 동시에 한국은 역사상 유래 없는 엄청난 도약을 꾀하 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이 너무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아 중현은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예안의 정체가 매스컴에 노출된다면 그녀를 노리는 자들 이 더욱 많아질 터이다. 그때를 대비해 지금부터 철저히 준비해야겠 지만, 일단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세력이 예안을 노린다는 사실부터 시급히 해결해야 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51 회] 날 짜 2004-03-12 조회 / 추천 3392 / 48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가장 소중한 것 그렇게 뛰쳐나간 후 잠깐이 지나면 다시 돌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새하얀 시트 위로 창백한 어둠이 깔릴 때까지 끝내 예안은 다시 나 타나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왜 안 오지…." 그런 심한 말을 들었으면서도 아직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자신이 우스웠다. 잠시 얼굴을 비춘 것 가지고 용서받았다고 여기는 건 대단한 착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의 눈은 병실문이 열리기만을 고대 하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보이지 않는 실에 매달린 어둠이 차갑게 창 밖을 맴돌고 있었다. 유리창을 때리는 찬바람의 기세는 제법 사나웠 다. 하염없이 어둠 너머를 응시하던 니콜라스는 벌떡 일어났다. "어머, 함부로 움직이시면 안 돼요." 막 들어서던 간호사가 그를 만류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뺨 을 손가락으로 감싸 가까이 끌어당겼다. "어머,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간호사는 깜짝 놀라 얼굴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뻗어온 농 밀한 유혹은 그녀의 의식을 마비시켰다. 강제로 키스 당한 순간 그 녀는 동공이 풀린 채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만 자고 있어." 니콜라스는 최면이 걸린 그녀를 침대에 눕혀놓고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형사들이 담배를 피러 잠깐 자리를 비운 건 엿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다. 병원 후문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곳곳에는 가로등 빛에 자리를 빼앗 긴 어둠이 스산하게 도사리고 있었다. 그 자리만을 골라 터덜터덜 걸었다. 딱히 가고 싶은 장소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병실에 가만히 처박혀 있는 것보다는 무작정 걷는 게 나았다. 이따금씩 차도를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태 평해 보인다. 쇳덩어리들이 참 시원시원하게 달리기도 한다. 횡단보 도를 건너 병원 근처의 공원에 도착한 니콜라스는 하늘을 올려다보 았다. 새카만 우주 곳곳에 불빛이 반짝인다. 하지만 그건 도심의 어둠을 밝혀주는 별빛이 아니라, 첩보의 눈을 번뜩이는 인공위성의 눈동자 였다. 낭만적인 운치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누나…." 보잘것없는 불빛들이 별자리처럼 이리저리 이어지고 엮어져 예안의 웃음을 그려내고 있었다. 하염없이 올려다보던 니콜라스는 금방이라 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시선을 수그렸다. 「나가. 당장 나가.」 마음 속에 뿌리를 내린 독설이 머리를 치켜든다. 발버둥을 쳐보지만 각인은 지워지지 않는다. 「웃기지 마. 사람 죽이려고 한 주제에 사과하면 다야?」 가슴은 미칠 듯한 아픔에 시달리고 있었다. 차라리 심장을 뜯어내 버리면 이 고통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을 것인가. 「너 같은 녀석 필요 없어. 당장 나가! 나가란 말이야!!」 니콜라스는 흐느껴 울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채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미안해… 미안해 누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본 슬픔은 미지의 영역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 켜주지 못했다. 그것은 달콤한 아름다움 따위가 아니라 미치도록 서 럽게 마음을 찢어발기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버림받았다는 아픔 의 본질인데, 어째서 이따위 것을 맛보고 싶어했던 것인가. 흐느껴 울고 울고 또 울었다. 풀잎을 쥐어뜯고 나무를 쓰러뜨리고 돌멩이를 부숴 버리며 울고 또 울었다. 눈물이 흘러 내려 흙을 적시 고 부서진 마음이 흘러 내려 다시 또 그 위를 덮었다. 서러운 밤하 늘의 불빛마저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 같아 참지 못하고 또다시 울 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때였다. "어디 아프니?" 번쩍 정신이 든 니콜라스는 황급히 몸을 돌리며 몇 걸음 물러났다. 순식간에 자세를 바로잡은 그는 잔뜩 경계하며 자신을 부른 사람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의 표정이 맥없이 탁 풀어졌다. "왜 그렇게 울고 있어?" 니콜라스는 자신의 눈을 비볐다. 믿을 수 없었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이 형은 나쁜 사람이 아니야."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었을 줄이야. 니콜라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시 한 번 눈을 비 볐다가 떴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왜 그렇게 울고 있니? 부모님은 어디 가셨어?" 낯선 얼굴. 하지만 얼굴 가득 짓고 있는 따스한 미소가 그의 마음을 잡아끌었다. "실컷 우는 건 슬픔을 해소시켜주긴 하지만, 너무 자학하는 건 좋지 않아. 너 자신을 소중히 아껴." 넋을 잃은 채 낯선 소년을 멍하니 쳐다보던 니콜라스는 더듬더듬 입 을 열었다. "너, 넌 누구야?" "글쎄. 그게 알고 싶어?" 17 아니 18살쯤 되었을까. 소년은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가득 따 스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진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와 새하얀 피부 가득 뿜어 나오는 향긋한 자스민 향기. 니콜라스는 덜덜 떨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이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누구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강렬한 매력과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영혼을 지니고 있는 소년. 맹세코 그는 소년을 처음 보는 것이었지 만, 그의 심장은 마치 오래 전에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난 것처럼 폭발하듯 뛰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다시 한 번 물었다. "누구야? 너는 누구야?" 손가락 끝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행여나 소년이 자신 의 동요를 알아차릴까 겁나 얼른 손을 뒤로 감추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나에겐 중요해." "말해주고 싶지 않은 걸." "그래도 말해." "말해줘도 너는 모를 거야." "상관없어. 말해." "알고 싶니?" "말해." "후훗. 자신 있으면 한 번 맞춰 볼래?" 일순간 소년의 눈이 부드럽게 빛났다. 나긋나긋한 말 한 마디 한 마 디에 니콜라스는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손을 펴서 오른쪽 가슴에 갖다 댔다. 두근거리는 건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이런, 손이 엄청 차가운데? 너 정말 괜찮은 거야?"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소년은 얼음처럼 차가운 니콜라스의 손을 잡고 깜짝 놀랐다. 안쓰러워하는 그 미소와 눈이 마주친 순간, 니콜 라스는 울컥한 기운이 가슴을 휩쓸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부들부들 떨렸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 나나난 괘, 괜찮아…요." 바보 같이.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단지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이 서러운 기분이 솟구쳐 올랐다. "혀, 형은 누구예요?" 울음이 그렁그렁한 니콜라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소년은 맞잡 은 그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살며시 갖다 댔다. 그리고 몸을 살짝 숙여 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내가 누군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네가 얼른 울음을 그치는 게 중요하지." 결국 니콜라스는 울고 말았다. 목소리에 취하고 눈빛에 설레고 부드 러운 그 온기에 가슴이 떨려서, 너무나도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참 을 수 없었다. "에이에이. 이렇게 울면 좋지 않아. 꽤나 씩씩하게 생겼는데 이래서 야 되겠어? 사내 녀석이 자꾸 이렇게 울고 그러면 여자한테 퇴짜 맞 는다 너?" 그는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그칠 수 없었다. 빛 바랜 설움이 가슴에 남긴 상처가 너무 아파서. 그 상처가 심장에 파놓은 구멍이 너무나 쓰라려서. 그 자리를 차곡차곡 채우는 슬픔이 너무나도 괴로워서. 너무 아프고 너무나 쓰라리고 너무나도 괴로웠다. 바보처럼, 그렇게 바보처럼 그는 눈물을 그치지 못한 채 한참 동안 울기만 했다. "울지마 꼬마야.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건 그렇게 울기 위해서가 아니잖아? 씩씩하게 웃으면서 행복하게 잘 살아야지." 소년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로 자신의 손을 꼭 잡아주고 있었다. "형." 울음 섞인 목소리. 소년은 따뜻하게 대답했다. "왜, 하고 싶은 말 있니?" "가지 말아요."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 니콜라스는 몰랐다. 울음이 맺힌 눈으로 멍하니 고개를 들어보니, 소년은 난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미안해." 그 순간, 니콜라스는 가슴에 무언가 무거운 것이 쿵 하고 떨어지는 걸 느꼈다. 마음의 한쪽이 찢어나가는 고통이 손을 뻗쳐 온 순간 그 는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울지 마 꼬마야. 널 낳은 부모님들이 지금 네 모습을 보시면 아마 몹시 마음 아파하실 거야." 소년의 포근한 품안은 너무나도 따스했다. 니콜라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목놓아 엉엉 울었다. 뺨 위로 차가운 이슬이 내려앉았다. 니콜라스는 가만히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풀잎에 맺힌 이슬 위에 자신이 누워 있었다. 먼 하늘에서부터 노랗게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소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멍하니 앉아 있던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년의 옷자락을 꼭 움켜쥐고 제발 가지 말라고 애원하던 어젯밤 일이 문득 생각났 다. 소년이 따뜻이 잡아주었던 손바닥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그는 또 다시 눈물을 흘렸다. 소년이 자신과 함께 가주길 원했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제발 자신의 곁에 있어주길 원했다. 하지만 우연한 만남으로 다가온 그는 -과연 우연이었을까 그게- 태양이 떠오르면 풀리는 마법처럼 어느덧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흐윽, 흑…." 니콜라스는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비수처럼 마음 속을 헤집는 그 리움의 상처가 너무 아파서. 자신의 마음 속에 공허한 빈자리를 만 들어놓고 사라져 버린 소년이 너무나 미워서. 그를 붙잡지 못하고 그대로 보내버린 스스로가 너무나도 한심해서. 그렇게 또다시 눈물만 쏟았다. 바보처럼 그렇게. 아이처럼 그렇게. 긴급 공지 띄웁니다. 필독입니다. 아담의 상처를 아직 안 읽었는데 읽을 계획을 갖고 계신 분들은 조아라에 있는 걸 읽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지금 현재 아담의 상처 수정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몇 편 정도는 이미 수정이 끝 난 상태구요. 아직 산더미처럼 남았지만 빠른 시일 내에 고칠 예정입니다. 스토리는 고치지 않습니다. 만연체 투성이인데다가 장광설로 이 루어진 문장들을 보다 간결하고 정돈된 문장으로 고치는 게 이 번 수정의 목표입니다. 수정본은 일단 드림워커에서 연재를 할 계획을 갖고 있고, 수정이 다 끝나면 조아라에 있는 버젼도 수 정 버젼으로 바뀔 것입니다. 아직 드림워커에서 아상 수정 버젼 연재를 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근시일 내에 시작할 예정이니, 읽을 계획이 있으신 분들 은 조아라에 있는 걸 읽지 말아주십시오. (너무 장광설에다가 필력도 형편없습니다. 뭐 소엄 역시 필력 이 떨어지는 건 마찬가지지만 아상은 그 정도가 더 심하지요.-_-) 드림워커 http://drwk.co.kr 한글로 '드림워커'를 쳐도 갑니다. 아직 아상 게시판도 안 만들었습니다. 수정 비축분이 어느 정 도 쌓이면 생성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소엄 게시판에 대고 조아라에 대한 이야기 는 절대!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ps : 정녕 제가 2일만에 연재를 한 주제에 '와 너무 연재 주 기가 짧은 거 아냐?'라고 감탄했단 말입니까. 귀차니즘의 마수 가 어느새 제 골수에 침투한 모양입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52 회] 날 짜 2004-03-14 조회 / 추천 3394 / 52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가장 소중한 것 환자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니콜라스는 자신의 무기를 챙기 면서 쭈뼛거렸다. 냉랭한 기운을 폴폴 날리며 의자에 앉아 있던 예 안은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빨리 챙기고 따라 와." "으, 응." 니콜라스는 잔뜩 기가 죽은 채 예안을 따라갔다. 화장대를 부숴 놓 은 것 때문에 엄마한테 혼날까 겁먹은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예안은 건물을 나서고 정원을 가로지를 때까지 한 마디도 없었다. 정문을 나서는 순간 우뚝 멈춘 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니콜라스를 돌아보았다. 올 것이 왔구나 싶은 그는 움찔했다. "이제 와서 특별히 사과 같은 걸 듣고 싶은 생각도 없고 네가 동네 한가운데에서 총을 쏴댄 걸 나무랄 생각도 없어. 일단 한 가지만 물 어보자. 너 정말 유빈이 죽일 생각으로 총을 갖다댄 거야?" "아, 아니야! 그, 그런 건 절대 아니야!" "그럼 왜 멀쩡한 아기 이마에 총을 댄 건데?" "그, 그건…." 니콜라스는 할 말이 없었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몰랐다는 말을 어떻 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예안은 싸늘한 표정을 풀었다. "네 나이가 아직 어리다는 걸 감안해서 이번 한 번만큼은 그냥 넘어 가 주겠어. 하지만 앞으로 또 이런 짓을 하면 그땐 정말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뜻밖의 용서. 니콜라스는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이야?" "특별히 봐주는 거니까 감사하게 생각해." "정말 용서해주는 거야? 나 때문에 집까지 이사하게 생겼다며?" "집이야 뭐 어차피 이사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어." "고마워 누나."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기뻐했다.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검은 눈 동자를 보노라니, 예안은 조금씩 가슴이 아파 왔다. 어쩌면 니콜라 스가 지닌 상실의 아픔이 그녀의 마음에까지 전염되고 있는 것일까. "자, 일단 호텔이라도 가자. 너 때문에 이제 그 집에는 못 들어가게 생겼으니까." 니콜라스는 예안이 내민 손을 기쁘게 잡고 걸음을 옮겼다. 예안은 모처럼 후련해진 기분으로 발을 떼어놓았다. 하지만 그녀는 몇 걸음도 채 떼어놓기 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 다. 한 팔에는 아기를 안고, 한 손에는 니콜라스의 손을 잡고 있으 니 지나가는 행인들마다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 사람 좀 그만 힐끔대란 말이야! 내 나이에 애 가진 게 그렇게 나 신기하고 이상한 구경거리냐구!'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예안은 서둘러 택시를 잡았다. 어찌어찌 해서 호텔까지는 정말 아무 문제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가 얻은 상처는 너무 컸다. 니콜라스와 둘이 무슨 관계냐고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는 택시 기사. 애엄마가 애 데리고 다니는 게 무슨 구경거리라고 흘끔대는 행인들. 모자지간이라고 대답해주면 수긍할 것이지 끈질기게 묻는 남학생. '내가 이러니까 밖에 나오기가 싫은 거라구. 제기랄!' 지원에게는 떳떳한 내 아기니 뭐니 하면서 자랑스럽게 말하곤 하지 만, 결국 그녀가 아기를 데리고 밖에 나돌아다니는 걸 꺼리는 이유 는 이런 시선을 받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하기야, 이 각박한 세상에서 어리디 어린 18살짜리 애엄마가 어디 흔한가.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예안은 여직원에게 방을 요구했다. 니콜라스를 데리고 올라가는 도중 여직원이 동료와 수군거리는 게 들렸다. 자신 과 니콜라스를 어린 부부쯤으로 여기는 입방아에 예안은 혈압이 솟 았지만 꾹 참았다. 룸에 들어서자마자 예안은 답답한 숨을 푸하 토해냈다. "내가 다시 이 호텔에 오면 사람이 아니다. 지배인이라는 작자는 도 대체 얼마나 바쁘길래 저런 버릇없는 직원을 냅두는 거야? 나중에 이 호텔 사 가지고 확 폐기처분 해버려?" 니콜라스는 다소 미안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근원 적인 원인은 바로 자신이 아닌가. "근데 아저씨는 뭐라고 하셔? 아저씨는 누나 정체에 대해서 아직 아 무것도 모르잖아?" "어제 집에 돌아가자마자 틀어박혀서 한 걸음도 안 나왔어. 아빠가 바람 쐬러 나간다는 것도 극구 말렸구. 초인종 눌러대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거든. 아빠가 어떻게 된 거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거 변명하느라 머리에 쥐나는 줄 알았어." "내 얼굴 본 사람들이구나. 미안해." "휴우." 문득 자신의 처지가 비참해진 예안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너 때문에 집에도 못 들어가고 이게 뭔 꼴이냐. 멀쩡한 집 놔두고 호텔에 돈 갖다 버려야 하다니… 으으윽! 돈 아까워서 이거 어떻게 하라구!" "그럼 호텔비는 내가 낼게." "네가 돈이 어딨어? 100억 달러(1조 원)나 되는 거 이상한 데다 다 쓰고 지금 몇 십만 원 남았다며? 누군지 몰라도 네 파트너라는 사람 정말 불쌍하다. 맨날 적자만 나는 가계부 정리하는 것도 참 신경질 날 거야 아마." "난 돈을 낭비하지 않아. 정말 필요한 곳에만 썼을 뿐이야." "어디다 썼는데?" 니콜라스는 얼굴을 굳혔다. 그는 예안을 마주보며 또박또박 힘주어 대답했다. "그건 말할 수 없어. 내 목숨하고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니까." 지금도 충분히 강해 보이는데 1조 원이나 되는 돈을 퍼다 부을 까닭 이 있을까. 예안은 어이가 없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아기가 입을 오물거리며 손을 뻗쳐 왔다. 예안의 관심은 곧바로 아 기에게 옮겨졌다. "앗, 배고파 유빈아? 신경 못 쓰고 있어서 미안." 예안에게 가장 즐거운 시간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시간이다. 니콜 라스는 엄마와 아기의 행복한 교감이 이뤄지는 그 광경을 부러운 듯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근데 나 있는 앞에서 젖먹이고 있으면 창피하지 않아?" "응? 별로 안 창피한데?" "그래도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잖아? 기억 안 나? 제나르의 저택에서 탈출했을 때 누나가 옷 입고 자는 거 답답해해서 내가 벗겨줬잖아? 그때 누나 나한테 화냈었어." 정말 그랬음을 떠올린 예안은 피식 웃고 말았다. 예전에는 남자들이 자신의 몸을 보는 걸 절대 참을 수 없었는데, 어째서 지금은 니콜라 스 앞에서 아기 젖까지 먹이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은 것인가. "글쎄, 왜 그럴까?" 니콜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예안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아마도 네가 편해서겠지. 뭐랄까. 넌 틈만 나면 날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려고 드는 속이 시커먼 남자들하고는 다르잖아?" 어떻게 보면 칭찬 같기도 하고 다르게 해석하면 일정한 구역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경계선을 긋는 것 같기도 했다. 니콜라스는 자신에 대한 예안의 마음이 정확히 어떤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녀에 대 한 자신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휴우. 모르겠다.' 그는 저조한 얼굴로 물끄러미 예안과 아기를 바라보기만 했다. 몹시 배가 고팠던 듯 아기는 힘차게 젖을 빨고 있었다. 예안은 간지러우 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키득키득 웃어가며 아기의 배를 다독여주고 있었다. 세상 무엇보다 행복해 보이는 그 모습에 니콜라스는 강한 질투를 느꼈다. "누나. 나도 젖 주면 안 돼?" "뭐?" 뜬금 없는 부탁에 예안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웃기지 마. 내가 네 엄마라도 돼?" 니콜라스는 지지 않았다. "전에는 하루 정도 엄마 노릇해줄 수 있다고 했잖아." "그건 그때 이야기지." "그런 게 어딨어? 한 번 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해줘야 하는 거 아 냐?" "웃기지 마. 하여튼 안 돼. 내 가슴은 내 것도 아니고 유빈이 거야. 너한텐 못 줘." 쌀쌀하리만큼 냉담한 거절. 잔뜩 기가 죽었던 니콜라스는 다시 용기 를 내어 슬그머니 예안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지금 뭐 하냐는 그녀 의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한 번만, 응? 안 돼?" "안 돼. 절대 안 돼!" "한 번만."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한 번…." "안 돼!!" 마지막에는 니콜라스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잔뜩 기가 죽은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비에 젖은 새끼 토끼처럼 안쓰러운 그 모습에 예안은 괜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아빠가 하루만이라도 잘 대해주라고 했었지?' 그렇지만 도대체 뭘 어떻게 해줘야 한단 말인가. 이 녀석 부탁을 들 어주는 건 죽어도 싫다. 끙끙대며 고민하던 예안은 쪽팔림을 무릅쓰 며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럼 무릎베개라도 해줄까?" "응!" 남자였던 시절이라면 절대 입에 담지 않았을 대사였다. 어쨌든 지금 은 잘 어울리니 그냥 넘어가자. 니콜라스는 좋아라 하며 예안의 무 릎을 베고 누웠다. '별것도 아닌 것 같고 어린애처럼 좋아하네. 아, 그러고 보니 얘는 아직 어린애였지.' 예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니콜라스의 머리칼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니콜." "응." "너 꽤나 어린애처럼 변한 것 같아. 사실 미국에서 널 처음 봤을 땐 어린애라는 느낌이 그다지 없었거든. 그때는 어린애라기보다는 무슨 기계 로봇 같은 뭐 그런 게 강했는데, 지금은 전혀 안 그래." 아기는 어느새 배가 찼는지 작은 트림을 토해냈다. 예안은 잠든 아 기를 옆에 내려놓았다. 두 손이 자유로워진 그녀는 니콜라스의 뺨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 내렸다. "어제는 심한 소리해서 미안해." 니콜라스는 눈을 감은 채 움찔했다. "넌 잘 모르겠지. 하지만 유빈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마지 막으로 남겨준 유산이야. 나한테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아기라구. 내가 요새 유빈이한테만 정신 팔고 살아서 네가 섭섭한 건 아는데, 그래도 난 네가 날 좀 이해해줬음 좋겠다." 따스한 그녀의 손길을 음미하던 니콜라스는 문득 뜨거운 뭔가가 뺨 을 타고 흐르는 걸 느꼈다. 굳이 확인해볼 필요도 없었다. "우냐? 사내 녀석이 뭐 이런 거 가지고 울고 그래?" 이상하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예전에는 흘리는 법조차 몰랐던 눈 물. 하지만 한 번 터진 뒤로는 너무 흔하게 흘러나오는 것도 눈물이 다. "너 나 좋아하냐?" 울컥하는 기운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그것을 참 았다. '별것 아닌 말 갖고 울고 그러네. 역시 어린애는 어린애인 걸까?' 예안은 괜히 이런 분위기를 조성한 게 후회되었다. 거북한 느낌이 싫었던 그녀는 표정을 활짝 폈다. "에휴. 내가 왜 이딴 쓸데없는 소리나 하는 건지 모르겠네. 너 같은 애가 사랑이니 뭐니 하는 걸 알 리도 없는데 말이야. 하여튼 유빈이 많이 미워하진 말아 주라. 알았지?" "…아해." 소리가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예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 물었다. "응? 뭐라고 했어?" 니콜라스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예안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당황 한 그녀가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는 울먹이며 자신의 마음 을 가득 쏟아냈다.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처음에는 황당했다. "정말 좋아해. 정말 좋아해. 정말 좋아해." 두 번째에는 안쓰러웠다. "아주 많이 좋아해. 좋아한다구. 좋아한단 말이야." 세 번째에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부드러운 표정을 띤 예안은 가만히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래그래. 좋아해라 좋아해. 좋아하는 것 갖고 누가 뭐라고 하냐? 좋아하든 싫어하든 네 맘대로 해." "좋아해… 좋아한단 말야… 흐윽…." 아직은 니콜라스의 울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완전히 알 수 없었다. 단 하나 예안이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는 잃어버린 기억으로 인한 공포를 자신에게서 보상받고 싶어했다는 사실. '그래서 화가 안 났던 거냐? 유진우 넌 참 입맛도 까탈스럽다.' 단지 자기 자신을 따뜻이 보듬어줄 보호자의 온기를 필요로 했던 니 콜라스. 그런 그에게 나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게 비로소 커다란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누나." "어?" "어제 나… 누나한테 나가라는 말 듣고 나왔을 때… 정신을 잃었는 데… 막 세상이 미워지려고 그랬다?" 커다란 상처를 입은 아이의 얼굴. 예안은 그런 표정이 차라리 생소 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난 이 세상을 그대로 포기했을지도 몰라. 나 자신을 포기했 을지도 몰라. 그럼… 그럼 어떻게 됐을까?" 예안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문득 「델」과 맞서 싸우던 니콜라스의 모습이 생각났다. 화염에 불타 이글거리던 그의 강인한 눈동자. 그 것은 그녀의 마음 속에 각인처럼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우리 동네 하나쯤은 그냥 날아갔겠지. 어쨌든 간에 네 힘은 무시할 수 없는 거니까. 그리고 넌 탱크가 쏜 포나 전 투기가 날린 미사일에 맞아 죽었을 테고." "탱크?" 니콜라스는 피식피식 비웃었다. 탱크 따위는 가소롭다는 뜻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날 불렀어." 예안은 의아했다. "불렀다니? 누가?" "처음 듣는 목소리였어. 근데 그 순간 왈칵 눈물이 나더라. 뭐랄까. 아주 소중한 무언가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느낌이었어." 깨끗한 뺨을 타고 눈물이 한 방울 굴러 떨어졌다. 예안은 마음이 아 파 왔다. 슬픔에 사로잡힌 그의 기분이 예안의 가슴에까지 전이되고 있었다. "근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 "왜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거지? 난 분명히 뭔가 소중한 걸 잃어버 렸어. 잊고 있었어." "…." "근데 왜 기억나지 않지? 왜 나는 잃어버렸다는 것도 모른 채 살았 던 거야?" "글쎄.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그의 눈동자는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예안은 뭐라 해줄 말이 없었 다. 그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잊고 무엇을 모르고 살았는지 아무것 도 모르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해줘야 한단 말인가. "기억나지 않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난 분명히 뭔가를 잃어버 렸어. 하지만 그게 뭔지 기억나지 않아."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잃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살아 간다는 건 얼마나 갑갑한 것인가. 어쩌면 인간의 운명을 쥐고 있는 절대 공포는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방에 유빈이 좀 눕혀놓고 올게." 부담스러운 분위기에 숨막혀하던 예안은 얼른 일어나 아기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눈물을 글썽인 채 길게 누워 있던 니콜라스는 힘 없이 중얼거렸다. "어딨어… 당신은 어딨어…." 또다시 튀어나온 그 말.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랐다. "어딨는 거야…." 무릎을 두드리면 튀어 오르듯. 그렇게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의미 없 는 중얼거림. 도대체 그것은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인가. 문득 책이 읽고 싶다는 욕구가 들었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소중하 게 넣어둔 조그만 책을 꺼내어 펼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 기 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책제목이었다. 「가장 소중한 것」 휴머니즘을 철저히 부정한 철학서를 바탕으로 무수한 인기, 온갖 이 슈, 그리고 학회와 인권단체의 갖은 지탄과 비난을 한 몸에 얻고 있 는 제임스 해론. 그러나 그는 자신의 다른 저서들과 성격을 달리하 는 유일한 철학서를 한 권 냈다. 그것이 바로 지금 니콜라스가 들고 있는 것이었다. "인간이기에 살 가치가 없다. 인간이기에 죽어야 한다. 인간이기에 소멸해야 한다." 이 짧은 세 마디로 축약될 수 있는 제임스 해론의 철학서들은 한결 같이 인류의 존속을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소중한 것」만큼 은 달랐다. 니콜라스는 가만히 소리내어 앞부분을 읽어보았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저마다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 그것이 없이 인 간은 살아갈 수 없다. 현대 사회가 행복하지 않은 것도 바로 그러한 까닭에서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니콜라스는 서둘러 눈물을 닦아내고 다시 읽 었다. "먼 옛날 인간이 잃어버렸던 가장 소중한 걸 되찾게 되면 떠났던 축 복은 다시 찾아들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가장 소중한 걸 잃어버리 지 않고 갖고 있는가?" 바로 얼마 전까지 만큼은 그의 저서 중 유일하게 공감할 수 없었던 책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니콜라스는 제임스 해론이 던지는 메 시지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내가 잃어버린 건 도대체 뭐지?"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책을 덮으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잃어버린 걸 되찾는다면, 나도 행복해질까?" 행복. 그것은 니콜라스에게 너무나 막연하고 무겁게 느껴지는 단어 였다.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그냥, 그냥 아주 기분이 좋아졌으면 좋겠 어." 그는 눈을 감았다. 침묵 사이로 조용히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온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그것은, 잃어버린 무언가를 몹시 그리워하는 니콜라스의 마음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분위기 다운은 여기까지- 혹시라도 소엄을 갈무하시는 분들이 있다면은(정말 있을까?-_-) 그러지 말아달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렇다 해서 제가 어떤 조 치를 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은 여러분들의 양심에 맡기는 것이겠지만요. 진지하게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제 글이 다른 사람의 PC에 남아 있는 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거든요. 요즘 들어 아상을 리메이크 하고 있는데, 몇 개월 전에 완결냈었 던, 그리고 그 당시에는 문장에 대해 커다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 던 것에 대해 지금 생각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후반부는 아직 안 읽어봐서 모르겠지만, 하여튼 초반부는 완전 개판 개 날린 문 장으로 이뤄져 있더군요. 뜨헉-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소엄을 완결내고 다시 시간이 좀 흐른 후에 보게 된다면 저는 같은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즌에 모르 는 사람이 소엄을 갈무리해서 갖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사실상 소름끼치도록 부끄럽습니다. 그러므로 갈무리를 하지 말아 달라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53 회] 날 짜 2004-03-17 조회 / 추천 3296 / 42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가장 소중한 것 이병원 교수를 만나기 위해 춘식은 아침부터 부산하게 외출 준비를 했다. 원래라면 미리 약속을 잡고 만나야하겠으나 혹시라도 모를 도 청의 가능성 때문에 그는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가스총도 미리 사놨고. 음, 일단 안심이군. 한수 녀석에게라면 몰 라도, 설마하니 미국 녀석들이 나한테까지 총을 쏘진 않겠지. 그렇 게 되면 정말 엄청난 긴장 사태가 벌어진다구." 그러나 완전히 안심할 순 없다. 한수의 말에 따르면 쫓기는 와중에 도 녀석들은 총을 쐈다고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가스총으로만 안전 을 보장할 순 없기에 춘식은 일부러 건장한 남자 직원들 세 명까지 불러 같이 가기로 했다. '여차하면 총알받이로 써야지.' 자신들의 상관이 이런 생각으로 호출한 걸 알 리 없는 직원들은 정 원에서 얼른 가자고 외치고 있었다. 깔끔한 정장을 빼 입은 춘식은 차에 올랐다. "자, 가자." "예, 사장님." 춘식은 차에 올라 잠깐 마음의 정리나 할 겸 눈을 감았다. 그런데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차가 멈췄다. "내리십시오 사장님." "뭐?" "다 왔습니다. 내리시라구요." 출발한지 오 분도 채 안 됐는데 벌써 도착했단 말인가. 떨떠름한 채 내리던 춘식은 주변을 둘러보고서야 이 교수와 자신이 이웃사촌이었 다는 걸 깨달았다. 어쩐지 저 녀석들이 저리도 심하게 투덜거린다 싶었더니,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나. "바로 코앞인데 도대체 뭐가 불만이시라고 우리까지 불러서 차를 운 전하라 하시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녀석들이 노골적으로 투덜거리는 게 들려온다. 춘식은 쑥스럽기 그 지없었다. "어흠, 어흠." 멋쩍어하던 그는 헛기침을 연신 하며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우진 기업 회장 김춘식이라고 합니다. 이 교수님을 만나 뵙고 싶어 서 왔습니다만." 「저런, 남편은 지금 집에 없는데요?」 허탕을 친 춘식은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이 교수는 아무리 바빠도 휴일에는 반드시 집에 있다는 정보 하나만 믿고 아침부터 이런 먼 발걸음을 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인가. "혹시 어디 가셨는지 알 수 있습니까?" 「요새 아주 바쁘다고 며칠째 연구소에서만 머무를 뿐 집에는 잘 안 들어오고 있어요. 혹시 남편이랑 약속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아닙니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럼 나중 에 다시 뵙겠습니다." 춘식이 그렇게 돌아서자 차를 운전했던 진석이 투덜거렸다. "휴일 날 아침부터 일할 게 있다는 소리에 놀라 달려왔더니 결국 이 렇게 쫑난 거예요? 이렇게 잠깐 차나 몰라고 시키실 줄 알았으면 하 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절대 안 왔습니다. 그러니까 미리 약 속이라도 잡아놓으셨으면 저희들이 헛걸음은 안 했잖아요."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이른 점심 겸해서 내가 한 턱 쏠 테니까 시내로 가자구." "어 진짜요? 노랭이 사장님이 웬일이에요?" "이봐, 이봐. 나도 쏠 때는 쏘는 사람이야. 자네는 여태껏 나를 자 린고비로 취급했나?" 진석은 좋아라하며 차를 몰았다. 다른 두 사람도 잔뜩 기대에 차서 춘식이 얼마나 비싼 음식을 살까 기대했다. 고층 빌딩들이 즐비한 시내로 접어들고 한참 달렸을 때였다. "잠깐만. 잠깐만 차 세워." "예? 아, 예." 도로 한 변에 차가 정지하자 춘식은 차창을 내리고 밖을 내다보았 다. 봄 햇살을 가득 받고 서 있는 하얀 건물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망막에 커다랗게 와 박혔다. 옥상에 큼지막하게 서 있는 「유한전 자」라는 글씨가 그의 가슴에 새롭게 와 닿고 있었다. "사장님?" 가볍지 않은 분위기를 느낀 진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춘식은 고개를 돌리며 쿡쿡 웃었다. "자네들은 유한전자를 어떻게 생각해?" "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만 마주 볼 뿐 뭐라 대 답하지 못했다. 한국의 첨단산업을 이끌어 가는 거둥 중 하나인 유 한전자가 뭐 어떻다고 저러는 것인가. "잡을 수 없는 꿈이라 생각하나? 아무리 손을 뻗고 점프를 해도 닿 지 못하는 구름이라 생각하나?" "…."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기대해도 좋아." 자신감으로 충만한 녹색 눈동자를 떠올리며 춘식은 미소지었다. 그 리고 창 밖으로 손을 뻗어 유한전자 빌딩을 가리켰다. "저놈은 언젠가 우리가 먹는다." 맥과 유전에 대해 정호에게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놓 고 예안은 밤새도록 고민했다. 욕심 같아서는 당장 사실대로 털어놓 고 싶었다. 비록 순수한 자신만의 능력을 통해 이룬 성공은 절대 아 니지만 자신이 한국에서 이런 위치를 차지한다는 걸 정호에게 자랑 하고 싶었다. 하지만 새벽녘이 터 올 즈음에 예안은 역시 당분간은 안 된다는 결 심을 굳혔다. 시트날타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한 정호는 걱정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거란 배려에서였다. "휴우. 그럼 도대체 이번엔 뭐라고 둘러대지? 아파트 산 돈이야 레 이온 형이 나한테 아부 떨 겸해서 준 거라고 둘러댔지만…. 그러고 보니 레이온 형은 잘 있을까? 내가 쏜 총에 어깨까지 맞았는데…." 레이온을 떠올리던 예안은 얼굴을 찌푸렸다. 어떻게 생각하면 자신 이 이렇게 고생하는 데에는 그 인간 탓도 상당히 있다. "에잇. 괜찮을 거야. 배에 총 맞고도 멀쩡했는데 어깨에 맞았다고 별 일 생기겠어?" 옛날 일을 떠올리던 예안은 쑥스럽게 웃었다. 도대체 그때 무슨 정 신으로 방아쇠를 당긴 건지. 지금 와서 다시 그때처럼 해보라고 누 가 시킨다면 절대 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유빈아, 잘 잤어? 자아, 자아 밖에 나가자." 잠에서 깨어나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아기를 안아 올린 예안은 졸 린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왔다. 먼저 일어난 니콜라스가 준비를 다 끝낸 채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일어났네. 잠은 제대로 잔 거야?" "그럭저럭 잘 잔 것 같아." 밤새도록 침대에서 뒤척이고 거실을 서성거렸으면서 그럭저럭 잘 잤 다는 게 말이 될 소리인가. 예안은 그의 거짓말을 눈치챘지만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오늘 아빠가 여기로 오실 거야. 일단 네가 총 쏘고 난동 부린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사는 해야 하니까. 아빠한테는 어제 미리 말 해뒀어. 물론 사실대로 말한 건 아니고 그냥 대충 얼버무리거나 둘 러댄 거지만." "…미안해." "됐어. 하여튼 이제 이사해야 되니까 너도 그렇게 알고 있어. 나도 아빠한테 둘러댈 거짓말 밤새도록 생각해두기는 했는데 사실 통할지 는 자신 없다." "근데 누나." "응?" 니콜라스는 쭈뼛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처음 병원 왔을 때 그대로 뛰쳐나간 거야? 그때 나 용서해주려 고 온 것 아니었어?" 창백한 그의 얼굴은 생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며칠 동안 그가 끙끙대던 이유 중 하나가 그게 신경 쓰여서라고 생각한 예안은 괜히 미안해졌다. "아 그건… 사실 아빠 말씀도 있었고 내가 좀 심했다는 생각도 있었 고 해서 큰 마음먹고 너 이해해주려고 했는데, 막상 얼굴 보니까 괜 시리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거든." "그래서 그렇게 뛰쳐나간 거야?" "어. 신경 쓰였다면 미안해." 그제야 니콜라스는 표정을 조금 폈다. 예안은 웃음이 나왔다. '이 녀석도 이렇게 보면 꽤나 귀엽단 말이야. 그의 어깨를 끌어안아 주려던 예안은 초인종 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 켰다. "아빠 왔나 보네." 현관으로 가 화면을 통해 정호가 밖에 서 있는 걸 확인한 예안은 문 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오던 정호는 니콜라스를 발견하고 굉장 히 반가워했다. "성주도 여기 있었구나. 예안이한테 얘기는 들었어." "예. 안녕하세요." "그래, 누나랑은 화해 잘 했니?" "네. 그럭저럭요." 더 이상 예안이 니콜라스를 미워하는 것 같진 않았다. 두 사람 사이 가 원만하게 잘 해결된 걸 확인한 정호는 마음을 한시름 놓았다. 그 러나 그는 아직 해결해야 할 의문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는 팔짱을 끼며 지그시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딸아. 멀쩡히 잘 지내다가 왜 갑자기 이사하려고 하는 건지 그 타당한 이유를 이 아버지에게 친절하게 에누리 없이 A4 1000페이 지, 한 페이지 당 700 글자 이상으로 해서 설명해주지 않겠니?" 웃고 있었지만 어이없어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예안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윽. 혹시 오늘 아침에도 이웃사람들이 찾아와서 귀찮게 초인종 눌 러댄 거 아냐? 엘리베이터에서 괜히 마주치고 뭐라 뭐라 이상한 말 이라도 들은 거야?' 그냥 어제 정호도 이곳으로 오게 할 걸 하고 후회해봤지만 이미 버 스는 지나갔고. 예안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미리 생각해둔 거짓말을 차근차근 늘어놓았다. "내가 전부터 말했잖아. 난 아기가 태어나면 시끄러운 아파트 단지 보다는 주택가의 정원이 딸린 조용한 집으로 이사가고 싶다구." "그래?" 정호는 흥미를 보였다. 그의 얼굴에서 의심이 사라진 걸 확인한 예 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생각해 봐. 아파트 단지는 얼마나 시끄러워? 거기서 도대체 어떻게 애기를 키우라는 거야? 좀 무리가 되더라도 조용한 주택가로 이사가 는 게 훨 낫지." "음. 그건 그렇긴 해." "그렇지? 아빠도 그렇게 생각하지?" "음." 원래 정호는 이웃들이 줄기차게 찾아오는 이유(총기 발포 사건 때문 이다)를 물으려고 했다. 더불어 느닷없이 튀어나온 이사 선언에 대 해 품은 의심도 함께.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손자 이야기가 슬며시 주제에 끼어 들자 그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까먹은 채 삼천포로 빠져들었다. "성주야. 너 잠깐 호텔 1층에 내려가 있지 않을래? 아빠랑 아주 중 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거든." "알았어." 니콜라스가 자리에서 일어난 후 깊이 생각에 빠져 있던 정호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음. 이사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근데 그런 집은 솔직히 비싸잖 아? 우리가 그럴 여유도 별로 없고 말이야." "하지만 하고 싶어. 나 지금 진지하게 이사를 생각하고 있다구." 이렇게 자연스럽게 의심을 돌리다니. 예안은 지금 이 순간 자기 자 신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그럼 도호한테 부탁해볼까?" "뭐?" "돈 구할 데가 도호나 충호 밖에는 없잖아. 충호보다는 도호가 널 좋아하는 편이니까 도호한테 부탁해야지." "에엑?" 돈을 마련할 방법이 있느냐는 물음이 나올 줄 알고, 당연히 그에 대 해서 세 가지 가닥과 열 가지 줄기와 백 가지가 넘어가는 변명거리 를 미리 생각해두었던(과연?) 예안은 크게 당황했다. "말도 안 돼! 왜 삼촌들한테 부탁한다는 거야?" "그럼 돈은 어디서 구하고? 아, 그러고 보니 도호 녀석이 아예 자기 집에 다시 들어와 살라고 할 지도 모르겠네." "그건 싫어! 절대 싫어!" 정호는 예안이 펄펄 뛰는 것도 외면한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겨 들었 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를 위해서라면 체면을 구기는 한 이 있더라도 동생한테 손 벌릴 생각이었다. "내가 돈 좀 달라고 하면 도호 녀석은 기꺼이 줄 거야. 음. 근데 그 것보다는 차라리 다시 그 집에 들어가는 게 어때? 정우도 그렇고 현 우도 그렇고 아마 쌍수 들어 환영할 걸? 너도 요새 걔들한테 별로 적개심 같은 거 못 느끼잖아?" "말이 되는 소릴 해! 내가 왜 그래야 돼?" "나쁠 건 없잖아? 걔들도 그렇고 제수씨도 그렇고 도호 녀석도 다 너 좋아하는데 뭐 어때?" "나 전에 말했잖아! 이제 친척들이랑은 인연 끊을 거라고!" 정호는 그만 웃고 말았다. 사실 말은 그렇게 차갑게 하면서 아기가 태어난 뒤로 예안은 친척들에게 많이 부드러워졌다. "내가 이틀 전에 말하지 않았니? 넌 이제 어른이라구." "어… 그, 그랬지." 예안은 말문이 막혔다. 정호는 다시 말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아이스런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을 거야? 이제 어 엿한 한 아이의 엄마가 됐으면은 어른스러워질 줄도 알아야지, 이 다음에 유빈이가 널 보고 어떻게 크겠니?" "아빠!" "친척들하고 인연 딱 끊고 지내는 건 좋지 않아. 막말로 이 아빠한 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니? 여자는 아무리 돈 같은 게 많아도 다 필요 없어. 부모 없는 여자는 친척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야." "아빠!!" 예안은 목청이 찢어져라 외쳤다. 정호는 다소 얼떨떨했다. "왜 그렇게 소리는 지르고 그래? 유빈이 울잖아." "앗." 퍼뜩 놀란 예안은 얼른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눈을 뜬 아기의 눈동 자가 울먹울먹하고 있었다. "아앗. 유빈아 울지 마. 소리 질러서 미안해 미안." 하마터면 아기를 울린 못된 엄마가 될 뻔한 예안은 간신히 아기를 달래 다시 재웠다. 그리고 기가 막힌 눈으로 정호를 쏘아보았다. "난 죽었으면 죽었지 다신 그 집에 안 들어가. 내가 전에 말하지 않 았어?" "하지만 너 요새 걔들하고 사이 많이 좋아졌잖아?" "그거랑 이거는 별개야. 삼촌들하고 화해를 할 순 있어도 삼촌들에 게 손 벌리는 짓은 내 자존심상 못해." 정호는 조금 안타까웠다. 예안이 친척들과 섞이지 못하는 게 몹시 걱정이었다. 하지만 예안이 그렇게 이를 바드득 갈고 있다 해도 도 호와 충호는 그 이유는커녕 예안이 자신들을 적대한다는 것조차 모 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만 해." 거침없이 말을 자른 예안은 정호가 말을 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밀 어붙였다. "일이 어떻게 되는 건지 이제부터 슬슬 말하려고 하는데 왜 자꾸 엉 뚱한 소리를 꺼내는 거야? 지금부터 어떻게 이사를 할 건지 아주 중 요한 이야기를 할 거니까 아빠는 일단 들어 봐." 그리고 예안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무언가 엄청난 말이 나올 듯한 분위기. 강한 불안함에 휩싸인 정호는 예안이 말을 꺼내기 전에 먼 저 물었다. "너 혹시 아빠 놀래키려고 그러는 거지?" "으, 응? 따지고 보면 그렇게 될 지도 모르겠네." 찔끔한 예안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점점 작아졌다. 정호는 그럼 그렇지라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번에는 또 뭔데? 아빠가 전에 말했잖아. 놀래킬 일 있으면 아껴 두지 말고 그때 다 말해버리라고." "그래서 지금 말하려고 하잖아!" "전에 ST기관이니 어쩌니 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 같이 말했으면 좋 았잖아!" "그때는 이런 말 할 입장이 아니어서였다구! 하여튼 일단 들어보기 나 해!" 가뜩이나 불안한데 저렇게 뜸을 들이고 있으니 간이 바짝바짝 오그 라들었다. 정호는 불안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예안의 입술에서 무슨 말이 떨어질까만을 경계했다. "나 장인어른 만났어." "???" 정호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불쾌하거나 어이없어서가 아 니었다. 그는 예안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했다. "표정이 왜 그래? 나 장인어른 만났다구." 고장난 형광등이 깜박깜박 거리는 방처럼 어둠에 휩싸인 채 간헐적 으로 반짝반짝하던 정호의 머리 속에 일순간 불이 확 들어왔다. 눈 을 휘둥그렇게 뜬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왜,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기대했던 것보다 열렬한 반응에 예안은 그만 기가 팍 죽었다. 자연 히 목소리가 움츠러들었다. "자, 장인어른 만났다구." "그러니까, 장인어른?" "어. 장인어른." "장인어른을 만났다고?" "그렇다니까." 무슨 머나먼 남태평양에서 문명과 격리된 채 살아온 원주민들이 쓰 는 언어도 아닌데 어째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인가. 정호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장인어른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야? 그리고 시아버지라면 모를 까 웬 장인어른… 아!!" 정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원한 벼락이 정수리를 훑고 지나갔 다. 그는 비로소 예안이 한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 "자자자, 장인어른이라면…?" "아빠가 생각하는 게 맞아." 자신의 말을 정호에게 완전히 이해시켰다는 뿌듯함에 취한 예안은 가슴을 쭉 폈다. "내 여자친구의 아버지, 그러니까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몸의 친 아버지 되는 분을 만났다 이 소리야." "지, 진짜…니?"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던 정호의 얼굴이 창백하게 바꾸었다. 동시에 그의 입술 끝이 파리해지면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예상 못한 반응에 예안은 그만 당황했다. 이건 자신이 생각했던 게 아니었다. "아빠…? 왜 그래?"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정호는 당장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넋 나간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던 그는 예안이 두 번 세 번 재차 부르 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아빠? 괜찮아? 어디 몸이 아픈 거야?" "아, 아니야, 아니야. 계속 말해 봐." 예안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 나 몹시 걱정하면서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니까… 전에 장인어른을 길거리에서 정말 우연히 만났는데, 사 실 나도 얼굴을 본 적이 없어서 처음에는 못 알아봤어." 정호의 안색은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 예안은 움츠러든 말투로 계 속 말을 이어나갔다. "난 처음에 그 분을 몰랐는데 그 분이 날 알아보신 거야. 날 붙잡고 엉엉 울길래 그만 얼떨결에 집까지 따라갔는데 굉장한 부자더라." 그 말에 정호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사진하고 뭐 그런 걸 보여줘서 '진짜 예안이' 부모님이라는 거 알 았어. 근데 아빠 정말 괜찮아? 얼굴이 디게 안 좋아 보이는데?" 얼버무리듯 말을 끝맺은 예안은 잔뜩 기가 죽은 채 정호의 눈치만을 살폈다. 그녀는 도대체 정호가 왜 저렇게 창백한 안색인 건지 그 까 닭을 몰랐다. '왜 저러지? 설마 유전에 대한 걸 눈치채기라도 한 거 아냐?' 이런 터무니없는 상상까지 머리 속을 떠돌고 있을 때, 정호가 간신 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그 분들이 너보고 돌아오라고 했겠구나?" "응?" "그렇잖아. 그 분들이 그렇게 부자고 또 혈육이라면 당연히 그 집으 로 들어가야겠지. 호적도 제대로 정리해야 하고 말이야." 그제야 예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창백한 아버지의 얼굴을 반사적으로 살폈다. "아빠?" "그렇잖아. 그렇게 해야 하잖아." 정호는 억지로 웃고 있었다. 파리해진 채 바르르 떨리는 입술. 비로 소 예안은 그가 하나뿐인 자식과 손자를 생판 남에게 빼앗기는 걸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니? 그분들 입장에선 네가 친딸이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로 되찾으려고 할 텐데?" 정호는 천장을 쳐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그는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 고 있었다. 자식을 남에게 빼앗기는 건 아닐까 전전긍긍하는 아버지 의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던 예안은 그만 가슴이 아팠다. '바보! 바보 유진우! 왜 하필 이따위 거짓말을 생각해낸 거야!' 예안은 울고 싶어졌다. 단지 제일 그럴 듯하다는 이유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이런 거짓말을 선택한 자기 자신이 무척이나 한심했다. 하지만 이왕 엎질러진 물.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계속 말을 이었다. "나, 난 그 분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기억상실에 걸린 것 처럼 행동했어." "잘했어." "내가 지금 행복하게 잘 산다고 해도 그 분은 한사코 집으로 데려가 려 하시더라." "당연하겠지. 잃어버린 딸을 되찾았는데 어느 부모가 안 데려가려고 하겠니." "무작정 거절하는 것도 그 분, 또 '진짜 예안이'한테 미안하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일단 그 분하고 합의는 봤어. 그 분이 정 그렇다면 자 기 옆집에 새로 집 하나를 사줄 테니 거기서 살라고 애걸복걸을 하 시더라." 말을 마친 예안은 우울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거짓말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정호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잘했다 잘했어. 너하고 내가 죄인이지. 그 분한테서 금지옥엽 귀한 딸 하나를 빼앗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백 번 죽어도 할 말 없으니, 너 그 분 앞에서 친딸 연기 잘 해야 한다." 정호의 얼굴에서 거짓말처럼 우울함이 사라졌다. 그는 평온한 미소 를 띤 채 예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연기 잘할 수 있지?" 나긋나긋한 목소리. 하지만 파르르 떨리는 손길을 통해 예안은 정호 가 어떤 기분일지 충분히 짐작했다. "일단 그 분이 원하는 대로 이사해. 마냥 무시할 순 없는 거잖아?" "…미안해 아빠.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 아빠도 같이 갈 거야." 정호는 예안의 위로에 그만 웃어버렸다. "아빠한테 미안해할 것 하나도 없어. 지금까지 잘해주지도 못한 마 당에 이런 호강 누리고 사는 판인데…. 오히려 내가 널 마음 고생시 켜서 미안하지." 예안은 씁쓸했다. 기분은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54 회] 날 짜 2004-03-20 조회 / 추천 3169 / 52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가장 소중한 것 "잘 해주셔야 합니다 아버지." "걱정하지 말라니까. 이 아버지가 언제 실수하는 거 본 적 있냐? 다 큰 녀석이 보채기는 원…." 초조해하는 중현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두오는 느긋하게 웃었다. 아버지가 자신의 생각을 꿰뚫어본다는 느낌에 중현은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여튼 실수하셔선 안 됩니다. 지금 예안씨 양아버님은 예안씨의 정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구요. 괜한 걱정 끼쳐 드리기 싫다고 예안씨가 철저하게 비밀에 붙이고 있으니까, 절대 실수하셔 선 안 됩니다." "걱정 마 걱정 마. 그러니까 내가 그 서예안이라는 여자애 아버지 역할을 하고, 네가 오빠 역할을 한다 이거지?" "네." "음. 근데 그러면 우리 가족들에게도 다 말해서 협조 얻어야 하는 것 아니냐?" "말이 되는 소릴 하세요! 예안씨의 정체에 대한 건 우리나라 기밀사 항이란 말입니다! 어머니한테도 비밀로 지켜야 하는 거라구요!" "그럼 만약 그 여자애 양아버지가 우리 집에 찾아오기라도 하면 어 떻게 할 거냐?" "그 부분은 예안씨가 알아서 처리한다 하셨으니 걱정할 것 없습니 다. 아버지는 제가 부탁드린 일이나 잘 해주시면 된다구요." 사실 중현도 그게 마음에 걸렸다. 바로 옆집이고 하니 정호가 느닷 없이 찾아오기라도 하면 방법이 없었다. '뭐… 그건 예안씨가 알아서 하겠지. 똑똑한 사람이니까 어련히 알 아서 잘 처리할 거야.' 예안의 천재적인 두뇌를 믿는 중현은 그렇게 마음을 놓으며 옷매무 시를 다시 점검했다. 좋아하는 여자의 양아버지를 뵈러 가는 길인데 옷차림을 소홀히 해서야 되겠는가. 거울을 한 번 더 보고 난 뒤 그 는 두오를 재촉했다. 예안이 친부모라 말한 사람들을 만나야 할 때가 다가왔다. 정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양치질을 하고 머리를 빗고, 미리 세 탁해두었던 깨끗한 옷을 꺼내어 입었다. 사돈을 만나러 가는 자린데 꾀죄죄하게 보일 순 없었다. "휴." 준비를 다 끝낸 정호는 욕실에 걸린 거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별로 잘생길 것도 못생길 것도 없는 평범한 중년의 남자가 거울 안 에 서 있었다. 특별히 가진 것도 없고 학력이 좋은 것도 아닌 데다가 직업도 없는 실패한 인생. 그게 바로 자신이다. 그나마 자신이 가진 것 중 남에 게 번듯하게 내보일 수 있는 건 성공한 동생들뿐인가. "아니지, 아니지. 하나가 더 있지." 정호는 고개를 휙휙 내저으며 열린 문을 통해 거실을 내다보았다. 앞서 준비를 다 끝낸 예안이 아기를 품에 안고 뭐라고 속삭이고 있 었다. 흐뭇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정호는 오늘 만나게 될 사람들에게 절 대 자식을 빼앗기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택시는 별로 가파를 것도 없는 길을 달렸다. 차장에 고급주택들이 연 이어 새겨졌다가 뒤로 밀려나기를 반복했다. 진짜 부자들이 몰려 산 다는 이곳. 살아 생전 여기에 올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정호는 자꾸 만 수그러드는 마음을 애써 달랬다. "다 왔습니다." 택시에서 내린 세 사람과 한 아기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긴가 봐 아빠." 정호는 예안이 가리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여기까지 올 라오면서 봤던 집들보다 더 넓고 화려한 주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동안 호텔에만 머물렀더니 좀이 쑤셔 죽는 줄 알았어. 역시 내 집에서 자는 게 제일 맘이 편하다니까." 예안은 좋아라 하며 정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정호는 씁쓸한 기분으 로 뒤따라갔다. 집의 크기와 화려함은 밖에서 보던 것과 안에서 보던 것이 확연히 틀렸다. 커다란 감나무와 실외 수영장을 떠받든 채 잔디를 보듬고 있는 정원은 입이 벌어질 정도로 넓었다. 현관 계단 앞에 좌우로 각 기 앉아 있는 자그마한 돌사자들은 따뜻한 봄의 트림을 소리 없이 토해내고 있었다. '도호네 집보다 더 크네.' 도호의 집에서 살 때에는 그것이 동생의 집이었기에 위축감 같은 건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와보는 부자 동네에서 이런 사치스 런 공기를 맛보고 있으니, 절로 고개가 수그러들고 있었다. "와, 집 깨끗하다. 청소 다 해놓은 모양이네. 돈 좀 들었겠다." 정호의 마음을 모르는 예안은 아기가 태어나면 정원이 딸린 집에서 살고 싶다는 소원이 이뤄진 걸 마냥 기뻐하기만 했다. 위축감이 든 눈으로 3층집을 훑어보던 정호는 너무 좋아하는 예안의 모습에 그만 웃고 말았다. "아빠, 나 집에 먼저 들어가 보고 올게. 차성주, 너도 같이 가자." 예안은 좋아라 하며 아기를 껴안은 채 니콜라스를 잡아끌었다. 정호 는 흐뭇함과 위축감이 교차된 시선으로 그 모습을 쫓았다. "마음에 드십니까?" 흠칫. 옆에서 들려온 젊은 남자의 목소리에 정호는 얼른 고개를 돌 렸다. 검은 양복을 위아래로 빼 입은 귀족풍의 청년이 서 있었다. "누구십니까?" "저는 김중현이라고 합니다. 굳이 존대를 쓰실 건 없습니다. 예안이 의 오빠니까요." "아, 그래요? 헌데… 김씨라고요?" 정호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중현은 얼른 덧붙였다. "제 어머니께서는 서, 재자, 희자를 쓰십니다." "아… 그렇군요." 그제야 정호는 수긍했다. 오랜 관습의 영향 덕분에 사람들은 대부분 아버지 성을 따르는 경우가 많지만, 취향에 따라서는 어머니 성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아드님과 제 여동생이 여행 가던 중, 사고로 아드님만 사망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 부분은 정말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네." 전혀 사실과 다르기에 정호는 식은땀을 흘렸다. 마찬가지로 예안의 부탁을 받고 이런 연기를 하는 중현 역시 정호와 별다른 심정이 아 니었다. 한 중년과 한 청년이 각각 상대방을 속이고 있으면서 서로 에게 미안해하는 얄궂은 상황이랄까. "제 여동생이 기억을 잃은 건 정말 안타깝지만 그래도 그동안 선생 님께서 보살펴 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듣자하니 양딸로 삼아서 보살펴 주셨었다구요." "아니… 아직 호적에는 올리지 않았는데." "그런가요? 다행이군요." 뭐가 다행이라는 건가. 정호는 기분이 조금 나빠졌다. "아버지는 지금 뒤뜰에 계십니다. 조금 있다가 여기로 나오시면 두 분이 서로 인사를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정호는 까닭 없이 불쾌해졌다. 아마 예안을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딸을 되찾으셔서 지금 몹시 기뻐하고 계십니 다. 사례의 표시로 오늘 저녁을 사겠다고 하셨는데, 혹시나 시간이 되시려는지요?" "저녁이라면, 그쪽 가족들 전부하고?" "아니, 아닙니다. 저하고 제 아버지 하고만요. 사실 아직 집에는 여 동생 다시 찾은 걸 말하지 않았거든요. 오늘 저녁쯤에나 말할 생각 이라서요." "왜 집에는 말하지 않았나? 예안이를 찾게 된 건 며칠 전이라며?" "여동생이 부탁했거든요. 지금 여동생 찾은 사실이 가족들에게 알려 지면 당장 집으로 데려가려 할 테니까요. 게다가 아이까지 있는 사 실이 알려지면…." 아이 아빠가 죽고 없으니 할아버지한테 무슨 해코지를 할 지도 모른 다는 소리인가. 정호는 조금 울컥했지만 참았다. 딸의 육체는 되찾 았으되 영혼을 영영 잃어버린 상대방 가족의 처지를 생각해서 이해 하는 게 가장 좋겠지. "일단 이 집을 새로 샀으니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고, 저희 집도 바로 이 근처니까 어머니께서도 수긍하실 겁니다. 당분간 제 여동생 의 기억이 돌아오기까지 일단은 기다려야겠지요."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정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상대방보다 자신이 우세한 입장 에 있다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아버지가 뒤뜰에서 아직도 안 나오시는군요. 제가 모시러 갈 테니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알았어." 중현이 뒤뜰로 사라지려는 찰나, 퍼뜩 뭔가가 생각난 정호는 얼른 그를 불렀다. "잠깐만." "네?" "혹시 자네 집안에 매드 사이언티스트 같은 사람 없나?" "??" "흠, 흠. 이상한 질문을 해서 미안하군." 정호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당황을 밟고 황당함을 넘어 패닉으로 빠지기 직전이었던 중현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걸음 을 옮겼다. 혼자 남은 정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 사람들은 자기 딸 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나?' ST기관이니 뭐니 하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헌데 반응을 보니 그냥 집이 부자인 게 전부인 보통사람들인 듯 싶 었다. '그럼 뇌 이식 수술을 하면서 김윤우라는 사람이 예안이 몸에다가 임의의 처리를 한 걸까?' 정호는 옛날에 예안을 데리고 나타나 뇌 이식 수술을 해주었다고 설 명한 레이온이 생각났다. 그때 정호는 범인과 달리 지혜롭고 총명해 보이는 눈빛, 그리고 당당한 자신감을 지닌 레이온을 참 마음에 들 어 했었다. 레이온이 예안에게 거금까지 주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정호는 내심 그와 잘 되기를 빌기도 했다. 정호는 천천히 정원을 거닐었다. 스쳐 지나가는 봄바람이 무척 따뜻 했다. 커다란 정원과 화려한 주택. 이 정도면 가히 한국에서 손꼽히 는 부자들이 살 법한 집이었다. "이런 집을 선뜻 사줄 정도면 도대체 그 사람들은 얼마나 부자라는 거야?" '진짜 예안'이 그런 집안의 딸이라는 말은 정호에게 상당한 불안을 안겨주었다. 자신은 가진 게 없는 초라한 아버지다. 예안이 언젠가 자신을 버리고 그들에게 가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도무지 사 그라지지 않았다. 정호는 집을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중현과 어떤 중년 남 자가 서 있었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얼마나 힘있는 남자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정호는 왠지 초라해지는 자신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아버지, 저기 오셨습니다." 정호를 발견한 중현이 그렇게 말했다. 고개를 천천히 돌리던 두오는 정호와 눈이 마주치고 친절하게 미소지었다. 바로 그 순간, 두오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는 걸 느낀 정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친절한 미소와 고집 세어 보이는 주름에 눈이 닿은 순간, 정호는 그가 누군지 깨달았다. 어이없는 얼굴로 두오를 뚫어져라 응 시하던 정호는 허탈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김두오 국회 의원님?" 집안에는 이미 중현이 알아서 가구들을 다 마련해둔 뒤였다. 이 집 사고 가구까지 다 꾸미고 하려면 구매금이니 인건비니 뭐니 해서 돈 이 꽤나 들었을 것이다. 예안은 빨리 중현에게 돈을 줘야겠다 생각 하며 일층으로 내려왔다. 삼층까지 다 둘러본 터라 그런지 몸이 약간 피곤했다. 갈색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그녀는 아기를 옆에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후~아. 드디어 내 소원이 이뤄지는구나. 이런 조용한 집 정원에서 유빈이랑 같이 햇빛을 쬐며 여름을 보내는 꿈을 꿨는데 말이야." "아주 소박한 꿈이네. 누나가 가진 재력에 비해선 말이야." "그런가?" 예안은 기분 좋게 미소지으며 이제는 많이 밝아진 니콜라스의 얼굴 을 대견한 듯 들여다보았다. "근데 누나.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뭔데?" "누나는 누나 아빠한테 왜 거짓말을 해? 왜 유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거야? 그러고 보니 사실 좀 많이 이상해. 친아버지면서 자기 딸이 천재라는 것도 모르고, 또 미혼모가 됐는데도 별 걱정 안 하고 오히려 마냥 좋아하기만 하고…." "잠깐." 예안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너… 지금까지 나랑 아빠가 친부녀지간인 줄 알았어? 내가 자세한 이야기 안 해줬니?" "친부녀지간 아니었어?" 그제야 니콜라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은 걸 떠올린 예안 은 괜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 잘해주자 하면서도 자신은 무의식적으로 그에 대해 선을 긋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랑 나는 친부녀지간이 아니야. 피는 전혀 섞이지 않았다구." "그럼?" "뭐… 쉽게 말하자면 시아버지와 며느리 관계랄까? 유빈이 아버지, 그러니까 유진우가 아빠의 친아들이거든." 예안은 진실을 말하지 않고 주변사람들에게 즐겨 사용하는 거짓말을 썼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니콜라스와 비밀을 많이 공유하 고 있다고 해도 역시 한도가 있는 법이었다. 니콜라스의 얼굴에 불쾌함이 떠올랐다. "그럼 누나가 미혼모가 됐는데도 아저씨가 좋아한 이유가…." "어? 아빠?" 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예안은 희색이 되어 일어났다. 힘없이 현관을 들어서던 정호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빠 방도 다 꾸며 놨더라. 한 번 들어가 봐. 내가 보기에는 굉장 히 좋던데, 아빠 마음에도 쏙 들 거야." "으, 응." "왜 그렇게 서 있어? 이런 집 얻기가 어디 쉬운 줄 알아? 괜한 걱정 같은 건 하지 말고 얼른 아빠 방이나 구경해 봐." '진짜 예안'의 친부모라 내세운 사람들 때문에 정호가 불안해하고 있는 거라 생각한 예안은 계속 그를 재촉했다. 뭔가 말하려고 했는 데 졸지에 꿔다 논 보릿자루가 되어 버린 니콜라스는 신경질을 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전에 살던 아파트보다 방이 더 크지? 게다가 주택가라서 굉장히 조 용하고 또 공기도 맑아. 애들 떠드는 소리가 울리지도 않고 시끄럽 게 차들이 오가는 소리도 없어. 좋지? 아빠도 여기 살아서 좋지?" "그래, 좋구나." "역시 아기는 이런 데서 키워야 돼. 시끄럽고 번잡한 아파트 단지에 선 아기 정서가 불안해진다구. 나무와 흙 냄새가 있어야 아기가 쑥 쑥 건강하게 잘 큰다니까." 정호는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안은 신이 나서 계속 말했다. "수영장도 있다? 봤지? 유빈이가 좀 크면 여름에는 거기서 같이 물 놀이도 할 수 있을 거야. 굉장히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응?" 혹시나 정호가 계속 우울해하는 건 아닐까 싶어 예안은 일부러 활기 차게 굴었다. 그는 자신을 위하는 예안의 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음." 정호는 창가로 다가갔다. 아늑한 방안으로 햇살이 가득 쏟아져 들어 오고 있었다. 크고 화려한 고급 주택. 동생들의 도움 없이 이런 집 에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은 없다. 기쁨보다 불안함이 더 컸 던 건 결코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었다. "예안아." "응?" "그 사람들 네 친가족 아니지?" 선작수(or 조회수)와 코멘트 수는 반비례 관계인가? .. ... .... ..... ...... 왠지 글 쓰는 게 맥빠진다. ps : 만약 onne님 아상을 혹시 퍼가셨으면은 전부 지워주십사 부탁드립니다. 이유는 아시죠?^^;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55 회] 날 짜 2004-03-21 조회 / 추천 3428 / 52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가장 소중한 것 생글거리던 예안이 돌연 굳었다. 정호의 건조한 눈빛을 당황한 채 받아내던 예안은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헛기침을 했다. "무…슨 말이야? 아빠 뭐 잘못 먹기라도 했어?" 애써 태연한 척 하려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역시….' 혹시나 해서 찔러본 게 맞아떨어진 걸 확인한 정호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사실대로 말해 줘. 그 사람들, 너랑 친가족 아니잖아?" "그, 그게…." "그 김중현이라는 사람하고 사귀는 사이기라도 한 거니?" 정호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예안은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거짓말을 되돌리기에 늦었음을 직감했다. "휴우. 머리가 아프구나." 정호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예안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혹시 사귀는 사이인 건 아닐까 하고 한 번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그건 절대 아닌 것 같아. 만약 그렇다면 네가 이런 거짓말을 할 필 요가 없잖아?" "…." "게다가 너는 남자는 절대 싫다고 했고. 또 유빈이만 바라보고 산다 고도 했고. 그리고 또 네 입장을 생각해보면 결코 그 중현이란 남자 랑 사귀는 건 아닌 것 같아." 어떻게 눈치챈 건지는 몰랐다. 하지만 이미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 다는 것을 직감한 예안은 입술을 깨물며 망설였다. "아빠 사실은 말이야…." "그래, 말해 봐.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편안하게 말해 봐." 정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거짓말하는 걸 완전히 포기한 예안은 허탈한 한숨을 토해냈다. "가능하면 아빠한텐 말 안 하려 했는데 이렇게 되버렸네. 근데 먼저 한 가지만 물을게. 내가 거짓말했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 "네가 아버지 역으로 내세운 사람이 김두오였잖아." "김두오 의원님이랑 성이 달라서? 하지만 어머니 성을 따르는 것도 있잖아?" "하필 다른 사람이 아닌 김두오 의원이라는 것 자체가 수상했어. 말 로 설명하기는 좀 그래. 하여튼 널 한 번 찔러보니까 대번에 알겠더 라." 유명인을 내세운 게 실수였던 것인가. 예안은 좀더 신중하게 대역을 생각할 걸 하고 후회했다. '차라리 돈주고 다른 사람을 고용해서 내세우는 게 더 나을 뻔했을 까? 으휴,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은 거지?' 유젤의 두뇌는 분명 이 세상 누구보다도 뛰어나다. 하지만 아무리 하드웨어가 좋으면 뭐하나. 한참 뒤떨어지는 소프트웨어로 힘겹게 돌아가고 있으니 이 모양이지. 예안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아직 거짓말하는데는 서투른가 보네. 중현 아저씨도 너무해. 이 렇게 금방 들통날 줄 생각도 못했단 말이야? 한 번쯤 조언 해줄 수 도 있었잖아.' 원래 두오와 중현은 이 거짓말을 미심쩍게 여겼지만, '그래도 아이 큐 350이 넘는 인간이 생각한 건데'하는 식으로 손발을 맞춰준 것이 었다. 예안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아빠. 이 집, 내가 샀어. 내가 가진 돈으로 산 거야." 간결한 대답. 정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예안을 주시했다. 녹색 눈 동자가 충만한 자신감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다 털어놓을게. 우리가 전에 살던 아파트도 내 가 가진 돈으로 산 거야. 김윤우 형, 아니, 김윤우 박사가 준 돈으 로 산 게 아니라 내 돈으로 산 거야." "국회의원씩이나 되는 사람이 할 일이 없어 그런 거짓말에 장단을 맞춰 주진 않을 텐데? 그 분은 어떻게 끌어들인 거니?" "거기엔 깊은 사연이 있어. 미안해. 말해줄 수 없어." 예안의 눈빛이 미안함에서 자신감으로 다시 바뀌었다. "내가 지금 당장 아빠한테 말해줄 수 있는 건 하나 뿐이야. 난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소심한 고교생 따위가 아니라는 거야." 투명한 유리창을 거쳐 들어온 햇살이 그늘진 붉은 폭포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창틀에 둘러싸인 파란 하늘을 등진 녹색 눈동자가 강인 하게 빛났다. 그건 어른만이 지닐 수 있는 굳건한 자신감이었다. 흐뭇해진 정호는 그만 풀썩 웃어버렸다. "그게 전부야? 그밖에는 말해줄 수 없니?" "아직은 곤란해. 미안해, 아빠." "돈은 도대체 어떻게 벌었어? 지금 얼마나 갖고 있는데?" "그것 역시 말해줄 수 없어. 미안해." "그럼 이것만 말해 줘. 불법적인 데 관여된 건 아니지?" "아니야. 김 의원님 같은 사람이 도와주는 거 보면 모르겠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니 걱정이 되었지만 정호는 더 이상 묻지 않 기로 결심했다. 딸과 자신 사이의 격차가 자꾸 벌어지는 게 약간 두 렵긴 했지만, 그는 이대로 딸을 믿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정히 예안을 껴안았다. "아빠는 우리 딸 믿어. 아직은 물어보지 않을게. 하지만 나중에 때 가 되면 반드시 다 말해줘야 돼. 알았지?" "…응." 몹시 미안한 기분을 느낀 예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시트날타 녀석들만 어떻게 처리하면 말해줄 수 있을 거야, 아빠. 그때까지만 모른 척 해 줘.' 잠시 후 예안을 품에서 떼어놓은 정호는 밝게 웃었다. "그럼 새집에 온 기념으로 또 한 번 술잔치를 벌여야지? 여기 냉장 고에 술 사다놓은 거 있니?" "응. 아마 있을 거야. 내가 차릴게." 예안이 나가려 하자 정호는 서둘러 말렸다. "너는 아기랑 놀아주고 있어. 어차피 넌 먹지도 않을 건데 아빠가 해야지." "알았어." 정호가 방밖으로 나가기 직전 예안은 가만히 그를 불렀다. "아빠." "응?" 정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예안이 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안해." 굉장히 크게 신경 쓰고 있나 보다. 정호는 픽 웃어버렸다. "미안해할 것 없어. 아빠는 널 믿으니까. 하여튼 일단 쉬고 있어." 정호가 나간 뒤 예안은 아기를 다독이며 눈을 감았다. '휴우. 이렇게 쉽게 탄로날 줄 알았으면 그냥 미리 말해버릴 걸. 괜 히 탄로날 거짓말 생각한답시고 힘만 뺐잖아.' 걱정을 끼치기 싫어 묻지 말아 달라 했지만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 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그녀는 중현에게 전화를 걸었 다. 그는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아, 예안씨. 무슨 일이신가요? 뭔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거라도 있 었나요?」 "중현 아저씨. 들켰어요." 「네?」 "아빠가 아셨다구요. 김 의원님이 제 친아버지라고 둘러댄 게 거짓 말이라는 거요." 「아, 결국 들켰군요.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그렇게 됐군요.」 "쳇. 제가 거짓말에 이렇게 소질이 없는 줄 오늘 처음 알았어요." 「사실 그건 누가 봐도 허술한 거짓말이었어요.」 예안은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중현 아저씨는 왜 승낙하고 나선 거예요?" 「저야 예안씨가 달리 무슨 생각이 있어서 이런 허술한 거짓말을 지 어낸 건 줄 알았습니다만.」 결국 바보는 나 하나였나. 머쓱해진 예안은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눈 뒤 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왔다. '어라? 웬일로 쟤가 TV를 다 보고 있지?' 거실에는 TV에 푹 빠진 채 정신 없이 보고 있는 니콜라스가 있었다. 조금 신기했다. "우와, 오늘 해가 동쪽에서 뜬 거 맞아? 웬일로 네가 다 TV를 보고 있어? 뭐 재밌는 거라도 해?" 푹 빠져 있던 니콜라스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토론회 보고 있어." "토론회? 무슨 토론회를 본다고… 엥?" TV를 본 예안은 기가 막혔다. TV에서는 두 팀으로 나뉘어진 사람들 이 열성적으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한쪽은 제임스 해론을 옹호하 는 쪽이었고 다른 한쪽은 비난하는 쪽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난 또 네가 무슨 바람이 들어서 TV같은 걸 보고 있 나 했다.' 자신 또래에게 어울리는 액션 영화나 애니메이션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 어째서 니콜라스는 저 따위 토론회를 보고 있는 것일까. '저런 건 어른들도 머리 아파 한다구. 너 같은 어린애가 즐겨할 만 한 게 아니야. 그거 알기나 해?' 저런 어린아이가 저렇게 지루한 토론에 심취해 있는 모습은 강한 위 화감까지 자아낸다. 그의 옆에 앉아 잠시 TV를 시청하던 예안은 역 시 저런 건 자신과 전혀 안 어울린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저런 토론회 종종 본 적 있는 것 같아. 원래 그 런 쪽에 관심이 없어서 제임스 해론이라는 이름은 잘 몰랐지만 말이 야." 은근슬쩍 말을 걸었는데 대답이 없었다. 예안은 조금 부아가 났다. "근데 기왕이면 저런 골치 아픈 프로그램보다는 건담 같은 게 더 재 미있지 않겠냐?" 채널을 돌리라는 은근한 압박이 담긴 권유였다. 하지만 여전히 대답 이 없었다. '쳇.' 심술이 난 예안은 멋대로 채널을 돌릴 심산으로 리모컨을 집어들었 다. 하지만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니콜라스가 사나운 기세로 리모 컨을 빼앗아 버렸다. "뭐…야…." 버럭 화를 내려던 예안은 방해했다가는 가만 두지 않겠다는 그의 사 나운 눈빛에 그만 기가 죽었다. '젠장. 내가 화딱지가 나서라도 내일 당장 TV를 한 대 더 사고 말 테다!' 예안은 이제부터 이 인간이 투정부린다 해도 절대 받아주지 않으리 라 굳게 다짐하며 아기와 놀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TV에 빠져 있던 니콜라스가 이윽고 기지개를 켰다. 만족 스러운 프로그램이었는지 무척 편안한 얼굴이었다. "이제 끝났나 보네. 근데 그게 그렇게 재밌냐? 내가 딴 채널 좀 보 려고 하는데 사람 확 째려볼 정도로?" "어? 누나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예안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어이없어 하던 그녀는 사뭇 심각한 얼 굴로 이야기를 꺼냈다. "니콜라스, 이건 정말 내가 너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말이야." "응?" "너 이제 그만 청부업자 일은 그만두고 양지로 나온다고 하지 않았 니?" "그랬긴 했지. 근데 왜?" "그렇다는 녀석이 그런 염세주의자 철학에 푹 빠져 지내서야 되겠 어? 네가 음지에서 살고 있을 때에는 제임스 해론의 저서가 널 지탱 해주고 위로해주고 그랬을지 몰라도, 이제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서는 그만 밝아져야 할 필요가 있잖아?" 니콜라스의 얼굴이 불쾌함으로 물들었다. "그래서? 누나는 내가 양지에서 살기 위해서는 제임스 해론과 그만 절연해야 한다 그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누나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어. 그 말은 안 들을 걸로 할게." 매몰차게 고개를 돌리던 니콜라스는 퍼뜩 정신이 들어 예안을 다시 홱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 가득 차가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딴에는 너 생각해줘서 한 말인데, 뭐? 알았다, 알았어." 예안은 냉담한 얼굴로 아기를 안고 일어났다. 당황한 니콜라스는 그 녀의 바지를 붙잡고 늘어졌다. "미, 미안해 누나! 그,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니었어. 나, 난 단지 그냥…." "누가 뭐라니? 넌 네가 좋아하는 제임스 해론이랑 잘 먹고 잘 살아. 난 우리 아기만 있으면 되니까 말이야." "자, 잘못했어 누나!" 니콜라스는 거의 울음을 터트릴 듯한 얼굴로 예안을 꽉 붙잡고 놔주 지 않았다. 그러나 예안은 화가 난 게 아니었다. 그녀는 얼굴 가득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과는 달리, 속으로는 키득키득 웃고 있 었다. '이 녀석 놀리는 것도 꽤나 재밌네?' 한참 동안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이던 예안은 마지못한 척 그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너한테 그런 취미 활동은 안 어울려." "…취미 활동 아닌데." "어허." 니콜라스는 찔끔해서 말을 바꿨다. "아, 알았어. 취미 활동이라고 할게." "하여튼 그런 취미 활동은 안 좋은 거야. 알았어?" "…그래? 누나가 보기에는 이상한 것 같아?" "당연하잖아! 당장 가서 네 방을 둘러보라고! 책장에 꽂혀 있는 책 들 가운데 제임스 해론의 이름이 안 들어가 있는 거라곤 전혀 없잖 아!" 질풍 노도의 길을 잘못 타 그릇된 방향으로 빠진 열혈 청소년을 설 득한다는 신념에 취한 예안은 목이 부서져라 열변을 토했다. "그 따위 것은 당장 다 집어 치워! 그런 책을 읽고 그런 토론회 프 로그램을 보고 그런 철학가를 숭배하느니, 차라리 건담 애니메이션 을 보거나 신 창세기전 10을 클리어 하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이겠 다!" 예안은 생각나는 대로 주워섬기고 있었지만 그 두 가지 다 비생산적 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고개를 숙인 채 듣고 있던 니콜라스가 얼 굴을 들었다. "누나가 잘 몰라서 그래." "뭘?" "제임스를 비난하고 나서는 녀석들이 그의 추종자들에게 진창 깨져 나가는 걸 보면서 내가 얼마나 희열을 느끼는지 누나가 알아?" 예안은 입을 다물었다. 니콜라스의 진중한 눈빛에서 묘한 섬뜩함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굉장한 사람이야. 그를 좋아하고 그의 책을 읽고 그에 관한 모든 걸 알려 노력하는 건 결코 비생산적인 취미 따위가 아니야." 예안은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아직 14살밖에 안 된 어린 소년이 이 렇게까지 빠져들 수 있다는 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임스 해론이 그렇게나 대단한 철학가라는 뜻일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걸까?' 예안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니콜라스가 먼저 선수를 가로챘다. "누나는 가장 소중한 걸 잃어본 적 있어?" "!" 예안은 그대로 굳었다. 가벼운 전율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소중한 걸 잃어본 적이 있어?" 조금 전의 못마땅함 따위는 깨끗이 사라진 채 벅찬 흥분이 예안의 가슴을 차지했다. 자신의 슬픔을 타인에게 말해주는 건 인간만이 누 릴 수 있는 최고의 쾌락. 지금 그 기회가 예안에게 찾아왔다. "소중한 걸 잃어본 적 있어?" 아기를 옆에 내려놓은 예안은 무릎에 깍지를 꼈다. 그녀는 자신을 빤히 주시하는 니콜라스의 눈빛을 똑바로 바라보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있지." "있어?" 니콜라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예안은 씁쓸히 덧붙였다. "사실 살아오면서 아무것도 안 잃어본 사람은 없잖아? 난 좀 운이 나빠서 가장 소중한 걸 잃어버렸지만 말이야." 니콜라스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렇잖아. 잃을 게 얼마든지 많은데 왜 하필 가장 소중한 걸 잃어 버리겠어? 운이 아주 나쁘지 않고서는 불가능해. 안 그러냐?" 무거운 분위기가 두 사람의 옷깃을 잡고 늘어졌다가 부서지기를 반 복했다. 머쓱한 기분 속에 머리를 북북 긁고 있던 예안은 아기를 껴 안았다. 살갗에 와 닿는 뽀송뽀송한 느낌이 그녀의 마음을 한결 위 로해주었다. "그래도 난 지금 행복해." "어째서? 가장 소중한 걸 잃었다며?" "글치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나한테 남겨준 선물이 있잖아." "그게 뭔데?" "여기, 여기 말이야. 우리 아기." 예안은 아기의 뺨에 얼굴을 비비며 행복한 듯 히죽 웃었다. 아기도 헤실헤실 웃으며 조그만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잡 아당겼다. "내가 전에 말했잖아. 우리 아기는 내 가장 소중한 사람이 마지막으 로 나한테 남겨준 선물이라구." "선물?" 니콜라스는 침울했다. 자신이 예안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없 다는 서운함이었을까. "지금 누나한텐 아기가 가장 소중해?"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예안은 활기차게 대답했 다. "응. 두말하면 잔소리 아냐?" 그가 마음 속으로 슬퍼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예안은 잔인하게 쐐기를 박았다. "세상 무엇보다 우리 유빈이가 나한텐 가장 소중해. 내 목숨보다도 더." "그렇구나." 니콜라스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마음이 몹시 아프고 가슴이 뭉클했 다.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심장이 몹시 뛰었다. 그는 억지로 통증을 구겨 참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뭐가?" "난 누나의 기분을 잘 모르겠어. 소중한 걸 잃어본 그 느낌이 어떤 건지 도저히 기억나지 않거든."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연한 분위기가 그의 전신에서 쏟아져 나왔다. 울고 싶지만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는 그의 눈동자를 보았을 때, 예 안은 가슴이 시리도록 저려오는 걸 느꼈다. 소중한 걸 잃은 슬픔조 차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얼마나 견딜 수 없이 비참한 일인가. "그 사람도 그랬을까?" "그 사람? 누구?" "내 가장 소중한 사람 말이야. 그 사람도 나랑 헤어졌을 때 나처럼, 누나처럼 그렇게 마음이 아팠을까?" "…." "근데 기억이 안 나. 이상하지? 분명 나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인데 왜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 왜 난 잃어버렸다는 것조차 모르 고 있었던 거지?" 그의 얼굴에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이 울고 있는 것 조차 모른 채 울고 있는 그의 굳은 표정을 보고 있으니, 예안은 가 슴이 더욱 아파 왔다. "근데 잃어버렸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전혀 모르고 있었다며?" "목소리를 들었어." "목소리?" 예안은 퍼뜩 그가 병원에서 퇴원한 직후에 한 말이 생각났다. "목소리라면, 혹시 네가 혼수 상태에 빠졌을 때 꿈에서 들었다던 그 목소리를 말하는 거니?" 니콜라스는 흥분해서 외쳤다. "꿈이 아니야! 그건 꿈이 아니야!" 뜻밖의 반응에 예안은 찔끔했다. "그건 꿈이 아니야! 개꿈 따위가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구! 절대 아니야!" "누, 누가 뭐랬냐?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갑자기 니콜라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꿈이 아니라는 자신의 주장조차 신뢰하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게 꿈이면 난 어떡하지?" 예안은 뭐라 해줄 말이 없었다. "정말 어떡하지? 그게 꿈이면 난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뺨을 적시는 니콜라스의 눈빛이 처연하게 빛났다. 그는 애써 힘들게 미소짓고 있었다. "상관없어. 꿈이든 아니든 분명히 그 목소리의 주인이 나의 가장 소 중한 사람이라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니콜라스의 슬픈 표정은 그렇 게 말하고 있는 듯 했다. "근데 왜 기억이 안 나지? 이렇게까지 마음이 아파 오는데, 이렇게 슬픈데, 도대체 왜 그게 누군지 기억이 안 나는 거지? 아니, 내가 잃어버린 게 정말 사람이기는 한 걸까? 혹시 동물이나 무슨 물건 같 은 건 아닐까?" 단지 상실의 아픔만을 기억할 뿐 그 외의 것은 전부 죽은 기억의 시 신 아래 묻어두고 있다는 사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얼마나 강 한 아픔인가. "누나." "응?" "나 지금 울고 있어?" 예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니콜라스는 헤헤 웃으며 얼른 눈물 을 닦아냈다. "미안해. 내가 너무 바보 같이 굴어서. 앞으론 울지 않을게. 눈물을 보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평소 냉철한 그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너무나 어린애 다운 모습이었다. 오히려 이게 가장 그에게 어울리는 것인지도 모른 다. 누가 뭐라던 그는 아직 14살의 어린 소년이니까. "피곤해. 난 이만 가서 잘게." 부끄러움을 느낀 그는 서둘러 일어나 이층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등을 기대고 서자마자 그의 몸이 천천히 무너졌다. 눈물 이 톡, 떨어졌다. '바보같이… 이제 안 운다고 했잖아.' 하지만 한 번만 실컷 울자. 니콜라스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눈물을 쏟았다. 빨갛게 물든 석양이 처연하게 빛났다. 투명함을 잃은 햇살이 힘들게 창틀에 내려꽂히고 있었다. 창 밖에선 봄옷을 새로 입은 나뭇가지들 이 반기듯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힘들게 막고 있던 슬픔의 둑은 너무나 쉽게 터져 나갔다. 가슴을 붙잡으며 주저앉은 그는 침대 시트를 움켜쥔 채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손가락 사이에 묻어 나오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바닥에 이리저리 흩어졌다. 소리 죽여 울음을 찢어발기던 그는 그렇게 잠이 들었다. 로열나이트님. 선의에서 우러나오신 장난이시겠죠? 그렇죠? .. ... .... 그렇다고 믿을게요.ㅡㅡ; ps : 아담의 상처 수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 끝나면 공지 띄울 터이니 아직 안 읽으신 분은 그때까지 참아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56 회] 날 짜 2004-03-24 조회 / 추천 3381 / 36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하늘의 속박 「3월 15일. 미 제3해군대대 출격」 「3월 16일. 일 제1해군대대 이시카와 해역에 포진」 「3월 17일. 일 제9해군대대 아키타 해역에 포진」 「3월 21일. 미 제17해군대대 출격」 「4월 1일. 미 제2해군대대 출격」 「4월 2일. 일 제3해군대대 후쿠오카 해역에 포진」 . .. ... 레이온은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그는 분함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 다. 「4월 3일. 중국 KAL 해군함대 한국 남해안 해역 쪽으로 포진」 그의 눈에 섬뜩한 살기가 이글거렸다. 보고서 검토를 잠시 멈춘 그 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이마를 짚었다. 오랫동안 축적된 피로가 한 꺼번에 엄습해 왔다. 「4월 10일. 미국 Summer 미사일기지 공격 시스템 최종 점검」 차가운 분노를 입안으로 곱씹던 레이온은 쾅! 소리나게 탁자를 내리 쳤다. 벌떡 일어난 그는 이리저리 서성거리다 결국 화를 식힐 겸 담 배를 꺼내 물었다. 그러나 막 불을 붙이려는 찰나 그는 신경질적인 손길로 담배를 빼서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이어서 새것이나 다름없 는 라이터와 담뱃갑마저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4월 12일. Summer 미사일기지 52발의 FIRE-3 실전 핵탄두 장착」 그 순간 레이온은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 게 뜨고 있던 그는 그만 의자를 들어 대형 스크린을 향해 힘껏 던졌 다. 요란한 소리가 튀어 오르며 스크린이 그대로 박살났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어째서 세계정세가 이렇게 변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그걸 몰랐을까. 분명 하나하나 놓고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는 '합법적인 군사훈련' 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두 종합해 놓고 보면 제 아무리 어린아 이라 해도 강대국들이 작정하고 한국을 몰아세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앤슨, 그 빌어먹을 자식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거지?" 초조하게 이리저리 서성거리던 레이온은 결국 참지 못하고 튕겨지듯 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지나가던 하인이 다소곳하게 인사하는 걸 노골적으로 무시한 채 앤슨의 거처로 뛰어갔다. "앤슨!" 서재 한가운데에 앉아 포도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던 앤슨은 천천 히 레이온을 돌아보았다. 격한 분노로 붉게 달아오른 레이온의 얼굴 을 쳐다보던 그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로 날 찾아왔지?" "몰라서 묻나?" "글쎄. 짐작 가는 게 별로 없는데." 죽일 듯 앤슨을 노려보던 레이온은 뚜벅뚜벅 다가왔다. 그의 바로 코앞에 당도한 레이온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주먹으로 거칠게 탁 자를 내리쳤다.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냐! 이 빌어먹을 자식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 불가능이다, 레이온." "말장난은 그만해! 이 미친 자식아!" 씨근덕거리는 숨을 토해내던 레이온은 거칠게 앤슨의 멱살을 잡았 다.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 "뭐냐? 도대체 뭐냐?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지?" "무슨 말을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그런 뻔한 거짓말로 날 능욕할 셈이냐. 그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댄 레이온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닥쳐! 지금 강대국이라는 자식들이 극동아시아 쪽으로 군사력을 집 중시키고 있다는 것쯤 내가 모를 줄 알았냐!" "아, 요새 들어 튀어나온 그 소란스런 군사훈련을 말하는 건가?" "그래 이 자식아!!" 레이온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평소의 그와는 너무 달랐다. 차가운 가슴을 지닌 인형처럼 좀처럼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평소의 그와는. "전쟁이야! 이건 아무리 봐도 전쟁 준비중이라고! 그렇게 밖에 생각 할 수 없단 말이다! 이 개자식아! 도대체 전에 총리와 주석을 납치 해서 무슨 말을 지껄인 거냐!" "별말은 하지 않았다. 단지 양자 컴퓨터 설계도가 한국에 있다는 사 실을 살짝 귀띔해주었을 뿐이야." "사실대로 말해!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건지!" 레이온의 얼굴에는 활활 타오르는 분노가 불꽃처럼 넘실거리고 있었 다. 앤슨은 그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속으로 미 소를 지었다. 감정을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그가 화를 낸다는 게 왠지 즐거웠다. "히죽히죽 웃지만 말고 빨리 말해!" "아아, 그전에 잠깐 이 손이나 좀 놓아주지 않겠어? 이러고 있으니 도저히 말을 할 수 있어야 말이지." "닥치고 어서 말해!" 아무래도 화를 가라앉히는 건 그른 것 같군. 쓴웃음을 짓던 앤슨은 갑자기 레이온의 손목을 움켜쥐고 간단히 그의 팔을 떼어냈다. 그의 얼굴이 분함과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아무리 네가 힘이 세다 해도 에날도스를 지니지 않은 이상 나에게 는 상대가 안 돼. 잊었나?" "크윽…." 앤슨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신마저 질투했던 힘을 지닌 자만 이 지을 수 있는 오만한 미소였다. "죽인다 너…." 레이온은 타오르는 눈동자로 앤슨을 노려보았다. 눈빛만으로도 능히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듯한 무시무시한 살기였지만, 앤슨은 아무렇지 도 않게 그 시선을 받아냈다. "자, 일단 앉지 그래. 계속 서있으려니까 다리가 아프군."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레이온은 결국 자리에 앉았다. 앤슨은 포도주를 한 잔 따라 그에게 내밀었다. "일단 한 잔 하고 좀 진정하지 그래?" 말없이 앤슨을 노려보던 레이온은 거친 손길로 그것을 받아 한 번에 들이마셨다. 쾅! 소리나게 잔을 내려놓은 그는 입술에 묻은 술방울 을 주먹으로 거칠게 문질렀다. "자, 이제 말해라." "성격이 참 급하군. 아직 서론조차 꺼내지 않았는데." 앤슨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이 묻었다. "미국은 현재 본토를 방어할 최소한의 군사력만 남겨놓은 채 전력을 극동아시아 쪽으로 집결시키고 있지. 명목상으로는 비상시를 대비한 대규모 군사훈련이라지만, 대부분의 국가들은 맥을 손에 넣은 한국 을 의식해 무력시위를 하고 있다 생각하고 있고 말이야. 뭐 썩 틀린 추측은 아니지." 레이온은 침묵했다. 앤슨은 계속 말했다. "일본 또한 한국쪽 해안 해군의 배치 비율을 높이고 있지. 중국 역 시 그들의 기세에 편승해 한국 남해안의 바깥쪽을 크게 포진하듯 해 군을 집결시키고 있고. 마찬가지로 명목은 군사훈련." 책을 읽는 듯한 덤덤한 말투였다. 레이온은 분노를 깨물며 그를 노 려보기만 했다. "웃기지 않아? 전세계의 최강대국이라 칭송 받던 두 나라와, 한때 손꼽히는 경제대국이었던 한 나라. 이렇게 세 나라가 그 조그만 한 국을 의식해 이런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별 건 아니다. 단지 맥이 지닌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잠깐 짚고 넘 어갈 생각이었을 뿐이야. 그들 세 나라가 동시에 노골적인 군사훈련 을 할 정도면 역시 함부로 건드릴 순 없다는 증거겠지? 다른 건 몰 라도, 일단 맥은 대단한 전쟁 억지력을 지니고 있어." "넌 알 텐데? 그 나라들이 하는 짓거리는 결코 평범한 군사훈련 따 위가 아니야." "맞아. 그리고 한국을 상대로 유리한 입장을 얻어내기 위한 무력시 위 따위도 아니지.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들은 꼼짝없이 그렇게 생 각하고 계산기를 굴리고 있지만 말이야." 앤슨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키득키득 웃어댔다. "작년에 있었던 한미석유조약 갱신에서 미국은 전보다 더 불리한 계 약을 체결하고 말았지. 일본 역시 미국과 별다르진 않았어. 그나마 예전의 이라크전이 현대에 재현될 것을 두려워한 한국이 크게 선심 쓰듯 그렇게 넘어갔기 마련이지, 실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밀어붙였 더라면 아마 미국과 일본은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한 단 한 방울의 석유조차 얻을 수 없었을 거야." 레이온은 전혀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그저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앤 슨의 설명을 지루하게 듣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쨌든 지금의 미국으로서는 맥까지 손에 넣은 한국을 더 이상 그 대로 두고 볼 수 없겠지. 그들은 동북아시아, 특히 그 중 한국에 대 한 자신들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걸 결코 원하지 않을 테니까." "넌 지금 뭘 숨기고 있어, 앤슨." 레이온은 차갑게 그의 말을 끊었다. 앤슨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당 황한 기색이 스쳤다가 지워졌다. 레이온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미국의 경우, 한국을 상대로 무력시위, 아니 전쟁을 결심한다 해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아. 과거 중동국가를 상대로 몇 번의 석유전쟁을 일으킨 그들에겐 오히려 그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레이온의 사나운 눈동자는 시종일관 앤슨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빠르게 말을 이었다. "중국과 일본은 달라. 비록 한국과 일본이 철천지원수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서로 협력하지 않을 수 없는 사이야. 중국 역시 마찬가지. 그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무리하게 전쟁을 강행하지 않아도 어차피 미국보다는 보다 더 많은 걸 한국에게서 얻어낼 수 있어. 근데 지금 판국은 미국보다 오히려 중국과 일본이 더 적극적으로 한국을 고립 시키려 하고 있어." "그래서?" "뭔가 이상하다는 거야. 맥을 손에 넣은 한국의 군사력이 비약적으 로 증가될 게 두렵다면, 일본과 중국은 오히려 한국과의 사이를 더 돈독히 하는 게 쉽고 유리하지 않나?" 앤슨은 무표정한 얼굴로 포도주 잔을 입에 가져다가 땠다. 그의 눈 동자에선 아무런 감정도 읽혀지지 않았다. "말해 봐, 앤슨.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숨기고 있지?" 피 끓는 분노가 조용히 녹아 있는 힘있는 목소리. 앤슨은 지금 그가 필사적으로 화를 참고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역시 레이온이군. 눈치가 상당히 빨라. 하긴, 세계 제일의 천재라 일컬어지는 인간에게 그건 오히려 당연한 것일까?" 뒷짐을 지고 일어난 앤슨은 햇살이 쏟아지는 창가로 천천히 걸어갔 다. 레이온은 말없이 그의 등을 노려보았다. "네 전공이 생명공학과 로봇공학이라 했던가?" "새삼스럽게 그걸 묻는 까닭이 뭐지?" "아아, 차라리 네가 정치학을 전공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머리가 달린 인간이라면 이 정도쯤은 누구나 추측할 수 있어." "그건 아니야. 레이온, 너 아닌 다른 사람들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마라. 미일중이 무리한 군사훈련을 강행하는 이유가 고작해야 맥을 손에 넣은 한국을 의식한 무력자랑이라 생각하는 돌머리가 자그마치 백 억이 넘는다. 하기야 평범한 녀석들은 매스컴이 보여주는 것만 믿고, 또 그걸 바탕으로 판단하지." 레이온은 말이 없었다. 그의 눈동자에선 어느새 분노가 많이 사그라 져 있었다. 투명한 유리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앤슨은 미소를 지으며 등을 돌렸 다. 화사한 미소와는 달리 그의 얼굴엔 가릴 수 없는 우울함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처음 사도의 존재를 알게 되었던 때가 생각나는군. 그게 6년 전이 었던가? 5년 전이었던가?" 레이온은 침묵했다. 자신이 예전에 몸담았던 '사회'에 관한 이야기 는 그가 제일 싫어하는 주제였다. "레이온. 사도는 왜 저주를 받았지?" "…." "사도의 존재를 알고 나와 클랙 대신 님은 굉장히 놀랐다. 우리는 그런 초월적인 두뇌를 지닌 집단이 몇 세기 동안 전세계의 과학과 경제를 꽉 쥐어 잡고 있는 줄 상상도 못했으니까." 레이온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앤슨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사도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조사하던 중 나는 아주 재미있는, 아니 아주 우울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건…." "말하지 마." 그제야 레이온은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 가득 차가운 분노가 떠올 랐다. "누구도 기억 못하는 사실을 진실인 척 속여 나를 회유하려 들지 마 라, 앤슨. 절대 잊지 마. 너와 나는 다만 계약에 묶여 있을 뿐이야. 만약 계약을 저버린다면 언제든지 나는 시트날타를 이 지구상에서 없애 버릴 거다." "가능할까?" "나에게 불가능이란 없어." "불가능이란 없다라. 그런데 어째서 넌 유젤을 잡지 못했지?" 차가운 비수처럼 아프게 마음을 찔러오는 그 말. 레이온은 뜨거운 분노를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말해 봐. 불가능이 없다는 네가 왜 그때는 유젤을 잡지 못했지?" 6년 전의 그 아픔, 그 슬픔, 그 고통. 미소짓는 얼굴로 잔인하게 지 난 괴로움을 상기시키는 앤슨은 정녕 악마였다. 하지만 그는 또한 슬픔이 뒤섞인 미소밖에 지을 수 없는 악마였다. "왜 잡지 못했지?" 갑자기 레이온은 앤슨이 뿌옇게 보였다. 시신경 계통이 잘못된 것일 까. 아픈 추억이 눈동자에 머무르는 듯 눈이 몹시 아팠다. "이런, 이런. 울고 있구나, 꼬마." 정말 울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걸 확인할 자신이 없었던 레이 온은 뿌옇게 흐려진 창을 통해 앤슨을 바라보기만 했다. 앤슨의 얼굴이 돌연 차갑게 변했다. "아직도 내가 주의했던 걸 지키지 않는구나. 없앤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식으로 우리 민족을 모욕하지 마라." "계속하면? 혁명이 완성된 후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그렇다." 천연덕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냉정한 대꾸였다. 레이온은 기가 차서 그만 웃고 말았다. "가진 능력이라곤 고작해야 에날도스 하나밖에 없는 주제에 감히 그 런 일을 할 수 있다 생각하나?" "에날도스는 위대한 능력이다. 더 이상 우리를 모욕하지 마라, 레이 온." 차가운 경고가 녹아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레이온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그렇게 대단한 능력이라면 혁명이라는 것도 한 번 에날도스로 이뤄 보시지." "레이온!!" 앤슨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레이온을 죽이고 싶어 하는 듯 그의 손이 파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살기를 품은 에날도스 가 응축되는 걸 태연히 지켜보던 레이온은 차갑게 미소지으며 일어 났다. "경고한다 앤슨. 미중일을 끌어들여 유젤을 감히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 따위는 버리는 게 좋을 거야. 만약 그 아이가 손톱만큼이라도 다친다면 난 절대 너, 아니 너희들을 가만 두지 않는다." "…." 죽일 듯한 태도와는 달리 앤슨은 말이 없었다. 모욕은 용서 못한다 는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던 이유. 그것은 바로 레이온의 분노가 자 신의 신념보다 더 강하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레이온은 차갑게 돌아섰다. "난 너희들이 모르는 공격, 감시 루트를 수도 없이 갖고 있어. 내 눈을 어떻게 속여보겠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것쯤은 앤슨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레이온 이 지금 이렇게 경고하러 올 수 있었겠는가. 그가 나간 후 앤슨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컸구나. 정말 많이 컸구나, 꼬마…." 앤슨은 결코 그를 겁내지 않는다. 하지만 슬픔을 감춘 그의 눈동자 를 직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한테 경고도 다 할 줄 알고 말이야. 후후후…."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그는 레이온이 자신을 말려주기를 바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말려도 소용없다. 인류를 멸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난 기필코 혁 명을 완성하고 말 테니까." 가만히 탁자를 손으로 쓸던 그는 다시 창가로 걸어갔다. 얼굴에 와 닿는 따사로운 햇살이 너무나 눈부셨다. 그는 뜨겁게 작열하는 하늘 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름다워. 정말 아름다워." 그렇게나 오래도록 간절히 원했던 태양.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 면 그는 무슨 짓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57 회] 날 짜 2004-03-28 조회 / 추천 3169 / 47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하늘의 속박 니콜라스는 그로부터 며칠 정도 심한 혼란을 겪는 것처럼 보였다. 예안은 그가 걱정이 되지 않은 건 아니나, 그와 같은 사람을 어떻게 위로하는지 딱히 알지 못했기에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다행히 이삼일 정도가 지나자 그의 마음은 점차적으로 안정 되가는 듯 보였다. 비록 가슴속에 남아 있는 찌꺼기까지 완전히 떨쳐버리진 않은 것 같았지만. 며칠 후의 어느 날 아침이었다. "굿모닝." 니콜라스는 눈을 떴다. 몇 번 눈을 깜박거리던 그는 충혈 된 눈으로 예안을 쳐다보았다. "너 또 울었구나? 아직 완전히 괜찮아지지 않은 거야?" 그 말에 화들짝 놀란 니콜라스는 얼른 뺨을 만져 보았다. 눈물이 말 라붙은 자국이 대번에 만져졌다. 자면서 저도 모르게 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우, 울지 않았어. 아마 꿈을 꿨을 거야!" 자신을 마음 약한 꼬마로 보는 게 싫었던 것인가. 예안은 키득 웃으 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꿈속에서 운 것도 운 거지 뭐어. 어쨌든 오늘은 어디 나가봐야 하 니까 빨리 외출 준비 좀 해. 근데…." 예안은 말끝을 흐리며 걱정스런 얼굴로 그를 면밀히 살폈다. "너 괜찮겠어?" "응?" "아무래도 몹시 안 좋아 보이는데, 그냥 오늘은 나 혼자 나갈까?" 니콜라스는 기겁했다. "말도 안 돼! 누나 혼자 나돌아다니는 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누나 가 더 잘 알잖아! 재수 없게 나 없을 때 시트날타인지 하는 그 녀석 들이 누나를 발견하면 어쩌려고?" "하지만 너 그래 가지고서야 어디…." "괜찮아, 괜찮아.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나에겐 목숨 걸고 누나를 보호해야 하는 임무가 있으니까." 니콜라스는 잠시 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 자신과 예안은 어디까지나 의뢰로 맺어진 공적인 관계라는 걸 상기했다. '근데 만약 내가 뒷세계 1위의 청부업자가 아니라, 보잘것없는 어린 애였으면 누나가 날 돌아봐 줬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입맛이 썼다. 그는 얼른 몸을 일으키며 예안 의 등을 떠밀었다. "금방 준비하고 나갈 테니까 누나도 얼른 외출 준비 해. 여자들은 외출 한 번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잖아." 나는 예외인데? 예안은 목구멍까지 그 말이 솟아 나왔으나 그에게 떠밀려 밖으로 나가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닫힌 문을 등지고 예안이 한숨짓고 있을 때, 다시 문이 열리며 니콜 라스의 얼굴이 나타났다. "오 억 달러나 받아먹었으면 일을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냐. 그동안 괜히 쓸데없는 투정이나 부려서 미안해. 이제부터는 제대로 할게." 그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예안은 그가 힘들게 미소짓는다는 느낌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휴우. 알았어. 그럼 빨리 준비하고 나와." "응." 일부러 더 활기차게 구는 그의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던 예안은 천 천히 돌아섰다. 널은 홀 천장 중앙에 달린 샹들리에는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먹음직 스런 고급 음식의 향이 서늘한 실내 바람과 함께 주변을 맴돌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잔을 하나씩 든 채 웃고 떠들고 있었다. 누가 봐도 한눈에 고급 인간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들 의 옷차림은 화려했다. 지금 이 자리는 바로 대한민국의 대표적 재 벌 기업인 유한그룹의 후계자, 김재호의 24번째 생일 파티장이었다. '이게 바로 재벌3세 파티장이구나. 화려하고… 모인 사람들이라고는 고급 인간들밖에 없고….' 하지만 예안은 자신했다. 저들 따위보다는 '유젤'이 훨씬 더 고급 인간이라는 것을. '아직 김재호는 안 들어온 모양이네. 빨리 경고하고 우리 아기 보러 가야 되는데. 아씨, 지금쯤 나 엄청 찾고 있을 텐데.' 분명 12시에 파티가 시작된다 들었는데 도대체 재호 이 인간은 왜 아직도 안 들어서는 것인가. 예안은 얼굴을 찌푸렸다. "누나." "응?" "누나 혹시 유한기업하고 잘 알고 지내는 사이기라도 한 거야?" "아니, 왜?"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예안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럼 도대체 여긴 왜 왔어?" "선전포고하려고." 니콜라스는 어리둥절했다. "선전포고?" "그래, 선전포고." 니콜라스는 모처럼 여자답게 치장한 예안을 의아한 얼굴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쪽 어깨에 걸쳐 가슴으로 늘어뜨린 붉은 머리카락은 흰 원피스와 아주 잘 어울렸다. 장신구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소 박한 차림새였지만, 지금 예안은 누구보다도 빛나고 있었다. 얼굴에 띠고 있는 차가운 미소까지. "좀 오래 되긴 했지만 계약을 완전히 잊어버린 건 아니거든. 그리고 일단 채무자에게 빚이 있다고 확실히 알려야 하잖아?" "계약? 채무자? 빚?" "그래." 알쏭달쏭한 대답이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말해주지 않았다. '흠. 뭐가 뭔지 모르겠네.' 니콜라스는 와인이 담긴 잔을 가만히 들어 홀 안의 풍경을 비춰보았 다. 그와 예안은 가장 구석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시선 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저, 실례합니다만." 옆에서 들려온 남자 목소리에 예안은 흘끗 돌아보았다. "왜 그러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쪽 숙녀 분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물어도 될까요?" - 바드득 지금 치마까지 입고 있는 데다가 이미 애까지 낳은 몸임에도 불구하 고 그놈의 숙녀라는 말은 왜 그렇게 이가 갈리는지. 예안은 팔짱을 낀 채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실례가 되니까 대답 안 해줄래요." 청년의 표정이 순간 황당함으로 일그러졌다가 다시 활짝 펴졌다. "아하하, 재미있는 대답이군요. 괜찮다면 같이 파티를 즐겨도 되겠 습니까?" "오늘 파티의 주인공은 제가 아니라 김재호가 아닌가요?" "뭐어, 김재호씨에게는 이미 축하한다고 인사했으니 다른 파트너를 찾아도 될 듯 한데요." "어라? 김재호는 아직 안 왔는데요?" "개인적으로 조금 알고 있는 사이라 미리 만나서 축하한다고 벌써 말했죠." 예안은 끄덕이며 가만히 주변을 훑어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자신에게 쏠려 있었다. 왠지 뿌듯했다. '아아, 역시 예안이는 아름다워. 저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전부 다 예안이만 쳐다보고 있잖아.' 예안은 가슴을 폈다. 예전 같았으면 저 시선들이 부담스러워 뛰쳐나 가고 말았겠지만, 이제 그녀는 그것을 냉소적으로 즐길 정도까지 성 장했다. "혹시 프랑스에 가보신 적 있나요?" "아니요. 왜요?" "파리에서 아가씨와 비슷한 여성분을 언뜻 본 기억이 있어서 말입니 다. 한눈에 보고 충격을 받아 뒤쫓아갔지만 곧바로 인파 속으로 사 라져서 매우 안타까웠는데, 이렇게 한국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 랐거든요." "하지만 전 프랑스에 가본 적이 없는 걸요. 미국말고는 가본 나라가 없어요." "그러면 제가 워싱턴을 파리로 착각했나 봅니다." "제가 간 곳은 뉴욕이었어요. 미국의 수도가 아니라." "뉴욕도 미국의 수도입니다." "네?" "경제 수도잖습니까." 그는 연신 밝게 미소짓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예안은 그만 쿡쿡 웃었다. "헤. 지금 저한테 작업 거시는 건가요?" "눈치가 빠르시군요. 참 좋습니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예전, 남자들이 유젤에게 반 해 접근하는 걸 심하게 질투하던 때와는 너무 달랐다. '아, 진짜 내가 많이 변했나 보네.' 머리로는 지금 이 상황을 질색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가슴으로는 그 게 되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예안은 시선을 들었다. "이름이 뭐죠?" "진시월입니다." "예쁜 이름이네요. 남자 이름 같지 않아요." "뭐 다들 그렇다고 하더군요. 이번엔 제가 아가씨의 이름이 뭔지 들 을 수 있을까요?" "서예안. 18살이에요." "어어? 저랑 동갑이시네요 예안씨." 그제야 예안은 눈을 크게 떴다. "그쪽도 18살이라고요?" "커헉. 그럼 도대체 제가 몇 살인 줄 아셨습니까? 제가 그렇게나 삭 아 보이나요?" 그제야 예안은 시월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자세히 뜯어보니 고등 학생의 앳됨이 없진 않았다. 경직된 분위기의 정장이 그를 어른스럽 게 돋보여준 모양이었다. "정장 때문에 좀 어른스럽게 보였어요. 정말 우연이네요. 저랑 동갑 일 줄이야. 그럼 지금 고2?" "뭐 그렇습니다만… 그런데 우리 나이도 같은데 그냥 말 편하게 하 는 게 어떨까요?" 예안은 서슴없이 끄덕였다. "그래, 좋아. 그렇게 하자." 시월은 만족스럽게 미소지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만나서 반가워." "뭐, 나도 그럭저럭." 두 사람은 미소를 띤 채 가볍게 악수했다. 근처에서 몰래 지켜보기 만 할 뿐, 예안의 차가운 분위기를 겁내 다가서지 못하던 청년들은 몹시 안타까워했다. 시월이 그런 청년들을 의식하며 의기양양하게 미소짓고 있는 걸 바라보던 니콜라스는 내심 못마땅했다. '저 녀석 기분 나빠.' 니콜라스는 시월이 들으라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암컷 놓고 싸워 이긴 수컷 같아. 꼴불견이야." 얼핏 그 말을 알아들은 시월의 이마에 힘줄이 삐죽 돋았다. 그는 기 분이 조금 상한 표정으로 예안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쪽은 누구니?" "아, 성주 말이야?" 한 번 장난쳐볼까? 예안은 짓궂게 미소지으며 니콜라스의 목을 팔로 와락 껴안았다. "이쪽은 차성주. 내가 키워서 잡아먹으려고 집에서 기르고 있는 영 계야." "콜록! 콜록!" 사례가 들린 시월은 급히 허리를 숙여 기침을 했다. 예안은 사악하 게 미소지으며 몹시 재미있어 했다. "야야야. 농담이다 농담. 넌 농담하고 진담도 제대로 구분 못하냐?" "순간 진담인 줄 알았어. 그 왜, 그런 여자애들 있잖아. 미소년 사 냥을 즐기는 애들." "호오? 네 눈에는 성주가 미소년으로 보인다 이거야?" "선이 좀 가늘어서 여자 같은 게 흠이긴 해도 이 정도면 충분히 매 력적인 미소년이지. 하지만 남자답다 소리 듣기에는 상당히, 꽤나 많이, 아주 몹시 힘들 것 같은데?" 시월은 장난을 치듯 니콜라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기분이 상한 니 콜라스는 시월의 손목을 덥석 잡아 어깨에서 떼어냈다. 두 사람의 눈빛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 경직된 침묵이 짧게 지나갔다. 시월은 피식 웃으며 손목을 빼냈다. "와우, 너 꽤나 힘이 세구나? 이름이 차성주라고 했니? 나이는 어떻 게 돼?" "14살." 일부러 손의 힘을 빼준 것도 모르나. 니콜라스는 퉁명스레 대답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재미있게 지켜보던 예안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었다. "힘으로만 따지면 넌 얘한테 상대도 안 돼. 얘가 얼마나 힘이 센지 넌 모를 거야." "힘세 봤자 그게 그거지. 결국 어린애잖아." 비웃으려고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니콜라스는 기분 이 상했다. 그는 조금 울컥했지만 예안의 체면을 생각해서 가만히 있었다. "얘가 전에 나 기절했을 때 우리 집까지 나 안고 간 적도 있어. 백, 이백 미터도 아니고 꽤나 먼 거린데 말야. 그 정도면 대단하지 않 아?" "너 같은 미소녀라면 수천 킬로미터를 안고 걸어도 힘이 넘쳐날 것 같은데? 그 왜, 이런 말도 있잖아? 여자의 미모와 남자의 힘은 정비 례 관계라고 말이야." "풉." 낯뜨거운 칭찬이었지만 왠지 재미있었다. 시월과 친구하면 상당히 재미있을 것 같았다. 예안은 깔깔 웃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너 참 재미있는 애구나. 나랑 친구 안 할래?" "원하던 말이야. 여기 내 텔레폰 넘버." "영어 쓰지마 짜샤. 내가 영어라면 아주 이를 가는 사람이라구." 말투가 다소 거칠었지만 이미 눈에 콩깍지가 씌인 시월은 그것까지 귀엽게만 보였다. 번호를 교환한 뒤 예안은 작게 기지개를 켜며 벽에 기댔다. "그러고 보니 분위기가 정말 장난 아니다. TV에서나 보던 국회의원 에, 한창 뜨고 있는 연예인에, 반지르르하게 옷 빼입은 중년 아저씨 와 아줌마들까지 바글바글 하니 말이야. 국회의원하고 연예인들은 그럭저럭 알아보겠는데 저 사람들은 다 누구야? 설마 김재호 친척은 아닐 테고?" "유한 그룹이나 다른 회사들 간부쯤 되겠지. 연예인들이야 이런 자 리에 스폰서 눈도장이나 찍어두려 오는 거야. 사실상 장식품 역할이 나 마찬가지지 뭐." "장식품이라…." 한 번쯤 상상해본 적 있는 사치와 향락의 공간이 눈앞에 펼쳐져 있 었다. 그러나 그것을 갖고 싶다는 욕심이나 자신에겐 어울리지 않는 다는 자괴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진시월이라 했지?" "응." "오늘 첨 만났는데 이상하게 너랑 이야기하는 게 재밌었어. 이런 기 분은 처음이야. 사실 난 내 또래 남자들이랑은 친하게 못 지내는 편 이거든." "그래?" 예안이 자신에게 호감을 느꼈다 생각한 시월은 내심 만족스러웠다. "이거 대단한 영광이네. 그럼 네 친구로 계속 머물러 있으면 언젠가 내 손으로 면사포 씌워줄 수도 있는 거야?" 순간, 예안의 얼굴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그따위 소리 지껄이지 마!" 차가운 살의를 담고 있는 목소리. 시월은 창백한 공포를 느끼고 그 대로 굳었다. 주위에 있던 몇몇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안은 말없이 시월을 노려보았다. 시월은 겨우 미소를 지으며 장난 스레 받아넘겼다. "야야, 농담이다 농담." 예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월은 초조해졌다. "농담이라니까. 농담 한 번 한 거 갖고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친구 하기로 했으면 이 정도 농담은 그냥 애교로 봐주는 거 아냐?" 예안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어떻게 마음을 풀어줄까 다급해하 던 시월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너, 지금 네가 굉장히 오해하고 있다는 거 알아? 내가 좀 전에 면 사포 씌워준다 어쩐다 하는 게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해?" 예안의 표정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먹혀들었다 생각한 시월은 회심 의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거 내가 너의 여자친구가 되고 싶다 그런 뜻이야." "?" "그 왜, 결혼식 때 신부 옷 입는 걸 친구가 도와주고 그러잖아. 그 런 뜻이라구."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지만 넌 여자가 아니잖아?" "현대의학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말라구. 돈만 처바르면 70대 할아버 지를 쫙 빠진 20대 여자로 둔갑시킬 수도 있는 게 바로 현대의학이 야." 예안은 그만 풀썩 웃어버렸다. 너무 쉽게 화가 풀어져 버렸다. "너 썰렁한 농담 디게 좋아한다. 내가 그런 썰렁한 농담 듣고 웃어 본 게 또 처음이네." "썰렁했어? 나름대로는 유머랍시고 한 건데." "아하하, 어쨌든 덕분에 웃게 되서 고맙다." 예안은 시월과 이야기하는 게 몹시 즐거운 듯 연신 미소짓고 있었 다. 말없이 그 광경을 쳐다보던 니콜라스는 강한 질투를 느꼈다. 그 는 뾰로통한 얼굴로 예안의 옷자락을 슬그머니 잡아당겼다. "응, 왜?" "나, 머리 아파." "아파? 아프면 집에 있지 왜 나오고 그랬어?" 예안은 걱정스런 안색으로 그의 이마를 짚었다. 기죽은 척 그녀의 품에 살며시 안긴 그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몰래 시월을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참나.' 어린애한테 견제 당하고 있었나. 난처함을 느낀 시월은 고개를 돌리 고 슬그머니 웃어버렸다 . "성주가 널 참 많이 따르네. 둘이 무슨 관계야?" "내 친구 동생인데 사정상 지금 우리 집에 살고 있어." "널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은데?" "뭐 좀 그런 편이야. 내가 엄마 같다나 뭐라나." 자연스럽게 그 말을 입에 담으면서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자신 을 의식한 예안은 쓰게 웃고 말았다. 아기를 낳은 후, 싫어도 어느 새 남자로부터 저만큼 멀어진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그동안 진우로 서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쳐 온 게 헛수고로만 느껴졌다. '뭐 엄마는 맞으니까. 어쨌든 지금의 난 여자잖아.' 그래도 아기가 처음으로 말을 하게 됐을 때 '아빠'라고 부르는 걸 듣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조용히 자신을 위 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애들을 썩 싫어하는 편은 아니거든. 그래서 이 녀석이 날 따 르는 게 귀찮지만은 않아." "풉. 그래도 엄마 같아서 좋다니, 역시 어린애는 어쩔 수 없네." 잠자코 듣고 있던 니콜라스는 울컥했다. 그는 예안의 팔을 밀쳐 내 며 앞으로 나섰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총구가 시월의 가슴으로 향했다. 사람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실탄 : 여자의 미모와 남자(연인)의 힘은 정비례 관계다. 구체적으 로 어떤 힘을 말하는거지? 에덴 : 에이, 다 알면서. SP 말이야.(발그레) 실탄 : SP? 그게 뭔데? 에덴 : 훗. 그 이상은 못 알아들은 사람을 위해 설명을 생략하기로 하지. 실탄 : 너무해! 힌트라도 하나 줘! 에덴 : 힌트? 알았어. 하나 줄게. 뭐냐면… 바로 SP라는 게 콩글리 쉬라는 거야! (후다닥) 실탄 : 어, 어이? 어디가는 거야아아!!! 예에. 4일만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엠티 갔다 왔는데 심한 몸살 감 기가 걸려서 돌아와 버렸네요. 원래는 그냥 쉬어야하겠지만, 4일 동 안 선작이 6이나 떨어진 걸 보고 너무 큰 충격을 먹은 바람에 이렇 게 다시 한 편 업하고 갑니다.-ㅅ-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58 회] 날 짜 2004-03-31 조회 / 추천 3168 / 55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하늘의 속박 "다시 한 번 말해 봐. 지금 뭐라고 했어?" 반말임에도 불구하고 시월은 덤덤했다. 오히려 예안이 당황해서 어 쩔 줄 몰랐다. "야, 너 미쳤어? 이런 데서 그런 거 꺼내면 어떡해?" 예안은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나무랐다. 하지만 니 콜라스는 총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커다란 모욕이라도 입은 양 시 월을 차갑게 노려보기만 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제야 시월은 픽 웃음을 띄웠다. '어? 웃어?' 보통 총을 들이대면 일반인은 으레 겁먹기 마련인데, 웃어? 니콜라 스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아하하, 이거이거 원." 시월은 박수를 짝짝 치며 돌아보았다. 총 때문에 경직되어 있던 주 변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여러분들께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거 진짜 총이 아니라 장난감 BB탄 총이니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설마 어린 꼬마애가 이런 자리 에서 진짜 총 들고 설치겠습니까? 여기는 미국이 아니에요." 그제야 사람들은 안도했다. "뭐야 놀랐잖아." "난 또 괜히 긴장했네." 장난이라는 걸 알고 나니 놀랐던 게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안심한 사람들이 자신들로부터 관심을 거두는 걸 흘끗 확인한 시월은 그제 야 혀를 차며 니콜라스를 나무랐다. "너 이 녀석. 아무리 장난감 총이라 해도 이런 자리에서 그런 거 함 부로 꺼내면 못쓰는 거 알아, 몰라? 그 총은 또 어디서 샀어? 생긴 게 꼭 진짜처럼 생겼구만." 니콜라스는 총을 겨눈 채 꼿꼿이 서 있었다. 그는 말없이 시월을 노 려보기만 했다. "빨리 집어넣지 못해? BB탄 총이 얼마나 무서운지 너 알기나 하는 거야? 장난감 총이라 해도 얼마든지 사람 눈쯤은 실명시킬 수 있단 말이야." "빨리 집어넣어. 왜 자꾸 애처럼 굴고 그래?" 보다 못한 예안이 나서자 니콜라스는 겨우 총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시월에게 미안해하는 기색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예안 은 조금 분통이 났다. "너 집에 가서 죽었어. 이 자리가 어디라고 함부로 그런 걸 꺼내는 거야?" 예안이 낮게 으르렁거리듯 말하자 니콜라스는 약간 기겁했다. "쏠 생각 같은 거 없었어. 그냥 위협용이었다구." "지금까지 프로답게 잘 해왔잖아? 근데 왜 하필 이런 자리에서 그런 실수를 하고 그래?" "하지만… 아냐, 됐어." 니콜라스는 다소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긴, 아직 어 리다는 말에 발끈해서 그랬다는 말을 창피해서 어떻게 하나. 시월은 아무것도 모른 채 말을 걸었다. "성주가 장난감 총을 참 좋아하나 봐. 이런 자리에까지 들고 다니다 니 말이야." "뭐… 아직 좀 어리잖아. 14살밖에 안 됐으니까 말이야." "하긴 14살이면 한창 그런 것에 관심 보일 법하지. 근데 예안이 넌 어느 학교 다녀? 나는 천월 고등학교 다니는데." "대명고등학교 다녔었는데 작년 여름에 자퇴했어. 별로 다닐 필요도 못 느끼고, 그냥 대학 빨리 가려구." "호오? 그럼 지금은 대학생인 거야? 어느 대학 다녀?" "아직 대학생은 아니야. 원래는 올해 대학 가려고 했는데 사정이 있 어서 수능만 연습삼아 치고 말았어." "몇 점 나왔니?" 고득점 경력이 있는 자는 남들이 자신의 점수를 물어볼 때가 이 세 상에서 가장 즐겁다. 예안은 가슴을 당당하게 쭉 펴며 히죽 웃었다. "490점." 시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오, 대단한데? 장난 아니다 너." 그의 눈동자에 떠오른 건 경악도 비웃음도 아닌, 말 그대로 순수한 감탄이었다. 입이 떡 벌어지며 경악하는 모습을 상상했었던 예안은 약간 어리둥절했다. '엥? 왜 안 놀라지? 이러면 내가 섭섭하잖아?' 예안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별로 안 놀라네? 보통 사람들은 490점 맞고 대학 안 간 거 엄청 아 깝다고들 하던데? 스카이 수석 합격은 따놓은 점수인데 버렸다고 말 이야." "뭐 사정이 있으면 안 갈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요즘 누가 명문 대학 같은 거 따지고 그러니? 그냥 대학가서 자기가 열심히 공부하 기만 하면 되는 거지." "하긴, 그 말이 맞긴 해." "근데 왜 이번에 대학을 안 간 거야? 그래도 점수가 아까워서라도 나 같으면 갔을 텐데." "그냥 좀 사정이 있었어. 경제적인 문제는 아니고 내가 집에만 붙어 있어야 할 일이 좀 있거든." 아기 때문이라고 말해주면 이 녀석은 아마 기겁을 하고 뒤로 나자빠 질 것이다. 하지만 그와의 관계를 좀더 유지하고 싶었던 예안은 아 쉽지만 아기에 대해선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녀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지금 그녀는 유젤이 지닌 미모를 가지고 시월을 놀려주는 걸 상당히 즐기고 있었다.(무의식적으로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뭐야? 왜 나만 두고 둘이 이야기하는 거야?' 니콜라스는 예안과 시월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친해진 게 불 안하기만 했다. 음료수에 독약이라도 타서 저 녀석에게 먹여 버릴 까? '쳇….' 그는 풀죽은 얼굴로 주머니에 감춘 총을 만지작거렸다. 서운하기 그 지없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시끌시끌하게 달아올랐다. 그들은 얼른 고개를 돌 렸다. 저쪽 입구에서 오늘 파티의 주인공인 재호가 화려한 양복 차 림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린애처럼 생일이 좋은 건지, 그는 얼굴 에 웃음을 가득 띄우고 있었다. '그 웃음이 과연 얼마나 갈지 두고 보겠어, 쓰레기.' 예안은 팔짱을 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시월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너 혹시 김재호씨에게 안 좋은 감정이라도 있니?" "응? 왜 그렇게 생각해?" 쌀쌀맞을 정도로 차가운 반응에 시월은 움찔해 말을 흐렸다. "아, 그냥…." 가라앉은 눈동자로 재호를 주시하던 예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좀 웃기다. 무슨 약혼식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생난리 법석을 떨고 있대? 생일 케이크도 그냥 평범한 1단 짜리 케이크면 됐지, 저런 5단 짜리 케이크를 누가 다 먹냐?" "그래도 올해는 좀 나아. 작년에는 웬 사회자가 나서서 진행하는 바 람에 이게 생일잔치인지 결혼식장인지 구분이 안 갔거든. 김재호씨 도 작년에는 엄청 쪽팔렸을 거야." 잠시 그 모습을 상상해본 예안은 쿡 웃음을 터트렸다. "디게 웃겼겠다. 결혼식도 아닌 생일파티에서 사회자가 나서서 마이 크 들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거." "올해는 사회자가 없는 걸 보니 김재호씨가 유치해서 못하겠다고 김 회장님한테 항의라도 했나 보네. 하긴 나 같아도 쪽팔려서 두 번 다 시 그런 짓 못 하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는 시월은 어느 모로 보나 기품 이 넘쳐흐르는 귀공자였다. 어느 재벌집 아들인지는 모르나, 이 자리 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상당한 귀족이라는 증거로 충분 했다. '근데 좀 이상하네.' 예안은 빤히 그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길을 알아챈 시월은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얼굴을 돌렸다. '이상하다, 이상해. 왜 이 녀석이 밉지 않지?' 딱히 꼬집어 말할 순 없었지만 분명 예전과는 다른 감정의 변화가 예안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집안의 후광을 입기 마련인, 잘사는 집 자녀들에 대한 적개심. 그것이 지금 그녀의 마음 속 어디 에도 없었다. '아, 하긴 이제 나는 세계 제일의 부자지. 유전을 가진 세계 제일의 부자….' 집 사느라 돈을 펑펑 쓸 때에도 별로 느끼지 못했던, 자신이 세계 제일의 부자라는 사실이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왠지 저 사람들이 다 우습다. 한심해.' 예안은 웃고 떠들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을 훑어보며 혀를 찼다. 그것은 상대적 약자에 대한 멸시 따위가 아니었다. 어느덧 그녀는 세속적 가치에 대한 집착을 거의 다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 지만 그녀는 아직 그 사실을 몰랐다. '빨리 말하고 가자. 더 이상 여기 있는 것도 짜증난다.' 예안은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녀가 재호에게 다가가자 아까부터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시에 숨을 죽였다. 어느 덧 홀 안의 모든 시선은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 부담스런 시선이 온 몸 가득 쏟아지고 있었지만, 예안은 수줍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것들을 받아냈다. 그리고 재호에 게 차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김재호씨." "예, 반갑습니다." 예안이 독을 품고 있다는 걸 눈치챈 재호는 빙긋 웃었다. "와 줘서 고맙습니다 예안씨. 혹 제가 보낸 초대장을 거절하면 어떡 하나 하고 걱정했거든요." "설마요. 제가 얼마나 재호씨의 초대장을 고대하고 있었는데요." "아, 그렇습니까? 영광이군요." "근데 만약 초대장이 하루만 더 늦게 왔으면 전 못 왔을 거예요. 최 근에 이사했거든요." "오, 그러세요? 이거 언제 한 번 집들이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달리, 둘은 속으로 제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재호는 어떻게 하면 눈앞의 이 먹음직스런 먹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고심하고 있었고, 예안은 장차 자신의 손에 폐기처분될 재호의 앞날을 상상하고 있었다. '재수 없어 정말.' 예안은 재호가 머금고 있는 친근한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그의 진면목을 알지 못할 거라 생각하 니 왠지 그들이 한심하고 우스웠다. '어쩌면 다 똑같은 족속들일 수도 있지.' 예안은 쓰게 웃으며 재호의 옆에 서 있는 노인, 김성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유한그룹의 위명과 회장님의 탁월한 경영 능 력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어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가워요." 올해 72세가 되는 성후는 굴지의 대기업 회장답게 흐르는 기도가 당 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나도 만나서 반가워요 아가씨. 근데 아가씨는 우리 재호랑 무슨 관 계인가요?" "글쎄요. 그것은 재호씨에게 물어보시면 아실 수 있을 거예요." 예안은 적의를 감춘 화려한 미소를 얼굴 가득 띄운 채 성후를 면밀 히 살폈다. '과연 대기업 회장답게 사람을 압도하게 생겼구나. 글치만 이렇게 대단해 보이는 사람이 자식, 아니 손자 교육은 도대체 왜 그 따위로 시킨 거지?' 성후가 손자 인성 교육만 제대로 시켰어도 혜인이 상처받을 일은 없 었을 거라 생각하자 이가 갈렸다. 하지만 예안은 필사적으로 적의를 감추었다. '아, 어쩌면 이 할아버지가 재호 자식한테 그러라고 시켰을지도 모 르겠다. 이 사람 입장에선 15조 원어치 지분이면 어떻게 해서든 손 에 넣고 싶어할 테니까.' 예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이리저리 뜯어보던 성후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재호에게 물었다. "재호야. 이 아름다운 아가씨는 누구냐?" '아름다운 아가씨? 우웩, 당신이 그런 말하는 게 얼마나 닭살인지 알아요?' "저랑 좀 알고 지내는 아가씨입니다. 이름은 서예안이라 하구요." '좀 알고 지내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각별한> 사이지.' "호오, 그래? 네가 언제부터 이런 아가씨랑 사귀었지?" '사귄 거 아닌데요 회장님. 난 당신들의 적이라구요.' "좀 됐습니다." '뭐 이 악연이 시작된 게 작년이니 좀 되기는 했지.' "아무쪼록 둘이 잘 되길 빌어주마." 성후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예안을 바라보았다. 적의를 감춘 채 생글 거리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던 예안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만 얼 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뭐, 뭐야?' 이상했다. 어째서 그의 눈빛에 이렇게 기가 죽어버리는 걸까. '제, 젠장! 그렇게 쳐다보지 마! 난 당신들 적이란 말이야! 재수 없 어!' 예안은 사랑하는 손자며느리를 쳐다보는 듯한 그 눈빛에 이가 갈렸 다. 그리고 자신이 성후에게 순간이나마 죄책감을 느꼈다는 게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그녀는 일부러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김재호씨의 24번째 생일을 축하드려요. 내년에도 반드시 이 자리에서 생일파티 하는 걸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예안이 성후의 눈빛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눈치챈 재호는 태연히 미소지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디 그 자리에 예안씨가 제 옆에 있으면 원 할 바가 없겠습니다만." "원한다면 그렇게 해드릴 수도 있죠. 별로 어려울 건 없으니." 내년 너의 생일 때 망가진 널 비웃어 주마. 예안은 그렇게 속으로 깊이 다짐하며 그대로 등을 돌렸다. 여자들이 안도해하는 탄성과 남 자들의 아쉬움 섞인 탄식이 섞여서 터져 나왔다. "아참. 이거 실례지만, 아가씨는 어느 집안 따님인가요?" 그대로 가 버리려던 예안은 성후의 물음에 멈칫했다. 등을 돌린 그 녀는 고개를 옆으로 까딱하며 되물었다. "제가 어느 집안이냐구요?" "네, 알고 싶군요."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예안은 문득 저쪽에 서 있는 니콜라스와 시월 을 돌아보았다. 그들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피식 웃고는 다시 시선 을 성후에게 돌렸다. 팔짱을 낀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 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제가 내는 간단한 키워드만으로도 전부 다 알 아차릴 거예요. 아니, 미개인이 아닌 이상, 사람이라면 어느 나라 국민이든 간에 다 알아 맞출 수 있을 거예요." "으음." 자신감으로 가득 찬 대답에 성후는 짧은 신음을 흘렸다. 저런 광오 한 대답을 믿어야 할 것인가. "적어도 유한그룹보다는 제 집안의 재력이 훨씬 더 막강하죠. 이만 하면 만족스런 대답이 되셨어요?" 소리가 작았기에, 재호와 성후를 제외한 그 누구도 예안의 대답을 알아듣지 못했다. 예안이 무언가 허풍을 치고 있다 단정지은 재호와 는 달리, 그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은 성후는 놀라움을 애써 감추 며 고심했다. '친족이 카를로스 경영진 고위 간부급이라도 되나? 아니면 이카루 스? 네로스? 포세이돈은 우리 회사보다는 감히 더 낫다고 말하기가 힘들고… 그 외에는 딱히 짚이는 곳이 없는데.' 하얀 피부와 녹색 눈동자, 그리고 붉은 머리칼이 이루는 아름다운 대조를 찬찬히 뜯어보며 성후는 다시 생각했다. '혹시 어느 나라 왕가의 숨겨진 공주 뭐 그런 거라도 되나?' 터무니없는 부분까지 상상이 미친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였다. "유한전자, 조만간 빼앗아 드리죠. 기대하셔도 좋아요." 어느새 바짝 붙어선 예안은 작은 목소리로 차갑게 속삭였다. 성후는 확 깨는 기분이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릴까요? 유한전자, 조만간 확실히 빼앗아 드릴 테니 기다리고 계세요." 어린 여자 같지 않게 냉소적인 음성. 성후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새파랗게 질린 그는 저도 모르게 더듬더듬 손을 내밀었지만, 이미 예안은 저 멀리 사라져 버린 후였다. 어이없는 얼굴로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던 성후는 허탈한 목 소리로 물었다. "재호야. 저 아가씨는 도대체 누구지?" 재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 하면 어떻게 하란 소리냐? 유한전자를 빼앗는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호? 예안씨가 그렇게 말했어요?" 재호는 피식 웃으며 부드러운 말로 성후의 놀란 마음을 다독거렸다. "그 말의 내면적 의미를 눈치채지 못하셨네요. 어차피 저랑 결혼한 다면 유한전자를 가질 수 있게 되잖아요?" "허어?" "그 말은 아마 곧 제 마음을 빼앗는다는 뜻일 겁니다." 성후의 얼굴이 누그러졌다. 재호는 웃음 띤 얼굴로 덧붙였다. "물론 지금은 조금 흥미가 있을 뿐이긴 하지만요." "그러니까 나는 이런 자리는 싫다니까. 사업가들한테 얼굴 도장 찍 어봐야 의사 생활하는데 도대체 뭐가 도움이 된다는 거야?" "임마, 누가 얼굴 도장 찍으래? 아무리 그래도 네 친형 생일인데 안 온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내빼고 그러는 거야?" "형 친구들만 오는 거라면 기꺼이 참석하겠어. 하지만 난 정치가와 사업가들, 거기다 덤으로 같지도 않은 것들이 연예인이랍시고 실실 대며 바글거리는 꼴은 도저히 못 봐." "임마, 그렇게 깐깐하게 구니까 여자한테 절묘하게 채이기나 하는 거야." 걸핏하면 그걸 잡고 넘어지냐. 재원은 이를 바드득 갈며 말없이 걸 음을 옮겼다. 유준은 서둘러 그와 보조를 맞췄다. "그러고 보면 네 친구 동생도 참 나쁜 놈이다. 안 그래? 현우라고 했던가, 정우라고 했던가?" "형은 정우고 동생은 현우. 우리 과 애인데 그새 정우 이름 잊어버 렸어? 저번에도 같이 밥 먹었잖아." "아 그랬나? 내가 원체 기억력이 나빠서 말이야." "그 머리로 어떻게 대학 들어왔는지 내가 더 신기하다 임마." 싫은 티를 잔뜩 풍기며 홀 안으로 들어서던 재원은 그대로 멈췄다. "왜 갑자기 멈추고 그래? 안 들어가?" 유준은 재원의 등을 떠밀어보았지만, 그는 끄덕도 안 했다. "어이? 안 들어가?" 몇 번 떠밀어 보았지만 돌이 되어 버린 재원은 대답조차 없었다. 오 랜 원수와 마주치기라도 한 건가. 유준은 재원의 시선이 머물러 있 는 곳으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에에. 전개 진행 속도가 좀 느린 것 같죠? 선작 네 자리가 되면은 아마 순식간에 지나갈 겁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대박 연참 을 준비 중에 있거든요.-_-)// 지금까지는 거의 양자 컴 설계도를 놓고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포 석을 깔고 있던 중이었구요.(저게 어딜 봐서?) 일단 일이 터지면 사실상 쏜살같이 사건이 진행될...거에요 아마.(근데 왜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건데?) silvergini님, 벤쟈민님, 칼바위님, 크리쳐아일님, remaeld님, 굉장히 오랜만입니다. 흐흐흐. 어디로 사라진 줄 알았습니다 정말.-- 그러고 보니..미티어샤워님도 요새 안 보이고(이분 닉이 참 특이 해서 기억;), 설지현 님도 안 보이고, 에 또... 휴. 사람 이름을 잘 기억 못하는 저로서는 여기가 한계군요.--;; 아, 물론 자주 보이는 분들은 저기서 제외입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59 회] 날 짜 2004-04-04 조회 / 추천 3050 / 40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하늘의 속박 재원은 얼굴을 찌푸렸다. 몹시 낯익은, 아주 보고 싶어했던 얼굴이 었다. 하지만 누구의 것인지 당장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갑자기 재원은 눈앞의 소녀가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마지막으로 봤 을 때보다 더욱 성숙해진 분위기 탓에 아마 순간 그녀가 누구인지 몰라봤던 모양이었다. "안녕." 재원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인사했다. 전부 다 정리 된 줄 알았 던 옛 그리움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예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재원이 누구인지 당장 기억나지 않았기 때 문이었다. 그러나 곧 그가 누구인지 생각해낸 그녀는 몽환의 경계에 서 벗어난 사람처럼 환하게 미소지었다. "오랜만이네 재원 형?" 예안은 자신이 지금까지 그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음 을 상기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태연히 악수를 청했다. "그동안 잘 지냈어?" 아무렇지도 않은 그녀의 반응에 놀란 재원은 말이 없었다. 그는 최 소한 그녀가 당황하거나 미안해할 거라 생각했었다. "여자가 먼저 악수를 청했는데 그렇게 서 있으면 내가 머쓱할 거라 생각 안 해? 안 받아줄 거야?" 재차 말을 걸었을 때 재원은 겨우 씁쓸히 웃으며 악수를 받았다. "정말…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냈니?" 목소리가 떨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가슴을 메웠다. 식은땀이라 도 흘리고 있으면 창피해서 어떡하나 하는 근심도 있었다. 그는 결 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확신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그러고 보니 형 그동안 이터널 피닉스에 접속 한 번도 안 하더라? 이제 게임 접은 거야?" "나도 이제 대학교 3학년 올라가니 더 이상 빈둥빈둥 놀 수 없잖아. 이제부터는 본과생인데." "아 그러고 보니 형 의대생이었지. 그 이름도 아주 찬란한 S대 의대 생." "…비웃는 거니?" 설마 그럴 리가. 예안은 냉소적인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설마. 내가 왜 그까짓 거 갖고 질시하거나 그러겠어? 그냥 좀 아는 사람 생각이 나서 그랬을 뿐이야.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재원의 눈에 비친 예안의 모습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더 당 당해지고 자신감이 붙은 태도가 황송할 정도로 눈부신 미모를 한층 더 돋워주고 있었다. "그런데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글쎄, 뭐 오고 싶어 온 건 아니고. 좀 심각하게 할 말이 있어서 와 봤을 뿐이야. 근데 형이 왜 여기에 있어?" "아 그건 말이야." 재원은 문득 자신들이 홀 입구를 막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 들이 수군거리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기, 여기 있으면 좀 그러니까 다른 데 가서 이야기하지 않을래?" "나 곧 가봐야 하니까 그냥 간단히 말 해." 말하는 폼을 보니 그냥 해본 소리는 아니었다. 재원은 서둘러 묻고 싶었던 몇 가지를 꺼냈다. "그동안 몇 번 너한테 전화 해봤는데 안 받더라? 전에 내가 준 핸드 폰 설마 버린 거니?" "형이랑 그대로 끝이라 생각해서 새로 하나 샀어. 지금 그 핸드폰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아마 배터리도 오래 전에 다 소모됐을 걸?" "…그렇구나." 재원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그동안 혼자 그걸 신경 쓰고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게 못내 창피하기만 했다. "아직 형은 대답 안 했어. 형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아 나는…." 재원이 뭐라 말하려는 찰나 유준이 그를 잡아끌었다. "재원아. 벌써 시작한 모양인데 빨리 들어가자. 네 형이 지금 너 엄 청 기다리겠다." 예안은 순간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런 기색을 감추고 침착하 게 물었다. "형이 기다린다니? 무슨 소리야 그게?" "사실 오늘 생일 파티 주인공이 내 친형이거든. 일단 가서 인사하고 올 테니까 너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래? 꼭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재호와 예안이 어떤 관계인지 모르는 재원은 그렇게 부탁하며 안으 로 들어갔다. 그는 혹시라도 그녀가 가버릴 걸 두려워하며 연신 뒤 를 돌아보았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예안은 천천히 등을 돌리며 피식 웃어버렸다. "재원 형이 김재호 그 자식 동생이란 말이야?" 이상하게 크게 놀랍진 않았다. 세상은 참 좁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 이었다. "누구니 저 사람?" 여태껏 잠자코 지켜보던 시월이 물었다. 재원이 자신은 염두에도 두 지 않아 기분 나빠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응, 재원 형이라고 내가 예전에 게임상에서 좀 친하게 지냈던 형이 야. 얼마 전에 연락을 끊었는데 이렇게 우연히 다 만나네." "그래?" 시월은 궁금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더 묻진 않았다. 예안은 시계를 들여다본 뒤 다시 말했다. "나 이만 가봐야겠다. 집에서 나 기다리는 사람이 있거든." "그래? 아쉽네. 친해지자마자 이렇게 헤어지다니…." 시월은 진심으로 서운하게 여기며 손을 내밀었다. 예안은 기꺼이 악 수를 받아주었다. "그럼 잘 들어가. 전화할게." "그래, 너도 잘 놀아." 시월에게 손을 흔들어준 뒤 예안은 등을 돌렸다. 말없이 옆에서 걷 고 있던 니콜라스가 그제야 어깨를 툭툭 쳤다. 이쪽 좀 봐달라는 의 미였다. "저 수컷은 또 누구야?" "말했잖아. 그냥 예전에 게임에서 좀 알던 형이야." "그게 끝?" "더 말해 줘? 매일 버닝 나이트를 해가며 게임을 하곤 했었는데 그 때는 내가 형한테 남자라고 속이고 있었어. 오프라인에서 우연히 만 나게 됐는데 어쩌다 보니 서로 어색해져서 그때부터 흐지부지 연락 끊게 됐지. 만족해?" "저 수컷도 누나한테 반했던 모양이네. 아니, 지금도 그럴까?" "글쎄. 거기까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들이 엘리베이터 앞에 당도하자 문이 열렸다. 예안은 안에 탄 후 1층 버튼을 눌렀다. 니콜라스가 물었다. "기다리지 않을 거야?" "왜 기다리냐?" "기다릴 거라 생각했는데." "몰라. 자기 쪽에서 알아서 찾아오겠지. 내가 택시에 타기 전에 쫓 아오든지 말든지 그건 재원 형이 알아서 할 문제지." 집에 가기 전에 쫓아오면 만나주는 거고 아니면 그냥 가버리겠다는 소리였다. 재원에게는 냉정한 소리겠지만, 니콜라스는 그 말이 기분 좋기만 했다. 건물을 나선 두 사람이 택시 정류장 쪽으로 향하는 찰나였다. "자, 잠깐만! 기다려!" 예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재원이 숨을 몰아쉬며 달려오고 있었다. 셔츠 자락이 다소 흐트러진 걸 보니 얼마나 초조해하며 뛰어왔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기다리라고 했는데 벌써 가면 어떻게 해?" "글쎄. 별로 형이 나 만나고 싶어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거든."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내가 너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데, 연락도 안 되고 얼마나 속 쓰렸는지 알아? 그렇다고 정우네 집에 찾아갈 수 도 없고…." 예안은 그 기분만은 이해했다. 그는 자신이 현우와 사귄다고 알고 있었을 터이니, 아마 현우 얼굴 보기가 민망했을 것이다. "형 정우 형한테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 같은 학교 같은 과 동기라 고 하지 않았나?" "?" "나 정우 형네 집에서 쫓겨났어." "뭐어?" 재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예안은 몹시 재미있어하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나 애 뱄었거든. 그래서 정우 형 가족들이 나한테 엄청 실망하고 나 집에서 쫓아냈어. 그래서 지금은 따로 떨어져서 아기랑 같이 재 미있게 잘 살고 있어." 재원의 얼굴에 불신이 가득 떠올랐다. 그는 도저히 예안의 말을 믿 을 수 없었다. "저, 정말이니?" 그는 심하게 더듬거리며 물었다. 차라리 이것이 꿈이었으면 했다. "풉." 갑자기 예안이 피식 웃었다. 그는 어리둥절했다. "농담이야 농담. 그걸 믿으면 어떡해? 나 쫓겨나거나 그런 거 없었 어. 그냥 내 발로 그 집 나와서 잘 살고 있을 뿐이야. 아, 집 나왔 다고 하면 뉘앙스가 좀 이상한가? 그럼 독립이라고 하지 뭐." 예안은 깔깔 웃었다. 향긋한 그녀의 체향이 재원의 얼굴 위로 닿았 다가 흩어졌다. 그는 얼굴을 붉혔다. 예전부터 반드시 손에 넣고 싶 어했던 그 체취였다. "근데 형. 김재호하고 형제지간이야?" "어? 어. 김재호는 내 친형이야. 2살 터울이지." 예안은 입맛을 다셨다. 한때나마 친하게 지냈었던 사람이 자신의 철 천지원수와 친형제간이라는 건 참 얄궂은 일이었다. "그거 참 유감이네. 근데 형은 왜 그 동안 형이 재벌3세라는 거 말 하지 않았어?" "그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떠들고 다니니. 단지 운이 아주 좋아서 재 벌가에 태어났을 뿐 내 능력으로 일궈낸 건 아니잖아." "아하. 그래서 형은 경영 쪽으로 안 가고 의대 쪽으로 간 거야?" "뭐 그런 것도 있긴 해." "하지만 서울대 의대라 하면 엄청 알아주는 곳이잖아. 사실 가난한 집 애들은 사교육비가 부담 돼서 그런 대학 그런 과 무척 가기 힘들 지. 요즘은 노력이 수재를 만드는 게 아니라 돈이 수재를 만드는 시 대니까." 그건 날카로운 가시를 숨긴 말투였다. 언뜻 그것을 느낀 재원은 당 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어째서 그녀가 적개심을 보이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예안의 표정이 돌연 싸늘하게 변했다. 재원은 바짝 긴장했다. "김재호는 형과 형제라는 걸 감사히 여겨야 될 거야. 원래는 아예 뿌리까지 남기지 않고 싹둑 잘라버리려 했지만 옛 정을 생각해서 그 냥 빼앗는 걸로 그치겠어." "무슨 말이니??" "뭐어. 어차피 요즘 들어 무너뜨리는 것보다는 그냥 빼앗는 게 더 무난할 거란 생각이 들긴 했어. 어쨌든 유한그룹은 우리나라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 중 하나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차기 총수 자리 는 누굴 시켜 줄까나?" "뭐?" 재원은 불쾌했다. 아무리 예안을 좋아한다 해도 유한그룹을 무너뜨 린다 어쩐다 하는 소리를 듣고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느닷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유한그룹을 무너뜨린다니? 누가? 네 가?" "왜, 못할 것 같아?" "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해? 당장 취소하지 않으면 나 화 낸…." '화낸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솟아올랐다가 다시 기어 들어갔다. 재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햇살을 걸러내는 밀짚모자 아래 빛나는 녹색 눈동자가 자신을 죽일 듯 싸늘하게 노려 보고 있었다. "형을 봐서 뿌리까지 무너뜨리지는 않겠어. 다른 계열사까지 손대지 는 않겠어. 하지만 유한전자는 조만간 반드시 빼앗아 버리고 말 테 니, 기대하고 있어도 좋아." 재원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알기로 예안은 유한전자를 빼앗는다 어쩐다 하는 소리를 할 만한 능력을 지닌 여자애가 절대 아니었다. 정우에게 들어 알고 있는 것이니 확실했다. 헌데 저 자신감은 도대 체 무엇이란 말인가. "난 이만 가볼게. 나중에 생각나면 전화 해." 예안은 할 말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는 재원의 셔츠 앞 주머니에 종 이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그대로 돌아섰다. 비웃듯 그 를 쏘아보던 니콜라스도 그녀를 뒤따랐다. 멍한 눈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쫓던 재원은 종이를 꺼내 펴보았다. 「010-9876-5678」 몇 번이고 훑어보던 재원은 그것을 소중하게 꼭 쥐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예안이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그녀 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는 언제까지나 그곳을 계속 쳐다보 기만 했다. 헥헥. 금요일 저녁부터 술 때문에 죽을 뻔 했습니다. 과 동기랑 선배 들이랑 술 마시러 갔는데, 아 글쎄 바로 옆에 동아리 선배들이 있 지 몹니까. 그래서 두 테이블을 왔다갔다.-_- 게다가 더 기가 막힌 건, 한쪽은 소주 파티인데 한쪽은 맥주 파티.; 집에 돌아와서 숙취 때문에 죽는 줄 알았죠. 난생 처음으로 겪어 보는 그놈의 숙취가 정말 사람 미치게 하더군요. 엎친데 덮친 격으 로 감기까지 걸리는 바람에 일요일 새벽 4시까지 꼼짝 않고 앓아 누웠습니다. 헥헥헥.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60 회] 날 짜 2004-04-05 조회 / 추천 3067 / 61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하늘의 속박 그 날 저녁이었다. 아기를 안은 채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예 안은 정호가 욕실로 들어간 사이에 니콜라스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너 이제 완전히 괜찮아 보인다?" 부러운 눈으로 줄곧 아기만을 응시하던 니콜라스는 조용히 되물었 다. "무슨 뜻이야?" "그렇잖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세상 포기한 사람처럼 굴었 는데 이제는 괜찮아 보이잖아? 오늘 재호 자식 파티장에서도 꽤나 활기차게 굴고…." "누나 눈에 활기차 보인다면 나도 좋아." 예안은 맥이 빠졌다. 이건 자신이 원했던 대답이 아니었다. "나 지금 너 놀린 거야. 알아?" "놀렸다고?" "그래! 너의 부끄러운 과거를 내가 들췄으니 너는 당연히 창피해서 어쩔 줄 몰라해야 한다구! 난 그걸 기대하고 그렇게 말을 걸었는데 네가 그렇게 심드렁하게 반응하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니콜라스는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예안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너처럼 재미없는 애랑 앞으로 한동안 같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날이 다 깜깜하다." "어쩔 수 없잖아. 난 누나를 지켜야 하니까." "그런 뜻이 아니야 바보야. 사람이 놀림을 받았으면 놀리는 사람 무 안하지 않게 좀 부끄러워하거나 그래야 하는 거 아냐?" 니콜라스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예안은 투덜거리며 아기를 안 아 올렸다. 농담도 이해 못하는 어린애랑 무슨 재미로 같이 노냐.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어, 진시월?" 예안은 몹시 반가워했다. 니콜라스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왜 일찍 왔냐고? 아아, 나 좀 바빠서 말이야. 넌 잘 모르겠지만 내 가 짊어지고 있는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데. 우리집안 경제도 내가 다 책임지고 있고 하여튼 뭐 그렇게 난 많이 바쁜 몸이라구. 너처럼 한가하게 공부만 하면 모든 게 장땡인 건 아니란 말야." 항상 집안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새 친구를 사귄 게 그렇게나 기뻤던 것일까. 예안은 니콜라스가 불만스러워하는 것도 모른 채 통화하기 에 바빴다. "응? 내일 만나자고? 아아, 안 돼. 내일 모처럼 일요일이라 나 유빈 이한테 서비스해야 한단 말이야. 내가 뭣 때문에 정원이 딸린 집으 로 이사했는데? 이게 다 유빈일 위해서였다구. 유빈이가 누구냐구? 아, 그그 그건…." 아기에 대한 주제가 도마 위에 오르자 예안은 당황했다. 그녀가 적 당한 대답을 찾아 궁리하는 사이에 전화가 뚝 끊어졌다. 허탈한 표 정으로 액정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쳇, 하필이면 이럴 때 배터리가 다 떨어지냐. 알이 하나밖에 없어 서 좀 불안하긴 했는데…." "진시월인가 하는 그 수컷한테 유빈이에 대해서 말할 생각이야?" "으, 응?" 별거 아닌 질문인데도 예안은 당황했다. "으… 뭐, 이야기 흐름이 그렇게 되면 말해야겠지." 미혼모라는 걸 항상 자랑스럽게는 여기지 못하는 걸까. 예안은 마음 이 그저 복잡하기만 했다. 아기와 자신에 대해 언제나 떳떳하게 여 겼다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 기분은 도대체 무엇인지 몰랐다. 니콜라스는 그녀의 혼란을 눈치채고 빙긋 웃었다. "누나, 즐기고 있지?" "?" "즐기고 있잖아. 누나한테 접근하는 남자들 놀려주는 거 즐기고 있 잖아." 예안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무,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는 거야?" "아니었어? 내가 보기에 누나는 즐기는 듯 한데? 수컷들 마음을 홀 리게 해서 넘어오게 만든 다음에 유빈이를 보여줘서 절망하게 만들 의도 같은 거 없었어?" 예안은 속마음을 들킨 듯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그것을 감추기 위 해 일부러 화를 냈다. "헛소리하지 마!" "아니라고 할 수 있어? 정말로?" 빤히 물어오는 눈동자. 예안은 그것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 그야…."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었던 예안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 다. 정말 니콜라스의 말이 옳은지, 아니면 그 외의 다른 이유가 있 어서 대답을 할 수 없었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쿡. 누나도 역시 암컷이네. 그것도 굉장히 도도한 암컷." 니콜라스는 즐거워하며 베개를 끌어안고 일어났다. "수컷들을 유혹해서 괴롭히는 걸 즐기는 취미까지 있구 말이야. 하 여튼 대단해 누나도." "너…." 분했지만 반박할 거리가 없었던 예안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난 잠시 니르와 이야기 좀 하러 갈게. 좀 있다 내려올 거야." 뭐가 그리 즐거운지 키득키득 웃으며 올라가는 그의 뒷모습을 불만 스럽게 쫓던 예안은 뭔가가 옷을 잡아채는 걸 느꼈다. 돌아보니 아 기가 그 자그마한 손을 움직여 셔츠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녀는 대번에 기분이 풀어졌다. "유빈아. 성주 삼촌 참 나쁜 사람이다. 그치? 저렇게 엄마 놀리는 거 좋아하구." 아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 같았다. "엄마 말 알아듣는 거야? 아유, 이뻐라." 정말 알아듣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안은 기쁜 표정으로 아기의 뺨에 입술을 갖다 댔다. "어이구, 시원하다. 역시 여름에는 찬물로 샤워하는 게 딱이야." 욕실에서 정호가 나왔다. 그는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며 소파에 앉 았다. "아직 3월 달밖에 안 됐어 아빠. 초봄이라구." "그래도 날씨만큼은 영락없는 여름인데 뭐 어떠니? 온난화 때문에 해가 갈수록 계속 더워진다니까. 아빠가 어렸을 땐 이 정도는 아니 었는데 말이야." "그렇게 더운가? 난 잘 모르겠는데." "너야 워낙 특이하니까 그렇지. 유빈이나 이리 좀 줘 봐." 예안은 아기를 건네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특이하다는 말. 정 호는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겠지만 그녀는 몹시 신경 쓰였다. 따지 고 보면 이 세상에서 그녀보다 더 특이한 사람은 없다. "아이구 우리 유빈이 참 귀엽기도 하지. 어서 어서 쑥쑥 커야 될 텐 데 말이야." 정호는 함박웃음으로 아기를 얼렀다. 예안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 나 이층으로 향했다. 니콜라스가 뭐하나 볼 생각에서였다. 방문을 여는 순간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질적인 한기가 방안 에 가득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이게 에날도스인가 하는 건가?' 아직 해가 걸려 있는데도 방안은 어두웠다. 어지러운 파동을 그리는 기운이 빛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굉장하구나.' 언뜻 어디선가 이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은 기억이 났다. 바로 예전 에 미국에서 마주쳤던 제나르의 「델」과 똑같은 느낌이었다. '쟤 진짜 이름이 아마 엘리우스라고 했었지?' 예안은 다소 우울한 얼굴로 니콜라스를 주시했다. 그는 자신이 지켜 보고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너무 똑같아.' 방안 가득 차 있는 기운은 시트날타 인들의 그것과 아주 흡사했다.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해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바로 니콜라스가 엘리우스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 한참 후 니콜라스가 눈을 떴다. 거짓말처럼 빛이 사그라졌다. "어? 누나 언제 왔어?" 예안은 털썩 앉으며 말했다. "좀 전에 들어왔어. 넌 내가 온 것도 도통 모르고 있더라." "에, 그럼 내가 니르와 이야기한 거 다 들었어?" 니콜라스의 얼굴에 부끄러운 당황함이 떠올랐다. 예안은 그가 별 거 아닌 거 갖고 다 부끄러워한다 생각했다. "아니, 난 아무 말도 못 들었어. 네가 뭐라고 말을 해야지 듣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입 꼭 다물고 에날도스만 촥 휘날리고 있는데 내가 무슨 재주로 도청하냐?" "무슨 소리야? 난 바로 조금 전까지 누나에 대해서 니르에게 이야기 하고 있었…." 니콜라스는 실수했음을 느끼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예안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호오? 내 이야기하고 있었냐? 그래, 무슨 이야기인데? 내가 좋아서 죽겠는데 난 몰라준다 어쩐다 뭐 그런 식으로 투정이라도 부렸어?" "아, 아냐!" 그는 황급히 부정했다. 그러나 얼굴 가득 떠오른 홍조를 숨기진 못 했다. "에이. 거짓말하지 마. 넌 얼굴만 보면 확 티가 나거든? 아, 혹시 나한테 젖 한 번만 줘도 되냐고 칭얼댔다가 퇴짜 맞았다는 것까지 낱낱이 다 일러바친 건 아니지?" 가뜩이나 붉어진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예안은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 진짜 그런 이야기까지 다 했단 말이야? 나 같으면 쪽팔려서 그 런 이야기 절대 꺼내지도 못할 텐데, 너 참 대단하구나. 나한텐 네 전재산 어디다 썼는지조차 말 안 해주면서 그 사람한테는 비밀이 하 나도 없는 거야?" "아니야! 그런 말 안 했어!" "안 하긴 뭘 안 해? 네 얼굴에 다 써있는 걸? 아, 나 이거 너무 섭 섭해서 오늘 밤 못 자겠네. 나 좋다고 매달릴 땐 언제고 알고 보니 다른 여자랑 알콩달콩 재미있게 즐기고 있었다니." 예안은 일부러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니콜라스는 벌떡 일어나 빽 소리를 질렀다. "아니야! 아니라구! 난 그런 말 안 했어! 내가 좋아하는 건…." 예안은 짓궂게 되물었다. "좋아하는 건? 그게 뭔데?" "그, 그건…." 니콜라스는 말문이 막혔다. 예안은 장난스런 미소를 띠며 계속 추궁 했다. "말해 봐. 네가 좋아하는 게 누군데?" "그, 그게…."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구? 응?" "아, 알면서 뭘 물어!" "에이에이, 네가 말을 안 해주는데 내가 무슨 재주로 그걸 알아? 무 슨 독심술 같은 거 할 줄 아는 것도 아닌데." 예안이 장난으로 이러는 거 뻔히 알았지만 니콜라스는 어떻게 대응 해야 되는지 몰랐다.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던 그는 눈을 딱 감고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역시나 어린애다운 해결방법이었다. "누나야! 누나 좋아한다구! 이제 됐어!" "킥킥." 예안은 피식피식 웃으며 그의 작은 등을 껴안았다. 이 녀석이 좋다 고 하는 건 이상하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소리내어 그를 불러보았다. "니콜라스." "…응?" "나도 네가 좋아." "남자는 싫다며?" 삐진 건지 뾰로통한 말투였다. 놀림 받은 것 때문에 그러나. '이 녀석도 내 아이였음 참 좋겠다. 이참에 아예 그냥 양자로 확 들 일까?' 아무래도 나이 차이 때문에 그건 좀 그렇겠지? 예안은 그와 유빈이 친형제처럼 지내는 모습을 상상하고 쿡 웃고 말았다. 정말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남자는 싫은데 이상하게 너는 좋아.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꼭…." "…아이 같아서 좋다 이거야?" "뭐 그렇지." 니콜라스는 예안의 품에서 떨어졌다. 그는 어린애답지 않게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누나." 예안의 가슴에 머리를 살짝 기댄 그는 조그맣게 말했다. "언제는 나 보기도 싫으니까 꺼지라고 했으면서 그런 말하면 안 찔 려?" 예안은 조금 당황했다. 이 녀석, 왜 아픈 과거를 꺼내고 그래! "그, 그때는 진짜 네가 미웠었다구! 네가 한 번 내 입장 돼 봐! 내 아기한테 총 들이대고 있는데 어떤 미친 엄마가 '아이구 예뻐라'하 겠냐!" "쏠 생각 같은 건 없었어. 유빈이 녀석이 너무 미워서 나도 모르게 우발적으로 튀어나온 행동이었다구." "하여간 어쨌든!" 니콜라스는 어느새 예안의 무릎 위까지 올라왔다. 예안은 이대로 이 녀석 페이스에 말려도 되나 투덜거리면서도, 잠자코 그의 뺨을 쓰다 듬어주었다. "누나는 만약에 나랑 유빈이랑 위험에 처했는데 둘 중 하나만을 구 할 수 있다면 누굴 구할 거야?" 아이 같지 않게 무거운 음색이었다. 예안은 말문이 막혔다. "대답 안 해도 돼. 들으면 왠지 더 슬퍼질 것 같으니까." 니콜라스는 애처롭게 대답했다. 쓸쓸한 기분이 든 예안은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른 채 그의 머리칼을 쓸어주기만 했다. 그는 씩씩하게 얼굴을 폈다. "하지만 누나는 그런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만약 그런 상황에 처하면 내가 유빈일 구해줄 테니까. 설령 내가 죽더라도 말이야." "뭐?" 예안은 흠칫 놀랐다. 니콜라스는 미소지으며 덧붙였다. "유빈이가 죽으면 누나는 슬퍼할 거잖아. 난 누나가 우는 거 보고 싶지 않거든. 그러니까 만약 내가 죽는 일이 있더라도 유빈이는 꼭 구해줄게." 예안은 무거운 눈으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터지려는 울 음을 길고 짙은 속눈썹 사이에 감춘 그의 뺨은 슬픔에 젖어 창백하 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던 그녀는 결국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가슴이 벅차기만 했다. "그래그래, 고맙다. 고마워." 예안은 다정히 그를 껴안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니콜라스는 부르 르 떨리는 속눈썹을 닫으며 끝내 못한 한 마디를 속으로 중얼거렸 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신을 영원히 기억해달라는 말. 그 말을 하기가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61 회] 날 짜 2004-04-09 조회 / 추천 2933 / 34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하늘의 속박 춘식은 미칠 것만 같았다. 이 좋은 날씨에 왜 그러냐고? 아, 글쎄 이놈의 이병원 교수라는 인간이 도대체가 집에 붙어 있을 날이 있어 야 말이지. "으윽… 젠장, 젠장!" 춘식은 오늘도 힘없이 대문 앞에서 돌아서며 이를 갈았다. 직원들이 동정하는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 몇 번 허탕 칠 때만 해도 이 녀석들은 '바쁜데 왜 끌고 다녀요!'라는 식으로 불평을 터 트렸는데, 기특하게도 사장이라는 분이 하도 헛걸음을 치다 보니 이 제 가엾게 여겨주는 판이었던 것이다. "오늘은 뭐래요?" "부산에서 지금 세미나 참가 중이래." "과연 노벨상까지 받았던 서울대 교수, 대단하군요. 바쁩니다 바빠. 모 중소 기업 사장은 하도 할 짓이 없어서 허구헌날 모 교수 쫓아다 니다가 허탕치기 바쁜데 말이죠오." "자네 말 다 했어?" "왜 그러십니까? 저는 사장님이 그렇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모 중 소 기업 사장이 그렇다는 거지요." "끄응. 우리 회사는 중소기업이 아니야. 그리고 나는 사장이 아니라 회장이라고." "누가 뭐랍니까? 사장님이 아니라 모! 회! 사! 중소 기업 사장 말입 니다." 하도 허탕을 치다 보니 이제는 미안해서 그런 비꼼에도 달리 반박할 용기가 안 생겼다. 그저 이빨이 부서져라 이를 바드득 바드득 가는 게 춘식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젠장! 노벨상 받았으면 다야! 이 내가 엄청난 사업 프로젝트를 갖 고 이렇게 차바퀴가 닳도록 드나들고 있는데 도대체 왜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없는 거야!" "그냥 사장님 핸드폰 번호 남기고 연락을 기다리시는 게 어때요?" "그건 안 돼. 이 일은 무조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야 하는 거란 말 이야."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무언가 아주 대단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허탕은 허탕이었다. 이제 직원들이 춘식에게서 보상을 받아내야 할 시간이었다. "회는 이제 물립니다. 오늘은 그냥 노멀하게 일반 레스토랑으로 가 는 게 어때요?" "레스토랑? 끄응." 거의 매일 장정 셋을 데리고 다니다 보니 허탕 치는 횟수가 늘어날 수록 지갑도 점점 가벼워지고 있었다. 춘식은 생글생글 웃으며 메뉴 를 제안하는 직원을 얄밉게 노려보다가 손가락으로 X를 그렸다. "자네가 웃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라도 칼질은 절대 안 돼. 오늘도 변함 없이 회다!" "으윽! 회는 이제 물린단 말입니다!" "이 대리 님 말씀이 맞아요! 이제 그만 슬슬 레파토리 좀 바꿔요 사 장님!" "레스토랑으로 가자구요!" 직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애원함에도 불구하고, 춘식은 가차없이 말을 잘랐다. "내가 돈 내지 자네들이 돈 내나? 어쨌든 무조건 회야 회! 어서 차 출발시켜!" "쳇…." 운전을 맡은 성식이 불평하며 엑셀을 밟았다. 춘식은 자신을 야금야 금 벗겨먹는 부하 녀석들을 속으로 욕하며 눈을 감았다. '젠장할, 이 짓도 어디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으휴, 장정 세 녀석 들 매일 같이 멕이려니 돈이 장난 아니게 깨지잖아.' 나중에 이교수와 손을 잡게 되면, 그만큼 꼭 얻어먹으리라고 춘식은 이를 바드득 갈며 맹세했다. "근데 사장님.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열렬하게 이병원 교수 를 찾는 겁니까?" "내가 전부터 누누이 말했잖아. 아주 중요한 거라고. 아직 자네들한 테 말해줄 수 없어." "거참 디게 쫀쫀하게 구시네. 도대체 뭔 비밀이라고 저렇게 입을 봉 하시는 거야? 혹시 양자 컴 설계도라도 주워서 저러시는 거 아냐?" "콜록! 콜록!" 사례가 들린 춘식은 목을 움켜잡고 켁켁거렸다. 놀란 성식이 얼른 차를 세웠다. 옆에 앉은 직원이 황급히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야, 양자 컴 설계도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춘식은 불안한 표정으로 성식을 노려보았다. 성식은 한 손으로 운전 대를 잡은 채 머리를 북북 긁었다. "그냥 해본 소립니다. 이병원 교수는 양자 컴 쪽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사람이고, 또 우리 회사는 그쪽으로 뛰어들만한 회사는 아니잖 아요. 그러니 사장님이 어디서 양자 컴 설계도라도 주워서 그렇게 매달리는 게 아닐까 하고…." 성식은 지금 아예 소설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춘식이 마냥 웃을 수 만은 없는 것은, 그가 쓰고 있는 시나리오가 실제 상황에 딱딱 맞추 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점쟁이나 하지 우리 회사엔 뭐 하러 들어왔어?' 춘식은 그렇게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참았다. "그러고 보니 자네 토익 점수가 970점이라고 했지?" "아, 네." "그거 전부 다 찍은 거지? 자네 순수한 실력으로는 900은커녕 800도 못 넘었지?"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혹시나 했는데 역시 사실이었다. 춘식은 하마터면 펄쩍 뛸 뻔했다. "혹시 자네 학창 시절 별명이 찍기 도사 아니었나?" "와, 사장님 쪽집게시네요. 제가 학창 시절 때 찍기 도사로 엄청 날 렸죠.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봤다 하면 무조건 전교 5등 안에 들었 거든요. 실력은 전교에서 놀만한 수준이 영~ 아닌데 말이죠." 성식은 신이 나서 주저리주저리 자기자랑을 늘어놓았다. 춘식은 얼 굴을 찌푸렸다. "어쩐지 그럴 것 같았어. 이 세상에 객관식 시험이 존재하는 한 자 네는 노력하지 않아도 출세할 거야." "…그거 칭찬이십니까?" "에잉. 일단 출발이나 해. 나도 배고파 죽겠으니까. 이 교수를 찾는 이유는 나중에 협상이 잘 되면 자연히 알게 되니까 그때까지는 모른 척 해. 아직은 말해줄 수 없어." 성식은 멋쩍어하며 다시 엑셀을 밟았다. 춘식은 지금쯤 부산에 꼭꼭 숨어 있을 이 교수를 떠올리며 다시 이를 바드득 갈았다. '정말이지 미치겠구만. 디스크를 손에 넣은 게 언제인데 아직까지 일에 착수 못했으니.'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함부로 정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일이었 다. 어떻게 해서든 이 교수와 연락이 닿아야 일단락이 마무리 될 텐 데, 이 인간이 사람 말려 죽이기로 작정을 했는지 도대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춘식은 사람 환장한다는 말이 어떤 건지 근래 들어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자 정우와 현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가워하며 내달았다. "어서 와,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지 않았어?" "그다지 별로. 안녕하셨어요?" 아기를 안은 채 들어서던 예안은 수정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 뒤를 따라 니콜라스가 언제나 그렇듯 감흥 없는 얼굴로 들어섰다. "성주도 왔구나? 재미있게 잘 놀다 가." 정우가 기분 좋은 얼굴로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자 니콜라스의 눈 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맘에 들지 않다는 신호였지만 정우는 눈치채 지 못했다. "와, 유빈이 많이 컸네. 예전에 봤을 땐 손바닥만하더니, 이제 제법 무겁다? 체중 재어 봤어?" "3.5kg 정도 되요." "이런, 아직도 작구나. 갓난아기 정도밖에 안 되네." "뭐 차차 크겠죠. 전 걱정 안 해요." 수정은 아기를 안은 채 즐거워하다 마침 이층에서 내려온 준우를 보 고 손을 흔들었다. "준우야 예안이 왔어. 인사 안 하니?" "네?" 예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준우는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흠칫 놀랐 다. 예안은 그에게 덤덤히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준우 형."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던 준우는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는 억지 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왔어. 재미있게 잘 놀다 가. 나는 일이 좀 있어서 이만…." 준우는 말끝을 흐리며 다시 이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보아하니 예안 이 오늘 여기 오기로 되어 있는 걸 몰랐던 눈치였다. "준우 형 왜 저래요?" "전에 내가 말하지 않았니? 준우는 이제 지쳐서 완전히 손들고 기권 했어." "아, 그러고 보니 형이 말해준 것 기억난다." 정우의 설명에 예안은 그저 끄덕이기만 했다. 그저 그뿐이었다. 예 전 같았으면, 더 이상 준우에게는 상처를 줄 수 없게 된 것을 몹시 아쉬워했을 터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많이 달라졌다. 어린애의 치기 어린 보복 심리 따위는 이미 쓰레기통에 구겨 넣은 지 오래였다. 한 아이의 엄마로서 어엿한 어른이 된 지금, 언제까지 그런 시시콜콜한 낡은 감정에 얽매여 살 수는 없었다. "아저씨는 안 보이시네? 판사들은 일요일에도 많이 바쁜 거야?" "글쎄. 난 아버지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 친구를 만나러 가신 건지 아니면 밀린 일거리 때문에 출근하신 건지…." "현우 너는 모처럼 일요일인데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거야? 예전에 는 일요일만 되면 친구들이랑 논다 어쩐다 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 잖아." "그거 누나가 우리 집에 오기 전 이야기인데? 나 누나가 우리 집에 온 후로 일요일에는 밖에 나가본 역사가 거의 없어. 뭐 누나가 다시 우리집 나간 뒤로는 집에 별로 붙어있지 않았지만." 예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의 자신은 유진우가 아니라 서예안인 데 아직도 자주 잊어먹곤 한다. "일단 이층으로 올라가자." "응." 네 사람은 이층 거실로 올라갔다. 예안은 오랜만에 와보는 이 집안 을 새삼 신기한 듯 둘러보면서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누가 빼앗아 갈 새라 여전히 아기를 품에 꼭 안은 채였다. "내가 이 집 나간 지 반 년이 좀 넘지 않았어? 그런데도 여기는 여 전하다? 별로 변한 것도 없고 말이야." "네가 쓰던 방도 그대로 있어. 한 번 들어가 볼래?" "에? 아직까지 안 치웠어?" 나중에 네가 다시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정우는 목구멍까지 솟구친 그 말을 입안으로 삼켰다. "그냥 치울 시간도 없고 어차피 새식구가 더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내버려둬도 상관없을 듯 싶어서. 성주 너도 계속 서 있지 말고 앉지 그러니?" 불쾌함을 감춘 채 이리저리 훑어보던 니콜라스는 말없이 자리에 앉 았다. 정우와 현우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행동거지 만 보아도 예안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연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러고 보니 너네 이사했다고 들었어. 정말이야?" "어. 지금 있는 집은 아기 키우기에는 별로 안 좋아서 정원이 딸린 집을 새로 장만했어." "꽤나 비쌀 텐데." "돈이라면 걱정할 것 없어. 내가 이래 뵈도 가진 게 좀 되거든. 꽤 나 부자 동네로 이사했으니까 이제 더 이상 형네한테 꿀리거나 그러 진 않을 거야." 상냥한 어조였지만 보이지 않는 가시가 분명히 박혀 있었다. 현우는 몹시 무안해졌다. "꿀리다니? 우리가 언제 누나를 무시하거나 그런 적 있는 것도 아니 잖아?" "글쎄, 그건 모르지. 혹시나 무의식적으로 그랬을 수도." "지금 빈정거리는 거야?" "서얼마. 그냥 농담 삼아 해본 소리야. 신경 쓰지 마." 장난치는 것인가? 정우와 현우는 그녀의 진심을 알아차리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들에게 있어 그녀의 마음은 언제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럭비공보다 더 변덕스러운 것이었다. "누나, 아기 한 번 안아봐도 돼?" 느닷없는 현우의 부탁에 예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피식 웃으며 아기를 건넸다. "그래그래. 우리 예쁜 유빈이 한 번 안아보고 싶다면 얼마든지. 자 아, 조심해." "으, 응." 현우는 떨리는 손으로 아기를 받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아기를 관찰 하듯 내려다보았다.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아기와 눈이 마주쳤다. '귀엽네…에에?' 순간 아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황한 현우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아기는 우렁차게 울음을 터트렸다. 거실이 떠나갈 듯한 울음소리에 예안은 얼굴을 찌푸렸다. "넌 또 왜 아기를 울리고 그래? 예전에도 유빈이 엄청 싫어하더니, 그 버릇 아직도 못 고친 거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현우는 어쩔 줄 몰랐다. 그냥 시선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 지 멋대 로 울어 젖히는 걸 어쩌란 말인가. "이래 내!" 예안은 아기를 얼른 빼앗았다. 엄마 품에 돌아오자 아기는 언제 그 랬냐는 듯 울음을 그쳤다. "너 죽이려고 한 사람 알아보는 거야? 걱정 마 걱정 마. 엄마가 지 켜줄 테니까." 그 말이 현우에게 상처가 되는 것도 모른 채 예안은 아기를 얼렀다. 현우의 표정이 핼쑥하게 변했다.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 누나?" "응?" 현우는 약간 흥분한 어조로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게 도대체 언제적 일인데 아직도 그걸 기억하고 있어? 그때 우리 는 누나 인생을 생각해서 그렇게 하는 게 좋다고 권했을 뿐이잖아!" "누가 뭐래니? 왜 괜히 흥분하고 그래?" 전혀 관심 없다는 태도였다. 현우는 그녀에게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유리한 쪽은 결코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어쨌거나 지금 상황에서는 그때 우리가 백 번 잘못한 게 맞으니까 괜히 걸고넘어지거나 하지 마. 너 때문에 나까지 안 좋은 인상 살까 겁나니까." 머뭇거리던 정우가 기회를 봐서 그렇게 속삭였다. 현우는 못마땅한 나머지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알았다고 조그맣게 대답했다. '바보들.' 과거 그들과 예안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니콜라스 는 기분이 몹시 좋았다. 평범한 인간들과 그녀 사이에 어떠한 차이 가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 결코 그들에게 광명이 없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시험시즌인 거 아시죠? ...앞으로 극악연재모드로 접어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주간연재를 할지도.;;;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62 회] 날 짜 2004-04-09 조회 / 추천 2898 / 88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하늘의 속박 니콜라스는 정원으로 나왔다. 크고 작은 나무들 사이로 푸른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벌써 여름이 다 된 건가. 해가 물러간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덥네." 밤하늘에는 이미 무수한 별자리들이 매연과 오염에 밀려 자취를 감 춘 지 오래였다. 새카만 비단 곳곳에는 반짝이는 인공위성의 불빛만 새겨져 있었다. 니콜라스는 허망한 눈길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지금 까지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 보았다. '시트날타. 엘리우스.' 예안을 노리는 자들, 시트날타. 그들은 자신을 가리켜 엘리우스라고 했었다. '이게 에날도스라고?' 그는 작은 기합과 함께 오른손을 빠르게 내밀었다. 파란빛이 쏘아지 며 앞에 있던 조그만 돌멩이가 산산조각 났다. '이게?' 미지의 초능력 에날도스. 얼마 전 몽환의 세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 를 들은 이후 그는 이제 어느 정도 자신의 에날도스를 자유롭게 사 용할 수 있게 되었다. '잠금장치 같은 게 더 남아 있는 것 같긴 해. 확신할 순 없지만 난 100% 에날도스를 사용할 수 있는 건 분명 아니야.' 그가 사용한 기운은 제나르의 공명신수 「델」과의 혈전에서 느꼈던 것과 흡사했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 시트날타 그들이 말하는 대로 엘리우스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인가. 그는 무언가 아주 깊은 세뇌가 걸려 있 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다 의심스러웠다. "무슨 생각해?" 등뒤에서 예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접근을 알고 있었던 니 콜라스는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냥 이런 저런 생각. 오늘 밤 여기서 자고 갈 거야?" "아마도 그럴 것 같아." "누나는 저 사람들 싫어하지 않았어?" "예전엔 그랬지." "예전? 그렇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거야?" "글쎄. 모르겠네." 예안은 피식피식 웃으며 커다란 정원석에 걸터앉았다. 짧은 반바지 아래로 하얗게 뻗은 다리가 별빛을 반사하며 늘씬하게 빛났다. 무척이나 고혹적인 모습이었다. 니콜라스는 멍한 눈으로 그녀를 주 시했다. "분명 예전에는 싫어하긴 했어. 하지만 언제까지 그런 칠칠맞은 기 분을 끌고 갈 순 없잖아? 난 더 이상 철없는 어린애가 아니라 의젓 한 엄마이자 어른이라구." "어른. 어른이라." 자신과는 너무나도 먼 그 단어를 입안으로 곱씹으며, 니콜라스는 강 한 위화감에 흠뻑 심취했다. "너 아직 대답 안 했어." "뭘?" "무슨 생각하고 있었냐는 내 물음에 대답 안 했다구." "아." 니콜라스는 씁쓸히 웃으며 예안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응석을 부리듯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그는 살짝 눈을 감았다. "그냥… 나는 과연 누구인가 뭐 그런 생각하고 있었어." 예안은 놀리는 말투로 짓궂게 물었다. "와우, 드디어 질풍노도의 시기가 시작된 거야? 이제 너도 어린애의 껍질을 벗고 어른으로 거듭나는 거니? 그래서, 그렇게 고찰해본 성 과가 좀 있었어?" "누나가 글쎄라고 했으니 나도 글쎄야." "에이에이. 내가 아무리 좋아도 그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따라하면 못 써." 예안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어깨에 닿을 락말락하게 긴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가며 하얀 뺨이 드러났다. 아기 처럼 고운 순수함을 간직한 얼굴이었다. 니콜라스는 무겁게 말했다. "기억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아." "…."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해. 누나를 쫓고 있다는 그 적, 시트 날타라는 녀석들과 내가 무언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 말이야." "엘리우스를 말하는 거니?" 니콜라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뜬 그는 예안의 녹색 눈 동자를 똑바로 주시했다. "내가 정말 엘리우스인지 아니면 우연히도 그 녀석과 비슷한 힘을 지니고 있는 건지는 확신할 수 없어. 하지만…." 일 억 분의 일의 확률이라도 좋으니 부디 엘리우스가 아니기를 바라 는 마음. 예안은 그것을 십분 이해했다. "내가 그런 녀석들과 같은 편이라는 거, 나 인정하기 싫어. 그 녀석 들은 누나의 적이잖아?" 예안은 가슴이 뭉클했다. 왠지 그에게 고마운 기분이 들었다. "그럼 넌, 만약에 시트날타 녀석들이 내 적이 아니었으면 어땠을 것 같아?" "으, 응?" 니콜라스는 당황해서 머뭇거렸다. 아직 이런 기습을 받아칠 만한 연 륜은 쌓이지 않은 것인가. 예안은 쿡쿡 웃으며 그의 어깨를 가슴으 로 끌어당겼다. "너무 그렇게 고민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때가 되면 모든 게 다 해 결되겠지." "그거 너무 안일한 생각 아니야?" 니콜라스는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예안이 껴안아주는 게 좋은지 그녀의 품으로 자꾸만 파고들었다. 추운 겨울날 어미의 품을 파고드는 새끼 곰처럼. "사실 뭐 지금 당장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잖아? 막말로 말해서, 네 가 시트날타 녀석들이 싫다면 오히려 네 과거가 기억나지 않는 게 더 좋은 거 아니야?" "그건 그렇긴 해." "너무 고민할 것 없어. 정 뭐하면 너 내 아들해서 나랑 같이 살아 라. 어때? 좋지?" 니콜라스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아들?" "왜, 싫어?" "아니 싫다기보다는…." 그는 표정을 찡그린 채 고민했다. 가끔씩 그녀가 자신의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을 땐 있지만, 막상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이런 걸 가리켜 사람들은 실망이라고 하던가. "누나." "응?" "사실 나 얼마 전에 병원에서 지낼 때, 간호사 몰래 공원으로 나온 적이 한 번 있다?" 무거운 목소리였다. 예안은 그가 가만히 들어주기만을 원한다는 걸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 근데 낯설지가 않았어. 그 사람 앞에서 울 기도 참 많이 울었다? 근데 눈을 떠보니 없었어. 다시 보고 싶어." 다소 두서가 없는 말이었지만 처연한 기분만큼은 뼛속이 아리도록 시큰하게 전해져 왔다. 어느새 니콜라스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이상해.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어. 나… 바보 같지만 그때만큼은 그 사람이 나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했었어. 웃 기지?" "글쎄." 예안은 뭐라 대답하면 좋은지 몰랐다. 그 사람 얼굴을 보지 못했으 니 건너가자고 말하는 건 너무 성의 없는 다독임이 아닌가. "그 사람 잘생겼어?" "아마 그럴 거야." "남자야?" "어." "몇 살로 보이든?" "몰라. 열 여덟 정도로 보이기도 했고 이십 대로 보이기도 했고 삼 십 대로 보이기도 했어." 소년의 순수함과 더불어 세월을 초월한 연륜을 지닌 사람이라는 소 리인가. 예안은 언제고 그런 사람을 실제로 한 번 봤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 그 사람이 참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응." "네가 분명 무언가 소중한 걸 잃어버린 것 같다고 말했지?" "…응." "이상하잖아?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며? 근데 어떻게 그런 걸 안다는 거니?" 니콜라스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영혼으로 느낄 수 있는데, 그까짓 이유가 그렇게나 중요한 것인가. "나도 잘 몰라. 하지만 확실해." 나지막하지만 힘있는 음성. 결코 커다란 착각 따위에 사로잡혀 있는 소년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예안은 한숨을 쉬며 그의 머리칼을 쓸어 내렸다. "그렇게 믿고 싶은 거야? 네가 봤다는 그 사람이 너의 소중한 사람 이기를?" "…." "내 생각에는 말이야. 네가 처음으로 그런 사람을 봐서 당황하고 있 는 것 같아. 넌 청부업자 일을 하며 살았으니 지금까지 그런 경험 한 적이 없을 것 아냐?" 니콜라스는 침묵을 지켰다. 예안은 다시 말했다. "그냥 연락처라도 알아두지 그랬어? 너 같은 애가 매료될 정도라면 정말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나도 한 번 보고 싶다. 너랑 친하게 지냈어도 또 좋았을 텐데 말이야." 니콜라스는 한숨 섞인 후회를 조용히 삼켰다. 연락처. 왜 그것을 받 아두지 않았을까. "누나 말대로 받아둘 걸 그랬나 봐. 근데 어떡해. 나 이제 그 사람 다시 볼 수 없는데." 붉어진 눈시울에서 조용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거짓 눈물 따위가 아 니었다. 그는 위선의 울음을 만드는 법을 모른다. 예안은 마음이 아파 왔다. '이 녀석, 정말 울고 싶은 건가 보네. 아니 벌써 울고 있지 참?' 한없이 강할 것 같으면서도 너무나도 연약한 아이. 만지기만 해도 그대로 부서질 것 같은 마음을 지닌 아이. 어째서 나는 이 아이에게 그런 심한 상처를 준 것일까. 예안은 진심으로 그것을 후회했다. "나 기억 따위 영영 잊어도 좋아." "응?" "내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영영 되찾지 못해도 좋아." "…." "그것이 무엇인지 영영 알지 못해도 좋아." 예안은 무거운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그의 뺨에 맺힌 눈물이 보드 라운 슬픔을 비춰내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영영 그 사람을 다시 못 만나는 건 싫어. 그걸 상상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파 죽을 것 같애." 니콜라스는 어느덧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지 만 그의 그리움까지 달래주지는 못했다. 그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처 럼 느껴진 예안은 그저 꼬옥 끌어안아 주기만 했을 뿐,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예안의 품에서 한참을 울던 니콜라스는 이윽고 눈물을 그쳤다. 그녀 의 가슴에서 살짝 빠져나온 그는 힘없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근데 어째서 그 사람이 내 가장 소중한 사 람일 수 없는 걸까?" 처량하기 그지없는 음색이었다. 예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헤헤, 내가 생각해도 내가 너무 바보 같다. 소중한 걸 잃었다는 건 알면서 그게 사람인지 물건인지 동물인지도 모른다니 말이야. 그런 주제에 이런 생각이나 하고. 한심하지? 안 그래 누나?" 예안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네가 그 사람에게 그런 기분을 느 꼈다면 이제부터 그 사람이 네 가장 소중한 것이 될 수도 있잖아?" "그래?" "응. 아마 그럴 거야. 그나저나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우리 니콜 라스가 이렇게 홀딱 반해버린 거야? 이 몸을 능가하는 초절세 미소 녀라면 납득하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징그러운 남자라고 하니 대략 이해가 안 돼." 장난스런 말투에 니콜라스는 웃고 말았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었어." 아름다운 사람. 예안은 그게 어떤 뜻인지 이해했다. 그에게 있어 웅 장한 영혼을 지닌 사람은 모두 다 아름답게만 보인다. 그는 기지개를 켰다. "앞으로 다시 그 사람을 보는 건 힘들겠지만, 그래도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난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꼭꼭 붙잡아서, 꽁꽁 묶어서, 도 망치려 하면 다리를 부러뜨리고 팔을 잘라서라도 내 곁에 영영 머무 르게 할 거야." 아이답지 않은 섬뜩한 말투. 아니, 오히려 아이이기 때문에 이렇듯 잔인한 발상을 품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안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겼다. "근데 그랬다가는 그 사람이 놀라서 멀리 멀리 도망가겠다. 다시 만 나기도 전에 말이야." "상관없어." "널 엄청 미워할 텐데?" "상관없어. 내 곁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되니까." 단 한 번 가진 만남으로 이런 어린아이가 그런 독한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사람들이 추구하는 순수함의 맹점이라는 것을 과연 누가 알고 있을 것인가. 그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해. 난 이만 먼저 들어가 볼게, 누나." "그래, 잘 자. 네가 그 사람을 꼭 다시 만나기를 빌어줄게." 니콜라스가 들어간 후 혼자 남은 예안은 멍하니 밤하늘을 응시했다. "휴." 괜히 쓴웃음이 나왔다. 다시 그 사람을 만나면 팔을 자르고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자신의 곁에 머무르게 하겠다는 니콜라스의 다짐. 그것이 어린아이의 치기나 농담이 결코 아닌 것을 알고 있는데, 어 째서 그걸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가. '강철 심장이라도 된 거냐 유진우? 니콜라스는 지금 진심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데 너는 왜 안 놀라는 거야?' 스스로에 대해 자신이 없었다. 내가 아닌 것처럼 변해간다는 위화 감. 평소에는 자각하지 못한 그것은 혼자 있을 때면 잠복기를 마친 바이러스처럼 고개를 쳐들곤 했다. "유니콘. 너는 내가 왜 이런지 알아?" 답답한 나머지 그렇게 물었다. 사전설명과 서론이 생략된 뜬금 없는 물음이었지만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그건 신인류로서 점점 자각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아주 바람직한 것이죠.」 "너 평소에 내가 하는 짓거리 안 봤어? 맨날 유빈이랑 이것저것 놀 기 바쁘고 그러다가 이렇게 아주 가끔 한숨만 내쉬는 것뿐인데? 그 게 어째서 내가 신인류로 자각한다는 뜻이 되는 거야?"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걸 물으시는 거죠? 신인 류로서 깨어나고 있다는 건, '전 주인'의 흔적이 되살아나는 것이잖 습니까? 왜 그걸 기뻐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따지고 보면 그렇다. 유젤의 그림자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라면 분명 기뻐해도 좋은 것이다. 하지만 예안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러지 못했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휴우. 정말 모르겠다.' 예안은 도리질을 쳤다. 혼란의 찌꺼기는 조금도 털어지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길 끝에는 유젤과 어떤 식으로든 만날 수 있다는 기 대가 있는데, 어째서 그걸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것인가. '이유라도 알게 되면 속이 아주 시원할 텐데. 에휴휴.' 예안은 주저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 카만 밤하늘이 무척 무서웠지만 보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렇듯 밤하늘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 '참아! 참으라고!' 예안은 그렇게 외치며 외면하려는 눈동자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하 지만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머리 위에 펼쳐진 건 단지 오염 된 공기 때문에 별빛이 가려진 더럽 혀진 밤하늘에 불과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그것을 똑바 로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날 렸다. 그녀의 눈에서 서서히 초점이 사라졌다. 새카만 비단처럼 펼쳐진 광택 위에 희미한 형체가 조금씩 모습을 드 러냈다. 고귀한 은폐막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는 그것은, 오염 된 서 울의 밤하늘을 뚫고 예안의 눈동자까지 일순간에 당도했다. 찬란한 에덴 혹성의 실루엣이 그림자처럼 떠올랐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올렸어요. 그러니 추천 많이 눌러줘요. 코멘도 많이 달아줘요.[징징징] ps : 제 기억력을 너무 믿지 마세요. 자주 안 달아주심 저는 여러 분들을 잊어버린다구요.ㅠㅠ[이러면서 은근슬쩍 압박 넣는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63 회] 날 짜 2004-04-10 조회 / 추천 3058 / 56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하늘의 속박 맹세코 처음이었다. 에덴을 이렇게 올려다보는 것은. 겁이 났었다. 단지 에덴을 바라보는 것. 그 하나만으로 자신의 운명이 멈출 수 없 는 폭주를 시작할까봐. 그것이 너무나 두려워 그동안 감히 단 한 번 도 쳐다볼 수 없었다. 전신이 떨렸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날 붙잡지 마! 날 붙잡지 말란 말이야!' 하늘의 어둠이 절대 공포가 된다는 것.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 얼마 나 두려운 일인가. 평온한 휴식을 취해야 할 시간이 공포로 다가온 다는 것은 차라리 미치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것이다. 하지만 예안은 미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약해져야 할 이 유가 없었다. 강해져야만 했다. 유젤의 몸과 소중한 아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조금의 틈만 있어도 자신을 잠식하려 드는 「노블 네트워크」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나인 상태로 남아 있기 위해서라도. 그러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강해져야만 했다. 그녀는 지지 않고 에덴을 노려보았다. '날 속박하려 들지 마! 난 당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없어!' 예안은 마음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천사가 두 팔을 벌리며 하강하 듯, 노블 네트워크의 촉수가 달콤한 유혹을 뿌려왔다. 하지만 그녀 는 기를 쓰고 그것을 견뎌냈다. 여기서 질 순 없었다. 에덴의 위압 감에 패배하게 되면, 자신의 운명은 송두리째 그것에 지배당하게 되 므로. 거대한 혹성과 나약한 인간의 팽팽한 접전이 계속 이어졌다. "하악, 하악…." 마침내 예안은 거친 숨을 터트렸다. 팔뚝 가득 소름이 돋아 있었다. 그녀의 영혼은 그 누구보다 고귀했지만, 거대한 땅덩어리에 맞서기 에는 너무 보잘것없었다. 모든 것이 두려웠다. 단지 잠깐 동안 노려보는 것조차 이렇게 힘이 드는데, 과연 에덴이 던져주는 달콤한 유혹을 언제까지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지구. 자신의 모든 흔적이 남아 있는 이 지구. 여기에 머무를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이 없었다. "지지 않아. 난 절대 지지 않아." 예안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하늘을 노려보았다. 찬란히 빛나고 있 는 에덴. 아무도 볼 수 없는 그것. 그녀의 운명에 새겨진 낙인을 다 시 확인시켜주듯 그것은 끊임없이 빛나고 있었지만, 그녀는 절대 질 생각이 없었다. "유니콘. 넌 내가 이러는 게 바보 같아 보여?" 「뭘 말씀하시는 건가요? 에덴 혹성을 거부하시는 것 말입니까?」 예안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는 증거였다. 「유젤 님이 지구에 남든, 에덴 혹성으로 건너가시든 간에 그것은 유젤 님의 자유입니다. 제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죠. 하 지만 어떤 길을 선택하든 간에, 그것은 차후에 되돌아갈 수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되돌아갈 순 없어." 예안은 허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되돌아가지 못해. 한 번 거기로 건너가면 난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 오지 못할 거야."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이 변 했다는 걸 상기했을 때부터였다. 처음에는 단지 육체가 바뀌어서 성 격이 변한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영혼의 색 깔이 유젤의 것과 흡사하게 변해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겁을 냈다. 그리고 자신을 혐오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유젤과 완벽 하게 같아지는 걸 어째서 두려워한단 말인가. 변해 가는 걸 은연중에 두려워했다. 두려워하는 자신을 혐오했다. 그 두 가지 괴로움에 지쳐버린 자기 자신을 달래려고 하면, 어느새 에덴의 실루엣이 마음 속에 나타나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솔직히 난 말이야. 많이 무서워.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변하고 있는 것 같아." 「확실히 성격이 부드러워지긴 하셨더군요. 그것 때문에 남자들에게 그 몸을 빼앗길까봐 겁나는 겁니까?」 예안은 앤드류를 떠올리며 조용히 끄덕였다. 자신이 그를 받아들인 건 자신의 의지 때문이 아니라, 유젤의 몸에 각인된 「기억」때문이 었다. 이제 와서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수용의 손길. 그녀는 운명 과 시간이 허락한다면 앤드류를 만나기 전으로 모든 것을 다시 되돌 리고 싶었다. 유젤의 몸으로 살아가는 걸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유젤 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했다. 하지만 언제 부터인가 '강제로' 그녀의 마음 속에 커다란 자리를 차지해 버린 앤 드류. 그 남자 때문에 그녀의 모든 건 뿌리부터 흔들려 버렸다. 그 녀는 두려워했다. 언젠가 그에게 넋 놓고 유젤을 빼앗겨 버리는 끔 찍한 결과가 찾아올까 봐. 「약해지지 마십시오. 유젤 님을 노리고 접근하는 남자들에게 관대 해지셨다 해서 마음이 약해지신 건 아닙니다. 오히려 유젤 님의 의 지가 확고하게 변했기에 이제 접근하는 남자들을 뿌리치지 않을 정 도로 여유가 생기신 겁니다.」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 예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내가 예전에 남자들이 접근하면 기겁하고 뿌리쳤던 게, 예안 이를 지킬 자신이 없어서 그렇게 초반부터 겁을 냈다는 소리야?" 「그렇습니다. 이제는 많이 강해지셨으니 더 이상 그렇게 과민반응 을 보일 필요가 없어진 거지요.」 "그렇게 말해주니 힘이 나네. 고맙다 유니콘." 문득 맥의 탄생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맥은 유젤 을 보호하는 게 탄생 목적이었다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렇다고 보 기에 맥은 지나치게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유니콘. 네 탄생 목적이 뭔지 나한테 말해줄 수 있냐?"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저는 당신을 보호하고 또 행복하게 해 드리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요. 당신이 행복해지는 게 바로 저를 만 든 사람의 마지막 소원이었습니다.」 "오리지널 유젤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어?" 궁금했다. 오리지널 유젤이 지금 어디에 있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다. 그러나 궁금해한다는 것조차 바로 거짓이었다. 「직접 확인해보시면 되지 않습니까? 노블 네트워크는 당신에게 항 상 열려 있습니다.」 노블 네트워크. 에덴인에게만 허락된 고귀한 무형의 의사소통로. 하 지만 예안은 그것의 존재를 알면서도 선뜻 접속해볼 엄두를 내지 못 했다. 단 한 번 자신의 마음을 개방하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 '유진 우'로서 사고할 수 없고 살아갈 수 없고 죽을 수조차 없다는 걸 알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니콘. 난 말이야. 절대로 거기에 가지 않을 거야. 설령 지구가 멸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지구인으로써 지구에서 죽을 거야. 절대로 거기에는 가지 않아." 예안의 목소리는 무척 떨렸다. 그녀는 맥에게 말하고 있는 게 아니 라 자기 자신의 다짐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곳에 내 모든 게 있어. 혜인이, 엄마, 아빠, 그리고 밉긴 해도 친척들. 내 친구들도 있고, 원수도 있어. 날 좋아해 주는 사람도 있 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 내가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 그래서 지구가 재밌고 소중한 거야. 난 지구를 절대 떠날 수 없어." 「유젤 님이 살아 계신 동안에 지구가 멸망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에덴인들도 유젤 님이 스스로 찾아오기 전에는 강제로 끌고 가지 않 을 테구요. 그들은 단지 유젤 님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거죠?」 "몰라서 묻니?" 에안은 한껏 비웃음을 지었다. "날 속일 생각 같은 건 하지 마. 네 기준, 아니 오리지널 유젤의 기 준으로 봤을 때 내가 행복해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내가 모를 줄 알아?" 맥은 대답하지 않았다. 예안은 한껏 차가운 어조로 덧붙였다. "넌 결국 날 거기로 데려가고 싶어하는 거잖아.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어?" 「아닙니다.」 "거짓말 하지 마." 「아닙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제가 거짓말을 한다 생각하시면 언 제든지 '기억'을 읽어보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 기억 속에 모든 진 실이 다 들어 있습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오리지널 유젤의 기억을 꺼낸다는 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예안은 잘 안다. 그녀는 언제든지 그것을 꺼내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맥이 유도한 대로 모든 것이 흘러 간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런 식으로 날 다루려 하지 마."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 "거짓말 하지 말라니까!" 예안은 맥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오리지널 유젤의 기억 속에 있는 행 복은, 바로 인간들이 없는 낙원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영 원히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만든 인공지능이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게 결국은 뻔하지 않은가. "난 널 믿어. 하지만 조금 전 그 말은 믿지 않아. 몇 가지 확실하게 말해둘게. 쓸데없는 생각 갖지 마. 쓸데없는 짓도 꾸미지 마. 그냥 너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게 내버려두고, 그것만 제대로 도와주 면 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왔습니다.」 거짓인지 진실인지 구분할 수 없는 건조한 기계음. 인공지능의 회로 속을 꿰뚫어보고 싶다는 듯 원격장치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예안은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거기는 어때? 아름다워?" 「왜요, 흥미가 있으신가요?」 예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왜 그런 걸 물었는지 몰랐다. 「아름답습니다. 정말 아름답지요. 산업 혁명 전의 지구를 그대로 복제해놓은 모습이지요. 그곳에는 오염도 없고 미움도 없고 불행도 없습니다. 또한 인간 역시 거의 없습니다.」 "거의 없다고? 아예 없다는 게 아니란 소리야?" 「조물주 프로젝트가 완성되고 난 후 아담을 따르는 몇몇 사도인들 이 에덴으로 이주했지요. 그래봐야 전체 인구수가 열 명도 채 되지 않습니다.」 "참… 아름다운 곳이겠구나." 맑은 물이 흐르고 시원한 바람이 불고 깨끗한 비가 내리며 온갖 매 연 물질이 없는 곳. 그런 낙원에서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인간들이 오손도손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과연 궁극의 행복인가. 아니면 다 시없는 불행인가. '몰라. 생각하지 말자. 나에겐 나대로의 삶의 방식이 있잖아.' 예안은 쓸데없는 생각을 쫓기 위해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원한다 면 낙원의 세계에 언제든지 갈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유혹이었다. 뿌 리치기 힘들 정도로 그것은 거세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단코 이곳을 떠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때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이브의 눈물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잡설에서 수 차례나 말했고, 또 공지까지 띄워놨는데 자꾸 물으시면 솔직히 좀 지칩니다.--; 여러분들은 한두 번 묻는 걸로 끝나겠지만, 저는 똑같은 질문을 수십 번이나 받았거든요.; 좋은 말도 자꾸 들으면 안 좋은 법이라구요.ㅠㅠ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64 회] 날 짜 2004-04-16 조회 / 추천 2914 / 55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하늘의 속박 예안은 뒤로 고개를 돌렸다. 찬바람을 맞으며 정우가 서 있었다. "쓸쓸해 보이네. 가을도 아닌데 무슨 여자애가 그렇게 처량하게 한 숨 내쉬고 있니?" 정우는 조심스럽게 예안의 옆에 앉았다. 그녀를 어려워하는 분위기 가 묻어나는 몸짓이었다. "쓸쓸? 내가 그렇게 보였어?" "어." 정우는 짤막하게 긍정한 뒤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어렵게 입을 열 었다. "혹시 진우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풋." 털썩 웃음이 나왔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좋아하는 사람을 떠올 리고 있던 건 맞지만, 예안이 그리워하던 건 세상 누구도 찾지 않는 유젤의 그림자였다. 그녀는 유젤의 귀여운 미소를 씁쓸히 상기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구나." 정우는 한숨을 토해냈다. 그는 말없이 예안의 옆자리를 턱으로 가리 켰다. 앉아도 되겠냐는 뜻이었다. 예안은 가벼운 끄덕임으로 허락했 다. "아직 어린 나이에 혼자 애 키우면서 살려니까 힘들지?" 옆에 앉자마자 그는 그렇게 물었다. 예안은 그가 무슨 의도로 묻는 지 몰랐다. "무슨 뜻이야?" "하고 싶은 게 아주 많을 거야. 학교도 다니고 싶고, 친구들하고 놀 러 다니고도 싶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많고, 그밖에 해보고 싶은 게 정말 많을 거야. 아기 때문에 포기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거야. 그렇지?" 예안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끄덕였다. 썩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 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왜 대학 안 간 거니?" "당연하잖아. 젖먹이 두고 내가 어떻게 마음 편히 학교 다녀?" 쌀쌀맞은 그 대답엔 보이지 않는 가시가 숨겨져 있었다. 정우는 그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거 알아? 나 너무 화가 난다는 것." 그의 목소리는 질투로 가득했다. 예안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주 시했다. "화가 나. 진우 때문에 네 인생이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 그 녀석 때문에 네 주변으로 내가 들어갈 수 없다는 게 너무 화가 나.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어." 정우가 남자였던 자신을 질투하고 있었다. 아무도 겪어보지 못한 아 이러니한 상황에 예안은 강한 쾌감을 느꼈다. 하마터면 커다랗게 웃 을 뻔했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참았다. 좀더 그를 놀려주고 싶었 다. "형. 그거 알아? 진우는 굉장히 뜨거운 애였어. 특히 밤에 말이야." 정우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예안은 속으로 키득키득 웃으 며 계속 거짓말을 이어나갔다. "진우는 힘이 너무 좋아서 말이야. 어쩌다가 같이 자는 날이면 나 그 날 자는 거 완전히 포기해야 했어. 내가 자도록 가만히 내버려두 질 않았거든. 하여튼 힘이 장난 아니야 정말. 가끔씩 다른 남자들도 그렇게 힘이 좋은가, 하고 궁금증이 들 때가 많아." 쇠가마도 녹일 듯한 혈기가 정우의 얼굴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손가 락을 살짝 대기만 해도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예안은 필사적으로 웃음기를 감추며 시치미를 뚝 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참 그리워. 버닝 나이트 해본 지도 디게 오래 돼서 그런지 밤이면 밤마다 참 쓸쓸해. 이 청춘을 불사를 날이 없으니 답답해 미치겠는 거 있지." 예안의 거짓말을 그대로 믿어 버린 정우는 부글부글 끓는 질투를 필 사적으로 억눌렀다. '왜 이래 유정우? 어차피 예안이가 진우랑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는 건 알고 있었잖아?' 자신이 너무 비참했다.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에 각인된 그림자가, 항상 보잘것없다 여긴 사촌동생의 것이라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무슨 수로 그 각인을 지워버려야 할지 몰라 더욱 안타깝기 그지없었 다. 정우는 억지로 미소지었다. "전혀 의외다. 그런 말은 혜민이 같은 애나 막 하는 건 줄 알았는데 말이야. 이거 너에 대한 생각을 상당히 수정해야겠는걸?" "나에 대한 생각? 지금까진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정리를 마친 그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아주 예쁘고 아름답고… 강한 아이.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않아도 혼자 일어서는 강한 아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혼자 어린 나이에 애 낳을 결심까지 할 정도로 씩씩한 아이." 조용한 그의 음성 끝에 보이지 않는 울음이 조금씩 맺히고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숙연한 분위기였다. 예안은 차마 그를 똑바로 바 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진심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아 직도 옛 과거를 가지고 그를 놀리고 있었다. 그게 몹시 창피했다. "힘들어도 남에게 손 내밀기 싫어하는 아이. 웃으면서도 좋아하던 사람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아이. 그게 너무 가여워서 보살펴 주고 싶은 아이." 정우는 일단 그렇게 끝을 맺은 뒤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다시 말했 다. "난 널 돌봐주고 싶어. 진심이야." 무거운 분위기가 어둠 아래 깔렸다. 귓가를 스치는 찬바람이 삭막한 유혹을 속삭이고 있었다.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예안은 비로소 시선 을 들었다. 그녀는 정우를 똑바로 주시한 채 또박또박 힘주어 대답 했다. "틀렸어." 정우는 말없이 예안을 주시했다. 그녀는 시큰둥한 얼굴로 기지개를 켰다. "난 아이가 아니야. 난 한 아이의 엄마라구. 현우나 준우 형, 그리 고 정우 형보다도 더 어른이야. 난 더 이상 아이가 아니야." "아아, 그렇지. 넌 더 이상 아이가 아니지 참." 정우는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쓰디쓴 그의 미소 위로 반짝 이는 별빛이 내려앉았다. 비참한 본심을 억누르지 못해 괴로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예안보다 앞서고 있다 여겼다. 그 녀가 자신을 뒤따라올 수 있도록 그 자리에 잠깐 머물러 있으면 모 든 게 잘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나 빨리 자신을 앞 서 버렸다. 그녀와의 격차는 이제 너무나 크게 벌어져 있었다. 그 모든 게 다 아기 때문이었다. 은연중에 항시 무시해왔던 사촌동생의 그림자. "너 참 많이 변했어. 유빈이가 태어난 뒤로 말야." "어떻게?" "이제 더 이상 우리를 미워하지 않잖아. 얼마 전까지는 우리가 진우 의 모든 걸 빼앗았다는 이유로 우리를 엄청 싫어하지 않았니?" 예안은 정우가 지금 말하고 있는 자신의 예전 모습에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런 적이 있었나, 하고 스스로에게 반문할 정도로 낯설기 만 했다. "솔직히 그때 나 좀 기막혔어. 뭐랄까… 어린애가 말도 안 되는 논 리 늘어놓으며 싫다, 싫다 우기는 걸 보는 것 같았거든." 정우는 예안이 기분 나빠하진 않을까 염려했다. 그러나 걱정과는 달 리 그녀는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마음 상한 기색은 없었다. "정답이네." 예안은 시원스럽게 인정했다. 정우는 당당한 그녀의 모습이 심히 낯 설게만 느껴졌다. "맞아. 그때의 난 너무 유치하고 치졸했어. 형네한테 그런 어이없는 방식으로 복수하려 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너무 창피해. 어떻게 사귀는 척 하다가 뻥 차버리는 걸로 복수가 된다 생각할 수 있냐?" 무슨 뜻일까. 정우는 숨이 막혀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적어도 복수를 하고 싶으면 돈 같은 걸 동원해서 집 안을 폭삭 망하게 하든가 그래야지. 왜, 드라마 같은 것에서도 그런 거 많이 나오잖아? 여자가 돈 많은 회장을 꼬셔서 정부가 된 다음에 자기 원수들 철저히 파멸시키는 내용 같은 것." 예안은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미소 뒤에 자리잡은 무거운 색깔을 언뜻 확인한 정우는 차마 웃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지금 그녀가 장난을 치고 있는지 진 심으로 그러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둘 중 어느 하나인지 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장난이었어'라고 웃으며 말해준다면 마음 편하게 넘어가야 할 텐데, 그러기에는 이미 지나친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농담이야 농담. 사람이 왜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래? 내 말투하고 표정 같은 거 보면 농담이라는 거 대번에 티 안 나?" 예안은 장난에 모든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하지만 허무한 그 리듬 이 멎은 뒤에 따라온 고요함이 두려워, 정우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 다. "근데 밤이 너무 늦은 것 같아. 이만 들어가자. 아무리 난 학교 안 다닌다지만 형은 다르잖아?" "내일은 일요일이야." "아, 그랬어? 몰랐네. 난 거의 매일매일 노는데 바빠서 날짜 감각이 조금 없거든." 예안은 발딱 일어나 기지개를 쭉 편 뒤 정원을 가로질러 갔다. 묵묵 히 그녀의 뒷모습을 주시하던 정우는 한숨과 함께 일어났다. 현관문 손잡이를 잡던 예안이 흠칫했다. 그녀는 천천히 등을 돌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수한 반짝임이 신기루처럼 새겨진 어두운 우주는 신비로운 기색을 가득 품고 있었다. 그 안에 자리잡은 에덴 혹성의 실루엣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두고 봐. 난 절대 지지 않아.' 예안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맹세하듯 중얼거렸다. 정우가 왜 그러 냐고 물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받아넘겼다. "그러고 보니 이제 너 고등학생이잖아?" "응응." "이거 입학 선물이라도 내가 하나 해줘야 하는 거 아냐?" "정말 해줄 거야?" 현우의 눈동자는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예안은 손 가락을 딱 소리나게 퉁겼다. "건담 V1 프라모델은 어때?" 현우는 크게 실망했다. 그는 그따위 프라모델 보다는 무언가 조금 더 대단하거나 커다란 의미를 지닌 선물을 원했다. "내가 무슨 어린애야? 이 나이 돼서 그딴 거나 조립하면서 놀고 있 게?"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건담 V1 시리즈라 하면 서른, 마흔 넘은 매니아들이 얼마나 열광하고 맥을 매는지 알아? 멋들어지게 뻗은 그 유려하고 수려한 직선미! 파핑과 하이라이즈는 물론이요, 탭 댄스와 카포에라까지 다 소화해낼 수 있는 그 정교한 시스템!" "하지만 프라모델에는 그게 없지." "네가 건담 애니메이션을 단 한 번도 안 봐서 프라모델이 유치하다 느니 어쩌니 하는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공부에만 매달리지 말고 그런 고상한 취미 생활도 좀 즐겨 보란 말이야! 신 기동전기 건담 V1에서 최신기종모빌슈트 알키윈이 CX-1 콜로니를 단 한 방의 라이플로 보내버린 그 멋진 순간을 네가 알기나 해!" "하지만 프라모델은 그걸 못하지." "너 이 자식! 알키윈이 지구연합군 최대규모의 최강전함 '다크스톰' 을 단독으로 격추시킨 모습을 봤다면 절대로 건담이 시시하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말은 못할 거야!" "하지만 프라모델은 종이배도 못 격침시키잖아." 무려 세 번에 걸친 태클을 받은 예안은 하마터면 게거품을 물고 쓰 러질 뻔했다. 자신이 그렇게나 애지중지하는 프라모델의 희소성과 무한한 가치를 몰라주는 현우 녀석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너너너, 입학 선물 같은 거 받을 생각 꿈에서라도 하지 마. 그랬다 가는 나한테 죽을 줄 알아. 알았어?" 예안은 잔뜩 삐진 채 일어났다. 그러자 현우는 얼른 그녀의 손을 잡 아 다시 앉혔다. "왜 또? 프라모델 같은 건 시시해서 선물로 받을 가치도 없다며?" 현우는 쑥스럽게 웃으며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앞으로 내밀었다. 어린애가 엄마한테 용돈 달라고 비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시시한 거 말고 나랑 같이 하루 데이트, 어때?" 예안의 눈이 당황함으로 커졌다. 그러나 화가 난 기색은 없었다. 현 우는 이때다 싶어 계속 졸랐다. "딱 한 번만! 응? 누나랑 딱 한 번만 데이트 해보고 싶어. 이상한 짓 같은 거 절대 안 할 테니까 제발, 응?" "전에 했었잖아?" "그건 누나가 불순한 의도로 해준 거지, 순수한 의도에서 나랑 같이 즐긴 게 아니었잖아. 난 이번에 정말 순수하고 재밌게 누나랑 같이 하루를 보내고 싶어."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내쉬던 예안은 현우의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 예쁘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가 다소 차가운 빛을 발했다.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나? 네가 나 때문에 상처받는 건 오히려 날 기분 좋게 한다고. 그거 농담으로 한 말 아니야." 현우의 얼굴이 돌연 굳었다. 그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저기 누나…." "듣기만 해." 현우는 찔끔했다. 예안이 무슨 소리를 할 것인지 몹시 두려웠다. 당 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두 번 다시 그녀 앞에 당당히 설 기회가 없을 것 같아 필사적으로 참아 냈다. "네가 자꾸 그런 식으로 내가 좋다 어쩐다 식으로 나오면 나도 날 감당 못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한 명 뿐이야. 그 걸 방해하려 드는 사람은 누구도 내가 용서하지 않아." 현우는 잔뜩 기가 죽은 채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가기에 는 너무 억울했던 그는 용기를 쥐어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나랑 같이 백화점 쇼핑이나 가자. 내가 갖고 싶은 선물 직접 고를 테니까 누나가 사주는 건 어때?" "그게 데이트잖아. 안 돼."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 이 정도도 안 된다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 도 난 건담 프라모델과는 절대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 해 주라 응? 그래도 평생 한 번 밖에 없는 내 고등학교 입학식이잖아." "근데 입학식 지난 지 조금 됐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선물은 뒤늦게라도 줄 수 있는 거지." 묵묵히 듣고 있던 예안은 쓴 한숨을 내뱉었다. 조금 전처럼 형식적 으로 화라도 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 덕였다. "알았어." "정말이지? 약속한 거다?" 현우는 뛸 듯이 기뻐했다. 예안은 착잡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방을 나왔다. 문에 등을 기대고 선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피식피식 웃어버렸다. 자신이 너무 바보 같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나… 너무 약해지는 거 아니야? 이러다가 앤드류뿐만 아니라 아무 한테 예안이 빼앗겨 버리는 거 아냐?' 오리지널 유젤의 기억을 열쇠 삼아 예안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뿌리 를 내린 앤드류.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한 마음의 성벽은 이미 그 형 체를 찾아볼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최근 들어 그녀는 그것을 절감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손 써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약해지지 않아. 난 절대 약해지지 않아.' 예안은 현재 자신이 지닌 육체와 배경이 이성에게 더 없이 매력적인 요소라는 걸 자각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가는 앤드류 -반드시 그 가 아니라 해도- 에게 유젤을 빼앗겨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무너져 버린 마음의 장벽 을 조만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하늘의 속박 챕터 끝입니다. 이제 다음 챕터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 ... .... ..... 164화에 와서 한다는 소리가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입니다'라니. 저 자신이 참 한심하군요.[한숨] 이야기가 잘 기억나지 않는 분들은 중반부, 그러니까 137화부터 다시 한 번 읽어보시면 될 겁니다. 시험기간이라 연재가 늦군요.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건.; 그리고 오늘 조회수 40만 힛 했습니다.>_<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65 회] 날 짜 2004-04-18 조회 / 추천 3113 / 36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태동 오랜 전통과 명문집안들의 단골집으로 잘 알려진 유명 한식집 앞에 검은 고급차들이 줄을 지어 섰다. 이어서 양복 차림의 경호원들이 내려 주변을 샅샅이 감시하는 가운데 김영환 대통령이 차에서 내렸 다. 제일 깊숙한 방에 들어선 대통령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이윽고 야당 총재 김두오 의원이 들어섰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호기 있게 손을 들어올리며 영환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총통 각하." 느닷없이 튀어나온 공격이었지만 영환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 히려 오랜만에 젊은 마음으로 돌아간 듯해 감회가 새로웠다. '이 짓도 참 오랜만이군.' 속으로 쓴웃음을 짓던 그는 똑바로 두오를 주시했다. 곧바로 반격이 튀어나갔다. "천황 폐하께서 그리 불러 주시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경호원들은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나름대로 재밌으라고 연출한 농 담이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두오와 영환은 몹시 서운했다. "재미있습니까 각하?" "의원님은 재미있나요?"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추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경호원들은 아무렇지도 않군요. 난로라도 하나 주지 않으면 썰렁해 서 얼어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괜한 기우였나 봅니다." "이 친구들은 많이 단련되어 있어서 그런 거죠." "그런가요 총통 각하? 근데 왜 저는 몰랐던 거죠?" "그거야 당연히 천황 폐하는 아직 이른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알츠하 이머 초기 증세를 보이기 때문인 거죠. 이미 우리가 이 짓하고 논 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쳇. 이러니 저러니 해도 늙으면 죽어야 하는 건가 봅니다." 영환은 자신 있게 태클을 걸었다. "걱정하지 마시구려. 그대는 본인보다는 한창 젊으니 말이오." "세 달 먼저 태어난 거 가지고 지금 자랑하는 거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소. 난 지극히 객관적인 사실만을 말할 뿐인데 왜 그렇게 과민 반응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 둘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썰렁한 농담만을 주거니 받거나 했다. 이미 이 짓거리에 익숙해진 경호원들은 그들이 노망을 떨든 말든 간 에 상관 않고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원래 장난이라는 것도 주변에서 맞장구를 쳐줘야 재밌는 법이다. 머 쓱해진 영환은 손을 들어 휙휙 내저었다. 나가라는 뜻을 알아차린 경호원들은 경례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비로소 영환은 표정을 진지하게 다잡았다. 천황 폐하 어쩌구저쩌구 하며 지기를 갈구던 조금 전과는 사뭇 달랐다. "그나저나 자네, 유젤 박사를 직접 봤다고 들었는데." "맞아. 양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연기를 하려고 하니 좀 도와달라고 했었지. 알고 보니 유젤 박사는 집안사가 여러 가지로 많이 꼬였더 군. 특별히 나쁜 건 없지만 제3자 입장에서는 뭔가 뭔지 헷갈릴 지 경이야." "중현이가 유젤 박사에게 꽤나 관심이 많다고 들었어." "그런 것 같아." "하지만 유젤 박사는 두 살 난 아이가 있지 않나." 두오는 걸출하게 술을 쭉 마신 뒤 술잔을 탕!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그런 건 상관없어. 자네는 여태껏 내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 는 남자인 줄 알았나?" "흐음. 하지만 아무리 우리 부모님 때하고는 가치관이 많이 변했다 지만 자네 같은 명문 집안에서 미혼모를 며느리로 맞아들이는 건 쉽 지 않지. 게다가 중현이는 아직 총각이잖아. 제수씨가 찬성하지 않 을 텐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문제는, 중현이 녀석 마음이 너무 나약하 다는 데 있지. 그리고 제수씨가 아니라 형수님이라고 부르게." 영환은 의아했다. 그가 알기로 중현은 누구보다도 굳은 심지를 지닌 건실한 청년이었다. "무슨 소리야? 중현이가 마음이 약하다니?" "에잉, 사내 녀석을 영 잘못 키웠어. 도대체 그렇게 수줍음이 많아 서야 어디 미녀를 손에 넣을 수 있느냐 이 말이야. 자세한 건 물어 보지 않았지만 대충 유젤 박사 눈빛만 봐도 중현이 녀석이 지 마음 을 한 번도 어필 안 한 걸 알 수 있겠더군." 영환은 크게 놀랐다. 여태껏 실패라고는 몰랐던 그 엘리트 녀석에게 봄처녀같은 그런 수줍은 면모가 있었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게 정말인가?" "그렇다니까." 두오는 짜증스런 표정으로 끄덕였다. 그 둘은 어느새 자신들이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도 잊고 삼천포로 빠져들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군. 그 도도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엘리트 녀 석이 늦바람 난 수줍은 중년 남자처럼 꼬리를 내리고 어쩔 줄 몰라 하다니, 이거 완전히 해외 토픽감인데?" 두오는 못마땅한 나머지 얼굴을 구겼다. "늦바람 난 수줍은 중년 남자? 자네는 무슨 비유를 그따위로 하나?" "왜, 내 비유가 어때서? 이래 뵈도 대학 시절에는 문예창작강의를 들으며 언젠가 노벨상을 받아 세계 제일의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던 문학소년이었다구."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야오이 소설에 노벨상을 주진 않아." 영환은 표정을 구겼다. 두오의 독설에 가슴이 아팠기 때문이 아니 라, 새삼 대학 시절의 절망과 고뇌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과장된 제스처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으윽! 생각해보면 정말 억울하이, 친구! 세계제일의 야오이 소설가 가 되겠다는 내 꿈은 그때 교수님의 그 한 마디에 그만 좌절되고 말 았지! 야오이 소설은 노벨상을 받을 수 없다니!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작품의 질이 높고 낮음을 떠나서, 일단 대중에게 먹히지 않으니 어 쩔 수 없는 거 아닌가. 어떤 미친 출판사가 다른 나라 야오이 소설 을 번역해서 자국에 유통시킨단 말인가?" "그래도 억울해. 그때 나는 자네와 나를 모델로 삼아 아주 아주 멋 진 야오이 소설을 구상 중이었단 말일세! 이름하여, 붉은 은하수!" 한 나라의 대통령과 야당 총재답지 않게 장난스런 모습. 하지만 지 금 그 둘은 아주 진지했다. "붉은 은하수? 자네가 구상했다는 야오이 소설이면 대충 어떤 내용 일지 짐작이 가는군." "아니야, 아니야. 아마 자네는 상상도 못할 걸세. 왜냐하면 이 소설 은 그때까지 내가 추구했던 모든 스타일과 형식을 버리고 새로운 길 을 택한 소설이거든." "왠지 기대되는군. 어떤 내용인가?" "세 종류의 문화권으로 나뉘어진 인류와, 각각의 문명에서 한 명씩 의 영웅들이 전 우주의 운명과 구조를 밝히려 노력하는 가운데 아름 다운 갈등과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그려낸 이야기일세." 두오는 황당한(이라 쓰고 '감탄한'이라 읽는다) 나머지 입을 쩍 벌 렸다. "난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지.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한 여자를 놓고 두 남자가 벌이는 삼각 관계라 생각 하겠지만!"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오, 역시 자네는 대번에 알아차리는군." "자네의 동인남 경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소리를 할 거 야. 얼마 전에는 나보고 아직도 동인남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 느니 어쩌느니 했으면서, 정작 아직 자기가 한창 날리는 대학생인 줄 아나 보군." 그렇게 신랄하게 비난하면서도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건 도대체 어 떻게 변명하려고 그러시나. 영환은 듣는 둥 마는 둥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하여튼, 일반인이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내가 구상했던 소설은 SF 를 기반으로 펼쳐지는 두 남자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와, 그 둘을 아름다운 동인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게 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여 자의 이야기일세." "호오. 다크 트라이앵글이로군." "두 남자는 이념과 민족과 국경과 머나먼 우주권 문화의 경계를 넘 어 신에게조차 버림받은 사랑을 아름답게 이루려 하지만, 여자가 필 사적인 마수로 그 둘을 방해하려 한다는 너무나도 슬픈 사랑 이야기 지." 차가운 표정으로 술을 입에 대었다 땐 두오는 날카롭게 눈을 빛냈 다. 영환과 눈이 마주친 그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썼나?" 자네 노망이 들었군, 정신 병원에 가보지 그래? 라는 식의 말이 튀 어나오리라 예상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나이라는 건 아름 다운 예술을 추구하는 동인남들에게 있어 그들의 빛을 퇴색시키는 요소가 아니다. "미안하네 친구. 그 소설을 구상했던 당시, 국문학과 교수로부터 야 오이 소설은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 없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고 난 앓아 누웠다네. 그리고 그 뒤로 오랫동안 야오이에는 손을 대지 못 했지." "오랫동안?" 두오의 눈이 다시 한 번 빛났다. "영원히는 아니군. 그렇다면 지금은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린가?" 영환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훗훗. 현재 모 동인 사이트에서 연재하고 있다네. 조회수가 아주 높은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썩 괜찮은 분위기 속에서 호황을 누리고 있지. 나름대로 매니아층도 좀 생겼고 말일세." 두오는 서둘러 PDA를 꺼냈다. "거기가 어딘가?" "훗. 기밀을 위해서 그건 말해줄 수 없네 친구. 하지만 누구나 이름 을 들으면 단번에 알 수 있는 그런 사이트지. 이 정도까지 말하면 아직 '은퇴하지 않은' 자네는 충분히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하네만?" "아. 알 것 같으이 친구." 두오는 환한 표정을 지었다. 영환은 껄껄 웃었다. "기밀 유지를 위해서 사이트 주소나 이름은 말해줄 수 없으니 이해 해주게." "이해하네 친구. 한나라의 대통령이 직무를 소홀히 한 채 동인 소설 을 연재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 얼마나 개망신인가. 난 자네를 충 분히 이해할 수 있네." "오늘 저녁에 집에 가거든 꼭 접속해보게." "알았네 친구." 잘 쓰지 않는 하게체를 써가며 반쯤 장난으로(과연 장난?)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문득 인기척을 느꼈다. 황급히 옆을 돌아 보니 예안이 문을 활짝 연 채 놀란 나머지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두 노동인(노인+동인)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유, 유젤 박사!" "아, 아니 들어왔으면 왜 노크를 하지 않고…." 두 사람은 서둘러 방석을 깐다 먼지를 턴다 근엄한 표정을 짓는다 체면을 유지하기 바빴다. 하지만 이미 이 나라 최고 자리에 앉아 있 는 사람들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알아버린 불쌍한 대한민국의 청소년 은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험, 험. 오랜만에 다시 보는구나." 얼이 빠진 예안을 거의 끌다시피 해 자리에 앉힌 영환은 멋쩍은 듯 헛기침을 연신 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예안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제가 지금 무슨 드라마나 몰래카메라 찍는 그런 곳에 잘못 온 것 아니죠?" 역시 다 들었군. 두오와 영환은 어쩔 줄을 몰랐다. "그, 그게 말이야. 우리 둘은 원래 죽마고우였던 터라 단 둘이 있을 때면은 이렇게 장난치고 놀아. 늘그막에 웬 주책이냐고 할 지 모르 지만 이런 농담이 꽤나 재미있는 거거든. 너도 우리 나이 되어 보면 알겠지만…." "제가 보기에 두 분은 장난이 아니었어요. 그건 아무리 봐도 진짜였 다구요." "허어, 유젤 박사. 장난이란 말이오 장난." 예안과 만난 경험이 거의 없는 두오는 서먹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 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장난이라고 하기에 두 분 표정은 너무 진지했다구요." 황급한 영환의 변명. "원래 장난은 진지하게 하는 게 더 재미있는 거야." 사색이 된 두오의 옹호. "젊은이들은 흔히 노인들이 장난 같은 건 안 할 거라 생각하지만 그 건 편견이오. 유젤 박사." 얼굴을 구기는 예안. "말도 안 돼요. 그게 장난이라니.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분이 붉은 은하수니 뭐니 하는 SF 야오이 쓰는 데 열중하고 있다니. 말도 안 돼 이건." 순진하기 그지없는 이 나라의 기둥이 어른에 대한 존경심을 상실하 기 직전이었다. 영환은 찔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담이라니까 농담. 설마하니 내가 이 나이 돼서 그런 걸 쓰겠니? 손가락이 늙어서 이제는 타자도 빠르게 못 친다구." "한 번 알아볼까요? 유니콘, 지금 당장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야 오이 사이트에서 붉은 은하수라는 소설이 있나 없나 검색해 봐." 느닷없이 예안이 손목시계형 원격장치에 대고 그렇게 말하자 두오와 영환은 흠칫 놀랐다. 설마하니 저런 초소형 컴퓨터를 항상 휴대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 못한 그들이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예안은 고개를 들었다. "…있다네요." "…." "…." "뒷세계 동인 사이트에서 첫 번째로 큰 「열린 동인」이라는 곳에서 '붉은 은하수'가 아주 폭발적인 조회수 아래 연재되고 있다는데요? 나틀리스라는 닉네임으로 올리고 계시는군요?" 저런 추상적인 요구에 즉각적으로 응해 순식간에 비공개 동인 사이 트의 특정 소설을 검색해낸 유니콘의 성능에 그들은 할 말을 잃었 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노동인(노인+동인)들만의 아름다운 비밀 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입을 열 수 없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영환이 서둘러 변명했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하지만 있다는데요?" "국정 일이 얼마나 바쁜데 내가 그따위 야오이 소설 쓰는데 시간을 투자한단 말이니? 게다가 이 할아버지는 타자도 빨리 못 친다고!" "하지만 있다는데요?" "그럴 리가 없잖아! 그냥 다만 이 친구와 내가 농담 삼아 한 말이 우연스럽게도 실제 있었던 일인 것 뿐이야!" 믿어줄까 말까 고개를 갸웃하던 예안은 씩 웃었다. "네. 알았어요. 믿을게요." 영환과 두오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렇게 믿어주면 참 고맙겠구나." 정말 아닌 척 시치미를 뚝 떼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들이 우 스웠지만 예안은 내색하지 않았다. '킥킥.' 예안이 속으로 웃음을 구겨 참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두오는 아주 인 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유젤 박사. 그래, 요새 일은 잘 되어 가고 있소? 아들놈한테서 이 야기 들으니 아주 바쁘다고 하던데." "아, 그다지 바쁘진 않아요. 그리고 유젤 박사라 부르지 마세요. 그 냥 이름 불러주시고 말도 편하게 해주세요. 할아버지한테서 그런 존 대 들으면 너무 부담스럽거든요." "허허, 아주 예의가 깍듯한 청소년이군. 좋아. 그렇게 하지." 예안은 조금 창피했다. 중학교 과학 교과정에 나오는 열역학 제1법 칙의 기초적인 개념이 뭔지도 까먹었는데 박사, 박사 소리를 들으면 온몸에서 알러지 반응이 일어나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래, 요새 일은 잘 되어가고 있니? 듣자하니 이런 저런 연구 개발 때문에 천문학적 자금이 소모된다고 하던데." "특별히 돈을 꺼낼 생각 같은 건 없어요. 설계도 같은 것도 아직 다 짜여지지 않았고…." "흐음." 영환은 입맛을 다셨다. 맥 같은 걸 혼자 제조할 정도로 엄청난 두뇌 를 지닌 과학자가 저렇게 긴 시간을 투자하면서까지 매달릴 정도라 면, 필경 엄청난 부가가치를 낳을 수 있는 물건일 것이다. 하지만 예안이 춘식에게 투자한 금액과 이번에 집 산답시고 꺼낸 돈 을 제외하고는, '연구비라는 명목'으로 돈을 지출한 적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는 땅을 치며 울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혹시 지금 하고 있는 연구가 어떤 것인지 대충이나마 이야기를 좀 들어볼 수 없니?" "네?" "아, 기밀 유출 같은 걸 염려하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유전 에 관한 것도 철저히 비밀 지키고 있는 나인데, 뭐 궁금증을 조금 충족시켜준다 해서 어때?" "그, 그게…." 기밀이고 자시고 나발이고 뭔가를 좀 알아야, 아니 뭘 좀 하고 있는 중이어야 말해주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예안은 울고 싶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계속 사기 쳐야 돼! 유니콘 바보! 왜 애초에 나에 게 이런 거짓말을 시켜 가지고!' 속으로 울상을 짓고 있던 예안은 반사적으로 원격 장치를 살폈다. 액정에 떠오른 글씨를 확인한 그녀는 안도했다. "맥3를 만들려구요." "???" 패닉에 빠진 영환과 두오. 예안은 황급히 덧붙였다. "아, 그러니까 지금 제가 쓰고 있는 맥이 세컨드 버젼이거든요? 이 번에 서드 버젼을 새로 만들려고 해요. 물론 전신을 다 만드는 건 아니고, 제가 세컨드 버젼에서 만족하지 못한 부분들을 뜯어고치는 정도에만 머무르겠지만, 그래도 맥이 확 달라질 거예요." "그거 흥미가 당기는 이야기군. 하지만 보통 그런 건 업그레이드라 고 하지 않나?" "업그레이드라고 하기에는 그 변화가 너무 광범위하니까요. 맥의 외 장과 내부 동력 기관을 이루고 있는 금속들을 전부 엘레스토늄보다 더 강한 금속으로 만들 예정이거든요." 한 마디로 지금의 강도를 뛰어넘는 초고강도의 신금속을 개발할 예 정에 있다는 소리인가. 영환은 바짝 구미가 동했다. "그렇다면 기한은 얼마나 걸릴 듯 해?"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맥 녀석이 이렇게 말했으니 지가 알아서 그 금속을 만들어 허물을 벗고 환골탈태를 하든지 말든지를 하겠지. 예안은 그렇게 속으로 중 얼거리며 슬슬 화제를 바꿨다. "뭐 하여튼 간에 근시일 내에 끝낼 예정이에요. 그런데 할아버지, 이번에 MIT가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와 합작해서 개발했다는 양자 컴 퓨터에 대한 이야기는 들으셨어요?" "응?" 영환은 의아했다. 물론 그런 보고를 받은 적은 있지만 개발이 실패 로 끝났다는 추가 설명에 별로 신경 쓰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네가 중현이한테 그런 이야기를 한 번 한 적이 있지? 물론 미국이 양자 컴 개발에 몰두했다는 보고는 받았어. 하지만," "대실패였다는 소리인가요?" 예안이 중간에 말을 가로챘다. 영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근래 들어 중국과 일본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조 짐이 있었어. 그네들은 철저히 비밀로 하고 있지만, 얼마 전에 주석 과 총리가 각각 같은 날에 납치 됐었다는군. 그리고 며칠 후에 다시 안전하게 돌아왔지." "에? 진짜요?" "어, 진짜인가? 근데 그거 국가 기밀 아닌가?" 예안은 물론이고 두오도 상당히 놀랐다. 영환은 별 것 아니라는 얼 굴로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히 걔네들 국가 기밀이지 우리나라 국가 기밀은 아니잖 아. 뭐 일단 녀석들은 자국의 최고 권력자가 허무하게 납치 당한 게 밝혀지면 국제적인 개망신이라 생각해서 숨기고 있는 듯 해. 사실 여기에는 다른 해석도 있어." "어떤 건데요?" "처음 정보원에서는 어떤 조직이나 국가에서 비밀스런 목적을 가지 고 그 둘을 같은 날에 납치했다 생각했어. 하지만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사조직은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같은 강대국들이 그런 짓을 꾸몄다고 봐야 해." "그런 서양권 나라들보다는 차라리 중동권 국가들이 그랬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지 않을까요?" "동기로 볼 땐 그래. 하지만 그들의 능력으로는 총리와 주석을 같은 날에 납치할 수 없어. 물론 미국 같은 나라들 역시 죽을힘을 쥐어 짜내도 그런 납치극을 못 벌일 테지만, 일단은 그렇게 했다고 가정 해보자고." "네." "근데 그 나라들이 납치를 벌였다고 가정하면, 동기로 봤을 때 도저 히 설명이 안 돼. 기를 쓰고 조사해봤지만 전쟁으로 치달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런 짓을 할 이유는 절대 없단 말이야." "그럼 혹시 납치 해프닝 자체가 그 둘의 비밀 만남을 숨기기 위한 이중 연극?" 두오의 말에 영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렇다고 봐야지.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은 그런 생쇼를 했으며, 왜 그렇게 철저하게 이중 연극을 한 건지 의문이 생 기지. 그래서 정보원에서 꽤나 골머리를 썩고 있어." 짐작 가는 일이 있는 예안은 얼굴을 붉혔다. 영환은 그녀의 심경 변 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사실 난 얼마 전까지 양자 컴 설계도는 미국의 대실패로 끝난 웃기 지도 않은 해프닝이라 생각했어. 하지만 네가 그게 아닐 수도 있다 고 중현이한테 말했었잖아?" "네." "그 말을 듣고 조금 생각해봤고, 또 앞서 말한 대로 중국 주석과 일 본 총리가 그런 이중 연극을 벌이면서까지 비밀 만남을 가진 까닭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대충 연결은 되는 것 같더군. 아마도 양자 컴 에 얽힌 문제 때문인 듯 해." 영환은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그는 최근 양자 컴 개발이 단순한 해 프닝이 아니라는 데까지 잠정적 결론을 내려두고 있었지만 그 이상 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양자 컴퓨터 프로젝트에는 우리들이 상상하지도 못한 커 다란 비밀이나 가치가 있다고 봐야 해. 하지만 거기까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어. 하다 못해 그들이 정말 개발에 성공했는지 실패했는 지조차도 말이야." "혹시 모르지요. 일본과 중국이 그것을 노리고 있는 건지도." 그 이유를 알지만 말해줄 순 없었던 예안은 어설프게 웃으며 생각나 는 대로 그렇게 둘러댔다. "그게 참 이상하단 말이야. 현재 중국 해군함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물론 대놓고 포위하는 건 아닌데, 마치 한반도를 둘러싸는 형 국으로 치닫는 기세야. 일본 역시 우리나라 쪽 해안으로 군사력을 집중시키는 중이고." "설마 세계대전 같은 게 일어나겠어요? 괜한 기우일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일요일이라 한 편 더 올립니다. 셤기간이라 평일에는 연재가 힘들 듯 하다고 전에 말씀드렸죠?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66 회] 날 짜 2004-04-22 조회 / 추천 2947 / 40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태동 영환은 술을 한 잔 쭉 들이킨 다음 다시 말했다. "일단 미국이 양자 컴 개발에 성공했는데 그걸 속이고 있다는 네 말 이 맞다고 가정하자. 아니, 네 말이라면 거의 100% 사실이겠지." "아, 네." 예안은 황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유니콘이 하는 말을 듣고 곧 이곧대로 주장하는 자신 때문에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대외 정책 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으니. "사실 국가간의 관계가 악화되느냐 호전되느냐는 결국 서로의 이익 에 직결된 문제지." "그렇긴 하죠."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세계의 흐름이 급격히 바뀌는 건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어. 우리나라에는 유전이 있으니까." "네. 근데 그건 이 나라 게 아니고 제 건데요." 따끔한 지적에 영환은 쿡쿡 웃었다. "하여튼 그렇다 치자구. 자, 그렇다면 유전 외에 중국과 일본이 이 런 움직임을 보일 만한 요소가 뭐가 있을까? 유전보다 대등한, 혹은 유전에 맞먹는 그런 천문학적 이익을 지닌 요소가? 물론 맥은 제외 하고." "양자 컴이겠지요." "맞아. 그렇게 생각하면 미국이 양자 컴 개발에 성공했다는 네 주장 은 거의 신격화되는 셈이야. 동시에 그것은 강대국들이 전쟁을 불사 할 정도로 엄청난 고성능이라는 소리겠지." 예안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정보원에서 내린 결론에 의하면, 미국이 양자 컴을 개발한 것에 대 해 대응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이 손을 잡고 미리 우리나라를 집어삼 켜 두려는 건지도 모른다는 거야. 음, 근데 이건 너무 과격한 표현 인가?" "뭐 우리나라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려 한다는 거나, 식민지로 만들려 한다는 거나, 집어삼키려 한다는 거나, 결국 다 똑같은 뜻 아니에요?" "그렇긴 하지." 영환은 다시 한 번 술을 따라 쭉 들이마셨다. 잠자코 그 둘의 대화 를 듣고 있던 두오가 끼어 들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뭔가 좀 이상한데." "?" "미국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만 손을 잡았다는 게 좀 이상해. 어째서 우리나라에는 양자 컴 개발 사실을 알리지 않고 그렇게 집어 삼키려 하는 거지? 그건 너무 무모하고 위험한 짓 아니야?" "아직까지는 그저 가정일 뿐이야. 정보원 혹은 내가 민감하게 반응 하는 것일 수도 있어." 영환은 그렇게 설명했다. 그러나 두오는 수긍하지 않았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와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그것은 무력이 아니라 대화로 이뤄져야만 해. 단순하게 생각해 봐. 지리적인 상황 을 고려해볼 때, 우리나라는 미국과 손을 잡아 중일에 대항하는 것 보다 동북아시아간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게 더 이익이야. 중일 녀 석들도 그걸 모르진 않아." "그들은 지금 우리가 양자 컴을 탐내 미국과 손을 잡으려 할지도 모 른다고 생각할 수 있어. 사실 중일과 손을 잡는 것보다는 그게 더 한국에 이익이야." "그럼 도대체 자네의 생각은 뭐야? 결국 일본과 중국이 미국에 대응 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 한다는 뜻인가?"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을 뿐이야. 아직 그들의 움직임에 대해 심각 하게 생각하는 나라조차 없어. 멋모르고 우리가 섣부르게 판단할 것 일 수도 있어." 두 죽마고우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예안은 몹시 미안해졌다. 미국이 양자 컴 설계도를 도둑 맞았는데 그게 한국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 말해줘도 그들은 당장 왜 동북아시아의 형국이 이런 미묘한 방향으 로 흘러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듣고 있으려니까 이거 너무 미안해지네. 미국하고 중일이 협력한다 는 건 아예 생각하시지도 않잖아. 나중에 양자 컴에 대해선 많이 양 보해주자. 어차피 유니콘이 지가 더 뛰어나다고 했으니까.' 뉴런형 컴퓨터인지 뭔지 하는 게 얼마나 뛰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양자 컴을 컴퓨터로 취급하지도 않는 귀하신 분이니 어련히 잘 알아 서 하시겠지. 예안은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한참을 입씨름하던 두 노인은 동시에 예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둘이 합창하듯 그렇게 묻자 딴 생각에 잠겨 있던 예안은 당황했다. "예, 예?" "너는 왜 이런 움직임이 벌어지는 거라고 생각해?" "그, 그게…."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예안은 얼른 대답했다. "그냥 중국하고 일본이 군사훈련 벌이는 게 우연히 일치한 것 가지 고 두 분이 괜히 과민반응 보이는 게 아닐까요?" "…." 두오와 영환은 할 말을 잃었다. 애초에 '심상치 않다'며 이 이야기 의 시작을 끄집어낸 당사자가 저런 말을 해서 되는 건가. 황당해하는 그들의 얼굴에서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달은 예안은 황 급히 덧붙였다. "아, 물론 일반인이 볼 때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죠." "흐음." 진지한 이야기가 나올 타이밍이었다. 두 권력가는 바짝 긴장한 채 예안의 얼굴만을 주시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그냥 미국이 양자 컴 개발 사실을 숨기는 의도가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거든요. 그게 사실이 든 아니든, 중국과 일본이 그에 맞서기 위해 유전을 빼앗으려 드는 것이든 아니든, 어차피 그것들은 중요하지 않아요." 예안의 눈동자가 자신감에 가득 찬 녹색 빛을 내뿜었다. "중요한 건 바로, 맥은 태양계 최강의 전투병기라는 거죠." 두 노인은 풋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렇긴 하지. 그네들이 아무리 발악해봤자 맥이 나서서 바 주카포 한 발만 쏘아버리면 지구상에서 영영 지워질 테니까." "전에 FIRE-3 요격 테스트에서 시범적으로 보여준 화력은 정말 대단 했어. 그 정도면 가히 목성까지는 몰라도 지구 정도는 충분히 날려 버릴 수 있겠지." 두 사람이 맥을 띄워주자 기분이 좋아진 예안은 신이 나서 되는 대 로 주워섬겼다. "그리고 달나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날려버릴 수 있을 걸요?" "달나라?" "그 왜, 에덴 혹성 말이에…." 퍼뜩 정신이 든 예안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영환과 두오는 어리둥 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달? 에덴 혹성? 그게 무슨 소리니?" "아, 그 그게…." 에덴 혹성은 지구인에게 미지의 영역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예안은 얼굴이 빨개진 채 말을 더듬었다. 영환과 두오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의 빛이 의심으로 바뀌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예안은 마음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초조한 나머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던 그녀는 심호흡을 한 뒤, 일부러 활기찬 어조로 대답했다. "그냥 해본 소리예요. 너무 그렇게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미스터 리 현상이나 야사 같은 것에도 관심이 좀 있거든요. 달에 대한 것도 그러한 측면에서 관심을 좀 갖고 있을 뿐이에요." 그들의 얼굴에 새겨진 의심은 지워지지 않았다. 아마도 에덴 혹성이 라는 이름에 대해 궁금하게 여기고 있으리라. 예안은 확실히 쐐기를 박으려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두 분이 물어보셔도 대답해드릴 수 없어요. 제가 추구하는 이익과 신념에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니까요. 두 분이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해해드릴 수 없구요. 죄송해요." 그들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에덴 혹성, 우연히 스치듯 들었던 그 명칭이 예안에게는 아주 중요하다는 것 하나만큼은 직감 했다. 영환은 분위기를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조금 전 주제에 대한 관심을 끄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유젤 박사님."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뜻하지 않은 존칭에 예안은 크게 당황했다. "그, 그건 제가 대외적으로 쓸려고 생각해둔 가명이잖아요? 그리고 왜 갑자기 존대를 쓰세요?" "지금부터 박사님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이것은 사적인 친분 관 계에서 하는 부탁이 아니라 한국의 대통령으로서 프랭크 안쏘니 유 젤 박사님에게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존칭을 안 쓸 순 없 지요." 영환의 태도는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한순간에 분위기를 휘어잡는 그의 기백에 예안은 잔뜩 주눅들었다. "이번에 전라도 지역에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첨단 연구소가 들어선 다는 건 알고 있지요?" "아, 네." 예안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일단 신문하고 뉴스에서 많이 보도하고 있어서 주워들은 건 좀 있 어요." "알다시피 그것은 기업이 세우는 연구소가 아니라 국가가 전격 지원 하는 국립과학연구소입니다. 완공은 올해 안으로 끝나고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이 될 예정이에요. 그리고 우리 정부는 이 연구소를 선두로 해서 전라도 지역을 첨단연구소 밀집지역으로 개발할 야심을 갖고 있습니다." 영환의 얼굴은 자신감으로 빛나 있었다. 붉은 은하수니 열린 동인이 니 뭐니 하던 좀 전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예안은 비로소 그에게 서 한 나라를 이끌어 가는 국가 원수의 면모를 보았다. "유젤 박사님이 그 연구소의 소장을 맡아주지 않겠습니까?" "!!" 예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소장이라고? 지금 내가 정녕 잘못 들 은 게 아니란 말인가? "뭐…라구요?"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나라 최대 국립연구소장 자리를 유젤 박사님 이 맡아달라 부탁하는 겁니다." 한국의 과학을 좌지우지할 그런 자리를 맡아달라? 예안은 안색이 새 파랗게 질린 채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예안은 속으로 그렇게 비명을 질렀다. 영환은 그것도 모른 채 계속 밀어붙였다. "박사님이 원하는 대로 일단 신변에 대한 건 철저히 기밀로 붙이겠 습니다. 대외적으로 연구소장 역할을 해낼 사람도 이미 잠정적으로 물색해 놓았습니다. 박사님을 노리는 자들이 누군지는 아직 알지 못 하나, 지금 국정원의 총 정보력을 동원해 그들에 대해 조사하고 있 습니다." "…." "우리는 박사님의 힘이 필요해요. 박사님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부디 소장 자리를 맡아줘요." 살아오면서 이런 충격적인 제안을 받을 줄이야. 넋이 나가 있던 예 안은 영환의 간절한 눈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제, 제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전 나이로 보나 실력 으로 보나 뭐로 보나…." "맥이나 무한동력장치처럼 세기를 초월한 업적을 이룩한 사람이 못 한다면, 도대체 이 세상 누가 할 수 있단 말인가요?" "하, 하지만…." "부디 거절하지 말아줘요. 한국은 당신의 힘을 필요로 해요. 당신도 한국인이지 않습니까?" 무작정 거절하기에는 핑계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예안은 원격장치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한테 물어볼까? 하지만 여기서는 그럴 수 없으니….' 예안이 한참 동안 대답을 않자 영환은 그녀가 대가를 놓고 저울질을 하고 있는 거라 판단했다. "물론 공짜로 맡아달라는 건 아닙니다. 아, 그리고 당연히 물질적인 대가는 아니에요. 어차피 박사님은 유전을 갖고 있으니 이제 더 이 상 그런 게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럼 뭘 줄 수 있다는 거죠?" 예안은 반사적으로 그렇게 되물었다가 깜짝 놀랐다. '미, 미쳤어? 소장 자리 맡을 수도 없으면서 이런 걸 알아서 뭘 어 쩌려고!' 그녀는 펄쩍 뛰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말을 거둬들일 순 없었다. "권력. 그게 바로 우리가 박사님에게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영환의 목소리는 자신에 가득 차 있었다. 강한 호기심을 느낀 예안 은 펄펄 뛰던 것도 잊고 고개를 갸웃했다. "권력이요?" "그렇습니다. 박사님이 원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권력이든 간 에 그 자리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함부로 대통령이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는 게 아 니잖아요? 국회의 승인이 없으면…." 예안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속으로는 펄쩍 뛰고 있었다. 애초에 소 장 자리를 맡을 생각도 뭣도 없으면서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 으로 묻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잠자코 있던 두오가 그제야 끼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거야." "네?" "내가 두 팔 걷고 나선다면 그런 법안 한두 개쯤 통과시키는 건 일 도 아니야. 국회에 대한 승인이라면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예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비로소 지금 이 자리가 그 이야기 를 꺼내기 위해 마련된 자리라는 걸 깨달았다. '가볍게 담소나 나누자고 한 거 다 거짓말이었잖아! 이래서 정치가 들이 하는 말은 믿으면 안 된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있었던 거야?' 4월22일이군요. 주인공이 가상으로 만든 생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2004년에 주인공은 태어나지도 않았지만요.[..] 오늘은 저에게 있어 아주 특별한 날입니다. 법정대린의 동의 없이 핸드폰도 살 수 있고, 취직도 할 수 있고, 계약서 같은 것도 작성 할 수 있으며, 선거권도 주어지는 데다가 쪼끔 야하게 말해서 남 녀 혼숙도 가능한...[어, 어이?] 네, 그렇습니다. 오늘이 바로 제 생일이자, 이제 드디어 미성년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성인으로 거듭나는 날입니다. 흑흑흑. 이제 좋은 시절 다 갔네요 꺼이꺼이~ ps : 시험 아직 안 끝났어요.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67 회] 날 짜 2004-04-26 조회 / 추천 2922 / 48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태동 예안은 계속 머뭇거렸다. 영환은 좀더 목소리에 힘을 불어넣어 설득 했다. "현실적으로 볼 때 맥을 빌리는 조건으로 유전을 넘겨준다는 건 우 리에게 있어 커다란 손해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런 출혈을 감 수하면서까지 거래를 성사시켰는지 한 번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어째서 손해라는 거죠? 유전의 산유량은 유한이지만 맥은 연료의 소멸이 없는 무한동력이라구요." "유젤 박사님처럼 모든 물질적 가치를 초월한 분에게나 그렇게 느껴 질 뿐이죠. 우리에게 당장 피부로 와 닿는 것과 박사님의 느낌은 크 게 다릅니다." "대국민 투표에서 90% 이상이 찬성했잖아요." "일반인들은 우리나라가 맥을 샀다고 알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맥을 구입한 것이 아니라 대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국민들 은 크게 분노할 겁니다. 가뜩이나 맥을 산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실 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판입니다." 예안은 할 말이 없었다. 대통령은 다시 말했다. "분명 맥의 무한동력은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현 인류는 그런 초월 적 가치를 지닌 동력기관을 소화할 수 없습니다. 똑 까놓고 말해서, 설계를 알 수 없는 무한동력장치를 사느니 핵융합로 제조 기술을 넘 겨받는 게 우리로서는 백 배 더 나았을 겁니다." "그, 그럼 왜…?" "박사님이 거절했잖습니까? 그런 초월적인 기술을 넘겼다가는 전세 계의 주목을 받아 위험해질 수 있으니 못하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처음 중현의 제안을 받았을 때 유니콘의 지시대로 그렇게 둘러댄 기 억은 분명 있었다. 예안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때 당시 박사님이 말한 건 궤변이었습니다. 핵융합로 제조 기술 이 한국에 넘어오면 박사님의 정체가 드러나지만, 맥을 팔아 넘길 때에는 조심만 하면 정체를 숨길 수 있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박사님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인 건 따로 생각이 있어서였습니다."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았다. 예안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연구소장 자리를 맡아달라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당신처럼 대단한 천재 과학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라 면 유전 따위는 전혀 아깝지 않으니까요. 간단하게 생각하시죠. 유 전은 대한민국이 박사님에게 드린 선물입니다." "너무 무모하시네요. 제가 소장 자리를 맡겠다고 각서를 쓴 것도 아 닌데 그렇게 구두로 해결하려 하시다니. 막말로 말해서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거절한다 해도 각하는 어쩔 수 없어요." 예안은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유니콘이 뭐라고 지시할 틈 도 없었다. "유전을 빌미 삼아 박사님을 옭아맬 생각 따위는 없었습니다. 하지 만 박사님도 양심이 있다면 그대로 꿀꺽 해버리지는 않겠지요." 상당히 가슴을 찌르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그의 페이스에 끌려 가는 게 조금 억울했던 예안은 가벼운 억지를 부려보았다. "만약 제가 소장 자리를 맡는다 해도 따로 대가를 요구할 거란 생각 은 안 해보셨어요? 그럼 뭘 주실 건데요? 한국 정부가 유전말고 저 에게 또 줄 수 있는 게 뭐 있나요?" "박사님은 이미 부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력가입니다. 물질적인 대가는 필요 없겠지요. 어차피 우리도 박사님에게 드릴 수 있는 게 하나밖에 없습니다." 영환의 눈빛은 모든 걸 자신의 의지대로 밀어붙일 수 있다는 자신감 에 불타고 있었다. 예안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권력?" "그렇습니다." 충격에서 쉽사리 깨어 나오지 못한 예안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유전을 받았을 때에는 뭘 몰라도 한참 몰랐던 때라, 그냥 돈벼락 맞 았거니 하면서 좋아라 했던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 나라 최고 통치 자의 입으로 직접 '권력을 줄 테니 우리 사람이 되라'는 말을 듣는 건 그 느낌이 크게 달랐다. 이윽고 생각을 대충 정리한 예안은 고개를 들었다. "권력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거죠?" "국민 투표로 뽑는 자리를 제외하고는 무엇이든지요. 하기야 박사님 이 국회의원후보로 나선다면 90% 이상의 지지율로 당선될 지도 모르 지요. 아, 그러고 보니 아직 나이 제한이 있군요." 예안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들의 제안에 솔깃한 건 사실이었다. 맥의 무력과 유전이 지닌 부, 그리고 막강한 권력까지 손에 넣는다 면 시트날타를 견제하는 데에도 한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런 대규모 연구소장자리는커녕, 중학교 과학선생조차 할 수 없다 는 게 바로 문제였다. "시간을 좀더 주세요. 생각해볼게요." 결국 예안은 일단 그렇게 말을 맺었다. 영환은 만족스러운 듯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잘 부탁합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는 다시 친밀한 이웃 할아버지 노릇을 해야겠지?" 비로소 분위기가 편안해졌다. 예안은 얼굴을 활짝 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사람 뒤통수 치는 거 좋아하는 분인 줄 미처 몰 랐어요." "원래 내 친구들이 나만 보면 오토바이 헬멧부터 써. 뒤통수 얻어맞 을까 봐." 예안은 쿡쿡 웃으며 서비스겸 영환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영환 은 사양 않고 술을 받아 마셨다. "좀 심심하네요. 그냥 우리 아기 데리고 올 걸 그랬나 봐요. 할아버 지한테도 한 번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나도 네가 아기 낳았다는 소리 들었어. 한 번 보고 싶어 몸이 달아 했는데 기회가 없네. 이참에 데리고 오지 왜 혼자 왔니?" "그냥요. 뭐, 다음 번에 한 번 더 불러주시면 보여드릴게요." "그래그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방안 가득 흘렀다. 하지만 예안은 마냥 웃고 즐길 수만은 없었다. 어차피 맥의 도움 없이 연구소장을 맡을 순 없 기에 거절해야 옳지만, 면전에서 딱 잘라 거부할 수가 없기에 할 수 없이 대답을 뒤로 미룬 것에 불과했다. '휴. 거짓말은 한 번 하기 시작하면 계속 커진다는데 내가 바로 그 꼴이구나. 진짜 이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맥이 도망가기라도 한다면 난 완전 엿 되는 거네.' 예안은 집에 돌아가자마자 맥과 상의해야겠다고 투덜거렸다. 니콜라스는 정원 한쪽 나무 밑에서 흙장난을 치며 예안이 나오기만 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호원들이나 종업원들이 이상한 눈으로 흘끗 대곤 했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몇 시 간째였다. "어, 이제 나왔네?" 저쪽에 예안의 모습이 보이자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녀는 미안한 표정을 한 채 다가왔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네가 끼어 들 수 있는 자리가 아 니었거든." "알아." 비밀 회의를 가지는 자리에 일개 경호원에 불과한 자신이 합석할 순 없었다. 니콜라스는 그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근데 이 한식집은 참 특이하네. 방음 처리도 굉장히 잘 되어 있고, 일반 손님은 아예 보이지도 않더라. 그래 가지고 장사가 잘 될까?" "고위 정치가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인가 보지 뭐." "그런가? 어쨌든 그만 가자." 예안은 니콜라스와 함께 살짝 뒷문으로 빠져 나왔다. 그들은 지나가 는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니콜라스는 예안의 옆모습을 연신 흘끔거렸다. 물어본다면 누나는 말을 해줄까? 그렇게 그가 속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어, 자, 잠시만요! 아저씨 잠시만 멈춰주세요!" 뭔가에 화들짝 놀란 예안은 황급히 부탁했다. 차가 멈춰 서자 그녀 는 후다닥 내렸다. 아주 급한 일이라도 생긴 듯 발빠른 움직임이었 다. "아저씨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진짜 잠시면 돼요." 예안은 어느 건물 앞으로 달려갔다. 입구에 세워진 게시판에 영화 포스터가 여러 장 붙어 있었다. 그녀는 우두커니 선 채 멍청한 얼굴 로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잔뜩 궁금한 얼굴로 뒤따라온 니콜라스는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누나, 영화 좋아해?" 게시판에 붙어 있는 영화 포스터는 조만간 JM 영화사에서 개봉하기 로 되어 있는 영화였다. 니콜라스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포스터를 이 리저리 살폈다. "주연 김혜인, 최계수. 날개를 잃어버린 천사와 천사의 날개를 숨긴 인간 남자의 사랑 이야기. 「선녀와 나뭇꾼」?" 순정파들이나 좋아할 법한 영화겠다고 중얼거리며 무심코 시선을 돌 리던 니콜라스는 깜짝 놀랐다. 예안의 눈시울이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흘러내릴 듯 붉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나? 왜 그래?" 니콜라스는 예안의 어깨를 잡고 살짝 흔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저 후회가 가득한 시선으로 포스터만을 멍하니 들여다보 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눈가를 훔치며 돌아섰다. "그만 가자." 차마 함부로 말을 걸 수 없는 무거운 분위기였다.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던 니콜라스는 쓴웃음과 함께 그만 두었다. '이 사람들 때문인가?' 그는 포스터 안의 배우들을 머리 속에 담아두기 위해 뚫어지게 들여 다보았다. 그리고 예안을 따라 택시로 향했다. 예안은 집으로 가는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아까 미팅을 끝내고 나 올 때와는 달리 얼굴에 우울함이 가득했다. 니콜라스는 몹시 걱정이 되었지만 쉽사리 말을 꺼내진 못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예안은 아기부터 찾았다. "아유, 우리 아기. 엄마 없는 동안 잘 잤어?" 예안은 얼굴을 활짝 편 채 아기를 껴안고 볼을 비비기에 여념이 없 었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편안한 기분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지 못했 다. 아기를 통해 억지로 슬픔을 억누르려 발버둥치는 그 모습이 안 쓰럽기 그지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리를 비켜주는 게 좋겠지? 누나도 그렇게 하는 게 자기한테 좋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니콜라스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그만 올라가 볼게." "응? 그래. 편히 쉬어." 방밖으로 나온 그는 문을 닫기 전 마지막으로 예안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웃고 있지만 수심에 젖어 있는 녹색 눈동자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자리를 비켜주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하 며 문을 닫았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예안은 비로소 한숨을 내쉬었 다. 혜인을 생각하니 우울하기 그지없었지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유니콘. 이제부터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빨리 설명 좀 해 봐. 내 가 죽게 생긴 거 안 보이니?" 「생각할 것도 없이 간단합니다. 그냥 기꺼운 마음으로 소장 자리를 맡으시지요.」 "난 그런 대형 연구소장자리는커녕 중학교 물리 선생도 제대로 못해 낼 인간이라구. 내가 과학에 대해 도대체 아는 게 뭐가 있냔 말이 야?" 「왜 없습니까?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공부하면 한 달도 안 되어 자 연과학계열 노벨상은 전부 다 휩쓸 수 있을 겁니다.」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해?" 「유젤 님의 두뇌라면 충분히 가능하죠.」 물론 예전에 수능 공부를 해본 경험을 통해 유젤의 뇌가 입이 벌어 질 정도로 고성능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드웨어가 아무리 좋아봤자 뭐하나. 소프트웨어가 그 성능의 단 1%도 따라가지 못하는 게 현실인데. "에휴. 지금 내 꼴이 완전 양자 컴퓨터에다가 윈도우즈 95 깔아서 쓰는 거나 마찬가지지 뭐." 아기가 입을 오물거렸다. 엄마가 지금 자신에게 말을 거는 거라 생 각해 열심히 대답하려고 하는 건가 보다. 무척 귀여웠다. "우리 유빈이가 빨리 빨리 커야 하는데 말이야. 아직 말 한 마디 못 하니까 맨날 엄마 혼자 심심해." 아기가 배가 고프다는 듯 손을 내뻗으며 소리 없이 칭얼거리자 예안 은 젖을 물렸다. 시간이 정지한 듯 고요하고 평화로운 기분이 가슴 가득 스며들었다. 깊은 심해에 몸을 맡긴 듯 예안은 사랑을 빨아먹 는 아기의 율동을 느끼며 포근하게 미소지었다. 유젤과 함께 이 아기를 키우고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또다시 그 런 생각이 엄습해왔다. 괜시리 눈물이 날 것 같았던 예안은 일부러 활기차게 이야기를 꺼냈다. "유니콘, 사실은 말이야. 난 그런 연구소장 같은 거 별로 맡고 싶지 않아. 물론 네 말대로 죽어라 공부하면 한 달 안에 노벨상도 탈 수 있겠지. 나도 예안이 두뇌만큼은 인정하니까 말이야." 어느덧 서산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조금씩 어두워지는 창 밖 풍 경을 그윽한 시선으로 어루만지며, 예안은 다시 말했다. "근데 그런 거 하기 싫어. 난 그냥 하루빨리 시트날타 녀석들 다 정 리하고, 그리고 평생 아빠랑 유빈이랑 그렇게 같이 어려움 없이 조 용히 행복하게 살고 싶어." 「그 마음은 십분 이해합니다. 하지만 시트날타 문제를 하루속히 해 결하기 위해서는 한국 정부의 정보력이 절대 필요합니다. 그들의 요 구를 무조건 거절하다가는 서로간의 사이만 나빠질 뿐입니다. 이제 유젤 님이 그들에게 양보할 때가 되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요.」 한국 정부가 유전을 예안에게 넘긴 건 바로 그러한 요구를 관철시키 기 위함이었다. 맥을 만든 과학자를 끌어들여 한국의 과학 수준을 눈부시게 발전시킨다면 유전에 비할 바가 못 되는 엄청난 효과를 낳 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들이 기대하고 있는 잘나신 천재 과학자께서 수2 정석 한 번 훑어본 적 없는 도도한 몸이라는 사실이 었다. "그럼 결국 내가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좋다 이거야?" 「그렇습니다. 시트날타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정보력이 필요하니까요.」 "그럼 지금까지 왜 도움을 청해보라는 말을 하지 않았어? 진작 말하 면 좋았잖아?" 「굳이 이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 필요는 없다 판단했으니까요. 언젠 가 그들이 손을 내밀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그동안 한국 정부가 나한테 언제 그런 말을 할지 계산하고 있었단 소리야?" 「그렇지요. 그리고 그들이 먼저 말을 꺼냄으로써 유젤 님이 보다 우세한 입장에 서지 않았습니까?」 예안은 한숨과 함께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아기는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휴우." 역시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여야만 할까. 세상 무엇보다 귀여운 내 아기를 토닥이며 예안은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유젤이 마지막으로 남긴 이 소중한 생명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을 못하겠는가. 어차피 맥이 다 알아서 해줄 텐데 뭘. "할게. 하겠어."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그에 따라 필요한 기능을 하나 작동시켜 야겠군요. TPS 기능을 작동시키겠습니까?」 "그게 뭐야?" 「유젤 님이 뇌파를 통해 마음속으로 저와 직접 대화를 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그냥 OK라고 대답해주시면 그때부터 항상 작동합니다. TPS 기능을 작동시키겠습니까?」 "하, 할게." 예안은 어리둥절해하며 승낙했다. 그 순간 머리 속이 뚫리는 느낌이 그녀를 덮쳤다. '들리시나요?' '어, 어라?' 느닷없이 머리 속에서 유니콘의 기계음이 들렸다. 깜짝 놀란 예안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 이게 TPS인지 뭔지 하는 기능이야? 우와, 디게 신기하다. 근데 왜 지금까지는 이 좋은 거 안 알려줬어?' '물어보지 않으셨잖아요.' 꼭 할 말 없으면 저런 말 하더라. 예안은 유니콘의 나태함을 탓하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샤워를 마친 니콜라스는 가운을 입고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며 거 실로 나왔다. 소파에 등을 깊이 묻은 그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 다. "재미없는 것밖에 안 하네." 그는 흥미 없는 얼굴로 이리저리 채널을 돌렸다. "무슨 얼어죽을 교양이야." 다른 데로 돌려보니 오락 프로그램이 한창이었다. "저런 거 하면 재미있나?" 다시 돌려보니 이번엔 여자 가수가 야한 옷을 입고 목이 터져라 열 창하는 장면이 나왔다. "뭐야? 축구공 가슴하고 뚱뚱한 엉덩이 빼고는 별 매력도 없는 암컷 이 어디서 감히 사람을 유혹하고 있어? 기분 나빠." 니콜라스는 짜증스런 손길로 다시 채널을 돌렸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TV 방송국들이 아예 작정을 했는지 토론 프로그램이나 시사 프로그램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나마 최근에 즐기게 된 것이 그런 프로그램들인데, 방송국에서 이딴 식으로 시청 자를 우롱한다면 킬러로써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테러해야지." 니콜라스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고 일어났다. 그 안에는 소형 플라 스틱 폭탄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총기류와 연막 장치 등이 잔뜩 들 어 있었다. 그는 지금 진심으로 방송국 사장을 협박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어라?" 떨어뜨린 리모컨이 눌러지며 채널이 다시 돌아갔다. 흥미 없는 시선 으로 흘끔대던 그의 시선이 그대로 정지했다. 「허무주의의 기둥, 제임스 해론! 그가 한국에 온다!」 니콜라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는 멍한 얼굴로 무기류가 든 가방을 떨어뜨렸다. 더듬거리며 TV 앞으로 다가간 그는 어린아이처 럼 TV를 두 손으로 잡은 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극단적 냉소주의를 바탕으로 무수한 광신도들을 확보했으며, 철저 한 안티 휴머니즘으로 학회와 인권단체로부터 온갖 비난을 사고 있 는 제임스 해론이 내한 강연을 가진다.」 그의 눈이 등잔만하게 커졌다. 사진이나 나이, 신분, 학력, 국적, 거주지 등을 비롯하여 개인 프로필이 일체 밝혀지지 않은 제임스 해 론. 그가 내한 강연을 가진다는 건 가히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무엇 보다 니콜라스는 세상에 다시없을 열렬한 팬이었다. 그는 끓어오르 는 기쁨을 참을 수 없었다. "누, 누나! 누나! 누나아!" 그는 천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일인데 그래?" "제임스, 제임스가 한국에 온대!" 잔뜩 흥분에 취한 그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밑층에서 예안의 대답 이 다시 돌아왔다. "뭐라고? 잘 안 들려?" "제임스! 제임스가 한국에 온다구!" "누가 와?" "제임스!! 제임스가 한국에 온다구!!" 예안의 대답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잘 들리지 않으니까 그냥 나중에 물어보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 다. 뭐부터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던 니콜라스는 얼른 옷장으로 달려가 문을 열고 옷을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없어! 없어! 옷이 없어! 으아악! 옷이 없어어!" 그랬다. 워낙에 그런 데 관심 없이 살다 보니 그런 날에 입고 나갈 멋진 정장 한 벌조차 없었다. 니콜라스는 어찌 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며 자신의 머리를 마구 쥐어박았다. "바보! 바보! 왜 진작 옷도 안 사 놓은 거야!" 첫 데이트를 앞둔 어린애처럼 설렘을 억누르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실로 천진스러웠다. 그가 처음 예안을 만났을 때 지니고 있었던 날 카로움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과연 누가 지금의 그를 보고 마 피아도 무서워 벌벌 떠는 청부업자라 생각할 것인가. 생일 축하 고맙습니다. 근데 제가 늙었다는 게 그렇게나 축하할 만한 일이었나요 여러분?ㅠㅠ 저는 아직 청소년이고 싶단 말입니다아!-_ㅠ ps : 생일 축전 감사합니다 야차왕님. 근데 거기서 예안이가 쥐고(?) 있던 게 뭔지 처음에 몰랐죠.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유빈이구나'하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ㅅ- 여담이지만, 신인류 남자는 기본적으로 모두 검은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세대를 거듭할수록 그 특성들이 계속해서 달라지게 되는데요. 이미 제이와, 그 다음 세대부터 완전체를 이룩한 녀석들이기 에 발전이라고 할 순 없고 변화라고 하면 어울리겠네요. 제가 생각해도 좀 복잡하게 꼬인 이 모든 인과 관계들이 도대체 언제 쯤 끝이 날지 생각하면 참 앞날이 까마득합니다. 구상을 해놓으면 뭘 해요. 손가락하고 시간이 따라줘야 말이죠.-ㅅ- 이번 주말에는 정말이지 날 잡고 광필 모드로 글 휘갈겨 볼랍니다. 선작이 963, 즉 앞으로 네 자리까지 37밖에 남지 않았기에 20연참 준비하려면 빡세게 해야 하거든요. 쿨럭.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68 회] 날 짜 2004-05-01 조회 / 추천 2523 / 30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태동 창문 위로 밤바람의 속삭임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그 득한 거리 위로 하나 둘씩 별빛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오염된 공기 를 뚫고 간신히 지상에 도달한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예안은 한 숨을 토해냈다. '아무래도 혜인이를 만나야겠어.' '모든 게 가장 바람직하게 끝났습니다. 근데 왜 굳이 다시 일을 벌 이시려는 겁니까?' 아문 상처를 괜히 쑤시지 말라는 것인가. 예안은 조금 울컥했다. '전부터 깊이 생각해봤어. 역시 한 번쯤은 만나봐야 할 것 같아. 어 떻게 지내고 있는지, 최소한 잘 지내고 있는지 만큼은 내 눈으로 확 인하고 싶어.' '그다지 좋은 결과는 없을 텐데요.' '네가 말려도 만날 거야.' 예안의 태도는 단호했다. 맥은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혜인씨와의 관계를 다시 이어나가든 아니든 유젤 님의 안위에 특별 히 문제될 건 없겠죠. 별달리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은 없군요.' '다시 이어나가겠다는 게 아니야. 그냥…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것 뿐이야.' 오랫동안 끊어져 있었던 인연을 다시 잇는다는 게(잠깐이라 해도) 어떤 의미인지 예안은 잘 안다. 다시 혜인을 만나게 된다면, 이번에 는 등을 돌리는 게 예전과 비교할 수조차 없이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자칫 혜인에게 또 상처를 주 는 일이 벌어질까 두려웠지만, 그녀가 잘 지내고 있는지 만큼은 두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어, 너 왜 그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아기를 안고 거실로 나서던 예안은 니콜라스가 싱글벙글인 걸 보고 의아했다. 평소 웃기는커녕 거의 표정의 변화가 없는 녀석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건 몹시 드문 일이었다. "제임스 해론이 온대." "아, 그렇… 뭐어?" 무심코 넘어가려던 예안은 깜짝 놀랐다. "제임스 해론? 제임스 해론이 온다구?" "응. 제임스 해론이 한국에 온대. 다음주 토요일날 중앙시민홀에서 강연을 가진다고 하더라. 일반인들도 참가할 수 있어. 어제 온라인 으로 간신히 표 주문했어. 신청 받은 지 1분도 안 돼서 3천 석이나 되는 자리가 다 매진됐거든." 놀랄 만한 속도였다. 예안은 제임스 해론의 인기를 새삼 실감했다. "그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인기가 있었냐? 난 사실 네가 말해 주기 전까지는 이름도 거의 모르고 있었는데." "아, 물론 한국인들만 산 게 아니야. 오히려 외국인들의 구매 비율 이 더 높아." "엥? 우리나라에 온다며? 그럼 외국인들은 표 사봐야 말짱 도무룩이 잖아?" "비행기 타고 오면 되지." 그 정도면 광신도 수준이라 할 만 했다. 예안은 어처구니없었다. "그 사람 얼굴 한 번 보자고 비행기 타고 한국까지 온단 말이야? 요 새 기름 때문에 비행기 표 값이 장난 아닌데, 대단하네 정말." 예안은 아기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고 소파에 내려놓았다. "그건 그렇고, 나 조금 후에 외출할 거니까 너도 준비 다 해 놔." "어디 가게?" "응. 갈 데가 있어." 예안은 다소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니콜라스는 직감적으로 뭔 일 이 있다는 걸 느꼈다. "무슨 일인데?" 그의 눈동자가 호기심과 걱정이 섞여 빛나고 있었다. 예안은 쓴웃음 을 지으며 그의 뺨을 토닥거렸다. 마치 친어머니 같은 다정한 손길 이었다. "그냥… 내가 뿌린 씨앗이 어떻게 되었나 확인하러 간다고나 할까?" 니콜라스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이상 없이 건강하게 크진 못했겠지. 그렇지만 질병 같은 건 없을 거라 믿어. 그러니 별 걱정은 안 해." 근데 왜 그렇게 울고 싶어하는 건데? 니콜라스는 입술을 헤집고 튀 어나올 뻔한 그 말을 간신히 삼켰다. "AK 엔터테인먼트로 가주세요." 처음 듣는 명칭이었다. 니콜라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 만 예안은 그의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턱을 괴고 차장 밖을 내다보기만 했다. 택시는 시원스럽게 주택가를 빠져 나와 국도에 접어들었다. 약 삼십 분 가량이 지나자 택시는 고층건물들이 즐비한 번화가에 그 둘을 내 려놓았다. 예안은 기지개를 켜며 AK 엔터테인먼트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녀 의 표정이 비로소 조금 살아났다. "호, 역시 연예 기획사답게 멋지게 생긴 건물이네. 대기업에 비하면 별로 크진 않지만." 니콜라스는 다소 어리둥절했다. AK 엔터테인먼트라고 해서 그게 뭔 가 했더니, 뜻밖에도 연예 기획사였다. "이런 곳에 왜 왔어? 누나 설마 연예인 하려고?" "시트날타가 언제 어디서 날 잡아가려고 나타날지 모르는 판인데, 내가 미쳤다고 얼굴 팔릴 그런 짓 하냐? 그냥 좀 만나볼 사람이 있 어서 그래." 오는 내내 붉게 상기되어 있던 예안의 얼굴. 갑자기 그 위로 어두운 그늘이 스치고 지나갔다. 니콜라스는 몹시 궁금했다. 기대에 차 두 근거리면서도 만나는 게 두렵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인가. "일단 들어가자." 예안은 건물 안에 들어서자마자 모자를 벗었다. 붉게 찰랑이는 머리 카락이 허리까지 예쁘게 늘어뜨려졌다. 가수와 탤런트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역시 예안이는 아름다워.' 유젤의 미모에 대한 자부심을 만끽하고 있던 예안은 얼떨떨한 채 다 가오는 경비원에게 생긋 웃어주었다. 그의 얼굴이 대번에 붉어졌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온 거냐…요?" 처음에 골수팬이 무단으로 들어온 줄 알았던 그는 무심코 반말을 했 다가 얼른 '요'자를 붙였다. "친구를 좀 만나보려고 왔어요. 대충 알아보니까 지금 이 시간에 여 기에 있을 거라고 하더라구요." "친구?" "예. 김혜인이라고 작년 대명 고등학교 퀸 페스티벌에서 우승한 여 자애 있잖아요." 경비원의 얼굴이 일순 찌푸려졌다. 원칙대로라면 따끔히 혼내 쫓아 내야겠지만, 생전 처음 보는 가슴 울렁이는 미소녀에게 차마 그런 짓을 할 순 없었다. "허, 이거 참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슬그머니 주위를 돌아보니 그냥 들여보내라고 남자들이 무언의 압박 을 가하고 있었다. 그는 어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바로 그때, 다행스럽게도 그를 구제해주는 목소리가 있었다. "제가 책임질 테니 들여보내는 게 어때요?" 인기 영화배우 최성수의 말이었다. 경비원은 희색이 되었지만 겉으 로 드러내진 않았다. "하, 하지만 그건 좀 곤란한데요." "괜찮습니다. 제가 책임지기로 하죠. 나중에 실장님이 뭐라고 하시 면 제가 허락했다고 말씀드리세요." "에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경비원은 예안에게 들어가라는 눈짓을 보내면서 슬그머니 그녀의 어 깨를 떠밀었다. 그의 손이 어깨에 닿자 예안은 몹시 불쾌했지만 꾹 참았다. "누군진 모르지만 고맙습니다." 경비원이 사라진 후 예안은 노골적으로 불쾌해하며 그의 손이 닿았 던 어깨를 툭툭 털었다. 성수는 그녀가 자신을 몰라보자 몹시 당황했다. 그는 당연히 그녀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내가 누군지 몰라?" "예? 누군데요?" 성수는 비참했다. 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라고 소문이 자 자한 자신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인기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팬클럽 회원만 해도 몇 만 명이 넘었다. 하지만 이런 미소녀가 몰라준다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 가. "저기, 나 최성수라고 해. 「비 더 앰비셔스」에 남주로 출연했었는 데, 몰라?" "아, 그 영화가 아주 유명하다는 건 들었어요. 근데 별로 영화 보는 거 좋아하지도 않고 바빠서 보러 갈 틈도 없었죠." 예안은 그가 대뜸 반말하는 게 조금 기분 나빴다. 그렇지만 좀 전 그의 도움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걸 고려해서 정중히 존대를 써주었 다. "좀 섭섭하네. 근데 너 참 용감하다. 보통 이런 데는 너 같이 약속 도 안 하고 또 아는 사람도 없는 애가 들어오면 내쫓기부터 하는데, 어떻게 들어올 생각을 다 한 거야?" "에? 왜요?" "몰라? 골수팬들이 어떻게든 연예인 한 번 직접 보고 싶거나, 혹은 소지품 같은 거 기념으로 가져가려고 들어오는 일이 태반이잖아. 청 소원으로 분장해서 들어오기도 하고, 회사 간부들하고 친척이라 속 이고 들어오기도 하고 하여튼 말도 아니야." 연예계에 대해서는 애초에 거의 관심이 없는 예안으로서는 처음 듣 는 이야기였다. "이상하네요. 제가 아는 아저씨 회사는 들어가도 경비원들이 별 말 안 하던데?" "그거야 일반 기업들이니 그렇고, 연예 기획사에서는 보통 그렇게 안 하지. 아, 아닌가? 내가 알기로는 일반 회사들도 1층 출입문 근 처에서 경비원들이 잡상인 같은 사람 못 들어가게 할 텐데?" 예안은 조금 발끈했다. "제가 어딜 봐서 잡상인이라는 거예요?" "좋아하는 연예인 싸인 같은 게 필요해서 들어온 것 아니었어?" "말했잖아요! 친구 만나러 왔다고요!" "그건 식상하다 못해 이미 진부한 거짓말이야." "그런 거 갖고 거짓말 안 해요!" "알았어, 알았어. 믿을게." 성수는 어쩔 수 없이 믿어준다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예안은 은근히 약이 올랐다. "그래, 네 친구라는 애가 누군데?" 예안은 잠시 망설였다. 자신이 과연 혜인의 친구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지 자신감이 없었다. "김혜인이요." 만약 네 자리가 된다면, 다음주말에 20연참을 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비축분이 문제가 아니라, 20회 분량 퇴고하는 게 장난 아니게 스트레스거든요.;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69 회] 날 짜 2004-05-01 조회 / 추천 2929 / 66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태동 성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의외였다. "누구라고?" "김혜인이요. 작년에 대명 고등학교 퀸 페스티벌에서 우승한 여자애 있잖아요." "호, 난 또 장지혁이나 김성우 같은 유명 남우 골수팬일 줄 알았는 데, 전혀 의외네? 보통 얼굴 반반한 여자애들이 그런 사람들 많이 좋아하잖아? 아니면 나 같은 사람이라든지." 성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예안은 어이가 없어 얼굴을 찌푸렸다. '자기 잘난 맛이 사는 사람인가?' 이런 인간이랑 그다지 상종하고 싶지 않았던 예안은 서둘러 물었다. "그럼 혹시 혜인이가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오늘 여기에 있다고 들 었는데."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걔랑 사전에 약속 잡아두지 않았어?" "그, 그건…." 정곡을 찔린 예안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흐음 역시 거짓말인가. 근데 좀 의외네. 이런 애가 김혜인 같은 여 자애 팬일 줄이야.' 예안이 김혜인의 팬인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거라 생각한 성수는 좀더 사근사근하게 대했다. "오늘 스케쥴상 걔는 여기에 없어. 지금쯤 사진 촬영한다 어쩐다 해 서 제주도에 있을 걸? 걘 지금 막 뜨기 시작한 신인이라 영화 촬영 끝났다고 해서 쉴 틈이 없거든. 다음 달에 걔가 출연한 영화 개봉하 는 거 알지?" "아, 네. 여기에 없는 거군요." 있을 줄 알고 무작정 찾아왔는데 없었다. 예안은 몹시 서운해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분명히 오늘 있는 줄 알았는데…." "잘못 알고 찾아왔구나. 근데 그런 건 어디서 들었어?" 예안은 당황했다. 차마 자칭 천하무적 시스템이라 외치고 다니는 녀 석한테 물어봐서 알았다고 대답할 순 없지 않은가. "재주껏 알았어요. 어쨌든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니콜… 아니, 차성 주. 그만 가자." 예안은 그만 가려고 니콜라스를 떠밀었다. 순간 성수가 얼른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지금 뭐하시는 거죠?" 예안은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성수는 냉담한 반응 에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특별히 바쁜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차 한 잔 하는 게 어때? 이대로 그냥 가는 거 아쉽지 않아?" 이런 속물들의 접근은 이제 지겹다 못해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예 안은 속으로 이를 바드득 갈며 힘껏 손을 빼냈다. "자기가 나름대로 인기 연예인이라고 자랑하면서, 처음 보는 사람한 테 차 한 잔 같이 하자고 권할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아요?" "시간은 항상 빠듯하지만 너 같은 미인한테 내줄 시간은 얼마든지 있지." "미안하지만, 전 저보다 어린애랑은 차 같은 거 안 마셔요." "무슨 소리야? 아무리 봐도 넌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꼭 나이가 많아야만 어른인 건 아니죠. 나이는 많아도 어른값 제대 로 못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에요." 여자한테 치근대지 말고 나이값이나 하라는 소리였다. 예안은 그에 게 잡혔던 손목을 불쾌한 얼굴로 툭툭 털면서 모자를 썼다. "그만 가자 차성주." "자, 잠깐만…." 성수는 황급히 예안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니콜라스와 눈이 마주 친 순간 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 을 것 같은 살기였다. 얼어버린 그는 입을 열지 못했다. 시베리아에 떨어진 것처럼 몸이 달달 떨렸다. 니콜라스는 훗 하고 비웃으며 성수에게 낮게 속삭였 다. "사람을 잘 구별하고 접근해. 너 같은 하찮은 광대와 누나가 어울린 다 생각해?" 니콜라스는 새파랗게 질린 성수를 한껏 비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 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가 성수를 겁주는 걸 지켜보던 예안은 쿡 쿡 웃으며 말을 걸었다. "너 사람 겁주는 거 디게 잘하는구나." "청부업자 인생은 헛산 게 아니거든." "과거 경력이 자랑스러운가 보네.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창피할 것도 없어." 예안은 깔깔 웃으며 정문으로 향했다. 그때 도어가 열리며 커다란 챙이 달린 모자를 쓴 소녀가 들어섰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소녀는 이윽고 얼굴이 환해지며 이쪽을 향해 뛰어왔다. "앗." 때마침 예안은 열쇠고리를 떨어뜨렸다. 그녀가 허리를 숙임과 동시 에 소녀가 스쳐지나갔다. 그 바람에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했 다. 열쇠고리를 주워든 예안은 몸을 바로 세웠다. "쳇. 아무래도 열쇠 고리 바꾸는 게 좋겠다." "그냥 지문인식 장치 달면 열쇠 같은 거 필요 없잖아. 그거 돈이 얼 마나 든다고 안 다는 거야?" "실수로 손가락 같은 것에 상처 나면 안 먹히잖아." "그럼 홍채 인식 장치로 바꾸면 되잖아." 예안은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며 열쇠고리를 주머니 에 집어넣었다. 그때였다. "매니저 오빠!"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예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나 안 늦었죠? 휴우. 다행이다." 예안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마음 속에서 무언가 툭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돌리는 게 왜 그렇게 힘이 들었는지. 아직도 과거를 마주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단 말인가. 챙 넓은 모자를 쓴 소녀가 한 남자와 마주선 채 대화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예안은 자신도 모르게 소녀를 향해 한 걸음 떼어놓았다. 그리고 소녀의 얼굴을 확인한 순 간 예안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눈을 비 비고 다시 살폈다. 분명히 혜인이었다. 그 순간 마음이 녹아 내리는 것만 같았다. 목구멍 가득 후회가 울컥 하며 올라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휴우. 교통 체증이 엄청 심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까딱하다가는 약속 시간에 못 맞췄을 뻔했지 뭐예요." 혜인의 귀여운 미소를 눈동자에 담는 순간 예안은 가슴을 움켜쥐었 다.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아직 초봄인데도 날씨가 굉장히 덥네요. 올해는 여름이 정말 장난 아니게 덥겠다." 활기에 가득 찬 혜인의 음성이 전부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찌르고 들 어왔다. 아팠다. 너무 아팠다. '혜인아.' 뛰어가고 싶었다. 소리쳐 부르고 싶었다. 그녀를 와락 껴안고 싶었 다. 하지만 발이 바닥에 붙기라도 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삼일 후에 제주도로 가는 거 알지? 준비 단단히 해뒀어?" "에이, 무슨 해외 여행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자꾸 묻고 그러 세요? 걱정 마세요, 제가 무슨 국내 여행 한 번도 안 해본 애도 아 니고." "비행기 이륙할 때 괜히 고막이 멍하다고 소란 피우는 애들 있거든. 혹시 너도 그럴까 봐서." "무슨 제가 비행기 한 번도 안 타본 앤 줄 알아요?" 너무 오랜만에 보는 혜인의 얼굴은 무척 밝았다. 헤어지기 전 마지 막으로 보았던 슬픔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해맑은 미소 사이에 숨겨진 아픔까지 감추어지지는 않았다. "누나?" 불안함을 느낀 니콜라스가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예안은 돌아 보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혜인에게 머물러 있었다.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일단 이번에 찍은 영화만 초대박 나면 좋을 텐데 말이야. 그럼 당장에 너 톱스타 급으로 뛰어오를 테니까." "저 연기 경험도 별로 없는데 그럴 리가 있겠어요? 전 부디 쪽박만 안 찼으면 좋겠어요. 감독님하고 스태프 분들에게 굉장히 미안하잖 아요." 혜인은 좀처럼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예안은 그녀를 향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가 힘없이 떨어뜨렸다. 소리쳐 그녀를 부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예안은 씁쓸히 등을 돌렸다. 가죽모자를 쓰고 다니는 게 참 다행이 었다.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가는 들켰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녀 는 주머니에서 열쇠고리가 다시 떨어진 것도 모른 채 걸음을 떼어놓 았다. "잠깐 요앞 편의점에 갔다 올게요. 아침을 못 먹었더니 배고파 죽을 것 같아요." "그래." 정문을 향해 총총총 걸음을 옮기던 혜인은 떨어져 있는 열쇠고리를 발견했다. 의아한 얼굴로 그것을 집어든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앞쪽을 쳐다보았다. 모자를 쓴 소녀와 어린 소년이 막 정문을 나서 려 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혜인은 한달음에 그들 앞으로 달려갔다. 깜짝 놀라 뒤돌아본 예안은 얼른 모자를 숙여 얼굴을 가렸다. 그녀 앞에 도착한 혜인은 가쁜 숨 을 몰아쉬며 열쇠고리를 내밀었다. "이거 떨어뜨리신 거 아니에요? 저쪽에서 주웠는데." 예안은 숨이 막혀 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 서 있던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열쇠고리를 받아들었다. "고…맙습니다." 애써 목소리를 낮췄는데, 설마 알아차렸을까? "와, 머리카락 빨갛게 염색하셨네요. 제 친구 중에도 머리색깔이 이 런 애가 있는데." 다행히 혜인은 알아보지 못했다. 활기에 찬 그녀의 목소리에 예안은 괜히 눈물이 났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바이바이." 혜인이 먼저 나간 뒤, 한참 동안 열쇠고리를 만지작거리던 예안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좋아 보여 다행이야.' 혜인이 사라진 방향을 눈으로 쫓던 예안은 힘든 미소를 지으며 걸음 을 옮겼다. 불안한 얼굴로 서 있던 니콜라스는 잠자코 뒤를 따랐다. 직감적으로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좋다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직 난 바보인 것 같아. 용기가 많이 생겼다 생각했는데.'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혜인의 앞에 서자마자 나약한 유 진우로 되돌아가 버렸다. 이제 떳떳이 그녀를 만날 수 있을 지도 모 른다 은근히 기대했지만, 보이지 않는 단절의 끈은 아직도 악몽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얼마예요?" "만 오천 원입니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거스름돈을 챙긴 혜인은 종이 봉투에 가득 담긴 먹거리를 들고 편의 점을 나섰다. 아직 신인이라서 얼굴을 가리지 않아도 알아보는 사람 이 없지만 서운하진 않았다. 자신의 힘으로 여기까지 해냈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중요한 사실이었다. "이거 갖고 되려나 모르겠네. 현수 오빠하고 대식이 오빠랑 충석 오 빠 식성이 장난 아닌데 말이야. 설마 이번에도 잠깐 자리 비운 사이 에 내가 먹을 것까지 다 먹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가벼운 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걷던 혜인은 횡단보도 앞에 섰다. 강한 햇살을 가려보려 이리저리 모자의 각도를 바꾸던 그녀의 눈이 문득 길 건너편으로 향했다. "와, 머리를 하늘색으로 염색하고 다니는 사람이 다 있네." 하늘색 머리카락을 지닌 또 다른 한 사람을 떠올리며 혜인은 씁쓸히 미소지었다. "웬만큼 대담하지 않으면 저렇게 못하는…데…?" 소녀의 옷차림을 확인한 순간 혜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 저 사람 조금 전에 열쇠고리 떨어뜨렸던 사람 아냐? 근데 아까 는 머리가 빨간색이었는데…?" 멀어서 얼굴을 확인할 순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 순간, 혜 인의 뇌리에는 오직 단 하나의 이름만이 스쳐지나갔다. "이럴… 수가…." 비틀거리던 혜인은 그만 종이 봉투를 떨어드렸다. 식빵과 우유 등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흩어졌다. 옆에 서 있던 중년 여자가 호들갑을 떨며 주워 주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오로지 길 건너편 예안에게 머물러 있었다. 눈물이 맺혔다. 숨이 가빠 왔다. 혜인은 강한 어지러움을 느낀 채 비틀거리다 가로수에 몸을 기댔다. "어떻게… 어떻게…." 당장 뛰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빨간 불이었다. 어쩔 수 없이 발만 동동 굴렀다. 이윽고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자마자 혜인은 쏜살같이 내달았다. "어, 학생? 이거 안 가져 가?" 중년 여자가 소리쳐 불렀다. 하지만 혜인은 못들은 채 무작정 뛰었 다. 예안이 들어간 길에 당도한 그녀는 잠시 멈추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쪽에서 예안이 택시에 오르고 있었 다. "잠깐만! 잠깐만!" 혜인은 숨을 헐떡거리며 뛰어갔다. 그러나 택시는 벌써 출발해 버렸 다. 허탈함에 취한 그녀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머리 속이 엉망이었다. 어째서 예안이 자신을 찾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진우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단 말인가. 불길한 상상이 머리를 스친 순간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껴 울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70 회] 날 짜 2004-05-07 조회 / 추천 2750 / 35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태동 그 날 저녁 내내 예안은 머리 속이 엉망이었다. 그 좋아하는 아기를 껴안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택시를 뒤쫓아오 다 지쳐 주저앉아 엉엉 우는 혜인의 모습이 망막에 각인된 채 좀처 럼 지워지지 않았다. 또다시 혜인을 울린 자신이 한심했다. 동시에 자신이 그녀에게 그만 큼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걸 기뻐했다. 기뻐하는 자신을 다시 경멸했다. 혜인보다는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더 중요시한다는 사실 에 예안은 강한 자기 혐오를 느꼈다. 이제 혜인을 만나러 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도대체 그 여자랑 무슨 사이인 거야?' 니콜라스는 삶을 포기한 노인처럼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는 예안이 몹시 걱정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물어도 그녀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는 기다리다 보면 나아질 거라 애써 생각하며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고 보니 며칠 남지 않았어. 이제 드디어 제임스 해론을 볼 수 있는 거야.' 제임스 해론이 한국에 온다는 사실을 접한 이후 니콜라스는 아무것 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어서 어서 흘러 그 날이 되기 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때 전화가 왔다. 예안은 멍한 얼굴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나 아저씨야. 그동안 잘 지냈니?」 춘식의 목소리를 확인한 순간 예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의 머리 속에 남아 끊임없이 괴롭히던 혜인의 모습이 순식간에 지워지 고 냉철한 이성이 대신 자리잡았다. 정호가 안방에 있는 걸 확인한 그녀는 안심하고 말했다. "어쩐 일이세요?" 「휴우. 간신히 이 교수랑 약속 날짜를 잡았어. 조만간 그 사람에게 디스크를 보여주고 협력을 얻어낼 생각이란다.」 "그거 잘 됐네요. 근데 디스크가 우리 손에 넘어온 게 도대체 언제 적 이야기인데 이제 겨우 약속을 잡으신 거예요?" 「나도 힘들었다구. 이 교수 이 인간이 당최 내가 찾아갈 때마다 집 에 있지 않으니 사람 환장할 노릇 아니냐? 그나마 겨우 약속 잡은 것도 신의 도우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야.」 "어쨌든 간에 잘 됐네요. 저도 근래에 여러 가지 일들에 치여 살다 보니 정신이 없었어요. 하여튼 앞으로도 잘해주세요, 아저씨." 「그래. 걱정하지 마.」 예안은 전화를 끊은 뒤 생각에 잠겼다. 춘식 덕분에 비로소 진지하 게 사색할 여유가 생겼다. '일단 가장 시급히 처리해야 할 게 바로 그 연구소장 취임 건인가? 뭐 그거야 유니콘이 지가 알아서 일한다고 했으니까 난 허수아비 노 릇만 잘해주면 되겠지.' 그 건에 대해서 이미 그녀는 처음부터 무의식적으로 답을 내려두고 있었다. 그동안은 그 답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시간에 불과했다. '너무 바빠서 혜인이 걱정할 시간도 없네. 참 비참하다 이거.' 다시 혜인을 떠올린 예안은 어이가 없어 쓰게 웃고 말았다. 넋을 잃 을 정도로 혜인에 대해 몹시 걱정하고 있었던 주제에, 춘식의 목소 리 한 번 듣고 재빨리 걱정에서 발을 빼낸 자신이 이질적으로 느껴 졌다. 사고의 영역을 마음대로 바꾸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 히 좋은 능력이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쾌감까지 일으켰다. 하지만 그게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가식적으로 감정을 꾸미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때마다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곤 했지만, 앞 으로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게 더 좋을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중현은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는 예안의 전화 를 받고 아침부터 서둘러 차를 끌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도착했다 고 전화하고 난 뒤 잠시 후 그녀가 나왔다. 안색이 몹시 좋은 걸 보 고 그는 내심 안도했다. 좋은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결정하신 것 같군요." "네. 소장 자리 맡기로 했어요. 어차피 저한테 나쁠 건 없잖아요? 기왕이면 저도 제 능력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하는 게 좋을 테니까. 정보력도 필요하고 말이죠." 중현은 뛸 듯이 기뻤지만 꾹 참았다. 예안에게 어른의 듬직한 모습 을 보여줘야 했다. "엄마가 기분이 좋으니 아기까지 기분이 좋은 것 같군요. 예안씨와 아기, 참 행복해 보여요." 거기에 내가 끼어 들 순 없습니까. 무심코 그렇게 말할 뻔했던 중현 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당황을 아무도 눈치 못 챈 걸 확인 한 그는 안도하며 엑셀을 밟았다. 그들을 태운 차는 이윽고 청와대에 도착했다. 손님이 손님인지라 간 단한 검문만으로 통과되었다. 예안은 중현의 안내를 따라 건물 안으 로 들어섰다. 복도에는 경호원들이 엄중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전 에 한 번 와봤던 곳이라 그녀의 걸음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죄송하지만 니콜라스씨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저를 따라 오시지 요." 니콜라스는 반사적으로 예안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그러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중현을 따 라 휴게실로 갔다. 예안은 혼자 집무실에 들어섰다. 안에는 여러 명의 장관들과 김영환 대통령이 원형 탁자를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그녀가 안에 들어서자 마자 그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진지한 기도가 방안 가득 흘렀 다. "안녕하세요." 예안이 활기찬 음성으로 정적을 깼다. 그녀를 처음 보는 장관들은 홀린 듯 쳐다보고 있다가 헛기침을 하며 정신을 차렸다. "대통령님, 이 분이 프랭크 안쏘니 유젤입니까?" 영환은 흐뭇하게 끄덕였다. 김 장관은 놀란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예안을 확인했다. 그의 눈동자는 경악에 가득 차 있었다. 초과학적 기술의 결정체를 만들어낸 천재 과학자가 이렇게나 젊은 여자였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예안에 대해 대충 어느 정도 들어 알고 있었지 만 직접 보니 그 놀라움이 더 했다. "저와는 초면이 아니죠? 그런데 그 아기는 뭐지요? 동생입니까?" 국방부 장관이 호기심에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국정원장을 제외한 다른 장관들도 얼굴에 궁금함이 가득했다. "제 아이인데요." 아무렇지도 않은 대답이었지만 그들은 뛸 듯이 놀랐다. 분명히 18살 이라고 들었는데, 무슨 벌써 아들이 있단 말인가. 영환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여러분들이 놀라는 건 십분 이해합니다. 하지만 자기 생각만 확고 하다면 몇 살에 애엄마가 되느냐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아닐 까요? 사적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얼른 주제로 넘어갑시다." 영환은 김 장관에게 시작하라는 눈치를 보냈다. 아기에 대해 잔뜩 궁금함을 보이던 그는 브리핑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 라면 부하에게 시켰어야 하겠으나 예안의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가 해야 했다. "현재 전라도에 건설 중인 국립과학연구소의 총 부지는 710만 평입 니다. 각종 최첨단 시설과 편의시설, 숙박시설들이 들어서게 될 것 이며 인근지역에 대한 가치 창출 효과는 수 조 원을 넘어서리라 예 측됩니다.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고속도로와 고속전철이 깔릴 것 이며 인천 공항의 세 배 규모가 넘는 공항 또한 들어설 것입니다. 21세기 이후 대한민국의 과학을 주도할 발판이 전라도 지역에 깔리 게 되는 것이죠." 영환은 어떠냐는 시선으로 예안을 흘끔거렸다. 그녀가 감탄을 감추 지 못하자 그는 속으로 몹시 흐뭇해했다. 과연 그녀가 소장 취임 건 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할지 기대되었다. 브리핑이 끝난 후 침묵이 찾아왔다. 기대와 호기심에 찬 시선이 예 안에게 쏠렸다. 아기를 어르고 있던 그녀는 천천히 주변을 훑어보았 다. 자신이 어떤 대답을 해주느냐에 따라 이들의 희비가 결정될 거 라 생각하니 우쭐한 기분까지 들었다. "대통령 할아버, 아니, 각하의 제안 받아들이기로 할게요." "오오!!" 그들 모두는 뛸 듯이 기뻐했다. 나름대로 자신하고 있었지만 정말 예안이 제안을 받아들일 줄 확신할 수 없었던 영환도 한시름 놓은 채 기뻐했다. "자, 이제 국방부와 국정원장만 남고 모두 나가주시기 바라오. 유젤 박사에 대해서는 철저히 기밀에 붙여야 한다는 건 다시 말하지 않아 도 알겠지요?" 기쁨이 어느 정도 진정된 후 영환이 묵직한 말투로 말했다. 지명 당 한 장관들만 제외하고 모두 나간 뒤 예안은 지루해 죽겠다는 얼굴로 하품했다. "재미있었니?" "설마요. 끔찍해 죽는 줄 알았어요. 이런 자리인 줄 알았음 그냥 전 화로 대답만 해줄 걸, 괜히 왔나 봐요." "나중에 권력을 잡게 되면 이보다 더 지루한 일도 많을 텐데 벌써부 터 그러면 어떡하니?" "권력요? 그딴 거 안 해요 안 해." "그럼 무료로 소장 자리 맡겠다는 거니? 그러면 뭐 우리야 좋지." "쳇. 그냥 제가 익숙해질 수밖에 없네요. 무료봉사 할 순 없으니." 지루하다는 듯 아기가 크게 하품했다. 예안은 아기 볼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댔다. "보세요 보세요. 우리 아기도 지루하다고 하잖아요?" "아기가 참 귀엽네. 이름이 뭐니?" "유빈이에요. 서유빈.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예안은 아기만 있으면 좋다는 얼굴로 뺨을 비벼댔다. 사랑스러운 아 기와 눈부신 미소녀 엄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스해지는 광경이었다. "힘들겠구나." 영환은 미소를 지은 채 무겁게 말했다. 아기를 쓰다듬던 예안의 손 이 멈칫했다. "애 아버지 없이 엄마 혼자 애 키우는 게 쉬운 건 아니지. 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돈으로 전부 다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예안은 고개를 숙인 채 아기의 뺨만 어루만졌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힘들면 언제든지 말 하렴. 뭐든지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줄 테니까." 예안은 씁쓸히 끄덕였다. 유젤의 모습이 다시 생각나 마음이 몹시 아파 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지워지지 않는 고통스런 그리움. 그 것은 어차피 그녀 혼자 짊어지고 가야 할 몫이었다. 영환은 화제를 바꾸었다. "사실 정말 소장 자리 받아들일 줄은 몰랐어. 네 연락 받았을 땐 혹 시 거절하려고 그러는 게 아닐까 하고 가슴이 다 콩닥콩닥했거든." "정보력이 필요했거든요. 권력은 그다지 바라진 않지만 있는 게 좋 을 것 같았구요. 그리고 유전 때문에 한국 경제가 주춤하게 된 건 제가 어떻게 해서든 메워 줘야하지 않겠어요? 그래야 저도 마음이 한결 편할 테구요." "하여튼 잘 생각했어. 앞으로 잘 부탁해요, 서 소장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두 사람은 미소지으며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둘을 지켜보던 장관들 도 기쁜 듯 손뼉을 짝짝 쳤다. "이제 쭉쭉 올라갈 일만 남았군요. 앞으로 우리나라 과학이 얼마나 발전할지 눈앞에 선합니다. 이제 다른 나라들은 우리나라 쫓아오는 것도 힘겨워하겠지요." "힘겨워하다니요. 쫓아올 엄두조차 못 낼 겁니다. 격차가 얼마나 심 한데 감히 따라올 생각을 한단 말입니까?" 두 장관은 인간을 초월한 과학자니 뭐니 하면서 예안을 한껏 치켜 주었다. 그녀는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었을 뿐 속으로는 쪽팔려 죽을 지경이었다. 열역학 제1법칙이 뭔지도 모르는 불쌍한 사람을 연구소장으로 받아들인 저 사람들이 불쌍하기까지 했다. "사실 연구소장 자리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 부득불 여기까지 오라고 했단다. 이것을 좀 보겠니?" 영환은 서류를 내밀었다. 의아해하던 예안은 그것을 받아들고 몇 장 뒤로 넘겨보았다. 거기에는 놀라운 사실이 적혀 있었다. 눈에 띄게 표정이 굳어진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영환을 돌아보았다. "거기 쓰여져 있는 대로야. 미중일의 움직임이 현재 몹시 심상치 않 아. 아무래도 뭔 일이 일어나기는 일어나려는 듯 싶어." 보고서에는 미국, 중국, 일본의 연합적인 움직임에 대한 상세한 설 명이 기술되어 있었다. 각각 독자적인 군사훈련을 벌이는 척 하던 세 나라들이 본격적으로 한국을 압박하는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국민들의 혼란을 우려해 아직 언론에는 발표하지 않았어. 비공식적 으로 항의해 봤지만 군사훈련이라고만 핑계를 대더군. 어이없는 일 이지." 예안은 어이가 없어하며 계속 보고서를 넘기다 멈칫했다. 그제야 왜 영환이 이것을 자신에게 보여주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근데 이거 국가 기밀이잖아요? 아무리 제가 연구소장 자리를 맡기 로 했다지만 이런 걸 함부로 보여주셔도 돼요?" "어차피 넌 대한민국의 최고급 기밀을 알고 있잖아?" "네? 뭘요?" "맥 말이야, 맥." 예안은 머쓱해졌다. 냉철히 생각해보니 자신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대한 기밀을 알고 있고, 또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지금부터 좀더 커다란 걸 보여주려 했어. 근데 고작 이 정 도에 놀라면 내가 너무 서운하지 않겠니?" 예안은 의아했다. 대통령은 그녀가 얼마나 놀랄지 은근히 기대하며 설명했다. "한 달 전, 제1비행대대의 최종 편제를 끝냈다." "?" "해군에서 맥이 서게 될 자리를 만들었단 소리야. 이제부터 맥은 대 한해군 소속 이순신 항모의 제1비행대대 대장기로서 활동하게 될 거 야." 비로소 예안은 영환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바야흐로 맥이 정규군에 편입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맥이 하늘을 쇄도하며 적군을 제압하는 모습을 상상한 예안은 흥분 한 나머지 주먹을 꽉 쥐었다. 가슴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음. 내일하고 낼 모레도 한편씩 더 올릴게요. 주중에 너무 뜸했으니.;;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71 회] 날 짜 2004-05-08 조회 / 추천 2755 / 76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태동 뜨거운 햇살이 갑판 위로 내려 쪼이고 있었다. 처녀 항해 경험이 없 는 이순신 항모 위로 수십 기의 전투기들이 즐비해 있었다. 날씬한 몸체 가득 눈부신 빛을 내뿜는 그것들은 실로 아름다웠다. 박재형 대령은 착잡한 눈으로 항모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맥을 대장기로 하는 제1비행대대의 훈련이 있는 날이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맥이 이륙할 일은 없었다. 한국군에는 아직 맥의 파일럿이 탄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박재형 대령. 자네 지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나?" "기, 김 준장님!" 느닷없이 뒤에서 상관이 나타나자 박재형 대령은 깜짝 놀라 경례를 붙였다. "자네 요즘 이상하군. 무슨 생각을 하길래 내가 몇 번이나 불렀는데 도 못 들은 겐가?" "죄, 죄송합니다. 별 것 아니었습니다." 별 것 아니었다는 말을 믿기에는 너무 넋을 빼놓고 있었다. 김준기 준장은 의심쩍은 눈으로 박재형을 이리저리 살폈다. "자네 또 그 생각하고 있었나? 왜 자네가 제1비행대대 대장이 아닌 가 하고 말이야?" 박재형은 난처한 얼굴로 대답을 회피했다. 김 준장은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내가 자네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야. 직위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뭐로 보나 자네는 누구보다 대장기를 몰 만한 인물이니까. 하 지만 생각해보게. 자네가 파일럿 훈련을 받은 지 얼마나 되었나? 이 제 겨우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잖아? 그 상태에서 자네에게 덜컥 맥 을 맡길 순 없지. 안 그래?" 박재형은 비참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는 모의 시뮬레이션에서 누구 보다 높은 성적을 내고 있는 우수한 파일럿이었다. 그러나 1등 성적 표 따위는 맥을 조종할 수 없는 현실을 위로할 수 있는 게 아니었 다. "몇 년 더 지나서 자네가 나무랄 데 없는 실력을 갖춘다면 대대장으 로 발탁될 거야. 그러니 그때까지 실력을 꾸준히 키우게." 그의 말이 맞았다. 박재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얼굴을 폈다. 당장이라도 맥을 조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고 기 다려야지 별 수 있겠는가. "그나저나 오늘 중요한 손님이 오신다고 하니 자네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두게." "손님이요?" 재형은 조금 긴장했다. 해군 대장이 방문할 때에도 중요하다는 말을 해본 적 없는 김 준장이 저런 말을 할 정도면 보통 높은 사람이 아 닌 듯 했다. "대통령님이 기지를 방문하신다." 해군기지는 오늘 중요 인물의 방문을 받아 부산해졌다. 환영식 준비 를 한답시고 온갖 욕설들이 판을 치고 돌았다. 복장이 흐트러졌다며 부하의 머리를 쥐어박는 상관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평소에 환영식 준비한답시고 훈련 시간의 대부분을 그렇게 잡아먹었음에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그들은 두 시간이 넘는 시간을 준비하는데 할애했다. 시간이 되자 대통령이 차로 도착했다. 그는 국방부 장관과 국정원장 을 각각 대동하고 있었다. 그들이 두 줄로 나열해 선 군인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자 일제히 경례가 터져 나왔다. 실로 그 모습은 장관이 었다. 군인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대통령은 웃음 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이들이 바로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지켜나갈 젊은 세대들. 말단 병사 하나 하나의 얼굴에까지 자신감이 뻗쳐 있었다. 거기에는 맥이 이곳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도 한몫 했으 리라. 멀리서 대통령 전용 헬기에 탄 채 구경하던 예안이 감탄했다. "대단하네요. 대단해요 정말." "당연하죠. 세계 최강의 전투병기가 이 기지에 배치되었는데, 사기 가 높아지지 않을 리가 있습니까? 저들에게는 자신들이 세계 최강의 해군이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예안은 기분이 좋았다. 자신 덕분에 타인이 용기를 얻는다는 것. 그 것은 선과 악의 구분을 떠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우월감 의 일종이었다. 또한 우월감은 항상 쾌감을 동반한다. "저기 이순신 항모가 보입니까? 저곳에 맥이 실려 있습니다." 중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바다에는 거대한 항모가 위풍당당하게 떠 있었다. 매끄러운 광택을 발산하는 철 구조물 덩어리. 인간이 만들 어낸 가장 값진 건축물이자 그 중에서도 가장 최신형으로 일컬어지 는 엘가와 급 항모였다. "이순신 항모라…." 예안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벅찬 흥분을 달랬다. 오랫동안 한국 민이 염원해왔던 군사무기 중 하나가 그 첫발을 내딛은 장면에 가슴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태껏 재정 문제와 주변국의 압박 등으로 소형항모 하나 건설하는 데에도 눈치가 보였죠. 이것으로 우리 해군은 세계에 내놓아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전력을 갖추었습니다. 이순신 항모는 우리나라가 처 음으로 건조한 초대형 항모입니다. 맥은 격납고 안에 들어 있습니 다." 예안은 손으로 창을 짚은 채 뚫어져라 항모를 바라보았다. 대한민국 에 있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그 항모는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왔다. "아, 그러고 보니 저 녀석도 참 기구한 팔자로군요." 의아함을 느낀 예안은 중현을 돌아보았다. "원래라면 저 녀석이 가장 화려한 진수식을 마치며 국민들의 열광을 받아야 할 팔자였습니다. 하지만 맥이 등장하는 바람에 그 모든 영 광을 다 빼앗기고, 기껏해야 신문 한쪽 자그마한 기사로나 실리게 되었죠." "훗. 그거 좀 미안하네요." 대통령 전용 헬기는 이윽고 착륙장에 내려앉았다. 그들이 헬기에서 내리고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별을 단 군인이 다가와 경례를 붙였 다. "대통령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안은 잠자코 따라갔다. 지나치게 깍듯한 태도로 보아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듯 했다. 그의 안내를 받아 어느 방에 들어가자 영환이 기다리고 있다 반갑게 맞이했다. "같이 오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직 네 얼굴을 세상에 공개해야 할 때가 아니라서 그랬다." "알아요. 근데 제1비행대대는 어디 있죠?" "지금 곧 가볼 생각이었단다. 근데 아무래도 나는 같이 가지 못할 것 같구나. 괜히 나 때문에 시선이 쏠려 네 정체가 들통나면 곤란하 잖아?" "아, 그렇네요." "석 준장하고 중현이하고 네 경호원하고 그렇게 넷이서 갔다 오려무 나.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네, 그럴게요." 석 준장은 그들을 군용차로 안내했다. 그들을 실은 차는 시원한 도 로를 내달렸다. 거센 바람에 아기가 움츠리자 예안은 몸으로 꼭 감 싸주었다. 석 준장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흘끗대다 실례라는 걸 느끼고 얼른 시선을 거뒀다. 항구에 도착한 그들은 조그만 보트 에 올라 이순신 항모로 향했다. "잠시 후 제1비행대대의 훈련이 있습니다. 물론 맥은 아직 파일럿이 선정되지 않아 참가하지 않습니다. 대장기가 빠진 채 훈련하는 터라 대원들이 조금 맥이 빠져 있긴 해도 꽤나 괜찮은 구경이 될 겁니 다." 예안은 석 준장의 설명을 들으며 사령탑으로 올라갔다. 갑판이 잘 내려다보이는 위치였다. 살아 생전 항모 지휘실에서 갑판을 내려다 볼 줄 몰랐던 예안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랬다. '베리굿하고 켈립스가 지금 날 보면 굉장히 부러워하겠지? 아아 자 랑하고 싶다, 자랑하고 싶어.' 덧붙이자면, 그들은 예안이 인터넷에서 사귄 밀리터리 매니아 친구 들이었다. 2기의 폭격기가 활주로에 올라 이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예안은 어 줍잖게 전해들은 지식을 통해 그것의 기종을 알아보았다. "저건 전투기가 아니라 폭격기네요?" "맞습니다. 제1비행대대는 39기의 폭격기와 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 다." "보통 비행대대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어요?"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맥의 기능을 볼 때 전투기는 단 한 기도 필 요 없다 생각했습니다. 전투시 맥이 단독으로 모든 적기들을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요." 예안은 그런대로 납득했지만 얼굴이 찌푸려지는 건 사실이었다. 그 녀는 처음에 비행대대라고 해서 맥 혼자 달랑 소속된 그런 걸 상상 했었다. 부하 전투기들이 폭격기로만 이뤄진 것이 그나마 나을 테지 만, 차라리 없는 것보다는 못했다. 캐터펄트가 빠른 속도로 2기의 폭격기를 밀어붙였다. 엔진의 사출력 과 캐터펄트의 압력에 의지해 띄워진 폭격기는 잠시 기우뚱하는가 싶더니 이내 하늘로 날아올랐다. 재차 다른 폭격기들이 그 뒤를 따 랐다. "이곳을 보시죠. 제1비행대대가 가상 적지로 지정한 이곳에 모의 폭 탄을 떨어뜨리러 이동하고 있습니다." 예안은 석 준장이 가리키는 레이더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말대로 출격한 폭격기들이 일정한 진형을 갖춘 채 날고 있었다. "지금 막 모의 폭탄을 떨어뜨렸군요. 전원이 귀환하고 있습니다." "실제 전쟁에서 저런 모습을 보면 참 멋지겠네요. 일단은 맥이 안 끼어 있어서 좀 아쉽긴 하지만 말이에요." 예안은 입맛을 다셨다. 그저 밋밋하게 레이더로 훈련 상황을 지켜보 는 건 마음에 차지 않았다. 보다 더 가까운 자리에서 엔진의 열기를 마음껏 느껴보고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씩 웃으며 석 준장을 돌아보았다. "맥을 출격시켜도 될까요?" 박재형 대령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제1비행대대의 첫 훈련에 맥이 참여하지 못한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 분명 자신은 모의 시뮬레이션 에서 2등이 무색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하지만 그럼 무엇하 는가. 이렇게 대장기가 빠진 썰렁한 훈련을 치르고 있는데. 이윽고 폭격기들이 귀환했다. 레이더로 그걸 확인한 그는 한숨을 길 게 내쉬었다. 그는 부하들을 만날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레이더의 반응이 이상했다. 폭격기들이 항모에 내려앉지 않고 저속 으로 다시 방향을 바꾼 것이었다. 항모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닐 까 걱정이 된 그는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그 순간 맥이 갑판으로 나왔다. 그걸 본 순간 그는 수화기를 든 그 대로 굳어버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맥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맥은 캐터펄트의 힘도 필요로 하지 않 고 혼자 솟구쳤다. 프로펠러나 로켓 추진력도 없이 조용히 수직 상 승하는 맥의 비행은 백조처럼 우아했다. 이윽고 맥은 폭격기들과 한 데 섞여 멋진 진형을 그리며 비행했다. "말도 안 돼!" 박재형 대령은 버럭 외쳤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현재 맥의 후 보 파일럿 중에서는 자신이 가장 우수한 성적을 달리고 있었다. 그 런 자신조차도 아직 맥을 함부로 조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자네, 여기 있었군." 김 준장이 뒤에서 그를 불렀다. 그는 놀란 채로 돌아보았다. "기, 김 준장 님. 도대체 저게 어떻게 된 거죠? 지금 맥이 비행한 겁니까?" "자네가 보는 그대로일세." "하, 하지만 말도 안 됩니다. 후보생 중에서 제가 가장 성적이 뛰어 나단 말입니다. 저보다 맥을 더 잘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 다. 그런데 어떻게 맥이 날아오른단 말입니까?" "자네도 지겹도록 들어봤을 거야. 맥을 만든 사람 말이야." 박재형은 깜짝 놀랐다. 이건 너무 뜻밖이었다. "서, 설마 프랭크 안쏘니 유젤이 안에 타고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그는 이미 죽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죽은 건 맞네. 하지만 그를 도와 맥을 제작했던 사람들 전원 이 죽은 건 아니지. 얄궂게도 세상에는 그 사람들의 이름이 전혀 알 려지지 않았지만 말이야." 박재형은 가까스로 자신을 진정시켰다. 숨소리는 한결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심장은 쿵쿵거리고 있었다. 냉철하기 그지없는 자신이 이 정 도인 걸 보면, 놀라도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지금 맥에 타고 있는 사람은 나이가 좀 어려. 하지만 누구보다도 훌륭한 파일럿이라고 하더군." "그럼 왜 그 사람을 정식 해군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겁니까?" "전시도 아닌데 미성년자를 군인으로 받아들일 순 없지 않나. 그리 고 저 사람은 군인이 될 생각도 없다네. 하지만 자네가 맥의 파일럿 이 되기 전에 전쟁이 터진다면 아마 저 사람이 나가 싸워야겠지." 박재형은 이를 악물었다. 맥의 파일럿이 되기 위해 지난 일 년간 뼈 를 깎는 노력을 해왔다. 자신이 폭격기에 탄 채 맥의 호위를 받아 적지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는 누구보다 자존심을 중시하는 군인이었다. "자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 그러니 혹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자 네가 어엿한 맥의 파일럿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맥이 제1비행대대 대장기로서 처음 가지는 훈련에 해군이 아닌 민간인이 탑승해 있다 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치욕일세." 박재형은 마음이 쓰라렸다. 그는 굳은 얼굴로 맥이 사라진 먼 하늘 을 응시했다. 맥이 남긴 자취를 뒤쫓는 그의 시선은 상처 입은 자존 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차피 저 사람은 민간인, 그것도 항공 과학자일세. 저 사람이 전 장에 나갔다가 만약 목숨이라도 잃게 되면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지. 그러니 자네가 하루빨리 조종술을 습득하는 게 그를 도와주는 거 야." "분발하겠습니다." 박재형은 이를 악물었다. 실탄 :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선작이 네 자리가 되지 못했군요. 아마도 다음주 안으로 될 듯 싶습니다. 그러므로 20연참을 다음주말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에덴(속마음) : 와아~ 탈고분 아직 못 모았는데 정말 다행이다 다행이야.ㅠㅠ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72 회] 날 짜 2004-05-10 조회 / 추천 2739 / 52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태동 예안은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팔을 팔꿈치까지 빨아들인 조종간 의 느낌이 모든 센서의 정보를 하나 하나씩 그녀에게 불어 넣어주고 있었다. 주변 환경을 전자 신호로 전환한 정보들이 눈앞에 환상처럼 펼쳐져 있었다. 제1비행대대는 진형을 맞추어 곡예 비행에 가깝게 날고 있었다. 실로 감탄이 나올 만한 광경이었다. 자신은 맥을 조종 하기에 최적인 육체를 지니고 있었지만, 보통 사람인 그들이 저런 멋진 비행술을 펼친다는 건 칭찬 받을 일이었다. '진짜 멋지게 잘 난다. 한국군 인재는 그 어떤 나라에도 결코 뒤지 지 않는다는 게 정말인가 보네.' '무슨 말씀입니까. 저들의 조종기술은 지극히 천박합니다.' '엑? 저게 뭐가 어때서? 멋지기만 한데?' '유젤 님이 저 폭격기를 조종하신다면 저보다 더 우아하고 아름다운 비행술을 펼치실 수 있습니다. 구인류 따위의 반사신경이 뛰어나봤 자 얼마나 뛰어나겠습니까?' 예안은 속도를 더 내며 쓴웃음을 지었다. 유니콘의 인간 비하 발언 은 언제나 할 말이 없게 만든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런 발언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됐기에 마냥 편하게 웃을 수만도 없었다. '사실 제1비행대대니 뭐니 이런 팀을 편성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그냥 저 혼자만으로 구성된 부대 하나를 만드는 게 오히려 다른 구 식 비행기들이 제 발목을 잡지 않고 좋지요.' '하지만 소위 윗대가리들이라는 사람들이 조금 꽉 막혀 있는 걸 어 떻게 하냐. 그래도 너를 제외한 다른 비행기는 폭격기로만 구성했잖 아.' '제가 저 녀석들보다 화력이 뒤떨어진단 말씀인가요?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입니다.' 예안은 할 말이 없었다. 무한동력에서 샘솟는 끝없는 에너지를 통해 반경 수천km 이상의 화염구도 가볍게 만들어내는 맥의 입장에서 볼 때 불만스러워하는 건 당연했다. 전쟁이 벌어진다면 맥이 애기 돌보 듯 저 폭격기까지 보살펴야 할 테니 당연히 화딱지가 날 것이다. '저는 혼자만으로 충분히 최고의 전투기, 최고의 헬기, 최고의 폭격 기, 최고의 핵 억지력 역할을 전부 해낼 수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에는 아예 적국의 항모가 원양으로 나오기 전, 혹은 적국의 핵미사 일이 영해에 들어오기 전에 격침시키거나 격추시킬 수도 있죠. 그리 고 적국을 불길로 덮어버리는 겁니다.' '그래그래, 너 잘났다.' 예안은 투덜거리며 고도를 좀더 낮췄다. 그때였다. '12-13 좌표 부근 해저 1500미터 지점에 잠수함 한 척이 포진해 있 습니다. 한국군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잠수함입니다.' 뜻밖의 상황에 처한 예안은 당황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여기는 한국 영해잖아?' '타국의 인식코드까진 알지 못하기에 정확한 국적을 추정할 순 없습 니다만, 모델이 CSNN-23 핵잠인 것으로 보아 일본이나 중국 소속인 듯 싶습니다.' '모델? 그런 것도 알 수 있냐? 너 참 대단하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100km, 260km, 510km 떨어진 지점에도 각각 잠 수함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CSNN-23 급입니다. 아마 네 척 중 한 척은 국적이 다른 듯 싶습니다.' '흠. 어떻게 하지?' '가장 멀리 있는 잠수함을 제외하고는 전부 영해 안에 숨어 들어와 있습니다. 격침시킨다 해도 국제법상 잘못된 건 없습니다.' '격침시키라구? 나보고?' 예안은 질겁했다. 그건 곧 사람을 죽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현대전은 게임입니다. 정치와 무력이 하모니를 이뤄내는 게임입니 다. 비유하자면 정치인들은 게임을 컨트롤하는 게이머이고, 장교들 은 약간의 자기 판단권을 지닌 고급 유닛, 일반 병사들은 수동적으 로 명령을 받아들이는 저급 유닛 정도가 되겠지요.' 맥을 잠시 뜸을 들인 후 못을 박듯 말했다.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상대를 쓰러뜨리 는 것입니다.' 살인의 정당화는 마약처럼 달콤하다. 범죄 조직의 두목은 첫 살인으 로 괴로워하는 부하를 위로하기 위해 악마보다 더 매끈한 혀를 손에 넣으려고 노력한다. 바로 지금의 맥도 그랬다. 맥의 기계음성은 바 위처럼 단조로웠지만 그 속에는 달콤한 꿀을 감추고 있었다. 예안은 맥의 논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녀석은 이런 식으로 항상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자신을 조금씩 변화시키려 한다. 그러나 더 마 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로 녀석의 꼬임에 거부감 없이 모른 체 하며 넘어가 주려는 자신이었다. '시트날타 소속은 아닌 듯 싶습니다. 아직도 제 힘을 모른 채 설치 는 녀석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격침시키는 게 좋습니다.' '하지만…. 일단 물어봐야겠어.' 예안은 한참을 망설이다 통신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사령부와 연결 되었다. 「무슨 일인가?」 "석 준장님. 지금 제가 아주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했어요 오버." 예안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녀가 손녀처럼 귀엽게 느껴진 석 준장 은 그만 소리 없이 웃어버렸다. "지금 제가 있는 곳 근처에 활동 중인 아군 핵잠수함이 있나요? CSNN-23급이에요." 뜻밖의 말에 석 준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그 근처 해역에서 활동 중인 잠수함은 없는데? 게다가 우리 해군은 CSNN-23급은 쓰지 않아.」 "그럼 적 잠수함이 확실하군요. 어떻게 할까요? 맥은 저보고 지금 잠수함들을 요격시키라고 계속 조르고 있는데요?" 「잠깐 기다려. 그런 건 함부로 처리할 만한 사항이 아니야. 일단 상부에 보고를 할게. 아, 그리고 이럴 땐 요격이 아니라 격침이라고 말하는 거야.」 그 순간 모니터에 붉은 점이 반짝였다. 곧바로 경고음이 뒤따랐다. '가장 근처에 있는 두 척의 핵잠에서 6기의 FIRE-2가 발사되었습니 다! 핵탄두를 탑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거리 90km!' 예안은 새파랗게 질렸다. 충분히 막아내거나 피할 수 있었지만 군사 적인 접촉은 태어나서 처음이었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서, 석 준장님! 지금 큰일났어요! 원잠들이 미사일을 발사했어요! 으아악! 저 죽어요!" 「뭐, 뭐야?」 석 준장은 크게 당황한 채 지시를 내리려 했으나 입이 안 움직였다. 맥의 기능에 대해 아는 게 없어 버벅대던 그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채, 채프를 발사해!」 "그, 그런 거 없어요!" 「그, 그럼 디코이를 발사해!」 "맥은 잠수함이 아니라구요!!" 얼마나 당황했으면 하늘을 날고 있는 놈한테 디코이를 발사하라는 명령까지 내렸겠는가. 어쩔 줄 몰라하던 예안은 간신히 안정을 되찾 고 비행대 전체에 명령을 내렸다. "모두 기수 돌려 기지로 돌아가!!" 일단 명령을 하나 내리고 나니 정신이 보다 맑아졌다. 미사일이 맥 의 속도를 쫓아오지 못하는 걸 확인하니 한결 더 안심이 되었다. 미 사일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다소 초조함을 떨친 예안은 이제 어떻게 하나 궁리했다. '어떻게 하지?' '미사일 몸체에 이상이 생길 경우 그 즉시 폭발하도록 세팅해놓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라이플 버스터를 준비하십시오. 핵 폭발력 이상 의 화력으로 날려버리는 게 가장 좋습니다.' '알았어. 그게 좋겠다.' 예안은 급히 정지한 뒤 방향을 180도 바꿔 미사일을 향해 라이플을 겨누었다. FIRE-2는 핵잠수함 전용 핵미사일. 맥의 요격 능력을 고 려한 적군은 일반 핵미사일과는 달리 안전 장치를 세팅해두지 않았 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다. 그렇다면 아예 통째로 날려버리는 게 가장 좋았다. '조준 완료.' 신중하게 디스플레이를 주시하던 예안은 발사 버튼을 눌렀다. 이윽 고 눈부신 빛의 기둥이 쏟아져 나왔다. 곧바로 공중에서 엄청난 폭 발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폭발력은 모조리 라이플 버스터 포의 에 너지에 밀려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단 한 조각의 방사능 구름 조각도 거기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예안은 잠시 동안 맥을 공중에 세운 채 자신이 만든 결과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바다 표면에 일어난 거센 흐름이 수평선 너머를 향해 사자처럼 맹렬히 달려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녀가 멍하니 시선을 빼앗기고 있을 때, 귀환 중이던 폭격기 한 기가 무전 을 보내 왔다. 「훌륭합니다. 대장 님.」 예안은 퍼뜩 놀랐다. 그녀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대답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앞만을 보았다. 「언젠가 다시 한 번 대장님과 같이 하늘을 누벼보고 싶습니다. 그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난 대장이 아닌데요? 예안은 엉겁결에 그렇게 대답하려 했 으나 맥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해군기지는 난리법석이 되어 있었다. 중현은 예안에게 어디 다친 곳 은 없느냐고 수선을 떨었다. 석 준장을 비롯하여 대거 소환된 장성 들이 모두 그녀를 걱정했다. 그녀는 어떻게 된 거냐고 쏟아지는 질 문에 정신이 없었다. "분명히 CSNN-23급이었다고 했니?" "우리나라 영해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허허, 이런 지독한 놈들 을 다 보았나!" "FIRE-2를 발사했다고? 맙소사, 그것은 핵잠수함 전용 핵미사일이잖 아!" "도대체 어떤 빌어먹을 녀석들이야? 쪽바리 놈들? 떼놈들? 아니면 양놈들인가?" "당장 그들에게 항의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명백한 선전포고요!" 그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타국의 원잠이 영해까지 쳐들어와 핵 미사일을 날렸다는 건 위험이고 자시고를 떠나 군인에게 있어 크나 큰 치욕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큰 일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그 지경까지 일을 방치해둘 수 있냐는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 다. "그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지금 막 들어온 보고입니 다." 중현은 걱정스런 얼굴로 보고서를 펼쳤다. 장성들은 일제히 숨을 죽 였다. "유감스럽게도 예안씨가 발포한 라이플 버스터 포로 인해 엄청난 파 도가 일어나 시마네, 토토리, 교토, 이시카와 지역에 해일이 덮쳤습 니다. 내륙 쪽에 가까운 교토는 다른 세 지역보다 그 피해가 적었다 하나, 그 외의 지역은 당장 피해가 얼마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 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합니다." 장성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게 사실이라면 아무리 이쪽이 영해침범에다가 핵미사일이라는 선물까지 받았다 한들 불리한 입장 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는 곳은 일본의 침수 지역일 것이다. "큰일입니다. 정보원에서도 이 일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 을 못 잡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침체되었다. 초상이라도 난 것만 같았다. 어두운 안색이 가득한 장성들의 얼굴에 몹시 걱정을 느낀 예안은 조심스레 물었다. "저, 중현 아저씨. 제가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거예요?" 중현은 그윽한 눈으로 예안을 바라보았다. 큰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 럼 풀이 죽어 있는 그녀가 몹시 안쓰러웠다. "아니오. 예안씨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운이 나빠 녀석들의 함정에 빠졌을 뿐입니다." "남의 영해에 제멋대로 들어와 핵미사일까지 발사한 건 그 녀석들이 잖아요? 근데 왜 우리가 이렇게 쩔쩔매야 하죠?" 예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저들의 선제 공격, 그것도 핵 공격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자위수단이었지 않은가. 그 런데 어째서 우리가 이렇게 걱정해야 한단 말인가. "그들이 일본이나 중국의 소속이라는 증거가 없습니다. CSNN-23급 잠수함이라는 것만 예안씨가 말씀해주셔서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 리고 CSNN-23급은 중국과 일본말고도 쓰는 나라가 꽤 있습니다." "하, 하지만…." "원래 국제사회라는 건 그러한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나 라가 몹시 난처한 입장에 처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걱정인 건, 이 일로 인해 국민들이 맥에 대해 반감을 갖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엣?"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예안은 크게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 어났다. 그 바람에 아기가 울음을 터트렸지만 그녀는 아기를 달래줄 여유조차 없었다.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순 없습니다. 이번 일로 인해 우리나라가 국 제사회에서 고립 당하면 산유국이라 해도 고달파지는 건 당연합니 다. 그렇게 되면 국민들은 이 모든 게 맥 때문이라고 돌려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대중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이니까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요! 일본 녀석들이 먼저 뻔뻔하게 침 범해놓고 그러는 건데 무슨 권리로 큰 소리를 치는 거래요? 만약 그 녀석들이 끽소리라도 했다가는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예안은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외쳤다. 장성들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씩씩대는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의 심정이 어떨지 잘 알 고 있었지만 선뜻 위로의 말을 건넬 순 없었다. 앞으로의 일을 걱정 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듯 했기 때문이었다. 그 날 저녁 일본이 입은 피해의 대략적인 통계가 나왔다. 사망자는 100명도 되지 않는 적은 수였다. 해일의 규모에 비해 볼 때 극히 미 미한 수치였다. 그러나 부상자의 수치는 대단했다. 거기다가 천문학 적인 재산 피해를 보탠다면 피해규모는 엄청났다. 한국은 그 모든 피해를 돈으로 갚아줄 자금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 런 행운을 잡은 일본이 순순히 넘어가 줄리 만무했다. 게다가 시트 날타의 깃발 아래 모종의 계획의 일석을 담당하는 일본이었기에 더 욱 그러했다. 한국은 세계 언론에 이 모든 건 사고이며,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적 극 호소했다. 그러나 비밀리에 일본과의 합의를 끝내고 한국을 구렁 으로 몰아넣으려 작정한 중국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기다 렸다는 듯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한국을 포위했다. 일본 함대도 그 기세에 덩달아 합류했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 나라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은 이제 일반인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많은 나라들이 극동아시아의 정세를 주요 뉴스로 삼아 보도를 내보냈다. 한국은 대외적으로 계속해서 자신들의 무죄를 호 소했지만 그 어떤 나라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전쟁의 태동이 크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결국 선작이 네 자리가 됐습니다.[털썩] 171화에 와서야 겨우 네자리가 되다니..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가 없군요.;; 비축분이 아직 완전히 준비 되지 않은 관계로 주중에는 연참 약 속을 지키는 게 불가능하고, 가급적 주말에 하도록 노력해보겠습 니다. 생각해보니 다음 주에 테스트 하나가 더 있더군요.-_-a 자꾸 연기해서 저도 속상합니다만 어쩔 수 없네요. 하여튼 이번 주말에 약속 지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73 회] 날 짜 2004-05-11 조회 / 추천 2917 / 47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재회의 의미 「일본 정부는 이번 피해에 대한 공식적인 항의서를 보내왔습니다. 그들은 이번 사태로 인해 피해를 입은 자국민들에 대하여 한국이 정 식으로 사과하고 보상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른 우리나라의 대응은 어떻습니까?」 「청와대는 현재 침묵을 지키고 있으며, 이번 사태가 단순히 군사 훈련 중의 실수인지 아닌지조차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예안은 TV를 꺼버렸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휴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예안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일났네 정말. 진짜 어떡하냐." 일본이 피해를 입은 게 자신의 탓이라는 건 인정했지만 그래도 억울 한 게 사람 마음이었다. 그놈의 잠수함이 어느 나라 것인지 밝혀진 다면 시원하게 짓밟아줄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하니 환장할 노릇이 었다. 힘을 갖고도 쓰지 못하는 갑갑함이 어떤 건지 절실히 알 것 같았다. 한국 영해에 원잠이 침범한 사실, 그리고 핵공격을 당했다는 사실은 발표되지 않았다. 라이플 버스터 포의 막강한 에너지에 휩쓸려 방사 능 에너지가 전부 파괴되었기에 핵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증거가 없었 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실대로 발표해봤자 터무니없는 거 짓말을 한다는 비난을 받을 게 뻔했다. 그때 전화가 왔다. 반사적으로 움찔해 폰을 노려보던 예안은 슬그머 니 받았다. "어떻게 됐어요, 중현 아저씨?" 「일이 아주 난처하게 됐습니다. 우리나라 영해에 침범한 원잠들이 맥을 향해 핵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증거, 아니 하다 못해 원잠들이 영해에 침범했다는 증거라도 잡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인공위성 사진 같은 거 없어요? 그걸로 확인하면 핵폭발이 일어났 는지 아닌지 쉽게 알 수 있잖아요. 그리고 FIRE-2가 핵잠수함 전용 핵미사일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그때 당시 우리나라 위성들은 일시적 에러로 인해 촬영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아무래도 해킹을 당한 것 같습니다.」 예안은 직감적으로 어떤 나라들이 작정하고 한국을 함정으로 몰아넣 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하도 짚이는 데가 많다 보니 딱 이거 다 하고 꼬집어낼 수 없었다. 침묵하는 그녀를 안쓰럽게 여긴 중현 은 부드러운 어조로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부 다 잘 해결될 겁니다.」 "네. 알았어요." 전화를 끊고 난 뒤 예안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나 혼자 궁상 떨어 봐야 딱히 좋은 생각은 나오지 않았다. 「원잠들의 국적을 밝히지 못한 게 아쉽긴 합니다만 어쩔 수 없습니 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은 결코 이번 사태를 호락호락 넘어가 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한국을 손아귀에 넣고 싶어했으니까요.」 미국과 중국은 표면적으로 이번 사태와 관련이 없지만 일본의 요구 가 있다면 기꺼이 참여할 것이다. 차라리 인근 해역이 오염되는 걸 감수하고 핵이 폭발하는 걸 방관했더라면 오히려 한국이 큰소리를 떵떵 칠 수 있었다. 예안은 새삼 그 사실을 후회했다. "젠장. 진짜 그 원잠이 어느 나라 건지 밝혀지기만 하면 내가 가만 안 둔다. 만약 그게 일본 거면은 모두 다 죽여버리겠어." 라이플 버스터 포로 불바다가 된 일본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울부짖 는다. 어미들은 어린 아이를 안고 통곡한다. 청년들은 노구의 부모 를 들쳐업은 채 이리저리 방공호를 찾아 헤맨다. 죽음의 기운이 일 본 전체를 뒤덮고 있고, 거리마다 시체로 인해 발 디딜 곳이 없다. 사람들의 통곡이 하늘을 찌르고 피가 흘러 강으로 바다로 유입된다. 절망만이 존재하는 그 자리에서 맥이 홀로 굳건하게 서 있다. 그 위 로 승리자의 미소가 찬란히 걸려 있다. 문득 시간이 멈췄다. 예안은 천천히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녀의 얼 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 내가 무슨 생각을…." 예안은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음습한 추위가 엄습 해왔다. 거미줄에 걸린 듯 몸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발작처럼 창백하게 떨던 그녀는 머리를 부르르 흔들었다. 무서웠다. 방금 전의 자신은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순간적인 울 화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런 마음을 품었던 자신. 피로 질퍽해진 대 지를 밟은 채 승리자의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을 다시 떠올린 순간 그녀는 무언가 올라오는 걸 느꼈다. "우욱! 우욱!" 먹은 게 아무것도 없지만 구토가 나왔다. 자신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냥 좀 화가 나서 그랬을 뿐이라 고 자기 위로도 해봤지만 스스로에 대한 무서움은 떨쳐지지 않았다. "왜 그래 누나?" 니콜라스가 들어서며 그렇게 묻는 순간 예안은 퍼뜩 깨어났다. 비로 소 정신이 든 그녀의 망막에 방안 풍경이 비춰졌다. "아, 아무것도 아냐!" 지나치게 과장된 부정에 니콜라스는 조금 의아했다. 그는 더 묻지 않고 턱으로 아기 방을 가리켰다. "애기가 울어. 가 봐." 예안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아기 방으로 달려갔다. 조금 섭섭한 눈 으로 그녀를 쫓던 니콜라스는 쥐고 있던 팜플렛을 꺼내어 펼쳤다. 제임스 해론의 방한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극동아시아에 전쟁이 몰아닥치든 말든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니콜라스의 말대로 아기가 시끄럽게 울어 젖히고 있었다. 예안은 아 기가 이렇게 크게 우는데도 눈치 못 챈 자신을 탓하며 무릎을 꿇었 다. 신기하게도 안아 올리자마자 아기는 울음을 뚝 그쳤다. 더 이상 엄마를 보채지도 않았다. 아기가 마냥 사랑스러웠다. 엄마가 기분이 극도로 저조할 때면 어떻 게 알아차리고 울어대는지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둘 사이에 텔레파 시라도 통하는 것인가. 예안은 조금 전까지 자신을 괴롭히고 있던 상념이 말끔히 사라지는 걸 느꼈다. 다 아기 덕분이었다. "우리 유빈인 참 영특하기도 하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예안은 아기 뺨을 계속 쓰다듬었다. 아기는 평화로운 얼굴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이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라도 잘해야 한다 생각하니, 새삼 용기가 치솟아 올랐다. 「이 아기를 너에게 줄게.」 갑자기 유젤이 생각났다. 또다시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더 이상 눈 물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 그리워 울고 싶은데 울 수 없다는 괴로움 은 실로 상상을 초월했다. 아기가 없었더라면 그 고통을 이기지 못 하고 진작 미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우리 유빈이한텐 나 혼자밖에 없으니까 내가 잘 해야 돼. 까닥하다 가 이번 사태 때문에 내가 엿 먹으면 두고두고 우리 유빈이한테 흠 이 된단 말이야.' 예안은 아기를 안은 채 컴퓨터를 켰다. 탐(Talking About Mac) 사이 트는 한창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접속하자마자 무섭게 베리굿이 말을 걸어왔다. 「너도 이번 사태에 대해 들었지? 해일 사태 말야.」 「응.」 「도대체 누가 맥을 조종했는지는 몰라도 참 어이없다. 이번 일 때 문에 한국은 엄청 물먹게 됐어. 세계 언론한테 엄청 욕먹는 꼴이 눈 앞에 훤하다 훤해.」 예안은 울컥했지만 참았다. 일반인들은 국적불명의 원잠이 핵미사일 을 발사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매스컴에서 보여주는 것만 믿지 말라고 했지만 베리굿은 수긍하지 않았다. 일반인이 모르는 다른 사정이 있었을 거라 변명하자 뭐 때 문에 그렇게 군대 편을 들어주는 거냐고 반박하는 바람에 예안은 결 국 입을 다물어야 했다. 회원들은 팽팽하게 양쪽으로 나뉘어져 뜨거 운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진 예안은 그만 컴퓨터를 껐 다. "휴우." 예안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많이 안 좋은가 봐?" 어느새 들어온 니콜라스가 옆에서 빤히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보면 알잖아. 일이 아주 심각해졌다는 거." "나는 누나가 왜 그렇게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애초에 누나가 잘못한 게 아냐. 힘이 없는 것도 아냐. 근데 왜 그렇 게 쩔쩔매는 건데?" "그럼 넌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일본을 없애버려. 그럼 되잖아." 니콜라스의 눈동자는 진지했다. 예안은 그가 결코 농담하는 게 아님 을 알았다. 그는 농담을 모른다. 사람 목숨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 지도 않는다. 피 냄새 가득한 뒷세계를 헤치며 살아온 그에게는 백 명의 목숨이든 일 억 명의 목숨이든, 적이라면 죽여버려야 할 유기 물 덩어리에 불과했다. 더 우스운 건 따로 있었다. 예안 자신이 그의 생각에 반발심리를 전 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구국적 영웅심리 같은 건 일절 없었 다. 맥의 세뇌에 넘어간 건지 단지 이 상황을 조금 어려운 게임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을 자각할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자기혐 오가 일었다. 화려한 응접실에 레이온이 앉아 있었다. TV에서는 일본과 한국의 삐 거덕거리는 관계에 대한 보도가 한창 쏟아지고 있었다. 잔뜩 흥분한 채 기사를 내보내는데 바쁜 여 기자를 죽일 듯 노려보던 레이온은 TV를 껐다. "어때? 재미있었나?" 하얀 나이트 가운을 입은 앤슨이 투명한 글라스를 든 채 들어섰다. "저런 실속 없는 거나 보여 주려고 날 불렀나? 정말 실망이군." "꼬마가 그렇게 알고 싶어했던 일의 경과를 알려준 건데 흥미가 없 나 보네? 이거 맥빠지는데?" 레이온은 소름이 끼쳤다. 지구상의 그 누구보다 우월하다고 항상 자 부해왔던 자신. 그런 자신조차도 때때로 앤슨의 생각을 읽을 수 없 는 순간이 있다. 그의 생각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보통 때조차도 일 부러 그가 사고를 개방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인지할 때마다 레이온은 앤슨에게 강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레이온은 자신의 그런 공포를 드러내지 않았다. 가까스로 잡 은 이 대등한 위치를 다시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히 감정을 감춰야만 했다. 만약 자신이 두려워한다는 사실이 그에게 들켜 버린 다면 유젤은 그대로 시트날타의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미 위성사진 판독은 끝났다. 한국 영해에서 어떤 원잠이 맥을 향 해 FIRE-2 6발을 발사했어. 한 척의 단독발사는 아닌 것 같더군. 적 어도 두 척 이상이다." 앤슨은 즐거운 표정으로 손뼉을 짝짝 쳤다. "역시 꼬마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백 점 만점에 구십 점짜 리 정답이다. 그래, 그 외에는?" "…없다." 레이온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더 이상 대답할 수 없다는 게 너 무 분했다. "비록 단서가 그것 뿐이라 해도 생각해둔 건 있었을 것 아닌가? 아 무거나 괜찮으니 마음놓고 한 번 말해 봐." "앤슨 네가 배후에 있다는 것만 짐작할 뿐 그 외에는 도저히 모르겠 다. 이 일을 꾸민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 이 일을 꾸민 나라가 무슨 이득을 얻게 되는지." 원잠의 국적이 밝혀지지 않은 이상 레이온이 더 알 수 있는 건 없었 다. 배후에 앤슨의 입김이 강하게 닿아 있으리라는 것은 심증으로 알 수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정보를 얻을 마음은 없 었다. 게임판을 벌여놓고 즐기는 듯한 유유자적한 그에게 고개를 숙 이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군중들의 심리는 참 웃겨. 그들은 개미보다 더 비겁하고, 여우보다 더 교활하고, 닭보다 더 어리석어. 처음 맥을 구입할 때만 해도 열 광적 지지를 보냈던 그들이 지금 와서 슬슬 태도를 바꾸는 것만 해 도 충분히 알 수 있지 않나?" "일부 그런 세력들이 생기고 있긴 해도 아직까지 맥에 대한 지지는 압도적이야." "아직은 한국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닥친다면 그들의 마음은 100% 돌아선다." 앤슨은 키득 웃으며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한국 정부는 한국민들에게 맥을 완전히 이해시키는데 실패했던 것 같군. 그러니 고작 이 정도 시련에 슬슬 겁을 집어먹는 녀석들이 나 오는 거겠지. 맥은 인간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절대 만들어낼 수 없 는 예술품이다. 그걸 모독하는 한심한 꼴은 도저히 봐줄 수 없군." "예술품?" "몰랐나? 맥은 예술품이다. 그 막강한 아름다움, 그 굳건한 아름다 움, 그 거대한 아름다움.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위대한 예술품이다." 흉기가 예술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레이온도 인정했다. 그러나 앤슨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맥은 단순한 흉기로만 쓰이지 않 는다. 이용하기에 따라서 맥은 세상을 멸망시킬 악마의 낫으로도, 세상을 구원할 천사의 성물로도 쓰일 수 있다. 무한동력은 바로 그 런 것이었다. "기억해두는 게 좋다, 레이온. 이건 다만 현상의 증명을 위한 가벼 운 포석에 불과해." "현상의 증명?" 앤슨이 이번 사태의 배후에 있다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가 무엇 을 노리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레이온은 잔뜩 불안한 얼굴 로 그를 보았다. 그는 TV를 켠 채 한국 대통령의 기자 회견을 보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이번 사고에 대해 대단한 유감을 표합니다. 피해를 입 은 일본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 드리며, 아울러 적절한 보상을 해줄 것을 약속드립니다. 또한….」 TV에서는 의례적인 멘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앤슨은 이를 갈다가 TV를 꺼버렸다. "능구렁이 같으니라고! 네 녀석이 지금쯤 속으로 얼마나 헤벌쭉 하 고 있는지 내가 다 몰라서 그러는 줄 알아!" 레이온은 분노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왜 그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본을 겁에 질리게 한 것만으로도 네놈들은 속으로 헤벌쭉 웃고 있을 거다! 근데 뭐? 진심으로 사과? 웃기고 있어!" "이해 못하겠어. 난 너를 이해 못하겠어." 레이온은 허망한 얼굴로 힘없이 말했다. 앤슨은 화를 내다 말고 진 정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의 눈빛에서는 어느새 분노의 기운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실로 놀랍도록 정교한 마인드 컨트롤이었다. "원잠이 어느 나라 건지는 몰라. 하지만 미사일을 발사하도록 유도 한 인물이 너라는 건 분명히 알겠어. 그렇지만 네가 왜 이렇게 번거 로운 짓을 벌이는지는 이해 못하겠어. 이런 짓을 해서 도대체 너에 게 무슨 이득이 있는 거지?" "말했잖아. 현상의 증명이라고. 엔젤에게 보여줄 법칙을 내 손으로 손수 증명하는 중이다." 앤슨은 레이온이 일부러 유젤을 놓아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레이 온 또한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두 사람은 훤히 들여다 보이는 얇은 레이스로 각자 마음을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 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상대의 마음을 가린 천 조각이 한쪽에서 부터 검게 물들어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서로가 상대에게서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데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어차피 엔젤을 잡아들이는데 넌 전혀 도움을 주지 않잖아. 도와줄 생각도 없고 말이다. 나뿐만이 아니다. 마리오도 이미 네 속마음을 훤히 눈치채고 있다." 앤슨의 눈동자는 싸늘했다. 그는 진심으로 경고하고 있었다. "도와줄 생각이 없다면 잠자코 지켜보기나 해라. 우리가, 아니 내가 어떻게 엔젤을 잡아들이는지 말이다." 음. 제목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불거져 나왔군요. 전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지만, 선작수에 깊은 연관이 있다는 새로운 이론(?) 에 마음이 덜컹한 나머지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ㅅ- 여러분들은 현재 제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 가급적 바꿔라. 2. 내버려둬도 좋을 듯(중립). 3. 가급적 바꾸지 마라. 코멘으로 투표 좀 해주시구요. 만약 바꿔야 한다면 어떤 제목을 쓰 는 게 좋을지 의견도 좀 써주세요. 기한은 일단은 무기한으로 받을 테니 늦더라도 많이 참여해 주시구요. 그리고 선작을 안 하고 보는 분들도 있을 테니, 만약 제목을 바꾼다면 < 세 제목 - 기존 제목> 이런 식으로 해야할까요? 이것에 대한 의견도 좀 부탁 드리구요.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74 회] 날 짜 2004-05-15 조회 / 추천 2649 / 39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재회의 의미 일본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거리마다 한국을 비탄하는 시위가 줄을 이었다. 정부가 한국에 겁을 집어먹은 게 아니냐는 비난도 거셌다. 심지어 이런 치욕을 받고 어떻게 고개를 들고 살아갈 수 있냐고 할 복하는 젊은이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어디에도 예외가 있 기는 마련이었다.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오발설에 대해 의심을 품는 세력도 조심스레 생겨났다. "맥이 라이플 포를 발사한 건 정말로 단순한 오발이었습니까?" "전투 배치도 아니고 단순한 훈련 중 그렇게 엄청난 화력을 오발했 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기자 회견 도중 몇몇 기자들이 그렇게 물어 왔다. 호이즈미 총리는 태연히 대답했다. "그것이 사고였는지 아니면 한국이 어떤 다른 목적을 품고 있었는지 우리로써는 알 수 없는 문제입니다. 정부는 다만 이번 사태로 인해 피해를 입은 국민 여러분들이 한국으로부터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기자들의 질문은 계속 빗발쳤다. 두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기자회견 을 끝낸 총리는 피곤한 얼굴로 집무실로 돌아왔다. 중국 주석으로부 터 핫라인이 들어와 있었다. 「일이 잘 되어가고 있어서 몹시 기쁘오. 부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잘 잡아 한국을 최대한 옭아맬 수 있도록 해야 하오.」 "걱정하지 마시오. 이미 그에 따른 완벽한 준비가 갖추어져 있소." 「그거 참 안심되는구려. 헌데 말이오. 그 앤슨이라는 청년에 대해 서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거요.」 총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앤슨에 대한 경계심은 그가 아직 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게 하는 요소였다. 「우리 정보원이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어 조사했지만 그들의 흔적 조차 찾아낼 수 없었소. 보통 대단한 은신력을 지닌 자들이 아니오. 게다가 일본과 중국의 국가원수를 소리소문 없이 납치해서 다시 되 돌려놓을 수 있는 힘까지 지니고 있으니 더 위험하지.」 예전에 앤슨에게 납치 당했던 일이 생각난 총리는 신음을 삼켰다. 또다시 그런 일을 겪을지 모른다는 불안을 품고 살아간다는 건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 뒤로 경호를 열 배로 늘렸소.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호락호락 납 치 당하지 않을 것이오." 「그건 함부로 장담할 수 없는 거요. 열 경찰이 한 도둑 잡지 못한 다는 말도 있소.」 "지금 일본의 모든 정보력을 총동원해서 그들에 대해 파헤치고 있 소. 중국과 일본의 정보력을 합친다면 이 세상 그 무엇도 밝혀내지 못할 게 없소." 「하지만 그들은 이미 우리가 그들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거요. 왜 그들이 그걸 알면서도 경고 한 마디 하지 않고 잠자 코 있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오.」 "모르고 있을 수도 있소. 아니, 필경 모르고 있을 거요. 그들이 그 렇게까지 대단한 정보망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소." 「그건 모르는 일이오. 하여튼 일이 너무 잘 풀린다 해서 마음놓지 말고 항상 조심하도록 하시오. 그들 입장에선 납치가 곤란해진다 해 서 암살까지 어려워지는 건 아닐 테니까.」 주석은 통화를 끊었다. 암살이라는 말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총리 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분노로 시뻘개진 눈동자를 들어 창 밖을 노 려보던 그는 두 팔로 책상을 짚으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웃기지 마. 대 일본제국의 총리 대신인 내가 감히 그따위 녀석들에 게 암살 당할 것 같으냐?" 지금은 이용당하고 있지만 언젠가 반드시 혹독한 맛을 보여주리라. 총리는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얼마 전 가까스로 이병원 교수와 약속을 잡은 춘식은 카페에서 기다 리고 있었다. 이윽고 약속 시간이 되자 이 교수가 들어섰다. 춘식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미리 생각해둔 입에 담기도 낯부끄러운 칭찬을 곁들이자 이 교수는 기분이 좋은 나머지 얼굴이 잔뜩 상기되었다. 엘리트라고 해서 시건방진 건 아닐까 고민 했었는데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상대하기 쉽겠어.' 춘식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헌데 무슨 일로 저를 만나고자 하신 건지요?" 이 교수는 춘식이 왜 그렇게 자신을 찾아다녔는지 몹시 궁금했다. 학계에서 이름이 드높다 하나, 아직 현재 맡고 있는 프로젝트에서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 못한 그는 왜 춘식 같은 기업가가 자신을 찾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교수님이 양자 컴퓨터에 관한 세계적인 권위자라 들었습니다. 이름 있는 과학학술지에서 교수님의 성함을 질리도록 보았습니다. 우리나 라의 이름을 드높이는데 기여하시는 교수님을 항상 존경해왔습니 다." 또다시 이 교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그는 춘식의 아부가 내 심 싫지만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요새 시끄러운 일들이 많지요? 동해 건너 원숭이들이 워낙 시끄럽게 짖고 있어 밤에 잠자는 것조차 힘듭니다그려." 춘식은 이야기를 빙빙 돌렸다. 이 교수는 그가 왜 그러는지 몰라 어 리둥절했지만 그대로 그의 페이스를 따라주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나라도 엄연한 강대국이잖습니 까? 말로 해서 안 될 일 같으면 힘으로 눌러버려도 될 것 같군요. 과거 미국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세계 언론의 비난을 사게 됩니다. 과거 미국이 그랬듯 이요." "하지만 보다 쉽게 여러 이득을 손에 넣을 수 있겠지요. 과거 미국 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랬다가는 김영환 대통령은 암살 당할지도 모릅니다. 과거 부시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김영환 대통령을 암살한 일본 닌자들은 모두 붙잡혀 공개 사형에 처해지고 일본은 쑥대밭이 될 것입니다. 과거 이라크가 그랬듯이 말 입니다." "부시 암살범이 체포되기는 했지만 이라크까지 피해를 입은 건 아니 었습니다만?" "조금쯤은 발전이 있어야죠. 언제까지 과거의 전철만 밟을 순 없잖 습니까?" 춘식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몇 분간의 대화로 이 교수의 성격을 단번에 꿰뚫어보았다. 나이답지 않게 과격한 면모와 가슴에 감추고 있는 뜨거운 불꽃. 이 교수는 그것을 표출해낼 돌파구를 찾아 헤매 는 사람이었다. '생각보다 과격하군. 역시 일이 쉽게 풀리겠어.' 춘식은 007 가방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게 뭡니까?" 춘식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자신들을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제 제안을 승낙하지 않으신다 해도 어디 가서 이 이야기를 해서는 절대 안 됩 니다. 이건 국익에 직결된 문제니까요. 약속해주시겠습니까?" 춘식의 기도는 보통이 아니었다. 직감적으로 심상치 않은 일임을 알 아차린 이 교수는 굳은 얼굴로 끄덕였다. 안심한 춘식은 표정을 약 간 풀었다. "이 교수님은 양자 컴퓨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죠?" 이 교수는 춘식이 왜 그런 걸 물었을까 잠시 궁리했다. 그리고 대답 했다. "대단히 중요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양자 컴퓨터는 전세계 모든 보 안망을 쥐었다 폈다 할 수 있는 대단한 무기가 될 수 있으니까요. 청동기 시대로 비교하자면 티타늄으로 만들어진 검과 화살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이 안에 바로 그 엄청난 무기가 들어 있습니다." 춘식은 가방을 툭툭 두드렸다. 이 교수의 얼굴이 경악으로 굳었다. "말 그대로 엄청난 성능을 지닌 양자 컴퓨터 설계도와 제작시 필요 한 기술의 모든 것이 이 가방 안에 들어 있습니다. MIT와 로스알라 모스 연구소가 합작으로 개발한 것이지요." "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이 교수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교수형에 처해진 강시보다 더 파 리한 안색이었다. "쉽게 믿지 못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저의 이름을 걸 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한 청년이 목숨을 걸고 이 녀 석을 한국까지 가져왔습니다. 이제 우리 같은 기득권자들이 그런 희 생 정신에 대해 보답해줘야 할 때입니다." 춘식의 목소리는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조금의 거짓조차 담고 있지 않은 음성이었다. 경악에 부르르 떨리던 이 교수의 눈썹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시체처럼 파리하던 그의 안색에 조금씩 혈기가 감돌았 다. "정말입니까? 농담이나 거짓말하는 게 아닌가요?" "전 재벌은 아닙니다. 그러나 상당한 수의 계열사를 거느린 우진 그 룹의 회장입니다. 그런 제가 교수님 같은 분에게 쓸데없는 거짓말을 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이 교수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춘식 같은 신분을 지닌 자가 이런 상황에서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양자 컴퓨터입니다. 전세계 모든 전산망을 붕괴시킬 수도 있는 엄 청난 녀석을 우리가 독점하게 되었단 말입니다. 이것을 빼돌린 '노 스나 리'라는 과학자는 조국의 영광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습니다. 그 마음을 우리가 기필코 받아줘야만 합니다." "좋습니다. 믿겠습니다." 그제야 춘식은 얼굴을 활짝 폈다. 무거운 짐을 하나 내려놓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이 사실을 알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가뜩이나 맥의 오발 사건으로 인해 한국이 비인도적인 국가라 비난받는 판입니다. 이 와중에 그런 스파이 짓까 지 저질렀다는 게 밝혀지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 습니다." "그래서 이 교수님께 이 녀석을 가져온 것입니다. 미국은 현재 우리 나라가 이 녀석을 훔쳤다는 증거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노벨상까지 받으셨던 이 교수님이 이 녀석을 맡아 양자 컴을 만든다면 그 누구 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교수는 마음이 흔들렸다. 양자 컴퓨터까지 독점하게 된다면 한국 은 자원, 기술, 군사, 그 어떤 분야에서든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 다. 그야말로 로마 이후로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나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결심을 굳히고 말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저에게 몇 가지 약속과 함께 각서 한 장만 써주시면 됩니다. 물론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어도 교수님에게는 해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책임은 전부 제가 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합의는 너무나 쉽게 이루어졌다. 춘식은 이 일로 인해 한국에 찾아올 번영과 자신과 예안에게 돌아올 막대한 보 상을 상상하며 기쁨에 젖었다. 그들은 몇 시간 정도 의논을 한 뒤 헤어졌다. 그들이 나가고 난 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모자 쓴 남자가 핸드폰을 꺼냈다. "김춘식과 이 교수가 지금 막 나갔습니다. 그들의 거래는 성공적으 로 끝났습니다." 연참 약속은 다음주로 또 미루겠습니다. 제가 이번주에 재시험이 있거든요. 가급적 약속을 지키고 싶지만 글에만 매달릴 순 없으니까 요. 대신 한두편 정도는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절대로 설문조사의 부진한 결과를 보고 삐져서가 아닙니다.[강조] ps : 설문목록에 '이 글은 매니악한가?' 설문 하나 오랜만에 추가 했습니다. 많이 참여해주세요~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75 회] 날 짜 2004-05-17 조회 / 추천 2706 / 34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재회의 의미 중현이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언론은 대체로 맥을 옹호하는 쪽이었 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일본을 비난하는 그들의 태도는 국민 여론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절감케 했다. 왜 일본은 보상을 해준다는데 도 그렇게 거절하는 것이냐 하는 의견도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었 다. 만약 양국 간의 갈등이 팽팽하게 당겨진 이 상황에서 맥이 핵 공격 을 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당장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핵 공 격을 해온 잠수함이 일본의 소유라면 상황은 한국에 더욱 유리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을 용의자에 올려두기는 했어도 깊이 의심하고 있진 않았다. 핵 공격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일본 역시 만 만치 않은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일본 외의 제3국가가 극동아시아에 분열을 불러오기 위해 핵 발사를 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그럼 왜 일본은 자신들의 머리 위에 핵을 터트리려 한 녀석들과 뒤늦게라도 손을 잡았는지 의 문이 생긴다. 한국 정보부는 이 사실을 놓고 머리에서 불이 나도록 고민했지만 뾰족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며칠 후 중현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예안은 그의 차를 타고 청와대로 갔다. 며칠 사이에 몇 년은 늙은 듯한 대통령이 고심한 표정으로 그 녀를 맞이했다. "잘 지냈니?" "별로요. 할아버지도 그다지 잘 지내시진 못한 것 같은데요?" 예안은 왜 영환이 그렇게 고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국은 국 고가 빵빵하니 그냥 일본에게 돈 몇 푼 쥐어주면 간단히 끝날 것이 다. 비록 국론이 조금 분열되기는 했어도 그건 일시적인 군중심리일 뿐,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사그라질 거라 생각했다. 국방부 장관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사태가 생각한 것과는 달리 아주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어. 사실 우 리는 일본이 해일 피해를 입은 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하루 빨리 원잠의 소속 국가를 밝혀내는 걸 중요시했지." 대통령이 이어서 말했다. "나도 그냥 적절한 사과와 피해 보상 몇 푼 쥐어주면 이상적으로 끝 날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그들은 마치 합의 자체를 원하지 않는 듯 지나치게 강경하게 굴고 있어. 얼마 전 일본 청년이 할복 자살 했다 는 이야기는 들었지?" "네." 예안은 무겁게 끄덕였다. 대통령은 다시 말했다. "일본도 용의자이지만 그 혐의성은 굉장히 옅어. 왜냐면 핵 공격이 성공하면 그 녀석들도 피해를 입게 되니까. 그래서 일본과 우리나 라, 나아가서 동북아시아를 분열시키기 위해 제3국가가 술수를 부린 거라고 생각해봤어. 그렇지만 너무 교활해. 미사일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을 경우까지 미리 준비해둔 것만 같아. 다른 나라에 증거 요 청을 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거절했어." 사태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단지 맥을 파괴하기 위한 작전만 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은 이유 없이 한국의 보상을 거절 하고 있고, 한국의 위성은 해킹 때문에 사진 촬영을 못했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은 증거 사진을 갖고 있으면서 제공하기를 거부한다. 척 봐도 단순한 해프닝은 아니었다. "국외 언론도 이상한 쪽으로 논점을 몰아가고 있어. 사고가 아니라 일본을 도발하기 위해 일부러 그랬다는 거야." 예안은 어이가 없었다. "우리가 그럴 생각이었음 진작 입 싹 씻고 나 몰라 하지 왜 먼저 사 과하고 나서서 돈 물어준다고 했겠어요? 도대체 어떤 방송국들이 그 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껄이는 거죠?" 너무 흥분한 나머지 예안은 거친 표현까지 사용해버렸다. 그러나 그 것을 가리켜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CMN과 BBQ가 그 선두 주자를 맡고 있어. 그리고 국내 언론 역시 우 리에 대해서 마냥 호의적이지만은 않아." 예안은 기가 막혔다. "아, 아니 왜요? 우리나라 언론이잖아요? 걔네들 미쳤대요? 왜 우리 나라 언론이면서 우리나라한테 불리하게 구는 거래요?" "좀 이상한 구석이 있어서 지금 조사 중이야. 어쨌든 요새는 여러 가지로 골치가 아파." "그냥 시원하게 전쟁 한 번 해서 일본 깔아뭉개는 건 어때요?" 전쟁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발언에 그들은 깜짝 놀랐다. "말도 안 돼! 지금 우리가 먼저 나서서 전쟁을 벌이면 몰염치한 국 가라고 욕만 잔뜩 먹게 돼!" "증거 사진 보내달라는데 못하겠다면서요? 다들 합심해서 우리나라 물 먹이려는 거 아니에요? 아, 어쩌면 그 원잠이 일본 것일지도 모 르겠네요. 일본은 전부 CSNN-23급만 쓰잖아요?" "물증이 없어. 심증만으로 밀어붙일 수도 없어. 그리고 낙진이 떨어 지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일본이 핵을 발사할 이유도 없어." "물증이 없으니 심증으로라도 밀어붙여야지요. 일본이 주범은 아니 라 해도 분명히 이 일과 관련 있을 거예요." 예안의 과격한 발언에 그들은 몹시 난처해했다. 그들이라 해서 전쟁 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이쪽에서 핵 공 격을 빌미로 삼아 전쟁을 일으키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것이었다. 어쨌든 한국이 지금의 난처한 상황에서 무사히 빠져나온다는 건 어 려운 일이었다. 차라리 시원하게 전쟁하는 게 오히려 나았다. 맥이 나선다면 전쟁이 개시되자마자 일본은 초토화될 것이다. 지난날의 핏값을 받아내는 건 물론이요, 잘만 하면 일본 경제를 한국에 완전 귀속시켜 실질적 식민지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국가안보회의에 제가 끼어도 되는 거예요?" "넌 맥을 만든 사람이잖아. 충분히 낄 자격이 있어. 정 사람들이 뭐 라고 하면 군사부문 자문 담당으로 합석했다 하면 되지." 국방부 장관이 그렇게 농담 삼아 대답했다. 예안은 피식 웃으며 다 시 말했다. "제가 맥을 타고 무력시위를 하는 건 어때요? 그리고 일본한테 협상 할 거냐 말 거냐고 밀고 나가는 거예요. 그럼 모든 게 만사 오케이 로 돌아갈 거예요. 그 기세를 타고 핵 공격한 나라가 어느 놈인지도 밝혀내는 거죠. 어때요?" "국가 이미지만 나빠질 것 같은데. 잘못은 혼자 다 한 주제에 상대 가 합의 안 해준다고 으르렁대는 몰상식한 국가라는 소리 듣겠군." "일본 근처에서 안 하고 우주로 나가서 할게요. 소행성 덩어리들을 꽝꽝 쏴서 맞추는 훈련할게요." 영환은 고개를 흔들면서도 내심 맥의 성능에 감탄했다. 우주에서도 보급 없이 활동할 수 있는 전투 병기라니. 그 활용 영역이 무궁무진 에 가까운 것이다. "혹시 미국의 양자 컴퓨터에 대해서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말해줄 수 있니?" 갑작스런 화제 전환에 예안은 조금 당황했다. 그녀는 판단이 서지 않은 눈동자로 조심스레 영환의 눈치를 살폈다. "관점을 돌려서 생각해봤어.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 미국의 양자 컴 퓨터 개발 건을 끼워 넣으니까 대충 그럴 듯한 답이 나오더군. 미국 은 양자 컴퓨터 개발에 성공했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은 그에 대항 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식민지화 음모를 꾸몄다, 따라서 거기에 방해 가 되는 맥 파괴 공작을 벌였다. 대충 들어맞지 않니?" 간단하면서도 명쾌한 추리였다. 현대 사회에서 전산망이 완전 붕괴 된다는 건 곧 명줄을 빼앗긴다는 걸 의미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일 본과 중국은 체면을 차리거나 기다릴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핵공격을 그냥 눈감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일본이 핵공격을 승낙했을까요? 중국은 몰라도 일본은 확 실히 낙진 피해를 입잖아요?" "원래 약속에서는 핵이 아닌 일반 고폭탄 미사일을 쓰기로 되어 있 었는데 중국이 그걸 멋대로 어긴 건지도 모르지." "빌어먹을 녀석들이네요." 예안은 분노한 나머지 또다시 거친 표현을 써버렸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아니, 누구도 그걸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은 골치가 아팠다. "어쨌든 모든 건 실패로 돌아갔어. 근데 왜 일본과 중국은 큰소리를 치고 있지? 우리가 심적으로 그들을 용의자에 올려두고 있다는 건 그들 자신도 알 텐데 왜 그런 미친 짓을 하는 거지? 믿고 있는 구석 이라도 있는 건가?" 영환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예안은 마지막 한 마디에서 강렬 한 불안을 느끼고 흠칫 놀랐다. '믿고 있는 구석?' 햇살이 영환의 뺨에 새겨진 주름을 이리저리 어루만지고 있었다. 말 없이 그의 얼굴에 진 그림자를 바라보던 예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이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비로소 체감했기 때문이었 다. 그녀는 그만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 버렸다. "시트…날타?" 고요한 침묵이 찾아왔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멍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던 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소리가 몹시 크게 들렸다. 식은땀까지 흘리던 영환은 간신히 목소리를 내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예안의 얼굴에 당황함이 새겨졌다. 그들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눈동 자를 매섭게 빛냈다.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들었으니 어 찌 그냥 물러날 수 있겠는가. "말해 봐. 그게 무슨 소리니?' "그, 그건…." 부담스런 그들의 눈빛을 필사적으로 피하던 예안은 결국 이기지 못 하고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말씀드릴 수 없어요." 영환이 뭐라 말하려 하자 예안은 얼른 덧붙였다. "짚이는 데가 한군데 있어요. 일단은 제가 알아서 어떻게 해볼게요. 만약 제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말씀드릴 게요. 그때까지는 일단 기다려 주세요." 심각한 눈빛을 교환하던 그들은 결국 영환이 대표로 고개를 끄덕임 으로써 승낙을 표시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세력이 배후에 있 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예안을 믿고 넘어가기로 했 다. '시트날타가 배후에 있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습니다. 생각해 보시지 요.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면 당연히 제가 참전하게 됩니다. 유젤 님이 저에 탑승하는 때를 노려 붙잡으려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맥의 설명이었다. 예안은 수긍했다. '하지만 확실하진 않군요. 시험해보지 않겠습니까? 시트날타가 과연 배후에 있는지 아닌지 말입니다.' '전쟁을 일으키자는 거야? 너 그게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해? 민간인 들도 민간인이지만, 애꿎은 군인들이 마구 죽어나간다고. 그게 바로 전쟁이라는 거야.' '수만 명이 죽든 수십 만 명이 죽든 무슨 상관입니까. 시트날타의 본거지를 알아내서 박살내는 게 더 중요하지요. 그리고 제가 나서면 전쟁 개시하자마자 곧바로 끝날 테니까 몇 명 안 죽을 겁니다.' 수십 만의 목숨을 숫자로도 여기지 않는 맥의 논리. 그러나 예안은 화를 내지 않았다.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가지지 말 라고 형식적으로 자신을 꾸짖었을 뿐이었다. 바로 이 순간 그녀는 섬뜩함을 느낄 정도로 자신이 변했다는 걸 절감했다. 그것은 실로 두려운 것이었다. 유젤을 좋아했기에 유젤과 동일해지는 걸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이질적인 자신에게 느끼는 섬뜩함을 가끔 동반하는 것이었다. 수십 만이라 해도 그것이 인간이라면 숫자로도 여기지 않는 논리. 그것을 수용하면서까지 유젤을 향한 이 마음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회의. 그 두 가지 상념이 머리를 스친 순간 예안은 강한 공포를 느 끼고 얼른 그것을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그 얘기는 그만 하자. 어쨌든 일단 지켜보자고.'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76 회] 날 짜 2004-05-21 조회 / 추천 2686 / 38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재회의 의미 '전쟁이 벌어졌을 때 가장 좋은 건 역시 일본의 군사기지를 초토화 시키는 거겠지요. 비밀기지까지 찾아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눈에 띄는 군사기지와 함대만 파괴해도 충분합니다. 전투기들은 이륙하는 족족 전부 격추시켜 버리면 그만이구요.' 청와대에서 돌아온 뒤에도 맥은 한사코 물고 늘어졌다. 예안은 그 이야기를 더 하고 싶지 않았다. 전쟁을 거부하지 않는 자신의 진심 을 인지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맥은 그녀의 마음 안의 허점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계속해서 전쟁을 부추겼다. 자신의 무력 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시트날타에 좋은 경고가 된다는 설득에 서부터 시작하여, 세계의 패자가 되고 싶지 않냐는 달콤한 회유까지 뒤따랐다. 「저를 타고 있을 때 유젤 님은 절대 강자입니다.」 예안은 몹시 마음이 흔들렸다. 맥을 타고 마음껏 전장을 누비며 절 대 무력을 과시하는 자신의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그것은 명예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했다는 증거이면서, 동시에 그 녀가 아직 지구인의 잔재를 지니고 있다는 암시이기도 했다. 맥은 바로 그런 심리를 물고늘어지고 있었다. '중국과 일본이 양 사이드에서 탄도 미사일을 날린다 해도 상관없습 니다. 오히려 비밀 미사일 기지까지 드러나게 될 테니 우리한테는 굉장히 좋은 거지요. 수백 발의 탄도 미사일이 동시에 날아온다 해 도 저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요격할 수 있습니다. 차량에 미사일을 실어 운반한다 해도 어차피 개전 초기에 주요 도시들을 박살내버리 면 그만이지요.' '그럼 민간인들이 엄청 죽어. 비난이 장난 아닐 걸? 게다가 나는 떨 거지까지 괜히 끌어들여 죽이고 싶진 않아.' 엉겁결에 그렇게 대답했던 예안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인간의 목 숨이 존엄하기에 죽일 수 없다는 이유가 아니라 귀찮은 게 싫어 떨 거지들을 내버려두겠다는 논리. 아무리 잊으려고 발버둥쳐도 정신을 잠깐만 놓으면 그 역겨움은 그림자처럼 되살아난다. '엉뚱한 생각은 마십시오. 유젤 님은 고귀한 에덴인, 일반 인간들과 는 다릅니다. 그들의 목숨을 유젤 님의 목숨과 동일시하지 마십시 오. 그것은 스스로의 존엄성을 저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안은 처음으로 맥의 비정함을 느꼈다. 생명의 고귀함에 대한 맥의 논리는 이미 무심함을 넘어서 비정함으로까지 변질되고 있었다. 맥 에 대해 알면 알수록 새롭게 다가오는 모습. 이제 그녀는 나중에 맥 이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겁이 나는 한편 은근히 기대 되기까지 했다. '어쨌든 사람이 거의 안 죽는 쪽으로 방법 좀 찾아 봐. 우리 아기가 나중에 엄마 살인마라고 충격 먹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예안은 결국 그렇게 우스갯소리로 넘어갔다.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맥은 모르는 사이에 점점 자신을 세뇌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저에게 보통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하찮은 것입니다. 유젤 님과 유 빈 님을 제외하고 그 어떤 인간도 저에게는 유기물 이상일 수 없습 니다.' '유니콘. 내가 전에 말했지? 함부로 무슨 이상한 짓 같은 거 꾸미지 말라고. 그 명령에는 지금처럼 이상한 말로 날 꼬드기지 말라는 것 도 포함 돼.' 맥은 대답을 않았다. 예안은 쐐기를 박듯 강하게 말했다. '한 번 더 말할게. 난 내가 살기 위해서 네가 정말 소중하고 또 널 필요로 하지만 역으로 네가 내 인생을 컨트롤하려 드는 건 정말 반 갑지 않아. 그걸 명심해줬으면 좋겠어.' 예안은 그렇게 말하고 기지개를 쭉 켰다. 맥이 자신의 말을 엄수할 지는 의심이 갔지만 그렇게 엄포를 놓으니 일단 안심이 되었다. "누나, 내일 시간 있어?" 이층에서 내려온 니콜라스가 그렇게 물었다. "왜?" "제임스 해론의 강연날짜가 내일이야. 입장권 사는 김에 누나 것까 지 같이 샀어. 같이 가지 않을래?" 니콜라스의 눈빛은 무심했다. 그러나 예안은 그가 자신이 함께 가주 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귀여운 꼬마는 자 기가 숭배하는 철학가를 좋아하는 여자한테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 다. "알았어. 어차피 할 것도 없고 남아도는 게 시간인데. 그리고 너 없 이 나 혼자 있으면 위험하기도 하니까." 니콜라스는 몹시 좋아하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아마 잔뜩 산 옷 중 에서 무엇을 입고 갈지 고르느라 오늘밤을 다 샐 것이다. 흐뭇한 얼 굴로 바라보던 예안은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탐 사이트는 발을 내딛으면 발바닥에 화상을 입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달아올 라 있었다. 예안은 대체로 전쟁을 원하는 분위기가 좀 거슬렸다. 어차피 자세한 사정을 알지도 못한 채 국외·국내 언론에 휩쓸린 대중들의 생각이 라는 건 뻔했다. 보상해준다는데도 말을 안 듣는 일본 녀석들을 때 려잡자는 발상. 물론 일본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갖고 있는 한국의 역사를 생각해볼 때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시트날타가 배후에서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모르는 판국에서 개 념 없는 대중들에게 끌려가기 싫었던 것이었다. '근데 아무리 봐도 뭔가 좀 이상해. 외국 언론은 몰라도 왜 국내 언 론까지 대부분 전쟁을 지지하는 쪽이지? 다른 나라 전쟁에 군대를 파견하는 거라면 모를까, 우리나라가 직접 전쟁을 벌여야 한다면 아 무리 군사력이 강해도 반대하는 사람들 수가 엄청날 텐데?' '아까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잠깐 그 부분을 언급했었습니다. 이상한 낌새가 있어 현재 조사하는 중이라 했으니 조만간 밝혀지겠지요.' 예안은 불안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녀는 단순한 한반도 식민지화 따 위가 아닌 고차원적인 음모가 저 위에서 도사리고 있다는 걸 예감했 다. 시트날타가 상상하기 힘든 관념적인 목적을 지닌 채 저 높은 곳 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을 집요하게 노리는 그들을 떠올린 순간 예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결단코 그들에게 잡힐 수 없었다. '절대 안 잡혀. 잡히기 전에 너희들을 내가 먼저 망가뜨릴 거야.' 예안은 굳은 얼굴로 그렇게 다짐했다. '어?' 게시물을 이리저리 뒤적이던 중 그녀는 흥미로운 글을 하나 발견하 고 눈을 크게 떴다. 「이번 사태는 한국을 집어삼키려는 일본과 중국의 욕심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훈련 중 맥이 느닷없이 해일을 일으킬 정도로 강한 포를 발사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외국 잠수함들이 미사일 공 격을 해오자 맥이 거기에 대해 반격한 게 분명합니다.」 '와. 이 사람 추리력 장난 아닌데? 설마 찍은 건 아니겠지?' 예안은 조금 감탄하며 계속 읽어나갔다. 「중국, 일본, 미국은 사고해역의 인공위성 사진을 한국에 제공하고 그 판독 결과를 공개해야 합니다. 일본은 의도적으로 단서들을 숨긴 채 자신들이 피해자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들의 흉계에 넘 어가지 말고 신중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건 그들의 의도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읽다보니 뭔가 이상했다. '우리나라'라고 칭하지 않고 '한국'이라고 칭하는 것도 의심스러웠고, 무엇보다 왜 미중일이 위성사진을 공개 해야 한다 주장하는지 어리둥절했다. 한국의 위성이 해킹 때문에 일 시적인 작동불능에 빠졌던 건 국가 기밀이었다. 일반인이 그런 걸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이거 아무리 봐도 일반인이 아니라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이 일반인 인 척 한 것 같지 않아? 한 번 물어봐야겠다. 궁금함을 떨치지 못한 예안은 중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중현 아저씨, 혹시 중현 아저씨나 다른 요원들이 탐 사이트에서 일 반인인 척 하고 글 올리신 거 있어요?" 「예. 당연하지요. 우리로서는 무모한 국내 언론과 특종 챙기기에만 바쁜 세계 언론의 장단에 넘어가 미일중이 원하는 대로 끌려갈 수는 없으니까요. 별 효과는 없겠지만 그래도 요원들 거의 전부가 매달려 서 일반인인 척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조금 전에 글 하나 봤어요." 예안은 게시물 작성자의 이름이 J.H인 걸 흘끔 확인했다. "근데 너무 노골적으로 말씀하신 거 아니에요? 우리나라 위성이 교 전 당시 에러 때문에 사진 촬영을 못했다는 사실까지 고스란히 남기 시면 어떻게 해요? 눈치 빠른 사람이 보면은 일반인이 아니라는 거 대번에 알겠다." 「아, 그렇습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군요. 하여튼 요원들에 게 단단히 주의시키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전화를 끊은 뒤 예안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아기를 품에 안아 든 그녀는 하품을 연신 하며 거실로 나왔다. 온라인과 마찬가지로 TV에 서도 온통 이번 사태에 대해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열변을 토하 는 여 기자를 무심한 눈으로 들여다보던 예안은 폐허가 된 일본 땅 에서 불타오르는 불길을 떠올렸다. 그녀의 상상 속의 일본 상공에서 는 폭격기를 이끄는 맥이 유유히 비행하고 있었다. 잔인한 공상에 잠깐 빠져 있던 그녀는 다시 하품을 하며 아기를 다독였다. "내가 다 밀어버리면 그만이야. 우리 유빈이를 슬프게 하려는 놈들 은 절대 용서 못해."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멍한 눈으로 TV를 들 여다보던 예안은 꾸벅꾸벅 졸다 잠이 들었다. 조그마한 손으로 엄마 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던 아기도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침묵과 어둠이 잔뜩 깔린 넓은 방이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장식들 이 즐비해 있었지만 어둠이 그것들을 모조리 가리고 있었다. 아직 빛에 익숙한 눈동자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소년은 누군가 들어 서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돌아보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우리 뜻대로 되어가고 있다. 이대로라면 근시일 내에 극 동아시아는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될 거야. 엔젤에게 인간이 얼마 나 더러운 족속들인지 증명해줄 무대가 완성되는 셈이지." 어둠 속에 앤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가 다가오는 소리가 뚜 벅뚜벅 그 뒤를 따른다. 그러나 소년은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어때?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오니 마음이 편안한가?" "조금은."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소년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앤슨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킥킥 웃으며 소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무 섭섭하게 굴지 마라. 난 항상 널 우리의 동족이라 생각해왔 다. 네가 동족이 될 자격이 없다 해서 널 배척하는 머저리들은 그냥 무시해버려. 게다가 이제 대부분 너의 공적을 인정하고 있지 않나? 널 우습게 보는 녀석들은 하나도 없다. 네 어머니도 지하에서 기뻐 하실 거다." "꼭 이래야만 해?" 소년의 목소리는 우울함이 가득했다. 그의 음성은 아름답고 청명했 지만, 고통을 쥐어짜는 괴로움까지 한데 뒤섞인 것이었다. "망설일 필요는 없다고 지겹도록 말하지 않았나? 우리는 다만 아주 오랫동안 빼앗겼던 권리를 되찾으려는 것 뿐이야. 그것을 위한 준비 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또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해서 야 되겠어?" 칭얼거리는 동생을 나무라듯 점잖은 목소리였다. 소년은 반박했다. "엔젤도 사람이야." "우리가 만들어낸 사람이지." "그녀에게도 행복할 권리가 있어." "그녀를 본 적도 없으면서 잘도 말하시는군. 어울리지 않는 휴머니 스트 흉내라도 낼 셈인가?" 소년은 고개를 돌려 앤슨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숨겨진 그의 눈동자 는 슬프게, 아주 슬프게 빛나고 있었다. 앤슨은 그것을 보면서 생각 했다. 그의 눈동자는 미칠 듯 혁명을 추구해온 자신의 양심을 찌르 고 있다고. 그가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배척받아온 것은 에날도 스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혁명을 향한 마음이 약해지게 만드는 저 눈빛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를 강요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어." "있어. 엔젤은 바로 우리 손으로 만들어졌으니까." "엔젤을 탄생시킨 건 박사야. 우리가 아니야." "박사는 우리로부터 자금을 받았지." 소년은 씹듯이 내뱉었다. 암울함이 가득한 어조였다. "저주받을 거야. 우리는 다시 한 번 신에게 저주받을 거야." "그전에 우리가 먼저 신을 쳐 없앤다. 아무도 우리를 저주할 수도 없고 우리에게 벌을 내릴 수도 없어. 그야말로 완벽하지 않나?" 소년은 알았다. 앤슨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에게는 그를 말릴 힘도 없다는 것을. "걱정하지 마라. 혁명이 완성되면 네가 잃어버렸던 힘도 다시 생겨 날 거다. 난 그렇게 확신해." "에날도스 따위, 필요 없어." 잠깐 시간이 멈췄다. 못 들은 말을 들은 것처럼 멍하니 굳어 있던 앤슨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년을 노려보았다. 세상에 다시없을 모 욕을 받은 사람처럼 격렬한 분노에 불타오르던 그의 눈동자가 붉게 변했다. "필요 없다고? 에날도스가 필요 없다고? 그게 자랑스런 우리 민족으 로서 입에 담을 소리인가?" 소년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그는 또박또박 힘주어 대답했다. "필요 없어. 내 어머니를 죽음으로 이르게 한 그런 힘 따위는 전혀 필요 없어." 앤슨은 손을 들었다. 분노에 불타는 푸른빛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맺 혔다. 이대로 조금만 통제를 풀어버리면 푸른빛은 소년의 전신을 갈 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앤슨은 소년을 보았다. 소년도 앤슨을 보았다. 둘의 눈빛에 서로에 대한 증오심은 없었다. 증오처럼 보이는 분노가 있었을 뿐이었다. 소년은 혁명에 미친 앤슨에 대한 안타까움을. 앤슨은 민족을 이해하 지 못하는 반동분자에 대한 안타까움을. 그 둘은 그렇게 서로를 안 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에 대한 그들의 이해심은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진 않지만 서로의 신념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앤슨은 미소지었다.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화를 내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의 손에 매달려 있던 푸른빛도 어느새 사 그라진 뒤였다. "에날도스를 저주하는 네 마음은 십분 이해한다. 아마 네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네가 충격을 받아 에날도스를 쓰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는 소년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사랑하는 아들을 귀여워해 주는 아버지의 손길과도 같았다. "에날도스는 우리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이다. 그것을 항상 잊어버 리지 않도록 해라." 잠자코 소년을 응시하던 앤슨은 밖으로 나갔다. 혼자가 된 소년의 뺨에 한결 짙어진 어둠이 달라붙었다. 비로소 그의 얼굴에 약간의 생기가 찾아왔다. "증명이라고?" 그는 허망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축복의 힘, 에날 도스. 그것을 단 한 번도 사용해본 적 없는 이 가녀린 손. 남들은 자신이 어렸을 때 에날도스의 폭주로 사망한 어머니 때문에 충격을 받아 그것을 사용 못하는 거라 말한다. 하지만 그것과는 달리 소년은 진실 된 이유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질기고 질긴 운명의 사슬로 자신을 얽매고 놓아주지 않는 에날도스. 출생과 삶, 그리고 죽음까지 자신의 모든 걸 망쳐놓는 저주받은 힘. 그래서 더욱 운명을 미워하고 힘을 저주하고 자신까지 증오했던 것 이었다. 태양을 갈구하는 동족. 혁명을 향한 그들의 염원. 하지만 그들의 모 든 노력이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소년은 알고 있었다. 거대한 신 앞 에 인간이라는 건 무력함을 상징하는 하나의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그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바보였다. 결국 또 한 번 신으로 부터 버림받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을 도와주고 있으니. "그만두고 싶어. 그만두고 싶어." 그는 괴로운 얼굴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고요한 그 울음소리는 아주 슬펐다. 연참의 시간이 다가왔군요. 이번 주말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연참 의 홍수에 빠뜨려 드리죠. 후훗... [2주일 가까이 약속 미룬 주제에 말이 많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77 회] 날 짜 2004-05-23 조회 / 추천 2383 / 31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재회의 의미 어젯밤 영환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영환은 필사적으로 조사하는 중이긴 하지만 별다른 수확이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는 예안 이 흘린 시트날타라는 이름에 대해 좀더 알기를 은근히 원했지만, 그녀는 절대 안 된다고 거절해버렸다. 몹시 서운해하는 영환에게 미 안함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트날타에 대해 털어놓으면 자신 의 현재 육체가 클론이라는 것과 더불어 여러 가지 밝히고 싶지 않 은 비밀들까지 밝혀지게 될 것이다. 그것만큼은 절대 막고 싶었다. 한반도 전체에 전쟁 분위기가 만연하게 흐르고 있었지만 태양은 여 느 날과 마찬가지로 평화로웠다. 전쟁은 역사를 바꿔버릴 정도로 인 간들에게 중요한 것이지만 대자연에게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그리 고 예안은 평화로운 오후를 '전쟁해요 제발!'이라고 징징대는 맥의 칭얼거림으로 보내야만 했다. '우리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일본이 생각할 거라구요? 맙소 사, 절대 아닙니다. 전쟁을 바라지 않고서야 그들이 저한테 핵공격 까지 강행하겠어요? 자기가 먼저 시작해놓고 한국 정부가 배상해주 겠다고 하는데 배째라 정신으로 밀고 나오겠어요? 그 녀석들은 지금 전쟁을 바라고 있다구요.' 인공지능도 흥분하긴 하나 보다. 깍듯한 '습니다~'체는 어디로 내버 려두고 흥분한 어조로 귀여운 말투를 구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 가 원잠이 일본 소속이라는 물증이 없다는 말을 할 땐 언제고, 지금 모순된 주장을 펼쳐 가며 예안을 설득하고 있었다. '사실 전쟁해봤자 우리한테 불리한 것도 없는데 일본이 오히려 전쟁 을 바라는 척 강경하게 나온다는 것도 좀 이상해.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 저러는 거 아니야? 그러니 우리는 그 녀석들 의도에 넘어가 지 않아야 한다고.' '전쟁하는 게 절대 좋다니까요. 이 기회에 한국 위신도 세울 수 있 고 시트날타에 좋은 경고도 되고 유젤 님 주가도 더욱 올라갈 테고, 일석삼조 아닙니까?' 이 녀석이 밤새도록 제발 한 번 붙게 해달라고 보채는 바람에 잠을 설친 걸 생각하면 산성비를 확 부어버리고 싶었다. 사실 예안도 일 본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전장에 나서게 되면 개미떼를 죽이 듯 무심하게 사람들을 밟아나가는 자신을 발견할까 두려웠다. '니콜라스 내려 왔어. 이제 그만 하자. 머리 식히러 가는 와중에까 지 이런 이야기하는 건 싫어.' '쳇. 오늘 저녁에 못 주무실 줄 아세요.' '빼버리면 그만이지 뭐.' 니콜라스는 모처럼 멋들어진 옷을 빼 입고 있었다. 캐쥬얼이 너무 화려하다는 느낌이 없진 않았으나, 그래도 예안은 정장이 아닌 것에 안도했다. 그녀는 정호에게 아기를 잘 맡아달라 부탁한 뒤 니콜라스 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콜 택시가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시내로 접어들었을 즈음 예안이 말문을 열었다. "너 굉장히 기대 많이 한 모양이다?" "응. 어젯밤 제대로 잠을 못 잤어. 제임스 해론이 어떤 사람일지 너 무 너무 궁금한 거 있지." 니콜라스의 말투는 활기에 가득 차 있었다. 예안은 그가 많이 변했 다는 걸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의 그 무뚝뚝한 말투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그는 보통 어린이에 동화되어 있 었다. 그러나 만약 적이 나타난다면 그 순간 그는 잔인한 청부업자 로 되돌아가 모조리 말살해 버릴 것이다. "제임스 해론이라…. 근데 그 사람 몇 살이야?" "나도 잘 몰라. 가서 보면 알게 되겠지 뭐." 생기에 가득 차 반짝이는 니콜라스의 눈동자는 처음 데이트를 나가 는 어린애처럼 흥분에 가득 차 있었다. 예안은 그를 보며 생각했다. 이 아이를 자신이 거둬들여 학교도 보내고, 공부도 시키고, 그렇게 평범한 사람처럼 살게 해주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고. '나중에 한 번 말해볼까?' 그러나 꺼내자마자 곧바로 거절당할 것 같았다. 니콜라스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총을 뺀 자신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평소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였다. 그들은 어느덧 중앙시민홀에 도착했다. 예안은 내리다 말고 무수한 사람들이 몰려 있는 걸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콩나물 시루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제임스 해론의 인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더욱이 군중의 절반 이상은 외국인이었다.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한국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전쟁이 꼭 나란 법은 없겠지. 한국이나 일본이나 뭐 생각이 아예 없는 나라들은 아닐 테니까.' 예안은 니콜라스를 따라 인파를 파고들었다.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 딪치는 바람에 몇 번이고 모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속으로 몹시 투덜거렸다. '근데 유니콘. 너도 제임스 해론한테 좀 관심 있지 않았어? 옛날에 나한테 아름다움이 어쩌구 저쩌구 할 때 그 사람 저서를 인용한 적 도 있잖아?' '유명 도서들의 내용을 데이터에 담고 있을 뿐 그에 대해서는 관심 없습니다.' 니콜라스가 겨우 길을 만들어 앞장섰다. 콩나물 시루보다 비좁은 지 역을 탈출하고 나자 예안은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시끄러운 함성 때문에 아직도 귀가 멍멍했지만 퇴근 시간 번화가 지하철보다 는 그래도 나은 것 같았다. "사람들 정말 많다. 저 사람들 전부 다 안으로 들어갈 수나 있나?" 예안은 엄청난 인파를 질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표 없는 사람들이 태반일 거야. 제임스가 나중에 나올 때 어떤 사 람인지 한 번 보기라도 할 모양인가 보지 뭐. "저런 엄청난 경쟁률을 제치고 표를 두 장씩이나 산 너도 참 대단하 다, 대단해." 아직 시간이 훨씬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강당에는 사람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예안과 니콜라스도 간신히 자리를 찾아 앉았다. 좋 은 자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썩 나쁜 자리도 아니었다. "근데 누나는 제임스 책 읽어본 적 있어?" "없어. 그냥 대충 어떻다 라는 것만 너한테 잠깐 들어봤을 뿐이야. 뭐 네가 갖고 있는 건 죄다 원서밖에 없어서 읽을 수도 없지만." "원서를 못 읽는다고? 누나가? 그거 굉장히 의외네." 니콜라스는 예안이 영어를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근데 나 한국어로 쓰여진 것도 갖고 있어. 전에 말했는데?" "어? 그래? 그렇다면 이따가 집에 가서 한 번 읽어봐야겠다. 근데 너는 원서로 된 거만 사면되지 뭐 하러 그렇게 여러 개를 사냐? 돈 아깝게." "각 나라 언어마다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거든. 그것 때문인지 다른 언어로 쓰여진 걸 읽을 때마다 그 기분도 달라져." "원래 번역서라는 게 대부분 다 그래."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왔다. 바깥에서 제임스 해론의 얼굴 한 번 보려고 발을 구르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바짝 조여진 분위기 속에서 예안은 까닭 없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 래며 얼른 시작하기만을 기다렸다. "근데 그것들 번역한 게 아니라 제임스가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 각 각 여러 나라 언어로 써서 활자화 한 거래. 제임스가 몇 개 국어를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10개 국어 이상은 할 줄 아는 모양이야." "진짜?" 예안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인문학자가 이렇게 명성을 드 날리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열 개 국어 이상을 할 줄 안다니. 왠지 맥이 빠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그야 나도 열심히 공부만 한다면 열 개 국어가 아니라 백 개 국어도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자신은 단지 유젤의 육체를 받았기에 그런 뛰어난 지능과 능력을 얻 은 것에 불과했다. 보통 인간으로 태어나 그런 능력을 쌓은 사람들 을 볼 때마다 부러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또한 그것은 아직 에덴인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앗! 시작하려나 봐!" 예안은 서둘러 강당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행자가 나와서 의례적인 멘트를 늘어놓고 있었다. 제임스가 등장한 줄 알았던 사람들의 얼굴 에 실망한 기운이 가득했다. 한국어로 인사를 마친 진행자는 다시 똑같은 말을 영어로 바꿔 말했다. "저렇게 하지 않아도 어차피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다 알아들었을 텐데." 니콜라스가 투덜거렸다. "이 많은 사람들이 한국어를 어떻게 알아? 아무리 근래 들어 한국어 가 세계적으로 중요해지긴 했어도 몇 년 되지 않았잖아?" "제임스가 한국인이라는 추측이 유력해. 한국어로 된 저서가 가장 생동감이 넘치거든. 그래서 그의 골수팬들은 대부분 원어민 수준으 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어." 예안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쯤 되면 빠돌이와 빠순이를 넘어서 광신도를 가볍게 짓밟고 비웃어줄 수준이었다. 물론 그녀는 제임스 해론의 저서를 읽고 자신이 인간인 게 싫어 자살한 사람들이 한때 수두룩했을 정도라는 것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 그의 인기를 체감하는 건 느낌이 달랐다. 지루한 인사 멘트와 몇 가지 절차가 끝나고 드디어 사회자가 물러갔 다. 바야흐로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져 있던 제임스가 등장하는 순간 이었다. 장내에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커다란 침묵 이 깔렸다. 마치 중대한 종교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진지하기 그지 없는 분위기였다. 누구 하나 이 기도를 깨뜨릴 생각을 않았다. 경직된 분위기가 부담스러워 속으로 투덜대던 예안은 누군가가 드러 나자 좀더 잘 보기 위해 자세를 바꾸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이 눈동 자에 또렷이 들어온 순간 그녀는 표정을 잃은 채 굳어버렸다. 그녀 는 눈을 크게 뜨고 제임스를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친애하는 인간 여러분들. 반갑습니다." 제임스 해론은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꺼냈다. 약간의 피로가 담겨져 있었지만 그래서 더 듣기 감미로운 미성이었다. "여러분들은 제가 왜 갑자기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건지 의아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어떤 사람인지 기대하셨을 겁니다." 예안은 멍청하게 굳은 얼굴로 제임스를 응시했다. 지금 이 상황이 꿈인가 싶었다. "어떻습니까? 저는 과연 여러분들의 기대를 충족시킬만한 고급 인간 인가요?" 농담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무거운 목소리였다. 그의 어조에 는 재치와 중후함이 번갈아 섞였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장내에서 침 묵이 깨져 나갔다. 사람들은 신의 모습을 확인한 크리스챤처럼 일제 히 함성을 올렸다. "우아아아!" "제임스! 제임스! 제임스!" 절제된 함성이 강당을 뒤덮었다. 정중한 군가가 울려 퍼지는 듯 했 다. 고막이 터져 나갈 정도로 시끄러웠지만 그들은 누구 하나 고함 외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법에 홀린 듯 미친 사람처럼 제임스의 이름을 부르짖고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다. 그 가운데 예안은 혼자 멍청하게 굳어 있었다. 제임스의 얼굴은 자 신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흥분을 참지 못한 채 고함을 외치려던 니콜라스는 그제야 그녀의 낌새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누나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어디서 좀 보던 얼굴이라서…." 예안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고 있 었다. 단지 친한 친구가 저런 대단한 철학가라는 걸 알게 되어서 놀 란 것만은 아니었다. 바로 이 순간, 그녀는 앞으로 전개될 자신의 삶에 제임스가 막대한 영향을 끼치리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 던 것이다. 고독한 사상가. 학계의 배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항상 오만하게 세 상을 굽어보는 위대한 철학자. 현대 염세주의에 무수한 영향을 끼친 월드 스타, 제임스 해론. 그는 차세현이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78 회] 날 짜 2004-05-23 조회 / 추천 2418 / 29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재회의 의미 예안은 두 시간 동안을 멍청한 기분으로 지냈다. 혹시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몇 번이고 눈을 다시 비비며 제임스 해론의 얼굴 을 확인했다.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닌가 싶었다. '어떻게 저 녀석이 저기에 있는 거야!' 몇 번이고 그렇게 터지려는 고함을 억눌러야 했다. 당장 강당으로 뛰어 올라가 세현을 끌어내리고 싶은 마음을 짓밟아야 했다. 어째서 네가 거기에 있는 거냐고 고래고래 외치고 싶은 충동을 그렇게 죽여 야 했다. 꿈을 꾸는 듯한 두 시간이었다. 노란 조명 아래서 그의 목소리는 때 론 빠르게, 때론 느리게, 때론 감미롭게, 때론 격정적으로 시시각각 변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은 마치 마약이라도 복용한 듯 몽롱한 표 정으로 세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위대한 천재였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모두 진실이었 다. 거짓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여태껏 당연하게 진실이라 알 고 있었던 것도 그의 입을 거치면 세상에 다시없을 추한 거짓이 되 었다. 자연스럽게 거짓이라 알고 있었던 것도 그의 목소리에 실리면 더 없이 훌륭한 진리로 탈바꿈했다. 아무도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떠드는 사람이 없었다. 처 음에는 그렇게 광분하던 사람들이 그가 입을 열기 시작하자 약속이 라도 한 듯 일제히 함성을 멈췄다. 그 어떤 독재자도 이처럼 완벽하 게 사람을 컨트롤 할 순 없으리라. 그는 실로 위대한 사상가였으며, 위대한 궤변론자였고, 위대한 정치가였다. 모두가 그에게 매료되었 다. 그 가운데 깨어 있는 사람은 오로지 예안 뿐이었다. '소름이 끼친다.' 그것이 예안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세현의 강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 달콤한 꿈의 바다를 헤엄치 는 듯 몽롱한 그들의 눈동자. 그것은 실로 소름끼칠 정도로 아름답 고 또 무서운 광경이었다. 드디어 강의가 끝났다. 세현이 퇴장하고 난 뒤에도 사람들은 한참이 나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무도 세현의 나이를 잡고 늘어 지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세상의 끝에서 귀중한 진리를 얻은 사 람처럼 흡족해했으며, 그렇게 아쉬워하며 강당을 떠났다. "누나? 안 가?" 강당 위에 남겨진 세현의 잔영을 노려보듯 허공을 응시하던 예안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 벌써 사람들 다 갔네?" "누나도 굉장히 충격 받았구나! 그럴 줄 알았어!" 자신이 좋아하는 철학가에게 예안이 매료되었다 생각한 니콜라스는 기쁜 나머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세현이 녀석이 제임스 해론이라고? 차세현 그 녀석이?' 작년에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긴 채 미국 MIT 조교수로 유학을 떠나 고 생일 선물 외에는 소식 한 통 없었던 세현. 그와의 재회가 이런 충격적인 모습으로 이뤄질 줄 상상도 못했던 예안은 아직도 구름 위 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말도 안 돼. 아무리 녀석이 머리가 좀 좋기로서니, 그것은 어디까 지나 이공계쪽일 뿐이라고! 철학이라는 게 어디 머리 좋다고 해서 되는 거야?' 예안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애써 감추며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이제는 조금 전까지 보았던 사람이 정말 세현이 맞나 하는 의심까지 들 정도였다. '혹시 세현이 녀석이랑 얼굴만 똑같은 그런 사람 아닐까?' 하지만 분명 제임스 해론은 자신을 소개할 때 한국식으로 18살이라 고 했었다. 그렇다면 예전에 세현의 집에서 보았던 제임스 해론의 저서는 녀석의 책이었단 말인가. 혼란을 달래려 애쓰던 예안은 문득 니콜라스가 걱정스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 는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왜 그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미, 미안. 그냥 좀 쓸데없는 생각하느라 그랬어. 이제 그만 가자." 예안은 걸음을 옮기는 내내 배신감에 시달렸다. 제임스 해론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게 그렇게나 어려웠단 말인 가. 녀석에게도 말못할 사정이 있었을 테지만 그래도 배신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머!" 앞에서 걸어오던 어떤 여자와 니콜라스가 부딪쳤다. 그녀가 들고 있 던 커피가 쏟아지며 니콜라스의 옷을 더럽혔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걸 어쩌죠?" 니콜라스는 귀찮은 얼굴로 얼룩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여자에게 시 선도 주지 않은 채 예안에게 말했다.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물로 대충이라도 빨아야겠어." "알았어. 저기 휴게실에서 기다릴게." 니콜라스는 거듭 사과하는 여자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화장실로 갔 다. 예안이 그 대신 괜찮다고 여자를 안심시켜 돌려보냈다. 휴게실로 간 예안은 아무 자리나 골라잡아 앉았다. 사람들의 모습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휴. 세현이 그 녀석한테 그런 비밀이 있었다니, 정말 놀랄 노 자다 이거." 예안은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기지개를 쭉 켰다. 거의 일 년 만에 한국에 왔으면서 왜 자신에게는 연락 한 번 안 하는지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때였다. "오랜만이야." 눈앞의 풍경이 굳었다. 예안은 기지개를 켠 채로 잠시 멎었다. 가슴 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예안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벽에 어깨를 기대고 선 세현의 모습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조금 야윈 듯 하지만 한결 성숙한 어른의 눈동 자를 가진 그. 반가운 그 미소와 직면한 순간 예안은 긴장의 끈이 느슨해졌다. "그동안 잘 지냈어?" 굳어 있던 예안은 그제야 겨우 깨어났다. "으, 응. 오랜만이야." 예안은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세현을 직접 맞닥뜨리게 되면 잔뜩 쏘아주리라 벼르고 있던 독설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뇌 세포가 집단으로 반란을 일으키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아까부터 계속 널 보고 있었는데 조금도 눈치 못 채더라. 사실 그 동안 몇 번이고 너한테 연락하고 싶었는데 사정이 있어 그러지 못했 어. 이번에 한국에 오면서 솔직히 널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진 않았는데 이렇게 얼굴 보게 돼서 기뻐."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는 수척한 얼굴. 예안은 강한 위화감을 느 꼈다. 키가 조금 더 자라고 여유가 조금 더 생기고 조금 더 강해 보 이는 걸 제외하고 그는 변한 게 없었다. 헌데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이질감이 그의 전신에서 가득 풍기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두 려움을 느낀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양팔로 몸을 감쌌다. "근데 좀 놀랐다. 네가 제임스 해론이었을 줄 상상도 못했거든. 나 아까 단상에서 너 보고 숨이 멎는 줄 알았어." 예안은 애써 농담 삼아 그렇게 말을 건넸다. "옛날에 잠깐 귀띔해준 적 있는데 눈치 못 챘어?" "귀띔? 언제?" "기억 안 나? 옛날에 왜 네가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이해할 수 없다 는 말 한 적 있잖아. 그때 내 저서 내용을 일부 인용하고 내 필명까 지 곁들였는데 눈치 못 챘단 말이야?" 비로소 예안은 그 일을 기억해냈다. 아마 앤드류를 만나기 전으로 기억했다. "근데 넌 변함 없구나. 여전히 아름다워. 도저히 네가 인간처럼 느 껴지지 않아." 고요한 적막이 그 둘을 감쌌다. 세현은 밝게 미소짓고 있었다. 그리 고 예안은 알 수 없는 한기를 느꼈다. 몸이 떨리고 있었다. 너무 아 름다워서 인간 같지 않다는 칭찬이 이렇게 무서운 느낌을 동반하는 것인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비로소 그녀는 그가 예전과는 확 연히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보고 싶었어. 정말 보고 싶었어." 절실한 간절함까지 느껴지는 어조였다. 예안은 굳은 상념에서 퍼뜩 깨어났다. 이건 녀석이 할 말이 아니다. 녀석이 입에 담을 말이 아 니다. 예전의 녀석이었다면 조금 더 무뚝뚝하고, 거칠면서도 부드럽 게,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예안의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 어디에서도 예전의 흔적 을 잡아낼 수 없었다. "너 많이 변했구나." 무턱대고 그렇게 불쑥 내뱉어 버렸다. 세현이 당황하지 않을까 걱정 하면서도 몸이 먼저 반응해 버렸다.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찾아온 적 막한 분위기. 비로소 자신이 실수했음을 느낀 예안이 당황한 채 사 과하려 했을 때 세현이 말을 가로챘다. "이게 원래 나일 거란 생각은 안 해?" 재회는 완전히 달라진 친구의 모습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하다는 것. 예안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범준은 초조한 얼굴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여보, 좀 천천히 가요." 지희는 숨차 하며 범준을 뒤쫓아갔다. "빨리 가지 않으면 늦어. 세현이 녀석 일정이 많이 바쁠 테니까 자 칫 얼굴도 보지 못할 수 있다구." "제임스인가 하는 사람이 정말 세현이라는 보장은 없잖아요?" "당신도 TV를 봤으면 알 거 아냐!!" 범준은 걷다 말고 버럭 화를 냈다. 지희는 움찔했다. 작년 세현이 집을 나가고 소식이 끊어지면서부터 그녀는 범준과의 말싸움에서 항 상 밀리곤 했다. 어찌 되었든 그녀와 석훈이 세현의 가출에 근본적 인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 그리고 이제부터 세현이하고 석훈이랑 차별 하지 말고 똑바로 대하고. 알았어?" 언제부터인가 다정함을 잃어버린 남편. 지희는 이 모든 게 세현이 가출했기 때문이란 생각에 이가 갈렸지만 꾹 참았다. 범준은 여직원을 찾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제임스 해론씨를 만나볼 수 없겠습니까?" "곤란합니다. 제임스씨는 지금 무척 바쁘세요." "제발 부탁합니다. 제임스 해론씨가 제 친아들이라구요. 꼭 한 번 만나봐야 합니다." "글쎄, 이러시면 곤란해요. 제임스 씨와 친한 사이라고 거짓말을 하 고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더라도 들어주지 않을 기세였다. 범준은 애가 탄 나머지 애걸도 해보고 내가 누군지 아냐고 윽박질러도 보았 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유한그룹 사장의 체면을 그렇게 구길 대로 구긴 후 그가 힘없이 돌아서려 할 때였다. "무슨 일이시죠?" 아들의 목소리에 범준은 그대로 굳었다. 그는 감격에 겨운 채 천천 히 등을 돌렸다.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조금 야윈 모습을 확인한 순 간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지난 일 년 동안 밤이면 밤마다 생각해두었던 무수한 사과 멘트들이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제임스씨. 이분이 제임스씨 친부라고 어찌나 우기시는지 좀 난처하 던 참이었어요." "그래요?" 키가 조금 더 커진 것 같았다. 약간 수척해진 얼굴이 무거운 분위기 를 자아내고 있었다. 타지에서 얼마나 고생했으면 저렇게 됐을까 하 는 마음이 범준을 안타깝게 했다. 그는 차마 세현을 덥석 끌어안지 는 못하고 엉거주춤하며 입을 열었다. "세현아. 아버지다."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세현의 어조는 덤덤했다. 그러나 범준은 그가 자신에게 보이는 거부 의 몸짓을 보지 못했다. "인석아. 그 동안 왜 연락이 없었어?" 결국 참지 못한 범준은 와락 세현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세현은 태 연히 그를 밀쳐냈다. "이러지 마세요." 뜻하지 않은 쌀쌀한 반응에 범준은 크게 당황했다. "세현아? 아버지야. 아버지라니까." "헤어지기 직전에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부자간의 사이 는 그걸로 끝난 거라고요." 범준은 그만 울컥했다. "못된 놈! 아직도 그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거냐!" 그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만났다는 흥분과 아 들이 자신을 외면한다는 분노가 뒤섞인 것이었다. "그때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전 더 이상 자식이 아니라고 요." "아버지가 화가 나서 그런 말을 할 수도 있는 거지, 네 어머니를 대 신해 널 좀 혼냈기로서니 그렇게 꽁해 있을 수 있는 거냐!" 비로소 세현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어머니라는 단어에 기가 막혀하는 조소였다. 지희는 그가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흘끔하자 움찔했다. "누가 제 어머니라는 거죠? 이 여자가 말입니까?" 범준은 너무 놀라 뒤로 넘어갈 뻔했다. 설마 세현이 지희 앞에서 이 여자 운운하며 이런 모욕을 안겨 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그였다. "제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단 한 분뿐이세요. 질투심에 불타 의붓아 들을 구박하기에 바쁜 이런 하찮은 여자가 어떻게 제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거죠?" 지울 수 없는 모멸감에 지희는 그저 이를 악물기만 했을 뿐 한 마디 의 반격도 못했다. 그녀와 싸잡아 모욕당한 범준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건드리면 깨져 버릴 것 같은 얼굴로 모욕의 언사를 읊는 세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미 우리의 인연은 끝났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세현은 거만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한껏 조소했다. 그건 아들 을 외면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어리석은 인간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그 순간 범준은 세현이 여태껏 한 번도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만 가보시죠. 다시는 찾아오지 마시길 바랍니다." 예전 같았으면 다리를 부러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제정신이 들게 했 을 것이다. 그러나 세현은 원망을 품고 투정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더 이상의 인연을 연장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었다. 범준은 지희의 손을 잡아끌며 돌아섰다. 발걸음을 돌리는 게 무척이 나 힘들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등뒤에서 세현이 잘못했다고 빌며 매 달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되면 받아줘야지, 하고 중얼거려도 보지 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건 뭔가 아니다는 외침만이 머리 속을 맴돌았을 뿐이었다. 세현은 무뚝뚝하게 사라지는 아버지를 보았다. "저 사람이 당신 아버지인가요?"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79 회] 날 짜 2004-05-23 조회 / 추천 2509 / 30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내 소중한 자존심 세현은 등을 돌렸다. 그곳에는 20대 초반의 여자가 서 있었다. 날씬 한 몸매가 드러나는 타이트한 옷차림은 뭇남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는 무심한 눈으로 여자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기 만 했다. "한때는." "한때는? 제임스, 시간이 흐른다 해서 아버지라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에요." "내 마음 속에서 저 사람은 내 아버지가 아니야."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그런 건 싫어요." 세현은 풀썩 웃으며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제시는 슬픈 눈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한 강연이 일단 성공적으로 끝나 다행이네요. 하긴, 당신의 추종 자가 전세계적으로 몇 만 명인데 실패할 리가 있겠어요? 현대에서 철학가로서 이렇게까지 성공한 사람은 당신뿐일 거예요." "성공은 아냐. 내가 한국에서 살았을 때 친구들 중에서 제임스 해론 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애들이 거의 태반이었어." "어린애들이 본질에 대해 뭘 알겠어요?" 세현은 소리 없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처구니없어 하는 웃음 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본질을 안단 말이야?" "당연하잖아요." "너무 추켜세우는 거 아니야? 난 그저 세 치 혀를 이용해 달콤한 몇 마디를 흘리는 것뿐이라고." 세현은 무거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늘진 그 무게를 아버지에 대한 연민으로 해석한 제시는 안쓰러워하며 말했다. "저대로 아버지를 돌려보내도 정말 괜찮겠어요? 당신의 어머니가 천 국에서 굉장히 슬퍼하실 거예요." "말했잖아. 그날 이후로 저 사람은 더 이상 내 아버지가 아니었어. 그리고 어차피 천국은 없어. 어머니 역시 저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 고." "사랑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결혼을 했겠어요?" "위원회로부터 날 보호하기 위해서였겠지." 세현은 덤덤히 대답했다. 제시는 그의 음성에서 사멸된 증오를 읽어 버렸다. 그것은 몸부림치고 싶어하는 처절함이 그대로 얼어버린 마 음이었다. 무거운 침묵에 둘러싸인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당신의 운명을 원망해요?" "아니." "그들을 미워해요?" "아니." 제시는 울컥했다. 미워하면서도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가 어 리석다 여겨서가 아니었다.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적을 위해 봉사하 면서도, 미워한단 말조차 꺼내는 게 용납되지 않는 그의 인생이 너 무 가여워서였다. 그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운명의 신을 너무 증오했 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어머니가 죽은 건 그들 때문이라고요! 그런데도 그들을 원 망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건 착각이었을 뿐이야. 어쨌든 난 재물이 아니라는 게 증명 됐으 니 이제 모든 게 잘 됐잖아?" 속마음을 감춘 채 살아야만 했던 세현이 가엾게 느껴질 때마다 제시 는 울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혼자 힘으로 울음을 참아내야 만 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우는 여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법조차 배 우지 못한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의 주변을 돌아볼 만한 여유를 지니 지 못한 사람이었으니까. "그 사람은 갔나요? 그, 서예안이라고 하던 여자요. 당신 첫사랑이 라고 했죠?" "갔어. 근데 표정이 안 좋네? 설마 질투하는 건 아니겠지?" 어울리지 않는 농담에 제시는 울컥 눈물이 치솟고 말았다. 그러나 세현에게 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되었기에 그녀는 힘들게 눈 물을 감췄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내가 왜 당신에게 붙어 있는지 그 이유를 잊 었어요?" 세현은 무심한 얼굴로 그녀를 주시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시체로 변 해버린 분노가 가득했다. 소멸된 슬픔의 빛도 서려 있었다. 형체를 잃어버린 증오까지 그렇게 뒤범벅이 되어 공허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본분을 지키기 위해서겠지. 하지만 당신 아버지는 16년 전에 그 잘 난 본분을 지키지 못했어. 그런 무력한 남자의 딸을 내가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제시는 슬펐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날카로운 칼로 사람 의 마음을 사정없이 푹푹 찌르는 그의 독설이 어떤 슬픈 의미를 담 아내고 있는지 그녀는 안다. 조금이라도 눈을 떼었다가는 그의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져 버리리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더욱 더 그를 안쓰럽게 여겨왔는지도 모른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울음을 억누르는 제시를 무심하게 바라보던 세현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살을 깎는 진심으로 아버지의 과오를 대신 사과하는 그녀가 가엾게 느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그녀를 둘러싸고 있 는 운명의 손길을 생각했다. 자신은 그것을 거부하려 하지만 그녀는 적극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또 그녀 자신의 본분을 지키려 하고 있다. 그 어느 쪽이 합당한 것인지 그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재물의 운명을 타고 태어나셨다 해서 나까지 그런 건 아 냐. 위원회도 한동안 날 의심했지만 검사 결과 난 지극히 평범하다 는 게 입증됐잖아? 그러니 제시는 더 이상 내 곁에 머무를 필요가 없어."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야. 그리고 제시의 그런 행동이 날 더욱 위험하게 만 들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해? 위원회 녀석들 중, 혹시 제시가 수호자 가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녀석들이 있다는 걸 알아?" 제시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 녀석들을 죽이면 되지요. 난 아버지처럼 무기력하지 않아요." 제임스와 예안이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을 듣게 된 니콜라스는 굉장히 놀라워했다. 커피 얼룩을 씻으러 화장실로 간 사이에 예안이 제임스를 만났다는 말에 그는 몹시 안타까워했다. 그는 커피를 쏟은 그 여자를 다음에 만나면 절대 가만 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 고 세현에 대해 이리저리 코치코치 캐물었다. 처음에는 예안도 그가 엄마 치마잡고 늘어진 아이처럼 구는 게 싫진 않았다. 그러나 아기를 돌볼 새도 없이 말상대를 해주다 보니 점점 귀찮아졌다. 간단한 생활 관계에서부터 기호 식품이라든지 좋아하는 게임, 취미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소한 생활 패턴까지 물어오는데는 정말 질려 버렸다. 안 되겠다 싶은 예안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속 사포를 쏘듯 빠르게 내뱉었다. "사람들하고 별로 잘 어울리진 못했어. 성적은 단연 톱이었지만 대 하기 어려운 면이 있어 아이들은 물론이고 교사들도 거의 접근하지 않았어. 이제 됐니?" 그만 아기 좀 보러 가야겠다고 일어나려는 순간 니콜라스가 다시 예 안을 잡아 앉혔다. "그럼 왜 제임스가 한국에서 학생으로 살고 있었던 거야? 무슨 특별 한 이유라도 있어?" 니콜라스는 비키라고 해도 전혀 비켜주지 않을 태세였다. 예안은 왜 사람들이 빠돌이 빠순이를 그렇게 기피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 다. 그녀는 한 대 쥐어 박아주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러가며 부글 부글 끓는 가슴을 달랬다. "글쎄. 난 잘 몰라. 17살 나이에 MIT 조교수 자리까지 맡은 대단한 녀석 머리 속을 내가 알 게 뭐야?" "누나는 제임스보다 지능은 더 뛰어나잖아. 좀 성의 있게 대답해주 면 안 돼? 난 제임스를 보다 더 자세히 알고 싶다구." "사실 나도 걔에 대해서 잘 몰라. 예전에는 내가 누구보다 걔에 대 해 더 잘 안다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어. 난 그때까지 빙산의 일각만 보고 개에 대해 잘 안다고 우쭐대고 있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현이 아닌 제임스로서의 모습을 떠올리며 예안은 조금 우울한 표 정을 지었다. 너무나 달라져 버린 그의 모습은 자신과 그 사이에 좁 힐 수 없는 거리가 있다고 속삭여주는 듯 했다. "걔가 제임스 해론이라니. 난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 니콜라스가 맹목적으로 우상시하는 철학가가 세현이었다는 건 너무 뜻밖이었다. 물론 그에게 남다른 면이 있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학계를 뒤흔든 대단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경악과 어이없음을 수백 번 뒤섞는다 해도 부족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나 내일 세현이랑 만나기로 했는데 너도 같이 갈래?" 니콜라스는 숨을 숙였다. 조심스럽게 예안을 올려다보던 그는 떨면 서 되물었다. "나도 같이 가도 돼?" "상관없을 거야. 가고 싶어?" "가고 싶어! 가고 싶어!" 그는 갑자기 예안의 목에 매달리며 뛸 듯이 좋아했다. "데려가 줄 거지? 정말 데려가 줄 거지?" "그래그래. 데려가 줄게. 어차피 내가 밖에 나갈 땐 항상 너 데리고 다녔잖아. 어쨌거나 넌 내 경호원이니까." 어차피 시트날타의 위협이 남아 있는 이상 예안은 니콜라스와 항상 동행해야 했다. 영환이 정보력을 총동원해 알아보는 중이라 했지만 사실 그녀는 별반 기대를 갖지 않았다. 제나르의 「델」까지 간단히 물리친 니콜라스를 데리고 다니는 게 오히려 안심이었다. "나도 세현이 녀석 저서나 한 번 읽어볼까? 니콜, 내가 읽기에 뭐 괜찮은 거 있음 한 번 추천 날려 봐. 물론 원서로 된 건 빼고." "알았어. 근데 누나 원서 진짜 못 읽어?" "못 읽는다니까. 나는 한국어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 니콜라스는 그 사실을 매우 의아해하며 자신의 방으로 갔다. 잠시 후 그는 책 한 권을 집어들고 내려왔다. 그것은 예안이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는 책이었다. '인간이 아름답다 느낄 수 있는 존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전에 맥이 예안의 정체성에 대해 설명하며 인용했던 책이 었다. 그때 제임스 해론이라는 이름을 얼핏 듣긴 했지만 그냥 지나 쳤었던 기억이 났다. 쓴웃음으로 책을 펼치던 그녀는 깨알같은 글씨 가 즐비해 있는 걸 보고 기겁해서 책장을 덮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이거 좀 심하다. 내가 독서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다. 무슨 대서사시도 아니고 웬 글씨가 이렇게 작아?" "그거 다 읽으려면 열 시간은 우습게 걸려. 마음의 여유를 갖고 천 천히 읽는 게 좋아. 근데 누나한텐 상관없지 않아? 천재들은 원래 독파하는 속도가 빠르잖아?" 물론 예안은 마음만 먹는다면 삼십 분이 아니라 촤르륵 넘기는 것만 으로도 독파를 넘어 통째로 암기까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먹 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예안은 책을 되돌려주며 질린 시선으로 니콜라스를 살폈다. 이런 책 을 한두 권도 아니고 수십 권, 그것도 똑같은 책을 언어별로 사서 모은다면 그건 이미 광신도를 넘어선 수준이었다. 도대체 세현의 어 떤 부분이 이렇게까지 그를 매료시켰는지 예안은 몹시 궁금했다. "너 그렇게 제임스 해론이 좋아?" "응!" "나보다도 더?" 니콜라스는 당황했다. 걸려들었다 싶은 예안은 씨익 웃었다. "말해 봐. 나보다도 더 좋아?" 그는 어쩔 줄 몰라했다. 엄마와 아빠 중 누가 더 좋냐는 질문을 받 은 아이처럼 당혹스러워하는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예안은 앞으 로도 종종 이 녀석을 놀려먹어야겠다는 사악한 생각을 품으며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그만 생각해. 더 고민했다가는 너 죽겠다. 세현이 녀석이 여기 없 는 게 좀 아쉽긴 해도 뭐 재밌었어. 하여튼 이제 너의 가장 소중한 사람은 세현이까지 모두 세 명이 된 거지?" "세 명? 무슨 소리야?" "전에 말했잖아. 네가 병원에 있을 때 만났던 그 사람 말야. 다시 만나지 못한다 생각하니 가슴 아파 죽을 것 같다며? 그 사람하고 나 하고 그리고 세현이까지 이렇게 세 명 아냐? 때로 운명의 신은 아주 사소한 손짓 하나로 인간에게 커다란 계시를 내리곤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런 암시가 주변에 널려 있어도 전혀 보지 못한다. 그리고 완벽한 에덴인으로서 승인 받지 못한 예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지금 이 사소한 대화가 앞으로 어떤 커다란 일이 벌어지리라 암시하고 있다는 걸 상상도 못했다. "내가 누굴 만났다는 건데? 누나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80 회] 날 짜 2004-05-23 조회 / 추천 2506 / 29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내 소중한 자존심 그 날 밤 예안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창문을 두드리는 별빛의 노크 소리가 시끄러워서가 아니었다. 머리 속이 완전히 헝클어진 듯 제대 로 정돈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낌새가 전혀 없이 니콜라스 를 스리슬쩍 찾아온 기억상실증. 그것은 마치 앞으로의 일이 평탄하 지 않을 거라 암시하고 있는 듯해 기분 나빴다. 「기억 안 나? 처음 보는 어떤 사람 만났는데, 딱 보는 순간 '이 사 람이다'하고 필이 꽂혔다며?」 「나 그런 말 한 기억 없는데?」 「말도 안 돼. 너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 그 사람을 다시 보지 못하 면 가슴이 아파 죽을 것 같다 어떻다 그렇게 말했잖아?」 「도대체 무슨 소리야? 누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아까의 대화를 떠올린 예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니콜라스의 눈동자는 분명히 거짓말을 하 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또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병자의 것도 아 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기억못하고 있단 말인가. '머리에 충격을 받은 것도 아니고 특별히 나쁜 일이 일어났었던 것 도 아닌데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나 진짜 미치겠네. 안 그래도 요 새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터져서 복잡하기 그지없다고. 사소한 일 하나 하나에도 일일이 다 신경 쓰인단 말이야.'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지요. 니콜라스씨가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 지 못하는 게 그다지 큰 일은 아니잖습니까?' '그게 왜 큰일이 아니야? 녀석이 울면서까지 그렇게 고백한 일을 기 억 못하고 있는데.' '일부러 숨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유젤 님 앞에서 울었던 게 부 끄럽고 창피해서 말이지요.' '뭐, 그럴 수도 있겠다. 글치만….' 예안은 그래도 불안했다. 물론 니콜라스가 기억상실증이냐 아니면 부끄러워서 숨기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 히 알고 있으리라 여겼던 사실이 어떤 식으로든 간에 감춰지는 건 불안한 마음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잠이 오지 않은 그녀는 컴퓨터를 켰다. 아기가 불빛에 몸을 뒤척이 자 그녀는 얼른 모니터의 방향을 돌렸다. 탐 사이트는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열기에 달구어져 있었다. 이번 한일관계에 대해 전 국민의 관심이 최고조에 달아 있다는 증거였다. 예안은 자신이 깊이 연루되어 있기에 사람들의 반응 하나 하나가 몹 시 신경 쓰였다. 국론이 하나같이 주전 쪽으로 치닫는 게 조금 이상 했다. 대통령의 말대로 국민방송사들이 하나같이 그런 쪽으로 대중 을 유도하는 것도 이상했다. '시트날타 녀석들이 방송국 사장들을 매수라도 한 게 아닐까? 그렇 지 않고서야 맨날 티격태격 대기 바쁜 언론이 이렇게 나올 까닭이 없잖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내일 중현 아저씨한테 한 번 자세히 알아보라고 해야겠다. 그러고 보니 중현 아저씨하고 대통령 할아버지도 국론이 한 판 붙자 쪽으로 만 치닫고 있어서 당황하던 눈치던데.' '상당히 수상쩍습니다. 아무리 적어도 최소 40% 이상은 전쟁을 반대 하는 게 정상인데 말입니다.' '그만큼 일본이 싫다는 거야 뭐야? 근데 사실 전쟁해봤자 우리한테 별 득은 없는데.' '득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일본을 한국의 완전한 지배 하에 둘 수 있 겠죠. 합법적인 식민지 같은 거 말입니다.' '그게 별 득이 안 된다는 거야. 일본 따위를 종속시켜봐야 뭐가 좋 아? 먹기는 돼지 같이 먹으면서 병아리 힘도 제대로 못 내는 비실비 실한 말이나 마찬가지잖아. 오히려 다른 나라들 비난만 잔뜩 사고 말 걸?' '역으로 일본이 그것을 노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한 국의 지배를 받거나, 혹은 전쟁에 참혹하게 패한 뒤 세계여론에 힘 입어 보상 같은 걸 받아내는 식으로 말이지요.' '그건 너무 억지다. 아무리 여론이 세게 나온다 해도 결국 이긴 놈 이 짱이라구. 미쳤다고 이긴 쪽에서 보상을 해주냐?' 문득 핸드폰이 눈에 띄었다. 예안은 표면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면 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시월이한테 연락 몇 번 한 적 없었는데, 한 번 전화나 해볼까?" '해보시지요. 밤중이지만 아마도 쌍수 들어 반길 겁니다.' 어쩔까 고민하던 예안은 결국 전화를 걸었다. 이윽고 신호가 끊어졌 다. 「여보세요.」 "나야." 「어? 이 밤중에 웬일이야?」 시월의 목소리는 활기에 가득 차 있었다. 아직 자지 않고 있었던 모 양이었다. "그냥 심심해서 한 번 전화 해 봤어. 뭐하고 있었어?" 「응. 지금 게시판에서 논쟁 하나 붙었거든.」 "어느 사이튼데?" 「알까 모르겠네. 탐 사이트라고, Talking About MAC이라고 하는 데…」 "아, 나 거기 알아. 나도 거기 굉장히 자주 들르거든. 게시물 같은 건 별로 남기지 않지만 말이야." 「아, 그래 이거 굉장한 우연이네.」 시월은 취미가 맞아떨어진 게 기뻤던지 굉장히 목소리가 밝았다. 「네가 전화 안 해줘서 나 굉장히 섭섭했어.」 "나 많이 바쁘다구. 그리고 한 번 정도는 전화 한 걸로 기억하는 데?" 「하긴 언제 했다고 그래? 내 쪽에서 한 게 전분데.」 예안은 그에게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친구 하자고 해놓고 그 동안 외면하고 있었다니. 원성 들어도 싸다 싸. 「우리 내일이나 모레쯤 한 번 만나지 않을래? 어떻게 된 게 친구 하자고 해놓고 한 달이 다 되가는데 얼굴 한 번 못 볼 수 있냐?」 "내일? 내일은 좀 곤란한데?" 내일은 세현과의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예안은 시월이 바로 곁에 있기라도 한 듯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삼일 후쯤은 어때? 나 그때쯤은 널널할 것 같은데." 「좋아.」 자세한 일정을 정한 뒤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예안은 전화를 끊었 다.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근데 만나도 괜찮은 건가?' '친구잖습니까. 뭐 어떤가요. 언제까지 혼자 독불장군처럼 살 생각 은 아니셨잖아요.' 맥은 잠시 말을 끊은 뒤 덧붙였다. '물론 저는 그게 좋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그건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예안은 별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넘어갔다. 다음날 아침. 니콜라스는 분주하게 준비를 마치고 예안을 기다렸다. 이윽고 옷을 다 갈아입은 예안이 밖으로 나왔다. "오. 쫙 빼 입었네 오늘도? 역시 제임스 만나러 간다니까 사람이 달 라진다 너." 니콜라스는 다소 수줍은 듯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자, 나갈까?" "응!" 니콜라스는 활기 차게 예안을 따라 나섰다. 미리 예약해둔 택시를 탄 그들은 약속장소로 향했다. 세현이 기다리고 있는 곳은 번화가에 자리잡은 깨끗한 카페였다. 그들이 막 카페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였다. "꺄악! 소매치기야!" 찢어지는 고함소리에 놀란 예안은 얼른 뒤를 보았다. 모자를 쓴 한 남자가 여자 핸드백을 들고 저쪽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그 뒤를 젊 은 여자가 울상이 된 채 어쩔 줄 몰라하며 쫓아가고 있었다. 다급해 진 예안은 니콜라스를 떠밀었다. "가서 도와 줘! 너 발 빠르잖아!" "내가 왜?" 못마땅한 눈으로 예안을 바라보던 니콜라스는 할 수 없이 소매치기 를 향해 뛰었다.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릴까 생각하던 예안은 일단 안 에 들어가 있기로 했다. 카페로 들어가자 창가에 있던 세현이 얼른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오래 기다렸어?" "별로 오래 기다리진 않았어." 세현의 미소는 며칠 전보다 한결 더 여유 있어 보였다. 비로소 그가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 같아 예안은 안심했다. "오늘 네가 쏘는 거지? 너 돈 많잖아. 제임스 해론 광신도들이 장난 아니게 받쳐준다고 들었는데." "쏜다면 쏠 순 있어. 근데 네가 먹어야 말이지." 예안은 뜨끔했다. "무, 무슨 소리야?" "너 학교 다닐 때부터 뭐 먹는 일이 일절 없었잖아. 다른 애들이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위장이 고장나서 아무것도 못 먹는다고만 대답하 고 그랬잖아." 예안은 조금 야릇한 기분을 느꼈다. 세현이 그런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 써가며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다니.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신경 쓰는 것만큼 그에게 신경 써주지 않았던 게 조금 미안했다. "더 예뻐졌구나." "그, 그래?" 예안은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였던 시절의 베스트 프렌드로부 터 그런 말을 듣는 건 굉장히 어색했다. 그때 니콜라스가 카페로 들어왔다. 예안을 발견한 그는 성큼성큼 걸 어오며 투덜거렸다. "소매치기 잡아서 경찰에 넘겼어. 근데 왜 이 더운 날에 나 뛰어다 니게 하는 거야?" 투덜거리며 들어서던 니콜라스는 문득 세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곧 세현이 제임스라는 걸 깨닫고 안색이 환해졌다. "제, 제임스 씨?" 니콜라스는 반가움에 그만 생각할 것도 없이 손을 내밀었다. 헌데 세현은 이상했다. 그는 마치 지옥에서 자신을 따라온 악마를 본 사 람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 어떻게 네가 여기에 있는 거지?" "예?" 예안과 니콜라스는 어리둥절했다. 세현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야? 왜 여기에 있냐니? 너 얘 알아?" 어이없어 하던 예안은 니콜라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 혹시 옛날에 멋모르고 사람 죽이다 쟤네 가족까지 죽인 거 아 냐?" "아, 아냐! 난 목표를 제거하기 전에 항상 주변인들을 전부 다 체크 한다고! 저런 얼굴은 절대 없었어!" 그럼 도대체 뭐지. 예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세현을 다시 바라보았 다. 다행히 그의 태도는 다시 조금 전의 온화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 었다. 물론 그게 더욱 이상했지만. "너 조금 전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여기에 있냐니?" "아아, 미안. 순간 착각했어. 옛날에 나와 내 친구들을 죽인 후 자 기도 자살하겠다고 덤비던 광팬이 하나 있었거든. 지금쯤 연방 교도 소에 있을 그 녀석과 비슷한 사람을 갑자기 봐서 당황했어." "그래? 성주가 그 녀석이랑 비슷하게 생겼어?" "언뜻 보니까 그랬는데 자세히 보니까 아니야. 내가 그 녀석 때문에 항상 불안해하다 보니까 트라우마가 생겼나 봐. 신경 쓰게 했다면 미안해." 세현은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뒤였다. 예안은 뭔가 조금 찜찜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이 꼬마 신사분은 누구?" 쭈뼛거리던 니콜라스는 조그맣게 대답했다. 조금 전 과감히 악수를 청하던 용기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없었다. "차성주라고 해요." 손가락을 대기만 해도 싱그러움이 뚝뚝 묻어날 듯 빨개진 얼굴이었 다. 수줍은 꼬마처럼 부끄러워하는 그의 모습은 보기 드문 것이었 다. 예안은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 이렇게 구는 건 처 음 보았다. "얘는 내 친구 동생인데 지금 우리 집에서 하숙하고 있어. 얘가 장 난 아니게 너 좋아하는데, 알아?" "날 좋아한다고?" "얘가 제임스 해론 팬이야. 제임스 해론의 저서라면 한국어, 일본 어, 영어, 중국어, 라틴어, 가리지 않고 죄~다 사 모은다구." "오, 이거 영광인데?" 세현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니콜라스와 눈을 마주쳤다. 숨이 막힐 듯한 아름다운 미소. 니콜라스는 엄청난 부끄러움을 느끼고 고개를 그대로 푹 숙여버렸다. '아름답다. 아름다워.' 니콜라스는 눈이 부셨다. 생각했던 대로 제임스 해론은 무척 아름다 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달구어진 강철 빛이 감도는 검은 눈동 자는 생기 발랄한 역동 속에 깊은 공허함을 감추고 있었다. 지금까 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것을 보고 절망하고, 또 절망했을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눈빛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스스로 그의 일부분이 되기를 자처했을 것인가.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니 콜라스는 가슴이 벅찼다. "아, 전화 왔어. 나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 그때 예안이 폰을 꺼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콜라스는 기겁을 해 서 매달렸다. "어, 어딜 가려고 그래?" "어딜 가긴? 전화 좀 잠깐 하고 온다니까?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인데 기쁘지 않아?" "누, 누나!" 니콜라스는 몹시 당황한 채 예안과 세현을 번갈아 살폈다. 세현은 쿡쿡 웃으며 턱을 괴었다. 어미 잃은 아기 오리처럼 어쩔 줄 몰라하 는 그가 몹시 귀여워 보였음이리라. "이거 좀 섭섭한 걸? 그래도 내 팬이라고 해서 꽤나 두근거렸는데, 정작 나랑 같이 단둘이 있는 건 싫어하다니 말이야." "그, 그게 아니에요!" "괜히 미안해서 거짓말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 사람들한테서 미움받는 건 이제 워낙에 익숙해져서 말이야." 니콜라스는 안색이 확 변했다. 세현이 지금 자신을 놀린다는 건 상 상도 못한 그는 어쩔 줄 몰라했다. "아, 아니에요!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나, 난 당신을 정말 엄청 하늘만큼 좋아한다구요!!" 카페 안의 사람들이 다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주변의 시선이 그들에게 확 쏠렸다. 예안은 킥킥 웃으며 귀밑까지 얼굴이 붉어져 있는 니콜라스의 머리칼을 이리저리 헝클어뜨렸다. "얘가 이렇다니까? 언제는 내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해놓고 또 금새 한눈 팔고 그래. 하여튼 전화 좀 하고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 어." "그래." 예안이 저쪽으로 간 뒤 비로소 둘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분위기가 그들을 에워쌌다. 세현은 시종일관 여유가 가득 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광적으로 좋아하던 사람과 이렇게 단 둘 이 있게 된 경험은 처음이었던 니콜라스는 마냥 부끄럽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은가. 어떤 표정을 지으면 좋은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게 좋은가. 목소리를 어떻게 하고, 어떻게 웃는 게 좋고, 어 디를 어떻게 쳐다보는 게 그가 마음에 들어할까. 니콜라스는 그렇게 처음 소개팅에 나온 사람처럼 수줍어했다. "너, 굉장히 좋은 영혼을 갖고 있구나?" "네?"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어. 그 사람의 영혼이 얼마나 깨끗하고 아 름다운지. 넌 굉장히 좋은 영혼을 지녔어. 결코 흔치 않아." 세현의 목소리는 무척 달콤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진리를 설법하는 수도사 같았다. "예안이를 좋아하니?" "…네." 니콜라스는 수줍게 대답했다. 세현은 피식피식 웃으며 다시 말했다. "어떡하지 이거? 나도 예안이를 좋아하는데 말이야. 한국을 떠나기 전에 나는 침까지 발라두었다구." "그, 그래요?" 니콜라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혹시나 그것 때문에 그가 자신 을 싫어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넌 이성으로써 예안일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이성으로써 좋아해요!" 발끈한 나머지 반사적으로 그렇게 외쳤던 니콜라스는 실수했음을 깨 달았다. 가뜩이나 하얀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 아니, 그그그, 그게 아니라…." 세현은 화를 내기는커녕 재미있다는 눈길로 니콜라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던 그는 허리를 90도까지 꾸벅 숙였 다. "죄, 죄송해요! 그, 그그그,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괜찮아." 세현의 얼굴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성모 마리아라 해도 그보다 더 따스한 미소를 지을 순 없을 것이다. 니콜라스는 얼굴이 다시 또 빨 개졌다. 만약 지금껏 그의 손에 죽어나간 마피아들이 그 광경을 봤 다면 땅을 치고 통곡할 것이다. "몇 살이니?" 세현의 목소리는 무척 감미로웠다. 니콜라스는 들뜬 얼굴로 답했다. "한국식 나이로 14살이요." "아직 많이 어리네. 근데 예안이랑은 어떻게 알게 된 거니?" "아, 그건…." 세현에게 잔뜩 홀린 채로 있던 니콜라스는 하마터면 곧이곧대로 대 답할 뻔했다. 다행히 그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경호의뢰를 맡았 어요'라는 대답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아. 아까 예안이가 말했지 참. 예안이 친구 동생인데 하숙하고 있 다고." "…네." 니콜라스는 쭈뼛거리며 세현의 얼굴을 홀린 듯 쳐다보았다. 아까보 다는 많이 대담해졌지만, 아직도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몸이 움 찔움찔하곤 했다. 그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어보는 느낌이었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예안과 처음 만났을 때에도(지금도) 이렇진 않았다. 바라보는 것만 으로도 행복하고 부끄럽고 또 아름다운 사람. 살아가면서 그런 사람 을 만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축복 받은 것인가. "앗." 니콜라스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만 물컵을 밀쳐 버렸다. 테이블 보가 물에 흠뻑 젖었다. 그의 바지까지 물이 떨어졌다. "저런, 조심해야지." "죄, 죄송해요." 세현은 얼른 손수건을 꺼내어 니콜라스의 옷을 닦아주었다. 니콜라 스는 그의 손이 참 부드럽다 생각했다. 사람이 이렇게 따스한 온기 를 지닐 수 있을까. 세현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뭐랄까. 벅찬 감동의 기운 을 숨기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니콜라스는 그가 왜 그러는지 몰 라 눈만 깜박였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달싹였다가 결국 한숨을 토해내는 그의 눈동자는 애수에 가득 젖어 있었다. 몇 번이 고 망설이는 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던 그는 이윽고 초조함을 지 운 뒤 씩 웃었다. "뭐하고 노는 걸 좋아하니?"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81 회] 날 짜 2004-05-23 조회 / 추천 2450 / 26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내 소중한 자존심 예안은 어두운 얼굴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결국 그렇게 됐나요. 참 안타깝네요." 일본은 전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들이 한국에 요구한 것은 실로 기가 찬 것이었다. 해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 하여 '맥의 사형식'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해해주고 싶은 마 음이 싹 사라지는 어처구니없는 요구였다. 만약 이 사실이 발표되면 아마도 한국민들은 모두 크게 분노할 것이다. 「어차피 가지지 못할 거 없애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뜻이죠. 기가 찰 노릇입니다. 지금 대통령님은 극도로 분노하고 있습니다.」 "하…." 예안은 기가 찼다. 그동안 전쟁에 대해 가볍게 생각해왔지만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보니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지금 당장이라도 일본을 세계지도에서 지워버릴까요?" 예안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진심이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랬다가 우리나라는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말아 요!」 "힘을 가진 자가 장땡이라고 말한 건 중현 아저씨잖아요." 「하지만 대외적으로 이번 사태는 우리 잘못이란 말입니다!」 "동해에서 맥에게 미사일을 발사한 건 그 녀석들이 틀림없어요. 일 본이 옳다구나 하고 그렇게 적극적으로 맥을 부수려고 나오는 걸 보 시면 몰라요?" 「그건 증거가 없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증거! 증거! 그놈의 증거 타령 좀 그만하세요!!" 예안은 배터리를 빼버렸다. 화가 나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지금 까지는 일본이 적당한 요구를 하면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이었다. 그 러나 맥을 부수라는 가당치도 않은 요구까지 받은 이 마당에 그럴 필요가 어디 있는가. '화나셨군요.' '당연한 거 아냐? 내가 지금 화 안 나게 생겼어?' '저를 부수라는 요구 때문입니까? 이거 너무 황송한데요? 저는 유젤 님이 저를 그렇게 아껴주시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자기 사형식이 요구되고 있는 판인데 그런 농담을 할 여유가 나오 냐. 예안은 그래도 싱글벙글인 맥이 좀 답답하면서도 번뇌를 초월한 녀석의 사고회로가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가만, 그러고 보니 이상한데? 일본 녀석들 하는 짓거리 하나 하나 가 노골적으로 한 번 붙자 식 아니야?' '그렇긴 합니다. 그들의 요구는 사실상 한국으로서는 들어주기 싫을 정도로 벅찬 것이었죠. 수해지역에 대한 적절한 보상과 사과 몇 마 디만 됐지, 왜 그런 무리수를 두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녀석들 진짜로 전쟁 원하는 건가? 근데 이길 자신도 없으면서 도대체 어떻게?' '아직 저의 파일럿이 선정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저를 구입한지 일 년도 채 안 됐는데 벌써부터 한국이 파일럿을 육 성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건 좀 억지야. 한국이 몇 년 전부터 비밀리에 파일럿을 육성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구. 게다가 여차하면 프랭크 안쏘니 유젤 의 <동료>를 소환해서 파일럿으로 쓸 수도 있어.' 예안은 손가락을 물며 생각에 잠겼다. 한국을 비난하는 세계 언론. 기다렸다는 듯 지나친 요구를 해오는 일본. 그전부터 한국을 견제하 는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는 열강들. 게다가 국내 언론까지 전쟁에 대해 지나치다 생각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모든 게 하나 같이 이 상했다. 「맥을 폐기하라는 일본의 부당한 요구에 대하여 정부는 아직 아무 런 의사를 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런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시민들의 시위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 일본 대사관 앞에서는 일본을 처단하라는 시민들의 격렬한 항 의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뉴스 아나운서의 속보에 예안은 퍼뜩 깨어났다. 그녀는 얼른 TV를 바라보았다. 일본을 물리치라고 격렬히 시위하는 시민 단체들의 모 습이 보도되고 있었다. 일본의 요구가 어느새 언론에까지 흘러 들어 간 모양이었다. '어라? 분명히 중현 아저씨가 이거 기밀급에 속한다고 했었는데? 어 떻게 된 거지?' '확률은 낮지만, 일본이 일부러 귀띔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이없어진 예안은 그게 말이 되냐고 반문하려 했다. 그러나 재차 이어진 맥의 설명에 할 말을 잃었다. '일본이 정말 전쟁을 원한다면 충분히 그랬을 수 있습니다.' 정수리를 찌르는 느낌에 예안은 우뚝 정지했다. 주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단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바로 한국과 일 본의 개전이라는 최악이면서도 가장 호탕한 시나리오. 일본은 정녕 그것을 바라고 있단 말인가. "쪽바리 놈들은 다 죽여야 돼! 어디서 감히 저런 말도 안 되는 요구 를 하는 거야!" 근처에서 한 남학생이 광분해서 외쳤다. 다른 사람들도 그를 옹호하 고 나섰다. "원래부터 쪽바리 놈들은 염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어! 저 녀석들 은 그냥 맥이 나서서 다 쓸어버려야 한다니까!" "정부는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이 기회에 지금까지 우리가 받았던 수치를 다 씻어버릴 생각은 안 하고!" "까짓 거 한 판 붙어버려!" 전쟁의 참혹함을 겪지 않은 세대라 그런지 지나치게 적극적이었다. 잠자코 그들을 쳐다보던 예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들의 분노에 공 감하지 않은 채 일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신이 이질적으로 느껴 진 탓이었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까짓 거 붙으면 붙는 거고 말면 마는 거지. 일본이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저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건지 는 모르지만 붙어보면 알겠지 뭐.' '잊으셨습니까? 이번 사태에는 시트날타가 개입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알아.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녀석들도 전쟁이 일어난다 해서 이익 얻는 건 없잖아? 날 찾지 못하고 있으니까 맥에 탈 때를 노려 납치 하는 건 사실 너무 무모하고 성공 확률도 낮은 계획이야.' '그렇다면 시트날타는 용의자 리스트에서 제외하는 겁니까?' '그건 아니구. 에구구구, 모르겠다. 일단은 지켜보면 알겠지.' 예안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날 것 같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리로 돌 아왔다. 헌데 낌새가 이상했다. "뭐야? 둘 다 왜 그래?" 물에 젖은 니콜라스의 옷을 닦아주고 있었는지 세현이 손수건을 들 고 서 있었다. 줄곧 니콜라스만을 응시하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 렸다. 그의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성주가 너무 씩씩하게 생겨서 말이야. 어렸을 적 잃어버린 내 동생 이 생각났어." "동생?" 아까는 범죄자고 이번에는 동생이냐. 녀석에게 동생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본 예안은 어리둥절했다. "지금쯤이면 아마 키가 성주만큼 컸을 거야 아마. 아아 갑자기 보고 싶어지네." "그, 그러냐?" 다소 무거운 분위기에 절로 기분이 숙연해졌다. 동생이 있다는 말은 왠지 거짓말 같았다. 감격에 찬 눈으로 니콜라스를 그윽하게 바라보 는 세현은 분명 자신의 본심을 숨기는데 필사적인 얼굴이었다. "나 사실 급한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겠어. 미안해." "어? 어? 어? 벌써 간다고?" 오랜만에 만났는데 벌써 간단 말이야? 당황한 예안은 등을 돌리는 그의 팔목을 덥석 붙잡았다. "야. 어디 가려고 그래?" 괴로운 표정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있던 세현은 힘없이 예안을 돌아 보았다. 억지로 짓고 있는 밝은 미소와 마주친 순간 그녀는 그만 입 을 다물어 버렸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희석된 슬픔에 젖어 서글프 게 빛나고 있었다. "왜 지금까지 말 안 했어?" "뭐?" "왜 지금까지 말 안 한 거니? 진작 말했으면 내가 널 도와줄 수도 있었잖아?" 예안은 이해할 수 없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지금 장난해?" 커다란 이질감으로 가득한 공포가 손길을 뻗쳐 왔다. 크게 당황한 예안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목을 뿌리치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여전히 밝게 미소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 뒤로는 벅찬 슬 픔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지금까지 널 혼자 힘들게 해서 미안해." 도대체 세현은 니콜라스의 눈동자에서 무엇을 엿보았기에 저렇듯 슬 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가. 불길한 상상이 막 형체를 잡아가려는 순간 예안은 급히 브레이크를 걸며 외쳤다. "그만!! 거기까지!" 예안은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더 이상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가는 안 될 것만 같았다. "너 오늘 엄청 이상한 거 알아? 아무래도 안 되겠어. 네 말대로 오 늘은 일단 헤어지는 게 낫겠다."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했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세 현의 눈동자는 자신의 마음을 낱낱이 꿰고 있는 것 같았다. "널 이해할 수 있어. 그동안 무척 많이 힘들었을 테니까." 망설이던 그는 조심스레 덧붙였다. "하지만 난 네 편이야." "야! 그만하란 말이야! 왜 자꾸 그따위 헛소리나 지껄이는 거야!" 불길한 예감을 참지 못한 예안은 그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카페 안 의 시선이 전부 이리로 집중되었다. 니콜라스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 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예안은 짜증을 부리며 세현의 등을 떠밀었 다. "자꾸 그런 헛소리 할 거면 가! 가란 말이야!" 잠시 동안 슬픈 눈으로 예안을 바라보던 세현은 그대로 발걸음을 옮 겼다. 발을 떼어놓는 자리마다 마모된 슬픔을 짙게 뿌리고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 그것은 맹세코 예안이 처음 보는 사람의 것이었다. 씩씩거리며 세현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예안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짙은 밤이 낮게 깔린 방송국 복도를 세 그림자가 걷고 있었다. 철저 히 훈련받은 군인처럼 그들의 걸음걸이는 절도 잡혀 있었다. 목표에 해당되는 방문 앞에 도착한 그들은 숨을 죽이며 권총을 꺼냈 다. 희미한 별빛을 반사하는 쇳조각이 어둠 속에서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안전을 확인한 뒤 그들은 서둘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불이 켜진 형광등 아래 여러 가지 서류더미 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을 뿐이었다. 굳은 얼굴로 권총을 이리저리 겨누며 경계하던 그들은 재빨리 PC의 데이터를 검색했다. "찾았나?" "제길! 없습니다!" "이메일 같은 것도 남기지 말고 전부 다 뒤져!" "그러기엔 시간이 없습니다. 이대로 통째로 디스크를 떼어 가는 게 좋겠습니다." "증거를 남기면 곤란… 에잇, 됐어. 그냥 떼버려." 차준혁은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몇날 며칠을 기다려서 잠입했는데 허탕이로군. 제길!" 이윽고 PC를 손보던 요원이 일이 끝났다고 말했다. 차준혁은 부하들 을 이끌고 서둘러 방송국을 떠났다. 귀환하자마자 차준혁은 곧바로 국정원 비밀회의실로 출두했다. "실패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오지 않았단 말인가?" "예. 몇 군데 의심 가는 장소를 뒤진 다음 사장실까지 쳐들어갔지만 불만 켜져 있었을 뿐 아무도 없었습니다. PC의 디스크를 떼어오기는 했는데 글쎄 과연 수확이 있을지는…." 중현은 책상에 팔꿈치를 세운 채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미안한 소리지만, 자네는 미끼였어." "네?" "그 녀석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일부러 자네를 방송국으로 침투시킨 거야. 녀석들은 방송국이 아니라 한 평범한 식당에서 만나고 있었 다." 차준혁은 허탈했다. 중현은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취조실에 현재 녀석을 감금해두고 있어. 아쉽게도 상대편은 그만 놓쳐 버렸지만." "그럼 도로아미타불이 아닙니까?" "하지만 이대로 조용만을 놓아줄 순 없어.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 해. 고문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녀석의 입을 열게 해야 해." "그건 인권주의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만?" "누가 육체적인 고문을 한다고 했나? 그냥 정중하게 모시면서 몇 날 며칠 잠 못 자게 할 거야. 이 정도는 고문이 아니라 그냥 일반 취조 라구." 중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도 따라 와." 따라오지 말라고 해도 따라갈 생각이었다. 차준혁은 잠자코 중현을 뒤따랐다. 도청과 탈출이 절대 불가능하게 만들어진 지하 비밀 취조실에는 스 산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의자에 꽁꽁 묶인 중년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한국 언론을 이끌어나가는 메이저 방송사의 하나인 KCS의 사장 조용만이었다. "성과는 좀 있나?"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요원이 얼른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난처한 빛이 가득했다. "죄송합니다. 단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독하군. 군인도 아닌 일반인이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땡깡을 부리 는 건지 모르겠어." 중현은 혀를 차며 조용만의 턱을 잡아 얼굴을 들어올렸다. "조용만씨. 이제 그만 말씀해주시죠? 누구의 사주를 받고 여론을 그 렇게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사주 따위는 받지 않았다! 우리 방송국이 추구하는 이념대로 보도 를 했을 뿐이야!" "보수고 진보고 나발이고 가릴 것 없이 언론이란 언론들은 전부 주 전 쪽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이게 과연 누군가의 사주 없이 가능하 다고 보십니까?" "감히 선량한 시민을 이렇게 핍박하다니! 천벌을 받을 것이다 이놈 들!" 중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뜻을 알아차린 요 원이 서둘러 서류 가방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꺼내어 늘어놓았다. "이 남자를 알고 있습니까?" 사진 속의 젊은 남자 얼굴을 확인한 조용만은 흠칫했다. 중현은 그 것을 놓치지 않았다. "요셉 프리센. 나이는 25세, 국적은 미국, 직업은 미 제나르 상원 의원의 비서이며, 아직 미혼. 당신과의 연계점이 무엇이 있을까 철 저히 조사했지만 아쉽게도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당신을 붙잡아올 수밖에요." 조용만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이 남자로부터 어떤 대가를 받고 주전 쪽 보도로 밀고 나간 것이지 요? 그것만 말씀드린다면 정상참작이 가능하도록 힘써볼 의도는 있 습니다." 의도'는'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언제고 뒤집어도 상관없다는 뜻이 된다. "웃기지 마! 어디서 말도 안 되는 합성 사진 가지고 감히 나를 협박 하는 거냐!" 조용만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금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중 현은 탐탁하지 않은 얼굴로 사진을 한 장 집어 그대로 구겼다. "당신 같은 매국노 때문에 과거 우리나라가 그렇게 열강들에게 핍박 받아온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중현은 웃는 얼굴로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건 바 로 진정한 분노였다. 그때였다. "그는 매국노가 아니야."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82 회] 날 짜 2004-05-23 조회 / 추천 2419 / 30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내 소중한 자존심 등뒤에서 들린 낯선 목소리에 그들은 일제히 놀랐다. 튕겨지듯 자리 를 박차고 자세를 바로잡은 차준혁은 황급히 총을 겨누었다. 밝은 형광등 빛 아래 젊은 청년이 오만하게 우뚝 서 있었다. 자신감 이 가득한 그의 얼굴은 신의 사자라도 되는 양 당당하게 빛나고 있 었다. 기억에 없는 얼굴. 중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당신은 누구죠?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혹시라도 청년이 상부의 비밀 간부라도 된다면 엿 되는 것이었기에 중현은 신중히 대처했다. 물론 25세 정도 되어 보이는 나이로 봤을 때 그럴 거라고 믿진 않았다. "네 기억력은 닭보다 못한가 보군. 방금 전까지 내 프로필을 줄줄이 늘어놓았으면서 말이야." "뭐?" 순간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중현은 경악에 찬 음성을 내질렀 다. "서, 설마 요셉 프리센?" 요셉은 한 발짝 앞으로 내딛으며 차갑게 웃었다. "바로 맞췄어." "어, 어떻게 당신이 여기까지…?" 중현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요원의 보고를 통하며 요셉 이 에스카 호텔에 있다는 것을 이미 확인했다. 게다가 철저한 경호 망이 갖춰진 이곳에 그가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헌데 어째서 그가 여기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궁금해하는 것과 같은 방법을 써서 들어왔지." "뭐?" 위급한 와중에도 중현은 어리둥절했다. "나의 특기는 최면술. 특정인의 생각을 내가 원하는 대로 유도하거 나 일정한 시간 안에 생긴 기억들을 지울 수 있지." 요셉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묵직한 중력이 그의 손가락 끝에 실려 있었다. 그의 손이 빛난다고 느낀 순간 중현은 앞뒤 생각할 것도 없 이 외쳤다. "발사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차준혁이 방아쇠를 마구 당겼다. 그러나 차준 혁이 볼 수 있었던 것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요셉의 모습이 아니 었다.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듯 총알은 공중에 정지한 채 회전 하고 있었다. 실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조심해야지 요셉. 너는 전투용이 아니잖아." "죄송합니다." 한 명이 아니었단 말인가? 중현은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킨 채 벽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여유를 부리듯 핸드폰을 위로 던 졌다 받았다 하던 그 남자는 이윽고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몹시 낯익은 얼굴이었다. "다, 당신은!" 그제야 그가 누군지 생각난 중현은 비명을 내질렀다. "기억하고 있나 보군. 이게 몇 달 만이지?" 검은색 색안경을 낀 청년은 중현이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바로 맥 의 구입 계약건을 놓고 한창 한국이 달아올랐을 때 포세이돈의 직원 이라며 자신에게 접근해 예안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던 인물이었다. 예안을 노리는 적이라는 걸 눈치채고 여러 방면에 걸쳐 조사해보았 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 "당신은 포세이돈의 직원이라고 속여 접근했던 그 사람 아니오?" "제대로 기억하고 있군.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까지 용케 잘 알고 있고 말이야." 중현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책상에 엉덩이가 닿은 순간 그는 마리오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손을 뻗어 비상벨을 눌렀다. 다행스럽 게도 마리오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한결 안심이 되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조용만은 원래 위치로 되돌려놓아야겠어. 우리 계획에 방해가 되는 건 잠자코 지켜볼 수 없단 말이야." "탈출시키겠다는 건가? 하지만 원래대로 되돌려놓는다 해도 다시 잡 아들이면 그만이다." "아니. 너희들은 절대 다시 잡아들이지 않아." 중현은 황당했다. 마리오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말하지 않았던가? 요셉은 기억을 지우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마리오 경. 몇 시간, 혹은 몇 일 전부터 생긴 모든 기억을 지울 수 있을 뿐이지 내가 원하는 기억을 찾아 지울 순 없습니다." "그럼 최면을 걸면 되잖아. 그것도 네 특기일 텐데?" 여기가 적지라는 것도 망각한 건지 빙글빙글 웃기까지 하는 마리오 의 여유에 중현은 속이 뒤틀렸다. 하지만 꾹 참았다. 조금만 기다리 면 요원들이 총을 들고 여기로 들이닥칠 것이다. "최면? 그렇다면 조용만은 지금 최면에 걸려 있다는 말이냐?" 중현은 정보를 얻어낼 셈으로 그렇게 물었다. "알아서 추리하도록 해. 나는 동화책에 나오는 바보 같은 마왕처럼 적에게 비밀을 술술 불지는 않으니까. 이제 잠들어야 할 시간이다." 마리오는 한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중압감 가득한 기세였다. 차준 혁은 볼 것도 없이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총알은 보이지 않 는 벽에 부딪치고 바닥에 툭툭 떨어질 뿐이었다. "슬슬 팔이 아파 오는군. 역시 저항이 장난이 아니란 말이야." 마리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의 손에서 파르 스름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젠장, 너무 늦잖아.' 중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꼼짝 마!" 육중한 철문이 열리며 권총을 든 요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중현은 일순 희색이 돌았지만, 방금 확인한 마리오의 그 힘을 과연 부하들 이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쓸모 없는 것들이군." 요원들은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폭음을 뚫고 날아간 총알 들은 일제히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바닥에 떨어질 뿐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기괴한 현상에 당황한 요원들은 어쩔 줄 모 른 채 탄창을 갈아 끼우고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결과는 마 찬가지였다. 안 되겠다 싶은 중현은 조용히 뒷걸음질을 쳤다. 비상용 엘리베이터 를 이용해 자신만이라도 탈출할 생각이었다. 기억을 지우고 최면을 거는 게 가능하다면 나중을 위해서 한 명이라도 탈출해야만 했다. 그의 뜻을 눈치챈 차준혁이 조심스럽게 총을 집어들었다. 중현은 고 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뒷걸음질 쳤다. 진득한 땀이 손바닥 가득 배어 나왔다. 이쪽은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듯 등을 돌리고 있는 마리오의 뒷모습은 마치 악마처럼 보였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막 닫히려는 순간이었다. "마리오 경! 한 녀석이 도망칩니다!" 여유 있게 총알을 받아내고 있던 마리오는 재빨리 뒤를 돌아 손가락 을 뻗었다. 그러나 때를 놓치지 않고 차준혁이 방아쇠를 당겼다. 마 리오는 어쩔 수 없이 엘리베이터 공격하는 걸 포기하고 날아오는 총 알부터 막았다. "제길!" 가능하면 사람을 죽이지 않으려고 시간을 끌었던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줄이야. 마리오는 이를 바드득 갈며 요원들에게 손을 뻗었다. 패 닉에 빠져 어쩔 줄 몰라하던 요원들은 푸른빛이 닿자마자 그대로 쇼 크를 느끼고 기절해 버렸다. 차준혁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녀석 때문에 놓쳤어!" 마리오는 잔뜩 화난 얼굴로 기절한 차준혁을 발로 걷어찼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경찰이 들이닥치기 전에 빨리 피해야 해요. 아무리 당신이 괴물 같은 힘을 지녔다고는 해도 떼거지로 몰아붙이 면 소용없다구요." "알았어, 알았어." 마리오는 투덜거리며 기절한 조용만을 들쳐업었다. 힘쓰는 일은 어 디까지나 그의 몫이었다. 무사히 지하 취조실을 빠져 나온 중현은 급히 전화를 걸어 지원을 불렀다. 전화를 끊고 불과 오 분도 채 되지 않아 수십 대의 경찰차 가 들이닥쳤다. 그 사이 마리오가 탈출했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중현은 분명 감시 카메라를 통해 마리오가 탈출하지 않았 다는 걸 확인했다. 통솔자가 급히 어떻게 된 사태냐고 물었다. 중현은 침입자가 들어왔 으니 어서 잡으라고 했다. 사살해도 상관없다는 말을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무장 경찰들이 재빨리 뛰어들어와 건물 곳곳을 헤집고 다녔다. 그러나 비밀 취조실을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의 방을 뒤졌음 에도 불구하고 마리오와 요셉은 보이지 않았다. 조용만 역시 마찬가 지였다. "혹시 그 사이 탈출한 게 아닐까요?" 들것에 실려나가는 요원들을 흘끔대며 통솔자가 그렇게 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분명히 감시 카메라로 전 통로를 확인했다." "하지만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이를 갈며 모니터를 노려보던 중현은 컴퓨터를 주먹으로 쾅! 내리쳤 다. 피가 흘러나왔지만 분함에 취한 그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마리오라고 했겠다. 어디 두고 보자." 비릿한 여유가 가득한 얼굴을 떠올리며 중현은 들끓는 분노를 삭혔 다. 잠시 후 그는 어떻게 설명하나 걱정하며 국정원장의 집무실로 향했다. 다른 루트를 통해 이번 사태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들은 국 정원장은 조금 화난 얼굴로 그를 나무랐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완전히 당했습니다. 녀석들은 조용만을 데리고 사라졌습니다." "비밀 취조실에 있었다면서? 도대체 녀석들이 어떻게 그곳까지 쳐들 어왔단 말인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짐작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요셉의 얼굴을 떠올리며 중현은 침착히 입을 열었다. "녀석들은 초능력 비슷한 특이한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녀석의 특기는 최면을 거는 것과, 기억을 지우는 것이라 언뜻 들었 습니다. 아마도…." "자네, 지금 소설 쓰나?" 국정원장은 기가 차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중현은 펄쩍 뛰었다. "사실입니다. 분명히 그렇게 들었습니다. 게다가 그 중 한 녀석은 총알을 공중에서 멈추게 하는 특기를 가졌습니다. 마치 염동력 같 은…." "좋아, 좋아. 최면술과 염동력이 나왔으니 다음 번에는 순간이동 능 력이 나오겠군. 공간 점프와 아공간 개방 능력은 부수로 따라붙겠고 시간 이동 능력도 머지 않아 나오겠는데? 이보게, 중현이. 난 지금 까지 자네를 아주 좋게 봤어. 근데 이건 좀 너무 심하다 생각하지 않나? 솔직히 과실을 보고하면 내가 설마 자네를 때려죽이기라도 할 것 같은가?" "사실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유젤 박사의 적이었습니다." "뭐어?" 국정원장은 깜짝 놀랐다. 비로소 그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서렸다. "혼란을 우려해 말씀드리진 않았지만 염동력을 지닌 쪽과 예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포세이돈의 직원이라고 속여 접근했으나, 후에 조사해본 결과 그런 사람은 없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그들의 초능력이 정말 실존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도구를 이용해 그럴 듯하게 숨긴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대단한 마술사라 해도 그런 트릭을 발휘하는 건 불가능하다 생각합니다." "흐음." 그제야 국정원장은 자신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중현은 조금 안심하 고 덧붙였다. "처음에는 요셉이라는 남자의 배후 세력이 조용만을 사주한 거라 생 각했습니다. 그들에게 매수 당한 조용만이 그런 편파적이고 주전적 성향을 띤 보도를 연이어 내보냈다고요.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계속 말해보게." "요셉이라는 남자는 최면술을 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조 용만은 지금까지 최면에 걸려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들이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언론을 컨트 롤했단 말인가?"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일본과 중국, 미국이 그러한 호전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그들의 안배가 있었기 때문 일지도 모릅니다." "그건 너무 억측이 아닌가? 그런 막강한 힘을 지닌 사조직이 존재한 다는 건 말도 안 돼." "글쎄요.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일본이나 중국, 또는 미국 정부에 소속된 비밀 기관일지도 모르지요. 어쨌거나 다른 언론 사 최고 경영자들도 최면에 걸렸을 가능성이 무척 높습니다." 국정원장은 탄식했다. "이제 와서 갈아치워 버리기에는 너무 늦었어. 국론은 이미 전쟁을 벌이자는 쪽으로 기울고 있단 말이야. 아무리 전쟁을 겪지 않은 세 대라 전쟁의 참혹함을 모른다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군."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붙어도 별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일본도 전쟁을 원하고 있는 분위기고, 또 한 번 붙는다 해서 우리가 불리할 건 없으니까요." "자네는 일본이 함정을 파놓았을 가능성은 생각도 안 하나 보군. 그 렇기 않고서야 경제력, 군사력으로 열세인 일본이 그렇게까지 간 크 게 나올 리 없지 않은가?" 중현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샅샅이 조사를 해보았지만 그들이 달리 숨기고 있는 전력이나 함정 같은 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중국과 미국이 편 을 들어주고 있어 헛된 자신감만 갖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럼 초능력 비스무리한 걸 지니고 있다는 그 인물들은?" "설령 그들이 일본의 소속이라 해도 별 상관없습니다. 맥이 나선다 면 그까짓 녀석들 쯤이야…." 국정원장은 조용한 눈길로 중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엔 젊은 혈 기에 불타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 역시 전쟁을 모른 채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자라난 젊은이. 강대한 힘에 대한 책임감보다는 역사가 가르쳐준 민족의 한만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기에 저렇듯 전쟁을 불사하는 것이었다. "그것보다는 먼저 최면에 걸렸을 가능성이 높은 언론사 경영진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생각 좀 해보게. 그리고 그 초능력 쓴다는 녀 석들이 미일중 어느 나라 소속인지, 아니면 소속이 아닌지 그것도 좀 알아보게." "알겠습니다." "서두르게." 돌아서던 중현은 문득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국정원장을 돌아보았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그 얼굴에 국정원장은 몹시 놀랐다. "자네 왜 그러나?" "대통령님이, 대통령님이 위험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 앗!" 그제야 국정원장도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국정원 비밀 취 조실에 태연히 들어와 범인을 빼낼 정도로 대단한 녀석들이 대통령 암살이라고 못 할 법은 없지 않은가.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83 회] 날 짜 2004-05-23 조회 / 추천 2404 / 28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내 소중한 자존심 사무실 가득 따스한 햇살이 내리 쪼이고 있었다. 어느덧 서서히 뜨 거워지고 있는 그것은 이제 곧 여름이라는 것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 었다. 그러나 이 사무실에서 그런 열기를 조용히 즐길 여유를 지닌 사람은 없었다. 국정원장은 밤새 잠을 못 이룬 창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되었나?" "부상 2명, 경상 3명. 다행히 사망자는 없습니다. 대통령님도 무사 합니다." 중현은 굳은 손으로 보고서를 계속 넘겼다. "침입자는 단 한 명. 복면을 하고 있었기에 건장한 남자라는 것 외 에는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단독으로 대통령 침실 바로 앞까지 침 입했으며, 침실 문에 종이를 대고 그 위에 칼을 꽂았습니다." "종이의 내용은?" "이것은 시작이다, 그 한 마디뿐이었습니다." "우습게 보지 말라는 건가. 제길!" 국정원장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난 새벽에 발생한 대통령 암 살 미수 사건. 복면을 한 범인은 대담하게도 단독으로 청와대에 침 입해 대통령 침실 바로 앞까지 침투했다. 또한 범인은 자신의 힘에 대한 자만이 지나친 건지 아무도 죽이지 않았고, 충분히 대통령을 암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고문을 침실문에 박아 넣는 걸로 끝냈다. 그리고 유유히 사라졌다. "당장 경호망을 열 배 이상으로 늘리는 게 좋겠군." "이미 그러한 지시를 내렸더군요. 과연 얼마나 효력이 있을지는 의 문입니다만." "어쨌거나 이걸로 확실해졌군. 그 녀석들이 만약 미일중의 소속이라 면 상당히 골치 아파진다는 게 말이야." 중현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꺼냈다. "미일중의 소속은 아닌 듯 합니다만." "무엇으로 그리 장담하나? 그럼 자네는 설마 야쿠자나 마피아 따위 가 그런 힘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건가?" 감입니다. 중현은 목구멍까지 치솟은 그 말을 꿀꺽 삼켰다. 그 말을 꺼냈다가는 바보 취급당할 게 뻔했다. "한 번 유젤 박사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적어도 미일중 어느 한 나라 의 소속인지 아니면 전혀 독립된 조직인지 정도는 알고 있겠지요." "하루빨리 물어 봐. 그리고 앞으로 그 녀석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해! 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어!" 지금까지 예안의 적에 대해 소홀하게 생각한 감이 없지 않았던 국정 원장은 크게 후회했다. 단 한 명의 침투원으로 국가 원수를 충분히 암살할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을 지닌 이들이 예안을 노리는 걸 방치 하고 있었다니. 명색이 정보를 다루는 최고 위치에 있는 자로서 창 피하기 그지없었다. 니콜라스는 하루종일 멍한 표정으로 창 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겉으 로는 정호가 없는 틈을 타 총 손질을 한다지만, 실린더와 헝겊이 따 로따로 놀고 있는 걸로 봐선 딴 생각을 하는 게 뻔했다. 예안은 짝 사랑에라도 빠진 듯한 그 몽롱한 눈빛이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샘이 났다. 자기 좋다고 매달리던 꼬마애가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 람 생각하느라 정신을 빼놓고 산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세현이 생각하냐?" 니콜라스는 깜짝 놀랐다. 예안은 짓궂게 재차 말했다. "얼굴에 다 쓰여 있어. 너 지금 세현이 생각하고 있지?" 그의 얼굴이 대번에 빨개졌다. 몇 달 전과는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풍부한 감정의 소유. 처음 만났을 때 인형 같은 얼굴로 반말이나 툭 툭 내뱉던 아이가 저렇게 변했다는 게 예안은 내심 신기했다. '근데 세현이 그 녀석 저번 그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었지? 그리고 도대체 왜 연락이 없는 거야? 이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죽겠 잖아.' 바쁜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세현은 그 뒤로 도통 연락이 없었 다. 강연이 주목적이 아니라 다른 사업 계획이 있어서 한국에 들어 왔다고 하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전화 한 번 안 해주는 게 내심 섭섭했다. 18살밖에 안 된 주제에 벌써부터 사업을 한다는 게 은근히 부럽기까지 했다. 그녀 자신도 맥과 유전을 소유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 지나 유젤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노력 없이 얻은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 보니 세현처럼 스스로의 힘을 통해 광명을 이루는 사람을 보 면 은근히 부러운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그때 중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중현 아저씨? 무슨 일이세요?" 「저 지금 예안씨 집 앞에 와있는데 잠깐 나와주실 수 있나요? 대단 히 급한 일입니다.」 "알았어요." 평소 침착한 중현의 음성이 불안에 가득 차 있었다. 예안은 무슨 일 이 생겼나 의아해하며 대충 채비를 갖추고 밖으로 나갔다. 차를 세 워놓고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현이 핼쑥한 얼굴로 맞이했다. "잘 지내신 것 같군요. 다행입니다." "다행이라뇨? 그럼 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요?" 중현은 별다른 일 없어 보이는 예안의 모습을 보고 안심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녀가 야속했다. 그녀의 적이 어느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는지 만이라도 귀띔해 주었다면 일이 한결 쉬웠을 것이다. "어젯밤 청와대가 습격을 받았습니다." 예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뭐라고요? 습격 당해요? 청와대가요? 할아버지, 대통령 할아버 지는 무사하시나요 그럼?" "침입자는 대통령 침실 문에 경고문을 꽂은 채 그대로 사라졌습니 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대통령 암살쯤은 해낼 수 있다는 자 신감의 표현이었죠." 예안은 어이가 없었다. 청와대가 습격까지 받았다면 이미 선을 넘어 버린 것이다. 더 이상 사탕 빼앗아 놓고 배 째라고 나오는 아이를 어떻게 혼낼까 고민해야 할 수준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동안 비공식적으로 KCS의 조용만 사장을 납치해 여러 가 지 혐의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헌데 어젯밤 초능력자들이 나타나 서 그를 데려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에 청와대가 습격을 받았습니다. 상황을 보아하니 조용만은 그 녀석들의 최면에 걸려 있 는 것 같았습니다." 예안은 묵묵히 앞만을 바라보았다. 차창에 달라붙는 여름의 열기가 식었다가 달아오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중현은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까지는 예안씨의 결정을 존중해서 여러 가지 불안한 점들을 물 어보지 않았습니다만, 더 이상은 안 되겠습니다. 언제든지 대통령의 목숨을 거둬갈 수 있는 녀석들에게 제대로 대항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 예안씨의 적에 대해 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예안은 눈을 감았다. '결국 이렇게 됐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빨랐 다. 그녀는 아직 결심이 서지 않았다. 시트날타에 대해 완전히 털어 놓고 정부의 철저한 협조를 얻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유젤이 클론 인간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어찌 될 지 몰라 두려웠던 까닭이었다. "죄송해요. 말씀드릴 수 없어요." "지금 우리나라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 겁니까!" 중현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화들짝 놀란 예안은 놀란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언제나 부드러웠던 그가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대통령을 간단히 암살할 수 있는 초능력자, 아니 미친 녀석들이 우 리나라를 노리고 있다고요! 그런 상황에서 언제까지 그렇게 질질 끌 어대며 모든 걸 숨기기만 할 겁니까! 예안씨 혼자 힘으로 그렇게 무 서운 녀석들을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중현은 씩씩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간헐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그의 거친 숨소리를 제외하 고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예안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손톱을 튀겼다. 이윽고 고개를 돌린 중현은 몹시 미안한 얼굴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런 모습 보여드려서." "…." "하지만 정말 심각합니다. 이제 더 이상 TV에서 떠들듯, 억지 부리 는 어린아이 달래듯이 일본을 혼낸다 어쩐다 수준의 가벼운 이야깃 거리가 아닙니다. 단독으로 청와대를 뚫고 들어가는 초능력자들이 득실거리는 집단이 개입하고 있다는 게 밝혀진 이상, 모든 관점을 전면 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현의 간절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예안은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몹시 망설여졌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무모한 영웅 흉내를 내 야 할 것인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여 전히 모든 걸 숨기고 있을 것인가. 냉정히 생각해볼 때 클론 인간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해도 영환과 중현은 그냥 거리낌없이 넘어가 줄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예안 이 지닌 능력이 중요했지, 그녀가 자연의 축복을 받은 인간이냐 아 니냐 하는 건 발톱의 때만큼도 못했다. '하지만….' 그러나 예안은 그들 외의 다른 사람들까지 믿을 순 없었다. 대중에 게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고, 또 클론 인간이라는 사실까지 덩달아 밝혀지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무수한 군중 은 하나같이 자신을 추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최악의 경우 자신의 모든 걸 빼앗고 짓밟힐 수도 있었다. 육체가 바뀌었다 는 사실까지 들통난다면 더욱 심각할 것이다. 오리지널 유젤의 기억 에 존재하는 인간들이란 바로 그랬다. "죄송해요. 말씀드릴 수 없어요." "하지만 예안씨." 예안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제가 곧 해결해드릴게요. 시트날타는 현재로써는 어떻게 처리할 수 없지만 일본의 입을 다물게 하는 건 우는 애기 달래는 것보다 더 쉬 우니까요." 중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음성에 자리잡은 무거움을 느낀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저, 혹시…?" "중현 아저씨가 생각하는 게 맞아요.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게 제 가 알아서 다 해결할게요." 중현은 새파랗게 질린 채 반대했다. "아, 안 됩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가 먼저 무력을 쓰면 당장 몰상식한 국가로 낙인찍히게 될 겁니다! 절대, 절대로 그것만큼은 안 돼요!" "왜 안 되는데요?" 예안은 한껏 조소했다. "이유를 말해보세요. 왜 안 되는지." 중현은 차가운 섬뜩함을 느꼈다. 징그러운 거부감이 마음 속에서 치 밀어 올랐다. 모든 세속적 가치를 초월한 채 녹색으로 빛나는 눈동 자는 자신의 연약함을 한껏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일본을 밟아버릴 거예요. 그럼 모든 게 해결돼요."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84 회] 날 짜 2004-05-23 조회 / 추천 2455 / 24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내 소중한 자존심 외출하기 전 시월은 다시 한 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말쑥한 귀공 자의 얼굴이 안에 비춰지고 있었다. 유한전자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 는 아버지와 핸섬한 얼굴, 그리고 명석한 두뇌. 이만하면 그 어떤 여자의 마음이라도 사로잡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 새로 알게 된 소녀는 만만치 않은 구석이 너무 많았다. "방심은 금물이지." 집을 나온 그는 예안과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이미 그녀가 먼저 와 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숙녀를 기다리게 해서 남자로써 실격이니 뭐니 하며 과장된 제스처를 떨어가며 앉았다.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시험 기간일 텐데 이렇게 나와도 돼?" "기말고사 다 끝났어. 이제 여름방학만 기다리면 되는 입장이라고." "고2 여름방학이라면 별로 놀 시간 없잖아? 고3을 대비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난 기본이 탄탄하게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그럴 필요는 없어. 지금 당장 수능 쳐도 명문대학 간판은 골라잡을 자신 있거든." 시월은 상류층 집안의 아들답게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예안은 불쾌 한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시월의 자신감은 오만에 가깝지만 오만의 바로 코앞에 멈춰선 자부심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타인을 매료시 키기 위해 얼마만큼 자신을 치켜세워야 하는지 드물게 잘 알고 있는 소년이었다. "난 네가 참 부럽다." 시월은 의아했다. "뜬금 없이 무슨 소리야?" "사실 나도 너처럼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 친구도 별 로 없고, 내가 만들 틀 안에서 허우적대고 그렇게 살았던 기억이 괘 나 많아." "내가 보기에 넌 지금도 충분히 자신감 있어 보이는데?" "이건 내 힘으로 얻은 게 아니야." 이것은 다만 유젤이 준 선물에 부록으로 따라온 자신감일 뿐, 진정 한 노력을 통하여 얻은 것이 아님을 예안은 알았다. 그래서 시월처 럼 스스로 빛나는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근데 사실 네가 탐 사이트를 자주 들르는 줄 꿈에도 몰랐어. 여자 애들은 보통 밀리터리라고 하면 질색하잖아." "그건 21세기 초반 이야기지. 지금은 안 그런 여자들도 많잖아." "그래도 아직까지는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밀리터리 만화를 태연히 보는 여자들이 없지. 사실 얼마 전 지하철에서 미니스커트 입은 잘 빠진 여자가 밀리터리 만화를 떡하니 보는 걸 봤는데, 너무 놀라서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어." 시월의 얼굴은 매우 유쾌했다. 예안은 시원시원한 그의 성격이 마음 에 들었다. 남자였을 때 무척 갖고 싶어했던 성격. "난 군인이 되고 싶어." 예안은 대뜸 그렇게 말했다. 시월은 깜짝 놀랐다. "군인? 아니, 왜?" "물론 육군은 되고 싶지 않아. 그렇다고 해서 엔지니어 취급받는 해 군 함선 조종사 따위도 되고 싶진 않아. 내가 되고 싶은 건 전투기 파일럿이야. 궁극적으로는 맥의 파일럿이 되고 싶어." 예안은 시월의 반응을 살폈다. 그가 이 장난에 어떻게 반응을 보이 는지 알고 싶었다. 머리에서 김이 나오도록 고민하던 그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그것도 좋겠지. 헌데 나중에 네 남편 될 사람은 좀 싫어하지 않을 까? 배우자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군인이라는 건 남자고 여자고를 떠나서 누구나 다 싫어할 것 같은데?" "뭐 결혼 같은 건 안 해. 그리고 꼭 군인이 될 계획 같은 건 없어. 생각이 그렇다는 거지." 시월은 결혼을 안 할 거라는 말에 몹시 신경 쓰였다. "왜 결혼을 안 할 건데?" "그런 것에 꼭 이유가 있니? 어쨌든 안 할 거야." 예안은 단호하게 대답을 거절했다. 시월은 애가 탔지만 더 물고늘어 졌다가는 분위기가 묘해질 것 같아 포기했다. "근데 너 탐 사이트에서 무슨 아이디로 활동해?" "크루얼 파일럿(Cruel Pilot). 이게 내 닉네임이야." 시월은 깜짝 놀랐다. "네가 크루얼 파일럿이라고? 진짜?" "어? 너 나 알아?" 예안도 깜짝 놀랐다. 탐 사이트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은 다섯 명도 채 되지 않는다. "나 베리굿이야, 베리굿." "뭐어?" 시월은 얼떨떨한 얼굴로 예안을 다시금 살폈다. 평소 지나친 농담으 로 자신을 당혹케 했던 동갑내기 여자애가 예안이었을 줄 상상도 못 한 그였다. "세상 정말 좁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을 수 있냐…." "그, 그러게…." 예안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평소 아기 자랑을 많이 했던 전적이 있는 그녀는 갑자기 시월이 그걸 물어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너 툭하면 네 아기 어쩌구저쩌구 자랑했잖아? 난 처음 에는 좀 의심했지만 네가 하도 자연스럽게 말하길래 나중에는 철썩 같이 믿었다구. 그거 어떻게 된 거야?" "노, 농담이잖아. 당연한 거 아냐?" "하지만 너무 진짜 같이 말했다구. 너 정말 악취미다 악취미." "아하하…." 예안은 웃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어색함을 감추려 노력하며 그렇게 흐지부지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시월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의 하늘은 참 푸르렀다. 여름의 창공에는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 걸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해수욕장으로 피서 를 떠나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띄웠다. 엄연한 여름이었다. 오랫동안 전쟁을 잊고 살아서인지 사람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없었 다. 지금 바로 동해에서는 한국 해군과 일본 해군이 팽팽한 대치 중 인데 말이다. 일본 자위대가 정식 군대로 승격되고 그 첫 상대로 한 국이 될 지도 모르는 판인데 일반인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예안은 조금 입맛이 썼다. "하아." 아까 시월에게 아기에 대한 걸 한사코 숨기려 한 자신에게 환멸이 일었다. 항상 아기를 떳떳하다 여겼다 생각했는데 왜 막상 그 순간 에는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 만 것인가. 이대로 아기를 안았다가는 아기가 눈치채고 울음을 터트릴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집에 들어가기 가 망설여졌다. "빨리 가자. 이렇게 더운 날씨에 밖에 오래 있는 건 별로 안 좋아." 카페 밖 가로수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니콜라스가 다가왔다. "빨리 헤어져서 다행이네. 진시월인지 뭔지 하는 그 수컷은 누나를 노리고 있으니까 각별히 조심해." "너 걔 싫어?" "싫어. 그 녀석은 누나를 노리고 있잖아." 니콜라스는 때묻지 않은 아이처럼 너무 솔직하다. 그의 순수함을 부 러워하며 그를 바라보던 예안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상관없어. 내가 마음 안 주면 그만이지 뭐." "누나 원래 남자 엄청 싫어하지 않았어? 근데 왜 갑자기 새삼 그 녀 석이랑 친하게 구는 거야?" 예안은 씁쓸히 고개를 돌렸다. 한때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던 그녀 는 시월처럼 빛나는 자신감이 가득한 사람을 볼 때마다 늘 부러웠 다. 여자가 되고 혜민을 다시 만났을 때 너무 쉽게 끌린 것도 바로 그 자신감에 눈이 부셨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쇼핑이나 갈까?" "쇼핑?" "나중에 세현이 또 만나러 갈 건데 그때 너 입을 옷도 좀 사고, 우 리 유빈이 옷도 좀 사고 그래야지. 집 근처에 백화점 새로 생겼던데 거기 가보자. 어때?" "좋아!" 세현의 이름이 나오자 니콜라스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승낙했다. 이럴 때의 녀석은 참 귀엽다고 예안은 속으로 쿡쿡 웃으며 택시에 올랐다. 집에 도착한 그녀는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정호에게서 아기 먼저 넘겨받았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는 눈을 뜨고 뭔가를 말 하고 싶은 듯 입을 오물거렸다. "유빈아. 오늘은 성주 삼촌이랑 엄마랑 같이 옷 사러 갈 거야." "옷 사러 가게?" "응. 성주랑 유빈이랑 같이 다녀오려구." 정호는 그러라고 하고 그들을 배웅했다. 예안은 아기를 품에 꼭 안 은 채 집 근처 백화점으로 향했다. 걸어서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 였기에 택시는 부르지 않았다. '휴우. 그나저나 일본은 어떻게 하지?' 중현은 일본을 밟겠다는 자신의 말에 반대했다. 끝내 의견을 굽히자 않자 그는 결국 시간을 좀더 달라는 말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어떤 방법을 찾아내든 간에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생각이었다. 맥에게 끌려가지 않으려 전쟁을 극구 반대했던 그녀가 이제 오히려 전쟁에 더욱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이건 내 잘못이 아냐. 일본 녀석들이 먼저 시트날타와 손을 잡아서 이렇게 된 것뿐이라고. 다 자업자득이야. 결코 내 잘못이 아냐.' 예안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모자를 좀더 바로잡아 머리카락을 가렸 다. 한산한 거리에 뜨거운 햇살이 가득 내려앉고 있었다. "근데 니콜, 너 면허 같은 거 없어?" "있어." "그럼 진작 말하지 그랬어? 괜히 그동안 귀찮게 콜 택시 부르고 그 랬잖아?" "차 사서 돌아다니는 거 좋지 않아. 내가 차를 운전하는 중에 적으 로부터 습격을 받으면 대처하기가 마땅치 않거든." "아, 그래? 아쉽네." 토요일이라 그런지 백화점에는 사람이 많았다. 예안은 누가 아기를 채가기라도 할 까봐 품에 꼭 껴안았다. 이따금씩 그녀의 미모에 홀 린 사람들이 호기심과 신기함으로 뒤섞인 눈으로 아기를 보곤 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며 눈이 마주친 사람들에게 씩 웃어주곤 했다. "유빈이가 굉장히 자랑스러운가 봐." 니콜라스가 게임기를 하나 골라 어루만지며 그렇게 말했다. "당연하지. 내 아기 안 예뻐하는 엄마가 이 세상 어디에 있냐?" "세상에 패륜아는 많아. 그리고 패륜부모도 많지. 이 세상 모든 부 모가 누나 같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건 착각이야." 그는 다소 냉정한 말투로 말하고는 게임기를 내려놓았다. "근데 누나는 모르는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유빈이를 자랑스럽게 보 여주면서 왜 진시월 같은 수컷한테는 꺼리는 거야?" 날카로운 질문에 예안은 순간 당황했다. "뭐, 뭐어?" "사실 그렇잖아. 난 누나가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하겠어. 도도한 암컷으로서 콧대를 내세우는 거라면 납득하겠는데 누나는 그게 아니 라고 하잖아." 말문이 막힌 예안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비꼬거나 놀리는 거 라면 'Would you shut up the ugly mouth?'라고 웃음 띤 얼굴로 쏘 아붙이면 그만이겠는데, 니콜라스는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니 그럴 수 없었다. 게다가 어느 철학가가 말했다. 무지는 죄가 아니라고. "게임이라는 게 참 재미있더라. 누나 나 이거 사줄 수 있어?" 다행히 니콜라스는 자기가 알아서 화제를 돌렸다. 예안은 내심 다행 이라고 안도하며 끄덕였다. "사고 싶으면 사. 나도 나중에 같이 하자." 니콜라스는 PS를 집어들며 다시 물었다. "근데 제임스도 게임을 좋아할까?" "음. 적어도 내가 아는 세현이는 게임을 엄청 좋아했어. 나 못지 않 았지. 뭐 내가 조금 더 게임을 잘했지만 말이야." 세현과 같이 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상상했는지 니콜라스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동인녀들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꺅꺅거리며 어쩔 줄 몰라했을 것이다. 예안은 새로 나온 게임이 뭐 없나 진열대 위를 다시 살폈다. "누나! 누나! 이거 이거! 이거 사 줘! 나 이게 정말 갖고 싶단 말이 야!" "그거 지난번에도 산 거잖아? 그러니까 누가 망가뜨리래?" "사 줘어~ 제발~ 한 번만 더 사주면 절대 안 망가뜨릴게!" 순간 예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놀란 얼굴로 시선을 돌리던 그 녀는 터져 나오는 신음을 간신히 틀어막았다. 바로 옆 코너에서 남 매로 보이는 소녀와 소년이 사 줘, 안 돼, 하며 티격태격 대고 있었 던 것이다. 그들은 바로 우성과 마리였다. 다급해진 예안은 반사적으로 주위를 살피고 눈을 크게 떴다. 멀지 않은 곳에서 세정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다행히 세정은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얼굴 을 맞닥뜨리는 건 시간 문제였다. "얘들아. 이제 그만 저쪽으로 가…." 미소 띤 얼굴로 우성과 마리를 부르던 세정은 예안과 눈이 마주치고 말끝을 흐렸다. 의아함을 느낀 마리 남매도 고개를 돌리다 그제야 예안을 발견했다. 놀란 그들은 입을 다문 그대로 굳어버렸다. 잠시 후 세정이 쓴웃음을 지으며 예안에게 말을 건넸다. "이거 오랜만이네. 이런 데서 볼 줄이야. 세상 참 좁구나." 적의나 미움이 전혀 깃들이지 않은 음성이었다. 당황해 어쩔 줄 몰 라하던 예안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정말 오랜만이에요." 뜻밖의 장소에서 이뤄진 뜻밖의 만남으로 예안은 머리 속이 그야말 로 엉망진창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지 몰랐다. 이대로 그냥 도망 쳐야 하는지, 아니면 계속 아는 척을 해야 하는지조차도. 이혼 당시 세정도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이제는 이해하고, 그동안 자 신 혼자 뒤틀려 있었다는 것도 이제는 인정했다. 하지만 세정에게 임신은 거짓말이었다고 둘러대기까지 했던 마당에 친한 척 사근사근 하게 대할 순 없었다. "어? 근데 그 아기는 뭐니?" 그제야 아기의 존재를 알아차린 세정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예안 은 너무 놀란 나머지 반사적으로 아기를 뒤로 감추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그냥 제 친구 아들인데 잠깐 제가 돌 봐주는 거예요!" 한 눈에 봐도 알아차릴 수 있을 어설픈 거짓말이었다. 세정의 얼굴 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마리 남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안은 돌이 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닫고 눈을 질끈 감았다. 뒷걸음질 을 조금씩 쳐봤지만 세정의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그 아기… 누구 아기니?"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85 회] 날 짜 2004-05-23 조회 / 추천 2453 / 29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내 소중한 자존심 예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말했잖아요. 제 친구 아들인데 제가 대신…." 세정의 날카로운 눈빛에 예안은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자신이 생 각해도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다. 여유가 좀더 있었더라면 그럴 듯 한 거짓말을 생각해냈을 텐데. "그, 그나저나 아주머니는 여기 웬일이세요? 쇼핑하러 오신 거예요? 아까 보니까 얘랑 쟤랑 게임기 가지고 티격태격 하던데요? 사실 게 임 오래 하면 전자파 때문에 건강에도 좋지 않아요! 하, 하지만 두 뇌 개발에는 좋으니까 게임 많이 한다 해서 너무 뭐라고 하진 마세 요!" 당황한 나머지 예안은 그렇게 횡설수설했다. 조금 날카롭게 그녀를 바라보던 세정은 눈빛을 풀었다. 세정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한 발짝 다가갔다. 예안은 움찔해서 뒤로 물러나갔다. "언제까지 그렇게 뒤에 숨기고 있을 거야? 그렇게 들고 있으면 아기 가 괴로워하잖아." 예안은 그 말에 반사적으로 아기를 앞으로 안았다. 양손으로 잡고 있었던 탓인지 아기가 울먹울먹이고 있었다. 너무 미안해진 그녀는 어쩔 줄 몰라했다. 세정은 그 반응을 보고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네 아기 맞지? 언제 낳았니?" 세정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예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떤 대답 을 하든 간에 입을 열게 된다면 복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할 것 같 아서였다. "참 귀엽구나. 한 번 안아봐도 되니?" 세정의 손이 아기에게 닿은 순간 예안은 눈을 번쩍 떴다. 사고의 통 제력을 잃어버린 그녀는 그만 되는 대로 소리질렀다. "안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만지지 말아요!!" 카랑카랑한 고음에 세정은 움찔했다. 매장의 모든 시선이 삽시간에 이쪽으로 쏠렸다. "아주머니 손자 아니에요! 아니라구요! 그러니까 만지지 말아요! 왜, 왜 자꾸 사람을 그렇게 괴롭게 하냐구요!" 씩씩거리며 세정을 노려보던 예안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상관하지 말라구요 이제…." 이제 모든 건 틀렸다. 너무 허무하게 아기를 들켜버리고 말았다. "차성주. 그만 가자." 예안은 힘없이 돌아섰다. 세정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세정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그들이 사라진 후 마리는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엄마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작스런 만남과 뜻밖의 전개. 머리로는 어떻게 된 건지 알겠는데 가슴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 예안이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세정은 따뜻한 미소를 띤 채 마리를 돌아보았다. "마리야. 조카랑 같이 살고 싶지 않니?" "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설마 정말 저 아기가 예안이 아기라는 말씀이세요?" 마리는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그러나 세정은 대답이 없었다. "엄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세정은 시선을 들었다. 그녀의 뺨을 타고 한 줄 기 눈물이 흘렀다. 가여운 아이. 헤어진 후로 한 번 안아주지도 못 한 아이. 이미 죽어 세상에는 없는 아이. 그 아이의 혈육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저 감격스러웠다. 서글픈 행복에 그렇게 젖어 있던 그녀는 손수건을 들어 눈가를 찍어냈다. "마리야. 우성아." "네 엄마." 세정은 그들을 차마 바라보지 못한 채 말했다. "전에 나하고 한 약속, 들어줄 수 있지? 그…." 진우의 혈육을 가족으로 받아들여주겠다는 약속을 말하는 것이었다. 마리와 우성은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우리는 착한 자식들이잖아요. 그렇게 해서 엄마 마음이 편 해지신다면 따를게요. 저희도 새 가족이 생기는 거 찬성해요." 마리가 제법 어른스럽게 대답했다. 세정은 몹시 고마워하며 의붓딸 의 손을 붙잡았다. "고마워. 고마워 마리야." 살아 있었다. 하나뿐인 핏줄이 살아 있었다.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여기고 포기했던 생명이 활기차게 살아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 를 이제야 바로잡아줄 수 있게 된 세정은 감격한 나머지 그대로 기 절해 버렸다. 예안은 이를 악물고 뛰었다. 그녀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나!" 니콜라스는 차마 그녀를 붙잡진 못하고 바로 옆에서 같이 달렸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누나! 정신 차려!"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예안은 계속 뛰었다. 앞에 사람이 지나가든 오 토바이가 지나가든 차가 지나가든 보이지 않는지 전혀 거침이 없었 다. 안 되겠다 생각한 니콜라스는 최후의 카드를 내밀었다. "유빈이가 울잖아! 정신 안 차릴 거야!" 순간 예안은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그녀는 멍한 슬픔이 가득한 시 선으로 아기를 바라보았다. 니콜라스의 말대로 아기가 울먹이고 있 었다. 엄마의 슬픈 기분이 그대로 전염된 모양이었다. "미, 미안해 유빈아." 예안은 우뚝 선 채 아기를 꼬옥 끌어안았다. 그러나 아기는 쉽사리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잘못했어. 엄마가 잘못했어. 제발 울지 마. 뚝뚝." 그래도 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젖을 물리자 그제 야 울음을 뚝 멈췄다. 흐뭇하게 아기 머리를 쓰다듬고 있을 때 주변 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의아한 예안은 고개를 들다 말고 얼굴을 확 붉혔다. 길거리 한가운데에서 어린애가 어린애 젖을 먹이 고 있으니 사람들의 시선 사기 딱 좋은 광경이었던 것이다. '으악! 쪽팔려!' 당황한 그녀는 아기를 감싸안은 채 무작정 뛰었다. 모자 덕분에 얼 굴이 잘 보이지 않았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화끈해진 뺨은 식지 않았다. 겨우 그 자리를 벗어나 사람들이 없는 곳에 당도한 예 안은 태평스럽게 젖을 빨고 있는 아기를 얄미운 듯 내려다보았다. "너 때문에 엄마 망신당했잖아. 어떻게 할 거야?" 그래도 아기는 태평스럽게 지 욕심만 채우고 있었다. 은근히 약이 오른 예안은 조그만 주먹을 만들어 아기 이마에 살짝 쥐어박았다. 처음으로 엄마한테 얻어맞은 아기는 젖을 빨다 말고 다시 으앙 울음 을 터트렸다. "미, 미안. 잘못했어. 많이 아파?" 당황한 예안은 얼른 아기를 달래었지만 쉽사리 울음을 그치지 않았 다. 얼러도 보고 뽀뽀도 해보고 젖을 물려도 소용없었다. 그녀는 아 기를 안은 채 엉거주춤 서서 어쩔 줄 몰랐다. 출산한지 반년이 다 되서야 비로소 맛보는 육아의 괴로움은 생각보다 고달픈 것이었다. "유빈아. 그만 울어, 응? 제바알. 그만 울어어." 아무리 애원해봐도 아기는 쉽사리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살짝 꿀밤 맞은 거 갖고 아예 엄마 등골을 빼놓으려 작정한 모양이었다. 예안 이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야 아기는 겨우 울음을 그쳤다.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는 당당하게 젖을 빠는 아기를 기계적 으로 쓰다듬기만 했다. "애기 보기 참 힘들다. 으휴. 지원이 누나가 그렇게 겁주던 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아까부터 한심한 눈으로 아기를 쳐다보던 니콜라스가 입을 열었다. "덥게시리 왜 대낮부터 그렇게 뛰고 그래? 근데 아까 그 아줌마 전 에 그 아줌마 아냐? 왜 그렇게 도망쳤어?" 예안은 잠시 망설이다 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전에 말했잖아. 그 아줌마가 유빈이 할머니… 뻘쯤 돼." "유빈이 아버지의 어머니?" 예안은 잠자코 끄덕였다. 니콜라스는 조금 놀란 눈으로 아기와 그녀 를 번갈아 살폈다. "근데 왜 그렇게 도망쳤어? 도망칠 이유가 없잖아? 그러고 보니 누 나 옛날에도 그렇게 도망쳤었지?" 대답을 하기가 망설여졌다. 세정이 실은 자신의 친모라는 사실을 말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던 예안은 결국 망설임 끝에 거짓말 을 늘어놓았다. "유빈이 아버지가 죽었으니까 그 아줌마한테는 이 아기가 유일한 손 자가 되잖아. 그래서 날 거두시려고 그러는 거야. 근데 난 그게 싫 어. 너무 부담스럽고, 또 구속되는 게 싫거든. 그래서 도망쳤어." 니콜라스는 예안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이해했 다는 얼굴로 혀를 차던 그는 예안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이렇게 쓸데없이 고민하고 있어봤자 해결되는 건 없어. 일단 백화 점으로 가자. 옷은 마저 사야 할 거 아냐? 그리고 집에 가서 고민하 자구." 니콜라스는 보다 활달해지기는 했어도 합리적인 성격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백화점이고 뭐고 간에 일단 집에 가서 편히 쉬자는 말을 꺼냈을 것이다. 하기야 그게 가장 그다 운 특성인지도 몰랐다. 예안은 다시 백화점으로 향하는 내내 입맛이 썼다. 자신의 마음이 너무 훤히 들여다보였다. '하아. 정말 넌 바보야 유진우.'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다 여겼으면서도 세정을 보자마자 거부한 이 유. 그것은 사소한 문제로 엄마와 싸우고 난 뒤 자살함으로써 엄마 를 슬프게 하려는 못된 아이와도 같은 심정이었다.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의 이면적인 모습이었지만,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게 아니었다. 참 못 됐다. 정말 못 됐다. 이것이야말로 나쁜 아이의 전형적인 표 본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 누구도 함부로 비난할 수는 없다. 일부러 엄마를 슬프게 하는 아이만큼 못되면서도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 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삐뚤어진 애정의 그릇에 엄마의 관심 을 억지로 채워 넣으려다 보니 삐뚤어진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에덴 : 뭐냐 이 어설픈 심리묘사는? 실탄 : 미안타.;;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86 회] 날 짜 2004-05-23 조회 / 추천 2510 / 28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내 소중한 자존심 "안 돼! 안 돼! 그대로 슛! 그렇지!!" 축구 경기를 보던 정호는 환호성을 질렀다. 한국 공격수가 상대편의 수비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멋진 중거리 슛을 날려 선취점을 따냈기 때문이었다. "골이다, 골!" 예안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정호를 풀이 죽은 시선으로 바라보았 다. 아직까지 세정으로부터의 연락이 없었지만 그건 이사했기 때문 에 연락처 알아내는 게 늦은 까닭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언제 빚쟁 이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사람처럼 우울한 얼굴로 어제 저녁과 오 늘 아침을 보내야만 했다. 세현은 당분간 만날 수 없다는 예안의 전화를 받고 몹시 우울해했 다. 니콜라스도 세현과의 약속이 취소된 걸 몹시 안타까워했지만 예 안은 한가하게 그를 만나러 다닐 여유가 없었다. 극동아시아의 불안 전한 분위기도 이미 그녀의 관심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제 아무 리 위대한 성인군자라 해도 나라의 흥망보다는 당장 발목에 박힌 가 시가 더 걱정되는 법이다. "어? 전화 왔네?"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리자 정호는 아무 생각 없이 받았다. 그러나 상대편의 목소리를 확인한 순간 그는 얼굴이 굳어지며 반사적으로 예안을 살폈다. 다행히 예안은 혼자만의 걱정에 빠져 있었다. 그는 안심하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오랜만이군. 무슨 일이야?" 「지금 만나요. 만나서 이야기해요.」 세정의 목소리는 굳은 각오에 가득 차 있었다. 정호는 직감적으로 좋지 않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마음을 다잡 았다. 그가 만날 장소를 말하자마자 세정은 전화를 끊었다. "휴." 멍한 시선으로 끊어진 수화기를 바라보던 정호는 무거운 한숨과 함 께 몸을 일으켰다. "아빠, 어디 가?" "친구가 잠깐 만나자고 해서 말이야. 금방 돌아올게." 정호는 간단한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약속한 카페까지는 택시 로 이십 분이 채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안에 들어서서 주위를 둘러 보니 세정이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네. 한 반년 만인가? 잘 지냈어?" 세정은 죽일 듯한 눈빛으로 정호를 노려보았다. 그는 흠칫했다. "왜 그렇게 사람을 노려보고 그래? 아직도 원한이 안 풀린 거야? 하 지만 따지고 보면 내가 당신한테 입은 상처가 더 크…." "유빈이는 내가 데려가겠어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정호는 잠시 멍해졌다. 이윽고 석화에서 깨어 난 그는 놀란 눈을 크게 뜨고 더듬거리며 물었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유빈이라니? 그게 누군데?" "시치미 뗄 생각은 하지 말아요. 우리 진우 아들 유빈이 내가 데려 가서 키우겠다구요. 물론 엄마와 아이를 떼어놓을 순 없으니 예안이 도 같이 데려가겠어요." 당돌한 세정의 말에 정호는 머리 속이 하얗게 변했다. 전혀 예상 못 한 상황에 얼떨떨해 있던 그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알았어?" "며칠 전 백화점에서 예안이랑 마주쳤어요. 예안이 표정하고 태도 보고 한눈에 친아이라는 거 알았어요. 애가 당황한 건지 자기 친구 아이라고 거짓말하는데 그걸 믿을 리가 있나요? 당신이 이사해서 알 아내는데 좀 힘들었지만 하여튼 알 건 다 아니까 거짓말할 생각은 말아요. 날짜로 보나 뭐로 보나 진우 아이가 틀림없어요." 세정의 눈동자는 독기에 가득 차 있었다. 정호는 더 이상의 거짓말 은 통하지 않음을 느끼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너무 쉽게 들통나버렸네. 어쩌지." "왜 나한테 그런 거짓말했어요? 왜 임신 안 했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식으로 날 속인 거죠?" 정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정을 그렇게 속여야 했던 이유. 그것은 세정을 용서하고 이해하기로 마음먹었으되, 아버지를 생각해 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예안의 결심 때문이었다. 가장 바람직한 이별을 연출하기 위해서는 임신이 거짓말이었다고 세정에게 거짓말 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내 뜻대로 일이 처리되 면 더 이상 당신을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세정은 아주 자신만만했다. "지금 당장 예안이와 유빈이를 데려가겠어요. 이건 남편하고 아이들 도 인정한 거예요." "나하고 예안이 의견은 묵살하고?" "당신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나요? 예안이가 싫다고 해도 강제로 데 려갈 거예요. 당신 밑에서 지내면 예안이나 유빈이 장래를 위해서도 결코 좋지 않다구요. 내가 데려가는 게 가장 바람직한 거예요." 나약하기만 했던 예전 같았으면 아마도 꼬리 한 번 세워보지 못하고 그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세정의 그늘을 빌지 않아도 예안과 유빈의 장래가 충분히 밝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 이상 헤어져야 할 이유는 없었다. "거절하겠어." "뭐라구요?" "거절하겠다고. 우리는 당신 인형이 아니야. 당신이 우리 인생에 끼 어 들 이유는 없어." 세정은 화가 난 얼굴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럼 예안이 인생이 그대로 망가진다 해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우 리나라에서 아직까지는 미혼모가 그렇게 좋은 취급받지 못한다는 것 도 그새 잊었어요? 예안이한테는 내 그늘이 필요해요! 유빈이도 마 찬가지구요!" "당신 도움 없이도 그 아이 혼자서 충분히 자기 자리 만들 수 있어. 그러니 제발 우리 인생에 관여하지 마. 예안이는 나랑 같이 살기로 했으니까." 정호는 냉랭하게 말했다.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입술을 깨물던 세정 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다고 내가 물러날 줄 알아요? 어디 한 번 두고 보자구요. 당신 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예안은 아기를 안고 니콜라스와 함께 장을 보러 나왔다. 자신은 언 제부터인가 먹는다는 느낌을 완전히 잊어버렸지만, 정호는 보통 사 람이었기 때문에 밥을 안 차릴 순 없었다. 니콜라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인간 인 듯 했으나, 그 자신조차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고, 또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기에 그녀는 관심을 껐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난리법석 을 떨며 놀라워해야 할 일에 그렇게 덤덤해져 간다는 것도 그녀가 얻은 변화 중 하나였다. "이거 어때?" "꽤 싱싱한 것 같네. 사." "음. 아줌마. 저것도 하나 주세요." 야채코너와 고기코너 등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카트에는 음식재 료들이 수북히 쌓였다. 니콜라스는 뚱한 얼굴로 카트를 밀며 중얼거 렸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해야 해? 난 이래 뵈도 명색이 보디가드란 말이 야." "어허. 그럼 너한테 우리 아기 맡기리? 그리고 이 내가 이 무거운 카트 밀고 다녀야겠어?" 주변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게 쪽팔렸지만 예안은 꿋꿋이 참아냈다. 모르면 몰라도 아마 저 중에 절반은 자신들을 어 린 부부라 생각하고 있으리라. 원래 사람들은 같은 것을 봐도 흥미 있는 쪽으로 상상하는 버릇이 있기 마련이다. "아유, 동생들 데리고 장보는 거야? 착하기도 하지 참. 누가 데려갈 지 몰라도 아가씨랑 결혼하는 남자 정말 복 받은 거야." 얼굴이 익은 한 아주머니 점원이 너스레를 떨었다. 말로는 동생이라 하면서도 은근히 호기심을 보이는 걸 보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했다. "휴, 무도 샀고 양파도 샀고 오이도 샀고 참외도 샀고 사과도 샀고 돼지고기도 샀고 양념도 샀으니 이제 다 산 건가?" "숨 넘어가겠어 누나." 그들은 카운터에 와서 계산을 치른 뒤 산 것들을 봉지에 담았다. 니 콜라스는 짐을 들며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제임스하고 한 약속은 다 취소되고 이런 짐이나 들어야 하다니." "세현이를 그렇게 만나고 싶어?"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누나도 잘 알잖아? 약속이 취소 돼서 내가 얼마나 실망했는지 누나가 알아?" 니콜라스와 티격태격하는 건 아직은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예안은 곧 자연스러운 어울림을 획득할 수 있었다. '얘도 은근히 참 귀엽다니까. 우리 유빈이도 얘처럼 키우고 싶다 정 말.' 아, 오해하지 마라. 어린 시절부터 총 쥐어주고 사람 죽이러 다니라 시킨다는 뜻이 아니다. "엄마~ 나 저거 사줘~ 히잉~" "안 돼. 저거 많이 먹으면 이빨 썩는단 말이야. 다음에 사줄게." 예안은 우뚝 멈췄다. 어린 꼬마애가 엄마 치맛자락을 붙들고 초콜릿 을 사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조르다가 안 되니까 나중에는 엉엉 울 음까지 터트렸다. 난처해진 엄마는 할 수 없이 초콜릿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제야 아이의 표정이 환해졌다. 예안은 침울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건 기억에 없는 장면이었다. 두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엄마와 떨어 졌는데 저런 기억이 있을 리 없었다. 어렸을 때 엄마와 같이 장을 보러 가거나 놀러 다니는 애들을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부럽곤 했었다. 그런 비참함을 맛보기 싫어 결국 자신의 정신을 학대하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정말 바보 같았다. 어린 아이라면 어린 아이답게 마음껏 투정을 부 리거나 했어야 했다. 어린 아이가 엄마 보고 싶다고 아무리 울어 젖 혀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도대체 나는 무엇 이 겁나서 일부러 엄마를 그리워하지 않은 척 그렇게 냉소적으로 굴 었단 말인가. 하다 못해 엄마 보러 가자는 아빠의 권유를 단 한 번 만이라도 받아들였다면 이렇게 가슴에 깊은 응어리가 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안은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쌔근쌔근 잘 자고 있었다. 이 사랑스 러운 아기만큼은 결단코 그런 슬픔을 겪게 하지 않으리라. '진짜 엄 마'를 빼앗았으니 그만큼 더 사랑해주리라. 그렇게 아기의 행복한 미소를 영원히 나만이 독점하며 그렇게 살리라. 세정의 슬픈 눈동자가 떠올랐다. 임신이 거짓말이었다고 말했을 때 절망하던 그녀의 눈빛이 기억났다. 목구멍에서 무언가 울컥하며 올 라올 것 같았다. 입을 막고 서 있던 그녀는 반사적으로 아기를 꼭 안았다. 어느새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누나?" 니콜라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슬픔의 오라에 전염된 장내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죽인 채 그들을 주시했다. 울음과 그리움을 참으며 서 있던 예안은 아기의 배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눈물기가 사 라진 눈동자가 굳센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만 가자." 예안은 무뚝뚝하게 내뱉고 정문을 나섰다. 어차피 자신이 선택한 길, 후회는 없었다. 삐뚤어진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으면 끝까지 삐뚤어지게 나갈 것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 게 살아갈 것이다. 다른 건 전부 다 변한다 해도 그것만큼은, 세정 에 대한 태도만큼은 전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보잘것 없는 어린 시절을 함께 해온 소중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노력 이었다. 에덴 : 이건 더 어설프다 야? 실탄 :ㅠㅠㅠㅠㅠㅠ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87 회] 날 짜 2004-05-23 조회 / 추천 2592 / 35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붉은 발현 테라스의 커튼이 바람에 부대끼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진 술잔 위로 별빛이 첨벙거리며 내려앉았다. 도심의 불빛이 그득한 풍경을 등뒤로 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던 호이즈미 총리는 문득 인기척을 느 꼈다. "오랜만입니다." 등뒤에는 검은 제복을 입은 앤슨이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아 무런 낌새도 못 느꼈는데 어느새 이곳에 들어온 걸까. 총리는 몸서 리쳐지는 두려움을 느꼈다. 이곳 관저를 제집 드나들 듯 하는 이 사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취하지 못할 목숨 따위는 없을 것 같았다. "정말 오랜만이군. 일단 한 잔 하지." 총리는 맞은 편에 앉았다. 앤슨의 옆에 서 있던 아리따운 여자가 포 도주 병을 들어 그 둘의 잔에 따라주었다. 총리는 잔을 받으며 흘끔 흘끔 그녀를 훔쳐보았다. 늙은 나이에도 힘이 끓어오를 정도로 대단 한 미인이었다. 온갖 백전을 치른 용사처럼 강인한 눈동자가 인상적 이었다. "유나가 마음에 드십니까? 하룻밤 빌려드릴까요?" 앤슨의 농담에 총리는 흠칫 놀랐다. 순간이나마 유나에게 품었던 흑 심이 들킨 게 부끄러워 그는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자신을 하룻밤 빌려준다 운운하는 농담이 오고 감에도 유나는 무표정했다. 인형의 얼굴을 갖다 붙인 듯 예쁘지만 차가운 눈빛이었다. "필요 없네. 자네는 날 모욕하는 겐가?" "하하, 농담입니다.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는군요." "아무리 농담이라 해도 그렇지. 그리고 자네 부하를 그렇게 함부로 취급해도 되나?" "유나는 제가 명령만 내린다면 죽음도 불사합니다."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런 여자가 목숨까지 바친단 말인가. 총 리는 몇 번에 걸친 앤슨과의 접촉을 통해 두려움만 잔뜩 얻었다. 그 에게 복수하겠다는 결심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공기가 아주 좋군요. 조만간 피냄새와 화약냄새로 가득 찰 테지만 말입니다." 앤슨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을 움켜잡으며 그렇게 말했 다. 전쟁과 파괴를 숭배하는 아레스 신처럼 감격스러워하는 그의 어 조에 총리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의 의도에 맞춰 한국 도발 정책을 펼치는 게 과연 잘하는 짓인지 자신이 없었다. "대단히 잘해주시고 있더군요.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자네가 날 먼저 죽일 게 아닌가. 목숨과 국익 이 걸린 일인데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해내야지." 총리는 비꼬는 어조로 은근히 그를 도발했다. 그러나 그는 빙긋 웃 기만 했다. "한 가지 자네에게 꼭 따지고 싶은 게 있다네. 도대체 왜 맥에게 핵 미사일을 발사한 거지? 만약 맥이 요격하지 않고 폭발했다면 낙진은 우리나라에까지 떨어졌을 거야." "흐음. 주석님이 그런 말을 했을 리 없을 텐데요? 어떻게 아셨습니 까?" "자네는 날 바보로 아는가? 위성 사진만 판독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을 걸세. 말해보게. 도대체 왜 핵을 발사한 거지?" 총리는 분노를 억누르며 그렇게 따졌다. 그러나 앤슨은 전혀 미안해 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어차피 요격되었으니 끝난 일 아닙니까? 핵은 터지지 않았고 일본 에는 낙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만약 핵이 터졌으면 우리 일본도 그대 로 끝이었단 말이야!!" 총리는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앤슨은 글라스를 혀로 핥았다. 죽 은 쥐의 피를 빨아먹는 고양이처럼 싸늘한 눈빛이었다. "지금 저에게 화내시는 겁니까?" 사람의 심장을 얼릴 듯 차가운 목소리. 총리는 세상에 다시없을 커 다란 두려움을 맛보았다. 학창 시절, 밑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끝 에 난 꽃을 꺾어 여자친구에게 바칠 때에도 이런 두려움을 맛보지 못했었다. 목소리만으로 인간의 영혼을 찢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눈앞의 젊은 청년이리라. "어차피 핵은 폭발하지 않고 요격될 운명이었습니다. 400km 떨어진 거리에서 마하 70의 속도로 떨어지는 10발의 대륙간탄도를 수 초 안 에 전부 요격한 맥의 성능을 잊으신 건 아닌가요? 결과적으로 바람 직하게 끝났고, 현재 판국은 일본에 대단히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습 니다. 그럼 된 게 아닌가요?" 총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앤슨의 부드러운 책망이 악마의 꾸짖음처 럼 들렸다. 그는 다리의 떨림을 애써 참았다. "자네는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고 작해야 양자 컴퓨터나 맥 때문에 이 일을 벌이는 건 아닌 것 같아. 자네는 다른 계획이 있지?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아주 커다랗고, 터 무니없는 일을 꾸미고 있는 게 맞지?" "터무니없다라. 꼭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앤슨은 유나에게 눈짓했다. 그녀는 빠른 손놀림으로 칼집에서 검을 꺼내어 총리의 목에 겨누었다. 눈에 채 비치지도 않을 빠른 속력에 총리는 식은땀을 흘렸다. 풍압만으로도 살갗을 벨 듯한 빠르기였다. "너무 많은 걸 알려 들지 마십시오. 목숨이 짧아질 수 있습니다." 앤슨은 태연히 글라스를 핥으며 싸늘히 웃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고, 그 시체를 해부하고, 찌꺼기를 씹 어 삼킬 수 있을 듯한 차가운 눈동자. 총리는 마음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유나. 그만 검을 거둬들여." 앤슨은 부드럽게 말했다. 유나는 태연히 검을 집어넣으며 그의 뒤에 섰다. 총리는 두려움과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의 검을 보았 다. 칼집에 집어넣기 전 순간적으로 검이 빛난 것 같았다. "당신은 아무것도 묻지 말고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럼 못 해도 유전 혹은 양자 컴퓨터, 잘되면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굳 힐 수 있습니다. 서로 좋은 조건 아닙니까?" "하, 하지만 한국에는 맥이 있는데 그걸 무슨 수로…." "전에 말씀드린 대로 맥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합니다. 원래 우리 소 유였던 것을 우리가 다루지 못할 까닭이 없지요." 우리 소유? 엄청난 힌트가 될 수 있을 듯한 단어에 총리는 귀를 쫑 긋 곤두세웠다. 그러나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법한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당신은 아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나면 한반 도는 영원히 일본의 종속이 될 겁니다." 마약보다 달콤한 유혹이 마음에 대고 노크했다. 총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래. 이제 와서 포기할 순 없지 않은가. 끝에 무엇이 기 다리고 있든 간에 갈 때까지 가보는 수밖에. 카페 앞에 선 예안은 잠깐 멈췄다. 초조한 얼굴로 모자를 만지작거 리던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안에 들어섰다. 안쪽 창가에 앉아 연거푸 물을 마시던 세정은 이쪽을 발견하고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예안은 바짝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안녕하세요." 예안은 고개를 살짝 숙인 뒤 태연히 앉았다. 의연한 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가슴은 심하게 쿵쾅거리고 있었다. "얼굴이 예전보다는 좋아 보이네. 요새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는 거 야? 학교는 잘 다니고 있고?" 이미 조사해서 뻔히 다 아는 처지에 왜 그런 걸 묻는단 말인가. 예 안은 추궁 당하는 느낌에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아시다시피 고등학교는 작년에 자퇴했고 대학교는 아직 안 들어갔 어요. 공부 같은 거 별로 안 하고 요새는 그냥 놀고 있어요." 예안은 그렇게 덤덤히 말했다. "저런, 왜 학교 자퇴했어?" 뻔히 알면서 일부러 묻는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그러나 먼 저 말을 꺼내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유빈이는 안 데리고 나왔네. 아직 젖먹이라며? 그런데 안 데리고 다녀도 되는 거야? 분유가 아니라 모유 먹인다며?"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예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기가 화 제에 오르는 게 여간 거북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 왜 절 만나자고 하셨는지 알고 싶은데요." "아기가 태어날 때 굉장히 작았다고 했지? 근데도 무사히 출산했구 나. 많이 아팠니?" "…왜 절 만나자고 하셨죠?" "이제 슬슬 아기가 말할 때도 되지 않았니? 어때? 요새 뭐라고 말하 고 싶어하는 그런 기미 없었어? 입을 옹알거린다거나 뭐 그런 거 말 이야." "아줌마." 예안은 힘들게 말을 잘랐다. 차마 발끈할 순 없었다. 세정의 부드러 운 미소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유빈이는 아주머니랑 아무 관계없어요." "왜 관계가 없다는 거니? 그래도 내 친손자인데." "그래봐야 소용없어요. 친권 행사 할 수 있는 건 저예요." "다행이네." "네?" "네가 지금 거짓말을 안 하잖아. 난 또 네가 진우 아이 아니라고 거 짓말하면 어떻게 추궁해야 하나 하고 계속 고민했거든." "그런 어리석은 거짓말 이제 안 해요. 그리고 어차피…." 예안은 잠시 입술을 깨물고 망설였다. 세정에게 정말 이 말을 해야 하나 머뭇거려졌다. 그녀는 결국 힘들게 입을 열었다. "유빈이한테 아주머니 이야기는 안 할 거니까." 세정의 얼굴이 돌연 굳어졌다. 예안은 쓰린 마음으로 그녀를 외면하 며 일부러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다. "말 그대로예요. 아주머니랑 저랑은 아무 관련 없어요. 유빈이는 엄 연한 제 친아들이니 제가 알아서 키울 거예요. 전 그럴 능력이 있어 요. 아주머니한테 손을 벌릴 필요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요. 어차피 저하고 아주머니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요." 세정은 암담한 나머지 눈을 감았다. 예안과 자신 사이에 펼쳐진 결 계는 비록 약해지긴 했어도 여전히 굳건했다. 세정은 무슨 수를 써 서라도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주인이 한사코 허락하려 하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 사람은 무능력해. 난 너와 유빈이를 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 않아." "전 아빠에게 의지하는 게 아니라 모시고 있는 거예요. 오해는 말아 줬음 좋겠네요." "그러니까 답답하다는 거야. 도대체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런 의무를 져야 하는 거니? 오히려 네가 손주를 낳아줬으니 그 사람이 너에게 뭔가를 해줘야 하는 거 아니니?" 세정은 거침없이 내뱉었다. 억양만 날카롭지 않을 뿐이지 독설에 가 까운 어조였다. "내 말대로 하렴. 그 집에서 나오고 우리 집으로 와. 그이에게는 내 가 적당한 보상을 해줄 생각이니까 아무 걱정할 필요 없어." "헤에. 말씀 들어보니까 저에 대해서 조사도 제대로 안 하셨네요." 예안은 빈정거리듯 말했다.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어딘지 주소나 한 번 알아보셨어요? 매 현동이에요, 매현동." 세정은 놀랐다. 매현동이라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사는 상류층들 이 폐쇄적인 단지를 이루고 살아가는 곳이었다. 그녀도 바로 그 근 처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정원 딸린 집에서 아기 키우고 싶어서 그냥 산 집이죠. 그것도 제 순수 능력으로요. 아, 제가 돈이 어디서 났는지는 모르시죠? 주식을 했을까요? 유산을 받은 걸까요? 아니면 운 좋게 복권에 당첨된 걸까 요? 알아서 상상해보세요. 어쨌든 전 제 돈 주고 산 집 못 떠나요. 이 집이 얼마짜리인지나 아세요?" "팔면 되잖아." 잠시 말문이 막혔던 세정은 그렇게 말했다. 예안은 코웃음을 쳤다. "지금 팔면 세금이 얼마나 나오는지 아시고서 하시는 말씀이세요?" 세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금 물어주는 건 석준의 능력으로 충 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핑계를 대면서까지 자신과 함께 살지 않으려는 예안의 마음을 되돌리는 건 돈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었다. 그녀가 마음을 열지 않는 상황에서 억지로 데려가면 살아가는 동안 사사건건 부딪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서로만 괴롭게 될 뿐이다. "세금 같은 건 내가 다 해결해줄 수 있어. 친척한테 받은 하나뿐인 유산인데 아무렴 내가 설마 떼어먹겠니? 일단 오늘은 집에 가서 잘 생각해 봐." 세정은 결국 오늘은 이렇게 매듭짓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88 회] 날 짜 2004-05-23 조회 / 추천 2518 / 30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붉은 발현 예안은 가슴에 먹구름을 잔뜩 품은 채 카페를 나섰다. 우울한 얼굴 로 돌아서는 세정을 잠깐 동안 바라보던 그녀는 반대쪽으로 발을 떼 어놓았다. 발바닥이 땅에 붙어버린 듯 한 걸음 한 걸음을 떼어놓는 게 무척 힘들었지만 그래도 무뚝뚝하게 걸었다. 결국 세정에게 상처를 줘버리고 말았다. 보잘것없는 자존심을 지키 되 세정에게 상처는 주지 말자는 결심 지키기가 왜 이렇게 힘든 것 인가. 예안은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빛이 넓게 뻗쳐 있 는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지평선 너머 저쪽 어딘가에는 에덴 혹성의 실루엣이 그림자처럼 걸려 있을 것이다. 단 한 번 똑바로 마주보는 것조차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만 했던 바로 그 에덴 혹성. 조금만 돌아보면 상처가 될 수 있는 요소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밟히는 것들은 전부 지우고 싶은 과거들뿐이었 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하지만 자신의 본질 자체가 송두리째 뒤바뀔 수 있는 운명까지 즐길 수는 없는 법이다. 적어도 자신의 자 아가 아직까지는 에덴인이 아닌 구인류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는.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가슴이 약간 욱신거렸지만 그런대로 참 을 만했다. "저기, 괜찮으세요?" 지나가던 한 남자가 걱정스런 얼굴로 묻는다. 반사적으로 움찔한 예 안은 어깨를 짚은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남자는 멋쩍은 표정으로 물러났다. 조금 비틀거리던 예안은 집에서 자신만을 기다리고 있을 아기를 떠올리며 애써 미소지었다. 아기를 위해서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지. 집에 도착한 예안은 깜짝 놀랐다. 이삿짐 센터 직원들이 대문 앞에 서 초인종을 누르며 서성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지금 뭐하는 거에요?" "최석준씨가 보내서 왔는데요. 이사하실 거 아닌가요?" 직원 중 한 명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예안은 그가 자신을 흘끔 흘끔 훔쳐보는 게 기분 나빴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최석준이라는 사람이 누군데 함부로 이사를 하라 마라 하는 거죠? 이 집은 제 명의로 된 제 집이에요. 법적으로 아무 하자 없다구요. 그리고 차압 받을 짓도 한 적 없어요!" "저, 그럼 혹시 한세정씨는 모릅니까? 만약 그렇게 말씀하실 때 그 이름을 대면 알 거라고 최석준씨가 그러셨는데요." 비로소 예안은 어떻게 된 것인지 깨달았다. 황당함과 패닉이 뒤섞인 눈으로 그들을 훑어보던 예안은 꾹 참고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집주인인 제가 이사할 생각이 없고, 또 그 사람들은 저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뭔가를 잘못 알고 오신 모양인데 그냥 돌아가 주세요." 예안의 완강한 태도에 직원들은 더 말도 못 붙여보고 그대로 떠났 다.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던 예안은 문을 열고 안으 로 들어갔다. 총을 쥔 채 현관문 옆에 기대고 서 있던 니콜라스가 그녀를 맞이했다. "너 왜 여기 서 있어? 총은 또 왜 뽑았어?" "밖에 있던 녀석들이 혹시 적이 아닐까 생각했어. 그래서 대비하고 있던 거야." 니콜라스는 총을 집어넣으며 덤덤히 말했다. "그 아주머니랑은 이야기 잘 끝냈어?" "응. 그럭저럭." "다음부터는 혼자 가지말고 나랑 같이 다녀. 만약 이삿짐 센터 녀석 들 중 누나의 적이 섞여 있었다면 어쩌려고 그랬어?" "괜찮아. 한두 번쯤 혼자 다닌다 해서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 니잖아? 어차피 그 녀석들은 내가 한국에 있다는 것도 잘 모를 거 야. 설마 알아도 자세한 주소는커녕 서울에 있는지 아닌지도 갈팡질 팡할 텐데 뭘." 예안은 건조한 어조로 대답하고 소파에 앉았다. TV를 켜자 늘 그렇 듯 뉴스가 쏟아져 나왔다. 여 기자가 급박한 말투로 동해 배타적 경 제 해역에서 대치 중인 한국과 일본 함대의 상황을 급파하고 있었 다. 아직까지는 가상적에 대한 경계 수준이었지만 편집된 화면만으 로도 강렬한 긴장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한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이는 걸까?" "아직까지는 그냥 대치 중이야. 우리나라에 맥이 있는 이상 일본은 먼저 선전포고 못할 걸?" "일본은 내세울 것도 없으면서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땡깡 부리는 지 모르겠어. 그냥 순순히 보상금 준다 했을 때 얼씨구나 하고 받아 먹으면 그만이지, 왜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하려고 드는 거지?" "내가 그 속을 어떻게 아냐." 예안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아기를 품에 안았다. 한국과 일본이 전쟁 을 벌이든 말든 지금 그녀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여차하면 맥을 타 고 나가서 미사일을 요격하고 함대를 박살내면 그만이었다. 지금 그 녀는 세정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벅찼다. 투명한 글라스에 알알이 맺힌 붉은 와인이 매끄럽게 빛났다. 햇빛을 산란하는 바다 표면처럼 아름다운 그 광택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세현은 한 모금 마신 뒤 잔을 내려놓았다. 옆 테이블에서 아까부터 이쪽만을 쳐다보던 여자들이 홀린 듯한 시 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매력적인 수컷에게 암컷들이 끌리는 건 방방 뛰고 좋아할 일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자연의 법 칙이 아닌가. 여자들이 수군덕거리는 게 간헐적으로 귀에 들릴 때마 다 괜히 호텔 레스토랑을 약속 장소로 잡았다는 후회가 들긴 했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그때 정문에서 예안이 들어섰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이쪽 으로 다가왔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방금 왔어." 세현은 미소 띤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꽤나 신경 써서 옷을 차려 입은 니콜라스가 조심스럽게 그를 훔쳐보았다. 예안은 세현의 평온 한 눈빛을 보고 의아함을 느꼈다. 전에 만났을 때와는 달리 이상한 낌새가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잖아? 그럼 그땐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사람 헷갈리 게시리." 세상 끝에서 가장 커다란 절망을 발견한 것 같았던 그때의 세현. 하 지만 지금의 평온한 모습에서 그때의 그 흔적은 조금도 잡아낼 수 없었다. 오죽하면 내가 착각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 으니 말이다. "성주라고 했던가? 옷이 참 예쁘구나." 세현의 칭찬에 니콜라스는 귀밑까지 얼굴이 붉어졌다. 보통 남자애 라면 예쁘다는 칭찬에 발끈할 텐데 그는 마냥 좋기만 했다. "근데 이런 데서 만나도 되는 거야? 너 아버지와 의절했잖아? 그럼 주머니 사정이 별로 좋지 않을 텐데?" "제임스란 이름 하나만으로도 평생 놀고 먹을 돈을 거머쥘 수 있어. 그건 네가 전혀 걱정할 문제가 아니야. 하긴, 어차피 위원회 녀석들 에게 줘야 할 돈이니까 내가 쓸 수 있는 건 1%도 안 되는구나." "위원회?" 생소한 뉘앙스에 예안은 갸웃했다. 세현은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보 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 녀석들이 있어. 날 질기게도 괴롭히는 녀석들이지." 에안은 의아했다. "미국에서 너 텃새라도 받은 거야? 천하의 차세현이?" "미국에서가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날 괴롭힌 녀석들이야. 물론 지 금은 입장이 어느 정도 뒤집어졌지만, 그래도 얼굴 맞대면서 웃을 수 있는 녀석들은 아니지." 예안은 조금 긴장했다. 조금만 유도하면 녀석이 변한 이유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너 미국에서 어떻게 살았길래 그렇게 변한 거야?" "전에 말했잖아. 이게 내 본모습일 거란 생각은 안 해 봤냐구."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그것을 읽은 니콜라스는 끼어 들지 못하고 쭈뼛거리며 눈치만 살폈다. 말문 이 막혀 있던 예안은 헛기침을 하며 반박했다. "지금의 네가 진짜 모습일 거라곤 생각 안 해. 조금 더 무뚝뚝했던 예전의 네가 그래도 더 좋았어." "호오, 이거 영광인데. 예전의 날 좋아했다니." "친구로서 좋았다는 소리니까 착각은 말아라." "하핫. 나 미국 떠나는 날까지 안 보이던 주제에 그런 말은 잘도 하 는구나." 세현의 농담조에 예안은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심한 말을 해놓고 또 기습 키스까지 당한 마당에 어떻게 배웅을 나갈 수 있었단 말인가. "근데 두 사람은 항상 붙어 다니는 거야?" 니콜라스는 세현의 눈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검은 광택이 가득한 그 눈동자는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기억을 떠올리려 할 때 마다 뿌연 안개가 뇌리를 덮어와 모든 흔적을 지웠다. "왜요? 질투하는 거예요? 내가 누나랑 너무 친하니까?" "그렇다면 어쩔 거니?" "마음껏 질투해보세요. 아무렴 누나도 생각이 있다면 노땅보다는 영 계를 더 좋아할 테니까요. 사람들은 알카드 모델보다는 에너자이저 를 더 선호하기 마련이라구요." 예안은 하마터면 뒤로 까무러칠 뻔했다. 니콜라스가 언제 이렇게 적 극적인 농담을 한 적이 있단 말인가.(비록 썰렁하긴 했지만) 그만큼 그는 세현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단 말인가. 조금 질투가 났다. 자기만 졸졸 따라다니던 녀석이 자기 아닌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인다는 게. 시샘에 사로잡힌 그녀가 세현 을 투박하려 했을 때였다. "참 밝게 컸구나." "네?" 알 수 없는 말에 니콜라스는 어리둥절했다.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던 그는 세현의 눈동자에서 깊은 동질감을 발견했다. 호기심을 느낀 그 는 좀더 자세히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것의 형체를 확인했 다 여긴 순간 가슴에 무언가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 시간이 멈췄다. 눈앞의 풍경이 모조리 정지했다. 하얀 캠버스 안으 로 전신이 빨려 들어간 순간 레스토랑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예안을 비롯한 사람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얀 백색이 넓게 펼쳐진 벌판 위에 앉아 있던 그는 벌떡 일어났다. '누나! 누나!' 흐릿한 시야가 가득 펼쳐져 있었다. 고함을 질러도 내 목소리가 아 닌 듯 어색하게 들렸다. 뜻밖의 상황에 어찌할 줄 모르던 그는 무작 정 뛰었다. 아니, 뛰려고 했다. 「주피엘.」 흐릿한 소녀의 목소리가 뿌연 바람에 실려왔다. 심장의 호흡이 정지 하는 충격에 그는 그만 우뚝 멈췄다. 「주피엘. 바다에 가자. 너에게 바다를 보여주고 싶어.」 마음의 장벽을 산산이 허물어뜨리는 목소리. 니콜라스는 그만 그 자 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넋이 나간 채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귀 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소년의 목소리였다. 「레오나. 바다는 가지 마. 바다는 위험해.」 「왜에? 바다가 얼마나 멋진 곳인데. 주피엘은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내 느낌이 말해주고 있어. 바다는 위험하다고. 가지 말자. 가면 안 돼.」 「쳇. 주피엘은 겁쟁이야. 물이 무서워서 그러는 거지? 하긴 주피엘 은 불을 다스리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럼 다음에는 꼭 같이 가는 거다? 알았지?」 온화한 소년과 활발한 소녀의 목소리가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점점 멀어져갔다. 눈에 초점에 돌아옴에 따라 현실의 풍경이 다시 비춰졌 다. 검은 광택으로 빛나는 세현의 눈동자가 망막에 맺힘과 동시에 그의 정신은 현실 세계로 완전히 회귀했다. "왜 그래?" 예안이 걱정스런 물음이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기억 -일부분일지라도- 이 깨어났다는 감격이 너무나도 컸던 덕분이었다. "아아…." 니콜라스는 멍한 눈으로 세현에게 손을 뻗었다. 시야가 흐려지며 그 의 실루엣이 헝클어졌다. 환상 속에 들렸던 소년과 소녀의 목소리. 자신이 그 둘 중 한 명인가 아니면 그 둘을 지켜보던 또 다른 사람 인가 하는 의문과 안타까움이 고개를 쳐든 순간 그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흐흑, 흐윽…." 니콜라스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세현은 팔짱을 낀 채 무심한 눈 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속눈썹이 순간 바르르 떨렸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89 회] 날 짜 2004-05-23 조회 / 추천 2507 / 28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붉은 발현 갑작스런 일에 당황한 예안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야야, 왜 그래? 왜 그런 거야? 응?" 니콜라스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마음의 자물쇠에 녹이 슬기라도 한 듯 그렇게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예안은 안절부절못했 다. "괜찮아 너?" 이윽고 니콜라스는 힘들게 눈을 들어 세현의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아름다움을 무심한 미소로 감춘 눈동 자. 그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다, 당신… 당신은 누구죠?" "제임스 해론." 짤막한 대답이었다. 니콜라스는 멍한 눈빛으로 그의 대답을 되뇌었 다. "당신은 본질을 꿰뚫어보는 사람이라고 들었어요. 맞나요? 지금 나 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죠?" "그건 너무 거창한 칭찬이지. 하여튼 최면이 통했다니 다행이야. 그 렇게 실컷 울고 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지지." "최면?" "허락을 구하지 않고 최면을 걸어서 미안해. 하지만 그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네 마음이 그대로 부서져 버릴 것 같아서 그랬어. 넌 마음 속에 아주 무거운 돌을 하나 올려놓고 있는 것 같았거든." 최면이었던 말인가. 조금 전 그의 눈동자에서 보았던 건 단순한 최 면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다 보기에는 너무 대단하고 거룩한 따스함이었다. 어떻 게, 어떻게 그런 자상함을 최면 따위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거짓말하지 말아요. 최면이라니, 최면이라니? 말도 안 돼요! 사실 대로 말해요! 당신은 누구죠! 나에 대해서 뭘 알고 있어요! 말해봐 요! 어서!" 니콜라스는 거칠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세현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서예안. 잠깐 내가 머무는 곳에 가지 않을래? 너에게 보여주고 싶 은 게 있어." "이익…." 니콜라스가 이를 가는 것도 무시한 채 세현은 예안에게 대답을 채근 했다. 망설이던 예안은 잠자코 끄덕였다. "나도 네가 어디서 사는지 한 번 보고 싶다. 일어나자 성주야." "잠깐. 성주는 안 돼." 예안은 의아한 눈으로 세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니콜라스의 눈빛을 여전히 외면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절대 안 돼. 미안하지만 성주라고 해도 예외는 없어." 예안은 망설였다. 니콜라스를 떼어놓고 혼자 돌아다니다가 시트날타 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괜찮아 누나. 이 사람이랑 함께 있으면 안전할 거야." 니콜라스는 아주 후련한 얼굴로 일어났다. "그래도 정 위험하면 이걸 부숴. 그럼 어디든 간에 내가 일 분 안으 로 달려갈 테니까. 물론 서울 밖을 벗어나면 안 돼." 니콜라스는 그렇게 속삭이며 달걀처럼 생긴 물건을 예안에게 건네주 었다. 하얗고 둥글게 생긴 그것은 달걀의 1/2 정도 크기였다. 세현 이 못 보게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던 예안은 할 수 없다 는 듯 끄덕였다. "그럼 성주 넌 먼저 집에 들어가 있어. 난 세현이랑 잠깐 있다가 나 중에 집에 들어갈게." "응." 니콜라스는 젖은 시선으로 세현을 바라보았다. 가슴 벅찬 감동이 그 의 눈동자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말해줄 수 없어요?" "제임스 해론." 똑같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더 이상 실망하지 않았다. 조금 전 그에게 거칠게 굴었던 게 미안하기까지 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는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준 사람이 아닌가. 니콜라스는 손을 들어 가슴을 매만졌다. 심장이 좀더 따스하게 뛰고 있었다. 마음을 걸어 잠그고 있던 빗장이 풀려나간 것만 같았다. 예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살의(殺意) 이외의 모든 감정들을 이제 전 부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실로 벅찬 감격이었다. "고마워요 제임스. 덕분에 마음이 아주 편해졌어요."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세현은 미소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니콜라스는 기쁜 얼굴로 악수를 받았다. 자신이 그렇게 열광하던 인물과 악수를 나누고 또 그가 신 경 써줬다는 사실이 무척 감격스러웠다. 니콜라스가 먼저 돌아간 뒤 그들은 차에 올랐다. 세현의 차는 조금 어울리지 않게 중후한 멋을 자랑하는 고급 중형차였다. "와아, 네가 이런 차를 타고 다니는구나. 대단하다." "난 널 이런 후진 차에 태우는 게 오히려 미안한데? 좀 아까워. 위 원회한테 돈을 안 퍼줬으면 이것보다 더 좋은 차로 샀을 텐데." "위원회?" 또다시 튀어나온 생소한 뉘앙스에 예안은 머뭇머뭇했다. 뭔가 물어 보고 싶었으나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세현은 그녀가 궁금해하는 눈치인 걸 알면서도 그저 웃기만 했을 뿐 더 설명하지는 않았다. "여기가 내 집이야." 차가 멈춘 곳은 한 고급 맨션가였다. 차에서 내린 예안은 깨끗한 건 물을 올려다보며 조금 감탄했다. 고작 17살 때 독립한 세현이 이런 좋은 집에서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이 내심 부러웠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세현은 예안을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3 층 맨 끝이 그의 집이었다. 집안에 들어선 예안은 상상했던 이미지 와는 조금 다른 풍경에 신선함을 느꼈다. 명색이 학자이니 온갖 서 적들이 득실거릴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대형 컴퓨터 등 전자 기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흡사 사이언스 매니아의 집에라도 온 기분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집이 너무 너저분하니?" 세현은 커피를 끓여 내오며 그렇게 물었다. 낯설다는 눈으로 거실을 둘러보던 예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책 같은 게 잔뜩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 웬 쇠붙이들이 이 렇게 많냐?" "잊었어? 나 작년에 MIT 조교수로 유학갔었잖아. 지금은 어엿한 프 로페서라고." 예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명한 철학가이자 천재 공학 교수라. 녀 석의 이미지와 아주 잘 어울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설었다. 남들은 하나도 손에 넣기 힘든 그것을 두 개나, 그것도 어린 나이에 손에 쥔 그가 몹시 대단해 보였다. 그녀는 그가 건넨 커피잔을 들지 않은 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네가 그 나이에 벌써 교수라니, 솔직히 안 믿어진다. 너 '교수는 밤에도 잠들지 않는다'라는 일본 만화 알아? 거기 나오는 리차드 R 심슨 교수도 18살이었어." "하지만 연인은 일본인 여대생이었지." "오, 아네? 근데 난 네 연인이 아니잖아."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거지 뭐." 세현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예안은 절로 쓴웃음이 나왔 다. '휴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만약 그가 적극적으로 구애를 해온다면 어디까지 뿌리칠 수 있을지 예안은 자신이 없었다. 유일하게 마음이 통했던 절친한 친구의 마음 을 과연 다른 남자에게 그랬듯 냉철하게 거절할 수 있을 것인가. 게 다가 10대의 나이에 철학계를 휘어잡고, 그 대단한 MIT의 교수가 되 었다고 하지 않은가. 만약 자신이 결혼을 한다면 녀석은 전혀 꿇리 지 않는다. 그 순간 레이온이 떠올랐다. 예안은 주먹을 바짝 쥐었다. 지금쯤 비 밀 연구실에서 열심히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만들고 있을 그가 이 사 실을 안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아 복잡하다 복잡해.' 예안은 곧 모든 생각을 머리 속에서 지웠다. 어찌 되었든 자신이 누 군가의 연인이 된다는 건 유젤을 배신하는 것. 먼 훗날 죽어 유젤을 만났을 때 당당하기 위해서, 그리고 아기에게 떳떳하기 위해서 그녀 는 스스로를 지킬 의무가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으면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내주는 행위. 그것은 바로 아내와 딸을 사창가에 팔아먹는 쓰레기보다 비도덕한 짓이 아닌가. "아, 근데 너 미국에서 사진 찍은 거 있으면 좀 보여줄래? 너가 어 떻게 살았는지 좀 궁금하다 야." 예안은 어색한 미소로 화제를 돌렸다. 내심 대답을 기대했던 세현은 약간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사진 같은 건 없어. 미국에서 별로 좋은 기억이 없거든. 한가하게 사진 같은 거나 찍을 여유가 없었어." "왜? 미국에서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글쎄. 뭐, 지옥이었다고나 할까?" 세현은 농담조로 말했다. 그러나 예안은 그의 음성에 얽힌 무거운 가닥을 잡아내고야 말았다.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예안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신의 궁금증을 채우려다 그에 게 상처 주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세현은 대답 없이 TV를 켰다. 뉴스 채널로 돌리자 일본과 한국의 팽 팽한 대치 상태가 보도되고 있었다. 잠시 동안 묵묵히 그것을 바라 보던 그는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여전하네. 그래도 조금쯤은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이 있을 줄 알았는 데, 한국인들은 역시 일본을 한 번 혼내줘야 속이 풀리려나?" "무슨 말이야?" "일반인은 잘 모르지만 지금 이 상황은 단순히 한국을 도발하려 드 는 일본의 삽질이 아니야. 일본의 뒤에는 중국과 미국, 그리고 그 외의 세력들이 버티고 서 있어." "한국에는 맥이 있잖아. 미일중이 떼거지로 덤빈다 해도 어차피 상 대는 되지 않아." "이번 사태는 맥을 부수는 게 주된 목적이 아니야." 세현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예안을 돌아보았다.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눈길에 예안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마치 그는 자 신이 맥의 파일럿이라는 걸 눈치채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바보 같이. 세현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컴퓨터를 켰다. "청와대에 탄원서를 넣기도 하고 대형 사이트에 게시물을 등록하는 등 별의별 짓을 다 해봤지만 아무도 내 말에 귀기울이지 않아. 한국 은 이번 사태를 조용히 돈으로 해결하고 넘어가야만 해. 전쟁이 벌 어지고 한국이 이긴다 해서 모든 게 바람직하게 끝나는 건 아니라 고. 한국의 승리 자체가 적의 목적일 수도 있으니까." 예안은 불현듯 의심이 솟구쳤다. 세현은 마치 적들의 목적을 전부 다 아는 듯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건 그가 MIT의 교수고, 유명 철 학가 제임스 해론이라는 변명으로 합리화시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너 꼭 마치 일본의 속셈을 아주 잘 아는 듯이 말한다?" "일본?" 세현은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더욱 수상쩍었다. "이거 받아." 세현은 흰 봉투를 예안의 무릎 앞에 내놓았다. 그녀는 의구심에 찬 눈으로 그것을 집어들었다. 안에는 유럽 지도가 곳곳에 빨간 원으로 표시된 채 들어 있었다. 그리고 한 장의 디스켓도 있었다. "이게 뭐야?" "네가 제일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야. 원래는 비행기편도 마련 해줄까 했는데, 그 정도는 네 힘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관뒀어. 앞으로 한 1, 2년 간 그곳에서 지내." 예안은 패닉에 빠졌다. 세현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 해되지 않았다. 보여줄 게 있어서 따라왔더니 느닷없이 지도 한 장 던져주고 이곳에 가서 몸 사리고 있으라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 단 말인가? "너 내가 무슨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채무자나 범죄자라도 되는 줄 아니? 내가 왜 여기에서 숨어살아야 하는데?" "쫓기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 아니잖아." 순간 오싹한 한기가 찾아왔다. 예안은 지도를 든 채 어이없는 눈으 로 세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결코 장난을 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난 예안은 발끈해서 벌떡 일어났다. "야! 너 지금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쫓기다니? 누 구한테 쫓긴다는 건데! 말도 안 되는 소리 작작 좀 해! 너 미국에서 이런 식으로 사람 놀리는 법만 배워 갖고 왔어?" 세현은 무언가 변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이상한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예안은 씨근덕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자칫 그와의 관계가 뒤틀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녀와 화를 계속 부추기고 있었다. "서예안. 일단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내 말대로…."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동시에 세현의 얼굴이 핼쑥하게 굳었다. "이, 이런 젠장!" 세현은 어쩔 줄 몰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딘가 이상한 그 모 습에 예안은 분노도 잊은 채 어리둥절해했다. "뭐야? 왜 그래? 누가 왔길래 그렇게 놀라?" "빠, 빨리 숨어! 그리고 절대 나오지 마! 나오면 안 돼! 알았어?" 세현은 절박했다. 지금 초인종을 누른 사람이 죽음의 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혼란에 빠진 예안은 다소 두려움이 실린 시선으로 현관 쪽 을 흘끗 살폈다. "누가 왔는데 그래?" "하여튼 빨리 저 방으로 가서 숨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나오 면 안 돼! 알았어?" 세현은 예안을 억지로 골방에 밀어 넣었다. 어어 하는 사이에 안에 갇힌 예안은 세현이 현관으로 뛰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도대체 누가 왔기에 저렇게 당황하는지 몹시 답답해진 그녀는 살짝 문을 밀다가 방문객의 목소리를 듣고 그대로 굳었다. "잘 지냈나 제임스?" 꿈에서라도 잊을 수 없는 목소리. 방문객은 바로 마리오였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90 회] 날 짜 2004-05-23 조회 / 추천 2573 / 28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붉은 발현 어젯밤 이병원 교수로부터 정식 답변을 받은 춘식은 아침부터 부산 히 외출 준비를 했다. 이 교수의 목소리가 다소 좋지 않았던 게 마 음에 걸렸지만 요새 그의 부인이 아프다고 하니 그것 때문이라 생각 하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어디 가십니까 아저씨?" "어. 지금 이 교수를 만나러 가는 길이야. 그리고 이제 곧 프로젝트 에 착수해야 할 테니 많이 바빠질 거야." "드디어 양자 컴퓨터를 제조하는 건가요?" 한수가 흥분에 찬 얼굴로 물었다. "이 교수와는 정식으로 이야기를 다 끝냈어. 양자 컴으로 얻은 이익 을 사용하는 데 제한을 걸어둘 각서도 받아냈으니 만사 오케이야. 이제 공장만 짓고 양자 컴퓨터를 우후죽순으로 펑펑 뽑아내면 그만 이지." 한수는 양자 컴퓨터로 크게 타격을 입을 미국을 상상하고 기쁨에 젖 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춘식을 배웅하고 난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 와 TV를 켰다. 요즘 이슈로 떠오른 한국과 일본의 대치 상황이 긴박 한 기자의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왔다. 조만간 한국이 다른 나라들을 모두 제치고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떠오를 거라 생각하니 너무 기분 이 좋아 콧노래까지 나왔다. 그 때 핸드폰이 울렸다. 한수는 당연히 춘식이 전화했을 거라 생각 하고 받았다가 상대를 확인하고 그대로 굳었다. 「오랜만입니다 한수씨.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노, 노스나 씨!" 한수는 반가움과 놀라움으로 범벅이 된 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아니 당신이야말로 잘 지냈습니까? CIA 녀석들이 고이 놓아주 던가요? 전 당신이 꼼짝없이 죽은 줄 알았습니다." 「전 건강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제가 부탁드린 일은 잘 되고 있나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만간 머지 않아 한국에는 양자 컴퓨터 생산 공장이 들어설 거고, 반도체 찍어내듯 양자 컴퓨터가 대량으로 생산 될 겁니다. 이제 곧 전세계 네트워크는 한국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될 겁니다." 「그거 참 다행이군요.」 "제가 일을 부탁드린 사장님은 정말 믿을만한 분이셨습니다. 양자 컴으로 얻은 이익이 그 분에게 어느 정도 돌아가는 건 용납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사실 이 일은 그 분이 성사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 라서 말입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제 당신의 역할은 끝났으니까요.」 갑자기 냉담해진 목소리에 한수는 어리둥절했다. "제, 제 역할이 이미 오래 전에 끝난 건 다 아는데 왜 새삼스럽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확인차 드렸을 뿐입니다. 어쨌든 수고하셨습니다. 당신은 정말 훌 륭한 <제크>입니다.」 "제크요?" 「모르시나요? 찰베르드 미카엘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하 급 병사 이름입니다. 자신이 전달하는 국왕의 편지가 그의 아버지의 처형 명령서라는 것도 모른 채 애국심에 불타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한 비운의 사나이죠. 아, 물론 그는 평민과 귀족 아버지 사이에 서 태어난 사생아였습니다.」 전화가 끊어졌다. 눈을 깜박거리며 앉아 있던 한수는 벼락 같이 뇌 리에 꽂히는 충격에 튕겨지듯 일어났다. 얼굴이 흙빛이 된 그는 옷 을 챙겨 입을 새도 없이 쏜살같이 집을 뛰쳐나왔다. 지나가는 택시 를 잡아탄 그는 제발 춘식에게 아무 일이 없기를 초조하게 기원하며 택시 기사를 재촉했다. 춘식은 기분이 너무 좋았다. 너무 설레서 어젯밤 잠을 제대로 이루 지 못했지만 전혀 졸리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차가 조금만 막혀도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정지해 있는 도로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도 콧노래까지 나왔다. 이 교수의 학교로 찾아가자 몹시 초조해하던 이 교수가 황급히 춘식 을 맞이했다. "어서 오시죠. 그나저나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노릇입니까?" 기분 좋은 얼굴로 들어섰던 춘식은 몹시 당황했다. 이 교수의 태도 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무, 무슨 말입니까?" "양자 컴 말입니다, 양자 컴!" "네?" 춘식은 순간 강한 불안을 느꼈다. 뭔가 수습할 수 없는 커다란 일이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아주 결정적인 오류가 있단 말입니다!" "오, 오류라니요?" "이 설계대로 양자 컴을 만든다면 고전 시스템과의 결합에서 이뤄지 는 데이터 전송에 미세한 결실 현상이 발생한단 말입니다! 그 오차 는 극히 미미하지만 1GB 이상의 데이터가 교환될 시에는 기하급수적 으로 그 비율이 늘어나요! 데이터 자체가 랜덤으로 뒤죽박죽 되기 때문에 그 어떤 수정 프로그램으로 보완한다 해도 소용없어요! 뿐만 아니라 양자 컴 그 자체에서도 미미한 데이터 미스가 발생한다고요! 이건 근본적인 설계 자체가 잘못된 양자 컴이란 말입니다!" 이 교수는 얼굴이 시뻘개진 채 그렇게 씩씩거렸다. 춘식은 패닉에 빠진 채 그대로 멍하니 서 있었다. 고막이 떨어지기라도 했는지 아 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꼼짝 말고 손들어!"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네 명의 미국인들이 들어섰다. 검은 양복을 입은 그들은 살벌한 얼굴로 춘식에게 일제히 총을 겨누었다. "김춘식. 당신을 스파이 혐의로 체포하겠다." "무, 무슨 소리야!" "당신들은 누구요?" "우리는 이 교수 당신에게는 볼 일이 없소. 김춘식, 얌전히 따라 와 라. 비록 우리한테 체포권은 없지만 당신이 저지른 범죄는 지극히 중대한 것이므로 예외 사항에 속한다." 유창한 한국어로 말하며 다가온 미국인은 수갑을 꺼냈다. 춘식은 반 사적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의 손은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 는 양 디스크를 꽉 쥐고 있었다. 경악해 어쩔 줄 몰라하던 이 교수 가 정신을 차리고 끼어 들었다. "이건 무효요! 소파 협정이나 우리나라 어느 법에도 미국인이 한국 영토에서 한국인을 체포할 수 있다는 조항은 없소!" "이건 예외요, 프로페서 리. 저자는 유전과도 맞바꿀 수 없는 엄청 난 물건을 함부로 빼돌렸소. 이 자리에서 즉결 처형한다 해도 한국 정부는 우리 눈치를 봐야 할 입장이란 말이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그 설계도에는 치명적 결함이 있단 말이 오! 근본부터 잘못된 거라 수정한다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란 말이 오! 아예 전부 다 폐기해야 할 설계도란 말이오!" "그건 한국인 과학자 중 당신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오, 프로페서. 때문에 당신이 사라지면 한국은 미국에 쩔쩔 기게 되어 있소. 결함 이 있는 디스크가 들통나면 안 되니까 당연히 함께 없애야겠지." 이 교수는 멍청한 얼굴로 미국인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유일한 증인인 당신은 권총으로 자살하고 디스크는 파괴될 거요. 한국 정부는 자국민이 벌인 스파이 짓에 가담한 데다가 디스크까지 잃어버렸으니 고개를 못 드는 건 물론에다가 엄청난 손해배상까지 해야 할 거요. 정부 고위 인사와 당신이 양자 컴 생산 공장과 설계 도의 수입 경로에 대해 대화한 건 이미 다 녹음해 두었소." 빠져나갈 길이 없이 완벽히 걸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던 이 교 수는 춘식에게 버럭 외쳤다. "그 디스크를 갖고 도망가시오! 그게 없어지면 한국은 엄청난 손해 배상을 해야 하오! 유전이나 맥 둘 중의 하나는 내놔야 한단 말이… 큭!!" 이 교수는 미처 말을 잇지 못하고 털썩 쓰러졌다. 그의 배를 쳐서 기절시켰던 미국인은 다시 춘식에게 총을 겨누었다. 그의 뒤에 시립 해 있던 세 미국인들이 기절한 이 교수를 질질 끌어 한쪽에 놓았다. "미스터 김. 당신은 전문가가 아니오. 말만 잘하면 단순한 하수인이 나 중개인의 죄만 짊어지고 풀려날 수 있소. 이 교수와 당신이 둘 다 자살하면 괜한 의심을 살 수 있으니 가능하면 당신까지 죽이고 싶지 않소. 얌전히 그 디스크를 이리 내놓으시오." 춘식은 패닉에 빠져 있었다. 이 모든 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미국에서 가족들을 전부 잃었다는 한수의 눈물 고 백도 전부 다 거짓이었단 말인가? 애초에 미국은 손해배상으로 맥을 갈취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일을 꾸몄단 말인가? 양자 컴은 개발되 지 않았다는 말인가? 순간 춘식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보상을 해준다는데도 유족들을 위 로하기 위해 맥을 처형하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오는 일본. 그 들이 왜 배째라 정신으로 나오는지 그는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바로 미국의 이러한 조작이 뒤에 있었기에 일본이 그렇게 거세게 나왔던 것이다. 지금 맥이 미국에 넘어가게 되면 일본과 대치중인 한국은 큰 힘을 쓰지 못하고 그대로 깨질 것이다. 게다가 일본에는 합법적 인 선전포고 구실이 있었다. 그 모든 걸 막기 위해서는 디스크를 증 거로 삼아 미국의 음모를 밝혀내야만 했다. "앗!" 춘식은 주저하지 않고 창 밖으로 몸을 날렸다. 3층이지만 밑은 화 단. 잘만하면 살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칼날 같은 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것도 잠시, 그는 이윽고 다리에 엄청난 통증을 느꼈다. "크윽!!" 그는 후들거리며 일어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다리가 부러진 모양 이었다. 재수 없게도 일요일인 데다가 일본과 전쟁하라고 국회에 시 위를 간 탓에 학생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며, 명색이 서울대라는 곳이 일요일이라고 이렇게 사람이 없어도 되는 거야?" 끙끙대며 일어나려던 춘식은 문득 누군가 뛰어오는 걸 보았다. 그가 한수임을 확인한 순간 춘식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건물 안으로 뛰어들던 한수는 춘식을 발견하고 놀라 이쪽으로 달려왔다. "아, 아저씨? 괘, 괜찮습니까?" "다리가 부러졌어. 크윽… 근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냐?" "제, 제 불찰입니다. 속았습니다. 노스나 리는 처음부터 돈 때문에 미국에 넘어간 매국노였다구요!" "그랬냐? 너도 속은 게냐? 크윽…."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안 돼. 시간이 없어. 곧 있으면 나를 쫓는 양키 놈들이 나올 거야. 빨리 이 디스크를 가지고 이 주소로 가라. 그래서 서예안이라는 여 자애한테 이걸 건네주고 자초지종을 설명 해. 그 아이가 내 상관이 다." "네, 알았습니다." 한수는 춘식이 건넨 디스크와 주소지를 받아들었다. 춘식은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한 번 신신당부했다. "명심해라. 설계도가 아무 쓸모 없다고 해도 그게 부서져 버리면 한 국은 그걸 증명할 방법이 없어. 잘못하면 맥을 내놓아야 할 지도 모 른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걸 꼭 지켜서 미국의 음모를 밝히는 증 거로 사용해야 해. 알았느냐?" "알겠습니다." 그때 막 건물 안에서 나온 미국인들이 이쪽을 발견했다. "저기다! 잡아라!" 춘식은 한수를 힘껏 떠밀었다. "가, 빨리 가!" 걱정스런 시선으로 춘식을 내려다보던 한수는 재빨리 뛰었다. 그 뒤 로 미국인들의 추격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91 회] 날 짜 2004-05-23 조회 / 추천 2951 / 61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붉은 발현 예안은 멍청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제임스, 도대체 지금 앤슨과 같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지?" "당신이 알 필요 없습니다, 마리오 경." "말해라. 난 들을 자격이 있어." "앤슨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 나 또한 그의 의도는 전혀 모릅니다. 당신이나 나나 결국 그의 장기말처럼 취급되고 있다는 걸 아직도 모 릅니까?" 골방의 문을 통해 들려오는 대화. 섬뜩한 공포를 담은 채 상대방을 집요하게 추궁하는 마리오의 음성과 반박하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세 현의 목소리. 누가 우열인지는 길게 들어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예안은 멍청한 눈으로 벽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세현이 시트날타 사람이란 충격적인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녀석은 미국으로 유학을 간 게 아니라 시트날타 의 부름을 받고 일상 생활을 그만두었단 말인가. 녀석이 늘 말해주 었던 집안의 불화. 의붓아들과 의붓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아버지와 자신을 미워하는 새형과 새어머니. 그것들은 전부 다 연출된 거짓이 었단 말인가. "또 오겠다." "살펴 가시지요, 마리오 경." 현관문이 닫히고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이쪽으로 오는 발걸 음 소리가 뒤따랐다. 발소리의 불안정함으로 보아 몹시 망설이고 있 는 것 같았다. 예안은 멍청한 눈으로 천천히 열리는 문을 주시했다. "갔어." 그걸로 끝이었다. 세현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더 이상 예안 에게 뭐라 할 말이 없음이라. 더 확인해볼 필요도 없었다. 이것으로 완전히 확실해졌다. 그는 예안의 정체를 눈치채고 있다는 것이. 긴 침묵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벽에 기대고 멍하니 앉아 있던 예안 은 입을 열었다. "너… 시트날타였…어?" 그녀의 목소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자신을 노리는 적이 친한 친구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음이라. "숨겨서 미안해. 하지만 말할 기회가 없었어." 순간 예안의 눈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웃기지 마! 뭐가 말할 기회가 없었다는 거야! 전학 가기 전만 해도 충분히 나한테 말할 기회가 있었잖아! 점심 시간이라든지! 학교 끝 나고 나서라든지! 앤드류 공연장에 갔었던 때라든지! 얼마든지 말할 기회가 있었잖아! 왜,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가 사람들 틈에 끼 여 사는데 재미 붙이는 게 참 안쓰러워 보였니? 그래서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뚝 잡아떼고, 또 잡아가지도 않은 거야?" 세현은 다급히 변명했다. "그게 아니야. 난 네가 엔젤이라는 사실을 이번에 한국에 와서 알았 어. 그전까지는 까맣게 몰랐어."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그 전까지는 몰랐다는 게 말이나 돼!" "정말이야. 네가 니콜라스와 함께 있는 걸 보고 엔젤이라는 사실을 알았단 말이야." 예안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전신의 세포가 간헐적으로 뒤틀리며 괴 로워하고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활시위는 조금도 느슨해 질 기미가 없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자신을 조금 진정시켰다. "좋아. 한 번 말해 봐. 어디 변명을 해보란 말이야." 예안의 목소리는 여전히 표독스러웠다. 세현이 한 걸음만 더 떼었다 가는 그대로 한 대 칠 기세였다. "난 원래 니콜라스와 엔젤을 잡아들이는 사람이 아냐. 그래서 사진 을 본 적도 없고 인상착의도 몰랐어. 하지만 저번에 네가 니콜라스 를 내 팬이라며 데리고 나왔을 때 한 눈에 그 애가 니콜라스임을 알 아볼 수 있었어." 그래서 그때 그런 이상한 말을 하고, 또 이상한 태도를 보였던 것인 가. 마음을 정리한 후에는 다시 예전처럼 돌아온 듯한 모습을 연출 할 수 있었던 것인가. 예안은 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강한 배신 감을 느꼈다. 그 어떤 커다란 저울이라도 이 배신감의 무게는 잴 수 없으리라. "위험해. 지금 한국은 굉장히 위험해. 앤슨은 지금 널 찾는답시고 눈에 불을 켜고 온갖 음모를 꾸미고 있어. 일본이 저렇게 무모하게 나오는 건 전부 다 앤슨이 뒤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야. 너나 한국은 앤슨의 계략에 넘어가선 안 돼." "앤슨?" "우리 민족의 고위직 중 한 명이야. 군수통제권을 한 손에 쥐고 있 는 막강한 젊은 권력자라구." "우리 민족? 우리 민족이라고?"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세현의 입으로 우리 민족 운운하는 걸 들을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래? 그럼 옛 친구인 정을 생각해서 그 사람이 무슨 짓을 꾸미는 지 말해줄 수 있어? 아니면 이대로 날 잡아갈 거야?" "말해줄 수 없어. 나도 그 사람이 궁극적으로 뭘 꾸미는지 알지 못 해. 머리 속에 능구렁이가 들어찬 사람이란 말야." "말해주기 싫은 거겠지." 예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현이 안타까운 얼굴로 한 걸음 다가오자 그녀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다가오지 마! 거기 서! 안 그럼 죽여버릴 거야!" 새낀 밴 살쾡이 같은 사나운 반응에 세현은 움찔했다. "나더러 유럽으로 가라느니 하는 것도 사실은 덫 안으로 날 밀어 넣 기 위해서지? 네 혼자 힘으로 손쉽게 날 잡아서 공을 세울 속셈이 지? 그래서 아까 마리오가 왔을 때 그렇게 당황했던 거지? 안 속아, 누가 너한테 속아넘어갈 줄 알아?" 세현은 기가 막혔다. 화가 난 그는 버럭 외쳤다. "널 잡을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잡았어! 여자인 네가 남자인 내 힘을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웃기지 마. 네가 날 잡는다고?" 예안은 차갑게 웃었다. 실성한 사람처럼 그렇게 섬뜩하게 웃어댔다. 소름끼치게 아름다운 얼굴과 어울려 요사스런 미(美)까지 자아내는 미소였다. 세현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바짝 긴장했다. 미친 사람처럼 그렇게 웃어젖히던 예안은 갑자기 뚝 멈췄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섬뜩한 아름 다움이 가득한 그 모습에 세현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느껴지지 않아. 너에게선 힘이 느껴지지 않아. 그런 주제에 이 날 잡겠다고?" 그녀는 태연히 한 손을 들어올렸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푸른빛이 뻗 어 나오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의지로 사용해본 적 없는 고결한 힘. 그녀가 에덴인임을 증명하는 숭고한 빛.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더 이상 나약한 지구인 서예안이 아니라, 운명을 다스릴 자 격을 지닌 거룩한 존재였다. 유전, 전쟁, 세정, 그 모든 미련에 관 한 문제를 손톱의 때보다 하찮게 여길 수 있는 인간으로 탈바꿈해 있었던 것이다. "어디 한 번 받아보시지?" 그녀가 손을 뻗자 빛의 구체가 세현의 가슴에 날아들었다. 미처 피 할 새도 없이 얻어맞은 세현은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약해. 너무 약해. 그런 주제에 감히 날 잡겠다고?" 그녀는 다시금 미친 사람처럼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그녀가 손을 뻗 자 그물 같은 푸른빛이 쏟아져 나와 세현의 전신을 감쌌다. 금빛으 로 변한 에너지 그물은 이윽고 세현의 모든 것을 낱낱이 분석하기 시작했다. "호오? 이제 보니 너 다른 녀석들이랑 좀 다르구나? 힘을 포기하고 대신 다른 걸 얻었네? 어라? 그러고 보니 이 코드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그녀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손에 넣은 아이처럼 키득거렸다. 과연 폭 풍과도 같은 이 한순간이 지나간 뒤에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을 전부 기억할 수 있을 것인가. "사도? 사도? 너 설마 사도인이야? 이 코드는 아무리 봐도 사도인이 잖아? 좋아. 좀더 살펴봐야겠어." 그녀는 히죽히죽 웃으며 에너지 그물을 움직였다. 세현이 고통스러 워하는 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예안」으로서의 자아를 잃어버린 지금의 그녀는 구인류 따위는 먼지보다 하찮게 취급하는 거룩한 존 재였던 것이다. "어어? 너 마음 속에 뭘 숨기고 있지? 호오, 이거 단순한 기억 봉인 같은 게 아니잖아? 인과율의 빈틈을 잘도 모아서 이렇게 꼭꼭 숨겨 놓았네? 설마 동료들한테 이게 들키기라도 하면 죽는 거니?" "보, 보지 마…. 크윽!" 세현은 죽을힘을 짜내어 그렇게 말했다. 온몸이 부서질 듯한 통증에 말 한 마디 꺼내는 게 지독하게 힘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아랑 곳하지 않고 태연히 그의 모든 인과율을 이룬 실버넷의 흔적을 찾아 힘을 주입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세현은 신음을 지를 생각도 못한 채 괴로워했다. "영광으로 알아. 너 같은 하찮은 인간이 고귀한 노블 네트워크에 접 속할 수 있는 게 어디 보통 행운으로 되는 줄 알아?" 보통 인간이 강제로 노블 네트워크에 접속되는 고통은 죽음을 초월 한 것. 세현은 영혼이 몇 번이나 찢어졌다 붙여지는 괴로움에 시달 렸다. 새하얀 배경이 자신의 영혼을 감싸오는 걸 느낀 세현은 직감 적으로 아주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 무형 의사 소통로 속에 휘 말리게 되면 그 어떤 마음의 봉인이라도 손쉽게 깨져 나갈 것이다. 노블 네트워크란 바로 그런 무서운 것이었다. 그때였다. "예안아…?" 귀에 익은 목소리에 그녀의 몸이 문득 정지했다. 요사스런 미소가 입가에서 사라졌다. 황금빛으로 빛나던 머리카락이 다시 붉은 색으 로 돌아왔다.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리고 「유젤」에서 「예안」 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혜, 혜인아?" 눈앞에는 혜인이 당황한 채 서 있었다. 조금 전의 그 빛을 보고 놀 란 게 틀림없으리라. 예안이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세현은 간신 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강제 접속이 남긴 고통의 잔해가 전신에 남 아 있는 탓인지 가만히 있어도 욱신거렸다. "혹시나 네가 화가 나면 무슨 짓을 할 지 몰라서 내가 혜인이를 불 렀어. 넌 이상하게 혜인이라면 끔찍하게 여겼잖아." 예안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비로소 자신이 조금 전에 했던 모든 일 들이 기억났다. 예전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쓸 수 없었던 힘을 아무 렇지도 않게 사용하여 세현을 괴롭힌 자신. 마음의 상처를 감춘 부 분을 들키지 않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블 네트워크에 귀속되는 걸 거부한 세현. 만약 혜인이 조금만 더 늦게 나타났다면 세현은 강제 로 노블 네트워크에 접속한 후유증 때문에 백치가 되거나 죽어버리 고 말았을 것이다. 오싹했다. 조금 전의 「그녀」는 분명히 자신이되 자신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지령을 받는 것처럼 킬킬대며 세현의 영혼을 난도질하던 광경이 떠오르자 예안은 헛구역질을 해댔다. "우욱! 우욱!"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어째서 그 동안 힘을 쓰지 못했는지를. 그것은 바로 자신이 에덴의 가호를 받는 자임을 증명해주는 것. 따 라서 「유젤」이 아닌 「예안」으로 있는 동안에는 아무리 발버둥쳐 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호기심에 노블 네트워크에 접속하려 해봤 을 때 그럴 수 없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힘을 거부하고 지구인으 로서 살아가려고 발버둥을 치는 자에게 고귀한 에덴인의 의사 소통 로가 전혀 열리지 않는 게 당연했다. "괘, 괜찮아?" 혜인이 걱정스러워하며 다가왔다. 그녀의 팔이 몸에 닿은 순간 예안 은 강하게 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놀란 혜인이 미처 붙잡을 새도 없이 그녀는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어쩔 줄 몰라하던 혜인은 세 현을 돌아보았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세현아?" "후, 후후후, 후후후후…." 세현이 미친 듯 웃어대기 시작했다. 조금 전 펼쳐진 자신과 예안 사 이의 까마득한 거리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음이다. 그는 허탈한 마음 을 가득 안은 채 혜인의 부축을 느끼며 그대로 기절했다. 선작 네 자리 되면 연참한다 해놓고 그 약속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이렇게 지키게 됐습니다. 에덴 : 근데 아직 15연참밖에 안 했잖아? (떠민다) 넌 저리 꺼지고, (다시 정면 향해 생긋) 오늘 안으로 나머지 분량 올릴 수 있도록 노력 해보겠습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92 회] 날 짜 2004-05-25 조회 / 추천 3271 / 42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붉은 발현 예안은 무작정 뛰었다. 머리 속을 폭탄으로 날린 듯 아무 생각도 나 지 않았다. 그저 심장이 부서질 때까지 뛰어야 한다는 본능만이 헐 떡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이성의 제어를 벗어난 ST기관은 영원히 그녀에게 에너 지를 공급할 것이다. 숨을 헐떡이고 피로가 쌓이고 졸음이 오는 그 모든 현상. 그것은 다만 그녀의 무의식이 ST기관의 능력을 거부했기 에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했다. ST기관이 100% 작동한다면 산 소조차 필요로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게 바로 유젤의 육체였다. "하아, 하아…." 숨이 차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예안은 거친 숨소리를 토해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지구인이라는 부질없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금방 이라도 깨질 듯한 가쁜 호흡소리는 그렇게 공허한 부르짖음을 계속 해서 토해냈다. 정신이 든 예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맥에 탑승한 채였다. '여기가 어디지? 내가 왜 널 타고 있어?' '서해안에서 10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유젤 님이 저를 부르셔서 날아왔습니다.' 그랬었나. 예안은 크게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왜 그렇게 숨이 차는 겁니까? 당신은 무한의 에너지를 생산하는 ST 기관을 지닌 에덴인입니다. 숨이 찰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맥의 중후한 어조. 그러나 예안은 전혀 놀라 지 않았다. 오히려 씩 웃기까지 했다. '유도심문 같은 거 하지 마.' '유도심문이 아닙니다. 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 봉인된 기억이 깨졌는지 아닌지 확인해보려는 주제에 유도 심문이 아니라는 것인가. 예안은 피식 비웃으며 따졌다. '그래서? 확인하면 어쩔 건데? 그렇다면 어쩔 건데?' 듣고 싶었다. 과연 맥은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지. 그리고 역시 녀석 은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가야 할 곳으로.' 예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색 바랜 공허함을 깊이 감추고 있는 그 웃 음소리는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을 마음대로 제어하려 드는 맥 의 비정함에 대한 실망, 혹은 녀석의 뜻을 따르겠다는 승낙의 웃음, 아마 그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 후자는 아니다. '내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했지? 넌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내가 지구에서 살든 에덴 혹성에서 살든 그건 네가 관여할 게 아니란 말이야.' 웅웅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맥이 지속적으로 합리적인 대답을 찾고 있다는 표시였다. 이윽고 맥이 대답했다. '제가 처음 눈을 떴을 때 사고회로에 각인된 것은 바로 <돌아와라> 는 지령이었습니다.' '돌아와라?' '그렇습니다. 물론 저 혼자가 아닌 누군가를 반드시 데리고 돌아오 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 누군가가 누군지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 도 되겠지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리지널 유젤이 지구에 남긴 최후 의 미련. 바로 현재의 유젤, 즉 자신이라는 것을. '저는 처음 가동할 때부터 사고회로가 깨어 있었던 게 아니었습니 다. 만들어지고 얼마간은 아무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그저 파일럿의 조종에 맡겨 무언가를 부수고, 부수고, 또 부수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어떤 자극에 눈을 떴습니다. 단순한 수동 전투병기가 아닌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유기물로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맥의 어조는 장엄했다. 자신의 존재, 살아있는 의의, 그리고 사명 의식을 자랑스러워하는 말투였다. 그 누가 감히 지금의 맥에게 '로 봇 주제에'라고 비난할 수 있으랴. '아시겠습니까? 제가 지성체로 다시 태어나 처음으로 받은 임무이자 살아가는 의미는 바로 유젤 님을 에덴 혹성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완수할 것입니다.' 맥의 어투는 비장했다. 예안은 힘들게, 아주 힘들게 고개를 저었다. '난 갈 수 없어. 절대 가지 않을 거야.' '어째서요? 유젤 님은 이곳에서 영원히 머무실 수 없습니다. ST기관 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는 한 영원히 늙지 않고 그 아름다움을 지키 며 살아가는 당신을 인간들이 가만히 내버려둘 것 같습니까? 그들은 지극히 하찮고 미개한 종족입니다. 그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게 과 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비정함. 지금의 맥에게서 느껴지는 건 오로지 핏빛으로 적셔진 비정 함뿐이었다. 임무를 위해서라면 산을 허물고 도시를 태우고 사람을 몰살하고 지구마저 산산조각 낼 수 있을 비정함. 녀석이 어떻게 지 금까지 그 차가운 금속 심장을 숨겨왔는지 혀가 내둘러질 지경이었 다. '유젤 님의 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우주입니다. ST기관이 살아 있는 한 유젤 님의 육체는 외부 세계와는 전혀 독립된 세계입니다. 끊임없는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영양분을 얻고 찌꺼기를 배출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다른 것들과는 다르단 말입니다. 고독 조차 견디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그들과 위대한 당신이 정녕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안은 허망한 눈빛으로 허공만 응시했다. 한국의 함대들이 빠른 속 도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외부 공격에 노출된 맥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바보 같은 짓. 어차피 레이더는 맥을 탐지할 수 없고 열 원 추적 방식은 열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방출해 속여버리면 그만이 다. 누구도, 그 누구도 맥을 부술 수 없는데 어째서 한국조차도 그 것을 모른단 말인가. 예안은 화가 났다. '그렇습니다. 당신에게 아부하는 한국조차도 어리석기 그지없습니 다. 지구상에 저를 부술 수 있는 힘은 마더 외에 존재하지 않는데 그들이 뭐가 잘났다고 감히 저를 호위한단 말입니까?' 그녀의 울화를 읽은 맥이 그렇게 충동질했다. 그녀는 가슴을 움켜쥐 었다. 터질 듯한 심장이 가쁜 호흡을 토해내며 역겨운 붉은 빛 혈액 을 온몸에 보내고 있었다. '저주스러워. 저주스러워.' '저주요? 뭐가 저주스러운 거죠?' '저들과, 저들과 똑같은 붉은 피를 가졌다는 게 저주스러워. 흐윽!' 예안은 눈동자가 시뻘겋게 변한 채 증오를 담아 그렇게 외쳤다. 머 리 속을 끊임없이 흘러들었다 빠져나가는 영상. 이브의 눈물에 굴복 한 자신의 울음소리 위로 온기가 사라진 차가운 뺨이 겹쳐 지나갔 다. 순백의 스펙트럼을 형성하는 기억의 필름이 어지럽게 머리 속을 휘돌았다. 그녀는 거친 숨을 토해냈다. "죽지 마! 죽지 마! 엄마! 죽지 마!" 어린 소녀의 절규가 머리 속에 흘러 들어온 순간 예안은 그렇게 외 쳤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보고 몸부림치는 건지는 몰랐다. "아빠! 아빠!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흐윽!"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자격 없는 눈물이 그렇게 흘렀다. 들어줄 사람 없는 울음소리가 그렇게 공허하게 울렸다. 왜 우는지 무엇 때 문에 우는지 어째서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지 모른 채 그렇게 하염없 이 울기만 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 기억의 잠금을 풀고 흘러 나와 심장을 갈기갈기 뜯어버렸다. 그렇게 그녀는 몸과 마음이 엉망진창이 된 채 소멸의 끝을 향해 달 려갔다. 그곳만 지나면 이제 지구에 대한 모든 미련은 사라진다. 끊 임없이 다투는 원래의 기억과 현재의 자아는 서로 상대의 존재를 근 본부터 부정했다. 하지만 잠금이 막 깨어지려는 순간 그녀의 눈앞에 정호가 나타났다. '아빠?' 세정이 나타났다. '엄마?' 친척들이 나타났다. '삼촌? 숙모? 정우 형? 준우 형? 현우? 혜민이?' 혜인이 나타났다. '혜인아?' 그리고 세현이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에 원망이 나타났다. '차세현 너….' 그녀는 다시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가쁘게 울며 고통을 호소했 다. 가슴이 터질 듯 아프고 쓰라렸다. 봉인의 잠금을 깨부수려하는 자신의 발목을 어느새 친구들과 가족들이 붙잡고 있었다. 고귀한 힘 은 끊임없이 그녀를 충동질했다. 친지들은 필사적으로 그녀를 붙잡 았다. 망설임은 잠시. 그녀의 손에서 커다란 빛이 뿜어져 봉인을 자 물쇠 째로 산산조각 내버렸다. 어느 순간 빛이 사라졌다. 다툼이 사그라졌다. "…." 예안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 어느덧 눈물이 그쳤다. 「괜찮습니까?」 오랜만에 들어보는 맥의 음성이었다. 딱딱하고 건조하지만 어딘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계음. 그녀는 차가운 어조로 대답했다. "괜찮아. 걱정할 것 없어." 「어느 쪽이지요?」 유젤이냐 아니면 예안이냐를 묻는 것인가. 예안은 눈물을 닦으며 훗 하고 웃었다. "아쉽게 됐네. '유젤 디야스 마르셸'은 죽었다." 스파크가 요란하게 튀었다. 에러에 빠진 시스템이 어지럽게 빛났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맥의 사고회로가 패닉에 빠져 있는 것이다. 예안은 승자의 미소를 지은 채 거만하게 기다렸 다. 한참 후 맥이 다시 말했다. 「믿을 수 없군요. 오리지널의 기억이 소멸하다니. 이건 전혀 계산 밖입니다.」 "날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그게 너이든 유 젤 디야스 마르셸이든 간에 말이야." 충격을 받은 맥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예안을 에덴으로 데려가 야 한다는 본능과 그녀의 말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본능.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일부 정보들을 부풀리거나 숨 기거나 모른 체 하면서 그녀를 유도해왔다. 하지만 무언가를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오리지널 유젤의 기억이 싸움 끝에 소멸되어 버렸으 니 다 틀려 버린 것이다. "어라? 근데 여기는 어디지?" 그제야 예안은 여기가 황해가 아님을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황해에 떠 있었는데 지금은 다른 곳이었다. 「조금 전 폭주하실 때 뒤엉킨 조종신호를 저에게 보냈습니다. 랜덤 으로 이리저리 이동하다 멈춘 곳이 '운 사납게도' 여기군요. 여기는 일본의 영해입니다.」 예안은 조소했다. "운 사납게? 네가 일부러 유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어?" 맥은 지지 않았다. 「유젤 디야스 마르셸의 기억이 소멸되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정말 소멸된 게 맞다면 제 말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능구렁이 같은 놈. 하지만 예안은 어느 정도까지는 맥의 독단을 허 용해주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간에 녀석은 자신이 행복해지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뭔가를 해보기도 전에 수포로 돌아가 버렸으니 녀 석도 속이 탈 것이다. "어쨌든 유젤 디야스 마르셸은 죽었으니 이제 나에게 무언가를 숨기 는 일은 없겠지? 앞으로 다시 잘 부탁한다, 유니콘." 예안은 여유 있게 한쪽 눈까지 찡긋해 보였다. 순간 그녀의 오른손 이 바르르 떨리는 걸 맥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맥은 내색하지 않 고 모른 체 했다. 「알겠습니다.」 "자, 그럼 돌아가자." 예안은 내심 안도하며 방향을 돌렸다. 그때였다. 「후방 30km 지점에서 미사일 10기 발사.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 습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93 회] 날 짜 2004-06-05 조회 / 추천 2420 / 26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붉은 발현 누군지 확인할 것도 없었다. 바로 일본 함대였다. "훗. 뭘 믿고 감히 이 나한테 덤비는 거야?" 예안은 한껏 가소롭게 비웃으며 라이플을 위로 겨누어 느리게 몇 발 쏘았다. 여러 발의 화구(火球)가 느린 속도로 공중에 흩어지자 미사 일들은 그것들을 향해 방향을 바꾸었다. 바로 열원 추적 방식의 허 점이었다. 미사일이 갈팡질팡하자 당황한 일본 함대는 재차 미사일을 날리려고 했다. 그때 엄청난 굵기의 섬광이 그들을 덮쳤다. 20척의 군함들은 하나 남김 없이 전부 폭발을 일으키며 재가 되었다. 디스플레이를 지켜보던 예안은 키득키득 웃으며 이번에는 수평선 너머에 있을 일 본 영토를 조준했다. "어떻게 요리해줄까? 응? 가뜩이나 너희들 때문에 내가 무척 골치 아팠다고." 예안은 키득키득 조소하며 조준 시스템으로 목표를 설정했다. 그러 나 방아쇠를 달리려는 찰나 그녀는 스크린에서 눈을 떼었다. "유니콘. 왜 말리지 않지?" 「적을 동정할 까닭이 어디 있습니까?」 "설마 아직도 전쟁을 바라고 있는 거야?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내가 먼저 도발해서 벌어진 전쟁은 탐탁하지 않아?" 「무슨 대답을 원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안은 잠자코 조준을 취소했다. 머리가 한결 맑아졌다. 겁 없이 일 본 영토를 습격하려 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비로소 조금 전 일본 함대를 몰살시킨 게 약간 후회되었다. "그 배에 몇 명이나 타고 있었을까?" 「어림 잡아도 수천 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무거운 한숨이 가슴 가득 밀려왔다. 손가락을 까딱하는 행위 하나로 수천 명의 사람을 물귀신으로 만든 자신. 그러나 입맛이 조금 썼을 뿐 그 어떤 죄책감이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알 아차린 맥이 충고하듯 넌지시 말했다.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게 당연합니다.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발사 버튼을 눌러 죽이는 것. 그건 단지 진짜 화약을 사용 하는 '게임'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예안은 자신을 손을 내려다보았다. 수천 명을 물고기 밥으로 만들고 도 전혀 떨리지 않는 손. 더럽혀진 이 손으로 과연 아기를 떳떳하게 보듬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런 씁쓸함도 잠시였다. 아기의 어린 미소를 떠올린 순간 그녀는 어느덧 일본해군의 죽음도 잊은 채 행복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나른한 표 정으로 팔을 늘어뜨린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와 공명 모드로 움직이고 있을 때면 참 기분이 좋아. 온갖 무수 한 정보들이 내 머리 속을 흘러 들어왔다가 다시 흘러나가거든. 보 통 사람은 아마 미쳐버리겠지만 난 충분히 그 정보들을 처리할 능력 이 있어." 「저 역시 그렇습니다. 공명 모드로 움직이고 있을 때 확장되는 시 야와 끓어오르는 힘, 그리고 광범위하게 펼쳐지는 초고속 시냅스의 범위. 저에겐 그것이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이지요. 인간으로 비유 하자면 최고급의 척추를 얻었다고나 할까요?」 "뭐야? 그럼 내가 네 척추 역할 밖에 못한다는 거냐?" 「동물은 척추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자동 조절 장치를 제외하고 모든 수동적 움직임을 다 명령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신세인가요? 안 그렇습니까?」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 예안은 다시 조종대를 잡았다. "이제 진짜 가자. 유빈이가 기다리겠어." 「라져.」 "바보야. 그건 파일럿이 쓰는 대사야." 하얀 손이 쥐고 있던 글라스가 떨어지며 쨍강 깨졌다. 붉은 와인이 흘러 카펫을 적셨지만 레이온은 개의치 않았다. 그만큼 맥이 움직였 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었다. "한국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일본의 술수에 넘 어가는 일이 있더라도 시원하게 한 번 붙어보자는 건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두운 얼굴로 서 있던 30대 초반의 남자가 그렇게 대답했다. 레이 온은 우울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이제 그만 슬슬 얼굴을 펼 때도 되지 않았나? 언제까지 그렇게 죽 을상을 쓰고 살 거지, 칼?" 칼은 대답을 않았다. 레이온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당신도 참 가엾군. 가엾어.' 문득 칼을 처음 만났던 5년 전이 생각났다. 그때의 자신은 18살, 칼 은 26살이었다. 아내와 딸을 잃고 좌절하던 그에게 복수를 도와주겠 다고 자신이 손을 내밀었을 때 슬퍼하던 와중에도 어이없어 하던 그 의 얼굴. 아마도 이런 꼬맹이가 어떻게 나를 도와줄 수 있었겠느냐 하는 확신을 품고 있었겠지. 그러나 지금 칼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 "자네는 좀더 독기를 죽일 필요가 있어. 그렇게 칼날을 세우고 있으 면 아무도 자네에게 접근하려 하지 않아. 자네가 꿈꾸는 이상이 자 꾸 늦어지는 걸 바라나?" "명심하겠습니다." "쯧쯧. 자네를 보면 헤라클레스가 생각 나." 칼의 얼굴에 약간의 의문이 떠올랐다 지워졌다. 5년 전 가족을 잃은 뒤로 웃는 법을 잃어버린 그에게는 그나마 놀라운 감정의 표시였다. "나에게 그런 동료가 있었어. 나와 이상이 같았지만 선택한 길은 서 로 달랐지. 우리는 다시없을 동지이면서 또 적이기도 했어." "그 친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칼은 흥미를 보였다. 아마도 이상을 추구했다는 말에 관심이 쏠린 탓이리라. 레이온은 아련한 추억을 회상하듯 씁쓸히 웃으며 등을 돌 렸다. "죽었어." "…이상은요? 그 친구가 꾸었다는 꿈은요?" "완성됐지. 결국에는." "레이온의 힘으로? 아니면 그 친구의 힘으로?" "우리 둘 다 아냐. 어이없게도 반칙 플레이어가 끼어 들어서 모든 걸 해결해 버렸거든." 레이온은 씁쓸히 웃었다. 그의 평생 소원이었던 후유증이 소거되던 순간, 아직도 그 날의 기억은 허탈한 악몽으로 그의 기억에 자리잡 고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힘들게 이루려하던 꿈은 위대한 천재의 손과 초월적 인 힘에 너무 손쉽게 완성됐지. 행복하지 않았냐고? 천만의 말씀이 야. 우리는 불행했어. 우리는 이상 그 자체를 원했던 게 아니라 이 상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중요시 여겼던 거야." 칼은 침묵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싸늘한 우울함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죽은 가족들을 떠올린다 생각한 레이온은 허무한 웃음을 띠 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너무 그렇게 꿈만 바라보지 말게. 꿈을 이뤄나가는 과정 그 자체를 중요시 여기도록 해. 자네의 정당한 힘이 아닌, 다른 반칙을 끌어들 여 이루게 된다면 그건 더 이상 꿈이 아니게 되니까." "당신은 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칼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신보다 한참 연하인 레이온을 상관 취 급해 정중하게 대하던 평소와는 달랐다. 사뭇 반항적인 어조였다. "악마가 힘을 빌려준다 해도 좋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원하는 세 상을 만들 수만 있다면…." "악마? 악마라고?" 작은 웃음. 레이온은 두 팔을 벌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머리 위 에 펼쳐진 싱그러운 여름 하늘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푸른 저 창공 을 가슴에 마음껏 담을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텐데. 눈을 감고 있던 그는 칼을 돌아보았다. 그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악마라는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아. 신이 가끔 악마 흉내를 낼 뿐이야. "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94 회] 날 짜 2004-06-05 조회 / 추천 2778 / 35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붉은 발현 해군기지에 맥을 착륙시킨 예안은 놀라서 어떻게 된 거냐고 김 준장 이 따라붙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한 반도의 기류가 불안한 시점이다. 잠깐 미쳤다가 정신이 들어보니 맥 을 불러서 타고 있었다는 말을 어떻게 해줄 수 있겠는가. 쓸데없이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일본 군함 20척을 몰살시킨 것, 알려주지 않을 건가요?' '어차피 알게 될 텐데 뭘. 그리고 지금은 더 이상 그 생각하고 싶지 않아.' 예안은 냉랭히 말했다. 고속기차를 타고 금방 서울로 돌아온 그녀는 택시를 잡았다. 집 근처에 내린 그녀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터 덜터덜 걷던 중 누군가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걸 보았다. "누구세요?" "혹시 이 집에 사세요? 이름이 서예안 맞습니까?" "아, 네. 맞긴 한데…?" 다짜고짜로 묻는 한수의 태도에 예안은 조금 어리둥절했다. 얼굴이 환해진 한수는 묵직한 디스크를 꺼내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저는 정한수라고 합니다. 이것을 받으시죠." "아, 정한수씨라면?" 춘식에게 디스크를 건네줬다는 그? 근데 그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의아해진 예안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그가 쥐어준 디스크와 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게 뭐죠? 그리고 저희 집에는 무슨 일이시죠?" 한수는 흥분해서 외쳤다. "이 디스크에 들어 있는 양자 컴 설계도는 가짜입니다! 우리는 미국 에 속은 거라구요!" 뒤통수를 얻은 맞은 기분이었다. 멍청하게 눈을 뜬 예안은 어이없다 는 얼굴로 한수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가짜…라니요?" 예안은 어이없는 시선으로 손에 쥔 디스크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가 짜라니?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가짜가 확실합니다. 미국의 쇼에 저희가 완전히 넘어간 거라구요! 노스나 리는 애초에 우리편이 아니라 미국 에 매수된 매국노였습니다!" "아…." 비로소 머리 속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한국을 도발하는 일본, 한국 을 포위하는 중국, 양자 컴을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움직임 이 없었던 미국. 마지막으로 이 모든 사태의 뒤에 숨어 킬킬대고 있 을 시트날타. 그제야 예안은 근래 있었던 여러 일들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전쟁?" 예안은 멍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시트날타는 결국 삼국 연합과 한 국의 전쟁 시나리오를 써 내려가고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어째서? 설마하니 정말로 자신이 맥을 탈 때를 노려 붙잡기 위해서, 단지 그 하나를 위해서 이런 터무니없는 짓을 벌였단 말인가? 그때였다. 피잉! 희미하게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수의 눈이 경악과 고통 으로 크게 떠졌다. 그의 배에서 바닥을 적실 듯 피가 흥건히 흘러나 오고 있었다. 예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인형처럼 굳어 있었 다. "아리스! 지금 저 녀석을 죽이면 어떻게 하나! 이런 명령은 어디에 도 없었어!" "약한 소리하지 마, 닐슨. 어떤 방법을 쓰든 간에 목적만 완수하면 그만이야." 총을 쏜 것으로 보이는 미국인과 그의 동료들이 옥신각신 다투고 있 었다. CIA 요원들인가. 하지만 길거리에서 이렇게 함부로 사람을 쏘 고 당황해서 다투는 걸 보면 어딘지 좀 웃겼다. 예안은 한수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부릅뜬 그의 눈동자에서는 이미 생명이 사라져 있었다. 참 허망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슬프지 않았다. 산뜻한 기분으로 아기를 키우려고 산 집 앞에서 하 필 사람이 죽어나갔다는 게 재수 없었을 뿐이었다. '도망치십시오. 위험합니다.' 맥이 경고를 해왔다. 그러나 예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당신들은 누구죠?" "CIA 요원이다. 얌전히 들고 있는 디스크를 이리 넘겨." 한수를 죽인 여자 요원 아리스와 옥신각신하던 젊은 남자 닐슨이 날 카롭게 말했다. 그들은 여자인 아리스까지 포함해서 모두 5명이었 다. "기분 나빠." 예안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다가가던 요원 중 한 명이 얼핏 알아듣고 반문했다. "뭐라고 했지?" "기분 나쁘다고 했어. 왜 하필 여기서 죽인 거야? 모처럼 산뜻한 기 분으로 아기 키우려고 내가 신경 써서 구한 집인데." 어이없어 하던 닐슨은 비웃음을 띠며 권총을 겨누었다. 어차피 이렇 게 된 거 누가 보든 말든 후딱 처리하고 뜨는 게 최선이었다. 길거 리에서 한수를 쏴 죽인 아리스는 나중에 문책하면 그만이었다. 평소 에 얼굴 좀 예쁘다고 도도하게 굴던 녀석의 콧대가 망가질 걸 생각 하니 기분이 무척 좋았다. "자, 얌전히 손 들고 그 디스크를 이리 내…." 핑! 핑! 핑! 핑! 네 발의 소음성이 울림과 동시에 아리스를 제외하고 모두 다 쓰러졌 다. 정확히 심장에 총알이 박힌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 를 바라보며 사망했다. 피어오르는 화약 냄새 한가운데 서 있던 아 리스는 예안을 바라보며 냉소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엔젤." 순간 예안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새겨졌다. 한수의 죽음으로 인한 정 신적 쇼크. 그것 때문에 또다시 자신을 잃어버리려 하던 그녀는 엔 젤이라는 한 마디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당신… 설마 시트날타?" 예안은 두려움에 떨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아리스는 생긋 웃 으며 한 발짝 다가갔다. 냉혹하면서도 아름다운 얼굴과 잘 어울리는 미소였다. "뭐, 뭐 때문에 여기 왔지? 서, 설마 날 잡아가려고? 안 돼! 난 안 가! 못 가! 저리 꺼져! 내가 갈 것 같아! 웃기지 마!" 사고가 뒤엉킨 예안은 나오는 대로 독설을 내뱉었다. 그러나 아리스 는 그저 어린아이 달래듯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인형처럼 차가운 섬뜩한 그 미소. "저의 이름은 유나. 하지만 당신을 데려가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뭐?" "어차피 억지로 데려간다 해도 당신은 결국 또 탈출할 테니까요. 그 리고 우리에게 결코 협조하려 하지 않겠죠. 그럴 바에야 차라리 당 신이 제 발로 우리에게 돌아오도록 하는 게 나아요. 이것이 앤슨 경 의 생각입니다." 예안은 멍청한 얼굴로 유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실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나온 유나는 재빨리 디스크를 빼앗았다. 어어 하다 그것을 빼앗긴 예안이 달려들기 전에 유나는 그것을 담벼락에 던져 버렸다.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디스크가 여러 조각으로 부서졌 다. 유나는 예안을 돌아보며 냉소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그럼 이제 당신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만을 기다 리죠." 상냥한 어투와는 어울리지 않게 다시 한 번 차갑게 웃어 보인 유나 는 그대로 저 멀리 사라졌다. 바람을 타듯 빠르게 없어지는 그녀의 뒷모습과 깨진 디스크를 번갈아 쳐다보던 예안은 허탈한 얼굴로 털 썩 주저앉았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95 회] 날 짜 2004-06-12 조회 / 추천 2699 / 36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붉은 발현 "어떻게 된 거야?" 멍하니 앉아 있던 예안은 니콜라스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한 손에 권총을 든 그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그 여자는 누구야?" 그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예안은 멍한 시선으로 다시 허공을 응시했 다. 유나가 사라진 방향이었다. "혹시 시트날타?" 예안은 끄덕였다. 그녀는 거의 패닉 상태였다. '아아. 어쩌지?' 몸서리쳐지도록 두려웠다. 시트날타가 진작 자신을 찾아내고 감시하 고 있었다는 사실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진 작 자신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니콜라스를 떼어놓고 가까운 거 리를 혼자 돌아다닌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렇다면 어째서 그 동안 나서지 않았던 것인가. "녀석에게 살의가 없어서 그냥 주의하면서 지켜보고 있었어. 만약 녀석이 허튼 짓을 하려 할 때 허점을 찌를 생각이었어." 그녀의 침묵을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의심으로 해석한 니콜라스는 그 렇게 설명했다. 그녀는 대답을 않은 채 멍한 얼굴로 한수와 CIA 요 원들의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체를 정면으로 바라보는데도 이상하게 오싹한 기분이 안 났다. 인간에서 점점 벗어나려 하는 자 신을 자각하는 듯해 섬뜩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사람이 죽었으니 귀찮게 되었네. 일단 내 무기들 은 전부 다 숨겨두는 게 좋겠어. 괜히 들키면 좋을 게 없으니까." 니콜라스는 귀찮다는 얼굴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과연 그다운 말이 었다. '이제 어쩌지?' 예안은 비틀거리다가 니콜라스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마음 속에 서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이 집에서 아기를 건강하게 키우는 싶었 던 소원을 접어야 할지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우스웠다. 사람이 여 럿 죽어나간 상황에서도 자신은 그런 것이나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다. 머리가 몹시 아팠다. 뇌 세포를 과로로 혹사시켜 죽이는 게 시트날 타의 목적이라면 녀석들은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 셈이다. 한수의 시신이 자신을 비웃는 듯해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부릅뜬 그의 눈동자는, 왜 내가 죽기까지 했는데 넌 육아 걱정이나 하는 거 냐고 비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담벼락 아래 부서진 디스크 를 흘끗 쳐다보았다. "엘리우스." "엘리우스는 내 이름이 아니잖아. 왜 갑자기 그렇게 불러?" 니콜라스는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고 덤덤히 되물었다. 노려보듯 한 수의 시신을 바라보던 예안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만약에, 만약에 녀석들이 널 그렇게 부르면서 유혹하면 어쩔 거 야?" 니콜라스는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목소리에 좀더 힘을 주어 재차 물었다. "그땐 어떻게 할 거야? 절대 녀석들을 따라가지 않는다고 약속할 수 있어?" 니콜라스는 예안의 진의를 이해했다. 그녀는 자신의 약속을 원하고 있었다. 그런 것쯤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그는 총을 집어넣은 뒤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댔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그녀 의 손바닥에 전해졌다. "내 심장 소리 들리지?" 예안은 묵묵히 끄덕였다. 니콜라스는 덤덤히 말했다. "이것이 멎기 전까지 누나를 배신하는 일은 없을 거야." 조금의 강조도 섞이지 않은 덤덤한 어조였지만 예안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끄덕였다. 남에게 진심을 전하는 것에 있어서 화려한 강조는 오히려 그 가치를 떨어뜨리는 법이다. 그녀는 그의 검은 눈동자에 자리한 굳고 단단한 광택을 들여다보다가 그를 껴안았다. "고마워." 신고가 들어오자 감식반을 비롯한 형사들이 현장으로 출동했다. 그 러나 현장에는 이미 국정원에서 보낸 사람들이 와 있었다. 형사들은 살인사건현장에 왜 그들이 와 있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어쨌거나 조사는 그들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누군가가 갑자기 미국인들의 뒤에 나타나 총을 쏴서 그들을 죽였다 는 것 외에 딱히 밝혀낼 수 있는 건 없었다. 시신들에 박힌 총알들 의 강선은 모두 동일했다. 증거를 전혀 남기지 않은 미지의 인물이 미국인들을 비롯하여 한수까지 죽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하지만 그 것까지였다. 중현은 예안을 따로 만나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시트날타의 정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 채 이번 살인사건의 대략적 인 일을 말해주었다. 양자 컴 설계도 디스크에 관한 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중현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쓸데없이 일 벌려서요." "아닙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중현은 내심 속이 탔다. 양자 컴퓨터 설계도 해 프닝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좀 억울했다. 그러나 무 엇보다 걱정인 건 가짜 디스크 사건으로 미국이 어떤 시비를 걸어올 것인가 하는 거였다. '미국이 작정하고 이 일을 꾸몄다면 분명 몰아세울 만한 증거들이 있을 텐데.' 전에 언뜻 들었던 시트날타라는 이름이 미국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하는 고민도 잇따라 그를 괴롭혔다. "정한수씨에게는 대단히 미안하게 되었네요. 이 일 때문에 목숨까지 잃으셨는데 애초에 헛된 것이었다니." "안 되었지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루빨리 잊어버리세요." 중현은 예안이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느끼고 그렇게 위로했다. 그러나 실상 그녀는 한수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지 않았다. 무감각한 자신을 자각하는 게 싫어 일부러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고, 또 슬픈 목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창 밖의 거리에는 뜨거운 햇살이 가득 맴돌고 있었다. 활기에 찬 사 람들이 거리를 오고간다. 자동차 엔진 소리도 섞여 있었다. 평화로 운 저 분위기에 나만 섞이지 못한다는 억울함도 조금 있었다. 그러 나 그런 마음은 눈 깜짝할 사이에 형체를 잃어버렸다. 아침에는 춘식이 입원한 병원에 갔었다. 춘식은 모든 게 자기 실수 라며 그녀에게 깊이 사과했다. 그녀는 별로 그를 책망하고 싶은 마 음은 없었다. 오히려 이 일로 인해 시트날타가 자신의 위치를 파악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고마울 지경이었다. 대한의 두뇌라 일컬어지는 이병원 교수도 무사하니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미국이 어떻게 나올지 주시해야 한다는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일이 대단히 커졌군요. 일본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픈데 미국이 확실하게 끼어 들 명분까지 생겼으니 말입니다." 중현이 무거운 목소리로 예안의 상념을 깨뜨렸다. "이틀 전에 맥으로 20척의 일본 군함을 격침시키셨더군요. 이상하게 일본이 발표하지 않아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안은 잠자코 그를 주시했다. "녀석들은 아마도 최적의 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요. 지금 이 대로라면 전쟁은 피할 수 없습니다." 중현은 주전파 쪽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선제 공격으로 전쟁이 발발 하는 건 원치 않았다. 이틀 전 그 일은 앞으로 귀찮은 골칫덩이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머리를 쥐어 싸고 앞으로의 일을 고민했다. 지금은 일본이 그 사실을 발표하지 않고 있지만 알 만한 나라들은 다 알 것이다. 일본 도 그 사실을 계속 숨길 의도는 없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근시일 내 에 전쟁의 불길이 피어나게 된다. 100% 한국의 잘못이라는 명분과 함께. "격침시킬 생각은 없었어요. 하지만 그쪽에서 먼저 절 공격했기 때 문에 반격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영해로 먼저 쳐들어간 건 맥이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고장이었어요. 어쩔 수 없었어요." 중현은 입을 다물었다. 거짓말처럼 느껴졌지만 마땅히 반박할 거리 가 없었다. "하지만 책임을 피할 생각은 없어요. 만약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한 국에 피해가 거의 없도록 제가 다 해결할게요." 중현은 끄덕였다. 맥은 충분히 그 약속을 지킬 능력이 되었다. "중현 아저씨는 아무쪼록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만약 무슨 일이 생 기면 유전을 팔아서라도 물어줄 테니까요." 중현은 씁쓸히 웃었다. 과연 유전을 팔아야 할 정도로 큰 피해가 생 기기나 할까? 맥이 없다 해도 일본만 상대하는 경우라면 유전의 수 익 중 일부만 떼어도 충분히 그 손해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대충 다 말씀드렸죠? 전 그만 가볼게요." 예안은 일어나다 말고 한 가지 덧붙였다. "저희동네에서 수사하는 건 가능하면 빨리 접어주세요. 어차피 정치 적인 문제니 그런 식으로 해봤자 소용없잖아요?" 중현은 무거운 얼굴로 끄덕였다. 어쩐지 그녀에게 거리감이 느껴졌 다. 돌아오는 길의 하늘은 참 맑았다. 예안은 우울한 얼굴로 시종일관 땅을 보며 걸었다. 저 하늘 너머에서 에덴 혹성이 자신을 내려다보 며 고작 그 정도 갖고 힘들어하냐고 비웃을 거라 생각하니 차마 올 려다볼 수 없었다. 지금은 낮이라 절대 그것이 보일 리 없는데도 말 이다. 그녀는 우뚝 멈춘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 해서였다. 니콜라스는 그녀의 기분을 전환시켜줄 겸 말을 건넸다. "어제 제임스한테서 전화 왔었는데." 순간 그녀의 눈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뭐라고 하든? 넌 뭐라고 대답했고?" 원수를 갈아 마실 듯한 살벌한 얼굴에 니콜라스는 당황했다. "그냥 누나가 잘 들어왔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대답해줬어. 전화를 끊고 나서 조금 있다가 총 소리가 들려서 나가 보니 그 꼴이 되어 있었고." "어이없네. 자기가 날 잡으려고 한 주제에 안부하는 척 전화나 해?" 니콜라스의 얼굴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예안은 내뱉듯 말했다. "앞으로 세현이 그 녀석이 전화하면 무조건 끊어버려. 그 녀석이 날 찾는답시고 찾아오면 무조건 공격해." "왜?" "그 녀석은 내 적이야. 그 녀석도 시트날타란 말이야." 니콜라스는 들고 있던 전자수첩을 뚝 떨어뜨렸다. "뭐라고? 누나, 지금 뭐라고 했어?" "말했잖아. 그 녀석도 시트날타라구." 그의 눈동자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그것은 이내 경악으로 변했다. "제임스가 누나 적이라고? 진짜? 진짜야? 지금 장난하는 거 아냐?" 니콜라스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제임스가 누나의 적이라니? 그 는 따스하진 않지만 평온한 눈빛을 지녔다. 그런 그가 어떻게 누나 의 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푸른 창공이 머리 위에 떠 있었다. 그게 자신을 비웃고 있는 듯해 예안은 이를 악물며 눈을 감았다. 자신은 '우리 민족'의 다른 사람 들과 상관없다는 세현의 변명을 믿고 싶어하는 마음과 그것을 부정 하고 싶은 소망에 그녀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죽어가던 한수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가 살아온 내력에 대해서는 춘식에게 이미 들었다. 참 가엾은 인간. 갱들에게 가족들을 모두 잃 고 그것을 미국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던 가장. 그리고 끝내 미 국 첩보 요원의 총에 죽어야 했던 사람.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원망해야 할 대상은 갱들을 방관했던 미국이 아니라 무기력한 조국이었다. 유전이 솟은 후 국력이 비약적으로 상 승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그의 복수를 외면하지 않았던가. 뜨거 운 향수에 젖은 나머지 조국의 무관심을 깨닫지 못하고 모든 원망을 타국 정부에만 돌려야 했던 그는 과연 천국에서나마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인가. "천국은 없어." 예안은 얼굴을 찡그리며 그렇게 내뱉었다. 니콜라스가 고개를 갸우 뚱했다.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재차 내뱉었다. "천국은 없다니까." 그녀는 한수가 죽은 순간 귀찮게 됐다는 생각만 하던 주제에 지금 와서 이런 위선이나 즐기는 자신을 경멸했다. 기분이 엿 같은 나머 지 괜히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미워 보였다. 지금 시트날타가 눈앞 에 나타난다면 이성을 잃고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에게 는 그런 능력이 없으니 참아야하겠지. 굴당이 님의 조언에 감사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했었던 것 같습니다. 거북하셨던 다른 분들도 아직 어린 넘의 투정이라 생각하고 그냥 너 그러이 넘어가주시면 좋겠습니다.^^; 요새 연재가 늦습니다. 시험 기간인 데다가 이것저것 할 것도 많고 해서 그렇습니다. 앞으로는 연재 주기가 좀더 빨라지도록 노력하겠 습니다. 근래에 재생의 매력에 푹 빠져 있습니다. 자하르의 광기와 두 섹시 엘프들의 자태가 눈앞에 아른거려 글이 안 써지고 있습니다. 재생 사느라고 밥값까지 쪼개야했지만 전혀 아깝지 않군요. 아직 안 보 신 분들은 한 번 꼭 보시기 바랍니다. 자랑 하나 : 저는 재생4권'부터는' 작가 싸인본을 얻는답니다.-_-V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96 회] 날 짜 2004-06-18 조회 / 추천 2355 / 27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붉은 발현 영환은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일국의 원 수답지 않게 조금 경박한 태도였지만 장관들은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지금 한국은 무척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어찌 하면 좋겠소?" 영환의 시선을 받은 국정원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영환은 굳은 얼굴로 국방부 장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좋은 생각 없소?" 국방부 장관도 마찬가지로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젓기만 했다. 영환 은 속이 바짝바짝 타 들어갔지만 그들을 탓하진 않았다. 그들로서도 이런 엿 같은 상황이 닥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결국 전쟁을 피할 순 없단 말인가." 영환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장관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의 눈치만 살폈다. 원래 영환은 적극적으로 전쟁을 원하진 않았지만 걸려오는 싸움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오랜 철천지원수 일본인 데다가 한국에는 맥까지 있다. 오히려 전쟁이 발발하지 않으면 한국이 아쉬 워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그러나 상황은 하루아침에 뒤바 뀌었다. 여태껏 사태를 주시하던 미국이 드디어 나섰다. 비밀리에 전달된 외 교 문서를 받은 순간 영환은 까무러칠 뻔했다. 세상을 뒤바꿀 수 있 는 초고성능 양자 컴퓨터 설계도가 한국인에 의해 분실되었던 것이 다. 게다가 미국은 한국 정부가 그 일을 주도했다는 증거까지 갖고 있었다. 그런 기억이 없는 영환은 펄쩍 뛰고 놀랄 일이었다. 하지만 증거는 완벽했다. 영환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춘식과 이병원 교수의 증언을 토대로 미국의 노림수를 알아냈지만 반박할 증거가 없었다. 유일한 물증인 디스크는 이미 파괴되었던 것이다.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손을 써보았을 텐데, 너무 늦었다. 미국은 맥 혹은 유전 둘 중의 하나로 손해배상을 해줄 것을 요구했 다. 어느 것 하나도 한국으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제외하면 손해배상을 해줄 길은 요원했다. 중국도 비밀 문 서를 통해 미국을 지지한다는 뜻을 비췄다. 틀림없이 뒤에서 모종의 거래가 있을 것이다. 완벽한 사면초가였다. 오발 모함으로 인해 일본과 팽팽한 갈등을 조 성해 전세계에 안 좋은 이미지를 쌓게 한 뒤 시간차 공격으로 양자 컴퓨터 사건을 터트린 타이밍은 실로 절묘했다. 매일 같이 안보회의 가 소집되었지만 두 가지 일이 한꺼번에 들이닥친 탓에 결론이 내려 지지 않았다. 오랜 침묵을 깨고 국정원장이 입을 열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유전과 맥은 절대 줄 수 없습니다. 다른 부분에 서는 많은 양보를 해줄 수 있지만 그 둘은 절대로 안 됩니다." "본인도 그걸 아니 이리 답답한 것이 아니오." "유한전자나 중원전자 둘 중 하나를 양보하면 어떻겠습니까? 일단 아쉬운 만큼 급한 불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일제히 어두운 얼굴이었다. 국정원장이 저런 말을 한다는 건 미국의 흉계를 밝혀낼 길이 막혔다는 뜻이었다. "받아들이지 않을 거요. 양자 컴퓨터와 유한전자는 그 가치를 비교 할 수 없을 테니까." "러시아를 꼬드겨보는 건 어떨까요? 막대한 차관을 약속한다면 우리 의 편을 들어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우리가 유전과 맥을 한꺼번에 손에 넣어 팽창하는 걸 대단 히 경계하고 있소. 그들은 차라리 그 둘 중 하나를 미국에 줘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할거요." "유럽은 어떨까요? 러시아야 본국과 바짝 붙어 있으니 그렇다 쳐도, 유럽은 다르지 않습니까?" "글쎄, 러시아보다는 낫겠지만 그들 역시 우리를 두려워하는 건 마 찬가지일 텐데." 또다시 암울한 분위기가 그들을 에워쌌다. 그들은 몇 번이고 침묵을 깨뜨려가며 의논을 해보았지만 좋은 방법은 나오지 않았다. 간간이 괜찮은 듯한 방법이 나왔다가 무산되기를 계속 되풀이했다. 그들의 안색은 점점 초췌해져만 갔다. 안보회의의 결론은 결국 한 가지 방 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때 국사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소." 영환은 지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장관들은 침묵한 채 그를 주시 했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한 짓거리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거였소. 한일합방은 이미 벌써 100년이 넘었고 정신대 할머니 등 직접 피해 를 본 분들은 한 명도 살아있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 다고 했소. 반드시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이오. 사과가 아닌 대가 말이오, 대가." 영환은 어두운 얼굴로 지난 세월 동안 일본이 취한 입장을 떠올렸 다. 월드컵도 공동 개최하고 기술과 경제도 협력하기도 한 사이였지 만 대부분의 한일협력과정에서 메인은 일본이었을 뿐 한국은 들러리 에 불과했다. 일본은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도 질질 끌어오다 몇 십 년 전에야 겨우 마지 못해하며 수정하지 않았던가. 툭하면 독도 내 놓으라고 들들 볶아대면서 식민지 역사에 대해서는 단 한 번의 사과 조차 않은 나라. 그게 바로 일본이었다. "난 그때부터 대통령을 꿈꾸었소. 내가 이 자리에 오르면 일본에 보 복하리라 결심했소. 허나 어른이 된 후에 돌아보니 그게 말처럼 쉬 운 일이 아니더군. 일단 전쟁을 하려면 명분도 있어야 하고 다른 나 라들 눈치도 살펴야 하고 UN의 결의도 받아야 하고, 하여튼 여러 가 지 애로 사항이 꽃핀단 말이오. 게다가 가장 중요한 힘도 있어야 하 고 말이오." 장관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영환은 계속 말했다. "그 모든 문제를 다 처리한다 해도 가장 중요한 걸림돌은 남아 있 지. 바로 감정에 치우친 나머지 나라를 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 요. 국민들이 아무리 일본을 미워한다 해도 우리나라를 망하게 하면 서까지 보복하려 하지는 않을 테니까. 물론 본인 역시 마찬가지요." 어렸을 적부터 꿈꿔왔던 일본의 패망은 철이 들어 생명의 무게를 깨 달으면서 희미해져갔다. 역사가 가르쳐준 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죄 없는 피를 흘려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본인은 무조건 전쟁을 비판하거나 반대하지는 않소. 얼마 전이었다 면 일본 함대를 전멸시켜서라도 우리의 의지를 일본에 관철시켰을 거요.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오. 지금 전쟁을 벌인다면 무수한 피를 흘릴 각오를 해야 하오." 그 피의 대부분은 타국 젊은이들의 피일 테지만. 영환은 목구멍을 넘어오려는 그 말을 간신히 삼켰다. 장관들은 영환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다 결연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영환은 착잡함과 후련함이 뒤섞인 눈으 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일본의 하늘과, 그보다 더 멀리 있는 미국의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반대쪽 창문에는 중국의 하늘이 보였다. 저 푸른 창공 아래에 젊은 피가 쓰러질 것이다. 바 로 그의 결단에 의해서. "전쟁결의안을 준비하시오. 국회의 승인을 얻어야겠소." 니콜라스는 차가운 총신을 만지작거렸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밟 히는 잔디가 스산한 소리를 냈다. 정원 가득 차가운 바람이 내려앉 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카만 비단 같은 밤하늘에 는 금가루가 조금 뿌려져 있었다. 그만큼 하늘이 오염되었다는 증거 였다. 하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밤하늘에서는 아예 별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하니 지금은 많이 나아진 것이었다. '제임스가 적이라니.' 그는 허망한 얼굴로 총신을 닦았다. 그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펄 쩍 뛰는 예안의 사나운 기세가 떠올랐다. '제임스가 적이라고?' 과거 악덕고리대금업자의 손에 걸려 부모를 잃은 한 아이의 의뢰를 받은 적이 있었다. 목표물의 이마에 총탄을 박아 넣기 직전까지 그 는 자신이 옳은 일을 한 것이라 생각했다. 안일한 휴머니즘 따위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살인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없진 않았기에 그런 자기합리화를 필요로 했다. 목표물이 쓰러지고 난 뒤 옆방에서 조그만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나 왔다. 아이는 아버지가 죽은 줄도 모르고 배고프다며 칭얼거렸다.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를 어린 아이가 아버지의 피를 손에 가득 묻힌 채 방글방글 웃으며 배고프다고 조르는 광경. 그리고 자신이 그 광 경을 연출했다는 사실. 그것은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섬뜩한 느낌이 었다. 아이와 눈을 마주친 순간 그는 강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래서 정 신 없이 그 집을 뛰쳐나왔다. 니르는 그게 바로 죄책감이라 했다. 그는 니르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기억을 되찾아 감정을 손에 넣기 위해 발버둥치곤 했지만 제일 먼저 인지한 게 죄책감이라는 건 허용할 수 없었다. 괴로워하는 그에게 니르는 한 권의 책을 권했다. 바로 제임스 해론 의 저서였다. 인간의 본질을 부정함으로써 한 단계 높은 가치를 추 구하는 철학에 그는 심히 감동 받았다. 그는 정신 없이 제임스 해론 에 빠져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마음의 안 식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바로 인간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것이었고, 제임스 해론은 그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적이라니. 제임스가 적이라니.' 운명이 장난이라도 치는 것일까. 자신이 붕괴되지 않게 도와준 우상 제임스를 적으로 만나게 해주다니. 니콜라스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운명이 지닌 의미를 되새겼다. '당신이 하고 싶을 대로 하세요.' '그래도 될까?' '억지로 바꿔볼 생각은 말아요. 마음 내키는 길로 가세요. 그곳에 당신이 원하는 게 있을 거예요.' 니르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피로한 탓인지 오랫동안 교신하기가 힘 들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예전에 니르에게 물었던 말을 떠올렸 다. '왜 니르는 내 곁에 있는 거야?' 슬램가에서 쓰러져 있던 자신을 발견한 것은 니르였다. 이름을 제외 하고는 나이도 직업도 무엇도 알려주지 않았던 그녀. 그녀는 왜 니 콜라스를 도와주는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 대답은 그의 기 억 깊은 곳에 가라앉아 때때로 알 듯 말 듯한 혼란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살인의 환희를 느껴본 지도 어언 일 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누군지 알고 싶다는 욕구는 처음 예안을 만나기 전보다 강하게 줄어 있었다. 그녀에게서 줄곧 느꼈던 신비한 이질감이 아마도 정체성의 갈망을 삭게 했을 것이다. 그것은 제임스 해론도 해줄 수 없었던 것 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뿐인가. "내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제임스 해론씨." 니콜라스는 감정 없는 얼굴로 그리 중얼거렸다. "나타나면 죽일 거예요." 어린 소년이 생기 없는 말투로 자신의 우상에게 죽음을 약속하는 광 경. 그것은 달빛이 사라진 밤하늘의 허망함보다 섬뜩했다. 그의 발 자국 소리가 잦아드는 뒤로 풀벌레들이 울었다. 실탄 : 야. 예안 : 네? 실탄 : 하나 갖고 외롭지 않니? 이제 슬슬 둘째도 생각하는 게 어때? 예안 : (침묵)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97 회] 날 짜 2004-06-18 조회 / 추천 2394 / 37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붉은 발현 그로부터 얼마 후 백악관에서 대통령 성명 발표가 있었다. 전세계의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미국 대통령 C.W 카네기는 MIT와 로스알라 모스가 합작한 가운데 양자 컴퓨터 개발에 성공했다 밝혔다. 미국의 분위기는 한순간에 폭발적으로 들끓었다. 그러나 양자 컴퓨터 설계 도를 한국에 강탈당했고, 또 그것이 파괴되었다는 부연 설명이 잇따 르자 아메리카 영토는 한순간에 싸늘히 식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한국에 공식 외교문서가 전달되었다. 양자 컴퓨터를 강탈한 것에 대한 사과와 손해배상을 하라는 것이었다. 양자 컴퓨터 같은 거물을 손해배상 할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맥 혹은 유전 을 주는 것이었다. 미국이 억지를 부리는 거라 생각한 한국민들은 크게 분노했다. 그러나 이병원 교수와 과학기술부 장관의 대화를 녹 음한 테이프가 공개되자 그들은 할 말을 잃었다. 미국의 말은 사실 이었던 것이다. 일본은 미국에 이어 자국 영해에 침입한 맥이 20척의 군함을 격침시 켰다고 발표했다. 한국이 정신을 차릴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 다. 외교적인 문제는 계속해서 불거졌다. 세계는 한국의 부도덕함을 비난하며 미국과 일본에 사과하라 요구했다. 천문학적인 숫자의 항 의문서가 청와대에 빗발치듯 날아들었다. 맥의 오발로 인한 일본 영토 침수, 양자 컴퓨터 도난 의혹, 그리고 일본 영해 침입 등으로 인해 한국은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되었다. 전쟁을 일으켜서 끽소리도 못하게 짓밟을 것이냐. 아니면 맥이나 유 전 둘 중 하나를 포기하느냐. 한국은 그렇게 두 가지 선택 중 하나 를 강요받게 되었다. 마침내 대통령의 권한 아래 전쟁결의안이 국회의 최종 승인에 붙여 졌다. 극동아시아는 포효를 터트리기 직전의 사자처럼 크게 동요했 다. 전세계의 눈이 일제히 조그만 나라 한반도에 쏠렸다. 「앞으로 두 시간 후면 국회의 최종 승인 여부가 판가름나게 됩니 다. 여의도에는 현재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시민들이 몰려들어 투표 결과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반도와 세계의 역사가 다시 쓰여지느냐 마느냐 하는 이 시점, 전세계의 눈은 여의도에 쏠려 있 습니다.」 예안은 냉정한 눈으로 TV를 껐다. 그리고 상냥한 얼굴로 옆에 누워 있는 아기를 안아 올렸다. "걱정하지 마, 유빈아.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가 널 지켜줄게." 니콜라스는 다정한 모자의 모습을 조금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이 집의 위치는 이미 시트날타에 들켰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그 녀는 피할 생각을 않는다. 덕분에 그만 하루 24시간 내내 감시를 서 느라 죽을 맛이었다. "누나. 정말 이 집에 계속 살 거야?" "말했잖아. 어차피 녀석들은 내가 여기 있는 걸 뻔히 알면서 그동안 내버려두고 있었다고. 지금 녀석들은 날 강제로 잡아들일 생각이 없 어."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있는 건 위험해. 언제 녀석들 마음이 변해서 누나를 잡으러 올지 모르는 일이잖아? 만약 아저씨를 인질로 삼기라 도 하면 어쩔 거야?" "녀석들이 그렇게까지 비겁하다고는 생각 안 해. 그리고…." 예안은 유나의 차가운 눈을 떠올렸다. 시트날타에서도 분열이 일어 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앤슨이라는 자는 자신의 위치를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숨겨왔던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마 리오나 엘르, 둘 중 하나가 쳐들어왔을 것이다. 영환과 중현은 일본 영해 침입과 군함 격침 건에 대해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 예안이 지닌 힘에 비추어 볼 때 큰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디스크가 파괴되고 나서 어느덧 2주가 지났다. 한국과 일본 함대는 동해에서 팽팽한 대치를 벌이고 있었다. 전쟁결의안이 통과되는 순 간 한국 함대는 망설이지 않고 발포할 것이다. 세현은 아무 연락이 없었다. 물론 예안은 그의 연락을 받을 생각도 없었다. 그가 시트날타라는 게 밝혀진 이상 모든 정을 끊어야 했다. 그리고 예안은 아무렇지 않게 그럴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내일 유빈이 할머니를 만나기로 했어. 미리 준비 해 둬." "누나 지금 제정신이야? 녀석들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판 국인데 유빈이 할머니나 만나고 있게?" "네가 날 잘 지켜주면 되잖아." "김중현이 하는 말 못 들었어? 언제 어느 때 맥이 나서야 할지 모르 니까 단단히 준비하고 있으라고 했잖아." "난 지금 유빈이 할머니 문제 처리하는 게 더 급해." 예안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니콜라스는 처음으로 오싹한 한기를 느 꼈다.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는 그녀. 그녀가 자신과 동류라는 사실의 인지. 그리고 환희. 보통 사람은 간접적으로든 간에 살인과 파괴에 대해 거부감을 보인 다. 그러나 예안은 전쟁이 벌어지면 자신이 가장 많은 사람을 죽여 야 할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무신경했다. 니콜라스는 예안의 눈동자 에서 녹빛의 고독을 보았다. 니콜라스는 탄식하듯 말했다. "니르가 알면 날 엄청 혼낼 거야. 이런 판국에 의뢰인이 위험에 노 출되는 걸 방관했다고 말이야." "위험에 노출시키고도 잘 지켜주는 게 청부업자의 임무 아니야? 5억 달러나 받아먹었으면 이 정도 일은 해낼 줄 알아야지." "차라리 계약을 물고 싶네. 으휴." 예안은 풍부해진 그의 표정을 보며 작게 웃었다. 점점 인간답게 변 해 가는 그와 인간다움을 잃어 가는 자신. 대조적인 지금 이 상황은 무척 아이러니였다. 예안은 불타오르는 일본 함대와 바다에 수장될 미군 함대를 떠올리 며 미소지었다. 이제는 나약한 예전처럼 일본을 짓밟는 상상만으로 자기 혐오를 느끼지 않았다. 유젤 디야스 마르셸을 죽임으로써 그녀 는 한 단계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좋아하실 일이 못 됩니다. 유젤 디야스 마르셸은 지금 에덴 혹성에 살아 있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내 기억 속에서 그 유젤은 죽었어.' '당신이 사랑했던 <유젤>은 유젤 디야스 마르셸의 복제입니다. 그녀 가 가지고 있었던 기억과 능력은 전부 유젤 디야스 마르셸에게서 물 려받은 것입니다. 그래도 그렇게 그녀의 존재를 부정하실 겁니까?' 그렇다. 예안이 사랑했던 유젤은 오리지널인 유젤 디야스 마르셸의 복제였다. 유젤을 사랑한다면서 유젤 디야스 마르셸의 기억을 머리 에서 죽였다고 희희낙락하는 건 분명 우스운 모순이다. 그러나 그 모순까지 수용해야 할 만큼 예안은 에덴에 대해 강한 두려움을 느끼 고 있었다. '유젤은 지금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녀는 유젤 님에게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을 겁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유젤 님은 그녀의 복제니까요. 그녀는 유 젤 님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입니다.' 그녀도 유젤. 나도 유젤.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여자도 유젤. 너무 헷갈렸다. 예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명령했다. '앞으로 날 유젤이라고 부르지 마. 그렇게 부르니까 자꾸 헷갈려. 이제부터는 날 마스터라고 불러.' '알겠습니다.' 맥은 별다른 반대 없이 승낙했다. 호칭 같은 건 맥에게 있어 왈가왈 부할 정도로 큰 문제가 아니었다. '에덴 이야기를 좀더 해줘. 케이는 어떻게 해서 달을 제2의 지구로 만들 수 있었던 거지?' 예안은 자력으로 모든 사실을 알 수 있으면서도 일부러 맥에게 물었 다. 유젤 디야스 마르셸의 기억을 건드리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이론적인 면에서 볼 때 달을 지구로 만드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닙 니다. 기본 입자인 로데늄을 알고 있고, 또 그것의 움직임을 제어하 는 실버넷을 다루는 파장을 생성할 수 있다면 말이지요. 물론 행성 DNA 역시 필요합니다.' '행성 DNA?' '동물과 식물들, 그리고 세균과 바이러스가 DNA를 갖고 있듯 행성 역시 자신을 형성하는 정보를 담고 있는 그릇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행성 DNA이며, 아담은 그것을 손에 넣었기에 지구와 똑같은 별 을 만들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럼 그걸 손에 못 넣었으면 지구와는 전혀 다른 별을 만들어야 했 을까?' '그렇겠죠. 하지만 하나의 행성 DNA를 새로 재창조해낸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도 엄청난 세월이 걸릴 것입니다. 물론 아담에게 있어 그건 절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만,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는 지구의 DNA를 손에 넣는 게 가장 좋았겠죠.' 예안은 바람의 호흡소리를 들으며 생명의 의미를 생각했다. 인간과 똑같이 살아 숨쉬는 지구. 인간처럼 DNA를 지닌 지구. 아니, 인간이 지구처럼 DNA를 지니고 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까. 물은 지구의 피이다. 산은 지구의 뼈이다. 흙은 지구의 살이다. 구름으로 변한 물을 바람이 구석구석까지 운반하고 흙이 굳어져 바 위가 된다. 암석이 모여 산맥을 이룬다. 먼지로 부서진 살덩이와 뼛 조각을 물이 다시 뭉쳐 몸을 형성한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바람 한 조각까지 전부 다 지구가 호흡하는 소리였다. 그전까지는 까맣게 몰랐던 진리가 손에 잡힐 듯 너무나 가까이 보이고, 들리고, 느껴졌다. 당연하지만 몰랐던 사실. 지구는 생명체이다. 실탄 : 야. 예안 : 네? 실탄 : 아무래도 둘째는 딸이 좋겠지? 예안 : (침묵) 실탄 : 왜, 또 아들 낳으려고? 예안 : (버럭) 애 낳는다는 말 안 했어요!! 실탄 : 그게 어디 네 맘대로 되니.(히죽)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98 회] 날 짜 2004-06-19 조회 / 추천 2805 / 110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붉은 발현 '그럼 아담은 결국 자기가 직접 숙주를 만들어낸 세균이네.' 예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이 숙주를 좀먹는 세균이라면 에덴 혹성을 만든 케이는 결국 혁신적인 진화를 거친 세균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 식으로 보시면 곤란하죠. 아담은 세균이 아닙니다. 악성 세균 들의 공격에 견디다 못해 결국 새로운 몸을 만들어 피신한 <정상 세 포>입니다.' '헤, 넌 그렇게 생각해?' 에덴인을 옹호하는 맥의 논리는 실로 두터웠다. 전에도 예안은 에덴 인을 비꼬는 식의 말싸움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어쩌면 진심으로 맥을 이기고 싶다는 바램 자체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근데 진짜 궁금한 게 있어. 아담은 어떻게 해서 지구의 DNA를 손에 넣을 수 있었지?' 사고회로를 맹렬히 가동시키는지 맥은 말이 없었다. 평소처럼 둘러대 지 않는 걸 보면 대답할 자신이 없거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정리 가 안 된 듯 했다. 아마도 전자일 것이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장된 데이터로 추측해 볼 때 아마 마더의 허락이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마더?' '지구의 의지 말입니다. 지구인들의 논리로 보자면 마더는 여신쯤 되겠군요. 지구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생물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으니 말입니다.'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거룩한 환희와 지울 수 없는 증오가 떠오르는 이름, 마더. 마음 속에서 이렇게나 마더를 찬양하고 이렇게나 마더 를 저주하는 걸 보면 에덴인은 마더로부터 크나큰 은혜와 벌을 동시 에 받았었나 보다. 그 뒤로도 예안은 많은 대화를 했다. 맥은 예전과는 달리 가려운 곳 을 긁어주듯 그녀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그녀는 대화를 통해 자신이 몰랐던(하지만 언제든 알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다. 지구의 저주를 받은 인간, 사도. 마더의 벌을 피해 다른 혹성으로 피신한 아담과 이브. 이 땅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월적 힘. 그것들은 전부 예전에 간략하게 들은 경험이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 나 모든 걸 자세하게 알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 건 이번이 처음이었 다. 맥이 자신을 속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말해준 것도 마찬가지 로 처음이었다. 예안은 그렇게 지구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달의 비밀을 비롯하여 지구를 형성하는 초월적 힘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단 하나 그녀가 알지 못한 사실. 그것은 오리지널 유젤과 제이, 그리고 케 이, 이 세 사람 사이에 과연 어떤 일이 있었는가였다. 맥에게 물어보면 녀석은 기꺼이 대답해줄 것이다. 하지만 예안은 은 연중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오리지널 유젤의 기 억을 소멸시켰다는 자신의 거짓말을 맥이 믿고 있다 생각했다. 그러 나 그 세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물어보지 않는다는 건 맥이 자 신의 거짓말을 눈치챌 수 있는 단서라는 사실을 그녀는 몰랐다. '고마워. 대충 궁금한 게 풀렸어. 근데 웬일로 이렇게 술술 말해주 는 거야? 옛날에는 락이 걸려 있어서 절대 안 된다고 둘러대지 않았 니?' '락이 걸려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습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예안은 소리 죽여 웃었다. 일정한 정보를 은닉하거나 공개함으로써 자신을 컨트롤하려 했던 맥의 의도. 그녀는 유젤 디야스 마르셸의 기억을 소거시켰다는 거짓말을 통해 맥을 완전히 자신의 뜻대로 다 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구인의 자아가 강하게 유지되는 동안에 그녀가 에덴에 얽힌 진실 을 알게 되면 미치거나 맥을 거부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녀를 에덴 으로 데려가고자 하는 본능과 반대하는 것이었기에 맥은 그동안 여 러 정보들을 숨겨왔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맥과 그녀는 그렇게 충성스런 부하와 주인이면서 동시에 반 대적 관계에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해야 할 운명이었다. '아빠한테 이 사실을 말해주면 뭐라고 할까?' 예안은 정호에게 아직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하면 좋 은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유전까지였다면 이렇게 걱정하지 않아 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싫든 좋든 간에 자신은 지구와 에덴 혹성 의 존속 그 자체까지 깊이 관여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그럼 이제 당신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만을 기 다리죠.」 유나가 남긴 마지막 그 말이 몹시 신경 쓰였다. 디스크를 부수고 사 람을 죽여서까지 전쟁 발발을 확실시하려는 시트날타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예안은 아무 생각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상대의 숨소리만 들릴 뿐 아무 말도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예안 은 인상을 쓰고 다시 말했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잘 지냈나 엔젤?」 처음 듣는 목소리. 그러나 예안은 엔젤이라는 한 마디에 적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굳었다. "처음 듣는 목소린데? 당신 누구지?" 「앤슨이다. 유나가 말해주지 않았나?」 "앤슨?" 거친 숨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이쪽까지 들려왔다. 예안은 소름이 끼 쳤다. 상대는 진작 자신의 위치를 파악했으면서도 모종의 목표를 위 해 내버려둔 그 인물이었다. 바로 유나가 말했던. "무슨 일로 전화했지?"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는 없다. 그냥 네가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 겸해서 전화했을 뿐이야.」 안부라고? 예안은 비웃어주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유나가 말한 대로 난 엔젤 너를 강제로 데려오게 할 생각은 없다. 네 발로 스스로 우리에게 오게 만들 생각이지. 그러니까 굳이 번거 롭게 도망간다 어쩐다 할 필요는 없어.」 "그걸 어떻게 믿지?" 「믿지 않는다면 왜 도망 안 가고 전화를 받고 있는 건가?」 예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상대방의 덤덤한 어조가 심히 거슬렸다. 「혹시 마리오 경이나 엘르를 걱정하는 거라면 안심해도 좋다. 비록 마리오 경이 나보다는 높은 신분이기는 해도, 나도 꽤나 강력한 권 한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거든. 아무쪼록 앞으로도 건강하게 잘 지내 길 바라지.」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예안은 허탈한 얼굴로 수 화기를 든 채 멍하니 허공만 응시했다.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고여 있지 않았다. 며칠 전의 자신이었다면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었을 것 이다. '점점 성장해나가고 계시는군요. 축하드립니다.' 맥의 어조가 심히 거슬리면서도 당연하다 생각되었다. 가슴이 조금 두근거리기만 할 뿐 식은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자신. 그게 무엇 을 의미하는지 예안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에덴인에 점점 가까워 지고 있는 것이다. '내 발로 찾아오게 만든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자신의 변화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지쳤던 그녀는 쭈그리고 앉아 손 가락을 물며 앤슨이 남긴 말을 되새겼다. '세뇌라도 걸겠다는 거야? 하지만 나한테 세뇌 거는 건 불가능할 텐 데?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이럴 때 유젤 디야스 마르셸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고민한 예 안은 곧 답을 알아차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맥에게 거짓말을 들키지 않을까 하고 그동안 조심해왔던 유젤 디야스 마르셸의 기억. 그 안 에는 찬란히 불타오르는 지구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피로해진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 예안은 아기를 안고 정원으로 나갔 다. 뜨거운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완연한 여름이었다. 그 늘진 곳에 앉은 예안은 아기의 뺨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유빈아. 넌 언제쯤 되면 말할래? 응?" 아기는 까르르 웃으며 이빨이 조금 돋아난 입으로 엄마의 손가락을 물었다. 조그만 치아가 손톱을 누르는 느낌이 간지러워 예안은 키득 키득 웃었다. "아얏!" 아기가 힘주어 깨물자 조금 통증을 느낀 예안은 반사적으로 손가락 을 빼냈다. 아기는 장난감을 빼앗긴 얼굴로 잔뜩 찡그렸다. 그게 너 무 귀여워 꼭 안아주려던 그녀는 말라죽은 잡초에 묻은 자신의 피를 보았다. 그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잡초에 묻은 피에서 희미한 빛이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노랗게 말라죽은 잡초가 한 차례 부르르 떨리더니 초록색으로 변했다. 줄기가 꼿꼿이 일어서더니 이를 모를 조그만 꽃 이 순식간에 피어났다. 눈부신 생명의 기운이 역동적으로 붉게 발현 되고 있었다. 예안은 그대로 얼어붙은 채 멍하니 그 광경을 주시했다. 완전히 되 살아난 잡초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듯 했다. - 푸드드득! 갑자기 하늘을 수놓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수많은 새들이 몰려왔다. 예안은 어이없는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나무에도, 정원에도, 담에도, 지붕에도, 그렇게 어디에도 새들이 앉아 있었다. 부리를 일 제히 자신에게 향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것들은 마치 위대한 신에게 경배를 올리는 사제들처럼 엄숙했다. 예안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바로 옆에서 들린 날 갯짓 소리에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그것을 쳐냈다. 그녀의 어깨에 앉으려던 새는 흰 깃털을 몇 개 떨어뜨린 채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녀의 주변을 빼곡이 감쌌던 수천, 수만 마리의 새들이 일제히 하 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뭐, 뭐야 저거?" 예안은 멍청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맥이 말했다. 「동물은 인간보다 훨씬 민감합니다. 생명 에너지의 커다란 반응을 느끼고 본능에 따라 이곳으로 몰려왔던 거지요.」 예안은 멍한 얼굴로 자신에 의해 되살아난 잡초를 내려다보았다. 다 른 인간과 별다를 것 없는 붉은 피 한 방울에 그런 힘이 숨겨져 있 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잡초의 줄기를 쓰 다듬으며 새의 방문의 의미를 생각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누구 하나 들여다보지 않았다. 새들 도 태초부터 지니고 있는 그런 감각을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영구히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멀리 사라져 가는 새떼를 바라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가 슴 가득 후련한 기분이 밀려들어왔다가 갑갑함을 남기고 다시 빠져 나가기를 반복했다.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이 유젤의 귀여운 미소 를 비춰내고 있었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기분으로 눈부신 햇살 을 견디던 그녀는 허리를 숙여 아기를 안아 올렸다. 그 날 저녁 전쟁결의안이 국회의 최종 승인을 받았다는 기사가 전세 계로 보도되었다. 제가 아는 T 작가분의 팬카페가 창립되었다고 하시더군요. 역시 인 기작가...(각혈)은 넘어가고, 하여튼 축하말을 게시판에 남기고 왔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이런 건 직접 미소녀로 말을 해줘야 하는데 이 분이 오늘따라 좀처럼 접속을 안 하는군요. 인기 작가라고 바쁘 다 이건가. 쳇.(쿨럭) 추천 push 부탁...ㅠㅠ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199 회] 날 짜 2004-06-26 조회 / 추천 2581 / 34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달콤한 유혹 공기를 찢으며 대함 미사일이 날아왔다. 모두 30발. 한국군 함포장 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레이더를 보았다. 승무원들의 얼굴에는 여유 가 가득했다. 그들이 마음 속으로 세 번을 세기도 전에 화면에서 미 사일의 흔적이 전부 사라졌다. "요격되었습니다." 승무원이 침착하게 보고했다. 함포장은 태연한 얼굴로 일본 함대의 다음 발악을 기다렸다. 이번에는 50발의 미사일들이 발사되었다. 그 러나 다시 3초가 지나기 전에 스크린에서 반응이 사라졌다. 맥이 전 부 다 요격한 것이었다. "정말 놀라운 성능이야." 김지수 사령관은 일본 함대가 있는 쪽 수평선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멀리서 빛나던 희미한 폭발광이 몸부림치다 이내 힘을 잃고 수그러 들었다. "지금 맥은 어디에 있지?" "본항모 500미터 상공에 있습니다. 육안으로 확인 가능합니다." "음." 김지수 사령관은 굳은 빛으로 끄덕였다. 맥이 레이더에 걸리지 않는 다는 것은 아군의 발목을 잡는 요소이기도 했다. 맥이 어디쯤에 있 는지 항상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데, 레이더에 잡히지 않으니 그게 쉽지 않았다. 인공위성의 힘까지 빌어 겨우 위치를 포착하고는 있으 나 맥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는 한 그것도 힘들었다. 더군다나 맥의 파일럿은 일본 함대를 격침시키는데 신이 나 통신도 제대로 안 받아 주는 판이었다. '멋지군.' 굵은 섬광이 수평선 너머로 뿜어지는 광경을 구경하며 김지수 사령 관은 크게 감탄했다. 부하들도 넋을 잃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 다. 맥의 전투는 단순한 무력의 표출이 아니라 그 자체로써 예술의 정점을 이루고 있었다. "전멸입니다!" 지석 준장이 흥분에 찬 어조로 보고했다. 김지수 사령관은 잠시 생 각을 하다 비공식 항해일지에 조그맣게 써넣었다. 「아군 피해 무(無)」 펜을 내려놓은 김지수 사령관은 주먹을 불끈 쥐며 항모 갑판을 내려 다보았다. 날씬한 전투기 형태의 맥이 내려앉고 있었다. 맥은 견인 도 필요로 않고 자체 출력으로 크래프트 캐리어(Craft Carrier)로 갔다. 김지수 사령관은 흐뭇한 눈으로 맥의 멋진 자태를 응시했다. 제3함대가 한 발의 미사일도 사용하지 않고 일본 함대를 전멸시킬 수 있었던 것은 전부 다 맥 덕택이었다. "할 말이 없는 전투였습니다. 마치 30세기의 전투병기가 타임머신을 타고 우리 시대로 넘어온 듯한 착각까지 들더군요." "맥이 세계의 판도를 바꿔놓을 거란 말은 과연 틀린 게 아니었군 요." 장성들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며 즐거워했다. 그들은 맥이 그 어떤 현대무기도 가볍게 무찌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전쟁 을 통해 맥은 한국에 무한한 영광을 가져다 줄 것이다. 전쟁결의안이 통과된 후로부터 전세계에 큰 소용돌이가 일었다. 조 그만 반도에 자리잡은 나라가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 도전장을 내민 것이었다. 오랜 풍파에 송곳니가 많이 닳았다 하지만 여전히 패국의 이름을 지키고 있는 미국, 그리고 과거 세계제일의 경제대국이라 불 렸던 일본. 떠오르는 신흥강국 한국이 그 둘을 상대로 미사일을 겨 누었다는 것은 세계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일이었다. 한국의 부도덕함을 비난하던 세계 언론은 한국이 전쟁을 결심한 순 간 한 끗발 수그러들었다. 각 나라들은 겉으로는 조금씩 한국을 비 난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먹을 수 있을까 심 각하게 고민했다. 전쟁결의안이 통과되고 그 다음날 동해에서 대치 중이던 일본군과 한국군은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7:3 정도로 무력이 밀리던 한국 함 대는 군함 한 척, 미사일 한 발의 손실도 없이 나카무라 함대를 전 멸시켰다. 바로 맥이 참전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국은 신흥강대 국으로써의 위상을 알리기 위한 서막을 대승으로 장식했다. 이지스함-3 10척을 비롯한 갖가지 최신함으로 구성된 나카무라 함대 가 전멸했다는 소식을 접한 호이즈미 총리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우지타오 주석에게 핫라인을 넣었다. "이걸 어쩌면 좋단 말이오? 나카무라 함대가 전멸했소. 대일본제국 의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는 나카무라 함대가 적함 한 척도 전멸 못 시키고 모조리 바다에 수장되었단 말이오." 맥의 고성능에 충격을 받은 주석도 말을 더듬었다. 「FIRE-3 요격 실험 때부터 괴물인 건 알아봤지만 그 정도일 줄은 설마 몰랐소. 과히 명불허전이구려.」 "그렇게 감탄할 때가 아니오. 벌써부터 국민들은 크게 동요하고 있 단 말이오." 「귀국의 국민들은 어차피 처음부터 전쟁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았 소? 고작 해전에서 한 번 패배했다고 벌써부터 그렇게 겁을 먹는단 말이오?」 "하지만 이건 너무 무력의 차이가 크잖소? 국민들 중 누구도 맥이 그렇게 무식하게 쎄리라고는 상상도 않았을 거요. 나카무라 함대가 미사일 한 발도 안 쓴 적군에게 전멸 당할 줄 누가 알았겠소?" 「설마 그 결과를 곧이곧대로 발표했소?」 총리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주석은 그의 뜻을 알아듣고 다소 누그러진 어 조로 말했다. 「과정은 중요하지 않소. 어차피 끝에 가서 우리가 웃고 있기만 하 면 되는 거요.」 "맥은 괴물이오. 전부터 알았지만 오늘 확실히 깨닫게 되었소. 맥을 어떻게 처리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거 요." 총리는 아직도 부들부들 떨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카무 라 함대가 변변찮은 공격 한 번 못 해본 채 전멸 당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느꼈던 그 서늘한 한기를 잊어버릴 수 없었다. 당장이라 도 총리관저 창문 밖에서 맥이 라이플 포구를 들이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으, 으아아악!" 총리는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수화기는 바닥에 떨어져 굴 렀고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창문 바깥에 소리 없이 떠 있는 맥은 유리창을 향해 포구를 겨누고 있었다. 녀석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도대체 조기 경보 시스템은 뭘 했단 말인가? 「아아, 배불뚝이 일본 총리 아저씨는 잘 듣도록 하세요.」 맥의 외부 스피커에서 30대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론 한국어 였다. 어울리지 않게 무척 귀여운 억양이었지만 총리는 그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저 거대한 포구가 언제 불을 뿜을지 몰라 그는 새하 얗게 질린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벽이 조금이라도 물렀다면 그는 벽을 뚫고 도망쳤을 것이다. 「이 전쟁을 원한 건 일본이니까 나중에 우리한테 욕하기 없기예요? 잘 알았죠? 그럼 이만 갈게요.」 맥은 고속 상승한 뒤 전투기로 변해 저 멀리 사라졌다. 식은땀을 흘 리며 벽에 기대어 있던 총리는 바닥에 털푸덕 주저앉았다. 그의 표 정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저, 저런 괴물을 도대체 무슨 수로 잡겠다는 거야?" 우르르 몰려온 부관들과 수행원들이 걱정스런 얼굴로 그를 살폈다. 넋이 나간 채 속으로 앤슨을 향해 저주를 퍼붓던 총리는 겨우 정신 을 차리고 비틀비틀 일어났다. 도쿄 거리는 완전 패닉에 빠져 있었 다. 아찔했다. 적국의 전투병기가 단독으로 수도를 휘젓도록 그대로 방관하다니. 곧 온 국민의 원망이 내각에 집중될 것이다. 총리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어차피 이왕 선택한 도박. 이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대한 배당금을 따내야 했다. 이순신 항모에는 맥의 파일럿 전용 휴식실이 있다. 사령관이 머무는 거처보다 안락하고 온갖 편의가 갖춰져 있는 곳으로써, 한 나라의 모든 무력을 짊어진 인물에게 이런 전용 휴식실이 주어지는 건 당연 했다. 장성들은 자신들보다 지위가 낮은 인물이 그런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 일체의 불평도 않았다. 김지수 사령관도 그 일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김지수 사령관은 단신으로 그곳으로 갔다. 노크를 하고 기다리자 이 윽고 예안이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오세요." 김지수는 미팅에 나가는 청년처럼 조금 설레어 하며 들어섰다. 갓 샤워를 마쳤는지 예안은 향긋한 샴푸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뒤에 감춰진 은은한 체향이 더 매력적이라 생각했다. "일본 영토까지 갔다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레이더에 잡히지 않아서 뒤늦게 겨우 알았지요. 얼마나 맥이 빨랐으면 처음에는 그런 줄도 몰랐을까요." 김지수는 정중하게 존대를 했다. 예안은 일반에는 알려지지 않은 맥 의 제조자이자 장차 국립과학연구소의 소장 자리를 맡을 인물이었 다. 당연히 자신의 존대를 듣고도 남았다. "왜 그런 위험을 무릅쓴 거지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습니 까?" "그냥 심심해서 총리관저에 가서 겁을 좀 줬어요. 아마 오늘 일본 석간 신문에는 장난 아닌 기사들이 잔뜩 실릴 걸요?" 예안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키득키득 웃었다. 수십 척의 군함을 혼 자 전멸시킨 파일럿 같지 않게 귀여운 그 모습에 김지수는 은근히 마음이 끌렸다. 생각 같아서는 자신의 손자라도 소개시켜주고 싶을 정도로 그녀가 탐났다. 하지만 대단한 남자들의 구애를 질리도록 받 고 있을 거란 생각에 애써 아쉬움을 접었다. "중국 함대 움직임은 아직 없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그들과 적대관계가 아니니 지금쯤 그 들은 이리저리 심각하게 저울질을 하고 있을 겁니다." "전 굳이 그들과 손을 잡을 필요는 없다 생각해요. 어차피 나 혼자 서도 다 박살낼 수 있으니까." 김지수는 가벼운 전율을 맛보았다. 과연 테슬라를 뛰어넘는 세기에 다시없을 천재다운 자신감이었다. "다음 작전은 뭐지요?" "이대로 남해로 향해서 목포 기지 쪽을 노리는 일본 함대를 공격할 예정입니다." "에? 설마 지금부터 거기까지 가려고요? 그쪽에도 해군 기지가 있으 니까 거기에 맡기면 되잖아요?" "만만치 않은 대규모 함대가 이동 중이라 그들만으로는 좀 곤란합니 다. 게다가 작전이 성공한다면 이 전쟁을 처음부터 다시 재고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일본을 빠뜨릴 수 있습니다." 김지수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 몇 시간 후면 종전을 외치는 일본 국 민의 목소리가 내각에 도달할 것임을 알았다. 세상에 그 어떤 병기 가 감히 맥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맥은 핵미사일 공격까지 같잖아 하며 쓸어버린 괴물이었다. 그가 나간 뒤 존재감 없이 구석에서 총 손질을 하던 니콜라스가 자 리를 털고 일어났다. "유빈이 할머니 만난다고 해놓고 일본 군함이나 부수고 있네?" "어쩔 수 없잖아. 설마하니 갑자기 전쟁을 벌일 줄은 나도 몰랐단 말야. 전쟁결의안 통과되고 며칠은 지난 다음에 싸울 줄 알았다구." 예안은 초조하게 자신의 전화만 기다릴 세정을 생각하며 우울한 표 정을 지었다. 아마 세정은 자신이 여전히 독한 감정을 품고 있는 거 라 단단히 오해하고 있을 것이다. 세정과의 관계가 깊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주제에 그런 걱정이나 하는 자신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 우울한 걱정은 그만. 예안은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누이며 애처롭게 자신을 찾을 아기를 생각했다. 모유를 선호하지만 전장에까지 아기 를 데리고 올 순 없어 일단 핑계를 대고 정호에게 맡기긴 했는데 과 연 잘 있을지 몹시 걱정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쥐어 싸맨 채 끙끙대며 하루빨리 임무를 마치고 집으 로 돌아가기를 기도했다. 아까 일본 총리 코앞까지 쳐들어가 겁을 준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번 편은 다소 퀄리티가 걱정됩니다. 숙성시키지 않고 곧바로 퇴고 하고 올린 거라서요. 원래 퀄이 낮았으니 그냥 안심해도 좋다라고 하 신다면 할 말 없지만요.(흑;) (전 글을 미리 써두고 2~4주 정도 후에 손질한 다음에 올리는데 그 과정을 숙성이라고 합니다.;)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화끈한 전투씬이 없군요. 사실 자신이 없어서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기도 합니다만, 이것은 전쟁소설이 아니기에 전쟁씬 자체를 중요 취급하지 않아서라는 게 더 정확한 이유입니다. 아, 그리고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데요. 아담의 상처는 조아라 것을 읽지 마시고 수정해서 연재 중인 드림워커 것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정말.=ㅅ=;; drwk.co.kr (일반연재란에 있습니다.;;) ps : 깜박했는데 이제 200회를 맞이할 때가 되었군요. 이번에는 출석 체크만 하고 넘어가면 재미없으니 좀더 색다른 걸 해보고 싶... 지만 여러분들이 활발하게 참여 안 해주시면 대략 전의상실입니다.ㅡ.ㅡ; 실제로 독자분들의 이벤트 참여율이 저조하다는 건 진리에 가깝고요. 그래서 저도 비교적 덜 귀찮은 출석체크만 여태껏 해온 것이었습니다. 출석체크 말고도 별도로 감상문 쓰기(아무도 안 할 것 같다.;;)라 든지 하는 걸 한 번 해볼까요? 상품은...이브의 눈물 비축분(480kb) 를 걸고 하면 꽤나 참여율이 높으려나요. 성의만 있는 감상문이라면 가리지 않고 그냥 다 주기로 하고...(쿨럭) 아니면 주인공 둘째 이름 짓기로 할까요?--; 한 번 골라보세요 여러분들이. 정 귀찮으시다면 늘 그랬듯이 출석 체크만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거고요.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00 회] 날 짜 2004-06-28 조회 / 추천 2605 / 43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달콤한 유혹 "모든 게 우리의 뜻대로 되어 가고 있습니다." 앤슨은 다소 피로한 얼굴로, 그렇지만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클랙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끄덕였다. "수고했네. 이제는 한국이 대승하도록 만들기만 하면 되겠지." "적극적으로 방해를 하지 않는 이상 한국의 승리는 필연적입니다. 일본 총리와 중국 주석에게는 대단히 미안하지만 말이지요." 클랙은 그 두 국가원수의 파멸을 상상하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그들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직위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앤슨. 마리오 경과 자네 누이동생이 죽어라고 엔젤의 행방 을 찾고 있는 건 아나? 그들에게 아무런 귀띔도 해주지 않을 건가?" "그 둘은 저와는 걷는 길이 다릅니다. 만약 엔젤의 행방을 제가 알 고 있다는 게 그들에게 흘러가면 대단히 곤란한 일이 벌어지겠지요. 가급적이면 끝까지 비밀로 해두려고 합니다." 클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제 그만 말해주지 않겠나? 이 전쟁을 일으켜서 과연 우 리에게 어떤 이득이 있는지 말일세. 그동안 이 늙은이는 자네의 대 답을 기다리느라 너무 지쳤어." "이득요?" 앤슨은 소리 죽여 쿡쿡 웃었다. 클랙은 그 표정을 보고 일이 잘 풀 릴 것임을 확신했다. 저것은 앤슨이 자신감에 가득 차 있을 때 곧잘 짓고 하던 표정이었다. "별것 아닙니다. 다만 현상의 증명이라고나 할까요?" "현상의 증명?" "엔젤에게 인간이 얼마나 더러운 족속인지, 인간들이 얼마나 어리석 고 비열한지 뼈저리게 깨닫게 해줄 생각입니다. 이번 전쟁은 바로 그 일환에 지나지 않습니다." 클랙은 그 관념적인 목적이 어떤 형태로 구체화되어 자신의 앞에 나 타날지 무척 궁금했다. 그러나 아무리 캐물어도 앤슨은 그 이상 답 해주지 않았다. 지켜보면 결국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둘이 여러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엘르가 그들을 찾아왔다. "오랜만입니다, 클랙 대신 님." 엘르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요즘 많이 바쁜가 보구나. 얼굴이 핼쑥하군." 앤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라버니. 제 한 몸은 제가 잘 관리하고 있으니 까요. 조만간 엔젤을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안 되더라도 엔 젤의 거처는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엘르는 자신감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앤슨은 혈육을 속이는 게 조 금 마음에 걸렸지만 모든 것은 대망을 위해서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저희에게 모든 걸 맡겨 두세요. 엔젤은 곧 잡아들일 수 있어요." 엔젤은 현재 이순신 항모에 탑승한 채 임무를 위해 남하 중이었다. 이순신 항모가 귀환하고 난 뒤 경호의 틈새를 파고들어 납치한다는 게 현재 엘르와 마리오가 세운 계획이었다. 미행을 제대로 하면 당 장 납치는 불가능해도 장래를 노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계 획은 앤슨의 은밀한 방해공작에 가로막힐 것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어요. 사실 그것 때문에 클랙 대신 님을 뵈 러 왔습니다. 제나르 대신 님은 지금 몹시 바쁘셔서요." "뭐지?" "게이트가 닫히고 있습니다." "오, 저런." 클랙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앤슨의 얼굴도 평소 침착한 그 같 지 않게 창백하게 물들었다. "언제 그 사실을 알았느냐?" "이틀 전에 알았습니다. 보고가 늦어 대단히 죄송합니다." "끙. 이틀 정도면 그다지 늦은 것도 아니야. 괜찮다." 앤슨과 클랙은 심각한 얼굴로 앞으로의 일을 궁리했다. 그들은 평소 답지 않게 무척 초조한 안색이었다. 그들의 본토와 지상세계의 통로 역할을 하는 '게이트'가 닫히고 있다는 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 다. 자칫하면 본토가 지상세계로부터 영원히 고립될 수도 있었다. "이상하군. 게이트는 20년을 주기로 닫히지 않았나? 마지막 의례를 치른 후 아직 17년 밖에 지나지 않았어." "그 정도 변수는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하루빨리 엘리우스를 찾아 의례를 치러야 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엔 젤을 붙잡아야 하죠. 그 둘은 지금 같이 있으니까요." 엘르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앤슨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의례라. 벌써 그럴 때가 되었군. 그래도 게이트가 닫히기까지는 최 고 반년의 여유가 있으니 걱정은 없다.' 의례라는 것은 게이트가 닫히려 할 때마다 치르는 의식이다. 간단히 말하면 공명신수 「마기」의 강대한 힘으로 게이트를 유지시키는 것 이었다. 마기를 지니고 있는 엘리우스를 하루빨리 찾아내는 것이 사 태의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대단히 걱정하시고 계십니다. 이대로 가다가 우리 시트날타는 지상세계와 영원히 단절되고 말 것입니다." 클랙은 침울한 얼굴로 끄덕였다. 수천 년 동안 게이트가 닫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게이트가 닫히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 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물론 에날도스를 활용하면 또 다른 이동 수단을 강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지의 리스크를 떠안는 것보다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확실히 해야만 했다. 그게 현명한 처사였다. 「출동입니다.」 휴식실 내부 스피커가 짤막하게 울렸다. 니콜라스와 빈둥거리며 카 드놀이를 하던 예안은 얼른 일어나 전투복으로 갈아입었다. 헬멧으 로 얼굴을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심해." "걱정 마." 예안은 비밀 통로를 통해 서둘러 격납고에 갔다. 아무도 없는 걸 확 인한 그녀는 안심하고 맥에 탑승했다. 그녀의 정체는 고위장성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일반 승무원들은 박재형 대 령이 맥의 파일럿인 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훈련을 마스터하 면 사실이 될 일이기도 했다. 갑판으로 나온 맥은 수직 상승으로 날아올랐다. 이곳은 남해, 일본 함대와의 거리는 300km였다. 레이더에는 100발이 넘어가는 미사일이 날아온다고 표시되어 있었 다. 맥은 매처럼 쏜살같이 날아가며 라이플 버스터 포로 미사일들을 전부 요격시켰다. 순식간에 일본 함대 한가운데에 당도한 맥은 이족 보행형으로 변해 군함들을 내려다보았다. 갑판에 나와 있는 승무원 들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맥은 의도적으로 그들의 모습을 확대했다. 예안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버스터 포를 쏴 군함들을 전부 격침시켰다. 항모를 포함해 50척 가까운 함대가 전멸하기까지는 일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바 다 위는 순식간에 붉은 폭염과 시커먼 기름으로 뒤덮였다. '다음부터는 그냥 격침시키지 말고 전투와 항해만 불가능하게 해서 포획해야겠다. 이거 우리나라 바다가 너무 더러워지잖아.' '가미카제 정신으로 덤빈다면 아마도 절대 불가능할 겁니다. 뒤통수 를 맞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냥 깨끗이 격침시키는 게 낫습니다.' 예안은 얼굴을 찌푸렸다. 맥의 어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군다 나 맥은 의도적으로 승무원들의 얼굴을 확대함으로써 자신에게 자극 을 주려 했다. 그녀는 맥이 아직도 포기 못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항모로 귀환하니 승무원들이 다소 맥빠진다는 표정으로 갑판에 나와 있었다. 미사일 한 번 못 쏴보고 이겼으니 김이 새기도 할 것이다. 특히 맥을 대장기로 하는 제1비행대대는 불평이 한껏 고조에 달해 있었다. 맥이 혼자서 다 처리하니 자신들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 다. 어차피 그들 전부가 폭격기라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도. 김지수 사령관은 오늘의 전과를 놓고 참모들과 함께 앞으로의 작전 을 분석했다. "엘가와 항모 한 척과 51척의 군함 격침이라. 놀라운 성과로군." "이제 일본은 이 전쟁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될 겁니다." 이것으로 일본은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들은 소유하고 있던 두 개의 초대형 항모 중 한 척이 포함된 함대를 송두리째 잃었다. 전쟁 개시 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전쟁을 원점으로 되돌려야 할지 도 모를 심한 손실을 입은 것이다. 게다가 한국은 여태껏 미사일 한 발의 소모도 없었다. 특히나 며칠 전 맥이 도쿄를 휘젓고 돌아간 것 때문에 일본 전체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가능성 희박한 전쟁을 결심한 내각에 온 국민 의 원망이 집중되고 있었다. 호이즈미 총리는 초조해하며 앤슨이 약속을 지켜주기를 기다렸다. 맥이 파괴되기만 한다면 순식간에 승패를 뒤집을 자신이 있었다. 그 러나 그를 말려 죽이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앤슨은 연락이 없었다. 백악관에 취재를 갔던 짐은 으레 듣곤 하는 대통령의 멘트에 지루함 을 느끼고 먼저 빠져 나왔다. 그는 동료인 빅과 함께 정부의 무능력 함에 대해 한심함을 토로했다. "으이구, 양자 컴을 잃은 것으로도 모자라 전쟁까지 벌이다니, 정말 카네기 정권이 미치지 이상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제나르 의원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절대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야. 어찌 되었든 간에 재선 때 볼만한 일이 벌어지겠군." 웬만한 의식이 있는 자들이라면 이번 전쟁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작년 FIRE-3 요격 테스트 때 맥의 성능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었다. 게다가 한국에는 유전이 있었다. 현실 적으로 한국을 이길 수 있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국 을 자극해 전쟁을 결심하다니? "하지만 좀 의외기는 해. 아무리 한국이 신흥강대국으로 발돋움했다 지만 일본과 중국, 그리고 미국의 삼연합 체제에 섣불리 먼저 도전 장을 내미는 건 좀 무리가 아닌가? 어쩌면 카네기 정권도 그들이 정 말 전쟁을 결심할 줄은 몰랐을 거야." "그건 카네기 정권을 옹호해주는 발언에 지나지 않아, 빅. 어찌 되 었든 간에 미국은 패배할 거야. 조만간 세계 초강대국이 될 한국과 동맹 관계를 이렇게 허무하게 망가뜨렸다는 것은 카네기 정권의 무 능함을 말해주는 증거에 불과해." "그래도 아직 우리나라와 한국이 직접적인 교전을 벌인 적은 한 번 도 없었으니 외교를 잘하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순 있지 않을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빅. 하지만 카네기 정권은 지금 박쥐처럼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단 말이야. 한국은 이것을 좋게 보지 않을 걸? 타이밍을 다 놓친 후에 뒤늦게 허겁지겁 나서봤자 미국이 볼 수 있 는 건 맥의 포구일 거라고." "여기야."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던 혜인은 세현이 들어서자 반가운 얼굴 로 손을 들었다. "오래 기다렸어?" 세현은 혜인의 맞은편에 앉으며 그렇게 물었다. "아니. 나도 방금 왔어." 그들은 간단한 먹거리를 시켰다. 분위기가 조금 어색했다.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세현이 결국 먼저 침묵을 깼다. "영화 대박 났다고 들었어. 일은 잘 되어가고 있니? 그러고 보니 이 제는 너도 명실공히 인기 여배우네?" "쑥스럽게 뭘 그런 이야기를 하고 그러니?" 세현은 색안경과 모자로 얼굴을 감춘 혜인을 주시하며 부드럽게 웃 었다. 콜라가 나오자 혜인은 얼른 빨대를 꽂아 몇 모금 마셨다. 이 따금씩 떨리는 손가락이 그녀의 초조함을 말해주었다. "있잖아. 나 저번에 본 거 말야." "그만." 혜인이 조심스럽게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자 세현은 가차없이 말을 잘랐다. "미안해. 그때 일에 대해선 나도 아무것도 설명해줄 수 없어. 그냥 잊어 줘. 아무것도 묻지 마. 이렇게 부탁할게." "하지만…. 응, 알았어." 망설이던 혜인은 세현의 단호한 얼굴을 보고 결국 승복했다. 하지만 불안함과 궁금증이 가시는 건 아니었다. 얼마 전 세현의 집에서 보 았던, 금발의 예안의 몸에서 이상한 빛이 나오던 그 광경이 밤이면 밤마다 그녀를 괴롭혔다. 어디선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는 느낌이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예안이가 너한테 먼저 연락한 적 있어?" "아니, 없어. 왜?" "아냐. 아무것도." 세현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어색해 하면서도 누구 하나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세현은 지난 몇 주간 내내 그 생각만을 해왔다. 앤슨의 진정한 목적 은 잘 모르지만, 그가 예안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어 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서까지 그 녀의 도망을 권고했던 것이었다. 그는 욱신거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지난 번 예안의 공격을 받았을 때 입은 고통의 잔해가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다. '뭐였을까? 도대체 뭐였을까 그건?' 원래 그는 「천사 프로젝트」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을 속박하는 운명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만 중요시했다. 그러다가 예안을 만났고, 알 수 없는 이질함을 지닌 그녀에게 그만 반해버렸 다. 하지만 신이 장난이라도 친 것인지, 그녀는 엔젤이었다. 그는 예안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었다. 하지 만 섣부르게 그녀를 도운답시고 나설 수도 없었다. 어머니가 재물의 운명을 타고났기에 어렸을 때부터 위원회의 감시를 받았던 자신이 수상한 짓을 한다면 무슨 위험이 닥칠지 몰랐다. "그런데 진우는 어떻게 됐어?" 혜인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세현의 눈이 의아함으로 커졌다. "진우? 갑자기 걔 얘기는 왜 꺼내?" "진우가 암에 걸린 거 알고 있었어. 지난 일 년간 나도 마음의 정리를 많이 했고, 이제 아무렇지 않게 그 애를 떠올릴 수 있어. 말해 줘. 진우는 어떻게 됐어?" 세현은 어리둥절했다. 자신이 알기로 진우는 작년 3월경에 사고로 죽었다. 그때 예안이 진우인 척 하며 메신저로 살아있다고 속이려 했지만 결국 들통나지 않았던가. "진우는 작년 3월 달에 사고로 죽었잖아?" "무슨 소리야? 내가 작년 여름에 진우를 만났는데? 자기 암이니까 이제 잊어달라고 그랬단 말이야." "뭐?" 세현은 불길함을 느꼈다. "분명히 진우를 만났어? 틀림없이 진우였어?" "응…." 혜인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얼마 전부터 품어왔던 의심이 이제 거의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전까지 자신 이 알고 있었던 게 정말 진실이었는지 믿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도사린다는 사실이 세현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 다. 지난 시간 동안 그는 어떻게 해서 예안이 진우를 알고 있었는 지, 그리고 진우와 오랫동안 사귀던 사이였다는 등의 거짓말을 했었 는지 그 이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예안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레이온이 탄생시킨 복제인간이었다. 지극히 범인인 진우와 그런 사이라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애당초 없 는 것이다. 아 그리고 말입니다. 제 친구 중에서 건전한 미소녀 그림 콜렉팅을 취 미로 하는 녀석이 있습니다. 녀석에게서 받은 그림들을 훑어보던 중 아상의 여주인공인 유서운의 이미지(제가 생각한)와 대단히 흡사한 이미지를 찾아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이미지보다는 다소 어려 보 이지만 정말 흡사하더군요. 놀랬더랬습니다.-_-; 그러니까 케이와 갓 첫날밤을 마치고 난 뒤의 조금 성숙해진 그 이 미지(제가 생각한)가 바로 저거라니까요.(도주) ps : 나중에 일러스트 그리는 법을 배우면 제가 직접 그려보겠습니 다. 한 십 년 후쯤예요.(다시 도주)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01 회] 날 짜 2004-06-30 조회 / 추천 2457 / 45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달콤한 유혹 춘식은 병실 침대에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현장 리포터의 긴박한 목소리가 생동감 있게 사태를 전달해주고 있었다. 제3함대는 단 한 발의 미사일도 사용하지 않고 여태껏 백여 척에 가까운 일본 군함을 격침시켰다. 그 중에는 엘가와급 항모도 한 척 끼어 있었다. 실로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이대로만 승승장구한다면 일본을 우리나라 식민지도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겠습니다." 옆 침대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이병원 교수가 농담조로 말했다. 그 는 CIA와 몸싸움을 벌이다가 한 팔과 두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탕 해 춘식과 같은 병실에 입원했다. "제 입장에서는 그저 모두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양자 컴을 손에 넣 으면 우리 회사가 당장에 글로벌 기업이 될 수 있다고 제 상관에게 큰소리를 땅땅 쳐놨는데, 일이 이 지경이 돼버렸습니다." "상관이요? 대주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아닙니다." 춘식은 멋쩍어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예안에 관한 것은 다른 사람들 에게 절대 비밀이었다. "그나저나 맥은 정말 잘 싸우는군요. 제가 알기로 웬만한 전투기 조 종하는 데만도 4, 5년은 훈련해야 한다는데, 박재형 대령이라고 했 나요? 그 군인은 정말 우수한 군인 같군요. 훈련한지 일 년도 채 안 됐을 텐데 저렇게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비밀이 있습니다." 이병원 교수는 키득키득 웃으며 소리 죽여 말했다. "지금 맥을 조종하는 사람은 아마도 박재형 대령이 아닐 겁니다." "네? 무슨 소리죠?" "말 그대로입니다. 믿을 만한 정보에 의하면 프랭크 안쏘니 유젤은 죽은 인물이 아니라고 합니다." 춘식은 하마터면 펄쩍 뛸 뻔했다. 이 교수는 그의 반응에 대단히 만 족스러워하며 계속 말했다.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전라도 지역에 건설 중인 대규모 국과연 구소를 아시죠? 거기에 프랭크 안쏘니 유젤 박사가 연구소장으로 취 임된다고 합니다." "사실입니까? 헛소문이 아니라요?" "믿을 만한 정보입니다. 원래 그 자리는 제 것이 되어야 할 자리였 으니까요." "아…." 춘식은 이 교수의 씁쓸한 표정을 보고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입 장에서 보자면 이건 자존심에 상처가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뭐, 괜찮습니다. 연구소장이 되어봤자 힘들게 일만 할 테고, 자유 시간도 별로 없고 할 테니까요. 그것보다는 차라리 지금처럼 학교에 서 자유분방하게 연구하는 게 훨씬 좋습니다. 학생들에게 낙제점수 주는 재미도 쏠쏠하구요." 진지한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멘트에 춘식은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낙제점수 주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다니, 당신은 정말 못된 선생이 군요." "하하, 뭐 인정합니다. 하지만 힘든 선생 생활, 그 재미라도 없으면 무슨 맛으로 보내겠습니까?" 그 둘은 한참을 낄낄거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크게 웃어젖 히다 보니 어느새 마음의 벽이 많이 허물어졌다. 사업관계에서 벗어 나 친분관계로 접어드는 과정은 언제 겪어도 유쾌하다. "정한수씨에게는 정말 안 되었군요." 춘식은 침울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녀석을 위한 복수가 지금 행해지고 있습니다. 녀석도 하늘 위에서 그나마 위안을 삼을 겁니다." "상상도 못했습니다. 미국이 가짜 양자 컴 설계도를 만들어서까지 한국과의 전쟁을 유도할 줄이야. 헌데 정말 이상하군요. 미국은 맥 을 깨부술 자신이라도 있는 걸까요?" 춘식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의문점을 끄집어낸 이 교수도 같이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미국의 행동에는 여러 가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여태껏 드 러난 결과로 보자면 미국은 가짜 양자 컴 사건을 터뜨리면서까지 한 국과의 전쟁을 갈구한 나라였다. 헌데 지금은 한국에 먼저 선전포고 까지 당한 처지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혹시 프랭크 안쏘니 유젤 박사나 그의 동료쯤 되는 사람이 미국에 도 맥에 버금가는 병기를 만들어준 게 아닐까요?" 춘식의 조심스런 추측에 이 교수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 저었다. "그건 억측에 가깝군요. 그렇다면 미국 성격상 진작에 세상만천하에 공개해서 온갖 자랑을 늘어놓았을 겁니다." "비밀무기는 숨김으로써 그 가치를 발하는 법이잖습니까?" "세기를 초월한 신병기라면 오히려 일찍 공개하는 게 위상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사실상 요즘 시대에 전쟁 한 번 벌인다는 게 보 통 쉬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자칫 전쟁에 써보지도 못하고 영원히 묵혀둘 바에야 일찌감찌 공개해버리는 편이 낫지요." 춘식은 조금 불안한, 그러면서도 의문투성이인 얼굴로 끄덕였다. 그 는 TV에 나오는 백악관의 자태를 바라보며 미국의 의도에 대해 곰곰 이 고찰했다. 이 교수가 끝을 맺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미국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예상치 못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아니면 카네기와 제나르의 세력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삽질한 건지 말입니다." 3주일 가량 맥이 거둔 전과는 실로 놀라웠다. 200척이 넘는 군함을 격침시켰고, 일본에 2척 밖에 없는 엘가와급 항모를 모두 물고기 밥 으로 만들었다. 맥이 요격한 미사일과 전투기의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거기다 전쟁 초기에 도쿄로 쳐들어가 총리관저에 위협용으로 포구를 들이댄 것은 상상 이상의 효과를 낳았다. 일본 국민들은 한국을 자 극한 것이 대단한 착각에서 빚어진 삽질이라는 것을 깨닫고 모든 원 망을 내각으로 돌렸다. 총리는 집무실에서 초조한 얼굴로 전화기만 노려보고 있었다. 바깥 에서는 취재를 원하는 기자들의 아우성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한국을 싹 쓸어버린 뒤 국민들 앞에 떵떵거리며 나서 고 싶었다. 그러나 맥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한 그것은 불가능했 다. 게다가 지금 와서 맥이 파괴된다 해도 이미 막대한 피해를 입은 일본이 한국을 누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왜 연락을 안 하는 거야! 도대체 왜!" 참다 못한 총리는 빽 소리를 내질렀다. 대담하게 두 국가의 원수를 납치한 그 실력을 믿고 전쟁을 벌였는데, 왜 맥이 설치고 다니도록 내버려두고 있단 말인가. 아니, 그것보다 도대체 왜 바람난 남자가 부인 피하듯이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총리는 튕겨지듯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비 서에게 앤슨이라는 남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연결시키지 말라는 명 령을 내렸으니 틀림없었다. "앤슨인가?" 「그렇습니다. 늦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니, 됐네. 자네에게도 사정이 있었겠지." 총리는 머리끝까지 솟구친 화를 간신히 억눌렀다. 어찌 되었든 간에 앤슨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본이 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걸 막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런데 우리 약속은 어찌 되었나? 자네가 맥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써주겠다고 한 약속 말일세." 「죄송합니다. 사정이 바뀌었습니다.」 "무슨 소린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맥의 능력이 훨씬 뛰어나서 말입니다. 그 래서 한동안은 맥의 진짜 성능을 체크하기 위해 마음껏 날뛰도록 내 버려두기로 결정했습니다. 총리 각하께는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 다만, 위에서 내린 결정이라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총리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자, 자네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건가! 맥을 봉쇄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대로 패전국이 되고 말아!"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닙니다.」 "자네는 일본이 한국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두고 보겠단 말인가?" 「그것도 우리가 알 바 아닙니다.」 "이 개자식! 감히 날 속이다니!" 총리의 얼굴에 분노가 이글거렸다. 비로소 앤슨에게 농락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구르며 그를 욕했다. 그러나 이미 전화는 끊어진 뒤였다. 총리는 얼굴이 시뻘개진 채 경호원과 기자들이 몸싸움을 벌이는 소 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마치 악마가 자신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기 위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처럼 들렸다. 총리는 좌절한 채 눈을 감아 버렸다. 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일 본의 암울한 미래와, 전국민의 비난을 받으며 사퇴하는 자신의 모습 이 그려졌다. 어쩌면 반국가 반역자로 몰려 국외 추방을 당할 수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엘리트의 길을 착실하게 다져가며 이 자리까지 올라온 자신이 그런 비참한 길로 내몰리는 것이다. "안 돼! 안 돼! 그것만은 안 돼!" 총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그러나 비참한 미래가 다가오 는 소리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경호원과 힘든 몸싸움 끝에 승 리한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한 노인이 초라한 안색으로 절망에 찬 신음을 내뱉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주석의 처지도 이와 별반 다르지는 않았으나, 다행히 중국은 한국에 직접적으로 압력을 가한 적이 없었다. 한국은 일본과 미국에만 선전 포고를 했기에 중국과는 여전히 우호관계였다. 얼마 전부터 앤슨에 대해 의심을 품어오던 주석은 그 날 저녁 일본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난 기사를 보고 자신의 추측을 확신으로 바꾸 었다. 앤슨은 처음부터 맥을 억제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 었다. '한국의 앞잡이인가?' 주석은 그 문제를 놓고 혼자 오랫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총 리, 앤슨과의 거래를 비밀로 하기 위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오랜 생각 끝에 주석은 결국 앤슨이 한국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는 간단하면서도 인정하기 어려운 결론을 내렸다. '교활하군.' 주석은 한국과 앤슨의 관계를 깊이 궁리하며 그렇게 매듭을 지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는 한국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할 여지가 얼마 든지 남아 있었다. 주석은 즉시 한국을 원거리 포위한 함대들을 본 국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대승을 거둔 것을 축하한다는 외교문서 를 한국 정부에 보냈다. 미국의 가짜 양자 컴 사건 등등 아직 해결되지 않은 구석들이 찜찜 했지만, 주석은 자신이 대략적으로 잡은 국제 흐름의 틀을 토대로 결론을 내린 뒤 그렇게 넘어갔다. 일본은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한국과 일본은 상호불가침 조약을 비 롯한 여러 가지 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한국에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약속했지만 한국은 거절했다. 돈이라면 넘치고도 남는 한국은 일본 의 시장 점유를 원했다. 앞으로 합법적으로 일본을 뜻대로 요리하겠 다는 의도였지만, 일본은 그것을 거절할 힘이 없었다. 호이즈미 총리를 비롯한 다수당은 전원 사퇴했다. 호이즈미 총리를 한국에 협조한 반역자라 주장하는 언론 세력은 날이 갈수록 그 힘이 커졌다. 힘든 재판이 되겠지만 총리는 결국 무죄 판결을 받을 것이 다. 그러나 나라를 말아먹은 무능력한 지도자라는 딱지는 이제 그의 비석까지 따라갈 것이다. 약 한 달 동안 집을 떠나 있었던 예안은 상기된 얼굴로 개선귀항하 는 이순신 항모 갑판으로 나왔다. 항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 를 들고 개선함대를 환호하고 있었다. 승무원들은 갑판으로 나와 경 례를 붙였다. 예안은 가슴 벅찬 그 광경을 갑판 한쪽에 숨어 지켜보 고 있었다. 그녀는 심하게 두근대는 가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대단히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지구인의 자격을 상실한 것은 아닐까, 에덴인에 완 전히 흡수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많이 시달렸었다. 하지만 그 녀는 지금 이 흥분을 통해 아직 자신은 예전 그대로라는 확신을 얻 을 수 있었다. '유빈이는 잘 있을까?' 아기가 무척이나 보고 싶어졌다. 집에 돌아가면 아기를 꼭 껴안고 자야지. 그동안 많이 컸을까? 분유는 잘 먹고 지냈을까? 아빠가 혹 시 이상한 의심을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을까? 그녀는 흥분으로 잔뜩 상기된 얼굴로 앞으로의 행복을 그렸다. 짐을 가지러 휴게실로 돌아간 그녀는 응접실에 누가 와 있는 느낌을 받았다. 안에 들어간 그녀는 영환이 앉아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 다. "어, 할아버지가 여기는 웬일이세요?" "웬일은. 개선장군을 만나고 직접 치하하러 왔지." 영환은 빙긋 미소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와 있던 국방부 장관이 박수를 짝짝 치며 앨범 크기의 함을 가져왔다. "흠. 비공식 훈장 수여라서 관중이 두 명밖에 없는 게 유감이로군." "예?" 국방부 장관의 말에 예안은 얼떨떨한 눈으로 그 둘을 번갈아 살폈 다. 영환이 넥타이를 고쳐 잡자 국방부 장관은 함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멋진 황금색의 훈장이 들어 있었다. 영환은 그것을 집어 경 건한 태도로 예안의 가슴께에 달아주었다. 예안은 멍한 얼굴로 서 있었다. "국가의 위기를 모른 척 않고 용감히 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낸 역전의 용사에게 이 훈장을 수여합니다. 대한민국 대통령 김영환." 모든 의례를 전부 생략한 간단한 훈장 수여식이 그렇게 끝났다. 국 방부 장관이 박수를 짝짝 쳤다. 구석에서 지켜보던 니콜라스가 감정 없는 얼굴로, 그렇지만 진심으로 기쁜 듯 박수를 쳐주었다. 쑥스러 운 얼굴로 머리를 긁적긁적 대던 예안은 퍼뜩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 다. "잠깐, 그거 「빅토리 빅토리」에 나오는 대사 아니에요? 표절이라 고요 그거!" "네가 이해하렴. 비공식 훈장 수여다 보니 내가 직접 멘트를 생각해 내야 했는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그런 것에는 영 꽝이라서 말이 야." 예안은 고개를 숙이고 작게 빈정거렸다. "대단히 아주 잘 나가는 동인지 작가분께서 하실 말씀이 아닌데요. 조회수가 얼마더라?" 영환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꾹 참았다. 나중에 기회가 오면 이 모든 원흉인 두오를 절대 가만 두지 않겠다고 그렇게 굳게 결심하며. 알다시피 저는 여러 가지 상식들에 대한 습득율이 대단히 저조합 니다. 그 점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어제 삼두표님이 공짜술자리가 있다고 불러서 갔습니다. 대한민국 의 가우리님을 그때 처음 뵈었습니다. 생각보다 날카로운 이미지를 가지신 분이더군요. 근데 정말이지 그 집 닭갈비 맛 없더군요. 삼두표님은 닭갈비가 첨 이라서 맛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시겠더랍니다. 들고 간 재생 1, 2, 3 권에 싸인까지 받아오고, 지하철이 끊겨서 택시비까지 얻어서(쿨록) 그렇게 겨우겨우 새벽에 돌아왔습니다. 술도 별로 안 마셨는데 멀 미 때문에 고생고생해가며 글 좀 쓰다가(어이;;;) 자고 일어나보니 우체부 아저씨가 소포를 갖다 주더군요. 재생 4권 싸인본이었습니다. v-_-v '친애하는 XX에게'라고 멋들어지게 싸인이 된 증정본이었습니다. 후훗. 부럽죠?(맞는다) 아상 수정도 오늘따라 유난히 잘 되고(근데 1편 밖에 못했잖아?) 증정본도 받고, 하여튼 여러 모로 기분 좋은 날이었습니다. 쿨럭.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02 회] 날 짜 2004-07-03 조회 / 추천 2520 / 55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달콤한 유혹 예안은 잔뜩 흥분한 채 집에 도착했다. 한 달만에 보는 집이었지만 몇 년은 족히 떠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나마 처음 3주간은 전화라 도 자주 할 수 있었지만 최근 일주일간은 너무 바빠서 그럴 틈도 없 었다. 그녀는 아기가 보고 싶어서 온몸이 근질거렸다. "아빠, 나 왔어!" 거실에서 낑낑대며 아기를 어르고 있던 정호는 얼굴이 환해져서 돌 아보았다. "이제 왔어? 재미는 있었니?" "응." 정호는 예안이 한 달 동안 해외 여행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행은커녕 장기간 패싸움 벌이러 떠났었다는 것을 알면 아 마 울지도 모른다. 아, 물론 일본에 쳐들어간 적도 있으니까 따지고 보면 해외 여행이라 박박 우길 건덕지는 있었다. "유빈이 그동안 잘 보살폈지? 어디 다치거나 아픈 거 없었지?" 예안은 아기를 와락 끌어안으며 정호를 쏘아보았다. 팔불출 어머니 의 살벌한 그 눈빛에 정호는 식은땀을 흘렸다. 실수로 라디오 떨어 뜨리는 바람에 애기 발등 찧은 적 있다는 게 탄로 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이 안 되었다. 아가야, 할아버지 살려줘야 하는 거 알 지? 모른 척 해야 한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그냥 같이 데리고 가던가 아니면 여행을 안 갔 으면 되는 거였잖아." "말이 되는 소릴 해. 하여튼 아빠가 그동안 잘 보살폈으리라 믿어. 에구구, 어디 보자, 우리 아들." 예안은 깔깔대며 아기를 꼭 껴안았다. 한 달만에 봐서 그런지 제법 묵직했고 머리털도 꽤 나 있었다. 아직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많이 어려 보였지만 태어날 때 그렇게 작았으니 이 정도는 당연했다. 그 녀는 뽀송뽀송한 아기의 뺨에 뽀뽀를 하며 사랑스럽다는 듯 연신 쓰 다듬었다. "아주 좋은 소식이 있어." "응? 뭔데?" "직접 보면 알아." 정호는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쿡쿡 웃었다. 예안은 어리둥절한 눈 으로 아기를 보듬다가 가냘픈 목소리를 듣고 그대로 굳었다. "어, 엄마…." 예안은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아기를 살폈 다. 아기는 까르르 웃으며 그 조그만 입을 귀엽게 오물거리고 있었 다. 정호는 흐뭇한 눈으로 다정한 두 모자를 바라보았다. "지, 지금 뭐라고 했니? 뭐라고 했어? 응?" "엄마." 조금 불완전한 발음이었지만 똑똑히 들렸다. 그녀는 다급히 다시 한 번 채근했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말해줄래?" "엄마. 엄마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눈꺼풀을 깜박거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 다. 정호가 지켜보는 게 괜히 부끄러워 그녀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리고 다시 품안의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아기는 어린 천 사처럼 해맑게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예안아. 봤니? 우리 아기가 말을 했어.' 그녀는 살짝 배여 나온 눈물을 닦았다. 비로소 아기를 잘 키웠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죽어서 저 세상에 가면 예안이를 만나서 자랑해야지. 나 혼자서 우리 아기 이렇게 건강하게 잘 키웠 다고. "엄마. 배고파." 아기는 그 조그만 손을 뻗어 엄마의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사랑스럽 다는 눈으로 귀여운 칭얼거림을 바라보던 예안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죽겠지? 하긴, 이 아빠도 네가 처음 말했을 때 너무 기뻐서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괜히 쑥스러움을 느낀 예안은 얼른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애가 말문을 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왜 '엄마 배고파' 야? 아빠 그동안 분유 제대로 먹이기나 했어?" 정호는 내용물이 가득 든 분유통을 가져와 흔들어 보였다. 하나 빼 고는 전부 뜯지 않은 것들이었다. "애가 안 먹는다고 자지러지게 울어 젖히는데 낸들 도리가 있니? 할 수 없이 배고프면 먹겠다 싶어서 그냥 냅둔지 어언 한 달이야." "뭐? 설마 한 달 동안 굶겼단 말야?" 예안은 할퀴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물었다. 정호는 당황한 땀을 뻘 뻘 흘리며 변명했다. "애가 입을 안 여는데 내가 무슨 재주로 퍼 먹이니? 그나마 좀 크기 라도 했다면 패서라도 먹이겠지만…." "뭐? 팬다고? 말이 되는 소릴 해! 이런 조그만 애가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아빠!"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 말이." 자식새끼 다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말을 너무 일찍 절감한 정호는 속 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이러다가 나중에 유빈이 놀이방 만든답시고 내 방까지 내놓으라고 소리치는 거 아닌가 몰라. "아아, 미안해 유빈아. 이 엄마가 너무 못나서 널 한 달 동안이나 굶겼구나. 그런데도 안 죽고 잘 버티다니, 넌 정말 참 용해." 예안은 얼른 단추를 풀고 젖을 물렸다. 뒤통수를 북북 긁으며 모자 의 행복한 그 교류 광경을 응시하던 정호는 이윽고 손을 내렸다. 그의 눈동자가 다소 냉정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이 아빠랑 이야기 해보지 않으련?" "응? 뭐가?" "네가 방금 말한 그거. 아기가 한 달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도 대체 어떻게 버틸 수 있는지 말이야." 예안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머리 속이 확 깬 듯한 기분이었다. '바, 바보 같이! 왜 그걸 생각 못한 거야!' 너무 당연하게 익숙해져 있다 보니 신경을 못 썼다. 유아기의 미성 숙한 ST기관으로도 한 달 정도는 생명을 연명할 수 있다는 사실. 그 녀는 그 사실을 지나치게 당연시한 나머지 정호도 그럴 거라 생각하 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특별히 새삼스런 일은 아니야.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네 몸은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했지? 아기도 그것과 마찬가지라서 기저귀가 필요 없다고 했었고." 정호는 머리를 북북 긁었다. "그렇게 긴장하지는 말거라. 아빠는 널 추궁하려는 게 아니야. 단지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 것 뿐이야." 예안은 다소 주눅이 든 얼굴로 그를 살폈다. 젖을 빨던 아기도 어정 쩡한 분위기를 느끼고 입을 멈췄다. 정호는 그만 쿡 웃어버렸다. 엄마와 아기가 동시에 주눅이 들어 자 신을 살피는 모습이 너무 우스웠다. "그동안 많이 걱정했지만 널 믿고 기다렸어.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아빠한테 비밀로 한다 생각하지 않니? 이제 그만 슬슬 아빠한테 털 어놓으면 안 될까?" "…." "아빠가 네 고민을 해결해주지 못할까봐 그래? 하지만 가족이니까 그런 건 얼마든지 말해줄 수 있잖니. 너와 고민을 공유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안 될까?" 예안은 반사적으로 아기를 꽉 껴안으며 눈을 감았다. 예전부터 어렴 풋이 상상했던 순간이 눈앞에 현실로 닥쳐왔다. 한 발만 더 내밀면 정호에게 모든 비밀을 털어놓고 홀가분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동안 자신이 겪은 일들을 정호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수만 가지의 방법들을 생각해두었다. 하지만 그것들 중 지금 기억나는 것 은 단 하나도 없었다. 망설임을 이겨낸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웠다. "…생각을 좀더 해볼게. 미안해, 아빠."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니?" "조금만, 며칠만 더 생각해볼게." 이제 어느 정도 결심이 선 것인가. 정호는 가만히 끄덕였다. "알았어. 아빠는 우리 딸 믿어." "…응." 자연스럽게 자신을 딸로 받아들이는 정호의 태도에 새삼 위화감을 느낀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정호는 편히 쉬라고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아 기를 쓰다듬던 그녀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선 그녀는 침대 에 털썩 주저앉으며 푸하 숨을 뱉었다.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자 몸 이 노곤해졌다. "엄청 쫄았네. 에휴, 그나저나 이제 진짜 아빠한테 말해야 하나?" "쫄았네가 뭐야?" 예안은 퍼뜩 놀라 품안의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와, 유빈이 말 잘 하네?" "말 잘 해?" "응. 잘 해. 아주 잘 해." "에헤헤, 유빈이 말 잘 한다." "아유, 귀여워. 엄마가 뽀뽀해줄게." "뽀뽀, 뽀뽀." 조금 어눌했지만 또박또박 따라하려 애쓰는 게 무척 기특하고 귀여 웠다. 예안은 유빈을 꽉 끌어안으며 이마에 입술을 댔다. 유빈은 그 작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조그마한 아기의 체온을 뺨으로 감싸며 그녀는 몹시 행복해했다. "한 달이나 맘마 못 먹어서 배고팠지?" "한 달이 뭐야?" "응. 유빈이하고 엄마가 떨어져 있던 만큼." "엄마. 유빈이 떠나지 마." "알았어. 이제 누가 뭐라고 해도 안 떠나. 우리 아들 곁에 꼭 붙어 있을 거야. 유빈이도 좋지?" "응. 좋아." 대화가 점점 유치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지만 이해해주기 바란다. 쓰 고 있는 작자는 지켜보는 여러분들보다 수백 배는 더 괴로워하고 있 을 것이다. 닭살.;;;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03 회] 날 짜 2004-07-04 조회 / 추천 2555 / 38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달콤한 유혹 니콜라스는 밤이슬이 내려앉은 정원을 쓸쓸히 거닐었다. 심정이 무 척 복잡했다. 낮에 보았던 그 광경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예안은 아이를 너무 아낀다. 한때 그는 그것을 몹시 질투했었다. 아 니, 지금도 질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부르르 떨리는 자 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타오르는 질투를 잠재웠다. 집안에서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정호와 예안은 하 루종일 아기에게 이것저것 말을 시키며 질리지도 않는다는 듯 그렇 게 놀고 있었다. 그 안에 자신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자신은 그 들과 가족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일이 지겨워졌다. 예안을 보호하면서 그녀의 보디가드 로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오늘처럼 싫었던 적이 없었다. 이제는 그녀의 가족이 되어 행복하고 떳떳하게 살고 싶었다. "응?" 인기척을 느낀 그는 총을 빼들었다. 그는 소리나지 않게 살금살금 대문을 향해 다가갔다. '거봐. 내가 결국 올 거라고 말했잖아.' 그는 속으로 작게 투덜거리며 문 옆에 몸을 숨기고 기다렸다. 안쪽 을 살피던 인물은 이윽고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니콜라스는 바 람같이 뛰쳐나와 그의 팔을 꺾고 총을 겨누었다. "움직이면 쏜다. 가만히 있어." 니콜라스는 으슥한 골목으로 그를 끌고 갔다. 반항 않고 순순히 끌 려온 걸 신기해하며 그의 얼굴을 확인한 니콜라스는 너무 놀라 하마 터면 총을 떨어뜨릴 뻔했다. "다, 당신이 여기를 왜…?" "아프잖아 이거." 세현은 얼굴을 찡그리며 팔을 주물렀다. 니콜라스는 어이없음과 놀 람, 그리고 반가움이 교차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정신 차려, 니콜라스. 이 사람은 누나의 적이야.' 마비될 뻔한 이성을 간신히 다잡은 니콜라스는 세현의 이마에 똑바 로 총을 겨누었다. "여긴 무슨 일로 왔죠? 누나를 납치하러 온 건가요?" "아니야. 내가 왜 친구를 납치하겠어?" "웃기지 말아요. 당신이 누나의 적이라는 거 다 알고 있어요." 어두운 공기 아래 드러난 총신이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세현은 니 콜라스의 살의가 거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 어린 소년은 예 안을 위해서라면 진심으로 자신을 죽일 의도가 있는 것이다. 고개를 숙인 세현과 그에게 총을 겨눈 니콜라스. 차가운 밤바람이 그 둘의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흔들림 없는 그 구도는 차 라리 멋진 그림이라 느껴질 정도로 무게가 있었다. "복잡한 심정이다." 세현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니콜라스는 흠칫한 나머지 하 마터면 총을 거둘 뻔했다. 낯설지 않은 어두운 심연이 세현의 눈동 자에서 빛나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흔들리는 눈으로 세현을 주시했다. 그를 겨눈 총신의 차 가움을 통해 비로소 그와 자신이 적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할 수 있어. 난 할 수 있어.' 그는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상대가 아무리 예전에 미치도록 좋아했 던 철학가라 할지라도, 누나의 적인 이상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게 아닌가. "정말 복잡한 심정이야." 세현은 니콜라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는 총을 겁내지 않았다. "설마 네가 나에게 총을 겨눌 줄은 몰랐어." "그때 나는 당신이 적인 줄 몰랐어요." "그런 의미가 아니야. 다만…."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걸까? 니콜라스는 세현이 어떤 표정을 짓 고 있는지 한 번 보고 싶었다. 미미하게 떨리는 머리카락만으로는 그의 눈동자가 어떤 빛을 띠고 있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 "옛날에, 만약 내가 널 찾게 된다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생각해 봤어. 하지만 도저히 할 말이 없더라. 어쨌든 널 불행하게 만든 것 은 우리 민족 모두의 잘못이니까." "거기까지. 난 내 과거를 별로 알고 싶지 않아요. 내가 엘리우스이 든 아니든 간에 당신들은 무조건 나의 적이에요." 세현은 등을 돌려 복잡한 심정이 담긴 눈으로 니콜라스를 응시했다. 흔들림 가득한 그 눈빛이 니콜라스를 혼란에 빠뜨렸다. 뭐야? 뭐야? 왜 저렇게 날 보는 거야? 도대체 이유가 뭐야? "이것만은 믿어 줘. 난 네 적이 아니야. 예안이의 적도 아니야." "그 말을 어떻게 믿으란 말…." 세현은 니콜라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니콜라스는 말을 채 잇지 못하 고 총을 떨어뜨렸다. "우리 이러지 말자. 이렇게 되려고 우리가 태어난 건 아니었잖아. 이렇게 되려고 우리가 만난 건 아니었잖아. 난 절대로 너희들의 적 이 아냐." 창백한 초췌함에 적셔진 세현의 눈동자가 마력 같은 빛을 내뿜었다. 그 속에 자리잡은 거대한 세계를 엿본 니콜라스는 끌리듯 그것을 향 해 한 발짝 내밀었다. 그러나 그 속에 완전히 흡수되기 전에 그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튕겨지듯 빠져 나왔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죠?" 세현을 거칠게 밀어낸 니콜라스는 재빨리 총을 주워 그를 겨누었다. 격렬한 운동을 한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힘없이 나동그라져 있던 세현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니콜라스를 우울한 눈으로 주시하던 그는 억지로 등을 돌렸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무척 힘들었다. "내가 너희들의 적이 아니라는 것만은 믿어 줘. 오늘은 이만 갈게." "내가 그대로 보낼 거라고 생각해요?" 니콜라스를 흘끗 돌아본 세현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발을 떼 어놓았다. 니콜라스는 총을 쥔 손을 부르르 떨며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그러나 마법에라도 홀린 듯 육체는 그것을 거부했다. 세현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나 꼼짝 않고 그렇게 서 있던 니콜라 스는 겨우 마비된 이성을 되찾았다. 잔뜩 화가 난 그는 건물 벽에 총을 힘껏 내던지며 답답한 고함을 내질렀다. "으아아아!!" 그는 주먹이 터져 피가 흐를 때까지 시멘트벽을 마구 쳐댔다. 하지 만 답답한 속은 풀리지 않았다. 시뻘개진 눈동자로 세현이 사라진 어둠 너머를 노려보던 그는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예안이, 여행에서 돌아왔다더라." 책과 씨름을 하고 있던 정우의 손이 멈칫했다. 수정은 책상에 과자 와 주스를 놓으며 계속 말했다. "한 번 가봐야 하지 않니?" 정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수정은 속으로 쿡쿡 웃었다. 초조함이 극에 달한 아들의 마음을 한 번씩 찔러보는 게 무척 재미있었다. "현우는 뭐래요?" 정우는 관심 없는 척 그렇게 물었다. "벌써부터 간다고 난리법석이더라. 하긴, 그동안 예안이가 너희들 자기 집에 못 오게 오죽 안달하지 않았니?" "매현동으로 이사갔다고 했죠? 엄마는 그 집에 가보셨어요?" "응. 정말 큰 집이더라. 우리집보다 더 커." 우울해진 정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예안 이 친척들에게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다고 알고 있었다. 예안은 단 지 집 한 채만 살 정도라 말했지만, 그들은 그보다 더 많이 받았을 거라 추측했다. 정우는 뒤바뀐 입장을 상기하며 한숨을 지었다. 뛰어난 미모와 막대 한 재산을 한꺼번에 쥔 예안에게 앞으로 많은 남자들이 꼬일 가능성 은 대단히 컸다. 비록 미혼모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쯤은 아무렇지 않게 여길 남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 자신도 그랬으니까. "나 지금 걔네 집에 갈 건데, 너도 같이 가지 않으련? 현우는 같이 간다고 방방 뛰고 있는데." 한숨을 짓던 정우는 책을 덮었다. "저도 갈게요." "나 왔어, 허니~"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혜민이 뛰어들며 예안을 와락 껴안았다. 예안 은 눈살을 조금 찌푸리면서도 그녀를 반겼다. "디게 더울 텐데 용케 왔네?" "그깟 더위쯤이야. 우리 조카 보고 싶어서 한달음에 달려왔지." "엄밀히 따지면 조카는 아니다." "뭐 어때? 그냥 편한 데로 부르는 게 서로에게 좋은 거지 뭐." 거실에서 자기 몸보다 큰 공을 갖고 놀며 아장아장 기고 있던 유빈 은 혜민을 보고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야한 누나다." 막 유빈을 껴안으려던 혜민은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녀는 당황 해서 삐질삐질 웃고 있는 예안을 노려보았다. "너, 도대체 쟤한테 무슨 말을 했길래 날 보자마자 대뜸 저런 소리 를 하는 거야?" "벼, 별 말 안 했어. 그, 그냥…." "그냥 뭐?" "야한 거 좋아하니까 물들지 않게 조심하라고 그랬지. 아예 세뇌를 가하던데." 니콜라스가 그렇게 말하며 끼어 들었다. 혜민은 눈을 샐쭉하게 뜨고 예안을 노려보았다. "정말 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아하하, 그게 말이지…." 예안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어쩔 줄 몰라하다가 슬그머니 유빈에게 다가갔다. 유빈은 까르르 웃으며 엄마에게 손을 뻗었다. 예안은 유 빈을 두 팔로 안아 올려 혜민에게 불쑥 내밀었다. "자, 뇌물." "…." 지 아기를 뇌물로 바치는 엄마나, 그렇다고 좋아서 웃는 아기나 참 거기서 거기다. 멋쩍게 웃는 예안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던 혜민은 유빈을 받아 품에 안았다. 그녀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했다. "역시 퀸이 낳은 아기는 달라도 뭐가 다르구나. 빽빽대는 다른 애들 이랑은 완전히 다르네. 아아, 나도 아기 하나 낳고 싶어." "넌 백 명을 낳아도 이런 귀여운 아기는 못 낳을 걸?" "말이 되는 소릴 해. 백 명 낳기도 전에 내가 먼저 죽을 텐데." "훗. 부정은 안 하는구나." "…맞는 말이니 뭐. 내가 아기였을 때 장난 아니었다고 우리 부모님 이 그러셨거든." 혜민은 자신을 닮아 시도 때도 없이 빽빽거리는 아기를 상상하고 우 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너 같은 애기 둘만 낳으면 넌 잠도 못 자고 시달리다가 죽을 거다'라고 늘상 말하곤 했다. '쳇. 나처럼 얌전한 애가 어딨다고.' 혜민은 궁시렁거리며 유빈을 조금 높이 들어올렸다. "근데 처음에는 그렇게 작았는데 정말 빨리 큰다? 말도 디게 유창하 게 하고, 벌써부터 기기도 하고 말이야." "날 닮아서 똑똑해서 그래." "쳇. 푼수 같으니라고." 혜민은 조금 부러운 눈으로 유빈을 쓰다듬다가 예안에게 다시 넘겼 다. 유빈을 품에 꼭 끌어안는 예안의 얼굴은 자애가 가득했다. 흐뭇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운 눈으로 그들 모자를 바라보던 혜 민은 얼굴을 약간 굳히고 헛기침을 했다. 이제 조금 진지한 이야기 를 할 타이밍이었다. "근데 말이야. 너 정말 혼자서 유빈이 키울 거니?" "응? 무슨 소리야?" "내가 할 말은 아닌 거 알아. 하지만… 아무래도 아버지는 필요하지 않을까?" 예안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엄마의 기분이 가라앉은 걸 느 낀 아기도 움직임을 멈췄다. "네가 친척한테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은 건 알아. 글치만 아기는 돈 으로만 키울 수 있는 게 아니잖니?"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예안은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혜민은 조금 불안한 얼굴로 말을 가 다듬었다. "그러니까…." 때마침 울린 초인종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굳은 눈으로 그녀를 바 라보던 예안은 유빈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정우형네 왔나 보네. 문 열어주고 올게." 문을 열어주러 가는 예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혜민은 머리를 북북 긁었다. "아씨,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왜 말이 꼬이는 거야? 저 기집애, 사람 쫄게 만드는 건 또 어디서 배워 갖고. 에휴, 쟤 설득 못하면 스위스제 시계가 날아갈 텐데."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04 회] 날 짜 2004-07-08 조회 / 추천 2409 / 33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달콤한 유혹 예안은 혜민이 시커먼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나가서 문 을 열어주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네. 그럭저럭요. 형도 잘 지냈어? 현우 너도?" 예안은 정우들에게 손을 살짝 들어 인사했다. 예상대로 준우는 오지 않았다. "준우는 동아리 애들하고 바다로 바캉스 갔다더라." "그래?" 예안은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정우는 그녀가 아이를 낳기 전과는 정말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철없는 억하심 따위는 이제 완 전히 보이지 않았다. '형들 가족이 진우를 그렇게 만들었잖아! 난 형들 가족이 미워!' 예전에 그녀가 했던 말을 상기하며 정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들에게 마음을 완전히 열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열었 을 수도 있다. 바보 같은 준우 녀석. 그것도 모른 채 지쳐 나가떨어 지다니. "숙모. 오셨어요?" "응. 혜민이도 왔구나." "어, 오빠도 왔네? 난 현우만 올 줄 알았더니. 대딩 3년 차면 열심 히 공부해야 하는 거 아냐, 오빠?"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방학 숙제 안 해?" "미안하지만 우리 학교는 방학 숙제가 없다고. 그리고 난 예안이랑 아주 많이 친해서 여기에 자주 오는 편이라구. 뭐, 얘가 애 낳고 나 서는 거의 오지 않았지만." 니콜라스가 말없이 고개를 까딱함으로써 인사했다. 그와 그다지 친 하지 않았던 정우들은 조금 서먹한 얼굴로 인사를 나눴다. 혜민은 예안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깔깔거렸다. 은근히 부럽다는 시 선으로 혜민을 보던 정우의 눈빛이 아장아장 기고 있는 유빈에게 가 닿았다. 자기 몸집 만한 공을 굴리며 놀던 유빈은 까르르 웃음을 터 트렸다. 예안이 손을 내밀자 유빈은 엉금엉금 기어서 그녀의 품에 갔다. "유빈아, 할머니한테도 한 번 안겨 봐야지?" 수정이 손을 내밀자 유빈은 눈을 찌푸리며 경계했다. 예안은 유빈이 자신을 올려다보자 괜찮다고 끄덕였다. 수정은 유빈을 받아 안고 즐거워했다. "아이구, 많이 튼실해졌네. 전에 봤을 때는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더니." 현우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유빈을 보다 예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서일까. 눈부시게 날씬한 아름다움 위로 범 접하기 어려운 성숙함까지 덧씌워져 있었다. 그는 새삼 그녀와 자신 사이가 까마득하게 벌어졌음을 실감했다. 혜민은 준우 형제의 표정을 살피고 속으로 쿡쿡 웃었다. '아아 고민되네. 둘 중의 아무나 도와줘도 난 삼촌한테 시계를 받지 만 그래도 양심이 있지. 어떻게 한 명만 콕 집어서 밀어 줘?' 저들도 참 처량한 신세였다. 일 년 가까이 꿋꿋이 해바라기 해왔는 데 정작 그 상대가 이제는 관심도 보이지 않으니. "그런데 예안이 너 학교는 어떻게 할 거니? 이제 유빈이도 어느 정 도 컸으니 슬슬 생각하는 게 어때?" "에이, 괜찮아요. 나중에 천천히 가든가, 뭐 안 되면 그냥 안 가고 말지요." "그래요 숙모. 아직 얘는 시간 많이 남았다고요. 이제 겨우 18살밖 에 안 됐는데 무슨 벌써 대학이에요?" "그렇긴 하지만 미리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곤란하잖아?" 예안은 수정에게 유빈을 다시 건네 받았다. 엄마 품에 돌아온 아기 는 기분이 좋은 듯 해맑게 웃었다. "이건 어때? 탁아소나 가정부 같은 사람들이 정 그렇게 불안하다면 내가 유빈이 맡아줄까?" "네?" 예안은 조금 의외였다. 자신은 아직 생각지도 않은 문제를 수정이 신경 써줄 줄은 몰랐다. "요새 사회가 각박하다 뭐다 해서 탁아소 같은 걸 위험하게 느끼는 거잖니? 하긴, 나도 충분히 이해해. 얼마 전에도 어떤 유괴집단이 탁아소를 차려서 아이들을 손쉽게 몽땅 유괴해버렸으니까. 겁이 날 만도 하지." "그런 것도 있지만 전 아직 별로 학교 가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요? 일단은 우리 애기만 돌볼래요. 유빈이는 지금이 엄마가 제일 필요한 시기잖아요?" 수정은 흐뭇함과 안쓰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한창 멋 내고 싶고 돌 아다니고 싶을 나이에 아기만 돌보겠다는 의지가 기특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그 나이에 학교를 가지 않는다는 것은 그냥 두고 보기 걱 정되었다. "고등학교는 좀 무리지만, 그래도 대학교는 고등학교에 비해서 시간 이 많이 남아돌잖아? 너 작년에 수능도 잘 봤다고 들었는데, 올해 조금만 공부해서 일단 대학은 들어가렴. 애기는 내가 돌봐줄 테니 까." 예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말씀은 고맙지만 지금 당장은 그러고 싶지 않아요. 대학 2, 3년 늦 게 간다고 해서 뭐 특별히 나쁠 것도 없고요." "그래도 생각은 해 봐." "네. 알았어요." 자그마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유빈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당황한 모두의 시선이 유빈에게 쏠렸다. 예안은 놀라서 유빈을 꼭 끌어 안아주며 물었다. "왜 그래 유빈아? 배고프기라도 한 거니? 아니면 더워서 그래?" 유빈은 칭얼거리면서 손가락으로 수정을 가리켰다. "엄마. 할머니 가라고 해." "왜에?" "엄마하고 나 떼어놓잖아. 할머니 가." 예안은 조금 허탈했다. 그녀는 얼른 아기를 껴안고 몸을 일으켰다. 약간 무안한 나머지 얼굴이 빨개졌다. "젖먹일 시간이라서요. 조금 있다가 나올게요." 예안은 아기를 안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멀뚱멀뚱한 시선을 교환하 던 그들은 일제히 어이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혜민은 어깨를 으쓱하며 수정을 툭툭 쳤다. "미움 받으셨네요 숙모?"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던 수정은 참지 못하고 키득 웃음을 터트렸 다. "뭐야 이거? 내가 엄마와 아이 떼어놓으려는 악역이 된 거니?" "그렇다니까요. 미움 받았어요 미움. 내가 볼 때 유빈이 저놈은 지 혼자 엄마 독차지하고 능청 떨 놈이에요. 지금쯤 아마 지 엄마 품에 꼭 안겨서는 '할머니 미워 나빠 무서워' 이렇게 이간질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고요." 혜민의 말을 들은 정우는 다음 번에는 애기가 좋아할 만한 장난감을 사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우는 유빈이 또래의 아기들이 좋아할 만 한 것들이 뭐가 있을지 조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시 뭐든지 뇌물 이 빠지면 안 되는 것이다. "근데 아기가 말 정말 유창하게 잘 한다. 다른 애들보다 말은 좀 늦 게 하는 감이 없지 않았는데, 한 번 말문 트니까 장난 아닌데?" "그래봐야 혀 꼬부라진 소리가 어디 가요? 전 아직도 엄마말고는 알 아듣기가 힘들어요." 혜민은 키득 웃으며 예안을 따라가기 위해 일어났다. 그녀는 올라가 기 전에 정우 형제들에게 살짝 속삭였다. "잘들 해 봐. 투지를 잃지 말고. 오케이?" 정우 형제는 조금 못마땅한 눈으로 혜민의 뒷모습을 보았다. 저 불 여우 같은 게 또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을까? 이층에 올라간 혜민은 예안의 방에 들어가기 앞서 문에 귀를 댔다. 방안의 대화가 그럭저럭 잘 들렸다. "할머니 미워." "응. 그래그래. 엄마도 미워." "할머니 나빠." "맞아. 엄마도 글케 생각해." "할머니 무서워. 가라고 해." "알았어, 알았어. 다음부터는 오지 말라고 할게." 예상대로 방안에서는 유빈이 어눌한 발음으로 수정을 욕하고 있었 다. 순진한 엄마는 지 애기가 세상에서 젤 착한 줄 알고 그저 맞장 구만 쳐주고 있을 게다. 혜민은 머리를 북북 긁으며, 도대체 저 어린 녀석이 어디서 사람 뒷 다마 까는 법을 배웠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요즘 애들은 참 조숙하단 말이야. 나는 세 살이 넘도록 남을 욕하 지 않았다고 했는데 말이야.' 머리를 쥐어뜯으며 '누가 가르쳤을까?'를 고민하던 혜민은 궁리하는 걸 포기했다. "에잇, 인간은 원래 발전하는 동물이니까 유빈이가 나보다 일 년 앞 서가는 것쯤이야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지 뭐. 어차피 순해빠 진 것보다는 사악한 게 세상 살아가는데 더 편하니까." 손잡이를 잡으려던 그녀는 멈칫했다. 아래에서 올라온 니콜라스가 맞은편 방에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야, 성주야." "응? 왜?" "네가 가르쳤지? 다 알아." "…?" "발뺌할 생각하지 마. 이 집안에서 유빈이한테 저런 거 가르칠 사람 은 너 밖에 없다고. 쯧쯧쯧, 나중에 예안이가 너 때문에 애기 교육 다 망가졌다고 땅을 치고 후회할 거야." 혜민은 혀를 쯧쯧 차며 예안의 방으로 들어갔다. 니콜라스는 어리둥 절한 얼굴로 그녀를 보다가 머리를 긁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뭐야. 아직도 욕구 불만인가?"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05 회] 날 짜 2004-07-10 조회 / 추천 2216 / 26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달콤한 유혹 "들어가도 돼?" 예안이 들어오라고 하자 혜민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예상한 대로 유빈은 지 엄마 품에 꼭 안겨서 칭얼거리고 있었다. 혜민은 팔짱을 끼고 투덜거렸다. "귀여운 애라는 거 다 취소야. 사악해." "?" 예안은 어리둥절했다. 혜민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예안의 옆에 앉았 다. "서유빈. 너 솔직히 말해 봐." 유빈은 어눌한 발음으로 물었다. "응? 왜 그래, 야한 누나?" 혜민의 이마에 힘줄이 삐죽 돋았다. "바로 그거라고 그거! 너 나 갈굴려고 언어 실력을 초고속으로 발달 시키는 거지? 어린애 주제에 왜 그렇게 말을 잘 하냐고! 지금 다들 너보고 뭐라는 줄 알아? 말도 안 되게 말을 너무 잘한다고 한다고!" 유빈은 손가락을 물고 갸웃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 다. 뒤로 넘어갈 정도로 깜찍한 포즈였지만 혜민은 거기에 속아넘어 가지 않았다. 저 놈은 니콜라스의 악영향을 받은 사탄의 아기가 틀 림없었다. "엄마. 야한 누나 뭐라고 말해?" 뭐라고 말하는 거냐고 묻는 건가 보다. 예안은 웃음 띤 얼굴로 설명 해주었다. "우리 유빈이가 말 너무 빨리 배운다고 부러워하는 거야. 야한 누나 는 우리 유빈이만할 때 말을 너무 늦게 배웠거든." "아하하, 야한 누나는 바보다." "그래. 야한 누나는 바보야." 아주 엄마와 아이가 손발이 척척 맞아서 사람을 갈구고 있구만. 혈 압이 팍팍 끓고 있던 혜민은 끓는 한숨을 토해냈다. 그래, 마음씨 착하고 예쁜 내가 져주지 않으면 누가 져주겠어. "니콜라스가 애를 버려놓은 게 틀림없어." "무슨 소리야? 우리 유빈이가 버리긴 뭘 버렸다고 그래? 얼마나 착 하고 예쁜데." "지 엄마 눈에는 천사겠지." 혜민은 아기를 낳는 것은 한참 뒤로 미뤄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 전에 결혼생각부터 하시지?) 자신의 주변에는 니콜라스처럼 어 린 아이의 인성을 비뚤어지게 만들 폭탄들이 너무 많이 도사리고 있 었다. 사악하기 그지없는 친구들로부터 시작하여 친척, 그리고 자신 의 부모까지 전부 다 적이었다. 유빈이 예안의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알았다는 듯 끄덕이며 옷을 벗어 젖을 물려주었다. 혜민은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자애에 가득 차 있는 예안 의 얼굴. 몇 달간 보지 못한 사이에 그녀는 자신보다 훨씬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나도 그냥 빨리 애나 하나 낳아볼까?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낳는 게 아무래도 좋겠지?' 혜민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가 지워버렸다. 애가 애를 낳는다고 해서 어른이 된다는 보장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그러니까 결혼 생 각부터 하시지?) "젖을 먹이는 거 어떤 느낌이야?" "응?" 의외의 질문을 받은 예안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글쎄. 아주 행복한 기분이지." "행복? 네 몸의 영양분을 빼앗기는데 그게 어째서 행복한 기분이 니?" 예안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넌 무슨 생각하는 게 그 모양이야? 빼앗기는 게 아니라 먹이는 거 라고, 먹이는 거! 애기가 무슨 기생충이니? 영양분을 빼앗긴다 어쩐 다 하게?" "뭐 그게 그거잖아. 퍼먹이는 거나 빼앗기는 거나." 혜민은 머리를 북북 긁었다. 이윽고 그녀는 은근한 미소를 띠며 물 었다. "그런데 저번에 현우랑 데이트한 건 잘 됐어?" "데이트?" 예안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가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현우가 자 기 생일날 같이 쇼핑하러 가자고 애걸복걸한 것을 말하는 모양이었 다. "그냥 같이 돌아다니면서 옷이나 몇 벌 사고 그랬어. 근데 그건 왜?" "별일은 없었어? 예를 들면 현우가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갔다거나, 기가 막힌 선물을 했다거나?" 예안은 알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이 사악한 사촌은 지금 무슨 꿍수를 부리는 게 틀림없었다. "그런 거 없었어. 그리고 있어도 내가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 걸?" "왜? 현우 정도면 멋진 신랑감이잖아. 너도 언제까지나 혼자 살 생 각은 없지 않아? 솔직히 현우가 너보다 한 살 어리기는 해도 빠지는 건 없잖아? 키가 작아, 인물이 못생겼어, 아니면 머리가 멍청해? 집 안도 빵빵하고, 그만하면 충분히 일등 신랑감이지." "글쎄에. 난 별로 결혼 같은 거 생각 없는데. 그리고 너, 내 나이를 한 번 생각해 봐. 내가 지금 신랑감 찾아 허겁지겁할 나이니?" 그래도 아까보다는 좀 누그러진 태도였다. 혜민은 기회다 싶어 계속 몰아붙였다. "그럼 있잖아. 정우 오빠랑 비교해서는 어때?" "뭐?" 예안은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비교고 뭐고 할 것 없어. 난 연애는 생각도 없다니까." "그래도 한 번 냉철하게 비교해 봐. 만약에 어쩔 수 없이 꼭 골라야 겠다면 그 둘 중 누구를 고를 거야?" "음…." 예안은 잠시 고민했다. 과연 둘 중 누가 더 괜찮을까? '정우 형은 준수한 멋이 있고, 그리고 또 숙성된 맛이 있겠지? 현우 는 같이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고, 그리고 좀 신선하고 파닥파닥 튀 는 면도 있고….' 무슨 생선 품평회 하나 보다, 이 인간. '그래도 정우 형이 나이가 좀 있으니까 괜찮겠지? 아무래도 남자는 나이가 좀 있어야 한… 아니야! 남자는 나이가 적은 게 좋아. 아무래 도 힘을 팍팍 쓸 수 있잖아? 엥? 근데 내가 왜 이따위 생각이나 하 는 거야?" 내가 이 따위 생각이나 하다니. 예안은 얼굴을 팍 붉히고 혜민을 노 려보았다. 혜민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 처럼 히죽 웃었다. 사악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너 지금 현우가 젊으니까 힘이 더 좋겠다 뭐 그런 생각했지?" 귀신이다 이 녀석. "에헤헤, 다른 사람들한테 절대 말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죽일 듯 이 노려보지 마." "정말이지?" 예안은 아기를 안은 채로 혜민을 노려보았다. 그게 남들에게 알려지 면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다. "정말이고 말고. 내가 언제 약속 어기는 거 봤니?" "…알았어. 일단은 믿을게." "저기 있잖아. 너도 해수욕장 갈 거지?" 느닷없는 제안에 예안은 어리둥절했다. "해수욕장? 뭔 해수욕장?" "우리 가족들은 매년 공동으로 피서나 피한 가잖아. 너 작년에 둘 다 안 간 거 기억 안 나? 그래서 올해는 큰아버지들이 너 꼭 데려간 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어." 예안은 비로소 남자였을 때도 그랬던 적이 있음을 기억해냈다. 물론 그녀는 남자였을 때 열 살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같이 여행 간 적이 없었다. 작년에도 임신과 출산 때문에 여행을 가지 않았다. 예안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별로 가기 싫어." "왜에? 내가 너랑 같이 해수욕장 가려고 얼마나 많이 기대했는지 알 아? 나 지난 겨울부터 계속 헬스장 다녔다고." 혜민은 벌떡 일어나 모델처럼 포즈를 잡으며 군살을 뺀 몸매를 자랑 했다. 감흥 없는 얼굴로 그녀를 훑어보던 예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차피 유빈이 때문이 제대로 놀지도 못할 텐데, 괜히 덥기만 하게 그런 데 가서 뭐하니? 그냥 난 올해도 집에 있을래." 실은 다른 남자들에게 유젤의 몸매를 보여주기 싫어서였다. 그녀의 독점욕은 출산 이후로 한층 더 깊어져 있었다. "그러지 말고 가자. 응? 나 이틀 전부터 계속 밥도 굶고 있단 말 야." "이틀 전부터? 아니, 해수욕장으로 언제 떠나는데?" "열흘 후." 예안은 할 말을 잃었다. 비키니 한 번 입어보자고 12일을 단식투쟁 한단 말인가? "너도 여자라면 알 거 아냐! 그 짧은 여름 동안 비키니 한 번 입어 보려고 일 년 내내 몸매 가꾸는 거! 넌 별로 노력도 안 하고 그런 좋은 몸매를 가졌으면서 감히 그런 특권을 포기하겠다는 거야? 그것 은 내가 용서 못해!"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06 회] 날 짜 2004-07-10 조회 / 추천 2215 / 28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달콤한 유혹 예안은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내 몸매가 좋은 건 나도 알지만, 그렇다고 내가 해수욕장에 가야 할 이유는 없잖아?" 혜민은 게거품을 물고 쓰러질 뻔했다. 이 녀석, 고단수다! 그 와중 에도 염장 신공을 발휘하다니. "젠장, 젠장. 어떻게 애까지 낳은 아줌마하고 힘들게 헬스해서 몸매 가꾼 나하고 비슷할 수가 있냐고. 이건 신의 농간이야, 농간." 혜민은 투덜거렸다. 지난 몇 개월 간의 고행과 이틀 동안 단식 모드 로 접어든 게 억울하기만 했다. 유빈은 화가 난 그녀의 얼굴을 보고 까르르 웃었다. 어린 아이의 눈 에는 그저 모든 게 재밌어 보이나 보다. 혜민은 유빈을 보고 표정을 조금 풀었다. 사악하다 뭐다 라고 투덜 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는 귀여운 천사인 것이다. "큰아버지하고 우리 아버지는 사실 너를 좀 어려워하셔." "왜?" "그렇잖아. 사실 따지고 보면 큰아버지하고 우리 아버지가 제일 큰 아버지, 그러니까 유빈이 할아버지 희생으로 이렇게 된 거니까. 그 런데 유빈이가 태아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너한테 해준 게 없잖아. 너한테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 예안은 조금 의외라는 눈으로 혜민을 보았다. '얘가 이런 생각을 다 했나?' 예안은 새삼 혜민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의 혜민은 정 호가 희생한 것에 대해서 '그게 뭐 어때서?'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아니면 내가 변했나?' 어쩌면 혜민은 원래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남자였을 때의 자신이 곡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씁쓸 히 웃음을 머금었다. 엄마의 기분이 우울한 걸 알아채고 아기가 손을 꼭 잡았다. 예안은 순수한 눈망울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유빈의 자그마한 손을 꼭 잡아 주며 빙긋이 웃어주었다. 유빈도 기분이 좋은 듯 헤실거렸다. 혜민은 말을 하다 말고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들 모자는 다 른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견고한 막을 두르고 있었다. 새삼 부 러워졌다. '저게 혈육의 정이라는 걸까? 근데 왜 나는 우리 부모님한테 그런 걸 별로 못 느끼지?' 혜민은 엄마한테 활짝 웃어주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했다. 십중팔 구는 '용돈 떨어졌니?' 이럴 것이다. '에잇. 나 그렇게 막 나가는 딸내미 아닌데 왜 엄마는 날 그렇게 몰 아붙이는지 모르겠어.' 하긴 자신에게 잘못이 있긴 했다. 뭔가 바라는 게 있을 때만 귀여운 딸인 양 애교를 부렸으니, 엄마가 그렇게 나온다 해도 할 말은 없는 것이다. "하여튼 갈 거지? 응? 갈 거지?" "싫어. 안 갈 거야." "너 자꾸 그러면 정우 오빠하고 현우 놓고 야한 상상했다는 거 다 말해버릴 거야?" 예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혜민은 승기를 잡았다는 듯 의기양양해 했다. "나도 네 이미지를 와장창 깨부수고 싶지는 않거든? 세상에나, 순진 한 줄 알았던 애가 그런 야한 상상이나 할 줄 누가 알았겠어? 하긴,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우리 중에 가장 먼저 사고 친 애니 그럴 수도 있지. 원래는 내가 첫 스타트를 끊으려 했다고!" "…원하는 게 뭐야?" "말했잖아. 같이 해수욕장 가는 거. 정말 별거 아니지?" 예안은 끄응 하며 잠시 생각했다. 혜민은 태도를 바꾸고 애걸하듯 매달렸다. "그렇게 빼지만 말고 같이 가자. 응? 친척 중에서 나만 여자라서 재 미도 없고 또 위험하단 말야. 사촌 오빠들하고 사촌 동생은 어떻게 하면 내 수영복을 벗길까, 어떻게 하면 실수로 가장해서 내 가슴 한 번 만져볼까 그 생각밖에 안 한단 말이야." "설마." 예안은 지긋한 눈으로 혜민을 살짝 노려보았다. 지난 세월 동안 가 족 바캉스에서 혜민이 어떤 악행을 벌였는지는 절실하게 잘 알고 있 었다. '어디서 사람을 속이려 들어?' 그래도 그런 거짓말까지 써가며 매달리는 게 귀엽긴 했다. 끙끙거리 던 예안은 유빈의 볼을 쿡 꼬집으며 물었다. "유빈아.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말없이 꿋꿋하게 젖만 빨고 있던 유빈은 눈알을 굴렸다. "잠깐만, 이거 좀 빼고 말해볼래? 응?" 예안은 유빈을 살살 달래며 젖꼭지를 빼려 했다. 유빈은 얼굴을 찡 그리며 가슴을 꽉 잡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억지로 뺐다가는 그냥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예안은 결국 포기했다. "침묵은 긍정이라잖아. 유빈이도 마음 같아서는 바닷가에 가고 싶은 거야. 엉큼한 녀석, 벌써부터 누나 비키니를 보고 싶어하다니." "…네가 그러니까 야한 누나 소리를 듣는 거야." 혜민은 발끈했다. "그 호칭은 네가 유빈이한테 가르쳐서 그렇게 된 거잖아! 순진한 애 기들은 주위에서 가르치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도 몰라! 애 엄마가 되가지고!" "…언제는 사악하다 뭐라더니, 이제는 순진이야?" 예안은 편한 대로 말을 바꾸는 그 재주 하나만큼은 참 부럽다고 투 덜거렸다. "갈 거지? 갈 거지? 갈 거지? "알았어, 알았어. 해수욕장 갈게. 간다, 가. 가면 되잖아. 이제 됐 지?" "진짜지? 나중에 말 바꾸기 없기다?" "내가 너야? 이랬다저랬다 하게?" 혜민은 눈을 샐쭉하게 뜨고 예안을 노려보았다. "내가 꼭 박쥐라도 되는 양 그렇게 말한다? 어쨌든 간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오빠들한테 전할게!" 예안이 미처 불러 세우기도 전에 혜민은 밖으로 나가버렸다. 계단을 쿵쾅거리며 뛰어내려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예안은 유빈의 볼을 살그머니 쓰다듬었다. 이제 배가 부른지 유빈은 나른한 표정으로 입을 떼고 헤죽거렸다. "유빈이도 바다 가고 싶어?" "바다가 뭐야?" "응. 큰 수영장 같은 거." "수영장은 뭐야?" "음… 그러니까 물이 많이 있어. 욕조 알지? 그것처럼 물을 받아놓 은 건데,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어." "나도 가고 싶어! 나도 갈래!" 유빈은 자그마한 팔로 엄마 가슴을 치면서 외쳤다. 조그만 아기가 어눌한 발음으로 외치는 게 참 귀여웠다. 예안은 깔깔 웃음으로 데 려가 준다고 말하며 유빈을 꼭 껴안고 뺨을 비볐다. '우리 유빈이 말 정말 유창하게 한다? 그치?'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말문 트는 속도는 다른 아기들과 별로 다를 것 없지 않았 어? 한 번 말문을 트면 그 뒤로는 빠르게 말을 배우는 거야? 원래 신인류는 그래?'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나저나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일본은 항복했지만 미국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였다. 그녀는 지금 잠깐 휴가를 나온 것이지 전쟁이 끝나 서 이렇게 탱자탱자 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원칙대로라면 전쟁 중에 군인에게 휴가를 주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같이 귀항한 다른 해군 승무원들은 지금 언제 출전 할지 모르는 처지이지 않습니까?' '시끄러. 나는 특별 대우라고. 그리고 난 군인이 아니야. 그냥 무료 AS로 잠시 파일럿 역할을 해주는 것뿐이라고.' 'AS라고 해서 소홀히 하면 소비자가 싫어합니다.' '괜찮아. 다른 대체품이 없으면 결국 소비자는 한 곳에만 몰리게 되 어 있다고.' '독과점의 폐해로군요. 정부의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겠는데요.' '지금은 그 정부가 소비자니 날 컨트롤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거 야.' 예안은 키득거리며 유빈을 쓰다듬었다.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아기는 그저 좋아서 히죽히죽 웃기만 했다. 평안한 어느 날의 오후였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07 회] 날 짜 2004-07-10 조회 / 추천 2408 / 38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달콤한 유혹 한국이 일본에게 항복 선언을 얻어냄에 따라 세계는 크게 요동쳤다. 한국 기업의 주가는 당장 큰 폭으로 껑충 뛰어올랐으며, 미국과 일 본의 주가는 대거 하락했다. 미국 정부는 애초에 의미 없는 전쟁을 시작했다는 국민들의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을 상대로 한 도발을 그치지 않았다. 혹자는 그것을 가리켜 카네기 정권의 막판 도박이라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전쟁을 반대하는 미국 시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양자 컴 퓨터 설계도를 빼앗겼으니 응당 앙갚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 력도 상당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한국의 부도덕함을 비난하던 세계 언론은 한국이 일본을 상대로 승 리한 순간 한 끗발 수그러들었다. 각 나라는 겉으로는 한국을 비난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먹을 수 있을까 심각 하게 고민했다. 거리는 한산했다. 예안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아기를 꼭 껴안은 채 묵묵히 걸었다. 행인 수가 조금 줄어들기는 했지만 대체로 평온한 분위기였다. 그만큼 한국이 이 전쟁을 게임처럼 수월하게 치르고 있 다는 표시였다. 예안은 약속장소로 들어섰다. 초조하게 앉아 있던 세정이 반갑게 그 녀를 맞았다. "이제 왔니? 덥지 않았어?" "뭐 그럭저럭요. 안녕하셨어요?" 예안은 세정에게 건성으로 인사하며 앉았다. '얘들은 왜 데리고 왔지?' 예안은 마리와 우성이 이 자리에 있는 게 탐탁하지 않았지만 내색하 지 않았다. "얘가 내 조카야, 누나?" 우성이 신기한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예안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 푸렸다. '내가 왜 네 누나냐?' 생각 같아서는 그렇게 쏘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라도 아기 앞에서 성격 나쁜 애처럼 굴 순 없었다. 우성은 예안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유빈만 계속 들여다보았다. 유빈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우성을 빤히 보다가 까 르르 하며 손을 내밀었다. 우성은 히죽 웃으며 자그마한 손을 맞잡 으려 했다. "유빈아, 많이 덥지?" 예안은 반사적으로 유빈을 끌어당겨 옆에 앉혔다. 유빈은 우성을 잊 어버리고 엄마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누웠다. 우성은 겸연쩍어했 다. "애기가 참 예쁘네. 애기 키우는 거 재미있니? 밤에 막 울고 그러지 는 않아?" 마리가 그렇게 말을 걸었다. "세상에 수월한 일이 어딨어. 그냥 힘들어도 내가 할 일이다 하고 하는 거지. 그리고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고, 또 즐거우니까." 세정은 흐뭇해했다. 의젓한 엄마 몫을 해내는 예안이 그저 예쁘고 기특하게만 보였다. 문득 진우가 살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났다. 조 금 눈물이 났지만 세정은 억지로 참았다. 괜히 청승맞게 우는 꼴을 보이기 싫었다. "며칠 후에 우리 가족들이 해수욕장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가지 않을 래? 사실 그 말 하고 싶어서 오늘 불렀거든." "겨우 그 말씀하시려고 이 더운 날씨에 부르셨어요? 차라리 전화로 하시지." 예안의 어조에는 가시가 없었다. "전화로 하면 넌 왠지 안 간다고 할 것 같아서." "직접 말한다 해서 내용이 달라지진 않지요." 세정은 입을 다물고 반사적으로 마리를 살폈다. 마리는 맡기라는 듯 미소지으며 말을 꺼냈다. "그렇게 빼지 말고 같이 가자. 우리 아빠 소유의 호텔이 하나 있거 든? 디게 시설도 좋고 편해. 그 해수욕장 물도 아주 깨끗하고 좋 아." "별로 생각 없어." 예안은 일부러 매몰차게 답했다. 세정에게 자꾸 약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엄마한테 마음을 열면 아빠가 서운해할 것이다. "호텔 지하에 플스6 게임장도 있어. 아직 한국에는 발매되지 않은 게임도 많아. 마이크로 카이져라든지, 데드 바디라든지 그런 것들 말이야." "…진짜?" 예안은 슬그머니 물었다.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는 걸 알아챈 마리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게임광은 어쩔 수 없다니까.' 마리는 그녀 자신도 게임광이기에, 게임광이 게임에 얼마나 강한 애 착을 보이는지 알았다. 한국에는 아직 발매되지 않은 게임들이 수두 룩하다면 안 가고는 못 배길 것이다. 좀 치사하기는 하지만 이게 가 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무슨 우리 가족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잖니? 그냥 네가 우리 가족에 편견을 좀 갖고 있는 듯 싶어서, 그걸 없애주고 싶은 것 뿐 이야. 그것도 안 되니?" "음…." 예안은 마음이 흔들렸다. 플스6 게임장, 미출시 게임, 게다가 공짜. 그 글자들이 눈앞에서 계속 아른거렸다. "…알았어요. 갈게요." 세정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마리와 우성도 마주보며 씩 웃었다. '미안 아빠. 게임만 하고 올게.' 예안은 속으로 정호에게 깊이 사과했다. 고작 게임에 아빠를 저버렸 지만 그래도 괜찮지? 아빠도 엄마랑 친하게 지내라고 늘 노래를 불 렀잖아? "근데 언제 가는 건데요? 저도 구일 후에 가족들끼리 해수욕장 가기 로 했는데." "에? 그럼 연달아 이중으로 가게? 피곤할 텐데?" "상관없어요. 어차피 학교도 안 다니고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까." 세정은 마리와 눈빛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마리가 알아서 하라는 듯 작게 끄덕였다. 세정은 안심하고 다시 말했다.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날짜를 정하렴. 어차피 이 여행은 널 위해 가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네가 편할 데로 해야지." "그럼 한 14일 후쯤으로 해요." "음. 그때쯤이면 방학이 끝날 타이밍은 아니고, 뭐 좀 늦기는 해도 괜찮을 것 같구나. 사람도 별로 없을 것 같고. 그렇게 하자." 예안은 다소 누그러진 얼굴로 끄덕였다. 그녀의 마음은 벌써부터 플 스6 게임장으로 달려가 있었다. 게임기가 박살날 때까지 퀘스트를 깨줘야지. 그동안 출산과 육아 때문에 게임을 도통 못해서 그녀는 굶주릴 대로 굶주린 상태였다. 세정은 예안이 마음을 한결 열은 듯 해서 안심했다. 그녀는 이번 여 행에서 예안의 마음을 완벽히 녹이리라 하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저기, 누나. 나 애기 한 번 만져 봐도 돼? 내 조카잖아." 예안은 우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우성은 차갑게 느껴지는 그 시선에 약간 움찔했다. 이윽고 예안은 표정을 풀고 유빈을 건넸다. "그래라. 울리지 않게 조심하고." "고마워." 우성은 자신의 조카가 신기한 듯 이리저리 살폈다. 세정은 감격한 손으로 아기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마리도 귀엽다고 꺄꺄거리며 장난감처럼 아기를 쓰다듬었다. 예안은 조금 우울한 눈으로 그 광경 을 바라보았다. 세정의 마음이 닿을 듯 느껴졌다. 슬픈 감격에 어쩔 줄 몰라하는 세 정의 기분이 잡힐 듯 눈에 보였다. "애기가 참 예쁘구나." 세정이 문득 예안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예안은 세정의 눈가에 어 린 물기를 보고 기분이 묘했다. 뭐라 말하고 싶은 듯 입이 간질간질 했다. 근데 말문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이런 걸 가리켜 욱했다고 하던가? "고마워. 이렇게 예쁜 손자를 낳아줘서." 뭔가가 가슴에서 울컥했다. 예안은 그 기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일 부러 표정을 차갑게 했다. "고마워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좋아서 낳은 거니까." "그래.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 애를 그렇게 좋아해 줘서…." 세정은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예안은 가슴이 너무 답답해 고개를 돌렸다. 카페 밖에서 기다리던 니콜라스가 그녀 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피식 웃어버렸다. 기분이 조금 나아 졌다. 세정에게 자신이 진우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 말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지 않다면 그것 또한 거짓말일 것이다. 예안은 자신이 진정으로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세정을 이해하 고 받아들이기를 원하는지, 그게 아니면 정호를 생각해서 세정과 완 전히 인연을 끊기를 원하는지. 입으로는 세정이 싫다 싫다 하면서 매번 져주는 척 만나주고, 또 여행도 같이 간다고 하는 흐지부지한 자신의 태도가 너무 싫었다. '확실히 내 마음을 알아봐야겠지.' 예안은 이번 여행에서 어떤 식으로든 결판을 꼭 내겠다고 굳게 다짐 했다. '에구구, 그런데 더블 트립 뛰려면 좀 힘들겠다. 안 그래도 언제 미 국하고 붙을지 모르는데 말야. 설마 한창 수영 중인데 갑자기 출동 하라고 하진 않겠지? 이건 만화가 아니라고.' 실탄 :...이건 만화는 아니지만 소설이야. 예안 :그래서요? 실탄 :뭐긴. 한창 재미있을 때 출동 명령이 날아오겠지. 오브젝트는 '사악한 악의 축 미국을 무찔러라!' 정도가 되겠네. ..그렇다는 겁니다.(긁적) 저 자신도 지금 놀라고 있습니다. 잠도 안 자고 밤샘해서 눈이 퀭 한테 글을 연달아 라이브로 3편이나 써서 올리다니요. 어헉.; 이틀 연달아 안 좋은 일만 있었는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싶은 마음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새벽의 언데드는 정화되기 위해 관으 로 기어들어가겠습니다. ps : 이것은 대체역사물류가 아닙니다. 주인공을 세계 최고로 만들 수는 있어도(이미 최고 아냐?;;), 한국을 세계 최고로 만들 일은 없을 거란 이야기입니다. 물론 앞서 말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한 국을 세계최강대국으로 성장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만. ..뭐 그렇다는 겁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08 회] 날 짜 2004-07-11 조회 / 추천 2504 / 35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달콤한 유혹 세정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예안의 옆에 니콜라스가 따라 붙었다. 그 는 여태껏 카페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했어?" "별거 아냐. 그냥 이주 후에 같이 바캉스나 가기로 했어." "누나는 유빈이 할머니 굉장히 싫어하지 않았어?" "글쎄. 싫어하기야 했지…." 예안은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더 이상 세정에 대한 미움이 자신의 마음 안에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섣불리 입 밖으 로 꺼내는 것은 두려웠다. "그냥 이번에 가서 확실히 정리하려고. 이렇게 흐지부지 끌고 다니 는 건 내 적성에 도저히 안 맞아." "혹시 먹이에 넘어간 것은 아니고?" 예안은 찔끔했다. "무, 무슨 소리야?" "난 또 누나가 그렇게 쉽게 넘어가길래 무슨 게임 같은 걸로 유혹이 라도 했나 하고 생각했거든. 말 들어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네." 예안은 숨이 넘어가는 얼굴로 가슴을 쓸어 내렸다. 니콜라스는 아무 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녀의 팔을 잡고 걸었다. 그녀는 새삼 질린 얼 굴로 그를 보았다. '이 녀석 엄청난 고수야. 모른 척 시치미를 떼며 사람 피 말리게 하 는 데 엄청 고수라고.' '제가 보기에는 정말 몰라서 그런 듯 싶습니다만?' '아니야. 단지 표정 연기가 워낙에 능해서 네가 몰라보는 것 뿐이 야. 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저건 아무리 봐도 소 뒷발로 쥐 잡은 건데요?' 맥은 내키지 않는 어조로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예안은 '지금까지 속았어, 속았어'라고 궁시렁거리면서 계속 걸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예안은 한 손으로 아기를 안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예안씨. 저 중현입니다.」 "아, 네. 무슨 일이세요?" 예안은 불현듯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이 판국에 중현이 전화가 의 미하는 건 딱 하나였다. 「죄송하지만 휴가는 끝입니다. 곧 미국하고 전투를 벌여야 하거든 요.」 "에엑? 벌써요?" 예안은 놀란 소리를 부르짖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지나가는 사 람들이 신기한 눈으로 보았지만 그녀는 자각하지 못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미국이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듯 협상테이블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요. 한 번 호된 맛을 보여주는 것도 괜찮을 듯 보입니다.」 "으윽." 예안은 신음을 삼켰다. 니콜라스는 팔짱을 끼고 그녀가 통화를 끝내 기만을 기다렸다. '뭔가 이상하군요. 일본이 형편없이 패배하고 항복한 마당에 미국이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도발하는 것입니까?' '몰라. 낸들 그걸 어찌 아냐.' '무슨 흉계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일단 주의하라고 말씀은 하세 요.' 예안은 폰에 대고 말했다. "중현 아저씨. 미국이 무슨 이상한 짓 꾸미고 있는 그런 낌새는 없 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싸워봤자 상대가 안 될 게 뻔한데…. 핵미사일도 맥한테는 소용없다구요." 「그래서 지금 정보원에서도 골머리를 썩고 있습니다. 하지만 특별 한 함정이 보이지 않기에 이대로 붙자는 게 우세한 의견입니다. 일 단 이삼일, 빠르면 오늘 안에 소환 결정이 날 수 있으니 준비해두라 는 말씀드리려고 전화 걸었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 네. 끊을게요." 전화를 끊고 난 후 예안은 허망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유빈이 까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예안은 울상이 된 채 아기와 눈을 마주쳤다. "어떡하지 유빈아? 엄마 못 놀러가겠네." "왜에?" "엄마 곧 일하러 가게 될 지도 몰라." "또 떨어져야 하는 거야?" 유빈은 어눌한 발음으로 싫다고 말했다. 예안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우리 유빈이, 엄마 없는 동안에 할아버지랑 잘 지낼 수 있지? 금방 돌아올게." "싫어싫어. 엄마 가지 마. 안 간다고 했잖아." 어눌한 발음으로 울먹이던 유빈은 끝내 우앙 울음을 터트렸다. 예안 은 어쩔 줄 몰라하며 달랬다. 거리의 사람들이 이따금씩 멈추고 신 기한 눈으로 그들 모자를 보았다. 예안은 그런 시선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정말 미안해 유빈아. 있잖아. 다음에는 꼭 계속 같이 있어줄 테니 까…." "가지 마. 가지 마." 유빈은 가지 말란 말을 연발아 반복하며 계속 울었다. 니콜라스는 예안이 쩔쩔매는 것을 신기한 눈으로 구경했다. '저렇게 하면 여자들은 다 말을 들어주나?' 그는 자신이 아기처럼 울며 떼쓰는 걸 상상해보았다. 동시에 까닭 모를 오한이 들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유빈은 울다 지쳐 결국 잠이 들었다. 예안은 지친 얼굴로 택시를 잡 았다. "누나.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응? 무슨 말?" 망설이던 니콜라스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얼마 전에 제임스가 집에 왔었어." 예안의 눈동자가 사납게 변했다. "그래서? 그냥 돌려보냈어?" "일단 쫓아버렸지." "잘했어. 아주 잘했어." 예안은 아주 시원스럽게 말했다. 니콜라스는 까닭 모를 우울함을 느 꼈다. "그런데 난 제임스가 정말 우리의 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의 눈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구." "그 녀석이 거짓말을 하든 안 하든 간에 내 적이라는 건 변하지 않 아. 시트날타에 몸담고 있는 한은 영원히." 예안은 택시 기사가 듣지 못하도록 작게 말했다. 어차피 그가 알아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는 모를 것이다. 니콜라스는 복잡한 마음을 안고 창 밖을 보았다. 스쳐 지나가는 건 물들과 가로수의 풍경이 마음을 한층 더 답답하게 했다. '적이라.' 그 날 밤 보았던 세현의 눈동자는 너무 투명했다. 도저히 나쁜 의도 를 품고 있는 사람의 것이라 볼 수 없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운명을 한탄하는 우울한 눈빛. 그것이 니콜라스의 마 음에 남아 그를 계속 괴롭혔다. '당신과 적이 되기 싫어요. 그냥 거기에서 나오면 안 되나요?' 니콜라스는 세현을 다시 만나면 죽이겠다는 자신의 결심이 터무니없 이 사그라지는 걸 느꼈다. 살인청부업자 일을 해온 이래로 이런 일 은 처음이었다. 자존심이 무척 상했지만, 차라리 그 자존심을 포기 하고 싶을 정도로 그는 세현과 적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 날 저녁 중현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출동이 확실하게 결정 났 으니 두말 않고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예안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유빈에게 사실을 고했다. 유빈은 옷자락 을 붙들며 가지 말라고 떼를 쓰다가 결국 지쳐 잠들었다. 예안은 어 린 아기에게 몹쓸 짓을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아직 말해줄 수 없니? 아직도 더 기다려야 돼?" 또 한동안 어딜 갔다온다는 소리에 정호는 우울한 얼굴로 물었다. 예안은 잠시 쭈뼛거리다가 말문을 열었다. "나 결심 섰어. 이번에 돌아오면 사실대로 다 말할게." "그래." 정호는 조금 기쁜 얼굴을 했다.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그만큼의 부담을 짊어지는 것이다. 그는 차라 리 이대로 그냥 모른 체 편안히 넘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어린 자식에게 모든 부담을 지울 수는 없었 다. 그는 자신도 그 부담을 나눠 가지고 싶었다. "결국 바캉스는 캔슬 돼버렸네. 다들 서운해하겠다." "뭐 어쩔 수 없지. 혜민이네한테는 아빠 보고 연락하라고 했으니까 알아서 할 테고. 엄마는…." 예안은 세정을 떠올리고 조금 씁쓸해했다. 세정은 아마도 몹시 서운 해할 것이다. 기대했던 것이 허망하게 부서질 때의 그 씁쓸함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잠 못 이룬 밤을 보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엄마는 단 한 번도 전화를 한 적이 없었다. '그때의 보복을 지금 하는 셈이니 좋아해야 하는 거야, 나?' 예안은 휴대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대로 전화를 하지 않으면 어린 시절 겪은 쓸쓸함을 그대로 되돌려줄 수 있는 것이다. 니콜라스는 심상치 않은 기분을 느끼고 조용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피식거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열었다. "더 길게 끄는 것도 귀찮잖아? 내 대에서 끝내지 뭐." 그럼 이제 슬슬 이브의 눈물 비축분을 나눠드리겠습니다. 5분이 참가해주셨죠. 망울의흔적님은 아직 아상을 안 보셨다 하니, 아상을 나중에 보신 뒤에 말씀하시면 그때 드리겠습니다. 그 전에는 보아봐 야 의미가 없거든요.; 나머지 네 분들은 따로 저에게 메시지를 보내셔서 파일을 받을 이멜 주소나 메신져 주소를 남겨주시면 됩니다.(...) ps : 200화 이벤트는 일단 열흘 후까지는 진행합니다. 그때가 지나면 종결되는 것입니다. 근데 더 참여할 분들이 있으려나.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09 회] 날 짜 2004-07-15 조회 / 추천 2271 / 33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달콤한 유혹 예안은 그 날 저녁 해군기지를 향해 출발했다. 중현이 차를 보내주 겠다고 했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안전을 염려한 중현의 의도는 고맙 지만 니콜라스가 곁에 있으니 구태여 그럴 필요는 없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라 고속열차 안은 한산했다. 예안은 맞은창에 비 치는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아, 글구 보니 이 열차편 내가 전에 납치 당했을 때 탔던 그 열차 편이야." "그래?" "어. 방향은 달랐지만. 그때 나 이 열차편 타고 서울로 돌아오던 중 이었거든." "그럼 조심해야겠네. 또 여기서 납치 당할지도 모르니까." 예안은 설마 그러겠냐는 듯 키득거렸다. "마리오나 엘르는 이제 날 못 잡을 걸? 이렇게 듬직한 보디가드가 옆에 있잖아?" 니콜라스의 목을 와락 껴안은 예안은 그렇게 킥킥거렸다. 그는 뺨에 닿는 뭉클한 가슴의 감촉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내심 싫지는 않았다. "동생이랑 여행이라도 가는 건가요?" 옆에 앉아 있던 중년의 여자가 말을 걸었다. "아, 네. 해수욕장 가서 며칠간 좀 놀려고요." 예안은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꾸며댔다. "동생이랑? 아가씨 정도면 남자들이 줄을 설 텐데 왜 남자친구하고 같이 가지 않고요? 남동생이랑 같이 가면 별로 낭만이 없을 텐데?" "남자친구? 그런 거 안 키워요." 뾰로통해서 대답하는 게 귀여웠던 중년 여자는 쿡쿡 웃었다. "해수욕장이면 어디로 가요? 열차편 보니 해운대나 광안리는 아닌 것 같은데." "에… 망상 해수욕장 가요." 예안은 엉겁결에 그렇게 둘러댔다. "흠? 이 열차편으로 가려면 좀 멀리 돌아가야 하는데요? 처음 가는 건가 보군요?" "아, 예. 그래요. 처음 가는 거거든요. 그래서 차편을 잘 모르겠더 라고요." "우리 집이 그 근처에서 민박하는데, 묵지 않을래요? 아가씨같은 미 인이라면 공짜로 해줄 수도 있는데." "아, 예?" 자연스럽게 둘러댄 거짓말이 탄로 날 지경에 처한 예안은 조금 당황 했다. 그녀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친척이 근처에서 살아서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말씀만이라도 감사 해요." "에구, 우리 아들 녀석한테 한 번 보여주고 싶었는데…." 중년 여자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예안은 조금 놀림 받은 기분이 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니콜라스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누나 인기 좋네. 그렇지만 기분은 나쁘다." 녀석의 귀여운 질투에 예안은 피식거렸다. "저기 아가씨, 어떤 사람이 이 쪽지를 전해주라고 하던데요?" 모자를 쓴 청년이 다가와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말했다. 그가 내민 쪽지를 본 예안은 어리둥절했다. "쪽지요? 누가요?" "글쎄요. 좀 우울하게 생긴 30대 남자였어요." 예안은 쉬 감이 잡히지 않았다. 청년은 예안의 미모를 힐끔거리다가 니콜라스의 차가운 눈과 마주쳤다. 니콜라스는 살기를 담아 그를 노 려보았다. 잔뜩 쫄은 그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떴다.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쫓던 니콜라스는 예안에게 눈을 돌렸다. 그녀 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왜 그래?" 쪽지의 내용 때문인가? 니콜라스는 어깨 너머로 쪽지를 살펴보았다. 「다음 역에서 내려라. 안내원을 보낼 테니 조용히 따라와라. 그렇 지 않으면 열차를 폭파하겠다.」 예안은 쪽지를 구겼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시트날타는 아니야. 걔네들이 이런 짓을 할 리 없어. 일본? 미국? 설마 그 녀석들이 나에 대해 알아버린 걸까?' 창문에는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멋지게 빛나고 있었다. 어느새 열 차는 도심을 훨씬 벗어나 있었다. 예안은 창 밖의 어둠을 노려보며 골똘히 궁리했다. "어떻게 할 거야?" "일단 나가봐야겠어.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도 모르겠고." 마음 속에서 짚이는 사람이 한 명 있었지만 예안은 고개를 저어 그 것을 부정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그'의 목표가 완수될 리 없 었다. "어? 망상 해수욕장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급한 일이 생겨서 빨리 되돌아가 봐야 하거든요." 중년 여자는 다소 아쉬워했다. 열차가 정지하자 예안은 서둘러 내렸 다. 썰렁한 플랫폼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니콜라스는 언제든지 총을 꺼낼 수 있도록 감각을 곤두세웠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지적인 눈빛을 한 여자가 다가왔다. 니콜라스는 바짝 긴장한 채 여자를 노려보았다. 날카로운 미인형인 여자는 갈색 미니스커트의 사무직 차림을 하고 있었다. "따라 오시죠." 여자는 등을 돌려 앞장섰다. 니콜라스는 불길한 눈으로 예안을 돌아 보았다. "따라갈 거야? 위험할지도 몰라." "알아. 글치만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누가 보냈는지도 좀 궁금해. 사실 짚이는 곳도 있지만…." 예안은 부디 자신의 짐작이 틀리기를 바라며 여자를 따라갔다. 역을 빠져나가자 차도에 한 대의 리무진이 대기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오랫동안 소유자가 지닌 부를 대변해온 유서 깊은 차였다. 예안은 배짱 있는 척 일부러 과장되게 감탄했다. "헤, 이런 좋은 차까지 대동하는 걸 보니 꽤나 부자가 절 불렀나 봐 요? 이거 영광인데요?" 여자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예안은 조금 신경질이 났지만 꾹 참 았다. 니콜라스는 언제든지 총을 꺼낼 수 있도록 긴장을 늦추지 않 았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차는 어둠을 향해 달렸다. 예안과 니콜라스는 이곳이 처음이었다. 첩첩산골까지는 아니지만 완전 시골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열차역과 어느 정도 벌어지자 그나마 간간이 보이던 불빛 들도 완전히 사라졌다. '완전 시골이잖아. 여기서 누가 날 보자고 하는 거지?' 주변에 널린 적들이 너무 많다 보니 섣불리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어느덧 차는 속도를 줄이더니 이윽고 완전히 멈췄다. "내리시지요." 여자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차에서 내린 예안은 여자의 뒤를 따라 어둠을 걸었다. 십 분 가량을 걷자 갑자기 주변이 환해졌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은 빛이 너무 강렬하다고 호소했다. 예안은 얼굴을 찡그리며 전방을 살폈다. 넓은 공터에는 커다란 비행기가 착륙해 있었다. 길이가 200 미터는 족히 넘어가 보이는 화려한 비행기였다. 이상하게도, 눈을 씻고 둘 려봐도 활주로는 보이지 않았다.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비행기인가? 니콜라스는 바짝 긴장한 채 총을 꺼냈다. "여기에 누가 있는 거죠?" "들어가 보시면 압니다. 직접 만나 보시지요." 예안은 갈등했다. 자칫하다가 비행기가 그대로 출발해버리면 영영 유빈과 바이바이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으면서 그 대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 결국 니콜라스를 믿기로 결심한 그녀는 여자를 따라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복도를 따라서 예안을 어느 방 앞으로 안내했다. "니콜라스씨는 여기서 기다려 주시지요." "뭐?" 니콜라스는 차가운 눈으로 여자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여자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곤란한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 분을 위해 준비된 사적인 자 리이니 가급적이면 여기 계셔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니콜라스의 눈동자가 강한 살기를 뿜었다. 과거, 마피아 대부조차도 오줌을 지리게 했던 무시무시한 기운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목각 인 형이라도 되는 듯 덤덤하게 살기를 받아냈다. "니콜라스. 그렇게 해." "뭐? 그건 너무 위험해." "아니야. 내 생각이 맞다면 아마 위험하지는 않을 거야. 왠지 나 누 가 불렀는지 알 것 같거든." 예안은 어설프게 미소지으며 니콜라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피하고 싶은 과거와 마주친 것처럼 숨가쁜 설렘에 젖어 있었다. 설마 아는 사람인 건가? 은근히 질투가 난 니콜라스는 화풀이를 한답시고 여자를 죽일 듯 노려보다가 몸을 홱 돌렸다. "알았어 누나. 위험하면 전에 내가 준 그거 깨부수는 거 알지?" "에엑? 그거 집에 놓고 왔는데?" "뭐? 그거 만드느라고 내가 얼마나 힘을 썼는데!" 에날도스를 어느 정도 자유자재로 사용하게 된 기념으로 기쁘게 만 들었던 신호알을 그렇게 허술하게 놓고 다니다니. 니콜라스는 속이 뒤집힌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았다. "에헤헤, 미안, 미안. 다음부터는 잘 갖고 다닐 테니까 화 풀어. 나 중에 맛있는 거 사줄게." "나 음식 안 먹는 거 누나도 알잖아. 쳇." 니콜라스는 투덜거리며 아무 좌석이나 골라 털썩 앉아버렸다. 멋쩍 어하던 예안은 정색하고 문손잡이를 돌렸다. 또다시 짧은 복도가 나왔다. 복도 끝에는 철로 만들어진 문이 지옥 의 입구처럼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익숙한 분위기에 가볍게 전율 하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발을 떼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끼이익, 하는 소리가 그렇게 무 섭게 들린 건 처음이었다. 화려함으로 치장된 방이 눈에 가득 들어 왔다.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은 감히 발을 내딛는 것이 송구스러울 정도로 우아했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의 눈부신 조명이 그녀의 눈 을 당황하게 했다. 예안은 가라앉은 눈으로 등을 돌리고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의자를 돌렸다. "오랜만이야. 유젤." 레이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밝게 웃었다. 미얄세려 님. 이멜이 꽉 찬 듯 한데요. 반송됐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해당 안 되는 분들께서도 이멜주소를 남기면서 보내달라고 하시네요. 장난..이시겠지요?(--);; 어쨌거나 해당 된 분들에게는 다 보낸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빠지신 분들이 있다면 제가 형광등이니 이해하시고, 다시 코멘을 달아주세요. 더 참가하실 분들은 없는 것 같지만, 일단 이벤트는 20일까지 합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10 회] 날 짜 2004-07-16 조회 / 추천 2309 / 44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달콤한 유혹 "왜 날… 불렀어?" 한참 후 예안은 겨우 용기를 내어 그렇게 물었다. 긴장한 탓인지 목 소리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레이온은 그걸 보고 말없이 웃었다. "일단 좀 앉지 그래?" 레이온은 그녀에게 의자를 권했다. 우두커니 서서 그를 노려보던 그 녀는 작게 이를 갈며 털푸덕 주저앉았다. 그녀는 태연한 척 애써 없는 배짱을 부렸다. "돈 꽤나 많나 보네. 이런 전용기도 갖고 다니고 말이야. 에어포스 원은 완전히 저리 가라인 걸?" "성능은 그것보다 더 좋아. 수직이착륙도 되고, 뭐 여러 모로 꽤 쓸 만해." 레이온은 와인 잔을 두 개 놓고 붉은 와인을 따랐다. 느긋한 그 태 도에 예안은 숨이 막히는 불안함을 느꼈다. 혹시 하는 불길한 생각 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녀는 애써 잊으려 했다. "자, 마셔." 잠시 잔을 노려보던 그녀는 내뱉듯 말했다. "나 이거 못 먹는 거 알잖아." "그래? 아직도 마더가 널 허락하지 않았나 보다." 레이온은 자신의 잔을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예안은 두려움 이 조금 섞인 눈으로 그를 보았다. 전과는 분명 달라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완성한 걸까? 이렇게 빨리?' 그녀는 재빨리 오리지널 유젤의 기억을 뒤져 계산해 보았다. 그러나 몇 번의 검산을 해보아도 '아직 아니다'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 여유는 뭐란 말인가. 결국 그녀는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형. 설마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완성했어?" "아니." 레이온은 태연히 대답했다. 예안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럼 뭐야? 완성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날 찾아왔어?" "완성하고 난 뒤면 찾아와도 된다는 소리니?" 예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언변에 휘말리는 게 싫었다. 그에게 약 점을 보이는 것도 원치 않았다. 한 번 그에게 얽히면 쉽게 빠져 나 올 수 없을 것이다. "요새 꽤 많은 일들을 벌였더구나. 지구 반대편에서도 네 활약이 자 자하던데. 개전 며칠만에 단독으로 일본을 개박살냈다고 말이야." 레이온은 유치원에서 상을 타온 아이를 칭찬하듯 부드럽게 말을 꺼 냈다. 예안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손가락을 튕기기만 했다. "너무 주목받는 것은 좋지 않단다. 시트날타가 항상 널 노리고 있다 는 걸 잊어선 안 돼." 그가 자신을 애 취급하는 게 거슬렸던 예안은 노골적으로 손톱을 딱 딱 튕겼다. 창문 밖에 걸린 어둠을 잠시 쳐다보던 레이온은 표정을 더욱 부드럽게 하고 그녀를 주시했다. "혼자 애 키우기 많이 힘들지?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러고 보 니 얼마 전에 유빈이가 말문을 텄더구나." "…어떻게 알았어?" "난 항상 널 지켜보고 있어. 너에 대해서는 뭐든지 다 알고 있지." 예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새삼 자신을 향한 그의 집착이 얼마나 질 긴지 절감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자신을, 정확히는 유젤을 얻기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할 것이다. 그동안 예안은 발버둥을 쳐가며 레이온을 떨쳐낼 방법을 궁리해보았 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지구상의 어 디든지 전부 스캔할 수 있었으며, 자신을 소유하기 위해서라면 세상 을 멸망시킬 실력과 각오까지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맥은 형의 편이야.' 가장 두려운 사실은 바로 그것이었다. 맥은 한 번도 시인한 적이 없 었지만 예안은 맥이 레이온의 편이라는 걸 잘 알았다. 자신이 레이 온의 여자가 되어야만 가장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맥은 생각한 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녀석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레이온하고 떨어져 있는 동안 예안은 잠깐 동안 그의 존재를 잊기라 도 해보려고 발버둥쳤다. 짧은 시간의 안심이라도 획득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무럭무럭 커 가는 유빈을 볼 때마다 각인처럼 레이온 의 이름이 떠오르곤 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아이를 사랑했지만, 아이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가 채운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아이를 통해 자신의 존 재를 그녀에게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너도 알 거야. 이 전쟁은 단순히 열강들의 세력 구도 싸움이나 이 익 쟁취 따위가 아니라는 걸. 이 전쟁의 배후에는 시트날타가 있 어." 레이온은 덤덤히 설명했다. "앤슨이라는 이름 기억하고 있지?" 예안은 마지못해 작게 끄덕였다. "…어." "그가 배후에서 모든 걸 조종하고 있어. 그는 일본 총리와 중국 주 석을 납치해서 설득시켜서까지 집요하게 이 전쟁에 매달리고 있어." 예안은 퍼뜩 옛날 영환에게 들었던 그 사건이 생각났다. 그때 영환 은 총리와 주석이 비밀리에 만나 모종의 음모를 꾸민 게 아닐까 하 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가. '앤슨이 납치했었구나. 역시….' 그제야 예안은 어떻게 해서 일본의 삽질이 탄생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일본은 앤슨에게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패였다. 또한 노스 나 리가 앤슨의 지휘 아래 있는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중 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이 시트날타의 공작에 놀아났다는 결론이 나 온다. "난 네가 너무 걱정 돼. 그들이 널 함부로 건드릴 거라고는 생각하 지 않지만, 요즘 들어서는 자꾸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앤슨은 그만큼 위험한 인물이야." "내 걱정 따위 할 필요 없어. 형은 형 일이나 잘 해." 예안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레이온은 그래도 상관없다는 얼굴을 하 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그녀의 토라진 듯한 반응 하나 하나까지 그 저 귀엽기만 할 뿐이었다. "자이오 다이아몬드는 이제 곧 완성 돼." "그 소리는 작년에도 했어." "올해를 넘기지 않을 거야."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던 예안은 그 말에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 다. 그는 설렘이 가득한 표정으로 만족스러운 듯 가볍게 웃었다. "나는 곧 너와 동등해지게 돼. 그 날이 멀지 않았어." "형도 신인류가 되겠다는 거야?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써가면서까 지?" 예안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레이온은 피식거리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글쎄. 그렇게 밖에는 생각 못하고 있구나. 동등해진다는 게 반드시 그런 의미만은 아니란다."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듯한 그 말투가 예안은 몹시 기분 나빴다. 레이온은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갔다. 창의 바깥쪽에 달라붙은 투명한 냉기를 황홀히 주시하던 그는 다시 등을 돌렸다. 그의 눈동자는 오 랜 갈증에 시달린 야수처럼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 불꽃 속에서 자 신을 향한 집착을 발견한 예안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왜, 왜 그렇게 봐?" 그녀는 황급히 일어나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레이온은 그런 그 녀가 귀여워 킥킥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어. 내가 널 잡아먹니?" "…." "그래도 이제 많이 여자다워졌구나. 아니, 많이 본모습을 되찾았다 고 해야 할까?" 레이온은 와인 잔을 들어 탁자에 내려놓았다. 예안은 새파랗게 경직 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식탁보가 미미하게 펄럭이는 소리가 그렇게 크고 무섭게 들린 것은 처음이었다. 지루한 침묵이 그들의 숨결 사이를 맴돌았다. 바깥의 풀벌레 우는 소리까지 느껴질 정도로 고요했다. 레이온은 승자의 미소를 지은 채 웃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예안은 애써 경직된 미소를 얼굴에 만들었다. "저기, 형 지금 뭐라고 했…어?" "본모습을 되찾았다고 했어." 레이온은 잘라 말했다. 그녀의 간절한 심정을 모른다는 듯이. 어처 구니없는 얼굴을 하던 그녀는 조금씩 한 걸음 내딛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본모습을 되찾았다니?" "후우. 아직 모르고 있었구나? 맥 녀석이 말해주지 않았니?" 예안은 반사적으로 팔찌형 원격장치를 살폈다. 노란색 금속 재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맥의 외면을 대신 말해주듯이.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참 신비로워. 제아무리 뇌의 매커니즘이 복 잡하다 한들 그 원리를 완전히 꿰뚫는다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꿔 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야. 본인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살도록 만들어버리는 것도…." 레이온은 희미하게 말끝을 흘리며 웃었다. 그리고 잘라 말했다. "쉽지. 아주 쉬워." 잠깐 동안 이어진 침묵. 그리고 예안은 폭발했다. "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란 말야!" "못 알아들었니? 다시 한 번 말해줄까?" "장난하지 마!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장난을 하는 거야!" "후후, 장난이라고 믿고 싶겠지. 하지만." 레이온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정복욕에 불타는 수컷의 눈빛이었다. "사실이야. 난 장난은 하지 않아." 짧은 그 침묵이 왜 그렇게 무섭게 들렸는지. 잠깐 동안 굳어 있던 예안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발악하듯 외쳤다. "웃기지 마! 웃기지 말란 말야! 왜, 왜 사람이 알아듣지도 못할 헛 소리를 하고 그래! 난 지금 형이랑 장난할 기분이 아니라고!" "쉬웠어. 널 속이는 건 아주 쉬웠어. 그저 그 남자애의 기억을 복사 해서 살짝 불어넣었을 뿐인데 넌 조금의 의심도 없이 자기가 그 남 자애라고 믿더군. 뇌 이식 수술? 그 따위는 하지 않았어." 차라리 능청스럽기까지 한 그 태도. 그게 저주스러웠던 예안은 진심 으로 분노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진우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영원히 유젤을 사랑하겠다고 한 그 맹세를 잔인하게 깨뜨리려는 것 이다.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예안은 미친 듯 발악하며 악을 썼 다. 샹들리에가 와장창 깨져 나갔다. 곧바로 비상등이 켜져 다시 밝아졌 다. 와인 잔이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 났다. 와인병이 깨져 그의 얼 굴에 와인이 튀었다. 그는 미동도 않은 채 발악하며 가구를 때려부 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식탁보가 찢기고, 테이블의 다리가 부서지 고, 멋진 스탠드의 허리가 부러지고 등이 깨졌다. 방안을 엉망으로 어지럽힌 예안은 털썩 주저앉아 씩씩거렸다. 레이 온은 태연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니? 왜 난 오리지널 유젤의 기억을 갖고 있는 가, 왜 난 이렇게 쉽게 인간에게서 멀어지는가, 그런 생각이 든 적 이 없었니?" 있다.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을 정도로. 그래서 그렇게 두려워하며 발악한 것이 아니었나. "자기가 철썩같이 그 남자애인 줄 알고 여자에 적응하려 끙끙대는 널 볼 때마다 사실 좀 웃겼어. 많이 귀여웠거든. 원래 진작에 말하 려고 했는데 끙끙대는 네가 너무 예뻐 보여서 차마 그러지 못했어." 예안은 분노로 시뻘개진 눈을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자극해 폭발시켜놓고도 태연히 웃고 있었다. "그렇지만 덕분에 마더의 눈을 속이는데는 성공적이었어. 만약 그 남자애의 기억을 넣어 너의 사고를 교란시키지 않았다면 마더는 진 작 너의 존재를 눈치챘을 거야. 그리고 널…." 레이온의 눈이 다시 차갑게 빛났다. 신을 향한 증오가 응축된 불길 이었다. "죽였겠지."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11 회] 날 짜 2004-07-18 조회 / 추천 2362 / 28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달콤한 유혹 하나의 인간을 진리로서 그 자체를 달리 정의하려 할 때 그 당사자 는 극도의 공포를 느낀다. 어느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의 원수를 죽이려는 청년이 그 원수가 자신의 친아버지임을 알았을 때 그 사실 을 부정하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일찍이 인류의 역사에서 진리를 매개체로 한 인간을 부정한 사례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예안은 지금 새로운 역사의 시발 점에 서 있다 해도 좋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려는 공포 속에서도 꿋꿋이 인내를 고수했다. "처음부터 난 너를 소유할 생각까지는 없었어. 그냥 너를 한 번만 더 볼 수 있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 전의 네 몸을 복제해 지금의 너 를 탄생시킨 거야." 예안의 눈동자에서 흔들림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서글프게도 그녀는 자신의 그런 변화를 정확하게 인지했다. "시트날타는 건방지게도 감히 이 나도 소유할 수 없는 너를 가지려 했지. 그래서 나는 너를 맥에 태워 탈출시켰다. 그 전의 기억이 모 두 깨어나면 결국 너는 날 찾아올 거라 생각했어. 얄팍한 기대였지 만, 넌 꼭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잖아?" 기억의 조각 사이에서 예안은 과거 오리지널 유젤이 그에게 해준 약 속을 끄집어냈다. 그러나 그 약속은 레이온의 추억에서 너무 커다랗 게 미화되어 있었다. "널 강제로 임신시켰던 건…. 그래, 불안해서 그랬다는 게 아마 정 확히 맞을 거야. 네가 정말 약속을 지킬지 난 확신할 수 없었어. 기 억이 영영 되살아나지 않을 수도 있었으니까." 레이온의 어깨가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때의 그 불안을 상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넌 어떤 남자애와 함께 잡혀온 거야. 난 그걸 보고 희망을 예감했다. 어쩌면 내가 지금 당장 널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 대 말이야. 남자애의 심장은 멈춰 있었지만, 기억은 충분히 복사할 수 있었어." 레이온은 흥분한 얼굴로 예안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미안해 견딜 수 없어하는 느낌이 묻어났다. "실은 널 탈출시키기 전부터 네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어쩌면 내가 널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느니 뭐니 하는 건 죄다 거짓말이고, 네가 마더한테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고 해야 정답이겠지." 마더를 향한 아련한 증오. 그 불꽃이 레이온의 눈동자 안에서 넘실 거리고 있었다. "나는 도박을 했어. 남자애의 기억을 너에게 불어넣었지. 그렇게 함 으로써 너의 파장을 감춰, 마더가 널 찾지 못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어. 그리고 그 도박은 보다시피 성공했다." 예안은 완전히 흔들림이 사라진 눈으로 그를 보다 손을 내려다보았 다. 평소 같았으면 식은땀이 흥건히 고여 있었을 텐데, 손바닥은 놀 라우리만큼 깨끗했다. 심장의 고동을 확인한 예안은 암담한 나머지 눈을 감았다. 그녀 자 신조차도 놀랄 정도로 차분해진 고동 소리. 그것은 그녀가 지금 인 간에게서 얼마만큼이나 또 멀어졌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의 변화를 무섭도록 정확히 인지한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 몸서 리를 쳤다. 레이온이 내뱉는 말은 전부 하나 하나가 자신의 본질을 부정했다. 자신을 인간이 아닌 것으로 만들려 했다. 그리고, 자신의 육체는 거기에 철저히 부응했다. "…거짓말이야." 예안은 힘들게 그 부정을 밀어냈다. "사실이야." "거짓말이야." "사실이야." 예안은 목청이 터져라 버럭 외쳤다. "거짓말이야!!" 엉망으로 어지럽혀진 방 한가운데에서, 레이온은 씩씩대는 그녀를 자신감에 찬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처지가 뒤바뀐 것이다. 그녀는 그보다 더 높았고, 더 고귀하며, 더욱 존엄 하지 않은가. 예안의 흥분에서는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레이온도 그녀도 그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위치가 그렇게 바뀌지 않는 것 이다. 연기였다. 예안의 흥분은 연기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의 본질을 부 정하려는 레이온에 맞서야 한다는 이성적인 본능에 불과했다. 그러 나 그녀의 육체는 그 연기에 저항했다. "부정하고 싶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건 네 진심이 아닐 거야. 당장 널 봐도, 넌 억지로 흥분한 척 하고 있지 않니? 분노하는 널 꾸며서 연기하고 있지 않니?" "도대체 형이 원하는 게 뭐야? 그따위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날 교 란시키는 이유가 뭐야? 뭐야? 뭐냐고!!" 흥분한 예안은 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것은 속이 빈 종이 인 형보다도 더 가벼웠다. "내가 원하는 것? 그건 네가 더 잘 알지 않니?" 레이온은 차갑게 미소지었다. 미치광이보다 더욱 무섭지만 미치지는 않은, 그래서 차라리 슬프게 느껴지는 그 미소를. "난 널 원해. 네가 갖고 싶어." 예안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잠깐 동안 빠져 있었던 그의 세뇌에 서 드디어 풀려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무서워…. 하지만 이게 좋아.'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그 공포를 마음껏 음미했다. 이 기분, 이 흥분, 이 스릴이야말로 자신이 진우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유젤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고 위로해주는 메시지였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는 마. 예안이는 내 거야." "그 남자애가 지어준 이름? 네가 좋다면 그 이름을 계속 쓰도록 해. 이미 죽은 라이벌의 소원 하나 제대로 못 들어주겠니."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예안은 노골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걷어내는 그의 태도가 몹시 거슬 렸다. "날 속일 생각은 그만 둬. 형이 지금 거짓말하는 거 다 알아. 수술 따윈 애초에 안 했다고?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하는 거야!" 깨진 병조각을 집어든 예안은 그것으로 찌를 듯 거세게 레이온을 노 려보았다. 그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시선으로 조용히 그녀의 기세 를 응시했다. "난 이제 더는 널 내버려둘 수 없어. 앤슨은 이미 네 존재를 눈치채 고 있어. 언제 그들이 널 잡아갈지 모른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밤 에 잠이 안 와." 레이온은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예안을 겨누었다. 검붉은 총신에 서는 예리한 집착이 칼날보다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순순히 내 것이 되어 줘." 두근두근. 두근두근. 두근두근. 밀물처럼 밀려들어오는 거센 고동을 느끼며 예안은 침을 삼켰다. 자 신을 부정하려 하고, 강제로 자신을 가지려 하는 그가 몹시 미웠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이 희미하게 아파 오기 시작했다. 파르르 떨리 고 있는 총구를 볼수록 더욱 그러했다. 그가 유젤을 얼마나 사랑하 고 갈구하는지 잘 알기에, 지금 그가 어떤 심정으로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지도 또한 아는 것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깨끗하게 모든 혼란을 잊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지 모 른다. 그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냥 억지로 믿고, 그의 소유가 되어 아무 두려움 없이 사는 것도 좋을 것이다. 뜨거운 불길에 내던 져진 전갈이 스스로 자신을 찌르듯, 그의 말은 그렇게 그녀에게 달 콤한 유혹으로 다가왔다. 그냥 모두 포기하고 이 고통을 접으라고. '안 돼! 그건 싫어!' 그 순간 가족들이 생각났다. 친구들이 생각났다. 지난 모든 것들을 잃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소망. 그리고 나를 나 자신으로서 그대로 지키고 싶다는 염원. 그것들이 쓰러지려는 그녀를 붙잡아 세우는 순 간, 맥이 말을 걸어왔다. '받아들이시지요.' 그녀는 화를 냈다. '너까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언제까지 그렇게 모르고 사실 겁니까? 언제까지 그렇게 불안해하며 사실 겁니까? 그는 마스터를 최고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입 니다. 마스터를 가장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웃기지 마! 말도 안 돼! 난 예안이가 아니라 진우란 말이야! 기억 을 전부 고스란히 갖고 있단 말이야! 그걸 아니라고 하는데 너 같으 면 믿을 수 있어!' '제발 편해지십시오. 더 이상 마스터가 혼자 불안해하는 꼴은 볼 수 없습니다. 시트날타는 마스터를 잡아서 어떤 식으로 이용할지 모르 는 녀석들이란 말입니다.' 차라리 애원으로까지 들린 맥의 부탁. 그러나 예안은 그것을 받아들 일 수 없었다. '웃기지 마! 절대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잠시간의 침묵. 그리고 맥은 다시 말했다. '오리지널 유젤의 기억을 죽였다는 말씀이 거짓말이라는 거 진작부 터 알고 있었습니다.' 예안의 얼굴에 일순 당황함이 새겨졌다. '자기 자신을 죽였다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그렇게 그 진우라는 자 아를 지키고 싶으신 겁니까? 인간의 집착이란 건 가히 무섭군요. 남 의 영혼에 그림자로 끼어 들어온 주제에 그렇게 완벽하게 본인 행세 를 할 수 있다니 말입니다.' 유진우라는 인간을 비아냥거리는 그 어조. 예안이 정말 진우로서의 자아를 지키고 싶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반박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 는 그러지 못했고, 그래서 혼란이 더욱 커지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 버렸다. 철컥, 하는 격철음이 예안의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맥과 이야기는 다 끝냈니? 이제 대답을 해주지 않겠어?" 레이온은 한 발짝 슥 내딛었다. 예안은 겁을 먹고 주춤주춤 뒤로 물 러났다. "내 것이 되어 줘. 제발 이대로 내 것이 되어 줘. 난 널 다치게 하 고 싶지 않다." 집착. 그 거대한 불꽃을 그의 눈에서 확인한 예안은 자지러지듯이 외쳤다. "싫어어어!!" 차라리 절규에 가까웠던 그 고함, 그 비명, 그 목소리. 울음이 번진 그녀의 얼굴을 쓸쓸히 주시하던 그는 서글프게 웃어버렸다. "아프진 않을 거야. 흉터도 없을 거야. 잠깐 자고 일어나면 모든 건 좋아져 있을 거야." - 탕! 방아쇠가 당겨졌다.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김과 동시에 예안의 몸이 쓰러졌다. 마취약이 발린 총탄은 그녀의 어깨에 붉은 선혈을 그려냈 다. 레이온은 쓰러진 그녀를 안아 들면서 슬프게 중얼거렸다. "정말 미안." 210화와 211화의 독설을 삭제합니다. 그 말을 철회하는 것도 뭣도 아니니 그 악플러형 사람에 해당되는 분들은 좋아하실 것도 없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 212화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요새 들어서 절단마공의 숙련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걸 느낍니다. 하지만 다른 분들이 보시기에는 어떨지 모르겠군요.^^; 자아, 특별 이벤트! 다음 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최초로 맞추시는 딱 한 분에게는 이브의 눈물 비축분을 일부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코멘 트를 마구마구 남겨주세요~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12 회] 날 짜 2004-07-19 조회 / 추천 2500 / 39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해저의 속삭임 그토록 오랫동안 갖고 싶어했던 것을 손에 넣은 충족감. 그것은 꿀 로 목욕하듯 아주 달콤했다. 레이온은 뜨거운 애수가 가득한 눈동자 로 의식을 잃은 예안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뺨을 연신 쓰다듬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주 오래도록 갖고 싶어했던 것. 가질 수 없으리라 절망했던 것. 그 소중한 것은 이제 나만의 것이 되어 내 앞에 잠들어 있다. 세상 에서 가장 커다란 그 행복에 심취해 있던 레이온은 가볍게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예안은 미동도 없었다. 레이온은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지 않는다 생 각했다. 순수한 무(無)를 가득 품고 있는 그의 눈동자는 호수처럼 투명했다. 그래서 오히려 무섭게 보이는, 광기 없는 미친 것. 단추가 하나 둘 풀어졌다. 벌어진 셔츠 자락으로 눈부신 흰 살결이 드러났다. 레이온은 황홀한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그는 황송한 듯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그녀는 반항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허락했다고 생각했다. 스르륵 하며 셔츠가 바닥에 떨어졌다. 신비한 아름다움이 무르익은 그녀의 몸이 수줍게 드러났다. 여신의 숨결에 적셔진 듯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의 손이 가벼운 경련을 일으키며 브래지어 끈을 풀었 다. 순결하고 새하얀 가슴이 조명 아래 활짝 드러났다. 그는 황송한 듯 조심스럽게 붉은 돌기에 키스했다. 그녀의 아기만이 만질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성역. 그것을 소유했다는 짜릿한 쾌감에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미지의 설렘에 가득한 눈으로 그녀 의 가슴을 애무하며, 그렇게 극락에 발을 내딛은 듯 황홀해했다. 그는 좀더 그녀가 보고 싶었다. 이제 자신의 소유가 된 것을 두 눈 에 똑똑히 박아두고 싶었다. 그녀의 알몸은 그녀를 탄생시킬 때 실 컷 보았지만, 그때는 그녀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떳 떳이 그녀의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레이온의 손이 예안의 바지에 닿았다. 떨리는 손은 소중한 듯 허리 띠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허리띠를 풀려 했다. "컥!" 바람을 가르며 뻗어진 그녀의 손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숨이 막 힌 그는 그만 그녀를 놓쳐 버렸다. 허나 그녀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가녀린 손은 그의 목줄기를 더 욱 단단히 틀어쥐었다. "넌 누구지?" 싸늘한 목소리. 질식에 갇힌 와중에도 레이온은 그 목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너, 넌… 크헉!" 그녀는 태연히 일어나 그의 목을 잡고 들어올렸다. 한 손으로 건장 한 청년의 목을 잡고 들어올리는 힘. 도저히 일반 여자의 힘이 아니 었다. "말해라. 넌 누구지? 여기는 어디지?" 얼음의 결정이 그녀의 눈에서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레이온은 부들 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팔을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끄 덕도 하지 않았다. "케이는 어디 있지? 말해. 그렇지 않으면 죽인다." 차가운 그 시선. 냉정한 그 눈빛. 레이온은 설마 했던 일이 악몽이 라는 이름으로 다가왔음을 깨닫고 말았다. '아아….' 레이온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의 얼굴은 산소결핍으로 새파랗게 변 해 있었다. 그녀는 그가 위험함을 느끼고 손을 놓았다. 그의 몸이 카펫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약하군. 아니면 내가 강한 건가?" 무뚝뚝한 어조. 레이온은 그만 눈물을 흘렸다. "왜 깨어났습니까, 제이…." 악몽의 화신을 바라보듯 절망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던 그는 울 분에 찬 주먹을 바닥에 내리쳤다. 주먹이 깨질 때까지 그렇게 계속 내리쳤다. 그녀는 싸늘한 시선으로 발광하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여기가 어딘지 말해.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어." 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하염없 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결코 바라지 않았던 최악의 결과, 금단의 이브가 마침내 눈을 뜬 것이었다. 아니. 어차피 이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유젤과 제이는 떼어놓을 수 없는 일심동체, 하나였다. 유젤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제이 로 각성할 가능성도 있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가. '바보다. 난 바보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비웃듯 오만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녀가 원망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간신히 유젤을 손에 넣었다 생 각했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다시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조물주 프로젝트는…."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망연자실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손 을 부들부들 떨면서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 그녀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극한 분노가 타오르고 있는 것이었 다. 그 증오가 레이온에게 향했다. 그녀는 시뻘개진 눈으로 그를 노 려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목을 틀어쥐고 다시 들어올렸다. "말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살을 베어낼 듯 예리한 목소리. 운명의 아이러니를 느낀 레이온은 그만 고통도 절망도 잊은 채 키득거렸다. "모든 것은 늦었습니다, 제이."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레이온은 키득키득 웃었다. "당신은 영원히 깨어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게 당신을 위해서 도, 케이를 위해서도, 모두를 위해서도 좋은 겁니다." 그녀는 분노했다. 그녀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목이 졸리는 고 통 속에서도 레이온은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우당탕하고 뭔가 깨지고 넘어지는 소리가 들린 순간 니콜라스는 벌 떡 일어났다. 그러나 안에 들어가려는 찰나, 그를 여기까지 데려온 여자가 앞을 막아섰다. "들어가시면 곤란합니다." "무슨 소리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데! 비켜!" 니콜라스는 살기를 담아 외쳤다. 그러나 여자는 꿈쩍도 않았다. "싸움이 난 것은 아닙니다. 아마 유젤 님께서 분노하셔서 방안을 어 지럽히는 중일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비켜! 안 그럼 쏜다!" 니콜라스는 총을 꺼내 겨누었다. 그러나 여자의 눈에는 전혀 흔들림 이 없었다. "곤란합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살의가 가득한 그의 시선. 그리고 덤덤한 그녀의 눈빛. 전혀 반대하 는 성질의 그것들은 공중에서 섞여 보이지 않는 불꽃을 튀겼다. 니콜라스는 다시 한 번 강한 살기를 뿜었다. 그러나 여자의 눈빛은 여전히 덤덤했다. 마치 목각으로 만들어진 인형처럼. 흔들림 없는 그 얼굴이 짜증이 난 니콜라스는 방아쇠를 당겼다. - 탕탕! 총알은 문에 부딪쳤다. 방탄재질은 상처를 입지 않고 총알을 튕겨냈 다. 니콜라스는 재빨리 피한 여자를 놀란 눈으로 보았다. "대단한데? 내 총알을 피하다니 말이야." 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여태껏 자신의 총알을 피한 이는 단 한 사 람, 마리오밖에 없었다. 그의 사격술은 마피아도 벌벌 떨 정도로 놀 라운 것이다. "이번엔 안 놓친다!" 니콜라스는 다시 총을 쏘았다. 여자는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총알을 피해냈다. 스탠드가 깨지고, 달력이 찢어지고, 꽃병이 박살났다. 니콜라스는 놀라운 눈으로 여자를 보았다. 탄창이 빌 때까지 쏘았는 데 여자는 단 한 발도 맞지 않은 것이다. 실로 인간의 것이라 믿어 지지 않는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총이 안 된다면 내가 직접 잡아주지!" 총을 버린 니콜라스는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뒤로 휙 물러나던 여자 는 등이 벽에 막혀 멈췄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여자에게 주 먹을 휘둘렀다. 여자는 손바닥을 펼쳐 그의 주먹을 잡았다. 팽팽한 힘 겨루기가 이어졌다. 니콜라스는 인상을 쓰며 다른 주먹을 뻗어 휘둘렀다. 여자는 그것도 잡았다. 그는 양주먹이 잡힌 채 얼굴 을 잔뜩 찌푸렸다. 여자의 표정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젠장!" 니콜라스는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여자에게 잡힌 주먹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팠다. 도저히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너, 인간이 아니구나." 여자는 여전히 덤덤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조금의 놀람도 없었다. "당신은 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 얌전히 기다리십시오." "쳇, 기분 나쁜 걸. 치마 입은 여자한테 이렇게까지 밀리다니." 눈살을 찌푸리며 한 팔을 휘두르던 니콜라스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손바닥에서 푸른빛이 영롱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기계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여자는 비로소 경계하는 포즈를 취했다. "어디, 이것도 버틸 수 있는지 한 번 보겠어." 투명한 구체가 그의 손바닥에서 나와 떠올랐다. 축구공 크기의 구체 표면에서는 뜨거운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찢고 부수 어 버리는 파괴의 기운이었다. "엄청 연습한 성과를 처음 써먹어 보는 거니까 영광으로 알아. 그리 고 조심해. 전투에 직접 써보는 건 처음이라서 나도 위력을 장담할 순 없거든." 니콜라스는 말이 끝나자마자 구체를 여자에게 던졌다. 구체는 폭발 적인 기운을 싣고 여자에게 날아갔다. '저것이 폭발하면 이 비행기도 타격을 입는다. 자칫 모두가 죽을 수 있다.' 피할 순 없다. 그렇다면 막아야 한다. 그렇게 판단한 여자는 지체 없이 두 팔을 모아 구체를 막아냈다. "큭!" 처음으로 여자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구체는 눈부신 빛을 뿌리며 지직거렸다. 여자의 팔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이윽고 빛이 사그라졌다. 여자는 슬그머니 자신의 팔을 살폈다. 왼 팔이 팔꿈치에서부터 없어져 버렸다. 오른팔도 심하게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아몰퍼스 P형 합금으로 만들어진 팔이 이렇게 되다니. 다이너마이 트의 몇 배를 뛰어넘는 위력이다.' 니콜라스는 그 모습을 보고 꼴좋다는 듯 키득 웃었다. "그건 폭파하는 게 아닌데, 피하지 그랬어? 설마 내가 이 비행기를 날려버릴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여자는 말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표정이 떠올라 있었 다. 자존심이 종잇장처럼 구겨진 분노가. "어쨌든 팔 하나가 없어졌으니 이제 조금 전처럼 까불지는 못하겠 지? 나머지 팔 하나도 멀쩡하진 못하군." 니콜라스는 키득거리며 주먹을 우드득거렸다. 여자라고 해서 봐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알고 싶군. 안드로이드도 과연 공포를 느끼는지."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13 회] 날 짜 2004-07-24 조회 / 추천 2280 / 40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해저의 속삭임 니콜라스는 살기 띤 미소를 지으며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사라 진 왼팔을 아쉬워하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오른팔까지 망가진 지 금, 그녀가 쓸 수 있는 수단은 단 하나 뿐이었다. '자폭.' 그러나 여자는 곧 그 방법을 포기했다. 자폭하면 비행기가 통째로 날아가 버린다. 레이온과 예안도 같이 죽게 되는 것이다. '어떡하지?' 여자는 끊임없이 전자두뇌를 굴렸다. 그러나 니콜라스를 막을 수 있 는 방법은 도저히 없었다. 상황은 완전히 여자에게 불리한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핑! 니콜라스는 흠칫 놀랐다. 일반인은 알아듣지 못할 미약한 소리였지 만 그는 분명 들었다. 저것은 소음기가 장착된 총소리였다. 여자는 총소리를 감지한 니콜라스를 보고 놀라워했다. '일반인은 전혀 듣지 못할 소리다. 그런데 저 사람은 어떻게 알아들 은 걸까?'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 가늠할 수 없는 청력. 그러고 보니 저 소년은 인간이라기에는 믿어지지 않는 괴력을 소유하고 하고 있었다. 게다 가 손바닥에서 만들어낸 신비한 에너지 구슬. 절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쉽지만 널 때려부수는 건 나중으로 미뤄야겠군." 니콜라스가 문을 열려 하자 여자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달려들었다.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막으라는 명령은 지켜야 했다. "귀찮아." 여자가 눈에 살기를 품고 달려들자 니콜라스는 주먹을 가볍게 휘둘 렀다. 복부에 주먹을 맞은 여자의 몸이 붕 떠올랐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여자는 저만치 나동그라졌다. 여자는 억지로 일 어나려고 애를 써보았다. 그러나 중요한 회로가 끊어진 듯 몸이 말 을 듣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재빨리 문을 열었다. 방안은 심하게 어지럽혀져 있었다.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 같았다. "누나?" 레이온의 목을 틀어쥐고 있는 그녀를 보고 니콜라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한 손으로 그의 체중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도저히 가녀린 소녀의 것이라 믿어지지 않는 괴력이었다. 그녀가 눈을 돌렸다. 차가운 얼음의 결정체였다. 니콜라스는 그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한 걸음 물러났다. 평소 보아오던 활기 찬 눈빛이 아니었다. "너는… 니콜라스?"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지럽혀진 기억의 잡동사니를 힘들게 뒤지는 듯한 표정이었다.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니콜라스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 을 받았다. 고작 눈을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 손바닥이 흥건히 젖어 있는 것이었다. 이제껏 이렇게까지 자신을 긴장하게 만든 이는 결코 없었다. 니콜라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누나, 괜찮아?" 그녀는 더욱 혼란스러워 했다. 손아귀에 힘이 풀어지자 레이온의 몸 이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가 의식이 거의 없는 걸 확인한 니콜라스는 다시 그녀에게 눈을 돌렸다. 그녀는 심하게 몸을 비틀거리고 있었다. "누나? 괜찮은 거야?" "너는 누구지?" 초록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혼란으로 덧칠해져 있지만 한 치 의 장난기도 없는 눈빛이었다. 니콜라스는 그제야 그녀가 예안이 아 니라는 것을 깨닫고 멍한 얼굴이 되었다. '뭐야 이거?' 분명 누나의 육체였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의 영혼이 그 안에 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맞닥뜨린 그는 패닉에 빠진 표정을 지 었다. "당신은 누구지? 왜 누나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거지?" "나는…." 제이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마음은 심하게 뒤틀려져 있 었다. 틀어진 그 마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영혼이 강제로 맞물려진 고통. 그것을 억지로 견디던 그녀는 끝내 머리를 쥐어 잡고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 악!!"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머리를 움켜잡은 채 그렇게 계속 고통스러워 했다. 니콜라스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상대가 누나가 아 니라면 자신이 걱정할 까닭은 없었다. "그대로 사라져. 그리고 누나를 돌려 줘." 제이는 괴로워했다. 뒤틀린 기억. 어긋난 시간. 내가 아닌 누군가가 이미 끝내버린 나의 꿈. 세 엇갈림의 고통에 시달리며 비명을 지르 던 그녀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동자는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웃기지 마! 내가, 내가 이대로 사라질 것 같아!" 비틀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지탱하던 그녀는 니콜라스를 향해 한 걸 음씩 다가왔다. 당황한 니콜라스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나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공격하는 건 쉽다. 하지만 누나도 다칠 텐데.'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던 니콜라스는 문득 유빈이 생각났다. 마음 에 안 드는 녀석이었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누나 정신 차려! 유빈이를 두고 그대로 없어질 거야!" 제이의 몸이 멈칫했다. 니콜라스의 목을 향해 뻗어오던 팔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니콜라스는 침착한 눈으로 제이를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지고 있었다. 좋은 기회다. "정신 차려! 누나가 없으면 유빈이는 누가 보살펴!" 제이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것은 제이의 것이 아니었다. "아아…."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그녀는 털썩 쓰러졌다. 니콜라스는 황 급히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 위에 그녀 의 머리를 놓았다. 새파랗게 질린 그녀의 얼굴에 이윽고 온기가 돌 아왔다. "누나 괜찮아?" 눈꺼풀이 몇 번 깜박이더니 눈이 스르르 떠졌다. 힘없이 자신을 올 려다보는 녹색 눈동자를 보고 니콜라스는 안심했다. 그 눈빛은 예안 의 것이었다. "정신이 든 거야?" "니콜라스…." 예안은 그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격렬한 운동을 하고 난 듯 온몸이 피로하기 그지없었다. ST기관의 무한생명에너지로 버티는 육 신이 지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안은 그것에 만족했다. ST기관이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한 다는 사실. 그것은 아직 자신이 지구인으로, 유진우로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꿈을 꿨어." "꿈?" "있지. 내 몸을 다른 사람한테 뺏기는 꿈…." 예안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꿈속에서 들었던 여자의 목소리가 기억 났다. 영혼이 얼어붙는 건 아닐까 섬뜩해할 정도로 차가운 제이의 목소리. 그녀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어이없어 했다. '왜 제이의 기억이 나한테 있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건 오리지널 유젤의 기억이지 제이의 기억은 아니었다. 물론 오리지널 유젤과 제이가 하나였던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긴 하 다. 그러나 조금 전 자신의 몸을 점령했던 섬뜩한 기억은 아주 낯선 것이었다. 그건 자신이 알고 있는 기억이 아니었다. 도대체 형은 내 몸에 무슨 짓을 했던 거지? "형…." 비틀거리던 예안은 쓰러져 있는 레이온을 보았다. 감히 자신의 본질 을 부정하면서까지 자신을 소유하려고 한 남자였다. 그녀의 눈동자 에 분노가 떠올랐다. "누나?" 니콜라스가 걱정스럽게 불렀다. 예안은 피식거리며 화를 누그러뜨렸 다. 어찌 되었든 레이온은 자신에게는 커다란 은인이었다. 또 무척 가여운 사람이기도 했다. 고작 이 정도 가지고 자신이 그를 비난할 자격은 없었다. 예안은 이번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녀는 유젤을 향한 그의 사 랑의 깊이를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오리지널 유젤의 기억 덕분이 기는 했어도. "어?" 그제야 예안은 상반신에 아무것도 안 입고 있는 걸 깨달았다. 그녀 는 얼굴을 붉히며 반사적으로 니콜라스를 밀어내고 등을 돌렸다. "옷이나 좀 가져 와. 아무거나." "응." 니콜라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뛰어나갔다. 예안은 창 밖 의 어둠을 내다보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뭐야, 유진우? 어울리지 않게 부끄러움이나 타고. 네가 여자야? 여 자냐고? 응?" 예안은 남자로서의 자아를 더 소중히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여 자로서 살아가는 것은 연기로 그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 남자로서의 자신을 포기하면, 그 틈을 타고 레이온이 공격해 들어올 것이다. "으윽…." 레이온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서서히 의식이 깨어나고 있 는 모양이었다. 예안은 연적을 바라보듯 차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 았다. "깨어났어?" 예안은 적의를 누르며 덤덤히 물었다. 겨우 눈을 뜬 레이온은 가슴 을 팔로 살짝 가리고 있는 그녀를 보고 피식 웃었다. "예쁘다 유젤." "헛소리하지 마. 난 그렇게 한가하지 못해." 차가우리만치 침착하게 그를 추궁하는 자신이 싫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좀더 뜨거운 분노를 목소리에 싣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깊은 나락에 침전되듯 고요한 자신을 바라보는 게 싫어 그녀는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형. 사실대로 말해. 거짓말이지? 아까 한 말 다 거짓말이지?" "후후. 수술 따윈 하지 않았다는 말?" 레이온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정색했다. "거짓말이 아니야." 그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이잖아! 왜 자꾸 날 속이려고 드는 건데!!" 그것은 분노이되 분노가 아니었다. 형식적으로 어설프게 분노를 흉 내내는 몸짓에 불과했다. 예안은 지금 화를 내고 싶어도 낼 수가 없 는 것이다. 그 의미의 본질을 꿰뚫어본 레이온은 승기를 손에 넣었 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는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고 있을 거 야. 지금 네 기분이 어떤지 잘 살펴보도록 해." 예안의 눈동자가 점점 가라앉았다. 침전되어 있던 가짜 분노가 씻은 듯 사라졌다. 바로 그게 한계였다. 하찮은 감정을 흉내내는 어설픈 속이기의. 눈을 감은 그녀는 두 손으로 가슴을 감쌌다. 자궁 속의 태아처럼 천 천히 뛰는 심장 소리가 그녀의 영혼을 울렸다. 어울리지 않게 가장 분노해야 할 상황에서 주어진 차가운 침착함.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곱씹던 그녀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14 회] 날 짜 2004-07-28 조회 / 추천 1990 / 31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해저의 속삭임 "형." 예안은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온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부탁해.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 줘." 레이온은 흔들리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울먹였다. "제발 부탁이야. 나한테서 예안이를 빼앗아 가지 마. 나한텐 이제 그 애 하나뿐이란 말이야. 어차피 형은 그 애가 아니더라도 좋은 여 자들 얼마든지 골라잡을 수 있잖아?" 가녀린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힘없이 바닥에 늘어뜨려진 붉은 머 리카락이 미미하게 떨렸다. 레이온은 조금 수척해진 얼굴로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네가 지금 우는 게 진심이라 생각하니?" 예안은 눈물 젖은 얼굴을 들어 그를 보았다.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가련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레이온은 조금도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는 듯 눈빛을 굳혔다. "넌 지금 그 남자애의 그림자에 속고 있는 거야. 네가 그 남자애라 고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냉정하게 생각하면 내 말이 거짓말이 아 니라는 것을 알 텐데?" 더 이상의 분노가 솟아나지 않는 가슴을 쓰게 어루만지며, 예안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전 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자신을 부정하려 하고 있는데도. "이제 방황은 그만 두고 나한테 와. 난 누구보다 널 아끼고, 사랑하 고, 지켜줄 수 있어." 차라리 받아들이고 싶은 그의 부드러운 음성. 그러나 그에게 유젤을 빼앗기는 것은 싫다. 예안은 한 조각 남은 오기로 그를 부정하려 했 다. "싫어! 싫단 말야! 제발 날 내버려 둬!" 악을 쓰며 그의 손을 뿌리친 예안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어설프게 증오를 흉내낸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나한테 다가오지 마! 예안이를 뺏으려고 하면 형을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죽일 거야! 정말 죽일 거야!" 레이온은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도저히 자신의 말을 믿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 이상 그녀가 원하는 대로 내버 려둘 수는 없었다. 시트날타의 본국과 바깥 세계를 연결하는 게이트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그동안 느긋해하던 앤슨이 드디어 서두를 조짐이 보였다. 그것을 더 참고 볼 수 없었던 레이온은 결국 자신이 먼저 손을 쓴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도저히 말을 믿을 생각을 않는다. "앤슨은 나와는 달라. 그는 너를 잡아들이는 것쯤은 손쉽게 해낼 남 자란 말이야." "웃기지 마. 난 안 잡혀. 누구에게도 안 잡혀." "니콜라스를 믿는 거니? 하지만 그 녀석도 시트날타의 인물이잖아!" 그의 고함에 예안은 움찔했다. "알고 있었어?" "내 정보망을 우습게 보지 마. 네 주변에 있는 인물들은 진작에 다 꿰고 있어." 레이온은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일어났다. 전신이 조금 욱신 거렸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예안은 가슴을 팔로 가리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는 더 이 상 다가오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다는 건 앤슨도 알고 있다는 거야.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니?" 그녀는 앤슨에게 들켰음에도 거처를 옮기지 않는다. 그는 어리숙하 게 살아가는 그녀가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갑갑하게까지 느껴지는 느긋함은 그녀가 에덴인이었기에 표출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무의식 적으로 구인류가 자신에게 위협을 끼치지 않을 거라 방심하고 있는 것이다. 레이온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씩씩거리던 그는 움찔한 예안 을 노려보듯 바라보며 내뱉었다. "널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어." 간절한 어조였다. 그러나 예안은 고개를 저었다. 도무지 마음에 와 닿지는 않는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해야 정답이었다. "너는 인간들 틈에서 오래 살 수 없어.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의 인 격체로 널 좋아하는 게 아니야. 너를 숭배하고 있을 뿐이야. 그 사 실을 모른 채 말이야." 그는 흥분이 침전된 얼굴을 한 채 녹빛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 다. "만약 그들이 그걸 자각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한 번이라도 상상해 봤니?" "…무슨 소리야?"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예안은 되물었다. 레이온은 그녀를 비웃듯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생물은 자기보다 월등히 고귀한 것을 숭배하려고 하지. 인간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야. 네 주변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너의 고귀함을 감지하고, 그래서 널 숭배하고 있을 뿐이야. 그걸 널 좋아한다고 착 각하고 있는 거지." 아름답다고 느낀다는 건 자신보다 월등히 고귀한 존재와 접할 때 형 성되는 마음의 변화이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반복해오면서, 인간들 은 타인에 대한 호감과 고귀한 존재에 대한 숭배를 구분하는 힘조차 잃어버렸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기에, 그녀 주변의 사람들은 그녀를 좋아할 수 없다. 숭배하고 추앙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좋아한다는 호감으로 착 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렇게 쉽게 끌리고, 쉽게 다뤄지는 것 뿐이다. 그러한 숭배는 대단히 위험하다. 인간은 고귀한 존재에 어떤 식으로 든 맞서서, 그것을 무너뜨리고 싶어한다. 그녀를 망가뜨리려는 미친 놈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판국이다. 추앙심의 본질을 자각하고 난 뒤 인간들이 그녀를 어떻게 대할지 예측할 수 없다. 레이온은 침착히 그런 이야기를 했다. 예안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너는 인간들 사이에서 오래 살 수 없어. 아니, 그렇게 평범하게 섞 여 지낼 수 없다고 하는 게 옳겠지. 그래도 네가 계속 그렇게 살아 가고 싶다면…."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에서 날카로운 청광이 쏟아져 나 왔다. "인간들을 지배해." 예안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그의 절실함이 비로소 가슴 에 조금 와 닿았다. 그는 단지 유젤을 빼앗으려고만 하는 게 아니 다. 진심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염려해주는 것이다. 조용히 가슴을 감싼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조금 전까지의 서러 움은 거짓말처럼 말끔히 사그라져 있었다. 레이온은 등을 돌렸다. 그는 팔짱을 끼고 창 밖을 바라보며 무뚝뚝 하게 계속 말했다. "나는 네가 인간들 사이에서 망가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네가 불 행해지는 것도 원치 않아.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널 잘 이해 할 수 있는 내가 옆에 있어줘야 해." "…."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 결국 난 네 부하 따위로 전락하고 말 거야. 누가 뭐라고 해도 네가 나보다, 아니 구인류보다 고귀한 것은 절대 사실이니까." 예안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레이온은 등을 돌리고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빙긋 웃었다. 한결 여유로워진 미소였다. "내 욕심이지만, 난 너의 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너와 동등한 입장에서 널 사랑해주고 싶어. 그래서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만들려 고 하는 거야." 단 한 번 신이 인간에게 허락했다는 선악과, 자이오 다이아몬드. 일 찍이 인간이 만들어낸 아담은 그것을 써서 죽은 이브를 살려내고 제 2의 지구, 에덴 혹성을 만들었다. 그것을 사용한다면 한 명의 구인 류를 신인류로 탈바꿈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제발 날 거부하지 마. 이대로 순순히 나를 따라 와. 너만 오케이 한다면 유빈이하고 너, 나, 이렇게 셋이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어. 네가 원한다면 그 유정호라는 사람도 함께 할 수 있어." 그는 유혹을 하는데 능숙하다. 끌리지 않을 수 없는 신비한 분위기 를 지니고 있다. 그가 신인류로 태어났더라면, 모든 인간들은 한결 같이 그의 지배를 자청하고 나섰을지도 모른다. 눈을 뜬 예안은 말없이 그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녹빛 보석같은 그 청명함에서 레이온은 부정의 의지를 보았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싫은 거구나? 그러기 싫은 거구나?" 예안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그 녀석 기억 때문이지? 그 하찮은 남자애 기억 때문에 그러는 거 지? 대단해, 구인류의 집착이란 정말 대단해. 남의 영혼에 그림자로 끼어 들어온 주제에 그렇게 완벽하게 본인 흉내를 낼 수 있다니 말 이야." 빈정거리는 어투에 예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그 말은 맥이 했던 말과 대단히 흡사했다.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본 레이온은 작게 피식거렸다. "그렇게 놀란 눈을 할 건 없어. 맥은 함부로 프라이버시같은 걸 넘 기지 않으니까. 하지만 해킹은 가능하지."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들어올렸다. 무척 자랑스러운 얼굴이었다. "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나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 해. 아니,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게 정답이겠지. 그 녀석은 네 가 내 소유가 되길 원하고 있으니까." 그녀는 굳은 얼굴로 원격장치를 노려보았다. 차갑게 빛나는 은색 광 택이 맥의 외면을 대신 말해주었다. "미쳤다고 말해도 좋아. 그렇지만 난 이대로 널 그냥 두고 볼 수 없 어. 네가 계속 거부한다면, 네 팔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널 내 것으 로 만들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넌 불행해지니까." 예안은 그의 눈동자에서 섬뜩한 묵빛의 광기를 보았다. 기다림과 사 랑이 한데 섞여 만들어진 그것은 차라리 수용하는 게 편할 정도로 두려운 것이었다. 그가 뚜벅뚜벅 다가왔다. 그녀는 겁먹은 얼굴로 주춤 뒤로 물러섰 다. 그러나 몇 발짝을 떼어놓지도 못하고 벽에 가로막혔다. 집착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예안은 멍한 눈으로 그의 체온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그를 보듬어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조금씩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것은 오리지 널 유젤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속삭였다. 아주 달콤하게. "잊지 마. 넌 내 것이 돼야 한다는 걸." 그의 집착이 애수로 비춰 보인다는 것. 그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싶 어진다는 것. 그녀는 그 변화의 의미를 깨달아 버렸다. 요새 한창 잘 나간다고 소문이 자자한 인기작가, 월명X희의 중X님 을 어제 만나서 벗겨먹었습니다. 저녁 식사에다가 술값까지 X강님이 전부 다 내셨지요.(오호호호) 무엇보다도 월명성희 1, 2권 싸인본을 즉석 라이브 생산으로 얻었 다는 게 어제의 가장 큰 쾌거였습니다. 오늘따라 콜라가 무척 먹고 싶어지는군요. 하지만 주머니에 돈이 없 습니다. orz 블로그를 폐쇄했습니다. 새로 재단장을 하려고요. 그런데 다시 재가입 을 하려니까 일주일 후에 된다는군요. 어휴. 아담의 상처 수정 끝냈습니다. 이제 조아라에 있는 것을 읽으셔도 됩니다. 이번이 두 번째 수정, 그러니까 세 번째 완결인만큼 저에게는 그 의 미가 남다릅니다. 일단 더 이상의 수정은 없습니다. 이만하면 이제 남 앞에 선보여도 부끄러워 쪽팔릴 지경은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수정하지 않으면 미 칠 것 같은 강박관념은 이제 없으리라 봅니다. 아상은 분량이 1380kb정도입니다. 수정 전에는 2500kb 가량 됐으니, 거의 1/2로 그 분량이 줄어든 셈입니다. 그만큼 이번 문장의 군더더 기를 다 뺐습니다. 특히 앤드류를 부각시켰고, 서운이 죽는 장면 등등의 애절함을 이전 버젼보다 더 임팩트하게 할 수 있어 만족스러웠습니다. 첫 번째 수 정버젼의 아상에 비해서 제 필력이 향상된 것을 느낄 수 있어 정말 좋았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불만족스러운 부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 상 전체에 걸친 미흡함이지, 이번 수정 작업에 대한 불만이 아닙니 다. 전 한 마디로 이번 수정은 정말 성공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좀 부끄럽지만 쓰다가 몇 번 운 적도 있습니다.(...) 독자분들 중에서 아상을 안 본 분들이 있으시다면 봐주십사 부탁드 립니다. 아상을 보시면 소엄이 더욱 더 재미있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아상을 보셨던 분들이라도, 수정 버젼을 한 번 더 봐주시면 고맙겠습니다.(물론 시간이 나시면요.) 스토리가 달라진 것은 없지 만, 중요하고 긴박한 부분 등에 있어서의 연출이 예전과 사뭇 달라 졌습니다. 제가 몇 번 울기까지 했다니까요.(...) ps : 200화 이벤트는 오늘로서 종료를 고합니다. 참여해주신 16분 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혹, 참여를 했는데도 제가 상품을 드리지 않은 분들은 208화에 코멘으로 남겨주세요. 기억력이 깡통 이라 뭐든지 쉽게 잊어버립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15 회] 날 짜 2004-07-29 조회 / 추천 2157 / 33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해저의 속삭임 "비켜!" 예안은 화를 내며 그의 몸을 거칠게 밀어냈다. 통증의 잔해가 남아 있던 그는 힘없이 뒤로 밀려났다.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었을 뿐, 그는 몸 여기저기에 느껴지는 아픔을 억지로 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거짓말 더 이상 재미없어! 말했잖아! 예안일 빼앗아가지 말란 말이야! 절대 못 줘! 형이든 누구든, 예안이는 절대 못 줘! 내 거 야! 내 거야! 내 거란 말이야!" 서럽게 느껴지는 발악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유젤에 대한 '그림자' 의 집착이었는지, 아니면 자아를 지키고자 한 몸부림이었는지는 그 도 그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서러운 것이다. 주먹을 불끈 쥔 레이온은 죽일 듯 예안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동 자에 숨은, 한 나약한 소년의 그림자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정말 건방지구나. 그렇게나마 살아남았으면 됐지, 감히 너 따위가 나한테서 유젤을 빼앗아 가려고 해?" 예안은 겁에 질린 눈으로 주춤 물러섰다. 아니, 물러서려고 했다. 그러나 등에서 느껴지는 것은 서늘한 금속 벽의 감촉뿐이었다. 그는 죽일 듯한 눈을 한 채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그가 증오하는 것은 예안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자리잡은 나약한 기억의 그 림자였다. 그는 자신의 빛으로 그 그림자를 지워버리려 했다. "왜, 왜 그래?" 잔뜩 겁을 집어먹은 예안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를 밀쳐내고 도 망가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유젤마저도 그를 원하고 있 는 것인가. 예안은 처음으로 이 육체에 강한 배신감마저 느꼈다. 갑자기 그가 눈빛을 풀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앤슨은 네가 아기를 낳은 걸 몰라. 네가 어디에 있는지만 파악하고 있으니까." "…알고 있어." 예안은 억지로 태연한 척 끄덕였다. 유빈의 존재를 앤슨이 안다면 그는 진작에 그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생각해 봐. 만약 앤슨이 유빈이를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덤덤한 어투였지만 예안은 얼굴이 새파랗게 굳었다. 그는 초연한 눈 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널 강제로 납치해도 또 탈출할 우려가 있기에 앤슨은 지금 너에게 손을 대지 않는 거야. 그는 네가 자발적으로 시트날타에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무언가를 꾸미고 있지. 그래서 네 거처만 파악해놓고 별 다른 신경은 쓰지 않는 거야." 레이온은 불길함을 상징하는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예안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설마…?" "그 설마가 맞아. 앤슨이 유빈이를 알게 되면 아마 얼씨구나 하고 납치하겠지. 그리고 목적을 이룰 때까지 네 접촉을 막을 걸? 한 달 에 한 번만 만나게 해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야." 그 순간 예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는 속으로 바보 같은 자신을 탓했다. 바보 같이! 여태껏 왜 그런 생각을 못한 거야! 방을 뛰쳐나온 예안은 니콜라스가 가만히 서 있는 걸 보았다. 그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으려 일부러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럴 시간 없어! 집으로 얼른 가야 돼!" 그의 손에서 셔츠를 낚아챈 예안은 그것을 입으면서 뛰었다. 대화를 엿들은 니콜라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빠르게 뛰었다. '유빈아! 무사해야 돼!' 앤슨에게 잡혀 우는 아기를 상상하자 숨이 막힐 듯 가슴이 조여 왔 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는 가슴을 안고 어둠 속으로 뛰어갔다. "잠깐!" 갑자기 레이온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무시하고 뛰어가려 했으나, 그 목소리에 자리잡은 중후함을 느끼고 그만 슬그머니 멈췄다. 입구에 선 채로 레이온은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는 집착을 싣고 활활 불타고 있었다. "잊지 마. 절대 잊지 마. 넌 내 거라는 것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를 노려보던 예안은 등을 홱 돌려 어둠 속을 뛰었다.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던 니콜라스도 서둘러 그녀를 따라갔다. 멍한 얼굴로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레이온은 문을 닫고 등 을 돌렸다. 절뚝거리며 일어난 넬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심하게 망가진 넬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왼팔은 아예 없어져 버렸고 오른팔은 심하게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복부에도 강한 충격을 받았는지 찌그러진 와중에 스파크가 이따금씩 피어올랐다. "심하게 당했군. 네 전투력으로도 이길 수 없었나?" "죄송합니다. 상대의 전력을 몰랐기에 그만 당했습니다. 하지만 다 음 번에는 이렇지 않을 것입니다." 넬은 패배의 안색이 없는 얼굴로 덤덤히 말했다. 과연 감정이 거세 된 안드로이드 다웠다. "유젤 님이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앤슨은 아직 모릅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안다고는 안 했어. 만약 알게 된다면 위험할 거라고 했지." "그렇다면 유젤 님은 바보로군요. 그런 것쯤은 진작에 예측하고 있 는 게 정상 아닙니까?" "바보? 정말 그렇게 생각해?" 레이온은 피식거렸다. 누구라도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넬은 모른다. "넬. 인간은 말이야. 무의식적으로 자기보다 약한 상대를 깔보는 경 향이 있어. 자기보다 약한 복서에게 방심한 탓에 쉽게 벨트를 내주 는 챔피언이 좋은 예지." 넬은 덤덤한 얼굴로 들었다. 그를 좀더 잘 보좌하기 위해서 하나라 도 많은 데이터를 획득하는 것이 그녀의 임무 중 하나였다. "너무 뻔한 사실이라고 해도, 상대방이 자신보다 한참 아래의 인간 일 때는 무심코 그냥 넘어가게 돼. 그리고 이건 꼭 인간에게만 해당 되는 게 아냐. 인간을 넘어서 모든 생물들에게 해당되는 거지." 넬은 알았다는 듯 끄덕였다. "그렇다면 유젤 님은 자기도 모르게 각성을 해나가고 있다는 말도 되겠군요." "…그렇게 되나? 그럼 이거 기뻐해야 하는 걸까?" 천재는 바보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천재가 그만큼 많은 방심을 내보인다는 뜻이 된다. 범재를 아무것도 아니라 여기고 깔보는 것이다. 유빈을 인질로 삼아서 협박한다는 가정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 러나 예안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 속에 무의식적으로 구인류를 깔보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레이온은 창가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는 창문에 달라붙은 서늘함 을 바라보며 조금 서글픈 얼굴을 했다. 조용히 그를 바라보던 넬이 물었다. "앤슨은 유빈이 님을 알게 된다 해도 납치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젤 님을 회유하기는 쉽다 하나, 그만큼 유젤 님의 미움을 사게 될 테니 까요. 그것은 앤슨이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알아. 앤슨은 유빈이를 알게 돼도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납 치하지 않을 거야. 아직 그만큼 여유가 있으니까." 묵빛의 어둠을 바라보던 그는 쓰게 덧붙였다. "하지만 그가 계획한 게 실패로 돌아갈 경우에도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그의 등에서 서늘한 한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예안이 앤슨의 소 유가 되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앤슨은 차갑다. 그리고 훌륭하다. 그러나 그것은 구인류를 대할 때 만 그러할 뿐이지, 그가 실제로 예안을 만나게 됐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예측할 수 없다. 앤슨처럼 집념이 강한 엘리트일수록 신세 계와 맞닥뜨린 충격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예안은 그 자체로 월등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그 초월의 미(美)에 심취했을 때, 앤슨은 정말 그녀를 박제로 만들어 자신의 곁에 두려 할지도 모른다. 상대를 사모하지만 숭배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때에, 인간은 그 아름다움을 죽여서라도 손에 넣고 싶어한다. 그것이 바로 본질의 강간. 무거운 기운이 흐르는 그의 뒷모습을 주시하던 넬은 입을 열었다. "이 전쟁을 통해 앤슨이 바라는 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레이온은 그제야 등을 돌렸다. 서늘한 그의 눈동자는 어리석은 인간 을 향한 비웃음을 가득 품고 있었다. "현상의 증명이지." 그러나 레이온은 알고 있었다. 앤슨은 현상을 증명하기는커녕, 증명 당할 것이라는 것을. 소엄이 끝나기 전까지, 복선에 관한 질문에는 일체 노코멘트로 일관하겠습니다.(예전에도 말했지요?) 그것은 독자 여러분들이 스스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입니다. 저는 독 자의 권리를 빼앗고 싶지 않습니다. ps : 유조아에 있는 아담의 상처도 수정 완료했습니다.; 왜 유조아에 있는 건 냅뒀다는 소문이 도는 거지요?ㅠㅠ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16 회] 날 짜 2004-07-31 조회 / 추천 2266 / 33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해저의 속삭임 택시 안에서 예안은 내내 초조해했다. 니콜라스는 걱정이 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을 뿐 말을 걸진 않았다. 차창 밖을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을 보며 예안은 발을 동동 굴렀다. 아무리 침착해 보려고 해도 심장의 두근거림이 가라앉지 않았다. '괜찮을 거야. 앤슨은 아직 유빈이를 모르고 있잖아? 알았으면은 벌 써 저번에 잡아갔겠지.' 첫 번째 출전했을 때 앤슨이 아무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으며, 예안은 또다시 택시 기사를 채근했다. "아저씨. 좀 빨리 가주세요." "지금도 제한 속도 넘어서고 있어. 무슨 일인데 그래?" "빨리 좀 가주세요. 빨리요." 초조한 마음을 가득 안고 예안은 그렇게 재촉했다. 택시 기사는 혀 를 쯧쯧 차며 또 엑셀을 밟았다. 속도는 140km/h에 가까웠지만, 예 안은 그래도 굼벵이 위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1초라는 시간이 한 시 간처럼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겨우 집에 도착한 예안은 초인종을 누를 새도 없이 열쇠로 문을 열 고 뛰어들었다. 니콜라스가 얼른 삯을 치르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유빈아! 유빈아!" 거실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TV를 보고 있던 정호는 숨을 헐떡 이며 뛰어든 예안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왜 연락도 없이 되돌아왔니?" "유빈이, 유빈이 어딨어!!" 침착함을 잃은 그녀는 악을 썼다. 척 보기에도 반쯤은 넋이 나가 있 는 상태였다. 정호는 얼떨떨한 얼굴로 아기 방을 가리켰다. "유빈이라면 지 방에서 자고 있는데…." 정호를 내팽개친 채 예안은 문을 열었다. 불을 켠 그녀는 아기침대 에 누워 쌔근쌔근 자고 있는 유빈을 보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다리 에 힘이 풀리며 몸이 무너진 그녀는 기다시피 침대로 갔다. 겨우 안 심이 되었다. 그녀는 턱을 괴고 유빈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으로 유빈의 입가를 가만히 간질였다. 자그마한 배를 다독이던 그녀는 소리 없이 터져 나오는 눈물을 삼켰다. 이 소중한 아기가 인질로 잡힌다는 것은 상 상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레이온은 미처 모르고 있던 그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한 것은 원망스럽지만, 그래도 예안은 그 사실 하나만큼 은 진심으로 감사했다. "으, 응…." 유빈이 조금만 몸을 뒤척였다. 예안은 서둘러 눈가를 찍어내며 일어 났다. 불을 끄고 돌아서던 그녀는 어둠 속에서 목소리를 들었다. "어, 엄마?" 어눌한 발음으로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그녀는 왈칵 눈물을 쏟을 뻔 했다. 그녀는 다시 불을 켜고 아기 침대 곁으로 갔다. 눈을 뜬 유빈이 조 그만 팔을 뻗으며 일어나려 낑낑대고 있었다. 그녀는 피식거리며 두 팔로 유빈을 들어올려 가슴에 껴안았다. "엄마. 어디 갔어." 말은 이렇게 잘하는데 아직 걸음마도 못하는 아이. 예안은 유빈을 소중하게 꼭 껴안으며 뺨을 비볐다. "엄마가 잘못했어. 이제 유빈이 두고 아무데도 안 갈게." "진짜지?" "그러엄." 유빈은 헤실헤실 웃으며 어눌한 발음으로 엄마 좋다는 말만 반복했 다. 예안은 눈을 감고 품안의 아이를 다독이며 고운 목소리로 자장 가를 불러주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분유도 안 먹으려고 드는 아이를 혼자 내 버려두고 싸움이나 하러 가다니. 난 부모로서 정말 실격이야.' 어느덧 유빈은 평화로운 얼굴로 잠이 들었다. 그녀는 아이의 뺨에 가만히 입술을 댔다. 그때 노크 소리가 똑똑 들렸다. "들어 와." 니콜라스가 들어왔다. 그는 잠시 부러운 시선으로 그녀 품안의 유빈 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전쟁은 어떻게 할 거야? 내일 당장 출항하기로 되어 있지 않았어?" "안 갈 거야." "김중현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상관없어. 이제 더 이상 유빈이 혼자 못 놔둬. 레이온 형 말대로 언제 앤슨이 와서 유빈이 잡아갈지 모르잖아?" 니콜라스는 가만히 끄덕였다. 자신의 임무는 그녀를 따라다니면서 보호하는 것이지, 정치 게임에서 그녀가 어떻게 행동하도록 조언하 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전장으로 가든 가지 않든 자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아까 그 남자는 도대체 누구야? 누나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치고 는 너무 집착이 강한데." "…있어. 넌 몰라도 돼." "그 남자랑 이야기하고 있을 때 일부러 안 들어갔어. 누나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듯 해서." 그의 변명이 귀엽다 생각하며 예안은 쿡쿡 웃었다. "걱정 마, 걱정 마. 네 능력을 의심하거나 그런 거 아니니까." "여차 싶으면은 당장 쳐들어가서 그 녀석을 쏘려고 했어." "그래그래. 알았다, 알았어." 왠지 아이처럼 칭얼거리는 것 같다. 뾰로통한 얼굴로 못 믿는 거냐 고 바라보는 게 무척 귀여웠다. 예안은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얼굴 을 펼 수 있었다. "이 집에 있는 동안은 안심해. 난 자는 중에도 침입자가 접근하면 알아차릴 수 있으니까." "그래, 너만 믿을게. 그만 들어가서 자." 문이 닫히고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게 들렸다. 예안은 어둠 속에 서도 아기를 껴안고 계속 등을 다독였다. 서투르지만 어색하지는 않 은 자장가 소리가 고요하게 어둠을 타고 흘렀다. 어느 순간 자장가가 뚝 끊어졌다. '잊지 마. 절대 잊지 마. 넌 내 것이라는 것을.' 그 말을 하던 레이온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백열빛을 등진 채 집착의 섬뜩함, 오히려 애달픈 애수로까지 비춰지는 눈을 하고 자신 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을. 손을 들어올린 예안은 어둠을 통해 그것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미약 한 불빛에 의지해 그녀는 손가락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가 한 말이 거짓말이기를 바랬다. 뇌 이식 수술 따위를 하지 않았 다는 말이 거짓이기를 바랬다. 지금까지 이렇게 힘들게 살아온 자신 이 유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유젤을 몹시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을 만큼. 그러나 유젤이 되고 싶기는 해도, 처음부터 자신이 유젤이었다는 것 은 원치 않는다. 자신을 부정 당한다는 것은 이 마음까지도 함께 부 정 당하는 것이다. '죽일까?'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예안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 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죽여버릴까?' 그녀는 레이온의 심장을 틀어쥔 자신을 상상했다. 그의 목숨을 빼앗 는다면 이 세상에서 자신을 부정할 수 있는 자도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지?' 그녀는 곧 그 생각을 포기했다. 그가 없어진다 해서 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살아있어야 진실을 추궁할 수 있는 기회 도 살아있는 법이다. 예안은 팔찌형 원격장치를 흘끗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녀석에게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겠지?' 맥은 철저하게 레이온의 편이었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그 사실을 노골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굉장히 섬뜩했다. 아기가 몸을 조금씩 뒤척이는 걸 느끼며, 예안은 아까 정신을 잃었 을 때의 자신을 떠올렸다. 마취약이 발린 총탄을 맞자 생명의 위협 을 느낀 제이가 본능적으로 눈을 뜬 그 순간을. 내가 아닌 누군가, 나 자신도 모르게 내 몸에 잠자고 있던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깨어나는 것은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다. 제이에게 몸을 빼앗긴 순간의 공포를 상기하며, 예안은 슬그머니 옷을 내려 왼쪽 어깨를 살폈다. 하얀 어깨는 소름끼치도록 깨끗했다. 상처 따위는 흔적조차 없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래. 차라리 이게 꿈이었으면….' 총에 맞았는데도 상처가 없다. 꿈이라 둘러대고 도피하기에는 오히 려 좋은 것이다. 그러나 무의미하게 현실을 부정해봤자 남는 것은 없다. 아기를 다독이며 그녀는 다시 생각을 바로잡았다. 그녀는 어째서 제 이의 기억이 자신에게 있는지 생각했다. 오리지널 유젤, 즉 유서운이 지닌 제이로서의 기억은 물론 지니고 있다. 그러나 순수한 제이의 기억은 자신이 갖고 있을 수 없는 것이 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망설이던 그녀는 눈을 감고 조심스럽게 제이의 흔적을 더듬어가기 시작했다. '신은 우리를 원하지 않아요….' '왜 당신이 그렇게 고통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조물주 프로젝트는 곧 완성돼요….' 끊어진 길을 억지로 잇듯, 제이의 기억을 쫓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 이었다. 그러나 예안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상념의 조각들을 찾아 이어나갔 다. 이따금씩 섬뜩하리만큼 지독한 동질감이 거센 공격을 퍼부었지 만 꿋꿋이 참아냈다. '저주할 거예요. 죽어서도 당신을 저주할 거예요.' 뚝. 예안은 반사적으로 추적을 멈췄다. 절정의 공포에 심취한 듯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어둠을 응시하던 그녀 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유빈을 꼭 껴안았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무시무시한 상상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너무 두려워 감히 엿보는 것조차 불가능한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이. 힘들게 그것을 부정하던 그녀는 유빈이 자그마한 팔을 뻗는 걸 느꼈다. 올망졸망한 아기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그녀는 픽 웃어버렸다. 어 느새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유빈아. 왜 깼어? 어서 자." 손가락을 물며 또렷한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던 아기는 다시 스르륵 잠이 들었다. 평화롭게 잠든 아이를 바라보던 그녀는 이윽고 무거운 한숨을 소리 없이 토해냈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번호를 확인해보니 중현이었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저, 김중현입니다. 지금 예안씨가 도착하기로 예정된 시각이 훨씬 넘었습니다. 걱정이 돼서 전화 드렸습니다만….」 "전 가지 않을 거예요." 수화기 너머로 중현이 크게 놀라는 게 느껴졌다. 예안은 침착한 얼 굴로 레이온을 만났던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그와 시트날타의 정체 에 관해서는 생략한 채, 가족들이 인질로 잡힐 우려가 있어 집에 있 겠다고 그렇게 둘러댔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중현은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동안 미처 몰랐습니다. 예안씨 거처가 그들에게 발 각되었을 줄은….」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사실 저도 잘한 건 없죠. 최근에 알았으면 서 일부러 말씀드리지 않았으니까요." 「당장 예안씨 집을 중심으로 경호망을 펼치도록 하겠습니다. 예안 씨는 니콜라스씨가 있어 괜찮다지만, 니콜라스씨가 다른 가족분들까 지 보호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래주시면 고맙고요." 예안은 성의가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음성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렇지만 이번 전쟁은 우리나라에 정말 중요합니다. 맥이 참전하 지 않는다면 패배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어떻게 내일이라도 와주시면 안 될까요? 가족분들을 보호할 요원들을 지금 당장 집 근 처에 잠복시키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계속 집에만 머무르고 싶다. 얼마 전의 그녀 였다면 중현이 아무리 간절히 부탁하든 어쩌든 간에 그렇게 했을 것 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녀는 책임감에 점차적으로 눈을 떠가기 시작했 다. 출산 이후 정신적으로 한층 성장한 그녀는 더 이상 어린아이처 럼 칭얼거리지 않았다. 중현의 말을 거부할 수는 없다. 중요한 전쟁을 앞두고 있는 판국에, 가족이 위험하다고 무턱대고 빠지겠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무책임 한 것이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눈을 떴다. "알았어요. 그럼 제 아이도 같이 데리고 갈게요." 조금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잘하면 되겠지. 예안은 그렇게 중 얼거렸다. (필독 부탁드립니다) 아담의 상처 내용 요약. 전세계의 의학, 과학, 경제, 전쟁 등등은 수백 년 전부터 존속해온 사도라는 과학자 집단이 컨트롤하고 있었다. 이들의 정체는 그 어떤 나라도 알지 못했으며, 그들은 간부들의 수 가 100명 남짓밖에 되지 않지만 한결같이 아이큐 200 이상의 천재들 뿐이었다. 서기 1940년도에 이르러 그들은 갑작스러운 질병을 앓기 시작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원인을 밝혀내는 것조차 불가능한 괴질이었다. 그 들은 그것을 저주 혹은 후유증이라고 불렀다. 그 시기에 사도 제일의 천재 과학자 레파드웬은 무수한 연구를 통해 알젝시온 유전자라는 것이 후유증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알젝시온 유전자는 단순히 대물림 되지만은 않았다. 수정체 단계에서 유전자 조작을 한다 해도, 성인이 된 후에 다시 생겨나기 일쑤였다. 저주라는 말 이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었 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서기 2010년도- 그 시대 사도 최고의 여 과학자 가이아는 NM 프로젝트(New Mankind) 를 시리우스(사도의 수장)와 공동으로 추진했다. 프로젝트의 핵심은 후유증을 이겨낼 수 있는 신인류를 탄생시켜 사 도의 맥을 잇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무에서 탄생된 사내아이, 즉 아담에게는 케르베로스(애칭 : 케이)라는 코드네임이 주어졌다. 두 번째 탄생에서 가이아는 자신의 뱃속의 아이를 수정체 단계에서 직접 NM 프로젝트 처리를 가해 신인류로 탈바꿈시켰다. 그렇게 케이와 6년의 차이를 두고 태어난 여자아이, 이브에게는 주 피터(애칭 : 제이)라는 코드네임이 주어졌다. 신인류의 가장 큰 특성은 ST기관을 통해 먹지 않아도 살 수 있고, 구인류와는 비교도 안 되게 뛰어난 지능을 지녔다는 것이었다. 제이는 완벽한 신인류였기에 후유증이 없었다. 그러나 불완전한 프 로토 타입이었던 케이는 후유증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가이아가 죽은 후 케이는 조물주 프로젝트라는 것을 추진했 다. 물질의 모든 것은 로데늄이라는 하나의 입자로만 이뤄졌다는 것 에 착안해, 달을 재료로 사용해 하나의 별을 만드는 것이었다. 후유증은 인간들의 원초적 감정, 열등감에서 뿜어 나온 사념파와 마 더(지구의 의지)의 힘이 결합돼 발생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낸 케이는 후유증을 치유하려면 지구를 떠나지 않는 이상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더불어 수장에게 조물주 프로젝트 를 알렸다. 그러나 그것을 반대한 수장은 케이와 제이를 죽이려고 했다. 그 과 정에서 제이는 죽었고, 케이는 부상을 입은 채 살아나갔다. 케이는 제이를 복제해서 부활시켰다. 그러나 제이의 몸에서는 항상 특수 파장이 흘러나오기에 사도에게 위치를 들킬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케이는 제이의 뇌를 어린 남자아이의 몸에 이식했다. 떳떳이 모습을 드러낼 힘을 쌓은 뒤에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고로 그만 남자아이의 몸에 들어간 제이를 잃어버리고, 십 년이 지난 후에야 병원에서 제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제이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자신이 유서운이라는 남자로만 알고 있었다. 양부모는 모두 사망했으며, 유서운은 백혈병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의 설명을 들은 유서운은 처음에 믿지 않았지만, 살 수 있다는 말에 이끌려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를 따라갔다. 원래의 몸으로 되돌아간 유서운은 여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케이는 제우스라는 경제망을 형성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도와의 접전 을 꾀했다. 케이는 제이가 기억이 되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알스가 그녀를 납치하는 것을 방관하기까지 했다. 사도에 잠시 감금됐던 유서운은 불현듯 제이의 기억을 깨닫게 되었 다. 그러나 10년 동안 형성된 구인류의 자아는 너무 강해, 유서운은 제이의 기억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제이와 서운은 완벽히 갈라졌고, 유서운은 케이에게 매달리 면서까지 살아남으려 했으나 끝내 제이의 공격에 소멸되었다. 그렇 게 이브가 완벽히 되살아났다. 최후의 결전이 끝난 후 케이는 조물주 프로젝트를 완성해 새로운 혹 성을 만들었다. 그 혹성을 에덴 혹성이라 명명한 뒤 아담과 이브는 아담의 방주(우주선)를 타고 그 별로 이주하며 엔딩. (but, 이야기는 유서운(남자)이 정체불명의 청년(케이)을 병원에서 처음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스토리가 전개되어 감에 따라 알젝 시온 유전자, 조물주 프로젝트, 마더, NM 프로젝트 등의 복선들이 하나 둘씩 밝혀지는 식이다.) --------------------------------------------------------------- 1부의 내용을 최대한 간략하게 줄인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흐름 만 빼내서 설명한 것이지, 가이아, 레파드웬, 메넬라오스, 헤르메 스, 하데스, 비너스, 기타 등등의 비운의 캐러들의 얽히고 설킨 관 계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음. 이것을 봤으니 이제 나는 1부 안 봐도 문제없어'라는 분들에게 는 제가 정말로 더 이상 해드릴 말이 없습니다. 그런 분들은 소엄을 읽으시다가 또 헷갈려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몰라요 알려 줘요 이게 뭐예요?'라고 물으셔도 저는 대답해드리지 않습니다. 2부에서 유서운은 기억을 고스란히 지닌 채 케이와 제이의 딸, 유젤 로 환생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외면한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해 지구 로 가출하는 것이지요. 후유증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사도의 어린 천재 소년 레이온(17세)과 그때 맞닥뜨리게 되고, 그럼으로써 벌어지는 또다시 갈등이 전개되 어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게 2부의 대략적인 흐름입니다. 그래서 오리지널 유젤(유서운의 환생)은 제이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전생에서 제이의 의식이었던 적이 있으므로) 서예안이 어 째서 제이와 유서운의 기억을 동시에 지니고 있을 수 있느냐에 대해 서 대답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최근 서예안이 자각한 제이의 기억은 자신이 알고 있던 기억 하고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서예안은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스토리 설정상 꼬인 부분이므로 글을 계속 읽다 보면 나 올 것입니다. 예리한 분들은 오늘 올린 편에서 그 답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원래 소엄은 1, 2부를 읽지 않아도 읽을 수 있도록 기획했습니다. 그러나 1, 2부를 읽지 않고도 완벽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간혹 자신은 1부를 안 봤는데도 다 이해한다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제 입장에서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1부를 안 읽어서 그렇다는 게 아니고요, 제가 힘들게 구상하고 짠 스토리를, 전부 다 읽지 않고서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왠 지 제가 바보가 된 기분이라서요. 1부와의 연관성은 소엄에서는 시크릿 스테이지와 같습니다. 메인 퀘 스트를 깨는데는 부담이 거의 없지만, 숨겨진 미궁같은 건 애초에 포기해야 합니다. 1부를 읽지 않는다면요. 그렇지만 소엄만 본다고 해서 소엄의 메인 스토리를 이해 못하는 것 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1부와 관련된 것만 이해를 못할 거라는 따 름이지요. 하여튼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1부를 안 읽으셨는데 1부 관련된 내용을 몰라서 버벅거리다가 질문하시는 건 자제해주세요. 저 위에 서 스토리 요약해드린 것만으로 전 할 것 다 했다 생각합니다. ps : 날씨가 많이 덥군요. 하루하루가 매사 의욕이 없어서 미치겠습 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17 회] 날 짜 2004-08-04 조회 / 추천 1765 / 20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해저의 속삭임 뜨거운 열기를 실은 바람이 산등성이를 따라 올라갔다. 머리카락을 지져 버릴 듯 강렬한 햇살을 억지로 견디던 엘르는 참다못해 손부채 질을 했다. 숨을 쉴 때마다 몸 속으로 들어오는 더위가 폐를 뜨겁게 했다. "피곤한가 엘르?" "아니오, 괜찮습니다." 엘르는 서둘러 손부채질을 멈췄다. 마리오는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 은 채 묵묵히 산을 올라갔다. 그 뒤로 비장한 기운이 감도는 얼굴을 한 여러 명의 남자들이 정갈한 복장을 한 채 뒤따르고 있었다. "실패했다지?" 한참을 묵묵히 걷던 마리오가 다시 입을 열자 엘르는 죄스러운 어조 로 조심스레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뜻밖의 실수였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엔젤이 탄 차를 헷갈려 하다니. 절대 해서 는 안 될 실수를 해버렸어." "면목 없습니다." "됐어. 당신을 더 탓해봐야 나아질 건 없겠지." 엘르는 조금 분한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에게 그런 타박조 를 듣는 건 무척 기분 나빴다. 어느덧 정상이 많이 가까워졌다. "도착이군." 산허리의 한 동굴 앞에 선 그들은 일제히 심호흡을 했다. 마리오는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 허리를 펴며 중얼거렸다. '이곳은 언제 와봐도 익숙해지지 않는군.' 높이 2미터 가량 되는 동굴 안에서는 으스스한 한기가 뿜어져 나오 고 있었다. 원혼이 내뿜는 살의에 싸여진 듯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가볍게 몸서리를 치던 그들은 마리오를 선두로 해서 안 에 들어갔다. 종유석이 툭툭 꺾어지는 소리가 곳곳에서 스산하게 들려왔다. 이번 이 두 번째인 엘르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뒤를 따 라가는 서너 명의 남자들도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한참을 걷자 육중한 문이 나타났다. 기관총으로도 끄떡없는 고강도 합금으로 만들어진 문이었다. 이 근처의 토지는 모두 시트날타의 소유라 누가 들어올 일이 없다. 그런데도 저런 튼튼한 문을 마련해놓았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것 이 안에 숨겨져 있다는 뜻이다. 마리오는 전자 장치에 암호를 입력했다. 신분확인 시스템은 그의 홍 채와 암호를 체크한 뒤 문을 열어주었다. 유리창을 손톱으로 긁는 듯 소름끼치는 듯한 느낌에 그들은 일제히 얼굴을 찌푸렸다. 소리 자체는 아무 특색이 없는데도 긴장한 탓인지 괜히 섬뜩하게 느껴졌다. 문틈으로 찬란한 빛이 강렬하게 쏟아져 나왔다. 신비한 눈부심에 놀 란 그들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들어가자." 마리오가 무뚝뚝하게 내뱉으며 먼저 한 걸음 들여놓았다. 조금씩 빛 에 익숙해지며 들어간 그들은 거대한 빛이 떠 있는 걸 보았다. 그들은 황홀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놀라워했다. "오오." "이것이 바로 게이트…." 눈앞의 허공에는 거대한 틈이 벌어져 있었다. 다른 차원, 다른 세계 와 이곳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통로구. 그곳에서 끊임없이 새하얀 빛 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황홀한 눈으로 게이트를 주시했다. "엘르 당신은 꼭 게이트를 처음 보는 것처럼 감탄하는군." 그녀는 황홀함이 섞인 시선을 게이트에서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지상세계로 나올 때에는 충격 때문에 기절해서 미처 구경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침대에 누워 있었으니까요. 정말 아름답군요. 아름다워요." 그들의 눈에는 신비한 힘을 향한 동경이 가득했다. 게이트를 향해서 한 발짝 떼어놓은 마리오는 다시 우울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게이트 관리는 그의 전속 관할이었다. 그는 게이트를 다루거나 만지 는 데에 익숙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게이트, 신이 우리에게 남긴 최후의 허락이다." 숙연한 어조에 그들은 고개를 숙였다. 엘리는 부들부들 떨리는 발을 억지로 땅에 딛고 섰다. 그들은 너나할것 없이 안색이 창백했다. 그 중 유일하게 괜찮아 보이는 인물은 마리오뿐이었다. '과연 카이저야. 우리는 서 있기조차 힘든데 끄덕도 않다니.' 엘르는 게이트를 만지작거리는 마리오를 동경과 외경의 눈으로 바라 보았다. 카이저. 가장 강력한 에날도스를 지닌 자에게 주어진다는 호칭. 과연 그 이름을 지닌 자답게 마리오는 대단히 멀쩡해 보였다. "역시 닫히고 있군." 게이트를 만지작거리던 마리오는 전보다 틈이 좁아져 있는 걸 확인 하고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크기가 십 미터 이상 되는 거대한 게이트는 조금씩, 조금씩 닫히고 있었다.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그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최고 반 년 정도는 버틸 수 있어. 하지만 그게 한계다. 반드시 그 전까지 엘리우스를 찾아내 의례를 치러야만 한다." 그들은 일제히 침을 꿀꺽 삼켰다. 의례를 치른다는 것이 엘리우스에 게 어떤 대가를 종용하는 건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일단은 응급 처치를 해야겠군. 모두 힘을 개방해라." 마리오는 재킷을 벗고 손을 모아 게이트를 향해 뻗었다. 다른 사람 들은 그를 똑같이 따라 했다. 그들의 손에서 일제히 푸른빛이 쏟아 져 나왔다. 게이트의 새하얀 빛과 맞물린 푸른빛은 용트림을 하듯 신비한 섬광 을 토해내며 회색빛 춤을 추었다. 그들은 이를 악문 채 자신이 지닌 모든 힘을 게이트를 넓히는데 쏟 아 부었다. 살갗 위로 붉게 도드라진 혈관 위로 힘든 땀방울이 송글 송글 맺혔다. 이윽고 거친 색채의 강렬한 빛이 터지는가 싶더니 다시 처음의 새하 얀 빛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은 흠뻑 지친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휴. 간신히 응급처치는 했군." 마리오는 손을 쓰기 전보다 아주 조금 틈이 넓어져 있는 것을 확인 하고 쓸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엘리우스가 지닌 공명신수는 도대체 얼마나 강력하기에 한 번 의례를 치를 때마다 20년 가까이 게이트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과연 잡을 수 있을까?' 조금씩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는 작년 미국 공항에서 마주쳤던 엘리 우스의 강대한 힘을 기억하고 있었다. 제나르의 공명신수를 너무나 간단히 물리친 엘리우스의 그 강한 파워. 과연 엘리우스를 잡아들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과거 조상들은 매번 무슨 재주로 엘리우스를 제압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재킷을 걸친 마리오는 문 밖으로 나갔다. 일행이 전부 빠져 나오자 마리오는 다시 문을 봉인했다. 진이 빠진 얼굴로 잠시 문을 바라보던 그들은 마리오를 선두로 해서 동굴을 빠져 나왔다. 제나르의 저택으로 돌아온 마리오는 서재를 찾았다. 노크를 하고 들 어서던 그는 흠칫 놀랐다. 서재에는 제나르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30대의 남자가 제나르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다름 아닌 제나르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오스카 알카저드였다. "오랜만이군 마리오 경." 오스카는 무뚝뚝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그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마리오는 쓴웃음을 건네며 고개를 까딱였다. "오랜만입니다. 오스카 님." "그래, 게이트의 폐쇄는 잘 막았나?" "그럭저럭이요. 앞으로 반 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스카는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반년이라. 시간이 얼마 없군. 한시라도 빨리 엘리우스를 잡아들여 야만 해." 제나르가 권한 차를 조심스럽게 받은 마리오는 뜨거운 기운을 한 모 금 넘긴 뒤 무심결을 가장하며 물었다. "그동안 오스카님이 지상세계에 나오신 줄도 모르고 있었군요. 그런 데 어떻게 지상세계에 나오신 겁니까?" 찻잔을 쥐던 오스카는 피식 웃었다. 나를 우습게 보느냐는 의미가 깃들인 조소였다. "나같은 약골이 어떻게 저항을 견디고 지상세계로 나왔냐는 뜻인가? 아무리 내가 지상세계에 나온 게 몇 번 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너 무 노골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 "그렇지 않아도 저항이 심해서 에날도스를 쓰는 건 꿈도 꾸지 못하 는 신세다. 그러니 전처럼 경을 암습하는 일 따위는 없을 거야." 오스카의 눈동자에 담긴 적의를 의식한 마리오는 등줄기가 조금 서 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오스카는 아직도 자신에게 강한 경쟁 의식 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제나르의 부인은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귀부인이었다. 그 러나 그녀는 자식 교육에서만큼은 대실패를 거두었다. 그녀는 사람 에게는 제각각의 개성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스카는 헤이져보다는 정치가로서의 자질이 더 뛰어났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아들을 훌륭한 능력자로 만들기 위해 어려서부터 각종 혹독한 훈련을 시켰다. 그 탓에 오스카는 자신과 비슷한, 혹은 자신보다 어린 아이들과 항 상 비교를 당하면서 자랐다. 특출한 실력을 지니고 있던 마리오와 특히 심하게 비교를 당했다. 그의 성격이 비뚤어지게 된 것은 바로 그러한 어린 시절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방심할 수 없다.' 마리오는 오스카가 무리를 하면서까지 지상세계로 나온 까닭이 뭘까 고민했다. 오스카는 무의미한 에날도스 증폭 훈련으로 인해 많은 시 간을 낭비했어도, 결국 앤슨과 더불어 시트날타 최고의 두뇌로 자리 잡은 남자이다. 방심은 절대 금물이었다. "여태껏 엔젤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지?" 비웃는 그 어조에 마리오는 입술을 깨물기만 했다. 함부로 화를 낼 순 없었다. 오스카는 존경하는 제나르 대신의 아들이기도 했으니. "자네도, 엘르도, 앤슨도 전부 다 바보인 것 같군. 나라면 진작에 엔젤을 찾아내서 본국으로 끌고 왔을 거야. 황태자 전하께서 자네들 의 불만족스러운 성과를 듣고 얼마나 걱정스러워하고 계신지 아나?" "엔젤은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난 지능을 지녔습니다.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얼마 전에 마기의 기운이 폭주했다고 들었는데. 그때 충분히 엘리 우스와 엔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나라면 말이야." 말문이 막힌 마리오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저 남자라면 충분히 그 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앤슨은 어이없게도 쓸데없는 전쟁까지 자극했더군. 도대체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얻을 수 있는 게 뭔가? 자네들 능력은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나?" 말투가 몹시 거슬렸지만 마리오는 참았다. 상대는 자신보다 지위도 높고 나이도 많았다. 무엇보다 제나르 대신의 외아들이라는 사실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비웃는 눈동자로 마리오를 훑어보던 오스카는 피식거리며 찻잔을 들 어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말했다. "일단은 자네들이 어떻게 할지 지켜보지. 자네라면 몰라도, 앤슨은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아는 것 같으니." 오스카의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한 비웃는 미소가 옅게 퍼져 있었 다. 그것은 그가 무언가를 꾸밀 때 종종 짓곤 하던 미소였다. 마리 오는 설마 아니겠지 하고 억지로 불안감을 잠재웠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18 회] 날 짜 2004-08-04 조회 / 추천 1689 / 21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해저의 속삭임 동해의 푸른 물결 위를 거대한 항공모함이 유유자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호위함들이 주변에서 멸치 한 마리 샐 틈 없는 감시망을 펼 치고 있었다. 선두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헤엄치는 잠수함 위로 차 가운 물방울이 끊임없이 부서져 내렸다. 그러나 멋져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함 대는 지금 미국 함대와 전투를 벌이러 가는 중이었다. 거대한 이순신 항모에는 아무나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이 있었 다. 다름 아닌 맥의 파일럿 전용 휴게실 근처였다. 일반 승무원은 맥의 파일럿과의 접촉이 금지되었다. 장교들도 마찬 가지였다. 그들은 왜 자신들에게까지 접근을 금지시키는지 상당히 불만스러워했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상부의 조치를 이해할 수 없었 던 것이다. "박재형 대령 얼굴은 나도 잘 알고 있어. 도대체 그까짓 게 뭐 그리 큰 비밀이라고 우리에게까지 접촉을 금하는 건가?" "매국노가 끼어 있을 가능성 때문인지도 모르지. 맥의 파일럿은 아 직 박 대령 한 명밖에 양산 못 했으니까, 만약 박 대령에게 큰일이 생기면 맥은 고철이나 마찬가지잖나." "그렇다고 해도 이해할 순 없군." 박희선 대령과 장승기 대령은 조금 불만스런 어투로 이야기를 나누 며 복도를 걸었다. "이봐 잠깐. 여기서 더 나갔다가는 궁전 근처라고." 갑자기 박희선 대령이 발을 멈추며 말했다. 궁전이라는 건 맥의 파 일럿 전용 휴게실을 뜻하는 말이다. 본 항모에서 가장 호사스러운 장소가 그곳이기에 다들 별칭으로 궁전이라 부른다. "이왕 온 김에 박 대령 얼굴이나 잠깐 보고 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 하게.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싶은가?" "쳇. 농담이야. 빨리 가자고." 그들은 발길을 돌렸다. 그때 누군가가 맹렬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 다.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던 그들은 정면으로 날아오는 공을 얼굴에 얻어맞아 버렸다. "죄, 죄송해요." 그들은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하얀 피부와 대조적인 붉은 머리카락 을 지닌 소녀가 허겁지겁 뛰어와 공을 집어들며 허리를 숙였다. 향긋한 체취가 코끝을 스쳤다. 그들은 놀란 숨이 멎는 걸 느꼈다. 그만큼 눈앞의 소녀는 현세의 것 같지 않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 다. 마치 천사가 강림한 것 같은, 그런 지독한 아름다움. 소녀는 그들을 빤히 쳐다보다 얼굴이 붉어진 채 저쪽으로 후다닥 뛰 어갔다. 멍한 표정으로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박희선 대령이 먼 저 입을 열었다. "제길, 내가 나이가 몇 갠데 가슴이 다 뛰는군." 박희선 대령은 장승기 대령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나 그는 석상에 서 풀려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리둥절해하던 박희선 대령은 이내 그 이유를 깨닫고 머리를 긁으 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 친구 아직 노총각이었지. 가슴 떨릴 만도 하겠어." 그는 자신의 딸보다 몇 살 많아 보이지도 않는 소녀에게 가슴이 두 근거렸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애꿎은 머리만 북북 긁어대던 그는 뭔가 이상함을 깨닫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저쪽은 궁전인데? 왜 여자가 있지?" 궁전은 맥의 파일럿 박재형 대령의 전용 휴게실이다. 일반 승무원은 물론이고 장교들까지도 그와 접촉이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웬 기가 막히게 아리따운 미소녀가 저쪽에서 튀어나왔다. 그렇다면 결론은? "쯧쯧쯧, 자네한테는 빛이 보이지가 않는군." 그렇게 되는군. 박희선 대령은 안쓰러워하며 장승기 대령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근데 박 대령이 전쟁터에 자기 애인을 몰래 데려올 사람이었나?" 결론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고민하던 박희선 대령은 머리만 계속 긁 적였다. 놀란 가슴을 안고 돌아온 예안은 공을 쥔 채 가슴을 쓸어 내렸다. "후아, 깜짝 놀랐잖아. 여긴 내 구역인데 도대체 왜 저 사람들이 있 는 거야?" "무슨 일 있었어?" "공 주우러 갔는데 웬 장교들이 있더라고. 제길, 내 얼굴을 다 봐버 렸어!" 예안은 털썩 쪼그리고 앉아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고위 장성들이라 면 몰라도, 별도 못 단 장교들에게까지 정체를 드러내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였다. "에이씨, 몰라. 지들도 생각이 있으면 함부로 말은 안 하겠지. 그냥 신경 끄자." 그녀는 나중에 김지수 사령관에게 말해둬야겠다고 결심하며 들끓는 속을 풀었다. 니콜라스는 단검을 공중에 던졌다 받았다를 반복했다. 허공에 튀어 오르는 은색 빛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예안은 의자에 뉘여 놓은 유빈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휴, 세상에서 나보다 더 한심한 부모는 없을 거야. 어린 아기를 전쟁터까지 데리고 오다니." 떼어놓고 다니는 게 불안해서 그랬다지만 마음을 여간 졸이는 게 아 니었다. 처음 이틀은 만약 항모가 피격 당했을 때 어떻게 탈출할지 등등의 도주 시나리오를 짜느라 잠도 제대로 못 이루었으니. "아쉽다. 내가 몸이 두 개라면 누나하고 아기 둘 다 지켜줄 수 있을 텐데." "빈말이라도 고마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예안은 그가 빈말로 하는 게 아님을 알았다. 그 는 농담이나 예의를 즐기지 않는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몸이 두 개이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바닷바람이나 좀 쐬고 싶다." 아이를 어르며 예안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모처럼 모든 사내아이들 의 꿈인 이순신 항모 탑승을 이룬 처지에 갑판으로 한 번 나가보지 도 못한다는 게 너무 억울했다. "갑판으로 나가면 되잖아." "내 정체가 들통나잖아. 절대 숨겨야 한다고." "어차피 거의 다 들킨 것 같던데 뭐 어때서 그래?" 예안은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이 맞기도 했다. 레이온도 앤슨도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꿰고 있는 지금, 이렇게 비밀을 지키려고 바 둥거리는 게 우스워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냥 눈 딱 감고 나갈까? 잠시 그렇게 생각하던 예안은 곧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1%의 확률이라도 높이는 게 현명한 짓이다. 그깟 갑판 구경이나 하자고 확률을 떨어 뜨릴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아기를 품게 껴안고 뒹굴거렸다. 너는 본래부터 유젤이었다 는 레이온의 말을 잊어버리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태연함을 가장했 다. 고양이처럼 빈둥거리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니콜라스는 한 마 디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 같지가 않아. 꼭 무슨 동생 데 리고 소풍가는 여자 같아." 뒹굴뒹굴하던 예안은 피식 웃으며 의자에 길게 누웠다. 아기를 배 위에 눕힌 그녀는 눈을 니콜라스에게 향했다. "나 사실 지금이 훨씬 편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거든."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지금은 그냥 맥 타고 나가서 마음껏 싸우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잖아?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여러 가지 해야할 것들이 엄청 많단 말이야. 혜인이 문제도, 김재호 그 자식 문제도, 시트날 타 문제도, 그리고…." 금기어를 입에 담듯 어려워하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레이온 형 문제도 그렇고." 복잡한 심정이 복받친 그녀는 살짝 눈을 감았다. 그냥 아기와 같이 어디 조용한 곳에서 함께 오손도손 살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기가 이 렇게 힘들 줄은 미처 몰랐다. 처리해야 할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주변에 널려 있었다. 철없는 어린 애처럼 귀찮다고 차일피일 미루기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유 와 운명이 걸린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그녀는 팔을 들어 주먹을 꽉 쥐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예전처 럼 크게 긴장하지 않는 것이다. 제이의 의식이 깨어난 후로 자신은 구인류에서 한 걸음 더 멀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게 싫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자. 집에 돌아가면 일단 혜인이하고 김재호 그 녀석 문제부터 해결하는 거야. 차근차근, 그렇게….' 세정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레이온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 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현의 얼굴이 떠오른 순간, 예안은 저도 모 르게 이를 바드득 갈았다. "누나?" 니콜라스가 조금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눈을 뜬 그녀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피식 웃었다. "별거 아냐. 그냥 머리가 하도 복잡해서 그래." 아기가 배고프다고 칭얼거리자 그녀는 젖을 물렸다. 그렇게 사랑을 빨아먹는 아이의 체온을 가슴으로 느끼며 행복해했다. 피곤한 문제들이 발치에 잔뜩 깔려 있지만 억지로라도 여유를 가지 기로 마음먹었다. 시트날타의 눈을 피해 영원히 유젤을 내 것으로 하여 사랑스런 아기와 함께 오래도록 조용히 행복하게 지내는 소원. 그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소원을 이루기로 마음먹었다. '절대 잊지 마. 넌 내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또다시 레이온의 암시가 평온함을 흐트러뜨렸다. 그녀는 가 늘게 진저리를 치며 저도 모르게 아기를 꽉 껴안았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자가 방어 행동의 일종이었다. 레이온의 속박을 끊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의 그림자 를 지워버리려고 발버둥이라도 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기도 유 젤도 모두 다 그에게 빼앗기고 말 것이다. 삐익. 삐익. 갑자기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니콜라스와 예안은 놀 란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유빈이 잘 지키고 있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예안은 얼떨떨해하는 니콜라스에게 아기를 넘 긴 뒤 탈의실로 뛰어들어갔다. 서둘러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헬멧을 쓰고 달려나가는 예안의 뒷모습 에 대고 니콜라스는 입을 모아 외쳤다. "조심해!" "알았어!" 유빈과 단둘이 남은 니콜라스는 시무룩한 얼굴로 조용한 분위기를 견디다 슬그머니 유빈을 내려다보았다. 유빈은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그의 시선을 빤히 쳐다보았다. "쳇. 그렇게 쳐다보지 마. 재수 없어." 니콜라스는 뾰로통한 얼굴로 아기의 이마를 살짝 쥐어박으려다가 슬 그머니 손을 내렸다. 이 녀석은 아직 걸음마는 못 떼어도 말은 어느 정도 할 줄 안다. 일러바치기라도 하면 자신만 혼나게 된다. '에휴.' 유빈을 옆에 뉘여 놓은 니콜라스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제임스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적으로 규정짓기로 맹세했는데도 자꾸만 마음이 약해진다. 세현의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릴 때마다 심금이 울리듯 가슴이 떨려온다. 니 콜라스는 눈을 감고 억지로 생각을 다른 데로 돌렸다. 어찌 되었든, 세현은 적이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19 회] 날 짜 2004-08-04 조회 / 추천 1680 / 24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해저의 속삭임 폭음과 함께 수십 발의 미사일이 날아올랐다. 그것들은 꽁무니에서 불꽃을 내뿜으며 날아오고 있었다. 전부 열원추적형 방식의 미사일 들이었다. 맥은 라이플 버스터를 들어 겨누었다. 쾅쾅, 하고 육중한 버스터 포 가 발사되었다. 미사일들은 순식간에 증발되었다. "헤헤, 이까짓 거!" 예안은 호기 있게 외치며 맥을 돌진시켰다. 디스플레이에 표시된 함 대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300km의 거리를 십 몇 초만에 돌파한 맥 은 재빨리 칼을 뽑아들었다. 츄앙! 길이 5미터의 엘레스토늄 재질의 검이 햇빛을 반사했다. 가장 가까 이에 있던 미군함이 발칸포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맥은 수면에 약간 떠 있는 상태로 미끄러지듯 달려가 칼을 휘둘렀다. 흰 무지개가 공중에 그려졌다. 두 동강이 난 군함은 전신에서 스파 크를 일으키다 그대로 폭발했다. 동료함이 당하는 걸 본 다른 군함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들은 미칠 듯이 발칸포를 발사했다. 그러나 엘레스토늄으로 이루어진 장 갑은 가볍게 총탄을 튕겨냈다. 맥은 왼팔로 버스터 포를 들어 발사했다. 순식간에 세 척의 군함이 폭발을 일으키며 물고기 밥이 되었다. 갑판에 나와 있던 승무원들의 절망한 표정이 디스플레이에 표시되었 다. 그러나 예안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군함들을 격침시켰다. 전력의 차이는 확연했다. 전투가 벌어지고 불과 십 분도 지나지 않 았는데 미군함대는 전력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어라?" 위험 표시가 뜨자 예안은 서둘러 확인해보았다. 10발의 FIRE-4가 이 곳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FIRE-3로는 맥을 이길 수 없다는 걸 깨 달은 미 국방부가 죽을힘을 다해 개발한 차세대 장거리 미사일이었 다. 「위험합니다. 앞으로 20초 안에 이곳에 도달합니다.」 "쏴서 맞추자." 맥은 하늘을 향해 버스터 포를 들어올렸다. 쾅쾅,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섬광이 솟구쳐 올라갔다. 인공위성의 유도를 받아 사정거리 안으로 진입하려던 9발의 FIRE-4 가 순식간에 증발되었다. 남은 한 발의 미사일은 간신히 사정거리에 들어왔으나, 곧바로 형제들의 뒤를 따라 소멸되었다. 장성들은 질린 얼굴로 맥을 바라보았다. 발사 테스트도 미처 못 치 른 최고의 고폭 미사일로 맥을 잡으려 한 발악마저 실패한 것이다. "이, 이길 수 없습니다! 이대로는 이길 수 없어요!" 참모장이 굳은 얼굴로 사령관에게 외쳤다. 그의 얼굴은 미치기 직전 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애초에 위에서는 본함대가 이길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맥 의 전투 패턴을 알아내는 미끼에 불과한 것이다. 미끼는 미끼 노릇 을 톡톡히 해내도록." 사령관은 굳은 얼굴로 대답하며 야수처럼 군함들을 먹어치우는 맥을 바라보았다. 맥은 마치 자신들을 갖고 놀듯, 항모에는 손도 대지 않 고 호위함만 야금야금 몰살시키고 있었다. "LA호 격침! 노스라이저 호 격침! 워싱턴 호 격침!" 비명에 가까운 보고가 들어왔다. 그새 또 3척의 호위함이 격침 당한 것이었다. 미사일도 제대로 쏴보지 못하고 물고기 밥이 된 승무원들 은 얼마나 원통해할 것인가. 장성들은 침통한 얼굴로 호위함들의 신호가 사라지는 걸 보았다. 화 면에는 이제 3척의 호위함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근거리 전투에도 능숙한 맥을 상대로 그들이 이길 방법은 애초에 없 었다. 맥의 단단한 장갑판을 뚫기 위해서는 대단한 파괴력의 미사일 이 아니면 안 되었다. 발칸포 따위는 그저 간지럽기만 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장거리 전투라 해서 그들에게 유리한 건 아니었다. 레이더 에 잡히지 않는 맥을 인공위성으로 간신히 추적해서 열원추적 미사 일을 날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맥은 수백km의 거리 밖에서도 간단하게 라이플 버스터 포로 미사일을 요격시켜 버린다. "사령관님.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보다못한 함장이 그렇게 물었다. 사령관은 주름진 얼굴을 굳히며 눈 을 감았다. '최후의 수단을 써야 할 것인가?' 사령관은 출전하기 전 위에서 내려온 극비리의 명령을 받았다. 모든 것을 희생하지 않으면 실행할 수 없는 명령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이 함대에서 오로지 그 하나 뿐이었다. 그는 군복 속에 감춘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위에서는 가급적 이 버튼을 쓰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령관은 그들의 말이 형식적인 멘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써야 하나?' 마지막 한 척의 호위함이 불꽃으로 화했다. 곧이어 맥이 항모 갑판 에 내려와 섰다. 실로 대담하고 오만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사령 관은 기도를 올리며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이봐. 항복할 거야 말 거야?」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가 사령실에 울렸다. 원어민 못지 않게 유창한 발음이었다. 호기심이 동한 사령관은 버튼에서 손을 슬쩍 뗐다. "맥과 강제로 교신이 연결되었습니다. 끊을까요?" "아니, 됐다. 죽기 전에 이야기나 한 번 하지." 사령관은 옷깃을 바로잡은 뒤 스크린 앞에 섰다. 그러나 화면에는 상대의 모습이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난 가급적 너희들이 항복했으면 좋겠어. 항공모함을 그대로 부수 는 건 솔직히 너무 아깝거든. 이걸로 우리 애기 놀이방 꾸미면 좋 겠… 아니, 그게 아니고 우리 해군 전력에 보탰으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너희들도 살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니야?」 목소리는 30대 중반 남자인데 말투는 어째 어린 여자 같았다. 그 이 질감은 언어의 경계선을 뛰어넘음에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조금 얼떨떨한 얼굴을 하던 사령관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우리는 자랑스런 미군 함대이다. 치욕스런 항복 따위는 결코 하지 않는다. 하물며 이 귀중한 항모를 적에게 고이 넘길 성싶으냐?" 장성들이 감동 받은 얼굴로 사령관을 보았다. 맥의 파일럿은 아쉽다 는 어투로 말했다. 「그거 아쉽군. 그럼 잘 가.」 맥은 항모 갑판에서 솟구쳐 올랐다. 폭발을 우려해 조금 떨어진 곳 에서 포를 쏠 셈이었다. 그러나 사령관은 때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리모컨을 눌렀다. "미합중국 만세! 그 순간 항모의 비밀격납고에 숨겨져 있던 수소폭탄이 폭발했다. 순 수 무게만 25톤이 넘어가는 어마어마한 파괴력의 폭탄이었다. 시뻘건 화염이 함체를 잡아먹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열폭풍이 순식 간에 뻗어나갔다. 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눈이 멀어버리는 엄 청난 섬광이었다. 순식간에 바닷물이 증발하며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맥의 전신에 맞부딪쳐 왔다. 더러운 열폭풍을 품은 에너지가 그렇게 한순간에 폭발했다. 미국함대가 수소폭탄으로 자폭까지 하면서 맥을 공격했다는 보고는 즉각 영환에게 보고되었다. 보고서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던 영환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그래서 맥은 어떻게 되었지?" 중현은 걱정으로 새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모,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지 연락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만, 소식이 끊긴지 10분도 안 됐으니 속단할 때는 아닐 수도…." "자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바로 코앞에서 수폭을 정면으로 맞 았는데 어떻게…." 영환은 말을 잇다 말고 몸을 휘청거렸다. 맥의 능력을 철두철미하게 믿지만 이건 아니었다. 세상의 그 어떤 장갑이 수소폭탄의 파괴력을 바로 코앞에서 얻어맞고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앞날이 깜깜해진 영환은 그만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터질 듯이 심 하게 지끈거렸다. "이놈들…." 영환은 미국의 하늘을 씹어 삼킬 듯 노려보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과연 이런 꽁수를 부리기 위해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전쟁을 원하고 있었단 말인가. 최악의 금지된 무기를 사용하면서까지, 국제사회의 맹렬한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맥을 부수고 싶었단 말인가. 해맑은 예안의 얼굴을 떠올리던 영환은 곧바로 고개를 저어 그것을 떨쳐냈다. 그녀의 죽음이 안타깝기는 해도 지금 당장은 미국을 처리 하는 게 급선무였다. "미국에 국제압력을 넣어야겠다. 겁없이 수폭까지 쓴 녀석들이니 이 제 욕을 먹기 싫어도 먹을 수밖에 없을 거야. 철저히 고립시켜주겠 어, 이놈들." 중현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집무실을 나왔다. 가슴이 떨어져 나 갈 듯 심하게 욱신거렸다. '예안씨….' 그녀가 죽었을 거라 생각하니 중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음 속에 서는 그렇게 허무하게 맥이 당할 리 없다는 생각이 맴돌았지만, 사 회에서 27년을 키운 자아는 쓸데없는 희망을 가지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하마터면 쓰러질 뻔한 그는 간신히 벽을 짚고 몸을 지탱하며 앞으로 의 일을 걱정했다. 미국은 이 좋은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들은 양자 컴에 맞먹는 엄청난 보상금을 뜯어내려고 악착같이 달려들 것이다. 자칫하다가는 일본, 심지어는 중국마저 다시 적으로 돌변할 가능성 도 얼마든지 있었다. 상상하기는 싫지만, 예안이 정말 죽었다면 한국의 장래에도 엄청난 타격이 올 것이다. 세계 유일무이한 초과학대국이 될 수 있는 기회 를 박탈당하게 될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국방부 장성들은 대다수가 옷을 벗어야 할 것이다. 한국의 과학을 지금보다 몇 십, 몇 백 배 이상으로 끌어올릴 천재가 죽었다는 것은 보고서 몇 장으로 해결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중현은 비틀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나중에 정호에게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할지 상상만으로도 괴로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써야 할 때가 아니었다. 당장 미국, 일본, 심지어 중국까지도 그 반응을 유심히 살펴봐야 했다. 그는 국 가정보원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 날 저녁 중현은 각 나라에 파견해놓은 부하들로부터 쉴 새 없는 급보를 받았다. 일본과의 승리를 축하한다고까지 말했던 중국은 물 론이요, 한국에 대패하고 한창 종전 처리 중인 일본의 움직임까지 수상하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아예 축제 분위기였다. 한국은 유전을 통해 벌어들인 자금으로 한창 급상승 중이기는 하나, 아직 6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군사부문에 있어 성능이나 물량 등 은 미국 하나도 감당해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맥이 파괴된 것으로 알려진 이상 미중일은 더 이상 한국을 겁낼 필 요가 없어졌다. 금지된 무기까지 쓴 것으로 미국에 압력을 넣을 수 도 있겠으나, 전쟁의 최종 패배자가 하는 말은 씨알도 안 먹힌다는 논리는 이미 역사가 몇 차례나 증명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20 회] 날 짜 2004-08-04 조회 / 추천 1727 / 22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해저의 속삭임 투명한 창문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알알이 맺히고 있었다. 호스로 시원한 물을 뿌리며 차를 세차하는 제시를 바라보던 세현은 멀리 산 너머에 걸려 있는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희미한 화약 냄새가 머나 먼 바다에서부터 여기까지 풍기는 듯 했다. "서예안이 그렇게 걱정되세요? 맥은 세계 최강의 무기라면서요?" 거센 수압을 차 위로 뿌리던 제시가 그렇게 물었다. "분명 맥은 아주 강해. 하지만 상대가 흉수를 쓴다면 위험해질 수도 있어." "흉수요?" "예를 들면 핵을 쓴다든지 하는 거 말이야." 제시는 당치도 않는다는 얼굴로 작게 웃었다. "핵미사일 따위는 그냥 멀리서 요격해버리면 그만이잖아요?" "근접 전투를 벌일 때 핵으로 자폭하면 큰일이잖아." 상상도 못했다는 얼굴로 잠시 굳었던 제시는 억지로 옅게 미소를 지 었다. "설마 그렇게까지야 하겠어요? 전쟁에서 핵을 쓴다는 게 어떤 의미 인지 미국이 모를 리가 없잖아요?" "지지 않으려고 발악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 세현은 초조한 얼굴로 먼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맥의 성능 을 제대로 알고 있지 않았다. 그저 막연히 대단하다고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엄연히 물질로 이루어진 물체이다. 그가 지닌 지식으로 미루어볼 때, 핵폭발을 맞고도 부서지지 않는다 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미국이 최후의 발악 겸해서 핵을 쓴다면, 못 맞출 것도 없는 것이다. "오스카님이 지상세계에 나오셨어요." 제시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세현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놀란 기색을 감추며 태연함을 가장했다. "그래? 무슨 일로?" "글쎄요. 그 분의 꿍꿍이야 저는 모르지요. 아무튼 당신도 조심하도 록 하세요. 지난번처럼 암습당하는 일이 없도록요." 세현은 굳은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제시는 관심 없는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많은 궁리를 했다. 그 누구와도 뜻을 같이 하지 않는 오스카는 분명 위험 분자이다. 그 러나 앤슨, 마리오의 신경이 그에게 쏠림으로써 그만큼 세현이 안전 해질 수도 있었다. '암습만 조심하면 돼.' 제시는 굳은 얼굴로 신경을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오스카는 자신에 게 반대한다 생각하면 상대가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암습을 가하는 남자이다. 한때 그의 기습 공격에 당해 앤슨과 마리오는 심한 부상 을 입은 적도 있었다. '오히려 잘된 거야. 이제 앤슨 경은 제임스에게 신경을 덜 쓰겠지.' 안타까운 눈으로 세현을 바라보며 제시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어? 저게 뭐지?" 세현이 갑자기 하늘을 가리키며 그렇게 물었다. 제시는 얼른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가요?" "없어졌어. 방금 뭔가 빠르게 지나간 것 같았는데…." 어리둥절한 얼굴로 하늘을 훑어보던 세현은 이윽고 피식 웃었다. "미안. 아무래도 헛것을 봤나 보네. 날씨가 너무 더워서 그런가." "덥다고요?" 야릇한 미소를 지은 제시는 갑자기 호스를 세현에게 향했다. 거센 수압이 그의 전신에 뿌려지며 그의 옷이 흠뻑 젖었다. 화들짝 놀란 세현은 두 팔로 물줄기를 막았지만 이미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뭐, 뭐하는 거야 제시!" "덥다면서요? 시원하게 해줬잖아요?" 제시는 깔깔거리면서 계속 그에게 물을 뿌려댔다. 쏟아지는 수압에 눈을 제대로 못 뜨던 세현은 갑자기 확 달려들어 호스를 빼앗았다. 그는 이를 바드득 갈며 어어어 하는 제시에게 호스를 향했다. "제시 너도 한 번 당해 봐!" 세현처럼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제시는 깔깔거리며 그 자리에 주 저앉았다. 그녀는 물을 피할 생각도 않은 채 배꼽이 빠져라 크게 웃 어댔다. 호스를 잠근 세현은 슬그머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물에 흠 뻑 젖은 제시의 옷이 타이트한 몸매를 드러내고 있었다. 뺨에 달라 붙은 젖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흰 피부를 더욱 매끄럽게 보이게 했 다. 갑자기 그녀가 아름답게 보였다. 세현은 어색한 침묵을 지켰다. "생각은 해봤어요?" 굳은 얼굴로 제시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세현은 다시 슬그머니 눈 을 돌렸다. 한 가지 답만을 강요하는 제시의 눈동자가 부담스러워서 였다. "같이 사랑의 도피하자는 거 말이야?" "전 그런 거 가지고 농담하고 싶은 마음 따윈 없어요. 빨리 결정하 도록 해요. 지금은 오스카 때문에 사람들이 당신을 신경 쓰지 않고 있지만, 조만간 다시 당신을 조사하기 시작할 거예요." "말했잖아. 위원회는 내가 제물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 "천만에. 그들은 아직도 당신을 의심하고 있어요." "제물은 지금 엔젤과 같이 있어. 한 시대에 두 명의 제물이 존재할 수는 없어." 제시는 기가 차다는 얼굴로 피식 비웃음을 터트렸다. 싸늘히 얼굴을 굳힌 그녀는 세현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수호자예요. 제물이 누구인지, 누가 엘리우스인지 알아보는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란 말이에요." 최강의 공명신수, 마기를 지닌 엘리우스는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 는 다섯 번째 대신이다. 일정한 시험을 거쳐 자격을 얻은 자에게 주 어지는 다른 4마리 공명신수와는 달리, 마기는 스스로 자신의 주인 을 택한다. 그러나 마기를 얻은 자는 게이트를 유지하게 위한 제물로 바쳐진다. 20년을 주기로 닫히는 게이트를 원상복구 시키기 위해서는 마기의 모든 힘을 쏟아 부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강력한 저항 은 숙주의 죽음을 종용하는 것이다. 시트날타에는 엘리우스와 수호자에 관한 여러 가지 전설이 내려온 다. 그중 가장 유력한 설은, 엘리우스는 시트날타를 거부한 반역자 이고 수호자는 그의 절친한 측근이라는 가설이었다. 현재 엘리우스 의 희생으로 게이트를 넓히는 관습(의례)이 최초 엘리우스의 처형에 서부터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의례가 있었다. 엘리우스를 찾아낼 때 마다 시트날타는 그를 제압하기 위해 무수한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엘리우스 곁에는 반드시 그를 보호해주는 인물이 있었다. 그 인물은 바로 수호자라고 불렸으며, 카이저 못지 않은 강력한 에날도스로 엘 리우스를 보좌하곤 했다. 무작위로 선택되는 엘리우스와는 달리, 수호자는 그 대를 이어서 전 승되어 온다. 그래서 누가 수호자인지는 한눈에 뻔히 알아볼 수 있 다. 그렇지만 엘리우스를 제압할 때까지 결코 수호자를 죽이거나 박해하 지는 않는다. 수호자가 지닌 강력한 에날도스는 의례를 치르는데 있 어 중요한 매개체로 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카이저급을 함부로 대 할 수 있는 자는 열 손가락으로 꼽는 판국이다. '소수의 희생.' 제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자신은 수호자였다. 그리고 세현은 엘리우스였다. 모르는 녀석들은 니콜라스라는 청부업자가 엘 리우스라고 주절대지만, 그녀는 누가 엘리우스인지 단번에 알아보는 능력을 지녔다. 지난 세월 동안 엘리우스와 수호자는 자신들의 목숨을 희생당해 시 트날타를 지켜왔다. 지긋지긋하게 이어져온,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 생이었다. 제시는 이제 그만 그 악연의 고리를 잘라버리고 싶었다. 혁명이 완 성되면 모든 것이 좋은 게 아니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최후의 의례가 될 거라 여겨지는 '혁명'조차도 엘리우스와 수호자의 희 생을 조건으로 한다. "제임스." 세현을 뒤에서 껴안은 제시는 나지막하게 그를 불렀다. 뭉클한 가슴 의 감촉이 등에 닿았지만 세현은 얼굴에 변함이 없었다. "게이트가 닫히기까지 앞으로 반년이 남았어요. 반년만 지나면 이제 더 이상 그들이 우리, 아니 당신을 잡을 이유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녀는 더욱 강하게 그를 껴안았다. "도망가요. 반년만 잘 숨어 다니면 모든 게 끝나요. 어차피 마리오 급의 카이저가 두 명 이상 힘을 합치지 않으면 절 이길 수 없어요. 우리는 절대 잡히지 않을 거예요." "그들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찾아낼 수 있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우리를 잡을 거야. 그리고 말했잖아. 난 제물이 아니야." 제시는 그를 품에서 떼어내며 화를 냈다. "아직도 그렇게 자신을 속일 셈인가요!" "속이는 게 아니야. 엘리우스들은 한 시대에 공존하지 않아. 어머니 가 제물이셨는데, 어떻게 나까지 제물이 될 수 있지? 나는 16년 전 어머니가 희생당하는 걸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제시는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그녀가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부분 이기도 했다. 엘리우스가 죽으면 마기는 새로운 태아를 찾아 스며든다. 그리고 새 로운 엘리우스가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16년 전 세현의 어머니는 엘리우스로 몰려 희생당했다. 세현은 그 당시 2살이었다. 그렇기에 위원회는 엘리우스가 세현일 거라고 생각 하지 않는 것이다. 임신 기간을 감안한다면, 현재의 엘리우스는 많 아봐야 만 15살을 넘길 수 없다. "저도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확실해요. 당신은 분 명, 분명히 엘리우스예요. 전 느낄 수 있어요." 세현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러나 제시는 그의 얼굴 한 켠에 드리워진 그늘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얼른 들어가자. 제시 몸매가 다 보여 서 내가 다 아찔해." 재미없는 농담을 던지며 세현은 등을 돌렸다. 그때 세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무슨 일이야?" 등을 돌린 채 심드렁한 얼굴로 전화를 받던 세현은 그만 손에서 핸 드폰을 놓쳐 버렸다. 심상치 않은 기도를 느낀 제시는 반사적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세현은 손을 덜덜 떨면서 제시를 돌아보았다. 제시는 긴장한 채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멍한 얼굴로 동쪽 하늘을 노려보던 세현은 갑자기 목청이 찢어져라 외쳤다. "이, 이 빌어먹을 자식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21 회] 날 짜 2004-08-04 조회 / 추천 1735 / 22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해저의 속삭임 핵 자폭 공격에 맥이 당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세계로 뻗어나갔다. 한국 정부는 국민들의 사기를 고려해서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으나, 미국의 적극적인 정보 유출을 막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세계는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국의 과학자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함에 젖었다. 맥의 원리를 해부해보고자 했던 의욕이 허무 하게 꺾인 것이다.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었다. 맥에 무수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세계 과학자들은 미국에 커다란 앙심을 품게 되었다. 이것은 미국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악효과였다. 그러나 분명 흐름은 미국에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한국은 승리의 여신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누가 봐도 미국이 승리한 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국은 가짜 양자 컴퓨터 설계도를 보상하라는 미 국의 부당한 요구를 부정할 입장마저 박탈당해버렸다. 한국이 힘으로 굴복시켜놓았던 맥의 오발 사건을 일본이 다시 들고 일어설 조짐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전쟁에 절대 관여치 않으려 했던 중국도 그 태도를 180도 확 바꾸었다. 모든 한국민들은 맥의 파괴를 안타깝게 여겼다. 한이 많은 나라라서 한국이라는 우스갯소리를 지워줄 수 있는 소중한 물건을 너무 허무 하게 잃어버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소식이기를 바랬다. 맥이 살아남아 있기를 바 랬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맥의 사망 소식이 뒤집어질 기미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미한 흔들림을 어렴풋이 느끼던 예안은 이윽고 힘들게 눈을 떴다. 몇 번 눈을 껌벅이던 그녀는 얼른 스크린을 보았다. 깜깜한 풍경 외 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지?' 맥이 머리 속으로 대답해왔다. '대서양의 심해입니다. 폭발의 영향으로 여기까지 날아왔습니다. 공 격을 당하고 난 뒤 31시간 10분이 흘렀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미 항모 안에 수소폭탄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 서 일어난 폭발이라 미처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예안은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수폭이라고? 그럼 너 많이 다친 거야?' '일부 회로가 조금 일그러지긴 했지만 자체 수복이 가능합니다. 앞 으로 4시간 30분만 더 지나면 가동할 수 있습니다.' 허탈한 얼굴로 스크린을 바라보던 예안은 피식 웃어버렸다. '정말 대단하구나 너. 핵폭발을 정면에서 얻어맞고도 멀쩡하다니.' '미리 알고 있었다면 조금도 충격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설마 자폭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에너지 방어막을 구성하는 게 조금 늦었던 것뿐입니다.' 맥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며, 한편으로는 미국의 술수를 거세게 비 난했다. 예안은 피로한 표정으로 살며시 눈을 감았다. '태평양에서 싸웠는데… 대서양까지 날아오다니.' 과연 수소폭탄의 위력은 막강했다. 현존하는 물리법칙을 철저히 무 시하는 에너지 방어막으로 보호했음에도 불구하고, 태평양에서 대서 양 심해까지 날아왔으니. '빨리 가는 게 좋겠어. 모두들 네가 부서진 줄 알고 걱정하고 있을 거야.' '만약을 위해서라도 회로를 완전히 수복하고 가는 게 좋습니다. 같 은 공격을 또 당한다면 찰나간의 딜레이로 핵폭발을 고스란히 얻어 맞을 수도 있습니다.' 맥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조금 격양된 어조로 덧붙였다. '엘레스토늄이 아무리 막강하다 해도 에너지 방어막 없이는 핵폭발 을 견뎌낼 수 없습니다.' 인공지능도 분한 마음은 있는 것일까. 예안은 눈을 감은 채로 그렇 게 생각을 해봤다. 갑자기 에덴 혹성이 떠올랐다. 에덴 혹성에 있을 오리지널 유젤이 떠올랐다. 그녀는 아마 날 비웃을지도 몰라. 하찮은 구인류 따위에 게 이렇게 당했다고 말이야. '돌아가면, 돌아가면 전부 다 가만 안 둘 거야.' 예안은 살기를 씹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증오의 빛깔. 현재 그녀가 짓고 있는 차가운 표정은 구인류가 지닐 수 없는 것이었다. 과연 그 녀는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인가. '오리지널 유젤은… 지금쯤 날 보면서 비웃겠지?' '지금 제가 바다 속에 있으니 못 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네가 잠시 내통을 멈춘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비웃는 그 어조에 맥은 말이 없었다. 예안은 눈을 감은 채로 아이를 타이르듯이 물었다. '레이온 형이 한 말, 그거 거짓말이냐고 물어봐도 넌 아니라고 대답 하겠지?' 맥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차가운 공허함이 예안의 배신감을 한층 강 렬하게 자극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화는 나지 않았다. '내가 전부터 누누이 말하지 않았어? 날 속이지 말라고, 내가 시키 는 대로만 하라고 말이야. 명심해. 내가 누구이든 어떻게 되어야 하 든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이 행복해지도록 만드는 것이 저의 사명입 니다.' '마스터라고 부르라고 했어. 난 너의 주인이야.' '예. 마스터.' 맥은 전혀 굴함이 없는 어투로 그렇게 말했다. 복종만을 위해 만들 어진 존재이기에, 복종을 하면서도 그렇듯 당당함을 잃지 않는 것이 리라. 한참 후 예안은 무거운 어조로 다시 말했다. '알아.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넌 절대 듣지 않는다는 거. 너에게는 내 명령이 절대적 우선 순위가 아니라는 것도.' 그녀의 명령은 맥에게 있어 최우선이 아니라 차선이었다. 기본 시스 템에 각인된 형식에 반하는 그녀의 명령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것 이다. '저의 회로에는 저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금지가 걸려 있습니다. 그것만 어기지 않는다면 저는 무조건 마스터의 명령에 따라야 합니 다. 마스터가 저에게 자폭하라고 명령한다 해도, 그 명령이 부당하 지만 않다면 저는 따를 것입니다.' '부당하다는 건 어떤 건데?' '제가 없어지면 마스터에게 위험이 닥쳐오는 경우 정도 될까요?' 예안은 그만 쿡쿡 웃어버렸다. 맥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마스터의 명령을 실행해도 좋은지는 그 범위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 범위는 제 회로에 걸린 금지가 허락해준 것이지요. 어찌 보면 그 금지야말로 진실한 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마스터와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이렇게 사고할 수 있는 것도 전부 다 그것 이 저에게 허락해준 것이니까요.' 맥과 진심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는 앞으로 다시 찾아오기 힘들 것이다. 이제 그녀는 맥이 진의가 무엇인지 알아버렸기 때문이 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에덴 혹성으로 데려가는 것. '넌 내 편이 아니야. 지금 당장 네가 날 실은 채 에덴 혹성으로 간 다 해도 이상할 게 없겠지.' '그렇게 해볼까요?' 날카롭게 벼려놓은 칼처럼 그렇게 긴장감이 예리하게 섰다. 팽팽하 게 당겨진 분위기 속에서 맥을 향한 적의를 불태우던 예안은 슬그머 니 기분을 가라앉혔다. '넌 그렇게 못해. 유빈이가 집에 있으니까.' 맥은 한풀 꺾인 어조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유빈 님이 외부에 있는 한 저는 마스터를 에덴 혹성에 데려갈 수 없습니다. 각오해두시죠. 만약 유빈 님과 같이 저에게 탈 때에는 그 즉시 지구를 탈출할 겁니다.' '그럼 왜 유빈이가 내 뱃속에 있을 땐 그렇게 하지 않았지?' '그때의 마스터는 에덴인이 아니었으니까요. 뉴타입의 껍질을 뒤집 어쓴 구인류에 불과했으니까요. 억지로 데려가 봤자 최악 외의 결과 를 얻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이제 예전과는 크게, 아주 크게 달라졌단 말인가. 당신은 더 이상 구인류가 아니다. 절대 부정할 수 없지만 동의하기 도 싫은 맥의 논리는, 천 년의 무게보다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눈을 뜬 예안은 언제 그렇게 원망했느냐는 듯 밝게 미소지었다. 놀 랍도록 빠른 마인드 컨트롤이었다. "이런 구질구질한 이야기는 그만 하자. 너랑 나랑 사이가 틀어져 봐 야 서로 좋을 것도 없으니까." 「저는 마스터와 틀어질 것도 없습니다. 마스터의 안위와 관련된 것 만 아니라면 지금까지 전부 복종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요.」 "어쨌든 난 흔들리지 않아. 난 예안이가 아니라 유진우라고. 그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절대 확실해." 예안은 장난을 치듯 피식피식 웃으며 디스플레이를 켰다. 시스템의 회로는 어느새 전부 복구되어 있었다. 아주 잠깐 동안 이야기한 것 같은데 벌써 4시간이 넘게 지나간 모양이었다. '이제 그만 가야겠다.' 기지개를 켠 그녀는 조종간에 팔을 집어넣으려고 했다. 그때 맥이 갑작스럽게 경고했다. 「커다란 에너지가 감지되었습니다. 거리 100미터!」 화들짝 놀란 예안은 얼른 불빛을 켰다. 맥의 두 눈에서 밝은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어두운 심해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기괴하고 커다란 물고기들이 스크린을 스쳐지나갔다. 눈이 아예 없 는 물고기, 딱딱한 갑주로 둘러싸인 물고기, 쇠꼬챙이처럼 길기만 한 물고기 등 희한한 물고기들뿐이었다. 그러나 예안의 시선은 그 심해어들에 닿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경 악한 눈을 크게 부릅뜬 채로 스크린 너머를 주시했다. 백여 미터 앞 에는 아주 거대한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 크기는 무려 수백 미터가 넘었다. 이끼처럼 생긴 물때가 달라붙 은 청동빛 피부는 다시없을 굳건한 단단함을 자랑했다. 풍만한 몸매를 간신히 가린 치마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아슬아 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잘려나간 두 팔의 허전함이 미지에 대한 신 비함으로 승화되어 가슴 떨리는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조용한 물결의 흐름이 동상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아주 오랜 세월을 그렇게 숨을 죽여왔을 듯, 아름다운 고요함이 물결을 따라 유유히 흘러갔다. 예안은 손을 덜덜 떨면서 눈을 비볐다. 그 거대한 동상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러나 꿈은 아니었다. "미로의… 비너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22 회] 날 짜 2004-08-04 조회 / 추천 2187 / 34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해저의 속삭임 그 놀라움을 과연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까. 그 어떤 천재시인이라 도 할 말을 잊은 채 좌절해버릴 기묘하고 신비한 형상에 맞닥뜨린 예안은 한참 동안 굳어 있었다. 몇 번이고 눈을 비벼가며 확인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전혀 잘못 되지 않았다. 눈앞의 수백 미터 짜리 상은 분명 미로의 비너스 상이 틀림없었다. 언젠가 TV에서 우연찮게 봤던 그 강렬한 아름다움이 더욱 강하게 뿜 어져 나오고 있었다. 기괴한 생김새의 심해어들이 물결처럼 비너스 상의 주위를 맴돌았 다. 조명을 반사하는 청동빛 피부는 칼을 대면 그대로 피가 흘러내 릴 듯 생동감이 넘쳤다. 감히 바라보는 것조차 황송했다. 예안은 넋을 잃은 채 비너스 상을 정신 없이 바라보았다. 물결의 흐름이 갑작스럽게 빨라지기 시작했다. 예안은 흠칫 놀라 반 사적으로 맥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비너스 상이 고개를 살짝 돌려 예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하마터면 심장이 멎을 뻔한 그녀는 새파 랗게 질린 채 비너스 상과 눈을 마주쳤다. 두근. 두근두근.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급작스럽게 뛰기 시작했다. 갈비뼈를 뜯은 뒤 가슴을 헤치고 튀어나올 듯 그렇게. 주체할 수 없는 두근거림을 고통스런 얼굴로 억누르던 예안은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 너는 누구지? 마음의 영혼을 때리는 강렬한 음성이었다. 초점이 사그라진 눈을 한 예안은 벼랑 끝에 피어난 꽃처럼 위태로운 얼굴로 비너스 상에서 눈 을 떼지 못했다. 「위험합니다. 정신 차리세요.」 맥이 경고했다. 그러나 예안은 그것을 듣지 못했다. 비너스상에 완 전히 정신을 사로잡힌 그녀의 영혼은 일 만 년, 그 오랜 세월의 자 취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우주가 보였다. 지구가 보였다. 거대한 대기의 흐름이 드넓은 바다 와 광활한 대지를 감싼 채 잔잔히 흘러가고 있었다. 파도가 철썩이는 검푸른 바다. 시리도록 청명한 하늘빛 색깔이 수면 위로 내려꽂혔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푸른 물결의 흐름이 흩어졌다 모이는 곳에 거대한 대륙이 있었다. 아름다운 새들의 노랫소리가 유유자적하게 흘러가고, 자그마한 짐승 들이 샘물을 찾아 뛰노는 숲이 있는 곳. 섬이라고 부를 수 없는 커 다란 땅덩어리가 그렇게 뜨거운 숨결을 토하고 있었다. 그 대륙에 하나의 국가가 있었다. 많은 도시들이 있었다. 셀 수조차 없는 무수한 사람들의 웃음이 모였다가 흩어졌다. 물건을 고르는 아낙네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엄마 손을 잡고 시장을 누비는 아이들은 친구들과 놀 생각에 즐거움이 가득하다. 저 녁거리로 쓸 커다란 사슴을 짊어진 남자들의 어깨에는 뿌듯함이 가 득하다. 시야가 다시 바뀌었다. 어느덧 무더운 여름이었다. 지독하게 내린 비로 강줄기가 범람해 마을을 덮치기 직전이었다. 흰 제복을 입은 남자가 말을 타고 나섰다. 건장한 병사들이 그의 뒤 를 따랐다. 홍수의 물살이 그들을 향해 거세게 달려들고 있었다. 남자가 손을 뻗었다. 병사들도 일제히 손을 뻗었다. 그들의 손에서 신비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빛이 물줄기를 밀어냈다. 물살은 그들의 힘에 순응하듯이 순 순히 비켜 흘렀다. 자신들의 힘으로 대자연의 재앙을 막아낸 그들은 득의만면한 웃음을 터트렸다. 산사태가 일어났다. 흙탕빛 토양이 물에 섞여 마을을 덮치려고 했 다. 마을의 흔적을 지워버릴 듯 커다란 산사태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도 아주 간단히 막아냈다. 병아리의 목을 비틀듯이. 짐승의 습격. 강의 범람. 산사태. 홍수. 그 어떤 재앙도 그들은 아 주 손쉽게 막아냈다. 그들이 지닌 신비한 힘은 그들을 세계 제일의 영장류로 발돋움시켜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대륙뿐만이 아니라, 지구에 있는 모든 대륙을 점령했다. 모든 생물들이 그들의 발아래 벌벌 떨었다. 불을 손에 넣었다고 의기양양해 있던 인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다른 대륙이었다. 멋진 의복을 입은 남자가 커다란 칼을 뽑았다. 단 상 아래에는 몇 명의 남자들이 결박당한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들 과는 달리 이 땅에서 줄곧 살았던, 힘을 지니지 못한 나약한 인간들 이었다. 남자는 칼을 뽑아 그들을 처형했다. 자신들에게 반항한 타대륙의 인 간들에게 극도의 공포를 보여주었다. 공포심이 극에 달한 나약한 인간들이 그들을 덮쳤다. 그들은 그 빛 의 힘으로 간단히 인간들을 죽였다. 땅을 적신 뜨거운 피를 발로 짓 밟으며 쾌감을 만끽했다. 그들은 왕이었다.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 는 이 세계의 진정한 왕. 모든 생물이 그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모든 인간들이 그들에게 무릎 을 꿇었다. 그들과 인간들은 겉모습만 같을 뿐이었다. 그들은 인간 들이 지니지 못한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 힘을 지닌 한 인 간들은 절대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세력을 뻗어나가던 그들에게도 재앙 이 닥쳤다. 모든 동물을 정복하고, 홍수를 막고, 산사태마저 간단히 물리친 그들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무서운 대재난이었다. 그들이 살고 있던 대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지진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튼튼하지 못한 건물들은 쉽게 무너졌다. 나약한 어린애와 여자들이 건물 잔해에 깔려 이승을 하직했다. 강줄기가 터져 마을을 덮치고 산이 무너져 마을을 깔아뭉갰다. 그러 나 그들은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막아도 막아도 계속해서 끊임없 이 들이닥쳤다. 지진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절망 이 떠날 날이 없었다. 그들은 살고 있던 대륙을 버리고 타대륙으로 도망가려 했다. 타대륙 에 나가 있던 자들이 동족을 구출하러 가려 했다. 그러나 맹렬하게 격동하는 파도는 타대륙으로 향하는 배들을 계속 집어삼켰다. 타대륙에 나가 있던 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그들 이 항상 자랑스럽게 여겨 왔던 힘. 그것이 충만하게 몸에 가득 차 있는데도 죽어 가는 무수한 동족들을 구할 수 없었다. 거대한 황성이 무너졌다. 물줄기의 흐름이 튼튼한 제단을 삼켰다. 울부짖는 소리가 며칠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홍수의 흐름과 지진 의 통곡은 그들이 굳건하게 쌓아올린 그 모든 것들을 삼켜버렸다. 차가운 해일이 퍼져나간다. 두 조각, 세 조각으로 갈라진 거대한 대 륙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도망갈 곳은 없다. 살아남은 자들은 어쩔 줄을 모르며 절망에 찬 울부짖음을 내질렀다. 타대륙에 나가 있던 자들은 피눈물로 동족의 멸망을 안타까워했다. 광활한 대륙이 가라앉는다. 바다의 흐름에 그렇게 삼켜진다. 그들의 모든 것, 그들이 지닌 모든 것, 그리고 그들의 목숨이 그렇게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최후의 순간, 가장 강한 힘을 지닌 자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거대 한 결계를 쳤다. 결계는 바닷물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막아냈다. 그것이 한계였다. 최강자의 목숨을 희생했어도 대륙이 가라앉는 것 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두운 심해로 땅덩어리가 빨려 들어간다. 깊은 무저갱 속으로 그렇 게 가라앉는다. 가라앉는다. 가라앉는다. 가라앉는다. 마침내 심해의 바닥에 가라앉았다. 그렇게 그들은 빛이 전혀 닿지 않는 어두운 심해로 던져졌다. 그들을 보호하는 거대한 결계가 호흡을 하며 산소를 내뿜었다. 스스 로 빛을 합성해 그들의 땅을 다시 비춰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부터 그들이 살아가야 할 곳은 심해의 감옥. 타대륙에 남겨진 자들은 인간들을 호령하며 세력을 키웠다. 그들은 문화를 퍼트리고, 전설을 퍼트리고, 기술을 퍼트리며 그렇게 언젠가 가라앉은 민족들이 다시 세상에 나올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인간들의 숫자가 많아지고, 인간들의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점차 통솔하기가 벅차게 되었다. 최후의 전쟁에서 패배한 그들은 이 대로는 안 됨을 깨닫고 정체를 감추었다. 그들 중 일부는 스스로 힘을 포기하고 보통 인간이 되었다. 그 대가 로 월등한 지능을 손에 넣었으나, 힘을 포기했다는 맹렬한 비난을 피할 순 없었다. 그렇게 지상에 남겨진 그들은 완전히 갈라져 돌아 섰다. 힘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 은밀하게 인간들 틈으로 녹아 들어간 그 들은 비밀리에 힘을 키우며 세상을 호령했다. 그들의 숨결은 세계 어디에도 있었다. 그들은 글자를 만들고, 달력을 만들고, 물건을 만 들었다. 그들은 유럽의 영어 선생이기도 했고, 중국의 역사학자이기도 했고, 또한 미국의 대통령이기도 했다. 그들은 이야기를 다듬었고, 역사를 왜곡했고, 전설을 퍼트렸다. 그들은 가라앉은 자신들 대륙의 이야기를 하나의 전설로 꾸며 인간 들 사회에 침투시켰다. 그것은 하나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 너희를 지배했던 우리를 잊지 마라. 커다란 환청이 머리 속에 다시 한 번 울린 순간 예안은 천천히 환영 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새파랗게 굳은 눈으로 비너스상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설마… 설마…."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무도 당연한 듯 의심하지 않았던 전설. 단지 인류사의 흥미 거리에 불과하다고 치부하며 낄낄대었던 웅장한 시나리오. 그 장엄한 생명은 태산처럼 거대한 전율을 깊숙이 숨긴 채 어두운 심해에서 일만 년이 넘게 호흡해왔던 것이다. - 이 행성의 주인은 우리다. 해저의 속삭임이 차갑게 숨결을 뻗쳐 왔다. 차갑게. 아주 차갑게. 아담의 상처 바로 가기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23 회] 날 짜 2004-08-06 조회 / 추천 1978 / 28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잊혀진 대륙 권태로운 얼굴로 스크린을 들여다보던 칼은 급작스런 에너지 파장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잠깐 당황했던 그는 곧바로 얼굴에서 놀라움 을 지우고 능숙하게 기기를 다루기 시작했다. "위치는 P1434, K7765라…. 대서양인가?" 그래프의 막대기가 심한 굴곡을 그리고 있었다. 이론적으로 볼 때 자연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기형 에너지 반응이었다. 칼은 뚫어져라 모니터를 바라보며 턱수염이 없는 턱을 어루만졌다. 까칠까칠해서 싫으니 제발 수염 좀 깎으라고 말하던 딸이 죽은 후에 야 면도를 하게 된 그였다. 불현듯 떠오른 그리움을 지우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예 전에 레이온이 했던 말을 상기했다. '조만간 재미있는 일이 생기게 될 거야.' 그 말이 곧 현실이 되는 것인가. 이윽고 눈을 뜬 칼은 작게 중얼거 렸다. "재미있다는 일이… 바로 이건가?" "호오?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나, 칼?"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칼은 흠칫 놀라며 돌아보았다. 한쪽 손으로 문을 짚고 선 레이온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어 보였다. "드디어 캐치됐나 보군." "캐치요?" 레이온은 궁금함이 가득한 칼의 음성을 무시하고 스크린 앞으로 다 가갔다. 심각한 얼굴을 한 레이온은 기기를 조작해 에너지 파장이 잡히는 좌표를 정확히 계산해냈다. "대서양에 있었군. 설마 정말 거기인 줄은 몰랐는데? 과연 그들답 군. 그렇게 대담하게 자기들 위치를 사람들에게 알리다니 말이야." 밑도 끝도 없이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칼은 혼란에 빠졌다. "무슨 소리입니까 그게?" "간단해. 시트날타 본거지를 드디어 찾아냈다는 거지." 칼의 얼굴이 순간 차갑게 굳었다가 원래의 빛으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그래. 이제 입장이 뒤바뀔 때가 가까워진 거야. 앞으로는 시트날타 가 내 명령을 들어야 할 거다." 레이온의 얼굴은 감격 비슷한 통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태껏 앤슨과 마리오 등에게 부하 비슷한 취급을 받은 굴욕을 드디어 갚아 줄 때가 된 것이다. 진작에 끝냈어야 할 시트날타와의 인연을 여태껏 유지하고 있던 것 은 그들의 본거지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였다. 나중에 반드시 필요 할 때가 올 거라 생각했기에 여태껏 시트날타에 붙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다행스럽게도 저들이 먼저 친절하 게 알려주었으니, 이제 더 이상 시트날타에 볼 일은 없다. "그럼 이제 관계를 끊으면 되는 겁니까?" 초췌한 안색 가득 설렘을 띠고 있던 칼이 그렇게 물었다. 레이온은 작게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어두웠던 그의 얼굴에 비로 소 약간의 활기가 돌았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아니야. 하지만 언제든지 그렇게 할 수 있지." 레이온은 팔짱을 낀 채 고민했다. 그의 얼굴은 즐거운 설렘으로 가 득 덮여 있었다. "이제부터 무얼 할까? 그들의 본거지를 알았으니 그 좌표를 핵미사 일 시스템에 입력해둘까?" "당장 준비하죠." "후후후, 나중에 앤슨이 이걸 알면 볼만한 얼굴이 되겠어." 보이지 않는 앤슨과의 경쟁에서 드디어 우위를 손에 쥐게 된 레이온 은 득의만면한 웃음을 터트렸다. 앞으로 앤슨이 자신의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에도 쩔쩔맬 것을 생각하니 유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칼은 옅게 미소지으며 크게 웃는 레이온을 바라보았다. 레이온이 하 고자 하는 일이 잘 될수록 자신의 목표 역시 이루기 쉬워진다. 그들 은 같은 배를 탄 동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사업은 잘 되어가고 있나?" "아직까지는 순조롭습니다. 얼마 전 한국에 새로운 판매망을 뚫는데 성공했습니다." "조심하도록 해. 장기밀매는 아직까지는 불법이니까 말이야." "우리가 파는 것은 장기가 아닙니다." 칼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그 속에 담긴 살기, 그것은 레이온 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더러운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의 부조리 를 증오하는 눈빛이었다. 잠자코 그의 눈을 바라보던 레이온은 고개를 돌리며 쓰게 말했다. "나는 자네에게 생명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당신 덕분에 저는 제 꿈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었으니까요." "자네가 원하는 세상을 이루기 바로 직전까지 간다 해도, 자네가 지 닌 생명의 무게가 가볍다면 아무 소용없어." 레이온의 말투에는 진중함이 넘쳐흘렀다. 자신보다 열 살 이상 많은 중년 남자에게 보일 태도가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그 둘의 관계는 자연스러웠다. 칼은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레이온은 감흥 없는 눈동자로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지켜봐 주십시오. 당신이 구해준 이 생명의 무게, 그것이 결코 가 볍지 않음을 반드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어." 그들을 에워싸고 있던 한기가 씻은 듯이 녹아 내렸다. 레이온은 언 제 엄격히 굴었냐는 듯 밝은 미소를 띠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만 일어나. 자네 가족들이 하늘에서 자네의 그런 모습을 보면 얼 마나 슬퍼하겠어? 자네는 어깨를 당당히 펼 만한 힘이 있다고." 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동자에 자리잡은 굳은 의지 를 확인한 레이온은 속으로 작게 웃었다. 그가 이루고자 하는 염원. 그것이 성공으로 장식되든 실패의 늪에 던져지든 그 어느 쪽도 레이온에게는 나쁘지 않다. 칼의 성공을 향 한 그 과정만을 지켜보면 되는 것이다. "칼. 자네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나는 관여하지 않을 거야. 자네에게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계기를 준 것만 해도 충분해."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자네를 통해 신의 의지를 시험하고 있는 거야. 과연 내 가 신에게 도전해도 이길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말이야." 레이온은 등을 돌리며 눈을 감았다. 그의 등뒤로 태산보다 무거운 기백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내가 내 친구 이야기를 했던가?" "헤라클레스라는 분 말입니까?" "했었나 보군. 그래, 녀석은 말이야. 가엾게도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버렸지. 녀석이 그토록 싫어하던 에덴인, 신인류가 녀석의 꿈을 대신 이루어주었지. 녀석은 아마도 편히 눈을 감지는 못했을 거야." 칼은 잠자코 레이온의 이야기를 들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신경을 곤 두세웠다. 그러나 색깔이 맞춰지지 않은 퍼즐놀이를 하는 듯 혼란스 럽기만 했다. 레이온은 항상 그랬다. 뜻도 모를 단편적인 말을 불규칙적으로 내뱉 곤 했다. 칼은 힘들게 머리를 굴려가며 레이온의 진의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소원을 한결 더 쉽게 이룰지도 모른다 는 기대감에서였다. 광기 잃은 미치광이. 레이온을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단어는 바 로 그것일 것이다. 칼은 그가 하는 말을 모두 이해하려고 했고, 또 전부 이해할 수 있다고 기대했지만, 실상 그는 단 한 조각조차도 이 해하지 못했다. 만약 누가 물어보면 칼은 주저 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레이온은 미쳤다고. "칼." "네. 말씀하시죠." "내 친구는 비록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자기 생명의 무게 가 녀석이 지녔던 꿈에 맞먹는다는 것은 증명했다. 녀석이 처음부터 제대로 된 이론을 세웠으면 필경 행복해질 수 있었을 거야." 무겁기 그지없는 어조에 칼은 신음을 삼켰다. 레이온은 등을 돌린 채로 다시 덧붙였다. "난 자네가 녀석을 뛰어넘어 줬으면 해." 이루 말하기 힘든 감격이 칼의 가슴에 스며들어왔다. 별로 멋질 것 도 없는 단순한 격려였지만, 칼은 그 안에 배인 굳건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칼은 오른손을 들어 뜨거운 심장에 갖다댔다. 그리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꼭 이루고 말겠습니다." 그제야 표정을 옅게 만든 레이온은 칼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그럼 앤슨을 만나러 가볼까? 아마 지금쯤 맥이 수폭을 얻어맞은 것 때문에 잔뜩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지도 몰라." 레이온은 미군함대의 자폭 사건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오스카가 그 배후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마 앤슨과 마리오는 맥이 파괴당했다며 절망하고 있을 것이다. 그 러나 유젤이 타고 있는 맥을 인간의 힘으로 부수는 건 불가능하다. 그들이 막 연구실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삐익 삐익 하는 신호음이 요란하게 퍼지더니 스크린에 파동의 굴곡이 심하게 그려졌다. 깜짝 놀란 레이온은 얼른 스크린 앞으로 달려갔다. "맥? 웬일이냐?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 「레이온.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맥의 어조는 흥분에 가득 차 있었다. 아니, 강조를 위하여 녀석이 흥분을 연기하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나는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을 수 없어요.」 사람이라면 심장이 터졌을지도 모르는 격한 어조. 그것을 흉내내는 맥의 음성을 들으며, 레이온은 녀석이 뭘 말하는지 알겠다는 듯이 피식거렸다. 「당신이 옳았습니다. 그들은 심해의 밑바닥에서 정말로 존재하고 있었어요.」 레이온은 여유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두 팔로 기기를 짚었다. 자신 감에 찬 눈동자로 그래프가 요동치는 스크린을 들여다보던 그는 또 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아틀란티스는 존재한다고." 소엄의 제목을 바꾸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몇 달 전부터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었지요? 갑작스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고심한 끝에 무난하게 '붉은 성지의 아리아'로 바뀌기로 했습니다. 월명성희의 중강님께서 제목 바꾸는데 큰 도움이 되어주셨습니다. (별의별 제목이 다 나왔습니다.;) 아담의 상처 바로 가기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ps : 원래 잠수하려 했는데, 저 말씀과 부탁 드리려고 부득이 한 편 써서 업했습니다. 이제 다시 더위가 사그라질 때까지 잠수하겠습니다.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24 회] 날 짜 2004-08-07 조회 / 추천 2673 / 37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잊혀진 대륙 제시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집으로 들어간 세현은 거친 손놀림으로 짐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당장, 당장 돌아가야 돼. 지금 녀석들은 미쳤어!" 그가 무엇을 들었기에 저렇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지 제시는 알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팔짱을 풀은 제시는 그를 따라서 짐을 정 리하기 시작했다. "뭐 때문에 그러는 거죠? 아까 그 전화는 뭐였어요?" 세현은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짐을 정리했다. 상당히 흥분한 탓에 바르르 떨리는 손은 옷가지를 제대로 집지 못하고 있었다. 혀를 끌끌 차던 제시는 그의 손을 밀어내고 대신 짐을 챙겨주었다. 경련을 일으키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물러난 세현은 허탈한 웃음 을 피식 터트렸다. "제시, 내가 지금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그 말에 제시는 짐을 정리하다 말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해 한다는 듯 생긋 웃었다. "알긴 아는군요. 당신이 지금 가봤자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걸." 다른 이들의 관점에서 세현은 그저 자금을 벌어들이는 구성원에 불 과했다. 에날도스를 지니지 못했다고 알려진 세현은 일정 이상의 권 한을 지닐래야 지닐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당황하는 걸 보면 그 서예안이라는 여자한테 무슨 큰일이 생긴 게 틀림없군요?" "…수폭을 맞았대." 제시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황함이 새겨졌다. "지, 진짜요? 그럼 어떻게 된 건가요? 죽은 거 아니에요?" "아니야."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손바닥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세현은 단호한 목 소리로 덧붙였다. "죽진 않았어. 난 느낄 수 있어." 제시는 침을 꿀꺽 삼키며 짙은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위험 때문에서인지 그는 항상 자신이 엘리우스가 아니라고 부정해왔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 처음으로 그 사실을 인정할지도 모른다는 기대 가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눈을 감은 세현은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했다. "제시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고 있어." "…." "하지만 난 정말 엘리우스가 아냐." "그럼 어떻게 서예안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거죠?" 날카로운 그 물음에 세현은 열 번 정도 심호흡을 할 만큼 깊게 생각 했다. 그리고 칼로 자르듯 날카롭게 대답했다. "에날도스가 없는 것과는 관련 없어. 제시 당신은 에날도스를 지녔 는데도 느끼지 못했잖아?" "…." "예지력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 둬." 짤막한 그 대답에서 제시는 들어올리지 못할 거대한 세월의 무게를 느꼈다. 그 어떤 아름다운 위로를 한다 해도 그의 마음을 가다듬어 주지는 못할 거라 생각하자 까닭 없이 분했다. 얼굴을 굳힌 그녀는 빠른 손놀림으로 짐을 주섬주섬 챙겼다. "빨리 준비하고 미국으로 가요. 적어도 저는 카이저급 이상이니 그 들에게 뭔가를 요구할 자격은 된다고요." "갈 수 없어." "조금 전에 빨리 가자고 말한 건 당신이었잖아요?" 세현은 옅은 미소를 입가에 띤 채 제시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쿨럭 기침하며 붉은 피를 한 움큼 쏟아냈다. 흰 셔츠가 소름끼치는 적빛 으로 물들자 제시는 당황하며 그를 부축했다. 서둘러 손수건을 꺼낸 그녀는 그의 턱을 닦아주며 놀란 음성으로 물 었다. "왜 그런 거예요?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예요?" 가까스로 창백한 미소를 띠고 있던 세현은 또다시 피를 토해냈다. 제시는 다급해졌다. 닦아도 닦아도 핏줄기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 았다. 어쩔 줄을 몰라하던 제시는 의사를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일어나려 는 그녀의 어깨를 세현이 힘들게 잡았다. 피묻은 손자국이 그녀의 어깨에 찍혔다. "그럴 필요 없어.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당신…."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던 제시의 뇌리를 불현듯 불길한 생각이 스치 고 지나갔다. 그녀는 의구심이 가득한 어조로 물었다. "설마 당신 어떤 증세인지 알고 있는 거예요?" 세현은 피를 조금씩 토하면서 키득키득 웃기만 했다. 제시는 화가 난 나머지 그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말해요! 말해보라고요!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알려지면… 안 돼. 그럼 난 죽어." "괜찮아요! 안심하고 말해봐요! 난 수호자잖아요!" 수호자. 대대로 엘리우스를 지키는 측근들을 일컫는 말. 태고에는 어떤 모습으로 엘리우스와 공존하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반드 시 엘리우스에게 도움이 되지만은 않는다. 세현의 어머니가 죽은 것 이 전대 수호자의 탓이 컸다는 게 바로 그 예이다. 그래서 세현은 의식적으로 제시를 피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거친 기침을 내뱉으며 세현은 힘겹게 말했다. "난… 엘리우스가 아냐. 제시 네가 착각하고 있는 거야." 위험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주변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까지 속이는 것이 최고의 암시라고 한다. 그러나 세현의 눈동자에는 그런 기운이 없었다. 이순신 항모 함대는 교전지역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수폭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입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찌나 지독한 자기장이 불어닥쳤는지 한 시간 가까이 전자장비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덕분에 본국으로의 보고는 한참이나 늦어졌다. 가까스로 통신이 열 렸을 때에 이미 정부는 인공위성을 통해 수폭이 터진 것을 알고 있 는 상태였다. 국방부 장관은 핫라인으로 서둘러 맥의 생존 여부를 물었다. 김지수 사령관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일반 고폭탄도 아 니고 수폭의 폭발 한가운데 있었으니 어떤 물체라도 살아남을 수 없 는 것은 자명했다. 맥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전세계로 뻗어나갔다. 미국은 이 호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전력을 가다듬어 한국을 침공하려 했 다. 신중하게 주사위를 굴리던 중국도 일시적으로 감췄던 이빨을 다 시 드러내려 했다. 졸지에 한국은 여러 열강들을 상대로 맥도 없이 혼자 전쟁을 치러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승산은 희박했다. 자금면에서는 그 어떤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미국 등의 압력을 받 는 나라들이 한국에 쉽사리 고급 무기를 팔 리가 만무했다. 그렇게 한국이 한없이 불리한 처지에 놓였을 즈음에 또다시 충격적 인 사실이 알려졌다. 다름 아닌 맥이 파괴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었다. 어떤 한국인이 풍경 촬영 중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날아가는 물체를 찍은 사진이 그 주장의 발단이었다. 전문가의 엄격한 검증 결과 그 것은 분명 맥이 틀림없다는 결론이었다. 화질이 좋지 않아 자세히는 알아볼 수 없었으나, 맥은 파괴되지 않았다는 건 분명했다. 중국, 러시아, 유럽에서도 같은 사진을 찍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한 국의 정보 공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세계는 맥의 그 놀라운 장 갑에 경외를 보냈다. 전세계의 과학자들은 미칠 듯한 흥분을 참아내 야 했다. 수소 폭발의 한가운데서도 맥은 잿더미가 되기는커녕 살아 남았던 것이다. 현대 물리학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맥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유럽을 지나친 것으로 보아 대서양 어딘가에 떨어진 것으로 파악, 즉각적으 로 수색 작업을 준비했다. 미국 등은 한껏 날카롭게 다듬었던 발톱을 주춤거려야 했다. 만약 맥이 살아있는 거라면 패전은 확실해진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 해 맥의 생존 여부를 알아본 뒤, 화해해야 한다면 가능한 빨리 화해 하는 게 좋았다. 그렇게 전세계의 시선이 대서양으로 향하게 된 즈음, 니콜라스는 엄 마와 떨어진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도 목청이 찢어져라 울어 젖히는 아기를 달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그만 울어 이 녀석아." 어르고 달래다 안 돼서 큰 소리를 지르니까 더 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을 새삼 존경하게 된 니콜라스는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나무 그늘 밑에 털썩 주저앉았다. "휴우." 삼엄한 경비 속에 국방부를 드나드는 차량들을 바라보던 니콜라스는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울 엄마 어딨어어. 어딨어어." 되도 않는 발음으로 예안을 찾는 유빈의 울음소리를 멍한 얼굴로 듣 던 니콜라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걸 알면 이러고 있겠…." 그는 말을 잇다 말고 멈췄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유빈은 울음 을 뚝 그쳤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마터면 품에 안고 있던 아기를 떨어뜨릴 뻔한 니콜라스는 안간힘 을 쓰며 옆에 내려놓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맛보지 못한 극통이 뇌리를 엄습했다. "흐으윽, 으으윽…." 니콜라스는 쿨럭거리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시뻘건 피가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놀라서 그에게 달려왔다. 그는 끊 임없이 쿨럭거리며 계속해서 피를 쏟았다. 피를 보고 놀란 아기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엘리우스.' 환청이 들렸다. 그의 의식은 오랜 세월의 자취를 쫓아 달리기 시작 했다. 오랫동안 세상에 금지된 성스러운 세월의 자취, 그것을 따라 가는 그의 의식은 세포가 해체되듯 그렇게 풀려버렸다. 아담의 상처 바로 가기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25 회] 날 짜 2004-08-27 조회 / 추천 1530 / 79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잊혀진 대륙 지난 줄거리. 해군기지로 떠나는 예안을 중간에 불러들인 레이온은 원래 뇌 이식 수술을 하지 않았다고 말해 그녀의 분노를 산다. 혼란을 딛고 그와 헤어진 예안은 중현의 재촉을 이기지 못하고 아기를 데리고 항모에 탑승한다. 전투 도중 호위함을 모두 잃은 미 항모는 수폭으로 자폭해 맥을 공 격하고, 대서양에 떨어진 맥은 거대한 미로의 비너스 상을 본다. 동 상이 보여준 일 만 년 전의 풍경을 통해, 예안은 시트날타의 정체를 알고 놀라워한다. 한국 함대는 긴급히 귀환하고, 맥의 생사유무에 관한 세계의 관심은 점점 고조된다. 국방부 정원에서 유빈을 보호하며 예안을 걱정하던 니콜라스는 불현 듯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의식을 잃는다. 흐릿한 광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니콜라스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 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이건 꿈? 아니면 환각? 그러나 그 둘 중 어느 하나라고 하기에는 지 나치게 리얼하다. '주피엘! 주피엘! 도와줘!' 불현듯 익숙한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전에 세현의 암시에 걸렸 을 때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벌떡 일어난 니콜라스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마구 달렸다. 미칠 듯한 두려움이 쉴새없이 솟구쳐 올랐지만, 목소리의 주인을 확 인하고 싶은 욕구가 더 컸다. 고풍적인 느낌의 거리가 길게 뻗어 있었다. 낯선 풍경이 뚜렷한 선 을 그리고 있었지만 어디선가 한번 봤던 듯 익숙한 느낌이었다. 데 자뷰 현상인가. 니콜라스는 무릎까지 물이 질퍽거리는 거리를 빠르 게 달렸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점점 차 오르고 있던 물은 어 느덧 니콜라스의 허리를 넘어섰다. 그는 이를 악물며 참고 계속 달 렸다. '레오나 괜찮아?' 모퉁이를 돌자 거대한 신전이 나타났다. 한 소녀가 파도에 휩쓸려나 가는 동상을 붙잡은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소년이 소녀를 간신히 붙잡아 끌어올렸다. 동상은 결국 떠내려가 버렸다. '어떡해? 어떡해? 동상이 떠내려가 버렸어.' '그깟 동상 따위 챙길 시간 없어. 빨리 도망쳐야 돼.' '도망쳐도 소용없어! 소용없단 말야! 신은 우리를 죽일 거야! 우리 를 멸망시킬 거야! 이 대륙을 바다 속에 가라앉혀 버릴 거라고!' 소녀가 울부짖었다. 소년은 안타까운 얼굴로 소녀를 달랬다. 니콜라 스는 가슴까지 물이 차 오른 것도 잊은 채 멍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 보았다. 멀리 떨어져있는데도 소녀의 절박한 마음이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 졌다. 소녀의 절망이 자신의 좌절인 것처럼 안타까웠다. '어떡해! 어떡해! 난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단 말야!' '레오나. 내가 어떻게든 손을 써볼게.'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주피엘이 뭘 어쩔 수 있다고….' 소녀의 얼굴이 불현듯 창백하게 굳었다. 그 경직된 표정은 멀리서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너 설마…?' 소년은 결연한 태도로 끄덕였다. 니콜라스는 소년이 어떤 얼굴을 하 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소년은 아까부터 한 번도 이쪽을 돌 아보지 않았다. '그만 둬! 그만두란 말야! 그런 짓을 하면 네가 죽는단 말이야!' '모두가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 '도망가! 너 혼자라면 도망갈 수 있잖아!' '널 버리고 도망가라고? 그럴 순 없어.' 울컥하는 기운이 목구멍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왔다. 니콜라스는 억지 로 입을 틀어막으며 계속 그들을 지켜보았다. 물은 어느덧 턱에 찰랑거릴 정도로 높이 차 올라 있었다. 사방 어디 를 둘러보아도 물이 없는 곳은 없었다. 소년은 천천히 일어나 두 팔을 벌렸다. 붉은색 기운이 전신에서 뿜 어져 나와 퍼지기 시작했다. 형언할 수 없는 영롱한 그 빛깔은 입에 담는 것조차 송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것은 바로 희생, 그 거룩한 이름. 거대한 붉은 막이 지붕처럼 대륙 전체를 덮었다. 그렇게 끝까지, 끝 까지 계속 뻗어나갔다. 물살의 흐름이 점점 느려졌다. 수위가 점점 낮아졌다. 신의 분노가 사라진 것인가. 사람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돌았다. 그러나 하늘을 쳐다본 그들은 이내 절망했다. 대륙을 뒤덮은 투명한 막 위로 검푸른 바닷물이 보였다. 결계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통해 수많은 물고기들이 보였다. 태양은 보이지 않았다. 점점 깊어지는 심해의 흐름을 통해, 그들은 영원히 태양을 잃어버린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지옥의 업화보다 더 한 절망. 그들은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살아남았다는 기쁨 따위는 어느덧 사 라져 버렸다. 목청이 터질 때까지 울부짖으며, 그렇게 울부짖으며 잃어버린 태양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이제부터 그들이 살아가야 할 곳은 심해의 감옥. 태양의 고 귀한 빛은 더 이상 그들에게 밝은 하늘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이 제 그들은 아름다운 은하수를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잃 고 심해의 감옥에서 지난 영광을 그리워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주피엘! 주피엘!!' 소녀의 울부짖는 소리에 니콜라스는 정신을 차렸다. 시뻘건 화염에 싸여 있던 소년의 몸이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모든 기력이 빠진 듯 소년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레오나….' 무언가를 좀더 말하고 싶은 듯 소년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소 년은 끝내 가슴속의 말을 풀지 못한 채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주피엘! 주피엘!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감긴 소년의 눈을 불신의 얼굴로 바라보던 소녀는 미친 듯이 울부짖 었다. '장난이지? 장난이지? 재미없어. 이런 장난치지 마. 일어나. 일어 나. 제발 일어나란 말이야!' 소녀는 절망하며, 그렇게 절망하며 소년의 몸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생명이 사라진 소년의 몸은 도무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흔들고 때리고 애원해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니콜라스는 불현듯 심장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소녀의 슬픔이 가슴속으로 전이되어 지독한 고통을 낳 고 있었다. "뭐지?" 니콜라스는 홀린 듯한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턱밑에서 찰랑거 리는 물은 어느새 허리까지 그 수위가 줄어 있었다. 소년의 몸을 붙들고 우는 소녀는 니콜라스가 바로 곁에까지 다가가 도 반응이 없었다. 어느새 소녀의 코앞까지 다가간 니콜라스는 가만 히 손을 뻗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 살아난 것을 안도하던 이들. 심해의 감옥에 던져진 것을 저주하던 이들. 그들의 구슬픈 탄성이 환청처럼 투명하게 잦아들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도 손은 소녀의 몸을 통과해 허공만 움켜잡았다. 뭐라고 위로를 해주고 싶은데 만질 수가 없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상실감을 피워 냈다. 소년과 소녀의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바람의 흐름에 휘감겨 부 스러지듯이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퍼뜩 정신이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낯설지 않은 느낌 이 가득하던 거리도, 집도, 신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귀신에라도 홀린 듯한 얼굴을 한 그는 조금 전까지 소년과 소녀가 있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털썩 주저앉았다. 바닥을 짚은 손에 까칠까칠한 풀이 잡혔다. 분명히 신전의 대리석 광장에 있었는데? "여기가 어디지?" 니콜라스는 어이없는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름 모를 들꽃이 피어난 넓은 초록 동산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 생생 하게 느꼈던,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사람들의 그 절망의 호흡소리는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꿈을 꿨나?" 뺨을 꼬집어본 니콜라스는 이게 꿈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환각이 라고 하기에는 지나치리만큼 생생하다. "유빈이는?" 그제야 정신이 든 니콜라스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휙휙 둘러 보았다. 그렇다. 자신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국방부 정원에서 유빈 을 데리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생소한 동산 에 내팽개쳐져 있단 말인가. "유빈아! 서유빈!" 초조해진 니콜라스는 동산을 뛰어 내려오며 소리를 질렀다. 그의 고 함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누나! 누나!" 이성을 잃다시피한 그는 목청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아무 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뭐야? 뭐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잔뜩 흥분한 그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다가 문 득 하늘에 시선이 닿았다. 그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저건… 뭐지?" 죽음보다 짙게 드리워진 파란 하늘이었다. 싱그러운 하늘빛 청명함 으로 빛나는 창공이 아닌, 심해의 깊은 공간처럼 검은색에 가까운 검푸른 하늘이 지평선 끝에서 끝까지 뻗어 있었다. 복귀했습니다.=_=/ 추천 눌러주세요~ 아담의 상처 바로 가기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26 회] 날 짜 2004-08-28 조회 / 추천 1474 / 32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잊혀진 대륙 멍한 얼굴로 주저앉은 니콜라스는 초점이 사라진 눈으로 하늘만을 올려다보았다. 오랜 죽음이 침전된 심해의 검푸른 빛깔이 그의 마음 에 강한 불신을 심어주었다. "여기는 도대체 어디야?" 꿈이라고 믿고 싶지만 꿈은 아니다. 환각이라 믿고 싶지만 환각은 아니다. 현실보다 그 감도가 떨어지지도 뛰어나지도 않는 산들바람 은, 지금 이 순간이 현실 그 자체라고 말해주었다. 유빈이 걱정이 된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이내 맥없 이 다시 주저앉았다. "뭐야? 도대체 뭐야?"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은지 몰랐다. 왜 국방부 정원에 있던 자신이 갑자기 이런 곳으로 내동댕이쳐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늘같지도 않은 하늘을 짊어지고 있는 이곳은 과연 지구이기나 한 것인가. "제길! 제길!" 화가 난 니콜라스는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그의 체내에 응축된 힘 이 거친 파괴력으로 승화되어 마구잡이로 난사되었다. 그의 발 밑을 중심으로 요란한 폭음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풀이 짓이겨졌고 꽃에 불이 붙었다. 바위가 부서지고 흙이 파헤쳐졌 다. 검게 탄 대지의 내음이 기분 나쁘게 후각을 자극했지만 그는 발 작을 멈추지 않았다. 몸 안의 모든 힘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 짜내면 꿈이 깰 거라고 믿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악, 하악…." 모든 힘을 뽑아낸 니콜라스는 큰 대자로 누웠다. 반경 수백 미터 지 역이 초토화가 된 채 검은 죽음의 냄새를 물씬 피워 올리고 있었다. 가루가 된 바위 조각 사이에 허리가 꺾여진 들꽃을 보노라니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그는 엉금엉금 기어가 그것을 보듬어 주려고 했다. 그러나 간신히 버티고 있던 들꽃은 그의 손가락이 살짝 닿자마자 푹 꺾어지며 숨을 거두었다. 마치 친구들을 학살한 적의 동정은 받기 싫다는 것처럼. "여기, 네가 이렇게 만들어놓은 거니?" 불현듯 들린 음성에 니콜라스는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갈색 머 리를 허리까지 기른 소녀가 꽃바구니를 껴안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소녀와 언어가 통한다는 것에, 정확히는 소녀가 영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감사했다. 적어도 외계는 아닌 모양이었다. "황궁을 치장하는데 쓸 꽃들인데 네가 이렇게 망가뜨리면 어떡해? 경비병 아저씨들이 이 사실을 알면 넌 엄청 혼날 거야." "황궁이라니?" 소녀는 니콜라스가 이상한 말을 한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황궁을 몰라? 너 시민 맞니? 설마 태어나자마자 산 속에서 혼자 살 았다는 뭐 그런 거는 아니겠지?" "정말 몰라.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여기가 어디냐니? 황궁 소유 자연 꽃밭이잖아."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도대체 이 곳이 무슨 세계냐는 거야. 난 분명히 조금 전까지 한국이란 나라 국방부 정원에 있었단 말이야." 소녀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너 설마 바깥 세상 인물? 아니,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지?" 바깥 세상 인물? 의미불명의 말에 니콜라스는 크게 당황했다. "용서할 수 없어! 감히 하등한 바깥 세상 사람 주제에 황궁 꽃밭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단 말이야!" 빈 꽃바구니를 저쪽으로 던진 소녀는 주먹을 발끈 쥐고 전투 태세를 취했다. 어딘지 언밸런스한 그 포즈에 니콜라스는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그러나 소녀의 전신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어오르자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가만두지 않겠다!" 소녀가 빠르게 주먹을 뻗자 섬광이 번쩍하며 날아왔다. 복부에 강한 타격을 입은 니콜라스는 윽 하고 주저앉아 콜록거렸다. 소녀는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바깥 세상인이 내 공격을 맞고도 살아 있을 수 있지?" 초토화된 주변을 돌아보던 소녀는 더욱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분명 에날도스의 흔적이야. 하지만 어떻게 바깥 세상인이 에 날도스를 쓸 수 있는 거지? 설마 우리 민족?" 그러나 소녀는 곧바로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아니야. 우리 민족이면 여기가 어디냐고 물을 리가 없잖아. 그리고 분명 한국 국방부에서 이곳으로 왔다고 했어. 가만, 바깥 세상 사람 인데 에날도스를 쓸 수 있다고?" 콜록거리는 니콜라스를 바라보는 소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설마 엘리우스? 말도 안 돼! 진짜 엘리우스라고 쳐도 어떻게 이렇 게 약할 수가 있어?" 전대 엘리우스가 사망하면 마기는 한 태아를 골라 주인으로 선택한 다. 이때 선택되는 태아는 반드시 바깥 세상인의 핏줄이다. 그리고 엘리우스는 이름이 아니라 마기가 선택한 숙주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명칭이다. 대부분의 엘리우스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평범하게 살아간다. 따라 서 소녀는 일단 니콜라스가 엘리우스인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운명을 자각하고, 그에 따른 에날도스의 폭주 로 공간전이가 되었다면 그럭저럭 설명이 된다. 그러나 네 마리 공명신수의 힘을 합쳐도 상대가 안 된다는 최강 공 명신수를 지녔다는 사람치고는 너무 허약했다. "이봐. 너 정말 엘리우스 맞아?" "모, 몰라. 그런 거." 이곳이 시트날타의 본거지라는 것을 깨달은 니콜라스는 콜록거리며 그렇게 둘러댔다. 사실 갑작스럽게 이동된 것 때문에 흥분해서 발작 하느라 힘을 쏟아내지만 않았더라면 눈앞의 계집애 정도는 이길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소녀가 자신을 엘리우스가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 나았다. 정체를 들켜봐야 좋을 것은 없었다. "끄응.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 어쨌든 너도 에날도스를 갖 고 있는 걸로 봐선 우리 민족이 맞는가 보다. 때려서 미안해." 소녀는 니콜라스가 바깥 세상에 나가 있는 민족 중 누군가가 사생아 로 낳은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드물지만 그런 케이스가 아 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판단을 내리자 자연히 그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사근사근해 졌다. "그런데 바깥 세상에서 살았다면서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는 거니? 혹 시 게이트로 들어왔어?" "게이트? 그게 뭔데?" "모르니? 우리 아틀란티스 대륙이랑 바깥 세상을 연결해주는 통로 말이야. 수백 년 동안 한 번도 닫힌 적이 없대." 니콜라스는 아틀란티스라는 말에 흠칫 놀랐다. 아까 보았던 환영이 생생하게 머리 속에 떠올랐다. 그 두 가지가 머리 속에서 교차하면 서 하나의 결론을 낳았다. '설마 여기는 바다 속?' 흠칫 놀란 니콜라스는 다시 하늘, 아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제 야 검푸르게 빛나는 저 색깔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알 것 같았다. "눈치챘나 보네. 네가 생각한 대로 여기는 바다 속이 맞아. 우리 아 틀란티스 대륙은 만 년 전쯤에 신의 분노를 사서 대륙째로 바다에 가라앉았거든." 니콜라스는 놀라움 가득한 눈으로 소녀를 보았다. 과연 저 말을 믿 어도 좋은 것인가.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야. 당장 저 하늘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저 것은 하늘이 아니라 바닷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보호막이 야. 만 년 전 대륙이 가라앉을 때 주피엘 사제가 자기 목숨을 희생 해서 저 보호막을 쳤대." 만 년 동안이나 저 결계가 유지되었다는 말인가. 니콜라스는 소리 없이 신음을 삼켰다. "게이트는 대륙이 가라앉고 삼십 년 정도 지나서 만들어진 거래. 그 뒤로, 대륙이 가라앉기 전에 다른 대륙에 나가 있던 사람들하고 겨 우 연락이 된 거지." 니콜라스는 진지한 얼굴로 설명을 들었다. "근데 게이트는 20년을 주기로 한 번씩 닫혀. 델, 자인, 디르, 웨버 의 힘을 모두 끌어 모아도 그것을 막을 수 없었대. 마기의 힘이 없 으면 게이트는 닫혀버리고 만대." "델하고 자인 뭐…? 그게 뭔데?" "공명신수 이름을 말하는 거야. 마기만 빼고 전부 다 화룡의 모습을 하고 있대. 5대 대신 님들이 각각 한 마리씩 부리고 있다고 들었어. 그것을 지녔다는 것은 우리 민족 중에서 최고로 강한 사람들이라는 뜻이야." 마기.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니콜라스는 강한 전율이 가슴에서 들끓 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거부감? 아니면 내가 엘리우스라는 증거? 소녀는 말을 계속했다. "공명신수는 모두 다섯 마리고, 5대 대신이 한 마리씩 지니고 있어. 원래는 일정한 시험을 거쳐 통과하면 전대 대신으로부터 공명신수를 물려받는 식이었어. 근데 수천 년쯤 전에 마기의 주인이 우리 민족 을 배신했대. 전설로 내려오는 거라 확실하진 않지만 바깥 세상인과 사랑에 빠졌다고 하더라." "사랑?" "응. 그래서 마기의 주인이 자기 본분을 버리고 도망치려는 것을 잡 아서 강제로 마기를 뽑아냈대. 마기의 주인은 그 쇼크를 이기지 못 하고 죽었대. 그때 예상 밖으로 엄청난 에날도스가 쏟아져 나왔는 데, 그 힘 하나만으로 게이트가 닫히지 않도록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 소녀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민족을 배신했다가 처형당 한 마기의 주인에게 아무런 연민도 분노도 못 느끼는 듯이. "그 뒤로 마기는 사라졌어. 마기는 시험을 치르지 않고 직접 자기 힘으로 바깥 세상인을 골라서 주인으로 삼았대. 마기의 주인이 죽기 전에 마기에게 강한 원념을 심어줘서인가 봐. 마기는 대를 이어가면 서 바깥 세상 사람을 주인으로 삼아 우리한테 복수하려고 했어." 소녀의 눈에서 살벌한 원기가 뿜어져 나왔다. 니콜라스는 저도 모르 게 주춤거렸다. "마기의 힘은 세월이 갈수록 계속 강해져서 다른 공명신수들의 힘을 합쳐야 간신히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돼버렸어. 언제부터인가 마기에 게 선택받은 주인을 엘리우스라고 부르기 시작했어. 그리고 우리 민 족은 대대로 엘리우스를 붙잡아서 마기의 힘으로 게이트가 닫히는 것을 막아왔어." 소녀의 설명이 끝났다. 충격적인 사실들을 연이어 접한 니콜라스는 초점이 구겨진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그런 걸 말해주는 거야? 나는 바깥 사람인데? 내 가 만약 엘리우스면은 어쩌려고?" "너 부모 없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지?" 듣기에 따라서는 불쾌해할 수도 있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니콜라스 도 소녀도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맞는데. 왜?"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보기에 너는 우리 민족 누군가와 바깥 세상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같아. 그런 경우가 없지는 않거든." "그렇다면 날 가만 놔둬도 돼? 아까는 엘리우스가 바깥 세상 사람이 랑 사랑에 빠져서 처형했다며?" "그냥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 사랑에 빠져서 민족을 배신했으니까 그런 거지. 우리는 그렇게 꽉 막힌 사람들이 아니야. 어쨌든 이것도 참 인연인가 보다." 소녀는 처음 공격할 때와는 태도를 싹 바꾸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가끔 가다 에날도스가 폭주해서 공간전이가 되는 경우도 있긴 한 데, 바깥 세상에서 우리 대륙으로 이동한 적은 한 번도 없어. 잘 됐 다. 대신 님들이 이걸 알면 게이트 없이 이동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 기뻐하실 거야." 소녀는 니콜라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빙긋 웃었다. 아담의 상처 바로 가기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27 회] 날 짜 2004-08-29 조회 / 추천 1519 / 94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잊혀진 대륙 비너스 상은 말없이 신비한 빛을 발했다. 심해어들은 대열을 맞추어 조용히 상의 주위를 휘감으며 헤엄치고 있었다. 요요하게 흐르는 그 장엄함을 디스플레이를 통해 지켜보던 예안은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건 뭐였지?' 신의 노여움. 울부짖는 사람들. 그리고, 가라앉는 아틀란티스 대륙. 그녀는 방금 전 자신이 본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도,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대단하다. 대단해 정말.' 예안은 눈을 감은 채로 치를 떨었다. 일만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명 맥을 잃지 않고 힘을 키워오며, 언젠가 다시 세상을 호령하리라 벼 르던 그들의 야심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인류의 역사와 문명은 왜곡되고 있었다는 것. 그들의 손아귀에 쥐어 진 채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 과연 세상의 그 누가 이 놀라운 사실 을 알고 있을까. 이 일이 밝혀지면 전세계는 난리가 날 것이다. 일만 년 전부터 강대 한 초능력을 지닌 해저국가가 아무도 몰래 전세계의 숨통을 쥐고 있 었다니. 그 충격적인 사실을 온전한 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 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유니콘. 혹시 너도 봤니?" 「예.」 맥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예안은 자신이 환각을 보거나 한 것이 아 님을 알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떡하지?" 「무엇을요?」 "그, 그렇잖아. 단순한 마피아 같은 것도 아니고 만 년씩이나 벼르 고 별렀던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이 날 노리고 있는데…." 예안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자신이 없어졌어. 그런 사람들한테서 날 지킬 수 있을까?" 「자신감을 잃지 마십시오. 마스터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고귀한 인 간입니다. 그 누구도 마스터를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맥의 단호한 말이 위로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새하얀 얼굴 가득 무거운 한숨을 지은 예안은 다시 디스플레이를 들여다보 았다. 한 번도 눈을 떼지 않고 똑바로 맥 안의 예안을 바라보던 비너스 상 의 왼쪽 어깨에서 갑자기 왼팔이 생겨났다. 예안은 별로 놀라지 않 은 얼굴로 비너스 상의 왼팔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젖은 먼지가 가라앉아 있는 심해 바닥의 어느 한 부분이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저기로 가라는 뜻인가 보다. "가보자." 예안은 무거운 음성으로 중얼거리고는 그쪽으로 맥을 움직였다. 맥 이 그 위에 서자마자 눈부신 빛이 전신을 감쌌다. 두 개의 세계가 부딪치는 흐름에 몸을 맡긴 예안은 이를 악물며 눈을 감았다. 흔들림이 멈추자 그녀는 슬며시 눈을 뜨고 디스플레이를 보았다. 바 로 눈앞에 거대한 동굴이 보였다. 동굴은 맥이 똑바로 걸어 들어가 도 머리를 부딪치지 않을 정도로 컸다. 뒤쪽을 비추는 디스플레이를 켠 예안은 터지려는 신음을 삼켰다. 보 이지 않는 벽이 막아서기라도 한 듯 해수가 수직을 이루고 있었다. 물은 단 한 방울도 동굴 쪽으로 침투하지 못하고 있었다. "와, 어떻게 물이 저렇게 되냐? 꼭 차원결계라도 친 것 같아. 신기 하다. 그치?" 예안은 억지로 태연함을 가장하며 활기차게 말했다. 「지구인들이 보면 패닉을 일으키겠지만 제가 알고 있는 과학으로는 설명 가능한 현상입니다. 별것 아닙니다.」 "호오, 그래? 그럼 너도 저거 할 수 있어?」 「저는 전투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저런 것은 못합니다.」 "쳇. 곧 죽어도 잘난 척이구나."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예안은 결국 직접 부딪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언제까지나 시트날타를 피해 살 수만은 없지 않은가. 차라리 잘 되었다고 돌려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본거지를 알아내 기만 하면 혼을 내주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지 않았던가. 이 기회 에 황태자인지 바드로 3세인지 하는 녀석의 볼기짝을 시원하게 한 방 딱! 때려주면 다시는 접근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는다? 그렇다면 할 수 없다. 전세계의 모든 양 초와 채찍을 동원해서라도 녀석을 노예로 길들이는 수밖에. "여왕님의 말을 듣지 않을 노예는 세상에 없… 가만, 내가 지금 무 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녀는 당황했다. 맥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S와 M의 합성어로서, 학대 음란증 또는 피학대 음란 증이라고도 말하며, 다른 말로는 가학적 변태 성욕 또는 피학적 변 태 성욕이라고도 말하지요. 전자는 성적 대상에게 고통을 가함으로 써 성적 만족을 얻는 이상 성행위를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전자가 자기 자신에게 향한 것으로서….」 "그, 그만해!!" 잘 익은 홍시처럼 얼굴이 붉어진 예안은 귀를 틀어막으며 외쳤다. 맥은 진지함을 가장하며 일부러 중후한 어조로 말했다. 「궁금해하시기에 보충 설명을 드렸을 뿐입니다. 출처는 네이버 지 식 in입니다.」 "역시 네이버 군이 좋긴 좋… 이게 아니야아!!" 얼굴이 새빨개진 채 전방 스크린을 노려보던 예안은 겨우 진정시킨 뒤 내뱉었다. "모처럼 좀 진지해지려고 하는데 그런 쓸데없는 소리나 할 거야?" 「먼저 진지함을 깨부순 건 마스터였습니다.」 "알았어, 알았어, 알았다고! 나 아주 자알 알았으니까 이제 그딴 소 리 그만 지껄이고 좀 진지해져! 알았어?" 「알겠습니다.」 녀석의 농담 때문에 괜히 마음이 뒤죽박죽이 된 것 같다. 크게 심호 흡을 한 뒤 예안은 표정을 일부러 조금 차갑게 굳혔다. 침착함을 좀 더 획득하기 위해서였다. "가보자. 가보자고." 그녀는 자기 암시를 걸듯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워준 다음 맥에서 내렸다. "너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알겠습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어루만지며 예안은 조심스레 걸음을 내딛었다. 동굴은 조금 길고 어두웠다. 그녀는 천천히 걷다가 지나치게 어둠에 눈이 익숙하다는 것을 새삼 자각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자.' 인간이 아니라는 등의 부정적 사고에 휩쓸릴 필요는 없다. 예안은 그렇게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동굴 끝에 보이는 빛을 향해 나아갔다. 이윽고 동굴이 끊어지며 넓은 벌판이 나왔다. 눈부신 빛이 얼굴 위 로 내리꽂히자 예안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손으로 빛을 가렸다. 신비한 느낌을 가득 품은 벌판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곳곳에 세 워져 있는 처음 보는 나무는 그녀를 반기듯 산들바람에 가지를 흔들 었다. 신발에 밟히는 풀잎이 곱게 접히는 소리를 들으며, 예안은 멀리 보 이는 강을 향해 조금 멍한 얼굴로 다가갔다. 졸졸졸 흐르는 맑고 얕은 강물을 들여다보던 예안은 가만히 손을 뻗 어 물고기를 쥐었다. 물고기는 그녀를 보고도 도망가지 않았다. "여기가… 아틀란티스?" 손안에 잡혀 팔딱거리는 물고기를 들여다보던 예안은 가만히 중얼거 렸다. 긴 세월의 무게를 실은 바람이 살랑거리며 날아와 그녀의 머리카락 을 흔들었다. 수면에 비친 붉은 머리카락이 미미하게 흔들리며 일그 러졌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물고기를 놓아준 그녀는 기묘한 설렘이 가득한 가슴을 안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강이 있고 벌판이 있고 산맥이 있었다. 머나먼 곳에 뻗쳐 있는 지평 선 너머로 바닷물을 막고 있는 투명한 막이 보였다. 지평선 끝에서 지평선 끝까지, 그렇게 거대한 대륙을 감싸고 있는 투명한 막 뒤에 서는 시퍼런 해수가 흘러가고 있었다. 예안은 멍한 눈을 한 채 강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하얗게 비워진 머리 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예안은 경계의 자 세를 취하며 돌아보았다. 커다란 칼을 허리에 찬 기사풍의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다가 그녀 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그녀에게 반하기라도 한 듯 더듬 거리며 뭐라고 말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뭐라고 하는 거지?' 예안은 섣불리 입을 열지 않은 채 가만히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남 자는 그녀가 입을 열지 않자 조금 답답해하며 다시 뭐라 말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답답한 듯 가슴을 몇 번 치던 남자는 예안에게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어떡할까 망설이던 그녀는 작게 끄덕이고는 그를 따라갔다. 다행히 끄덕인다는 것이 여기서도 긍정의 의미인 모양이었다. 듀렌은 수도에서 살며 빵집을 경영하는 평범한 제빵사였다. 그는 다 른 아틀란티스인(人)과 마찬가지로 에날도스를 지니고 있었지만, 대 다수가 그러하듯이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 며 적군을 사살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근 3억에 달하는 아틀란티스인들은 모두 에날도스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중 수백만 명을 제외한 대다수는 일상생활에서 수족을 대 신해 사용할 수 있는 강함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 듀렌도 그 대다수에 속했기에, 접시를 두 개 돌릴 것을 대여섯 개 돌리는 수준 정도밖에는 에날도스를 응용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듀 렌은 그저 그런 평범한 사십대 제빵사에 불과했다. "아저씨! 여기 빵 빨리 주세요!"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인석아." 듀렌은 황성에서 헤이저 수업을 받고 있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어 려서부터 특출했던 아들은 바로 그의 자랑거리이자 희망이었다. 이제 아들이 수업을 마치고 정식 헤이저가 돼서 바깥 세상에 나가면 한동안은 못 보겠지만, 먼저 간 아내에게 면목이 서도록 집안이 활 짝 필 것이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황성에 있을 아들이 예고도 없이 집으로 돌아오자 듀렌은 어리둥절 하면서도 반가워했다. "아니, 무슨 일인데 편지도 없이 집에 왔니?" "아, 그게 말이죠…." 마크는 말끝을 흐리며 조금 겁먹은 듯 따라오고 있는 예안을 눈으로 가리켰다. 듀렌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다가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아, 혹시 네 여자친구 소개시켜주려고 온 거니? 오오, 대단한 미인 이구나. 이 정도면 황성 아가씨들도 상대가 안 되겠는데? 아유, 이 고운 머리카락 좀 봐. 정말 예쁘구나 예뻐." 마크는 난처해하며 말했다. "여자친구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강가에서 우연히 본 아가씬데 말 을 못하는 것 같아요." 듀렌은 조금 놀라며 안쓰러워하는 얼굴을 했다. "저런…. 안 됐네.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말을 못한다니…." "정신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말만 못하는 것 같아 요. 말도 못 알아듣는 것 같지만 대충 손짓 발짓으로 이야기하면 뜻 은 통해요." 마크는 예안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권한 뒤 빵을 집어서 주었다. 얼 떨결에 빵을 받아든 그녀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가게 내부를 돌아보 았다. 사람들은 신기함과 호의가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힐끔거렸다. 그들 은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며 수군거렸다. 만약 그녀가 아틀란티스어 를 할 수 있었다면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녹아버렸을 것이다. "아무래도 갈 곳하고 보호자 없는 아가씨 같은데 그냥 내버려두기도 뭣해서 일단 데려 왔어요. 일단은 우리가 좀 보살폈으면 좋겠어요." 듀렌은 아들의 뜻을 알아차리고 감격해했다. 자기 신부감을 찾아와 서 소개시켜주는데 기분 좋아하지 않을 부모는 없다. "그래서 좀 보살피다가 아예 우리집 식구로 만들어버리자 그거로구 나? 알았다 알았어. 아버지에게 맡기거라. 네가 황성에 가 있는 동 안 이 아버지가 잘 먹이고 재워주고 보살펴주고 있으마." 마크는 손을 크게 내저으며 얼굴을 확 붉혔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갈 곳 없는 아가씨를 내버려둘 수가 없어 서 그랬을 뿐이란 말이에요." "훗. 과연 그럴까?" 의미심장한 말에 마크는 상당히 부끄러워하며 얼른 시선을 돌렸다. 예안은 빵을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만 했을 뿐 입을 전혀 대지 않 고 있었다. "일단 들어와요. 아가씨가 쓸 방을 알려 줄게요." 마크는 손으로 따라오라는 시늉을 한 뒤 앞장서서 걸었다. 예안은 만지작거리던 빵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를 따라갔다. 마크는 아버지가 가게 식구들에게 예쁜 며느리를 얻게 되었다고 침 이 튀도록 자랑하는 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확 붉혔다. 앞장서고 있 기 망정이지, 만약 그녀가 이 얼굴을 봤으면 얼마나 망신인가. 이윽고 마크는 어떤 방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설명했다. "이 방을 쓰도록 하세요. 제가 황성에 들어가기 전에 쓰던 방이니까 부담 갖지는 말구요.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저나 아버지에게 말씀하 세요. 아참, 말은 못하지. 하여튼 자주 올게요. 외박은 금지되어있 지만 외출은 매일 가능하니까요." 마크는 상대방이 못 알아들으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을 안정시켜주 기 위해 친절한 어조로 계속 말했다. 편히 쉬라고 말한 뒤 마크는 잠시 나갔다. 조금 낯설다는 눈으로 넓 지도 좁지도 않은 평범한 방을 둘러보던 예안은 방 한가운데에 털썩 앉았다. 그러니까 복귀했다니까요.=_=/ 성실연재 하는 게 기특하시다면 추천을 꾹~ 아담의 상처 바로 가기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28 회] 날 짜 2004-08-30 조회 / 추천 1426 / 59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잊혀진 대륙 커피잔을 들고 연구소 정원으로 나간 칼은 무더운 여름 태양을 올려 다보았다. 작열하는 태양은 아직 한여름의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레이온은 벌써 이틀째 개인 연구실에 틀어박힌 채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시트날타의 본거지를 알 아내고 기세 등등해 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걱정이 되는 건가.' 왜 그가 저렇게 바뀌었는지 칼은 알고 있었다. 예안은 귀환하지 않 고 맥을 타고 아틀란티스 대륙으로 가버렸다. 레이온으로서는 걱정 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아틀란티스 대륙은 에너지 방어막 같은 것으로 보호되고 있을 것이 다. 어떻게 그 안으로 들어갔는지는 모르나, 맥이라면 그러고도 남 을 거라고 칼은 생각했다. 어쩌면 레이온은 그녀를 도와주러 뒤따라 갈지도 모른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응? 엘리자가 왜 저러지?' 이 연구소에서 일하는 여직원 엘리자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정문 을 나서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평소 쾌활하기로 유명하던 그녀는 요 근래 들어 계속 죽을상이었다. "엘리자." 칼이 부르자 엘리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 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무슨 일이 있어요? 표정이 영 안 좋은데?"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러지 말고 말해봐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있는 힘껏 도와줄 테니." 칼의 부드러운 음성에 엘리자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처럼 변했다. 평소 칼은 여성들, 특히 여자애들에게 친절하고 상냥하기로 유명했 다. 여자들이 아무리 큰 실수를 저질러도 결코 화를 내는 일이 없으 며, 능력이 닿는 한도 내에서 그 잘못을 덮어주었다. 연구소에 근무하는 여자들은 칼을 무척 가엾게 여겼다. 모두들 내색 은 안 했지만 여자들은 칼이 갱들에게 아내와 딸을 잡혀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곱게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몇 날 며칠 동안 짐승 같은 사내 들에게 돌려지다 비참하게 죽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엘리자는 그를 얼마나 동정했는지 모른다. "어서 말해 봐요. 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그렇게 얼굴이 안 좋은 거 예요?" 망설이던 엘리자는 눈물을 머금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자신의 여 동생이 성폭행을 당했는데, 피의자가 잘 나가는 백만장자라 재판에 서 이길 길이 요원하다는 것이었다. 칼의 얼굴이 당장 싸늘하게 굳었다. 엘리자는 아예 눈물을 쏟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피의자가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해 압박한다는 사실, 이쪽이 아무런 재력도 권력도 없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명예훼손죄로 고소하겠다고 길길이 날뛴다는 사실을 그녀는 눈물과 함께 쏟아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칼은 억지로 표정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러 나 싸늘한 그 눈매에서 분노를 숨길 길은 없었다. "저런, 그런 일이 있었군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할 수 있는 모 든 힘을 동원해서 도와줄 테니까." 엘리자는 눈물을 닦으며 고마워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빈말이 아니에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써서라도 그 개자 식을 기필코 감방에 처넣을게요." 엘리자는 펑펑 울면서 칼에게 몸을 기댔다. 칼은 그녀의 가녀린 어 깨를 감싸 안아 주면서 무섭게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가 노려보는 방향에는 한 소녀의 인생을 짓밟아놓고도 돈으로 슬 쩍 넘어가려는 개자식이 낄낄거리며 엉덩이를 흔들어대고 있을 것이 다. 그러나 녀석은 앞으로 더 이상 그 살찐 엉덩이를 흔들 수 없을 것이다. "칼. 급히 가봐야겠다. 서둘러 준비를 해." 칼이 엘리자를 안심시켜서 집으로 보낸 뒤, 급한 표정으로 나온 레 이온이 그를 재촉했다.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박사님. 저는 아무래도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분노의 기색이 칼의 얼굴에 잔뜩 떠올라 있는 것을 보고 레이온은 흠칫했다. "무슨 일이지?" "엘리자의 여동생이 성폭행을 당했는데 피의자가 상당한 거물이라 재판에서 이기기 힘들 듯 하다고 합니다. 제가 도와줘야겠습니다." 칼은 강간범을 혐오했다. 약한 여성과 여자애들을 아꼈다. 원래 촉 망받는 유약한 학자였던 그는 아내와 딸을 갱들에게 잃은 뒤 그렇게 변했다. 레이온은 별다른 불쾌감 없이 알았다는 듯 끄덕였다. "그렇군. 알았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자네가 지금 하려는 일도 결국은 자 네 목적을 위한 일환이니까. 난 지금 그것을 지켜보고 있지 않나." "그렇게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전 준비하러 가겠습니다." 정중히 사과한 칼은 황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칼의 눈동자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언뜻 본 레이온은 작게 피식거렸다. "범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곱게 죽기는 틀렸군. 차라리 순순히 감 방으로 갔으면 좋았을 텐데." 아내와 딸을 그렇게 잃은 뒤 칼은 다시는 그녀들 같은 피해자가 생 기지 않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했다. 예전에 가족들을 따라 죽 으려 했던 그가 결국 자살을 포기한 것은, 바로 그런 세상을 만들겠 다는 맹세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레이온은 폐인이 된 그의 눈동자에서 지독한 증오를 발견하고 그를 거둬들였다. 과연 그가 지닌 생명의 무게가 그에게 성공을 안겨줄지 아닐지를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휴우." 문득 예안이 생각난 레이온은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바보같이. 도 대체 어쩌자고 시트날타 본거지로 그렇게 어슬렁어슬렁 숨어 들어갔 단 말인가. 그러다가 잡히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내가 정말 너 때문에 못 산다, 유젤." 그러나 말과는 달리 레이온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어찌 되었든 이 일을 기회 삼아 그녀를 한 번 더 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설레어 했다. 서둘러 정문을 나서던 그는 불현듯 왼쪽 어깨가 몹시 아파 오는 것 을 느끼고 무릎을 숙였다. "크윽…." 예전에 그녀가 쏜 총에 맞은 어깨가 몹시 아팠다. 그녀를 만나러 가 기 직전이면 항상 발생하는 통증이었다. 체내에 각인된 이 고통이 지워지지 않기에 그는 더욱 열정적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와 동 등해진다는 자신의 꿈을 불태울 수 있는 것이다. 잠시 후 통증이 가라앉자 그는 어깨에서 가만히 손을 뗐다. 총알이 박히던 순간을 상기하며 어깨를 내려다보던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 고 연구소를 나섰다. 청소를 마친 제시는 허리를 두드리며 식사를 준비했다. 야채를 써는 칼질 소리가 경쾌하게 부엌을 울렸다. 보글보글 끓는 물에 고기와 야채, 그리고 양념을 집어넣은 제시는 전기밥솥의 밥이 다 된 것을 확인했다. 제시는 지금 김치찌개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세현이 한국에서 살았 을 때 가장 좋아하던 음식이었다. "식사 다 됐어요." 제시는 세현의 침실로 들어갔다. 세현은 웃통을 벗은 채로 앉아 얇 은 커튼을 투과하는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시는 그가 몸도 좋지 않은데 무리한다고 혀를 끌끌 찼다. "뭘 하고 있어요?" "한국 하늘을 바라보고 있어." "한국쪽 하늘이 보이지는 않을 걸요? 그쪽은 지금 밤이지만 여기서 는 밝은 하늘 밖에 안 보이니까요." 세현은 슬쩍 웃으며 제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시는 핏기가 어느 정도 돌아온 그를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처음 피를 쏟고 기절했을 때만 해도 제시는 그가 죽는 게 아닐까 하 고 덜컥 겁이 났다. 의사는 도저히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녀 는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한 채 자신의 무력함을 절감해야 했다. 그렇게 꼬박 하룻밤 동안 생사를 넘나들었던 그는 다음날 아침이 되 자 겨우 정신을 되찾았다. 제시는 어떻게 된 것인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세현은 왜 묻지 않느 냐고 의아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자신 의 마음을 감추었고, 상대를 꿰뚫어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맛있겠네. 고마워." "뭘요. 이 정도야." 제시는 세현보다 몇 살 더 많았지만 항상 깍듯하게 대하고 존대를 한다. 그들은 여러 가지 언어에 능통했지만 주로 한국어를 사용하기 를 즐겼다. 세현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한국에서 살았기에 한국어를 가장 잘 했고, 또 가장 선호했다. 제시는 식사를 하며 몇 가지 정보를 말해주었다. "한국은 영국하고 몇몇 유럽 국가 도움을 받아서 현지에 맥 인양 작 업반을 구성했어요." "그렇겠지. 아무래도 본국에서 대서양까지 선발대를 보내려면 시간 이 엄청 걸릴 테니까." "미국은 지금 신중히 사태를 주시하고 있어요. 섣불리 한국을 자극 했다가 맥이 부활한 뒤 곤란해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그럴 수밖에. 그들도 바보가 아니라면 이제 맥의 능력을 잘 알았을 테니까. 수폭으로도 부술 수 없는 그 무시무시한 방어력 말야." 그들은 잠시 입을 다물고 식사에 열중했다. 제시는 별로 밥맛이 없 어 보이는 그의 안색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그는 제시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건조하게 밥알을 씹었다. '수폭을 맞고도 살아나다니…. 과연 앤슨이 탐낼 만도 하군. 무한동 력이라는 게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야.' 세현은 에너지 실드와 같은 종류가 맥을 보호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것 외에는 수소 폭탄의 폭발 한가 운데에서 살아날 길이 없었다. 파괴력을 견디는 금속의 강도에는 한 계가 명확하니까. 그러나 허황되었다는 것은 일단 제쳐두고, 에너지 실드를 미지수에 대입시킨다면 답은 달라진다. 경우의 수를 그 한 가지로 좁힌다. 그리고 그 전제 하에 생각한다. 그럼 맥은 적어도 수폭 이상의 에너지를 한순간에 뽑아낼 수 있는 동력원을 지니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찌개를 한 수저 뜨면서 세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예안을 걱정해도 모자랄 판에 맥의 무한동력장치에나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우습게 느껴졌다. "앤드류 회장의 움직임이 조금 이상해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미 정부에 적극적으로 반전 압력을 넣고 있어요." 제시의 말에 세현은 놀란 얼굴로 수저를 툭 떨어뜨렸다. 제시는 의 아해했다. "왜 그래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세현은 그렇게 얼버무리며 들키지 않게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앤 드류는 예안과 맥의 관계를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단한 정보력이군. 미국 정부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텐데. 아 니면 예안이가 말했을까?' 예안과 앤드류가 나란히 선 장면을 상상해본 세현은 얼굴을 구기며 그 환영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제임스, 너에게 지금 이런 감정이 어울린 다고 생각해?' 그는 흔들리는 자신을 다잡으려 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다루기 어렵다는 마음은 너무나 손쉽게 이성을 배반한다. 세현은 조금 암담한 표정으로 눈을 감으며,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예안에게 집착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했다. 친했던 친구, 진우의 여자친구였다는 사실 때문에? 그러나 정말 우 정 때문이라면, 예안이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렇게 화 를 내거나 암담해하지 말아야 했다. 세현은 예안을 처음 보았던 작년 봄을 떠올렸다. 그때 뇌리를 강타 했던 충격, 진정 아름답다 느낄 수 있는 사람을 처음으로 보았던 그 순간의 환희가 머리 속에서 그림자처럼 되살아났다. 그때부터 그는 그녀가 엔젤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는지도 모른 다. 무리를 해서 약간의 억지를 추리에 삽입했다면 진작에 그 사실 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는 왜 자신이 그녀에게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알고 싶었다. 어째 서 자신이 위험을 무릅써가면서까지 그녀를 걱정하는지 확인하고 싶 었다. 예안은 레이온 박사가 탄생시킨 복제인간이었다. 그렇다면 복제인간 특유의 이질감이 느껴져야 하지, 그런 눈부신 우월함이 느껴진다는 것은 모순이다. '레이온 박사는… 도대체 누구를 복제한 걸까?' 문득 세현은 예안의 원본 인간이 누구인지 한번 보고 싶었다. 죽었 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 원본 인간이 지금 우주 너머에서 지구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서도 알지 못할 것이다. by eden 복귀했다는데 왜 못 믿나요.=ㅅ= 저 복귀 했어요=_=/ (아싸 기특한 성실연재~) 아담의 상처 바로 가기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28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로얄나이트 학교에서 컴퓨터수업 도중 긁 읽는중.. -ㅅ- 걸리면 끝장이닷.. -ㅁ- 09-01/14:02 실탄 유링/ 맞습니다. 자료들은 남아 있는데 아무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없죠. 08-31/03:48 유링-★ 음,.. 코코로의 악마님 현 인류는 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진즉에 달에 관한 모든 내용들이 말살- 되었다..라고 할까요? 맞죠? 실탄님? 08-31/03:46 유시 후후.. 앞으로 4개월은 지옥이다야 ㅠ_ㅠ 08-31/02:57 갈마 계속 성실연재 해주면 매일매일 코멘 달아주고 추천 눌러줄텐데,,, 08-31/00:15 케라시스 오오옷 기특해 죽겠어 >.< 추천 꾹!!! 08-30/21:53 카제 하루 한번이 이렇게 기쁜것 이었다니.... 08-30/21:42 木卜弓師 수고하셨어요오~! 08-30/20:39 Justice™ chuchon! 08-30/19:53 힐직 추천 추천~~~~ 08-30/19:28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29 회] 날 짜 2004-08-31 조회 / 추천 1329 / 43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잊혀진 대륙 예안이 마크에 집에 머무른 지도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그녀는 이 곳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들었다. 많은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그간 얻은 정보를 토대로 대충 이곳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다를 게 없다는 말이 맞기는 한가 보다. 예 안은 이곳에서 특별한 이질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양초로 불을 켜 고 말이 수레를 끌고 돌과 나무, 흙 같은 것으로 집을 짓는다는 것 만 제외하면. 황성까지 있다는 지역이 이런 것을 보면 이곳은 첨단 과학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게 확실했다. 인구는 3억이 약간 웃도는 수준이었다. 과학 문명이 발달하지는 않 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특유의 힘을 실생활에 적극적으로 응 용했다. 식량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질병을 고치는 것 정도는 쉬웠 다. 아틀란티스의 생활 수준은 수백 년 전 지구의 모습과 흡사했다. 딱 히 서양이나 동양 어느 한쪽 위주는 아니었고, 그 둘을 융합했다는 표현이 옳았다. 거대 비너스 상은 외부에 남은 아틀란티스인들이 일만 년 동안 인위 적으로 인류 문명과 발전 속도를 컨트롤해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바깥 세상과 이곳의 분위기가 흡사하다는 것이 납득된다. '우리에게 허락된 땅에도 금속이 있었다면 이 행성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우리였을 것이다.' 예전에 마리오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는 허락된 땅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들은 과학을 대단히 높은 수준까지 발전시킬 능력을 지녔지만, 그 것을 키울 기반이 되는 금속이 없었기에 끝내 가라앉은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암흑에 숨어 세상을 교묘하게 컨트롤하 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이상한 건 있어.' 수저를 집어든 예안은 뚫어져라 그것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이것은 틀림없는 금속이었다. 그렇다면 마리오가 한 말은 도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유니콘. 금속이 없다는 게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글쎄요. 납득하기 힘들군요. 금속이 없다면 단순히 과학 문명이 발 달하지 못하는 수준을 떠나서, 웬만한 오두막집 하나도 제대로 짓지 못한 채 원시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최소한 나무를 벨 도끼와 톱, 그리고 못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상하잖아. 이곳이 일만 년도 더 됐다면, 그리고 그렇게 오랫동안 뒷세계에서 인간들을 컨트롤했다면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 는 곳보다는 과학 문명이 더 발달해야 하는 거 아냐? 분명히 인구가 3억씩이나 된다고 그랬어. 그 정도면 뭘 해도 쪽박은 안 찬다고.' 맥과 그렇게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마크가 방안으로 들어왔 다. "그렇게 방에만 있으면 건강에 안 좋아요. 나가서 빛도 좀 쐬고 그 러세요." 그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흉내를 하며 겁먹은 듯한 미소를 일 부러 지어 보였다. 마크는 그녀가 이곳 말을 못 알아듣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좀더 효과적으로 은닉하기 위해 그의 오해를 이용했다. 지속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인 맥은 자신이 대단히 뛰어난 시스템임을 자랑하며, 그들의 언어를 보란 듯이 해석해서 그녀의 뇌에 직접 전 해준다. 그래서 그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고,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의 언어를 쓸 수도 있었다. 아틀란티스인들은 여러 가지 언어를 섞어서 썼다. 그들은 바깥 세상 에는 유출되지 않은 자신들만의 고유 언어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또, 영어, 불어, 독어, 일어, 중어 등을 비롯하여 세계 여러 언어까지 자연스럽게 구사했다. '고등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닌 일반인들이 저렇게 여러 언어를 자연 스럽게 사용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만약 저들이 모두 지상으로 올라가게 된다면 이십 년도 지나지 않아 전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이었다. 지상에서는 한 나라의 엘리트 정도 되는 수준이 이곳에 서는 길바닥의 돌멩이처럼 자그마치 3억씩이나 널려 있다. 일반인이 저 정도 수준인데 이곳의 엘리트들은 얼마나 또 대단하겠는가. 예안은 성급히 행동하지 않고 마크의 집에 머무르면서 찬찬히 아틀 란티스 고위직을 만날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곳 의 분위기를 확실하게 파악해둘 필요가 있었다. "여, 마크. 마누라랑 같이 바람 쐬러 가는 거야?" "좋겠네 좋겠어. 이그, 누구는 이 나이 되어서도 여태껏 혼잔데 누 구는 혼자 예쁜 애인하고 벌써부터 동거나 하고 말이야." 가게에 찾아왔던 마크의 친구들이 킥킥거리며 놀려댔다. 마크는 표 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하지만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은 분명한 태 도로 그들의 말을 맞받아쳤다. "그런 사이 아니라고 말했잖아. 이 아가씨는 그냥 갈 곳이 없어서 데리고 있을 뿐이라고." "그렇게 걱정되면 나한테 맡길래? 우리 부모님이 그 아가씨 보시면 며느리감으로 아주 좋아라 하실 텐데 말야." 한 친구의 말에 마크는 되도 않는 소리 말라며 눈을 부라렸다. 그걸 보고 친구들이 '그것 봐'하며 킥킥거렸고, 다시 마크가 눈을 부라리 는 등 그런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거리에 나서도 사람들의 시선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마크가 좀처럼 보기 드문 미인과 동거하는 것을 신기해했고, 그녀의 머리카락이 희귀한 붉은 색이라는 것에 강한 호 기심을 보였다. 예안은 이곳에서 머리카락이 한 번도 하늘색으로 변한 적이 없었다. 맥은 이곳이 해저이고, 이곳을 밝혀주는 것은 태양이 아니라 커다란 에너지 장막에서 나오는 빛이기에 그렇다고 설명했다. 마크는 예안을 데리고 뒷동산으로 갔다. 넓은 벌판에서 불어오는 바 람을 만끽하며 그는 즐거워했다. "앉으세요." 예안은 몸짓으로 이해한 척을 가장하며 앉았다. 말을 못 알아듣는 시늉을 하는 것도 여간 쉬운 게 아니었다. "저쪽에 황성이 보이죠? 저는 저곳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견습생 수준 밖에 안 되지만, 곧 정식으로 헤 이저 칭호를 받을 거예요. 스승님도 제가 특출한 재능을 지녔다고 칭찬하시곤 하거든요." 마크는 예전에 했던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었다. 예안이 못 알아듣는 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이. "늦어도 반년이 지나기 전에는 지상세계로 나갈 수 있을 거예요. 물 론 나들이하러 가는 것은 아니에요. 태양을 다시 되찾으러, 혁명을 완수시키기 위해서 가는 거예요." 예안은 이해는 못하더라도 말을 듣는 것은 좋아한다는 표정을 가장 했다. 그녀가 어느 산 속에서 부모도 없이 혼자 살아온 여자라고 생각한 마크는 기분 좋은 얼굴로 계속 이것저것을 이야기해주었다. "황성에는 게이트가 있어요. 그것은 지상의 미국이라는 나라의 산지 깊은 동굴에 있는 게이트와 연결이 돼있죠. 대륙이 가라앉기 전에 타대륙으로 나가 있던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 또 바깥 세상으로 나 갈 수 있었던 것은 다 그 게이트 덕분이래요." 예안을 바라보는 마크의 눈동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듯 부드러 웠다. 질리도록 겪었지만 익숙해지지는 않은 그 눈빛을 직시하는 게 싫어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게이트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지는 현재 전해지고 있지 않아서 아무도 몰라요. 하지만 신이 우리를 갖고 놀기 위해서, 막다른 골목 에 몰아넣은 쥐를 천천히 괴롭히듯 즐기기 위해서 만들어주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죠. 일만 년 전 우리를 이 심해에 처박아 넣은 그 신이 말예요." 항상 이 흐름을 타기 시작하면 마크는 저도 모르게 격분하며 이야기 를 재미없게 끌고 나가기 마련이었다. 경험으로 이미 그것을 알고 있는 예안은 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유빈이는 잘 있을까? 걔는 모유 아니면 안 먹는데. 지금쯤 쫄쫄 굶 고 있을 텐데 괜찮을까?' '한 달 동안 굶어도 잘 버텼습니다. 걱정하실 까닭이 있나요?' '그래도 나 없다고 울고 있을 거 아냐. 걱정돼. 그냥 시트날타 알아 보는 것도 다 팽개치고 지금 당장 돌아갈까?' '원래 신인류 아기는 모유를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습니다. ST기관이 다소 불안정하다고는 하나 한두 달 모유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걱정 마십시오. 니콜라스씨가 잘 보살피고 있을 겁니다.'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질감은 자신뿐만 아니라 아기에게까지 손을 뻗는다. 은연중에 그것을 느낀 예안은 서글퍼오는 가슴을 살며 시 어루만지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기는 모유를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것 은 NM 프로젝트가 신인류의 유전자에서 인간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 지 못한 까닭에서이다. 아이는 수유를 통해 모성을 확인한다. 자신이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 보호받고 있음을 인지하고 안심한다. 어미는 수유를 통해 자애를 확인한다. 아이를 보호하고 양육한다는 그 뿌듯함에 취해, 그럼으로써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을 인지하기 위 해 젖을 물린다. NM 프로젝트는 수백 년 전부터 전세계의 부와 첨단 과학을 양손에 쥔 채 모든 물질적 가치를 독점해왔던 비밀 과학자 집단, 사도가 사 십여 년 전에 추진한 프로젝트이다. 백 명 안팎의 천재로 구성된 그들은 모든 것을 가졌지만 그로 인해 신이나 다름없는 지구의 의지, 즉 마더에게 저주를 받았다. 그 저주 를 소멸시키고자 가이아 박사는 월등한 신인류를 탄생시키는 NM 프 로젝트를 추진했다. 결과적으로 볼 때 프로젝트는 성공리에 끝났지만 여러 개의 부작용 아닌 부작용을 낳았다.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데 어미는 모유를 생산하고 아이는 모유를 섭취한다는 것이 그 중 하나였다. 무한의 에너지를 생산하는 ST기관 이 있는 이상, 수유의 본능은 진작 유전자에서 지워져야 옳았다. 현재 에덴 혹성에 살고 있는 아담, 최초로 탄생된 신인류 케이는 그 런 현상이 발생한 것은 마더의 개입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 는 좀더 나아가서, 가이아 박사가 NM 프로젝트를 기획한 것도 마더 의 의도였다는 가설을 내세웠다. 케이는 저주의 힘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기 위해, 달을 재료로 사용 해 제2의 지구를 만들어 에덴 혹성이라 명명하고 이주했다. 그러나 그것도 마더의 도움이 있었기에 결과적으로 가능했다. 마더는 사도에게 시련을 내림과 동시에 시련을 해결할 방법도 같이 내렸다. 가이아가 NM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해준 것, 케이가 죽은 제이를 살 려내고 조물주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도록 2개의 자이오 다이아몬 드를 허락해준 것이 바로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케이와 제이,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오리지널 유젤은 끝내 마더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맥은 진중한 어조로 그 사실들을 말했다. 이미 여러 번 들은 이야기 였지만 예안은 질리지 않는다는 얼굴로 경청했다. '어쩌면 마더는 마스터에게 자신의 진의를 알릴지도 모릅니다. 오리 지널 유젤은 그것을 기대하고 있을 테구요.' '오리지널 유젤은 그걸 알아서 뭐하려고?'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입니다. 그것은 구인류든 신인류든 차이가 없습니다.' 예안은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씁쓸히 웃었다. 자신은 원래 조금 시 니컬한 사고방식을 지닌 평범한 소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느덧 태 양계에서 가장 기묘한 운명에 처한 인간이 돼버렸다. 자아 정체성은 이미 예전에 붕괴되기 직전까지 갔다. 레이온이 뇌 이식 수술 따위는 하지 않았다고 밝혔던 그 순간부터 줄곧, 진정으 로 편했던 적은 없었다. 여러 번에 걸친 자아 혼란의 고통. 그 속에서 그녀가 스스로를 잃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기의 존재 덕분이었다. 아무리 힘들어 도 아기가 헤실헤실 웃는 것을 보면 모든 근심이 지워지고 힘이 솟 아났다. 아기는 일종의 락(Lock)처럼 그녀가 무너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아 기가 없었다면 그녀는 진작에 미쳐버리거나 혹은 유젤로 각성해서 지구를 떠나버렸을 것이다. '절대 잊지 마. 너는 내 것이라는 것을.' 악몽과도 같았던 그 한 마디가 생각난 순간 예안은 무의식적으로 몸 을 움츠렸다. 그녀는 자신을 향한 레이온의 집착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도 유젤의 몸에 그렇게나 집착했기에, 집착하고 있기에,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집착할 것이기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네? 아무것도 생각 안 했…." 무심코 대답하던 예안은 퍼뜩 잘못을 깨닫고는 말끝을 얼버무렸다. 마크는 놀람에 찬 눈빛을 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원래 말할 줄 알았던 거예요?" "그, 그게 그러니까요…." 모든 언어를 분석할 수 있는 맥의 시스템과 공명함으로써 아틀란티 스어를 알아들을 수 있다. 그것은 동시에 언제든 아틀란티스어를 사 용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예안은 경솔하게 실수한 자신을 탓하며 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사실은 말을 못하거나 그런 게 아니에요. 사정이 있어서 일부러 벙 어리인 척 하고 있었어요." 긴장을 조금도 늦추지 않으며 그녀는 변명했다. 마크는 잔뜩 기뻐하 는 얼굴을 한 채, 조금의 틈이라도 생기면 그녀를 껴안고 환호할 듯 이 보였다. "저 사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제가 전에 어디서 살았는지, 이 름이 뭔지, 제가 왜 거기에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요." "…그랬군요." "벙어리인 척 속인 건 죄송해요. 하지만 말을 하다 보면 사람들에게 제가 기억을 잃었다는 게 들통날지도 몰라서 그랬어요. 괜히 잘못 돼서 이상한 곳에 팔려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잖아요?" "팔려가다니요?" 마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술술 거짓말을 이어나가던 예안 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조금 버벅거렸다. "에, 그러니까 매음굴이라든지 노예시장이라든지…." 마크는 어이없다는 얼굴을 한 채 말했다. "정말 기억이 헝클어지신 모양이군요. 그것은 바깥 세상 이야기잖습 니까? 매음굴이나 노예 시장 같은 것은 우리 대륙에 없는데요? 아예 범죄와 음지라는 것 자체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바깥 세상 이야기하 고 우리 대륙을 혼동하고 있으신 듯 하네요." "그, 그래요?" 예안은 황당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곳이기에 그런 게 없 단 말인가. 사람 사는 곳이라면 응당 그런 것들이 한두 개쯤은 있어 야 정상 아냐? "기억상실이라는 게 정말이신가 보군요. 안 됐습니다." 마크는 가엾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맥이 키득 웃는 어조로 머리 속에 대고 말했다. '그 동안 거짓말을 길게 한 대가를 톡톡히 받는 모양입니다. 그러게 꼬리가 길면 밟힌다잖아요.' '시끄러. 그 거짓말 중 태반은 네가 시켜서 한 거잖아.' 그래도 거짓말이 대충 먹혀들었으니 잘 된 건가. 예안은 맥의 놀림 에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며 그렇게 자신을 달랬다. by eden 아담의 상처 바로 가기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29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슈엘 음..혹시나했는데 정말로 복귀하셨네요. 잇힝~ 건필하세요. 09-01/12:19 공부타오 수고하세요................................ 09-01/01:38 木卜弓師 수고하세요오~ 09-01/00:14 [,] 음.............................................냐. 08-31/23:40 쟈인 쩝 -ㅁ- 쟈인..........이람서 자인이램..ㅠ_ㅠ 쩝 그냥 그러려니 해야 하납.....역시 말없이 꾸준히 보는 독자는.... 08-31/23:31 씩씩한마치 실탄님의 페이스대로 연재해주세요^^ 한마디만 할께용~`실탄님을 믿쑵니닷~~^0^ 08-31/22:42 씩씩한마치 작가님의 안좋은 사정이 해결되거나 심적으로 힘이나셔야 좋은글이 나오지요~전 꼭 글맡겨놓은빚쟁이처럼 우습게 구는 독자들을 같은 독자로서 이해못한답니당^^ 08-31/22:40 설지현 ㅇㅅㅇ;;; 난 실탄님이 기계인줄 알았는데...ㅠ_ ㅠ 08-31/20:51 esik 실탄님의 성실연재가..너무나 사랑스럽네요^^;; 후후.예안양말하셨... 08-31/20:24 『둥이』 아 이제서야 실탄님의 복귀를 믿게되었다는....복귀안하실동안 소엄 재감상하고있었습니다 ㅜㅡ 08-31/19:58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30 회] 날 짜 2004-09-01 조회 / 추천 1393 / 29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잊혀진 대륙 소녀는 자신의 나이가 만으로 15세이며 이름은 유하라고 소개했다. 니콜라스는 이름이 뭐냐는 유하의 물음에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즉 석에서 재키라는 가명을 지어냈다. 황성으로 안내하면서 유하는 아틀란티스 대륙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 었다. 바깥 세상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아틀란티스인을 처음 봐서인 지 유하는 니콜라스에게 강한 호기심을 가졌다. 니콜라스가 떨어진 곳은 황성에서 약 1km 정도 떨어져 있는 자연 꽃 밭이었다. 그는 꽃을 꺾기 위해 왜 이곳까지 오냐고 물었다. 유하는 인공적으로 기르는 것보다 이렇게 내버려두는 것이 더 잘 크기 때문 이라고 대답했다. "벌레나 잡초 같은 걸 안 솎아줘도 되는 거야? 이렇게 꽃밭이 멀면 관리하기도 무척 힘들 텐데?" "어쩔 수 없어. 황성에는 헤이저가 많이 머무르고 있어서 작은 꽃들 은 그 기운을 못 견디고 죽어버려." 유하의 설명 중에는 이 대륙이 호주보다 약간 더 크다는 말도 포함 돼 있었다. 니콜라스는 그 부문에 의문을 품었다. "대서양에 그만한 땅덩어리가 들어갈 공간이 있어? 유럽하고 아메리 카를 끼워 맞춰보면 그 정도 크기가 안 남을 텐데?" "글쎄. 전해 내려오는 말로는 유럽하고 아메리카가 붙어 있기 전부 터 아틀란티스 대륙은 별개로 떨어져 있었다고 하더라. 그 둘이 떨 어진 다음에 그 틈으로 들어간 거겠지." "그런가?" 유하는 니콜라스를 황성으로 안내했다. 성벽 가까이에 선 니콜라스 는 멀리서 보던 때와는 달리 압도적인 위용에 내심 감탄했다. 하지 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성문에서부터 멀리 보이는 황궁의 형태는 무척 개성적이었다. 대충 보기에는 유럽 양식을 따른 것 같기도 했으나, 자세히 보면 인류사 에 나오는 어떤 양식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뜻 봐서는 그 크기를 알 수 없었다. 끝이 어딘지 잘 보이지 않는 둘레를 통해 한국의 웬만한 도시보다도 훨씬 클 것이라고 지레 짐작 했을 뿐이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궁전만 해도 그 수가 서너 개는 가볍게 넘어갔다. 투명한 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성곽은 분명 아름답고 굳 건해 보였지만, 특이하게도 현대 건축술의 냄새는 어디에서도 나지 않았다. 그만큼 역사가 오래 되었다는 사실은 성의 규모의 대단함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요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황궁과 정원의 그 방대한 규모에 비해서 주변을 둘러싸고 있 는 성벽은 아주 튼튼하지는 않았다. 적의 침입에 대한 방어보다는 예술적인 목적을 띠고 만들어졌다는 색채가 한층 강했다. "성벽이 멋지기는 해도 좀 약해 보인다. 이래서는 외부에서 침입하 는 적을 막아내기가 어려울 텐데?" 니콜라스의 물음에 유하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답했다. "누가 감히 반역을 한단 말이야? 황실의 힘이 얼마나 쎈데." "그래도 틈을 봐서 쳐들어오거나 그럴 수도 있잖아. 사람 마음은 아 무도 모르는 거랬어." "그럴 일은 없어. 우리 민족은 그 누구도 반역심 따위는 품지 않아. 지금 우리가 시급히 해야 할 것은 하루라도 빨리 태양을 되찾는 것 이니까." 말끝마다 태양을 되찾는다, 되찾는다 하는데 도대체 무슨 재주로 되 찾는다는 건지 니콜라스는 의아했다. 그러나 막 물으려는 찰나 유하가 후다닥 앞으로 뛰어가며 지나가는 한 여자를 붙잡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로라 아주머니." "오, 유하구나. 꽃밭에 갔다 오는 길이니?" "네. 근데 꽃밭이 엉망이 되는 바람에 허탕만 쳤어요. 내일 다시 다 른 곳에 가서 꽃을 꺾어와야겠어요." "고생이 많구나. 열심히 하렴." "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로라는 유하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는 가던 길을 갔다. 니콜라스는 유하의 옆에 바짝 붙어 서면서 물었다. "누구야?" "응, 있어. 나랑 친한 아주머니." 니콜라스는 그렇구나 하면서 끄덕였다. 그는 뽑을 준비를 하고 있던 주머니의 권총에서 슬그머니 손을 뗐다. 그는 유하와 로라가 방금 무슨 대화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10 개 국어를 원활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신이 어떤 나라 언어인지도 몰랐다는 사실에 그는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방금 그거 무슨 언어야? 처음 듣는 건데." "우리가 원래 쓰던 말이야. 그냥 아틀란티스어라고 생각하면 돼." "아틀란티스어?" 유하는 무표정한 니콜라스의 안색 아래에 어떤 생각이 도사리고 있 는지도 모른 채 그를 데리고 계속 걸었다. 그는 조금 전에 유하가 로라와 내통을 했던 것이라면 주저 없이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투에 거짓말을 한다는 흔적이 없었기 에 그만둔 것이다. 정원은 넓었다. 그들은 성문에서부터 무려 이십 분을 걸어서 겨우 황궁에 도달할 수 있었다. 느긋하게 걷는 것이 익숙한 유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 나 평소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습관화됐던 니콜라스는 답답해서 죽 을 맛이었다. 휘황찬란한 장식이 가득한 복도는 길고 복잡하게 뻗어 있었다. 니콜 라스는 고급 융단이 깔린 복도를 걸으면서 지금까지 지나쳐온 복도 의 구조를 남김없이 암기했다. 유하는 니콜라스를 데리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요리를 준비하고 있 던 젊은 여자들이 반가워했다. "어라? 유하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거니?" "응. 이 애한테 먹을 것을 좀 주려고." 유하는 니콜라스를 흘끗 가리키며 말했다. 빨간 천으로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묶어 내린 여자가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의미심장한 어 조로 말했다. "어어? 혹시 네 남자친구? 그런 거야?" "너무했다. 아무리 좋을 때라지만 어떻게 남자친구를 황성까지 데리 고 올 생각을 다 하니." "권력의 힘이라는 거지 뭐." 세 여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깔깔거리며 유하를 놀려댔다. 유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막 구워진 커다란 빵을 집어들었다. "이거 하나 가져갈게. 자 먹어." 니콜라스는 유하가 내민 빵을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유하가 더 볼일 없다는 듯 돌아서자 그는 얼떨떨해 하다가 뒤따랐다. 뒤에서 세 여 자들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참. 유하는 도대체가 놀리는 재미가 없다니까." "다른 여자애들은 조금만 놀려도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하는 데 말이야. 쟤는 아직 15살 밖에 안 됐으면서 왜 저렇게 재미없는 거래?" 그녀들은 불어, 중국어, 일어, 영어 등 여러 언어를 아무렇지도 않 게 섞어서 사용했다. 드문드문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섞이긴 했지 만 니콜라스는 그녀들의 대화를 대부분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여자들이 쓰는 말, 어떻게 된 거야?" "여러 나라 말 섞어서 사용하는 거? 당연한 거 아니야? 원래 언어 갈래를 퍼트리고 다듬은 것도 우리 민족이었다고. 저 정도도 못해주 면 아틀란티스라는 이름이 울지." 니콜라스는 이들이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것을 깨닫고 소리 없이 신 음을 삼켰다. 한낱 부엌에서 일하는 시녀들도 저렇게 유창하게 여러 언어를 사용한다면, 소위 말하는 엘리트들은 얼마나 대단할지 상상 이 안 되었다. 그러나 유하를 따라 걸으며 찬찬히 생각을 되짚어나가던 중 니콜라 스는 뭔가 강한 위화감을 깨달았다. "그런데 여기는 전자기기 같은 것이 하나도 없네. 아까 보니까 가스 레인지나 전자 오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솥을 사용해서 음식을 만들고 있고. 혹시 황실 취향이 그런 고풍스런 쪽이야?" "그런 게 아니야. 이곳에서는 사실 자연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어. 물론 이론 자체는 바깥과 연동해서 많이 발달했지만, 여기서는 전자 계산기 하나도 못 만들어." "아니, 왜?" 뜻밖의 대답에 니콜라스는 놀라워하며 물었다. 유하는 키가 조금 작 은 그를 흘끗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에는 금속이 없거든." '정확히 말하자면 전기가 통하는 금속이 없습니다.' 예안은 눈앞에 죽 늘어놓은 숟가락, 젓가락, 칼, 금속 재질의 아머, 방패 등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대부분의 샘플을 손에 넣어 실험해보았지만 몇 번을 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모든 금속의 전기 저항력이 비정상적으로 높습니다. 이 정도면 거 의 나무 수준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이런 금속밖에 없으니 과학 문 명이 발달하고 싶어도 발달할 수가 없었겠지요.' '정말 금속이 맞긴 한 거야? 금속의 모양을 한 쇳덩어리가 아니라?' '쇳덩어리도 금속입니다. 금속의 모양을 한 비금속이 아니냐고 물으 셔야지요.' 맥이 가볍게 핀잔을 주자 예안은 무안해서 얼굴을 붉혔다. 그까짓 말실수 좀 할 수 있는 거지, 뭘 그렇게 무안을 주고 그래? '대부분의 성질들이 제가 알고 있는 금속들과 같습니다. 철이라 생 각되는 이곳의 물질들은 철 그 자체입니다. 알루미늄이나 구리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한 가지, 전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만 빼 고요.' '왜 전기가 안 통하는 거지?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저의 데이터에 입력된 과학 지식을 토대로 해서 전기가 통하지 않 는 금속을 생산할 순 있습니다. 금속에 어떠한 처리를 가해 일시적 으로 전기가 통하지 않게 만드는 거지요. 다만 에너지 공급을 중단 하면 금속은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맥은 잠시 말을 끊었다. 자신이 지닌 지식을 뛰어넘는 현상을 과연 인정해야 하는지 머뭇거려지는 것이었다. '믿기 힘들지만 마더가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 같습니다. 마더가 아 니고서는 이 대륙의 모든 금속들이 영구히 전기가 통하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아틀란티스 대륙을 심해로 가라앉힌 것은 마더였다. 마더는 아무렇 지 않게, 최고로 냉정하게 그들을 심해의 감옥에 가두었을 것이다. 바깥 세상 최고의 우수 집단, 사도를 백 년이 넘도록 후유증이라는 저주에 시달리게 했던 것처럼. 그러나 예안은 어째서 마더가 아틀란티스를 직접적으로 멸망시키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다 못해 게이트를 폐쇄시켜 영구히 바깥 세상과 단절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마더는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사도를 직접 멸망시키지 않고 인간의 사념파를 명분으로 삼 아 저주를 내렸던 것과 흡사한 맥락이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하 고 또 생각해보아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도대체 마더의 목적이 뭐야? 진짜 왜 이렇게 번거롭게 구는 거야?' '글쎄요. 어쨌든 시트날타, 아니 아틀란티스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 가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마스터는 아틀란티스인들이 마더에 저항 해 싸울 때 그 사이에서 줄을 잘 타서, 마스터의 안전을 최우선적으 로 확보해야 합니다.' 복잡하고 알 수 없는 마더의 사고를 피해 아담과 이브, 그리고 오리 지널 유젤은 도피를 선택했다. 그들은 마더와의 다툼 끝에 지쳐버린 몸과 마음을 이끌고 에덴 혹성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구인류의 무모함이 여전히 남아 있는 예안은 왠지 이가 갈렸 다. 지독한 오기에 사로잡힌 그녀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마더의 진 의를 꼭 알아내고 싶었다. 성질 난다는 얼굴로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그녀는 양 무릎을 손으로 짚은 채 눈을 감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레이온 형이 그런 말을 했지. 마더가 허락하지 않았으 면 나를 복제할 수 없었다고 말이야. 도대체 마더는 뭘 원하길래 사 도도 그렇고, 아틀란티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하여간 이렇게 모 든 걸 뒤죽박죽으로 만든 거야?' 자신에게만큼은 마더가 진의를 알릴지도 모른다는 오리지널 유젤의 가설이 차라리 맞아떨어지기를 바랬다. 마더는 인간의 열등감을 구실 삼아 사도에게 저주를 내렸다. 신의 허락이 없으면 복제할 수도 없는 신인류를 탄생시키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아틀란티스 대륙을 가라앉혀 놓고도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고 친절하게 게이트까지 만들어 주었다. 세월의 고리를 그렇게 복잡하게 비틀어놓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다면 정말 화가 날 것이다. 예안은 마더를 만나기만 한다면 목을 조 르는 한이 있더라도 꼭 본심을 듣고 말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혼자 결단을 불태우던 그녀는 문득 자신의 상념에 커다란 이 물질이 끼여 있음을 깨닫고 새하얗게 경직되었다. '나를… 복제할 수 없었다고? 내가 지금 나라고 말한 거야?' by eden 아담의 상처 바로 가기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30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darksoldier 드뎌 복잡한 반전의 시작이다..ㅋㅋㅋ 아싸라 비야~ 09-05/22:24 darksoldier 드뎌 복잡한 반전의 시작이다..ㅋㅋㅋ 아싸라 비야~ 09-05/22:24 darksoldier 드뎌 복잡한 반전의 시작이다..ㅋㅋㅋ 아싸라 비야~ 09-05/22:24 Variety 반전에 반전 +.+ 09-05/16:20 Variety 반전에 반전 +.+ 09-05/16:20 유시 이제 둘째 가질시간.. 09-03/00:13 로얄나이트 처음 부분은 쉽고 재미있었는데.. 지금은 조금 어렵네.. 재미있기는 하지만.. 09-02/16:41 산바위 맥이 겨우 일반 금속(?) 성질로 만들어 졌을까요? 그나저나 이제 겨우 55%라니....흥미진진... 09-02/01:52 kiri 그럼 유니콘 통신기는 어떻게 작동하는 거에요? 아틀란티스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_-;; 09-02/00:19 설지현 헷갛혀 죽겠오오오오.. 09-01/23:47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31 회] 날 짜 2004-09-03 조회 / 추천 1430 / 29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잊혀진 대륙 충격에 휩싸인 예안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를 복제…? 나를…? 내가 '나를'이라고 말했단 말이야?" 녹색 눈동자가 혼란으로 뒤범벅이 되어 흐릿한 빛을 발했다. 순간적 으로 그녀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맥은 황급히 충고했다. '진정하십시오. 제발 진정하십시오.' "내가 지금 진정하게 됐어!" 예안은 벌컥 화를 냈다. 머리가 깨부수어지는 통증을 느낀 그녀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리고 자신의 혼란 이 맥의 탓이기라도 한 듯 원격장치를 노려보며 바락바락 외쳤다. "말해! 말해! 너 내 정신에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내가 그따위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거냐고!" '진정하십시오. 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맥의 말을 믿지 않은 채 오히려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웃기지 마! 아무 짓도 안 했음 내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 네 가 세뇌라도 하지 않은 이상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잖아!" '실수입니다. 마스터가 실수로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하지 말란 말이야!!"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곤두섬과 동시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삽시간 에 찬란한 금발로 변했다. 그녀는 체내에 끓는 분노와 힘의 기운을 이기지 못한 채 눈이 충혈 되어 닥치는 대로 가구를 집어던졌다. 우당탕 하며 탁자가 넘어지고 베개가 날아다니는 소리에 놀란 마크 가 서둘러 달려와 방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가씨?" 폭발하려는 힘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예안은 핏줄이 솟아난 눈으 로 그를 노려보며 사납게 외쳤다. "나가! 당장 나가!!" 마크는 놀란 얼굴로 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려 했다. 그 순간 커다란 빛의 구체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피할 새도 없이 가슴에 정통으로 에너지 덩어리를 직격 당한 마크는 기절해서 넘어졌다. 씩씩거리던 예안은 문득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오른손을 들어 내려다보았다. "뭐…지?"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의 망막에는 조금 전 폭사된 에너지탄 의 불꽃 자태가 고스란히 남아 혼란을 덧칠해주고 있었다. '진정하십시오. 소란을 피워 사람들 이목을 집중시켜봤자 마스터에 게 도움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맥은 일부러 싸늘한 어조로 충고했다. 정신이 번쩍 든 예안은 오기 가 나서 화를 내려다가 다음에 녀석이 한 말을 듣고 멈췄다. '이렇게 허무하게 정체를 들킬 생각입니까? 만약 여기서 잡히면 다 시는 유빈이 님을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여기는 적의 본거지라 는 것을 기억하시죠.'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 아기가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잡혀서 아기와 영영 헤어질 수는 없지 않은가. 진정하는 게 좋겠다. 잠시 동안 멍한 눈을 하고 있던 그녀는 문득 어깨를 보았다. 좁은 어깨를 지나 가슴에 걸쳐진 황금빛 머리카락 몇 올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거 왜 이래?" 그녀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금빛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머리카락 은 물기가 빠지듯 서서히 금빛 색채를 잃어가다가 원래의 붉은 빛으 로 되돌아왔다. '기억 못하십니까? 예전에도 한 번 그랬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랬던 적이 있었나. 기억의 자취를 더듬던 그녀는 불현듯 세현의 얼굴을 떠올리고 질끈 눈을 감았다. 그랬다. 그녀는 치 떨리는 배신감에 취해서 변명도 제대로 들어보지 않고 세현의 정신을 강간하듯 휘저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가 옛 친 구였다는 사실은 전혀 감안하지 않은 채. 그때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억 나지 않는다. 모든 힘이 개방되었다는 증거, 황금빛 머리카락을 휘 날리며 요사스럽게 웃어댔다는 것 밖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겨우 진정된 그녀는 쪼그리고 앉았다. 쓰 러진 마크를 바라보던 그녀는 조금 기죽은 얼굴을 하며 맥에게 사과 했다. '미안해. 괜히 널 몰아붙여서.' '괜찮습니다. 그러실 수도 있지요.'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조금 전 폭주의 이유를 고민했다. 신인 류로서의 각성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때 그녀의 머리를 점령했던 것은 다름 아닌 자아가 부정 당한다는 분노, 그것뿐이었다. 갑자기 그녀는 심장에 태연함을 이식한 듯 표정을 싹 바꾸었다. '아아, 유빈이 보고 싶다. 보고 싶어.' 자신 때문에 기절한 마크도 잊어버린 채 그립다는 얼굴로 털썩 드러 누운 그녀는 아기가 옹알대는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 웃었다. 한낱 호기심에 사로잡혀 이유를 캐물어 들어가다가 실수라도 저지르 면 모든 것은 붕괴된다. 어쩌면 그녀는 그 사실을 언뜻 느끼고 있었 던 건지도 모른다. 애써 아기의 재롱을 떠올리는 것은 도피의 일환 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구인류의 자아가 울타리를 펼친 덕에 전부터 예견되어 있던 변화는 조금 더 그 시일이 늦추어졌다. 그것이 과연 좋은 결과로 다시 돌아 올 것인지 아닌지는 훗날이 되어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빈이 안고 싶어. 젖 물리고 싶어.' 발딱 일어나 앉은 예안은 상의를 걷어올리고 손가락으로 유두를 가 만히 쓰다듬했다. 젖을 물리던 때의 감각이 기억났다. 아기가 젖을 빨며 간지럼 태우던 순간이 떠오르자 그녀는 까르르 웃으며 바닥에 뒹굴다가 막 깨어난 마크와 눈이 마주쳤다. "…." 마크는 뒤통수를 긁으며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예안은 얼른 상의를 내리고 얼굴을 확 붉히며 외쳤다. "뭘 봐요! 당장 나가요! 나가! 나가란 말이야!" 그녀의 카랑카랑한 고음에 상처 입은 얼굴이 된 마크는 얼굴이 새빨 개진 채 밖으로 나섰다. 볼이 발그스름하게 달아 있는 것으로 보아 무안해서 얼굴이 빨개진 게 아니라 그녀의 몸을 보고 화끈 달아오른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가게에서 빵을 나르던 듀렌은 마크가 놀란 가슴을 안고 나오자 걸음 을 멈추고 의아해했다. "굉장히 큰 소리가 났던데? 혹시 싸우기라도 했니?" "아, 아니에요. 아가씨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는데 제가 모르고 방문 을 열어버렸어요." "저런. 조심하지 그랬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한 듀렌은 쿡쿡 웃으며 가버렸다. 마크 는 다소 진정된 얼굴로 숨을 골랐다.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비로소 예안이 발사했던 에너지탄의 위 력에 신경이 쓰였다. 체내에 얼얼하게 남아 있는 통증의 잔해를 더 듬으며 그는 심각한 얼굴을 하였다. '단 한 방에 나를 쓰러뜨리다니. 저 아가씨가 지닌 에날도스가 도대 체 얼마나 되는 거지?' 그는 어이가 없었다. 마리오 등의 강력한 능력자를 배출한 명문, 세 자르반 가문 출신의 5대 대신 알렉스도 그의 재능을 칭찬했다. 아무 리 방심했다고는 하나 그런 자신을 에너지탄 한 방으로 기절시킨다 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혹시 자신이 터무니없는 신분 - 황실의 숨겨진 사생아 등의 고귀한 아가씨에게 목메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그는 혼란스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서 자." 황성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던 유하는 저녁이 가까워지자 니콜라스 를 어떤 조그만 방으로 데려갔다. 가구도 거의 없이 침대 하나만 달 랑 있는 방이었지만 사람의 손이 자주 닿은 듯 깨끗했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창 밖과 침대를 번갈아 바라보던 니콜라스는 팔짱을 끼고 있는 유하를 돌아보았다. "근데 여기는 어떻게 밤이 찾아오는 거야? 설마 저 보호막이라는 녀 석이 빙글빙글 돌고 있을 리는 없을 텐데?" "말도 안 되는 상상은 관둬. 12시간을 주기로 보호막이 스스로 빛을 내뿜었다 멈췄다를 반복해서 낮과 밤이 만들어지는 것 뿐이야." "흐음, 그래?" "비록 조그만 대륙이기는 하지만 물질은 계속 순환되고 있어. 강이 대륙 끝으로 흘러가 보호막에 닿으면 섞여 있던 노폐물이 보호막을 통과해서 바다로 나가거든. 구름도 만들어지고 비도 내리고, 하여튼 그래." "그렇구나." 니콜라스는 감흥 없다는 얼굴로 끄덕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이곳 에 대해 보다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 대신 님들이 다들 바쁘신지 좀처럼 뵙기 힘드네. 내일 아침 일찍 올 테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편히 자 둬. 대신 님들은 바 깥 세상에서 태어난 사생아라고 해서 색안경 끼고 바라보는 분들이 아니셔. 그럼 잘 자." "저, 저기 말이야." 막 나가려던 유하는 그가 불러 세우자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왜? 무슨 할 말 더 있니?" 손을 뻗은 채 주춤거리던 니콜라스는 예안에 대해 물어야 할지 말아 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섣불리 말을 꺼내는 것은 위험하다. 그는 결국 입을 다물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아니 됐어. 고마워." "싱겁기는. 그럼 나 간다." 유하가 나가자 니콜라스는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침대 위로 몸을 던 졌다. 스프링식은 아니었지만 그런 대로 편히 잘 만한 푹신한 쿠션 이었다. "후아." 오늘 하루 동안 너무 충격적인 사실들을 연이어 접한 니콜라스는 이 제야 조금 편안해진 기분으로 머리를 식힐 수 있었다. 어둠이 얼굴을 덮자 눈을 감은 그는 아까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겪은 일을 차근차근 되짚어가며 어떻게 된 건지 고민했다. '만 년 전 우리 대륙이 가라앉을 때 주피엘 사제가 자기 목숨을 희 생해서 저 보호막을 쳤대.' '주피엘! 주피엘!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엘리우스. 마기를 보여다오.' '공명신수를 보는 게 처음은 아니겠지? 이 녀석의 이름은 델이라고 한다.' 유하의 설명, 환영 속에서 들었던 말, 마리오가 했던 말, 제나르가 했던 말이 커다란 소용돌이를 그리며 니콜라스의 귓가를 맴돌았다. 조금 괴로운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는 그의 뇌리를 다시금 때리는 말 이 있었다. '그래서 마기의 주인이 자기 본분을 버리고 도망치려는 것을 잡아서 강제로 마기를 뽑아냈대.' 눈을 번쩍 뜬 니콜라스는 반사적으로 권총을 뽑아들고 입구를 겨누 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어떤 인기척도 없었다. 신경이 지나치게 곤두서 있는 것을 느낀 니콜라스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했다. 그러나 한번 흥분한 심장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너와 동족이잖아. 약속할 수 있어? 그 사람들한테 설 득 당해 날 배신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 예전에 결단을 요구하던 예안의 목소리가 불현듯 떠올랐다. 숨을 몰 아쉬던 그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이 녀석들하고 한 패가 될 리가 없잖아. 날 불행하게 만든 녀석들인데…." 흐릿한 어조로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는 문득 놀란 얼굴을 하고 허공 을 응시했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 속에서 단련된 그의 눈동자에는 조금도 놀람도 없었다. 생소한 생기가 잠시 동안 반짝였을 뿐이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둠을 응시하던 니콜라스는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갑함을 느낀 그는 단추를 몇 개 풀고 창문을 열어 찬바람이 들어 오게 했다. 술을 즐기지는 않지만 술이 있다면 한 잔 거하게 마시고 취하고 싶었다. 조금 전에 불현듯 생겨나 자신을 괴롭히는 이 혼란 을 알콜에 섞어 버리고 싶었다. 찬바람에 씻자 어느 정도 머리가 맑아졌다. 그는 억지로 혼란을 지 우고 서둘러 방을 나설 준비를 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빨리 누나를 찾으러 가자."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숨을 죽인 채 재빠르고 조용 하게 움직였다. by eden 아담의 상처 바로 가기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31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뽀까리 도다리? -_-?;;; 09-14/10:47 비스바덴 광어?????도다리의 다른말???? 맛있는데 -_-ㅋ 09-05/23:46 레이미안 음... 광어이야기라 09-05/22:56 darksoldier 광어이야기라... 작가님이 추천 하셧으니 한번 보죠 ㅋㅋ 09-05/22:29 숙이님 광어이야기 이미 보고 있는건데 ㅋ 09-05/20:01 天下 앗 광어이야기....;; 09-04/21:11 나와너그리고그대 초사이어인이다아앗 09-04/20:40 실탄 끄응. 사설에서 좀 추천하기로서니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09-04/19:30 기나긴여정 아..아무리.. 내용이 잼있지만.. 간접광고는 좀;; [먼산...] 09-04/18:36 설지현 님이 추천한다면..ㅇㅅㅇ 한번 보죠....;; 09-04/12:39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32 회] 날 짜 2004-09-07 조회 / 추천 1396 / 22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잊혀진 대륙 성을 빠져 나온 니콜라스는 잠시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얼른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고 다시 움직였다.다 다 벽 뒤에 늘어선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적당한 기회를 노리던 그는 저쪽에서 한 여자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하늘이 돕는 건지 근처 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기회다 싶은 그는 그녀가 눈앞을 지나가는 순간 번개같이 손을 뻗었다.다 다 "웁! 웁!" 다 니콜라스가 재빨리 끌어당기자 여자는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 려 했다. 그러나 그가 입을 틀어막았기에 낮은 신음만 흘러나왔다.다 다 "조용히 해. 죽이지는 않아."다 다 자신보다 키가 큰 여자의 허리를 억지로 숙인 니콜라스는 얼른 손을 떼고 입을 맞췄다. 그의 작은 혀가 섬세한 움직임을 그리며 입안으 로 유영해오자 여자의 눈이 커졌다가 몽롱하게 변했다.다 다 완벽하게 최면에 걸린 것을 확인한 니콜라스는 여자를 놓아주고 물 었다.다 다 "혹시 최근에 머리카락 색이 변하는 여자를 본 적이 있어? 햇빛을 쐴 때와 안 쐴 때가 색이 다른데."다 다 여자는 흐릿한 얼굴로 대답했다.다 다 "아니오." 다 "그럼 혹시 머리카락이 파랗거나 빨간 여자를 본 적이 있어?"다 다 "아니오."다 다 "제길. 그럼 혹시 처음 본다던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 여자를 본 적 없어?"다 다 "아니오."다 다 여자는 흐릿한 눈을 한 채 아니오만 반복했다. 혀를 차던 니콜라스 는 여자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여자는 여전히 몽롱한 눈 을 한 채 저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면 최면은 알아서 풀릴 것이다.다 다 팔짱을 낀 그는 허공을 노려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다 다 "누나는 여기로 안 왔을까?"다 다 예안이 여기에 있을 거라 기대하는 것부터가 모순이었지만 왠지 그 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낯설지 않게 피부에 느껴지는 바람의 호흡소리가 바로 그러했다.다 다 걱정스런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다 다 "하긴 저런 평범한 여자가 뭘 알겠어? 적어도 이 대륙 사정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는…."다 다 문득 유하가 생각난 그는 말끝을 흐렸다. 그녀라면 필경 이 대륙 사 정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누나에 대해서 이미 파악해 놓았는지도 모른다.다 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어두운 정원으로 향하는 한 시녀를 붙잡 아 최면을 걸고 유하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다행히 유하는 성 안 에 살고 있었다. 짐작했던 대로 고급 신분의 인물인 듯 했다.다 다 그리고 이건 중요하지는 않은 여담이지만, 야밤의 밀월을 즐기려던 시녀의 상대는 아마 오늘밤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할 것이다.다 다 시녀에게서 알아낸 대로 넓고 복잡한 복도를 달린 니콜라스는 문득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섰다.다 다 북쪽 방향에 많은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 중 어떤 기운은 그 도 자신이 없을 정도로 강한 기운을 감추고 있었다.다 다 '누구지?'다 다 니콜라스는 호기심이 동했지만 들킬 것을 우려해 일부러 방향을 먼 데로 돌렸다. 이곳은 황실이 가장 강한 에날도스인지 아날로그인지 를 지니고 있다고 하니 아마도 황제나 뭐 그쯤 되는 모양이었다.다 다 '찾았다!'다 다 한참을 돌고 돈 끝에 겨우 유하의 방을 찾아낸 니콜라스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한편으로는 무슨 놈의 성이 이렇게 크고 미로 같 은지 모르겠다며 짜증을 냈다.다 다 문에 귀를 대고 방안의 숨소리를 체크한 그는 유하로 추정되는 인물 이 자고 있음을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예상했던 대로 유하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다 다 유하의 침대 가까이에 가 선 니콜라스는 잠시 동안 그녀를 내려다보 았다.다 다 예쁘고 강인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강했다. 아무리 힘을 다 소모했고 또 방심했다고는 하나, 그를 한 번 무릎 꿇렸던 적이 있으니.다 다 '통할까?'다 다 니콜라스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면서 자신 없어 했다. 그는 살갗이 닿 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 최면을 걸 수 있었다. 키스를 통해 보다 강한 최면을 걸 수 있었다. 섹스를 하면 아무리 상대방이 강인한 정 신력을 지녔다 해도 굴복시킬 자신이 있었다.다 다 예전에 철통같은 보호를 받는 마피아 대부를 암살했던 경험이 떠올 랐다. 처음으로 그가 두 손을 들 뻔했던 청부였다. 실력으로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지하 방공망에 숨어서 꼭꼭 나오지 않는 상 대방을 죽이는 것은 핵폭탄을 쓴다 하더라도 불가능했다.다 다 그래서 그는 상대방의 정부를 납치해 최면을 걸기로 했다. 그러나 그녀는 보기 드물게 강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어서 좀처럼 최면에 걸 리지 않았다. 입을 맞출 때마다 오히려 사나운 기세로 그의 입술을 물어뜯곤 했다.다 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섹스를 통해 그녀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리 고 그녀의 옷안에 여러 개의 소형 고폭탄을 넣어 돌려보냈다. 마피 아 대부는 잡혀갔던 애인이 살아 돌아왔다고 기뻐했다. 그리고 폭탄 세례에 걸레 조각이 되었다.다 다 죄책감은 없었다. 애초에 그녀도 살인 청부 대상에 들어있는 인물이 었다. 그의 신조는 확고하다. 언제나 정당한 사유가 있는 청부만 받 아들인다. 상관없는 사람의 목숨이나 신체는 건드리지 않는다.다 다 '어떡하지?'다 다 그는 고민이 가득한 얼굴로 잠이 든 유하를 내려다보았다. 키스만으 로 그녀를 굴복시킬 자신은 없었다.다 다 그렇다면 필경 섹스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예안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망설여졌다. 유하는 엄연한 적이기에 그녀에 대한 죄책 감은 없었다.다 다 '할 수 없지. 일단 작은 것부터 해보고 안 되면 큰 걸로 가자.'다 다 결심을 굳힌 니콜라스는 허리를 숙여 유하에게 입을 맞췄다. 타인의 혀가 제멋대로 입안으로 비집고 들어오자 그녀는 놀라서 일어났다. 다 "무, 무슨 짓이야!"다 다 유하는 그를 벌떡 밀어내며 경계의 태세를 취했다. 니콜라스는 감흥 없는 얼굴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다 다 "효과 없네. 통했으면 좋았을걸."다 다 그제야 니콜라스의 얼굴을 알아본 유하는 어이없다는 표정 가득 배 신감을 드리우고 노려보았다.다 다 "이게 무슨 짓이야, 재키! 지금 당장 날 납득시키지 못하면 널 죽여 버리겠어!"다 다 "난 재키가 아니야. 내 진짜 이름은 니콜라스 베르노."다 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에 유하는 얼떨떨해 했다가 불현듯 그 이름이 뜻하는 바를 깨닫고 앙칼지게 외쳤다.다 다 "에, 엘리우스?"다 다 "너희들은 날 그렇게 부르더군."다 다 니콜라스는 총을 뽑아 왼손에 쥐고 유하에게 겨누었다. 그리고 감정 이 없는 차가운 얼굴을 한 채 말했다.다 다 "난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정도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어. 순순히 대답해. 너희들이 지금 누나를 데리고 있나?"다 다 "누, 누나라니?"다 다 "너희들은 엔젤이라고 부르더군."다 다 유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고 보니 엘리우스와 엔젤은 현 재 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다 다 "왜 엔젤을 여기서 찾아? 설마, 엔젤이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아니겠지?"다 다 "대답만 해. 너희들이 누나를 데리고 있어?"다 다 "모, 몰라! 난 아무것도 몰라!"다 다 엘리우스라는 이름에 겁을 집어먹은 유하는 에날도스를 사용할 생각 도 못한 채 그렇게 부르짖었다. 차가운 눈으로 유하를 바라보던 니 콜라스는 총을 치우고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다 다 그가 무뚝뚝한 시선으로 단추를 풀기 시작하자 유하는 사색이 된 채 외쳤다.다 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지금!"다 다 "나는 섹스로 강한 최면을 걸 수 있거든. 너한테 최면을 걸어서 자 세한 정보를 알아내려고."다 다 "나, 난 사실대로 말했어! 거짓말하는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고 그랬잖아!"다 다 "그거야 그냥 해본 소리였지."다 다 상의를 벗자 매끄럽게 빛나는 그의 호리호리한 상체가 드러났다. 유 하는 엘리우스의 위명에 짓눌려 그를 공격할 생각도 못한 채 죽을상 이 되어 외쳤다.다 다 "이런 짓 하지 마! 나중에 엔젤이 이 사실을 알면 널 어떻게 생각하 겠어!"다 다 "무슨 소리야?"다 다 "다 알고 있어! 너희들이 서로를 좋아하는 거! 연인을 두고 다른 여 자와 이런 걸 해도 된다 생각해!"다 다 "상관없어. 육체는 어차피 껍데기일 뿐이야. 그리고 누나가 날 좋아 하는지 아닌지는 나도 몰라."다 다 니콜라스의 눈에는 흥분도 욕정도 쾌감도 아무것도 떠올라 있지 않 았다. 남들에게는 중대한 의미인 육체 결합이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 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다 다 "꺼져! 꺼져! 꺼…읍! 읍!"다 다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던 유하는 니콜라스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자 소리도 못 내고 읍읍거리기만 했다.다 다 사무적인 손놀림으로 유하의 어깨를 쓸어 내린 그는 딱딱한 말투로 작게 말했다.다 다 "부드럽게 해줄 테니까 걱정은 안 해도 돼. 이래 보여도 나 경험 많 으니까."다 다 유하는 눈물까지 흘리며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그의 억센 힘을 당 해낼 순 없었다. 체격은 그녀보다 작지만 그는 웬만한 성인 남자 여 럿의 힘을 합친 것보다 근력이 더 강하다.다 다 그녀가 반항을 멈추지 않자 니콜라스는 옷을 벗기다 말고 한숨을 쉬 며 말했다.다 다 "너희들 말이야. 나에 대해서 조사를 했으면 내 신조가 뭔지 정도는 알지?"다 다 유하는 반항하다 말고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그녀의 입 을 막은 손을 떼지 않은 채로 조용히 말했다.다 다 "나는 상관없는 사람은 안 건드려. 최면을 걸 때도 키스 이상으로 걸어본 적은 없어. 강간 혐오주의자라서가 아니야. 관련 없는 사람 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싫어서일 뿐이야."다 다 그의 눈동자에 싸늘한 기운이 맺혔다. 그녀는 사시나무 떨 듯이 몸 을 떨었다.다 다 "하지만 너희는 나의 적이자 누나의 적이야. 그래서 난 이 자리에서 널 건드려도 명분상 아무 손색이 없다 이거야. 경고는 한 번만 할 테니까 잘 들어. 더 이상 반항하지 마."다 다 니콜라스는 총구를 유하의 이마에 겨누었다. 그리고 게임을 하듯 무 심한 어조로 말했다.다 다 "반항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죽인다."다 다 by eden 아담의 상처 바로 가기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32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유시르네온 쿨럭.. 10-02/22:40 네코~♡ 그...그리고보니 아담의 상처에서는 질리도록 많이나왔는데(...) 소엄에서는 처음이네요 =ㅁ=;; 건필하세요 >ㅅ>> 잊혀진 대륙 그가 내뿜는 살기는 진짜였다. 결코 자기 과시욕 따위가 아니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정말 섹스를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읍읍!" 유하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깨물었다. 그는 전혀 아프지 않은 얼굴로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토해냈다. 탄창이 돌아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리자 겁을 집어먹은 유하는 눈 을 휘둥그렇게 떴다. "반항하지 마라." 그가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싸늘한 그의 눈동자에 깃들인 무심함에 시선이 닿은 순간 그녀의 몸이 허물어지듯 무너졌다. 더 이상의 반항은 무의미했다.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을 죽일 것이다. 그는 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잘 생각했어. 소리도 지르지 말고 얌전히 있어. 금방 끝날 거야. 모든 게 끝나면 기억도 지워줄게."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지금 이 순간이 정말 현실인가 도저히 믿어 지지 않았다. 여태껏 많은 소년들의 구애를 받았다. 그러나 눈에 차는 남자가 없 어 오만하게 거절했던 자신이었다. 그녀에게는 바드로 3세처럼 강하고 멋진 남자와 결혼해서 예쁜 아이 들을 낳아 밝은 태양 아래에서 키운다는 꿈이 있었다. 그러나 그 소 중한 꿈은 지금 민족의 반역자 엘리우스에게 더럽혀지려 한다. 니콜라스는 어렵지 않게 그녀의 상의와 속옷을 벗겼다. 그녀는 초점 이 망가진 눈으로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똑바로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부드러운 살결을 사무적으로 쓰다듬던 그는 새하얀 가슴에 입술을 댔다. 노련한 혀의 움직임에 집요하게 시달리는 분홍빛 돌기가 주인 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뜨거워졌다. 이성을 배반하는 야속한 육체의 반응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침대 시트를 쥐어뜯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반응한다는 참을 수 없는 치욕에 사로잡힌 그녀의 손끝에 푸른 기운이 맺혔다. "반항하면 죽인다." 그가 애무하다 말고 덤덤히 말했다. 차가운 살기가 그녀의 귓가에서 부터 몸 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그녀는 독에 중독된 벌레처럼 사지를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손에 모였던 에너지가 흩어지듯 사라졌다. 부드러우면서도 거칠었다. 소년 같지 않게 숙달된 노련함으로 유두 를 공략하던 입술이 가슴 선을 따라 새하얀 목줄기에 도달했다. 전신을 휘감는 야릇한 느낌에 그녀는 눈을 꽉 감으며 치를 떨었다. 자신을 괴롭히는 그 감각을 에날도스가 폭주했을 때의 고통으로 생 각하려고 했다. 그러나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몸은 더 뜨거워졌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열화와 같은 움직임으로 자신의 몸을 구 석구석 애무하는 그가 적이라는 사실은 이미 뇌리에서 지워진지 오 래였다. 폭발할 것 같은 몸뚱이를 팔딱거리던 그녀는 참지 못하고 거친 숨을 터트리며 그의 목을 뒤에서부터 껴안았다. 그는 그녀의 목에서 입술을 떼고 보드라운 입술을 훔쳤다. 그와 그 녀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 그의 눈동자는 싸늘하고 무심했다. 뱀파이어의 키스처럼 아름다운 애무를 선사하는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순식간에 몸이 식어버린 유하는 그의 목을 껴안았던 손을 천천히 풀 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흥분하는 게 좋을 거야. 그게 너나 나나 서로가 편해." 강제로 여자를 안는 사람이 읊을 대사 따위가 아니었다. 유하는 창 녀보다 저급이 되어 버린 기분에 치를 떨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말했잖아. 나는 섹스로 강한 최면을 걸 수 있어. 왜 나한테 이런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너희들이 말한 대로 내가 엘리우 스이기 때문인가 보지." 그는 덤덤하게 말한 뒤 다시 그녀를 애무했다. 그의 작고 보드라운 입술이 유역을 쓰다듬으며 젖꼭지를 입에 머금었다. 그녀의 체내 깊숙한 곳에서부터 짜르르 울리는 쾌감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사력을 다해 억지로 참았다. "나, 난 정말 아무것도 몰라. 엔젤이 우리 대륙에 들어와 있는 줄도 몰랐어!"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잠시 후면 알아볼 수 있겠지." "이, 이러지 마 제발! 이러지 말란 말야!" "걱정하지 마. 모든 게 끝나면 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울상이 된 유하는 치를 떨며 침대 시트를 찢을 듯 세게 쥐어뜯었다. 그가 애무를 잠시 중단하고 자신의 하의로 손을 뻗자 이성을 잃은 그녀는 순간적으로 오른손에 에너지를 집중시켰다. 파괴력을 실은 가냘픈 손가락이 그의 머리통을 덮치려고 했다. 그는 어렵지 않게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정말 말을 안 듣는군." 지나치게 무심한 어조에 더욱 강렬한 공포를 느낀 유하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위협용으로 왼손에 힘을 축약시켰던 그는 그녀가 심하게 겁을 집어먹자 피식 웃으며 남은 옷을 마저 벗겼다. 그녀는 완벽히 알몸이 되었다. "겁내지 마라." 보드라운 허벅지살을 쓰다듬으면서도 그의 어투는 여전히 덤덤했다.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게 두려웠던 그녀는 눈을 더욱 질끈 감으며 악몽 같은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윽!' 그때 파공음을 뿌리며 다가오는 기운에 그는 황급히 몸을 날렸다. 뒤쪽에서부터 날아온 푸른 에너지탄이 창문을 깨뜨리며 밖으로 날아 갔다. 문 쪽에는 키가 큰 여자가 원피스 잠옷을 입은 채 한 손에는 새파란 광채가 빛나는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는 그 녀의 얼굴에서 니콜라스는 어디선가 봤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 기억났다. 너는 저번에 누나한테 찾아왔던 가짜 CIA 녀석이군. 그때 디스크를 부쉈던가?" "가짜는 아니야. 실질적으로 난 CIA 비밀 요원이기도 하다." "뭐 어쨌든. 근데 그렇게 보니 꽤 예쁜데?" 니콜라스는 그렇게 농담을 하며 유나에게 총을 겨누었다. 지나치리 만큼 무심한 그와 그녀의 표정은 섬뜩하리만치 닮아 있어, 마치 거 울을 세워놓은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머리 속이 하얗게 빈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유하를 흘끔 바라본 유 나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유하야. 옷을 입어." "어, 언니!"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유하는 울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유나는 다시 니콜라스에게 시선을 돌리고 검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자매였나 보군. 역시 처음부터 소리를 못 지르게 몇 대 패야 했나? 그렇게 하면 진짜 강간하는 것 같아서 그만 뒀는데 말이야." 유나의 차가운 얼굴에 순간적으로 분노가 스쳤다가 지워졌다. "짐승 같은 놈. 패지 않고 덮치면 그건 강간이 아니기라도 한단 말 이냐?" "강간이 아니라 고문을 하고 있었지. 적이 가진 비밀을 알아내려고 말이야." 니콜라스는 적이라는 말에 강조를 실으며 총을 쥐지 않은 오른손에 힘을 응축시켰다. 그의 오른손이 빛나기 시작하자 유나는 질끈 입술을 깨물며 검에 에 날도스를 불어넣었다. 새파란 검신이 푸른 빛깔에 물들여 요요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니콜라스는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오른손에 모은 에너지탄을 발사 했다. 소음기를 거친 짤막한 총음과 더불어 푸른 에너지탄이 유나가 쏜 검기와 허공에서 부딪쳤다.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가구가 몇 개 부서진 걸 제외하고 다 행히 큰 피해는 없었다. 유하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방어막을 쳐서 자신을 보호했다. 유나는 폭발 기운 뒤에 언뜻 비친 그의 그림자가 사라진 것을 보고 재빨리 몸을 돌리며 자세를 바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차가운 총구는 이미 그녀의 목줄기에 닿아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뒤에서 총구를 들이댄 그는 승리했다는 기쁨도 없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게임 끝. 항복해라." 유나는 전부터 그가 자신과 같은 부류임을 알고 있었다. 적에게 일 말의 인정도 보이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자세. 그것을 지 닌 사람은 덤덤하게 총구를 겨누고 덤덤하게 방아쇠를 당긴다. 니콜 라스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패배했다는 치욕에 몸을 떨며 유나는 검을 떨어뜨렸다. 여자답지 않 게 강력한 에날도스와 동체시력을 지니고 있어 젊은 나이에 앤슨의 경호원으로 발탁된 그녀의 체면이 한순간에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분해할 필요는 없어. 나는 강하니까." 나 따위는 이겨도 기쁘지 않다는 건가? 당연한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듯 덤덤한 어조에 그녀는 더욱 이가 갈렸다. 어려서부터 그 강함을 동경했던 언니가 허무하게 등뒤를 내주고 패 배했다. 유하는 그 사실에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죽인다." "뭘 말하라는 거지?" "누나는 어디 있지? 너희들이 엔젤이라고 부르는 여자 말이야." 유나의 눈이 의아함으로 커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녀는 두 손을 들어올린 자세 그대로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엔젤이 어떻게 여기 와 있다는 거지?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나도 알고 있었을 거다." 젊고 예쁘게 생긴 여자답지 않게 딱딱한 어조에 니콜라스는 가만히 눈살을 찌푸렸다. 정확히는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 생각해서였다. "나는 적에게 인정을 베풀 줄 몰라.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후회할 거야." "사실이다. 엔젤은 정말 여기에 없다." "할 수 없군." 니콜라스는 총구를 겨누지 않은 채 태연히 손을 뻗어 유나의 옷을 찢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수모에 그녀는 주먹을 꽉 쥔 채로 부르르 떨었다. 팔꿈치까지 흘러내린 옷안으로 들어온 그의 작은 손이 가슴을 움켜 쥐자 그녀는 치욕에 몸을 떨면서도 꿋꿋이 참아냈다. 유하는 믿었던 언니가 자신의 눈앞에서 몸이 더럽혀질 지경에 처하 자 놀라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싸늘 한 그의 시선이 스칠 때마다 사지가 오그라지는 공포를 느껴 그러지 못했다. 흥분도 욕정도 죄책감도 없는 얼굴로 유나의 몸을 쓰다듬던 니콜라 스는 그녀의 어깨를 눌러 무릎을 굽히게 했다. 그때 멀리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재미 없다는 얼굴을 했다. 아무래도 아까의 폭음이 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운 모양이었다. '하긴. 못 들으면 병신들이지.' 니콜라스는 태연한 얼굴로 유나의 등을 세차게 밀며 순간적으로 에 너지탄을 응축해 쏘았다. 등에 격중 당한 유나는 입에서 피를 흘리 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됐다.' 짧은 시간 안에 모은 기운이라 죽지는 않았겠지만 충분히 전투불능 으로 됐을 터였다. 그는 유하가 비명을 지르며 유나를 부축하는 것 을 무시한 채 복도를 빠르게 달렸다. "잡아라! 잡아라!" 멀리서부터 사람들이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니콜라스는 체내를 흐르는 힘을 재본 뒤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달렸다. 저들 개개인을 상대로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개떼는 좀 곤란 했다. 원래 영웅 유닛도 하급 유닛에게 포위 당하면 얄짤 없이 죽는 법이다. 궁전을 빠져나온 니콜라스는 흠칫 놀랐다. 사람들이 죄다 일어난 모 양인지 정원에는 무수한 횃불들이 가득 차 있었다. 흠칫 놀랐지만 그것은 잠깐. 그는 여기 금속에는 전기가 흐르지 않 는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했다. 서치라이트나 레이저 탐지기 따위의 전자 감시망이 없다면 빠져나가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아니지. 지금 성밖으로 나가는 건 위험해.' 생각을 바꾼 그는 몸을 낮추고 어두운 외길을 달려 북쪽에 있는 커 다란 궁전으로 향했다. 그들의 허를 찔러서 오히려 황궁 깊숙한 곳 으로 숨을 생각이었다. 궁전 문에는 두 명의 병사가 눈을 부릅뜬 채 시립해 있었다. 숨을 죽이고 그들을 살피던 니콜라스는 돌멩이 하나를 집어 반대 방향으 로 던졌다. "누구냐!" 잔뜩 긴장해 있던 병사들은 돌멩이가 떨어진 곳으로 달려갔다. 니콜 라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움직여 궁전으로 들어갔다. '됐다. 이제 안전할 거야.' 통쾌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 그리고 근처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벽에 몸을 붙이고 선 채 소리 죽여 킥킥 웃어댔다. "본거지로 무사히 침투했고, 자아 이제부터 뭔가 쓸만한 정보를 좀 알아내러 가볼까?" 니콜라스는 얼굴을 싸늘히 굳힌 채 소리 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 궁전이 제일 큰 것으로 보아 여기에는 가장 고위급 인물이 거처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일이 잘 풀려서 그 인물을 인질로 잡는다면 예안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물론이요, 적에게 큰 타격을 주는 것도 식은죽 먹기 였다. 어떤 방 근처에 다가간 니콜라스는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아 까 유하를 찾아다닐 때 언뜻 느꼈던 가장 강력한 기운이었다. '하나가 아니네?' 신경을 좀더 곤두세운 그는 강력한 반응 하나와 거의 꺼져 가고 있 는 반응 하나가 같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던 그는 결국 어둠 속에서 몸을 드러냈다. 갖가 지 보석으로 치장된 화려하고 커다란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놀라서 창 끝을 내밀며 외쳤다. "누구냐! 썩 물러가라!" 니콜라스는 대답을 않고 재빠르게 그들의 뒤로 돌아가 수도로 목덜 미를 내리쳤다. 총알을 쓰지 않고 간단히 그들을 기절시킨 그는 망 설이지 않고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엄숙한 어둠이 가득한 방 내부에서부터 무거운 공기가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검소하게 장식된 넓고 황량한 방을 훑어보던 그의 눈이 한 쪽에 있는 침대에 닿았다. 다른 가구와 달리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그 침대는 반투명한 실크 커튼을 사방에 늘어뜨린 채 빛을 차단하고 있었다. 거의 꺼져 가는 생명 반응이 침대에, 그리고 가장 강력한 반응이 침대 머리맡에서 느껴졌다. 만만치 않은 강력함이 커튼을 뚫고 전해져 왔다. 처음으로 느끼는 살벌한 긴장에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침대 위의 환자를 바라보던 사람은 커튼 뒤로 비치는 니콜라스의 실 루엣에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누구냐?" by eden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33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설지현 에잉..아쉽네..전개 더 나가지.. 09-18/22:04 유시 내 이름이.. 이름이.... 이름이..... 09-18/00:43 Fallen ...1부. 절대 안봐야지. (농담인가 진담인가 그것은 미스테리...퍽!) 09-17/09:49 esik ..............................으히 09-15/23:39 소녀이름 으아. 조금 약했네요~ 1부를 봐서..... 이제 익숙하다는 듯~~ 09-15/22:39 코코로의악마 바드로인강>? 09-15/21:40 리아♡ 니콜라스가 무심하게 말하고 하니까 저도 그냥 그렇게 넘어가지네요. 니콜라스의 무심함이 더 와닿았다고나 할까.a 09-15/21:35 뇨뇨뇨에바다뇨!! =_= 느낀다라.......... 침대에 누워 있는 넘은 누굴까.... 09-15/20:56 darksoldier 천천히 쓰세요^^ ㅎㅎ 09-15/19:03 소쿠리. 느끼니? 느끼는 거냐? 09-15/18:32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34 회] 날 짜 2004-09-18 조회 / 추천 1261 / 20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잊혀진 대륙 위엄이 가득한 음성이었다. 침입자에 대한 분노가 절제된 채 깃들여 있었다.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 같았다. 니콜라스는 숨을 들이마시며 긴장감을 곤두세웠다. 상대는 조금 전 까지 그가 상대했던 조무래기와 동급이 아니었다. 군주에 자리에 올 라 세상 모든 이들을 호령해도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을 강자였다. 순간적으로 총을 떨어뜨릴 뻔했지만 니콜라스는 그 압박감을 간신히 이겨냈다. 그는 초점이 흔들리는 눈으로 커튼 뒤 청년의 실루엣을 노려보았다. 자신의 손바닥을 본 니콜라스는 신음을 삼켰다. FBI와 마피아를 상 대로 목숨을 건 혈전을 무수히 넘겨왔던 육체가 그의 의지에 반하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고작해야 커튼 뒤에 몸을 숨긴 청년의 한 마디에 벌벌 떨고 있는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는 너는 누구지?" 니콜라스는 성대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긴장감을 참으며 일부러 호 기를 부렸다. 청년은 일말의 너그러움도 없는 싸늘한 음성으로 대답 했다. "무엄하다. 침입자 주제에 그런 걸 묻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가?" "혹시 당신이 이곳의 최고 지휘자인가?" "나는 카이브레프 알뮤스 바드로 3세, 아틀란티스 제국의 황태자다. 너는 설마 엘리우스인가?" "아니… 그렇다. 내가 엘리우스다." 반사적으로 부정하려던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 하와 유나에게는 자랑스럽게 엘리우스라는 단어를 내뱉었으면서도 바드로 3세에게는 숨기려고 했다. 그를 두려워한다는 증거였다. 기묘한 살기가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 니콜라스의 호흡을 휘감으 며 맴돌았다. 수천 년 동안 게이트를 유지하기 위해 희생을 강요당 해온 모든 엘리우스들의 원한이 깃들인 걸까. 그의 눈동자가 붉게 타올랐다. 두려움이 지배했던 것은 잠시. 아버지의 원수를 대면한 것보다 더한 분노에 사로잡힌 니콜라스는 격한 흥분에 취한 눈으로 바드로 3세를 노려보았다. 총을 쥔 그의 손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나는 엔젤을 찾고 있어. 말해라. 어디다 숨겼지?" "호오, 엔젤? 그녀가 이곳에 와 있는가?" 호기심이 가득한 음성이었다. 니콜라스는 직감적으로 그들이 정말 예안에 대해 모르고 있음을 깨닫고 아차 싶었다. 그는 그녀가 여기 에 잡혀 있는 줄 알고 그 난리를 피웠는데, 오히려 상대방에게 좋은 정보만 제공한 꼴이 된 것이다. "살의를 품고 있군." 바드로 3세는 니콜라스의 적의를 느끼고 몹시 유쾌해했다. 강자만이 지닐 수 있는 여유인가. 니콜라스는 이를 부드득 갈며 그의 빈틈을 찾았다. "나를 공격할 생각인가? 좋군. 어디 한 번 해보아라." 커튼에 가려진 바드로 3세의 실루엣은 몹시 당당했다. 니콜라스는 그가 웃을 가치도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 여겼다. 분한 마음 이 그의 가슴을 메웠다. 총구가 미미하게 떨렸다. 실루엣을 겨눈 니콜라스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는 세계 최고의 킬러라는 자부심을 북돋으며 힘껏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공기를 찢으며 굉음을 토했다. 손가락 끝에 닿는 둔탁한 느 낌을 음미하던 니콜라스는 승리를 확신했다. 절대 피할 수 없는 궤 도였다. 그러나 기대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실루엣을 비춰내던 얇은 커 튼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스르르 움직였다. 기묘한 펄스가 파 르스름하게 형성되었다. 천은 부드럽게 총알을 감싸 운동 에너지를 빼앗았다. 살상력을 상실한 총알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니콜라스는 불신의 눈빛으로 바닥에 떨어진 총알과 바드로 3세의 실 루엣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이성을 잃다시피한 그는 방아쇠를 마구 당겼다. 탕! 탕! 탕! 세 발의 총알이 굉음을 뿌리며 날아갔다. 천은 다시 살아 있는 생물 이 되었다. 총알들은 먼저 발사된 총알과 동일한 운명에 처했다. 상 대방이 자신의 상상을 넘어서는 강한 인물이라는 것을 새삼 자각한 니콜라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그러지? 설마 밑천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인가?" 아무런 감정도 채색돼 있지 않은 건조한 음성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조롱으로 들리는 어투였다. "이제 내 차례인가." 바드로 3세의 실루엣은 오른손을 들어 강력한 힘을 손끝에 집중시켰 다. 커튼 너머로 막대한 빛이 쏟아져 나오자 니콜라스는 창문을 향 해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창문이 와장창 깨지며 니콜라스의 몸이 바 깥으로 뛰어 내렸다. "전하!" 제복을 입은 신하들이 우르르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안전 여부를 물었다. 그들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네 발의 총 알을 보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황제와 황태자가 동시에 있는 침실 경호를 이따위로 했으니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었다. "전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들은 소임을 소홀히 한 죄를 물어달라고 간청했다. 심금을 부르짖 는 목소리였지만 바드로 3세의 실루엣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침입자가 지금 막 창문으로 뛰어 나갔으 니 빨리 가서 잡아들이도록 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신하들 중 몇몇은 창문으로 뛰어 내려 니콜라스를 쫓았다. 몇 명은 왔던 복도를 다시 빠져나갔고, 그 외의 나머지는 침실 문 앞에 시립 한 채 철통같은 호위망을 구성했다. 커튼에 흡수되는 신하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던 바드로 3세는 묵묵히 침대에 누워 있는 노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깨끗한 얼굴에서 굳센 제왕의 기개가 사라지며 근심의 빛이 떠올랐다. "아버님. 정신이 드십니까?" 황제의 손끝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 는 모양이었지만 너무 쇠약해 있어 혀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처지였다. 심지어 그는 아들 바드로 3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 다. 바드로 3세는 아버지의 야위고 주름진 손을 들어 뺨에 갖다대며 서 글프게 중얼거렸다. "곧 태양을 되찾아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그때까지 조금만…." 강력한 기운들이 틈을 좁히며 접근해왔다. 조금의 소리라도 냈다가 는 당장 들킬 것이다. 니콜라스는 심호흡을 하며 왼손에 든 총신을 혀로 핥았다. 긴장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그 특유의 버릇이었다. 예전에 수십 명 의 마피아를 상대로 온몸에 피칠을 한 채 사투를 벌였을 때 이후로 생긴 버릇이었다. 인혈을 먹는다는 터무니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기도 했다. 차갑고 매끄러운 금속이 혀에 닿자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는 숨을 죽인 채 멀리 달아날 기회를 기다렸다. 강력한 힘을 지닌 자들이 샅 샅이 뒤지며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그들은 고위직임에도 불구하고 하급 경비원들에게 시키지 않고 직접 니콜라스를 사냥하려 했다. 그가 지닌 힘을 우습게 보고 있지 않다 는 증거였다. 니콜라스는 아까 보았던 바드로 3세의 힘을 상기했다. 과연 다시 맞 붙는다면 이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총알을 자연스럽게 공중에 정지시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 요하다. 바드로 3세는 그 불가능한 일을 연약한 커튼을 매개체로 해 서 손쉽게 해냈다.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니콜라스는 총만 사용했을 뿐 에날도스를 개방하지 않았다. 그 러나 그것은 바드로 3세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모든 힘을 개방해서 싸웠다 해도 승리를 획득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쉽게 해답을 내리 기 어려운 물음이었다. '누나의 적이 이런 녀석들이었구나.' 이런 대단한 녀석들이 예안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전재산을 탈탈 털어 마련한 '최후의 카드'까지 종래 에 사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니콜라스는 자신이 지닌 힘만으로 예안 을 보호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추격자들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날카롭게 곤두 선 청각은 추격자들의 거친 호흡 소리를 생생하게 잡아내었다. 그의 호흡이 잘 벼려놓은 칼처럼 예리하게 빛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린 순간 니콜라스는 침을 꼴깍 삼켰다. 날은 어두워져 있고 다른 녀석들은 조금 멀리 떨어져 있다.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컥!" 바로 옆에서 작은 손이 번개같이 뻗어오며 목을 움켜잡자 제복을 입 은 남자는 숨이 막혀 괴로워했다. 니콜라스는 그의 심장을 꺼낼 수 있었으나 일부러 경동맥을 졸라 실신시켰다. 혈향이 풍기면 다른 녀 석들이 눈치챌 것을 우려해서였다.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남자를 으슥한 곳에 기대어 놓은 니콜라스는 새로운 먹이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동료가 보이지 않는 것을 이 상하게 여긴 한 녀석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가 먼저의 남자와 같은 꼴이 되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니콜라스는 정신력을 극도로 끌어올려 집중했다. 사방에 펼쳐진 지 형 등의 정보가 거대한 펄스로 환원되어 그의 뇌리에 전달되었다. 안전한 도주로와 추격자들의 움직임, 도주 성공률 등을 점검하던 그 는 이윽고 눈을 번쩍 떴다. 쫓기는 와중 시종일관 덤덤했던 그의 눈빛이 차가운 살기에 젖어 빛 났다. 오른손에 힘을 모은 그는 그늘에 가려진 성벽에 에너지탄을 날리고 그대로 뛰쳐나갔다. 폭음과 함께 벽돌이 부서져 무너지는 소리가 울렸다. 추격자들이 황 급히 달려왔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이미 낮은 포복으로 그들의 시야 를 벗어나고 없었다. "어떻게 된 건가, 제롤 경? 그쪽 방향에서 혹시 보지 못했나?" "못 보았습니다." "젠장! 다들 흩어져서 쫓도록!" 멋진 수염을 기른 나스 경이 외침과 동시에 그들은 빠르게 흩어져 니콜라스의 흔적을 찾았다. 잠시 후 한 명이 흔적을 발견했다며 소리를 질렀다. 한껏 초조해 있 던 그들은 발견자의 음성이 귀에 익지 않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그의 주위로 모였다. "어디? 어디인가?" "이것을 보십시오. 녀석의 발자국입니다." 침입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이 수풀 사이에 나 있었다. 이미 날이 상당히 어두워져 있어 여간 밤눈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찾아 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거기서 발견자를 의심해야 했지만 그 러지 않았고, 그것은 그들의 패배로 이어졌다. "수고했다. 자 모두 힘내서 쫓아가자." 나스 경은 부하들을 격려하며 발자국을 쫓으려 했다. 그러나 바로 뒤에서부터 날아온 강력한 에너지탄이 그들의 등에 정확히 격중했 다. "바보들." 처음에 기절시킨 남자로 자신을 가리고 있던 니콜라스는 히죽 웃으 며 일어났다. 신음하고 있는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정신을 잃었다. 그는 한쪽 만족스러워했다. 일부러 발자국을 남기고 동료인 척을 가장하여 그들의 등을 공격하 려던 계획은 성공했다. 손을 털은 뒤 그는 용케 정신을 잃지 않고 버티는 남자, 나스 경의 머리맡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네가 이 녀석들 지휘자인가 보군." "크윽…." 어이없는 속임수에 넘어가 한꺼번에 당한 나스는 분함을 참지 못한 채 고통스러워했다. 니콜라스는 덤덤한 얼굴을 한 채 나스의 턱을 손으로 거칠게 잡아 돌려세워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게이트는 어디에 있지?" "누, 누가 그걸 말해줄 성싶으냐…." 나스는 피가 흐르는 입술을 깨물며 단호하게 대답을 거절했다. 니콜 라스는 두 번 묻지 않고 주먹을 들어 그의 안면을 세게 때려 기절시 켰다. "별수 없네. 바드로 3세라는 녀석을 다시 한 번 찾아가야 하나." 어떻게 하면 그를 확실히 제압할 수 있을까를 골똘히 궁리하며 니콜 라스는 흙을 털고 일어났다. 황태자에게 다시 덤비는 것은 다음이었 다. 적어도 지금은 황궁을 탈출해야 했다. "빨리 누나부터 찾아야지." 벽이 부서지는 폭음을 들은 사람들이 멀리서부터 달려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니콜라스는 망설이지 않고 어둠 아래로 몸을 낮게 숙이고 빠르게 뛰었다. by eden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34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esik 아아.. 소엄[..♥]사랑해요 소엄<-역시 이이름이 아주 정감가는// 핫핫. 09-19/17:30 류아미 드디어 돌아왔군요 ( 털썩) 좋아요~ 09-19/15:02 뮤리빈 무셔 ㅜㅜ 09-19/14:46 어둠속에달빛 수정도 끝났겠다, 다시 선호작품을 등록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_ _) 09-19/08:38 세라핌루시퍼 가끔 그 회사하나 조진다는 일이랑 그 X같은 쉐이 조지는일이 잊혀진듯해서 난감;;; 혜미였던가? 그애를 도와줘야죠 ~.~ 09-19/07:59 darksoldier 아싸 소엄으로 컴백이다 ㅋㅋㅋ 역시 이제목이 좋아요!! 09-19/01:23 설지현 ㅇㅅㅇ...소엄으로 컴백인가. 09-18/22:13 위선의폭풍 실탄님이 보고계셔? 09-18/19:40 반야, 어라, 제목이 또 바꼈네, 실탄님은 변덕쟁이 -_-;;;;;, 예저에도 유빈이 이름가지고 고민하시더니, 09-18/19:36 Di-Ti-Mi 되돌아왔군요! 그리운 소엄! 09-18/19:23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35 회] 날 짜 2004-09-20 조회 / 추천 1343 / 12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개인지 관련 공지입니다 아담의 상처 개인지 예정 공지입니다. 별것은 아니지만 아담의 상처를 이번에 개인지로 내보자 하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전에 몇 분이 구매 의사가 있는지 그 숫자를 파악하기 위한 가예약 신청을 받습니다. (개인지란 제가 직접 인쇄소에 돈을 지급하고 책을 찍어내는 것입니다. 출판사나 서점, 총판(대여점) 등의 라인을 거치지 않고 제가 직접 독자분들에게 책을 파는 것이지요.) 가예약 신청 게시판 http://adam.lil.to 이것은 가예약입니다. 책을 받을 주소 기타 등등 개인사항에 대해서는 아직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현재 이 게시판의 목적은 몇 분이 개인지를 살 것인지 숫자 파악에 있습니다. 일단 여러분들이 작성하셔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본인의 닉네임과 활동 사이트 예컨대 조아라에서 공지를 보고 오셨는지 드림워커에서 공지를 보고 오셨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어디서 이 소식을 접하고 오셨는가 적어달라는 것이지요. 이메일 주소까지 적어주시면 더욱 좋습니다. 2. 본인이 구매할 부수. 예컨대 개인지 총 권수가 2권이라면 그것을 각각 1부씩 해서 2권을 살 것인지, 2부씩 해서 4권을 살 것인지에 대한 것을 적어주시면 됩니다. 위 두 가지는 필수로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가예약 신청은 10월 25일까지 받겠습니다. (사설) 개인지 판매는 경제적인 이익이 아니라 하나의 글이 책으로 엮인다는 것에 그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저는 어떠한 금전적 이득을 바라고 개인지 판매 결심을 굳힌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이득이 없다 해도 아담의 상처를 책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전 기꺼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아직 학생의 신분인 관계상 금전적 손해가 있는 일에 섣불리 뛰어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최소한 손익분기점, 즉 제가 손해도 이득도 없는 본전치기는 되어야만 개인지를 판매할 수 있습니다. 부디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아담의 상처는 최종 수정 버전으로 만들어질 것입니다. 유조아에서 아담의 상처 수정 전 버전을 보신 분들이 기억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버전입니다. 본디 아담의 상처는 2500kb의 분량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올해 여름에 행한 수정 작업으로 인해 분량이 1380kb까지 줄어들었습니다. 시놉시스 자체에는 변함이 없으나, 문장에 있어서 대대적인 다이어트가 있었습니다. 아예 새로 썼다고 보심이 옳을 것입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개연성 오류나 미약한 연출 등에 있어 신경을 썼습니다. 개인지 출판이 확정되면 또 한 번의 수정 작업을 할 것입니다. 특별 보너스로 에피소드들을 추가할 계획도 있습니다.(이 부분은 어떤 이야기가 들어갔으면 좋겠다라는 독자분들의 투표를 받아서 집필할 생각입니다) 현재 시판되는 판타지 소설들은 한 권 당 분량이 300kb입니다. 저는 한 권 당 분량을 500-600kb(혹은 그 이상도 될 수 있음)로 해서 제작할 생각입니다. 책값은 일단 만원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나, 일반 판타지보다 그 분량이 두 배 가까이 된다는 점에서 여러분들이 결코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단은 2권, 많아도 3권 안으로 완결까지 마무리를 지을 계획입니다. 이것은 가예약입니다. 과연 몇 분이 살 의향이 있는지 그 숫자를 파악하려는 것입니다. 덧붙여, 일정 숫자 이하이면 재정 문제상 어쩔 수 없이 중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수정 버젼 중 일부 발췌 - 제이의 인격이 살아나고 서운이 사라지는 부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는 자신에게 세뇌를 가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결국 어찌 되었든 간에 그는 자신을 사랑했고, 자신도 그를 좋아했다. 모든 잘못은 사실대로 털어놓고 도와달라 부탁하지 못하는 용기 없는 자신에게 있었다. - 정말 괜찮은 거야? 꿈틀. - 그래도 괜찮은 거야? 꿈틀. - 그렇게 죽어도 좋은 거야? 음침한 속삭임이 들린 순간 그녀는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괜찮을 리가 없잖아! 나, 난 죽고 싶지 않단 말야!" 서운의 몸이 무너졌다. 그녀는 앤드류를 세게, 아주 세게 껴안고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죽음의 공포가 킬킬대며 그녀의 마음을 마구 휘저었다. 걸레가 되어 버린 마음이 너무 아파 참지 못하고 그녀는 계속 울었다. 망가진 마음의 조각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고칠 수 있는데, 후유증을 고칠 수 있는데 왜 반대하는 거예요? 도대체 왜!」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조물주 프로젝트는 인류에게 너무 위험한 거야.」 피어오르는 화약 냄새와 함께 이브의 심장을 부순 은탄환. 인간들에게 아담과 이브는 결국 흡혈귀보다 못한 존재였단 말인가. 「저주할 거예요. 저주할 거예요. 죽어서도 저주할 거예요.」 숨이 끊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이브의 목소리. 서운은 그 처절한 음성을 기억 속에서 꺼내며, 자신을 죽일 수밖에 없는 제이의 처지를 마침내 동정했다. "누나 왜 그래? 정말 왜 그래? 그렇게 정현이 싫어? 그럼 나와 같이 영국으로 가자. 정현이 누나 못 찾도록 내가 누나를 지켜줄게. 누나를 평생 사랑하고 아껴줄게. 그러지 말고 영국으로 가자. 응?" 슬픈 기분에 전염된 앤드류는 그녀를 세게 껴안으며 그렇게 말했다. 눈물 젖은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그녀는 애써 피식피식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별거 아니야." 거짓말하지 마. "정말 별거 아니야." 거짓말하지 마. "정말 괜찮대두.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서운은 눈을 감으며, 거짓의 미소를 짓는 자신을 저주했다. 거짓말하지 마. 죽고 싶지 않은 거잖아? 제이를 동정하긴 뭘 동정했다고 그래? 「넌 케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어. 안 그래?」 환청이 들렸다. 아아, 제이. 그래. 이제 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넌 행복해지고 싶어했어.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더라도 행복해지고 싶어했어. 그렇게 잔인한 네가, 그렇게 무서운 네가 이상하게 나한테만큼은 그렇게 긴 시간을 허락했구나. 넌 나에게 시간을 주고 있는 거구나. 그럼 난 너에게 고마워해야겠지? "흐흑." 서운은 자신의 안에서 뭔가가 깨졌다가 다시 재조립되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변화의 한가운데에 선 그녀의 영혼은 강한 아픔에 시달리고 있었다. "졸려." "으, 응? 그럼 자." "졸려. 나 졸려." "내가 재워줄까?" 앤드류는 무릎베개를 해준답시고 그녀를 눕혔다. 그녀는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 귀여운 동생이 갖고 싶었다고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자고 일어나면 아마 나는 이 세상에 죽고 없겠지. 가예약 신청은 코멘트나 메일로 받지 않습니다. 가예약 신청 게시판에서만 받습니다. 가예약 신청 게시판 http://adam.lil.to 개인지는 450페이지씩 해서 2권 완결입니다.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35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반야, 아는 작가님이 제본 낼려고 하실 때 책값 약 12000원에, 약 200여명 정도, 한다더군요. 음, 그럼 100명 정도만 신청해도 될 것 같은데요? 09-25/20:13 실탄 그밖에도 궁금하신 게 있다면 사양 말고 물어보세요. 09-24/04:58 실탄 통신버전에는 없는 새로운 에피소드 등은 구매자분들의 요구를 받아서 새로 집필해 넣을 예정이며, 조금 난해하다는 의견에 따라 좀더 쉽게 꾸밀 계획입니다. 09-24/04:57 실탄 페이지수는 400 페이지 정도 될 것이며(일반 판타지는 300페이지) 페이지당 글자 수를 좀더 많이 넣어서 다소 빡빡한 조판이 될 듯 합니다. 09-24/04:55 실탄 3권 완결이 될 것이며, 한 권당 분량은 일반 판타지 책의 1.6배 정도로 잡고 있습니다. 보통 책은 원고지 1천매가 한 권인데 저는 1천6백 매를 한 권으로 잡고 제작한다는 것이지요. 09-24/04:53 실탄 현재 권당 12,000 ~ 12,500원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이번 주말이나 연휴가 끝난 후에 인쇄소를 가서 견적을 뽑은 뒤에 알려드리겠습니다. 09-24/04:48 TM세아로스 ...사고싶어도 자금의 압박이란 ...--;; 아무튼 될수있으면 사야겠다고 생가중 ㅡㅡ;; 권당얼마정도잡을껀지만 알려주세요..--? 09-23/15:18 위선의폭풍 대박 나시길~ 09-23/14:57 darksoldier ㅎㅎㅎ 실탄님 힘내세요^^ 건필~~ㅋ 09-21/08:37 실탄 긴급 추가 : 현재로서는 3권 완결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사실은 차후 편 사설과 게시판 공지에서 다시 밝히겠습니다. 09-21/00:00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36 회] 날 짜 2004-09-24 조회 / 추천 1271 / 16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에피소드 - 소녀의 몽정기 소녀의 몽정기 때는 그녀가 아직 애엄마가 되기 전, 그러니까 시트날타에 다시 잡혀 가기 직전이었다. 다 그 당시 그녀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여자가 된 지 상당한 시일이 지나 유젤과의 이별에 대한 슬픔도 어느 정도 희석된 상태였다. 세현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뒤였으며, 혜인과 한창 친하게 지내던 즈음이었다. 다 그 당시만 해도 그녀는 두 아리따운 미소녀가 두 손을 붙잡고 꺅꺅거 리며 주변 남정네들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는 짓거리는 애니메이션에 서나 나오는 줄 알았다. 다 그러나 한 발작만 뒤로 물러나 돌아보면 자신이 바로 그 주역 중 하나 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상대역은 물론 혜인이었다. 다 "저거 예쁘지 않아?" 다 백화점 보석 코너를 구경하던 중 혜인이 어떤 반지를 가리키며 그렇게 물었다. 보통 여자친구였다면 '응 너무 예쁘다', 혹은 '아니야. 너랑 전 혀 안 어울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다 그러나 예안은 아직 남자의 영역에 발을 더 길게 걸치고 있었기에 자 연히 가격표로 먼저 눈이 돌아가며 입을 떡 벌려야만 했다. 동그라미 가 몇 개인지 세어보는 것부터가 두려웠지만 그녀는 애써 표정을 침착 하게 하고 말했다. 다 "응. 예쁘다. 너랑 무척 잘 어울려." "나 저거 살까?" "말도 안 돼. 가격표를 한 번 봐." 다 그제야 가격표를 돌아본 혜인은 섭섭한 얼굴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다 "너무 비싸다. 절대 못 사겠네." 다 혜인이 서운해하며 돌아서자 예안은 고민에 찬 얼굴로 주머니 안의 카 드를 만지작거렸다. 앤드류가 정호와 함께 독립할 집을 사라고 준 현 금 카드였다. 다 '이거 확 써서 저 반지 사줄까?' '연적이 준 돈을 써서 여자친구에게 허세를 부리겠다는 겁니까?' '그, 그게 그렇게 돼?' 다 어떤 하나의 개념이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새로운 개념으로 환원될 때 모든 공식은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1+1은 2가 아니라 3이라는 절대 전제를 수립해놓고 수학 문제집 해설지의 옳음을 증명하려 할 때 엉망이 되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 그런데 작가가 도대체 왜 이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안 그래도 그 인 간 한창 건망증이 심해져서 친구들에게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를 반 복한다고 하던데. 다 "…흠, 흠. 내가 그런 쓸데없는 거 생각할 때가 아니라고." 다 예안은 얼른 혜인이 있는 쪽을 보았다. 혜인은 예안을 혼자 내버려둔 채 다른 보석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다 보통 여자들은 동성 친구를 끌고 다니면서 아이 쇼핑할 것이다. 그런 데 혜인은 지금 예안을 남자친구 대하듯이 혼자 내버려두고 있었다. (짐짝 취급하는 게 남자친구 대하는 거?) 그것을 보면 혜인도 무의식 적으로는 예안이 원래 남자였다는 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 "…." 다 봐라, 실 모씨의 아들 모 탄씨 또 헛소리하고 있지 않은가. 치매기가 요새 한창 심해졌다니까. 다 "에잇! 그냥 사겠어!" 다 예안은 큰마음 먹고 앤드류가 준 카드를 긁어서 결국 혜인이 예쁘다고 좋아했던 그 보석을 사고 말았다. 참 자존심도 없지. 연적이 준 돈으로 보석을 사서 여자친구에게 선물하는 남자가 어디에 있을까. 다 "저기, 혜인아. 있잖아 이거…." "우리 핸드백도 구경하러 가보자!" 다 수줍은 미소를 띤 예안이 막 선물을 건네려는 찰나 혜인은 그녀를 이 끌고 3층 가방 매장으로 갔다. 어어어 하는 사이에 손을 잡혀 짐짝처 럼 이리저리 끌려 다니던 예안은 결국 전 백화점 매장을 한 바퀴 돌아 보기 전까지 선물의 '선'자도 꺼내지 못했다. 다 저녁때가 된 무렵 비로소 예안을 끌고 지하 식당으로 간 혜인은 주스 에 꽂은 빨대를 빨며 깔깔거렸다. 다 "아까 그 옷 봤니? 정말 예쁘지 않았어?" "으, 응." "그게 한 벌에 몇백만 원씩이나 하는 거래. 아아, 정말이지 그런 거 입 고 다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돈이 썩어서 줄줄이 넘쳐나는 사람들이겠지." "맞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으휴, 내가 아까 고른 그 반지 사는 사 람도 돈이 썩어서 주체할 수 없어 하는 사람일 거야!" 다 예안은 자기 욕을 듣는 듯 해 뜨끔했다. 혜인은 한숨을 쉬며 갖고 싶 은 건 많지만 하나도 살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다 남자였을 때는 보지 못한 혜인의 색다른 모습에 예안은 내심 신기하면 서도 환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조신한 줄만 알았던 혜인은 저렇게 크게 웃을 줄도 알고, 저렇게 과장된 표정을 지을 줄도 알고, 저렇게 크게 흥분할 줄도 안다. 다 "어? 지하철 끊겼네?" 다 백화점 밖의 금은방까지 모두 섭렵하고 난 뒤 전철은 이미 끊겨 있었 다. 혜인은 난처해하다가 할 수 없이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 "우리 오늘 저기서 자자." "응?" 다 혜인이 가리킨 곳은 호텔이었다. 예안은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 다 "저, 저기서 자자고?" "응. 여관이나 모텔은 위험해서 안 돼. 얼마 전에 신문도 안 봤니? 모 텔에서 술 취해서 혼자 자는 여자를 모텔 직원이 성폭행 했다는 기사 도 있었어." 다 다 큰 남녀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핑계를 대는 것은 강아지 자살 보다 못한 헛소리겠지? 예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혜인에게 손을 붙 잡혀 질질 끌려갔다. 자식, 속으로는 좋으면서. 다 간단한 샤워를 하고 난 그녀들은 가운을 걸친 채 TV를 보거나 오늘 보았던 옷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혜인 혼자 서 속사포처럼 떠들어대고 예안은 아무 말도 못하고 듣기만 했다. 다 "그러니까 그 핸드백은 명품인 척하고 있지만 전문가인 내 눈으로 볼 때는 가짜가 분명해. 백화점에서 고객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게 틀림없다니까." "응. 응." 다 예안은 고개를 끄덕이는 척 하면서도 실은 한 마디도 듣고 있지 않았 다. 그녀의 눈은 가운 틈으로 살짝 드러난 혜인의 뽀얀 속살에만 줄곧 닿아 있었다. 다 쉴새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던 혜인은 문득 예안의 시선을 눈치챘다. 다 "어…? 너 지금 뭐 보는 거야?" 다 그 와중에도 예안의 눈길에 늑대의 본능이 섞여 있다는 것을 느낀 혜 인은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퍼뜩 놀란 예안은 쑥스럽다는 듯 헤헤 웃 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 벗어놓은 옷에서 조그마한 반지함을 꺼낸 예안은 어리둥절해하는 혜인 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다 "이게 뭐야?" "네가 갖고 싶어했던 거." 다 혜인은 의아해하며 그것을 열었다가 놀란 얼굴이 되었다. 반지함에는 아까 자신이 갖고 싶어했던 그 반지가 들어 있었다. 다 "너 이거 어떻게 산 거야? 이거 장난 아니게 비쌀 텐데?" "뭘. 그 정도 사줄 능력은 되지. 자아, 내가 끼워줄게." 다 예안은 혜인의 왼손 약지(강조)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조금 어색한 얼 굴로 손을 뒤집어가며 반지를 감상하던 혜인은 즐거움과 쑥스러움이 범벅이 된 표정으로 말했다. 다 "고, 고마워. 근데 이러니까 왠지 꼭 청혼받는 기분이네." "청혼하면 안 돼?" "으, 응?" 다 혜인은 뜻밖이라는 얼굴로 예안을 보았다. 예안은 한껏 진지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그리고 속삭였다. 다 "오늘밤, 널 나한테 맡겨주지 않을래?" "무, 무슨 소리야?" "에이, 쑥스러워하기는. 프로포즈 링까지 받았으면서 설마 내빼지는 않 겠지? 이 호텔에 먼저 오자고 한 것도 너였어." 다 삽시간에 분위기가 뜨거워졌다. 혜인은 달아오른 얼굴로 예안의 눈동 자를 보았다. 녹색 눈동자는 격한 흥분에 취해 빨갛게 물든 듯 보였다. 다 혜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스르륵 하고 그녀의 옷이 벗겨지는 소리가 뽀얀 살갗을 스쳤다. 예안의 손이 그녀의 앙증맞은 가슴을 살며시 어 루만졌다. 허물어지듯이 몸이 무너진 혜인은 이를 악물었다. 다 이브를 유혹했다는 뱀이 전신을 기어다니듯 이루 말할 수 없는 황홀한 느낌이 솟았다. 내 몸이 다른 누군가의 손에 맡겨져 내 것이 아닌 듯 뜨거워지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한 기분이었다. 혜인은 거칠게 달아오른 숨을 몰아쉬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다 "이, 이러지 마." 다 혜인은 부끄러워하며 예안을 밀쳐내었다. 한창 좋았다가 거절당한 예 안은 섭섭해하며 말했다. 다 "갑자기 왜 그래?" "이러지 마. 부끄러워."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부끄러워 해?" "있어. 있단 말야." "보고 있긴 누가 보고 있다고 그래? 여기에 우리 둘 말고 누가 더 있 어?" "보고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누가?" 다 혜인은 몹시 부끄러워하며 작게 덧붙였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다 "실탄 님이 보고 계셔." 다 다 예안은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오슬오슬 추운 게 마치 겨울이 라도 된 것 같았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조금 전 꾸었던 꿈을 떠올리 던 그녀는 안 그래도 달아오른 얼굴을 한층 더 붉히며 이불을 머리끝 까지 뒤집어썼다. 다 '으악! 무슨 이 따위 꿈이나 꾸는 거야 유진우!' 다 때는 무수한 솔로부대원들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는다는 여름이 다가 오고 있는 시즌. 긴긴 밤을 홀로 보내는 소녀 아닌 소녀의 몽정기는 그저 므흣하기만 하다. 다 by eden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36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hammer 실탄님의 압박...ㅋㅋㅋ 보고 쓰러지는줄 알았습니다. 10-12/00:02 류아미 큭큭 기절합니다 T_T 마리아로 등극! 10-06/20:24 희랑(曦朗) .. 실탄님 ;; 푸후후후훕. 10-01/10:21 까멩 실탄신..... 09-26/22:28 크리쳐아일 오 사치코 오네사마!!!!!!!!! 사치코상 사치코상 우리의 로사 키넨시스~~ -_-/ 09-25/14:18 제로시크 ...실탄님이 보고계셔라니...이거 리플을 절대로 안달수가 없군요...그런데 이거 점점 매니악해져가고 있는거 아니예요? 09-25/02:41 Oasis_Roon 실탄님이 보고계셔..!! 최고네요 09-25/00:43 네코~♡ ..시..실탄미떼(....IIIOTZ) 09-25/00:26 Di-Ti-Mi .......... -_- ;;; 09-24/23:01 카웰 마리아사마....실탄님도 보고 계시군요.... 09-24/22:37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37 회] 날 짜 2004-09-24 조회 / 추천 1348 / 18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만 년의 갈망 산중턱에서부터 차가운 바람이 불어 내려왔다. 예안은 눈을 감은 채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흐름을 느꼈다. 그녀의 두 손에 푸른 빛이 맺혔다. 눈을 뜬 그녀는 축구공 만한 에너 지 구체가 만들어진 것을 보았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빠른 속도 로 회전하고 있었다. 조금 힘들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에너지 탄을 던졌다. 느릿하게 허공을 유영하던 에너지탄은 멀리 떨어진 바위 에 정면으로 충돌했다. 굉음과 함께 하얀 먼지가 일어났다. "콜록! 콜록!" 그녀는 작은 기침을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산산조각 난 바위는 본연 의 형체를 잃고 가루가 되어 있었다. 뿌듯한 표정으로 자신이 만든 작품을 감상하던 그녀는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가슴을 폈다. '어때? 나도 꽤 대단하지?' '그럭저럭 괜찮은 컨트롤이 나왔군요. 이번 것은 특별히 50점을 드리겠 습니다.' '우엑, 너무 짜다 짜! 이게 어째서 50점 밖에 안 된다는 거야!' '100점 만점을 받고 싶으시다면 좀더 분발하시지요.' 깐깐하기로 유명한 M 운전학원 교관보다 냉정한 말투였다. 예안은 툴 툴거리면서 손을 털고 돌아섰다. 그녀의 등뒤에서 하얀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며칠 전 이성을 잃고 날뛰던 그녀는 실수로 그만 마크에게 에너지 직 격탄을 먹인 경험이 있었다. 그에게 미안했지만, 덕분에 그녀는 처음으 로 자신의 의지로 ESP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맥의 설명에 의하면 신인류는 본디 태어났을 때부터 ESP를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전까지 예안은 자신의 의지로 ESP를 사용하지 못했다. 항상 제정신이 아닌 반쯤 미친 상태에서 힘을 남발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지난 며칠 동안 그녀는 매일 같이 이곳을 찾아와 맥의 조언을 들으며 힘을 컨트롤하는 연습을 했다. 그녀는 제 딴에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맥은 항상 짠 점수만을 주었다. 지금도 보면 알 수 있다. 에너지탄 한 방으로 바위 하나를 산산조각 냈는데도 고작 50점만 주고 있지 않은가. '언제부터 손바닥만한 돌멩이를 바위라고 불렀습니까? 그새 국어 사전 개편이 있었나요?' '시끄러! 내가 바위라면 바위인 거라고!' '이것은 분명한 진실 왜곡이며 허위 사실 날조입니다. 마스터는 기망 행위와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해도 할 말 없습니다.' '기망 행위는 알겠는데 명예 훼손은 뭐야? 누가 날 명예훼손죄로 고소 한다는 건데?' '바위협회에서 떼거지로 들고일어날 겁니다. 이것도 엄연한 명예훼손죄 라고요.' '시끄러.' 예안은 그렇게 맥과 투덜거리며 마크의 집으로 돌아왔다. 성에서 외출 한 마크는 밖에서 칼을 손질하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요. 덥지는 않았어요?" "별로요." 마크는 그녀가 파워 컨트롤 연습을 하고 있는 줄 꿈에도 몰랐다. 그는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주야를 가리지 않고 그녀를 걱정했다. "어이, 마크. 식은 도대체 언제 올릴 거야?" "아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요, 네블스 아저씨!" 지나가던 이웃 아저씨들이 웃으면서 진한 농담을 건넨다. 그의 이웃들 은 그와 그녀의 결혼을 거의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몇 놈들만 빼고. "오, 산책 갔다가 이제 돌아오시는 겁니까? 아가씨, 위험할지도 모르니 다음 번에는 저와 같이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네가 더 위험해, 잭. 이런 늑대 녀석말고 저랑 같이 산책을 즐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가씨?" 마크의 친구들이 꼬리를 살랑거리며 예안에게 접근했다. 마크의 얼굴 이 팍 일그러졌다. 그녀가 모습만 드러냈다 하면 작업을 들어가는 자 칭 죽마고우들 때문에 그는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예안은 항상 매정하게 그들의 접근을 거절했다. 보통 처 녀들이 그러하듯이 부끄러워하거나 수줍어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신비한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여자들이 결코 지 니지 못한 분위기였다. 그녀가 지닌 깨끗하고 화사한 외모는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들의 호감까지 샀다. 그녀가 이곳에 머무른 지 얼마 지 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마크는 그녀의 인기가 높아지는 게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얼 마 전에 그녀가 지닌 강력한 힘을 안면으로 직접 체험했다. 그래서 그 녀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을 고귀한 신분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마크씨. 잠깐 들어와 보실래요?" 마크의 친구들이 야유를 보냈다. 마크는 얼른 얼굴에서 수심을 지우고 예안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은 예안은 조용히 물었다. "황성에서 수업을 받는다면 정확히 어떤 수업을 받는 거예요?" "주로 에날도스를 증폭시키고 컨트롤하는 훈련을 받지요. 바깥 세상의 교양이나 인문, 사회, 경제 같은 과목들은 바깥 세상에 나가는 순간까 지 필수로 받습니다." "너무 많다. 힘들겠네요." "사실 후자는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정말로 힘든 것은 에날도스 훈련 이지요. 아무리 모든 지식과 교양을 마스터했다고 해도 헤이저의 칭호 를 받지 못하면 바깥 세상에 나갈 수 없거든요." "헤이저? 그게 뭔데요?" "일정 이상의 에날도스 수치를 지닌 자에게 주어지는 자격 명칭 같은 겁니다. 그 정도 수준이 되지 않으면 바깥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도 나 갈 수가 없습니다. 게이트를 통과하다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버리 거든요." 헤이저에 대해서는 예전에 엘르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기억을 잃은 여자 행세를 하기 위해 일부러 아는 부분까지 코치코치 캐물었다. 예안은 컨트롤 연습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마크에게 아틀란티스에 대 해 이것저것을 묻곤 했다. 마크는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고 정성스레 가르쳐 주었다. 예안은 그동안 이곳의 권력 구조, 지리적 특성, 그리고 문화성 등을 포함한 대략적인 것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틀란티스는 기본적으로 황실이 주축이었다. 그보다 하위 개념으로 귀족이 존재하기는 하나, 실질적으로 귀족과 평민 사이에 신분적 격차 는 거의 없었다. 귀족과 평민이 결혼하는 것은 여기서는 이야깃거리도 못 되는 흔한 일이었다. 대신 황실의 권한은 막강했다. 대륙이 가라앉기 전부터 가장 강력한 인물이 다스렸던 아틀란티스인만큼, 황제가 지닌 능력은 범인의 상상 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물론 황실 가족이라고 해서 다 강하진 않다. 황제가 지닌 그 강대한 힘은 대대로 후계자에 이어서 전승된다. 선대로부터 정당하게 힘을 전 승받은 황제만이 그 막강한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저기 혹시 제가 황궁에 들어갈 순 없나요?" "별로 어렵진 않습니다만, 왜요?" "그냥 구경이 좀 하고 싶어서요. 근데 정말 어렵지 않아요? 명색이 황 궁인데도요?" "걱정 마십시오. 제가 이래 보여도 아가씨에게 황궁을 구경시켜드릴 능력은 충분히 있습니다." 마크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하듯 말했다. "저 그럼 언제 꼭 한 번 구경시켜 주세요. 황궁이라는 데가 어떻게 생 겼는지 보고 싶어요." "그러지요. 말 나온 김에 지금 당장 가보지 않을래요?" "지금요?" 지금 시각은 바깥 세상으로 환산했을 때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즈음이 었다. 잠시 생각해보던 예안은 끄덕였다. "네. 그럼 지금 가요." 마크는 외출 준비를 해야겠다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예안은 회심의 미 소를 감춘 채 방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쩔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하긴. 바드로 3세인가 하는 녀석이 있는 곳 알아내서 쳐들어가 야지. 조금 있다가 부를 테니까 단단히 준비하고 있어. 십 초 안에 날 아올 수 있게 말이야.' 예안은 적의 본거지를 알아낸 조폭들이 그러하듯 오른손바닥으로 왼손 주먹을 감싼 채 비틀었다. 뼈마디를 뒤틀어 뚜둑 소리를 내는 짓을 흉 내낸 것이었다. 그러나 망신스럽게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맥이 핀잔했다. '그게 아무나 한다고 해서 다 되는 줄 아세요?' 무안해진 예안은 붉어진 얼굴로 딴청을 피웠다. 이윽고 정규복장을 갖춘 마크가 방에서 나왔다. 파티 정장과 흡사한 붉은 태양이 그려져 있는 정갈한 차림이었다. 헤이저 훈련생들이 황궁 에 드나들 때 반드시 입어야 하는 복장이었다. 예안은 반사적으로 조금 움츠렸다. 가슴께에 그려진 붉은 태양이 자신 을 붙잡고자 하는 아틀란티스인들의 염원으로 느껴졌다. "자, 그만 가시죠." 조금 긴장하고 있던 예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by eden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37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꼽사리 바깥세상은 어케 되가는지/..... 10-21/14:15 위선의폭풍 후후. 돈 없어도~산다~ 09-30/01:04 위선의폭풍 화이팅.~~~ 09-30/01:04 힐직 으음...개인적으로 사고는싶지만..학생이라돈이 없네요 ㅜㅜ 추석때 돈좀 생기면 흐흐;;; 09-28/01:34 초전박살 아담도 아담이지만 소엄은 언제 풀판 한가요? 전 그게 더 관심이 09-25/10:24 klyp 잘보고 갑니당 예안씨 처들어가남;; 09-25/03:40 Di-Ti-Mi 원가 판매..... 밑지는 장사(...)를 하시네요 ;ㅁ; 실탄님의 글 사랑에 감탄합니다*-_-* 09-24/23:07 『둥이』 후아아......사고싶다아....가난한 고2에게는 불가능한것인가........ 09-24/21:52 darksoldier 집에나 들가야지 에혀 ;;; 09-24/21:52 darksoldier 방금 고스톱 1200만 어링 당하고 왔습니다... 흐미 내 피같은돈 ..ㅠ_ㅠ 09-24/21:51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38 회] 날 짜 2004-09-29 조회 / 추천 1172 / 26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만 년의 갈망 마크는 예안을 황성으로 안내했다. 황성에 가까이 접근할수록 사람들 숫자가 많아졌다. 번화가에는 여러 가지 물건들과 상권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시장통을 연상케 하는 북새통을 헤치고 나아가자 조용 하고 널찍한 대로가 나왔다. 저 멀리 커다란 성문이 보였다. 문의 좌우로는 하얀 성벽이 길게 뻗어 있었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성문이 좀 부실해 보이네요. 너무 멋에만 치장한 것 같아요. 저래서 적이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황권에 도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난 만 년 동안 반역이라 고는 엘리우스를 제외하고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엘리우스?” 생소하지 않은 이름에 예안은 호기심을 보였다. “최초로 민족을 배신했다는 배반자입니다. 사랑에 빠져 동족을 저버 린 인물이지요. 지겹게도 만 년이 넘도록 계속 환생을 거듭하고 있다 고 합니다.” “환생이요?” “예. 그래서 우리는 그때마다 엘리우스를 잡아서 처형했지요. 그 의례 를 통해서 계속 게이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겁니다.” 만 년에 걸쳐 처형과 환생을 거듭 겪는 기분은 어떤 느낌일까. 죽음에 지나치게 무감각해진 니콜라스의 무심한 눈빛을 떠올리며 예안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니콜라스씨에게 그런 비밀이 있었던 줄은 몰랐군요.’ ‘미 투야.’ 예안은 조심스러운 눈으로 마크를 보았다. 게이트를 유지하기 위하여 만 년 동안 환생하는 사람을 계속 죽였다는 놈들에게 붙잡혔다가는 무 슨 꼴을 당할지 상상이 안 되었다. 황성 안에 한 발자국을 들여놓자마자 기묘한 흐름이 느껴졌다. 오싹한 한기를 느낀 예안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왜 그러시나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속마음을 들킨 듯한 기분이 든 예안은 몸을 움츠리고 서둘러 걸었다. 마크는 그녀에게 황성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황성은 한국의 웬 만한 도시와 맞먹을 정도로 그 크기가 컸다. 황제가 거처하는 가장 큰 본성을 포함하여 총 15개에 달하는 궁전이 성곽 안에 있었다. “저기가 본성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머무시는 곳이지요. 저도 황제 폐 하의 모습은 한 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마크는 황성 중심의 가장 커다란 궁전을 가리키며 벅찬 얼굴로 말했 다. 예안은 원수를 바라보듯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궁전의 모습을 뇌리에 똑똑히 새겨 넣었다. “여기는 훈련장입니다.” 빽빽한 아름드리 나무 숲 공터에 넓은 훈련장이 있었다. 보기만 해도 무거워 보이는 철제 옷을 입은 청년들이 교관의 지시를 받아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검술을 연마하고 있었지만, 검술은 단지 몸을 튼튼 하게 하는 매개체에 불과했다. 그들이 하는 모든 훈련은 전부 에날도 스 컨트롤 능력의 강화로 귀결되는 것이다. “여어, 마크. 여기는 웬일이야?” “잠깐 구경하러 왔습니다.” “조만간 헤이저 통과 시험을 본다고 했지? 열심히 해. 자네라면 눈 감고도 통과할 수 있을 거야.” “하하, 감사합니다.” 멋진 콧수염을 기른 교관은 훈련생들에게 잠시 쉬라고 명령한 뒤 예안 에게 흘끔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이 멋진 아가씨는 누구인가? 자네 애인?” “그런 사이는 아닙니다. 그냥 제가 좀 돌봐주고 있는 사이인데 황궁 구경을 하고 싶어해서 데리고 왔지요.” “좋을 때로군. 아, 그렇다고 애인이랑 헤어지기 싫어서 일부러 헤이저 시험에 탈락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하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난 자네 한테 크게 실망할 거야.” “절대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요.” 교관과 마크는 친숙한 사이인 듯 허물없는 대화를 나누며 웃었다. 예 안은 차가움을 감춘 시선으로 마크를 보았다. ‘돌봐 준다고?’ 그녀는 그 말에 어떤 의미가 깃들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러한 발언에는 자신을 소유하고픈 욕망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굳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자 신의 목적만 달성하고 아틀란티스 대륙을 무사히 빠져나간다면 마크를 다시 볼 일은 없었다. 교관과 헤어진 마크는 이번에는 산책로로 예안을 데리고 갔다. 이름 모를 꽃들이 좌우로 만발하게 피어 있는 아름다운 길이 멀리까지 뻗어 있었다. 황족들이 가끔 나들이를 나오긴 하지만 황족 전용은 아니기에 자신 같은 사람들이 이용해도 상관없다고 마크는 설명해주었다. 그 뒤로도 마크는 예안에게 황성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훈련장이라든지, 좋은 과수가 있는 곳이라든지, 아니면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는 곳 등 관광적 색채가 강한 장소뿐이었다. 참다 못한 예안은 귤 비슷한 과일을 따서 먹어보라고 권하는 마크에게 물었다. “마크씨. 본성 안은 구경할 수 없나요? 전 거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꼭 한 번 보고 싶은데.” “글쎄요. 가능하긴 합니다만 거기는 사실 별로 볼 것도 없습니다.” 마크는 조금 난처한 얼굴로 얼버무렸다. 예안은 그의 마음을 눈치채고 하마터면 실소할 뻔했다. 그는 지위 높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여주기 싫어서 일부러 궁전 내부는 구경시켜 주지 않는 것이었다. “전 궁전 안이 꼭 보고 싶거든요. 너무 오래 걸어서 피곤하기도 하고 요. 본성으로 가요. 네?” 예안은 속으로는 이를 바드득 갈면서도 겉으로는 상냥하게 부탁했다. 더 이상 핑계 대기 곤란했던 마크는 할 수 없이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본성 안도 구경시켜드리지요.” “고마워요.” 그는 멀찍이 보이는 본성으로 향하며 제발 지체 높은 젊은 귀족들을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하얀 색으로 이루어진 본성은 고대 그리스를 연상케 하는 고풍스런 느 낌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예안이 고대 건물 양식에 조금만 조예가 깊었더라면, 유럽뿐만 아니라 중국 등의 동양적인 색채도 깃들여져 있 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아틀란티스 대륙이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을 때, 타대륙에 살아남은 아 틀란티스인들은 그들이 지닌 지식을 인간 사회에 퍼트리며 은밀하게 문명 발전 속도를 컨트롤해왔다. 따라서 언어나 그림, 문자, 건물 등을 비롯한 전세계의 모든 문화는 아틀란티스를 그 시초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황궁 안에 한 발자국을 들여놓자마자 예안은 아까부터 압박하고 있던 기운이 한결 더 짙어지는 걸 느꼈다. 일순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쇼크가 엄습해왔지만 그녀는 꾹 참고 태연한 척 했다. “어디 몸이 안 좋으신가요? 얼굴색이 나빠 보입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어서 구경이나 시켜줘요.” 예안은 태연한 척 대답했다. 어떻게든 그녀를 귀족들 눈에 뜨이게 하 고 싶지 않았던 마크는 한숨만 폭폭 내쉬었다. 귀족과 평민 구분은 없 다고 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 등에 있어서 권력을 지닌 귀족들이 보다 유리한 건 사실이었다. 황제가 머무르는 궁은 약 천 개의 방으로 이뤄져 있었다. 크기에 비해 숫자가 너무 적은 감이 없지 않으나, 각각의 방이 차지하고 있는 면적 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볼 때 결코 적은 수는 아니었다. 황제의 집무실은 비교적 정문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업무상 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그렇게 설계되었다고 마크가 설명했다. 대신 황제의 침실은 암살 등을 방지하기 위하여 상당히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것은 만 년 전의 이야기였을 뿐, 태양을 되찾아야 한다는 염원에 취한 지금까지 반역 세력은 엘리우스 를 제외하고는 생긴 적이 없었다. “저기가 황제 폐하의 집무실입니다. 지금은 바드로3세 황태자 전하께 서 머무르고 계시지요.” 복도 끝 멀찍이에서 마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했다. 멀리 보이 는 화려하게 치장된 문을 바라보던 예안은 긴장한 얼굴로 끄덕였다. 병사 둘이 지키고 있는 저 안에 자신의 목표가 있는 것이었다. ‘건물 구조 파악 및 위치 계산 완료했습니다.’ ‘알았어. 오늘밤 습격이다.’ 목표를 이루었으니 더 볼일은 없다. 예안은 가시를 감춘 얼굴로 생긋 이 웃으며 말했다. “피곤한데 이만 집으로 돌아가요. 저 사실 조금 전부터 몸이 별로 안 좋았거든요.” “아, 그래요? 어쩐지 얼굴이 안 좋아 보였어요.” 마크는 희희낙락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예고 없이 덥석 손을 잡힌 그녀는 기분이 몹시 나빴지만 나중을 위한 투자다 생각하고 꾹 참았다. 그들이 지나왔던 산책로를 통과하던 순간이었다. “마침 잘 만났다, 마크. 지금 훈련생들에게 시범을 보일 사람들이 갑 자기 앓아 누워서 곤란해하던 참이었어.” 나무 아래에서 다른 사람과 난처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던 마크의 상 관이 그를 보고 반색했다. 마크는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시범을 보일 사람이요?” “그래. 자네 능력도 이미 상당한 수준급이고, 지상에서 임무를 마친 후에는 어차피 훈련생들을 지도해야 하지 않는가. 지금 데이트 중인 건 이해하지만 손이 부족해서 그러니 빨리 따라 오게. 딱 두 시간만 내주면 돼.” 난처한 얼굴로 예안을 돌아보던 마크는 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헤 이저의 타이틀을 얻으려는 자가 이런 부탁을 거절 할 순 없었다. “전 알아서 혼자 돌아갈 수 있으니까 가보세요.” “죄송합니다. 그럼 나중에 집에서 봐요.” “네. 열심히 하세요.” 예안은 오히려 잘 되었다 생각하며 함박웃음으로 손을 흔들었다. ‘하늘이 돕는 모양입니다.’ ‘응, 잘 됐다. 이대로 사람들 없는 곳으로 살짝 빠졌다가 밤이 되기를 기다리자. 너도 출동 준비하고 있어.’ 마크가 훈련장으로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예안은 느긋한 얼굴 로 천천히 걸었다. 그녀는 이대로 마크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황성 어느 조용한 곳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계획한 것을 실행에 옮길 생 각이었다. 산책로 우측에 빽빽하게 심어진 아름드리 나무숲을 바라보던 그녀는 손가락을 딱 소리나게 튕기고는 조심스레 수풀을 헤치며 들어갔다. “잠깐만요, 아가씨.” by eden 아담의 상처 가예약 게시판 클릭 http://adam.lil.to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38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Inn 아 언제 또 올라올련지.. 기다리기힘들어서 아상이랑 소엄 한번씩 더봤다는 -_- 둘다 5번은 본거 같아;;; 10-02/16:24 얼음공쥬 -_- 기막힌 타이밍이군요...호기심이 머리를 쳐드는데요? 10-01/18:20 darksoldier 으읔... 이런 긴박한 순간에 끝을 내버리다니.... 실탄님 점점 약올리는걸 즐기는듯... 하네요 ㅠ_ㅠ/ 09-30/21:06 데빌크로우 (그런데...왜 실탄님 블로그를 오늘 알았을까 =ㅅ=) 09-30/15:43 데빌크로우 오 한편 올라왔군요~ 개인지 수정작업은 잘 되 가시는지..? 09-30/14:35 _ 흐으.. 그런데 저사람들도.. -_-; 어지간이.. 참을성 쥑이는듯.. 만년이라; 09-30/13:30 카제 바드로황제인가? 09-30/11:39 코코로의악마 흠; 나는 누나한테 ㅡㅡ; 돈갚는라고 - ㅁ-~~ 09-30/09:58 설지현 개인지 사고싶은데..돈이....ㅠㅠ 09-30/00:45 klyp 누굴 것인가~~ 09-30/00:24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39 회] 날 짜 2004-10-02 조회 / 추천 1213 / 19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만 년의 갈망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안은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뛸 듯이 놀랐지만 애써 태연한 척 뒤돌아보았다. 녹색 자수가 드리워진 깔끔한 복장을 갖춘 청년이 묘한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보통 신분이 아님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청 년이 지닌 기도는 압도적이었다. “무, 무슨 일이세요?” “숲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사육사들이 숲에 엘비들 을 풀어놓아 기르고 있거든요.” “엘비요? 그게 뭔데요?” “엘비를 모르세요? 새로운 공명신수로 길러내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에날도스 조작을 가해 탄생시킨 실험동물입니다.” 청년은 조금 의심스런 눈으로 예안을 보았다. 어떻게 엘비 같은 일 반 상식 용어를 모를 수 있느냐는 눈빛이었다. 예안은 청년이 딴생각을 못하도록 황급히 화제를 바꿨다. “저 그런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아저씨?” 청년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의 얼굴이 이십대 초반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예안은 멋쩍어서 헤헤 웃었다. “아, 죄송해요. 저보다 나이 많고 모르는 남자만 보면 무심결에 튀 어나오는 말버릇이라서 그래요.” “섭섭하군요. 아직 23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아저씨 소리를 들 어야 한다니 말입니다.” 아틀란티스는 나이를 만으로 계산하기에 한국식 나이로는 24살 정도 가 된다는 소리였다. 예안은 ‘그 정도면 아저씨 맞잖아’라고 큰일 날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런데 아가씨는 여기가 뭘 하고 있었나요?” “아는 분에게 부탁해서 잠깐 황성을 구경시켜 달라고 했어요.”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입니까?” “마크씨라고 해요. 조만간 헤이저 테스트에 통과해서 지상 세계로 나갈 예정이래요.” “호오, 마크요?” 청년은 마크를 아는 듯한 눈치였다. 예안은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 고 싶어 발을 동동 굴렀다. “아가씨는 제가 못 보던 얼굴이군요. 아가씨 정도 되는 미모라면 이미 그 명성이 자자했을 텐데 말입니다.” 유젤의 미모를 칭찬하는 말에 예안은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러나 겉 으로는 겸손한 척했다. “과분한 말씀이세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에게 잠깐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나요? 아가씨와 좀더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저는 피곤해서 이만 집에 돌아가 봐야 하거든요. 말씀은 감사하지 만 여기서 이만 헤어지죠.” “이거 죄송하지만 그럴 순 없겠는데요. 아가씨처럼 매력적인 여성 을 쉽게 놓아주는 건 여자에 대한 모욕이라고 교육받고 자라서 말입 니다.” 기분 나쁘지 않은 유혹에 예안은 그만 픽 웃어버렸다. 다른 남자들 이 저런 말을 했다면 유젤을 탐낸다 생각하고 기분이 나빠졌을 것이 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에 대해서는 화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솔직한 얼굴을 했다. “신기하네요. 사실 전 남성혐오증이 좀 있어서 남자들이 시간 내달 라고 하면 엄청 기분 나빠지고 그러는데 아저씨한테는 그런 느낌이 별로 없어요.” “그거 대단한 영광이군요. 하지만 그 아저씨라는 소리는 빼주시면 안 됩니까?” 청년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깨끗한 얼굴에서 하얗게 빛나는 치아 가 매력적이었다. 고됨을 모르고 자란 듯 하나 고됨의 가치를 소중 히 여기는 인물 같았다. 기묘한 끌림을 느낀 예안은 잠깐 동안 그에게 시간을 할애하기로 했 다. 그러면서도 맥에게 언제든지 이곳으로 날아올 수 있도록 준비하 라고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청년은 어느 한적한 정원으로 예안을 데리고 갔다. 조금 전의 산책 로와는 달리 사람들의 기척이 전혀 없는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밝은 빛을 반사하며 역동적인 생명의 기운을 내뿜는 수목들이 별천지처럼 사방에 널려 있었다. 이름 모를 아름다운 화초들이 애정의 손길을 기다리며 여기저기에 즐비해 있는 것을 감탄하듯 구경하던 예안은 한 나무 껍질을 조심스 레 쓰다듬었다. 손바닥에 만져지는 딱딱한 감촉이 야릇한 흐뭇함을 안겨주었다. “정원이 참 멋지네요.” “특급 정원사들이 매일 같이 관리하고 있는 곳입니다. 아틀란티스 에서 가장 아름다운 식물들만 모아놓은 곳이지요.” “꼭 무슨 황실전용 정원 같아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황실전용이라 해도 이보다 아름답지는 않을 겁니다.” “대단한 자신감이네요.” “자신감이 아니라 사실이라 해두지요. 저는 이 정원을 정말 사랑합 니다.” 청년은 크고 활짝 피어난 한 송이 커다란 꽃을 소중한 듯 쓰다듬으 며 그 향기를 맡았다. 눈을 감고 화목의 체향을 음미하는 그의 얼굴 은 이 정원을 사랑한다는 말이 전혀 거짓이 아님을 말해주었다. “동물에 비해서 단순하기는 하나 식물도 분명 감정을 지니고 있습 니다. 오히려 단순하기에 동물보다는 더욱 순수하고 격정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는 허리를 숙여 말라죽은 꽃을 소중한 듯 쓰다듬었다. 그의 손가 락에서 파란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에 닿자 놀랍게도 시들어 있 던 꽃의 허리가 펴지면서 말라비틀어졌던 꽃잎이 활짝 피어났다. “어라? 꽃이 되살아났네요?” “제가 지닌 능력 중 하나지요. 에날도스를 응용하면 죽은 꽃 한 송 이 살리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밝은 얼굴로 예안을 돌아보던 청년의 얼굴에 문득 씁쓸한 미소가 깃 들였다. “저는 이 정원을 정말 사랑합니다. 신이 우리에게 허락한 유일한 사치니까요.” 서글픈 그 어조에서 예안은 그가 잃어버린 어떤 것을 지독하게 목말 라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울함에 적셔진 그의 눈동자에서 타오르고 있는 건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지독한 갈증이었다. 그는 가여운 남자였다. 이루지 못한 갈망을 채우기 위해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식물들을 모아놓고 의미 없는 사치를 즐기는 가여운 남자였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가깝게 들렸다. 조 용한 그 박동에서 그녀는 유젤의 생명이 사라진 빈자리를 보았다. 그의 갈증과 그녀의 빈자리는 무척 닮았다. 아이를 눈에 넣을 듯 아 무리 예뻐해도 희석시킬 수 없었던 유젤에 대한 그리움. 아무리 꽃 향기를 맡고 맡고 또 맡아도 지울 수 없었던 태양에 대한 갈망. 그 둘은 거울을 세워놓은 것보다 흡사한 꼴이었다. “저, 왠지 모르지만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호오? 이제 아저씨에서 당신으로 한 단계 상승된 겁니까?” 청년은 조금 장난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안도 덩달아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좋아하진 마세요. 그래 봐야 어차피 나이 차이 많이 난다는 건 변하지 않아요.” “아가씨는 몇 살이나 되시기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전 아직 18, 아니 17밖에 되지 않았어요. 우리는 무려 7살이나 나 이 차이가 난다고요.” 청년은 사랑스럽다는 듯 따스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창피한 기분 이 든 그녀는 그만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상했다. 화를 내야 했다. 유젤을 탐내는 남자는 그가 누구이든 간 에 무조건 화를 내야 했다. 헌데 지금 왜 그를 어려워하고 있는가. 수목으로 다시 시선을 돌린 청년은 딱딱한 나무 껍질을 천천히 쓰다 듬었다. 예안은 무거운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훤칠한 그의 등뒤에 서부터 형언할 수 없는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일만 년 전 신은 우리를 버렸습니다. 우리가 가진 힘이 지상인들 에게 해가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를 이 심해의 감옥에 가두었 습니다. 우리가 생물들을 지배했던 것이 심해 밑바닥에서 만 년 동 안 참회해야 할 정도로 큰 죄입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지상인들은 지구를 그렇게 오염시켰으면서도 신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겁니까? 이 건 불공평한 게 아닙니까?” 무거운 그의 어조에는 진심의 낙인이 찍힌 분노가 담겨져 있었다. 예안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남자는 진심으로 신을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세월 동안 힘을 길러왔습니다. 인류 문명의 발전 속 도와 방향을 우리 뜻대로 교묘하게 컨트롤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는 우리가 지닌 뜻을 이룰 때가 되었습니다.” 청년은 씁쓸함과 기쁨이 교차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묵직한 감정의 압력을 느낀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수십 년 간 항상 혁명만을 생각해왔습니다. 잠이 든 순간까지 우 리를 버린 신을 저주했습니다. 꿈에서까지 태양을 다시 한 번 보고 괴로워했습니다. 우리의 이런 소원이, 우리의 이런 갈망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엔젤?” by eden 오늘 인쇄소에 가서 견적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인쇄소를 들어가자 마자 보인 것은 바로 샘플 혈맥 개인지 1~6권(두둥!) 아하하 왠지 신기한 기분이더라고요.(삐질;) 하여튼 견적을 뽑은 결과 새로 표지를 디자인해서 넣으면 돈이 20 만원 이상 비싸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표지는 인쇄소 에서 준비해놓은 기성표지 중 적당한 것을 골라 쓰기로 했으니, 제 발 표지에 대한 환상은 버려주세요.; 책은 페이지당 30줄 가량 해서 450 페이지로 2권 완결로 매듭짓기 로 했습니다. 책값은 권당 13,000원이며 배송료와 포장비까지 포함해서 토탈 3만 원으로 <최종 결정>되었습니다. 인쇄소가 갑자기 망하거나 종이값이 폭등해서 급작스럽게 인쇄비가 치솟지 않는 한 책값이 변하지 않으니 그렇게 알아두세요. (1,2권+배송료+포장비)= 3만 원 이것이니 따로 배송비 받느냐 마느냐는 질문은 말아주세요.(땀;) 가예약은 전에 말씀드린 대로 10/25일까지 받습니다. 뭐 이미 대충 구매하실 분들은 결정된 듯 보이지만 말입니다. 현재 아상을 편집버전에 맞춰 다시 리뉴얼 중인데 아마 11월 달 즈음에 리뉴얼을 마치고 인쇄에 들어갈 듯 합니다. 특별한 일이 없 는 한 11월 중순 즈음에 최종 준비를 마치고 실예약 공지를 올리 도록 하겠습니다.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39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로얄나이트 오늘 발매된 천사의성지 이것도 사야하는데 아 고민된닷 ㅠ_ㅠ 10-23/17:16 theduck(더덕) 컥 절단신공.., 10-05/14:25 베라도스 돈....이...모잘라................................................... 10-05/11:36 말많네 11월 중순이라...제발12월초 전에 대길간절이 바랍니다 ㅡ.ㅜ그이후에 보내시면 탈영해서 찻아 갑니다..ㅡ.ㅡ; 10-04/23:58 마치없던듯이 사고싶다.. 진짜 사ㅏ고싶다.. 흠......... 돈이 모자르다.. 흑흑 25일전에 모아서 꼭 사고만다 10-04/01:38 yeon 황태자같은데+_+ 꼭 예약할래요 통장에 돈을 모으고 있음~~ 10-03/18:24 위선의폭풍 어라 코멘트 남긴거 같았는데? 실탄상 내코멘트 지웠어요? 10-03/16:10 반야, 들켰군, -_- 그나저나 3만원이면 생각보다 많이 나왔네. 이만 오천 정도면 될 줄 알았는데, 음. 갑자기 고민;; 10-03/15:56 darksoldier 흐윽..;;;; 내이뿐 예안이 표지가 !!!! 10-03/13:14 얼음공쥬 들켜버렸군..-_-/ 10-03/10:48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40 회] 날 짜 2004-10-05 조회 / 추천 1133 / 27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만 년의 갈망 뜨거운 갈망에 휩싸인 청년의 푸른 눈동자를 보았을 때 예안은 기묘 한 예감을 느꼈다. 그와 자신은 대단히 흡사했다. 그는 태양을 그리 워하고 자신은 유젤을 그리워한다. 거울을 세워놓은 듯 똑같이, 가 질 수 없는 것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랜 시간을 고통받았습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 지도 모른 채 그렇게 벌을 받고 괴로워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기시감의 선을 뛰어넘는 어떤 이끌림 같은 것이었다. 예안은 아틀란티스 대륙이 왜 가라앉아야만 했는지 그 의미를 생각했다. 왜 자신이 유젤에게 선택되어 이렇듯 유젤의 모습으로 살아와야 했는지 그 책무를 생각했다. 어쩌면 별 쓸모 없는 것일 수도 있는 그것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청년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한 발자국 다가왔다. 예안은 주춤 뒤 로 물러서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그를 똑바로 올려보았다. 청년은 부 드럽고 섬세하게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껴안았다. 기묘한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인정할 수 없었다. 적의 품안에 서 따스함을 느끼다니. “혁명을 위해서 당신을 탄생시킨 것을 난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습 니다. 당신이 이렇게 아름답고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당신을 타산적 가치를 위한 매개체 따위로 전락시키지 않았을 것입 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괴기에 가까운 기묘한 설렘이었다. 예안은 저도 모르게 주춤 팔을 들어 그의 등을 껴안았다. 그가 미소짓는 것에서 왜 안도감을 느끼는 걸까. “당신의 복제를 허락했을 땐…. 그래요. 나는 신에게 복수해야한다 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꿈속에 나타나 당신을 복제하도록 시켰을 때 어디 두고 보자는 반발심을 가지고 천사 프로 젝트를 허락했습니다. 당신을 신이 우리에게 침투시킨 첩자라 생각 하고 한 번도 보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지금 정말 후회되는군요.” “신이… 시켰다고요?” “그렇습니다.” “신은… 어떤 모습이었죠? 그러니까… 당신의 꿈에 나타난 신 말이 에요….” 예안은 홀린 듯한 눈동자를 한 채 더듬더듬 물었다. 청년은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듯 다시금 꼭 껴안으며 그녀의 향기를 맡았다.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였습니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길게 기른….” 두근. 심장이 뛴다. 두근두근. 가슴이 뛴다. 두근두근두근. 카르마에 얽힌 십자가가 떠올랐다. 마그마가 들끓는 지하 깊은 곳이 었다. 그곳에는 지구의 핵이 있었다. 십자가를 둘러싼 거대한 힘은 마그마로부터 십자가를 보호하고 있었다. 십자가는 여자를 속박하고 있었다. 여자는 죽어가는 예수처럼 초췌 한 얼굴로 십자가에 붙잡혀 있었다. 여자는 예수보다 훨씬 성스럽고 고귀해 보였다. 암석으로 만들어진 가시 덩굴이 카르마의 사슬처럼 여자의 전신을 칭칭 감고 있었다. 그것은 여자이되 여자가 아니었다. 남자가 아니면서도 남자였다. 그 것은 거대한 의지의 흐름이 한 점에 모인 것. 지구의 의지가 육체라 는 껍데기를 빌어 발현된 것. 그것은 지구이되 지구가 아니었다. 지구가 아니면서도 지구였다. 그 것은 거대한 행성이 하찮은 인간에게 스스로를 각인시키기 위해 힘 들게 만들어낸 신기루였다. 그것은 신기루이되 신기루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구이되 지구가 아 니었다. 그것은 여자이되 여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더였다. “아….” 어떤 거대한 속삭임이 하나의 무(無)를 전하는 순간 예안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 예안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커다란 의지가 지닌 슬픔에 감염된 마음이 몹시 아팠다. 날카로운 칼로 심장을 도 려내는 것 같았다. “맹목적으로 신을 저주했습니다. 우리를 버린 신을, 단지 생물의 본능에만 충실한 우리를 버린 신을 저주했습니다. 우리를 버렸으면 서 우리보다 더 지독한 지상인들은 수용하는 신을 저주했습니다. 그 것은 지독한 모순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청년의 목소리는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신은 우리를 죽일 수 있었으면서도 죽이지 않고 심해에 가두기만 했는지, 왜 일만 년 전 주피엘 사제가 방어막을 치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두었는지, 하는 의 문이었지요.” 그의 음성이 꿈꾸는 것처럼 들렸다. 환각과 현실에 각각 한 발씩을 내딛은 예안은 가슴 깊이 밀려들어오는 거대한 슬픔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려 애썼다. “수 년 동안 고민했지만 그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항상 그것을 먼저 생각했고 밤이면 잠에 드는 순간까지 그 이유를 고민했지만 끝내 알 수 없었습니다. 바보 같은 짓일까요? 하찮은 인간의 몸으로 신의 의도를 깨달으려 한 것 말입니다.” “왜… 날 태어나게 했어요?” “신이 시켜서였습니다. 신의 허락을 받아서였습니다.” “신이 날 탄생시켜서 뭘 하라고 시켰는데요?” 다소 날카로워진 음성에 청년은 빙긋 웃었다. 예안은 눈물을 그치고 그를 노려보았다. 눈물은 멎었지만 가슴에 뻥 뚫린 구멍은 메워지지 않았다. “혁명을 위해서였습니다. 당신을 탄생시켜서 하루빨리 혁명을 완수 하라고 하더군요.” “마리오는 신에게 도전하는 게 바로 혁명이랬어요. 그 혁명을 신이 시켰다는 게 말이 돼요?” “아틀란티스에서 저를 제외한 이들은 모두 그렇게 알고 있죠. 제가 시켜서, 제가 원해서 혁명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진 실은 다릅니다. 혁명은 신이 저에게 계시를 내린 것이었습니다.” 기묘한 흥분이 들끓었다. 예안은 다시 자신을 껴안으려는 청년의 손 을 뿌리치고 노려보았다. “혁명이 도대체 뭔데요? 그게 완성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데요?” “태양을 되찾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태양을 되찾냐고요!” 화가 난 예안은 그만 버럭 고함을 질렀다. 청년은 전혀 화를 내지 않는 얼굴로 빙긋이 미소지으며 몸을 돌렸다. 이름 모를 커다란 꽃이 피어난 수목을 애인을 보듬듯 살며시 어루만 지던 그는 나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꽃을 땄다. 그는 꼿꼿이 서서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예안의 머리에 그 꽃을 꽂아주었다. 그녀는 미동도 않은 채 그를 쏘아보기만 했다. “당신은 신이 허락한 인간. 당신이 지닌 두뇌는 세상 누구와도 비 교할 수 없이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은 부모도 선생도 친구도 아무것도 필요 없이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뛰어난 당신이 혁명이 무엇인지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겁니까?” “내가, 내가 그 따위 걸 어떻게 알아요!” 울컥함에 취한 예안은 청년의 목을 쥘 듯 한 기세로 외쳤다. 청년은 다소 냉정해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따위라고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혁명은 우리에게 있어서 목숨보 다 존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일만 년 동안 태양, 오로지 그것 하나 만을 갈망해왔단 말입니다.” 또박또박 말하던 청년은 등을 돌렸다. 예안은 초점이 흔들리는 눈으 로 그의 등을 보았다. 그의 등은 만 년 동안 숙성된 제왕의 기개가 서려 있었다. “지상세계는 무척 아름답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이 정말인가요?” “…아름다워요.” “그래요? 아름다운가요? 백 억이나 되는 인류가 매일같이 쓰레기를 버리고 매연을 내뿜고 틈만 나면 핵을 쏘아대는데도 여전히 아름다 운가요?” “아름다워요.” 예안은 조금 힘들게 쐐기를 박았다. 그녀는 지상이 아름다운 곳이라 생각했다. 아름다운 곳이기에 사랑하는 아이와 함께 살아갈 가치가 있는 곳이라 여겼다. 눈을 뜨고 봐줄 수 없을 만큼 지상이 더러운 세상이었다면 그녀는 진작 아이를 데리고 지구 밖 에덴 혹성으로 떠 나버렸을 것이다. 청년은 등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아까처럼 따스해 보였다. “아름답군요. 여전히 아름다웠군요. 우리의 일만 년의 갈망이 결코 헛되지 않았군요.” 예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상했다. 그의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아 련한 상실감이 전염된다. 그것은 그녀의 의지도 그의 의지도 아니었 다. 어떤 미지의 힘이 그녀의 마음을 억지로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 녀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아틀란티스 대륙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원래 있던 곳?” “지상 말입니다. 본디 아틀란티스 대륙은 다른 대륙과 어깨를 같이 한 채 지상에서 군림하던 제왕의 땅이었습니다. 우리는 아틀란티스 대륙을 저 아름다운 지상으로 다시 되돌려놓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 로 혁명입니다.” 아찔한 충격이 예안을 엄습했다. 그녀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떨리 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왜 불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거죠? 당신이라면, 인간이 아닌 신이 내린 천사라면 혁명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 것 아닙니까?” “말도 안 돼요! 이렇게 큰 대륙을 지상으로 융기시키려면 지각 변 동급 정도 되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 흥분한 채 쏘아붙이듯 외치던 예안은 문득 자신의 말에 맹점이 있음 을 깨닫고 말끝을 흐렸다. 청년은 정확히 잡아냈다는 듯 빙긋 웃었다. “무한동력이 있다면 가능하죠. 바로 이 지구에는 무한의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성물이 있지 않습니까?” 그녀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청년은 여유 있게 미소지으며 덧붙였다. “맥은 인간이 만든 병기가 아닙니다. 신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우 리에게 저 태양을 다시 되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시켜 더러운 지 상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 신이 하사한 성물이란 말입니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 된 예안은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지금 자신 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맥이 유젤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맥도 유젤도 모두 다 혁명을 위해 탄생된 도구에 불과하다? 그것이 신의 뜻이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지독한 상실감에 사로잡힌 그녀는 초점이 사그라진 눈으로 외쳤다. 믿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믿고 싶지 않았다. 청년은 웃음을 띠며 두 팔을 가볍게 벌렸다. “나의 이름은 카이브레프 알뮤스 바드로 3세. 카뮤라고 불러 주시 면 됩니다.” by eden 이제 막 소엄의 가장 커다란 축이 밝혀졌군요. 지금까지 진행된 이 야기축을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일만 년 전 신의 저주를 받아 대서 양해저에 가라앉은 아틀란티스인들이 세상 밖으로 다시 환원하기 위 해혁명(Revolution Project)을 꿈꾼다는 것이 가장 큰 흐름입니다. 대륙을 융기시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지요. 맥의 무 한 동력에 대해 알게 된 아틀란티스인들은 그 에너지를 혁명에 사용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맥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유젤을 복제하려 하는 레이온에게 복제 작업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 한 것이지요. 그들의 소원이 성공으로 끝날지 아닐지, 그리고 마더는 그들에게 어 떠한 미래를 보여줄지 등 그러한 이야기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펼 쳐집니다. 더불어 생명의 무게를 증명하여 자신의 소원을 이루려고 하는 과학 자 칼과, 후유증을 치유하고자 스스로의 목숨까지 신에게 바친 친구 헤라클레스의 모습을 칼을 통해 지켜보는 레이온의 고뇌가 두드러질 것입니다. 우주의 카르마를 에워싸고 펼쳐지는 인물들의 갈등, 그 안에서 레이 온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이며 주인공 서예안은 어떤 미래를 소유할지 등은 앞으로도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에덴 : 뭔가 거창한 광고 같아. 실탄 : 시끄러.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새창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40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로얄나이트 완결이 몇편일까;; 10-23/17:21 실탄 헤라클레스는 아상에서 나온 적 없습니다. 헤르메스겠지요. 레이온의 형인. 10-07/21:53 Death_Reverse 그러고 보니 예전 아.상 에서는 헤라클레스 나올때 레이온은 전혀-_-(전편에 걸쳐 전혀 안나왔죠?) 10-07/18:49 『둥이』 여...역시.....전에 아틀란티스 나왔을때부터 대충 예상은 했지만 에효;;;; 10-06/22:03 darksoldier 암튼 잘보고 갑니다^^ 10-06/18:19 darksoldier 허헐..;;; 240화에 이제 시작이라니 -_-;;; 몬가 복선이있는거같은데 영 찾기가 힘드네요 ㅎㅎ 10-06/18:19 kimii 흐에; 240편에서 "이제 막 시작했습니다." 라는 의미의 글을; 10-06/17:15 esik 오오오. 점점점점점 절정에 다다라가고~, ,후후후.. 10-06/13:49 루리두리 생각없이 보면 됩니다..재미는 있으니 어차피 뒤에 사실이 나올테고.. 혼자 머리 굴려봤자... 10-06/12:58 『™아기천사』 실탄님의 소설은 먼가 중복과 힌트와.. 좀 심오한.. 면이.. 10-06/12:01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41 회] 날 짜 2004-10-08 조회 / 추천 1117 / 24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만 년의 갈망 서늘한 공기가 담을 타고 흘러 내려온다. 잠시 몸을 부르르 떨던 니 콜라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어젯밤에 정리해놓은 덩굴은 그의 몸을 충실하게 가려주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려던 그는 상당한 수의 기척을 느끼고 얼른 고개를 수그 렸다. 덩굴이 얽힌 틈으로 밖을 살핀 그는 꽤 많은 사람들이 질서정 연하고 조용하게 이동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결같이 그들의 체내에서는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저런 인물들 이 다수를 이루어 조용히 이동하는 것은 결코 보통 일이 아닐 게 틀 림없었다. ‘날 잡으려는 걸까? 아… 혹시?’ 설마 누나가 근처에 있는 게 아닌가까지 생각이 미친 니콜라스는 자 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대한 기척을 숨긴 그는 멀리 떨어져서 그 들의 움직임을 추적했다. 상당한 거리였지만 일반인을 훨씬 초월하 는 청각 신경을 지닌 그는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또렷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엔젤이 성안에 있다는 게 사실이야?” “그렇다고 하더군.”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맥은 미함대와 교전 중에 핵을 맞았다고 들 었는데?” “그만큼 맥이 대단하다는 거겠지. 어차피 맥이 핵 따위에 맞아서 박살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거야.” 성벽 뒤에 모습을 감춘 니콜라스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역시 예안 은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유나와 유하 그 자매가 깜찍하게도 거짓 말을 한 게 틀림없었다. 헤이저들과의 거리가 다시 멀어지자 그는 살그머니 움직이려 했다. 그때 어떤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온몸을 압박하는 강맹한 기운은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얼른 몸을 숨겼다. 누군가가 이쪽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그 인물이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지 않기를 빌었 다. 일대일이라면 모를까, 저렇게 많은 능력자들을 한꺼번에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알렉스 대신님?” 니콜라스가 있는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알렉스는 의구심을 지우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누군가 있는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착각인 것 같군. 빨리 가자.” “예!” 알렉스는 부하들을 이끌고 서둘러 남쪽으로 움직였다. 니콜라스는 그의 기운이 멀리 떨어질 때까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겨우 안정을 되찾은 그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일대일이라면 상대도 되지 않을 노친네에게 들킬 것이 두려워 바짝 긴장했다는 게 욕 나 오도록 분했다. 알렉스란 자는 분명 다른 이들보다 훨씬 강해 보였다. 그러나 순수 하게 낼 수 있는 힘만을 따졌을 땐 그가 더 강했다. 그런데 숫자에 밀려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으니 그의 자존심이 상처받은 것은 자명 한 일이었다. 벽을 노려보던 그는 옷에 묻은 흙을 털고 일어났다. 분노로 빨개진 그의 눈동자가 알렉스가 사라진 쪽을 노려보았다. 그는 일순 비틀거 리더니 손으로 벽을 짚고 중심을 잡았다. 그의 몸이 흔들리는가 싶 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예안은 덤덤한 눈빛으로 카뮤를 바라보았다. 지독한 놀람에 휩싸여 오히려 태연하게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대륙을 끌어올린다고요?” “그렇습니다.” “턱도 없는 계획이에요. 실패할 거예요.” “실패하지 않습니다. 무한동력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요.” “내가 맥을 줄 것 같아요? 아니면 맥을 뺏어보기라도 하겠다는 건 가요?” “어차피 맥을 뺏는다 해도 당신의 협조가 없으면 고철덩어리에 불 과합니다. 그러니 저는 엔젤, 당신의 마음을 우선적으로 차지해야겠 지요.” “내 마음을 차지한다?” 골치 아픈 수수께끼에 고민하듯 예안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천진 난만하게 귀여운 모습에 카뮤는 작게 웃었다. “그래요. 당신의 마음을 차지하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합당한 방 법으로 혁명을 완성할 수 있지요.” 카뮤는 녹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손을 잡은 그는 예의를 다해 정중한 몸짓으로 손등에 입술을 댔다. 아틀란티스 황태자로서, 신의 허락을 받아 탄생된 이브의 복 제에게 보내는 존중의 표시였다. 입술을 뗀 그는 묵묵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고 빙긋 웃었다. “손등에 하는 키스는 존경의 의미라고 하지요. 평생을 상대방에 의 지하며 살아가는 배우자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나의 아내가 되어주십시오, 엔젤.” 그의 청혼이 떨어진 순간 예안은 눈을 감았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가슴에서 메아리를 외치고 있었다. 그녀는 아까 보았던 마더의 환영을 떠올렸다.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의미를 생각했다. 그가 자신에게 청혼하는 의미를 생각했다. 모든 사건들의 흐름이 어디까지 흘러가고 어디에서 종결될 것인지를 생각 했다. 지구의 중심에서 카르마의 십자가에 속박당한 채 괴로워하는 여자의 울부짖음이 귓가를 맴돌았다. 과연 그것이 정말 마더일까. 마더가 날 속이기 위해 만들어낸 거짓 신기루는 아닐까 하는 의심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더는 왜 사도에게 저주를 내렸을까. 왜 신인류의 탄생을 도와주었 을까. 왜 에덴 혹성의 창조를 허락했을까. 그리고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그 모든 물음과 의혹이 하나의 커다란 카르마를 형성해 그녀의 뇌리 에 흘러 들어왔다. 그것은 신인류의 육체를 지닌 고귀한 그녀의 영 혼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막대한 사념파였다. 육체와 영혼의 딜레마가 뒤틀리는 고통에 시달리던 그녀는 이윽고 힘들게 눈을 떴다. “싫어요.” 카뮤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어째서 싫은 건가요?” “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아마 그 사람은 지상인이겠지요? 온갖 욕망과 불결함에 찌든 더러 운 지상인이겠지요? 그런 사람을 좋아한단 말입니까? 깨끗한 당신을 오물로 더럽히고 매만지며 낄낄댈 그런 하찮은 사람을 좋아한단 말 입니까?” 카뮤의 눈동자에는 질투의 빛이 없었다. 마치 떼쓰는 아이를 타이르 는 듯한 말투에 예안은 더욱 분함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진우는, 진우는 더럽지 않아요!” “진우?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 이름인가요?” “그 애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요! 내 아이의 하나밖에 없는 아버 지라고요! 당신이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이름 따위가 아니야!”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 채 마구 외쳤다. 생각나는 대 로 내뱉고 내뱉고 또 내뱉었다. 하얗게 텅 빈 머리 속을 주시하며 아무 말이나 닥치는 대로 내뱉는 건 차라리 미친 짓이었다. 카뮤는 부드러운 표정을 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분노도 질투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보다 그가 인간을 초월한 듯 보일 정도였다. “당신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랑 합니다. 부디 내 아내가 되어주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청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눈앞의 남자가 될 것이다.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는 그 의 청혼은 너를 영원히 속박하겠다는 악마의 속삭임으로 들렸다. “웃기지 말아요. 당신이 사랑하는 건 내가 아니고 맥이잖아.” “어떻게 해석하시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입니다. 허나, 당신을 향한 제 마음만은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카뮤의 구애에는 사랑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있다면 단 하나, 일만 년 동안 다듬어진 태양을 향한 갈망뿐. 그는 태양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아틀란티스 대륙을 지상으로 융 기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남자였다. 스스로의 심 장까지 뜯어다 제단에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남자였다. 그것은 다 름 아닌 순수를 초월한 독점욕. 그윽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품안에서 커다란 보석이 박힌 금관을 하나 꺼냈다. “이것은 황비만이 머리에 쓸 수 있는 관입니다. 또한 황제가 사랑 하는 여인에게 구애와 함께 선물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지상세계에 서의 반지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는 금관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받아주십시오. 저의 아내가 되어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덧붙였다. “우리에게 태양을 되찾아주십시오.” 알렉스가 부하들을 이끌고 향한 곳은 본성 쪽이었다. 니콜라스는 그 들에게 기척을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러우면서도 빠르게 뒤쫓아갔다. ‘저기는 그 황제 같은 녀석이 있던 곳이잖아?’ 가까이 다가갈수록 숨막히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만큼 보이지 않 는 상대방이 강하다는 증거였다. 또한 그의 감각이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날카로워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이 기운 을 뿜어내고 있는 자는 아마도 황태자쯤 되는 녀석일 것이다. 수많은 살인 청부를 행하는 과정에서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격한 스 릴에 사로잡힌 니콜라스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총을 꺼냈다. 특 수 제작되어 일반 소총 못지 않은 파괴력을 자랑하는 권총이었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잘 훈련된 군인의 어깨까지 날려버리는 무식한 놈이었지만, 그와 함께 무수한 사지를 헤쳐나온 동료이기도 했다. 이윽고 알렉스가 멈췄다. 뒤따라서 부하들도 걸음을 멈췄다. “여기서부터 원형으로 포위한다. 엔젤이 눈치채지 않도록 조심해서 움직여라.” “네!” 니콜라스는 예안이 저쪽에 있음을 깨달았다. 내내 증가하고 있던 심 장의 박동수는 바로 그것을 의미하고 있었나 보다. 살기 띤 눈동자로 멀리 알렉스를 훑어보며 총신을 핥던 니콜라스는 가장 가까이에 혼자 떨어져 있는 헤이저 한 명을 노리고 서서히 다 가갔다. 포위망을 형성하는데 여념이 없는 그의 정수리 바로 뒤에서 소음기가 장착된 총구가 싸늘한 빛을 뿜었다. by eden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41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darksoldier 니콜라스.. 너의 능력을 보여줘랏!!!! 예안이가 결혼 승낙 할리가... 10-11/10:35 Di-Ti-Mi 암, 재밌습니다! 10-10/20:41 캐논 아- 빨리 다음편이 궁금하군요~ 지금 왕이 예안을 잡아두고 대신이 잡으려고 포의하는 건가요? 10-10/14:22 위선의폭풍 하여튼...ㅡ.ㅡ;; 대화가 안통할때는 참..;;;;; 10-10/01:14 엘베루시아 어느소설이나 무서운 황제놈은 정말무섭다는-_- 10-09/18:35 샤키♥ ㅇ ㅏ+_+ 이야기의 스케일이 매우 큰!! // 다음회가기다려지네요^-^ 10-09/17:33 滿月 니콜라스 너의 총의 위력을 보여 주세요 10-09/02:06 설지현 흐으음... 10-08/23:59 _ 흐으.. +_+ 10-08/23:37 데빌크로우 스스로 혼란이 생긴다는것이죠. 무의식중에 자신이 유젤이라고 생각하는것이고요.(라고 하지만 사실은 추측이다 =ㅅ=) 10-08/22:05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42 회] 날 짜 2004-10-11 조회 / 추천 1156 / 21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만 년의 갈망 예안은 카뮤에게서 자신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그보다 못할지도 몰랐다. 유젤에 대한 자신의 집착과 일만 년 동안 숙성시킨 태양에 대한 갈망. 거센 폭풍과 연약한 갈대를 비 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둘을 견주어 보는 건 무의미함의 늪을 뒹구는 것이다. “싫어요.” “왜요?” “당신한테서는 진심이 느껴지지 않아요. 당신은 날 좋아하지도 않 으면서 나한테 결혼하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더 화가 난다고요. 나는 당신에게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하찮은 인간이 아니란 말이 에요.” “나는 진심입니다.” “진심이 아니에요.” 카뮤는 소리 죽여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일단 진심이 아니라고 칩시다. 그렇다면 내가 그대에게 내 진심을 증명한다면 그대는 내 요구를 받아줄 겁니까?” “웃기지 말아요. 만약 그랬다가는 이 대륙에 라이플 버스터 포를 쏴줄 거예요.” 언뜻 보기에 그녀는 재미없는 말장난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 금 그녀는 더 솔직할 수 없는 진심만을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좋아해서든 아니든 간에 무조건 화를 낼 것이다. 억지로라도 화를 낼 것이다. 분노를 연기할 것이다. “어쩔 수 없군요. 당분간 강제로 제 곁에 있어 주셔야겠습니다. 그 대가 내 요구를 받아들일 때까지는 그대를 놓아줄 수 없습니다.” 팔목을 잡힌 예안은 화를 내며 그를 밀어냈다. 그러나 연약한 소녀 의 몸으로 건장한 청년의 근력을 당해낼 순 없었다. “놔요! 놔요! 이거 놓으란 말이야!”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흔들림 없는 얼굴로 그는 사과했다.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사 무적인 사과였다. 그래서 더 화가 난 그녀는 힘껏 발버둥을 쳤다. 타앙! 멀리서 들린 총성에 카뮤는 흠칫 놀랐다. 그 틈을 타서 예안은 그의 손에서 재빨리 빠져 나왔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총성이 터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총소리가 난 거지? 총은 이미 오래 전에 사장되지 않았나?” 카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의 고민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틀란 티스에는 총기 생산이 수천 년 전에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시범적으 로 총기를 생산했던 당시, 대포가 아닌 이상 헤이저에게는 타격을 줄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까닭에서였다. 물론 가끔 취미 삼아 사냥총 등을 만들어 즐기는 자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극소수였다. 더군다나 황성 안에서 발포할 담력을 지 닌 자들도 없었다. 무방비 상태라면 헤이저라 해도 총에 맞아 죽는 건 당연했으니까. ‘이때야.’ 그가 다른 곳에 정신을 팔린 틈을 탄 예안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감히 나를 가두려고 했죠? 당신들은 이제 다 죽었어요!” “무슨….” 카뮤는 의아한 얼굴로 한 걸음 다가가다 핼쑥하게 굳었다. 멀리에서 부터 거대한 물체가 빠르게 날아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는 뭐라 말하려 했다. 그 순간 맥의 거대한 몸체가 허공에 순식간 에 나타났다. 뒤늦은 충격파가 거세게 들이닥쳤다. 고목과 유리창이 심하게 뒤흔들렸다. 어린 묘목들은 강풍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쓰 러져 버렸다. 맥의 비호를 등뒤에 진 예안은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꼈다. “순순히 항복하시죠. 내가 마음만 먹으면 이 대륙을 날려버리는 건 일도 아니에요.” “과연… 당신이 마음을 먹는다면 그럴 수 있겠지요.” 멍한 눈으로 맥의 압도적인 기세를 바라보던 카뮤는 침착함을 되찾 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당신은 저의 힘을 너무 얕보았습니다.” 카뮤는 두 팔을 벌렸다. 그의 양손 끝에서 눈부신 빛이 파르스름하 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제껏 보아왔던 능력자들과는 현저하게 다 른 압도적인 눈부심에 예안은 바짝 긴장했다. 총성이 잦아들기도 전에 남자의 육중한 몸이 흙 위로 쓰러졌다. 경 악한 헤이저들이 서둘러 다가왔다. 그들이 공격하기 위해 힘을 응축 시키는 순간 니콜라스의 총이 다시 불을 뿜었다. 탕! 탕! 탕! 코끼리도 잡는다는 강력한 탄환이 총구를 박차고 튀어나갔다. 헤이 저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탄도의 궤도를 피해냈다. 그러나 니 콜라스의 동체시력과 운동신경은 범인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었다. 발사된 세 개의 탄환 중 두 개는 목표물의 심장을 정확히 맞췄으며, 한 개는 살짝 빗나가 목표물의 다리를 맞추었다. “크악!” “으악!” 다리에 총을 맞은 자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심장에 총을 맞은 자는 비명을 지르며 사망했다. 다른 한 명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 고 즉사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세 명이 전투불능이 되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연달아 울린 총소리에 놀란 알렉스가 달려왔다. 니콜라스는 그가 아 까 자신의 위치를 파악했던 능력자임을 깨닫고 긴장을 더욱 곤두세 웠다. 알렉스에게서 느껴지는 기도는 다른 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한 것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시신들과 부상자를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던 알렉스 는 이를 갈았다. 그는 자신에게 똑바로 총구를 겨눈 니콜라스를 죽 일 듯 노려보았다. “엘리우스. 네가 이렇게 했느냐?” “그 이름으로 날 부르지 마.” 니콜라스는 차갑게 대답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불꽃을 튀기며 총알 이 날아갔다. 알렉스가 가볍게 손을 내젓자 보이지 않는 벽이 형성 되었다. 총알은 벽에 맞아 힘을 잃고 바닥에 툭 떨어졌다. “총알을 막아내다니, 제법인데?” 능글거리는 말투에 알렉스는 더욱 분노했다. “엘리우스! 민족을 배반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죄 없는 이들 을 죽이기까지 하느냐!” “죄가 없긴 왜 없어. 날 적대했다는 것 자체가 죄야.” “그래도 너의 죄를 뉘우치지 못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는 건데?” 니콜라스는 히죽 웃으며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눈으로 쫓을 수 없 는 엄청난 스피드였다. 알렉스의 뒤에 서 있던 한 명이 가슴을 움켜 쥐며 쓰러졌다. 구멍난 그의 흉부에서 붉디붉은 피가 흘렀다. 어이없는 부하의 죽음에 분노한 알렉스는 에날도스를 끌어올릴 수 있는 대로 끌어올렸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널 죽이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다!” “지, 진정하십시오 대신님! 엘리우스를 죽이게 되면 게이트를 유지 할 수 없게 됩니다!” “닉스! 말리지 마라! 내가 오늘 반드시 엘리우스 저놈을 죽이고야 말겠다!”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도 좋습니까!” 비명에 가까운 외마디에 알렉스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닉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깃들여 있던 분노는 어느새 많이 가라앉 아 있었다. “엘리우스가 지금 죽는다면 혁명도 이룰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을 잊으신 겁니까?” 이를 바드득 갈던 알렉스는 할 수 없다는 얼굴로 니콜라스를 노려보 며 차갑게 경고했다. “내, 우리 민족의 염원을 위해 지금은 참겠다. 하지만 곱게 보내주 겠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라.” 힘주어 말한 알렉스는 다시금 두 손에 힘을 모았다. 니콜라스를 사 로잡겠다는 듯 조금 전보다는 약한 빛이었다. 약하다고는 하나 사람 여럿은 충분히 잡을 수 있을 세기였다. 니콜라스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시범적으로 총탄을 몇 발 쏴보았다. 총탄은 알렉스의 근처에 접근하자 강한 기류에 휘감겨 돌진력을 상실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총은 안 통하는군. 성가시네.’ 얼른 총을 집어넣은 그는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심장에서부터 뻗어 나온 강한 에너지가 오른손 끝에 모였다. 손바닥이 파랗게 빛 나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여태껏 응축한 에너지탄을 쏘았다. 니콜라스는 이를 악물 며 전신으로 그것을 맞부딪쳐 갔다. 푸르스름한 빛과 불그스름한 빛 이 공중에서 한데 얽혔다. 지독한 스파크가 튀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강한 위력에 알렉스는 극 심한 고통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꽉 다문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조금씩 새어나왔다. “크윽… 제법이구나, 엘리우스.” “그런 말할 여유가 없을 텐데?” 온힘을 쥐어 짜내느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알렉스와는 달리 니콜라스의 얼굴은 평온했다. 니콜라스는 좀더 강하게 알렉스를 밀 어붙였다. 한계를 넘어선 힘이 부딪쳐 오자 알렉스는 입에서 피를 토했다. 몇 미터 가량 뒤로 주르륵 밀려난 알렉스는 균형을 잃고 쓰 러져 버렸다. “대, 대신님?” 믿었던 알렉스 대신의 패배에 헤이저들은 당혹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두 패로 나뉘어져 한 패는 니콜라스를 경계했고, 다른 한 패 는 재빨리 알렉스를 부축했다. “알렉스 대신님이 패배하다니, 이건 말도 안 돼!” “이럴 수가….” 니콜라스는 평온한 얼굴을 연기하며 흐트러진 호흡을 골랐다. 자신 이 지쳤다는 것을 패닉에 빠진 저 멍청이들에게 들켜서는 곤란했다. 그는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억지로 지탱했다. “비켜.” 그는 태연한 승리자의 얼굴을 연기하며 아무렇지 않은 걸음걸이로 그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알렉스의 패배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그들 은 아무도 제지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카뮤가 지닌 기도는 사뭇 압도적이었다. 어쩌면 그에게 맥을 무력화 시킬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스치자 예안은 재빨리 명령했다. ‘쏴! 당장 쏴버려!’ ‘큰일입니다. 발사가 되지 않습니다.’ 맥도 당황하고 있는 듯 했다. 어이없는 상황에 그녀는 눈을 크게 뜨 고 발을 동동 굴렀다. ‘파일럿이 승선하지 않으면 전투 못한다는 그거 거짓말이잖아! 빨 리 쏘란 말이야!’ ‘발사가 되질 않고 있습니다. 명령 시냅스에 문제가 발생한 것 같 습니다. 라이플 버스터가 말을 듣지 않고 있습니다.’ 당황한 예안의 얼굴을 흘끗 바라보며 카뮤는 여유롭게 웃었다. 그의 전신은 새빨간 불꽃과도 같은 오오라에 덮여 있어 마치 신의 강림을 연상케 했다. “이 땅은 신이 우리에게 허락한 최후의 성지. 이 땅에서 날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엔젤.” 그의 어투는 어느새 오만에 가까워져 있었다. “맥이 아무리 강하다 하나 결국 그 무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전자 신호를 중간에 차단해버리면 그만, 지상세계는 몰라도 이 땅에서 그 것을 해내는 것은 병아리 목을 비트는 것보다 쉽죠. 아쉽군요. 지상 세계였다면 당신이 날 누르고 의기양양해하는 걸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피하십시오!’ 맥이 경고하자 예안은 앞뒤 잴 것도 없이 앞으로 무작정 뛰었다. 전 신이 마비된 맥은 제어력을 잃고 그대로 쿵 하고 떨어졌다. 맥은 필 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카뮤의 에날도스에 전자신경회로가 차단당한 탓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하마터면 맥에 깔릴 뻔했던 예안은 숨을 고르며 주위를 살폈다. 그 녀는 의아함과 당혹함이 교차된 눈으로 카뮤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그가 바람을 일으켜 자신을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맥에 깔 려죽었을 것이다. “고, 고맙군요. 고철덩어리 부하에게 깔려죽은 바보 주인이 될 뻔 한 것을 막아줘서.”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농담이 나옵니까? 저는 지금 손가락 하나 도 움직일 수 없단 말입니다!’ 맥이 투덜거렸지만 그녀는 무시해버렸다. “그런데 어떻게 맥을 떨어뜨린 거죠?” “별거 아닙니다. 허락된 성지에서 이 정도도 하지 못해서야 아틀란 티스 제국의 황태자라 할 수 없지요. 분명 맥은 강하지만, 이 땅은 나의 영향이 크게 미치는 곳입니다. 물론 이곳이 아니라 지상세계에 서 싸웠더라면 내가 꼼짝없을 당했을 테지요.” 굳은 얼굴이 된 그녀는 자신만만해 하는 카뮤와 고철덩어리로 전락 해버린 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믿었던 맥이 무능력자보다 더한 신 세로 전락한 지금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탈출할 길은 요원했다. by eden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새창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42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mutation ......................3일을걸쳐..읽었습니다... 한마디로 굉장하군요.... 감격했습니다.. ;ㅁ; 아아~~~ ;ㅁ; 건필하시길... (_ _ 꾸벅 10-15/02:12 코코로의악마 크헉 .....윈도우탑재...엑스피로 업글하죠 ㅡ.ㅡㅋ 글픽 5700으로 ㅡ.ㅡㅋ;;;슈퍼맥으로 업글해야해 ㅜ ㅜ 10-12/20:34 darksoldier 점점 예안이가 재롱을(?)많이 피우는거 같네요^^ 귀여워요 10-12/20:04 뇨뇨뇨에바다뇨!! 윈도우의 파란화면이 떠오르는구려.... 10-12/20:03 공부타오 푸하하 예안 존나 귀여워..ㅋㅋ 10-12/15:17 染花 윈도우 탑재에 올인..-_- 10-12/13:22 케라시스 ㅡㅡ;; 파멸의 버스터가.... 거의 데미갓급의 힘이네...... 10-12/13:15 滿月 =_+; 예안이 또 시집 가겠어요 어떻게 해바요!!!! 10-12/10:44 데빌크로우 결국 맥도 윈도우를 탑재했(탕!) 10-12/08:22 산바위 윽...얼마전부터 실탄님이 좀 이상해진듯...아니.. 예안이가 이상해졌나..?? 10-12/00:51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43 회] 날 짜 2004-10-15 조회 / 추천 1100 / 23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만 년의 갈망 느긋한 걸음걸이로 예안에게 다가가던 카뮤는 순간 강한 살기를 느 끼고 멈칫했다. “꼼짝 말고 손들어.” 뒤에서부터 차가운 목소리가 들리자 카뮤는 태연히 돌아보았다. 니 콜라스가 한 손으로는 총을 겨누고 한 손으로는 에너지탄을 발사하 려 준비하고 있었다. “알렉스가 졌나?” “내가 이겼다. 생각보다 강하지 않은 남자였지.” “태연한 척 하지 않아도 좋다. 그대가 지금 몹시 힘들어하고 있는 건 피부색깔만 봐도 알 수 있으니.” 정곡을 찔렸지만 니콜라스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어린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정교한 마인드 컨트롤이었다. 카뮤는 기특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절제 능력이 아주 강하군. 도저히 어린 꼬마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야. 그것은 역시 그대가 엘리우스이기 때문에 그렇겠지?” “그 더러운 이름으로 날 부르지 마. 난 엘리우스가 아니라 니콜라 스 베르노다.” “사양하지 않아도 어차피 그대를 엘리우스라 불러줄 수 있는 시간 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대의 생명은 혁명이 완성되는 순간에 고귀 한 매개체로 소멸할 테니까.” 죽인다는 말보다 섬뜩한 어조였다. 니콜라스는 처음으로 감정이 꿈 틀하는 반응을 보였다. “전하!” 저쪽에서 유나와 유하가 달려와 카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다는 멘트는 삼가라. 지금은 눈앞의 적을 어떻게 처 리할 것인가가 최우선 과제다.” 유나는 이를 악물며 일어났다. 니콜라스에게 공격당했던 등이 욱신 거렸지만 참을 만했다. 아니, 참아야만 했다. 유하가 걱정스러운 얼 굴로 언니를 부축했다. 둘은 카뮤의 앞을 보호하듯 막아섰다. 스르릉하고 검이 칼집에서 뽑히는 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니콜라스 는 총구의 방향을 카뮤에게서 유나에게로 옮겼다. “꽤 심하게 다쳤을 텐데 누워 있지 그랬어?” “그 정도로 쓰러질 언니가 아니야! 감히 우리를 속인 대가를 톡톡 히 치르게 해주겠어, 엘리우스!” 유하는 두 손에 빛 에너지를 모으며 이를 악물었다. 살벌한 그 시선 을 니콜라스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었다. “널 건드리지 못해서 아쉽군. 그랬다면 지금쯤 넌 내 좋은 꼭두각 시 인형이 되어 다른 녀석들을 방해하고 있었을 텐데.” “닥쳐!” 조롱 아닌 조롱에 유하는 화를 벌컥 내며 에너지탄을 쏘았다. 니콜 라스는 황급히 에날도스를 엷게 퍼트려 방어막을 만들었다. 유하가 발사한 에너지탄은 방어막에 간단히 가로막혀 소멸되었다. “각성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에날도스를 다루는 능력이 우수 하군. 과연 마기를 지닌 자다워.” 카뮤는 칭찬하는 어투로,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소롭다는 얼굴을 한 채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손안에서 거대한 에너지 구체가 형성 되어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미성숙한 엘리우스 따위가 이 몸을 이길 순 없지.” 에너지 구체는 카뮤의 손을 떠나 니콜라스에게 날아갔다. 강력한 파 괴력을 감지한 니콜라스는 받아치지 않고 옆으로 뛰어 피했다. 그는 재빨리 예안에게 달려갔다. “어딜!” 때를 놓치지 않고 조그만 에너지탄이 그의 이마를 노렸다. 유하가 발사한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것을 피했다. 그리고 잽 싸게 예안을 안아 올렸다. “각오해!” 유나의 몸이 허공에 솟구쳤다. 그녀의 검이 흰 무지개를 그으며 니 콜라스의 정수리를 향해 쇄도해갔다. 그는 손바닥에 힘껏 에날도스 를 응축했다. 그리고 그녀의 검을 움켜쥐었다. 카강! 쇠와 바위가 부딪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놀랍게도 칼날을 잡은 그의 손에서는 전혀 피가 흐르지 않았다. “이, 이런….”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당황한 유나는 급히 에너지탄을 응축해 쏘 려 했다. 그러나 니콜라스의 동작이 더 빨랐다. “꺄악!” 초고속으로 압축된 에너지탄에 어깨를 얻어맞은 유나는 비명을 지르 며 쓰러졌다. 어제 그에게 당했던 등의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 은 상황에서 무리를 했으니 어쩌면 패배는 당연한 것이었다. “언니!” 놀란 유하가 서둘러 달려와 유나의 몸을 살폈다. 니콜라스는 다섯 손가락 끝에 각각 구슬 만한 에너지탄을 응축해 바닥을 향해 힘껏 발사했다. 흙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흙먼지 가 자욱히 일어났다. 그 틈을 타서 니콜라스는 예안을 안고 그대로 달아났다. “괜찮나?” 달아나는 니콜라스를 쫓지 않고 묵묵히 바라보던 카뮤는 유하에게 물었다. “언니는 괜찮아요. 그런데 태자 전하, 엘리우스를 쫓아가지 않으실 건가요?” “어차피 다시 이곳으로 오게 돼 있어. 맥이 우리 손에 있는 한.” 카뮤는 시체처럼 쓰러져 있는 거대한 맥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웃 었다. “헤이저들을 시켜서 맥을 철저히 감시하라고 해라. 엔젤과 엘리우 스는 반드시 맥을 회수하러 올 것이다.” “예.” “엘리우스와 엔젤이 나타나면 함부로 공격하거나 반격하지 말고 나 를 불러라. 엘리우스가 지닌 힘을 보아하니 5대 대신 둘 이상 힘을 합치지 않으면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예.” 카뮤는 쓰러진 맥에 다가가 금속 표면을 소중한 듯 쓰다듬었다. 손 바닥에 와 닿는 차가운 감촉이 조만간 혁명이 이루어질 것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기분 좋게 그 감각을 즐기던 카뮤는 소풍을 마친 사람 처럼 기지개를 켜며 황궁으로 들어갔다. 엔젤과 엘리우스가 아틀란티스 대륙에 잠입했다는 소식은 아틀란티 스인들에게 강한 혼란을 일으켰다. 바깥 세상과 이곳을 이어주는 통 로는 오로지 게이트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엄격하게 관리되는 게이트 를 어떻게 엔젤이 이용할 수 있었는지 그것을 놓고 귀족들 사이에서 는 의견이 분분했다. 곧바로 대륙 전체에 비상망이 걸렸다. 황궁 깊은 곳에 숨겨진 게이 트 주위로 물샐틈없는 경비망이 강화되었다. 엄청난 인력이 동원되 어 넓은 황성 벽을 바깥에서 촘촘히 포위했다. 미국에 주둔하고 있 는 제나르 등을 포함한 세력도 미국 산지에 위치한 게이트 관리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엔젤의 침투 문제 때문에 대륙 전체가 술렁이는 가운데 집으로 돌아 온 마크는 예안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아버지의 말에 소스라치 게 놀랐다. “아직 오지 않았단 말이에요?” “그래. 어떻게 된 거야?” “그럴 수가…. 분명히 먼저 돌아간다고 했는데….” 혹시 길을 잃은 게 아닌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마크는 잔뜩 걱 정스런 얼굴이 되었다. “아, 아무튼 찾아봐야겠어요!” 서둘러 집을 나선 마크는 평소 예안에게 집적거리던 친구들은 물론 이고 주변 이웃들에게까지 그녀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한결 같이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잔뜩 초조해진 마크는 처음 예안을 만났던 강가에까지 나가 보았다. 평소 그녀가 자주 가던 뒷산에도 올라가 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허탈한 기분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반겨준 것은 황성에서 갓 날아온 통지였다. 내용인즉슨 엘리우스를 본격적으로 체포하는데 필요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헤이저 시험을 오늘 저녁으로 앞당 겨서 치르겠다는 것이었다. 통지서를 읽고 난 마크는 그것을 손에 쥔 채 구겼다. 눈을 감고 예 안을 걱정하던 그는 할 수 없다는 얼굴로 아버지에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전 황성으로 돌아가 봐야겠어요.” “아니, 왜?” “헤이저 시험을 오늘 저녁으로 앞당겨서 치른대요. 엘리우스를 체 포하는데 아무래도 인원이 많이 필요한가 봐요.” “그렇구나. 잘 해라.” “네. 걱정 마세요.” 마크는 예안이 쓰던 방을 흘끗 돌아본 후 집을 나섰다. 불길한 기분 이 가슴을 살짝 적시고 있었지만 그는 별것 아닐 거라고 애써 자신 을 납득시켰다. by eden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새창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43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리아카센 예안이가 등장을 안했..(쿨럭;) 어서 나오렴 예안아아 ♥ 10-18/19:53 †兒孩† 훼훼훼훼 10-17/15:26 자카스 역시 슈퍼 맥으로 진화했어야-_-;; 10-17/11:36 神流 캬~! 진짜 양 많다. 이거 끝나고 2부 언제 연재 할까.. 10-16/17:52 染花 오오오....-_- 흥미진진한 스토리../ㅅ/ 10-16/17:37 Di-Ti-Mi 음, 맥이 어서 환골탈태를 해야하는데-_- 10-16/16:19 天下 허... 새로 만드는건가요?! 맥 맥을 못추다;;; 10-16/15:37 mutation 건필하세요오오 ;ㅁ; 10-16/15:28 esik ,,,, 맥이. 구려진거야. 흐흐. 새로운걸 만들어. 흐흐<<<- 10-16/09:24 칼바위 맥;;;;;; 맥없이 깨지다..... 이건가;; 10-16/03:05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44 회] 날 짜 2004-10-18 조회 / 추천 1149 / 25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만 년의 갈망 차가운 담벼락 위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벽돌로 만들어진 담 한 쪽은 어둠에 천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예안은 멍한 눈으로 어둠에 잠식당하는 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는 이윽고 두근거림이 조금 잦아든 가슴에 살짝 손을 올렸다. ‘뭐였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조금 전 자신의 반응을 떠올렸다. 바드로 3세 가 껴안았을 때 느꼈던 기묘한 안도감. 그것이 과연 진실한 자신의 의지였는지 아니면 누군가 - 예컨대 마더 같은 - 의 개입이었는지 혼란스러웠다. ‘마더야. 틀림없어. 마더야.’ 조마조마하게 가슴을 옥죄며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누구보 다 유젤을 소중히 여기고 독점하고 싶어하는 자신이 다른 남자의 품 에서 포근함을 느꼈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마더는 카뮤에게 나를 하사하려 했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다. 그녀 는 자기암시를 걸듯 멍한 눈빛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아직 시스템 링크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맥은 인간이었다면 풀죽었다 느껴졌을 어조로 사과했다. 예안은 조금 정신이 돌아온 눈빛으로 말했다. ‘네 잘못은 아니야.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너는 아무도 못 건드리는 최강이라고 하지 않았어?’ ‘무력은 최강이지만 저의 몸체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두뇌에 해당하 는 중앙 컴퓨터의 제어를 받아 움직입니다. 전자신경망을 통해 전기 자극이 흘러 각 부분에 명령을 내리는 거지요. 헌데 바드로 3세는 에 날도스로 그 신경망의 중간을 차단했습니다. 무협 식으로 말하자면 혈도를 짚인 거지요.’ 이 녀석은 무협지에 심취한 게 틀림없어. 전혀 즐겁지 않은 상황이었 지만 예안은 그만 작게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영영 못 움직이는 거야?’ ‘현재 복구 로봇을 가동시켜 막힌 부분을 뚫고 있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뚫을 수는 있을 듯 합니다.’ 황성 정원 구석에 계속 몸을 숨긴 채 그녀는 니콜라스가 돌아오기만 을 기다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 왁자지껄하게 자신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따금씩 그들이 이곳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휘감아왔다. 그러나 그녀는 이곳에 있으면 들키지 않을 거라 는 니콜라스의 말을 믿고 몸을 움츠렸다. 이윽고 니콜라스가 돌아왔다. “어디 갔다 온 거야?” “탈출 루트하고 이 성 구조를 좀 알아봤어.”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건데?” “탈출해야지. 내일 당장.” “어떻게?” 니콜라스는 불안함에 찬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 혔다. 이곳에는 그녀의 품을 독차지하는 아기도 없다. 그녀와 자신만 이 있다. 그녀는 지금 오로지 자신만을 믿고 있다. 그는 왠지 어깨가 으쓱해졌다. “외곽 지역까지 탈출하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듣자하니 여기는 바닷속이라던데? 현재로서는 지상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맥 을 타지 않는 이상은 말이야.” “끄응….” 결국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맥을 회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허 나 맥을 찾으러 돌아간다는 것은 호랑이 아가리에 자진해서 머리를 집어넣는 것보다 위험한 일이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간에 일단 부딪쳐 보는 수밖에. 내일 녀석들에게 쳐들어가서 맥을 되찾을 거야.” 니콜라스는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단호하게 중얼거렸다. “이길 수 있겠어? 그 황태자라는 남자 장난 아니게 강해 보이던데? 그리고 상대는 한둘이 아니잖아?” “그래도 해봐야지. 별 수 없잖아. 일단은 오늘 새벽에 몰래 움직여 볼 생각이야. 바깥으로 도망친 흔적을 만들어놓고 왔으니 아마도 성 안은 수비가 허술하겠지.” “그런 단순한 트릭에 속을까?” “속기를 기도해야지.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 예안은 문득 레이온이 도와줬으면 하고 생각했다가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언제부터 자신이 그에게 의지하고 싶어했는지 당혹스러울 정 도였다. ‘바보 같은 생각하지 마, 유진우. 따지고 보면 형도 네 적인 거 몰 라? 누구도 믿어선 안 돼. 절대 안 돼.’ 그녀는 의미 없는 꾸짖음을 속으로 토로하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레이온이 있었으면 많은 의지가 됐을 거라는 아 쉬움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네 시간 정도 후에 움직일 테니까 누나도 좀 자둬.” “너는 안 자?” “나는 누가 오나 안 오나 감시해야지. 보통 사람이 다가오는 건 잠 자고 있어도 기척을 감지할 수 있는데, 누나도 알다시피 여기 놈들은 보통 놈들이 아니니까.” 니콜라스는 마땅히 할 일을 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안은 그에 게 강한 고마움을 느꼈다. “이리 올래? 안아줄게.” “응?” 적잖이 당황한 그는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말 했다. “하도 기특해서 안아주려고 그래. 싫으면 말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던 니콜라스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품을 파고들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녀의 품이었다. 향긋한 향기가 전신을 감싸왔다. 온몸이 나른해지는 듯했다. 그는 수 줍은 듯 몸을 살짝 비틀며 아기곰이 어미 품을 파고들듯 조금 더 깊 게 그녀의 품을 파고들었다. 예안은 니콜라스를 껴안은 채로 눈을 감았다. 아기를 껴안고 있을 때 와는 사뭇 다르면서도 몹시 닮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모성애인지도 모른다. 조금 우스웠다. 아이까지 낳고 이렇듯 달콤한 모성애에 취한 채 유젤의 흉내를 내고 있는 현 실은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스릴이 있었다. 「수술 따위는 하지 않았어.」 순간 자신을 비웃으며 그렇게 말했던 레이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녀는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왜 이렇게 기분 좋을 때 갑자기 그런 '거짓말'이 떠올랐는지 짜증이 확 치솟았다. “누나.” “응?” “저기… 있잖아.” “뭔데? 말해 봐.” 어려운 질문인 듯 망설이던 니콜라스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도 젖 한 번 주면 안 돼?” “….” 그녀의 침묵을 화가 난 것으로 해석한 그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무슨 이상한 뜻으로 부탁한 거 아냐. 그 기분이 어떤 건지 알고 싶 어서 그래. 전에도 말했지만 잃어버린 기억을 깨우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경험들을 많이 해보는 게 좋댔어. 그래서… 그래서 그런 것 뿐 이야….” 풀죽은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화났다면 미안해. 그냥 못들은 걸로 해.” “좋아.” “응?” “좋다고. 좋다니까.” 니콜라스는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끄덕이는 그녀를 놀란 눈으로 올 려다보았다. 이윽고 그의 얼굴이 밝게 변했다. “대신 딱 한 번 만이다. 나중에 또 해달라고 하면 안 돼.” “으, 응!” 그는 몹시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윗옷을 벗었다. 브래지어까지 벗자 탐스러운 가슴이 새 하얗게 드러났다. 니콜라스는 풋풋한 두근거림에 사로잡힌 얼굴로 그녀의 가슴을 바라 보았다. 얄미운 유빈이 고놈이 혼자 독차지하고 나눠주지도 않던 것 이었다. 그는 동생의 사탕을 뺏는데 성공한 형처럼 신나하는 얼굴로 살며시 젖꼭지를 물었다. “….” 묘하게 들뜬 분위기가 그들 사이에 흘렀다. 그것은 은밀한 밀어의 속 삭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동생에게서 엄마의 품을 뺏은 형 같은 얼굴로, 그녀는 오랜만에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듯 어색한 눈길로 가 장 편한 곳을 더듬고 있었다. 그 둘의 모습은 신의 사랑을 받은 조각 가가 조각한 여신과 아이처럼 성스럽고 자애로워 보였다. ‘간지러워.’ 유빈과는 다르게 힘찬 기세에 예안은 상당한 간지러움을 느끼고 얼 굴을 살짝 찌푸렸다. 이윽고 그가 입을 떼고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밝게 웃었다. “고마워, 누나.” 그녀는 살짝 부끄러운 얼굴로 옷깃을 여미었다. 그는 평온한 얼굴로 그녀의 옆에 앉아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정말 고마워, 누나.” 뭐가 고맙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진심으로 무언가를 고마워 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끔은 성모마리아 흉내를 내는 것도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장난스러운 미소를 띄운 그녀는 그의 어깨에 팔 을 두르며 말했다. “다음 번에 또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넌 특별히 내가 아들로 삼 아줄게.” “그럼 나 이제부터 엄마라고 불러야 되는 거야?” “그러고 싶으면 그러든가.” “에이, 그래도 그건 싫어. 누나한테 해가 되잖아.” “마음대로 해. 마음대로.” 그녀는 장난스레 킥킥 웃었다. 그도 킥킥 웃었다. 그들은 친혈육보다 스스럼없이 즐겁게 소리 죽여 웃으며 서로의 체온에 의지한 채 밤을 보냈다. 마음의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것은 언제 겪어도 즐거운 일인 것 같았다. by eden 에덴 : 희소식입니다! 우리의 서예안양이 드디어 쇼타의 길에 온몸을 던지겠다고 공언해왔습니다!!! 자랑스러운 쇼타코머의 길을 걷기로 한 우리 서예안양을 우리 모두 박수로 축복해줍시다!! (끌려간다) 실탄 : 저 녀석의 헛소리는 잠시 접어두고, 소엄의 전개에 대해서 여 러 모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는 듯 하여 이참에 몇 가지 설명 을 드릴까 합니다. 현재 소엄은 이야기 중반부의 종결부분쯤에 도달해 있습니다. 서예안 이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무사히 탈출하고, 양자 컴퓨터(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 참 오랫동안 안 나온 듯;)로 인하여 발생한 한국 vs 미일 중 전쟁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밝혀지게 됨으로써 중반부가 종결하고 후반부로 돌입하게 됩니다. 후반부로 돌입하게 되면 초반부에서 중반부로 넘어왔듯이 1년 정도 의 타임 스킵이 있을 수도 있으나, 그것은 이야기 전개에 가장 적당 한 시간을 정해 제가 차후에 조정할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1년을 넘 어갈 일은 절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에덴 : 우와! 우와! 실탄은 역시 언제 봐도 진지해! 실탄 : 네 녀석이 바보 같은 거야. 내가 왜 널 탄생시켰을까.orz (기침 한 번) 에덴이 누군가 하면, 19살이던 당시 제가 아담의 상처 를 온라인상에 처음으로 연재했을 때 사용한 닉네임입니다. 에덴 : 실탄의 본모습이지요∼ 꺄아악∼ 실탄 : 보시다시피 저렇게 철이 없는 녀석이니 이해하고 넘어가 주시 기 바랍니다. 폭풍 : 내가 보기엔 둘 다 거기서 거기요.ㅡ,ㅡ; 실탄 :......... (삭제공지) 이번 주에 소엄 1, 2권이 <천사의 성지>라는 타이틀을 달고 책으로 나옵니다. 거참,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제목 한 번 참 잘 지었다고 생각합니다.(어디선가 한기가;;;) 따라서 책이 나오는 그날 1, 2권 분 량에 해당하는 부분, 즉 1화에서부터 61화까지 삭제 들어갑니다만, 어차피 이 공지를 보시는 분들에게는 아무런 해당이 없는 거겠죠?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새창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44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유시르네온 제발 서점에 있길! 10-30/23:08 세리즈어스 아항~ 아까 책방에서 본 천사의 성지가 님 꺼였어요?! 오호라~ 몰랐는데 - 0-ㅋㅋㅋ 10-24/20:22 『둥이』 에...에덴이 누군지 궁금했었는데;;;실탄님 쇼타버젼인가!!!(두둥!!OTL) 10-22/21:00 말많네 아.어디 출판인지 갈쳐주세염.. 10-22/20:44 말많네 개인지가 아닌 책으로 나오는건가요? 10-22/20:43 Di-Ti-Mi 으엌엌, 어찌되었든 축하드립니다!< 10-21/20:06 희랑(曦朗) ...... 미중년과 로리가 극강인데.. 개인지든 뭐라든, 기분 좋네요 10-21/00:18 mutation 꺄아아아 +ㅠ+ 건필하셔요 +ㅠ+ 10-20/22:14 아사에델 레즈에 쇼타까지라... 므흐흣한 분위기 ^^ 10-20/18:03 esik 아하~ 쇼타구나[..] 예안양. 쇼타구나.쇼타구나.쇼타구나~[방긋방긋] 10-19/18:35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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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45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悲緣愛歌 어어 봤어요 제목이 달라져서 순간 움찔... 결국 사버린..-_-;;; 10-25/21:54 위선의폭풍 ~~~ 화이팅 10-23/21:59 엘베루시아 책이 나왔다고 하기에(근데 왜 전 못 봤는지 모르겠군요;;;) 왜 모르신다는거죠?@_@ 작가님이 계약하고 펼치는거아닌가; 말뜻을 이해를못했다는;; 10-23/19:06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46 회] 날 짜 2004-10-23 조회 / 추천 1079 / 19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구원의 손길 차를 따르자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제시는 미리 조그 맣게 썰어놓은 과자들을 접시에 담아 쟁반에 올렸다. 그녀는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쟁반을 들고 세현의 방으로 갔다. “드세요.” “고마워.” 세현은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과자도 하 나 집어 입에 넣었다. 입맛이 없었지만 그는 억지로 씹어 삼켰다. “한국은 지금 어때?” “유럽의 도움을 받아 대서양에서 열심히 맥 수색 작업을 벌이고 있 지요. 하지만 아직까지 맥이 발견되지는 않았어요.” “미국 움직임은?” “처음에는 신중하게 지켜보다가 며칠째 맥이 나타나지 않으니 파괴 되었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나 봐요. 일본 근처에 대기시켜놓은 함 대를 곧 출항시킬 모양이던데요. 빨리 무슨 수를 쓰지 않으면 한국은 쑥대밭이 될걸요.” 침대 위에는 각종 뉴스 잡지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잡지들은 하나같이 미국과 한국의 관계가 어디까지 치달을 것인가를 특종으로 다루고 있었다. 태반은 근거 없는 상상에 기반해서 쓰여진 것이었다. 하지만 맥이 끝 내 발견되지 않는다면 미국이 이대로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것은 불 을 보듯 뻔했다. 세현은 그동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양 심은 무조건 예안을 도우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두려움은 함부로 민 족을 배신할 거냐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잠시만요. 길렌 씨에게서 전화가 왔네요.” 밝은 얼굴로 통화하던 제시의 안색은 전화가 길어질수록 점점 어두 워졌다. 이윽고 전화를 끊은 그녀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제임스. 절대 놀라면 안 돼요?” “무슨 일인데?” “엔젤, 그러니까 서예안씨가 대륙에서 붙잡혔대요.” 세현은 뛸 듯이 놀랐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예안이가 왜 대륙에 있어?” “그러니까 놀라지 말라고 한 거예요. 수폭에 맞아서 대서양에 떨어 진 엔젤이 왜 대륙에 있는 거죠? 아… 어쩌면 우연찮게 다른 통로를 발견해서 들어갔을 수도 있겠군요.” “다른 통로라면…?” 짚이는 것이 있었던 세현은 고개를 숙이고 쓴웃음을 지었다. 신, 아 틀란티스 대륙을 바다 아래로 가라앉힌 존재. 그 신이 이 사태에 개 입하기라도 한 것일까? 제시는 차분한 얼굴로 세현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씨근덕거리는 숨 을 가라앉힌 세현은 제길, 하고 벌떡 일어났다. 창문을 활짝 열자 농 도가 짙어진 더운 바람이 침실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제 곧 가을이 오는 것이다. 가을이 껑충 다가온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세현은 민족 안에서 자신 이 차지하고 있는 의미를 생각했다. 비굴함에 얼룩져 있는 의미를 아 프게 곱씹었다. 터트릴 방도를 찾지 못한 울화가 미칠 듯이 속에서 들끓었다. “일단 왜 예안이가 대륙에 있는지는 접어두자. 그래서, 지금 황태자 는 걜 어떻게 했대?” “맥을 포획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쉽게도 엔젤은 놓쳤다는군요. 그 리고 니콜라스라는 그 청부업자 남자애와 같이 있다는데요?” “니콜라스?” 세현의 눈빛이 일순간 흔들렸다. 제시는 그의 눈동자에서 어떤 불안 함을 엿보았다. 그는 자기암시를 통해 억지로 그 불안함을 외면하고 있었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지워버리듯이. 제시는 왜 그가 니콜라스라는 이름에 그렇게 강한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싶었다. ‘수호자?’ 순간 니콜라스가 수호자가 아닐까 생각했던 제시는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바보 같은 생각이다. 엘리우스의 충실한 부 하이자 호위의 숙명을 맡은 수호자는 자신뿐이었다. 세현은 길게 탄식하며 창문을 닫았다. 시끄러운 경적 소리가 한층 잦 아들었다. 그는 금고를 열어 몇 개의 서류를 꺼냈다. 건조한 눈동자로 서류를 건성으로 넘기던 그는 또다시 탄식했다. 그는 어딘가로 전화했다. 심각한 이야기를 한참 동안 했다. 그리고 다시 서류를 정리했다. 그가 비밀금고에 숨겨두었던 묵빛 디스크까지 꺼내들자 제시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뭘 하려는 건데요?” “기자 회견을 부탁했어. 두 시간 뒤에 나가봐야 돼.” “기자 회견을 해서 뭐하려고요?” “보면 알아.” 제시는 팔짱을 낀 채 조금 불안한 눈으로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어요. 당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세요.” 이대로 도망쳐서 그녀와 결혼하고 사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일순 세현의 뇌리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곧바로 예안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지금까지 그는 여자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단정은 예안과 처음 대면한 그 순간부터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그녀는 언젠가 꿈에서 보았던 여신의 거룩한 실루엣과 대단히 흡사했다. 인간은 아름다울 수 없는데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 는 틈만 나면 그 까닭을 생각했지만, 아무리 골몰해도 알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지금 그럴 걸 생각할 때가 아니야, 차세현.’ 차세현은 그의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제임스 해론은 그가 태 어났을 때 한 늙은 아틀란티스 대부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는 제임 스라는 이름보다 차세현이라는 이름을 더욱 사랑했다. 하지만 혁명을 염원하는 민족과 함께 하는 순간에는 그 이름을 쓸 수 없었다. 맥이 수폭에 맞은 후 식음을 전폐하고 고민했던 지난 며칠 간의 마 음 고생이 주마등처럼 그의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과연, 이제부 터는 사용하고 싶은 이름을 마음껏 쓸 수 있을 거라는 속삭임이 좋 은 보상이 될 수 있을까. 이제 과거와 이별할 시간이다. “이따위 것을 알아내서 뭘 어쩌려고!”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이 국내에서 기자 회견을 청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국정원으로 흘러 들어갔다. 실종된 맥과 더불어 강하 게 한국을 압박해오는 강대국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고 있던 중현 은 그 소식을 가져온 부하의 머리에 보고서를 집어던지려 했다. 그러 나 부하가 곧바로 덧붙인 말에 안색이 싹 바뀌었다. “그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사실입니다.” 놀랍게도 기자 회견을 가지기로 한 인물은 15살 때 MIT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천재이자 현직 교수였다. 게다가 그의 전공 중 하나가 컴퓨터 공학이라는 사실은 중현에게 강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불완전한 양자 컴퓨터는 MIT에서 개발된 것이었다. 기자 회견을 가 지는 인물은 MIT에서 근무하는 젊은 천재 교수였다. 전공도 일치했 다. 그렇다면 혹시? 생각할 것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중현은 기자 회견 장소를 찾았다. 미리 그의 명령을 받은 요원들이 철통같은 감시망을 형성하 고 있었다. 천재 소년 교수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중현은 한몫 잡았다 는 얼굴로 서성거리고 있는 기자들을 바라보다 눈살을 가볍게 찌푸 렸다. “현재까지 제나르 의원과 그 주변인물들을 상대로 엄중한 조사를 해보았습니다만 이렇다할 수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하지. 제나르 의원은 오랫동안 미국 정부에도 그 사실을 숨겨 온 능구렁이란 말이야. 고작 몇 달 조사한 거 가지고 꼬투리를 잡아 낼 수 있을 것 같나?” “그렇지만 이상한 점은 하나 있었습니다.” “뭔가?” 부하는 사진기를 꺼내들고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기자들을 흘끗 바라 보고는 말을 이었다. “쉐난도우 벨리의 상당한 면적이 제나르 의원의 소유로 되어 있습 니다. 제나르 의원은 일반인의 통금을 일절 금지시키고 있다 합니다. 아예 산맥 주위를 높은 철조망으로 에워쌌다고 하는군요.” “그거 수상하군. 가능하면 조를 짜서 침투시켜보도록 해.” “국정원이 무슨 델타포스입니까? 그런 건 국방부에 의뢰해야죠.” “그럼 국방부에 의뢰하면 되잖아. 지금 시국이 얼마나 급박한데 이 것저것을 따지고 있게 생겼어?” “그걸 의뢰하면 장관님 허가를 거쳐 대통령 승인을 받아야 할 겁니 다. 제 권한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니까요.” 날이 갈수록 입심만 늘어가는 젊은 부하를 지그시 노려보던 중현은 이번 사태가 무사히 수습되면 곧바로 부하들 군기부터 잡으리라고 단단히 결심했다. 이윽고 큰 키의 조금 여윈 듯한 소년이 들어왔다. 아직 청년이라고 하기에는 앳된 용모를 지닌 소년이었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임스 해론은 철학가로서도 과 학자로서도 굉장히 유명한 인물이었다. MIT가 한국 대학에 그를 뺏 기는 게 싫어 온갖 수단을 써가며 언론의 눈과 귀를 막았다는 소문 이 돌 정도였다. 또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철학관을 다진 그는 여러 개의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철학서를 펴내기도 했다. “어렵게나마 이 자리에 모여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세현은 다소 지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단상 뒤 한쪽 구석에서는 제시가 홀가분하면서도 걱정스런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누 구의 시선도 그녀에게 쏠려 있지 않았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현재 MIT의 전임 교수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또한 안티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철학 사상을 여러 차례 발표한 제임스 해론이라는 철학가로 알려져 있기도 하죠.” “아무리 젊은 혈기라지만, 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저명한 분 께서 이런 자리에서 안티 휴머니즘을 운운하셔도 되는 겁니까?” “인간을 한 차례 부정함으로써 보다 높은 단계의 긍정을 재고찰한 다는 게 제 신념입니다. 어차피 그 말을 한 건 저 자신을 소개하려는 의도에 불과합니다. 본론을 꺼내려고 하는 찰나에 엉뚱한 질문을 하 시는군요.” 가볍게 무안을 당한 기자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입을 다물었다. 세현은 다시 정면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 자리를 빌어 여러분들에게, 아니 전세계에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밝히려고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한국인 기자 여러분들뿐 만 아니라 전세계 저명한 언론 기자분들도 와 계십니다.” 과연 그 말대로 한국 기자보다는 백인이나 흑인 기자들의 숫자가 훨 씬 더 많았다. “이 자리가 파하고 난 뒤 세계 패권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상 상하는 것은 실로 두렵기만 합니다. 그만큼 제가 여러분들에게, 아니 전세계에 발표하려는 것은 범인이 상상도 못할 만큼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수척한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느릿느릿한 말투는 사람들의 마음을 휘 어잡는 묘한 힘이 있었다. 기자들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고뇌로 창백 하게 물든 세현의 안색을 주의 깊게 살폈다. “저는 작년 4월부터 MIT에서 획기적인 성능의 양자 컴퓨터를 비밀 리에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전쯤 현존하는 모든 전산망 을 깨뜨릴 수 있는 성능의 양자 컴퓨터를 개발했습니다.” 기자들은 소리 없이 경악했다. 어떤 기자들은 서둘러 수첩을 꺼내어 세현이 방금 한 말을 백지 위에 휘갈겨 썼다. 녹음을 하거나 영상을 비디오필름에 담는 이도 있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세현이 말한 양자 컴퓨터가 전쟁의 시발점이자, 미국이 배상하라고 요구하는 양자 컴퓨터 설계도와 깊은 관련이 있 음을 예감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깊은 정적 속에서 그들은 세현 의 입이 다시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짐작하시겠지만 현재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강탈한 뒤 폐기했다는 양자 컴퓨터 설계도는 제가 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맥이나 유전으 로 그것을 배상하라는 미정부의 요구는 부당한 것입니다. 왜냐면 그 설계도는 불량품이니까요.” “불량품이라고요?” 분위기가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웅성거리며 세현에게 온 갖 질문들을 던졌다. 세현은 어느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소란이 가 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본적인 설계 자체가 잘못된 양자 컴퓨터입니다. 고전 컴퓨터와 호환할 경우 데이터 전송에 있어 필연적으로 오차가 발생하게 되죠. 하드웨어 원리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에 어떤 소프트웨어를 동원한다 해도 절대 수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 양자 컴퓨터가 지닌 결함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미정부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유전을 내놓으 라고 한국을 닦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자들은 일제히 둔기로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싸늘한 정적 이 홀을 에워싼 가운데 한 미국인 기자가 크게 충격 받은 얼굴로 더 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그것이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미국의 톰 존슨 교수에게 전화를 걸 어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제임스 해론의 이름을 대고 말이지요.” 몇몇 기자들이 서둘러 폰을 꺼내 본국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홀 안은 순식간에 기자들의 통화 소리로 시끌시끌해졌다. 경악과 혼란, 불신이 그들의 눈동자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MIT측은 결국 세현 의 말이 사실이라고 시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현이 강단에서 내려오자 제시가 웃으며 다가왔다. “수고했어요. 큰 결심을 하셨군요.”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됐지. 이제부턴 제시가 날 좀 잘 보호해줘 야 돼.” “걱정 말아요. 5대 대신 둘 이상이 뭉쳐서 오지 않는 한 전부 다 때 려눕힐 수 있으니까.” 세현은 픽 웃으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지금쯤 이 사실을 안 앤슨은 이를 바득바득 갈 것이다. 오스카는 아마도 크게 분노할 것이다. 마 리오는 당장 그를 처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지도 모른다. 십수 년의 인연은 이렇게 쉽게 절연되었다. by eden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새창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46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네코~♡ 책으로 나왔군요 >ㅁ< 으음... 사야할텐데..;;; 또 여기저기 예산을 줄이려니 머리가 아프네요 ;ㅁ; 11-04/02:19 반야, ㅎㅎㅎ. 실탄님, 이름 알았다. 책 표지 보니깐, 보이는 군요. 늦었지만, 출판 축하드립니다. 주말에 서점 한번 가야겠군요. 10-26/07:33 산바위 통금을 일절 금지 => 통행을 일절...이 맞을 듯 싶네요. 통금(通禁)자체가 통행금지. 10-25/15:41 바--보 책 보니깐 프롤로그가 바꼈더군요.. 레이온에서 엔드류였나? -_-; 남주인공이 바뀐건지..ㅋ 10-25/09:11 빈이아빠 축하드려염^^아상부터 소엄까지 근 5일정도 컴만 보구 잇네요 ㅡ.ㅡ;;눈이 아릿하다는....;;; 10-25/00:41 darksoldier 다시한번 출판 하신거 축하 드립니다^^ 항상 건필 하세요 예안이 파튕!@ 10-25/00:17 darksoldier 실탄님 출판사하구 권당 가격좀갈켜 주세요 사야하기 때문에.;; 10-25/00:17 뮤리빈 오오! 축하드려요 실탄님 10-24/19:10 Eyes_ 개인지에 더 눈길이 가는 이유는~_~ 10-24/14:50 루리두리 공포탄님의 소설 "소녀여 아빠가 되라"도 볼만합니다.. 패러디. 10-24/13:24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47 회] 날 짜 2004-10-26 조회 / 추천 1058 / 16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구원의 손길 한일전쟁, 한미전쟁의 시발점이 된 양자 컴퓨터를 개발했다는 MIT의 현직 교수 제임스 해론의 기자회견이 알려지자 세계는 다시 격동하 기 시작했다. MIT와 백악관에는 매일같이 그게 사실이냐는 질문이 빗발치듯 쏟아 졌다. 중국은 슬금슬금 내보이려던 발톱을 황급히 숨겼다. 일본은 처 음부터 속아넘어갔던 것이라고 땅을 치고 통곡했다. 한국을 상대로 전투대기 중이던 미해군은 목표의식과 사기를 한꺼번에 박탈당했다. 미국은 결함투성이 양자 컴퓨터를 고의적으로 한국에 밀어 넣은 뒤 맥이나 유전 둘 중 하나를 차지하려 한 몰상식한 국가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세계는 이 세기적인 대(大)사기 사건에 대해서 한국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관심 있게 주시했다. 한국이 미국과 일본 에 어떤 보상을 요구할지를 놓고 언론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미국은 무의미한 전쟁을 그만둬라!" "정의를 수호한다는 나라가 이 무슨 개사기극이냐! 카네기 정권은 물 러가라!" 한국은 거리마다 미국을 조롱하는 시위가 빗발쳤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도 그 기세에 합세했다. 심지어, 조국이 역사에 길이 남을 사 기를 벌였다는 자책감에 괴로워하며 시위에 참가하는 미국시민들까 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카네기 정 권은 이제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필히 선택해야만 하는 운명에 처했 다. 모든 비난을 감수하고 이제라도 수습하는 것과, 세계와 자국의 언론을 무시한 채 이대로 전쟁을 강행하여 한국을 군사적 식민지로 만드는 것. 제임스 해론 교수의 발표가 있은 후 카네기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두 문불출한 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미국에 대한 세계의 조롱과 불신 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짙어졌다. 탁. 신문을 내던지듯 탁자에 놓은 오스카는 조롱하는 얼굴로 앤슨과 마 리오를 훑어보았다. "잘하는 짓이다. 앤슨 경, 마리오 경." 오스카는 한껏 비웃는 어조로 말을 꺼냈다. "앤슨 경. 나는 그대가 이번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부터 그래도 그대는 생각이 있는 인물인 줄 알았다. 헌데 이게 뭐지? 설마 자네가 계획했던 시나리오에 이 부분 까지 들어 있었다고 말하진 못하겠지?" 싸늘히 오스카를 노려보며, 앤슨은 대답했다. "철저히 저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스카 경은 지금 사태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셨습니까?" "미국에 개망신을 줘서 한국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한국 내에서 엔 젤의 입지가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더욱 엔젤을 붙잡는 게 힘들어진 다는 것도 모르나?" "엔젤이 지금 대륙에 있다는 것은 오스카 경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엔젤은 두 번씩이나 우리 손을 빠져나갔다. 세 번이라고 해서 못할 것은 없지."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자신감에 찬 앤슨의 눈동자를 비웃듯 바라보던 오스카는 창문을 향 해 등을 돌렸다. "자네 계획이 무엇인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일단 한국 내에서 엔젤 을 영웅화시키는 것이겠지." "…눈치채셨군요. 클랙 대신님도 모르시고 있던 것인데 말입니다." "자네가 생각하는 거야 훤하지." "어쨌든 제 의도가 무엇인지 안다면 저를 비난할 이유가 없지 않습 니까?" "자네 의도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자네는 무작정 한국의 손을 들어주는 데만 급급해서 일을 지나치게 틀어지게 했다는 거야. 지금 상황에서 미국이 한국을 상대로 전쟁을 계속할 의지를 품을 거 라 생각하나? 전쟁이 지속되지 않는다면, 적어도 미국이 한반도에 미 사일 한 방이라도 때려 넣지 않는다면 비싼 돈을 들여 이 전쟁을 기 획한 게 무효가 돼버린단 말이다." 앤슨이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줄 몰랐던 마리오는 조금 놀란 눈으 로 그를 보았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앤슨은 대답했다. "계속하게 만들어야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카네기 정권은 곧 실각할 거야. 한국을 어르기 위해서 미국인들 스스로가 카네기를 권좌에서 끌어내릴 걸세." 오스카는 커다란 조롱의 미소를 지으며 앤슨을 노려보았다. 앤슨은 그의 눈빛에 굴복하지 않은 채 반박했다. "애초에 이 정도 변수는 발생할 거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전쟁을 계속하게 만들 계획은 이미 완전하게 짜놓았습니다. 오스카 경은 전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켜보겠어." 자신감에 가득한 앤슨의 눈동자를 묵묵히 바라보던 오스카는 이번에 는 마리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앤슨 경은 그렇다 치고. 마리오 경, 제임스를 관리하는 건 자네 소 임이 아니었던가? 자네는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해치웠기에 제임스가 저딴 발표를 하게 가만히 내버려둔 건가? 아무리 자네와 앤슨 경이 삐걱하는 사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시국에서 양자 컴이 가짜였다는 게 밝혀지면 죽 쒀서 개 주는 꼴이라는 것도 몰랐나?” 마리오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한 채로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자 신감에 넘치는 앤슨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세현의 배신을 막지 못 한 것은 전적으로 마리오 그 자신의 책임이었다. "어떤 변명도 듣고 싶지 않네, 마리오 경. 지금 당장 부하들을 보내 서, 아니지, 아니야. 제임스의 곁에는 제시가 있지. 당장 자네가 직접 부하들을 데리고 가서 반역자 제임스 해론을 붙잡아오게. 이것은 명 령이야." "오스카 경은 명문가의 자제이기는 하나 지위상으로는 우리와 동급 입니다. 마리오 경에게 함부로 이런저런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는 아닙니다." "앤슨 경은 그 잘난 입 닥치고 있게. 그렇지 않으면 이번에는 정말 자네 팔 한 짝이 달아날지도 몰라. 내가 지켜보겠다고 해서 기고만장 한 건가?" 앤슨이 분노를 담은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오스카는 비웃기만 할 뿐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 건가? 그깟 에날도스가 조금 강하다고 해서 이 나를 함부로 공격하기라도 할 건가?" "…죄송했습니다, 오스카 경." "앞으로 다시는 이런 불경을 저지르지 말게. 뭐하나, 마리오 경? 지 금 당장 제임스를 잡으러 가지 않고?" 자존심 상한 얼굴로 오스카를 노려보던 마리오는 이를 부드득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꼴도 보기 싫으니 빨리 사라지게." 심호흡을 하며 오스카를 내려다보던 마리오는 비웃는 그의 눈빛을 참지 못하고 문을 거칠게 열며 서재를 나섰다. "박사는 철저히 감시하고 있나?" "예." "내 그럴 줄 알았어. 자네는 여전히 바보짓만 하고 있군." 앤슨은 크게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반박했다. "무슨 뜻입니까?" "도대체 왜 박사를 감시하고 있지? 1초라도 빨리 박사를 죽여버리지 않고?" "무슨… 뜻입니까? 지금 박사를 죽이면 혁명은 한 발자국 더 멀어집니다." "어차피 이미 엔젤이 탄생된 이상 박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오 히려 해만 될 뿐이야. 자네는 박사가 언젠가 우리를 배신하리라는 것 도 모르고 있었나?"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알고 있다는 사람이 일처리를 그따위로 하나? 지금이 박사가 우리 를 배신할 최적기라는 것도 계산 못하느냔 말이다." 앤슨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얼굴로 오스카를 보았다. 오스카는 한심하 다는 얼굴로 한 묶음의 보고서를 내밀었다. "박사는 이미 오래 전에 언제든 한순간에 모든 자금망을 은닉할 준 비를 마쳐 놓았다. 그리고 며칠 전 박사 개인 소유의 비밀기지를 은 밀하게 가동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박사는 아직 우리의 자금을 필요로 합니다. 하 필이면 지금 이 타이밍에 배신할 리가 없습니다." "자네 부하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정보 수집에는 정말 멍청하군. 박사 는 이미 세계적인 장기밀매 사업을 통해 막대한 연구자금을 고정적 으로 벌어들이고 있다. 그것도 몰랐나?" 불신의 눈으로 보고서를 훑어보던 앤슨은 그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 는 증거를 보고 조그맣게 신음했다. "이런 대규모의 장기밀매 사업을 도대체 어떻게…? 대량으로 인신매 매를 한다면 당장 세계적인 문제가 될 텐데…." "인신매매 따위를 하지 않고 박사 본인이 직접 '재배'해서 판매하니 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 알겠나?" "재배…를 한단 말입니까?" "박사 정도의 천재라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지. 자네는 꽤 머리가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 "죄송합니다. 이만 일어나야겠습니다."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모멸감을 참으며 앤슨은 정중히 인사하고 일어났다. 서재를 나서는 앤슨의 등뒤에 대고 오스카는 다시 빈정거 렸다. "어쩌면 박사라면 게이트를 통하지 않고 대륙으로 들어가는 방법도 알고 있을지 모르지. 우리의 보금자리가 쑥대밭이 되지 않도록 빨리 서두르게." 입술을 깨물며 서 있던 앤슨은 문을 닫자마자 부리나케 뛰었다. 쓸만 한 정보 몇 가지를 먼저 손에 넣었다고 거들먹거리는 오스카가 죽이 고 싶을 만큼 미웠다. 하지만 그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고 자신이 나 태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당장 박사를 찾아라!" "예? 박사를요?" "그래! 지금 당장!" 부하들에게 당장 레이온의 소재를 파악하고 체포하되, 필요하다면 사 살도 무관하다는 지시를 내린 앤슨은 피곤한 얼굴로 정원에 나가 햇 볕을 쪼였다. 산책하고 있던 제나르 대신이 앤슨을 보고 다가왔다. "피곤해 보이는군." "아, 대신님. 어쩐 일이십니까?" "내 아들 녀석 때문에 앤슨 경과 마리오 경이 몹시 고생하고 있군. 아들을 대신해 내 사과하지." 제나르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앤슨은 기겁하고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대신님께서 사과하실 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오스카 경의 말도 실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저와 마리오 경의 불찰입니다." "원래 그렇게 지독한 아이가 아니었건만, 언제부터 저렇게 변해버렸 는지 모르겠네. 이게 다 독한 에미를 만난 탓이겠지…." 제나르는 혹독한 수업으로 아들을 길러낸 부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씁쓸한 얼굴을 했다. 아들이 에날도스에는 별다른 재능이 없다는 것 을 그녀가 조금만 일찍 깨닫고 마음을 돌렸어도, 아들은 저렇듯 차가 우리만치 냉정한 전략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네가 기뻐할 소식이 하나 있네." "무엇입니까?" "맥을 포획하는데 성공했다는군."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앤슨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아니, 어떻게 그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하신 모양이야. 맥의 무력 자체를 봉쇄한 것은 아 니고, 신경 회로를 흐르는 전기 신호를 차단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 드셨다는군." "대단하군요, 황태자 전하는…." "대단한 분이시지. 그러니 이렇듯 우리 모두가 충성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가슴을 피던 제나르는 문득 병중에 누워 있는 황 제 바드로 2세를 떠올리고 다시 우울한 얼굴을 했다. "이제 엘리우스와 프린세스를 잡아들이는 것만 남았어. 프린세스는 현재 ESP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데다가 엘리우스는 아무리 마기를 지녔다고는 해도 단 혼자야. 내 생각에는 아마도 황태자 전하께서 나 서실 필요 없이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을 것 같군." "그렇겠지요. 그런데 대신님은 어째서 엔젤을 꼬박꼬박 프린세스라고 부르시는 겁니까?" "머지 않아 존귀한 황후가 되실 분인데 당연한 것 아닌가. 나는 엔젤 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프린세스라고 부른다네." "황후라고요?" "놀라기는. 황태자 전하와 프린세스가 맺어지면 황후가 되지 않겠나." 앤슨은 놀랐다기보다는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엔젤을 마음에 들어하시고 계십니까?" "그건 모르지. 허나 전하께서 프린세스를 한 번이라도 보신다면 아마 도 그리 될 거라고 생각하네. 프린세스는 그만큼 강하게 사람을 끌어 당기는 매력을 갖춘 여자지." 과연 엔젤에게 그 정도의 매력이 있는지 앤슨은 생각해보았다. 그러 나 그가 그녀와 조우했던 경험이라고는 바다 건너 전파를 통한 한 통의 전화가 전부였다. "아들 녀석에게 들었네. 박사는 처음부터 우리를 신뢰하고 있지 않았 다고?" "그렇습니다. 애초에 엔젤을 두 번이나 탈출시킨 사람은 바로 박사였 습니다. 박사는 배짱 좋게도 엔젤이 쏜 총에 스스로 맞아가면서까지 그녀를 탈출시키려 했지요." 제나르는 짧게 탄식했다. "박사도 어리석은 짓을 했군. 그렇게 프린세스를 원했다면 차라리 하 나를 더 복제했으면 됐을 것을…." "엔젤은 두 번 이상 복제할 수 없다고 합니다. 첫 번째 복제 작업도 신의 허락이 있었기에 간신히 성공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신의 허락?"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신의 장난에 놀아나고 있는 겁니다. 일만 년 전 우리를 그 어두운 심해에 가두었던 신은, 엔젤을 복제할 수 있 도록 허락함으로써 재미있는 장난을 치고 있는 겁니다." 제나르는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앤슨의 분노한 눈동자를 보았다. 앤 슨이 신에 대해 무슨 생각을 지녔는지 알고 싶었으나, 천천히 고개를 저으면서 그 욕구를 지워버렸다. 신이 어떠한 의도를 지녔는지 따위는 알 필요도 없다. 대륙의 영광을 지상에 다시 한 번 재현시킬 수만 있다면 무엇이 어떻게 되든 간에 상관없었다. 그것이 제나르의 소망이었다. by eden 10월 29일부터 10월 31일까지(3일간) 드림워커 작가대전 독자 투표 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른바 로또 식으로 해서 1등부터 6등까지 가장 많은 연참을 하는 순서대로 작품 순서를 독자들이 뽑는 것이지요. 그리고 대회가 끝난 후에 알아맞춘 독자에게는 상품이 있다고 하네요. 자세한 것은 드림워커(클릭 http://drwk.net) 에 가셔서 이벤트란 공지를 보고 참조하세요. 아직 이벤트 투표를 안 받는 모양이지만, 며칠 후에 공지가 올라갈 듯 싶습니다. 예. 이쯤되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채셨겠지요. 1등을 노리고 당연히 저도 이번에는 참가합니다. 시간도 널럴한 때겠다, 비록 한 달 간이지만 다시 불타는 예전의 저 로 돌아가겠습니다. 에덴 : 그럼 도대체 1부 개인지는 언제? 닥쳐.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47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슬픈영혼의랩소디 실탄님 제가 요새 유조아 뜸 한걸 아시고 책을 내셨네요 -_- 그런식으로 유조아에 로긴 해서 리플달게 만드시다니 대단ㅋ 10-30/19:33 오타의제왕 책....봤습니다. -_-;; 제목이 '천사의 성지' 더라구요. 그리고.. 실탄님 실명도 봤구요 ㅎㅎ;;; 10-30/12:18 위선의폭풍 엥? 실탄님 이름은 아주 아름답고 여성스럽고 두루루루루두둥이엇는데?(김태민이란 이름은 남자답잖아!!) 10-28/13:11 위선의폭풍 실탄씨T.T 왜 책이 영풍문고에 없는 고에요?(인터넷 오더를 안 즐기는 폭풍의 한마디)(그거나 그거나의 주인공 폭풍 ) 후리리 10-28/13:11 드아르나크 출판삭제를 하신다는 공지를 본후 '출판전에 한번 더보자'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처음부터 또 다시 읽었습니다. 다시 읽으니 이해안되던 부분들중 어느정도 이해가 되더군요. 10-27/21:52 뽀까리 "닥쳐"라는 한마디에 에덴이 울면서 뛰쳐나가지 않을까요? 모쪼록 부드러운 가정교육을;; ㅋㅋ(진지) 10-27/11:01 칼바위 출판축하 10-27/02:39 木卜弓師 축하드려요. 책 꺼풀 보니까 멋지게 나왔더라구요.. 10-26/23:56 마르티어스 연참이 기대되요 10-26/23:21 유링-★ 베리 굿~ 10-26/21:25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48 회] 날 짜 2004-10-30 조회 / 추천 987 / 15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구원의 손길 - 상품 이벤트 서로의 체온에 의지한 채 자고 있던 니콜라스와 예안은 날이 밝자 눈을 떴다. 니콜라스는 신중한 얼굴로 주변에 인기척이 있는지 없는 지를 면밀히 점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눈 떠가는 능력은 다른 이의 목숨을 지배할 범위도 함께 넓혀주었다. "이쪽이 제일 사람이 없어." 니콜라스는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누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게 좋겠어. 위험할 테니까." "황태자… 이길 수 있겠어? 그냥 맥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을까?" "어느 세월에? 앞으로 삼일은 더 있어야 회복된다며?" 맥은 황태자가 전자신호의 흐름을 에날도스로 차단한 것 정도는 금 방 해제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오였다. 복구로봇을 총 동원시켜가며 끙끙대던 맥은 결국 삼일은 더 있어야 되겠다고 말을 정정했다. '고물 같으니.' '그러니까 제가 환골탈태만 했더라면 이깟 점혈쯤은 그냥 가볍게 풀 수 있다니까요.' '시끄러, 고물.' 평소에 마구 휘젓고 다니던 녀석이 이상한 공격을 당해 옴짝달싹도 못하게 된 것이 가엾기는 했다. 녀석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볼까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언제 들킬지 모르는 판국에 녀석의 말대로 삼 일 동안 계속 이렇게 황궁 안에 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최선의 방법은 니콜라스가 황태자를 제압해서 맥을 해방시키도록 하 는 것이었다. 과연 니콜라스가 이길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지만 현재 로서는 그 방법 외에는 없었다. "그럼 갔다 올게." "응. 몸조심해." 예안은 살짝 손을 흔들어주고는 덤불 뒤로 다시 몸을 감췄다. 작정하 고 뒤진다 해도 이 넓은 황성 구석에 숨어 있는 그녀를 쉽사리 찾아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컨디션을 점검한 뒤 총을 꺼낸 니콜라스는 사람들의 인기척이 드문 곳만을 골라 빠르게 달렸다. 가끔씩 상당한 전투능력을 지닌 이들이 감각에 잡혔지만 그는 무시했다. 현재 최우선으로 노려야 할 목표는 바드로 3세 황태자였다. "엘…!" 본성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 두 명이 니콜라스를 보고 놀라서 외치려고 했다. 니콜라스는 그들의 입이 떨어지기 전에 잽싸게 방아 쇠를 당겨 그들의 미간에 총탄을 박아 넣었다. 그들은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르고 사망했다. 그는 재빨리 본성으로 들어갔다. 한 번 왔던 곳이라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바드로 3세가 어떤 환자를 간호하고 있던 침실로 향했다. 그 환 자는 바드로 3세의 아버지쯤으로 보였으니, 그를 인질로 잡는다면 목 적을 이루는데 한결 수월할 수 있었다. 복도 모퉁이를 도는 순간 커다란 칼을 찬 두 남자가 나타났다. 니콜 라스를 보고 잠시 주춤하던 그들은 얼른 칼을 빼들고 달려들었다. 칼 끝에는 파르스름한 기운이 맺혀 있었다. 총탄이 날아왔지만 그들은 총구의 각도를 통해 총탄의 궤도를 재고 칼등으로 막았다. "제법이군." 니콜라스는 빠른 스피드로 한 명의 등뒤로 돌아가 뒷목에 대고 방아 쇠를 당겼다. 남자는 비명도 못 지른 채 즉사했다. 동료의 죽음에 분 노한 다른 남자는 얼굴이 시뻘개진 채 앞뒤 재지도 않고 달려들었다. "흥분하면 지는 거야." 핀잔주듯 말한 뒤 니콜라스는 발차기로 그의 손등을 차 칼을 떨어뜨 렸다. 그의 팔을 꺾어 힘차게 복도 바닥에 힘껏 내동댕이친 뒤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미간에 총탄을 맞은 그는 눈을 감지도 못하고 사망했다. 손을 툭툭 턴 니콜라스는 한결 여유 있는 얼굴로 황제의 침실을 찾 아갔다. 가는 도중 꽤 적지 않은 숫자의 병력이 가로막았지만 그의 상대가 될 순 없었다. 멀리서부터 강한 힘을 지닌 자들이 달려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 만 그는 시종일관 태연했다. 이대로라면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황제 의 신병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마침내 침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까지 죽인 그는 두 손으로 태연히 문을 열어 젖혔다. 그의 등뒤에서는 혈향과 더불어 진한 화약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결국 왔군, 엘리우스." 어두운 침실에 서 있던 두 가녀린 실루엣이 살기를 품고 일어났다. 니콜라스는 황제가 여기에 없음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함정인가? 니콜라스 베르노가 이렇게 멋지게 속아본 건 정말 처음 이군." "함정이 아니다. 이미 위치가 알려졌으니, 위독한 황제 폐하를 비밀 장소로 모시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건 우리 뜻이야. 황태자 전하와는 아무런 관 련 없어." 유나와 유하는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나한테 죽고 싶었나? 정말 바보 같네. 몸도 성치 않을 텐데 말이야." 니콜라스는 차가운 총구를 그들에게 똑바로 겨누었다. 유나는 파랗게 빛나는 검을 똑바로 치켜세우고 그를 노려보았다. 유하는 여차하면 에너지탄을 발사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앞으로 15분이면 너희들이 믿고 있는 녀석들이 도착해. 하지만 그쯤 이면 충분하고도 남지. 너희들을 고문해서 황제가 어디 있는지 알아 내는 것쯤 말이야." 느릿느릿하게 말하던 니콜라스의 몸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번개같은 스피드에 일순 당황했던 유나는 재빨리 칼에 에너지를 모아 왼쪽을 향해 횡으로 힘껏 휘둘렀다. 챙! 가느다란 손가락과 칼이 부딪치며 금속의 타격음을 낳았다. 유나는 이를 악물었다. 에날도스를 갑옷처럼 응용하면 신체가 금속보다 단단 해질 수 있다고는 한다. 하지만 현재 자신은 에날도스와 가장 상성이 잘 맞는다는 오리할콘 재질의 검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에게 밀리는 것이다. "손가락 하나도 못 자르는 그런 칼을 어디다 쓰려고?" 조롱이 가득한 음성에 유나는 이를 악물며 검격을 펼쳐 나갔다. 니콜 라스는 그녀를 한껏 비웃으며 공격들을 남김없이 전부 피했다. 지켜보고 있던 유하는 언니를 도와주기 위해 재빨리 에너지탄을 응 축해 날렸다. 니콜라스는 손바닥을 펼쳐 그것을 막아냄과 동시에 유 나의 배에 발차기를 날렸다. 윽, 하고 주저앉은 유나의 뒷목에 차가 운 총구가 닿았다. "게임 끝이네. 항복해야지?" 한껏 조롱하는 어투에 유나는 이가 갈렸다. 조만간 카이저의 칭호를 받을 수 있을 만큼 막강한 자신이 아이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 이 너무 분했다. "말해. 황제는 지금 어디 있지? 그리고 황태자는?" "누가 그걸 말할 것…." 공기를 찢으며 발사된 총탄은 유하의 왼쪽 어깨에 맞았다. 유하는 외 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듯 몸을 숙였다. "황제는 어디 있지?" "차라리 죽여!" 분노에 찬 유나의 부르짖음이 미처 잦아들기도 전에 또다시 총알이 발사되었다. 유하의 오른쪽 어깨에서 상처가 터지며 피가 흘렀다. 유나는 동생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다음 번에는 왼쪽 다리, 그 다음은 오른쪽 다리, 마지막으로 심장이 다. 앞으로 네 동생이 죽을 때까지 두 번의 기회가 더 있는 거야. 황 제는 어디 있지?"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동생을 바라보던 유나는 눈 을 질끈 감고 외쳤다. "절대 말할 수 없다!" 탕! 불꽃을 튀기며 날아간 총알은 유하의 왼쪽 다리에 박혔다. 눈동자가 거의 풀려버린 유하의 몸이 바닥에 축 늘어졌다. 돌상보다 차가운 유 나의 눈동자가 애처롭게 흔들렸다. "황제는 어디 있지?" "엘리우스 너…." 유나가 이를 바드득 갈자 니콜라스는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유 하의 오른쪽 다리에서 다시 피가 튀었다. 사지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은 실로 처참했다. "이제 마지막 한 방이야. 황제는 어디 있지?" 유나는 울 듯한 얼굴로 유하와 니콜라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아무 말 도 하지 못했다. 한숨을 쉬던 니콜라스는 수도로 유나의 뒷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왠지 이 여자는 죽이기가 찜찜하던 말이야.' 기절한 유나의 몸을 바닥에 뉘인 니콜라스는 전신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유하에게 다가갔다. 지독한 고통이 뒤덮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하는 의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황제는 어디 있지?" "차, 차라리 죽여… 재키…." 유하는 숨이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불현듯 니콜라스는 가슴 한 구석 이 희미하게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멍한 얼굴로 심장의 고동을 어 루만지던 그는 의식을 잃어가는 유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창백한 뺨 위로 죽음의 숨결이 내려앉는 것을 보노라니 이상한 기분 이 들었다. 무감각 이외의 것을 그에게 느끼게 해준 인물은 지금까지 예안 밖에 없었다. 헌데 지금 그는 예안에게 느꼈던 것과는 사뭇 다 른 묘한 기분을 유하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넌 이대로 죽어선 안 되겠다." 니콜라스는 그녀의 상처 부위에 손을 얹고 정신을 집중했다. 파르스 름한 빛이 그의 손끝에 모였다가 상처로 흡수되었다. 피가 멎음과 동 시에 상처가 눈에 보이지 않는 느릿한 속도로 조금씩 아물어가기 시 작했다. 그전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능력을 언제부터인가 아무의 도움 없이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자신을 자각한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유하를 들쳐업었다. by eden 감상문 쓰기 이벤트를 하겠습니다. 기한은 11월 15일까지이며, 참여하시는 분 중 4분을 뽑아서 소엄(서명 - 천사의 성지)을 책이 나오는 대로 계속 족족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 다. (하지만 배송요금은 수신자 부담 택배로 합니다. 제가 정말 많이 가 난해서요.;;;) 감상문은 아무 편에나 달아주셔도 됩니다만, 제가 알아볼 수 있게 내 용 중에 <이벤트 참가>라는 말을 적어주시면 좋겠습니다.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새창 [추천] [비평/감상(3)]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48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까멩 오늘은 양이 좀 많네... 11-01/09:35 天魔上人 왠지 이 여자는 죽이기가 찜찜하던 말야(?) 찜찜하던인가요찜찜하단인가요????<ㅡ에에;;오타인거같,../땀 10-31/20:08 실탄 당첨된 3분에게는 1, 2권만 드리는 게 아니라 끝까지 다 드립니다. 10-31/16:03 반야, 그런건... 그런건.. 조만 일찍. 하시지.-_- 이미 사 버렸는데,.. 10-31/13:46 위선의폭풍 나도 사버렸는데. 흥 에덴냥을 돌려달라~(먼바다) 10-31/13:38 뇨뇨뇨에바다뇨!! ............... 10-31/11:50 아스트론 이번 이벤트를 참가할려고해도 천사의 성지를 오늘 사고야 말았기에....ㅠ.ㅠ 10-31/02:06 태양달그리고별 앨리우스가 2명이면 수호자도 2명인가요? 10-30/22:44 地獄門 엘리우스와 썸씽이 있던건가? 10-30/22:24 실탄 저기에 감상문 쓰기 버튼이 있습니다.; 10-30/22:18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49 회] 날 짜 2004-11-03 조회 / 추천 907 / 17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구원의 손길 뒤늦게 들이닥친 알렉스와 부하들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유나가 쓰러 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크게 놀랐다. 알렉스는 서둘러 유나에게 달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고통 스러운 얼굴로 간신히 숨쉬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다쳤으면 근신을 하지 않고 왜 여기 에 있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대신님…. 하지만 너무 분해서…." 이해했다. 조만간 카이저의 칭호를 획득할 자질이 있는 유일한 여전 자로서 그 높은 자존심이 한순간에 꺾였으니, 부상 따위는 눈에 들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부상까지 입은 몸으로 한 번 패배한 상대에게 다시 덤벼들 생각을 한단 말이냐!" 안타까움을 감추며 알렉스는 버럭 화를 냈다. 한 남자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대신님. 지금은 일단 유나를 의사에게 보이는 게 먼저인 것 같습니 다만…." 유나의 등에서 흘러나오는 심각한 출혈량을 보며 알렉스는 이를 바 드득 갈았다. 부하의 말대로 이대로 방치했다가 유나는 얼마 가지 못 하고 죽어버릴 것이다. "얼른 데려가서 의사에게 보여라. 빨리빨리!" "네!" 즉석으로 들것을 만든 두 명의 남자가 조심스럽게 유나를 싣고 서둘 러 달려갔다. 사라지는 유나의 모습을 침울한 눈으로 바라보던 알렉 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는 피와 화약 냄새가 니콜라스가 얼마나 강하 고 잔인한지를 여실히 말해주었다. 과연 엘리우스라는 이름값은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자리를 잘못 골랐다. 녀석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5대 대신 중 2명만 모여도 패배할 것이다. 더군다나 이곳 아틀란티스 대 륙에는 수천 명에 해당하는 헤이저들이 있었다. 니콜라스의 승리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엘리우스는 지금 황제 폐하를 노리고 있다. 분명 이 성 어딘가에 있 을 것이다. 서둘러 찾아내도록." "예!" 부하들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통증이 점점 아물어감에 따라 유하는 정신을 차렸다. 힘들게 눈을 뜬 그녀는 낯익은 방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먼지가 조금 쌓여 있는 잡동사니들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눈에 많이 익은 풍경이었다. 어렸을 때 숨바꼭질을 할 때마다 자주 숨어 들어오곤 했던 장소였던가? 조그만 천장을 힘겹게 올려다보던 그녀 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야…." 어깨가 시큰둥하게 저려 왔다. 송곳으로 후벼파는 듯 몹시 아팠다. 그녀는 눈물이 살짝 맺힌 채 상처를 보았다. 총탄이 뚫고 지나갔던 자리는 놀랍게도 치료가 되어 있었다. 불그스름한 멍 같은 게 살짝 남아 있기는 했지만. "이제 일어났어?" 어깨를 어루만지던 그녀는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일 으켰다. 무심한 표정으로 복도 쪽에 신경을 쏟던 니콜라스는 그녀의 어깨를 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일어나지 말고 누워 있어. 무리하다가는 상처 터진다." "너, 너, 너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원래부터. 네가 둔해서 눈치 못 챘을 뿐이야." 유하는 억지로 몸을 다시 뉘였다. 또렷이 내려다보는 니콜라스의 눈 동자는 아기처럼 순진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믿지 않았다. 자신을 취하려 했을 때 그는 태연 하게 저 순수한 눈망울을 연기했다. 죄책감이 전혀 깃들이지 않은 눈 동자로 자신을 쏘았다. 무심한 빛이 섞인 저 검은 눈동자는 세상의 풍파에 닳고닳은 살인자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었다. "날 어쩔 셈이야? 왜 여기로 데려 왔지?" "글쎄." "미리 말해두지만 난 황제 폐하가 어디 계신지 몰라. 안다고 해도 절 대 말하지 않을 거야." "널 고문하고 죽여도?" 칼이 들어온다 해도 입을 열지 않을 단호한 태도에 니콜라스는 살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전혀 살기가 깃들어 있지 않 았다. 그러나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 유하는 뿌리까지 숨결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그는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처럼 무의식적이고 사소한 동작 하나로 먹이감의 혼을 빼놓는다. 두려웠다. "전에 하던 거 계속 할까?" 그는 그녀의 가슴 안으로 태연히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는 놀라서 눈 을 흡 떴다. "너, 너…."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태연히 그녀의 몸을 더듬기 시작 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차가운 눈동자에 마비된 성대 는 명령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얼어붙은 몸은 전혀 반항할 생 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살기에 자극 받은 본능이 이성을 밀어내고 주도권을 쥐었다. 한 번 그의 무정함을 겪었던 육체는 짓밟히는 한이 있더라도 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가 손만 내민다면 그녀의 몸은 그녀의 의지를 거부하 고 그에게 교태라도 부릴 것이다. 살기 위해서. 입술이 부딪치며 강제로 혀가 엉켰다. 황홀한 죽음의 냄새가 그녀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멋대로 쾌락을 쫓아 달리려 하는 본능, 살고 싶어하는 육체의 의지를 채찍질하려 했다. 그러나 살기 위해 이성의 의지를 저버린 육체는 그의 통제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가는 두 팔은 어느새 그의 등 을 단단히 껴안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되었다. 흥분에 젖 어 반짝거리는 새하얀 곡선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숨을 헐떡이며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니콜라스는 욕정이 전혀 깃들이지 않은 무표정한 눈으로 그 녀를 보다가 가볍게 웃었다. "네 이름은?" "유, 유하 제스민…." "나이는 몇 살?" "여, 열 네 살…." "최면에 제대로 걸렸군." 그는 뿌듯했다. 역시 아무리 강한 정신 방어력을 지였다고 해도 육체 의 컨디션을 바닥까지 떨어뜨리면 최면에 걸린다. "황제는 어디 있지?" "모, 몰라…." "황제는 어디 있지?" "모, 몰라…." 괴로워하면서도 모른다고 부정했다. 최면에 걸렸다고는 믿어지지 않 는 완강한 거부였다. 그녀가 얼마나 강한 정신력을 지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입맛을 다시면서 다시 물었다. "죽고 싶은 건 아니잖아? 어서 말해. 그럼 편해질 거야."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일어났다. 동공이 풀린 채 그를 바라보던 유하는 숨을 헐떡이며 전신을 손톱으로 긁기 시작했다. 욕정을 주체하지 못 해 일어난 현상이었다. 니콜라스의 명령 때문에 그녀는 비명도 제대 로 지르지 못한 채 그렇게 몹시 괴로워했다. "마, 말할게! 말할 테니까 제발…." "제발 뭐?" "제, 제발 날 좀 어떻게 해줘…." 이성을 상실하기 직전에 놓인 그녀는 흐느끼며 말했다. 그는 됐다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앉았다.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이 그를 와락 껴 안았다. 몸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욕망의 화산은 이미 흘러 넘치 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느긋하게 그녀의 몸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황제는 어디 있지?" "지, 지하 1층 비밀 벙커에 있어…." "지하로 내려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데?" "이 방을 나서서 오른쪽을 돌아서 쭉 가면 입구가…." 뜨거운 애무에 황홀해하며 그녀는 이지가 반쯤 사그라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목적을 달성한 그는 그녀의 뒷목을 살짝 쳐 기절시켰다. 다시 일어나려던 그는 문득 멈추고 기절한 유하를 보았다. 자신보다 한 살 많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성숙한 몸이었다. 아마 2, 3년 만 더 지나면 꽤나 남자들 울릴 법했다. 그래봐야 누나한테는 상대도 안 되겠지만. 그는 불현듯 왜 자신이 그녀를 발가벗겼을까 고민했다. 최면을 걸 거 면 그냥 옷을 다 벗기지 않고 몇 번 애무함으로써 수치심을 심어주 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굶주렸나?' 여자에 대한 육체적 욕망, 그게 제일 타당했다. 마지막으로 여자를 안아본 것이 일 년이 넘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일찍 여자에 눈을 뜬 이 육체로서는 굶주릴 법하기도 했다. 그는 욕망이 쌓인 육체를 자신과 따로 분리하여 생각했다. 살인 청부 를 받은 목표 여성들을 강제로 취할 때조차도, 그 여자들을 안고 있 는 소년은 자신과 별개의 것이라 생각하곤 했다. 육체라는 것은 어차 피 껍데기에 불과한 게 아닌가. 그는 유하의 작은 가슴에 입술을 댔다. 욕정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 러나 여자를 원하고 있는 육체는 자신과는 별개의 것이었다. 그는 자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삶의 계약을 맺고 있는 동업자, 즉 육 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유하를 안으려고 했다. 그 순간 누나가 떠올랐다. 그렇다. 나는 지금 누나를 좋아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여자와 몸을 섞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두말 않고 유하에게 옷을 입혀주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가워 진 얼굴로 유하를 내려다보던 그는 방을 나섰다. '누나한테 한번 말해볼까?' 그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누나한테 같이 자자 소리 했다가는 아 마 크게 화를 낼 것이다. '지하 1층이라.' 그는 유하가 말한 장소를 향해 서둘러 뛰었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가 나왔다. 입구를 뛰어내려가자 긴 복도가 나 왔다. 천장에 촘촘히 박힌 야명주 덕분에 복도는 대낮같이 환했다. 저쪽에 철로 만들어진 굳건한 문이 보였다. 문 근처에서 열 명의 남자들이 지키고 서 있다가 니콜라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엘리우스!" 니콜라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의 오른손에 서 총신이 차가운 빛을 발했다. 기이한 살기가 흘렀다. 그들은 바짝 얼은 채 누구 하나 섣불리 공격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상대는 공명신수를 지닌 5대 대신 알렉스까 지 패배시킨 인물이었다. 그보다 훨씬 예전에는 제나르도 격퇴시켰다 고 하지 않았던가. 두려운 것이 당연했다. 이곳에는 5대 대신은커녕 카이저급도 없었다. 모두 니콜라스를 잡으 러 떠난 것이었다. 이곳에 투입된 병력은 만에 하나를 대비하기 위함이었지, 니콜라스가 쳐들어왔을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들은 니콜라스가 지하 벙커에 황제를 숨겼다는 사실을 알아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이다. 계산 착오였다. "모두 덤벼!" 주춤거리던 한 남자가 뇌호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용기를 얻은 다 른 이들도 칼을 뽑아들고 니콜라스에게 달려들었다. 총탄이 날아왔지 만 선두에 선 남자는 칼등으로 총탄을 튕겨냈다. "전기가 안 통하는 대신 강도는 무식하게 쎈 모양이네." 특수 제작된 권총의 총탄을 정통으로 맞고도 검신이 부러지지 않는 걸 보고 니콜라스는 농담조로 말했다. 선두에 선 남자는 있는 힘껏 칼을 들어 허공에 은빛 무지개를 그려냈다. 니콜라스는 총신을 칼날 에 비스듬하게 갖다대어 궤도를 흘림과 동시에 오른손으로 검신을 힘껏 잡았다. "크으윽…." 맨손의 적에게 칼이 잡혔다는 수치심으로 남자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니콜라스는 작게 비웃으며 손을 옆으로 힘껏 비틀었다. 챙강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이 부러졌다. 니콜라스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부러진 칼날을 앞으로 던졌다. 칼 날은 남자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사망했다. "제이크! 제이크!" 남자의 동료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친구의 죽 음을 확인한 그는 핏발이 선 눈으로 니콜라스에게 달려들었다. "죽어라!" 칼은 섬뜩한 파공음을 그리며 날아왔다. 그것을 피하자 반대쪽에서 또 날아왔다. 날아오면 피하고, 피하면 날아오고. 그렇게 몇 번을 반 복하자 니콜라스의 몸은 어느새 벽으로 몰리게 되었다. "죽어라, 제이크의 원수!" 남자는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칼을 높이 쳐들었다. 니콜라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남자는 동료의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 하며 칼을 내리쳤다. 챙강! 살가죽이 잘리는 소리 대신 돌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손 바닥에 쥐어진 얼얼한 느낌에 남자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눈 앞에 있던 니콜라스의 모습이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켈롭스! 뒤다!" "뭐라고?" 켈롭스는 뒤에서 날아오는 살기를 느끼고 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그 러나 벽에 박힌 검은 쉽게 뽑히지 않았다. 그는 흙빛이 된 얼굴로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검을 뽑으려고 했다. "바보로군." 니콜라스는 키득 비웃으며 주먹을 날렸다. 밑에서부터 힘껏 쳐 올라 온 조그만 어퍼컷은 켈롭스의 턱에 정확히 격중했다. 퍽! 턱뼈가 부서지며 뇌수가 튀었다. 도저히 소년, 아니 인간의 힘이라 볼 수 없는 파괴력이었다. 또 한 명의 동료가 사망하는 것을 본 남자 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다가 분노로 물들었다. "이, 이 자식! 엘리우스!" 두 명이나 동료가 죽었다. 크게 분노한 케인은 앞뒤 재지 않은 채 칼 을 들고 달려들었다. 분노가 가득 담긴 사나운 검세는 니콜라스가 주춤거릴 정도의 맹공 을 퍼부었다. 공기를 찢는 소리가 살벌하게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니콜라스는 섣불리 반격할 생각을 못한 채 그의 맹공을 피하는데 주 력했다. "죽어! 죽어! 죽으란 말이야!" 케인은 이성을 잃은 채 검을 마구 휘둘러대고 있었다. 공격은 강했지 만 허점 투성이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반격했다가 실수하면 이쪽도 크게 상처를 입을 것 이다. 니콜라스는 한결 느긋하게 피하며 허점이 좀더 커지기만을 기 다렸다. '큭!' 뭔가가 발에 걸렸다. 아까 죽인 남자의 팔이었다. 니콜라스는 하마터 면 중심을 잃을 뻔했다. 붕, 하고 크게 휘둘러진 검이 그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실날같은 핏자국이 미간에 새겨지며 머리카락 몇 올이 잘려 나갔다. 니콜라스는 다시 벽에 몰렸다. 케인이 분노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 다. 실수했다고는 하지만 저 한 명에게 이렇게 몰려버리다니. 니콜라 스는 창피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죽어라, 엘리우스!" 케인은 성급하게 노호성을 터트리며 크게 검을 휘두르려 했다. 그러 나 동료가 황급히 그를 말리고 나섰다. "케인! 안 돼! 엘리우스를 죽이면 안 돼!" "왜 안 된다는 거야! 이 녀석은 제이크를 죽였어!" "지금 엘리우스를 죽이면 혁명은 완성하지 못해! 다시 또 이십 년 동 안 이 지긋지긋한 해저 바닥에 민족들을 가둬놓을 셈이야!" 혁명이라는 말에 케인의 얼굴이 흔들렸다. 그때 케인을 말렸던 남자 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맙소사! 케인, 어서 피해!" 소스라치게 놀란 케인은 황급히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니콜라스의 손이 그보다 더 빨랐다. 은빛 검광이 만들어낸 궤적을 피해 케인의 가슴팍까지 파고든 곱고 작은 손은 피부와 근육을 찢고 들어가 심장 을 움켜쥐었다. "크…억…." 챙강.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케인은 동공이 풀린 채 숨도 못 쉬고 괴로워 하다 그대로 털썩 무너졌다. 구멍이 뚫린 그의 가슴에서부터 흘러나 온 피가 바닥을 적셨다. 그의 동료들은 불신감과 공포로 범벅이 된 얼굴로 그의 심장을 쥐고 있는 니콜라스를 바라보았다. 피칠이 된 니콜라스의 손에서 케인의 심장은 아직도 따뜻하게 뛰고 있었다. 그것은 악마의 형상이었다. by eden 폐인대전에 뒤늦게 합류합니다. 1일부터 지금까지 3권 마감하느라고 연재분량 글을 제대로 못 썼습 니다.(;;;) 내일 안으로 마감 끝내고 광참을 하려 합니다.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새창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49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네코~♡ 그러니까 플로피디스켓님의 말씀대로, 논리로 확실히 설정하기 모호한 존재인 이상, 개인적 견해차가 있겠죠. 근데 마치없던듯이님은 그 개인적인 견해차를 무시하고, 마치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듯이 말해서 문제가 됬다고 봅 11-17/11:11 기나긴여정 아아.. 내가 점점 철학자가 되어 가는구나.. (거참 달이 밝군.. 먼소리니 지금은 하연이라서 늦게 뜬단다...) 11-06/16:30 기나긴여정 지구는 인간만의 땅이 아닙니다. 강한자만이 살아 남을수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우뇌가 발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저 먹이 사슬의 하위권에 속한다는것을 명심하십시오 님들 (구체적으로 누구라고 하면 몰래 맞을듯..) 11-06/16:27 기나긴여정 다시 쓰기 귀찮아서 ㅡ _ㅡ.. 나무4개->나무4그루 11-06/16:23 기나긴여정 예를 들자면 아프리카 코끼리는 하루에 나무4개양의 나뭇잎을 먹습니다.문제인것은 그들이 먹고난후 배설물에서는 씨앗이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매년 아프리카는 벌목뿐만아니라 코끼리의 습성때문에10만톤씩나무들이 없어집니다. 11-06/16:23 기나긴여정 인간을 악마로 비유한것보다도 '악마는 인간이다.'라는 중심적 사상이 깊에 느겨진다는.. [먼산..] 만약 인간이 지구상의 악이면 지구상 모든 생물은 악입니다. 11-06/16:19 기나긴여정 냥~ 자기 자신보다 남을먼저 비난하는님을 보고 한말 뿐입니다. 전 마치없던듯이님이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것보다 우리를 보고 비난하는게 안타까울 뿐인겁니다. 11-06/16:16 플로피디스켓 마신이던지 악마던지 이런 것은 논리로 확실히 설정하기 모호한 존재가 아닙니까? 모두 개인적인견해차가 있는 거겠지요. 기나긴여정님하고 카르세아디르님들이 말도 안되는 비난을 하시는 듯 합니다만..... 11-06/14:00 카르세아디르 마치없던듯이 // 부족한 논리로 말도 안되는 비난은 삼가하는 게 좋겠지요. ㅡ.ㅡ; 마치없던듯이 님은 마신의 모습을 대체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궁금하군요. 11-05/23:07 기나긴여정 으음 마치없던듯이님은 남을 비판하는게 좋은건가요 ㅇ _ㅇ~ 그런 선입견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것입니다. 님은 자신은 그런적 없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님도또한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ㅇ _ㅇ? 이것을 자기중심적 사상이라고 하죵 11-04/22:04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50 회] 날 짜 2004-11-04 조회 / 추천 846 / 16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구원의 손길 피가 뚝뚝 흐르는 심장을 움켜주며 냉소하는 모습은 악마라 해도 믿 어질 정도였다. 헤이저들은 질렸다는 얼굴로, 그리고 분노한 얼굴로 니콜라스를 노려보다가 일제히 달려들었다. 분노에 사로잡힌 그들은 조직 공격의 초점을 잃어버린 채 마구잡이 공격을 펼쳤다. 니콜라스는 어렵지 않게 그들 사이를 파고들어 주먹 과 발길질을 날렸다. 푸른 빛이 감도는 주먹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한 명씩 윽, 하고 비명 을 지르며 쓰러졌다. 뼈가 함몰되고 살이 찢기는 소리가 피의 미학을 노래했다. "죽어! 죽어!" 동료들이 하나둘씩 쓰러져나가자 그들은 이제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저 조그만 녀석을 찢어 죽여야겠다는 일념만 이 그들을 지배했다. 대단히 만족한 미소를 지은 채 니콜라스는 하나하나 제압해나갔다. 흥분한 적을 상대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었다. 그는 피의 향기에 취해 반쯤 넋이 나간 채 그들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복도에는 피비린내가 흥건히 고였다. "으, 으아아…."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남자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을 치다 가 그만 넘어졌다. 니콜라스는 살기에 가득 찬 미소를 지으며 뚜벅뚜 벅 다가갔다. 피범벅이 된 손으로 남자의 목을 움켜쥔 그는 차갑게 킬킬거렸다. "여기에 황제 녀석이 있단 말이지? 그 건방진 황태자인가 뭔가 하는 놈의 아비가 있단 말이지?" "어서 죽여…. 크윽!" 한 손으로 남자의 목을 비튼 니콜라스는 경련을 일으키는 시신을 벽 에다 내던졌다. "말 안 해도 죽이려고 했어." 차가운 눈으로 문을 응시하던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두 손으로 문을 활짝 열었다. 안의 풍경을 본 그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척 보기에도 약해 보이는 시녀들이 바짝 긴장한 채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마지막 반항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굳이 죽이지는 않아." 타이르듯이 말하던 니콜라스는 침대 위에 꺼져 가는 미약한 기운이 숨쉬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시녀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성큼성 큼 침대로 걸어갔다. 침대에는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한 노인이 누워 있었다. 가늘게 눈 을 뜨고 있는 걸로 보아 정신을 차리고 있는 듯 했으나, 죽음의 기운 이 뒤덮고 있는 안색은 금방이라도 꺼져 버릴 것 같았다. 노인이 걸 치고 있는 수수하면서도 고급 재질의 잠옷은 그가 보통 신분이 아님 을 말해주었다. "당신이 황제인가 뭔가 하는 사람인가?" 힘겹게 얼굴을 돌리며 니콜라스를 올려다보던 노인은 크게 놀란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에, 엘리우스…." "그래. 당신들은 날 보고 엘리우스라고 말하더군. 하지만 당신 같은 사람들이랑 동족이라는 건 썩 내키지가 않는단 말이야. 그러니 그 이 름은 사양하겠어." 니콜라스는 차가운 총구를 노인의 이마에 갖다 댔다. 시녀들이 비명 을 터트리며 어쩔 줄 몰라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당신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어. 하지만 나하고 누나의 안전을 위해 서 잠시 인질이 돼줘야겠어. 일이 끝나면 고통 없이 죽여줄 테니까 걱정은 안 해도 돼." 선심 쓰듯 말하던 니콜라스는 저 멀리서부터 커다란 기운들이 황급 히 다가오는 것을 감지했다. 황태자와 그 부하들인 모양이었다. "당신 아들이 오는 모양이군. 하지만 이미 늦었어." "에, 엘리우스…." "왜, 더 할 말이 있나? 목숨 구걸만 빼고 뭐든지 말해 봐." "아냐. 엘리우스…. 너는… 너는…." 목소리는 너무 미약해 잘 들리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짜증스런 얼굴 로 황제의 입에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또렷하게 들렸다. "너는… 너는 엘리우스가 아니야…." "뭐?" 니콜라스는 황당한 얼굴로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쇠약한 기운을 담고 있는 늙은 눈동자는 전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카뮤가 들어섰다. 그의 뒤에는 적개심으로 가득한 눈을 한 정예들이 있었다. "미쳤구나, 엘리우스. 순순히 투항해도 용서해줄까 말까인데 이렇게 많은 전사들을 죽이다니." "네놈들의 용서 따위는 거저 줘도 안 가져." 니콜라스는 무뚝뚝하게 말하며 벽에 대고 총을 한 방 쏘았다. 총알은 황제의 얼굴 바로 위를 스쳐 지나갔다. 황제의 얼굴에 희미한 혈선이 그려지자 카뮤는 크게 분개했다. "무슨 짓이냐, 엘리우스! 당장 총을 버려라!"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야 할 건 너희들이야. 지금 당장 무릎 꿇지 않 는다면 황제의 목숨은 없어." 카뮤는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니콜라스는 무심함에 가까운 덤덤한 얼굴로 그의 시선을 받아냈다. 침 넘어가는 소리까지 들릴 커다란 침묵이 방안에 흘렀다. 분노한 시선으로 니콜라스를 쏘아보던 카뮤는 얼굴에서 살기를 거두 고 입을 열었다. "너만 인질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라, 엘리우스." "무슨 뜻이지?" "한스. 엔젤을 모셔 와라." "예." 시종일관 덤덤하던 니콜라스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헤이저들 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길을 트자 그 사이로 예안이 어쩔 줄 몰라하 는 얼굴로 걸어나왔다. 그녀의 좌우에는 각각 한 명씩의 남자가 따라 붙으며 그녀가 도망치는 것을 철저히 방지하고 있었다. "누나?" "미, 미안해 니콜라스. 그냥 가만히 숨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갑자 기 나타나서…." 카뮤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엔젤과 네가 거기에 숨어 있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네가 엔젤에게서 떨어지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날 속였군. 병력을 바깥으로 빼돌린 게 아니었어." 니콜라스는 이를 으드득 갈며 총구를 카뮤에게 겨누었다. 그는 눈 하 나 꿈쩍하지 않았다. 총알 따위야 쉽게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기인한 태도였다. "항복해라, 엘리우스." "닥쳐!" 니콜라스는 재빨리 방아쇠를 당겼다. 총신이 위로 튀어 오르며 두 발 의 총알이 카뮤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형성된 빛의 장막이 손쉽게 총알을 막아내었다. "알고 있을 텐데. 나에게는 총알이 통하지 않는다." "헤? 과연 그럴까?" 총구가 황제의 심장을 겨누었다. 하지만 카뮤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타이르듯이 말했다. "조금 전에는 내가 방심하고 있었기에 위협 사격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총알이 아버님의 몸에 닿기 전에, 아니 네가 방 아쇠를 당기기 전에 총을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 있어." "할 수 있으면 해보시지?" 히죽 웃는 니콜라스의 손가락이 움직이려는 순간 카뮤의 눈이 번뜩 였다. 총알이 총구를 박차고 뛰쳐나가는 짧은 순간 길고 복잡하게 뻗 은 에너지 그물이 총신을 순간적으로 에워쌌다. 그러나 그물이 총알을 부스러뜨리기 직전에 강한 섬광이 터졌고, 그 물은 흔적도 없이 허공에서 녹아버렸다. 안전하게 발사된 총알은 황 제의 머리카락을 몇 올 끊으며 또다시 벽에 박혔다. 니콜라스는 소리 없이 놀란 카뮤를 비웃으며 말했다. "에날도스는 너만이 쓸 수 있는 게 아니야." "치익…." "누나를 돌려보내. 그럼 황제의 목숨은 살려주지." 겁에 질린 예안의 얼굴을 바라보던 카뮤는 부하들의 눈빛을 보았다.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확인한 카뮤는 가벼운 한숨을 토하며 니 콜라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럴 수 없다." "뭐?" 당연히 이 거래에 응하리라고 생각했던 니콜라스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엔젤을 잃으면 우리는 혁명을 완수할 수 없게 된다. 설령 황제의 목 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혁명은 반드시 이뤄야만 한다." "하…." 니콜라스가 어이없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예안은 눈을 질끈 감 고 외쳤다. "상관하지 말고 이 녀석들 공격해! 어차피 이 녀석들은 나한테 손끝 하나도 댈 수 없어!" "과연 그럴까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던 카뮤는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 고 품으로 당겼다. 어어어 하는 사이에 그에게 강제로 안겨버린 그녀 는 뜨거운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덮치자 숨이 넘어갈 듯 크게 놀랐 다. "읍읍읍!" 그녀는 심하게 발버둥을 쳤다. 카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허리 를 더욱 세게 껴안으며 깊은 키스를 선사했다. 그녀는 손톱으로 카뮤 의 얼굴을 할퀴고 발로 그의 정강이를 찼다. 징그러운 벌레가 입안을 기어다니는 듯 전신에서 소름이 돋았다. 이윽고 카뮤의 얼굴이 떨어졌다. 그녀는 분노와 수치심으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그를 노려보다가 뺨을 힘껏 때렸다. "죽어버려! 개자식!" 말없이 웃으며 예안을 바라보던 카뮤는 분노로 부들부들 몸을 떠는 니콜라스를 흘끗 돌아보았다. "엔젤을 다치게 할 순 없지만 이런 짓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이 자식…." "자, 순순히 항복해라." 상황은 완전히 카뮤의 편으로 돌아섰다. 헤이저들은 의기양양한 눈으 로 니콜라스가 무릎을 꿇기를 기다렸다. 예안은 이게 다 내 탓이라는 자책감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 맥이 수복작업을 끝낸다고 해도 카뮤의 손에 잡혀 있는 이상 맥이 손쓸 도리는 없을 것이다. "…알았다. 항복하지." 니콜라스는 카뮤를 죽일 듯 노려보다가 이내 체념하고 총을 바닥에 던졌다. 다시 고개를 든 그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평정을 회복해 있었다. 평온 한 빛을 띤 검은 눈동자는 지나친 침착함으로 채색되어 오히려 강한 분노를 암시하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려던 헤이저들은 움찔했다. "묶어라." "예." 카뮤의 명령을 받은 한 남자가 용기를 내어 파란 밧줄을 들고 앞으 로 나섰다. 남자는 체념한 듯 서 있는 니콜라스를 밧줄로 묶었다. '윽!' 묶이자마자 밧줄은 엄청난 압력으로 죄어 왔다. 평범한 밧줄이 아닌 모양이었다. 조금씩 비틀거리던 니콜라스는 간신히 중심을 다잡으며 카뮤를 노려보았다. "연행해. 감옥에 가두어라." "예." "무기는 전부 압수해라. 감시망을 철저히 하는 것도 잊지 말고." "예." 부하들은 니콜라스를 끌고 갔다. 그는 끌려가기 직전 잠깐 멈추고 예 안을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말라는 평온한 눈빛에 그녀는 마음이 울 컥했다. 조소를 지으며 순한 양처럼 끌려가는 니콜라스를 바라보던 카뮤는 조용히 예안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는 카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 름대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었다. "엘리우스가 당신을 정말로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군요. 자기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당신을 구하려 하다니 말입니다." "…어차피 날 죽일 생각은 없잖아." "맞습니다. 하지만 아까와 같은 짓은 얼마든지 할 수 있죠. 원한다면 또 해드릴까요?" 심장이 덜컹한 예안은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아무도 그녀를 만 류하지 않았다. 카뮤는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다가갔다. 그녀는 다 시 뒤로 물러났다. 사람들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예안의 반응을 지켜 보고 있었다. "거, 건드리지 마! 내 몸 건드리지 마! 건드리면 죽을 줄 알아!" 새끼 밴 살코양이 같은 기세에 카뮤는 그저 부드럽게 웃기만 했다. 그녀의 연약한 반항 따위는 그에게는 애교 수준에 불과했다. "당장이라도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지만 참겠습니다. 어쨌든 엘 리우스와 약속했으니까요." 불타는 눈빛으로 예안이 카뮤를 노려보는 사이, 시녀들이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정성껏 모시도록 해라. 원하는 것이 있으면 뭐든지 들어주고." "예." 카뮤는 신부를 치장시키기 직전의 남자처럼 들뜬 눈빛으로 시녀들에 게 끌려나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문을 나서기 전 그녀는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시녀들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등을 돌려 카뮤를 노려보았다. 차갑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는 붉은 적의에 젖어 있었다. "절대, 절대 당신 뜻대로 되게 놔두진 않아." "마음대로 하시길. 나의 귀여운 천사여." 진심으로 사랑스럽다는 얼굴로 카뮤는 대답했다. 예안은 이를 바드득 갈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시녀들을 따라갔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카뮤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클랙 대신." "예. 하명하십시오." "엘리우스를 고문하게. 죽지만 않도록 아주 고통스럽게." "…알겠습니다." 찰나동안 흔들렸던 클랙의 눈빛이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카뮤가 내린 명령은 전혀 부당한 게 아니었다. 엘리우스라는 존재 자체가 애초에 인권 따위가 허락되지 않은 반역자이자, 도구 이상이 될 수 없었지 않은가. 전투 신하들이 나가고 시종들이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눈을 감았다 뜬 카뮤는 홀가분한 얼굴로 침실에 다가갔다. 엷은 커튼을 걷은 그는 죽음의 기색이 완연한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은 끝났습니다, 아버님. 엔젤은 우리 품으로 되돌아왔고 엘 리우스는 붙잡혔습니다. 이제 혁명을 이루는 것만 남았습니다." 파르스름하게 떨리던 늙고 하얀 눈썹이 이윽고 번쩍 올라갔다. 카뮤는 놀란 눈으로 서둘러 무릎을 꿇고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정신이 드십니까? 아버님, 정신이 드십니까?" 황급히 어깨를 흔드는 아들의 손길에 황제는 겨우 뜬 눈꺼풀을 힘겹 게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실날같은 음성이었다. "엘리우스… 엘리우스…." "네, 그렇습니다. 엘리우스를 붙잡았습니다." "엘리우스… 엘리우스…." "왜요? 엘리우스가 그렇게 저주스러우신가요? 걱정마십시오. 지금 클 랙 대신에게 엘리우스를 고문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엘리우스는 혁명 을 치르기 직전까지 극한의 고문 속에서 고통스러워할 것입니다." 바르르 떨리던 새하얀 눈썹이 살짝 밑으로 떨어졌다. "아니야…. 그 애는… 그 애는… 엘리우스가 아니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니콜라스 베르노는 엘리우스입니다. 그 녀석이 지니고 있는 힘은 분명 에날도스였습니다. 그 녀석의 잠재력 은 저를 웃돌고 있었습니다. 녀석은 엘리우스가 맞습니다." "아니야…." 숨을 몰아쉬듯 힘겹게 말하던 황제의 눈꺼풀은 결국 완전히 닫혀버 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카뮤는 황제의 가슴에 뒤를 대었다. 이윽고 그는 안심한 표정이 되었다. 황제는 숨을 거둔 게 아니라 잠 이 든 것이었다. "물을 한 잔 갖다 다오." "알겠습니다." 방을 거의 다 치우고 장식을 새로 다듬고 있던 시녀 한 명이 공손하 게 대답하고 물을 가지러 갔다. 혼란스런 얼굴로 잠이 든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뮤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갈수록 위독해지고 계신다. 어찌하면 좋은가?" 카뮤는 고뇌를 짊어진 얼굴로 깊이 고심했다. 그는 누군가가 들어서 는 것도 모른 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태자 전하." "응?" 누군가가 몇 번을 연거푸 부르자 카뮤는 고뇌에서 깨어났다. 그는 자 신을 부른 이를 보고 반색했다. "아니, 알렉스 대신이 아닌가? 그대는 어제 엘리우스에게 당해서 부 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돌아다녀도 괜찮은 건가?" "별것 아닌 상처였습니다. 태자 전하를 고심케 하여 심히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괜찮아. 그대가 건강하다면 아무쪼록 좋은 거지." 카뮤는 환하게 미소지으며 알렉스를 반겼다. 알렉스는 니콜라스에게 당한 상처의 잔재가 욱신거리는 것을 억지로 감추며 입을 열었다. "엘리우스를 고문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왜… 그러셨습니까?" "왜라니? 그대야말로 왜 그런 걸 묻지? 어차피 엘리우스는 의례가 끝남과 동시에 죽을 운명이다. 그전에 우리를 우습게 본 대가를 톡톡 히 치르게 하는 것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카뮤는 차갑게 미소지으며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by eden 감상문 쓰기 이벤트 참여율이 저조해서 현재 오티엘 천사님의 위 로를 듣는 중입니다. OTL 책을 걸고 하는 감상문으로는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감상문 이니 많은 참여 바랍니다. 채택된 분들에게는 1, 2권 증정본만 드리는 게 아니고, 1권에서부터 시작하여 신간이 발간되는 족족 계속해서 드릴 예정입니다. 고로, 다음부터는 증정본을 놓고 이 벤트를 할 일이 없다는 거죠. 미리 말씀드린대로 15일까지 합니다.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새창 [추천] [비평/감상(2)]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50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네코~♡ 윽.. 15일까지였네요... IIIOTZ .... 흑흑.. 방금 15일까진줄 모르고 썼다가 15일까지란 말 듣고 지웠...는데;; =ㅁ=;; 괜히 지운건가요?;;; 11-17/11:43 뇨뇨뇨에바다뇨!! 엘리우스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건가... 11-06/16:08 위선의폭풍 250화 축하! 달려라 달려! 11-05/16:07 슬픈영혼의랩소디 지금 쓰고는 있어요 근데 어렵네요; 11-05/16:01 베르단디의남자케이 이 황태자 아무래도..제대로 못 죽겠군요..그리고 예안도...좀 각성좀 하지..왜 이렇게 멍청하게 되는것인지... 11-05/12:36 초전박살 짱나게거 그냥 자살한다고 협박해요 나 혀깨물고 죽으면 그만이다..... 11-05/08:58 산바위 .....글쓰기는 젬병이라서...걍 살래요...1.2권 샀습니당..(인터넷에서..) 11-05/00:57 제로시크 앞으로 10일...과연 그전에 감상문을 쓸수가 있을라나... 11-04/23:51 esik 감상문..쓰고싶지만, , , , , 서도.. 글솜씨가 없어서[훗] 파산신 강림[..뷁] .. .. 15일까지니까 그전에 써서 보낼꼐요[<-] 11-04/22:52 기나긴여정 쿨럭 2등 되부렸네 (그런거에 신경쓰지 말라니까) 11-04/22:11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51 회] 날 짜 2004-11-05 조회 / 추천 854 / 14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구원의 손길 알렉스는 근심이 가득한 눈으로 카뮤를 보았다. 고문을 받을 니콜라 스가 걱정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자칫 카뮤가 비뚤어지게 된 건 아 닐까 그것을 걱정했다. 원래 카뮤는 다정다감하지는 않지만 사리분별을 할 줄 알고, 부하의 잘못을 무심하면서도 너그러이 덮어줄 줄 아는 군주였다. 적이라고 해서 이렇듯 죽지 않을 만큼 고문하라 명령할 남자가 아니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네. 나는 정신이 이상해지거나 잔인해진 것이 아니 라,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뿐이니까." 카뮤의 눈동자에서는 희미한 질투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알렉스는 언 뜻 그것을 느끼고 쓴웃음을 지었다. 어려서부터 감정을 거세할 것을 종용 당하며 자라온 이 냉혈 황태자는 지금 무언가를 강하게 질투하 고 있는 것이다. '엔젤….' 그는 아까 보았던 엔젤의 아름다운 모습을 회상했다. 인간의 냄새가 살짝 묻어버린 비인간적인 아름다움이었다. 한 줄기 그 얼룩 덕분에 그녀는 비인간에서 인간으로 격하되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살아 숨쉬는 듯한 생생한 아름다움을 뿜어낼 수 있는 듯 보였다. 그만하면, 충분히 황태자가 반할 법도 했다. 모든 장애를 없애서라도 손에 넣고 싶을 정도로. "알렉스 대신." "예." "내일 최후의 의례를 치르겠다." "내일, 말입니까?" 알렉스의 눈동자에 활기가 살아났다. 최후의 의례라 하면 혁명, 바야 흐로 이 거대한 대륙을 지상으로 다시 융기시키겠다는 소리였다. 일 만 년을 꿈꿔왔던 민족의 꿈이 드디어 실현되는 것이다. 그는 가슴이 뛰었다. "그렇다. 내일이다. 그러니 클랙에게 전해서, 내일 의례를 치르기 직 전까지 엘리우스를 최대한 고문해서 정신을 망가뜨리도록 해라. 정신 이 망가지면 망가질수록 공명신수, 마기를 빼내는 일이 더 쉬워질 테 니까." 카뮤는 황홀한 눈으로 자신의 몸을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여태 껏 다른 공명신수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로지 마기 하나만을 기다려 온 육체였다. "내일이면 나의 몸에 마기가 깃들이게 된다. 나는 이 아틀란티스 대 륙, 아니 이 지구에서 가장 강한 남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리석 고 나약한 지상인들을 다시 한 번 지배하러 저 지상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내일이면." 심장이 몸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뛴다. 알렉스는 흘러내리는 설렘을 간신히 추스르고는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독한 놈입니다.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있습니다." 클랙 대신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고문꾼이 입을 열었다. 혀를 차 며 피투성이의 니콜라스를 바라보던 클랙은 동정하듯 입을 열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다면 참지 않아도 좋다. 어차피 우리가 고문하는 것은 너에게서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에게 고통을 주기 위함이니까." 전신 가득 피가 흐르는 니콜라스의 꼴은 실로 처참했다. 그는 앉지도 못하고 양손이 벽에 고정된 채, 전신 가득 깊고 굵은 상처를 입고 있 었다. 피가 눌어붙은 상처 자국마다 커다란 화상 자국이 다닥다닥 붙 어 있었고, 고름이 멎은 부위에서는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시체나 다름없는 끔찍한 상태였지만 여태껏 니콜라스는 가벼운 신음 한 번 지르지 않았다. 고문꾼은 그의 초인적인 인내력에 실로 놀라워 했다. "과연 엘리우스군요. 아직 어린 아이인데 이렇게 참을성이 대단할 줄 은 몰랐습니다." 그의 음성에는 아무리 민족의 반역자라 하나 이런 어린 아이를 고문 해야 한다는 자책감이 묻어 나왔다. 클랙은 어렴풋이 그것을 느꼈다. "어쨌든 고문은 계속하도록 해라." "예? 지금 죽기 직전인데 말입니까?" 고문꾼은 탐탁하지 않은 얼굴을 했다가 사나운 클랙의 시선을 받고 황급히 표정을 바꾸었다. "아, 알겠습니다. 고문을 계속하겠습니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라. 황태자 전하께서는 내일 당장 혁명을 치른다고 하셨다. 어차피 엘리우스는 죽은 목숨, 그리고 우리 민족을 너무 많이 죽인 죄까지 짊어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조금이라도 죗값 을 치르고 죽어야 하지 않겠느냐." 싸늘히 말하는 클랙의 눈동자는 다소 착잡한 빛이 깃들여 있었다. 아 무리 명령이고 또 그른 일이 아니라고는 해도, 보통 사람이라면 열 번은 죽고도 남았을 고문을 신음 한 번 없이 견뎌내는 어린아이의 눈빛을 똑바로 좌시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럼 계속하도록." "알겠습니다." 등을 돌린 클랙의 뒤에서 살갗을 불로 지지는 소리와 더불어 피부가 연소하는 냄새가 피어올랐다. 등뒤를 돌아보고 싶은 욕구를 필사적으로 억누른 채 클랙은 지하 고문실을 나섰다. 방에서 나가지 않고 있는 시녀들을 초조한 눈으로 바라보던 예안은 맥에게 화풀이를 했다. '너 아직도 수리되려면 멀은 거야?' '아직 35시간 정도가 더 필요합니다.' '도대체가 중요한 때에는 도움이 하나도 안 되고, 너 정말 왜 그래?' '죄송합니다. 저로서도 전혀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공격을 당해서 말 입니다.' '35시간이면 그 전에 니콜라스가 죽겠다, 죽겠어. 으악! 그 뿐만이 아 니야! 그 미친 변태 사이코 황태자 녀석은 당장 오늘밤 나한테 올지 도 모른단 말이야!' 아까 끌려나오면서 니콜라스를 고문하라 명령한 카뮤의 명령을 들었 기에 그녀는 걱정이 태산같았다. 카뮤가 증오스러웠다. 그 조그맣고 때릴 데도 없는 아이를 어째서 고문하라 시킨 것인가. "그만 주무십시오." "니들이 있어서 자기 싫어." "엔젤님. 그만 주무십시오."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시녀가(그래봐야 20대 후반) 짐짓 중후한 어조로 명령하듯 말했다. 예안은 지지 않았다. "니들 먼저 나가. 그럼 잘게." "저희는 엔젤님께서 주무시는 동안에도 지켜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지키는 게 아니라 감시겠지. 달아나지 못하게 말이야." 시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그녀들을 바라보던 예안은 갑자기 은촛대를 집어 한 시녀에게 던졌다. 고개를 살짝 돌리며 시녀가 피하자, 은촛대는 문에 부딪쳐 떨어졌다. 찌그러진 은촛대를 말없이 쏘아보던 예안은 사나운 눈길을 시녀에게 던졌다. "운동신경이 꽤 좋은데?" 시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는 화도 안 나? 내가 촛대를 집어던졌는데도?" 그래도 시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 그럼 내가 너한테 칼을 집어던져도 그렇게 가만히 있을 거야?" 여전히 시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화가 난 예안은 씩씩거리다가 물주 전자를 집어들고 시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힘있는 음성으로 명령하 듯 말했다. "이건 피하지 마. 그냥 맞아." 예안은 물주전자를 집어던졌다. 허공으로 물이 튀어 오르며 물주전자 가 시녀를 향해 날아갔다. 조금 전 은촛대의 목표였던 시녀였다. 시녀는 물주전자를 피하지 않았다. 눈을 감지도 않았다. 물주전자는 그대로 시녀의 이마에 직격했다. 물이 흠뻑 쏟아지며 시녀의 옷이 젖 었다. 시녀의 이마에서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정말 가만히 있을 줄은 몰랐던 예안은 멍청한 얼굴을 했다. "왜 피하지 않았지?" 놀라워하는 예안을 묵묵히 바라보던 시녀는 피를 닦을 생각도 않은 채 그녀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조금 전에는 피해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하…." 어린아이가 반항을 부리는 듯한 심정으로 물건들을 집어던졌던 예안 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오히려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조금 전 차라 리 한 대 얻어맞고 싶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뜻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더욱 답답해졌다. 예안은 가슴을 마구 두 드려댔다. "너희 같은 것들 보면 짜증나. 그렇게 날 존중하는 척 해서, 그렇게 나한테 복종하는 척 해서 도대체 나한테 뭘 얻어내려는 건데?" "얻어내다니요? 당치도 않는 말씀이십니다." "거짓말하지 마. 너희들은 내가 혁명을 이뤄주길 바라는 거잖아. 아 니라고 할 수 있어?" 그 말에 시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기만 했다. 예안은 문 쪽에 서 있는 시녀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희들은 지금 크게 착각하고 있어. 난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아니야. 난 알 것 모를 것 전부 다 알고 있단 말이야. 자존심도 강하단 말이야. 그런 내가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레볼루션인지 에볼루션인지 하는 것을 이뤄줄 거라 생각해?" 시녀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예안은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하여튼 그 웃기지도 않는 황태자 자식한테 똑바로 전해. 무릎 꿇고 애걸하는 한이 있더라도 난 절대 혁명은 안 도와줄 거라고." "…." "당장 나가. 너희들이 안 나가면 난 절대 한숨도 못 잔단 말이야." 무거운 눈빛으로 예안을 바라보던 시녀는 말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 갔다. 다른 시녀들도 그 시녀의 뒤를 따랐다. 넓은 방안에는 커다란 썰렁함만이 감돌았다. 예안은 화려한 장식이 조각된 침대를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침대 주변을 꾸민 아름답고 고 급스런 장식들이 자신의 감금된 처지를 비웃는 듯했다. 으슬으슬 추워오자 예안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옷을 갈 아입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적이 주는 옷 따위는 입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뒤따랐다. 형광등 못지않게 훤하게 방안을 밝히는 램프를 끈 예안은 어둠 속을 노려보다 눈을 감았다. 니콜라스에 대한 걱정과 더불어 카뮤에 대한 의구심이 그녀의 마음 속에서 다시금 싹을 틔웠다. '뭐였지?' 그녀는 어제 카뮤의 품안에서 느꼈던 그 포근함의 정체를 다시 한 번 고민했다. 자신이 다른 남자의 품에서 안도감을 느낀다는 것은 있 을 수 없는 일이었다. 레이온의 경우, 그를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을 느끼긴 했지만 어디까 지나 유젤을 뺏기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 역시 함께였다. 헌데 이상하 게도 카뮤에게는 그런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더욱 '의식적으로' 그를 증오하고 싶어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답답한 가슴을 안은 채 창문을 열고 밤하 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하늘이라고 부를 수 없는 하늘이었다. 이 곳은 해저에 가라앉은 대륙이 아닌가. 형언할 수 없는 감동 아닌 감동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바로 공포가 감동으로 승화된 것이었다. 검푸른 저 바닷물 위에서, 새파란 저 대 기 위에서, 광활한 저 우주 한가운데에서 오리지널 유젤이 내려다보 고 있을 것이다. '에덴에서 여기도 볼 수 있을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오리지널 유젤이 지닌 신인류의 과학은 현대 인류의 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니까. 오리지널 유젤은 자신의 복제 를 몹시 안쓰럽게 여기기에, 그만큼 간섭하고 싶지 않기에 아주 커다 란 위험에 처하지 않는 한 모습을 절대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차이는 없다. 자신의 복제를 진심으로 아낀다면 오리지널 유젤은 존재 자체를 철저히 감춰야 했 다. 이렇게 예안이 그 존재를 알아버림으로써 괴로워하는 일이 생기 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에 앤드류에게 그랬듯, 세현에게 그랬듯 그 힘을 마음껏 사용할 수만 있 다면 좋을 거라는 안타까움이 절실하게 와 닿았다. '빨리 수리하지 않으면 난 정말 널 용광로에 넣어버릴지도 몰라. 어 서 서둘러.' '죄송합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녀는 맥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자신에게 심한 환멸을 느 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찬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원통형으로 생긴 거대한 검은색 잠수함이 들끓는 소음을 냈다. 사냥 감을 향해 도약하기 직전의 사자 같은 소리였다. 파도 속으로 구동음을 흘려보내던 잠수함이 이윽고 크게 흔들리며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크게 놀란 어군이 흩어져 달아났다. 철썩이 던 파도가 조용히 가라앉는 가운데 따스한 햇살이 잠수함을 은닉해 주듯 그 위를 쓰다듬었다. 10미터…. 100미터…. 1000미터…. 잠수함은 점점 심해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잠수함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빛줄기는 어느덧 해저 바닥을 훤히 비추고 있었다. 인류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심해 바닥. 생물의 시체가 부패하지도 못 한 채 막대한 영양소로 환원해 쌓여 있는 그곳은 태고의 신비한 모 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기분이 어떤가, 제임스?" "썩… 좋지는 않습니다." "동족을 배반하러 가는 길이라서?" 레이온은 비웃듯이 물었다. 세현은 창백한 얼굴을 한 채 해저 바닥을 구경하다가 그만 눈을 돌렸다. "신기한 일이지. 이런 곳에서 일만 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니 말이야. 일반인들이 이 사실을 알면 놀라서 뒤로 자빠질걸." 키득거리던 레이온은 넬이 가져온 쟁반에서 과자 한 조각을 집어 입 에 넣었다. "자네도 하나 들지 그러나?" "생각 없습니다." "동족을 치러 가는 와중이라 식욕이 없다는 건가? 하긴, 식욕이라는 게 딱히 좋은 건 아니지." 세현은 무슨 말을 하느냐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연신 킥킥거리 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내 꿈이 뭔지 아나?" "…모릅니다." "난 말이야, 이런 지긋지긋하고 맛없는 음식 따위를 먹지 않아도 살 수 있게 되고 싶어.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것이 정말 저주스럽거든." "신인류…가 되고 싶다는 뜻입니까? 당신이 복제한 엔젤과 같은?" "그렇게 볼 수 있겠군." 과자를 내려놓은 그는 푸념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 말투는 푸념이라기보다는 한(恨)에 가까웠다. "신인류라는 것은 말이야, 대단히 불공평한 존재지.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아니야. 인간을 사랑할 수 없지만 사랑할 수 있는 존재야. 신의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받은 인간이라고. 내 말 이해하겠어?" 세현은 그가 미쳤다는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의 논리는 일반에서 멀어져 있었다. "오리지널 유젤, 즉 엔젤의 원래인간이 지금 어디서 뭘하고 있는지 혹시 아나?" "모릅니다. 당신은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한 번도 없지 않 습니까. 시트날타에서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들었 습니다." "맞는 말이야. 난 네놈들에게 한 번도 그 애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 으니까. 내가 왜 그 애 이야기를 네놈들 같은 패배자들 따위에게 해 줘야 하지?" 심한 조롱이었지만 울컥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이제 민족과는 절연 했기 때문인가. "난 말이야. 그 앨 정말 좋아했어. 근데 그 애는 매몰차게 날 떠나 버리더군. 아, 아닌가? 그래도 떠나면서 나한테 울지 말라고 했으니 매몰찬 건 아닌가? 킥킥, 자랑은 아니지만 그때 그 애는 눈물까지 보 였거든. 어쩌면 지금 저 하늘 위에서 날 내려다보면서 눈물을 찍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면 그 빌어먹을 아담과 행복하게 알콩달콩 사느 라 나 같은 건 잊어버렸을지도." 세현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킥킥, 그 빌어먹을 아담은 글쎄 자기 딸을 아내로 삼았지 뭐야? 그 게 말이 된다 생각해?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자기 딸을 아내로 삼을 수 있는 거지? 신인류라고 해서 그런 게 다 용납되는 건 아니잖아?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레이온은 지금 울음을 참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만큼 그의 가면은 필사적이었다. "난 더 이상 바보 같이 살지 않아.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래, 그 애가 내 곁을 떠난다고 해도 절대 고이 보내주지 않을 거야. 꽁꽁 묶어서 내 곁에 두는 한이 있더라도 내 곁을 못 떠나게 만들 거야. 그래서 그 앨 닮은 아이들을 열 명쯤 낳아서 같이 행복하게 살 거야. 꼭 그렇게 될 거야…." 그의 말끝이 술에 취한 듯 흐려졌다. "…그랬다면… 정말 멋진 인생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무거운 분위기가 깔렸다. 넬은 아무런 말없이 그의 뒤에서 시립해 있 었다. 세현은 어두운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잠수함은 여전히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투명금속으로 만들어진 창밖에서는 괴기한 형태의 심해어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윽고 레이온은 평온함을 되찾았다. "그래, 너는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지?" "저 말입니까?" "그럼 너 말고 여기 또 누가 있는데?"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세현은 시선을 조금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깊은 수척함에 젖어 있었다. by eden 3권 마감을 끝냈습니다. 4일 걸렸습니다. ...이제부터는 마음껏 폐인대전에 빠질 수 있겠군요. 후훗;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새창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51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유시 건강한게 제일이야 11-06/15:28 꼼짝이 흠.. 신인류의 마직막 아이 이야기는 한편도 안나오네요 최근에 -- 11-06/08:01 제로시크 ......아니면 나만 그런건가?(게임광이라서 수십종류와 다양한 장르의 게임을 접한...-물론 그 다양한 장르의 범주에 에로게임도 들어간다는- 몸이니) 11-06/02:15 제로시크 어차피 눈만 다르고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끼니까(아아 그러고보면 정말로 동일인물수준이잖아...아니 신인류니까 물들진 않았을려나...) 그렇게 충격적이진 않은데요... 11-06/02:12 마르티어스 ㅡㅡ; 자기 아내 버려두고 딸이랑 살다니 ㅡㅡ; 11-06/01:23 木卜弓師 2부 내용이 여기서 약간 나오네요오.. 실탄님, 수고하세요~! 11-05/23:27 엘베루시아 케이 나쁜놈 죽어버려라; 11-05/23:26 슬픈영혼의랩소디 신인류니까 근친이 가능할지도... 11-05/23:13 코코로의악마 근친;; 내가보기엔 복제 유젤,,,,즉 현재 예안 몸속에 제이가 있는것보니;;; 제이가 죽고 제이 닮은 유젤과 유서운이라는걸 느껴서 아내로 삼앗지않앗을가? 11-05/22:33 데빌크로우 신인류는 유전자가 완전해서 구인류처럼 기형아는 안생긴다고 알고있습니다. 아니면 나 몰라라~ '-' 11-05/22:00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52 회] 날 짜 2004-11-06 조회 / 추천 790 / 17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구원의 손길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 뭘 해야할지도 모르겠다는 소린가?" "그래요.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세현은 초점이 일그러진 눈으로 레이온을 응시한 채 모르겠다는 말 만 반복테이프처럼 반복했다. 어딘가 망가지고 문드러져 상처를 하나 입고 있는 눈빛이었다. 레이온은 혀를 끌끌 찼다. "네 얼굴에는 무기력함 밖에 보이지 않는군." "그런가요?" "나와 비슷해. 나도 한때 그랬거든." 의의라는 빛이 세현의 얼굴에 떠올랐다. 한때라는 것은 지금은 그렇 지 않다는 의미이다. 이제 더는 스스로의 무력함을 자각하지 않아도 좋다는 의미이다. "사도라는 이름을 아나?"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습니다." 전신을 욱신거리게 하는 통증과 함께, 가녀림을 담은 선열한 음성이 떠올랐다. 「이 코드는 아무리 봐도 사도인이잖아? 좋아. 좀더 살펴봐야겠어.」 광기에 젖어 그 말을 중얼거렸던 그녀, 그때 그녀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아무리 고심을 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복잡한 고뇌가 그의 눈동자를 뒤덮었다. 레이온은 피식거리며 물었다. "그 애를 생각하고 있나?" "…네." "너도 그 애를 좋아하는 모양이군." "…그렇게 보였나요?" "아닌가?" 솔직히 말하자면, 모르겠습니다. 세현은 하마터면 튀어나올 뻔한 그 말을 집어삼키며, 다른 대답을 했다. "좋아한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착각한다는 것을 처음부터 깨닫고 있었죠." "색다른 대답이군." "그 애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맞는 말이야. 그 애는 태어날 때부터 인간을 초월했어. 인간보다 훨 씬 고차원적인 존재지." 레이온은 담배를 꺼내려는 듯 셔츠 앞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오래 전에 담배를 끊었음을 떠올린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렸다. 진중함이 그의 표정에 섞였다.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부터 이미 극히 일부의 정치가들이나 전문 가들은 전쟁 가능성을 예측하고 있었지.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막연 히 전쟁이 벌어질 거라 예측했을 뿐, 실제로 그렇게 엄청난 구도로 퍼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 세현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그런 시나리오를 꿰뚫어본 천재 과학자들이 수십 있었지. 그전까지 그들은 막연히 '동족'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이름 아래 통일돼있었는데,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해서 '사도'라 이름을 바 꾸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던 거야." "본격적인 활동?" "그래. 그전까지 그들은 단순히 스스로를 보호하고 과시하기 위해서, 경제력과 무력을 손에 넣는데만 주력했지. 하지만 더 이상 세계의 흐 름을 좌시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거야. 그들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느끼고, 세계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비밀리에 여러 나 라를 유도했어. "유도를 했단 말입니까?" "그래." 느릿하게 흘러가는 심해의 고동이 함실을 울렸다. 창밖에 보이는 물고기의 수는 어느새 대폭 줄어 있었다. 가끔씩 눈에 띄는 것들은 흉측한 모습을 지닌 심해어들뿐이었다. "그들은 이 세계를 컨트롤해줄 어떤 거대한 힘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함부로 양지에 드러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결론을 내린 사도는 그때부터 세계 에 개입하게 된 거야." "우리와… 비슷하군요." "전혀 달라. 아틀란티스는 세계를 집어삼키려 하지만, 우리는 세계를 뒤에서 지탱하려고 하니까." "아틀란티스라…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당당하게 그 이름을 읊을 수 있다는 것을 참 부러워 할 겁니다." 레이온의 얼굴에 의아함이 생겨졌다. "그건 무슨 뜻이지?" "글쎄요. 무슨 뜻이겠습니까?" 서글퍼 보이는 검은 눈빛에서 레이온은 그가 말못할 비밀을 지녔음 을 느꼈다. 한 번쯤 물어보고 싶은 욕구가 들었으나, 그는 결국 그만 두었다. 본래 사람들은 제각각 비밀을 한 개쯤은 지니며 살아가는 법 이니까. "사도… 이야기를 좀더 해줘요." "왜 궁금해하지?" "알고 싶습니다. 그 애가… 그 애가 어떻게 해서 태어나게 됐는지…." 레이온은 조소했다. "네가 그 애와 어울린다고 생각해?" "…."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 너에게 그 애는 너무 과분, 아 니 전혀 어울리지 않아." 노골적으로 비하시키는 발언에도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레이온 에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그는 천사 프로젝트의 핵심이 자, 그녀를 태어나게 한 사람이니까. 쓴웃음을 지으며, 세현은 대답했다. "말했잖습니까. 저는 그 애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제가 착각했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저는 다만… 다만 어 떻게 해서 일이 이 지경이 됐는지 그것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애초에 혁명을 원했던 것은 너희들이 아니었나?" "지금 사람들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혁명만 이루면 태양을 되찾 을 수 있을 거라고…." 레이온은 의아했다. "무한동력 에너지를 써서 아틀란티스 대륙을 지상으로 끌어올린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전혀 불가능하지 않은 일이야. 몇 가지 변수만 적 당히 조율하면 성공률은 99% 이상이 될 거라고 생각해." "정말 단순히 대륙을 지상으로 끌어올리기만 한다고 해서 태양을 되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세현은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레이온은 그것 역시 물어보지 않았다. "너도 참 사연이 많은 놈이로군. 좋아. 사도에 대해서 말해주지." "감사합니다." 쓸쓸한 눈빛으로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던 레이온은 묵은 기억을 천 천히 헤집었다. "고작 백 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건방지게 세계를 손에 넣은 것 때 문에 벌을 받은 건지도 몰라. 1944년 4월 4일, 그들은 신으로부터 저 주를 받았다. 그들은 그 저주를 후유증이라 명명했지." "어떤 저주?" "기형성 유전질환이었지. 유전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외부에서 영입 돼 사도의 간부로 성장한 인물에게도 어느 순간 갑자기 '알젝시온 유 전자'라는 것이 생겨났다." "알젝시온 유전자?" 세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그가 여태껏 얻은 지식에 그러한 유전자 명칭은 없었다. "너는 모를 거야.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니까. 지금으로부터 백년 전쯤, 저주와 싸웠던 한 천재 과학자가 인체를 대상으로 한 무 수한 실험 끝에 겨우 발견한 저주의 정체에 그렇게 이름 붙인 거다." "인체… 실험 말입니까?" "아주 잔인한 실험이었지. 무수한 사람들이 그 천재 과학자, 레파드 웬 박사에게 이용당하고 살해당했다. 산 채로 해부한 임산부의 자궁 에서 태아를 끄집어내어 산산조각 해 그 살점을 얼굴에 뿌리는 짓거 리는 그의 실험에서 극히 양호한 편에 속했지." 난방이 잘 되는데도 이상하게 몸이 부르르 떨린다. 세현은 창백한 안 색으로 레이온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레파드웬 박사는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지. 그리고 약 70년 후, 사 도의 촉망받는 천재 여류 과학자 가이아 박사가 NM 프로젝트를 통 해 저주에 맞서려 했다." "설마 또 인체실험을?" "아니야. NM 프로젝트는 New Mankind Project라고 해서, 후유증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신체와 뛰어난 두뇌를 가진, 구인류보다 월등 히 뛰어난 신인류를 탄생시키는 게 목적이었지. 이때 탄생한 사내아 이에게는 케르베로스라는 코드네임과 아담이라는 호칭이 주어졌다. 케이는 무에서 창조되었지." 조금 전에 그가 한탄하듯 말한 이름이 나오자 세현은 바짝 긴장했다. "두 번째로 탄생된 여자아이에게는 주피터라는 코드네임과 제이라는 호칭이 주어졌다. 제이는 케이와 달리 가이아 박사와 시리우스 수장 사이에서 생긴 수정란에 NM 프로젝트 처리를 가해 탄생되었지." "그렇군요." "그러나 문제는 있었어. 프로토 타입이었던 케이는 신체와 두뇌 기능 면에서는 신인류가 틀림없었지만, 후유증을 갖고 있었다. 반면 제이 는 케이보다는 신체와 두뇌 기능이 약간 뒤떨어졌지만 후유증을 지 니고 있지 않았지." 시커먼 어둠에 적셔진 수십 억의 세월이 창밖으로 느릿하게 흘러가 고 있었다. 함내를 울리는 레이온의 음성은 처량했다. "그러나 제이는 생체 컴퓨터로서 케이보다 월등히 뛰어난 두뇌를 지 녔지. 케이가 후유증을 제거하기 위해 고안한 조물주 프로젝트에서, 컴퓨터와 싱크로한 제이는 새 혹성을 만드는 엄청난 계산을 혼자 힘 으로 해냈다." "새 혹성?" "케이가 기억을 소멸하는 바람에, 지금 지상인들은 전부 다 잊어버렸 지. 하지만 너희들은 알고 있을 텐데? 11년 전 달이 사라지고 지구와 똑같은 혹성이 새로 탄생한 것 말이야. 케이는 달을 재료로 해서 지 구와 똑같은 제2의 지구를 만들었다. 그 별을 에덴이라 이름짓고 제 이와 함께 그 별로 이주했지." 세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레이온이 말한 사실, 즉 달이 사라지고 새 혹성이 탄생했다는 것은 아틀란티스인들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6년 전까지만 해도 지상인들은 달이 사라진 것과 새 혹성이 등장했 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때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난리가 일어났 으니까.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혼란이 초래한 때는 바로 그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6년 전 갑작스럽게 모든 지상인들은 달과 에덴 혹성에 관한 기억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아틀란티스인들은 그 사건을 철저히 조사 했지만, 어떻게 그런 불가사의한 일이 발생했는지 결국 알아낼 수 없 었다. "너희들 지식으로는 알 수 없었을 거야. 아담, 케이의 능력은 모든 인간들의 힘을 합쳐도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으니까. 이 나조 차도 그 앞에서는 원숭이 재롱밖에 피울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대단하다는 말입니까?" 세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천사 프로젝트를 결행하는 등 아틀란티스 에 막대한 도움을 제공한 레이온조차도 원숭이 재롱으로 치부할 정 도라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다는 말인가. 신인류라는 종족은. "케이와 제이는 유젤이라는 딸이 있었지. 그 애는 5살 때 부모와 다 툼을 벌이고 지구로 가출했다. 난 그 애와 만나게 됐고, 그 애와 같 이 지내게 됐고, 그 애를 좋아하게 됐다." "…실례지만 그때 몇 살이셨나요?" "17살이었다." 세현의 얼굴에 낭패라는 빛이 떠올랐다. 레이온은 그의 마음을 알아채고 피식거렸다. "신인류를 본래 성장이 빨라. 5살이라고는 하지만 유젤은 이미 어엿 한 성인이었어." "그, 그랬나요? 하긴…." 예안이 복제 작업으로 탄생한지 한 시간도 안 되어 순식간에 어른으 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세현은 납득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런데 아까 아담은 자기 딸을 아내로 삼았다고 하셨는데…." "아아, 그랬어. 케이는 유젤을 자기 아내로 삼았어." "…그렇다면 제이는 어떻게 된 건가요?" 레이온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무거운 눈으로 세현을 바라보았다. 어 둠이 일렁거리는 검은 눈빛에서 세현은 숨이 막히는 슬픔을 느꼈다. "죽었…나요?" 결국 힘들게 질문했다. 이번에는 금방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죽지 않았어." "그럼… 살아 있나요?" "아니. 살아 있지도 않아." "그럼 도대체 뭔가요?"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 죽었다고도 할 수 없고, 살았다고도 할 수 없다고 해야 할까?" 레이온은 조소하듯 중얼거리며 다시 세현을 등지고 섰다. "사실 나도 모르겠어." "제이가 어떤 상태인지 모른다는 뜻입니까?" "아니, 어떤 상태라는 것은 알아. 하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모 르겠군. 죽었다고도 할 수 없고 살았다고도 할 수 없는…." 그는 참 생각을 많이 하며 살아가는 남자인가 보다. 세현은 그의 주 변에서 광기가 사라지는 것을 초연히 주시했다. 그가 지금 혼란스러 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뭐라고 할까? 그래, 봉인이 좋겠군. 제이는 지금 봉인된 상태야. 아 니, 이십 년도 더 오래 전부터 봉인된 상태였어." "네? 그럼 십 년 전 혹성을 만드는 계산을 했다는 제이는 뭔가요?" "그건 제이가 아니야. 더미(dummy)야." "더미요?" "그래. 가짜지. 케이는 그것도 모른 채 가짜 제이가 좋아서 히히덕거 리며 잘 살다가 결국 뒤통수를 맞아버렸지." 세현은 종잡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새로운 광기가 레이온의 등 을 다시 가리고 있었다. "당신의 말은 이해할 수 없는 구석 투성이로군요." "너도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나?" "글쎄요.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쳤다고 생각되겠지요." 당신은 미치지 않았다. 다만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우월할 뿐. 세현 은 그렇게 돌려 말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전달했다. 말뜻을 알아차린 레이온은 작게 웃으며 뒤돌아보았다. "역시 너는 다른 녀석들과는 다르군. 그래도 딴에는 꽤나 천재라서 그런 걸까?" "천재라니요. 당신에 비하면 당치도 않습니다." "아니야. 너 정도면 나에는 못 미쳐도 충분히 천재랄 수 있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기도 해. 3억이 넘는 인구 중에서 왜 너 같은 천재는 너말고 없는 거지?" "그렇지 않습니다. 아틀란티스인들은 전부 머리가 좋습니다. 일상 생 활에서 기본적으로 5개 국어나 되는 언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지요." 레이온은 당치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고작해야 그것 뿐이야. 그걸 가지고 머리가 좋다고는 할 수 있어도, 천재라고 할 수는 없어. 이상하지 않아?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천재는 너 단 한 명뿐이라는 게." "글쎄요. 어쩌면 힘을 포기했을지도 모르지요."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세현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연약하기 그 지없는 새하얀 손바닥이었다. "저는 에날도스를 쓸 수 없습니다." "알고 있어." "저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호오? 그게 가능한가? 아, 근데 그런 걸 나에게 말해줘도 되나?" "상관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했지만, 당신에게만큼은 상관없습니다. 이제 당신과 전 한 배를 탄 입장이니까요." "웃기지 마. 한 배를 탄 입장? 나는 누구와도 같은 길을 걷지 않아. 오로지 혼자서 나아갈 뿐이다." "그 애…와도 말입니까?" 서글픈 빛이 다시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내가 걷는 길은 그 애를 향해 나아가고 있지." "…그렇군요." 이 사람의 운명도 참 기구하구나. 세현은 씁쓸히 중얼거렸다. 사랑을 구걸하는 남자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여자, 아니 여자 의 모습을 한 전혀 다른 존재. 세상은 무난하게 굴러가는 듯 보여도 가끔 이렇게 뒤틀어진 부분들을 하나씩 자기 몸에 새겨 넣곤 한다. 둘의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둘은 고개를 숙인 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세현은 지금으로부터 세 시간 전 레이온이 다짜고짜 자신을 찾아왔 던 순간, 그때 그가 띠고 있던 자신감에 찬 눈빛을 떠올렸다. 「두말 할 필요 없다. 복수하고 싶지 않나?」 도망이 아니라 복수라고 말했다. 그때 세현은 자조하듯 자신에게 물 었다. 과연 어느 것을 원하느냐고. 답은 복수였다. 「날 따라 와라. 그럼 네가 복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자신감과 광기가 뒤섞인 그의 눈빛을 보면서, 세현은 그가 자신의 비 밀을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목숨보다 중요한 비밀, 제시에게조차도 오랫동안 숨겨왔던 그 비밀을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것은 아니었다. 레이온은 단지 아틀란티스에 대한 자신의 적의를 눈치챘을 뿐이었다. 그 마음을 이용하고 있는 것뿐이 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제시가 위험하다고 극구 말렸지만 세현은 선뜻 레이온을 따라나서는 것을 선택했다. 어차피 애초에 도망만 다닐 생각은 없었다. 그는 동 족에게 갚아줘야 할 빚이 너무 많았다. "도착했습니다." 넬의 건조한 음성이 함실을 울렸다. 레이온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 에서 일어났다. "일어나. 이제 쇼 타임이다." "쇼, 인가요?" 세현은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중얼거렸다. 레이온은 우뚝 선 채 그를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쇼라고 부르는 게 어색한가? 그럼 개막식이라고 해두지." by eden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새창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52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esik ..끼아아아아악;ㅂ;...무지로인해 눈이 빙글빙글[!] 11-07/11:44 地獄門 흐음 케이가 뒤통수 맞는건 이브의 눈물 스토리인가 11-07/08:15 데빌크로우 아담의 상처 개인지가 더욱 기대되는군요 으으 돈님의 압박.. 11-07/04:27 뽀까리 순식간에 읽어내려가다보니..ㅠ_ㅠ 역시 실탄님의 글은 빠질 수 밖에 없는..ㅠ_ㅠ 11-07/03:04 뽀까리 헉! 벌써 끝?! 11-07/03:03 칼바위 !! 11-07/02:34 아스트론 흐흐흐흐~ 2일전에 감상문 등록했어요~ 덧글이지만요 11-07/00:22 天下 후후훗...접수했습니다(뭘?..;;;).... 11-06/23:11 klyp 호오 무슨 쇼를 보여 줄지 기대!! 11-06/23:11 초전박살 처음엔 뭐가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변수가 나타나서 뭔가 보이는군요 11-06/22:11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53 회] 날 짜 2004-11-07 조회 / 추천 719 / 12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구원의 손길 대륙을 둘러싼 거대한 방어막의 투명함 뒤로 시퍼런 심해의 해수가 흘러가고 있었다. 태양을 가장하며 산맥을 비추는 방어막의 웅장함을 멍한 눈으로 올려다보던 니콜라스는 멍청히 중얼거렸다. "여기가 어디지?" 그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살갗을 에이는 산들바람은 진짜였다. 아니, 진짜 이상으로 흡사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여기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여기에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히 고문 받고 있었는데.' 돌연 익숙한 느낌이 뇌리를 강타했다. 그는 머리를 움켜쥐며 주저앉 았다. 딱딱한 돌멩이가 무릎을 압박했다.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을 쥐어뜯으며 그는 신음했다. "으윽… 으윽…." 그는 왜 자신이 아픈 지도 모른 채 그렇게 고통스러워했다. 그때 작고 하얀 손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일어나, 주피엘." 씻은 듯이 통증이 사라졌다. 해맑은 미소를 가진 어린 소년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멍한 눈으로 올려다보던 니콜라스는 그 손을 붙잡으 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소년의 손을 통과해버렸다. 어느 한쪽이 신기루인 양. "고마워." "헤헤, 이제 안 우네? 많이 컸구나?" "내가 언제 울었다고 그래! 레온은 맨날 거짓말만 해!" "맨날 울었잖아. 아니라고 할 수 있어?" "아니야! 아니야! 안 울었단 말이야!" 레온이 보고 있던 사람은 니콜라스가 아니라 빨간 머리카락을 가진 어린 소년이었다. 그는 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나며 칭얼거렸다. '주피엘?' 니콜라스는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어디 서 들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들은 니콜라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시선을 일체 주지 않 은 채 즐겁게 떠들며 걷기 시작했다.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니콜라스 는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 그들을 따라갔다. "레온. 있잖아. 게이트는 언제 열리는 거야?" "글쎄. 장로님들이 노력하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바깥 세상으로 나갈 수 있을 거야." "나 빨리 바깥 세상에 나가보고 싶어."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야, 주피엘." "근데 레온. 왜 주피엘이란 이름을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되는 거 야?" 레온은 우뚝 멈췄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주피엘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혹시 다른 사람한테 말했어?" "아니. 레온이 말하지 말랬잖아." "잘했어. 절대, 절대로 그 이름을 다른 사람한테 말해선 안 돼. 안 그 럼 사람들은 주피엘 널 죽일 거야. 잊지 마. 주피엘이란 이름은 너하 고 나하고 단둘이 있을 때만 쓰는 거야. 알았지?" 니콜라스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굳은 다짐을 요구하는 그 눈동자는 어딘가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주피엘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응. 알았어." "약속이야?" "응." 어린아이답게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한 그들은 화기애애하게 웃으 며 손을 붙잡고 즐겁게 깡충깡충 뛰어갔다. 정말 사이 좋아 보이는 형제였지만, 니콜라스는 그들이 형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가사의한 느낌이었다. 저들이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낯설지는 않 았다. 니콜라스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걸을 힘이 없었다. 그는 힘없이 중얼 거렸다. '주피엘….' 얼마 전 환영에서 보고 들었던 이름과 저 붉은 머리카락의 어린 소 년은 무슨 관계인가. 단순한 동명이인? 아니면 어렸을 때의 모습? 그 것도 아니면 환생? 환생? 환생? 환생? "으윽…." 머리가 아파 왔다. 다리가 아파 왔다. 팔이 아파 왔다. 전신이 아파 왔다. 온몸 구석구석이 톱날에 갈기갈기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목에서, 손가락에서, 팔뚝에서, 가슴에서, 다리에서 피가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시뻘건 그림자가 저 멀리 사라지는 두 소년의 모습을 뒤덮 어 버렸다. 전신이 욱신거린다. 누군가가 부른다. '엘리우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누군가가 부른다. '엘리우스….' 죽고 싶을 듯 고통스럽다. 환청은 끊이지 않는다. '엘리우스… 정신 차려.' 극심한 고통 속에서 힘겹게 눈을 뜬 니콜라스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쇠사슬에 묶여 있는 몸은 피투성이로 난자돼있었다. 넓은 동산의 풍경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 은 차디찬 감옥이었다. 상처로 뒤덮인 다리를 오르던 생쥐와 눈이 마주쳤다. 생쥐는 전신의 털이 곤두선 채 벌벌 떨었다.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하던 생쥐는 니 콜라스가 잠시 허공으로 시선을 돌린 틈을 타서 저쪽으로 쪼르르 달 아났다. '견딜 만하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신은 이미 통증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망 가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 욱신거리던 느낌은 이미 내 것이 아닌 것 처럼 돼버린 지 오래였다. '엘리우스….' 또다시 환청이 들렸다. 순간 그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누구야! 누구냐고!" '엘리우스….' "누구야! 대답해! 대답하란 말이야!" 그러나 그는 자신의 외침이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다. 이것은 육성이 아니라 환청이었다. 머리 속에서만 울리는, 고름 같은 환청. 두개골 안에서 고름이 유영하는 느낌이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 은 충동이 일어났다. 전신이 불타오르는 듯한 끔찍한 그 느낌 속에서 그는 처절하게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묵직한 쇠사슬은 전혀 꿈쩍도 않았다. "이봐. 조용히 해. 나도 잠 좀 자자고." 밖에서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조금 전까지 그의 몸을 칼과 채찍으로 마구 난자하던 고문꾼이었다. 이를 갈며 고문꾼이 서 있는 쪽을 노려보던 니콜라스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위급한 이 순간에도 어떻게 예안을 구출할지만을 생 각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당장 자신은 여기에서 빠져나가는 것조차 불 가능한 몸이었다. "니콜라스." 또 환청이 들리네. 니콜라스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니콜라스." 유령인지 뭔지는 몰라도 참 귀찮은 놈이었다. 환청인 거 뻔히 아는데 왜 자꾸 계속 부르지? "니콜라스." 세 번째로 목소리가 들렸을 때 그는 환청이 아님을 알았다. 무심코 고개를 들던 그는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하고 경직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고문을 덤덤히 견뎌낸 그의 무심한 눈동자가 경악에 휩싸였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 "어, 어떻게 당신이 여기에…?" 눈앞에는 세현이 걱정스런 안색을 지은 채 서 있었다. 니콜라스는 지 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이것은 꿈인가? "끔찍하게도 당했구나. 지금 당장 풀어줄게." 밖의 간수는 기절한 모양이었다. 세현은 절단기를 꺼내어 니콜라스를 속박한 쇠사슬을 자르려 했다. 그 순간 니콜라스는 거칠게 몸부림을 쳤다. "하지 마요!" "왜 그래?" "당신이 절 구해줄 이유가 없잖아요! 당신은 지금 절 함정에 빠뜨리 려고 하는 거죠?" 세현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난 뒤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살폈다. "날 못 믿는 거니?" "당신을 믿을 리가 없잖아요! 당신은 누나의 적인데!" "아니야. 그건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그 말을 믿고 싶은 충동이 니콜라스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는 억지 로 그것을 떨쳐 버렸다. "다 알아요. 날 도와주는 척 하면서 뭔가를 노리는 거죠?" "내가 지금 이 상태의 널 구출해서 뭘 얻을 수 있다 생각해?" 니콜라스는 말이 막혔다. 세현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섰다. 그의 등은 무척 쓸쓸해 보였다. "엘리우스는 현재 붙잡혔고 엔젤은 철저한 감시 하에 놓여 있어. 고 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엘리우스는 자력으로 탈출할 수 없고, 엔젤은 연약한 소녀 이상일 수가 없지. 그리고 맥은 현재 바드로 3세가 움직 이지 못하게 봉쇄했고." "…." "지금 이 상황에서 이런 연극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내가 너 의 적, 그들과 같은 편이라면 말이야." 니콜라스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세현은 등을 돌려 그를 주 시하며 부드러운 표정을 띠었다. "날 믿어. 나는 네 적이 아니야." "하지만 당신은 그들과 같은 민족이잖아요! 저 빌어먹을 아틀란티스 인지 뭔지 하는 녀석들과!" "이제는, 아니야." 더 이상 단단할 수 없는 음성에, 니콜라스는 놀란 눈을 치켜 떴다. 세현은 차가운 조소를 짓고 있었다. "더 이상 나는 저들과 같은 민족이 아니야. 오늘 이 순간부터, 아니 어제부터…, 아니아니, 내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아니었어. 단지 바로 조금 전에 그것을 재확인했을 뿐이야." 의아함과 혼란스러움이 니콜라스의 눈동자에서 빛났다. 세현은 절단기를 들어 일단 그를 쇠사슬에서 풀어주었다. 전신이 고 문에 엉망이 된 그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세현이 재빨리 그를 부축해 부었다. "괜찮니?" 그의 품은 무척 따스했다. 어디선가 한 번 겪었던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의 환각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무 기억도 떠오르지 않 았다. 「실컷 우는 건 슬픔을 해소시켜주긴 하지만, 너무 자학하는 건 좋지 않아. 너 자신을 소중히 아껴.」 불현듯 어떤 속삭임이 니콜라스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의 표정 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왜, 왜 그래? 아프니?" 세현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니콜라스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휘 청거렸다. 세현의 목소리. 무의식 속에 남아 있던 목소리. 그 두 목소 리가 합쳐지며 하나의 형상을 낳았다. 「글쎄, 그게 알고 싶어?」 「그건 중요하지 않아.」 「말해주고 싶지 않은 걸.」 「말해줘도 너는 모를 거야.」 「그래도 알고 싶니?」 「자신 있으면 한 번 맞춰볼래?」 따스한 미소를 지닌 소년의 실루엣, 죽은 기억 속에 묻혀 있던 그 영 상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여태껏 너무나 당연한 듯 잊어버린 채 기억 해내지 못한 기억이었다. 경직이 멈췄다. 「내가 누굴 만났다는 건데? 누나,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기억의 화산이 정지했다. 몸의 떨림이 멎었다. 쥐 죽은 듯 고요한 가 운데 니콜라스와 세현의 심장만이 쿵쿵쿵 세게 뛰었다. "제임스…?" 묘한 생기에 찬 니콜라스의 눈동자를 어두운 안색으로 들여다보던 세현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니콜라스는 들뜬 얼굴로 물었다. "병원! 병원에서 우리 만났죠? 그렇죠? 그때 제가 당신을 보고 감격 해서 울고… 당신은 떠나고… 그리고 전 기억을 못하고…."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가던 니콜라스는 자신이 그동안 그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부분에 생각이 닿았다. 그러자 의심이 치솟았다. "그런데 왜 전 그걸 기억하지 못했던 거죠? 당신은 도대체 저한테 무슨 짓을 한 거죠?" "…하아." 세현은 어두운 얼굴로 일어났다. 니콜라스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는 우울한 눈빛으로 니콜라스를 주시했다. 수척한 서글픔이 가득 배여 있는 그 검은 눈동자는 니콜라스가 가장 좋아했던 것이었다. 처음으로 그를 보았을 때, 매력적인 강의로 사람 들을 휘어잡으며 발하고 있던 그 눈빛. "말해요. 말해요. 저한테 무슨 짓을 한 거 맞죠?" "…." "거짓말할 생각은 말아요. 도망칠 생각도 말아요." 니콜라스는 기침을 토하며 권총을 찾았다. 그러나 압수 당한 권총이 손에 잡힐 리 없었다. "여전하구나. 뭘 요구할 때마다 권총을 찾는 버릇 말이야." "절… 알아요? 옛날의 절 본 적 있어요?" 다급해졌다. 니콜라스는 초조한 얼굴로 세현에게 매달릴 듯 일어났 다. 그러나 고문에 혹사당한 발목은 휘청거리며 넘어졌다. 세현이 재 빨리 그를 부축해 주었다. 그들의 눈빛이 공중에서 얽혔다. 니콜라스는 쏘듯이 그를 바라보았 다. 그는 무언가를 우울해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저는… 최근 6년의 기억이 없어요. 혹시 뭔가 아는 게 있나요?" "…." "있다면 말해줘요! 제발 말해줘요! 전 누구고 당신은 누군지, 제가 어 디서 태어났는지 전부 다 말해달라고요!" 니콜라스는 절규하며 세현에게 매달렸다. 그 자신조차도 몰랐던 여린 모습이었다. 그는 흐느끼듯 울며 세현의 옷자락을 물고늘어졌다. 새 하얀 티셔츠에 어린 눈물의 얼룩이 물들었다. 한숨을 내쉰 세현은 가만히 그의 볼을 다독였다. 그는 눈물이 멈추지 않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말해줄게. 전부 다 말해줄게." 한 줄기 경직된 침묵이 그들의 숨결을 타고 흘렀다. 창살 사이를 비 집고 들어온 별빛 아닌 별빛이 창백한 그들의 얼굴을 매만졌다. "나는… 수호자야." "수호자?" "대대로 엘리우스를 보호할 임무를 띤 사람이지. 수호자의 시조는 엘 리우스의 부하였어. 최초의 수호자, 그러니까 내 시조분은 이성인 엘 리우스를 사랑했는데, 엘리우스에게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는 바 람에 결국 그 사랑은 이뤄지지 못했지." "…." "그 사랑이 아마 증오로 바뀌었나 봐. 시조분은 결국 엘리우스를 배 반했고, 엘리우스는 죽으면서 시조분과 그 자손들에게 대대로 이어질 저주를 남겼지. 그래서 우리는 일만 년이 지나도록 수호자의 운명에 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니콜라스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핏줄이 도드라진 손등이 부들부들 떨 리고 있었다. 내가 그랬다고? 내가 저주를 내렸다고? "그렇다고 널 원망하는 건 아니야. 넌 기억도 못하고 있을 테니까. 나와 내 윗대의 조상분들은 전부 수호자로서 엘리우스, 즉 대를 이어 환생한 너를 보호해왔어. 그게 우리가 짊어진 죗값이었으니까." 세현은 우울한 눈빛을 지우고 똑바로 니콜라스를 바라보았다. "전에 네가 몹시 슬퍼했을 때… 난 너를 찾을 수 있었어. 하지만 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순 없었지. 본디 수호자는 카이저 못지 않은 강 한 힘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난 그러지 않았거든. 그런 상황에서 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너와 날 둘 다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었 어. 그래서 난 널 진정시킨 뒤 나하고 만났다는 기억을 지웠어." 미칠 듯이 가슴이 두근거린다. 가장 소중한 것을 되찾았다는 느낌이 바로 이러할까. 내 것이라는 느낌, 유일무이하게 진정으로 이 세상에 서 내 것이라는 느낌이 니콜라스를 사로잡았다. 니콜라스는 간신히 손을 뻗어 세현의 뺨을 만졌다. 이 사람이 바로 나의 것이다. "제, 제임스…." 그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부모를 다시 만난 미 아처럼 가여운 눈물이었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게 왔지?" by eden Y물이냐.....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새창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53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희랑(曦朗) ..... Y물이든, 뭐든 상관하지 않고 좋아하고 있습니다; 11-08/21:21 엘베루시아 후후 11-07/23:51 플로피디스켓 작품성만 좋으면 저는 모든걸 다 포용할수 있습니다. 실탄님,금지된 세계도 환영입니다.[후후] 11-07/12:41 sairel Y물일지도.. 11-07/12:29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54 회] 날 짜 2004-11-07 조회 / 추천 825 / 16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대륙의 노래 예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감격 비슷한 감정이 심장을 장악했 기 때문이었다. 기적을 체험한 듯 경직돼 있던 심장은 이윽고 거세게 박동하며 기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미안해. 너무 늦어서." 가짜 별빛을 받아 빛나는 레이온의 얼굴은 수척했지만, 전에는 볼 수 없던 생기가 돌고 있었다. "들어가도 돼?" "어? 어, 드, 들어와, 형." 예안은 허둥지둥 비켜주었다. 끙차, 하며 창틀을 넘은 그는 불만스러 운 눈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런 좁고 더러운 방에 너를 가둬두고 있단 말이야? 아무리 포로라 고 해도 네가 얼마나 존귀한지 녀석들이 모를 리 없을 텐데, 이래도 되는 거야?" '이게 좁고 더럽다고?' 웃음이 나왔다. 100평은 족히 넘어가 보이는 이 넓고 화려한 방이 좁 고 더러운 것이라면 도대체 어느 정도는 되어야 호사스럽다는 소리 인가. 한 차례 기쁨이 가셨다. 예안은 조금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대답할 필요는 없겠지?" "아…." 문득 맥은 레이온의 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낸 예안은 씁쓸한 미소 를 머금었다. 그가 도와주러 온 것이 기쁘기는 하나, 그의 영향 아래 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씁쓸한 것이었다. "고맙지? 내가 구하러 와줘서." 장난스런 물음에 그녀는 그만 웃어버렸다. "뭐라고 대답해주기를 바라는데?" "좋아 죽겠다고 대답해주면 기쁠 것 같아." "키스가 아니라? 왜, 형 키스 뺏는 거 디게 잘하잖아." "누가 들으면 내가 강제로 한 줄 알겠다. 기억해 둬. 네가 먼저 자발 적으로 해줬다는 거." "매번 내가 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걸었잖아."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망각한 듯 태평스럽게 장난스러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근데 정말 어떻게 여기 온 거야?" "그동안은 여기 위치를 몰랐기 때문에 시트날타와 인연을 끊지 못했 어. 하지만 일단 위치를 안 이상, 방어막을 뚫고 침입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지." "인연을 끊지 못했다고? 그럼 지금은?" "네가 생각한 게 맞아. 앞으로 난 시트날타, 아니 아틀란티스와 인연 을 끊을 생각이야. 어차피 이제 저들이 제공하는 자금은 필요 없으니 까. 난 이미 나만의 독자적인 자금망을 형성했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복도에서 누군가가 걷는 소 리가 들렸다. 레이온은 황급히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예안은 시치미 를 뚝 떼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아직 안 주무시고 계신가요?" 얼굴을 내민 하녀가 다소곳하게 물었다. "내가 자든 말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신경 쓰지 말고 빨리 꺼져." 짜증 섞인 거친 말투였지만 하녀의 표정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안 녕히 주무시라는 정중한 인사를 남긴 뒤 하녀는 문을 닫았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예안은 살 떨린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 다. 레이온이 다가왔다. "이런, 우리 아가씨가 화가 단단히 났나 보네. 평소 안 쓰던 그런 상 스러운 말을 다 쓰고 말이야." "안 쓰긴 뭘 안 써? 형도 내 말버릇 알잖…." 무심코 대답하던 예안은 그의 눈동자에 투시된 인물이 자신이 아니 라 자신과 외모만 같을 뿐인 여자인 것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자. 빨리 여기서 나가자, 유젤." 레이온이 미소지으며 내민 손을 잡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뚫어 지게 바라보던 그녀는 피식 웃고는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무척 따스했다. 차라리 이대로 전부 다 잊어버린 채 모든 것을 맡기고 싶 을 만큼. "제시라는 여자가 있어. 나와 같은 수호자지. 나하고는 달리 막강한 에날도스를 지녀서, 5대 대신 중에 누구와 겨루어도 지지 않을 정도 야. 그런데 제시는 아무리 내가 엘리우스가 아니라고 설명을 해도 믿 지 않았어. 제시가 날 보호한답시고 항상 붙어 다니는 바람에 오히려 난 위원회로부터 정말 엘리우스가 아니냐는 추궁을 받아야 했어." 무거운 목소리는 느릿느릿하게 말머리와 말꼬리를 이었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를 정말 사랑하셨어. 행복한 가정을 이 룰 수 있을 거라고 믿으셨지. 하지만 내가 태어나기 전, 현 황제 바 드로 2세가 우리 어머니에게 눈독을 들이고 만 거야. 황제는 어머니 를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를 온갖 방법으로 괴롭혔고, 결국 아버지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셨지." 그의 슬픔이 아련하게 전해졌다. 니콜라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와 친분이 있었던 제시의 아버지, 비델크는 어머니의 죽음을 방관했어. 비델크도 우리 어머니를 사랑했거든. 그래서 제시는 나에 게 죄책감을 갖고 있어. 제시는 자기 아버지가 저지른 일을 몹시 부 끄러워 해." 허공에 걸린 어둠이 세현의 슬픔을 위로하듯 그의 머리카락을 조용 히 매만졌다. "어머니는 나를 가진 채로 바깥 세상으로 도망쳤어. 황제는 어머니를 손에 넣기 위해서 어머니가 '제물'이었다고 거짓 발표를 하고 체포명 령을 내렸지." "제물?" "엘리우스 말이야." 니콜라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분했다. 엘리우스라는 이름은 아 틀란티스에서 제물 이상의 가치는 지닐 수 없었단 말인가. "어머니는 바깥 세상 사람과 결혼하셨어. 계부는 내가 당신의 아들이 라고 믿었지. 사실은 나도 얼마 전까지, 그러니까 우연히 어머니의 일기장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내가 계부의 아들인 줄 알았어." 세현은 억지로 너털웃음을 지었다. "비델크는 뒤늦게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찾으러 왔어. 바보 같은 짓이었지. 그냥 어머니를 찾지 말고 조용히 이 더러운 대륙에 처박혀 살았으면 어머니는 죽지 않아도 됐는데 말이야. 녀석은 황제 의 친위대가 자기를 미행하는 것도 모른 채 어머니를 찾아냈고, 결국 어머니는 이 더러운 대륙으로 다시 끌려오셨지. 그때 나는 생후 6개 월도 되지 않았어." 그의 목소리에 증오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황제는 어머니를 협박했어. 자기 여자가 되라고 협박했어. 그렇게만 한다면 제물이라고 누명 씌운 것도 풀어준다고 했어. 하지만 어머니 는 굽히지 않았어. 결국 어머니는 황제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 로 세상을 버리셨지. 비델크는 그 뒤에 자살했어. 빌어먹을, 그럴 거 면 애초에 찾아오지 말았어야 하는 거 아냐?" 니콜라스는 며칠 전 보았던, 병으로 다 죽어가는 황제의 늙은 얼굴을 떠올렸다. 그때 황제는 그에게 엘리우스가 아니라고 말했다. 어쩌면 그것은 니콜라스에게 한 말이 아니라, 세현의 어머니가 자살한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흘러나온 헛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세현의 어머니를 발견했을 때 황제가 어떤 심정 이었을지 상상해 보았다. 강한 죄책감에 시달렸을 테고, 그것이 건강 을 악화시켰던 건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황제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가. 비록 한참을 어긋난 사랑이기는 했어도. 그러나 황제를 동정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니콜라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현은 온화한 표정을 띠었다. "자, 구질구질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빨리 여기서 나가자." "안 돼요. 누나를 두고 갈 순 없어요." "걱정하지 마. 예안이는 지금쯤 박사가 구해줬을 거야." "박사?" "넌 아마 모르겠다. 박사라고 있어. 예안이…를 탄생시킨 사람이지." 의아한 빛이 그의 눈동자에 떠올랐다. "탄생이라니요? 무슨 소리예요?" "몰랐어? 예안이는 복제인간이야.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탄생된 인간이지. 복제작업은 박사가 했고, 시트날타, 아니 아틀란티 스는 그 자금을 제공했지." "혁명이요?" "아틀란티스 대륙을 바다 위로 융기시키는 거야. 거기에는 막대한 에 너지가 필요해. 그래서 그들은 맥의 무한동력을 매개체로 사용할 계 획을 세웠지. 솔직히 난 아직도 무한동력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지 만 말이야. 이래 봬도 전공 중 하나가 물리학이거든." 세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니콜라스를 부축했다. 니콜라스는 전혀 고통 을 못 느낀다는 얼굴로 그의 부축을 받았다. 태연한 얼굴을 보면서 세현은 내심 속으로 감탄했다. '이렇게 어린데… 이렇게 어른스럽다니….' 그와 눈이 마주치자 세현은 우울한 표정을 얼른 지우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 감옥을 무사히 빠져 나온 그들의 머리 위를 별빛 아닌 별빛 이 비춰주었다. 사기그릇이 맑게 부딪치는 소리가 또르르 융단 위를 굴렀다. 정교한 문양이 수놓인 융단 구석에서는 새하얀 털을 가진 고양이가 털실공 을 물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싫증이 났는지 고양이는 털실공을 내려놓고 카뮤에게로 쪼르르 달려 와 다리에 몸을 비벼댔다.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던 카뮤는 웃음 띤 얼굴로 고양이를 쓰다듬어주려 했다. "…!" 돌연 안색이 창백해진 카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둘러 문을 열고 방을 나선 그는 복도에서 마찬가지로 황급히 어딘가로 향하던 클랙을 만났다. "클랙 대신. 혹시 자네도?" "전하도?" 그들은 상대가 똑같은 낌새를 느꼈음을 알아차렸다. 카뮤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방어막이 뚫렸다." "그런 것 같습니다. 이 거대한 흐름은… 방어막이 뚫리거나 그 격벽 에너지가 손상되지 않고서야…." "헌데 왜 침수 당하지 않는 거지? 이 정도로 큰 구멍이 뚫렸으면 그 수압 때문에 순식간에 대륙이 침수되는 게 아닌가?" "반응이 금방 사라진 것으로 보아 방어막이 다시 원상회복된 듯 합 니다. 하긴, 그 정도로 침수를 허락할 허술한 방어막이 아니니까요. 뭐니 해도 일만 년 간 이 대륙을 보호해온 방어막이 아닙니까. 문제 는 도대체 무엇이 방어막을 강제로 뚫고 쳐들어왔느냐는 것입니다." 카뮤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박사… 아니면 제임스인가?" "그렇겠지요. 그 목적은 아마도…." "엔젤을 데리러겠지. 허나 그렇게는 안 될걸. 클랙 대신, 지금 당장 비상을 알리고 경계 태세를 갖추도록 하게. 헤이저들은 그 기운을 못 느꼈을 가능성이 크니까." "알겠습니다." 클랙은 황급히 복도를 뛰어갔다. 불안함과 두근거림이 교차한 얼굴로 가슴을 쓰다듬던 카뮤는 휙 등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걸었다. 예안이 머물러 있는 방향이었다. 그녀의 방 앞에 당도한 그는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방문을 확 열어 젖혔다. 창문이 활짝 열린 사이로 커튼이 밤바람에 펄럭거리고 있을 뿐, 넓은 방안에는 사람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방안에 들어선 카뮤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 가 그만 분노한 얼굴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경비병! 경비병은 어디 있나!" "무, 무슨 일입니까, 전하?" 모퉁이 너머에서 경비병이 달려왔다. 카뮤는 분노한 얼굴로 외쳤다. "엔젤이 사라졌다! 당장 엔젤을, 엔젤을 찾아내!" "예엣?" 깜짝 놀랐던 경비병은 이쪽으로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고 변명하 려다가 사나운 카뮤의 안색을 보고 얼른 그 말을 집어삼켰다. 그는 훈련된 본능이 시키는 대로 경례를 하고 서둘러 뛰었다. 중심을 잃은 채 비틀거리던 카뮤는 노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벽을 주 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두껍고 단단한 벽에 커 다란 구멍이 뚫렸다. "크윽…." 시뻘개진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던 그는 휘청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새파란 빛이 발목에서부터 올라와 전신을 감싸안은 순간, 그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때아닌 경보에 황궁은 난리가 났다. 조용하던 정원은 병사들의 고함 소리로 왁자지껄해지고, 더위를 피하고 있던 벌레들은 수많은 횃불에 놀라 몸을 숨겼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던 사람들은 엔젤이 탈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경악했다. 잠시 우왕좌왕하던 그들은 이내 속속들이 소집 된 상관의 명령 하에 재빨리 대열을 갖춘 뒤 엔젤을 추격하기 시작 했다. 달콤한 잠에서 깨어나 투덜거리던 시민들은 엔젤이 탈출했다는 소리 에 사색이 되었다. 시민들은 두말 않고 수색 작업에 협조했다. 병사 들과 시민들은 한 마음 한 몸이 되어 엔젤을 찾아다녔다. 광장 구석의 커다란 나무 위의 울창한 잎 사이에 숨어 지켜보던 예 안은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기분 묘하네." "뭐가?"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찾으러 다닌다니 말이야. 기분이 참 묘한 거 있지." "후후, 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니까." 커다란 가지를 골라 앉은 채 레이온은 패드형 컴퓨터가 뭔가를 하고 있었다. '복구 작업은 완전히 끝났습니다. 언제라도 가동할 수 있습니다.' '부탁이니까 설치고 다니지는 마. 애써 복구시켰는데 또 혈도 짚이면 큰일이니까.' 가볍게 핀잔을 준 뒤 레이온에게 물었다. "형. 맥을 여기로 부를까?" "아직 그럴 필요 없어. 내가 보낸 사람이 니콜라스를 데리고 곧 여기 로 올 거야. 여기서 만나기로 했거든. 그때까지는 우리가 여기 있다 는 걸 들키지 말아야 돼." "알았어." 예안은 초조한 안색으로 니콜라스의 모습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광장에 나 있는 길을 통해 끊임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어왔다가 빠져 나가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괜히 들킬 것이 두려워 함부로 살피지 못 하고 굵은 가지에 몸을 찰싹 붙이고 있었다. "왔다." 레이온이 작게 말하자 그녀는 얼른 고개를 들어 밑을 살폈다. 수색망 을 넓혀 도시를 빠져나갔는지 사람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 가 운데, 저쪽에서부터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어둠 속이라 잘 알 아볼 순 없었지만, 작은 쪽이 니콜라스인 것은 알 수 있었다. "누나." "정말 다행이다. 근데 너 괜찮…." 반가워하며 니콜라스를 껴안으려던 예안은 상처투성이가 된 얼굴에 안색이 핼쑥하게 굳었다. 그녀는 싸늘한 표정을 한 채 잠자코 니콜라 스의 옷을 이리저리 걷어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 을 만큼 끔찍한 상처들이었다. "난 괜찮아. 근데 누나는…." "됐어. 이야기하지 말자." 그녀는 분노를 참으며 냉랭히 말했다. 니콜라스의 손을 잡고 돌아서 려던 그녀는 그를 데려온 사람을 흘끗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너, 너, 넌…?" "오랜만이네." 세현은 씁쓸히 웃었다. 경악과 황당함으로 범벅이 된 눈을 휘둥그렇 게 뜬 예안이 고함을 지르려는 순간 레이온의 손이 뒤에서부터 그녀 의 입을 막았다.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빨리 저쪽으로." 레이온은 발버둥을 치는 예안의 입을 막은 채 어두운 수풀로 갔다. 니콜라스와 세현이 잠자코 그를 따라갔다. 그늘 뒤로 몸을 숨기고 난 뒤에야 레이온은 입을 막은 손을 풀어주었다. "사람 숨 막혀 죽이려고 작정했어?" "걱정 마. 넌 숨이 막힌다고 죽지는 않으니까." "형은 내가 혐기성 인간인 줄 알아? 숨막힌다고 안 죽게?" "ST기관만 있으면 무산소 공간에서도 살아갈 수 있지. 아직 넌 ST 기관의 능력을 100% 활용 못하는 것 같지만 말이야." 레이온은 태연스레 대답했다. 부글부글 끓는다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 던 예안은 화기를 억누르고 세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냉랭히 말했다. "그런데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by eden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54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影元 하지만 약간씩 나타나는 가학적 성도착증세의 장면과 야X이 물에 비견될 장면, 비정상적인 집착이 사람의 관계사이를 씁쓸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군요. 어찌했든 건필! 11-08/12:35 影元 대략 반년만에 읽는데도 좋군요. 예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게 매우 좆타! 11-08/12:34 기나긴여정 켈켈~ 케이랑레이온 세현니콜~ 유젤은~ 여왕님 ( 먼소리여!!) 11-08/01:05 플로피디스켓 건필하세요- 11-07/12:41 유링-★ 어마~좋아요! ^^ 11-07/12:35 프레디 조타~ 11-07/12:15 silver7510 하나보면 또 올라와있고...연참...입니까? 11-07/12:09 아스트론 유후 연참 아이 좋아라~ 11-07/12:06 esik 킬킬킬킬;ㅂ;..세현X니꼴에 원츄 오백만개[..] 하지만 그리 성립되지 않는 커플[흥] 레이온씨..좋아요;ㅂ;... 이어져봐요[누구랑<-] 11-07/12:03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55 회] 날 짜 2004-11-08 조회 / 추천 712 / 12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대륙의 노래 세현은 억지로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왜긴, 널 구하려고 왔지." "네가 왜 날 구하는데?" "그야…." 그가 막 대답하려는 순간 예안은 레이온에게 눈을 돌리고 냉랭히 말 했다. "형 몰라? 이 녀석 시트날타, 아니 아틀란티스인이란 말이야. 우리와 적이라고. 근데 이런 녀석의 도움을 받을 생각을 해?" 난처한 기류가 그들을 맴돌았다. 레이온은 세현에게 네가 알아서 하 라는 눈짓을 보냈다. "아니야. 난 적이 아니야. 저들과 인연을 끊었다고." "무슨 소리야?" 단호한 부정에 예안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소란스러운 거리 쪽을 흘끗 돌아본 세현은 차분히 입을 열어 자신이 양자 컴퓨터의 결점을 발표했던 일, 황제가 자신의 어머니를 죽도록 만든 과거 등을 이야기했다. 길고 긴 시간이 지루하지 않게 흘러갔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듣 고 있던 예안은 그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이야?" "사실이야." "나보고 지금… 그걸 믿으라고?"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으로 레이온을 바라보았다. 그는 잘라 말했다. "믿어도 좋아. 녀석은 지금 널 속이려고 거짓말 따위를 하는 게 아니 야. 이미 다 잡아놓은 너에게 왜 굳이 그런 짓을 하겠어?" "하지만…." "내가 보장할게. 따지고 보면 녀석도 굉장히 기구하게 살았는데 네가 그렇게 부정하면 상처가 된다고." "…알았어. 믿을게." 복잡한 빛이 세현의 얼굴을 감돌았다. 내가 말하는 것은 믿지 않으면 서 그가 말하는 건 믿겠다는 것인가. 세현이 심난해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예안은 니콜라스의 상처 를 다시 살폈다. 눈을 돌리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화상자국이 덕지덕 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혀를 찼다. "그 자식들 정말 너무 한다. 어떻게 어린 아이를 이렇게까지 만들어 놓을 수 있어?" 니콜라스는 전혀 아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혀가 내둘러질 정 도로 대단한 참을성이었다. 레이온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말하는 게 완전 아줌마 다 됐구나." "아줌마라니! 무슨 헛소리야!" "아줌마는 아줌마지. 애 낳았으면 아줌마 아니야?" 발끈하는 그녀를 조금 편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세현은 문득 의구심 을 느끼고 굳어졌다. "애를 낳았다는 게 무슨 소리야?" "어?" 예안은 조금 당황한 눈으로 레이온의 눈치를 살폈다. "알아서 대답해. 난 상관없으니까." 친척들에게 그랬듯 유진우의 아이라고 대답하든 아니면 자신의 아이 라 대답하든 상관 않겠다는 태도였다. 예안은 레이온에게 왠지 모를 미안함을 느꼈다. "나 아이가 하나 있어. 지금 생후 8개월 정도 된 남자아이야." "!" 세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하던 그는 더듬더듬 물었다. "누, 누구 아인데?" "…유진우." 거짓말을 하면서, 가슴이 옥죄어 오는 느낌을 받았다. 레이온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차마 돌아볼 용기가 안 났다. "아아…. 그랬구나. 그런 사이였구나." 자조하듯 중얼거리던 세현은 애써 표정을 밝게 하고 말했다. "축하해." "…고, 고마워." 그녀는 어려워하는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레 이온이 손뼉을 짝짝 쳐서 주위를 환기시켰다.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쌓인 회포는 다음에 풀기로 하고, 일단 여 기서 빠져나가자." 예안은 걱정스런 눈으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 혹 유빈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부정한 것 때문에 그가 상처받지나 않았을까 불안했다. 그러나 곧 그녀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너? 레이온 형한테 마음 열지 마. 그랬다가 예 안이를 빼앗겨도 좋다는 거야?' 이제 단지 사랑하는 여자의 몸을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다 는 차원의 반항이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나의 정체성, 내가 살아 있 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싸워야 했다. 레이온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에게 굴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뇌 이식 수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유 진우'의 인격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걸 수용하게 된다. 그것 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고 싶었다. "이쪽으로 가자." 레이온은 한쪽 방향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수풀을 헤치며 십 분 정도 나아가자 곧 넓은 평야가 나왔다. 왼쪽 저 멀리에서 횃불을 들고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 다. 하지만 거리가 먼 까닭에 이쪽을 발견하기는 불가능할 터였다. "저쪽에 오토바이를 미리 준비해뒀어. 그걸 타고 가면 돼." "맥을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 "안 돼. 적어도 황태자가 어떻게 해서 맥의 신경회로를 차단했는지 그 원인을 밝혀내기 전까지는 함부로 쓸 수 없어." 레이온은 잘라 말하고 다시 걸었다. 세현은 니콜라스를 부축한 채 걸 음을 옮겼다. 니콜라스는 부축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의 도움을 받 는 게 기분 좋아 잠자코 걸었다. 개울을 두 번 건너자 저 멀리 보이던 사람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 졌다. 커다란 바위산이 나타나자 레이온은 걸음을 멈췄다. "기다리고 있어." 세현과 레이온은 바위산의 좁은 구멍 사이로 들어갔다. 이윽고 그들 은 두 개의 커다란 물건을 끄집어냈다. 예안은 그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이게 오토바이야?" 그것은 오토바이처럼 생기기는 했으나 오토바이가 아니었다. 세상에 바퀴 없는 오토바이가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날씬한 동체에서는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것처럼 차가운 냄새가 물씬 났다. "소형 반중력 엔진이 장착돼 있는 오토바이야. 바퀴를 쓰지 않고 지 면 위에 살짝 떠서 달리는 거지. 물론 출력이 약하기 때문에 하늘은 못 날아." "굉장히 고급 오토바이를 가져왔네. 이거 만들어서 팔아치우면 떼부 자 되겠다." 예안은 가볍게 농담조로 말하며 「오토바이」의 표면을 손으로 쓰다 듬었다. 레이온이 한 대에 타고 예안이 그 뒤에 탔다. 니콜라스는 세현이 뒤 에 탔다. 멀리서부터 조금씩 동이 터 오고 있었다. 두 대의 최첨단 오토바이는 아침 이슬이 묻어 있는 넓은 평원을 빠르게 달렸다. 먼지가 일어나기 는 했지만 소음은 거의 없었다. 뺨을 스쳐 가는 차가운 바람에 심취해 있던 예안은 비로소 해방의 자유를 느끼고 기분이 좋아 그만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렇게 기분 좋아?" "응! 날아갈 것 같아!" 그녀는 깔깔거리며 떨어질세라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지금 이 순 간만큼은 그가 사랑하는 여자의 몸을 탐낸다느니 하는 생각 따위는 전혀 들지 않았다. 오토바이는 이윽고 대륙을 보호하고 있는 「벽」 앞에 도착했다. 푸 른 바닷물이 투명한 벽 뒤로 시퍼렇게 흘러가는 광경을 예안은 질렸 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꼭 무슨 꿈을 꾸는 기분이야. 심해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신은 존재한다는 증거지. 얄궂은 형태지만 말이야." 레이온은 무표정한 얼굴로 벽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었다. 벽은 아무 저항 없이 그의 손을 통과시켰다. 보호장갑을 낀 그의 손은 벽을 뚫 고 차가운 해수에 노출되었다. 으그그그, 하는 소리와 함께 금속장갑 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황급히 손을 뺐다. "휴우. 대단한 압력이군." 그는 조금 찌그러진 장갑을 벗으며 중얼거렸다. 예안은 그의 장갑을 받아들고 신기한 눈으로 살폈다. "디게 단단한 건데 찌그러졌네?" "여기는 수심 일만 미터 정도 되는 지역이니까. 잘못해서 이 벽 쪽으 로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 저 수압에 노출되었다가는 끝장이야." "근데 왜 해수는 통과시키지 않으면서 사람은 통과시키는 거야?" "글쎄. 그건 신만이 아시겠지." 세현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보호막을 만든 건 신이 아니라 주피엘 사제입니다." "주피엘 사제?" "일만 년 전 가장 강대한 힘을 지녔다는 최고위 사제였죠. 대륙이 가 라앉던 날, 그는 자기 목숨을 희생해서 이 방어막을 만들었습니다." "그랬군." 레이온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넘겼다. 니콜라스는 복잡한 심정이 담긴 눈으로 방어막을 보았다. 친숙하진 않지만 낯설지도 않은 느낌이 가득 묻어 나오는 거대한 푸른 빛. 오 래 전부터 그것을 보아왔던 느낌이 그의 가슴을 사로잡았다. "그럼 만약 외부에서 여기로 공격해올 수도 있겠네? 잘못해서 배가 침몰하거나 하면 그 파편이 여기 하늘에서 떨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는 않아. 이 벽은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만 허용해. 하지만 밖으로 나가봤자 어차피 수압에 눌려 죽으니까 별 쓸모 없는 기능이 지. 참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어두운 얼굴로 어머니를 바라보듯 보호막을 주시하는 그의 뒷모습은 쓸쓸하게 느껴졌다. 레이온은 팔찌형 컴퓨터를 작동시켰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빈 공 간에 커다란 물체가 나타났다. 예안은 기절할 듯 놀랐다. "뭐, 뭐야 이거?" "우리가 타고 온 것. 그리고 타고 나갈 것."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방금 전까지 여기 아무 것도 없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냐는 거야." "투명화 모드 상태였어.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야." "그, 그래?" 예안은 새삼 그가 대단하다고 느끼며, 잠수함을 살폈다. 길이 30미터 에 폭 8미터 정도 되는 그것은 잠수함이라기보다는 소형 제작된 우 주선 같다는 느낌이었다. '저출력 반중력 엔진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비행은 무리지만 지면에 살짝 떠서 자동차처럼 달리는 건 가능합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제가 알고 있는 모델 중 하나니까요. 잊지 마십시오. 반중력 엔진은 저 또한 갖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가진 건 둘도 없을 최고급 출력을 자랑합니다만.' '잘나셨어요.' 맥에게 지그시 핀잔을 주며, 레이온을 따라 잠수함에 탑승했다. 아니, 탑승하려고 했다. "전부 여기 있었군." 날카로운 음성이 뒤에서 들렸다. 그들은 반사적으로 펄쩍 뛰며 뒤를 돌아보았다. 자색 수가 놓여진 옷을 입은 카뮤가 불쾌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도망친 아내를 되찾으러 달려온 남자처럼 집착으로 변질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끔찍히도 무서워 보였다. "내가 너희들을 못 찾을 줄 알았나?" 그가 오른손을 들었다. 그의 오른손이 빛나기 시작했다. "맘 편히 도망치도록 내버려둘 줄 알았나?" 그의 손이 빛을 내뿜었다. 가슴을 격중 당한 니콜라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니콜라스!" 세현과 예안이 당황한 얼굴로 니콜라스를 살폈다. 가슴에 난 화상 자 국 위에 손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콜록! 콜록!" 숨을 못 쉬며 괴로워하던 니콜라스는 이윽고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기침 소리에는 피가 조금 섞여 나왔다. 마비된 사지가 학질 환자처럼 경련을 일으켰다. 벌떡 일어난 예안은 분노한 눈으로 카뮤를 쏘아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당신이야말로 이게 무슨 짓입니까? 우리에게서 도망치다니요." "내 발로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겠다는데 당신이 무슨 참견이야!" "당신은 태어나기 전부터 제 것이 될 운명이었습니다. 운명에 순응하 기 바랍니다." "웃기지 마! 누가 네 맘대로 한대!" 레이온의 안색이 처음으로 창백하게 변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 으로 카뮤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분명히…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해서 여기 까지 온 거지?" "자네가 박사인가?" "…그렇다." "이제는 대놓고 말을 함부로 하는군. 좋아, 뭐 까짓 거 말해주지. 내 가 어떻게 여기 나타났느냐면 말이야." 히죽 웃음을 지음과 동시에 카뮤의 몸이 사라졌다. "이렇게 한 거야."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예안의 뒤에 나타 난 카뮤는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꽉 껴안고 있었다. "무, 무슨 짓이야!" 당황한 그녀는 허둥거렸다. 카뮤는 그녀를 더욱 바싹 껴안으며 차갑 게 조소했다. "놀랍나? 하지만 나에게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레이온은 굳은 눈으로 카뮤를 노려보았다. 믿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능력자라고 해도 순간이동까지 할 수 있다니. 이건 완벽히 계산 착오 였다. 이게 과연 황가의 핏줄이 지닌 힘이란 말인가. "헛된 반항은 그만하고 투항해라. 엘리우스만 곱게 넘겨준다면 너희 들을 살려보낼 용의도 있다." "…그렇게 하면 그 애는 돌려줄 거냐?" "박사! 지금 무슨 소리를!" 세현이 놀란 눈으로 외쳤다. 카뮤는 키득거리며 버둥거리는 예안을 단단히 껴안았다. "의미 없는 질문을 하는군. 대답은 No다." "그럴 줄 알았다. 결국 해결책은 하나 뿐이겠지." 레이온은 잠자코 뒤로 물러섰다. 세현과 카뮤는 그가 뭘 하려는지 의 아해하며 지켜보았다. 예안도 반항을 멈추고 불안한 눈으로 레이온을 보았다. "넬." "알겠습니다." 여자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렸다. 그러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슉! 허공이 갈리는 기척에 카뮤는 반사적으로 급히 오른손을 들었다. 에 날도스가 축적된 그의 손은 조그맣고 반투명한 방패를 만들어내어 공격을 막았다. 카캉! 힘과 힘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도자기를 두드리듯 맑은 소리였 다. 카뮤는 에날도스로 만들어낸 에너지 방패가 산산조각 나 형체를 잃는 것을 어이없는 눈으로 보았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카뮤는 눈앞의 여자를 주시했다. 이십대 초반쯤 되었을까. 갈색머리를 길게 기른 여자는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복장 을 한 채 손에는 원통형의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막대기에서는 길이 1.5미터 가량의 빛줄기가 뻗어 나와 칼날을 형성하고 있었다. "광선검인가?" "당신이야말로 더 놀랍군. 그 칼날은 무엇이든지 잘라버리는 것인데 말이야." 카뮤의 감탄을 레이온이 받았다. 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카뮤의 오른손에 다시 방패가 생겼다. 기 이한 빛이 감돌며 몇 겹의 장갑이 그 위에 덧칠해졌다. 이윽고 황금 색의 굳건하고 불투명한 방패가 그의 손등에 장착되었다. "감탄해할 건 없다. 어차피 칼질 한 번에 산산조각 났으니까 말이야." "그 방패는 조금 전 것보다는 더 튼튼해 보이는군. 하지만 아무리 튼 튼하다 해도 서너 번 막아내다 보면 못 쓰게 되어버릴 거야." "그땐 또 즉석으로 만들어내면 되지. 약한 방패라 해도 한 번 정도는 견디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 같자 레이온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by eden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55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Justice™ 츄천!! 11-08/23:43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56 회] 날 짜 2004-11-08 조회 / 추천 768 / 13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대륙의 노래 카뮤는 레이온을 쏘아보았다. "나는 그래도 박사 자네를 신용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자네를 모 함하는 것을 막아주었지." "그랬습니까? 실수하셨군." "설마하니 자네가 이런 배신을 할 줄은 몰랐다. 어리석기 그지없군." 침중한 음성 뒤로 카뮤의 오른손에 맺힌 빛이 요요하게 빛났다. 파괴 력을 가득 실은 기운이 일렁임에 주변 공기가 크게 뒤틀렸다. 황가의 피를 이은 자답게 강맹하기 그지없는 기운이었다. 넬은 광선검을 들고 침착하게 카뮤를 노려보았다. 예안이 인질로 잡 혀 있어 섣불리 손을 쓸 수 없었다. 잘못 공격했다가는 되려 그녀를 다치게 하고 말 것이다. "어떡할까요, 마스터?" "봐줄 것 없다. 공격해." "잘못하다가는 유젤님이 다치게 됩니다." "괜찮을 거야. 황태자는 자기 몸을 다치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유젤 은 지켜낼 거다." 황태자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웃음을 그친 그는 잠자코 예안을 놓아주었다. 그에게서 벗어난 그녀는 왜? 라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당신을 다치게 할 순 없으니까요. 인질 같은 거 없어도 나는 이들을 전부 제압할 수 있습니다." 오만한 자신감이 가득한 음성에 치를 떨던 그녀는 성큼성큼 레이온 에게 돌아갔다. 레이온은 안도한 얼굴로 그녀를 품에 껴안았다. "무서웠지? 이제 괜찮아." 자신을 애 취급하는 것에 울컥했다. 그의 품이 따스하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었다. 뭐가 뭔지 모를 변덕스러움에 한숨을 내쉬던 그녀는 잠 자코 그를 밀어내고 카뮤와 넬의 대치를 주시했다. "어떨 것 같아?" 가만히 보고 있던 니콜라스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글쎄. 황태자는 결코 만만치 않아. 나조차도 함부로 승패를 점치기 어려운 실력이었으니까." "저 광선검의 위력을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거다, 니콜라 스 베르노." 레이온이 핀잔하듯 말했지만 니콜라스는 눈조차 주지 않았다. 그가 누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상종하기 싫었다. 파랗게 빛나는 광선검이 허공을 갈랐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섬 뜩하게 뒤틀렸다. 넬은 그 틈으로 칼날을 빠르게 밀어 넣었다. 챙!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칼날과 방패를 맞부딪친 채, 카뮤와 넬은 부르르 힘 싸움을 겨뤘다. 힘껏 깨문 카뮤의 입술 사이 로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렀다. "크윽…." 팔을 부르르 떨던 카뮤는 왼손에 에너지를 모아 힘껏 발사했다. 총알처럼 튀어나간 압축 에너지탄은 넬의 배에 격중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터지며 넬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걸레가 된 옷 조각을 덤덤하게 찢어낸 넬은 침착히 광선검을 쥐고 카뮤를 노려보았다. 다소 손상이 간 방패에 에너지를 불어넣어 다시 회복시킨 카뮤는 조소를 지었다. "너, 인간이 아니구나." "…." "박사가 만들어낸 안드로이드인가? 이렇게 정교한 움직임을 보이는 안드로이드를 개발했을 줄은 몰랐군. 역시 박사를 잃어버린 건 큰 손 실이었어." 카뮤는 레이온을 흘끗 돌아보았다. "어떤가, 박사? 지금이라도 죄를 뉘우친다면 모든 걸 없었던 일로 해 주겠다. 다시 한 번 내 밑으로 들어오지 않겠나?" "나는 한 번도 당신의 밑에 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거 유감이로군. 자네 같은 두뇌를 잃는 것 말이야. 하긴, 어차피 엔젤이 자네보다 더 천재일 테니 상관은 없겠지?" "내가 죽으면 유젤은 슬퍼할 거다." 카뮤는 뜻밖이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미친 듯이 웃기 시작 했다. 그 와중에도 예안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그를 흘겨보며 나무랐다. "절대 슬퍼하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 레이온은 말없이 미소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다시 안았다. 그녀는 입 을 삐죽 내밀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이윽고 카뮤는 웃음을 그쳤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자네는 게이트를 통해서 왔나?" "설마. 쉐난도우 벨리가 얼마나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는지 잘 아는 데 내가 미쳤다고 게이트로 들어갈까? 나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이 곳에 들어왔다." "보호막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체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전부 막아낸 다. 자네 말은 모순이야."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에너지 실드를 일순간 무력화시키는 거지. 물론 대단히 고차원적인 과학 기술이 필요하다만, 나에게 있어 불가 능한 일은 아니다." 카뮤는 껄껄 웃으며 맞장구쳤다. "그럴 테지. 자네에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테지. 뭐니뭐니 해도 자네는 천사 프로젝트를 독단으로 이뤄낸 천재니까 말이야. 제임스 자네도 좀 본받을 필요가 있어." "저 혼자 벌어들이는 자금만 해도 막대한 액수입니다. 그것을 고스란 히 압류한 주제에 하실 말씀은 아니라 생각하는데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 않은가?" 세현은 말없이 카뮤를 노려보았다. 카뮤는 키득키득 조소하며 그를 똑바로 주시했다. "장난을 너무 오래 쳤군. 이제 다시 싸워볼까?" 카뮤가 오른손을 들자 에날도스가 급격히 압축되며 눈부신 섬광을 발했다. 그의 주변 공간이 일그러져 보일 정도로 격한 흐름이었다. 바짝 긴장한 넬은 몸을 날렸다. 광선검이 우아하게 회전하며 카뮤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파츠층! 파편이 조각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커다란 창이 생겨났다. 넬은 당황했지만, 이미 들어간 공격을 거둘 순 없었다. 방패와 광선검이 재차 허공에서 충돌하며 섬열 같은 불꽃이 터졌다. "큭!" 예안을 감싸고 등을 돌린 레이온은 가벼운 신음을 흘렸다. 폭발음에 고막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질지도 모른다.' 현재로서는 넬이 약간 유리한 듯도 보였으나, 카뮤는 아직 모든 능력 을 드러내고 있지 않았다. 만약의 경우를 결심한 레이온은 세현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의 뜻을 알아차린 세현은 조심스레 니콜라스를 등 에 업었다. 레이온은 예안의 손을 잡아끌고 잠수함에 타려 했다. "어딜!" 벼락같은 섬광이 날아오며 그들의 앞을 때렸다. 땅이 굵게 패이며 연 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거기 가만히 있어라. 배에서 멀리 떨어지는 게 좋아." 낮은 위협을 가한 뒤 카뮤는 넬에게 창을 힘껏 던졌다. 파르스름한 빛을 뿌리며 날아간 창은 넬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간발의 차로 창을 피한 넬은 여전히 덤덤하게 광선검을 휘둘러 카뮤 의 방패를 가격했다. 과연 안드로이드다운 침착한 공격이었다. 방패에서 불꽃이 튀며 방패가 다시 얇아졌다. 얇아진 방패 위를 선열 한 빛줄기가 다시 때렸다. 카강! 결국 방패가 소멸되었다. 카뮤는 여유를 잃지 않고 방패를 다시 생성 했다. 광선검이 한 번 때리자 방패는 다시 소멸되었다. 카뮤는 다시 방패를 생성했고, 광선검은 또다시 방패를 소멸시켰다. 그 사이 카뮤는 새로운 창을 형성했다. 파랗게 빛나는 창 끝이 허공 을 뚫으며 넬을 향해 쇄도했다. 넬은 황급히 창을 피했다. 카뮤의 손을 떠난 창은 관성으로 저 멀리 까지 날아갔다가, 멈칫하고 다시 넬에게 쇄도해 갔다. 카뮤가 창을 조종한다기보다는 창이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넬을 공격하는 듯한 형상이었다. 넬은 광선검을 휘둘러 간신히 창을 잘랐다. 두 조각이 난 창은 희미한 빛을 뿌리며 사라졌다. "제법이군." 카뮤는 방패를 포기하고 양손을 위로 올렸다. 그의 양 손바닥 위에서 는 각각 창이 한 개씩 떠올라 있었다. "두 개는 어떨까?" 두 개의 창은 뱀처럼 넬을 향해 쇄도해 갔다. 넬은 몸을 날려 창을 피했다. 하나는 피할 수 있었으나, 다른 하나가 어깨를 스치고 지나 갔다. 인공 피부 조각이 잘게 찢어져 너덜거렸다. 멀리까지 날아갔던 두 창이 멈칫했다. 창들은 넬에게 다시 방향을 돌 렸다. 넬은 창을 베려고 했다. 그러나 두 창의 움직임은 첫 번째 창 보다 더욱 정교하고 재빨랐다. 그 사이 카뮤는 다시 두 개의 창을 만 들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은 말아라, 박사." 레이온이 권총을 꺼내려 하자 카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타이르듯 이 말했다. 레이온은 쓴웃음을 지으며 총을 집어넣었다. 이렇게 된 이상 넬이 카뮤를 이기기를 기원할 수밖에 없었다. 창은 네 개가 되었고, 여섯 개가 되었고, 여덟 개가 되었다. 개수가 늘어날수록 창은 점점 정교해졌고, 교활해졌고, 잔인해졌다. "맥을 부를까?" 넬이 밀리는 걸 보다 못한 예안이 작게 소곤거렸다. 레이온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바드로 3세는 맥의 신경회로를 차단할 수 있잖아. 그게 어떻게 해서 가능한 건지 파악하고, 방어책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안 돼. 네가 인 질로 잡히는 것보다 맥이 인질로 잡히는 게 더 골치 아파져." "…내가 맥보다 불필요하다는 거야 뭐야?" "설마 그런 뜻이겠니? 삐치지 마." "쳇." 전투는 시종일관 카뮤가 리드하고 있었다. 어느덧 창의 개수는 열 여 섯 개가 되어 있었다. 넬의 옷은 이미 너덜너덜해 의복으로서의 기능 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붉은 광채가 비치는 새하얀 피부는 인간처럼 아름다웠지만, 정교한 움직임을 표현하며 공격하는 스무 개의 창은 그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치잇.' 오른팔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순간 넬은 할 수 없다 생각하고 레이 온의 눈을 보았다. 눈이 마주친 레이온은 허락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카뮤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 건가?" 불쾌함을 담아 조롱한 뒤, 양손을 빠르고 우아하게 움직였다. 응축한 빛이 폭발함과 동시에 스무 개의 창이 또다시 생겨났다. 총 마흔 개 의 창. 이대로라면 넬의 패배는 불을 보듯 뻔했다. '과연 장난을 치고 있던 거로구나.' 넬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검 손잡이 밑에 달린 붉은 버튼을 눌렀다. 시스템 봉인의 입구가 열린 뒤 미리 코딩된 암호를 입력했다. "뭐냐?" 순식간에 칼날이 길어졌다. 카뮤는 당황해서 재빨리 양손을 교차했 다. 마흔 개의 창이 한 점에 집중되며 방어선을 형성했다. 급속도로 응축된 에너지 그물이 그 뒤를 받쳐 굳건한 방패를 만들었다. 그러나 길어진 광선검은 그 거대한 방패를 꿰뚫었다. 수십 미터의 거 리를 순식간에 좁힌 칼날은 카뮤의 오른쪽 어깨를 꿰뚫었다. 피에 적 셔진 신음을 흘리며 카뮤는 주저앉았다. 동시에 그가 만든 거대한 방 패도 허공에 녹듯 사라졌다. "크윽…." 수십 미터로 길어진 광선검은 카뮤의 어깨를 완벽히 관통하고 있었 다. 레이온은 조롱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넬, 죽이지는 마. 이들이 지독한 원한이라도 갖게 되면 골치 아파지 니까." "네." 광선검이 스르륵 짧아지며 본래의 길이로 돌아왔다. 카뮤는 어깨에 뚫린 구멍에서 흐르는 피를 막으며 이를 악물었다. "칼날이… 길어질 줄이야." "광선검인데 그 정도는 당연히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 "큭. 하지만 이걸로 날 이겼다고 생각하진 마라." "악당들이 자주 하는 대사지." 레이온은 은빛 수갑을 꺼냈다. 보통 수갑과는 달리 두껍고 검은색 센 서가 붙어 있는 것이 무언가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는 수갑 같아 보 였다. 그는 넬에게 수갑을 건넸다. "그 수갑은 뭐지?" "에날도스를 일시적으로 봉인하는 기능이 있는 수갑이지. 그 녀석을 만드느라 고생을 많이 했어." "날… 인질로 잡을 셈이냐?" "그런 거지." "소용없다. 내 부하들은 혁명과 황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주저 않고 혁명을 선택할 테니까." "글쎄. 꼭 그렇게 극단적 요구를 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 수갑을 들고 카뮤에게 다가가던 넬은 순간 멀리서부터 쏘아지는 파 동을 느끼고 재빨리 몸을 날렸다.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 에너지탄의 폭격이 쏘아지며 땅이 패였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급히 달려온 마크는 카뮤의 안색을 살피고 흙빛이 되었다. 안색이 조 금 환해진 카뮤는 고통을 참으며 명령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저들을 공격해라. 특히 저 여자 로봇이 들고 있 는 검은 칼날이 갑자기 길어지니까 조심하고." "아, 알겠습니다." 굳어진 눈으로 노려보며, 마크는 힘주어 말했다. "이곳 위치를 대신님들께 알렸다. 곧 수천 명의 능력자들이 이곳으로 달려올 것이다. 순순히 항복해라." "바드로 3세라면 몰라도 너 하나쯤 해치우는 건 일도 아니야." 레이온이 비웃듯이 말했을 때, 과연 저 멀리에서부터 먼지가 피어오 르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백 명 정도는 되어 보이는 인원이 나는 듯 이 달려오고 있었다. 선발부대인 모양이었다. "넬. 사정 볼 것 없다." "알겠습니다." 공손히 대답한 넬은 다시 광선검의 길이를 늘렸다. 순식간에 칼날이 수km 이상으로 길어졌다. 비정상적인 길이에 마크는 입을 벌리고 놀 랐다. "아, 안 돼!" 카뮤가 다급히 외쳤다. 항상 짓고 있던 의기양양한 미소 따위는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당황한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넬은 여유 있게 팔을 휘둘렀다. 비정상 적으로 길어진 칼날은 눈에 보일까 말까한 거리에서 달려오고 있는 적들을 가볍게, 가볍게 베어나갔다. 수km 이상 떨어진 원거리에서 넬은 마음대로 그들의 목숨을 땅에 떨어뜨렸다. 수백 명의 능력자들이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오는 거대한 칼날을 피 하지 못하고 피를 흘리며 여러 토막이 나서 쓰러졌다. 짙은 피 냄새 가 여기까지 풍겨오는 듯 했다. "크윽…." 카뮤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다. 넬은 여유 있게 칼날을 거둬들여 본 래 길이로 되돌렸다. 지나치게 잔혹한 광경이었지만 예안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그들 이 가엾다 생각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너무 거리가 멀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볼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세현은 창백한 눈으로 넬과 레이온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손등에서 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적을 죽였을 뿐이다. 뭔가 잘못됐나?" 가볍게 일축한 뒤 레이온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마크에게 흘끗 시 선을 돌렸다. "그동안 우리 엔젤을 보살펴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주제에 어 울리지 않는 꿈은 버리도록 해라. 알았나?"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는 듯한 시선에 예안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 다. 마크는 지금 동료들이 무참히 죽어나간 것에 충격을 받아 떨고 있는 게 아니었다. 한눈에 반했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그녀가 다름 아 닌 엔젤이었다는 사실에 치를 떨며 경악하고 있었다. "넬." "알겠습니다." 별다른 명령은 없었다. 하지만 넬은 대번에 알아듣고 몸을 날렸다. 슈각! 멍하니 서 있는 마크의 오른쪽 어깨 위를 광선검이 훑고 지나갔다. 놀랍게도 상처 자국에서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잘림과 동시에 상처 자국이 타버렸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에날도스를 지닌 황태자와 는 달리, 마크의 신체는 광선검의 열기를 견디지 못했다. 잠시 후 비로소 통증을 느낀 마크는 비명을 지르며 상처 자국을 움 켜쥐었다. 무릎을 꿇은 그의 머리 위로 차가움을 담은 잔인한 음성이 내리 꽂혔다. "네 주제도 모르고 감히 내 것을 탐낸 벌이다. 앞으로 평생 그 상처 를 바라보면서 반성하도록 해라." by eden ps : 그러고 보니 오늘이 바로 소엄 1주년 되는 날입니다. 작년 11월 8일부터 연재했는데, 오늘 또 11월 8일이니 말이에요.^^; 자축~~~~~~~~~~~~~~~~~~~~~~~~~~~~~~~~~~~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56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이니^^ 그리고 오타지적이요..; <천사 프로젝트를 "독단"으로> 독단 -> 단독 이 맞는 단어 같네요; 11-14/15:11 이니^^ 1주년 축하드립니다~ 11-14/15:09 프레디 ㅊㅋㅊㅋㅊㅋㅊㅋ 11-14/02:08 샤키♥ 축하~+_+//////// 늦엇어요ㅠ ㅅㅠ 11-12/21:29 뽀까리 소엄이 드디어 한살이! 11-10/10:37 ふしぎ 1주년 축하드립니다!! 11-09/20:57 바--보 1주년 ㅊㅋ!! 11-09/00:54 『둥이』 1주년 축하~~ 11-09/00:20 木卜弓師 1주년 축하드려요~ 11-09/00:04 슬픈영혼의랩소디 실탄님 소엄 1주년 추카 드려요~^^~ 11-08/23:43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57 회] 날 짜 2004-11-09 조회 / 추천 714 / 8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대륙의 노래 아득하니 쏟아지는 잘린 팔의 고통을 참으며, 마크는 핏발이 선 눈동 자로 레이온을 노려보았다. 그는 냉랭히 웃고 있었다. "유젤은 너 따위가 바라볼 수 없는 여자야.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 보지도 말았어야지. 네 주제를 알도록 해."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정신이 일그러지는 두려움 속에서 이번에는 예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녀는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두려워…하는 겁니까?' 초점이 흔들렸다. 그렇다. 그녀는 지금 그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는 그를 사랑하는 척 하지만, 실상은 누구라도 좋으니 자신을 구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바로 시선을 돌려버리는 것이다. 아하, 그렇구나. 그렇다면 구해줘야지. "박…사…." 광기 섞인 신음을 토하며 마크는 몸을 일으켰다. 잘린 팔의 허전함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게 만들었다. "당신을… 절대 용서할 수 없…." 미친 빛깔에 젖어 번들거리는 그의 눈은 광견병에 걸린 개를 연상케 했다. 금방이라도 각막을 뚫고 발작하는 악마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 다. 악귀처럼 끔찍한 표정에 그녀는 질린 얼굴로 물러났다. "엔젤… 걱정 마십시오… 제가 곧… 구해…드리겠습니다…." 마크는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를 혀를 차며 보던 레이온은 발로 그의 배를 걷어찼다. 그는 신음을 흘리며 내동댕이쳐 졌다. "네 주제에 과한 꿈은 꾸지 말라고 했을 텐데." "박사… 당신을… 저주…." "미쳤군." 짧게 일축한 레이온은 더 보기 싫다는 듯 등을 돌렸다. 넬에게 카뮤 를 결박하라는 명령을 내리려던 순간 그는 경악성을 질렀다. "안 돼! 넬!" 이를 악문 카뮤가 붉게 타오르는 창을 만들고 있었다. 위급함을 알아 차린 넬은 주저 없이 몸을 날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창은 눈에 비치지 않는 스피드로, 똑바로 레이온의 가슴을 향해 날아 갔다. 레이온은 발이 지면에 굳은 채, 평소라면 전혀 쫓지 못했을 창 의 스피드를 육안으로 쫓았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잠시 시간이 정지 했던 것일까. 창이 다가온다. 죽음이 다가온다. 카뮤가 미소짓는다. "멈춰-!" 순간 비호같은 음성이 허공을 갈랐다. 붉은 빛줄기가 촥 뿌려졌다. 거대한 주먹이 형성되어 창으로 달려들었다. 손바닥을 쫙 편 주먹은 레이온의 가슴에 꽂히려는 창을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잡았다. 우드득우드득. 먹이가 생으로 씹히는 소리가 들렸다. 주먹의 관절이 이리저리 움직 이며 창을 산산조각 냈다. 거대한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창의 파 편이 주먹의 광채와 뒤섞여 녹색으로 빛났다. "큭… 마지막 힘을 다한 일격이었는데…." 카뮤는 체념한 표정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레이온은 승자의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숙인 채 카뮤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명심해라. 결코 내가 약해서 진 게 아니다. 방심하지만 않았 다면 아마 내가 이겼을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승자는 우리야. 넬. 바드로 3세를 정중히 포박하도록." "알겠습니다." 넬은 수갑을 들고 체념한 카뮤에게 다가갔다. 카뮤의 손목을 뒤로 돌 리고 수갑을 채우려는 순간이었다. "핫!" 갑자기 고개를 든 카뮤는 일갈을 발했다. 그의 전신에서 눈부신 섬광 이 폭사되었다. 맹렬한 파괴력이 폭발적인 기운으로 넬의 전신에 맞 부딪쳐 왔다. 그들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다행히 그들에게까 지 폭발의 여파가 미치지는 않았다. 섬광이 사라지고 눈을 뜰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팔뚝이 너덜너덜해진 넬의 자태뿐이었다. 황태자가 무릎 꿇고 있던 곳은 강한 폭발력에 시커멓게 패였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당했군. 순간이동을 할 줄이야. 이거 다음부터는 조심해야겠는걸?" 레이온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멍한 눈으로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고맙 다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구해줘서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난 죽었을 거야."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는 복잡한 감정이 얽힌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 다. '왜 그랬지?' 창이 다가오던 순간, 이대로 그가 죽는 걸 볼 수 없다고 외치던 심장 의 비명이 절실하게 귓가를 울렸다. 그 비명은 순간적으로 체내에 숨 겨진 힘을 증폭시켜 그를 구하게 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죽게 되면, 유젤을 빼앗을 수 있는 남자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던가. 근데 왜 이 몸은 그를 구했 단 말인가. '유젤'은 그가 살기를 원했단 말인가. "비켜." 어깨를 만지려는 그의 손을 냉정하게 뿌리쳤다. 멀리서부터 파공음이 들려왔다. 세찬 바람이 그들의 얼굴에 들이닥쳤다. 이윽고 비행기 형 태의 맥이 사뿐히 날아와 그들의 머리 위에 정지했다. "나는 맥을 타고 갈게." 예안은 냉정한 음성으로 자르듯 말했다. 레이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이 끝났으니까 이제 남자는 버리겠다는 거야?" "기분 나쁘게 생각하진 마. 니콜라스를 부탁할게." 다소 차갑게 말한 뒤 그녀는 먼저 맥에 올랐다. 전투 형태로 변한 맥 은 가볍게 보호막 밖으로 빠져나갔다. 엄청난 수압의 금속 표면에 달 라붙었지만 맥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우리도 이만 가자." 레이온은 멍청히 서 있는 세현과 니콜라스를 손짓으로 불렀다. 니콜 라스는 세현의 부축을 받아 힘들게 잠수함에 올랐다. 가만히 앉아 있 기만 해도 전신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신음 한 번 토하지 않 고 꾹 참았다. "제임스…." "이제 괜찮아. 안심해도 돼." 부드러운 위로에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이상했다. 내가 원래 이렇게 눈물이 많은 녀석이었던가. 따스한 세현의 가슴에 기대어 눈을 감은 채로, 그에게 느꼈던 모든 불안감이 말끔히 씻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는 혼란스러워하지 않 아도 된다. 더 이상 그는 적이 아니다. 더 이상 그를 억지로 미워하 려 하지 않아도 된다. 맑은 속삭임이 그렇게 귓가를 울리는 듯 했다. 힘든 싸움을 끝냈다는 안도감에 취한 니콜라스는 모처럼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 이 들었다. "유니콘." 「말씀하십시오.」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맥의 목소리는 조금 어색하기까지 했다. "솔직히 말해 봐. 바드로 3세가 정말 너한테 혈도를 짚은 거야?" 「무슨 의미입니까?」 "레이온 형이 극적인 순간에 날 도와주러 왔잖아. 이런 상황을 연출 하려고 일부러 당한 척 한 것 아니었냐고 묻고 있는 거야 지금." 「어이없는 질문이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치의 꺼림칙함도 없는 단호한 음성에 예안은 조금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나 너 믿어도 되는 거지?" 「바드로 3세는 강했습니다. 그에게 신경회로를 차단당한 것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아아, 다행이네. 난 또 네가 일부러 그런 연극을 한 게 아닐까 하고 걱정했어." 「당치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아무리 뛰어난 시나리오 작가라 해도 이런 결과까지 예측할 수는 없을 겁니다.」 알았다고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십자가에 족쇄가 채워진 여자의 환영이 불현듯 눈앞에 떠올랐다. 핏 빛 오라에 젖은 보라색 머리카락으로 전신을 가린 채, 눈을 뜰 생각 을 하지 않는 아름다운 여자의 환영이. 과연 눈을 뜨면 그 환각은 사 라질까. "카뮤가 날 껴안았을 때… 솔직히 포근함을 느꼈어." 「….」 "카뮤가 공격받았을 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안타까워하는 기분이 있었어. 레이온 형이 순간적으로 밉기까지 했어." 「왜요? 마스터는 결국 레이온 박사를 구하지 않으셨나요?」 "잘… 모르겠어. 그건 내 솔직한 기분이었을까?"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두근거리는 가슴에 살며시 손을 얹으며, 그녀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렸 다. "마더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 내가 카뮤에게 끌리도록 마더가 억 지로 개입하지 않았을까…하고 말이야." 「마더가 왜 그런 짓을 할까요?」 "그럴 수도 있잖아. 만약에 마더가 바라는 게 아틀란티스 대륙을 지 상으로 되돌리는 거라면… 그래서 날 복제할 수 있도록 허락한 거라 면… 내가 카뮤에게 끌리게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겠지." 마더의 강압이 그러한 형태로 이루어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두운 얼굴로 말끝을 맺은 뒤 그녀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가, 내가 지금 또 '나를 복제'라고 한 거야?" 「….」 "너 또 나한테 무슨 짓 했어! 대답해! 대답하란 말이야!" 그녀는 이지가 반쯤 일그러진 눈으로 외쳤다. 맥은 인간이었다면 한 숨을 내쉬었을 기분으로, 천천히 타이르듯 말했다. 「진정하십시오. 아무도 마스터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아무런 강제력도 깃들이지 않은 평온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한 마디에 쉽게 안정되었다. 「그렇게도 그 남자애의 자아를 지키고 있는 게 좋은 겁니까? 억지 로 심어진 타인의 인격을 나인 체 하며 살아가는 게 좋은 겁니까?」 육성이었다면 차라리 간절하게까지 들렸을 내용이었다. 「좋습니다. 정 그렇게 살아가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거기에 대해서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놀란 얼굴을 번쩍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입니다. 이제부터 마스터가 자기 자신을 유젤이라 생각하 든 유진우란 소년으로 생각하든 전 관여치 않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넌 오리지널 유젤의 지령을 받고 있잖아?" 「무슨 지령을 말입니까?」 추궁 같은 반문에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제가 오리지널 유젤로부터 받은 지령은 단 하나뿐입니다. 바로 당 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제가 그동안 했던 모든 것들, 일정 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은닉하거나 확대했던 것들은 그 지령을 완수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세운 계획이었습니다.」 "오리지널 유젤이랑… 계속 내통하고 있던 것 아니었어?"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모르겠군요. 내통 같은 것은 일절 하지 않 았습니다. 물론, 제가 모르는 사이에 오리지널 유젤이 제 데이터를 빼내갔을 가능성은 있지만 말입니다.」 부드럽고 단아한 어조에, 차라리 그 말을 믿고 마음을 편히 가지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그녀는 떨리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 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심해의 고동조차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 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나… 말이야. 이대로 그냥 나로 있고 싶어. 엔젤도, 유젤도, 아무것 도 되고 싶지 않아. 이대로 그냥 나인 채로 계속 있고 싶어. 그러면 안 될까? 응?" 「왜 저에게 부탁하십니까?」 "너는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있잖아. 아니,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그 꿈을 이룰 수 없잖아." 「….」 "부탁할게. 제발 이제 더 이상 날 속이지 말고, 레이온 형하고 내통 하지도 말고, 그냥…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줘." 무거운 침묵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감쌌다. 혼란이 다시 그 위 를 덮었다. 세상에서 가장 의지해야 할 존재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의지를 거스르려 한다는 것은 과연 배신인가 아닌가. 한참 후 맥은 다시 말했다. 「레이온 박사와 맺어지는 것이 마스터를 가장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를 선택하지 않고도 행복해질 자신이 있으십 니까?」 "있어." 「그렇다면 좋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레이온 박사와 일절 연락을 끊 고, 또한 차후 오리지널 유젤에게서 지령이 내려온다 하더라도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것을 거부하겠습니다. 오로지 당신의 명령 만을 따르겠습니다.」 따스한 안도감이 가슴으로 전해진다. 맥은 지금 거짓으로 맹세하는 것이 아니었다. 비로소 포근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고마워." 「천만에요.」 맥을 완전한 자신의 밑으로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녀석은 레이온과 맺어지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철썩 같이 결 론짓고 있었기에, 인간들 틈에 끼여 사는 것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신인류에게는 절대 불행한 일이라 단정지었기에. 허나 굳건한 그 알고리즘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서부터 깨뜨릴 수 있 는 것이었다. 자신은 유젤이 아니라 구인류 유진우, 그녀를 사랑하고 싶어하는 소년이라는 것을 녀석에게 각인시키기만 하면 하위 개념들 은 순차적으로 깨져나가는 것이다. "유빈이… 보고 싶다. 많이 컸겠지?" 「이곳에 있던 시기는 열흘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커봐야 얼 마나 컸겠습니까?」 "아니야. 신인류 아기는 굉장히 빨리 크니까 아마 지금쯤은 걸음마를 떼었을지도 몰라. 아빠가 많이 좋아하겠다, 그치?" 「기절이나 안 하시면 다행일 테죠.」 "그러고 보니 아빠한테 이제 모든 걸 다 말하기로 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느릿하게 뛰고 있던 심장이 다시 심하게 두 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숨겼던 모든 비밀들을 말한다면 아빠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친척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만 해 도 즐거워졌다. 불현듯 혜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애는 지금도 날 그리워하며 울고 있을까. 참 바보같이. 잊으라는데 왜 잊지 못하는 거야. 맞다. 그 애를 괴롭힌 남자가 있었지? 이름이 재호라고 했던가? 집으 로 돌아가면 녀석에게 약속한 대로 유한그룹을 개박살 내줘야겠다. 많이 늦은 만큼 이자까지 톡톡히 물어서 고통스럽게 해줘야겠다. 아, 그 전에 먼저 정원에 과일나무를 심어야겠다. 아기와 같이 나이 를 먹어 가는 나무를 매년 손질하며 행복을 장식해야겠다. 그럼 아마 하늘나라에서 유젤도 좋아할 테지. 그녀는 행복한 얼굴로 앞으로의 나날들을 그렸다. 장밋빛 미래가 벌 써부터 눈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아틀란티스는 다시 또 잡으러 올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정체를 안 이상, 이제 더는 겁이 나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들로부터 자신과 아이의 행복을 지킬 것이다. 누구도 함부로 손을 못 대게 만 들 것이다. "아! 아예 그냥 지금 아틀란티스 대륙을 없애버릴까?" 천진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손뼉을 쳤다. 작게 미소짓는 그녀의 얼굴은 웃으며 잠자리의 날개를 뜯는 아이와 흡사했다. 「해보시겠습니까?」 "그래. 이참에 전부 다 없애버리면 앞으로는 나 못 괴롭힐 거잖아." 「소용없을 텐데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녀는 전투용 디스플레이를 켰다. 사각형의 조준점 안에 둥그스름한 방어막에 휩싸인 거대한 대륙이 들어왔다. 방어막은 찬란한 빛을 발 하며 전설의 성지를 보호하고 있었다. 맥은 거대한 라이플을 겨누어 방어막을 조준했다. 파츠츠층. 빛이 뒤틀리며 총구가 파랗게 빛났다. 총구 주변의 물이 강한 열에 증발되어 수증기로 변했다. 막대한 에너지가 응축되는 주변으로 해수 의 흐름이 심하게 요동쳤다. 한순간 맥의 전신이 떨리며, 거대한 섬광이 해저 대륙을 향해 발사되 었다. 검은 물살을 헤치며 날아간 섬광은 거대한 빛의 방어막에 정면 으로 직격했다. 대륙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는 출력이었다. 그녀는 됐다 생각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디스플레이에 나타난 광경에 미 소가 일그러졌다. "뭐, 뭐야?" 빛이 흩어졌다. 섬광이 소멸되었다. 뿌연 수증기로 화한 물방울이 다 시 해수로 환원되었을 때 나타난 광경은 변함 없이 대륙을 보호하고 있는 방어막의 위용이었다. by eden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57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ふしぎ 마더가 유젤의 복제를 허락한 이유가 아틀란티스인들에게 더한 절망을 주기 위해서로 보이는거지? 희망을 줬다가 빼았는것처럼.. 11-09/21:06 엘베루시아 와아 연참신공 11-09/16:58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58 회] 날 짜 2004-11-09 조회 / 추천 750 / 9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대륙의 노래 「라이플 버스터의 에너지를 100% 자체 흡수했습니다. 적어도 외부 에서 가하는 공격은 통하지 않는 걸로 보입니다.」 "말도 안 돼." 「돌아가시죠. 어차피 바깥에서 저 방어막을 손상시킬 수 있는 방도 는 없습니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적을 눈앞에 두고도 손을 쓸 수 없 다는 사실이 분했다. "다른 방법 없어? 예를 들면 아예 이 근처를 초토화시킨다든가 하는 거 말이야." 「그랬다가는 전세계적으로 피해가 커집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십 니까?」 냉정한 직언에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한참 후 그녀는 할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그냥 돌아가자." 「네.」 맥이 막 등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거대한 에너지가 감지되었습니다!」 다급한 음성으로 맥이 경고했다. 예안은 서둘러 대륙으로 화면을 돌 렸다.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광경에, 그녀는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했다. 방어막의 빛이 붉게 변하고 있었다. 생명체의 몸 속을 흐르는 피처 럼, 역동적인 붉은 빛이 해수에 감겨 들어갔다. 물살을 유유히 헤엄 치는 심해어들은 빛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었다. 거대한 산맥이 일어나 분지를 형성했다. 산맥은 방어막을 감싸안듯이 천천히, 천천히 움직였다. 시커먼 암석의 손을 벌린 분지는 아기를 안는 어머니처럼 거대한 대륙을 포근히 안기 시작했다. 대륙이 가라 앉는 위를 산맥이 조금씩, 조금씩 덮어나가고 있었다. 해저 바닥 아래로 거대한 대륙이 사라지는 광경을 그녀는 멍청한 눈 으로 지켜보았다. 아스라하게 감도는 붉은 기운이 조심스럽게 물살을 밀어내었다. 땅 밑으로 사라지는 대륙의 그림자로부터 희미한 노랫소 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억겁의 시간은 어머니를 묶었고, 피에 젖은 십자가는 속박을 노래했다. 사슬에 묶이어 아이들을 버렸고, 돌고 도는 카르마는 세월에 씻기었다. 이제는 모든 걸 똑바로 바라보라. 너는 어머니의 축복을 받은 소중한 아이. 언어의 장벽을 넘어 은은하게 울려 퍼진 노랫소리에 그녀는 그만 눈 물을 흘렸다. 세월의 뒤안길로 다시금 사라지는 성지(聖地)는 구슬픈 이별을 노래하며 기약 없는 재회를 약속했다. "아…."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형언할 수 없는 성스러운 신비함이 가슴을 가득 가득 메운다. 눈물을 닦아낼 힘조차 잃어버린 채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허공이 일그러졌다. 십자가에 묶인 여자의 환영이 떠올랐다. 쇠사슬 을 칭칭 감은 채 고개를 숙인 그녀는, 보라색 머리카락을 발끝까지 늘어뜨린 채 호흡을 정지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이가 모닝 키스로 자신을 깨워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마스터?」 메아리처럼 울리던 맥의 음성이 어느덧 또렷해졌다. 정신을 차린 그 녀는 고개를 들었다.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무슨 잠을 그렇게 깊이 주무시나요?」 꿈을 꾸었단 말인가. 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했는데. 「지금 국방부에 접속해서 데이터를 빼냈습니다. 차세현씨의 말대로 양자 컴퓨터가 치명적 결함이 있다는 사실이 공표 되었습니다. 백악 관은 그 사실을 한국정부가 조작한 것이라 우기고 UN의 경고도 무 시한 채 전쟁을 결행했습니다. 이미 두 차례 교전을 치렀고, 한국군 은 20척의 함정과 30기의 전투기를 잃었습니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이 전쟁에 완전히 손을 뗐으나, 이대로 가다가는 누구라도 한국의 패배를 예측할 수 있을 겁니다.」 그녀는 침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조금… 조금 있다가 한국정부에 연락해. 한 며칠 정도 푹 쉬고 싶 어.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괜찮겠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차피 아직 시간은 많습니다.」 극적인 상황에서 등장해 미해군을 격퇴시킨다면 오히려 더욱 인정받 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계산에 넣은 맥은 흔적을 지우고 국방부 컴퓨터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고백할 게 하나 있습니다.」 "뭔데?" 「양자 컴퓨터의 결함,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마스터께도 숨겼습니다.」 "…괜찮아. 이해할게."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른 뜻은 없었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알아. 이해해. 넌 내가 행복해지기를 바란 거잖아. 전쟁이 나서 다른 나라를 격퇴시키면 내가 한국에서 크게 인정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 렇게 하고 싶었겠지." 저쪽에는 레이온의 잠수함이 부상해 있었다. 예안은 맥을 그쪽으로 가져다 댄 후, 콕피트를 열고 빠져 나와 잠수함으로 건너 탔다. '너는 당분간 물 속에 숨어 있어.' '알겠습니다.' 맥에게 명령한 뒤 해치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레이온이 반가운 얼 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괜찮니? 운 것 같은데."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뺨에 달라붙은 눈물 자국을 어루만 졌다. 그녀는 가볍게 그의 손을 쳐내며 세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세현이 너는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모르겠어." "하여튼 다시는 아틀란티스에 돌아가지 않는 게 확실한 거지?" 세현은 주저 없이 살짝 끄덕였다. "그럼… 니콜라스를 잠깐만 맡아줄래? 얘 부상이 나을 때까지라도 좀 보살펴 줘." "알았어." "이 잠수함 조종할 줄 알지? 컴퓨터로 움직이는 거니까 아마 너 정 도라면 쉽게 다룰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한 뒤 레이온에게 다시 얼굴을 돌렸다. 그는 조금 긴장한 채 그녀를 주시했다. "형은 내려." "…왜?" "내려 봐. 할 말이 있어." 예안이 먼저 잠수함 밖으로 나가자, 레이온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 녀를 뒤따라갔다. 둘은 소형 보트를 타고 해변가로 갔다. 시원한 바 닷바람이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래사장에 발을 디딘 그녀는 표정을 활짝 펴며 두 팔을 벌렸다. 그 녀는 감개무량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기 기억에 있는 곳이야." "그래?" "응. 옛날에 내가 시트날타 한국지부에서 처음 이 몸으로 눈떴을 때, 맥 타고 도망쳤다가 다시 여기로 되돌아왔거든. 여기서 한국 경찰을 만났는데, 그때 형이 보낸 사람이 날 도와줬어. 그리고 다음날 형이 호텔로 날 찾아왔고." 새삼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레이온은 작게 미소지었다. "형은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야?"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만들어야겠지." "풉. 아직도 못 만들었어?" "너무 그렇게 나무라진 말아 줘. 인간의 신분으로 그것을 만든다고 도전한 것 자체가 역사에 길이 남아 칭송 받을 일이라고." "하긴, 자이오 다이아를 만드는 건 불가능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뭐 니뭐니 해도 신이 만든 선악과가 아니겠어? 그걸 인간의 손으로 만 든다는 게 말이 돼?" 레이온은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선악과라…." 과거 선악과를 하사 받은 자들은 자신의 소원을 결국 이루었다. 가이 아 박사는 신인류를 탄생시키는데 성공했으며, 아담은 새 혹성을 만 드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행복했다고, 행복하다고, 행복 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게 바로 선악과를 내린 진의인지도 모르지. 소원은 이루었 지만 모두들 행복해지진 못했어. 결국 마더에게 이용만 당하고 만 거 야. 하지만 난 그렇게 되진 않아. 절대로.'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레이온은 예안과 함께 해변을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이 우리 둘을 보면 아마 연인이라 생각하겠지?" "납치범에게 끌려가는 가여운 여자아이라 생각할 거야." "뭐야, 너무해. 그래도 난 네 아이 아버진데 그런 식으로 말할 거니?" 그녀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그는 긴장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이렇 게 가까이에서 그의 얼굴을 진지하게 들여다본 게 과연 얼마만일까. 바로 코앞에서 올려다본 그는 참 잘생긴 얼굴을 갖고 있었다. 수척한 그늘이 진 새하얀 피부는 꽤나 많은 여자들을 울렸을 법했고, 가냘프 지만 튼튼한 어깨는 그 안에서 마음껏 응석을 부리고 싶을 정도로 듬직해 보였다. 이대로 그의 소유가 되어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이를 위해 서도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자아를 지키는 것 또한 다른 무엇 못지않게 소중했다. "이제부터 뭘 할 거야?" "말했잖아.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만들 거라고." "그걸 만들면 뭘 할 거야?" "글쎄… 내가 뭘 할 건지는 짐작하고 있지 않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외면하며,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게까지 신인류가 되고 싶어?" 그녀의 중얼거림을 언뜻 들은 그는 킥킥 웃으며 어깨를 만졌다. "나는 너랑 동등해지고 싶어. 그렇지 않으면 널 사랑할 수 없거든." "…." "사랑이라는 건 서로가 동등해야만 할 수 있는 거야. 어느 한쪽이 우 월하거나 뒤쳐져 있으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자비에 불과해." 태양이 머리 위에 높이 떠올라 있었다. 파란 빛깔로 물든 물결은 약 한 파도가 되어 쏴아아아 해변에 부딪치고 있었다. "신이 왜 인간들에게 자비를 내리는지 아니?" "몰라." "자비는 우월한 존재가 자기보다 뒤쳐지는 존재에게 내리는 사랑이 야. 바꿔 말하자면, 신은 인간들이 자기의 아래에만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거지. 그래서 영원히 인간들을 지배하고, 인간들에게 숭배 받 고 싶어하는 거지. 신은 인간들이 자기와 동등해지길 바라지 않아." 상당히 독특한 해석이었다. 종교인들이 이 말을 들었다가는 발끈할 거라고 그녀가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다시 말했다. "물론 저건 종교의 본질이고, 실제 신은 그렇지 않아. 신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자비가 아니라 자애지." 마더. 입에 담기조차 거룩한 그 이름이 뇌리를 맴돌았다. "하지만 신의 사랑이라는 것이 항상 인간들에게 좋게 작용하는 것만 은 아냐. 인간들이 그 자애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을 때에도 신은 아 무것도 모른 채 그저 좋을 거라고만 생각하지. 그것은 당연해. 신과 인간의 관점은 명백히 다르니까." 깊은 한숨이 그의 입술을 타고 흘렀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회한을 곱 씹는 그의 등은 무척이나 서글퍼 보였다. 묘한 분위기에 취한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등으로 다가갔다. 그의 넓은 등을 두 팔로 껴안고 얼굴을 기댔다. 그가 흠칫 놀라는 게 느껴 졌다. "왜, 갑자기 내가 좋아졌니?" 애써 넉살을 부리는 그의 음성은 떨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극단적 광기로 자신을 치장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연약하고 순수 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형. 아기 보고 갈래?" "으, 응?" 그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빙긋 웃 었다. "아기 보고 가." 정호는 오늘도 칭얼거리는 손자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벌써 열 흘째 밤잠도 제대로 못 잔 터라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지만, 그렇 다고 그만 좀 칭얼거리라고 소리를 버럭 지을 수도 없었다. 어린 아 이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지 자식 내팽개치고 어디로 사라져서 연락 도 없는 엄마라는 녀석이 잘못이지. 간신히 달래고 달래 겨우 유빈을 재운 정호는 그대로 소파에 풀썩 쓰러져서 잠을 청했다. 그러나 초인종 소리가 그의 단잠을 방해했다. "누구야, 도대체?" 그는 신경질을 부리며 일어났다. 붉게 충혈 된 눈을 비비며 인터폰을 든 그는 하마터면 숨이 멎을 뻔했다. "이노무 자슥이 도대체 왜 연락 한 번 없다가 이제야 오는 거야!" 불같이 화를 낸 정호는 한달음에 정문으로 내달았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그의 고함은 뒤로 갈수록 잦아들었다. 레이온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이, 이런…." 눈을 휘둥그렇게 뜬 정호는 이윽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을 덥 석 잡았다. "아이구, 여기는 또 어떻게 알고 왔어요? 잘 왔어요, 잘 왔어. 내 집 처럼 생각하고 편히 놀다 가요." "아빠는 난 보이지도 않아?" 예안이 입을 삐죽이자 정호는 눈알을 부라렸다. "네 자식이 지금까지 너 찾으며 울다가 겨우 잠들었다. 빨리 가 봐." "앗, 유빈이 또 울렸단 말이야?" 정호를 힐끗 째려본 그녀는 눈썹을 휘날리며 집안으로 달려갔다. 반가운 미소를 띤 정호는 다시 레이온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그동안 연락 한 번도 안 할 수 있습니까? 제가 그동안 얼마 나 선생님이 연락해주기만을 기다렸는지 아세요?" "너무 바빴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 "그래, 어서 들어가시지요." "네." 정원으로 한 발자국 들여놓은 레이온은 어색한 얼굴로 둘러보았다. 구석구석까지 따스한 행복의 자취가 듬뿍 묻어 있었다. 그가 태어나 고 자라왔던 사도의 훵한 연구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정원수가 바람에 미미하게 흔들렸다. 자신을 반기지 않는 듯한 흔들 림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by eden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58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뇨뇨뇨에바다뇨!! 실제로 미국이랑 전쟁났다면 이미 한국은 없는거라 쳐야되죠....크크 11-09/20:18 은관 그러면 전투기 손실수는 적어도 세자리 숫자가 되어야겠지요. 그런 상황이라면 이륙도 못하고 지상에서 격파되는 기체가 훨씬 많을테니 말입니다. 11-09/06:48 은관 한국 해군 함정 전체가 바다로 나가지는 않았을 테니, 20척의 함정을 잃을 정도로 폭격을 심하게 당했다면 공격의 최우선순위가 되는 공군기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11-09/06:46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60 회] 날 짜 2004-11-10 조회 / 추천 788 / 19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날개가 찢어진 천사 요람에 누워 자고 있는 아기의 배 위에 살며시 손을 댔다. 따스한 감 촉이 느껴진다. 굉장히 오랜만에 느껴보는 듯 감격스럽다. 고작 2주 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였다. 살며시 아기의 뺨에 볼을 비볐다. 아기 가 조금씩 몸을 뒤척인다. 한 손에 쏙 잡히는 조그만 주먹은 그저 앙 증맞기만 하다. 조금 눈물이 날 것 같다. 눈을 껌벅거리던 예안은 가느다란 손가락으 로 아기의 입 언저리를 어루만졌다. 아기가 눈을 떴다. 눈꺼풀을 껌벅이던 눈동자가 엄마를 발견하고 이 내 휘둥그레진다. "엄마?" 여전히 불완전하지만, 헤어지기 전보다는 많이 명확해진 발음이었다. 그녀는 히죽 웃으며 아기를 안아 올렸다. "엄마야?" "응. 엄마야." 유빈은 헤실거리며 짧은 두 팔을 내밀었다. 그저 엄마가 다시 와서 좋기만 한가 보다. 그녀는 헤헤 웃어주며 꼭 껴안고 뺨을 비벼댔다. "엄마 나빠. 나 혼자 안 한다며." "미안해. 이제부턴 진짜 계속 옆에 있어줄게." "나빠. 엄마 나빠." "응. 그래. 엄마 나빠. 정말 나쁜 엄마야." 헤어지기 전보다 더욱 자란 듯한 아기가 마냥 사랑스럽기만 했다. 이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터이다. 그녀는 모 든 고뇌를 잊은 얼굴로 아기를 품에 꼭 껴안은 채 즐거워했다. 한참을 그렇게 놀아주다 보니 유빈은 어느덧 잠이 들었다. 엄마가 없 는 동안 밤잠을 설치느라 많이 피곤했던가 보다. 그녀는 아기를 다시 요람에 뉘여 놓고 밖으로 나왔다. 거실에는 정호와 레이온이 탁자를 사이에 둔 채 앉아 이야기를 나누 고 있었다. 가까이 가면서 슬쩍 들어보니, 주로 정호가 '애 둘'을 키 우면서 겪은 고초들을 부풀려 떠들고 있었고, 레이온은 웃는 얼굴로 듣는 쪽이었다. "아빠 왜 거짓말은 하고 그래? 내가 언제 애처럼 굴었다고?" 그녀는 입을 삐죽이며 레이온의 옆에 앉았다. "사실은 사실이잖아. 네가 어딜 봐서 어른이야? 아직 애지." "어른 몫 충분히 해내잖아, 나. 허위 정보 유포하지 마. 형은 그대로 믿어버린단 말이야." 정호는 쿡쿡 웃었다. 나란히 앉아 있는 둘이 참 잘 어울려 보였다. 이대로 예안이 그를 선택해서 함께 행복하게 잘 산다면 그보다 좋을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섣불리 그 말을 꺼내기에는 좀 그랬다. 어쨌거나 예안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미혼모였으니까.(정호는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고 보니 예안이가 아이를 낳았다고 들었는데요." "아, 네. 그랬지요. 아주 건강한 사내아이입니다." "한 번 봐도 될까요?" "아, 네. 그러세요." "절대 만지지 마. 그냥 보기만 해." 예안은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작게 웃던 레이온은 고맙다고 말하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예안은 뒤따라가지 않은 채 신문을 폈다. "며칠 동안 뉴스 같은 거 안 보고 살았더니, 정말 참 많은 일들이 있 었네." 미국과 한국과의 교전 사건 등이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대부 분의 국가들이 한국을 지지하고 있었고, 미국은 홀로 외로이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다. 수십 년 전 같았으면 압도적인 군사력을 지닌 미국이 순식간에 우위 를 점하고 한국을 경제 식민지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그렇 게 만만한 국가가 아니었고, 시대 역시 무력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만만한 시대가 아니었다. 신중한 눈으로 신문 기사를 읽는 그녀를 의구심에 찬 시선으로 바라 보던 정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근데 어디 갔다 왔니?" "응?" 중후한 음성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빠는 무척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약속했잖아. 갔다 온 다음에 전부 다 말해주겠다고." "아…." 흠칫 하는 기색과 함께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변했다.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슬그머니 신문을 내려놓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베란다로 갔다.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을 만끽하던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아빠. 있잖아…." 그녀는 정호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그동안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 들을 숨김없이 전부 말했다. 어떻게 해서 유젤을 만났으며, 어떻게 해서 유젤이 되었으며, 시트날타한테 어떤 일을 당했는지 기타 등등 전부를. 물론 정호가 위험에 빠지는 것이 싫어 아틀란티스 전설 운운 등은 하지 않았다. 그냥 국가적인 테러집단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정도 로만 둘러대었다. 다 듣고 난 정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예안은 아빠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두려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떨리는 가슴을 다스렸다. 너무 두려워서 입 밖 으로 꺼내지 못한 한 마디, 그 한 마디가 혀끝을 맴돌았다. '나 아빠 자식이 아닐지도 몰라.' 만약 자신이 유젤이라면, 아빠와 자신을 잇는 한 가닥 인연의 끈은 처음부터 없었던 셈이 된다. 예안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아빠에게서 삶의 보람을 빼앗을 순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은 여전히 아빠의 자식이어야 했고, 유빈은 아빠의 손자여야 했다. 사박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의 숨결이 바로 등뒤에서 느껴졌다. 아빠가 뒤에서부터 포근히 안아주는 순간, 그녀는 눈을 질 끈 감았다. "많이 무서웠겠구나." "…." "미안해. 이 아빠는 그것도 모르고 너한테 서운해하기만 해서. 하지 만 진작 사실대로 말해주면 좋았잖아? 아빠가 너한테 도움이 되어줄 수도 있었고 말이야." "…미안." "그래, 이제는 괜찮은 거야?" "응. 정부가 날 보호해주기로 했어. 니콜라스도 실은 내 친구 사촌동 생이 아니라 정부에서 고용해준 보디가드야." "그렇게 어린애로 괜찮겠니?" "괜찮아. 겉보기에는 어린애라고 해도, 미국에서 마피아들도 벌벌 떠 는 고급 청부업자래." "그래… 그렇구나." 딸을 품에서 놓은 아버지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며 뒷짐을 짚었다. 무거운 한숨이 발등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이 아빠는 그냥 네가… 평범하게 살길 바랬는데…." "미안해." "아니야. 어쩔 수 없지. 네가 그 몸으로 살아가게 된 순간부터 그렇 게 예정돼있던 거라며?" 정호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가슴이 꽉 막히는 걸 느꼈다. "아빠가 부탁 하나 할게." "응?" "절대 몸조심하렴. 네가 맥과 유전을 가졌다는 게 알려지게 되면 주 변에서 널 노리고 엄청나게 몰려들 거야. 그 사람들이 치켜 세워주는 데에만 너무 기분 좋아서 영웅이 되겠다는 생각 같은 건 가지지 마. 알았니?" "알았어." 불길한 무게를 담은 예언 같은 부탁이었지만 그녀는 별것 아니라는 얼굴로 흔쾌히 약속했다. "정말 예쁘다, 우리 아기…." 레이온은 유빈을 품에 안은 채 눈에 넣을 듯 들여다보며 즐거워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복을 손에 넣은 사람처럼 맑은 웃음으로 아기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즐거워했다. "으앙…." 갑자기 아기가 울기 시작하자 그는 당황했다. "왜, 왜 우니?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아니면 배고파? 엄마 불러 줄까?" 바로 그 때였다. "유빈이 어쨌어!" 콰당!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질 듯 벌컥 열렸다. 씩씩거리며 나 타난 예안은 그가 아기를 안고 있는 것을 보고 버럭 화를 냈다. "형! 내가 유빈이 함부로 만지지 말랬잖아! 유빈이가 형 아기야? 내 아기라구! 내 아기란 말이야! 건드리지 말라구우!" 레이온은 크게 당황해서 쩔쩔맸다. 만지지 말고 보기만 하라는 추상 같은 령을 어기고, 아기를 안고 3층 거실로까지 나와버렸으니 백 번 죽어도 할 말이 없었다. "미, 미안. 유빈이가 너무 귀여워서 그만…." "변명은 하지말고! 내 허락 없이 앞으로 유빈이 만지지 마! 걱정하지 마 유빈아! 엄마가 구해줄게!" 버럭 화를 내며 그의 팔에서 아기를 빼앗아 안은 예안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행복한 얼굴로 아기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레이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태도에서는 아기를 장난감처럼 여 기는 태도가 조금 묻어 나와서였다. 하지만 무척 사랑스럽고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니 그냥 넘어가는 게 무난할 듯 했다. "으앙…." "왜 그래 유빈아? 배고프니? 엄마가 젖 줄까?" 엄마 품으로 돌아와 일단 안심했던 아기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얼른 상의 단추를 풀어헤친 그녀는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아기는 울음을 멈추고 젖을 빨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유젤, 네가 유빈이를 갖고 탈출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너도 이렇게 어엿한 엄마가 되었구나. 아직 나이가 18살밖에 안 됐지만 그래도 넌 잘 해낼 거야. 나도 아빠 노릇 제대로 할…." 행복한 표정으로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던 그녀는 갑자기 귀여운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획 돌아보았다. "웃기지 마, 형! 어째서 형이 얘 아빠란 거야!" "사실 내가 유빈이 아빠는 맞잖아." 그는 기가 죽었다. 그녀는 찡그린 표정을 풀지 않았다. "형이 유빈이 아빠라고 해서 내 남편 노릇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난 남자랑 결혼할 생각 따위는 절대! 네버! 결코 없으니까! 알았어?" "그, 그렇지만 난 널 사랑하는데…." "형이 사랑하는 건 <유젤>이지 내가 아니잖아? 그리고 어차피 나도 남자를 사랑하느니 좋아하느니 할 순 없는 사람이라구."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난 형이 나보고 사랑한다 말할 때마다 화가 나. 예안이를 좋아할 수 있는 건, 아니 형의 입장에선 유젤이라고 해야 하나? 그 애를 좋아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이 아이는 형의 아이가 아니야. 나와 예안 이의 아이라구." 고개를 다시 획 돌린 그녀는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아기의 뺨을 어루만졌다. 어깨를 으쓱하며 다가온 그는 그녀의 뒤에서부터 조용히 감싸안았다. "사랑한다 유젤. 그러니 부디 허락해 줘. 내가 이 행복을 지킬 수 있 도록." "제발 부탁인데 날 여자로 보지 마. 나와 예안이를 혼동하지 마. 내 남편 노릇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난 남자랑 결혼할 생각 따위는 없 고, 남자를 좋아할 생각 따위도 없으니까." 그리고 소녀는 다시 덧붙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예안이 뿐이야." 선열한 음성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연했다. 순간적으 로 어두운 표정을 지었던 레이온은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하하, 그래 맞아. 너는 아직도 그 빌어먹을 녀석의 기억을 갖고 있었지. 깜박했어. 그 기억을 지우는 걸 말이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아기가 젖을 빠는 걸 뚝 멈췄다. "걱정하지 마. 아프진 않을 거야. 지금 곧 그 녀석을 네 머리 속에서 꺼내줄게." 레이온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뭔가를 꺼냈다. 언뜻 보기에는 스턴 건처럼 생긴 조그만 도구였다. 스위치를 눌러 작동시키자 파르스름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아기를 품에 꼭 껴안은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왜, 왜 이래 형…?" "이건 그 녀석의 기억을 지워주는 장치야. 전혀 아프지 않을 테니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너는 구인류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고 신인류 로 다시 탄생하는 거야." "이, 이러지 마 형…."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성대가 굳은 듯 비명이 나오지 않는다. 막다 른 벽까지 몰린 그녀는 푸른 스파크가 눈앞에 들이밀어지자 그만 눈 을 질끈 감았다. "…."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자 그녀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기기를 집어넣은 레이온이 키득거리고 있었다. "바보야. 이건 그냥 스턴 건이야." "…." 그러니까, 지금, 사람 하나를, 바보로 만들었다, 이 말씀? "기억 지우는 것 따위는 이제 못해. 뭐, 그 남자애의 기억을 가진 유 젤인지, 아니면 유젤의 몸을 가진 그 남자애인지는 네가 결정해야 할 문제겠지만 말이야."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예안은 슬그머니 일어났다. "이런 장난치는 게 재밌어? 사람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아하하, 알았어, 알았어. 다음부터는 안 그럴 테니까 화 풀어." "우리 아기 놀란 거 책임져! 놀라서 얼굴이 새파래졌잖아!" 아기는 다시 으앙 울음을 터트렸다. 예안은 황급히 품에 꼬옥 안고 등을 다독였다. 레이온은 즐거운 듯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윽고 아기는 울음을 멈췄다. 잠이 든 것을 확인한 예안은 아기를 옆에 내려놓았다. "형." "응?" "내가 많이 생각해봤는데…."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망설였다. 함부로 발설하기 어려운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재촉하는 그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형은 아무래도 자이오 다이아몬드 만드는 거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 레이온의 얼굴이 핼쑥하게 굳었다. 그녀는 오해하지 말라는 얼굴로 다급히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자이오 다이아 따위를 만들어봤자 형한테는 하등 도움이 안 돼. 형 가슴에 난 구멍을 그까짓 번쩍거리는 보석 따위로 메울 수 있을 거 라 생각해?" "…." "유젤 디야스 마르셸을 만나. 만나서 모든 걸 해결해. 그렇지 않으면 형 가슴에 난 구멍은 평생 메워지지 않을 거야." 마침표를 찍은 그녀는 후련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오랫동안 앓은 체 중이 내려간 듯 시원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가 이 말을 들어줄까. 너무 조용해서 불안감이 든 그 녀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레이온의 얼굴은 평온했다. 달콤한 밀어를 들은 남자의 표정도 매몰 찬 거절을 들은 구혼자의 얼굴도,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유젤." 끝까지 그렇게 부르기야? 예안은 한숨을 내쉬며 포기했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왜?" "우리 잠깐… 잠깐 나가지 않을래?" "나가자고?"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이온은 웃으며 일어났다. "데이트하자는 거야. 유빈이도 같이 데리고." "음…." 눈살을 찌푸리며 고민했다. 산 사람 소원 한 번 들어준다 치면 되건 만, 아기와 함께 나간다는 게 영 찜찜했다. 거리의 사람들이 그걸 보 고 뭐라 생각할 것인가. 한참을 생각하던 그녀의 눈에 레이온의 어깨가 들어왔다. 옷자락이 살짝 걷어져 조그만 상처가 드러나 있었다. 예전에 시트날타에서 탈 출할 때 그가 자청해서 입은 상처였다. 그 흉터 자국이 남아 있는 어 깨를 보자 왠지 모를 죄책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알았어." 그녀는 슬그머니 눈을 돌리며 끄덕였다. 가슴을 욱신거리게 하던 감 각이 말끔히 사라졌다. by eden 이번화는 많이 낯이 익으실 거예요.ㅎ_ㅎ;;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60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뽀까리 상당히요!!! 이건 1회째때 나왔던!!!!!+_+감개가 무량해요ㅠ_ㅠ 11-16/10:31 『ºsaycast』 프롤로그.. 처음 볼때부터 궁금했다죠.. 언제 나오는건지.. 드디어 나왔군요 11-11/19:30 슬픈영혼의랩소디 프롤이였네!! 11-11/16:17 染花 드...드디어 프롤로그가~! 감격입니다..ㅡ.ㅜ 11-10/23:05 滿月 눈에 많이 익는것이 아니라 박혀 있던건데 ; 11-10/22:40 『둥이』 프...프롤이다!!드디어 여기까지 아아~ 11-10/21:51 뇨뇨뇨에바다뇨!! 아아..그렇군.... 너무 오래되서 기억이 안나.. 11-10/20:04 꼽사리 ㅋ,,,, 마침내 여기까지,,,기나긴 여정이었습니다... 작가분에게 감솨,,, 11-10/19:44 金鱗魚 아아.. 프롤로그였군요.. 너무 오래되서...;; 건필하세요~ 11-10/19:30 _ 프..프롤로그 ...-ㅇ-.. 11-10/19:10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61 회] 날 짜 2004-11-11 조회 / 추천 769 / 16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날개가 찢어진 천사 아기를 데리고 바람을 쐬러 나간다는 말에 정호는 쌍수를 들어 환영 했다. 예안은 아빠가 레이온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이 조금 탐탁하 지 않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어린 아기를 동반한 나들이로 과연 갈만한 곳이 있을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가볼 만한 장소는 널려 있었다. 극장 같은 곳은 무리였지만 수족관이라든지, 분수대가 있는 공원이라든지, 비둘기들이 날아다니 는 광장이라든지. "비둘기는 위험해. 잘못 했다가는 우리 아기 눈 쪼아서 멀게 할 수도 있다고." "쳇. 무드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여자 같으니라고." "…여자 취급은 하지 말아 줘." 광장에는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하나 혹은 둘씩 데리고 데이트를 하 고 있었다. 눈망울을 굴리는 유빈을 품에 안은 채, 예안은 과연 타인 의 눈에는 자신들이 어떻게 비칠까를 생각했다. 아마 많이 젊기는 해 도 나무랄 데 없는 멋진 부부로 보일지도 모른다.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딱히 그가 밉살스럽다는 것보다는, 위험 한 불륜을 즐기는 여자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고나 할까. 레이온이 비둘기 먹이를 사와서 뿌리자 비둘기들이 몰려들었다. 아기 는 그것을 보고 작은 손을 뻗으며 깔깔거렸다. 레이온이 미소지으며 다가오자 아기는 그에게 두 팔을 내밀었다. 한 번도 그에 대해서 설명한 적 없는데 아기는 별 스스럼이 없다. 어 쩌면 아기도 그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예안 은 복잡한 눈으로 아기와 그를 번갈아 보았다. 심술궂은 기분이 든 그녀는 아기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유빈아. 넌 엄마랑 저 아저씨랑 어느 쪽이 더 좋아?" "엄마!" "만약 둘 중 한 명을 계속 안 봐야 한다면 어느 쪽?" "저 아저씨!" "아이구, 이뻐라." 함박웃음을 지은 그녀는 아기의 얼굴에 뺨을 비볐다. 가까이에서 다 듣고 있던 레이온은 볼멘 소리로 말했다. "꼭 어린애한테 그런 심술궂은 질문을 해야겠어?" "왜 심술궂다는 거야?" "그렇잖아. 엄마랑 아빠랑 둘 중 하나 놓고 누가 더 좋냐고 묻는 것 만큼 잔인한 게 어딨어?" "형이 왜 유빈이 아빠야?" "그럼 넌 왜 나보고 아기 한 번 보고 가라고 한 건데?" 그 말에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녀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 었으니까. 굳이 말하자면, 반드시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사명감을 느 꼈다랄까. "자아, 아이스크림이다."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레이온이 세 개의 아이스크림을 사왔다. 예안 과 유빈은 약속이라도 한 듯 멀뚱멀뚱한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어린 엄마와 어린 아들이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참 귀여워 보 였다. "에이, 네가 이런 거 싫어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성의를 봐서라도 먹 어 주라." "싫어. 안 땅겨." 잘라 대답하면서, 그녀는 언제 자신이 이렇게 음식을 싫어하도록 변 했는지 속으로 놀라워했다. "나두 안 먹어 아저씨. 엄마 찌찌 먹을 꺼야." 잘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엄마 흉내내듯 획 돌린 유빈은 짧은 팔을 뻗어 엄마 가슴을 만졌다. 낑낑대며 옷섶을 풀려 하자 그녀는 작게 웃으며 아기 손을 떼어냈다.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중에. 응?" "싫어. 나 배고파아." "나중에, 나중에. 응?" 몇 번을 더 조르던 아기는 끝내 엄마가 말을 안 들어주자 얼굴을 찡 그렸다. 침울하다고 하기에는 미숙하고, 실망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과장이라고 해야 할까. 하여튼 그런 표정이었다. 광장을 나선 그들은 근처 수족관에 갔다. 커다란 유리 안에서 헤엄치 는 각종 물고기들을 보고 유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먹이를 주는 잠수부 직원을 보고 손을 흔들기도 했다. 레이온과 예안은 그것을 보 고 밝게 웃었다. 행인들은 행복해 보이는 그들 세 사람을 부러운 눈으로 흘끔거리고 지나가곤 했다. 그러나 행인들은 몰랐다. 그들 세 사람은 지구상의 누구보다 더 기구한 사연을 하나둘씩 지녔다는 사실을. 수족관을 구경한 뒤 이번에는 동물원으로 갔다. 사자, 기린, 낙타, 코 끼리, 뱀, 치타 등등을 처음 보는 아기는 꺅꺅거리며 무척 좋아했다. 능숙하지 않은 혀를 굴려가며 레이온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묻기도 했다. 동물원을 둘러보고 정문을 나설 때에는 몹시 서운해하며, 다음 에 꼭 다시 오자고 약속을 요구했다. 레이온은 웃으면서 꼭 그러자고 했다. 예안은 한결 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잘 놀았니?"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정호가 의미심장한 어투로 물으며 반겼다. 아빠 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예안은 작게 흘겨보며 신발을 벗었다. "유빈이가 많이 피곤한가 봐. 가서 재우고 올게." "그래라." 아기방에 아기를 데려다놓고 재운 예안은 불을 끄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는 레이온 혼자만 있었다. "아빠는?" "친구분이랑 약속 있으시다면서 나가셨어." "그새? 빠르기도 해라." 예안은 혀를 내둘렀다. 아빠는 필경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나간 게 아니라 어떻게든 자리를 비켜주고 싶어서 나갔을 것이다. '전혀 고마운 기분은 안 들지만.' 넓은 집에 둘만 있으니 왠지 서먹서먹했다. 어쨌거나 자신은 그의 아 이를 낳은 몸이다. 말로는 형이라고 부르고, 또 은밀한 관계를 가진 기억 따위는 없다지만, 뭔가 야릇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 짓말이다. "우리 영화나 보러 갈래? 유빈이는 자니까…." 레이온의 제안에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끄덕였다. "그러자." "준비하고 나와." 별로 준비할 것도 없었다. 원래 치장에 신경 쓰지 않는 그녀는 벗어 두었던 겉옷을 다시 걸치는 것으로 준비를 끝마쳤다. "잠깐만. 아빠한테 전화 좀 하고." 정호에게 전화를 한 예안은 외출할 거니까 당장 집으로 오라고 했다. 서슬 퍼런 박력에 레이온은 옆에서 쿡쿡 웃었다. 그들은 집 근처의 백화점 영화관으로 향했다. 일반 극장보다는 스크 린이 작긴 하지만 가깝다는 장점이 있어 그녀가 주로 애용하는 장소 였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대가 주말이 아니고 영화 또한 최신 영화가 아니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화점 영화 관에 손님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었다. "이상하네? 왜 사람이 하나도 없지?" "이 영화 디게 오래된 거거든." "디게 오래된 영화를 왜 상영하는 거야?" "글쎄." 레이온은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뭔가를 눈치챈 그녀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형이 손 썼지?" "맞아, 너랑 단둘이서만 영화 보고 싶어서 내가 힘 좀 썼어. 오늘밤 이곳은 우리 둘만 쓸 거야." "…이상한 짓 하면 죽어." "킥킥. 내가 네 성질을 아는데 설마 그러겠니?" 어쩔 수 없는 남자다. 어깨를 으쓱한 예안은 스크린이 가장 잘 보이 는 위치를 골라 앉았다. 레이온도 그 옆에 앉았다. 이윽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로 상영한 영화는 「날개가 찢어 진 천사」라는 영화였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한 남자는 어느 날 길에서 심하게 다친 천사를 주움으로써 급격한 운명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순백의 날개와 아름 다운 외모를 지닌 천사를 남자는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지만, 천사는 인간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였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천사는 결국 천계의 부름을 받아 다시 하 늘로 돌아가게 되었고, 부러진 날개는 성스러운 빛을 받아 다시 붙게 되었다. 천사가 하늘로 올라가려 하자 남자는 눈물로 막는다. 인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천사는 조금의 서운함도 슬픔도 아쉬움도 없이, 따스 하게 미소지으며 행복하라고 한다. 결국 남자는 칼을 들어 천사의 날개를 잘라낸다. 순백의 날개가 붉은 피로 더럽혀진다. 천사는 비명을 지르며 기절하고, 남자는 천사를 가 지겠다 결심하고 방에 감금한다. 허나 다음날 방문을 열었을 때 천사는 방에 없다. 새 날개가 돋은 천 사는 남자에게 원망조차 품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천사의 날개는 고귀한 것이었다. 인간의 칼로 잘라낼 수 있는 게 아 니었다. 천사의 보복은 훌륭했다. 천사는 남자에게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음 으로써, 절대 무관심을 유지함으로써 둘도 없는 훌륭한 징벌을 가했 던 것이다. 영화가 방영되는 내내 예안은 스크린에서 눈을 땔 수 없었다. 작품 성, 연출, 배우의 연기, 모든 면에서 영화는 훌륭했다. 두 번째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의 제목은 「도플갱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평화롭게 살고 있던 소년은 어느 날 일어난 의문의 살인 사건으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는다. 경찰은 곧바로 수사에 나서게 되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결국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살인자의 손에 경찰마저 희생당한다. 살인 자는 인간 같지 않은 힘으로 그의 목을 졸라 숨지게 했다. 연이은 경찰들의 희생에 당국은 이것이 보통 사건이 아님을 깨닫고 철저한 조사를 벌인다. 그러던 중 그들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최초로 목을 졸려 살해당한 경찰관의 목에 나 있는 손자국은 부모를 잃은 소년의 것과 똑같았다. 경찰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소년을 감금한다. 감금한 지 이틀 후, 당국에서 나온 조사자는 철창이 뜯어져 있고 수사국 안의 모든 인물이 살해당한 것을 발견한다. 사건은 점점 더 극단적으로 치닫게 된다. 정신을 차린 소년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지닌 소년이었다. 사람들을 살해한 자는 다름 아닌 타인의 모습을 훔쳐먹 고 살아가는 몬스터, 도플갱어였던 것이다. 도플갱어는 소년의 모습을 완전히 훔치고 소년과 똑같은 모습이 되 어 살아가려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피의 제물이 필요했 다. 도플갱어는 소년을 죽이기는커녕 상처 하나 내서는 안 되었다. 소년은 도플갱어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도플갱어는 강했고, 빨랐고, 영리했다. 총을 쏘아도 도플갱어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도플갱어를 죽이기 위해서는 은으로 만들어진 단도를 십자가에 박는 것뿐이었다. 꾀를 낸 소년은 세상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척 한다. 소년이 강에 뛰 어내리려는 순간 도플갱어는 깜짝 놀라 달려온다. 모습을 빌린 자가 죽게 되면 자신 또한 형체조차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소년은 은단도로 도플갱어의 심장을 찌른다. 도플갱 어는 투명한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형체를 지니지 못한 몬스터는 흐 르는 피마저도 투명했다. 도플갱어는 자신을 미워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지만, 소년은 냉정하 게 도플갱어의 전신을 난도질한다. 결국 도플갱어는 눈물을 쏟으며 죽는다. 신기하게도, 죽는 순간에 도플갱어가 흘린 눈물은 사람처럼 붉었다. 그제야 깜짝 놀란 소년은 서둘러 집으로 달려간다. 뛰던 중 누군가와 부딪치지만, 정작 부딪친 사람은 소년을 보지 못한다. 소년은 왜 사 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지 몰라 공포에 떤다. 문득 바닥을 내려다보니 있어야 할 그림자가 없다. 소년의 공포는 극에 달한다. 소년은 울면서 집으로 뛰어온다. 미친 듯이 문을 열고 집안으로 뛰어 들다가 장식에 팔을 긁혀 상처를 입는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는 붉은 빛이 아니라 투명했다. 그것을 보고 소년 은 극한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방문을 열고 뛰어든다. 침대에 몸을 던지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 어쓴다.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눈물을 타고 공포가 흐른다. 누군가가 톡톡 두드린다. 덜컥 겁이 난다. 다시 두드린다. 더욱 겁이 난다. 이불을 살짝 들춰본다.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웃고 있다. 도플갱어였 다. 가슴에는 희미한 상처 자국이 나 있다. 상처 자국에는 피가 조금 묻어 있다. 피는, 붉었다. 소년은 비명을 지른다. 도플갱어는 킬킬 웃는다. 소년의 손이, 발이, 팔이, 다리가, 몸통이 사라진다. 사라진다. 점점 사라진다. 옷가지만 남기고 소년은 사라진다. 도플갱어는 키득키득 웃는다. 갑자기 도플갱어가 허리를 숙이고 울기 시작한다. 왜 자신을 거부했 느냐고 울부짖는다. 그러지만 않았다면 너도 살고 나도 살 수 있었는 데 왜 거부했냐고 절규한다. 도플갱어는 거울을 본다. 거울에서 소년의 모습이 나타난다. 소년은 속삭인다. 나는 너를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너와 공존할 순 없다고. 스산한 바람이 불어온다. 도플갱어가 절규하는 뒤로 핏빛 커튼 콜이 조용히 내려앉는다. 끝까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예안은 이윽고 감동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와, 장난 아니게 재밌다. 근데 이상하네? 저 정도로 재밌으면 오래 전 거라고 해도 굉장히 유명했을 텐데, 영화도 처음 보는 거고 배우 도 잘 모르는 사람들 뿐이야." "그래?" 피식거리던 레이온은 급작스럽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는 그녀 가 피할 새도 없이 이마에 키스했다. "뭐야? 징그럽게." 그녀는 별다른 화를 내지 않고 투덜거렸다. 그의 안색이 밝아졌다. 어쩌면 이대로 그녀가 자신을 받아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그의 가 슴을 적셨다. "아. 많이 늦었다. 이제 그만 집으로 가자." 시계는 어느새 저녁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별로 늦은 시간은 아니 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아기가 보고 싶었던 그녀는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는 레이온을 재촉했다. 집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안방을 열어보니 정호가 잠옷을 입은 채 자고 있었다. 2층 아기방을 열어보니 요람에서 아기가 새근새근 잘 자고 있었다. 안심한 얼굴로 문을 닫은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레이온을 오늘 여 기서 재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이 일었다. 이 시간에 내쫓기도 뭐했던 그녀는 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2층 손님방이 있으니까 형은 거기서 자면 될 거야." "재워줄 거야? 근데 기왕이면 네 방에서는 안 될까?" "쫓겨나고 싶으면 계속 헛소리 해." 가벼운 힐난에 그는 킥킥거리며 그녀를 따라갔다. 미리 치워놓았던 손님방 문을 연 그녀는 그에게 방안을 보여주었다. 그는 마음에 들었 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자." 그녀가 방으로 돌아가려 하자 그는 황급히 불러 세웠다. "잠깐만." "응? 왜, 뭐 할 말 있어?" "우리 그냥 자지말고… 이야기나 하는 게 어때?" 예안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갸우뚱거렸다. "우리 어차피 내일 헤어지면 이제 한동안… 아니 아주 오랫동안 못 볼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그답지 않게 더듬거리는 꼴이 우습게 느껴진 그녀는 쿡 웃으며 소파 에 앉았다. "알았어, 알았어. 어차피 나 학교도 안 가는데 까짓 거 뭐 그냥 밤새 면 되지." "고마워." 맞은편에 앉으며 레이온이 기쁘다는 듯이 살짝 웃었다. 왠지 모를 쑥 스러움을 느낀 예안은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딱딱 튕겼다. by eden 다음편이 중반부 클라이막스로군요. 날개가 찢어진 천사 챕터가 끝나고 한 개의 챕터가 더 있는데, 그 챕 터까지 끝나게 되면 중반부가 종결되고 종반부가 시작됩니다.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61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샤키♥ 와아+_+ 갑자기 262편이 더 생겨버렷네! 정말 기나긴 여정+_+!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당 11-12/21:52 하얀마법 5타 찬란한 영광 11-12/18:59 木卜弓師 영화 내용은 복선일까요오? 11-12/02:09 슬픈영혼의랩소디 4타 성스러운 영광 ㅋ 수고요^^ 11-12/00:47 _ 후우....-ㅇ-.. 뭔가 어렵.. ; 11-12/00:29 esik ...[♥].. ... ...레이온씨 왜이렇게 좋을까[마이너한녀석<-] 11-12/00:27 현이~☆ 3타 하늘의 영광~!@ 11-11/23:42 엘베루시아 근데 저 두이야기가 왠지 낯익은; 11-11/23:42 엘베루시아 이것도 다보면뭐보나 흑흑 11-11/23:27 klyp 잘보고 갑니다 젬있어용!! 11-11/22:26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62 회] 날 짜 2004-11-12 조회 / 추천 834 / 15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날개가 찢어진 천사 쭈뼛쭈뼛하던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 "차라도 한 잔 줄까?" "응. 부탁해." "조금만 기다려." 부엌으로 간 그녀는 보온병에서 물을 꺼내 차를 탔다. 접시에 찻잔을 받쳐들고 쟁반에 얹은 뒤 2층 거실로 다시 올라왔다. "고마워." 차 한 모금을 마신 뒤 레이온은 빙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 이사 갈까?" "응? 갑자기 왜?" "이 집은 예전에 한 번 들킨 적이 있어. 앤슨이란 남자가 섣불리 잡 으러 가진 않을 거라고 했고, 또 니콜라스도 있고 해서 그냥 여기에 죽치고 있었는데,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잖아? 난 오늘 아틀란티스 대 륙에서 탈출하기까지 했으니까." 볼을 긁적이던 레이온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거야." "무슨 소리야?" "바드로 3세는 널 적극적으로 붙잡지 않았어. 눈치 못 챘니?" "…무슨 소리야?"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새하얀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변했다. "말 그대로야. 바드로 3세가 모든 능력을 동원했으면 나는 아마 널 구출해내지 못했을지도 몰라. 그만큼 바드로 3세의 능력은 나로서도 엄청난 변수였거든. 하지만 그는 너무 방심했고, 너무 자만했고, 또 너무 가볍게 행동했어." "?" "어쩌면… 그는 일부러 너를 놓아줬을지도 몰라." "말도 안 돼. 그 사람 행동, 적어도 진심이었다고. 형은 내가 바보인 줄 알아?" "감수였겠지. 일이 잘 되어서 너를 붙들고 있어도 좋은 거지만 어쩔 수 없이 놓치더라도 나쁜 것은 아니다라고 감수한 거겠지. 한 마디로 말하자면, 너를 붙잡는데 소극적이었다고나 할까?" 녹색 눈동자에 혼란이 깃들였다. "그럼 황태자는… 날 붙잡아도 좋은 거지만 놓치더라도 상관없었다 뭐 그런 소리야?" "그래." "아니, 어째서? 아니, 왜 형은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 "너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니까." "?" 패닉에 물든 얼굴을 즐겁게 들여다보며, 레이온은 다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말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너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절실해. 너는 혁명을 이루 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거든. 게다가 바드로 3세는 지금 너한 테 단단히 반해 있어." "…." "하지만 너는 물건이 아니야. 억지로 잡아둔다고 해서 넘어오지 않 아. 물론 만에 하나라도 넘어온다면 좋겠지만, 그게 실패로 돌아간 이상 처음부터 노리고 있던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는 거야." 예안은 의아했다. "처음부터 노리고 있던 방법?" "양자 컴퓨터에서부터 시작해서 한반도 전쟁까지 모든 게 다 녀석들 이 계획적으로 꾸민 일이었어. 앤슨은 순차적으로 미군함대를 출격시 킬 계획표까지 짜두고, 백악관을 컨트롤해 자기 계획을 추진했어. 그 리고 성공했지." "성공이라니? 미국은 지금 거의 발악하는 수준인데?" "한국의 승리가 앤슨이 노리는 거야. 이래도 모르겠니?" 그녀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국의 승리가 앤슨이 노리던 것이었다니, 이 무슨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됐어. 그럼 일단 모르고 있어.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까." 지금 말해주면 안 되냐고 물으려던 예안은 멈칫했다. 그는 몹시 부드 러운, 하지만 결코 풍화되지 않을 강한 눈동자를 한 채 자신을 바라 보고 있었다. 그가 저런 눈을 하고 있을 때 한 번 안 된다고 말한 건 절대 안 된다. '천사의 날개를 꺾는다라…. 앤슨. 적어도 너의 그 계획 하나는 마음 에 드는구나.' 그녀를 한국, 아니 전세계적인 스타로 만든다. 만인이 그녀를 우러러 보게 되고, 모두가 그녀를 사랑하고 동경하게 만든다. 최고의 영광과 최고의 행복, 최고의 인생이 빛나는 옥좌에 그녀를 앉힌다. 그리고, 한순간에 밑바닥까지 내동댕이친다. 더 없이 간단하지만 더 없이 소름끼치는 계획이기도 했다. 그리 되면 그녀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상실할 것이다. 크게 상처 입은 그녀를 그때 가서 다독여주기만 하면 손쉽게 넘어올 것이다. 앤슨은 그것을 노리고 양자 컴퓨터 탈환 사건에서부터 시작하여 한 반도 전쟁을 비롯한 모든 것들을 꾸몄다. 두려울 정도로 거시적인 시 야와 대담성을 지녔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세현이 중간에 느닷없이 아틀란티스를 배신하고 양자 컴퓨터에 대한 모든 걸 까발린 변수가 발생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앤슨의 계획을 조금 더 빨리 앞당겼을 뿐이었다. 세현은 앤슨의 진정한 계획을 몰랐다. 미국이 한국을 지배하도록 만 드는 것이라고 오해했다. 만약 앤슨의 진정한 계획을 눈치챘더라면 다른 방향으로 예안을 도울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을 것이다. "무슨 생각해?" 그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걱정스런 눈으로 빤히 쳐다 보고 있었다. 레이온은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저 아름다운 녹 색 눈동자가 나만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은 정녕 이 세상 에 '그것'밖에 존재하지 않는 걸까. 그는 자신의 오랜 계획을 점검했다. 모든 것은 완벽하다. 장기밀매 사업은 순조롭게 운영되고 있고, 자금망은 전세계적으로 굳건하게 뻗 어 있다. 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이론과 기술도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 으며, 마음의 각오는 이미 오래 전에 섰다. 단 한 가지,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빼면. 신이 단 두 번 인간에게 허락했다는 선악과, 자이오 다이아몬드. 그 것을 손에 넣지 않는 이상 그의 계획은 절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 었다. 그러나 세상의 불균형을 깨질 것을 염려했는지, 신은 인간들은 선악 과를 함부로 만들 수 없게끔 제재를 가했다. 과거, 그 뛰어났던 아담 조차도 두 개의 자이오 다이아몬드밖에 만들 수 없었으니. "형? 형?" 연거푸 부르는 말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 라보던 그녀는 그가 밝게 웃자 안심한 표정이 되었다. "난 또 형이 잠깐 정신이 나갔나 했어. 안 그래도 제정신이 아닌 형 이 정신 나갔다가는 큰일 나잖아." "정신이 나갔다니? 누가 그런 말을 해?" "유니콘이 맨날 그러던걸? 형은 반쯤 미쳐 있는데 미치지 않은 척 연기하는 거라고." 그만 웃음이 나왔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큭큭, 웃어댔다. 멋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이던 그녀는 그가 웃음을 그치기를 기다려 입을 열었다. 어울리지 않게 나긋나긋한 음성이었다. "고마웠어, 형." 가슴에 무거운 돌이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나는 설마 형이 거기까지 도와주러 올 줄은 몰랐어. 정말… 하여튼 너무 고마웠어. 난 형한테 맨날 못되게 굴기만 했는데, 많이 미안하 더라." 막혔던 댐이 터지듯,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 은 마음 속에서만 흘러내리는 눈물이었다. "아,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형 받아들인 게 아니라는 것은 말 안 해 도 알지? 나 구해준 거 가지고 이상한 거 요구하면 미워할 거다?" 그녀는 눈을 찡긋했다. 그는 터지려는 서글픔을 참는 눈으로, 하지만 평온함의 가면을 쓴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답답해서 주먹으로 두드리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그녀가 이 마음을 눈치채버리겠지. 고맙다는 한 마디에 이렇게 가슴 설레는 이 나약함을 알아차리겠지. 어떻게 하면 따스한 말 한 마디 들어볼까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용기가 없어 매번 광기로 스스로를 치장하는 어리석음을 놀리겠지. "응? 형, 왜 그래?" 갑자기 그녀가 놀란 눈으로 묻는다. 그는 비로소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 보았다. 어라? 언제부터 울고 있었던 거지? "우는… 거야?" 그녀가 떨리는 음성으로 묻는다. 그녀가 걱정하며 내 얼굴을 만진다. 그녀가 눈물을 닦아준다. 아아, 그녀가 날 위로해주고 있다. 「남자가 울면 못 써.」 환청이 뇌리를 쑤신다. 울고 있는 내가 보인다. 걱정하는 그녀가 보 인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줄곧 나를 거부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형?" 그가 덥석 껴안자 그녀는 놀란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는 그녀의 몸을 으스러지듯이 꽉 껴안은 채 사정하듯 말했다. "유젤. 우리 도망가자. 도망가자. 난 더 이상 네가 고통받는 것 따위 보고 싶지 않아." "형?" "그 사람은… 그 사람은 항상 널 괴롭히기만 하잖아. 너한테 아무것 도 해준 게 없잖아. 근데 왜 그 사람만 걱정하니? 왜 그 사람 때문에 아파하니? 이제 그만 나만 봐주면 안 돼? 안 돼? 응? 응?" 울먹이는 그의 음성은 어느새 6년 전 좋아하는 여자를 떠나보내야만 했던 나약한 소년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현재가 아닌 과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현재가 아닌 과거의 육체에 있 었다. "형…." 불안함을 느낀 그녀는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는 그럴수록 더욱 그녀 를 세게 껴안았다. "유젤. 제발, 제발 나랑 같이 가자. 응?" "시, 싫어! 이러지 마, 형!" 그녀는 겁에 질린 음성으로 외쳤다. 그가 화를 냈다. "왜, 왜 싫다는 거야! 널 항상 괴롭히기만 하는 그 사람이 그렇게 좋 단 말이야! 왜, 왜 나는 바라봐 주지 않는 거야!" 과거의 속박에 사로잡혀 이글거리는 그의 눈동자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강한 두려움을 느낀 그녀는 힘껏 그를 밀쳐내고 도망치려 했다. 그때였다. 푸욱! 이물질이 침투하는 소리가 들렸다. 푸욱! 따뜻한 액체가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걱스걱. 살집을 헤집는 소리가 들렸다. 몸 안에 무언가 낯선 것이 침입한 감 각이 느껴졌다. 곧이어, 엄청난 통증이 양쪽 옆구리에서 느껴졌다. "아아악!!"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아니, 쓰러지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집요하게 그녀를 껴안은 채, 다리가 풀린 그녀를 억지로 세운 채 그 녀의 몸 속을 뒤적거렸다. 날카로운 칼에 베어진 그녀의 양 옆구리에 서는 붉디붉은 피가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그는 피투성이가 된 손으 로 그녀의 몸 속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초점이 그녀의 눈동자에서 사라졌다. 붉은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그는 사랑스럽다는 듯 벌어진 그 입술에 키스했다. 혀와 혀가 엉키며 관능적인 피의 사랑을 갈구했다. 천사가 흘린 피는 마약보다 달콤한 향기를 발하며 더 없는 쾌락으로 승화되었다. 피투성이가 된 두 손이 천사의 몸 안에서 빠져 나왔다. 주먹을 펴자 반짝이는 두 개의 보석이 나타났다. 보석은 피에 젖어 번들거리며, 천사의 몸으로 다시 돌아가려 울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주먹을 쥐어 보석을 손바닥 안의 암흑에 가뒀다. "이것이 자이오 다이아몬드…." 그녀의 몸에서 꺼낸 두 개의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손에 쥔 그는 감 흥 없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기절해 쓰러져 있던 그녀의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전신에서 뿜어지던 빛은 서서히 범위를 좁혀가며 양쪽 옆구리에 난 상처에 몰려들었다.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아물어 가는 틈 사이로 녹색 빛이 찬란하게 쏟아져 나왔다. 새로운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그녀의 몸에서 다시 만 들어진 것이다. "역시 소용없군.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적출해봐야 너는 인간이 되지 않아." 그는 아까 보았던 영화를 떠올렸다. 천사를 사랑한 남자는 천사의 날 개를 떼어내지만, 결국 천사는 새 날개가 돋아서 날아가 버린다. 날개는 다만 천사를 상징해주는 것일 뿐, 천사 그 자체는 아니다. 날 개를 잃었다 해서 천사가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그것을 몰랐기에 천사에게 상처만 줘버린 것이다. "아악… 아악…."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녀는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레이온은 고통에 잠식당한 새하얀 뺨을 어루만지면서 쓰게 중 얼거렸다. "천사는… 인간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일까? 그래서 신은 자신만만하 게 천사를 인간들에게 보낸 것일까?" 그는 웃어버렸다. 무슨 말을 했는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기억이 난다. 영화 속의 남자가 라스트 씬에서 읊었던 대사였던가. 나는 그 어리석은 남자와 똑같은 짓을 저지른 걸까. "혀, 형… 이게 무슨 짓…." 고통에 시달리던 그녀는 이를 악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에 는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아프니?" "다, 당연하잖아…." "나는 더 아파." 레이온은 그녀의 허리를 찌른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런 상처 자 국도 없는 고운 손은 천사의 피를 가득 묻힌 채 전율하고 있었다. "나는 더 아파. 너를 찔러서 내가 더 아파. 왜 그걸 몰라주니? 응?" "혀, 형…." 갑자기 그의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잘못한 건 너야. 네가 함께 가자고 했으면, 나를 거부하지만 않았으 면 이렇게 되지 않았어. 날 원망하지 마. 원망하지 말란 말이야!" 다시 그의 표정이 수척하게 변했다. "미안해. 미안해, 유젤. 많이 아팠지? 많이 아팠지? 미안해. 정말 미 안해…." 그녀를 안아 올린 그는 허리를 숙여 키스했다. 반항할 힘도 없었던 그녀는 힘없이 키스를 받아들였다. 그가 자신의 온몸을 더듬는 데도 아무런 반항을 할 수 없었다. 고통의 와중에도 이대로 그에게 모든 걸 맡긴 채 전부 다 잊어버리고 싶어하는 나약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안녕." 키스가 끝난 뒤 레이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예안은 힘겹 게 눈을 뜬 채 사라지는 그를 보았다. 그의 등은 모든 걸 포기한 남 자처럼 서글퍼 보였다. 저 장면을 어디서 봤는데. 어디서 봤더라. 아, 아까 영화에서 보았구 나. 천사의 날개를 잘라 도망친 남자가 저것과 똑같은 뒷모습을 갖고 있었구나.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아파… 아파…." 양 옆구리가 아팠다. 그녀는 눈물을 참으며 옆구리를 살폈다. 상처는 어느새 나아 있었다. 그러나 피부가 커다랗게 베어진 흉터가 고스란히 있었다. 흉터는 그녀에 대한 레이온의 집착과 사랑을 말해 주듯 뚜렷한 형체를 자랑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레이온은 그녀를 손에 넣은 것이다. 이제 이 흉터가 없어지지 않는 한, 그녀는 영원히 그를 기억하게 될 테니까. "어, 엄마…." 겁에 질린 목소리에 놀란 그녀는 번쩍 눈을 들었다. 아기방 입구에서 아이가 벽에 기대고 선 채 놀란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봐야 할 아기의 첫 걸음 마를,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 보게 된 것이 우스웠다. 유빈은 아장아장 걸음을 떼었다. 이따금씩 넘어지기도 했지만, 곧 혼 자 힘으로 일어나 엄마의 머리맡까지 다가왔다. 질퍽한 피가 밟히자 으앙 울음을 터트렸다. "괜찮아, 괜찮아. 엄마 괜찮아…." 숨이 넘어갈 듯 우는 아이를 어르며,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허리가 칼로 쑤시듯이 아팠다. "엄마…." "괜찮대두. 울지 마, 뚝." 엄마의 피를 얼굴과 팔에 묻힌 채 자지러지듯이 울던 아이는 이윽고 간신히 울음을 그쳤다. "그 아저씨가 엄마 이렇게 만든 거야?" "…아니야. 엄마가 너무 나빠서… 그러니까 그 아저씨 미워하면 안 돼. 알았지?" 그를 증오한다. 하지만 이 어린 아이마저 그를 증오하는 현실은 보고 싶지 않다. 그녀는 억지로 모든 걸 자신의 탓이라 부정하며, 힘겹게 아이의 피를 닦아주었다. 닦으면 닦을수록 아이는 더욱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제야 자신의 손 에 흥건히 묻어 있는 피를 발견한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네 아버지도 참 가여운 인생이거든. 그러니 너만이라도 미워하지 마. 엄마 혼자서 미워하면 충분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기를 품에 안고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 잠이 쏟아졌다. 여기서 자면 피로 더러워질 텐데. 어두운 저 하늘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한순간 반짝였다. by eden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62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뽀까리 레이온을 인정한 겁니까? 아이의 아버지라니? 11-16/10:47 얼음공쥬 -_- 레이온은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_- 11-14/02:18 Eyes_ ...가만히 글을 읽다 보니 저랑 비슷한 상황이군요, 아니. 레이온은 인간같기라도 하지, 저의 아버지란 인간은 헛소리 막하시는 분이라서요... 11-13/14:27 天魔上人 -ㅁ- 자이오다이아는 바끄로 나오면 자이오역활을 못하는건가요?? 11-13/13:59 滿月 다이아몬드 만들지 안고 그냥 칼 질 해서 얻었네 레이온 . 11-13/13:13 월하은 ..아버지라; 무의식적으로 인정하는발언?; 11-13/13:11 초전박살 어째 점점 맘에 안들어 간다는......... 11-13/11:07 我愛風 음.. 짤린 천사의 날개는 천사의 날개가 아니다...인가 11-13/00:59 카르세아디르 그럼 자이오다이아몬드가 4개가 된건가요? ㅡ.ㅡ;; 11-13/00:24 카제 헛헛 11-12/23:25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63 회] 날 짜 2004-11-13 조회 / 추천 756 / 13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날개가 찢어진 천사 피유우우웅! 수십 발의 미사일이 날아왔다.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으며 디스플레이 를 들여다보던 예안은 발사 명령을 내렸다. 허공에서 몸을 빙글 회전 한 맥은 재빠르게 미사일을 조준하고 포를 쏘았다. 수 초도 걸리지 않아 미사일은 전부 요격 당했다. "일단 한 놈." 예안은 디스플레이를 들여다보았다. 사격형 모양의 도형이 좁혀지며 함정 한 척을 타켓으로 삼았다. 섬광이 쏘아졌다. 수백km의 거리를 순식간에 돌파한 에너지 포는 목 표로 삼은 함정을 폭파시켰다. 산산조각 난 파편과 기름이 높이 튀어 올랐다가 바다 위로 흩어졌다. 곧이어 다른 함정들이 그 함정의 뒤를 따랐다. 순차적으로 이뤄지는 격침에 미해군은 패닉 상태였다. 미사일도 레이 더도 통하지 않는 상대를 도대체 무슨 수로 격추시킬 것인가? "또 당했습니다!" 참모의 비명에 사령관은 눈을 감았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누가 이 런 결과를 예상했겠는가. 제임스 해론 교수의 발표가 있은 직후 전세계가 한국 편으로 돌아서 버리는 바람에 미국의 입지가 좁아지긴 했다. 실제로 미국 내에서도 카네기 정권의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했을 정도니까. 허나 미국은 군사력에서만큼은 한국을 압도한다고 절대 자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 실종된 맥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맥이 파 괴되지 않았더라도 핵을 맞은 충격에 파일럿이 사망했을 거라 판단 한 미 정부는 지체 없이 한국 침공을 결정했다. 많은 미국민들이 이 결정을 반대했다. 그러나 이미 양심에 의존하기 에 미국은 너무 멀리까지 와 있었다. 이대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 게 되면 한국이 요구하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함과 동시에, 다른 나 라보다 훨씬 불리한 조건에 석유를 사들여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미국은 한국을 침공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맥이 없는 한국군은 아무리 한창 급발전하고 있다고 하나, 오랜 군수산업으로 다져진 미군에 비하면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였다. 과장된 표현을 빌리자면, 미국산 미사일 하나가 비행 할 때마다 한국 전투기 한 기가 반드시 추락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동해 최전방에 배치된 한국해군함대를 전멸시킨 뒤 유유자적 하게 한국 본토를 향해 쳐들어갔을 즈음,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맥이 나타난 것이었다. 백악관은 발칵 뒤집혔다. 미함대는 패닉에 빠졌다. 맥이 등장한 이상 이미 승리의 여신은 한국에게 완전히 넘어갔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한국에 사과하고 물러나자고 외치는 목소리 가 미국 내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미 한국은 수십 척의 함정과 수 천 명의 해군을 잃은 뒤였다. 한국정부가 사과를 받아들이고 싶어도 사망한 군인들의 부모와 국민들이 앞장서서 반대하는 처지였다. 미국은 이미 너무 멀리 왔던 것이다. "끝." 최후로 남은 항모를 격침시킨 예안은 후련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쭉 켰다.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조종간에 붙여 놓은 아기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만 좀 보세요. 사진 닳겠습니다.」 "쳇. 그렇게 분위기 깰 거야?" 「지금 이러고 있을 틈이 없습니다. 청와대에서 받은 지령을 이행하 셔야지요.」 "알았어, 알았어."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제트모드 변환명령을 내렸다. 거대한 전투기 로 변한 맥은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수평선 너머를 향해 빠르게 날기 시작했다. 마하 1, 마하 2, 마하 3, 마하 4…. 맥은 계속 속도를 올렸다. 속도가 올라갈 때마다 맥의 금속표면이 더 욱 빨갛게 변했다. 시뻘겋게 달구어진 마찰 열기가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 한 줄기 유성으로 화한 맥은 머나먼 미국 본토를 향해 쏜살같 이 달렸다. 슈유웅! 미국 본토를 가로질러 워싱턴에 당도한 맥은 순식간에 정지했다. 뒤 늦은 충격파가 들이닥치며 건물들의 유리창이 깨져나갔다. 갑작스런 돌풍에 휘청거리던 사람들은 이윽고 허공에 떠 있는 맥을 보고 놀라 서 비명을 질렀다. "맥이다!" "으악! 공습이다!" 평화로운 거리는 일순 패닉에 점령당했다. 놀란 사람들은 허둥지둥 우왕좌왕하며 지하를 찾아 도망쳤다. 앞사람이 넘어지자 뒷사람이 등 을 밟고 뛰는 광경도 틈틈이 보였다. "훗." 디스플레이를 통해 지켜보던 그녀는 조소를 흘리며 백악관 상공을 향해 날아갔다. 새하얀 본건물을 잠시 노려보던 그녀는 숨을 들이마 시고 외부 스피커를 켰다. 「항복해.」 불친절하게도, 영어로 말하지 않고 한국어로 했다. 그렇지만 상대방 쪽에서 알아서 통역할 것이다. 물론 음성 변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굵직한 남자 목소리였다. 「그렇지 않으면 대통령 목숨은 없다. 설마 허접한 방공호 따위를 믿 고 버틸 생각은 아니겠지?」 그녀는 언제 자신이 이렇게 대담해졌는가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백악관에서는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하니 조금 전까지 태평양에서 교전하고 있는 맥이 방공망을 뚫고 본토를 지나 백악관 상공까지 당도할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을 테니, 아마 대통령 측 근은 지금 패닉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녀는 조금 시간을 주기로 결정하고, 맥을 조종해 하늘로 라이플 버 스터 포를 발사하게 했다. 붉은 섬광이 고깔형으로 넓게 퍼지며 눈부 신 빛을 토했다. 엄청난 불꽃잔치였다. 「20기의 인공위성이 지금 공격으로 소멸했습니다.」 "그러라고 한 거야." 그녀는 대범하게 잘라 말하며, 다시금 백악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의 무력 시위는 핵폭탄을 능가하는 화력이었다. 백악관이 바 보가 아닌 이상 바로 코앞에서 그런 협박을 가했는데 배 째라 정신 으로 밀어붙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때 한국 본토에서 연락이 들어왔다. 김영환 대통령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방금 전 카네기 대통령에게서 핫라인이 들어왔다. 무조건 항복하겠 다더구나. 그러니 그만 돌아오도록 해.」 "아쉽네요. 백악관을 초토화시키고 싶었는데." 「바짝 쫄게 만들어서 설설 기는 꼴 구경하는 것도 괜찮지. 하여튼 얼른 돌아오도록 해. 곧 정식으로 승리를 선언할 테니까.」 "네에. 잘 알았습니다, 대통령 각하." 장난스레 경례를 붙인 예안은 다시 맥을 전투기로 변환시켰다. 맥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눈에 비치지 않는 빠르기로 쏜살같이 본토를 향 해 귀환했다. 미처 숨지 못하고 공포에 질린 채 맥의 자태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리며 주저앉았다.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 대통령을 장관은 미소지으며 바라보았다. "좋게 끝나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 아이는 정말 우리나라의 복덩어리 로군요." "암, 그렇고말고. 복덩어리지 않소? 핫핫핫." 대통령은 흐뭇해 죽겠다는 얼굴로 껄껄 웃었다. "자, 곧 대국민 발표를 해야 할 테니 당장 선언문을 준비하도록 시켜 야겠소. 음, 이 문구는 반드시 넣도록 시켜야겠군. 우리는 비겁한 술 수를 동원하면서까지 무모한 전쟁을 강행한 카네기 정권의 폭정으로 부터 미국민들을 해방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어떻소?" "재미는 있겠군요. 하지만 백악관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자존심 상한 나머지 공멸을 택할지도 모르지요." "공멸은 없소." 대통령은 잘라 말했다. 그만큼 맥의 무력을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장관은 안도한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맥이 수폭을 맞고 실종되었을 때, 다른 누구보다 예안의 생사를 걱정했던 인물은 대통령이었다. 국 방부 장관인 자신이 이 나라의 안위를 위하여 맥이 무사히 돌아오기 를 기원했을 때, 대통령만큼은 그녀의 생사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 었다. 맥이 생환하자 한반도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미함대에 일방적으 로 밀리고 있는 처지였지만, 맥이 참전함으로써 형국은 단번에 뒤집 어져 버렸다. 맥은 단독으로 여섯 척의 항공모함을 격침시키고, 수많은 함정과 더 불어 엄청난 수의 미 전투기를 수장시켰다. 그리 되는 데까지는 불과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아메리카 본토에서부터 오고 있던 미군의 증원 병력과 보급물자 역 시 항로를 되돌릴 새도 없이 격침 당했다. 미국 소속의 군사위성들은 맥의 귀신같은 눈에 하나 남김없이 잡혀 50% 이상이 우주의 먼지가 되어버렸다. 전투에 참전한지 불과 몇 시간 만에 맥은 최후의 발악을 꾀하던 엘 가와급 항모 4척과 수십 척의 호위함을 마저 격침시키고 순식간에 워싱턴까지 날아가 미국의 항복을 받아냈다. 실로 전율스런 전과가 아닐 수 없었다. "대통령님. 일본 총리로부터 핫라인이 들어왔습니다." "오, 총리가?" 대통령은 즐거운 웃음을 띠며 전화를 받았다. 「로타케 마시라우 총리입니다.」 "김영환 대통령이오. 총리 자리에 새로이 취임하신 것 뒤늦게나마 축 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호이즈미 총리는 일본 패전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사퇴했다. 무척 이 례적인 일이기는 했으나, 국가의 존망 자체를 위태롭게 했던 그가 정 계에서 살아남을 길은 없었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에서 승리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오, 벌써 거기까지 소식이 들어갔나요?" 「이미 전세계에 한국의 위명이 자자합니다. 승전 소식은 아마 지금 쯤 지구 반대편까지 전해졌을 겁니다.」 영환은 껄껄 웃었다. 과연 일본의 신임 총리는 태도가 재빨랐다. 다 른 누구보다 먼저 승전을 축하해주다니. 발이라도 핥을 듯 축하하는 총리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 다. 곧이어 중국, 러시아에서도 승전을 축하한다는 국가원수들의 핫 라인이 왔다. 그날 청와대 전화선에는 승전 축하 전화로 인해 불이 날 정도였다. "준비가 다 됐습니다." 비서실장이 들어와 보고했다. 영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시다, 장관." "예." 영환은 장관을 대동하고 회견장으로 갔다. 이미 수십 명의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영환이 들어서자 삽시간에 긴장했다. 단상에 올라선 영환은 미리 작성한 발표문을 손에 쥐고 천천히 읽어 나갔다. 한국은 후안무치한 국가 미국을 상대로 처음에는 많이 고전 했으나, 곧 맥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승리를 거뒀으며, 카네기 정 권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1억 5천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숨을 죽인 채 TV를 통해 대통령의 발 표를 지켜보았다. 전쟁은 조금 전 정식 종결했으며, 한국은 이 전쟁 에서 완전 승리를 거두었다는 발표에 국민들은 환호를 보냈다. 대통령 발표가 끝난 뒤 방송국에는 맥에 대해서 묻는 문의가 빗발치 듯 쏟아졌다. 맥을 만든 이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다는 요구, 맥의 파일럿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질문, 맥을 한 번 타볼 수는 없냐는 어린아이의 부탁, 등등해서 오만가지 전화가 방송국을 괴롭혔 다. 항구에 모인 사람들은 이순신 함대가 귀환하는 것을 열광적으로 환 영하고 있었다. 맥의 파일럿 대역을 맡고 있는 박재형 대령이 전방에 나서자, 사람들의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졸지에 영웅의 자리를 박탈하게 되어버린 박재형 대령은 조금 쑥스 럽기는 했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진짜 영웅>의 안전을 지켜주는 것이라는 상관의 말을 상기하고 열심히 손을 흔들어주었다.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보던 예안은 등을 돌렸다. 자신이 저 자리에 서 있지 못한 게 조금 섭섭하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큰일을 해주셨더군요." 미리 기다리고 있던 중현이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 녀는 풀썩 웃으며 작게 손을 흔들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게다가 사실 제가 임무를 소홀히 한 것도 많구요. 원래라면 군법회의에 회부됐을 거라고요." "원칙대로라면 그렇겠지만, 감히 예안씨를 군재판소에 세울 간 큰 사 람은 없을 겁니다." "대통령 할아버지께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저도 그동안 고민이 많았어요." 과연 그녀의 표정은 그전과는 사뭇 달리 수척함이 드리워져 있었다. 며칠 안 본 사이에 많은 고뇌를 겪었나 보다. 중현은 그게 뭔지는 모 르지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꺼내봤자 그녀는 전 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말씀은 대통령님께 직접 전해드리시죠. 아주 좋아할 겁니다." "청와대까지 갈 시간을 못 내겠네요. 이제부터는 제 아이하고 많이 놀아주기로 했거든요." 아이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그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떠올랐다. 그녀 가 출산을 한 이래, 그는 자신보다 열 살 연하인 그녀 앞에서 때때로 무척 작아지는 기분을 받곤 했다. "그럼 다음에 봐요." 한 시간 정도 걸려 서울 시내에 도착한 예안은 중현에게 다음에 보 자고 말한 뒤 헤어졌다. 차창을 내리고 서운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 을 바라보던 중현은 차를 돌렸다. 예안은 피곤한 얼굴로 거리를 걸었다. 거리마다 사람들은 승리의 축 배를 올리고 있었다. 길거리의 대형 스크린에서는 맥의 활약에 대한 방송이 연이어 보도되고 있었다. 「현재 미정부와 우리정부간의 원활한 전쟁배상협상이 벌어지고 있 으며, 정부는 전쟁배상금으로 최소 500억 달러 이상을 받아낼 것이라 의사를 밝혔습니다. 또한….」 그녀는 가벼운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다가 우뚝 멈췄다. '야. 500억 달러래.' '왜요?' '내 몸값이랑 똑같잖아. 아틀란티스도 나 탄생시킬 때 500억 달러 들 었다고 했잖아.' '근데 왜요?' '한국정부도 디게 통이 크지 않아? 전쟁에서 한 번 이겼다고 저렇게 무식하게 돈 뜯어내다니 말이야.' '그러니까 자기 몸값 높다고 자랑하는 겁니까 지금?' 거리마다 축제 분위기였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오늘 만큼은 외모에 반한 양아치들이 집적거린다 해도 웃으며 넘어가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어, 꽤 반반하게 생겼는데?" "우리랑 같이 놀지 않을래?" 우뚝. 방금 전 웃으며 넘긴다는 말은 취소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낯빛을 굳혔다. "빨리 사라지지 않으면 너희들 크게 혼날 거야." "하하, 앙탈도 귀여워라." 한 녀석이 킥킥 웃으며 손을 뻗어왔다. 예안은 한숨을 토해냈다. "이봐, 그 손 치우지 못해?" 근처에서 사복 차림으로 그녀를 따르고 있던 남자들이 앞으로 나섰 다. 척 보기에도 한 싸움할 것 같은 덩치가 열 명 가까이 나서자 양 아치들은 잔뜩 쫄아서 주춤거렸다. "뭐, 뭐야 당신들?" "이 분이 누군지 알고 함부로 접근하는 거야? 평생 콩밥만 먹게 만 들어줄까?" 겁에 질린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던 양아치들은 눈짓을 교환한 뒤 냅 다 빼서 달아났다. "고마워요."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남자들은 다시 그녀와 무관한 일행인 척 가장하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녀를 따랐다. 어느덧 그녀는 집 앞에 도착했다. 초인종을 누른 뒤 그녀는 됐다는 얼굴로 남자들을 돌아보았다. "이제 그만 가보셔도 돼요. 장교나 되시는 분들을 번거롭게 해서 죄 송해요." "아아, 아닙니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통솔자격 장교가 대표로 잘 자라 인사했다. 예안은 다시 한 번 고맙 다 말한 뒤 집으로 들어갔다. "니콜라스는 언제쯤 올까?" '글쎄요. 세현씨가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입니다.' "그런 모양이야. 매정한 녀석, 어떻게 전화 한 번 안 할 수 있어?" 걱정스런 얼굴로 기다리고 있던 정호는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헤 실헤실 웃으며 두 팔을 벌리는 아이를 품에 안은 그녀는 기분 좋게 웃으며 앉았다. "엄마 없는 동안 잘 놀았니?" "응. 근데 엄마 또 어디 갔어?" "잠깐 일하러. 엄마가 일을 해야 우리 유빈이 장난감도 사주고 옷도 사주고 그럴 거 아니야?" 이제는 능숙한 애엄마가 다 된 자식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던 정호 는 한창 승전 방송이 보도되는 TV를 껐다. "이겼더구나." "그깟 미군, 맥 앞에서는 오합지졸이야." "그래도 몇 시간만에 미국의 항복을 받아내다니… 대단해." 정호는 막대한 거리감을 느끼고 씁쓸해했다. 언젠가 느꼈던 불안감, 자식이 날개를 달고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훨훨 날아가 버리는 현 실이 목전에 닥쳐 와 있다. 불안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자식이 잘 되면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꾸짖어도 보았다. 하지만 쉽게 안정될 순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맥의 주인이다. 유전의 주인이다. 한미전쟁에서 다시없을 막 대한 공훈을 세운 인물이다. 자신의 딸이 그런 대단한 사람이라니, 그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빠." "응?" "이제는 정우 형네랑 결혼해라 어쩌라 그런 소리 안 할 거지?"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하렴. 결혼을 해서 알콩달콩 잘 살든지, 유빈이 혼자 데리고 화려한 싱글을 만끽하든지 이제 이 아빠는 상관하지 않 으마." 아이의 볼을 문지르며 예안은 쿡쿡 웃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그녀는 의아해하며 아이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지?" by eden 주인공의 몸에서 적출한 2개의 자이오 다이아는 현재 레이온이 가져 갔습니다. 그에 대한 자세한 배경은 다음 화에서 아시게 될 겁니다.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63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크리쳐아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지" bu eden ... 바이에덴이란 사람인건가요;;; 퍽퍽!! 11-14/01:35 플로피디스켓 건필 11-14/00:44 엘베루시아 유빈과 결혼이라 쿨럭.;; 11-14/00:07 희랑(曦朗) 와아와아 역시 좋습니다 11-14/00:06 我愛風 엔드류.일지도, 그러고보니 잊혀졌었네''; 11-13/23:48 마르티어스 의외의 반전도 재미있을듯 유빈이랑 결혼하는것도? 유빈이 7살만 되도 어른이잖아요 11-13/21:59 esik [...♥]발그레[...] 11-13/21:34 카제 커어 11-13/21:18 天魔上人 헉;ㅁ; 서버정검?그런비슷한건데 =ㅁ= 왠 외계어가 뜬다 =ㅁ= 괜히 확인눌렀.. 11-13/19:51 아스트론 레이온이 그걸 이용해서 자신이 신인류가 될려고 발악한다라는? 11-13/19:08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64 회] 날 짜 2004-11-14 조회 / 추천 808 / 21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날개가 찢어진 천사 화면에 나타난 인물은 처음 보는 남자였다. 나이는 한 3, 40대 정도 되었을까.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구니?" "몰라. 모르는 사람이야. 근데 외국인 같아." 정호는 얼굴을 굳혔다. "나가지 마라. 어쩌면 외국 스파이일지도 몰라." "그래?" 고개를 갸웃하며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나가기로 했다. 상대방이 스 파이 같지도 않았고, 이 야밤에 찾아올 정도면 뭔가 중요한 것을 가 져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ESP를 이제 어느 정도는 능숙하 게 쓸 수 있으니, 신중을 기한다면 상대가 총을 들고 있다 해도 쉽게 기습하고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나가볼게." "하,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어." 걱정 말라는 뜻으로 손을 까딱인 뒤 현관을 나서서 정문으로 총총총 뛰어갔다. 문을 열자 바바리 코트를 입은 남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 왔다. 역시 모르는 얼굴이었다. "누구세요?" "칼 루이스라고 합니다. 레이온 박사님의 조수지요." 레이온이라는 이름에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내뱉었다. "돌아가 주세요." "잠깐만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난 할 말 없어요. 돌아가서 그 남자한테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옆구리의 상처가 다시금 아파 왔다. 그녀는 입 술을 깨물며 쏘아붙였다. "그 남자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통받는지 알기나 해요? 내 몸에 난 상처 볼 때마다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요? 내 아이가 그걸 보고 아프 지 않냐고 울 때마다 얼마나 가슴 아픈지 알아요? 이제 와서 도대체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거예요?" 그녀는 씨근덕거리며 분노를 토해냈다. 칼에게 화를 내봤자 아무 소 용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에게라도 화를 내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레이온은 그녀를 칼로 찌른 뒤 떠났다. 그녀의 몸 속에서 꺼낸 두 개 의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떠났다. 사랑한다고 그렇게 달콤하게 속삭였으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거리낌없이 그녀를 찔러버 린 것이다. 아니, 오히려 사랑하는 그 마음이 거짓이 아니었기에 더욱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다. 눈물보다 순수한 진심이었기에 더욱 공포를 느꼈던 것이다. 두려웠다. 앞으로 그가 또 어떤 짓을 할지, 그리고 그를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이대로, 이대로 그와의 인연이 처음부터 없었 던 것처럼 녹아버렸으면 했다. 그것이 부질없는 소망이라는 것을 알 면서도. "박사님이 보내서 온 것이 아니라 제 자의로 여기 온 것입니다. 박사 님은 제가 여기 왔다는 것조차 모르십니다.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시간을 내주십시오." 칼의 눈동자는 간절했다.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망설이던 예안은 할 수 없다는 얼굴로 끄덕였다.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근처 카페로 가시죠." "네." 등을 돌린 칼이 먼저 앞장섰다. 그는 조용하고 깨끗한 거리에 자리잡 은 카페로 그녀를 안내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카페에는 손님이 거 의 없었다. "사람이 별로 없네요." "승전 소식 때문에 다들 술독에 빠져 있지요. 누가 카페에서 느긋하 게 차나 마시겠습니까?" "하긴." 그들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그가 존대를 하는 게 다소 거북 하게 느껴졌다. 간단한 음료를 시킨 뒤 칼은 예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감정한 파 란 눈동자에서 그녀는 절대 고독의 슬픔을 엿보았다. 한창 정열을 불 태워 일할 남자가 저런 눈을 가지게 된 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직접 뵙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군요." "네?" "사실 전에 한 번 슬쩍 뵌 적이 있습니다. 동해해군기지로 가시던 중 열차를 폭파하겠다는 협박편지를 보낸 사람 기억하시나요?" 기억을 더듬던 그녀는 아 하고 탄성을 발했다. "그게 아저씨였어요?" "네. 아, 하지만 정말 폭파시킬 생각 따윈 없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말하면 엔젤은 알아들을 거라 생각했던 거죠." "근데 중간까지 갔을 땐 아저씨가 아니라 넬이 마중을 나왔는데?" "유젤씨를 차마 마주볼 용기가 없었습니다. 제가 심한 잘못을 저지르 는 것 같았거든요." 칼은 가벼운 경련을 일으키는 손으로 물을 한 잔 마셨다. 예안은 그 의 심정을 이해하기로 했다. 적어도 벌벌 떨리는 그의 손만큼은 진심 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절…?" "제… 이야기를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반문하려던 그녀는 묵직한 분위기를 느끼 고 입을 다물었다. 칼은 쓸쓸히 웃었다. "그럼 허락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 "제게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착한 아내와 예쁜 딸 하나가 있었죠. 적 어도 몇 년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녀는 심상치 않다 느끼고 천천히 칼의 얼굴을 살폈다. 행복했던 시 절을 되씹는 그의 얼굴은 다시없을 안타까움과 증오로 잠식돼가고 있었다. "정말 남부럽지 않은 가족이었습니다. 저는 촉망받는 과학자였고, 아 내와 딸은 둘 다 착하고 건강했고, 우리에게는 행복하게 사는 일만이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그 행복이 깨졌습니다." "…왜요?" "딸을 데리고 소풍을 나갔던 아내는 마약중독자 갱들에게 붙잡혔습 니다. 아내와 딸은 그 빌어먹을 녀석들에게 윤간을 당한 뒤 살해당했 습니다. 그때 제 딸은 고작 7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 그가 지닌 슬픔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간 그녀는 측은하다는 표정 을 지었다. 어설픈 동정이 그에게 더 큰 상처가 된다는 걸 알지만 어 쩔 수 없었다. "복수는… 했습니다. 레이온 박사님이 복수를 도와주었습니다. 하지 만 그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런다고 해서 아내와 딸이 살 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 "그 뒤로 저는 레이온 박사님에게 투신했습니다. 다시는 제 아내와 딸 같은 비극을 겪는 사람들이 없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런가요?" "얼마 전에는 연구소 직원 중 한 여직원이 여동생이 성폭행 당한 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상대방이 권력가였기 때문에 재판에서 승소할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서서 도와주었 습니다." "어떻게 했는데요?" "재판에게 승소하게 한 뒤 막대한 손해배상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뒤는요?" "남근을 자르고 죽였습니다. 그 더러운 근육덩어리는 개에게 먹이로 던져줬죠." 예안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후련하셨나요?" "아니요." "그럼 왜 그러셨죠?" "글쎄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러실 건가요?" "네." "망설임은 없고요?" "절대 없습니다." "모순된 대답이군요. 후련하지도 않은 일을 망설임 없이 한다니 말이 에요." "여자인 당신은 이해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군요. 남자들이 너 무하다고 나무라는 것은 이해가지만 말입니다." 예안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어깨를 으쓱했다. "제 친구도 성폭행 당한 적이 있다고요. 전 그 녀석을 아저씨가 말씀 하신 녀석보다 더 심하게 괴롭힌 다음에 죽여줄 거예요." 칼은 소리 죽여 쿡쿡 웃었다. "절 이해해주시는 겁니까? 다행입니다." "그 남자는 지금 뭘 하고 있죠?" 그제야 칼은 그녀가 지금까지 줄곧 레이온을 '그 남자'라고 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얼굴을 굳힌 채 차가운 냉소로 빛나는 녹색 눈 동자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로 오싹한 한기를 발하고 있었다. "레이온 박사님은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실험 중이십니다." "내… 몸 속에서 빼낸 거 말이에요?" "네, 그렇습니다." "성공하기를 빌어야겠군요. 실패하면 또다시 웃는 얼굴로 내 앞에 나 타나서 사랑한다 어쩐다 지껄인 다음에 내 배를 가를 테니까요." "그 분을 이해해주십시오. 그 분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도저히 자이 오 다이아를 만들 수 없었으니까요." 예안은 키득키득 웃으며 빈정거렸다. "그 잘난 천재 과학자께서 하지 못하시는 일도 있었나요? 그 남자는 작년에 곧 자이오 다이아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말했어요." "만들 수는… 있습니다. 다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왜, 한 십 년 정도 걸리나 보죠?" "10억 년이 걸립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조소가 지워졌다. 핼쑥한 안색이 된 그녀는 놀 란 음성으로 물었다. "그, 그렇게 오래 걸려요?" "얼마 전에 최종 계산이 나왔습니다. 하나의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만 들기 위해서는 10억 534만 801년 77일 3시간 20초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수치에 그녀는 까무러칠 뻔했다. 칼은 간절함을 품고 말했다. "박사님을 이해해주십시오. 그 분은 정말 당신을 사랑하셔서, 그래서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 배를 가른단 말이에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구인류의 기술로 자이오 다이아를 만 들기 위해서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10억 년의 숙성 기간이 필요했으 니까요. 박사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더 또한 자이오 다이 아를 만들려면 그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고요." "마더가요?" 그녀는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전능함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마더 또 한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런 엄청난 세월을 인내 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단시간 내에 자이오 다이아를 만들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 신인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체내에서 만 만들 수 있을 뿐, 그들의 체내에서 자이오 다이아를 적출해봐야 본래의 성능의 50%도 내지 못합니다." 우드득우드득. 탁자 아래에서 가늘고 흰 손가락이 뼈마디 뒤틀리는 소리를 냈다. 본 능적인 거부감을 표출하는 것이었다. 한참 후 그녀는 가까스로 분노를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좋아요. 아저씨가 한 말씀은 잘 들었어요. 그래서, 저한테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거죠?" "아무 것도 해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분을, 조금이나마 이해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싫은데요. 난 절대 그 남잘 이해하지 않을 거예요." 냉정하게 잘라 말하는 태도에 칼은 쓴웃음을 지었다. 안타까움을 숨 기고 있는 자조적인 미소였다. "그렇다면… 지켜봐 주기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 분이 앞으로 어 떻게 되실지만이라도…." "싫어요." "당신이 지켜봐 주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분이 하는 모 든 일은 전부 당신을 위해서… 아니, 당신과 밀접하게 연관돼있는 것 이니까요." "그래도 싫어요." 어린아이의 칭얼거림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레이온을 다시 보 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었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어조가 그것을 증명 했다. "꼭 부탁합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칼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가 난 건지 우울한 건지 알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예안은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 어났다. 밖으로 나왔을 때 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용건이 끝나자 곧장 돌아가 버린 모양이었다. 밤이슬을 맞으며,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뱃속을 뒤적 거리며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찾던 레이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를 떠올리자 곧이어 지울 수 없는 상처의 고통까지 떠올랐다. 그녀는 신음을 억지로 씹어 삼키며, 자신의 배를 가를 때 그가 짓고 있던 세상에 다시없을 슬픈 표정을 생각했다. "하아." 그녀는 상념을 떨치기 위해 일부러 아이 생각만 했다. 부드러운 미소 가 떠오르며,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세정의 남편인 석준은 근래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퇴근하고 돌아 오면 반겨주는 것은 썰렁한 집안 분위기였고, 아내는 늘상 걱정스런 얼굴로 정신을 빼놓고 있었으며, 아이들은 엄마 눈치 보느라 시끄러 운 소리 한 번 못 내는 판국이었다. '이러다 제가 제 명에 못 살지.' 석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며느리격이 되는 아이와 화해를 하는가 싶 었다가 수포로 돌아간 이후, 세정은 살아갈 보람을 잃은 사람처럼 무 기력하게 변했다. 보다못한 석준은 한 마디 했다. "그렇게 세상 떠날 것처럼 굴지말고 당신이 먼저 전화라도 해보지 그래?" "…무서워요." "당신하고 완전히 인연 끊을 생각이었으면 그 아이도 그런 전화하지 않았을 거 아니야? 정말 무슨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러는 것 같은데, 당신이 먼저 전화 거는 게 낫지 않아?" "그래도 무서워요." 세정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해수욕장으로 같이 놀러가기로 약속했을 때만 해도 세정은 예안의 마음이 거의 넘어왔다고 희망에 차 있었다. 급한 일이 생겨서 약속을 못 지키겠다고 전화했을 때도 조금 실망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더 악화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뒤로 예안은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걸어본 적도 있으나, 정호는 예안이 지금 집에 없다고만 했을 뿐,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고 일관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남편과 아이들이 별것 아닐 거라고 위로했 지만, 세정은 최악의 상황만을 가정했다. 어쩌면 그 아이는 매몰찬 거절을 드러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아." 어느덧 가을이 완연한 정원을 물끄러미 내다보며 세정은 또다시 한 숨을 쉬었다. 따르르릉. 전화벨이 울리는 순간 세정은 자리에서 튕겨지듯 일어났다. 조금 전 까지 무기력하게 한숨만 내쉬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놀라운 민첩함이었다. "여보세요?" 세정은 다급한 음성을 쏟아냈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 "예안이니? 예안이니?" 상대방이 두 번이나 대답이 없자 세정은 더욱 다급히 물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석준은 또 잘못 걸려온 전화일 거라 생각하고 상심한 아내 를 위로해줄 말을 궁리했다. 「저어…. 안녕하셨어요?」 그러나 아내를 위로할 필요는 없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정말로 예안 이었다. 세정은 반가운 빛을 가득 띄운 채 황급히 말했다. "그, 그래. 일이 있다는 건 잘 됐니? 몸은 건강하고?" 「…네. 그럭저럭요.」 "으, 응…."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본디 크게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거니와, 세 정이 예안에게 강한 부담을 느끼고 있기에 더욱 분위기가 어색했다. "한 번 놀러오라고 그래." 보다못한 석준이 그렇게 조언했다. 세정은 안색을 활짝 펴며 고맙다 고 끄덕인 뒤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저, 우리 집에 한 번 놀러오지 않으련? 아주머니가 맛있는 거 해줄 게." 「아니요.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그, 그래?" 세정은 한껏 실망한 얼굴이 되었다. 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조심스 러워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저, 아주머니. 오늘 시간이 되시면 잠깐 뵐 수 있을까요?」 "…!"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분명히 만나자는 말이었다. 너무 놀라 가슴이 벌렁벌렁했던 세정은 황급히 침착함을 되찾고 대 답했다. "그, 그럼. 이 아줌마는 언제든 괜찮아. 그래, 몇 시에 어디서 만날 까? 거기? 응? 알았어. 그럼 지금부터 준비할게." 세정은 전화를 끊고 부리나케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세상 포기한 듯 싶더니 전화 한 통에 원래대로 돌아온 거야?" "아이 참. 미안해요. 있다가 이야기해요." 한껏 밝은 얼굴로 대답하며 세정은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2층에 서 몰래 내려다보던 마리와 우성은 서로를 마주보며 키득 웃었다. 어 쨌든 엄마가 활기를 되찾아서 안심이었다. by eden 나중에 나오겠지만 미리 설명해드리자면, 음, 마더가 케이에게 준 자이오 다이아는 결정체가 아니라 일종의 원석이었죠. 케이는 그것 을 가공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물론 제이의 몸에서 적출해서 써도 되었으나(금방 재생하기에), 자 이오 다이아는 체외로 빠져나오면 성능이 월등히 떨어지기에, 그것 을 가지고 조물주 프로젝트(새 혹성 만들기 계획~_~)를 실현할 수 는 없었겠지요. ..그러니까 나중에 나오는 설명이지만 어차피 몇 화 안 나서 나올 설명이기에 설정 설명은 사설에서 안 한다는 금기를 잠깐 접어두고 (저는 융통성 있는 사람~) 말씀드리는 겁니다아.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64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染花 후우....-_-;; 스토리 멋지군요..;; 11-15/15:41 esik 우어어. 미친박사라도. .. ..레이온씨가 좋다;ㅂ;<- 11-14/23:16 『둥이』 아 2부도 보고싶어진다~~언제 예안이는 바닥으로 떨어질것인가.....크크크 11-14/22:50 꼽사리 질문하나,, 예전에 4가지 없는 재벌2센가,, 회사 망가트린다고 했던것 같던데,, 어떻게 됐는지.. 11-14/22:41 滿月 다이아몬드 성능 50% 이고 이것이 2개라 해도 그 성능이 100%가 될수는 없습니다 . 50%짜리 를 몇백몇천개를 해도 절때로 100%는 될수없고 99.9%의 효과밖에 기대할수없습니다 11-14/16:42 얼음공쥬 -_- 왠지 징그럽다는 느낌인데요..하하.. 흥미진진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나? 11-14/15:07 뇨뇨뇨에바다뇨!! 신인류몸에서 나온 자이아 다이아몬드는 50%의 성능을 내는데 2개를 가져갔으니.....100%인가...-_-; 지몸에다가 심으려나....ㅋ 11-14/13:06 루리두리 의학적으로 환자한테 1명씩 병문안 올때마다 1.5%씩의 치유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럼 67명이 병문안 온다고 완쾌 될까요? 그런겁니다.. 11-14/11:04 빨간등산화 흣 아무리 소설속 설정이 라지만 ....생살을 찢어내구 꺼내다닝,,,(6_6) 너무낭 옆기적인 작가님,,,,, 독자는 유구무언 이라는;;;;; 11-14/11:02 아스트론 그런데 2개를 뽑아냈잖아요~ 한개당 50%의 효능이라면 2개면 100%아닌가요? 11-14/10:45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65 회] 날 짜 2004-11-15 조회 / 추천 762 / 21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날개가 찢어진 천사 가급적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수수하게 차려 입고 약속 장소로 나 간 세정은 곧 창가에 앉아 있는 예안을 볼 수 있었다. 세정은 옷매무 시를 다시 한 번 다듬은 뒤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안녕. 내가 좀 늦었지?" "아니에요. 저도 방금 왔는데요 뭘. 자, 유빈아. 인사해야지?" 엄마 무릎에 앉아 까르르 웃고 있던 아이는 세정과 눈이 마주치자 조용해졌다. 세정은 침을 꿀꺽 삼키며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인사해 야 돼?'하는 눈으로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예안은 끄덕였다. "네 할머니셔. 인사해야지?" 세정은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했다. 할머니라고? 그렇다면 이제 자 신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는 말인가? "안넝하세요." 유빈이 혀 짧은 소리로 인사했다. 1주년도 안 된 아기치고는 놀랍도 록 능숙한 발음이었다. 세정은 연신 눈물을 찍어냈다. 영특한 아이 같으니라고, 누굴 닮아서 저렇게 똑똑할까? "엄마. 근데 왜 내 할머니야?" "응. 네 아빠 엄마 되는 분이거든." "아빠?" 유빈은 생소한 용어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세정은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파 왔다. 아빠라는 이름이 뭔지 알기도 전부터 아빠를 잃어 야 했던 어린아이의 운명이 마냥 가여웠다. 유빈을 옆에 내려놓은 예안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세정의 시선을 피했다. 눈을 똑바로 마주치기가 영 쑥스러웠다. "저… 그동안 죄송했어요." "…아니야." "전 제가 그렇게 하는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건 진우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아닐 거라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러니 까… 그게…." 세정은 웃음과 함께 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림으로써 그녀가 변명하려 는 것을 가볍게 막았다.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돼." "…네." 평온하게 미소짓던 예안은 뚫어져라 쳐다보는 세정의 시선이 부담스 러워 다시 아이에게 눈을 돌렸다. 푹신푹신한 시트에서 뒹굴거리던 아이는 엄마가 두 팔을 내밀자 까르르 웃으며 안겼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세정은 말없이 다시금 눈물을 찍어냈다. 엄마가 우는 걸 흘끔 바라본 예안은 가슴이 시큰둥해지는 느낌을 받 았다. 엄마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는 커다란 결심이 필요했지만, 막상 화해를 향해 손을 뻗쳐보니 그동안 자신이 품고 있었던 미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배고프지 않니? 뭐 먹고 싶어?" 세정은 억지로 웃음을 만들며 물었다. 여전히 그 시선을 부담스러워 하며, 예안은 슬그머니 얼굴을 돌렸다. "전 괜찮아요. 그냥… 그냥…." "아아, 그런 말은 안 해도 된다고 했잖니. 이제 우리 서로 좋은 이야 기만 하자. 응?" 한껏 밝게 미소짓는 세정의 얼굴은 누구보다 편안해 보였다. 비로소 엄마와 눈을 똑바로 마주친 예안은 오랜만에 자연스럽고 편안한 미 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렇게 엄마와 화해를 했다. 거창한 사과도 뜨거운 눈물도 거룩한 용 서도 없는, 그냥 처음부터 싸우지도 않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서로 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 조금은 눈시울도 뜨거워졌고 눈물을 찍어 내기도 했으니 아주 울지는 않았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이렇게 자연스럽게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보아 핏줄은 과연 핏줄인가 보다. 그제야 안심했다는 미소를 지으면서, 예안은 자 신이 유진우라는 사실을 좀더 굳건히 다질 수 있었다. 유진우이기 때문에 이렇게 쉽게 엄마와 화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 진우가 아니라면 이렇게 화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자신은 유진우였던 것이다. 모든 진실을 고백할 용기는 아직 나지 않았다. 하지만 화해를 향해 무사히 한 발자국을 내딛었으니, 언젠가는 엄마에게 숨김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고 그 품에 안겨 엉엉 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벌써부터 그 날을 상상하며, 예안은 들키지 않게 작게 웃었다. 나중 에 울게 되기를 기대하며 지금 웃는다는 것은, 다소 모순이긴 하지만 나름대로는 행복한 일이었다. 예안은 아이를 안고 터덜터덜 걸었다. 집 대문 앞에 당도하자 그녀는 초인종을 눌렀다. "매번 초인종 누르거나 열쇠 꺼내는 것도 참 귀찮네. 홈 관리 시스템 이라도 달을까?" 그러나 곧 한숨과 함께 포기했다. 홈 관리 시스템이 일반화되어 있기 는 했지만, 그것은 다루기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고장이라도 한 번 나거나 하면 여간 골치 아프지 않았다. 차라리 원시적이기는 해도 열쇠를 애용하는 것이 훨씬 편했다. "엄마 잘 만나고 왔어?" 정호가 조금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오늘 아침 예안이 어디 나갔는지 알고 있는 그는 세정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 몹시 신경 쓰 였다. "응. 엄마하고 화해했어." "화해했어? 잘…했다." 음성이 조금 떨렸다. 섭섭하거나 충격적이어서가 아니었다. 엄마와 화해했다는 게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정에게 딸과 손자를 빼앗 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만들어낸 긴장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예안은 아이를 내려놓고 빙긋 웃으며 아빠의 등을 껴 안았다. "걱정 마, 아빠. 나는 아빠하고 계속 같이 살 거야. 엄마한테는 아직 전부 다 사실대로 말하지도 않았는걸 뭐." "엄마. 엄마는 왜 할머니를 엄마라 불러?" 손가락을 입에 물은 채 유빈이 물었다. 순간 정호와 예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으, 응? 그, 그게 그러니까 말이야…. 아! 그냥 좀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서 그렇게 부르는 거야. 유빈이는 엄마 마음 이해하지?" 알아서 좋을 것 없는 사실을 알아버릴까 겁이 난 예안은 조금 당황 한 채 변명했다. 유빈은 알았다는 얼굴로, 정확히는 뭐가 어떻게 되 든 상관없다는 얼굴로 끄덕였다. "휴우. 살았다. 괜히 유빈이가 이상한 거 알게 되면 큰일이잖아." "아직 어린 아이가 뭘 안다고 그렇게 걱정하고 그래?" "유빈이가 얼마나 똑똑한지 아빠가 몰라서 그래. 날 닮아서 정말 엄 청 똑똑하다고." "너라면 어느 쪽? 여자 쪽? 남자 쪽?" "그야 당연히 여자쪽…." 무심코 대답하던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여자 쪽을 닮아서 그렇다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자신이 '진우의 기억을 가진 유젤'이라고 인 정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갑자기 예안이 말을 끊고 우울한 표정을 짓자 정호는 어리둥절한 얼 굴을 했다. "왜 그러니?"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나 먼저 씻고 잘게." 예안은 의아해하는 정호를 내버려둔 채 아이를 데리고 욕실로 갔다. 아이 옷을 먼저 벗기고 그녀도 옷을 벗었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 은 뒤 아이를 데리고 몸을 담갔다. 피로가 싹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을 만끽하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엄마. 이거…." 물을 가볍게 튕기며 장난하던 아이는 엄마의 허리에 깊게 난 상처를 보며 울상을 지었다. 울 것 같은 표정에 놀란 그녀는 등을 토닥토닥 하며 안정시켜주었다. "많이 아파?" "괜찮아. 이거 이제 안 아파." "아파 보여. 아파 보인단 말이야." "정말 괜찮아. 유빈이는 울지 않아도 돼." 괜찮다는 엄마의 화사한 미소에 아이는 다시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천사같이 순진한 아이의 미소에 엄마의 얼굴은 한결 더 밝아졌다. 희 뿌연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가운데, 잠시 동안이나마 고뇌를 잊은 엄마와 아이의 웃음소리가 욕실을 가득 메웠다. "오, 드디어 퇴원하신 겁니까? 축하드립니다." 춘식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직원들은 일제히 책상 앞에 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특히 진태는 호들갑을 떨어가면서 춘식에게 친근감을 표시했다. "세상에,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렇지 어떻게 만 원짜리 한 장 때문에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답니까?" 진태가 그렇게 호들갑을 떨자 춘식은 쓴웃음을 지었다. CIA니 양자 컴퓨터 설계도니 하는 것을 그대로 알릴 수 없어서, 회사에는 만 원 짜리 지폐가 창밖으로 떨어지는 것을 잡으려다가 실수로 떨어지는 바람에 다리가 부러졌다고 둘러댔는데, 분위기로 보아하니 한동안은 그걸로 단단히 놀림받을 것 같았다. "다리도 다 나으셨으니, 이제 약속을 지키셔야지요?" "약속이라니?" "아, 전에 말씀하신 거 말입니다. 유한전자는 우리가 먹겠다, 뭐 이런 거요." 뜨끔한 얼굴이 된 춘식은 이내 벌레 씹은 표정으로 변하며 투덜거렸 다. "이제 몰라, 그딴 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 다 틀려버렸어. 애초에 그게 가짜였다고. 이제 나는 걔 얼굴을 무슨 수로 본다냐.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큰소리를 쳐놨으니 단단히 기대하고 있을 텐데…." 면회를 잘 오지도 않은 걸로 보아 '상관'은 대단히 화가 난 것이 틀 림없었다. 춘식은 어떻게 변명할까 고뇌하며 한숨을 토했다. 「회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비서의 콜에 춘식은 사색이 되었다. 누가 찾아왔는지 짐작이 갔기 때 문이었다. "회장실로 들어오시라고 해." 옷매무시를 바로잡은 뒤 춘식은 사무실을 나섰다. 직원들은 장난을 칠 분위기가 아님을 느끼고 굳은 표정으로 그를 배웅했다. 그가 회장실로 들어서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예안은 자리에서 일 어나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퇴원 축하드려요." "그, 그래. 정말 오랜만이다…." 춘식은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몹시 어려워하는 태도를 보였다. 양자 컴퓨터 설계도만 있으면 유한전자를 손에 넣는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큰소리를 떵떵 쳐 놨지만 실패로 돌아갔으니, 아마도 크게 실망해서 추궁하러 왔을 것이다. 전에는 이해해준다고 말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디 그렇게 되나. 그는 그녀보다는 '그녀의 가문'이 어떻게 나올지 심히 걱정이었다. 물 론 그녀는 자신의 배경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일절 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가 대단한 집안의 자녀일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천 억 단위의 거금을 선뜻 내놓는 여고생은 응당 그에 걸맞는 막강한 가문 을 지고 있기 마련이니까. "그동안 병문안 자주 못 가서 죄송해요. 많이 바빴거든요." "으, 응. 아니야. 그것보다 뭐 좀 마시지 않을래?" "괜찮아요. 그리고 오늘은 진지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일 단 앉으세요." 힘이 깃든 목소리였다. 춘식은 쭈뼛거리며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았다. 가볍게 턱을 쓰다듬으며 뭔가를 생각하던 그녀는 이윽고 진지한 눈 을 들었다. "유한전자가 갖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되죠?" 그녀가 양자 컴퓨터 실패 건을 놓고 추궁할 서두를 꺼내는 거라 생 각한 춘식은 죽을상을 지었다. "그건 내가 정말 미안하고, 할 말 없게 됐다. 내가 제대로 알아보지 않아서… 모든 게 다 내 능력 부족 탓이겠지." "지금 아저씨를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춘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언뜻 느낀 예안은 조금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양자 컴퓨터 사건은 아저씨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어요. 그걸 놓고 아저씨를 추궁하겠다느니 어쩌겠다느니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아 요. 전 지금, 진심으로 유한그룹을 박살내고 싶은 마음이라고요."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든 춘식은 얼굴을 굳힌 채 녹색 눈동자를 슬그 머니 바라보았다. 시리도록 청명한 녹색 눈동자에는 선열한 의지가 굳게 담겨 있었다. "얼마가 들든 좋아요. 유한전자를 뺏고 싶어요." "…얼마나 들든 좋다고?" "네. 얼마나 들든 다 댈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얼마면 돼요? 얼마를 투자하면 유한전자를 뺏을 수 있죠? 아, 물론 그 금액을 전부 다 손 해봐도 상관없어요. 유한전자를 뺏을 수만 있으면." 결코 장난으로 하는 말 따위가 아니다. 마음 속까지 굳어진 얼굴로 고민하던 춘식은 이윽고 계산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200조 원." "…." "200조 원만 있으면 돼. 그럼 큰 손해를 보겠지만, 유한전자를 손에 넣을 수 있어." 아마도 크게 당황하고 있으리라. 춘식은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예안이 지닌 배경이 아무리 대단한 가문이라 해도 수백 조 원이라는 금액은 절대 만만한 액수가 아니었다. 세계 제일의 부자 앤드류 회장 도 총 자산이 500조 원, 그것도 대부분이 현금이 아닌 주식으로 이뤄 져 있다. 춘식은 이미 예전에 계산해보았다. 온갖 치밀하고 교활한 수를 장기 적으로 동원하지 않고, 단시간 내에 정공법으로 유한전자를 손에 넣 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바로 200조 원 이상의 돈이었다. 일 개 개인으로서는 바라보는 것조차 허가되지 않은. 예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뭔가를 생각했다. 예상했던 반응과는 판이 하게 다른 모습에 춘식은 침을 꿀꺽 삼켰다. 왜 크게 실망한 표정이 아닌, 신중하게 저울질을 하는 모습이지?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거면 되겠어요?" "…!" 춘식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 그게 무슨…." "그거면 되겠냐고요." 청명한 자신감이 녹빛에 휩싸여 반짝였다. "내일이라도 당장 그 돈 아저씨 앞에 갖다 놔드릴 수 있어요. 그거 면, 그거면 충분히 유한전자를 집어삼킬 수 있다 이거지요?" 당장 대답하지 않은 채, 춘식은 천천히 그녀의 눈빛을 살폈다. 자신 감에 가득 차 있는 녹색 눈망울은 결코 거짓말을 하거나 허세를 부 리는 것이 아니었다. 춘식은 담배를 피워 물려다가 사나운 눈빛을 받고 얼른 재떨이에 대 고 구겼다. 손가락을 얼굴에 짚은 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던 그는 이윽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능하니?" "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춘식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감탄이나 전율했다기보다는 어처구니없다는 쪽에 가까웠다. '후후…. 남준이 녀석 완전 닭 쫓던 개 돼버렸군.' 국가 예산급의 자금을 고작 회사 하나 깨부수는데 사용하겠다고 자 신 있게 말하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은가? 다시 또 한참의 시간을 고뇌하는데 할애한 그는 이윽고 진지한 표정 을 지으며 물었다. "프랭크 앤쏘니 유젤…과 어떤 사이야?" 예안은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 그를 보았다. 그 정도의 자금을 회사 깨부수는데 얼마든지 탕진해도 좋다는 의사를 밝혔다. 여기까지 왔다 면, 춘식이 바보가 아닌 이상 얼마든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 는 것이다. "며칠 후면 뉴스에 나갈 테니까 미리 말해도 상관없겠죠. 맥은 바로 제가 만들었어요."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그녀는 조금 더 힘을 담아, 선언하듯 덧붙였다. "아저씨가 상상한 게 맞아요. 프랭크 앤쏘니 유젤은 저예요." by eden 여러 가지 사건들 때문에 미뤄두었던 김재호 망가뜨리기 프로젝트가 이제야 발동되는군요. 그동안은 아무리 궁리해보아도 저 사건이 끼어 들어갈 부분이 없어서 미뤄두었는데…. 저 사건은 그냥 빼버릴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사건 자체가 굉장히 스릴 있고 재미있고 흥미 있어서가 아니라, 차후에 전개될 시놉의 기 반을 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앤드류도 곧 나옵니다아. 그리고 감상문 이벤트 당첨자는 내일 발표하기로 하겠습니다.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65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뽀까리 -ㅁ- 오예! 사탕님 최고! 11-16/11:03 klyp 후후 흥미 진지 ~~ 11-15/22:23 뇨뇨뇨에바다뇨!! 드디어 다 밝히는군....후후 11-15/19:52 美夕 키야~~ 좋다 좋아~ 11-15/19:08 독고성 아이고 재미있습니다. 고무림란에 가서 비평글 가지고 열라 싸웠는데 소엄보니깐 속이 다 시원합니다 11-15/18:39 카제 그러고 보니 몇 일 후에 발표 한다는 것은 앤드류도 그 사실을 알게 된 다는 것이군요~~ 11-15/16:44 꼼짝이 히야 이 몰입감~ 다음편이 기대됩니다. 11-15/16:15 染花 햐아.....이제 전개가 어떻게 진행될지 흥미진진해지기만 하는군요..-_-;; 11-15/15:44 실탄 예 오늘까지입니다. 오늘 날짜는 15일인데요.-_-; 11-15/15:38 滿月 저기요 ~~ 에틀란티스 이야기는 이번회 이야기 거의 다 끝나고 시작 했으면 합니다~~~ 11-15/14:48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66 회] 날 짜 2004-11-16 조회 / 추천 737 / 17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날개가 찢어진 천사 처음에 춘식은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나 생각했다. 그만큼 예안이 한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저기, 지금 뭐라고 했니? 프랭크 소시지가 뭐 네 별명이었다고?" "현실도피는 그만두세요, 아저씨. 프랭크 앤쏘니 유젤은 저라고 말씀 드렸어요." "그러니까, 프랭크 소시지가 뭐?" 춘식의 얼굴에 떠오른 패닉은 지워지지 않았다. 예안은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드릴게요." 잠깐 실례, 라고 말하며 그녀가 회장실을 나갈 때까지 춘식은 멍한 얼굴로 '200조 원이나 하는 프랭크 소시지가 있었나?' 따위의 말만을 중얼거리다가, 드디어 그녀가 한 말뜻을 완전히 이해하고 사색이 되 어버렸다. "자, 잠깐!!" 그는 다급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문이 열리며 다시 그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제 이해하셨어요?" 순진한 빛을 띤 능숙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다리가 얼어붙은 채 앉을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그녀에게 시선을 고 정시키던 그는 이윽고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프, 프랭크 앤쏘니 유젤이 너라고…?" "네." "그, 그렇다면 맥은…?" "맞아요. 맥은 제가 만들었어요." 쿠궁! 머리 속에서 벼락이 쳤다. 거센 천둥이 뇌 세포를 헤집었다. 사고의 실타래가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되었다. 눈알이 튀어나오기 직전인 춘식을 똑바로 바라보던 녹색 눈동자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뭐예요, 그렇게 괴물이라도 보는 듯한 눈은? 그럼 설마 아저씨는 제 가 어떤 부호가문 외동딸 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셨던 거예요?" 자신감에 빛나는 녹색 눈동자는, 세상에 대한 조롱을 동시에 머금고 있었다. "그동안 아저씨께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은 것,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 해요. 사실 제가 아저씨께 접근해서 이 회사를 차린 목적은 단순한 사업 따위가 아니었어요." 아직도 어리벙벙한 기분에서 깨어나지 못한 춘식은 예안이 하는 말 을 멍청히 듣고 있었다. "그동안 아저씨를 시험한 것은 죄송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저를 배신하지 않고 계속 제 밑에서 일해줄 믿을만한 사람이 절실하게 필 요했어요. 그래서 아저씨께 접근했던 거예요." 차분한 설명이었다. 경악의 공간에 발을 디디고 있던 그는 조금씩 현 실로 회귀했다. 사업가로서의 두뇌가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럼… 시험 결과는?" "합격. 전 이제 아저씨를 믿을 수 있어요." 싱긋 웃음을 띄운 예안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춘식은 바로 악수를 받지 않고 멀뚱멀뚱 그 손을 바라보았다. 예쁘고 가녀리면서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강인함을 감춘 손이었 다. 이 손을 잡으면 앞으로의 인생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 을 만큼 급변하리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석상처럼 서 있던 그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하얀 손을 맞잡았다. 손 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손은 보들보들하고 부드러운 느낌과 더 불어 날카로운 가시를 숨기고 있었다. 믿음으로 따르지 않고 저버린 다면 언제고 그 가시가 모습을 드러내어 그를 할퀼 것이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래." 흔들리는 눈빛을 다잡은 그는 강인하게 빛나는 녹빛 눈동자를 황송 한 듯 들여다보며, 아들에게 마음 속으로 사과했다. 아들 녀석에게는 대단히 미안스럽게도 꼭 한 번 진지한 자리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은 지킬 수 없게 되었다. 눈앞의 소녀에게 어울릴 법한 남자는 아예 없 다고 봐도 무방했으니. 요즈음 혜인은 다소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데뷔 영화가 대 박이 난 직후 대번에 인기스타의 반열에 올라서는 바람에 그동안 몸 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쟁 덕분 에 휴가 아닌 휴가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전쟁도 종결되었다고 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다시 바 빠질 것이다. 휴게실에서 한가롭게 주스를 마시고 있던 그녀는 매니저 오빠가 가 져온 살인적인 스케쥴 표를 보고 하마터면 입안에 머금고 있는 주스 를 뿜을 뻔했다. "이, 이렇게 생활하고도 살 수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에요!" "넌 사람이기 이전에 연예인이야." 매니저 오빠는 대번에 그녀의 불만을 묵살하면서, 단호한 얼굴로 쐐 기를 박았다. "넌 지금이 가장 중요할 때야. 데뷔 영화가 대박이 났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네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라고. 영화뿐만이 아니라 CF, 청춘 드라마, 토크 쇼, 게임 프로그램, 하여튼 가릴 것 없 이 닥치는 대로 나가서 인지도를 쌓아올려야 돼." "닥치는 대로요?" 혜인은 불만스럽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아, 표현을 그렇게 했을 뿐이지, 아무 데나 널 내보내진 않아. 일단 회사방침은 너를 톱 스타로 키우는 것에 있으니까, 네 가치를 떨어뜨 릴 천박한 오락 프로그램 따위에 내보낼 일은 없을 거야. 안심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살인적인 스케줄 표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하얗게 화장한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윽, 공부도 해야 하는데 이렇게 일에 치여서 살다니…. 이러다가 나 학교 졸업도 못하는 거 아니에요?" "연예인들은 그런 거 걱정 안 해도 돼." "하지만…." "날 믿어. 반드시 널 한국을 대표하는 톱 스타로 만들어줄 테니까." 웃으며 등을 두드려준 매니저는 그녀가 혼자 살인 스케쥴의 공포를 만끽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한숨을 연거푸 내뱉 으며 스케줄 표를 들여다보던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기지개를 크 게 켰다. 톡톡.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리자 혜인은 별 생각 없이 돌아보았다. "누구세…." 뒤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한 순간 말이 정지했다. 그 사람은 어색하 게 웃으며 손을 작게 들어 인사했다. "아, 안녕?" 혜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예안이었 다. 한때 친한 친구였으며, 그녀가 좋아했던 남자를 죽음까지 혼자 독차지한 연적.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움이 생기지 않아 한사코 만나 고 싶지 않았던 여자. "무슨… 일이니?"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예안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긁적이며 맞은 편 에 앉았다. 스케줄 표를 흘끗 본 그녀는 일부러 과장된 표정을 지으 며 감탄했다. "와, 내달부터는 너 이렇게 빡세게 사는 거야? 이거 완전히 사람을 하나 잡겠다는 거잖아? 나라면 절대, 절대 이렇게 못 살아." 결별하기 전과 변함 없이 유쾌하고 명랑한 태도에 혜인은 마음이 한 꺼풀 꺾이는 걸 느꼈다. 잠시 쓴웃음을 짓고 있던 그녀는 밝게 미소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 기획사에서는 날 아예 죽이려고 작정을 했나 봐. 이런 스케줄 대로 살다가는 몸이 열 개라도 남아나질 못한다고." "혹시 회사에서 너한테 생명 보험이라도 들어놓은 거 아니야? 그래 서 일부러 이렇게 빽빽한 스케줄을 짠 거 아닐까?"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 어떻게 하지?" "그냥 도망쳐 버려." "하지만 계약기간은 아직 많이 남았는걸?" "그럼 민사소송 걸어버려. 이렇게 사람을 혹사시키는 건 분명한 인권 모독이라고." 서로 얼굴을 마주본 그들은 이윽고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크게 깔깔거렸다. 이따금씩 휴게실을 지나치던 사람들이 신기한 눈으로 그 들을 흘끔거렸다. 그들은 다른 이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오 랜만의 만남을 즐거워했다. "정말 오랜만이다.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 "뭐 그냥 이것저것 일하면서 지냈어." "학교는 어떻게 했어?" "아직 고등학교 중퇴지 뭐. 아, 검정고시 패스했으니 중퇴는 아닌가?" "대학은 안 갈 거야?" "가야하는데 사정이 좀 그래서…." 예안은 말끝을 흐렸다. 혜인은 친구가 변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한 결 안심이 되었다. 가끔 잠들기 전, 예안과 진우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심하게 욱신거렸지만, 나중에 우연 히라도 그들과 마주쳤을 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지 만, 막상 이렇게 대하고 보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월이라는 것은 그만큼 대단한 놈인가 보다. "근데 있잖아…." "응?" 혜인은 손톱으로 주스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 굴로 물어보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지금은 세월에 많이 희석되었다 지만, 한 사람을 좋아했던 감정이란 그렇게 쉽게 소멸되는 것은 아니 었다. "진우는 어떻게 됐어?" 예안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혜인은 다 안다는 얼굴로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진우 이제 세상에 없는 거 다 알아.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 "나 이제 정말 괜찮아. 흘러간 세월이 얼만데 내가 아직까지 베개 붙 잡고 엉엉 울 거라 생각했니? 나 그렇게 약한 애 아니야." 애써 밝게 미소짓는 혜인의 얼굴은 그만큼 여분의 슬픔을 간직하고 있었다. 예안은 순수한 저 눈망울에 대고 여태껏 길게 거짓말을 했던 것에 심한 자책감을 느꼈다. "네 아이가 이제 한 8개월쯤 됐니? 언제 한 번 보여주지 않을래?" "으, 응?" 예안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자신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라 해석한 혜 인은 한결 친근한 미소를 지었다. "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진우가 마지막으로 남긴 아이가 보고 싶다 는 게 아니라, 내가 정말 좋아하는 친구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 고 싶어서일 뿐이야." 그토록 길게 거짓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혜인은 여전히 친구라 불 러주고 있다. 예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책감을 느꼈다. "저, 혜인아." "응?" "우리… 친구인 거야?" 혜인은 왜 그러느냐는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그럼 친구지, 우리가 언제는 친구 아니었어?" "하지만…." "아, 그동안의 공백은 신경 쓰지 마. 서로에게 피차 어쩔 수 없는 사 정이 있었을 뿐이잖아? 잠깐 흔들리기는 했지만, 난 우리가 이제부터 다시 우정을 쌓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혜인은 진우가 죽고 없는 이상 예안과 자신과의 관계는 다시 예전처 럼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마음을 읽은 예안은 한결 불편 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미안해. 나 너랑 친구할 수 없어." 벼락같은 소리에 혜인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창백하게 말라붙은 입술 사이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무, 무슨 소리야? 그, 그게 무슨 말…?" "말 그대로야. 나 너랑 친구… 할 자격이 없어. 오랫동안 널 속여왔 으니까." 예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딘지 편안해 보이는 미소였다. "속이다니? 뭘 속였다는 건데?" 혜인의 얼굴에 떠오른 당황함이 더욱 짙어졌다. 아마도 속으로 온갖 상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 중 진실에 근접한 것은 하 나도 없을 테지.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예안은 재촉하는 눈빛도 외면한 채 눈을 감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마음 속 어두운 부분에서부터 자신의 비겁함을 꾸짖는 소리가 킬킬거리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진지하게 들어 줘. 너에게는 무척 믿기 힘 든 이야기일거야. 하지만 결코 장난이나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니까 힘들어도 날 믿어주길 바래." 중후한 진지함이 담긴 음성에 혜인은 표정을 더욱 굳혔다. 눈을 뜬 예안은 미안함이 담긴 자신 없는 표정을 지으며 혜인의 눈 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우는 죽지 않았어." "!" 순간 혜인의 몸이 튕겨지듯이 벌떡 일어났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 을 휘둥그렇게 뜬 그녀는 예안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무슨 소리야 그게?" "말 그대로야. 진우는 죽지 않았어. 지금도 아주 건강하게 잘 살아 있어. 그동안 너한테 거짓말했던 거야." 터질 듯한 가슴을 억누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간신히 숨소리를 가라앉힌 혜인은 녹색 눈동자를 노려보듯 주시했다. 일 초가 하루처럼 길게 느껴졌다. 벽에 걸린 대형 시계의 째깍째깍하 는 초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지루한 침묵이 주변을 맴돌았다. 혜인은 차가운 눈빛으로 대답을 촉구했다. 고개를 숙인 채 주저하던 예안은 이윽고 다시 입을 떼었다. "사실이야. 진우는 죽지 않았어." "말도 안 돼. 분명히 장례식까지 치렀잖아? 그런데 어떻게 죽지 않았 다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 왜 나를 속였다는 거야? 날 속일만큼, 그 렇게 해야할 만큼 진우는 내가 꼴도 보기 싫었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보노라니 가슴이 아파 왔다. 예안은 차마 그녀를 마주보지는 못하고 시선을 떨구었다. 혜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비밀을 털어놓기로 했으면서, 지금 또 상처를 주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혜인아. 그런 게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결국 나 꼴 보기 싫어서, 내가 너무 싫으니까 일부러 그런 거짓말까지 한 거잖아? 진우한테 똑바로 전해 줘. 사람 이 정말 그럴 줄은 몰랐다고, 나도 너한테 크게 실망했다고 똑똑히 전해 줘." 혜인은 악에 받친 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녀를 쏘 아붙였다. 예안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혜인이 토해내는 원망 섞인 말들을 듣기만 했다. 이럴 때는 그냥 아무 소리 않고 들어주는 게 가 장 좋은 방법이었다. 이윽고 쏘아붙이다 말고 지친 혜인은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는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구경하는 것도 모른 체 하며 눈물을 닦았다. "아, 이제 좀 속이 다 시원하네." "…." "너한테까지 심한 말 해서 미안해. 하지만 네 말 듣고 보니 내가 너 무 비참해져서…." "혜인아." "응?" 어설프게 미소지으며 사과하던 혜인은 심상치 않은 예안의 표정에 가슴이 조금 철렁했다. 예안은 주저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널 속인 건 정말 내 의지가 아니었어. 그 당시 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거든. 괴로워하는 널 보 면서, 나도 많이 가슴 아팠어." 눈물에 젖은 검은 눈동자가 어리둥절함으로 커졌다. 예안은 말을 계속했다. "난 네가 상처받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어.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순 결 운운해서 너한테 상처 준 것도 정말 미안하게 생각했어.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그건 꼭… 정말 꼭 사과하고 싶었어. 이제라도 내 사과 받아주면 안 되겠니?" 어리둥절해하던 검은 눈동자가 황당함으로 또다시 커졌다. 눈동자 속 에 자리잡은 황당함은 그 말뜻을 깨달은 순간 경악으로 변했다.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예안은 내뱉듯이 말했다. "유진우는 나야. 지금까지 속여서 미안해." by eden 이벤트 당첨자분 카르세아디르(조아라) 에이디엘(조아라) 대천사미카엘(드림워커) 이 세 분인데, 제가 그냥 제 입맛과 연필 굴리기로 고른 것이니 채택 되지 않은 분들 섭섭해하지 마세요.무슨 비평글도 아니고 감상문이 니..--;; 이 분들은 1권부터 시작하여 나오는 증정본 전권을 지속적으로 드립 니다. 단, 수취인 부담 택배라는 것을 명심해주시고요.(...) 따로 메시지로 자택 주소(우편번호 필수!)와 수취인 성함을 알려주시 기 바랍니다. 단, 12월 1일까지 연락이 없으시다면 그 분은 당첨자에서 제외하고 다 른 분에게 증정본이 가게 됩니다. ps : 3권이 다음주 수목쯤에 나온다고 합니다. 3권 분량을 그쯤에 삭 제토록 하겠습니다. ps2 : 모 판타지 와레즈 사이트에서 당당하게 '아상 수정본'을 요구하 는 게시물을 보고 빽 도는 줄 알았지요.--; ps3 : 개인지는 정말 올해 안에 할 겁니다. 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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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 너 지금 뭐라고…?" "유진우는 나라고 했어." "아니… 그러니까… 그게…." "어렵게 생각하지 마. 그냥 내가 말한 그대로 받아들여. 난 지금 너 한테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농담을 하는 건 더더욱 아니야." 커다란 패닉이 검은 눈동자를 잠식했다. 해명이 아닌 부정을 요구하 는 간절함에 예안은 쓰게 웃었다. "못 믿겠지. 믿을 수 없겠지. 이해해. 너를 충분히 이해해." 혜인은 몸을 움츠렸다. 믿고 싶지 않다는 듯이. 이제는 되돌릴 수조차 없다. 예안은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길을 걸을 때면 너는 항상 내 왼쪽에 서서 팔짱을 끼곤 했어. 네 가 슴에 팔이 닿아서 내가 쑥스러워할 때마다 너는 짓궂게 웃으며 내 팔을 더 세게 껴안곤 했어. 떡볶이를 먹을 때면 항상 오뎅을 먼저 먹 곤 했고, 그래서 나랑 다툼을 벌이기도 했어. 나도 오뎅을 좋아했는 데, 나는 항상 오뎅을 마지막 즐거움으로 남겨두곤 하는 버릇이 있었 으니까." 핼쑥한 빛이 혜인의 얼굴을 스쳤다. 예안이 한 말은 소름끼치도록 정 확한 진실을 꿰뚫고 있었다. "넌 남산 타워에 올라 야경을 내려다보는 걸 좋아했어. 두 팔을 벌리 고 크게 고함을 지르는 걸 무척 좋아했어.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다 쳐다보면, 너는 오히려 더욱 좋아하곤 했어. 그 때문에 나 참 많이 쪽팔렸다. 알지?" 새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검은 눈동자를 살짝 덮은 긴 속눈 썹이 가늘게 떨렸다. 예안은 덤덤한 얼굴로 말을 계속 했다. 폭발할 것 같던 가슴은 어느 새 진정되어 있었다. 내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닌, 말을 하는 나를 멀 찍이서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참 신비로웠다. "난 아직도 그날 밤 네가 울던 모습을 기억해. 네 고백을 듣고 나서 내가 매몰차게 거절했을 때, 너는 옷섶을 제대로 여미지도 못하고 흐 느끼면서 나한테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만 말했어. 사실 정말 죽일 놈은 난데, 정말 미안해야할 놈은 난데 말이야." 말을 멈춘 예안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긴장으로 바싹 건조된 입술은 가뭄이 든 논바닥처럼 갈라져 있었다. 정신 없이 듣고 있던 혜인은 힘들게 눈을 마주쳤다. 폭풍우에서 갓 빠져나온 사람처럼 얼빠진 표정이었다. "저기, 예안아?" "말해." "저… 저기, 난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거짓말 아니야. 농담도 아냐. 난 지금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있는 거야." 뜨거운 진실을 담아, 그녀는 힘있게 쐐기를 박았다. "유진우는 나야. 내가 유진우야." 허망한 마음을 끌어안은 채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 혜인은 호들갑 을 떠는 가정부 아주머니에게 아무 말도 못한 채 방에 들어가 쓰러 지듯이 누웠다. 반쯤 초점이 풀린 눈동자는 정상으로 돌아갈 기미가 안 보였다. 그만큼 오늘 그녀가 들은 이야기는 놀라운 것이었다. '뇌 이식 수술?'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 나 그 단어가 지닌 뜻을 인지한 채 중얼거리는 것은 아니었다. 망치 에 얻어맞은 무릎이 튀어 오르듯이, 조건반사적으로 무심결에 입안을 맴도는 것이었다. 혜인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을 뒤졌다. 초조한 마음이 떨리는 손끝 가득 묻어났다. 그녀는 미친 듯이, 옛날 에 울면서 책상 서랍 깊이 내팽개쳐버렸던 사진틀을 찾았다. 이윽고 서랍 깊숙한 곳에서 사진틀을 꺼냈다. 얼마나 오래 방치해두 었던지 먼지가 잔뜩 끼어 있었다. 사진 속의 소년은 세상에 대한 원 망이 묻어나는 눈빛을 한 채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예안의 얼굴을 억지로 그 위에 대입시켜 보았다. 당연하지만 둘은 전 혀 닮지 않았다. 턱선에서부터 시작하여 입술이라든지 코라든지 머리 카락이라든지 그 어느 것도 닮지 않았다. '아….' 혜인은 침음성을 삼켰다. 딱 하나 닮은 부분이 있었다. 원망하는데 익숙해져 있는 서글픈 눈빛, 그것 하나만큼은 소름끼치도록 닮아 있 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동안 깨닫지 못했을까. "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혜인은 소중한 듯 사진틀을 가슴에 꼬 옥 끌어안았다.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사진 위에 툭툭 떨어졌다. 놀란 그녀는 옷소매로 얼른 눈물을 닦아냈다. '믿어 줘. 널 놀리는 게 아니야.' 더할 나위 없는 절실함을 품고 있던 녹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가슴이 다시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기묘한 설렘에 물든 뺨이 빨갛게 변했다. "아아…." 털썩 주저앉은 혜인은 사진틀을 껴안은 채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살아 있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사람이 살아 있었다. 내 곁에서 주욱 머물며 내가 아파할 때마다 함께 해주었다. 이것이 정녕 현실이란 말 인가? 그녀는 볼을 꼬집었다. "아얏!" 아팠다. 꿈이 아닌가 보다. 다시 꼬집었다. 역시 아프다. 정말 꿈이 아닌가 보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아 있던 그녀는 실없이 웃기 시작했다. 우 스워서 웃는 것도 슬퍼서 웃는 것도 어이없어 웃는 것도 아니었다. 왠지 웃으면 안 될 것 같은 어떤 사명감 비슷한 감정이 그녀의 마음 을 온통 뒤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웃었다. 놀란 가정부가 걱정스런 얼굴로 방문을 열 때까 지 얼굴이 온통 눈물에 젖은 채, 그렇게 계속 웃었다. '결국 저지르셨군요.' '그래. 하지만 후회는 안 해.'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내내 예안은 후련한 얼굴이었다. 오랫동안 숨겨온 비밀을 털어놓는 것이 이렇게 편안할 줄 알았다면 진작 그렇 게 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조금 남아 있긴 했지만 어쨌든 후련하 기 그지없었다. 진실로 혜인을 위한다는 이유만으로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냐고 누군 가가 추궁한다면 할 말은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예안은 자 신이 <유젤의 육체를 가진 진우>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혜인을 이용한 셈이 된다. 만약 그 사실을 혜인이 알았다가는 치료할 수 없을 만큼 심한 상처 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예안은 그런 것들은 전부 의식의 구석 으로 밀어놓은 채 후련함에 들떠있기만 했다. "응?" 문득 걸음을 멈춘 예안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웨딩샵 쇼윈도 안쪽 을 살폈다. 웨딩드레스를 걸친 여자 마네킹의 아리따운 자태가 묘한 설렘으로 다가왔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그녀는 결심을 굳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여직원은 반갑게 맞이하면서도, 결혼과는 동떨어졌을 것 같은 어린 소녀가 손님이라는 사실에 내심 놀란 눈치였다. "저… 웨딩 드레스 한 번 입어봐도 되나요?" "그럼요. 한 번 골라보세요." 웃는 얼굴로 승낙한 여직원은 예안에게 갖가지 종류의 웨딩 드레스 를 보여주었다. 신부의 섹시한 면을 강조하는 스타일에서부터 시작하 여 청순한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디자인까지.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 지 않는 것이 없었다. 예안은 굉장히 상기된 얼굴로 이것저것을 열심 히 살폈다. '지금 뭐하시는 건가요?' '보면 몰라? 웨딩 드레스 고르고 있잖아?' '설마 혜인씨에게 씌워드리려고요?' '응? 어떻게 알았어?' 맥은 긴 침묵으로서 사람이었다면 기절초풍했을 기분을 표시했다. 그녀는 드레스를 고르다 말고 쿡 웃었다. '농담이야. 난 농담도 못해?' '그럼 어디다가 쓰시려고요?' '내가 입으려고 그런다.' '설마 앤드류 왕자와 결혼하기로 결심하신 건가요? 아니면 레이온 박 사와?' '미쳤냐?' 레이온의 이름이 나오자 그녀는 당장 화를 냈다. '그 남자 이름은 꺼내지 말라고 내가 지겹도록 말했지?' '죄송합니다. 하지만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아니, 여태껏 잘 지내시던 분이 갑자기 웨딩 드레스라니요.' 여직원의 이것저것 설명을 들어가며 드레스를 고르던 그녀는 심드렁 하게 대꾸했다. '다 쓸데가 있으니까 넌 잠자코 지켜보기나 해.' 냉정하기 그지없는 어투에 맥은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그녀는 마음에 딱 드는 디자인을 찾아냈다. 쇄골 뼈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슴 바로 위 라인까지 드러내는 소매 없는 새하얀 웨딩 드레스였다. 상당한 노출을 곁들인 디자인이기는 했으나 천박하다는 느낌은 일절 없는, 노출과 정숙함의 아슬아슬한 중도를 지켜낸 디자 이너의 노력이 돋보이는 훌륭한 웨딩 드레스였다. "이걸로 하시게요?" "네. 한 번 입어봐도 될까요?" "그러세요." 탈의실에서 여직원의 도움을 받아 웨딩 드레스를 입은 예안은 밖으 로 나와 거실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거울에는 범접하기 힘든 성스러운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 아니 여자가 아닌 그 무엇이 인간의 육체를 빌린 채 서 있었다. "와, 참 아름다우세요. 손님 약혼자는 정말 복 받으신 거예요."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거울에 바짝 다가간 그녀는 새하얀 장 갑을 낀 손을 거울 표면에 살며시 갖다댔다. 거울 안의 여자가 웃어 보인다. 유젤이 웃고 있는 것이다. 저 옆에 내가 있을 수 있다면 정 말 좋을 텐데. 눈물이 또르르 굴러 내렸다. 갑작스런 반응에 놀란 여직원은 걱정스 런 얼굴로 다가왔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어디 아프기라도 하신 건가요 라고 걱정하는 여직원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둘러댄 예안은 손끝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그녀는 다시 거울을 보았다. 잠시 날개를 접고 인간의 모습을 빌린 천사가 서글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고결한 아름다움은 인간의 냄 새를 한 겹 덮었다 해서 전혀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한미전쟁이 미국의 일방적인 패배 선언으로 종결됨과 동시에 한국은 명실공히 세계의 패자가 되었다. 맥과 유전을 동시에 지닌 한국은 이 제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강대국이 되었다. 한국은 전쟁배상금으로 돈이 아닌, 미국이 지닌 각종 중요한 특허들 을 요구했다. 미국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눈물을 머금 고 한국이 요구한 특허들을 고스란히 넘겨주었다. 또한 한국은 자국에 유리한 평화 조약을 미국과 맺었으며, 그 조약에 미국은 향후 50년 간 타국에 대하여 어떠한 군사적 행위도 가질 수 없다는 조항을 넣었다. 이른바 미국은 이제 완전히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된 것이었다. 한국민들은 자국에 이러한 영광을 가져다준 맥에게 열광했고, 맥을 만든 이에게 다시없을 찬사를 보냈다. 프랭크 앤쏘니 유젤이 저 세상 에서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행사가 곳곳에서 이뤄지는 것은 이제 한 국에서 흔한 일이 되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예안은 '나 안 죽 었어!'라고 불같이 화를 내곤 했지만.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돌아온 뒤 니콜라스는 주욱 세현과 같이 지냈 다. 누나가 걱정이 되어 돌아가려고 했으나, 그럴 때마다 그녀는 화 를 내며 무조건 세현과 함께 있으라고 명령했다. 딴에는 세현을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고 배려해주는 게 고맙기 도 했으나, 언제 아틀란티스에서 사람을 보내 누나를 납치할지 모르 는데 마음 편하게 지낼 수만은 없었다. '적어도 그 녀석들, 룰은 꼭 지킬 거야'라고 누나가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긴 했지만, 그에게는 이 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책을 읽고 있던 세현은 오늘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니콜라스를 보고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누나 생각하고 있어?" "…네." "너무 그렇게 초조해하지 마. 누나도 다 생각이 있을 거야." "하지만…." 카뮤가 싸우는 장면을 떠올린 니콜라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때 넬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광선검이 갑자기 길어지는 기능을 지 녔음을 카뮤가 몰랐기 때문이었다. 카뮤는 인간의 육체로서 안드로이드인 넬의 기능을 완전히 압도했다. 물론 니콜라스도 넬을 이길 자신은 있었지만, 그처럼 압도적인 차이 로 승세를 점할 자신은 없었다. 전에 한 번 넬을 이겼던 것은 비행기 가 폭파할 것을 두려워한 넬이 위축되었던 탓이 컸을 뿐, 순수한 실 력의 차이에서 기인한 우세는 아니었다. "그렇게 걱정돼?" "네." "그럼 예안이 얼굴 보러 갈까?" 니콜라스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로소 아 이다운 귀여운 모습에 세현은 키득키득 웃으며 그의 머리를 헝클어 뜨렸다. "예안이가 오늘 여기 온다고 했어. 한 30분 정도 후면 도착할 거야." "정말요?" 누나가 온다는 소리에 니콜라스는 들뜬 얼굴이 되었다. 그 애를 참 많이 좋아하는가 보다, 세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흐뭇해했다. "제임스. 잠깐 나 좀 볼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인데?" "할 말이 있어요. 잠깐이면 돼요." "또?" 세현은 못마땅한 눈으로 제시를 보았다. 제시도 마찬가지로 못마땅한 눈으로 세현을 보았다. 결국 눈싸움에서 진 세현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제 시를 따라갔다. 니콜라스는 뭐 때문에 그런 건지 몹시 궁금했으나 따 라가 보지는 않았다. 옥상으로 올라간 뒤 제시는 팔짱을 낀 채 사나운 눈으로 세현을 노 려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줄래요?" "제시가 본 그대로야." "뭐가요? 당신이 수호자라는 얼토당토 않는 헛소리 말이에요?" "그게 왜 헛소리라고 생각해?" 마치 저녁식사 메뉴를 묻듯이 침착한 말투였다. 제시는 주먹을 우드 득 쥐며 이를 악물었다. "무조건 도망치려고만 하지 말아요. 전 그런 거 절대 용서 못해요." "도망 따윈 치지 않아. 지금 날 보면 모르겠어?" "당신이 엘리우스가 아니라니!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제시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새하얀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전 엘리우스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다고요! 그런 뻔한 거짓말이 통 할 것 같아요!" "지금 제시가 착각하고 있는 거야."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을 다스리며 거친 숨결을 토하던 제시는 이윽고 표정을 한결 누그러뜨렸다. "좋아요. 그렇다고 쳐요. 그렇다면 옛날에 제임스 어머니가 제물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인정한 건 어떻게 설명할 셈이죠? 엘리우스에게 서 수호자가 태어난다는 게 가능하리라 생각해요?" 세현은 아무 말도 않은 채 그녀를 뚫어져라 보았다. 이윽고 그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지나쳐 걸었다. "피곤해.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자." 1층으로 내려가는 그의 서글픈 뒷모습을 노려보듯 바라보던 제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주먹을 부르르 떨던 그녀는 참지 못하고 의 자를 발로 힘껏 걷어찼다. by eden 수능 보시는 분들 100% 실력 발휘 기원합니다.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67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말많네 감사합니다. 11-18/16:34 실탄 [제목 : 천사의 성지, 출판사 : 르네상스] 입니다. 11-17/20:52 말많네 음 서점에 책을 주문햇는데.. 없다는군요.. 실탄님 소엄 출판사랑 재목좀 다시좀 부탁드려여.. 11-17/20:47 케라시스 아자잣 420점을 향해~ 11-17/19:34 케라시스 버서커가 되었습니다 제능력보다 더 많은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이제 남은건 기다리는것 11-17/19:33 슬픈영혼의랩소디 ↓님 그 그런거에요?! (오늘 수능치시는 분들 파이팅!!) 11-17/17:51 天魔上人 ;ㅁ; 우우 .. 진우는 늑대 ㅋ_ㅋ 혜인이 몸 다 봐놓고 나 진우야 이러면 .. 설득력이 없잖아! 11-17/16:55 esik ;ㅂ;!! 우우. 좋아요[♥]정말 착하시고 아름다우신 우리의 실탄님[♡] 11-17/12:34 _ ~_~..! 11-17/10:04 자비의여신 매일 한편씩은 올려주시는 실탄님 정말 고마워요^^ 11-17/08:01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68 회] 날 짜 2004-11-17 조회 / 추천 713 / 21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날개가 찢어진 천사 "꽤 깨끗한 곳이네." 집안을 슥 둘러보고 난 뒤 예안이 내뱉은 감탄사였다. "남자 둘이서 지낸다 해서 엄청 더럽고 냄새도 막 나고 그럴 줄 알 았는데, 은근히 너 청결하다?" 그렇게 놀리면서, 그녀는 자신도 남자였지 않느냐고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곳이야. 위원회에서도 여기라면 쉽게 찾 아내지는 못할 거야." "하긴, 공기 더럽고 사람 우글거리는 서울 한복판에 숨어 있는 게 오 히려 안 들키겠다." "니콜라스가 폭주만 하지 않으면 돼." "폭주?" 그녀는 무슨 소리냐는 의미로 저쪽에서 권총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니콜라스를 흘끗거렸다. "니콜라스는 아직 엘리우스로서 완전히 자각하지 못했어. 그러다 보 니 때때로 힘을 컨트롤하지 못해서 폭주를 일으키고 마는 거야. 그렇 게 되면 5대 대신이 지닌 공명신수가 니콜라스의 위치를 쉽게 알아 차려." 몇 달 전 니콜라스가 이성을 잃고 난동을 부려 나무 한 그루를 통째 로 불태웠던 일이 생각났다. 과연, 그것이 폭주의 형태란 말인가. 세현은 엘리우스의 유례에 대해 설명했다. 이미 알고 있는 그녀는 때 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때로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사실에 놀라워 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더불어 자신은 대를 이어 엘리우스를 지켜야할 부하인 수호자 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니콜라스를 찾지 못했던 이유는 말할 수 없는 까닭 때문에 에날도스를 잃었기 때문이라 했다. 힘을 지니지 못한 수 호자는 곁에 있어 봐야 방해만 되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석연치 않은 구석 - 어딘지 우울해 보이는 안색 등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야기가 끝났을 때 예안은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럼 넌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모르겠어." "네가 모르면 어떻게 해? 지식 in 네이버에 물어보기라도 하리?"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농담에 세현은 씁쓸히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막아야겠지." "뭘?" "혁명, 말이야. 아틀란티스 대륙은 다시 융기해서는 안 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대륙을 가라앉힌 건 신이야. 그 신의 뜻을 거스르고 다시 전설을 세 상 위에 올려놓는다고 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오히려 더욱 강한 분노만 사게 될 거야." 예안은 과거 사도가 받았던 저주를 생각했다. 저주를 받은 시기만 달 랐을 뿐, 사도와 아틀란티스는 지나치게 흡사했다. 도대체 마더는 왜 특정인간들에게 그런 편증(偏憎)을 보이는 걸까. "혁명을 막는다 치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서 막을 건데? UN에 알 리고 도움이라도 얻을 생각이야?" "UN에 알려봤자 달라질 건 없어. 오히려 그들은 신세계를 만났다고 들떠서 당장 교류를 추진하려 할 거야. 아틀란티스인들은 동등한 입 장에서 교류할 생각도 필요도 전혀 없는데 말이야." 예안은 끄덕이며 인정했다. 아틀란티스의 꿈은 다시 한 번 이 행성을 지배하는 것이지, 지상인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넌 그럴 힘이 없잖아? 설마 제임스 해론이라는 이름 하나 가지고 그들과 싸우려고? 아니면 MIT의 교수라는 명함 가지고?" 당치도 않다는 듯이 그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내가 표면에 나설 필요는 없어. 난 그냥 뒤에서 보조하기만 하면 돼." "보조하다니, 누굴?" "너 말이야."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보고 그걸 막으라고?" "당연하잖아. 넌 그럼 눈뜨고 지켜볼 생각이었어?" "내가 왜 혁명을 막아야 되는데?" 당당하게 되돌아온 반문에 세현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무, 무슨 소리야?" "사실이 그렇잖아. 난 굳이 혁명을 막는다 어쩐다 하고싶은 생각은 없어. 그냥 그 녀석들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나 혼자서 자유롭게 살 아갈 수만 있다면 대만족이야. 그 녀석들이 다른 방법으로 혁명을 이 룬다면 나는 필요 없어지니까 오히려 서로에게 좋은 게 아닐까?" 세현은 할 말을 잃고 멍한 얼굴을 했다. 갑자기 그녀가 킥킥거리며 손사래를 쳤다. "농담, 농담. 그냥 해본 소리야. 뭐 사실 혁명이 어떻게 되든 말든 난 상관하지 않겠지만, 그 녀석들은 자꾸 날 괴롭히려 드니까 이제 나도 적극적으로 그 녀석들을 방해해줄 거야." 그럼 그렇지. 세현은 들키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차세현. 이거 하나는 꼭 알아둬야 해." "뭔데?" "나는 그 녀석들이 나한테 접근해온다면 가리지 않고 다 죽여버릴 생각이야." 차가운 살기가 듬뿍 배어나는 어투에 세현은 안색을 굳혔다. 서릿발같은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살인의 미학 따위를 추구하는 게 아니야. 특별히 내가 잔인해진 것 도 아니야. 다만 그 녀석들은… 살인은 물론이고 전쟁까지 불사하면 서 나를 붙잡아 이용하려고 했어. 그러니 나도 응당 그 녀석들과 동 등하게 냉혹해지지 않으면 안 되잖아?" 매몰찬 말투에 세현은 씁쓸히 웃었다. 그녀의 이런 반응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아야 하는 게 당연할지언데, 이상하게 가슴 한 구석이 쓰라 렸다. "너도 그러니 확실히 결정해 둬. 최악의 경우 나는 아틀란티스 대륙 을 통째로 잿더미로 만들 수도 있어. 실제로 이미 한 번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탈출하면서 라이플 버스터 포를 쏘기도 했어." '실패로 돌아갔지만 말입니다.' '너는 좀 빠져.' 맥이 끼어 들자 그녀는 속으로 가볍게 핀잔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하여튼 그렇다는 거야. 네가 날 돕겠다는 것은 그런 꼴을 봐야 할지 도 모른다는 거야. 넌 그걸 감당할 자신 있니?" 시리도록 푸른 냉정함이 빛나는 녹색 눈망울을 바라보며, 세현은 저 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약하디 약한 마음이 녹아 내리고 대신 단단한 의지가 자리잡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 있어." "자신 있어?" "그래. 약속할게. 난 절대 흔들리지 않아. 그러니까 널 돕게 해줘." 흑진주 같은 검은 눈동자는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예안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끄덕였다. "좋아. 그 마음이 변치 않길 빈다." 친구와 겨우 다시 화해를 했다. 이래도 될까 하는 망설임이 전부 씻 어나간 것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그 때문에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이 그보다 더욱 컸다. 비로소 편안한 표정이 된 친구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잘한 결정이라 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언젠가 진짜 이름을 녀석에게 말해줄 수 있다 면 참 편해질 텐데. 혜인에게 그랬듯이. 예안은 좀더 있다가 가라는 세현의 부탁을 거절한 뒤 밖으로 나섰다. 니콜라스가 서운한 얼굴로 꼭 가야 되느냐고 물었지만, 그렇게 떨어 지기 싫으면 같이 가자는 말에는 고래를 도리도리 저었다. 참 어지간 히도 세현이 좋은가 보다. '수호자와 엘리우스라는 게 그렇게 깊은 사이인가?' 걷다 말고 멈춘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데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꼭 동인지 속 캐릭터가 된 기분이 야. 안 그래?' '생각하는 게 왜 꼭 그 모양이신가요? 이제는 장미의 세계까지 발을 내뻗으실 생각인가요? 부탁이니까 백합으로만 만족해주시기 바랍니 다. 사람들도 그걸 바랄 거라고요.' '시끄러.' 그녀는 투덜거리며 지하철을 탔다. 안주머니 안에 숨긴 권총이 조금 거추장스러웠지만 떼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권총은 칼이 아틀란티스인으로부터 몸을 지키라고 선물한 것이었다. 탄환이 아니라 충격파가 발사되는 방식이며, 에날도스 능력자들에게 효과적이라는 설명도 첨부했다. 권총을 볼 때마다 레이온이 생각났다. 필경 레이온은 그녀가 안전하 기를 바라면서 이것을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애절함을 품은 채 그녀의 배를 갈라 자이오 다이아 몬드를 꺼내 갔다. 이제 그녀가 그를 떠올릴 때마다 증오의 이름은 항상 함께 하게 되었다. 극한의 고통은 극한의 쾌락과 어깨를 같이 한다고 한다. 사랑이 극점 에 달했을 때,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잔혹함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이다. 지금의 레이온이 바로 그랬다. '솔직히 많이 두려워.' '레이온 박사 말입니까?' '그래. 내가 예안일 좋아하는 마음보다… 형이 예안일 좋아하는 마음 이 더 강한 것 같아.' 그로부터 유젤을 지킬 수 있을까. 그에게 이 몸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을까. 예안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레이온 박사가 왜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가져갔을까요? 마스 터의 배를 가르면서까지 말입니다.' '글쎄… 아무래도 신인류가 되고 싶어서가 아닐까?' 그녀는 자신 없다는 어조로 사견을 밝혔다. 그러나 맥은 긍정하지 않았다. '순수한 자이오 다이아몬드 원석은 일찍이 신, 즉 마더가 인간에게 두 번 허락했다고 합니다. 가이아 박사가 이브를 탄생시켰을 때 한 번, 그리고 아담에게 한 번. 전자의 경우에는 한 개의 원석을 주었지 만 후자의 경우에는 두 개의 원석을 주었죠.' '모두 세 개네?' '가이아 박사는 그 자이오 다이아몬드로 이브, 즉 제이를 탄생시켰습 니다. 아시다시피 오리지널 유젤의 어머니이자 아담인 케이의 연인인 여자였죠.' '에? 그럼 아담은 어떻게 탄생된 거야? 신인류를 탄생시키려면 자이 오 다이아몬드가 필요하지 않아?' 그녀는 멀쩡하게 생긴 한 회사원이 자신의 엉덩이를 만져볼까 생각 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의아한 빛을 띠었다. '그러니까 조금쯤은 기억을 뒤져보시라니까요. 기억을 뒤져보면 다 나오는 내용이란 말입니다!'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서 뭔가 많이 모호해. 그냥 네 말 듣고 정리 하는 게 더 빨라.' 맥은 인간이었다면 한숨을 내쉬었을 어조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가이아 박사는 마더에게 제안을 받았다고 합니다. NM 프로젝트를 통해 어느 정도의 가능성, 즉 그녀 자신이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다룰 자격이 있음을 입증해 보이라는 것이었지요. 그녀는 결국 NM 프로 젝트를 성공시켜 아담을 탄생시킴으로써 마더로부터 자이오 다이아 몬드를 하사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 아담은 불완전한 거 아니야?' '바로 보셨습니다. 최초의 신인류 아담은 불완전한 신인류였지요. 하 지만 마더로부터 하사 받은 원석을 가공한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통 해 탄생된 이브, 제이는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신인류였습니다.' 그녀를 노리던 회사원은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그녀의 뒤쪽에 슬금 슬금 바짝 가까이 붙었다. '한번 탄생된 신인류는 더 이상 마더의 통제를 받지 않습니다. 마더 는 하나의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만드는 데에 10억 년의 세월을 필요 로 합니다. 하지만 이미 독립된 개체가 된 신인류는 자이오 다이아몬 드를 적출 당한다 하더라도, 간이 재생하듯 곧 새 자이오 다이아몬드 를 체내에서 만들어내지요.' 그녀는 무심결에 자신의 옆구리를 어루만졌다. 옷 아래로 크게 흉이 진 상처가 만져졌다. '어떤 의미에서 신인류는 마더, 즉 신을 초월했다고 볼 수 있는 선택 받은 인간입니다. 마더조차도 10억 년에 한 개 밖에 만들어낼 수 없 는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빠른 시간 안에 생산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 그녀는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잘 들어주십시오.' '듣고 있어.' '분명 신인류는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빠른 시간 안에 만들 수 있습니 다. 하지만 그것은 본인의 체내에 머무르고 있을 때만 순수한 자이오 다이아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 외부로 적출되면 일정 이상 그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과연 레이온 박사가 마스터의 몸에서 꺼내 간 자이오 다이아로 목적을 이룰 수 있을지는….''미지수라 이거지?' 그녀는 자르듯 결론을 내리며, 자신의 엉덩이를 슬금슬금 만지는 남 자의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냅다 비명을 질렀다. "도와줘요! 치한이야!" "뭐, 뭐야?" 순간 복잡한 지하철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남자는 기 겁을 해서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녀는 있는 힘껏 손목을 붙든 채 비 명을 질렀다. "이 남자가 제 엉덩이를 만졌어요! 치한이에요!" "저는 경찰입니다. 어디 봅시다." 사복 차림을 한 남자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삽시간에 사 람들의 시선이 몰리자 치한 남자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마도 취미 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아, 아니 저는 그게 저 그러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서에 가서 합시다. 따라 오시죠." 경찰은 냉정하게 말한 뒤 성추행 현행범으로 남자를 붙잡았다. 남자 는 인생이 다 끝났다는 얼굴을 한 채 고개를 푹 수그렸다. 고소해하던 예안은 지하철이 정지하자 얼른 내렸다. '하여튼 난 형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 '형이 가엾다는 건 알아. 하지만 형은 내 믿음을 배신하고 내 배를 칼로 잘랐어.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유빈이가 자꾸 상처 보고 우는 게 가슴 아파서 같이 목욕도 제대로 못한단 말이야.' 일련의 증오만을 담을 수 있다면 차라리 행복하겠다. 그에게 증오 이 외의 감정을 품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나 그에게 동정을 느 끼지 않을 수 없기에, 더욱 더 그를 멀리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더 이상 맥과 이야기를 하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거리에 내려앉는 햇살은 어느새 많이 옅어져 있었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어느덧 가을이 껑충 다가온 것이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아이와 함께 보낼 계획이었다. 생일잔칫상과 크리 스마스 파티를 함께 치르면 참 좋을 것이다. 혜인이를 초대하면 더욱 좋겠지. 그녀는 부푼 가슴을 안고 계속 걸었다. 저 멀리 정문이 보였다. 열쇠를 꺼내려던 그녀는 순간 흠칫했다. 뒤에서부터 비친 그림자가 정문에 반사되고 있었다. 느릿하게 불어오는 찬바람이 갑자기 따스하게 느껴졌다. "…누구?" 그녀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안녕." 앤드류가 손을 흔들며 작게 웃었다. 혼란이 깃들인 녹색 눈동자가 미 미하게 흔들렸다. "애, 앤드류?" 그녀는 어색한 이름을 부르듯 그를 불렀다. 그가 미소지었다. "응. 나야. 이제 나타나서 미안해." "앤…드류?" 멍청한 빛이 녹색 눈동자를 휘감았다. 새하얀 뺨이 바르르 떨리며 벅 찬 감정을 표시했다. 앤드류는 따스하게 미소지으며, 두 팔을 벌려 그녀를 품안으로 끌어 당겼다. 그녀는 아무 저항 없이 그에게 안겼다. "애, 앤드류…." "누나 힘든 거 다 알고 있어. 말 안 해도 돼." 그는 부드럽게 속삭이며 그녀의 여린 몸을 꼭 껴안았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남자의 어깨였다. 참으로 포근한 어깨였다. 눈물이 조금 흘렀다. 한결 든든해진 기분이 들었다. 만 년 동안 꿈을 꾸어온 자들로부터 간신히 탈출한 그녀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배가 갈린 그녀이다. 겉으로는 아무리 강한 척 해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해도 속으로는 두렵고 무섭지 않을 리 없었 다. 그래봐야 아직 18살뿐이지 않은가. 어쩌면 세상에서 자신의 유일한 아군일 수 있는 그의 품안에서, 그녀 는 다시없을 평온함을 느꼈다. 비록 그것이 오리지널 유젤의 흔적이 야기한 것이라 해도, 어찌 되었든 지금 이 순간만큼은 편안했다. by eden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68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esik ... ...장미..! ...백합이라니.... 진정. 소엄이 그길로... orz 11-19/18:01 뽀까리 백합과 장미의 세계.... 왠지 복습하는 듯한 느낌이!! 11-19/16:24 天下 백합은 뭐고 장미는 뭐죠? ㅡ.;;; 해석불능~!!!!!! 11-18/22:26 天魔上人 그 있잖아요 롯데표 아이스크림 롯데 앤드류바~빡빡 펴졌네 길쭉헬쭉해~=ㅁ= 머시없는 부자집도련님~롯데 앤드류바~_~ 11-18/20:02 루리두리 앤드류가 누구더라... 갑자기 생각 안나네.. 11-18/11:49 자비의여신 정말 멋져요 !! 11-18/07:36 染花 아아.....또 올라왔다니..-_-b 11-18/03:00 뇨뇨뇨에바다뇨!! 흐음... 11-17/22:53 카루엔 아아, 실탄님. 저의 구세주 이십니다. .끄윽.. ㅠ.ㅠ.... <- 11-17/22:49 케라시스 부럽기도 합니다 ㅎㅎㅎ 11-17/21:48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69 회] 날 짜 2004-11-18 조회 / 추천 701 / 17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날개가 찢어진 천사 집안은 깨끗했다. 그리고 넓었다. 내부 장식은 화려하지도 현란하지도 않고 소박하기만 했다. 아늑한 분위기가 앤드류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았다. 누나가 이곳에 살고 있 었구나. 미지의 세계에 발을 내딛은 듯 설레어하며 집안 이곳저곳을 구경했 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 누나의 집이라서인지, 다른 집에서 보았더 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평범한 장식 하나 하나까지 범상치 않게 느 껴졌다. 장식용 장검에서부터 시작하여 벽걸이 TV, 컴퓨터, 그리고 아기가 머리에 뒤집어 쓴 속옷까지… 응? 속옷? "왜 쟤가 머리에 팬티를 입고 있어?" "뭐, 뭐야 이거!" 화들짝 놀란 예안은 서둘러 아이가 머리에 쓰고 있는 여자 팬티를 벗겨내 감추었다. 자식 교육을 잘못 시킨 듯 얼굴이 화끈화끈했다. "흐응, 누나한테 그런 취미가 있었구나? 이거 누나랑 결혼하면 자기 전에 항상 팬티를 모자 대신 써야 되는 거야?" "죽고 싶으면 얼마든지." "킥. 그래도 이젠 예전처럼 펄펄 뛰지는 않네?" 소리 죽여 키득거리던 앤드류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가 안고 있는 아기의 보드라운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형용키 힘든 묵 직함을 느낀 아기는 칭얼거리거나 빽빽 울지 않고 가만히 그의 쓰다 듬을 받았다. 그녀는 그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만지는데도 아 이가 가만히 있는 건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아기… 예쁘네." 이윽고 그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그 떨림의 한 구석에서 한 가닥 질 투를 잡아낸 그녀는 시선을 피했다. 사랑하는 애인이 있는데도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모 드라마 여자 주인공의 마음이 이럴까. 그녀는 앤드류에게 한 조각 미안함을 느끼는 자신을 자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허용돼서는 안 되는 감정이라 스스로를 꾸짖 었다. 자신은 그에게 아무 잘못한 게 없으며, 유빈은 유젤과 나의 소 중한 아이라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흠, 흠. 생각보다는 질투를 안 하는구나." "대놓고 질투했다가는 누나 다시는 나 안 보려고 할 거잖아." "제대로 알고 있구나. 다행이야." 널찍한 집안에 세 사람만 있어서인지 무척 조용했다. 예안은 정호가 오늘 집에 없는 것을 신에게 감사했다. 앤드류의 존재를 아빠가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신이라…. 그래봐야 마더지만.' 진심을 담아 기원할 신조차 없는 현실을 서글퍼하며, 그녀는 씁쓸히 베란다로 나갔다. 앤드류가 뒤따라왔다. "힘들지 않아?" "뭐가?" "여자 혼자 아기 키우는 거." "그럭저럭 할 만해." "그래도 금전적인 어려움도 있을 테고… 아, 이건 아닌가? 하여튼 아 무래도 주변에서 좀 멸시하거나 그러지 않아? 한국은 아직까지도 그 런 게 없어지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글쎄? 난 별로 그런 거 못 느꼈는데? 뭐 하긴 내가 워낙 생활 반경 이 좁다 보니까." "생활 반경이 좁다고?" 앤드류는 묘한 웃음소리를 냈다. 등을 돌린 그는 책상 위에 놓인 디지털 캠코더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핸드폰을 두 개 정도 합친 카메라형 크기의 그것은 빛 바랜 세월의 먼지를 전신에 가득 입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구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모델이요, 색채였다. "이거 잘 간직하고 있네?" "응? 원래 내 거니까." 무심결에 대답한 예안의 얼굴이 순간 어색하게 변했다. "아, 그게 아니라…." "풋. 됐어. 그렇게 애써 부정하려 하지 않아도 돼." 서둘러 말을 잘못했음을 변명하려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오리지널 유젤>의 흔적은 그녀가 괴로움 을 느끼게 하는 요소였다.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적출해도 떨어지지 않는 질긴 흔적. "유빈이… 한 번 안아봐도 돼?" "으, 응?" 냉큼 거절하려던 그녀의 눈동자가 수척한 시선에 와 닿았다. 그는 간 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결국 그녀는 고민을 접고 미미하게 끄덕였다. "그래. 안아 봐." 그는 대답 없이 살며시 유빈을 껴안았다. 울상을 하고 엄마를 바라보 던 아기는 엄마가 끄덕여주자 불만을 접고 그에게 안겼다. 팔 안에 느껴지는 사랑스러운 무게에 앤드류는 하마터면 눈물을 흘 릴 뻔했다. 그녀의 아이다. 누나의 아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아 이다. 그렇지만 내 아이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수컷의 본능인 걸까. 그녀를 몹시 사랑하고 있고, 그녀 가 낳은 다른 남자의 아이도 기꺼이 받아들일 거라 맹세했다. 하지만 품에 안긴 이 조그만 무게의 주인이 나였으면, 하는 바람은 결국 지 울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아이를 쓰다듬던 앤드류는 다시 예안에게 건넸다. 엄마 품으로 돌아온 아이의 표정이 다시 활짝 펴졌다. "얘가 디게 영특하네." "그치? 날 닮아서 그래." 그는 히죽 웃는 그녀를 복잡한 눈으로 보았다. "아이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어?" "글쎄…." 그녀는 주저하다가 되물었다. "사진 한 번 볼래? 사진 있는데." "…응." 아이를 내려놓고 책상 서랍을 뒤진 그녀는 먼지가 쌓인 사진틀을 꺼 냈다. 옛날에 세현과 함께 찍었던 사진이었다. 앤드류는 그것을 받아 들며 가볍게 웃었다.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데나 처박아두고 있 었던 거야?" "뭐, 사진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리고 필름하고 메 모리 카드도 있으니 얼마든지 새로 뽑을 수 있고."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내심 찔렸다. 자기 사진 보관에 갖은 정성을 들 이는 사람은 나르시스트밖에 더 있겠는가. 앤드류는 한참 동안 사진을 들여다본 뒤 억지로 미소지었다. "뭐랄까… 참…." "참?"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과연 그는 진짜 내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할까. "예쁘게 생겼네." 쿠궁! 한 줄기 벼락이 그녀의 뇌리를 때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기보다는, 황당하고 어이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 고 물었다. "무, 무슨 소리야?" "어, 왜? 남자치고는 꽤나 예쁘게 생겼잖아? 피부도 하얗고 머릿결도 좋아 보이고 선도 꽤나 가늘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눈매가 좀 마음 에 걸리지만, 꽤 괜찮은 마스크인데?" 한 번도 (남자였을 때) 자신의 외모가 잘났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예 안은 어이가 없다 못해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그녀는 혹시 사진을 잘 못 준 게 아닐까 싶어 그에게서 사진을 빼앗았다. 하지만 아무리 눈 을 비비고 봐도 분명 자신의 모습이었다. "너 혹시 세현이 보고 그런 소리 하는 거야?" "누구? 키 큰 애? 작은 쪽이 누나 옛 남자 아니었어?" "…." 도대체 이 마스크 어디가 예쁘게 생겼다는 말인가. 그녀는 마치 사진 이 뚫어지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찌릿하게 노려보았다. '일반인 기준으로 봤을 때 분명히 여자 여럿 울릴 법한 외모입니다. 한세정씨 미모가 어디 가겠습니까.' '마, 말도 안 돼!' '그렇지 않고서야 김혜인씨 같은 절세 미소녀가 그렇게 애걸하며 매 달릴 리가 없지요. 이건 정말 배신입니다. 아마 수많은 사람들이 마 스터 남자 모습이 별로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거라고요. 그 사람 들에게 도대체 뭐라고 해명하실 겁니까? <그래도 너만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라고 절규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말입니다.' '끄응….' 그녀는 신음을 흘렸다. 냉정하게 뜯어놓고 보자니 꽤나 괜찮은 얼굴 같기도 했다. 하지만 예쁘게 생겼다는 건 정말 충격이었다. 다른 누 구도 아닌 앤드류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근데 옆의 키 큰 애는 누구야?" "아, 있어. 내 친구." "누나 옛 남자하고 그 녀석하고도 친구였나 보네?" "뭐, 그렇지." "그렇게 둘이 같이 찍은 사진 보니까 제법 잘 어울린다. 친구 쪽이 공 타입이야? 누나 옛 남자가 수 타입이고?" 농담 같은 말투에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카를로스의 회장 취미가 장미물이었어? 이거 당장 언론에 찔러 넣 어야 되겠는데?" "웃자고 해본 소리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 줘. 헛소문이라도 나면 주가가 대번에 폭락한다고." 그들은 정원으로 나왔다. 원탁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아이는 엄마 품에서 재롱을 부렸다. 아이의 아버지가 아닌 남자는 옅은 질투심까 지 깔끔히 지운 채 그 광경을 보았다. 남녀 사이에 흐르는 기묘함만 없었더라면 누가 보아도 평화롭고 아름다운 가정이었을 것이다. "아무 것도 묻지 않네." "응? 뭐가?" "내가 왜 이렇게 늦게 왔는지 그래도 한 번은 물어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많이 섭섭해. 역시 누나한테 난 그 정도로 소중한 존재는 아니었던 거야?" 그는 장난기 뒤로 서운함을 감추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번에 알아차 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지금 물어볼게. 왜 그동안 연락 한 번도 안 했어? 너 최근 석 달은 전화 한 번 안 한 거 알지?" "많이… 바빴거든. 누나 때문에." "나 때문에? 내가 뭘 어쨌는데?" "누나는 안전하지가 못하잖아." 아이를 쓰다듬던 하얀 손이 우뚝 정지했다. "너… 나에 대해 뭔가를 알아?" "뭘 말인데? 맥을 만들었다는 거 말이야?" 정지한 손이 파르르 떨렸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아이는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예안은 마음의 동요를 간신히 다스리고 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누나가 옛날 일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 이유를 알 텐데? 이래 봬도 나는 6년 전 누나가 울고 있을 때 손을 내밀었던 사람이라고." 11년 전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앤드류는 그 말을 힘들게 곱씹어 삼켰다. 조금 당황한 예안은 맥을 추궁했다. '유니콘. 이게 어떻게 된 거야? 6년 전에 분명히 아담은 지구인들의 기억을 전부 지웠잖아?' '그전부터 의심하고 있었는데 오늘 확실히 알겠군요. 앤드류 왕자는 어떤 계기에서 기억을 되살린 게 틀림없습니다. 그가 마스터에게 처 음 접근해왔을 때도 분명히 달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분명히 그랬다. 그녀는 숨차 하는 얼굴을 한 채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어나갔다. 이윽고 그녀는 얼굴을 들었다. "너 어디부터 어디까지 기억하는 거야?" "입장이 반대가 됐네. 처음 만났을 때는 내가 누나 보고 기억해내라 고 윽박질렀는데 말이야." "빨리 대답해. 이거 나한테 중요한 문제야." "글쎄… 내가 어디까지 기억하더라…." 앤드류는 볼을 긁으며 생각에 잠겼다. 수척한 얼굴로 과거를 되새기 는 그의 금발머리카락이 바람에 미미하게 흔들렸다. "누나도 알다시피 11년 전에 달이 사라지고 새 혹성이 생겼지. 그때 나는 직감적으로 정현, 아니 케이가 그것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어. 그 사람말고는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 "그로부터 5년 후 누나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났어. 이번에는 유서운이 라는 이름이 아닌 유젤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야." 그녀는 씁쓸히 웃었다. 유서운이라는 이름은 본디 죽은 이브를 케이 가 되살렸을 때, 그전의 기억을 전부 잃은 이브가 쓰던 이름이었다. 하지만 기억이 되살아남에 따라 이브는 구인류의 기억인 유서운의 인격을 배척했고, 결국 이브의 안에서 유서운은 완벽히 죽어버리게 되었다. 그렇게 이브는 완전한 '제이'가 되어 새 혹성으로 떠났다. 앤드류도 레이온도 둘 다 자신의 뒤에 비치는 유서운의 그림자를 보 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유서운이 될 수는 있어도, 유서운 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에 달린 일이었다. 그녀는 원하기만 한 다면 유서운도 제이도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되지 않은 채 이대로 남고 싶었다. '이브…라.' 새 혹성으로 이주한 케이와 제이는 딸을 낳았다. 그리고 유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실은 유젤은 제이가 자신의 정신에서 죽 여버린 구인류의 자아, 즉 유서운이 환생한 것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유서운은 자신을 외면했던 케이와 자신을 죽인 제 이의 딸로 태어났던 것이다. 그러니 도저히 에덴에서 견딜 수 없어 지구로 가출했던 것이겠지. 앤드류와 예안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안은 앤드류가 잊어버린 부분에 대해 보충 설명을 해주었고, 앤드류는 예안이 모르고 있는 추 억들을 이야기해주었다. 기억이 돌아오기 전의 유서운이 얼마나 재미 있고 활발하고 귀여운 소녀였는지, 그리고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좋 아했는지 기타 등등을 전부. 흥겹게 풀어나가던 이야기는 어느 순간 뚝 멈췄다. 한 가닥 위화감을 누르던 그녀는 결국 용기를 내었다. "근데 내가 알기로 6년 전 지구에 어떤 사고가 있었다고 하던데." "그랬지. 한때 지구 전체가 멸망할 뻔했지." "그 사건을 알아?" "글쎄. 나는 지구가 멸망할 뻔했다는 것밖에 모르겠어." 앤드류는 서글픈 얼굴로 눈물을 참으며 덧붙였다. "6년 전 겨울이었을 거야, 아마.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때 나는 누나에 관한 기억을 잊어버리고 있었어. 하지만 가슴 한 쪽에 구멍이 났다는 것만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 "…." "겨울날 거리를 걷고 있는데 하늘에서 눈송이가 떨어지는 거야. 별것 아닌 눈이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아파 오더라. 길가는 것도 멈추고 하늘을 봤어. 초저녁이라 그런지 별들이 이따금씩 보였는데, 갑자기 서쪽 하늘에서 푸른 빛이 번쩍하는 거야." 그 때의 감동을 되살리는 그의 얼굴은 서글픈 환희 그 자체였다. "그때 기분을 뭐라고 할지… 깜깜한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았는 데, 어둠 속에서 플래쉬가 터진 걸 본 듯했다고 할까? 전부는 아니었 지만 내가 잊어버리고 있던 것들 중 많은 것을 떠올릴 수 있었어. 나 는 누나가 나를 가엾게 생각해서 내 기억을 되살려준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그는 미소지으며 녹색 눈동자를 똑바로 주시했다. "누나는 처음 만났을 때 날 전혀 모르고 있었어." 가슴이 옥죄어 오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를 볼 때마다 느꼈던 답답한 기분이 뭔지 언뜻 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뒤에 있는 오리지널 유젤의 그 림자를 갈구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그의 사랑은 연인의 사진을 애 무하는 남자의 숨결, 고작해야 그 정도 의미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녀는 처음으로 오리지널 유젤에게 질투를 느꼈다. 그의 사랑을 거 절하려 하는 주제에 질투 따위를 느끼다니.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종 잡을 수가 없었다. "후후, 말하지 않아도 돼. 누나, 이번에도 또 지구로 가출한 거지? 왜, 케이하고 부부싸움이라도 했어?" "…아냐, 그런 거." "아아, 쑥스러워서 거짓말을 하는 거든 정말 모르고 있었든 간에 상 관은 없는데, 제발 나중에 다시 나 떠날 때는 미리부터 좀 말이라도 해주라. 나도 우주선 타고 따라가게." 그는 농담조로 말했지만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그녀는 갑자기 눈을 빛내며 말했다. "너 나랑 좋은 거 안 해볼래?" "좋은… 거?" 푸른 눈동자가 갸웃거리며 의구심을 토해냈다. 예안은 킥킥 웃으며 그의 팔을 잡아끌고 일어났다. by eden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69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오타의제왕 크흑... 유진우... 네놈마저 날 배신하다니... ㅜ.ㅡ 어...없애버리겠어!!!! 11-20/18:35 유시 그래도 너만은 안그럴줄 알았는데. 11-20/14:57 Castle 약간 의아한점이. 앤드류가 주인공이 클론이라는사실을 모르고 케이가 유젤을 아내로 맞이했다는걸 알고있다면 유빈이의 아버지를 케이라 생각하고있어야 정상이 아닌지요 11-19/23:57 天魔上人 ㅋㅋ회사 무너뜨리기라 =_=;; 11-19/19:14 프레디 흑..이럴줄 알았으면 보지말고 한번에 볼껄 -_ㅜ 괜히 기다려지네..? 11-19/19:00 esik .....H.. 저 H 좋아해요[<-].. 소엄이...변해가고있어요<-.. 푸하;ㅂ;..장미물[...]그럼전 장미의 소녀[..<-] 11-19/18:04 뽀까리 좋은거라하면 밥 먹기가 아,아니었나;;;(많은 분들의 반응이;;) 11-19/16:32 마르티어스 H는 여러분이 상상하기 나름.. 11-19/15:58 마르티어스 It's H time! 11-19/15:58 유유 너무 재미있어요...흠..실은 어제 이 소설에 관한 꿈을 꿨답니다...현실적이면서도 저와 가장 관련된 꿈을...냐핫.. 11-19/12:26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70 회] 날 짜 2004-11-19 조회 / 추천 669 / 30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날개가 찢어진 천사 "이게 좋은 거야?" 앤드류는 입고 있는 턱시도를 불편한 듯이 내려다보았다. 웨딩드레스 를 입은 채 면사포를 점검하던 예안은 투덜거리듯이 힐난했다. "영광으로 알 것이지 왜 그렇게 잔말이 많아?" "영광은 영광이지만… 청혼도 안 했는데 이런 건 좀…." 그녀가 장난스런 기분으로 이러자는 것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은 심하게 뛰었다. 턱시도를 입은 채 웨딩드레스 차림의 누나 옆 에 나란히 설 수 있다니. 꿈 속에서나 이룰 수 있었던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직시했다. 그녀는 자신과 결혼하 려고 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좋은 것'을 경험하는 것뿐이었다. 장난 같은 결혼식이 끝나면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처럼 되돌 아가 때로는 쌀쌀맞게, 때로는 장난스럽게, 때로는 유혹하며, 그렇게 자신을 가지고 놀 것이다. 하지만 장난감이라고 해도 좋다. 이런 장난이라면 몇백 번이든 간에 좋다. 장난이 끝난 후에 누나가 또다시 나를 울린다 해도. "준비 됐어?" "으, 응." "그럼 한다." 앤드류는 쑥스러운 듯이 단상 앞까지 걸어나갔다. 하객이라고는 없는 빈자리가 좌우에 널려 있지만, 발 밑에 밟히는 푹신한 융단의 감촉만 큼은 진짜였다. 그는 주례사가 없는 단상 앞에 서서 두근거리는 가슴 을 안고 '신부' 입장을 기다렸다. 웨딩마치가 울렸다. 투명한 면사포를 뒤집어쓴 신부가 꽃을 가슴에 안은 채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들러리도 하객도 무엇도 없이 혼자였 지만, 그녀의 모습은 백합보다도 눈이 부셨다. "누나… 예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웃기만 한다. 보기 드문 상냥한 미소였다. 앤드류도 따라서 웃었다. 그녀의 미소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님을 아 는데도 기쁘기 한량없다. 신부가 옆에 섰다. 신랑이 앞을 바라본다. 그들은 주례사가 눈앞에 있다고 상상했다. 하객들이 꽉 차 있다고 상상했다. 그런 마음 덕분 인지, 그 둘 외에는 아무도 없는 빈 성당임에도 불구하고 마음만은 꽉 차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성모 마리아상에 대고, 그들은 변함 없는 사랑을 맹세 하는 신랑 신부의 흉내를 냈다. 신의 존재도 가짜였고 그들의 맹세도 가짜였지만 허전하지는 않았다. 신부는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가녀리고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새 하얀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앤드류가 반지를 끼워주자 기쁘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앤드류는 그 미소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녀는 자신의 뒤에 비친 누군가를 의식하며 행복한 신부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신랑은 속으로 씁쓸히 중얼거렸다. '그 남자애를… 보는 거야?' 아까 사진틀에서 보았던 소년을 생각했다. 유약하고 고집스러워 보이 는 얼굴과 눈매를 가진 소년. 그녀는 그 소년의 그림자를 마음 속에 서 지우고 싶지 않아 하는 듯 보였다. 신랑은 그것이 서글펐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그녀의 손위에 손을 올렸다. 장갑을 낀 가느다란 손이 그의 손에 반지를 끼워준다. 그리고 수줍게 웃는다. 하지만 그것은 그를 위한 미소가 아니다. '예안아. 행복하게 해줄게. 꼭.' 신부는 웃는 얼굴로 상상했다. 이 결혼식장에는 사람들이 꽉 차 있다. 주례사가 대견한 미소를 지으며 사랑을 맹세하라 말한다. 하객들은 우렁찬 박수로서 두 사람의 결합을 축복해준다. '나'는 멋진 턱시도를 입고 '유젤'에게 반지를 끼워준다. '유젤'은 아름다운 웨딩 드레스를 입고 수줍어하고 있다. 우리들은 지금 막 결혼한 것이다. '앤……드…류?' 하나의 이름이 머리 속을 떠돈다. 앤드류? 그게 누구야? 하객 중 한 명인가? 왜 지금 갑자기 그 이름이 생각나는 거지? 예안아. 왜 지금 나말고 다른 남자를 생각하니? "누나?" 눈물이 또르르 굴렀다. 놀란 앤드류는 쓰러지려는 그녀를 황급히 부 축했다. 초점이 사라진 눈으로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며, 그녀는 더듬 더듬 입을 열었다. "진…우야." "누나?" "진…우…." 가냘픈 음성이 떨려나왔다. 앤드류는 안쓰러움과 서글픔을 담은 가슴 에 그녀를 기대게 하고 눈을 감았다. "걱정 마. 걱정하지 마. 누나는… 누나는 꼭 행복해질 수 있을 거 야…." 내가 아닌 다른 남자를 그리워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건 슬프다. 그녀 가 원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 남자를 흉내내는 인형이라는 사실이 서글프다. 그녀를 사랑하는 이 마음을 접을 수 없다는 현실이 그저 처량하다. 평화롭게 잠든 순백의 신부를 내려다보며, 그는 새하얀 뺨에 달라붙 은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정신이 들어?"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앤드류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얼 굴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어디야?" "누나 집." "아, 그래? 아기는?" "아기방에서 자고 있어." 깨어나자마자 아기부터 찾는 걸 보면 영락없는 애엄마다. 앤드류는 속으로 유빈을 부러워했다. 잠이 덜깬 듯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녹색 눈동자에 이윽고 초점이 돌아왔다. "결혼식은 어떻게 됐어?" "누나가 기절해서 파토났지 뭐. 하객이라도 한 명 있었으면 아마 참 웃겼을 거야. 하긴, 어차피 다 끝난 뒤에 기절해서 상관없나?"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 "뭐가?" "그러니까… 너 보고 그런 거 해달라고 한 거…."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도리질을 쳤다. "누나 옛 남자 흉내만 내달라고 한 거 말이야?" 녹색 눈동자에 혼란이 깃든다. "알고… 있었어?" "내가 바보야? 누나가 누구를 바라보는지, 나를 통해 누굴 생각하는 지도 생각하지 못하게? 어쨌든 영혼의 결혼식만이라도 올려서 만족 했어?"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 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서, 그에게 '유진우'를 흉내내달라고 부탁 하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잔인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앤드류는 화제를 돌렸다. "한미전쟁 이겼더라." "아, 그랬지."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뭘 말이야?" "누나는 이제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 됐어. 이제부터는 결코 순탄하게 살 수 없을 거야.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누나는 대통 령보다 더 중요하고 더 경호를 요하는 사람이라고." 앤드류는 집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런 주택가는 좋지 않아. 근처에 아무도 없고 널찍한 지역에 집을 새로 지어. 지하 벙커도 당연히 추가해야겠지. 경호원들은 한 천 명 정도 고용하고, 자동화기나 소형 미사일 정도는 장비해 두는 게 좋을 거야." 그녀는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지하 벙커하고 자동화기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소형 미사일까지 하라 는 건 좀 심한 거 아니야?" "그 정도로도 부족해. 생각 같아서는 요격용 미사일이라도 내가 배치 해주고 싶은 심정인걸?" "네가 그렇게까지 걱정 안 해줘도 돼." "그렇게 해. 해야만 해." 앤드류는 답답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 철없는 여자는 아직도 자신 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 하나만큼은 11년 전이나 6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 없이 항상 똑같 았다. 한숨을 내쉬던 그는 그녀의 등뒤로 돌아갔다. 어깨에 팔을 두르고 바 싹 몸을 기대 향기를 맡았다.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어쩌면 동정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좋다. 동정이든 뭐든 이렇게 껴안고 있을 수 있다면. "니콜라스 베르노는 어디 갔어?" "잠깐 내보냈어. 개도 사생활이 있으니까. 곧 돌아올 거야." "너무하네. 명색이 암흑계 최고 청부업자라는 녀석이 그렇게 일을 내 팽개치고 놀러 다녀도 되는 거야?" "놀러간 게 아니라 일이 있어서라니까. 녀석에게는 녀석 나름대로 굉 장히 중요한 거라고." "그래도…." 앤드류는 내심 불만스러워했다. 예안은 목을 두른 그의 팔을 떼어내 며 피식거렸다. "그렇게 걱정스러우면 네가 총 잡고 나 지켜보던가." "그렇게 할까? 하지만 한국에서는 총 소지 규제가 너무 까다로워서 말이야." "관리들 잘 구슬려 봐. 정 안 되면 국회의원들을 전원 매수해서 특별 법이라도 하나 통과시키던가." "내가 매수하는 것보다는 누나가 미인계를 쓰는 게 더 빠를 거야."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킥킥거렸다. "재미없는 소리나 하는 건 여전하구나, 너?" "이거 왜 이래? 내가 얼마나 유머감각 있는 남자라고 소문났는지 누 나 알기나 해?" "말이 되는 소릴 해. 맨날 싱거운 이야기나 하다가 질질 짜는 짓밖에 안 했으면서…." 깔깔거리며 말하던 그녀는 퍼뜩 깨달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어색 한 빛이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그는 씁쓸히 말했다. "기억…하고 있구나." "…." "나는 도대체 누나를 모르겠어. 처음에는 나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 것처럼 굴더니, 이제는 내가 모르는 것까지 다 알고 있고, 그러면서 도 우리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은 아직도 모르는 게 많고, 또 가끔은 내가 모르는 것도 기억하고 있고 말이야." 주저하던 그녀는 힘들게 입을 떼었다. "그래서? 넌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데?"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게 아니야. 그냥 그대로… 그대로 내 곁에 있 어줬으면… 아니아니, 그냥 말없이 날 떠나지만 않았으면… 아니아니, 날 버리지만 않아 줬으면… 해." 세계 제일의 위치를 차지한 남자가 간절히 사랑을 구걸한다. 거기에 따르는 감정은 우월감도 아니요, 쾌감도 아니요, 자신감도 아니었다. 그의 진심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언젠가 이 몸을 그에게 뺏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무조건 그를 거부하려하는 죄책감이 고개를 쳐드는 것이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 좀 있으면 누나 양아버지 오시겠다. 나는 그럼 이만 갈게." "응. 잘 가. 배웅은 안 할게." 앤드류는 그러라고 웃으며 현관을 나섰다. 가만히 서 있던 예안은 베 란다로 달려가 정원을 가로지르는 그를 보았다. 대문이 열리고, 닫혔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그녀 는 작게 한숨을 토하며 등을 돌렸다. 아기방으로 가보았다. 아늑한 빛이 감도는 가운데 아기는 쌔근쌔근 잘 자고 있었다. 아장아장 걸을 때 좋아라하던 아빠의 모습이 생각났다. 이제 걸음마 도 하니까 제대로 된 신발을 사줘야겠지? 파란색이 좋을까? 초록색 이 좋을까? 아니면 검정색이 좋을까? 대견하다는 눈으로 아기를 다독이던 그녀는 더 늦기 전에 씻을 생각 으로 욕실로 갔다.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찬물이 쏟아지며 몸 과 마음을 차갑게 해주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온몸에 비누칠을 해나 갔다. 몸을 씻을 때면, 자신의 전라를 거울을 통해 마주할 때면 유젤에 대 한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곤 한다. 이렇게까지 그 애를 그리워하는데, 내가 유젤이라고? 뇌 이식 수술은 하지 않았다고? 개소리였다! 레이 온은, 아니 그 남자는 개소리를 한 것이다! 예안은 자신이 유진우라는 것을 굳건히 믿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아빠의 아들이고 유젤을 사랑하는 유진우라고 스스로를 확인시켰다. 비누칠을 하던 손가락이 문득 옆구리에 닿았다. 길게 난 상흔이 만져 지자 그녀의 팔이 부르르 떨렸다. 그 남자의 얼굴을 잊어버리려 발버둥을 쳐보았다. 하지만 이 상처를 볼 때마다 각인처럼 떠오른다. 그는 사랑한다 속삭이며 그녀의 배를 갈랐다. 그 자신의 냄새, 그녀가 원치 않는 흔적을 그녀의 몸에 낙인 찍는데 성공했다. 이빨이 딱딱 맞부딪쳤다.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눈을 질 끈 감고 뜨거운 물을 틀었다. 수증기가 피어오르며 살결이 빨갛게 달 아올랐다. 억지로 모든 걸 잊겠다는 듯 그녀는 몸을 씻었다. 갑자기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옷을 입을 새도 없이 타올만 걸친 채 뛰쳐나갔다. 방이 떠나가라 울던 아이는 엄마가 나타나자 울음을 그쳤다. "유빈아, 왜 울어? 뭐라도 나타났니?"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아기를 품에 안았다. 아이는 짧은 팔로 엄마 의 얼굴을 만지며 더듬거렸다. "어, 엄마가… 엄마가… 울잖아." "응? 엄마가 울다니? 엄마 안 울어." "아니야. 엄마 울어. 울어." 아기자기한 감동이 그녀의 마음에서 피어올랐다. 아이가 그저 대견해 진 그녀는 꼭 껴안고 뺨을 비벼댔다. "울지 마 아가야. 엄마는 괜찮으니까, 응?" "하지만… 엄마 아프잖아." 아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엄마의 허리를 가리켰다. 엄마는 아이가 그저 귀엽고 대견하면서, 속으로는 아이를 슬프게 만든 그 남 자에게 원망의 말을 퍼부었다. 그 남자가 이 상처를 내지만 않았더라 면 이렇게 아이가 슬퍼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어휴. 이 땀 좀 봐. 씻어야겠네." 내키지 않지만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욕실로 갔다. 아이는 엄마와 목 욕하는 걸 좋아하지만, 엄마의 상처를 보면 가슴 아프게 운다. 달래 주면 다시 또 금방 잊고 까르르 웃지만, 웃음이 그친 뒤에 엄마에게 아프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래도 아이가 웃는 걸 보면 즐겁다. 그녀는 아이의 전신에 비누칠을 하며, 혜인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를 생각했다.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기대가 되었다. 혜인은 반드시 연락을 해줄 것 같았다. 불현듯 상처가 아파 왔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까르르 웃던 아 이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뚝 멈췄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허리를 감쌌다. 아이가 울먹울먹하자 괜찮다 고 말해주려 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성대가 고통에 잠 식당한 것 같았다. 이윽고 아이가 자지러지듯이 울기 시작한다. 안아주고 싶은데 허리가 너무 아프다. 정말 그 남자가 원망스럽다. 그렇게 날 사랑하면서, 자 기 욕심 챙기자고 그런 짓을 하다니! 서서히 통증이 멈췄다. 핼쑥한 안색이 점점 밝아졌다. 그녀는 가느다 란 한숨을 내쉬며 아이를 달랬다. 엄마가 괜찮은 걸 보자 아이는 울 음을 멈춘다. 그녀는 영화를 생각했다. 인간 남자에게 날개를 뜯긴 천사는 전혀 고 통스러워하지 않았지? 근데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걸까?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견딜 만 했다. 본체에서 적출되어 미친 구인류 의 손에 들어간 <천사의 날개>는 지금쯤 그녀보다 더욱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날개는 천사의 몸에 붙어 있을 때만 고결할 뿐, 인간의 손에 들어가면 탐욕의 더러움에 젖어버리니까. 그녀는 다시 영화를 생각했다. 레이온이 그 영화를 자신에게 보여준 의미를 생각했다. 영화의 결말에서 남자가 모든 걸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천사의 날개 를 자신의 등에 달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했다. 그렇게 하 면 아마도 결말이 크게 바뀌지 않았을까? 남자는 천사를 따라 천계 로 올라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름이 돋았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도 추워졌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아이를 껴안았다. 모든 것을 잊는 데에는 아이를 껴 안는 것이 최고였다. 아이를 근심을 망각하는 매개체로 삼는 것을 속 으로 사과하며,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상처 자국이 욱신거렸다. 날개가 떨어진 자국이 아팠다. by eden 3권이 나왔다고 하니 그 부분을 삭제하겠습니다.; 1, 2권에서 편집 실수 과정에서 생긴 따옴표가 다음 줄로 밀린 오타 는 3권에서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ㅅ-;;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70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산바위 책도 보고 있는데...프롤로그 부분이 트리던군요..앤드류가....@@, 또 어떤점이 다를지 찾아보는재미..^^ 11-20/08:57 자비의여신 매일 한편씩 올라오는 소엄 정말 좋습니다 ㅡㅡb 와방~ 11-20/07:40 klyp 유빈의 미래가 상당히 기대 11-20/01:06 아스트론 저 오늘 3권 샀어요 ㅠ.ㅠ 결국 감상문...넘 어설프게 쓴 나머지 컥! 11-19/22:54 카제 추천은 기본적인 것인데에~ 11-19/22:36 케라시스 우리모두 추천한표씩 하고갑시다 11-19/22:16 크리쳐아일 흐음..... 어째선지 옜날부터 이런 감정 전개는 익숙하다 했더니만 이제서야... 순정 마화라고도 불리는 소녀 만화의 전개 비슷 하달까요... 깊게 생각하고 다시 그걸뒤집어서 재정립 하는 방식이.. 11-19/21:41 esik ...유빈씨. 나중에 장성할거야[응?] 11-19/21:23 뇨뇨뇨에바다뇨!! -_-;;;;;; 납치하고 싶어지는걸.... 11-19/21:05 만두먹구 정말정말~~재미있어요~>ㅁ< 저꼭 책으로도 읽어볼께요~! 11-19/20:49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71 회] 날 짜 2004-11-20 조회 / 추천 557 / 17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이후 >>> 분수령에 서다 협상을 끝낸 재호는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회의실을 나섰다. 유한그 룹 이사들은 중원그룹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며 서로에게 좋게 협상 이 풀린 것을 반겼다. 내일 조간 신문에는 유한전자와 중원전자가 전폭적인 개방을 통한 기술 제휴 계약을 맺었다는 기사가 보도될 것이다. 양 회사의 주가는 상승될 것이며, 한국의 전자산업을 도약시키는 선두자의 자리에는 유 한그룹과 중원그룹이 서게 될 것이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재호는 대외적인 미소를 지으며 중원전자 사장인 충호와 악수를 나 누었다. 그 둘은 식사를 하러 가기 위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아직 학생이라고 들었는데 그 나이에 유한전자 이사 자리를 맡고 계시다니, 정말 놀랍습니다.""능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할아버님의 덕을 보고 있는 거지요. 덕분에 눈치도 많이 본답니다." "설마요. 김 이사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경영에 놀라운 수완을 발휘한다는 것은 우리 회사의 말단 직원들도 다 아는 일입니다." "이런, 벌써 중원그룹까지 그런 헛소문이 퍼진 겁니까?" 엘리베이터가 1층에 정지했다. 정문으로 가자 경비원이 그들을 알아 보고 꾸벅 인사했다. "그나저나 유 사장님에게는 대단한 미인 조카가 한 명 있다고 들었 습니다만…." "호? 김 이사가 예안이를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어쩌다 보니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통 연락이 안 되더군요."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자주 집을 비운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아이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순간적으로 재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이라니? "아이라니요?" "아, 모르시는가 보군요. 그 애는 지금 한 아이의 어머니입니다. 엄밀 히 말하면 그 애는 저의 형님의 양녀가 아니라 며느리라고 해야 하지요." "며느리요?" "형님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조카가 되는 셈인데, 예안이는 그 녀석과 사귀었다고 하더군요."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재호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다가 한 가닥 위화감을 잡아내었다. "그런데 있었습니다, 라는 건 무슨 뜻이지요?" "작년에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아… 그런가요?" 재호는 안 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눈썰미가 대단히 좋은 사람 이라면 가식의 표정 뒤에 히죽 웃는 미소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충호는 그렇게까지 눈치가 좋은 사람은 아니었고, 또 그럴 필요 도 없었기에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어갔다. 미리 예약한 한식당으로 향하면서 재호는 내심 앞으로의 일을 계획 했다. '돌아왔나. 이제부터 슬슬 손을 좀 써야겠군.' 처음 예안을 만났을 때 부하를 시켜 조사해보았지만, 그녀 주변 남자 에 대해서 별다른 것을 발견하진 못했다. 헌데 그때 이미 임신 중이 었다니, 과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말이 맞긴 맞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정신 없이 후계자 수업을 받고 사업 감각을 키우느라고 그녀 에 대한 건 잠시 밀어두고 있었다. 하지만 몇 년 동안 구상해온 대형 프로젝트도 오늘 막 무사히 마쳤으니, 슬슬 다시 접근해볼 참이었다. 아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건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런 여자들 이 데리고 놀기에는 색다른 맛이 있는 법이었다. 유충호 사장과 친척 이라는 게 조금 걸릴 수도 있으나, 본디 그런 걸 신경 안 쓰고 살았 던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고민이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유충호 사장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머리 속으로는 어떻게 예안을 요리할까를 궁리했다. 강제로 덮쳐서 울리는 것도 괜 찮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그것은 자신에게도 위험했다. '역시 정공법?' 지금까지의 태도를 전부 다 지워버리는 것은 어떨까. 예의바르고 겸 손한 귀공자를 가장하며, 정신을 차리고 새 사람이 된 듯한 착각을 심어준다. 그렇게 혼을 빼놓고 온갖 단물을 다 빨아먹은 뒤에 본색을 드러내어 걷어차는 것은 어떨까. '그건 너무 재미없어. 좀더 길게 갖고 놀았으면 좋겠는데.' 재호는 예안이 마음에 들었다. 그 예쁜 얼굴이 쾌감에 젖어 신음하는 꼴을 보고 싶었다. 본래 여자 관계가 문란하고 여자들에게 마음을 주 지 않는 그에게 있어, 이번의 경우처럼 한 여자에게 강하게 집착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거 잘 먹었습니다." "대접이 변변찮아서 오히려 미안할 지경입니다. 다음 번에는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그들은 적당히 취기가 오른 채 헤어졌다. 비서가 몰고 온 차에 탄 재 호는 집으로 향하는 뒷좌석 위에서 다시금 두뇌를 회전시켰다. '어떻게 하지?' 일에 열중하려고 해도 자꾸만 그 녹색 눈동자가 생각나서 짜증난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잘난 척 하는 그 예쁜 얼굴이 자신의 밑에서 설설 기게 만들어줄 참이었다. 여자를 지배할지언정 여자에게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그녀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오피스텔에 도착한 그는 옷을 벗을 생각도 않은 채 침대에 그대로 엎어져 잠이 들었다. 꿈에서 그는 예안이 교태스런 표정을 지으며 엉겨붙는 것을 보았다. 천박하다고 연거푸 걷어차도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다리를 벌 리며 자신에게 엉겨들었다. 아주 흐뭇한 꿈이었다. 다음날 숙취의 고통도 없이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난 그는 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아침을 차려먹을 새도 없이 다시 출근 준비를 했다. 학교를 아직 졸업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업 감각을 키우고 회사 내부에 인지도를 쌓아올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할아버지의 충고를 충실히 따르는 중이었다. 그가 출근했을 때 사내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인가?" "아무래도 누군가가 M&A를 시도하는 것 같습니다." "M&A?" 재호는 기가 차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감히 어느 누가 있어 유 한전자에게 M&A를 해온단 말인가. 한때 몇몇 대부호들이 모여 유한전자 경영권을 박탈하는 것을 심각 하게 의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소모될 거라 예상되는 막대한 코스 트와 획득하는 이익 사이를 저울질하던 그들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유한전자는 바로 그런 회사였다. "그래, 얼마짜리 공격인데?" "그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주가가 벌써 10% 이상 떨어졌습니다. 그 런데도 매도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흠." 재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는 과거 심심풀이 삼아 유한전자를 '무식한 M&A'로 빼앗으려면 어느 정도의 자금이 있어야 되는지 계 산해본 적이 있었다. 답은 최소 200조 원이었다. 그것도 70% 이상을 잃을 각오를 해야만 했다. 개인이 동원할 순 있는 액수는 아니다. 하지만 국가 예산급인 저만한 액수를 기업 하나 뺏자고 도박에 거는 멍청이 대통령도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란 말인가. "일단 지켜보자고. 돈이 썩어나는 녀석이 할 짓이 없어서 지금 장난 이라도 치고 있는 모양이야." "네. 알겠습니다." 누군가의 악질적인 장난이라고 재호는 결론을 내렸다. 아마도 유한그 룹에 꽤나 악감정이 있는 녀석이, M&A가 아니라 주가가 떨어지기를 바라고 돈을 쏟아붓고 있는 모양이었다. '소용없는 짓을 하고 있군.' 유한전자는 공룡기업이다. 이 정도 공격으로는 흔들리지도 않는다. 재호는 '유한그룹에 악감정을 갖고 있는 돈 많은 머저리'의 도발 따 위에는 일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주기적으로 대폭 주식을 내놓아 가격을 떨어뜨린 뒤 시장에 풀린 주 식을 사들여 다시 내놓는 얼굴 없고 돈은 많은 머저리의 공격은 그 날 오후까지 끊이지 않았다. 비로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알아차린 재호는 직원들을 시켜 그 머 저리의 정체가 뭔지 알아보도록 했다. "우진 기업?" 재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우진 기업이라면 올해 간신히 대기업의 반열에 들어선 회사였다. 얼굴을 찌푸린 그는 직원에게 우진 기업이 지금 공격으로 잃은 금전 적 손실이 얼마인가를 계산했다. 무려 10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는 어이가 없었다. "말도 안 돼. 그런 신생 기업이 도대체 어디서 그런 큰돈이 났단 말 이야?" "하지만 사실입니다." "우진 기업 회장은 미쳤군. 소중한 사업 자금을 고작 유한전자 주가 떨어뜨리는데 쏟아붓는단 말인가?" 재호는 우진 기업 회장에게 원한 산 적이 있었나 생각하면서 퇴근을 지시했다. 꺼림칙한 구석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상대방은 이제 가진 자금을 전부 소모했을 터였다. 주가가 다소 떨어지긴 했지만 상대의 공격이 멈춘다면 내일부터는 다시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다음날에도 공격은 끊이지 않았다. "뭐야?" 어제의 두 배에 해당하는 기력으로 공격을 해온다는 보고에 재호는 서류를 결재하다 말고 놀라서 외쳤다. "두 배라면, 오늘은 20조 원을 쏟아부었단 말인가? 아니, 도대체 그 쪼끄만 회사 어디에서 그런 큰돈이 나서?" "그, 글쎄요…."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정부에서 몰래 도와주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우진 기업 따위가 그런 큰돈을 낭비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재호는 패닉에 빠진 얼굴로 고심했다. 어쩔 줄 몰라하며 서 있던 직원이 조심스럽게 사견을 꺼냈다. "저, 유젤 가문이 뒤를 봐주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재호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유젤 가문이라 하면 세계에서 제일 가는 대부호였다. 연간 45조 달러의 돈을 벌어들이는 유전을 소유하 고 있으니. 200조 원이라 하면 항모전대를 여럿 맞출 수 있는 막대한 자금이지 만 그들에게는 잃어도 별 상관없는 돈이다. 직원의 말이 사실이라 가 정하고 볼 때 우진 기업이 저렇게 무식하게 돈을 퍼붓는다는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는 한다. "하지만 어째서 우리를? 우리 회사가 샘슨 유젤에게 뭔가 잘못한 거 라도 있었나?" "글쎄요. 혹시 우리 회사가 판 노트북으로 밤새 컨닝 페이퍼를 만들 다가 오류가 나서 자료를 다 날려버린 적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요?" 가벼운 농담이었지만 재호는 웃을 수 없었다. 주가는 어느새 심각하 다고 볼 수 있는 수준까지 떨어져 있었다. "당장 외출을 준비 해!" 그는 서둘러 차를 대기시킨 뒤 샘슨 유젤의 집으로 나는 듯이 달려 갔다. 샘슨 유젤의 저택은 한적한 교외 지역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샘슨 유젤을 만날 수 없었다. "지금 없단 말입니까?" 해외여행을 갔다는 말에 재호는 어이가 없었다. 그는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한 채 터덜터덜 회사로 돌아왔다. 샘슨 유젤의 비호 아래 유한전자가 공격당하고 있다는 소문은 당장 회장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곧바로 유한그룹 각 계열사의 사장들이 소환 명령을 받았다. CIA 못지 않은 도청방지설비를 자랑한다는 유한그룹 총본사 회의실 에 모인 사장들은 이번 사태를 놓고 심각하게 회의했다. 그들은 당혹 스럽기 그지없었다. 하필 중원전자와 기술제휴계약을 체결한 지금 시 점에서 공격이 들어올 줄이야. "우진 그룹이 유한전자 경영권을 완전 박탈하기 위해서는 최소 얼마 나 필요합니까?" "못 잡아도 200조 원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소유한 지분은 얼마지요? 우리에게 우호적인 세력이 소유한 지분은?" "우리가 소유한 지분이래 봐야 15%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우 호적인 세력 지분이 12% 정도이니, 다 합쳐도 27% 밖에 안 되지요." "그 정도 지분으로 여태껏 잘도 경영권을 지켜왔군." 회장의 가벼운 핀잔에 유한전자의 사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워낙에 덩치가 크니까요. 30%의 지지만 있어도 경영권 방어에는 충 분하고도 남았습니다. 헌데 이렇게 맹점을 찔릴 줄은 몰랐지요." "흐음…." 그들은 깊이 고심했다. 소문대로 우진 기업의 뒤에 유전의 소유자인 샘슨 유젤이 버티고 있다면 경영권을 방어하는 것은 무리였다. 200조 원은 유한그룹뿐만 아니라 한국조차도 벌벌 기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하지만 샘슨 유젤에게는 한 달치 수입도 안 되는 '푼돈'에 불과했다. 전세계의 석유소비를 담당하는 유전의 소유자란 그만큼 막 강한 부를 쥐고 있는 위치였다. "어쨌든 샘슨 유젤이 우리에게 적의를 갖고 있다면 무슨 수를 쓰더 라도 경영권을 막아낼 순 없습니다. 그를 만나서 설득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 같습니다." "그렇긴 한데, 이해할 수가 없군요. 셈슨 유젤은 왜 우리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걸까요?" "혹시 모르죠. 학창 시절 유한전자 제품 노트북으로 컨닝 페이퍼를 만들다가 시스템 에러로 다운 먹은 경험이라도 있는지." 재호의 그 말에는 사장들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경직된 분위기가 다소 완화된 가운데, 회장이 입을 열었다. "하여튼 샘슨 유젤이 배후에 있다면 우리나 우리에게 우호적인 세력 힘만으로는 막을 수 없어. 가능하다면 정부에 중재를 요청하는 것도 좋겠지." "글쎄, 그것이 과연 통할까요?" "유한전자가 망하는 건 정부도 바라지 않을 테니 일단 말해보는 수 밖에." 사장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성후 회장이 김영환 대통령과 친분이 있다는 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회의는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끝이 났고, 사장들은 제각각 회사로 돌아갔다. 수심을 안고 회사로 돌아가던 재호는 차에서 직원의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시원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탓인지 그의 음성은 짜증기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직원은 전혀 여의치 않았다. 「큰일났습니다. 현재 전체 채권의 50%가 상환요청이 들어와 있습니 다.」 "뭐야? 그게 무슨 소리야?" 「우진 기업이 고의적으로 채권자들에게서 채권을 사모아….」 거기까지 들었을 때 그는 암담해서 눈을 감아버렸다. 기업이 아무리 튼실하다 해도 빚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금 융통과정 이 다소 막혔거나 기타 특수한 사정이 있을 때면 이사회에서 채권발 행승인을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채권을 끌어 모아 이런 시기에 날리다니, 상대방은 여간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알았어. 지금 곧 갈게." 전화를 끊은 뒤 재호는 비서에게 더 빨리 달리라고 재촉했다. 검은색 세단은 나는 듯이 달려 본사에 도착했다. 비서가 차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릴 틈도 없이 내린 그는 서둘러 안으 로 뛰어들어가려 했다. 그때, 맑고 가녀린 음성이 뒤에서부터 그를 불러 세웠다. "오랜만이네." by eden http://blog.naver.com/cruelnuclear [추천] [비평/감상(0)] [설문목록(8)] [작가공지] [연재물리스트] <<< 이전 [271 회] 이후 >>> 272271270269268267266265264263262261260259258257256255254253252251250249248247246245244243242241240239238237236235234233232231230229228227226225224223222221220219218217216215214213212211210209208207206205204203202201200199198197196195194193192191190189188187186185184183182181180179178177176175174173172171170169168167166165164163162161160159158157156155154153152151150149148147146145144143142141140139138137136135134133132131130129128127126125124123122121120119118117116115114113112111110109108107106105104103102101100999897969594939291908988878685848382818079787776757473727170696867666564636261605958575655545352515049484746454443424140393837363534333231302928272625242322212019181716151413121110987654321 Name Comment Date 뮤리빈 갈수록 재미있어져가요~ 11-21/13:32 染花 절단마공....허...허허허....... 글이 흥미진진져 가는건 좋지만.... 각혈을 하게 하시는군요.. 11-21/07:56 산바위 오랜만일줄 알았슴..ㅡ.ㅡ(실탄님 변했슴...) 11-21/01:24 프레디 오오오옷 ㅡㅜ 미치겠다~ 말라죽네 ㅜㅜ 11-21/01:05 remaeld 묘하게...꼬박꼬박 올라와서...슬금슬금 무서워지기 시작하네요 11-21/00:57 klyp 쿨럭 황제가 져서 내상을 입었는데 이제는 주화입마 까지 ㅠㅠ 11-21/00:36 『™아기천사』 흠 단전 파괴는 저한테 맡겨 주시오.. 친구에게 배운 엽기술이 있다오.. 정신적 데미지를 주어서.. 주화입마에 빠져 무공을 못쓰게 된다오.. 다만.... 연참신공도 없어질수도 있어서 문제라오.. 11-21/00:06 ふしぎ 크헉!! 주화입마에...큭! 11-20/23:32 암흑의검 ......... 절단... 마공....... 아아...... 단전을 파괴 시키던지 해야지원.. 11-20/22:42 _ 으아악.. 이런 이런!! 11-20/22:21 [최근코멘트] [지난코멘트] [ 사업제휴 ] [ 이용약관 ] [ 개인정보 보호정책 ] Copyright ⓒ 2000-2003 조아라 (Joara) All rights reserved. 나의 세계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 환경 | 연예 | 기타 소설 판타지 게임 퓨젼 무협 역사 SF 전쟁 추리 공포 연애 팬픽 수필 시 시나리오/희곡 평론 아동 패러디 완결 출판 소설 | 판타지 | 게임 | 퓨젼 | 무협 | 역사 | SF | 전쟁 | 추리 | 공포 | 연애 | 팬픽 | 수필 | 시 | 시나리오/희곡 | 평론 | 아동 | 패러디 Class | Tip & Tech | Q & A | Study 자유 | 글자랑 | 비평/감상 | 추천 | 문화 | 나의생각 | 위트/유머 | 가입인사 | 고백 | 의견 노리랜드 | 피서지 | 복날 | 노리챗 | 공포 최근작품검색 작품통합검색 토론통합검색 작가검색 회원검색 작 가 실탄 제 목 소년이여 엄마가 되라 [272 회] 날 짜 2004-11-21 조회 / 추천 397 / 11 선작수 1401 공지 (삭제 공지) 2004-10-18 more...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13 14 15 <<< 이전 분수령에 서다 대단히 귀에 익은 목소리에, 재호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환상이 깨 지기를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처럼. 그의 뒤에는 밝은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새하얀 피부를 지닌 소녀가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바라보는 것조차 숨이 막혀올 정도로 아찔한 미소였지만, 그 화사함 뒤에는 필경 날카로운 독가시가 숨어 있을 것 이었다. 재호는 웃었다. 정말 반갑다는 듯이. "이거, 정말 오랜만이군. 그래, 그동안은 잘 지냈나?" "그럭저럭. 네 녀석 꼬라지가 보이지 않아서 나름대로 속은 편했어." "사업 때문에 너무 바빠서 한동안 너한텐 신경을 써줄 수가 없었어. 이제라도 만나게 돼서 다행으로 생각해." 뜻밖에 반가운 연인을 만난 듯 나긋나긋한 음성에 예안은 고개를 갸 우뚱거렸다. "몇 달 못 본 사이에 성격이 많이 변한 것 같네." "좋은 쪽이라는 의미지?" "비굴해졌다는 뜻이야." 그의 얼굴 위로 찰나간에 불쾌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그것 을 눈치채고 흡족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 날 찾아왔지?" "어제 아침에 테러를 당했을 텐데 얼마나 우거지상이 되어 있는지 궁금해서 한 번 와봤어. 근데 생각보다는 여유가 있네? 지금 그럴 틈 이 없을 텐데 말이야." 순간 재호는 싸늘히 굳었다. "무슨 소리지?" "응? 한국말 이해 못해?"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경영권 말이야. 지금 결코 안전하지 않을 텐데?" 재호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 여자애가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단 말인 가? 설마 벌써 주식시장에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단 말인가? "소문 같은 거 듣고 온 거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셔." "너…." "그렇게 불쾌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유한전자는 앞으로 내가, 아니 내 고용인이 잘 경영해줄 테니까 말이야. 유한전자 사원들도 너 같은 저질 인간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행복할 거야. 안 그래?" 유쾌하다는 빛을 얼굴 가득 드리운 그녀는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소 녀처럼 즐겁게 말을 이었다. "유한전자를 시작으로 해서 유한생명, 유한화재, 유한물산 같은 다른 계열사들도 전부 속속들이 빼앗는 거야. 두세 개 정도 빼앗기고 나면 이사회는 경영부실을 책임으로 물어서 김성후 회장을 해임시킬 거야. 그럼 내가 너한테 했던 약속을 지키게 되는 거지." "약속?" "잊었어? 유한회장은 곧 퇴임할 거라고 했잖아. 그것도 경영부실이라 는 불명예스런 딱지를 달고 말이야." 그녀는 키득키득 웃었다. 재호는 주먹을 꽉 쥔 채로 노려보았다. 단 순한 악담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자신감에 차 있는 눈이다. "너… 샘슨 유젤과 무슨 관계야?" "아무 관계없어." 가차없이 잘라 말한다. 하지만 재호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에 임시주총을 신청했어. 그럼 6주 뒤에 보자고. 과연 누가 웃고 있을지 말이야." 그녀는 킬킬거리면서 등을 돌렸다. 혼란과 노기가 뒤섞인 눈으로 그 녀의 뒷모습을 쏘아보던 그는 이를 악물고 등을 돌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전혀 다른 나라말을 사용 한 것도 아니고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표현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혼란스러운가. 「유한전자는 내가 곧 뺏을 거야. 두고 봐.」 예전에 그 말을 하면서 차갑게 미소짓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장관급 인물과 대단히 친밀한 관계인 듯 보였습니다. 직통으로 연 결돼서 압력을 넣더군요.」 그러고 보니 그녀를 고소했던 변호사도 그렇게 난감함을 표시했지. 그때 재호도 그녀가 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라고 어렴풋이 눈치는 채 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유한전자를 빼앗거나 유한그룹을 휘청거리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을 지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현재 한국에 서 자신의 명줄을 포기하지 않고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나 기업은 아무도 없다. 대통령도 그것은 하지 못한다. "칫!" 재호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간에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김창수 기자는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로 부장실을 나섰다. 부장에게 서 또 한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먹구름이 가득한 얼굴을 보고 후 배들은 모른 척 그에게서 멀어졌다. 이럴 때는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 는 게 좋았다. "제길." 창수는 투덜거리며 책상에 앉았다. 입을 열었다 하면 특종, 특종 밖 에 안 찾는 부장의 입술을 확 꿰매버리고 싶었다. 동료 녀석이 이죽거리며 다가온다. 얼마 전에 톱 연예인을 밀착 취재 해 특종 하나를 잡은 녀석이다. 부장에게서 입에 침을 바르도록 칭찬 을 들었으니 아마도 어깨에 단단히 힘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에휴휴." 그는 투덜거리며 노트북과 카메라를 챙겼다. 이렇게 사무실에 죽치고 앉아 있어 봐야 부장이 또 뭐라뭐라 잔소리할 테니, 방송국에 가서 연예인 붙잡고 취재라도 해볼 참이었다. 미리 약속을 해두었으니 설 마 펑크는 안 내겠지. 따르르릉.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예. 여보세요." 그는 건성으로 수화기를 귀에 댔다가 깜짝 놀라 자세를 고쳐 잡았다. "예? 뭐라고요? 예. 예… 알겠습니다. 예. 거기서 뵙죠. 예. 지금 곧 가겠습니다." 그는 황급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옆자리에 앉은 동료가 물었다. "무슨 전화야?" "특종." 창수는 그 한 마디만을 남기고 쏜살같이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엘리베이터를 잡을 새도 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간 그는 황급히 건물 을 나섰다. 나는 듯이 약속장소에 도착한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척 봐도 한국인이 아님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남자는 이국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라든지, 금발이라든지. "만나서 반갑습니다. 요셉 프리센이라고 합니다." "이창수라고 합니다." 창수가 명함을 건네자 요셉은 명함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창수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지는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급하시군요. 숨이나 좀 돌리고 말씀하시지요." 무척 느긋한 태도였다. 창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초조한 빛을 누그러뜨렸다. "요새 M신문사에 많이 밀리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그렇습니다. 잘 아시는군요." 군사 쪽을 전문으로 다뤄온 M신문사는 최근 급격한 판매부수를 올 려 이름을 한껏 드높였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한반도 전쟁은 M신 문사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한 셈이었다. 최근 한국 내에서는 박재형 대령의 인기가 급격히 높아지고 있었다. 세계최강이랄 수 있는 맥의 유일무이한 파일럿인 데다가 한반도 전 쟁에서 지대한 공을 세웠다는 사실이, 젊은 여성들과 딸 가진 부모에 게 급격한 호감을 사게끔 했다. M신문사는 연예신문사로 돌변한 게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박재형 대령의 사소한 부분들을 밀착 취재했다. 그럴 때마다 박재형 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은 이런 과한 관심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 단순한 군인일 뿐이라 설명했다. 그럴수록 그의 인기는 높아졌다. 뭐 앞에 열거한 부분들을 조금만 돌려 말하자면 졸지에 창수가 몸담 고 있는 신문사는 생각지도 않은 M신문사를 경쟁사로 맞이해 고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요셉은 그러한 사실들을 늘어놓으며 분개한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지요. 멍청한 M신문사는 대역에 불과한 그를 주역으로 착각하여 국민들에게 철저히 잘못된 정보를 주입시켰습니 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네? 무슨 소리입니까?" 창수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셉은 더욱 온화하게 미소지으며, 일부러 화제를 빙빙 돌렸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맥이라는 무기는 결코 가벼운 장난감 따위가 아닙니다." 창수는 앞서 요셉이 말한 게 무슨 뜻인지 묻고 싶었으나 물어봐도 말해줄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참았다. "그렇지요." "일반 전투기 한 기를 조종하기 위해서는 최소 몇 년은 훈련을 받아 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한국이 맥을 사들인지 얼마나 되었습니 까? 고작해야 일 년, 아니 2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창수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맥처럼 대단한 전투기…라고 하지요. 하여 튼 2년도 채 되지 않아 그처럼 맥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는 게 가 능하다고 보십니까?" "그렇다면…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셉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일단 두 가지 상황을 상정해볼 수 있겠죠. 하나는 한국이 맥을 사기 로 결심한 것은 근래가 아니라 아주 오래 된, 그러니까 최소 5년은 넘었을 거라는 것." "…." "이렇게 상상해 봅시다. 프랭크 앤쏘니 유젤은 유전을 달라고 요구했 습니다. 하지만 한국 입장에서는 그것이 쉽지 않았겠지요. 아무리 자 기들에게 유리한 조건이라 해도, 전재산을 처분하면서까지 구입해야 하는 무기일 테니, 그만한 시일이 걸린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죠." 창수는 과연,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요셉의 말은 아직 끝나 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남습니다.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교섭을 벌였 다면 필연적으로 다른 나라가 눈치채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게다가 5년을 질질 끌 정도로 교섭이 잘 풀리지 않았는데 프랭크 앤쏘니 유젤 박사가 맥의 파일럿 훈련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수 있었 을까요?" "그렇지요." "의문스런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요셉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등을 깊이 묻었다. "물론 이것은 상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이런 경우…는 어 떨까요?" "어떤?" "프랭크 앤쏘니 유젤은 살아 있다, 라는 것 말입니다." 순간 창수는 눈을 부릅떴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프랭크 박사가 살아있다니요?" "이것을 먼저 보시죠." 요셉은 가방에서 몇 장의 사진을 꺼내어 창수에게 보여주었다. 테이 블 위에 놓여진 사진들을 급히 훑어본 창수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남자 여럿 울렸을 법한 예쁘장한 외모를 가진 소녀가 사진의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여자애는 누구인가요?" "계속 보시죠."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계속 보기를 권했다. 창수는 어리둥절함을 잠 시 누르고 사진을 다시 살폈다. 남아 있는 사진이 줄어들면 줄어들수 록 그의 얼굴에 자리잡은 경악도 점점 짙어져만 갔다. 처음 몇 장은 소녀 혼자 찍힌 사진이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창수 의 눈에 익은 인물들이 사진에 함께 등장했다. 어떤 때는 한 명이, 어떤 때는 두 명이, 어떤 때는 여러 명이 한꺼번에. 놀랍게도 그 중 에는 야당 총재 김두오 국회의원과 김영환 대통령도 끼어 있었다. 사진을 다 보고 난 뒤 그는 낯빛을 굳히며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그 사진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 글쎄요…. 그냥 이런 사진만 보고서는…."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나온다. 기자의 '감'으로 본질을 꿰뚫어보면서 도, 결정적 증거가 없어 차마 말은 못 떼는 것이리라. 요셉은 느긋하게 팔을 뻗어 마지막 사진을 한 장 꺼냈다. 그것을 본 창수의 눈이 함지박만하게 변했다. 사진 속에서 소녀가 군용 전투복을 입고 헬멧을 옆구리에 낀 채 머 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있었다. 소녀의 바로 뒤에는 전투모드로 변신 한 맥이 당당하게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이건…?" 사진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요셉은 느긋하게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쐐기를 박았다. "그렇습니다. 프랭크 앤쏘니 유젤은 살아 있습니다. 아니, 애초에 프 랭크 앤쏘니 유젤이라는 이름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본명은 서예 안, 아직 18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죠." "이런… 말도 안 되는…." 어이없는 신음이 떨려나왔다. 요셉은 됐다 생각하고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저 또한 아내가 한국인이어서 한국에 지극히 관심이 많습니다. 아내 가 한국을 사랑하는 것만큼 저 역시 한국을 사랑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특종을 독점할 수 있을까 궁리하던 창수는 요셉이 다시 말하기 시작하자 진지하게 경청했다. "솔직히 한국정부가 무슨 의도로 서예안의 존재를 감추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엄격하게 말해 이것은 한국민 전체를 우롱하는 처사나 다름없습니다." 요셉의 목소리는 점점 격양되었다. 나무랄 데 없는 연기에 창수는 홀 딱 넘어갔다. "한국정부와 서예안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었는지는 모르나, 맥을 구 입하는 데에는 한국의 소중한 유전이 지급됐습니다. 이런 엄청난 대 거래를 꾀함에 있어 국민들의 눈을 가린다는 것이 말이나 될 법한 소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YH정권은 지금 철저하게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창수는 짐짓 분개한 얼굴로 맞장구쳤다. 요셉은 그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국민들은 모든 것을 알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지요." "한국정부는 모든 것을 밝힐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자는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당신 의 사명은 뭔가요?" 창수에게 그 질문은 주저할 것 없이 이 특종을 보도하라는 소리로 들렸다. 실로 악마의 애무보다 더욱 달콤한 소리였다. "당연히 모든 이에게 진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요셉은 웃음을 지으며 똑바로 앉았다. "이 사진들… 제가 가져갈 수 있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시죠. 그러라고 드린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한국민도 아닌데 이렇게 한국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주 시다니,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제 아내가 한국인이니까요. 저 역시 절반은 한국인이라고 평소 생각 해왔습니다." 창수는 입이 벌어지려는 것을 억지로 감추고 요셉에게 정중하게 인 사했다. 카페를 나선 그는 다시 나는 듯이 달려 회사로 돌아갔다. 사 무실에 나와 있던 부장이 그를 보자마자 꾸짖었다. "일은 안 하고 또 왜 이렇게 기어들어 와?" "부장님, 부장님! 특종입니다, 특종!" 숨이 넘어갈 듯이 창수가 말하자 부장의 얼굴은 곧 심각하게 변했다. 창수가 뺀질거리는 구석은 있을지언정 허튼 소리는 안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부장이었다. "특종이라니?" "이것을 좀 보십시오." 창수는 재빨리 사진을 꺼내 보여주면서 요셉에게 들은 대로 설명했 다. 부장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게 사실이야?" "사실입니다! 이 사진을 보시면 알 것 아닙니까!" "합성된 것일수도…." "그렇다면 전문가에게 의뢰를 해보면 되지요! 합성인지 아닌지는 두 시간도 안 돼서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창수는 1면에 헤드라인으로 내 보내야 한다고 열성을 토했다. 부장은 놀라운 특종이기는 하지만, 그 만큼 위험부담이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한창 말다툼을 벌이고 있을 때 부장은 사장의 콜을 받았다. 부장은 씩씩거리는 창수에게 머리나 좀 식히고 있으라고 말한 뒤 사 장실로 갔다. 창수는 찬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시며 속을 달랬다. 이윽고 부장이 돌아왔다. 헌데 그의 얼굴은 조금 전과는 상당히 달라 져 있었다. 창수는 직감적으로 뭔가 심상치 않은 말을 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상하군." "무슨 일이십니까?" "사장이 어떻게 이 일을 알고, 무조건 1면으로 내보내라고 닦달을 하 는 거야. 자네, 설마 사장에게 먼저 말한 뒤 나한테 가져온 건가?"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창수는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던 부장 은 고민을 접어둔 채 눈을 빛냈다. "어쨌든 사장이 허락한 거야. 무조건 1면에 크게 실어." TITLE ▶29636 :: 264 - 분수령에 서다(3) 실탄(cruel) 04-11-22 :: :: 12053 숨을 막히게 하는 탁한 매연 틈을 뚫고 차들이 시끄럽게 오가는 광 경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녀는 이윽고 등을 돌렸다. 머리에 쓴 커다란 검은 모자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에는 껄끄러운 만남을 가져야 하는 사람처럼 망설임이 묻어 있었다. 소녀, 예안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질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인파 속 을 뚫고 계속 걸었다. 이윽고 약속 장소가 나타났다. "휴. 안 늦었네." 주말을 맞이한 시내를 거니는 것은 끔찍했다. 차라리 콩나물 시루 속 을 헤집고 다니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어쨌든 간에 약속 시간을 어기지 않아 다행이라고 안도하면서 약속 상대를 찾았다. "괜히 토요일로 약속 잡았나." 아직 오지 않은 듯 카페 어디에도 혜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예 안은 일단 입구가 잘 보이는 자리를 적당히 골라 앉았다. 여자 일행 없이 앉아 있던 남자들이 묘한 눈빛으로 추파를 던져왔지 만 깨끗이 무시했다. 여자의 자존심이 있지, 이런 좋은 날에 시내까 지 동행할 여자 하나 없는 처량한 남자는 설령 독신주의가 아니라 해도 절대 사양이었다. 이윽고 혜인이 도착했다. "여기야." 그녀와 눈을 마주친 예안은 조금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혜인은 잠 깐 흠칫했다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한눈에도 입술을 질 끈 깨물고 있는 것이 다 보였다.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혼란을 억누르 고 있는 것이리라. "잘… 지냈어?" 어색하게 인사를 꺼내 보았다.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었지만 목소 리가 떨리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혜인의 눈치만 살폈다. 쭈뼛거리는 그 태도에 혜인은 혼란도 잊고 그만 웃어버렸다. 어미 몰 래 비상식량을 꺼내 먹어버린 아기 다람쥐를 보는 것 같았다. 혜인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한결 편안해졌다고는 하지만, 지금 이 자리는 결코 편안한 기분을 안고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아, 안녕…." 몇 번 숨을 고르던 혜인은 억지로 작게 웃으며 인사했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목소리도 무척 떨렸다. 크게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저… 우리 뭐라도 시킬까?" "으, 응." 예안은 테이블 구석의 콜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종업원이 메뉴판을 들고 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음… 너 뭐 마실래?" "아이스 커피 주세요. 너는?" "아, 난 됐어." 직원은 알았다고 고개를 숙인 뒤 카운터로 갔다. 예안은 어색해 죽겠 다는 미소를 지으며 혜인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혜인의 얼굴 이 대번에 빨개졌다. "저, 있잖아. 네가 저번에 한 말…." "으, 응." "그거… 가능한 소리야?" 쭈뼛거리는 얼굴 가득 미묘한 의심기가 섞여 있었다. 하긴, 마음으로 믿고 싶다 해도 이성은 그것을 거부할 것이다. 어떻게 뇌 이식이 성 공했다 치더라도, 좋아했던 남자애가 여자가 돼버렸다는 현실을 누가 믿고 싶을까. 예안은 한숨을 억누르고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믿을 수 있겠니?" "…." "난 진우하고 너 사이에만 있었던 일들을 전부 다 알고 있어. 내가 그것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 날 믿어줄 순 없는 거야? 아니면 넌 진우가 새로 생긴 여자친구한테 그런 비밀스런 이야기까지 전부 다 말했다고 생각해?" '그렇게 나를 못 믿어?'하고 진우가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혜인은 움 찔했다. "아, 아니. 난 그런 뜻에서가 아니라…." 대번에 손사래를 치며 사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가닥 미심 쩍음까지 없앨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것은 그녀뿐만이 아니라 누구라 해도 똑같을 것이다. 잠시 고심하던 예안은 왼손을 들어 혜인에게 보여주었다. 팔찌에 채 워진 두툼한 시계를 보고 혜인은 어리둥절했다. "시계는 왜?" "잘 봐." 예안이 속으로 명령하자 시계에서 빛이 쏘아져 올라왔다. 즉석에서 손바닥만한 크기의 홀로그램이 형성되자 혜인은 깜짝 놀랐다. "이, 이게 뭐야?" 혜인은 신기함과 어리둥절함이 뒤섞인 눈으로 홀로그램을 보았다. 예 안은 가만히 보기만 하라는 듯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주변에서 새로 나온 악세사리냐는 둥 신기하다는 둥 웅성거리는 게 들렸지만 깨끗이 무시했다. 입체 영상은 예안이 머리 속으로 상상하고 있는 광경을 영화처럼 생 생하게 비춰내었다. 유진우가 바닷가에서 맥을 타고 온 유젤을 만난 것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해서 죽게 되었으며, 어떻게 해서 유젤의 몸을 얻고 살아가게 되었는지를 전부 다. 영상은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서글프게, 때로는 처절하게, 일 년이 조금 넘는 지난 세월 동안 예안이 겪은 일들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조잡한 컴퓨터 합성 영상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생 생했다. 꿈결같은 영상이 끝난 뒤 혜인은 멍한 눈으로 예안을 보았다. 예안은 다소 쑥스러운 듯 슬그머니 팔을 거둬들였다. "이…게… 뭐야?" 초점이 흐트러진 눈으로 혜인이 더듬더듬 입을 연다. 예안은 정말 미 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사과의 말을 꺼냈다. "지금까지 속여서 미안해. 하지만 보다시피 난 그럴 수밖에 없었어. 내가 유진우라는 게 주변에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없으니 이대로 비 밀로 하고 여자로 살자 생각했거든. 하지만 지금 말하는 거지만 난 처음부터 널 싫어했던 게 아니라 그냥 네가 나한테서 정이 떨어지게 만들려고…." "나 말고 다른 여자 만나느라고 그렇게 차갑게 대했던 거야?" 예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소리야?" "사실이잖아.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도대체 뭐야? 바람은 절대 안 피운다고 그렇게 노래를 불렀으면서, 어떻게 딴 여자 만나느라 나한 테 그렇게 차갑게 대할 수 있어?" 검은 눈동자에는 울음기가 맺혀 있었다. 졸지에 여자를 울려버린 예 안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 아니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그게 뭐시기 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너무 당황해서인지 말이 정리가 안 되었다. 예안은 펄쩍펄쩍 뛰고 싶 은 마음을 억누르며 변명거리를 찾아 헤맸다. 작은 주먹을 파르르 떨고 있던 혜인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얼굴을 예안에게 바짝 들이대었다. 그리고 위협하듯 낮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지금 네가 들어있는 그 몸이 바람핀 상대라 이거지?" "으, 응?" "그러니까 나는 내 남자를 빼앗아간 여자를 지금 보고 있다 이거지?" "에?" "결국, 내 연적 이콜 내 남자, 이거란 소리야?" 그게 그렇게 되나. 한숨을 쉴 가치조차 없는 황당한 결론에 예안은 당황함도 잊고 머리만 긁적거렸다. "하아." 혜인은 다시 털푸덕 주저앉았다. 팔을 들어 눈물을 찍어냈다.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흑진주처럼 맑은 검은 눈동자가 반짝 이며 웃고 있었다. "그럼, 있잖아. 키스해줄 수 있어?" "뭐!" 화들짝 놀란 예안은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울음기를 지운 혜인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솔직히 그거 봐도 네가 유진우라는 거 못 믿겠어." "하, 하지만…." "물론 네가 이제 와서 이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건 알아. 네 가 그럴 애가 아니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아무리 명백한 증거가 있 다 해도… 너무 황당한 이야기를 들고 와서 무조건 믿어달라고 하는 건 심하지 않아?" "그, 그런…." 그녀는 모자를 벗고 머리를 긁적였다. 새하얀 얼굴이 난처함에 물들 어 새빨갛게 변했다. 붉은 머리카락과 빨개진 볼이 제법 잘 어울려 '소녀 같은' 이미지를 꾸몄다.(아줌마 주제에 이 정도 묘사면 양호한 서비스라 생각하지?) "해 줘. 그럼 믿을게." 손톱을 물어뜯던 예안은 할 수 없이 혜인의 옆에 앉았다. 혜인은 당 당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도톰하고 새빨간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 보던 예안은 입안에 침이 고이는 걸 느꼈다. '바라고 계셨군요.' '중요한 순간이야. 넌 입 닥치고 있어.' 카리스마 만땅을 담아 맥을 꾸짖은 후 눈을 질끈 감았다. 혜인의 어 깨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가쁜 숨결이 느껴진다. 새색시처럼 수줍어하는 향기가 느껴진다. 예 안은 가녀린 어깨를 좀더 깊고 농밀하게 감싸안으며, 잘먹겠습니다 하고 속으로 외치며 입술을 포갰다. 얼굴과 얼굴이 떨어지고 난 뒤 그 둘은 눈을 떴다. 그 둘은 누가 먼 저랄 것도 없이 수줍은 연인처럼 얼굴을 더욱 붉혔다. 사람들이 놀라 입을 떡 벌린 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들 관심 밖이었다. 지금 그들 눈에는 상대방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서투르네."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혜인이 수줍어하며 말했다. 예안은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미, 미안. 연습할 새가 없었어." "괜찮아. 난 능숙한 것보다는 서투른 게 좋거든." 둘은 서로를 마주보지 못한 채 몸만 배배 꼬았다. 예안은 기쁨의 환 호성이 터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수줍어하는 작은 몸짓 하 나하나가 전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크게 원망을 들을 거라 생각했다.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속일 수 있 느냐고 눈물로 비난한다면 기꺼이 감수하기로 각오했다. 그러나 기대 하지도 않았던 방향으로 일이 잘 해결되었다. 그녀는 날아갈 듯한 마 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좋아 죽겠다는 듯 실실 웃었다. '애엄마가 그래도 되는 겁니까? 설마 나중에 혜인씨를 유빈이님 앞에 데려다놓고 <이 사람이 네 새 아빠야>라고 말할 셈은 아니겠죠?' '시끄러. 넌 빠져.' 그렇게 맥을 꾸짖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받은 예안은 흠칫 놀랐다. 그녀는 혜인의 눈 치를 살핀 뒤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없는 구석으로 간 예안은 안색을 굳힌 채 물었다. "그게… 사실이에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마 중현은 죽을상을 짓고 있을 것이다. 국정원은 당장 청와대로부 터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간부들이 줄줄이 엮여 옷을 벗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만큼 중현이 알려준 소식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녀는 표정을 더욱 차갑게 했다. "그거 대단히… 유감이군요. 정부 능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됐나요? 참 실망이에요." 예안은 입술을 깨물며 중현을 원망했다. 그러나 어투와는 달리, 그녀 의 입가에는 조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말 면목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라도 어떻게 수습을 해야….」 "말이 되는 소릴 하세요. 이미 다 밝혀졌다면서요? 이제 와서 수습은 무슨 수습? 이 따위로 일을 처리하면서 저한테는 그냥 '모든 걸 믿으 면 된다' 그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어이없네요, 어이없어." 입가에 띠고 있는 조소와는 달리 호된 꾸지람이었다. 아마 중현은 더 더욱 고개를 숙이고 있을 것이다. 이윽고 그녀는 그를 어르듯 말투를 바꿔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죠." 「네?」 "기자회견을 준비해주세요. 제가 직접 해명할게요." 「네에?」 화들짝 놀란 음성이었다. 곧이어 우당탕 하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놀란 나머지 의자에서 넘어 졌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예안은 쿡쿡 웃으며, 하지만 그런 웃음기를 전파로부터 완벽히 감추 며 덧붙였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잖아요.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일이 이 지경 이 됐는데 구차하게 계속 숨어야 돼요? 차라리 당당하게 밝히는 게 저를 위해서도, 정부를 위해서도, 그리고 이 나라를 위해서도 좋은 거예요. 아시겠어요?" 「네. 그렇습니다만….」 "그러니까 조만간 기자회견을 준비해주세요. 괜히 더 숨기려고 들어 서 이상한 소문까지 퍼지게 만들지 마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예안은 만족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맥이 말을 걸었다. '성장하셨군요.' '그렇다고 생각해?' '무척 냉정하셨습니다. 잘하셨어요.' '고마워.' 그녀는 싸늘히 웃었다. 조금 전 혜인과 킥킥거리던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미소였다. 본래 그녀는 아틀란티스에서 돌아온 후 자신이 맥의 주인이라는 것 을 세상에 밝히려고 했다. 자신을 숨기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아틀란티스는 처음부터 자신의 위치를 파 악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쪽에서 손을 쓰기도 전에 저쪽에서 먼저 손을 썼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르나, 자신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일 단 이루고자 하는 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당신을 세계 제일로 만들려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모르시겠습니까?」 얼마 전 칼은 굳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예안은 그때도 지금도 칼 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있다면 아틀란티스가 자신의 정체를 까발림으로써 무언가를 노리고 있다는 것뿐. 그러나 그녀는 예전처럼 나약하게 도망쳐 숨어버리는 대신, 철저히 그들이 원하는 대로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적이 다가오면 공격해 쓰러뜨릴 것이다. 나를 슬프게 하면 두 배 이상으로 아프게 만들어줄 것이다. 한국정부에 분노한 척 연기한 것도 바로 그 일환이었다. 자리에 돌아왔을 때 혜인이 물었다. "무슨 전화야?" "응. 별거 아니야." 예안은 웃는 얼굴로 얼버무렸다. 어차피 오늘 저녁 뉴스가 보도되면 다 알게 될 테니까 굳이 지금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기묘하게 가슴이 설렜다. 내 정체를 알게 되면 혜인이는 어떤 얼굴을 할까, 하는 두려움 비슷한 두근거림이 가슴을 사로잡았다. "우리 나갈까?" "응. 그러자." 턱짓으로 바깥을 가리키자 혜인은 즐거운 표정을 띠며 일어났다. 모 자를 쓰던 예안은 혜인이 자신의 팔을 덥석 끌어안자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혜인은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 생긋 웃었다. "왜, 싫어?" "아니." 예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가게를 나섰다. 회전문이 빙글 하며 닫히는 틈 사이로 새하얀 백합의 향기가 풍겼다. by eden 에덴 : 마지막 문장은 뭘 의미하는 거야? 실탄 : 대세는 백합이야. 고치기 지우기 목록 키아 오오. 역시 시대는 백합이죠. 근데... 부제목 틀리셨습니다.(...) 2004/11/22 실탄 제가 몸이 안 좋아서 그렇습니다.-_);; 2004/11/22 사케쿠 이것은....... 이것은...... 백합? 아니 장미물이라고 해야하나..... 이거 원..... 나 참. 동성연애물로 발전? 2004/11/22 crowsley 저... 옆에 다른 글 제목 중에 '백합은 순수를 잃었다"가 묘하게 눈에 띄네요.. 2004/11/22 영 백합이 되는 건가.....요? 2004/11/22 七夜 靑い .....백합....인 것입니까......? ... ... 씨익 (!?!?) 2004/11/22 Rayven 그런데.. 왜 장미고 백합일까요?; 2004/11/22 gforce 아시지 않는 쪽이 건전하답니다(씨익) 2004/11/22 루리에르피나 알고 있는것도 좋답니다 (씨익) 2004/11/22 이레이나 백합은 목이 떨어져서 불건전한 꽃...(퍽) ...장미물 원츕니다(씨익) 2004/11/22 아햏&# 우헤헤헤 이젠 이글이 레즈물로?ㅋㅋ 2004/11/23 흐르는 물 백합만세+_+/ 혜인의 재등장을 정말 바라고 있었는데 이렇게 멋지게 해주시다니+_+ (지난번의 꿈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는겁니까!!) 2004/11/23 세닐리아 - 그리고 그녀들의 모습을 마리아님이 지켜보고 계셨다. (인 걸까요;) 2004/11/23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6/18 페이지 ▶ 274 - 평화수호자(9) [3] 실탄 2004/11/2614Kb 829 ▶ 273 - 평화수호자(8) [1] 실탄 2004/11/2612Kb 830 ▶ 272 - 평화수호자(7) [1] 실탄 2004/11/2612Kb 808 ▶ 271 - 평화수호자(6) [2] 실탄 2004/11/2616Kb 844 ▶ 270 - 평화수호자(5) [3] 실탄 2004/11/2613Kb 894 ▶ 269 - 평화수호자(4) [12] 실탄 2004/11/2612Kb 1002 ▶ 268 - 평화수호자(3) [9] 실탄 2004/11/2513Kb 942 ▶ 267 - 평화수호자(2) [9] 실탄 2004/11/2413Kb 906 ▶ 266 - 평화수호자(1) 종반부 시작 [6] 실탄 2004/11/2413Kb 984 ▶ 265 - 분수령에 서다(4) - 중반부 종결 [40] 실탄 2004/11/2321Kb 1154 ▷ 264 - 분수령에 서다(3) [13] 실탄 2004/11/2212Kb 997 ▶ 263 - 분수령에 서다(2) [9] 실탄 2004/11/2114Kb 958 ▶ 262 - 분수령에 서다(1) [8] 실탄 2004/11/2013Kb 963 ▶ 261 - 날개가 찢어진 천사(11) [7] 실탄 2004/11/1913Kb 935 ▶ 260 - 날개가 찢어진 천사(10) [7] 실탄 2004/11/1813Kb 827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2][3][4][5] 6 [7][8][9][10]▶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29664 :: 265 - 분수령에 서다(4) - 중반부 종결 실탄(cruel) 04-11-23 :: :: 20864 글라스에 담긴 와인이 출렁인다. 와인은 붉었다. 피 냄새를 연상케 할 정도로. "좋군." 고운 남자의 손이 와인잔을 든다. TV에서는 한국 뉴스 보도가 흘러 나오고 있다. 남자는 웃었다. 아마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이 뉴스를 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절로 흥겨워졌다. 「맥을 건조했다는 프랭크 앤쏘니 유젤 박사는 실제 살아있었으며, 놀랍게도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여성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익명 의 정보 제공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현재 청와대는 조만간 기자회견 을 가질 것이라는 대답으로만 일관하고 있습니다. 또한….」 뚝. 오스카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꺼버렸다.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뒤에 시립해 있는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청년은 외팔이였다. 오른쪽 어깨 아래에서부터 소매가 허공에 펄럭거 리고 있었다. 누구라도 혀를 찰 정도로 가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청년의 눈만은 살아 있었다. 자신의 팔을 이렇게 만든 자에 대한 강한 분노로 이글거리는 검은 눈동자는 지옥에서 갓 올라온 악 마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그는 바로 마크였다. "지상세계에 나온 기분은 어떤가, 마크?" "대단히… 좋습니다. 지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세계인 줄은 정말 몰랐 습니다." "아름답다? 내 생각에는 아름다움으로 따지면 우리 시트날타 대륙보 다 더 아름다운 곳은 지구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데?" "이곳에는 태양이 존재합니다." 마크는 잘라 대답했다. 태양이 존재한다, 그 전제 하나만으로도 충분 히 지상은 아름다울 수 있다는 논리. 그것이 마음에 든 오스카는 소 리 없이 웃었다. "이제 전세계가 엔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조만간 엔젤은 공중파 방송을 타고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게 될 거야." "…." "모든 인간들이 엔젤을 우러러 보게 될 것이다. 모두가 엔젤을 경배 하게 될 것이다. 모두가 엔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녀에게 가족 을 잃은 패전국가의 국민들조차도 말이야. 그것이 바로 엔젤이 지닌 힘이다." 잘린 팔에서 고통이 되살아난다. 마크는 신음을 참으며, 자조적인 어 투로 중얼거렸다. "힘…?" "그렇다. 힘이다. 엔젤은 보통 인간이 지니지 못한 힘, 타인을 끌어당 기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 나조차도 끌려 들어갈 뻔했으니까. 오스카는 그 말을 목구멍 안으 로 삼키며 쓴웃음을 지었다. "명심해라, 마크. 엔젤은 결코 지상인들 사이에서는 행복할 수 없다. 조만간 그녀를 손에 넣고 싶어하는 자들이 날뛰게 될 것이고, 그녀는 온갖 불행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힘은 지녔으되 나약한 심성을 지닌 자들은 그녀를 손에 넣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그녀에게 상처 입히고 말 것이다. 그래선 안 되겠지?" "절대, 절대 안 됩니다. 엔젤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마크는 피에 걸고 맹세하듯, 단호하게 대답했다. 오스카는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겠지?" "메시아의 수호." "그렇다." 오스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보검을 꺼내어 마크에게 내밀었다. 마크는 한쪽 무릎을 꿇고 황송하다는 듯이, 하나 남은 왼팔로 보검을 받들었다. "자네에게 그 임무를 맡기겠다. 영광으로 알도록." "감사합니다." 마크는 보검을 받아들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어둠 너머로 사라 지는 그 모습을 오스카는 미소 띤 눈으로 보았다. "당신은… 정말 두렵습니다." "앤슨인가?" 오스카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무심한 어조로 되물었다. 두렵다는 표정을 지은 채 그를 바라보던 앤슨은 조심스럽게 한 걸음 내딛었다. "당신은… 제 계획을 알고 있었습니까?" "천사를 최고의 위치에 올린 뒤 밑바닥까지 내동댕이쳐서 인간을 불 신하게 만든다는 계획 말인가?" 앤슨은 쓴웃음을 짓기에 앞서, 자신의 생각을 처음부터 꿰뚫어보고 있던 그의 혜안에 전율을 느꼈다. 오스카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발상은 대단히 좋아.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만 빼면." "무슨… 말입니까?" "엔젤을 밑바닥까지 내동댕이친다.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어떻게 한다는 거지?" "…." "자네가 상상하는 방법이 뭔지쯤은 알아. 하지만 그렇게 하면 엔젤은 인간들을 불신하기에 앞서 우리를 먼저 증오하게 될 거야. 자네는 그 것을 알고 있었나?" 앤슨은 힘들게 끄덕였다. 정말 자신 있는 계획이었지만, 레이온조차 도 진심으로 감탄했던 거시적인 계획이었지만, 결정적으로 대단히 위 험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아차 실수했다가는 엔젤은 인간 보다는 아틀란티스라는 이름을 먼저 증오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걱정 말게." 그제야 오스카는 뒤를 돌아보았다. 맹금의 살기를 감춘, 따스하고 자 상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발상 자체는 정말 훌륭해. 도박성이 짙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내 조언을 받으면서 착수하면 실패할 일은 없을 거야." "…." "엔젤은 곧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그렇지 않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앤슨은 그 말이 입 밖으로 튀 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오스카는 히죽 웃으며 다시 등을 돌렸다. 어둠을 향해 뻗은 그의 손 은 태양을 움켜쥐고 싶어하는 듯 파르르 떨렸다. "신은 우리에게 천사를 선물했지만… 과연 그 천사는 우리의 소원을 들어줄 메시아일까?" 서글픔 비슷한 어두운 감정이 그의 등을 덮었다. "자네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없나? 어쩌면…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 터 지금까지 줄곧 신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었다는 상상 말이야." 앤슨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그러나 그도 오스카도 알고 있었다. 그 긍정을 적출하기에 그들은 너무 멀리까지 왔다는 것을. "갖고 놀고 싶다면 좋다. 꼭두각시처럼 춤춰야 한다고 해도 좋다. 하 지만… 하지만…" 오스카는 앤슨을 돌아보며 싸늘히 웃었다. 섬뜩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태양은 우리가 가진다. 그거면 돼." "대통령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비서실장이 공손히 시립한 채 말했다. 보지 않아도 목소리가 떨려나 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는 걸까. 영환은 뒷짐을 진 채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비서실장은 그가 무 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 아이는 지금 어떤가?" "차분하게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초조한 기색은 없나? 안절부절못하고 있진 않나?" "그런 느낌은 없습니다. 오히려 어린아이 같지 않게 너무 침착해 사 람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그럴 테지. 비록 미성년이지만 누구보다 강하고 똑똑한 아이니, 고작 이 정도 가지고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린 없을 테지. 대통령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들의 부주의가 그녀의 정체를 들통나게 한 것 같아 마음을 편히 놓을 수 없었다. 예안은 괜찮다고 말했다. 청와대 깊숙한 곳까지 단독으로 침투할 수 있는 초능력자까지 소속된 집단이기에, 어차피 들통나는 건 시간 문 제라고 그를 위로했다. 하지만 어린아이 같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지나치게 침착한 태도는 마치 정부의 허술한 보안능력을 나무라는 듯하여 영환은 씁쓸한 미 소를 지울 수 없었다. 한국은 맥과 그녀의 힘을 빌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나라로 명실공 히 거듭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제대로 해준 것은 없다. 오죽 하면 그 간단한 부탁 - 정체가 들통나지 않게 해달라는 요구도 들어 주지 못해 이렇게까지 와버렸으니. 영환은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가시지요. 국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기다린다?" 영환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국민들은 서예안의 존재를 알아버렸다. 맥을 만든 천재 과학자, 실질 적인 유전의 소유자, 세상에 다시없을 천재, 그리고 한미, 한일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영웅. 그녀를 대신할 수식어는 지나치게 많았다. 전세계인들은 서예안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했다. 국민들은 맹렬하게 모든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해왔다. 더 이상 한국 정부가 물러설 자리는 없었다. 이 모든 건 전부 그 시트날타인지 뭔지 하는 빌어먹을 녀석들 때문 이었다. "휴우." 다시금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하며, 그 애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 금까지의 일을 상기했다. 수수께끼의 전투로봇이 서울 시내 상공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은 일. 당돌하게 유전을 달라고 요구하는 녹색 눈을 들여다보며 쓴 웃음을 짓던 일. 수폭을 맞은 맥이 행방불명되었을 때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걱정하던 일. 짧지 않지만 길지도 않은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직 소녀의 나이지만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더 이상은 아 이 취급을 할 수 없는 그 애는, 이제 모든 이들이 우러러보고 선망하 는 자리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것이 비록 자의로 빚어진 일은 아니었지만, 그 애는 기꺼이 자신이 감수하겠다고 말했다. 이쪽 입장이 지나치게 곤란해지는 것을 막아주 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필경 내부에서 어떤 커다란 변화를 겪었음이 틀림없다. 냉정하게 볼 때 그 애와 자신은 정치적인 거래가 오간 관계이긴 하 다. 하지만 성장하고 있는 증거를 보노라니 절로 즐거워지는 것은 어 쩔 수 없었다. "가지." "예." 대통령은 집무실을 나서서 기자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자국 기자는 물론이요, 세계 여러 매스컴에서 보낸 유명 기자들이 속속들이 와 있 었다. 영환은 대통령에 취임할 때보다 더 요란한 관심을 받는다는 것을 새 삼 상기했다. 단상 위에는 벌써부터 카메라 플래쉬가 쏟아지고 있었 다. 그러나 오늘 저 빛을 받을 주역은 자신이 아니라 따로 정해져 있 었다.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단상에 선 영환은 대통령답게 위엄 있는 태도로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나라는 얼마 전 미합중국과 정식으로 종전 협정을 맺었습니다. 비록 서로의 오해에서 불거진 전쟁으로 뼈아픈 괴로움을 겪기는 했 지만, 앞으로 양국은 과거보다 더욱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 을 거라 생각합니다." 쥐 죽은 듯 침묵이 떠도는 가운데 플래쉬만 요란하게 터졌다. "평화를 획득한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기는 하나, 다소 부끄럽게도 그 것을 얻어내는 데는 대한국군의 힘보다 한 소녀의 공이 컸습니다. 그 소녀는 총을 잘 쏘지도 못하고, 군인 훈련을 받아본 적도 없으며, 무 엇보다 아직 열 여덟 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녀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워 우리나라에 승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승리 운운하는 대목에서 미국 기자들의 얼굴이 다소 새빨갛게 변했 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이 자리를 통해 정식으로 세계 평화 유지에 지대한 역할을 가한 천 재 과학자 프랭크 앤쏘니 유젤, 아니 서예안 양을 국민 여러분과 전 세계 시민 여러분 앞에 소개합니다." 대통령은 목소리에 잔뜩 힘을 담아 선언하듯 말했다. 좌우에 시립해 있던 장성들이 우렁차게 박수를 치는 가운데, 입구에서부터 한 소녀 가 당당하게 걸어나왔다. 그 순간 공기의 흐름이 정지했다. 차갑다기보다는 서늘한 감각이 사 람들을 지배했다. 셔터를 누르는 것도 잊은 채 기자들은 멍하니 소녀가 단상 위에 서 는 것을 바라보았다. 타오르듯 붉은 머리카락과 새하얀 제복 차림이 묘하게 참 잘 어울렸 다. 언뜻 보기에는 어린 소녀가 아버지의 군복을 빼앗아 입은 것처럼 보이는, 절로 웃음이 나오는 사랑스러운 모습이었지만 간단한 동작 하나하나에까지 품위가 배여 있었다. 옥석처럼 깨끗하고 눈부신 피부 가 눈처럼 새하얀 제복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순백의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한순간 세계의 시선이 이 자리에 집중되었다. 모두가 놀라야 한다는 것조차 잊은 채 정신을 빼앗겼다. 굳은 듯 결빙된 시간이 이윽고 해동하듯 깨어났다. 소녀는 쑥스러운 듯 볼을 긁었다. 지극히 소녀다운 행동에, 소녀가 두르고 있던 지나친 신비함이 꺼풀이 벗겨지듯 사라졌다. 아름다움의 가치가 떨어졌다는 게 아니다. 인간의 냄새에 한결 물들 었다는 느낌이 살아나며, 빛으로 달려도 닿지 않을 듯 멀게만 보이던 소녀와의 거리감이 좁혀졌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죠?" 순간 폭소가 터졌다. 마법에서 풀려난 사람처럼, 사람들은 누구랄 것 없이 크게 웃음을 터 트렸다. 누구보다 아름답고 위엄 있어야 할 천사가 실수를 저지른 것 을 본 것처럼, 거센 웃음의 파도는 그들을 강하게 덮쳤다. 2056년 9월 12일. 수십 억 지구인들이 최초로 동시에 웃음을 터트린 날이었다. "저분답습니다." 스크린을 보고 있던 칼이 미소지으며 레이온을 돌아보았다. 수척한 얼굴과 잘 어울리게 어둠으로 몸을 감싼 채 스크린을 보고 있던 레 이온은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보고 싶지 않아. 저 애가 인간들 장난감 따위로 전락하는 건." "적어도 장난감은 아닌 듯 한데요." "틀려. 장난감이야. 내가 보기엔." 새하얗고 고운 뺨과 어울리지 않게, 인간들을 향한 그의 독설은 차갑 기만 하다. 얼마나 오랜 고뇌에 시달려야만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걸까. 칼은 전율을 느꼈다. 레이온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칼이 부축하려 했지만 매몰차게 거절 했다. 그는 뚜벅뚜벅 벽으로 다가갔다. 벽에 손을 대자 여태껏 벽이었던 부 분이 비밀금고로 변했다. 지문을 인식한 금고가 열렸다. 안에 달린 레버를 잡고 밑으로 내리자 벽의 한쪽 부분이 갈라지며 양옆으로 넘어갔다. 그 사이로 길고 깊은 터널이 드러났다. 복잡한 전선이 얽혀 있는 터 널에서부터 차가운 바람이 싸늘하게 흘러나왔다. 레이온은 주저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따라오라는 말 한 마디도 없었 지만, 그의 등은 뭘 그렇게 서 있느냐고 나무라는 듯 보였다. 머뭇머 뭇하던 칼은 결국 조심스럽게 그를 따라갔다. 터널은 어두웠다. 그리고 길었다. 칼은 불안한 얼굴로 레이온을 따랐다. 양옆에 펼쳐진 금속의 벽에서 부터 차가운 느낌이 번져 나왔다. 까닭을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이 전신을 덮쳤다. 칼은 지금이라도 되돌아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따라 갔다. 이윽고 터널이 끊어지며 새로운 문이 나왔다. 레이온이 감광 장치에 손을 들이대자 다시 문이 열렸다. 눈이 멀어버릴 듯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칼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이윽고 눈이 빛에 익숙해졌다. 슬그머니 팔을 내린 칼은 눈앞에 자리 잡은 풍경에 할 말을 잊었다. 거대한 돔 형의 공간 한가운데에 커다란 캡슐이 자리잡고 있었다. 투 명한 액체로 가득 채워진 듯, 캡슐은 반짝이며 빛을 굴절시켰다. 은 백색 매끄러운 광택은 눈을 깜박거리는 것조차 싫을 정도로 아름다 웠다. 커다란 캡슐 안에는 한 개의 보석이 둥둥 떠 있었다. 푸른 빛을 내뿜 는 보석은 신이 하사한 선물처럼 신비해 보였다. 이따금씩 투명한 캡슐 벽과 보석 사이에서 모세혈관처럼 복잡한 방 전이 일어났다. 그것은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는 신의 일부분처럼 고 귀해 보였다. 칼은 이를 악물며 뒷걸음질을 쳤다. "저것은…." "숙성된 자이오 다이아몬드다. 유젤의 몸밖으로 빠져 나오면서 떨어 진 기능을 LCC 용액을 써서 인위적으로 복원시켰지. 저것은 칼, 자 네를 위해 준비한 거다." 경련이 일어난다. "저를… 위해서입니까?" "그렇다." 칼은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뭐라 말이 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사람은 오래도록 바라던 꿈이 이루어질 순간이 다가왔을 때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버린다는 게 과연 정말인가 보다. "자, 칼. 저것을 집어라. 그럼 자네의 소원은 이루어지게 돼." 레이온은 달콤한 어조로 그를 유혹했다. "복수하고 싶지 않나? 자네 딸을, 자네 아내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세 상에 복수하고 싶지 않나? 온갖 더러운 생각을 덜떨어진 머리 속에 처박아놓고 하루하루를 소진하며 번식행위를 하기에만 바쁜 더러운 사내놈들을 응징하고 싶지 않나?" 칼의 눈이 몽롱해졌다. "지금이 기회다. 이제 자네 소원은 이루어질 수 있어. 저것만 잡으면 된다." 초점이 사라진 눈을 한 채 칼은 캡슐로 다가갔다. 소중한 듯 투명한 금속 표면을 쓰다듬다가 길게 입맞춤을 했다. 레이온은 팔짱을 낀 채 그것을 보았다. 이윽고 칼은 등을 돌렸다.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 그의 얼굴은 늘 그 렇듯 무거운 수척함에 젖어 있었다. "이것을… 가지면 되는 겁니까?" "그렇다. 그럼 자네 소원은 이루어지게 돼." "정말…입니까?" "그렇다." "지금 당장?" "그렇다." 칼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머리 카락을 쥐어뜯으며 전신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두려워하지?" 레이온이 비웃듯 물었다. 칼은 계속 괴로워했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나도 신도 자네 편이야." 칼의 경련이 멈췄다. 쓰러지듯 주저앉아 있던 그는 서서히 몸을 일으 켰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직… 아직은…." 수척한 얼굴 가득 망설임이 드러났다. 레이온은 한숨을 내쉬고 등을 돌렸다. "그런가…. 아직은 각오가 안 섰다는 거겠지?" "네…. 너무 갑작스러워서…." "갑작스러워서가 아니겠지." 세상의 운명을 바꾼다. 전능함을 초월한 그 힘이 갑작스럽게 주어지 는데 평온할 인간은 없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진심으로 원했던 것 이라 해도. 아마 칼도 마찬가지이리라. "좋다. 칼, 그렇다면 시간을 주마. 각오가 서면 다시 말하도록 해라." 칼은 캡슐을 보았다.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반짝였다. 칼은 녀석이 울 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녀석의 주인이 지금 아파하는 것이라 생각 했다. 다시 레이온의 등을 보았다. 비로소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힘겹게 입술을 달싹이며 감사의 말을 꺼내려던 칼은 결국 뜻을 이루 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괜찮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어차피 그라면 전부 다 알고 있을 테니. 누가 뭐라 해도 그는 신에게 도전한 위대한 인간이 아닌가. 칼은 고개를 숙였다. 손톱으로 바닥을 쥐어뜯듯이 긁었다. 터질 것 같은 감동이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아, 외치고 싶다. "소리를 질러도 좋아." 레이온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 순간 칼을 제어하고 있던 잠금쇠가 풀 렸다. 우리에서 해방된 맹수처럼 그는 크게, 아주 크게 고함을 질러 댔다. 기쁨과 두려움이 뒤섞인 남자의 고함은 실내를 쩌렁쩌렁하게 뒤흔들 었다.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그에 답하듯 다시금 방전을 일으켰다. 가슴 가득 후련한 울음과 비명을 터트리는 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이온은 용액 위에 떠 있는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보았다. 간헐적으 로 반짝이는 그것은, 주인이 지금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듯 울 고 있었다. 레이온은 주먹을 쥐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했 다. '그 애의 배를… 갈랐나?' 기억이 조금씩 흐려졌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내가… 도대체 왜…?' 눈앞에 어둠이 펼쳐졌다. 어둠 저 건너편에서부터 거울이 다가왔다. 점점 커진 거울은 이윽고 눈앞에 당도했다. 사람만큼이나 커진 거울은 두 팔을 마구 뒤흔들며 킬킬거렸다. 레이온은 거울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자신과는 다른 표정을 짓 고, 다른 동작을 하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내가 아닌 내가 말했다. 「그 애가 울고 있을 거야.」 '울고… 있어?' 「그럼. 아주 많이 아파하고 있을 거야.」 '아파…한다고?' 레이온은 모르는 나라말을 들은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했다. 거울 속 의 자신은 어느새 소년의 모습처럼 작아져 있었다. 어린 시절의 레이 온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바보 같은 녀석! 선악과를 손에 넣는다 해서 네가 아담이 될 줄 알 았나? 신이 절대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거다! 너는 신의 저주를 받을 거야!」 거울 속의 소년, 어린 레이온은 손가락질을 하며 크게 분노했다. 레이온은 무릎을 꿇고 거울을 쓰다듬었다. 흐릿한 눈동자가 혼란스럽 다는 빛을 발했다. '그래도 상관없어. 그 애를 내 것으로 할 수만 있다면.' 「미쳤어! 미쳤어! 넌 미쳤어!」 거울 속의 소년은 마구 고함을 질렀다. 할 수만 있다면 거울을 뚫고 밖으로 나올 듯한 기세였다. 레이온은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달싹여 뭔가 변명을 하려 했다. 마냥 울기만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어린 시절의 과거, 어린 시절의 나. 어리기만 했던 자신이 가여웠다. 어린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려 유젤 을 복제했고, 끝내 배를 갈라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꺼내기까지 했다. 그런데 왜 이런 비난을 들어야 하는가. 「나는 그런 걸 해달라고 한 적 없어! 없어! 없단 말이야!」 거울 속의 어린 레이온이 고함을 질렀다. 혼란스러워하던 레이온은 갑자기 빙긋 웃었다. 그리고 주먹을 들어 거울을 힘껏 내리쳤다. 쨍그랑! 거울이 산산조각 났다. 깨져나가는 파편 조각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일그러진 얼굴을 한 어린 레이온이 감옥에 갇힌 짐승처럼 비명을 질 렀다. '이제 알았다. 넌 내가 아니야.' 나라면, 원하지 않았다고 말할 리가 없다. 나였다면, 이렇게 나를 비난할 리가 없다. 정말 나라면 아마 칭찬을 해줬을 것이다. 그토록 원했기에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네'가 원하지 않았다면 이 렇게 되지도 않았다. "박사님?" 걱정스러운 칼의 음성에 레이온은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주변을 둘 러싸고 있던 어둠도, 깨져나간 거울 파편도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식은땀을 닦아내며 그는 억지로 미소지었다. "아아, 괜찮아. 잠깐 피곤했을 뿐이야." 그는 쉬어야 한다고 말리는 칼도 뿌리치고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캡 슐과의 거리가 줄어들자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우는 소리가 한결 잘 들렸다. 보석이 울고 있다니, 아마 다른 이들이 들었다면 미쳤다고 손가락질 을 했으리라. 하지만 그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시리도록 청명한 빛을 발하는 이 녀석은 지금, 진심으로 슬퍼서 울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참아주렴." 그는 두 팔을 벌려 연인을 껴안듯 거대한 캡슐을 껴안으며, 사랑스럽 다는 듯 속삭였다. 그녀를 품에 안았을 때의 감각을 상기했다. 그러나 손안에 떠오른 감각은 그녀의 피를 묻힌 채 뱃속을 뒤적거리 던 기분 나쁜 감촉뿐이었다. 아무리 기억해내려 애써도 그녀를 껴안 았을 때의 느낌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은 모든 것을 잃어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뭐라더라. 영화에서는 이와 같은 상황을 참 적절하게 표현하곤 하던데. 파멸을 향해 달려간다고 하던가? 그는 웃기 시작했다. 우스워서 견딜 수 없었다. 칼이 수심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미친 듯 계속 웃었다. 푸른 보석이 다시 한 번 반짝였다. 녀석도 미치고 싶은가 보다. by eden 실탄 : 정말 미치고 싶은 건 나야. 에덴 : 왜? 실탄 : 바퀴벌레 때문에! 나는 벌레를 혐오하는 지극히 연약한 청 년이라고! 왜 한겨울에 갑자기 바퀴벌레가 등장하는 거야! 여름 내 내 바퀴벌레 한 마리 보기도 힘들었다고! 덕분에 바퀴벌레 퇴치약 사느라 거금 5천원이 깨졌단 말이야! 에덴 : 어머나 징그러♡ .......(잡설은 여기까지) 결국 이때가 왔습니다. 글을 쓰면서 과연 '과연 오기나 할까?'하고 저 스스로도 반신반의했던 이 때가 결국 왔습니다. 본화를 마지막으로 하여 소엄은 '중반부'를 종결하고, '종반부'에 돌 입하게 되었습니다. 중반부 마지막회치고는 임팩트가 다소 약한 듯 하지만, 스토리 전개상 어쩔 수 없었다는 궁색한 변명을 믿고 그냥 넘어가주시기 바래요. 저는 글을 쓸 때 A4로 100p씩 해서 01번, 02번, 03번…. 이런 식 으로 계산을 합니다. 헌데 어느덧 20번 파일을 만들게 되었군요. 처음 글을 기획할 때 '30번까지 가지 않을까?'하고 계산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어버릴 지도 모르겠습니다.(박장대소) 그럼 중반부 종결&종반부 시작을 기념하여 '출석체크'도 아닌 '생존신고'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꽤나 많은 독자분들이 도중 탈락한 것으로 압니다만, 과연 몇 명까지 살아남았을지 신고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손을 번쩍 들어주세요. 고치기 지우기 목록 섬마을김씨 에....김군 살아남았습니다. 2004/11/23 타로 ^^ 번쩍! 실탄님 /ㅁ/ 히히히히. 아응 너무 좋아 성실연재. 2004/11/23 타로 헉 -_- 니마 멈미까. 여유부리다가 1타를 놓치다니... 여기에서마저... ㅠㅠ 유조아 추천 1착으로 만족해야 하나. 2004/11/23 실탄 섬마을김씨/ 후후 폐인대전은 잘 하시고 계십니까? 현재 남아 있는 비축분은?(씨익)(왜 웃어!) 타로/ 니마는 항상 여유만 부리다가 1착을 놓치잖아요.ㅋ_ㅋ;; 2004/11/23 화사 잘보고 잘 자고 잘 살아있습니다... 2004/11/23 미르카도르 저는 당연히 살아있습네다!실탄동무! 2004/11/23 luin -_-)/ 2004/11/23 영 종반부~~ 기대하며 2004/11/23 RAGNAROK 생존 신고 하~~~~ㅂ니다...... 2004/11/23 키아 음... 뭐 얼마전에 보기 시작해서 아담의 상처까지 이틀만에 독파한 폐인입니다.;; ...끝날때까지 살아있겠습니다. '')/ 2004/11/23 흐르는 물 당연히 살아있습니다만... 2달안에 끝나지 않는다면 군대에 끌려가는 고라 못보게 되겠군요.OTL (끝날리는 없겠지만;;;) 2004/11/23 청월 보석이 미치면 어떻게 되나요 2004/11/23 사케쿠 감동, 감동입니다. 어찌됐든 저도 생존신고 합니다. 이제부터가 기대 되는군요. 혜인과의 백합물. 그리고 재호를 나락으로 밀어뜨린 후일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ㅁ+ 2004/11/23 七夜 靑い .........그 도플갱어가 레이온이었습니까;; 빨강머리들은 아니었군요 ㅡㅡ;; 그나저나 바퀴벌레라.....저희집은 한겨울에 바퀴는 물론 모기가 날아다닌다는...짜증나 죽겠어요 ㅜ.ㅜ 2004/11/23 J.N 저도 살아 있어요 +ㅁ+ 실탄님 화이팅~!!! 바퀴벌레도 화이팅!! <-... 2004/11/23 세닐리아 항상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2004/11/23 dark 음.... 2004/11/23 아스트론 원래라면 우조아에서 생존 신고를 했겠지만 왠지 거기서 하니 잘 안되어서요 저 생존했어용~ 2004/11/23 샤이나크 리플 처음 다네요... ^^ 한때 미쳐서 이틀동안 다 독파한 적도 있을 정도로 이글 제 맘에 딱 들게 재밌네요 건필하세요 2004/11/23 팽이가리 결말을 기대합니다. 2004/11/23 chaosgray 생존.... 2004/11/23 일루져니스트 아핫; 분수령에 서다(2)까지 2일동안 노력해서 다본 인간입니다; 현재 생존! 2004/11/23 궁금돌이 생존뿐입니까? 계속해서 읽고 내려가는 중입니다. 실탄님 아낌없이 본인을 사격해주세요 쭈우욱. 2004/11/23 루나체리 재밌게 읽고 있어요.하루도 빠짐없이 이글보러 온다는 ㅎㅎ; 2004/11/23 마기 음...!! (번쩍!) 손!! 2004/11/23 해적왕 프롤로그부터 계속 살아남아서 읽은 해적왕 GM임라고 합니당..ㅋㅋ (*__)~♡ 2004/11/23 멍멍이 저도 프롤로그때부터 봤담니다.ㅋ 그런데 이번에 나온게 천사의 성지 맞죠? 2004/11/24 bismarck -_-// 2004/11/24 도로테 손 번쩍!!!!!!!!!!!!! 2004/11/24 the ST 아마... 드림워커 기준으로 세페이지 정도 있을때부터 보기 시작했습니다... 소엄 마무리랑 이브의 눈물까지 잘부탁드려요~ 파이팅... 2004/11/24 ☆★파우스트 아담의 상처때부터 지금까지-_-)v... 살아남았습니다.;;(논리플쟁이) 2004/11/24 지널 처음 올리는 거지만.... 여기에 아무도 모르는 생존자도 살아있습니다!!! 2004/11/25 윤정 으음.. 수능보기 2주전쯤 천사의 성지로 시작해서 아직까지 살아있습니다. 아담의 상처는 언제쯤 출판되나요? 2004/11/25 실탄 출판사를 통한 출판은, 절대, 안 됩니다.-_-; 개인지로 찍어서 판매할 생각입니다.-_-; 2004/11/25 적색의바드 생존신고!!!! 우헤헤헤 ~_~;; 2004/11/26 키엘문 저도 살아있어요-ㅁ-;; 2004/12/18 착하게살자 좀 늦게 왔지만 저도 살아 있어요. 2005/01/03 얼음보숭이 ..저도 2005/02/02 라이트리 노병은 죽지 않는다 2005/02/05 아키 아상을 처음 연재하기 시작하고 소엄을 연재하면서 휘청[?]거리시는거 까지 처음부터봤지만 별말 없었던 아키/ 아직 살아있긴합니다 제가 코맨트를 단적도 있었지만 이미 모두 지워진 옛 이야기[dog sound] 2005/02/17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6/18 페이지 ▶ 274 - 평화수호자(9) [3] 실탄 2004/11/2614Kb 829 ▶ 273 - 평화수호자(8) [1] 실탄 2004/11/2612Kb 830 ▶ 272 - 평화수호자(7) [1] 실탄 2004/11/2612Kb 808 ▶ 271 - 평화수호자(6) [2] 실탄 2004/11/2616Kb 844 ▶ 270 - 평화수호자(5) [3] 실탄 2004/11/2613Kb 894 ▶ 269 - 평화수호자(4) [12] 실탄 2004/11/2612Kb 1002 ▶ 268 - 평화수호자(3) [9] 실탄 2004/11/2513Kb 942 ▶ 267 - 평화수호자(2) [9] 실탄 2004/11/2413Kb 906 ▶ 266 - 평화수호자(1) 종반부 시작 [6] 실탄 2004/11/2413Kb 984 ▷ 265 - 분수령에 서다(4) - 중반부 종결 [40] 실탄 2004/11/2321Kb 1156 ▶ 264 - 분수령에 서다(3) [13] 실탄 2004/11/2212Kb 997 ▶ 263 - 분수령에 서다(2) [9] 실탄 2004/11/2114Kb 958 ▶ 262 - 분수령에 서다(1) [8] 실탄 2004/11/2013Kb 963 ▶ 261 - 날개가 찢어진 천사(11) [7] 실탄 2004/11/1913Kb 935 ▶ 260 - 날개가 찢어진 천사(10) [7] 실탄 2004/11/1813Kb 827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2][3][4][5] 6 [7][8][9][10]▶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29724 :: 266 - 평화수호자(1) 종반부 시작 실탄(cruel) 04-11-24 :: :: 13392 종반부 시작입니다. 자정, 사람들이 모두 잠자고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주택가에서 멀리 떨어진 M거리의 환락가에는 비로소 불이 켜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주택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상권도 그다지 밀집하게 발달하 지 않은 M거리의 지하철역은 낮이면 항상 한산하다. 그러나 저녁이 가까워지면 사람들이 우글거리기 시작한다. 모 신문사 A기자의 우스갯소리를 빌자면, 바늘 하나 떨어질 틈도 없 이 여자를 사려는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것이다. M거리에 환락가가 생긴 것은 몇 달이 채 되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고 쓰러져갈 듯한 판잣집이 군데군데 널려 있 는 M거리였지만, 몇 달 전을 기점으로 해서 밤이면 밤마다 향락이 판치는 쾌락의 도시로 변신했다. 보통 사창가라고 하면 밑바닥 하층민 남자들이 많이 찾아온다. 사무 직장인만 되어도 차라리 아가씨를 부르면 불렀지, 소위 말하는 집창 촌은 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M거리는 달랐다. 이곳에서는 많은 수는 아니지만 직장인은 물론이요, 언론기자나 대기업 사원 같은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 었다. 아주 재수가 좋을 때면 정치가들이 들락거리는 사진을 찍어 협 박용으로 쓸 수 있기도 했다. 그만큼 M거리는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최고의 미녀들이 득실거리 는 음지였다. 고급 스포츠카 한 대가 달려와서 M거리에 정지했다. 별로 새삼스러 운 풍경도 아니었기에 남자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중에는 부러운 눈으로 스포츠카의 멋진 곡선을 정신 없이 구경하 는 이들도 있긴 했으나, 대부분은 오늘은 어떤 여자를 골라 즐길까 하는 생각으로 머리 속이 꽉 차 있었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20대 후반의 깨끗한 인상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 는 길이 익숙한 듯 당당한 걸음으로 한 집을 골라 들어섰다.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자 이윽고 그가 원하는 방이 나왔다. "에리. 나 왔어." "휘준씨!" 벗으니보다 못한 야한 드레스를 걸친 여자가 폴짝폴짝 뛰어 휘준의 품에 안겼다. 훤칠한 키에 잘록한 허리, 탐스러우면서도 풍만한 가슴 이 무척 매력적인 여자였다. 휘준은 익숙한 듯 여자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고 다른 손으로는 가 슴을 터트릴 듯 세게 쥐며 깊게 키스했다. 키스가 진해짐에 따라 여 자의 허리가 점점 뒤로 젖혀졌다.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여자의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이불 위 에 쓰러진 여자의 몸에서 휘준은 거칠게 옷을 벗겨냈다. 눈처럼 새하 얀 알몸이 드러났다. 휘준의 남성은 팽팽하게 솟구쳤다. 휘준은 몹시 서둘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듯 보였다. 여자는 그 의 머리를 가슴에 묻게 하고 숨이 넘어갈 듯 교성을 질렀다. 끈적끈 적하게 달아오른 두 몸뚱이가 하나가 되어 이불 위를 뒹굴었다. 후끈한 열기가 방안을 휘감았다. 휘준은 정신 없이 여체를 탐닉하며 쾌락에 빠져들었다. 야수처럼 거친 움직임 아래 놓인 여자는 몸을 활 짝 개방한 채 거침없는 교성을 내질렀다. 둘은 서너번 정도 서로에게 매달리고 난 후에 겨우 식은땀을 흘리며 떨어졌다. 휘준이 팔베개를 해주자 에리는 교태스런 미소를 지으며 그의 옆에 달라붙었다. 에리라는 이름을 쓰긴 하지만 외국인은 아니다. 이곳 관습상 그런 이 름을 사용하는 것뿐이다. "그새 기술이 더 늘었는데? 설마 내가 며칠 안 왔다고 다른 남자랑 놀아난 거 아니야?" "에이, 설마요. 난 휘준씨 오기만을 항상 기다렸는걸." 휘준은 웃는 얼굴로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물론 에리는 그 말을 들 을 수 없었다. 그가 속으로만 말한 것이기에. "자, 여기." "어머, 늘 고마워요." 에리는 휘준이 내놓은 봉투를 감격한 얼굴로 집어들었다. 제법 두툼 한 봉투가 뿌듯한지 그녀는 품에 안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생활하는 거 재미없지 않아? 이제 그만 슬슬 내 말대로 하는 게 어때?" 에리는 싱긋 웃었다. 이 남자는 일이 끝나고 나면 늘 저 이야기를 꺼 낸다. "죄송하지만 아직 전 이곳에 빚이 있어서 그럴 수가 없어요." "선불금 말인가? 하지만 그건 법적으로 무효잖아?" "네,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사장님'에게는 법보다는 주먹이 먼저예 요. 돈을 안 갚고 도망치거나 경찰에 밀고한 여자들은 반드시 비참한 죽음을 당해요." 하룻밤 몸을 파는 하급 창녀지만, 에리는 잘 교육받은 여자처럼 기품 이 있었다. 그것은 에리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일하는 다른 창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등교육을 마친 여자들은 이런 곳에서 몸을 팔지 않는다. 차라리 고 급 콜걸이 될지언정, 집창촌에 투신할 리가 없다. 하지만 이곳은 특 이하게도 여자들 전부가 상당한 고등교육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외모는 톱 배우 뺨칠 정도로 미색이었으며, 몸매 또한 바라보는 것만 으로 침이 줄줄 흐를 정도로 글래머였다. 잠자리 기술도 얼마나 죽이 는지, 이곳에 한 번 발을 들인 남자들은 마누라는 다시 돌아보기도 싫다고 입을 모아 말할 정도였다. 요약하자면 이곳은 최고급 여자들을 싼값에 판매하는 사창가이며, 마 약과도 같이 남자들의 발목을 붙잡는 곳이다. 한번 이곳을 찾은 남자 는 매일같이 간절하게 이곳 생각만 하며, 돈이 있으면 지체 없이 이 곳을 찾아 허리띠를 푸르고 지갑을 연다. "선불금이 얼마나 되는데?" "10억이요."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긋 웃으며 말한다. 10억. 일반 서민들은 바라보는 것조차 겁이 나는 막대한 돈이다. 하지만 이 여자는 그런 막대한 빚 때문에 이런 세계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밝게 미소짓는다. 이 점 또한 휘준이 그 녀에게 푹 빠지게 한 요소 중 하나였다. "그거만 갚으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건가?" 에리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씀이에요?" "내가 그 돈 갚아주겠어. 그럼 당신은 여기서 나갈 수 있지?" 초조한 빛이 여자의 얼굴을 스쳤다. "휘준씨. 절 위로할 생각에서 하신 말씀이라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 요. 하지만…." "당신은 아무 생각할 필요 없어. 사장 어딨어? 내가 그 돈 갚아줄 테 니까, 지금 당장 나오라고 해!" 휘준은 다소 흥분한 채 호기 있게 고함을 질렀다. 에리는 손가락을 물며 어쩔 줄 몰라했다. "여기 있습니다, 손님." 갑자기 문이 열리며 삼십 대 풍의 남자가 나타났다. 깔끔한 양복 덕 분인지 포주 같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남자였다. 상상했던 이미지와 너무 다른 모습에, 그리고 갑자기 문을 열고 나타 났다는 사실에 휘준은 잠깐 놀랐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당신이 이곳 주인인가?" "주인은 아니고 관리자입니다. 그런데 저 아이를 사시겠다고요?" 휘준이 바라보자 에리는 불안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 모습마저 사 랑스럽게 느껴진 휘준은 굳게 끄덕이고는 다시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래. 내가 에리를 사겠다. 10억이라고 했지?" "선불금은 그렇습니다만 손님께서 에리를 데리고 나가시려 하신다면 저희로서는 원가만 받을 순 없습니다. 최소 2할은 더 얹어주셔야 합 니다." "뻔뻔스럽군. 법적으로 무효인 선불금으로 약한 여자들을 묶어두고 협박하는 주제에 뭐라고?"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이니까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남자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또렷이 물었다. 도저히 창녀를 관 리하는 포주 따위라 생각하기 힘든 깔끔한 미소였다. 그러나 휘준의 눈에 그런 게 들어올 리 없었다. 그는 경멸의 미소를 지으며 지갑에서 수표 다발을 꺼내어 남자의 얼굴에 던졌다. "여기 있다. 확인해 봐." "12억 확실히 맞군요. 감사합니다, 손님." 마찬가지로 남자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휘준에게 정중히 허리 를 숙였다. 용건이 끝났다는 듯 몸을 일으켜 옷을 입은 휘준은 에리 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 잠깐만요! 옷이나 먼저…." "이런 더러운 곳에서 준 옷 따윈 입을 필요 없어." 옷을 걸친 듯 만 듯한 남자가 앞장서고, 알몸인 미녀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그 뒤를 따라간다. 평범한 밤거리였다면 대단히 진귀한 풍경이었겠지만, 이곳에서는 흔한 광경이었다. 휘준은 에리를 끌고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이곳저곳에는 미처 방까 지 들어갈 틈도 참지 못한 남자들이 여자들을 쓰러뜨린 채 그 위에 서 헉헉거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욕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저런 버러지들과 동류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묵묵히 에리를 끌고 갔다. 그는 서두르 다가 발을 밟은 남자가 모 국회의원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꾸 지 못했다. 차에 탔을 때 휘준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시동을 켜는 게 아니라 에 리의 몸을 탐하는 것이었다. 이미 여러 번 일을 치르고 난 뒤임에도 불구하고 에리의 몸은 남자를 끓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뜨겁고 달콤 한 키스 뒤에 이어진 열화와 같은 섹스 속에서 휘준은 세상에 다시 없을 쾌감과 사랑을 느꼈다. 몇 번이나 그녀의 몸 속에 쾌감을 쏟아 부었는지 모르겠다.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새벽 5시가 넘어 있었다. 그제야 휘준은 에리에게서 떨어졌다.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에리는 숨을 헐떡였다. 땀에 젖어 발 그레해진 그녀의 얼굴이 사랑스럽게 느껴진 휘준은 참지 못하고 뜨 겁게 키스했다. 축 늘어진 몸에 다시금 힘이 들어오며 두 남녀의 몸 이 엉켰다. "휘준씨. 저기…." 에리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짐승처럼 달려드는 그를 살며시 밀어 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늦었군. 일단 집으로 갈까?" "네." 휘준은 대충 옷을 입고 차를 출발시켰다. 에리는 알몸인 채로 창 밖 을 두리번거렸다. 대낮이라면 사내놈들에게 꽤나 좋은 구경을 시켜줬 겠지만, 지금은 새벽이었고 차유리는 검게 썬팅이 된 것이었다. "휘준씨." "응?" "고마워요." 에리는 손뼉을 짝 치며 생글생글 웃었다. 휘준은 아랫도리에 다시 힘 이 들어가는 걸 느끼며, 더욱 액셀을 세게 밟았다. 이거 아무래도 오 늘 출근하기는 그른 것 같았다. "여기가 휘준씨 집이에요?" "그래." "우와, 대단해요." 꽤 넓은 정원이 딸린 저택을 보고 에리는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휘 준은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를 살핀 뒤 슬며시 그녀를 차에서 내리게 했다. 침실로 들어가자마자 그는 그녀를 쓰러뜨리듯 넘어뜨렸다. 두 몸뚱이 는 다시 하나가 되어 거친 쾌락을 토해냈다. 침대가 심하게 삐그덕거 렸다. 피잉. 그때 희미한 파공음이 들렸다. 공기를 가르며 날아온 조그만 침이 에 리의 흰 목덜미에 꽂혔다. 단단하게 잘 짜여진 육중한 남자의 몸 아 래에서 버둥거리던 사지가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다가 축 늘어졌다. 휘준은 당황해서 몸을 일으켰다. "누구야?" "우리다." "서, 선배님!" 어둠 속에서 몸을 드러낸 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휘준은 당황해서 몸을 일으켰다. 황급히 옷을 입는 그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갈색 머리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했건만, 결국 사랑에 빠졌냐?"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말했지? 절대 사랑하지 말라고, 안 그럼 너만 손해라고 말이야." 갈색 머리의 남자, 재혁은 클클 혀를 찼다. 마취침을 쏘았던 남자, 진 원이 장난스럽게 재혁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너도 얼마 전에 그랬으면서 뭐 그렇게 딱딱하게 나와?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말라고. 오늘만 지나면 저 녀석도 너처럼 될 테니까." 가슴 아픈 기억이 있는 듯 재혁은 움찔한 표정을 지으며 진원을 노 려보았다. "쓸데없는 소리. 하여튼 작업이나 시작하자." "오케이." 남자들이 장갑을 끼며 앞으로 나서자 휘준은 당황한 얼굴이 되어 그 들 앞을 가로막았다. "자, 잠깐만요! 정말 '그것'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럼 우리가 왜 여기 왔을 거라 생각하나?" "하, 하지만 그건 살인입니다! 인권 유린이라고요!" "인권?" 재혁은 턱도 없는 소리라며 코웃음을 쳤다. "저 여자에게 인권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기절한 에리의 몸뚱이를 쓰레기 건드리듯 발로 툭툭 차는 행위에 휘준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개시 날짜는 삼일 후였는데 네 녀석 낌새가 하도 수상해서 잠복하 고 있었더니 역시나였군. 뭐 여자를 다른 곳으로 빼돌린 것도 아니고 해서 이번만은 눈감아 주겠지만, 다음부터 괜한 감정에 빠져 똑같은 일을 벌이면 가만두지 않는다." 휘준은 분한 듯 입술을 깨물기만 했다. 재혁은 다시금 나무랐다. "저 여자를 산 돈이 네 돈인 줄 착각하면 곤란해. 국민들의 귀하디 귀한 혈세다." 우두커니 서 있는 휘준을 내버려두고 남자들은 가져온 들것에 에리 를 실었다. 정신을 차린 휘준은 서둘러 그들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초조함 때 문에 발걸음이 비틀거렸지만 차마 그만두라는 고함은 더 나오지 않 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것일 뿐. 지하실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첨단 의학 장비가 갖춰져 있었 다. 흰 가운을 입고 있던 세 명의 의사가 긴장한 얼굴로 그들을 맞이 했다. 수술용 침대에 사뿐히 눕혀진 에리를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시작해주십시오, 박사님들." 의사들은 일제히 긴장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전에 다시 한 번 확인해두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 여자에 대한 것이라면 대답은 같습니다. 여기 장관님이 친히 증 명한 서류도 있습니다." 재혁은 한 장의 증명서를 내밀어 보여주었다. 장관의 인장이 찍힌 증 명서였다. 그래도 의사들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명심해 주십시오. 이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존 재입니다. 자, 그럼 시작해주십시오." 서로를 마주보던 의사들은 할 수 없다는 얼굴로 수술용 메스를 손에 들었다. 고감도 센서가 장착된 여러 개의 수술용 로봇 팔들이 위잉위 잉 소리를 내며 작동했다. 조금 전까지 몸을 섞었던 여자의 배가 갈리고 다리가 잘리고 눈알이 도려지는 끔찍한 광경에 휘준은 사색이 된 채 주저앉았다. 재혁은 못 마땅한 눈으로 휘준을 째려보다가 다시 에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의사들은 신중한 얼굴로 작업했다. 장기를 뒤적거리기도 했고, 조직 을 채취하기도 했고, 샘플을 고성능분석장치에 넣어서 분석해보기도 했다. 그러기를 두 시간 정도 흘렀다. 의사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에리의 배를 닫고 냉동 캡슐에 넣었다. 캡 슐 옆에는 에리의 뇌, 심장, 간, 폐, 이자, 등의 장기가 담긴 용기가 놓여 있었다. "어떻습니까?" "믿기 어렵지만… 정말입니다." 제일 나이가 많은 의사가 얼굴에 흐른 식은땀을 닦으며 덧붙였다. 한 국의학협회 회장 자리를 맡고 있는 추원우 교수였다. "이 여자는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전혀 다른 동 물입니다." by eden 중반부 종결의 감격을 만끽할 새도 없이 종반부 시작이군요. 이럴 땐 괜히 폐인대전에 참가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어쨌든 친구와의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5등 안에 드는 녀석이 감자탕 사기) 연재를 늦출 수 없습니다. ps : 제 글은 평균이 13kb 대이기 때문에 총 용량을 계산하기가 편합니다. 집계하시는 분 편하라고(사실은 나 편히 계산하자고--;) 일부러 용량을 비슷비슷하게 맞춰나가고 있는 겁니다.(중반부 종결 편은 어쩌다 보니 21kb가 됐습니다;) 근데..1등이 569kb라..(긁적) 제가 현재 351kb이므로..218kb 차이로군요. 3일동안 하루에 70kb씩 쓰면 따라잡을 수 있겠군요. .. ... 1등은 저 멀리 어딘가로 손을 흔들며 아득히....... 고치기 지우기 목록 키아 음;; ...저 아가씨들은 역시... 물건너온 아가씨들인가요.(...아니 묘사가 좀...;;) 2004/11/24 셜이움 혹시 아틸란티스 사냥이 시작 된건가? 2004/11/24 영 이제 시트날트.. 시험체군...컼.. 2004/11/24 七夜 靑い 호오; 아틀란티스인이 저런 곳까지 퍼져있다니;; 2004/11/24 dark 왠지 스너프가 생각나네... 본건아니지만 ㅡ.,ㅡ 2004/11/24 꼬마코린 허어? 2005/04/02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6/18 페이지 ▶ 274 - 평화수호자(9) [3] 실탄 2004/11/2614Kb 829 ▶ 273 - 평화수호자(8) [1] 실탄 2004/11/2612Kb 830 ▶ 272 - 평화수호자(7) [1] 실탄 2004/11/2612Kb 808 ▶ 271 - 평화수호자(6) [2] 실탄 2004/11/2616Kb 844 ▶ 270 - 평화수호자(5) [3] 실탄 2004/11/2613Kb 894 ▶ 269 - 평화수호자(4) [12] 실탄 2004/11/2612Kb 1002 ▶ 268 - 평화수호자(3) [9] 실탄 2004/11/2513Kb 942 ▶ 267 - 평화수호자(2) [9] 실탄 2004/11/2413Kb 906 ▷ 266 - 평화수호자(1) 종반부 시작 [6] 실탄 2004/11/2413Kb 986 ▶ 265 - 분수령에 서다(4) - 중반부 종결 [40] 실탄 2004/11/2321Kb 1156 ▶ 264 - 분수령에 서다(3) [13] 실탄 2004/11/2212Kb 997 ▶ 263 - 분수령에 서다(2) [9] 실탄 2004/11/2114Kb 958 ▶ 262 - 분수령에 서다(1) [8] 실탄 2004/11/2013Kb 963 ▶ 261 - 날개가 찢어진 천사(11) [7] 실탄 2004/11/1913Kb 935 ▶ 260 - 날개가 찢어진 천사(10) [7] 실탄 2004/11/1813Kb 827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2][3][4][5] 6 [7][8][9][10]▶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29742 :: 267 - 평화수호자(2) 실탄(cruel) 04-11-24 :: :: 13449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중현은 이윽고 누 군가가 노크하자 반가운 얼굴을 하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볐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재혁이 들어왔다. 재혁은 자신보다 젊은 상관에게 정중 히 고개를 숙이며 보고를 준비했다. "예상했던 대로였습니다." "음…." 중현은 신음했다. 간단한 한 마디였지만 그 안에 녹아 있는 의미는 여간 큰 게 아니었다. "박사님들은 뭐라고 하시던가?" "입을 모아 말씀하시더군요. 이것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전혀 다른 동물이다, 라고요." "인간의 모습을 한 다른 동물이라…." 중현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우리가 입수했던 대부분의 정보가 맞아떨어졌습니다. 심장과 안구, 간, 폐, 신장 같은 주요 장기들의 경우 인간과 완벽하게 동일한 구조 및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의 것들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골격과 겉모습은 물론 예외입니다." 재혁은 보고내용이 담긴 초소형 메모리 칩과 보고서를 출력한 종이 를 넘겼다. 중현은 메모리 칩을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일단 보고서를 천천히 살폈다. 어느 것 하나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보고서를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그의 안색은 점점 흙빛이 되었다. 에리라는 여자를 해부한 의사들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그녀는 인간의 모습을 지닌 다른 종족이었다. 공상과학 소설에 나오는 유사인종이라 말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 는 낭만적인 스토리가 만들어지겠지만, 아쉽게도 여기는 엘프나 호빗 은커녕 오크 한 마리도 존재하지 않는 현실 세계였다. 돼지는 그럼 뭐냐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돼지와 오크는 아 무런 연관성이 없다. 어쨌든 그 여자는 골격과 겉모습은 인간과 동일하다. 인간과 똑같이 생각하고 말도 할 줄 안다. 일부 주요 장기들은 인간의 체내에 이식 해도 좋을 정도로 동일성을 보인다. 하지만 인간은 아니다. 언뜻 보기에는 대단히 이상한 논리였다. 허나 보고서를 찬찬히 뜯어 보게 되면, 그리고 최대한 냉정하게 머리를 식히고 사고하면 에리는 인간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첫째, 그녀는 눈이 두 개가 넘었다. 이 문장에 의구심을 품을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이었다. 겉보기에 에리의 안구는 두 개 뿐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 예컨 대 피부 아래나 골반 뼈 틈새, 그리고 두개골 속에도 안구가 존재하 고 있었다. 둘째, 그녀는 염색체가 인간과 전혀 달랐다. 단순히 다운증후군이나 클라인펠터 증후군 같은 환자처럼 '인간의 염 색체 중 일부'가 몇 개 더 많아지거나 빠진 것이 아니었다. 기본 염 색체 수와 구조 자체에서부터 인간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보였다. 그럼 어떻게 주요 장기 같은 것은 이식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 생긴 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그런 의문도 명쾌하게 설명했다. 최첨단 의료기기를 동원한 테스트 결과 에리의 심장 같은 장기에는 '속이기'이라는 특수한 기능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은 인간 을 비롯하여 다른 동물들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기능이었다. 에리의 심장은 인간과 구조는 같지만 아주 기초적인 것 - 염색체나 DNA 구조는 전혀 다른 종족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아니 그렇게 칭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판이하게 다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다른 사람에게 이식은 불가능하다. 억지로 이식을 한다 해도 면역 억 제제가 무의미한 강한 거부반응 때문에 심장이 죽어버려야 한다. 하지만 실험 결과 전혀 그렇지 않음이 밝혀졌다. 다른 동물들에게서 는 여태껏 발견할 수 없었던 특수한 유전자가 본체의 세포를 속인다. '속임수'에 넘어간 본체는 이식된 심장이 인간의 것, 그것도 쌍둥이에 게서 받은 것처럼 딱 맞는 것이라 인식하여 받아들인다. 그것은 심장 뿐만이 아니라 안구 등을 비롯한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으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설명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중현은 건성으로 넘겼다. 보고서에서는 에리가 왜 인간이 아닌지에 대한 증명만을 구구절절이 늘어놓았을 뿐 다른 소리는 일절 없었다. 하지만 보고서 마지막 장을 넘길 때 중현의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 즉 에리 같은 여자가 태어나 게 된 목적은 단 하나뿐이었다. "장기매매." "맞습니다. 틀림없습니다."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 중현과 재혁은 굳은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여 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오싹한 짜릿함이 그들을 감쌌다. "교활하군." "네. 맞습니다. 정말 대단히 교활한 자들입니다." 재혁은 바드득 이를 갈았다. 상대방이 어떻게 해서 현대의학계도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을 이런 대단한 생명가공기술을 개발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에리 같은 여자 (라고도 부를 수 없는)를 탄생시킨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일반적으로 장기매매는 철저히 금지되어 있다. 전세계 어디를 막론하 고 살아있는 인간의 신체를 사고 파는 건 불법이다. 인권 그 자체를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주제이기에 더욱 민감한 부분이다. 허나 세계 인구는 많고 장기를 필요로 하는 환자 또한 많다. 뇌사자 등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장기를 기증한다 하더라도 턱없이 부 족하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하면, 그 수요를 수용할 만큼의 장기를 제공할 수 있다면 가히 세계를 쥐고 뒤흔들 수 있는 막대한 돈을 건지게 된다. 유전이 검은 황금이라면 장기밀매사업은 붉은 황금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붉은 황금이라는 글자를 뚜렷이 할 만한 여건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일단 장기매매 자체가 불법이고, 강제로 장기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인명을 해쳐야만 한다. 하지만 과연 경찰이 그것을 가만히 볼까? 설령 그럴 능력을 지닌 단 체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과연 그렇게 지나치게 눈에 띄는 짓을 하려고 할까? 이런저런 이유에서 장기매매는 아직까지 사회에 결정 타를 날리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에리가 탄생된 배경은 대단히 교활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보고서에 따르면 그녀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 인 간이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난자가 이용되었을 가능성 또 한 1% 미만이었다. 결국 '그들'이 장기를 사갈 소비자를 기다리는 동안 여자들을 내세워 매춘 사업을 벌이고, 거래처가 나타난 후에는 여자들의 머리를 쪼개 고 배를 갈라 온갖 장기들을 내다 팔아도 아무런 손을 쓸 방도가 없 었다. 왜냐하면 '불법'이 아니었으니까. 배아복제 금지에 관한 법을 어겼다고 영장을 발급 받을 수도 없고, '사람'을 죽였다는 명목으로 체포할 수도 없다. 여자들을 감금해 윤락 사업을 벌였다고 몰아붙일 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왜 수컷들은 복제하지 않는 걸까요?" "암컷으로 하는 게 더 수지가 맞으니까 그렇겠지. 암컷이라면 장기를 살 상대방이 나타날 때까지 매춘 사업으로 짭짤한 수익을 올릴 수 있으니까." "설마요. 많아 봐야 한 달에 몇 백입니다. 설마 상대방을 물색하는데 몇 달 이상 오랜 시간이 걸릴 리도 없고, 그들 입장에서는 엄청난 푼 돈 아닙니까?" "푼돈이라 해도 안 들어오는 것보다는 나아. 그리고 범세계적으로 이 런 사업을 벌인다면 그 푼돈은 더 이상 푼돈이 아니게 된다." 굳은 중현의 말에 재혁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문제였다. '그들'은 한국의 일부 도시에서만 이 런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오죽하 면 얼마 전 비밀리에 여러 나라에서 죽겠다고 도움을 다 요청해왔겠 는가. 전문가들의 도움을 얻어 추산해본 결과 그 비인도적인 범죄집단은 매춘사업과 장기밀매사업을 통해 연간 최소 수 조 달러 이상의 돈을 벌어들이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장 각국은 발칵 뒤집혔다. 이만한 자 금을 손에 쥐고 흔드는 녀석들이라면 최첨단 함정, 전투기로 육성된 군대를 지닌다 해도 억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우연히 꼬리를 잡아 이렇게까지 추적은 했다. 허나 상대 는 아직도 몸통을 숨긴 채 드러내고 있지 않았다. 몸통을 드러낸다 해도, 윤리적인 비난은 가할 수 있을지언정 법의 심판대 위에 그들을 세울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취급하는 여자들은 '인간'이 아닌 '가축'이기에. 녀석들은 또한 고급 유전자 데이터만을 다루는지, 여자들은 하나같이 절세 미색에다가 글래머였다. 또한 어떻게 교육시켰는지는 몰라도 갖 가지 밤 기술은 물론이요, 명문가에서 자라난 아가씨처럼 행동가짐과 말씨에 교양이 넘쳐흘렀다. 거기에 반한 남자들이 있지도 않은 선불금을 내고 여자를 정부로 삼 아 데려간다. 하지만 얼마 후 여자는 자기 의지로 가출해서 본래 있 던 곳으로 되돌아가 얌전히 장기제공자가 된다. 혹은 남자의 집에서 살해당하여 주요 장기들이 없어진 끔찍한 모습으로 발견된다. 각 나라 정부들이 그 실체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시체를 부검하는 과정에서 여자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기 때문이었다. 당 장 정부는 발칵 뒤집혔고, 이 사실은 극비에 처해졌다. 사망자의 남 자들이 도대체 왜 수사를 그딴 식으로 하냐고 발을 동동 굴렀지만, 마땅히 해줄 말이 없으니 더 미칠 노릇이었다. "머리가 아프군." 중현은 이마를 짚었다. 수철은 초췌한 안색으로 술집 간판을 바라보았다. 너무 낡아 귀퉁이 가 보기 싫게 떨어진 간판을 덮은 어둠이 쓸쓸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 여기로 가면 되는 겁니까?" 안내인은 태연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런 더러운 술집에서 도대체 어떻게…." "보관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첨단 설비들을 등에 지고 다니는 것은 아니니까 너무 초조해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래도 수철은 불안한 빛을 지우지 못했다. 누가 봐도 범죄에 거부감 을 가진 일반시민이었다. 금방이라도 손잡이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문을 열자 한눈에 보기에 도 더러워 보이는 복도가 나타났다. 과장되게 표현해서 한 사람도 지 나가기 힘들 것 같은 좁은 복도를 간신히 건너간 수철은 방안 풍경 을 보고 흠칫 놀랐다. "관?" "놀라실 것 없습니다. 이곳은 예전에 어떤 장의사가 살던 곳입니다." 안내인은 건성으로 대답하고 쪼그리고 앉아 관을 열었다. 어울리지 않게 첨단 잠금 장치가 보이지 않게 숨어 있었다. 안내인이 지문을 대고 암호를 입력하자 잠금 장치가 풀렸다. "왜 하필이면 관입니까?" "가장 안전하니까요." "하지만 전 장기를 사려는 건데… 관에서 꺼낸 장기를 사다가 제 처 에게 이식하라는 건 좀…." 척 보기에도 수철은 귀신을 두려워하는 듯 보였다. 관에서 커다란 상 자를 꺼낸 안내인은 미소지으며 수철을 보았다. "어디에 보관하든 간에 물건은 물건 그 자체로 존재합니다. 싫으시다 면 지금이라도 무효로 할까요?" "아니, 아닙니다." 수철은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물러간다는 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안내인은 빙그레 웃으며 상자를 건넸다. "물건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왼손 검지와 중기를 싹싹 비볐다. 대금을 달라는 것이었다. 품에 끌어안은 상자를 쓰다듬는 수철의 눈빛이 다소 묘하게 변했다. "이 안에 제 처를 살릴 녀석이 들어있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주문하신 사항대로 '제조'했습니다." "재료도구는 아마도 칼이나 총탄이겠지요. 그리고 재료는 인간이었을 테구요." "…네?" "당신을 납치 및 살인죄로 체포한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 으며,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다." 태도가 확 변한 수철은 권총을 꺼내어 그를 겨누었다. 어느새 입구에 서부터 쏟아져 들어온 경찰들이 일제히 권총을 꺼내어 안내인을 단 단히 겨누었다. 안내인은 황당하거나 놀란 빛이 전혀 없는 얼굴로 조용히 물었다. "체포입니까?" "그렇다. 순순히 투항하도록." "무슨 명목으로요?" "납치 및 살인죄다. 사체를 손상시킨 데다 장기밀매까지 했으니 사형 을 면하긴 힘들겠지." "납치? 살인? 사체 손상? 장기밀매?" 안내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되물었다. "당신들은 토끼를 납치하고 죽인 뒤 간을 꺼내어 팔아도 체포할 겁 니까?" "무슨 소리지?" 수철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안내인은 갑자기 씩 웃었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챈 수철은 발악하듯 외쳤다. "쏴! 놈을 쏴!" 당황한 경찰들은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퍽, 하고 머리가 터진 안내인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뒤통수에서부터 피가 흥건히 고여 나와 바닥을 혈향으로 물들였다. 수철은 어이가 없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다뤄 돈을 버는 녀석들일수록 삶에 대한 집착 이 강하다. 헌데 이 놈은 뭔가? 단순히 체포되기 직전에 놓였을 뿐인 데 게임을 포기하듯 목숨을 저버리지 않는가. "사망했습니다."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하기에 팔을 걷고 나선 부하 한 명이 그렇게 말했다. 수철은 당혹함을 지울 수 없었다. "이건 무슨… 홀린 기분…." 그의 형사 인생 중 가장 어이가 없었던 날을 꼽으라면 바로 오늘이 었다. 수철과 그의 부하들이 그렇게 황당해하고 있을 때, 수철에게 체포 명 령을 내린 경찰서장은 '위에서 내려온 사람'에게 온갖 욕을 듣고 있 었다. "그렇게나 중요한 일이라고 설명드렸지 않습니까! 헌데 그렇게 함부 로 체포 명령을 내리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자네 상관이 국정원 간부이든 장관이든 간에 난 상관 안 해. 대통령 이라 해도 그건 마찬가지야. 내게 중요한 건 우리나라 국민 중 누군 가가 납치, 살해당했고 장기까지 빼앗겼다는 것 뿐이야." 서장은 전혀 지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반박했다. 상대방과 상대방을 보낸 사람이 지닌 신분 따위는 일절 상관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이 렇게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에게 권력을 앞세워 내세우는 부당한 명 령은 오히려 반발만 살 뿐이었다.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 S동에서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여자가 잔인하게 두개골과 배가 갈려서 죽고, 기타 여러 중요한 장기 들이 없어진 것 말입니다." "당연히. 만약 우리 서 관할 지역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 살인 자 놈은 당장 나한테 잡혔을 거야." 자신만만한 건 좋지만 제발 위에서 얼마나 애달아하고 있는지는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남자는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서장님이 체포하라고 한 장기밀매단 끄나풀은 S동 살인사건과 밀접 한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 오히려 잘 됐군." 손뼉까지 치며 기뻐하는 서장의 태도에 남자는 꼭지가 돌아버릴 지 경이었다. "녀석들은 지금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아니 전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단 말입니다! 마피아보다 더 크고 더 무섭고 더 비밀스런 녀석들이 라고요! 미끼를 던져주고 신중히 추적할 생각이었는데 서장님이 그렇 게 하시면 일을 망치는 것밖에 더 되지 않습니까!" 다소 놀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장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때 부하가 찾아와 서장에게 뭐라고 소곤소곤 말했다. 서장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하게 변하자 남자 또한 바짝 긴장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부하를 노려보듯 하던 서장은 부하가 나가자 떨 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 놈이 자살했다는군." by eden 왜 제목이 평화수호자일까요...? 니콜라스가 청부업일을 하며 벌었던 백 억 달러의 행방(지금 녀석은 빈털털이죠 저와 마찬가지로.-┎)과 관련이 있습니다. 고치기 지우기 목록 궁금돌이 워프머신가동! 저도 탑승시켜주세요~ 2004/11/24 RAGNAROK 공간도약.... ^^ 여러번의 경험에 의거하면 단순히 그냥 제목을 지으셨으리 만무하고.... 전 그냥 읽어 보렵니다... ^^ (니 머리로 모르는걸 그렇게 포장할거 까지는 없잖아~~~ 퍽 ㅠ.★) 2004/11/24 七夜 靑い 장기...장기 밀매라....설마 레이온? 2004/11/24 사케쿠 풋, 공간도약. 아무튼 이번편은 레이온과 많이 얽힐 것 같군요. 2004/11/24 키아 에헤... 레이온씨의 돈벌이수단이었군요.-_-)/ 물건너온 언니들인가 했더니.(...) 2004/11/24 일루져니스트 ㅋ.. 그, 그런거였나... 쿨럭.... 잘읽고갑니다~ 2004/11/24 해적왕 이거..혹시 레이온의 장사(??) 아닌가a;; 전에 내용중에 장기밀매로 돈번다고 그랬었는데a;;; 아니면 말구~ 맞으면 잇힝~* (- _-)/ 2004/11/24 Rayven 위에 오타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검지와 중기를 (?) 약간 이상한..; 2004/11/24 미르카도르 조직 우두머리가 레이온인가....박사에서 조직계의 거물로..... 2004/11/25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6/18 페이지 ▶ 274 - 평화수호자(9) [3] 실탄 2004/11/2614Kb 829 ▶ 273 - 평화수호자(8) [1] 실탄 2004/11/2612Kb 830 ▶ 272 - 평화수호자(7) [1] 실탄 2004/11/2612Kb 808 ▶ 271 - 평화수호자(6) [2] 실탄 2004/11/2616Kb 844 ▶ 270 - 평화수호자(5) [3] 실탄 2004/11/2613Kb 894 ▶ 269 - 평화수호자(4) [12] 실탄 2004/11/2612Kb 1002 ▶ 268 - 평화수호자(3) [9] 실탄 2004/11/2513Kb 942 ▷ 267 - 평화수호자(2) [9] 실탄 2004/11/2413Kb 908 ▶ 266 - 평화수호자(1) 종반부 시작 [6] 실탄 2004/11/2413Kb 986 ▶ 265 - 분수령에 서다(4) - 중반부 종결 [40] 실탄 2004/11/2321Kb 1156 ▶ 264 - 분수령에 서다(3) [13] 실탄 2004/11/2212Kb 997 ▶ 263 - 분수령에 서다(2) [9] 실탄 2004/11/2114Kb 958 ▶ 262 - 분수령에 서다(1) [8] 실탄 2004/11/2013Kb 963 ▶ 261 - 날개가 찢어진 천사(11) [7] 실탄 2004/11/1913Kb 935 ▶ 260 - 날개가 찢어진 천사(10) [7] 실탄 2004/11/1813Kb 827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2][3][4][5] 6 [7][8][9][10]▶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29783 :: 268 - 평화수호자(3) 실탄(cruel) 04-11-25 :: :: 12502 남자는 펄쩍 뛰었다. "아니! 어째서 자살했답니까! 그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입니까!" 멱살이라도 쥐고 흔들 기세에 서장은 크게 움찔했다. "내, 낸들 아나? 곧 자세한 보고가 들어올 테니까…." "혹시 실수로 발포해서 죽여버린 건 아니고요? 실책을 위장하려고 자살이라 둘러대는 건 아닙니까?" 서장은 무슨 억지를 부리느냐는 듯 눈알을 부라렸다. 그러나 흥분 상 태에 빠진 남자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조만간 위에서 엄한 문책이 내려올 겁니다. 각오해 두십시오." 펄펄 날뛰다가 겨우 진정한 남자는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으르렁거 리듯 말했다. 사자 이빨에라도 기꺼이 키스할 엄청난 박력에 놀란 서장은 남자가 나간 뒤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야기는 잠시 몇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기이식 수술이 급작스런 활기를 띠게 된 그 즈음, 한 무리의 FBI 요원들은 뉴욕의 뒷골목 지하에서 한 무리의 수상한 남자들을 쫓고 있었다. 요원들은 권총을 쥔 채 신중하게 몸을 감추며 검은 옷을 입 은 남자들을 살그머니 뒤쫓았다. 멀리서 보기에도 남자들의 태도는 절도가 잡혀 있었다. 군인이라는 것을 억지로 감추는 듯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였다. 과장된 표현으로 말하자면, 성인 남자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만한 좁은 벽이 나타났다. 바짝 붙어 있는 주제에 벽은 까마득히 높아, 옥 상을 올려다보려면 고개가 다 아플 정도였다. 만약 위에서 떨어지는 물건에라도 얻어맞는다면 그대로 사망이라는 상상을 할 틈도 없이, FBI 요원들은 살그머니 남자들을 추격했다. 모퉁이를 돌자 쓰레기 냄새가 뒤섞여 풍겨 오는 거리가 나타났다. 남 자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익숙한 손놀림으로 쓰레기 더미를 옆으로 치웠다. 바닥에 감춰진 커다란 철문이 나타나자 멀리서 보고 있던 요원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욕구를 억눌렀다. 가장 덩치가 큰 남자가 손잡이를 잡고 들어올리자, 철문은 녹이 부서 지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블랙홀이 입을 벌린 것처럼 커다 란 구멍이 스산하게 드러나자 남자들은 주저 없이 내려갔다. 요원들은 서둘러 달려나갔다. 한 요원이 무릎을 꿇고 철문에 귀를 대 었다. 이윽고 그가 됐다는 얼굴로 손짓하자, 그들은 조용히 철문을 열고 뒤따라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 코를 얼얼하게 하던 지독한 쓰레기 냄새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지하에서부터 풍겨오는 비릿한 피 냄새 덕분이었다. 필경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자, 요원들 은 손에 쥔 권총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공중제비를 돌아도 좋을 정도로 넓은 복도를 그들은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코를 찌르는 혈향이 점점 진해졌다. 멀리서부터 밝은 빛이 보였다. 빛이 가까워짐에 따라 요원들은 더욱 긴장을 곤두세웠다. 이윽고 복도가 끊어졌다. 요원들은 호흡을 맞추며 재빨리 몸을 숨기 며 입구 너머의 낌새를 살폈다. 그들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수백 평은 됨직한 넓은 공간은 피 냄새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곳에 자리잡은 풍경은 미친 살인자가 전기톱을 들고 시체를 마구 난도질 하는 장면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욱 끔찍했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들이 여럿 있었다. 조금 전 요원들이 추격했던 남자들도 그 중에 있었다. 수술용 침대라기보다는 제단에 가까운 간이침대가 열 개 가량 놓여 있었다. 간이침대에는 발가벗은 여자들이 누워 있었고, 가운을 입은 남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들의 배를 갈라 장기를 꺼내 운반용 기에 담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쓸모 있는 장기들을 다 꺼낸 여자들의 시체가 수북히 쌓여 뒹굴고 있었다. 후각을 마비시키는 피 냄새의 근원은 바로 그것 이었다. 아직 장기를 적출당하지 않은 여자들은 한쪽에 가만히 줄을 서 있었 다. 실 한 올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특이하게도 여자들은 전혀 겁먹지 않은 얼굴이었다. 흡사 식사배급을 기다리는 노숙자처럼 평온한 안색이었다. 처참한 광경이 눈앞에서 벌 어지고 있고, 자신들이 이제 곧 그 주역이 되게 생겼는데도 말이다. 요원들은 필경 세뇌를 당한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한 요원이 구역질을 하려고 했다. 다른 요원이 잽싸게 그의 입을 틀 어막았다. 남자들은 거침없이 손을 움직였다. 여자를 마취시키지도 않은 채 배 를 갈라 심장을 꺼내고, 간을 꺼내고, 신장을 꺼냈다. 여자의 얼굴에 서는 두 개의 안구를 꺼냈다. 커다란 절단기로 음부에서부터 배꼽 위까지 자른 뒤 메스를 몇 번 뒤적거리자 여러 개의 안구가 남자의 손에 들려나왔다. 요원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엉덩이 속에 눈알이 있다니? 마지막으로 남자는 자궁을 적출해 생명유지처리를 한 뒤 용기에 소 중히 담았다. 한눈에 봐도 장기를 팔아치우기 위한 살인현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꼼짝 마!" 대장격인 죤즈가 앞으로 나서며 총을 겨누었다. 십여 명의 요원들이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머리 위로 손을 올리고 투항해라." 한창 여자의 배를 가르던 남자들은 흘끗 그들을 돌아보았다. 남자들 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권총을 꺼냈다. 탕! 탕! 탕! 요원들은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남자들은 총 한 번 쏴보지 못 하고 뇌수를 튀기며 사망했다. 한숨을 돌린 요원들은 서둘러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여자들 앞으로 갔다. 여자들은 흐릿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요원들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때 완전히 사망한 줄 알았던 남자 중 한 명이 쓰러진 채로 손을 뻗었다. 확성기를 꺼내어 입에 가까이 가져간 남자는 움직이지 않는 성대를 억지로 짜내어 말했다. "자…살…해라…." "무슨 소리야?" 요원들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무언가가 깨 지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뭐, 뭐야?" 놀랍도록 처참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자들이 저마다 손가락을 머리 속에 쑤셔 넣어 두개골을 터트리고 있는 것이었다. 도저히 가녀 린 여자 같지 않은 괴력이라고 놀라기에 앞서, 어떻게 일제히 목숨을 버릴 수 있는지 소름이 끼쳤다. "하… 하…." 여자들이 전부 쓰러지고 난 뒤 요원들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털썩 무 릎을 꿇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죤즈가 부하들을 나무랐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주범을 찾아야 돼!" "예!" 요원들은 황급히 안을 뒤졌다. 장기를 담을 수많은 용기와 용기를 보 관할 커다란 냉동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기록을 보관하기 위한 용도로 보이는 컴퓨터가 있었다. 해킹에 능한 요원이 나서서 컴퓨터를 점검했다. 별다른 보안장치가 되어있지 않은 컴퓨터였다. 요원은 이곳을 관리하는 남자 -이미 죽어 쓰러진- 와 칼 루이스라는 인물이 메일을 주고받은 기록을 찾아냈다. 죤즈는 서둘러 본부에 전 화를 걸어 위치 추적과 더불어 체포를 부탁했다. 이윽고 조회 결과가 본부에서 나왔다. 다행스럽게도 칼이라는 남자는 이곳에서 1km 정도 떨어진 호텔에 있었다. 그들은 후속부대에게 칼을 잡으러 가겠다고 연락한 뒤 재빨리 지하 실을 나섰다. 피 냄새로 질퍽한 공기를 벗어나자 비로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차량에 오른 그들은 나는 듯이 호텔을 향해 달렸다. 칼이 묵고 있는 방을 찾아낸 그들은 호텔측으로부터 열쇠를 받고 엘리베이터를 기다 릴 새도 없이 달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칼이라 짐작되는 남자는 잠옷을 입고 TV를 보고 있었다. "칼! 당신을 납치살인 및 장기밀매혐의로 체포한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다!" 죤즈는 마음 같아서는 '너 따위는 묵비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변호사 를 선임할 권리도 없다 개새끼야!'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칼은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재판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모든 걸 포기한 절망도 아닌 얼굴에 죤즈는 은근히 거슬렸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매스컴에는 철저한 비밀로 붙여졌다. 증거가 완 벽하게 갖춰진 이상 더 미룰 것도 없었다. 연방수사국은 칼을 납치살 인 및 장기매매죄로 기소했고, 두 달 후 재판이 열렸다. 연방검사는 두 달 간 묵비권만을 행사한 칼이 과연 어떻게 자백할지 기대하면서, 심문을 시작했다. "그 여성들을 납치, 살해하고 장기를 꺼내어 매매했다는 것을 인정합 니까?" "도살하고 장기를 꺼내 매매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납치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범죄행위도 아닙니다." 입을 앙 다물고 있던 칼이 처음으로 시원시원하게 입을 열었다. 검사 측에서 보여준 사진 등의 증거물을 이미 본 배심원들은 칼의 당당한 태도에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검사측은 속으로 승소를 확신했다. 자연히 미소가 그려졌다. "브라운 제크 박사님을 증인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인정합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십 대의 남자가 증인석에 오르자 검사는 의아하 다는 눈으로 보았다. 칼이 저 남자를 증인으로 내세워 무엇을 하려는 건지 궁금했다. 양심에 빗대어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맹세한 브라운은 배심원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입을 열었다. "배심원들께 묻고 싶습니다. 미국은 가축을 도살하고 그 장기를 꺼내 타인에게 매매한 자는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나라입니까?" 배심원들은 일제히 어리둥절해졌다. 브라운 박사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거라 짐작한 판사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발언을 저지하 려 했다. 그때 브라운의 입에서 결정적 대사가 떨어졌다. "미스터 칼이 장기를 꺼내라 지시한 그 여성들은 인간이 아니었습니 다. 고로 미스터 칼은 납치살인은커녕 장기매매 죄에도 해당되지 않 습니다." 배심원들은 자지러질 듯이 놀랐다. 검사측은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는 지 어이가 없다 못해 입을 떡 벌렸다. 판사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그게 무슨 소리냐고 브라운을 추궁했다. 브라운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자료들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그 여성들은 미스터 칼의 생명공학 실험 중 탄생된 동물입니다. 겉 모습은 인간과 놀라우리만치 흡사하고 언어를 배울 수 있을 정도로 지능 역시 뛰어납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라고 볼 수는 없습 니다." DNA부터 인간과는 확연하게 다르며, 내부 장기를 세밀히 뜯어본 결 과 인간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브라운은 배심원들이 그 사실 을 이해하기 쉽게 천천히 설명했다. 이 재판에서 밝혀진 그 여성들의 정체는 실로 충격적인 것으로서, 한 때 프린스턴 대학의 촉망받는 생명공학자였다가 사라졌던 칼 루이스 박사가 만들어낸 '키메라'였다. 인간이나 동물의 난자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생명을 만드는데 기 초가 되는 단백질 따위의 물질을 DNA 단계에서부터 합성하여 수정 란과 같은 세포를 만든 후 인공자궁기 안에서 육성한다. DNA 설계 에서부터 급성장하도록 되어 있는 여자들은 열흘이 채 걸리지 않아 성인이 된다. 인간과 모습은 똑같지만 인간은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체내에 숨겨 진 안구나 DNA 구조를 제외하더라도 그러한 증거는 명백했다. 더욱이 충격적인 사실은 칼이 여자들을 탄생시킨 목적이었다. 마치 돼지를 사육하여 인슐린을 만들어내듯이, 칼은 여자들을 이용하여 환 자들에게 필요한 장기들을 만들어 판매했다. 여자들의 법적 위치는 장기를 생산하기 위한 가축 -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었다. 칼은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다. 충격을 받은 연방수사국은 이대로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칼 을 기소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다. 그러나 현재의 법 구조에서 칼에게 적용할 수 있는 죄목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자들의 법적 위치는 분명히 인공 가축이었고, 가 축을 도살했다 해서 살인이나 장기밀매 혐의를 들이댈 수는 없었다. 이 사건은 매스컴에는 철저히 기밀로 붙여졌다. 도저히 일반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겉보기에는 영락없는 인간이고 말도 할 줄 알지만 절대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동물'의 존재를 세상에 공표할 수는 없었다. 결국 연방수사국은 패배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FBI 요원들이 사 살했던, 여자들을 해부했던 남자들 역시 칼이 탄생시킨 '키메라'라는 사실 또한 밝혀졌다. 칼은 '비싼 가축'을 죽여 물질적 손해를 끼친 연 방수사국에 거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했고, 당연하지만 승소했다. 범세계적으로 뻗어 있던 장기밀매조직을 일망타진할 수 있게 되었다 고 기뻐하던 미국의 스튜 대통령은 아연실색했다. 재판 과정에서 '일 부나마' 밝혀진 조직 「티아마트」의 막대한 자금 흐름이 더욱 스튜 정권을 경악하게끔 했다. 일개 범죄집단이 소유한 자금력이 가히 한 나라의 국가 예산에 필적했기 때문이었다. 백악관은 극비리에 회의를 벌였다. 미국의 미래를 위해 그들을 흡수 해야 한다는 주장과, 세계의 인권과 윤리의식 자체가 뿌리째 위험하 니 편법을 쓰더라도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놓고 매일같이 다툼을 벌였다. 한미전쟁 패전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한 카네기 대통령의 뒤를 이은 스튜 대통령은 상당히 신중하고 안정지향적인 정치가였다. 옥신각신 하는 양쪽 의견을 놓고 저울질하던 그는 결국 국민들을 혼란시키지 않는 길을 택했다. 극비리에 백악관으로부터 칼 루이스를 암살하고 「티아마트」의 모 든 것을 흔적도 없이 말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살인공작원과 특 수부대는 물론이요, 군대까지 동원될 조짐이 보였다. 그러나 칼 루이스는 재빨랐다. 그는 백악관이 채 결정을 내리기도 전 에 서둘러 몸을 숨겼다. CIA와 NSA가 눈에 불을 켜고 찾았지만 칼 의 흔적은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았다. 장기밀매사업은 계속해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티아마트의 꼬리를 잡는다 해서 법의 심판을 받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공식적 인 수사는 자연히 중단되었다. 미 정보기관은 계속해서 티아마트의 흔적을 찾았다. 백악관은 세계 여러 나라에 티아마트의 존재와 정체를 비밀리에 알린 뒤 협조를 요 청했다. 각국 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이만큼이나 거대한 장기밀매조직이 '합 법적으로' 판을 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소말리아에서 핵폭탄을 제조했 다는 루머보다 놀라운 것이었다. 미국의 협조를 부탁 받은 나라들 중에는 티아마트의 막대한 자금력 과 생명공학기술을 탐낸 나라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뜻을 같이 하 는 나라들의 비난이 두려워 겉으로는 수사에 착수하는 척 했다. 미국 은 그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티아마트의 일망타진에 협조해달라는 극비외교문서는 청와대에도 도 착했다.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dark 음.... 리플이없네 ㅡ.,ㅡ 2004/11/25 사케쿠 아아. 예안들은 도대체 언제 나오는 겁니까아아. 연참이라서 좋지만 이래서는..... 2004/11/25 키아 으흠... 가축이라.-ㅁ-;;; 다르면 모두 가축인 겁니까. 젠장. 가끔 법이란 건 '기준 내의 누군가'만을 위한 면죄부란 생각이 드는군요. 쳇.; 2004/11/25 the ST 예안이를 꺼내줘요..... 2004/11/25 라냔 조만간 저런 미래가 오지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생기네요..ㅡㅡ;; 예안이가 보고 파요~~~ 2004/11/25 七夜 靑い 쿨럭;; 칼...성이 루이스.....칼 루이스;; 2004/11/25 루리에르피나 '미국' 이니까 가능합겁니다. 2004/11/25 해적왕 GM 허허...주인공 안나오니깐 재미없다..=ㅅ=+ 그나저나...그 키메라를 어떻게 만들었데유~?? 궁금하네...생명공학이 뛰어나다해도... 손쉽게 키메라를 공장처럼 팍팍~찍어내다니..r(= ㅅ=)r 대단해요~ - _-)乃 2004/11/25 대천사미카엘 흐음.....3권씩 오다고 치고....수신자 택배이니까......15권이라고 따져보면...중얼중얼......5번 택배를 받아야 하고....약 15000원의 돈이 드는군요. 사인은 꼭 해주셔야 합니다!!! 이왕이면 사진도....(퍽) 2004/11/25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6/18 페이지 ▶ 274 - 평화수호자(9) [3] 실탄 2004/11/2614Kb 829 ▶ 273 - 평화수호자(8) [1] 실탄 2004/11/2612Kb 830 ▶ 272 - 평화수호자(7) [1] 실탄 2004/11/2612Kb 808 ▶ 271 - 평화수호자(6) [2] 실탄 2004/11/2616Kb 844 ▶ 270 - 평화수호자(5) [3] 실탄 2004/11/2613Kb 894 ▶ 269 - 평화수호자(4) [12] 실탄 2004/11/2612Kb 1002 ▷ 268 - 평화수호자(3) [9] 실탄 2004/11/2513Kb 944 ▶ 267 - 평화수호자(2) [9] 실탄 2004/11/2413Kb 908 ▶ 266 - 평화수호자(1) 종반부 시작 [6] 실탄 2004/11/2413Kb 986 ▶ 265 - 분수령에 서다(4) - 중반부 종결 [40] 실탄 2004/11/2321Kb 1156 ▶ 264 - 분수령에 서다(3) [13] 실탄 2004/11/2212Kb 997 ▶ 263 - 분수령에 서다(2) [9] 실탄 2004/11/2114Kb 958 ▶ 262 - 분수령에 서다(1) [8] 실탄 2004/11/2013Kb 963 ▶ 261 - 날개가 찢어진 천사(11) [7] 실탄 2004/11/1913Kb 935 ▶ 260 - 날개가 찢어진 천사(10) [7] 실탄 2004/11/1813Kb 827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2][3][4][5] 6 [7][8][9][10]▶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29859 :: 269 - 평화수호자(4) 실탄(cruel) 04-11-26 :: :: 11912 청와대는 근심에 휩싸여 있었다. "티아마트…라."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나오는 창조신의 이름을 조직명으로 쓰다니, 센 스가 있다고 해야 할까, 신경이 돌로 돼있다고 해야 할까. 김영환 대통령은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가 고개를 들었다. "장관은 어떻게 생각하오?" "미국이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나 스튜 대통령의 의지가 확실 한 이상, 적극적으로 티아마트의 소탕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합법적으로 그들을 체포할 명분이 없소만?" "그렇지만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사회질서가 깨집니다. 그 들의 정체가 알려진다면 전세계적으로 대혼란이 일어나고 말 겁니다. 우리나라도 거기서 예외는 아닙니다." "그렇긴 하지만." 영환은 다시 신중히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팩스로 출력된 외교문 서의 검은 글자가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그냥 해보는 소리지만, 그들을 끌어들이는 건 어떻소?" "불가입니다." 장관은 딱 잘라 대답했다. 아무라 막대한 금전적 이득이 보장돼 있다 해도 기존 사회질서가 뿌리째 흔들리게 되는 것은 사양하겠다는 의 지가 확연했다. "헌데 이런 경우는 어떻게 생각하오?" "어떤 경우 말씀이십니까?" "미국이 거짓말을 하는 경우." 장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한 번도 그런 쪽으로는 생각해본 적 없 었기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탓이었다. "글쎄요…. 어떠한 목적을 노리고 거짓 외교문서를 돌릴 수 있을 가 능성도 없진 않으나, 만약 거짓말이라 친다면 이런 거짓말로 무슨 이 득을 얻을 수 있을지 해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긴, 그렇기도 하겠군." "서 소장에게 한 번 물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실제로 티아마트가 하는 것처럼 장기적출용으로 무에서 인간 비슷한 동물을 탄생시킬 수 있는지 없는지…." 영환은 끄덕였다. "그게 좋겠군." 길고 거칠게 뻗은 산맥 너머에서부터 따스한 바람이 불어 내려온다. 어느덧 봄이 왔음을 알리는 것이다. 새하얀 콘크리트로 뒤덮인 돔형의 매끄러움을 타고 봄날 햇살이 흘 러내렸다. 투명한 열기가 고이는 화단 가장자리에는 이름 모를 들꽃 이 피어나 있었다. 이곳은 신국립과학연구소. 2056년 가을이 끝나갈 즈음에 완공이 끝나 고 2057년 봄부터 가동을 시작했다. 총 면적은 수백만 평에 달한다. 원형의 중심에 위치한 중앙연구소를 주축으로 해서 수십 채의 보조연구소가 주변에 포진해 있다. 그 바깥 을 다시 3미터 높이의 담과 철조망이 감싸고 있으며, 연구소에서 1km 떨어진 곳에는 군사기지까지 있다. 연구소 내에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도로망 덕분에 최단 시간 내에 다 른 건물로의 이동이 가능하다. 미사일 요격 시스템과 지하벙커까지 갖추고 있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규모인지는 어린아이라도 충분히 미루어 파악할 수 있다. 한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인재들은 모두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대 우는 여느 대기업 못지 않게 좋으며, 정부의 관심과 예산 지원은 가 히 상상을 초월했다. 이 연구소는 가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과학에 몸을 담고 있는 이 라면 어느 누구라도 선망하게 되었다. 그 까닭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 한 천재 과학자가 이곳 소장으로 있기 때문이었다. 그 인물은 바로 지금 중앙연구소에 할당된 자신의 개인 연구실에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유빈아! 그거 건드리지 말랬잖아!"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던 예안은 화학 약품 운반용 로봇을 신기한 듯 만지작거리는 유빈을 보고 기겁을 해서 달려갔다. "아무거나 함부로 건드리지 말란 말이야! 위험하다니까!" 복도를 흘끗 지나가던 여직원 한 명이 혀를 찼다. 아무리 봐도 저건 과보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생각되었다. "소장님. 저번의 그 기획안 말인데요…." 서류뭉치를 한 아름 안고 들어온 남자 직원은 예안이 아이를 나무라 고 있는 걸 보고 머리를 긁적이며 나갔다. 그녀가 한 번 아이에 정신 이 팔리면 다른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온다는 건 이 연구소 사람들 은 전부 아는 사실이었다. "한 번만 더 엄마 말 안 들으면 다음부터는 집에 떼어놓고 온다?" "잘못했어. 안 그럴게 엄마." 유빈은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까딱 숙였다. 도무지 반성의 기미가 안 보이는 꼬라지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오냐오냐하면서 키운 대가를 요새 그녀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좋은 걸 어떡하나. 다소 개구쟁이가 된 것은 좀 곤란 해도 어쨌든 그래도 사랑스런 아이인걸. "니콜라스 형이랑 같이 놀아. 엄마는 지금 일해야 되니까." "나 형한테 총 쏘는 법 가르쳐 달라고 해도 돼?" 빠개지려는 머리를 안고 암담한 예산안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기겁을 해서 돌아보았다. "무, 무슨 소리야?" "나 총 배우고 싶어." "안 돼! 절대 안 돼!" "안 돼? 하고 싶은데?" 그녀는 황급히 심호흡을 했다. 손가락을 입에 문 채 그렇게 빤히 쳐 다보면 마음이 약해지잖아! '너, 너무 귀여워!' 욕정을 참지 못한 그녀는 아이를 와락 껴안고 볼을 비벼댔다. 결재를 받으러 왔던 직원이 다시 머리를 긁적이고 나갔지만 그녀의 관심 밖 이었다. '역시 마스터는 팔불출이었습니다.' '시끄러! 귀엽잖아!' 아이가 숨이 막혀 켁켁거릴 때까지 꼬옥 껴안고 부비부비하던 그녀 는 이윽고 아이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춘 뒤에 타이르듯이 말했다. "유빈아. 총은 유빈이같이 어린 아이가 다루기에는 아직 위험해. 유 빈이는 나중에 나이 좀 많이 먹으면 그때 가서, 알지?" "싫어. 나 배우고 싶어. 배우고 싶어. 배우고 싶어." "아, 글쎄 안 된대두." "배우고 싶어어." 연구실에는 때 아닌 아이 칭얼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구원들 은 또 그러려니 하고 소장을 만나려던 계획을 내일로 미루었다. 결국 억지로 젖을 물려 일단 재운 그녀는 진땀을 흘리며 잠든 아이 를 침대에 눕혔다. "일하면서 애 키우기 무지 힘들다 정말." 책상에 앉은 그녀는 아까 부하 직원이 넘긴 결재 서류를 하나하나 검토했다. 처음 연구소장으로 취임했을 때에는 맥이 서류결재에서부 터 프로젝트 진행까지 일일이 다 해주었지만,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을 줄 안다고 이제는 혼자서 그럭저럭 논문까지 쓸 정도는 되었다. 그녀가 자력으로 쓴 첫 논문이 발표되었을 때 세계 모든 과학자들이 열렬한 흥미를 보였다. 그러나 논문의 '수준'이 '난해'하기 그지없어 머리를 쥐어 싸매고 괴로워했다는 뒷소문이 있었다. '엄청난 악필이었으니까요.' '지금 시대에 자필을 잘 쓰는 사람이 어딨어!' 하필이면 논문을 최종 정리하던 그 날 컴퓨터가 부서지는 바람에 자 필로 작성했는데, 샤프가 멸종 직전에 놓인 현대 사회에서 글씨 잘 쓰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그녀의 글씨는 지렁이가 담 넘어 가듯 했고, 가뜩이나 한국어식 난해한 표현뿐만 아니라 지독한 악필 과 씨름을 해야 했던 과학자들은 몸져 앓아 누웠다는 소문도 있다. 그녀가 첫 발표했던 논문은 초전도 현상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녀는 논문을 발표하자마자 상온에서도 초전도 상태를 유지하는 물질을 개 발해 당장 전세계에 특허를 신청했다. 그전까지 한국과 송전 계약을 체결했던 유라시아 대륙의 여러 나라 들은 일반 송전용 전선을 쓰고 있었다. 전기저항력이 다소 낮기는 했 지만, 어쨌든 그 무지막지하게 먼 거리로 전기를 전송하는 터라 손실 률은 실로 무지막지했다. 물론 무한동력에서부터 전달되는 전기라 얼마가 손실되든 간에 상관 은 없었지만, 지나치게 과부하가 걸려 위험성이 높았던 것은 사실이 었다. 하지만 신국립과학연구소가 초전도 물질을 개발한 덕분에 이제 는 보다 더 안전하게 전기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아, 끝냈다." 서류 결재를 마친 그녀는 축 늘어지듯 책상에 엎어졌다. 불과 몇 달 도 안 되는 사이에 세계 최고의 과학자가 된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 었지만, 아직 '괴수'의 반열에는 접어들지 못한 그녀였다. 때문에 이 런 단순 숫자 노동에는 쉽게 지치는 것이었다. 「소장님. 김태호 국가정보원장님이 오셨습니다.」 아이 옆으로 밍기적밍기적 기어가 누우려던 그녀는 스피커에서 나온 음성에 얼굴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아무렇게나 내팽개쳐둔 흰 가운을 걸친 그녀는 응접실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런데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조금 전까지 숫자와 씨름하고 있었으니까요. 용건이 뭐예요?" 김 장관은 공손하게 존대를 했다. 한때 그녀의 요청에 따라 반말을 한 적이 있으나, 그녀의 지위를 존중해주는 의미로 다시 존대를 쓰는 것이었다. 그녀가 몇 번 싫다고 말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한 나라의 장관에 대한 태도치고는 불손한 편이었지만 장관은 허허 웃으며 넘어갔다. 그전부터 그녀를 알고 지냈던 덕도 있었고, 손녀처 럼 귀엽게 느껴진 덕도 있었다. 무엇보다 잠이 절실해 보이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낸 게 미안했다. 장관은 서두를 생략하고 곧바로 용건부터 꺼냈다. "이걸 보시죠." "이게 뭔데요?" "미국에서 극비리에 보내온 외교문서입니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한 장 한 장 넘겼다. 종이를 넘길수록 찌푸 림이 점점 더 심해졌다. 마침내 그녀는 문서를 탁 소리나게 덮고는 장관을 바라보았다. "이게 사실이에요?" "그렇습니다." "허참…. 별 희한한 놈들도 다 있군요." 그녀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런데 왜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시죠? 설마 티아마트인가 하이 마트인가 하는 녀석들 잡는데 맥을 쓰자는 이야기를 하시려는 건 아 니겠죠? 그건 소 잡는 칼로 파리 쫓는 거나 다름없어요." "아니, 아니. 그게 아닙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여기에 적힌 내용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자문을 구하고 싶어서입니다." "무에서 장기이식용 '가축'을 창조해서 배양하는 것 말인가요?" "네."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당연하잖아요. 가능해요." "네?" 김 장관은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녀는 뭘 새삼 되묻느냐는 얼 굴로 쐐기를 박았다. "그거 가능하다니까요. 뭣하면 제가 다음 달까지 해 보일까요?" "아, 아니 그런…." 장관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입만 뻐끔뻐끔거렸다. 인권주의의 근본질서 가 전복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티아마트를 소탕하는데 전력투구해야 한다고 대통령 앞에서 열변을 토했던 게 바보짓을 한 기분이었다. "하긴, 이상하긴 하네요. 저야 가능한 거라지만, 웬만한 과학자들은 이런 거 엄두도 못 낼 텐데…." 그녀는 말을 잇다 말고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말고도 그것이 가능한 남자의 이름이 퍼뜩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 남자인가 보네.' '틀림없습니다.' '돈이 참 많이도 필요한가 보다. 이런 짓까지 해서 돈을 벌어들이는 거 보면 말이야.' '무조건 비난할 일이 아닙니다. 뭐 어쨌든 간에 그 여자들의 법적 지 위는 가축, 당연히 정부로서는 합법적으로 손쓸 도리가 없지요.' '돈은 엄청 벌어들이겠네. 한 1년에 수 조 달러는 벌겠지?' '그럴 테지요. 범세계적으로 장기판매 사업을 벌인다면….' 하지만 창조신의 이름을 조직명으로 사용한 것은 참으로 언밸런스하 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자신들은 병으로 고통받는 자에게 새 생명을 창조하여 선사하는 거룩한 일을 하고 있다는 무언의 시위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혹시… 짐작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심상치 않은 얼굴을 보고 장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쓴웃음 을 지으며 가차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없어요." 믿기 힘들다는 듯 녹색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던 장관은 이윽고 자리 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그녀가 말을 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없었다. "자문 감사합니다. 적어도 무조건 루머인 건 아니로군요." "국제적으로 장기판매를 한다면 국정원 감시망에도 걸려들었지 않나 요? 그럼 루머가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 텐데요?" "물론 장기밀매 흐름이 커지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에서 장기를 만들어 파는 줄은 몰랐지요. 어딘가에서 대규모 인간 사육이 라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만 생각했습니다." "와, 그거 끔찍한데요."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다만 사육되는 게 인간이 아닌 '가 축'이라는 점이 다를 뿐. 김 장관이 돌아간 후에도 예안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전 보았던 문서의 내용을 머리 속으로 처음부터 곱씹으며 생각에 깊이 잠겼다. '이상해. 너무 느려. 자이오 다이아몬드 꺼내간 게 작년인데, 왜 아직 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지? 자이오 다이아몬드만 있으면 당장 신인류 돼서 내 앞에 나타나야 하는 거 아니야?' '신인류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서 성격이나 가치관이 바뀌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해서 나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그녀는 레이온의 사랑을 집착이라 표현했다. 그럼으로써 그를 미워하 는 마음에 힘을 실어주려 했다. '도대체 그 남자는 지금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 팔짱을 낀 채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저 소장님. 방송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는데요…." 여직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눈을 뜬 예안은 어이없다는 얼굴 로 반문했다. "아니, 그 사람들을 여기까지 들여보냈단 말이에요?" "정부로부터 취재 허가를 받았다고 막무가내로 들여보내 달라고 하 는데 어쩔 수 없어서…." "그걸 믿으면 어떡해요?" 예안은 한심하다는 듯 나무란 뒤 일어났다. 소심하다고 소문난 여직 원은 어쩔 줄 몰라하며 그녀를 따랐다.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멍멍이 도대체 누가 그런? 허모양 류모군 육모군은 누굽니까? 주인공이 나오면 좋지않습니까;;; 2004/11/26 물고기인형 음 방송국 사람들 대단하네요 -_-; 역시;;; 2004/11/26 영 앞으로의 내용도 기대~ 2004/11/26 셜이움 그 합병한다는건 어떻게 된건지...;; 2004/11/26 키아 '괴수'의 반열이라.;; 2004/11/26 七夜 靑い .....팔불출... ... ... ......으으억~귀엽다..... 2004/11/26 라냔 그만큼 예안이 사랑받고 있다는거예요^^;;;; 유빈이같은 아이라면 "노"라는 단어는 못할거 같은데.. 총쏘기. 그래... 살인..그래..ㅡㅡ;;;; 2004/11/26 사케쿠 아니? 유빈이가 총을? 레이온 찾아오면 다짜고짜 방아쇠부터 당길 지도... 위험하군..... 위험해..... 그나저나 오늘은 예안이의 등장!! 기쁩니다아아!! 조금 실탄님께 부담이 되었다는 것이 조금 걸리지만;; 아무튼 그외 예안의 주변 사람들 반응도 보고 싶어요. 2004/11/26 섬마을김씨 맞습니다. 유가 사람들 및 재호 등 여러 사람들이 프랭크 안쏘니 유젤의 정체를 알았을 때의 그 경악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요!! 2004/11/26 실탄 그 장면들을 괜히 생략했나 보군요.. 가능하다면 출판본에서는 넣도록 노력해보지요.(그때까지 출판 도중 하차가 안 난다면.--;;) 2004/11/26 마기 추가분이란 이름으로 뒤에 덧붙여 넣으시지요. 출판본까지 기다리게 하지 마시고... ^^ 2004/11/27 디젤 찬성~^^ 화끈하게 써비스 쏴 주십시요 ㅋㅋ 2005/01/27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6/18 페이지 ▶ 274 - 평화수호자(9) [3] 실탄 2004/11/2614Kb 829 ▶ 273 - 평화수호자(8) [1] 실탄 2004/11/2612Kb 830 ▶ 272 - 평화수호자(7) [1] 실탄 2004/11/2612Kb 808 ▶ 271 - 평화수호자(6) [2] 실탄 2004/11/2616Kb 844 ▶ 270 - 평화수호자(5) [3] 실탄 2004/11/2613Kb 894 ▷ 269 - 평화수호자(4) [12] 실탄 2004/11/2612Kb 1004 ▶ 268 - 평화수호자(3) [9] 실탄 2004/11/2513Kb 944 ▶ 267 - 평화수호자(2) [9] 실탄 2004/11/2413Kb 908 ▶ 266 - 평화수호자(1) 종반부 시작 [6] 실탄 2004/11/2413Kb 986 ▶ 265 - 분수령에 서다(4) - 중반부 종결 [40] 실탄 2004/11/2321Kb 1156 ▶ 264 - 분수령에 서다(3) [13] 실탄 2004/11/2212Kb 997 ▶ 263 - 분수령에 서다(2) [9] 실탄 2004/11/2114Kb 958 ▶ 262 - 분수령에 서다(1) [8] 실탄 2004/11/2013Kb 963 ▶ 261 - 날개가 찢어진 천사(11) [7] 실탄 2004/11/1913Kb 935 ▶ 260 - 날개가 찢어진 천사(10) [7] 실탄 2004/11/1813Kb 827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2][3][4][5] 6 [7][8][9][10]▶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29911 :: 270 - 평화수호자(5) 실탄(cruel) 04-11-26 :: :: 12544 일반 응접실에서 판을 치고 있던 기자는 예안이 나타나자 반색을 하 고 일어났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서 소장님. KCS의 김태훈 기자입니다." 카메라맨이 재빨리 카메라를 켜고 그녀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냉랭히 입을 열었다. "여기는 촬영이 금지돼있습니다. 취재도 마찬가지고요. 여기까지 오 시느라 수고하신 건 알지만, 돌아가 주셨으면 하네요." "가벼운 인터뷰도 안 됩니까?" "안 됩니다." "그래도 부탁드립니다. 서 소장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국민들을 생각해주십시오." 차라리 '우리 밥벌이 좀 하게 인터뷰에 응해주세요'라고 솔직하게 접 근해온다면 생각해볼 법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친절하게 대해주고 싶어도 그럴 생각이 저 멀리 달나 라까지 날아가 버린다. "잠깐이면 됩니다. 잠깐이면 돼요." 기자는 사근사근하게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안은 카메라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마 지금쯤 방송국 서버에 영상이 지속적으로 전송되고 있을 것이다. 경호원을 불러서 이들을 내쫓았다가는 당장 오늘 저녁 뉴스에 무슨 말이 실릴지 모른다. 언론이라는 것은 본디 그런 게 아닌가. '아아, 난 앤드류만큼은 안 되나 보네.' 앤드류는 오랜 관록 덕분인지 매스컴을 다루는 실력만큼은 단연 뛰 어났다. 그녀는 다음에 만나면 그 노하우 좀 전수해달라 해야겠다고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5분 안에 끝내주세요. 일이 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기자는 PDA를 꺼내 손에 들고 질문을 시작했다. "좋아하는 남자분이 있으신가요?" "콜록!" 예안은 사례가 들려 기침했다. 가슴을 두드리며 숨이 넘어갈 듯 기침 하던 그녀는 이윽고 평정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황당한 나머지 목소 리가 떨려 나왔다. "그, 그런 거 없어요." "그 남자분이 앤드류 회장이 아닌가요?"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 절대 튀어나올 수 없는 후속타였다. 예안은 뒤로 자빠질 뻔한 몸을 가까스로 지탱했다. "그, 그런 거 없다니까요! 앤드류 회장하고는 그냥 친구 사이에요!" "어디까지 가셨나요?" "그냥 친구이자 동업자 관계라니까요! 저스트 프랜드! 몰라요?" "항간에는 올 크리스마스에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무슨 인터뷰가 이 따위야!' 차마 면전에 대고 고함을 지르진 못해서 속으로만 악을 썼다. 사람 말은 한 귀로 듣고 두 귀로 흘리면서 무슨 인터뷰를 한다는 말인가. 뭐가 어째? 누가 연인이고 누가 크리스마스에 결혼식을 올려? '아주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 다 해먹어라! 으이구! 이게 앤드류 그 자식 때문이야!' 작년 연말, 앤드류는 예안에게는 미리 말도 하지 않고 그녀와 자신이 애인 사이라는 것을 세상에 발표해버렸다. 당연히 매스컴은 발칵 뒤집혔다. 베일에 가려진 신데렐라가 맥을 제 조하고 미국을 물리치고 신국립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한 한국의 영웅이었을 줄은 아무도 상상 못했으니까. 뒤늦게 뉴스와 신문에서 그것을 확인한 그녀는 어떻게 된 거냐고 국 제전화를 걸어 펄쩍 뛰었다. 하지만 그는 '누나를 보호하기 위한 거 야'라고 간단히 일축해버렸다. 그녀를 노리는 적들을 견제하기 위한 예방책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 나 그녀는 납득할 수 없었다. 지난 가을 청와대에서 공식 발표가 있은 후 그녀는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죽은 줄 알았던 천재 과학자 프랭크 앤쏘니 유젤이 사람 심장 떨리게 하는 미소녀였다는 사실에 세계인들은 경악하는 한편 강한 매력을 느꼈다. 특히 한국에서 그녀의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단독으로 맥을 건조한 데다가, 유전을 소유했고, 한국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며, 사람 숨 넘어가게 하는 미모까지 지녔으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열광 했는지는 작년에 발행된 신문 기사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대단한 그녀와 세계 제일의 철혈 경영가 앤드류 회장이 연인 사이라는 소문이 나버렸으니, 매스컴이 얼마나 좋아했을지는 불을 보 듯 훤했다. 앤드류의 그 제멋대로 발표가 있은 후 그녀가 겪은 시달림은 범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명색이 군인인 내가 왜 이런 기자 하나도 상대 못하고 쩔쩔매야 하 냐고.' 그녀는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현재 그녀의 직위는 이 연구소의 소장이자 해군대장이었다. 한일전 쟁, 한미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훈을 인정받아 대장자리를 받은 것이 었다. "취재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뵙죠." 예안은 녹초가 된 얼굴을 억지로 감추며 화사하게 미소지었다. "다음 번에는 제가 많이 바쁠 것 같네요." 다음이라는 것은 없을 거라는 소리였다. "아, 괜찮습니다. 바쁘지 않은 시간을 골라서 올 테니까요." 없다면 내가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제가 널널한 시간에 기자님 다리가 아플지도 몰라요." 그랬다가는 다리몽둥이를 분질러버리겠다는 뜻이었다. "걱정 마세요. 이래 보여도 아령을 한 터라 팔 힘에 제법 세답니다." 다리가 부러지면 팔로 기어서라도 오겠다는 각오였다. 어쨌든 기자는 그렇게 돌아갔다. 그녀는 비로소 긴장을 풀며 한껏 피 곤한 듯 축 늘어졌다. "그래도 유빈이는 아직 안 들켜서 다행이다. 휴우." 그녀가 미혼모라는 사실은 아직 세상에 발표되지 않았다. 웬만한 연 구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위에서 내려온 압력에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덕분에 매스컴에는 비밀로 지킬 수 있었으나, 과연 비밀이 들통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상상하는 것조차 사양하고 싶었다. 아이의 존재가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아직 어린 나이에 매스컴에 노출되어 전세계의 관심을 받게 되면 아이의 성장에 악영향이 끼칠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 때때로 누군가가 그녀를 깎아 내리기 위해 팬클럽 사이트에 악감정 이 가득한 게시물을 올릴 때가 있었다. 그 중에는 가끔 그녀가 아이가 여럿 딸린 문란한 여자라는 욕설도 끼어 있었는데, 아무것도 모른 녀석이 소유욕에 눈이 멀어서 한 짓이 라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가슴이 철렁했다. 물론 별거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뒤에는 악착같이 아이피 주소를 추 적하여 따끔하게 혼내주곤 했다. 어쨌든 가입자 수가 일 억 가까이 되는 팬클럽이다 보니까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여담이지만, 그녀의 팬클럽을 관리하는 운영자는 여러 기업으로부터 비싼 몸값으로 스카웃 제의를 받고 있다고 한다. 범세계적인 규모의 팬클럽을 별다른 트러블 없이 잘 경영하는 능력을 높이 본다고 하던 가 뭐라나. '뭐, 시월이 걘 원래부터 그런 거 잘 하게 생겼어. 귀티가 줄줄 흐르 잖아.' '확실히 행동 하나는 재빠릅니다. 그렇게 빨리 팬클럽을 만들어버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근데 귀티 흐르는 거랑 일 잘하는 게 무슨 상 관관계가 있는 건가요?' '그렇다는 거지 뭐. 하여튼 녀석이 시키지도 않은 거 만들어서 나만 귀찮게 됐지 뭐.' 그녀는 게시판을 뒤적거리며 탐탁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게시물의 내용이라고 해봐야 절반은 '사랑해요 누나!' 혹은 '내 심장 을 당신에게', 가끔은 'All I have is for you!' 따위의 닭살 돋는 멘 트투성이 뿐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누나라는 호칭이 언니로 바뀌었을 뿐 똑같은 내용이었다. '나이 적은 애들이 그렇게 부르는 건 이해되는데, 나보다 나이가 훨 많은 사람들이 그러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돼?' '그냥 좋게좋게 받아들이시지요. 그만큼 마스터가 사람들을 끌어당긴 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별로 그런 거 필요 없어.' 그녀는 입을 삐죽이며 노트북을 덮고 일어났다. 피곤한 몸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켠 뒤 개인 연구실로 다시 돌아갔다. 기자 녀석 때문에 시 간을 많이 빼앗겼으니 오늘은 밤을 새렷다? 「소장님. 친구분이 찾아오셨는데요.」 내부 통신기에서 그녀 개인 비서의 음성이 울렸다. 예안은 안색이 환 해졌다. "들여보내세요." 「예.」 몇 분 정도 기다리니까 복도에서 누군가가 걷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 고 문이 열리고 한 소녀가 배시시 웃으며 들어왔다. "안녕?" "어서 와." 예안은 반갑게 웃으며 혜인을 껴안았다. 혜인보다는 키가 컸지만 그 렇게 큰 차이는 아닌지라 품에 쏙 안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뭐 남자 였을 때도 그다지 큰 체구는 아니었으니 상관없으려나. "뭐하고 있었어?" "일하고 있었지. 바빠 죽겠다 정말." "연구소장이라는 거 디게 바쁜 건가 보네? 영화 찍는 것보다 더 바 쁜 거야?" "어떤 의미에선 그래. 그리고 툭하면 테러한다 어쩐다 하는 사이코도 가끔 나오구 말이야. 이럴 땐 네가 톱 스타라는 게 좋긴 좋다. 네 주 변에서 알아서 너 경호해주니까 말이야." 올해로 열아홉이 된 혜인은 소녀의 이미지를 한꺼풀 벗어 던지고 성 숙한 여자로 거듭났다. 조금 더 커진 키하며, 보다 매혹적으로 변한 몸의 굴곡이 스크린에서의 그녀의 매력을 한층 돋워준다. 짧은 기간 동안 과할 정도로 분위기가 변한 혜인을 놓고 혹자는 그 녀가 가슴 아픈 사랑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분노하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미친 녀석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용서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혜인의 팬 홈페이지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예안은 움찔하곤 했 다. 그 미친 녀석이 다름 아닌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어 떤 반응을 보이려나. "유빈이는 지금 뭐해?" "자고 있어. 힘들어 죽겠다 야." "팔자에도 없는 엄마 노릇하려니까 힘들지?" "그렇게 웃지 마. 그런 쪽에서는 그래도 내가 너보다는 어른이라고." "잘나셨어요 정말." 혜인은 킥킥 웃으며 예안의 허리를 껴안고, 어깨에 머리를 묻으며 체 향을 맡았다. 백합물을 선호하는 남정네들이 보았다면 흐뭇한 웃음을 지었을 알콩달콩한 분위기였다. "소장님 잠깐 이것 좀…."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서던 남자 직원은 그대로 얼어버렸다. 예 안은 강아지처럼 찰싹 붙어 있는 혜인의 등을 어루만져주며 직원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나중에 이야기해요." "네, 네." 직원은 당황해서 물러갔다. 당장 내일 아침 출근할 때 연구소 직원들 이 어떤 눈으로 볼지 기대되지만, 정작 당사자는 흥미가 없었다. "근데 혜인이 너 남자친구는 안 만들어?" 그 말에 혜인은 품에서 떨어지며 눈을 흘겼다. "내가 그러길 원해?" "아니, 물론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됐어. 앞으로 그런 거 말하지 마." "…알았어." 모든 진실을 밝힌 후 혜인과 예전보다 더욱 돈독한(이라 쓰고 '므흣 한'이라고 읽는다) 사이가 된 건 좋다. 문제는 그녀가 자신에게 뭘 원 하는지 알면서도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끔 무모하리만치 자신에게 매달리는 혜인을 의식할 때마다 앞날이 뻔한데 계속 달려가야 하는가 하고 한숨을 내쉴 때가 있긴 했다. 그러나 그런 낌새를 보일 때마다 혜인은 아직 어린데 왜 그렇게까지 앞서나가서 걱정하느냐고 나무라곤 했다. "근데 이렇게 온 거 보면 영화 다 찍은 모양이야?" "응. 삼일 전에 촬영종료 파티했어." "언제 개봉해?" "다음 달 12일에 해. 4월 12일." "대박 나길 빌어줄게." "말로만?" 혜인은 뭔가를 바라는 눈치였다. 예안은 피식거리며 서랍에서 조그만 상자를 하나 꺼냈다. 상자는 곱게 포장되어 있었다. "자, 여기 선물." "고마워." 뛸 듯이 좋아하며 혜인은 선물을 풀어보았다. 새파랗고 조그만 보석 이 달린 목걸이였다. 파란 광택과 은색 목걸이줄이 아기자기한 조화 를 이루는 게 마음에 쏙 들었다. "이거 예쁘다. 네가 걸어주면 안 돼?" "응." 혜인은 긴 머리를 손으로 틀어쥐어 목걸이를 걸기 쉽게끔 했다. 예안 은 손을 머리 뒤로 돌려 가늘고 흰 목에 목걸이를 걸어준 뒤 살짝 입맞춤을 했다. "이건 서비스." "가, 간지러워!" 혜인은 깔깔거리며 예안을 밀쳐냈다. 건전한 이성애주의자가 봤다면 거참 잘하는 짓이다, 라고 혀를 찼겠지만, 백합물 선호자들에게는 더 할 나위 없이 흐뭇한 광경이었다. 예안은 일 때문에 바쁘니 저녁 때 다시 보자는 말로 혜인을 돌려보 냈다. 산더미처럼 쌓인 결재서류를 전부 처리하는 데에는 꼬박 네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서류의 대부분이 전산작업으로 처리됐기 망정이지, 전부 종이로 출력해서 도장을 찍었다면 종이 냄새에 질식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빈아. 오랜만에 집에 가자." 겨우겨우 일을 끝낸 그녀는 흐느적거리며 아이를 깨웠다. 유빈은 잠 에 취한 채 싫다고 떼를 부렸다. 결국 그녀는 녹초가 된 몸으로 아이를 품에 안고 연구소를 나섰다. 차를 대기시켜두고 기다리고 있던 니콜라스가 문을 열어주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피곤해 보여." "밀린 일이 많아서 그래. 저번 달에 유빈이랑 너무 많이 놀았잖아." 뒷좌석에 아이를 앉히고 안전벨트를 채워준 뒤 그녀는 조수석에 앉 아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입구에서는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고 별다른 절차 없이 통과시켰다. "세정 아주머니한테서 연락 왔어. 언제 한 번 보고 싶대." "응." "정호 아저씨가 부산에서 대뱃살 초밥 드시다가 체해서 병원에 실려 가셨대. 뭐 위험한 건 아니었대." 예안은 소리 죽여 웃어버렸다. "아빠도 참, 적당적당히 좀 드시지 왜 그랬대?" "요새는 해산물에 한창 맛을 들이셨나 봐. 다음 달에는 일본으로 출 국하신다고 하더라." "뭐 일본이 초밥 본고장이기는 하니까." 처음 그녀가 정체를 밝혔을 때, 맥은 정호가 부정적인 쪽으로 변하는 것을 우려했다. 알고 보니 자기 자식이 유전을 소유한 세계 제일의 천재 과학자에다가 한국 전쟁에서 일등 공훈을 세운 맥의 파일럿이 더라. 아무리 사람 좋은 인물이라 해도 충분히 눈이 뒤집혀 타락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호는 '살림이 나아졌으니 못했던 꿈을 이루겠다'고 선언했 을 뿐 향락을 즐기거나 하는 쪽으로 타락하지도, 거만한 인물로 변하 지도 않았다. 아빠가 못했던 꿈이 뭔가 궁금했던 예안은 미식가의 길이었다는 사 실을 알고 허탈했다. 기대했던 것에 한참 못 미치는 소박한 꿈에 맥 이 빠진 그녀는, 돼지고기를 먼저 평정하고 오겠다는 아빠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것이 바로 작년이었다. 창밖은 어느새 많이 어두워져 있었다. 부드러운 시트의 감촉에 몸을 묻은 채 그녀는 피로를 달랬다.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영 초 연참!!! 2004/11/27 RAGNAROK 헉....... 언제 다 읽지.... ㅠ.ㅠ 2004/11/27 디젤 아버님..살 찌시겠군요. 오랜만에 돈독한(!) 화였습니다. 백합소녀들....좋아라~ 백합녀들간의 귀여운 사랑다툼...정도의 서비스도 좋지않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쓰읍~(침 닦는 Sorry~) 2005/01/27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6/18 페이지 ▶ 274 - 평화수호자(9) [3] 실탄 2004/11/2614Kb 829 ▶ 273 - 평화수호자(8) [1] 실탄 2004/11/2612Kb 830 ▶ 272 - 평화수호자(7) [1] 실탄 2004/11/2612Kb 808 ▶ 271 - 평화수호자(6) [2] 실탄 2004/11/2616Kb 844 ▷ 270 - 평화수호자(5) [3] 실탄 2004/11/2613Kb 896 ▶ 269 - 평화수호자(4) [12] 실탄 2004/11/2612Kb 1004 ▶ 268 - 평화수호자(3) [9] 실탄 2004/11/2513Kb 944 ▶ 267 - 평화수호자(2) [9] 실탄 2004/11/2413Kb 908 ▶ 266 - 평화수호자(1) 종반부 시작 [6] 실탄 2004/11/2413Kb 986 ▶ 265 - 분수령에 서다(4) - 중반부 종결 [40] 실탄 2004/11/2321Kb 1156 ▶ 264 - 분수령에 서다(3) [13] 실탄 2004/11/2212Kb 997 ▶ 263 - 분수령에 서다(2) [9] 실탄 2004/11/2114Kb 958 ▶ 262 - 분수령에 서다(1) [8] 실탄 2004/11/2013Kb 963 ▶ 261 - 날개가 찢어진 천사(11) [7] 실탄 2004/11/1913Kb 935 ▶ 260 - 날개가 찢어진 천사(10) [7] 실탄 2004/11/1813Kb 827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2][3][4][5] 6 [7][8][9][10]▶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29912 :: 271 - 평화수호자(6) 실탄(cruel) 04-11-26 :: :: 16306 작년 가을, 정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드러내 보인 후 그녀는 이사를 결심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은 쓸데없이 화려하기만 할 뿐 보안에는 심각한 구멍이 있다는 앤드류의 충고를 받아들여서였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니콜라스가 자신이 있으니 이사까지는 안 해도 된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일은 상당히 진척 된 후였다. 새 집의 전반적인 설계와 기획은 앤드류가 맡았다. 그는 겨울에는 땅 이 얼어붙기에 공사를 할 수 없다는 주장도 묵살한 채, 특수발열장치 를 동원하면서까지 한겨울에도 공사를 강행했다. 집이 최종 완성되는 데에는 반 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새 저택은 시내에서 상당히 떨어진 교외 지역에 세워졌다. 인접지역 에 인가는 별로 없었지만, 그렇다고 교통이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집의 위치를 둘러본 뒤 예안은 무척 흡족해했다. 외곽 담의 가로세로가 각각 300미터에 달하는 정사각형 형태였으며, 대각선이 교차하는 중심지에는 5층 저택이 있었다. 네 귀퉁이 근처에 는 각각 감시초소가 세워져 혹시라도 모를 외부에서의 침입을 철통 같이 방어했다. 지하벙커는 물론이요, 특별히 정부의 허가를 받아 미사일 요격 시스 템과 자동화기까지 설치한, 거의 소규모 군사기지 수준의 방어력을 갖춘 저택이었다. "도착했어." 육중한 철문이 미끄러지듯이 열린 사이로 차를 달려 저택 현관 앞까 지 당도한 뒤 니콜라스는 예안을 흔들어 깨웠다. 눈을 비비며 일어난 그녀는 조수석에서 내리고 뒷문을 열어 잠든 아 이를 꺼냈다. 넓은 실외 수영장을 천천히 둘러보며 걷던 그녀는 손가락을 딱 튕겨 소리를 냈다. "왜 그래?" "여기 수영장 밑바닥에 맥을 숨겨놓으면 딱인데 말이야. 긴급할 때 수영장 물이 빠지고 안에서 맥이 튀어나오면 상당히 그림이 될 것 같지 않니?" "유빈이가 그렇게 해달라고 졸랐구나. 그러니까 어린이 만화는 보여 주지 말라니까." 나이가 오십 줄에 접어든 집사가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집안을 청 소하는 등의 일을 하고 있던 고용인들이 그들에게 꾸벅 인사했다. 모 두 정부 차원에서 엄격한 심사를 거친 뒤에 고용된 인물들이었다. "진시월씨께서 와 계십니다." "아, 그래요?" 예안은 아이를 안은 채 시월이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갔다. 심심한 듯 앉아 있던 그는 그녀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응, 꽤 오랜만이네." "디게 많이 피곤해 보인다. 나 아무래도 괜히 왔나 보네." "아아, 괜찮아 괜찮아." 예안은 미안해할 것 없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불편한 듯 집안을 둘러보던 시월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여기 처음 오는 건 아니지만 올 때마다 도저히 적응이 안 돼." "왜에? 집이 커서? 근데 너네 집도 꽤나 부자지 않아?" "그런 의미가 아니야. 정문을 통과할 때마다 저기 어딘가에 자동화기 나 요격 미사일이 숨겨져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 등에서 진땀 이 흐른다구. 갑자기 컴퓨터가 미쳐서 나한테 총탄을 마구 날릴지도 모르잖아?" "5겹으로 철저히 방어되는 거니까 괜찮아. 침입자 사살보다는 내부인 보호에 더 중점을 뒀거든." 잘도 이런 집에서 사는 구나, 하고 시월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처음 김재호의 생일 파티장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났을 때만 해도 그 녀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 전혀 몰랐다. 그냥 어느 재벌가의 곱 게 자란 아가씨 정도로만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천재 과학자란다. 그것도 맥이라는 괴물을 한국 정 부에 팔아서 유전까지 받아낸 세계 제일의 거부란다. 그쯤만 해도 충분히 놀라서 턱이 빠질 지경인데 한일전쟁, 한미전쟁 에서 막대한 공훈을 세워 갖은 훈장은 물론이요, 현직 해군대장이기 도 한단다. 이런 화려한 경력 앞에서 '신 국립과학연구소장'이라는 명함은 오히 려 빛을 잃을 정도였다. 처음에 그녀에게 연심을 품지 않고 있었다면 거짓말이었다. 일단은 친구로서 접근한 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사이가 좀더 깊어지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지금, 그는 자신의 마음을 거의 포기 한 상태였다. 뭐 친구로 남는 것도 나름대로 좋긴 하다만. "학교는 잘 다니고 있어? 경영학과 다닌다고 했지?" "응. 근데 숫자 놀이 때문에 장난 아니게 머리가 아파. 그 놈의 수학 이 싫어서 문과로 왔는데 대학에서도 숫자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게 너무 싫어." "경영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너네 아버지가 유한생명에 근무하신다 고 하셨던가?" "뭐, 그렇긴 해." 시월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예안과 시월은 적대 관계라 할 수 있었다. 작년에 그녀가 수백 조 가량의 돈을 내다버리 면서까지 유한전자를 강제 쟁탈했기 때문이었다. 무리한 M&A의 후유증으로 유한전자의 가치는 급락했고, 가장 커다 란 계열사를 잃은 유한그룹은 하마터면 연쇄 부도까지 갈 뻔했다. 김성후 회장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해 그룹 전체가 휘청거리는 것 만큼은 막았다. 하지만 한국1위의 기업이라는 타이틀은 이미 대성그 룹에 넘겨줘 버린 뒤였다. "김재호가 지금 장난 아니라고 하던데? 너한테 유한전자 뺏기고 거 의 반쯤 폐인처럼 살다가 지금 눈에 불을 켜고 유한전자 되찾으려고 난리라고 하더라." "지금 유한전자를 되찾아서 뭐하려고? 그때 회사 브랜드 가치가 엄 청 폭락하지 않았어?"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맥을 건조한 신 국립과학연구소장이자 유전의 소유주인 서예안 해군 대장'이 유한전자를 강탈했다는 소문이 퍼진 후 사람들 인식이 오히려 그전보다 훨씬 좋아져버렸다고." 잠에서 깬 아이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시큰둥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갖고 싶어할 정도로 유한전자가 뭔 가 알맹이가 있는 회사였다 이런 소리?" "요약하자면 그렇지." "아예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 다 하고 있네. 기가 막혀서 참." 그 잘난 체 하기 좋아하고 오만한 김재호가 한때 폐인으로까지 전락 했다니, 무척 고소했다. 가능하면 한 번쯤 그 꼬라지를 봐두고 싶었 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유빈아, 깼어? 배고프니? 젖 줄까?" 아기의 동글동글한 눈망울 언저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는 살짝 뽀뽀를 했다. 다정하기 이를 데 없는 모자를 바라보던 시월은 속으로 쓴웃음 을 지었다. 채팅으로만 알고 지내던 시절, 그녀가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던 '우리 아기'라는 녀석이 정말 존재하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자신이 트루먼 쇼의 주역이라도 된 줄 착 각하기도 했다. "유빈이 깼으니까 나 그만 가봐야겠다." "어, 왜? 더 놀다 가지?" "넌 잘 몰라서 그렇지만 저 녀석 지 엄마 독점욕이 대단하다고. 네가 잠깐만 자리 비우면 난 쟤 등쌀에 시달려 죽는단 말이야." "에이, 거짓말하지 마. 우리 아이가 얼마나 착한데 그런 모함을 하고 그래?" "모함이 아니라는 걸 증명할 길이 없어 안타깝다." 영악하기 그지없는 눈빛을 갈무리한 순진한 눈망울을 지그시 노려보 던 시월은 배웅은 필요 없다 말하고 집을 나섰다. 창고에서 소총을 꺼내온 니콜라스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탁자 위 에 그것을 늘어놓고 해제한 뒤 부품을 하나하나 닦았다. "총 손질 하는 중이야?" "응." "근데 왜 여기서 해? 유빈이가 그거 보고 자꾸만 총 배우고 싶다 어 쩐다 소리하잖아?" 그녀가 짐짓 나무라는 투로 말하자 니콜라스는 총을 닦는 것을 멈추 고 빤히 바라보았다. "나 솔직히 걔가 총 쏘는 법 배웠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기가 막혔다. "뭐어? 무슨 소리야?" "걔가 은근히 사격에 소질이 있더라고. 어렸을 때부터 잘만 훈련시키 면 나를 능가하는 청부업자가 될 지도 몰라." '벌써부터 후계자감을 탐색하고 다니는군요. 과연 세계 제일의 청부 업자답습니다.' '시끄러. 넌 좀 빠져.' 맥에게 면박을 준 뒤 그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유빈이는 총의 ㅊ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 도록 키울 거란 말이야." "그건 문맹이잖아." 잠시 말문이 막혔던 그녀는 얼굴이 빨개진 채 외쳤다. "아, 어쨌든! 빨리 총 가지고 네 방으로 가! 그리고 좀 있다가 유빈이 할머니한테 갈 거니까 준비해두고 있어." "지금 이 시간에? 너무 늦었지 않았어?" "오늘이 아니면 언제 볼지 모르니까 그렇지." 머리를 긁적이며 부품들을 수거한 니콜라스는 터덜터덜 자신의 방으 로 올라갔다. 아이의 미래를 검게 물들일 사악한 마수를 제거했다는 사실에 그녀 는 작게 안도했다. 엄마 품에서 빤히 엄마 얼굴을 올려다보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엄마. 나도 총 갖고 싶어." 그녀는 기절초풍했다. 가까스로 쓰러질 뻔한 몸을 유지한 그녀는 짐 짓 말투를 엄하게 하고 나무랐다. "안 돼. 총은 위험해서 안 돼." "그래도 갖고 싶어." "아 글쎄 총은 안 된다니까. 안 된다는 건 절대 안 되는 거니까 떼 쓰지 마." "갖고 싶어." 떼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울음을 터트리는 것도 아니다. 엄마를 똑 닮은 녹색 눈동자로 빤히 쳐다보며 해달라는 말만을 평온하게 반복 한다. 바로 유빈이 뭔가를 진심으로 하고 싶을 때 즐겨 쓰는 패턴의 1단계였다. 평소 아이에게 홀딱 넘어간 채 살고 있는 그녀는 웬만한 것들은 죄 다 들어주는 편이었다. 비행기 쇼가 보고 싶다는 한 마디에 군에 압 력을 넣어 전투기 묘기 쇼까지 벌였을 정도였으니. 물론 대외적으로 는 군사 훈련 핑계를 댔고 군비는 사비로 충당했다. 하지만 총을 배우는 것만큼은 절대 안 되었다. 나중에 나이를 좀 먹 어서 취미로 사격을 배운다는 거라면 모를까, 벌써부터 니콜라스와 죽이 맞아서 둘이 총 쏘고 사람 잡으러 다니는 꼴은 두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볼 수 없었다. '이게 다 니콜라스 그 녀석 때문이야.' 틈만 나면 유빈의 신체구조를 유심히 살피는 니콜라스를 떠올리며, 그녀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본래 니콜라스는 유빈이 그녀의 애정을 독차지한다 여기고 상당히 질투하는 편이었다. 지금이야 웃어넘기지만, 유빈이 갓난아기였을 때 에는 이마에 총구를 들이대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얼마 전 일어난 가벼운 발포 사고가 유빈에 대한 니콜라스의 마음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았다. 평소처럼 총을 분해해 손질하고 난 뒤 다시 재조립한 니콜라스는 잠 시 바람을 쐬러 나갔다. 근처에서 위험한 낌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 기에 그는 총을 탁자에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때 한창 걸음마에 재미를 붙인 유빈은 안방에서 엄마 옆에서 자다 가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는데, 아 글쎄 테이블에 놓인 총에 마음이 끌렸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어린 아이 눈에는 검은 총신의 매끄러운 선이 미녀의 허벅지보다 더 매혹적이었을 터였다. 어쨌든 총을 들고 신기해하던 아이는 십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고급 도자기를 향해 한 번 쏴보았다. 이 깜찍한 작은 악마가 노 린 목표는 눈 튀어나오게 비싼 도자기가 아니라, 도자기 위에 아슬아 슬하게 놓인 '턱이 빠지게 비싼' 보석 목걸이였다. 덕분에 엄마가 애인에게 선물하려고 비행기 타고 직접 오지로 날아 가 원석을 구하고 보석 가공술을 익히면서까지 만든 필살의 작품이 산산조각 나버렸다.(목걸이의 주인이 남자가 아니라는 것만은 살짝 귀띔해둔다.) 바람을 쐬고 돌아온 니콜라스는 그 광경을 보고 놀랐다. 그 이후 니 콜라스는 어떻게 하면 누나를 설득해 유빈이 요놈을 자신의 후계자 로 삼을지 그것만을 고심하게 되었다. 짧게 요약하자면, 셋이서 아주 재미있게 알콩달콩 잘 살고 있다 이 소리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렴." 거실에 모여 있던 세정의 가족들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려워 하는 얼굴로 예안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유빈은 한결 또렷해진 발음으로 세정에게 인사했다. 세정은 푸근한 웃음을 띠며 아이를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쪽 구석에 어색하게 서 있던 우성이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누나, 안녕?" "응. 잘 지냈어?" "어." "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니?" 마리가 나무라듯 말하자 예안은 웃음을 띠며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다." "그러게. 정말 얼굴 보기 힘들다. 신국립과학연구소장과 해군대장을 동시에 지내고 있는 사람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가 봐?" "그거 비꼬는 거 아니지?" "설마. 자랑스러워하는 거야. 친구들에게 너랑 아는 사이라고 막 말 하고 싶어 죽겠는 거 억지로 참고 있는 거 알기나 하니?" 작년, 예안이 자신의 정체를 공식 발표한 후 그녀를 대하는 세정들의 태도는 확 변했다. 미혼모 혼자 아이 키우는 건 어려우니 우리가 도 와줘야 한다 생각하고 있었던 그들 입장에서 예안의 정체는 경악스 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예안도 그들이 얼마나 무안해했을지 충분히 이해했다. 그녀는 그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었고, 결국 겨울이 한 번 지나가고 난 즈음에는 예전과 흡사할 정도로 어색한 관계가 회복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세정의 가족들과 아는 사이라는 것을 세상에 밝히길 원치 않았다. 그들에게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해서이기도 했고, 유빈의 존재가 밝혀지는 것이 꺼려서이기도 했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 그들은 세상은 물론이요, 지인들에게까지 철저히 비밀을 지켰다. 덕분에 한 번 만나러 올 때마다 이렇게 밤을 타서 몰래 움직여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양자가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를 하던 예안은 새벽이 되자 그만 가봐야겠다 며 일어났다. "밤도 늦었는데 그냥 자고 가지 그러니?" "일이 있어서 안 돼요. 저 많이 바쁘거든요." "응. 그래. 그럼 다음에 또 오렴. 유빈이도 할머니 보러 또 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이가 알아들을 리 없지만, 세정은 푸근히 웃으 며 아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피곤한 눈으로 안전벨트를 메는 그녀를 안쓰러운 듯 바라보던 니콜 라스는 이윽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냥 내일 이후로 시간 잡지 그랬어? 디게 피곤해 보이는데. 게다가 몇 시간 있지도 못하고 말이야." "내일부터는 엄청 바빠서 시간 낼 수가 없거든." 그녀는 피곤하면서도 기분 좋은 얼굴을 한 채 중얼거렸다. "그래도 할머니 무척 좋아했지? 유빈이도 할머니 좋아했고 말이야." "기분 좋은 모양이네." "당연하잖아. 손자하고 할머니가 사이 안 좋으면 그 사이에 낀 내가 얼마나 불편한지 알아?" "어린 손자와 할머니 사이가 안 좋은 경우도 있어?" 집으로 향하는 내내 그녀는 아이를 껴안은 채 히죽 웃기만 했다. 이 제 또 내일이면 방송국에서 보낸 기자들이 자신의 귀가를 눈치채고 인터뷰에 응해달라고 불같이 초인종을 눌러댈 테지만, 집 근처 주차 장이 각계각층 인물들의 고급 자동차로 가득 찰 테지만, 아이를 데리 고 엄마를 만나러 갔다가 돌아오는 지금은 행복하기만 했다. 혜인을 제외하고 고등학교 친구들과는 거의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어차피 과거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현재 행복할 수 있는 요건을 갖 추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갑자기 니콜라스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덕분에 그녀의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무, 무슨 일이야?" 그녀는 놀람을 추스르고 아이를 달래며 물었다. 니콜라스는 총을 꺼 내 실탄을 장전하고 차문을 열었다. "앞에 누가 쓰러져 있어." "근데 총은 왜 들고 나가?" "함정일지도 모르니까. 누나는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 절대 문을 열 면 안 돼." 조금 긴장한 채 그녀는 끄덕였다. 다이너마이트를 밟아도 끄떡없는 방탄차이니 안에 타고 있으면 안전할 것이다. 총을 든 니콜라스는 차 진로를 가로막은 채 쓰러져 있는 여자를 향 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엎어지듯 쓰러져 있어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전체적인 몸맵시는 미인형에 가까웠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결 고운 금발이 가녀린 인상 을 더욱 돋보여주는 느낌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감각을 곤두세웠다. 여자의 맥박과 호흡 주기를 신중히 체크했다. 이윽고 그는 총을 내렸다. 여자는 정말 기절해 쓰러져 있는 것이었 다. 기절한 척하면서 이쪽의 목숨을 노리는 것이라면 응당 그에 걸맞 는 살기가 느껴져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다. 다른 사람이 여자를 미끼로 자신들을 노리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그 렇다면 주변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느껴져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게 없 기 때문이었다. "이봐. 일어나. 여기서 뭐해?" 니콜라스는 여자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여자는 반응이 없었다. "무슨 일이야?"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예안이 아이를 안고 나왔다. 아이는 큼지막한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며 쓰러져 있는 여자를 살폈다. "어디를 다쳤던가 아니면 배가 고파 쓰러졌던가 둘 중 하나인 것 같 아. 어떻게 하지?" "음…." 망설이던 그녀는 할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집으로 데려 가자." "병원에 데려다주는 게 아니고?" "의사한테 빨리 보여주는 게 나아. 로버트 씨한테 보여주면 되겠지." 자신의 전용 주치의에게 보여줘야겠다 생각한 그녀는 니콜라스를 시 켜 여자를 뒷좌석에 눕혔다. 여자를 눕히고 나오려던 니콜라스는 그제야 여자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새하얀 뺨과 오똑한 콧날, 붉은 입술. 눈이 감겨 있어 어떤 눈동자를 가졌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충분히 미인이라 불릴 법 한 여자였다. 묘한 끌림을 느낀 그는 좀더 자세히 여자를 들여다보았다. 예쁘게 생 겼다는 사실이 아닌 기묘한 무언가가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왜 그래?" 예안이 의아한 어조로 묻자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뒷문을 닫았다. 그때까지도 여자는 깨어나지 않았다. 차는 집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중간에 시간을 지체했던 터라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새벽 3시가 넘은 상태였다. 방에서 달게 자고 있던 로버트는 환자가 있다는 예안의 부름에 황급 히 가운을 걸치고 의료가방을 들고 뛰어나왔다. "어떻게 된 건가요?" 신중히 환자를 진찰하며 로버트가 물었다. "글쎄, 저도 모르겠어요. 집에 오는 길에 쓰러져 있던데 아무래도 다 른 병원에 데려가는 건 좀 늦을 듯해서 일단 로버트씨에게 데려온 거거든요." "별 외상은 없습니다. 영양실조인 듯 하군요." "영양실조요?" "일단 영양주사를 놓겠습니다. 니콜라스씨, 환자를 적당한 방에 데려 다 눕혀주시겠어요?" 니콜라스는 끄덕이고 여자를 가볍게 들어올렸다. 어린아이 같지 않은 힘에 로버트는 혀를 가볍게 차며 구경했다. 그가 평범한 소년이 아닌 최고급 경호원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데도, 볼 때마다 자꾸 놀 라게 된다.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마기 의료가방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 같은데요. 예안의 집 정도면 종합병원 수준의 시설을 갖춘 의무실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듯.. 지나가는 소리였습니다. 2004/11/27 디젤 쯥...니콜라스는 나이 몇개나 됐다고 벌써 후계자를 키우려다니... (아~ 태클은 아니고 농입니당~ㅋㅋ) 오오~ 유빈이가 조금 커서 니콜라스와 한조를 이루는 멋진 느와르를 만들어내는것도 멋지겠는걸요~ 사제지간도 우정도 뛰어넘은...WHY물을 약간 곁들인....ㅋㅋ 2005/01/27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6/18 페이지 ▶ 274 - 평화수호자(9) [3] 실탄 2004/11/2614Kb 829 ▶ 273 - 평화수호자(8) [1] 실탄 2004/11/2612Kb 830 ▶ 272 - 평화수호자(7) [1] 실탄 2004/11/2612Kb 808 ▷ 271 - 평화수호자(6) [2] 실탄 2004/11/2616Kb 846 ▶ 270 - 평화수호자(5) [3] 실탄 2004/11/2613Kb 896 ▶ 269 - 평화수호자(4) [12] 실탄 2004/11/2612Kb 1004 ▶ 268 - 평화수호자(3) [9] 실탄 2004/11/2513Kb 944 ▶ 267 - 평화수호자(2) [9] 실탄 2004/11/2413Kb 908 ▶ 266 - 평화수호자(1) 종반부 시작 [6] 실탄 2004/11/2413Kb 986 ▶ 265 - 분수령에 서다(4) - 중반부 종결 [40] 실탄 2004/11/2321Kb 1156 ▶ 264 - 분수령에 서다(3) [13] 실탄 2004/11/2212Kb 997 ▶ 263 - 분수령에 서다(2) [9] 실탄 2004/11/2114Kb 958 ▶ 262 - 분수령에 서다(1) [8] 실탄 2004/11/2013Kb 963 ▶ 261 - 날개가 찢어진 천사(11) [7] 실탄 2004/11/1913Kb 935 ▶ 260 - 날개가 찢어진 천사(10) [7] 실탄 2004/11/1813Kb 827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2][3][4][5] 6 [7][8][9][10]▶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29913 :: 272 - 평화수호자(7) 실탄(cruel) 04-11-26 :: :: 11652 로버트는 여자에게 몇 가지 조치를 해주었다. 이대로 둬도 괜찮을 테 니 안심하라는 말을 듣고 예안은 자러 갔다. 그날 밤 니콜라스는 정원에 마련한 사격장에서 소음기를 장착한 총 으로 사격 연습을 했다. 핑. 핑. 핑. 세 발의 탄환이 발사되었고, 나무토막에는 정확히 세 개의 구멍이 일 직선으로 뚫렸다. 구멍간의 간격은 자로 잰 듯이 정확했다. 실로 혀 가 내둘러질 정도로 놀라운 사격 실력이었다. "이번엔 좀 다른 걸 해볼까." 총을 집어넣은 그는 몸을 살짝 비틀며, 검지손가락을 세운 오른손을 정면으로 쭉 뻗었다. 검지손가락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늘고 긴 섬광이 번개같이 발사되었다. 탄환 세례로 구멍이 나 있던 나무토막은 순식간에 불에 타 재가 되었다. 별로 강한 위력은 아니었지만 그는 만족했다. 그는 지금 파워가 아닌 정확도를 연습하는 중이었다. 그는 비밀창고에서 소형 자동화기를 꺼내왔다. 비밀 브로커를 통해 개조한 물건으로서, 군대에서는 거저 줘도 쓰지 않는 모델이었다. 소 음을 최대한 줄이려다 보니 탄환의 파괴력과 연사 속도가 본래의 위 력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했다. 에날도스를 연습하기 위해서 는 이보다 더 좋은 무기가 없었다. 특수 콘크리트 벽 쪽으로 탄환이 발사되도록 방향을 조정한 뒤 그는 콘크리트 앞에 섰다. 그리고 원격 장치로 자동화기를 작동시켰다. 드드드드드! 총성이 쏜살같이 울렸다. 소음기를 거쳤다고는 하지만 제법 큰 소리 였다. 니콜라스는 미리 응축한 에날도스를 외부로 발출해서 하나의 벽을 형상화했다. 그의 눈앞에 팔각형 모양의 투명한 벽이 형성되었다. 초 당 수십 발씩 발사되는 탄환은 벽 위를 강하게 때려댔다. 지직. 지지직. 벽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좀더 힘을 불어넣었 다. 금이 갔던 부분이 상처가 아물 듯이 다시 달라붙었다. 탄환이 그 위를 다시 때려 또 금을 만들었다. 그가 힘을 불어넣자 다시 금이 사 라졌다. 탄환은 빗발치듯 계속 쏟아졌다. 그는 이를 악물며 몸을 움츠렸다. 하나 둘씩 에너지 벽에 구멍을 뚫고 콘크리트 벽에 박히는 탄환의 개수가 늘어났다. 어깨 옆과 머리 위를 탄환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최대한 몸을 움 츠리며 에너지 벽의 크기를 줄였다. 밀도가 높아지자 탄환은 더 이상 벽을 뚫지 못했다. 이윽고 탄환이 떨어진 자동화기는 자연스럽게 연 사를 멈추었다. "휴우."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에너지 벽을 해제했다. 자칫하다가는 죽겠다고 예안이 질색하며 말리는 방식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이 훈련 방식을 고집했다. 위험을 항상 옆에 두어야만 계속 감각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응?" 자동화기를 주섬주섬 정리하던 그는 사람의 그림자가 정원에 나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까 저녁에 길에서 주웠던 바로 그 여자였다. '정신이 들었나?' 그는 습관적으로 총알을 장전한 뒤 뒤에 감추고 여자를 향해 다가갔 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여자는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회색빛 공허함이 깃들인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누나와는 다른 의미에 서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눈빛에 그는 호기심이 동했다. "정신이 들었어?" "…." "왜 그런 곳에 쓰러져 있었지?"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니콜라스를 주시했다. 반말 듣는 게 기분 나빠서라고 해석한 니콜라스는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난 원래 말투가 이래.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으니 네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 "여기가… 어디죠?" 비로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무척 듣기 좋은 미성이었다. "뭐, 일단은 경기도라고 할 수 있으려나? 근데 수도하고 별로 가깝지 는 않아." 여자의 눈동자는 공허했다. 흡사 백지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모든 것이 지워진 것이 아닌, 처음부터 아무것도 써넣지 않은 백지를. 니콜라스는 신기해하며 여자를 찬찬히 주시했다. "네 이름은 뭐지?" "내… 이름?"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이름이 뭔지 기억 못한다기보다 는, 이름 같은 것이 있었나 하고 고민하는 듯한 태도였다. 니콜라스는 더욱 의구심을 느꼈다. "나이는? 살았던 곳은? 기억나는 사람이나 지역은? 아무것도 없어?" "없…어요." 머리를 움켜쥔 채 여자는 대답했다. 억지로 성대를 쥐어짜는 듯, 거 의 흐느끼는 듯한 음성이었다. 나름대로 이 여자에게도 사연이 많은가 보다라고 생각한 니콜라스는 추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동시에 골치가 아파 왔다. '기억상실 같은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여자를 이곳에 함부로 둘 수는 없다. 하지만 기억상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는 여자의 처지가 남의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여자의 등을 떠밀었다. "피곤해 보이는데 일단 자도록 해.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 자고." 여자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셔츠에 손을 가져갔다. 단추가 풀 어지고, 옷섶이 벌어지고, 새하얀 가슴이 조금씩 드러났다. 니콜라스는 당황했다기보다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여자를 질책하듯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나… 하고 싶어… 사랑해요… 빚이 있어… 아버지가 고통…. 도망치 면 비참한 죽음을 당해요…." 여자는 계속해서 옷을 벗으며 더듬더듬 말했다. 그러나 문장의 앞과 뒤가 제대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새 여자는 알몸이 되었다. 무릎을 꿇은 여자는 니콜라스의 다리 를 소중한 듯 감싸며 가슴을 비벼댔다. 어찌 보면 발정난 암캐 같아 보인다. 하지만 공허함이 깃든 눈동자를 볼 때 여자 자신의 의지로 이렇게 된 게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세뇌라도 당한 매춘부였나?' 신빙성이 있는 추리였다. 근래 들어 부녀자들을 납치해 세뇌를 시킨 다음 매춘사업을 벌이는 세력도 속속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였으니. 과학의 발달이 가져온 또 다른 폐해였다. 어쩌면 이 여자는 더 이상 손님을 받을 수 없게 되어 버려진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니콜라스는 좀더 표정을 부드럽게 하고 여자 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억지로 옷을 입혀주었다. "이봐." "네?" "앞으로 내 명령 없이는 아무한테도 이런 짓을 하면 안 돼. 알았어?" 니콜라스는 맨살이 드러난 여자의 어깨를 양손으로 짚으며 힘을 담 아 명령했다. 피부가 닿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 최면을 걸 수 있는 그이다. 여자는 대번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빨리 들어가서 자." 함부로 최면을 걸어버린 게 다소 미안했지만 세뇌로 피폐해진 정신 을 지닌 여자라면 차라리 이렇게 하는 게 나았다. 여자가 들어간 뒤 니콜라스는 자동화기를 창고에 넣기 위해 힘껏 들 었다. "!" 순간 어딘가에서 은밀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흠칫 놀랐지만 전 혀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천천히 자동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옆에 놓인 정비장치를 들고 태연히 자동화기를 살펴보았다. 어 디 불발탄이 끼어 있는 것은 아닐까, 녹이 슬어 잘 회전하지 않는 것 은 아닐까. 정말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신중하게 살펴보면서, 안심한 듯 다시 움직이는 기척의 위치를 추적했다. "휴, 됐다." 정비를 다 끝낸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감탄사를 내뱉은 그는 다시 자 동화기를 집어들고 움직였다. 창고 쪽으로 향하자 인기척은 안심한 듯이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겁도 없군.' 이 시간에 이 집에 몰래 숨어 들어왔다면 이유는 뻔했다. 예안을 납 치해서 어느 나라로 데려가 강제로 무기개발을 시킨다든가 하는 거 창한 이유에서부터 시작하여 약탈결혼이라는 황당한 이유까지. 요격 미사일은 물론이요, 곳곳에 자동화기 시스템이 설치된 정원을 뚫고 현관까지 당도한 것을 보면 보통 대단한 첩보원은 아닌 모양이 었다. 1층 거실에 들어선 인기척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조심스럽 게 투시안경을 들어 살폈다. 레이저 빔 장치라든지 하는 것이 설치돼 있지 않나 주의하는 신중함에, 숨어서 보고 있던 니콜라스는 하마터 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이 집은 정문과 외벽, 그리고 정원에는 무수한 트랩들이 설치돼있지 만 정작 저택에는 간단한 알람 장치밖에 설치돼있지 않았다. 녀석은 그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아무런 트랩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침입자는 조심스럽게 2층 을 향해 올라갔다. 니콜라스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누나 방은 1층인데?' 보통 1층부터 뒤지는 게 상식 아닌가, 하고 중얼거리며 니콜라스는 기척을 지우고 침입자를 따라갔다. 2층 복도에 올라선 침입자는 투시안경으로 다시 한 번 살핀 뒤 방문 을 하나 하나 열어보았다. 문을 열기 전에 귀를 대어 안에 사람이 있 는지 없는지, 있다면 깨어 있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어?' 여자가 자고 있는 방문까지 당도한 침입자는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니콜라스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서둘러 방문 옆으로 가 벽에 몸을 붙이고 방안을 살폈다. 침대에서는 여자가 쌔근쌔근 잘 자고 있었다. 아기처럼 순수해 보이 는 얼굴이었다. 침입자는 침대 머리맡에 서서 잠시 여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이 윽고 뭔가를 꺼냈다. 언뜻 보기에 휴대형 소형 확성기처럼 보이는 기 기장치였다. "일어나." 단말기를 거친 음성이 조용히 울렸다. 여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 침입자는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래도 여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 야 남자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들고 있던 가방을 옆 에 내려놓고 열었다. 가방 안에서 청진기를 비롯한 의료도구를 꺼내 침입자는 여자를 진 찰하기 시작했다. 바로 붙잡으려고 준비하던 니콜라스는 좀더 지켜보 기로 했다. 이윽고 진찰을 마친 침입자는 통신기를 꺼냈다. 주변을 조심스레 살 핀 침입자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상하게 움직이지 않습…. 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만 이 대로는 증거가 남…. 알겠습니…." 목소리가 지나치게 작았던 탓에 청력이 좋기로 유명한 니콜라스조차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드문드문 알아들은 말로 침입자의 정체 와 목적을 알아차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침입자는 가방에서 투명한 약물이 담긴 약병을 꺼냈다. 그것의 정체 를 알아본 니콜라스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화이트 데빌!' White devil, 마피아들이 시체를 빠른 속도로 제거하기 위해 즐겨 쓰 는 악마의 약물이었다. 살아있는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간에 유기물질은 저것에 닿으면 그대로 녹아 없어진다. 흔적은 남지만 유전자 채취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져 버리기에 증거를 없애기에는 더 없이 좋은 약품이었다. 단, 효과가 뛰어난 만 큼 값도 눈이 빠지게 비싸 웬만큼 큰 조직에서도 쉽게 사용하지 않 는 약품이었다. 1회분에 500만 달러나 하는 약품이니. 아무튼 이것만은 확실했다. 저 여자는 화이트 데빌을 쓰면서까지 없 애야 할 중대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침입자가 몸담고 있는 조직은 화이트 데빌을 취급할 정도로 대규모라는 사실. 니콜라스는 주저 없이 나섰다. "움직이지 마." 뚜껑을 열려던 남자는 흠칫 놀라 정지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지? 몰라도 할 수 없어. 섣부른 짓은 하지말고 무기를 내려놔라. 지금부터 셋을 세겠어. 하나, 둘…." "항복." 침입자는 재빨리 약병과 무기를 내려놓고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호오? 나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모양이네?" "이 바닥에서 당신 이름을 모르는 머저리는 없으니까." 어쩐지 비아냥거리는 것으로 들렸다. 두려움이 전혀 담기지 않은 음 성이었기 때문이었다. 기분이 몹시 상한 니콜라스는 남자의 양어깨에 총탄을 쏘았다. 소음 기를 박차고 나간 총탄은 조준점에 정확히 박혔다. 남자는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런 게 어딨어? 항복했는데 총을 쏘다니…." "죽이지는 않았잖아."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는 음성에 더욱 화가 난 그는 퉁명스럽게 말 을 받았다. "말해. 너는 누구고 왜 여기에 온 거지? 그리고 저 여자 정체는 대체 뭐고?" "말해줄 것 같아?" "말 안 하면 넌 죽어." "죽음 따윈 두렵지 않아." 허세가 아니었다. 일말의 두려움도 떠올라 있지 않은 냉정한 눈빛이 그것을 증명했다. 니콜라스는 더욱 기분이 상했다. 남의 목숨을 거두는 일을 한다고 해 서 자기 자신의 목숨까지 하찮게 여기는 사람은 그가 혐오하는 것 중 하나였다. "어디 법원에 가서도 그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지 두고 보겠어." "미안하지만, 난 법원에는 가지 않아." 마지막 오기를 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남자를 포박하려던 니콜라스의 뇌리를 퍼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황급히 남자의 양팔꿈치를 쏘아 행동불능으로 만들려 했다. 그러나 남자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남자는 어깨에 총알이 박혀 움직 임이 부자유스런 팔을 억지로 움직여 화이트 데빌의 뚜껑을 열었다. 한 발의 총알이 그의 왼팔에 박혔다. 나머지 한 발이 오른 팔꿈치를 망가뜨리기 직전 그의 손목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촤악. 하얀 약물이 허공에 분수처럼 뿌려졌다. 남자는 만세를 부르려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약물은 그의 얼굴에서부터 어깨까지 넓게 덮었다. 치지직 하고 살이 타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육신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손톱 만한 기름덩어리가 남아 있는 바닥을 바라보며 니콜라스는 눈 만 껌벅였다.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디젤 그레이트!!!! 멋드러지게 재밌게 보고있습니다. 근데...저 처자의 이름은 뭐로 하실런지...ㅋㅋ 오랜만에 여자 캐릭터 하나 추가요~ 2005/01/27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6/18 페이지 ▶ 274 - 평화수호자(9) [3] 실탄 2004/11/2614Kb 829 ▶ 273 - 평화수호자(8) [1] 실탄 2004/11/2612Kb 830 ▷ 272 - 평화수호자(7) [1] 실탄 2004/11/2612Kb 810 ▶ 271 - 평화수호자(6) [2] 실탄 2004/11/2616Kb 846 ▶ 270 - 평화수호자(5) [3] 실탄 2004/11/2613Kb 896 ▶ 269 - 평화수호자(4) [12] 실탄 2004/11/2612Kb 1004 ▶ 268 - 평화수호자(3) [9] 실탄 2004/11/2513Kb 944 ▶ 267 - 평화수호자(2) [9] 실탄 2004/11/2413Kb 908 ▶ 266 - 평화수호자(1) 종반부 시작 [6] 실탄 2004/11/2413Kb 986 ▶ 265 - 분수령에 서다(4) - 중반부 종결 [40] 실탄 2004/11/2321Kb 1156 ▶ 264 - 분수령에 서다(3) [13] 실탄 2004/11/2212Kb 997 ▶ 263 - 분수령에 서다(2) [9] 실탄 2004/11/2114Kb 958 ▶ 262 - 분수령에 서다(1) [8] 실탄 2004/11/2013Kb 963 ▶ 261 - 날개가 찢어진 천사(11) [7] 실탄 2004/11/1913Kb 935 ▶ 260 - 날개가 찢어진 천사(10) [7] 실탄 2004/11/1813Kb 827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2][3][4][5] 6 [7][8][9][10]▶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29914 :: 273 - 평화수호자(8) 실탄(cruel) 04-11-26 :: :: 12279 다음날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난 예안은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를 니콜라스에게 전해듣고 사색이 되었다. "그, 그게 정말이야?" "응. 여기 증거도 있어." 니콜라스는 남자의 소지품을 보여주었다. 천 달러짜리 지폐 뭉치와 각종 휴대용 의료도구, 권총, 등등을 보고 그녀는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도." 그가 보여준 손톱 만한 기름덩이를 보고 그녀는 두려움도 잊고 의아 해했다. "그게 뭔데?" "침입자 시체. 화이트 데빌을 뿌리면 뭐든지 이렇게 돼. 살아있는 사 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예외는 없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기름덩이를 천천히 살피던 그녀는 이윽고 떨 림이 다소 가신 목소리를 내었다. "그 남자 목적이 뭐였어? 나? 아니면 유빈이?" "둘다 아니었어. 우리가 어제 데려온 그 여자." "그래?" 그나마 다행이라는 빛이 순간적으로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지만 니콜라스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 자신부터도 그녀가 목표가 아니었다 는 것에 안도하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서둘러 중현에게 연락을 하고 난 뒤 니콜라스는 입을 열었다. "아무튼 저 여자는 느낌이 좋지 않아. 처음에는 납치당한 뒤 세뇌 처 리 돼서 강제 매춘을 하다가 버려진 여자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아. 화이트 데빌까지 써서 시체까지 없애려고 한 걸 보면 알 수 있어." "왜?" "화이트 데빌은 1회분에 5억 이상씩 하는 초고가품이거든. 마피아 녀 석들도 어지간히 중요한 인물 시체 같은 거 없애는 게 아니라면 절 대 쓰지 않아. 너무 비싼 데다 희귀하니까." 뭔가 생각난 그녀는 손뼉을 짝 쳤다. "그럼 혹시 그 화이트 데빌을 만든 사람들한테 한 번 알아보면 되지 않을까? 최근 들어 누가 이것을 사갔는지, 하고 말이야." "말도 안 돼. 「프로메테우스」한테 그런 거 물어봤자 대답 같은 건 절대 안 해줘." "프로메테우스?" "화이트 데빌을 만든 조직 이름이야. 그 조직은 절대 함부로 화이트 데빌을 만들지 않고, 아무에게나 팔지도 않아. 반드시 중요한 쓰임새 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에만, 그것도 1회분 당 5백만 달러씩이나 받고 판다고." 예안은 니콜라스의 말투에서 뭔가 의구심을 느꼈다. "너 혹시 프로메테우스인지 프로세스인지 하는 조직하고 잘 아는 사 이야?" "나 거기 단골이거든." "거기가 뭐하는 곳인데?" "음… 한 마디로 잘라 말하긴 힘들고, 그냥 불법무기판매소 정도로 생각하면 돼. 물론 그 녀석들은 대부분 직접 만들어서 판매하지만 말 이야." 니콜라스는 자신의 권총 - 일반 규격을 철저히 무시한 파괴력- 을 보여주며 씩 웃었다. "이 녀석도 그 녀석들이 만들어준 거거든." "아… 그래?" 이럴 때마다 새삼 그가 청부업자였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겉모 습만 보자면 아직 자신의 턱 밑까지밖에 미치지 못하는 가녀리고 어 린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하여튼 큰일이야. 담과 정원에 설치된 방어장치는 웬만한 녀석들은 절대 돌파하지 못하는 것인데, 그 남자는 굉장히 간단하게 저택까지 접근해왔어. 나도 녀석이 10미터 안에 들어왔을 때야 겨우 알아차렸 다니까." "그래?" 니콜라스가 저렇게까지 정색을 짓고 말할 정도라면 대단히 심각한 일이었다. 그녀는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고민에 잠겼다. "너 그래도 이제 에날도스도 제법 쓸 줄 알고, 또 엘리우스는 원래 아틀란티스에서 최강이라고 하잖아? 설마 네 힘으로도 상대가 안 되 는 거야?" "힘으로는 내가 이기지. 하지만 녀석들은 기척을 숨기는 능력이 너무 뛰어나. 그게 문제야." 굳이 힘을 쓰지 않고 권총만으로 충분히 제압한 것만 봐도 무력의 차이는 현저했다. 하지만 녀석들이 작정하고 니콜라스를 피해 예안이 나 유빈을 노린다면 끝이었다. "저 여자 세뇌돼서 자기가 누군지도 다 잊어버린 듯 한데, 일단은 치 료를 받아보게 하는 게 좋겠어. 혹시 기억이 되살아나면 뜻밖의 정보 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기억상실증을 외과치료로 되살리는 건 아직 불가능하지 않 을까?" "저 경우는 기억상실증이라기보다는 세뇌가 걸린 거니까 상관없어." 니콜라스는 일이 잘 풀릴 거라 여겼다. 축소형 도시라고까지 불려지 는 이 저택에는 자가발전장치는 물론 최첨단 의료시설까지 갖춰져 있었다. 거기다가 독일 출신의 세계적인 의사 로버트 박사까지 있었 다. 일이 안 풀릴 까닭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부름을 받고 온 로버트는 그 말을 듣고 난색을 표했다. "그런 건 불가능합니다." "아니, 왜요?" "세뇌에 대해서 저는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그런 건 후진국에서 군사 용으로나 쓰려고 극비리에 연구하는 거잖습니까." 요컨대 합법적인 활동과 연구만 해온 자신들은 그런 것에 대항할 요 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소리였다. 니콜라스는 맥이 빠졌다. "그럼 어떡하지…?"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이윽고 로버트 박사가 조심스럽 게 이야기를 꺼냈다. "정부에 이야기를 한 번 해보는 게 어떨까요?" "왜요?" "아무래도 가재 마음은 게가 안다고, 정부에서도 혹 세뇌기술을 개발 하고 있었을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민간인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그런 안건 같은 건 없어요. 설령 개발 중이거나 완료 후였다고 해도 전부 다 폐 기했을 거예요. 그런 게 있어봤자 나라 이미지만 나빠지지, 무슨 소 용이 있나요? 전쟁이 난다 해도 맥이 한 번 뜨기만 하면 모든 게 만 사 오케이인데." 로버트 박사는 과연 하며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분명 해군 장성이었다. 그가 물러가고 다시 둘이 되자 예안은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가뜩이나 그 남자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는데 이번에는 웬 이상한 놈들이 나타나서 사람을 귀찮게 구는 거야? 정말 난 편히 살긴 글렀 다니까." "그 남자? 레이온 말이야?" "어." "무슨 일 있었어?" "있어. 그런 게." 그녀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니콜라 스는 끈질겼다. "그러지 말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번 말해 봐. 내가 도움이 될 지 도 모르잖아." "됐어. 마음은 고맙게 받을게." "얼른 말해 봐. 만약 저 여자와 관련이 있다면 어쩔 거야?" 그 말에는 흠칫 놀랐다. 그러나 그녀는 곧 고개를 가로 저었다. "관련이 있다면 저 여자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거야. 내가 이곳 에 있는 거 뻔히 알면서 그 남자가 번거롭게 이런 짓을 벌일 까닭은 없다고." "혹시 모르는 일이야. 어서 말해 봐. 어서." 니콜라스의 재촉에 못 이긴 그녀는 레이온이 '가축 인간'을 배양하여 도살한 뒤 장기를 판매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간략히 들려주었다. 범세계적인 규모로 사업을 벌이기에, 여태껏 벌어들인 총 수입이 유 전의 몇 분지 일에 맞먹을 거라 추측된다는 소리에 니콜라스는 크게 놀라움을 표시했다. 다 듣고 난 뒤 그는 신중히 의견을 밝혔다. "그러니까 누나 말은, 그 남자가 이런 식으로 누나한테 다시 접근해 올 이유가 없다 이거야?" "그래." "그럼 저 여자가 누나 앞에 나타난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글쎄. 그냥 우연이 겹친 거 아닐까? 사실 만약에 날 노리고 저 여자 를 내 앞에 던져놓은 거라면, 어젯밤에 왜 내 방에는 안 들어오고 저 여자 방으로 들어갔겠어? 하여튼 저 여자는 그 남자하고는 관련 없 을 거야." "그런가?" 니콜라스는 수긍하는 듯하면서도 여전히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한 번 정밀검사를 받아보게 했으면 좋겠는데…." "너 혹시 저 여자 좋아하는 거 아니야?" 짓궂은 질문이 날아왔지만 그는 흥분해서 발끈하기는커녕 무슨 소리 를 하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녀석들이 이대로 끝나지는 않을 테니 좀더 기다려봐야겠어. 누나도 몸가짐 조심하는 게 좋아. 혹시 모르니까." "네가 옆에 붙어있으면 만사가 오케이일 텐데 뭐가 걱정이야?" 이윽고 경호시스템 담당이 난처한 얼굴을 한 채 들어왔다. 척 보기에 도 뭔가 중요한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어젯밤 침입자가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올 수 있는지 알아냈습니다." 그녀는 눈동자를 깜박였다. "시스템 자체가 다운을 먹은 상태였더군요. 자체 버그 때문인 건 아 니었고, 외부에서 누군가 강제로 해킹한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에에? 방어 시스템은 외부와 완전히 고립돼있지 않나요? 근데 어떻 게 해킹이 가능하다는 거죠?" "실은 한 달에 한 번씩 정비도 하고 업데이트도 할 겸해서 외부와 회선을 연결하곤 하는데, 아마 그때 침입했던 것 같습니다." 니콜라스와 예안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잠깐, 그 여자가 우리 집에 온 건 어제잖아? 근데 그 전부터 미리 바이러스 같은 걸 깔아두고 있었다는 소리야?" "이상하네." 설마 레이온이 드디어 자신에게 마수를 뻗치는 것인가 싶어 덜컥 겁 이 난 예안은 흙빛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걱정은 기우였다. "저 실은 그 정비날짜가 바로 어제였습니다." "그, 그랬어요? 놀랐잖아요. 그런 건 좀 일찍 말해주지." 예안은 한시름 놓으며 관리자를 가볍게 나무랐다. 그때 집사가 찾아와서 중현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그를 기다리고 있 었던 그녀는 선선히 들어오게 하라고 했다. 관리인이 다시 한 번 죄송하다고 말한 뒤 나가고 나서 조금 있다가 중현이 들어왔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중현은 어젯밤 아무 일도 없었느냐고 걱정을 표시했다. "뭐 아무 일은 없었어요. 그 녀석이 노린 건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 이었거든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라니요?" 예안은 자기 이름도 기억 못하는 여자를 어제 주워서 지금 재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간략히 설명했다. 다 듣고 난 중현은 어처구니없다 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니까 수상한 사람인지도 모르는 여자를 함부로 집안에 들이셨 다고요? 덕분에 어젯밤에는 방어 시스템이 마비된 상태에서 적의 습 격까지 받았고요?" "그, 그렇지요." 상당히 분노한 음성에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난처함을 표시했다. 중현은 울고싶은 마음을 억눌러야만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대통령 보다 더 중요하고 더 두터운 경호를 요하는,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중 요한 인물이라는 분 사고방식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해부라도 해보 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쨌든 다음부터는 절대 눈뜨고 뒤통수를 맞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 하며 중현은 본론을 꺼냈다. "이 사건은 일단 대외적으로는 경찰이 맡아야겠습니다. 아직 신고는 안 하셨죠?" "네. 아직은요."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하지요." 중현이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꾹꾹 누르자 예안은 서둘러 저지했다. "왜 그러시죠?" "알아서 한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그는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위에서는 이미 결정이 났습니다. 대외적으로는 검찰이 이 사건을 수 사하되 실제로는 첩보기관이 나서서 조사하는 것으로요." "그만큼 평범한 사건이 아니라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화이트 데빌 같은 것은 국정원에서도 간부급 이상이 아 닌 인물들은 이름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최고급 아이템입니다. 더군다 나 정체를 모르는 그 상대는 대담하게 <황궁>까지 침투했습니다. 이 런 사건을 검찰이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녀는 뜻밖의 제안을 꺼냈다. "이 사건은 그냥 저한테 맡겨주시면 안 되나요?" "예?" 중현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무슨 처녀 귀신 옷고름 푸는 소리란 말인가. "불가능하진 않잖아요? 명목상이긴 해도 어쨌든 전 해군 대장 지위 도 갖고 있다고요. 범죄 수사가 아닌 군 임무로 간주하고 제가 그 책 임을 통솔하는 형식으로 하면 서류상 문제 될 건 없잖아요? 그렇다 고 생각 안 하세요?" "그야… 말은 그렇습니다만… 과연 위에서 인정할지는…." "허락 안 해주면 허락하게 만들면 되죠."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과연, 그녀가 말을 꺼내면 위에서는 끽 소리 않고 그렇게 하세요, 라고 말할 것이다. 한국에서 그녀의 말은 가히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알았다고 두 손을 든 중현이 돌아가고 나자 니콜라스는 궁금증을 표 시했다. "왜 누나가 직접 하겠다고 나선 거야?" "불쾌해서." "불쾌?" "그냥 이제는 좀 달라지기로 했어. 내 인생을 지들 맘대로 조작하려 고 하는 녀석들한테 반항도 할 겸해서 말이야. 나한테 접근해오는 녀 석들은 내가 전부 다 박살내버릴 거야." 니콜라스는 녹색 눈동자를 찬찬히 살폈다. 작년 대서양 해저에서 귀 환한 이래 더욱 빛깔이 짙어진 눈동자였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녀는 분명히 변했다. 강해졌다라고 잘라 말할 수 는 없지만, 내면에서 어떤 커다란 변화를 겪은 것만큼은 확실했다. 유한그룹에 치명타를 날린 것이 바로 좋은 증거일 것이다. "뭐 바람직한 변화긴 하네. 근데 어떤 식으로 알아볼 건데? 설마 누 나가 직접 하겠다 해놓고 국정원 힘을 빌리려는 것은 아니겠지?" "나도 체면이 있지 그렇게는 안 해." "그럼 군대를 동원하려고?" 해군력이란 그저 무식하게 두들겨 때려부수거나 쏘아서 격추 혹은 격침시키는 것밖에 없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니콜라스는 왠지 걱 정스러웠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여. 착각하지 마. 내가 설마 미사일하고 어뢰 날리는 것밖에 못하는 사람들 데려다가 첩보전을 시키겠니?" "그럼?" 예안은 씩 웃으며 동쪽 하늘을 가리켰다. 무심코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니콜라스는 퍼뜩 깨닫고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그래도 난 좀…." 니콜라스는 그답지 않게 더듬거리며 불만을 표시했다. 그가 왜 그러 는지 대강 이유를 짐작하는(아니 거의 확실하지만) 그녀는 작게 웃음 소리를 냈다. "에이, 네가 걔 별로 안 좋아하는 건 알지만 그냥 조금만 참아 줘. 날 위해서, 응?" 뾰로통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할 수 없다는 듯 끄덕였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디젤 궁금....도대체 누굴까? 동쪽하늘... 그?.....음.....새삼 느끼는 거지만... 전 머리가 나쁩니다. 그래서....책을 읽는 것이 더욱 재밌는것 같군요 -_-(당췌 예상을 못하니..) 이번호의 명대사!!! ...황궁... 2005/01/27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6/18 페이지 ▶ 274 - 평화수호자(9) [3] 실탄 2004/11/2614Kb 829 ▷ 273 - 평화수호자(8) [1] 실탄 2004/11/2612Kb 832 ▶ 272 - 평화수호자(7) [1] 실탄 2004/11/2612Kb 810 ▶ 271 - 평화수호자(6) [2] 실탄 2004/11/2616Kb 846 ▶ 270 - 평화수호자(5) [3] 실탄 2004/11/2613Kb 896 ▶ 269 - 평화수호자(4) [12] 실탄 2004/11/2612Kb 1004 ▶ 268 - 평화수호자(3) [9] 실탄 2004/11/2513Kb 944 ▶ 267 - 평화수호자(2) [9] 실탄 2004/11/2413Kb 908 ▶ 266 - 평화수호자(1) 종반부 시작 [6] 실탄 2004/11/2413Kb 986 ▶ 265 - 분수령에 서다(4) - 중반부 종결 [40] 실탄 2004/11/2321Kb 1156 ▶ 264 - 분수령에 서다(3) [13] 실탄 2004/11/2212Kb 997 ▶ 263 - 분수령에 서다(2) [9] 실탄 2004/11/2114Kb 958 ▶ 262 - 분수령에 서다(1) [8] 실탄 2004/11/2013Kb 963 ▶ 261 - 날개가 찢어진 천사(11) [7] 실탄 2004/11/1913Kb 935 ▶ 260 - 날개가 찢어진 천사(10) [7] 실탄 2004/11/1813Kb 827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2][3][4][5] 6 [7][8][9][10]▶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29915 :: 274 - 평화수호자(9) 실탄(cruel) 04-11-26 :: :: 13594 화창한 햇살이 내리 쬐는 아침,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 앤드류는 회장 실에서 신문을 펼쳐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실제 신문을 보는 것 이 아니라 부하의 보고를 기다리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것은 신문이 거꾸로 되어있다는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부하에게서 연락이 왔다. 잽싸게 신문을 치운 앤드류는 스크 린을 켰다. "어때? 좀 알아냈어?" 「예.」 "말해 봐." 「프로메테우스에 관한 정보는 웬만한 CIA 간부들은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했을 정도로 극비리에 취급된다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세계평 화유지라는 거창한 이념을 내세우고 있긴 한데, 실질적으로는 불법무 기를 생산·판매하는 일 같은 걸 하고 있죠.」 그런 성격일 거라고는 짐작하고 있었다. 앤드류는 낮게 웃음소리를 냈다. "과연, 그동안 뭘 하고 있었던가 했더니 그런 일을 하고 있었군." 「예?」 "아아,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 하도록." 부하는 잠시 의아한 숨소리를 내더니 목청을 가다듬고 다시 보고를 계속했다. 「먼저 화이트 데빌이라는 것을 집중적으로 조사해보았습니다. 무미, 무취의 하얀 색깔을 띤 죽음의 약이기에 화이트 데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더군요.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체이든 사체이든 간에 이 것을 뿌리면 그 자리에서 녹아버린다고 합니다. 프로메테우스에서도 연간 100회 분 미만으로 한정 생산하며, 1개 당 500만 달러 정도를 받고 판매한다 합니다.」 "과연, 뒤가 구린 놈들이 좋아할 법한 약이로군." 「그렇지요. 실제로 유명 정치가를 암살한 뒤 사용해서 증거를 없앴 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을 정도입니다.」 프로메테우스의 주인, '그 남자'가 하는 일이라면 빈틈 따위는 없을 것이 당연하다. 부하는 모르고 있지만, 앤드류는 프로메테우스의 주 인과 몇 년 전 인연을 맺었던 적이 있었다. 희석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남자에 대한 이미지는 글쎄, 세상을 증오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발 밑에 둬야만 안전하다고 여기는 매드 사이언티스트 정도의 느낌이었다. "프로메테우스의 주인을 만나고 싶어. 어떻게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 을까?" 스크린 너머로 부하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경악한 것이다. 이윽고 마음을 추스른 그는 제정신이냐는 눈으로 앤드류를 바라보았 다. 전자파를 거쳐 합성된 영상임에도 그가 경악하고 있는 것이 눈에 잡힐 듯 생생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어째서? 이쪽이 그쪽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한 번 만나달 라, 사례는 충분히 하겠다, 그렇게 점잖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안 된다는 건가?" 「프로메테우스는 CIA측에서도 그 존재 여부를 쉽사리 인정하지 않 으려 드는 반국가 테러리스트 집단입니다. 만나보고 싶다고 신청하는 것, 아니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 자체가 위험하단 말입니다.」 "그럼 나는 지금 몹시 위험한 처지겠군. 덩달아 자네도 말이야. 우리 는 이미 프로메테우스를 알고 있으니 말이야. 안 그런가?" 부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고 있지 못했던 듯 했다. "이왕 위험해진 것 조금만 더 위험을 무릅쓰면 안 될까? 혹시 알아? 프로메테우스가 자기들을 조사한 것 때문에 자네한테 불쾌함을 품고 나쁜 의도로 접근해올지?" 「그, 그건….」 부하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얼마 전 그가 결혼을 해 아이까지 두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앤드류는 살살 구슬렸다. "사실 나는 프로메테우스의 주인을 조금은 알고 있어. 듣자하니 굉장 히 독선적인 데다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거슬린 자들은 절대로 용 서하지 않는다고 하더군." 앤드류는 표정을 심각한 척 꾸미며 비스듬히 턱을 괴었다. "자네를 너무 큰 위험으로 끌어들인 건 위험하지만, 어쨌든 프로메테 우스는 꼭 만나봐야만 해. 어떻게 연락할 길이 없을까?" 「하,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아마 지금쯤 프로메테우스는 자네가 내 명령을 받고 자기들을 조사 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야. 이대로 가만히 그들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이쪽에서 적극적으로 이해를 구하러 나가는 게 낫다고 생 각하는데?" 현재 처한 위험과 앞으로 발생한 위험의 크기를 놓고 저울질하던 부 하는 할 수 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방법을 찾아보지요.」 "브라보." 앤드류는 즐겁다는 듯이, 박수를 짝짝 쳤다. 워싱턴의 한 번화가를 성큼성큼 걷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커다란 키와 잘 짜여진 몸을 검은색 양복 안에 감춘 남자는, 빛이 통 과할 수 있을까 의심될 정도로 짙은 선글라스를 쓴 채 당당하게 거 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꽉 다문 굳은 입술과 조각을 빚은 듯 잘생긴 얼굴은 사람들의 마음 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전신에서부터 느껴지는 기도가 여간 강렬하지 않아, 그와 마주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한 번쯤 걸음 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기 일쑤였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고급 빌딩을 뒤로 한 채 계속 걸어서, 남 자는 파란색 빌딩 앞에 도착했다. 「P.H.K. Company」 빌딩 앞에 놓인 조각에 새겨진 글자를 잠시 뚫어져라 바라보던 남자 는 안으로 들어섰다. 경비원의 제지를 받았지만 오늘 여기서 만나기 로 한 인물의 이름을 대서 무사 통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젊고 늘씬한 여자가 사무적인 표정으로 남자를 맞이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미스터 테스." 남자는 말없이 끄덕이고는 여자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여자는 바로 버튼을 누르지 않고 붉은색 비 상벨을 길게 꾹 눌렀다. 정확히 15초 동안. 여자가 손을 떼자 신기하게도 벨이 울리는 대신 층수 버튼 하단 부 분의 금속 덮개가 벗겨지며 황금색 버튼이 나타났다. "그것은 진짜 금인가?" "그렇습니다." "상당히 호사스런 취미로군. 남들이 잘 보지 않는 것에 금으로 장식 해놓다니 말이야." "정작 중요한 것은 남이 보지 않는 곳에 있어야만 한다, 라는 게 사 장님의 신념이십니다." "멋진 신념이로군. 마음에 들어." 엘리베이터는 지하 10층으로 내려갔다. 대외적으로 이 건물은 지하 3층까지밖에 없다. 지하 4층부터는 소위 말하는 시크릿 스테이지처럼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한 것 을 원하는 '진짜 손님'에 한해서만 개방된다. C급 주문을 가져온 손님은 지하 4층, B급 주문을 가져온 손님에게는 지하 5층, A급 주문을 가져온 손님에게는 지하 6층이 개방된다. 그리 고 특급 주문을 원하는 손님은 최하층인 10층에서 '사장'과 직접 면 담하고 거래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이렇듯 PHK 회사는 표면적으로는 유망한 소프트웨어 회사지만, 실 질적으로는 세계평화유지를 위한다는 모토를 내걸고 암흑가에서 활 동하고 있다. 신념이라는 놈을 지킨답시고 퍼붓는 돈을 생각하면 암 흑가라고 부르기에는 상당히 부족했지만. 엘리베이터가 멈춰서고 문이 열렸다. 싸늘한 한기가 밀려들어오자 남 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도착했습니다, 미스터 테스. 내리시죠." 여자가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남자는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 생각했는지 더욱 당당한 걸음걸이 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눈앞에는 십 미터 길이의 복도가 뻗어 있었다. 복도 좌우에는 미술관 에 걸려 있어야 할 세계적 명화들이 보란듯이 걸려 있었다. "저건 몽크의 절규가 아닌가? 모조품치고는 잘 그렸군." "모조품이 아니라 진짜입니다." 남자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자칭 세계평화유지연합 총수 「프로메테우스」에게 역사적 명화를 도둑질하는 취미가 있었던가?" "특급 주문을 가져온 손님들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투철한 상인 정신 의 연장이라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과연, 하고 끄덕이며 남자는 문 앞에 섰다. 이 철문 너머에 남자가 바라는 인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인물의 마음이 갑자기 바뀌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복도 벽 뒤에 숨겨진 기관총탄이 남자를 벌집으로 만드느냐 마느냐가 결정되기도 했다. 프로메테우스의 신념에 철저히 반대하는 의뢰 혹은 불순한 의도를 품고 온 자들 - 예컨대 프로메테우스의 총수를 암살하려한 인물들은 복도를 완전히 지나가기도 전에 보통 벌집이 되기 마련이었다. 혹은 프로메테우스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라도. PHK 회사의 숨겨진 이름은 프로메테우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를 이끌어 가는 총수의 이름도 프로메테우스였다. 조직의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붙인 걸 보면 그 남자도 어지간히 작명 센스가 없거나 혹 은 귀찮은 성격인 모양이었다. "프로메테우스에 잘 오셨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커다란 방이 나왔다. 한쪽에는 커다란 벽면 스크 린이 있어, 진짜 자연과 똑같은 풍경을 홀로그램처럼 비춰내고 있었 다. 도저히 지하 10층이라 믿어지지 않는 정교한 생생함을 멍한 듯이 바라보던 남자는 헛기침을 했다. "당신이 프로메테우스입니까?" "그렇습니다. 미스터 앤슨." 테스, 아니 앤슨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름대로 신분을 위조하는 데에 공을 들였다 생각하는데 이렇게 대번에 들통나버리다니. 이윽고 앤슨은 웃음을 지우고 프로메테우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 본명을 알고 있다면 제 조국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수도 있겠군 요. 정말 그렇습니까?" "아틀란티스의 후예라는 것 말입니까?" 침착하기로 유명한 앤슨도 이때만큼은 신음을 흘렸다. 바깥 세상에서 꽤나 오랜 활동을 했으니, 본명 정도가 저들에게 알려 진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허나 아틀란티스 전설 - 보통 사람 에게는 심심풀이 신화 정도로 인식되어야 할 이름이 어떻게 이런 상 황에서 거침없이 나온다 말인가. "그렇게 놀란 눈으로 볼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지구에서 일어나 는 모든 것들을 알고 있으니까요.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데에 그 정도 는 당연한 것 아닙니까?" "호,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언제 어디 지역에 지진이나 화산이 일어 나는 것 정도도 쉽게 알 수 있겠군요?" "곤란합니다, 미스터 앤슨.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인간의 힘이 구성 하고 있는 흐름이지, 대자연의 법칙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인 간의 힘을 벗어난 것이니까요." 앤슨은 찬찬히 프로메테우스를 다시금 살폈다. 전체적으로 참 잘생긴 얼굴이었다. 프로메테우스의 주인은 좋은 유전 자만을 골라서 지녔다고 하는데, 과연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이미지가 주는 차가운 기품 때문인지 일반인이 경 외는 느낄지언정 호감을 느낄 남자는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이 남자 앞에 서면 뱀 앞에 놓여진 개구리처럼 목이 움츠러들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해서 우리 조국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 다. 하지만 다시는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말아주기를 바랍니다." "어째서라고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게 조금 아쉽군요. 뭐든지 다 알고 있다는 것은 때로는 인생을 재미없게 느끼게 합니다." 프로메테우스는 강한 힘을 지닌 자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을 한 채 소리 없이 웃었다. "무슨 뜻입니까? 혹시 당신은 그 부분까지 알고 있는 건가요?" "당신들은 허락되지 않은 곳에서는 진짜 이름을 부를 수 없다는 것 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마터면 앤슨은 뒤로 자빠질 뻔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아틀란티스에 대 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쳐도, <저주>에 대해서까지 알고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은 혹시… 사도…." "그만." 프로메테우스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을 잘랐다. "미스터 앤슨이 저에 대해 무슨 추측을 하는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서로에게 피차 좋은 기억을 남길 일은 아니니 이쯤에서 묻어두기로 합시다."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묻어두자는 타협이었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앤슨은 과연, 하며 속으로 납득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사도 출신임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아 틀란티스라는 이름과 <저주>를 알고 있는지 해명이 된다. 그러나 여기 온 용건은 그와 사도의 관계를 캐물으려는 것이 아니다. "주문이 있습니다." "저를 직접 만나고 싶어한 것으로 보아 보통 주문은 아니겠지요. 그 래, 무엇입니까?" "니콜라스 베르노를 죽여주십시오." 처음으로 프로메테우스의 표정이 매섭게 변했다. 여태껏 짓고 있던 표정과는 전혀 달랐다. 조금 전까지는 날개를 접은 독수리의 얼굴이 었다면, 지금은 날개를 활짝 편 맹금의 발톱 같은 얼굴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갸웃하던 프로메테우스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어조였다. "왜인지 물어도 될까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니콜라스 베르노는 우리 민족의 반역자입니다. 당연히 그에 상응하 는 대가를 치러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직접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맡아주시겠습니까, 맡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앤슨은 차가운 눈빛으로 대답을 촉구했다.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에서는 푸른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귀하 의 목숨을 접수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에, 프로메테우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은 무슨 뜻인가요?" "아아, 실례. 너무 재미있는 농담을 들어서인지 조건반사적으로 그만 웃음이 나와버렸습니다." 앤슨은 대단히 불쾌한 얼굴을 하며, 힘을 응축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서 빼려 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시기적절하게 자연스럽게 화제 를 돌림으로써 앤슨이 적대행위를 보이는 것을 막았다. "니콜라슨 베르노는 누구도 죽일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그건 마찬 가지입니다." 모였던 힘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앤슨은 적의를 완전히 지우고 의 아한 눈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기까지 오셨으면 보셨을 겁니다. 저 문 밖의 복도 양옆에는 장갑 차도 쉽게 뚫고 들어오지 못할 강력한 기관포가 설치되어있습니다." "그랬습니다만… 그게 무슨 상관인지요?" "몇 년 전 니콜라스 베르노가 특급 주문을 가지고 이곳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지요. 아무에게나 특급 주문을 들어주지는 않는다고 하자 니콜라스 베르노는 자기가 강함을 증명해 보이겠다며, 저 복도 한가 운데에 선 채 기관을 작동시키라고 했습니다." 앤슨은 기가 차다는 얼굴로 물었다. "바보짓 아닙니까? 인간의 몸으로 저기서 살아남을 리가 없습니다." 설령 공명신수를 지닌 5대 대신이라 해도 그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아예 멀리서부터 이곳을 공격해 초토화시키는 거라면 몰라도, 사방이 기관포로 에워싸인 채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은 홀로그램뿐일 것 이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습니다." 앤슨의 안색은 흙빛이 되었다. "그게 가능합니까?" "제가 오히려 묻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마 치 총알이 그의 몸만은 피해 지나가는 듯… 그렇게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현상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경험을 되새기는 듯 프로메테우스는 씁쓸한 기색이었다. "저는 즉각 모든 것을 그만두고, 그가 내건 주문을 받아들이기로 결 정했습니다. 특급 주문 중에서도 특급에 속하는 주문이었지요. 저는 일찍이 두 명의 후보자를 물색해두긴 했지만, 설마하니 정말로 '그것' 을 실현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것도 후보 대상에도 올려 두지 않았던 한낱 청부업자 따위에게 말이지요." 앤슨은 강한 흥미를 느꼈다. 「프로메테우스」를 이끌어나가는 이 남 자가 저런 표정을 지을 정도라면, 니콜라스가 요구한 주문이라는 것 이 여간 큰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주문이 무엇이었습니까?" 사교적이면서도 차가운 냉기가 빛나는, 처음의 얼굴로 되돌아온 프로 메테우스는 유쾌한 듯이 대답했다. "핵미사일을 팔라는 것이었지요."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七夜 靑い 니...니콜라스....돈을 아토믹 사는데 다쓴건가!? 그나저나 사도....이제는 소엄이나 아상에서 그리스풍의 이름이 나오면 가장 처음 떠오르는 집단이 되버린 ;; 2004/11/27 사케쿠 그, 그 그 돈을 핵미사일로!! 오 지저스!!! 2004/11/27 디젤 앗! 잊고있었던 유흥비의 출처가....밝혀지는 순간!!! 자자....앞으로 터질 부부싸움을 즐거이 기대하며.... (너희중에 죄없는 자. 내게 짱돌을 던지라....후두둑...퍽!퍽!퍽!퍽!퍽!) 2005/01/27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6/18 페이지 ▷ 274 - 평화수호자(9) [3] 실탄 2004/11/2614Kb 831 ▶ 273 - 평화수호자(8) [1] 실탄 2004/11/2612Kb 832 ▶ 272 - 평화수호자(7) [1] 실탄 2004/11/2612Kb 810 ▶ 271 - 평화수호자(6) [2] 실탄 2004/11/2616Kb 846 ▶ 270 - 평화수호자(5) [3] 실탄 2004/11/2613Kb 896 ▶ 269 - 평화수호자(4) [12] 실탄 2004/11/2612Kb 1004 ▶ 268 - 평화수호자(3) [9] 실탄 2004/11/2513Kb 944 ▶ 267 - 평화수호자(2) [9] 실탄 2004/11/2413Kb 908 ▶ 266 - 평화수호자(1) 종반부 시작 [6] 실탄 2004/11/2413Kb 986 ▶ 265 - 분수령에 서다(4) - 중반부 종결 [40] 실탄 2004/11/2321Kb 1156 ▶ 264 - 분수령에 서다(3) [13] 실탄 2004/11/2212Kb 997 ▶ 263 - 분수령에 서다(2) [9] 실탄 2004/11/2114Kb 958 ▶ 262 - 분수령에 서다(1) [8] 실탄 2004/11/2013Kb 963 ▶ 261 - 날개가 찢어진 천사(11) [7] 실탄 2004/11/1913Kb 935 ▶ 260 - 날개가 찢어진 천사(10) [7] 실탄 2004/11/1813Kb 827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2][3][4][5] 6 [7][8][9][10]▶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29916 :: 275 - 평화수호자(10) 실탄(cruel) 04-11-26 :: :: 14699 처음에 앤슨은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게 아닌가 의심했다. 그만큼 프로 메테우스가 한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윽고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를 덮친 감정은 어이없음이었다. "핵미사일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도 나라 하나를 멸망시킬 수 있는 녀석으로요. 시 험해보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작동되기만 한다면 미국조차도 단 한 발로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하… 하…." 프로메테우스가 불법적으로 무기를 생산해 판매한다는 이야기는 귀 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게 중에는 권총이나 소총 같은 자잘한 '호 신용' 무기에서부터 시작하여, 군함이나 잠수함 같은 초대형 무기도 포함돼있었다. 하지만 핵미사일까지 취급한다니. 이것만은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이 기 힘들었다.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원래 핵폭탄이라는 것은 부엌에서도 만들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간단한 원리가 아닙니까?" "하, 하지만 그렇다면 미사일 탑재는 어떻게 하는 겁니까? 그것도 간 단하다고 변명할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앤슨의 우려는 당연했다. 핵탄두 자체는 만들기 쉬워도, 그것을 목표 지점까지 정확히 실어나를 운반체계는 결코 쉽지 않다. 군사위성과 조기경보기, 요격미사일 등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방공망을 뚫고 정확한 지점에 버섯구름을 만들기 위해서는 웬만한 미사일 가 지고는 어림도 없다. "그 점이라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제가 소유한 최고급 군사위성만 해도 20개는 족히 넘어가니까요. 단언하건데, 미국의 군사위성도 결 코 이보다는 뛰어나지 못할 겁니다. 운반체계 또한 평범한 탄도탄이 아닌, FIRE-3 따위는 웃음도 안 나오는 최고급 대륙간탄도를 쓰고 있지요. 물론 두 가지 다 제가 개발한 것입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결코 평범한 반국가 테러리스트 지원 조직 따위 가 아니다. 과연, 세계평화유지를 위해 몸바쳐 일하고 있다고 떠들어 댈 자격이 있을 힘을 지닌 자이다. "니콜라스 베르노에게는 총 3개의 핵미사일이 할당되었습니다. 그는 미사일 한 개 당 각각 30억 달러, 그리고 미사일의 관리와 발사에 소 모되는 비용 10억 달러, 도합 100억 달러의 비용을 저에게 지불했습 니다. 한화로 계산하면 1조 원 정도 되겠군요." 앤슨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3발의 미사일은 대단히 특별히 작동되는 것으로서, 한 번 그에게 권한을 위임한 이상 저라고 해도 다시 회수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발사 명령을 내린다면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에서 항시 대기하고 있 는 무인 핵잠수함에서 그가 원하는 지점을 향해 미사일이 발사될 것 입니다.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당신조차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절대, 절대로 막을 수 없습니다." 차가운 선언과도 같은 자신감에 앤슨은 식은땀을 흘렸다. 장난이 아니다. 니콜라스 베르노에게 그런 보험카드가 있었을 줄 누 가 알았겠는가. 절대 가만 내버려둘 수 없는 일이었다. 아틀란티스의 목적은 어디까 지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지,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다. 니콜라스가 나라 세 개는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을 지녔다면, 응당 그 힘을 회수해 야 할 것이다. "헌데 왜 그것이 그를 죽일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이지요?" 선글라스 뒤에서 푸른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다시금 적의가 드러 난 눈빛에 프로메테우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대답에 따라서는 「프로 메테우스」 전체를 소거시킬 수도 있다는 의지가 뚜렷해서였다. "니콜라스 베르노가 특급 주문을 했던 VIP라서라고 생각하신다면 오 산입니다, 미스터 앤슨." "?" "우리는 손님이 요구한 주문을 착실하게 이행하기만 하면 그만입니 다. 그 뒤에 손님에게 위해를 끼친다 해도 '거래' 자체가 무산되는 것 은 아니지요. 물론 대단히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손님에게 위해를 끼치는 일은 없습니다." 느릿느릿 말을 이어나가는 프로메테우스의 어조에는 한 소년에 대한 경외심이 조금 섞여 있었다. "니콜라스 베르노에게 할당된 3기의 핵미사일은 그가 명령을 내렸을 때만 발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목숨 자체가 곧 발사 키워드가 되기도 하지요." "무슨 뜻입니까?" "그가 죽는다면 그 순간 미사일은 발사됩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생명 신호가 끊긴 지점을 향해서 말입니다. 물론 자연사가 아닌 살해당했 을 경우에만 한정됩니다." 앤슨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이제야 알았느냐는 듯, 한결 여유로워진 웃음을 지으 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누구도, 누구도 절대 니콜라스 베르노를 죽일 수 없습니다. 훼도니츠 가를 주축으로 한 미국계 마피아들이 왜 니콜 라스 베르노에게 번번이 당하기만 하는지 아십니까? 그들의 힘으로 는 니콜라스 베르노에게 상처 하나 입힐 수 없는 것도 있지만, 니콜 라스 베르노를 죽였다가는 그 즉시 미국에 핵미사일이 떨어진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프로메테우스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 3차원 홀로그램을 흉내낸 벽면 스크린의 아름다운 인공 자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앤슨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왜 특정 개인에게 그런 위험천만한 힘 을 쥐어준 거죠? 당신은 당신 스스로도 세계평화 유지에 힘쓴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힘이라는 것은 한 곳에 모여 있을 때보다 분산되어 있을 때 평화를 유지하는데 더욱 강력한 영향을 발휘합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 지요." 팔짱을 낀 채 프로메테우스는 앤슨을 흘끗 돌아보았다. 언뜻 보기에 는 대단히 건방져 보였지만 앤슨은 탓하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거만 을 떨 자격이 있는 남자였다. "저는 일찍이 니콜라스 베르노에게 부여된 것과 같은 권한을 소유할 수 있는 후보자로 두 명을 물색해놓았습니다. 키리에 K 하데스, 앤드 류 아더 필립 루이스 윈저, 이 두 명이었지요." "그렇다는 건 그들이 당신의 존재를 알고 당신에게 핵미사일을 팔라 고 요구하면, 니콜라스와 똑같은 조건을 달고 그 요구를 들어주겠다 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이미 제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관심이 없어서 요구해오지 않는 것뿐이지요." 주먹을 불끈 쥐고 프로메테우스를 노려보던 앤슨은 이윽고 쥐어짜는 듯이 물었다. "키리에 K 하데스는 누구입니까?" "제 오랜 친구입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살아 있을 거라 믿고 있죠." "특이한 이름이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나름대로 사연이 있는 이름이라고 하더 군요. 할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넣었다고 하더군요." 프로메테우스는 소리 죽여 웃으며 의자에 다시 앉았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분명 강력한 힘이 필요하고, 그 힘은 반 드시 분산되어 있어야 합니다. 세계 곳곳을 잘 뒤져보면 그런 힘을 소유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드물게 나타나곤 하죠. 앤드류 회장이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그 자격이라는 것은 어떻게 구분하는 것입니까?" "일단 투철한 자기 신념이 있어야만 합니다. 박애주의나 인도주의 신 봉자여야만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힘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되 맹신 하거나 남용하지 않으며, 나아가서 균형을 추구하는 성품을 지닌 자 에만 극히 한정됩니다. 니콜라스 베르노의 경우에는 힘에 대한 투철 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권한을 제공했던 것이었습니다." 쉽게 감을 잡을 수 없는 상당히 모호한 소리였다. 앤슨은 불현듯 시 험해보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습니까?" "무슨 뜻인가요?" "당신이 설정한 그 기준을 놓고 보자면, 저는 어떻느냐는 소리입니 다. 제가 니콜라스 베르노와 똑같은 주문을 한다면 당신은 받아들이 겠습니까?" 프로메테우스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훌륭한 전략가입니다. 절대적 힘이 당신에게 주어진다면 당 신은 훌륭한 정치가로서 세계평화유지에 강하게 기여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잘 포장해봐야 독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리고 독재 속에서는 평화가 유지될 수 없지요." 한 개인 혹은 한 집단에게 모든 힘이 응축되어 세계를 다스린다면, 아무리 정책을 잘 펼친다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불만을 품은 세력들 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보다 혼란스러운 그런 상 황에서는 평화가 유지될 수 있을 리 없다. 프로메테우스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힘이 분산해서 존재해야 한다 생각했다. 동시에 그 힘은 외부로 절대 노출돼서는 안 되었다. 어디까지나 음지 속에 감춰진 채 철저히 서로서로를 견제하고 있어 야만 양지에서는 평화가 유지된다는 논리였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 을 딴 반국가 조직 「프로메테우스」를 창설하기에 이른 것이다. "과연, 잘 알겠습니다. 니콜라스 베르노는 현재로서는 그 누구도 죽 일 수 없다는 뜻이겠군요. 그가 살해당한다면 그 나라에는 곧바로 핵 미사일이 떨어질 테니까요." "2기의 미사일이 여분으로 더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누가 자기를 노린 건지 니콜라스 베르노가 눈치채게 된다면, 그는 죽기 전 에 주저 없이 나머지 2기의 미사일을 배후자의 조국을 향해 발사할 것입니다." "백 억 달러짜리 보험을 들어둔 셈이군요." "뭐, 그렇다고 봐야 할까요." 자리에서 일어난 프로메테우스는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앤슨에게 악 수를 청했다. 앤슨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럼 이제 제 쪽에서 물어봐도 될까요?" "무엇을 말인가요?" "왜 니콜라스 베르노를 죽일 생각도 없으면서 죽여달라고 한 건지 궁금하군요." "저런. 알고 계셨군요." "제가 가진 정보망을 우습게 보시면 대단히 곤란합니다, 미스터." 자아. 과연 뭐라고 대답해야 광기에 가까운 신념으로 세계평화를 유 지하는 이 남자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앤슨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글쎄…. 증명하고 싶었다고 하면 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증명?" "우리는 지금까지 니콜라스 베르노가 「엘리우스」인 줄 알고 있었 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단 한 분이 그것을 필사적으로 반대 하고 나섰습니다. 우리는 그 분에게 당신이 틀렸다, 당신은 뭔가 착 각하고 있다고 설명했지요. 하지만 그 분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아틀란티스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면, 프로메테우스는 엘리우스라는 이름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아틀란티스 대륙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앤슨은 이제 와서 굳이 계속 숨길 까닭은 없다 생각했다. 결심을 굳 히는데 다소 힘이 들기는 했어도. 프로메테우스는 찬찬히 앤슨의 수심 어린 얼굴을 살폈다. "바드로 2세 황제 폐하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역시. 앤슨은 쓴웃음으로 허탈한 마음을 감추었다. "그 이름까지 알고 있습니까? 과연 당신은 대단하군요." "이 정도는 당연한 것이지요. 헌데… 엘리우스라 하면 태고에 아틀란 티스가 해저 바닥에 가라앉았을 당시, 민족을 배신했다는 반역자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계속해서 환생하고 있지요. 가장 강한 공명신수 마기는 빌어먹게도 엘리우스를 계속 주인으로 선택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제 생각에는 반역자라서 마기가 주인으로 택하는 것이 아니 라, 마기가 주인으로 택한 자가 반역자가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앤슨은 고개를 가로 저음으로써 그 생각에는 동조하지 않는다는 뜻 을 밝혔다. 아무리 대단한 힘을 지닌 상대라 하더라도 민족 내부의 문제를 평가하는 것은 사양이었다. "프로메테우스 당신에게는 모욕이 되지 않을까 싶지만, 니콜라스 베 르노가 진짜 엘리우스라면 당신의 공격을 받는다 하더라도 살아남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어쨌거나 엘리우스는 최강의 공명신수를 지닌 자 이니까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우리 민족 전원이 그의 목숨을 노리고 달려든다 하더라도, 그가 스스로의 목숨을 중시해 싸우지 않고 도망 가기만 한다면 절대로 죽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정도인가요." 프로메테우스는 흥미가 당긴다는 듯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하여튼 우리는 황제 폐하에게 니콜라스가 엘리우스라는 것을 증명 해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주문을 받아들이죠." 앤슨은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무슨 소리입니까? 방금 전에는 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니콜라스 베르노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죽인다는 의도를 품 고 공격은 할 수 있겠죠. 프로메테우스의 공격을 받고도 살아난다면 어쨌거나 그가 엘리우스라는 게 확실히 증명된다는 것이겠죠?" 앤슨은 그렇군요 하면서 만족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주문의 방향을 살짝 비틀기만 하면 원만하게 해결되는 것이었다. 니콜라스 베르노를 죽여달라가 아닌, 그가 당신의 공격을 받고도 살아남는지 확인해달라 로 바꾸면 되었다. 만족스런 해결을 본 앤슨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다시 나왔다. 밝은 햇살을 받자 조금 전까지 프로메테우스의 총수를 만나고 있었 다는 현실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는 빌딩을 나서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투명한 광택을 받아 반짝 이는 빌딩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영락없이 부유하고 튼튼한 소프트웨어 기업이다. 그 러나 실상은 세계평화유지를 모토로 내걸고 각종 불법 무기들을 팔 아치우는 반국가 단체에 불과하다. 국회 같은 곳에서 서식하는 높으 신 어른들의 표현을 빌자면 말이다. 세상은 정말 모를 일이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그는 등을 돌렸다. 언젠가는 「프로메테우스」의 흔적 역시 지구상에서 지워버려야 한 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존재는 아틀란티스가 이 행성을 지배하는 데 에 절대 방해가 될 것이기에. 맥을 건조한 천재 과학자, 한국을 승리로 이끈 해군대장, 유전을 소 유한 세계 제일의 거부, 신국립과학연구소장. 모두 다 예안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타이틀이었다. 그 외에도 한숨 나오도록 아름다운 절세 미소녀, 꼭 결혼해보고 싶은 여성 1위 기타 등등 별의별 수식어들이 그녀를 따라다녔지만, 어쨌든 공식석상에서 붙는 호칭은 앞서의 것으로 한정돼 있었다. '백합을 사랑하는 소녀라는 호칭도 있지 않습니까?' '시끄러.' 할 일 없이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던 그녀는 발끈해서 쏘아붙였다. 이윽고 그녀는 잡지를 덮으며 기지개를 켰다. "으아아. 심심해 죽겠네." '심심하면 일을 하세요. 직장에는 지금 일이 얼마나 밀렸는데 출근도 안 하고 이렇게 노시는 겁니까?' "가끔은 휴식도 필요하다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집에만 있자니 별로 할 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 었다. 만나서 같이 놀 친구들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이건 원 한국 에서 자신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보니 집 밖으로 한 발자국 나가는 것조차 겁날 지경이었다. 바로 어제까지는 취재를 원하는 기자들이 집 밖에서 우글거리며 만 나달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진땀을 흘렸다. 연구소로 출근했다는 핑계 로 돌려보내지 않았으면 지금쯤 이렇게 멀쩡히 정신을 차리고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어째서 자신이 연예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현재 자신의 타이틀은 어디까지나 천재 과학자, 신국립과학 연구소장, 해군대장, 유전의 소유자, 이 4개가 전부였다. 당연히 세계 과학 학술지라든지 하는 곳에서 러브 콜이 와야지 정상 이 아닌가. 헌데 어째 연락 오는 곳의 90%는 연애 가십지라든지 방 송국 같은 곳이었다. "엄마. 엄마. 이거. 이거." 손목시계를 들고 나타난 유빈은 아장아장 걸어오며 그것을 흔들었다. 엄마는 아이를 번쩍 안아 품에 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시계 할아버지 거야. 건드리면 안 돼." "응." 아이는 주저 없이 시계를 엄마에게 내밀었다. 이런 부분에서만큼은 아이도 떼를 쓰지 않는다. 가정 교육이 나름대로 잘 되었다는 증거로 보면 될까. "엄마. 누나 언제 와?" "혜인이 누나 말이야? 아니면 혜민이 누나?" "둘 다." "왜, 그 누나들 보고 싶어?" "응." "엄마보다 더?" 유빈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엄마가 세상에서 최고로 좋다는 뜻이었다. 덤으로 예쁜 누나들까지 옆에 있으면 더 좋다는 의미까지 숨어 있는 동작이었지만, 이 팔불출 엄마는 그것도 눈치 못 채고 그 저 좋아 죽겠다며 꽉 끌어안고 뺨을 비비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 방송국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토론회 프로그램에 참석하겠다는 예전의 약속을 지켜달라는 전화였다. "알았어요. 그럼 지금 갈게요." 맥의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르다 보니 자연히 그 제작자는 항상 이리 저리 끌려다니느라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전부 다 거절해버리고 싶었지만, 그녀 자신도 국민의 눈을 주의 깊게 의식하 고 있었고, 또한 정부의 간곡한 부탁을 함부로 거절할 수도 없이 무 척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궁금돌이 하데스의 자식은 결국 태어낫군요~_~ㅋㅋ 설마 레이온? 2004/11/27 七夜 靑い 허...하데스는 아직도 행방불명인가 보군요;; 2004/11/27 七夜 靑い ...얼래? 하데스 자식이었습니까!? ...그럼 하데스는 거기서 살아나왔단 소리네;; ...사도들은 하나같이 다 괴물들 ㅡㅅㅡ;; 2004/11/27 사케쿠 하데스? 뭡니까 그건? 2004/11/27 궁금돌이 하데스와 비너스(맞나?)사이의 아이로 추정. 마지막에 하데스가 그여자 살리려구 방공호에 넣고 자신은 죽죠. 2004/11/27 RAGNAROK 사도는 아직 존재한다..... 2세로써..... 하긴 한번에 쿼크단위로 분해시키기에는 너무 큰 녀석이었죠.. 2004/11/27 jhj1502 제가 기억 하기론 실탄님이 하데스 안죽었다고 한거 같은데요. 기억 상실증 걸리고 한 여자랑 다닌다고 들은거 같은데 ㅋ;;; 확실치 않구요. 하데스는 아상 시리즈 1부에서 나옵니다. 잘 찾아 보세요 (아직 2부는 안나왔어요) 2004/11/27 실탄 제가 죽지 않았다고 한 것은 비너스입니다. 방공호에 들어갔기 때문에 살았다는 시놉이지요. 2004/11/27 루시퍼 어쨋든 그 하데스와 비너스의 자식이 결국 태어나긴 한거군요.. 2004/11/29 타로 흐음. 드디어 2004/12/05 디젤 앙~ 유젤을 더욱더 띄워주세요~ 만세 근데...어렸을적부터 궁금했던거지만... 핵폭탄과 수소폭탄중 어떤게 더..셀까?......요? 마징가와 태권브이중 어떤게 더..셀까?......요? ...이런 느낌은 아니겠죠? 당장 실탄님 강추인 네이버 지식in에서 찾아보장~ 2005/01/27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5/18 페이지 ▶ 289 - 추억의 그림자(1) [3] 실탄 2005/03/149Kb 740 ▶ 288 - 인조의 가치(7) [18] 실탄 2005/03/117Kb 981 ▶ 287 - 인조의 가치(6) [13] 실탄 2005/02/237Kb 1024 ▶ 286 - 인조의 가치(5) [15] 실탄 2005/02/147Kb 966 ▶ 285 - 인조의 가치(4) [18] 실탄 2005/02/0210Kb 976 ▶ 284 - 인조의 가치(3) [12] 실탄 2005/01/159Kb 1077 ▶ 283 - 인조의 가치(2) [8] 실탄 2005/01/136Kb 894 ▶ 282 - 인조의 가치 [27] 실탄 2004/12/3111Kb 1242 ▶ 281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6) [38] 실탄 2004/11/2613Kb 1770 ▶ 280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5) [1] 실탄 2004/11/2613Kb 872 ▶ 279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4) [3] 실탄 2004/11/2612Kb 827 ▶ 278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3) [2] 실탄 2004/11/2613Kb 831 ▶ 277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2) [1] 실탄 2004/11/2616Kb 828 ▶ 276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1) [1] 실탄 2004/11/2613Kb 967 ▷ 275 - 평화수호자(10) [11] 실탄 2004/11/2615Kb 903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4] 5 [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29917 :: 276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1) 실탄(cruel) 04-11-26 :: :: 13244 토론회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초반에는 그녀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각 분야에서 전문가로 인정받는 사람들이 가벼운 담소를 나누듯 이 야기를 나누었고, 그녀는 이따금씩 그들이 던지는 질문에 적당히 대 답만 해주면 되었다. 프랭크 앤쏘니 유젤이라는 이름에 겁을 집어먹었는지 학자들은 그녀 와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하기야 맥에는 현존하는 과학 법칙 을 초월한 이론만 골라서 적용되었으니, 그들이 그녀를 두려워하는 것은 나름대로 이해할 법한 일이었다. "에… 그러니까 서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원거리 에너지 전송기가 실 용화된다면 송전용 전선을 연결하지 않고도 무선으로 에너지를 보낼 수 있다 이 말씀이시죠?" "네." 겨우 자기 차례가 돌아온 그녀는 침착히 설명을 시작했다. 최근 신국립과학연구소에서는 전선을 통하지 않고도 맥의 에너지를 원거리 전송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밝혔다. 또 한 번 세계는 발칵 뒤집혀졌다 따위의 표현을 기대한 사람이 있 다면 대단히 미안하게도, 대부분 '아, 그렇군' 하며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말았다. 사람들이라는 것은 매번 놀라다 보면 나중에는 면역 이 되기 마련이다. 이 기술은 한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어 송전용 전선을 설치할 수 없는 나라에 전기를 판매하기 위해 개발되 었다. 물론 기존에도 전자파 등을 이용해 무선으로 전기를 보내는 기술이 개발돼있긴 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주변에 있는 전자기기들을 망가 뜨리고, 손실률도 무지막지하다는 단점이 있다. 허나 연구소에서 발표한 이 기술은 그런 문제가 전혀 없었다. 에너지 손실률이 '다소' 크긴 하나, 어차피 무한동력에서 나오는 에너지이기 에 누구도 손실률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너지 손실률이 99%대라는 것은 지나치게 치명적인 수치가 아닐까요? 서 박사님이라면 보다 더 손실률을 낮출 수 있는 기술도 충분히 개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한 학자의 지적에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 개발한 기술은 두 가지예요. 하나는 말씀하신 대로 에너지 손 실률이 99% 대고요, 다른 하나는 손실률이 0%이지요. 그렇지만 0% 짜리는 발표할 생각이 없어요." "어째서죠?" 방청객들은 숨을 죽였다.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당당하게 받아내며,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굳이 말하자면, 정부의 부탁 때문이랄까요." "?" "0%짜리가 발표되면 득을 보는 건 우리나라가 아니라 다른 나라예 요. 우리나라는 어디까지나 무한동력에서 에너지를 뽑아내니까, 손실 률이 0%이든 99.999%이든 전혀 상관없잖아요." "아, 그렇군요." 방청객들의 탄성 사이로 간간이 탄식이 섞여 들렸다. 바라볼 것도 없 이 외국인 방청객임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턱을 살짝 괴었다. 공개석상에서 다소 무례한 태도였지만 아 무도 나무라지 않았다. 그녀는 한국 발전에 막대한 기여를 했고, 또 무척 아름다웠기에 국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소녀였다. "일단 이 기술을 실생활에 적용하자면, 앞서 말씀드린 대로 송전용 전선이 깔리지 않은 나라에도 당장 전기를 팔 수 있고요. 아, 그럼 초전도 물질은 괜히 개발한 셈이 되나요?" 사람들은 그 말에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군사무기에 이용할 수 있다는 거죠."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입니까?" "이 기술은 전기 에너지를 무선으로 보내는 게 아니라 에너지 그 자 체를 무선으로 보내는 거예요. 따라서 레이저 포 발사 장치와 에너지 수신 장치를 붙여서 제조한 다음에 함정이나 전투기에 달아주면 만 사 오케이죠." "하지만 레이저 포는 이미 오래 전에 개발되지 않았습니까? 굳이 그 원리를 응용할 필요가 있을까요?" "에너지 생산 장치가 무지막지하게 무거운 데다가 눈 튀어나오게 비 싸서 실용화는 일찌감찌 포기됐다는 것을 기억해주시기 바래요." 방청객 한 명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제작비가 비싸다 해도 계속 개량하면 생산 단가를 낮출 수 있지 않 을까요?" "맞는 말씀이에요. 근데 한 백 년 후쯤이나 가능할걸요?" 사람들은 다소 소란스럽게 수군거렸다. 나름대로 그에 관해 의논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현재 개발된 레이저 포 에너지 생산 장치를 하나 만드는데는 뉴타 노 급 항공모함 한 척을 건조하는 비용이 들어요. 그것을 전투기나 전투함정에 단다고 생각해보세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죠." 그 부분에 관해서까지는 잘 모르고 있었던 사람들은 가벼운 신음을 흘리며 납득했다. "제가, 아니 우리 연구소가 개발하려는 장치는 하나 만드는데 탱크 1 기 만드는 가격도 안 들어요. 아주 가벼워서 전투기에도 설치할 수 있죠. 그렇게 되면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 해도 맥이 나설 필요가 없 어질 거예요. 그냥 연구소에 가만히 앉아서 에너지만 보내면 그만이 니까요. 한국군대 평균 전력이 급상승하는 결과가 되는 거죠." "만약 그렇게 되면 크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될까요?" "미사일이나 함포를 만들 필요가 없어져요. 그리고 공격 명중률이 100%에 가까워지게 되는 거죠." 수군거리던 방청객 중 다른 한 명이 다시 발언권을 얻어 질문했다. "저 만약에 그 장치가 한국군에 실용화된다면, 수치로 환산했을 때 지금보다 몇 배 정도 더 강해지게 되는 걸까요?" "계산을 안 해봐서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전력 면에서는 한 열 배 이상 강해지고, 군 유지비용은 몇 배 이하로 절감되지 않을까요? 포 탄이나 미사일 같은 걸 만들 필요가 없으니까." 많은 국민들이 흥미 있게 지켜보는 가운데 신 국립과학연구소장이 참가한 토론회(를 가장한 대외적인 무기자랑 쇼)는 환호 속에서 막을 내렸다. 팬이라며 달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대기실로 들어간 예안은 한 소녀 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혜인이었다. "프로그램 잘 봤어. 디게 당당하게 말을 잘 하던데?" "이 짓도 이제는 아주 익숙해졌다니까." 예안을 바라보는 혜인의 얼굴은 뿌듯함에 가득 차 있었다. 맥의 표현 을 빌자면, 자기 남자가 성공한 것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이랄까. "니콜라스는 근데 어딨어?" "잠깐 수상한 낌새가 보여서 조사하러 나간다고 말해달래." "그래?" 혜인은 니콜라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예안이 그녀에게만큼은 괜찮 다 생각하고 중현의 반대를 무릅쓰고 말해두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청부업자였으나 거액의 돈을 주고 경호원으로 둔갑시켰다는 설 명을 처음 들었을 때, 혜인은 '이렇게 어린 아이가?'하고 놀라워했으 니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다. '수상한 낌새라…. 뭐지?' 다소 걱정이 되긴 했으나 니콜라스의 실력을 믿고 있는 예안은 곧 알아서 처리하고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기껏해야 자신에게 반해서 만나주지 않으면 테러하겠다고 폭탄 들고 설치는 미친놈 같은 부류 일 게 뻔했다. "유빈이는 왜 안 데려 왔어?" "아직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라구. 내가 미혼모라는 거." "왜에?" "유빈이가 불쌍하잖아.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카메라에 노출되면 얼 마나 가여워?" "아, 그렇긴 하겠다." 예안은 단말기를 꺼내 자신의 저택 지하에 고이 모셔놓은 컴퓨터에 접속했다. 맥의 두뇌와 동일한 원리로 만들어진 뉴런형 컴퓨터였는데 아직 세상에는 발표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맥과 동등한 성능이니만큼 그녀가 일을 하는 데 있이 커다란 도움이 되어주는 녀석이었다. 세상에 발표했다가는 아마 군침 흘릴 사람이 꽤 되겠지만, 그녀는 뉴런형 컴퓨터만큼은 사람들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다. 일에 열중하는 그녀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혜인은 슬며시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왜?'하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무슨 부탁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대번에 마음을 읽힌 혜인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여튼 눈치는 빨라 가지고. "저기, 나 이번에 영화 계약한 거 말인데, 네가 제작하는 거 좀 도와 줬으면 해서 말이야." "응? 다음달에 개봉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럼 다 찍었다는 소리 아 니야?" "그거말고 그 다음에 찍기로 한 거 있거든. 근미래 SF 영화인데, 감 독이 꼭 맥을 출연시키고 싶다고…." 혜인은 몹시 부끄러워하며 말끝을 흐렸다. 예안은 별것도 아닌 거 가 지고 그러냐는 의미로 상냥히 웃으며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쓰다 듬어주었다. "알았어. 네 부탁이니까 해줄게." "네 권한으로 할 수 있는 거야?" "야야. 내가 이래 봬도 해군 대장이라고. 군 홍보 차원에서 한다고 그러면 간단히 해결 돼." "하지만 영화 찍는 동안에는 맥이 전기를 공급 못 하잖아?" "걱정할 것 없어. 영화 찍으면서도 외부에 에너지를 공급할 수는 있 으니까." 선뜻 부탁이 받아들여지자 혜인은 손뼉을 치며 좋아라 했다. "고마워. 역시 너밖에 없어." "입으로만?" 주변에 누가 있나 슬그머니 살핀 혜인은 헤헤 웃으며 뺨에 입술을 갖다 댔다. 예안도 좋다고 히히 웃으며 자신보다 약간 키가 작은 혜 인을 품에 안았다. 미소녀 둘이 껴안고 있는 광경이 연예기자에게 발견되었다면 참 재 미있는 기사가 실렸을 테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아무나 쉽게 들어올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러니 조금 더 찐한 상황을 상상한 백합 매니아들은 다음 기회를 기대해주길 바란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백 합 향기가 또 나지 않아? 니콜라스는 절대절명의 위기를 맛보고 있었다. 수많은 인파. 시끄러운 소리. 미는 사람과 밀려 넘어지는 사람. 번잡한 공기를 타고 어디에선가 희미한 살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 살기는 분명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식은땀을 흘렸다. '어디지?' 미약하지만 분명 그것은 살기였다. 착각이 아닐까 하고 몇 번이나 되 뇌었으나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태연히 걸었다. 손에 잡힌 권총의 차디찬 감촉이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에날도스를 사용하면 총보다 더 효과적으로 목표를 제거할 수 있는 데도 총을 고집하는 이유는 바로 그 안정감 때문이었다. 몇 년 동안 혈육이 낭자한 삶을 함께 헤쳐 나온 총은 누구보다 든든한 심리적 파트너였다. "죄, 죄송합니다." 바삐 지나가던 이십 대의 여자가 니콜라스와 부딪쳐 쓰러졌다. 혹시 적이 아닐까 하는 예감에 반사적으로 총을 꺼내려던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여자를 일으켜주었다. "조심해요." 여자는 거듭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바쁘게 뛰어갔다. 니콜라스는 일반인을 의심했던 것이 부끄러워 머리를 긁적였다. 니르 가 이걸 알았다면 감이 녹슬었냐고 나무랐을 것이다. 그는 살기가 도사리고 있는 곳을 향해 신중히 걸음을 옮겼다. 수없이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중 한 명이 살기를 지운 채 자신을 노 리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마다 차디찬 권총을 매만지며 자신을 달래고, 신경을 보다 곤두 세웠다. 어느 순간이었다. 거짓말처럼 살기의 근원이 뚜렷하게 잡혔다. 여러 갈래로 구불구불하게 갈라진 길이 일직선으로 통합된 듯한 느 낌이었다. 그는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소음기를 박차고 뛰쳐나간 총알은 무수한 사람들이 겹겹이 겹쳐진 사이에 난 아주 작은 틈을 뚫고 날아갔다. 그것은 총알이 목표를 노리고 날아간다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블랙홀이 총알을 빨아들이고 있는 듯한 광경이었다. 총알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목표를 정확 히 맞추었다. 픽. 니콜라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분명히 살기를 느꼈고, 약점을 노렸고,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되돌아온 소리는 살가죽이 뚫릴 때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아무리 시끄럽고 혼잡하다지만 목표의 흔적을 놓칠 귀가 아니었다. '잠깐.' 그는 뛰어가고픈 마음을 누르고 침착히 생각했다. 저 소리를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다. 방탄복을 쏘았을 때 나는 소리보다는 둔탁하지만, 장갑차를 쏘았을 때보다는 부드러운 소음. '아!' 그는 마음 속으로 손뼉을 짝 쳤다.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발끝에서부터 턱 바로 아래까지 몸 대부분 을 가리는 전신방탄슈트. 어느 군에도 알려지지 않은, 프로메테우스 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비밀리에 판매하는 방탄 제품을 쏘았을 때 나는 소리가 바로 저랬다. 몇 년 전 그는 청부업자 생활을 하며 모은 전재산을 들고 프로메테 우스를 찾아가 핵미사일 3기를 샀던 적이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어떤 사 명감을 느꼈기에,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전재산을 쏟아 부어 프로메테우스에 특급 주문을 했던 것이었다. 그때 당돌하게도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능력을 테스트해보려 했고, 그는 기꺼이 기관총탄이 난무하는 사이에서 십 분을 버텨냈다. 총알이 신들린 듯 비껴가는 광경에 프로메테우스가 경악하는 것을 즐겁게 구경한 후, 감히 자신을 시험한 대가를 충분히 돌려주었다. 녀석의 심장을 향해 총을 쐈던 것이다. 등을 돌리고, 눈을 감고, 1밀 리미터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조준으로. 죽일 생각은 없었다. 단지 녀석의 담이 얼마나 큰지 한 번 시험해보 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그때 들린 소리가 바로 저랬다. 프로메테우스가 제복 안에 받쳐입고 있던 특수강화방탄슈트. 종잇장처럼 얇은 데다가 투명한 색깔이기에 언뜻 봐서는 입었는지 아닌지를 파악할 수 없는 슈트였다. '서로 상대를 시험했으니 비긴 걸로 합시다. 당신의 주문은 받아들이 겠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빙글빙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때 니콜라스는 자 신이 어찌할 수 없는 인물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하여튼 조금 전 들린 소리는 그때 프로메테우스를 쏘았을 때 났던 소리와 동일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그 방탄슈트 역시 아무에게나 함부로 판매하 지는 않는다고 했다. 니콜라스가 프로메테우스를 만나기 전까지 판매 된 방탄슈트는 단 한 벌도 없었다. '훼도니츠가에서 산 걸까? 하지만 프로메테우스가 마피아에게 함부로 방탄슈트를 팔 리가 없는데?' 세계평화유지를 모토로 내걸고 활동하는 녀석들이니, 수류탄도 견뎌 내는 강화슈트를 마피아에게 팔 리가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저 슈트 의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머리를 노려야 하나?' 그는 조금씩 움직이는 살기를 따라 느긋하게, 하지만 초조함을 감춘 발걸음으로 쫓아가며 계속 고민했다. 저 슈트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턱 밑까지 덮는 A형, 하나는 머리 끝까지 덮는 B형. 당연히 B형이 방어력에는 더 성능이 좋지만 외관상 슈트를 입었다는 게 대번에 발각난다는 단점도 있다. 반면 A형 슈트는 입었다는 티가 나지 않기에, 상대가 심장이나 복부 같은 곳을 먼저 노린다면 죽은 척 했다가 기습을 노릴 수도 있었다. 상대가 A형을 입고 있다면 머리를 노리면 된다. 그러나 B형을 입고 있다면 총은 쓸모가 없다. 저 슈트는 기관총과 수류탄까지 견뎌내는 괴물이다. 뚜둑뚜둑. 그는 총을 쥐지 않은 왼손 뼈마디를 비트는 소리를 냈다. 검지손가락 사이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조금씩 맺혔다. 걸음을 멈춘 채 손가락을 앞으로 쭉 뻗고 감각을 곤두세웠다. 총이 통하지 않는다면 이걸로 끝장을 내주겠다.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가 하려는 일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신중히 힘을 모은 뒤 에너지탄을 길게 힘껏 발사했다.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디젤 좀더...좀더...은은한 백합의 향기를.... 그나저나...처음 쐈던 한발이 머리를 조준한게 아니었다니... 그럼 바로 B타입인걸 알았을텐데... 사격시의 트라이앵글 머시기...그 조준 타격점 세군데... 어쩌고 하는 걸 들었던 기억이... 태클로 보였으면 죄송... 2005/01/27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5/18 페이지 ▶ 289 - 추억의 그림자(1) [3] 실탄 2005/03/149Kb 740 ▶ 288 - 인조의 가치(7) [18] 실탄 2005/03/117Kb 981 ▶ 287 - 인조의 가치(6) [13] 실탄 2005/02/237Kb 1024 ▶ 286 - 인조의 가치(5) [15] 실탄 2005/02/147Kb 966 ▶ 285 - 인조의 가치(4) [18] 실탄 2005/02/0210Kb 976 ▶ 284 - 인조의 가치(3) [12] 실탄 2005/01/159Kb 1077 ▶ 283 - 인조의 가치(2) [8] 실탄 2005/01/136Kb 894 ▶ 282 - 인조의 가치 [27] 실탄 2004/12/3111Kb 1242 ▶ 281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6) [38] 실탄 2004/11/2613Kb 1770 ▶ 280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5) [1] 실탄 2004/11/2613Kb 872 ▶ 279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4) [3] 실탄 2004/11/2612Kb 827 ▶ 278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3) [2] 실탄 2004/11/2613Kb 831 ▶ 277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2) [1] 실탄 2004/11/2616Kb 828 ▷ 276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1) [1] 실탄 2004/11/2613Kb 969 ▶ 275 - 평화수호자(10) [11] 실탄 2004/11/2615Kb 903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4] 5 [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29918 :: 277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2) 실탄(cruel) 04-11-26 :: :: 16038 믿을 수 없게도, 상대방은 공격을 피해냈다. 최고의 살인기계 니콜라스 베르노가 전력을 다한 에너지탄을 말 그 대로 피해냈다. 놀라기에 앞서 어이가 없어진 니콜라스는 눈 깜짝할 속도로 살기를 거둬들였다. 총을 안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은 그는 공격의사가 없다는 의미로 성큼성큼 걸어 접근했다. 상대방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느낄 수 있 었다. 녀석 역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렇게 왔을 것이다. 정말로 이쪽 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 건물 전체에 폭탄을 설치하던가, 아니면 미 사일을 날렸을 것이다. 바쁘게 지나가던 사람들은 어린아이같지 않게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 찔끔 놀라 물러났다. 왕처럼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걸음을 떼어놓던 니콜라스는 벽에 기 대고 서 있는 남자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신분을 증명하는 아무런 표식도 없었지만 니콜라스는 그가 누구인지 한 눈에 알아보았다. 상대방은 자신과 안면이 깊은 남자가 보낸 인물 이었다. 자연히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졌다. "이게 무슨 짓이지? 나는 분명히 네 주인의 손님이다."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니콜라스 베르노. 당신이 지불한 대가에 대해서는 우리도 착실히 계약을 이행하고 있습니다." "날 죽이면 미국도 사라지게 된다. 프로메테우스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서릿발같은 음성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니면, 프로메테우스가 시스템에 손을 보기라도 했나? 내가 명령을 내려도 미국에는 폭격이 가하지 않도록?" "설마요. 그것은 사장님의 신념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장 착된 미사일은 사장님이라 해도 발사되지 않도록 다시 조작할 순 없 습니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핸드폰을 조작하는 행동은 대단히 건방져 보 인다. 그러나 말투만큼은 다시없이 공손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바로 옆에서 살벌한 대화가 이뤄지는 것도 모른 채 바삐 지나가고 있었다. "그럼 도대체 뭐야?" "다른 손님에게서 새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 하더군요."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입니다. 어렵게 생각하진 마십시오." 적어도 거짓이 깃들인 음성은 아닌 듯 들렸다. 니콜라스는 의구심을 품은 채 찬찬히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당신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정도 공격으로 당신을 죽일 순 없다는 것을요." "…."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디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아 주십시오." 남자는 등을 돌려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니콜라스는 권총을 만지작거 렸다. 지금이라도 총을 쏘면 그를 죽일 수 있다. A형 강화슈트는 머 리까지 보호하지는 못한다. 잠시 동안 총을 만지작거리던 니콜라스는 슬그머니 등을 돌렸다. "꽤 대담하네." 그가 알고 있는 프로메테우스는 이상적인 신념에 사로잡혀 있는 남 자였다. 광기와 신념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스스로 를 끊임없이 일깨워 균형을 유지하는 인물이었다. 한 발짝만 잘못 내딛어도 자아가 붕괴될 수 있는 신념을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는 보통 정신력으로는 버텨낼 수 없는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남자가 아무 주문이나 함부로 받아들여 자신을 노릴 리가 없다. 게다가 프로메테우스의 부하는 분명 자신을 죽이지 못하는 것을 증 명하는 것이 주문이라고 말했다. 짚이는 구석을 하나 남김없이 점검해보았다. 마피아는 아니다. FBI나 CIA도 아니다. 그들에게는 프로메테우스에게 그런 주문을 할 까닭이 일절 없었다. 조금 더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슬슬 접근하는 건가 보네.' 거의 반년 만인가.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탈출하던 날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라니. 그때를 생각하면 상처 자국이 욱신거렸다. 이제는 전부 아물어 외관 상 아무런 흔적도 없지만, 치욕까지 전부 소실된 것은 아니었다. 녀 석들이 접근해오기만 하면 하나 남김없이 전부 다 죽여주겠다고 별 을 바라보며 얼마나 이를 악물었던가. 그는 총을 점검했다. 자신의 몸을 점검했다. 완벽했다. 언제라도 녀석 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괴롭게 죽여줄 자신이 있었다. 단호한 결의를 품은 채 그는 예안을 찾아갔다. 대기실에는 그녀가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누나가 아니었어. 목표는 나였어." "그래?" 예안은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살폈다. 그러나 짚이는 구석이 있 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일반인은 상상할 수도 없는 세계에서 1 인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아이이다. 세상 모두가 원수라 해도 크 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집에 갈 거야?" "응. 그래야지." 의자에서 일어난 예안은 선글라스를 쓰고 모자를 써서 머리카락을 감췄다. 옷을 갈아입는 등 꽤나 변장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오늘은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런지 자신이 없었다. 무슨 연예 인도 아닌데 밖에 나갈 때마다 팬이라는 사람들이 수십, 수백 다스로 밀려드는 경험은 절대 사양이었다. "꺄악! 박사님이다!" "박사님! 박사님!" "여기 좀 봐주세요!" 뒷문을 통해 나가려 했는데 어느새 알아차린 여학생들이 플랭카드를 들고 우르르 달려왔다. "저기 대장님이다!" "대장님이야!" 낌새를 눈치챈 남학생들도 놓칠쏘냐는 얼굴로 우르르 달려왔다. 왼쪽 에는 장차 대한민국 아줌마 협회를 짊어지고 나갈 여학생들, 오른쪽 에는 한창 혈기 넘치는 사내놈들. 과연 오늘도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 하고 저번처럼 억지로 끌려가야만 하는가. 니콜라스는 주저 없이 총을 꺼냈다. 그리고 하늘로 총구를 겨누고 방 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느닷없는 총소리에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일제히 깜짝 놀랐다. 발이 지면에 붙은 듯 굳어 있는 그들을 천천히 번갈아 둘러본 니콜라스는 예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응…." 그녀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따라갔다. 사람들이 다 보는 도시 한 복판에서 발포라니, 제정신이야? 주차장에는 엄중한 경호망이 형성돼 있었다. 수백 명의 전경들이 완 전무장한 태세로 죽 늘어서 있는 건 실로 장관이었다. 쥐새끼 한 마 리 숨어들 틈도 없었다. 하늘에는 10기 가량의 군용 전투헬기가 떠 있었다. 대공미사일 시스 템은 지금쯤 1급 경계상태에 접어들어 있을 것이다. 모두가 그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중요한 인물이라고는 하지만 대통령도 저렇게까지 엄중한 호 위를 받지는 않는데 너무한 거 아니냐고 불평할 인물이 있을지도 모 른다. 그러나 안일하게 경호했다가 한 번 쓴맛을 단단히 본 적이 있는 한 국정부는 그녀가 공식자리에 나설 때마다 군대까지 동원하여 엄격한 호위망을 펼쳤다.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밝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매스컴 에 다시 나올 기회가 있었다. 정부는 그때 수백 명의 인력을 동원하 녀 철저한 경호망을 펼쳤다. 그러나 행사를 모두 마치고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던 중, 하늘을 날아가고 있던 민간 헬기에서부터 갑자기 기관총포가 튀어나왔다. 하 늘에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총탄 세례에 열 명의 호위원이 사망하 기까지 했다. 니콜라스는 기관총포가 외부로 노출되는 소리를 듣자마자 에너지 방 어막을 펼쳤고, 덕분에 그녀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헬기는 방향을 틀어 재빨리 도주했다. 그러 나 범인들은 끝내 탈출 루트를 확보하지 못하고 긴급 출동한 전투기 에 격추당했다. 엄밀한 조사 끝에 정부는 외국 테러범들의 소행이라는 것을 밝혀냈 다. 그러나 어떤 국가가 사주했는지는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자칫 심각한 외교 문제로까지 빚어질 수 있는 사건이었다. 온 국민들 이 흥분해서 반드시 범인을 사주한 국가를 밝혀내야 한다고 고래고 래 소리를 질렀다. 전쟁에서 패배한 일본과 미국이 가장 큰 의심을 받았다. 한국민들은 일제히 목소리를 높여 그들을 쳐야 한다고 외쳤다. 그만큼 그녀가 국 민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세계는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는가, 그리고 일어난다면 이번 전쟁은 얼마만큼 대규모로 펼쳐지는가 싶어 크게 긴장했다. 그러나 사태는 피해당사자인 예안이 적극적으로 정부에 압력을 넣는 통에 더 커지지 않고 수그러들었다. 애초에 자신의 정체를 밝힘으로 써 엄청난 위험에 노출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녀는 일을 더 키울 생각은 없었다. 단, 복수는 확실하게 했다. 누가 사주했는지는 밝혀낼 수 없었지만, 사주를 받은 테러집단의 본체는 철저히 괴멸시켰다. 물론 언론에는 발표하지 않고 비밀리에 처리했다. 공격하는 자는 누구든지 용서하지 않는다. 자신을 노리는 자들에 대 한 그녀의 강한 의지의 표출이기도 했다. 그 뒤로 한국정부는 그녀가 어디 나갈 때마다 경호에 세심한 주의를 기했다. 그녀는 바닷가에 한 번 바람쐬러 가는 것조차 혼자 갈 수 없 었다. 니콜라스만 살짝 대동한 채 자주 놀러나가곤 하지만, 그럴 때 마다 중현의 꾸짖음을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오늘처럼 공개적인 장소에 나올 때에는 싫어도 할 수 없이 헬기 편대까지 동원한 경호를 받게 된다. "나야 미리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상관은 없는데, 아빠는 굉장히 괴로 울 것 같아." "그렇겠지. 이런 것에는 익숙한 분이 아니니까." 어디 한 번 나갈 때마다 반드시 경호원들이 따라붙는 게 싫다고 울 상 짓던 아빠를 떠올리며 그녀는 쿡쿡 웃었다. 니콜라스는 자연스럽게 차 뒷문을 열어주었다. 그녀가 뒷좌석에 오르 자 그도 운전석 문을 열고 차에 탔다. 차의 이름은 맥카닉, 그녀가 붙인 애칭이었다. 맥카닉은 세상에 단 한 대만 존재하는 모델로서, 캐딜락 리무진은 비 교도 안 되는 최고 방탄차였다. 차의 설계와 제작은 그녀가 직접 담 당했다. 강도는 박격포를 쏜다 해도 멀쩡히 튕겨낼 정도였으며, 차체 바로 밑 에서 수류탄이 터져도 멀쩡했다. 최첨단 군사위성을 전속 이용하는 네비게이터에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인공지능 맥과 직접적으로 연 결되어 지령을 받아 가동되는 반격 시스템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우스갯소리로 몇 개의 무기를 설치했는지 모르겠다 선 언했을 정도로 맥카닉에는 많은 무기가 숨겨져 있었다. 일반에 공개 된 정보만 놓고 보자면, 전후방 전조등에 각각 2열씩 총 8열의 레일 건이 장착돼 있으며, 차문 바로 아래에는 개폐방식 레이저 발사장치 가 숨겨져 있었다. 상대적으로 약한 좌측과 우측 방향에서 달려오는 적을 섬멸하기 위 하여 4개의 타이어 속에도 레이저 포 발사장치가 숨겨져 있었다. 차 뒷창과 트렁크 사이에는 소형 미사일 발사장치까지 숨겨져 있었다. 하여튼 M신문사 모 기자의 말을 빌자면, 이른바 달리는 요새인 셈이 었다. "여기는 1호기. 상태는 순조롭다." 1호기 헬기 조종사는 정기 연락을 보낸 뒤 살짝 방향을 틀었다. 저 아래의 뻥 뚫린 도로에서는 수십 대의 호위차량을 거느린 맥카닉이 시원하게 달리고 있었다. 날렵하게 쭉 뻗은 맥카닉의 멋진 곡선을 부러운 듯 바라보던 조종사 는 레이더를 보고 경악성을 질렀다. "여기는 1호기! 적기 출현!" 다른 헬기들도 황급히 적기가 출현했다는 보고를 했다. 그러나 공군 관제실도 어차피 레이더를 통해 적기가 출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 었다. 느닷없는 비상사태에 가까운 공군기지에서 대기하고 있던 파일럿들 은 황급히 전투기에 올랐다. 긴급 발진했다고는 하나 여기까지 전투 기가 도착하려면 최소 이십 분은 걸릴 터였다. "조기경보기는 도대체 뭐한 거야! 적기가 영토에 침입하는데도 못 알 아차리다니!" 공군기지 사령관이 크게 화를 내자 장교는 황급히 변명했다. "동해안 영해에서 갑작스레 솟아올랐습니다. 레이더에 잡히지 않았던 게 당연합니다!" "헛소리 작작하고 빨리 격추 시켜!" 사령관은 레이더를 들여다보며 초조한 듯 발을 동동 굴렀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적기가 보통 기종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미사일도 아닌 주제에 바다 속을 항해해서 접근한 뒤 날아오 르다니, 그가 알기로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은 맥 밖에 없었다. 단 3기에 불과한 적기의 습격이었지만 한국 군사령부는 크게 당황하 고 있었다. 호위 임무 중이던 헬기 조종사들은 이를 악물고 적기를 향해 달려들 었다. 그러나 애초에 대지 공격만을 목적으로 무장한 헬기이다. 그들 이 할 수 있는 일은 적기의 시야를 어지럽히는 것 외에는 없었다. 적기는 음속으로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헬기부대를 농락했다. 이따 금씩 과시하듯 날개를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공격에 한층 여유를 부 리는 태도였다. 위험하다는 연락을 받은 니콜라스는 급히 엑셀을 밟았다. 앞뒤로 호 위하던 차량들이 황급히 비켜주었다. 적기가 나타난 마당에 앞을 가 로막고 있다가는 오히려 방해만 된다. "어때?" "80km 앞에 터널이 있어. 거기까지만 가면 돼." 도로가 구불구불하다 보니 쭉쭉 밟지도 못하고 시속 150km 정도로 만 달려야 했다. 니콜라스는 애가 탔다. 차량 내부 레이더에서는 차의 바로 머리 위에서 삼각형을 그리며 날 고 있는 적기의 추적을 생생하게 비춰내었다. 희생을 각오하고 몇몇 조종사들이 헬기 몸체를 적기에 부딪치려 시도해보았지만, 적기는 번 번이 그 시도를 무산시켰다. 니콜라스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핸들 아래에 위 치한 붉은 버튼을 눌렀다. 내부 모니터 바로 아래에서 복잡한 계기판이 튀어나왔다. 그는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청색 버튼을 힘껏 눌렀다. 피유웅! 차량 후방에 장착된 2문의 미사일 발사관이 열리며 소형 미사일 4기 가 차례로 발사되었다. 크기는 작지만 첨단 컴퓨터와 고성능 폭약이 탑재돼있어 웬만한 대공미사일 몫은 톡톡히 해내는 미사일이었다. 그때 유유자적하게 날고 있던 적기의 날개 아랫부분에서 푸른 빛이 쏟아졌다. 레이저 광선은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4기의 미사일을 정확 히 꿰뚫었다. 공중에서 붉은 폭발이 일어났다. "제길!"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느낀 니콜라스는 핸들을 크게 꺾었다. 때마침 하늘에서 내리꽂힌 레이저 광선이 아슬아슬하게 좌측 범퍼를 스치며 아스팔트를 터트렸다. "지원은?" "늦어! 십 분은 더 있어야 도착한대!" "그 전에 통구이가 되고 말 거야!" 3기의 적기는 헬기 부대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유유자적하게 맥카 닉을 따라가며 허공을 몇 차례 순회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판단한 예안은 맥을 불렀다. 수백km 떨어진 연구소 옆에 마련된 송전실의 긴급 발진문이 황급히 열렸다. 그 안에서 튕겨지듯 솟아오른 맥은 재빨리 전투기로 변신해 쏜살같 이 날았다. 십 초도 채 걸리지 않아 이곳에 당도한 맥은 전투모드로 변신할 새 도 없이 라이플 버스터 포를 쏘았다. 적기 편대는 약속이라도 한 듯 삼각형의 크기를 넓히며 맥의 공격을 피했다. 예안은 신음을 삼켰다. "어떻게…." 맥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전투기가 있었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현존하는 어떤 전투기도 맥의 이빨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어떻게 저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쿠앙! 맥은 다시 한 번 포를 쏘았다. 한 적기가 오른쪽 날개 끝에 포를 얻 어맞고 비틀거렸다. 녀석이 검은 연기를 뿌리며 낙하하려는 듯 하자 맥은 굵은 광선을 쏘아 공중에서 증발시켰다. 맥카닉이 파편에 당하 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나머지 두 기가 광선포로 맥을 공격해왔다. 맥은 가소롭다는 듯이 피 하지도 않고 그대로 맞았다. 그 공격은 맥에게 아무 피해도 주지 못 했다. 맥은 마무리를 짓기 위해 전투모드로 변해 포를 쏘았다. 급선회를 하 며 포를 피하려던 한 적기가 허공에서 그대로 불꽃으로 화해 사라져 버렸다. 남은 건 단 한 기. 맥이 절대 놓칠래야 놓칠 수 없는 목표였다. 지켜보던 모두가 그것을 확신했다. 절대 놓칠 리가 없다고. 그러나 뜨거워진 포구가 은백색 날개를 겨누는 바로 그때, 수평선 너 머에서부터 거대한 구형의 빛에너지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바 다 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적 잠수함이 원거리 에너지 포를 발사한 것이었다. 구체는 똑바로 차를 향해 떨어졌다. 맥은 재빨리 적기를 포기하고 차 를 보호하기 위해 앞을 가로막았다. 빛의 구체가 머금고 있는 에너지는 소형 핵탄두에 버금가는 위력, 그 렇다면 이쪽도 그에 상응하는 방어를 펼쳐야 한다. 그렇게 판단한 맥 은 지체 없이 방어막을 전개했다. 둥근 구체와 푸른 방어막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강렬한 섬광이 뜨거운 열기에 휩싸이며 타올 랐다. 방어막의 곡선을 타고 흘러 튀어나간 열에너지에 도로가 녹고 나무 가 재가 되었다.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던 이 나라 모든 국민들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그녀의 무사함을 기원했다. 이윽고 빛이 사그라졌다. 두려운 장면을 보듯 천천히 화면으로 시선 을 돌리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작년 미군으로부터 항복을 얻어내고 돌아왔을 때처럼, 맥은 당당하게 허공에 떠 있었다. "하… 어떻게 살았는걸?" 여차하면 에너지 방어막을 전개할 준비를 하고 있던 니콜라스는 멋 쩍게 웃으며 돌아보았다. 그녀도 놀란 표정을 감추며 여유 있는 척 웃어 보였다. "그러게." "누군지 몰라도 정말 바보 같은 놈들인 게 틀림없어. 이렇게 무식하 게 공격해오다니 말이야."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몰려왔다. 그녀는 다친 곳은 없냐는 물음에 고 개를 저어 아니라고 대답했다. 차문을 열어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녀는 가만히 내버려두라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위험이 가시고 안전이 찾아오자 그녀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상당히 화나네." "응?" "지금까지 맥카닉에 폭탄이 설치돼있었던 적도 있었고, 집에 폭발물 이 배달된 적도 있었어. 영해에서 격추 당하긴 했지만, 연구소로 미 사일이 발사된 적도 있었고. 하지만 그것들은 전부 다 애교로 봐줄 수 있었어. 왜냐고? 정말로 위험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녀는 상당히 분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근데 이건 뭐야? 도대체 어떤 미친 녀석이 이렇게까지 나를 노리는 거야? 니콜라스, 한반도에 설치된 대공 방어망이 얼마나 튼튼한지 아 니? 그걸 뚫고 여기까지 적기가 들어오려면 얼마나 대규모 전투기 부대가 공습했을지 짐작이 가? 내 이것들을 지금 당장!" 단 3기의 적기가 바다 속에서 솟아올라 기습해왔다는 것을 모르는 그녀는 지나치게 흥분 상태였다. 혀를 차던 니콜라스는 통신이 들어와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뭐지?" 통신을 켜자 한 장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놀라워하며 눈을 크게 뜨던 그는 이윽고 쓴웃음을 지었다. 행운이 있기를. - 프로메테우스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디젤 우웃!! 엘리 VS 프로메 사이에 예안이 참가? 기억상실의 소녀는? 정체불명(?)의 집단은.... 후후...점점 재밌게 꼬여가고 있군요 2005/01/27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5/18 페이지 ▶ 289 - 추억의 그림자(1) [3] 실탄 2005/03/149Kb 740 ▶ 288 - 인조의 가치(7) [18] 실탄 2005/03/117Kb 981 ▶ 287 - 인조의 가치(6) [13] 실탄 2005/02/237Kb 1024 ▶ 286 - 인조의 가치(5) [15] 실탄 2005/02/147Kb 966 ▶ 285 - 인조의 가치(4) [18] 실탄 2005/02/0210Kb 976 ▶ 284 - 인조의 가치(3) [12] 실탄 2005/01/159Kb 1077 ▶ 283 - 인조의 가치(2) [8] 실탄 2005/01/136Kb 894 ▶ 282 - 인조의 가치 [27] 실탄 2004/12/3111Kb 1242 ▶ 281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6) [38] 실탄 2004/11/2613Kb 1770 ▶ 280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5) [1] 실탄 2004/11/2613Kb 872 ▶ 279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4) [3] 실탄 2004/11/2612Kb 827 ▶ 278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3) [2] 실탄 2004/11/2613Kb 831 ▷ 277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2) [1] 실탄 2004/11/2616Kb 830 ▶ 276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1) [1] 실탄 2004/11/2613Kb 969 ▶ 275 - 평화수호자(10) [11] 실탄 2004/11/2615Kb 903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4] 5 [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29919 :: 278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3) 실탄(cruel) 04-11-26 :: :: 12963 펄펄 뛰며 화를 내던 예안은 니콜라스가 쓴웃음을 짓자 의아했다. "왜 그래? 그 메시지는 뭐고?" "직접 볼래?" 니콜라스는 그녀가 화면을 쉽게 볼 수 있도록 몸을 비켜주었다. 메시 지를 보고 난 그녀는 어이없어 했다. "이게 뭐야?" "프로메테우스에서 보낸 메시지." "프로메테우스? 그 화이트 데빌을 만들었다는 곳 말이야?" "응." "거기서 왜 이런 메시지를… 아, 설마?" 새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변했다. 니콜라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누나가 상상하는 게 맞다고 말하듯 끄 덕였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따지는 듯한 기세로 물었다. "왜 거기서 널 공격한 건데? 너 거기 단골이라고 하지 않았어?" "단골은 단골이지. 그 녀석들 내가 대가 지불한 것은 확실히 지켜.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날 없애라고 주문한다면, 그리고 그 주문이 합 당하다고 판단하면 그것은 또 그대로 충실히 해." "누가 네 목숨을 없애달라고 요구했는데?" "글쎄. 아직은 모르겠어." 아틀란티스인들일 거라고 짐작한다는 말은 숨겼다. 괜히 그 이름을 꺼내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요새 그녀는 눈치가 꽤 빨라졌다. 그가 짓는 쓴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눈을 치켜 떴다. "이제 슬슬 나서시겠다는 건가?" 예안은 조소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퍼뜩 생각난 게 있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우리집에 있는 그 여자 죽이러 온 남자 말이야. 혹시 그 남자 프로 메테우스에서 화이트 데빌을 산 게 아니라, 프로메테우스에서 직접 보낸 사람이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확실치는 않아." 니콜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프로메테우스가 정말 아틀란티스의 주문 을 받아들여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면 그 즉시 통보했을 것이다. 세뇌 당한 여자를 모른 척 접근시키는 짓거리 따위를 할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저번에 침입했던 그 남자는 진심으로 그 여자를 죽이려고 했다. 그 여자를 죽이려는 척 들어와 예안을 노렸다고는 도저히 보기 힘들었다. 그 여자와 그 여자를 노리는 자들은 프로메테우스와 별개의 존재이 다. 이것만은 확실했다. 그런 설명을 듣고 난 예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골치 아프게 됐네. 아틀란티스 녀석들 하나만 해도 정신이 어지러운 데 괜히 엉뚱한 일에까지 끌려들어간 거 아냐?" 「문제는 하나 더 있습니다.」 예안은 손목에 찬 원격장치를 내려다보았다. 니콜라스는 호기심을 보 였다. 맥이 실제 음성으로 말하는 것은 몹시 드문 일이었다. 「조금 전 그 전투기들은 현대과학 기술로는 만들 수 없는 것이었습 니다.」 "당연하잖아. 그렇지 않고서야 한 번만이라고는 해도 네 공격을 피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어쨌든 전부 다 격추 시켰겠지?" 「죄송합니다. 1기는 놓치고 말았습니다.」 "뭐? 지금까지 입 다물고 있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어?" 예안은 실망하기에 앞서 경악했다. 아무리 지원사격에 힘입었다고는 하나 맥의 눈을 피해 도망치다니? 이게 가능한 소린가? 「그 전투기의 움직임과 형태가 낯설지 않아서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아프로디테 시리즈의 <파이어 블록>이더군요.」 한순간, 호흡이 정지했다.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그녀는 저 멀리 떠 있는 맥을 멍청히 바라 보기만 했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니콜라스는 가만히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 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마법에서 풀려나듯, 굳은 몸에 혈류가 돌았다. "아프로디테… 시리즈라고?" 「그렇습니다.」 맥은 잘라 말했다. 그녀는 숨을 거칠게 쉬며, 손을 내려다보았다. 가 늘고 새하얀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프로디테 시리즈라는 것은 오리지널 유젤의 기억에 존재하는 이름 이었다. 아담, 케이가 사도에 머무르고 있던 시절 그 천재적인 재능 을 발휘하여 개발했던 전투기 모델. 아담과 이브가 지구를 떠난 지금 그 전투기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사도 외에는 없어야 했다. "과연… 그렇다면 네 공격을 피하고, 도망칠 수 있었던 것도 이해가 가네. 아프로디테… 사도…." 사도는 수백 년 동안 세계의 그림자에 숨어 존속했던, 천재 과학자들 의 집단이다. (구인류에 비해)그들이 지닌 과학은 실로 놀라운 것이 어서, 케이(아담)와 제이(이브)가 탄생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그들 의 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케이가 탈출하고, 에덴 혹성이 탄생함에 따라 그들은 점차적 으로 세상에 간섭할 의지를 잃게 되었다. 그리고 6년 전 지구에 있었 던 커다란 <사고> 이후 완전히 그 흔적을 감추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사도가 왜…?"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전혀 뜻하지 않은 존재가 나타나자 사 고회로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전화가 왔습니다. 받으시겠습니까?」 혼란스러워하고 있던 그때 차량 모니터에 글씨가 떠올랐다. 발신번호 를 확인한 그녀는 희색이 되어 전화를 받았다. "앤드류?" 「어떻게 된 거야? 사고가 있었다면서?」 앤드류는 대단히 창백한 안색이었다. 자다가 일어난 듯 잠옷 차림에 머리카락도 부스스했다. 그녀는 수심에 잠겼던 것도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 를 으쓱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보시다시피 습격이 좀 있었어. 물론 당연히 쫓아버렸지." 「어디 다친 덴 없어?」 "보면 몰라? 맥까지 출동시켰는데 설마 내가 다치겠니?" 그제야 앤드류는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토했다. "근데 앤드류. 프로메테우스에 좀 알아봐 달라는 건 어떻게 됐어?" 「화이트 데빌을 누가 사갔는지는 고객 비밀이라서 말할 수 없대. 대 신에 다른 주문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어.」 "쳇. 뻔뻔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습격할 땐 언제고 다른 주문은 받아 주겠다고?" 「습격했다니? 프로메테우스가 누나를 습격했다는 거야?」 "그래.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니콜라스." 앤드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니콜라스는 조금 전 자신들을 습격한 전투기를 보낸 자가 프로메테 우스일 거라고 했다. 맥은 그 전투기가 사도가 개발한 아프로디테 시 리즈라고 단정지었다. 그렇다면 프로메테우스와 사도는 동일한 뿌리를 지녔거나 혹은 동일 한 집단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녀는 계속 기억을 더듬었다. 흔적을 감추었다고는 하나, 사도는 자존심이 대단히 강하고 단일화된 집단이었다.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면 프로메테우스라는 가명을 사용 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프로메테우스는 사도 그 자체는 아니라는 소리가 된다. 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프로디 테 시리즈를 사용할 리가 없을 테니까. 「프로메테우스의 총수와 만날 기회를 얻었어. 누나가… 거기에 나가 보지 않을래?」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앤드류는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그녀는 주저할 것 없이 끄덕였다. "그래주면 고마워. 나도 프로메테우스한테 꼭 확인하고 싶었던 게 있 거든." 앤드류는 말리고 싶다는 얼굴로 몇 번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그만 두었다. 어차피 자신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그녀는 프로메테우스를 찾아가 멱살을 쥐고 흔들었을 것이다. 잠이 들면 항상 생각난다. 선홍빛으로 하늘을 물들이며 수평선 끝까지 뻗어나가던 붉은 선. 세상을 덮은 절망 속에서 숙원이 이루어졌다고 웃고 있던, 친구의 광 기 가득한 얼굴.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환희하고 있는 나. 「성공이야! 성공이야!」 무엇이 그렇게 그 녀석을 기쁘게 했을까. 나는 또 왜 기뻐하는 녀석을 보고 행복해했을까. 왜 '그 사람'은 우리를 보고 자기 탓이라고 자책했을까. 「모든 게 내 탓이다. 시리우스를 미워한 나머지… 너희들을 이 지구 에 그대로 방치한 내 탓이야.」 검은색 머리칼과 하얀 살결을 지닌 '그 사람'은 쓸쓸해하며 그렇게 말한다. 환영 속의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에게 묻는다. 「당신의 코드네임은?」 「케르베로스.」 「아아, 당신이 아담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썩 꺼져. 이곳은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니야.」 그럼 그 사람은 또다시 쓸쓸하게 미소짓는다. 동정하지 말라고, 이제 와서 누구를 위하는 척 하는 거냐고 아무리 화를 내어도 그는 불쾌해하지 않는다. 「잘못한 거야.」 그는 우리가 잘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엇을 잘못했다는 걸까. 단지 저주, 후유증을 소멸시키기 위 해 힘들게 아둥바둥 싸웠을 뿐인데. 후유증은 자신보다 우월한 타인을 증오하는 인류의 열등감과 지구의 의지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저주라 한다. 백 억에 달하는 동족의 증오 와 신의 편증(偏憎)을 견뎌가며 싸웠던 우리에게 칭찬은 해줄 수 없 었던 걸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모두가 적이었다. 인간들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사도의 존재를 무의식중에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더, 즉 지구의 의지에게 사도를 비참하게 만들어달 라고 요구했고, 마더는 그대로 시행해 후유증이라는 저주를 내렸다. 그런 고통스런 삶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목숨이 부서지는 줄도 모르고, 닳고 부스러져 더 이상 남아 있는 목 숨이 없다는 것도 모르고, 그래도 목숨을 던져가면서 싸웠다. 그런데도 칭찬해줄 순 없었단 말인가.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후유증을 증오하고 있었을 텐데. 「말했잖아. NM 프로젝트는 대실패였다고, 대실패.」 헤라클레스는 늘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리고 싸늘한 총신의 감각이 손안에 쥐어졌을 때, 아득한 절망의 끈 을 붙잡고 늘어졌을 때 자신은 친구의 말을 따라하고 있었다. 「그 애는 결국 사도를 뿌리부터 무너뜨리고 말 거다. NM 프로젝트 는 역시 저주받은 게 틀림없어. 넌 지금 속고 있어.」 그때는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몰랐다. 그냥 그러지 않으면, 그들 신인류를 무작정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레이온은 신인류와 사랑에 빠져 버렸다. 그래서 쏘았던 것이다. 「너는 바보야… 프로메테우스….」 어깨가 피로 물든 채 레이온이 악을 쓰듯 말한다. 몇 번이고 기억을 지우고 닦아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싫은 장면의 한 부분이다. 무엇이든 지울 수 있는 지우개가 있다면 가장 먼저 그 광경부터 지 우겠다고 맹세했을 정도니까. 그때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랐다. 그냥 헤라클레스를 믿었고, 믿고 있는 것을 따랐고, 레이온을 그 믿 음에 끌어들이려 했다. 하지만 레이온은 잘못했다고 말했다. 그 사람도 잘못했다고 말했다. 모두가 잘못했다고 말했다. 흐릿한 기억은 결코 또렷하게는 되살아나지 않는다. 아주 가끔 잊어버린 일부분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보고 나면 다시 또 금방 잊어버린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는데? 제발 누가 좀 말해달란 말이야! 「보여줄까?」 어둠 속에서 머리를 움켜쥐고 괴로워하던 프로메테우스는 처음 듣는 여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분명 처음 대하는 목소리인데 신기 하게도 어디선가 들어본 듯 가슴 한 구석이 찡해왔다. 보랏빛 향기가 그의 전신을 감쌌다. 향기는 비단처럼 고운 머리카락으로 변했다. 머리카락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그는 하마터면 아기처럼 웃어버릴 뻔했다. 이것은 기억에 남아 있는 광경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는 긴 머리카락으로 아기였던 내 코를 간지럽 히고 깔깔거리곤 하셨으니까. 잠깐, 근데 어머니는 보라색 머리카락을 갖고 있지 않았는데? 「보여줄까?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전신이 녹아 내리는 달콤함에 취한 그는 들뜬 눈을 한 채 끄덕였다. 불꽃이 피어난다. 지구의 푸른 빛깔이 붉은 색에 먹혀 들어가고 있었다. 곳곳에서는 거대한 중력의 폭발이 일어났다.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있다. 내가 내가 아니고, 남이 남이 아닌 세상. 내가 남이고, 남이 나인 세상. 내가 남의 마음을 볼 수 있고, 남이 나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세상. 그것은 아비규환이었다. 「제가 이런… 짓을 저질렀나요?」 지구가 멸망으로 치닫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떨림도 잊어버린 목소 리로 물었다. 「너 혼자가 아니야. 네 친구도 함께였지.」 「헤라클레스가… 이런 짓을?」 인류가 사라졌다. 문명이 소멸됐다. 지구가 멸망했다. 정녕 저것을 나와 헤라클레스가 했단 말인가? 「당신은 누구지요?」 「보여줄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바라보기만 해도 아찔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였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은 실로 눈부셨다. 보라색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흘러내려 발끝을 덮었다. 「무겁지… 않아요?」 그는 여자의 두 손목과 두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보고 물었다. 여자는 생긋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무거워. 네가 풀어줄래?」 그는 무릎을 꿇고 족쇄를 살폈다. 족쇄에는 검은 쇠사슬이 길게 매달려 있었다. 쇠사슬은 저 멀리 어둠 속 끝까지 뻗어 있었다. 억겁의 세월을 달려간다 해도 도달하지 못할 정도로 길었다. 「죄송해요. 저는 풀 수 없어요.」 「역시 그렇지? 아직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 여자는 뜻 모를 소리를 한다. 쇠사슬이 그렇게 번거롭다면, 그냥 풀어버리면 될 텐데. 아니면 여자는 쇠사슬을 풀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여자의 모습이 희미해진다. 정신이 아득해온다. 프로메테우스는 눈을 감았다. 사라지는 보랏빛 향기가 아쉬워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이윽고 그는 꿈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한참 동안 멍해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쇠사슬을 풀다가 엉망진창이 되었던 손은 거짓말처럼 멀쩡했다. 당연했다. 그것은 꿈이었으니까.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상 걸고 다니던 목걸이를 목에서 풀었다. 몇 년을 열어보지 않았던 펜던트를 열고 안에서 메모리 카드 를 꺼냈다. 벽의 한 부분에 손을 댔다. 벽이 넘어가며 금고가 드러났다. 그는 비밀번호를 입력한 뒤 레버를 돌려 열었다. 그리고 금고 안에 자리잡은 조그만 슬롯에 메모리 카드를 꽂고 돌렸다. 벽면 전체가 커다란 스크린으로 변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통신 회로가 가동되자, 컴퓨터는 수신자를 찾아 강한 전파를 쏘았다. 화면에는 아직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전파가 늦게 도착할 리는 없을 테고, 상대방은 아직 통신을 받을 생각이 없나 보다. 그래도 끈기 있게 기다렸다.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받을 것이다. 잡음의 지직거림이 더욱 커졌다. 스크린이 한쪽에서부터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드디어 받았나 보다. 프로메테우스는 평온한 웃음을 띠었다. 화면에는 한 청년의 얼굴이 나타났다. 무척 수척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왜 그런 걸까. 그동안 많이 앓기라도 했던 걸까. 뭔가 감동적인 말을 해주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간 감동 적인 영화도 많이 보고, 명작 소설도 많이 읽고, 거울을 보고 연습도 많이 했는데. 왜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걸까. 「무슨 일이야, 프로메테우스?」 화면 속의 청년이 거칠게 입을 열었다. 헤어지기 전과 똑같이 변함 없는 거친 말투였다. 그의 정신이 서서히 깨어났다. 29살의 평화수호자 프로메테우스가 아닌, 22살의 사도의 간부 프로메 테우스로 돌아간 그는 비로소 옅은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레이온."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RAGNAROK 드디어 마더가 등장했네요... 사도 역시 건재했고. 과연 신인류와 사도 같이 편 먹으면 좋을거 같은데. 2004/11/27 디젤 쇠사슬은 저멀리 어둠속 끝까지 뻗어있었다. 억겁의 세월을 달려 간다해도 도달하지 못할만큼 길었다... 이번호의 멋진 부분이었습니다. 2005/01/27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5/18 페이지 ▶ 289 - 추억의 그림자(1) [3] 실탄 2005/03/149Kb 740 ▶ 288 - 인조의 가치(7) [18] 실탄 2005/03/117Kb 981 ▶ 287 - 인조의 가치(6) [13] 실탄 2005/02/237Kb 1024 ▶ 286 - 인조의 가치(5) [15] 실탄 2005/02/147Kb 966 ▶ 285 - 인조의 가치(4) [18] 실탄 2005/02/0210Kb 976 ▶ 284 - 인조의 가치(3) [12] 실탄 2005/01/159Kb 1077 ▶ 283 - 인조의 가치(2) [8] 실탄 2005/01/136Kb 894 ▶ 282 - 인조의 가치 [27] 실탄 2004/12/3111Kb 1242 ▶ 281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6) [38] 실탄 2004/11/2613Kb 1770 ▶ 280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5) [1] 실탄 2004/11/2613Kb 872 ▶ 279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4) [3] 실탄 2004/11/2612Kb 827 ▷ 278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3) [2] 실탄 2004/11/2613Kb 833 ▶ 277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2) [1] 실탄 2004/11/2616Kb 830 ▶ 276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1) [1] 실탄 2004/11/2613Kb 969 ▶ 275 - 평화수호자(10) [11] 실탄 2004/11/2615Kb 903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4] 5 [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29920 :: 279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4) 실탄(cruel) 04-11-26 :: :: 12087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레이온은 반가움도 원망도 기쁨도 분노도 아닌 복잡한 감정이 섞인 눈으로 프로메테우스를 보았다. 인간들에게 최초로 불을 가져다준 신의 이름을 코드네임으로 받을 수 있어 좋았다며 웃곤 했던 친구. 녀석은 불을 재앙이라 해석하며 자조적으로 웃곤 했다. 그리고 친구인 자신에게 총을 쏘기까지 했다.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7년만인가.」 한참 후 레이온은 힘들게 말을 꺼냈다. 프로메테우스는 그가 통신을 끊지 않은 것이 기쁘다는 듯이 끄덕였다. "그래. 7년만이지." 「많이 늙었네. 옛날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야.」 "섭섭해. 그래도 아직은 이십 대라고." 그들은 오랜만에 만난 친한 친구들의 흉내를 내보았다. 그러나 역시 자신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꿈을 꾸었어." 「꿈?」 "꿈에서 어떤 여자를 만났다. 참 아름답더군. 보라색 머리카락을 아 주 길게 기르고 있었어." 「마더겠군.」 "마더?" 「정말 다 잊어버린 모양이군. 케이가 지구인들의 기억을 전부 다 지 워버리겠다고 했을 때 난 설마 사도인들의 기억까지 지울 수 있을까 의심했는데 말이야.」 레이온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네가 만난 여자는 마더일 거야. 지구의 의지이자 신이지. 넌 7년 전에 한 번 마더를 만난 적이 있어.」 "몰라. 어렴풋이 기억 날 것 같기도 해. 환각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는 아직도 구분할 수 없지만 말이야." 자조적으로 웃는 프로메테우스의 얼굴은 아련한 기억을 되새기는 듯 쓸쓸해 보였다. "7년 전 그날, <사고>가 끝난 이후로 나는 항상 악몽을 꿨다." 「….」 "모르겠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기억나는 건 레이온 네가 이건 <사고>라고 말해주던 것 뿐이야." 7년 전 사고가 있은 후 케이는 지구인들의 기억에서 에덴 혹성과 달, 그리고 <사고>에 관한 기억을 전부 지워버렸다. 프로메테우스가 아무리 되살리고 싶어도 봉인이 풀리지 않는 한 기 억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나약한 구인류의 정신력으로는 고귀 한 신인류가 가한 잠금은 풀리지 않는다. 「프로메테우스. 그건 사고였다.」 "…." 「그러니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돼. 괴로워하는 것은 나 혼자만으 로도 충분하다.」 얼어붙은 가슴을 망치로 내려치듯, 아찔한 충격이 시리도록 차게 가 슴을 덮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물었다. "왜 나는 기억하면 안 되는 거지?" 「….」 "기억하고 싶어. 알고 싶어. 도대체 7년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나는 사도로 돌아갈 수 없는지. 알고 싶어. 모든 걸 알고 싶어." 기억하진 못하지만, 몸은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집단, 사도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그러니 이렇듯 평화수 호라는 이념을 내걸고 집단 프로메테우스의 총수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겠지. 마찬가지로 사도 쪽에서도 프로메테우스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몸은 알고 있으니까. 왜 돌아갈 수 없는지, 왜 받아들일 수 없는지 서로가 기억하지 못하 고 있다. 그럼에도 돌아갈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알고 있는 것은 레이온뿐이었다. 「좀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어, 프로메테우스. 내가 알고 있는 너는 좀더 거만하고, 좀더 자신만만하고, 좀더 사려 깊은 남자였다. 단순 기억상실증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하는 남자가 아니야.」 레이온은 어린아이를 위로하듯 부드럽게 덧붙였다. 「프로메테우스의 총수가 이렇게 마음 약한 남자라는 소문이 나서는 장사하기가 곤란해지잖아? 안 그래?」 그의 허리가 푹 꺾였다. 폭소를 터트리던 그는 키득키득 웃었다. "아하하하, 그래 네 말이 맞아. 나는 프로메테우스의 총수지. 이런 못 난 꼴을 보이면 안 되는 건데. 미안했다, 레이온." 조금 전의 슬픔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린 듯 프로메테우스의 표정은 마냥 쾌활했다. 레이온은 기쁘다기보다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 를 주시했다. 소름끼치도록 재빠른 감정의 변화는 무언가가 심각하게 어긋나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좋은 정보를 하나 알려줄까, 레이온?" 「어떤?」 "프랭크 앤쏘니 유젤, 아니 서예안 박사를 만나기로 했다." 레이온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프로메테우스는 고개를 갸웃거 렸다. "어라? 혹시 너랑 아는 사이였어?" 「…그래.」 "좋은 쪽? 나쁜 쪽?" 어느 쪽인가 하고 그는 잠시 생각했다. 자신은 좋은 쪽이라 생각하지 만 그쪽에서는 나쁜 쪽이라 생각하겠지. 그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좋은 쪽.」 "그래? 그렇다면 이거 실수했군. <파이어 블록>을 3기나 보내서 인 사치레로 공격했는데 말이야. 나중에 사과해야겠다." 「그 머저리가 너였나? 나는 사도의 누군가가 그런 짓을 벌인 줄 알 았는데.」 "설마. 사도는 지금 몸을 웅크리고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고. 지금 세계를 지키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 프로메테우스야." 어린아이가 가슴을 쭉 펴며 자랑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레이온은 킥 킥 웃어버렸다. 「그럼 왜 미국과 한국이 싸울 때는 나서지 않았지?」 "싸움을 먼저 건 것은 미국이었는데다가, 한국이 승리할 예정이었으 니까. 그런 경우는 그냥 지켜보고 있는 게 가장 좋아." 「만약 한국이 미국에 밀리면 어쩌려고 그랬어?」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한국에는 맥이 있는데 말이야.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됐더라면 내가 나섰을 거야. 워싱턴에 대륙간탄도를 날 리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지." 자신감이 가득한 태도만큼은 7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변함이 없다.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어쩌면 자신의 인생 중 가장 행복했을지 모르 는 그때를 상기하며, 레이온은 씁쓸히 미소지었다. 「그래서 7년이나 연락을 끊고 있다가 그것 자랑하려고 지금 연락한 거야?」 "그럴 리가 있겠어? 다른 좋은 정보도 알려줄 겸해서 겸사겸사 연락 한 거야." 「좋은 정보?」 "앤드류 회장이 티아마트를 조사하고 있어." 레이온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날 속일 생각은 하지 마, 레이온. 티아마트는 네가 조직한 자금줄 맞지?" 「그래.」 의외일 정도로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어차피 세계제일의 정보망을 갖고 있는 프로메테우스를 속일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네가 유젤 박사랑 아는 사이라고 하니까 그냥 말하는데, 유젤 박사 집에 '키메라'가 하나 얹혀 살고 있나 봐." 「뭐?」 레이온은 눈을 크게 치켜 떴다. 전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길에서 우연히 주운 모양이야. 하여튼 설마 키메라일 거라고는 상상 도 못하고 있는데, '처리반'이 키메라를 처리하러 왔다가 니콜라스 베 르노에게 걸려 자폭했다는군. 그것도 화이트 데빌로 말이야." 쓴웃음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랬군. 앤드류 회장은 키메라와 프로메테우스 네가 무슨 관련이 있는 거라 생각한 모양이지?」 "그런가 봐. 난 거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말이야." 화이트 데빌은 「프로메테우스」가 비밀리에 독점 제작하여 소량판 매하고 있는 시체제거용 약물이다. 그러나 그 원기술은 다름 아닌 사 도로부터 가져온 것이었다. 레이온 역시 한때는 사도의 간부였던 남 자, 화이트 데빌을 만들 수 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또다시 엮이게 되다니. 레이온은 기묘한 운명의 흐름 을 감지했다. 자신과 예안을 어떤 힘이 이어주고 붙여주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말을 하면 그녀가 크게 화를 낼 테지만. 「만나는 건 좋아. 하지만 이상한 짓은 하지 말도록 해.」 "알았어. 하지만 상인정신을 발휘하는 것은 좀 눈감아 줘." 「상인정신?」 "나도 먹고살아야 할 거 아니야. 핵미사일을 한 10기 정도 팔아야겠 어. 1기당 30억 달러니까, 300억 달러 정도 챙길 수 있겠군. 거기다가 유지비까지 합치면 한 330억 달러쯤 될까?" 「자격은 충분하겠지만, 걔한테는 핵미사일 따위 필요 없어.」 "필요 없는 물건을 잘 파는 것도 상인의 재능 중 하나라고." 레이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폭소했다. 이윽고 겨우 웃음을 그친 그는 눈물까지 찔끔 흘려가며 말했다. 「완전히 상인이 다 됐군. 그러다가 나중에는 세계평화까지 돈에 팔 아 해치우는 거 아니야?」 "설마. 아직은 그래도 제정신이라고. 진작 돈에 미쳤으면 아무나 가 리지 않고 전부 여기저기 마구 핵미사일을 퍼줬을 거야." 「어쨌든 잘해봐.」 "너와 아는 사이라는 이야기, 할까?" 「그럴 필요 없어. 저쪽에서 알아볼 테니까.」 "그래? 이건 너무 불공평해.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죄다 기억하다니." 프로메테우스는 무의식적으로 예안의 진정한 정체를 묻는 행위를 피 하고 있었다. 더 이상은 에덴인과 얽히고 싶지 않다는 강한 방어본능 이 무의식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는 증거였다. 레이온은 평온하게 웃으며 말했다. 「옛날에 네가 꿈꿨던 세상 말이야. 돌려 생각하면 그 세상은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이라고도 할 수 있었어. 중간에 실패로 돌아가 지옥 이 돼버리고 말았지만 말이야.」 프로메테우스는 입을 다물었다. 공백의 과거 앞에서 결코 떳떳하지 못한 자신을 자각했다. 「근데 넌 지금 기억을 잃어버렸으면서도 그 일을 하고 있어. 어떤 의미에서는… 네가 잃어버린 건 단지 기록에 불과한 건지도 모르겠 다. 기억을 잃지 않았어도 넌 지금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을 테니 까 말이야.」 "아아, 너무 이해하기 어려워. 그냥 속시원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는 말해주면 안 되나?" 말은 그렇게 하지만, 레이온이 먼저 말해주겠다 한다면 제일 먼저 도 망칠 게 뻔했다. 프로메테우스, 그는 분명히 자신의 기억을 두려워하 고 있었다. 「하여튼 즐거웠다. 그럼 이만.」 프로메테우스는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에 내가 또 연락해도… 받아주는 거냐?" 레이온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석연치 않은 어떤 기 분을 느꼈다. 「자주 연락하고 지내. 뭐 서로가 바빠서 그럴 틈도 없겠지만.」 그 말을 끝으로 통신이 끊어졌다. 멍하니 앉아 있던 프로메테우스는 갑갑한 가슴을 살짝 두드렸다. 이 건 도대체 뭐야. 기껏 7년만에 만나놓고 한다는 소리가 감동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수수께끼형 문답이란 말인가.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그들에게 잘 어울리는 재회의 인사 였다. 상실의 슬픔이 섞인 눈물 한 방울이면 재회의 감격을 표현하기 에는 충분하고도 넘친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사치다. 「서예안 박사님이 오셨습니다. 니콜라스씨도 함께입니다.」 인터폰을 통한 비서의 음성에 프로메테우스는 정신을 차렸다. 그의 눈동자가 차가운, 그러면서도 유쾌한 느낌이 묻어나는 빛을 발 하기 시작했다. 22살의 사도의 간부에서 29살의 프로메테우스 총수로 지금 막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모시도록." 「예.」 음성이 끊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천천히 사무실을 한 바퀴 거닐었다. 멋진 풍경 도 맑은 공기도 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도 있지만, 그것들은 전 부 가짜다. 이곳은 지하 10층이 아닌가. 흡혈귀처럼 햇볕에 약한 피부를 지닌 것은 아니지만, 인간들 사회로 나가는 것은 두렵다. 인간관계를 제대로 만들어나갈 수 있을까가 아 닌, 또다시 자신이 타인을 하등하다 여기고 비웃지는 않을런지 두려 운 것이었다. 다행히 상대는 한국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천재 영웅과 암흑계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고급 청부업자이다. 약한 것은 살 가치가 없다며 미쳐 달려들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해도 좋겠지. 기묘한 설렘. 이곳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느꼈던 감각이었다. 비서를 따라가다 말고 걸음을 멈춘 그녀는 으슬으슬 추워오는 몸을 양팔로 감쌌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닐 리가 없다.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이곳 어 딘가에 이렇듯 자신을 전율케 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계속 가야 할까. "걱정하지 마. 프로메테우스는 깔끔한 성격이라서 원수라 해도 이런 자리에서 위해를 가하진 않아." 그녀가 미지의 대상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있는 거라 해석한 니콜라 스는 애써 안심시켰다.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인 그 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숨겨진 지하 10층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발을 내딛은 순간 심장의 두근거림이 더욱 거세졌다. 길지 않은 복도 저 건너편에 위치한 문에서부터 벅찬 흥분 이 전달되었다. 저 문이다. 저 문 너머에 뭔가가 있다. 아이를 달래듯이 두려워하는 자신의 몸을 달랜 그녀는 애써 용기 있 는 척 성큼성큼 발을 내딛었다. 문이 저절로 열렸다. 밝은 빛이 안에서부터 쏟아져 나왔다. 새하얀 섬광을 어깨 뒤에 짊어지고,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사교적으로 미소짓는 얼굴은 조각을 깎은 듯 잘생겼다. 그녀는 숨이 멎을 듯한 얼굴을 한 채, 그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프로메테우스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서예안 박사님. 아니면 해군 대장님이라 불러드릴까요?" 프로메테우스는 예의바르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아찔한 충격에서 겨우 깨어난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나를 몰라?' 그의 얼굴은 분명 오리지널 유젤의 기억 속에 있었다. 그는 오리지널 유젤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알아보지 못하는 거지? '케이는 모든 것이 끝난 후 오리지널 유젤을 에덴 혹성으로 다시 데 려갔습니다. 그리고 지구인들의 기억에서 에덴 혹성과 달에 관한 모 든 기억들을 지워버렸죠. 그들 신인류에 관한 기억까지 전부.' 예전에 맥이 말해주었던 사실이 또렷이 떠올랐다. 이 남자는 사도의 간부. 오리지널 유젤과 레이온과 밀접한 인연을 맺 었으면서도, 아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 그와 관련된 모 든 기억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비로소 그녀는 여유롭게 웃을 수 있었다. "당신이 프로메테우스인가요?"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Rayven 사도.. 아직 있긴 하나보군요. 2004/11/30 실탄 프로메테우스의 표현을 빌자면, 아직 존재는 하되 활동을 중지했다고 볼 수 있겠죠.; 아시겠지만 프로메테우스와 레이온은 2부에서 사도의 간부였습니다만, 지금은 아닙니다. 2004/11/30 디젤 오오...프로메랑 레이군이..이런 PSHY였다니... 역시 친구는 닮는다고 해야하나...끼리끼리 논다고 해야하나... 귀여운 기억소실 키메라양의 이름을 밝혀라~!! 국민은 알 권리가 있다... 2005/01/27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5/18 페이지 ▶ 289 - 추억의 그림자(1) [3] 실탄 2005/03/149Kb 740 ▶ 288 - 인조의 가치(7) [18] 실탄 2005/03/117Kb 981 ▶ 287 - 인조의 가치(6) [13] 실탄 2005/02/237Kb 1024 ▶ 286 - 인조의 가치(5) [15] 실탄 2005/02/147Kb 966 ▶ 285 - 인조의 가치(4) [18] 실탄 2005/02/0210Kb 976 ▶ 284 - 인조의 가치(3) [12] 실탄 2005/01/159Kb 1077 ▶ 283 - 인조의 가치(2) [8] 실탄 2005/01/136Kb 894 ▶ 282 - 인조의 가치 [27] 실탄 2004/12/3111Kb 1242 ▶ 281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6) [38] 실탄 2004/11/2613Kb 1770 ▶ 280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5) [1] 실탄 2004/11/2613Kb 872 ▷ 279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4) [3] 실탄 2004/11/2612Kb 829 ▶ 278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3) [2] 실탄 2004/11/2613Kb 833 ▶ 277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2) [1] 실탄 2004/11/2616Kb 830 ▶ 276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1) [1] 실탄 2004/11/2613Kb 969 ▶ 275 - 평화수호자(10) [11] 실탄 2004/11/2615Kb 903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4] 5 [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29921 :: 280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5) 실탄(cruel) 04-11-26 :: :: 12993 다소 지친 듯한, 하지만 한 치의 나무랄 데도 없는 완벽하게 아름다 운 음성이 그의 귀를 울렸다. 그는 천천히 소녀의 얼굴을 살폈다. 티 한 점 없는 매끄러운 살결, 세상에 대한 조소가 역력히 빛나는 맑은 녹색 눈동자, 타오르듯 붉게 빛나는 붉은 머리카락. TV로 보던 것과 실물은 또 달랐다. 그녀는 실로 완벽했다. 인간의 눈으로는 한 치의 잘못된 부분도 찾을 수 없으리만큼. "과연." 그가 감탄하며 손뼉을 짝짝 치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뜻이죠?" "당신은 레이온이 반할 만한 여자로군요.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 남자 이름은 꺼내지 말아요. 난 그 남자를 찾으러 여기에 온 것 이 아니니까요." 레이온과 그녀가 어떤 관계인지 알고 싶은 호기심에 유도심문 비슷 하게 말을 꺼냈던 프로메테우스는 조금 당황했다. "싸움이라도 했습니까?" "차라리 싸우기라도 했으면 좋겠군요. 하여튼 그 남자 이야기는 그만 둬요." 그녀는 앉으라는 말도 안 했는데 당당히 응접용 소파에 앉았다. 니콜 라스는 우뚝 선 그대로 말없이 프로메테우스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프로메테우스는 싱긋이 웃었다.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주십시오, 니콜라스 베르노. 제가 맡은 주문은 당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증 명하는 것이니까요." "모순 아닌가요? 그렇게 절묘하게 전투기를 3기나 보내놓고서 죽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목적이었다니." "파이어 블록은 스스로 사고하는 인공지능이 장착되어있죠. 어디까지 나 논리적인 사고방식에 입각한 것이지만 말입니다. 아마 최후의 최 후까지, 파이어 블록은 니콜라스 베르노를 죽이지 않았을 겁니다." 그녀는 의아했다. "어째서요?" "니콜라스 베르노가 죽는다면 여기 미국이 즉시 잿더미가 될 테니까 요. 그럼 저 또한 위험해지게 됩니다. 파이어 블록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슨 소리예요? 니콜라스가 죽는 거랑 미국이 잿더미가 되는 거랑 무슨 관계가 있죠?" "이런.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하셨습니까?" 프로메테우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니콜라스가 1조 원의 돈을 들여 사 놓은 3기의 핵미사일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누군가에게 그가 살해 당한다면 그 즉시 그가 죽임을 당한 곳으로 1기, 그리고 그가 최후의 순간에 명령을 내린 장소로 나머지 미사일들이 날아간다는 사실도. 다 듣고 난 예안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옛날에 1조 원이나 되는 돈 탕진했다고 하던 거 핵 장난감 사느라 고 날렸던 거야?" "핵 장난감이라뇨. 아무리 맥을 만드신 분이라 하더라도 그런 말은 실례입니다. 핵은 적어도 인간들에게는 충분히 위험한 무기니까요." "저에게는 장난감이에요." "하지만 장난감 칼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법이랍니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그녀는 프로메테우스를 빤히 보았다. 앞이마를 타고 흩어진 몇 가닥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검은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빛났다. 미지의 존재를 맞닥뜨렸을 때 발하곤 하는 바로 그 빛이었다. 끝없는 의문에 대한 호기심, 바로 그것. 이윽고 프로메테우스는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한 것인지요?"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비용은 비쌉니다." "상관없어요. 당신이 평생 써보지도 못할 거금을 안겨줄 수도 있으니 까요." 자신감에 찬 어조에 그는 낮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기본 요금은 1백만 달러로 하지요. 차후에 추가 요금이 붙 는 걸로 하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생각보다는 싸네요. 좋아요. 먼저, 지금 우리 집에 있는 여자를 알고 있나요?" "예. 알고 있습니다." "그 여자를 보낸 게 당신인가요?" "설마요. 저는 전혀 관련 없습니다. 아프로디테 전투기 3기를 보내기 는 했지만 말입니다." 그때의 위급함이 또다시 생각난 그녀는 다소 울컥했지만 참았다. 지 금은 먼저 물어볼 것이 따로 있었다. "그 여자는 그럼 도대체 정체가 뭐죠?" "키메라입니다. 짐작하고 계셨을 텐데요?" 예안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가 다시 평소처럼 되돌아왔다. 혹시나 하고 의심은 품고 있었지만 막상 '그렇다'는 대답을 들으니 기분이 썩 불쾌했다. "티아마트는 '그 남자'가 만든 조직이죠?" "레이온을 말하는 거라면 맞습니다." "그 남자는 왜 그런 조직을 만들었죠?" "글쎄요. 일단은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해두죠. 더 자세한 건 저도 알지 못합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세계최고의 정보조직이기도 하다고 들었어요. 그런 데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요?" 그는 황송하다는 듯이 웃었다. "최고라고 해서 모든 걸 알고 있는 건 아니지요. 제가 알고 있는 건, 레이온은 분명 무언가를 꾸미고 있고 거기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 하기 때문에 티아마트를 조직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벌어 들인 돈만 해도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인데, 도대체 그가 무엇을 꿈꾸 고 있는지는 저도 모르겠군요." 잠시 말을 끊은 그는 비릿하게 미소지으며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살 폈다. "당신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알면서 저에게 확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녀는 뜨끔했지만 표정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좋아요.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죠. 그 남자는 왜 그 여자를 저 에게 보낸 거죠?" "그런 게 아닙니다. 아마도 우연히 낙오된 키메라가 당신에게 이끌려 찾아간 것이겠지요. 자기 의지를 상실한 키메라는 본능에 따라 움직 이니까요." "화이트 데빌을 그 남자에게 팔았나요?" "아니요. 레이온은 충분히 화이트 데빌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원래 같은 뿌리를 지녔으니까요." 그녀는 작게 끄덕였다. 아마 사도를 말하는 것일 게다. 아담 때문에 많은 기억을 잊어버린 탓인지,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이 사도에 대해서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쉽게 궁금증이 풀리자 그녀는 맥이 빠질 정도였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 물음이 더 남았다. "그 남자와 연락을 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되죠?" "프로메테우스는 남의 사랑싸움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헛소리!!" 그녀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외쳤다. 부끄러움이 아니라 수치심으로 붉어진 얼굴이었다. "전 당신하고 말장난을 하러 여기 온 게 아니에요. 제가 마음만 먹으 면 아메리카 대륙쯤은 잿더미로 만들 수도 있어요. 장난은 치지 말고 확실히 말해요." 웃음을 잃지 않는 얼굴로 천천히 그녀를 살핀 뒤 그가 입을 열었다. "레이온을 만나서 어쩔 생각이신가요?" "죽일 거예요." 그녀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반년이 조금 넘는 지난 세월 동안 그녀는 레이온에 대해 많은 고민 을 했다. 그리고 결국 그의 생명을 거두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본심은 달랐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그를 만나서 해결을 봐 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를 만나야 한다는 동기를 뚜렷이 하기 위해서 는 그를 향한 살의가 최적의 요소였다. 그런 마음을 눈치챈 듯 프로메테우스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천천 히 뜸을 들였다. "저는 그 녀석과 당신이 어떤 관계인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잃 어버린 기억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테지요?" "…." "그 녀석이 있는 곳이 어딘지 알려드릴 순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굳 이 알려드리지 않아도 곧 그 녀석이 당신에게 연락할 것 같은 예감 이 드는군요." "예감 하나만 믿고 돈을 지불하란 말이에요?" "믿어보셔도 좋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최 고의 남자가 한 말이니까요." 개그맨이나 내뱉을 대사를 대단히 진지한 얼굴로 읊는 뻔뻔함에 그 녀는 그만 웃어버렸다. 여태껏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던 니콜라스가 그제야 자기 차례라 는 듯 나섰다. "프로메테우스. 이번에는 나랑 이야기를 좀 할 수 있을까?" "얼마든지요." "왜 날 공격했지?" "말씀드렸다시피 우리가 당신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주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입니다." 순간적으로 강한 살기가 확 뿜어져 나왔다. 피부를 베어버릴 듯 예리 하기 그지없는 강맹한 기운이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그의 살 기를 받아냈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기세였다. 말없이 그를 쏘아보던 니콜라스는 슬그머니 살기를 거두었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건가?" "그렇습니다." "언제까지 그럴 생각이지?" "질질 끌 거라 오해하시면 대단히 곤란합니다. 지금까지는 그냥 가벼 운 인사였고, 조만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러 갈 겁니다. 그 관문만 넘기시면 주문은 끝나게 됩니다. 당신이 제발 당하는 일이 없기를 빕 니다. 그래야 우리도 의뢰인의 소망을 들어주는 셈이 되니까요." 예전에도 그랬지만, 하여튼 종잡을 수 없는 남자다. 지금 당장 손을 뻗으면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태연히 주문을 이행하겠다 고 지껄이다니.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그 녀석들의 정체는 알고 있나?" "아틀란티스의 후예지요. 대서양 아래에 대륙이 가라앉아 있다고 알 고 있습니다." "그럼 그 녀석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뭔지는 알고 있나?" 그제야 프로메테우스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니콜라스는 속으로 가 볍게 박수를 치며 유쾌한 빛을 띠었다. "당신도 은근히 모르는 게 많군. 하여튼 고마웠어." "별말씀을. 그나저나 백만 달러 짜리 대답이 되었는지는 솔직히 걱정 이군요. 바가지를 씌우는 악덕상인 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요." "아아 괜찮아. 어차피 내 돈 아닌 데다가 누나는 돈이 썩어서 주체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거 비꼬는 것처럼 들린다, 너?" 퉁명스럽게 니콜라스를 노려보던 그녀는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 났다. 그녀와 니콜라스가 문밖으로 향하자 프로메테우스는 환히 웃으 며 손을 흔들었다. "살펴 가십시오. 마중은 나가지 않겠습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비서가 그들을 1층 로비까지 안내 해주었다.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건물을 나선 그들은 잠시 걸음을 멈 추고 하늘을 찌를 듯 높이 뻗어 있는 빌딩의 유려한 자태를 물끄러 미 구경했다. "어땠어?" "글쎄. 뭐랄까… 그 남자하고 아는 사이라서 그런지 어디 한 구석이 살짝 미쳐 있는 사람 같아." "정답일지도 몰라. 세계평화를 유지한답시고 핵미사일을 나 같은 놈 에게 파는 녀석이 미친놈이 아니고 뭐겠어?" 그녀는 동의한다는 의미로 끄덕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날 알아보지 못했어.' '당연합니다. 기억을 잃었을 테니까요.' '나도… 솔직히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던 건 아니야. 어찌 되었든 간에 오리지널 유젤의 기억을 완전히 얻은 건 아니니까. 내 기억을 통해 알아보았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일기장을 보고 알고 있었다는 느낌 이랄까?' 그녀는 니콜라스가 빤히 바라보는 것도 잊어버린 채 하늘을 바라보 며 손을 쭉 뻗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어. 장기밀매로 자금을 벌고 싶었다면 굳이 성체를 만들어서 배를 가를 게 아니라, 환자의 DNA에 맞춰서 거기 에 맞는 장기만 새로 만드는 게 빠르고 효율적이지 않아? <속이기 기능>이 딸린 장기를 가진 성체를 만들 필요 없이.' '확실히 그렇습니다만.' '그 남자, 아직 자기 소원을 이루지 못했을 수도 있어. 아무리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있다고 해도 어줍잖은 지식이나 기술로 신인류가 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금 그 남자는 여러 가지 임상실험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그러 면서 자금도 벌고, 일석이조지.' '그렇다면 아직 소원을 이루진 못했겠군요.' '아마 그럴 거야. 신인류가 되는 과정에서 성격이 변해서 내 앞에 나 타나지 않는 게 아니라, 아직 자기 소원을 못 이뤘기 때문에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거야. 나도 이런 말하긴 싫지만, 그 남자는 날 갖고 싶어하니까.' 워싱턴의 번화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길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모자 쓴 소녀가 조국의 원수라는 것을 일절 몰랐다. 알았다면 아마 큰 소동이 났겠지. 장난스러운 생각이 든 예안은 히죽 웃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대통령 얼굴이나 한 번 보고 갈까?" 예정에 없던 손님의 방문에 백악관은 난리가 났다. 즉시 경호망이 배 이상 강화되었으며, 장관이라는 장관들은 죄다 속 속들이 백악관으로 소환되었다. 한참 업무를 보던 사람, 점심을 먹고 있던 사람, 잠깐 졸고 있던 사람 등 가릴 것 없이. 스튜 대통령은 어째서 그런 거물이 입국하는데도 모르고 있었냐고 불같이 화를 냈다. CIA 국장은 입국했다는 보고를 전혀 받지 못했다 며 쩔쩔매었다. 공항에서 분명히 체크했을 텐데 모르고 있었다는 게 말이 되냐고 스튜 대통령이 화를 냈을 때, 예안이 끼어 들었다. "맥을 타고 왔거든요. 모르는 게 당연하죠." 한 마디로 말해서 정식 입국 절차도 밟지 않고 무단으로 이 나라에 들어왔다는 소리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당장 국외로 추방을 하거나 했을 테지만, 상대는 미국을 무릎 꿇린 소녀였다. 스튜 대통령은 기왕이면 미리 좀 알려줬 으면 준비를 했을 텐데, 하고 사근사근하게 그녀를 대했다. 구두라도 핥을 듯한 친절함에 니콜라스가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을 정도였다. 그녀의 요구에 따라 그녀가 미국에 입국했다는 사실은 비밀로 하기 로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 스튜 대통령은 바짝 긴장한 채 말을 꺼냈다. 한국이 뭔가 뜯어가고 싶은 게 있어 그녀가 온 게 아닌가 몹시 걱정이 되었다. "그런 건 없고 그냥 심심해서 들러봤어요. 여기까지 왔는데 얼굴도 안 비치고 그냥 간다면 나중에 각하께서 섭섭해하실까봐서요." "영광입니다. 잘 오셨습니다." 스튜 대통령은 살며시 웃으며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다. 미 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패권이 이 어린 소녀에게 달려 있는 처지다 보니, 그가 비굴하다 나무라는 측근은 아무도 없었다. "요새 티아마트 소탕 작전에 한창 공을 들이신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알고 계셨군요." 상대가 온 목적은 패전국가에게서 뭔가를 뜯어내고자 한 게 아니다. 덩달아 요새 한창 골치를 썩히고 있는 티아마트가 주제에 오르자 그 는 한결 신이 났다. "들으셨다면 알고 계시겠지만, 그 녀석들은 악랄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무리 무에서 창조해낸 생명체라 하더라도 엄연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상 장기매매 대상으로 취급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 않습 니까. 그런 사악한 녀석들은 천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법적으로 하자는 없는 거잖아요?" "그렇지요. 그게 문제입니다." 스튜 대통령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한때 세계의 경찰이라고까지 불렸던 미국의 대통령이라기보다는, 자 국의 장래를 염려하는 복덕방 할아버지가 아닐까 하고 생각할 모습 이었다.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디젤 전혀 상관없는 얘기지만.... 개인적으로 Fuckin' AMERICA...이 노래는 정말 싫어합니다. 미국을 무지 싫어합니다. 미국 문화는 즐깁니다. 일본을 무지 싫어합니다. 일본 문화는 즐깁니다. 일본과 미국이 자근자근 밟히는걸 대리만족하며 즐기고 있습니다. 더욱더 열심히 자근자근 밟아주세요~ 고통이 쾌감으로 바뀔때까지...ㅋㅋ 2005/01/27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5/18 페이지 ▶ 289 - 추억의 그림자(1) [3] 실탄 2005/03/149Kb 740 ▶ 288 - 인조의 가치(7) [18] 실탄 2005/03/117Kb 981 ▶ 287 - 인조의 가치(6) [13] 실탄 2005/02/237Kb 1024 ▶ 286 - 인조의 가치(5) [15] 실탄 2005/02/147Kb 966 ▶ 285 - 인조의 가치(4) [18] 실탄 2005/02/0210Kb 976 ▶ 284 - 인조의 가치(3) [12] 실탄 2005/01/159Kb 1077 ▶ 283 - 인조의 가치(2) [8] 실탄 2005/01/136Kb 894 ▶ 282 - 인조의 가치 [27] 실탄 2004/12/3111Kb 1242 ▶ 281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6) [38] 실탄 2004/11/2613Kb 1770 ▷ 280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5) [1] 실탄 2004/11/2613Kb 874 ▶ 279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4) [3] 실탄 2004/11/2612Kb 829 ▶ 278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3) [2] 실탄 2004/11/2613Kb 833 ▶ 277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2) [1] 실탄 2004/11/2616Kb 830 ▶ 276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1) [1] 실탄 2004/11/2613Kb 969 ▶ 275 - 평화수호자(10) [11] 실탄 2004/11/2615Kb 903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4] 5 [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29922 :: 281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6) 실탄(cruel) 04-11-26 :: :: 13328 "분명 녀석들이 하는 일은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 문제지요." 예안은 가만히 웃기만 할 뿐 입은 열지 않고 스튜 대통령의 다음 말 을 기다렸다. "만약 일반인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절대 받아 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봐도 인간임이 틀림없는데 DNA와 장기 구조가 조금 다르다고 해서 도살하고 장기를 꺼내 쓰다니요."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 아니었나요? 그래서 타종족에 대해서 얼마 든지 잔인해질 수 있을 텐데요." 그녀가 가볍게 비아냥거리자 스튜 대통령은 버릇처럼 얼굴을 찌푸렸 다가 이내 그녀의 신분을 상기하고는 표정을 폈다. "단순히 그런 관점에서만 바라볼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겉모습만큼 은 자기와 똑같고 말도 할 줄 아는 인간을 도살하는 광경을 보고 일 반인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 짐작 못하시겠습니까?" 티아마트의 존재와 그들이 해온 일이 공표된다면 세계 언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것이다. 키메라를 인간으로 인정하여 동등한 인권을 부여하자는 쪽과, 그들을 가축으로 취급하여 인류 발전에 이용해야 한다는 쪽. 어느 쪽 주장이 옳은가를 따지는 것에 앞서, 세계는 커다란 혼란에 빠질 것이다. 오랜 세월이 걸려 키메라의 법적 위치를 정의한다 하더 라도 반대쪽에서 순순히 따라줄 리가 없다. 어쩌면 인류는 영원히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매일같이 두 파 로 나뉘어 싸움만을 벌일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 그 틈을 노려 키메 라가 인류를 공격해 세계의 지배자가 될 수도 있다. 그들에게 그런 능력과 의지가 있다면. 스튜 대통령은 그런 부분을 최대한 강조하며, 자신은 인류 사회가 흔 들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역설했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 한 번쯤 상상해봤을 법한 일이지, 아무도 이런 일이 정말 발생할 것이라고 바라지는 않았을 겁니다. 제가, 아 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람들의 그런 소망을 깨뜨리지 않고 유 지시켜주는 것입니다." 예안은 다리를 꼬고 앉은 채 팔걸이 끝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거만한 여왕과도 같은 그 모습은 무례하긴 했지만 그 녀에게 잘 어울리기도 했다. 아무도 그녀를 탓하지 않은 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누구 앞에 서든 당당하게 굴 자격이 있었다. "각하는 꽤 괜찮은 사람이군요." "예?" "카네기 전 대통령은 사실 지나치게 자국중심적인 사람이었지요. 그 사람에 비하면 각하는 꽤나 괜찮은 분이에요." 자칫 조롱으로 들릴 수 있는 발언이었으나, 스튜 대통령은 만족한다 는 듯 웃기만 했다. "각하의 뜻은 잘 알았어요. 그러니까 키메라가 인간이든 아니든 그런 걸 떠나서, 세계에 혼란을 불러오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런 부분을 받아들이기에 인류는 아직 미성숙합니다." "이해했어요. 하지만 티아마트를 소탕하는 건 안 돼요." 스튜 대통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의 깊게 듣고 있던 그의 측근들 도 덩달아 불쾌한 빛을 띠었다. "오해하진 마세요. 저는 미국을 생각해서 드린 말씀이니까." "무슨 소리입니까?" "티아마트는 미국이나 UN의 힘으로 어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 에요. 정공법이든 뭐든 간에 티아마트를 궤멸시키려 한다면 아마 회 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될 거예요." "그래봤자 전세계를 상대로 티아마트가 버텨낼 리가 없습니다." 스튜 대통령은 자신감이 가득 찬 어조로 잘라 선언했다. 그녀는 비웃듯 되물었다. "국민들 전부를 잃는다 하더라도 소탕하고 싶은가요?" 그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무, 무슨 소리입니까, 그게?" "티아마트를 우습게 보지 마세요. 그들이 UN군 따위에 밀릴 리도 없 지만, 최악의 경우 결코 혼자 곱게 죽진 않아요. 아마 자기들을 공격 한 나라에 핵 몇 방씩은 떨어뜨리려 하겠죠." CIA국장이 흥분한 얼굴로 끼어 들었다. "우리는 전세계 모든 핵물질의 움직임을 철저히 감시해왔습니다. 티 아마트 따위가 핵탄두를 소유하고 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만 번 양 보해 그렇다고 쳐도, 운반체계가 부실하다면 핵은 있어봤자 소용없습 니다." "글쎄요. 어쨌든 전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티아마트를 공격하는 것은 물론이고 추적하는 것도 제 허가 없이는 안 돼요. 저는 절대로 허락 할 수 없어요." 허가 없이는 안 된다? 절대 허락할 수 없다? 지나치게 오만한 어투에 스튜 대통령은 심히 불쾌했다. 아무리 강대 국이라 해도 약소국에 무언가를 요구할 때에는 그만큼의 격식과 명 분을 차리기 마련이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지나치게 깔아뭉개면 들어 줄 것도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니. 헌데 그녀는 어린 탓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자신감이 드센 탓인지 해 서는 안 될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 있었다. "닥터. 이곳은 미국입니다만…." 스튜 대통령은 일부러 말끝을 흐림으로써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보좌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안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들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귀국과의 우호관계와 닥터의 체면을 존중해 참았습니다 만,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대단히 곤란합니다." 니콜라스는 태연히 손을 주머니에 넣고 권총을 잡은 채, 여차하면 뺄 태세를 취했다. 그의 위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보좌관들은 바짝 긴장한 채 양복 안주머니에 숨긴 권총을 뺄 준비를 했다. 느슨했던 분위기는 단숨에 활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누군가가 먼저 총을 빼든다면 대번에 깨져버릴 것이다. "사과하십시오.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참기만 할 미국 대통령은 없습 니다." 으르렁거리는 듯한 음성이었지만, 그녀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모든 것을 잃어도 좋다는 것인가요?" "닥터!" 끝까지 도발하는 어투에 스튜 대통령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와 동 시에 보좌관들은 일제히 권총을 빼어 그녀를 겨누었다. 니콜라스도 재빨리 스튜 대통령을 겨누었지만, 누가 봐도 수적으로 그녀 쪽이 훨 씬 불리했다. "창 밖을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녀는 전혀 겁을 집어먹지 않은 채,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퍼뜩 생 각난 게 있는 스튜 대통령은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그가 상상 했던 광경 - 맥이 포구를 겨누고 있는 모습 따위는 없었다. "지금 절 우롱한 겁니까, 닥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실망하셨나요? 당연하지 않아요? 맥은 여 기서 수백km 떨어진 곳에서 포를 겨누고 있는 걸요?" 그녀는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조롱하는 어투로 쓰다듬으며, 자신을 포위한 보좌관들을 여유 있게 둘러보았다. "맥은 지금 백악관을 비껴가는 각도로 워싱턴을 겨누고 있습니다. 총 을 내리지 않으면 워싱턴에서부터 시작해서 미국 중앙 지역을 가로 질러 뉴욕을 뚫고 나가는 광선포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조용한 말투였지만, 협박하기에 있어서는 오히려 효과적이었다. 스튜 대통령은 아연한 얼굴로 외쳤다. "닥터는 전쟁을 벌일 각오로 여기 왔습니까!" "전쟁을 하길 바라세요?" 오히려 되묻는다. 마치 이쪽에 책임을 전가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속으로 이를 갈던 스튜 대통령은 손을 들어 보좌관들이 무기를 거두 도록 명령했다. 그제야 예안은 표정을 온화하게 바꾸고 아이를 타이르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저는 전쟁을 할 생각으로 온 게 아니에요. 도발을 할 생각은 더더욱 없어요. 그저 티아마트에 대해서는 앞으로 절대 모른 척 하겠다는 약 속만 해주시면 돼요." 스튜 대통령은 당장 대답하지 않은 채 푸른 눈동자로 그녀를 노려보 기만 했다. 어지간히도 분한 듯 이마에는 힘줄이 솟아 있었다. 하긴, 강대국으로 일컬어지는 미국의 국가원수로서 그가 어디 이런 취급을 받아볼 기회가 있었겠는가. 아마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을 심 정일 것이다. "물론 그에 합당한 보수는 지불할 생각이에요. 그럼 됐죠?" "…보수?" 비로소 스튜 대통령의 얼굴이 다소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알아먹었냐 는 듯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무엇을 드릴까요? 드릴 게 너무 많다 보니 막상 뭘 줘야 할지 제가 고르기는 힘들군요." "맥을 달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이플 버스터 포 최대 출력을 버텨내는지 일단 시험해본 뒤에 드 리도록 하죠." 스튜 대통령은 과장된 태도로 손을 흔들었다. "그냥 해본 소리였습니다. 맥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다른 걸 말씀해보세요. 제가 드릴 수 있는 걸로." 상당히 나긋나긋한 음성이었다. 어쩌면 생각지도 않은 행운일지도 모 른다 생각한 스튜 대통령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쉽게 결정하기 힘드신 모양이네요. 저는 지금 바빠서 그만 가봐야 하는데, 나중에 따로 말씀해주시겠어요?" "어? 그래도 됩니까?" "네.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기대하지 않은 배려에 스튜 대통령은 쾌재를 불렀다. 무엇을 요구할 지 측근들과 진지하게 의논할 여유가 생긴 셈이었다. 예안은 사교적인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외교문서를 보냈던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손을 써서 잘 타일러주시기 바래요." "알겠습니다." 스튜 대통령은 웃는 얼굴로 악수를 받으면서도, 속으로는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과연 무엇을 받는 게 좋을까. 인사를 마친 뒤에 예안은 올 때와는 다르게 조용히 백악관을 빠져나 갔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얼굴을 보았지만, 그 문제는 백악 관측에서 처리해줄 것이다. 공식적으로 그녀는 미국을 방문하지 않은 셈이 될 것이다. 맥을 타고 초음속으로 태평양 위를 날아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니 콜라스는 궁금증을 표시했다. "왜 미국한테 손을 떼라고 한 거야?" "위험하니까. 그 남자는 미국 같은 나라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남자 가 아니야. 잘못 자극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니콜라스는 작년에 아틀란티스 대륙으로까지 그녀를 구하러 왔던 레 이온을 떠올렸다. 어딘가 하나쯤 미쳐 있어 보이기는 해도, 잔인하다 거나 사악한 심성을 지닌 자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그리고 그 남자는 내가 처리할 거야.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양보하 지 못해." 그는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레이온과 누 나 사이에 뭔가 커다란 일이 있었다는 건 알지만, 무엇 때문에 그녀 가 이렇게까지 그를 미워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그게 정말 미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호감과 미움은 원래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언젠가 보았던, 누나의 허리에 나 있던 두 개의 커다란 상처 자국이 원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은 몰랐다. 물어보면 누나는 선선히 대답해주겠지만, 별로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예안이 돌아간 뒤 CIA 국장은 사람들을 전부 물려주기를 청했다. 스 튜 대통령은 선선히 그러도록 했다. 둘만 남자 국장은 제일 먼저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는 듯 한숨을 내 쉬었다. 대통령은 의아했다. "왜 그러나?" "십 년 감수했습니다." "?" "닥터 서를 경호하고 있던 소년의 얼굴을 기억하십니까?" 대통령은 가만히 끄덕였다. "대단히 어린 소년이더군. 한 14살쯤 되어 보이던데, 왜 그러지?" 역시 대통령은 모르고 있다. 국장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의 이름은 니콜라스 베르노입니다. 한 번쯤 들어보신 적은 있으실 겁니다." 대통령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그… 아이가 니콜라스 베르노였다고? 최고의 청부업자 니콜라스 베 르노 말인가? 마피아도 벌벌 떤다는?" "그렇습니다. 사실은 마피아뿐만 아니라 CIA와 FBI도 벌벌 떨고 있 지만 말입니다." 순간적으로 크게 당황했던 대통령은 이윽고 침착함을 되찾았다. "아무리 실력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결국 혼자 아닌가? 게다가 그렇 게 나이 어린 소년인데, 뭐가 무서워서 벌벌 떤다는 거지?"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미처 말리지 못했습니다. 말씀드리건데, 앞으 로 절대 니콜라스 베르노에게 총을 겨누지 마십시오." 대통령은 불쾌한 표정을 짓기에 앞서 왜 그런 말을 모르겠다는 얼굴 을 했다. 이 부분이 바로 카네기 전 대통령과 스튜 현 대통령의 차이 점이었다. "니콜라스 베르노를 쏘게 되면 우리는 죽습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미국인의 대부분이 죽게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왜 마피아가 니콜라스 베르노를 두려워하는지 아십니까? 기껏해야 14살밖에 안 된 어린 소년인데 말입니다." 대통령의 얼굴이 의문에 물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국장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니콜라스 베르노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다면 바로 그 장소로 수백 메가톤급 핵미사일이 떨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CIA 내에서도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뜻밖의 말에 대통령의 얼굴은 새파랗게 변했다. 국장은 차분하게 그를 진정시켜가며 프로메테우스라는 미치광이 과 학자가 이끄는 자칭 세계평화유지군과 니콜라스가 소유한 3기의 핵 미사일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CIA도 몇 년 전에야 간신히 그 존재를 알아낼 수 있었던 집단 프로 메테우스와, 그들이 지닌 무력이 너무 강대해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 고 내버려두고 있다는 말에 대통령은 흙빛이 되었다. 내친 김에 국장은 몇 년 전까지 미 정부와 비밀리에 활발한 교류를 나누었던 거대 과학자 집단, 사도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다. 7년 전 그들이 느닷없이 자취를 감추었으며, 다시 연락할 수 없었다는 말도 물론 덧붙였다. 그리고 자신의 추측 또한 덧붙였다.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닥터 서는 사도 출신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 니다. 또 닥터 서는 니콜라스 베르노를 경호원으로 데리고 있으며, 그는 프로메테우스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지요." "프로메테우스가 닥터의 소유일지도 모른다는 소린가?" "그렇습니다." 대통령은 생각에 잠겼다. 국장의 조리 있는 설명을 듣고 보니 과연 뭔가가 딱딱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그도 사도의 존재는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 었다. 왜 사도가 갑자기 활동을 정지했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예안이 사도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신빙성이 있었다. 니콜라스는 프로메테우스로부터 3기의 핵미사일을 제공받아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보험으로 사용하고 있고, 또한 예안의 경호원일을 맡 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사도로부터 독립한 그녀가 프로메테우스라 는 조직을 비밀리에 만들고, 니콜라스를 경호원으로 키웠다는 소리가 된다. 몇 번을 생각해보아도 그럴 듯한 추리였다. "하지만 근거는 별로 없군." "심증만은 확실하지요."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 치면, 한국은 프로메테우스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셈이 되는 건가?" "아마 모를 겁니다. 닥터 서는 자기 밑천을 남에게 함부로 밝히는 인 물 같아 보이진 않았으니까요." 고심에 찬 얼굴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대통령은 소름이 오싹 돋 는 것을 느꼈다. "그럼 닥터 서가 노리는 것은 도대체 뭐지?" "글쎄요…." 말끝을 흐리던 국장은 자조적인 낯빛을 띠며 덧붙였다.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그녀가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것 말입니다." by eden 아공간 점프 완료. 12구획의 게이트 통과. 26일간의 우주 폐인대전 레이스 종결. 집필머신 실탄호 무사히 임무 완료. (수고했다. 이제 푹<초강조!!!> 쉬어라.) 고치기 지우기 목록 궁금돌이 워프가동? 이런이런 다음주에 장거리워프를 계획하도록 하세요! 2004/11/26 七夜 靑い 쿠...쿨럭;; 실탄님의 역습!? (하...하늘이 떨어진다!!) 2004/11/26 사케쿠 엄청납니다아아아!! 폭참이라니요!! 이런 생각지도 못한!!! 2004/11/26 실탄 그래도 1등은 못했습니다.(운다) 2004/11/26 현율 헉...13편......인간이 아니십니다.....ㅡ0ㅡ~ 2004/11/26 사케쿠 이런 엄청난 역습을!! 용량도 상당한 것으로........ 저는 윗분 말 그대로 하늘이 떨어져 내리는 줄 알았습니다아!!! (기쁨에 몸소리를 친다.) 아아아..... 오스트랄로페테쿠스와 격투전을 벌인 뒤 3000피트 상공에서 연속 108회의 제비를 돌 만큼 기쁜 현실이군요!! 2004/11/26 사케쿠 정말 가공할만 합니다아아. 2004/11/26 히토미 엄청나네요;;;;;; 2004/11/27 히토미 근데 푹 쉬는건........... 얼마동안?;;;;; 2004/11/27 parang 음..;;; 마지막코멘트가 신경쓰이네요 푹<초강조> 쉬어라 ..... 이거혹시 당분간 연재 없음?;;; 2004/11/27 사케쿠 어라? 그러고보니 마지막 코멘트..... oh!! no!!! 대체 얼마간 동안 쉬시는 겁니까아아!! 설마 예전처럼 3일 주기 연재로 돌아가는 것도 모자라 한 달간 쉬실 생각? 2004/11/27 dark 이렇게 연참하시고서 잠수하시는건 아니겠죠? 2004/11/27 해적왕 GM 헐..대단해요..-_-乃 이거..아상부터 함 보고싶당..ㅠ..ㅠ 2004/11/27 섬마을김씨 .......강력... 2004/11/27 해적왕 GM 근데...이거 스토리가 점점...느려지는것 같은데요..-_-? 스토리가 매우 길게 늘여지는듯합니다... 2004/11/27 비상사태 삐~익 삐~익 비상사태 비상사태 지금 즉시 모든 우주선들은 비상사태로 돌입하기 바란다 다시한번 말한다 지금 즉시 모든 우주선들은 비상태로 들어가기 바란다 앞으로 15분후에 아공간 워프가 있을 예정임 전번의 아공간 워프보다 2배의 거리를 예상하고있다. 2004/11/27 RAGNAROK 이것이 과연 인간으로써 할수 있는 일인가?? 2004/11/27 Jin 이거 혹시 비축분을 다 쓰시고 나서 한참동안 쉬실려는 의도..??;;; 엄청나네요...;; 잠시 외출하고 온 사이 이렇게나 많이... 2004/11/27 영 한동안은 연재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뜻??? 2004/11/27 냐앙~ -_-; 당황이지만... ㄳ 라는...-_-;; 그래도 <푹>은 절대 불가 !!!! 2004/11/28 라이트리 저, 작품소개를 봤을때 맥이 맥(MAN)이라고 되어 있는데... MAC 아닌가요? 아니면 말구 (퍽!) 2004/11/28 실탄 시험 기간이니 2주일 정도연재를 쉬겠습니다아.(...) 2004/11/29 dark 이런 ㅡ.ㅡ;; 2004/11/29 라냔 너무 어마어마한 분량에 놀라서 몇일동안 제목만 구경했습니다.;;; 오늘에서야 다 봤는데.. 실탄님 너무 무리하셔서 몸살감기라도 걸리는게 아닌지 걱정되네요^^;; 시험 잘보세요~~~ 화이팅~~~ 2004/11/29 이나카엘튼 .........상당히 강조하시는 군요......뭐, 이만큼의 분량을 보건데 힘드셨겠어요;;; 푹 쉬세요^^ 2004/11/29 희랑 2등을 축하드립니다. 좋은 결과를 안고 돌아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항상 많은 분량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2004/12/01 하랑 집필머신이라니요.; 왠지 실탄님이 기계같다는 느낌이 든다는.;; 아무쪼록 시험 잘 보세요^^ 2004/12/02 비스마르크 아상을 읽다보니 제글이 공지위반으로 삭제되었다고 하는데 저는 글을 쓸때 다른 닉네임을 사용했었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합니다. 넷상에서 아이디가 중복될때가 있지만 막상보니까 기분이 찹착합니다. 사이트에 가입할때 이닉을 다른분이 사용할때는 세컨닉으로 사용했는데 아상을 다시읽다가 묘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2004/12/05 궁금돌이 이야-_- 진짜루 제대루 쉬시네요 ㅎㅎ......................... 돌아오시죠-┏ 2004/12/10 실탄 4, 5일 내로 귀환하도록 하겠습니다.(아싸 이제 놀 수 있다.ㅜㅜ) 그리고 아직 상품을 못 받으신 분들..죄송합니다. 제가 그동안 많이 바빴고, 또 며칠 간은 아파서 골골대는 바람에 그럴 와중이 없었습니다. 상품은 이번주 토요일에 꼭 부치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2004/12/17 마기 아아...오늘이면 돌아오시려나... 목이 한자는 빠져있....////o-rz.... 보고싶어요~ 실탄님~ 2004/12/23 루타 아주 제대로 쉬시는군요......;;;; 2004/12/27 엄능이 정말 제대로 쉬십니다;;1달이 넘었다구요오;ㅁ; 제발 돌아오세요>,.의 모든 전력이 꺼졌다. 곧이어 다시 비상발전장치가 가동하 며 밝아졌다. 그러나 방어시스템이 원상회복 되기 위해서는 5분의 시 간이 필요하다. 그 5분 안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둘은 재빨리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으로 침입했다. 인공지능이 정지한 방어시스템은 침입자를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응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의 기척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닥터는 영화배우 친구의 촬영장에 가 있다. 기회는 오늘밤뿐이 었다. 그들은 재빨리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방문을 열어보 았다. 마침내 한 여자가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한 그들은 작게 안도했다. 한 명이 가방에서 커다란 기기를 꺼냈다. 휴대용 전신촬영장치였다. 그는 그것으로 여자의 전신 X-레이를 찍었다. 그리고 서둘러 황궁을 빠져나왔다. 거리에 하나둘씩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촬영을 마친 혜인은 분장실 겸 수송의 역할을 맡고 있는 차로 돌아 왔다. "끝났어?" "응. 힘들어 죽겠어." 예안이 피식거리며 수건을 건넸다. 땀을 닦은 혜인은 능숙하게 화장 을 지우고 피부 보호 크림을 발랐다. "근데 너 요새 바쁘다고 들었는데 이런 곳까지 몰래 와도 돼?" "괜찮아. 어차피 일 안 한다고 굶어죽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킬 때 하고 내키지 않으면 안 하는 거지." "니콜라스는 어디 갔어?" "잠깐 주변 좀 둘러본다고 나갔어. 걔 요새 꽤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거든." "성찬우라는 사람은?" 예안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 사람이 마음에 드니?" "아,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당치도 않다는 듯 혜인은 손을 휙휙 내저었다. "맥이 촬영에 협조해주겠다고 하니까 감독님이 디게 많이 기대하시 더라. 잘 해야 돼, 알았지?" "걱정하지 마. 조종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고, 내가 설마 세트장을 부수기라도 하겠니?" 유빈은 뒷좌석에 팔을 앞으로 모으고 앉은 채 엄마가 친구와 대화하 는 것을 똘망똘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언가 미묘한 분위기가 잡 힐 듯 말 듯 했지만 아직 나이가 어렸던 탓에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 해할 수 없었다. 영화 촬영 일정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즈음 대통령으 로부터 연락이 왔다.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 지금 청와대로 와줄 수 있느냐는 말이었다. 예안은 의아해하면서 일어났다. "나 그만 가봐야겠어. 급한 일이 생겼나 봐." "그래. 다음에 봐." 차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성찬우가 얼른 따라붙었다. "청와대로 가야겠어요. 니콜라스는 어딨죠?" "곧 돌아올 겁니다. 아, 저기 오는군요." 저쪽에서 니콜라스가 어슬렁어슬렁 오고 있었다. 대통령이 급히 불렀 다는 소리에 니콜라스는 다소 못마땅했지만 별말은 않고 차를 세워 둔 곳으로 향했다. 최고급 수퍼카로 손꼽히는 제로스 GX 파이어는 시원하게 뚫린 도로 를 타고 달렸다. 사람들의 이목을 사는 게 싫어 오늘은 맥카닉을 집 에 두고 나온 것이었다. 이윽고 그들은 청와대에 도착했다. 니콜라스와 찬우는 집무실까지 들 어가지 않고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대통령은 다소 어두운 얼굴로 예안을 맞이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미묘한 불길함이 느껴졌다. 대통령은 일단 앉기를 권한 뒤 무겁게 이 야기를 꺼냈다. "티아마트…와 무슨 관계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잠깐 동안 경직되어 있다가 겨 우 침착함을 되찾고 되물었다.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으셨어요?" "미국의 스튜 대통령이 말하더라. 티아마트에 일절 손을 대지 말라고 네가 협박했다고 말이야." "협박?" 어처구니없는 뉘앙스에 그녀는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스튜 대통령도 꽤 하는데요. 겉으로는 들어줄 것처럼 굴다가 뒤에서 는 각하께 일러바치기나 하고 말이에요." 각하라는 호칭은 그녀가 다소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즐겨 쓰는 호칭 이었다. 대통령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가 펴졌다. "그런 게 아니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내가 물어보았다. 뒤에서 전 부 내가 명령한 척 하고 말이야." "각하는 어떻게 아셨는데요?" "이것을 좀 보겠니?" 대통령은 잠자코 커다란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안에는 X-레이 필름 과 더불어 여러 장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사진 속 인물이 지나라는 것을 확인한 예안은 안색이 창백하게 물들 었다. 필름을 쥔 손이 미미하게 덜덜 떨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들어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저희 집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셨나요? 아니면 저희 집에 특수공 작원이라도 잠입시키셨나요?" 화가 난 탓에 그녀의 목소리는 다소 날카롭게 변했다. "티아마트는 절대 용서될 수 없는 공공의 적이다. 그리고 너는 우리 한국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고. 그런 네가 티아마트와 관련되어있다는 사실이 흘러나가면 어떻게 되겠니?" 실수를 저지른 아이를 꾸중하듯 대통령의 음성은 다소 엄격했다. "아직은 티아마트의 존재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으니 괜찮 지만, 너를 시기하는 자들이 몽땅 다 까발리면 너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돼. 부디 몸조심하거라." "할아버지. 저희 집에 공작원을 침투시킨 적이 있냐고 지금 묻고 있 잖아요." "너를 위해서였다! 네가 티아마트 따위와 연관되어있다는 사실을 알 았을 때 내 가슴이 얼마나 철렁했는지 아니!" 그녀는 크게 움찔했다. 대통령이 자신에게 목소리를 높인 것은 이번 이 처음이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지며 침묵이 흘렀다. 예안은 어디에 시선을 둬야 좋을지 몰라 애꿎은 손톱만 물어뜯었다. 대통령은 다시 얼굴을 온화하게 바꾸고 말했다. "조심하거라. 너에게 말은 안 했지만, 이 자리를 노리고 있는 정적이 한 명 있어. 날 대통령에서 끌어내리기 위해서, 혹은 차기 대통령 자 기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얼마든지 네 얼굴에 흙탕물을 뒤집 어씌울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지금 이 사실을 전부 다 알고 있어. 물증도 여럿 있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지금은 잠 자코 있을 뿐이야." "그 사람이 누군데요?" "누군지 알면 뭐하게? 니콜라스를 보내서 목이라도 딸 생각이냐?" 무안해진 그녀는 얼굴을 확 붉혔다. 그런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는 사실이 조금 창피했다. 대통령은 타이르듯이 말했다. "너도 생각이 있으니 티아마트를 조사한다고 나섰겠지. 네가 티아마 트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네가 무슨 장난을 치고 있는지 그런 건 일 절 묻지 않겠다. 하지만 위험한 장난은 되도록 빨리 정리해. 지금의 너는 이 나라의 상징적인 존재야. 국민들 누구도 상징에 상처가 생기 는 걸 원하지 않을 거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미심쩍음을 떨칠 수 없었다. 시선을 떨어뜨린 채 손톱을 틱틱 튕기던 그녀는 고맙다고 말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DDDDJ 끝이라...리플도 안남기고 실탄님 작품을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벌써 이렇게 됬군요. 2005/02/14 실탄 예. 한 390화 정도 가면 끝나겠죠. ...보인다고 해서 다 잡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orz 2005/02/14 해적왕 소설이..질질 끄는것 같은데...-_- 초반보다 내용의 흥미도나 내용의질을봐도 많이 떠러졌어요.. 아니시면 좀더 휴식을 취하면서...천천히 에덴시리즈를 처음쓸때의 그 느낌을 살려보시는것도 좋을것 같군요... 2005/02/14 실탄 의욕이 떨어져서 이것도 간신히 뽑아져 나오는 건데 질질 끄는 것 같다고 하면 서글픕니다. 지금은 질질 끄는 타이밍이 아니고 마지막 한 고비를 남겨두고 달려가는 중입니다. 2005/02/14 대천사미카엘 한달연재 가는 니까?.....으앵ㅜㅡㅜ 2005/02/14 gforce 저는 안 보입니다 @_@ 2005/02/14 안녕히 작가님 왕팬입니다... 드디어 폭참의 시작입니까? 두근두근 2005/02/14 실탄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2005/02/14 laputa 음.... 전 이브의 눈물 보고 싶은뒈~~~~~~~~~~~ 2005/02/14 디젤 하하~ 컨디션 난조에 여러 요소들이 겹쳐서 힘드신것 같네요.. 리플 다시는 분들은 모두 소엄이 좋아서 여기까지 오신분들이라 생각합니다. 무심코 한마디 던지는것으로 힘들어 하시는 작가분에게 조그만 상처라도 줄수있는 발언은 되도록 조심하시는게 좋을듯... 작가분도 현재 힘든 상태시고.. 누구나 컨디션에 영향을 받으니까 이런때일수록(ㅋㅋ 군대용어...갔다온분은 아실듯) 따뜻한 위로와 응원이 필요하지않을까요? 고로...실탄님 힘내세요~ 2005/02/15 안녕히 혹시 폭참이란 말이 실탄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아무튼 힘네세요... 2005/02/15 실탄 해적왕님에게 한 말입니다. 안녕히 님에게 한 말이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2005/02/15 laputa 음 ㅡㅡ. 수원 애경 북스박스에 가봣는데 책이름을 찾을 수가 없내요(책이름이 뭐였더라염 ,,ㅡㅡ. 정식명칭염) 2005/02/15 안녕히 천사의 성지더만요... 근데 소엄이 더 좋다는..... 2005/02/16 아키 근 1년 만에 다시와본 드워-_-. 오오. 많이 바뀌긴 했지만[내용] 그대로인건 그대로군요.... 으음.. 유토피안트리를 막 연재 시작할때부터 안온거 같은데 대체 언제적이지..[에엥?] 휴;; 슬럼프-_-... 힘내세요 [설마 발렌타인데이라고 상처받고 자는겁니까아..?] - 뭔소리래;; 2005/02/17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5/18 페이지 ▶ 289 - 추억의 그림자(1) [3] 실탄 2005/03/149Kb 740 ▶ 288 - 인조의 가치(7) [18] 실탄 2005/03/117Kb 981 ▶ 287 - 인조의 가치(6) [13] 실탄 2005/02/237Kb 1024 ▷ 286 - 인조의 가치(5) [15] 실탄 2005/02/147Kb 968 ▶ 285 - 인조의 가치(4) [18] 실탄 2005/02/0210Kb 978 ▶ 284 - 인조의 가치(3) [12] 실탄 2005/01/159Kb 1079 ▶ 283 - 인조의 가치(2) [8] 실탄 2005/01/136Kb 896 ▶ 282 - 인조의 가치 [27] 실탄 2004/12/3111Kb 1244 ▶ 281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6) [38] 실탄 2004/11/2613Kb 1772 ▶ 280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5) [1] 실탄 2004/11/2613Kb 874 ▶ 279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4) [3] 실탄 2004/11/2612Kb 829 ▶ 278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3) [2] 실탄 2004/11/2613Kb 833 ▶ 277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2) [1] 실탄 2004/11/2616Kb 830 ▶ 276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1) [1] 실탄 2004/11/2613Kb 969 ▶ 275 - 평화수호자(10) [11] 실탄 2004/11/2615Kb 903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4] 5 [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37160 :: 287 - 인조의 가치(6) 실탄(cruel) 05-02-23 :: :: 7029 패터슨은 세계 경제를 주름잡고 있는 글로벌 기업인 카를로스의 사 장이었다. 동시에 현재 미국을 이끌어나가고 있는 스튜 대통령의 오 랜 친구이기도 했다. 카를로스가 지닌 규모와 영향력에 비추어 볼때 그 최고 경영자는 일 반인과는 확이하게 다른 경제 감각과 머니 센스를 지니고 있음은 자 명했다. 한일전쟁, 한미전쟁 등 몇 번에 걸친 대규모 경제적, 정치적 파동이 있었지만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헤쳐온 패터슨의 감각을 앤드류 회장 도 인정하고 있었고, 그는 사내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굳건하게 굳힐 수 있었다. 패터슨은 다소 긴장감이 감도는 눈빛으로 눈앞에 앉아 있는 사나이 를 훑어보았다. 흰 양복과 거만한 몸짓이 잘 어울리는 남자, 오랜 친 구이자 미국을 이끌어나가는 최고 통치자.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패터슨은 친구를 몇 년 간 이 나라 국민에게 빌려주게 되었다고 껄껄 웃으며 어깨를 치기도 했다. “자네가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걸 보면 예삿 일은 아닌 것 같군.” “하하, 아니야. 아무렴 내가 일이 있어야만 친구를 찾아올 정도로 매 정한 사람으로 보이나?” “난 작년에 자네를 이 나라 국민들에게 빌려줬네. 자네는 내 친구이 기 이전에 이 나라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곤란해. 나도 이 나 라 국민이란 말이야. 사적인 일을 볼 틈에 나라 경영이나 더 신경 쓰 라고.” “정말 자네가 보고 싶어서 온 거야.” 패터슨은 말만이라도 그렇게 해주는 게 좋다는 듯 껄껄 웃으며 한 잔 권했다. “뜸들이지 말고 말해보게. 뭐가 고민인가? 중동은 아닐 테고 아마도 동북아시아쪽 문제겠지? 석유 유통권이 중원 그룹에 낙찰된 게 불만 인 건가? 하긴, 중원 그룹 회장은 로비 따위로 어떻게 해보기에는 무 리가 있는 인물이지. 닥터도 그걸 아니까 중원 그룹에 낙찰시켜 준 걸 테고 말이야.” “석유 이야기가 아닐세. 바로 그 닥터 이야기야.” “닥터?” 얼굴빛이 다소 의아하게 변하는 친구에게, 스튜 대통령은 얼마 전 닥 터가 백악관에 찾아와서 티아마트에 일절 손을 대지 말라고 요구했 음을 알려주었다. 치욕스러운 협박과 그 뒤를 이은 달콤한 조건을 서슴없이 말해주는 그의 얼굴은 닥터에 대한 도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패터슨은 이마에 손가락을 짚으며 시선을 떨어 뜨렸다. 그가 고민할 때 자주 취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닥터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힌 다 이건가?” “그래. 의논을 해보았지만 무엇을 요구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닥터가 소유한 건 많지만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건 단 하나, 그리고 섣불리 닥터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달라고 하면 화만 사고 받을 건 못 받게 될 지도 모르지. 알다시피 닥터는 지극히 자기 감정대로 움직이는 여 자지 않나.” “무엇을 받는다라….” 패터슨은 깊이 고민에 잠겼다. 언뜻 보기에는 간단한 듯하면서도 돌 려 생각하면 대단히 고민되는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닥터의 이용가치는 무궁무진하다. 핵융합로 설계에서부터 강력한 군 사무기를 비롯하여 획기적인 의약까지, 그 무엇이든 닥터는 선뜻 내 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럴 능력도 갖추고 있다. 워낙에 받을 수 있는 게 많다 보니 어느 것을 받는 게 가장 미국에 이익일지 결정하는 것은 쉬운 게 아니었다. 군 수뇌부는 군사무기를 요구하라 하고, 과학부는 고급 기술이나 자연과학 이론을 요구하라고 한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로 자기 분야에 이득이 되는 것을 요구하 라고 한다. 그 한가운데에서 결정을 하자니 여간 고심이 되는 게 아 니었다. 한참 생각한 뒤 패터슨은 밝아진 얼굴을 들었다. 스튜는 다그치듯이 물었다. “좋은 생각이 있나?” “이걸 요구해보는 게 어떻겠나? 그러니까….” 처음에는 황당함으로 일그러졌던 스튜 대통령의 얼굴은 이야기가 길 어짐에 따라 환희로 바뀌었다. 멀리서부터 폭음이 들려왔다. 곧이어 마중 나와 있던 미 정부 수뇌진 들은 날씬한 전투기 형태의 맥이 활주로에 내려앉는 것을 볼 수 있 었다. 콕피트가 열리고 전투 복장을 갖춘 예안이 내렸다. 뒤를 이어 니콜라 스가 얼굴을 찌푸린 채로 따라 내렸다. “이쪽으로 오시죠. 대통령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 남자가 유창한 한국어로 안내하며 사근사근하게 대했다. 예안은 무뚝뚝한 걸음으로 그들을 따라 차에 올랐다. 미국 대통령 전용차인 방탄 리무진은 시원하게 도로를 달렸다. 경호 원들이 탑승한 검은색 차가 전후좌우에서 리무진을 호위하며 백악관 까지 달렸다. 백악관에서 예안은 대통령 집무실로 안내되었다. 당당하게 들어선 예 안은 태연히 의자에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다소 거만한 몸짓이었지 만 스무 살도 안 된 여자다 보니 대통령은 왠지 웃음이 났다. 거슬린 다기보다는 오히려 호감이 쏠렸다. “결정을 하신 모양이군요. 티아마트에는 손을 떼기로?” “닥터가 요구해올 때부터 손을 떼야 하는 건 기정사실이었습니다. 지 난 시간은 우리가 그 대신 닥터로부터 무엇을 선물받는 게 좋은지 고민하는 데 지나지 않았지요.” “그것까지 결정하셨어요? 좋아요, 무엇을 드리면 될까요?” 단도직입적으로 요구해오는 것을 보아하니 아마도 협상에는 대단히 서투를 것 같다. 아니, 협상 자체를 할 필요가 없다 보니까 몸에 배 인 습관인지도 모른다. 대통령은 과연 그녀가 뭐라 반응할까 내심 기 대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랬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닥터의 아이를 미국의 아이로 주십시오.” 어디 말해보라는 낯빛을 띠고 있던 얼굴이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심 상치 않음을 눈치챈 대통령은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총소리와 함께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자리에 구멍이 뚫렸다. 그녀가 손에 쥔 총에서는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CIA 국장이 반사적으로 총을 꺼냈지만 대통령은 집어넣으라고 손짓했다. 여전히 총구를 대통령에게서 겨눈 채로 그녀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지금, 뭐라고 하셨지요? 제 아이를 달라고요?” 정말 자신을 죽일 듯한 눈동자였다. 한 마디라도 실수했다가는 오늘 인생을 하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오해입니다. 총을 내리고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들을 가치도 없어요! 미친 거 아니에요! 달라고 할 게 따로 있지 어 디서 제 아이를 달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서유빈군을 달라고 요구한 게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내 아이는 유빈이 하나밖에 없 는데, 그럼 따로 아이를 하나 더 낳아서 달라는 그런 헛소리였다는 건가요?” “비슷합니다만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닥터의 난자가 가지고 싶습 니다. 바로 그뜻입니다.” 눈이 녹듯 차가운 표정이 한순간에 풀어졌다. 다소 얼이 빠져버린 그 녀는 그제야 총을 내렸다. 십 년 감수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린 대통령은 이제 이야기가 좀 통하겠다 싶었다. 총탄에 꿰뚫린 의자에 다시 앉은 그는 아까와는 달 리 여유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닥터가 줄 수 있는 건 많습니다. 신형 군사무기,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신약, 신소재, 그리고 현대 과학을 몇 단계나 뛰어넘어 있는 과 학이론까지. 그 중 어느 것 하나만 받는다 해도 미국은 비약적인 발 전을 꾀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눈앞의 이익에 급급 해 진짜 대어를 놓치고 싶지는 않군요.” 이제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듣고 있다. 대통령은 이 조건이 먹힐지도 모르겠다고 희망을 가졌다. “미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가문의 아이로 키우겠습니다. 최고의 교 육을 해줄 것이며, 만인이 우러러 보는 훌륭한 아이로 키우도록 하겠 습니다. 그러니….” “그래서 미래의 미국의 도구로 쓰시겠다?” “기왕이면 미국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위인이라 봐주십시오. 그 아이 는 종국에는 미국의 가장 큰 지도자이자 영웅이 될 것입니다.” 대통령은 최고의 정치가답게 낯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찬찬히 그녀를 살폈다. 그녀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속으로 키득거렸다. ‘제법인데? 설마 그런 요구를 해올 줄이야?’ 긴장감이 완전히 사라진 그녀는 의자에 깊이 등을 묻은 채 팔걸이의 딱딱한 부분에 대고 손가락을 두드렸다. 무언가를 고심할 때 나오는 그녀의 버릇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췄다.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디젤 일단 연재에 감사~^^ 후후..전 미국 시민권을 주려나...그 비슷한 상상을 하고있다가 뒷통수!! 역시 지금까지의 분위기에 맞게 유전자 므시기 어려운 내용으로 흘러가는군요.. 음...여전히 내용은 예상불가.. 어떻게 흘러갈까? 계속 관심 가지고 보고있겠습니다 2005/02/23 안녕히 예안이 거절 할 것 같군요. 그렇지 않더라도 그 아이는 절대 태어나지 않겠죠... 만약... 정말로 만약 그 아이가 태어난다면 유빈이와 라이벌이 될 가능성이...그러면 소설은 4부로 넘어갈 듯. 아님 말고...ㅋㅋ 2005/02/23 영 태어나는것 자체가 불가능 하지 않나요? 설령 난자가 있다고 해도. 예안이 조차 마더의 허락의 의해 성공한 케이스인데.. 과연 미국이 마더의 허락을 얻을수 있을지.. 설마 마더가 허락해서 태어나는건 ... 2005/02/23 손님 유전자 복제?? 불가능 할듯 체외 수정도 불가능 할 듯.. 2005/02/23 bismarck 주기야 주겠죠. 난 줬으니 알아서 만들어내라고 하고(어차피 불가능인걸 아니..) 대신 뭘 또 요구하겠죠? 2005/02/23 Vaninda 태어나는게 불.가.능. 해야지요. 유빈이 말고는 예안이 아니는 없다고 봅니다. 2005/02/23 xiu bismarck님 말대로 일단 주는대신 또 무언가를 요구할듯. 게다가 주더라도 마더의 허락이 없는한 테어날리가 없어요. 유젤의 복제인 예안이조차 마더의 허락으로 인해서 겨우겨우 만들어진건데요.(만들어졌다 하니 어감이 이상하군요^^;;;) 2005/02/23 텐시노 마더의 허락을 받고 태어난건 서예안 뿐인거 아닌가.. 그렇다면 유빈이도 마더의 허락을 받앗다는 건데 ;; 2005/02/23 궁금돌이 유빈이가 실험관아기인걸로 기억합니다. 물론 예안이가 배속에서 키운거니깐 다를려나... 일단 수정이 가능한건 확인됀거죠... 2005/02/23 안녕히 휴우,,, 역시 소엄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딱 한줄로 인해 엄청난 반항이...역시 대단한 소설! 2005/02/24 루리에르피나 아직 체외수정은 불가능 하다고 알고있는데요... 아니지 아틀란티스 정도면 가능할지도.. 2005/02/24 jhj1502 현실 적으로 지금 시험관 아기가 생기고 있쬬.... 시험관에서 정자 와 난자를결합 시킨뒤 여자의 자궁에 정착 시켜서 기르는 방법으로요.... 오랜만에 보는 소엄 짱 >_< 실타님 수고 많으시네요~ 2005/02/25 jhj1502 에구 실타님이래 ㅜ_ㅡ 2005/02/25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5/18 페이지 ▶ 289 - 추억의 그림자(1) [3] 실탄 2005/03/149Kb 740 ▶ 288 - 인조의 가치(7) [18] 실탄 2005/03/117Kb 981 ▷ 287 - 인조의 가치(6) [13] 실탄 2005/02/237Kb 1026 ▶ 286 - 인조의 가치(5) [15] 실탄 2005/02/147Kb 968 ▶ 285 - 인조의 가치(4) [18] 실탄 2005/02/0210Kb 978 ▶ 284 - 인조의 가치(3) [12] 실탄 2005/01/159Kb 1079 ▶ 283 - 인조의 가치(2) [8] 실탄 2005/01/136Kb 896 ▶ 282 - 인조의 가치 [27] 실탄 2004/12/3111Kb 1244 ▶ 281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6) [38] 실탄 2004/11/2613Kb 1772 ▶ 280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5) [1] 실탄 2004/11/2613Kb 874 ▶ 279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4) [3] 실탄 2004/11/2612Kb 829 ▶ 278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3) [2] 실탄 2004/11/2613Kb 833 ▶ 277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2) [1] 실탄 2004/11/2616Kb 830 ▶ 276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1) [1] 실탄 2004/11/2613Kb 969 ▶ 275 - 평화수호자(10) [11] 실탄 2004/11/2615Kb 903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4] 5 [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38635 :: 288 - 인조의 가치(7) 실탄(cruel) 05-03-11 :: :: 6524 "답은 No입니다." 서운하리만치 차가운 대답이었지만 스튜 대통령은 조금도 실망한 표 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무엇을 모르는군요. 고급 난자를 사기 위해서는 얼마의 금액이 필요 한지 조사도 해보지 않으셨나요?" 안색이 다소 변한 대통령이 뭐라 반박하기 전에 그녀는 재빨리 화두 를 가로챘다. "얼마 전 한 여자의 난자가 비싸게 팔려 화제가 된 적이 있었지요. 유럽 어디의 여자였는데,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명문 대학 출신에 키 도 크고 권위 있는 미인 대회의 우승자이기도 했죠. 거기다가 아이큐 또한 상위급. 공식적으로 거론되진 않았지만 아마 2, 3억 정도 되는 가격에 팔렸을 겁니다. 난자추출이라는 게 한 번만으로 끝나지 않는 다는 것을 감안하면 십 억 정도는 들였겠죠." 대통령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재미있다는 표정을 가득 띤 채 자 신을 뜯어보는 눈앞의 소녀가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워졌다.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고급 유전자 만 지녔다고 자부하고 있어요. 미모에 있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생각하고, 두뇌도 지구상에서 제일 뛰어나죠. 그리고 또…." 재미있다는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느낀 순간 대통령은 저도 모르 게 불안함을 느끼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의 불안함은 곧바로 현 실이 되었다. "크악!" 예안이 들고 있는 광선건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에 노출된 대통 령의 팔은 그대로 하얀 연기를 피워올리며 녹아들어갔다. 순식간에 그는 팔 하나를 잃은 불구가 되었다. "각하! 무슨 일입니까!" 대통령의 비명소리에 놀란 요원들이 쳐들어왔다가 안의 풍경을 보고 경악했다. 특이한 총을 손에 쥔 소녀와 팔 하나를 잃고 상처 부위에 서 연기를 피워올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대통령. 누가 보아도 어떻게 된 건지는 뻔했다. "닥터! 감히 당신이 대통령 각하를 암살하려 하다니!" 분개한 요원들은 일제히 총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그 와중 에도 이를 악물며 손을 들어 그들을 말렸다. "그만… 두게. 닥터가 무슨 생각이 있어 그랬을 테니…." 고통을 짜내는 대통령과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녀를 번갈 아 바라보던 요원들은 몹시 분해하며 총을 집어넣었다. "나가 있게. 어서!" 이를 악물며 명령하는 대통령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요원들은 서둘러 의료진을 부르기 위해 뛰어갔다. 집무실에 다시 둘만 남게 되자 대통령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일어서서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 나라의 수장이라는 자존심이 그를 버티게 해주었다. "우리가 비록 당신에 비하면 약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자존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정당한 해명이 없을 경우 우리 는 대한민국에, 아니 당신에게 선전포고하겠습니다." 다리가 후들거리면서도 꼿꼿이 서 있으려고 필사적인 모습이 어느 정도 감동적으로 느껴진 모양이다. 그녀는 조금은 상냥해진 미소를 지으며 팔꿈치 위까지 없어진 그의 오른팔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낸 그녀는 흐르는 피를 상처 부위에 발랐다. 고통스런 와중에도 당황한 대통령은 지금 무엇하는 짓이냐고 외치려 했다. 그 순간, 상처 부위에서 고통이 씻은 듯 사라졌다. "이, 이게 어떻게 된…?" 대통령은 놀란 나머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상처 부위에서 빛이 나 더니 빠른 속도로 상처가 치료되고 있었다. 아니, 팔이 새로 생겨나 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섯 손가락 끝까지 전부 회복된 대통령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팔에 힘을 주어 보았다. 내 팔이 아니라 는 위화감은 전혀 없이 깨끗했다.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한바탕 꿈을 꾸고 난 듯한 기분이었다. "보다시피 이런 것도 할 수 있죠." 놀라워하는 대통령을 재밌다는 듯 뜯어보며 그녀는 피식거렸다. "어떤 중환자라 해도 제 피를 소량만 복용하거나 바르기만 해도 완 치시킬 수 있죠.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건 불가능하지만요." "이건…." 완전히 충격받은 대통령은 할 말을 잊은 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 만 했다. 조금 전의 경험 탓이었을까. 매력적인 새하얀 피부가 유난 히 아름다워 보였다. 소름끼치도록 아름답게. "여기서 문제. 제 난자는 과연 가치가 얼마쯤 될까요?" 돈으로는 살 수 없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대통령은 숨을 헐떡이 며 그녀를 똑바로 주시했다. "혹시라도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일이 없기를 빌게요. 괜한 병자들이 찾아와서 아우성피우는 경험은 절대 하고 싶지 않거 든요. 이 사실은 제가 세상에 발표하지 않는 한 무덤까지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손등에 키스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신다면 그렇게 하지요." "좋아요. 아프게 한 위자료라 쳐드리지요." 어느새 농담까지 할 정도로 안정을 되찾은 배짱이 갸륵하게 느껴진 그녀는 픽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웃음 띤 얼굴로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은 대통령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티 없이 깨끗한 피부는 흡사 살아 숨쉬는 대리석처럼 매끄러워 보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손이다. 거기에 키스를 한 것은 얼마나 대단한 행운 인가. 아쉽다는 듯 입술을 뗀 대통령은 그녀와 눈을 똑바로 맞추고 선언하 듯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에게는 거짓말을 해봤자 소용없겠죠. 지금 제가 결심한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말해보세요." "아무래도 당신의 난자를 포기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당신을 구성하 고 있는 유전자 하나만 얻는다 해도 천금의 보석보다 귀한 가치일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한다고 한 거니까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줄게요. 하 지만 쓸데없는 욕심은 가지지 않는 게 좋아요." "저, 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가 있습니까? 제게 아들 녀석이 하 나 있는데 괜찮으시다면…." 그녀는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맞선까지 주선할 정도로 여유가 있으시군요. 농담으로 치고 넘어가 줄게요." "이런, 반쯤은 진담이었는데 말입니다." "반은 농담이잖아요." "나머지 반은 기대였습니다." "헛된 기대는 휴지통으로." 유쾌하다는 듯 가볍게 웃어보인 그녀는 집무실을 나섰다. 뒤늦게 의 료진과 달려온 요원들은 대통령이 멀쩡한 것을 보고 멍한 표정을 짓 기만 했을 뿐 그녀를 제지하지도 못했다. "각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닥터가 장난을 좀 쳤을 뿐이야. 신경 쓰지 말게." 홀로그램 비슷한 정도로 생각한 요원들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의 료진을 돌려보냈다. 창가에서 그녀를 태운 차가 공항으로 달려가는 것을 바라보던 대통 령은 무거운 손으로 커튼을 쳤다. 죽어버린 팔이 되살아나던 순간의 감촉이 아직도 서늘하게 남아 있 었다. 새로 얻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던 대통령은 탁자를 뚫여져라 바라보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해냈다. 하늘 아래 저런 인간이 걸어다니는 것은 신의 장난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다. 쓰디쓴 중얼거림만 속에서 맴돌았다. by eden 드디어 인조의 가치 챕터가 끝났군요. 고작 7화밖에 되지 않으면서 석 달 가까이 걸려 끝나게 된 것은 제 게으름을 증명해주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오늘부터는 소엄도 용제도 성실연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안구건 조증 때문에 스타도 더 할 수 없게 됐으니 아마도 약속을 못 지킬 일은 없을 겁니다. 그 증거로 오늘 소엄을 2연참 이상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치기 지우기 목록 염원 으힛 화이팅~ 2005/03/11 판마녀 저런저런.. 실탄님의 안구건조증덕에 소엄이 다시 떳지만.. 반가워할수만은 없는 노릇이군요..;; 2005/03/11 유하 씁, 어쩔 수 없지. 설마의 90%.. 믿어볼께, 10%를 =_=;; 2005/03/11 주니어 실탄 습관처럼 아무생각 없이 들어오니까 한편 올라와 있네요. 대강 한달에 한번 체크하면 될듯; 2005/03/11 안녕히 오오오. 연참이라... 그럼 예안의 상처가 치유된 것은 피의 힘이었군요. 난 이름까먹었던 그 돌 때문이줄 알았는데... 2005/03/11 영 피의 위력이 엄청난데요;; 2005/03/11 실탄 으엑 아무래도 손가락이 지쳐서 오늘 2연참은 하루 미뤄야겠네요. 2005/03/11 DDDDJ 여유있게 올리세요 2005/03/11 대천사미카엘 멋있습니다. 2005/03/11 텐시노 헉 2연참을 2005/03/11 ㅠ_ㅠ 2연참이라니요... 올린지 하루도 안되서 그런 거짓말을 하시다니요. 벌써 하루가 지나서 12일이 되었습니다. 그 벌로 10연참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안그럼 결혼해서 옥동자 닮은 딸 낳을거에요 2005/03/12 근육.. 근육질이닷 2005/03/12 근육.. 손가락아프시면 피조금 바르세욤 2005/03/12 laputa 약간 좀 썰렁한 ㅡㅡ. 선물로 손등키스라니............ 이거 좀 그런데요... 난자 대신 조그마난 선물이라도 줄줄 알았는데 2005/03/12 laputa 글구 개인적으로 좋아한ㄴ 글중 실탄님 글을 좋아하는데 이제 연참을 많이 하신다니 반가운 소식이네용..... 그런데 실탄님 스타실력보고싶다 져도 중수정도는 되는데 ㅋ 2005/03/12 실탄 그거만 먹고 물러난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스튜는 그렇게 바보가 아닙니다. 그리고 저도 중수 정도는 됩니다만 요새는 고대의 문만 하느라 일반 대전은 하지 않습니다. 2005/03/12 디젤 냥~ 갠적 사정으로 얼마간 컴을 못쓰다 오랜만에 올라와보니...후두둑 3편이나... 후후...읽을거리가 3편이나 있다니..즐겁습니다 2005/03/18 한타박스 케릭터에게 강제권을 가진 작가는...? (둘째 계획은 폐기인가?^^;) 2005/04/27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5/18 페이지 ▶ 289 - 추억의 그림자(1) [3] 실탄 2005/03/149Kb 740 ▷ 288 - 인조의 가치(7) [18] 실탄 2005/03/117Kb 983 ▶ 287 - 인조의 가치(6) [13] 실탄 2005/02/237Kb 1026 ▶ 286 - 인조의 가치(5) [15] 실탄 2005/02/147Kb 968 ▶ 285 - 인조의 가치(4) [18] 실탄 2005/02/0210Kb 978 ▶ 284 - 인조의 가치(3) [12] 실탄 2005/01/159Kb 1079 ▶ 283 - 인조의 가치(2) [8] 실탄 2005/01/136Kb 896 ▶ 282 - 인조의 가치 [27] 실탄 2004/12/3111Kb 1244 ▶ 281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6) [38] 실탄 2004/11/2613Kb 1772 ▶ 280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5) [1] 실탄 2004/11/2613Kb 874 ▶ 279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4) [3] 실탄 2004/11/2612Kb 829 ▶ 278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3) [2] 실탄 2004/11/2613Kb 833 ▶ 277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2) [1] 실탄 2004/11/2616Kb 830 ▶ 276 -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1) [1] 실탄 2004/11/2613Kb 969 ▶ 275 - 평화수호자(10) [11] 실탄 2004/11/2615Kb 903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4] 5 [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38897 :: 289 - 추억의 그림자(1) 실탄(cruel) 05-03-14 :: :: 9484 샤워를 마친 예안은 머리카락을 말리며 거실로 나오다가 짙은 피 냄 새를 맡았다. 흠칫 놀라 보니 현관에서 니콜라스가 온몸에 피칠을 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서고 있었다. 걱정이 들었지만 그녀는 모른 체 넘어가주었다. 그는 아이이기 이전 에 앞서 자존심이 강한 프로다. 공식적으로 자신과 그는 피의뢰인과 의뢰인의 관계. 개인적인 일로 의뢰인이 일정 이상 걱정하는 것을 그 는 원하지 않는다. 근래 들어 니콜라스는 밖에 나가는 일이 많아졌다. 들어올 때는 꼭 전신에 피를 묻히고 들어온다. 한 번은 사람을 죽인 거냐고 물어보았지만 그건 아니라고 했다. 쇠와 기름으로 이루어진 기계 덩어리만 상대하느라 재미가 없다고 짤막하 게 대답했을 따름이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집요하게 니콜라스를 공격한다. 예안에게 피해가 미 칠 것을 염려한 니콜라스는 항상 밖에서 그의 공격을 받는다. 매스컴에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는지 폭탄 등을 사용한 요란스러운 공격은 없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백 번도 더 죽었을 습격을 받고도 니콜라스는 살아남았다. 언제부터인가는 시간을 정해놓고 공격할 정도로 신사적인 면모를 보 여주기도 했지만, 목숨을 노리고 있는 상대에게 예의 바르다고 칭찬 해줄 의무는 없다. 니콜라스의 기척을 느낀 지나가 2층에서 내려왔다.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기분이 든 그는 살짝 웃음을 지으며, 자신보다 큰 그녀 를 품에 안았다. “지나. 밥은 먹었어?” “네.” “로버트씨는 뭐라고 해? 아기는 건강하대?” “네.” 얼핏 보기에는 다정한 주종 관계이다. 눈을 비비고 자세히 뜯어보면 정다운 오누이로도 보인다. 그 이상의 관계를 상상하는 것은 두 사람 에게도 실례였고, 상상하는 본인에게도 수치라 느껴질 정도로 화목한 분위기였다. 가만히 둘을 바라보던 예안은 품에 안은 아이를 쓰다듬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 지나를 봤을 때부터 그녀는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나가 티아마트의 단서인 키메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있었을 뿐, 그냥 과거를 잃은 평범한 여자였다면 이 집에 두고 있지도 않았 을 것이다. 더군다나 합성인간에 불과할 뿐인데 아이까지 배고 있다는 것도 마 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를 낳는다고 해봐야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냈 듯 새로운 제품이 생산된 것일 뿐이다. 그 이상의 의미를 붙이는 것 은 부조리일 뿐이다. 장기매매를 위해 합성된 인조인간이라면 응당 그에 걸맞는 동정심이 나 아니면 사무감만을 느껴야 할 터인데, 이런 혐오감을 느끼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아마도 레이온의 행방을 말해주는 단서이기에 이럴 테지만. “엄마. 난 언제 학교 가?” “우리 유빈이는 학교 같은 거 안 가. 엄마가 나중에 가정교사라도 하 나 붙여줄게.” “학교 가면 내 또래 애들 많이 볼 수 있을 거라고 로버트 아저씨가 그랬어.” “유빈이는 그런 애들과는 비교 할 수 없이 귀한 아이야. 항상 그런 자긍심을 갖고 살아야 돼. 알았지?” “알았어.” 아이는 뜻도 잘 모르면서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갓 태어났을 때에 는 너무 조그맣고 연약해 사람 마음을 바짝 죄게 하더니, 아직 생후 24개월도 되지 않았는데 어느새 이렇게 컸다. 엄마 가슴에 매달리며 재롱을 피우던 아이는 밤이 깊어가자 곧 피곤 함을 느끼고 엄마 품에서 잠이 들었다. 웃음 띤 얼굴로 아이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던 그녀는 무 심코 TV를 켰다가 잠깐 경직되었다. “왜 그래?” 마침 피를 씻고 나오던 니콜라스는 의아함을 느끼고 TV에 시선을 주었다. TV에서는 개인이 소장한 알려지지 않은 희귀한 명물을 소개하는 프 로그램이 진행 중이었다. 딱히 그녀가 놀랄 만한 소재가 아니라고 여 겼기에 자연히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윽고 꿈에서 깬 듯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급 씹다가 큰 소리로 외쳤다. “성찬우씨!” “예!” 2층 베란다에서 점검을 하고 있던 성찬우는 재빨리 뛰어내려왔다. “내일 당장 일본에 가봐야겠어요. 준비해두세요.” “알겠습니다.” 느닷없는 일본행에 궁금하기도 하련만 성찬우는 조금도 동요를 드러 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오히려 니콜라스가 무슨 일이냐는 듯 호기 심을 보였다. “무슨 일인데 그래?” “나중에 말해줄게. 미안하지만 넌 빠져. 이번에는 성찬우씨랑 조용히 다녀오는 게 좋겠어.” “응. 아무래도 지금의 난 위험하니까….” 프로메테우스 때문에 비밀 여행을 하고 싶다면 차라리 떨어지는 것 이 낫다. 그가 풀이 죽은 듯 하자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가볍 게 위로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만큼 네가 거물이라는 증거잖아? 그러니까 가 슴을 펴.” 칭찬을 듣고 아이처럼 기분이 좋아진 니콜라스는 잘 자라고 인사하 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돌리던 중 그는 쇠가 튀어나온 부분에 손가락을 긁혔다. 살갗이 살짝 베어지며 피가 몇 방울 바닥에 툭 떨어졌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핏자국을 닦아내려던 그는 바닥에 그려진 피 문양에 순 간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뭐지?’ 가슴을 스치는 어두운 느낌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그는 뒤를 돌아 보았다. 예안이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소파에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닐 거야.’ 헛된 예감이라 치부한 그는 애써 조금 전의 불길함을 잊어버리려 노 력하며 문을 닫고 불을 껐다.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유서 깊은 야쿠자 집단인 게니마루 파는 겉으로는 가나코 무역회사 라는 법인을 내세우고 활동한다. 보석밀수, 마약밀매 같은 범죄에 의 존하는 것은 이미 구시대적인 이야기, 그들의 활동 영역 중 90%는 경찰에게도 장부를 보여줘도 상관없을 정도로 떳떳하고 합법적인 분 야였다. 나머지 10%는 외부에는 발설할 수 없는, 그들만의 은밀한 범죄 행각 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그 10%가 다른 90%를 음에서 지원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이기는 했지만. 게니마루 파의 보스인 진은 푸른 빛이 반짝이는 보석상을 황홀한 듯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근래의 취미였다. 대단히 우연한 경로를 통해 입수하게 된 보석상이었지만 그는 이 보 석을 미친 듯 사랑하게 되었다. 정교하게 세공된 여자의 모습은 상상 해본 적 없는 이상형 그 자체였고, 이런 여자가 있으면 모든 것을 포 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그 모습은 매혹적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다이아로 조각한 여자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것 도 높이 20c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세계의 명물을 소개한답시고 몇몇 한국놈들이 찾아왔을 때에도 대단 히 자랑스러워하며 청취를 허락했다. 평소 같았으면 어리석은 한국인이라며 비웃고 깔봤을 게 뻔했기에 부하들은 괘씸하게도 말세가 아니냐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전통을 고 수하고 있는 다른 파에서 그랬다가는 참수를 당해도 할 말이 없었을 테지만, 여기는 게니마루 파였다. “사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돌려보내.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잖나.” “그게… 보스가 가진 그 보석의 출처를 알고 싶다고 하시는데….” “방송을 보고 찾아온 놈팽이라도 되나? 알려주기 싫으니까 돌아가라 고 해.” “알려주기만 하면 백만 불을 주겠다 합니다.” 비로소 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출처 한 번 알려주는데 백만 불을 선 뜻 지급하겠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 없다. 그런 사람이 찾 아왔다면 예사 일은 아닐 것이다. 흥미가 생겼다. “들여보내.” 잠시 후 부하의 안내를 받고 한 소녀와 청년이 들어섰다. 귀한 스타 일의 자신만만한 청년실업가나 검은색 넥타이를 맨 중년 변호사쯤의 이미지를 상상했던 진은 다소 실망했다가, 모자와 색안경 아래로 드 러난 소녀의 얼굴선이 상당히 고운 것에 새로운 흥미를 느꼈다. “그 보석이 얼마 전 TV명물쇼에 출연했던 것인가요?” 인사도 생략하고 다짜고짜로 용건부터 꺼내는 소녀의 태도가 사뭇 흥미로웠다. 어딘지 다급한 느낌이 났다. “그 전에 자기 소개부터 해야 하지 않나?” “아, 그렇군요. 한국에서 온 유민이라고 해요. 이쪽은 제 사촌오빠인 진환이라 하고요.” “진이라고 부르면 된다. 그런데 이 보석의 출처를 알려주면 백만 불 을 주겠다고?” “그 전에 잠깐 그걸 살펴봐도 될까요?” 왜 이 보석에 집착하는지는 의아하지만 살펴봐도 되겠느냐는 것은 딱히 이상한 요구는 아니었다. 진은 딸에게도 절대 손 못 대게 했던 보석을 잠자코 소녀에게 넘겼다. 투명하면서도 푸른 빛을 발하는 보석을 말없이 응시하는 소녀의 눈 시울이 서서히 붉은 빛에 젖어들어갔다. 소녀의 감정이 격해지고 있다는 것을 얼핏 느낀 진은 아무 소리 않 고 바라보기만 했다. 눈을 지긋이 감은 예안은 두 손으로 보석을 꼭 쥐고 잠금장치가 깨 어진 기억에서 어떤 과거를 떠올렸다. 「케이. 나 생일 선물 뭐해줄 거야?」 「네가 좋아할 만한 거 해줄게.」 「쇼핑몰에서 노트북 하나 봐둔 거 있는데 그거 사 줘. 지금 컴퓨터 는 너무 저사양이라서 돌아가는 게임이 몇 개 없어.」 「…가끔은 여자다운 선물을 달라고 해봐.」 붉은 머리카락의 귀여운 소녀가 가볍게 미소지으며 한 청년에게 매 달려 선물을 조르는 광경이 떠올랐다. 행복해하는 소녀의 마음이 기 시감을 뚫고 그대로 전달된다. 아득한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 듯 가슴 한구석이 쓰리다. 붉어진 눈시울을 껌벅이며 환영에서 풀려났다. 예안은 살짝 흘러내린 눈물을 닦으며, 다소 차가워진 어조로 요구했다.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 보석, 제가 사겠어요.” 그녀는 진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덧붙였다. “원하시는 가격을 말씀하세요. 얼마가 들든 사겠어요.” “무슨…. 이건 팔 생각이 없어!” 흥분해서 외치던 진은 눈물을 닦기 위해 색안경을 벗은 그녀의 새하 얀 얼굴을 보고 흠칫했다. 낯설지 않은 향기가 느껴지는 녹색 눈동자 는 가슴이 시릴 듯 아름다웠다. 그는 무심코 보석과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둘은 어딘가 닮아 있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강하게 밀어닥쳤다. 진의 눈동자가 점차적으로 끓어오르는 감정에 사로잡히자 예안은 흠 칫 놀라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오쿠토. 이 자들을 묶어라.” 그 명령에 그녀와 찬우는 물론이고 진의 부하들까지 놀랐다. “뭘 하고 있나? 보스의 말이 말 같지 않게 들리나?” 평소 사장님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해고하겠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 보스가 저러는 것은 처음이었다. 부하들은 다소 의아해하면서도 서둘 러 줄을 가져와 그녀를 묶으려고 했다. 탁 하고 부하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쳐낸 그녀는 화기가 타오르는 눈 으로 진을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요?” “위해를 가하진 않을 테니 순순히 묶이는 게 좋아. 그렇지 않으면 이 것을 부숴 버리겠다.” 협박에 굴복하는 것은 자존심 상했지만 그렇게까지 나오는데는 어쩔 수 없다. 그녀는 칫 하고 이를 갈며 순순히 묶였다. 여차하면 즉시 공격하려고 했던 찬우는 의뢰인이 아무 사인도 보내지 않자 할 수 없이 따라 묶였다.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자여니야 흙 ㅡㅜ 스타가 안되요오 ..OTL 그나저나.. 오랜만이에요오~ 즐독하고갑니다아 //ㅅ// 연참 화이팅>ㅅ.< 2005/03/14 한조 그거맞습니다만 -ㅅ-;;; 2005/03/14 해적왕 스토리가 점점 길어지고...연재기간도 길어지니... 탈락자(??)들이 많아지네요...-_ㅠ 2005/03/15 주니어 실탄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05/03/16 디젤 후후후...제가 기억을 못하는것이 아니었군요.. 묘한 승리감(?)이 입니다~ 근데...저 아찌 본가 다 뒤집어 놓을일 있나.. 감히 예안을 감금하다니... ㅋㅋ 2005/03/18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4/18 페이지 ▶ 304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4) [7] 실탄 2005/04/0813Kb 616 ▶ 303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3) [6] 실탄 2005/04/0711Kb 634 ▶ 302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2) [9] 실탄 2005/04/0613Kb 623 ▶ 301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 [13] 실탄 2005/04/0511Kb 735 ▶ 300 - RESTART(6) [9] 실탄 2005/04/0413Kb 693 ▶ 299 - RESTART(5) [10] 실탄 2005/04/0314Kb 634 ▶ 298 - RESTART(4) [13] 실탄 2005/04/0212Kb 694 ▶ 297 - RESTART(3) [15] 실탄 2005/04/0112Kb 687 ▶ 296 - RESTART(2) [7] 실탄 2005/03/3113Kb 643 ▶ 295 - RESTART(1) [9] 실탄 2005/03/3013Kb 781 ▶ 294 - 추억의 그림자(6) [6] 실탄 2005/03/2912Kb 698 ▶ 293 - 추억의 그림자(5) [12] 실탄 2005/03/2814Kb 685 ▶ 292 - 추억의 그림자(4) [15] 실탄 2005/03/2412Kb 814 ▶ 291 - 추억의 그림자(3) [9] 실탄 2005/03/2012Kb 881 ▷ 290 - 추억의 그림자(2) [7] 실탄 2005/03/147Kb 885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 4 [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39464 :: 291 - 추억의 그림자(3) 실탄(cruel) 05-03-20 :: :: 11964 기회를 틈타 예안은 방을 빠져나왔다. 이미 바깥은 상당히 어두워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한국 정부에 연락해서 이 괘씸한 녀석들을 응징하고 싶 지만 참기로 했다. 고작 방해전파장치 따위로 외부와의 연락을 방해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어리석음에 코웃음도 조금 나왔다. 살그머니 복도를 지나치던 중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렸다. 재빨리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살며시 살펴보니 정장 차림을 한 중년 남자들이 뭐라 웃고 떠들며 안채로 들어서고 있는 게 보였다. 얼굴에 부티가 흐르는 것이 척 보아도 잘 나가는 사업가 아니면 정 치가쯤 되어보였다. 게니마루 가는 일본에서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 로도 영향력이 큰 가문이니 저런 모임이 잦은 것은 당연할 것이다. 지금은 저 따위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을 때가 아니다. 먼저 성찬우가 어디에 감금돼있는지를 알아야 했다. ‘유니콘, 너한테 찾아달라는 것은 아무래도 좀 억지겠지?’ ‘성찬우씨에게 추적 칩이 달려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원하신다면 지 금 당장 그곳으로 날아가 협박을 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가볍게 일축한 뒤 금속탐지기능을 동원해 도검류가 보관돼 있는 방 을 찾아 들어갔다. 과연 일본의 명문가문답게 여러 가지의 진검들이 반짝거리며 진열돼있었다. 그중 적당한 검을 꺼낸 그녀는 칼을 스르릉 뽑아보았다. 날카로운 예 기가 빛나는 것이, 힘이 없다 해도 손쉽게 적을 위협할 정도는 되어 보였다. 신인류에게 허락된 힘, 초능력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기에 그녀는 평소 무기를 거의 휴대하고 다니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런 녀석 들 따위에게 그런 사실을 알릴 필요는 없기에 부득불 무기를 찾은 것이었다. 조용한 정원에 적당히 몸을 숨기고 기다리던 그녀는 이윽고 아까 봐 둔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지나가자 조용히 뒤에서 나타나 입을 틀어 막았다. 그리고 칼날을 목에 가져갔다. “내 보디가드는 어디에 있지?” 여자는 대답 대신 허리를 숙였다. 동시에 팔꿈치를 뒤로 찌르며 배를 노렸다. 상대가 공격할 거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예안은 순간 당황해서 공격 을 피하다가 그만 검을 떨어뜨렸다. 여자는 재빨리 검을 쥐어 멀리 집어던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온화한 표정을 띠기까지 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말투는 정중했으나 따르지 않겠다면 강제로라도 끌고가겠다는 의지 가 뚜렷했다. 바드득 이를 갈던 예안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과연, 야쿠자는 일하는 여자들도 다르다는 건가.” “가주님께서 아시면 큰일납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당신, 내가 누군지 알고 있어?” “닥터라는 것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안은 짐짓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조롱 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제스처였다. “알고 있네? 그런데 그렇게 겁없이 나와도 되는 거야?” “게니마루 가 안에서 가주님의 말씀은 절대적입니다. 상대가 누구이 든 간에 잘 모시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저는 응당 그렇게 해야만 합 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그 충성심이 아니라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그렇게 배짱 좋게 나오는 것 말이야.” 문득, 이 여자의 표정이 구겨지게 하면 얼마나 통쾌할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이미 늦었어. 조금 전 내가 이곳에 감금돼있다는 사실을 한 국에 연락했으니까. 대통령은 당장 군대에 비상대기령을 내렸지. 지 금쯤 청와대는 선전포고문 서두를 어떻게 쓸까를 궁리하고 있는 중 일걸?” 순간적으로 여자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예안은 사뭇 즐거워졌다. “당신이 아무리 그렇게 잘난 체 해봐야 나와는 스케일이 달라. 어설 픈 폼 잡지 말고 지금 당장이라도 가주한테 무릎을 꿇고 자비를 빌 어보라고 해.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다.”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오기는 그만 부려. 처량하게밖에는 안 보여.”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여자가 공격 자세를 취했다. 한순간 여자가 크게 보였다 싶더니 곧이 어 짙은 적의가 쇄도해들어왔다. 예안은 살짝 몸을 틀어 피하며 키득 거렸다. “날 인질로 잡아서 전쟁을 어떻게 해볼 생각이라면 틀렸어. 이래 보 여도 나는….” 히죽 웃음을 흘린 예안은 자연스럽게 오른팔을 수평으로 뻗었다. 새 하얗고 고운 손끝에서 푸른 섬광이 흘러나오며 서서히 형상을 갖춰 나갔다. “싸움도 좀 할 줄 알거든.” 경악으로 뒤덮인 여자의 얼굴을 즐겁게 주시하던 예안은 빛으로 된 칼을 높이 들어올렸다.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칼끝이 목에 닿는 순간 여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자아. 그럼 내 보디가드한테 안내해주실까?” 가까스로 눈을 뜨고 차가운 미소가 짓궂게 빛나는 얼굴을 빤히 들여 다보던 여자는 묵직한 한숨을 토해냈다. 소문만큼 아름다운 소녀이지만, 소문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 게 깨달았다. “당신은… 인간이 맞습니까? 그 칼은 어떻게 된 거죠? 눈에 보이지 않는 초소형 광선검 장치라도 갖고 다니는 건가요?” “좋을 대로 생각해.” 그렇게 생각해주면야 굳이 기억에 손을 댈 것도 없이 오히려 이쪽이 편하다. 생각보다는 여자가 대범하다는 것에 놀랐지만 결국 그래봐야 평범한 구인류일 뿐,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억지로 감추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예안은 속으로 비웃으며 따라갔다. “어디 가는 길인가?” 모퉁이를 돌다가 여자보다 지위가 높아 보이는 남자와 마주쳤다. “손님께 별당을 안내해드리던 길이었습니다.” “손님?” 남자는 의아한 눈으로 예안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뜻밖에 굉장한 미인이라는 것에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남자의 마음을 대번에 눈치 챈 예안은 히죽이면서도 모른 체 했다. “그럼 이만. 좋은 밤 되세요, 기무라씨.” 아쉽다는 듯 그 자리에 서서 몇 번이고 돌아보던 남자는 마지못해 멀어져갔다. “속이는 게 자연스러운데 그래?” “칭찬 감사합니다.” “태연한 척 해봐야 소용없어. 당신도 결국 남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인간이라고.” “당신은 평범하지 않다는 뜻인가요?” “길게 말할 필요는 없지. 인정해. 내가 평범하지 않다는 거.” 태연히 반박한 예안은 늑장 부르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여자는 성찬우가 감금돼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 한 거처로 보이는 현대식 일층 건물이었다. 자그마한 창문에는 도둑 방지용 창살도 있었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도 그것은 도둑방지용이 아니라 탈출방지용이라 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수제작된 강철입니다. 일반 도구로는 흡집을 내는 것조차 불가능 할 겁니다.’ ‘과연, 현대식 사교도소라 이거지?’ 여자가 문앞에 서서 머뭇거리기만 할 뿐 더 행동을 보이지 않자 예 안은 다소 짜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뭐해? 문 안 열고?” “저, 코드번호는 제가 알지 못합니다만….” “그래? 수고했어.” 무슨 뜻이냐고 여자가 말하려는 순간 예안은 여자의 목을 뒤에서 움 켜쥐었다. 파르스름한 스파크가 튀면서 여자의 몸이 축 늘어졌다. 기 절한 것이다. 참 쓸만한 능력이라고 중얼거리면서 문 앞에 선 예안은 다시 힘을 끌어내 광선검을 형상화시켰다. 푸른 열기가 빛나는 칼날은 잠금장치 를 아주 간단히 잘라냈다. “성찬우씨. 데리러 왔어요.” 무기와 연락장치를 모두 압수당한 채 안에 감금돼있던 성찬우는 믿 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와 그녀의 손끝에서 빛나는 칼을 번갈아 응 시했다. “설명은 나중에. 급하니까 빨리 나와요.” “아, 알겠습니다.” 성찬우는 경호대상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게 치욕스러운 듯 얼굴 을 살짝 구긴 채로 그녀를 따라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일단 저쪽에 숨는 게 좋겠습니다. 곧 사람들이 들이닥칠 테니까요.” “어째서요?” “이런 감옥에는 반드시 경보장치나 감시용 카메라를 설치해놓기 마 련입니다. 지금쯤 제가 탈출했다는 것을 알고 비상이 걸렸을지도 모 릅니다. 일단은 몸을 숨겨야 해요.” 그 말이 맞다고 여긴 예안은 성찬우가 가리킨 으슥한 정원으로 일단 몸을 숨겼다. 과연 그의 말대로 잠시 후 한 무리의 덩치들이 우르르 물려와서 문 이 열린 감금소를 들여다보다가 일본어로 뭐라고 욕설을 내뱉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녀는 옆의 찬우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이것도 나름대로 스릴 있네요.” “죄송합니다. 별 도움이 못 되어서.” “미안해하실 건 없어요. 애초에 무리했던 건 나니까.” 바로 코앞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향기에 성찬우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붉혔다가 억지로 안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남자들이 난리를 피우는 것을 훔쳐보며 몹시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매끄러운 향기가 풍기는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성찬우는 누가 볼 세라 재빨리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손 에 잡힐 듯 들렸다. 그는 그녀가 눈치채지 않기를 바랬다. “담을 넘기에는 너무 높아요. 정문은 너무 위험하고, 뒷문을 찾아보 는 게 좋겠습니다.” “총이 없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다소 위험하지만 괜찮을 겁니다. 이래 봬도 무술을 익혔으니까요.” 그녀는 끄덕였다. 최고의 경호원이라 했으니 그에 합당한 실력을 쌓 고 있을 것이다. 예안은 잠시 자신의 힘을 접어두고 그의 능력이 어떤지 한 번 지켜 보기로 했다. 여차하면 힘을 발휘하면 된다 생각하기에 그녀는 한없 이 느긋했다. 모퉁이를 돌던 중 정원을 두리번거리며 탈출자를 찾고 있는 덩치 둘 을 보고 성찬우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기척을 죽이고 뒤에서부터 다가간 성찬우는 작은 기합소리와 함께 수도로 덩치들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90kg이 넘어보이는 거구의 남자 둘을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기절시키 는 실력에 예안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실력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런 호리호리한 체격으로 저렇게까지 해낼 줄은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지요.” “네.” 기절한 남자 둘을 가볍게 끌어다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 놓은 뒤 성찬우는 앞장 서서 주의깊게 달렸다. 저 멀리 작은 문이 하나 보였다. 정문이나 후문까지는 안 되어 보였 고 아마 쪽문쯤 될 듯 했다. 별다른 잠금장치가 설치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척 보기에도 건장한 감시원 여섯 명이 떡 버티고 있으니 절로 망설여졌다. 진도 바보는 아닐 테니 탈출 소식을 듣고 감시망을 배 이상으로 늘리는 게 당연 하다.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은 더 위험합니다. 차라리 저쪽을 강행돌파하는 게 낫습니다.” 속마음을 들킨 듯 하자 그녀는 겸연쩍은 기분이 들었다. 성찬우는 지 금 자신들이 대단한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자신들은 언제든지 안전하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 다. 하늘에서 맥이 나타나 포구를 겨누는데 어떤 인간이 벌벌 떨지 않을 수 있을까. 외교적 문제로 불거지는 것이 귀찮다면 당장이라도 한국 정부에 콜 을 넣으면 된다. 김영환 대통령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일본 수상 을 닦달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여유는 충분히 있었고, 또 오리지널 유젤의 것이었던 보 석상 문제로 이곳에 온 터라 일을 크게 불리기는 싫었다. 그래서 성 찬우를 말리지 않았다. 성찬우는 어둠이 깔린 곳을 따라 높은 포복으로 살그머니 다가갔다. 그의 발이 나뭇가지를 밟으며 뚝 하는 소리가 났다. 그의 얼굴이 창 백함으로 변색됨과 동시에 남자들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남자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다른 지역을 수색하던 남자 들이 고함을 듣고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예안은 낭패라는 표정을 지으며 대통령에게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 했다. 맥을 부르는 것은 언제라도 할 수 있으니 그것은 최후까지 아 껴둘 생각이었다. 핑! 핑! 핑! 소음기가 장착된 총 특유의 발포 소리가 들렸다. 느닷없는 발포에 예 안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눈먼 총에 제대로 맞으면 신인류라 해도 죽을 수밖에 없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총의 목표는 자신이 아니라 성찬우였다. 저들 도 철저히 언질을 받았을 테니 보디가드를 봉쇄하려는 것이리라. “위험해요!” 성찬우는 가능한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지기 위해 힘껏 뛰었다. 그도 저들이 노리는 게 자신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가 달아나는 방향에서 수십 명의 남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성찬 우에게 일제히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다급해진 예안은 당장 맥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맥이 이곳까지 오기 위해서는 적어도 수십 초는 필요로 한다. 그 기간 동안 그가 무 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 순간 기묘한 광경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수십 발의 탄환이 성찬우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중 일부는 그의 오른팔을 완전히 꿰뚫었다. 탄환이 스친 뺨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다리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오른팔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 소매자락에 구멍까지 났는 데도. 설명할 길 없는 불길함을 느낀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탄환은 계속해서 빗발치듯 날아들며 성찬우를 맞췄다. 그러나 급소에 는 한 발도 맞지 않았다. 마치 방패의 신이 그를 수호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의 오른팔만이 그 수호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위화감이 가득한 그녀의 시선을 느낀 성찬우는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서글픈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어디선가 본 듯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 순간 그녀는 사 고력을 잃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는 너덜너덜하게 변한 기계팔을 내려다보았다. 걸레가 돼버린 소매 자락을 찢어내자 인공피부가 거덜난 기계팔이 흉측한 그 모습을 드 러냈다. 침묵에 휩싸인 예안은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잠에서 깨어나 듯 한순간에 정신을 차렸다. “당신은…?” “이렇게 들켜버렸군요.” 마크는 씁쓸히 웃으며 기계팔을 떼어내 허공에 던졌다. 붉은 빛이 번 쩍임과 동시에 수명이 다한 기계팔이 불타 재가 되었다.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대천사미카엘 마크...? 어쨌든 오랜만이 시네요. 실탄님. 2005/03/20 안녕히 마크? 아상에서도 없던 인물이잖아요. 누구지? 2005/03/20 실탄 아틀란티스에서 주인공이 제일 처음으로 만난 아틀란티스인입니다. 레이온한테 오른팔이 잘린 사나이죠. 2005/03/20 사케쿠 우웃!! 마크!! 이런!! 2005/03/20 안녕히 아아. 그 마크!!! 머리 나쁜 거 탄로났다....ㅠㅠ 그나저나 그 연정은 아직도 못 버렸나 보군요...후후 2005/03/20 텐시노 흐 2005/03/20 조찬우 내이름이 조찬우 인데 ㅋ 헉 마크!!! !!! 2005/03/20 영 아 ..저사람 이군요. 2005/03/21 원츄 아아 5월3일달 영장 날아 왔는데 소엄 완결을 보고 싶다,ㅠㅠ 영장 날아와서 마음이 쌩뚱 맞네요,;; 2005/03/21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4/18 페이지 ▶ 304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4) [7] 실탄 2005/04/0813Kb 616 ▶ 303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3) [6] 실탄 2005/04/0711Kb 634 ▶ 302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2) [9] 실탄 2005/04/0613Kb 623 ▶ 301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 [13] 실탄 2005/04/0511Kb 735 ▶ 300 - RESTART(6) [9] 실탄 2005/04/0413Kb 693 ▶ 299 - RESTART(5) [10] 실탄 2005/04/0314Kb 634 ▶ 298 - RESTART(4) [13] 실탄 2005/04/0212Kb 694 ▶ 297 - RESTART(3) [15] 실탄 2005/04/0112Kb 687 ▶ 296 - RESTART(2) [7] 실탄 2005/03/3113Kb 643 ▶ 295 - RESTART(1) [9] 실탄 2005/03/3013Kb 781 ▶ 294 - 추억의 그림자(6) [6] 실탄 2005/03/2912Kb 698 ▶ 293 - 추억의 그림자(5) [12] 실탄 2005/03/2814Kb 685 ▶ 292 - 추억의 그림자(4) [15] 실탄 2005/03/2412Kb 814 ▷ 291 - 추억의 그림자(3) [9] 실탄 2005/03/2012Kb 883 ▶ 290 - 추억의 그림자(2) [7] 실탄 2005/03/147Kb 885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 4 [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39769 :: 292 - 추억의 그림자(4) 실탄(cruel) 05-03-24 :: :: 12130 지금 이 상황은 위험하다. 오감을 자극하는 모든 것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허공에 높이 떠올라 불타고 있는 기계팔. 서글프다고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그 처량한 불꽃이 예안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시간이 멎은 게 아닐까 착각될 정도로 긴 침묵 속에서, 그녀의 의식 은 며칠 전에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듯 희미한 기억을 끄 집어냈다. ‘네 주제도 모르고 내 것을 탐낸 벌이다. 앞으로 평생 그 상처를 바 라보면서 반성하도록 해라.’ 차갑게 피어오르는 음성과 함께 솟구치는 피. 그리고 잘려나간 남자 의 팔. 조각난 그림이 맞춰지듯, 선명하게 피어오르는 영상을 멍하니 쫓던 그녀는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마크는 서글픈 빛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표시를 해주기를 바 라는 얼굴이었다. 차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말을 건네기에는 두려움까지 느낄 정도로 비장한 안색이었다. “죄송합니다. 결코 기만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정체가 발각된 이상 더는 힘을 숨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마크 는 총을 쏘아대던 남자들을 간단히 기절시켰다. 그들의 팔이나 다리 등 신체 한두 부위에서는 살이 익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저… 엔젤이 지상인들 사이에서 혹 나쁜 일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경호원 임무에 자원했을 뿐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앤슨이 시킨 짓인가요?” 그녀는 뜻밖에도 차분해진 음성으로 물었다. 예전 같았으면 반쯤 패 닉에 빠졌을 터이다. 허나 언제 아틀란티스인들이 촉수를 뻗쳐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정도 사건은 새삼스러운 것 도 못 되었다. “앤슨은 아닙니다. 당신은 잘 모르시겠지만 우리는 당신을 강제로 납 치할 생각은 추호도….” “알고 있어요. 내가 내 발로 자기들에게 걸어오도록 하는 게 진짜 계 획이라면서요?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건지는 웃기지만. 혹 시 내가 여기 일본까지 날아오도록 한 것도 아틀란티스가 꾸민 일인 가요?” “그건 아닙니다. 그저 당신의 경호원이 되고 싶어 오스카님에게 부탁 했을 뿐입니다. 정말 그게 다입니다.” “오스카? 당신이 내 주변에 잠입해 있었다는 사실은 그 사람만 알고 있나요?”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그래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이윽고 생각 을 정리한 듯 얼굴을 더욱 차갑게 다잡았다. “어쨌든 지금이라도 발각났으니 다행이네요. 당신 얼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으니 내 앞에서 꺼져요.” 심장이 비수에 찔린 듯 비틀거리던 마크는 쓰러지려는 마음을 붙잡 고 간절히 애원했다. “당신을 안전한 곳까지 탈출시킬 때까지만이라도 제발….” “난 어디에 있든 안전해요. 상관말고 어서 꺼져요. 지금 기분이 아주 더러우니까 죽여버리기 전에 어서 꺼져요.” “이곳은, 이곳은 위험합니다.” “하? 어째서요?” “잘 모르겠지만 예감이 좋지 않….” 마크는 말을 잇다 말고 눈을 부릅떴다. 꽉 깨문 입술 틈을 비집고 피 가 흘러나왔다. 그의 몸이 서서히 무너졌다. 예안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차갑게 그가 쓰러지는 것을 내려다보 았다. 상대는 적이 보낸 첩자, 그런 사람이 죽는 것을 걱정해야 할 의무는 없다. “큰일날 뻔했군.” 마크가 쓰러지면서 그의 뒤에 서 있던 진의 모습이 보였다. 진은 소 음기가 장착된 권총을 손에 든 채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한가락 하는 경호원인 것 같군. 특수합금으로 된 잠금장치를 자르고 달아나다니 말이야. 소형 레이저 칼이라도 쓴 건가? 그대가 만들어준 건가?” 진은 아틀란티스와는 아무런 관련은 없는 듯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크를 공격할 리가 없다. “그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 조용히 따라와.” 나지막하지만 힘있는 경고마저 우습게 들린 그녀는 작게 킥킥거리며 뜻밖에 순순히 그를 따라갔다. 탈출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예기치 못한 변수를 맞이한 그녀는 조 금 더 이들과 놀아줄 생각이었다. 저 얼굴을 짓밟는 것은 흥미가 식 은 다음에 해도 될 터였다. 김영환 대통령은 기분이 대단히 좋지 않았다. 석창렬 의원과 대면을 가지고 난 뒤면 항상 그러했다. 발칙하게도 닥터로부터 맥과 유전을 빼앗아 나라에 귀속시키겠다는 생각을 품은 자와는 도저히 같은 방안의 공기를 마시기 힘들었다. 실 로 나라를 말아먹겠다는 생각이 아닌가. 닥터가 앙심을 품고 외국으로 망명이라도 떠나는 날에는 큰일이다. 유전이나 맥보다는 오히려 닥터 하나가 더욱 가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석창렬은 어째서 모르는지 갑갑하기만 했다. 대충 업무를 정리한 영환은 중현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이리 앉게. 그 자, 요새는 어떤가?” “특별한 사람을 만나고 있진 않습니다. 도청은 물론이고 철저히 감시 하고 있지만 별다른 연락이 닿지는 않더군요. 만사에 조심을 꾀하는 모양입니다.” “철저히 조사하도록 해. 분명히 누군가가 뒤에서 받쳐주고 있을 거 야. 어쩌면….” 영환은 말끝을 흐렸다. 과거 청와대에 겁없이 쳐들어와 대통령 침실 에 칼을 꽂고 사라진 범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중현도 안색이 핼쓱하게 변색 했다. 예안을 노리는 정체불명의 자들. 그들의 목적이 무언지 모르나 현재로서는 석 의원의 지원자로 짐작되는 집단은 그들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그 애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싶군.” “연락할까요?” “그래.” 중현은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았는지 눈 썹이 살짝 내려앉았다. 몇 번 이야기를 하고 난 뒤 중현은 곤란하다 는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을 닫았다. “지금 집에 없다고 합니다. 외출을 나갔다는군요.” “그래?” 대통령은 그럼 며칠 후에 다시 약속을 잡는 게 좋겠다 생각하고는 다시 업무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이 순간 예안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마크는 빛 하나 새어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에 내던져진 채 가 늘게 숨을 쉬고 있었다. 냉정하게도 진의 부하들은 그의 상처를 돌보 아주지 않았다. 죽어버리는 게 오히려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 했다. 시력이 상실되다시피 한 눈빛으로 천장을 노려다보며, 마크는 가슴을 크게 들썩였다.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하는데, 그래야 엔젤을 도와줄 수 있는데 하는 강박관념이 그의 뇌리를 괴롭혔다. 불현듯 인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강렬한 빛이 쏘아지며 그의 몸을 휘감았다. 피가 멎었다. 상처가 아물어가기 시작했다. 거친 숨결이 한층 수그러 들면서 시력이 되돌아왔다. 마크는 힘들게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었다. 어둠 속에서 또렷한 목소리가 울렸다. “왜 시킨 대로 하지 않았지?” “죄, 죄송합니다. 엘리우스가 언제나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그럴 기 회를 찾지 못했습니다.” “변명은 삼가라. 왜 시킨 대로 하지 않았지?” 냉정함이 느껴지지 않는, 그래서 더욱 건조한 음성에 마크는 얼어붙 을 듯한 두려움을 느끼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엔젤은… 엔젤은 우리의 소중한 메시아입니다. 그런 엔젤을 더럽힌 다는 것은… 저로서는 도저히….” “그렇지 않으면 엔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누가 너에게 직접 하라고 했나? 어디까지나 적당히 내가 시키는 대로 연기만 하면 된 다고 하지 않았나?” 비웃음이 역력함에도 불구하고 마크는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꾸미는 계략은 그 어떤 아틀란티스인이라 해도 입 에 거품을 물고 분개할 정도로 치졸하고 더러운 것이었지만, 마크는 다른 사람에게 고해바칠 용기도 없었다. 허나 그의 생각이 틀리지는 않았다. 지난 시간 동안 엔젤의 곁에 머 무르면서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다. 엔젤은 이미 인간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어 있다. 그런 더러운 수단을 쓰지 않고서는 엔젤은 영영 아틀 란티스에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너는 전사다.” “….” “너의 사명은 엔젤에게 진정한 안식처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는 것 이다. 그것을 위해서 작은 상처 하나 둘쯤 주는 것은 죄가 아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계획을 변경한다. 오늘밤 시행해라.” 마크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지금 진심이냐는 외침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은 탓이다. 이제 네 정체마저 들켜버렸으니 이 방법 외에는 없어.” 목소리의 주인이 사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마크는 고개를 서서히 떨구었다. 시계는 자정이 넘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가만히 앉아 있던 예안은 지금 상황을 놓고 차분히 생 각에 빠져들었다. 성찬우는 아틀란티스인들이 붙인 감시자였다. 니콜라스가 첫 대면부 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덜거린 것은 본능적인 경계심 때문에서 였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 정체가 들통났으니, 저쪽에서 어떤 식으로든지 접근할 때가 되었을 것이다. 어둠 속을 가만히 노려보던 그녀는 불현듯 어떤 위화감이 느껴졌다. 불빛이 새어들어오는 문 틈으로 무언가 낯설지 않은 인기척이 존재 감을 뻗쳐왔다. 분명 진은 아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녀는 별다른 경계의 자세를 취하지도 않고 묵 묵히 문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밖에 있는 거 다 알고 있어.” 인기척이 움찔 하고 놀라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희미한 조소를 깨물 며 덧붙였다. “들어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텐데?” 조용히 문이 열리며 마크가 들어왔다. 쭈뼛쭈뼛하는 그를 냉소적인 시선으로 노려보며 그녀는 어깨를 가볍 게 으쓱했다.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다시 찾아온 그를 조롱하는 의미 의 몸짓이었다. “멀쩡하군. 죽은 줄 알았는데.” “그 정도로 죽지 않습니다. 다친 척 위장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왜 왔지? 당신 얼굴은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했을 텐데?” 이제는 존대도 생략한 차가운 말투였지만 마크는 조금도 개의치 않 고 서슴없이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탈출만은 돕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아무 리 당신이라고 해도 이곳에서 혼자 힘으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합 니다.” “그것은 당신이 신경 쓸 바 아니야.” “제 마지막 부탁이니 제발 들어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왜 그렇게까지 날 신경 쓰는 거지?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난 아틀란티스로 돌아갈 생각 따윈 없어. 내 인생은 내 거야. 아무도 손댈 수 없어. 당신들에게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차갑게 응수했지만 좀처럼 그는 고개를 들 줄 모른다. “저는… 당신을 사모합니다.” “듣기 거북한 소리는 집어 치워.” “이 마음만은 진심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남자로서, 당신을 이곳에 서 탈출할 수 있게 해주는 것만큼은 안 되겠습니까? 절대로 아틀란 티스로 당신을 데려가거나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을 한국까지 무사히 모셔다 놓은 뒤에 사라지겠습니다. 제발!” 비굴함에 가까운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 았다. 이제껏 그녀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남자는 많았다. 평범한 학생으로 지내던 시절에도 많았고, 닥터라는 이름으로 일약 국제적인 유명인이 되었을 때에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매일같이 꽃과 선물을 들고 찾아와 사랑을 구하는 남자들에게 차디 찬 조소를 날려주었던 그녀다. 지금의 몸으로 살게 되었을 때부터 싸 늘하게 굳은 마음을 완전히 깨부순 남자는 이제껏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 자신부터가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열고 싶지 않았다. 이 몸은, 자신만의 것이다. 유젤은 나만의 것이다. “그거 알아? 나는 날 좋아하는 남자를 굉장히 싫어해. 아니, 증오한 다고 보는 게 낫겠지?” 무슨 말인가 싶어 마크는 고개를 들었다. 조금도 웃고 있지 않은 그 녀의 눈은 마치 인형의 눈처럼 무섭게 느껴졌다. “그런 남자들이 접근해올 때마다 전부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그래선 안 된다 생각하고 꾹 참았어. 그래도 집요하게 따라붙는 스토커들은 패가망신을 시켜주니까 알아서 조용해지더군. 일자리 빼앗고 가업을 망하게 하면 알아서 물러나더라고. 하지만 당신은 아틀란티스인이니 까, 그렇게 싱겁게 처벌하지 않아도 되겠지?” 차갑고 푸른 빛이 그녀의 손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대우주의 진리를 투영한 듯 고귀하게만 느껴지는 빛이었다. 마크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두려움을 느꼈지만 꾹 참고 그녀 를 올려다보았다. 손안에 힘을 응축하며,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눈앞의 청년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활화산처럼 들끓었다. 이 자는 악마다. 유젤을 탐내고 빼앗으려는 악마다. 사랑을 가장한 저 눈동자 속에는 얼마나 더러운 흑심이 깃들어 있을 것인가. 절실하게까지 느껴지는 저 애절함은 더러운 음욕을 보기 좋게 포장 한 것에 불과하다. 저 머리통 속에는 유젤을 껴안고 뒹굴고 핥을 생 각밖에 없을 것이다. 몇 년이고 애절하게 기다렸다는 앤드류도, 모든 것을 포기해도 좋다 고 말하는 레이온도 결국 눈앞의 이 자와 다를 게 없다. 육체의 속박 을 벗지 못한 남자들의 사랑이란 결국 그렇게 추잡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다르다. 본래의 육체를 잃고 유젤의 몸을 이어받음으 로써 그런 더러운 속박을 완전히 버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사랑은 순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자신만큼 깨끗한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은 존재하 지 않는다. 이 내 마음만이 숭고한 것이고, 그 외의 것들은 모조리 추잡하고 더러울 뿐이다.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추잡한지 지금 이 자리에서 확인시켜 줄까?” 그녀는 덤덤히 말하며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눈부신 빛이 시리도록 푸르게 번져 나갔다. “노블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영광, 지금 당신에게 선물하지.” 푸른 빛이 그녀의 손을 떠나 마크의 머리를 휘어감았다. 깨질 듯한 고통이 두개골을 울리자 그는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질끈 깨문 그 의 입술에서 피가 흘러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by eden 유진우도 나름대로 참 많이 불쌍한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미워하지거나 싫어하지들 마세요. (무언가 의미심장) 고치기 지우기 목록 엘베루시아R 오오 ;ㅁ; 2005/03/24 대천사미카엘 아앗 ;ㅁ; 2005/03/24 RAGNAROK 어린 아이처럼 독점하기 위해서 많이 발버둥(?) 하네요. ^^ 점점 유젤에 대한 사랑이 집착으로 변해가는 듯하네요.(아니 시작부터가 집착이었나? 후후훗) 2005/03/24 셜이움 으음... 전부터 생각했지만 역시 주인공은 삐뚤어진 놈이여... 2005/03/24 안녕히 예안이... 무서워졌다... 2005/03/24 영 어째.. 이제는 사랑이라는 것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데.. 예안이의 해동이군요.. 2005/03/24 영 그리고 이번에야 말로 노블 네트워크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나오기를 기대중이에욥 2005/03/24 실탄 에. 전에 두어 번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신인류의 의식이 모이는 무형의 세계 같은 거죠. 이것을 통해서 모든 신인류는 다른 신인류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고, 또한 자기 마음을 다른 이에게 전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이들의 사고회로가 완전히 개방된다랄까요. 2005/03/24 피에수투 다크홀리의 아카식레코드같은 개념이군요(의미불명) 2005/03/25 실탄 아카식 레코드와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만.;; 2005/03/25 나 1화부터, 291화까지 개근중. -> 본 독자를 보아서라도 광참을 하시오! 2005/03/25 나2 저두 개근했는데..-_-* 광참!! 광참!! 2005/03/25 루리에르피나 갈수록 여왕님이 되가는 우리의 예안양 ㅡㅡ; 실탄 사마의 여왕님 행진은 어디까지? 2005/03/25 bismarck 미워하지 말라고 하지만 점점 더 미워지는 걸요....-0-b 2005/03/26 피에수투 다르군요.쯔빙..때문에 더 기대됨. 연참부탁!프리즈! 한번보고 두번보고 자꾸만보고싶네~♩ 2005/03/26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4/18 페이지 ▶ 304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4) [7] 실탄 2005/04/0813Kb 616 ▶ 303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3) [6] 실탄 2005/04/0711Kb 634 ▶ 302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2) [9] 실탄 2005/04/0613Kb 623 ▶ 301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 [13] 실탄 2005/04/0511Kb 735 ▶ 300 - RESTART(6) [9] 실탄 2005/04/0413Kb 693 ▶ 299 - RESTART(5) [10] 실탄 2005/04/0314Kb 634 ▶ 298 - RESTART(4) [13] 실탄 2005/04/0212Kb 694 ▶ 297 - RESTART(3) [15] 실탄 2005/04/0112Kb 687 ▶ 296 - RESTART(2) [7] 실탄 2005/03/3113Kb 643 ▶ 295 - RESTART(1) [9] 실탄 2005/03/3013Kb 781 ▶ 294 - 추억의 그림자(6) [6] 실탄 2005/03/2912Kb 698 ▶ 293 - 추억의 그림자(5) [12] 실탄 2005/03/2814Kb 685 ▷ 292 - 추억의 그림자(4) [15] 실탄 2005/03/2412Kb 816 ▶ 291 - 추억의 그림자(3) [9] 실탄 2005/03/2012Kb 883 ▶ 290 - 추억의 그림자(2) [7] 실탄 2005/03/147Kb 885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 4 [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0113 :: 293 - 추억의 그림자(5) 실탄(cruel) 05-03-28 :: :: 13561 선홍빛으로 물든 공간이 깨어지며 붉은 파편이 튀었다. 조각은 이내 환한 빛으로 변해 수만 개의 촉수처럼 주변으로 사정없 이 뻗어나갔다. 빛은 너무 환하고 밝아, 오히려 지옥의 심연보다 어두워보였다. 빨려 들어갔다가는 영혼의 밑바닥까지 산산조각나게 될 거라는 섬뜩함이 마크를 짓눌렀다. 빛은 계속해서 세력을 넓혀갔다. 어둠에 둘러싸인 주변의 모든 것이 빛에 잡아먹혔다. 그 안에는 마크 자신도 있었다. 그 순간 제3의 눈이 떠졌다. 평범한 인간에게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제3의 눈, 인과율의 법칙에 사 로잡힌 개체는 그 존재를 깨달을 수 없는 절대적인 것, 그것이 지금 마크의 마음 속에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갓 떠진 그 절대적인 시야를 통해 마크는 자신의 마음을 똑바로 주 시했다. 지저분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추악한 감정이 보기좋은 사랑의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킬킬거리고 있었다. 제3의 눈은 마음의 거울을 통해 그의 욕정 을 그대로 비춰주었다. 비명을 지르며 애원하는 엔젤, 킬킬거리며 그녀를 학대하는 자신, 끝 없는 욕정의 분출과 정복 끝에 남은 것은 너덜너덜한 고깃덩이가 된 엔젤과 그녀를 뜯어먹는 자신이었다. 식인의 와중에도 자신은 더러운 하반신을 그녀의 몸뚱아리에 집어넣고 있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마크는 찢어지듯 비명을 질렀다. 저것은 내 마음이 아니다. 마음이 억지로 뒤틀린 부작용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울부짖음에 가까운 절규가 그의 심장을 쥐어뜯었다. 그는 가슴을 치 고 머리카락을 부여잡으며 저것은 내가 아니라고 외쳤다. 처절한 발광의 그림자를 뚫고 어떤 목소리가 그의 마음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일본 야쿠자의 집에 감금되었을 때를 노린다. 사람들을 시켜 엔젤을 더럽힐 것이다. 물론 밑바닥에서 구르는 남자들을 이용할 것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엔젤을 더럽히다니! 모두가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이미 앤슨과 마리오도 동의했다. 5대 대신 중에서 이미 세 분이 찬 성한 일이다. 마크 자네 하나가 반대한다 해서 철회되는 게 아니야.’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마크는 통증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 통증이 차라리 지금 이 환영을 깨부수어줬으면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이대로는 엔젤은 영원히 우리에게 돌아 오지 않아. 지상인들을 시켜 엔젤을 더럽히고, 그래서 엔젤이 지상인 들에게 증오를 품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미래는 없어.’ 저절로 무릎이 꿇렸다. 더러운 신음이 입안을 빠져나오며 허공에 녹아들었다. 처음에 마크가 맡아야 했을 임무는 보디가드인 척 위장하고 접근한 뒤, 엔젤을 더럽히고 엔젤의 아이를 살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크는 절대로 그 임무를 맡을 수 없었다. 엔젤의 아이를 죽 인다는 것도 죽인다는 거지만, 무엇보다 고귀한 그녀를 자신이 더럽 혀야 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자 오스카는 계획을 변경했다. 돈만 주면 무엇이든지 하는 밑바 닥 남자들을 시켜 그녀를 더럽히고, 거물 정치가들을 조종하여 엔젤 을 타락시킨다는 것이었다. 미국과 일본, 심지어는 한국조차도 그 후 보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빛은 더욱 길어진 촉수를 뻗어왔다. 촉수는 마크의 온몸을 칭칭 묶은 채 킬킬거리듯 허공을 마음껏 휘저었다. 손짓은 더욱 농밀하게 변하며 그의 마음을 유혹했다. 스스로 인식하 는 것도 거부할 정도로 깊은 마음까지 전부 까발라졌다. 그것은 인간 이 견딜 수 있는 치욕이 아니었다. ‘날 갖고 싶지 않나요?’ 상기된 뺨의 엔젤이 야릇한 유혹을 뻗쳐온다. 한 마리 짐승이 된 자 신은 알몸의 그녀를 마음껏 더럽히고 소유하고 학대한다. 사랑이 존 재하는 줄 알았던 그곳에는 그 못지 않게 저질스런 쾌락도 공존하고 있었다. 마크는 끝없이 엔젤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 환영에 시달렸다. 다시 느 껴보지 못할 지독한 쾌락과 자기혐오가 그곳에 있었다. 이윽고 머리가 찢어지는 고통이 엄습해왔다. 어린아이처럼 눈물이 마구 솟으며 그는 간신히 현실로 되돌아왔다. 차가운 표정을 띤 그녀가 바닥에 쓰러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 니, 차갑다는 표현조차 어울리지 않을 무표정이었다. “노블 네트워크에 접속한 경험은 어때?” 눈물이 앞을 가려 입을 열 수 없었다. 자기 자신의 아주 깊은 곳까지 전부 다 까발려지는 것, 그것은 절대적인 치욕이자 고통이었다. 마크는 그녀를 사모하는 마음의 본질이 그렇게 추악하고 더러운 것 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할 길이 없어 어린아이처럼 눈물만 그렇게 하염없이 흘렀다. “날 위한답시고 떠드는 당신네 민족은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돼. 그게 내가 당신들에게 가지 않는 이유야. 알겠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마크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듣는지도 인 식하지 못한 채 멍하니 미동도 않고 누워만 있었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렇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 가만히 내 버려두지 않겠어.” 이만하면 충분한 응징이 됐겠다 싶은 예안은 눈도 돌리지 않고 밖으 로 나섰다. 초점없는 시선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주시하던 마크는 검은 연기가 자신의 마음에 달라붙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안개처럼 형체가 없던 그것은 이윽고 서서히 실체를 갖추 며 하나의 개체가 되었다. 그것은 마크를 꼭 빼닮은, 온통 검은색만 을 지닌 마크의 그림자였다. 그림자가 속삭였다. ‘이대로 보낼 거야?’ 마크는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지금 보내면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몰라. 저 여자에게 네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지금뿐이 없어. 그래도 그냥 보낼 거야?’ 목소리는 절대적인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크는 세뇌에 취한 듯 멍한 얼굴로 천천히 일어났다. “엔젤….” “뭐야? 아직도 의식이 있어? 대단한 정신력이네. 보통 사람은 노블 네트워크에 접속하면 미쳐버리는 게 정상인데 말이야.” 귀찮다는 듯이 발길질이라도 한 대 날려줄까 돌아선 예안은 좀비처 럼 섬뜩한 눈동자에 흠칫 놀랐다. 칙칙한 눈빛은 사랑이 부패해 만들 어진 욕정이 가득했다. “사랑…합니다….” 그는 더듬더듬 말하며 조금씩 다가왔다. 불길한 분위기에 압도당한 예안은 겁을 잔뜩 집어먹은 얼굴로 주춤 주춤 물러서다 벽에 몰렸다. 그를 공격해야 한다는 간단한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그녀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뭐, 뭐야? 저, 저리 가!” 그가 어깨를 잡자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녀의 옷을 촥 찢어버렸다. 새하얀 어깨가 드러나자 수치심과 더 불어 분노에 취한 그녀는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그녀를 세게 껴안았다. 흉골이 으스 러질 듯한 압력에 그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힘을 쓰십시오!’ 이를 악문 예안은 손안에 에너지를 응축시켰다. 마크는 그녀의 손을 두툼하게 맞잡았다. 모였던 에너지가 잡힌 손을 통해 그의 몸으로 흡 수되었다. 그녀는 숨이 막히는 와중에도 어이가 없었다. ‘뭐, 뭐야? 내 힘을 흡수했어! 이건 말도 안 돼!’ ‘지금 데이터를 분석 중입니다.’ 맥도 어지간히 다급해하고 있었다. 그 사이 그녀의 상의는 마크에 손 에 완전히 찢겨 넝마가 되었다. 상반신이 알몸이 되자 그녀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그를 힘껏 밀어붙였다. 그러나 건장한 남자의 힘을 당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시 한 번 힘을 끌어모았지만 번번이 그에게 흡수당할 뿐이었다. ‘알아냈습니다. 노블 네트워크에 접속한 후유증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죽음의 문턱에서 인간은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됩니다. 그 남자는 노 블 네트워크에 접속했으면서도 미치거나 죽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 경험이 그 남자의 잠재력을 비정상적인 수준까지 높인 것 같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 이대로 당하란 말이야!’ 우당탕 소리가 나며 그녀는 뒤로 넘어졌다. 마크의 육중한 육체가 그 위를 덮쳐 눌렀다. 커다란 손이 보드라운 가슴을 우악스럽게 쥐었다. 그녀는 아파서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이건 내 거란 말이야!!” 이 하찮은 남자가 감히 유젤의 몸을 더럽히려 하고 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혀끝을 마르게 하는 커다란 분노에 사로잡힌 그녀는 있는 힘껏 힘을 모아 그의 등을 후려쳤다. 번쩍하고 빛이 나며 그의 옷이 타서 사라 졌다. 그러나 그는 피부에 옅은 화상만 입었을 뿐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손은 어느새 그녀의 바지를 벗기려 하고 있었다.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이한 그녀는 반쯤 미친 채 그의 뺨을 할퀴고 손등을 깨물고 배를 걷어찼다. 그래도 그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오 히려 더욱 강한 힘으로 내리누를 뿐이었다. 갑자기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던 그녀는 무언 가 축축한 것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고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의 옆구리에 박힌 칼날을 타고 핏물이 철철 흘러내리며 바닥을 적 시고 있었다. “위험했군. 정말 다행이야.”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크의 몸을 밀쳐내고 일어난 그녀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이십대 중후반쯤 되어보이는 청년이었다. 검청색 머리카락을 지녔으 며 키가 컸다. 새하얀 피부에 조용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귀공자 스타일의 남자였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전에도 이와 비슷한 분위기를 지닌 사람을 본 적 있다. 바로 마리오였다. “당신은 누구지?” “오스카 필르리엔 알카저드. 그냥 오스카라고 부르면 된다.” 몇 번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그녀는 조금도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여차하면 그를 공격할 태세를 취했다. “이런, 옷이 다 찢어졌군. 이거라도 걸치겠나?” 오스카가 자신의 겉옷을 벗어 건네주자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멀찌 감찌서 조심스레 받아들어 걸쳤다. 새하얗게 빛나는 아름다운 몸이 검은색 재킷 안으로 사라지자 오스카는 조금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왜 나를 구해줬지?” “여자가 남자한테 몹쓸 일을 당하기 직전인데 구해주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닌가?” “당신네들이 시킨 거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 민족은 그대를 포용하려는 것이 목적이지 더럽히는 게 아니야. 이 미친 녀석이 그대를 너무 연모한 나머지 제 정신을 잃고 그랬던 것 같군. 그래서 즉결처형했다.” 차가운 비웃음을 지으며 오스카는 마크의 몸을 발로 걷어찼다. 피가 끊임없이 새어나오고 미동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정말로 죽은 듯 이 보였다. “하지만… 이 녀석이 아무 이유없이 그대를 덮친 것은 아닌 것 같은 데? 조금 전에 이곳에서 어떤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이 녀석이 그대 를 덮친 게 그것과 관련이 있나?”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상관없다 여기고 내뱉듯이 대답했다. “노블 네트워크에 접속시켜서 이 남자가 지닌 진실한 마음을 직접 보여줬어. 아마 그것 때문에 쇼크를 좀 먹어서 그렇게 변했던 건지도 몰라.” “요컨대 미쳤다는 건가?” “그렇다고는 볼 수 없어. 그냥 잠금장치가 풀리면서 평소에는 절대 드러나지 않는 초자아가 육체를 점령했다고 보면 될 거야.” “조금 어렵군. 헌데 그렇다면 단순히 이 녀석의 탓만이라고는 볼 수 없잖아? 그대가 이 녀석을 그렇게 만든 게 아닌가?” 오스카는 마크를 몹쓸 놈 취급한 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울컥 한 예안은 사나운 기세로 그를 노려보며 또박또박 반박했다. “이 남자는 자기도 인식하지 못하는 마음 속 깊은 곳에 날 자기 소 유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숨기고 있었어. 난 그것을 이 남자에게 보여줬을 뿐이야. 결국 잘못은 이 남자에게 있는 거라고.” “그것은 억지야. 자기도 인식하지 못하는 진짜 마음이라고 해봐야 어 차피 평생 드러나지 않을 게 뻔하지 않나? 그리고 연모하는 여자와 몇 번쯤 섹스하는 꿈은 남자라면, 아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 는 당연한 거야.” 예안은 기분이 대폭 상했다.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지겨워진 그녀는 험악한 심리상태를 구태여 숨기지 않았다. “당신도 날 잡으러 온 거겠지? 질질 끌지 말고 싸우는 게 어때?” 풉 하는 웃음이 오스카의 얼굴에 피어났다. “보기와는 달리 성격이 급하군. 나는 그대를 제압하기 위해 온 게 아 니야. 거래를 하나 할까 해서 왔지.” “거래?” “그대에게 위협을 가하지는 않는다. 잠깐만 경계를 풀고 이야기를 들 어보는 건 어때?” 꺼림칙하다고 대답하기에는 미안함이 느껴질 정도로 지극히 신사적 인 태도였다. 고개를 갸웃갸웃하던 그녀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아무 의자나 골라잡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언제 이곳 사람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무사태평인데 그 래? 무슨 말인지 한 번 들어나 보자.” “이 저택의 모든 사람들은 전부 다 재워놓았다. 내가 손을 쓰기 전까 지는 아무도 깨어나지 못해.” “영원히 손을 쓰지 않으면?” “죽는 거지.” 섬뜩함이 놀라 달아날 정도로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게 가볍고 유쾌 한 어조였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하면 좋을까…. 그래, 앤슨을 알고 있지?”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목소리는 들어본 적 있어. 유나라는 여자를 보내서 가짜 양자 컴 디스크를 부수기도 하고,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 다린다는 식으로 이상한 전화도 했어.” “그대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앤슨이 꾸민 것이다.” “뭐라고?” 대단히 의아해하는 빛이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대는 TV를 봤겠지? 세계의 진귀한 명물을 소개하는 프로그램 말 이야. 그래서 정체를 숨기면서까지 이런 조그만 섬나라까지 몰래 찾 아온 게 아닌가?” “맞긴 한데… 그렇다면 설마?” “그렇다. 진이라는 야쿠자가 갖고 있는 보석상은 그대가 알고 있는 물건이 아니라 가짜다.” 그녀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하게 변했다. “말도 안 돼. 앤슨이 그 보석상을 알고 있을 리가 없어. 어떻게 그런 연극을 꾸몄단 말이야?” “레이온 박사한테 들었겠지.” “거짓말이야! 당신이 지금 날 속이는 게 분명해!” “만약 그 보석상이 진짜였다면 그대가 알기 전에 이미 우리가 가로 챘을 것이다. 우리가 설마 한낱 지상인 따위에게 자이오 다이아몬드 를 맡겨두고 태평히 잠을 이룰 수 있을 정도로 멍청한 신경을 지녔 으리라 생각하나?” 상당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는 주장이었다. 예안은 이 남자가 무슨 생 각을 하는지 몹시 궁금해졌다. by eden 속보입니다. 우주여행을 꿈꾸는 실탄씨가 최근 레이온 박사로부터 어렵게 입수한 아공간 도약 점프 엔진을 장착한 원양 우주선을 타고 머나먼 우주 레이스를 펼친다 합니다. 과연 34일의 레이스 기간 동안 18명의 경쟁 자를 물리치고 1등을 탈취할 수 있을지 그 결과가 심히 주목됩니다. 인터뷰를 가지겠습니다. 실탄 : 제4차 폐인대전에서는 아쉽게 2위에 그치고 말았지만 이번은 자신이 있습니다. 오늘을 위해 반중력성 폭발식 로켓 엔진과 아공간 도약 점프 엔진을 레이온으로부터 어렵사리 사들였습니다. 저는 반드 시 우승할 겁니다. 기자 : 하지만 연료가 하나도 없다고 들었는데요. 실탄 : 항해를 시작함과 동시에 생산하면 그만입니다. 라이브당이여 영원하라! 기자 : 실탄씨는 본래 마음 내키는 대로 라이브 연재와 비축 연재, 폭참 연재를 하는 유유자적당원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실탄 : 독도를 다케시마라 우기는 판국인데 소속당 하나 바꾸지 못한 다는 게 말이 됩니까? 기자 : 포부를 말씀해주시지요. 실탄 : 그런 거 없습니다. 무조건 일일연재! 기자 : 아공간 도약 점프는 언제 하실 건가요? 실탄 : 에너지 충전에만 약 30일 가량을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레이 스가 끝나는 마지막 날, 다른 경쟁자들의 마음이 헤이해졌을 때 순식 간에 저만치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기자 : 기대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말로만 하는 일이 없기를 빕니다. 그런 고로, 폐인대전 시작입니다. 고치기 지우기 목록 전사&마법사 아공간 점프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30일이라.... ㅠㅠ 시험기간 이잖아 ㅠㅠ 2005/03/28 실탄 소년이여 폐인이 되라 2005/03/28 안녕히 실탄님의 마지막 멘트 good! last 주파트를 올리겠다는 거 아닙니까? 후훗. 2005/03/28 사케쿠 실탄 님 드디어 아공간 워프로군요!!(흥분!) 마지막 날을 기대하겠습니다아!! 2005/03/28 RAGNAROK 지난번의 그 엄청난 연참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근데요. 이번에는 상품이 뭐예요? 지난번은 폴라리스 렙소디(맞나? 소장본 전집)이었는데... 2005/03/28 실탄 기대하는 게 과연 좋은지는 의문이군요. 무슨 의미인지는 마지막 날에 아시게 될 겁니다. 2005/03/28 텐시노 오 드디어 폐인대전인가.. 엄청난 분량의 압박을 느끼고 싶어~ 2005/03/28 오옷... 소년이어 페인이 되어라에 한표!! 2005/03/28 영 1등 하시길.. 간절히 소망? 합니다.후후 2005/03/28 루리에르피나 용제를 접으시고 소엄 폭연참에 한표!! 2005/03/28 다이제스트 연료는 자이오 다이아몬드로 충당을.... 2005/03/29 판마녀 설마.. 연료충전한다면서 연중들어갔다가. 마지막날 폭참을?;;;;;;; 두렵군요..; ... 레이온박사가 고장난 엔진을 비싼값에 넘긴게 아닌지...;;;; 2005/03/29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4/18 페이지 ▶ 304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4) [7] 실탄 2005/04/0813Kb 616 ▶ 303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3) [6] 실탄 2005/04/0711Kb 634 ▶ 302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2) [9] 실탄 2005/04/0613Kb 623 ▶ 301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 [13] 실탄 2005/04/0511Kb 735 ▶ 300 - RESTART(6) [9] 실탄 2005/04/0413Kb 693 ▶ 299 - RESTART(5) [10] 실탄 2005/04/0314Kb 634 ▶ 298 - RESTART(4) [13] 실탄 2005/04/0212Kb 694 ▶ 297 - RESTART(3) [15] 실탄 2005/04/0112Kb 687 ▶ 296 - RESTART(2) [7] 실탄 2005/03/3113Kb 643 ▶ 295 - RESTART(1) [9] 실탄 2005/03/3013Kb 781 ▶ 294 - 추억의 그림자(6) [6] 실탄 2005/03/2912Kb 698 ▷ 293 - 추억의 그림자(5) [12] 실탄 2005/03/2814Kb 687 ▶ 292 - 추억의 그림자(4) [15] 실탄 2005/03/2412Kb 816 ▶ 291 - 추억의 그림자(3) [9] 실탄 2005/03/2012Kb 883 ▶ 290 - 추억의 그림자(2) [7] 실탄 2005/03/147Kb 885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 4 [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0203 :: 294 - 추억의 그림자(6) 실탄(cruel) 05-03-29 :: :: 12091 친근한 미소를 띤 채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앤슨이 그대를 이곳에 유인해서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아나?” 그 따위 것을 알 리가 없다. 그녀는 궁금증이 짙게 묻어나는 눈길로 그를 주시했다. “그대의 몸을 더럽히려 했다. 저질 남자들을 시켜서 말이지. 이 녀석 도 그 중 하나다.” 오스카는 쓰러진 마크의 몸을 발로 다시 툭툭 찼다. 분노로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째서? 아틀란티스는 날 귀중히 여기지 않았어?” “그렇기야 하지. 허나 앤슨은 여간한 방법으로는 그대가 우리에게 오 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군. 그래서 지상인들을 시켜 그대를 더럽힘으로써 그대가 지상인들을 증오하게 하려 했지. 그 뒤에 아닌 척 그대 앞에 나서서 그대 마음을 다독이려 했던 것 같군.” 여러 모로 신뢰할 수 있는 주장이었다. 조금 전에 마크에게 더럽혀질 뻔했다는 경험 또한 그의 말을 믿게 했다. 미심쩍인 구석이 많은 남자지만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에게 설득당한다는 게 왠지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웃기지도 않네. 고작 그 정도 가지고 내가 세상이라도 포기한 것처 럼 축 늘어질 거라 생각했단 말이야?” 오스카는 몹시 분해하는 그녀를 재미있다는 표정을 띠고 물끄러미 주시했다. 그의 시선을 의식한 그녀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나와 거래하고 싶다는 건 뭐지?” “별거는 아니야. 나는 앤슨와 마리오를 밀어내고 차세대 권력자가 되 고 싶어.” “뭐? 아틀란티스인들은 그런 게 없는 줄 알았는데?” “말도 안 돼. 우리도 사람이다. 단지 지금은 혁명이라는 공통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안 그런 듯 보일 뿐이지, 혁명이 완성되고 나면 오 랫동안 억압받았던 온간 개인적인 욕구들이 쏟아질 것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시작되는 거지. 그 혼란스런 시기가 찾아오기 전 에 나는 내 입지를 보다 확실히 굳혀두고 싶어.” “꼭 혁명이 이뤄질 것처럼 말하는데? 안 됐지만 나는 아틀란티스에 돌아갈 생각은 없어.” “돌아오라는 게 아니야. 혁명만 이루어 달라는 것뿐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진지한 어조에 그녀의 고개가 절로 갸우뚱해졌다. “딱 한 번만 그대가 우리를, 아니 나를 도와주면 된다. 혁명이 완성 되면 아무도 그대를 쫓지 못하도록 해주겠다. 거래하자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싫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대 혼자라면 몰라도, 이미 아이까지 있지 않나? 난 그대가 아이를 몹시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오스카가 아이를 들먹이자 그녀는 움찔 놀랐다. 하기야 한국의 웬만 한 고위직 간부들은 유빈의 존재를 알고 있으니, 아틀란티스가 지금 껏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철통 같은 저택을 짓고 자신과 함께 하지 않는 한 아이는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게 했던 게 아닌가. “그대의 집에 최첨단 방어체계를 갖췄다 해서 방심하지 마라. 대통령 이 보낸 첩보원들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을 우리가 못 들어갈 것 같은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앤슨은 그대의 아이를 납치해 그대를 협박하는 것도 감수할 것이다. 그대의 비난을 사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 그것은 설득이라기보다는 간청에 가깝게 들렸다. 오스카의 목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약점이 있는 이상 그대는 언제까지나 마냥 우리를 피할 수만은 없 다. 언제고 한 번은 부딪쳐서 해결을 봐야 한다. 하지만 무력으로만 해결하려 하면 그대나 그대 아이도 피해를 입겠지. 그대는 혼자고 우 리는 여럿이니까.” “분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네.” “그렇기 때문에 그대는 나와 거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약속하지. 일이 끝난 뒤에는 절대로 그대를 귀찮게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그녀는 한결 차분해진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가 꼭 당신과 거래를 해야 하나? 내가 앤슨에게 그렇게 하자고 제안할 거란 생각은 안 해?” “어차피 앤슨에게는 통하지 않아. 그 녀석은 단지 혁명을 완성시키는 것만이 목적의 전부가 아니라, 그대를 우리들 품안에서 벗어나지 못 하게까지 하려고 하니까. 그리고 바드로3세 황태자 전하께서 그대를 간절히 원하고 있으니, 원만한 해결을 보고 싶다면 그대는 나와 거래 를 하는 수밖에 없다.” “당신은 카뮤의 마음을 돌릴 정도로 힘이 있다는 뜻이야?” 카뮤라는 이름에 오스카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황태자 의 애칭이라는 것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는 애칭을 그대는 자연스럽게 쓰고 있군. 그대 말이 맞다. 나는 황태자 전하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힘을 지닌 몇 안 되는 남자다. 내가 조금만 더 입지를 굳히고 그대를 놓아줘야 한 다고 반대하면. 아무리 간절히 그대를 원한다 해도 황태자 전하는 결 국 내 말을 따라야 할 것이다.” “황권이 강하다고 들었는데 그런 것만은 아닌가 보군.” “내 능력이 뛰어나서라고 봐주면 고맙겠군.” “앤슨보다는 똑똑해 보이는걸.” 그 말에 오스카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완전히 누그러진 그녀는 어느 정도 친근감이 깃든 미소를 띠었다. “좋아, 거래하겠어.” “고맙군. 그럼 지금 나를 따라가겠나? 조용한 곳에서 그대와 며칠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안내해.” 오스카는 정중한 몸짓으로 그녀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쌌다. 그의 손이 몸이 닿는 순간 그녀는 조금 움찔했지만, 기껏 우호적 관계가 되기로 해놓고 이 정도로 방방 뛰는 것도 우스워 조용히 있었다. 문을 나가기 전 오스카는 마크의 손가락 끝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 는 것을 흘끗 보았다. 여태껏 흘러내린 피의 양으로 보아 저대로 놓 으면 얼마 가지 않아 죽을 게 뻔해 보였다. ‘내버려둬도 괜찮겠군.’ 평생의 대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오스카는 그 녀를 저택 밖에 대기해둔 차까지 안내했다. 그는 신사답게 차문을 손 수 열어주는 매너까지 보였다.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예안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말못할 아련함이 안개처럼 조금씩 피어났다가 사그라 지는 것을 느꼈다. ‘그 보석, 정말 가짜였을까?’ ‘상황을 보아하니 이들은 마스터보다 먼저 그것을 알고 있었던 듯 합 니다. 진짜였다면 벌써 손에 넣었을 테죠.’ ‘하긴, 그게 여기에 있을 리가 없잖아? 오리지널 유젤이 갖고 있을 게 뻔한데…. 나도 참 바보 같아. 그 정도도 생각 못하고 어린아이처 럼 흥분해서 달려왔으니….’ ‘이제 어쩌실 겁니까? 정말 오스카라는 남자와 거래를 하실 겁니까?’ ‘피를 덜 보고 끝낼 수 있다면 그게 낫잖아. 나 혼자라면 물라도, 유 빈이까지 있는데 위험을 감수할 수도 없고 말이야.’ ‘그 남자를 마냥 믿을 수는 없습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런 남자 하나 둘쯤은 나 혼자서도 충분히 때 려눕힐 수 있어.’ 날씬하고 커다란 여객기가 창문에 비치는 사람 모습까지 뚜렷이 보 일 정도로 낮게 날고 있다. 어느덧 공항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전용기를 준비해뒀다. 그만 내리지.” 먼저 내린 오스카가 차 문을 연 채 손을 내밀고 있었다. 에스코트라 도 해줄 셈인가 보다. 예안은 가만히 그의 손을 바라봤다. 이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는 행 동에는 어떤 의미를 붙일 수 있을까.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을 기꺼이 잡고 차에서 내린 그녀는 햇볕이 조금 따가와 눈을 가렸다. 새하얀 얼굴에 새겨진 손 그림자가 추억의 그리움을 정의하듯 옅게 빛나고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프로테메우스의 습격을 받고 온몸에 기름칠과 피칠을 한 채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가던 니콜라스는 가볍지 않은 기 운을 느끼고 흠칫했다. 살기라기보다는 그 아랫단계인 적의로 해석할 수 있을 그 기운은 다 름아닌 예안의 저택을 노리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침착하게 돌아섰다. 가능한 인기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뒤 기름냄새와 피냄새를 풍기는 옷을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길거리 분수대에 들어가 몸에 묻은 냄새를 제거했다. 일을 마친 그는 총알을 장전하고 살그머니 인기척을 향해 다가갔다. 발걸음 소리도 완벽히 지운 터라 적은 조금도 그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다. 모퉁이를 돈 순간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적은 모두 네 명, 사복 차 림을 한 건장한 남자들이었다. 원거리 소형 금속탐지기를 가동시켜 본 결과 총을 소지하고 있다고 표시되었다. 가만히 귀기울여 보니 한국말로 낮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 내 용까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쯤만 되어도 상대방의 배후가 누 구인지는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필경 정부에서 보낸 요원들일 게 뻔했다. 그는 얼마 전 예안이 투덜거렸던 내용을 떠올렸다. 대통령이 자기에 게는 말도 없이 지나를 데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 때문에 기분 이 상했다는 말이었다. 그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는데, 누나가 새삼 집을 비운 사이에 저런 사람들을 보낸 것이 왠지 불길했다. 특별히 신변보호를 요구한 적도 없고, 만약 그렇다면 누나는 미리 말을 했을 것이다. ‘대통령인가? 아니면 대통령의 정적?’ 두 가지 가능성을 놓고 저울질하던 그는 이럴 때가 아니라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그들의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총을 치우고 수도로 그들 의 목덜미를 재빠르게 쳐 기절시켰다. ‘혹시…?’ 불길한 예감이 든 그는 제빨리 집에 들어가 아이 방을 제일 먼저 열 어젖혔다. 유빈은 침대 위에서 잘 자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이불을 활짝 걷어찬 채로. 일단 안심한 그는 2층 지나방에 들어갔다가 잠깐 경직되었다. 이 시 간이면 늘 자고 있을 지나가 침대에 없었다. 그는 재빨리 당황함을 가라앉힌 뒤 청각에 신경을 집중했다. 혈관이 팽창하며 혈액 순환 속도가 빨라졌다. 고밀도의 신경회로가 쿵쿵쿵 크게 박동하며 청각을 극대화시켰다. 수돗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 아래에서 자고 있는 아이의 심장이 뛰 는 소리, 풀벌레가 우는 소리, 백열등이 타는 소리 등등이 손에 잡힐 듯 또렷하게 들렸다. 그러나 그 어느 소리 중에서도 지나의 소리는 없었다. 이 집에 없는 것이다. 제발로 나갔을 리는 없을 테니, 분명히 밖에서 있던 패거리 들에게 납치당했던 것이리라. ‘일단 몸을 피하는 게 좋겠어.’ 니콜라스는 서둘러 아래로 내려갔다. 이불을 걷어차고 자는 광경에 혀를 끌끌 차던 그는 아이의 어깨를 몇 번 흔들어 깨웠다. “서유빈. 일어나.” “으응…?” 손가락을 물며 잠에서 깬 유빈은 졸리다는 눈으로 크게 하품을 했다. 니콜라스는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갖다대고는 낮게 덧붙였다. “나쁜 사람들이 우리를 노리고 있어. 놀라지 말고 조용히 해. 지나 누나는 벌써 끌려갔어.” 그 말에 유빈은 대번에 겁먹은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큰소리를 내지 는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자. 네 엄마와 합류해야지. 빨리 옷 입어.” 유빈의 방에 설치된 보호장치를 진작 지나의 방에 달아두지 않은 게 후회되었지만, 지나간 일을 붙잡고 고민하기에는 지금 상황이 너무나 도 촉박했다. 간단한 무기와 이럴 때를 대비해 마련해둔 현금뭉치를 가방에 쓸어 넣은 그는 옷을 입고 나온 유빈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어디 놀러가는 줄 알아? 웬 나들이 옷이야?” 유빈은 찔끔 놀라 고개를 숙였다. 다른 옷을 갈아입힌다고 여유를 부 리다가는 언제 적들이 쳐들어올지 모른다. 니콜라스는 혀를 쯧쯧 차 며 유빈을 업고 재빨리 어둠 속을 달렸다. 눈부신 조명에 지나는 눈을 떴다. 처음 보는 하얀 방안이었다. 어디선가 소독약 냄새가 희미하게 풍기 고 있었다. 기억이 나진 않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한 내음. 가라앉은 심연을 자극하듯 약품 냄새는 집요하게 그녀의 마음을 들쑤셨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지나는 자신의 몸을 내 려다볼 수 있었다. 딱딱한 침대 위에서 사지가 결박당한 채 누워 있 었다. 보통 여자였다면 이 상황을 무서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공포라는 감정을 몰랐다. 기껏해야 니콜라스가 장난을 치는 건가 하 는 생각만 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윽고 하얀 마스크를 쓰고 하얀 가운을 입은 중년 남자들이 방에 들어왔다. 그들은 지나가 의식을 차린 것을 개의치 않고 자기들끼리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이 그렇다면 하루빨리 티아마트를 체포해야 합니다. 인간의 생 명을 갖고 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여자는 인간이 아니라고 하잖습니까? 인간의 난자를 사 용한 것도 아니고, 그저 겉모습과 일부 장기만 인간과 똑같을 뿐입니 다. 이 여자… 키메라라고 했나요? 키메라의 신체 구조를 파헤친다면 병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인류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과 똑같이 생긴 가축의 배를 갈라 장기이식을 하는 것을 보고 자란 어린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기성세대들조차 받아들 이기 힘든, 자칫 전 세계의 윤리관을 고스란히 뒤흔들지도 모르는 녀 석들입니다. 키메라는 세간에는 비밀로 하고 말살해야 해요.” 니콜라스가 아니었구나. 무어라 왁자지껄 떠드는데 무슨 말인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신을 놓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긴 한데 왜 자신이 여기에 묶여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조용히 해주십시오. 박사님들의 임무는 이 여자의 신체에 대한 조사 를 하는 것이지, 티아마트를 체포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게 아닙 니다. 티아마트라는 이름조차도 세간에는 현재 극비이니,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시기 바 랍니다.” 젊은 남자의 힘있는 목소리가 중년 남자들의 기세를 대번에 꺾었다. 잠시 동안의 침묵 후 가운을 입은 남자 중 한 명이 다시 기운을 차 린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자, 일단 조사를 해봅시다. 먼저 혈액과 조직세포 체취부터 해야겠 지요?” 그는 주사기와 메스를 들고 지나에게 다가왔다. 팔뚝에 따끔한 느낌 이 드는 것과 동시에 지나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by eden 모니터가 이상해졌습니다.;;; 폐인대전 어떻게 하라고..orz 고치기 지우기 목록 심심해요 어어어어....이런 1등 ~(-ㅁ-)~ 2005/03/29 안녕히 예안이 성격이... 많이 무정해졌네요... 마크를 저대로 죽게 내버려 두는 건가요? 뭐... 적의 함대를 고민한번 없이 없앨 때부터 그려려니 했지만... 역시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대중매체와 게임의 영향이 크군요... 쿨럭 2005/03/29 사케쿠 우어........ 안돼요오오오. 2005/03/29 영 마크가 뭔가 일을 저질을것 같군요. 기대 합니다. 2005/03/30 眞魔狼 JoJo 아 어 모니터없이 글을 써주시리라 믿습니다 ;ㅅ; 2005/03/30 제6법 어째 주인공은 언제나 "저런 녀석 하나쯤 나 혼자서도 충분해!" 하다가 당하는것 같은... 주인공이란 놈이 발전이 없냐 -_-;;; 2005/03/30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4/18 페이지 ▶ 304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4) [7] 실탄 2005/04/0813Kb 616 ▶ 303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3) [6] 실탄 2005/04/0711Kb 634 ▶ 302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2) [9] 실탄 2005/04/0613Kb 623 ▶ 301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 [13] 실탄 2005/04/0511Kb 735 ▶ 300 - RESTART(6) [9] 실탄 2005/04/0413Kb 693 ▶ 299 - RESTART(5) [10] 실탄 2005/04/0314Kb 634 ▶ 298 - RESTART(4) [13] 실탄 2005/04/0212Kb 694 ▶ 297 - RESTART(3) [15] 실탄 2005/04/0112Kb 687 ▶ 296 - RESTART(2) [7] 실탄 2005/03/3113Kb 643 ▶ 295 - RESTART(1) [9] 실탄 2005/03/3013Kb 781 ▷ 294 - 추억의 그림자(6) [6] 실탄 2005/03/2912Kb 700 ▶ 293 - 추억의 그림자(5) [12] 실탄 2005/03/2814Kb 687 ▶ 292 - 추억의 그림자(4) [15] 실탄 2005/03/2412Kb 816 ▶ 291 - 추억의 그림자(3) [9] 실탄 2005/03/2012Kb 883 ▶ 290 - 추억의 그림자(2) [7] 실탄 2005/03/147Kb 885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 4 [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0280 :: 295 - RESTART(1) 실탄(cruel) 05-03-30 :: :: 13137 스산한 안개가 낮게 깔려 있는 서울 교외의 어느 한 대저택 앞에 검 은색 중형차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정지했다. 경비원이 얼굴을 확인하려 했으나 뒷좌석에 앉은 양복차림의 남자는 검문을 받는다는 것 자체를 모욕으로 느꼈는지, 신분카드를 거칠게 내미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전자감식판에 카드를 긁은 경비원은 pass 표시가 뜨자 두말 않고 차 를 통과시켰다. 겉보기에는 유서깊은 대부호의 집 정도쯤 되지만 보 안의 정도는 일개 국가의 최고정보기관에 맞먹는 수준이었다. 아름답다기보다는 화려할 뿐인 정원을 가로지른 중년 남자는 현관에 서 자신을 마중나온 사람들을 보고 이마의 주름을 폈다. 중년 남자는 다름아닌 석창렬 의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허리에는 늘 그렇듯 검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검집을 차고 있었다. 왜 시대에 뒤떨어지는 무장을 하고 있 는지 가끔 궁금하곤 했지만, 동업자의 부하 여직원의 무기 취미 생활 을 신경 쓰기에는 낯짝이 두껍지 못했다. “오스카씨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하게.” “예. 이쪽으로 오시지요.” 응접실에 들어선 석창렬은 창 밖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 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빛을 빨아들일 듯 검은색 정장 차림에 왠지 거북한 첫인상을 받았다. “그대가 석창렬 의원이오?” 인기척을 알아차린 오스카는 뒤를 돌아보며 가볍게 미소지었다. 친근 감이 느껴지는 웃음이었지만, 서른도 안 되어 보이는 젊은이의 말투 치고는 불손했기에 석창렬은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어릴 때부터 귀족 교육을 받고 자란 명문가의 자제의 태도에 자존심 이 상했다는 것도 반쯤 이유가 되었다. “처음 뵙겠소. 석창렬이라 하오. 미흡하지만 현재 국회의원 직을 맡 고 있소.” “앤슨에게 들었겠지만 부족할 테니 간단한 소개를 하겠소. 이름은 오 스카라 하고 앤슨의 상관이오. 직위는 당신네 식으로 표현하자면 내 무 재상쯤 될 거요.” “앤슨은 당신이 상관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자존심상 그런 말을 안 했던 거요. 앤슨은 군수통제권을 쥐고 있지 만 그것을 제어하는 것은 나요.” “그대들의 조국이 어디에 있는지 들을 수 있겠소?” “의미없는 질문이오.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알게 될 텐데 지금 그것을 알아서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소.” 처음에 느꼈던, 불손함에 가까웠던 위화감은 어느덧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그만큼 눈앞의 청년이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강하 다는 뜻이리라. 앤슨과 대단히 흡사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앤슨보다 더욱 감정이 없 고 두려운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왜 날 이곳으로 오게 한 거요? 나는 앤슨과 거래를 한 거지 당신과 거래를 한 게 아니오.” “어떤 집단과 맺은 계약은 그 집단의 상위집단에게도 효력을 발휘하 오. 앤슨과의 거래는 내 승인이 없으면 전적으로 무효요. 그러니 당 신은 반드시 나와 만날 의무가 있는 거요. 이해하겠소?” 잠시 말을 멈춘 앤슨은 창밖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지었다. “여기 오기로 되어있던 다른 사람이 도착했소. 그대도 잘 아는 얼굴 일 거요.” 궁금증을 느낀 석창렬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조금 놀랐다. 거침없이 들어서던 김재호는 석창렬을 보고 마찬가지로 의아해했다. “석 의원님 아니십니까?” “자네가 여기는 웬일인가?” “저야 오스카라는 사람이 만나자고 해서 온 겁니다만….” “나도 마찬가지일세.” 의외의 만남에 다소 당혹스러워하는 김재호를 흘끗 쳐다본 오스카는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만나서 반갑소. 내가 오스카요.” “반갑습니다. 김재호라고 합니다.” “알고 있소. 유한그룹의 능력있는 젊은 후계자. 그대에 관한 소문은 나의 본가에서도 자자하지.” “그러십니까? 영광입니다.” 오스카는 일단 둘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떨떠름한 기색을 지우지 못 한 채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사람을 시켜 차를 내오게 한 뒤 오스카는 이야기를 꺼냈다. “두 분이 앤슨과 거래를 맺은 것은 알고 있소. 하지만 이제부터 그 계약에 관한 모든 효력은 본인을 통해서만 유지되오. 얼마 전 앤슨으 로부터 그것에 관한 권한을 회수했소. 오늘 두 분을 뵙자고 한 것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요.” “아쉽군요. 유나씨 같은 미인의 얼굴을 보는 것이 위험한 계약관계에 서 유일하게 얻는 즐거움이었는데 말입니다.” “필요하다면 하룻밤 상대로 빌려줄 수도 있소.” 능글맞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포커 페이스를 지키기로 유명한 김 재호조차도 그 말에는 낯이 뜨거워졌다. 그는 앤슨을 딱 한 번 본 적 있었다. 겉으로는 앤슨과 계약을 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모든 절차는 유나를 통해 이루어졌고, 그도 묘한 허 탈감을 느끼게 하는 남자보다는 강인한 이미지의 미인과 함께 하는 것이 더 좋았다. 단 한 번 보았던 앤슨의 이미지는 뭐랄까. 강한 경쟁의식과 더불어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을 듯한 어떤 거대한 벽과 같은 느 낌이었다. 여태껏 자신만만하게 살아왔던 그에게 있어 상대도 안 될 듯한 인물이 동년배에 존재한다는 것은 치욕에 가까웠다. 기본적으로 오스카는 앤슨과 흡사한 이미지였다. 그러나 앤슨이 붉게 빛나는 불꽃이라면, 오스카는 어둠에 동화된 검은 불꽃이었다. 스스 로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채 상대방을 집어삼켜버리는 검은 불꽃. “유나씨는 앤슨씨의 부하가 아니었습니까?” 겨우 정신을 차린 김재호는 화제를 살짝 돌렸다. “앤슨의 부하는 맞지. 하지만 난 앤슨의 상관이오. 그러니 앤슨의 부 하는 내 부하가 되기도 하지.” “그렇군요. 하지만 하룻밤 빌려준다니, 저 같이 소심한 사람에게는 낯뜨거운 말씀입니다. 그런 농담은 삼가주시죠.” “내가 농담이나 하는 사람으로 보이나 보군?” 가벼움을 품고 있는 말투였지만 듣는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하룻 밤 유나를 요구한다면 정말 그렇게 해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부의 명령을 받아 차가운 섹스를 제공하는 여자 따위는 질 색이다. 김재호는 강한 부담을 느끼고 화제의 흐름을 뒤집었다. “우리에게 무언가 부탁할 일이 있어서 부른 게 아닙니까? 고작 계약 이행권이 이행되었다는 이야기나 하려고 바쁜 사람들을 이곳까지 오 라고 한 건 아닐 텐데요?” “아아, 그렇군. 두 분에게 보여드릴 사람이 있소.” “누구입니까?” “보면 알 거요.” 오스카는 리모컨을 집어들어 버튼을 눌렀다. 곧 측면에 위치한 벽이 세로로 갈라지며 양쪽으로 밀려갔고, 벽 건너편의 방을 비추는 투명 한 유리창이 드러났다. “마술 거울이오. 이쪽에서는 저쪽을 볼 수 있지만 저쪽에서는 이쪽을 볼 수 없지. 그럼 잠시 실례.” 응접실에서 나간 오스카는 이윽고 유리창 건너편 방의 문을 열고 모 습을 드러냈다. 이쪽을 돌아본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싱긋 웃어보 이기까지 했다. 도대체 누구를 보여주려는 건가 궁금해진 두 사람은 목을 길게 빼고 건너편을 응시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두 사람은 숨이 멎는 것을 느꼈다. 속이 살짝 비칠 듯한 검은 드레스를 걸친 여자였다. 소녀라기에는 성 숙하고 여인이라기에는 앳되어 보이는 기묘한 매력이 돋보이는, 숨이 막힐 듯 강한 향기를 풍기는 미모를 지닌 여자였다. “잘 어울리는군. 사랑하고 싶을 정도인데?” “듣기 유쾌한 농담은 아니니까 자제해주길 바래. 나라고 좋아서 이런 걸 입고 있는 줄 알아? 여기 여자들이 이런 것 밖에 안 주니까 할 수 없어서 입은 거지.”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걸치고 비스듬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 은 실로 매혹적이었다. 멍하니 바라보던 김재호는 가슴이 쿵쿵쿵 심 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불편한 것은 없나?” “그런 건 없는데 전화 좀 쓰게 해줘. 애가 잘 있나 확인해봐야 돼.” “그건 곤란하다. 앤슨과 나는 서로를 몹시 신경 쓰지. 내가 그대와 접촉한 것은 앤슨에게는 절대 비밀이야.” “쳇, 할 수 없지.”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한참 동안 이야기를 했다. 대화의 내용은 대부 분 김재호와 석창렬이 잘 모르는 인물들의 관한 이야기였다. 앤슨이 나 유나의 이름이 간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오스카 주변 인물들을 놓고 이런저런 저울질을 하는 듯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예안은 그만 쉬겠다고 돌아가버렸다. 오스카는 배웅 을 마치고 이쪽 방으로 돌아왔다. 멍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김재호는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는 오스카의 시선에 화들짝 놀라 헛기침을 했다. “왜 닥터가 이곳에 있는 겁니까?” “본 그대로요. 닥터는 나와 함께 하기로 했지.” “함께 하다니? 무엇을요? 닥터와 당신들은 어떤 관계입니까?” “설명하자면 길지만, 어차피 당신들에게는 말해줘야 할 부분이니 지 금 말하겠소.” 페이스를 주도하듯 목청을 가다듬은 오스카는 낮은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 민족은 인구수만 수 억이 넘어가는 거대 국가이지만 세계사에 드러난 적은 한 번도 없소. 아마 전 세계의 대부분의 인간들이 우리 를 알지 못하고 있을 거요.” “으음.” “우리는 혁명이라는 것을 꿈꾸고 있소. 그것이 어떤 건지는 알려줄 수 없지만, 빠르면 올해, 늦으면 내년 안에는 결성될 테니 그대들도 곧 알게 될 거요. 그러니 그것에 관해서는 더 묻지 말고 그냥 기다리 면 될 거요.” “혹시 닥터와 혁명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눈치가 빠르군. 바로 그렇소.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한동력을 낼 수 있는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을 다룰 수 있 는 인물은 세계에서 단 한 명, 바로 닥터 뿐이오.” 무언가 모를 위압감에 느껴지는 어조에 김재호는 안색이 다소 창백 해졌다. “그런데 무한동력이라니, 그게 사실이오?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김 영환 정부의 언론플레이에 놀아났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데.”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전쟁까지 불사하며 탐냈던 거요. 그 정도 면 충분히 설명이 될 텐데?” “미국은 양자 컴퓨터 설계도 때문에 한국과 전쟁을 했던 거잖소? 결 국 가짜로 알려졌지만.”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지. 애초에 미국은 가짜 양자 컴퓨터 설계도를 일부러 한국에 넘어가게 한 다음 그것을 꼬투리 삼았던 거요. 궁지에 몰린 한국이 맥을 넘기게 될 거라 기대하고 말이오.” “당신 말대로 맥이 무한동력으로 움직인다면 한국정부는 맥을 주는 것보다 유전을 주는 게 더 말이 되지 않소?” “그렇기야 하지만, 무한동력보다는 유전이 당장 한국에 큰 도움이 되 는 거니까 맥을 줄 거라 생각했던 거요. 아사하기 직전의 거지에게는 수억 원 대의 수표보다는 딱딱한 빵 한 조각이 더 도움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요.” “말이 심하군. 한국은 아사하기 직전의 거지가 아니오.” “부국강병을 이루기야 했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전을 토대 로 삼고 있지 않소? 오죽하면 한국정부는 유전을 닥터에게 넘긴 뒤 에도 자기들이 재산관리자를 자청하고 나서서 그것을 관리하고 있지 않소? 40%의 막대한 세금을 물리면서까지 말이오.” 그것은 석창렬이 분하지만 인정하고 있는 현 정부의 교활한 정책 중 하나였다. 문서로나 법률상으로 유전은 분명히 서예안 개인의 소유지 만, 40%에 달하는 막대한 세금을 물리는 데다가 국제거래를 비롯한 모든 절차를 한국정부가 담당하고 있어 실질적으로는 한국정부의 품 안의 황금알이었다. 연간 45조 달러의 막대한 수익이 세금을 제외한 액수가 닥터의 구좌 로 입금되기는 하지만, 제비 눈물 만큼도 꺼내 쓰지 않으니 실질적으 로 돈 관리를 하는 주체는 한국정부였던 것이다. “닥터는 인간이 아니오. 정확히 표현하자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고 해야겠지.” “그게 무슨 뜻입니까?” “닥터의 두뇌는 천재의 지능을 훨씬 초월하오.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니까 그렇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닥터 가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신종 인간이라는 사실에 있지.” 김재호와 석창렬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약 7년 전 우리는 어떤 천재 과학자와 거래를 했소. 그는 우리의 자 금 지원을 받고, 자기조차 뛰어넘는 대단한 인간을 탄생시켰지. 그게 바로 닥터요.” 꽉 다문 입술 사이로 김재호는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오금이 저려지 는 놀라운 이야기였다. “안타깝게도 그 과학자도 더 이상 닥터와 같은 신품종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고 했소. 닥터의 복제인간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고, 난자 를 채취해 수정란을 만들어 다른 모체에 착상시키는 작업도 실패할 확률이 까마득하오.” 잠시 말을 멈춘 오스카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석창렬을 빤히 응시 했다. “우리는 당신이 바라는 일을 최대한 도울 거요. 그래서 당신이 정권 을 차지하고 차기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해줄 거요. 그건 어렵지 않 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자칫 닥터가 한국이라는 나라에 영원히 실망 을 느끼고 떠날지도 모르오. 당신은 그것을 감내할 자신이 있소?” 석창렬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차피 닥터는 당신들 소유가 아 니냐는 반박을 하기에 그는 너무나 선명하게 현 상황을 인식하고 있 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이들 집단과 닥터 사이에는 상당한 알력이 있는 것이다. 이들은 닥터를 회유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하 고 있지만 여의치 않은 게 분명했다. 그 과정에서 앤슨과 오스카 사 이에 저렇듯 상반하는 입장도 생기고 말이다. “분명 무한동력을 우습게 생각하고 있던 내가 잘못했다는 것은 인정 하겠소. 당신 말대로 우리나라에 실망한 닥터가 다른 나라로 망명해 버릴 가능성도 있겠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수하게 되더라도 상 관없을 정도로 난 절실하게 대통령 자리를 원하오.” 현 정부가 무능하다는 비판도, 맥과 유전은 반드시 나라에 귀속되어 야 한다는 부르짖음도 모두 자신의 욕심을 가리기 위한 보기좋은 구 실일 뿐이다. 털어놓을 수 없는 진심은 다름아닌 이 나라의 최고 정치가가 되고 싶다는 늙은 남자의 야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스카는 대단히 만족스런 웃음을 띠며 손뼉을 가볍게 쳤다. “부디 그 마음가짐 잃지 않기를 빌겠소.” by eden 아틀란티스 측의 젊은 세력자들은 크게 오스카, 앤슨, 마리오, 엘르 로 나뉘어집니다. 마리오와 엘르는 초반부터 등장했으니 잘 아실 거라 생각하여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잊은 분들을 위해서 덧붙이자면, 앤슨은 중반부부터 등장하여 양자 컴 퓨터 설계로로 인한 한미전쟁을 유도했던 인물입니다. 덧붙여 레이온 과 몇 년 전부터 아는 사이이기도 하지요. 오스카는 위 네 명 중 제일 늦게 등장한 인물이데, 에날도스가 현저하 게 약하지만 지략은 뛰어나다는 설정의 인물입니다.(설정만 그래요;;) 5대 대신 중 한 명인 제나르의 아들이기도 하지요. 나이도 네 명 중 가장 많습니다.(그래봐야 이십대, 젊은이여 영원하라!) 김재호는 유진우의 첫사랑인 김혜인에게 안 좋은 상처를 남긴 이른바 악역인 캐릭터이지요. 오스카가 현재 이용하고 있긴 하지만 뭐 그다지 비중이 크다고는 볼 수 없고, 그냥 도구쯤 될 겁니다. 이야기가 길어짐에 따라 앞부분 내용을 잊어버린 분들을 위해서 부연 설명을 덧붙인 겁니다. 원래 사설로 글을 설명한다는 것을 꺼려하지만 어쩔 수 없겠더라고요. 역시 융통성이 최곱니다 사람은. ps : 소엄 사상 최초로 영문 챕터입니다.(...)/ 고치기 지우기 목록 안녕히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리메이크 공진줄 알고... 재시작? 재도약?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 2005/03/30 영 앞으로도 기대중입니다.. 하지만 예안이가 너무 싶게 생각하는것 같아서.....쩝... 뭔가 반전이 생길것 같은 느낌이.. 2005/03/30 사케쿠 으음........... 재밌게 돌아가는 군요. 2005/03/31 眞魔狼 JoJo 아앗 오타요 심품종 -> 신품종 2005/03/31 해적왕 혁명의 부활을 알리는건가요...?? 그나저나...오스타의 속마음을...알고싶네..-_-)+ 2005/03/31 대천사미카엘 언제나 멋있습니다. (건필!!) 2005/03/31 전사&마법사 다시시작? 새로운 시작? 아마도 아틀란티스의 부활이나 예안이의 활약이 펼쳐질 듯 하네요 2005/03/31 실탄 아틀란티스의 부활이라뇨. 그건 너무 지나친 페이스입니다.(..) 2005/03/31 한타박스 작가는 융통성을 부르짖어도...주연은 융통성 제로에 답답녀(!?)이니...^^; 2005/04/27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4/18 페이지 ▶ 304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4) [7] 실탄 2005/04/0813Kb 616 ▶ 303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3) [6] 실탄 2005/04/0711Kb 634 ▶ 302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2) [9] 실탄 2005/04/0613Kb 623 ▶ 301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 [13] 실탄 2005/04/0511Kb 735 ▶ 300 - RESTART(6) [9] 실탄 2005/04/0413Kb 693 ▶ 299 - RESTART(5) [10] 실탄 2005/04/0314Kb 634 ▶ 298 - RESTART(4) [13] 실탄 2005/04/0212Kb 694 ▶ 297 - RESTART(3) [15] 실탄 2005/04/0112Kb 687 ▶ 296 - RESTART(2) [7] 실탄 2005/03/3113Kb 643 ▷ 295 - RESTART(1) [9] 실탄 2005/03/3013Kb 783 ▶ 294 - 추억의 그림자(6) [6] 실탄 2005/03/2912Kb 700 ▶ 293 - 추억의 그림자(5) [12] 실탄 2005/03/2814Kb 687 ▶ 292 - 추억의 그림자(4) [15] 실탄 2005/03/2412Kb 816 ▶ 291 - 추억의 그림자(3) [9] 실탄 2005/03/2012Kb 883 ▶ 290 - 추억의 그림자(2) [7] 실탄 2005/03/147Kb 885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 4 [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0344 :: 296 - RESTART(2) 실탄(cruel) 05-03-31 :: :: 12948 창문을 통해 김재호와 석창렬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오스카는 누군가 접근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등을 돌리지 않고 무뚝뚝하게 내뱉듯 물었다. “어떻게 됐지?” “죄송합니다. 실패했습니다.” “호, 어째서?” “아이가 있는 방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도록 잠금장치가 되어있었습 니다. 무리했다가는 엘리우스가 낌새를 눈치챌 가능성이 있었기에 어 쩔 수 없이 키메라만 납치하는데 그쳤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우스는 아이를 데리고 도망쳤겠군.” “예. 지금 행방을 쫓고 있습니다.” 등을 돌린 오스카는 가식의 미소를 띠고 유나를 주시했다. 그녀는 상 대에게 위압감을 주는 그의 시선을 꿋꿋이 받아내며 서 있었다. 그러나 태연한 척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는 법이다. 사람의 마음을 꿰 뚫어보는 눈을 가진 자가 바로 이 남자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감추며 유나는 속으로 경의를 품었다. 어떻게 엔젤은 이런 남자를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는 걸까. 역시 신인류라서, 보통 사람보다는 훨씬 우월하니까 그런 걸까. 이 남자는 과연 엔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품을까. “많이 예뻐졌군.” “감사합니다.” 별로 고마움이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였다. 오스카는 전혀 개의치 않 고 그녀의 턱을 손으로 감싸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게 했다. 지나치게 생기를 잃어 퇴폐적으로까지 느껴지는 눈동자는 오스카의 각막에 맺힌 자신의 모습을 결국 외면했다. “오늘 밤 내 방으로 오겠나?” “죄송합니다.” “호, 어째서? 앤슨에게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는 건가? 그 녀석은 그대 마음을 전혀 알아주지 않아. 왜 그렇게 일편단심인 거지?” 명백한 도발이었지만 전혀 도발로 느껴지지 않는 어조이자 눈빛이었 다. 그게 바로 이 남자의 장점이자 단점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 을 갖고 놀면서도 전혀 불쾌한 감정이 생기지 않게 하는. 갑자기 그가 턱을 놓아주고 몸을 휙 돌렸다. “한국의 정권 붕괴는 이미 초읽기에 들어갔다. 한국민들은 맥이 매매 가 아니라 대여됐다는 사실을 앍고 현 정부에 강한 실망과 불신을 느끼게 될 거다. 수습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게 내버려둘 수 는 없지. 약간만 손을 봐주면 엔젤은 이 땅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된 다. 한국으로서는 절망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좋은 거지.” “….” “앤슨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지만, 아쉽게도 앤슨은 너무 물러 터졌어. 고작해야 그 정도만으로 엔젤이 인간들에게 혐오를 느 낄 거라 예측하다니, 똑똑하다고 소문난 앤슨의 생각은 겨우 그 정도 밖에 안 됐나 보군. 집단강간이나 한 번쯤 당하게 해줘야 아무래도 효과가 좋지 않겠나?” 움찔한 유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설마, 정말로 그렇게 하실 생각입니까?” “모르겠군. 좋은 효과를 낼 만한 방법은 여러 개 알고 있는데 막상 실천하기에는 조금 힘들어서 말이야. 그대가 보기에는 정말 그렇게 할 것 같은가, 아닌 것 같은가?” 분노라기보다는 어이없음에 사로잡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오스 카는 히죽 웃음을 띠었다. “그만 돌아가보도록 해. 앤슨이 그대와 나 사이를 의심하면 골치 아 파진다.” 석창렬은 비서에게 차를 몰고 혼자 돌아가라 지시하고 김재호의 차 에 탔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서 두 사람은 조금 전 오스카와 나눈 대화에 관해 한참이나 골똘히 생각했다. “자네가 보기에 그는 어떤 인물 같은가?” 꽤 오래 유지된 침묵을 깨고 석창렬이 먼저 질문을 꺼냈다. 김재호는 간단하게 자신의 판단을 표시했다.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가 적으로 돌아서면 그보다 두려운 일은 없을 겁니다.” “동의하네.” “우리가 지금 하려는 일도 대단히 위험하지만… 그렇다고 그와 손을 끊으면 더욱 위험해집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다른 길로 돌아갈 생각은 없네. 그렇다면 애초에 이 일에 뛰어들지 도 않았을 걸세.” 의지가 뚜렷한 석창렬의 대답을 들으며 김재호는 손으로 쓰디쓴 웃 음을 지었다. 그는 나라가 다소 몰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차기 대통령이 되어 한국 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야망이라도 있다. 하지만 자신은 대체 무 슨 일념으로 여기까지 돌진해왔는지 지독한 의구심이 생겼다. 예안이 마음에 들어서? 물론 마음에 들기야 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내색하진 않았지만 저 정도 여자라면 평생 옆에 둬도 질리지 않겠다 는 생각은 해봤다. 남들은 그것을 첫눈에 반했다고들 표현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그는 한 여자에게 반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결혼이란 가문과 회 사를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교육을 어려서부터 받고 자라난 까닭이 기도 했다. 하지만 좀 예쁘장하기만 한 게 전부인 고아 소녀인 줄 알았던 그녀 는 세계가 경악한 최첨단 과학기술체 맥을 탄생시킨 장본인이었고, 전 세계가 눈치를 살피는 거물이었다. 유한그룹의 후계자라는 명함 따위는 그녀에게 우습기만 할 뿐이다. 어쩌면 사근사근한 미소를 듬뿍 묻힌 결혼 반지를 선물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시작부터 심각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 갈등의 골이 너무 깊어 그녀를 가지게 해주겠다는 말에 그렇게 간단하게 혹했는지도 모른다. ‘개시일은 3일 후요. 명심하시오.’ 명령투에 가까웠던, 그렇지만 전혀 오만하다는 느낌이 없이 당연하다 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던 오스카의 음성이 귓가를 울렸다. 핸들을 크게 꺾으며 김재호는 피식거렸다. 어찌 되든 간에 그녀에게 기억되지 못하고 잊혀지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적어도 아주 틀린 선 택을 한 것은 아니다. 인류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어느 바다의 심해에는 오래 전부터 거대 한 잠수함 한 척이 항해하고 있었다. 공상과학소설에 나오는 노틸러 스 호를 연상케 하는 이 잠수함은 그보다는 훨씬 발달된 기술로 만 들어졌으며, 훨씬 거대했다. 자그마치 길이만 1km가 넘어가는 이 잠수함은 배라기보다는 하나의 산업단지라 보아도 좋을 정도로 각종 첨단 생산시설을 내부에 갖추 고 있었고, 거기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해저에서 구할 수 있는 자원 채취능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의료시설과 생활문화 공간은 물론이요, 혹 위험한 바다생물이나 해군 함대와 조우하더라도 충분히 상대를 궤멸시킬 수 있는 군사적 기능 까지 두루 갖추고 있었다. 함내에 길게 난 복도를 따라 제임스가 바쁘게 뛰고 있었다. 그는 모 퉁이를 돌다가 한 남자와 그만 실수로 부딪쳤다. “아, 미안해요. 칼, 레이온은 지금 어디에 있죠?” “제1연구실에 있는데…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몹시 급한 일이 생겼어요. 미안해요, 나중에 봐요.” 제임스는 다시 한 번 사과하고는 제1연구실을 향해 바쁘게 뛰었다. 연구실에 당도하자마자 그는 노크도 없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무슨 일이야?” 안경알 너머로 레이온이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물었다. 지나치게 예 민한 반응으로 보아 무언가 계산이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럴 때 그를 건드리는 것은 자살행위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을 정도로 지금 상황은 급했다. “아틀란티스 소유의 비밀함대 이동을 포착했어요.” “그래?” “놀라지 말아요. 공격 목표는 한국이에요.” 레이온은 잠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잠깐의 놀라움은 곧 바로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냉정한 표정 밑으로 숨어버렸다. “아틀란티스의 기술력이라고 해봤자 현대 기술에 약간 앞서거나 엇 비슷한 정도야. 대규모 기습전이라면 모를까 보안 유지를 위해 급히 편성한 잠수함 몇 척 가지고 한국을 어찌해볼 수는 없을 텐데.” “요즈음 한국 정권은 심상치 않아요. 대통령과 야당의 석창렬 의원이 지나치게 대립하고 있는 것 하며, 야당 총재인 김두오 의원이 버젓이 건재하는데도 재직의원의 1/3 이상이 석 의원을 지지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요.” “석창렬 의원이 정권 찬탈을 위해서 유젤을 희생양으로 삼을지도 모 른다는 걱정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제임스는 불길한 표정과 침묵함으로써 긍정을 표시했다. “보고서 파일명은 뭐지?” “XKF32예요. 암호는 걸어두지 않았어요.” “걸핏하면 암호를 걸어두는 버릇을 드디어 고쳤나 보군.” “놀리지 말아요. 바깥 세상에서 십 년이 넘게 유지하던 버릇이 쉽게 고쳐질 리가 없잖아요.” 함내에서 도대체 무슨 보안을 지킬 필요가 있느냐고 프로텍트 좀 걸 지 말라고 호통을 치곤 하던 일이 생각난 레이온은 피식거리며 보고 서 파일을 열어보았다. 다소 심각한 얼굴로 보고서 내용을 읽어내려가던 그는 이윽고 창을 닫은 뒤 제임스를 돌아보았다. “확실히 자네 추측이 틀리지는 않은 듯하군.” “그렇지요? 빨리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만 해요.” “누구를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라뇨? 당연히….” 자연스럽게 대답하려던 제임스는 차갑게 굳은 레이온의 얼굴에서 한 가닥 위화감을 느끼고 절로 입을 다물었다. 냉소에 가까운 안색을 띤 채로 레이온은 테이블을 짚었다. 다소 건방 져 보이는 태도였지만 그에게는 몹시 자연스러운 자세였다. 그는 오 만을 소유할 자격이 있는 남자다. “유젤을 위해서인가? 한국을 위해서인가?” “….” “어느 쪽을 대답하든 간에 나는 자네를 비웃을 거야. 아틀란티스가 바보 머저리가 아닌 이상 유젤에게 위해를 가할 리가 없고, 또 유젤 이 멍청히 앉아서 당하고 있을 애도 아니잖아? 유젤에게는 맥이 있 어. 그리고 우리가 한국을 위해서 봉사할 의무도 없지. 우리는 그저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된다. 이해하나?” 오금이 저릴 정도로 차가운 말투였지만 틀린 부분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 한 가닥 불안감은 남는다. 머리로는 그의 말이 맞다 는 것을 인정하지만 가슴은 불길하다고 외치는 것이다. 본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아틀란티스가 한국 정 부의 대잠초계망에 걸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비밀함대를 동원했 다는 것은 무언가를 작정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일만 년이 가깝게 침묵을 지켜왔던 민족이니만큼 한 번 움직이기 시 작하면 그 파도는 거침없이 세계를 집어삼키리라. 지상세계와 아틀란 티스 대륙을 이어주는 <게이트>가 예상보다 빠르게 닫히기 시작했 다는 것도 분명 그들의 불안감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그 부분은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나저나 키메라는 어때?” “다들 건강해요.” “자금 상황은?” “전혀 문제 없어요. 국제적인 장기매매를 벌였으니만큼 티아마트가 소유한 현금은 천문학적인 수치를 넘어가죠.” 딱딱하게 굳은 말투에는 존엄한 생명을 저속하게 굴리는 행위를 비 난하고자 하는 외침이 담겨 있었다. 레이온은 그것을 눈치채고 가소 롭다는 듯 피식거렸다. “제임스. 그 여자들은 인간이 아니야. 내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가 축에 불과할 뿐이다.” “….” “티아마트는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훌륭한 품종이다. 자네 는 그 품종을 탄생시킨 남자를 보필할 영예를 얻은 행운아고. 항상 그것을 잊지 말도록.”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생각이 전혀 없는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라 그런지 우습다는 기분이 먼저 들었다. “왠지 비아냥거리는 것으로 들리는군요. 나를 나무라는 것 같기도 하 고요.” “눈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군.” 귀찮음이 역력한 표정으로 보아 더 이상 아틀란티스의 비밀함대 이 동을 운운하는 것은 심기만 거스를 것 같았다. 그의 승인이 없다면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세현은 지 켜보기나 해야겠다 생각했다. “전부터 궁금하던 게 있어요. 물어봐도 되나요?” “말해 봐.” “키메라는 어떻게 해서 태어난 거죠? 당신은 무에서부터 단백질을 합성해 인공 DNA를 만들고 그 배를 배양시켰다고 말했지만… 아무 리 생각해도 그 말은 믿을 수 없어요.” 컴퓨터는 사물이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거나 거기에 몇 가지 손질을 덧칠할 수는 있어도 처음부터 만들어낼 수는 없다. 명작이나 명품의 모습을 데이터로 저장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창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일뿐. 그러나 대자연 앞에 비하면 인간 역시 하나의 컴퓨터에 불과하다. 생 명의 신비를 발견하고 그 기원을 밝혀낼 수는 있어도 새로운 기원을 창조하는 것은 원론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기껏 해야 몇 가지 개체의 유전자를 합성하여 인조 생물을 만들어내는 것 정도가 전부이다. 레이온은 키메라를 구성하는 DNA는 전부 자신이 단백질 단계에서부 터 창조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제임스는 믿을 수 없었다. 수억 쌍 이 넘어가는 구조를 한 명의 인간이 하나부터 끝까지 일일이 창조한 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 하지만 DNA를 짜집기 하기 위해서는 그 모체가 되는 생물이 필요한 데, 키메라를 이루고 있는 DNA는 알려진 어떤 생명체의 DNA와도 달랐다. 아니, 모든 키메라의 DNA 구조 자체가 전부 달랐다. 절대 불가능한 일이 또 한 번 불가능의 실루엣을 품고 현실이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딜레마가 형성되는 것이다. “자네의 그 잘난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 하지 만 자네는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게 있어.” 비웃는 것 같기도 서글픈 것 같기도 한 표정을 한 채 레이온은 덤덤 히 설명을 계속했다. 왜 키메라에 관해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저런 표정을 짓는지 제임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답은 간단해. 바로 랜덤 조합이지.” “랜덤이요?” “그렇다. 일정한 공식을 만들고, 그 공식을 해치거나 넘어서지 않는 수준에서 유전자가 형성되도록 알고리즘을 짜는 것이다. 내가 설마 밤잠을 설쳐가며 일일이 모든 키메라의 유전자를 합성할 거라고 생 각했나?” 제임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가 간신히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그것은 생명의 방정식이 아닌가요?” “그거 꽤 멋진 표현이군. 자네도 문학적 센스가 있는데?” “바깥 세상의 인간들이 알면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만한 업적이군요. 그 알고리즘을 얻기 위해서라면 인간은 전쟁, 아니 멸망도 불사할 거 예요.” 조금 전의 의구심은 전부 잊어버린 듯 제임스의 얼굴에는 위대한 과 학자에 대한 찬양이 깃들어 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의 본질 중 하나는 자연의 비밀을 탐구하는 과학자였다. “신이 자기 만족을 위해서 나한테 선물한 거 가지고 유세를 떠는 게 창피하긴 하지만, 뭐 어떤가 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지.” “신의 선물이요?” “그럼 설마 내가 나 혼자만의 힘으로 그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겸손하시군요. 하긴, 인간이 태어나게 된 것부터가 신의 뜻이니 틀 린 말은 아니지요.” 낭만적인 조물주 찬양주의 발언쯤으로 인식한 제임스는 가볍게 응수 하며 넘어갔다. 살짝 기가 막히다는 웃음을 터트린 레이온은 머리를 긁적이며 제임 스에게 표정이 보이지 않게 돌아서고 중얼거렸다. “진짠데.” by eden 쉽게 말해서 시디key를 생각하시면 됩니다.(라는 것보다는 시디키 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게 맞는지 또 확신이 안 서는군요) 어쨌든 그건 중요하지 않고, 정말 중요한 것은 일일연재를 무사히 지켰다는 것입니다. 오후 10:30분 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간신히 맞췄군요. 고치기 지우기 목록 사케쿠 후웃....... 과연 예안은 어떻게 될 것인가. 2005/04/01 영 당할까요... 그럼 조금 혐오감 .. .;;; 2005/04/01 실탄 오스카는 예를 들었을 뿐이지 정말 실현하겠다는 말은 한 적 없습니다. 가볍게 예를 든 거긴 하지만 뭐 사실은 사실이지요. 2005/04/01 안녕히 제 소설에 등장하는 지우는 당했는데.. 쿨럭. 예안은 어떻게 될까나... 근데 아틀란티스의 기술력이란게 그렇게 큰 발전이 없었군요.. 그럼 지식쪽으로 발전했나... 그것도 아니면 도대체 뭐가 잘난거지? 2005/04/01 군발이230 흐음 아아 일일연재는 맞는것 같은데 왜 하루가 늦은듯한 느낌이... 소엄을 볼때면 시간을 거슬러서 본다는 느낌이... 주절주절,,,,, 건필 2005/04/01 NANA 금속에 전기가 통하지 않는데 무슨수로 기술을 발전시키겠습니까...(전기가 안통하면 진공관도 소용이 없는데...) 2005/04/01 코코로의악마 헐...티아매트 복제인간이//무에서./.먹는 무 -ㅁ-???? 2005/04/20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4/18 페이지 ▶ 304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4) [7] 실탄 2005/04/0813Kb 616 ▶ 303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3) [6] 실탄 2005/04/0711Kb 634 ▶ 302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2) [9] 실탄 2005/04/0613Kb 623 ▶ 301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 [13] 실탄 2005/04/0511Kb 735 ▶ 300 - RESTART(6) [9] 실탄 2005/04/0413Kb 693 ▶ 299 - RESTART(5) [10] 실탄 2005/04/0314Kb 634 ▶ 298 - RESTART(4) [13] 실탄 2005/04/0212Kb 694 ▶ 297 - RESTART(3) [15] 실탄 2005/04/0112Kb 687 ▷ 296 - RESTART(2) [7] 실탄 2005/03/3113Kb 645 ▶ 295 - RESTART(1) [9] 실탄 2005/03/3013Kb 783 ▶ 294 - 추억의 그림자(6) [6] 실탄 2005/03/2912Kb 700 ▶ 293 - 추억의 그림자(5) [12] 실탄 2005/03/2814Kb 687 ▶ 292 - 추억의 그림자(4) [15] 실탄 2005/03/2412Kb 816 ▶ 291 - 추억의 그림자(3) [9] 실탄 2005/03/2012Kb 883 ▶ 290 - 추억의 그림자(2) [7] 실탄 2005/03/147Kb 885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 4 [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0423 :: 297 - RESTART(3) 실탄(cruel) 05-04-01 :: :: 11809 니콜라스는 항구를 이용하기 위해 부산으로 향했다. 비행기를 이용하 는 게 빠르긴 하나, 상공에서 적과 맞닥뜨리게 되면 피할 길이 없어 진다. 배 위에서는 그래도 바다에 뛰어들 수도 있지 않은가. “형,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네 엄마한테 가는 거야. 집은 위험해.” “엄마는 일본에 있다며?” “그래서 배 타러 가는 중이잖아.” 점점 커감에 따라 은빛이 감돌기 시작하는 유빈의 머리색이 부담스 러워 니콜라스는 길거리에서 모자를 사다 씌워주었다. 예안은 예쁜 색이라며 몹시 좋아했지만, 그는 쉽게 눈에 띄이는 도박은 지금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의 느린 걸음에 그는 답답함을 느꼈다. 생각 같아서는 냅다 들쳐 메고 뛰고 싶었다. 그러나 유괴범 따위로 오해라도 받아 괜히 시선을 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까부터 어디선가 느껴지는 시선이 몹시 신경 쓰였다. 누군가가 쫓 고 있는 것 같은데 정확한 위치를 잡아낼 수 없다는 사실도 몹시 거 슬렸다. ‘프로다. 쉽지 않겠는걸.’ 아무리 근 2년 간 뒷세계에서 발을 빼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간단히 추적을 허용했다는 것은 수치였다. 차라리 정면으로 대면하고 싸운다면 간단하겠지만, 상대방은 조용히 미행만 할 모양이었다. “형, 나 저거 사 줘.” 유빈이 가리킨 것은 휴대용 게임기였다. 이 상황에 무슨 게임기 타령 이냐고 짜증을 내려던 니콜라스는 곧 생각을 바꿨다. 그는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로 승낙했다. “좋아. 대신에 저거 사주면 칭얼거리지 말고 형 말을 잘 따르는 거 야. 알았어?” “응.” 동생을 데리고 나들이를 하는 학생처럼 니콜라스는 태연히 매장에 들어섰다. 어려서 철이 없는 건지 지금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고 좋아 라 하는 아이의 모습에 쓴웃음만 나왔다. 전자종합매장이 아니라 그런지 게임기의 가격은 상당히 비싼 편이었 다. 그러나 가격표 따위가 눈에 들어올만큼 한가하지는 못하다. 그는 미행을 전혀 눈치못채고 여유를 부리는 사람인 척 한가하게 게임기 들을 둘러보았다. 성인 남성 키만한 진열대를 돌아간 그는 갑자기 자세를 낮추고 유빈 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남들 눈에 뜨이지 않도록 재빨리 권총을 건넸다. “서유빈. 형 말 잘 들어.” “응?” “형은 잠시 화장실에 가는 척 할게. 하지만 네가 안 보이는 곳에서 널 지켜보고 있을 거야. 잠시 후에 모르는 사람이 와서 형이 어디 갔 냐고 물을 거야. 그럼 화장실에 갔다고 대답하고, 이 총으로 그 사람 을 쏴.” “그럼 죽지 않아?” “잠만 자게 될 거야. 이 총은 사람을 잠재우는 총이지 죽이거나 다치 게 하는 총이 아니야.” 고개를 갸웃갸웃하던 유빈은 밝게 웃으며 총을 받았다. “시키는 대로 하면 게임기 사주는 거지?” “전자파에 뇌졸증을 일으킬 정도로 실컷 게임하게 해줄게.” 가볍게 대꾸한 니콜라스는 몇 번 더 게임기를 살피는 척 하다가 화 장실 쪽으로 향했다.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유빈 이 있는 쪽을 향해 감각을 극대화시켰다. 과연 짐작대로 누군가가 다가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호의를 품고 있지는 않았다. 게임기를 만지작거리던 유빈은 또각또각 하는 하이힐 소리가 가까워 지며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고개를 들었다. 화려한 금발을 길게 빗고 미니스커트 정장을 입은 외국계 여자가 눈웃음으로 인사 를 건네며 허리를 숙였다. “꼬마야, 혼자서 뭐하니? 엄마를 잃어버렸어?” “형은 잠깐 화장실 갔어. 곧 올 거야.” “게임기 사려고? 게임을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게임은 엄마가 좋아해. 엄마 만나면 주려고 사달라고 한 거야.” “어머, 참 착한 아이구나.” 게임기를 진열대에 다시 꽂은 유빈은 천진스럽게 고개를 옆으로 가 로저었다. “아니야. 난 착하지 않아.” “응? 그건 무슨 뜻이니?” “미안해, 누나.” 유빈은 살짝 숨기고 있던 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마취침이 피부에 꽂 히는 순간까지 여자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인식하지 못했다. 설마 이렇게 어린아이가 자신을 공격하랴 하는 방심 탓이었다. 여자는 자세를 낮춘 그대로 경직되었다. 니콜라스가 황급히 뛰어나와 여자를 살폈다. 마취 효과가 제대로 먹힌 것을 확인한 그는 급히 여 자를 들쳐메고 유빈의 손을 잡고 매장을 빠져나왔다. 일행이 쓰러진 것쯤으로 해석한 다른 손님들과 매장 직원은 아주 잠깐 동안 관심을 두었을 뿐이었다. 사람들의 눈에 뜨지 않는 곳까지 여자를 데리고 간 니콜라스는 몸수 색을 해보았다. 현금과 권총 한 자루만 나왔을 뿐, 신분을 증명할 만 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여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살폈다. 그러나 역시 처음 보는 얼굴이 었다. ‘한국이 배후가 아니었던 걸까? 아니면 한국 말고 배후에 다른 녀석 들이 또 있는 걸까?’ 그는 아틀란티스를 떠올렸다. 충분히 이런 일을 꾸밀 만한 동기를 지 닌 녀석들이긴 하다. 그러나 그들이 지나를 납치해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지나는 임신 중인데. 괜찮을까?’ 그녀가 걱정이 되었지만 지금은 유빈을 신경 쓰는 게 급선무였다. 우 선순위만을 따르는 것은 다소 냉정해 보일지 모르나, 그가 보기에는 제일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고속버스가 터미널에 정지했다. 니콜라스는 짐을 챙긴 뒤 곤히 잠자 고 있는 유빈을 흔들어 깨웠다. “다 왔어. 어서 일어나.” 눈을 비비며 일어난 유빈은 졸리다고 투덜거렸다. 니콜라스는 가볍게 묵살하고 유빈의 손을 잡고 버스에서 내렸다. 평범한 여행객인 척 가장하고 중앙에 위치한 휴게소에 갔다. 창가 쪽 테이블 왼쪽에서 세 번째 자리에 앉아 불고기 햄버거 4인분을 시키 고 기다렸다. 이윽고 젊은 여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니콜라스씨, 회장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선박을 대기해뒀습니다. 가시지요.” “미행은?” “그 정도도 신경 못쓸 정도로 어리숙하진 않습니다. 안심하십시오.” “다행이군.” 그들은 여자가 밖에 대기해둔 차에 올랐다. 차는 미끄러지듯 국도를 달려 항구에 접어들었다. 대형 유조선이 출 항 준비를 한창 갖추고 있었다. “이봐, 우리는 기름이 아닌데?” “그렇다고 호화 여객선을 타고 갈 수는 없잖습니까? 눈에 띄는 짓은 삼가야지요.” “그냥 해본 소리니까 신경 쓰지 마. 어선보다는 유조선이 낫다는 거 알고 있어.” “설마요. 태평양을 건너다가 전복될 일 있습니까?” 니콜라스는 유조선에 오른 뒤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밖 에서 보기에는 평범한 대형 유조선이었으나, 안에서 봤을 때에는 유 조선으로 위장된 호화 개인용 유람선이었다. “날 놀린 건가? 기분이 별로 좋진 않아.” “말장난을 좀 쳤을 뿐입니다. 그래도 전 니콜라스씨를 도와주고 있는 입장이니 노여워하지는 마세요.” “화나진 않았어. 기분이 좀 상했다 뿐이야.” 유빈은 신기해서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선실까지 들어가기도 귀 찮았던 니콜라스는 짐을 갑판 위에 내려놓고 털썩 주저앉았다. 어느 덧 항구는 상당히 멀어져 있었다. “자잘한 상처가 많으시군요.” “프로메테우스 때문에 골치 깨나 아파서 그래.” “그게 누구죠?” “앤드류가 말 안했나 보군. 그렇다면 들을 생각은 버려.”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함부로 밝힐 수 없는 비밀이라는 뜻이다. 여자 는 더 물어보는 것을 자제했다. “이 배는 안전한가?” “잠수함 한두 척은 무섭지 않을 정도의 무장을 갖추고 있습니다.” “적은 바다 밑에서만 나타나지 않아.” “첨단 대공미사일 시스템도 갖추고 있습니다. 안심하세요.” “앤드류 회장도 겁을 상실했군. 민간인 주제에 이런 무장이 장착된 배를 소유하고 있다니.” “돈만 있으면 못할 게 없는 법입니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네.” 앤드류의 도움까지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자존심 상했지만 별수 없 는 선택이었다. 혼자 힘만으로도 충분히 유빈을 보호할 수 있다고 자 신하지만, 실패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 앤드류의 도움은 필수였다. 이상하게 예안은 연락을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어 누군 가에게 감금당한 처지라 해도 맥을 통한다면 연락 하는 것은 식은죽 먹기일 텐데. 그렇다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연락을 자제하고 있다는 말이 되지 만, 하루라도 아이를 안 보면 입안에 가시가 돋을 것처럼 굴던 사람 이 그럴만한 일이 뭐인지 의구심이 생긴다. “서예안씨는 어디에 있죠?” “일본에. 하지만 연락이 안 돼.” “회장님께서는 서예안씨도 기왕이면 찾아서 모시고 오라고 말씀하셨 습니다만….”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지금은 서유빈을 보호하는 게 우선이야. 아무리 급해도 불가능보다는 가능한 것에 신경을 쓰자고.” 자신의 무릎 위에서 잠든 아이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넘기던 니 콜라스는 길게 뻗은 수평선으로 눈을 돌렸다. 수면 위에 잔잔한 주름 을 남기는 파도의 싱그러움이 불투명한 불안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엔젤의 동향을 감시하고 있던 엘르는 갑자기 엔젤이 행방불명되고 니콜라스와 유빈까지 사라지자 크게 당황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그 사실을 전해들은 앤슨은 망연자실한 얼굴이 되었다. “엔젤이 사라져? 어디로?” “모, 모르겠어요.” “한국 정치가들 동향은 어때?” “별로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진 않아요. 엔젤이 소리소문없이 어디 여 행가는 것은 번번이 있는 일이라…. 하지만 엘리우스와 엔젤의 아이 까지 한꺼번에, 그것도 엔젤과는 따로따로 사라졌다는 것은 뭔가 이 상해요.” “제대로 잘 감시를 했어야지.” 또다시 2년 전 그때처럼 숨박꼭질을 해야 하는 생각이 들자 앤슨은 다소 답답해졌다. 무엇보다 여태껏 자신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듯 한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엔젤이 느닷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몹 시 신경 쓰였다. “유나. 뭐 알고 있는 거 없나?” 언제나처럼 무표정을 일관한 채 서 있던 유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전 세계 국가들의 이목이 엔젤에게 집중된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 진 탓인지 몹시 불안했다. 차라리 엔젤이 자기들을 피하기 위해 사라 졌다면 오히려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몰염치한 국가가 엔젤을 자국의 소유로 하기 위해 몰래 자신들의 눈을 피해 납치극을 벌였으리라는 가능성도 있는 터라 예 전과는 달리 무척 불안했다. “소식은 들었다, 앤슨 경.” “오스카님?” 반갑지 않은 목소리에 앤슨은 창백하게 굳은 채 뒤돌아보았다. 반쯤 열린 문에 기대고 선 오스카는 흙빛이 된 앤슨을 비웃듯 빙긋 웃어보였다. “그대가 얼마나 무능력한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돼서 즐거웠다. 그래서 대책은?” 조롱이 역력한 말투에 앤슨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방금 보고를 받았습니다. 지금부터 대책을 세우겠습니다.” “난 일이 발생하자마자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늦게 알았다, 죄송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 무능력한 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변명이지.” 대응할 길이 없는 도발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앤슨은 오스카의 얼굴 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상대는 나이로 보나 배경으 로 보나 지위로 보나 자신보다 한 수 위다. 자신이 유일하게 앞서는 것은 강력한 에날도스를 지녔다는 것뿐. 분함을 억누르는 앤슨을 잠시 바라보던 오스카는 품에서 서류 봉투 를 꺼내 탁자에 던지듯 놓았다. “엘리우스의 행적을 발견했다. 읽어보게.” 깜짝 놀란 앤슨은 모욕감도 잊은 채 서둘러 봉투를 열어보았다. 보고 서 형식으로 되어있는 몇 장의 서류와 엔젤의 아이를 데리고 유조선 에 오르는 니콜라스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앤슨은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오스카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것을 어떻게?” “자네라면 언젠가 이런 실수를 저지를 줄 알고 내가 따로 사람을 붙 여놨지. 자, 이제는 자네가 얼마나 덜 무능력한지 증명해야 할 차례 아닌가? 나는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잠수함 한 척 없으니 자네 가 엘리우스를 쫓을 차례야. 이번에는 날 실망시키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군.” “명심하겠습니다.” 어딘가 지나친 조롱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앤슨은 서둘러 유나와 엘르에게 니콜라스를 추적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평소의 그였다 면 무턱대고 니콜라스를 쫓기보다는 조용히 미행하는 것을 택했겠지 만, 오스카의 조롱에 모욕감이 치민 나머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벽에 비스듬하게 기대고 있던 오스카는 히죽 웃음을 띠며 핸드폰을 꺼냈다. 신호음이 끊기자 그는 음산하면서도 낮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실행해라.” 푸른 바다 속에 잠수해 있던 무인 잠수함은 부상을 명령하는 더미 프로그램의 뜻에 따라 미사일 발사 심도까지 올라왔다. 인근 해역을 경비 중이던 해군 잠수함이 뒤늦게 발견하고 경고했지만 무인잠수함 은 무시한 채 한 기의 미사일을 발사했다. 화들짝 놀란 해군 잠수함은 더 이상의 경고를 포기하고 어뢰를 발사 했지만, 불꽃의 유영을 내뿜는 미사일은 산산이 부서진 모체를 뒤로 한 채 하늘을 가로질렀다. 날카로운 은색 빛줄기는 전설의 재도약을 알리는 시발점처럼 뜨거운 열기를 있는 힘껏 내뿜으며 창공을 붉게 물들였다. by eden 갑자기 진행 속도가 빨라진 듯한 느낌이....? 예전이 생각나는군요.(폭소) 라지만 앞부분을 기억하시는 분이 얼마나 될지 절망. 덧붙이지만 아틀란티스는 현대에 발달된 과학을 이론적으로만 공 부하여 약간 앞서나갈 수는 있을지언정, 사도처럼 현저하게 초월 하거나 주도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분 말씀처럼 금속에 전기가 흐르지 않는데 과학이 발달할 수가 없지요. 깜짝 퀴즈 : 저 미사일의 목표가 어딘지 정확히 맞추시는 분이 있다면 내일은 2연참을 하겠습니다. 고치기 지우기 목록 영 목표는 앞서 나온 일본 야쿠자 본부. 2005/04/02 사케쿠 예안네 집인가요? 아니면 유조선? 흐음....... 둘 다 대공미사일 기타 등등의 장비를 갖추고 있어서 그건 힘들텐데 말입니다. 2005/04/02 사케쿠 예안네 집인가요? 아니면 유조선? 흐음....... 둘 다 대공미사일 기타 등등의 장비를 갖추고 있어서 그건 힘들텐데 말입니다. 2005/04/02 안녕히 승률은 독자쪽이 높네요. 일단 가까운 곳은 아니라는 거군요... 어뢰가 아니라 미사일이나 최소 100km 떨어진 곳이고... 음... 엔젤을 감시하기 위해 한국 근해에 있었을 테니 한국 일본 둘 중 하나가 목표겠네요.^^ 명목상 엔젤이 속한 한국에 피해를 입힐 일은 없고... 앗 잠깐... 좀 더 넓게 생각해서... 엔젤이 없어진 마당에 뭐라 말할 순 없겠지만 원래부터 예정대어 있던 계획이라면... 엔젤은 한국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야 하니까 미사일의 목표는 한국이 될 수도 있겠군요. 엔젤이 사라진후 미사일 공격이 한국으로 향했다...음... 그 미사일 공격이 엔젤이 쏜 건지 아님 다른 누군가가 쏜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만약 엔젤이 이를 막아주지 않는다면 한국은 엔젤에게 배신감을 느낄테고... 그럼 엔젤은 인간에게 회읨감을 느끼고... 아. 모르겠네요... 일단 한국의 서울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들어온 사람은 아무대로 불러 줘요... 승기는 독자쪽입니다. 쪽수로... 쿨럭. 2005/04/02 안녕히 으윽... 틀렸다! 미사일이 발사된 곳은 엔슨과 오스카가 탄 잠수함이 아니군요... 에라 모르겠다. 그냥 서울! (청와대, 예안의 집 모두 포함) 후훗. 2005/04/02 희야 유전....혹은 청와대 2005/04/02 희야 흠..청와대로 올인하죠.... 2005/04/02 마더울프 일본에 올인-_-... 하고 싶지만 예안이 있기때문에 무효군요 것참. 뭔가 조정을 해서(혹은 만우절 스페샬으로) 일본총리 집에 쏴버리는건 안됩니까~ 2005/04/02 안녕히 독도...;; 2005/04/02 Jin 한국이 아닐까요? 안녕히님 말씀하고 똑같은 내용인데.. 예안이 없는 한국은 쉽게 당할테고...사람들은 자신들이 우상처럼 받쳐주던 예안이 맥을 타고 나타나서 도와주기는 커녕 코빼기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배신감과 분노를 느낄테고...으음...그 상태에서 맥이 매매가 아니라 대여라는 사실이 더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사람을은 예안을 매도하고..예안은 회의를 느끼고... 뭐..이 정도가 아닐까 하는데..;;; 2005/04/02 군발이230 일단 나열해 보면 국내: 청와대, 예안의집, 예안이 알고 있는 사람들집, 유조선을 위장한 유람선 국외: 일본총리집외 개념없는 정치인들, 미국백악관, 흐음.. 이중에는 있지 않을까,,, 2005/04/02 해적왕 처음부분다..기억하고있어요... 가출해서...유젤과 맥을 만난 장면..아직도 제머리속에 남아있죠..ㅎㅎ 그때읽은 기분이란...상당히 흥미진진하고... 많은 수수께끼가 있어서..그런걸 생각하면서.. 재미있게 읽었는데.. 2005/04/02 휘동이 유조선에 올인!!~!~! 2005/04/02 나 지구에 한표(아마 맞췄을거 같은데-_-;) 어쨌든 맞기만 하면 되니까 맞았으면 2연참!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2005/04/02 전사&마법사 에덴에다가 ㅋㅋ 그건 아니겠고.... 아마도 제일 유력한 건 한국과 일본. 예안이가 있는 곳이라든지 아니면 유전을 쓸어버리던지... 혹시 예안이가 일하는 연구소나 맥이 있는 곳일까나.. 아 모르것다 2005/04/02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4/18 페이지 ▶ 304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4) [7] 실탄 2005/04/0813Kb 616 ▶ 303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3) [6] 실탄 2005/04/0711Kb 634 ▶ 302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2) [9] 실탄 2005/04/0613Kb 623 ▶ 301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 [13] 실탄 2005/04/0511Kb 735 ▶ 300 - RESTART(6) [9] 실탄 2005/04/0413Kb 693 ▶ 299 - RESTART(5) [10] 실탄 2005/04/0314Kb 634 ▶ 298 - RESTART(4) [13] 실탄 2005/04/0212Kb 694 ▷ 297 - RESTART(3) [15] 실탄 2005/04/0112Kb 689 ▶ 296 - RESTART(2) [7] 실탄 2005/03/3113Kb 645 ▶ 295 - RESTART(1) [9] 실탄 2005/03/3013Kb 783 ▶ 294 - 추억의 그림자(6) [6] 실탄 2005/03/2912Kb 700 ▶ 293 - 추억의 그림자(5) [12] 실탄 2005/03/2814Kb 687 ▶ 292 - 추억의 그림자(4) [15] 실탄 2005/03/2412Kb 816 ▶ 291 - 추억의 그림자(3) [9] 실탄 2005/03/2012Kb 883 ▶ 290 - 추억의 그림자(2) [7] 실탄 2005/03/147Kb 885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 4 [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0525 :: 298 - RESTART(4) 실탄(cruel) 05-04-02 :: :: 11754 미국으로의 항해길은 그럭저럭 순조로웠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적이 이쪽의 움직임을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판단이 서지 않다 보니 대책을 세우기도 여의치 않 았다. 원한 살 만한 짓을 한 건 아니지만 짚이는 곳이 워낙에 많은 까닭이었다. 아틀란티스는 예전부터 적이었다. 국내에서 예안을 시기하는 세력이 없다고는 볼 수 없었다. 또한 자국의 안녕을 위하여 그녀를 끌어들이 려 혈안이 되어있는 외국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니콜라스는 일단 적이 누구인지 판단을 내리는 것은 잠시 보류하기 로 했다. 우선은 누나와 합류해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연락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안전할까?” “이럴 때를 대비해서 회장님께서 비밀 도피처를 세계 여러 곳에 마 련해두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심이 되면서도 왠지 신경 쓰이는 대답이었다. “앤드류는 이런 일이 터질 것을 알았단 말이야?” “글쎄요. 서예안씨가 워낙 대단하다 보니 아무래도 그녀 한 사람을 놓고 국가간에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고만 생각하신 것 같습 니다.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지만 저는 그런 것까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고요.” “프로메테우스와 앤드류는 어떤 관계지?” “잘 아는 사이는 아닙니다만, 안면 정도는 익혀둔 관계로 보시면 됩 니다. 프로메테우스의 총수가 예전에 회장님께 접근해온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스스로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노력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남자이다. 그런 자신감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 도로 그에 걸맞은 세력도 갖추고 있다. 그런 남자이니만큼 함부로 타인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거나 하지 는 않는다. 그럴 경우는 오직 상대방이 그만큼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 을 인정했을 때 뿐이다.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앤드류에게는 프로메테우스의 관심을 받을 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세계적인 부자라는 타이틀은 분명히 아닐 터이다. ‘아저씨는 어떻게 하지?’ 정호는 여행 중이었지만, 워낙 급하게 한국을 벗어난 까닭에 미처 그 에게는 아무런 연락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다시 그를 찾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너무 위험하고 비효율적이라 어쩔 수 없이 근심만 거듭하는 수밖에 없었다. “형. 엄마 만나러 간다고 했잖아?” “맞아.” “거짓말. 바다로 가봤자 엄마 못 보는 거잖아. 형 거짓말 했지?” “지금 네 엄마와 연락이 안 돼. 그래서 연락이 닿을 때까지 안전한 곳에 피해 있으려는 거야.” “엄마 어디있는데?” “일본에 있는데 나도 더는 모르겠어. 연락이 안 돼.” 유빈의 얼굴이 울 듯이 변했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조금도 쩔쩔매지 않았다. “네 엄마가 어디 가서 위험해질 사람도 아니고 걱정할 게 뭐가 있다 고 사내 자식이 질질 짜려고 그래? 한 번만 더 찔끔거리면 다시는 권총 못 가지고 놀게 해준다.” “내가 언제 찔끔거렸다고 그래!” “차라리 소리를 지르는 게 낫다. 어린애가 질질 짜는 건 정말 질색이 거든.” 어린 동생을 달래주는 다정한 형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태도에 여자 는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그때 허리에 찬 호출기가 진동을 하자 여자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니콜라스는 다소 창백해진 여자의 표정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 이라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이야?” “제어실에서 부르고 있네요. 가봐야겠어요.” 여자는 그럼 이만, 이라고 짧게 내뱉은 뒤 서둘러 함선 내부로 달려 갔다. 기관실겸 지휘부 역할을 겸하는 제어실 문을 열어젖힌 여자는 안으로 뛰어들며 다급히 책임자를 찾았다. “죤, 무슨 일이에요?” “정체불명의 잠수함이 추격하고 있어요.” “설마. 군용 잠수함이 민간선을 왜 추적을 한다는 거죠? 그냥 우연히 이 해역에서 활동 중인 잠수함 아니에요?” “하지만 벌써 삼십 분째 우리 항로를 따라오고 있어요.” “혹시 액티브 소나를 쓰진 않았겠죠?” “대놓고 <나 위장 유조선이다>라고 광고할 일 있나요?” “어쨌든 일단 지켜보기로 해요.” 여자는 디스플레이가 그려내는 궤적을 어두운 표정으로 주시했다. 잠 수함 한두 척쯤은 무섭지 않을 무장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적극적 공격 자세를 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보루이다. 가급적이면 적의 눈에 띄지 않고 무사히 뉴욕 항에 입항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 였다. “무슨 일이야?” 상기된 음성이 뒤에서 들렸다. 니콜라스가 닫히려는 문을 손으로 짚 은 채 서 있었다. 긴장으로 수축된 실내 분위기에 니콜라스는 자신의 확신이 맞았음을 느꼈다. “지금 이 배, 추격 받고 있는 건가?” “네. 그래요.” 여자는 자기측의 실수로 보안이 허술해졌다 여기고 몹시 미안한 표 정을 지었다. 뚜벅뚜벅 다가온 니콜라스는 디스플레이에 표시된 추격 잠수함의 제 원과 항로 등을 확인하고는 휙 등을 돌렸다. 다급해진 여자는 서둘러 그를 쫓아나갔다. “뭘 하려고요?” “싸울 준비를 해야지. 그럼 이대로 당하고 있을까?” “상대는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을 거예요. 이쪽에서 먼저 나설 필 요는 없다고요.” “지원을 기다리면서 쫓고 있는 거라면 어떻게 할 건데?” “그렇다고 이쪽에서 먼저 공격할 수도 없잖아요!” 답답함이 한계까지 치솟은 듯 여자는 날카로운 고함을 질렀다. “댁들 어뢰를 빌릴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해. 저 녀석들은 내가 처리 하겠어.” 가진 건 권총 한 자루밖에 없는 사람이 무슨 재주로 수km 밖에서 쫓아오는 잠수함을 처치하겠다는 건지 여자는 어이가 없다 못해 한 심함을 느낄 정도였다. 선실문이 막 닫히려는 순간 디스플레이를 들여다보고 있던 죤은 비 명을 질렀다. “큰일났습니다! 어뢰 공격입니다!” “뭐라고요?” 여자와 니콜라스는 대번에 흙빛이 되어 서로를 쳐다보았다. 죤은 식 은땀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로 디스플레이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비 명처럼 외쳤다. “모두 3기! 거리 3천! 피해야 해요!” 여자가 뭐라고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중앙 시스템은 어뢰 공격을 인 지하고 스스로 회피 기동을 실시했다. 어뢰를 따돌리기 위한 디코이 공격을 실시하겠느냐는 물음이 떠올랐지만, 비상시인 까닭에 자동적 으로 Yes가 선택되어 디코어가 발사되었다. 존과 여자는 진땀을 흘리며 공격 상황을 표시하고 있는 디스플레이 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4기의 디코이를 따라 어뢰 2기가 흩어졌지만 나머지 1기는 줄기차게 본함을 쫓아왔다. 디코이를 조종하는 죤의 손이 덜덜 떨렸다. 갖은 모든 기능을 동원했 지만 어뢰는 속지 않았다. 적어도 본함의 디코이를 능가하는 기술로 제작된 게 분명했다. 어느덧 거리는 1천 미만으로 줄어 있었다. 「공격을 막을 수 없습니다. 승무원과 승객을 대피시켜 주시기 바랍 니다.」 냉정하게까지 들리는 시스템의 최후의 경고에 죤은 눈을 질끈 감았 다가 뜨며 여자를 돌아보았다. 안색이 창백해질 대로 창백해져 있던 여자는 이를 갈며 선실을 뛰어나갔다. “잠깐만.” 니콜라스는 낮은 목소리로 여자를 불러세웠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빨리 구명 보트를 준비하고, 서유빈군 을 피신시켜야….”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어뢰가 다른 데로 빗나가고 있어.” “네?” 의아해진 여자는 디스플레이를 확인했다가 그의 말이 사실임을 알아 차리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죤은 살았다고 펄쩍펄쩍 뛰며 여자를 껴 안고 좋아라 날뛰었다. “미안하지만 좋아할 때가 아니야.” “왜 그런 말을 해요? 격침되는 걸 피했잖아요.” “그게 문제라는 거지. 평범한 유조선이 군용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알아차리고 회피 기동에 디코이까지 발사했어.” 여자의 얼굴에서 살았다는 기쁨이 사라졌다. 니콜라스는 죽음의 위기 에서 벗어난 소년 같지 않은 차가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고는 탁자 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디코이에 속은 것도 아니고 어뢰가 스스로 궤적을 빗나가서 자폭했 다고. 저 녀석들은 애초에 우리를 격침시킬 생각이었던 게 아니라, 우리가 정말 목표가 맞는지 확인하는 게 진심이었던 것 같은데.” “그, 그렇다면….” “최신식 잠수함까지 동원한 녀석들이 항모라고 동원 못하리라는 법 은 없지. 누나를 탐내는 국가는 얼마든지 많아. 항모 한두 전대쯤 동 원한다 해서 이상할 게 못돼.” 안색이 변한 여자는 서둘러 죤에게 말했다. “잠수함을 격침시켜야겠어요.” “어뢰 공격 하나도 제대로 못 피한 주제에 무슨.” “회피 기능이 약간 떨어진다는 것은 인정해요. 하지만 이 배도 어느 군함 못지 않은 최신신 장비가 장착된 배라고요. 1대1 싸움에서는 결 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팔짱을 낀 채 니콜라스는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어딘지 음산한 기운 마저 풍기는 그 모습은 도저히 어린 소년 같지 않았다. “쓸데없는 짓은 관둬. 내가 보기에 저 잠수함이 성능 면에서는 이 배 보다 우위야. 불필요한 어뢰 낭비는 삼가고 내가 하는 것을 지켜보기 나 해.” “맨몸으로 잠수함을 격침시키겠다는 건 아니겠지요?” “보면 알아.” 니콜라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갑판으로 나왔다. 여자와 죤은 서로 를 마주보다가 어쩔 수 없이 니콜라스를 따라 나왔다. 권총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는 갑판에서 옷을 하나 둘씩 벗었다. 탄 탄하고 날씬한 몸이 드러나자 여자는 얼굴이 빨개졌다. 어리다고는 하지만 그의 알몸에서는 묘한 색기가 흘렀다. “위험해요!” 여자가 말리는 것도 무시한 채 그는 바다에 풍덩 뛰어들었다. 다급해 진 여자는 구조정을 준비하라 지시하고는 서둘러 본부에 회선을 넣 었다. 지지직 하는 잡음이 잠깐 동안 나타났다 사라지자 화면에는 앤드류 의 얼굴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지?」 “큰일났습니다, 회장님. 니콜라스씨가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차근차근 말해 봐.」 떨리는 가슴을 가라앉힌 뒤 여자는 잠수함의 추격을 받고 있었다는 것부터 니콜라스가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것까지 빠르게 설명했다. 신중한 표정으로 들은 뒤 앤드류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소년이지만, 니콜라스는 마피아들도 벌벌 떠는 뒷세게의 프로다. 돈만 주면 미국 대통령도 혼자서 암살할 수 있다는 인물이 바로 그야. 그런 실력자가 어뢰 공격 때문에 공포에 질려서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하지만 이건 말이 되질 않아요! 맨몸으로 어떻게 수km 떨어진 잠수 함을 공격한단 말입니까!” 「나도 그게 궁금하니까 지켜봤다가 나중에 자세히 말해주기를 부탁 하지.」 더 할 말 없다는 듯 앤드류는 회선을 끊어버렸다. 허탈함에 얼굴이 일그러진 여자는 죤과 서로 마주보다가 쳇 하고 이를 갈았다. “어쨌든 구명정을 준비해요. 살아돌아온다 하더라도 이렇게 높은 배 까지 뛰어오를 수는 없을 테니.” 바다 속은 신비했다. 태초의 풍경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느낌이랄까. 피부가 급속도로 차가워지는 것에 잠시 적응을 못하고 있던 니콜라 스는 이윽고 감각을 되찾았다. 수면 위로 희미하게 비쳐 보이는 태 양,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시퍼런 물결, 처음 보는 물고기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펴보았다. 단단히 힘이 들어간다. 그는 자신이 숨을 쉬지 않고 있음을 선명하게 인지했다. 하지만 괴롭 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어쩌면 바다가 자신을 환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청부업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그는 서투른 일솜씨 때 문에 목표를 제거한 뒤 추격을 따돌리지 못하고 절벽 끝까지 몰리게 되었던 적이 있었다. 총에 맞는 것보다는 바다에 뛰어드는 게 생존 확률이 높았기에 그는 주저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 확인사실을 위해 적들은 절벽 아래 수면으로 총탄을 쏘아댔고, 그는 적의 눈을 피하기 위해 깊이 깊이 잠수했다.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바다는 자신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체온증에 시달리지도 않았고 수압을 느끼지도 않았다. 호흡을 정지 했지만 조금도 숨이 막히다는 느낌은 없었다. 마치 몸 전체를 감싼 바닷물이 피부를 통해 산소와 체온을 공급해주 듯, 자궁 속의 태아처럼 아늑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그날 무사히 돌아와 니르에게 그 이야기를 했을 때 니르는 신의 사 랑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니르를 못 본지도 벌써 2년이구나…. 이번에 미국에 가면 니르를 꼭 만나봐야지.’ 누나와 함께 있는데만 정신이 팔려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말하면 섭 섭해할지도 모르니까 열심히 돈을 버느라 못 왔던 거라고 핑계를 대 자. 니르는 눈치챌지도 모르지만 착하니까 이해해줄지도 몰라. 말할 수 없이 따뜻하고 아늑한 기분에 심취해 있던 니콜라스는 검은 그림자가 저 멀리서 가까워지는 것을 감지했다. 몽환에 젖어 있던 눈 이 번쩍 뜨이며 살기 띤 미소가 그려졌다. ‘너구나.’ 사신의 웃음을 띤 그는 천천히 잠수함을 향해 다가갔다. 수영을 잘하 는 것도 지느러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조금도 어렵지 않게 잠수함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는 잠수함의 머리 부분에 달라붙었다. 그때 발사구가 열리며 두 발 의 어뢰가 다시 발사되었다. 눈살을 찌푸린 그는 손에 힘을 응축시켰다. 황금이 녹듯 샛노란 광채 가 일어나며 손 주변의 해수가 증발하기 시작했다. 손바닥 위로 둥실 떠오른 빛의 구체는 해수의 접근을 거부하며 스스 로 강한 빛을 내었다. 그 모습은 흡사 우주 한가운데 떠 있는 태양처 럼 고결해 보였다. 한껏 차가워진 표정으로 발밑의 잠수함 선체를 흘끗 바라본 그는 어 뢰를 향해 힘껏 에너지 구체를 던졌다. by eden 어제 낸 깜짝 퀴즈의 정답을 맞추는 분이 있다면 2연참을 하겠 다고 한 약속 말입니다. 예에. 그 중에 정답이 있긴 있었습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어제는 4월 1일이잖아요. 고치기 지우기 목록 Corean 콜록...12시가 되는 순간 업로드 하셨나보네요.. 이러면 내일을 기다리기가 힘든데 ㅠ 2005/04/02 실탄 그게 아니라 10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한 뒤에도 40분 정도는 아는 누님과 메신저 채팅을 했고요.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췄지요. 2005/04/02 volunteer 마지막에 만우절이란.. 말에 손이.. 후들후들.. 2005/04/03 영 컥.. 만우절........ 2005/04/03 haneui 부들부들 2005/04/03 4.1 꾸엑,,,,,훠이 훠이 .... 2005/04/03 희야 슥슥슥... 2005/04/03 Jin 아아...유조선이였나요? 전혀 생각지도 못 했던 곳이군요... 만우절만우절만우절....(...부들부들...) 2005/04/03 대천사미카엘 만우절..........ㅜㅡㅜ 2005/04/03 휘동이 설마 설마 했는데...결국 만..우.....절...털썩 ㅠㅠ 2005/04/03 루리에르피나 쓰으으윽 쓰으으윽(칼가는 소리) 2005/04/04 루리에르피나 쓰으으윽 쓰으으윽(칼가는 소리) 2005/04/04 꼬마코린 ...철컥...(장전) p.s:설마 니콜라스가 하데스의 아이...?왠지 그런 생각이-_-;; 2005/04/05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4/18 페이지 ▶ 304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4) [7] 실탄 2005/04/0813Kb 616 ▶ 303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3) [6] 실탄 2005/04/0711Kb 634 ▶ 302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2) [9] 실탄 2005/04/0613Kb 623 ▶ 301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 [13] 실탄 2005/04/0511Kb 735 ▶ 300 - RESTART(6) [9] 실탄 2005/04/0413Kb 693 ▶ 299 - RESTART(5) [10] 실탄 2005/04/0314Kb 634 ▷ 298 - RESTART(4) [13] 실탄 2005/04/0212Kb 696 ▶ 297 - RESTART(3) [15] 실탄 2005/04/0112Kb 689 ▶ 296 - RESTART(2) [7] 실탄 2005/03/3113Kb 645 ▶ 295 - RESTART(1) [9] 실탄 2005/03/3013Kb 783 ▶ 294 - 추억의 그림자(6) [6] 실탄 2005/03/2912Kb 700 ▶ 293 - 추억의 그림자(5) [12] 실탄 2005/03/2814Kb 687 ▶ 292 - 추억의 그림자(4) [15] 실탄 2005/03/2412Kb 816 ▶ 291 - 추억의 그림자(3) [9] 실탄 2005/03/2012Kb 883 ▶ 290 - 추억의 그림자(2) [7] 실탄 2005/03/147Kb 885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 4 [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0657 :: 299 - RESTART(5) 실탄(cruel) 05-04-03 :: :: 14129 위협용으로 발사되었던 어뢰는 뜻하지 않은 방해를 받아 전방에서 폭발했다. 강렬한 수압이 터지며 함체가 크게 뒤흔들렸다. 그러나 바 닷물은 니콜라스에게는 조금의 피해도 주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딱딱한 함체에 귀를 갖다댔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윙윙거리며 컴퓨터가 작동하는 소리만이 들렸을 뿐, 사람의 말소리 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다. 그는 좀더 청각에 집중했다. 냉각팬이 돌아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 로 감각이 극대화되었다. 이쯤 되면 말소리까지는 아니더라도 호흡소리나 심장 소리 정도는 들릴 터이다. 그러나 역시 기계음을 제외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 는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뿐이다. 이 녀석은 무인 잠수함인 것이다. ‘재미없게 됐네.’ 수압에 눌려죽으며 공포에 죽어가는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불가능하 게 됐다. 그는 손에 에너지를 집중해 장갑 선체 안으로 쑤셔넣듯 박 아넣었다. 그리고 재빨리 함체를 박차고 일어나 멀어졌다. 잠수함의 전면에 금이 가는가 싶더니 외부의 수압을 이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찌그러졌다. 고철덩어리로 전락한 채 어두운 심해로 가라앉 는 잠수함을 말없이 바라보던 니콜라스는 수면을 향해 솟구쳤다. “푸하!” 그는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배를 찾아 이리저리 둘 러보다가 순간 경직되었다. 저 멀리 보이는 배의 상공에 몇 척의 항 공기가 정지한 채로 갑판에 와이어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생각할 것도 없이 잠수한 그는 배가 있는 방향을 향해 재빠르게 나 아갔다. 배의 좌현에 도달하자 그는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 리고 손가락을 좌현 표면에 박아넣으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 가락이 박힐 때마다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늦었어, 엘리우스.” 갑판에 올라온 순간 그는 이것이 꿈이기를 바랬다. 기억에 남아 있는 얼굴, 유하가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깔보듯 주시하고 있었다. 잠깐 패닉에 빠져 있던 니콜라스는 침착을 되찾고 물었다. “유빈이는 어디 있지?” “엔젤의 아이? 위를 봐.” 그는 반사적으로 머리 위에 떠 있는 항공기를 바라보았다. 한 남자가 유빈을 안은 채로 얼굴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이는 잠이 들었는지 조 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시끄럽게 굴면 일이 힘들어지니까 마취시켰어. 건강에는 지장이 없 으니 안심해도 될 거야.” “어떻게 여기에 나타날 수 있었지? 내가 자리를 비운 것은 삼십 분 도 채 되지 않는데.”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항공기라서 가능했던 거야. 멀리서 스탤스 기 능을 갖춘 배에 대기하고 있다가 이륙하면 소나 정도로는 발견할 수 없으니까. 덧붙이자면 특수 목적으로 건조된 배라서 항공기 이착륙은 물론이고 잠수도 가능해.” “설마 프로메테우스가?” “바로 맞췄어.” 완전히 당했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다. 니콜라스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우리를 도와준 사람들은 어쨌지?” “안심해. 쓸데없이 사람을 해칠 생각은 없어. 사령부에 잠만 재워놨 으니까 조금 있다가 깨어나서 안전하게 돌아가게 될 거야. 단.” 얼음같은 눈동자가 니콜라스의 얼굴을 싸늘히 노려보았다. “너는 살아돌아가지 못해.” 희미한 빛이 그녀의 손에 번뜩인 순간 니콜라스는 직감적으로 위험 을 예감했다. 그것은 공포나 분노보다는 객관적인 사고에 따른 판단 이었다. 잠수해 있는 잠수함을 때려부수는 것은 오히려 쉽다. 잠수함은 어디 까지나 적 잠수함이나 선박을 격침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지, 심해 한 가운데를 누비고 다니는 인간을 사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슬쩍 다 가가서 겉장갑을 뚫고 해수가 침입할 수 있게 만들면 그만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수십 미터 상공에 떠 있는 수송기까지 날아오를 재주도 없는 데다가, 이 배가 폭파되기라 도 한다면 얄짤없이 죽은 목숨이다. 바다로 도망친다면 살 수는 있겠 으나 이대로 아이를 빼앗기고 혼자만 살아돌아가면 누나에게는 뭐라 고 한단 말인가. “너무 흥분한 거 아니야? 너희들 말대로 내가 엘리우스라면, 날 죽이 는 것은 너희들에게도 좋지 않을 텐데?” “엘리우스가 아니라면 너는 여기서 살아돌아갈 수 없어. 엘리우스가 맞다면 의례가 끝난 후에 죽게 될 거야. 어느 쪽이든 간에 너는 살아 남지 못해.”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유하는 에너지탄을 날렸다. 니콜라스는 날카로운 빛줄기와 함께 유성우처럼 쐐도해 들어오는 에 너지탄을 가까스로 피했다. 가슴이 따끔해서 흘끗 내려다보니 방금 공격이 스치고 지나간 핏자 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붉은 피가 찢어진 피부를 적셨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그것을 느낀 니콜라스는 흙빛 이 되었다. 유하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강한 자의 여유라기보다는 사무적이라 고 해야 어울릴 듯한 어투였다. “너한테 그런 치욕을 겪은 뒤 연습을 많이 했어. 힘 자체에서는 밀릴 지 모르지만, 컨트롤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 “고작 스친 거 가지고 너무 자만하는 거 아니야?” 니콜라스는 몸을 웅크렸다가 갑판을 박차고 뛰었다. 유하는 덤덤하게 양손을 사용해 에너지탄을 그에게 날렸다. 에너지탄은 마치 레일건처 럼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날아들어 배의 이곳저곳에 상처를 냈다. 그는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을 통해 에너지탄의 방향을 예측해 유하 에게 접근했다. 몇 번 위험한 고비가 있었지만 순식간에 호흡 소리가 느껴질 만큼 가까워졌다. 그러나 유하는 전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이 정도쯤은 예상했 다는 표정이었다. 니콜라스는 위험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다 판단 하고는 손아귀에 힘을 집중시켜 뻗었다. 유하의 목을 조를 셈이었다. 순간 유하의 손이 가슴 쪽으로 거둬들여지며 붉은 빛이 났다. 투명하 면서도 붉은 빛의 칼날이 손끝에서 솟아올라 위협했다. 니콜라스는 황급히 몸을 뒤로 뺐으나 관성의 방해에 쉽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반격을 피하는데 성공했다. 깔끔하게 잘려나간 앞머리 카락을 바라보며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적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다는 생각에 얼른 표정을 지 우고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정말 많이 강해졌구나, 너.” “예전에는 너한테 반항 한 번 제대로 못했지.” “그 정도면 충분히 아틀란티스 내에서 한 자리 차지할 만한데?” “단지 싸움을 잘한다고 해서 높은 지위를 줄 정도로 야만적인 국가 가 아니야, 아틀란티스는.” “그렇겠지. 일 만 년이나 되는 세월을 바다 속에서 썩었으니 아련하 시겠어?” 그 말에 울컥한 유하는 칼날을 한순간에 길게 만들어 니콜라스를 위 협했다. 그러나 그는 어렵지 않게 피해냈다. 조금 전에는 너무 가까 이에서 예기치 않은 반격을 받은 터라 앞머리카락이 잘리는 수모를 당했을 뿐, 미리 조심하고 있으면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는 자신이 대단히 불리하다는 것을 선명하게 인지했다. 유하를 제압하고 유빈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 능이나 마찬가지다. 사력을 다한다면 유하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죽일 수는 있겠으 나, 시간을 끄는 동안 비행기가 유빈을 태우고 도망쳐 버리면 넋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각만 하지 말고 덤벼 봐!” 이번에는 유하가 먼저 공격해왔다. 빛의 칼날이 종횡무진으로 허공을 난도질했다. 니콜라스는 뒤로 물러나며 빠른 몸놀림으로 공격을 하나 하나 피했다. 그러나 피하기만 해서는 결국 지게 된다. 그 증거로 그의 뺨과 팔뚝 등에 자그마한 생채기가 하나둘씩 새겨지고 있었다. “날 똑바로 보지도 못하면서 공격은 정확한걸?” “나는 너처럼 문란하지 않아!” “이왕이면 조숙하다고 해줘.” “입 닥쳐!” 분노한 유하는 칼날의 숫자를 더 늘렸다. 허공을 유영하는 칼날은 자 유의지를 가진 것처럼 변화무쌍한 움직임으로 그를 공략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진다. 그의 머리 속에서 패배라는 두 글자가 조금씩 뚜렷해졌다. ‘할 수 없지.’ 그는 틈을 노렸다가 이를 악물고 유하를 향해 달려들었다. 일부러 가 슴팍을 내준 허술한 공격이었다. 유하는 그것도 모른 채 동귀어진을 시도한다 판단하고는 원거리에서 에너지탄을 날렸다. 사람 머리통만한 빛의 구체는 니콜라스의 가슴을 직격했다. 미리 각 오하고 있던 그는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아냈다. 폭발의 충격에 난간까지 튕겨난 그는 입술에서 피를 흘리며 손을 앞 으로 뻗었다. 최후의 공격을 하고 싶지만 부상이 너무 심해 말도 할 수 없는 패배자의 연기를 완벽하게 해냈다. 그리고 저항없이 뒤로 넘 어지며 바다 속으로 풍덩 빠졌다. 손쉬운 승리에 잠시 넋이 나가 있던 유하는 서둘러 난간으로 달려가 밑을 내려다보았다. 바닷물 표면이 붉게 물들어 있다가 점점 색깔이 연해졌다.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이긴 거야?” “그런 것 같군요.” 유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뒤돌아보았다. 키가 크고 준수한 이미지를 풍기는 남자, 프로메테우스가 상냥하게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말도 안 돼요. 엘리우스는 강하다고요. 아무리 내가 죽어라 연습했 다지만 고작 이 정도에 이렇게 간단히….” “그는 삼십 분이나 되는 시간 동안 바다에 잠수해 있었던 데다가 맨 손으로 잠수함 한 척을 격침시켰습니다. 아무리 그가 인간을 초월했 다고는 하지만 휴식도 없이 아가씨와 싸웠으니 이기는 것은 불가능 했겠죠. 그래도 최후까지 그는 용감히 싸웠습니다.” 아쉽다는 표정을 가득 지은 프로메테우스는 저 멀리 가까워지고 있 는 자신의 배에 시선을 던졌다. 잠수함의 기동성에 항공모함의 이점 을 결합시킨 특수 선박이었다. 유빈을 태운 수송기가 갑판에 내려앉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말을 이 었다. “내가 경솔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그에게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 건데 그랬습니다. 아무튼 얼마 후면 이 지점에 핵미사일이 날아올 테니 빨리 피하는 게 좋겠 습니다. 심해로 잠수하면 안전할 겁니다.” “….” “앤슨씨가 이 일을 알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군요. 어쨌든 엘리우스가 사망했으니 혁명은 늦춰지게 되었군요.” 충격에서 겨우 깨어난 유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니콜라스는 엘리우스가 아니에요.” “예?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숙주가 죽으면 공명신수인 마기는 숙주의 몸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숙주를 찾아가게 돼요. 그때 발생하는 에너지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숙주가 어디쯤에서 태어나는지 알 수 있죠. 하지만… 마기는 나타나 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제임스 해론 박사가 엘리우스일지도 모르겠군요.” “그것까지 알아요? 프로메테우스는 정말 대단하군요.” “이래 봬도 세계의 균형을 유지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그 정도 쯤은 파악하고 있어야 큰소리를 칠 수 있죠.” 프로메테우스는 유하에게 레이디 퍼스트라며 먼저 탑승하길 권했다. 유하는 사양하지 않고 먼저 항공기에 올랐다. 뒤늦게 올라온 프로메 테우스는 유하의 옆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메며 아까 하던 말을 계 속 이어나갔다. “니콜라스는 고급 청부업자이기는 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쉬운 상 대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혼자였으니까요. 거기다가 인질도 있었고 말입니다.” “인정해요.” “하지만 제임스 해론 박사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는 지금 레이온과 같이 있으니까요.” “레이온 박사를 잘 아는 듯한 말투네요. 그는 배신자예요.” “아틀란티스와 거래를 한 사이였을 뿐이죠. 계약내용은 착실하게 이 행했으니 사기꾼이라 몰아붙일 명분도 없습니다. 어쨌거나 제임스 해 론 박사는 니콜라스씨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할 겁니다. 레이온은 정말 뛰어난 과학자거든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당신이 있잖아요?” “하하, 저에게 지나친 기대를 걸면 대단히 곤란합니다. 저는 그저 균 형을 깨지 않는 범위 내에서 관조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유하는 시선을 살짝 늘어뜨리며 그를 훔쳐 보았다. 키가 크고 잘생긴 얼굴에 쾌활하기까지 해 여러 모로 호감이 가는 타입이다. 이따금씩 느껴지는, 고뇌의 흔적으로 보이는 어두운 그늘까지도 사람의 흥미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 자신과는 나이 차이가 상당히 나지만 깍듯하게 존대를 써주며 숙녀 취급을 한다. 그러고 보니 그가 누군가에게 반말을 하는 것을 본 적 이 없는 것 같다. 항상 모든 이에게 똑같이 친절하고 상냥한 남자. 그러나 겉표면만 따 스할 뿐인 그의 체온에는 사람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절대 냉정 이 분명 자리잡고 있다. 어쩌면 그러한 냉정함이 그의 진심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세계의 패자가 될 수 있는 힘을 갖추었으면서도, 세계의 균형을 유지 하는 자리를 거머쥐었을 리가 없을 테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다는 욕망을 떨구지 못한 채 유하 는 배에 옮겨 탔다. 항공기를 격납고에 집어넣은 뒤 배는 곧바로 잠 수했다. 곧 밀어닥칠 핵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유하는 가장 깊숙한 곳에 마련된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아이를 눕혀놓고 살피고 있던 남자가 황급히 일어나서 나갔다. 무릎을 꿇은 유하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넘겼다. 형언하기 어려운 설렘이 가슴을 뚫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 아이가 바로 엔젤의 아이다. 우리를 구원해줄 메시아의 소중한 보 물이다. 아이가 우리 손에 있는 한 엔젤은 이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한동력과 마기, 엔젤과 엘리우스만 있다면 혁명을 완성하는 것은 꿈이 아니다. 아틀란티스 대륙은 융기하고 다시 한 번 이 행성의 지 배자가 될 것이다. 지구를 지배하는 민족의 미래를 상상하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던 유하는 문득 낯설지 않은 기운을 느꼈다. 그녀는 대번에 안색이 변한 채 사령실로 향했다. 프로메테우스가 그 녀를 보고 의아해했다. “무슨 일입니까?” “주변을 탐지해봐요. 뭔가가 접근하고 있어요.” “설마요? 접근하고 있는 적 어뢰나 잠수함은 없습니다. 아니, 소나 사정거리에 잡히는 물체라고는 조금 전의 그 배 말고는 아무것도 없 습니다.” “필터링 기능을 끄고 다시 탐지해봐요. 잠수함이나 어뢰… 그보다는 훨씬 작을 수도 있어요.” 심상치 않아 하는 어투에서 뭔가를 눈치챈 프로메테우스는 신중하게 탐지 기능의 설정을 조정했다. 순식간에 디스플레이에 복잡한 점이 나타나며 눈을 어지럽혔다. 주변을 떠도는 물고기떼들까지 전부 인식 하다 보니 뭐가 뭔지 판단할 수 없을 정도였다. “호오? 정말 뭔가 이상하군요.” “뭔데요?” “이 물체를 보시지요.” 프로메테우스는 빠르게 움직이는 작은 점 하나를 가리키고는 동시에 다른 인식점들은 표시되지 않게 했다. 디스플레이에 목표가 한 개만 표시되자 알아보기가 쉬워졌다. “대단히 빠른 속도로 본함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알려진 물고 기가 낼 수 있는 속도가 아닙니다. 게다가 같이 움직이는 물체도 없 이 혼자서 다가오고 있군요.” 유하는 긴장한 표정으로 점을 주시했다. “어떤 물체로 추정되죠?” “글쎄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크기로 놓고 보자면… 사람 하나 정도로 추정됩니다만.”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겉잡을 수 없는 희열이 그녀의 가 슴을 감쌌다. 자신이 왜 이렇게 흥분하는지 모른 채 가슴을 움켜잡고 있던 그녀는 이윽고 침착함을 되찾고 웃음을 띠었다. “어쩌면 제임스 해론을 잡으러 갈 필요가 없겠는데요.” by eden 아슬아슬하게 3분 남기고 세이프. 일일연재는 지켰습니다. 덧붙여, 가끔 소설 파일을 줄 수 없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확실하게 못박아두건데 <절대 불가>입니다. 저는 대다수의 분들에 대하여 <연재하는 사이트에서는 당신의 내 글 을 보는 것을 허용하겠다>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작 가분들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저런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어디까지나 <연재하는 사이트에서의 관람 허용>이지, 그 외의 경우는(예 : 불펌 갈무리 등등) 허용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아마 대부분은 아실 거라, 그리고 이해하실 거라 생각하고 생략하겠습니다. 저만이 가진 개인적인 이유를 굳이 하나만 대자면, 몇 년이 지나기 전에는 삭제할 예정이라서 그렇습니다. 나이를 좀 먹은 다음에 과거 에 썼던 글을 보면 사람은 참 부끄러워지기 마련이더군요. 안 그래도 소엄 초기글을 보면 낯뜨거워질 정도인데, 그것이 타인의 손에 두고 두고 남도록 파일을 줄 리가 없지요. ps : 김종성님. 하루빨리 연락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고치기 지우기 목록 세닐리아 수고하셨어요^^ 2005/04/03 안녕히 니콜라스는 사람이 맞는 겁니까? 혹시 인조인간은 아닌건지.. 쿨럭 2005/04/04 다이제스트 니콜라스는 아마 음... 아틀란티스의 결계를 치기위해 희생한 양반의 환생체인것으로... 2005/04/04 영 마더가 무엇 때문에 니콜라스 만들었을지 궁금하군요.. 2005/04/04 셜이움 프로메테우스는 니콜라스가 안죽었다는거 알텐데... 핵미사일이 안떨어지니... 으음... 아틀란티스는 니콜라스가 죽으면 그자리로 핵미사일이 투하된다는걸 모르나요? 2005/04/04 염원 갈무리따윈 생각해본적이 없었는데 해보니깐 안되네; 2005/04/04 실탄 셜이움/ 본문에 <곧 핵미사일이 떨어질 테니 잠수하겠다>라는 프로메테우스의 대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곧바로 잠수했죠. 프로메테우스는 당연히 핵미사일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발사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굳이 확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화 마지막 부분을 보시면 알겠지만 니콜라스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눈채친 것입니다. 2005/04/04 실탄 덧붙여 과거 프로메테우스는 앤슨에게 핵미사일 거래를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아틀란티스는 그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일부러 바다 위에 고립될 때까지 내버려두었던 것도 어느 정도 있고요. 2005/04/04 셜이움 유하는 모르는걸 보니 일부 사람들만 알고 있는것 같은데... 맞나요? 2005/04/04 실탄 정보의 등급과 전파 범위라는 게 있으니까요. 모든 이들이 다 알고 있지는 않을 테죠. 2005/04/04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4/18 페이지 ▶ 304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4) [7] 실탄 2005/04/0813Kb 616 ▶ 303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3) [6] 실탄 2005/04/0711Kb 634 ▶ 302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2) [9] 실탄 2005/04/0613Kb 623 ▶ 301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 [13] 실탄 2005/04/0511Kb 735 ▶ 300 - RESTART(6) [9] 실탄 2005/04/0413Kb 693 ▷ 299 - RESTART(5) [10] 실탄 2005/04/0314Kb 636 ▶ 298 - RESTART(4) [13] 실탄 2005/04/0212Kb 696 ▶ 297 - RESTART(3) [15] 실탄 2005/04/0112Kb 689 ▶ 296 - RESTART(2) [7] 실탄 2005/03/3113Kb 645 ▶ 295 - RESTART(1) [9] 실탄 2005/03/3013Kb 783 ▶ 294 - 추억의 그림자(6) [6] 실탄 2005/03/2912Kb 700 ▶ 293 - 추억의 그림자(5) [12] 실탄 2005/03/2814Kb 687 ▶ 292 - 추억의 그림자(4) [15] 실탄 2005/03/2412Kb 816 ▶ 291 - 추억의 그림자(3) [9] 실탄 2005/03/2012Kb 883 ▶ 290 - 추억의 그림자(2) [7] 실탄 2005/03/147Kb 885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 4 [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0765 :: 300 - RESTART(6) 실탄(cruel) 05-04-04 :: :: 12863 잠수함의 움직임을 담당하는 시스템은 곧바로 전투 준비를 했다. 그 러나 적은 잠수함이 아닌 사람이다. 잠수함 표면에 바짝 붙어 있는 적을 무슨 재주로 공격할 것인가. 절대 공격 목표로 설정될 수 없는 존재가 공격 목표가 되었다는 현실에 알고리즘이 뒤틀리지 않은 것 만 해도 다행이었다. "이번에 돌아가면 시스템을 좀 손봐야겠습니다." "어째서요?" "애초에 해저에서 맨몸인 인간과 전투를 하게 될 거라는 가정은 넣 지 않았으니까요. 인공지능이 꼬였을지도 모릅니다." "고작 그 정도로 꼬인단 말인가요?" "나름대로 정교하게 짜여진 인공지능이니까요. 휴먼형 인공지능이라 면 꼬이지는 않습니다만, 잠수함에 그런 인공지능을 설치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한다…?" 장착 무기라고는 미사일과 어뢰가 전부이다. 기관총이나 발칸포 따위 가 장착되어있을 리가 없다. 내부 무기고에 총기류가 있긴 하지만 바 다 속에서 해치를 열고 나가는 것은 바보 짓이다. "할 수 없군요. 부상해야겠습니다." 유하가 끄덕임으로 동의하자 프로메테우스는 시스템에 부상 명령을 내렸다. 디스플레이는 Yes라고 대답하고는 곧바로 부상을 시도했다. 갑자기 함체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탁자에 놓인 찻잔이 쏟아졌고 프로메테우스와 유하도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모서리를 붙잡고 간신히 중심을 유지한 유하는 떨떠름한 얼굴이 되 어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무언가가 부상을 막고 있습니다." "무언가요?" 둘은 동시에 서로를 마주보았다. 니콜라스가 설마 이 거대한 잠수함 의 부상을 억지로 누르고 있단 말인가? "이거… 그동안 우리가 니콜라스씨를 너무 과소평가했던 것 같군요. 맨몸으로 잠수함의 부상을 막는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이건 말도 안 돼요." "그렇게 따지면 이런 깊은 바다에서 짜부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다 는 것 자체가 불가능이 아닌가요?" "하긴, 그렇기야 합니다만." 프로메테우스는 액티브 소나를 통해 니콜라스에게 모르스 신호를 보 냈다. 관심 있게 지켜보던 유하는 이윽고 그의 손가락이 멈추자 궁금 증을 표시했다. "뭐라고 한 거죠?" "잠수함이 격침되면 서유빈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 일단 부상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가만, 그가 대답을 하는군요." 소나에 미약한 신호가 잡혔다. 프로메테우스는 신중하게 신호음을 체 크했다. "서유빈군을 내놓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하는군요. 부상을 허락할 테니 즉시 서유빈 군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엔젤의 아이는 절대 줄 수 없어요. 우리가 보호해야 해요." 유하는 단호하게 결의를 표시했다. "일단 부상한 뒤 이야기를 합시다. 서유빈군이 있으니 괜한 짓은 못 하겠지만 만에 하나 함체에 공격을 받으면 곤란해집니다." "협상은 없… 알았어요. 일단 이야기를 해보자고 해요." 프로메테우스는 이야기를 해보자는 말에 별다른 의미를 붙일 수 없 다는 걸 알고 있었다. 초조해진 상대방이 극단적인 짓을 저지르지 않 게끔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이야기를 해보자는 말에 니콜라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알았다고 대 답을 해왔다. 선내를 빨갛게 비추던 경고불빛이 정지하며 잠수함이 서서히 부상했다. 잠수심도가 0인 것을 확인한 유하는 해치를 열고 잠수함 밖으로 나 갔다. 그녀는 머리를 내밀면서 경계를 거두지 않았다. 불빛이 번쩍이며 뒤통수를 향해 뭔가가 날아왔다. 그녀는 재빨리 뒤 돌아보며 벽을 쳐서 공격을 막았다. 파르스름한 불꽃이 튀며 에너지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야기를 하자고 했을 텐데 이렇게 기습을 하기야?" 유하는 날카롭게 니콜라스를 노려보았다. 그는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 자 대단히 아쉬워했다. 한순간에 유하를 제압하고 내부로 침입해 유 빈을 구출하려는 계획이 허사가 된 것이다. "생각보다 어리석네. 바다 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다면 섣불리 살아 있다는 걸 드러내지 말고 우리를 따라왔다가 내릴 때 덮쳤으면 더 나았을 텐데." "그러려고 했는데 그쪽에서 먼저 눈치를 채버렸잖아." "어떻게 알았지? 우리가 눈치챘다는 거." "갑자기 부상하려고 했으니까. 내가 죽었다고 여긴다면 이 근처에 핵 미사일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절대 부상할 리가 없잖아." "어리석다는 말은 취소. 제법인걸?" 매끈한 잠수함 표면에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고 섰다. 유하는 예의 그 빛의 칼날을 양손에 형성한 채로, 니콜라스는 언제라도 에너지 직 격탄을 날릴 준비를 한 채였다. 전투력은 모르나 심리적인 면에서는 유하가 다소 불리했다. 조신하게 살아왔던 그녀는 적이라 해도 연하의 소년이 알몸으로 서 있는 모습 에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난감했다. 그녀의 곤란함을 눈치챈 니콜라스는 피식거렸다. "나랑 하고 싶어?"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만 해!" "내숭 떨 것 없어. 네 몸은 날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 걸." "엘리우스!!"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그럼 그 빨개진 얼굴은 뭐지?" 그의 음성이 야릇하게 느껴졌다. 형체 없는 유혹이 나긋나긋한 목소 리 가득 담겨 있었다. 무형의 실루엣 뒤에서 매혹의 향기가 손짓을 하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니콜라스는 어느새 자신의 뒤로 돌아가 목 줄기에 손가락을 대고 있었다. 한줄기 빛이 맺힌 손가락은 언제든 에 너지 광선으로 자신의 목을 꿰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공포나 두려움에 앞서 조금 전에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 던 건지 당혹스러웠다. 그 마음을 눈치챈 니콜라스는 킬킬 웃으며 그녀의 가슴을 손으로 잡 았다.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욕을 느꼈다. "균형미는 괜찮네. 한 번 건드려보고 싶은 정도인데?" "너, 네가 몇 살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그렇게 질색할 것 없어. 난 열두 살인가 때부터 여자를 알았으니까." 가슴을 어루만지던 손을 올려 턱을 감싸쥔 니콜라스는 시선을 깔고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등을 내줬는지 궁금하지?" 그녀는 이를 악물며 분함을 깨물었다. "간단해. 난 사람의 마음을 매혹할 줄 알거든. 최면의 일종이지. 전에 도 말했지만 난 최면이 특기야." "죽일 테면 죽여. 하지만 엔젤의 아이는 넘길 수 없어." 해치가 자동으로 닫혔다. 니콜라스는 흥미 없다는 듯이 흘끔 내려다 보았다. "널 포기하고 잠수함은 도망가시겠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지. 난 지옥 끝까지 이 녀석을 쫓아가서 유빈이를 구할 생각이거든." "아무리 네가 엘리우스라 해도, 몇날 며칠 동안 숨도 안 쉬고 잠수함 에 매달려 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런 건 필요 없어. 바다가 나에게 힘을 주니까." 그 말에 유하는 움찔했다. 니콜라스는 자신보다 키가 조금 큰 그녀를 조롱하듯 꽉 껴안으며 귓 가에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청부업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실수로 바다에 빠진 적이 있었어. 나는 죽음을 예감했는데, 이상하게 괴롭다는 느낌은 전혀 없 었지. 해저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는데 수압을 느끼지도 않았고, 숨을 쉬지 않았는데도 답답하지 않았어. 난 설마 내가 벌써 죽은 건가 하 고 생각했어." "…."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어. 바다가 나를 감싸주고 있었던 거야. 바다 는 나를 수압으로 누르지도 않고, 내가 숨을 쉬지 않아도 견딜 수 있 게 해줘. 어떻게 잠수함이 부상하지 못하게 막았는지 궁금해? 내가 바다에게 부탁했어. 저 녀석이 떠오르지 못하게 막아달라고. 지금 내 가 한 마디만 하면 이 녀석은 당장 찌그러들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될 거야."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듣고 있던 유하는 더듬더듬 되물었다. "어, 어쩌겠다는 거야?" "말했잖아. 유빈이를 내놔." "그럴 순 없어. 날 죽여도 그렇겐 못해." "정말이지 지긋지긋해. 혁명인지 나발인지 하는 것에 집착하는 너희 들 말이야!" 니콜라스는 유하의 뺨을 거칠게 짝 쳤다.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 며 나동그라졌다. 천만다행으로 미끄러져 바다에 빠지지는 않았다. "누나와 날 괴롭히는 건 이만 포기해! 우리는 네놈들 장난감이 아니 란 말이야!" 몹시 흥분한 그의 눈이 빨갛게 물들었다. 살해당한 사람의 피에 물들 여진 듯 소름끼치는 선홍색이었다.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그의 전신에서 오오라처럼 뿜어져나왔다. 그 의 주변이 일그러져 보이며 뜨거운 열기에 숨이 막혔다. 유하는 극도의 공포에 질렸다. 아까 자신이 이겼던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아, 하긴 그때는 당한 척 연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다른 게 당연한 걸까. 아니, 단순히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는 아까보다 배 이상의 강한 힘 을 방출하고 있다. 원론적인 분노가 그의 모든 잠재력을 한계 이상으 로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만 년이 넘게 게이트를 유지해온 그의 진정한 힘, 게 이트의 폐쇄를 막기 위한 희생물서의 진정한 분노인지도 모른다. 유하는 옷안에 더듬더듬 손을 넣었다. 탁구공 만한 구체가 손에 딱딱 하게 잡혔다. 이것을 준 사람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엘리우스를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마기가 깃들어 있던 수호제황석을 가공하여 만들었다는 구슬만이 엘 리우스를 제압할 수 있다고 했다. 단순히 무력으로 제압하려 한다면 그는 세상 끝까지 모든 추적을 뿌리치고 도망칠 수 있다 했다. 그만큼 절대적 효과를 갖고 있지만, 자칫 엘리우스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기에 그 사용은 절대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하도 아까는 이것을 사용하지 않았던, 아니 못했던 것이다. 선홍빛 구체가 허공을 날아왔다. 저 공격은 나를 죽일 수 있다. 나는 죽게 될 것이다. 저 빛에 휩쓸려 세포 한 조각 남지 못하게 갈가리 찢어질 것이다. 격한 두려움에 점령당한 유하는 짧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구슬을 꺼내 힘껏 던졌다. 구슬은 빠르게 회전하며 빛의 공격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 회전에 휘말려 빛의 중심부가 뜯어진 살점처럼 헝클어졌다. 눈 하나 깜박일 시간도 못 되는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마치 영원의 흐름처럼 길게 느껴졌다. 시간이 그대로 얼어붙은 듯했다. 니콜라스는 구슬이 자신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고, 가슴팍까지 날아올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구슬은 고속으로 발사된 탄환처럼 맹렬히 회전하며 그의 가슴을 파 고들었다. 전기톱으로 난도질당한 시체처럼 시뻘건 피가 허공으로 뿜 어지며 혈화를 그렸다. 그의 온몸이 시퍼렇게 변색하기 시작했다. 마치 죽음의 멍이 전신을 뒤덮은 듯한 기괴한 모습이었다. 유하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지 만, 아무런 소리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이게 무엇…." 니콜라스는 피에 젖은 기침을 토하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더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시퍼렇게 물들었던 온몸이 어 느덧 새하얀 빛깔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유하는 질린 눈으로 괴로워하는 그를 보았다. 아까 그를 쏘아 배 아 래로 떨어뜨렸을 때와는 다른, 슬픔에 가까운 빛깔이 그녀의 마음을 뒤덮었다. "괘, 괜찮아 재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니콜라스를 살폈다. 숨쉬는 것도 괴로운 것처럼 보였다. "미, 미안해! 실수였어.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 미처 말을 잇기도 전에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눈이 멀어버릴 듯한 섬광에 유하는 그만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물 러나지 않으려 해도 빛은 그녀를 몰아냈다. 아니, 니콜라스의 주변의 모든 것을 밀어냈다. 힘겹게 눈을 뜬 유하는 니콜라스가 쓰러진 채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 을 보았다. 순백의 날개 한 쌍이 그의 등에서 솟아나는 광경을 언뜻 본 것 같았다. 날개는 서서히 타오르는 화염에 휩싸이며 붉디붉은 색 으로 변했다. "재키…?" 그녀는 더듬더듬 그를 불렀다. 그러나 자신의 귀에도 들리지 않는데 그가 들었을지는 의문이다. 밝은 후광의 중심에서 누군가가 그를 감싸안는 것이 보였다. 유하는 필사적으로 눈을 뜨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를 감싸안는 이가 발치까 지 내려오는 긴 보라색 머리카락을 지녔다는 것만 알았을 뿐, 그 사 람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이윽고 거짓말처럼 빛이 사라졌다. 유하는 털썩 주저앉은 채 멍하니 허공만 주시했다. 이상하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치 잃어버린 것을 확인한 사람처럼. 니콜라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에도 그의 자취는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전 그를 데려간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그건 환영이 아니었단 말인가. "아니야…. 환영 따위 아니야…." 그녀는 눈꺼풀을 깜박거렸다. 강한 빛에 노출된 눈은 완전히 회복되 지 않았다. 환영이 아니라는 증거다. 해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프로메테우스가 잠수함 밖으로 모습을 나타났다. 주위를 둘러본 그는 유하가 털썩 주저앉아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다가왔다. "강한 에너지 반응이 감지돼서 놀랐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강한… 에너지 반응이요?" "예. 1천 킬로톤급 핵폭탄에 맞먹는 에너지가 감지되었다가 곧바로 사라졌습니다. 그 정도 폭발이 있었다면 거대한 해일이 일어나고도 남았는데, 아니 그 전에 우리가 살아남을 수 없어야 하는데 멀쩡하군 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현상에 프로메테우스는 반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비과학적인 힘에 의지하며 살아왔던 유하도 그와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여자를 봤어요." "여자요?" "얼굴은 몰라요. 하지만 여자가 맞을 거예요. 어머니, 맞아요. 어머니 같은 느낌이었어요. 보라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있었는데 재키를 안고 데려가 버렸어요. 재키한테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도 못 했는데…." "사과요?"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던 프로메테우스는 복잡한 심정이 다중으 로 얽혀있는 유하의 얼굴을 보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혹시 니콜라스씨를 좋아했습니까?" 유하는 멍한 눈으로 허공만 응시했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무거운 침묵이 그에게는 충분한 대답이 됐다. "들어갑시다. 어찌 됐든 간에 당신은 임무에 성공했으니 맘 편히 웃 을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간신히 부축을 받아 일어났지만 곧바로 쓰러져 버렸다. 혀를 끌끌 차며 다시 일으켜주려는 그의 손을 뿌리치듯 거절한 유하 는 벌떡 일어나 수평선 너머로 지는 석양을 향해 다가갔다. "위험해요. 더 이상 가면 바다에 빠진단 말입니다." 그의 외침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가슴을 가득 메운 싸늘함이 무언가 뻥 뚫려버린 듯한 마음을 선명하 게 드러내고 있었다. 수면을 황금빛으로 물든 석양을 멍하니 바라보던 유하는 무릎이 풀 려 털썩 주저앉았다. by eden 갑자기 웬 신파냐....orz 아 낯부끄러워. 고치기 지우기 목록 루리에르피나 1타 후후후 우리의 니콜라스 군은 어디로 워프? 2005/04/05 엘베루시아R 재키라;; 으음 갑자기 시스프리의 체키체키~가 생각나는 2005/04/05 사케쿠 유빈이는! 유빈이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아!! 유빈이 때문에 예안이가 휘둘리는 것은 정말 싫습니다! 어떻게 좀 해주시길...... 2005/04/05 xiu 아... 마더가... 마더께서 니콜라스를... 그것보다 유빈이는요?;ㅁ; 2005/04/05 영 마더가 ... 더욱 싫어 진다는.... 2005/04/05 안녕히 저기 근데 유빈이 얼마나 컸나요? 이제 꽤 많이 컸을텐데... 성장이 빠르니까. 흐음... 근데 마더는 왜 갑자기.. 쿨럭. 정말 엄마인건가? 2005/04/05 유리에 마더께서 니콜을 어디로 데려가시는 걸까요..?? 그치만 유빈일 먼저 구해주셔야지ㅠㅠ 나중에 케이랑 유젤이랑 예안이에게 미움받으시려구ㅜㅜ 유빈이두 나중에 크면 케이처럼 미남이..+ㅁ+ 근데.. 유빈이두 예안이 처럼 머리색깔이 변하나요-_-? 아님 케이처럼 환상적인(?) 검은빛 머리카락? 2005/04/05 꼬마코린 ...그거 미스터리군-_-+ 2005/04/05 전사&마법사 니콜라스는 '마더에게 선택받은 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네요. 운이 이렇게 좋으니 2005/04/05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4/18 페이지 ▶ 304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4) [7] 실탄 2005/04/0813Kb 617 ▶ 303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3) [6] 실탄 2005/04/0711Kb 635 ▶ 302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2) [9] 실탄 2005/04/0613Kb 624 ▶ 301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 [13] 실탄 2005/04/0511Kb 738 ▷ 300 - RESTART(6) [9] 실탄 2005/04/0413Kb 698 ▶ 299 - RESTART(5) [10] 실탄 2005/04/0314Kb 636 ▶ 298 - RESTART(4) [13] 실탄 2005/04/0212Kb 696 ▶ 297 - RESTART(3) [15] 실탄 2005/04/0112Kb 689 ▶ 296 - RESTART(2) [7] 실탄 2005/03/3113Kb 645 ▶ 295 - RESTART(1) [9] 실탄 2005/03/3013Kb 783 ▶ 294 - 추억의 그림자(6) [6] 실탄 2005/03/2912Kb 700 ▶ 293 - 추억의 그림자(5) [12] 실탄 2005/03/2814Kb 687 ▶ 292 - 추억의 그림자(4) [15] 실탄 2005/03/2412Kb 816 ▶ 291 - 추억의 그림자(3) [9] 실탄 2005/03/2012Kb 883 ▶ 290 - 추억의 그림자(2) [7] 실탄 2005/03/147Kb 885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 4 [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0893 :: 301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 실탄(cruel) 05-04-05 :: :: 10924 케리는 몇 년 전 한국으로 유학 온 스물 다섯의 학생이었다. 한국인 과 아무 무리 없이 대화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어도 능숙하게 구사 했고, 성적도 뛰어났다. 사교성도 밝고 쾌활해 타지의 친구들과도 허 물없이 곧 친해졌다. 예전부터 그는 한국에 취직을 하고 눌러앉을까 고국으로 돌아갈까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전 한국에 눌러앉기로 마음을 결정했다. 한국에는 바로 그가 존경하는, 맥을 개발한 과학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 맥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개발자의 천재성에 매료되었고, 매 스컴에 노출된 그녀를 보고 미모에 반했다. 그 역시 맹렬하게 그녀를 추종하는 사람 중 하나였으며, 팬클럽에 가입하여 오래 전부터 왕성 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덕분에 한 번 정도는 낙제 점수를 맞을 뻔하 기까지 했다. 그 날도 그는 교외 지역에 세워진 그녀의 저택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악수나 대화라도 한 번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 대에서였다. 왜 한국 정부는 그녀 같은 인재를 강단에 세우고 배움의 장을 열지 않는지 그는 내심 불만이었다. 그의 꿈은 하루빨리 졸업하여 그녀가 소장으로 있는 연구소에 취직하는 것이었다. 국가적인 기밀 연구를 하는 곳이다 보니 귀화를 하지 않는 한은 불가능 할 테지만, 까짓거 귀화하면 그만이었다. 오늘도 허탕이라 여기고 돌아가려는 순간 그는 저 멀리 상공에서 뭔 가가 반짝 빛나는 것을 보았다. 저게 무언가 의구심을 품을 사이도 없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진 빛은 이윽고 눈앞에서 폭발했다. 케리는 잠시 동안 선 채로 꿈을 꾸는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방 금 보았던 빛이 미사일의 종류라는 것과 닥터의 저택을 날려버렸다 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으, 으아아아!" 현우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남들보다 빠르게 대학에 진학했다. 좋아 하던 누나가 어느덧 자신의 손에 닿지 않은 먼 곳으로 가버렸다는 사실에 큰 자극을 받은 것이 이유에 한몫 했다. 강의가 끝나고 강의실을 나오는데 누군가가 등을 치며 불러세웠다. "네가 유현우지?" 현우는 시력 보호를 위해 낀 안경을 고쳐 쓰며 누군지 생각했다. "진환이라고 했던가?" "그래. 잠깐 시간 좀 돼?" "안 될 건 없지." 둘은 음료를 뽑아들고 휴게실로 갔다. 어떤 교수가 강의를 잘하느니, 어디 거리의 집이 맛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뜻밖에 상대는 현우와 같은 나이였다. 대학에 일찍 진학한 탓에 동갑 내기 친구가 없던 현우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그런데 네가 닥터와 친척이라는 소문이 있어. 사실이야?" 빈 음료수캔을 버리려던 손이 멈칫했다. "저기 실은… 내가 그 사람 정말 좋아하고 존경하거든. 한 번 뵐 수 있게 해주지 않을래?" 진환의 눈에는 또래뻘의 소녀가 세계적인 위치까지 올라갔다는 동경 이 담겨 있었다. 소개팅 주선 요구인 줄 알고 화를 내려던 현우는 쓴 웃음을 지으며 끄덕였다. "사촌 누나야. 얘기해보고 허락하면 그렇게 해줄게." 그는 고맙다고 했다. 현우는 뭘 그런 걸로 고마워하냐고 대답했다. 그때 광장에 설치된 대형 TV에서 긴급 속보가 흘러나왔다. 무심코 시선을 던진 현우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란 학생들이 웅 성거리며 TV 앞으로 몰려들었다. 「속보입니다. 약 1시간 20분 전 동해에 불법 침입한 잠수함이 미사 일을 발사해 닥터의 저택을 초토화시켰다 합니다. 닥터와 그 가족의 생사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며, 야당의 김석준 의원은 국가적인 인물의 저택이 테러당하도록 현 정권은 무엇을 했느냐고 목소리를 높여 비난했습니다. 아울러….」 흙빛이 된 현우는 그만 무릎에 힘이 풀렸다. 혜인은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운 채 새로 출연할 영화를 고르고 있었다. 시나리오를 훑어보며 틈틈이 접시에서 과자를 한 조각씩 집 어먹었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매니저가 뛰어들어왔다. 혜인은 화들짝 놀 라 일어나며 얼굴을 찌푸렸다. "여자 방에 함부로 들어오는 게 어딨어요?" 그러나 매니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다급히 말했다. "큰일났어." "무슨 일인데요?" "닥터, 그러니까 네 친구 집에 미사일이 떨어졌대." 혜인은 기절할 듯 놀랐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미사일이라뇨? 전쟁이라도 난 거예요?" "테러리스트 소행인가 봐. 아니면 한국에 위협을 느낀 나라가 테러리 스트를 가장하고 공격했다든지. 어쨌든 저택이 완전 초토화가 됐대." "그럼 진우, 아니 예안이는 어떻게 됐어요?" "글쎄,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어. 일단은 집에 없었을 거라 추측하고 있긴 하지만…. 만약 집에 있었다면 전부 몰살당했을 거야." 창백한 안색으로 숨을 몰아쉬던 혜인은 가까스로 가슴을 진정시켰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난 그녀는 서둘러 외출복을 챙겼다. 정호는 남해안 지역을 여행 중이었다. 앤드류가 설계한 새 저택으로 이사한 이후 그는 대부분의 나날을 집에 머무르지 않고 외출하거나 여행함으로써 소모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집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곳곳에 설치된 부비트랩과 침입자 격퇴용 방어장치 따위가 겁나서라 는 게 아니다. 예안이 몰고 온 부는 자신이 누릴 자격이 없다는 생각 에서였다. 하나뿐인 자식이 손이 닿지 않는 높은 위치로 올라가 버렸다는 사실 이 기쁘다기보다는 부담스럽고 서운하기까지 했다. 아기자기하고 행 복하게 지냈던 예전이 차라리 더 낫다고까지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의 행복은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사치였다. 이따금씩 진우가 좋아했다던 여자애, 그러니까 지금의 자식이 쓰고 있는 몸의 원주인은 누구인가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그 여자애가 진 우에게 지금의 자리를 선물했다면 그것은 그 애만의 것이지, 자신의 것은 아니다. 그렇게 확고하게 신념을 굳힌 정호는 온갖 꿀물을 노리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멀리했다. 연락이 끊어진 옛 친구들이 하루에도 몇 명씩 나 타나 '나 알지?'라고 웃으며 악수를 청하는데는 기가 찼다. 그래서 그는 신분을 숨기고 딸이 그렇게 질색하는데도 경호원도 없 이 혼자 훌쩍 여행을 다니는 중이었다. 다행히 일반인들은 닥터의 얼 굴은 알아도 닥터의 양아버지 얼굴은 몰랐다. 유명 국수집에 들린 정호는 이 동네의 명물이라는 칼국수를 한 그릇 주문했다. 이윽고 모락모락 김이 솟아오르는 국수가 나오자 그는 젓 가락으로 국수자락을 들었다. 때마침 속보가 나오자 그는 무슨 일이 났나 하고 궁금해하며 국수가 락을 물었다가 그대로 놓쳤다. 뉴스에서는 아나운서가 다급한 얼굴로 한국에 테러가 발생했다고 방송하고 있었다. 문제는 테러로 초토화된 장소가 딸이 있는 집이라는 것이었다. "어이구, 큰일났구먼. 도대체 어떤 썩을 놈들이 우리나라에 테러 따 위를 한 겨?" "말세로구만 말세야. 군대는 도대체 뭐하고 있었대?" 식당 안의 사람들이 혀를 차며 뭐라고 웅성거리는 것 같았지만 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한 정호는 아찔 함을 딛고 간신히 일어섰다. 허둥지둥 계산을 마친 그는 재빨리 역으로 향했다.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달려와 그의 앞에 섰다. 검은 양 복을 입은 몇몇 남자들이 차에서 내렸다. "실례합니다. 유정호씨죠?" 걸음을 멈춘 정호는 짜증스런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자네들은 누군가?" "국정원에서 나왔습니다. 유정호씨 신변을 보호하라는 임무를 맡았습 니다." "신변 보호?" "속보를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닥터의 저택은 몇 시간 전 테러를 당 해 없어졌습니다. 다행히 닥터와 손자분은 그때 집에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사할 거라는 말에 정호는 한결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안전하지만은 않습니다. 목표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면 테 러리스트들은 다시 날뛸 겁니다. 그 전에 닥터와 가족분들 신병을 확 보해 보호해야 합니다. 저희를 따라와주시지요." "내 딸은 어디 있나? 내 손자는?" "저희도 지금 온힘을 다해 찾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몰래 외국에 나가신 듯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인 듯 하다. 정호는 무거운 한숨을 얼굴 가득 지으 며 젊은이가 안내하는 대로 차에 올랐다. 공손하게 뒷좌석 문을 닫아준 젊은이는 운전석으로 돌아가면서 핸드 폰을 꺼냈다. "엔젤의 양아버지 신병 확보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엔젤의 아이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유하가 정중히 무릎을 꿇고 그렇게 보고했을 때 앤슨은 터져 나오려 는 분노를 씹어삼켜야만 했다. "나는 너에게 엘리우스를 잡으러 가라 명령한 적이 없다. 왜 멋대로 행동해서 일을 더 그르치게 한 거지?" "오스카님의 명령이셨습니다." "아무리 오스카 경이 나보다 지위가 높다 해도 그럴 권한은 갖고 있 지 않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니콜라스는 이미 멀리 도망치고 있는 상태였 고, 그 상황에서 앤슨 경 소속의 병력이 따라잡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근처에는 제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제 가 잘못한 것인가요?" 그렇게 대답한다면 더 이상 추궁할 말이 없어진다. 그리고 원칙을 어 기긴 했어도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토록 앤슨의 화를 돋구고 있 는 것이었다. 엘리우스는 사망했고 엔젤의 아이는 그곳에 없었다니. "네가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큰 지 알고 있나? 의례를 치르지도 않았 는데 엘리우스를 죽이다니,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는… 엘리우스가 아니었습니다." 유하는 피가 나오도록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가 정말 엘리우스였다면 그토록 허무하게 당할 리가 없습니다. 그 가 죽었을 때 마기의 흔적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앤슨 경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앤슨은 할 말이 없어졌다. 유하의 말이 맞았다. 니콜라스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 동안 5대 대신 중 누구도 마기의 폭주를 느끼지 못했다. 숙주를 잃은 마기는 폭주한다. 공명신수를 소유한 5대 대신은 그 폭 주를 감지하여 마기가 어디쯤으로 이동하는지 대략적인 정보를 알 수 있다. 하지만 폭주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해 두게, 앤슨 경. 몇 년 동안의 착각이 아무리 수치스럽다 해 도 상관없는 어린아이를 그렇게 달달 볶아서야 되겠나?" 느닷없이 나타난 오스카의 참견에 앤슨은 순간적으로 안색을 굳혔다. "착각이라니요? 무슨 말씀입니까?" "그럼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자네와 자네 동생, 그리고 마리오 경은 지난 2년 동안 니콜라스 베르노가 엘리우스라고 착각했다. 귀중한 시 간을 니콜라스 베르노의 뒤를 쫓느라 허비해버린 거야. 심문회가 열 리면 자네들은 결코 책임 회피를 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엘리우스…." "아직도 모르겠나? 니콜라스 베르노가 죽었지만 마기의 폭주는 일어 나지 않았어! 엘리우스는 역시 제임스 해론이었단 말이다!" 오스카는 처음으로 크게 소리 높여 호통을 쳤다. 시체처럼 안색이 창 백해진 앤슨은 무릎의 힘이 풀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그때 부하로부터 연락이 왔다. 별 생각 없는 얼굴로 보고를 받은 오 스카는 이윽고 흙빛이 되었다. "그게 정말인가? 알았다. 좀더 조사해보도록." 그는 전화를 끊었다. 심상치 않은 얼굴에 앤슨은 가슴이 죄어지는 불 안을 느꼈다. "무슨 일입니까?" "테러리스트가 엔젤의 집을 공격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앤슨은 뛸 듯이 놀랐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더니 완전 그 꼴이었다. "범인은 누구랍니까? 아니, 테러리스트가 정말 맞긴 한 겁니까?" "아닐 가능성이 크지. 고작해야 테러리스트 따위가 한국 대잠초계망 을 뚫고 들어와 한국 방공망을 무시하고 엔젤의 집까지 정확히 미사 일을 날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아." "그렇다면 역시 미국이나 일본일까요?" "미국일 가능성이 더 크지. 스튜 대통령 낌새가 좋지 않았어. 나라의 인재로서 엔젤을 원하는 듯 싶더군. 그게 안 되자 전에는 난자를 달 라고 요구하기까지 했어." "으음…."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에 앤슨은 감쪽같이 속았다. 미사일을 날려 엔젤 의 집을 초토화시킨 인물이 오스카라는 사실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 했다. by eden 오늘로서 순수 본편만으로 300화입니다. 유조아에서 얼마 전에 맞이하긴 했지만 그 당시에는 공지성 글도 죄 다 포함되었기에 순수 300화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했죠. 무언가 간단한 이벤트를 하긴 해야겠는데 생각나는 게 없네요. 고치기 지우기 목록 루리에르피나 천사의성지 1~5권 전권... 상품 2005/04/06 황창랑 굿~ 윗분에게 한표~ 2005/04/06 실탄 그냥 특별 에피소드 삽화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는데요... 2005/04/06 영 쩝.. 전권 상품이 좋은데. 2005/04/06 volunteer 100연참... 부탁드립니다.. 후훗.. 2005/04/06 해적왕` 그냥...실탄님을 상품으로...(퍼버벅!!) 에....끌려간다... 2005/04/06 꼬마코린 ...그걸로는 시시하니까 다음내용을 개인지로 낸후 싸인까지해서 보내는것 은...?(몇개 보낼려고 개인지 내면 적자다+_+) 2005/04/06 jhj1502 오랜만에 등장한 현우 -_-; ㅋ 제 동생과 이름이 같아서 왠지 친근감이 느껴지는..... 2005/04/06 자여니야 어라 왠일로연참 [..] 이것만 보고 자러갈꺼에요오옷! [..] 항상 4시에 자던버릇[응?]이 금방 고쳐질리가없잖![응? 응!?] 2005/04/06 자여니야 연참이 아니네 [..] 2005/04/06 ☆★파우스트 헉... 진우의 아버지는 아틀란티스인들에게 잡힌건가? 2005/04/07 전사&마법사 300회 되신거 축하드리고요. 더 좋은 활동 보여주세요. 2005/04/08 머냐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라........-_-; 에거서 크리스티 생각이 ....... 2005/04/09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4/18 페이지 ▶ 304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4) [7] 실탄 2005/04/0813Kb 617 ▶ 303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3) [6] 실탄 2005/04/0711Kb 635 ▶ 302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2) [9] 실탄 2005/04/0613Kb 624 ▷ 301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 [13] 실탄 2005/04/0511Kb 738 ▶ 300 - RESTART(6) [9] 실탄 2005/04/0413Kb 696 ▶ 299 - RESTART(5) [10] 실탄 2005/04/0314Kb 636 ▶ 298 - RESTART(4) [13] 실탄 2005/04/0212Kb 696 ▶ 297 - RESTART(3) [15] 실탄 2005/04/0112Kb 689 ▶ 296 - RESTART(2) [7] 실탄 2005/03/3113Kb 645 ▶ 295 - RESTART(1) [9] 실탄 2005/03/3013Kb 783 ▶ 294 - 추억의 그림자(6) [6] 실탄 2005/03/2912Kb 700 ▶ 293 - 추억의 그림자(5) [12] 실탄 2005/03/2814Kb 687 ▶ 292 - 추억의 그림자(4) [15] 실탄 2005/03/2412Kb 816 ▶ 291 - 추억의 그림자(3) [9] 실탄 2005/03/2012Kb 883 ▶ 290 - 추억의 그림자(2) [7] 실탄 2005/03/147Kb 885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 4 [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0968 :: 302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2) 실탄(cruel) 05-04-06 :: :: 12812 정원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도처에는 향기가 짙게 깔려, 마음을 싱그럽게 해주었다. 새하얗게 피 어난 꽃봉오리는 아무리 봐도 질릴 줄을 모른다. 대자연의 향취를 도심에 그대로 옮겨놓은 듯 멋진 정원에 예안은 기 분이 무척 좋았다. 이런 곳이라면 아이에게도 몇 번쯤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내일 아침 미국으로 출발하기로 오스카와 약속을 해두었다. 아틀란티 스 비밀미국지부에 도착하면 앤슨이나 마리오 등이 소유한, 적대적 세력의 모든 정보를 하나 빠짐없이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맥은 그것 들을 알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거라며 기뻐했다. '위험하진 않겠지?' '오스카가 딴마음을 품고 있다면 위험해질 수 있겠지만, 그의 말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전부를 바치는 깨끗한 인 간들의 집단은 존재하기 힘듭니다. 그 안에서는 분명히 배신자나 야 심에 사로잡힌 인물도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지금 마스터는 충분히 강합니다. 이곳에서 오스카와 그 부하들을 따 돌리고 도주하는 것은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아틀란티스 비밀기지로 들어가게 된다면… 그가 정말로 마스터를 속인 거라면 탈출하기 힘 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하고 있어. 그런데 잘 될 거라고 했으면서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덧붙이고 그래?' '최선과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것은 인공지능 특유의 버릇입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저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동등한 맥 락이죠.' 지금 어디서 괴상한 철학틱한 반박을 들이대느냐고 나무라려고 했을 때였다. '잠시만요. 본가 홈 시스템과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맥은 본가에 설치된 방어시스템 등과 긴밀한 연락망을 갖추고 원거 리에서 제어하고 있었다. 연결이 끊겼다는 것은 본가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뜻한다. 그녀는 자연히 바짝 긴장했다. '계속 연결시도를 해보고 있습니다만, 연결되고 있지 않습니다.' '설마 고장난 거야?' '말도 안 됩니다. 이중삼중으로 보호된 시스템이 아무 조짐도 없이 고장날 리 없습니다. 무언가 일이 일어난 겁니다.' 가슴이 바짝바짝 죄어오기 시작했다. 집에는 아이도 있는데, 누군가 의 습격이라도 받은 거라면 큰일이다. '현재 국방성을 비롯한 정부 기밀 데이터에 접근해 관련 자료를 검색 하고 있습니다. 잠시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웬만한 일이 아닌 이상 그런 불법적인 루트를 통하지 않는 맥이 그 런 시도까지 한다면 보통 큰일이 아니다. 그녀는 잠자코 맥의 대답을 기다렸다. 본가에 아무 일도 없었으면 하 는 마음이 강했다. "여기 있었군." 오스카의 목소리가 등뒤에 들렸다. 그녀는 불장난을 하다 들킨 아이 처럼 깜짝 놀랐다. "무, 무슨 일이야?" 바짝바짝 가슴이 죄어지는 통에 갑자기 뒤에서 불렀으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자연히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졌다. 허물없는 사이처럼 그녀의 옆에 자연스럽게 앉은 오스카는 깍지 낀 양손을 이마에 댔다. 무언가 심각해 보이는 태도에 그녀는 마음이 더 욱 불안해졌다. "내일 미국으로 가려 했던 계획은 취소해야 될 것 같다." "무슨 일인데?" "그대의 본가에 미사일이 떨어졌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눈꺼풀을 깜박이며 뭔 말을 들었던 건지 인식하려 애썼다. 의식이 자꾸 흐릿해지며 오스 카의 말을 분석하는 것을 거부하려 했다. '사실입니다. 국방부 장관에게 그 사실이 보고된 것을 지금 막 확인 했습니다. 아직 대통령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맥이 인간이었다면 침통했을 어조로 확인사살을 시켜주었다. 예안은 머리 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미사일이 떨어졌다고? 내 집에? 그럼 유빈이는? 내 아이는? 온갖 상념이 폭발하듯 한꺼번에 떠올랐다가 일그러졌다. 차라리 이것 이 꿈이기를 바랬다. 그러나 불편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스 카의 모습은 환영이 아니었다. "미국은 아니다. 일본도 아니야. 짐작 가는 곳이 한 군데 있긴 하지 만… 아마도 100% 확실할 것이다." "어디, 어딘데?" 겨우 패닉에서 깨어난 그녀는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상대가 누군지 알기만 한다면 찢어 죽이고 말겠다는 분노가 얼굴 가득 떠올랐다. "그대도 알지 않나. 앤슨뿐이다." 그녀 자신도 놀랄 만큼 차분해졌다. 가슴에 얼음을 갖다 댄 듯한 기 분이었다. 「너는 곧 우리에게 돌아오게 될 거야.」 줄곧 의구심이 지워지지 않을 만큼 자신만만했던 앤슨, 한미 전쟁의 배후에는 앤슨이 있다고 외치던 옛 친구 세현, 더 이상 앤슨의 음모 에 놀아나는 꼴은 볼 수 없다던 레이온, 의심의 씨앗을 품고 마음 깊 이 잠자고 있던 장면들이 필름처럼 떠올랐다. 그녀는 잠깐 동안 아이에 대한 걱정을 마음에서 지우는데 성공했다. 앤슨의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은 침착해야 할 때였다. "왜 앤슨이 내 집에 미사일을 떨어뜨렸다는 건데? 설마 날 갖지 못 하면 없애버리고 말겠다는 생각에서?" "그럴 리가. 그대가 집에 없고 아이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꾸민 짓이다." "무슨 의미야?" "그대 같은 사람도 이 정도 큰일을 당하면 제대로 추리가 되지 않는 가 보군. 아직도 모르겠나? 앤슨은 그대의 집에 테러를 가한 후 그것 을 미국이나 일본의 음모로 일단 겉표지를 꾸밀 생각이다. 그리고 한 국을 시켜 조사를 하게 만들겠지." 예안은 멍청한 표정으로 오스카의 말을 들었다. 걱정을 지우는데 성 공했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기껏 유지하고 있던 차분함 이 자꾸만 사라지는 것을 보니. "앤슨은 바깥 세상의 인간들이 그대를 공격했다는 오해를 만들어낼 셈이다. 앤슨의 계략이 성공한다면 그대는 필경 바깥 세상의 인간들 을 미워하게 되겠지. 아이까지 납치 당했으니 그대는 더욱 바깥 세상 의 인간들을 미워하고, 자기를 따르게 될 거라 생각하고 있는 게 분 명하다." 드디어 그가 하는 말을 완벽히 이해했다. 그러나 당장 분노가 터져 나오지는 않는다. "내 아이가 납치를 당했다는 건 무슨 소리야?" 그녀 자신도 놀랄 만큼 차분한 음성이었다. 뜻밖의 냉정함에 오스카 는 약간 의외를 느꼈다. 앞뒤 안 가리고 폭주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 것은 예상과 달랐다. "앤슨은 습격자가 있다는 것을 일부러 니콜라스가 베르노가 눈치채 게 했다. 불안을 느낀 니콜라스 베르노는 일단 그대의 아이를 데리고 앤드류 회장에게 도망쳤다. 하지만 바다 위에서 앤슨의 습격을 당했 지. 니콜라스 베르노는 사망했고 아이는 앤슨에게 빼앗겼다." 니콜라스가 죽어?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거울에 묻은 얼룩이 뚜렷해지듯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대가 이대로 돌아가면 한국 정부는 그대에게 자기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밝히고 사죄를 청할 것이다. 아마 그때쯤 앤슨이 그대 앞에 나타나겠지. 한국 정부가 지금 그대를 속이고 있는 거라고, 그대를 자기들 꼭두각시로 만들고 맥과 유전을 완전히 손에 넣기 위해서 계 략을 꾸미고 있는 거라고 그대를 속이겠지." "대통령은… 바보가 아니야. 나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게 현명 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현직 대통령은 그렇겠지. 하지만 차기 대통령은 그렇지 않을걸?" "무슨 소리야?" "야당의 석창렬 의원이라는 자가 얼마 전부터 그대와 맥에 관해 심 도 있는 조사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차기 대통령이 될 심산이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그대와 현직 대통령을 깎아 내리는 게 제일 빠른 방법이다. 내 짐작이지만 아마 그 자는 앤슨의 사주를 받았던 게 틀 림없을 것이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그만 해. 그녀는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만의 착 각이었다. 실제 그녀는 소리를 지르기는커녕 입을 열지도 않았다. 손가락도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스카와 눈을 마주치는 것도 두려 워 허공만 노려보았을 뿐이다. "앤슨은 오래 전부터 그대가 자발적으로 우리에게 돌아오게 하려고 일을 꾸민 것 같다. 미국이나 일본이 그대의 집을 습격하고 그대의 아이를 죽이게 만들었다는 시나리오를 그대에게 들이댈 생각 같군. 물론 그 악역 중에는 필경 한국도 끼어있을 것이다." "그만 해!" 갑자기 예안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폭발적인 바람의 기세가 그녀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모래바람이 눈을 따갑게 하자 오스카는 반 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이윽고 힘이 그쳤다. 오스카는 슬그머니 팔을 내리고 주위를 살폈다. 정원이 엉망이 되어있었다. 그녀를 중신으로 땅이 움푹 패여 있었다. 그녀의 기세를 정면으로 맞았던 자신의 옷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는 미약하기는 하나 자신이 에날도스를 지녔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제임스 해론처럼 에날도스가 제로(0)였다면 저 꺾여진 나무 꼴이 되 었을 것이다. "앤슨은 어디 있지?" 놀랄 만큼 차가워진 음성이었다. 이제껏 봐왔던, 어른스러운 척 하지 만 사랑스러운 소녀일 뿐이었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진심으로 누 군가를 증오하는 자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였다. 오스카는 속으로만 만족을 표시하며, 짐짓 질린 사람인 척 떨리는 어 조로 대답했다. "나는 잘 모른다."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지?" "일단 한국 정부와 접촉을 해보면 될 것 같다. 지금 앤슨이 한국 정 부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니까." 무뚝뚝한 눈빛으로 사람을 노려본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차가운 눈동자이지만, 청명하게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는 여전히 사랑스럽기만 하다. 아름답다는 표현이라는 것은 바 로 이런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절대적 어휘인지도 모른다. 이윽고 사람을 압박하는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가 떠난 것이 다. 비로소 홀가분한 표정을 지은 오스카는 기지개를 크게 켜면서 중 얼거렸다. "연기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군." "오스카님, 괜찮으세요?" 몸을 숨기고 있던 유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괜찮다. 아무리 약해빠졌다지만 엔젤이 날 죽이려 했던 것도 아니고 분노를 표출했을 뿐인데 그 정도에 죽는다고 엄살 피우지는 않아." "앤슨 경은 누가 엔젤의 아이를 데리고 있는지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미뤄두었던 계획을 실행하려 하고 있죠. 언니가 말해줬어요." "지상인들이 엔젤을 버리게 만든다는 계획?" "네. 벌써 석창렬 의원이 탄핵을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불안함 투성이라고는 해도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마냥 조사만 할 수는 없었을 테지. 엔젤의 아이를 데리고 있는 게 한국이든 일본이든 미국이든 죄를 뒤집어씌우기만 하면 그만이니." 오히려 엔젤의 아이가 정말로 납치당했거나 죽었다면 엔젤이 지상인 들을 증오하게 만들기에 좋은 구실이 된다. "하지만 녀석이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엔젤의 아이가 내 손에 있다 는 것을 안다면 절대 움직이지 않았을 거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저… 실은 그 문제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흠? 왜, 아이가 단식투쟁이라도 벌이고 있느냐?" "아니요. 아이는 건강해요. 아무것도 안 먹고 있긴 하지만 엔젤의 아 이라서 그런지 멀쩡하더군요." "그럼 뭐가 문제라는 거지?" "엘리우스, 아니 니콜라스와 싸웠을 때 일인데…." 유하는 침착하게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해주었다. 강한 빛과 함께 어 떤 여자가 죽은 니콜라스를 데려갔다는 사실, 핵폭탄급 에너지가 방 출되었지만 멀쩡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오스카는 얼굴을 굳혔다. 오스카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심했다. "그거 심상치 않은 일이군. 어쨌든 니콜라스가 죽은 건 확실하지?" "예. 그래요…." "그렇다면 된 거다. 물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 민족 중에서도 얼마든지 있다. 넌 그의 허풍에 속은 거야." "정말 그럴까요?" 유하는 차라리 그렇게 믿고 싶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지상인 중에서도 에날도스를 지닌 인물이 태어날 가능성이 있어. 우 리보다 막강한 에날도스를 가진 돌연변이가 태어날 수도 있는 거지. 하지만 그래봐야 아주 작은 수치일 뿐이야. 어차피 이 행성을 지배하 게 될 민족은 우리다." 오스카는 무뚝뚝하게 단정지었다. "어차피 그는 엘리우스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은 차라리 잘 된 일이다. 그만 잊어버리도록 해." "…예. 알았어요." 정중히 예의를 갖춘 유하는 정원을 빠져나왔다. 우연히 마주친 집사에게는 정원이 망가졌으니 손을 좀 보라고 지시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려는 것은 금물이며, 소문을 내는 것도 금지라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괜히 울적해진 유하는 1층에 설치된 비밀방에 들어갔다. 오스카를 비 롯한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절대 들어갈 수 없는, 이 집에서 가 장 철통같은 경비망을 자랑하고 있는 방이었다. 방안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어두운 복도를 걷자 육중한 철문이 나타났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비로소 밝은 빛이 가득한 방이 나타났다. 넓은 공간에는 놀이기구를 포함한 어린아이를 위한 모든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갖춰져 있었다. 몇 명의 유모들이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 느라 진을 빼고 있었다. 바로 유빈이었다. '이런 지하에 아이를 가둬두면 건강에 안 좋을 텐데….' 얼마 후에 거처를 옮길 거라 했으니 상관없을까. 엄마한테 보내달라고 칭얼거리는 아이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유하 는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니콜라스의 가슴을 꿰뚫던 순간 의 섬뜩한 감각이 새삼스럽게 되살아났다. '그 빛… 그 여자… 그건 대체 뭐였을까?' 두근거리는 가슴을 니콜라스를 죽였다는 죄책감으로 받아들이지 않 기 위해, 유하는 애써 그렇게 생각의 방향을 돌렸다. 아이의 모습을 확인한 뒤 밖으로 나온 유하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 는 것을 흘끗 돌아보며 새삼 감회에 젖었다. 엔젤의 아이는 우리 손에 있다. 오스카 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나, 이로서 엔젤은 우리가 완벽히 컨트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혁명은 멀지 않았다. 태양은 아틀란티스 대륙만을 비추기 위해 떠오를 것이다. 햇빛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은 이제 황금빛 행복을 마 음껏 누리게 될 것이다. 정말 멀지 않았다. by eden 이번 사건은 진행 흐름이 시간적으로 나열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 서 다시 헷갈려 하는 분들을 위해 부연설명을 하겠습니다. 오스카가 앤슨에게 '니콜라스가 도망쳤다'라고 알려준 시점에서 이미 오스카는 유빈이의 신병을 확보하고 있던 겁니다. 그 다음에 주인공 의 본가에 미사일이 떨어진 것이죠. 흥이 나는 대로 쓰다 보니 시간의 흐름이 꼬였습니다만 굳이 고칠 생 각은 없습니다. 이것이 라이브의 장점이기도 하니까요. 고치기 지우기 목록 안녕히 오타! 오스카를 엘슨이라고 썼네요... 중반 이후쯤부터요...^^ 대충 예상이 맞긴 했는데 오스카가 다 불었네요...;;; 2005/04/06 자여니야 흐음....... 자아.. 예안'군' 몸안에있는자이로 다이아몬드를 폭주시ㅋ....... [타앙!] 2005/04/06 해적왕 허허~ 라이브의 장점이라;; 왠지 압박이...;; 재미있게 보고있어요!! 홧팅! 2005/04/06 라에르 상당한 모험을 하고 있군여... 만약 계획이 밝혀질 경우엔 엔젤에게 위해를 가한 민족의 배신자까지도 가능할것 같은데....... 그리고 가족이 다 죽을경우 미련없이 달나라로 맥타고 가버릴수있고; 2005/04/06 영 쩝.......여러가지 상황이 한꺼번에 일어나니. 골치 아프군요. 2005/04/07 희야 오스카도 핵을 모르는건가요? 맥의 능력이라면 지구어딘가 핵이떨어졌다는건알테고 그럼 니콜라스가 죽지않은것도 알텐데.. (달은...극소수를 제외한 모든인류의 기억에서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틀란티스도 포함해서..) 2005/04/07 실탄 흠..속도감을 좀 살렸는데 부담스러운 분도 있으신가 보군요. 2005/04/07 行人원! 달?[흠?]달이란내용은 못봣는대[...] 2005/04/08 行人원! 아 예안은 달ㄹ나라가 보일걸요..[전내용보면 예안은 달인가 하는 그..무슨세상이 보인다고 나와요] 2005/04/08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4/18 페이지 ▶ 304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4) [7] 실탄 2005/04/0813Kb 617 ▶ 303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3) [6] 실탄 2005/04/0711Kb 635 ▷ 302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2) [9] 실탄 2005/04/0613Kb 626 ▶ 301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 [13] 실탄 2005/04/0511Kb 738 ▶ 300 - RESTART(6) [9] 실탄 2005/04/0413Kb 698 ▶ 299 - RESTART(5) [10] 실탄 2005/04/0314Kb 636 ▶ 298 - RESTART(4) [13] 실탄 2005/04/0212Kb 696 ▶ 297 - RESTART(3) [15] 실탄 2005/04/0112Kb 689 ▶ 296 - RESTART(2) [7] 실탄 2005/03/3113Kb 645 ▶ 295 - RESTART(1) [9] 실탄 2005/03/3013Kb 783 ▶ 294 - 추억의 그림자(6) [6] 실탄 2005/03/2912Kb 700 ▶ 293 - 추억의 그림자(5) [12] 실탄 2005/03/2814Kb 687 ▶ 292 - 추억의 그림자(4) [15] 실탄 2005/03/2412Kb 816 ▶ 291 - 추억의 그림자(3) [9] 실탄 2005/03/2012Kb 883 ▶ 290 - 추억의 그림자(2) [7] 실탄 2005/03/147Kb 885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 4 [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1047 :: 303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3) 실탄(cruel) 05-04-07 :: :: 11488 나라의 중요한 인물이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노출되도록 뭐하고 있었 냐는 비난에 김영환 정권은 정신이 없었다. 언론에서는 하나같이 테 러를 놓고 괴롭히지, 국민들은 비난하지. 그나마 김두오 의원이 막아주고 있는 야당은 다른 데에 비하면 조용 한 편이었지만, 김 의원의 역량도 한계가 있었다. 테러가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영환 대통령은 탄핵당했다. 이 날 한반도는 다시 한 번 술렁였다. 목소리를 높여 현 정권을 비난하던 사람들은 일제히 분노의 화살을 야당에게로 돌렸다. 전국민이 하나가 되어 위기를 몰아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권력 싸움이나 하고 있어서야 되겠느냐는 주장이 하늘을 찔렀다. 김영환 대통령이 테러 문제로 비난받고 있기는 하지만 무능력한 대 통령은 아니었다. 일본과의 전쟁을 피해 없이 승리로 이끌고,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에 서 유리한 입장을 따내는데 성공해 한반도의 빛나는 미래를 위한 토 대를 굳건히 다진 대통령이다. 테러 문제로 국민들이 잠시 실망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정치가이다. 그러나 탄핵 이유를 밝혔을 때에는 목소리를 높여 야당을 비난하던 국민들과 매스컴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맥은 판매가 아니라 대여된 것이다>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힌 석창렬 의원은 현 대통령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나 다름없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그의 주장인즉슨, 대통령이 유전을 넘기면서까지 얻어낸 결과가 맥의 구매가 아닌 대여라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닥터와 협의해 일반 국민 에게는 맥을 구매했다고 속였다는 것이었다. 뇌물 거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국민들 누구라도 눈앞이 아찔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증거가 있 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자신 있게 비밀문서의 사본을 내놓았다. 공중파 방송을 타고 전파된 비밀문서의 내용은 전 국민을 충격에 빠 뜨리는데 충분했다. 여론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맥의 대여는 실수이긴 하나 나라를 팔아 먹은 행위는 아니다 라는 쪽과,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매국 행각 이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팽팽하게 대치했다. 국회는 행정기능이 마비된 청와대를 대신하여 긴급히 닥터의 신병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말이 신병확보이지 실질적으로는 체포나 마찬가지였다. 짙은 선글라스와 모자를 눌러 쓴 예안은 지하철에서 내렸다. 모자 아래로 흘러나온 푸른 머리카락을 보고 몇몇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닥터를 동경하여 그녀의 스타일을 흉내 내는 젊은 여자들은 많았다. 시내 공기는 탁했다.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얼굴에 어두움과 분노가 교차하고 있었다. 테러 를 당했다 하니 나라 분위기가 흉흉한 것은 당연할 테지만, 그것 이 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녀는 묵묵히 걸음을 빨리 했다. 택시를 타고 가는 것이 편하지만 남들의 이목을 살 위험이 크다. 한참을 걸어 집 근처에 도착하니 웅성거리는 사람들과 왱왱거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경찰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구경꾼을 밀치고 앞쪽으로 나간 예안은 폐허가 된 광경에 다리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아무것도 없었다. 있다면 커다랗게 패인 구덩이 뿐.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도란도란 영원히 살게 될 줄 알았던 집은 온 데간데없고,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커다란 구덩이가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휘청거리는 무릎을 지탱하지 못한 그녀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진정하십시오. 유빈님은 살아있을 겁니다. 오스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앤슨이 납치했다고요.' 맥이 다급히 위로했지만 귀에 들어올 리 없다. 눈물이 말라버릴 정도 로 지독한 슬픔만이 가슴을 세게 눌렀다. '앤슨은 바보가 아닙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유빈님을 죽였을 리가 없 습니다. 분명 어딘가에 살아계실 겁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만에 하나 저곳에 아이가 있었다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머리로 아는데도 가슴은 '혹시나' 하는 불안 감을 떨치지 못했다. "괜찮으세요?"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남학생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무심코 그를 올려다보는 와중에 그만 모자가 떨어졌다. 일제히 그녀에게로 시선이 몰렸다. 구경꾼들은 대단히 낯익은 얼굴에 상대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 닥터야!" "닥터가 왜 여기에?" "바보야! 당연하잖아! 자기 집에 미사일 떨어졌는데 너 같으면 안 와 보겠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점점 소란스러워지자 예 안은 조금씩 겁을 집어먹었다. 군중의 눈에는 놀람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회복할 길 없는 커다란 실망과 배신감도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들의 소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다가왔던 경찰들은 닥터가 있다는 소리에 얼굴색이 대번에 변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예안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조금씩 물러났다. 그 렇게 만들어진 공간으로 이십 여 명의 경찰들이 뚜벅뚜벅 다가왔다. "신국립과학연구소에 소장으로 근무하시는 서예안씨 되십니까?" "예. 그런데요…." "전국적으로 수배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우리를 따라와주셔야 하겠습 니다."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은 그녀는 차갑게 대꾸했다. "무슨 혐의로요?" "국가를 상대로 한 사기 혐의입니다. 맥은 매매된 게 아니라 대여된 거라면서요?" 더 말할 필요 없다는 듯이 경찰은 수갑을 철컥 채웠다. 그녀는 화가 치밀었다. "지금 당신이 누굴 체포하는 건지 알기나 해요?" "수배령이 내린 용의자를 체포하는 거죠.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예안이 체포당하는 광경을 구경했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듯한 기분에 그녀는 강한 치욕을 느꼈다. 생각할 것도 없이 그녀는 힘을 방출하며 팔을 힘껏 휘둘렀다. 섬광탄 이 터지듯 강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수갑이 잘라져 떨어졌다. "이, 이게 무슨…?" 기상천외한 현상에 경찰과 구경꾼들은 강한 공포를 느끼고 뒤로 주 춤주춤 물러났다. 그녀는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구경꾼들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난 당신들에게 많은 걸 해줬어요. 그런데 고작 유전 하나 가지고 이 러기예요? 매매라 속인 건 인정하지만, 무한동력의 가치로 놓고 보자 면 대여라 해도 오히려 내가 손해보는 거래였다고요." "체, 체포해!" 가까스로 당황함을 벗어던진 책임자가 소리를 질렀다. 홱 하니 그를 죽일 듯 노려보던 예안은 더 이상의 저항은 포기한 채 뒤돌아 냅다 뛰었다. 겁에 질린 구경꾼들은 그녀 앞을 막을 생각을 않고 비켜주었다. 허겁 지겁 도로를 달린 그녀는 얼마 전에 개장한 가게 앞 모퉁이를 크게 돌았다. 끼이익. 브레이크 패달 밟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경찰인가 하고 생각한 그녀 는 한 방 먹일 준비를 했다가 손을 내렸다. 뒷좌석에서 혜인이 얼굴을 내밀고 외쳤다. "빨리 타!" 잠시 망설이던 예안은 재빨리 뒷좌석에 탔다. 차문이 닫히자마자 차 는 크게 우회해 빠른 속도로 달렸다. 뒤늦게 경찰과 경찰차들이 그곳을 들이닥쳤다. 그러나 그들은 혜인의 차가 예안을 태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 놓쳤다는 보고를 받은 책임자는 불같이 화를 냈다. 부하들은 할말 없 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꾸중을 들었다. 책임자는 특진 기회를 놓쳤 다며 분해하다가 무전기로 상부에 보고했다. 곧 이 부근을 중심으로 감시망이 깔릴 것이었다. 차는 종로에 있는 혜인의 오피스텔에 정지했다. 매니저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혜인은 차에서 내렸다. 예안도 뒤따라 내렸다. 매니저는 몸조심하라는 말을 덧붙이고 차를 몰고 사라졌다. 혜인은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 예안의 몸을 떠밀어 넣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다시 열릴 때까지 예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거 써." 혜인이 내민 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예안은 묵묵히 받아서 머리 에 썼다. 복도에 사람들이 있나 없나를 살핀 혜인은 살그머니 현관문을 열고 손짓했다. 안에 들어가자 향긋한 방향제 내음이 후각을 자극했다. 비로소 추적 을 뿌리쳤다는 안도감에 취한 예안은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괜찮아?" 혜인이 당황하며 어깨를 붙잡았다. 말없이 그녀를 돌아본 예안은 눈 물을 조금씩 흘렸다. "혜안아. 나 어떡해…." "무슨 일이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우리 아기가, 우리 아기가…."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그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 어린 아이가 낯선 사람들에게 붙잡힌 채 엄마를 찾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 지는 듯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혜인은 얼굴색을 굳혔다. "유빈이가 어떻게 됐는데?" "흐윽… 흐윽…." "납치라도 당한 거야?" 그녀는 흐느끼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충분한 대답이었다. 무거운 한숨 을 내쉰 혜인은 에라 모르겠다는 듯 같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을 꼭 잡아준 혜인은 천장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네 집이 테러당했다는 뉴스 보고 정말 놀랐어.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야." 아이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던 예안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듣기만 했다. "그런데 너 무슨 잘못한 거 있니? 왜 수배령이 내린 거야? 너 하고 나 사이 아는 내 친구들이 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더라. 왜 그 런지 모르겠다고." "나한테… 배신감이라도 느낀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예안은 차가워진 어조로 물었다. 혜인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정도로 생각 없는 애들은 아니야. 맥이 구매가 아니라 대여됐던 거라는 사실에 실망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범죄자 취급을 할 정도로 닥터가 가치 없는 인물은 아니니까." "하지만 윗대가리 중 일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무슨 뜻이야?" "유전이 나 같은 어린 계집애한테 넘어가는 꼴을 두고 볼 수 없다는 거겠지. 맥 같은 위험한 장난감을 개인 소유로 남겨둘 수 없다고 이 를 갈고 있을걸?" 석창렬이라는 이름과, 그 배후에서 웃고 있을 아틀란티스라는 글자를 떠올리며 그녀는 더욱 가슴을 차갑게 때렸다. 끊임없이 솟구치는 아 이에 대한 걱정과 슬픔을, 아틀란티스를 향한 분노로 갈무리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유빈이를 구하러 가야 돼." 눈물을 닦은 예안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혜인이 다급하게 허리를 붙잡았다. "지금 수배령이 내렸다는데 나갔다가 붙잡히면 어떡하려고 그래? 일 단은 아무 생각말고 쉬고 있어." "구하러 가야 돼. 유빈이는 지금도 날 찾고 있을 거라고." "지금은 절대 안 돼. 일단 좀 쉬고 생각하자. 누가 납치한 건진 몰라 도 너까지 붙잡히면 어쩌려고 그래?" 간신히 설득해 앉힌 혜인은 잠깐 먹을 것을 사오겠다며 외출했다. 아 무 말도 없이 사라지지 않을 것을 굳게 약속한 건 물론이었다. 넓은 원룸에 혼자 남자 멍한 기분이 찾아왔다. 이따금씩 눈꺼풀을 깜박이며 천장을 바라보는 게 움직임의 전부였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또다시 가슴을 적시는 아이 생각에 눈물이 막 나오려는 찰나 초인종 이 울렸다. 슬픔에 눌리기에 앞서 불안함부터 솟아난 그녀는 긴장하며 일어났다. '누구지?' 문에 달린 렌즈를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훤칠한 키와 깔끔한 스타일 의 젊은 남자가 밖에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여자에게 자상할 것 같고 인기가 많을 듯한 타입의 남자였다. 괜한 질투심이 솟은 예안은 문을 벌컥 열었다. "혜인아…." 반가워하며 인사하려던 청년은 문을 열어준 사람을 보고 당황해서 머뭇거렸다. "누구시죠?" "그건 내가 할 말이라 생각하는데요? 난 혜인이 친구예요. 그쪽은 누 군데요?" "전 혜인이 동료…입니다만. 장태준이라고 하는데 혹시 들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아 하고 속으로 탄성을 내지른 예안은 곧 얼굴을 찌푸렸다. 동료 중 하나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다고 혜인이 투덜거린 게 생각났 기 때문이었다. 장난스럽게 '그럼 사귀어보지 그래?'라고 하자 삐져서 샐쭉하게 노려보던 게 얼마나 귀여웠던지. 혜인을 좋아하는 남자라고 판단이 서자 태도가 다소 차가워졌다. "혜인이는 지금 없어요." "어디 갔는데요?" "잠깐 뭐 사러 간다고 했어요. 금방 돌아올 거예요." "저, 그럼 안에서 기다리면 안 될까요?" "친구 동료라지만 처음 보는 남자를 서슴없이 들어오게 할 정도로 저는 멍청하지 않은데요?" 가시가 뚜렷한 쏘아붙임에 태준은 난처한 듯 머뭇거렸다. 혜인의 동 료라면 연예계에 종사하는 사람일 텐데 생각보다는 순진한 듯했다. 잠시 뜸을 들이고 난 예안은 선심을 쓰듯 말했다. "일단 들어오세요." "감사합니다." 태준은 희색이 되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by eden 소제목에 특별히 강한 기대를 품는 분들이 없지는 않는 듯 한데요. 심각하게 생각하실 것 전~~혀 없습니다. 소제목이라는것 이야 뭐 원래 폼생폼사 아닙니까. 실제로 알맹이를 보면 별것 없다는 것을 300화 넘도록 겪어오셨으면서도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셨나요?(...) 고치기 지우기 목록 안녕히 음... 예안이 릴렉스... 릴렉스... 아... 그리고 이런 분위기가 좋아요. 무언가 대단한 존재가 추락하는 .. (아무래도 전 정신상태가 이상한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아요....^^;) 2005/04/08 해적왕 이거...오스카라는 인물..상당히 위험해 보이는데요..ㅋㅋ 모든걸 계산산하고서...정말..소름끼칩니다 아무래도...아틀란티스로 돌아가 혁명이 실행..쿨럭;; 아무튼 오스카란 사람..무섭다..ㅠㅠ 2005/04/08 영 오스카 같은 인간이 옆에 있다면.... 절대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는.. 2005/04/08 ... 오스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초능력에 사도 머린가? 2005/04/08 꼬마코린 ...시련을 너무주지마세요+_+ 2005/04/08 ;;; 그냥 맥으로 다 죽이지..윗대가리들.. 2005/04/08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4/18 페이지 ▶ 304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4) [7] 실탄 2005/04/0813Kb 617 ▷ 303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3) [6] 실탄 2005/04/0711Kb 637 ▶ 302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2) [9] 실탄 2005/04/0613Kb 626 ▶ 301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 [13] 실탄 2005/04/0511Kb 738 ▶ 300 - RESTART(6) [9] 실탄 2005/04/0413Kb 698 ▶ 299 - RESTART(5) [10] 실탄 2005/04/0314Kb 636 ▶ 298 - RESTART(4) [13] 실탄 2005/04/0212Kb 696 ▶ 297 - RESTART(3) [15] 실탄 2005/04/0112Kb 689 ▶ 296 - RESTART(2) [7] 실탄 2005/03/3113Kb 645 ▶ 295 - RESTART(1) [9] 실탄 2005/03/3013Kb 783 ▶ 294 - 추억의 그림자(6) [6] 실탄 2005/03/2912Kb 700 ▶ 293 - 추억의 그림자(5) [12] 실탄 2005/03/2814Kb 687 ▶ 292 - 추억의 그림자(4) [15] 실탄 2005/03/2412Kb 816 ▶ 291 - 추억의 그림자(3) [9] 실탄 2005/03/2012Kb 883 ▶ 290 - 추억의 그림자(2) [7] 실탄 2005/03/147Kb 885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 4 [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1108 :: 304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4) 실탄(cruel) 05-04-08 :: :: 13345 일단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기는 했지만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태준은 부끄러움도 없는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에 어디에 눈을 둬야할지 몰랐다. 미모의 여자의 시선을 잡는 것은 좋지만 뜯어 보는 듯한 눈길을 견디는 것은 썩 유쾌하지는 않다. 사람을 무슨 동물처럼 세심히 관찰하는 시선을 여자로부터 받아본 경험이 전무한 그는 난처함을 넘어서서 의구심까지 느꼈다. "저,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니요." 그만 좀 뜯어보라는 의미로 건넨 말인데 가차없이 부정한다. 그러면 서도 눈길을 거둘 줄은 모른다. 이것은 노골적이다. 태준은 그렇게 확신하면서도 혜인의 친구라는 간 판 때문에 쓴소리를 할 엄두를 못 냈다. 이윽고 예안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혜인이와는 어떤 사이시죠?" 새로운 화제가 생기자 살았다 싶은 태준은 얼른 대답을 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상대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무언가 이상했다. 저 눈초리는 애인에게 접근하는 사람을 노려보는 남자의 눈초리와 대단히 흡사했다. 태준은 그녀가 왜 저런 눈으로 보 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경쟁심이 솟구친 태준은 불쑥 속마음을 꺼냈다. "좋아하는 사이입니다." "혜인이도요?" "아니, 저만요." "근데 왜 '좋아하는 사이'라고 말해서 사람 헷갈리게 만들어요?" 노골적으로 가시가 박힌 말투였다. 시비를 걸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태준은 결코 상대방이 자신에게 호감이 있어서 질투하는 게 아니라 는 것을 확신했다. 왕자병 환자만은 될 수 없다는 자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대는 자신에게 적의를 조금도 숨기지 않고 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태준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아주 예쁘게 생기셨네요." "적어도 남자들이 거부하지 않을 정돈 돼요." "고작 그 정도? 자기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시는군요. 아예 연예계 쪽 일을 해볼 생각은 없나요? 제가 그쪽에서 일하고 있으니 선이 쉽 게 닿는데." 그 말이 결코 진심이 아님을, 예안은 뚜렷이 느끼고 있었다. 태준은 부드러운 말로 자신의 시비를 받아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가 어떤 가시를 드러낼지 기대했다. "그 목걸이, 제 눈이 맞다면 천만 원 단위가 넘어가는 고급품 아니었 던가요?" 무심코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진 그녀는 차갑게 대꾸했다. "내 돈으로 산 거 아녜요. 친구가 선물로 준 거예요." "좋으시겠어요. 그런 비싼 물건도 아무렇지 않게 선물해줄 친구들이 많아서. 사람들은 끼리끼리 논다고 하지요?" 너도 같은 부류가 아니냐는 조롱이 또렷이 담긴 말이었다. "그 정도 미모와 부를 가지셨으니 웬만한 남자는 눈에 차지도 않으 시겠지요. 친구가 저 같은 남자와 알고 지낸다는 게 그저 못마땅하신 거죠?" "무엇을 믿고 그렇게 함부로 사람을 단정짓는 거죠?" "다짜고짜 사람을 도발하는 거. 그리고 지금 그렇게 나를 노려보는 거. 그 두 가지를 믿고 단정짓는 겁니다." 녹색 눈동자가 차가운 빛을 띠고 노려본다. 허나 태준은 조금 전과는 달리 전혀 기가 죽지 않고 맞받아쳤다. "한 가지 재밌는 거 알려줄까요?" "뭐죠?" "나, 혜인이와 같이 자본 적 있어요." 태준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예안은 조롱을 잔뜩 품은 눈으로 그 를 쏘아보며, 또박또박하게 덧붙였다. "왜 이제 당신한테 시비거는지 이해해요?" 충격을 벗어 던지지 못한 태준은 사나운 눈길을 피해 그만 눈을 내 리깔았다. 겨우 자신을 진정시킨 그는 창백해진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서, 설마 혜인이가 그런…?"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동성 친구끼리 같이 자본 게 그 렇게 흠이 되는 건가요?" 커다란 낭패감이 태준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는 상대가 자신을 갖고 놀았음을 깨달았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놀리다니, 대단히 고약한 취미를 가지셨군요." "칭찬 고마워요." "내 주변에도 당신처럼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여자분들이 꽤 있지만, 당신 같은 골수 페미니스트는 그 중에 없었어요." "내가 골수 페미니스트?"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남자를 그저 하찮게 보고, 어떡하면 깔아뭉 갤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하는 여자잖아요!" "호오, 제법 강단은 있네요." 한창 다투고 있을 때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목소리를 높이던 태준은 당황해서 주저앉았다. 그러나 이미 혜인은 태준이 소리를 지르던 광 경을 보고 난 후였다. 장바구니를 내려놓은 혜인은 사납게 태준을 노려보았다. "태준 오빠, 지금 내 친구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거죠?" "자기와 너 사이에 내가 무슨 상관이냐고 대들던데?" 태준은 사색이 되어 예안을 째려보았다. 예안은 관심 없다는 듯 시큰 둥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웃기지 뭐야. 자기가 너 안지 얼마나 됐다고 나한테 그런대?" "태준 오빠!" 커다란 실망이 가득한 고함에 태준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벌떡 일 어난 그는 어쩔 줄 몰라하며 변명했다. "혜인아, 그게 아니야. 내가 다 설명할게. 사실은…." "듣기 싫어요! 내 친구 지금 안 좋은 일 당해서 힘들어하는데 그것도 못 알아보고 시비나 걸고 있어요? 빨리 집에나 가요!" 더 말할 필요 없다는 듯 혜인은 그를 현관문 밖으로 밀었다. 질질 밀 려나간 태준은 문이 꽝 하고 닫힐 때까지도 믿어달라는 눈으로 간절 히 바라보았다. "저 오빠가 한 말 신경 쓰지 마." "너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던데?" "그런 말 하지 마. 나 기분 나빠, 유진우." 유진우라는 이름에 또박또박하게 힘이 실렸다. 흐뭇한 웃음을 살며시 띤 예안은 곧 풀죽은 듯 시선을 떨어뜨렸다. "너 도대체 내가 어디가 그렇게 좋았던 거야?" "모성 본능을 자극하잖아." "내가 기억하기에는 성격만 더러웠던 것 같은데?" "애들은 원래 다 그러니까 괜찮아." "애들?"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자 혜인은 재미있어하며 덧붙였다. "나 연하 취향이야. 몰랐어?" "나는 연하가 아니잖아!" "동안이고 어려보이는 편이었으니까 무효." 심각한 표정을 지은 혜인은 턱을 쓰다듬으며 예안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그리고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지금도 예뻐져서 좋긴 한데, 그러게 왜 하필이면 여자가 됐어? 그렇 다고 내가 레즈가 될 수도 없잖아." "내가 졌다. 그만하자." "후후, 이제 넌 나한테 안 돼." 배고프겠지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혜인은 장바구니를 들고 싱크대 로 갔다. 야채를 썰고 고기를 볶는 등 음식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맛있는 냄새가 방안 가득 퍼졌다. 그러나 예안은 군침이 도는 음식 냄새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 다. 그녀는 멍하니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혜인의 뒷모습을 주시하 기만 했다. 한때 상상하곤 했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혜인이가 날 위해 요리를 하고, 나는 한가롭게 그 광경을 바라보는 장면. 한쪽에는 우 리들의 아이가 쌔근쌔근 잠들어 있겠지. 눈앞이 흐려져 예안은 손등으로 쓱 문질렀다. 퍼뜩 깨달았다. 유젤을 그리워했던 마음이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 을 정도로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을. 지금처럼 남자였을 때 품 었던 희망이나 되새기고 있는 게 증거였다. 유젤을 오래도록 기억하려 했지만, 이미 <유진우의 마음>은 대답 없 는 편도적 사랑에 오래 전부터 지쳐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구인류의 한계, 레이온은 자신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신인류가 되려는 것이다. 신인류가 된다면 오리지널 유젤 에 대한 마음을 변치 않고 영원히 간직할 수 있을 테니. 흐릿한 의식을 딛고 일어난 예안은 혜인의 등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뒤에서부터 말없이 껴안았다. "왜 그래?" 혜인은 조금의 수줍음도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거 알아? 나 너 많이 좋아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은 하고 그래?" 미묘한 불안을 감지한 혜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너 좋아했던 거 정말 진심이었어. 그리고… 괜히 너한테 상처 줘서 미안해. 그때 나 많이 어렸던 거 알지? 너 철없는 연하 따위가 좋다 그랬으니까 이해해줄 수 있지?" 그렇다고 내가 연하라는 걸 인정하는 건 아니지만. 예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속으로만 덧붙였다. "너… 설마 어디 가려고?" "유빈이 찾으러 가야지. 지금쯤 많이 울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위험하잖아." "위험해도 어쩔 수 없어. 자기 아이 하나도 못 지키는 바보 멍청이는 죽어버리는 게 차라리 나아." 비로소 등을 돌린 혜인은 간절한 시선으로 마주 보았다. "지금 너 정상 아니야. 수배범이 된 데다가 아이까지 납치당했잖아. 그런 정신으로 멀쩡히 어떻게 대처할지 생각할 수 있겠어? 여기 며 칠 동안 숨어 있으면서 네 친구들 도움 구할 방법이나 생각해 봐. 유 럽이나 미국으로 망명간다면 아마 쌍수 들어서 널 환영할 거야. 그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그랬다가 유빈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흔들림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물음에 혜인은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 을 해도 생각을 돌리지 않으리라는 것은 명백했다. 그래도 걱정을 떨치지 못한 혜인이 뭔가 다시 말을 하려는 때였다. "누가 왔네?" 갑작스런 초인종에 혜인은 불안함을 품고 인터폰 앞으로 갔다. 화면 에는 매니저의 얼굴이 비춰지고 있었다. "매니저 오빠가 갑자기 무슨 일로…." 잊어버린 게 있나 싶은 혜인은 문을 열었다. 무언가를 난처해하는 매 니저의 얼굴이 드러났다. "오빠, 무슨 일이에요?" "그게…." 그때 매니저를 제치고 옆에서 사복 차림의 남자 둘이 모습을 드러냈 다. "여기에 지명수배자 서예안씨가 있다는 제보를 받고 왔습니다." "오빠?" 당황한 혜인은 이게 어떻게 된 거냐는 눈으로 매니저를 노려보았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한 매니저는 고개를 돌린 채 모기소리처럼 작 게 대답했다. "잘못한 게 없다면 체포된다고 해서 큰일은 아니잖아…. 아무리 친구 라지만 범죄자 은닉은 중죄라고. 회사에서 너한테 얼마나 크게 기대 하고 있는데 잘못되기라도 하면…." "오빠.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분노를 참지 못한 혜인은 매니저의 뺨을 세게 올려붙였다. 얼굴이 짝 돌아간 매니저는 얼얼한 뺨을 쓰다듬으면서도 굽히지 않았다. "네가 원한다면 조만간 새 매니저 구해줄 거야." "오빠!" 참지 못한 혜인이 다시 뺨을 날리려는 때였다. "그만해." 얼음처럼 차분한 음성에 혜인은 등을 돌렸다. 냉정한 시선으로 이쪽 을 바라보던 예안은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두려움이라고는 없는 기 세에 경찰은 선뜻 수갑을 채우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어차피 내가 부딪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되는 건 없어. 수갑이나 채우시죠." 그녀가 얌전히 두 팔을 내밀자 경찰은 수갑을 채웠다. 양팔이 붙잡힌 채 끌려나가던 예안은 가다 말고 멈춰 섰다. 그리고 망연자실해하는 혜인을 돌아보았다. "내 걱정은 하지 마. 금방 풀려날 테니까." 넋놓은 표정으로 경찰에 연행되는 친구를 바라보던 혜인은 이윽고 정신을 차렸다. 헐레벌떡 뛰어간 그녀는 경찰을 붙잡고 외쳤다. "아저씨, 이건 잘못된 거예요! 제 친구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고요!" "이러시면 곤란해요." "제가 보증한다니까요! 뭔가가 잘못된 거예요! 맞아요, 누군가가 누명 을 씌운 게 틀림없다고요!" 혜인은 경찰을 계속 붙잡고 친구를 놓아달라고 간청했다.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경찰 한 명은 엘리베이터가 올라오자 혜인을 거칠게 밀어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힘없이 나동그라진 혜인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을 멍한 눈으 로 보았다. "괜찮니?" 조심스러운 음성에 홱 하니 고개를 돌린 혜인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매니저를 노려보다가 다시 뺨을 때렸다. 반대쪽 뺨도 보기 좋게 얻어맞은 매니저는 사람을 죽일 듯한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가 내뱉은 혜인은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당신은 해고야." 프로메테우스는 부산항으로부터 100km 떨어진 지역에 호화 유람선 을 띄워놓고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가 부하의 보고를 받았다. "한 시간 전 닥터가 체포되었답니다." "체포당해준 거겠지. 닥터가 마음 먹고 도망친다면 누구도 잡을 수 없다." "한국 검찰은 조사 끝에 거의 대부분의 닥터 재산을 압류했다고 합 니다." "비자금을 안 만들기로 유명한 부호 아닌가. 재산 파악하는 것도 굉 장히 쉬웠겠지. 그래, 얼마나 되지?" "현재까지 파악된 것만 80조 달러 가량 된다고 하는군요." "엄청나긴 하지만 생각보다는 적은데?" "한국 정부가 그동안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었으니까요. 이런저런 사업에 임시로 끌어다쓴 자금이 꽤 될 겁니다. 그 부분도 지금 검찰 이 추적하고 있다 합니다." "하긴, 조금씩 비자금 떼어다 먹어도 닥터는 신경도 안 쓸 테니까. 이자로 붙는 것 중에서 1%만 슬그머니 떼먹어도 얼마야?" 여직원은 노트북을 두드리며 브리핑을 계속했다. "조금 전 <심판의 빛> 점검을 끝냈습니다. 점검 결과 시스템에는 아 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다면 니콜라스 베르노는 아직 살아있단 말인가?" "하지만 발신전파가 지구 어디에서도 감지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 다면 역시 죽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아무리 비과학적인 점 투성이라지만 그것만은 확실해." <심판의 빛>은 미사일 유도 전용 인공위성 시스템 체계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세계의 균형을 유지할 자격을 갖춘 인물을 선정해 핵미사일 발사 권한을 부여한다. 해당 인물이 원하는 지역에 언제든 미사일을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이다. 해당 인물이 타살 당했을 시에는 사망 장소에 미사일이 떨어진다. 지금까지 이 권한을 부여한 사람은 니콜라스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그 모든 일렬 과정은 지구 주위를 도는 수십 개의 유도 위성과 위성 에 장착된 중앙 컴퓨터가 관리한다. 컴퓨터는 스스로 사고할 수 있 어,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하고 자기 자신을 발전시킨다. 제작자인 프로메테우스라 할지라도 시스템 점검이나 업데이트만을 할 수 있을 뿐이며, 기존 권한자의 권한을 회수할 수는 없다. 물론 프로메테우스가 생각을 바꾼다면 심판의 빛 자체를 먼지로 돌 릴 수는 있다. 회유만을 할 수 없을 뿐이다. 그러나 심판의 빛을 건 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제작할 때부터 프로메테우스가 품은 거룩한 신념이었다. "심판은 뭐라고 하던가?" "니콜라스 베르노는 아직 죽지 않았을 거라고만 대답합니다. 그래서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았던 거라는군요." "하지만 살아있을 상황이 아닌데?" "죽었다는 완전한 증거 역시 없다고 하더군요." "하여튼 컴퓨터들이란 융통성이 없다니까." 프로메테우스는 겉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밝은 웃음을 띠었다. 신문을 펴들고 다시 일광욕을 즐기기로 한 그는 선실로 내려가는 비 서에게 짤막하게 명령했다. "항구에 배를 갖다 대.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다."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꼬마코린 오오오+_+!!! 2005/04/08 THEDUCK 흠냐~ 재미있게 보고 잇습니다,, 아담부터 봤따는 ㅋㅋ 아참 그런데 안녕히님 들어오시다 보세요 님이 쓰시던 소설이 다 사라졌네요,, 찾아봐도 없던데,, 지우셧나요?? 2005/04/08 주니어 실탄 파이팅 2005/04/09 영 열심히 실탄님을 따라 가겠습니다.. 후후 2005/04/09 나 여러분은 아직 보이지 않으신가요? 그렇다면 조금만 더 뛰시면 됩니다. (생략 부분) 제가 여러분을 위해 광참을 해드리겠습니다. -> 마지막 줄 원츄! 2005/04/09 나2 뛰고 싶어도, 광참을 해야 뛰든지 말든지 할것이 아니겠습니까..(OTL) 2005/04/09 조찬우 위에오타인듯 듣기싶어요 ->듣기 싫어요 2005/04/09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4/18 페이지 ▷ 304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4) [7] 실탄 2005/04/0813Kb 619 ▶ 303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3) [6] 실탄 2005/04/0711Kb 637 ▶ 302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2) [9] 실탄 2005/04/0613Kb 626 ▶ 301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 [13] 실탄 2005/04/0511Kb 738 ▶ 300 - RESTART(6) [9] 실탄 2005/04/0413Kb 698 ▶ 299 - RESTART(5) [10] 실탄 2005/04/0314Kb 636 ▶ 298 - RESTART(4) [13] 실탄 2005/04/0212Kb 696 ▶ 297 - RESTART(3) [15] 실탄 2005/04/0112Kb 689 ▶ 296 - RESTART(2) [7] 실탄 2005/03/3113Kb 645 ▶ 295 - RESTART(1) [9] 실탄 2005/03/3013Kb 783 ▶ 294 - 추억의 그림자(6) [6] 실탄 2005/03/2912Kb 700 ▶ 293 - 추억의 그림자(5) [12] 실탄 2005/03/2814Kb 687 ▶ 292 - 추억의 그림자(4) [15] 실탄 2005/03/2412Kb 816 ▶ 291 - 추억의 그림자(3) [9] 실탄 2005/03/2012Kb 883 ▶ 290 - 추억의 그림자(2) [7] 실탄 2005/03/147Kb 885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3] 4 [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1142 :: 305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5) 실탄(cruel) 05-04-09 :: :: 12223 닥터를 체포했다는 소식을 접한 국회는 긴급 호송 명령을 내렸다. 일반 용의자와는 차원이 다른 중대한 인물의 호송이다. 당연히 그 준 비는 몇 배로 두터울 수밖에 없었다. 닥터를 태운 차를 중심으로 완전무장한 경찰 수백 여 명과 수십 대 의 경찰차가 포위한 채 이동했다. 열 기의 경찰 헬기가 동원되었으 며, 군대는 혹시라도 모를 움직임에 대비하기 위해 비상경계체제에 들어갔다. 맥이 있는 발전소에는 일개 대대의 병력이 배치되었다. 기갑사단을 추가 배치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논의 끝에 제외되었다. 군 장 성들은 맥이 누군가에게 탈취당할 가능성만 제거하면 안전할 거라 생각했다. 그들은 맥이 자의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몰랐다. 예안은 일단 경찰서 유치장까지 연행되었다. 아직 재판을 받지 않았 으니 죄수는 아니고 용의자일 뿐이다. 그러나 특급 죄수 이상으로 엄 중한 감시를 받는 용의자이기도 했다. "맥 대여 계약 체결을 조건으로 김영환 대통령에게 비자금을 제공했 다는 게 사실입니까?" "김영환 정부가 유전을 관리하는 동안 수익의 일부를 정치자금으로 빼돌리는 것을 묵인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한 말씀만 해주세요!" 마이크를 들이대는 기자들과 경찰들 사이에서는 몸싸움에 가까운 실 랑이가 벌어졌다. 예안은 시끄럽게 소리치는 기자들에게는 일절 눈길 도 주지 않은 채 똑바로 정면을 보고 걸었다. 일말의 죄도 없다는 당당한 태도가 공중파를 타고 전국에 퍼지자 상 당수의 국민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본래 대중이란 한 사람의 상승보다는 추락을 보고 더욱 즐거움을 느 끼는 법. 그들은 닥터에게 죄가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세계 제일의 부와 천재적인 두뇌, 그리고 뛰어난 미모를 지닌 남부러 울 것 없는 완벽한 소녀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는 광경. 그것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허사가 되었다는 게 중요했다. 철컹. 차가운 유치장 창살이 닫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예안은 조용히 구석에 가서 앉았다. 본래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었을 유치장이었지만 경찰 측은 특별히 그녀를 배려해서 혼자 쓰도록 해주었다. 국제적인 위명을 떨치는 인 물을 위한 나름대로의 관심이었다. 그러나 그런 저급한 관심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그녀는 쭈그 리고 앉은 채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기자들은 경찰들에게 밀 려나면서도 정신 없이 그녀의 사진을 찍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면회다." 예안은 차가운 물방울이 이마에 떨어진 것처럼 깜짝 놀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간에 누가 왔냐고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누가 찾아왔는 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오실 줄 알았어요, 중현 아저씨." 취조실에서 중현과 일대일 면담을 허락받은 예안은 앉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지나치게 차분한 음성에 중현은 불가사의한 호감까지 느꼈다. "대통령 할아버지는 어떻게 됐죠?" "현재 업무 정지 상태입니다. 지금 상황은 대단히 좋지 않습니다. 최 악의 경우… 대통령직을 박탈당하실지도 모릅니다." 탄핵 이후로 상황이 계속 악화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알았다는 듯 끄덕였다. "니콜라스가 죽었어요." 죄책감이 가득한 음성에 중현은 무척 놀랐다. 그러나 표정에 크게 드 러내지는 않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니콜라스씨가 죽다니요?" "살해당했다나 봐요. 중현씨도 알고 있는 제 적에게." "도대체 누가 니콜라스 베르노를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FBI도 겁 내지 않는 마피아들도 두려워서 벌벌 떠는 사람인데…." "믿어지지 않더라도 사실이에요. 그리고 제 아이도 그들에게 납치당 했어요." 자조적인 웃음을 지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중현은 가슴 시린 안타 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은 섣부른 위로를 건넬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가슴을 억눌렀다. "대통령 할아버지가 저 때문에 난처한 지경에 빠진 건 정말 죄송하 다고 전해주세요. 하지만 전 지금 대통령 할아버지를 도울 정신이 없 어요. 하루라도 빨리 제 아이를 찾으러 가야 돼요." "이해합니다. 진심으로요." "그렇지만 그 전에… 니콜라스 파트너에게 니콜라스가 죽었다는 소 식을 전해줘야만 해요. 그 사람이 어딨는지 중현씨는 알고 있죠?" "니콜라스씨의 파트너요?" "니르라는 여자 말이에요. 의뢰인과의 면담이나 거래성립 쪽 일을 한 다는 니콜라스 동업자 말이에요." 때때로 운명의 신이라는 것은 뜻밖에도 사소한 모습으로 위장한 채 사람들 틈에 숨어 있기를 즐긴다.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던 사람들 이 그 위화감을 깨닫는 순간 놀라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짓궂다고 말하기에는 잔인한 취미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 음에도, 그러한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니콜라스씨에게 동업자가 있다는 소리 는 처음 듣는데요?" 오후에 시내로 배치된 육군 병력은 닥터가 감금된 경찰서 인근 지역 호위 임무를 경찰로부터 떠맡았다. 세계로부터 콜이 끊이지 않는 거 물이니 만큼 어느 국가가 몰래 망명을 도울지 모른다. 국회는 닥터에 대한 감시의 눈길에 조금도 소홀함을 두지 않았다. 그 것은 닥터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어둠에 물들여진 서울 상공에 한 기의 민간 헬기가 떠 있었다. 헬기 에 장착된 원거리 카메라를 통해 병력 배치 현황을 생생하게 구경하 던 프로메테우스는 짤막하게 감상을 밝혔다. "사람 대접을 할 줄 모르는 녀석들이군. 닥터를 고작 저따위 좁은 경 찰서 유치장에 가두다니." "그렇다고 특급 호텔의 스위트 룸을 빌릴 수는 없는 노릇이죠." "어쨌든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사실이야. 시작해." "예." 비서는 헬기 계기판의 붉은 버튼을 꾹 눌렀다. 승인을 허락받은 시스 템은 모든 전투머신을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크기 2미터 가량의 머신들이 정지해 있는 차를 비롯하여 건물 등 엄 폐물 사이를 지나서 병사들에게 접근했다. 사람처럼 생긴 그것들은 손목과 어깨, 몸체 부분에 각각 발사구를 갖고 있었다. 가슴판의 덮개가 열리며 조그만 소형 물체가 빠르게 발사되었다. 물 체는 하얀 연기를 뿜어내며 병사들 앞에 떨어졌다. 한순간에 사람을 잠재워버리는 강력한 수면 가스였다. 단 한 명의 병사도 외부의 침입을 눈치채지 못한 채 수면에 빠져 쓰 러졌다. 머신들은 길목을 막고 쓰러진 병사들의 몸을 옮겨다가 한쪽 으로 치웠다. 헬기에서 와이어를 타고 내린 프로메테우스는 방독면을 쓴 채로 경 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경찰서 내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잠이 든 채 쓰러져 있었다. 어지럽게 서류가 늘어진 책상과 잠든 사람들을 혀를 차며 바라보던 프로메테우스는 유치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들었다. "마중 나왔습니다, 닥터." 프로메테우스는 유쾌하게 웃으며 불을 켰다. "오랜만이군요."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설마 제가 올 줄 예측하고 있었습니까?" "그럴 리가요. 당신이 온다고 해서 특별히 나아질 건 없으니 좋아라 할 것도 없는 거죠." 프로메테우스는 그녀의 뺨에 눈물 자국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대단 히 안쓰러워했다. "아이 생각을 하면서 눈물 짓고 있었던 겁니까? 역시, 아이 앞에만 서면 당신도 자애로운 어머니밖에는 될 수가 없나 보군요." "유빈이를 납치하는데 설마 당신이 도움을 준 건 아니겠죠?" "글쎄요." 미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말에 그녀는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같은 사람,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용서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뭐가 당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거야! 왜 아무 죄도 없는 나와 내 아 이를 괴롭히는 거냐고!" 유쾌한 표정을 싹 지운 프로메테우스는 얼굴을 차갑게 굳혔다. "당신은 세계를 뒤엎을 수 있는 힘을 지녔으면서도 고작 한국이라는 둥지에 만족하며 안주하려 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죄입니다." 숨길 수 없는 고뇌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고독함을 밟고 서서 세 계를 관조하면서도, 결코 자신이 택한 길을 후회하지 않는 남자만이 지닐 수 있는 번뇌였다. 그녀는 울컥한 기분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화를 낼 때가 아니다. 그 에게서 알고 싶은 게 있다. "니콜라스에 관해서 많이 알아?" "적어도 미 정부가 아는 것 이상은 압니다." "동업자가 있어?" "처음 듣는 이야기로군요. 니콜라스 베르노는 언제나 혼자였습니다. 동업자 따위가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여덟 살 때 슬램가에 쓰러져 있는 것을 거둬서 청부업자로 일하게 끔 도와줬다는 젊은 여자 같은 사람이 없단 말이야?"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어디에서 그런 말을 들었습니까?" 그의 표정에는 조금의 거짓도 드러나 있지 않다. 예안은 무거운 표정 을 바닥을 향해 떨어뜨렸다. 적어도 그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 남자다. 보다 더 큰 이익의 수호를 위해 진실을 왜곡하는 일은 있을지언정, 거짓을 말함으로써 스스로의 혀를 더럽히는 짓은 하지 않는 긍지 높은 사람이다.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짓던 그녀는 실성한 사람처럼 피식피식 웃 음을 터트렸다. "그럼 뭐지? 니콜라스가 그렇게 말했던 니르라는 여자는 도대체 누 구인 거야? 걔가 나한테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아니면 걔 어디가 이상하다는 거야?" 프로메테우스는 대단히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은 채 경청했다. "세상이 바보가 돼서 돌아가는 것 같아. 니콜라스는 이제 볼 수 없게 됐지, 내 아이는 납치 당했지, 아빠는 행방을 모르지, 나는 완전히 한 국의 적으로 찍힌 채 이 꼴이 돼있지.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꼴을 당해야 돼? 어이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니콜라스 베르노는 살아있을지도 모릅니다." 넋이 나간 얼굴로 한탄하던 예안은 흠칫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아있다니? 오스카는 분명히 죽었다고 말했는데?" "추측일 뿐입니다. 분명 니콜라스 베르노는 도저히 살아 나올 수 없 는 상황에서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만, 확실하게 죽었다는 증거 또한 없습니다. 그래서 심판 녀석도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은 것이죠." "심판?" "니콜라스 베르노에게 핵미사일을 판매했다는 이야기는 전에 했지 요? 그 발사 관제를 제어하는 컴퓨터를 심판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축 늘어져 있던 눈동자에 미묘한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프로메테 우스는 흐뭇한 웃음을 띠며 만족해했다. "그 녀석이 그러더군요. 니콜라스 베르노가 죽었다는 결정적인 증거 가 없다고.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녀석이기는 하지만 허황 된 오류에 빠지지는 않는 녀석이니까 일단 믿어볼 참입니다." "정말 살아있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지금 어디에?" "좋은 소식을 들려주니까 다시 고운 말이 나오는군요. 그것까지는 저 역시 모릅니다. 어쨌거나 확실하게 살아있다는 증거가 없기도 마찬가 지이니까요." 그 정도라면 충분하다. 일단 희망은 가질 수 있으니. 잠시 가슴이 들떴던 그녀는 아이가 생각나자 다시 안색이 울적하게 변했다. "닥터의 집에 있던 키메라가 한국 정부에 잡힌 것, 알고 있습니까?" "지나요?" "그새 이름까지 붙인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지나라는 키메라는 지 금 한국 정부의 손안에 있습니다. 물론 아틀란티스의 손이 닿아 그렇 게 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고위 정치가들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그래서요? 그게 어쨌다는 거죠?" 예안은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고작해야 인조 생 명체 따위가 뭐가 중요하다고 지금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느 냐고 질책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어디에 잡혀있는지 제가 알고 있습니다. 가보시겠습니까?" "내가 뭐하러요?" "오늘 안으로 가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내가 알 바 아니…." 대뜸 쏘아붙이려던 예안은 문득 니콜라스가 생각나 멈칫했다. 그 녀석은 지나를 참 애지중지 아꼈지. 지나가 가졌다는 근원 모를 아이에게도 크게 신경을 쓰곤 했다. 경직된 얼굴로 고심을 거듭하던 그녀는 어쩔 수 없지만 가봐야겠다 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 "알았어요. 내 아이 먼저 구한 다음에 지나도 구할게요." "안 됩니다. 당신의 아이는 목숨만큼은 전혀 위험하지 않지만 그 키 메라는 오늘내일 안으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가봐야만 합 니다." "내 아이가 먼저예요." "그렇다면 실컷 당신 아이 먼저 구하러 가보시지요. 대신에 어디에 있는지는 당신 스스로 알아내야 할 겁니다." 그녀는 힘껏 분함을 깨물며 그를 쏘아보았다. 그렇다. 자신은 지금 아이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오스카가 앤 슨이 납치했을 거라고 말했으니, 천상 앤슨이 접근해올 때까지 이 차 가운 유치장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잠시 동안 마음을 진정시킨 그녀는 다소 차분해진 얼굴로 말했다. "좋아요. 지나한테 먼저 가겠어요. 대신에 유빈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줘요." "걱정 마십시오. 약속은 어기지 않습니다." 정말이지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다. 니콜라스를 죽이겠답시고 그렇게 줄기차게 공격을 해대고는, 이렇게 찾아와 니콜라스는 죽지 않았을 거라고 위로 아닌 위로나 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무언가 함정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간혹 들지만 이 이상으 로 나빠진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는 아군은 아니지만, 적어도 완전한 적도 아니니 조금쯤은 믿어볼 가치가 있다. '그래. 어디까지나 조금일 뿐이야….' 그의 안내를 받아 경찰서를 나서면서 그녀는 흘끗 그를 노려보았다. 아이를 되찾기만 하면 절대, 절대로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by eden 그러니까 제가 챕터 제목 보고 기대하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ps : 밤샘을 해서 그런지 너무 졸립니다. 하지만 오늘 5시에 약속이 있어서...잠깐 눈 붙이고 나가야겠는데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지 참 걱정이 되는군요. 고치기 지우기 목록 lyg2468 ..........살아서 돌아와 주세요;; 2005/04/09 루리에르피나 좀비라도 되어서 돌아와 주세요 2005/04/09 나 완결을 내고 가주세요....(라고 말하고 팬들에게 맞아죽는다) 2005/04/09 겨울 .. 괜히 죄송한..-_-; 힘드셨을텐데 푹 주무시고 내일도 힘내세요! ^ㅡ^ 2005/04/10 흐음 으흠 국회가 행정부 노릇을 한다는 얘긴데.. 실현 불가능한 일이죠.. 차라리 대통령 탄핵하고 새로운 대통령이 야당에서 나온다면 모를까.. 기관이 완전히 다르니까요. 심장이 안 좋다고 다른 사람의 간을 심장의 자리에 붙인다고 뛰지는 않죠..대통령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한후 새로운 대통령이 나와야 하지만 보통 이런 경우 계엄령을 내려 국회를 무력화 하고 언론만 잡으면 상황 ok 대통령 아찌가 너무 쉽게 당하는 듯... 뭐 사실 언론과 손 잡고 반론을 펼친다면 승산이 없는 상황도 아닌 듯 한데.. 좀 쉽게 끝나는 듯 하네요.. 2005/04/10 실탄 대통령의 업무는 중지됐고 나라는 긴급한 상황(유전 사기 정도면 충분히 국운을 건 전쟁 이상으로 긴급하다고 봄)인 특수한 경우입니다. 현 시대의 법 근거는 어떠한지 잘 모르겠으나, 미래 같은 경우는 위와 같은 상황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애초에 그러한 지적을 피하기 위해서 시대를 근미래로 잡은 것입니다. 2005/04/10 실탄 덧붙여 아틀란티스는 언론사 경영진들을 세뇌할 수 있습니다.; 2005/04/10 안녕히 어려워. 어려워... 사소한 일상 얘기로 돌아가 주세요... 오랜만에 집에서 돌아왔더니 소염이 2개 올라와 기뻤는데 벌써 다 읽었버렸네요.^^ 2005/04/10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3/18 페이지 ▶ 319 - 낙원(4) [24] 실탄 2005/04/2215Kb 883 ▶ 318 - 낙원(3) [14] 실탄 2005/04/2122Kb 832 ▶ 317 - 낙원(2) [11] 실탄 2005/04/2012Kb 786 ▶ 316 - 낙원(1) [8] 실탄 2005/04/2014Kb 734 ▶ 315 - 부등호(7) [15] 실탄 2005/04/1912Kb 785 ▶ 314 - 부등호(6) [12] 실탄 2005/04/1814Kb 704 ▶ 313 - 부등호(5) [15] 실탄 2005/04/1713Kb 774 ▶ 312 - 부등호(4) [13] 실탄 2005/04/1614Kb 740 ▶ 311 - 부등호(3) [12] 실탄 2005/04/1521Kb 710 ▶ 310 - 부등호(2) [11] 실탄 2005/04/1412Kb 641 ▶ 309 - 부등호(1) [10] 실탄 2005/04/1313Kb 690 ▶ 308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8) [7] 실탄 2005/04/1212Kb 675 ▶ 307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7) [22] 실탄 2005/04/1113Kb 696 ▶ 306-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6) [8] 실탄 2005/04/1014Kb 670 ▷ 305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5) [8] 실탄 2005/04/0912Kb 722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 3 [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1297 :: 306-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6) 실탄(cruel) 05-04-10 :: :: 13744 "지나가 이런 곳에 있단 말이에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앞의 시설물을 바라보며, 그녀는 질렸 다는 느낌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서치라이트 시설을 비롯한 철통같 은 경비망이 갖추어진 거대한 건축물, 이것은 아무리 봐도 군사 시설 물이었다. "그렇습니다. 그 키메라는 이곳에 있습니다." "아니, 왜 군대가 지나를 잡아두고 있는 거죠?" "티아마트는 이미 세계적인 테러조직으로 낙인찍혔으니까요. 정작 레 이온은 테러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데 말입니다." 섣불리 들어가기에는 두려움이 느껴지는 장소이다. 온갖 첨단 감시 설비들이 갖추어져 있을 게 뻔한데, 아무런 장비도 없이 잠입했다가 는 벌집 신세가 될 것이다. 그녀의 걱정을 눈치챈 프로메테우스는 가슴에서 리모컨 비슷한 것을 꺼냈다. "그게 뭐죠?" "연락용 단말기입니다. 이곳에 전자 포를 발사하도록 명령을 내리겠 습니다." 그는 단말기를 조작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를 따라 그녀도 잠자코 한 쪽으로 물러섰다. 어두운 저 하늘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새하얀 빛줄기가 포물선을 그 리며 시설물을 향해 정확히 내리꽂혔다. 커다랗고 푸른 폭발이 터지 듯 일어났다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시설물은 멀쩡했지만, 모든 건물의 불이 꺼져 있었다. "전자장치 가동을 일시 중단시켰습니다. 복구하는데 꽤 시간이 걸릴 테니 여유 있게 들어갈 수는 있을 겁니다." "적의 습격이라 단정짓고 감시망을 강화하면요?" "그때는 죽어라고 도망쳐야지요." 웃자고 한 소린가. 그녀는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다가,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떼어놓자 넌덜머리를 치며 뒤쫓아갔다. 육중한 철로 된 중앙문이 나타나자 프로메테우스는 초고온 절단기를 꺼내 간단하게 잘라냈다. 콰당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바닥에 쓰러 졌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복도가 눈앞을 가로막자 그는 야시경 을 꺼내어 썼다. "이봐요, 나는 안 줘요?" "필요합니까?"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반박에 그녀는 재미없다는 듯 칫 하고 이를 갈 며 손을 내저었다. "됐으니까 혼자 쓰세요." 어둠은 그녀에게 아무런 제약을 주지 못한다. 내키지는 않으나 마음 만 먹는다면 이 정도 어둠 속은 대낮처럼 활보할 수 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복도가 이윽고 끊어졌다. 프로메테우스는 엘 리베이터 계기판을 조작해 문을 열었다. "전자파 포를 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엘리베이터가 작동하는 거죠?" "특수한 방어장치가 설치되었다면 전자폭탄을 맞아도 작동하는 게 당연합니다." 최하층수 버튼을 누른 프로메테우스는 빙긋이 웃으며 덧붙였다. "이 아래에 그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는 뜻이겠죠."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점점 내려가는 층수만 또렷이 주시했다. 한 층 한 층 내려갈 때마다 무거운 기운이 가슴을 짓눌렀다. 도망치 고 싶은 기분, 전부 다 부수어 버리고 싶은 충동, 등등 오만가지 상 념이 머릿속을 괴롭혔다. "불안할 것 없습니다. 함정 같은 것은 아니니까요. 뭐 때문에 거짓말 을 해가면서까지 유치장에 갇혀 있는 당신을 함정으로 끌어내겠습니 까?" 위로하는 건지 조롱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착 가라앉아 있는 음성이 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프로메테우스는 품에서 권총을 꺼내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열린 문 밖으로 또다시 복도가 보였다. 천장에는 둥근 등이 밝혀 환 하게 비추고 있었다. 복도 끝에는 또다시 철문이 보였다. 사람의 모 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정말 지나가 있단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지나를 데리고 뭘 하길래 이런 곳에…." 프로메테우스가 출입시스템을 깨부수는 것을 구경하던 그녀는 불안 으로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구체적으로 말할 순 없지만, 봐서 는 안 될 것 같은 광경을 보고 말 것 같다는 예감이었다. 문이 열리자 조그마한 공간이 나타났다. 지름이 몇 미터도 채 되지 않을 조그만 방은 사방이 투명한 유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앞장서서 유리 건너편을 확인한 프로메테우스는 등을 돌리고 흘끗 눈짓을 했다. "보시지요." 그녀는 잠자코 걸음을 내딛었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불안 함은 송곳이 되어 가슴을 쿡쿡 찔렀다. 유리 건너편에는 커다란 공간이 있었다. 실험실과 수술실을 합쳐놓은 듯한 공간이었다. 생체실험실이라고 하면 딱 알맞은 이미지일까. 십여 명에 해당하는 흰옷의 연구원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그들 은 이쪽은 보이지도 않는지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예안은 투명한 벽을 손으로 짚으며 심호흡을 했다. 끔찍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광경에 동공이 저절로 커졌다. 한가운데에 놓인 침대에는 지나가 알몸으로 묶여 있었다. 특수금속으 로 사지가 결박된 채였다. 메스를 든 연구원이 지나에게 다가갔다. 팔뚝의 피부를 가르고 근육 의 상태를 살폈다. 조직 성분을 채취한 연구원은 피부를 봉합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나오던 피가 새카 맣게 굳었다. 다른 연구원이 지나의 배를 갈랐다. 안의 장기 상태를 세심하게 살피 고는 조직을 채취했다. 죽으면 안 된다고 여겼는지 세심하게 배를 닫 고 피부를 봉합했다. 팔뚝을 봉합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회복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서인 듯 싶었다. 다른 의사가 지나의 성기에 내시경을 넣고 관찰을 시작했다. 마치 식 용 가축을 진찰하는 듯 냉정한 움직임이었다. 예안은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붉은 피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비 릿한 맛이 느껴졌지만 입술이 다쳤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지나의 팔이 갈라졌을 땐 자신의 팔이 갈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지나의 배가 갈라졌을 땐 자신의 배가 갈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지나와 신경이 동일화돼버린 것처럼, 지나가 당하는 모든 일들이 자 기 자신에게도 일어나는 것처럼 강한 수치와 분노가 일어났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참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프로메테우스는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을 뿐, 그녀를 부축할 생각은 품지 않았다. 팔이 뜯겨나갈 듯 아프고 내장이 분해되는 듯 고통스러웠다. 누군가 몸 안을 파헤치는 듯 고통스럽고, 누군가 몸 안을 들여다보는 듯 수 치스러웠다. 익숙한 느낌의, 그렇지만 결코 기억에는 없는 환청과 환영이 귓가를 맴돌고 머리 속을 헤집었다. 「이번에도 실패인가, 박사? 벌써 몇 번째 실패인지 알고 있나?」 「천사 프로젝트가 4년 만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나는 지금 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 「벌써 4년째 저런 실패작 따위가 나오고 있으니 내가 화를 내지 않 게 생겼나?」 「유젤의 몸은 현 인류를 훨씬 초월한다. 기존의 단순한 방식으로 완 전한 복제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알고 있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성과를 보이란 말이다! 위에서 지금 얼마나 초조해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희미하기만 하던 환영이 조금씩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하얀 빛이 가득한 연구실이었다. 거대한 캡슐이 사방에 즐비해 있고, 유쾌하지 못한 약 냄새가 코를 찌른다. 흰 가운을 입은 청년은 초조한 얼굴로 캡슐을 하나하나씩 둘러본다. 캡슐 안에는 너나할 것 없이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머리색을 가진 여자들이 눈을 감고 잠들어 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여자들은 조금씩 변해간다.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몸을 가지고 태어난 여자들이 조금씩 달라진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개성은 부질없는 것. 실패라는 증거 밖에는 되 지 않는다. 청년은 피곤함에 젖은 표정으로 캡슐들을 일일이 쓸어본다. 그의 얼 굴에는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가득하다. 답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묻고 싶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를 만나고 싶어하는 거냐고. 캡슐에 담긴 여자들의 눈을 통해 예안은 청년의 깊은 번뇌를 보았다. 그가 발 딛고 있는 절망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또렷이 확인했다. 그가 짊어진 괴로움을 해결해주지 못해 괴로워하는 수백, 수천 명의 여자들의 안타까움에 절실히 동화되었다. 「무에서부터 복제할 수 없다면 차라리….」 가장 깊은 문이 열린다. 스산한 한기가 뿜어져 나와 레이온의 몸을 천천히 감싼다. 예안의 의식은 가장 두려운 것이 저 안에 있음을 느꼈다. 캡슐의 여 자들은 일제히 눈을 뜨고 그 안을 바라보았다. 짙은 어둠이 가득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두려웠다. 순간 레이온이 등을 돌렸다. 예안의 의식과 그는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의식이 가물해지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그의 눈동자가 커지며 눈앞에 닥쳐왔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정신을 차렸다. 그의 눈동자는 간데 없고, 죽음의 빛이 가득한 지나의 눈동자가 자신 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세뇌를 걸듯 자신에게 속삭였다. 저것은 환각이야. 잘못 본 거야. 지나가 여기를 볼 수 있을 리 없어. "닥터…?" 프로메테우스는 이상함을 느끼고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듯 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귀신에라도 홀린 사람처럼 뚫어져라 벽 건너편을 바라보는 그녀의 태도에 프로메테우스는 강한 불길함을 느꼈다. 건너편에서 한 연구원이 다른 수술 도구를 집었다. 지나의 머리카락 을 밀고 드릴을 준비했다. 피부를 절개한 뒤 드릴로 머리뼈에 구멍을 뚫었다. 뼛조각을 들어내자 뇌를 감싼 점막이 노출되었다. 연구원은 점막을 절개하고 뇌를 개방했다. 연구원은 어떤 약물을 주사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약물이었지만, 예안은 그것이 아주 위험한 물질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약물이 주사되자 지나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녀의 숨소리가 조금 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색으로 변했다. 뇌로부터의 신호가 끊어지자 정지하려고 했던 심장은 인공 심폐에서부터 전해진 새로운 자극에 속아 다시 뛰기 시작했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지나는 완전히 죽은 것이다. 저기 수술대 위 에 살아있는 것은 가짜 신호에 속아 심장이 박동하고 있는 몸뚱이일 뿐, 지나의 정신은 완전히 죽은 것이다. "아아…." 신음이 터져 나왔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듯 가쁘고 호흡소리가 거칠어졌다. 무거운 돌덩이로 가슴을 꽉 막은 듯 지독한 괴로움이 그녀를 억눌렀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제 지나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키메라 자체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오직 자신이 태어나기 위해 '그'가 겪었던 수많은 실패가 만들어낸 비운의 희생물, 존재의 의미조차 지니지 못한 채 폐기물로 태어나 폐 기물로 살다가 저렇듯 폐기물로 죽어야 하는 비참한 인간. 그러나 모든 이들은 입을 모아 외칠 것이다. 키메라에게는 인간의 이 름을 소유할 자격이 없다고.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실패작일 뿐이라고. 똑같은 운명의 안배를 딛고 태어났지만, 실패의 늪에 던져진 것과 성 공의 축복을 받은 것은 이렇듯 다른 것이다. "아아아아악!!" 갑자기 예안은 실성한 고함을 질렀다. 귀청이 찢어질 듯 날카롭고, 또한 구슬픈 비명소리였다. 프로메테우스는 순간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뒤돌아 서 달렸다. 그녀가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얼핏 보았지만 개의치 않고 무조건 엘리베이터까지 달렸다. 지상으로 나온 그는 밖에 대기해둔 헬기에 황급히 탑승했다. "출발해! 어서! 이곳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져라!" "무슨 일입니까?" "이곳은 대단히 위험하다! 조금이라도 멀러져야 해!" 평소에 보지 못한 프로메테우스의 다급한 모습에 비서는 숨이 넘어 갈 듯 당황하면서도 재빨리 출동 명령을 입력했다. 엔진이 작동하며 로터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세찬 바람이 일어나 며 헬기가 서서히 떠올랐다. 이윽고 속도가 붙은 헬기는 최대한 빠른 속력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프로메테우스는 초조한 안색을 지우지 못한 채 손으로 성호를 긋는 등 안정을 좀처럼 찾지 못했다. 걱정이 된 비서는 손수건을 건네 그 의 땀을 닦아주려 했다. 그 순간 번쩍하는 폭발이 일어났다. 멀리 떨어진 사람의 시력까지도 한순간 잃게 하는 대단한 폭발이었다. 세찬 폭풍우가 일어나며 헬기가 거세게 흔들렸다. 추락할 듯한 세찬 격동에 비서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프로메테우스는 비서의 몸을 끌어안고 안전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두 사람의 몸이 구석으로 나동그라졌다. 이윽고 폭풍우가 그쳤는지 헬기의 움직임이 안정되었다. 비서는 추락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 이라 여기고, 좀 전에 있던 자리를 내다보다가 그대로 굳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반경 수km의 지역이 말 그대로 순수한 폐허가 되 어있었다. 핵폭탄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거대한 구덩이가 움푹 파여 있는 광경 에 비서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조금만 출발이 늦었으면 우리도 저 폭발에 휘말렸겠지." 프로메테우스는 나동그라질 때 이마에 난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닦 으며 피식거렸다. 비서는 자신 때문에 그가 다쳤다는 것을 상기하고 미안해하며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주었다. "어떻게 된 거지요?" "모르겠다. 닥터가 폭주한다는 것만 느꼈어. 그래서 앞뒤 돌아보지 않고 냅다 도망쳤지." "설마, 저 폭발이 닥터의 초능력만으로 일어난 거란 말씀인가요?"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야. 닥터는… 적어도 우리 인간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존재라 했으니까." 레이온이 그렇게 말했다면 틀림없다. 프로메테우스는 아찔했던 순간 을 상기하며 다시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런데 어째서 닥터가 폭주한 건가요?" "글쎄…. 자기 언니뻘, 아니 자기 자신뻘 되는 여자가 해부용 식물인 간이 되는 광경을 봤는데 폭주하지 않는다면 비정상이겠지. 자기 자 신이 당하는 것과 동일한 공포와 분노를 느꼈을 거다, 아마도." 작아져 가는 폐허를 흘끗 바라보던 프로메테우스는 방탄 유리창에 손가락을 천천히 갖다대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네 부탁대로 했다, 레이온. 하지만… 난 도대체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어둠이 물러가는 소리와 함께 조금씩 햇볕이 뚜렷해졌다. 극악의 공포가 머물렀던 자리임에도 개의치 않고 태양은 따사로운 빛을 폐허가 된 대지 구석구석까지 뿌려주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의문의 폭발로 간밤에 쑥대밭이 되었 으니 한바탕 난리가 났으리라. 깊게 패인 구덩이 한가운데의 재가 들썩거리더니 한 여자가 불쑥하 고 일어났다. 몸에 묻어있던 먼지가 바람에 날려가자 투명하고 날씬한 곡선을 지 닌 알몸이 태양 아래 드러났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푸른 빛깔의 머리 카락은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하게 따사로운 햇살을 반사했다. 흐릿하기만 하던 의식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여자는 문득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팔은 무언가 커다란 물체를 소중한 듯 꽉 껴안고 있었다. 형체가 부스러져 금방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 물체는 분명히 사람의 몸이었다. 희미하게 자연치유의 흔적이 남아있는 팔이 부서져 내렸다. 칼자국이 나 있던 배 부분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머리카락이 밀어지고, 뼈가 뜯어진 머리 부분이 조금씩 흩어졌다. 얼 굴을 덮고 있던 피부가 물에 녹은 종이처럼 형체를 잃어가며 조금씩 바람에 날려 없어졌다. 예안은 지나였던 물체를 꽉 껴안고 무릎을 꿇었다. 바람은 매정하게 지나의 몸을 완전히 먼지로 되돌려 대지로 돌려보냈다.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금 솟기 시작했다. 가슴이 꽉 막혔던 부분이 비로소 뚫어지며 새로운 고통이 그 자리를 다시 차곡차곡 채 웠다. 몸과 마음이 전부 망가지는 것만 같다. 가슴이 찢어진다는 기분이 바 로 이런 것인가. 그녀는 참지 못하고 힘껏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비통이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이 느낄 수 있는. by eden 무언가 강렬한 느낌을 심어줘야 하는데 어째 싱겁게 돼버려서 씁쓸한 느낌을 금할 수 없는 이번 화입니다. 가슴으로 써야 하는 부분을 반쯤 이성으로 써버린 탓에 아마도 그리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다시 쓰기에는 무리가 좀 있군요. 고치기 지우기 목록 루타 우오오오오!!!(;;;) 2005/04/10 헤임달야 뭔가 영화에 한장면 같은 스펙타클(?)한 느낌이네요.. 굿이요.. 2005/04/10 안녕히 최종병기 그녀...가 떠오르는... 그보다 아키라가 더 먼저던가... 아무튼... 설마 예안이 지구를 멸망시키는 건 아니겠죠? 2005/04/11 안녕히 왜 두개가 써진걸까요? 쿨럭. 한번 눌렀는데...^^; 2005/04/11 실탄 예에. 하나 지워드렸습니다. 2005/04/11 판마녀 충분히 강렬했습니다. 비통해 하는 예안이의 심정이 확연히 느껴졌구요.. 무슨 의도로 저렇게 예안이를 괴롭히는건지 모르겠군요. 2005/04/11 영 예안이 괴로워 할수록. 소설이 재밌어요....... 2005/04/11 루리에르피나 이쯤에서 진정한 남주인공이 나타나야 할때? (예안은 패스) 2005/04/11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3/18 페이지 ▶ 319 - 낙원(4) [24] 실탄 2005/04/2215Kb 883 ▶ 318 - 낙원(3) [14] 실탄 2005/04/2122Kb 832 ▶ 317 - 낙원(2) [11] 실탄 2005/04/2012Kb 786 ▶ 316 - 낙원(1) [8] 실탄 2005/04/2014Kb 734 ▶ 315 - 부등호(7) [15] 실탄 2005/04/1912Kb 785 ▶ 314 - 부등호(6) [12] 실탄 2005/04/1814Kb 704 ▶ 313 - 부등호(5) [15] 실탄 2005/04/1713Kb 774 ▶ 312 - 부등호(4) [13] 실탄 2005/04/1614Kb 740 ▶ 311 - 부등호(3) [12] 실탄 2005/04/1521Kb 710 ▶ 310 - 부등호(2) [11] 실탄 2005/04/1412Kb 641 ▶ 309 - 부등호(1) [10] 실탄 2005/04/1313Kb 690 ▶ 308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8) [7] 실탄 2005/04/1212Kb 675 ▶ 307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7) [22] 실탄 2005/04/1113Kb 696 ▷ 306-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6) [8] 실탄 2005/04/1014Kb 672 ▶ 305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5) [8] 실탄 2005/04/0912Kb 722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 3 [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1365 :: 307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7) 실탄(cruel) 05-04-11 :: :: 13283 "유빈아…." 흐릿한 눈동자로 돌아선 예안은 절뚝이며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부터 다가오던 경찰은 그녀를 보고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확성기를 들고 정지하라 외쳤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눈앞에 어떤 인간이 지껄이는 게 보였 으나 관심 밖이었다. 그녀의 뇌리에는 온통 아이에 대한 생각 밖에는 없었다. 실성한 것쯤으로 판단한 책임자는 겉옷을 벗어들고 예안의 앞으로 다가왔다. 딴에는 알몸을 감싸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의 손이 어깨에 닿는 순간 그녀는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가 걱 정스러워하며 옷을 덮어주는 순간 불같이 분노가 일어났다. 벌떡 일어난 그녀는 힘껏 팔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예기가 쏟아지며 책임자의 팔이 종이처럼 잘렸다. 잘린 단면에서 물보라처럼 피가 쏟 아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겁을 집어먹은 총탄이 폭풍처럼 쏟아졌다. 흐느적거리며 일어난 예안은 눈앞에 투명한 벽을 형성시켰다. 벽 위 로 빗발치듯 총탄이 날아들며 때렸다. 벽은 끄덕도 하지 않고 그들을 향해 나아갔다. 벽이 점점 커지며 점 점 가까워지자 그들은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총탄이 바 닥날 때까지 마구 방아쇠를 당겼다. 서늘한 땀이 옷을 축축하게 만들 었다. 깔깔거리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그들을 덮쳤다. 그들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피비린내가 자욱히 일어났다가 식어가 는 그들의 몸 위를 천천히 덮었다. "유빈아… 엄마가 곧… 데리러 갈게…." 혼탁한 눈으로 일어난 예안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느꼈던 불안함은 확신이 되어있었다. 시중을 들어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교양 있고 예의가 바르다. 그러 나 태도만 친절할 뿐, 딸을 만날 수 있느냐는 물음에는 한사코 확답 을 피했으며, 이곳에서 나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지도 않았다. 감옥 아닌 감옥, 그렇게 이곳을 결론짓는 데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 지 않았다. "일어나셨습니까?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인 여자는 요리를 정호 앞에 준비했다. 한국인 취향에 맞는 따뜻한 찌개와 밑반찬을 곁들인 아침 식사였다. 그러나 편한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닌데 식욕이 날 리가 없다. 정호는 몇 수저를 뜨다 말고 밥상을 물렸다. "우리 딸은 언제 만날 수 있지요?" "저희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요사이 테러 때문에 정신이 없으신 듯 한 것 같지만…." "그럼 전화라도 한 통 하게 해줘요." "그것도 곤란합니다. 닥터께서는 현재 비밀리에 어떤 일을 하고 계십 니다. 외부에서 접촉하는 것은 힘듭니다." 완곡한 듯 하지만 명백한 감금이다. 정호는 분명 자식에게 심상치 않 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예감했다. 설명할 순 없지만, 이들이 결코 호의를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 이들과 예안과의 협상에서 자신의 안위가 히든카드로 제시될지도 모른다. 방안에 혼자만 남자 정호는 뒷짐을 지고 창가로 갔다. 간밤에 온 비 로 적셔진 정원이 싱그러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대부호나 소유할 수 있을 법한 정원에 고급 저택, 그렇다면 자신을 감금하도록 명령한 자는 평범한 범죄자 따위가 아닐 것이다. 외국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사람들이 다수 있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외국 세력이 개입한 건지도 모른다. 그것이 마피아 같은 외국계 범죄 집단인지, 아니면 정부에서 직접 손을 쓴 건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슬그머니 의자를 집어든 정호는 힘껏 창문을 향해 던졌다. 둔탁한 소 리가 울리며 의자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유리창은 조금의 손상도 없이 멀쩡했다. 하다 못해 실금조차 생기지 않았다. 특수제작된 강화유리임이 분명하다. 영화에서나 보던 방탄 유리 따위 일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창문은 열리지 않게 되어있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감금이다. "잘 주무셨습니까." 낯선 느낌의 젊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정호는 뒷짐을 진 채로 돌아보았다. 희미한 금발이 섞여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이 서 있었다. 검은 제복이 무척 잘 어울리는, 차갑고 도도한 느낌의 젊은이였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눈동자였다. 고뇌의 한계에서 진정으로 그 고뇌를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결코 평범 한 젊은이 같지 않은 청년이었다. "자네는 누구지?" "오스카라고 합니다." "왜 날 이곳에 가두고 있는 건가?" "가두고 있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저희는 닥터의 아버님을 보호하 고 있는 중입니다. 테러리스트가 닥터와 그 가족을 꾸준히 노리고 있 으니까요." "이것은 보호가 아니라 감금이야. 내가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할 줄 아나?" 정호는 다시 한 번 의자를 집어 유리창에 힘껏 던지고는, 깨지지 않 는 유리창을 화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할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시 늉이었다. 난감하다는 듯 오스카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쉽게 속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너무 뻔한 연극이었나?" "이제야 제대로 실토하는군."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하군. 보통 사람이라면 겁에 질려서 패닉 상태 였을 텐데 말이야. 아니면 엔젤, 아니 닥터의 양아버지로 생활하면서 배짱이 많이 늘어난 건가?" 조용하면서도 사람을 휘어잡는 박력이 넘치는 음성에 정호는 상대가 누구인지, 그 배후에 어떤 세력이 있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예전에 예안이 말해주었던 바로 그 자들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더욱 위험하다. 그 자들은 국가도 어찌하기 힘든 초국가적 인 존재에다가 오로지 자신들이 따르는 신념에만 의거해 행동한다고 했다. 어쩌면 예안도 이미 이들의 손에 잡힌 것은 아닐까, 자신이 모르는 새에 이미 그들은 자신을 인질로 하여 협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퍼뜩 들자 정호는 흙빛이 되었다. "우리 딸은 어떻게 됐지?" "아직 우리 손에 있지는 않다. 하지만 위치를 파악하고 있으니 조만 간 잡히게 될 거다." "날 인질로 삼아서 어떻게 해볼 생각은 하지 마. 그 애를 위험에 빠 뜨리느니 차라리 그 전에 내 숨통을 끊을 거다." "겁쟁이 중년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제법이로군. 걱정하지 않아도 된 다. 당신을 인질로 삼을 생각은 애초에 없었어." 오스카는 가슴에서 총을 꺼내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소리 와 함께 정호는 가슴에서 심한 고통을 느끼고 쓰러졌다. 바닥을 적신 피가 얼굴을 더럽힐 때까지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 닫지 못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동안의 만찬은 사형수에게 베푸 는 친절일 뿐이었어." 상큼하게까지 느껴지는 단아한 어조로 말을 맺은 뒤 오스카는 문을 열고 나갔다.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든 정호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는 자신이 바닥에 쓰러져 있음을, 가슴에 총을 맞았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의식이 점점 흐려왔다. 구멍이 난 폐로는 더 견디기 힘들었다. 차라리 홀가분해졌다. 인질이 되어 자식에게 해를 끼치느니 이대로 죽는 것이 더 낫다. 자신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불행해진다면 그 얼마나 개망신인가. 전처는 또 뭐라고 비난할 것인가.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행방불명되었다가 느닷없 이 여자가 되어 돌아온 자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 덕분에 마냥 행복하기만 했던 시간, 자고 일어나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딸 을 두게 되어 얼떨떨했던 순간까지도. 의식이 까맣게 변했다. 이상하게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죽음인가. 죽는다 해서 슬퍼하진 말자. 그래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에 죽게 되었으니 나름대로 운이 좋다고 생각하자. 아비가 죽었다는 것을 알 게 되면 그 애는 또 펑펑 울지 모르지만, 나중에 저 세상에서 만났을 때에 추억을 안주삼듯 같이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때 까지는 꼭 술을 배우겠지? 손가락이 힘없이 꺾여졌다. 조용한 방안에는 잿빛 죽음의 기운이 서 서히 뒤덮였다. "시신은 정중히 인수해라. 털끝만큼도 무례를 갖추지 말도록." 방아쇠를 당긴 장본인이 할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스카는 떳떳 한 얼굴이었다. 죄는 없지만 살아선 안 될 사람들은 분명 존재한다. 필요에 따라 그 들의 목숨을 거둔다 해도 그에 따른 예의는 갖춰야 하는 법, 오스카 는 그러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다. 깨끗이 씻기고 좋은 옷을 입고 유리 뚜껑이 달린 관에 담겨진 정호 앞에서 오스카는 잠시 묵념을 갖췄다. 눈앞에 잠든 중년 남자는 하찮은 지상인이 아니라, 아틀란티스의 꿈 을 완성하기 위해 바쳐진 고귀한 재물이다. 오스카는 그에 따른 예의 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묵념을 끝낸 오스카는 유하를 돌아보았다. "엔젤은 어디 있지?" "폭발 지점으로부터 남서쪽으로 50km 떨어진 외진 숲에 있습니다. 의식을 잃은 건지 더는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두오 국회 의장은 이 사태에 연루되었다는 비난에 따라 자진 사퇴했습니다. 맥 의 매매가 성립되기까지 그도 한몫 했으니까요." "석창렬 의원이 그럼 곧 의장이 되겠군. 앤슨이 잘 밀어주겠지. 그리 고 현 대통령은… 살아있으면 더 방해만 될 테니 슬슬 제거해주는 게 좋겠군." "도와주시려고요? 앤슨 경을 밀어낼 생각 아니셨나요?" "지금은 합동 플레이를 펼칠 때야." 간결한 대답이지만 그 안에 숨은 의미를 파악하기에는 충분한 근거 를 그는 이미 행동을 통해 보여주었다. 니콜라스를 죽이라 명령하고, 엔젤의 아이를 납치하고, 그리고 엔젤의 양아버지를 사살함으로써. "자, 이제 그만 우리의 메시아를 마중나가야 할 때다." 옷매무새를 단정히 가진 오스카는 먼저 앞장을 섰다. 저택 뒤쪽에는 헬기가 대기하고 있었다. 무언가가 다가오는 느낌에 예안은 눈을 떴다. 흰토끼 한 마리가 자신 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손을 뻗어 토끼를 쓰다듬었다. 토끼는 전혀 겁을 내지 않고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귀엽다고 느낀 그녀는 토끼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마치 아이를 껴 안은 듯 평온한 기분이었다. 눈을 감은 그녀는 잠시 후 토끼를 놔주었다. 껴안았을 때의 느낌이 안락하긴 하지만 저것은 어디까지나 토끼일 뿐, 아이는 아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어디로 갔을까. 아이가 있는 곳을 알려준다고 말해놓 고서는. 죽기 전에 지나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정말로 나를 봤던 것일까. 복제 과정의 실패작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아주 작은 능력 하나 정도 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투시력 같은. 그래, 그럴지도 몰라. 지나는 아마 해부당하기 직전 어떤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힘들게 이쪽을 바라보았던 거고,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나를 바라보면서 지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기 자신이 나를 위한 희생물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걸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쌍둥이 형제를 보고 좋아하듯 그런 기분을 느꼈던 걸까. 품에 조금씩 묻어 있는 재를 바라보며 그녀는 부질없는 질문을 계속 던졌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며 질책했다. 만약 희생을 치러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넌 지나를 다시 살려내 겠느냐고. 잔인한 답은 곧바로 되돌아왔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지나는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자 형제이지만, 실패물을 위해 자신이 희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신은 그저 축복의 성공을 거머쥐었다는 자긍심을 딛고, 실패에 사라져간 생명을 위해 눈물 한 방울만 지어주 면 그만인 것을. 주변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바람이 세차게 불며 춥다는 느낌이 살짝 들었다. 세찬 바람에 눈을 가리며 고개를 든 그녀는 한 척의 헬기가 떠 있는 것을 보았다. 와이어를 타고 두 명의 남녀가 헬기에서 내렸다. 두 남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그녀는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대가 얼마나 무서운 일을 겪었는지는 이미 들었다. 어느 정도 예 측하고 있었으면서도 도와주지 못했던 것,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무뚝뚝하면서도 진심으로 상대를 위하는 말투에 그녀는 가슴이 울컥 함을 느꼈다. "석창렬 의원은 앤슨의 도구에 불과하다. 앤슨은 지금 한국을 우리 시트날타 지부로 삼으려 하고 있다. 나 역시 그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앤슨은 그대에게 고통을 주는 것도 불사하지 않고 있다. 난 그것만큼은 찬성할 수 없다." 유하가 커다란 겉옷으로 자신을 감싸는 것을 예안은 멍한 얼굴로 가 만히 내버려두었다. "김두오 국회의장은 곧 이번 사태에 연루되었다는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도 다음 의장으로 석창렬 의원이 선출되겠지. 현 대통령은 앤슨에게 암살 당할 가능성이 높다. 석 의 원은 앤슨의 지원을 받아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하고 주변국과의 정상회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다. 그리고 다음 대선에 나가 대 통령으로 뽑히겠지." 유하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이를 보듬듯 예안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녀는 여전히 초점 없는 눈으로 오스카의 설명 을 듣기만 했다. "그러고 난 뒤 앤슨은 그 모든 책임을 한국에 뒤집어씌울 것이다. 그 대를 불행하게 만든 것이 한국이라고, 한국이 그대의 아이를 납치하 고 양아버지를 죽였다고 속일 것이다." "아빠가… 죽었다고?" 비보를 접한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덤덤한 목 소리였다. 그러나 그녀가 느끼는 비통을 표현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 이 어울렸다. "그렇다. 앤슨은 이미 그대의 양아버지를 죽였다. 아마도 테러리스트 나 한국 정부의 소행이라고 속일 셈이겠지." "내… 아이는?" "현재 앤슨이 데리고 있다. 앤슨의 세력은 나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터라, 그리고 자칫 내가 앤슨에게 암살당할 수 있기에 섣불리 도와줄 수는 없다.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줄 수 있다." "알려줘. 내가 구하러 가겠어." "그러지." "그전에… 우리 아빠는…?" 비로소 목소리에 울음이 조금씩 묻어나왔다. 오스카는 애처롭다는 표 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채 유하에게 눈짓을 했다. 유하가 단말기로 뭔가를 입력하자 헬기에서 다른 와이어가 내려왔다. 와이어 끝에는 관처럼 보이는 물건이 매달려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그녀는 땅에 놓여진 관으로 다가갔다. 투명한 뚜 껑 아래에는 아버지가 잠자는 듯한 얼굴로 누워있었다. 숨소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혈색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가슴에 한 발, 즉사였다." 뒤에서 오스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녀의 귀에 들릴 리 가 없다. 울음이 묻어나는 눈으로 아버지의 시신을 쓸어보던 그녀는 참지 못 하고 관 위에 엎드렸다. 겉옷에 싸인 좁은 어깨가 들썩거렸다. 통곡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꽉 막힌 가슴이 막았다. 마음껏 울고 싶은 데 아까 다 흘려버렸는지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오스카는 한참 후 그녀가 살기 띤 눈으로 자신을 쏘아볼 때까지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었다. "앤슨은 지금 어디 있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심장을 멈추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 나운 눈동자였다. 오스카는 만족감이 섞인 미소를 얼굴 아래 감춘 채, 상을 당한 동업 자에게 표하는 예의를 전혀 잃지 않은 표정을 띠었다. "미국에 있다. 내가 안내해주겠다." by eden 지금 우울해요. 네, 그래요. 제 기분과 잘 어울리는 이번 화로군요. 유정호씨는 오늘을 기점으로 사망하셨습니다. 고치기 지우기 목록 사케쿠 예안 너무 휘둘린다아!! 뭐....... 다 스토리겠지만 서도 말입니다. 이렇게 휘둘려서야 어떻게 끝이 좋겠나요. 그나저나 저번에도 말한 것 같지만 예안은 신인류이면서도 언제까지 앤슨이나 오스카 같은 인간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는 겁니 까아? 2005/04/11 JIn 똑같은 글이 4개나 있어서 놀랬어요ㅋㅋ 예안이가 신인류의 힘을 발휘해서 앤슨이랑 오스카랑 아틀란티스를 날려버리는 거예요! 아님 에덴으로 도망가던가... 2005/04/11 실탄 지금은 휘둘려야, 그리고 휘둘릴 수밖에 없는 때라 그렇습니다. 그리고 중복된 코멘트는 제가 지워드렸습니다. 2005/04/11 자여니야 .... 아슬아슬한 타이밍이군요..조아라엔 1분에 올라왓더마 [..] 실패한줄알앗 <- 2005/04/11 섬마을김씨 ...가셨구나...삼가 명복을... 2005/04/12 자여니야 탄상 요즘 왜이리 보기 힘들까요오 [물끄럼] 2005/04/12 실탄 조만간 한 분 더 가십니다.(...) 2005/04/12 영 아무리 그래도 너무 휘둘리는 군요.....쩝 조금은 반항도 해줘야 할텐데.... 저렇게 휘둘리다는 점점 답답함이 상승중.~~~ 2005/04/12 실탄 아는 게 없는데 휘둘리지 않는다는 게 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은 실질적으로 너무 고립돼있으니까요. 심지어 레이온조차 주인공을 속이고 있습니다. 2005/04/12 실탄 자여니야/ 저도 보기 힘들던데요. 시간대가 안 맞는 듯하네요. 2005/04/12 ;;;; 세계제일의 천재가 인간의 사고회로를 가졌다지만 너무 아무것도 파악못하는거 아닌가요?;;; 재미있는데..전에도 많이 당하고도 또 저런 사기를 믿는건가.;;왠지.;; 어쩻든 쥔공(의 앤?)아부지 불쌍하다.. 2005/04/12 영 계속 궁금했던건데 노블네트워크? 였던가요.. 거기에 다른사람을 연결시키면 그사람의 마음도 읽을수 있는거 아닌가요? 2005/04/12 Jin 나름대로 유정호 아저씨 좋아했었는데ㅜㅜ 오스카..정말 무서운 사람이군요-_- 예안이 어서 오스카의 만행을 알아차리고 복수를 했으면.. 2005/04/12 실탄 오스카는 처음부터 주인공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앤슨은 분명한 적이었고요. 오스카가 주인공에게 한 말에 타당성이 적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이 뚜렷하고 설득도 뚜렷한 이상 주인공이 현재 오스카를 의심해야 할 이유는 없죠. 2005/04/12 jhj1502 대체 오스카가 좋은건지 앤슨이 좋은건지 -_-; 아 헷갈렷 ㅋ ㅜ_ㅡ 다시 읽어 봐야 하나 ㅜ_ㅡ 소엄 재미있게 보구 있어요 실탄님 짱 ~ 2005/04/12 실탄 앤슨은 오스카보다 먼저 등장했습니다. 그 둘은 기본적으로 목적과 하는 행동은 같습니다만, 오스카가 앤슨보다 더 야심이 있고 교활하고 잔인한 편입니다. 오스카는 혁명을 이룩함과 동시에 아틀란티스가 전 세계를 석권했을 때 자기 적이 될 수 있는 마리오와 앤슨을 미리 눌러놓으려는 거죠. 그래서 위와 같은 일들을 꾸미고 있는 겁니다. 그 차이만 염두에 두시면 헷갈릴 일이 없으실 겁니다. 2005/04/12 미르카도르 그렇게나 고기를 좋아하시던 유정호씨는 끝내 고기먹고 죽었군요 =_= 2005/04/12 실탄 고기 먹은 장면 안 나온 것 같은데요. ps : 고기는 제가 무척 좋아합니다. 2005/04/12 셜이움 경찰만 불쌍하다... 악당도 아니고 주인공한테 죽었네;;; 뭐, 생각해보면 주인공도 악당인가...;;; 2005/04/12 꼬마코린 ...명복을... 2005/04/13 한타박스 아이큐350이상 이라...150정도만해도 기본적인 추리력이랄까...사건을보고 온갖 과정을 대입해서 최적의 결론을 도출해낸다...싶은 능력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진실유무를 떠나서요(주관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주인공은 아무리봐도 가진바능력을 1%도 발휘못하는 무능력자네요... 설정탓하기엔 그 엄청난 설정이 오히려 족쇄랄까...능력좋고 배경좋아도 아무런 자각을 못한다...여러가지 인격을 믹스해놔서 혼란스럽다...마더의 개입이니 닥처라...해도 여전히 무능력자 로만 보이네요....노블네트워크를 이용시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 시스템 인지는 모르지만...최소한 상대방의 속마음 그이상은 알수있는 시스템인데 오스카와 그 무리가 마크를 사주해서 펼치려한 음모자체는 이미 알고있을 텐데도 왜 오스카의 그런 뻔한수작에 당하고 있는지도 궁금하구요... (제임스헤론의 속마음을 해체할때 이미 상대방의 심층의식정도?는 충분히 해킹하더군요...그런데 왜?) 비평인지 감상평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말재주가 없는데 멋적게 끄적거릴 려니...손가락이 반란을... 쓰는재주는 없지만 그렇다고 보는 눈 마저 없는건 아닌지라... 의도를 하나도 모르는상황에서 감히 글쓴이의 창작세계에 짱돌하나 던저 봤습니다...^^; (절 대 로 저는 재미나게 보고있는 독자중 한명이니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그냥...억지상황이 간혹보이는게 설정탓...케릭터탓...상황탓하기엔 뭔가 답답해 놔서^^;;;) 소.엄의 최대 장점은...꼬아놓고 괴롭히기...(여러의미로^^;) 소.엄의 최대 단점은...꼬아놓고 숨기기...(이것역시...^^;) 완성하는 그때까지 힘내시고 건필하세요^^; 2005/04/27 한타박스 3 6 9로 글을 읽은것은 아니지만...그래도 이해안되는 상황들은... 글쓴이께서 생각하던 상황의 묘사를 무의식적으로 타이핑하는 과정에서 유실되는건 아닌가 싶은......무서운 상상을 해봤습니다 2005/04/27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3/18 페이지 ▶ 319 - 낙원(4) [24] 실탄 2005/04/2215Kb 883 ▶ 318 - 낙원(3) [14] 실탄 2005/04/2122Kb 832 ▶ 317 - 낙원(2) [11] 실탄 2005/04/2012Kb 786 ▶ 316 - 낙원(1) [8] 실탄 2005/04/2014Kb 734 ▶ 315 - 부등호(7) [15] 실탄 2005/04/1912Kb 785 ▶ 314 - 부등호(6) [12] 실탄 2005/04/1814Kb 704 ▶ 313 - 부등호(5) [15] 실탄 2005/04/1713Kb 774 ▶ 312 - 부등호(4) [13] 실탄 2005/04/1614Kb 740 ▶ 311 - 부등호(3) [12] 실탄 2005/04/1521Kb 710 ▶ 310 - 부등호(2) [11] 실탄 2005/04/1412Kb 641 ▶ 309 - 부등호(1) [10] 실탄 2005/04/1313Kb 690 ▶ 308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8) [7] 실탄 2005/04/1212Kb 675 ▷ 307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7) [22] 실탄 2005/04/1113Kb 698 ▶ 306-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6) [8] 실탄 2005/04/1014Kb 672 ▶ 305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5) [8] 실탄 2005/04/0912Kb 722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 3 [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1435 :: 308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8) 실탄(cruel) 05-04-12 :: :: 11983 날씬한 전용기 한 척이 우아하게 날아와 활주로에 내려섰다. 미끄러 지듯이 활주로를 달리며 감속한 전용기는 이윽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선글라스를 쓴 젊고 키가 큰 외국계 청년이 보디가드의 경호에 둘러 싸인 채 내렸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앞다투어 밀려나오며 마이크를 들이대었다. "닥터를 영국으로 망명시키기 위해서 방한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행방불명된 닥터가 이미 회장님의 보호 아래 있다는 말도 있는데요. 그게 사실인가요?" 한 마디만 해달라는 집요한 요구가 빗발쳤지만 앤드류는 끄덕도 하 지 않았다. 보디가드들이 기자들과 거칠게 몸싸움을 벌이며 앤드류가 지나갈 길을 텄다. 미리 대기해두었던 차에 오른 앤드류는 비로소 분노가 가득한 표정 을 띠었다. 이런 판국에도 그저 화제거리만 찾아 헤매는 저런 기자들 은 그가 제일 경멸하는 부류였다. "석창렬 의원 댁으로 곧바로 가지." "알겠습니다." 차는 시원스럽게 방향을 돌렸다. 앤드류는 노트북을 꺼내다 말고 눈 을 감았다. 한줄기 걱정이 눈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누나….'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은 아닐까. 하나부터 열까지 걱정이 되어 손에 일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자신이라도 제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그녀를 도울 수 있게 된다. 기껏 한국까지 와놓고 마 음이 흔들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얼마 나 개망신인가. 얼마 걸리지 않아 석창렬 의원의 집에 도착했다. 그는 미리부터 준비 를 갖춰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었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분노로 목소리가 떨려나왔으니 앤드류는 짐짓 그렇지 않은 척 위장 했다.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고 눈앞의 상대를 살폈다. 중년과 노년 사이에 머물러 있는, 아직 권력을 위해 한창 욕망을 불태울 나이. 결코 마음 에 흡족한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과는 아주 정반대였다. "성의를 다해 준비한다고는 했으나 음식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소. 딸 내미가 서양식을 준비하자고 했으나 먼 길에서 오시는 손님에 대한 도리가 아닌 듯해 한식으로 준비했소." "배려 감사합니다." "자, 시장하실 텐데 식사부터 하시지요." 석창렬은 앤드류를 손수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가 앉자 이윽고 가족 들이 들어와 인사를 하고는 탁자에 둘러앉았다. 갓 스무살이 넘어 보 이는 막내아들은 세계 제일의 거부를 눈앞에서 보게 된 탓인지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능숙하게 주도하며 석창렬은 식사 분위기를 이끌 어나갔다. 화제를 주름잡는 것이라면 앤드류도 뒤지지 않았다. 두 사 람은 가끔씩 서로에게 동의하거나 반박하기도 하며, 상대 파악에 온 힘을 기울였다. 식사가 끝나고 차를 즐기는 시간이 되었다. "비행기 안에서 신문을 보았습니다. 오늘 아침 김두오 의원이 의장직 에서 자진사퇴 했다고 하는군요." "그렇습니까. 소식 한 번 빠르군요." "강력한 다음 의장 후보가 석 의원님이라고 들었습니다. 미리 축하드 립니다." "웬걸요. 아직 뽑힌 것도 아닙니다." 겸손을 유지하면서도 끝없는 자신감만큼은 조금도 숨기지 않고 있다. 앤드류는 눈앞의 이 사람에게 어떠한 지지대가 있음을 강하게 확신 했다. 그가 능력이 없다는 것은 아니나, 그의 본래 위치에서 지금에 이르기 까지는 능력만으로는 통용되지 않는다. 뛰어난 운도 받쳐줘야만 가능 한 법이다. 그러한 운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거저 생겨났다고는 믿 을 수 없다. 프로메테우스도 말했다. 석창렬 의원을 조심하라고. 그런 인물이 굳이 지적을 할 정도면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상대 임이 틀림없다. 시트날타가 연관되어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누나가 행방불명이 되기까지는 이 중년 남자도 지대한 공을 끼쳤으 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앤드류는 다시 분노로 가슴이 떨려왔 지만 꾹 눌러 참았다. 지금은 그런 기분을 내색할 때가 아니다. "닥터가 한국을 상대로 사기극을 벌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몰랐나요? 닥터는 맥을 대여했으면서 감히 매매했다고 국민 모두를 속였습니다. 유전은 우리나라 예산의 90%를 담당하던, 말 그대로 황 금알을 낳는 거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요." "본래 대여비용으로 유전을 요구한 것은 누나, 아니 닥터의 뜻이었습 니다. 한국 정부는 거기에 응했으면서도 국민들의 비난을 두려워해 대외적으로는 매매라고 해두자고 한 겁니다. 왜 그 책임을 닥터가 져 야 하는 것이죠?" "사건이 사건이니만큼 파급이 미쳤다고 해둡시다. 닥터는 그간 나라 를 위해 일한 공적도 있고 하니 가벼운 근신이나 재산몰수 정도로만 끝나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맥은 어떻게 되는 거지요?" 날카로움을 숨긴 물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석창렬은 미소를 지었다. "그야 당연히 정부가 관리하게 되겠지요." "어째서죠? 거래를 무효화한다면 당연히 맥은 원주인인 닥터에게 돌 려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한국의 법률을 잘 모르시는 듯한데, 한국에서 일반인은 권총 한 자 루도 소지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위험한 군사무기를 개인이 소유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귀하의 모국인 영국이나, 현재 거주 중이신 미국도 마찬가지 라 생각하는데요?" "닥터는 미국이나 영국에 망명 신청을 하고 그 나라의 국민이 될 수 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귀국은 타국의 군사무기를 부당하게 점유 하는 게 됩니다." 그 말에는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는지 석창렬은 입을 다물었다.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던 가족들은 자신들이 끼어들 분위기가 아님을 깨닫고 하나둘씩 거실을 떠났다. 이윽고 거실에는 그 둘만이 남은 채 차가운 분위기를 꾸미게 되었다. "지금 스튜 대통령이 닥터를 자국민으로 끌어들일 의사를 갖고 있습 니다. 만약 미국이 맥의 소유권을 넘겨달라 요구한다면 어떻게 하시 겠습니까?" "글쎄요. 그 부분은 대통령이 결정할 문제이지 제가 어떻게 확답을 해드릴 문제가 아닙니다. 전 의장도 아니고 일반 의원에 불과할 뿐입 니다." "조만간 의장을 거쳐 다음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뽑히실 분께 그 의 사를 여쭙는 겁니다." "그릇을 크게 봐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조금 황당한 말입니다. 김영환 대통령은 업무가 중지되긴 했지만 어엿한 이 나라의 대통령입니다. 탄핵 재판이 나기 전에는 아무도 미래를 모르는 겁니다." 겸손을 가장하고 있지만 권력에 대한 동경만큼은 유감 없이 드러나 고 있다. 물질적인 가치보다는 만인의 숭배와 존경을 더욱 추구하는 자가 바로 눈앞의 이 남자일 것이다. 이 늙은이에게는 돈은 통하지 않는다. 앤드류는 그것을 느꼈으면서도 가슴에 손을 넣어 봉투를 꺼냈다. "받으시지요."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의 정체를 눈치챈 석창렬은 탐욕이나 분노보다는 호기심이 깃든 눈으로 앤드류를 살폈다. "이것을 받으시고 제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허허,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앤드류는 빙긋이 웃음을 지으며 봉투 내용물을 꺼냈다. 10억 달러짜 리 수표 한 장이었다. 그는 재빨리 석창렬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돈에 대한 흑심은 조금 도 없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호기심만 한층 더 강해졌다. "일반인은 구경도 할 수 없을 큰돈이군요." "10억 달러가 고작 그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까?" "연간 45조 달러를 벌어들이는 유전이나 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 지요." 입맛을 다시던 앤드류는 라이터를 꺼내어 수표에 불을 붙였다. 살인 도 마다할 수 있을 법한 금액이 눈앞에서 사라져 가는데도, 그 돈이 자기 것이 될 수 있었는데도 석창렬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탁자에 떨어진 재를 내려다보던 앤드류는 작게 탄식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 권력을 잡는다면 그것은 큰 불행이 될 겁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이 말이 칭찬으로 들립니까?" "귀하 같은 대단한 인물을 탄식하게 했으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빠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석창렬은 모른 체 했다. 더 이상 그를 자극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자신은 이미 흔들릴래야 흔들릴 수 없는 확고부동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다. 승자는 패자에게 아량을 보여야 하는 법, 침묵을 지키는 것만 해도 충분한 의무 이행이 된다. 「속보입니다. 탄핵 재판을 앞두고 있는 김영환 대통령이 오늘 오전 2시 경 스스로 머리에 총을 쏴 숨졌습니다.」 뉴스에서 흘러나온 속보에 앤드류는 일어나려고 말고 멈칫 했다. 「타살이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에 청와대는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으며, 경찰은 국민들에게 죄송하다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탄핵으로 인한 수치심에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다급함에 젖어 있었다. 앤드류는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그나마 한국에서 예안을 도와줄 수 있을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그가 자살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기에 앞서, 눈앞이 캄 캄해질 정도로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죄를 받은 겁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죄를요." 석창렬은 조의를 표하지도 않고 덤덤히 말했다. 급속도로 눈동자가 차가워진 앤드류는 차분히 석창렬을 노려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찻잔을 입에 댔다가 떼는 태도가 무척이나 거슬 렸다. 늙은 주름 아래 빛나고 있는 저 눈은 분명히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 람의 것이다. 그는 대통령의 죽음의 전개 과정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확신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렇게 확신한 앤드류는 지금까지의 가식적인 예의를 벗어 던졌다. 날카로운 표정을 띤 그는 불편한 심기와 유감, 그리고 경멸을 조금도 숨김없이 드러냈다. "과연, 의원님께서 원하고 계신 게 무엇인지 뼈저리게 확인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계속 그렇게 시치미나 떼고 계시지요. 어디 한 번 혼란한 이 와중을 틈타 한국이 얼마나 추락할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겠습니다. 자 알 막아보시기 바랍니다, 석창렬 차기 대통령 나으리." 석창렬은 앤드류가 현관을 나설 때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앤드류 또 한 배웅은 바라지도 않았다. 기분만 더러워질 뿐이다. 앤드류는 대문을 나서자마자 침을 뱉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올라 떠났다. 눅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탓인지 천장에는 드문드문 거미 줄이 쳐져 있고, 침대 시트에는 낡은 먼지가 묵직하게 쌓여 있다. 한쪽에 놓인 서랍에는 몇 년 동안 묵었는지 모를 세월의 바램이 고 스란히 묻어있었다. 아마도 니콜라스가 무기류를 보관하던 것이었으 리라. 구석에는 책상이 하나 있었다. 오래된, 그렇지만 소중해 보이지는 않 는 책 몇 권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니콜라스가 가끔씩 들뜬 얼 굴로 자랑하곤 했던, 니르와 다정하게 찍었다는 사진첩 따위는 어디 에도 보이지 않았다. '니콜라스씨에게 동업자가 있다고요? 무슨 말씀인가요?' '니콜라스 베르노에게 동업자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군. 뭔가를 착 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니르는 엄마 같은 여자였어. 어쩌면 니르가 내 엄마였을지도 몰라.' 머리 속은 그저 어지럽기만 하다. 그러나 뒤통수가 지끈거리지는 않 았다. 이대로 혼란에 몸을 맡기고 잠을 청하고 싶은 기분이다. 참 이상하기도 하지. 혼란스러운데 아늑한 기분이라니. 니콜라스가 자신을 만나기 전에 지냈던 거처는 아름답다는 말은 붙 여주기 힘든 곳이었다. 크지도 않았고 안락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있으려니 마음이 포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니콜 라스는 불가사의한 이 편안함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니르라는 가상 의 인물을 상상하고 엄마처럼 여겼을지도 모른다. 희박한 추측과 허망한 상상을 번갈아 오고가던 그녀는 누군가가 접 근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듯 정신을 차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오스 카가 들어왔다. "니콜라스 베르노 같은 인물이 이런 곳에서 지냈다니…. 청부업으로 웬만한 부호 저리 가라 할 돈을 벌었을 텐데." "그 애한테는 돈이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별 필요도 없 을 미사일 몇 개 사는데 전재산을 쏟아붓는 녀석이라고." "언제까지 여기 있을 참인가? 이제 그만 그대의 아이를 구하러 가봐 야 하지 않나?" "아아, 그래야지. 잠깐 니콜라스가 어떤 곳에서 살았는지 눈에 담아 두고 싶었을 뿐이야. 지금이 아니면 평생 못 볼 것 같으니까…." 불투명한 미래를 딛고 일어설 각오가 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미 소를 띤 채, 그녀는 끼이익 하고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틈 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마치 정들었던 고향을 영원히 떠나는 사람처럼 가슴 한 구석이 허전 하기만 하다. 니콜라스가 정말 살아있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다음에 한 번 더 이곳에 와보자. 아니, 그 애는 반드시 살아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축 늘어졌던 어깨를 억지로 펴며, 그녀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눈부신 햇살이 그녀의 험난한 앞길을 비춰주듯 사뿐히 내려앉았다. by eden 어제는 유정호씨가 사망한 데 이어 오늘은 김영환 대통령님께서 사망하셨습니다. 설마 내일은 주인공을? ..설마요. 그럼 이야기 끝이죠. 김영환씨가 자살할 만한 이유가 뭐가 있어? 억지야! 라고 반박하는 분은 아마도 없으리라 믿습니다. 본편도 제가 초기에 상상했던 이미지 중 하나였는데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던 까닭인지, 생각보다는 수수 하게 나왔군요. 뭐 이것도 나름대로 마음에 듭니다. 요즘은 삘을 받아서 그런지 쑥스럽게도 쓰고 난 뒤 별로 싫은 부분이 없어서 편히 술술 써지긴 하더군요. 고치기 지우기 목록 대천사미카엘 앗!!!! 요즘 많이 죽어나가는 추세군요!! 혹시 이 대통령의 죽음도 오스카가? 2005/04/12 유진 저런.... 저런놈이 국민의대표인 한국이라면 없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정도... 웩...-ㅠ- 2005/04/12 영 한국이 어디까지 추락하게 될지... 2005/04/12 해적왕 제가 보기엔...의외로 저런사람이 더 괜찬다고 생각하는데요 일단은 돈욕심이 없다는게 좋은점이긴하지만;; 그래도...결과보단 과정이 중요한거니깐요... 앞으로 한국의 미래는 어떻게 됄지...궁금해요..ㅎㅎ 2005/04/12 찐빵 석창렬이라고 했던가 과연 저런 인물만 나온다면 내가 그에게 아낌없는 한표를 줄 수있텐데 해적왕님 말씀에 동의 합니다 2005/04/13 셜이움 몰살의 실탄옹...[타앙~] 2005/04/13 한타박스 니콜은...이미 등장 초기부터 주인공과 같은 안먹어도 산다...라는 계념의 인간(!?) 이였으니까...... 2005/04/27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3/18 페이지 ▶ 319 - 낙원(4) [24] 실탄 2005/04/2215Kb 883 ▶ 318 - 낙원(3) [14] 실탄 2005/04/2122Kb 832 ▶ 317 - 낙원(2) [11] 실탄 2005/04/2012Kb 786 ▶ 316 - 낙원(1) [8] 실탄 2005/04/2014Kb 734 ▶ 315 - 부등호(7) [15] 실탄 2005/04/1912Kb 785 ▶ 314 - 부등호(6) [12] 실탄 2005/04/1814Kb 704 ▶ 313 - 부등호(5) [15] 실탄 2005/04/1713Kb 774 ▶ 312 - 부등호(4) [13] 실탄 2005/04/1614Kb 740 ▶ 311 - 부등호(3) [12] 실탄 2005/04/1521Kb 710 ▶ 310 - 부등호(2) [11] 실탄 2005/04/1412Kb 641 ▶ 309 - 부등호(1) [10] 실탄 2005/04/1313Kb 690 ▷ 308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8) [7] 실탄 2005/04/1212Kb 677 ▶ 307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7) [22] 실탄 2005/04/1113Kb 698 ▶ 306-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6) [8] 실탄 2005/04/1014Kb 672 ▶ 305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5) [8] 실탄 2005/04/0912Kb 722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 3 [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1518 :: 309 - 부등호(1) 실탄(cruel) 05-04-13 :: :: 12934 이름 모를 커다란 나무가 서 있는 언덕 정상에 예안은 팔짱을 끼고 섰다. 어디까지가 집이고 어디까지가 집이 아닌지 구분이 안 갈 정도 로 커다란 저택들이 바둑판처럼 정돈하게 늘어선 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미국에서도 제일 가는 부호들이 모여 산다는 이곳, 그 중에서도 가장 호화롭고 넓은 거리 중앙의 저택을 노려보며 그녀는 격동하는 가슴 을 간신히 억눌렀다. "저기에 내 아이가 있단 말이지?" 분노와 흥분을 힘들게 다스리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눈을 감고 고목 에 등을 기대고 있던 오스카는 작게 끄덕였다. "그렇다." "앤슨도 저기에 있고?" "그렇긴 한데 지금은 없을 거다. 하지만 곧 그대의 아이를 한 번보러 방문하겠지." "그래. 그렇단 말이지." 증오의 형체가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나를 이 꼴로 만들고, 사랑하는 아이를 납치하고, 아버지까지 죽게 만든 녀석이 저기에 있다. "미리 말해둘 게 한 가지 있다." "뭔데?" "개인적으로 앤슨이 하는 일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관점에서 봤을 때, 녀석이 한 일은 다소 지나치기는 해도 부 당하지는 않다." "그래서?" 미약한 살기가 피어오르자 오스카는 오해 말라는 듯 재빠르게 덧붙 였다. "나는 그대에게 아이와 앤슨이 어디 있는지는 알려줄 수 있어도, 이 이상 그대를 도와줄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민족을 배신하는 것이니까." "도와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어차피 내가 해결하려고 했으니까." "아이를 구출하는데 맥을 부르는 건 오히려 적의 이목을 사는 지름 길이다. 좋지 않아." "맥을 부를 생각은 없어. 단신으로 해결할 거야." "그런데 맥은 한국에 그대로 내버려둬도 괜찮은 건가?" "상관없어. 한국을 응징하는 건 내 아이부터 구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그런가." 잠시 발 아래 펼쳐진 호화로운 거리를 내려다보던 오스카는 반 걸음 정도 살짝 물러났다. 자신이 나설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라는 간접적 인 의사표시였다. "부디 성공을 빌겠다." "고마워. 나중에 보답할게." 경직된 음성으로 대답한 예안은 성큼성큼 내려갔다. 서늘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것을 잠시 만끽하던 오스카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등을 돌렸다. 고용주의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그 고용인의 어깨도 덩달아 으쓱해 진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집안의 내소사를 도맡아하는 젤 루에 또한 그러했다. 이 저택의 주인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저택을 소유할정 도로 많은 부를 지녔으며, 국민들에게 인기가 자자한 제나르 의원을 집으로 초대해 허물없는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등 정계의 젊은 용이 었다. 그런 주인을 몇 년째 모신다는 것은 물질과는바꿀 수 없는 젤 루에의 자신감이었다. 몇 년간 이 집에서 일하면서 온갖 궂은 일들을 접한 그에게 오늘같 은 일은 특별히 새삼스러운 게 아니었다. 구인광고도 내지 않았는데 이 집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갑작스레 부탁을 해오는 낯선 소녀를 설 득하는 것 정도는. "이러면 곤란해요, 아가씨." 신분증을 잠시 들여다보던 젤루에는 고개를 흔들며 돌려주었다.딱히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상대의 나이가 지나치게 어리다는것이 마음에 걸렸다. 한창 학교를 다니고 친구들을 사귈 나이에 이런 대부호 저택의 하녀 로 일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는 게 왠지 이상했다. "제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건가요?" 서늘함이 느껴질 정도로 지나치게 차분하고 온화한 태도가 더욱미심 쩍은 기분이 들게 했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예쁘다는 것도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을 한다고 해놓고는 얼굴값을 한다며 지나치게 깐깐하게 구는것은 아닌지, 혹은 집주인을 꼬셔서 팔자 한 번 고쳐 보려는 여자는 아닌 지, 하는 의심을 떨칠 길이 없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예요. 이 집은 지금 특별히 인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해서 아가씨를 고용할 이유가 없단 뜻이에요. 정말미안해요." 젤루에는 의례적인 멘투로 유감을 표하면서, 머리를 계속 굴렸다. 첫 대면했을 때부터 어디선가 한 번쯤 본 것 같다는 느낌을떨칠 수가 없었다. "아, 혹시 아가씨는...?" 비로소 눈앞의 소녀의 정체에 대한 실마리를 떠올린 젤루에는깜짝 놀라 뭐라 말하려 했다. 그러나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끼고 의식을 잃었다. 차가운 얼굴로 젤루에를 내려다보던 예안은 가만히 손바닥을 들어 그의 머리에 올려놓았다. 희미한 빛이 흘러나와 그의 몸으로흡수되었 다. 이윽고 그는 정신을 차렸다. 그의 눈동자는 흐릿했다. "당신은 조금 전 날 고용했다." "나는 조금 전 당신을 고용했다." "내 신분에는 조금도 문제가 없다." "당신 신분에는 조금도 문제가 없다." "좋아." 그녀가 손가락을 딱 소리나게 튕기자 젤루에의 눈빛이 순식간에정상 으로 되돌아왔다.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던 그는 재빨리 일어나며 그녀를 나무랐다. "여기서 뭐하고 있나? 아가씨가 무슨 일을 해야할지 알려줄 사람들 을 만나게 해줄 테니 빨리 따라오게." "예. 감사합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끄덕였다. "주인님은 입맛이 무척 까다로운 분이셔. 술은 즐겨하지 않으신데 가 끔 지인께서 갖다주시는 고급 와인만큼은 즐겨 드시지. 식사를 준비 할 때에는 컵이나 그릇에 물 한 방울 묻어 있어선 안 돼. 전에 어떤 애는 그것도 모르고 잔을 갖다드렸다가 호되게 혼나고 쫓겨난 적이 있지." 젤루에가 소개시켜준 중년 여자는 통통하게 살이 찐 몸매에 상당히 수다스러운 인물이었다. "워낙 깔끔하고 신사다운 분이셔서 고용인에게 손을 대는 일은 결코 없어. 전에 어떤 애는 그것도 모르고 주인님을 꼬셔볼까 했다가 망신 만 사고 해고당했지. 너도 꽤나 반반하게 생겼는데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해." "염려 마세요." 생각보다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에 예안은 다소 놀랐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간단한 암시만 걸어도 상대는 자신이 닥터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제가 할 일이 뭐죠?" "청소하는 것과 준비된 식사를 갖다드리는 것. 그럼 설마 내가 너에 게 식칼을 잡으라고 하겠니?" 주인의 식사를 준비하는 게 무슨 특권이라도 되는지 여자는 목소리 를 높이고 웃어젖혔다. 예안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여자 의 수다를 계속 들었다. 어느 방 앞을 지날 때였다.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이 들어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덩달아 멈춘 중 년 여자는 왜 그러냐는 눈으로 그녀를 봤다. 쿵쿵쿵 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안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억지로 태연한 미소를 띠었다. "이 방은 누구 방이죠?" "응? 나도 잘 몰라. 문이 잠겨 있어서 아무나 함부로 못 들어가." "주인님이 이곳은 들어가지 말라고 명령했나 봐요?" "글쎄, 그런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근래 두 달 정도는 주인님이저택 에 머무신 적이 없으니까. 사업 때문에 해외에 자주 나가시는 편이거 든. 그래도 시도때도없이 주인님 친지분들이 오셔서머무시다 가시니 까 항상 주인님이 보고 계신다는 마음가짐으로일을 해야 해." 그녀가 뭐라고 지껄이든 이미 예안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부엌으로 안내받은 예안은 마침 저녁을 준비해야 하니 야채를 다듬 으라는 명령을 받고 식칼을 잡게 되었다. 너 따위에게 식칼을 잡게 해줄 것 같냐는 식으로 말을 할 땐 언제고. 그녀 말고도 몇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여자들이 깔깔거리며 함께 일 을 하고 있었다. "네가 오늘 새로 들어온 애니?" "네." "몇 살이야?" "열..여덟이요." 한국식으로는 19이지만 여기서는 만으로 계산한다는 것을 떠올린 그 녀는 그렇게 대답했다. "이름이 뭐지?" "지나요." "난 하일리라고 해." "네." 하일리는 큰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닌 전형적인 서양 여자였다. 이름이 뭐랬는지 기억도 안 나는 아까의 중년 여자보다는 말수가 덜 한 편이었지만 어쨌든 수다스러웠다. 집에 빚이 있어서 학업을 포기 하고 부자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사람치고는 그래도 말이 많고 활발한 편이었다. 물에 씻은 야채를 바구니에 옮기면서 예안은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물어봤다. "그런데 혹시 이상한 소리 같은 거 들릴 때 없어요?" "응? 무슨 말이야?" "실은 아까 어떤 방앞을 지나가는데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더라고요." "아아, 혹시 절대 들어가지 말라던 그 방 말이야?" 뭔가를 알고 있구나.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 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 가끔 밤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라." "이상한 소리요?" "응. 애 울음소리 같기도 하는 소리가 가끔 들리더라고. 처음에는 아 이 귀신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벌벌 떨었어." "요즘도 들려요?" "지금은 안 그런 것 같아. 집사 아저씨에게 물어보면 자기도 모르겠 다고 갸우뚱하더라.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고." 그다지 심각한 표정은 아니다. 아마도 집주인이라는 사람이 숨겨둔 아이가 있겠거니 하는 정도로만 생각할 뿐, 납치나 범죄의 맥락으로 추측하는 것은 아닌 듯 했다. 오스카는 앤슨이 바쁜 일정으로 최근 이 저택에 머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오스카가 자신에게 알려줬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을 테 니, 아이를 구출하고자 한다면 지금이 적기다.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자 그녀는 입을 틀어막으며 허리를 숙였다. 이 이상 신중함을 지킬 순 없다. 오늘 내일 안에라도 당장 아이를 데리 고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앤슨의 동료가 가끔 이곳에 머무는 모양이었다. 저렇듯 요란하게 저 녁을 준비하는 것을 보면. 아틀란티스인일 게 틀림없었지만 그녀의 관심 밖이었다. 어차피 상대 는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을 테니, 아 이만 구해서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밤이 가까워지자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옆침대에서는 하일리가 곤히 잘 자고 있었다. 낮에 일한 탓에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조심스럽게 일어나 옷을 입은 그녀는 가발이 잘 씌워졌는지 확인하 고는 방문을 열었다. 끼이익 하는 소리가 오싹하게 들렸다. 복도 모퉁이를 돌던 중 젤루에와 갑자기 마주쳤다. "응? 이 시간에 어딜 가는 중이지?" "잠이 안 와서 산책 좀 하려고요." "멀리 나가지는 마." 다행히 그는 별 의심은 하지 않고 빨리 자라고 말하고는 가버렸다. 여차하면 최면을 걸 준비를 하고 있던 그녀는 안심하고 다시 고양이 걷듯 조심스레 움직였다. 낮에 봐두었던 방 앞에 당도한 그녀는 떨리는 가슴으로 작게 심호흡 을 하고 문손잡이를 살짝 돌렸다. 예상대로 잠겨 있었다. 이까짓 것쯤이야. 그녀는 주먹을 쥐고 검지손가락을 세웠다. 손가락 끝에서 날카로운 파란 빛이 뿜어져나와 날카로운 바늘을 형성했다. 주저 없이 바늘을 손잡이 옆에 찔러 넣자 치이익 하는 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그녀는 고기캔을 따듯 간단하게 문의 잠금 부분을 도려 내었다. 손잡이 부분이 떨어져 나오자 그녀는 조심스레 손에 쥐고는 문을 살 짝 밀었다. 안에 들어선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작은 마찰음이 그렇게 크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방은 안락한 느낌이었다. 가운데에는 조그만 아이용 침대가 놓여있었 다. 창문에 창살이 쳐져 있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방탄유리가 틀림없 을 것이다. 침대 머리맡에 다가간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울다 지친 아이가 피로 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눈물이 울컥 나올 것 같았다.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자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말문을 잊고 감격에 젖은 그녀는 깨울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숱 적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얼굴만 들여다보았다. 엄마의 손길을 느꼈는지 아이가 조금씩 뒤척였다. 이윽고 아이가눈을 뜨자 조금 놀란 그녀는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갖다댔다. "엄마?" "그래, 엄마야. 엄마가 구해주러 왔어." 그 말을 하면서 또 한 번 가슴이 울컥했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엄마를 올려다보던 아이는 기쁘다는 듯이 헤실헤 실 웃기 시작했다. "어디 갔다 왔어?" "늦게 와서 미안해. 나쁜 사람들 때문에 많이 무서웠지?" "응." "이제 그럴 일 없을 거야. 엄마하고 같이 여기 빠져나가는 거야." "근데 나 배고파." 예안은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며 유빈을 끌어안았다. 굉장히 오랜만에 아이를 안아보는 듯 감개가 무량했다. 행복하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이 시간이. 마치 나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뚜렷이 느낀다고나 할까. 지금의이 느낌이 너무 소중해, 아빠한테 종종 팔불출이라 놀림받으면서도 아직 까지 아이를 품에서 떼어놓지 못하는 것이다. 비명에 죽어간 아버지가 생각난 그녀는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이곳을 빠져나간 다음에는 제일 먼저 아버지 장례를 치르자. 시신은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숨겨뒀으니 괜찮을 것이다. 장례가 끝난 뒤에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자. 한국은 이용당했을 뿐이 라고는 하지만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 또 응징하자. 그리고 니 콜라스를 찾은 다음에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셋이서 조용히 살자. 그렇게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던 그녀는 유빈이 배가 부르다고 말 하자 단추를 잠그고 일어났다. 문을 막 빠져나가려던 그녀는 그제야 유빈의 팔뚝에 작은 문양이 있 는 것을 발견했다. "이게 뭐니?" "몰라. 어떤 아저씨가 이상한 물감을 칠했어." 그녀는 주의 깊게 문양을 살폈다. 그것의 정체를 깨닫자 난감한 얼굴 이 되었다. 이것은 도난방지용 특수페인트였다. 유빈을 데리고 이 방을 나가게 되면 저택 전체에 비상벨이 울릴 것이다. 이 자리에서 당장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피부에 상처를 내지 않 고서는. 어쩌지 하는 얼굴로 망설이던 그녀는 할 수 없이 탈출은 내일로 미 루기로 했다. "유빈아. 오늘밤만 참을래?" 아이는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엄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그림 때문에 지금은 데리고 나갈 수 없어. 내일 낮에 다시 올테 니까 일단 오늘밤은 참아." "지금 나가면 이 그림 때문에 들키는 거야?" "응. 그러니까 오늘밤만 참아. 알았지?" "…알았어." 침울한 표정을 감추지는 않았지만 기특하게도 더 이상 칭얼거리지는 않는다. 아쉽다는 듯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어준 그녀는 아이의 뺨에 입술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문을 닫았다. 아까 도려낸 손잡이의 절단면에 특수접착제를 바르고 구멍에 밀어 넣었다. 절단면 이 깨끗한 관계로 쉽게 표시가 나지 않았다. 작업을 마친 그녀는 아쉬운 기분을 누른 채 서둘러 처소로 돌아갔다. 그날밤 잠이 오지 않았다. by eden 불타는 청춘을 PC방에서 글 쓰는데 소비해야 하다니. 내 팔자야.orz 고치기 지우기 목록 안녕히 멋지네요...^^ 부등호... 2005/04/13 실탄 그다지 긍정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부정적인 의미이죠. 2005/04/13 안녕히 왠지 어느 한쪽으로밖에 치우칠 수 밖에 없다는 속상함 같은거랄까요... 음... 등호는 무언가 양립할 수 있다는 안정감을 주지만 부등호는 그 어느쪽 이든 선택자의 외면을 받아야 하니까요.(부등호도 작은 수를 등진채 큰 수를 바라보네요... 그러고보니.^^) 실탄님 혹시 수학강의시간 때 영감을 받은 건 아닌지... 쿨럭. 갑자기... 응용 수학이 떠오르는... 제길... ~~ 참. 완결이 몇 화라 했죠? 2005/04/14 대천사미카엘 화이팅 실탄 님^^ 2005/04/14 실탄 아직 모르지만 의외로 금방 끝날 것 같습니다. 2005/04/14 쿠스키스 전 성실연재를 하시는 실탄님이 너무 좋아요. 2005/04/14 영 부정적인 의미라...... 그러면 결국 아직까지는 뭔가 일이 있을거란 이야기네요. 2005/04/14 루리에르피나 전 2연참 하는 실탄님이 좋아요 2005/04/14 루타 전 5연참 하는 실탄님이..(퍽) 2005/04/14 대천사미카엘 설마 배드 엔딩은...... 2005/04/14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3/18 페이지 ▶ 319 - 낙원(4) [24] 실탄 2005/04/2215Kb 883 ▶ 318 - 낙원(3) [14] 실탄 2005/04/2122Kb 832 ▶ 317 - 낙원(2) [11] 실탄 2005/04/2012Kb 786 ▶ 316 - 낙원(1) [8] 실탄 2005/04/2014Kb 734 ▶ 315 - 부등호(7) [15] 실탄 2005/04/1912Kb 785 ▶ 314 - 부등호(6) [12] 실탄 2005/04/1814Kb 704 ▶ 313 - 부등호(5) [15] 실탄 2005/04/1713Kb 774 ▶ 312 - 부등호(4) [13] 실탄 2005/04/1614Kb 740 ▶ 311 - 부등호(3) [12] 실탄 2005/04/1521Kb 710 ▶ 310 - 부등호(2) [11] 실탄 2005/04/1412Kb 641 ▷ 309 - 부등호(1) [10] 실탄 2005/04/1313Kb 692 ▶ 308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8) [7] 실탄 2005/04/1212Kb 677 ▶ 307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7) [22] 실탄 2005/04/1113Kb 698 ▶ 306-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6) [8] 실탄 2005/04/1014Kb 672 ▶ 305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5) [8] 실탄 2005/04/0912Kb 722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 3 [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1584 :: 310 - 부등호(2) 실탄(cruel) 05-04-14 :: :: 12432 "딱 30분이면 된다니까." "안 돼요. 지금 바쁘단 말이에요." 귀찮음을 넘어서 짜증 수준까지 애걸하는 스틴의 데이트 요청을 거 절한 예안은 서둘러 저택을 나섰다. 20분쯤 걷자 하일리에게 들은 대로 커다란 나무가 나왔다. 한눈에 보 기에도 이 부근에서 가장 큰 나무였다. 나무 옆 도로에서 검은색 중형차가 기다리고 있다가 뒷문이 열렸다. 선글라스에 모자를 쓴 청년이 내리자 예안은 재빨리 다가갔다. 그는 변장한 오스카였다. "준비한 건?" "여기 있다." "고마워. 나중에 사례는 할게." 그가 건넨 조그만 통을 받아 품에 안으며 그녀는 기쁘게 웃었다. "앤슨도 영 바보는 아니로군. 도난방지용 페인트를 발라놓다니." "그럼 이만 가봐. 스틴이라는 녀석이 쫓아왔다가 당신 만나고 있는 거 보기라도 하면 곤란해." "스틴? 그건 누구지?" "몰라. 데이트 한 번 하자고 귀찮게 구는 녀석인데." 그녀가 돌아서자 오스카도 차에 올랐다. 차는 곧 그 거리를 떴고 그 녀는 통을 품에 숨긴 채 저택으로 돌아왔다. 스틴이 누굴 만나고 온 거냐고 치근거렸지만 덤덤히 무시했다. 성질 같아서는 손 좀 봐주고 싶지만 어차피 오늘밤이면 이곳을 뜰 테니 참는 게 나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유빈이 있는 방에 가고 싶었으나 꾹 견뎠다. 몇 시 간이라는 시간이 몇 십 년의 세월처럼 무척 길게 느껴졌다. 밤이 찾아오자 그녀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일리는 피곤하다며 일 찍 잠자리에 들었다. 시계가 새벽 1시를 가리키자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잠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낮에 오스카에게 받아둔 통을 꺼 내 품에 안고는 방을 나섰다. 정문 옆에 세워진 초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경비원은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하품을 하며 손전등을 꺼 내 상대방을 비춘 그는 모르는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잠이 확 달아났다. "누구냐?"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저벅저벅 다가왔다. 좋은 의도를 품 고 있지 않음을 깨달은 경비원은 호루라기를 불러 동료를 깨우려고 했다. 남자의 손이 번개같이 튀어나와 목을 잡았다. 경비원은 피가 역류함 을 느끼고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켁켁거리며 남자의 목을 떼어내 려 했지만 괴물처럼 힘이 세었다. 이윽고 경비원은 눈이 뒤집어진 채 쓰러졌다. 남자는 기절한 경비원 을 가볍게 들어다가 눈에 안 띄는 곳으로 던져 넣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일을 마친 남자는 저택 안쪽으로 저벅저벅 걸었다. 텅 비어있는 남자 의 오른 소매가 찬바람에 휘날렸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아이가 있는 방에 당도한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가볍게 노크를 했다. 그리고 어제 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손잡이를 쥔 순간 그녀는 흠칫 놀랐다. 어제와는 달리 문이 열려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그녀는 재빨리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그대 로 경직되었다. 아이는 온데간데없고 침대에는 웬 남자가 앉아 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이 만들어낸 남자의 그림자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이윽고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을 보고 그녀는 가볍게 신음 을 흘렸다. "당신은… 앤슨?" "기다리고 있었다, 엔젤." 예사롭지 않은 기도가 뿜어져 나왔다. 굳은 얼굴로 싸울 태세를 갖춘 그녀는 분노를 숨기지 않고 물었다. "내 아이는 어디에 감췄지?" "이미 안전한 곳으로 옮겨놨지. 안심해도 좋다." "미친 소리 하지 마. 내 품보다 안전한 데가 어디 있다고?" "걱정하지 마라. 너도 곧 아이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줄 테니. 그전에 우리가 원하는 일 하나를 해줘야겠지만." "헛소리는 그만 둬! 그렇게 평생 날 이용해먹으려는지 모를지 알아! 난 절대 네놈들한테 안 져!" 반항이라기보다는 발악에 가까웠다. 그냥 눈 딱 감고 어제 아이를 데 리고 도망갈 걸 하는 후회가 미칠 듯 가슴을 때렸다. 앤슨이 오늘 갑자기 돌아온다는 소리는 오스카에게서도 듣지 못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 그녀의 의심을 눈치챈 듯 앤슨은 차갑게 히죽 웃었다. "오스카 경의 눈을 속이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이익…." "오스카 경과 손을 잡은 건 현명했지만, 오스카 경이라 해서 내 움직 임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지는 못한다는 걸 알아야지. 근래 오스카 경 의 동향이 하도 수상쩍어서 혹시나 해서 돌아와 봤는데 뜻밖에 네가 저택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격이었지." 그녀는 어찌해야 할 줄을 모르고 갈팡질팡했다. 아이가 인질로 잡힌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에 숨겨뒀는지도 모르는데 무슨 반항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턱을 쓰다듬으며 그윽히 그녀를 바라보던 앤슨은 뜻밖의 말을 했다. "이렇게 보니 너는 정말 아름답군. 과연 보통 인간들이 미친 듯이 우 러르고 좋아할 만해." 그의 시선에서 좋지 않은 낌새를 느낀 그녀는 안색이 변했다. 그가 한 걸음을 떼어놓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오스카 경이 어떤 요구 조건을 내세웠는지는 대충 알고 있다." "…그래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 조건을 나 역시 그대에게 내걸고 싶다." "뭐?" 예상 밖의 제안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좋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묘한 다정함이 깃든 눈빛으로 주시하며, 그는 말을 이었다. "오스카 경이 야심만만한 인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 그가 날 제거 하려 한다면 선수를 쳐서 내가 그쪽을 제거하는 게 현명해." 그녀는 굳은 얼굴로 잠자코 들었다. "너를 영원히 붙잡아두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우리의 최대 목적은 혁명, 그 뿐이니까." 묵묵히 그를 노려보던 그녀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정말 나와 거래하겠다는 거야?" "그렇다." "내가 구체적으로 뭘 하길 원하는데? 당신 세계의 정치판에 끼어 들 어 표라도 던져주길 원해?" "오스카 경을 죽여주면 된다." 잠시 얼떨떨함을 감추지 못하던 그녀는 재빨리 냉정함을 되찾고 반 문했다. "그 다음에는 아틀란티스 대륙을 지상으로 올려주면 되는 거고?" "그렇지." 제안 자체는 나쁘지 않다. 오스카가 자신을 노리는 것을 알았으니 앤 슨 입장에서는 당연할 수도 있는 제안이다. 그러나 섣불리 받아들이기에는 힘든 제안이기도 했다. 그가 아이를 인질로 잡고 있다는 것도 이유지만, 정작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그가 아버지의 원수라는 것. 어떻게 아버지의 원수와 손을 잡을 수 있단 말인가. '지금은 그런 감정을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든 유빈님을 먼저 되찾을 궁리를 하셔야지요. 앤슨을 갈아 마시는 것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약속 따위야 어기라고 있는 것 아닙니까.' 맥이 인간이었다면 차분한 어조로 충고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 이었다. 지금 앤슨을 죽인다 해서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모욕 적이지만 일단은 굽혀서 아이의 안전을 확보한 다음 그를 갈아 마시 는 게 백 번 현명하다. 끓는 분노를 겨우 가라앉힌 그녀는 아빠에게 속으로 사과하며 말문 을 열었다. "좋아. 그렇게 하자." "대신에,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뭔데? 빨리 말해봐." 상대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는 판국이다 보니 자연스레 짜증스 런 말투가 튀어나왔다. 불길한 느낌의 미소를 지은 앤슨은 한 걸음 내딛었다. 자신을 담고 싶어하는 강렬한 눈빛에 예안은 커다란 불안을 느꼈다. "너를 안고 싶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낯선 외국어를 들은 것처럼.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말뜻을 깨달았다. 눈이 휘둥그레지 며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입술이 덜덜 떨렸다. "지금… 뭐라고 했어?" "너를 안고 싶다. 네 아이를 데리고 있는 것은 나이니, 그 정도는 계 약금으로 지불해줄 수 있겠지?" 저택의 가장 중심에 있는, 이른바 심장부라 말할 수 있는 중요한 방 까지 도달한 남자는 하나밖에 없는 왼손으로 문손잡이를 비틀었다. 굳게 잠겨 있던 손잡이는 우악스런 힘에 쉽게 부서졌다. 서둘러 방에 들어간 남자는 의자에서 졸고 있는 여자의 턱을 잡고 들어올렸다. 잠에서 깬 여자는 괴롭게 켁켁거렸다. "다, 당신은 마크…?" 마크는 숨을 쉴 수 있게 살짝 풀어주면서 으르렁거리듯 속삭였다. "엔젤의 아이는 어디 있지?" "마, 말할 것 같습니까…." "할 수 없군." 억지로 여자의 턱을 벌린 마크는 흰 알약을 밀어 넣었다. 여자는 삼 키지 않으려 했지만 마크가 억지로 입을 다물게 하고 턱을 세게 치 자 그만 꿀꺽 삼켜버렸다. 자백제가 위로 넘어가자 이윽고 여자의 눈빛이 풀렸다. 약효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엔젤의 아이는 어디 있지?" "위층… 오른쪽에서 세번째 방…." 대답을 듣고 난 마크는 미련 없이 여자의 목을 졸라 기절시켰다. 그 리고 서둘러 위층으로 향했다. 숨막히는 시간이 야속하게 흘러갔다. 패닉에 빠진 그녀는 눈동자만 껌벅거렸을 뿐,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머리 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렸다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였다. 마네킹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에게 한 발짝 내딛은 앤슨은 승자 의 미소를 지었다. "너에게 거부권은 없을 텐데?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네 아이에게 무 슨 일이 생길지 몰라." 명백한 협박이었다. 일말의 반항도 할 수 없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그녀는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사납 게 그를 노려보았다. 눈이 충혈되며 머리카락이 사납게 곤두섰다. 손 톱이 따닥따닥 맞부딪치며 그의 얼굴을 찢어놓고 싶다고 외쳤다. "난 지금까지 여자에 흥미가 없었지. 남들이 아름답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는 여자들을 여럿 봤지만, 천박함 밖에는 느낄 수 없 었다. 하지만 널 처음 봤을 때는 달랐어. 눈이 부시다는 것이 어떤 건지 느꼈다." 뱀 같이 달콤한 유혹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치욕으로 느껴졌다. 아이를 납치하고 아버지를 살해한 남자에게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하다니. 그에게 몸을 내주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었다. 점점 딱딱해지는 얼굴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앤슨은 말을 이었다. "왜, 나한테 안기는 게 싫은가?" "다, 당연한 거 아냐! 그 따위 요구를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네 아이가 죽게 된다 해도?" 그 말에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숙였다.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대로 그의 요구에 응하고 아이를 일단 되 찾아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방도를 생각해야 하는지. 그의 숨결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숨막힐 듯한 혐오감도 그에 따라 짙 어졌다. "다시 말해 봐. 네 아이가 위험해질 수 있어. 그런데도 내 말을 듣지 않을 생각인가?" 진심이다. 그는 진심으로 묻고 있는 중이다. 오슬오슬 한기가 느껴졌다. 이빨이 딱딱 부딪쳤다. 추운 날씨도 아닌 데 왜 이렇게 몸이 떨리는지. 그의 눈동자에서는 혐오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단지 저 검 은색 눈동자를 주시하는 것만으로도,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 로 역겨운 혐오감만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그녀의 무의식은 생각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자신의 몸과 아이의 안전, 그 두 가지를 놓고 저울이 심하게 흔들리 기 시작했다. 그녀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생각할 것도 없이 아 이를 택하는 게 옳거늘, 저렇듯 저울이 떨리며 망설인다는 것이. 저울이 조금씩 자신의 몸 쪽으로 기울었다. 부등호의 날카로운 끝이 아이를 찌르려 했다.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은 추악한 이기심을 확인 한 그녀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무릎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아아…." 지독한 한기가 몸을 에워쌌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만이 강하게 피어났다. 아이를 사랑한다 여겼다.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그러나 내면에 자리잡은, 빌어먹을 <인간의 마음>은 단지 그렇게 자 신을 속이고 있었을 뿐이다. 아이에 대한 사랑은 어디까지나 유젤의 분신에 대한 애정일 뿐이지, 본신에 대한 감정만큼은 아니었다. 유젤의 몸이 위험하다면 가차없이 아이는 포기한다. 아이는 또다시 새로 낳으면 그만이지만 유젤의 몸은 하나뿐, 유진우의 마음이 품고 있던 결론은 그렇듯 추악했다. "우, 웃기지 마! 나,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눈이 뒤집힌 채 벌떡 일어난 그녀는 누구에게 소리를 지르는지도 인 식하지 못한 채 발악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피가 나도록 비명을 지 르던 그녀는 사나운 눈동자를 앤슨에게 돌렸다. 흠칫 놀라는 앤슨이 물러날 틈도 없이 번개같이 달려간 그녀는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가녀린 소녀같지 않은 억센 힘에 그는 숨이 막힌 채 괴로워했다. 그의 멱살을 앞뒤로 세게 흔들며 그녀는 발광을 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원론적인 치욕을 부정하고자 하는 처량한 몸짓이었다. "아니야! 난 사랑한단 말야! 유빈이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한단 말야! 걜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어! 너 같은 더러운 사내새끼랑 한 번 같 이 자는 게 뭐가 그리 대순 줄 알아!!" 그 말이 진심이 아님은, 다른 누구보다 그녀의 무의식이 잘 알고 있 었다. 그녀를 이루고 있는 본질이 중요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젤 의 몸, 아이는 어디까지나 그 다음일 뿐이다. "진짠데… 진짠데…." 무의식의 소곤거림을 들은 그녀는 멍한 얼굴이 되어 그의 멱살을 놓 았다. 온몸에 힘이 풀린 그녀는 넋이 나간 얼굴로 허공을 노려보기만 했다. 겨우 풀려난 앤슨은 옷을 털며 일어났다. "겉보기와는 달리 힘이 아주 세군. 신인류라는 것들은 원래 그런가?" 그가 다시 한 걸음을 떼어놓는 순간, 무언가가 커다랗게 폭발하는 소 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그녀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by eden 실탄 : 마크가 결국 사고를 쳤군. 독하다 아직도 살아있었냐. 에덴 : (빤히) 정보를 하나 입수했어. 이번 챕터에서도 또 한 명 죽 는다며? 실탄 : ....부정하진 않겠어. 에덴 : (광분) 누구야! 이번에는 또 누굴 죽일 거야! 도대체 네 놈의 말살 리스트에는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적혀 있는 게냐! 왜 이렇게 많이들 죽이는 거냐고! 실탄 : 아 그야 나눠서 찔끔찔끔 죽이면 감칠맛 나잖아. 에덴 : 죽어버렷! 고치기 지우기 목록 영 콜록. 도대체 이번에는 누가 죽게 될련지.... 2005/04/14 자여니야 흐에에 그러면 그냥 가볍게 포옹한번해주고 [응?] 안아달라며요오 //ㅅ// 2005/04/15 Jin 유빈이나 니콜라스는 아니겠죠? 앤슨과 오스카에 한표... 2005/04/15 안녕히 바로 위에 루시페리아가 있어서 그런지 예안이 조금은 당해도... 쿨럭... 퍼억! 예안아 미안하다, 흥분했다. 2005/04/15 destiny 조금만 늦었어도 실탄 님이 사망하셨을텐데... ^^; 2005/04/15 실탄 폐인대전은 배틀로얄하고 달라서 하루 연재 안 하든 죽는 거 그런 거 없습니다. 마지막날까지는 모르는 거죠.-_- 2005/04/15 마더울프 더 죽이면 돌아가시는건 실탄님이 되실지도오오오...? 2005/04/15 ㅅ ㅔㅎ ㅣ 아아 죄송합니다.. 실탄이여 엄마가 되라 로 잘못읽었습니다..ㅜㅜ 2005/04/15 셜이움 커억... 아무생각 없이 달았던 몰살의 실탄옹~ 이란 말이 현실이 되어간다아~ [농담입니다...타앙~] 2005/04/15 실탄 옹은 할아버님들께 붙이는 호칭 아니었습니까.(...;;) 2005/04/15 꼬마코린 ...설마 앤드류죽고 레이온에게로 이어버리는...? 2005/04/15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3/18 페이지 ▶ 319 - 낙원(4) [24] 실탄 2005/04/2215Kb 883 ▶ 318 - 낙원(3) [14] 실탄 2005/04/2122Kb 832 ▶ 317 - 낙원(2) [11] 실탄 2005/04/2012Kb 786 ▶ 316 - 낙원(1) [8] 실탄 2005/04/2014Kb 734 ▶ 315 - 부등호(7) [15] 실탄 2005/04/1912Kb 785 ▶ 314 - 부등호(6) [12] 실탄 2005/04/1814Kb 704 ▶ 313 - 부등호(5) [15] 실탄 2005/04/1713Kb 774 ▶ 312 - 부등호(4) [13] 실탄 2005/04/1614Kb 740 ▶ 311 - 부등호(3) [12] 실탄 2005/04/1521Kb 710 ▷ 310 - 부등호(2) [11] 실탄 2005/04/1412Kb 643 ▶ 309 - 부등호(1) [10] 실탄 2005/04/1313Kb 692 ▶ 308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8) [7] 실탄 2005/04/1212Kb 677 ▶ 307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7) [22] 실탄 2005/04/1113Kb 698 ▶ 306-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6) [8] 실탄 2005/04/1014Kb 672 ▶ 305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5) [8] 실탄 2005/04/0912Kb 722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 3 [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1603 :: 311 - 부등호(3) 실탄(cruel) 05-04-15 :: :: 20855 엔젤의 아이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쉬워 맥이 빠 질 정도였다. 그때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채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게 불행의 화 근이라면 화근이었다. "크윽…." 마크는 신음을 깨물며 근육 섬유가 끊어진 다리를 억지로 질질 끌고 걸었다. 날카로운 고통이 뼈를 찌르는 와중에도 아이만큼은 품에 꼭 껴안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난 뒤 그는 비로소 오스카의 음모 를 깨달았다. 인간에 대한 엔젤의 신뢰를 상실하게 한다는 것만큼은 앤슨과 동일하지만, 오스카는 엔젤의 증오를 앤슨에게까지 떠넘기려 하는 것이다. 그 뿐이라면 차라리 낫다. 지금껏 아틀란티스에는 없었던 더러운 정 권 투쟁이 부활한다 해서 상관은 없다. 그만큼 아틀란티스가 평화로 워졌다는 뜻도 될 터이니. 그러나 앤슨을 밀어내기 위해 오스카는 지나치게 엔젤에게 혹독한 패를 꺼냈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흐릿해지는 의식을 억지로 붙잡으며 마크는 계속 뛰었다. 눈앞이 가 물가물했고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힘껏 뛰고 있다 생각하는데, 저 멀리 있는 담벼락은 조금도 가까워질 기미가 없었다. "마크,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아틀란티스어였다. 마크는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유하가 분노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손에 빛을 응축시 킨 것으로 보아 여차하면 공격할 태세였다. "비키거라. 난 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민족을 배신할 셈이에요!" "오스카 경이 먼저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어!" "웃기지 말아요! 엔젤의 아이를 납치하려고 한 사람의 말을 믿을 것 같은가요!" 분노를 참지 못한 유하는 힘껏 빛 줄기를 발사했다. 눈에 보이지 않 는 속도로 날아든 빛 줄기는 마크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옷이 타들어가며 피가 흘렀다. 커다란 화상 자국이 새겨진 어깨를 감흥 없이 흘끗 살핀 마크는 자 기 차례라는 듯 반격을 준비했다. 팔이 하나밖에 없기에 그는 일단 아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바닥 을 하늘을 향하게 한 뒤 허공에 빛의 원반을 생성시켰다. 커다란 원반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하자 유하는 잔뜩 긴장했다. "이 녀석은 물질이라면 무엇이든지 잘라버리지. 막고 싶다면 동등한 파워의 에날도스로 방패를 형성하는 수밖에 없어. 과연 너에게 그럴 힘이 있을까?" "잡소리는 관두고 덤벼요! 배신자에게 어떤 결말이 어울리는지 보여 줄 테니까!" 마크는 덤덤히 바라보다가 힘껏 원반을 던졌다. 핑그르르 회전하며 원반이 날아들자 유하는 두 주먹을 앞에 내밀고 힘껏 힘을 방출했다. 황금빛 방패가 생성되자 유하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원 반과 방패가 부딪치자 치이익 하고 쇠가 타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빛의 방패에 조금씩 금이 새겨졌다. 이윽고 방패는 원반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 났다. 장애물을 제거한 원반은 유하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날았다. 마크는 손을 까딱했다. 원반이 부메랑처럼 핑그르르 돌아 그의 손바 닥 위로 다시 돌아왔다. "네가 엘리트 코스를 밟은 천재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지금 나를 움 직이고 있는 것은 분노, 나 이상 가는 증오를 품지 않는다면 너는 결 코 지금의 나를 이길 수 없다." 그의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아지랑이 같은 불꽃이 넘실거렸다. 자 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는 미약한 기운이었지만, 유하는 똑똑 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마크는 자신의 생명을 태워가며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루고자 하는 바를 완성하고 나면 그의 육신은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 "엔젤의 아이를 납치해서 어쩔 셈이죠?" "엔젤에게 돌려줄 거야." "미쳤군요. 그럼 엔젤은 우리가 영영 찾아낼 수 없는 곳으로 숨어버 릴 거라고요! 엔젤은 지금 아이 빼고 모든 것을 잃었어요! 엔젤이 아 이와 함께 맥을 타고 우주로 도망가버리면 어떻게 잡을 건가요?" "내가 알 바 아니야." "우리의 대륙이 영영 차가운 해저 바닥에 처박혀 있어도 상관없다는 소리예요! 당신의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태양만 그리워하며 산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은 건가요!" 그 설득은 치명적이었는지, 잠시 동안 그가 움찔했다. 그러나 그는 곧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어. 이 이상 엔젤이 불행해지는 것은 두고 볼 수 없어." "미쳤군요! 당신은 미쳤어요!" "한 사람을 희생하면서까지 우리 모두가 행복해져야 하나? 너는 단 한 번이라도 엔젤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 있어?" 유하는 크게 울컥했지만 반박하지는 않았다. 아니, 반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자신들이 하고 있는 짓은 인간으로서 용서받 지 못할 행위이므로. 개인적 잣대를 들이대고 추궁한다면 입이 백 개 라도 할 말이 없다. "진정해요. 이런다고 달라지진 않아요. 차분히 이야기를 하자고요." 일단 그를 달랠 심산으로 유하는 차분히 말했다. 그러나 마크는 막내 가내로 말을 듣지 않았다. "비키지 않는다면 널 죽이고 길을 열겠다. 어서 비켜!" 그의 눈은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고 있었다. 설득이 전혀 먹힐 것 같 지 않은 눈이다. "당신은 우리 민족 모두를 멸망시키고도 남을 사람이야!" 격정을 참지 못한 유하는 목청이 터져라 외치며 힘껏 돌진했다. 그녀 의 양손에 형성된 빛의 쌍검이 그의 목을 노렸다. 이 정도쯤 막아내는 것은 일도 아니다. 마크는 무게의 중심을 뒷발에 싣고 에너지를 방출해 방패를 만들었다. 칼과 방패가 부딪치자 폭음 이 터지는 소리가 주위를 뒤흔들었다. 둘은 지지 않고 버텼다. 유하는 칼로 그의 방패를 뚫으려 했고, 마크 는 방패로 그녀를 밀어내려고 했다. 용광로가 녹듯 강한 빛이 일어나 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먼저 유하의 입술에서 주르르 피가 흘렀다. 마크는 회심의 미소를 지 었지만, 곧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입안에 고이는 비릿한 느낌을 깨물며 유하는 억지로 씩 웃었다. 민족 을 배신하면서까지 자기 감정에 충실하고자 하는 남자를 위한 비웃 음이었다. "이런다고… 엔젤이 당신 마음을 알아줄 것 같아요?" 그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엔젤은 지금 오스카 경의 손에 완전히 놀아나고 있어요. 오스카 경 이 준비한 함정은 완벽해요. 엔젤이 오스카 경을 의심할 이유는 조금 도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 이런 짓을 해봤자 결국 엔젤의 미 움만 한층 더 사게 될 걸요? 무엇보다…." 유하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이는 순간 마크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물러나려 했다. 팽팽한 대치를 벌이고 있는 중에 물러난다면 이쪽이 피해를 입을 것을 자명한 일, 때문에 그는 폭발적으로 에날도스를 방 출해 유하를 떨구려 했다. 그 순간, 저택 꼭대기에서 한 줄이 빛이 번쩍였다. 새벽의 여명을 관통한 빛은 마크의 어깨에 정확히 격중했다. 몸이 불타는 고통에 마크는 그만 힘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유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있는 힘껏 에날도스를 쏟아 부어 빛 의 칼날을 강화시키고, 약화된 방패에 힘껏 찔러 넣었다. 칼끝은 방패를 너무나 허무하게 꿰뚫고 들어가, 마크의 등을 뚫고 빠 져나왔다. 뜨거운 송곳에 심장이 꿰인 순간 마크는 눈을 힘껏 부릅떴다. 의식을 붙잡는 게 기적일 정도로 지독한 고통이 그를 엄습했다. 그는 마지막 반항을 하려 했다. 그러나 손에 모이던 빛은 점점 밝기 가 줄어들더니 끝내 사그라졌다. 피투성이가 된 처참한 모습의 마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유하는 얼굴에 튄 그의 피를 닦았다. 긴 머리카락에 흠뻑 묻은 피 냄새가 굉 장히 불쾌했다. 저택 꼭대기에서 마크를 공격했던 사람은 허공으로 높이 솟구쳐 유 하 앞에 사뿐히 착지했다. 그는 유하의 언니인 유나였다. "도와줘서 고마워, 언니." "마크는 어떻게 됐어? 죽었어?" "아직은. 하지만 저 상처를 봐. 손을 쓰더라도 이미 살리기는 글렀어. 살리고 싶은 마음도 없고." 거칠게 피를 닦아내며 냉정하게 내뱉는 동생을 유나는 다소 걱정스 런 눈으로 살폈다. 본래 저렇게 냉정한 아이가 아니었는데, 얼마 전부터 사람이 바뀐 듯 심신이 차가워졌다. 아마 오스카의 명령을 받아 엔젤의 아이를 납치 한 후부터였던가. 임무에 성공했는데도 우울해 보이는 동생이 걱정스러워 무슨 일이냐 고 물어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기다리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생각하던 유나는 엔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동생에게 눈짓했다. 유하는 오스카의 부하로 알 려져 있으니 얼굴을 보이는 것은 안 된다. 먼발치의 저택 현관을 잠시 바라보던 유나는 마크의 머리맡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남기고 싶은 말은 없나요, 마크씨?" 조금 전까지 동료였던,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의 임종을 장식하는 말 치고는 무척이나 차가운 어조였다. 힘들게 눈을 뜬 마크는 피투성이가 된 입술을 달싹였다. 유나는 어차 피 반항도 못하는 사람의 유언, 들어주자는 심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그의 입에 귀를 바짝 댔다. "아… 아틀… 란…." 유나는 대번에 낯이 변해 벌떡 일어났다. "아, 안 돼! 그러지 마요, 마크씨!" 그는 지상에서는 금지된 단어, 그것에 염원을 담아 말하려 하고 있 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유나는 서둘러 에날도스를 응축해 빛의 칼을 만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그에게 내리꽂았다. 금지어를 내뱉기 전에 그를 죽여버릴 작정 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 주변에 형성된 투명한 벽이 그녀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녀의 안색은 흙빛으로 창백하게 물들었다. 저것은 바로 신념과 목 숨을 맞바꾸는 자들에게 신이 허락한 최후의 가호, 여태껏 전설로만 전해들었던 바로 그 신비한 현상. 죽음의 사신이 문턱에 와 있는 것을 느끼며, 그는 피를 토하듯 힘겹 게 외쳤다. "저주받아라! 아틀란티스여!" 빛이 점점 강해졌다. 저 멀리서 앤슨과 엔젤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뛰어오고 있었다. 이대로 마크를 죽이기에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 하다. 혼란에 빠진 채 어쩔 줄 몰라하던 유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는 유빈을 보았다.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날려 아이를 안 으려 했다. 일단 이 아이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살려야 했다. 그러나 유나가 채 아이에게 당도하기도 전에 마크의 온몸에서 섬광 이 뿜어져 나왔다. 거대한 황금색 빛의 기둥이 수직으로 쏟아져 올라 가며 먹구름을 꿰뚫었다. 눈부신 광채가 이 일대를 뒤덮으며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무의식적으로 힘을 끌어올려 방어했던 유나는 온몸이 욱신거리는 것 을 느끼고 눈을 떴다. 앤슨과 예안의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앤슨은 입 모양으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정원은 완전히 초토화가 되어있었다. 직경이 수십 미터에 달하는 구 덩이가 움푹 패여 있었고, 넓게 쳐진 담에는 모조리 금이 가 있었다. 폭발의 여파가 수평으로 퍼지지 않고 수직으로 방출된 것이 그나마 피해가 적은 이유였다. 유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예안을 똑바로 올려다볼 자신이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참다못한 예안이 재촉하듯 물었다. 긴 침묵 끝에 유나는 조금씩 입을 열었다. "마크가… 살아있었습니다. 엔젤의 아이를 납치하려 했습니다." 대번에 예안의 안색이 변했다. "앤슨,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마크는 당신의 부하가 아니었어?"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나를 배신할 수는 있어도 오스카 경 의 휘하에 들어갈 가능성은 없다." "마크는 우리 민족을 배신했습니다." 그녀는 유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의미지?" "엔젤의 아이를 이용해 엔젤을 독점하려고 했습니다. 영원히 민족을 배신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요. 그와 잠깐 대 화해보았기 때문에 알 수 있었습니다." 강한 증오가 예안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녀는 움푹 패인 구덩이가 마 크의 시신이라도 되는양 살기 띤 눈으로 노려보았다. 유나는 탈골된 어깨뼈를 짜맞추려다가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는 것 을 느끼고 낯빛이 변했다. 주춤주춤 망설이던 그녀는 겨우 결심을 세 웠다. "그리고 이것을…." 유나는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로 손에 쥔 것을 공손하게 예안에게 받 쳐 올렸다. 무언가 하고 살피던 예안은 어린아이의 신발이라는 것을 깨닫고 새 파랗게 질렸다. "이, 이게 뭐야?" "…죄송합니다. 노력했으나 불가항력이었습니다. 사투 끝에 저에게 패배한 마크는 마지막으로 아이를 죽이고 자기도 죽을 작정으로 자 폭을 시도했습니다." 머리가 핑 돌았다. 순식간에 눈앞이 새까맣게 변했다. 고막이 찢어진 듯 모기가 앵앵거 리는 소리만 귓가에 울렸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 고 싶지 않았다. 실성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일어난 예안은 구덩이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는 미친 듯이 구덩이 이곳저곳을 찾아 헤매었다. 바위도 산산조각 난 폭발이 있던 자리에, 어린아이가 살아남았으리라 는 가능성은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아이를 찾는 것만큼은 멈출 수 없었다. "유빈아! 유빈아! 유빈아!" 그녀는 미친 듯이 아이를 목놓아 불렀다. 그러나 공허함을 실은 차가 운 바람만이 뺨을 쓰다듬어주었을 뿐, 어디에서도 대답은 없었다. 망연자실해진 그녀는 초점을 잃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부서진 돌 조각이 정강이를 찔렀지만 아프다는 것도 못 느꼈다. 자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한 바보 주제에 이 정도 가지고 무슨 아픔을 느낀 단 말인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들어왔다. 이제 나는 혼자라는, 세상에서 혼자가 되었다는 절대 고독. 스무 살 의 생일도 맞이하지 못한 소녀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벅찬 상실 감과 공허함이 꺼질 줄 모르고 타올랐다. "뭐야… 왜 죽은 거야…. 아직 많이 사랑해주지도 못했는데…." 부등호의 끝이 아이를 찔러서였을까. 아이보다 이 몸뚱이를 더 중요 시여기는 추악한 마음을 확인해서였을까. 단지 아이가 죽었다는 것 이상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가 되었다 는 것 이상으로 까마득한 감정이 미칠 듯 요동쳤다. 영원히 자기 자 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아아…. 유빈아… 유빈아…." 노블 네트워크 어디에서도 아이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있다면 이 빨로 물어뜯은 듯 끊어진 연결선 하나만이 어슴푸레 보였을 뿐. 그것 은 바로 아이가 비참하게 죽었다는 증거. '엄마, 앤드류 형이랑 결혼하면 미워.' '내가 이다음에 크면 나랑 결혼해.' '난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엄마….' '엄마….' 길지 않았던, 아이와 함께 했던 지난 순간들이 영화 필름처럼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시간들이지만, 이제 는 그것을 영원히 가슴에 묻고 살아야만 한다. 앤드류랑 친하게 지내는 게 싫다고 툴툴거렸던 때, 아무 말하지도 않 았는데 새아빠 같은 것은 싫다고 울며불며 난리를 피웠던 때, 커서 뭐가 되고 싶냐는 물음에 엄마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고 말해서 기특하다고 쓰다듬어줬던 때.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예안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하늘을 바라보았 다. 유난히 반짝이는 별빛 하나가 슬퍼하는 그녀를 위로하듯 찬란히 걸려있었다. 유나와 앤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주시했다. 갑자기 그녀의 주변에서 바람이 일어났다. 흑단같은 새카만 머리카락 이 황금빛으로 물들며 허공에 곤두섰다. 고결하고 눈부신 빛이 그녀 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눈을 뜰 수가 없다. 앤슨과 유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 렸다가 빛이 사그라지자 슬그머니 내렸다. 예안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휴우. 그럭저럭 일단락은 했군." "엔젤이 어디로 갔을까요?" "아직 모르지. 하지만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크가 살아있었다는 것은 뜻밖이었습니다." "그때 일본에서 손을 쓰지 않은 게 실수였군. 죽을 줄 알고 그대로 내버려뒀는데 어떻게 살아난 모양이야. 하지만 오히려 잘 됐어. 덕분 에 어린아이를 죽이는 척 하고 빼돌리는 번거로운 짓은 하지 않게 됐잖나." 앤슨은 얼굴에 덮어쓴 가면을 벗겨냈다. 그러자 조금 전보다 차갑고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다름 아닌 오스카였다. 오스카는 이어 앤슨의 목소리를 분장하기 위해 입에 넣고 있던 목소 리변조장치도 꺼냈다. "하지만 마크가 훼방을 놓지 않았더라면 엔젤의 아이는 죽을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어린아이 하나가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 상관없어. 오히려 눈앞에 서 죽어줬기 때문에 나중에 들통날 위험이 적어졌지. 이것으로 앤슨 에게 확실히 덮어씌울 수도 있게 됐고 말이야. 이제 엔젤은 앤슨을 죽도록 증오하게 될 거다." "그렇게… 해서까지 권력을 차지하고 싶은 겁니까? 당신은?" 유쾌하게 웃고 있던 오스카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노려보자 유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용서하십시오. 실언했습니다." "꽤나 건방지군. 말조심하도록 해." "죄송합니다."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오스카는 훌훌 몸을 털고 일어났다. 그는 뒷짐을 지고 밤하늘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별을 올려다보았다. "유나. 나는 권력을 잡고 싶은 게 아니다. 그 빌어먹을 앤슨과 마리 오 녀석을 깔아뭉개고 싶을 뿐이다." 어린 시절, 에날도스가 유난히 약한 탓에 어머니로부터 그들과 심하 게 비교를 당했던 적이 있었다. 근원을 모를 이 미움을 심어준 사람 이 어머니라는 것도 이제는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들을 밟아버리고 싶어하는 이 마음만큼은 자신도 어찌할 수가 없다. 그것은 순수했던 어린 나날들을 짓밟힌 것에 대한 맹세.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을 아직도 잊어버리지 못하는 심약 함과 비뚤어짐을 유감 없이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오스카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래… 그 녀석들을 밟아주고 싶을 뿐이야." 그들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은 성인 이 되어서도 지워지지 않아 이제는 자신도 감당하지 못할 적개심으 로 변해있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따르는 것뿐. '또 만났네?' 기이하게 생긴 거울이 어둠 속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기괴하 게 생긴 팔을 요란하게 휘두르며, 거울은 웅크리고 앉은 예안을 신기 하다는 듯 들여다보았다. '어어? 너는 생긴 것만 똑같지 그때 본 애가 아니잖아?' 그녀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시선을 들었다. '누구를 말하는 거야?' '아아. 얼마 전에 너와 똑같이 생긴 애가 너와 똑같이 뭔가를 고민하 고 있었어. 그래서 그런 걸로 고민하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모든 것 을 받아들이라고 말해줬지. 그런데 이상하게 겁을 집어먹고 나한테서 도망치더라. 내가 그렇게 무섭게 생겼니?' 거울은 깔깔거리며 팔을 흔들었다. 이상하게도 거울의 표면에는 그녀 의 모습이 비치지 않았다. 기괴한 모습을 가진 말하는 거울, 사람의 모습을 비추지 않는 거울, 섬뜩하다고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 애를 언제 봤는데?' '글쎄에? 어제였나? 일주일 전이었나? 한 달 전이었나? 작년이었나? 십 년 전이었나? 잘 기억이 안 난다. 에이, 아무렴 어때. 그래도 너는 날 무서워하지 않아서 좋다.'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던 그녀는 웅크린 팔을 펴며 물었다. '너는 누구야?' '나? 글쎄에? 네 마음의 어두운 부분일까? 네 마음의 밝은 부분일까? 네 마음의 감춰진 부분일까? 네 마음의 드러난 부분일까? 맞춰 봐! 맞춰 봐! 맞춰 봐! 그럼 재미있는 일이 생길 거야! 상을 줄게!' 거울은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요란하게 흔 들리는 팔이 지나간 허공마다 밝은 실루엣이 번지며, 거울의 표면에 점차적으로 매끄러움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멍하니 거울의 움직임을 쫓았다. 거울의 표면에 서서히 누군 가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표독스럽게 섬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기 자신이 누군가의 목을 조 르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유빈이었다. 머리가 깨지는 고통이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거울은 신나게 춤을 추다 말고 멈췄다. '왜 그래? 머리가 아파?'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잘못했어, 잘못했어 유빈아…. 엄마가 잘못 했어….' 잊어버리고 있던 슬픔이 비로소 생각난 그녀는 목을 놓아 흐느꼈다. 죄를 지었음에도 고통받는 게 싫어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있던 자기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죽는 날까지 용서를 빌어도 시원치 않을 마당 에, 어떻게 도피 따위나 할 수 있단 말인가. 견디기 힘들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빌어먹을 유진우의 마 음 따위 죽어버리라지. 도대체 뭐가 아깝다고 고작 그딴 요구에 아이 를 포기할 생각을 했는지. '힘든가 보구나.' 어디선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녀리고 고우면서도 톤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 무서운, 그러면서도 마음이 편해지는 음성이. '많이 아파 보여.' 예안은 울면서 끄덕였다. 누구라도 좋으니 아픈 이 마음을 지워주었 으면 했다. '그거, 진심이니?' '너… 내 마음이 들려? 내 생각을 읽을 수 있어?' '당연하지. 나는 곧 너인걸.' 어디 있느냐고 물으려는 찰나, 그 생각 역시 읽었는지 주변이 밝아지 기 시작했다. 거울은 어깨를 으쓱하며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배를 내밀고 섰다. 다 소 우스꽝스런 모습이었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딱딱한 거울 표면이 물결처럼 일렁거렸다. 거울 너머의 어둠에서부터 무언가가 가까이 다가왔다. 예안은 멍하니 거울을 향해 다가갔다. 거울 안쪽에 갇힌 무언가가 자 신에게 도와달라 속삭이고 있었다.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분 명히 들었다. 그녀는 거울 표면에 손가락을 댔다. 손가락 주변에서 빛이 뿜어져나 가며 거울 전체에 감겨 들어갔다. 옅은 수면 아래에 물고기의 그림자 가 떠오르듯, 칙칙한 거울 표면 너머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또렷이 떠 오르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닿은 곳을 중심으로 손이 생겨났다. 손을 중심으로 팔이 나 타났고, 어깨가 나타났고, 그리고 마침내 얼굴이 나타났다. 거울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마법에 걸린 듯 거울은 점 점 움직임을 잃으며 완전한 거울이 되어갔다. 말을 할 수도 춤을 출 수도 누군가를 비웃을 수도 없는, 그저 눈앞의 상대를 비추는 것밖에 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평범한 거울이. 거울 속에 나타난, 예안과 똑같이 생긴 여자는 빙긋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by eden 아는 분들은 알고 있는 장면. 눈에 익으실 겁니다. 이번 챕터는 1부 내용을 모르는 분들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 용이 될 것 같습니다. 일단, 캐릭터와 상황 자체를 모르실 테니까요. 조만간 주인공의 탄생 과정이 밝혀집니다. ..라고 말해봤자 그다지 특출한 비밀은 없습니다. 눈치 좋으신 분들 은 벌써 다 알고 있겠죠. 덧붙여, 아직 말살 리스트에 적힌 모든 이름에 X가 그려지지 않았습 니다. 아직 죽을 놈들 많이 남았다는 겁니다. ..그래도 주인공은 안 죽으니 염려마시길.(딴청;) 나중에 나올 예정이지만 우선적으로 이해를 돕기 위해 본편에 관한 몇 가지 부연설명을 하겠습니다. 아틀란티스인들은 자기들 대륙이 아닌 지상에서 강한 염원을 담아 (위에서 마크가 저주하듯이) 그 이름을 입밖으로 꺼내게 되면 신의 저주를 받아 죽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새 로운 이름의 필요성을 느꼈는데요, 몇 천 년 전 어떤 역사학자가 아 틀란티스의 철자를 거꾸로 해서 시트날타라는 이름을 지어낸 것입 니다. 굳이 새로운 이름을 쓰지 않고 철자를 거꾸로한 방법을 취한 까닭은, 저주를 내린 신에 대한 일종의 반항심리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는 거지요. 그다지 어감이 좋지도 않은 이름이지만 그런 이유에서 앤슨 을 포함한 많은 아틀란티스인들이 그 이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별것아닌 잡담 : 4.7버전을 기해 제니스는 드디어 완벽해졌습니다. 이제 누구도 제니스를 막을 수 없게 됐습니다. 제니스의 앞을 가로 막는 자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 고치기 지우기 목록 안녕히 정말 죽은건가요.. ㅠㅠ... 믿지 못하겠어요. 가장 사랑하는 아이를... 근데 제이인가요? 음... 심란해요. ㅠㅠ 오늘 내용은 너무 슬프다. 2005/04/15 루리에르피나 말살리스트에는 니콜라스도 들어있다에 한표 2005/04/15 루리에르피나 그런데 니콜라스는 언제 등장하죠? 2005/04/15 dkrmqlwb 실탄님 스타 고대의문.... 하십니까? (정말로 별것아닌 잡담..) 2005/04/15 영 의외로 말살 리스트에 니르(마더?)가 들어있다에 한표~~~ 그리고 유빈이가 죽다니..... 슬프네요 ㅠ_ㅠ. 그리고 아마 마지막에 나온 사람은 제이 겠죠? 2005/04/15 셜이움 으와. 진짜 한편당 한명씩 죽어가네요. 유빈이가 죽은건 좀 의외였... 이제 당분간 몰살모드는 off상태로 갈것같은데... 아니면 혹시 다음편에 또 누군가가? [덜덜덜] 그나저나 그럼 도데체 프롤로그에서 주이공이 들고있던 아기는 누구란말인가... 2005/04/15 꼬마코린 ...유빈이를 죽이다니...(그 귀여운 아이를...) 저주 받아라 실탄이여~~~!!! (...니콜라스도 죽는건가?) 2005/04/15 ;;;;; 주인공 넘당해서불쌍하다.';; 신인류니뭐니해도 뭐 제대로 뭐하나 못하네.;;;예안.;;; 역시 구인류의 사고회로가 문제일까나??;; 아니야!! 이건 실탄님의 주인공괴롭히기마공때문인가?;; 크윽..실탄님건필!! 예안은 힘내라.;;;; ;;;를 넘마니썻군.. 2005/04/15 자여니야 이런.. 역시 실탄상. 이렇게 뒷통수를 치다니 [..] 저만알고있는 (?) 몇몇 내타들도... 결론만 알려주면 중간과정이 궁금하잖! (중간과정까지알면 보는재미가없..) 냐햐햐햐햐! 하루에 2연참은 어떄요+_+? 2005/04/16 실탄 dkrmqlwb/ 그럭저럭 준고수급이라고는 생각합니다.-_-a 2005/04/16 xiu 설마... 유빈이를 죽일줄은 몰랐어요;ㅁ; 2005/04/16 JIn 말살리스트 이야기나 나왔을 때 설마 유빈이나 니콜라스는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고,글도 올렸는데...설마가 사람 잡는다고..유빈이였습니까? 유빈이의 성장과정을 보고 싶었다는... 2005/04/16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3/18 페이지 ▶ 319 - 낙원(4) [24] 실탄 2005/04/2215Kb 883 ▶ 318 - 낙원(3) [14] 실탄 2005/04/2122Kb 832 ▶ 317 - 낙원(2) [11] 실탄 2005/04/2012Kb 786 ▶ 316 - 낙원(1) [8] 실탄 2005/04/2014Kb 734 ▶ 315 - 부등호(7) [15] 실탄 2005/04/1912Kb 785 ▶ 314 - 부등호(6) [12] 실탄 2005/04/1814Kb 704 ▶ 313 - 부등호(5) [15] 실탄 2005/04/1713Kb 774 ▶ 312 - 부등호(4) [13] 실탄 2005/04/1614Kb 740 ▷ 311 - 부등호(3) [12] 실탄 2005/04/1521Kb 712 ▶ 310 - 부등호(2) [11] 실탄 2005/04/1412Kb 643 ▶ 309 - 부등호(1) [10] 실탄 2005/04/1313Kb 692 ▶ 308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8) [7] 실탄 2005/04/1212Kb 677 ▶ 307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7) [22] 실탄 2005/04/1113Kb 698 ▶ 306-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6) [8] 실탄 2005/04/1014Kb 672 ▶ 305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5) [8] 실탄 2005/04/0912Kb 722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 3 [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1645 :: 312 - 부등호(4) 실탄(cruel) 05-04-16 :: :: 14299 '너는 누구야?' 흐릿한 눈으로 거울 속의 여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자는 상냥한 미 소를 띤 채로 대답했다. '내 이름은 제이라고 해. 코드네임은 주피터.' '네가 왜 내 안에 있어? 너는 분명히….' '에덴 혹성에 있는 제이를 말하는 거라면 난 몰라. 그 제이가 누군지 는 알 것 같지만 지금 살아있을지 아닐지도 몰라. 나는 긴 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으니까.'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데?' '글쎄? 이십 년은 족히 넘은 것 같아.' 제이는 말라버린 눈물 자국 위로 다시 번지는 눈물을 안쓰럽다는 손 길로 쓰다듬었다. '아이가 죽은 건 안 됐어. 나도 도와주고 싶었지만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어. 네가 허락하지 않으면 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까.' 유빈의 죽음을 확인했을 때의 절망, 유빈보다 자기 자신을 더 우선시 하는 스스로를 자각했을 때의 자괴감, 하나로도 견디기 힘든 두 감정 이 소용돌이치듯 그녀의 마음을 맴돌았다. 복받치는 슬픔을 참지 못한 예안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다 필요 없어! 내가 죄다 잘못한 거야! 차라리 그 녀석들 말을 들었 으면, 그냥 그 녀석들 노예가 됐으면 유빈인 죽지 않아도 됐단 말야!' '이미 죽은 아이는 어쩔 수 없는 거야. 산 사람은 살아야지.' '싫어! 살고 싶지 않아! 아빠와 그 아이가 내 전부였단 말이야! 난 모 든 걸 다 잃었어! 이런 내가 더 살아서 뭐해!' 예안이 느끼는 슬픔을 전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제이는 얼 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거울 표면은 제이가 거울 밖으로 나오 려는 것을 막았다. '그렇다면… 내가 도와줄까?' 울다말고 예안은 멍청히 고개를 들었다. '도와줄 수 있어?' '그럼. 난 널 도울 수 있어.' '어떻게 도와줄 건데?' '널 그렇게 만든 녀석들에게 대신 복수해줄게. 난 충분히 그것을 이 룰 수 있는 힘이 있어.' 그저 지쳤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이대로 의식을 끈을 놓아 제이 의 그림자에 숨어버리고 싶다. 이대로 잠에서 깨어 눈을 뜬다면 또다시 가슴을 저미는 슬픔에 괴로 워하겠지. 아이를 구하지 못한 자기 자신을 경멸하면서 언제까지 고 통에 시달리겠지. 그것은 싫다. 그렇게 괴로워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 '동의했지? 자아, 그럼 이제부터 너와 날 바꾸는 거야.' 제이는 건너편에서 거울 표면이 이루는 투명한 벽에 두 손을 댔다. 거기에 맞춰 예안도 두 손을 놓았다. 투명하고 얇은 거울 표면을 사 이에 두고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맞잡은 모습이 되었다. 하얀빛이 일어나며 거울이 빙그르르 회전했다. 회전이 끝나며 두 사 람의 위치가 바뀌었다. 예안은 거울 안에, 제이는 거울 밖에. 제이는 거울에서 손을 떼어냈다. 거울 밖의 공기가 감명 깊은 듯 눈 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예안도 거울에서 손을 떼어냈다. 폐쇄된 거울 안이 위로가 되는지 쪼 그리고 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잠을 자는 건지 의식을 놓아버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가엾다는 눈으로 예안을 바라보던 제이는 살며시 등을 돌렸다. 거울 전체에 빛이 돌기 시작했다. 다시 생명을 얻은 거울을 뒤로 한 채, 제이는 점점 굳어지는 얼굴을 하고 세상을 향해 오랜만의 걸음을 내딛었다. "이봐, 여기 웬 여자가 있어." 작물의 상태를 살피던 젠글리는 나무 둥치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여자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쳐 동료들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달 려온 동료들은 여자를 발견하고 다들 의아해했다. "누구지?" "길을 잃었나?" 여자를 깨울 셈으로 가까이 다가갔던 젠글리는 뜻밖에 여자가 대단 한 미인이라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 처자식까지 있는 몸인데도 가슴 이 몹시 두근거렸다. 짙은 마성의 향기에 잠시 아찔함을 느꼈던 젠글리는 충동을 간신히 눌렀다. 그리고 여자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이봐요. 누군지는 몰라도 이런 곳에서 자면…." 갑자기 여자가 번쩍 눈을 떴다. 젠글리는 무심코 그 눈을 보았다가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눈동자가 무척 아름다웠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또한 너 무 차가워 인간 같지가 않았다. 기이한 두려움을 느낀 젠글리와 동료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몸에 묻은 흙을 가볍게 털어 내며 일어난 여자는 오랜만에 세상의 공기를 맛본다는 얼굴로 크게 심호흡을 했다. 감격을 넘어서 후련함 으로까지 비치는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젠글리가 뭐라 말을 꺼내려는 찰나, 머리 위에서 헬기의 로터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위를 올려다보자 세찬 바람이 아래로 불어닥치기 시 작했다. 상공에 떠 있던 헬기에서 와이어를 타고 한 남자가 내려왔다. 남자가 코앞까지 다가올 때까지 여자는 말없이 선 채 바라보기만 했다. "이런 곳에 있었군. 몹시 찾았다." 오스카는 심히 유감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가자는 의미로 손을 내밀 었다. 그러나 여자는 미동도 않은 채, 사람을 탐색하듯 오스카를 물 끄러미 들여다보기만 했다. 갑자기 여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오스카는 왜 그런지 몰라 조금 어리 둥절했다. "당신은 바보야. 아직도 내가 엔젤로 보여?"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차가운 목소리, 그리고 표정. 심상치 않음 을 느끼고 자세히 여자를 뜯어보던 오스카는 설마 하는 얼굴로 작게 신음했다. "당신은 설마…?" "그래. 나는 엔젤이 아냐. 이브지." 오스카는 몹시 놀란 얼굴이 되었다. 이브, 제이는 그가 당황하는 모 습을 팔짱까지 끼고 유쾌하다는 듯이 구경했다. 잠시 후 겨우 자신을 가라앉힌 오스카는 당황한 기색을 전부 지우고 말문을 열었다. 나무랄 데 없이 침착한 태도였다. "설마, 당신이 정말로 깨어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레이온 박사로부터 아주 적은 가능성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 아이가 나에게 육신의 통제권을 넘겼어. 자기는 이제 더 이상 살 고 싶지 않대." "그럼 엔젤은 죽은 겁니까?" "아니, 살아 있어. 바로 여기에. 하지만 당분간은 나오는 일이 없을 거야. 불러도 대답 안 할걸." 제이는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가슴을 살며시 감쌌다. 오스카는 정장을 고치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정중히 말했다. "당신이 깨어나게 됐다는 것도 또 하나의 기쁜 소식입니다. 지난 2년 간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면서도 그러지 못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당신의 부활 소식을 알게 되면 대단히 기뻐하실 겁니다." "안내해. 나 역시 보고 싶어." 제이는 누군지 알겠다는 듯 피식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오스카 는 신사다운 태도로 정중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엔젤의 행방불명으로 난리 났던 미국내 아틀란티스 비밀기지는 오스 카가 귀환하자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과연 제나르 대신의 외아들답 게 오스카는 무사히 엔젤을 찾아 귀환했다. 이런 기쁜 날 파티가 없을 수 없다며 오스카는 모두에게 마음껏 즐 기라고 명령했다. 평소 딱딱한 표정 외는 선보이지 않는 그까지 밝게 미소지을 정도로, 파티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그러나 마리오와 앤슨은 저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은 채 구석에서 마 지못해 술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멀리서 그들을 발견한 엘르가 상냥한 미소를 띠고 다가왔다. "마리오 경, 오빠. 왜 그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어요?" "무언가 영 찜찜해서 그래. 오스카 경은 나보다 더 빨리 엔젤의 위치 를 찾아냈고, 또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너무 간단히 설득해서 데 려왔어." "또 저것을 빌미로 우리를 얼마나 깎아내릴지 눈앞에 훤하군. 어려서 부터 너무 야심만만한 인간을 적으로 만들었어." 마리오도 가볍게 한탄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엘르는 앤슨과 살짝 잔 을 부딪치며 생긋 웃었다. "두 분에게는 조금 우울한 일이긴 해도, 민족 전체를 놓고 보자면 잘 된 일이잖아요. 이제는 다 끝난 거나 마찬가지예요." "엘리우스를 잡지 못했다는 게 변수이기는 해. 니콜라스 베르노가 엘 리우스가 아니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마리오가 작게 중얼거리자 앤슨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은 아직 모릅니다, 마리오 경." "무슨 뜻이지?" "니콜라스 베르노가 정말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오스카 경만이 알고 있겠지요. 어쩌면 다른 무언가를 노리고 우리들에게는 니콜라스 베르 노가 엘리우스가 아니었다고 거짓말을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어쨌거 나 오스카 경은 쉽사리 믿을 수 없는 인물이니까요." "자네 말도 일리가 있긴 해. 하지만 어차피 다 끝난 일 가지고 더 이 상 음모론을 들쑤시는 것은 좋지 않아. 깨끗하게 승복하고 한 번쯤 밟혀주면 오스카 경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굴욕적인 것만큼은 어쩔 수 없다. 그 부분은 마리오도 동의하는지, 안정을 찾으라 충고하면서도 벌레 씹은 표정을 감추지는 않았다. 홀 내를 장식하고 있던 수군거림이 잦아들었다. 마리오 일행은 묘한 분위기가 사람들을 침투하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한 여자가 오스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들어서고 있었다. 침 넘어가 는 소리까지 들릴 듯한 침묵 속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여자에 게 향했다. 거만한 여왕처럼 여자는 사람들에게 조금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공 허한 듯 하면서도 강렬하고, 모든 이를 비웃는 듯하면서도 그 도도함 이 잘 어울리는 녹색 눈동자에 모든 이들은 마음을 빼앗겼다. 부드러운 어깨 곡선을 유감 없이 드러낸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장미 처럼 붉은 머리카락은 에메랄드로 장식한 머리띠 아래에서 길게 찰 랑거렸다. 샹들리에 빛을 받아 녹색으로 반짝이는 보석처럼, 깊고 맑 은 눈동자는 눈부신 매력을 발산했다. 사랑스럽다는 말도 부족할 정도로 여자는 매혹적이었다. 인간이 아닌 인간이 눈앞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인사하겠습니까?" "그래." 오스카의 손을 놓은 제이는 자신에게 시선을 빼앗긴 사람들을 아무 렇지 않게 슥 훑어보았다. 발 밑의 군중을 훑어보는 듯 오만한, 그렇 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선. "다들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가워. 내 이름은 주피터, 그냥 제이라고 부르면 될 거야." 순간 사람들 사이에 동요가 일었다. 당황한 그들은 무슨 소리냐는 듯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웅성거렸다. 오스카가 나서서 분위기를 수습했다. "엔젤에게는 본래 자기 이름이 따로 있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비 밀이 많지만 그 이상은 알려고 하지 않도록. 아름다운 숙녀분의 사생 활은 기밀 문서 이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것도 모르나?" 사람들 사이에 웃음이 터졌다. 웅성거림이 조금씩 잦아들며 지나치게 들뜨지도 경직되지도 않은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자리잡혔다. "유난히 날 바라보는 세 사람이 있네. 마음에 들지 않아." "앤슨 일행을 말씀하시는 모양이군요." "알고 있어. 왼쪽부터 앤슨, 마리오, 엘르. 계급만으로 놓고 보자면 셋 다 당신 아래지." "개인 역량 또한 저에게는 못 미치는 자들입니다. 당신 같이 고귀한 분께서 신경 쓰실 이유가 없습니다." 제이는 피식거리며 화제를 돌렸다. "그 사람은 언제 오기로 했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안타깝지만 당장은 만나게 해 드릴 수 없을 것 같군요." "상관없어. 이십 년을 넘게 못 봤는데 하루이틀 더 늦춰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어." 가만히 손을 뻗어 와인잔을 쥔 제이는 혀를 내밀어 살짝 맛을 본 뒤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려놓았다.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나는 갓난아기였을 때 어머니의 젖도 거부했어.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은 썩 유쾌한 취미가 아니야." "그렇게 말씀하시면 꼭 자기는 인간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몰랐어? 나는 인간이 아니야." 제이는 무표정한 눈빛으로 오스카를 주시했다. 말없이 잔을 입술에 갖다가 뗀 오스카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신인류 또한 인간입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한." "나에게서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제거한다면 인간이 될 수도 있겠지. 살아가는데 전혀 필요가 없는 일반 내장이 나에게 남아 있다는 게 그 증거야. 하지만 뒤집어 말한다면,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있는 한 나는 인간일 수 없어." "그럼 ST기관을 적출한다면 그때부터는 보통 사람들처럼 소화기관을 이용해서 살게 된다는 겁니까?" "이론은 그래. 하지만 ST기관은 적출해봐야 소용없어. 다시 생겨나게 되니까. 내 허리에 있는 상처를 보지 못했어?"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스카는 그녀의 허리를 흘끔 살폈다. 그러 나 드레스가 아무리 얇다 한들 속의 상처가 비칠 리 없었다. "레이온 박사가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적출했습니까?" "그랬어. 뭘 하려는지는 모르지만 신인류를 탄생시키는 것과 새 혹성 을 만들려는 스케일만 아니라면 대부분 성공할 거야. 체외로 빠져나 온 자이오 다이아몬드는 50% 이하로 그 기능이 떨어져. 더 이상 무 한동력이 될 수 없지." 제이는 아까부터 자신을 흘끔거리는 남자에게 빙긋이 웃어 보였다. 남자는 황급히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눈을 마주칠 용기도 안 나는 모양이었다. "다들 즐거워 보이네." "그렇지요. 당신은 우리의 혁명을 이뤄줄 메시아니까요." "착각하지 마. 나는 당신 소원을 들어줄 생각으로 세상에 나온 게 아 니니까." 작은 목소리였기 때문에 오스카를 제외한 누구도 듣지 못했다. 그렇 지만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녀가 한 말을 듣지는 못했어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지금 그녀 가 대단히 불쾌해하고 있다는 것을, 무언가를 크게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제이는 자신의 분노를 타인에게 전 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싱겁다는 얼굴로 술잔을 들어올린 제이는 가볍게 손을 펼쳤다. 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모두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오스카는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 의 반응을 주시했다. "그 아이는 속일 수 있어도 나는 속이지 못해. 안타까운 일이지. 기 껏 열심히 머리를 굴려 음모를 짰는데 생각을 한 번 읽는 것만으로 들통나게 되니까." 안색이 창백해진 오스카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설마 내 생각을 읽었습니까? 당신에게는 그게 가능합니까?" "레이온이 아무 말도 하지 않던가? 노블 네트워크를 응용하면 그 정 도는 어렵지 않아. 지금 나에게는 보여. 당신이 지닌 모든 추악한 생 각이 보여." 관능적인 미소를 띠며 오스카에게 몸을 기댄 제이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제이는 그의 뺨 을 살며시 핥았다. "알고 있어. 당신이 이 몸뚱이를 가지고 싶어하는 거. 하지만 어쩌 지? 나는 당신같이 하찮은 인간의 몸뚱이 밑에서 헉헉거릴 생각도 없고, 더군다나 이것은 내 몸도 아니야." 그 말만큼은 홀 내의 모두가 똑똑히 들었다. 그들의 시선은 모조리 제이와 오스카에게 고정되었다. 제이는 귀찮다는 듯이 오스카를 밀쳐냈다. 그리고 사람들을 뜯어보듯 훑어보고는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그 애, 그 애는 바로 나. 너희들은 그 아이를 불행하게 했고, 그것은 나를 불행하게 한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지금부터 벌을 내 리겠어." 희고 가느다란 손이 앞으로 내밀어진다. 억겁의 시간이 흐르는 듯 길 고 지루하기만 하다.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정체를 깨달은 마리오 일행은 다 급히 외쳤다. "안 돼! 모두 피해!!" 차갑게 히죽 미소지으며, 제이는 손가락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늦었어." 그 순간, 황금빛 섬광이 그들을 덮쳤다. 미 영토 상공을 지나가고 있던 군사위성들은 일제히 커다란 폭발이 일어난 것을 촬영했다. 폭발 범위는 약 직경 80km. 날씨는 무척 맑았고 근처 상공을 지나가 는 미사일이나 비행물체 따위는 없었다. 폭발 지역에는 원자력 관련 시설이나 중요 군 시설은 일절 없었다. 테러리스트가 노릴 만한 상징 성도 없었기에 한동안 이 사건을 놓고 미 정부는 골머리를 썩혔다. 다만 정찰기를 타고 폭발 지역 상공을 수색했던 파일럿의 말에 따르 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젊은 여자가 구덩이의 중심에 선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지식한 정치가들에게 그런 허황된 보고가 먹힐 리 없었고, 한동안 신의 저주라느니 하는 괴담이 미군 내에 떠돌았지만 자연스 레 잊혀져갔다. by eden 현재의 주인공은 조금 뒤죽박죽이군요. 다음화에서 확실히 정리가 될 겁니다. 고치기 지우기 목록 유진 진우는 당분간 푹 쉬게 되겠군요. 제이 성격은 똑똑해서 좋지만, 진우도 맘에 들어요...-_-; 2005/04/16 실탄 예고합니다. 조만간 또 한 명 죽습니다.(쿨럭;) 2005/04/16 Jin 이번엔 도대체 누구입니까! 유빈이가 다시 살아 돌아올 수는 없나요? 으음...레이온이나 앤드류에 한표... (왠지 모르게 그 두 사람에게 끌린다는...) 2005/04/16 대천사미카엘 대신 복수해 주는 겁니까? 이브도 착한 사람인 듯... 2005/04/16 영 역시 노블 네트워크를 응용하면 사람 마음을 읽을수도 있군요. 2005/04/16 안녕히 흐음... 실탄님은 주인공 죽이기 전문가시니까... 진우가 죽겠네요.. 만약 그런게 아니라면... 진우는 이미 한번 죽었던게 아닐까요? (섬에서 권 총에 맞아 죽은게 아니라.) 그러니까. 서운이도 제이(실탄님 말을 들어보니 예안의 제이와 다른 것같음) 에 의해 죽었다가 유젤로 다시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아마도 이브 의 눈물에서 같은데 거기서 지우가 한번 죽은거지요... 쿨럭. 아님 말구요. (소설을 쓴다. 퍽!) 아니면.. 반대로 현재 예안의 몸을 갖고 있는 제이=이브는 이브의 눈물의 주인 공이 아닐까요? 아아. 복잡해. -------다음에 죽을 사람은 예안의 조력자들 중 또 한사람 같네요. (근데... 그 자리에 있던 아틀란티스인들은 전멸?) 2005/04/16 jhj1502 이브와 바뀌는걸 보고 예전에 봤던 도플갱어 영화 그 이야기가 생각 나네요 >_< 요즘 소엄 보는 재미로 산닷 ~~~ 2005/04/16 자여니야 흐음.. 그보다.. 마더<- 를 죽이는건..?[탕!] 2005/04/16 셜이움 아직 몰살모드가 off된게 아니란 말입니까. 유빈이 죽은게 꽤나 임팩트가 있어서 당분간은 아무도 안죽을줄 알았는데...; 2005/04/16 이시르 유즈?/span> 음... 이브는 같은 신 인류에게만 관대하군요.. 아상에서 이브성격이 그런것 같아요. 같은 신인류에게만 자애로운 어머니고.. 인간은 하찮게 봤던것 같은데..ㅡㅡ;; 그럼 마더는 뭐야ㅡㅡ? 2005/04/16 JIn 노블 네트워크로 유빈을 찾을려 했던 것처럼 니콜라스도 찾을 수 있지 않나요? 예안이 노블 네트워크로 마음만 먹으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2005/04/16 전사&마법사 나도 소설을 쓰면서 근처의 인간들을 죽이는 것으로 악명을 흐흐흐~~~{퍽} 2005/04/16 소녀여 아빠?/span> 이미 유젤의 폭주로 사람들은 셀수 없이 죽었습니다(...) 2005/04/17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3/18 페이지 ▶ 319 - 낙원(4) [24] 실탄 2005/04/2215Kb 883 ▶ 318 - 낙원(3) [14] 실탄 2005/04/2122Kb 832 ▶ 317 - 낙원(2) [11] 실탄 2005/04/2012Kb 786 ▶ 316 - 낙원(1) [8] 실탄 2005/04/2014Kb 734 ▶ 315 - 부등호(7) [15] 실탄 2005/04/1912Kb 785 ▶ 314 - 부등호(6) [12] 실탄 2005/04/1814Kb 704 ▶ 313 - 부등호(5) [15] 실탄 2005/04/1713Kb 774 ▷ 312 - 부등호(4) [13] 실탄 2005/04/1614Kb 742 ▶ 311 - 부등호(3) [12] 실탄 2005/04/1521Kb 712 ▶ 310 - 부등호(2) [11] 실탄 2005/04/1412Kb 643 ▶ 309 - 부등호(1) [10] 실탄 2005/04/1313Kb 692 ▶ 308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8) [7] 실탄 2005/04/1212Kb 677 ▶ 307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7) [22] 실탄 2005/04/1113Kb 698 ▶ 306-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6) [8] 실탄 2005/04/1014Kb 672 ▶ 305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5) [8] 실탄 2005/04/0912Kb 722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 3 [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1700 :: 313 - 부등호(5) 실탄(cruel) 05-04-17 :: :: 12544 "이곳은…?" 정신이 든 제이는 주변을 차분히 둘러보았다. 아틀란티스의 기지 하 나를 민간인 지역과 통째로 날려버린 후로 잠시 지쳐서 넋이 나갔던 것 같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바로 이곳이었다. "어둡네." 힘을 사용하면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탓이었다.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아냈다. 불이 켜짐과 동시에 공허한 느낌의 넓은 공간이 한눈에 들어왔다. 차가운 한기가 알몸을 감쌌다. 처음 보는 장소였다. 그러나 무척 익숙한 냄새가 났다. 차갑게 식어 버린 줄 알았던 가슴이 미어지는 이 그리움의 정체는 뭘까. 원형의 거대한 실내에는 커다란 캡슐이 가득히 있었다. 캡슐 뚜껑에 난 투명한 창을 통해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잠자는 듯 평온한 표정 을 짓고 있는 그들은 전부 죽은 시신들이었다. 이곳은 시신을 보관하 는 장소였다. "사도…? 여기는 사도 영안실?" 그랬구나 하는 듯 가볍게 끄덕이며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녀의 시선 을 문득 잡아끄는 캡슐 하나가 있었다. 다른 캡슐들과는 달리 무언가 특별한 느낌의 캡슐이었다. 희미한 향수가 느껴지는. 그 캡슐 앞에 선 제이는 잠자코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손을 내 밀어 붉은 버튼을 눌렀다. 캡슐이 스르륵 열렸다. 자욱한 한기가 뿜어져 나와 그녀를 감쌌다. 안은 텅 비어있었다. 그녀는 놀라지도 의아해하지도 않는 얼굴로 멍 하니 빈 캡슐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떻습니까,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물론 알고 있는 목소리이기에 귀에 익었 다는 표현을 썼을 뿐, 실제로는 몇 번 들어보지도 못한 남자의 목소 리였다. 제이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흰 가운을 입은 청년이 쓴웃음을 지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척한 인상이 잘 어울리는, 항상 고뇌하며 살아온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을 갖고 있는 청년이었다. "여기가 내 고향?"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캡슐은 당신이 15년이 넘게 잠들어있던 바로 그 캡슐이지요." "그러고 보니 당신을 본 기억이 나. 1년 전이었나? 2년 전이었나? 나 는 케이와 함께 사도를 탈출하려다가 아버지에게 총을 맞고 죽었지. 그리고 다시 눈을 떠 보니 당신이 눈앞에 있었어." "잠들어 있는 동안 있었던 일은 인지하지 못하는 겁니까? 하지만 그 러면서 어떻게 아틀란티스에 대한 걸 알고 있었던 거죠?" "그 애가 말해줬으니까. 난 나약한 그 애 대신 복수를 해줬어. 그 애 의 양아버지와 아이의 복수를." 레이온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언제고 제이가 다시 깨어나리라는 것을 예측했던 덕분일까. 처음 그녀의 부활을 겪었을 때와는 달리 그녀가 조금도 무섭지 않다. 아니, 오히려 처량하기까지 했다. 눈앞의 여자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가여운 존재이다. 친아버지에게 살 해당하고, 연인으로부터는 잊혀졌다. 그리고 지금은 분신의 몸을 빌 어 잠깐 세상 나들이를 나왔다. 서글픈 미소를 지은 레이온은 말없이 다가가 제이를 껴안았다. 제이 는 그의 품을 거부하지 않았다. 나신으로 낯선 청년에게 안긴다는 부 끄러움 같은 건 없었다. "그 애는 자기 자신이 어떻게 태어나게 된 건지는 모르고 있었어. 아 니, 알고 싶어하지 않은 것 같았어. 그래서 나도 몰라. 어떻게 해서 지금의 내가 있게 되었는지." "알고 싶나요?" "알고 싶어. 말해 줘. 부탁이야." 톤이 느껴지지 않지만 그래서 더욱 처량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이다. 레이온은 목청을 가다듬으며 왈칵 눈물이 솟을 뻔했다. 진짜 유젤이 이처럼 자신에게 다정하게 안겨 속삭여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22년 전 이브인 당신과 아담인 케이는 조물주 프로젝트를 통해 후 유증을 치료하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수장의 반대로 사도를 탈출하려 했지요." "그건 기억하고 있어. 그리고 난 아버지의 총에 맞아 죽었지." "케이는 당신을 복제했습니다. 그리고 조물주 프로젝트를 통해 달을 새로운 혹성으로 바꾸는데 성공했지요. 그리고 당신의 복제와 함께 그 혹성으로 이주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일입니다." "그건 그 애한테 들었어. 에덴 혹성이라고 했지 아마? 그래, 내 복제 는 지금 그 사람과 행복하게 잘 살고 있대?" "아니오. 죽었습니다. 7년 전에." "아아, 그래? 죽었구나…." 가족의 죽음은 누구라도 슬픔에 빠뜨린다. 하물며 죽은 상대가 자신 의 복제인 경우에는 두말할 것 없다. 그러나 제이는 자신의 복제가 죽었다는 사실보다는, 또다시 혼자가 된 아담이 얼마나 외로워했을지 그것을 걱정했다. "당신의 복제와 아담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었어요." "유젤 디야스 마르셸?" "예. 유젤은 그 이유를 저에게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어머 니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7년 전 지구로 가출했고, 그때 저와 만났습니다. 저는 그 당시 17살의 어린아이였는데 유젤을 보고 그만 좋아하게 돼버렸죠. 하지만… 후유증을 없애려고 했던 저를 도와주고 난 뒤 유젤은 에덴 혹성으로 가버렸습니다. 짝을 잃은 아담이 괴로워 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다면서요." 아내를 잃은 아버지. 그 아버지를 가여워한 딸은 결국 아버지의 두 번째 아내가 되었다. 좋아하지도 않았던 어머니가 죽은 자리를 대신 해서. 일반인의 윤리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지만, 그럼에도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은 무언가가 그들 사이에는 존재했다. 그런 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이 에덴인을 가리켜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이유이다. "유젤, 그 아이를 좋아했어?" "…네." "그래서 복제했고?" "…네." "하지만 실패했지?" "…네. 신인류를 복제한다는 것은 신의 허락이 있지 않는 한 불가능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는…." 그는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로 제이의 시선을 피했다. 제이는 작은 실 수를 저지른 아이를 달래듯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머리카락 을 쓸어 넘겼다. "괜찮아. 말해 봐." "…저는… 22년 전에 사망한… 최초의 이브인 당신의 시신을 이용했 습니다. 기존의 기억 인자를 억제하고… 그리고 유젤의 기억을 불어 넣었…습니다…." 한 자 한 자를 읊는 게 괴로웠다. 그는 심하게 더듬거리며 자신이 과 거에 했던 일을 고백했다. 말을 끝내고 나자 이루 말할 수 없는 후련함이 가슴을 차지했다. "그랬을 거야.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없다면 신인류를 복제한다는 것 은 불가능해. 하지만 자이오 다이아몬드는 오로지 마더만이 줄 수 있 는 거니까 네가 손에 넣을 수는 없었겠지. 그 사람도 자기가 직접 만 들지는 못하고 마더로부터 하사받았는걸." "당신은… 자애롭군요." "그렇게 보여?" 수척한 미소를 지으며 제이는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등을 돌려 자신이 과거 십 년 동안 잠들었던 캡슐을 바라보았다. "그냥 지쳐있는 것 뿐이야. 그 애는 나한테 죽고 싶다고 말했지만 정 작 살고 싶지 않은 건 바로 나야. 나는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조금 도 모르겠어."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왜 살아야하는지 모른다는 겁니까?" "네 말대로라면 케이는 지금 행복하잖아? 에덴 혹성에 있는 한 후유 증이 케이를 괴롭힐 일도 없을 거야. 무엇보다… 너 역시 사도의 간 부였을 텐데 조금도 후유증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네, 그래요. 12년 전 마더는 사도로부터 저주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겠지. 그렇게 간단하게 저주를 거둘 거라면 백 년이 넘도록 우리를 괴롭히지도 않았을 거야. 무언가 있어. 마더 는 무언가를 꾸미고 있어. 그 과정에서 사도는 잠깐 이용당한 것뿐이 고 말이야. 아니, 어쩌면 지금도 이용당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그 부분은 내가 설명해주마." 중후한 음성이 울리자 제이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예민한 사람 이 아니라면 잡아낼 수 없을 만큼 미미한 변화였지만, 그녀가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를 알기에는 충분했다. 커다란 기둥 뒤에서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깔끔한 백발에 노인 답지 않은 훤칠한 체구였지만, 젊어서부터 고뇌를 해온 사람만이 지 닐 수 있는 세월의 괴로움이 주름살로 뚜렷이 남아있는 노인이었다. 레이온은 알고 있었다는 듯 놀라지 않고 쓴웃음을 짓기만 했다. "오랜만입니다, 수장님." "정말 오랜만이구나. 그래, 그동안 잘 지냈느냐?" "글쎄요. 여자 문제 때문에 마음 편히 자본 적이 없다는 것만 빼고는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나름대로 세상을 주물럭거리기도 했고요."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은 야심을 품은 남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일이지. 하지만 옛날부터 너에게는 야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묵직한 인사를 끝낸 시리우스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얼굴 로 제이를 바라보았다. 22년 전 바로 이 손으로 죽여 이 방에 안치한 딸이다. 딸의 복제와 대면했을 때는 내 딸이 아니라며 강하게 부정했지만, 이렇듯 죽였던 딸이 살아 돌아왔으니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두 부녀의 얼굴에는 감격은 떠올라 있지 않았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그저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안타까움만이, 딸의 얼굴에는 증오마저 지쳐버린 피로만이 묻어있었을 뿐. "이것을…." 비로소 딸이 알몸인 것을 깨달은 시리우스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건넸다. 잠자코 바라보던 제이는 거절하지 않고 받아 걸쳤다. "사도가 마더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지요?" "나도 자세히 알지는 못해. 그저… 지난 수십 년 동안 고뇌하고 또 고뇌한 끝에 얻어낸 결론일 뿐이다. 증거는… 없어." "그런데도 잘도 말해주겠다고 말씀하셨군요. 그래도 어디 한 번 들어 는 보겠어요." 딴에는 비웃는 것 같은데 비웃음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지쳤다는 느낌만이 가득한, 그래서 더욱 안아주고 싶다는 바람밖에는 들지 않는다. 하지만 피묻은 이 손으로 딸을 안을 자격은 없다. 시리우스는 가슴이 미어지는 서글픔을 덤덤한 표정으로 감춘 채 말을 꺼냈다. "사도의 유래를 알고 있니?" "고대로부터 비밀리에 전해진 천재 과학자 가문이죠. 외부의 피는 일 체 받아들이지 않고 오로지 가문 내에서의 혼인을 통해 순수혈통을 지켜왔다고 들었어요. 기형아가 태어나는 일이 없다던, 완벽한 유전 자를 지닌 집단이라고 했지요? 물론 그래봤자 한계가 있겠지만요."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너도 모르는 게 있다. 너는… 잊혀진 우 리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모르지?" 시종일관 지쳐 있는 표정을 짓고 있던 제이는 흥미가 조금 끌린다는 듯 갸웃거렸다. "잊혀진 이름이요? 그런 게 우리에게 있었나요?" "그래. 지금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까마득한 옛날 우리 사도는 어 떤 고대 민족의 일부였다. 사도의 수장에게만 비밀리에 전해지는 고 대 문헌에 따르면, 그 민족은 초능력과 같은 힘을 지니고 있어 전 대 륙의 모든 영장류를 지배했다고 하지. 전기문명은 발달하지 않았지만 초능력을 응용해 원양 항해가 가능한 배나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항 공기 같은 것도 건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흥미로운데요?" 여전히 건조한 목소리 한끝에는 미약한 흥분이 빛나고 있었다. 제이 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그리고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알 것 같다 는 설렘을 띠고 아버지의 입을 주시했다. 가슴이 벅차다는 듯 심호흡을 한 수장은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 고대민족은 신의 저주를 받아 살고 있던 터전을 잃어버 렸지. 자기들이 지닌 초능력이 신의 저주를 받은 이유였다고 생각한 일부 세력들은 힘을 포기해야만 멸망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강경파 들은 힘을 포기하는 것은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 자기 자신을 버리 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반박했다. 그렇게 싸우다가 결국 두 세력은 완 전히 갈라지게 되었지." "설마, 힘을 포기한 쪽이 우리 사도의 시초라는 건가요?" "그래. 힘을 포기한 대가로 우리의 시조는 월등한 지능을 손에 넣게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 거지. 그리고 수백 년 전에 이르러 그때 까지 유지해온 이름을 버리고 사도라 개명했다. 잊혀진 이름을 알 자 격을 지닌 자는 수장 뿐이야." 미약한 흥분이 심장을 뛰게 한다. 제이는 설렘으로 얼굴이 조금씩 붉 어지는 것을 느꼈다. "힘을 포기하지 않은 쪽은 어떻게 됐나요?" "역사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까마득한 옛날 일이야. 벌써 몇 천 년 도 전에 완전히 연락이 끊겨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그렇게 이어져왔지. 나 역시 몇 년 전까지는 사도의 고대문헌을 통해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얼마 전 우연히 그들의 후 예와 연락이 닿게 되었다." "그 다음을 이브에게 말씀드릴 영광은 저에게 주지 않겠습니까?" 느닷없는 젊은 청년의 목소리에 레이온과 제이는 흠칫 놀랐다. 오로 지 시리우스만이 알고 있었다는 듯이 덤덤히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 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망토를 걸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눈매와 망토 안에 감춰진 녹색 자수가 잘 어울리는, 예리한 지적 매력과 인 내력이 돋보이는 눈동자를 갖춘 젊은이였다. "이제야 도착했군. 그대가 아틀란티스의 황태자인가?" 시리우스는 위대한 대륙의 후예를 지배하는 남자를 대하듯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의 말투에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공통의 시조를 둔 젊은 이에게 표하는 친근감도 묻어 나왔다. 카뮤는 특유의 오만한 표정을 지우고 공손하게, 자신들과는 다른 걸 을 선택함으로써 민족의 명맥을 유지해온 것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몇 천 년 만에 이렇게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뮤의 수장이시여." 감격 비슷한 무언가가 시리우스의 몸을 감쌌다. 수백 년 전 봉인한 사도의 진짜 이름, 뮤. 수장 외에는 아무도 모르 는 그 이름을 누군가가 알고 있고, 그 누군가는 그 이름으로 우리를 불러준다. 그것은 몇 백, 몇 천 년의 봉인이 풀리는 것 이상으로 짜 릿한 쾌감이었다. by eden 이제 왜 주인공이 뒤죽박죽인지, 왜 제이의 기억까지 주인공에게 있 는 건지 아시겠지요. 덧붙여 지난 회 동안 잠깐잠깐씩 등장했던 제이의 기억은 에덴 혹 성으로 이주한 복제 제이의 기억이 아니라 사도에서 탈출하지 못 하고 사망한 최초의 제이입니다. 206화에 210화(해저의 속삭임 <1>화와 <5>화)를 다시 훑어보시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과거 '영'님이라는 분께서 그때 '옛날 제이의 시체를 이용한 걸 까요?'라고 말씀하셨을 때 실탄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는 모종 의 섬씽이 있습니다. 고치기 지우기 목록 군발이230 흐미 역시 멋지군요 아틸란티스랑 모종의 관계가 있을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다른 계파군요.. 다시 합쳐질려나,, 2005/04/17 안녕히 그렇게 된 거 였군요... 아. 이제 스토리에 집중할 수 있겠다... 2005/04/17 영 어서 빨리 예안이가 부활 하기를~ 그리고 아직까지 니르가 나오지 않는것을 보니 마지막 반전이 남아있을것 같은데~~ 어서 빨리 니르를 보고 싶습니다. 진정한 목적이 먼지 궁금하다는~ 2005/04/17 ... 멋있는 내용 전개... 2005/04/17 흐음? 저기 유젤의 몸속에는 아담의 상처까지 있던 서운과 제이(제이 서운 유젤의 기억 모두 갖고 있잖아요)의 짬봉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짬봉 유젤을 복사했으니 당연히 안에는 달에 가서 조금 산 것까지 기억과 감정이 업데이트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왠지 업그레이드 버전 깔아놓고 최초의 오리지날 버전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아니면 최초의 제이(원본의 최후 버전), 최초의 제이의 기억+서운(유서운 최후 버전), 최초의 제이의 기억+서운+유젤(지금까지의 유젤 및 유사품으로 예안이 있음) 아니면 뭉뚱그려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인격 4개를 따로 생각해야 할지? 2005/04/17 흐음? 글구 가장 중요한 서운이라는 인격을 무너뜨린 제이말입니다.. 이것이 문젭니다.. 그러면 오리지날은 사라지고 유젤은 달까지 가서 재밌게 살다온 제이의 기억을 물려 받았으니 당연히 최초의 제이는 완전히 사라지고 한때나마 케이와 재밌게 살았던 제이 만이 남아야죠.. 2005/04/17 실탄 어떻게 생각하시든 간에 그것은 상상의 자유이지만.... 레이온이 했던 복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복제가 아닙니다. 무수한 복제 과정에서 그는 실패를 거듭했고(키메라가 실패작들), 결국 22년 전에 사망한 최초의 제이의 시신을 이용한 것입니다. 거기에 오리지널 유젤의 기억을 불어넣기만 한 거죠. 냉정히 놓고 보자면 복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나왔던 주인공은 오리지널 유젤의 기억에 어느 정도 구속이 걸리기는 해도 엄연한 자기 인격이 있었습니다. 오리지널 유젤이나 서예안과는 또 별개로 사도에서 탈출하던 중 사망한 제이의 인격도 따로 있는 거고요. 부분적으로 기억의 공유는 있을지언정 아직까지 그것이 완전한 하나가 된 적은 없습니다. 덧붙여 왜 최초의 제이가 사라져야 한다고 당연하다는 듯 말씀하시는지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2005/04/17 루리에르피나 1부를 안읽은 저로서도 이해가 가네요 실탄님 굿~ 2005/04/17 꼬마코린 -_-;;; 2005/04/17 셜이움 음... 전부터 생각했던건데요 소.엄의 단점이라고 할만한게... 설명이 부족하달까, 개연성이 부족하달까... 그러니까 예를들면 얼마전에 유빈이를 데리고 탈출하려다 팔에 무슨 장치를 해놔서 못하잖아요? 그런데 얼마 안있다가 다른편에서 주인공이 순간이동을 보여주죠. 그럼 전에는 왜 유빈이를 데리고 순간이동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경우에는 예를들어 주인공이 그때는 그러한 능력이 없었다거나 아니면 그방이 특수장치가 되어있는 방이라 힘을 못쓴다 라는 설정이라면 그에 대한 설명이 나왔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소.엄에는 이러한 부분들이 곳곳에 보입니다. 글을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시고 좀더 신경을 써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2005/04/17 셜이움 으윽, 너무 복잡해졌네. 한마디로 독자들이 어째서 주인공이 저런 행동을 하는가가 아니라 아, 그래서 주인공이 저런 행동을 하는구나 라고 납득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겁니다. 에구, 제가 글솜씨가 없어서 실탄님께서 오히려 헷갈려할까봐 겁납니다 ^^; 2005/04/17 실탄 주인공은 사용할 수 있는 능력에 제한돼있지요. 어느 정도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육체적 싸움이라면 초능력이 가능하지만 제이처럼 순간이동이나 지역 하나를 날려버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폭주라는 한 마디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이른바 버서커 모드라는 거죠. 주인공이 한계 이상의 능력을 보이는 것은 폭주했을 때 뿐입니다. 물론 제이는 굳이 폭주하지 않더라도 원활하게 모든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2005/04/17 셜이움 그런거였군요. 제가 하고싶은 말은 그러한 설정들이 좀더 자연스럽게 소설에 나타났으면 하는거랄까요. 소엄이 아마 책으로도 나온걸로 알고 있습니다. 책으로 읽는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을 잘 모를테니까요. 앞으로도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 2005/04/17 유진 음.... 저는 보고 이건 당연히 폭주모드! +_+ 우오오 하고 봤는데 사람들이 다 그런건 아니었군요 ㅡ.ㅡ; 뭐 하지막 저로선 딱히 설명을 따로 넣을 필요까진 없을정도의 수준이라고 보지만... 2005/04/17 흐음 저기요 제말의 요지는 서운을 죽인(글쎄 죽였다고 볼수 있나?) 자기가 오리지날이라고 했던 제이가 있었으니... 그 인격이 오리지날이 맞다면 당연히 유젤의 복사본인 예안에게도 그 것이 전해졌어야 정상이 아닐까라고 생각 했을 뿐이에요 2005/04/18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3/18 페이지 ▶ 319 - 낙원(4) [24] 실탄 2005/04/2215Kb 883 ▶ 318 - 낙원(3) [14] 실탄 2005/04/2122Kb 832 ▶ 317 - 낙원(2) [11] 실탄 2005/04/2012Kb 786 ▶ 316 - 낙원(1) [8] 실탄 2005/04/2014Kb 734 ▶ 315 - 부등호(7) [15] 실탄 2005/04/1912Kb 785 ▶ 314 - 부등호(6) [12] 실탄 2005/04/1814Kb 704 ▷ 313 - 부등호(5) [15] 실탄 2005/04/1713Kb 776 ▶ 312 - 부등호(4) [13] 실탄 2005/04/1614Kb 742 ▶ 311 - 부등호(3) [12] 실탄 2005/04/1521Kb 712 ▶ 310 - 부등호(2) [11] 실탄 2005/04/1412Kb 643 ▶ 309 - 부등호(1) [10] 실탄 2005/04/1313Kb 692 ▶ 308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8) [7] 실탄 2005/04/1212Kb 677 ▶ 307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7) [22] 실탄 2005/04/1113Kb 698 ▶ 306-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6) [8] 실탄 2005/04/1014Kb 672 ▶ 305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5) [8] 실탄 2005/04/0912Kb 722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 3 [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1780 :: 314 - 부등호(6) 실탄(cruel) 05-04-18 :: :: 13676 "뮤? 그것이 사도의 진짜 이름인가요?" "그래. 지금은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고 있지 않지. 아니, 이제 레이온과 너도 알게 되었으니 모두 세 명일까." "믿을 수 없군요. 아틀란티스까지는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뮤가 전설이 아니라 실존했다니… 사도였다니…." 레이온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태어나고 자라왔던, 어머니나 다 름없는 집단이 전설에 나오던 바로 그 주체였을 줄이야. "아틀란티스의 황태자, 그 다음을 말해준다는 것은 무슨 뜻이지?" 놀라움과 흥분이 가신 뒤 제이는 또렷이 물었다. 카뮤는 속 깊은 눈 동자로 그녀를 주시하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수천 년 전, 우리 민족은 우리가 지닌 강한 힘이 신에게 저주를 받 은 원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바람에 아틀란티스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갈라지게 됐죠. 힘을 포기한 그들은 아틀란티스라는 이름을 저버리고 스스로를 뮤라 칭했습니다." "거기까지는 짐작이 가." "신의 저주를 받아 우리 대륙은 대서양 밑으로 가라앉았습니다. 하지 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다시 지상으로 나올 수 있을 거라 믿고, 지상을 출입할 수 있는 자들을 통해 역사와 전설을 계속 해서 조작해왔습니다. 아틀란티스라는 이름을 지상인들이 절대 잊어 버리지 않도록 노력했죠." "세계 각지에서 전해오는 신화들… 그것들이 전부 다 조작된 거란 뜻이야?" "그렇습니다. 적어도 우리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신화나 민담은 우리의 손을 거쳤다고 보면 됩니다." "집요하네. 그리고 대단한 인내심이야. 수천 년 동안 잊어버리지 않 고 줄곧 그 짓을 해왔다니…." "그 점에서 보면 당신들 뮤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아까 한 말 못 들었어? 뮤는 수백 년 전에 사도라고 개명했다잖아. 그것은 더 이상 고대의 정체성에 얽매여 있지 않겠다는 뜻 아냐?" 그녀의 목소리는 특정한 관점을 취하겠다기보다는, 어느 한쪽이 되든 간에 상관없다는 뜻이 강했다. 사도의 유래가 몹시 뜻밖이었기에 잠 깐 놀라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만큼 제이는 지쳐 있었다. "뮤의 이름을 봉인한 것은 사실이다. 허나 더 이상 그 이름을 쓰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야. 자세한 이유는 나도 잘 모르지만, 개명을 결심한 사도의 초대 수장은 무언가 강한 고뇌를 했던 것 같다." "고뇌요?" "어쩌면 신의 계시를 받았는지도 모르지. 지금의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묵직한 음성에 제이는 쌀쌀맞은 표정을 지우고 눈을 감았다. 경건하 되 경건함이 아닌, 기묘한 침착함이 조금씩 피어올랐다. "마더가 뮤의 마지막 수장에게 계시를 내렸다는 것인가요?" "그렇게 생각해. 그때까지는 세상을 간섭하거나 통제하지 않던 뮤가 사도라 개명하고 적극적으로 세상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 무 언가 계기가 있어." "어처구니없는 추측이네요. 신, 아니 마더의 존재를 확인한 것도 아 니잖아요, 수장님은?" 22년 만에 만난 친아버지를 눈앞에 두고도 아버지라는 호칭은 전혀 사용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시리우스는 그걸 물고늘어지며 호통칠 자격이 없음을 알았다. "증거는 있어." "호, 그래요? 어떤 증거요?" "나 또한… 얼마 전 신의 계시를 받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제이는 이윽고 기가 차다는 듯 깔깔깔 웃음을 터 트렸다. "대단히 재미있는 말이네요. 그래, 어떤 계시를 받았나요? 사도를 폐 쇄하라는 계시? 인류를 멸망시키라는 계시? 아니면 에덴 혹성을 먼 지로 만들어버리라는 계시?" "아틀란티스 황태자가 곧 찾아갈 테니… 뮤와 아틀란티스를 다시 합 치라는 계시였다." "개꿈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지요?" 조용히 듣고 있던 카뮤가 자기 차례라는 듯 나섰다. "저 또한 신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뮤의 수장을 만나 아틀란티스와 뮤를 합치라는 계시였지요. 그렇게 한다면 우리에게 내린 저주를 거 두겠다고 신은 말했습니다." "개꿈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은 마더 따위를 따를 남자로는 안 보여." 카뮤는 속마음을 들켰다는 듯 피식거렸다. 난처하다기보다는 재미있 다는 웃음이었다. "그때 꿈에서 전 뮤의 수장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했지요. 뮤의 수장님은 저에게 어디로 오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을 해주 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만났습니다." 순간적으로 제이의 낯빛이 굳어졌다가 본래대로 돌아왔다. "아아, 그렇군요. 인정해요. 개꿈은 아니라는 거." 목청을 가다듬은 제이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시리우스를 노려보듯 주시했다. 그녀의 눈빛에서 날카로운 예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래서? 아틀란티스와 뮤를 하나로 합친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생 각인데요? 세계를 정복할 건가요? 하지만 그것은 뮤, 아니 사도의 힘 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요? 그렇지 않으면 에덴 혹성을 공격해 점령 할 생각인가요? 허황된 꿈은 집어쳐요. 지구의 모든 인간들이 달려들 어도 케이는 당해낼 수 없어요." 사나운 그녀의 눈동자가 카뮤를 향했다. "당신의 꿈은 아틀란티스 대륙을 융기시키는 것이라 했지? 자이오 다이아몬드의 힘을 빌린다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하지만 방법이 틀 렸어. 이 정도로 그 아이에게 심한 상처를 주었는데, 그 아이가 당신 들을 도울 거라 생각해?" "오스카가 지나쳤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허나 지상인들이 얼마나 치 졸한 존재인지 엔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웃기지도 않은 소리는 집어 쳐. 당신들은 지상인들이 치졸하다는 것 을 증명하기 위해 더욱 치졸한 짓을 한 거야. 지금 누구에게 억지 논 리를 들이대고 있는 거야?" 가녀린 소녀답지 않은 박력에 카뮤는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제이는 이번에는 레이온에게 얼굴을 돌렸 다. 앞서 두 사람을 대할 때와는 달리, 그녀의 얼굴에 자애로움과 가 여워하는 빛이 묻어났다.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유젤과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 뿐입니다." 레이온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제이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피식 웃었다. 편안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케이도 그랬다. 이상이니 뭐니 하는 것은 일절 없이, 그저 자기 자신 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만을 위해서 다른 것들은 거들떠보지도 않 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무수한 상처를 입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 그가 행복하다니 안심이다. 비록 자신은 영원히 그에게 잊혀져 홀로 고독을 견뎌야 하지만. 상냥하게 미소지으며, 그녀는 레이온에게 몸을 기댔다. 은은한 유혹 의 향기가 몸을 감싸자 레이온은 흠칫 놀랐다. 그는 제이를 뿌리치지 않았다. 그녀가 유젤 본인이라도 되는 양 눈을 감고 살며시 끌어안았다. 아니, 그녀와 유젤을 갈라놓고 정의하는 것 자체가 틀렸을까. "어때? 내가 같이 살아줄까?" 달콤한 속삭임이 유혹하듯 들린다. 그는 흠칫 놀랐다. "무슨 뜻인가요?" "어린애도 아니면서 수줍어할 필요 없어. 너는 충분히 고뇌했고, 또 드물게 구인류 중에서는 내 마음에 들었어. 너 같은 남자와 같이 살 아주는 것쯤은 가능할지 몰라." "아니… 제가 사랑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젤이지 당신은 아니…." 제이는 손가락을 세워 그의 입술에 댔다. 뒷부분은 더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서예안 그 아이도 유젤일 수 없어. 사물을 복잡 하게 구분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야.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믿어. 그 믿음대로 상대방을 정의하면 돼. 그렇게 하면 너도 행복해질 수 있어. 그 사람처럼." 레이온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말없이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가슴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과연 그렇게 될까? 그녀가 말한대로 하 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는 시선을 내려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발 돋움을 하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연약한 입술이 닿는 감촉은 그저 달콤하다. 동시에 혼이 빨릴 듯 짜 릿하다. 그는 미래를 상상했다. 제이가 유젤 흉내를 낸다. 그녀를 유젤이라 믿고 사랑한다. 둘 사이 에는 아이도 태어날 테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세상의 끝에서 둘은 언제까지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행복해한다. 가식의 사랑. 그것을 확인한다.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식은땀을 흘리며 제이의 시선을 외면했다. 제이는 알았다는 듯 끄덕이며 그의 품에서 떨어졌다. 그녀의 얼굴에 는 조금의 섭섭함도 아쉬움도 없었다. 면역이 된 피로만이 가득히 묻 어있었을 뿐이다. "잘 생각했어. 우리 관계가 그렇게 된다고 해봤자 가식적인 사랑을 벗어날 순 없으니까. 진심으로, 정말로 믿는 게 아니라 믿고 싶어한 다는 것에 그치면 결코 진짜는 될 수 없어. 잘 알고 있구나." "나를… 시험한 겁니까?" "맞아. 시험했어. 왜, 섭섭해?" 조금 전의 황홀함과 설렘이 씻은 듯 달아났다. 시험이라는 말에 레이 온은 상당히 분개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제이의 안색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러냐 는 무심함만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차피 앞으로 이 몸으로 계속 살아가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 아이 인걸. 그리고 그 아이를 곁에서 보살펴줄 수 있는 사람은 당신 하나 밖에 없잖아? 내 아이, 아니 내 분신이나 다름없는 그 아이 곁을 책 임질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시험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제이! 그게 무슨 소리냐!" 대번에 낯빛이 변한 시리우스는 제이에게 달려가려 했다. 제이는 귀 찮다는 듯이 오른손을 뻗쳤다. 투명한 벽이 생겨나 제이의 주변을 감쌌다. 딸을 안으려던 시리우스 는 벽이 자신을 가로막자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무릎을 꿇었다. "너는 그 사람과 똑같은 눈을 가졌어. 그러니 믿을게. 부디 그 아이 를 행복하게 해줘." 레이온은 흔들림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을 뿐, 어떤 맹 세도 걸지 않았다. 언어로서 표현된 약속의 허무함을 누구보다 잘 알 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의 양아버지와 아들 복수는 해줬으니까 더 이상 당신들에게 볼일은 없어. 당신들의 일만 년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야 할 거야. 평생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내가 알 바 아니지." 카뮤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녀를 둘러싼 빛이 점점 강해졌다. 조금씩 투명함을 잃어 가는 빛의 기둥을 수장은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신의 저주를 부정하던 당신이 결국 신의 계시에 따라 사도를 일만 년 전으로 되돌리려 하는군요. 그런 거 보면 참 신은 변덕스럽고 자 기 멋대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이!" 벌떡 일어난 수장은 제이를 감싼 벽을 움켜잡으며 외쳤다. 제이는 영 원한 종식을 맞이하는 사람 같지 않게 피식거리며, 잠깐 나들이라도 나가는 사람처럼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안녕. 바보 같은 아버지." 능구렁이 같은 늙은 정치가들이랑 밤새워서 말씨름을 했던 앤드류는 침대에 눕지도 못하고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아침이 되었는지 따스한 햇볕이 등을 쪼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너무 피곤한 탓에 쉬 일어나지지가 않았다. 부드러운 손이 등을 토닥였다. 비서인가? 여자가 몸에 손대는 거 싫 어하는 걸 알면서도 왜 저러는 거지? 짜증이 솟구친 앤드류는 벌떡 일어났다가 그만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는 전혀 뜻밖의 사람이 서 있었다. "안녕." 그녀가 상냥하게 미소지으며 인사를 건네는 순간 앤드류는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누나.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동안 어디 있었어?" "잠깐 피신해서 이것저것을 생각하고 있었어. 가족을 다 잃어서 많이 힘들었는데, 지금은 그럭저럭 정돈이 됐어." 그 말이 거짓말임은, 그녀 자신보다는 앤드류가 더욱 잘 알고 있다. 밝게 웃고 있지만 수척해 보이는 뺨을 안쓰럽다는 듯 쓰다듬으며, 앤 드류는 울컥한 나머지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짓궂은 미소를 띠며 그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우리, 어디 좋은데 놀러가지 않을래?" 미처 그가 뭐라 대답할 사이도 없이 그녀는 그의 팔을 잡아끌고 밖 으로 나갔다. 어어어 하며 끌려나가던 앤드류는 에라 모르겠다 생각 하고 기꺼이 그녀를 따라갔다. 피곤함이 가득한 그의 얼굴에 모처럼 의 밝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들은 오랜 연인처럼 다정히 데이트를 했다. 수족관을 거닐어도 보 고, 동물원 물개에게 먹이를 주며 깔깔거려도 보고, 네온 불빛이 가 득한 거리를 팔짱을 끼고 산보도 해보았다. 앤드류는 태어나서 오늘만큼 즐거운 날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아닐 까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다정했다. 아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이게 꿈이라 해도 좋았다. 누 군가가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라 해도, 잠시간의 편안함을 선사해줘서 고맙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닥터의 행방불명과 두어 번 일어난 세계적인 테러 때문에 혼란스럽 기는 해도, 두 사람에게는 아무 상관없었다. 앤드류는 매일매일이 오 늘 같기만 하면 행복할 듯 했다. 그러나 이것이 순간의 즐거움임을 그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 녀가 떠나기 전에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든, 누군가가 장난을 치는 것 이든, 아니면 꿈을 꾸는 것이든 간에 이제 곧 힘든 세계로 귀환해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밤거리가 잘 보이는 고층 레스토랑에서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침묵을 지켰다. "나 때문에 많이 힘들지?" 이윽고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누나가 설마 영영 내 마음 모른 체 하 고 입 싹 씻으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있었거든." 묵직한 분위기가 싫었던 그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여 웃는 얼굴을 가렸다. "너 참 좋은 남자구나." "응?" "다정하고, 성실하고… 무엇보다 그 아이를 참 아껴 주는 것 같아. 그렇게 올곧은 애정을 가졌는데도 그 남자한테는 질 수밖에 없다는 게 참 안타까워." "누나?"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앤드류는 냅킨을 꾸깃 세게 쥐었다. 고개를 든 그녀는 턱을 괴고 생긋 웃음을 띠었다. "난 인간을 사랑할 수 없는 여자지만, 너 같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사랑해줘도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 불쌍하고 너무 가엾거든." "누나." "알아. 동정하지 말라는 거지? 하지만 동정일 수밖에 없는걸. 나나 그 아이가 너에게 선물하는 사랑은 말이야." 무언가를 초월한다는 것은 항상 행복한 게 아니야. 그녀의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기분이 나빠진 앤드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주변을 이루고 있는 풍경이 물에 녹듯 사라졌다. 고층 레스토랑은 온데간데없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익숙한 사무실 풍경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창문을 통해 쏟아 지고 있었다. 앤드류는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 아래 펼쳐진 번화가에는 사람들이 바쁘게 오고가고 있었다. 여유는 느껴지지 않지만 여느 때와는 다른 평온한 아침 거리. 그러나 분명히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듯 허전했다. 아주 슬픈 꿈을 꾸었던 것 같은 데 꿈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별안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잠시 그러고 있던 그는 누가 볼 새라 얼른 눈물을 닦아냈다. "이러고 있을 틈이 없어, 앤드류." 그는 책상에 앉으며 스스로를 북돋웠다. 지금은 행방불명이지만 누나 는 곧 돌아올 것이다. 한가하게 울고 있을 틈은 없다. 누나가 더 이 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by eden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끝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속이 붙기 시작하면 분량 오차 범위가 무척 커져서요. 확실히 말씀드리자면 앞으로 남은 편수가 50화는 <절대> 넘지 않을 것 같습니다. ps : 본화에서 제이가 앤드류에게 한 말들을 잘 기억해두시면 나중 에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있습니다. 고치기 지우기 목록 사케쿠 으음........ 배드 앤딩인가요. 2005/04/18 영 제이 죽게되는 걸까요? 아니면 그냥 잠이 드는걸까요? 2005/04/18 루리에르피나 예안&니콜라스를 원했는데 시무룩... 2005/04/18 dkrmqlwb 엄청난 가속이 붙었군요.. 2005/04/18 린(燐) 예안&앤드류를 원했는데요.. 왠지 불가능 할 것 같은;; 2005/04/18 laputa 시험기간에도 불구하구 쿨럭(몽둥이 찜질 ㅡㅡ,,,, ) 실탄님의 글은 자주 보는데 쿨럭,,,, 에구 힘들다 마지막 극적인 반전은 없나요 ??? 제이가나오면서 좀 하강하는 듯한 느낌~~(기우일라나??) 2005/04/18 자여니야 저녀석인겁니까..? 그런겁니까?... 이왕이면 저녁에올려줘요?! 그래야 1빠의 희열을 느낄수있! [탕탕탕!] [SYSTEM - 자여니야님께서 사망하셧습니다.] 2005/04/18 실탄 이건 반전 드라마가 아닌데요.ㅡㅡ; 2005/04/18 jhj1502 엥 무대륙 아닌가 ㅋ -_-ㅋ 이속도라믄 폐인대전 끝나기 전에 소엄이 끝나는건 -_-? 실탄님 질문~~ 소엄 끝나믄 용제를 연제 하나요... 아니면 2부인 이브의 눈물? 이였나 그걸 연재 하나요 2005/04/18 실탄 아직 모르겠습니다. 일단 전체 분량에 상대해서 완결이 가까워졌다 뿐이지, 실제로 남은 횟수가 적은 편은 아니니까요.;; 그때 가서 생각해보렵니다. 2005/04/18 꼬마코린 ...혹시 '잔인무도실탄'이라는 칭호를 가지기위해 전부 쓱싹-해버리는...? 2005/04/18 해적왕 글을쓴다는것은 어떤 느낌일까요... 2005/04/19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3/18 페이지 ▶ 319 - 낙원(4) [24] 실탄 2005/04/2215Kb 883 ▶ 318 - 낙원(3) [14] 실탄 2005/04/2122Kb 832 ▶ 317 - 낙원(2) [11] 실탄 2005/04/2012Kb 786 ▶ 316 - 낙원(1) [8] 실탄 2005/04/2014Kb 734 ▶ 315 - 부등호(7) [15] 실탄 2005/04/1912Kb 785 ▷ 314 - 부등호(6) [12] 실탄 2005/04/1814Kb 706 ▶ 313 - 부등호(5) [15] 실탄 2005/04/1713Kb 776 ▶ 312 - 부등호(4) [13] 실탄 2005/04/1614Kb 742 ▶ 311 - 부등호(3) [12] 실탄 2005/04/1521Kb 712 ▶ 310 - 부등호(2) [11] 실탄 2005/04/1412Kb 643 ▶ 309 - 부등호(1) [10] 실탄 2005/04/1313Kb 692 ▶ 308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8) [7] 실탄 2005/04/1212Kb 677 ▶ 307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7) [22] 실탄 2005/04/1113Kb 698 ▶ 306-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6) [8] 실탄 2005/04/1014Kb 672 ▶ 305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5) [8] 실탄 2005/04/0912Kb 722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 3 [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1823 :: 315 - 부등호(7) 실탄(cruel) 05-04-19 :: :: 12115 시간이 멈춘 어둠 속에서, 예안은 언제까지고 웅크려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것도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미련의 사슬을 전부 벗었다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안 락함이나 마찬가지, 이대로 영원히 여기에 머무르고 싶었다. '그건 곤란해. 곧 그 사람이 다시 오고 있어.' 귀에 익은 음성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초점은 돌아오지 않 았다. '오다니? 누가 오는데?' '당연히 원래 여기 주인이었던 사람이지. 바깥 세상에 남은 미련을 전부 정리했나 봐. 빨리도 돌아오네.' '그럼 나 여기서 나가야 돼?' '암, 그렇고말고.' 비로소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개를 숙인 그녀는 비명처럼 외쳤다. '싫어! 그건 싫어! 난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아!' '안 돼. 안 돼. 안 돼. 집주인에게 집을 돌려줘야지. 안 그럼 나쁜 아 이야.' '나가고 싶지 않아! 나가고 싶지 않아!' 벌떡 일어난 예안은 머리를 움켜쥐고 무작정 내달았다. 어디를 가든 상관없었다. 가만히 멈춰있다가는 이곳에서 쫓겨날 것 같은 불안, 그 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그러나 곧 무언가에 부딪쳐 넘어졌다.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든 그녀 는 투명한 벽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반대쪽 세상을 비추는 거울의 표면이었다. 거울의 표면에 누군가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실루엣은 점점 커지고 뚜렷해지며, 이윽고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제이는 상냥하게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돌아왔어. 이제 다시 바꿔야지?' '싫어! 난 나가고 싶지 않아! 네가 말했잖아! 나 계속 여기에 있어도 된다고 그랬잖아!' '그런 적 없어. 네 대신 복수해주는 동안만 바꾸는 거라고 했지. 복수 가 끝났으니까 이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야 돼.'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아! 제이, 너도 여기서 영영 혼자 살고 싶은 건 아니잖아! 내가, 내가 여기서 살아줄게. 그러니까 바꾸지 마, 응?' '미안하지만 그건 곤란해, 공주님. 난 이미 20년도 더 전에 죽은 몸이 거든.' 눈을 감고 두 손을 펼친 제이는 거울을 돌렸다. 빙그르르 회전한 거 울은 두 사람의 위치를 바꿔놓았다. 제이는 다시 거울 안으로, 예안 은 다시 거울 밖으로. 제이는 어둠 속으로, 예안은 빛 속으로. 반항할 틈도 없이 어둠에서 쫓겨난 예안은 울부짖으며 거울 표면을 두드렸다. '들어가게 해줘! 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여기는 나 혼자 있기에도 비좁아. 그럼 잘 가렴.' 제이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제이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자 예안은 더 크게 울부짖었다. '제이! 제이! 너도 외롭잖아! 혼자만 있으면 외롭잖아! 내가 같이 있 어줄게! 나랑 같이 있으면 안 돼? 같이, 같이 있게 해줘! 제이! 제이! 제이이이!' 갑자기 제이가 걸음을 멈췄다. 울부짖는 예안을 천천히 돌아본 제이 는 위로 비슷하게 상냥한 미소를 띠었다. 진정한 고독이 무엇인지 알 고 있는, 그리고 그것을 덤덤히 받아들일 각오가 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따스한 표정이었다. '참, 앤드류를 잠깐 만났는데 굉장히 느낌이 좋은 사람 같더라. 어차 피 우리와 동등하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기는 해도, 마음만큼은 무 척 깨끗해 보여.' '제이!' '그러니까 너무 그 애 아프게 하지는 마. 강아지를 보듬듯 다독여주 는 정도는 할 수 있잖니?' '제이! 가지 마! 가지 마!' 빙긋 웃음을 띤 제이는 등을 돌렸다. 그녀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점 점 사라졌다. 여운이 가득한 마지막 음성만 남기고는. '슬퍼하지 마. 우린 또 만나게 될 거야.' 만약 네가 날 간절히 만나고 싶어한다면. 미약한 뒷부분은 끝내 예안 의 귀에까지 닿지 않았다. 빛이 조금씩 옅어졌다. 기둥이 점점 투명해졌다. 소멸의 흔적이 모두 사라짐과 동시에 제이는 눈을 감고 스르르 쓰러 졌다. 황급히 달려간 레이온이 그녀의 몸을 안아 무릎에 눕혔다. 그녀가 조 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유젤, 괜찮아? 정신이 들어?" 그녀는 눈꺼풀을 힘들게 깜박였다. 흐릿하게 보이는 남자의 얼굴, 많 이 본 사람처럼 무척 익숙하다. 정신을 차린 듯 그녀는 조금씩 입술을 달싹였다. "형…?" 제이가 아니구나. 레이온은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왠지 모를 서글픔을 느꼈다. 계속 살아갈 수 있음에도 스스로의 의지로 더 이상의 삶을 포기한 이브. 자신의 분신을 위해 생물로서의 기본적 욕구마저 억누른 여자. 그녀 에게는 어떤 경의를 취한다 해도 흡족하지 못하리라. 예안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다가 넘어졌다. 레이온이 다시 부축하려 했지만 거칠게 뿌리쳤다. 쉬지 않고 눈물이 흘렀다. 모든 미련을 정리한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던 제이, 그녀의 뒷모습이 눈앞이 아른거려 눈물 을 참을 수 없었다.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아이를 잃어버린 이 지 긋지긋한 현실 따위에. 소중한 것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 자기 자신 이 살아서 도대체 무엇한단 말인가. 차라리 그 어둠 속이 낫다. 그곳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하더라도 외 롭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곳에는 제이가 있다. 가족을 잃은 슬 픔 따위는 침투할 수 없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것도 슬퍼하지 않아 도 된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조차 그곳에서는 더 없는 기쁨이요, 시 간이 정지해 있다는 것조차 그곳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다. 그저 괴롭기만 한 현실, 살해당한 아버지의 시신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날카롭게 아이를 찌르던 부등호가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는 지옥. "아아… 아아…." 그녀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가슴이 미어 터질 것 같은 슬픔이 자꾸만 괴롭혔다. "가지 마! 가지 마! 제이!" 울음이 터지는 순간 강한 빛이 일어났다. 황금빛 섬광이 실내를 가득 히 채웠다. 그녀를 제외한 모두는 눈이 부셔 팔로 얼굴을 가렸다. 이윽고 빛이 소멸했다. 그들은 슬그머니 팔을 내렸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검은 그을음만이 남아있었을 뿐, 그녀는 없었다. "이브는 어떻게 된 거지?" 잔뜩 상기된 카뮤의 물음이었다. 넋을 잃고 멍하니 그녀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던 레이온은 고개를 천 천히 가로 저었다. "이브가 아닙니다. 그 애는 유젤이었어요." "엔젤이었단 말인가? 하여튼 어떻게 된 거냐니까!" "어딘가로 이동을 한 듯합니다. 아마도… 지구는 아니겠지요." 카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럼 혁명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알 바 아니지요. 당신들과 나는 이미 옛날에 갈라선 사이가 아 니었습니까?" "박사!!" 분노한 카뮤는 오른손을 그에게 뻗쳤다. 손바닥에서 빛의 창날이 방 출돼 순식간에 길어졌다. 날카로운 창끝이 레이온을 덮쳤다. 그러나 레이온은 움직이지 않았다. 창 끝이 그를 막 꿰뚫으려는 순간 빛의 벽이 형성되어 창을 막아냈다. 카뮤가 침착해진 얼굴로 공격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레이온은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어떻게 한 거지? 그대에게는 에날도스가 없을 텐데?" "나는 지구에서 제일 가는 과학자입니다. 대답이 됐겠지요." 더는 이곳에 미련이 없다는 듯 레이온은 등을 돌렸다. 카뮤는 말문을 닫은 채로 분함을 씹었다. 그를 대신해 시리우스가 등뒤에 말문을 던 졌다. "이제부터 뭘 할 생각이냐, 레이온?" "지금은 충격이 심해 지구를 떠났다 해도 곧 유젤은 돌아오게 될 겁 니다. 아니,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때를 위한 준비를 지금부 터 갖춰야지요. 저에게는 유젤의 몸에서 적출한 자이오 다이아몬드 2 개가 있습니다." 그 의미를 깨달은 수장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NM 프로젝트를 재현할 생각이냐! 하지만 불완전한 자이오 다이아 몬드로는 완전한 신인류가 될 수 없어!" "상관없습니다. 케이 또한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쓰지 않고 태어난 불 완전한 신인류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브와 열렬히 사랑할 수 있었지요. 그 정도만 되어도… 저는 만족합니다." "죽을지도 모른다." "죽음 따윈 이미 초월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저를 지켜보고 있으니, 설혹 죽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수장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헤라클레스라는 이름이 지니고 있는 무게는 그만큼 무거운 것이었다. "설마 헤라클레스가 못 다한 꿈을 대신 이뤄줄 생각이냐?" "제 조수의 소원입니다. 마침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2개나 있으니 그 소원을 들어줄 생각입니다. 소원이 성공으로 끝날지 실패로 끝날지 그것은 조수의 생명이 얼마만큼 무거운가에 달려있겠지요. 성공하면 이 지구에 영원한 유토피아가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이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레이온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틈으로 밝게 웃어 보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똑바로 걸어가는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미소였다. 허탈함을 참지 못한 시리우스는 등을 돌렸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카뮤는 그제야 물었다. "헤라클레스는 누구입니까? 못 다한 꿈이라는 것은 뭐죠?" "7년 전 죽은 사도의 간부이지. 녀석은 이상향을 지구에 재현함으로 써 후유증을 치료하고자 했어." "후유증이라면, 마더가 뮤 당신들에게 내렸다는 저주?" "그렇지. 인간의 사념파와 마더의 의지, 두 가지 원인이 후유증을 일 으킨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헤라클레스는 그 사념파를 제거하기 위해 모든 인간의 사고통로를 하나로 묶었지.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세계. 헤라클래스 는 실제로 '잠깐 동안' 그런 세상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재미있는 세상이 되겠군요. 하지만 그런 세상 따위가 오래 유지될 리 없습니다. 레이온의 조수라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나 허황된 꿈 을 꾸고 있군요." 카뮤는 피식피식 웃으며 등을 돌렸다. 검은 망토가 소리 없이 허공에 휘날렸다. "누가 무슨 짓을 꾸미든 간에, 이제부터 이 행성은 아틀란티스와 뮤 가 영원히 지배하게 될 겁니다. 그것은 변하지 않아요." "엄마가, 엄마가 잘못했어. 유빈아…. 미안해요, 미안해, 아빠…. 용서 해 줘 제발…. 흐윽…."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얼마나 그렇게 흐느꼈는지 모른다. 언제까 지 이렇게 울어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이를 잃고, 자신과 하나나 다름없는 분신이 영 원한 고독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진정한 의미의 혼자가 돼버렸다. 더없이 못난 자기 자신을 확인했다. 살 의욕이 나질 않았다. 이대로 심장이 멎어버렸으면 했다. 「울지 마십시오.」 익숙한 기계임이 들렸다. 그녀는 눈물 젖은 얼굴을 들었다. 복잡한 계기판과 스크린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여기는 맥의 조종석이었다. 한동안 의식이 없었던 것 같은데 언제 맥 을 불러서 탄 모양이었다. 그녀는 멍하니 외부 스크린을 응시했다. 새카만 우주가 눈앞에 펼쳐 져 있었다. 저 멀리 푸른 지구가 보였다. 당연하지만 달은 없었다. 이곳은 우주 한가운데였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한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변함 없이 그 자리에서 행성들을 비춰주는 태양. 황금빛 오오라는 태고적부터 그러했듯이 고 고하기만 하다. 지구는 계속 태양 주변을 돌았다. 지구가 움직이는 것을 통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라이플 포로 지구를 날려버리려 했다. 지구가 없어지면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모른 채 이 대로 영원히 머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그만 포기했다. 아버지와 아 이와의 행복한 추억이 남아있는 저곳, 좋아하던 친구와 엄마가 살아 있는 저곳을 어떻게 내 손으로 날릴 수 있단 말인가. 「지구로 돌아가지 않으실 건가요?」 "안 가. 난 다시는 지구를 밟지 않을 거야." 눈물 젖은 얼굴로 멍하니 지구를 바라보던 그녀는 스크린을 꺼버렸 다. 더 이상 보았다가는 미련도 슬픔도 증오도 모조리 뒤엉켜 버려 더 이상 내가 나일 수 없을 것 같았다. 몇 일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몇 달의 시간이 그렇게 하염없이 흘러갔는지 모른다. 우주 한가운데에서 외부와의 교류를 일절 차단한 채 그녀는 스스로를 내면에 폐쇄시켰다. 가끔 맥이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대답이 없었다.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다.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입을 막 았다.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킴으로써 슬픔을 견디려 했다. 「눈을 떠 보십시오.」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맥은 다시 한 번 재촉했다. 「유젤님. 눈을 떠보십시오. 딱 한 번만 눈을 떠보십시오.」 기계같지 않은, 몹시 간절한 어조였다. 오랫동안 닫혀있던 그녀의 눈 이 스르르 떠졌다. 기계처럼 건조한 동작으로 맥이 보여주는 화면을 바라본 그녀의 눈 썹이 위로 치켜졌다. 시리도록 푸른 거대한 땅덩어리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적빛 오로 라가 거대한 대지를 보호하듯 크게 감싼 채 대류한다. 태고의 아름다운 지구를 보는 듯 황홀한 광경. 그녀는 멎어버린 줄 알았던 심장이 다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혹성을 둘러싼 푸른 실루엣이 호흡하는 소리가 장엄하게 울렸다. 「에덴 혹성입니다.」 by eden 연재를 시작한지 일 년 반 남짓 흘러서야 겨우 오리지널 유젤이 등 장할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아담의 상처와는 유서운 성격이 많이 달라졌어요. 슬슬 끝이 보이기 시작하는 분들도 상당수 되실 거라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보다 많은 분들이 만족할 수 있는 괜찮은 엔딩을 만들기 위해서 요새 하루에 잠도 4시간 밖에 안 자고 고심하고 있습니다. (정말?) 예고.1 다음 챕터에서는 대량 몰살이 이루어집니다.(쿨럭;) 예고.2 일 년도 전에 언급했던 맥의 환골탈태가 이루어질 날도 드디어 멀지 않았습니다. 예고.3 주인공이 곧 므흣한 의미에서의 성인이 됩니다. 하지만 실탄은 너무 순진해서 어떻게 침대씬을 연출해야 할지 지금 갈 팡질팡하고 있어요. 고치기 지우기 목록 셜이움 믿겨지지 않습니다.(예고3이...타앙~) 쿨럭... 몰살이라니요... 혹시 지구가 멸망하기라도? 여하튼 잘 보고 갑니다~ 2005/04/19 안녕히 배드씬!!!! 기대... 기대.... 꿀꺽. 퍽! 2005/04/19 군발이230 기대 .......운 좋으면 입대하기 전에 소엄 완결 볼지도 .. 2005/04/19 gforce 순진하다니...아상에서의 실탄님을 기억하고 있거늘. 2005/04/19 ... 와 케이다 케이 ^^ 넘 존경스러 2005/04/19 영 배드씬이라는 누구랑? 그리고 몰살은 쩝... 2005/04/19 라티엠 누..누구와 배드씬? 혹시 거기서 딸이..?(다른 아이가..?) 2005/04/19 루리에르피나 드워 작가 분중 한분한테 부탁드리세요 김씨님 같은 분명히 멋지게(퍽!) 2005/04/19 Jin 배드씬의 영광된 주인공 자리는 누구? 앤드류에 한표... 대량 몰살에는 에덴 혹성 사람들도 포함에 한표.. 에덴 혹성을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보는군요!! 2005/04/19 린(燐) 저도 앤드류................예안을 생각하는 마음이 제일 깨끗한 것 같아요-_-; 2005/04/19 텐시노 아 시험기간 ㅠ 2005/04/19 꼬마코린 ...앤드류라...앤드류면 괜찮을것도 같지만 역시 레이온이 아닐지?;;; 으음,그리고 대량몰살이라...설마 에덴혹성까지;;; 2005/04/19 섬마을김씨 요호~~~~~~배드씬!!!! 2005/04/19 Jin 쓸데없는 말이긴 하지만;; 맥이 원래 예안을 유젤이라고 불렀나요? 유젤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맥과 예안이 협의(?) 본 걸로 알고있는데;; 2005/04/20 gram 그런데 질문 하나. 아.상에서 봤을 때는 원래 제이에게 ESP능력이 없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여기서는 ESP능력을 쓰는거죠? 육체도 원래 제이의 육체인데 제이는 처음부터 쓰던 것 처럼 자연스럽게 쓰던데요 2005/04/20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3/18 페이지 ▶ 319 - 낙원(4) [24] 실탄 2005/04/2215Kb 883 ▶ 318 - 낙원(3) [14] 실탄 2005/04/2122Kb 832 ▶ 317 - 낙원(2) [11] 실탄 2005/04/2012Kb 786 ▶ 316 - 낙원(1) [8] 실탄 2005/04/2014Kb 734 ▷ 315 - 부등호(7) [15] 실탄 2005/04/1912Kb 787 ▶ 314 - 부등호(6) [12] 실탄 2005/04/1814Kb 706 ▶ 313 - 부등호(5) [15] 실탄 2005/04/1713Kb 776 ▶ 312 - 부등호(4) [13] 실탄 2005/04/1614Kb 742 ▶ 311 - 부등호(3) [12] 실탄 2005/04/1521Kb 712 ▶ 310 - 부등호(2) [11] 실탄 2005/04/1412Kb 643 ▶ 309 - 부등호(1) [10] 실탄 2005/04/1313Kb 692 ▶ 308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8) [7] 실탄 2005/04/1212Kb 677 ▶ 307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7) [22] 실탄 2005/04/1113Kb 698 ▶ 306-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6) [8] 실탄 2005/04/1014Kb 672 ▶ 305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5) [8] 실탄 2005/04/0912Kb 722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 3 [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1901 :: 316 - 낙원(1) 실탄(cruel) 05-04-20 :: :: 13957 닥터는 회사를 통해 세계 여러 나라와 갖가지 기술 제휴를 맺고 있 었다. 정부의 눈치가 있어 자국에 치명적인 수준의 계약은 없었지만, 하나같이 고부가치를 주도하는 건수뿐이었다. 닥터의 실종과 수배령 때문에 손해를 보게 된 기업들은 한국 정부에 그 책임을 돌렸다. 그들은 합심해서 갖가지 방법으로 한국에 경제적 보복을 가하려 했다. 미국이나 일본 등 한국을 견제하는 강대국의 입 김도 경제적 보복 행위 유발에 한몫 했다. 대통령이 자살하고 국회의장이 사퇴하고 총리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 는 등 한국 정계는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이 틈을 타 주변국에서 한 국을 경제적 식민지로 종속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 가 일어났다. 그러나 새로이 의장직에 오른 석창렬 의원은 과감하게 가진 정상회 담에서 유리한 입장을 따내는데 성공해 국력 안정에 힘을 보탰다. 그 의 설득에 넘어간 각국 정상은 경제적 보복 행위를 철회하기로 약속 을 해주었고, 나라의 혼란은 일단락 되는 듯 보였다. 허나 석창렬의 노력 뒤에 아틀란티스의 입김이 닿아있다는 사실은 그를 제외하고 아무도 알지 못했다. 전용기에서 내리며 웃음띤 얼굴로 국민들에게 손을 흔드는 석창렬의 모습을 노려보던 김두오는 채널을 돌렸다. "그 애의 행방은?" 쉰 듯한 아버지의 음성이 안타까웠지만 중현은 내색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아직 못 찾았습니다." "허허, 나라가 어지러운 이 판국에 도대체 어디에…. 하기야 가족을 모두 잃었다고 했으니 제정신일 리가 없지만…." 김두오는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뭘 모르는 국민들은 잘 되었다고 좋아하고 있지만 그가 보기에는 엉망진창이었다. 맥과 유전은 나라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그 빌어먹을 녀석이 주장하 고 나왔을 때부터 알아봐야 했다. 당수도 아닌 의원 한 명이 설마 일 을 저지르겠느냐고 안일하게 여겼던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결국 모든 것은 석창렬의 뜻대로 되었다. 자신은 의장직에서 사퇴했 으며, 그 자리를 녀석이 대신 차지했다. 닥터의 모든 재산은 압류되 었으며 맥과 유전은 나라의 소유가 되었다. 현 대통령이 자살했으니 머지않아 총선이 있을 것이고, 정상회담을 한국에 유리하게 이끌어낸 석창렬은 압도적인 지지로 다음 대통령이 될 것이다. 그러나 김두오는 절대 대통령이 자살했다고 믿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동고동락하며 지내온 친구이다. 결코 자살 따위를 할 심약 한 녀석도, 자살을 할 만한 실수를 할 녀석도 아니다. 분명히 살해당한 게 틀림없으리라. 하지만 지금 시국에서 석창렬에게 불리한 발언을 해봐야 덤태기로 뒤집어쓸 것은 뻔했다. 엉망진창으로 흘러간다는 빤히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 실이 그는 너무 분했다. 화기를 참지 못하고 그만 탁자를 주먹으로 꽝 내리쳤다. 스스로가 한심해 한숨짓고 있을 때 속보가 흘러나왔다. 「속보입니다. 1시간 전 맥이 전기공급을 중단한 채 발전소 시설을 부수고 탈출했습니다. 곧바로 비상발전장치가 가동되었으나 전국적인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한동안 전국 일부 지역이 대대적인 정전사태 를 맞기도 했습니다.」 김두오는 리모컨을 들다 말고 그대로 경직되었다. 기자는 다급한 얼 굴로 계속 말했다. 「정부는 맥이 누군가에게 탈취된 것이 결코 아님을 강조했으며, 자 체 시스템에 따라 시설물을 부수고 탈출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아 울러 닥터를 옹호하던 소수세력은 닥터가 한국에 실망했기 때문에 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원격조종으로 맥을 빼돌린 게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등 혼란을 빚고 있습니다.」 칼은 TV를 껐다. 그리고 레이온을 돌아보았다. "한국은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을 했습니다." "유젤의 가치를 몰랐던 건 아닐 거야. 너무 대단하기 때문에 포용할 수 있을까 지레 겁을 먹고 밀어냈던 거겠지." "그런가요. 인간은 참 어리석은 동물이군요." "우리도 인간이야. 그것을 잊으면 곤란해, 칼." "인간…." 길지 않은 그 단어가 얼마나 중후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를 생각하 며, 칼은 쓰게 피식거렸다. "맥은 우주로 나갔지요?" "어떻게 알았지? 우리가 쓰는 레이더라 해도 맥을 잡아낼 수는 없을 텐데." "왠지 그럴 것 같았습니다. 유젤님은 그토록 험한 일을 당하셨으니… 지구가 싫어지지 않을까 하고요." "그것은 자네 기분을 그대로 옮긴 건가?" 칼은 침묵으로 긍정을 표시했다. 몸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온은 옷걸이에 걸쳐놓은 가운을 집 어 걸쳤다. 칼은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레이온의 걸음이 빨라졌다. 칼은 조바심을 내지 않고 그를 따랐다. 지루한 복도가 끊어지자 육중한 철문이 나타났다. 레이온은 홍채와 지문 정보를 입력하고 암호를 눌렀다. 인증이 끝나자 기이잉 소리와 함께 문이 옆으로 넘어갔다. 동시에 뜨거운 기운이 숨막힐 듯 밀어닥쳤다. 문 너머에는 넓은 광장 같은 공간이 자리잡고 있었다. 돔형으로 생긴 공간 한가운데에는 바 닥에서 천장까지 닿아있는 거대한 캡슐이 있었다. 캡슐은 고목의 뿌리처럼 하단이 복잡한 기기로 얽혀 있었다. 캡슐 안 에 채워진 액체에는 두 개의 보석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칼은 감격한 눈으로 보석을 올려다보았다. 영롱하게 빛나는 색채가 무척 아름다웠다. "자이오 다이아몬드의 숙성이 끝났다, 칼." "그럼…?" "그래. 이제 자네의 꿈을 이룰 차례야." 감격했다는 듯 보석을 바라보던 칼은 레이온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 를 조아렸다. 다소 지나쳐 보이지만,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최대한의 감사를 표하는 것이다. "당장 프로젝트 시행 준비해라." 칼은 지금은 이르지 않느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기다려왔 던 일이 바야흐로 이제야 이루어지려는 참이다. 서두른다고 해서 결 코 이른 게 아니다. 기지를 제어하는 중앙 컴퓨터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명유지 캡슐에서 수면 상태였던 키메라들이 일제히 깨어났다. 모든 키메라는 <제단>의 앞으로 모였다. 재단은 기괴하게 생긴 기계와 사람이 누울 수 있는 단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장치였다. 높이가 5미터에 달하는 원통형의 기계 중심에는 사각형의 금이 새겨져 있었다. 저 뚜껑을 넣고 안에 무언가를 넣는 구조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칼은 경건한 몸가짐으로 재단 앞에 섰다. 레이온은 한쪽 구석에서 팔짱을 낀 채 우두커니 서서 구경했다. 수많은 키메라 들이 알몸으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빼곡이 서 있었다. 착잡한 빛을 지우지 못하던 레이온은 등뒤에 설치된 단말기를 조작 해 인공위성을 제어했다. 지구를 둘러싼 43대의 인공위성이 전송해온 화면이 일제히 커다란 벽면에 떠올랐다. 이제 그는 지구 전 지역을 한눈에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아늑한 느낌의 푸른 지구 모습을 바라보던 레이온은 문득 옛 추억의 향수에 잠겼다. 「성공이야! 성공이라고!」 죽은 옛 친구의 음성이 귓가를 맴돌았다. 헤라클레스를 비웃었던 자 신은 지금 헤라클레스와 똑같은 행위를 칼에게 강요하고 있다. 기둥에 비스듬하게 몸을 기댄 레이온은 눈을 감고 읊조렸다. "칼. 내가 내 친구 이야기를 했던가?" "헤라클레스 말씀이십니까? 자주 하셨지요." "그때 나는 녀석을 비웃었어. 네가 하는 일이 절대로 성공할 리가 없 다고, 왜 그런 무의미한 일에 네 목숨을 바치는 거냐고 비웃었지." 칼은 손을 멈추고 우두커니 레이온을 주시했다. 독백 같은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녀석과 나, 그리고 프로메테우스는 친구였어. 우리 셋은 목적이 같 았지. 바로 후유증을 없애는 거." "후유증이요?" "그러고 보니 후유증에 관해서는 자세히 이야기를 안 했군. 후유증은 기형유전자질환이었는데, 단명하거나 미쳐버리거나 성적 불구가 되거 나 하여튼 여러 가지 증상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걸 말해. 세계를 다스리는 천재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던 사도 간부들에게는 죽음 이상으로 비참한 병이었지." 잠시 그 고통을 상상해본 칼은 숙연한 표정을 띠었다. 형식 없는 묵 념으로 극악의 고통을 견뎠던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후유증의 원인 중 하나는 인간의 사념파였지.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 진 감정은 타인에 대한 열등감이고, 존경이나 사랑, 우정 등 기타 등 등의 모든 감정은 그것을 원천으로 출발해 변형된 것이라는 이론이 있었어." 사념파를 제거하기보다는 사념파의 영향권에서 멀어지는 길을 택했 던 최초의 신인류, 아담을 떠올리며 레이온은 가슴이 무거워지는 느 낌을 겪었다. "헤라클레스는 그 이론이 맞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인간들의 열등감 을 제거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지. 바로 인간의 사고 소통로를 완전 개방하는 것이었어. 지금의 자네처럼." "알고 있습니다. 박사님이 제 모습에서 친구를 투영해보고 있다는 것 도요." "그렇다면 더 말 안 해도 쉽겠군. 나는 자네가 꼭 성공하길 빌어." 친구는 실패했으니까, 라고 덧붙이는 것은 삼갔다. 불완전하기는 해 도 칼은 자이오 다이아몬드까지 가지고 있다. 그 거룩한 신의 원석 없이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했던 친구와는 다르다. 지금 칼에게 어울리는 것은 격려이지 우려가 아니다. 그때와 지금은 크게 다르다. 칼은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밑으로 내렸다. 닫혀있던 판이 열리며 정 교한 컴퓨터가 새롭게 드러났다. "박사님. 전 죽게 되겠지요?" 레이온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칼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아무렇 지도 않다는 듯 덧붙였다.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에 대한 도전, 성공으로 끝나든 실패로 그 치든 간에 그 선구자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겠지요." "자네는… 죽음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군." "종종 박사님 친구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친구분은 어떻게 해서 신에게 자기 생명의 무게를 증명했을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오랫동 안 답을 찾을 수 없었지만 얼마 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칼은 가운을 벗고 재단에 누웠다. 기괴하게 생긴 수많은 로봇팔들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그에게 접근했다. "실은 저는 처음부터 답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단지 그것이 두려웠 기 때문에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죠. 전 저 자신의 그런 나약한 도피 심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 하나를 희생해서 다시는 저 같이 슬퍼 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갱들에게 희생당한 딸과 아내를 생각하며 그는 눈물을 삼켰다. 이 작업이 끝난 뒤 살아남지 못한다는 거,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제 는 아무 두려움도 없이 그저 홀가분하기만 하다. 실패로 그치든 성공 으로 끝나든 간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 극렬한 신념을 품고 오랜 시간을 같이 한 조수의 마지막이 될지 모 르는 순간이다. 그러나 레이온의 눈빛은 동요 없이 잔잔했다. 정교하고 복잡한 수술이 시작되었다. 로봇팔은 칼의 오른팔을 절단하 여 떼어낸 뒤 인공 기계팔을 그 자리에 갖다 붙였다. 근육섬유를 제 거하고, 신경을 잇는 대수술이었다. 수술이 성공하면 칼은 예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오른팔을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아니, 예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까지 가능하게 된다. 키메라들은 조금의 미동도 않은 채 수술이 이루어지는 재단을 물끄 러미 바라보았다. 엄숙하게까지 느껴지는 분위기 속에서 레이온은 자신의 과거를 되돌 아보았다. 유젤을 복제하려 했지만 무수한 실패작만 남긴 채 쓴맛을 봐야 했던 고통의 순간들. 본체에 제일 근접했던 복제체에 차라리 안주할까 생 각도 해보았던 체념의 시간들. 그러나 모든 시련을 딛고 결국 여기까지 왔다. 유젤은 이제 곧 완벽 한 유젤이 되어 자신만을 사랑해줄 것이다. 그녀의 사랑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단 열흘만 살다가 죽어도 좋다. 그런 각오도 없었다면 진작 프로메테우스처럼 세계균형유지 기구 따 위나 하나 만들어 온갖 사치를 누리고 사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세 시간에 걸친 수술은 드디어 끝이 났다. 마취가 풀리며 칼이 잠에 서 깨어났다. 칼의 앞에 선 레이온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모든 것을 버리 면서까지 이상을 이루고자 하는 위대하고도 나약한 남자에게 표할 수 있는 최대의 경의였다. "박사님, 그것을…." 칼이 지친 음성으로 말했다. 레이온은 알았다는 듯 끄덕이고는 캡슐 앞으로 다가갔다. 붉은 버튼을 누르자 캡슐 안을 가득 채운 용액의 수위가 낮아지기 시작했다. 용액이 완전히 빠지자 레이온은 유리벽을 치우고 안에 있 던 두 개의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꺼냈다. 다시 칼에게 돌아온 레이온은 한 개의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그에게 주었다. 황송하다는 듯 공손히 받아든 칼은 기계의 뚜껑을 열고 그 안에 집어넣었다. 자이오 다이아몬드와 융합한 기계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맹렬히 가동 하기 시작했다. 기계의 가장 윗부분에 장착된 돌 부분이 눈부시게 빛 나기 시작했다. 모든 키메라는 그 빛에 공명했다. 빛은 뱀처럼 실내를 꿈틀거리며 키 메라들에게 속삭였다. 너희들의 생명, 나에게 달라고. 하나둘씩 키메라들이 쓰러졌다. 생명의 기운이 키메라의 입에서 빠져 나와 빛에 흡수되었다. 키메라의 생명을 전부 거둔 빛은 기계의 돌을 거쳐 다시 자이오 다이아몬드로 되돌아왔다. 자이오 다이아몬드는 조 금 전보다 더욱 영롱하고 밝은 빛을 내뿜었다. 시리도록 푸른 빛에 가까운 자이오 다이아몬드. 감격한 눈으로 바라 보던 칼은 대답을 촉구하는 눈으로 레이온을 응시했다. "완전한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가진 능력의 99.999%까지 낼 수 있게 되었다. 칼, 자네는 성공했어." "성공… 입니까?" 신의 전지전능함에 가장 가까운 위대함이 지금 이 손에 있다. 칼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로 감격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시작하겠습니다, 박사님. 잔인할 수도 있으니 눈을 돌리시지요." "괜찮아. 자네는 홀로 신의 전능함에 도전하려는 남자야. 자네의 마 지막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눈을 돌린대서야 말이 안 되지." 칼은 수술대 앞에서 일어나 자이오 다이아몬드 앞에 섰다. 그의 마음 을 집어삼키고 싶다는 듯 자이오 다이아몬드는 끊임없이 빛났다. 등을 돌린 채로 칼은 덤덤히 말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니야." "정말 감사했습니다. 지금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은 그만 둬. 행운을 비네, 칼." "네. 박사님도요." 칼의 기계팔이 허공으로 들렸다. 관절이 꺾여지며 손끝이 원을 그리 는 광경은 엄숙 그 자체였다. 레이온은 눈꺼풀을 깜박이지도 않고 칼 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기계팔의 손가락이 칼의 가슴에 닿았다. 손가락 관절에서 기괴한 소 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손끝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크윽…." 비릿한 핏줄기가 칼의 입에서 흘렀다. 턱을 타고 흘러내린 피는 가슴 에서 새어나온 선혈과 합류해 하나가 되었다. 손가락은 점점 가슴을 파고들었다. 근육막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우드득 하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칼의 얼굴에 식은땀이 송 글송글 맺혔다. 고통을 참지 못한 왼팔이 기계팔을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기계팔은 아랑곳하지 않고 점점 가슴을 파고들었다. 푸욱 하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분수처럼 피가 철철 흐르는 가슴 안에서 기계팔이 빠져나왔다. 딱딱 한 손가락 관절은 피투성이의 뜨거운 심장을 움켜쥐고 있었다. 체외 로 적출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은 여전히 뛰었다. 인공심폐가 급히 작동해 칼의 혈액을 순환시켰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생명을 잠시 연장하기 위한 임시방편, 계획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끝 에 도달하면 칼은 죽게 될 것이다. 심장은 자이오 다이아몬드에 바쳐졌다.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빛이 심장을 집어삼켰다. 바람이 흩어지는 소리와 함께 심장은 눈 깜 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자이오 다이아몬드에 먹힌 것이다. 칼의 심장을 흡수한 자이오 다이아몬드는 곧 스스로가 심장이 되어 박동을 시작했다. 딱딱한 보석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박동하는 것은 실로 기괴했다. "자이오 다이아몬드는 자네의 염원을 흡수해 생명체가 되었다." 레이온은 덤덤히 말을 이었다. "이제 곧 마더가 자네의 염원에 대답해줄 것이다." by eden 흐응...레이온이 그렇게 나쁜 놈인가요? 저는 불쌍하다고 생각하는데..쿨럭; 고치기 지우기 목록 안녕히 묘사가 너무 정교해서 자꾸 생각이 나요... 일타네요...^^ 2005/04/20 군발이230 건필 제가 느끼는 것보다 조회수가 적네요,;; 아삼때부터 계속 봐왔는데 정말 완성도 높은, 환타지를 뛰어넘은 수작입니다, 2005/04/20 영 레이온이 뭐가 불쌍 합니까!!!라고 생각하는데...저만 그런가요? 2005/04/20 유진 불쌍한건 지 나름이고, 그래도 못됀건 사실.. 불쌍한 악역도 악역이다! -_-; 2005/04/20 七夜 靑い 불쌍하다해도 왠지 열받는다는 ㅡㅡ; 2005/04/20 음 -_- 제가 좋아하는 소엄.. -_-;; 오늘 실수로... 제목을 실탄이여 엄마가 되라 (소년) 으로 봤다는 쩝~ 썰렁하죠 ㅎㅎ;; 2005/04/20 루리에르피나 배드씬은은은~~~~~~ 2005/04/20 꼬마코린 ㅋ 2005/04/20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3/18 페이지 ▶ 319 - 낙원(4) [24] 실탄 2005/04/2215Kb 883 ▶ 318 - 낙원(3) [14] 실탄 2005/04/2122Kb 832 ▶ 317 - 낙원(2) [11] 실탄 2005/04/2012Kb 786 ▷ 316 - 낙원(1) [8] 실탄 2005/04/2014Kb 736 ▶ 315 - 부등호(7) [15] 실탄 2005/04/1912Kb 787 ▶ 314 - 부등호(6) [12] 실탄 2005/04/1814Kb 706 ▶ 313 - 부등호(5) [15] 실탄 2005/04/1713Kb 776 ▶ 312 - 부등호(4) [13] 실탄 2005/04/1614Kb 742 ▶ 311 - 부등호(3) [12] 실탄 2005/04/1521Kb 712 ▶ 310 - 부등호(2) [11] 실탄 2005/04/1412Kb 643 ▶ 309 - 부등호(1) [10] 실탄 2005/04/1313Kb 692 ▶ 308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8) [7] 실탄 2005/04/1212Kb 677 ▶ 307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7) [22] 실탄 2005/04/1113Kb 698 ▶ 306-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6) [8] 실탄 2005/04/1014Kb 672 ▶ 305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5) [8] 실탄 2005/04/0912Kb 722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2] 3 [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1922 :: 317 - 낙원(2) 실탄(cruel) 05-04-20 :: :: 11771 넓고 푸른 초원에 전투기 형태를 한 맥이 사뿐히 내렸다. 거대한 기 체가 일으키는 바람은 풀숲을 땅에 닿을 듯 쓰러뜨렸다.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던 초식동물들은 귀를 쫑긋 세우며 경계했다. 그러나 눈앞의 커다란 물체가 더 이상 위협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 자 곧 경계를 풀고 초원을 뛰어다녔다. 이곳의 동물은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간이 어째서 두려운지를 알지 못한다. 이윽고 콕피트가 열렸다. 초원에 내린 예안은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 러보았다. 평화로운 지평선이 세상 끝에서 끝까지 놓여 있다. 지평선 위쪽에 걸 린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태양이 저물고 있다. 더할 나위 없는,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이 저항 없이 녹아버릴 아름다 운 광경이었다. 낙원이라는 단어는 아마도 이런 곳을 수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리라. 저무는 태양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던 예안은 얼마 걷지 못하 고 초원에 쓰러지듯 누웠다. 보드라운 풀잎이 그녀의 좁은 어깨와 등 을 저항 없이 받아주었다. 멀리서 새들이 재잘거리며 날아와 하나둘씩 그녀의 주변에 앉았다. 누운 채로 고개를 돌린 그녀는 새의 머리를 무심코 쓰다듬었다. 새는 전혀 도망가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사람의 손길을 즐기는 고양 이처럼 부리를 내리고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부리로 손을 쪼는 느낌이 간지러워 그녀는 키득거렸다. 이상하게 지구에서 겪었던 슬픔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맑은 물 로 머리 속을 깨끗이 씻어버린 기분이었다. 이런 곳에서 산다면, 영원히 행복할 수 있을까. 큰 대 자로 누운 채 눈을 감았다. 전신을 감싸는 아늑함이 그저 포근 하기만 했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꿈에 취한 사람처 럼 몸을 일으키지도, 눈을 떠보지도 않았다. 부드러운 손이 뺨을 감싼다. 달콤하면서도 그윽한 향기를 지닌 여자 의 손이었다. 그제야 예안은 눈을 떴다. 누운 채로 자신을 깨운 사람을 말없이 올 려다보았다. "안녕." 소녀 같은 여자가 생긋 밝게 미소짓는다. 길게 찰랑이는 푸른 머리카 락과 눈처럼 깨끗한 피부를 지닌,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느낌의 아 름다운 여자였다. 예안은 여전히 누운 채로 입을 열었다. "유…젤?" "응. 내 이름은 유젤이라고 해. 네 이름은… 그러니까 지구에서 쓰는 네 이름은 서예안이라고 했던가? 만나서 반가워. 언젠가 네가 여기에 찾아올 줄 알았어." 이 사람이 오리지널 유젤. 모든 번뇌를 잊고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아 가는 사람. 한 번쯤 만나보고 싶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하고 싶은 이야 기가 많았기 때문에 만나보고 싶어했고, 이곳에 영영 가둬두는 게 아 닌가 두려웠기 때문에 만나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얼굴을 대면한 순간, 하고 싶었던 말도 까닭 없는 두려 움도 모조리 잊어버렸다. 거울을 처음 보는 어린아이처럼 신기하다는 듯 갸웃거리며 그녀를 들여다보았을 뿐이다. 여자는 밝게 미소지으며 예안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날 따라와. 멋진 걸 보여줄게." 뭐라 입을 열려는 찰나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푸른 초원은 온데간데 없고 시퍼런 바다가 발 밑에 넓게 퍼져있었다. 바다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어 깜짝 놀란 예안은 허공에서 허우적 거렸다. 여자가 재빨리 잡아주며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떨어지지 않으니까 안심해. 이 별은 절대 우리를 죽이지 않아." 행성의 수호를 받는다는 뜻일까. 여자는 손가락을 딱 소리나게 튕겼다. 금새 투명한 빛이 생겨나 구슬 처럼 그들을 감쌌다. 그들을 감싼 구슬은 천천히 밑으로 하강했다. 출렁거리는 물살이 머 리 위로 점점 올라가는 것을 예안은 신기한 눈으로 구경했다. 멋진 바닷속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름 모를 신기한 물고기들이 빠르게 주변을 오고갔다. 저만치 아래에 깔린 산호들이 똑똑히 보일 정도로 물은 투명하고 깨끗했다. 예안은 말문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그 풍경을 정신 없이 구경했다. "예쁘다." "그치? 케이하고 가끔씩 다툴 때마다 혼자 여기 오곤 하는데, 마음이 무척 편해져. 케이가 날 찾다 지쳐서 몹시 걱정할 때까지 여기 숨어 있다가 나가는 거야. 얼마나 재미있는데." 여자는 까르르 웃었다. 그렇게 보니 정말 소녀 같았다. "다른 데도 가보자." 여자는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그들을 감싼 바다 풍경은 없어지고,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산이 발 아래 나타났다. "꼭 히말라야에 온 것 같아." "하지만 그것과 똑같이 생기지는 않았어. 지구와 똑같은 별이라고는 하지만 지형이나 대륙 같은 것은 지구와는 다르거든." "아쉽네. 하와이나 괌에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그 정도는 지구에서도 충분히 갈 수 있잖아? 그리고 그것 말고 여 기에서도 얼마든지 놀 곳은 많아." 손가락을 튕기자 또다시 그들은 이동했다. 이번에는 새하얀 백사장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어져 있는 해변이었다. 갈매기가 끼룩거리고 투명한 파도가 간헐적으로 밀려온다. 잘게 부서 진 햇빛이 깨알같은 모래알 위로 내려앉는다. 정신 없이 해변을 구경하던 예안은 갑자기 뒤에서 밀치는 손길에 물 에 빠졌다. 옷이 흠뻑 젖은 예안은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여자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같이 물에 뛰어들었다. 그녀가 물을 튕기 기 시작하자 예안은 곧 찡그린 표정을 풀고 같이 물을 퍼부었다. 두 사람은 깔깔거리며 서로에게 물을 끼얹었다. 한참 후 흠뻑 젖은 두 사람은 암묵적으로 그만하기로 합의하고 모래 사장으로 기어 나왔다. 발을 끌다시피 나온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모래알갱이 위에 드러누웠다. "여기는 평화롭네." "그렇지?" "나도 여기서 살고 싶어. 살아도 돼?" "글쎄. 진심으로 바란다면 그럴 수 있을 거야." 여자는 뜻 모를 대답을 했다. "나 지구에 가고 싶지 않아. 여기서 살 거야." "원한다면 그렇게 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모래사장에 길게 발자국을 남기며 숲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았지만 예안은 불안하지 않았다. 조금 후에 여자는 다시 찾아 올 것이다. 이곳에는 누구도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다. 햇빛이 따사로워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나른한 봄의 기운이 머리카 락을 간질였다. 이대로 시간이 멈춘다면 행복할까. 누군가 뺨을 만지는 게 느껴져 그녀는 히죽 웃었다. 돌아왔나 보다. "제이, 여기 있었구나." 낯선 남자 목소리에 예안은 놀라서 눈을 떴다. 처음 보는 청년이 내 려다보며 싱긋 웃음을 띠었다. "한참 찾았잖아. 어디 가면 간다고 말을 해야지." "다, 당신은 누구…?" 엉겁결에 그렇게 물었지만 쓸데없는 짓이다. 이곳에서 오리지널 유젤 을 찾을 청년은 단 한 명 뿐이다. "케이?" 그녀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케이는 왜 그러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어디 몸이라도 아파?" "아, 아니요…." 머리 속이 하얗게 된 예안은 아무 말도 못하고 머뭇거렸다. 냉정히 보면 그는 신인류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남자. 자신과 아무 상관없으 면서도 동시에 뗄 수 없는 밀접한 유착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갑자기 그가 덥석 껴안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떼어내려 했지 만 굳어버린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낯선 남자에게 안긴 수줍은 소녀처럼 얼굴이 빨개진 예안은 모기 소 리 만한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저, 저기요…." "응? 새삼스레 말투가 왜 그래?" "이, 이것 좀 놓아주시면…." 케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그의 손은 조금도 망 설임 없이 능숙하게 물에 젖은 셔츠를 벗겨냈다. 아기처럼 그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저항도 못하고 뒤로 넘 어진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남자의 공세에 이렇듯 허물없 이 무너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가 목줄기에 키스하는 게 느껴졌다. 남자같지 않게 촉촉하고 부드 러운 입술이다. 희미하게 사과 젤리 같은 향이 풍겼다. 미미하게 떨 리던 두 팔은 반항을 포기하고 축 늘어졌다. 오랜 그리움을 담고,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 몸은 기억하는 것이다. 옛 연인의 손길을. 척박한 사도에서 둘이 끌어안고 외부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던 나날 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은 사라졌을지언정, 그와 그녀의 몸은 서로를 알아보고 보듬어주는 것이다. "케이. 그 사람은 손님이에요." 붉은 기가 감도는 입술에 막 키스하려던 그는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밑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여자와 못마땅하다는 듯 자신을 노려보 는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는 긁적거리며 일어났다. "왜 제이가 한 명 더 있는 거야?" "어쩌다가 나랑 심하게 닮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내가 이 별에 초대 했어요. 당신 여자는 그 사람이 아니라 나라고요." "아아, 미안해." 몰랐다고는 해도 외도를 피우려다가 발각된 남자 같지 않게 표정이 무척 밝다. 그가 강하게 껴안자 여자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표정을 풀고 피식거렸다. 상반신을 일으킨 예안은 둘이 껴안고 있는 광경을 말없이 주시했다. 케이는 뒤에서부터 여자를 껴안고 있고, 여자는 웃음 띤 얼굴로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미묘한 눈으로 응시하던 예안은 케이의 입술이 닿았던 목줄기를 말 없이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화끈한 열기가 묻 어 나왔다.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난 손님이랑 할 이야기가 있으니 먼저 집에 들어갈래요?" "알았어. 빨리 와." 여자는 손을 흔들며 케이를 배웅했다. 등을 돌리자마자 케이의 몸이 허공에서 녹듯이 사라졌다. 신기한 경험이었지만 예안은 별다른 감탄 을 느끼지도 않았다. 사과가 떨어지듯 당연하게 느껴졌다. "케이가 마음에 들어?" "으, 응?" "비명을 지르거나 저항할 줄 알았는데 너무 스스럼없이 받아주는 것 같아서." 괜히 창피한 기분이 든 예안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여자는 별로 나무 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너는 22년 전에 사망한 제이의 육신을 기반으로 해서 태어났으니까 케이한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해. 그러니 죄책감을 가질 필 요는 없어." "하, 하지만…." "내 기억과 유전자 일부까지 받았으니 내 분신이기도 해. 나는 곧 너 고 너는 곧 나야. 네가 원한다면 케이를 공동으로 남편 삼게 해줄 수 도 있는데, 어때?" 왠지 울컥한 예안은 바로 홱 쏘아붙였다. "그런 건 싫어. 난 내가 가졌으면 가졌지 다른 사람과 같이 쓰고 싶 지는 않아." 잠깐 동안 여자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피식거리는 표정만큼은 뚜렷 했다. 순간적으로 내뱉었던 예안은 곧 후회했다. 너무 바보 같은 소리를 한 것 같았다. 여자는 말없이 옆에 앉았다. 바닥에 떨어진 예안의 옷을 주워들고 허 공에 펼쳤다. 하얀 빛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옷의 물기가 전부 날아가 버렸다. 소금기까지 완벽히 세탁된 옷을 만족스러운 듯 몇 번 털은 뒤 예안에게 입혀주었다. 예안은 말없이 여자가 입혀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손길 하나 하나 마다 어머니 같은 자애로움이 느껴졌다. 응석부리고 싶다는 기분이 든 예안은 여자에게 몸을 기댔다. 여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무릎베개를 해주었다. "유젤, 케이는 네 아빠 아니야?" "틀린 말은 아니야." "그런데 왜 케이가 지금 네 남편인 거야? 그… 케이의 전처는…." "날 낳아준 어머니라면, 몇 년 전 죽었어." 눈을 살짝 뜬 예안은 무슨 말이냐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가볍게 한 숨지은 여자는 예안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넘기며 이야기를 풀 어나갔다. "12년 전에 나는 평범한 남자아이였어. 아니, 그런 줄 알고 있었어. 양친을 잃고 백혈병으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지. 그런데 그때 케 이가 나타난 거야." 뜻밖이라는 듯 예안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지닌 그녀의 기억에서 한 번도 스쳐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케이는 내가 본래 제이라는 여자라고 했고, 어떤 위험을 피하기 위 해 파장이 맞는 남자아이의 몸에 뇌 이식 수술을 했는데 사고로 잃 어버렸다고 설명했어. 난 반신반의했지만 어쨌든 살 수 있다는 말에 여자의 몸으로 들어갔지." 아기자기했던 나날들이 새삼 그리운 듯 여자는 눈을 감고 말을 계속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사도니 뭐니 아무것도 모르는, 15살까지 남자로 살아왔던 기억밖에 없는 평범한 여자아이였어.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 록 옛날 기억이 조금씩 깨어났지. 사도니 조물주 프로젝트니 NM 프 로젝트니 하는 단어를 하나둘씩 알게 되면서, 나는 과거를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저항했어." 허공을 크게 선회하던 갈매가 한 마리가 끼룩거리며 내려와 앉았다. "내 저항이 심해지면서 인격이 둘로 나뉘어졌어. 나 자신을 평범한 아이라고 생각하는 유서운이라는 인격과, 사도의 간부로서 케이만을 사랑했던 여자 제이의 인격으로." "…그랬구나." "마지막에 승리한 건 제이였어. 나는 케이가 날 도와주면 제이한테 지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하고 케이한테 매달렸어.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더라. 그때까지 그저 아빠처럼 여겼던 케이한테 내 몸까지 허락 했는데 결국 난 사라지고 말았으니까." 허탈함으로 장식된 쓴웃음이 여자의 얼굴에 가득 번졌다.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지만 난 죽지 않았어. 제이는 얼마 지나지 않 아 임신했고, 나는 제이의 딸로 다시 태어났거든." "그 아이… 설마?" "맞았어. 그날 밤의 아이야." by eden "운명이란 참 얄궂더라. 난 오랫동안 내가 누구인지 고민했어. 순수 한 유서운의 환생인지, 아니면 유서운의 기억만을 물려받은 유젤 디 야스 마르셸인지. 어느 쪽이든 간에 난 그것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 어. 견디다 못해 결국 지구로 가출했던 거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녀의 정체성은 달라지게 된다. 유서운의 환생이라 본다면 자신을 죽인 원수의 아이로 태어나게 된 운명이라 할 수 있다. 유서운의 기억만을 물려받은 유젤이라 본다면, 어머니를 죽인 원수의 딸로 태어나게 된 운명이라 할 수 있다. 임신한 것은 유서운이지 제 이가 아니었으므로. 유서운이 아이를 가진 후 제이는 그녀의 인격을 죽이고 육신을 차지했다. "그래서? 답은 찾은 거야?" "아니. 아직까지 난 내가 누군지 찾지 못했어. 아마 평생 못 찾을지 도 몰라." "슬프겠다." "글쎄? 이제는 내가 누구인지 찾는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라 고 생각해. 그냥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나를 믿고, 그리고 열심히 살 아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난 케이가 내 아빠였다고 생각 안 해. 세 상에서 내가 유일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즐겁게 살아가면 되는 거야." "저기, 유젤. 실은 물어볼 게…." 예안은 어려운 이야기를 속에 품은 사람처럼 머뭇거렸다. 여자는 다 안다는 듯 피식 웃으며 가만히 뺨을 쓰다듬었다. "네가 본 게 맞을 거야. 케이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그럼 역시…?" "응. 내 어머니라고 해야 할까? 그 사람이 지구인들에게 살해당한 다 음에 완전히 미쳐버렸어. 그래서 내가 어머니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거야." "그런… 불행하지 않아?" "그렇게는 생각 안 해. 알잖아. 지구인의 가치는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용없다는 거." 무엇으로도 금지할 수 없단 뜻인가. 아담과 이브의 사랑이라는 것은. 왠지 모를 숙연한 기분이 든 예안은 고개를 떨구었다. "엄마!" 우렁찬 사내아이의 고함과 함께 다다다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깜 짝 놀란 예안은 일어나려다가 등에 매달리는 무게에 놀라 다시 주저 앉았다. 웬 조그만 사내아이가 등에 매달린 채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은빛이 감도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지닌, 기껏해야 서너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였다. "오늘 엘리스하고 남쪽 얼음산에 갔다 왔어. 펭귄들 데리고 전쟁 놀 이했어. 나중에는 알스까지 끼었는데도 내가 이겼어. 잘했지?" 아이는 활발하게 떠들며 그녀의 품에 파고들었다. 놀라서 무심코 밀 어내려던 그녀는 그리운 향기를 느끼고 손을 멈췄다. 나에게도 아이가 있었다. 누구보다도 귀여운 아이가.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 슬픈데 눈물이 나오지 않 았다. "줄리어스. 엄마는 여기 있어." "응?" 예안의 가슴에서 얼굴을 뗀 아이는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왜 엄마가 둘이나 돼?" "아빠와 똑같은 소릴 하는구나. 그 사람은 지구에서 온 엄마 손님이 야. 엄마와 많이 닮았지?" "어, 그럼 혹시 나한테는 이모가 되는 사람?" "아쉽지만 그건 아니야. 그보다 더 가까운 사이지." 발딱 일어난 아이는 예안은 내버려두고 엄마에게 달려가 안겼다. 눈 에 많이 익은 그 광경을 예안은 서글픈 눈으로 응시했다. "안아볼래?" "응?" 예안이 건성으로 대답하자 여자는 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줄리어스. 저 사람한테 한 번 안겨보지 않을래?" 무슨 말이냐는 듯 엄마를 바라보던 아이는 이윽고 알았다는 듯 끄덕 였다. 엄마 품을 빠져나온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예안의 품으로 뛰어 들었다. 낯을 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따스한 체온을 말없이 껴안으며, 예안은 눈을 감았다. 마음이 안정되면서도 동요를 일으킨다.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갈등 이 고요한 파문을 그린다. 잃어버린지 얼마 안 된 이 느낌, 그러나 아주 오래 전에 잃어버린 듯 가슴이 쓰리고 공허하기만 하다. 이 느낌을 다시 되찾고 싶지만, 그것은 이제 불가능하겠지. "줄리어스. 엄마도 곧 갈 테니까 아빠한테 가 있을래?" "응? 언제 올 건데?" "금방 갈 거야." "알았어. 빨리 와." 예안의 품에서 빠져나온 아이는 힘차게 손을 흔들고는 뒤돌아 섰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나자 아이는 그 안으로 사 라졌다. 구멍은 곧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닫혔다. "어때? 귀여워?" "…응. 네 아이야?" "이제 다섯 살이야. 우리와는 달리 저 아이만큼은 구김살 없이 밝게 자라게 해주고 싶어. 케이와 내가 어떤 사이였다는 것은 혼자만 알고 있어 줘." 서글픈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예안은 아이가 사라진 방향을 마냥 바라보기만 했다. "이만 돌아가 봐야 하지 않아?"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안은 황급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안 가. 난 지구 절대 안 갈 거야." "하지만 네 얼굴은 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걸. 말로만 그럴 뿐 네 진심은 지구에 머물러 있잖아." "아니야! 지구는 내 아이를 죽였어! 내 아빠를 죽였어! 다시는, 다시 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잠시 잊어버리고 있던 슬픔이 생각난 예안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복받치는 슬픔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자애로운 미소를 띤 여자는 흐느끼는 예안의 등을 천천히 토닥여주 었다.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너는 이곳에 있어선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해 예안은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하지만 넌 돌아가야 돼.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거야." "싫어! 싫어! 가지 않을 거야!" "지구는 널 필요로 하고 있어. 그리고… 그 아이도 널 필요로 하고 있어." 이상하리만치 쓸쓸한 목소리다. 밝아 보이지만 마냥 무겁기만 한 표 정이다. 예안이 진정되기를 기다린 여자는 이윽고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높 이 가리켰다. 머나먼 수평선 위에 푸른 지구가 빛나고 있었다. "잘 봐. 지구가 변하고 있어." 평온하면서도 심상치 않음이 느껴지는 어조였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지구를 응시했다. 섬뜩한 느낌의 붉은 빛줄기가 푸른 지구를 잠식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게 퍼져 있던 붉은 기운은 악마의 혓바닥처럼 조금씩 조금씩 세력을 넓혀나갔다. "저게 뭐야?" "그 애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어. 하지만… 성공하기는 힘들 거야. 마더가 그렇게 호락호락 내버려둘 리가 없어." 여자는 가만히 예안을 끌어당겨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 했다. "가엾지 않니? 그 애는 너 하나만을 바라본 나머지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영역에까지 손댔어. 신에 대한 도전은 결코 전설처럼 아름답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아. 신의 영역을 침범한 인간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대가를 져야만 해."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어쩌기는. 네가 옆에 있어줘야지. 그 애를 외면하고 이런 곳에서 죽 치고 있을 거야?" "싫어. 내가 알 바 아냐." 여자는 떼를 쓰는 아이처럼 고개를 젓기만 하는 그녀를 안쓰럽다는 눈길로 주시했다. 무겁게 한숨짓던 여자는 예안의 뺨을 두 손으로 잡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따스하면서도 서글프게 느껴지는 키스였다. 불안한 표정을 지은 예안은 왜 그러냐는 듯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입 술을 뗀 여자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밝게 미소지으며, 어린아이를 안 아 올리듯 예안을 높이 들어올렸다. 신기하게도 그녀의 몸이 가볍게 붕 떠올랐다. 뭐라 입을 열려던 그녀 는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계속 떠오르는 것을 알아차리고 흙빛이 되 었다. 여자의 발치에서 솟구치는 희미한 빛의 기둥이 자신을 밀어 올 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뭐, 뭐하는 거야! 유젤! 내려 줘!" "지금 넌 여기 있어서는 안 돼. 돌아가렴.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유젤! 내려 줘! 내려 줘! 난 가고 싶지 않아! 지구에 돌아가고 싶지 않단 말이야!" 그녀는 울부짖듯 비명을 지르며 반항했다. 빛의 기둥은 조금도 아랑 곳하지 않고 그녀를 허공으로 계속, 계속 들어올렸다. 희뿌연 황금빛 구체가 그녀의 몸을 집어삼키는가 싶더니, 허공에서 그대로 녹아지듯 사라졌다. 예안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서글픈 미소를 띤 채 자신을 향해 두 팔 을 들어올리고 있던 여자의 얼굴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무실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남자는 문득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안경을 치켜올린 그는 창가로 가 먼 하늘을 주시했다. 불길한 느낌의 붉은 기운이 쉽게 알아차리기 힘든 속도로 조금씩 하 늘을 잡아먹고 있었다. 넓고 푸른 창공은 적조 현상이 일어난 바다처 럼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서류를 한 뭉치씩 안고 들어오던 젊은 여비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상 기후인가 봐, 라고 대답하려던 남자는 여비서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기묘한 느낌에 휩싸였다. 여비서의 눈동자에 떠오른 갈망이 느껴졌다. 남자의 학대를 받더라도 마음껏 스스로를 불태우고 싶어하는 그런 갈망이. 그 남자는 바로 다 름 아닌 자신이었다. 그녀는 남자의 눈동자에 떠오른 피로를 보았다. 의부증이 심한 아내 와 불만족스러운 부부생활, 주변에 자리잡은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 고 싶어하는 심리가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둘은 누가 뭐라할 것 없이 서로의 진심을 확인했다. 여자의 손에서 서류 뭉치가 떨어졌다. 둘은 서로를 끌어안고 격렬히 키스했다. 하늘 을 덮은 어둠이 더욱 짙어질수록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뚜렷이 확인 했다. 미국의 어떤 국회의원은 느닷없이 자신의 비서를 총으로 쏘았다. 얼 마 전에 맞아들인 젊은 아내와 밀회를 즐겼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 문이었다. 중미 어느 지역의 40대 남자는 가족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두 아들이 자신의 친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내의 눈을 통해 '알았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어느 삼십대 남녀 동창은 아내와 남편을 모두 버리고 사랑의 도피를 했다. 수십 년 동안 친구로 지내왔던 그들은 상대가 자신을 이성으로서 사랑하고 있음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었다. 중동의 어느 나라 왕자는 분노한 왕에게 살해당했다. 후계자인 아들 이 나라를 팔아먹을 궁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왕이 '알았기' 때문이 었다. 붉은 기운이 하늘을 완전히 뒤덮었다.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는 것은 붉게 물든 하늘뿐, 붉은 빛이 비추고 있을 때 사람들은 타인의 생각 을 모조리 훔쳐볼 수 있었다. 내가 남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고, 남이 나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 모두의 사고회로가 하나로 묶인 곳. 타인의 열등감, 타인의 증오, 타 인의 분노, 타인의 사랑,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곳. 나의 모든 것이 완전히 노출된 곳. 나의 열등감, 나의 증오, 나의 분 노, 나의 사랑, 그 모든 것이 노출된 세상. 짝사랑하고 있던 여자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된' 남자는 기뻐서 그녀에게 청혼했다. 그녀를 연모하고 있던 또 다른 남자는 그 둘이 사랑을 나누는 것을 '알게 되어' 칼을 들고 침입했다. 살인사건 이 일어나려는 것을 '알게 된' 경찰은 서둘러 총을 들고 체포에 나섰 다. 경찰이 쫓는다는 것을 '알게 된' 범인은 곧바로 범행을 포기했다. 온 세상이 아비규환이 되었다. 세계의 모든 업무가 정지되었다. 전혀 몰랐던 타인의 마음을 알게 된 자들은 웃거나 기뻐하거나 분노하거 나 슬퍼했다. 미처 몰랐던 주변 사람의 마음을 더욱 자세히 읽기 위 해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전 세계의 모든 범죄가 멈추었다. "칼. 성공이다." 스크린에 떠오른, 세계 곳곳을 비추는 화면을 바라보며 레이온은 덤 덤히 말을 이었다. "지난 열흘 동안 범죄 행위는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어. 자네는 인류에게 진정한 해방과 유토피아를 가져다준 거야." 인공 심폐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던 칼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애써 웃 음을 지었다. 더러운 남자들에게 윤간 당하고 잔인하게 살해당한 아 내와 딸의 영혼을 이것으로 위로할 수 있다는 기쁨이었다. 디스플레이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레이온은 속으로 놀라워했다. 이것이 바로 칼의 마음이 지닌 힘이었다. 다시는 자신 같은 불행을 겪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하고자 하는 칼의 염원에서 출발한 신념 은, 모든 범죄가 사라진 평화로운 유토피아를 재현하는데 성공한 것 이다. 일찍이 레이온의 친구인 헤라클레스도 이와 같은 세상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는 성공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내는데 그칠 뿐, 비참하게 실패했다. 그리고 죽었다. 지금쯤 지옥에서 헤라클레스도 이 광경을 보고 있으리라. 녀석은 과 연 칼을 보고 뭐라고 할까. 자기 꿈을 대신 이뤄줘서 고맙다고 박장 대소를 할까. 지옥에 오면 잘해주겠다고 호쾌하게 가슴을 팡팡 치고 있을까. "성공…입니까, 박사님?" 눈물 젖은 칼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레이온은 고개를 힘있게 끄덕였 다. 쇠약해져 뼈와 가죽 밖에 남지 않은 칼의 손을 잡으며, 레이온은 작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는 신에게 도전해서 승리했다. 자네야말로 지구에서 가장 위대 한 남자야." "아아…." 인류를 최초로 해방한 선구자라든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 물이라는 치장은 어찌 돼도 좋았다. 이것으로 자신과 같은 불행을 겪 는 사람들이 다시는 생기지 않는다면. 이 세상이 범죄 없는 세상, 모 든 인간이 서로를 불신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곳이 된다면. 삐삐삐삐삐삐. 갑작스런 경고음에 레이온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스크린 측면 에 달린 적색 경보기가 요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박사님?" 칼은 잔뜩 쇠약해진 음성으로 물었다. 무언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 서둘러 장비를 점검한 레이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미소지으며 돌아섰다. "생산설비 중 일부가 노화되어 제대로 가동하지 않는군. 걱정할 것 없다, 칼." "제 꿈은… 아무 이상 없는 거지요?" "그래. 자네의 생명을 대가로 이미 모든 인류의 사고소통로는 하나로 묶였어. 이것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또 다른 누군가의 생명 과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바쳐야만 한다." "안심…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박사님의 마음이… 느껴지는군요." 어둡게 미소지으며 레이온은 그의 머리맡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자네가 느끼는 내 마음은 어떻지?" "무언가 아주 슬픈… 불행한 사람이라고…. 사랑에 목이 마른…." 칼의 숨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뇌파표시장치는 그의 임종이 임박했음 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인가. 레이온은 마지막 순간이니만큼 억지로 밝게 미소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나 역시 자네의 마음이 뚜렷이 느껴져. 이 기지에 방어장치를 설치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군. 그만큼 자네의 생명이 무거운가 봐." "그렇게 되나요…. 하…하…." 뜻 모를 미소를 짓고 있던 칼의 손이 축 늘어졌다. 디스플레이에는 수평의 파장선만이 나타나고 있었다. 칼은 정말 죽은 것이다. 레이온은 그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떨구고 묵념했다. 삐삐삐삐삐삐. 경고음이 더욱 거세졌다. 레이온은 어두운 얼굴을 들어 경보장치를 바라보았다. 디스플레이에는 <위험>이라는 단어만이 계속해서 나타 났다. 이윽고 실내의 불이 탁 꺼졌다. 어둠 속에서 레이온은 미동도 않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불이 다시 들어왔다. 경고음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디스 플레이에 떠오른 위험 표시는 없어지고, 모든 장치는 정상적으로 가 동하고 있었다. 인공위성이 사진을 전송해왔다. 지구를 뒤덮은 붉은 기운이 빠른 속 도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사라진 지역의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생활 하고 있었다. 국회의원에게 살해당했던 비서는 처음부터 죽지 않은 것처럼 별탈 없이 의원의 젊은 아내와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가족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남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른 남자의 아이들을 자신의 아이로 알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다. 가족을 모두 버리고 사랑의 도피를 했던 남녀는 여전히 서로에게 좋 은 친구로 남아 자신의 가정에 충실했다. 아버지에게 살해당했던 중동의 왕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늙은 아버지 를 속여가며 나라를 팔아먹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붉은 빛이 모두 거둬졌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예전과 똑같은 생 활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지난 열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도 기억하지 못했다. 지난 열흘을 기록한 전 세계의 모든 자료는 지워졌으며, 천문학자들 은 어째서 지구가 열흘의 시간을 건너뛴 공전지점에 머물러 있는지 를 놓고 심각한 말싸움을 벌였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칼이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음에도. 마더는 냉정하다. 그가 지닌 생명, 그것의 무게는 고작 열흘간의 유 토피아를 재현할 수 있는 것 이상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잠들어 있는 칼의 시신을 내려다보던 레이온은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넬." "말씀하십시오."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 있던 넬이 대답했다. "실은 칼에게 말해주지 않은 게 있다." "무엇인가요?" "헤라클레스는 실패하지 않았어.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없었는데도 그 녀석은 성공했다. 마더에게 자기의 생명이 얼마나 무거운지 증명해 보였기 때문이었지." "생명의 무게요?" "그래. 녀석은 기계팔을 써서 심장을 뜯어내지 않고 직접 맨손으로 심장을 뜯어내 마더에게 바쳤다." 넬은 안드로이드답지 않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인간이 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그렇지. 그것이야말로 신에 대한 도전에 어울린다 할 수 있는 행위 였어. 아마도 칼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열흘 간의 유토피아에 그치고 만 것 같다." "하지만 헤라클레스라는 분께서 성공하셨다면 어째서 지금은…." "7년 전 아담의 개입 때문에 무로 돌아간 거지. 그 대신이라고 하기 에는 뭣하지만 마더는 후유증을 없애줬지. 그래서 헤라클레스 그 녀 석도 그럭저럭 만족한 채로 눈을 감을 수 있었던 거고." 헤라클레스는 유토피아 재림을 단지 수단의 대상으로 인식했다. 그러 나 칼은 목적 그 자체로 인식했다. 둘의 스케일이 이만큼 달랐던 게 서로 다른 결과를 낳은 원인인지도 모른다. "미안하다, 칼." 레이온은 또 한 번 사과했다. 그 사과의 의미를 아는 넬은 잠자코 침 묵을 지켰다. 처음 칼을 만났을 때, 레이온은 칼의 갈망을 보고 예감했다. 이 남자 라면 좋은 실험 사례가 될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그런 마음을 철저히 숨긴 채, 레이온은 손을 내밀었다. 칼은 의심 없이 그의 손을 잡았고, 그를 착실하게 돕다가 마지막에는 훌륭 한 실험 샘플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레이온이 칼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원조의 본 질은 어디까지나 실험 정신. 마지막까지 그것을 모르고 떠났으니 칼 은 나름대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나 남은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만지작거리며 레이온은 쓴웃음을 지 었다. 신인류가 된다는 것은 칼이 했던 일보다 더욱 위험하고 성공 가능성 도 낮다. 자신이 정말 성공할 수 있을지 레이온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소중한 자이오 다이아몬드 두 개 중 하나를 칼에게 주면서까지 그 가능성을 측정했던 것이다. 이런 더러운 마음을 알면 칼은 뭐라고 할까. 그래도 도와주셔서 고맙 다고 마음 편히 웃음을 지을까. 피식거리며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내던진 그는 광선총을 꺼내 쏘았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자이오 다이아몬드는 먼지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불완전한 자이오 다이아몬드의 한계, 완전한 자이오 다 이아몬드라면 핵이 폭발하더라도 끄떡하지 않을 것이다. 이 따위 불량품으로 도대체 무슨 꿈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맨손으 로 심장을 뜯어내야 했느니 뭐니 하는 것도 결국은 다 자기 좋으라 고 하는 변명에 불과할 뿐, 완전한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썼더라면 칼 은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진짜를, 완전한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손에 넣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 면 영원히 유젤과 동등해질 수 없다. "가자, 넬." "네." 레이온은 쓰게 피식거리며 그곳을 나섰다. 칼의 시신은 그의 가족이 묻힌 곳에 안치하는 게 좋겠지. 정신이 들었을 때 눈앞의 들어온 풍경은, 익숙한 맥의 내부였다. 스크린에 비치는 에덴 혹성이 점점 멀어졌다. 예안은 탈진한 표정으 로 그저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데, 저 낙원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몸이 말 을 듣지 않았다. 「돌아가야 돼.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거야.」 오리지널 유젤이 그 말을 했던 때가 생각났다. 더 없이 간절한 표정 을 짓고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가 생각난 예안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기대에 부응할 자신이 없었다. 지구에 돌아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모든 것을 잃었다.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잃었다. 가족을 전부 잃고,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고 그저 지쳐 울거나 아니 면 도피하는 것밖에 모르는 나약한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 단 말인가. 오리지널 유젤, 그녀는 바보다. 이런 나약한 자신에게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낙원 밖으로 쫓아냈단 말인가. 그녀는 잔인하다. 자신이 뭔가를 해야만 하더라도 그까짓 것쯤 눈감 아줄 수 있는데, 낙원에서 모든 것을 잊고 마음 편히 살 수 있도록 해줄 수도 있는데, 굳이 쫓아내야 했단 말인가. 꽉 다문 입술 틈으로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조종간을 붙잡고 얼마나 그렇게 울었는지 모른다. 갑자기 낯선 온기가 온몸을 감싸왔다. 모든 소리가 꺼진 듯 깊은 적 막이 찾아왔다.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기묘한 분위기가 찾아왔다. 기괴한 느낌에 사 로잡힌 예안은 식어버린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두근. 두근. 심장의 고동소리가 뚜렷이 들렸다. 혼자이되 혼자가 아니다.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 그런 느낌을 떨치지 못한 그녀의 표정에 두 려움이 떠올랐다.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가 조금씩 풍겨왔다. 향기에서는 아늑한 보랏빛 색채가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싼 풍경이 바뀌었다. 맥의 내부는 사라지고, 칠흑처럼 검 은 우주 한 공간이 나타났다. 두근거림이 점점 심해졌다. 어둠이 조금씩 걷히며, 허공에서 생겨난 흰 옷자락이 주위를 물들였다. 옷자락을 감싼 안개가 점점 형상을 갖추었다. 눈부시게 하얀 피부를 지닌, 발끝까지 부드러운 보라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나신의 여자. 아름답다는 말조차 모욕으로 느껴질 정도로 신비한 분위기를 발산하 는 여자였다. 눈을 뜬 여자는 가볍게 미소지으며 다가왔다. 여자가 가까워짐에 따 라 철컹 하는 쇠사슬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예안은 돌이 된 듯 굳은 채로 멍하니 응시했다. 여자는 팔목과 발목 에 찬 쇠사슬의 방해를 받으면서 힘들게 걸어왔다. 이윽고 철컹거리는 소리가 멈추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여자를 속박 하는 쇠사슬은 무거워 보였다. 「안녕.」 더없이 자애롭게, 여자는 선명한 미소를 띠었다. 붉은 기가 감도는 보라색 머리카락이 아슬아슬하게 여자의 알몸을 가리고 있었다. '당신은… 마더?' 「너희는 날 그렇게 부르나 보구나.」 아찔한 충격이 그녀를 엄습했다. 마더라고? 눈앞의 이 사람이 바로 그 마더라고?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아니, 무슨 생각을 해야 좋을지 몰랐 다. 지금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를 의심하는 행위마저 이 위대한 의 지를 모욕하는 것이리라. 태고부터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품어온, 자애로우면서도 더없이 잔인 한 어머니. 사도와 아틀란티스. 에덴과 지구. 구인류와 신인류. 그 모든 갈등의 근원을 제공하면서도 그저 관조하기만 할 뿐인 존재. 감격이되 감격이 아닌, 증오이되 증오가 아닌, 스스로 정의하는 것조 차 불가능한 정체불명의 감정에 휩싸인 채, 그녀는 간신히 말문을 떼 었다. '왜… 나타난 거죠?' 마더는 생긋이 웃으며 두 손을 모아 내밀었다. 마더의 움직임에 따라 철컹거리는 소리도 따라 움직였다. 그제야 마더의 전신을 옭아맨 쇠사슬에 눈이 닿았다. 큼직하게 굵은 쇠사슬은 무엇으로도 자를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해 보였다. 「무거워. 이거 좀 풀어줄래?」 by eden 웃고 있지만 조금의 즐거움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이다. 눈앞에 숨쉬 고는 있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는, 그러나 죽었다고는 더 더욱 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마더였다. '풀어달라고요? 무엇을요?'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육성은 헛된 메아리가 되어 의식의 세계에서만 머물렀다. 허나 마더는 충분히 느꼈으리라. 마더는 다시 두 손을 모아서 내밀었다. 손목에 채워진 쇠사슬이 섬뜩 한 느낌을 내뿜었다. 「이것을 풀어 줘.」 '그게, 그게 뭔데요?' 「날 옭아맨 카르마. 너라면 이것을 풀어줄 수 있을 거야.」 아무렇지 않게 뜻 모를 소리를 한다. 당연히 상대가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오랫동안 기다렸어. 이것을 풀어 줘.」 도대체 알 수 없다. 마더가 무슨 말을 하는지. 마더의 뜻을 자세히 알기 위해 예안은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그것만 으로 마더의 뜻을 파악하기란 불가능했다. 깨달은 게 있다면 오로지 단 하나, 아름다움이란 단어는 신을 찬양하 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사실뿐.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더는 이 보다 완벽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거대한 산처럼 느껴진다. 저 거대함은 때로는 자애를 품고, 때로는 잔인함을 품겠지. 웃고 있되 웃음을 모르는 눈동자. 하늘거리는 보라색 머리카락 뒤에 감춰진 신비의 보석을 예안은 똑바로 주시했다. 그녀의 마음에 더 이 상 두려움은 없었다. '아….' 마주친 시선을 통해 마더의 마음이 엿보였다. 마더의 기억과 감정이 인간의 영상으로 변환되어 허물없이 예안의 마음으로 흘러 들어왔다. 통제할 수 없는 엄청난 정보의 유입에 예안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 로워했다. 그렇지만 마더로부터 눈을 떼지는 않았다. 아니, 뗄 수 없 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태양계가 생겨난다. 마더의 기억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모른 채 그저 태양 주변을 돌기만 한다. 다른 행성과 교류하는 것 또한 금지된 채, 자신이 어디서 왔으며 왜 왔으 며 살아있는 건지 죽어있는 건지 판단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외로웠다. 그래서 생명체를 탄생시켰다. 최초로 생겨난 생명체는 살아간다는 본능조차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미개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쌓이고, 마더의 관심이 커져감에 따라 생명체는 점점 진화했다. 생명체를 키우는 것은 스스로의 사고마저 제한된 마더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생물들은 조금씩 지성을 발달시켰다. 그들은 적과 동료를 구분할 줄 알았고, 마더의 도움 없이 종족을 번식시키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어디에서 사냥을 하면 되는지, 적이 나타났을 때는 어디로 달아나면 되는지를 알게 되었다. 수월히 사냥하기 위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을 발달시킨 종족도 있었고, 적으로부터 쉽게 도망치기 위해 튼튼한 날개를 발달시킨 종족도 있었다. 마더는 기대를 품게 되었다. 어쩌면 이 아이들이 자신의 유일한 소망 - 존재의 의의를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때부터 실험이 시작되었다. 더 이상 피조물을 바라보는 마더의 시 선은 순수한 자애로움이 아니었다. 카르마의 법칙은 쇠사슬의 형태로 마더를 묶고 있다. 사슬이 단단하 게 조여질 때마다 마더는 기약 없는 수면에 들어간다. 그러나 때때로 카르마의 사슬이 느슨해지는 순간이 있다. 잠깐의 의 식을 차릴 때마다 마더는 냉정하게 생명체를 선별해나갔다. 거대한 몸집과 단단한 발톱을 비롯해, 두말할 나위 없는 육체적 강함 을 지닌 생물. 몸집도 작고 연약한 육체를 지녔지만, 조금씩 지성을 발달시켜나가는 종족. 최우선적으로 선별된 두 종족을 놓고 마더는 잔인한 판단을 내렸다. 지성 발달의 길을 택한 종족을 유지하기로 하고, 그 종족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거대한 파충류는 멸종시켰다. 선택받은 영장류는 살아남았고, 공룡은 멸종했다. 영장류는 착실하게 마더의 기대에 부응해나갔다. 카르마에 묶여 기나 긴 잠이 들었다가 깨보면, 언제나 그들은 잠들기 전보다 한층 더 발 달해있었다. 바야흐로 그들이 스스로를 인간이라 지칭하게 되었을 무렵, 마더는 대양 한가운데 서식하는 인간들이 유독 다른 인간들보다 강한 지성 과 힘을 지녔음을 알아차렸다. 다른 인간들과는 달리 그들은 여러 가지 능력을 쓸 줄 알았다. 허공 에 불을 만들어내기도 했고, 손을 대지 않고 무거운 물체를 간단히 들어올리기도 했다. 그들은 고립되어있으되 고립된 게 아니었다. 스스로를 다른 인간들보 다 우월하다 여기고 종족의 순수를 위해 선을 그은 것이었다. 긴 잠에서 깨어난 마더는 이제 본격적으로 나서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의 대륙을 차가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혔다. 무수한 사람들이 울부짖거나 목숨을 잃었지만 마더는 조금도 죄책감 을 느끼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저들은 자신의 피조물, 그리고 자신은 감정을 모르는 의지의 집합체. 거대한 땅덩어리가 차가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을 때, 마더는 언 제나 그랬듯 자애롭게 미소짓고 있었다. 또다시 수면의 시간이 찾아왔다. 마더는 일만 년 뒤를 기약하며 다시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도 저주를 내렸던 종족은 여전히 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신의 저주를 제각기 다르게 해석한 그들은 이미 오래 전에 둘로 갈라져 독자적으로 답습을 계속하고 있었다. 힘을 거둬들인 대가로 뛰어난 지능을 얻은 종족, 마더는 다시 그들을 선택했다. 전 세계 인간을 휘어잡고 있는 소수의 그들에게 또다시 강 한 저주를 내렸다. 저주를 뿌리치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들을, 마더는 자애로운 눈으로 관조했다. 괴로움에서 탈출하기 위해 악마가 된 남자, 무수한 인간들을 잡아다 가 온갖 잔인한 실험에 재료로 쓰고 내다버리기를 반복하는 과학자, 마더는 그에게 접근했다. 마더는 그에게 신의 원석을 하사하겠다고 계시를 내렸다. 단, 거기에 는 조건이 있었다. 신의 원석을 다룰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 보라는 것. 과학자는 당연하게도 수락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아무도 자신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즈음, 과학자는 미리 준비해둔 여성의 육체로 다시 부활했다.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숨긴 채, 그는 동료들과 혼신의 힘을 다 해 저주를 이겨낼 수 있는 다른 종족의 인간을 탄생시켰다. 그리하여 탄생된 인간이 바로 아담. 그는 분명히 뛰어난 신인류였으 나 저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의 탄생에는 신의 원석이 쓰 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완전하기는 해도 새롭고 뛰어난 인간을 탄생시킴으로써, 과 학자는 신의 원석을 다룰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만족한 마더 는 40억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숙성시킨 신의 원석 4개 중 하나를 그 에게 하사했다. 그리고 완전한 신인류, 이브가 탄생했다. 마더는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질 날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모든 인간의 운명은 마더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아담과 이브가 인간들로 부터 외면 받도록 하는 것은 무척 간단했다. 탈출 과정에서 이브가 인간들에게 사망하도록 만드는 것 역시 어렵지 않았다. 절망하는 아담에게, 마더는 진실을 감추고 다가갔다. 그리고 그에게 남은 세 개의 신의 원석 중 두 개를 하사했다. 아담은 그것으로 이브 의 복제를 탄생시켰고, 새 혹성을 탄생시켜 이주에 성공했다. 마더가 보여주는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의 감정은 인간의 영 상으로 전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차갑고 맑은 울림과 함께, 필름이 끊기듯 영상이 정지했다. 벅차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하지만 결코 감동 따위가 아닌 감 정에 휩싸인 예안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마더를 노려보았다. 수십 억 년의 세월을 견디며 모든 생명체를 포용해온 의지에 대한 예의가 아님을 알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감정을 제 어할 수 없었다. '왜… 나에게 이런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렇게 물어선 안 되었음을 알고 있다. 왜 그런 짓을 한 거냐고 물어 야 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은, 그에 따른 대답을 들 음으로써 지워지는 책임을 거부하기 위한 도피심리. 허나 또렷이 알고 있다. 얄팍한 외면 따위로는 마더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없음을. 마더의 감정이 다시 유입되었다. 인간의 기억을 훨씬 뛰어넘는, 헤아 리는 것조차 불가능한 아득히 먼 옛날. 어두운 공간이 걷어지며 신비한 우주가 나타났다. 코로나가 이글거리 는 태양, 태양 주변을 돌고 있는 아홉 개의 행성. 자기 자신이 왜 존 재하는지 언제까지 이렇게 태양 주변을 돌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것을 의심할 사고능력마저 족쇄가 채워진 비극의 존재들. 그들의 외침이 들렸다. 알고 싶다고 입을 모아 외치는 그 소리가 느 껴졌다. 「우주의 모든 것은 살아 있어. 태양도, 나도, 그리고 다른 무수한 별 들도. 심지어 우주 그 자체도 살아있는 거야.」 허공에 뜬 채로 예안의 한쪽 어깨를 부드럽게 감싼 마더는 나긋나긋 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자애로운 표정을 쓰고 아무렇지 않게 저주를 내린 존재라 느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웠다. 일만 년 전에도 그러했으리라. 저렇듯 부드럽게 속삭이며 아틀란티스 에게 저주를 내렸으리라. 그리고 사도에게도. 「살아있는 모든 것은 카르마의 지배를 받아. 무언가가 카르마의 실 을 통해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어. 그 무언가는 내가 자기 정체를 눈 치채거나 의심하는 것을 싫어해. 그래서 내가 의심을 품을 때마다 날 동면에 들게 하지.」 '동면…요? 그럼 지금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죠?' 「너희들 기준으로 수십 억 년의 세월 동안, 나는 그 무언가의 시선 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어. 하지만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잠깐 동안 감출 수 있을 뿐이야. 카르마가 날 속박하고 있는 한 그 무언가의 정체를 밝혀낼 수는 없어.」 그 말에 동조하듯 마더의 손목과 발목을 채운 쇠사슬이 철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검고 긴 쇠사슬은 어둠의 끝까지 길게 이어져, 그 끝이 어디쯤인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우주를 다스리는 자, 아니 법칙이라고 해야 할까. 그 법칙은 블랙홀 의 어둠에 숨어 카르마의 쇠사슬로 모든 것을 다스린다. 마더와 같은 존재에게 그 법칙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은 절대 금기사항. 마더는 그 것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긴 침묵에 휩싸여있던 예안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하지만 왜 나에게 그런 걸 말해주는 거예요? 대답해요! 왜 나에게 그런 걸 말해주는 거냐고요!' 「너는 내가 목표로 했던 인간의 최종 완성형이니까.」 더 물었다가는 견딜 수 없는 두려운 대답이 돌아올 것만 같다. 그럼 에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최종… 완성형이요? 그건… 무슨 뜻이에요?' 「난 알고 싶어. 이 우주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날 속박하고 있 는 카르마를 풀어줄 수 있는 사람, 우주를 유지하는 본질의 법칙이 무엇인지 밝혀낼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난 널 선택했어. 나는 수십 억 년 동안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렸어.」 소름끼치는 느낌에 휩싸인 채, 눈을 감았다. 차마 마더와 시선을 마 주치는 게 두려웠다. 아틀란티스를 가라앉히고, 사도에게 저주를 내리고, 아담과 이브가 에덴 혹성을 만들도록 한 행위. 아무런 연관없는 듯한, 무차별적인 우연의 발생과 운명의 장난이 합쳐진 것으로 보이는 모든 사건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독립된 사건이 아니었다. 모두가, 인간들 전부 가, 아니 피조물 전부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마더의 손에서 놀아 났던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은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마더가 연출한, 장대한 한 편의 시나리오였던 것이다. 까닭 없는 웃음을 터트린 예안은 이윽고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싫어요. 당신 뜻대로 하지는 않을 거예요.' 「어째서?」 '당신 말대로라면 내가 이렇게 불행하게 된 것도 결국 당신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거잖아요? 유빈이가 죽은 것도, 아빠가 살해당한 것도 전부 다 당신 때문이라는 말이잖아요? 그런 사람을, 아니, 당신 은 사람이 아닌가요? 하여튼 그런 존재를 위해 내가 일해야 할 이유 는 없어요!' 죽일 테면 죽여라. 벌레를 가지고 놀듯 자신을 가지고 논 존재의 시 나리오대로 따라가지는 않겠다. 그녀의 눈빛에는 그런 의지가 뚜렷이 살아있었다. 마더는 잠시 물러났다. 눈앞에 떠오른 마더는 여전히 자애로운, 하지 만 전혀 사랑할 수 없을 듯한 미소를 띤 채 손을 내밀었다. 두 손이 뺨을 감싸자 예안은 흠칫 했지만 입술을 꾹 깨물고 참았다. 여기서 놀라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 여기서 주눅드는 모습을 보 일 순 없다. 그것은 마더에게 무릎 꿇는 것이다. 「레파드웬이라는 아이도 너처럼 처음에는 내 말대로 할 수 없다고 거부했어. 하지만 곧 수락했지. 너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거야.」 '웃기지 말아요!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날 이 꼴로 만든 당신의 뜻대로 따를 순 없어요!' 「네 아이를 살려줄게.」 한순간, 호흡이 멎었다. 예안은 놀란 감정을 인식하지 못할 만큼 굳어버렸다. 창백해진 피부 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뭐…라고요?' 「네 아이를 살려줄게. 우주의 법칙을 밝혀낸다는 조건으로.」 이것은 꿈인가. 아니면 환청인가. 무어라 대답해야 하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겠다고, 그렇게 하자고 대답을 해야하는데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두렵고 무섭기 때문이었다. 이 순간 또한 마더의 장대한 시나리오 중 일부라는 것만큼은 어렴풋 이 느낄 수 있었다. 오로지 이 순간을 위해 일만 년 전 아틀란티스를 가라앉히고, 백여 년 전 사도에게 저주를 내린 존재다. 최후의 거래 를 성사시키기 위해 그 아이를 죽였다는 것쯤은 눈감고도 훤히 추측 할 수 있다. 그렇다. 따지고 보면 눈앞의 이 존재야말로 자신의 진정한 원수다. 아틀란티스니 사도니 뭐니 하는 것들은 죄다 이 존재의 손바닥 위에 서 놀아났을 뿐이다. 본질적으로는 자신과 같은 피해자이다. 하지만 더 이상 마더에 대한 증오는 피어오르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마음을 꽉 채운 것은, 그 사랑스러운 아이를 다시 한 번 이 품에 안 아보고 싶어하는 어미로서의 본능이었다. 그것까지 계산에 넣고 일을 추진한 마더, 당신은 정말 대단해. 그러 니까 신이겠지. '…하겠어요.' 입술을 꽉 깨문 채로 그녀는 내뱉었다. 협박에 굴복한다는 수치심은 없었다. 있다면 오로지 아이를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설렘만이 가득했을 뿐. 부드러운 미소를 띤 마더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희고 가느다 란 손가락으로 뺨을 감싸고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보슬보슬한 보라 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뺨을 간질였다. 마더의 몸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눈부신 빛이 뿜어지며 예안 의 눈을 뜨지 못하게 했다. 이윽고 빛이 사라졌다. 예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주변의 풍경은 익 숙한 맥의 조종석이었다. 마더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꿈은 아니다. 눈앞에 부유한 채 찬란하고 푸른 빛을 발하고 있는 보석이 그것을 증명했다. 가만히 손을 뻗어 보석을 쥔 예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손안에 쥐어 지는 딱딱한 감촉이 새로운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자이오 다이아몬드…." 이것만 있으면 아이를 다시 살릴 수 있다. 그 아이를 다시 이 품에 안아볼 수 있다. 은하수를 가린 붉은 대기가 지구에서 거둬진 날, 신은 최후의 선악과 를 하사했다. by eden 「기체 내부에 자이오 다이아몬드 존재 감지, 완전체와 일치율 100% 임을 확인, 조물주 프로젝트 및 그와 대등한 작업 실행 가능. 변신에 필요한 조건이 충족되었으므로 본 기체는 지금부터 파일럿의 승인 없이 단독으로 2단계로 변신 시도합니다.」 느닷없는 기계음에 예안은 화들짝 놀랐다. 맥은 더 이상의 설명 없이 굵직한 진동을 일으키며 무언가로 변하기 시작했다. 디스플레이에 단면도가 떠올랐다. 인간형으로 변신해 있던 맥은 천천 히 모습을 바꾸었다. 흉갑판이 열리며 팔이 접혀 들어가고, 날개가 접혀 사라진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에 맥은 안테나가 달린 거대한 원반형 물체로 변해 있었다. 처음 보는 녀석의 모습에 그녀는 할 말을 잊었다. 녀석에게 이런 기 능이 있다는 거, 지금까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녀석은 도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이윽고 맥은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여덟 개의 은폐 위성과 교신을 시도했다. 그 어느 나라 감시 체계에도 들키지 않은 채 지금까지 줄 곧 지구 주위를 공전하고 있던 인공 위성들이었다. 파르스름한 파장이 일어나 위성과 위성을 연결했다. 거미줄처럼 늘어 진 파장은 지구 바깥을 넓게 감싼 채 강한 빛을 내뿜었다. 그 네트워 크 한가운데에는 맥이 있었다. 예안은 디스플레이를 통해 지금 눈앞에 일어나는 모든 광경을 생생 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말릴 생각도, 무엇을 하는 중이냐고 물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드디어 모든 단계가 끝났다. 디스플레이에 나타난 조준점은 지구를 정면으로 겨누고 있었다. 맥이 물었다. 「완전한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확보되었으므로 조물주 프로젝트 시 행 가능합니다. 그러나 본 기체에 장착된 혹성 제조 기술이 조악한 관계로 조물주 프로젝트 실현을 위해서는 최소 지구 이상 가는 질량 의 물체를 필요로 합니다. 프로젝트 시행하시겠습니까?」 "너…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지구를 멸망시키겠느냐는 물음이라는 것을 깨닫자 퍼뜩 정신이 돌아 왔다. 맥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제2의 에덴 혹성 탄생이 가능합니다. 시행하시겠습니까?」 "웃기지 마!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그런데 써버리면 유빈이는 어떻게 살리란 말이야!" 「제 ST기관에 있는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사용하면 됩니다. 물론 저 는 파괴되겠지만 그것 또한 제 사명이랄 수 있으니까요.」 아찔한 유혹이 그녀를 엄습했다. 지금 맥은 거부하기 힘든 선택을 강 요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리고, 그 희생으로 만들어 진 새로운 낙원에서 아이와 영원히 단둘이 행복하게 살아갈 생각이 있느냐고. 도저히 뿌리치기 힘든 선택이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혼자서도 살아 갈 수 있는 인간임을 알았다. 구인류와 더 이상 교류하지 않아도 외 로워하지 않는 인간임을 깨달았다. 유일한 피붙이만 곁에 있다면 영 원히 행복을 만끽하며 살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러겠다고 대답하려 했다. 그 순간 머리 속에서 안개처럼 형 성된 미련이 그녀를 붙잡았다. '엄…마? 혜인아…?' 희뿌연 안개를 배경으로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이 차례차례 나타났다. 그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의 피로 만들어진 행복을 정말 누릴 거냐고 어둠은 물었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비명 을 질렀다. "아악! 아악!" 맥은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이것은 그녀에게 주 어진 최대의 시련,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녀는 가벼운 운명 위를 걸 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감안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 혼자 서 해내야 할 몫이다. 이윽고 비명이 그쳤다. 그녀의 두 손이 힘없이 밑으로 늘어졌다. 상 당히 지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큼은 살아있었다. "조물주 프로젝트는 취소야."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정말 실행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실행하지 않아. 지구를… 없앨 수는 없어." 「하등한 인간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을 택하셨군요. 한 번 더 묻 겠습니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또다시 반복된 확인을 통해, 그녀는 맥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지 금 선택의 길로 또한 마더의 준비. 조금이라도 마더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길을 지금 자신은 스스로 차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마더 따윈 어찌 되어도 좋았다. 자신과 동등할 수 없다 하나 진심으로 좋아했던 사람들을 죽일 수는 없는 법. 자신은 오리지널 유 젤, 케이, 그리고 제이와는 다르다. 구동음이 울렸다. 맥은 다시 원래의 형태로 되돌아갔다. 인공위성과 인공위성을 연결하던 거대한 푸른 실이 끊어지듯 사라졌다. 활동을 정지한 인공위성은 지구의 인력에 끌려 들어갔다. 몇 년의 세 월을 조물주 프로젝트 완성만을 위해 인내해온 그것들은, 마더에게 선택받은 인간이 거부함으로써 타 버린 먼지가 되었다. 조종석의 분위기는 가라앉은 듯 차가웠다. 이윽고 맥이 예전과 다름 없이 활기차게 말을 걸었다. 「안타깝습니다. 모처럼의 환골탈태가 주화입마에 걸려 그렇게 허무 하게 무로 돌아갔으니.」 심각한 느낌이 사라지자 예안도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네 ST기관에도 자이오 다이아몬드는 있잖아? 그걸 썼으면 진작 환 골탈태 할 수 있지 않았어?" 「제 목숨줄을 포기하면서 환골탈태해봐야 뭐합니까. 자, 그만 지구 로 돌아가시지요. 유빈님을 살릴 준비를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맥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맥 또한 마더로부터 어떤 계시를 받은 것은 아닐까. 지울 수 없는 의문이 눈앞을 가렸으나 그녀는 곧 걷어치웠다. 그런 것을 파고드는 것은 이제 무의미한 일,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는 것 이 중요할 뿐이다. 붉은 빛이 거둬지고 푸른 하늘이 다시 나타났다. 창백한 얼굴로 기다 리고 있던 제임스는 문이 열리자 재빨리 나섰다.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죠?" 레이온은 수척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은 허무해 보이기도, 처량해 보이기도 했다. "기억하고 있나? 지난 열흘 동안 있었던 일을?" "기억 못할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데!" "이상하군. 네가 어떻게 마더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지?" 강한 의구심을 품은 눈동자가 바라보자 제임스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 느낌을 받았다. 말없이 그를 꿰뚫어보던 레이온은 됐다는 듯이 시선을 거두었다. "제임스, 이제 너는 떠나도 좋다." 처음 제임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예?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이제 그만 떠나도 좋다. 난 더 이상 널 보호할 의무도, 그리고 여유 도 없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건 너 자신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위험으로 몰아넣을 뿐이야. 차라리 나와 떨어져 행동하는 게 네 안전을 확보하는데 유리할 거다." 무언가 심상치 않다. 항상 자신만만하던 이 남자가 왜 이리 수척해졌 단 말인가. "칼은 어떻게 됐지요?" "확인이 필요한가?" 가볍지 않은 어조에서 제임스는 얼핏 알아버렸다. 표정이 어두워진 그는 황급히 시선을 외면했다. "유, 유감이군요." "좀더 진심을 다해서 조의를 표해도 좋잖아? 일부러 네 마음을 그렇 게 숨길 것까지는 없어, 안 그래?" 사람을 놀리는 건가. 아니면 꾸짖는 건가. 꽤 오래 같이 지냈음에도 여전히 알 수 없는 남자이다. 세계를 멸망 시키거나 지배할 힘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항상 고뇌하기만 하는 걸까. 한숨짓는 제임스를 내버려두고 레이온은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제임스는 무거운 시선으로 멀어지는 레이온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묵직한 그 시선을 느꼈는지, 레이온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제임스, 내 말을 헛되이 듣지 마라. 지금의 내 곁에 있으면 넌 위험 해져. 내가 아직 이성을 갖고 있을 때, 지금 떠나는 게 너에게도 좋 을 거야." 결코 떠나지 않겠다 따위의 대답을 한다면 나름대로 멋진, 영화 속의 한 부분 같은 장면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는 어디까지나 스스로 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레이온을 따랐을 뿐, 그와 함께 세상의 끝까지 가줘야 할 의무는 없다. 자기 멋대로 마음이 결정을 내리는 것을 느낀 제임스는 억지로 어두 운 표정을 폈다. "알았어요. 나도 나 싫다고 밀어내는 사람 곁에 오래 있을 생각은 없 으니 안심하세요." "탁월한 선택이야. 부디 아틀란티스에 잡히지 않도록 해." "그래도 걱정은 해주는군요. 염려하지 마세요. 나도 내 앞가림 정도 는 할 수 있으니까." 정중함이 지나쳐 차가웠던 처음과는 다르게, 쾌활하게까지 느껴지는 음성이다. 모처럼 정이 든 녀석과 이대로 갈라서야 한다는 게 아쉬웠 지만 레이온은 그 마음을 숨겼다. 어차피 언젠가는 갈라져야 할 사이, 그리고 갈라서기에는 지금이 가 장 적기이다. 잠시 후 제임스가 떠났다고 넬이 보고했다. 스위스 은행 구좌 하나를 주려고 했는데 그것까지 사양하고 가버렸다고 했다. 녀석에게 돈은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마지막 성의를 거절하니 조금 섭 섭했다. 밤이 찾아오기까지 레이온은 멍하니 천체 망원경을 들여다보았다. 다 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우주만 관찰했다. "무엇을 보시는 중인가요?" 간단한 야식거리를 챙겨온 넬이 물었다. 레이온은 초췌한 안색으로 렌즈만 들여다보았을 뿐, 넬을 돌아보지도 과자에 손을 뻗치지도 않 았다. "에덴 혹성을 보려는 중이야. 하지만 안 보여." 쓴웃음을 짓던 레이온은 갑자기 망원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나 높이만 3미터에 달하는 거대 망원경이 그의 주먹에 부서질 리가 만 무했다. 애꿎은 망원경에 화풀이를 하던 레이온은 이윽고 지친 얼굴로 의자 에 주저앉았다. "난 지구에서 제일 가는 천재 과학자야."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에덴 혹성을 관찰할 수 있는 망원경 하나 만들 수 없는 거지? 아담과 나는 그렇게나 큰 차이가 난단 말이야?" 넬은 생각을 할 줄 알고 감정을 느낄 줄 아는 안드로이드이다. 그녀 는 치열하게 살아온 주인의 고뇌를 진심으로 이해했다. 평소 같지 않게 레이온은 무척 심약하고 불안해하는 표정이었다. 하 기야, 꿈을 이루기 위한 모든 제반을 갖췄는데, 가장 중요한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없으니 초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그라 해도 10억 년의 세월을 뛰어넘을 순 없다. 그를 몇 단계 나 건너뛴 아담조차도 자이오 다이아몬드의 원석을 직접 만들어내지 는 못했다. "박사님. 유젤님께 청혼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무슨 소리지?" 레이온은 지친 얼굴을 들어 넬을 노려보았다. 불쾌함보다는, 왜 그런 말을 하느냐는 어이없음이 더 강한 표정이었다. "이제는 인정하셔야 합니다. 박사님의 계획은 완벽하지만, 애초에 가 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었다는 것을요. 아무리 모든 준비를 다 갖춰놓 아 봐야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없다면 신인류가 될 수 없는 것은 당 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박사님이 신인류가 되려고 했던 이유를 생각해보세요. 유젤님을 사 랑해서가 아니었나요?"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수척해진 시선을 떨어뜨리고 생각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정확하게 꿰뚫는 말이다. 애초에 자 이오 다이아몬드를 손에 넣으려 했던 이유, 신인류가 되려 했던 이 유, 그것은 바로 유젤을 사랑해서가 아니었나. 하지만 그는 곧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넬, 아직 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어.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손에 넣 는 건 불가능하지만은 않아." "맥의 ST기관을 말씀하시는가 보군요. 설마 맥이 순순히 박사님에게 자기 생명을 내어주리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어떻게 알았지?"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그 정도는 충분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잠시 의외라는 표정을 띠었던 레이온은 쓰게 피식거렸다. 네 말이 틀 리지는 않아, 라고 말하는 듯했다. "유젤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만약 자기가 남자와 맺어진다면, 거기 에 어울리는 상대는 박사님밖에 없다는 것을요. 굳이 신인류가 되려 는 위험까지 무릅쓸 필요가 있습니까?" "네 말은 틀렸어. 내가 구인류에 머물러 있는 한, 유젤이 나에게 주 는 사랑은 동정일 수밖에 없으니까." "한 마디로 배가 부르다는 거군요."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한기 띤 눈동자는 더 이상 허튼 소리를 하면 부수어 버리겠다는 의 지를 띠고 넬을 노려보았다. "이번 한 번은 용서해주겠다. 다시는 그런 소리 지껄이지 마라." "박사님. 전 박사님을 위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어쩌면 유젤님은 박사님의 그 같은 집착 때문에 부담스러워하며 피하는 건지도 모른 다고요." "뭐라?" 가차없다는 듯이 일어나려던 레이온은 그 말에 멈칫했다. 그가 흥미 를 보이자 넬은 됐다 여기고 재빨리 덧붙였다. "박사님이 조금만 여유롭게 물러나셨으면, 그처럼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조금만 느슨하게 놓아주셨으면 유젤님은 진작 박사님과 맺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지나치게 몰아붙이면 여자는 호감을 느끼다 가도 두려워하기 마련입니다. 박사님은 여자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 른다고요." "넬, 지금 그 애를 점령하고 있는 건 여자 마음이 아니야. 나와 이야 기 한 번 해본 적 없는 구인류 소년의 마음이야."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차피 유젤님은 처음부터 어엿한 여성분이 었지 않습니까?" 묵묵히 넬을 바라보던 레이온은 이마를 손가락으로 짚고 곰곰이 자 신을 되돌아보았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아니, 생각해보니 지독하게 그 애를 몰아붙 였던 것 같기도 하다. 몇 년 동안 굳게 지켜온 결심이 흔들렸다. 힘들겠지만, 초조함을 억 누르고 조금쯤은 느슨하게 놓아줘 볼까. 그럼 넬 말대로 정말 나에게 마음을 열어줄까.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고민을 하던 레이온은 통신음이 삐익 삐익 울리자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인지 서둘러 살핀 넬은 안도했다는 표정을 띠며 돌아보았다. "맥이 돌아왔습니다." by eden 「대기권 진입합니다.」 잠깐의 진동이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인간의 기술로는 건조할 수 없 다는 기체답게, 맥은 별다른 저항 없이 대기권으로 들어왔다. 허공에 떠 있는 흰 구름을 헤치고 하강하자 푸른 대지가 한눈에 가 득 들어왔다. 인간의 손에 많이 오염되고 황폐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지구이다. "형이 있는 곳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맥은 어렵지 않게 레이온의 비밀기지를 찾아냈다. 예안은 어떻게 그 렇게 쉽게 알아냈느냐고 타박하지도 추궁하지도 않았다. 레이온의 기지는 훗카이도에서 서쪽으로 약 3천km 정도 떨어진 지 점에 잠수해 있는 거대 잠수함이었다. 비록 한 척의 잠수함이지만, 그 규모와 크기는 가히 기지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맥의 접근을 알아차렸는지 잠수함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해수면에 넓게 파동이 일어나며 검붉은 빛깔의 함체가 드러났다. 선미에 마련된 헬기 출입장에 맥은 사뿐히 내렸다. 이윽고 함교가 열 리고 레이온이 나타났다. 가볍게 맥에서 뛰어내린 예안은 아무렇지 않게 레이온에게 다가갔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조금 머뭇거렸다. "왜 그렇게 수줍어 해? 형답지 않게." 그녀가 가볍게 미소를 띠며 말을 건네자 그는 짐짓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날 원망하지 않아?" "내가 왜 형을 원망해야 되는데?" "그러니까… 난…." 네가 그 꼴이 되도록 모든 것을 방관했으니까. 어렵사리 말을 떼려는 순간 예안은 손가락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형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들어서 의미 없을 거라 생각해. 적어도 형이 날 해치려는 의도는 갖고 있지 않다는 것 은 알고 있으니까." 용서해주는 건가. 아니면 모른 체 하는 건가. 감명 받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레이온은 두 팔을 들어 덥석 껴 안았다. 신기하게도 그녀는 뿌리치지 않았다. "샤워하고 싶어. 안내해 줘." "알았어." 레이온은 황급히 그녀를 함내로 안내했다. 왠지 휘둘린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즐거웠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옷가지를 다소곳이 챙겨든 넬이 그녀를 안내했다. 넬을 흘끗 바라보 던 그녀는 말문을 닫고 따라갔다. 옷을 벗고 물줄기에 몸을 맡긴 그녀는 눈을 감았다. 마음의 티끌을 씻어내는 듯 무척 상쾌했다. 머리를 털면서 나오자 다소곳이 포개놓은 가운이 보였다. 가운을 걸 치고 띠를 맨 뒤 물에 젖은 머리카락에 수건을 둘렀다. 잘 둘러지지 않자 몇 번 낑낑대다가 포기했다. 넬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어떤 방으로 안내했다. 여자애가 선호 할 만한 아늑한 느낌의 방이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라고 작게 중얼거린 그녀는 머리를 털며 의자에 앉았다. 이윽고 레이온이 들어왔다. "기분은 어때?" "지금은 괜찮아. 걱정할 것 없어." 레이온은 몹시 망설였다. 크게 상심하고 슬퍼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 히려 덤덤해 보이자 더욱 걱정이 되었다. 신인류가 초연해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구인류에 관계된 일이다. 자기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은 구인류건 신인류건 가리지 않고 사람을 슬 픔에 빠뜨리게 하는 것, 그런데 그녀는 너무 태연했다. "에덴 혹성에 갔다 왔어." "그랬어?" "오리지널 유젤, 그러니까 내 본체였던 사람을 만나고 왔어. 줄리어 스라던가? 귀여운 남자아이까지 두고 잘 살고 있더라."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싶어 슬쩍 미끼를 던졌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이까지 두었다는 말을 들은 사람 같지 않게, 그는 너무 침착했다. 표정에 조금도 변화가 없 었다. "마인드 컨트롤의 개념을 알고 있니?" "무슨 소리야?" "난 분명 오리지널 유젤, 그러니까 너의 본체였던 여자를 좋아했던 적 있어. 하지만 그 애는 날 버리고 가버렸지. 그래서 난 내가 떳떳 하게 사랑할 수 있게끔 널 탄생시켰고… 난 널 사랑한다고 내 스스 로를 바꾸는데 성공했어. 대답이 됐니?" 그것을 순수한 애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맴돌았지만 그녀는 관두었다. 적어도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한 점 거짓도 없다. 그는 자 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는 것도 감수할 남자다. 그 뜨거운 열정을 조금만 식히고, 조금만 느슨하게 조였더라면 예전에 그를 선택했을지 도 모른다. "나, 형이랑 결혼해줄까?"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놀란 레이온은 잡아먹을 듯 그녀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었다. 그의 반응이 부담스러웠던 그녀는 시선을 돌리며 머뭇거리듯 덧붙였다. "아니, 뭐 사실 유빈이한테도 아빠가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멀쩡한 친아버지 내버려두고 다른 남자를 아빠라고 소개시켜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형 말고 다른 남자들이 특별히 내 마음에 드는 것 도 아니고… 아, 몰라! 그냥 못들은 걸로 해!" 다른 말은 전혀 귀에 안 들어왔다. 그녀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만이 그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그거 정말이야? 나 놀리는 거 아니지? 우리 정말로 결혼할 수 있는 거지? 그렇지?" "부부관계 없는 부부라도 괜찮다면 그렇게 하자." 레이온은 대번에 김이 팍 샌다는 표정을 띠었다. "그런 것도 안 하면 재미없어서 어떻게 살아?" "재미도 없고 아이 교육에도 안 좋은 그런 걸 왜 해? 게다가 남자 앞에서 다리 벌려봐야 별로 즐거울 것 같지도 않아." "그게 얼마나 좋은지 네가 잘 몰라서 그래. 뭣하면 지금 여기서 알려 줄까?" 묘한 미소를 띤 레이온은 몸을 기대며 가운을 살며시 들췄다. 황급히 그의 손을 뿌리친 그녀는 칫 하고 투덜거렸다. "내가 좋아서 못 산다고 할 땐 언제고 그동안 다른 여자와 많이 놀 아나셨나 보군. 그런 소리 하는 거 보니 말이야." "무슨 소리야? 난 다른 여자 같은 건 일절 몰라." "그럼 그게 좋은지 안 좋은지 어떻게 알아?" "너, 설마 유빈이가 시험관 아기로 태어났다는 말을 여태껏 믿고 있 는 건 아니겠지?" 순간 그녀는 굳어버렸다. 이상한 감정이 가슴에서 들끓었다. 유젤을 독점하고 싶어하는 유진우 의 마음이 다시 눈을 뜬 것이었다. 레이온이 유젤의 알몸을 껴안고 있는 광경을 상상한 순간, 유진우의 마음은 육체를 싸늘히 얼어붙게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형?" 애써 침착함을 연기한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미미하게 떨리는 녹색 눈동자는 분노를 감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찬가지로 침착해진 레이온은 새삼스러울 것 없다는 듯이 시선을 살짝 외면했다. "그냥 해본 소리야. 난 아직 너한테 손가락 하나 댄 적 없으니 안심 해도 좋아." "거짓말, 아니지?" "그런 걸로 거짓말은 하지 않아." 등을 돌려서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조 금 쳐진 듯한 어깨를 통해 무척 심란해하고 있다는 것은 또렷이 느 낄 수 있었다. '역시 그 마음이 그대로 남아있군. 울적하기는 하지만 계획에 차질은 없다는 뜻이니 웃어야 할까….' 그가 속으로 무슨 말을 중얼거렸는지는, 그녀가 알 리 없었다. 제정신이 들자 그녀는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기껏 그를 들뜨게 해놓 고 차갑게 추궁하다니. 약을 주었다가 다시 빼앗아온 꼴이었다. "저기, 형. 섭섭해하지 말고 나 좀 이해…." "잠깐, 그런데 유빈이한테 아빠를 만들어주고 싶어졌다는 건 무슨 뜻 이야?" 그제야 아까 그녀가 한 말에서 오류를 짚어낸 그는 의아함을 품고 돌아보았다. 죽은 아이를 거론하는 것이 그녀에게 못할 짓이지만, 이 경우는 정말 이상했다. 자랑하듯이 씩 웃어보인 그녀는 주섬주섬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짠! 이게 뭔지 알아?" 푸른 빛이 반짝이는 보석에 시선이 닿은 레이온은 대번에 흙빛이 되 었다. 그는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자이오 다이아몬드? 아니, 어떻게 그걸?" "설명하자면 길어. 하지만 유니콘의 ST기관에서 꺼낸 건 아니니까 바보 같은 상상은 마. 난 유니콘을 죽일 생각은 없다고." 수축된 표정을 지우지 못하던 레이온은 이윽고 얼어붙은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마더를 만났니?" 흠칫 놀라워하던 예안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어쩔 수 없지'하고 중얼 거리고는 끄덕였다. "여기 오기 전에 마더를 만났어. 마더가 어떤 조건을 내세웠는데 그 것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받았어. 이걸로 유빈이 를 살려낼 생각이야." 비로소 어떻게 된 건지 그는 이해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줄곧 슬픈 표정이 아니었구나. 그는 뚫어져라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응시했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빛 깔이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욕망을 자극했다. "형, 뭐해?" 넋이 나가 있던 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속 마음을 들킨 기분이 든 그는 얼른 표정을 얼버무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직접 보는 건 처음 이라서…." "전에 내 배를 가르고 꺼내간 것은 어쩌고?" 그녀는 짓궂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할 말이 없어진 레이온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지울 수 없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그의 얼굴에 번갈아 가 며 나타났다. "그건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그때의 난 어쩔 수 없…." "지나간 일은 그만 이야기하자. 나도 그 일을 가지고 별로 형 추궁하 고 싶은 생각은 없어." 다 이해한다는 듯한 말투에 그는 가슴이 울컥함을 느꼈다. 얼마나 듣 고 싶어했던가. 저런 다정한 말을. "자이오 다이아몬드의 힘을 끌어내려면 몇 가지 특수기기가 필요해. 오늘은 너무 늦은 데다 피곤해서 곤란하고, 내일부터 만들 생각이니 까 이 기지 시설 좀 빌려줘. 난 이만 쉴 테니까 형도 돌아가." 억지로 등을 떠밀리듯 나온 레이온은 복잡한 표정으로 닫히는 문틈 을 바라보았다. 아름답게 빛나는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눈앞에 아른거 려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박사님." 걱정에 가득 찬 넬의 음성이 몇 번을 불렀을 때에야 그는 겨우 상념 에서 깨어났다. "아, 넬? 무슨 일이지?"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유젤님 방 앞에 서 계실 생각이십니까? 가서 주무시는 게…." "아, 그래야지."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었던 레이온은 화끈거리는 뺨을 가리며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어째서 넬 앞에서 가면을 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넬에게는 무슨 일이든지 털어놓고 의논하거나 명령할 수 있는데도. 그날 밤 그는 밤새도록 침대에서 뒤척였다.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눈 앞에 아른거려 잠이 오지 않았다. 밤하늘이라도 구경하면 잠이 올까 생각한 그는 조용히 부상하도록 명령하고는 방을 빠져나왔다. 함교로 나오자 반짝이는 별이 가득히 수놓인 하늘이 그를 맞이했다. 소금기를 거느린 찬 공기가 어쩐지 자신을 비웃는 듯해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잠깐의 산책을 마치고 함내로 돌아간 그는 예안의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잘 자나 한 번 보고 갈까…." 그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피곤했던지 예안은 이불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신인류도 잠을 자기는 자는구나. 이론상 그들은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ST기관을 통해 영구히 생산할 수 있을 텐데, 휴식을 취할 이유가 있을까. 신인류 육체의 매커니즘에 관한 의문을 잠시 접어둔 채, 그는 살며시 그녀의 머리맡에 앉았다. 조용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이 불을 걷었다. 그녀가 깰 새라 조심스러운 손길로 옷을 벗겼다. 가운이 벗겨지며, 깨끗하고 투명한 피부가 드러났다. 양쪽 허리에 길게 난 상처를 말없이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미안함과 죄책감을 담은 손길이 상처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상처 자국에 살며시 키스한 그는 미안해 라고 들리지 않도록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 푸른빛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흠칫 놀라 그녀의 머리맡을 바라보았다. 베개 옆에 놓인 그녀의 손이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소중 히 쥐고 있었다. 그는 자이오 다이아몬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손을 뻗어 보석을 움켜쥐었다. 딱딱한 감촉이 손에 쥐어지는 순간, 견디기 힘든 유혹이 가슴에서 꿈 틀거렸다. 이것만 있으면 그녀와 동등해질 수 있다는 속삭임, 그것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보석을 쥔 채로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 형이랑 결혼해줄까?」 '결혼할까'가 아닌 '결혼해줄까'. 그것은 동등한 의미에서의 베품이 아 닌 동정. 억측이 아니다. 그녀는 무심결에 자신을 동정하고 있다. 그 런데 자신은 바보같이 본래의 목적을 잊고, 그녀의 동정을 받을 수 있다는 설렘에 취했다. 「부부관계 없는 부부라도 괜찮다면 그렇게 하자.」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 그것은 고작 그 정도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마음에 대고 물었다. 이대로 그녀가 하자는 대로 수긍 하는 게 행복한가 하고. 곧바로 '아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등한 사랑이 아닌 동정으로 는 결코 자신도 그녀도 행복해질 수 없다고. 그의 마음을 이루고 있는 어둠이 형상을 갖추었다. 형상은 그에게 손 가락질을 하며 꾸짖었다. 고작 그런 농담에 설레는 게 잘하는 짓이냐 고 크게 호통쳤다. 어두운 빛이 그의 얼굴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 정히 쓰다듬던 그는 허리를 숙이고 입을 맞췄다. 그녀는 잠시 뒤척거 렸을 뿐 잠에서 깨어나지는 않았다. 하나의 결심이 굳어지는 순간, 놀라우리만치 마음이 차분해졌다. 부 서진 돌 조각처럼 남아있던 죄책감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는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쥔 채로 살며시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느껴졌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마음 속을 맴돌았다. 호흡이 가빠졌다.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질 듯 비틀거리던 그는 입술 을 질끈 깨물고 내달렸다. by eden 상쾌하지 못한 기분으로 예안은 눈을 떴다. 간밤에 이상한 꿈을 꾼 듯 컨디션이 무척 저조했다.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그녀는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쯤 깨어났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이상하게 레이온은 나타나지 않았다. 별일도 다 있다 싶었다. 자신이라면 끔찍이 여기는 그가 아침이 되었 는데도 찾아오지 않다니.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있다 해서 거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아 니다. 무한동력은 어디까지나 연료일뿐, 연료를 사용할 수 있는 기기 장치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설계도를 새로이 만들 필요는 없었다. 맥의 기억회로에 있으므로. 시 간을 소모할 필요 없이 착실하게 설계도대로 기기를 만들면 된다. 제 작 설비는 이 잠수함 기지에 충분히 있을 터이다. 기기를 제작하기에 앞서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잘 있나 침대 위를 확 인해본 예안은 조금 당황했다. "어디 갔지?" 간밤에 손에 꼭 쥐고 잔 것 같은데 없었다. 베개 밑이나 침대 아래에 떨어뜨렸나 싶어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처음에는 잠버릇이 나빠 방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게 아닌가 했 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았다.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울고 싶은 마음을 꼭 누른 채 그녀는 열 심히 찾고 또 찾았다. 그러나 어디로 꼭꼭 숨었는지 나오지 않았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 뒤돌아보았다. 어느새 들어온 넬이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예안은 불안감이 점점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망설인 끝에 힘들게 입 을 떼었다. "저기, 형은 어디 있어?" "박사님은 떠나셨습니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한 마디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대답에 그녀는 흙빛이 되었다. "떠, 떠났다면 어디로…?" "처음 인연이 시작된 곳에서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혹시… 혹시…." 자이오 다이아몬드의 행방을 묻고 싶었으나 쉬 입이 떨어지지 않았 다. 그녀의 진심은 대답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넬은 잔인했다. 예안의 망설임 따위는 이해해주지 않고 무뚝 뚝하게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자이오 다이아몬드는 박사님께서 가지고 가셨습니다. 유빈님을 살려 내는 것보다 더 의의가 있는 곳에 쓰신다고요." 순간 예안은 자리를 박차고 넬에게 달려들었다. 멱살을 잡혔지만 넬 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일말의 반항조차 없었다. 마치 그러고 싶으면 그러라는 듯이. "안 돼! 그건 유빈이 살리는데 써야 한단 말이야!!" "저는 명령한 대로 따를 뿐입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집어 쳐!! 어딨어! 형, 아니 그 미친 자식 도대 체 어딨냐고!" 처음으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하늘이 찢어진다 해도 그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게 어떤 건데, 어떻게 해서 겨우 얻은 귀중한 물건인데, 그것을 멋 대로 가지고 달아나? 세상 모두가 적이 된다 해도 그만큼은 영원히 편이 되어주리라 믿었 다. 그래서 지구에 돌아오자마자 아무 망설임 없이 그를 찾아왔다. 헌데 이렇게 뒤통수를 쳐? 미친 듯 날뛰며 넬의 온몸을 후려쳤다. 마치 넬이 레이온인 듯 마구 때리고 짓밟고 내팽개쳤다. 폭주한 그녀의 손끝에서 형성된 빛의 칼 이 전신을 난도질했지만, 넬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지쳐버렸다. 엉망진창이 된 넬을 놓아주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허탈한 마음만이 가슴을 가득 맴돌았다. 집착을 넘어선 사랑, 단지 그것뿐인 줄 알았다. 집착이 강했기에 오히려 더욱 믿을 수 있는 사 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배신하다니. "박사님은 유젤님을 배신한 게 아닙니다. 그 분은 여전히 당신을 자 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십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집어 쳐." 미약한 음성에는 분노 대신 짙은 피로만이 가득했다. 화를 낼 힘조차 떨어진 것이다. "정말입니다. 그 분이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가져가신 건, 유빈님을 살려내는 것보다 유젤님이 더 원하실 만한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입 닥쳐. 지금 나한텐 유빈일 살려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 이를 악물며 일어난 예안은 손끝에 빛의 칼을 만들었다. 시퍼렇게 빛 나는 칼끝을 넬의 목에 겨누고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 자식은 지금 어디 있지?" "처음 인연이 시작된 곳에서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그렇게만 대답하면 아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이상은 저도 알 지 못합니다." 거짓말이다. 저 눈은 분명히 무언가를 아는 눈이다. 안드로이드라고 하나 그것만큼은 구별할 수 있다. 빠드득 이를 갈던 중 번개같이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맥에게 물었다. '유니콘, 형이 복제작업을 실행했던 장소가 어디지?' '유젤님이 태어나신 장소 말씀이십니까?' 평소라면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 말라고 타박했을 테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어딘지 알아?' '알고 있습니다.' '그럼 됐어. 출발 준비 해.' 사납게 넬을 홱 노려본 예안은 더 이상 볼일은 없다는 듯 서둘러 그 곳을 빠져나왔다. 혼자가 된 넬은 엉망이 된 몸뚱이를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수리 머신을 불렀다. 바퀴 달린 수리 머신이 다가와 넬을 들어올렸다. 이동까지 수리 머신 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넬은 망가져 있었다. 격납고로 달려간 예안은 서둘러 맥에 탑승했다. 맥은 그녀의 초조함 을 안다는 듯 재빨리 출구를 박차고 빠져나왔다. 고도 2천까지 상승한 맥은 잠시 허공에 멈췄다. 전투기 형태로 변신 한 맥은 넓은 바다 위를 쏜살같이 날기 시작했다. 음속을 훨씬 초월 한 속도에 공기가 뻘겋게 마찰을 일으켰다. 이윽고 어떤 섬의 상공에서 맥은 정지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있 는 외딴 무인도였다. 하늘에서 내려다보기에도 수풀이 우거져 있는 것이, 도저히 문명인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비밀연구소를 숨기기에는 이곳보다 적 합한 장소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맥을 잠시 정지시킨 예안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유젤이 태어난 곳이 라 하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들떴다. '진정해, 유진우. 넌 지금 중요한 물건을 찾으러 온 거야. 한가하게 소풍을 온 게 아니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꾸짖은 예안은 맥을 백사장에 천천히 하강시키려 했다. 그 순간 절벽에 숨겨진 발칸포에서 요란한 폭음과 함께 탄이 쏟아져 내렸다. 탄은 대부분 맥에 직격했다. 초고강도를 자랑하는 장갑판은 물론 끄 떡없었다. "뭐야? 지금 날 공격한 거야?" 「이 기지에는 본래 자동반격장치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레이온 박 사의 본뜻은 아닐 겁니다.」 "너, 설마 그 자식을 편드는 거야?" 「냉정한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 레이온 박사가 유젤님을 공격할 의 사가 있었다면 기습적으로 핵폭탄을 날렸을 것입니다. 그게 아니고는 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요.」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인정하기는 싫다. 그만큼 화가 나 있었다. 맥이 라이플 포를 가볍게 날리자 발칸포는 곧 멈추었다. 근처에 더 설치된 방어장치는 없는 듯 잠잠했다. 됐다 싶은 예안은 맥에서 내렸다. 이곳에서부터는 직접 발로 걸어 들 어가야 했다. 커다란 동굴로 위장한 입구가 덩굴 아래 입을 벌리고 있었다. 멀리서 언뜻 보아서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입구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위장되어있었다. 저곳에 그 남자가 있겠지. 그녀는 호흡을 크게 가다듬었다. 막 발을 떼어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입구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 오는가 싶더니, 곧 섬 전체가 휘황찬란한 빛에 휩싸였다. 지나치게 강한 섬광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윽고 빛이 그쳤다. 그녀는 슬그머니 팔을 내렸다. "뭐지? 무슨 일이야?" 커다란 불안이 피어올랐다. 혹시 그가 벌써 무슨 일을 저지른 건 아 닐까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그녀는 재빨리 입구로 뛰어들었다. 그녀가 뛰어들기를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문이 닫혔다. 놀란 그녀는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칫 하고 이를 갈며 다시 뛰었다. 이곳을 탈출하는 것은 나중에 맥을 불러서 반쯤 폭파시킨 뒤에 해도 늦지 않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레이온이 자신을 어찌할 수 없을 거라 는 믿음이 있었다. 그는 그녀를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여럿 있었지만 단 한 번도 한계를 넘지는 않았다. 구태여 이런 곳까지 끌여들여 무언가를 해볼 생각은 없을 것이라고 그녀는 믿었다. 만약 짐작이 틀렸다 해도 초능력을 사 용한다면 그 하나쯤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잠시 걸음을 멈춘 그녀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 에 대한 일말의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 자신이 한심했다. 복도는 길었다. 지루하리만큼. 숨이 가빠질 정도로 달린 끝에 복도 맞은편까지 당도한 예안은 허리 를 숙이고 거칠게 심호흡했다. 눈앞에는 특수합금으로 만들어진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문 옆에는 지문감식장치가 있었다. 문을 공격해야 하나 다른 길을 찾 아봐야 하나 망설이던 그녀는 혹시나 하는 심정에서 지문감식장치에 손을 갖다대었다. 등에 불빛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문이 스르르 넘어갔다. 잠깐 놀랐던 그녀는 곧 마음을 다잡고 안에 들어섰다. 안은 썰렁하고 황량한 느낌의 넓은 공간이었다. 원형의 공간은 사방 이 커다란 컴퓨터 단말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입구를 찾아 안을 둘러보던 예안은 문득 켜져 있는 컴퓨터에 시선이 닿았다. 무심코 입력장치를 건드리던 그녀는 흥미로운 이름의 파일을 발견하고 열어보았다. 무수한 자료들이 화면에 가득 떠올랐다. 그녀의 눈동자는 신중하게 하나하나를 훑어보았다. 자료는 대부분 키메라 탄생에 관한 것들이었다. 오리지널 유젤을 복 제하기 위해 레이온이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엄청난 용 량의 데이터였다. 인간의 처리속도를 뛰어넘은 속도로 그녀는 자료들을 하나하나 점검 했다. 그 엄청난 자료들을 통해, 그녀는 레이온이 이브의 시신을 이 용할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했다. 신인류를 복제한다는 것은 구인류는 물론이고 신인류에게도 쉽지 않 은 영역이었다. 케이조차도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없었다면 제이를 복 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맥은 자이오 다이아몬드 자체가 신인류로 변하는 게 아닐까 하는 가 설도 있다고 말했다. ST기관에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들어있는 게 아 니라, 신인류의 육신 그 자체가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변형된 형태이 며, ST기관은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론이었다. 그 이론을 따르면 어째서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체외로 적출되는 순 간 50% 이하로 기능이 떨어지며, 체내에서 다시 재생되는지를 설명 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예안은 곧 스스로를 꾸짖었다. 지금 이 따위 자료나 뒤적거리 자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그녀는 재빨리 다른 자료를 검색했다. 이 연구소가 어떤 설계로 지어 졌는지를 조사했다. 몇 차례의 탐문 끝에 그녀는 기지 단면도를 찾을 수 있었다. 스크린 에 떠오른 복잡한 도면을 세밀하게 살핀 그녀는 자신이 지금 어디쯤 에 있는지, 그리고 레이온은 어디쯤에 있을지를 알아내고는 재빨리 돌아섰다. 안쪽에 위치한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들어섰다. 층수 버튼의 가장 아 래에 있는 입력장치에 엄지손가락을 갖다대었다. 그녀의 예감은 맞았다. 키워드는 다름 아닌 그녀의 지문이었다. 레이 온은 이 기지의 모든 것을 둘러볼 수 있는 권한을 그녀가 태어나기 도 전에 부여했던 것이다. 이제는 네가 날 쫓을 차례라고 그가 말하는 듯해, 그녀는 기분이 몹 시 불쾌했다. 잡기만 하면 절대로 가만 두지 않겠다고 엘리베이터가 멈추기까지 내내 속으로 반복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는 최하층에 정지했다. 밖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정체 모를 기묘한 한기가 그녀의 전신 을 감쌌다. 갑자기 두려워졌다. 발을 내딛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 이 강하게 그녀를 찔렀다.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곧 스스로를 꾸짖었다. 아이 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그것은 가당치도 않다. 꾹 참고 어둠 속을 향해 다시 발을 내딛었다. 어렴풋하게 무언가의 형체가 보였다. "네가 날 쫓아서 오는 날이 오긴 오는구나." 갑작스레 울린 음성에 예안은 흠칫 놀랐지만, 곧 당황함을 지우고 어 둠 속을 노려보았다. "난 형이 설마 내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어." "널 배신한 건 아니야. 그러고 싶었다면 확실하게 네가 날 찾지 못하 도록 도망쳤을 거야." "형은 그렇게 하지 못해. 지긋지긋하게 이 몸뚱이를 가지고 싶어하잖 아. 안 그래?" 어렵지 않게 그를 찾아냈다. 그 사실에 일단 안도했다. 임계점을 넘어서지 않는 작업으로는 자이오 다이아몬드의 무한동력 을 소멸시킬 수 없다. 아까 섬 전체를 휘감았던 빛의 정체가 신경 쓰 이기는 했지만, 이렇듯 빨리 신인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언가 이상합니다. 저것은 레이온 박사의 육성이 아닙니다.」 '그럼, 기계음이라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인공적으로 합성한 기계음입니다.」 설마 레이온이 여기에 없단 말인가? 다급한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드러났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지금 네 눈앞에 있어. 사정이 있어서 인 조 성대를 쓰고 있을 뿐이야." 귀에 들리는 것은 여전히 기계음이지만, 그가 코앞에 있다는 것은 어 렴풋이 느껴진다. 다시 안심한 예안은 손을 내밀어 펼쳤다. "내놔. 자이오 다이아." "미안해. 벌써 써버렸어." "써버렸어도 없어지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더 이상 날 놀리지 말고 지금이라도 돌려주면 없었던 일로 해줄 수도 있어." "내가 널 놀리는 걸로 보이니?" "잔인하다고 생각 안 해? 아이 목숨 가지고 애엄마를 놀리는 게?" 어둠이 조금씩 걷혀진다. 커다란 의자의 뒷모습이 눈앞에 있는 게 보 였다.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조금씩 보인다. 불길한 느낌이 또다시 엄습했다. 지금까지 봐왔던 그의 모습과 어딘 가가 분명히 달랐다. "있지, 유젤. 난 말야. 너 없이 못 살아." "닭살 돋는 멘트는 집어치워. 난 형 없이도 잘 살 수 있어." "하지만 이제는 너도 나 없이 못 살게 될 거야." "자신 있으면 그렇게 만들어 봐." 여차하면 그를 공격할 준비를 갖춘 채, 예안은 신중하게 접근했다. 서로의 호흡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손을 뻗어도 닿지는 않는 거리였다. "과연 그럴까? 네가 지금의 날 잃고도 살 수 있을까?" 그의 목소리가 변했다. 기계를 쓰지 않고 직접 말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본래 그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선가 한 번 들어본, 분명히 기억 한구석에 남아 있 는 음성이었다. 실내에 불이 탁 들어왔다. 시야가 환해지며 여전히 뒤돌아보고 있는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의자에 누군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적어도 인형 따위는 아니다.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이 천천히 일어났다. 체격이 작고 가녀린 게, 언뜻 보기에도 레이온은 아니다. 그가 일어나는 것과 함께, 불안감은 조금씩 커지며 호흡을 압박했다. 그가 이쪽을 돌아보는 순간 예안은 호흡이 멎는 것을 느꼈다.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가 이윽고 새파랗게 굳었다. 흡사 도플갱어라도 본 사람 같았다. 새로 얻은 몸이 익숙지 않은 듯 비틀거리며 일어난 소년은 진정으로 만족한 자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를 띠었다. "어때? 이래도 네가 날 거부할 수 있을까?" by eden 이것은 꿈인가. 이것이 정녕 현실이란 말인가. 눈앞의 얼굴은 대단히 익숙했다. 아무리 희미해지고 또 옅어진다 해 도 절대 지워버릴 수 없는 기억, 그리고 얼굴. 소년은 레이온이 아니었다. 레이온의 마음을 이식 받은 유진우였다. "아아…." 언제나 상상으로만 남겨두어야 했던 갈망. 그것이 지금 손에 잡힐 듯 선명한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나 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유진우로서 유젤과 사랑을 나누어보고 싶어 한 마음. 유젤의 껍데기를 덮어쓴 유진우가 아니라, 본래의 나 자신 으로서 유젤을 대하고 싶어한 마음. 잠이 들었을 때마다 항상 목말라했던, 하지만 절대 이루어질 수 없기 에 무의식 속에 억지로 구겨 넣어야 했던 환상.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그 상상이 지금 현실이 되어있다. "어떻게… 어떻게…." "그 몸을 움직이고 있는 <마음>에게 묻겠어. 너는 지금의 날 거부할 자신이 있어?" 여전히 익숙지 않은 듯 무척 힘들어하는 음성이다. 억지로 영혼을 이 식한 후유증이 거동을 불편하게 하는 것 같다. 소녀의 마음은 거부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소녀의 내면을 차지하고 있는 마음은 본래 눈앞의 소년의 것이었다. 소녀의 마음은 예전 육체 와의 결합을 강렬히 원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거야? 뇌 이식… 수술을 했 을 때부터?" "맞았어. 유젤의 몸뚱이를 손에 넣는 것은 간단했지만 마음까지 가지 는 건 쉽지 않았어. 내가 신인류가 된다 해도 확신할 수 없었지. 그 래서 난 아예 유젤, 너의 마음을 내가 손쉽게 가질 수 있는 마음으로 바꿔버렸지." 처음부터 모든 것이 계획적이었다. 기억 이식을 했다느니 뭐라느니 하는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비로소 그의 진실된 계획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유젤을 완전히 소유하기 위해,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우연히 사망한 구 인류 소년의 마음을 이용했던 것이다. 유젤에 집착하는 소년의 마음을 유젤의 육체에 불어넣는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은 그 소년의 육체에 불어넣는다. 그리하게 되면 마음은 본래 자신의 것이었던 육체를 갈망하게 되고, 육체는 본래 자신의 것 이었던 마음과의 결합을 원하게 된다. 결국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사랑. 그러나 조금의 허점도 없이, 실로 완벽한 방법이다. 소녀는 허리를 숙이고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 속으로 깊이 그 가 천재인 것을 인정했다. 육신과 마음을 떨어뜨려 놓음으로써 발생 하는 인력을 이용한 사랑의 완성, 그것을 해내었으니 어찌 천재라고 칭하지 않을까. "많이 야위었네, 유진우." "오랫동안 냉동수면 시켰으니까." "죽은 게 아니었어?" "죽었지. 하지만 육신을 그대로 보존한다면 살려낼 가능성도 있지. 자이오 다이아몬드 같은 걸 이용한다면 말이야." "대단해. 당신은 정말 대단해." "그건 누구한테 하는 말이야?" "글쎄. 나도 잘 몰라." 그녀의 표정은 자포자기에 가까웠다. 허탈함을 느끼지 않는 포기, 그 것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수용의 또 다른 형태. 소년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갓 마음을 이식한 탓인지 수월히 몸뚱 이를 움직이지 못했다. 비실거리다가 쓰러지려는 것을 소녀가 재빨리 붙잡았다. 소녀의 어깨 를 짚고 버틴 소년은 만족스러운 듯 피식거렸다. "냉동수면을 했다면 그 몸은 아직도 17살 그대로야?" "어." "별로 체격이 좋은 것도 아닌데 너무 말랐다. 그래 가지고 제대로 힘 이나 쓸 수 있겠어?" 소녀의 마음은 소년의 육신을 간절히 원했다. 마음에서부터 일어난 인력,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거부할 수 없는 근본 법칙. 동시에 거부 하고 싶지 않은, 행복한 구속이기도 했다. 먼저 손을 내밀어준 것이 기쁘다는 듯 소년은 웃었다. 힘겹게 소녀의 목을 껴안은 소년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입술을 핥아도 소녀는 뿌리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소년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를 탐닉했다. 선명하게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에서, 소년은 그 이상의 것을 해도 좋 다는 무언의 허락을 보았다. 좀더 그녀를 자세히 보고 싶어 단추를 하나둘씩 풀었다. 그러나 손가락 끝이 떨리는가 싶더니 자신의 무게 를 감당하지도 못하고 바닥에 털썩 넘어졌다.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소년은 뒷머리를 긁었다. "생각보다 힘들다.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서인가 봐." "괜찮아. 내가 리드하면 돼." "에이, 그건 싫다. 남자 체면이 있지." "자기 몸도 못 가누고 비틀거리면서 사치스런 소리만 할 거야?" 소녀가 일으켜주자 소년은 피식 눈웃음으로 한쪽에 놓인 침대를 가 리켰다. 처음부터 이럴 셈이었구나, 하고 소녀는 키득거렸다. 가늘고 흰 손가락이 단추를 하나둘씩 열었다. 소년은 기대에 찬 눈으 로 지켜봤다. 소녀는 창피하니까 보지 말라고 시선을 외면했다. 소년 은 키득거리며 뒤에서 소녀를 와락 껴안았다. 둘은 강아지처럼 서로 를 껴안은 채 시트 위로 넘어졌다. 뒤치락거리던 소녀는 숨을 가쁘게 쉬며 멈추었다. 소년이 위에서 내 려다보는 게 부끄러워 팔로 가슴을 가렸다. 소년은 어디 한 번 보여 달라고 손을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가락으로 소녀의 손을 치울 수 있을리 만무하다. 깔깔거리던 소녀는 팔을 치우고 자신의 몸을 보여주었다. 소년은 예 쁘다고 속삭이며 둥근 선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소녀의 몸에서는 향긋한 과일 향이 풍겼다. "배고파. 배고파 죽겠어." 들뜬 표정을 짓고 있던 소녀는 김이 샌다는 듯 고개를 픽 돌렸다. "그럼 밥 먹으면 되잖아. 가서 먹고 와." "널 먹으면 안 될까?" 소녀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소년은 분홍빛 돌기를 입술로 가로챘다. 소녀가 간지럽다고 깔깔대며 등을 쳤다. 소년은 유두를 입안에 머금 은 채, 두 손바닥으로 소녀의 허리에서부터 다리까지 펼쳐진 곡선을 쓰다듬었다. 간지러우니까 그만하라고 소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둘은 손을 맞잡았다. 소녀의 몸 위에 무게를 실은 채, 소년은 다시 한 번 소중하다는 듯 키스했다. 야윈 손가락이 탐스러운 가슴을 쓰다 듬으며 내려와 얇은 다리를 감쌌다. 뜨거운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둘은 서로의 눈동자에서 자신을 갈 망하는 상대의 마음을 읽었다. 소년의 실루엣이 쓰러지듯 누웠다. 소녀는 모든 것을 개방한 채 소년 의 등을 힘껏 껴안았다. 가녀린 어깨를 두 손으로 꼭 잡으며, 소년은 소녀의 온기를 느꼈다. 깊숙이 맞물린 육체를 통해 애틋한 열기가 전달되었다. 오랫동안 갈라져있던 몸과 마음이 이제야 겨우 하나로 뭉쳤다. 둘의 결합, 그것은 흔히들 말하는 애정의 행위와는 크게 달랐다. 상 대를 향한 무한의 신뢰보다는, 비로소 나 자신을 되찾은 듯한 해방의 쾌감. 잔뜩 지쳤다는 듯 소년은 숨을 헐떡이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몸을 뒤 척이며 기댄 소녀는 손을 살며시 펼쳐 소년의 가슴에 올렸다. "저기…."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줘." 여윈 가슴에 얼굴을 살며시 묻으며, 소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음성으로 덧붙였다. "부탁이야." 불빛이 눈이 부셔 소년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다른 팔로는 소 녀의 어깨를 따뜻이 감싸며, 이제야 겨우 소원이 완성되었음에 잔잔 한 설렘을 느꼈다. 몸을 조금 일으킨 소녀는 말없이 소년의 얼굴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이제는 기억에 가물가물한, 하지만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얼굴. 그 는 부정하고 있지만 저것은 본래 자신의 것이었다. 고뇌로 까칠까칠해진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대하 듯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네가 날 받아줄 줄 알았어." "아아, 그래. 네 생각이 옳았어. 나는 지금의 널 거부할 수 없으니까." 자기 자신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에 미친 천재 과학자는 그런 인간의 기본 감정을 이용하여, 소원을 성취하는 데 멋지게 성공했다. "날 미워하지 않니? 이렇게까지 지독한 짓을 했는데?" "모르겠어.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안 나." 소녀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하얀 어깨가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기 시 작했다. 울고 있는 거라 생각한 소년은 말없이 소녀의 뺨을 감싸 가 슴에 끌어안았다. "나, 너랑 결혼해줄까?" "그건 내가 어제 했던 말이잖아." "네가 원한다면, 너와 결혼해줄 수도 있어." 입장이 뒤바뀌었다. 이제는 그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아도 이쪽에서 그를 원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저항을 모르는 복종이자, 굴욕 없 는 굴복. 소년이 빤히 바라보는 게 부담스러워 소녀는 시선을 외면하며 쑥스 럽게 중얼거렸다. "뭐야, 우리 이미 결혼한 거 아니었어?" "그렇게 말 돌리지 마. 싫어? 좋아? 확실하게 말해." "조, 좋아." "진작 그렇게 말하지. 뭘 새삼스럽게 첫날밤 치른 새색시처럼 수줍어 하고 그래?" 따지고 보면 틀린 표현은 아니라고 소년은 키득거리며 일어났다. 여 전히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리자 소녀가 재빨리 부축했다. 그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자 소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딜 가려고?" "식 올리러 가야지. 뭐 침대에서 결혼식 치르자면 나도 그게 더 좋으 니까 사양은 않겠지만. 그래도 낭만이라는 게 있잖아." 소녀의 볼을 꼬집으며 웃음을 터트리던 소년은 문 밖에 대고 넬을 불렀다. 잠시 후 넬이 깔끔한 모습으로 들어섰다. 이곳에 오기 전 처 참하게 박살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소녀는 넬이 옷을 챙겨주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넬을 망 가뜨렸던 것에 대한 미안함은 표정 어디에도 없었다. 넬 또한 자신의 신체를 박살낸 사람을 깍듯하게 대했다. 섬 인근 해역에는 잠수함 기지가 정박해 있었다. 그들은 모래사장에 정박해 있는 소형 보트를 타고 잠수함으로 옮겨 탔다. 잠수함에서 다 시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비행기로 갈아탔다. 넬이 조종하는 비행기 안에서, 둘은 상대의 손을 꼭 마주잡은 채 저 만치 아래 펼쳐지는 바다를 구경했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가 보면 알아." 비행기가 정박한 곳은 어느 외딴 지역이었다. 시골이라고 하기에는 미묘한, 말 그대로 한적한 장소였다. 조금 낡고 커다란 성당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소녀는 갸웃거렸다. "여기는 뭐 하러 왔어?" "너도 식 올리자고 동의했잖아. 넬. 시작해." "알겠습니다." 미처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소녀는 넬에게 끌려갔다. 한쪽에 세워놓은 대형 트레일러에서 옷을 벗고 씻겨지고 화장을 하는 등 상당한 수난 을 당해야 했다. 치장을 마친 소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밖으로 나왔다. 소년은 이미 준 비를 다 갖춘 채 방글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그 턱시도 차림은? 전∼혀 안 어울려." "너는 잘 어울리는데? 그 웨딩 드레스 내가 직접 고른 거야. 어때?" "네 취향이 이렇다는 것만 잘 알겠어. 이거 너무 야한 거 아냐?" 넬이 준비해둔 웨딩 드레스는 어깨끈이 없고 가슴 선이 뚜렷이 보일 만큼 깊이 파인 옷이었다. 소녀는 마음에 들지 않다고 투덜거리다가 소년이 흡족한 듯 빤히 바라보자 부끄러움을 느끼고 눈을 돌렸다. "그까짓 게 뭐가 야하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 생각 같아서는 탱크 탑에 미니스커트 웨딩드레스를 맞추고 싶었다고." "윽! 그런 걸 입느니 차라리 안 하고 말아." "에이, 안 한다 안 한다 소리는 이제 그만 해. 자, 들어갈까?" 소년은 웃음 띤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소녀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는 성당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래 전 버려진 성당인 듯 싶었다. 그러나 먼 지 하나 없이 깨끗이 청소돼있는 것으로 보아, 미리 식장으로 준비해 놓은 듯싶었다. 둘은 팔짱을 끼고 단상 앞까지 갔다. 단상 위에는 푸른빛을 발하는 보석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저것이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아 닌, 모습만 흉내낸 모조품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종교 같은 건 싫어하지 않았어? 왜 하필 성당이야?" "그렇긴 하지만, 딱히 이것말고 낭만적인 방법을 찾는 게 힘드니까. 그렇다고 다이빙하면서 식을 올릴 순 없잖아?" 소년은 눈을 감고 모조품 자이오 다이아몬드에 대고 기도했다. 그의 옆모습을 흘끗 보면서 소녀도 따라 기도했다. 어쩌면 그는 마더에게 주례를 부탁한 건지도 모른다. 짧은 기도를 속 으로 중얼거리면서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도가 끝난 뒤 소년은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냈다. 쑥스러워하는 소 녀의 왼손을 살며시 쥐고 약지에 끼워주었다. "자, 나도 해줘." 창피한 듯 볼을 긁적이던 소녀는 할 수 없다는 듯 소년이 건넨 반지 를 마찬가지로 그의 왼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소년은 신부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의 손이 가늘 게 떨리는 것을 힐끔 보며 소녀는 눈을 감았다. 따뜻하게 겹쳐진 입 술을 통해 둘은 서로의 온기를 재확인했다. 키스가 끝나고 소년이 활발하게 말했다. "자, 이제부터 우리는 부부야. 부부관계 없는 부부가 아니라 정식 부 부라고. 인정하지?" "뭐야, 아직도 그거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어?" "그럼 너 같으면 상처가 안 되겠니?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나 그때 엄청 상처받았다고." 히죽 미소를 띤 소녀는 소년의 목을 두 팔로 껴안고 몸을 기댔다. 청 초한 유혹이 선명하게 빛나는 몸짓이었다. "상처를 줬으면 치료도 해줘야지. 자, 날 네 맘대로 해도 좋아." 스스로가 생각해도 유치하다 여겼는지 소녀는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배를 잡고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어느덧 밖은 해가 많이 저물어 있었다. 인적이 드문 지역인지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조금도 안 보였다. 커다란 돌 위에 앉아,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멍 하니 응시하고 있던 소녀는 뒤에서 소년이 와락 껴안는 것을 느꼈다. "뭐하고 있었어?" "별을 보고 있었어." "그딴 거 보지 말고, 날 보면 안 돼?" "네가 내 앞으로 오면 되잖아. 그럼 실컷 봐줄게." 좁은 어깨를 말없이 쓰다듬던 손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소년의 손이 가슴언저리로 파고들자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막았다. "간지러워. 하지 마." "밤이잖아. 어른의 시간이라구." "너 아직 열일곱 밖에 안 됐잖아. 어른은 무슨 얼어죽을 어른이라는 거야?" "그러는 너는? 신분증에 열아홉이라 적혀있다고 정말 너 자신이 열 아홉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내 진짜 나이는 스물 넷에다가 넌 나보다 훨씬 어리다고." "아무리 날뛰어봐야 내가 연상인 건 변하지 않아." "아아, 그러세요? 그럼 누나라고 불러줄까?" 쿡 웃음을 터트린 소녀는 소년이 몸을 만지든 말든 내버려두었다. 웨 딩드레스가 이렇게 벗기기 힘든 옷인 줄 몰랐다고 끙끙거리던 소년 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을 느끼고 손길을 멈추었다. 두 사람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눈빛으로 서로의 의사를 교환한 둘 은 말없이 상대를 깊게 껴안았다. 밤이 깊어 가는 가운데 소년의 그림자가 소녀의 실루엣을 덮었다. 어 슴푸레한 별빛이 하나가 된 둘의 머리 위를 비추었다. by eden 현실 도피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이 마음은. 과거 그가 보여줬던 영화 도플갱어가 어떤 의미를 띠고 제작되었는 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지금 같은 이 순간이 찾아올 거라는 그의 메 시지였으리라. 여러 가지로 많이 혼란스럽다. 행복한지 불행한지 아직은 갈피를 잡 기가 힘들다. 그러나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유진우의 모습을 띠고 찾아온 그를 거 부할 수 없다는 것. 그와 몸을 섞고 나면 끝없는 후련함과 더불어 죽은 아이 생각이 자 꾸만 났다. 그러나 그의 손이 몸에 닿으면 곧 모든 잡념은 지우개로 지워진 듯 깨끗이 사라진다. 그와 몸을 섞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남녀의 결합과는 다른 특별한 의 미를 그녀에게 부여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였으며, 사랑이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를 재확인하는 행위였다. 가슴을 간질이는 손길에 눈을 뜬 소녀는 얼굴을 가볍게 찌푸렸다가 곧바로 풀었다. 아침 햇살이 방안을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 "몇 시야?" "아홉 시. 더 자려고?" "잠 다 깼어." "그럼…." 무언가를 요구하는 눈으로 소년이 주시하자 소녀는 키득거리며 그의 목을 껴안았다. 우윳빛 흰 다리가 가볍게 휘어지며 소년의 허리를 소 중히 감쌌다. 따스하면서도 깊은 곳, 아무리 머물러도 지루함을 느낄 수 없는 소녀 의 몸 안에서 소년은 언어를 뛰어넘은 사랑을 속삭였다. 아무리 서로의 온기를 확인해도 물리지 않는다. 물질의 경계선이 존 재하지 않는다면 둘은 진작에 하나의 개체가 되었으리라. 그만큼 다 른 것을 돌아보지 않고 서로에게 푹 빠진 채 며칠을 보냈다. "우리 데이트할까?" 한 차례 애정의 분출을 마친 뒤 소년은 옆에 누우며 물었다. 소녀는 그의 가슴팍에 몸을 기대었다. "어디 가고 싶은데라도 있어?"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그냥 여기 있자. 난 이대로가 가장 좋아." 소년은 의외라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너, 이제 보니 굉장히 밝히는구나?" "그런 게 아니잖아! 그냥…." 손가락을 입에 물고 쭈뼛거리던 소녀는 시선을 내리깔고 모기 소리 만하게 덧붙였다.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을 뿐이야." "그게 밝히는 거지." "놀리지 말라니까!" "귀여워서 더 놀리고 싶어지는걸?" "에이씨." 소녀의 가슴을 건드리며 장난을 치던 소년은 입술을 포갰다. 이제는 익숙해진 키스를 소녀는 즐거이 받아들였다. 향기로운 과일을 입에 문 듯 달콤하다.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는다. 한참의 시간을 침대 위에서 장난을 치며 보냈다. 그러고 보니 이 방 에 틀어박혀 있는 게 며칠째더라. 아쉬운 듯 입술을 뗀 소년은 일어나서 옷을 주섬주섬 챙겼다. "정말 나갈 거야?" "바람 좀 쐬자." 소녀는 서운하다는 표정을 가득 지으며 일어났다. 그러나 옷장에 마 련해둔 옷을 뒤적거리다가 곧 흡족한 표정이 되며 한 옷을 골라들었 다. 그것을 몸에 가져다대며 소년을 돌아보았다. "이거 어때?" "너무 야한 거 아니야?" 소년은 조금 싫다는 표정을 띠었다. 가슴이 꽤나 파인 데다가 소매가 없는 미니스커트형 빨간 원피스는 상당히 도발적인 디자인이었다. "그거 말고, 이거 입어." 그 말과 함께 소년이 골라준 옷은 보기에도 촌스럽고 답답한 디자인 이었다. 노출 부위가 지극히 적다는 것도 앞서 소녀가 고른 빨간 원 피스와 대조되는 부분이었다. "너, 지금 나보고 사람들 웃음거리 되라는 거지?" "괜찮아. 넌 뭘 입어도 예뻐." "그래도 이건 아니야. 그냥 이거 입는다." 안 되겠다는 생각에 소년은 한숨을 지었다. 그리고 소녀의 어깨를 살 짝 끌어안고는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노출 심한 옷은 싫어. 네 몸은 나 혼자만 보고 싶은데, 안 될까?" 흠칫 놀라는 얼굴을 하던 소녀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별로 감흥이 안 닿는 거 알고 있지?" "심하다. 그래도 남편이라는 사람이 그렇게까지 말하면 좀 감동 받거 나 그래야 되는 거 아니야?" 어울리지 않게 애처로운 표정까지 지으며 '이것만은 안 돼'라고 간청 하고 있다. 한숨과 함께 소녀는 한 발자국 물러나기로 했다. "알았어, 서방님. 당신 말대로 할게." "착하다. 이건 선물." 부드럽게 다독이며 소년은 뽀얀 이마에 키스해주었다. 합의를 본 소녀는 심플한 캐쥬얼 복장을 골랐다. 외출 준비를 끝낸 둘은 손을 잡고 거리로 나갔다. 미국의 번화가답게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으나, 혼잡할 정도는 아니었다. 행인들이 이따금씩 힐끔거렸지만 둘은 무시했다. 객관적으로 소년은 상당한 수준의 마스크를 지녔고, 소녀는 국제적인 매스컴을 타기까지 했던 미모의 소유자. 남들의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저 사람, 닥터 아니야?" "설마. 닥터가 왜 여기에 있겠어?" 석연치 않은 수군거림 따위는 두 사람 귀에 들려오지 않는다. 둘은 시종일관 즐겁게,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거리를 거닐며 데이트를 했다. 수족관의 물고기를 구경해보기도 하고, 오락실에 들러 대전 격투 게 임을 해보기도 했다. 연인들이 자주 들르는 잔잔한 분위기의 카페에 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 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공기가 좋은 공원이 있었다. 자연 그 대로만큼은 아니지만, 도심 한가운데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공 기가 맑고 상쾌했다. 둘은 벤치에서 어린아이가 포함된 가족들이 한가하게 공을 가지고 노는 광경을 구경했다. "다들 행복해 보이네." "난 행복한데, 너는 어때?" 소녀는 그 질문에 잠시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고 물었다. 순간적으로 아이 생각이 났지만 마음은 곧 그 환영을 지워버렸다. 밝은 표정을 띠고 소녀는 대답했다. "행복한 것 같아, 서방님." "서방님 소리 들으니까 백 배는 더 행복해지는 것 같아." "계속 그렇게 불러줄까, 서방님?" 손을 꼭 맞잡은 채, 소년은 소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그래도 좋고 안 그래도 좋아. 그냥 딱 지금만큼만 나 행복하게 해주 면 좋겠어."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표정을 띠며 소녀는 뺨에 입을 맞췄다. 별안간 찰칵 하는 카메라 셔터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둘은 의아해서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금발의 여자 가 카메라를 든 채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저기, 너무 잘 어울려서 저도 모르게 사진 한 방 찍었는데 괜찮으시 겠어요? 곤란하시다면 삭제할게요." 잘 어울린다는 말에 소녀는 좋아라 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상관없어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두 분 연인이신가 봐요? 언제부터 사귀셨어요?" "연인이요?" 주먹을 입에 가까이 가져다대고 키득거리던 소녀는 가볍게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이쪽은 내 남편이에요." 뜻밖의 말에 여자는 잠시 놀라워했다. 아무리 봐도 십대로밖에 안 보 이는 풋풋한 커플인데 부부라니. 그러나 여자는 곧 놀라운 표정을 떨치고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셨군요. 정말 잘 어울려요. 행복하게 사세요." "네. 고마워요." 여자가 가고 다시 둘이 된 소녀는 몹시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우리가 꽤 잘 어울리나 보네. 그치?" 소년은 말문을 닫은 채 소녀의 옆얼굴만 가만히 주시했다. 이윽고 쓴 웃음을 띠며 소녀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끌어안았다. 무언가 낯선 감정의 기류를 느꼈으나 소녀는 금방 아무것도 아니라 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아무것도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젯밤 밀어를 속삭이던 때와 똑같이, 소년은 들뜨면서도 기분 좋은 눈빛으 로 빤히 주시하고 있었으니. "우리, 내일은 바닷가나 가자." "응." "시간도 늦었으니 슬슬 그만 들어갈까?" "나 피곤해서 걷기 싫어. 별장까지 또 언제 가?" "그럼?" 히죽 웃음을 띤 소녀는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쪽을 흘끗 살핀 소 년은 덤덤히 되물었다. "러브호텔에 그렇게 한 번 가보고 싶었어? 야해라." "너, 사람을 밤새 주물럭거린 주제에 그딴 소리 할 처지는 아니라고 보는데? 그리고 피곤하니까 그냥 아무 호텔이나 들어가자고 했지 언 제 내가 러브호텔 가리켰어? 그런데는 몇 시간만 있다가 그냥 나와 야 한단 말이야!" "이제는 서방님 소리까지 말아먹으셨군. 슬프다." 입술을 삐죽이 내민 소녀는 쳇 하고 투덜거리며 팔짱을 끼었다. 일단 호텔에서 하룻밤을 숙박하기로 정했다. 호텔측에서 제공한 룸은 전망이 좋은 룸이었다. 도심을 수놓은 불빛이 하나가득 눈에 들어오 는 위치였다. 소년은 야경을 구경하는 소녀를 뒤에서 상기된 표정으로 껴안았다. "유젤." 뭔가를 간절히 원하는 음성이다. 새삼스레 두근거림이 피어올랐다. 지난 며칠간 내내 들으면서 이제는 아무렇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아 직은 익숙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익숙해지지 않은 것도 괜찮다. 지금은 상대의 음성 하나 하나 에 설레어해도 좋은 때가 아닌가. 이대로 그의 페이스에 끌려갔다가는 오늘밤도 상당히 고역이 되리라 는 것은 알고 있다. 물론 그와 몸을 섞는 게 싫지는 않다. 오히려 이 쪽 또한 간절히 원하고 있다. 허나 조금쯤은 튕기고 싶은 마음이 드 는 것은 왜일까. "가서 먼저 씻고 와." "그러지 말고…." "이렇게 식은땀 많이 흘리면서 나와 몸을 부대끼자는 건 아니겠지? 난 불결한 건 싫으니까, 가서 구석구석 잘 씻고 와. 알았지, 서방님?" 격침이다. 서방님이라니. 소녀는 얼굴까지 벌개져서 좋아하는 남편이라는 물건에게 확인사살 로 가벼운 입맞춤까지 선사했다. 그가 욕실에서 샤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야경을 구경하던 중 소녀는 발딱 일어났다. "나 잠깐 프론트에 갔다올게." 잠시 물줄기 소리가 멈추고 소년의 음성이 돌아왔다. "무엇 때문에?" "신문 좀 사려고. 금방 올 거니까 나 보고 싶다고 울지 마." "모르는 남자들 조심해." "걱정 마. 이래 봬도 웬만한 성인 하나둘쯤은 찜쪄먹을 수 있으니까." 소녀는 문을 잠그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미리 타고 있던 사람들이 의 아한 눈길로 수군거렸지만 무시했다. "저기…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호기심을 참지 못한 한 남자가 마침내 물었다. 닥터가 아니냐는 의문 이 가득 떠올라 있는 얼굴을 흘끗거린 소녀는 피식거리며 외면했다. 호텔측은 숙객들에게 신문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었다. 그건 마음에 드는 걸, 하고 소녀는 중얼거리며 석간 신문을 펼쳤다. 신문을 든 채 다시 룸으로 향했다. 붉게 빛나는 머리카락 탓인지 사 람들의 시선이 가득 쏠렸다. 닥터를 동경하여 스타일을 비슷하게 가 꾸는 젊은 여자는 많지만, 얼굴까지 흡사하다면 의심을 해볼 법하기 도 했다. 키로 문을 열려는 순간 옆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사복 차림 의 건장한 남자 둘이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냐는 듯 힐끔거렸다. 관심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저,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알 수 있습니까?" "닥터와는 비슷하게 닮았을 뿐이에요." 그 한 마디만 내뱉은 소녀는 문을 쾅 닫고 걸어 잠갔다. 아마도 미 정부에서 보낸 요원들이 틀림없을 것이다. 별로 긴장되지는 않았다. 어차피 미국은 자신의 남편이라는 작자 한 명도 감당 못할 것이다. 정 불안하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칠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걸 로 대만족이다. 신문을 펼친 채 들어서자 갑자기 뒤에서 소년이 튀어나오며 와락 껴 안았다. "신문은 무슨 일로? 뭐 볼 거라도 있니?" "그냥, 국제 소식이 어떤지 궁금해서." "그런 건 싫다. 나랑 같이 있을 땐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나만 바 라봐 줘." 밝음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 음성에는 조금의 절박함이 숨어있었다. 그러나 선을 넘은 뒤 해일처럼 밀려오는 즐거움에 감각이 마비된 소 녀는 그것을 잡아내지 못했다. "그럼 나도 씻고 올게." "괜찮아. 넌 안 씻어도 돼." "그래도 찜찜하단 말이야." "내가 괜찮다는데 누가 뭐래?" "아, 그래도 안 돼. 오분만 기다려, 서방님." 저렇게까지 나오는데 조금쯤은 기다려줘야지. 소년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소녀를 놓아줬다. 욕실 문이 닫히 고, 쏴 하는 물줄기 소리가 가슴을 설레게 했다. 마음껏 품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녀의 감촉이라는 것은. 분명 그녀의 마음은 인위적인 방법으로 손에 쥔 것이다.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때때로 너무 행복한 게 두렵기도 했다. 갑작스레 그녀가 자신에게 혐 오를 느끼고 다시 밀어내는 게 아닌가 하는 근거 없는 불안감이 솟 아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불안감은 잠시일 뿐이었다. 그는 적어도 시간이 남아있 는 동안만큼은 이 행복이 온전하리라고 자신했다. 「Time Limit : 148 hours 36 minutes」 "뭐하고 있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한숨짓고 있던 소년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가 손목을 황급히 가리자 소녀는 물기에 젖은 머리를 정리 하다 말고 갸웃거렸다. "그건 뭐야? 왜 감춰?" "아… 그냥 시계야." "싱겁기는." 소년은 설렘의 미소를 띠며 두 팔을 내밀었다. 밝게 웃음을 지은 소 녀는 그의 무릎 위에 앉으며 살며시 목을 껴안았다. 소리 없이 둘의 그림자가 포개지는 가운데, 타이머에 표시된 시간은 조금씩 줄어갔다. 「Time Limit : 148 hours 33 minutes」 해가 저물어가고 또다시 터오는 동녘. 새로이 아침을 맞이하는 순간 순간이 그저 귀중하기만 하다. 예전에는 몰랐던 순간의 소중함. 아침에 눈을 뜰 때면 피부에 전달되 는 따스한 체온을 통해 소녀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둘은 잠에서 깼으면서도 침대에서 한참 동안 손을 잡고 있었다. 이따 금씩 포옹을 하거나, 입을 맞추거나, 몸을 섞기도 했다. 서로의 체온 을 혼합하는 것은 아무리 반복해도 물리지 않는 즐거운 행위였다. 꿈같이 즐거운 시간이었으나 그림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녀는 애써 아이의 죽음을 잠깐 동안만큼은 잊기로 했다. 아이를 살 릴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멋대로 써버린 그에게 원망이 느껴지지 않 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아이에게는 몹시 미안했지만, 그리고 가슴이 아팠지만, 맥의 ST기관 에도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 죄책감을 자꾸만 희석시켰다. 오늘은 어제 저녁에 약속한 대로 해변으로 가기로 했다. 어떤 수영복 을 입을 것인가를 놓고 당연히 둘 사이에는 아기자기한 다툼이 일어 났다. "왜 이걸 입으면 안 된다는 거야?" 기껏 고른 아슬아슬한 초록색 비키니를 꽉 끌어안은 채 소녀는 홱하 니 노려보았다. 소년은 어림도 없다는 듯 고래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거의 벗은 거나 다름없는 차림으로 서핑을 즐기겠다고?" "네가 입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래?" "다른 사내들이 네 몸 흘끔거리는 건 나 싫어." 그는 <유진우의 마음> 이상으로 소녀에게 심히 집착한다. 그러나 소 녀는 그 집착이 예전처럼 부담스럽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 려 자꾸 놀려주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즐겁기까지 했다. "자, 이걸로 낙찰. 서방님 말 들어." 그러면서 그가 골라준 것은 파란색 원피스형 수영복이었다. 어떤 의 미에서는 비키니보다 소화하기 어렵다는 평을 듣는 모델이기는 하다. 디자인 또한 심플하면서도 튀지 않는 멋을 자랑했다. 우울한 얼굴로 남편이라는 작자가 골라준 물건을 만지작거리던 소녀 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했다. "아아, 너무해. 내 몸매를 서방님한테 자랑하고 싶어하는 순수한 꿈 을 잔인하게 짓밟다니." 잘도 그렇게 능청스러운 대사를 내뱉는구나, 너. "몸매 자랑은 우리 둘만 있을 때 실컷 해도 되잖아. 난 다른 남자한 테 너의 매혹적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거라고." 저기서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인 가게 주인 노총각은 보이지도 않지? "알았어. 서방님 말대로 할게. 하나뿐인 내 남편 내가 말 안 들으면 누가 말 듣겠어." 그러니까 못 이기는 척 하면서 그렇게 주변의 솔로들 가슴을 잔인하 게 짓밟지 말라니까. "아유, 착하다. 나중에 밤에 많이 예뻐해줄게." 솔로들이 들으면 절대 그냥 넘길 수 없는 장면이다. 그러나 때는 바 야흐로 염장의 계절, 누구도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어쨌든 대충 고를 것을 다 고른 그들은 상점을 나섰다. 해변 근처에 세워진 한인 상점이다 보니 가게 입구를 나서자마자 시퍼런 바닷가 가 한눈에 가득 들어왔다. 사람들이 바글거리지는 않았으나 다정한 커플이나 가족들의 모습은 상당히 눈에 띄었다. 오히려 인파가 바글거리지 않아 백사장과 물이 깨끗한 편이었다. 짓궂은 생각이 든 소녀는 살며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소년의 등을 힘껏 떠밀어 물에 빠뜨렸다. "앗! 차가워!" 소년은 허우적거리다가 간신히 균형을 되찾고 일어났다. 머리카락 끝 까지 물에 흠뻑 젖은 소년은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노려보았다. "사람을 갑자기 물에 빠뜨리는 게 어딨어? 심장마비 걸릴 뻔했잖아." 소녀는 대답 대신 킥킥 웃으며 물을 끼얹었다. 물보라와 파도가 한꺼 번에 밀려오며 소년의 전신을 흠뻑 적셨다. "가만 안 둬!" 이를 갈며 소년은 뛰어왔다. 소녀는 까르르 웃으며 도망쳤다. 그러나 곧 얼마 가지 못하고 붙잡혔다. 둘은 발이 걸린 채 모래사장에 넘어 졌다. "그만, 그만!" 숨이 가쁘도록 웃으며 소녀가 외쳤다. 소년은 숨을 헉헉 몰아쉬며 밀 물이 못 미치는 곳으로 기어 나와 드러누웠다. 뒤따라 물에서 나온 소녀는 힘이 빠진 얼굴로 소년의 옆에 길게 누웠다. "유젤." "…응?" 그렇게 부르는 것을 싫어하는 표정이 역력하지만, 마지못해하면서도 대답은 한다. 소년은 아직은 그 정도에 만족했다. "나 좋아해?" 힘든 침묵 끝에 튀어나온 물음은 그거였다. 소녀는 맥빠진다는 표정 을 지으며 일어나 앉았다. 손가락으로 배를 쿡쿡 찌르기만 할 뿐 대답은 자꾸만 아낀다. 참다못 한 소년은 자신의 배를 찌르는 소녀의 손목을 꽉 쥐었다. "말해 봐. 나 좋아해, 안 좋아해?" "…꼭 그런 걸 물어봐야 돼?" "그러니까, 좋아한다는 거지?" "아, 몰라. 사람 말문 막히게 하지 말라고." 남자의 마음이란 참 오묘한가 보다. 이미 육체적으로 깊은 사이고, 식까지 올린 와중에 그런 것을 기어코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걸 보니. 가만, 남자의 마음이라고? 언제부터 남자의 마음을 그렇게 멀게 느끼 고 있었지? "피곤해. 나 좀 잘게." 소년은 하품을 하며 소녀의 무릎을 베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대답할 틈도 없이 잠들었다. 소녀는 말없이 소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요즘 들어 그가 수 면에 빠지는 때가 많아졌다. 마음을 이식한 후유증일까. 몸도 비실비실하고 걷다가도 툭하면 쓰러 질 때가 있다. 관계횟수를 줄이면 그나마 나아질까 염려하는 말을 해 본 적도 있으나, 그것은 한사코 싫다고 했다. 해변가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자취를 감추고, 시퍼런 바다 표면에 별 그림자가 떠오를 때까지 소년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지울 수 없는 불안감을 느낀 소녀는 소년의 머리를 흔들었다. "그만 일어나. 언제까지 그렇게 잠만 잘 거야?" 이윽고 소년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혼수상태 따위가 아니었던 것 에 소녀는 안심했다. 기지개까지 켜며 몸을 일으킨 소년은 히죽 웃음을 띠었다. 소녀의 몸 을 깊이 껴안으며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손이 수영복 안 으로 들어오자 소녀는 간지러웠지만 뿌리치지는 않았다. "유젤." 그렇게 부르는 것은 싫지만, 그래도 저도 모르게 대답하게 된다. "응?" "이제는 네가 날 쫓아와 줄 거지?" 당장은 의미를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허나 간절함을 담은 그의 눈동 자를 보면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지 생각이 안 난 소녀는 말없이 입술을 포개기 만 했다. 짧지만 달콤한 키스가 끝났다. 소년은 서투르게 수영복을 벗기고는, 탐스럽게 드러난 붉은 돌기를 입에 물었다. 간지러움을 우선하는 뭉클한 감정에 사로잡힌 소녀는 눈을 질끈 감 았다. 몸 안의 열기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느낌, 예전에는 소중했지만 지금은 가슴아프기까지 한 감각이다. "왜 울어?" 소년의 다정한 음성에 소녀는 겨우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 다. 그의 마음에 부담을 지우는 게 싫어 황급히 얼굴을 돌렸다. "아니야. 그냥 눈에 먼지가 좀 들어가서…." "미안해." 애처로우면서도 조그만 사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소녀의 마음에 자리한 부등호는, 아이와의 시간보다는 지금 그와의 시간을 더 원한다고 속삭이고 있다. 때문에 그를 원망하지 않고 이해 하는 것이다. "저 하늘 어딘가에… 에덴 혹성이 있겠지?" "…싫어. 그런 말은 하지 마." 옛 여자를 잊지 못하는 연인 때문에 아파하는 것처럼, 소녀는 고개를 힘껏 가로 저었다. "괜찮아. 이제 더 이상 <그 여자>를 그리워하지는 않아. 나한테는 네가 있는걸." 예전에는 부담스러웠던 그의 집착을 이제는 즐긴다. 허나 그가 자신 에게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그만큼 오리지널 유젤을 그리워했다는 증 거가 되기에 착잡함 또한 함께 피어오른다. 전에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심경 변화였다. 이제 소녀는 그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다. 「Time Limit : 123 hours 21 minutes」 소녀 몰래 점점 줄어가는 타이머의 표시 시간을 확인한 소년의 표정 이 어두워졌다. "우리 그만… 들어갈까?" "응." 흐트러진 수영복을 바로잡은 소녀는 겉옷을 몸에 걸치고 소년을 부 축하며 일어났다. 허기가 져서 그런지 소년은 눈에 띄게 비틀거렸다. 지난 며칠 동안 그가 음식을 입에 대는 것을 본 기억이 없는 소녀는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그러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룸에 돌아온 소년은 침대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바닷물이 말라 생긴 소금기가 피부에 까칠까칠하게 붙어있었다. "안 씻어?" "피곤해. 네가 씻겨 줘." "짓궂어. 내가 힘이 어딨다고?" "왜, 너 강하잖아." 소년은 익살스런 웃음을 띠며 두 손을 내밀었다. 소녀는 혀를 차며 그를 일으켰다. 끙끙거리며 욕실로 데리고 들어간 소녀는 샤워기를 틀고 그의 몸을 씻어주었다. 뜨거운 물줄기가 몸 구석구석에 닿는다. 이따금씩 스쳐 지나가는 그 녀의 살결은 더 없는 매혹 그 자체다. 소년은 씻어주는 것을 기분 좋게 즐기다 말고 소녀를 껴안았다. 그의 눈동자에 떠오른 갈증을 본 소녀는 말없이 샤워기를 잠갔다. 열기를 품은 입술이 조용히 와 닿는다. 침묵의 입맞춤은 바로 격렬함 그 자체. 이윽고 그가 입술을 떼었다. 조용히 녹색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바라 보던 소년은 다시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가느다란 목줄기에 입술이 닿았다. 선명한 욕망의 흔적을 새하얀 목 줄기에 미끄러지듯 남기며, 입술은 조금씩 밑으로 내려갔다. 도톰하게 솟아오른 쇄골을 어루만지듯 감싸며, 동그랗게 솟아오른 가 슴의 탄력에 머물렀다. 여윈 팔뚝은 소녀의 등을 감싸며, 그녀의 몸 을 조금씩 조였다. 핏기를 잃은 입술은 그녀의 체온 구석구석을 쓰다 듬으며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달아오른 녹색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빙긋 웃음을 띤 입술은 다시 소녀의 입술로 돌아왔다. 소녀의 어깨에 묻은 물 한 방울의 감촉까지 소중히 애무하며, 소년은 소녀의 따뜻함 안까지 조용히 들어갔다. 얇고 하얀 두 다리가 미미하게 요동친다. 고운 두 손이 소년의 등을 힘껏 감싼다. 사랑이 아닌 스스로의 존재를 재확인하는 행위, 그것은 엄숙하면서도 고결해 보였다. 무심코 손이 소녀의 허리에 닿자 소년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가만 히 느껴지는 희미한 상처 자국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제는 희미해져 잘 보이지 않지만, 지울 수 없는 이 흉터를 그녀에 게 남긴 것은 바로 자기 자신. 그가 흉터를 쓰다듬자 들뜬 움직임을 보이던 소녀도 멈칫했다. "미안해. 많이 아팠지?" 비록 잘 보이지 않는다 해도, 이 흉터를 드러내는 것이 싫어 노출이 심한 복장은 싫다고 한 그의 마음을 조금은 알고 있다. 자신의 배를 갈랐던 당시 어쩔 수 없었던 그의 심정까지도. 소녀는 대답 대신 그의 등을 소중히 껴안았다. 소년은 다소 편안해진 미소를 띠며, 깊은 곳에서부터 전해지는 소녀의 체온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이윽고 소녀는 자신의 안에서 소년의 마음이 터지는 것을 느꼈다. 포 근하면서도 서글픈 기분을 떨치지 못한 소녀는 그가 빠져나가려는 것을 붙잡았다. 이대로 조금만 더 그를 자신의 안에 담아두고 싶었다. 자신의 존재를 계속 확인하고 싶었다. "아이가 생긴 것 같아." 갑작스레 튀어나온 소녀의 말에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소리야? 검사해봤어?" "그냥 알 수 있어. 내 몸에 일어난 변화를 내가 왜 몰라? 다른 생명 이 내 몸에 싹튼 거, 어제인가부터 어렴풋이 느꼈어. 처음에는 그냥 넘겼는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느낌이 뚜렷해졌어. 임신이 확실해." 처음에 소년의 얼굴에 자리잡았던 놀라움은 이윽고 기쁨으로 변했다. 그가 빤히 바라보는 게 쑥스러워 소녀는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소년은 더욱 단단하게 소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낳아줄 거니?" 소녀는 바로 대답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것이 거부가 아니라 수줍음 이라는 것을 소년은 바로 눈치챘다. 더욱 소녀가 사랑스러웠다. 그 아이는 바로 유진우의 아이임을, 레이온의 마음은 알고 있다. 허 나 서글프거나 아쉽다는 감정은 없다. 소중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 간이므로. "…고마워. 날 받아줘서." 그의 감사는 석연치 않은 불길함을 품고 있었다. 소녀는 어렴풋이 그 것을 느꼈으나 곧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둘째의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 아들일까 딸일까. 유빈이가 만약 살아 나면 동생이 생겼다고 좋아라 하겠지. 맥은 유빈이를 살리기 위해서 라면 자기를 희생할 수도 있다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앞으로는 행 복할 수 있을 거야. 행복과 불행. 시작과 끝. 진실과 거짓. 이별을 예감하는 사람과 조금 도 알지 못하는 사람. 상반된 감정이 교차하는 흐름에 기대어, 타이머는 조금씩 닳아가고 있었다. 「Time Limit : 118 hours 2 minutes」 by eden 다음날부터 소년은 호텔에 틀어박힌 채 소녀와 사랑을 나누는 데만 집착했다. 세계 이곳저곳을 구경하자는 약속 따위는 새카맣게 잊어버 린 듯,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려 하지 않았다. 사랑을 나누다 지치면 소녀를 끌어안고 잠들었다. 소녀가 잠깐만 빠 져나가려 하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는 꼭 붙잡았다. 소녀에게 싫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와의 육체관계는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행위, 애정의 결합을 넘어서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안색이 새파랗게 변할 때까지 자신에게 매달리는 소년의 모 습은 불안감이 짙어지는데 충분하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 초조한 그 가 걱정스러운 것이다. 어느 날 밤이었다. 그 날도 마찬가지로 소년은 마지막 힘 한 방울까 지 다 써버리고 난 후에야 숨을 몰아쉬며 시트에 쓰러졌다. 안타까운 눈으로 소년의 등을 쓰다듬던 소녀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떼었다. "너, 요즘 왜 그래?" "응? 뭐가?" 고개를 드는 것조차 힘들어 보인다. 목소리는 새카맣게 갈라져있다. 언뜻 보기에도 정상이 아니다. "밖에 나가지도 않고… 잠만 자거나 나랑 그거만 하고 그러잖아." "나는 좋은데. 왜, 너는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니지만…." 힘들게 몸을 돌린 소년은 억지로 웃음을 띠며 팔을 벌렸다. "자, 한 번 안아보자." 불안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던 소녀는 할 수 없이 그의 가슴에 몸을 기대었다. 소녀의 좁은 어깨를 껴안은 채 소년은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타이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환청이 틀림없겠지만 거 짓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소리. 그것은 시간이 멀지 않았음을 예감하 는 것. 이윽고 소년은 눈을 떴다. 걱정을 품고 잠이 든 소녀를 말없이 바라 보다가 입술을 훔쳤다. 키스가 끝나는 순간이 이토록 아쉽게 느껴지 는 것은, 허락된 시간이 끝나면 이 감각을 맛볼 수 없기 때문이리라. 「Time Limit : 8 hours 48 minutes」 타이머를 들여다보던 그는 소리 없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허탈함 과 아쉬움, 이별에 대한 증오가 가득 담긴 웃음이었다. 열흘. 이 육체로 마음을 이식한 때로부터 허락된 시간이다. 칼의 생 명의 무게가 열흘치밖에 되지 않았던 것처럼, 그의 생명 또한 열흘치 밖에는 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열흘. 이별을 준비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그 시간을 그는 사랑을 획득하는데 쓰기로 결심했다. 그 선택에 후회는 없으나, 타이 머가 꺼져 가면 꺼져갈수록 눈앞에 놓인 이별이 두렵기만 했다. 7년 전, 오늘과 같은 날이 오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때만 해도 덤 덤하게 이별을 맞이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환상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자신을 허물없이 받 아주는 그녀를 대하면서, 아이가 생긴 것 같다고 수줍게 고백하는 그 녀를 안으면서, 나약한 마음은 이별이 두렵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복받치는 감정의 폭주를 참지 못한 그는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울컥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몸을 세차게 껴안았다. 고통을 느낀 그 녀가 켁켁거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왜, 왜 그래?" "유젤… 유젤." 소년은 마냥 소녀를 부르기만 하면서 눈물만 흘렸다. 익숙하지 않은 그의 우는 모습에 소녀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를 다독이듯 소녀는 그의 얼굴을 가슴에 꽉 껴안았다. 왠지 모를 불안을 힘껏 깨물며,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뭐 때문에 그래? 말해 봐. 응?" 소년은 소리 없이 울기만 했다. 소녀의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 그는 아무 이유 없이 울 남자가 아니다. 그가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 지는 데에는 커다란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뭔지 불안했다. "설마 내가 너 버릴까봐 그래? 안 버려, 이제 너 안 버리니까 걱정하 지 않아도 돼." "유젤…." "네 아이까지 낳아서 잘 키워준다니까. 내 곁에서 안 밀어낼 테니까, 내가 잘 데리고 살아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응? 그러니까 그만 울 어, 서방님." 남은 시간은 이제 고작 하루분도 안 되는 만큼. 모래시계의 모래알이 다 떨어지고 나면 애틋하게 자신을 부르는 저 음성을 이제 듣지 못 하게 되겠지. "나이도 스물 넷이나 먹었다고 말하면서 왜 그렇게 어린애처럼 울기 나 하고 그래? 울지 마. 울지 말고 나랑 좋은 거나 하자." 소녀의 체온이 따스하게 느껴진다. 날카로움 따위는 오래 전에 무뎌 진 듯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왔는데, 겨우 그녀가 자신을 받아 주었는데 이제 8시간이 지나면 헤어져야 한다니. 눈앞까지 닥쳐온 운명이 서글퍼 울음을 삼켰다. 두려운 마음을 감추 고자 그녀에게 더욱 세게 매달렸다. 맞닿은 피부를 통해 그녀가 불안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끝끝 내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따스한 몸짓으로 묵묵히 위로해주기만 했을 뿐. 그것에 고마워하며, 그것을 다시 잃어야 한다는 것에 슬퍼 하며, 그는 더욱 사랑을 갈구했다.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사랑의 행위. 마침내 끝났다. 죽음의 색깔로 뒤덮인 얼굴을 한 채 소년은 잠이 들었다. 아니, 의식 을 잃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소녀는 차마 그의 얼굴을 확인할 생각을 못했다. 미약하게나마 들리 는 숨소리에 안심하며, 그의 등을 껴안은 채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태양이 솟구치며 아침이 왔음을 알렸다. 따스한 햇살이 창문을 통해 방안 구석구석까지 들어왔다. 얼굴에 와 닿는 열기가 눈이 부셔, 소년은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멍한 표정을 짓고 주위를 둘러보던 소년은 곁에 잠들어 있는 소녀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도톰하고 붉은 입술이 사랑스러워 살며시 입술 을 훔쳤다. 그래도 잠에서 깨지 않는다. Time Limit : 0 hour 0 minute You are dead. 모래알이 전부 밑으로 떨어졌다. 계산대로라면 자신은 이 아침 태양 을 볼 수 없어야 한다. 허나, 모든 시간을 소비한 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있다. 그러나 생명이 연장되었다는 기쁨은 없다. 어째서 죽지 않았는지 의 심만 지독하게 피어올랐을 뿐. "아아, 그런가." 감흥 없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답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것은 마더가 자신을 위한 배려, 그녀에게 최소한 작별 인사만큼은 건네고 떳떳이 떠나라는 선물. "쓸데없는 배려를 했군요, 어머니." 한편으로는 감사의 마음이 들기도 했다. 용기 없는 놈이라고 비난을 받아도 마땅하다. 멋대로 그녀의 세계에 침입했을 때는 언제고, 멋대 로 그녀의 세계에서 도망치려 했으니. 입술을 간질이는 손길에 소녀는 눈을 떴다. 창백하기는 하지만 어제 보다는 혈색이 좋아진 소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소녀는 발딱 일어나 소년을 껴안았다. 아침마다 남편 이라는 물건을 껴안는 것도 나름대로 즐거운 느낌. 이래서 사람들은 혼자 살 수 없는 건가 보다. "일어났어, 서방님? 또 그거나 할까?" 명랑하게 건네는 아침 인사에 소년은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수척해진 손으로 말없이 소녀의 등을 껴안고 다독였다. "유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야." "응?" 커다란 불안함을 느낀 소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떼어냈다. 소년이 짓 고 있는 서글픈 미소가 손에 잡힐 듯 또렷이 보였다. "이 몸으로 소생하는 것은 애초에 실패였어. 아니, 시한부 소생이라 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소녀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소년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 선을 떨어뜨렸다. "자이오 다이아몬드 한 개로는 완전한 소생술을 치를 수 없었어. 이 육신은 2년 전 이미 죽은 거니까. 그냥 살려내는 거라면 모를까, 내 마음까지 이식한 데다가 신인류의 육체로 바꿨기 때문에 자이오 다 이아몬드 한 개로는 오래 버틸 수 없어." 자이오 다이아몬드라 해서 전지전능한 것은 아니다. 신인류는 자이오 다이아몬드 그 자체가 변했다고 말할 수도 있는 존재. 하나의 신인류 를 살리거나 부활하거나 만드는 데에는, 하나의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필요로 한다. 하물며 죽어버린 구인류의 육체를 살려내고, 그것을 신인류의 육체로 탈바꿈했으니 열흘을 버틴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오래 전 죽은 육체를 열흘 간 부활시킨 것은 순수한 레이온의 업적. 그것만으로도 그는 천재라 칭송 받아 마땅하지만, 그 또한 한계를 초 월할 수는 없었다. 고작 한계를 예측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새하얀 얼굴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타이머가 다 됐어. 계산대로라면 난 오늘 아침 해를 보지 못하고 죽 어야 했어. 그동안 숨겨서 미안해." "살아있잖아? 하지만 살아있잖아? 계산이 잘못된 거 아니야? 아니, 애초에 할 필요가 없었던 계산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타이머가 다 됐는데도 지금 내가 살아있 는 것은 아마도 마더의 배려가 아닐까 생각해. 너한테 작별 인사를 하라는…. 난 마더와 최초로 대등한 계약을 맺은 인간이니까." 너를 가슴에 품었을 때부터. 네가 살아 숨쉬는 것을 봤을 때부터. 소년이 짓고 있는 미소가 조금씩 힘을 잃어갔다. 소녀는 다급한 마음 을 감추지 못하고 그에게 매달렸다. "죽지 마. 죽지 마. 잘 생각해보면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야. 맞 아! 맥한테도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있어! 그걸 쓰면 돼!" "그건 유빈이를 살리는데 써. 나 살리는데 쓰지 마. 이건 남편으로서 마지막 유언이야." "시끄러워! 아이 같은 건 또 낳으면 돼! 네가 없으면 안 돼!" 이성을 잃은 소녀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소년은 꾸짖듯 말했다. "유빈이를 두 번씩이나 죽이겠다는 거니? 날 위해서?" 무력감이 그녀를 감쌌다. 그의 눈에 떠오른 의지는 확고했다. 그는 아마도 오래 전부터 오늘과 같은 순간을 각오하고 있었으리라. 어디서부터가 연극이었고 어디서부터가 진심이었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훔쳐 달아난 게 미안했다는 사과는 그저 위장에 불과했을까. 그가 아기를 포기할 생각이었다가 뒤늦게 맥의 ST기관을 떠올린 것 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맥의 ST기관이 있으니 아이는 살아날 수 있 으리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른다. 그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으므로. 소녀는 머리 속이 꽉 막힌 채 부르짖었다. "죽지 마! 죽지 마! 유진우! 죽지 마!" 힘겹게 만든 미소가 그의 얼굴에 걸려 있다가 부스러졌다. 온기가 빠 진 그의 몸이 스르르 그녀의 무릎으로 넘어졌다. 갑작스런 소나기처럼 너무나 쉽게 다가온 이별. 그것을 깨닫기 위해 소녀는 한참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죽은… 거야? 이렇게 쉽게…?" 경련을 일으키는 손으로 그의 몸을 만져봤다. 딱딱하게 식어 더 이상 의 온기가 없는 어깨. 이제는 더 수척해질 일도 없이 먼지로 돌아가 는 일만 남은 손과 발. 무엇보다 다시는 뜨지 않을 두 눈이 그의 죽 음을 증명했다. 소녀의 몸이 스르르 무너졌다. 허망했다. 이별 따위 생각해본 적 없 는데 이렇게 갑작스레 헤어져야 하다니. 그때였다. 그의 몸에서 미약한 두근거림이 들려왔다. 소녀는 화들짝 놀라 그를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유진우! 유진우! 정신 차려! 너 살아있는 거지? 죽은 거 아니지? 그 렇지? 말해봐! 말해봐! 유진우!" 그의 손발이 조금씩 움직인다. 살아난 걸까? 소녀의 얼굴이 환히 밝 아졌다. 이윽고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 며 얼굴을 찌푸린다. "죽은 거 아니지? 살아난 거지? 그치?" 기대에 찬 소녀는 소년의 얼굴을 뚫어져라 살폈다. 미안해, 장난 쳤 어. 역시 넌 나 없이는 못 살지? 그런 반응을 기대하면서. 그러나 소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어? 서예안, 너 무사한 거야?" 한 줄기 벼락이 소녀의 뇌리를 때렸다. 눈을 휘둥그렇게 뜬 소녀는 간신히 용기를 내어, 떨리는 음성으로 물 었다. "무슨… 소리야?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자식들은 어떻게 됐어? 설마 여기에 우리 둘을 감금한 거야? 아 니면 네가 날 데리고 탈출한 거야? 나도 총에 맞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는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어라? 그러고 보니 상처 자국이 없네?" 자신의 몸을 더듬던 소년은 이윽고 둘 다 알몸이며 침대 위에서 마 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확 붉혔다. "으아아악! 내,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미안해, 미안해. 나, 나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소년은 코가 시트에 닿도록 고개를 숙이며 두 손을 싹싹 모아 빌기 시작했다. 다소 우스꽝스런 상황이었지만, 소녀는 조금도 우습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해. 졸려…." 힘들게 고개를 든 소년은 자꾸만 하품을 해댔다. 정신이 번쩍 든 소 녀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진우야! 자면 안 돼! 자면 그 사람들이 와서 우리를 잡아갈 거란 말 이야!" "하지만… 졸린걸. 더는 버틸 수가…. 으음…." "안 돼! 자지 마! 그 사람들한테서 날 지켜준다고 그랬잖아! 다음 세 상에서 만나면 재미있는 이야기해준다고 그랬잖아! 이 세상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오래오래 살면서 이야깃거리 모을 거라고 그랬잖아!" 견딜 수 없다는 듯 크게 하품하던 소년의 몸이 털썩 쓰러졌다. 마지 막으로 그의 신체를 지탱하던 생명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박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숨소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살아있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정말로 죽은 것이다. 이식된 마음과 육신, 그 두 가지가 죽은 것이다. 그리고 본래의 마음마저 죽은 것이다. "아아…." 소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두 뺨을 감쌌다. 머리 속이 날아가 버린 듯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모든 사고 회로가 새하얗게 정지 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본 건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것을 본 건가. 나 자신이 죽은 것을 본 건가. 아니면 트루먼 쇼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탄생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 을 존재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컨트롤 당하는 나 자신을 본 건가.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간다. <유젤>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식어버린 몸뚱이를 언제까지고 그렇게 품에 끌어안은 채. 어디서부터가 서예안이었고, 어디서부터가 유젤이었는지 분간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어디서부터 내가 아니었으며, 어디서부터 또 나 였는지까지도. 여러 개의 필름이 뒤엉켜 본래의 색깔을 잃어버린 것처럼, 그녀의 기 억 또한 모조리 엉켜 있었다. "모시러 왔습니다, 유젤님." 덤덤한 넬의 음성이 들렸다. 유젤은 죽은 소년을 여전히 끌어안은 채 천천히 넬을 돌아보았다. "유…젤?" "그렇습니다. 당신의 이름입니다." "내 이름… 내 이름… 유젤…." 초점이 사라진 눈으로 그렇게 중얼거려본다. 전혀 타인의 이름처럼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한 친근감이 느껴지는 이름. "어떻게 된 거야? 난 맥을 조종한 후유증으로 쓰러졌고… 진우는 총 에 맞았던가? 그럼… 여기는 시트날타 본부? 너는 시트날타 사람?" "순간적인 충격으로 의식이 2년 전 그 당시로 돌아간 듯 하군요. 갓 태어난 당신은 백지와 같습니다. 어떤 색깔을 입히느냐에 따라서 전 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죠. 박사님은 그 점에 착안, 때마침 사망 한 구인류의 기억을 당신의 두뇌에 이식함으로써 당신 스스로가 그 구인류라고 착각하도록 했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설명이다. 하지만 또렷이 귀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구인류 소년의 시신은 박사님이 상하지 않게 보관하고 계셨죠. 박사님은 오랫동안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손에 넣는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한 개만이라도 어떻게 손에 넣으면, 그 구인류 소년의 육체에 본인의 마음을 이식하여 당신과 동등한 사랑을 하겠 다는 생각이셨죠." "몰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직은 이해하기 힘드실 겁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알아두십시 오. 박사님이 신인류화를 하지 않았더라면 열흘만에 돌아가실 일도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구인류인 채로 남으면 유젤님의 사랑을 손에 넣는다 해도 그것은 편도적인 사랑이기에 싫다고 하셨습니다. 당신과 동등한 자격에서 사랑하고 싶어하신 거죠."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이해할 수 있 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기가 죽은 후에 이것은 말씀드리라 하셨습니다. 오스카와 앤슨, 마리오, 그들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물론 그 거대한 폭발을 견 디느라 모든 에날도스를 소진한 탓에 지금은 불구나 마찬가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힘을 회복할 거라 합니다." "오스카… 앤슨… 유빈이를 죽인 녀석들…." "그렇습니다. 처벌하러 가셔야지요." 넬은 영차 하고 죽은 소년의 몸을 안아 올렸다. 유젤이 떼를 쓰듯 놓 아주지 않으려 했지만 간단히 밀어냈다. "이리 줘. 진우는 지금 잠을 자고 있는 거란 말이야." 넬은 아이처럼 칭얼거리는 유젤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사뿐히 몸을 돌렸다. "하루속히 마음을 다잡고 일어나시기를 빕니다. 돌아가신 박사님도 그걸 바라실 겁니다." 넬이 방을 나서려 하자 유젤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가왔다. 금방이 라도 넘어질 듯 아슬아슬했다. "이리 내놔. 진우는 지금 이야깃거리 찾아서 떠난 거란 말이야. 금방 깨어날 거란 말이야. 돌려줘. 돌려줘." 멀리 떠나는 가족을 쫓아가는 아이처럼, 비틀거리며 따라오던 유젤은 문턱에 걸려 넘어졌다.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는 유젤을 말없이 흘끗거린 넬은 곧 자취를 감췄다.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혼자 남은 유젤은 언제까지고 끊어지지 않는 사고에 머물러 있었다. 지금껏 자신의 안에 머물러 있던 유진우의 마음이 작별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은 말했다. 그동안 네 안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은 내 육체가 세 상에 남아있기 때문이었다고. 마음은 또 말했다. 그런데 그 육체가 이제 완전히 죽어버렸다고. 그리고 마음은 말했다. 육체가 죽었으므로 이제 나 또한 사라져야만 한다고. 육체-자기 자신-의 죽음을 지켜본 마음, 자기 자신에게 안녕을 고하 는 마음. 그것은 마음 또한 죽어야 하며, 육체를 따라 어두운 고독으 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마음은 고마워했다. 그동안 날 좋아해 줘서 고맙다고. 그 리고 미안하다고. 여태껏 너를 속여왔던 것이. by eden "왜 그러십니까?" 멍해 있던 앤드류는 비서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손가락에 힘이 풀렸 는지 떨어진 볼펜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볼펜을 집었다. 이상했다. 까닭 모를 불안함이 뇌 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히 자세를 잡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무슨 일이지?" "백악관에서 은밀히 연락 왔습니다. 회장님이 지금 와주셨으면 한다 고요." "스튜 대통령이?" 앤드류는 의아함을 느꼈다. 자신은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사람 중 하나이자 스튜 대통령과 어느 정도 친분도 있다. 못 부를 사이는 아니다. 하지만 은밀히 오라고 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알았어. 준비하지." 얼마 전 한국을 방문했던 일 때문에 불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딱히 짐작 가는 게 없던 앤드류는 백악관을 향하는 내내 미심쩍은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두 시간이 걸려 백악관에 도착한 앤드류는 요원들의 안내를 받았다. 무기를 소지한 요원들이 안내하다니, 무언가 기밀로 처리해야 할 일 인 모양이었다. "어서 오시게." "오랜만입니다. 헌데 무슨 일로 이렇게 급히 절 찾으셨는지요?" "대단히 중요한 일이지. 우리나라의 운명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닐 만큼." 대통령은 손수 앤드류를 어느 방으로 안내했다. 건장한 요원 둘이 문 좌우에서 지키고 있다가 경례를 했다. 방안은 아늑한 분위기였다. 한쪽에 놓인 커다란 침대에는 한 소녀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붉게 빛나는 머리카락이 새하얀 시트 위에 아 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소녀의 얼굴을 확인한 앤드류는 기절할 듯 놀랐다. "누나?" 그는 대통령이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누나. 나야, 앤드류. 어떻게 된 거야?" 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자세히 보니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무언가 크게 상심해 이지를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앤드류는 가까스로 분노를 억누르고 대통령을 돌아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설마 미정부가 닥터를 지금껏 감금해두고 있었던 건가요?" "오해하지 말게나. 닥터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안 뒤부 터 미행을 하기는 했지만 직접적으로 손을 댄 적은 없네." "그럼 닥터의 지금 이 모습은 어떻게 된 거죠?" "글쎄, 우리도 그것을 알 수 없단 말이야. 묵고 있던 호텔에서 닥터 가 갑자기 뛰쳐나오더니 미친 사람처럼 맨발로 헤매는 걸 보다못해 일단 신병을 확보한 거지. 지금 자네도 봤다시피 닥터는 제정신이 아 닐세." 앤드류는 다시 걱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봤다. 무언가 잔뜩 겁을 집어 먹은 듯한 모습이 애처로웠다. "그럼 그동안 닥터는 누가 돌본 겁니까?" "특별히 고용한 여성들을 시켜서 돌봤지.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외부 로 나가는 것은 물론 연락도 철저히 금하고 있네." 앤드류가 닥터에게 연모를 품고 있다는 것은 세계적인 가십거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닥터가 언젠가는 앤드류와 결혼하지 않을까 하고 입방아를 찧는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은 다음 말을 꺼내기를 몹시 망설였다. "자네에게는 못할 말이지만… 닥터는 그동안 어떤 소년이랑 같이 다 녔다네." "남자랑요?" 앤드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통령은 주저하며 덧붙였다. "호텔에서 여러 날을 숙박했다는군. 같이 다니는 걸 본 요원이 말하 기를 꽤나 다정한 연인 사이 같아 보였다는군. 거기다가 여러 날 동 안 같은 방에 묵고… 자네라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앤드류의 안색이 핼쑥하게 변했다. 그리고 대통령의 입에서 결정적인 말이 떨어졌다. "그리고 닥터는 지금 임신 중이라네." 눈앞이 노래지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앤드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대 통령과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그게… 그게 사실입니까?" "사실일세. 유명의가 진단한 거야." "애아버지로 추정되는 그 소년은요?" "사력을 다해 찾고 있으나 행방을 찾을 수 없네." 앤드류는 직감적으로 니콜라스 베르노를 떠올렸다. 그러나 곧 아니다 하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통령이나 정보기관은 니콜라스를 알고 있다. 어떤 소년이라고 칭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닥터 주변을 맴도는 남자들을 차분히 검색해보았 지만 짚이는 곳이 없었다. GA그룹의 후계자인 록 켈턴? WS 회장의 막내아들인 짐 훼일즈? 유한그룹 회장의 조카인 김장윤? 소년이라 함은 아직 스무 살이 안 되었다는 소리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가문의 후광을 입었다고 해도, 고작해야 십대 부유층 아이들 이 세계적인 유명인물인 닥터에게 선뜻 접근할 용기를 낼 리 없다. 그렇다보니 검색의 폭은 대단히 좁았다. 그 중에서 마땅히 그녀의 마 음을 사로잡았을 녀석이 있으리라 기대하기는 불가능했다. 거기다가 미정부도 파악을 못하고 있는 녀석이니, 아마도 알려지지 않은 일반 인일 가능성이 컸다. 착잡함을 금치 못한 앤드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새끼 밴 암코양이처럼 그녀는 거칠게 뿌리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가녀 린 어깨가 덜덜 떨리고 있는 게 안쓰러웠다. 임신을 했다라. 그녀가 와주기만 한다면, 유빈이를 얼마든지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허나 그것과 이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뻔히 알면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그녀에게 원망도 솟는 등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그럼 미 정부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앤드류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대통령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자신을 이 자리로 부른 이유를 설명해달라는 요구도 포함돼있었다. "현재 닥터는 한국에서 국가적인 범죄를 저지른 인물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지. 잘만 설득하면 우리나라로 망명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 각하네." "그래서 절 부르신 겁니까?" "그렇지. 자네는 닥터와 친하니, 자네가 설득하면 닥터는 쉽게 넘어 올 거야."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계신 거 아닌가요? 비록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미국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하긴 했지만, 저는 미국인이 아니 라 영국인입니다. 그것도 왕실의 일원이지요." "자네 사촌형과 자네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졌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닌가?" 사실이었다. 현 영국 왕실의 불화는 관심 있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 을 정도로 유명했다. 앤드류가 오랫동안 영국에 돌아가지 않고 미국 에서 사업하는 것도 가정불화가 큰 이유였다. "게다가 자네 사업은 태반이 미국의 경제를 근반으로 하고 있지. 영 국보다는 미국이 발전할수록 자네 회사에도 도움이 돼. 거기다가 자 네는 닥터와 누구보다 친한 남자이고. 그래서 자네에게 도움을 청했 는데, 내가 잘못한 건가?" "…아니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하지." "그럼… 잠시 누나와 단 둘이 있고 싶으니 그래주시겠습니까? 시종 드는 사람들도 물려주셨으면…." "그러지." 곧 그와 그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방에서 나갔다. 둘만 남은 앤드 류는 그녀의 옆에 앉으며 손을 잡았다. 형언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피어올랐다. "누나…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애가 타던 마음을 몰라준 것에 대한 원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 의 마음을 뻔히 알면서 다른 남자랑 지내고 있었다는 것도 원망스러 웠다. 그러나 적어도 그녀가 무사하다는 사실, 그래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 고 있었다는 안도감이 다른 어떤 감정보다도 우선했다. "응?" 문득 그녀의 왼손에 끼인 반지를 발견한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굳었 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결혼 반지였다. "누나?" 그는 애절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두 팔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부들부들 떨기만 하고 있었다. 칠흑 같이 어두운 공간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유젤은 불안한 얼굴로 주변 을 두리번거렸다. 저 멀리서 빛이 보였다. 저쪽으로 가면 될까? 유젤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었다. 두려움이 엄습하며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갑자기 시야가 확 밝아졌다. 누군가의 모습이 저 멀리, 하지만 뚜렷 하게 떠올랐다. 유젤은 목이 터져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진우야! 유진우!' 밝은 빛에 휩싸인 진우가 눈앞까지 다가왔다. 따스한 미소를 띤 그는 말없이 유젤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그 손길에서 유젤은 잊어버리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눈 물이 주르륵 흘렀다. '어디 가는 거야… 재미있는 이야기 많이 많이 해준다고 그랬잖아… 이 세상이 얼마만큼 재밌는지 나중에 이야기해준다고 그랬잖아….' 확신할 수조차 없다. 오래 전 그 말을 했던 사람이 그였는지, 아니면 자신이었는지도. 희뿌연 빛에 휩싸인 채 진우의 모습이 사라졌다. 놀란 유젤이 두리번 거리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박사님?' 그는 수척한 미소를 띠며 유젤을 껴안았다. 아버지처럼 포근하고 깊 은 그 느낌에 유젤은 또 눈물을 흘렸다. '혼자 있는 건 무서워요. 박사님, 나 혼자 두지 마요.' '유젤. 박사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싫어요! 박사님은 박사님이지 레이온이 아니란 말이에요! 난 그 사람 이 될 수 없단 말이에요!' 이제야 기억났다. 그는 항상 자신에게 이름을 부르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를 대하듯 하 지말고 연인처럼 편히 대해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당시 유젤은 갓 태어난 아기나 다름없었다. 유젤에게 필요한 것은 평생을 함께 해줄 연인이 아니라, 따스하게 품어줄 수 있는 부 모 같은 존재였다. 유젤은 연인의 개념조차 몰랐다. 헌데 그는 유젤을 통해 누군가를 투 영해보고 있었다. 유젤은 그가 부모 역할을 하기 싫어한다고 느꼈고, 그것은 곧 두려움이 되었다. 그래서 도망쳤던 것이다. 허나 그는 도망치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맥에 태워주며 멀 리 도망가라고까지 했다. 그가 잡아주기를 원했지만, 아버지 같은 눈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을 봐주길 원했지만 그는 끝끝내 그러지 않았다. '박사님…. 미안해요.' 이제야 그가 어떤 절실함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는지 알게 된 유젤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자신을 외면했던 게 아니었다. 색깔이 다른 사랑으로 바라보았을 뿐이다. 다른 색깔의 사랑을 원했던 자신은 편 식을 하듯 투정을 부렸던 것이고. '유젤… 이제는 네가 날 쫓아올 차례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모습이 멀어져갔다. 허우적거리며 그 를 쫓아가던 유젤은 무언가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그녀는 어린아이 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누나, 정신이 들어?" 유젤은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들었다. 뺨을 만져 보니 눈물이 묻어 나왔다. 새하얀 빛이 주변에 가득하다. 처음 보는 낯선 방이다. 옆에는 앤드류가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가 누구인지 생 각해내는데 유젤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앤드류…?" "나 알아보겠어? 이제 정신이 좀 들어?" "아…." 눈꺼풀을 깜박이며 그를 주시하던 유젤은 이윽고 울음을 터트렸다. 앤드류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를 달랬다. "왜 그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겪은 거야?" "있지. 있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내 주변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거짓된 느낌 이다. 하지만 결코 환상은 아니지 않은가. 무엇을 하면 좋은지 몰랐다. 지금은 그저 마음껏 울고 싶은 기분밖에 안 들었다. 앤드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달래주었다. 이윽고 유젤은 눈물을 그쳤다. "여기는 어디야?" "…백악관." 앤드류는 괴로운 얼굴로 답했다. 그 단어가 지니고 있는 무게를 알기 때문이었다. "왜 내가 백악관에 있어?" "미 정부요원들이 누나가 정신을 잃고 헤매는 것을 발견했대. 사회적 으로 파장이 커질 것을 우려해서 일단 이곳으로 데려온 거야." "나, 여기서 나가고 싶어." "…알았어. 그럼 우리 집으로 가자." 불가능할지 모르는 약속이지만 앤드류는 그렇게 말했다. 카를로스를 회사 통째로 떼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대통령을 설득할 생각이었다. 어두운 얼굴로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대통령이 다가왔다. "닥터가 정신을 차렸군." "…들으셨습니까?" "미안하네. 감시장치를 갖춰놓아야 한다고 부하가 열변을 토해서 말 이야." 다소 불쾌하기는 했지만 크게 화나지는 않았다. 닥터는 모든 나라들 이 탐내는 황금인 데다가 현재는 주인이 없다. 대통령 입장에서는 당 연한 조치였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시겠군요. 닥터, 아니 누나는 당분간 제가 보호 하겠습니다." "자네가 무슨 자격으로?" "누나가 그러길 원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입을 다물고 찬찬히 살폈다. "누나는 누군가가 자기를 구속하는 것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제가 한 창 쫓아다닐 때, 저는 누나로부터 들을 말 못 들을 말까지 다 들어야 했습니다. 헌데 미정부가 자기를 감금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누나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맥이 워싱턴을 향해 포구를 겨눌지도 모르지. 전에도 한 번 그랬 던 적이 있으니." "이해가 빠르시군요. 그러니 누나는 제가 보호하겠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대통령은 한숨을 지으며 끄덕였다. "그렇게 하게. 아무래도 그것말고는 답이 안 보이는군." "감사합니다." by eden 궁전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대저택으로 검은 중형차 한 대가 미끄 러지듯이 들어갔다. 먼저 차에서 내려 반대쪽으로 돌아간 앤드류는 문을 열어주었다. "다 왔어." 유젤은 여전히 몸을 웅크린 채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그 모습도 귀 엽긴 하지만 도착했는데도 계속 저런다면 심각하다. 혀를 끌끌 차던 앤드류는 할 수 없이 몸을 숙였다. 그리고 가볍게 그 녀를 안아 올려 차에서 내리게 했다. 예전 같았으면 내려놓으라고 반항했을 텐데 조금도 그런 낌새가 없 다. 왠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앤드류는 유젤을 안고 현관을 들어섰다. "아, 회장님. 오셨습니까?" 두 명의 가정부가 나와서 인사하다가 유젤을 보고 흠칫 놀랐다. "닥터?" "회장님?"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얼굴이다. 앤드류는 쓴웃음을 지으며 설레설 레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의미였다. "이유는 알 것 없고, 누나가 우리 집에 있다는 것은 비밀로 해요. 절 대 외부, 특히 매스컴에 흘러 들어가게 해서는 안 돼요." "예. 알겠습니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일해온 사람들이니 만큼 그 정도는 믿을 수 있다. 닥터가 미국에 있다는 것이 국가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극비도 아닌 만큼 괜찮을 것이다. 앤드류는 2층 손님방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바로 몸을 웅크렸다. 겁을 집어먹은 토끼 같았다. "식사 준비할까요?" 노크를 하고 들어선 가정부가 물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네?" "지금 누나는 몸이 지극히 좋지 않아 일반 음식에 손댈 수 없어요. 그러니 그 부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예. 알겠습니다." 가정부가 나갔다. 유젤은 여전히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는 괜찮아진 듯 하지만 여전히 심각한 상태였다. 무언가 정신 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앤드류는 착잡한 시선으로 유젤을 응시했다. 12년 전부터 좋아했던 그녀를 눈앞에 두고 있지만 여전히 우울하다. 그녀의 뱃속에 다른 남 자의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두 번이라고 못할 것은 없다. 그러 나 아이 아버지가 이미 죽고 없었던 전과 지금은 다르다. 행방불명과 사망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아이 아버지가 나타난다고 해서 순순히 그녀를 넘길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괴로워하는 것을 무책임하게 내버려둔 어린 사내 녀석 따위에게는 결코 지지 않을 것이다. 어슴푸레하게 전신을 감싸오는 따스함에 취해, 니콜라스는 살며시 눈 을 떴다. 사방이 푸른빛으로 가득하다. 저 멀리 위에 금색 섬광이 조금씩 어른 거린다. 따스한 빛이 주변을 감싸고 있다. 빛이 형성한 벽 너머로 아름다운 심해의 광경이 보인다. '바다…?' 니콜라스는 손가락을 움직여보았다. 힘들었지만 조금씩 움직인다. 가슴에 났던 커다란 구멍은 어느새 아물어 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 면 몸은 완전히 회복될 것 같다. 그렇다면 복수도 가능할 것이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유빈이는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아틀란티스에게 끌려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해야 한다. '크윽….' 몸을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지독한 통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입술을 질끈 깨물고 참았다. 고급 청부업자 니콜라스 베르노가 고작 이 정도 고통에 굴복한다면 이만저만한 망신이 아니다. 눈앞에서 화악 하고 빛이 터졌다. 커다란 자애를 품은 따스함이 가슴을 적시기 시작했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아 니콜라스는 고통을 잊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눈앞에는 한 여자가 미소짓고 있었다. 넓은 바다 풍경을 배경으로 한 채, 발뒤꿈치까지 닿는 보라색 머리카락이 하늘하늘하게 흩날리고 있 었다. 새하얀 알몸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따스한 미소는 모든 고통 을 잊게 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얼굴이다. 니콜라스는 반가움에 취해 여자에 게 손을 내밀었다. '니르? 왜 여기에 있어?'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니콜라스를 감싸 안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맨살 이 와 닿았다. 여자를 모르는 몸이 아님에도, 욕정 따위는 한 조각도 생기지 않는다. 경건함 비슷한 자애로움만이 마음 속을 가득히 채웠 을 뿐. '니르가 날 구해준 거야?' 여자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정체 모를 불안함을 느 꼈다. '니르? 왜 말이 없어? 그동안 미국에 한 번도 안 갔다고 삐진 거야? 니르도 알잖아, 너무 바빠서 미국에 갈 수가 없었어.' 다정히 니콜라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여자는 이윽고 그의 몸을 천 천히 들어올렸다. 아기처럼 몸이 들려진 니콜라스는 뭐라고 말을 하 려 했다. 허나 소리가 사라진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을 감싸고 있던 빛이 공기방울처럼 터졌다. 희뿌연 섬광의 폭발 이 일어났다. 세찬 물살의 소용돌이가 그를 힘껏 밀어 올렸다. 강한 수압에 휩쓸린 채 그는 숨이 막혀 켁켁거렸다. 정신을 차린 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인적이 드문 해변가였다. 작별을 고하듯 썰물이 조용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묘한 감정에 휩싸인 눈으로 수평선을 응시했다. "니르…." 왜 그때 니르의 모습이 보였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굳이 몰라도 될 것이다. 니르는 예전과 변함 없이 여전히 자상하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모든 일이 끝나면 니르를 꼭 찾아가야지. 아마 집에 없을지도 모르지 만 상관없을 것이다. 보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부르면 니르는 어디에 있든지 와줄 것이다. 지금은 복수를 생각해야 할 때. 그 녀석들에게 니콜라스 베르노가 얼 마나 무서운지를 뼛속깊이 각인시켜줘야 할 때. 점차적으로 살기가 짙어지며, 니콜라스는 그곳을 떠났다. 넓은 정원은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정원의 한가운데에 세워진 5층 저택은 곳곳에 불이 켜져 있었다. 지 금 시각은 자정. 현대인에게는 늦은 시간이 아니다. 니콜라스는 어둠에 몸을 감춘 채 불빛을 응시했다. 권총의 서늘한 촉 감이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언뜻 보기에는 별다를 것 없는 상류층 저택. 그러나 마피아 대부의 본가를 습격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것이다. 제나르는 평범한 상원 의원이 아니라, 아틀란티스의 5대 대신이므로. 그가 일신에 지닌 힘 만 해도 상상을 초월한다. 권총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슬그머니 땅에 버렸다. 오랫동안 함께 해 온 소중한 파트너에게 조용히 작별 인사를 고했다. 권총은 약하다. 에너지탄을 모아 손가락으로 쏘는 것보다 전력이 현 저히 떨어진다. 조무래기들을 상대하는 것도 아닌데 전력감소를 택할 이유는 없다. 그동안 굳이 권총을 써온 것은 사지를 함께 헤쳐나온 파트너에 대한 예의였다. 그러나 이제 더는 예의를 차릴 수 없다. 손가락이 뚜둑거리는 소리를 냈다. 심호흡을 한 뒤 니콜라스는 불빛 을 향해 번개같이 몸을 날렸다. 현관에 당도하기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허나 어떤 감시 카메 라에 잡혔을지 안심할 수는 없는 법. 그는 상대가 눈치채기 전에 속 전속결로 끝낼 생각이었다. 거실에 뛰어들자마자 TV를 보고 있던 여자들을 가볍게 쳐서 기절시 켰다. 가장 강한 기운이 느끼지는 방을 찾자마자 문을 열어젖혔다. 안경을 쓴 제나르가 책상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오늘은 커피로 부탁해. 설탕은 세 스푼만 넣어서." 아직 눈치 못 챈 모양이다. 오히려 잘 됐다. 니콜라스는 조금씩 제나르의 등뒤로 접근했다.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느낀 제나르는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 순간 니콜라스는 번개같이 손을 내밀어 목을 움켜쥐었다. 허무하 게 제압당한 제나르는 켁켁거리며 반항했다. 니콜라스는 그럴수록 더 욱 힘을 주었다. "반항하면 목을 부러뜨리겠다. 그리고 이 저택의 모든 사람들을 죽이 겠어. 나에게는 그럴 힘이 있다." 니콜라스는 오른손에 에너지를 집중시켰다. 둥근 태양 같은 구슬이 손바닥 위에 둥실 떠올랐다. 저것에 맞았다가는 어찌 될지 아는 제나르는 굴욕의 빛을 띠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니콜라스는 잠자코 그의 목을 놓아주었다. 여차하 면 에너지탄을 그의 미간에 날릴 준비를 갖추면서. "죽은 게 아니었나?" "그 정도에 죽진 않아." "과연, 역시 네가 엘리우스였군. 하긴, 아무리 생각해도 제임스는 엘 리우스라고 볼 수 없었으니." "제임스가 엘리우스?" 니콜라스는 무슨 소리냐는 듯 갸웃거렸다. 제나르는 말해도 상관없다 여기고 입을 열었다. "전대 엘리우스라 의심받았던 세레스의 아들이지. 황제 폐하께서는 그녀를 엘리우스라 발표하고 잡아들이셨지만 결국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신들 논리대로라면 모순 아닌가? 그 사람이 엘리우스라면 어떻게 제임스가 엘리우스가 될 수 있지?" "세레스는 엘리우스가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 그래서 그동안 그녀가 보인 수상한 행동은 자기 아들이 엘리우스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제나르는 선명한 의지를 두 눈에 똑바로 담고, 니콜라스를 노려보듯 주시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제임스를 의심할 필요는 없지. 이렇게 살아남아서 날 협박하고 있는 것을 보면, 네가 분명히 엘리우스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제나르는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했다가는 죽음 을 맞이할 것임을 느꼈다. 상대는 지금 진심이다.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다. "유빈이는 어떻게 됐지?" "…아틀란티스에 있다." 역시 그랬던가. 니콜라스는 흙빛이 되었지만 꾹 참고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누나는 지금 어디 있지? 너희들이 엔젤이라고 부르는 여 자 말이야." "그것은 말할 수 없다." "아직 잡지는 못한 모양이군. 그렇지만 상관없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몰라 제나르는 의아했다. 순간 눈앞에서 불꽃 이 튀었다. 어느새 니콜라스가 수도로 뒤통수를 내려친 것이다. 제나르는 정신을 잃었다. 니콜라스는 그의 몸이 쓰러지지 않게 붙잡 고, 손바닥을 펼쳐 이마를 받쳤다.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빛이 그의 머리로 흡수되었다. 이윽고 제나르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조금 전보다 흐릿하게 변해있었다. "누나는 어디 있지?" "그것은… 말할 수…." 거부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제나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단한 의지군, 하고 중얼거리며 그는 최면에 더욱 힘을 주었다. "누나는 어디 있지?" "그것은… 말할 수… 없… 크윽!" "대단한 의지야. 하지만 그래봐야 당신만 더 괴로워져. 어차피 말해 야 한다면 빨리 말하고 편해지는 게 어때?" 무뚝뚝한 말이 더할 나위 없는 유혹으로 들렸다. 한 가닥 남은 제나 르의 이성은 필사적으로 최면을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 수록 더욱 강한 고통이 뇌리를 자극했다. 견디기 힘들었다. "애, 앤드류 회장의 집… 앤드류 회장의 보호…." "호오, 그랬군. 아틀란티스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게이트… 게이트를 이용하면…." "게이트는 어디에 있지?" "쉐난도우 벨리… 깊은 곳에…." 더는 들을 필요 없다. 니콜라스의 주먹이 허공을 날았다. 명치를 얻 어맞은 제나르는 앞으로 쓰러졌다. 제아무리 강한 에날도스를 지녔다 하나 육신은 늙은 노인, 콘크리트도 부수는 그의 주먹을 맞고 멀쩡할 수는 없다. 죽일까 생각해보았으나 아직은 그럴 필요가 없다. 오히려 기억을 손 봐두는 게 좋은 방법이다. 번거롭지만 일단 제나르의 기억을 손보았다. 아직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숨기는 것이 유리했다. 저택을 나선 니콜라스는 어떡할까를 망설였다. 그러나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앤드류는 방공호를 설계해줄 정도로 신중한 인물이니 누나를 잘 보 호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보호하러 갈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유빈을 지키지 못하고 적에 손에 넘겨줘야 했다는 게 수치스러웠다. 이대로는 누나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바다를 향해 뛰었다. 무조건 아틀란티스로 가야 한다. 그래서 유빈을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누나를 볼 자격이 없다. 이미 유빈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그는 자신이 오스카의 역 정보 공세에 넘어갔음을 조금도 상상 못했다. 니콜라스가 떠난 후 제나르는 지끈거리를 머리를 붙잡고 일어났다. "으윽. 깜박 잠이 든 모양이군. 머리가 이상하게 아픈데." 조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는 조금도 몰랐다. 그는 다시, 갑작 스럽게 왜 아틀란티스로 돌아오라고 아들이 부탁했는지를 놓고 고심 했다. by eden 게이트가 있다는 쉐난도우 벨리에 당도한 니콜라스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 부근은 출입금지였다. 아틀란티스가 제나르의 명의로 구입한 뒤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산맥 전체를 매매한 것은 아니 나 개인이 소유하기에는 상당한 면적이었다. 계곡 어딘가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이 아틀란티 스인들인지 게이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인지는 직접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이동했다. 발에 밟히는 돌멩이 소리에도 신중을 기했다. 커다란 동굴이 나타났다. 기운은 그 안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니콜라스는 서서히 힘을 끌어올렸다. 오른손에 힘을 집중시켜 에너지 구체를 만들었다. 혹시나 모를 경비를 격파하기 위해서였다. 날카롭게 경계심을 곤두세운 그는 안으로 들어섰다. 여름 같지 않게 차가운 한기가 그를 맞이했다. 어디선가 불빛이 흘러 나오는지, 동굴은 이상하게 밝았다. 언제 적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신중히 걸음을 옮겼다. 혹시라도 측방이나 후방에서 적이 튀어나올 것을 대비해 조금도 긴 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윽고 동굴이 끊어졌다. 거대한 철문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여는 게 쉬워 보이지 않았다. 어떡할까 망설이던 그는 모험을 하기로 했다. 에너지 구슬을 철문을 향해 힘껏 집어던졌다. 쇳덩어리가 우그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삽시간에 동굴 안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요란한 경계음이 멈추지 않았다. 짧은 시간 안에 그는 판단을 내렸다. 적들이 경보음을 듣고 달려오기 전에 끝내야 한다. 부서진 잔재를 뜯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허공에 빛을 뿜는 거대한 금이 그어져 있었다. 블랙홀의 입구 같은 게이트는 그에게 어서 오라 고 손짓하는 듯 영롱한 빛을 뿜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던졌다.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아니, 어둠에 잠식당했다. 끝없는 지옥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온몸이 으스러질 듯 한 기분을 억지로 참아냈다. 게이트를 지나는 동안 제정신을 유지하는 아틀란티스인은 없다고 하 던데, 과연 그럴만 했다. 이 정도의 고통이 한순간에 몰아치는데 정 신이 멀쩡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를 악물었다. 짭짤한 피가 입안에 고였다. 그 느낌마저 착각인 듯 한 기분, 그것은 두 번 다시 맛보고 싶지 않은 감각이었다. 이윽고 시야가 밝아졌다.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끝없이 추락하는 느 낌은 사라지고 없었다. 니콜라스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주변의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인 공시설을 갖춘 동굴은 간데 없고,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호화로운 지 하 광장 같은 곳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천장에 박힌 보석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대낮처럼 밝지는 않았으 나 책을 읽기에는 충분한 듯 했다. 뒤를 돌아보자 게이트가 눈에 뛰었다. 동굴에서 보았던 게이트와 조 금도 다를 바 없었다. 아까 것이 블랙홀이라면 눈앞의 것은 화이트홀 쯤 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주먹을 뚜둑거렸다. 새로이 차 오르는 긴장을 가라앉히며 심호 흡을 했다. 이곳은 아틀란티스 황궁, 마침내 적진에 발을 내딛은 것이다. 한쪽 방향에서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스스로의 존재감을 구태여 숨 기려들지 않는 오만함 그 자체. '바드로 3세.' 니콜라스는 주저 없이 그쪽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멈칫했다. '지금의 내가 그 녀석을 상대할 수 있을까?' 만만치 않은 힘을 지녔던 녀석으로 기억한다. 한 번이었지만 맥을 무 력화시키기까지 한 녀석이다. 경솔하게 상대할 순 없다. 고심을 거듭하던 니콜라스는 일단 몸을 감췄다. 마리오와 앤슨은 아틀란티스 수도에서 요양 중이었다. 제이가 일으킨 폭발로 심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반경 수십km를 깨끗이 날려버린 엄청난 폭발의 중심부에서 살아남 기 위해서는 가진 모든 에날도스를 소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폭발력을 비스듬하게 비껴나가게 할 정도로 정교한 컨트롤을 할 수 있는 능력자는 얼마 없었다. 당연히 살아남은 자는 마리오와 앤슨, 엘르, 그리고 그들의 보호를 받은 오스카뿐이었다. '싫군.' 마리오는 핏기 없는 손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의사는 당분간 절대 요 양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푹 쉬면 힘이 돌아올 것이라는 격려도 잊 지 않았다. 그러나 마리오는 자신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폭발에서 살아남기 위해 체내의 힘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끌어다 썼다. 당분간 이 아니라 영원히 힘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힘은 자기 자신을 증명해주는 것, 바로 분신이나 마찬 가지다. 힘을 잃었다는 것은 정상인이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것보다 더 큰 상실감을 느끼게 한다. "괜찮은가요, 마리오 경?" 한쪽 팔에 기브스를 한 엘르가 활기차게 들어섰다. 가장 후방에 있었 던 그녀는 회복 또한 빨랐다. 그러나 에날도스를 모두 소진했다는 점 은 다를 바 없었다. "너는 오빠는 찾지 않고 마리오 경부터 찾는구나." "미안해요. 마리오 경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거든요." 마리오의 옆침대에 누워있던 앤슨이 억지로 상반신을 일으켰다. "오스카 경은 어떻지?" "빠르게 회복되고 있어요. 에날도스도 멀쩡해 보이던걸요." "큰일이군. 우리는 당분간 힘을 쓸 수 없는데 그 사람은 멀쩡하니 말 이야." "그러게 말이야. 앤슨 경, 왜 그를 보호하자고 했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마리오 경. 그에게는 물어볼 것이 많으니까요." 앤슨은 동생의 부축을 받아 억지로 자세를 잡고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수호제황석의 일부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상하 게 느끼고 자세히 조사해보니 오스카 경이 쓸데가 있다고 가지고 갔 다 하더군요." "오스카 경의 신분이라면 수호제황석 일부를 갖다 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하필이면 수호제황석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수호제황석은 단 두 가지 목적으로 쓰일 뿐입니다. 마기를 봉인하거나, 혹은 무력화시 키거나." 뭔가 있음을 느낀 마리오는 잠자코 귀담아 들었다. "오스카 경은 유하라는 아이를 시켜 직접 니콜라스를 추격하도록 했 습니다. 헌데 그곳에 엔젤의 아이는 이미 없었고, 니콜라스는 유하의 손에 목숨을 잃었지요." "그렇다면 니콜라스는 엘리우스가 아니었군. 마기를 지닌 자가 그리 쉽게 죽을 리가 없으니." "아뇨. 그게 아닙니다. 오스카 경이 수호제황석을 가져갔다는 사실을 끼워 넣으면 앞뒤가 맞아떨어집니다." 마리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설마, 오스카 경이 엘리우스를 죽였다는 말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니, 어째서? 마기가 다른 숙주를 찾아가면 새로운 엘리우스를 찾 아내기까지 혁명은 또다시 늦춰지게 돼." "일반적으로 그렇기야 합니다. 하지만 오스카 경의 역량으로 볼 때… 마기가 새 숙주를 찾아가기 전 수호제황석에 3일을 머무르는 동안 봉인시키는 방법을 찾아냈는지도 모르지요." "훌륭한 상상력이다, 앤슨." 가볍게 손뼉을 짝짝 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리오와 앤슨은 흠칫 놀라 소리가 들린 방향을 주시했다. 이윽고 열린 문 뒤에서 오스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죽을 뻔한 위기를 겪고 난 뒤이지만 사람을 얕보는 미소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 미소가 그에게는 누구보다 잘 어울린다는 사실 또한 여전했다. "나름대로 완벽해. 누구라도 자네 추리를 듣는다면 내가 황실에 반역 하고 있다 생각하겠군." 앤슨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핼쑥해졌다. 반역이라는 단어는 몰아붙이 는 자가 몰리는 자나 똑같이 무거운 무게를 느끼게 한다. 잠시 주춤거렸던 앤슨은 이렇게 된 거 할 수 없다 생각하고 오스카 를 몰아붙였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말고는 쓸데가 없는 수 호제황석을 가져다가 무엇을 했다는 것입니까?" "마기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데 응용할 수 있지 않 을까 생각해서였다. 그것보다는 자네에게 심문하고 싶은 게 하나 있 는데,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엔젤의 아이를 납치해서 무엇을 하려고 했지?" 천만뜻밖의 말에 앤슨은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입니까? 제가 엔젤의 아이를 납치했다니요?" "자네 명의로 된 저택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이미 증인으로 확 보했다. 시치미를 떼도 소용없어." 오스카는 서류를 앤슨에게 휙 집어던졌다.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든 앤슨은 내용을 훑어보고 흙빛이 되었다. 손을 파르르 떨던 앤슨은 서류를 거칠게 구겼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무언가가 잘못된 게 틀림없습니다!" "그 말은 나중에 대신님들 앞에서 해보도록. 연행해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네 명의 남자들이 우르르 밀려들어왔다. 하나 같이 강한 에날도스를 지닌, 황제직속위병들이었다. 무언가가 커다랗게 잘못되었다. 앤슨은 항변을 하기 위해 오스카를 바라보다가 안색이 변했다. 오스카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사람을 궁지에 넣었을 때 종종 저런 미소를 짓는다. 그제야 그의 함 정에 걸려들었음을 깨달은 앤슨은 주먹을 부스러질 듯 세게 쥐었다. "오스카 경…." "할 말이 있으면 재판 때 해라. 사리사욕을 위해 엔젤을 차지하려고 한 더러운 자여." "잠시만요! 오스카 경, 이것은 뭔가 잘못된 겁니다! 오빠가 그런 짓을 했을 리 없다고요!" 엘르는 창백해진 얼굴로 외쳤다. 그러나 오스카와 위병들은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위병들은 앤슨이 부상자라는 것도 배려하지 않고 거칠게 끌고 갔다. 엘르는 멍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위병들을 쫓아 달려갔다.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은 채 마리오는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전혀 타인의 일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마리오 경, 몸은 괜찮은가?" 오스카가 가까이에 앉아 다정히 묻는다. 마리오는 어떤 대답을 해야 좋을지 두려웠다. 오랫동안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긴 했지만, 그래도 민족 제일의 두뇌라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적어도 민족의 힘을 하나로 묶어야 할 때에 분열을 일으키지는 않으리라 기대했다. 헌데 그 기대가 허투루 돌아갔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앤슨이 자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대강 짐작하고 있다. 아마도 태 반이 날 모함하는 내용이었을 테지. 하지만 진정 사악한 자는 내가 아니라 바로 앤슨이다." "엔젤을 혼자 독차지하려 했다고요?" "그렇다. 엔젤의 아이를 납치했으면서도 비밀로 한 것이 바로 그 증 거지. 이미 모든 물적 증거와 증인을 확보한 상황이다." 오스카는 마리오의 등을 툭툭 치면서 일어났다. "자네도 조심하도록 해. 앤슨은 속을 알 수 없는 자이니." 마리오에게 그 말은 너도 곧 저렇게 될 거니 각오해두라는 소리로 들렸다. 그는 뭐라 항변할 생각도 못했다. 그저 병실을 나서는 오스 카의 뒷모습을 멍하니 주시하기만 했다. 기분이 좋아 노래를 흥얼거리는 오스카의 뒤로 다가서는 여자가 있 었다. 다름 아닌 유나였다. "태자 전하께서 5대 대신 소환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제나르 대신께서 도 곧 아틀란티스로 돌아오실 거라 답변하셨습니다." "어머님이 좋아하시겠군." "대신님들이 모두 모이고 나면 엔젤을 독점하려 한 혐의를 놓고 앤 슨 경을 재판할 거라 합니다." "모두 모이는데는 사흘도 채 걸리지 않을 테니, 앤슨의 운명도 사흘 밖에 남지 않았군." 엔젤을 독점하려 한 것은 민족을 배반하는 행위와 동급. 원칙상으로 는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한다. 하지만 앤슨은 그간 많은 공을 세웠다. 어느 정도의 정상참작이 이루 어지리라는 것은 손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상참작이 이루어진다 해서 모든 직권 박탈에 최소 몇 년은 감옥에서 썩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중간에 감형이 되어 빠르게 석방된다 해도 민족을 배반한 자라는 오명은 씻을 수 없을 터이다. "기분이 묘하겠군. 좋아하던 남자이자 상관이 졸지에 민족의 배반자 가 되었으니 말이야." 유나는 대답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오스카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힐 끔 쳐다봤다. "아직도 그를 좋아하나? 잊어버려. 너에게 태양을 보게끔 해준 은인 은 나다. 너는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계속 나만을 위해 봉사해 야 해."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면 그런 망설임 따위는 걷어치워라." 지혜롭지만 오만하고 도도한 권력자. 오스카는 바로 그 표본이라 할 수 있는 남자였다. 그는 상처가 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던지면서 도, 상대가 저항할 마음이 들지 않게끔 한다. "오스카님."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온 소녀를 보고 오스카는 반색했다. "오, 유하로군. 그래, 무슨 일이냐?" "큰일났습니다. 쉐난도우 벨리가 누군가에게 습격당했습니다." "무어라?" 오스카는 그답지 않게 깜짝 놀랐다. 게이트가 습격당했다니, 아틀란 티스 역사상 거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거기에 군사비밀기지가 있다고 미국이 오해하기라 도 했나?" "아닙니다. 단독범의 소행인 것 같습니다." "단독범?" 짚이는 게 있는 오스카는 놀람을 가라앉혔다. 늘 그렇듯 여유가 섞인 미소가 얼굴에 나타났다. "니콜라스 베르노가 살아있었단 말인가?" "아무래도…." "흐응. 그렇다면 내 계산이 틀리는데? 역시 니콜라스 베르노가 엘리 우스였나? 수호제황석에 마기가 돌아오지 않아 아닐 거라고 생각하 고 있었는데, 죽지 않았던 거로군." 현재까지 엘리우스의 후보는 제임스와 니콜라스 둘로 좁혀져 있다. 제임스의 어머니인 세레스는 살아있을 때 엘리우스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은 적이 있고, 그 의심은 아들인 제임스에게로 이어졌다. 오스카 또한 제임스와 니콜라스 둘 중 어느 쪽이 엘리우스인지를 놓 고 고민을 해왔다. 그러나 에날도스를 전혀 쓸 수 없는 제임스를 엘 리우스라 생각하기에는 지나친 무리수가 따랐다. 그래서 마기를 수호제황석에 봉인할 방법을 알아낸 뒤 유하를 시켜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황실에 있는 수호제황석에 마기는 돌아오지 않았고, 따라서 제임스가 엘리우스라는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헌데 니콜라스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제임스에 대한 의심은 다시 걷혀진다. "그래서 게이트는 어떻게 되었지?" "문이 완전히 부서져 게이트가 노출된 채로 발견됐습니다.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서둘러 보수공사를 시작했으나, 이미 니콜라스는 게이트 를 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쯤 아틀란티스 대륙 어딘가에 있겠군. 서둘러서 찾아 내도록." "예." 예상치 못한 변수의 등장이기는 하나 불리한 쪽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 기회에 니콜라스를 제대로 붙잡아 마기를 토해내게 할 생 각이었다. 마기와 무한동력이 합쳐지면 대륙을 다시 지상으로 융기시 키는 것은 더 이상 꿈만이 아니다. '한 가지가 걸리지만….' 자신의 속마음을 모조리 읽고 비웃던 여자를 떠올리며 오스카는 어 두운 표정을 지었다. 제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곧 엔젤 또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기껏 앤슨을 덫에 몰아넣었는데 자칫하다가는 허 사가 될 뿐만 아니라, 이쪽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안 되지. 절대로 안 돼.' 오스카는 고개를 거칠게 흔들며 자신을 다잡았다. by eden 앙상하게 뻗은 나뭇가지에는 하나둘씩 꽃잎이 매달려 있었다. 따스한 열기를 품은 바람이 불어와 조용히 나뭇가지를 쓰다듬는다. 잘못 자라난 정원수 가지를 다듬고 있던 중년 부인은 누군가의 발걸 음 소리를 듣고 손을 멈췄다. "어머니." "오스카니?" 중년부인은 손을 멈추고 아들을 돌아보았다. "손이 거칠어지십니다. 이런 것은 정원사에게 맡기시지 않구요." "놔두렴. 이 어미의 취미생활이란다." 세월의 향취가 베어있다 하나 젊은 시절 지녔을 미모가 크게 바래지 는 않은 얼굴이다. 단아하게 묶어 내린 머리카락은 귀한 가문 사람 특유의 사치스러움도 없다. 그녀는 제나르 대신의 아내이자 오스카의 어머니인 안나였다. "몸은 괜찮은 거니? 이제 돌아다녀도 괜찮아?" "예. 염려해주신 덕분에 깨끗이 나았습니다. 아참, 어머니에게 알려드 릴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 무슨 일이기에 아들이 저리 기뻐하는 얼굴일까 하고 안나는 즐거워 했다. 그러나 오스카가 입을 연 순간 안색이 파리해졌다. "앤슨이 반역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엔젤의 아이를 납치해서 숨기는 등 엔젤을 독점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합니다." 파리해졌던 안나는 무겁게 한숨짓고 고개를 숙였다. 손에 쥔 정원사 용 가위를 내려놓은 안나는 말없이 아들의 손을 잡았다. "왜 그러세요, 어머니?" 기쁘지 않으시나요. 그렇게 말하는 아들의 얼굴이 안타깝기만 했다. 허나 누구를 탓하랴. 명석하고 장래가 밝은 아이를 저렇게 키워낸 것 은 바로 이 손인 것을. "오스카. 아직도 앤슨을 미워하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앤슨과 마리오. 그 둘을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미워하려면 차라리 이 어미를 미워하거라." "어머니.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안나는 철없던 젊은 시절을 후회했다. 오스카는 어려서부터 에날도스 에는 별다른 자질이 없는 아이였다. 두뇌가 명석하고 언변이 좋아, 정치가나 전략가로서 발군의 자질을 지녔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안나는 5대 대신의 아들이 에날도스를 다루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아들에게 혹독한 수업 을 강요했다. 때로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마리오나 앤슨과 심한 비교 를 하기도 했다. 육체적인 고문을 한 것은 아니나 정신적인 고문을 가한 셈이다. 덕분 에 그녀의 아들은 앤슨과 마리오를 심하게 미워하며 자라났다. 비교 당했던 열등감은 미움으로 변질됐고, 어떻게 하면 그들을 짓밟 을 수 있을까 호시탐탐 궁리만 하도록 성장시켰던 것이다. "오스카." "죄송합니다, 어머니. 곧 재판이 있어서 가봐야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오스카는 눈웃음으로 인사하고 돌아섰다. 손을 머뭇거리던 안나는 차 마 아들을 잡지는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여기에 온지 벌써 이틀이 지났다. 니콜라스는 정원의 덩굴 뒤에 몸을 감춘 채 황궁입구를 뚫어져라 살 폈다. 지난 이틀간 알아본 패턴으로 보자면, 이제 조금 있으면 과일 을 들고 간 시녀가 빈 바구니로 나타날 참이었다. '왔다.' 시녀의 모습이 나타나자 니콜라스는 언제든지 뛰어나갈 수 있도록 준비했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시녀가 옆을 지나갔다. 이곳은 경비병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 니콜라스는 번개같이 손을 뻗어 시녀의 입을 틀어막고 덩굴로 끌어당겼다. "웁! 웁!" 시녀는 반항하며 비명을 지르려 했다. 니콜라스는 입을 꽉 틀어막고 시녀를 바닥에 눕혔다. 금발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땅이 흩어져 먼지 투성이가 되었다. "소리를 지르면 죽이겠다." 그는 차분한 음성으로 경고했다. 험악한 음성보다는 살기를 담은 침 착한 경고가 더 효과적인 법. 예상대로 시녀는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반항을 멈추었다. 니콜라스는 시녀가 말할 수 있도록 손을 떼어냈다. "황제는 저 궁 안에 있나? 대답은 하지말고 고개만 끄덕여." 끄덕끄덕. "황태자도 저 안에 있나?" 끄덕끄덕. "황제 침실에는 어느 정도의 병력이 있지?" "겨, 경비병이 네 명…." 니콜라스는 의아했다. 그 정도 배치라면 전에 비해 나아진 것이 없다 고 할 수 있다. 답은 두 가지로 나뉜다. 녀석들은 자신이 여기에 쳐들어온 것을 모르 거나 아니면 함정. 하지만 게이트를 봉인한 철문을 완전히 부수어 놓 았는데 눈치를 못 챘다는 것은 억지다. '함정인가. 올 테면 와 보라는?' 쓴웃음과 함께 자존심이 대폭 상했다. 언제부터 니콜라스 베르노라는 이름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생겨났단 말인가. 시녀가 두려운 눈으로 보고 있다. 그는 흘끗 내려다보고는 급소를 쳐 서 기절시켰다. 한참을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침투할 방법을 궁리했다. 시녀에게 최 면을 걸어볼까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황태자의 눈썰미를 볼 때 쉽 게 발각날 것 같았다. "할 수 없지. 기억만 지워서 돌려보내야겠다." 그는 시녀의 이마에 손을 대고 힘을 집중했다. 희뿌연 빛이 잘게 부 서지며 이마에 흡수되었다. 이윽고 시녀는 눈을 껌벅이며 일어났다. 빈 바구니가 옆에 다소곳하 게 놓여있고, 머리카락과 옷은 흙먼지투성이가 되어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시녀는 옷을 털고 일어난 뒤 바구니를 집어들었다. 저쪽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눈동자를 눈치채지 못한 채 서둘러 돌아갔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느껴진다. 차가운 돌벽에 기댄 채 앤슨은 쇠창살만을 응시했다. 거의 사용된 일 이 없는 이 감옥에 들어와 있다는 게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울부짖던 부모님과 형제가 생각났다. 암담한 눈 으로 바라보던 엘르가 떠올랐다. 후련한 미소를 짓고 깔보던 오스카 의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돌바닥을 거칠게 내리쳤다. 주먹이 으스러질 듯 아팠지만 억지 로 신음을 깨물었다. 완벽하게 당했다.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채. 처음 오스카가 유하에게 따로 니콜라스를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알아차려야 했다. 니콜라스가 엔젤의 아이를 데리고 있지 않았다 고 유하가 보고했을 때 수상함을 느껴야 했다. 긴급한 상황이라 해서 마음놓고 오스카를 믿어서는 안 됐는데. 끼이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틈으로 바깥의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으나 곧 사라졌다. 누군가가 다가와 철창 앞에 섰다. 촛불에 의지해 앤슨은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유나?" 이제는 분하다는 기분도 안 들었다. 착잡함 비슷한 자포자기만이 쓰 게 입안을 맴돌았다. "곧 재판이 시작됩니다. 모시러 왔습니다." "언제부터였지?" "처음…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유나는 힘들게 대답했다. 앤슨은 멋대로 한 가닥 미안함이 남아있어 서라고 단정지었다. 그것을 동정으로 해석한 그는 더욱 분한 기분이 들었지만, 화를 내기에도 지쳤다. "오스카 경의 목적은 뭐였지?" "엔젤의 신병을 무사히 확보해 혁명을 이룩하는 것입니다." 교과서에 실어도 무난할 대답이다. 그러나 앤슨이 바라는 대답은 아 니었다. "말해라. 오스카 경은 처음부터 엔젤을 이용해 나와 마리오 경을 구 렁텅이에 빠뜨릴 생각이었지? 내가 모르는 사이 오스카 경은 엔젤과 접촉한 적이 있었지? 그렇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자, 그만 나오시죠." 살기를 품고 유나를 노려보던 앤슨은 휘청거리면서도 창살 밖으로 나왔다. 별다른 속박장치가 채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유나 하나쯤은 충분히 따돌리고 도망칠 수 있다. 아니, 마음만 먹었다면 언제든지 저 정도 창살은 박살내고 도망칠 수 있었다. 허나 그렇게 하면 곧 반역자가 맞다고 선전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오 스카도 그렇게 생각하고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그는 죄수복을 벗고 정갈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장식이나 문양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현재 죄수의 입장에서 재판을 받으러 가는 길 이기에. 네 명의 병사가 에워싸며 신전으로 안내했다. 새하얀 석조 건물이 그 에게 무거운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힘들게 계단을 올라 신전에 들어선 그는 무릎을 꿇고 기다렸다. 이윽 고 그를 재판하기 위한 사람들과 참관인이 하나둘씩 들어왔다. 반역자의 재판은 어떤 의미에서는 제사보다 엄숙한 자리. 때문에 참 관인은 오스카와 마리오, 엘르를 제외하고는 금지되었다. 그들 또한 재판에 능동적으로 참가할 수는 없다. 재판을 이끌어나가는 주체는 황제의 대리인 황태자와 5대 대신일 뿐이다. 클랙은 착잡한 눈으로 앤슨과 오스카를 번갈아 보았다. 다른 대신들 은 인정하지 않지만, 이 재판이 오스카의 함정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앤슨을 오래 지켜봐 왔다. 앤슨은 결코 반역을 꾀할 인물이 아니다. "재판을 시작하겠다." 황태자인 카뮤의 엄숙한 음성이 내부를 울렸다. 모두 경건한 몸가짐 으로 일어나 그에게 경례를 올렸다. "먼저 앤슨이 반역자라 주장한 오스카에게 묻겠다. 어째한 연유에서 앤슨을 반역자라 주장한 것이냐?" 공손히 일어난 오스카는 가볍게 쥔 주먹을 심장 부근에 대고 예를 취한 뒤 입을 열었다. "시애틀에 위치한 앤슨 명의의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통해 우연 한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앤슨이 어떤 사내아이를 비밀리에 감금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수상하게 여기고 조사를 해본 결과 엔 젤의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계속하라." "처음에는 뭔가 연락이 지연된 거라 여기고 앤슨이 알리기를 기다렸 습니다만, 조금도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참다못해 앤슨을 추궁하려고 하던 찰나, 바깥 세상에 출두할 자격을 얻은 지 얼마 안 된 마크라는 자가 엔젤의 아이를 데리고 도주했습니다. 하지만 궁지 에 몰리자 자폭했고, 그 바람에 엔젤의 아이도 사망했습니다." "무어라? 엔젤의 아이가 죽어?" 처음 듣는 사실에 5대 대신은 물론이고 카뮤까지 크게 놀랐다. 오스 카는 심히 유감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사실입니다. 시체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크흠…." 엔젤이 얼마나 상심하고 있을까를 생각한 그들은 일제히 어두운 표 정을 지었다. 엔젤의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된 앤슨은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 표정은 계략이 발각된 자로 오해받기에 충 분했다. "마크는 그대가 천거한 인물이 아닌가?" 클랙이 날카롭게 쏘아붙였지만 오스카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재능이 있어 훌륭히 임무를 수행할 거라 여기고 천거한 것은 사실 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의 방을 조사한 결과 앤슨으로부터 넘겨받 은 비밀 편지가 나왔습니다." "필적은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다." "위조의 가능성을 따지기에는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앤슨 은 엔젤에게 연모를 품은 나머지 자기 혼자 독점하려 한 것입니다." "으음…." 클랙을 제외한 대신들 중 두 명은 오스카의 설명에 납득한다는 신음 을 흘렸다. 오스카의 아버지인 제나르만이 딱히 수긍하지도, 그렇다 고 반대하지도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하. 앤슨은 명석하고 애국심이 강한 아이입니다. 반역을 꾀할 일 도 없거니와 설혹 꾀했다 하더라도 이렇듯 흔적을 빤히 남길 리가 없습니다." "사랑에 눈이 멀면 바보가 된다고 하지요." "누군가의 모함일 뿐이다!" "앤슨을 반역자로 모함함으로써 득을 볼 사람은 마리오 경 밖에 없 습니다. 그 둘의 권한은 부딪치는 일이 잦으니, 앤슨을 밀어내고 군 수통제권을 통째로 차지할 생각을 품을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전 마 리오 경을 믿고 싶습니다." 마리오는 외무성 비슷한 권한과 아틀란티스의 정보기관을 손에 쥐고 있다. 앤슨은 군수통제권을 손에 쥔 채 독자적으로 첩보시스템을 구 축해 유지해왔다. 그 둘이 지속적으로 대립하며 라이벌 관계로 지내온 것은 알만한 사 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오스카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앤슨은 반역자가 된다. 누군가가 앤슨에 게 모함을 한 거라 옹호하면 마리오가 가장 큰 동기를 지닌 인물로 떠오르게 된다. 사적인 감정을 제외하고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스카가 그 둘을 공격해야 할 동기는 희박하다. 꼼짝없는 덫에 빠진 것이다. 클랙은 입술을 힘껏 깨물며 오스카를 노려보았다. 오스카는 지지 않 고 그의 눈빛을 맞받아쳤다. 고심을 하던 카뮤가 뭐라 말을 하려는 찰나 어디선가 폭발하는 소리 가 들렸다. 깜짝 놀란 그들이 웅성거리고 있을 때 입구에서 한 병사 가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왔다. "불이 났습니다! 본궁에 불이 났습니다!" by eden 재판은 잠시 중단되었다. 다른 장소에 불이 난 거라면 불을 끄라 지 시하고 재판을 속히 진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본궁은 황실의 상징적인 곳. 상징이 불타고 있다는데 멀쩡히 재판을 계속하고 있을 수는 없다. 위병들은 앤슨을 다시 감옥으로 끌고 갔다. 카뮤는 황태자의 체면도 잊고 밖으로 나와 불타는 황궁을 확인했다. 대신들은 입술을 질끈 깨 물며 허공으로 치솟는 불꽃을 멍하니 주시했다. 에날도스로 끌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나, 기본적으로 에 날도스는 파괴형 기운이다. 불꽃이 작은 편이라면 정교한 컨트롤을 통해 날려버릴 수도 있으나, 저처럼 성 전체에 붙어 훨훨 타고 있을 때에는 손쓸 도리가 없다. 병사들과 시민들이 쉴새없이 물을 퍼날라 끼얹고 있으나, 불꽃은 좀 처럼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상자는?" "부상자가 상당수 나오기는 했으나 다행히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습 니다." 저만한 불이 났는데도 죽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에날도스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그런데 아까 폭발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카뮤가 미심쩍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도 그런 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 제나르가 맞장구를 치며 나섰다. "혹시 폭발물을 반입한 적 있는가?"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책임자는 펄쩍 뛰며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오스카는 남들에 게 들리지 않게 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벌써 행동 개시에 들어가다니. 재빠르군, 엘리우스." 황제가 있는 궁에 불을 지르는 것은 괜찮은 생각이었다. 한 가지 유 감이라면, 이미 오래 전부터 황제의 거처는 다른 궁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이다. 허나 이쪽의 이목을 끌기 위한 계략일 수도 있는 법. 오스카는 유나 에게 명령을 내릴 생각을 품고 그곳을 벗어났다. 적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리라는 것쯤은 니콜라스 또한 충분히 짐 작하고 있었다. 황제가 본궁에 없는 것은 이미 며칠 간의 잠복과 시녀를 통해 확인 했다. 아마도 예전의 사건 이후로 만약을 대비해 거처를 옮겼을 게 분명했다. 본궁에 불을 지른 것은 단지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다. 황제를 암살하 거나 끌어내기 위해 불을 지른 거라고 적이 착각한다면 더 좋다. 병사들이 불을 끄기 위해 정신 없이 달려든다. 니콜라스는 그들을 내 버려두고 황제가 있는 궁으로 향했다. 상대적으로 이쪽에 대한 관심 이 줄어들기를 바라면서. 예상한 대로 경비병들은 불꽃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데 정신 이 없었다. 어렵지 않게 그들의 뒤를 습격해 기절시킨 니콜라스는 시 시하다고 혀를 찼다. 그는 황제가 있는 침실 문을 힘껏 열어 젖혔다. 한쪽에 놓인, 얇은 실크로 가려진 호화로운 침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거침없이 다가가던 그는 놀라서 멈칫했다. 침대에서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그새 죽은 건가?' 황제가 대단히 위독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그는 긴장하며 다가갔다. 그러나 이불을 들춰보고는 곧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당했군." 침대에는 황제가 아니라, 사람 크기의 인형이 누워있었다. 어떡할까를 생각하던 그는 사람의 인기척을 느끼고 재빨리 침대 기 둥 뒤로 몸을 숨겼다. 다행히 나풀거리는 실크 커튼이 그의 조그만 몸을 몽땅 가려주었다. "아무도 없습니다." "이불이 걷혀져 있군요. 인형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 같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다. 여자의 목소리는 대단히 귀에 익었다. 유나 라고 하는 여자였던가. 니콜라스는 호흡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그들이 물러가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구석구석까지 뒤지지는 않고 곧바로 방을 나섰다. 인형으로 속인 방에 더 이상 남아있을 리가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주저앉은 니콜라스는 눈을 감고 감각을 집중시켰다. 미약한 심장 박 동소리, 이 성에서 꺼져 가는 생명의 기운을 잡아내려 애썼다. 불을 끄느라 아우성치는 병사들의 고함 소리가 크게 느껴졌다가 곧 아스라하게 작아졌다. 이 방을 조사했던 녀석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 리는가 싶더니 곧 걸러졌다. 벽을 기어다니는 벌레 소리까지 뚜렷이 들릴 만큼 감각이 극대화되 었다. 니콜라스는 이마에서 땀을 흘리며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온정신을 집중했다. 이윽고 그는 눈을 번쩍 떴다. "거기 있었나." 금방이라도 멈출 듯 미약한 심장 소리. 틀림없다고 확신한 그는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때마침 창문 바깥쪽은 사람이 거의 없는 외진 숲이었다. 더군다나 대 부분의 사람들은 불을 끄는데 집중하고 있으니, 이만하면 벽에 매달 린다 해도 눈에 띄지 않을 듯 했다. 창틀을 밟고 나간 그는 벽을 잡고 뛰어 올랐다. 가볍게 날아오른 그 는 윗층의 창틀을 손으로 잡으며 벽에 달라붙었다. 그것을 두 번 더 반복했다. 손가락으로 벽의 돌출된 부분을 잡고 매달린 그는 조금씩 왼쪽으로 이동했다. 상당한 높이지만 떨어질 거란 생각은 없었다. 원하는 창문까지 도달한 그는 잠시 멈추었다. 안에서 느껴지는 사람 의 기운을 확인해보았다. 틀림없었다. 방 입구 밖에는 몇 명의 병사가 돌아다니는 게 느껴졌다. 허나 상대 가 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거기다가 특별히 방안을 지킨다기보다는 그저 근처를 배회하는 듯 보였다. 하긴, 황제의 침실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는 문 앞 에 병사가 알짱거리게 해선 안 될 터였다. 완벽히 이긴 게임이다. 니콜라스는 조용히 창문을 열고 사뿐히 방안 에 뛰어내렸다. 가볍게 착지한 그는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황제의 침실이라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방이었다. '이 정도 위장은 해야지 찾아내는 보람이 있지.' 침대말고 가구라고는 눈에 띄지 않는다. 침대는 어디에서든 볼 수 있 는 나무 침대다. 누구라도 이곳을 놓고 황제 침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잠들어 있는 황제 앞에 선 그는 물끄러미 내려보았다. 수척하고 주름 진 얼굴, 힘겹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께. 손가락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숨을 거둘 것 같았다. 이런 병자를 가지고 인질극을 벌이는 것은 도무지 취미에 맞지 않는 다. 상대가 가여워서라기 보다는 찜찜해서라는 게 강한 이유였다. 인 질극을 벌이다가 자칫 상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한몫 했다. "일어나, 바드로2세." 낯선 소년의 목소리에 황제는 힘겹게 눈을 떴다. 시야가 침침한지 표 정이 변화가 없었다. 이윽고 자신을 깨운 상대의 얼굴을 알아보았는지, 황제의 주름진 눈 가가 치켜 올라갔다. "당신이 죽여달라고 프로메테우스에 의뢰한 당사자가 직접 찾아왔어. 반가워 죽을 지경이지?" 니콜라스는 조금의 사심을 담아 빈정거렸다. 황제는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에, 엘리우스…." 그는 감흥 없는 눈으로 황제를 쏘아보았다. 떨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 이 두려워서라고는 안 보였다. 무언가 다른 사연이 있는 듯 했지만 자신이 모르는 사연을 알고 있다는 게 기분 좋을 리 없었다. "당신들은 여전히 날 그 이름으로 부르는군. 하지만 난 그 이름을 쓸 생각이 없어." "어, 어떻게 여길…." "게이트를 통해서 왔지. 쉐난도우 벨리까지 침입하느라 고생을 좀 하 긴 했지만." 니콜라스는 검지손가락을 펴서 수직으로 들어올렸다. 손가락 끝에 푸 른 빛이 뭉치기 시작했다. "당신은 지금부터 내 인질이 되어주셔야겠어. 유빈이가 어디 있는지 는 대신이라는 녀석들이나 황태자라는 놈이 알고 있겠지." 금방이라도 죽을 듯한 이 사람이 알고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 다. 실정에서 손을 놓은 지 꽤나 오래 되었을 것이다. "아, 아니야. 너는 엘리우스가 아니야." 니콜라스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 풀었다. "전에 만났을 때와 변한 게 없군. 그때도 처음 날 보고 엘리우스라고 불렀다가 곧바로 아니라고 했지 아마?" 그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황제의 머리맡에 앉았다. 대단히 무례했 지만 적이기에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그딴 건 상관없어. 안 그래?" 가볍게 미소를 지은 니콜라스는 손을 뻗어 황제의 목을 잡았다. 조금 이라도 힘을 주었다가는 부러질 듯 나약한 목이다. 이 사람에게도 한때 기운이 철철 넘치던 때가 있었겠지. 노화와 죽음 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찾아든다 생각하니 왠지 재미있었다. 황제의 눈이 크게 치켜 떠졌다가 스르륵 감겼다. 설마 죽은 건가 놀 란 니콜라스는 서둘러 확인하고 안심했다. 잠이 들었는지 의식을 잃 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살아있었다. 그는 황제의 목에서 손을 떼려 했다. 헌데 손이 목에 달라붙은 듯 떨 어지지 않았다. "어어?" 당황한 그는 손에 좀더 힘을 주었다. 그래도 떨어지지 않았다. 자칫 하다가는 황제의 목을 부러뜨릴까 겁나 많은 힘을 줄 순 없었다. 그 순간 하나의 영상이 그의 뇌리를 때렸다. 그는 손을 떼어내는 것 도 잊고 멍한 얼굴이 되었다. 황제의 목을 움켜쥔 손을 통해 황제의 기억이 전달되었다. 니콜라스 는 정신 없이 황제의 기억에 빠져들었다.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와 많이 닮은 여자였다. 제임스의 어머니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전에, 황제의 감정이 강 하게 밀어닥쳤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황제는 미칠 듯 그 여자를 사랑했다. 여자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따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이 까지 뱃속에 가지고 있었다. 질투에 눈이 멀었다고는 하나 멀쩡한 연인이 있는 여자를 함부로 취 할 수는 없는 법. 그렇게 했다가는 황실의 인망과 존엄은 한순간에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황제는 계략을 세웠다. 여자가 바로 엘리우스라고 발표해 잡 아들이게 했다. 여자의 연인은 끝까지 여자를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황제가 보낸 병 사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 결국 여자의 눈물을 맞으며 사망한다. 황제에 대한 증오를 가슴에 품고 여자는 바깥 세상으로 도망쳤다. 연 인을 닮은 바깥 세상의 남자와 재혼하여 뱃속의 아이를 낳고 소중히 키웠다. 비록 황제에 대한 증오가 남아있긴 해도 그것으로 일단락 되 는 듯 보였다. 그러나 황제는 집요했다. 끝끝내 여자를 찾아내 아틀란티스로 다시 잡아들였다. 황제는 자신의 여자가 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여자는 끝끝내 거절 했다. 사랑하는 연인을 죽인 사람의 여자가 될 순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여자는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자의 죽음으로 충격 을 받은 황제는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갔고, 어린 황태자가 그를 대신 해 아틀란티스를 다스리게 되었다. 니콜라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슬그머니 손을 떼어보니 쉽게 거두 어졌다. "그런 일이 있었나." 그는 다소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황제가 사랑한 여자는 제임스 해론 과 무척 닮아있었다. 아마 그의 어머니가 틀림없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단지 운 없는 늙은이로만 여겼다. 하지만 그런 영상을 보 고 나자 용서할 수 없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찌를까 말까를 놓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니콜라스는 결국 한숨과 함께 주먹을 내렸다. 지금은 제임스 어머니의 복수를 해주기보다는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는 게 급하다. "슬슬 시작해볼까." 주먹을 뚜둑거리며 일어난 니콜라스는 방문을 쾅 하고 발로 찼다. 펑 소리와 함께 방문이 저만치 날아가자 병사들은 깜짝 놀라 방안을 들 여다보았다. "뭐, 뭐야!" "넌 누구냐!" "조용히 해. 함부로 소란 피우면 황제의 목숨은 없다." 니콜라스는 언제든 황제에게 공격을 할 준비를 갖춘 채, 차갑게 덧붙 였다. "지금 당장 가서 바드로3세를 불러와. 바드로3세뿐이다. 제나르니 뭐 니 하는 다른 조무래기들까지 데려왔다가는 황제의 발목부터 차근차 근 짓밟을 테다." 병사들은 사색이 되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눈빛을 교환한다 해서 딱히 좋은 수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눈앞의 상대는 어린 소년이기는 해도 자신들 정도는 찜쪄 먹고도 남 는다는 엘리우스. 거기다가 황제를 인질로 잡고 황태자를 불러올 것 을 요구하고 있다. 암묵적으로 합의를 본 둘은 한 명은 남고 한 명은 황태자를 부르러 가기로 했다. "이러고도 네가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엘리우스!" 분노를 참지 못한 병사는 그렇게 외쳤다. 니콜라스는 빙긋이 웃으며, 황제를 노리고 있던 검지손가락으로 그의 미간을 겨누었다. 공기가 끊어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병사의 미간에 조그마한 구 멍이 뚫렸다. 눈동자가 뒤집힌 병사는 이마와 뒤통수에서 피를 흘리 며 털썩 쓰러졌다. "심부름꾼은 한 명으로 족해." by eden 황제를 인질로 잡고 있다는 말에 놀란 카뮤는 당장 달려왔다. 지루하 게 기다리고 있던 니콜라스는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하품을 하며 일으켰다. 그의 손가락 끝이 황제를 정확히 겨누었다. 함께 가게 해달라는 대신들을 극구 물리치고 혼자 달려온 카뮤는 분 노하며 니콜라스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엘리우스? 연로하신 아버님을 인질로 삼다니!" "그쪽에서 할 말은 아니라고 보는데? 자, 유빈이는 어디 있지? 빨리 말하지 않으면 황제의 신체 부위가 하나씩 없어지게 될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미 죽은 엔젤의 아이를 왜 여기까지 와 서 찾는 거지?" 죽었다는 말에 니콜라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유빈이가 죽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상대가 당황하는 모습에 카뮤는 아버지를 인질로 잡혔다는 분노를 잠시 잊고 침착해졌다. "몰랐나 보군. 지금 그것 때문에 앤슨이 혐의를 입고 재판 중이다." "너희들이… 유빈이 납치한 거 아니었어?" "결단코 아니다. 부하의 단독 행동일 뿐이다." 아찔한 기분이 니콜라스를 감쌌다. 그러나 곧 떨쳐버리고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런 거짓말에 현혹되지 않아. 난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니 빨 리 유빈이가 어디 있는지 말해." "이미 죽은 아이를 네 앞에 데려다놓을 재주는 없다." "끝까지 말을 안 듣는군." 니콜라스는 주저 없이 에너지탄을 한 발 쏘았다. 가느다란 섬광은 황 제의 왼쪽을 스치며 벽에 구멍을 뚫었다. "엘리우스!" 카뮤는 비명을 지르듯 부르짖었다. 니콜라스는 다시 공격할 자세를 갖추었다. "빨리 말해. 그렇지 않으면 황제의 어깨가 날아간다." "죽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말을 안 듣는군. 꽤나 성가신걸." 또 한 발의 빛줄기가 발사되었다. 이번에는 황제의 오른쪽을 스치고 벽에 구멍을 뚫었다. 조금 전 공격보다 더욱 아슬아슬하게 황제를 스 쳐간 공격이었다. 벽에 뚫린 두 개의 구멍을 노려보며 카뮤는 이를 악물었다. 새카맣게 그을린 구멍이 니콜라스가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죽어 없어진 아이를 눈앞에 가져다놓을 방법은 없다. 하지만 상대는 믿어줄 기미가 없다. 이럴 때는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간신히 분노를 억누른 카뮤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씹듯이 내뱉었다. "인질을 잡지 말고 나랑 정정당당하게 대결하자. 네가 이기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역시 죽었다는 건 거짓말인가 보군. 거절한 다. 내가 왜 굳이 불리한 길을 택해야 되지?" 천연덕스럽게 내뱉은 니콜라스는 손가락 끝에 에너지를 강하게 응축 시켰다. 빛을 머금은 손가락이 강맹한 기운을 발하기 시작했다. "자, 유빈이가 어디 있는지 빨리 말해. 그렇지 않으면 이번에는 정말 황제의 발 하나쯤 날려버리겠어." 상대의 요구는 결코 들어줄 수 없는 요구이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물릴 방법도 없다. 카뮤는 재빨리 머리 속으로 계산해보았다. 니콜라스가 황제를 공격하 는데 걸리는 시간과, 자신이 그 공격을 커트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얼 마나 차이가 날지. 상당히 아슬아슬한 타이밍이 될 것이다. 위험성이 높은 도박이 될 수 밖에 없다. 허나 지금 상황은 도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결심을 마친 황태자는 순간적으로 에너지를 끌어 모으며 외쳤다. "네 녀석이 아버님을 해하게 놔두지는 않는다!" 강한 살의를 느낀 니콜라스는 재빨리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주저 없이 황제를 향해 빛줄기를 쏘았다. 붉은 불꽃이 순간적으로 증폭되었다. 불꽃은 카뮤의 전신을 덮으며 진한 형상을 갖추었다. 촉수 같은 시뻘건 줄이 수십 가닥 늘어나 앞 으로 뻗어나갔다. 니콜라스가 쏜 빛줄기와 붉은 촉수가 허공에서 얽 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니콜라스는 잠시 당황했다. 곧바로 재차 황 제를 노렸으나, 기회를 잡은 카뮤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한 방어막이 허공에 형성돼 니콜라스의 공격을 차단했다. 이를 악문 니콜라스는 두 손에 모든 힘을 집중시켰다. 굵은 섬광이 황제를 가린 방어막으로 발사되었다. 그러나 어느새 카뮤는 섬광의 진로 앞에 와 있었다. 그는 회심의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기압이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밝아졌다. 니콜라스는 순간적으 로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눈을 보호했음에도 잠시 동안 앞을 볼 수 없었다.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상대도 마찬가지라는 게 다행이었다. 이윽고 시력이 돌아왔다. 재빨리 뒤로 물러섰던 니콜라스는 슬그머니 팔을 내려 앞을 주시했다. 카뮤가 자신만만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 다. 그의 모습에 가려 황제는 보이지 않았다. "쳇. 인질을 뺏긴 건가." "투덜거리지 마라." 자신 있게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도망갈까도 생각해보았으나 이후로 황제를 인질로 잡는 것은 포기해 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카뮤와 단독으로 맞붙게 된 지금이 차라리 유리하다. "좋아. 이 자리에서 널 쓰러뜨리겠어." "나는 너보다 약하지 않아, 엘리우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니콜라스는 번개같이 몸을 날렸다. 폭멸의 기운 을 실은 주먹이 카뮤를 향해 날아들었다. 오른손에 에너지를 집중시 킨 카뮤는 주먹을 재빨리 움켜쥐었다. 파지직 하는 스파크가 일어나 눈을 부시게 했다. 팽팽한 힘 대치가 이뤄졌다. 둘은 이를 악문 채 상대의 힘을 밀어내 려 했다. 니콜라스는 다른 주먹을 뻗쳐 카뮤의 얼굴을 노렸다. 카뮤는 다른 손 을 펼쳐 그 주먹도 잡아냈다. 두 주먹이 잡힌 채 힘싸움을 펼치던 니 콜라스는 오른발을 들어 냅다 질렀다. 주먹을 놓은 카뮤는 재빨리 뒤로 몸을 날렸다. 눈앞에서 바람이 일어 나며 풍압으로 머리카락이 몇 올 잘렸다. 저 발차기에 맞았다가는 틀림없이 두개골이 깨졌을 것이다. 카뮤는 오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강한 스릴을 느꼈다. 에너지를 모은 니콜라스는 두 손을 맞잡았다. 손가락 틈으로 눈부신 섬광이 빠져나왔다. 지지 않겠다는 듯 카뮤도 힘을 끌어 모았다. 붉은색 광채가 전신을 감싸며 강한 오라를 내뿜었다. 불꽃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마구 날뛰 었다. 새하얀 빛의 화살이 발사되었다. 거의 동시에 붉은 불꽃이 앞으로 뻗 어나갔다. 강맹한 기운을 품은 두 공격은 허공에서 격돌했다. 또다시 눈을 멀게 하는 섬광이 쏟아졌다. 그러나 섬광은 둘의 눈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허공에서 부스러졌다. 그만큼 둘이 내뿜고 있는 기운은 강했다. 니콜라스는 손가락을 모두 펼쳤다. 손가락 끝에서 하얀 빛의 덩어리 가 분출돼 허공으로 떠올랐다. 둥둥 떠다니던 덩어리는 일제히 타원 의 형체를 갖추었다. 그에 맞서 카뮤도 허공으로 힘을 방출했다. 붉은 입자가 뭉쳐져 거대 한 방어막을 형성했다. "막을 생각인가?" "최후의 공격이 될지 모르니 온힘을 다해 보아라, 엘리우스." "너무 자신만만하군." 식은땀을 흘리는 카뮤와는 달리 니콜라스는 특유의 무표정이었다. 그 러나 카뮤보다는 사지를 많이 헤쳐 나왔기에 표정을 다스리는 게 익 숙할 뿐, 이길 확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죽어!" 짧은 고함이 터짐과 동시에 모든 공격이 날아들었다. 카뮤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대비했다. 곧이어 강맹한 기운이 전신으로 부딪쳐왔다. 꼭 깨문 입술에서 피가 조금씩 흘렀다. 뒤에는 황제가 있다. 피하면 황제가 죽는다. 카뮤는 오기로 그 자리 에서 계속 버텼다. 어느 한쪽도 물러설 수 없는 사투였다. 틈을 보인다면 상대에게 목숨 을 내줘야 할 것이다. 둘은 억지로 의식을 붙잡고 버텼다. 둘의 발이 조금씩 뒤로 밀렸다. 어느 순간이었다. 카뮤는 상대의 공격이 조금씩 약해짐을 느꼈다. 지친 건가? 회심의 미소를 지은 카뮤는 마지막 힘을 쏟아 부으며 외 쳤다. "내가 이겼다, 엘리우스!" 여분의 에너지를 공격 형태로 바꿔 니콜라스를 공격하려던 때였다. 감지하지 못할 미약한 에너지, 말 그대로 조금의 위해도 되지 않을 듯한 미약한 에너지 덩어리가 바로 코앞을 스쳐 뒤로 날아갔다. 그것이 시야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카뮤는 머리 속이 새하얗게 비는 것을 느꼈다. 그의 두 손은 반사적으로 방패를 칼로 바꾸어 상대를 공격했다. 힘의 균형이 깨짐과 동시에 엄청난 에너지를 정면으로 얻 어맞은 니콜라스는 피를 토하며 벽에 부딪쳤다. 카뮤는 부상을 입은 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재빨리 뒤돌아본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굳었다. 조금 전 그를 스쳐지나간, 생채기 하나 낼 수도 없을 것 같은 에너지 탄이 황제의 가슴에 구멍을 뚫은 뒤였다. 감지하지도 못할 만큼 약한 파워였다고는 하지만, 쇠약해진 황제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데는 충분 한 공격이었다. "콜록! 콜록! 어, 어쨌든 황제는 잡았으니 다행이군." 밭은기침을 하며 일어난 니콜라스는 여유를 잃지 않고 빈정거렸다. 어이없게 아버지가 공격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한 카뮤는 비명을 지르며 니콜라스를 공격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니콜라스는 간신히 피해냈다. 그러나 몇 발의 에너지탄이 어깨에 격중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카뮤의 눈에서는 초점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척 보기에도 제정신 이 아니었다. 그가 이성을 잃은 지금을 잘 활용하면 이길 수 있다. 그러나 황제를 죽이기 위해 틈을 보였을 때 당한 타격이 너무 크다. 마구잡이로 날 아드는 카뮤의 공격을 피하는 것도 버거웠다. 한쪽 벽이 완전히 날아갔다. 휑해진 벽을 통해 바깥 풍경이 생생하게 보였다. "전하!" 멀리서부터 병사들이 달려왔다. 그 중에는 대신들의 모습도 보였다. 시간이 너무 지체된 데다가 폭발하는 소리가 몇 차례 들렸으니 걱정 이 되어 명령을 어기고 온 것이었다. 입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니콜라스는 일어섰다. 자신은 부상을 입 은 데다가 저쪽은 지원군까지 왔다. 싸우면 무조건 진다. 거기다가 이쪽은 황제를 공격한다는 소기의 목적도 달성했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 니콜라스는 주저 없이 밖으로 뛰어내렸다. "황제는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하네요. 의사가 사력을 다하고는 있지만 오늘내일 사망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라더군요. 지금 황궁은 국 상 분위기예요." 제임스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제시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억지로 보려고 했다가는 그가 화를 낼 것이다. "기쁘지 않나요? 당신 어머니의 원수가 사경을 헤맨다는데?" "제시는 너무 짓궂어서 탈이야." "어쨌든 니콜라스 베르노를 엘리우스라 알아서 잘 오해해주고 있으 니 편하긴 편하군요. 진짜 엘리우스는 바로 당신인데 말이에요." "말했잖아. 난 제물이 아니야." "그 말에 힘이 없다는 거, 당신도 알아요?" 책을 탁 덮은 제임스는 피식거리며 일어났다. "가봐야겠군." 제시는 놀라서 물었다. "간다니요? 어디를요?" "어디긴, 본국이지." "말도 안 돼요. 게이트가 닫히기까지 이제 몇 개월 남지 않았어요. 그동안만 잘 피해 다니면 그들이 이제 당신을 쫓을 이유가 없어지게 된다고요." "게이트가 닫히든 닫히지 않든 그들은 내 목숨을 요구할 거야. 의례 를 치르기 위해서, 아니면 게이트가 영구히 닫히게 한 죄를 묻기 위 해서. 어느 쪽이든 간에 죽을 때까지 그들을 피할 순 없어." 뭐라 말하려던 제시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그가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앤슨이 엔젤을 독점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으면서부터 앤슨과 마리 오, 그리고 오스카의 마찰이 예전보다 한층 심해졌어요." "그 와중에도 권력싸움이라는 건가 보네." "오스카라는 사람이 참 대단한 거죠." "비아냥거리지는 마. 솔직한 의미에서 그 사람은 대단한 거니까." "하긴, 민족의 염원과 자기 야망을 동시에 이룩하려 하는 사람이니 대단하긴 대단하겠지요. 아무튼 이대로라면 앤슨은 반역자란 혐의를 뒤집어쓰고 직위를 잃게 될 거예요." "잘 된 거지. 우리가 활동하기 편하니까." 제시는 가볍게 피식거렸다. 앤슨은 군수통제권을 손에 쥔 인물로, 현대사회로 비교하자면 국방부 장관쯤 된다. 철저한 능력 위주라 하나 젊은 나이에 그런 직위까지 올라갔다는 것은 그만큼 대단하다는 증거, 당연히 많은 인재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다. 그들을 최종 제어할 수 있는 것은 황제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상관이 부당하게 내몰리고 있다고 판단한 밑의 사람들이 나선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들은 앤슨의 혐의를 벗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앤슨을 거꾸러뜨 리려 하는 오스카의 세력과 갈등을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그만큼 힘 에 공백이 생긴다. "그런데 정말 궁금한 게 있어요. 도대체 니콜라스와 당신은 어떤 사 이에요?" 제임스는 잠시 멈칫했다가 피식거리며 답했다. "오랜 친구지." by eden 우르릉 하고 천둥이 울렸다. 금색 번개가 하늘 아닌 하늘을 찢었다. 푸른 해수를 둥글게 감싼 막 이 울음을 토해내듯 계속해서 번쩍였다. 쏴아아 하고 비가 내렸다. 한기를 머금은 빗물은 눈물의 상징처럼 대 지를 촉촉하게 적셨다. 카뮤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창문 밖에 내리는 빗줄기가 무겁게만 느껴졌다. 아틀란티스 대륙에는 이렇게 세찬 비가 내리지 않는다. 어쩌다가 가 뭄의 단비처럼 내릴 뿐. 지금처럼 거센 빗줄기가 몰아치는 때는 수십 년에 한 번 뿐이다. 노크 소리 뒤에 시종이 들어왔다. 정중히 허리를 숙인 시종은 가라앉 은 음성으로 말했다. "승하하셨습니다." 카뮤는 눈을 감았다. 희고 고운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 렸다. 아틀란티스 대륙에는 이렇게 세찬 비가 내리지 않는다. 황제가 사망 한 경우를 제외하고. 몇 년을 버티셨지만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독하셨 던 아버지다. 그래도 조금만 더 버텨주셨으면 하고 항상 바랬다. 저 아름다운 태양을 언제고 당신에게 꼭 한 번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니, 살해당했다. 지독하게 슬픈데 눈물 이 나오지 않는다. "한 번이라도… 아버님께 태양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책하듯 카뮤는 중얼거렸다. 가슴이 꽉 막히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엘리우스 때문이다. 오랜 병고로 고생하면서도 태양을 한 번 보겠다는 의지로 버텨왔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전부 그 녀석 탓이다.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국상은 잠시 미뤄라. 아버님의 복수를 하기 전에는 상을 치르지 않 겠다." 시종은 잠시 멈칫했으나 곧 작게 고개를 숙였다. "엘리우스의 행방은 찾았나?" 떨리는 목소리에 짙은 살기가 묻어 나왔다. 살기가 자신을 향하는 것 이 아님에도 시종은 오금이 저렸다. 주저앉을 뻔한 수치를 간신히 모 면한 시종은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또 숙였다. "아직 찾지 못했다 합니다. 허나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되었다. 내가 직접 나서겠다." "하오나, 전하…." "차기 황제가 체통 없게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 없다는 말 따위는 집 어치워라. 녀석은 아버님의 원수다. 감히 아틀란티스 황제를 암살한 반역자란 말이다." 살기에 놀란 유리잔이 쨍그랑 깨졌다. 시종의 머리카락이 공포에 짓 눌리며 쫑긋 곤두섰다. 숨이 막히는 느낌이다. 시종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고정하시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만큼 카뮤로부터 뿜어지는 살 기는 압도적이었다. "그만 가봐라." 다소 누그러진 음성이다. 안도한 시종은 황급히 인사를 마치고 물러 갔다. 다시 혼자 남은 카뮤는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로 시선을 돌렸다. 저 빗물은 거대한 대지의 눈물. 저것은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아틀란티스 황제의 죽음을 슬퍼했을까. 카뮤는 손에 쥔 술잔에 힘을 주었다. 끼기긱 하는 소리와 함께 잔의 허리가 부러졌다. 유리가 깨진다기보다는 금속이 찢어지는 소리였다. 눈을 감은 채로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간 자를 생각했다. 그 녀석의 심장도 이런 울음소리를 내도록 해주겠다. 모든 것을 포기 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리 하고 말겠다. 황제가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어린아이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세찬 비에 마냥 좋아서 뛰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런 비가 내렸던 것은 수십 년 전, 아이들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인 것이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흠뻑 적시는 느낌이 너무 좋아 아이들은 소리 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황제의 죽음에 슬퍼하던 부모들은 말리지 않 고 내버려두었다.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에게 억지로 슬픔 을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니. "유스! 우리 저기까지 누가 빨리 달리나 시합하자!" "응." 리젠과 유스는 출발선을 긋고 달리기 자세를 갖췄다. 두 아이는 빗물 에 젖은 눈으로 희뿌연 정면을 응시하다가 동시에 출발했다. 목표지점은 자주 올라가곤 하는 커다란 나무. 진흙으로 범벅이 된 바 닥을 밟고 두 아이는 힘껏 달렸다. "헤헤, 내가 이겼어." "쳇." 리젠은 숨을 헐떡이며 나무 옆에 기대고 앉았다. 문득 땅을 본 유스 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여기 핏자국이 있어?" "정말이네?" 희미해지긴 했지만 그것은 분명 핏자국이었다. 두 아이는 이마를 맞 대고 고심했다. "아기 사슴이 다친 걸까?" "아니야. 아기 토끼가 다쳤을 거야." "어쨌든 치료해주자." "우리를 무서워해서 도망가면 어떡하지?" "괜찮아. 웃는 얼굴을 보여주면 안 도망갈 거야." 둘은 아기 토끼냐 아기 사슴이냐를 놓고 가볍게 말다툼을 하며 수풀 을 헤치고 들어갔다. 시선을 땅에 내리깔고 좌우를 갸웃거리며 핏자 국이 이어진 길을 찾았다. 순간 옆 수풀에서 두 팔이 불쑥 튀어나왔다. 팔은 두 아이의 목을 움 켜쥐고 강하게 졸랐다. 두 아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큰일날 뻔했군." 니콜라스는 피로한 음색으로 중얼거렸다. 아이의 시신을 끌어당긴 그 는 힘들게 땅을 파고 묻었다. 수풀잎을 잘게 뜯어 그 위를 덮어 파헤 친 땅이 보이지 않게 했다. "어린애들은 쓸데없는 호기심이 많아서 싫어." 땅을 파느라 무리를 했더니 왼쪽 어깨가 욱신거렸다. 기껏 싸매 놓은 상처가 다시 터지며 피가 흘러나왔다. 이를 악물며 그 자리를 떴다. 아이가 사라졌으니 얼마 안 있으면 걱 정이 된 부모가 찾으러 올 것이다. 재수 없다면 자신의 소행이라 짐 작하고 병사들이 몰려올 수도 있다. 평소라면 상대도 안 되겠지만, 카뮤의 공격에 부상을 당한 지금은 하 급 병사 두셋을 감당하는 것도 벅찼다. 아니, 그전에 걷는 것조차 힘 든 판이었다. 유빈을 구하러 왔으면서 상관없는 아이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내키 지 않는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일단 상처가 낫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하루 이틀 안에 나을 부상은 아니지만, 힘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게 된 때부터는 상처도 빨리 나았다. 그는 거기에 기대를 걸었다. 허나 특이하게도 이 상처는 쉬이 낫지 않는다. 아마도 카뮤의 공격에 는 특수한 힘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쉴새없이 내리는 비에 체력 을 빼앗겨 회복이 더디는 탓도 있었다. 그곳에서 멀리 떨어졌을 때 걱정이 된 부모가 찾아다니는 소리가 들 렸다. 그래도 아직은 아이들이 멀리 나갔다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시체가 발견되기까지는 시간을 번 셈이다. 저 멀리 동굴이 보였다. 니콜라스는 잘 됐다 여기고 동굴로 향했다. 비라도 피할 수 있다면 훨씬 좋아질 것이다. 동굴은 이상하게 밝았다. 자세히 보니 희미한 빛을 내는 알갱이가 암 반에 조밀하게 박혀 있었다. 이상함을 느낀 그는 쉬던 몸을 일으켜 계속 안으로 향했다. 깊이 들 어갈수록 빛은 조금씩 밝아졌다. 이윽고 복도가 끊어지고 눈부신 빛이 그를 맞이했다. 정면으로 마주 보는 게 힘들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그는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빛에 익숙해졌 다. 슬그머니 팔을 내린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잊었다. "이게 뭐지…?" 별천지라고 해도 좋을까. 저 광경은. 투명한 빛을 발하는 거대한 보석이 넓은 공간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정처럼 생긴 보석은 높이만 십여 미터를 가뿐히 뛰어넘을 듯 보였다. 바위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 싶었다. 보석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보이는 자잘한 알갱이들이 수도 없이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알갱이는 하나같이 신비하고 영롱한 빛을 발 했다. 새하얀 광채가 이리저리 엉켜 거대한 빛의 프리즘을 형성하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는 서 있 을 수 없었다. 이것은 일만 년 세월의 흔적. 죽어 부스러진 세월의 낡음 위에 또다 시 세월이 쌓여 만들어진 시련의 증거. "수호제황석…." 그는 저도 모르게 그 말을 중얼거렸다. 왠지 모르지만 저 수정의 이 름을 알 수 있었다. 무언가가 알려주었다기보다는, 그렇게 느껴졌다. 고향에 돌아온 듯한 편안함이 그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는 비틀거 리며 일어나 가까이에 떨어진 알갱이를 주워들었다. 알갱이에서 강한 빛이 일어났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거운 열 기가 얼굴 가득 몰아쳤다. 아련한 상실감이 가슴을 메웠다. 울고 싶은 마음이 그를 강하게 사로 잡았다.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이다. 무의식의 일부가 그렇게 외쳤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고 일어나 필 사적으로 그곳을 빠져나가려 했다. "저기다! 저기 있다!" 동굴을 나오자마자 병사들의 함성이 울렸다. 멀리서 한 떼의 병사들 이 이쪽으로 우르르 달려오고 있었다. 다른 지역을 수색하고 있던 병 사들도 동료의 외침을 듣고 이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얼굴이 일그러진 니콜라스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조금 전 발생한 강 한 빛이 동굴 밖으로 새어나가 들킨 모양이었다. 니콜라스는 병사들이 반원의 형태로 포진한 것을 둘러봤다. 걸을 힘 도 없었지만 항복할 의사 또한 없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조금씩 힘이 돌아오고 있었다. 부상 부위에서 느껴지는 통증도 한결 가라앉은 상 태였다. 그는 시간을 끌 셈으로 입을 열었다. "빨리도 찾아냈군." 병사들은 증오에 찬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황제 폐하를 암살한 것으로도 모자라 죄 없는 어린아이를 둘이나 죽이다니! 엘리우스,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냐!" "너희가 먼저 날 죽이려고 했잖아." "닥쳐라!" 장교로 보이는 인물은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저럴 때는 상 대의 무표정한 얼굴조차도 도발이 된다. "황태자 녀석은 지금 뭐하고 있기에 안 보이지? 아비를 잃고 질질 짜느라 정신이 없나?" "네 이 녀석!" 머리끝까지 화가 솟은 장교는 급히 생성한 공격을 날렸다. 니콜라스 는 옆으로 살짝 비켜서 피했다. 빛줄기는 뺨에 가벼운 생채기를 내고 절벽에 격중했다. 바위가 산산이 부서져 떨어졌다. 자욱히 일어나던 흙먼지는 세차게 내리는 비에 잡아먹혀 곧 사라졌다. "명중률이 형편없군. 그래 가지고서야 어디 부하들 앞에서 체면이나 세울 수 있겠어?" "이 자식!!" 가볍게 나무라는 투에 장교는 게거품을 물 정도로 화가 치솟았다. '됐다.' 니콜라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느 정도 힘이 돌아왔다. 이 정 도 전력쯤은 잘하면 상대할 수 있을 듯도 싶었다. "이봐. 중요한 거 하나 알려줄까?" "뭐냐?" "그건 말이야…." 가볍게 몸을 숙인 니콜라스는 바닥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갑작스런 돌격에 장교는 일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함을 되찾고 반격 준비를 갖 췄다. 장교는 두 손을 벌리고 힘을 집중했다. 물론 니콜라스는 그대로 지켜 볼 생각이 없었다. 중간 지점까지 이르자, 그는 갑작스레 속도를 가 속화시켜 돌진했다. 장교는 어어어 하고 당황했다. 흰 빛을 머금은 손이 허공에 원을 그렸다. 새하얀 빛줄기가 쏜살같이 뻗어 나왔다. 장교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검은색 모자가 둥근 빛 의 칼날에 슥삭 잘려나갔다. 병사들은 황급히 반격 준비를 갖췄다. 니콜라스의 몸이 번개같이 허 공을 날아 장교의 머리를 후려쳤다. 단 한 방에 장교는 깨끗이 의식 을 잃고 쓰러졌다. "시시해." 가볍게 장교를 짓밟고 선 니콜라스는 좌우로 손을 펼쳤다. 하얀빛이 뿜어져 나와 거대한 반원의 칼날이 되었다. 칼날은 눈에 비치지 않는 빠른 속도로 좌우로 뻗어 나갔다. 병사들은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공 격을 피해냈다. 적이 주춤한 틈을 타서 니콜라스는 재빠르게 달렸다. 기운을 어느 정 도 차렸다 하나 완전한 것은 아니다. 이만한 수의 병사들을 상대하다 가는 제풀에 지쳐 뻗게 된다. "제법이군, 엘리우스." 갑작스레 눈앞을 막아선 자의 출현에 니콜라스는 멈칫했다. 그는 재빠르게 상대를 파악했다. 힘의 기운이 느껴지긴 하나 매우 미 약해 하급 병사보다도 못하다.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 찰나간에 판단을 내린 니콜라스는 다시 박차고 뛰어나갔다. 단번에 쓰러뜨리고 도주할 생각이었다. "그럴 줄 알았지." 오스카는 느긋하게 중얼거리며 뒤에 감추고 있던 것을 앞으로 내밀 었다. 놀란 니콜라스는 그 자리에 우뚝 정지한 채 신음을 흘렸다. "이 아이의 목숨이 아깝거든 순순히 항복하시지." 좌우에 병사들을 시립 시킨 채, 오스카는 차갑게 미소지었다. 그는 두 팔에 유빈을 안고 있었다.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조찬우 헉 유빈이는 죽은게 아니였나.. 2005/04/30 안녕히 헉! 도대체 어떻게 된거지? 2005/04/30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2/18 페이지 ▶ 334 - 심판의 빛(8) [6] 실탄 2005/04/3012Kb 781 ▷ 333 - 심판의 빛(7) [2] 실탄 2005/04/3011Kb 663 ▶ 332 - 심판의 빛(6) 실탄 2005/04/3011Kb 642 ▶ 331 - 심판의 빛(5) [4] 실탄 2005/04/3011Kb 654 ▶ 330 - 심판의 빛(4) [6] 실탄 2005/04/3011Kb 735 ▶ 329 - 심판의 빛(3) [12] 실탄 2005/04/2913Kb 819 ▶ 328 - 심판의 빛(2) [16] 실탄 2005/04/2811Kb 910 ▶ 327 - 심판의 빛(1) [24] 실탄 2005/04/2712Kb 1046 ▶ 326 - Good bye, myself(7) [31] 실탄 2005/04/2616Kb 1196 ▶ 325 - Good bye, myself(6) [16] 실탄 2005/04/2612Kb 909 ▶ 324 - Good bye, myself(5) [39] 실탄 2005/04/2513Kb 1169 ▶ 323 - Good bye, myself(4) [55] 실탄 2005/04/2413Kb 1239 ▶ 322 - Good bye, myself(3) [22] 실탄 2005/04/2413Kb 932 ▶ 321 - Good bye, myself(2) [14] 실탄 2005/04/2312Kb 844 ▶ 320 - Good bye, myself(1) [20] 실탄 2005/04/2312Kb 964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 2 [3][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2745 :: 334 - 심판의 빛(8) 실탄(cruel) 05-04-30 :: :: 11620 뚫어져라 유빈을 쳐다보던 니콜라스는 조용히 두 손을 들었다. 평온 하게까지 느껴지는 무표정이었지만, 바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얼마나 분개하고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연행해라." 뒤늦게 달려온 병사들이 니콜라스의 손을 뒤로 묶었다. 거칠게 다루 고 있지만 니콜라스는 입을 꾹 다문 채 오스카만 쏘아볼 뿐이었다. 그는 한 마디 반항도 못한 채 끌려갔다. 그리고 차가운 돌로 만들어 진 지하 감옥에 감금되었다. 창살을 닫기 직전 한 병사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의 뺨을 후려쳤 다. 뺨에 붉은 상처 자국이 새겨졌지만, 그는 흘끗 바라보기만 했을 뿐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더욱 화가 난 병사는 다른 쪽 뺨도 후려치려 했다. 그러자 동료 병사 가 얼른 막았다. "그만 해. 명령 없이 포로에게 상처를 냈다가는 곤란해." "하지만 이 녀석은 폐하를 암살했다고!" 병사는 제 분을 못 이겨 하며 씩씩거리다가 자리를 떴다. 동료 병사 는 차가운 눈으로 니콜라스를 흘끗 내려봤다. 어차피 넌 죽게 될 거 야, 라고 말하는 눈초리였다. 니콜라스는 무시했다. 혼자 남은 니콜라스는 눈을 감았다. 어려운 지경에 처하면 눈을 감고 생각하는 건 그의 버릇이었다. 똑똑 하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사이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간간 이 섞인다.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바로 앞에서 멈췄다. 니콜 라스는 조용히 눈을 떴다. "재키." 쇠창살을 손으로 움켜쥔 유하가 상기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너였냐?'는 얼굴로 피식거렸다. "포로가 된 걸 비웃으려고 왔어?" "어떻게… 살아있었지? 분명히 심장이 뚫렸는데." "글쎄. 나도 뭐라고 설명하기가 난감한데." 재미있다는 표정까지 띤 채 방글거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 를 잃지 않는 모습에 유하는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빠진 다거나 불쾌해진다고는 할 수 없는 묘한 변화였다. 유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역시 넌 엘리우스였어?" "여전하군. 너희들 멋대로 사람을 엘리우스라 판단하느니 마느니 하 지 마. 불쾌해." "대답해! 우리에게는 중요한 문제란 말이야!" "적어도 너희들 일이 내 목숨보다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유하는 볼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크게 화를 내고 있다는 표시였다. "왜 황제 폐하를 죽였지?" "황태자 녀석을 죽이고 싶었거든. 아버지가 눈앞에서 죽는 거 보고 폭주했을 때가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게도 다른 녀석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지. 어차피 다 죽일 생각이었어." "넌 반역자야. 구제불능의 반역자!" "만약 내가 엘리우스가 맞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대대로 엘리우스를 반역자로 몰아세운 건 너희들이 아니었어?" 그렇지 않아, 라고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위험을 눈앞에 두고도 감 정의 변화가 없는 눈동자에 가슴이 꽉 막혔다. 반박하고 싶어도 입만 뻥긋거렸을 뿐, 한 마디 반론도 꺼낼 수 없었다. "일만 년 동안 지겹게도 찾아 죽였다니. 나 같으면 아마 원한이 뼛속 까지 사무쳤을 거야. 아무리 너희들 사정이 절박하다 해도 자기 목숨 보다는 아닐 테니까." 원한이나 독설을 쏟아 붓는다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지나치게 덤덤 한 어조였다. 실제로 그의 감정은 착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를 노려보던 그녀의 눈빛이 미묘하게 풀어졌다. 하지만 그는 그 변 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재키. 어떻게 되든 간에 넌 죽게 될 거야." "죽이려고 들겠지. 난 엘리우스인 데다가 너희들 황제까지 죽였으니." 재키라 부르지 말라고 쏘아붙이는 것도 귀찮았던 니콜라스는 건성으 로 받아넘겼다. 사형선고를 들은 소년이라고는 생각될 수 없는 태연 함이었다. "무섭지 않아? 죽는 게?" "난 내 기억이 시작됐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죽음과 가까이 있 었어. 죽을 뻔한 위기를 많이 겪어봤고, 많은 사람을 죽여봤어. 이제 와서 새삼 죽음이 두려울 리가 없지." 유하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넌 나보다 어리잖아? 그런데 어쩜 그렇게 태연할 수 있어?" "나이는 숫자일 뿐이야. 난 너보다 많은 사람의 피를 손에 묻혀봤어. 넌 지금까지 몇 명의 피를 네 손에 묻혀봤지?" 고작해야 두 명. 바로 니콜라스와 마크였다. 그나마 마크는 자신의 손으로 숨통을 끊은 게 아니었으니 피를 묻혔다고 말하는 것도 민망 했다. 어두운 표정을 짓고 망설이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시 말했다. "널 쏘고 나서… 많이 두려웠어. 처음으로 살인을 했다는 생각에 처 음에는 잠도 잘 오지 않았어." "마음이 약하군. 난 첫 살인을 했을 때도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로 돌아갔는데." "그래. 난 너만큼 강하지 못해. 그래서 두려워." 비로소 니콜라스는 글썽이는 눈물을 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 에 놀란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씨. 왜 눈물이 나지." 창피하다는 듯 얼굴을 돌리며 눈물을 닦아낸다. 이제는 놀랐다기보다 는 어이없다는 눈길로 바라보던 니콜라스는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너 혹시 나 좋아했냐? 이거 기분 나쁜데…." "웃기지 마! 누가 너 같은 걸!" 거칠게 홱 쏘아보는 것을 보니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니콜라스는 일 이 재미있어졌다고 생각했다. "너, 가학을 즐기는 취미가 있었어?" "헛소리 마! 멋대로 상상하지 말라고!" "하긴, 내가 그동안 널 좀 괴롭히긴 했지. 어때? 지금 여기서 한 번 즐겨보는 건?" "이익…." 빠드득 이를 갈며 노려본다. 그러나 가벼운 웃음거리 밖에는 느껴지 지 않는 모습이다.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니콜라스는 뒤로 벌러덩 누웠다. 그리고 팔베 개를 하고 눈을 감았다. 죽음 따위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 모습 이다. "난 이런 데서 죽지 않아." "헛된 희망은 버려. 넌 이곳에서 결코 탈출할 수 없어." "유빈이 때문에 지금은 잠시 묶여 있을 뿐이야. 장담하지. 난 반드시 유빈이를 구해서 이곳을 탈출할 거야. 그때는 너도 데려가 줄까?" "헛소리는 집어치우라고 했지!" "여자들은 참 이상해. 왜 다 들통난 자기 마음을 그렇게 숨기지 못해 안달이지?" 이쯤 되면 상대를 곯려주는 행동 이상은 될 수 없다. 눈에서 불꽃을 튀기며 노려보던 유하는 어두운 표정을 지우고 돌아 섰다. "제물의 운명을 타고 나서 어린 나이에 죽게 된 것은 유감이고, 또 가엾게 생각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제 폐하를 암살한 죄가 가벼 워지는 것은 아니야." "너희들이 누나를 괴롭히지만 않았으면 이곳까지 찾아올 이유도 없 었어." "어차피 마지막이 될 테니까 알려줄게. 엔젤의 아이는 이미 이 세상 에 없어." 짓궂음을 띤 표정이 삽시간에 지워졌다. 안색이 차갑게 굳은 니콜라 스는 뚫어져라 유하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그런 거짓말 상당히 불쾌해." "거짓말이 아니야. 엔젤에게 반해서 독점하려고 한 마크라는 사람이 엔젤의 아이를 인질로 삼으려 했어. 그렇지만 궁지에 몰리자 아이와 함께 자폭했지." 그 녀석들이 했던 말과 똑같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선뜻 그 말에 신 뢰를 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까 오스카가 인질로 삼았던 유빈의 모습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돼. 그럼 내가 아까 본 건 뭐란 말이야?" "오스카님이 보여준 아이 말이야? 그건 가짜였어. 겉모습을 속이는 것쯤은 일도 아니야." 믿을 수 없는 소리에,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거짓말하지 마. 그럴 리가 없어." "널 완전히 붙잡아놓은 상황에서까지 거짓말은 하지 않아."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 "사실이다. 거짓말이 아니다." 뜻밖의 목소리에 유하와 니콜라스는 흠칫 놀랐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에는 카뮤가 무거운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괜찮다. 반역자라 하나 가벼운 이야기 몇 마디를 한 것 가지고 흠을 잡지는 않아. 그만 가봐라." "예…." 니콜라스와 카뮤를 번갈아 흘끔거리던 유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 는다는 심정을 안고 멀어져 갔다. 뚜벅뚜벅 하는 발걸음 소리가 무겁게 석실을 울렸다. 쇠창살 사이로 비치는, 남자 같지 않게 선이 고운 적의 얼굴을 니콜 라스는 무섭게 노려보았다. 카뮤는 창살 바로 앞에 섰다. 굳은살이 없는 손으로 창살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부드러운 움직임과는 달리 우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창 살이 휘어졌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억센 악력이었다. 손가락이 단단한 창살을 파고들 어 자국을 남겼으니. 노려보는 시선에는 적의를 넘어선 증오가 가득 담겨 있다. 눈빛만으 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살기였다. 허나 살기라면 니콜라스도 지지 않는다. 몇 번이나 되는 사선을 넘어 서 지금에 이른 그다. 이 정도로 기죽지는 않는다. "엘리우스. 네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는 알고 있겠지?" "언제 갈지 오락가락하는 노인네 한 명을 죽인 게 뭐가 그리 대수라 는 거지?" 우드득. 새하얀 손에 핏줄이 돋아나며 창살이 휘어졌다. "이 더러운 반역자." "난 애초에 당신들 편이었던 적이 없어." "수천 년 전 지상인과 사랑에 빠져 민족을 저버린 과오를 벌써 잊어 버렸단 말이냐!" "그건 전설일 뿐이지. 그리고 수천 년 전 일이라면 잊어버리는 것도 당연하잖아? 그쯤 되면 공소시효도 훨씬 넘기고 난 일이라고." "네놈은 정녕 뉘우칠 줄을 모른단 말이냐!" "난 왜 당신이 그렇게 쓸데없이 분노하는지 모르겠군. 정작 화를 내 야 할 건." 얼음 같은 살기가 니콜라스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왔다. "바로 나인데 말이야." 싸늘한 한기가 석실에 가득 몰아쳤다. 죽음의 기운이 잿빛 안개를 품 고 카뮤의 전신을 둘러쌌다. 카뮤가 가볍게 기합을 터트리자 안개는 순식간에 흩어졌다. "속박을 걸었을 텐데, 어떻게 에날도스를 쓰는 거지?" "속박을 걸긴 걸었나? 별로 그렇다고는 못 느꼈는데." 카뮤보다 더욱 짙은 살기가 니콜라스의 눈에서 쏟아졌다. 죽음을 헤 치고 무수한 사람을 죽인 자만이 내뿜을 수 있는, 이것이 바로 진정 한 살기였다. "유빈이를 죽였다는 게 사실이냐?" "우리가 죽인 것은 아니다. 엔젤에 눈이 먼 배반자가 멋대로 행동하 다 궁지에 몰려 자폭했고, 불행히도 거기에 휘말렸을 뿐이다." "네놈들, 유빈이가 죽기까지 했는데 누나가 네놈들을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나?" 그 말에는 카뮤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 나 엔젤은 이미 충분한 어른. 모성에 상처를 입히고도 도움을 얻는다 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나 성격은 내가 잘 알지. 유빈이가 살아있어서 인질로 이용했다면 모를까, 네놈들이 죽여버렸으니 누나는 자기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 라도 네놈들 편이 되진 않을 거다. 무엇보다." 순식간에 니콜라스의 몸이 창살 앞으로 이동했다. 그가 번개같이 주 먹을 뻗자 카뮤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창살 사이를 뚫고 나온 주먹은 카뮤의 얼굴을 노렸으나, 그의 손에 잡혔다. 둘의 팔이 격하게 떨리며 팽팽한 힘을 겨루었다. 니콜라스의 얼굴에 는 공격이 실패했다는 아쉬움이 없었다. 카뮤의 얼굴에는 상대의 기 습을 막아냈다는 안도감이 없었다. "내가 그 전에 너희들을 가만 두지 않을 거다. 내가." 카뮤는 니콜라스의 눈에서 증오를 읽었다. 죽음이 아니고서는 결코 지워버릴 수 없을 증오를. 순간적으로 힘을 집중해 니콜라스의 주먹을 밀어낸 그는 사뿐히 뒤 로 물러났다.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조금 맺혀 있었다. "본래는 의례를 치르기까지 널 살려두려고 했다. 하지만 넌 아버님의 원수, 살려두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글쎄? 혁명인지 뭔지를 이루려면 마기라는 게 필요하다고 하지 않 았나? 날 죽이면 마기가 아무한테나 도망가버릴 텐데?" 그는 시간낭비를 감수할 수 있겠느냐는 뜻으로 빈정거렸다. 그러나 카뮤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마기는 숙주가 죽으면 수호제황석에 며칠 간 깃들여 힘을 축적한 뒤 새로운 숙주를 찾아 떠난다. 이제까지는 수호제황석에서 떠나는 마기를 붙잡을 길이 없어 다음 대 엘리우스를 찾아다녀야만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 "무슨 소리지?" "마기가 수호제황석에 깃들였을 때 봉인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는 것이다." 카뮤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는 것과 동시에 죽음의 빛줄기가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왔다. 니콜라스가 미처 피하거나 반격할 준비를 갖추기도 전에, 빛의 탄환은 그의 가슴을 정확히 꿰뚫었다. "죽어라. 아버님의 원수." 냉정한 증오를 담아 내뱉는 카뮤를 노려보던 니콜라스의 몸이 천천 히 쓰러졌다. 새빨간 선혈이 가슴에 난 구멍에서 흘러나와 그의 옷을 적시고 바닥을 적셨다. 넓은 대양에서 한 줄기 빛이 반짝였다. 새카만 우주에서 지구 주변을 맴돌고 있던 <심판>은 그 신호를 읽 었다. 그것은 <권한자>의 신체에 이상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심판>의 전자두뇌는 맹렬히 계산하고 또 판단했다. 수천 번이 넘어 가는 오류와 결론이 순환계처럼 반복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심판>은 계산을 끝냈다. <권한자>의 심전 도 수치는 완벽하게 정지. 소생할 가능성은 제로.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심판>은 심판의 빛 가동을 준비했다. 준비를 마친 뒤 해저 깊이 숨겨져 있는 무인핵잠수함과 강제로 교신했다.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텐시노 니콜라스, 다시 살아 날수 있을려나 2005/05/01 xiu 완전히 죽었군요;ㅁ; 심판... 핵폭탄 발사! 2005/05/01 아루미오나 앗싸!! 아틀란티스~~!! 망해버려~~!!!!!!! 2005/05/01 휘동이 맥의 포도 견딘 보호막을....핵미사일정도가...... 그것도 심해의 깊은곳에있는....갈수나 있을까나......복수는 물건너 간것일까요 2005/05/01 이시르 류 맥에게 유일하게 상처를 줄 수 있는게 핵 아닌가요? 아마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해도 조금이라도 피해는 주겠죠. 2005/05/01 꼬마코린 ...으음??? 2005/05/01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2/18 페이지 ▷ 334 - 심판의 빛(8) [6] 실탄 2005/04/3012Kb 783 ▶ 333 - 심판의 빛(7) [2] 실탄 2005/04/3011Kb 663 ▶ 332 - 심판의 빛(6) 실탄 2005/04/3011Kb 642 ▶ 331 - 심판의 빛(5) [4] 실탄 2005/04/3011Kb 654 ▶ 330 - 심판의 빛(4) [6] 실탄 2005/04/3011Kb 735 ▶ 329 - 심판의 빛(3) [12] 실탄 2005/04/2913Kb 819 ▶ 328 - 심판의 빛(2) [16] 실탄 2005/04/2811Kb 910 ▶ 327 - 심판의 빛(1) [24] 실탄 2005/04/2712Kb 1046 ▶ 326 - Good bye, myself(7) [31] 실탄 2005/04/2616Kb 1196 ▶ 325 - Good bye, myself(6) [16] 실탄 2005/04/2612Kb 909 ▶ 324 - Good bye, myself(5) [39] 실탄 2005/04/2513Kb 1169 ▶ 323 - Good bye, myself(4) [55] 실탄 2005/04/2413Kb 1239 ▶ 322 - Good bye, myself(3) [22] 실탄 2005/04/2413Kb 932 ▶ 321 - Good bye, myself(2) [14] 실탄 2005/04/2312Kb 844 ▶ 320 - Good bye, myself(1) [20] 실탄 2005/04/2312Kb 964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1] 2 [3][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2746 :: 334 - 이별의 전주곡(1) 실탄(cruel) 05-04-30 :: :: 11092 뜨거운 열기를 품은 한줄기 섬광이 우주 밖까지 솟구쳐 올렸다가 밑 을 향해 치달았다. 마하 수십을 넘어서는 엄청난 속도로 솟아오른 미 사일은 대기와 접촉하는 순간 엄청난 고온의 불꽃을 일으키며 시뻘 건 불꽃에 휩싸였다. 닥터가 모습을 감춘 지 수십 일째. 석창렬 국회의장을 중심으로 빠르 게 국론을 안정시켜가던 한국은 정체불명의 대륙간탄도 공격에 당황 함을 감추지 못했다. 핵공격으로 추정되는 미사일이 날아온다는 소식은 한창 기자들과 이 야기를 나누던 석창렬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석창렬이 무언가 구체 적인 지시를 생각하기도 전에, 미사일은 한반도 남부 지방에 정확하 게 내리꽂혔다.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죽어갔다. 많은 이들이 왜 자기가 죽어야 하는지 모르고 죽어갔다. 일본과 한국을 향한 핵 공격은 곧바로 세계적인 매스컴을 탔다. 엄청 난 수의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으며, 한국과 일본은 한때는 패닉 수준 까지 몰리기도 했다. 누가 왜 한국과 일본을 공격했느냐를 놓고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갈 라졌다. 고급 테러리스트의 소행이라 주장하는 자도 있었고, 조심스 럽게 닥터가 분노했기 때문이라 말하는 자도 있었다. 표면적으로 회사 P.H.K의 총수로 알려진 프로메테우스는 극비리에 한국을 방문해 동향을 살폈다. 실로 아비규환이었다. 핵폭발의 여파가 미치지 않은 지역의 사람들조 차 넋이 빠진 채 무엇을 해야 좋은지 몰라했다. 곳곳에는 이게 전부 정부가 닥터에게서 맥과 유전을 빼앗으려고 음 모를 꾸몄기 때문에 보복 당한 거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 었다. 그것은 대량 살인자인 닥터를 옹호하는 발언이라고 비난하며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목청을 높여 싸우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 한국이 이렇게 된 것에는 닥터의 실종이 크게 관여했다는 사실에 공통적으로 동의했다. "이 이상 나아가면 위험합니다. 저 부근은 방사선 노출 지역입니다." 운전대를 잡은 비서가 방사선 측정기를 확인한 뒤 그렇게 말했다. "방향을 돌려." "예." 핸들을 꺾으면서 비서는 흘끗 프로메테우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어린아이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니콜라스 베르노가 드디어 한 건 했군. 설마하니 죽기 전에 한국과 일본을 타켓팅 해놓았을 줄은 몰랐는데." "왜 미국은 공격하지 않았을까요? 아직 미사일 한 기가 더 남았을 텐데요." "닥터가 미국에 있기 때문이겠지. 어쨌든 이것으로 세계는 한동안 시 끄럽겠군." "즐거워 보이시는군요." "그렇게 보이나?" 프로메테우스는 피식거리며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넋을 잃은 채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 폭발지역에 가족이 있어 졸지에 혼자가 되어 절망하며 악을 쓰는 사람, 이게 전 부 정부가 멍청하기 때문이라고 삿대질을 하는 사람 등 갖가지 사람 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야흐로 국제 정세의 흐름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세계는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거센 변화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오랫동안 세계의 균형을 유지해왔노라고 자부해온 그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 변화를 주도할 인물이 누구인지를 생각했다. 변화의 한가운 데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생각했다. 피곤한 듯 눈을 감는 그의 표정에는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 사람처럼 후련함이 떠올랐다. 흐릿하기만 하던 주변 풍경이 하나둘씩 선명하게 떠올랐다. 정신을 차린 제임스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옆에는 어느새 정신을 차린 제시가 주변을 경계하며 서 있었다. "정신이 들어요?" "응. 게이트를 넘나드는 건 여전히 유쾌하지 못한 기분이야." "빨리 이곳에서 나가요. 곧 병사들이 눈치채고 들이닥칠 거예요."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지?" "3분 정도요. 양호한 편이에요." 이곳은 황궁의 지하에 위치한 곳. 적진의 심장부나 마찬가지이다. 서 둘러 벗어나지 않는다면 아틀란티스는 게이트 이용을 눈치채고 곧 추격해올 것이다. "조심." 귀가 밝은 제시는 재빨리 제임스를 한쪽으로 떠밀었다. 이윽고 우르 르 하는 발소리가 다가오는가 싶더니 한 무리의 병사들이 그들의 옆 을 스쳐 지나갔다. 사각지대에 숨은 덕에 발각되지는 않았다. "벌써 눈치챘나 보군요." "그러게 말이야. 이거 좀 어렵게 됐… 큭!"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제임스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주저앉았다. 제시 는 깜짝 놀라 그를 부축했다. "왜 그래요, 제임스? 무슨 일이에요?" "크, 크윽…."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괴로워한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던 터라 제시는 당황한 채 어쩔 줄을 몰라했다. 제임스는 허공을 향해 한쪽 손을 뻗었다. 바르르 떨리는 손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손을 잡으려는 듯 보였다. 초점이 사라진 눈동자는 보 이지 않는 누군가의 움직임을 쫓는 듯 보였다. 격한 기침과 함께 제임스는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검붉은 피가 보 기 싫은 색깔로 바닥을 더럽혔다. 제시는 안타까워하며 그의 등을 두 드려주었다. 이윽고 신음이 잦아들었다. 호흡이 한층 안정된 제임스는 고개를 숙 인 채 헉헉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니콜라스가… 당했어." "뭐라고요?" 뜬금 없는 말에 제시는 놀람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일어 난 제임스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용해 억지로 걸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그를 보다못해 제시가 황급히 부축해주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턱을 타고 검붉은 피가 한줄기 흘렀다. "당했어…. 좀더 빨리 와야 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니콜라스가 당했는지 아닌지 당 신이 어떻게 안다는 거죠?" 제임스가 뭐라 대답하려는 찰나였다. "누구냐?" 느닷없이 나타난 두 명의 병사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흠칫 놀란 제시는 칫 하고 이를 갈며 번개같이 몸을 날렸다. 여자의 몸이기는 하나 에날도스를 최고로 다룰 줄 아는 카이저의 호 칭을 지닌 그녀다. 힘이 실린 발차기 한 방에 병사들은 가볍게 나가 떨어졌다. "적이다! 적이다!" 병사를 쓰러뜨려 놓고 잠시 안심하고 있을 때 저쪽에서 그들을 발견 한 한 무리의 병사들이 소리를 질렀다. 제시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어렸다.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시간을 끄는 동안 5대 대신들이 오기 라도 한다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다. "일단 이곳에서 빠져나가요." "알았어." 제시는 제임스의 손을 잡아끌고 냅다 달렸다. 정면에서 몇 명의 병사 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길게 상대하지 않고 옆으로 밀쳐 내거 나 길만 뚫고는 계속 달렸다. 병사들은 고함을 지르며 쫓아왔다. 황궁을 빠져나온 둘은 잽싸게 정원을 가로질렀다. 갖가지 수풀과 정 원수들이 그들의 모습을 감춰주었다. 적이 침입했다는 소리에 가뜩이나 예민해 있던 병사들이 떼거지로 몰려나와 궁을 수색했다. 제시와 제임스는 식물들 뒤로 몸을 숨긴 채 그들로부터 조금씩 멀어져갔다. "어떻게 하죠?" 제시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원래 계획은 니콜라스 구출이었지만 이제 틀렸어. 날 따라와." 제임스는 뭔가를 결심한 얼굴로 앞장섰다. 그 같지 않게 지나치게 긴 장하는 모습에 제시는 불길함을 느꼈으나 묻지 않고 따라갔다. 니콜라스의 몸이 쓰러지는 순간 백색 광채가 일어났다. 카뮤는 놀라 지 않고 쓰러진 니콜라스를 주시했다. 빛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고요히 움직였다. 백색의 불꽃은 허공을 태우며 조금씩 위로 솟구쳐 올랐다. 생명의 열기에 휩싸인 먼지가 반 짝이는 가루가 되어 허공을 장식했다. 탄성이 터져나올 만큼 아름다 운 광경이었다. 불꽃은 이내 거대한 새의 형태로 변했다. 희게 타오르던 몸뚱이에서 새빨간 날개가 쑥 솟아 나왔다. 눈처럼 흰 몸뚱이는 어느새 피처럼 붉게 변한 채 커다란 불꽃에 휩싸였다. 스스로를 불태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새. 불꽃을 집어삼켜 영생 을 살아가는 새. 말로만 전해듣던 공명신수, 불사조 마기를 눈앞에 대한 카뮤는 형언할 수 없는 감격에 휩싸였다. 마기는 알아듣지 못할 고함을 토하며 크게 날개짓을 했다. 좁은 석실 은 마기의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녹아 내렸다. 천장에 구멍을 뚫고 솟구친 마기는 허공을 크게 선회한 뒤 어느 방 향으로 날아갔다. 뒤늦게 감옥에서 쫓아 나온 카뮤는 마기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전하." 오스카가 황급히 달려왔다. "엘리우스가 죽고 마기가 빠져나왔다. 어서 가서 마기가 수호제황석 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봉인해야 한다." "예." 오스카와 카뮤는 서둘러 수호제황석이 있는 동굴을 향해 달렸다. 동 굴 입구는 마기의 날갯짓 때문에 크게 녹아 있었다. 그들은 수호제황석이 있는 중심부까지 한걸음에 내달았다. 안에서 기 다리고 있는 놀라운 광경에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크게 숨을 들이마 셨다. 새하얗고 거대한 돌은 푸른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단지 아름답다는 표현을 넘어서, 생명이 깃들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싱싱함이 돌 전체를 감싼 채 맴돌고 있었다. 카뮤는 생명을 얻은 수호제황석을 덤덤히 올려다보았다. 태연한 듯 보이지만 그의 눈동자는 터질 것 같은 기쁨을 감추고 있었다. 오스카는 침착히 설명했다. "준비는 다 해놓았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손가락 끝에 상처를 내고 수호제황석에 피를 묻히시기만 하면 됩니다. 태자 전하가 주인이라고 마기에게 각인시키는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카뮤는 왼손가락 끝에 조그만 칼날을 만들어 오른손 가락을 가볍게 그었다. 그리고 선혈이 맺힌 손가락을 거대한 수호제 황석에 살며시 갖다댔다. 수호제황석은 생명의 고동을 터트리며 강한 빛에 휩싸였다. 불사조가 울부짖는 소리가 아련히 그들을 자극했다. 격한 진동이 일어났다. 바닥에 수도 없이 부서져 있던 수호제황석의 알갱이가 일제히 허공으로 치솟았다. 알갱이는 일제히 수호제황석에 달라붙었다. 다닥거리는 마찰음이 끊 이지 않았다. 흡사 거대한 자석에 철가루가 달라붙는 광경을 보는 듯 했다. 이윽고 빛이 사그라졌다. 알갱이로 흩어져 있던 수호제황석의 조각들 은 일제히 뭉쳐 하나가 되었다. "끝났습니다. 이제 마기는 또 다른 숙주를 찾아 떠나는 일이 결코 없 을 것입니다." "너무 쉬워서 맥이 빠질 정도군. 왜 선대 황제들은 지금까지 이 방법 을 쓰지 못했지?" "전하는 역대 그 어떤 황제 전하보다도 강하십니다. 그리고 수호제황 석을 상당수 긁어내 마기의 힘을 약화시켰습니다. 그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었기에 성공한 것입니다. 실제로 고대에 이와 같은 방법을 몇 차례 시도했다는 문헌이 있습니다만, 당시 황제는 지금의 전하만큼 강하지 않아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럼 이제 혁명을 이룰 수 있는 건가?" "어디까지나 마기는 혁명을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열쇠입니다. 이제 여기에 맥의 무한동력이 더해지면 아틀란티스 대륙을 지상으로 끌어 올릴 수 있습니다." "수고했다, 오스카 경. 그대의 노고는 잊지 않겠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오스카는 충직한 신하처럼 겸허하게 고개를 숙였다. 충격에 빠진 얼굴로 수호제황석을 올려다보던 유하는 비틀거리며 동 굴을 빠져나왔다. 머리 속이 복잡하고 어지러워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반쯤 넋이 나간 채 아무 곳이나 걸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니콜 라스가 갇혀 있던 석실이었다. 쇠창살이 형체도 없이 녹아 있는 광경을 멍하니 주시했다. 혹시나 싶 어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새카맣게 녹았다가 굳어 가는 암석만 있었 을 뿐 니콜라스의 모습은 흔적도 없었다. 마기가 내뿜는 열기는 전 숙주의 시신까지 가차없이 태워버릴 만큼 강하고, 또 냉정한 모양이었다. 눈물이 핑 도는 것 같은 느낌이 싫어 고개를 떨구었다. 머리 속이 마 구 헝클어진 기분이었다. 니콜라스는 적이다. 황제를 암살했고 엘리우스인 이상 어차피 죽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왜 그의 죽음에 이렇듯 복잡한 기분이 휘몰아치는가. 그녀는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평생 이해 못할지도 몰랐다. "잘 가. 재키." 유하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 순간 뒤에서부터 번개같이 날아드는 하 나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는 뒤에서부터 유하의 목을 조르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당황한 유하는 힘을 끌어 모아 반격하려 했으나, 상대방의 손끝에서 형성된 빛의 칼날이 목줄기를 겨누는 것을 느끼고 포기했다. "현명한 선택이야.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으니까 조용히 하도록." 알고 있는 목소리에 유하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제시는 입에서 손을 떼고 나지막하게 물었다. 다른 손은 언제라도 유하의 목을 찌를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어떻게 됐지?"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xiu 왠지 묘사가... 자이오 다이아몬드 같아요... 설마... 2005/05/01 bismarck 한 기는 죽은 장소에 떨어진다고 하지 않았나요? 2005/05/01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1/18 페이지 ▶ 후기 [35] 실탄 2005/11/273Kb 779 ▶ 346 - End Of Atlantis(2) <최종화> [14] 실탄 2005/11/2714Kb 813 ▶ 345 - End Of Atlantis(1) [9] 실탄 2005/11/2712Kb 536 ▶ 344 - 전설의 융기(8) [2] 실탄 2005/11/2710Kb 398 ▶ 343 - 전설의 융기(7) [6] 실탄 2005/11/2713Kb 385 ▶ 342 - 전설의 융기(6) [14] 실탄 2005/09/187Kb 1205 ▶ 341 - 전설의 융기(5) [23] 실탄 2005/08/2711Kb 974 ▶ 340 - 전설의 융기(4) [9] 실탄 2005/08/038Kb 907 ▶ 339 - 전설의 융기(3) [18] 실탄 2005/07/2712Kb 806 ▶ 338 - 전설의 융기(2) [17] 실탄 2005/07/169Kb 916 ▶ 337 - 전설의 융기(1) [20] 실탄 2005/07/1410Kb 1003 ▶ 에피소드 - My doctor [33] 실탄 2005/05/308Kb 1678 ▶ 336 - 이별의 전주곡(3) [33] 실탄 2005/04/3012Kb 1810 ▶ 335 - 이별의 전주곡(2) 실탄 2005/04/3012Kb 788 ▷ 334 - 이별의 전주곡(1) [2] 실탄 2005/04/3011Kb 844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 1 [2][3][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2747 :: 335 - 이별의 전주곡(2) 실탄(cruel) 05-04-30 :: :: 11890 "엘리우스는 죽었어요." 덤덤한 어투의 대답이다. 그러나 안에 담고 있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제시는 제임스의 말이 맞았다는 것에 조금 놀랐으나 곧 얼굴에서 표 정을 지웠다. "뭔가를 착각하고 있군. 니콜라스는 엘리우스가 아니야." "천만에요. 니콜라스는 엘리우스가 맞았어요. 그 증거로, 니콜라스가 죽자 마기가 빠져나와 수호제황석에 깃들었다고요." "뭐?" 이번에는 제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엘리우스는 제임스라고!" "제시님이야말로 오랫동안 착각하고 있던 거 아닌가요?" 빈정거림이 뚜렷한 어투에 제시는 불쾌함을 느꼈다. 제임스는 말없이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숨을 내쉰 제시는 유하의 뒤통수를 쳤다. 유하는 별다른 반항도 못 하고 그대로 기절했다. "어떡할까요?" "어떡하기는. 항복해야지."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제시는 재빨리 돌아서며 싸울 태세를 갖 췄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났다. 건장한 어깨에 수염 을 기르고, 온화하면서도 강인한 눈매를 가진 노인이었다. 누군지 알아본 제시는 가볍게 피식거렸다. "클랙 대신?" "대신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건방은 여전하구나. 제시." "나는 당신들 편이 아니니까요." "수호자는 참 지겹기도 하지. 일만 년 동안 물릴 줄도 모르고 엘리우 스를 지키는데만 전념하다니 말이야. 어쩌면 그것이 일만 년 전 엘리 우스가 내린 저주라는 생각은 안 해 봤느냐?"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군요. 그렇지 않아도 오래 전부터 당신과 싸워 보고 싶었어요." 공기가 타는 소리와 함께 제시의 두 손에서 에너지 구체가 형성돼 둥실 떠올랐다. 그녀의 발치를 중심으로 빛의 기둥이 일어나며 긴 머 리카락이 위로 솟구쳤다. 거센 바람이 일어나며 흙먼지가 날아올랐다. 파괴의 기운이 진한 형 체를 이루며 클랙을 압박해왔다.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기도는 결코 심상치 않다. 클랙은 바짝 긴장하 며 공격할 태세를 갖췄다. '대단하군. 이게 정녕 공명신수를 갖지 못한 능력자가 내보일 수 있 는 힘이란 말인가.' 재능이나 위력만으로는 마리오를 현저하게 초월한다. 클랙은 아까운 기분이 들어 혀를 찼다. 저런 능력자가 왜 하필이면 엘리우스의 편을 들어주는 것인가. 민족을 위해 일한다면 더욱 발전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감상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저 가냘프게 보이는 팔뚝은 자신을 갈기갈기 찢을 것이다. 클랙은 손을 내밀고 정신을 집중했다. 힘이 한곳에 모임에 따라 기류 가 빨라졌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회오리바람이 강하게 피어났다. 화악 하고 새빨간 불꽃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불꽃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더니 점점 형상을 갖추었다. 거대하 고 긴 몸통에 날카로운 네 개의 발. 전신을 감싼 불꽃과 같이 시뻘겋 게 번뜩이는 눈동자. 그것은 거대한 화룡이었다. "자인. 네가 나설 시간이다." 애완견에게 속삭이는 것처럼 클랙은 부드럽게 공명신수 자인의 몸뚱 이를 쓰다듬었다. 훨훨 타오르는 불꽃은 클랙의 손에 조금의 화상도 입히지 않았다. "그게 공명신수 자인인가 보군요." "그렇다. 너의 힘과 자인의 힘, 둘 중 어느 쪽이 우위인지 한 번 승 부를 내보자." "해봤자 무의미한 짓이에요. 마기 정도가 아닌 이상 공명신수 따위에 게 무릎 꿇진 않아요. 그리고." 차가운 살기가 번뜩였다. "공명신수 따위에나 의존하는 나약한 당신에게 지는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제시는 한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반동을 줄이기 위해 다른 팔로 손목을 꼭 잡은 뒤, 라이플 방아쇠를 당기듯 힘껏 에 너지를 응축해 날렸다. 거대한 화구가 주변을 달구며 쏜살같이 날았다. 자인은 몸을 꿈틀거 리며 클랙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화룡은 크게 입을 벌렸다. 제시가 발사한 불덩어리는 화룡의 입안으 로 빨려 들어갔다. 화룡은 간지럽다는 듯이 트림했다. 영락없이 비웃는 것이다. 그러나 제시는 발끈하지 않았다. "제법인걸. 어디 이것도 막을 수 있나 볼까?" 제시의 손바닥 위로 새하얀 빛의 창이 떠올랐다. 반대쪽 손을 크게 휘젓자 길고 굵은 빛줄기가 형성돼 창을 감쌌다. 한 번 흔들자 다시 빗줄기가 형성돼 창을 감쌌다. 팔을 휘젓는 횟수가 증가할수록 창은 조금씩 두터워졌고, 마침내 아름드리 나무 만한 크기가 되었다. 자인은 조금 긴장한 듯 몸을 꿈틀거렸다. 가벼운 비웃음을 띤 제시는 힘껏 창을 날렸다. 빛의 창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자인은 순간적으 로 몸을 움츠려 창을 피했다. 그러나 빗나간 줄 알았던 창은 궤도를 바꾸어 크게 선회하며 다시 자인을 노리고 날았다. 이번에는 더 빠른 속도였다. 자인은 두 번 피할 수 없음을 느꼈다. 막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클랙 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네 뜻대로 하라고 속삭였다. 입을 크게 벌린 자인은 체내 깊은 곳에서부터 힘을 끌어올려 뜨거운 숨결로 바꿔 토해냈다. 순식간에 공기가 달구어지며 주변의 풍경이 일그러져 보였다. 빛의 창과 화룡의 숨결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새하얀 창이 불꽃에 뒤 덮여 시뻘겋게 변했다. 자인은 사력을 다해 숨결을 토했다. 창의 위 력이 조금씩 깎이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클랙은 이를 악물며 자인에게 힘을 보탰다. 혼신의 힘을 다한 숨결은 마침내 창을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게 했다. 클랙은 지친 얼굴로 미소 를 지었다. 잘했다. 네가 최고다. 그렇게 칭찬하며. "어디를 보고 계시죠?" 목덜미에 서늘한 감촉이 와 닿았다. 클랙은 차갑게 굳어버린 채 천천 히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도 지친 것 같지 않은 제시가 생긋 웃으며 빛의 칼을 자신의 목 에 겨누고 있었다. "게임 끝인가요?" 가벼운 티타임을 통해 앞으로의 계획을 다듬던 오스카는 클랙이 제 시와 교전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래서? 지금 상황은 어떤가?" "멀어서 자세히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만 클랙 대신님이 상당히 밀 리시는 듯 합니다." "설마, 공명신수를 쓰면서도 밀리신단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오스카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과연 엘리우스의 수호자. 아틀란티 스인이면서도 섞이지 않고, 반목하면서도 결코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다더니 그에 걸맞는 힘은 지닌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공명신수까지 합세한 5대 대신을 상대로 우위를 보이다니, 이건 완전히 반칙이다.' 생각을 마친 오스카는 재빨리 명령을 내렸다. "지룡사단에게 명령해라. 한시바삐 클랙 대신님을 도와 반역자를 처 단하라고." "그게, 지룡사단은 현재 자발적으로 근신 중입니다. 앤슨님에게 씌워 진 누명이 벗겨지지 않는 이상은 누구의 명령도 따르지 않겠다고…." "무슨 말이냐! 지금은 비상시라고! 그따위 세력 싸움 따위를 하고 있 을 때가 아니란 말이야!" 발끈해서 호통을 치던 오스카는 재빨리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한 결 차분해진 어조로 말했다. "내가 직접 설득하겠다. 단장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예." 오스카는 서둘러 외출 준비를 갖췄다. 지룡사단의 단장은 황궁 밖에 있는 자신의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찾 아내는데 어려움이 들지 않아 다행이었다. 차갑게 노려보는 단장을 보는 순간 오스카는 한 대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곧 마음에서 지웠다. 그는 노기가 조금도 없는 평온 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멋대로 근신한다고 선언했다 들었는데,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클랙 대신님께서 반역자에게 밀리고 계신 단 말이야. 빨리 대원들을 이끌고 가서 반역자를 처단해라." "당신의 명령은 듣지 않습니다." "명령위반죄로 참수당하고 싶은가?" "그럴 수 있다면 해보시지요." 오스카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무슨 말을 해도 반석 같은 이 남자는 꿈쩍하지 않을 듯 보였다. 어쩔 수 없이 한 발 물러서야 할까. 하지만 너무 아깝다. 어떻게 해 서 앤슨과 마리오를 여기까지 몰아넣었는데. 그렇지만 클랙이 당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제시가 클랙을 이기고 자인을 흡수한다면 그 뒤부터는 대책 없게 된다. 다른 대신들은 황태자와 함께 수호제황석을 보러 가 있다. 거기까지 연락을 보내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리던 오스카는 할 수 없이 한 보 물러나 주기로 했다. "앤슨 경의 혐의에 관해서 공정하고 엄격한 조사를 약속하지. 대원들 을 이끌고 나가서 반역자를 처단하라." "당신이 앤슨님을 함정에 몰아넣었다는 것은 어린아이도 다 알고 있 는 사실입니다. 공정하고 엄격한 조사는 무슨 얼어죽을 조사입니까?" 노골적으로 적의를 품고 있는 상대 앞에 다른 우회적인 말을 계속 늘어놓았다가는 더욱 자극할 뿐이다. 오스카는 이를 바드득 갈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알았다. 앤슨의 혐의를 전면 없었던 걸로 하지." "당신이 누명을 씌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까?" "헛소리하지 마라! 누가 누명을 씌웠다는 거냐!" 싸늘히 주시하던 단장은 이윽고 피식거렸다. 이쯤에서 자신도 물러나 주는 게 서로에게 득이라는 것을 느꼈다. "서면으로 약속해주시지요. 말로만 하는 약속은 믿을 수 없습니다." "약점을 잡겠다는 건가. 좋다." 즉시 종이를 가져오게 한 오스카는 약속 내용을 적고 지장을 찍은 뒤 단장에게 내주었다. 가볍게 내용을 훑어본 단장은 만족해했다. "빨리 출동해라." "이 정도면 충분하군요. 알겠습니다." "안 돼! 그것만은 안 된다!" 클랙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제시는 미소를 풀지 않은 채 조금씩 그의 목에 상처를 그었다. "어째서요? 공명신수 계승식을 해주면 대신님을 살려드릴 겁니다. 목 숨을 잃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요?"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너에게 자인을 넘길 수는 없다!" 자인은 주인을 잃은 강아지처럼 끙끙대며 제시와 클랙을 번갈아 보 기만 했을 뿐, 조금도 손을 쓰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허튼 짓을 한다 면 제시의 손끝에 솟은 광검이 클랙의 목을 그어버릴 것이다. "숙주를 죽이고 강제로 취하는 방법도 있다는 걸 모르시는 않을 텐 데요. 물론 계승되는 순간 저에게 무리가 오긴 하겠지만, 정 계승식 을 해주지 않으신다면 대신님을 죽이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순순히 계승식을 해주신다면 서로에게 좋은 일이 될 텐데요." "차라리 날 죽여라!" 제시는 입맛을 다셨다. 가급적이면 정당한 계승식을 거쳐 자인을 손 에 넣고 싶었다. 클랙을 죽이고 강제로 자인을 취하는 방법은 육체에 커다란 무리가 따르게 된다. 그 후유증을 치료하려면 부상을 치유하 듯 상당한 요양을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틈이 없다. "할 수 없지요. 원망하려면 당신의 고집을 원망하세요." 제시는 반대쪽 손을 들었다. 화악 하고 빛이 터지며 야구공 만한 구 체가 떠올랐다. 이것으로 깨끗이 심장을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공명 신수를 다룰 자격을 갖춘 5대 대신을 향한 최후의 예의였다. "잘 가시길." 클랙은 죽음을 예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제시는 에너지탄을 클랙 의 등뒤에서 찔러 넣으려고 했다.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빛의 화살이 빠르게 눈앞을 스쳤다. 제시는 깜 짝 놀라 그만 집중력이 흩어졌다. 그 틈을 탄 클랙은 힘껏 에너지를 모아 뒤로 날렸다. 제시는 반사적으로 두 팔을 모아 방어했다. 타격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나 클랙이 자유롭게 된 데다가 적의 숫자가 늘어났다는 게 문제였다. "지룡사단인가." 아는 얼굴이 선두에 보이자 제시는 씁쓸히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쉽게 풀기는 그른 것 같네."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온 지룡사단은 일제히 그들 주위를 포위했다. 클랙은 어린 녀석들의 도움을 받게 되어 자존심이 상했지만 드러내 지는 않았다. 까딱하다가는 목숨과 자인을 한꺼번에 빼앗길 뻔했다. 자존심이 조금 구겨지는 정도로 끝났으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쉐스터. 누구의 명령을 받고 온 것이냐?" "오스카 경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어째서? 지룡사단은 앤슨에게 씌워진 누명이 벗겨지기까지 일절 근 신에 들어가기로 한 게 아니었나?" 비단 지룡사단 뿐만 아니라 앤슨의 지휘를 받는 무력단체는 한꺼번 에 자발적 근신을 선언한 터였다. 오스카와 앤슨의 세력이 음으로 양 으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황태자도 알고 있을 정도로 당연한 것. 클랙은 어째서 오스카의 명령을 받고 지룡사단이 출동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앤슨님에게 덮어씌운 혐의를 없었던 것으로 해주겠다고 오스카 경 이 약속해주셨습니다." "호, 그래? 서면으로 확실히 증명한 거겠지?" "예." "잘 됐군." 클랙은 고소하기 그지없었다. 앤슨과 마리오를 한꺼번에 밀어내려 한 계획이 부서졌으니, 오스카는 아마 지금쯤 땅을 치며 분해하고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제시 덕분이랄 수 있다. 그는 제시에게 감사하고 픈 마음까지 들었다. 제시와 제임스는 자신들을 포위한 지룡사단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 틀란티스에서 가장 강한 무력집단이라 일컬어지는 지룡사단. 그들 전 원이 모인 데다가 클랙 대신까지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전투는 무리였다. 머리를 쓸어 넘기며, 제시는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이건 좀 너무하네. 안 그래요, 제임스?" "난 제시만 믿어." "아아, 이래서 지켜줘야 하는 남자는 골치 아프다는 건가 봐." 제시는 주먹을 뚜둑거리며 미소를 띠었다. 지룡사단은 살기를 빛내며 거리를 좁혀왔다. "좋아요. 한 번 해보지요."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1/18 페이지 ▶ 후기 [35] 실탄 2005/11/273Kb 779 ▶ 346 - End Of Atlantis(2) <최종화> [14] 실탄 2005/11/2714Kb 813 ▶ 345 - End Of Atlantis(1) [9] 실탄 2005/11/2712Kb 536 ▶ 344 - 전설의 융기(8) [2] 실탄 2005/11/2710Kb 398 ▶ 343 - 전설의 융기(7) [6] 실탄 2005/11/2713Kb 385 ▶ 342 - 전설의 융기(6) [14] 실탄 2005/09/187Kb 1205 ▶ 341 - 전설의 융기(5) [23] 실탄 2005/08/2711Kb 974 ▶ 340 - 전설의 융기(4) [9] 실탄 2005/08/038Kb 907 ▶ 339 - 전설의 융기(3) [18] 실탄 2005/07/2712Kb 806 ▶ 338 - 전설의 융기(2) [17] 실탄 2005/07/169Kb 916 ▶ 337 - 전설의 융기(1) [20] 실탄 2005/07/1410Kb 1003 ▶ 에피소드 - My doctor [33] 실탄 2005/05/308Kb 1678 ▶ 336 - 이별의 전주곡(3) [33] 실탄 2005/04/3012Kb 1810 ▷ 335 - 이별의 전주곡(2) 실탄 2005/04/3012Kb 788 ▶ 334 - 이별의 전주곡(1) [2] 실탄 2005/04/3011Kb 839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 1 [2][3][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2748 :: 336 - 이별의 전주곡(3) 실탄(cruel) 05-04-30 :: :: 12006 며칠의 시간이 무의미하게 지나갔다. 유젤은 아무것도 안 하고 방에 틀어박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시 간을 보냈다. 가끔 걱정이 된 가정부가 들여다보았지만 보이지 않기 라도 하는 듯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앤드류는 회사일을 직원에게 맡긴 뒤 집에서 유젤만 돌보았다. 금방 이라도 망가질 듯한 그녀를 두고 한가하게 회사나 다닐 순 없었다. "누나. 나무 보러 나갈까?" 다정히 손을 잡고 물어도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기만 한다. 마치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아이 같았다. 한숨을 토한 앤드류는 유젤의 방을 나섰다.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두 드리던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침대에 내던진 그는 눕다시피 걸터앉았다. 천 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토해내는 게 버릇으로 굳어지는 게 아닐 까 걱정되었다. 유젤은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또다시 흐느꼈다. 자신에게 작별을 고하던 유진우의 마음, 그리고 열흘만이라도 사랑할 수 있어 행복했 다고 말하던 레이온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띠띠. 호출음이 울렸다. 유젤은 멍하니 교신장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호출음은 계속해서 울렸다. 맥은 직접 말을 걸 수 있으니 아니다. 누 군가가 맥의 회로에 침입해서 대화를 요청하는 것이다. 아니면 맥이 허락했든지 간에. 가만히 고개를 든 유젤은 천천히 팔을 들었다. 교신장치에서 빛이 쏘 아지며 흰 벽에 화면을 영사했다. 벽에는 그녀도 잘 아는 사람, 프로 메테우스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닥터.」 어떤 일을 겪었는지 정도는 짐작하고 있을 텐데 뻔뻔스럽게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허나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탈진한 상태였던 유젤은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무슨 일이에요?" 갈라지는 음성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프로메테우스는 안 됐다는 듯이 혀를 쯧쯧 찼다. 적어도 가여워하는 표정 하나만큼은 진 심이었다. 「당신에게 알려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알고 싶지 않아요." 「알아야 합니다. 니콜라스에 관한 것이니까요.」 니콜라스라는 이름에 유젤의 얼굴에 생기가 조금 돌았다. "뭔데요?" 「니콜라스는 지금 살아있습니다. 하지만 아틀란티스 대륙에 붙잡혀 있지요.」 살아있다는 말에 유젤은 뛸 듯이 놀랐다. 벌떡 일어난 그녀는 금방이 라도 화면에 달려들 듯 사나운 표정을 띠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니콜라스가 살아있어요?" 「네. 하지만 니콜라스는 당신의 아이가 아틀란티스에게 납치당했다 고 오해하고 구출하러 혼자 떠났습니다. 황제를 인질로 삼아 죽이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결국 붙잡혔습니다. 카뮤 황태자는 니콜라스를 죽이겠다고 크게 분노하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그의 목숨은 이제 시 간 문제입니다.」 머리 속을 차지하고 있던 무력감이 씻은 듯 날아갔다. 니콜라스를 구 하고 아틀란티스를 짓밟아야 한다는 외침이 살아났다. 생기를 되찾은 그녀가 마음에 든다는 듯 프로메테우스는 엷은 미소 를 띠기까지 했다. 「구하러 가실 겁니까?」 "당연하지요." 「어쩌면 최후가 될지도 모릅니다. 실패로 돌아간다면 당신은 영원히 그곳에 붙잡혀 살아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각오하고 있어요." 이미 모든 것을 다 잃었다. 더는 두려운 게 없다. 니콜라스마저 구하 지 못한다면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괴로움에 평생 시달리게 될 것이다. 「좋습니다. 그럼 아틀란티스 대륙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드리겠 습니다. 하지만 떠나기 전에 혹시라도 미련이 남은 게 있다면 전부 정리하고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런 건 없어요. 그렇게 대답하려는 순간 가슴 한 구석을 차지한 중 압감이 그녀의 입을 다물게 했다. '엄마… 혜인아….' 마음 속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유젤은 서글픈 미소를 머 금었다. 지금의 자신에게는 그들을 엄마라 부를 자격도, 친구라 부를 자격도 없다. 하지만 오랜 버릇은 여전히 그들을 그렇게 부르고, 또 그렇게 대하라 말한다. 통신이 끝난 후 유젤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두 발로 일어나는 게 며칠 만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살짝 방을 열고 나온 유젤은 두리번거리며 아래로 내려왔다. 가정부 가 그녀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앤드류의 방은 어디예요?" "저기입니다." 유젤은 고맙다고 끄덕이고는 노크도 없이 방문을 열었다. 때마침 나 오려던 앤드류는 유젤을 보고 몹시 놀라워했다. "누나? 이제 괜찮은 거야?"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유젤은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자신은 그를 앤드류라 부를 자격도, 그로부터 누나라는 호칭을 들을 자격도 없다. 그의 애절한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자격도 없다. 본래부 터 자신은 그와 아무런 관련 없는 사이였으므로. 그동안 모질게 그를 대한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스스로 가 한심하고 그가 가여워 가슴이 다시 미어지는 듯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않은 채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엉겁 결에 그녀의 어깨를 감싼 앤드류는 서늘한 불안함을 감지했다. 누나는 지금 멀리 떠나려고 한다. 두 번의 쓰디쓴 이별을 통해 얻은 경험으로 그는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황급히 무릎을 꿇고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손을 꼭 붙잡고 애원했다. "누나, 또 어디 가려고 그러는 거지? 그렇지?" 어느새 눈물을 그친 유젤은 어두운 표정으로 앤드류의 시선을 외면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서글픈 긍정. 절박해진 앤드류는 유젤의 뺨 을 잡고 억지로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러지 마. 나 누나 없이 못사는 거 알잖아. 응?" 구걸에 가까운 애원이다. 자존심 따위는 이미 그에게 휴지 조각보다 무의미해진지 오래. 알고 싶지 않지만, 유젤은 알았다. 앤드류는 자신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린 시절, 우연이 이루어준 첫 만남 때문에 그런 지독한 희생을 강요당하는 운명이라는 것을. 아 무 불평 없이 오히려 그 운명을 감사하게 여기며 수용하는 남자라는 것을. 많은 괴로움을 겪었을지언정, 그는 그래도 자신을 알게 되어 신에게 감사하다고 행복해하는 사람이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유젤은 말없이 그의 뺨을 잡고 이마에 입술을 맞 췄다. "…미안해." 아찔한 충격이 그의 눈동자에 휩싸였다. 멍하니 유젤을 바라보던 그 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불같이 화를 냈다. "미안하다는 소리는 하지 마! 제발, 제발 미안하다는 소리는 하지 말 란 말이야!" 이별을 품은 말, 미안하다는 사과가 얼마나 공허하고 얼마나 잔인한 대사인지 앤드류는 뼈저리게 알고 있다. 길지 않은 그 음절이 얼마나 상대에게, 그리고 당사자에게 상처가 되는지도. "나한테 안 미안해하면 되잖아. 날 안 떠나면 되잖아. 누나, 모든 걸 다 잃었잖아. 그럼… 이제 그만 날 받아줄 때도 되지 않았어?" 가슴을 울리는 간절한 구애였다. 허나 유젤은 자신이 그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가슴이 아픈 만큼 또렷이 알고 있었다. "난 널 사랑할 수 없어. 미안해." 푸른 눈동자에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선을 떨어뜨린 앤드류는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안 되는 거야?" "미안해." "정말… 안 돼?" "미안해." "일말의 가능성도… 없어?" 유젤은 대답 대신 가만히 그의 이마에 키스했다. 따스한 입술의 감촉 에서, 안쓰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앤드류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벽을 보았다. 천천히 일어난 그는 유젤에게서 등을 돌렸다. 햇빛을 가린 그의 등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떤 말부터 해 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결국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바보처럼 주저 앉기만 하는 사람처럼도 보였다. 유젤은 시선을 떨구고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윽고 오싹하리만치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그가 중얼거렸다. "그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누나는 평범하지 않으니까,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니까. 그래도 날 밀어내지 않는 누나를 지켜 보면서… 언젠가는 혹시나 잘 되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어." 그녀와 재회했을 때부터 그의 무의식은 이별의 순간을 준비하고 있 었다. 지금 이 순간 미쳐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 모든 인간은 미래를 예측하는 잠재력을 지녔다는 말이 있다. 근거 없 는 소리지만 그는 지금 그 말을 믿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오 래 전부터 이 순간을 점치고 있었다고. "지금 당장 떠날 거야?" 끄덕끄덕. "어디로 가는데?" "네가… 평생을 걸려도 못 오는 곳." "언제 돌아와?" "모르겠어." "두렵지는 않아?" "겁 나. 하지만 그래도 가야 해." "나도 데려가주면 안 돼?" 유젤은 또다시 침묵으로 거절했다. 앤드류는 휘청거리며 피아노 앞에 앉았다. 건반에 거칠게 손을 내려 놓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들어 유젤을 돌아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누나 생각하면서 작곡해둔 곡이 있어. 언젠가 누나한테 멋지게 프로 포즈하면서 들려주려고 했는데…. 지금 들어줄 수 있어?" 유젤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내젓지도 않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 언의 승낙으로 간주한 앤드류는 작게 '고마워' 하고 말했다. 그리고 건반을 눌렀다. 선율은 은은함을 품고 느릿하게 시작되었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감미롭게. 그의 사랑, 그가 키워온 감정, 그의 모든 것이 꿈결처럼 흘러가는 그 가락에 전부 담겨 있었다. 유젤은 눈을 감고 그의 연주를 느꼈다. 그가 얼마나 정성을 다해 이 곡을 만들었는지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잠들기 전이면 자신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삼키는 그의 모습이 떠올 랐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자신을 보고싶어하며 웃음 짓는 그의 모습이 떠올 랐다. 좋아한다고 고백하면서도 불안할 수밖에 없는 그의 애처로운 마음이 손에 잡힐 듯 또렷이 느껴졌다. 선율은 점점 거칠어졌다. 그는 미친 듯 건반을 누르며 내면에 쌓인 괴로움을 표출했다. 미안하다는 그녀의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돈다. 그것을 잊어버리기 위해 그는 더욱 빠르게 음악을 연주했다. 그것을 듣지 않기 위해 더 욱 격렬히 건반을 눌러댔다. 음이 찌그러졌다. 엉망진창으로 엉키며 음악이 멎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떨궜다. 가슴이 터질까 두려워 더는 곡 을 연주할 자신이 없었다. 뒤를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한참 후 그는 힘겹게 뒤를 돌아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침대 위에는 빛 바랜 낡은 캠코더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은색 광채 위로 미안하다고 말하던 그녀의 모습이 겹쳐져 그 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를 위해 만든 곡을 끝까지 연주하지도 못했다. 자신은 이처럼 용 기 없는 남자였다. 거절당한 것은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말없이 캠코더를 감싸안은 그의 몸이 바닥에 무너졌다. 오랜 기다림을 헤치고 그에게 내밀어진 수용의 손길. 그것은 잠시 간 의 즐거움만 남기고, 이렇게 다시 거두어졌다. 또다시 상처만 남기고 버려졌다. 그는 괴로운 사랑은 이제 그만 해야 지 하고 중얼거렸다. 내일부터는 자기만을 헌신적으로 바라봐 주는 여자를 찾아볼 것이다. 그 여자를 좋아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바보 같은 자신은 그녀가 다시 수용의 손 길을 내민다면, 상처받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또다시 그 손을 붙잡 을 남자라는 것을. 핵 공격 때문에 나라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그 여파는 영화계에도 크 게 영향을 끼쳐, 커다란 불황을 야기할 것으로 보였다. 비상 사태인 관계상 영화 촬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혜인은 한숨을 지으며 현관문을 열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의 발이 그녀의 시선에 들어왔다. 의아해하며 고개를 든 혜인은 기쁜 표정으로 변했다. "진우야!" 혜인은 좋아라 하며 유젤을 덥석 껴안았다. "어떻게 된 거야? 한국에는 언제 들어왔어? 수배령이 풀리지 않았다 던데 이렇게 돌아다녀도 돼? 한국에 핵 떨어진 게 네 탓이라는데 그 거 다 거짓말이지?" 유젤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혜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의도는 아니었을지라도, 결과적으로 자신은 혜인을 오랫동안 속여왔 다. 유젤에게 이식된 유진우의 마음은 유젤뿐만 아니라 본의 아니게 혜인까지 속여왔던 것이다. "미안해. 난… 진우가 아니야." "응? 무슨 소리야?" 혜인은 뭐라 말을 하려다 말고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유젤은 정신을 잃은 혜인을 부축해 들어가서 침대에 눕혔다. 손을 혜인의 이마에 데려다 말고 멈칫했다. 자신과 관련된 기억을 깨 끗이 지우는 게 그녀를 두 번 농락하는 게 아닐까 하는 자책감 때문 이었다. 그러나 지우지 않는다면 자신은 영원한 거짓말쟁이가 된다. 마지막 순간만큼은 솔직하고 싶었다. 굳게 결심한 유젤은 눈을 질끈 감고 혜 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이윽고 유젤은 손을 뗐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정말 미안해." 유젤이 사라지고 얼마 후 혜인은 조금씩 정신을 되찾았다. 어쩐지 머리가 멍했다. 한바탕 나쁜 꿈을 꾸고 난 기분이었다. "내가 왜 여기 누워있지?" 혜인은 멍한 손길로 뺨을 더듬었다. 가슴 한 구석이 비어버린 듯 허 전한 느낌이 떠나지 않았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 맞다. 오빠랑 데이트하기로 했지." 서둘러 일어난 혜인은 즐거운 표정으로 무슨 옷을 입고 나갈지를 궁 리했다.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이 서서히 등을 돌리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by eden 겨우 퇴고를 끝내고 폐인대전 기간 축적한 비축분(사실은 오늘 쓴 분량이라지요)을 올립니다. 거의 50시간 가까이 잠을 자지 못했더니 죽겠습니다. 이제 좀 쓰러져서 자야겠습니다.ㅡㅜ 고치기 지우기 목록 dark 오~~ ㅜㅜ 2005/04/30 염원 뭐...뭡니까 놀랬잖습니까!! 2005/04/30 텐시노 헉 엄청난 분량 2005/04/30 섬마을김씨 ........괴물.......하루 한 편 찍어내는 게 다인 사람과는 차원이 틀리다...;; 2005/04/30 실탄 덕분에 눈에는 핏발이 서고 헛소리를 남발하고 있습니다.-_-;; 2005/04/30 RAGNAROK 헉 항상 막판에 엄청난 양을 올리시는 실탄님...... 존경습니다.... __ 2005/04/30 코코。 멋지십니다!!!!!!!!!!!!!!이제 푹 쉬세요!!!! (그래도 곧 다시 돌아와주시길..+_+) 2005/05/01 대천사미카엘 역시.....멋있으십니다... 지존!! 2005/05/01 아스트론 막판에 내공을 발휘하시다니...... 주화입마에 걸리시면 곤란한데... 2005/05/01 실탄 이제 지난 폐인대전 때처럼 막판 폭참 후 한 달 탈진이 되는 겁니다. 2005/05/01 텐시노 하루에 한편씩 꾸준히 올리는것도 굉장한 것인데.. 2005/05/01 적색의바드 멋지십니다. 브라보.. 잠도못자고............................................... 읽고있엇넹. 푹쉬세요~ 2005/05/01 無有 경악!!! 충격!!! 2005/05/01 jhj1502 대단 하십니다 -_-; 오늘 오후에 왔을때 없어서 밤에 와보니 엄청난 양의.... 앤드류 참 불쌍하닷 -_-; 2005/05/01 피에수투 짱먹으세요!! 2005/05/01 영 앞으로 한달 정도 못 보려나;; 2005/05/01 지우군 대..대단하십니다 그럼 이제 '용제'로 돌아오셔야겠죠?^^ 2005/05/01 루리에르피나 10일만 쉬시고 돌아오세요요요요 2005/05/01 전사&마법사 일단 푹 쉬시고 다음에 되요(그래도 한달은 너무하고 1~2주 정도는 기다려 볼께요) 2005/05/01 이시르 류 허걱... .... 하..하..... 실탄님ㅠㅠ~ 이..일주일 드릴께요.. 그안에 돌아오셔야해요,..ㅠㅠ.. 많이 올려주시는 건 좋지만 꼭 이런 후에 한두달 연락 끊으시고 말 그대로 푸욱~ 쉬시는건.. 아닐테죠ㅠㅠ 2005/05/01 꼬마코린 ...존경스럽습니다...ㅠ.ㅠ;;; 2005/05/01 스세리 시,;실탄님;;;;;당황스럽습니다...하나씩 하나씩 보던것도 기뻤는데;;;;;정말 기쁘지만...;;;;;정말로...;;;;;존경스럽고...뭔가 죄송하네요..;;;;; 열심히 쓰시는거 몰아보는 듯한...;;;;고맙습니다...ㅠ_ㅠ; 2005/05/01 ;;; 실탄님~진정한 폭참을 보여주시는군요.;;!!! 굿!! 건필~ 2005/05/01 피에수투 작가대전에서 아쉽게 우승못하셨더군요. 개인적으로 우승하길 바랬건만.. 그래도 좌절치 마시고 건필! 힘내세요! 2005/05/02 공부타오 엇-_- 이게 모야..ㅠ 실탄님 쵝오..^^ 2005/05/02 미르카도르 실탄님은 가히 신인류라 불릴 자격이 있습니다;;; 2005/05/03 꼬마코린 ...과연 신인류... 2005/05/03 반야 아깝게 우승을 놓치셨네요. 저희는 덕분에 즐거웠지만; 그래도 2등하신 거 축하드립니다. 2005/05/04 꼬마코린 ...아무리 생각해도 2점차라...아깝네요; 2005/05/04 주니어 실탄 오늘 하루만에 91kb를 쓰시다니;; 2005/05/07 근데요 언제 까지 쉬시려구용..ㅠ 2005/05/23 우어어어어어 이제 돌아오세요오오오ㅠㅠ 2005/05/27 Corean 군대 갔다 -_- 2005/05/27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1/18 페이지 ▶ 후기 [35] 실탄 2005/11/273Kb 779 ▶ 346 - End Of Atlantis(2) <최종화> [14] 실탄 2005/11/2714Kb 813 ▶ 345 - End Of Atlantis(1) [9] 실탄 2005/11/2712Kb 536 ▶ 344 - 전설의 융기(8) [2] 실탄 2005/11/2710Kb 398 ▶ 343 - 전설의 융기(7) [6] 실탄 2005/11/2713Kb 385 ▶ 342 - 전설의 융기(6) [14] 실탄 2005/09/187Kb 1205 ▶ 341 - 전설의 융기(5) [23] 실탄 2005/08/2711Kb 974 ▶ 340 - 전설의 융기(4) [9] 실탄 2005/08/038Kb 907 ▶ 339 - 전설의 융기(3) [18] 실탄 2005/07/2712Kb 806 ▶ 338 - 전설의 융기(2) [17] 실탄 2005/07/169Kb 916 ▶ 337 - 전설의 융기(1) [20] 실탄 2005/07/1410Kb 1003 ▶ 에피소드 - My doctor [33] 실탄 2005/05/308Kb 1678 ▷ 336 - 이별의 전주곡(3) [33] 실탄 2005/04/3012Kb 1810 ▶ 335 - 이별의 전주곡(2) 실탄 2005/04/3012Kb 786 ▶ 334 - 이별의 전주곡(1) [2] 실탄 2005/04/3011Kb 839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 1 [2][3][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4979 :: 에피소드 - My doctor 실탄(cruel) 05-05-30 :: :: 8191 거대한 캡슐 안에서 거품이 보글거리며 일어났다. 투명한 유리관을 가득 채운 푸른 용액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역동감이 흘러 넘친다. 「POV 용액 배출 준비되었습니다.」 캡슐에는 나신의 소녀가 눈을 감은 채 떠 있었다. 길고 푸른 머리카 락은 푸른 용액에 섞여 영롱하게 반짝인다. 감격 비슷한 감정을 띤 눈으로 캡슐을 바라보던 남자는 붉은색 버튼 을 눌렀다. 폐쇄회로가 개방되며 숨겨진 스위치가 밀려나왔다. 스위치를 잡은 손을 잠시 떨던 남자는 이윽고 힘있게 내렸다.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캡슐을 채운 용액의 수위가 점점 낮아졌다. 의식이 없는 소녀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다시 버튼을 누르자 기둥형의 유리관이 위로 올라갔다. 외부 공기에 노출된 소녀의 피부는 희미한 경련을 일으켰다가 곧 가라앉았다. 한쪽 무릎을 꿇은 남자는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이윽고 소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커다란 눈망울에 제일 먼저 호기심이 떠올랐다. 갓난아기의 순수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눈빛이다. 남자는 조용히 소녀를 품에 껴안았다. 몸을 움직이는 게 익숙지 않은 소녀는 저항 없이 안기면서도, 끊임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호기 심 많은 아이처럼. "저… 누…구…?" 두뇌에 각인된 언어가 익숙지 않은 듯 더듬거리며 묻는다. 남자는 소 녀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 내렸다. 제나르 대신과의 대면을 마치고 연구실로 바삐 향하는 레이온을 뒤 따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얼굴을 흘끗 확인한 레이온은 관심 없다 는 듯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 무시당했음에도 앤슨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계속 따라붙었다. "축하하네, 레이온. 드디어 엔젤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다고?" "고맙군." "온 나라가 떠들썩해. 황태자 전하는 당장에라도 엔젤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나셨다더군." "유젤은 아직 약해. 게이트를 통과할 수 없을 거야." "황태자 전하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대로 상상해." 어느덧 레이온은 개인 연구소 앞에 도착했다. 그곳은 앤슨도 어찌할 수 없는, 레이온을 위한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 그의 양해를 구하지 못하면 제나르 대신 또한 들어갈 수 없다. 레이온은 앤슨이 보기 싫다는 듯 서둘러 문을 열었다. 앤슨은 히죽 웃음을 띠며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엔젤과 같이 잤나?" 대번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것은 창피함이 아니라 모욕에 기인한 감정이었다. "저리 꺼져!" 생각나는 대로 내뱉고는 문을 닫았다. 벽에 등을 기대고는 거친 숨결 을 토해냈다. 앤슨은 사람의 감정을 꿰뚫어본다. 눈치가 빠르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도 않을 정도로 예리한 통찰력이었다. 그의 시선에 노출되면 발가벗고 춤을 추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것은 참기 힘든 모욕이다.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힌 레이온은 유젤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언짢은 기분이 씻은 듯 사라지고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유젤이 있는 방 앞에 도착하자 그는 문을 벌컥 열었다. 순간 고막을 찢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수 초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식하 지 못했다. "박사님!" 유젤이 해맑게 웃으며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녀의 손에서 연기를 뿜는 총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는 비로소 조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났 는지 깨달았다. 오한이 피어났다. 하마터면 사랑하는 사람과 재회한지 이틀도 채 되 지 않아 그녀 손에 죽을 뻔했다.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유젤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유젤. 그거 어디서 났니?" "박사님 책상 서랍에 있었어요." "다시는 그거 만지지 마. 그거 몹시 위험한 거야." "그치만 재밌는걸요." 죽을 뻔한 사람은 재미없어. 레이온은 그 말을 입안으로 꾹꾹 눌러 삼켰다. 상대는 몸은 성숙하다 하나 정신은 세상물정 모르는 갓난아기. 신인 류답게 말은 익숙하게 할 줄 알지만 아직 백지상태나 마찬가지다. 고 작 이런 거 가지고 나무랄 수는 없다. 그는 유젤을 놓아주고 흰 가운을 꺼내어 걸쳤다. 한쪽 벽이 옆으로 밀려 넘어가고, 첨단 의료장비가 튀어나왔다. "자, 여기에 앉아 봐." 유젤은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맞은편에 앉은 그는 기기로부터 수십 개의 선을 뽑아 유젤 몸 이곳저곳에 장착했다. 그리고 청진기를 꺼내 손에 들었다. "옷을 좀 걷어보겠니?" 유젤은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옷을 걷어올렸다. 새하얀 피부가 드러 나며 그의 눈을 어지럽혔다. 청진기를 갖다대려다 말고 손이 멈칫했다. 레이온은 억지로 시선을 내리깔며 한숨지었다. "속옷, 왜 안 입었어?" "그게 뭐예요?" "…나중에 다시 알려줄게." 정신을 가다듬고 청진기를 갖다대면서, 차라리 그녀가 유혹하고 있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심장박동이 아직 좀 불규칙하구나. 외부 공기에 면역력이 완전히 갖 춰지지 않은 것 같네." 당연하지만, 유젤은 무슨 말인지 모른다. 그저 그가 시키니까 진찰받 는 것뿐이다. "계산대로라면 모레쯤이면 완전히 면역력이 갖춰질 거야. 그럼 바깥 에 나가도 돼. 어디 가고 싶은 데 없니? 예를 들면, 바다라던가…." 그렇게 물은 뒤 그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 알고 있는 세상이라고 는 이 좁은 연구실이 전부인 아이에게 무슨 소리를 한 건가, 하고. "저 엘베스틴 거리 2번가에 가보고 싶어요." 상당히 구체적인 장소 지정에 레이온은 놀랐다. 엘베스틴은 세계적으 로 유명한 디자이너로서, 그가 항상 패션 쇼를 여는 거리가 엘베스틴 거리로 불린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아는 이야기였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예쁜 옷을 입고 나오던데, 저도 그거 구경하고 싶어요." "상관은 없지만… 어디서 그런 걸…." 말끝을 흐리던 레이온은 흠칫 경직했다. 그는 진찰하던 손을 멈추고 헛기침을 했다. 해맑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유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웠다. "저기… 혹시 침대 밑에 있던 잡지 봤니?" "잡지가 뭐예요?" "그림이 여러 장 붙어 있는 거 말이야." "아아, 봤어요." "그 잡지 밑에 있던 빨간 책도… 혹시 봤니?" 유젤은 얼굴 가득 순수한 웃음을 지으며 끄덕였다. "네." 낭패다. 머리가 심하게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내 게 아니야! 빌인가 하 는 빌어먹을 조수놈이 보던 걸 압수해서 숨겨놨을 뿐이야! 중요한 프 로젝트를 맡고 있는 놈이 그런 거에 정신 파는 건 말도 안 되잖아! "유, 유젤. 다 설명해줄게. 그러니까 말이야. 그건…." 횡설수설 변명을 쏟아놓다 말고 의아함을 느꼈다. 유젤은 고개를 살 짝 숙인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묘한 안도와 함께 아쉬움을 느꼈다. 유젤을 진찰하는 시간. 아직은 그녀에게 서툰 그가 당당히 그녀를 이 곳저곳 만져볼 수 있는 기회이다. 그녀의 정신연령은 아직 갓난아이에 불과하다. 조류의 각인처럼, 그 녀는 태어나서 제일 처음 본 그를 부모쯤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게 싫은 건 아니다. 오히려 원했던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함부로 이 짓 저 짓을 할 수 없다는 게 조금은 아쉬웠다. 5년 에 걸쳐 겨우 다시 유젤을 만났는데, 서투르게 손을 댈 수 없다는 게 초조함을 불러일으킨다. 아직은 참아야겠지. 선을 떼어낸 레이온은 유젤의 몸을 안아 올렸다. 종잇장처럼 가벼운 느낌이었다. 느껴지는 그녀의 무게만큼 그의 마음도 가벼웠다. 침대에 그녀의 몸을 눕히고 곁에 앉았다.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귀 여워 살며시 잡아주었다. 그가 곁에 있음을 느꼈는지, 그녀의 숨소리 가 한결 느려졌다.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던 그는 이마에 입을 맞추고 일어나려고 했다. 순간 유젤이 눈을 떴다. 그리고 그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 "박사님. 가지 마요." "응?" "혼자 있는 건 무서워요. 가지 마요." 아아. 정말 유혹하는 거라면 좋겠다. 행복한 마음과 더불어 한 가닥 아쉬움이 피어난다. 레이온은 주저하 다가 결국 유젤의 옆에 누웠다. 그녀는 좋아라 하며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들린다. 레이온은 뛰는 가 슴을 다스리기 힘들었다. 팔에 닿은 그녀의 가슴이 또렷하게 느껴진다. 뭉클한 감촉이 남자의 심장을 더욱 뛰게 한다. 향긋한 내음에 그만 이성의 끈을 놓아버릴 것 같다. "유, 유젤. 저기 난…." 뭐라도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더듬거리며 내뱉었다. 그의 품에서 빤히 그를 올려다보던 유젤은 작게 말했다. "야한 건 안 돼요." 쿵. 실로, 맥이 빠지지 않을 수 없는 대사다. 달아올랐던 감정이 한순간에 식어버리는 것이 느껴졌다. 레이온은 실 망을 감추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말은 누구한테 배웠니?" "빌이 가르쳐줬어요." "아아, 그래?" 웃는 얼굴로 이를 바드득 갈면서, 레이온은 내일 반드시 그 녀석의 머리를 책 모서리로 갈겨주겠다고 다짐했다. by eden 염장물은 안 돼요. 그럼요. 절대로 안 돼요. 그러니 참으세요 레이온군. ps : 본래는 좀더 놀고 난 다음에 쓰려고 했는데 입대한 친구가 6/3에 휴가 나올 테니까 그때까지 완결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없다지요. 으히히히. 고치기 지우기 목록 안녕히 아아... 이런 분위기... 최고!11111 2005/05/30 CastLe 복귀를 축하합니다, 만 외전같군요 (쿵) 2005/05/30 사케쿠 야한 건 안 돼요! 마, 마호로?! 2005/05/30 페리 드디어 복귀 얼마나 기다렸는지.... 2005/05/30 자여니야 유후~...;;;화이토>ㅅㅁ< 유젤도 귀엽고... 2005/05/31 루리에르피나 유젤짜아아아앙~~~~ 귀여워~ >< 2005/05/31 영 레이온 이야기군요 ~~ 2005/05/31 꼬마코린 드디어 나왔네요오오오!!!!!!그런데 6월 3일?...제가 들은 챕터만해도 2~3개가 남은거 아니었나...무리일듯... 2005/05/31 lizers 아핫...친구분 나이스! 2005/05/31 미르카도르 오랜만이시구랴 =_= 2005/06/01 rel tales 야한건 안되요~~~[엣지노 다메니 도모이 이케나이 마스 ]이게 맞나 모르겟네요~~ㅋㅋ 2005/06/02 친구 실탄 이 나쁜놈..ㅠ 2005/06/09 친구2 실탄 이 나쁜놈..ㅠㅠ 2005/06/10 친구3 실탄 이 나쁜놈..ㅠㅠㅠ 빨리 글좀써..ㅠ 2005/06/10 루타 ↑ 정말 친구들일까...? 2005/06/17 친구4 신탄 이 나쁜놈..ㅠㅠㅠㅠ 빨리 글좀써!!! 2005/06/17 친구4 헉.. 분노에 말을 잘못했군..다시.. 실탄 이 나쁜놈.. ㅠㅠㅠㅠ 빨리 금좀써...ㅠㅠ !!! 2005/06/17 친구4 으악@!!!! 금말로 글임다!! 2005/06/17 친구4으악!!! 금말로 글임다 말고 금말고 글임다임다!! 2005/06/17 친구4 ;;휴.;; 2005/06/17 꼬마코린 ...아아 다음내용궁금해ㅜ.ㅜ.조 올라오세요; 2005/06/18 꼬마코린 좀=_=;; 2005/06/18 미친다! 아아아~~컴퓨터 고장 난 동안... 엄청 많이 올라 왔다!! 언제 다 읽지..; 100 몇개는 더 올라 온것 같은데........ 휴.... 2005/06/27 Corean 왜 글을 안 쓰시까? 2005/07/10 피에수투 프리즈 컴백! 2005/07/11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1/18 페이지 ▶ 후기 [35] 실탄 2005/11/273Kb 779 ▶ 346 - End Of Atlantis(2) <최종화> [14] 실탄 2005/11/2714Kb 813 ▶ 345 - End Of Atlantis(1) [9] 실탄 2005/11/2712Kb 536 ▶ 344 - 전설의 융기(8) [2] 실탄 2005/11/2710Kb 398 ▶ 343 - 전설의 융기(7) [6] 실탄 2005/11/2713Kb 385 ▶ 342 - 전설의 융기(6) [14] 실탄 2005/09/187Kb 1205 ▶ 341 - 전설의 융기(5) [23] 실탄 2005/08/2711Kb 974 ▶ 340 - 전설의 융기(4) [9] 실탄 2005/08/038Kb 907 ▶ 339 - 전설의 융기(3) [18] 실탄 2005/07/2712Kb 806 ▶ 338 - 전설의 융기(2) [17] 실탄 2005/07/169Kb 916 ▶ 337 - 전설의 융기(1) [20] 실탄 2005/07/1410Kb 1003 ▷ 에피소드 - My doctor [33] 실탄 2005/05/308Kb 1678 ▶ 336 - 이별의 전주곡(3) [33] 실탄 2005/04/3012Kb 1808 ▶ 335 - 이별의 전주곡(2) 실탄 2005/04/3012Kb 786 ▶ 334 - 이별의 전주곡(1) [2] 실탄 2005/04/3011Kb 839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 1 [2][3][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7857 :: 337 - 전설의 융기(1) 실탄(cruel) 05-07-14 :: :: 9999 지난 줄거리.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니콜라스는 타오르는 복수심을 안고 아틀 란티스 대륙으로 떠난다. 그러나 유빈은 이미 죽고 존재하지 않으며, 니 콜라스는 아버지를 잃고 분개한 바드로3세의 손에 살해당한다. 제시와 함께 아틀란티스 대륙으로 잠입한 제임스는 니콜라스의 죽음을 느낀다. 오스카는 제시를 붙잡기 위해 앤슨에게 씌운 누명을 벗겨주겠 다는 조건으로 앤슨의 부하와 손을 잡는다. 니콜라스의 죽음을 인식한 인공위성은 일본과 한국에 각각 1기씩의 핵 미사일을 유도해 폭발시킨다. 두 나라는 각각 아수라장이 되고, 핵 테러 에 닥터가 커다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주장은 전 한국민들을 분노케한다. 한편 프로메테우스로부터 니콜라스가 아틀란티스 대륙에 있다는 말을 들은 유젤은 구하러 가야 한다 결심하고, 앤드류와 혜인에게 마지막 작 별 인사를 하는데.... 넓은 홀에는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나지막한 선율은 실내를 채운 몇 안 되는 사람들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말쑥한 정장을 빼입고 식사용 카트를 끄는 웨이터, 가슴이 깊게 패인 드레스를 입고 약속 상대를 찾는 젊은 여성, 그리고 야경이 잘 내려 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청년. "오래 기다렸나." 익숙한 중년 남자의 음성에 재호는 차분히 고개를 돌렸다. 석창렬 의 원의 얼굴은 전에 만났을 때보다 한결 피로해 보였다. "아니오. 저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미국에 가신 일은 잘 되었나요?" "그럭저럭." 일이 잘 되었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재호는 어깨를 무겁게 으쓱했다. "그렇다면 이제 닥터는 영원한 한국의 적이 된 건가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닥터는 한국에 핵공격을 했어." "닥터가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모든 국민들이 그렇게 믿고 있지. 그리고 그 믿음을 뒤바꿀만한 증 거는 없네. 더군다나 그렇게 주장하는 자네 또한 닥터가 핵테러에 커 다란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건 부인할 수 없을 텐데." 재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보라색 와인을 한 잔 들어올렸다. 술 종류라 면 평소에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마시고 싶은 마음이 안 났다. 이윽고 그는 표정을 풀며 허물없는 웃음을 머금었다. "어쨌든 축하드립니다. 다음 대통령 자리는 이제 의원님이 맡아놓으 신 거나 다름없군요." "선거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김칫국을 마시면 어떻 게 하나." "사실인데 뭘 그리 빼십니까? 닥터를 나라의 괴뢰로 몰아세우고, UN 까지 달려가 외세의 개입을 근절시킨 의원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 고 있다는 걸 모르십니까. 당신은 이 나라를 위기에서부터 구원한 정 치가입니다." "어쩐지 빈정거리는 걸로 들리는군. 애초에 자네와 나는 한 배를 탄 동지가 아니었나." 검은 눈동자에 머무는 젊은 혈기는, 더할 나위 없이 차갑다. 석창렬 은 천천히 술을 마시며 왜 그럴까를 생각해보았다. 이윽고 석창렬은 입을 떼었다. "자네, 혹시 닥터를 좋아했나?" "개인적인 원한이 조금 있었습니다." "거짓말. 원한 따위가 있는 얼굴이 아닌데." "어떻게 생각하시든 좋습니다. 호감이면 어떻고 원한이면 어떻습니 까. 이미 사익을 위해 국익을 저버린 배반자들인데요." 돌연 석창렬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헛소리하지 말게. 우리는 떳떳하게 나라를 위해 일했어. 도저히 감 당 못할 변수 때문에 일부에서 조금 실패를 거둔 것 뿐이야!" "닥터가 이 나라를 증오하게 된 게 조금의 실패입니까?" "난 옳은 선택을 했어. 맥 같은 위험천만한 군사무기는 반드시 나라 소속이 되어야 해. 개인이 가질 만한 무기가 아니야." "그렇다면 보상 차원에서 유전은 닥터에게 줘야 했습니다." "유전은 곤란하지만 적절한 보상은 줄 생각이었지. 그리고 자네는 국 민을 속이고 실시한 대국민 투표가 민주정치 사회에서 용납되리라 보나? 나는 어디까지나 투표가 가진 부당성을 폭로하고 새로이 정당 한 절차를 밟으려 했을 뿐이야." 흥분한 채 말을 이어나가던 석창렬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깨닫고 표정을 바꿨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지? 닥터로부터 유전을 박탈하는 것에 자네 는 찬성했잖아?" "그냥… 요즘 들어서는 신물이 납니다. 그뿐입니다. 죄송했습니다. 그 럼 이만 저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얼이 빠진 얼굴의 석창렬을 뒤로 하고, 재호는 황급히 레스토랑을 빠 져 나왔다. 엘리베이터 뒤로 투명하게 비치는 야경이 무척이나 황홀하게 반짝였 다. 그러나 지평선 저 너머 어딘가에서는 방사선에 노출된 많은 사람 들이 신음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최근에서야 닥터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다. 그것은 짙어 지고 짙어져 본래의 색깔을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린 소유욕, 사랑의 다른 형태라 할 수 있을 그런 것이었다. 본래 그는 닥터를 배척할 생각이 없었다. 유나는 닥터와 유전 중 하 나를 가질 수 있게 해주겠다 했지만, 신뢰하지는 않았다. 아마 석창렬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정권을 잡는 것만이 그의 목적이었 을 뿐, 닥터를 어찌 한다거나 한국과 적이 되게 할 생각은 없었을 것 이다. 닥터 같은 천재가 등을 돌린다면 한국은 끝장이니. 하지만 뜻밖에도 한국은 핵 테러를 당했다. 닥터가 그랬으리라는 증 거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관련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다. 이 상황 에서 한국 정부가 닥터를 옹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 닥터는 이제 한국과 완전히 적이 된 것이다. "휴우." 무거운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극심한 피로를 느낀 재호 는 눈을 감고 엘리베이터 벽에 등을 기댔다. 이대로 쓰러져서 잠들어 버리고 싶었다. 국가적으로는 분명히 커다란 손실이다. 하지만 매스컴을 다독이고, 이 기회를 잘 활용한다면 석창렬 개인의 정치 인생에는 장밋빛 미래 가 펼쳐질 것이다. 유한그룹 또한 석창렬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눈부시게 발 전할 것이다. 닥터가 한국에 존재함으로써 생산되는 막대한 부가가치 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어쩌면 유한이라는 이름 자체가 없어질지도 모르지. 닥터가 건재하 다면 말이야." 끔찍한 미래를 상상하며, 재호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만은 되지 않기를 빌어야겠지. 7층에 이르러 엘리베이터가 정지했다. 문이 열리고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커다란 모자를 쓴 젊은 여자가 들어섰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 았지만 선이 고운 어깨로 보아 대단한 미인일 듯 싶었다. 평소라면 한 번쯤 농담삼아 말을 걸었을 법하지만, 머리 속이 복잡한 재호는 천장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 혹시 유한생명의 김재호 이사님 아니신가요?" 여자가 자신을 알고 있자 재호는 조금 의외였다. 아니, 그것보다는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듣기 좋게 울 리는 가냘픈 미성…. "맞습니다만… 저를 아십니까?" "네. 이사님과 따로 조용히 만나기 위해 일부러 이 엘리베이터에 타 기까지 한걸요." "영광이군요. 무슨 일로 절 만나고 싶어하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사님의 목숨을 거두려고요." 순간 재호의 안색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잠시 후 그는 억지로 너털웃 음을 터트리며 얼굴에서 불안함을 떨쳐냈다. "하하, 그거 별로 재미없는 농담이군요. 제 마음을 거둬가기 위해서 였다면 기꺼이 기쁘게 내드렸을 테지만, 제 목숨은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서 상당히 곤란한데요." "그래도 거둬갈 거예요." 그제야 여자는 빙글 몸을 돌리며 모자를 벗었다. 내내 등을 돌리고 서 있던 여자의 얼굴이 드러나자 재호의 안색은 경악으로 뒤덮였다. "다, 닥터…? 하, 한국에 있었나?" 놀란 나머지 말까지 더듬는 그를 덤덤히 바라보며, 유젤은 천천히 손 가락을 들어올렸다. "내가 누구인지 완전히 깨달은 지금, 더 이상 당신이라는 인간에게 유감은 없어요. 지금 당신을 단죄하는 건 전에 내가 가졌던 원한 때 문이 아니라 내가 오랫동안 속였던 그 아이에게 사과하는 의미예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뜬구름 잡는 그 말에 정신을 놓 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서 살기를 띠 고 빛나는 파란 광선을 눈앞에 둔 지금은. 언젠가 유나가 저것과 비슷한 능력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방탄 유리 를 종잇장 자르듯 가볍게 잘라버린 그 예리함이 상기된 순간, 이마에 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자, 잠깐! 지, 지금 뭘 하려는 거야!" "당신을 죽일 거예요." 인간의 감정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음성이었다. 그래서 더욱 두려웠다. "유한그룹을 무너뜨리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내 얼굴이 일그러 지는 게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날 죽인다 해서 유한그룹을 뺏을 수 있는 건 아니야!" "한때는 그랬죠. 그렇지만 그때와 지금은 달라요. 더 이상 당신을 살 려둘 이유도, 유한그룹 따위에 집착할 이유도 없어요. 이것 하나만 말할게요. 예전의 나는 당신을 패망시킬 마음이긴 했어도 죽일 생각 까지는 없었어요." 섬광은 뜨거운 칼날로 변해 부드럽게 재호의 가슴을 꿰뚫었다. 재호 는 경악으로 물든 얼굴 그대로 천천히 바닥에 쓰러졌다. 죽기 직전, 수많은 장면이 그의 머리 속을 꿰뚫었다. 처음 그녀를 만 났을 때, 건방지게 유한그룹을 무너뜨리겠다 선언했을 때, 석유 유통 권을 중원그룹에 낙찰시키며 의기양양하게 미소짓던 그때. 그의 단말마를 뒤덮는 추억 중 어느 것 하나도 그녀와 관련되지 않 은 게 없었다. 그는 심장이 싸늘히 굳어가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녀에 대한 감정이 소유욕을 훨씬 넘어서고 있는 그 무엇이라는 것을 깨달 았다. 하지만 육체를 뒤덮은 통증은 그가 마지막 순간에 깨달은 감정에 어 린아이처럼 부끄러워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피에 젖은 손을 펼치며 그녀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눈동자에 담아두려 필사적이던 그는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시뻘건 피가 그의 가슴에서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유젤은 건조한 눈으로 그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으로 직접 사람을 죽였다. 하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다. 흥분도, 죄책감도, 두려움도. 하다 못해 '죽였다'라는 감각조차도. 이 새하얀 손에 남은 거라고는 무언가를 찔 렀다는 일상적인 경험, 그것뿐. 그녀는 왜 그런지 답을 알고 있었다. 눈앞의 이 인간은 자신보다 열 등한 하등생물일 뿐이다. 하나쯤 죽였다고 해서 죄책감에 떨거나 흥 분할 까닭은 없다. 처연한 미소를 짓고 있던 카뮤가 떠올랐다. 무거운 숙명을 짊어진 채 성장기를 보낸 아틀란티스의 고귀한 황태자, 그의 피로 이 두 손을 적신다면 그때는 색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유젤은 뚜벅뚜벅 밖으로 나섰다. 잠시 후 시 체를 발견했는지 젊은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1층 홀을 가득히 채 웠다. 유젤은 더 이상 관심 없다는 얼굴로 조용히 그곳을 떴다. by eden 연재가 많이 늦었습니다. 변명은 않겠습니다만 잘못했다고도 생각 하지 않습니다. 저 또한 제 생활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끝이 멀지 않았습니다. <전설의 융기>를 제외하고 이제 남은 챕터는 단 두 챕터 정도일 겁니다. 최근 TS에 새로이 심취해 또다른 TS소설을 쓰고 있습니다만, 여기 에 공개하지는 않겠습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세계관은 에덴시리즈 의 것을 가져다가 쓰고 있는데, 역시 저는 TS파라는 것을 새삼 느끼 고 있습니다.--; 다음편 업뎃이 한 달 두 달 후는 아닐까? 하는 걱정은 접어두셔도 될 겁니다. 저도 양심이 있는 인간이니까요. 아무튼 End of Eden series 기대해주세요~ 고치기 지우기 목록 손목시계 죄송하지만.. 새 소설보다도.. 이브의 눈물이 궁금합니다... ㅜㅡ 언제쯤이면 집필하실 계획인지.... 2005/07/14 실탄 새로 쓴다는 TS물은 혼자 보려고 끄적이는 겁니다. 연재는 안 할 겁니다.; 2005/07/14 섬마을김씨 하등생물이란 단어가 걸리는 건 뭘까.......? 일단 복귀를 축하드립니다. 2005/07/14 꼬마코린 =_=!드디어,드디어,드디어!!!! 감사합니다ㅠ.ㅠ...으음,이제 진우군의 성격은 남지 않았나보군요... 뭔가 아쉬운=_=ㅋ 2005/07/14 DDDDJ "자, 잠깐! 지, 지금 뭘 하려는 거야!" "당신의 동인지를 그릴 거에요." 2005/07/14 으아악! 아악! 내용을 다 까먹었어! 2005/07/14 ^ㅠ^ 하하하 왼지 하등생물이라는 단어가 저역시 걸리네요 2005/07/14 CastLe 실탄님의 새 TS물, 팬으로서(!) 보고싶어요~ 2005/07/14 ;;;;; 미투~~ 2005/07/15 bismarck TS 가 뭐죠? 2005/07/15 실탄 트랜스 섹슈얼, 성전환물이라고 말합니다. 2005/07/15 공포탄 아니~ 그런걸 왜 혼자 보려고 집필을.. 덜덜.. 2005/07/15 헤임달 어엇... TS소설이라면 보고싶은데.. ;ㅁ; 2005/07/15 adrk 그런건 다같이 공유를 ~~~ 2005/07/15 영 다시 연재를 시작하셨네요~ 2005/07/15 달비 아~TS~보고파~~ 2005/07/15 Jin 소.엄 꽤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2005/07/15 책읽는 곰 TS소설... 많이 좋아해요~ (책방에는 TS소설을 찾기가 쉽지않네요;; 다른책방도 돌아댕겨봐야지;;) 아무튼 감기조심하시고(현재 독감때문에 이불뒤집어쓰고있음) 건필하세요~ 2005/07/15 龍 이브의 눈물은? 2005/07/15 타오 완결 아쉽지만 빨리 봤으면해요 2005/07/15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1/18 페이지 ▶ 후기 [35] 실탄 2005/11/273Kb 779 ▶ 346 - End Of Atlantis(2) <최종화> [14] 실탄 2005/11/2714Kb 813 ▶ 345 - End Of Atlantis(1) [9] 실탄 2005/11/2712Kb 536 ▶ 344 - 전설의 융기(8) [2] 실탄 2005/11/2710Kb 398 ▶ 343 - 전설의 융기(7) [6] 실탄 2005/11/2713Kb 385 ▶ 342 - 전설의 융기(6) [14] 실탄 2005/09/187Kb 1205 ▶ 341 - 전설의 융기(5) [23] 실탄 2005/08/2711Kb 974 ▶ 340 - 전설의 융기(4) [9] 실탄 2005/08/038Kb 907 ▶ 339 - 전설의 융기(3) [18] 실탄 2005/07/2712Kb 806 ▶ 338 - 전설의 융기(2) [17] 실탄 2005/07/169Kb 916 ▷ 337 - 전설의 융기(1) [20] 실탄 2005/07/1410Kb 1003 ▶ 에피소드 - My doctor [33] 실탄 2005/05/308Kb 1676 ▶ 336 - 이별의 전주곡(3) [33] 실탄 2005/04/3012Kb 1808 ▶ 335 - 이별의 전주곡(2) 실탄 2005/04/3012Kb 786 ▶ 334 - 이별의 전주곡(1) [2] 실탄 2005/04/3011Kb 839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 1 [2][3][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7993 :: 338 - 전설의 융기(2) 실탄(cruel) 05-07-16 :: :: 9403 때는 이른 저녁. 허나 세정의 집은 불만 켜져 있을 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목이 말라 2층에서 살금살금 내려오던 우성은 그만 실수로 화분을 넘어뜨렸다. 흙이 쏟아지고 화분대가 깨지는 소리가 울리자 우성의 안색은 새파랗게 변했다. 이윽고 안방문이 천천히 열리고 초췌해 보이는 세정이 나왔다. 그녀 는 아들을 나무라지 않고 묵묵히 쏟아진 흙을 주워담기 시작했다. "조심해야지." 깨진 화분을 다 치운 후 세정은 그렇게만 말하고 정원으로 흙을 버 리러 나갔다. 놀란 얼굴로 서 있는 우성의 뒤로 마리가 다가와 어깨 를 툭 쳤다. "왜 그랬어?" "물이 먹고 싶어서…." "그럼 조용히 갔다 오던가 나한테 부탁하던가 해야지, 화분이나 깨뜨 리면 어떡해? 예안이하고 유빈이 때문에 지금 엄마 반쯤 정신 나간 상태라는 거 알면서." "으응… 미안." 정원에 흙을 버리고 온 세정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최근 들이닥친 악소식에 그녀는 정신이 없었다. 유전거래는 대국민 사기였다는 보도, 닥터가 행방불명이라는 소식, 그리고 한국에 내리 꽂힌 핵 테러. 어느 것 하나도 그녀가 딸처럼 소중히 여기는 소녀와 관계되지 않은 게 없었다. 당장 국정원에서 파견된 요원들이 이곳을 덮친다 해도 이 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허나 아직까지 그런 조짐은 없다. 세정이 닥터와 어떤 사이인지 정부 에서 모를 리 없을 텐데, 가만히 내버려두는 걸 보면 모종의 배려가 있는 모양이다. 아니면 조사를 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서였거나. 그 아이는 사건이 터진 직후로 한 번도 연락한 적 없었다. 이제 겨우 세 살인 손자도 그 뒤로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미칠 것 같이 갑갑하고 초조한 기분, 지금 세정이 그랬다. 똑똑. 무언가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세정은 흠칫 고개를 들었다가 바람이 그랬을 거라 생각하고 다시 시선을 떨궜다. 똑똑. 또다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좀더 분명한 소리였다. 의아함을 띤 얼굴로 세정은 일어났다. 그리고 정원쪽 베란다 문을 열 자 나타난 소녀의 모습에 뛸 듯이 놀랐다. "어, 어떻게 된 거니?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어서 들어 와." 세정은 허둥지둥 유젤의 손을 잡고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유젤 은 곧 떠나야 할 사람처럼 엉거주춤하게 선 채, 머리에 쓴 모자를 벗 지도 않았다. 누가 볼 새라 유젤을 안방으로 밀어 넣은 세정은 냉수 한 잔을 들이 켜고서야 겨우 침착함을 되찾았다. 유젤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주변 을 두리번거리다가 세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전에 보았을 때보다 수척해졌지만, 그래도 보석 같이 예쁘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에 세정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얼마나 네 걱정했는지 아니?" "죄송해요." "연락 못 한 건… 그래, 이해해. 너도 쫓기는 몸이니까 연락 같은 거 못했겠지. 그래, 재판은… 아니다. 그런 건 나보다도 네가 더 잘 알아 서 하겠지. 유빈이는 건강히 잘 있니?" 뭐라고 말하면 좋단 말인가. 맹독처럼 치밀어오르는 슬픔에 유젤은 힘없이 시선을 떨구었다. 아틀란티스 인물 때문에 가엾게 폭사했다고 말한단 말인가? 그래도 되살려낼 가능성이 희박하게나마 존재하니 거기에 기대를 걸어보라 고 말한단 말인가? 미래가 어쨌든 현재는 하나다. 당신께서 눈에 넣을 듯 예뻐하던 그 아이는 지금 이 세상에 죽고 없다. 외면하고 싶다한들 그것이 바로 차가운 진실. 눈물이 흐른다고 생각하는데 뺨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유 젤은 말없이 세정을 올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스스로도 야속하게 느껴질 만큼 덤덤한 어조였다. "지금까지 속여서 죄송했어요." "…응?" "유빈이는 진우 아이가 아니에요. 죄송해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기에는 잔인할 만큼 덤덤한 목소리에 세 정은 한순간 넋이 빠졌다. 그러나 유젤은 이해할 시간도, 혼란스러워 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 진우 아기를 제가 갖고 있어요. 그렇지만 무 사히 낳는다 해도 보여드릴 수는 없어요. 전처럼 못된 생각 품어서가 아니에요. 제가… 다음부터는 제가 아주머니를 제대로 쳐다볼 수 없 게 될 거예요." 여전히 세정으로서는 조금도 이해 못할 말이다. 놀람과 혼란을 한꺼 번에 껴안은 그녀는 입을 뻐끔뻐끔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유젤은 고개를 가벼이 숙였다가 들었다. 새하얀 손가락에서 빛이 나 며 세정의 이마를 노렸다. 세정은 그대로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며 최 면에 빠졌다. 유젤은 세정의 몸을 안아서 침대에 눕혔다. "실은… 진우는 살아 있었대요. 제가 진우가 아니었대요. 이상하죠? 전 지금까지 제가 진우라고 생각해왔는데, 아니 최소한 제 안에 진우 라는 인격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잠들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세정과 얼굴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그 일이 없었더라면, 저는 최소한 진우의 그림자는 계속 마 음 속에 지니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제 마음 속에 있던 진 우의 마음은 완전히 죽었어요. 왠지 아세요? 진우의 몸도 결국 죽었 거든요." 유젤은 이제는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르게 된 넋두리를 계속 했다. "유빈이도 죽었어요. 유빈이가 죽은 것도 슬펐지만, 진우가 죽은 건 더 슬펐어요. 아니, 그건 슬펐다라는 말로는 표현이 안 돼요. 그냥…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나 자신이 죽는 것 같았어요…." 꽉 깨문 입술 옆으로 비로소 눈물이 조금씩 투명하게 흘렀다. "전 진우를 다시 살리고 싶어요. 솔직히 방법은 없어요. 진우를 살리 려면 맥의 ST기관에 있는 자이오 다이아를 써야 되는데, 맥이 승낙 할 리가 없거든요. 맥이 죽게 되면 저를 지켜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게 되니까요. 그래도 노력할 거예요…." 눈물의 투명함이 점점 더 진해진다. 고귀한 그 영롱함에 섞여 뭉쳐있 던 응어리가 희석된다. "하지만 유빈이는 살릴 수 없어요. 네, 그래요. 전 진우 대신에 유빈 이를 포기할 거예요. 둘 중 하나를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라도 제대로 얻을 수 없게 되니까요. 맞아요. 전 엄마 될 자격이 없는 바보 같은 아이예요. 그리고 잔인하구요. 그렇지만 그래도 진우가 보고 싶은데 어떡해요…." 유진우라는 존재를 향한 유젤의 감정은 일반적인 사랑을 넘어선, 자 기 자신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동일성. 육체와 마음을 떨어뜨렸다 만 나게 함으로써 발생하는 지독한 점착력이자, 후유증. 레이온은 그것을 노렸고, 그리고 성공했다. 고통스럽게 여과기를 통과한 최후의 선택은 지독한 자기 환멸을 낳 는 법이다. 이유가 어쨌든 유젤은 아이를 포기했다. 그러므로 더 이 상 세정을 볼 수 있는 낯이 없다. 아틀란티스를 억누르든 억누르지 못하든,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안녕히… 계세요." 온 세상이 새하얗다. 부드러운 백색의 향기에 취해, 카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코끝을 스 치는 것은 은은한 순결의 향기. 주변에 머무르던 하얀 안개가 조금씩 물러간다. 안개가 옅어짐에 따 라 그를 둘러싼 풍경이 조금씩 드러난다. 어디에 시선을 모아도, 눈 에 들어오는 것은 새하얀 풍경뿐. '이곳은…?' 카뮤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정신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안개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걷힌 안개 사이로 새하얀 풍경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 그러면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편안함이 전신을 아늑히 감싸는 기분. 이윽고 그는 헐떡이며 멈추었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안개가 거짓말 같이 사라지며, 무릉도원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났다.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진 드넓은 초원, 여기저기서 뛰어 노는 작은 동 물들, 졸졸졸 흘러가는 시냇가 위로 둥글게 하늘을 수놓고 있는 황금 빛 무지개. 그러나 카뮤의 눈은 평원의 그 어느 부분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조금씩 뚜렷해지며 커지고 있는 여자의 모 습을 쫓고 있었다. 어느덧 여자는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호흡소 리는 느껴지지 않는다. '당신은…?' 카뮤는 여자가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전에도 몇 번 이곳에 여자의 부름을 받아 온 적이 있음을 기억해냈다. 이곳에서 의 기억은 이곳에서만 이어진다는 것도. 여자는 대단히 아름다웠다. 살아있지 않다고 느껴질 만큼, 그 아름다 움은 인간계의 것이 아니었다. 투명한 우윳빛으로 매끄럽게 빛나는 알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다. 음란하다거나 천박하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는, 여신 의 육체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몸이다. 차가운 섬광을 발하는 족쇄는 여자의 두 손과 두 발을 묶고 있다. 족 쇄에 연결된 쇠사슬은 끝이 어디인지 모를 만큼 길었으며, 시간이 도 달할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곳에서부터 여자를 속박하고 있다. '그 아이가 와.' 여자는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가냘프면서도 웅장한 떨림을 담고, 카 뮤의 영혼 속에 울렸다. '엔젤? 엔젤이 오고 있습니까?' '그래. 그 아이가 와. 너희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서.' 뜨거운 감동이 카뮤의 가슴을 꿰뚫었다. 한 줄기 눈물이 감격을 담고 그의 볼을 타고 흘렀다. 여자는 고귀한 미소를 지으며, 다정히 카뮤의 뺨을 어루만졌다. '가렴. 그리고 그 아이를 맞이해.' 뺨에 닿은 여신의 체온이 조금씩 식어간다. 물러갔던 안개가 다시 주 변을 휘어 감으며, 여자의 모습이 점점 사라져간다. 어미를 부르며 놀던 작은 짐승의 울음소리가 환청인 양 희미해지며 지워져간다. 주변이 다시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것은 이내 어둠으로 변했다. 카뮤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뺨에는 눈물이 조금 묻어 있 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여신의 체온은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리 고 없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익숙한 자신의 침 실이었다. 불을 켜고 일어난 그는 옷을 갈아입고 침실을 나섰다. 문 앞을 지키 고 있던 병사가 깜짝 놀라서 경례를 했다. 냉철한 지배자로 돌아온 그는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대신들을 불러라." "예?" "우리들의 메시아가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다. 환영 준비를 해야 하 지 않겠느냐?" 병사들은 얼떨떨해하다가 그의 눈빛과 마주치고 나서야 겨우 이해하 고 황급히 달려갔다.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정신 없이 달리는 병사들 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뮤는 망토를 휘날리며 저벅저벅 걸음을 옮 겼다. '엔젤이 오고 있다…. 엔젤이 오고 있어….' 신이 계시했으니 틀림없을 것이다. 엔젤만 붙잡으면 드디어 일만 년 의 숙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실패는 없다. 있어서도 안 된다. 아틀란티스는 다시 한 번 이 행성을 지배할 것이며, 엔젤은 해방을 가져다준 메시아로서 영원히 아틀란티 스의 태양이 되리라. by eden 아아 더워요 더워요. 바다로 가고 싶어요. 비키닐 보고 싶어요. 마지막 말은 빼버리고 읽어주세요. 더위를 먹은 증거예요. 고치기 지우기 목록 섬마을김씨 예예 더위를 먹으면 은연중에 생각하던 말이 불쑥 튀어나오기 마련이지요.............(응?) 2005/07/16 실탄 설마요. 절대 그런 거 아님.-_-; 2005/07/16 루리에르피나 실탄님의 비키닐?(잊어주시길..) 2005/07/16 산바위 예안이가 비키닐 입는다고요? 음.....덥군요....장마철이라 습기도 많고...훠~이 습기.. 2005/07/16 사케쿠 아 시원합니다. 제 방은 에어콘이 있어서.(흐뭇) 2005/07/16 영 흠..... 솔로들의 저주가..... 2005/07/16 Corean B13'' | Retto 2005/07/16 영 만약에 진우를 살린다면 그것은 진우가 아니라...박사가 살아나는 거군요. 2005/07/16 자여니야 호에에에... 저런 비키니라니 [버엉..] 2005/07/16 꼬마코린 ...오오?그런건가... 유빈이 불쌍해...ㅠ.ㅠ... 2005/07/17 bismarck 예전엔 아틀란티스가 무지 미웠는데 지금은 유젤을 도와줄 단 하나의 아군으로 인식이 된다....ㅡㅡ;;.. 2005/07/17 xiu 만약에 진우를 살린다면 그건 진우일까요? 레이온일까요? 실은 진우보단 레이온이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어요^^;;; 2005/07/17 세히 ...-ㅁ-; 비키니를 보고싶어요 멋짐 2005/07/17 헉.. 비닐을 보고 싶다고요? 나도 더위를.. 2005/07/17 p;;;; 쎈쓰 2005/07/17 책읽는 곰 저도 바다에 가고싶어요~ 태어나서 한번도 바다서 물놀이한적이 없어서요~ 하지만 최근 등장한 해파리가 무서워서...(덜덜덜...) 2005/07/20 Corean 바다가고싶따 실탄님은 안오신다 그러므로 바다는 안오시므로 신탄님은 죽었다 2005/07/24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1/18 페이지 ▶ 후기 [35] 실탄 2005/11/273Kb 779 ▶ 346 - End Of Atlantis(2) <최종화> [14] 실탄 2005/11/2714Kb 813 ▶ 345 - End Of Atlantis(1) [9] 실탄 2005/11/2712Kb 536 ▶ 344 - 전설의 융기(8) [2] 실탄 2005/11/2710Kb 398 ▶ 343 - 전설의 융기(7) [6] 실탄 2005/11/2713Kb 385 ▶ 342 - 전설의 융기(6) [14] 실탄 2005/09/187Kb 1205 ▶ 341 - 전설의 융기(5) [23] 실탄 2005/08/2711Kb 974 ▶ 340 - 전설의 융기(4) [9] 실탄 2005/08/038Kb 907 ▶ 339 - 전설의 융기(3) [18] 실탄 2005/07/2712Kb 806 ▷ 338 - 전설의 융기(2) [17] 실탄 2005/07/169Kb 916 ▶ 337 - 전설의 융기(1) [20] 실탄 2005/07/1410Kb 1001 ▶ 에피소드 - My doctor [33] 실탄 2005/05/308Kb 1676 ▶ 336 - 이별의 전주곡(3) [33] 실탄 2005/04/3012Kb 1808 ▶ 335 - 이별의 전주곡(2) 실탄 2005/04/3012Kb 786 ▶ 334 - 이별의 전주곡(1) [2] 실탄 2005/04/3011Kb 839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 1 [2][3][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49787 :: 340 - 전설의 융기(4) 실탄(cruel) 05-08-03 :: :: 7989 결국 다시 이곳에 왔다. 묵혀두었던 흥분을 상기하며, 유젤은 크게 심호흡했다. 미세한 혈관 하나 하나까지 팽창하는 게 느껴진다. 태고의 신기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신비의 대륙, 아틀란티스. 이것으로 두 번째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유젤은 침착하게 맥의 시스템을 점검했다. 존을 통과하던 과정에서 혹시나 시스템 장애가 발생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모든 기능이 순조롭게 가동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유젤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도 않은 채 맥을 정지시켜두고 있었다. 니콜라스를 구하고 아틀란티스를 응징하러 오 긴 했으나, 구체적으로 무엇부터 시작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맥은 강하다. 압도적으로. 그러나 어디까지나 전쟁 무기로서의 무력이 강할 뿐이지, 인질을 구 출하거나 첩보전 등에는 취약하다. 유젤 자신 또한 특수한 능력을 지니긴 했다. 그러나 수많은 아틀란티 스인들 사이에서 과연 니콜라스를 구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 전에 언뜻 보았던 황태자만 해도 상당히 강하지 않았던가. "맥. 전에 황태자는 한 번 널 가동 불능으로 만든 적 있잖아. 대비책 은 있어?" 「초능력에 대해서는 짐작하고 있었으나, 황태자가 체외로 방출한 힘 을 아스트랄계로 전환해 시스템 전산 통로를 막아버릴 줄은 미처 예 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했던 것뿐입니다. 방어시스템을 구축했으니 또다시 당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황태자라면 전에 그 방법말고도 다른 방법으로 또 널 움직이지 못 하게 할 수도 있을 거야." 「모든 방어 기능을 극대화시켜두고 있습니다. 조금도 방심하고 있지 않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나저나 니콜라스씨를 어떻게 구출하실 생각인가요? 만약 니콜라스씨가 구금돼있다면 저로서는 어찌할 도리 가 없습니다.」 스크린에는 강력한 에너지원들이 수도 없이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다 는 표시가 깜박였다. 맥이 대륙의 보호막을 뚫고 침입했음을 상대도 눈치챈 게 분명했다. 맥은 적들이 약 수십 분 안에 이곳에 도착할 거라고 계산했다. 그때 까지는 결단을 내려야했다. "저 사람들 중에 황태자도 있어?" 「황태자로 짐작되는 강력한 에너지 반응은 없습니다만, 황태자가 자 기의 힘을 숨기고 있다면 알아낼 방도가 없습니다.」 "발사체를 날려서 카메라로 확인하면 어때?" 「가능성은 낮지만 변장을 했다면 알아볼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 니다. 무엇보다 굳이 취할 필요가 없는 조치라 생각합니다만.」 스크린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유젤은 이윽고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조 종석에서 일어났다. 「혼자 가실 생각이십니까? 위험합니다.」 "네 염려만큼 위험하진 않아. 너는 외부 스피커로 내 목소리를 내면 서 내가 네 안에 타고 있는 것처럼 적당히 연극해. 그리고 가능한 이 목을 네 쪽으로 쏠리게 하고. 나는 니콜라스를 찾아볼게." 「위험합니다. 허락할 수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어?" 「….」 유젤은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절친한 친구의 뺨을 만지듯 계기판을 쓰다듬었다. "그럼 부탁할게." 맥은 콕피트를 열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멀리 우뚝 서 있는 거대한 기체가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클랙은 숨 을 죽였다. 그래봐야 상대는 이미 자신들의 접근을 눈치채고 있을 테 니 불필요한 긴장이라 할 수 있을까. 슬그머니 돌아보니 다른 대신들도 자신 못지 않게 바짝 긴장하고 있 는 게 보였다. 오히려 젊은 녀석들이 상대적으로 덜 긴장한 채였다. 아마도 혈기 때문일 테지만. "난 아무리 생각해도 폐하의 의중을 모르겠네." 긴장 때문에 메마른 음성으로 알렉스가 말을 꺼냈다. 이야기를 하면 서도 그의 눈은 줄곧 맥을 쫓고 있었다. "무슨 뜻인가?" "자네도 알잖은가? 엔젤은 우리 아틀란티스에 이미 단단히 적개심을 품고 있네." "그 빌어먹을 오스카 녀석 때문이지." 클랙은 무릎을 치며 분개했다. 그 이름 석자만 입에 담아도 이가 바 드득 갈렸다. 알렉스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엔젤이 우리 아틀란티스를 미워하게 된 건 사실이고, 지금 이렇게 정면으로 부딪쳐봐야 엔젤이 혁명에 협조해줄 리 없잖은가?" "혹시 모르지. 무릎이라도 꿇으면서 애원하면 들어줄지도." "자네라면 그러겠는가?" 잠시 엔젤과 자신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본 클랙은 쓰게 미소지으 며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그만! 모두 정지!" 알렉스가 손을 높이 들어올리고 외치자 위병들은 모두 정지했다. 저 마다 무기를 들고 있지만, 표정에는 하나같이 전의가 없다. 전투를 위해 나서는 전사라기에는 지나치게 설레어 하는 얼굴들이다. 클랙이 이들을 대표해 앞으로 나섰다. 맥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빳 빳하게 서 있기만 했다. "엔젤. 그대가 우리에게 노여움을 품고 있는 것은 잘 알고 있소. 하 지만 잠시 우리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겠습니까?" 알렉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엔젤이 포구를 겨누어 쏴버릴지도 모른 다는 두려움이 순간적으로 치솟아서였다. 다행히 그의 불안은 불안으 로 그쳤다. "그대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실로 유감스럽게 생각하오. 허나 그것은 우리의 본의가 아니었소. 어디까지나 내부의 분열 때문에 일어난…." 클랙이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맥이 육중한 기계음을 흘리며 움직 이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바짝 긴장한 채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뜻 밖에도 맥은 그들을 내버려둔 채 전혀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무시당한 건지 아닌지 몰라 얼떨떨함을 느끼고 있을 때, 클랙의 부관 이 찢어지듯이 외쳤다. "저, 저쪽은 수호제황석이 있는 방향입니다!" "뭐라?" 클랙과 알렉스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위험해! 수호제황석에는 마기가 있다! 만약, 만에 하나라도 엔젤이 마기를 탈취한다면…." "막아야 한다! 아니, 하다 못해 수호제황석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라 도 해야 해!" 순식간에 행동 지침이 정해진 두 대신은 쏜살같이 맥을 앞질러 내달 았다. 위병들도 잔뜩 긴장한 얼굴로 상관을 따랐다. 그들의 초조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맥은 방향을 바꾸지 않고 철 컹철컹 걷기만 할 따름이었다. 조금 떨어진 커다란 바위 뒤에 등을 기대고 있던 유젤은 자세를 고 쳐 잡으며 바로 섰다. '조심하십시오.' '너도.' '저를 이길 수 있는 무력이란 이 행성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 걱정 은 접어두시죠.' 부근 지역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유젤은 황궁이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달렸다. 주변 풍경이 눈 깜짝할 속도로 뒤로 밀려난다. 상당한 스피드로 쉬지 않고 달리고 있는데 조금도 숨이 차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ST기관 의 힘이다. '일단 황궁과 반대방향으로 저들을 유인하고 있습니다. 저 정도 인원 이 빠져나왔다면 황궁은 텅 빈 껍데기나 다름없을 겁니다.' '응.' '저쪽 방향에서 상당히 강력한 에너지가 느껴지는데 저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마기를 품고 있는 수호제황석>이라는 물체 같습니다. 저 들이 당황해서 저를 앞지르는 것을 보면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는 물체 같습니다. 상당히 신경 쓰이는군요.' 유젤은 놀란 나머지 우뚝 멈췄다. '마기? 그건 엘리우스가 갖고 있다는 공명신수 아니야?' '그렇습니다. 어쩌면 니콜라스씨는 이미 사망했거나, 혹은 폐인이 되 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순간 눈앞이 흐릿해지며 무릎이 휘청거렸다. 그러나 유젤은 곧 이를 악물고 다시 뛰었다. '그런 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야. 넌 저들을 잘 유인 이나 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려운 이야기를 하듯 맥은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저를 대하는 말투나 태도가 예전과 별로 변하신 게 없군요. 맥이라 고 부르는 것을 빼면 말입니다.' 유젤의 얼굴에 살짝 파리함이 돌았다가 곧 지워졌다.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레이온 박사의 1차 목적은 유젤님과 그 구인류 소년의 인격을 동기 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박사는 그 구인류 소년의 육체로 자기 자신의 인격을 옮길 생각이었던 듯 싶습니다만, 유젤님의 경우 처럼 박사의 인격과 구인류 소년의 육체가 완전히 동기화되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사용했다지만 구인류의 육체가 신 인류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구요.' 유젤은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그리고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구인류 소년의 인격이 유젤님 마음에 남아 있었던 동안 동기화가 강 하게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그 기간은 결코 짧지 않죠. 지금의 유젤 님은 레이온 박사가 갓 탄생시켰을 때와는 별개의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한….' 숨이 차는 것도 아닌데 가슴이 찢어지는 듯 괴롭다. 그의 이름을 들 을 때마다. '부탁… 부탁이야. 모든 게 무사히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마.' '하지만… 알겠습니다. 그 이야기는 접어두기로 하죠.' 입술을 질끈 깨물고 유젤은 다시 달렸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이루어 진 사랑, 그렇지만 거부권을 행사하지도 못했던 사람에 대한 마음을 억지로 머리 속에서 밀어내었다. 저 멀리 우뚝 솟은 황궁 탑의 날카로운 끝이 보였다.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DDDDJ B형...? 음, 저도 B형이에요. 안녕하세요 동족님. 2005/08/03 책읽는 곰 어... 어떤 파급효과가 있는지요...?;;(<=이놈도 B형) 2005/08/03 아지다하카 저도b형인데...음.. 2005/08/03 세히 음.. 나는 그런성향인데 왜 A형이지..=_= 2005/08/03 dark 누가 또 딴지 걸었나보네 ㅡ.,ㅡ 2005/08/03 꼬마코린 음,난 o형이라서리,반갑소 친척님=_=; 2005/08/03 개똥맛피카츄 흠...저번에 네이버 뉴스에서 실탄 판다고 하든데 컹 실탄님인줄 알았더니 총알 이더구료 -ㅁ- ㅎ; 2005/08/03 영 어쩌면 유젤은 유젤이 아닐수도 있다는 것이로군요. 2005/08/03 실탄 영감이 오지 않아서 글이 안 써지네요. 이삼일 내로 복귀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2005/08/20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1/18 페이지 ▶ 후기 [35] 실탄 2005/11/273Kb 779 ▶ 346 - End Of Atlantis(2) <최종화> [14] 실탄 2005/11/2714Kb 813 ▶ 345 - End Of Atlantis(1) [9] 실탄 2005/11/2712Kb 536 ▶ 344 - 전설의 융기(8) [2] 실탄 2005/11/2710Kb 398 ▶ 343 - 전설의 융기(7) [6] 실탄 2005/11/2713Kb 385 ▶ 342 - 전설의 융기(6) [14] 실탄 2005/09/187Kb 1205 ▶ 341 - 전설의 융기(5) [23] 실탄 2005/08/2711Kb 974 ▷ 340 - 전설의 융기(4) [9] 실탄 2005/08/038Kb 907 ▶ 339 - 전설의 융기(3) [18] 실탄 2005/07/2712Kb 804 ▶ 338 - 전설의 융기(2) [17] 실탄 2005/07/169Kb 914 ▶ 337 - 전설의 융기(1) [20] 실탄 2005/07/1410Kb 1001 ▶ 에피소드 - My doctor [33] 실탄 2005/05/308Kb 1676 ▶ 336 - 이별의 전주곡(3) [33] 실탄 2005/04/3012Kb 1808 ▶ 335 - 이별의 전주곡(2) 실탄 2005/04/3012Kb 786 ▶ 334 - 이별의 전주곡(1) [2] 실탄 2005/04/3011Kb 839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 1 [2][3][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51881 :: 341 - 전설의 융기(5) 실탄(cruel) 05-08-27 :: :: 11230 “지금까지 잘 참아주었다.” 황궁의 발코니에 선 카뮤는 군중들을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말을 꺼 냈다. 모두가 그의 신하이고, 백성이었다. “많은 희생이 있었다. 오랜 인내가 있었다. 신이 우리를 버렸다 한들 우리가 품은 희망까지 지울 순 없었다. 이제 드디어.” 입술이 말라서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군중이 숨을 죽인 채 다음 말 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어깨가 무겁다. 아버지인 황제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오랫 동안 국정을 돌봐온 그였지만, 지금처럼 황제라는 두 글자가 묵직하 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우리가 다시 이 행성을 지배할 때가 된 것이다.” 짧지만 무거운 침묵. 그리고 곧이은 함성. “우와아아!” “아틀란티스! 아틀란티스!” 누군가의 외침에서 시작한 함성은 커다란 파도가 되어 군중을 휩쓸 었다. 모두가 흥분했다. 모두가 외쳤다. 곧 다가올 영광된 지배에, 모 두가 환호했다. 태양에 목말라 하던 지난 일만 년. 그 긴 세월을 마침내 추억으로 남 길 수 있는 때가 도래한 것이다. 카뮤는 발코니에서 등을 돌렸다. 신하들은 모두 감동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붉어진 시녀에게 시선이 닿았다. 시녀는 크게 감격한 얼굴로 감히 카뮤의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날카로운 침묵이 홀을 장식하고 있었다. 숨을 크게 내뱉기만 해도 얼 음이 깨지듯 와장창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카뮤는 천천히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붉게 달아오른 흥분 밑에는 긴 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오랫동안 꿈꾸어온 혁명, 그것이 마침내 이루 어지게 됐다는 기염에 한 조각 의심을 품는 것이다. 그것을 덜어내듯, 카뮤는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태양. 입에 담는 것조차 송구스러운 찬란한 그 이름. 그러나 신이 인간에게 하사한 그 영광은 우리가 독점하게 될 것이다. 지상인들은 다시 아틀란티스의 노예가 되어 비굴한 삶을 살게 될 것 이다. 그것이 바로 신을 위해 마련한 복수. “앤슨 경.” “예, 폐하.” 이름이 불리자 앤슨은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카뮤는 부드러우면서도 엄한 지배자의 눈으로 앤슨을 내려다보며 말문을 열 었다. “한때나마 그대의 충정을 의심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이제 그대 의 혐의가 풀렸으니 다시 한 번 우리 아틀란티스 제국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해주길 바란다.” “목숨을 다 바쳐 노력하겠습니다.” 오스카는 말없이 손등의 뼈가 울리도록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의 미 소가 미미하게 살짝 일그러졌다. 적의가 담긴 시선을 의식한 앤슨은 고개를 숙인 채로 훗 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 사이에서 살기가 흐름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오로지 단 한 명, 카뮤만이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카뮤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운 미소까지 띤 채로 둘 사이에 튀기는 불꽃을 구경했다. 지배자로서, 신하들이 서로 경쟁하는 것은 흐뭇한 구경거리일 뿐. “그리고 마리오 경.” “하명하십시오.” 마리오도 정중히 예를 취했다. 적의가 담긴 오스카의 시선이 마리오 에게로 옮겨졌다. “그 일은 어떻게 되고 있는가?” “아아, 그 일 말씀이십니까?” 흠칫 놀라워하던 오스카의 얼굴이 불안함으로 물들었다. 마리오는 그 광경을 흘끗거리며 엷은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답했다. “그 일이라면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믿고 있겠다.” “믿어 주십시오.” 흡족한 미소가 카뮤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러나 급히 달려온 다른 부 하가 무릎을 꿇자 사라졌다. “보고입니다. 맥이 현재 성스러운 동굴 앞까지 도달했다 합니다.” 신하들의 얼굴에 놀라움과 불안함이 떠올랐다. 웅성거림이 점점 커지 는 것을 묵묵히 듣고 있던 카뮤가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에는 별다 른 놀라움이 실려있지 않았다. “그래서? 엔젤은 무엇을 하고 있지?” “그게… 아직은 위협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클랙 대신님 께서 엔젤과 현재 대화 중이시지만 순순히 우리에게 협조할 것 같지 는 않다 하십니다. 모습을 보이지도 않고….” “그래?” 야릇한 미소가 카뮤의 얼굴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표정 변화의 의미를 알아챈 사람은, 적어도 이 자리에는 없었다. “좋다. 그대들에게 명령한다. 앤슨 경과 마리오 경을 제외한 모두는 각자 위치로 돌아가 자기 소임을 다하도록. 앤슨 경과 마리오 경은 클랙 대신과 합류해 엔젤을 생포하는데 힘을 쓰도록 해라.” “예!” 사람들이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는 동안 마리오와 앤슨은 재빠르게 대 답하고는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나 몇 걸음을 채 걷기도 전에 오스 카가 뒤에서 그들을 불러세웠다. “마리오 경, 앤슨 경.”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걸음을 멈췄다. 뒤에서는 오스카가 팔짱을 낀 채 싸늘한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원수를 대할 때조차도 항상 웃는 얼굴이던 오스카가 저렇게까지 자 기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 일이라는 게 뭐지? 폐하께서 그대에게 따로 명령하신 일이 있는 가, 마리오 경?” “지상의 주요 강대국 군사력을 장악하는 임무를 맡기셨을 뿐입니다. 우리 아틀란티스가 다시 한 번 이 행성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지상인들의 무기를 압수해야할 테니까요.” “난 한 번도 그에 관한 의논을 받지 못했다.” “군수통솔자는 저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마리오는 조금도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오스카도 그것을 느꼈지만, 얼굴을 찌푸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전까지는 외형상으로나마 ‘친밀한’ 관계였지만, 앤슨을 함정에 빠뜨림으로써 그들 사이는 완전한 적이 된 것이다. “며칠 감옥에 갇혀 있어서인가? 얼굴빛이 좋지 않군, 앤슨 경.”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에게 걸린 혐의를 무마시키느라 여러 모로 애쓰셨다는 이야기는 옛 부하로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옛 부하라. 말에 가시가 있군. 유나를 원망하고 있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몇 년 동안 저를 섬겨온 부하가 실은 스파이였 다는 사실조차 진작에 눈치채지 못한 저 자신이 한심할 뿐입니다.” “맞아. 자네는 한심하지. 당사자가 바로 뒤에 서 있는데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니 더 한심하고.” 무슨 말인지 깜짝 놀란 앤슨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다가 흠칫 놀 라워했다. 과연 그 말대로 유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뒤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스카는 한심하다는 듯이 이죽거렸다. “나는 잠시 자리를 비켜주지. 자네의 충성스런 옛 부하와 잠시 이야 기를 나눠보도록 하게.” 부드럽지만 가식적인 미소를 엷게 띤 채 오스카는 앤슨의 어깨를 두 드리고 지나쳤다. 마리오는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며 오스카의 뒷모습을 쫓다가 앤 슨과 유나에게 눈을 돌렸다. 자신이 무언가를 말할 입장도, 이곳에 있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곧 자리를 피해주었다. 복도에는 앤슨과 유나 둘만 남았다. 신뢰했던 부하가 실은 스파이였 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사람 같지 않게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앤슨은 갑자기 오른손을 높이 쳐들었다. 휘악 하고 바람이 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의 오른손은 유나의 뺨 을 때리지 못했다. 유나가 가볍게 그의 손목을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눈동자와는 달리 그의 손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 힘이 빠졌고, 유나는 순순히 손목을 놔주었다. “오스카 경과는 어떤 관계지?” “어려서 은혜를 입었습니다.” “은혜?” “저는 아카데미에서 가혹한 수업 과정에 적응하지 못하던 열등생이 었습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가족이라고는 동생 하나 밖에 없는 저로서는 아카데미에서 쫓겨난다면 앞길이 막막했습니다. 그런 절 도 와주신 분이 오스카 경이십니다.” 예전과는 달리 딱딱하기 그지 없는 말투이다. 손을 대면 그대로 단단 함이 만져질 것만 같다. “아틀란티스는 지상세계와는 다르다. 황제 앞에 모두가 평등해.” “그야 그렇겠지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지상 세계를 되찾는다 라는 목 표 하에서 평등할 뿐입니다.” “…무슨 뜻이지?” “에날도스에 일정 이상의 자질을 가진 어린이는 무조건 아카데미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혹독한 수업 끝에 강력한 헤이저로 성장하죠. 그 과정을 견뎌내지 못한 아이는 민족을 위할 줄 모른다고 손가락질 받 지요. 아무리 민족의 미래를 위한다지만, 어린아이의 인생을 짓밟아 면서까지 이룩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감정이 전혀 묻어나지 않는, 메말라붙은 목소리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처음부터 감정이 없다기보다는, 억지로 껍질 을 대어 마음을 감춘다는 듯한 느낌.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필 사적으로 무표정을 덮어쓴다는 느낌. 그것을 지울 수 없다. “만약… 만약 그때 당신을 먼저 만났더라면 제 인생은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군요.” 처음으로 유나가 짓고 있던 무표정이 살짝 풀어지며 서글픈 아쉬움 비슷한 색깔이 나타났다. 무언가를 깨달은 앤슨은 창백한 얼굴로 비명처럼 외쳤다. “설마, 금제를 받은 건 아니겠지? 오스카 경이 그걸 했단 말이냐? 그 건 증거 확보 즉시 사형에 처해지는 중범죄야!” “글쎄요. 금제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단지 부모님께서 무척 귀여워하셨던 제 동생, 유하 만큼은 그늘 없이 밝게 자랐으면 좋겠군요.” 앤슨은 바보가 아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 않다. “아무리 오스카 경이 비열하고 교활한 인간이라지만 그런 악독한 짓 을 하다니! 유나, 나한테 모든 걸 말해라! 그럼 내가 널 보호해주마!” “당신은 그 분을 이길 수 없습니다. 왜 그 분이 그렇게까지 당신과 마리오 경을 밟아누르고 싶어했는지, 그 하나만을 위해서라면 다른 것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그 분의 생각을 이해하고 있지 않은 한은 절대로요.” “무슨… 뜻이지?” “당신을 모함해 파멸시키기 위해서였다고는 하나, 그 분은 엔젤의 아 이를 죽이는 돌이킬 수 없는 짓까지 저질렀습니다. 그 의미를 아직도 모르신단 말인가요?” “그게 무슨 소리지?” “엔젤의 아이가 죽은 것은 마크가 엔젤을 손에 넣기 위해 단독으로 저지른 짓이 아니라, 오스카 경이 당신에게 혐의를 덮어씌우기 위해 꾸민 짓입니다.” 앤슨은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얼굴이 되었다. 핏기가 가시다 못 해 새하얗게 경직된 얼굴로 비틀거리던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설마… 오스카 경은 나만 파멸시킬 수 있다면 아틀란티스가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오스카 경이 당신에게 씌운 혐의를 무마시켰다 하나 그것은 잠깐일 뿐입니다. 과정이 어떻게 되든 당신은 파멸일 테지요.” 차가운 눈동자는 엷은 동정을 담은 채로 앤슨을 흘끗 보았다. “오스카 경에게 애국심이나 민족심 따위는 없습니다. 어린 시절, 열 등감을 품은 상대를 향한 증오와 복수심 뿐.” 충격에 휩싸인 앤슨을 남겨두고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유나는 그곳을 떠났다. 앤슨은 돌이 된 듯 언제까지고 그렇게 굳어있었다. 유나의 말을 통 해, 오스카가 얼마나 비뚤어져 있는지 알게 된 그는 사고회로가 새카 맣게 마비된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에 형성된 열등감. 그것은 비뚤어진 채로 성숙해 똑바로 펴 칠 수 없게 되었다. 오스카가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알았다. 에날도스 운용면에 있어서 그는 열등생이었고, 자신은 항상 그에게 비교 대상이 된 수재였으니. 그러나 오스카가 품고 있던 미움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지독 했고, 비열했으며, 비뚤어져 있었다. 어린 시절 비교대상이 됐던, 꼴 보기도 싫은 미운 녀석을 파멸시키기 위해서라면 나라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오스카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한시가 급해!” 비로소 정신을 차린 앤슨은 다급한 얼굴로 그 자리를 뜨려 했다. 오스카를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된다. 살인자의 누명을 덮어쓰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멈추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래에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 순간 무언가 싸늘하고 날카로운 기운이 등에 닿았다. 동시에 은은 하게 그를 휘감는, 달콤하면서도 지독한 살기. 부드러운 향기가 그의 후각을 꿰뚫었다. 전신을 마비시킬 정도로 매 혹적인, 그러면서도 뼛속 깊이 공포를 심어놓는 향기. 이 아찔함을 그는 전에 한 번 느껴본 적이 있었다. “소리 지르면 죽이겠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으면서도 그는 조금씩 시선을 뒤 로 돌렸다. 그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유젤은 싸늘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을 띠고 있었다. “카뮤는 어디에 있지?” by eden 슬슬 끝나가려고 하는 분위기인데 어째 연재 속도는 심상치 않습 니다. 아무튼. 그런데 엔딩이 대충 어떻게 될 것 같다고 상상하시는 분 있나요? '이렇게 이렇게 끝날 것 같다'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코멘트로 많 이 말씀해주세요. 여러분들이 어떻게 상상하는지, 제가 생각한 엔딩과는 어떻게 다를지 궁금합니다. 참여도가 높다면 의욕을 얻어 연재 속도가 빨라질 수도 있습니다. (이건 거래?) 고치기 지우기 목록 실탄 ...올려놓고 문득 날짜를 보니 24일만이군요;;;;;;;;; 시간 한 번 참 빨리 갑니다. 허헛.; 2005/08/27 자여니야 우흠.. 감상문 : 더써줘요오~ //ㅅ// [퍽!] 2005/08/27 텐시노 제 생각에는 이렇게 끝날것 같습니다. -끝- 죄송합니다 ㅜㅜ 2005/08/27 영 대충 예상하자면 아틀란티스가 올라 올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올라오는 것 대지뿐 아니 2명과...1대가 거기에 서있을것 같군요 2005/08/27 맛스타 자자!! 전멸하는 겁니다!! 하나의 티끌로 사라지는 겁니다아!! 달을 중심으로 지구가 공전하는 겁니다! 지구가 달의 위성이 되서 도는 겁니다아!! -당근 지구 멸망- 2005/08/27 사케쿠 하아............ 방금 전 아상 다보고 왔습니다. 으음...... 뭐랄까 소엄과는 조금 색이 다르달까요. 서운의 비중이 굉장히 적더군요. 아무튼 재밌었습니다. 2005/08/27 DDDDJ 아틀란티스 대륙이 올라가다가 밑에서 광선포 한방 맞고 소멸...으음...(탕) 2005/08/27 실페리온 이속도라면...한 두달정도면 완결이 날수 있을까나아...;; 2005/08/27 사케쿠 그나저나 2부 연재는 정말 못하는 겁니까아? 꼭 한번 보고 싶은데요, 으음........... 2005/08/27 ssizz 지금까지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2005/08/27 유진 펑 퍼벙 펑펑펑 ... "케이, 지구가 폭발했어요." "그렇군." 망가진 지구와 달을 스치고 텅빈 우주공간으로 맥이 사라져갔다. -끗- ...... 뭐 이런 엔딩도? 진심은 아닙니다만. 하하. 아직은 좀 더 상상해봐야 엔딩이 떠오를 듯 싶군요. 2005/08/27 궁금돌이 대략... 달에있는 진짜유젤이 개입할꺼 같은데요..... 아틀란티스는..... 아마 다시 봉인되던지 전멸.될듯... 아니면 의외의 반전으로 지금까지 모든게 유젤의 꿈속이라는...(퍽) 2005/08/27 CastLe ... 혹시 유젤이 죽고 틈새가 막혀벼린 아틀란티스는 완벽하게 지하에 묻힌다, 라는건 아니겠군요 (둘째가 있으니 아무래도 이정도는 안하시겠지요 -_-) 2005/08/27 페리 간만이네요.. 아마도 윗분말대로 오리지날유젤의 개입도 있을 뜻한 느낌이... 아틀란티스는 뜰 거 같긴해요. 그런데 마더가 못 뜨게 다시 가라앉히지 않을 까요... 아닌가 지구의 유젤 즉 완성형을 만들었으니까. 놔 두려나 그러면 아마 아틀란티스랑 사도의 남은 애들이랑 지구를 점령하고 그래서 언제 실탄님이 말 했듯이 달에까지 처들어 갈까요?..... 아마 달에는 유젤이랑 케이 등등 지금유젤이랑 되살아난 레이온등이 있지 않을까요. 2005/08/27 산바위 아틀란티스는 떠오릅니다..뜨고 뜨고 또떠서...새로운 달이 되는겁니다.... 2005/08/27 공부타오 결국엔 에덴 혹성으로 가겠죠? 아틀란티스의 백일몽은 잊혀진채로.. 실탄님 제발좀빨리 연재좀-- 2005/08/27 꼬마코린 으윽,너무 많은 생각들이 나와서 정립이 안되지만,어쨎건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결말은, 아틀란티스는 멸망. 유빈이 부활. 에덴으로 떠남. 끝=_=; 2005/08/28 부동심결 아틀란티스의 소원대로 지상으로 나가게 해주겠지요 그리고 맥을 이용해 싸그리 다 죽여 버리겠지요. 그리고 예안은 유빈이 살리고 진우 애 낳고 달로 가지 않을까요? 2005/08/28 실탄 구운몽식 결말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전개된 사건 중 실제로는 꿈인데 현실이양 포장한 것은 없습니다. 2005/08/28 미르카도르 에덴쪽에서 손을 쓸듯. 2005/08/28 JIn 아틀란티스가 어찌어찌해서 지상으로 올라오고.. 유젤은 에덴으로 날아가서 애 낳고 지내지 않을까요? 그리고 유젤이 낳은 애는 훗날 아틀란티스에 대항하든가... 아니면 유젤의 자손들이 아틀란티스에 대항하든가.. 그냥 아틀란티스가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끝? 2005/08/28 대천사미카엘 니콜라스의 죽음을 안 유젤 폭주. 카뮤 죽음. 아틀란티스 전멸. 유젤 한국으로 돌아가 대통령 아래 정부 각료 대부분 사망시킴. 에덴 동산으로 돌아감. 룰루룰루 하게 잘 삼. 끝. 하하하... 2005/08/28 Elment -ㅇ-!! 우오오오 드디어!! 2005/08/29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1/18 페이지 ▶ 후기 [35] 실탄 2005/11/273Kb 779 ▶ 346 - End Of Atlantis(2) <최종화> [14] 실탄 2005/11/2714Kb 813 ▶ 345 - End Of Atlantis(1) [9] 실탄 2005/11/2712Kb 536 ▶ 344 - 전설의 융기(8) [2] 실탄 2005/11/2710Kb 398 ▶ 343 - 전설의 융기(7) [6] 실탄 2005/11/2713Kb 385 ▶ 342 - 전설의 융기(6) [14] 실탄 2005/09/187Kb 1205 ▷ 341 - 전설의 융기(5) [23] 실탄 2005/08/2711Kb 974 ▶ 340 - 전설의 융기(4) [9] 실탄 2005/08/038Kb 905 ▶ 339 - 전설의 융기(3) [18] 실탄 2005/07/2712Kb 804 ▶ 338 - 전설의 융기(2) [17] 실탄 2005/07/169Kb 914 ▶ 337 - 전설의 융기(1) [20] 실탄 2005/07/1410Kb 1001 ▶ 에피소드 - My doctor [33] 실탄 2005/05/308Kb 1676 ▶ 336 - 이별의 전주곡(3) [33] 실탄 2005/04/3012Kb 1808 ▶ 335 - 이별의 전주곡(2) 실탄 2005/04/3012Kb 786 ▶ 334 - 이별의 전주곡(1) [2] 실탄 2005/04/3011Kb 839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 1 [2][3][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53581 :: 342 - 전설의 융기(6) 실탄(cruel) 05-09-18 :: :: 6501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물씬하게 풍기는 달콤한 향기가 속삭이고 있다. 너는 이제 곧 죽을 거야. 내 손에.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어째서인지 조금도 두렵다는 생 각이 들지 않는다. 아틀란티스에 축복을 가져다줄 메시아의 손에 죽는다면, 그것은 나쁘 지 않은 마지막. 한 번쯤 겪어보고 싶은 불행. "태자 전하는 '여름의 홀'에 있습니다." "여름의 홀?" "저쪽 모퉁이를 돌아서 나오는 홀입니다. 멀지 않습니다." 유젤은 앤슨이 말한 방향을 흘긋 바라보고는 살짝 끄덕였다. 허나 그 녀의 표정에 드리워진 차가움은 조금도 지워지지 않았다. "내 아이는 죽었어. 알고 있어?" "…알고 있습니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는 물음이었다. 유빈의 죽음에 관여한 것이 아 니었음에도. "사실대로 말해. 내 아이의 죽음에 너는 얼마만큼 책임이 있지?" "책임이 없다면… 살려줄 건가요?" "목숨이 아까워서 묻는 거야? 아니면 궁금해서 묻는 거야?" "당신이 내리는 죽음이라면 두렵지 않습니다. 당신이 아틀란티스에 등돌리는 것이 무서울 뿐이죠." "살려주지 않아. 누구도." 차가운 말맺음 뒤에 느껴지는 것은 암담함 그 자체. 앤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틀란티스를 향한 유젤의 증오, 그것은 생각보다 두터웠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어느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죽인 상대와 타협할 수 있을까. 그는 어디서부터 일이 틀렸는지를 생각했다. 천사 프로젝트를 통해 탄생한 유젤이 탈출했을 때도, 심지어 레이온이 아틀란티스를 배반했 을 때에도 그는 일이 잘못돼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일어날 수 있는 변수의 테두리 안이었다. 해결의 여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지만 유젤의 아이가 죽은 순간, 아틀란티스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것이다. 유젤의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리고 오스카가 그 일을 주도했음을 깨달았을 때 앤슨은 미칠 것 같다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알았다. 미친 것 아닌가? 그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일에 핏물을 끼얹 는 격이었다. 도대체 어느 어미가 자기 아이를 죽인 이들에게 손을 벌려주겠는가. 차라리 죽은 것뿐이라면 그나마 낫다. 그러나 아이는 분명히 아틀란 티스인 때문에 살해당했고, 유젤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지 금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고 추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상의 최악은 없다. "엔젤… 들어주십시오. 우리는 오로지 당신을 위해서…." "닥쳐. 듣고 싶지 않아." 감미로운 목소리는 증오를 담고 있다기에는 지나칠 만큼 차분해서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앤슨은 다급해졌다. "제발 한 번만 들어주십시오! 아이를 잃은 당신의 슬픔은 십분 이해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숭고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셀 수 없 을 만큼 무수한 아틀란티스인이 자기 자식의 목숨을, 자기 자신의 목 숨을 잃었습니다! 오로지 태양을 위해서!" 기가 끓는 부르짖음에도 유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아. 당신은 냉정하고 논리적인 설득가가 아니었어? 그런 비논리적이고 감정적인 말로는 당신의 죄를 변명하지 못해." "저의 죄요?" "내 아이의 죽음을 방관한 것. 지금 그 벌을 내리겠어." 순간 뜨거운 기운이 어깨를 긋는 게 느껴졌다. 구체적인 통증은 느껴 지지 않았다. 그저 몸의 어느 한 부분이 지독하게 불타고 있다는 환 상 비슷한 감각만 붙잡을 수 있었을 뿐이다. 앤슨은 바닥에 쓰러졌다. 시야가 흐려지며 의식이 점점 가물가물해져 왔다. 뜨겁게 타오르는 고통의 실루엣 뒤로 조금씩 뚜렷해지는 죽음의 눈 동자. 흑진주처럼 새카만 그 망막 뒤로 고독의 무게가 비춰 보였다. '…이것은… 죽음?' 향기가 멀어지고 있다. 유젤이 카뮤를 찾아 떠난 모양이었다. 꺼져 가는 의식의 마지막 조각을 붙잡고, 앤슨은 황태자가 무사하기를 기 원했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금속음이 울렸다. 누군가가 열쇠를 돌려 창살을 여는 소리였다. 제시는 힘들게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았다. 상대는 그녀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유하니?" "오랜만이에요, 제시님." 지금은 비록 포로 신세일지라도 한때나마 모든 아틀란티스인의 경원 을 받았던, 태어날 때부터 아틀란티스의 배반자일 수밖에 없었던 비 운의 여자와 이렇게 마주친다는 것. 그것은 가슴이 아려올 정도로 착 잡한 기분이었다. "제시님께서 저 같은 한낱 계집애를 기억해주신다니, 정말 대단한 영 광이에요. 아마 저는 이 날을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널 처음 만났을 때 범상치 않은 재질을 지닌 것을 눈치챘지. 네 언 니도 그랬던 걸로 기억해. 아마 그때 손을 쓰는 게 올바른 행동이었 을지도 몰라." "추해요. 이제 와서 그렇게 윽박지르는 거. 제가 존경하던 당신은 지 금보다 훨씬 근사한 여전사였어요." 제시의 입가에 쓴웃음이 피어났다. 그러나 탈진한 기력과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가느다란 빛의 탄환이 유하의 손끝에서 날았다. 탄환은 제시를 속박 하고 있는 결박을 모두 부수었다. 제시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던 제시는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정신력으 로 겨우 버티고 있지만,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약한 모 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임스는 어떻게 됐지?" 그게 제시가 가장 알고 싶은 것이었다. 몇 시간 전 갑자기 끌려나간 제임스가 어떻게 되었는지. "저는 말해줄 수 없어요. 알고 싶으시면 저를 제압해야 될 걸요." "난 금제를 당하지 않았어. 조금 탈진했다고 함부로 풀어주었다가는 네 목숨이 위험할지 몰라. 버르장머리 없는 꼬마 아가씨." "지금은 상관없잖아요." "날 모욕한 대가는 클 거야. 난 모욕은 참지 못해." 새파랗게 빛나는 제시의 눈동자는 유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유 하의 온몸을 투과하는 살기는 능히 심장을 멈추게 할 만큼 강했다. 그러나 유하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태연했다. 상대를 압박하는 기운 은 강맹하다 하나, 제시는 이미 한계를 넘어서서 탈진한 상태다. "걸으실 수 있겠어요?" "뭐?" "저를 따라오세요." 제시의 눈동자에서 살기가 지워졌다. 그리고 떠오른 감정은 호기심과 경계심 반반이었다. 그녀가 혼란스러워함을 눈치챈 유하는 빙긋이 미소까지 띠며 말을 이었다. "태자 전하의 명입니다. 그리고 저를 따라오시면 제임스씨가 어떻게 됐는지 알게 될 거예요." "제임스는… 무사해?" "아직은요." 검은 속눈썹이 부들부들 떨렸다. 제임스에 대한 걱정을 지울 수가 없 는 것이었다. 유하는 다시 웃음을 띠었다. 그것은 어린 아가씨에게는 어울리지 않 는, 때묻은 웃음이었다. "태자 전하가 계신 곳은 <비밀의 호수>입니다. 마리오 경 같은 분들 은 물론이고 5대 대신분들조차도 태자 전하가 지금 그곳에 계시다는 사실을 몰라요." 제시의 눈동자가 확 커졌다. 비밀의 호수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결 코 작지 않았다. "태고의 힘이 숨겨진 곳이잖아! 바드로3세는 거기서 도대체 뭘 하려 는 거지?" "직접 확인해보세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단지 제시님을 안내하라 는 명을 받았을 뿐이에요." 이를 악문 채 제시는 일어났다. 팔다리가 욱신거리고 뼈마디가 끊어 지는 것 같았지만 참았다. 유하의 부축이 굴욕적이었지만 뿌리치지 않았다. 지금은 참아야 할 때.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섬마을김씨 힘내세요. 2005/09/18 RAGNAROK 힘내세요. 나중의 행복을 담보로 지금 불행을 대출받으셨다고 생각하십쇼. ^^ 2005/09/18 권혁준 저기...아무것도 몰라서 물어보는건데요...실탄님께 무슨일 있나요? 왜 위에 두분다 힘내라고 하시는지...'-'? 2005/09/18 Elment 오오오!! 4타자... 에;; 그리고 힘내시길... 2005/09/18 텐시노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힘내세요. 2005/09/18 샤인^hermit 힘내세요!! 2005/09/18 영 아 정말 오랬동안 기다렸습니다. 2005/09/18 술탄 기다렸습니다. 그치만 느려요. 그렇지만 재밌어요. 그리고 힘내세요! 2005/09/19 아야카시 ...우흠.. .. 늦장에는 일도양단후에 점핑소드2방을.. [!?] 2005/09/19 세히 웰컴백. welcome back 2005/09/19 꼬마코린 부디 아틀란티스에게 당하지 않기를=_=! 2005/09/19 미르카도르 자아.....M4A1과 M16A2로 살짝 구멍만 내드릴게요오~♡ 2005/09/20 책읽는 곰 △어째서요...ㆀ 구멍나면 피가... 피가... 피가아......(풀썩...) 아무튼 おかえり입니닷... 그리고 뭔일인진모르겠지만 아무튼 파이팅요!(풀썩) (△최근 일본어를 조금씩 습득(?)하고있음... 애니를 위해...ㆀ) 2005/09/23 데오늬 홍헤홍헤~늦게나봐 봤습니당 힘내세용~ 2005/09/25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1/18 페이지 ▶ 후기 [35] 실탄 2005/11/273Kb 779 ▶ 346 - End Of Atlantis(2) <최종화> [14] 실탄 2005/11/2714Kb 813 ▶ 345 - End Of Atlantis(1) [9] 실탄 2005/11/2712Kb 536 ▶ 344 - 전설의 융기(8) [2] 실탄 2005/11/2710Kb 398 ▶ 343 - 전설의 융기(7) [6] 실탄 2005/11/2713Kb 385 ▷ 342 - 전설의 융기(6) [14] 실탄 2005/09/187Kb 1205 ▶ 341 - 전설의 융기(5) [23] 실탄 2005/08/2711Kb 972 ▶ 340 - 전설의 융기(4) [9] 실탄 2005/08/038Kb 905 ▶ 339 - 전설의 융기(3) [18] 실탄 2005/07/2712Kb 804 ▶ 338 - 전설의 융기(2) [17] 실탄 2005/07/169Kb 914 ▶ 337 - 전설의 융기(1) [20] 실탄 2005/07/1410Kb 1001 ▶ 에피소드 - My doctor [33] 실탄 2005/05/308Kb 1676 ▶ 336 - 이별의 전주곡(3) [33] 실탄 2005/04/3012Kb 1808 ▶ 335 - 이별의 전주곡(2) 실탄 2005/04/3012Kb 786 ▶ 334 - 이별의 전주곡(1) [2] 실탄 2005/04/3011Kb 839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 1 [2][3][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58088 :: 343 - 전설의 융기(7) 실탄(cruel) 05-11-27 :: :: 12537 지금까지 줄거리 사도와 아틀란티스가 하나의 뿌리였다는 사실과 마더의 목적이 우 주 탄생의 비밀을 밝혀낼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었음이 밝혀진다. 유젤은 마더의 소원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얻 게 되나, 레이온은 그것을 훔쳐 유진우의 몸으로 소생함으로써 유젤 의 모든 것을 손에 넣는데 성공한다. 잠깐의 사랑 후 레이온은 죽고, 혼자가 된 유젤은 최후의 결전을 위 해 아틀란티스 대륙으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대리석 바닥과 마찰하는 밑창 소리가 무겁게 울린다. 멀리서부터 알싸하고 고운 향기가 풍긴다. 그것은 살의, 달콤한 죽음 의 냄새. 새장 속의 새들은 지저귐을 멈춘 채 숨을 죽이고 있다. 동물의 예민 한 감각으로 침입자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끼이익 하고 문이 천천히 열렸다. 조금씩 벌어지는 틈으로 매서운 기 운이 쏟아져 들어왔다. 침묵을 지키던 새들이 미친 듯 지저귀기 시작했다. 여태껏 가려져 있 던 살기가 여과 없이 들이닥치면서 공포에 질린 것이다. 뚜벅뚜벅. 유젤은 거리낌없이 방에 들어섰다. 천천히 사방을 둘러보던 유젤은 침대 시트를 가만히 손가락으로 만 져보았다. 방안에서는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방을 비운지 상당히 오래된 듯 싶었다. 초조해진 유젤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설마 카뮤가 눈치채고 피 신한 걸까? 일단 그녀는 방을 빠져나왔다. 복도에는 경비병 하나 눈에 띄지 않았 다. 왠지 모르게 불길해졌다. 고요한 이 침묵은 누군가가 고의로 꾸 민 것만 같았다. 복도를 따라 달리던 유젤은 인기척을 느끼고 서둘러 벽에 등을 밀착 시켰다. 그리고 주의 깊게 상대를 살피다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초췌한 안색의 키큰 여자를 약간 더 작은 여자가 부축해 걷고 있었 다. 유젤이 놀란 건 작은 쪽의 여자 얼굴이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다. 유빈이 죽었던 그날 함께 있었던, 유빈의 죽음을 막지 못한 아틀란티 스의 인물. 아이의 울음소리가 기억나자 동시에 강한 증오가 치밀었다. 하마터면 그대로 뛰쳐나갈 뻔한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가슴이 다시금 찢어지듯 아파 오기 시작했으나, 유젤은 이를 으스러 지도록 악물고 참아 냈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야….' 유젤은 기척을 죽이고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서슬퍼런 눈으로 유하 의 등을 노려보며, 몇 번이고 피가 나도록 할퀴고 싶은 충동을 참아 가면서. 유하는 제시를 부축한 해 황궁 밖으로 나갔다. 밖은 시야가 훤히 드 러나기에 유젤은 망설였으나, 유하의 모습이 멀어지자 황급히 뒤따라 갔다. 황궁 뒤에 위치한 절벽을 크게 돌아가자 높이가 수 미터는 될 법한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육중한 철문이 동굴을 가로막고 있었으나 잠기지는 않았는지, 유하가 옆으로 밀자 쇠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 두 여자의 모습이 삼켜지듯 동굴로 사라졌다. 그러나 유젤은 선뜻 발 을 들여놓지 못했다. 시커먼 암흑에서부터 풍겨 나오는 불길한 내음. 섬칫한 공포가 역겨운 거부감을 그녀의 가슴에 심어놓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는 일.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그녀 는 발을 내딛었다. 차가운 물방울이 얼굴에 떨어지는 감촉에 제임스는 눈을 떴다. 온몸 의 뼈마디가 으스러진 듯 고통스러웠으며, 손가락 하나 까딱일 수가 없었다. 간신히 눈을 뜬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동굴 내부 같은 풍 경에 시야에 들어왔다. 자연적인 냄새가 전혀 없는 광채만이 동굴 내 부를 밝히고 있었다. 새카만 무기질의 암석을 타고 차가운 물방울이 똑똑 바닥에 떨어졌 다. 무심코 물방울을 따라 눈을 돌리던 제임스는 등을 보이고 서 있 는 청년을 발견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청년의 등에서부터 풍기는 기도는 심상치 않았다. 제임스는 그가 누군지 눈치채고 무심결에 신음을 흘렸다. "바드로3세…." "이제 깨어났나?" 나지막하지만 날카로운 음성이 뒤를 돌아본다. 어지간한 사람은 간단 히 죽일 수 있을 듯한 지독한 눈빛이 노려본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에 제임스는 조금 안도하 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느꼈다. "이곳은… 어디입니까? 왜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습니까?" "비밀의 호수다. 태고의 비밀이 잠들어있는 곳이지." 묵직한 절망을 느낀 제임스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얼굴에서 희망 의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의례를 치를 겁니까? 헌데 왜 나는 이곳으로 데려왔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자신을 왜 굳이 데려왔느냐는 말투에 카뮤는 피식거렸다. "시치미를 떼도 속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아니야. 엘리우 스." "나는 엘리우스가 아닙니다." "고작 마기를 다른 곳에 감추었다 해서 네놈이 엘리우스라는 게 들 통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나?" 무언가를 알고 있는, 그래서 비아냥거리는 음성이었다. 화들짝 놀란 제임스는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한껏 비웃음을 감추지 않은 채 카뮤는 덧붙였다. "처음에는 감쪽같이 속았다. 네놈과 니콜라스, 둘 중 누가 엘리우스 인지 부하들도 감을 잡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얼마 전 아버지의 복수 를 위해 니콜라스를 죽인 후로 어떻게 된 건지 알게 되었지." 제임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당혹함만이 떠올랐다. "이상했지. 난 분명히 눈앞에서 니콜라스 베르노를 죽였다. 하지만 니콜라스 베르노의 생명반응은 사라지지 않았어. 육신이 재로 변해 사라졌는데도 말이야.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 "그만-!" 이를 악물고 제임스는 비명처럼 외쳤다. 죽음. 그 아이가 죽었다고 제멋대로 지껄이고 있는 눈앞의 남자가 역 겹고 증오스러웠다. 분노를 깨물다 못해 흘린 피가 하얀 턱을 타고 흘러 옷깃을 붉게 물 들인다. "도대체,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를 괴롭혀야 만족할 겁니까? 당신네 민족들은 어디까지 우리에게 속죄를 요구해야 속이 시원한 겁니까?"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눈물 그 이상으로 분한 마음만이 그의 원통함 을 대변해주고 있을 뿐. 그러나 카뮤는 말이 없다. 비웃음기마저 사라진 차가운 냉소로 그를 훑어보기만 할 뿐이다. 얼음을 문지른 듯 차갑게 분노가 식어버린다. 정제된 열기 위에는 증 오 대신 허탈함만이 내려앉는다. 제임스는 고개를 떨구었다. 목소리가 떨리듯 새어나왔다. "아틀란티스의 황태자인 당신은 진실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초대 엘리우스는 아틀란티스의 배반자가 아니라 희생자였습니다." "그랬지. 선조 아틀란티스인들의 더러운 욕심에 희생된 제물이었지." "일만 년 가까이 당신들에게 쫓기며 참으로 지긋지긋했습니다. 잠이 들 때면 수천 번도 더 내 자신이 난자당하던 기억이 떠올라 악몽을 꾼단 말입니다. 그 고통을 압니까? 아냐구요!" 수천 번이 넘는 환생을 반복하며 각인된 죽음의 기억. 낙인과도 같은 악몽은 삶의 고리를 갈아타도 결코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묵묵히 제임스를 바라보던 카뮤의 입에서 쓸쓸한 음성이 새어나온다. "업보라는 것, 숙명이라는 것. 그것들은 사람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 시하고 이끌어주지만, 그것 이상으로 힘들고 아프게 하지." 무게 가득한 목소리는 아련한 상실감을 자아낸다. "약 1200년 전이었나? 1300년 전이었나? 그때 그대는 일곱 살에 불 과한 어린 남자아이였지. 살려달라 울부짖는 그대의 가슴을 손수 꿰 뚫으면서, 나 또한 견딜 수 없이 착잡했다. 운명은 그대를 민족의 배 신자로 몰아넣고 나로 하여금 수천 년에 걸쳐 그대의 목숨을 취하도 록 했지.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이들은 그대의 죽음에 환호했으나, 나는 피비린내로 가득한 내 손을 바라보며 염증을 느꼈다." 제임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지금 카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그의 놀라움을 이해한다는 듯 카뮤는 씁쓸히 웃음을 띠었다. 냉소도 아니고 비정함도 없는, 상대를 가엾이 여기는 처연한 미소였다. "수천 번도 더 난자당하던 기억 때문에 괴롭다고 했나? 나는 수천 번도 더 죄 없는 이를 죽여야 했던 기억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한 번 의 생을 마감할 때마다 이것으로 끝이길, 다시는 눈을 뜨지 않기를 바라고 바라고 또 바랬다. 그러나 신은 나에게 결코 안식을 주지 않 았어." "당신… 설마…." "생을 반복해온 것은 그대뿐만 아니다. 신의 이 놀음이 끝날 때까지 우리 모두는 영원히 쳇바퀴를 돌아야 할 운명이야. 하지만." 카뮤의 안광이 시퍼렇게 빛났다. 운명을 저주하고 신을 증오하는 자 만이 가질 수 있는, 지독한 심연으로 가득한 눈동자. "이쯤에서 그만 연극은 끝내기로 한다. 더 이상 신의 장난에 놀아날 필요는 없다. 이제야말로 아틀란티스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되찾을 때이다." 허공으로 높이 들려진 카뮤의 손에서 황금빛 섬광이 흘러나왔다. 눈 이 부시게 강렬한 빛이 동굴 내부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유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부축에 의지해 이를 악물고 걷던 제시는 눈이 부신 나머지 얼굴을 찡그렸다. 각막이 타버릴 것 같은 강한 빛이 저쪽에서부터 뿜어 나오고 있었다.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다. 다가오면 죽는다. 온몸을 에워싼 성스러운 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했다. 둘은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 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유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저쪽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빛은 그녀마저도 거부했다. 그녀는 안간힘을 써가며 빛의 저항을 무 력시키려 노력했다. 태풍을 거스르는 나무처럼, 바닥에 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다리를 억지로 끌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잔뜩 긴장한 채 맥을 둘러싸고 있던 아틀란티스인들은 멀리 지평선 에서 솟구치는 흰 빛의 기둥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기둥은 하늘을 지 탱하듯 창공과 지평선을 수직으로 길게 잇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진다. 저 빛은 일만 년의 세월 동안 그들이 기다 려온 구원의 빛줄기였다. "오오…." 클랙은 감격을 참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를 따라 모든 이들이 빛의 기둥을 향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해수가 비치는 창공을 새하얗게 물들이며, 빛은 그들의 머리 위를 따 스하게 비추었다. 밑바닥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따스한 느낌에 니콜라스는 조용히 눈을 떴다. '어… 나는 죽었는데…?' 마지막으로 기억이 끊어지던 순간 가슴에 남아 있던 죽음의 통증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시력을 잃었는지 아니면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형체를 잃었는 지 눈앞은 그저 새하얗기만 하다. 그러나 조금씩, 어렴풋하긴 하지만 조금씩 무언가가 잡힐 듯 보이기 시작한다. 사물이 형체를 되찾아가는 건지 시력이 돌아오는 건지는 알 수 없다. 몸이 무척 가볍다. 당장이라도 하늘을 날아갈 수 있을 듯 하다. 날개 만 있다면. 저쪽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보인다. 붉게 빛나는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 불안과 혼란이 담긴 녹빛 눈동자를 통해 그제야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누나에게, 나는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성대가 존재하지 않는 듯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니, 인간의 성대가 존재하지 않는 듯 언어 가 나오지 않는다. '뭐야…?' 눈앞이 조금씩 밝아지며, 다른 사람들의 모습도 드러난다. 에메랄드 빛 옷을 걸친 청년의 모습이 발아래 보인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청년이 자신을 죽인 아틀란티스의 황태자임 을 깨달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증오가 생기지 않는다. 감정 그 자 체가 메말라버린, 아니 텅 비어버린 듯한 느낌이다. 생소한 기분에 당황한 니콜라스는 그제서야 자신을 하염없이 쳐다보 고 있는 인물의 눈동자를 알아차렸다. 다른 누구보다도 간절한 눈빛 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그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 제일 늦었다. '당신은… 누구?' 초췌한 안색의 소년, 아니 이제는 청년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것 같은 인물이 주르륵 눈물을 흘린다. 낯설지 않은 느낌에 가슴이 욱신거린 니콜라스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지금 자신에게는 손이 없다는 걸. '날…개?' 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붉은 깃털로 뒤덮인 날 개가 존재하고 있다. 그의 온몸은 붉은 깃털로 뒤덮여 있어, 흡사 불 의 새를 연상케 한다. 전신에서 뿜어지는 열기로 주변이 일그러져 보인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놀란 니콜라스는 꿈이기를 바라며 제임스를 내 려다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눈물을 흘릴 수 없는 눈동자에 핑그르르 눈물이 맺힌다. 아마도 그것은 열기에 일그러진 공기가 만들어낸 신기루였을 지도. 「주피엘.」 어떤 목소리가 영혼을 울린다. 처음 듣는, 하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음성에 니콜라스는 가슴이 아팠다. 「레온…?」 목소리는 잠시 말이 없다. 스치듯 떠오른 추억에 니콜라스는 황급히 물었다. 「레온? 맞지?」 목소리. 그것은 오래 전 친구가 전하는 반가움의 표시. 니콜라스는 제임스를 주시했다. 그의 눈동자에 숨어 있는 고대의 기 억을 들여다보려 했다. 마음을 보호하듯 감싸고 감싸고 또 감싸고 있 는 벽을 하나씩 헤집어 나갔다. 오랫동안 잃고 있었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와 자신은 친구 였다. 그는 금발의 천진한 소년이기도 했고 자신은 에메랄드 빛 깃털 을 뽐내는 아름다운 매이기도 했다. 그는 온화한 인상의 노인이기도 했고 자신은 붉은 머리칼을 지닌 귀여운 소녀이기도 했다. 그는 모험을 좋아하는 용감한 전사이기도 했으며, 자신은 용맹을 상 징하는 커다란 표범이기도 했다. 그는 호기심 많은 귀여운 소녀이기 도 했으며, 자신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제이기도 했다. 그는 누명을 쓰고 사람들에게 쫓기는 반역자였으며, 자신은 그의 하 나밖에 없는 친구였다. 빛 바랜 영상 필름이 흘러가듯, 세월의 잡음이 섞인 대화가 끊어질 듯 말 듯 치직거리며 들린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우리가 죽게 되든 그들이 멸망하게 되든 이번 에 결정 나게 될 거야.」 「어째서 이 아이에게 그런 가혹한 운명이….」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어.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약속할게. 내가 소 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아이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어.」 자신이 예전에 했던 말이다. 자신이 예전에 들었던 말이다. 어째서 그동안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나는 이제 공명신수의 힘을 봉인한다. 그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네 몸에 잠시 숨는다. 이것 밖에는 아틀란티스의 눈을 피할 방법이 없구 나. 미안해, 세레스….」 by eden 세레스, 차세현(제임스 해론)의 친어머니입니다. 엘리우스로 몰려 오래 전 죽은 인물이죠. 고치기 지우기 목록 블스 뜨악, 올라왔네요!! 2005/11/27 te군 군대간다는 소문은 구라였던가..!(믿은거냐!) 2005/11/27 Pias 드디어.. 드디어어! 기다린 보람이..ㅜ_ㅜ.. 2005/11/27 꼬마코린 우우;; 2005/11/27 텐시노 드디어 군대 가시는 건가? 2005/11/27 피에수투 한달동안 들락날락 거리다 정말 군대간줄 알고 발길을 끊었드랬죠.. 오늘 문득 생각나 혹시나 하고 들려보니 아하~낚았을세! 기다렸습니다!하핫~ 2005/11/27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1/18 페이지 ▶ 후기 [35] 실탄 2005/11/273Kb 779 ▶ 346 - End Of Atlantis(2) <최종화> [14] 실탄 2005/11/2714Kb 813 ▶ 345 - End Of Atlantis(1) [9] 실탄 2005/11/2712Kb 536 ▶ 344 - 전설의 융기(8) [2] 실탄 2005/11/2710Kb 398 ▷ 343 - 전설의 융기(7) [6] 실탄 2005/11/2713Kb 385 ▶ 342 - 전설의 융기(6) [14] 실탄 2005/09/187Kb 1203 ▶ 341 - 전설의 융기(5) [23] 실탄 2005/08/2711Kb 972 ▶ 340 - 전설의 융기(4) [9] 실탄 2005/08/038Kb 905 ▶ 339 - 전설의 융기(3) [18] 실탄 2005/07/2712Kb 804 ▶ 338 - 전설의 융기(2) [17] 실탄 2005/07/169Kb 914 ▶ 337 - 전설의 융기(1) [20] 실탄 2005/07/1410Kb 1001 ▶ 에피소드 - My doctor [33] 실탄 2005/05/308Kb 1676 ▶ 336 - 이별의 전주곡(3) [33] 실탄 2005/04/3012Kb 1808 ▶ 335 - 이별의 전주곡(2) 실탄 2005/04/3012Kb 786 ▶ 334 - 이별의 전주곡(1) [2] 실탄 2005/04/3011Kb 839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 1 [2][3][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58089 :: 344 - 전설의 융기(8) 실탄(cruel) 05-11-27 :: :: 9580 빛의 기둥에 휩싸여 있던 카뮤가 조용히 눈을 감는다. 가볍게 쥐어진 주먹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와 빛의 기둥에 침투하기 시작한다. 거대한 불사조의 모습을 되찾은 니콜라스를 넋을 잃고 바라보던 유 젤은 깜짝 놀랐다. "그만 둬!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카뮤는 슬그머니 눈을 뜨고 유젤을 돌아보더니 피식 웃는다. 그녀가 숨어있었다는 사실쯤은 눈치채고 있었는지 조금의 동요도 없다. 둥그런 보호막이 카뮤를 감쌌다. 유젤은 힘을 모아 응축해 쏘았지만 보호막은 간단히 흘려버렸다. 무엇의 접근도 허용치 않겠다. 보호막은 마치 그렇게 외치듯 시뻘건 혀를 낼름거리며 서서히 크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차세현! 뭐해! 보고만 있을 거야!" 보다못한 유젤은 제임스의 멱살을 쥐며 외쳤다. 그러나 그는 반쯤 혼 이 빠진 얼굴로 카뮤가 <마기>를 지배해가는 광경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지금 이 녀석은 완전히 인형이나 다름없다. 유젤은 주저 없이 제임스 를 놓아버리고 외쳤다. "맥! 빨리 여기로 와!" 맥만 여기로 온다면, 저런 녀석쯤은 쉽게 박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리고 니콜라스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젤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러나 맥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그 명령에는 따를 수 없습니다.' "뭐? 너 미쳤어?" '반복합니다. 그 명령에는 따를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본 기체는 ST 기관의 동력을 외부공급모드로 전환합니다. 출력 100%까지 앞으로 30초 남았습니다. 반복합니다. 지금부터 본 기체는….' "뭐하는 거야! 너 미쳤어! 내 말을 들으란 말이야!" 유젤은 악을 쓰듯 목이 터져라 외쳤다. 땀방울이 맺힌 얼굴로 마기를 다스리고 있던 카뮤는 그녀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간신히 만든 듯 힘겨워 보이는 미소였다. "소용없습니다. 지금 맥은 신의 계시를 따르는 중이니까요." 유젤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이 되었다. "뭐?" "본래 맥은 당신을 위해 아담이 만든 것. 허나 그 아담의 탄생에까지 관여한 신이 맥에게 계시 하나 내리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되겠지요." "무슨… 무슨 소리야!" "이해 못하셨습니까? 맥과 마기, 당신과 나, 그리고 엘리우스가 여기 모인 것은 만 년 전,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정해진 운명이란 말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유젤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해야 올바를 것이다. 그녀는 단지 조금 행복해지 고 싶었을 뿐이다. 신의 계시니 운명이니 시나리오니 뭐니 하는 빌어 먹을 것들은 알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느끼고 싶지도 않았다. 붉디붉은 기운에 휩싸인 니콜라스는, 아니 '니콜라스였던 것'은 조금 씩 의식을 잃어갔다. 마기의 힘을 완전히 손에 넣은 카뮤는 몸이 부 서지는 통증을 견뎌가며 맥의 ST기관과 공명했다. 맥의 시스템은 외부의 간섭을 제거하고 파일럿의 명령을 따르려 최 대한 노력했다. 허나 지구를 다스리는 거대한 의지 앞에 조그만 컴퓨 터의 저항은 개미의 움직임보다 미미했다. 마침내 ST기관의 제어권은 카뮤에게 넘어갔고, 끝이 없는 막대한 에 너지가 쏟아져 나와 빛의 기둥에 휘감겼다. 빛은 구원의 상징처럼 널리 널리 퍼져나갔다. 아틀란티스인, 그들 모 두는 무릎을 꿇고 구원이 하사되기를 기도했다. 창공의 푸름에서 시작하여 들판의 광활함을 지나 거리의 조그만 돌 멩이 하나까지 전부 쓰다듬던 빛은 마침내 대륙을 휘감으며 하나로 합쳐졌다. 유젤은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동굴은 금방이라 도 무너질 듯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동굴이 아니라 이 대륙 전체가, 대륙을 떠받들고 있는 지반 전체가 떨리는 것이었다. 거대한 대륙이 조금씩 움직인다. 심해의 깊은 곳에서부터 파동이 일 어난다. 일만 년의 세월을 용트림하듯, 해수면까지 순식간에 당도한 파동은 푸른 폭풍으로 솟구치며 햇살에 산산이 부서진다. 높이 수십 미터가 넘는 해일에 휘말린 배들은 순식간에 뒤집혀 깊은 바다로 가라앉는다.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륙은 조금씩 조금씩 상승한다. 한 점에서 부터 시작된 해일은 인근의 모든 섬들을 집어삼킨다. 물방울이 찬란하게 부서진다. 만 년의 세월 동안 아틀란티스 대륙을 보호해온 보호막이 태양이 만들어낸 창공 아래 거침없이 모습을 드 러냈다. 거짓말처럼 빛이 사라졌다. 공중으로 부유한 카뮤는 대륙에서 제일 높은 산보다 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끝이 없는 수평선. 지상에 나올 때마다 보았던, 너무나 가지고 싶었 지만 눈동자에 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던 광경. 그것이 손을 내밀 면 잡힐 듯 발 아래 펼쳐져 있다. 카뮤는 천천히 아래로 하강했다. 암갈색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아 시 름을 잊은 얼굴로 언제까지고 수평선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렸을 적 이 바위에 앉아 중얼거렸던 소원 ― 지금 이 자리에서 수 평선을 바라보고 싶어했던 소망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폐하…." "제나르 경?" 돌아보지도 않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던 카뮤는 이윽고 덧붙였다. "술을 다오. 술이 마시고 싶다." "여기…." 제나르는 공손히 잔에 술을 따라 내밀었으나, 카뮤는 잔은 본 체 만 체 하고 술병을 빼앗듯 쥐었다. 그리고 병 꼭지를 물고 목마른 사람 처럼 벌컥벌컥 마셨다. 황족의 예법에 어긋나는 행위였으나 제나르는 군소리하지 않았다. "크큭, 크크큭…." 갑자기 카뮤는 미친 듯 웃기 시작했다. "크크큭, 크하하… 크하하하-!" 왜 웃음이 나오는지 그는 몰랐다. 유쾌해서, 무엇이 유쾌한지도 모르 면서 그저 유쾌해서 목이 터져라 웃음을 터트렸을 뿐. 스튜 대통령은 바쁘게 회의실로 향했다. 조금 전 받은 보고 때문에 그는 이성이 멎기 직전이었다. 회의실에는 긴급히 달려온 학자와 장관 몇몇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 통령은 앉는 것조차 생략하고 황급히 물었다. "그게 사실이오? 대륙이 하나 솟았다는 게?" "그렇습니다. 여기 위성 사진을 보시지요." 안경을 낀 50대의 학자가 몇 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위성에서 찍은 그 사진들은 해일이 일어나는 것부터 시작해서 거대한 대륙이 대서 양에 솟아오르는 장면을 순차별로 보여주었다. "당장 조사팀을 파견해야 합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미 눈치챘을 것 입니다. 적국이 이 대륙을 점거하는 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 야 합니다." "동부 지방에 해일 피해가 극심합니다. 서둘러 구호부대를 파견하고 시민들을 구해야 합니다." "이 대륙의 처분 방안이 구상될 때까지 불순분자들이 점령하지 못하 도록 군대를 파견해야 합니다." "해일 때문에 최소 오만 명 이상이 사망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 다. 대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군대를…." "시민들을…." 순식간에 쏟아지는 의견만큼이나 스튜 대통령의 머리 속도 엉망진창 이 되어있었다. 역사상 전례 없는 이 엄청난 사건은 세계의 패권 구도에 획기적인 선을 그을 것이다. 지리적인 군사적 이점은 따로 제쳐놓더라도, 신대 륙에 어떤 자원 보고가 묻혀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매스컴에는 최대한 비밀로 하라고 명령하겠지만, 사건이 사건이니만 큼 대중이 알게 되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다. 천연자연 그대로 보존해 야 한다는 주장과 타국보다 빨리 이권을 차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국론이 분열될 것이다. 반대 입장을 다독거릴 방안을 생각해야 하고, 불순분자들이 신대륙을 멋대로 이용하려는 것을 막아야 하고, 해일로 피해를 입은 시민들의 불만을 가라앉힐 정책도 구상해야 했다. 말 그대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럼 우선적으로 대서양에서 훈련 중인 제1함대를 급히 파견하기로 하지. 그리고 침수지에는 구호부대와 구호물자를…." 여기까지 말을 하던 대통령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다 가 흠칫 놀랐다. 그를 제외한 모두가 쓰러져 있었다.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 찰나 차가운 금속이 목덜미에 닿는 게 느껴졌 다. 그것이 총이라는 것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얌전히 있어." 낯선 청년의 목소리다. 그가 사람들을 기절시켰음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너는 누구냐?" "아틀란티스 제국의 외무재상인 마리오라고 한다. 지금부터 이 행성 의 지배권은 우리가 돌려 받을 것이다. 그 1차 작업으로 우선 미합중 국의 모든 군사력을 몰수한다." 이해할 수 없는 소리이다. 허나 '아틀란티스'라는 단어만큼은 똑똑히 알아들었다. 대통령은 신대륙이 솟은 사건, 청년이 밝힌 아틀란티스 제국이라는 말, 그리고 이야기에나 나오는 바다로 가라앉은 대륙을 순간적으로 떠올렸다. 그러나 무어라 외치기도 전에 현기증을 느끼고 의식을 잃었다. 세계 각국에 파견돼있던 아틀란티스인들은 대륙이 솟아오르자마자 재빠르게 움직였다. 고위권력자를 세뇌시켜 자신들 뜻대로 움직이게 했으며, 함대를 집결시키고 군사기지를 장악하는 등 세계의 무력을 빼앗았다. 어림잡아도 천 척은 훨씬 넘어가는 어마어마한 수의 군함이 대서양 으로 집결했다. 지상인들이 지닌 이빨과 발톱은 완전히 빼앗았다. 이 제 지상인들의 생사여탈권은 그들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카뮤는 여전히 암석에 앉은 채 수평선을 바라보며 실시간으로 전달 되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때 산중턱에 난 조그만 동굴에서 누군가가 터덜터덜 걸어나왔다. 핏기가 가신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따를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 유젤이었다. 부하들이 일제히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으나, 카뮤는 손을 저어 그만 두게 했다. "경들은 모두 물러가라." "하오나 폐하…." "물러가라고 하지 않았나?" 거부할 수 없는 군주의 명령에 부하들은 불안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물러났다. 유젤은 말없이 카뮤의 뒤에 섰다. 이토록 짙은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데도 돌아보지 않는 그가, 지독하게 미웠다. "니콜라스는… 어떻게 된 거지?" "마기요? 마기는 아마 소멸했을 겁니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죽어…? 어째서…?" "유감이지만, 예정돼있던 일이니까요." 순간 유젤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손아귀에 순식간에 힘을 응축한 그녀는 카뮤의 목을 힘껏 내리치려 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방패가 형성돼 그녀의 공격을 막아냈다. 카뮤는 천천히 일어나 살기로 이글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주시했다. "모든 것은 예정돼있던 일입니다. 마기의 소멸도, 아틀란티스 제국의 부활도. 그리고 내가 이 제국의 군주, 나아가서 이 혹성을 지배하게 되는 것까지도요. 아마 당신은 나의 반려자로서 내 옆에 존재하게 될 겁니다." "예정? 웃기지 마!" "사실만을 말했을 뿐입니다."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릴 거야." 녹색 눈동자가 진한 살기를 품고 이글거린다. 지독한 죽음의 향기가 그녀로부터 풍겨나오기 시작한다. "이미 그대가 막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그래도 막고 싶다면…." 카뮤는 차가운 미소를 띠고, 전투 자세를 취하며 힘을 끌어올렸다. "나를 죽이십시오." by eden 고치기 지우기 목록 Pias 우아아, 최고, 최고! 역시 기다린 보람이 있군요! 2005/11/27 Elment ㅠ_ㅠ 너무 오랜만입니다! 2005/11/28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1/18 페이지 ▶ 후기 [35] 실탄 2005/11/273Kb 779 ▶ 346 - End Of Atlantis(2) <최종화> [14] 실탄 2005/11/2714Kb 813 ▶ 345 - End Of Atlantis(1) [9] 실탄 2005/11/2712Kb 536 ▷ 344 - 전설의 융기(8) [2] 실탄 2005/11/2710Kb 398 ▶ 343 - 전설의 융기(7) [6] 실탄 2005/11/2713Kb 383 ▶ 342 - 전설의 융기(6) [14] 실탄 2005/09/187Kb 1203 ▶ 341 - 전설의 융기(5) [23] 실탄 2005/08/2711Kb 972 ▶ 340 - 전설의 융기(4) [9] 실탄 2005/08/038Kb 905 ▶ 339 - 전설의 융기(3) [18] 실탄 2005/07/2712Kb 804 ▶ 338 - 전설의 융기(2) [17] 실탄 2005/07/169Kb 914 ▶ 337 - 전설의 융기(1) [20] 실탄 2005/07/1410Kb 1001 ▶ 에피소드 - My doctor [33] 실탄 2005/05/308Kb 1676 ▶ 336 - 이별의 전주곡(3) [33] 실탄 2005/04/3012Kb 1808 ▶ 335 - 이별의 전주곡(2) 실탄 2005/04/3012Kb 786 ▶ 334 - 이별의 전주곡(1) [2] 실탄 2005/04/3011Kb 839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 1 [2][3][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58090 :: 345 - End Of Atlantis(1) 실탄(cruel) 05-11-27 :: :: 12305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유젤은 곧바로 카뮤를 공격했다. 날카로운 빛줄기가 허공을 가르자 카뮤는 재빨리 방어막을 펼쳐 공 격을 막아냈다. 상쇄시켰다지만 양팔의 뼈가 으스러질 듯한 충격이 고스란히 남았다. 힘에 눈을 뜬 그녀의 공격은 조금도 거침이 없었다. 기관포처럼 쉴새 없이 퍼부으며 카뮤의 목숨을 노렸다. 공격하면 막고, 막으면 다시 공격하고, 쉴 새 없는 공방의 긴장이 팽 팽하게 유지되었다. 폭우처럼 끊이지 않을 것 같던 유젤의 공격이 일순 멈췄다. 그러나 살의까지 멎은 것은 아니었다. "왜 반격하지 않지?" "그대가 다치는 것을 바라지는 않으니까요." "내가 널 살려둘 거라 생각하지 마. 살고 싶으면 반격해." "나를 살려주고 싶습니까? 왜 반격하라고 말하지요?" "저항도 하지 않는 상대를 죽이고 싶진 않아서야." 완전히 폐허가 된 주변 풍경은 무시무시한 공방이 이루어졌음을 말 해주고 있다. 바위는 가루가 되었고, 나무는 전부 재가 되었다. 이곳 저곳에는 큼지막한 구덩이가 패여 있다. 그렇지만 카뮤는 그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낸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깨끗한 차림이었다. 옷자락 하나 잘려나가지 않은 멀쩡함 이 유젤의 자존심을 더욱 상하게 했다. "저항해. 그렇지 않으면 죽어." "그대는 나를 죽일 수 없습니다." 대답 대신 이번에는 좀더 강한 공격이 돌아왔다. 카뮤는 피식거리며 간단히 받아내고는, 재빠르게 유젤의 뒤로 돌아갔다. 등을 빼앗긴 유젤은 황급히 피하려 했으나, 어느새 카뮤의 오른팔은 그녀의 목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남자 같지 않게 고운 손가락은 조롱하듯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 모릅니다. 그대가 아무리 고귀한 인간이라 하나, 긴 세월 동안 쌓인 우리의 한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완벽하게 제압 당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죽일 수도 있을 것이 다. 패배를 직감한 유젤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카뮤는 키득 웃으며 그녀 의 허리를 두 팔로 안고 냄새를 맡듯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당신은 참으로 사랑스럽고, 강해요. 당신은 우리 누구보다 훌륭한 여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퍼뜩 의문을 느낀 그녀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는 찰나였다. "오랜 소원을 이루게 된 것을 축하하오, 아틀란티스의 황제여." 진중한 표정을 띠며 다가오는 노인의 모습에 유젤은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그는 사도의 수장, 시리우스였다. "감사합니다. 뮤의 수장이시여." "그대의 오랜 소망을 이루었으니, 이제 그대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되 겠군. 애석한 일이오. 그대 같이 뛰어난 인물이 이 혹성의 지배자가 될 수 없다는 건." "나는 저 태양의 빛을 이 대륙에 뿌리게 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이 이상의 미련은 없습니다." 더욱 더 알 수가 없다. 의아함을 넘어서 당혹함을 느낀 유젤이 입을 열려는 찰나,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카뮤의 손에서 힘이 스르 륵 빠졌다. 카뮤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자 유젤은 풀려났다는 안도감보다는 의 아함을 느끼고 그를 살폈다. 숨을 몰아쉬며 괴로워하던 그는 억지로 고개를 들고는 웃음을 만들었다. "그대는… 나를… 죽일 수 없습니다…. 나는 그대에게 죽을 운명이… 아니니까요…." "뭐야? 지금 나를 놀리는 거야? 갑자기 왜 그래?" 놀란 음성이지만 걱정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다. 시리우스가 서둘러 달려와 카뮤를 살피고 탄식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허허…."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유젤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주변을 살 피다가 흡 하고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사람들이 모두 쓰러진 채 숨 을 몰아쉬며 죽어가고 있었다. 대륙을 타고 흘러오는 바람에는 생명 의 기운이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마더의 뜻이다. 아틀란티스 대륙은 이미 지상에서는 살아갈 수 없게 끔 진화했다. 그중 몇몇은 마더의 가호를 받아 지상에서 활동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지. 아틀란티스는 마더에게 도전했으므로 그 대가를 받는 것이다." "카뮤는… 모든 게 마더의 시나리오라고 말했는데요? 그게 어째서 마더를 거역한 게 되죠?" "마더에게 거역하는 행위 또한 마더가 정해놓은 시나리오. 우리 모두 는 마더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날 뿐이다." 대륙 전체가 죽어가고 있다. 태양의 축복에 노출되고도 살아갈 수 있 는 것은 극히 소수. 어디를 둘러보아도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뿐만 아니라 나무와 강, 풀 한 포기, 심지어는 자그마한 돌멩이 하나하나까지도 태양의 축복을 견디지 못해 죽어가고 있다. 아틀란티스에게 태양은 이미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변한지 오래였던 것이다. 어이가 없었던 유젤은 황급히 카뮤를 붙들고 물었다. "당신은 이렇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어? 말해봐! 알고 있었던 거야?" 이미 입술 색이 푸르게 변한 그가 희미하게 끄덕인다. 유젤은 더욱 기가 막혔다. "알고 있었으면서 도대체 왜 그랬어?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으면 적어도 죽지는 않을 수 있었잖아?" "이게 바로… 우리의 운명…." 죽어가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웃기지 마.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남의 손에 멋대로 놀아 나는 게 살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해? 그깟 태양이 뭐라고 자기 백성 들이 모두 죽을 걸 알면서 그랬던 건데?" 그가 가여운 것이 아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뿐이다. '살릴 방법이 있습니다.' 느닷없이 맥이 말을 걸어오자 그녀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맥 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원거리에서 그녀의 마음으로 직접 대화를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살리다니? 어떻게?" '아틀란티스 대륙을 둘러싼 보호막은 해저에 있을 때는 대륙을 보호 하지만 공기에 노출되면 오히려 대륙의 모든 것을 죽입니다. 이 보호 막을 제거하면 대륙은 다시 살아납니다.' "어떻게 없앨 수 있는데?" '저를 쓰시면 됩니다. 제 ST기관의 자이오 다이아몬드를 이용하면 제거할 수 있습니다.' 잠깐의 망설임이 유젤의 얼굴에 떠올랐다가 이내 차가운 비정함으로 변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아틀란티스는 내 원수야." '마더의 뜻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유젤님은 소원을 이룰 수 없을 겁니다.' 확고하다.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유젤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도대체 마더는 어디까지 모두를 갖 고 놀 작정인 건가? 우주 탄생의 비밀이 그렇게나 알고 싶었단 말인 가? 더 이상 마더에게 놀아나는 것은 지긋지긋하다. 하지만 여기서 거부 하면 마더는 '그'를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그토록 다시 만나 보고 싶어하는 사람을 영원히 죽음의 늪에서 잠재울 것이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해야만 한다. 모든 것은 도구. 그녀 자신도 도 구. 도구는 도구답게 이용당하는 것이 운명. 지긋지긋할지라도 그것 이 바로 섭리의 궤도. "그렇게… 해." 가슴을 파헤치는 기분으로 승낙을 선언했다. 마더의 뜻을 따르는 것 은 그녀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것. 소원을 이룬다는 것은 유빈을 영 원히 포기하는 것.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보고싶어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 하나를 잃고 하나를 얻는다. 그것은 태고에서부터 미래까지 이어지는 불변의 법칙. 저 멀리, 저 멀리서 커다란 빛의 기둥이 솟구쳐 오른다. 아마도 저기 에 맥이 있을 것이다. 끝없이 올라갈 것 같던 빛의 기둥은 하늘의 어느 부분에서 막힌다. 막힌 부분을 중심으로 하늘과 아틀란티스 대륙을 분리하고 있던 경 계가 새하얗게 물들어간다. 포근한 빛이 내리쪼이며 모두의 가슴을 어루만진다. 대륙을 감싸던 둥근 막이 새하얀 알처럼 변한다. 빛의 기둥이 사라진다. 기둥과 보호막이 맞닿아 있던 부분을 중심으 로 금이 번지기 시작한다. 굵게 퍼져나가던 금은 순식간에 창공의 전 부를 뒤덮는다. 알껍데기가 부서지듯, 대륙을 뒤덮은 막이 미세한 파편으로 깨져나간 다. 파편은 새하얀 눈송이로 변해 천천히 땅에 내려앉는다. 죽어가던 모든 이들이 정신을 차린다. 살아났다는 기쁨도 태양을 되 찾았다는 감격도 없다. 오로지 경외만이 그들의 얼굴을 차지하고 있 다. "눈이다…." "오오, 눈이다…." 이제껏 긴 세월 동안 대륙을 감싸고 있던 보호막이 눈처럼 미세한 파편으로 변해 떨어지고 있다. 일만 년의 부화기를 견디고 세상의 빛 을 받아들이게 된 그들을 축복하듯이. 쉴 새 없이 내리는 눈―파편―을 멍하니 바라보던 유젤은 카뮤를 살 폈다. 그러나 그는 평안한 얼굴로 숨이 끊어져 있었다. "바드로3세는 아틀란티스 대륙을 지상으로 끌어올리는데 자기 생명 을 바쳤다. 오랜 소원을 이루었으니 편히 갔을 거다." 시리우스의 말 따윈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슬픔도 아니고 후련 함도 아닌, 허탈함에 가까운 표정으로 멍하니 카뮤의 표정만을 들여 다보았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군요.' 맥의 음성이 머리 속에 울리자 유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맥?' '이제는 유젤님의 소원을 이루어야 할 차례지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미안함, 아니 오히려 죄책감이라고 해야 어울릴 듯한 기분이 그녀의 가슴을 가득 메웠다. 그녀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서는 맥의 자이오 다이아몬드가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맥의 죽음을 의미한다. '미안… 미안해.' '미안해하실 것 없습니다. 이것 또한 저의 운명. 그리고 저는 살아있 던 게 아니라 움직이고 있던 것뿐이니까요. 움직이는 것은 언젠가 정 지하기 마련입니다.' 유젤은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꽉 쥐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풀 위로 떨어졌다. '그 대신 마지막이니 제가 좀 멋대로 행동하겠습니다. 그래도 괜찮겠 지요?' 무슨 소리냐고 반박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맥과의 교신이 끊어지 며, 생소한 공허함이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유젤은 벌떡 일어나 달렸다. 맥이 있는 곳으로 쉴 새 없이 달렸다. 눈물이 고여 뺨을 적셨지만 닦지 않았다. 마침내 맥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맥의 육중한 다리에 기대며 한 껏 외쳤다. "맥! 맥! 대답해! 맥! 대답해! 대답하란 말이야!" 그러나 맥은 대답이 없다. 작은 구동음마저 들리지 않는다. 유젤은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본래 차가웠을 맥의 표면 금속 이 이 순간 더욱 싸늘하게 느껴졌다. 맥은 죽었다. 그녀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스스로 심장을 잘라내고 정지했다. 유젤은 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흐느꼈다. 가끔 자신의 뜻을 거역하 기는 했어도 무조건적인 아군이었던 녀석이 죽었다. 아버지를 잃고, 아이를 잃고, 그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와는 사뭇 다른 공허함에 가슴 이 쓰라려 견딜 수 없었다. 그때 눈앞에서 희미한 빛이 일어났다. 그녀는 눈물 젖은 눈으로 가만 히 바라보다 두 팔을 뻗었다. 빛이 사그라졌다. 그녀의 팔에는 조그마한 어린아이가 안겨 있었다. 바로 유빈이었다. 멍하니 아이를 바라보던 유젤은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잃어버린 하 나를 되찾은 느낌.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포근함이었다. "엄마…." 유빈이 눈을 떴다. 유젤은 나지막하게 되물었다. "왜?" "나 나쁜 꿈 꿨어. 엄마랑 떨어지는…." "저런, 많이 무서웠어?" "응. 무서웠어."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그건 그냥 꿈일 뿐이야. 그래… 꿈일 뿐이 야…." 어째서 맥이 그 사람이 아닌 유빈을 되살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 나 지금은 그 사람을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지독한 자기 상실 감보다는, 아이를 되찾았다는 모성의 기쁨에 몸을 맡기는 게 현명할 듯 하다. 눈물을 삼키며 그녀는 맥의 뜻을 이해했다. 자신은 처음부터 그 사람 을 되찾을 생각만 했지, 한 번도 아이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맥에 게 영혼이 있다면 저 세상에서 그것을 꾸짖을 것이다. 누군가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돌아보자 시리우스가 온화한 표정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유젤은 그에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 또한 신의 계시에 놀아난 하찮은 피조물. 자신이나 그나 다를 것은 없지 않은가. "자이오 다이아몬드는 세상에 하나가 더 있다." "네?" 유젤은 말뜻을 이해 못한, 아니 이해했지만 믿어지지 않아 멍청한 표 정으로 되물었다. 시리우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푸른 빛깔로 빛나는, 귀여운 소녀의 모습을 본따 만든 커다란 보석이었다. 익숙한 형상이다. 보석을 건네 받은 유젤은 가슴 한구석에 아련히 피 어오르는 그리움에 다시 눈물을 흘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자이오 다이아몬드는 이제 더 이상…." "이것은 7년 전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서해에 잠들어 있었다." 유젤의 안색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그렇다면 유전의 정체는…?" "그래. 그 아이가 지금의 널 위해 7년 전 마련해둔 것이다." 시리우스는 쓸쓸한 표정으로 일어나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멀 리 수평선을 주시하는 그의 뒷모습은 무겁고도 쓸쓸해 보였다. "이걸로 전부 끝난 것인지 아니면 더 남아있는지는 모른다. 너는 나 보다 많은 걸 알고 있을 테지만…. 어디까지가 마더의 뜻인지는 나 같은 구인류는 구분할 수 없다. 그저… 이제 그만 끝나기만을 빌며 살아갈 뿐이다." 시리우스. 사도의 수장. 자기의 유일한 딸을 죽여야 했던 노인. 그는 최근에 이르러 자기가 신의 뜻에 따라 움직여왔음을 알았을 것 이다. 신에게 분노를 품었지만, 분노하는 행위 또한 신의 계략이 아 닌가 끊임없이 의심했을 것이다. <이브>는 그를 한없이 미워했다. 하지만 유젤은 그에게 미움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가여웠다. 시리우스는 유젤을 돌아보지 않으며, 지나가듯 작게 중얼거렸다. 아 주 힘들게. "미안했다. 정말 미안했다, 제이야." 진심으로 사과하는 저 행동만큼은 마더의 의도가 아니기를. 속으로 그렇게 기원하며 유젤은 작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아버지." by eden 엔딩이 아니에요~ 아직 뒷 이야기가 더 남아있습니다~ 오늘 안으로 다 끝내버리겠습니다~ 몇 시간 후를 기다려주세요~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고치기 지우기 목록 곰 와 아담의 상처는 약간 새드엔딩이라서 안타까웠는데... ㅎㅎ 기대되네여.. 2005/11/27 실탄 저에게 하실 말씀(짜증이든 격려든 뭐든 간에)이 있으시면 오늘 전부 다 말해주세요~ 오늘이 지나면 저는 여러분들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되거든요~ 2005/11/27 미르카도르 아아....오랜 기간동안 아틀란티스에서 유젤과 같이 잠수를 하셨던 실탄님.... 드디어 부양 하셨군요 -_- 2005/11/27 냄비뚜껑 이제 2부가 거의 끝나가는 군요. 축하드립니다. 근데 3부는 계획 있으신가요? 있다면 여기 연재 하실 건가요? 2005/11/27 실탄 이게 3부인데요?;; 2부(이브의 눈물)는 오리지널 유젤이 지구로 가출해 레이온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그러니까 아담의 상처가 끝난 시대적 배경을 기준으로 5년 후의 이야기입니다.; 2005/11/27 눈팅독자 지금까지 리플하나 안올렸지만 재밌게봤던 유령독자입니다. 오랜만이에요. 근데 오늘이 지나면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게 또 무슨 일이 있으신건가요? 군대?(...) 어쨌든 참 재밌는 글이였고 나중에도 글 쓰실 여유가 있다면 재밌는 글 써주세요. 2005/11/27 Pias 역시..! 최고! 이야..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엔딩 기대치 최고. 마지막까지 힘내세요! 2005/11/27 꼬마코린 아아...마지막 하나 클릭하기가 두렵다.다시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4부도 있던가요?붉은 은하수...유젤은 등장안할 것 같지만 서도..; 2005/11/27 미르카도르 그 대통령의 y소설 말씀이신겝닊;;; 2005/11/28 Name Password 총 260 개의 게시물 1/18 페이지 ▶ 후기 [35] 실탄 2005/11/273Kb 779 ▶ 346 - End Of Atlantis(2) <최종화> [14] 실탄 2005/11/2714Kb 813 ▷ 345 - End Of Atlantis(1) [9] 실탄 2005/11/2712Kb 536 ▶ 344 - 전설의 융기(8) [2] 실탄 2005/11/2710Kb 396 ▶ 343 - 전설의 융기(7) [6] 실탄 2005/11/2713Kb 383 ▶ 342 - 전설의 융기(6) [14] 실탄 2005/09/187Kb 1203 ▶ 341 - 전설의 융기(5) [23] 실탄 2005/08/2711Kb 972 ▶ 340 - 전설의 융기(4) [9] 실탄 2005/08/038Kb 905 ▶ 339 - 전설의 융기(3) [18] 실탄 2005/07/2712Kb 804 ▶ 338 - 전설의 융기(2) [17] 실탄 2005/07/169Kb 914 ▶ 337 - 전설의 융기(1) [20] 실탄 2005/07/1410Kb 1001 ▶ 에피소드 - My doctor [33] 실탄 2005/05/308Kb 1676 ▶ 336 - 이별의 전주곡(3) [33] 실탄 2005/04/3012Kb 1808 ▶ 335 - 이별의 전주곡(2) 실탄 2005/04/3012Kb 786 ▶ 334 - 이별의 전주곡(1) [2] 실탄 2005/04/3011Kb 839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 1 [2][3][4][5][6][7][8][9]▶ 다음 페이지 새 글쓰기 이름 아이디 제목 내용 PimangBoard, Copyright Fresian / Skin by Silvercat.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ITLE ▶58093 :: 346 - End Of Atlantis(2) <최종화> 실탄(cruel) 05-11-27 :: :: 14315 그 후 이야기. 맥의 희생으로 아틀란티스 대륙이 되살아나긴 했으나 모든 아틀란티 스인들이 죽음의 손길을 피한 것은 아니었다. 에날도스가 약한 아틀 란티스인 일부는 사망하기도 했으며, 그 중에는 제나르 대신의 아들 인 오스카도 끼어 있었다. 니콜라스는 마기의 힘을 소멸당한 채 살아남았다. 그는 과거를 조금 도 기억하지 못했으며, 유젤이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 녀에 대한 감정만큼은 그대로 남아있어, 그 후로도 계속 그녀의 절친 한 동생으로 남는다. 제임스 해론은 자신이 니콜라스를 책임져야 한다며 친동생으로 삼아 함께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다닌다. 가끔 그가 전해주는 소식은 유젤의 즐거움이기도 했다. 바드로3세의 뜻에 따라 아틀란티스는 유젤을 차기 황제로 받들기로 한다. 비록 원수지간이나 이것이 마더가 정한 운명이라 생각한 유젤 은 아틀란티스의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로 한다. 아틀란티스 제국은 공식적으로 건국을 선언하고 지상의 다른 나라들 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지상인들은 신대류의 융기와 전설인 줄 만 알았던 아틀란티스의 존재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유젤의 뜻에 따라 아틀란티스는 지상인들의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 니라 그들과 함께 대등한 위치에서 나아가기로 방향을 바꾼다. 아틀 란티스에 존경과 소속감을 느낀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많아지며, 여러 나라들이 하나둘씩 아틀란티스의 지배를 받기를 자청하게 되고, 그래 서 지구 전체가 아틀란티스 혹성으로 통합하게 되지만, 그것은 아직 훗날의 일이다. 유젤이 닥터였음을 알게 된 한국은 보복을 두려워하나 유젤은 관심 조차 두지 않는다. 장기판의 졸에 불과했던 한국에 보복하는 것은 아 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평화유지를 우선적인 목표로 내세운 아틀란티스는 세계 각국과 활발 한 교류를 펼쳐나가며 막대한 영향력을 유감 없이 발휘하게 된다. (아틀란티스 대륙이 솟은지 약 1년 후 ― 유젤 디야스 마르셸 황제 의 즉위식이 있기 이틀 전날) "힘들다, 힘들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진우는 쓰러질 듯한 몸을 침대에 던졌다. 정말 로 육체가 피곤한 것은 아니다. 일주일을 철야로 일을 했으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정상적이라는 학습을 통한 행동이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귀찮아서 내던질까 하다가 마지못해 받았다. "여보세요." 「진우씨? 지금 어디에요?」 "집인데요?" 「뭐에요? 오늘 거래처와 미팅 약속 있는 거 몰랐어요?」 아뿔사! 생각해보니 어제 미스 리가 중요한 미팅이 있으니 스케쥴을 비워놓으라고 얘기했던 것도 같았다. "미안해요. 깜박 잊고 있었어요. 지금 갈게요." 「어휴, 진우씨 집에서 서울 시내까지 어느 세월에 오는 줄 알고 여 태껏 늑장 부르고 있어요? 최대한 서둘러도 30분은 늦을 것 같으니 까 나중에 잔소리 들을 각오 단단히 해둬요!」 미스 리는 앙칼진 목소리로 외치고는 전화를 끊는다. 최근 자기가 마 누라라도 되는 양 구는 태도가 달갑지만은 않지만, 어쨌든 잘못한 것 은 자신이었기에 진우는 투덜거리면서도 일어났다. 서둘러 준비를 마친 그는 현관문을 닫다 말고 멈칫했다. 쓸쓸한 실내 공기가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얼마 없었다. 1년 전, 길가에 쓰러져 있는 것을 우연히 경찰이 발견해 구해준 때로부터 그의 기억은 시작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유진우라는 것만 기억했을 뿐, 과거 어떤 인물이 었는지, 심지어는 몇 살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정부로부 터 새로운 주민번호를 받아 새 신분으로 여태껏 살아왔다. 스스로에 관해서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는 다방면에 걸쳐 놀라운 지식을 갖고 있었고 지능도 다른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뛰 어났다. 아직 대학생의 신분이었지만 이미 세계가 주목할 만한 논문 을 몇 차례 발표했고, 현재는 유명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근무하는 중 이었다. 매력적인 여성들도 많이 접근해왔고 젊은 나이에는 과다할 정도의 부와 명성을 손아귀에 넣었지만, 그는 항상 허전하고 외로웠다. 기억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허전함과 함께 가슴을 도려낼 듯한 괴로 움이 느껴진다. 오늘처럼 아무도 없는 집을 혼자 나설 때면 더욱 그 러했다. "후아…." 2층 난간에 올라간 그는 심호흡을 하며 집 앞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 보았다. 왠지 모르게 바다가 좋았던 그는 직장과 멀리 떨어진 곳임에도 불구 하고 이곳 외딴 바닷가에 2층 집을 짓고 줄곧 살아왔다. 허전함에 견 딜 수 없을 때는 바다를 바라보면 조금은 나아진다. 그때 무언가 평소와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 시야에 잡혔다. "어? 저게 뭐지?" 모래사장에 누군가 서 있다. 이쪽을 돌아보지 않아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체구가 작고 긴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는 것으로 보아 여자가 분명했다. 바다와 같은 신비한 느낌의 푸른 머리카락에 진우는 저도 모르게 그 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쓸린 그는 난간을 내려 와 여자를 향해 헐레벌떡 뛰었다. 여자의 바로 뒤까지 당도한 그는 잠시 멈추고 머뭇거렸다. 생전 알지 못하는 여자한테 뭐라고 말을 건단 말인가? 여자가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푸른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며 뺨 에 달라붙은 모습은 무척 고혹적이었다. 영혼을 빨아들일 듯한 싱그 러운 초록색 눈동자는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다. 이제 갓 스물쯤 되었을까? 기억에는 없지만, 그는 저도 모르게 굳게 확신했다. 자신은 분명 이 여자를 알고 있다고. "저기…." 우리 언제 만난 적이 있지 않나요, 라고 물으려는 찰나 여자가 먼저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를 와락 껴안았다. "…보고 싶었어." 그 순간 그는 여태껏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허전함이 씻은 듯이 사 라지는 것을 느꼈다. 슬프지 않은데, 오히려 기쁜데, 아무것도 기억나 지 않는데 이상하게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 볼을 적셨다. 그녀의 이름은 유젤 디야스 마르셸. 전세계에서 모르는 인물이 없는, 다름 아닌 아틀란티스의 황제라는 신분을 가진 대단한 여자였다. 자신이 그런 대단한 여자와 연인 사이였다는 것도 놀라운데 더군다 나 둘 사이에 애가 둘씩이나 있었단다. 자신의 정체가 다름 아닌 '처 자식을 내팽개쳐두고 신선놀음이나 하고 있던 놈팽이'라는 것을 깨달 았을 때 그는 이런 바보 자식 도대체 뭐 하고 있었냐고 한동안 자학 하기도 했다. 유젤은 보통 사람과는 달리 여러 가지 신비한 부분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괴물 취급받는 게 싫어 다른 사람들에게 숨겨 왔던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것 등― 점들과 대체로 흡사했다. 둘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모두 둘이었는데, 첫째는 이제 만으로 3살 이 된 남자아이였고 둘째는 태어난지 두 달 정도 된 여자아이였다. 다른 신생아에 비해 지나치게 크기가 작은 것이 흠이었지만 그것은 이상하게 봐줄 부분도 아니었다. 근데 웃기게도 첫째라는 놈이 글쎄 처음 아버지를 보자마자 대뜸 한 다는 소리가 이거였다. "웃기지 마. 난 당신을 아버지로 인정할 수 없어. 우리 엄마 빼앗아 갈 생각은 꿈에서라도 하지 마!" 처음에는 뭐 이런 못된 녀석이 다 있냐고 생각했다. 기억에도 없는데 이런 당돌한 녀석을 섣불리 아들로 받아들이는 건 무리였기 때문이 었다. 그나마 잘 울지도 않고 얌전하고 방긋방긋 웃던 둘째 딸은 쉽게 자 신의 아이로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태어난지 일 년째 되던 날 딸은 그를 기겁하게 했다. "아빠. 저 결혼하고 싶어요." 남들에 비해 성장이 빠르다 하나 이제 생후 일 년 밖에 되지 않는 '조그만' 딸이 결혼하고 싶다고 했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똑똑하 고 영리해 성인 수준의 언어능력을 구사하고 청소년 이상의 정신 성 숙도를 가진 딸이었으니까. 여기까지는 조숙한 딸의 애교로 보고 웃 어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넌 아직 어리니까 좀더 큰 다음에 이야기해보자, 하고 웃으며 넘어간 다음날 그는 하루만에 제엄마 못지 않게 성장한 딸의 모습을 보고 기겁해야만 했다. "이제 결혼해도 되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냐고 게거품을 물며 부랴부랴 아내와 의 논했지만, 요새 바쁘다고 잘 놀아주지도 않는 그의 아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깟 성장 좀 빨리 한다는 게 대수야? 그래,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니, 제니?" 제니는 숨넘어가기 일보 직전인 아버지(라고 해봐야 또래로 보인다) 를 모른 체 하며 빙긋 웃었다. "그게요…." 아틀란티스 황제의 즉위식이 끝났다. 즉위식을 축하하기 위해 아틀란 티스를 방문했던 앤드류는 먼발치에서 그녀를 보기만 했을 뿐, 아는 체를 하기는커녕 심지어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파티가 한창인 홀 분위기를 뒤로한 채 그는 쓸쓸히 조용한 황궁 정 원을 거닐었다. 사람 하나 없는 가운데 힘차게 솟아오르는 분수만이 그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혼자 여기서 뭐해?" 웬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뒤돌아보았다. 이제 갓 여섯 살쯤 되었을 법한 조그만 소녀가 빙긋 웃으며 서 있었다. 간단히 대답하고 관심을 거두려던 앤드류는 황급히 소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심플하지만 고급스러운 느낌이 묻어나는 옷, 어딘지 모르 게 상대를 압도하는 분위기, 무엇보다도 풀잎처럼 예쁘장한 녹색으로 반짝이는 눈동자와 하늘빛 머리카락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결코 낯설지 않은 이미지였다. "너는 누구니?" "사람들은 날 제니라고 불러." 앤드류는 신음을 삼켰다. 제니는 유젤 디야스 마르셸 여제의 둘째 딸 의 이름이다. 과거 앤드류가 그녀로부터 배신감을 느끼게 됐던 계기 이기도 하고. 그런 상대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앤드류는 복잡한 머 리 속이 들통날까봐 두려운 나머지 표정이 어색해졌다. "그냥… 걷고 있어." "많이 외로워 보이네. 파트너가 없어서 그런 거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른의 세계는 어린아이가 이해할 수 없는 법이야, 꼬마 아가씨." "내가 파트너 해줄까?" 어린아이다운 천진난만한 제안에 앤드류는 긴장을 풀고 그만 쿡 웃 음을 터트렸다. "미안하지만 내 허리까지도 안 오는 쬐끄만 꼬마아이를 파트너로 삼 을 정도로 궁핍한 것은 아니라서. 좀더 크면 오렴." 앤드류는 웃으며 등을 돌렸다. 한참 어린아이인데 왠지 모르게 두근 거린다. 누나의 딸이라서 그럴까?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던 가…. "이래도 내가 꼬마 아가씨로 보여, 앤드류?" 조금 전과는 확연하게 변한 음성이 그를 붙잡았다. 어린아이가 아닌, 성숙한 여자의 음성이었다. 앤드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저 뒤를 돌아보는 간단한 행위 에 불과할 뿐인데 이상하게 긴장되었다. 눈앞에는 꼬마아이는 온데간데 없고, 숨막힐 듯 뇌쇄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가 서 있었다. 그것도 거의 알몸으로! 부끄러움을 타지도 않는지, 여자는 몸이 커져 찢어진 아이 옷을 이리 저리 바로잡으며 빙긋 웃음을 띠었다. "이래도 당신 파트너로 자격이 부족할까?" 앤드류는 입이 떡 벌어졌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단 말인가? 여자가 미소를 띠며 걸음을 내딛었다. 어느새 앤드류 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새하얗고 길다란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다. 그만큼 여자가 뿜어내는 유혹의 향기는 살인적이었다. "그렇게 올곧은 애정을 가졌는데도 사랑을 보상받지 못하는 게 참 안타까웠어. 난 보통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여자지만, 이런 내 가식 적인 애정이라도 괜찮다면 받을래?"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굳었다. 기시감처럼 뇌리를 강하게 때리고 지 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다정하고, 성실하고… 무엇보다 그 아이를 참 아껴주는 것 같아. 그렇게 올곧은 애정을 가졌는데도 그 남자한테는 질 수밖에 없다는 게 참 안타까워.」 「난 인간을 사랑할 수 없는 여자지만, 너 같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사랑해줘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불쌍하고 너무 가엾거든.」 「알아. 동정하지 말라는 거지? 하지만 동정일 수밖에 없는걸. 나나 그 아이가 너에게 선물하는 사랑은 말이야.」 그때… 그때 누나가 그 말을 하면서 하고 있었던 눈동자. 그 눈동자 와 제니의 눈동자는 똑같이 말하고 있었다. 초월한다는 것은 무조건 행복한 게 아니라고. 앤드류는 제니의 손을 잡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기쁜데, 가슴이 터질 만큼 기쁜데 우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바보같이. "안 돼! 절대 안 돼! 무조건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 어도 안 돼!" 유젤 디야스 마르셸 여황 폐하의 부군께서는 결혼을 허락해 달랍시 고 찾아온 앤드류와 딸 앞에서 게거품을 물며 필사적으로 반대를 외 치고 있었다. 적어도 이십 년은 거뜬히 옆에 끼고 살 줄 알았던 어린 딸을 자신보다 나이도 많은 놈한테 뺏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에덴가(家)에서 그가 지닌 발언력은 미미하기 그 지없는 관계로 간단하게 개무시당했다. "두 사람이 좋다면 나는 반대 없어. 그런데 날 편안하게 장모로 대할 수 있겠어?" 유젤은 결코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닌, 편안한 미소를 띠며 앤드류를 바라보았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앤드류는 쓴웃음을 지으 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누나를 이해한다는 건 예전에 포기했어. 누나는 평범한 사람 이 아니잖아. 이제 그만 나도 날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고 싶어. 그리고 그 사람을 찾은 거고. 그것 뿐이야." 작은 미소를 띠고 있는 제니를 슬며시 돌아보며, 앤드류는 비로소 편 안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유젤의 생일- 그 날은 아틀란티스 대륙은 물론이요, 전세계적으로 축제 분위기였 다. 아틀란티스는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유젤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주요 인사들을 초청해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환호하는 사람들. 멋쩍어 하면서도 그들의 축하를 기꺼이 받으며 행진하는 황제의 가 마행렬. 기아와 분쟁을 비롯한 세계의 커다란 문제를 상당부분 해결해온 아 틀란티스는 전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나라였고, 그 나라의 군주인 유 젤은 모든 이의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다. "생일 축하해요." 꽃다발을 품에 안고 다가온 부군이 유젤을 끌어안으며 따뜻한 키스 를 건넨다. 단둘이 있을 때는 말을 편하게 하지만, 사람들 앞이다 보 니 경칭을 쓰는 것이다. 사람들의 환호가 더욱 커지자 유젤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다. 유젤의 귀에 살며시 입을 갖다댄 그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날 쫓아와 줘서 고마워." 순간 유젤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깃든다.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가볍 게 윙크하고는 쑥스러운지 딸 부부에게로 가버린다. 놀란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던 유젤의 눈동자에 눈물이 조금씩 고인 다. 그녀는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가며 살며시 눈물을 닦는다. 유젤은 후련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눈송이가 조금씩 떨어지며 그녀의 옷 위에 쌓인다. 사람들이 놀라서 웅성거린다. 지금은 눈이 내릴 계절이 아닌데? 눈송이는 점점 굵어지고 많아지며 함박눈으로 변해간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진다. 하늘에서 누군가 내려오고 있다. 길고 긴 보랏빛 머리카락으로 드레 스처럼 알몸을 가린, 여신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눈이 부시게 아 름답고 신비한 여자가. 여자의 사지에는 굵직한 쇠사슬이 채워져 있다. 하늘까지 닿아 있는 쇠사슬은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길었다. 유젤은 말을 잊은 얼굴로 여자를 본다. 여자는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고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더없이 자애로웠다. 「이 아이에게 가호가 있기를….」 여자의 음성은 인간의 음성이 아니었다. 마치 신의 음성처럼, 여기 모인 모든 사람의 머리 속에 그대로 울렸다. 두 손으로 유젤의 뺨을 살며시 감싼 여자는 이마에 키스했다. 그리고 얼굴을 떼어내며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바람처럼 눈송이가 흩날려온다. 그림이 지워지듯, 여자의 모습이 허공에서 서서히 사라져간다. TV를 통해 보고 있던 전세계 인들은 이 말로 설명 불가능한 기이한 현상에 할 말을 잊었다. 유젤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너울거리며 떨어지는 눈송이가 뺨에 닿으며 차가운 느낌을 심는다. 마더의 손길을 기억하듯, 그녀의 손이 닿았던 뺨을 가만히 만지던 유 젤은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어머니." 머나먼 창공 건너편에서 푸른빛이 반짝인다. 그녀의 앞날에 미소를 보내듯이. -끝- by eden 녀석인데 아직 어디에도 연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엄을 2부라 고 오해는 분들이 많은 것 같네요. 여러 가지 비하인드 스토리나 설정들이 많았는데 그것들을 전부 소 화하기에는 아직 제 실력이 미흡했구요. 개인적으로 그러한 부분들을 무척 아쉽게 생각합니다. 소엄을 통해 에덴 시리즈 세계관은 지구인, 지구의 신인류(유젤씨를 시초로 하죠), 그리고 에덴 혹성의 신인류, 이렇게 세 종류의 인류로 나뉘게 되었네요. 전에 한 번 언급했던 붉은 은하수는 이렇게 세 파 트로 출발한 인류의 몇 백 년 후 이야기인데 세계관만 같을 뿐이지 전혀 다른 작품이 될 것이며 무엇보다 정말 쓸 지 안 쓸지 계획이 안 잡혀있습니다.(....) 제가 쓸 차기작은 하등생물이라는 녀석인데 드림워커에 조금 올라와 있으니 어떤 글인지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 보시면 되구요. 현재는 연중이지만 군 복무만 끝나면 리메이크해서 본격적으로 연재할 계획 입니다. 에덴시리즈 풍의 글이지만 에덴시리즈와는 관계가 없어요. 왜 지금 안 쓰고 군 복무 끝나고 쓰냐고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내 일 군대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일입니다. 내일. 그래서 오늘 새벽부터 아무것도 안 하고 필사적 으로 소엄만 썼습니다. 두 달 넘게 글 손에서 놓았는데 그래서 걱정 도 많았는데 시간도 부족할 것 같았는데 해보니까 되더군요. 역시 인 간은 궁지에 몰리면 뭐든 해내는 동물인 것 같습니다.(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시험은 무조건 하루 전날 벼락치기로 치렀다는 것은 죽어도 말못합니다) 아무튼 오늘 이후로 달리는 코멘트는 제가 100일 휴가 나와서 확인 하도록 하겠으니, 지금 못 본다고 아끼지들 마시고 많은 격려의 말씀 부탁합니다.(단 군대에 관한 이야기는 금물! 지금 입대 때문에 속이 메슥거려 아무것도 못 먹을 정도로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있어 요~ 전 굉장히 예민한 성격입니다~) 덧붙여 소엄은 출판 삭제 문제 때문에(여러가지로 제 속을 썩였지요. 좋게 풀리지 않아서 참 게시판이 이상하게 되었죠) 앞부분이 없습니 다. 그런 이유도 있고 여러 가지 다른 이유도 있는 관계로 소엄 게시 판은 제가 휴가를 나와서 삭제할 계획입니다. 그게 100일 휴가일수도 있고 그 다음 휴가일 수도 있고 어쩌면 전역한 다음일수도 있지만, 확실한 건 100일 간은 삭제를 하지 않을 테니 못 본 분들은 그때까 지는 꼭 봐주시길 바라고요. 그럼 이만 준비할 게 산더미처럼 많아서 가보겠습니다! 충!성! by eden 넓은 바다 위로 잔잔한 파도가 바람에 부서지고 있다. 갈매기 끼룩거 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다. 뜨겁게 내리쪼이는 햇볕은 파도를 가르는 날치떼의 비늘에 반사돼 수면 위로 잘게 흩어진다. 대서양. 가슴 터질 듯 넓은 수평선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생 명의 발원지. 창공을 뚫고 빛줄기 하나가 빠르게 날아왔다. 빨갛게 달구어진 대륙 에 휩싸인 채 날아오던 물체는 이윽고 수면 위에 정지했다. 신의 금속이라 불리는 엘레스토늄 재질로 만들어진 로봇, 물체는 바 로 맥이었다. 수면 위로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물고기떼가 놀라 흩어지 는 가운데 그림자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검 게 도색된 잠수함이었다. 이윽고 잠수함의 해치가 열리고 프로메테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는 햇살이 눈이 부신 듯 이마 위에 손을 얹고 허공에 떠 있는 맥을 올려다보았다. "과연…." 찬사와 흡사한 탄식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잠시 후 맥의 콕피트가 열리고 유젤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음을 닫은 듯 차가운 녹색 눈동자가 발치 아래 프로메테우스를 내려다보았다. 한기에 가까운 섬뜩한 느낌이 그의 몸을 꿰뚫었다. 오싹한 기분에 휩 싸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씩 웃기까지 했다. "늦지 않았군요. 남은 미련은 전부 다 정리하셨나요?" 억지로 미소를 만들어보았지만, 유젤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다. 감 정의 흔들림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눈매는 그저 차갑기만 하다. 그녀의 침묵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신비가 느껴진다. 그것은 인간을 깔본다는 것을 넘어서서, 높은 계단을 밟고 선 채로 하등한 존재를 가엾게 여기는 아가페. 쓴웃음이 저절로 그의 입가에 피어났다. 그녀가 저런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므로. "아틀란티스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비로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듣기 좋은 미성이 감미롭게 귓가를 감쌌 지만, 그 아름다움은 공허했다. "곧 자세한 데이터를 맥의 컴퓨터로 전송해드리겠습니다. 바로 여기 서부터 수심 1,300m 되는 지점에는 현대 인류 기술로 인식할 수 없 는 존(zone)이 잇습니다. 20아벨, 즉 3천억 기가와트 가량 되는 에너 지를 그곳에 쏟아부으면 아틀란티스 대륙을 보호하는 방어막을 모습 을 드러냅니다. 방어막을 이루는 에너지와 같은 종류의 에너지막을 형성해 맥을 감싼 뒤 접근하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것들을 알고 있죠?" "레이온이 알려주었으니까요." 처음으로 유젤의 얼굴에 커다란 흔들림이 나타났다. 한순간이었지만, 프로메테우스는 그녀가 비로소 인간처럼 느껴진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무심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당신은 제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아틀란티스가 이길 거 라고 생각하나요?" "아틀란티스는 중요한 인질이라도 잡지 않는 이상 당신에게 100% 패 배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이미 인질이 될 만한 존재가 남아있지 않죠. 승자는 당신이 될 겁니다." 온화한 그의 어투는 그녀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그러나 몹시 정중하다는 그 점이 사람의 비 위를 거스르는 듯한 느낌까지 자아낸다. "아틀란티스가 저한테 무릎꿇게 되면, 그때도 당신은 그렇게 날 똑바 로 바라볼 건가요?" 살짝 노여움을 머금은 어투에 프로메테우스는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당신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던진 고귀한 인간, 받아만 주신다면 저는 기꺼이 당신의 신하가 되겠습니다." "기대하겠어요." 금속이 마찰하는 격음과 함께 콕피트가 닫혔다. 물보라가 첨벙 하고 높이 치솟으며 맥은 수면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거대한 물체가 빠르 게 하강하는 느낌이 잠수함을 뒤덮는가 싶더니 점점 희미해졌다. 맥이 튀긴 물보라에 흠뻑 젖은 채로, 프로메테우스는 한참이 지나도 록 고개를 들지 않았다. 존(zone)에 도착한 맥은 잠시 정지했다. 이윽고 흉부가 시뻘겋게 달 아오르며 엄청난 빛의 에너지가 튀어나왔다. 섬광은 새하얗게 해수를 물들였다. 반경 수십km의 범위 안을 헤엄치 던 심해어는 엄청난 에너지의 파장을 견디지 못하고 소멸했다. 시퍼런 반사광과 함께 스파크가 사방에 튀었다. 생명체는 결코 생존 할 수 없는, 아니 형체를 유지할 수조차 없는 전류가 맥의 주위를 뒤 덮었다.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 그 중심에서 일어나는 막강한 자기폭풍우는 존(zone)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현대 인류의 기술 수준으로는 인식은커녕 그 존재를 증명할 수조차 없는 에너지 통로, 존. 거대한 에너지를 직격으로 얻어맞은 입구 틈 새에서 흘러나오던 파장은 어느덧 육안으로 구별할 수 있을 만큼 뚜 렷이 형체를 갖추어나갔다. 희뿌연 수증기로 변한 해수는 파르스름한 스파크를 일으키며 에너지 의 흐름에 엉켜들어갔다. 강렬한 빛에 휩싸인 심해의 대지는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며 박동하 기 시작했다. 먼지처럼 피어오른 엄청난 대지의 껍질들이 상승하는 해수를 타고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마치 검은 비가 거꾸로 치솟는 듯한 그 광경 은 오싹함을 넘어 차라리 장엄했다. 파동을 그리는 지진을 중심으로 무수한 바위 조각들이 해저 바닥으 로 부서져 떨어졌다. 희뿌연 섬광이 어두운 심해를 물들이는 가운데, 암흑에 휩싸인 무언 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돔형의 벽이었다. 몹시 거대한. 반구의 형태를 한 빛의 벽은 태고의 향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대륙의 모습을 비춰내고 있었다. 벽은 해저의 지평선 끝까지 뻗어있었다. 거대한 대륙을 둘러싼 보호 막 앞에 맥의 존재는 인식할 수 없을 만큼 작았지만, 유젤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아틀란티스 대륙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손끝이 떨리며 잠자고 있던 분노가 곤두선다. 저것은 바로 자신이 불행하게 된 근원,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을 악착 같이 물고늘어지며 방해하는 자들의 보금자리. 그녀는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호흡을 고쳤다. 하지만 떠진 눈 사이에는 여전히 살기가 가득했다. "맥. 들어가자." 「알겠습니다.」 이윽고 빛에 휩싸인 맥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며칠이 지났더라. 열흘은 넘지 않은 것 같았는데. 하지만 열흘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은 제임스에게는 더할 나위 없 이 길게 느껴졌다. 24시간 간수의 감시를 받는 것도, 육체적인 고통 에 시달리는 것도 아닌데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제임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한쪽 발을 단단히 결박한 쇠사 슬이 무겁게 바닥을 긁는 소리를 냈다. 부은 발목에서 통증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 정도 가지고 죽는 소리를 내는 것은 민망하다. 제시의 처지에 비하면 자신은 사치였다. "제시… 괜찮아?" "견딜만해요." 한참만에 옆방에서 제시의 음성이 들려왔다. 반쯤 가사상태에 시달리 는 터라 제임스가 부르는 소리를 제대로 못 들었던 탓이었다. 한쪽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채 감금된 제임스에 비해, 제시는 사지가 벽에 단단히 결박돼있어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감옥 간수 가 남성 우월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제시가 5대 대신급 능력자라는 것 을 고려한 황실의 조치였다. 제시의 사지를 누르고 있는 쇠에는 제각기 붉은 빛을 내는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것은 수호제황석을 가공해 만든 것으로서, 에날도스 를 강하게 억누르는 효과가 있었다. 만약 평범한 쇠였다면 제시는 진 작에 탈출했을 것이다. "미안해요. 내가 힘이 모자라서 당신을 곤경에 빠지게 했군요." 기운 없는 음성이었지만 의식만은 또렷한 듯 했다. 제임스는 어두운 얼굴 가득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제시가 그 지경이 된 건 내가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어." "에날도스는 없겠죠. 하지만 당신에게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두뇌 가 있지 않나요?" 제임스가 잠시 침묵을 지키는 사이, 제시는 여전히 쇠약해진 음성으 로, 하지만 사기를 잃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알고 있어요. 당신은… 아틀란티스 대륙을 소멸시킬 수단을 이미 준 비해놨죠?" "어떻게 알았어?"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자폭 스위치도 없이 이곳까지 나와 단둘 이 오지는 않았겠죠." 피식 웃음이 그의 얼굴에 맺혔다. 자포자기와는 조금도 닮지 않은 미 소였다. "맞아. 난 언제든지 내가 원한다면, 그리고 어떠한 일이 닥친다면 이 곳으로 미사일이 떨어지게 세팅해놨어." "미사일? 고작?" "특수한 미사일이야. 아틀란티스 대륙을 둘러싼 방어막에 작용해서 방어막을 구성하는 에너지물질을 순식간에 분해시키지. 프레온 가스 가 오존을 파괴하는 것과 비슷한 거야." 제시는 여전히 가느다란, 하지만 조금 전보다는 한결 또렷해진 음성 으로 중얼거렸다. "이 대륙은 먼지 하나 못 남기고 소멸하겠군요." "그렇겠지. 난 부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래." "그들이 가여워서인가요? 당신의 어머니를 죽이고, 당신의 인생을 망 가뜨린 그들이?" "당신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제임스는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한참의 침묵이 어색하게 그 둘 사이에 머물렀다. 제시는 눈을 감은 채로 소리 없이 웃음을 띠었다. 벽에 가로막혀 있 어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제임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훤히 느껴지는 듯했다. "그렇다면 1초라도 빨리 마기를 각성시켜요. 공명신수를 제대로 부리 지 못하면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잖아요." 또 엘리우스가 아니라고 부정할 셈일까. 제시는 잠깐 동안 기다렸지 만, 제임스는 한참 동안 굳게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라도 있다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있을 텐데. 미약하게 전해지는 숨소리만으로 그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엘리우스는 최강의 공명신수 마기를 지녀서,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막강한 에날도스를 뿜어낼 수 있지요. 그렇지만 당신은 한 가닥 에날 도스도 낼 수 없는 몸이에요." "…." 힘들게 말을 잇는 제시가 얼마나 절박한 심정인지 느끼는 듯 제임스 는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당신이 엘리우스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마기의 힘이 너무 강하니까… 당신은 마기를 몸 속에 억누르 기 위해 모든 힘을 사용하고 있는 거라고, 그래서 겉보기에는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이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 말이 틀렸나요?" 묵묵히 천장을 올려다보던 제임스는 이윽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건…." 그의 입에서 무언가 말이 떨어지려는 찰나 갑자기 지진이라도 일어 난 듯 감옥 전체가 흔들렸다. 놀란 제임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 고, 제시도 충혈된 눈을 번쩍 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설마… 이건…." 제임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숨길 수 없는 흥분이 그의 숨결에 묻어났다. "보호막이 뚫렸어. 누군가가 침입한 거야."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예언이 있다. 커다란 지진이 대륙을 흔들고, 모두의 염원이 하나로 묶일 때 기적의 메시아가 강림하리라고. 예언은 너덜너덜한 고서적에 수록돼있다.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그 것은 전설일 뿐이라고 코웃음치는 자들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러나 모두가 예언을 믿었다. 예언이 현실이 될 때만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운명의 그 날을 그리며 살아간다. 그리고 임종을 맞이할 때, 자손의 손을 잡고 뒷일을 부탁한다. 자기 대신 운명의 그 날을 지켜봐 달라고. 사람의 수명은 백 년도 되지 않는다. 하나의 행성, 대지, 하다 못해 수천 년을 사는 고목에도 견줄 수 없는 짧은 시간이다. 먼지처럼 짧은 흔적을 수없이 걸쳐 이어가며, 그들은 태양을 기다렸 던 것이다. 결코 잊어버리지 않도록 발버둥쳤고, 염원이 이루어지기를 매일 같이 기도했다. 신이 최후로 허락한 미련, 게이트마저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까마득한 옛날, 진작에 모든 걸 포기하고 잊어버린 채 살아갔 을 것이다. 창 밖을 가만히 내다보고 있던 카뮤는 살며시 주먹을 쥐어 심장에 대보았다.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가슴이 맹렬히 살아있음을, 살아왔 음을 외치고 있다. "우리는 잊어버리지 않았어…. 지금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거 야…." 포기하지 않았기에 지금의 흥분을 느낄 수 있다. 주저앉지 않았기에 지금 이 미칠 듯한 감정의 폭주를 만끽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폐하…." 시종이 부르는 음성에 카뮤는 정신을 차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을 만 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종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카뮤는 이윽고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배자의 웃음소리가 황궁 전체를 울렸다. 강력한 힘이 담긴 그 웃음 소리를 수많은 사람들이 들었다. 모두가 일손을 놓았다. 모두가 황궁 광장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무실 앞 광장에는 무수한 숫자의 사람들이 몰려 바글 거렸다. 그럼에도 조금의 무질서도, 소음도 없다. 카뮤는 집무실 커튼을 걷어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모두의 얼굴에 불안함이 맺혀 있다. 불안함과 함께 미래를 향한 기대 감도 함께 걸려 있다. 그들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대지의 이 격렬한 떨림이 무엇을 의미하 는지를. 카뮤는 웃음을 멈췄다. 냉철함을 씌우지 못한 지배자의 얼굴은 폭발 하기 직전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커튼을 걷어올린 손을 치웠다. 그의 등이 휙 돌아가며 망토가 허공에 휘날렸다. "가자. 우리들의 메시아를 맞이하러." by eden 정말 저질유기체가 에덴시리즈보다 낫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케이군이 슬퍼할 거예요. 고치기 지우기 목록 사케쿠 아틀란티스의 멸망을 기대합니다아. 2005/07/27 DDDDJ 케이군을 기쁘게 만들어 볼까요 2005/07/27 꼬마코린 이제 가루가되는 거다! 2005/07/27 꼬마코린 연재해주셔서 감사해요ㅠㅠ... 2005/07/27 샤이나크 저.질.유.기.체가 더 좋아요^^ 2005/07/27 실탄 유젤 혼자 만으로 아틀란티스를 격퇴하는 것은 분명 무리다. .....하지만 드라군이 출동한다면 어떨까? 2005/07/27 chaosgray 유기체 만세~ 셀군 맥을 격파해버리세 2005/07/27 섬마을김씨 으음...이 놀이 정말 중독성이 강하죠...그치만 실패군요. 2005/07/27 실탄 쳇. 실패네요.-_-; 2005/07/27 darkpheonix 소엄이 더 좋던데 하지만 SCV가 출동한다면 어떨까? 2005/07/27 섬마을김씨 드! 라! 군! 잇힝~~~ 2005/07/27 개똥맛피카츄 저두 소엄이좋아염 -ㅁ-~ 하지만 케리건이 출동하면 어떻게 될까? 2005/07/27 영 소엄이 아직까지 좋아요.. 2005/07/27 꼬마코린 =_=고스트 핵...은 맥이 이미 버텼으니 무효? 2005/07/27 아지다하카 실탄님 인제 슬슬 폭참을 해보시는것이 ㅎㅎ 2005/07/28 bismarck scv 는 미네랄 광산과 가스에서 일해야죠 뭐. 2005/07/28 휘동이 정말~~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 엄소 ㅠㅡㅠ 다음회를 기대 합니다 그리구.....SCV는 최강의 유닛입니다!!! (개스공격 무방비 )(락다운 무방비 ) 그러나!! 초반 SCV 러쉬에는 그누구도 못당한다!! 왜?? 체력이 많은니까!!! 무려 60!! 마린보다 많다!! 2005/07/29 책읽는 곰 에, 에잇! 일은 프로브가 더 잘해요>ㅆ<(쉬지않아도되니까!) 하등생물도 좋지만... 소엄이 더 좋아요~ 맥 파이팅☆!(<=맥팬;;) 2005/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