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치킨]+[주인공이 강한 힘을 숨김] 다가오는 재앙, 시대의 강자들은 자기의 안위만을 도모한다. 홀로 재앙에 맞서는 힘을 숨긴 사내 김성철. 그의 거대한 발걸음에 주목하라...! 주인공이 힘을 숨김 - 로드워리어 ======================================= 프롤로그 악마군단장 베리타스는 생전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공포의 군주라 불리며 모든 이에게 두려움을 안겨다주던 그가 다른 존재에게 공포를 느끼다니. 그에게 공포를 안겨다 준 이는 한낱 인간이었다. 인간 따위는 원래 그의 눈빛만으로 죽일 수 있는 벌레만도 못한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그 앞에 서서 거대한 망치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인간은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고위 악마 발록 100여 마리가 전부 대갈통이 깨진 채 마계의 바닥에 너부러져 있다. 특출나게 화려한 기술도 마법도 없었다. 눈앞에 저 무식한 놈은 오직 망치 하나로 악마들의 골통을 부수고 우악스런 손으로 신체의 일부를 뜯어내고 찢어발겼다. 이제 모든 호위 악마를 쓰러뜨린 인간이 다가온다. “워.. 원하는 게 뭐냐? 인간? 네가 원하는 건 모두 들어...” 거대한 망치가 번개처럼 날아와 악마의 염소 같은 두상을 강타했다. 마계 서열 3위 대악마 베리타스의 양 눈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돌아갔다. 퍽! 퍽! 퍽! 퍽! 퍽! 무자비한 망치질은 대악마의 두상을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납작하게 만든 후에야 멈췄다. 악마는 죽었고 그의 군단은 무너졌다. 남은 것은 모든 악마들의 왕 해서니우스 맥스. 김성철은 불경한 육망성이 새겨진 문을 열어젖히고 악마왕의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응?” 핏빛 왕좌 위에 놓인 건 덩그러니 놓인 싸늘한 시체였다. 어안이 벙벙한 김성철 앞에 희끄무레한 형태가 나타났다. 해서니우스 맥스의 시체와 동일한 형태를 지닌 영체(靈體)였다. - 크하하하하하하! 넌 날 죽일 수 없다! 팔 가라즈의 소유자여. 그렇다. 그것은 영체화 된 악마왕이었다. 김성철에게 맞아죽기 싫어 육체를 버리고 스스로 영체화를 택한 것이다. 그 옆엔 거대한 슬라임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크하하하하하! 나도 죽일 수 없을 걸?” 라고 말하는 슬라임의 정체는 마계 서열 2위 변형자 칸트 에밀. 악마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타락천사의 육신을 버리고 천박한 슬라임의 형상을 취한 것이다. 하지만 김성철의 망치는 악마왕 때와 달리 부산하게 움직였다. 퍽! 퍽! 퍽! 퍽! 퍽! 망치를 한 대 맞아본 칸트 에밀은 한 가지 단순한 이치를 깨달았다. 존나 쌘 한 방 앞엔 모든 잔재주가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사.. 살려줘! 그만! 그만! 끄아아아아악!” 보랏빛 젤리가 이리 튀고 저리 튀더니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가 있던 자리엔 무시무시한 망치질로 인해 땅이 푹 패이고 모락모락 나는 연기만이 피어오를 뿐이었다. - 멍청한 놈. 내 말을 들었어야지. 반면 영체화된 악마왕은 여유만만이었다. - 너는 날 죽일 수 없다. 김성철 또한 알고 있었다. “…….” 영체화된 대상 상대로는 그 어떤 물리공격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물론 보잘 것 없는 영체라면 투기만으로 흩어버릴 수 있지만 상대방은 악마왕이다. 여간한 고위급 마법이 아니면 타격을 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김성철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아니 마법 따윈 키우지도 않았다. 마법을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마법사들을 악마만큼이나 혐오했다. 그 맹점을 악마왕이 노렸다. - 비록 내 군단은 잃었지만 다섯 재앙 중 하나인 내가 살아 있는 한 멸망의 예언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다. 네가 나를 파괴하지 못하듯이 나또한 너를 파괴할 순 없겠지만 나는 네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그 세상은 부술 수 있지. 네가 아무리 같은 인간을 혐오한다고 하지만 모든 인간이 죽고 마물만이 남은 세상에서 넌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마왕의 조롱을 들으며 김성철은 절실하게 느꼈다. 마법이 필요하다. 그것도 존나 쌘 마법이. ======================================= 1. 소환 궁전 대규모 소환진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밤하늘을 음산한 형태로 밝힌다. 희끄무레한 하늘을 보며 김성철은 문득 자신이 이 세계에 처음 소환됐을 때를 떠올렸다. 대략 20년 전의 일이리라. 그땐 정말로 무지하고 무방비했다. 숱한 죽음의 위기를 겪었고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지금에야 저 거대한 소환 궁전에 있는 모든 쓰레기들을 1시간 안에 전부 때려죽일 수 있지만 처음 소환됐을 때 느꼈던 막막함과 공포는 기억 한 구석에 생생히 살아 있다. 그때의 기억을 추스르며 김성철은 소환 궁전의 지하수로로 진입했다. 지하수로 입구 앞엔 늑대 인간 한 마리가 경계를 서고 있었다. “크르르.. 언제 끝나려나. 빨리 내 차례가 와야 할 텐데.” 한때 인간이었던 늑대인간은 인간성을 버리고 야수의 길을 택한 존재다. 천성이 포악하고 잔인한 자들이 택하는 전형적인 타락 코스로 성장 가능성은 지극히 낮지만 빠르고 쉽게 적당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계가 뚜렷한 늑대인간들의 유일한 기쁨이자 삶의 이유는 한때 자신과 같았던 신입 인간을 이빨과 손톱으로 찢어발기는 것이다. 처음 김성철이 소환 궁전에 소환됐을 때 늑대인간은 가장 악랄하고 잔인한 적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 주먹 거리도 안 된다. 김성철은 느긋하게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 늑대인간에게 걸어갔다. “크르르.. 누구냐!” 수로를 지키는 늑대인간이 코를 킁킁거리며 매섭게 뒤돌아본다. 덥썩! 억센 손이 늑대인간의 목을 틀어 잡았다. 늑대인간의 노란 동공이 확장됐다. ‘무.. 무슨 힘이야?!’ 비명조차 내지를 수 없는 압박감 속에서 늑대인간은 미지의 인간이 자신을 들어 올린 상태에서 다른 한 손으로 밧줄을 들고 자신의 목을 휘감는 걸 눈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덜컥! 밧줄이 목에 감긴 채 늑대인간은 나무에 매달린 채 한동안 버둥거리다가 축 늘어졌다. 김성철은 백지장과 펜을 꺼내 백지장 위에 아래의 문구를 휘갈겨 썼다. - 개 같은 세상! “…….” 김성철은 그 백지를 늑대인간의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검게 아가리를 벌린 지하수로를 향해 소환 궁전으로 잠입했다. 어두운 수로를 지나자 횃불이 밝히는 복도가 나타났다. 김성철은 기억을 더듬어 소환광장 쪽으로 향했다. 중간에 경비병 몇 명이 있긴 했지만 그들의 수준으론 김성철의 기척조차 느낄 수 없다. 김성철은 무인지경마냥 궁전 안을 돌파하며 마침내 목적했던 소환광장에 이르렀다. 거대한 소환진이 그려진 소환광장엔 수십 명의 마법사가 모여 소환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대규모 소환. 지구라 불리는 세계의 인간을 반강제로 소환하는 저주받을 의식이다. 한 번의 대규모 소환에 끌려오는 사람의 숫자는 1만 명이지만 이 중에 당당하게 살아남아 소환 궁전을 나갈 수 있는 자는 500명도 채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혹독한 시련 속에서 죽거나 마법학교 연구소재, 혹은 사고파는 노예로 전락한다. 소환 의식이 벌어지고 있는 광장은 총 4개. 청홍백적으로 명명된 각각의 광장 별로 2500명 단위의 인간이 소환된다. 김성철은 백광장을 선택해 숨어들었다. 백광장엔 2백 명에 이르는 소환사와 수호골렘 그리고 병사들이 광장을 지키고 있었고 그 사이로 가증스런 작은 요정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키키키키! 오늘은 어떤 쓰레기 인간들이 나타날까요? 더는 참지 못하겠네요! 쓰레기 마법사들! 어서 빨리 쓰레기 인간을 내놓는 거예요!” 일견 요정처럼 보이는 이 작고 흉측한 붉은 눈의 괴물은 사실 요정이 아니다. 호문클루스. 마법사의 플라스크 안에서 만들어진 인공생명체다. 호문클루스들은 곧 시작될 새로운 소환자들의 선별작업의 진행을 맡는데 이들의 가장 큰 기쁨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 죽어가는 인간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초록 모자를 쓴 호문클루스도 그런 놈들 중 하나인데 오늘은 운이 좋지 못했다. “키키키키! 꼴사나운 신입들을 어떻게 죽여야 잘 죽였다는 소리를 들을까요? 행복한 고민.. 테에에엥?!” 소환진에 정신이 팔린 호문클루스가 뒤로 빨려들듯이 낚아 채여 사라져버렸다. “…….” 호문클루스를 납치한 범인은 다름 아닌 김성철. 호문클루스의 붉은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 어떻게? 평범한 인간 따위가 어떻게 고귀한 나를?!’ 호문클루스는 크기는 갓난아기 정도 크기지만 그 힘과 민첩성, 체력은 평범한 인간의 다섯 배를 웃돈다. 호문클루스 둘이 모여 인간의 사지를 잡아 찢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런 호문클루스가 평범해 보이는 남자에게 허무하게 제압당했다. “퀘스트 로그 내놔.” 김성철이 무뚝뚝한 음성으로 다그쳤다. “퀘.. 퀘스트 로그? 감히 여기가 어디...?! 키이이이이!” 속전속결. 김성철이 호문클루스의 다리 하나를 통째로 잡아 뜯었다. 붉은 피가 사방에 튀었다. “어서 내놔라.” 내놓으라고 말하면서 김성철은 또 다른 다리를 잡아 뜯었다. 죽어도 관계없다. 대체할 호문클루스는 많으니까. 처참한 동료의 시체를 보면 입이 가벼워질 것이다. 팔을 잡아 뜯으려고 할 때 호문클루스가 울먹이며 말했다. “주.. 줄게요! 인간님!” 호문클루스가 다급히 입을 벌리더니 입안에서 빛의 구슬을 토해낸다. 김성철이 그 구슬을 낚아채자 그 앞에 문장이 떠오른다. [ 소환의 광장 퀘스트 목록을 손에 넣었습니다! ] [ 지금 퀘스트 목록을 열어보시겠습니까? ] 김성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빽빽한 글귀가 그의 시야를 뒤덮는다. [ 소환의 광장 퀘스트 목록 ] 사교적인 사람 - 소환 시작 후 10분 이내에 10명 이상과 통성명을 할 것 / 보상 - 불씨 스포츠맨 - 소환 시작 후 3일 이내에 팔굽혀펴기 300개 이상, 런닝 3시간 이상을 할 것 / 보상 - 근력증강의 아령 요리사 - 소환 궁전 퀘스트 중에 제공되는 식재를 3가지 이상 사용하며 요리 완성할 것 / 보상 - 하얀 빵(식량) 3개 ... 호문클루스가 건넨 정보 구슬 안엔 이 소환 궁전에서 달성할 수 있는 모든 퀘스트와 그 조건이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김성철은 그중 자신에게 필요한 퀘스트들을 찾아 헤맸고 곧 하나를 발견해냈다. 관찰주의자 - 소환 궁전 퀘스트 진행 중에 광장 정문의 문구를 소리 내어 읽기 / 보상 - 직관력 +1 ‘직관력은 반드시 올려야지. 저주 받은 것도 있으니.’ 다른 퀘스트를 찾으려고 하자 옆에서 헐떡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인간님... 이제 살려주시는 거죠? 네? 아파.. 아파 죽겠어요.” 두 다리가 뜯겨져 나간 호문클루스다. 그 호문클루스에 대한 대답은... 퍽! 한 방의 자비였다. 김성철은 너덜너덜해진 호문클루스의 시체를 하늘 높이 던져버렸다. 호문클루스의 시체는 쏜살처럼 까마득한 밤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피가 남긴 했지만 관계없다. 곧 인간의 피로 덧씌워질 거니까. “일반뿐인가? 히든 퀘스트 목록은 없군.” 하찮은 호문클루스에게서 얻은 것이다. 이 정도면 감지덕지다. 김성철은 어둠 속에서 때를 기다렸다. 곧 밝게 물든 마법진 속에서 현대적인 복장을 한 사람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소환자들이다. “여기는 어디야?”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방금 전까지 안락한 문명 세계에 있었던 자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을 둘러 싼 새로운 환경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놀라워 할 시간은 없다. 마법사들과 골렘, 위병들이 차례로 사라진 후 흉측한 외모를 지닌 호문클로스들이 남아 인간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키키키키! 인간들! 심판의 대지에 온 것을 환영한다!” 갓난아기만한 괴물들이 주변을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다니자 사람들을 어찌 할 바를 몰라 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자, 휴대폰을 두드려보는 자, 주변 사람들에게 속절없이 묻는 자 등등 반응은 각양각색이지만 처해 있는 상황은 한결 같다. 쥐도 새도 모르게 인간 무리 틈에 끼어든 김성철은 조용히 자신 앞에 떠오를 메시지를 기다렸다. ‘과연.. 성공할까?’ 모든 교단으로부터 파문당하고 마법사의 적으로 선언된 그가 마법을 배울 기회는 거의 없다. 한 놈 잡아 개 패듯 잡아 패서 마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마법을 쓰려면 그에 맞는 클래스부터 얻어야 하고 마법을 쓸 수 있는 클래스를 수여 받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다. 제단이 필요하고 제단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실력자가 필요하며 그리고 적당한 시기와 운을 필요로 한다. 나라 하나 박살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가 마법을 배우려고 하는 게 알려진다면 교단과 마법사들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김성철을 방해하려 할 것이다. 목숨보다 체면을 중히 여기는 꼴통 중의 꼴통들이니 말이다.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 김성철이 생각해낸 것은 공짜로 클래스를 주는 유일한 장소, 바로 소환 궁전이었다. 소환 궁전의 퀘스트를 받을 수만 있다면 마법을 배울 수 있는 클래스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김성철이 선택한 가장 온건하고 피해가 적은 방법이다. 차갑게 가라앉은 김성철의 눈앞에 기적처럼 메시지가 떠올랐다. [ 소환의 궁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 소환 궁전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 [ 곧 전투가 시작되오니 준비하여주시기 바랍니다. ] 됐다. 소환 궁전의 퀘스트가 발동됐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김성철 앞에 또 다른 문자가 떠올랐다. [ 경고! 당신은 죽을 수도 있습니다. ] “죽어? 내가?” 김성철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 1. 소환 궁전 (2) 광장을 둘러싼 벽의 철문이 열렸다. 꾸물거리는 괴생명체가 등장했다. 밤눈이 밝은 한 사내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마귀?” 그의 눈썰미는 정확했다. 하지만 백광장에 평범한 놈이 등장할 리가 없다. 등장한 녀석은 성인남성보다 큰 식인 사마귀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수백 마리가. “자! 쓰레기 인간들! 이제 곧 무기가 하나 나타날 테니 선택하는 거예요! 싸우던가! 도망가던가! 아니면 키키키! 순순히 벌레에게 먹히던가!” 호문클루스들이 춤을 추며 조롱조로 말했다. 군중들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김성철은 달랐다. 차가운 눈으로 자신 앞에 나타날 무기의 출현을 기다린다. 곧 허공 위에 낡은 철검 하나가 나타났다. 검을 만지자 검의 이름이 눈앞에 떠오른다. < 시작의 검 > 등급 : 일반-최하급 분류 : 검 효과 : 없음 비고 : 들고 싸워라. 죽던가. 죽이던가. “오랜만이군. 검을 쥐는 것도.” 오랜 기간 망치만을 들었다. 그렇다고 검을 아주 못 쓰는 건 아니다. 김성철의 검에 대한 숙련 등급은 마스터. 흔히 세간에 최고 등급이라 알려진 그랜드 마스터에 조금 못 치는 숙련도지만 인간 중에선 최고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웅성거림 속에서 김성철은 어둠 속에서 머리 위를 배회하는 투명한 물체를 감정했다. 핏줄이 딸린 투명한 눈알 모양의 소환수다 투명화 마법이 걸려 있어 보통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김성철에겐 하찮은 환영마법 따윈 통하지 않는다. ‘저건 주시자의 눈이군. 솎아내기를 시작한 건가?’ 김성철은 광장을 둘러싼 벽 위에 자리 잡은 널찍한 전망대를 노려보았다. 전망대엔 이쪽 세상에 자리 잡은 놈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주시자의 눈을 통해 싹이 보이거나 ‘연이 있는’ 인물을 골라내는 역할을 하는데 소환 초기인 지금은 윗선과 연이 있는 인물만을 골라내리라. 아니나 다를까 주시자의 눈들이 특정 인물들을 찾아 그 머리 위에 머문다. 일종의 표식이다. ‘주시자의 눈에 하급 퇴치의 술이 걸려 있군. 식인 사마귀 같은 잡것들은 알아서 피하겠지.’ 일부 주시자의 눈은 겉보기에도 용모가 뛰어난 여성과 남성 위에 머물러 있었다. 노예상인의 것이다. 아마도 때가 되면 계약을 제시해 목숨을 담보로 잔혹한 계약을 체결해 무고한 자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것이다. “자자! 쓰레기 인간들! 게임을 시작하겠어요!” 빨간 모자를 쓴 호문클루스가 이죽거리며 인간들 앞에 섰다. 한 사내가 호문클루스를 향해 걸어갔다. “야! 넌 뭐하는 새끼야? 어!” 20대 중반에 적당히 근육이 붙고 날렵해 보이는 사내였다. 현실 세계에선 주먹 좀 쓰고 다닌 모양이다 하지만 여기는 이계다. 현실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공간이다. “쓰레기 인간? 나에게 할 말이라도 있는 거예요?” 빨간 모자를 쓴 호문클루스가 이죽거리며 물었다. 사내는 기가 찬다는 듯 뒤를 돌아보더니 냅다 호문클루스를 걷어찼다. 그런데 그의 체중이 실린 발차기는 간단하게 호문클루스의 앙증맞은 두 손에 잡혔다. “어..? 어?!” 사내의 눈이 경악으로 물든 것도 잠시. 주변에 있던 호문클루스들이 득달처럼 몰려와 사내의 사지를 각각 나눠 잡았다. 칼을 휘둘러보지만 무의미한 저항이다. “이.. 이거 놔! 놓으라고! 씨발!” “쓰레기 인간이 주제를 모르고 설치니 우리가 버릇을 가르쳐 주겠어요!” 빨간 모자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서 우리들은 법인 거예요! 법을 거스르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호문클루스들이 키득거리며 사내의 사지를 각각 잡고 일제히 잡아 당겼다. “끄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 속에 사내의 몸이 여러 개로 찢겼다. 뒤이어 여성의 가파른 비명이 울려 퍼졌고 장내는 공포에 잠식됐다. 호문클루스는 인간들의 공포를 음미하며 거만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우리가 하는 말을 듣는 거예요. 저기 보이는 문으로 전력으로 뛰어가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기 보이는 사마귀 아가씨가 여러분을 보양식으로 먹을 테니까요!” 광장 주변에 처져 있던 결계가 무너졌다. 굶주린 사마귀 떼들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그제야 사람들은 깨달았다. 그들 앞에 놓인 운명이 무엇인지. 아우성과 함께 대탈주극이 이어졌다. 이천 오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일제히 거대한 문을 향해 달려갔다. 밀고 미치는 와중에 약자들은 넘어져 군중의 발에 짓밟혔고 거기서 죽음을 맞이했다. 군중 틈에서 김성철은 차분히 앞으로 나아갔다. 눈에 익은 광경이다. 호문클루스의 레퍼토리가 바뀌지 않았다면 출구 쪽엔 또 다른 불청객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끄어어어어어어!” 출구 쪽에서 사람의 손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인간의 형체를 한 괴인이 튀어나왔다. 아귀다. 인간의 살을 탐한다는 점에서 좀비와 같지만 자아가 있다는 점에서 인간에 어느 정도 가까운 존재. 하지만 그들의 식욕은 이성 위에 있다. 굶주린 아귀들은 싱싱한 인간을 보자 득달처럼 달려들었다. 가장 앞서가던 체력 좋은 남자들이 아귀들에 붙들려 산 채로 먹히기 시작했다. 목불인견의 참상이 눈앞에 펼쳐지자 선두의 사람들은 멈춰 섰다. 하지만 그들 뒤에는 이천 명이 넘는 군중들이 있다. 뒤에서 끝없이 몰려드는 군중들은 앞 사람을 뒤에서 밀어댔다. “밀지 마! 밀지 말라고!” 앞에 아귀를 둔 사람들은 전신의 힘을 사용해 버텨 보려하지만 중과부적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아귀를 향해 떠밀린 그들을 향해 아귀들이 덮쳐들었다. “크아아아아!” “배고파! 배고파!” 절규 속에서 아귀들의 파티가 시작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뒤에서는 아귀보다 강하고 무시무시한 또 다른 포식자가 뒤처진 자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여.. 여보!” 중년 사내가 아내를 지키기 위해 검을 휘둘러보지만 식인 사마귀는 원래 초심자가 이길 수 없는 존재다. 챙캉! 사마귀의 앞발에 검은 부러지고 사마귀의 날카로운 앞발이 무고한 희생자를 낚아챈다. 와그작! 와그작! 살과 뼈를 씹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들으며 호문클루스들이 만족스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게 빨리빨리들 뛰어 가셔야지! 굼벵이처럼 느려터지니까 저 꼴 당하는 거지! 꺄르륵!” 지옥과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지만 김성철에겐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에겐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가까워지는 정문에 새겨진 문구를 소리 내어 읽는 것이었다. “…죽음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날카로운 관찰력의 소유자군요. 성문의 문구를 유심하게 관찰함으로서 관찰주의자(일반)를 완료하였습니다. ] 보상 - 직관력 +1 첫 번째 퀘스트를 완료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 우홋! 좋은 남자! 넘어진 사람 3명을 도와 이타심(일반)을 완료하였습니다. ] 보상 : 사과 2알 [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두 개의 달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당신은 진정한 로맨티스트! 로맨티스트(일반)을 완료하였습니다. ] 보상 : 궁전 토큰 1개 탈출하는 과정에서도 몇 개의 소소한 퀘스트를 달성할 수 있었다. 사과 2알 같은 건 순전히 김성철의 기호에 따라 얻었지만 궁전 토큰이란 아이템은 소환 궁전 퀘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궁전 토큰의 숫자에 따라 클래스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히든 클래스를 얻으려면 죽자 살자 모아야 하겠지만 김성철이 원하는 클래스는 일반 등급에 속하는 마법사 클래스다. 대충 9개에서 10개 정도만 모으면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많이 모아봐야 소환 궁전을 주시하는 거대 길드와 군주들의 이목을 끌 뿐이니까. ‘대충 15개 정도면 안전권이겠지. 그나저나 직관력 하나가 올랐으니 오랜만에 상태창이나 열어볼까.’ 그때 아귀 하나가 김성철을 향해 달려들었다. 김성철은 쳐다보지도 않고 칼등으로 아귀의 대갈통을 후려쳤다. 그런데 너무 세게 쳤나. 대갈통이 단단한 화강함 바닥을 뚫고 들어가버렸다. “아차.” 나름 살살 때렸는데 힘을 너무 썼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신체능력은 초인을 넘어 신의 영역에 들어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니까. ‘힘을 숨길 필요가 있겠어. 그것도 아주 많이.’ 다행히 모두들 경황이 없어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 제 한 목숨 보전하기도 어려운 판국이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느새 도착점이 저 앞에 보인다. 호문클루스들이 피로 물든 천을 흔들며 빨리 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먼저 도착한 이들은 가쁜 숨을 내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도착점에 들어서며 김성철은 속으로 조용히 하나의 명령을 내렸다. ‘상태창.’ 통상 이 맘 때의 신인들의 상태창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기껏해야 능력치 창만 활성화되어 보잘 것 없는 능력치만 나타내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김성철은 이미 전설을 넘어선 존재. 그의 상태창은 그 전설적인 행보를 고스란히 나타낸다. <'부수는 자' 김성철의 현재 상태> [축복] 맹약(알 수 없음) 불요불굴(정신공격 면역) 혼돈신의 가호(힘, 민첩, 체력 10% 증강) 헤라클레스의 후계자(힘 +100) 광전사의 핏줄(체력 10% 이하 시 대량 회복) 인류의 챔피언(의지 +50) 하이엘프 왕국의 빠른 활(민첩 +30) 고대전사의 심장(힘, 의지, 체력 +5, 강인함) [저주] 맹약(알 수 없음) 대마법사 발자크의 최후의 전언(직관력 -10) 검성 카라카드라의 찬사(민첩 +1, 힘 -1) 고대신의 챔피언 아락-가르의 규탄(힘 -3) 암흑룡 그로티우스의 영겁의 저주(힘 -20, 체력 -20) 유령 들린 숲의 마녀 아델화이트의 평범한 저주(힘 -5, 발기부전의 저주) 제국의 적(세력 : 인간제국의 주적, 백지 현상금) 호라산 교단의 파문자(세력 : 호라산 교단의 주적, 파문) 뮤라 교단의 파문자(세력 : 뮤라 교단의 주적, 파문) 마법사 연합길드의 적(세력 : 마법사 연합길드 및 그 하위길드의 주적) 붉은 오크 대족장 드라쿨 무쇠주먹의 저주(종족: 오크에게 호감도 -30) 드워프 원한록 등재(종족: 드워프에게 호감도 -200) 상인연합길드 블랙리스트 등재(세력: 상인연합길드 및 모든 하위 세력과 거래 불가능) “…….” 너무 길다. 업적 창까지 활성화시키면 전부 다 읽는데 한 세월이 걸릴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여간해서는 자신의 상태창을 열지 않는다. 열 필요도 없지만. 김성철은 눈앞에 떠오른 빽빽한 글줄을 흩어버리고 원하는 하위 상태창을 떠올렸다. ‘능력치, 클래스 그리고 영혼각인.’ 그의 눈에만 보이는 글줄이 떠오른다. [클래스] 메인 클래스 - 태초의 전사(신화) 서브 클래스 - 상급 요리인(희귀) [능력치] 힘 999+ 민첩 853 체력 801 마력 3 직관력 -9 마법저항 611 의지 501 매력 18 운 18 [영혼각인 - 6 슬롯 ] 1. 영혼 수확자(전설, 체력 흡수 15%, 죽인 상대방으로부터 체력 회복) 2. 천둥방패(전설, 모든 종류의 마법에 50% 피해 반감, 전설급 이하 정신공격에 면역) 3. 진실의 눈(전설, 에픽 이하 모든 환영마법 무효화, 희귀 이하 모든 아이템, 마물, 스킬 감정) 4. 영혼 창고(에픽, 1,500종의 아이템 보관) 5. 기만자의 장막(희귀-상급, 상태창 위장) 6. 공백 비교적 간략한 데이터 속에서 김성철이 먼저 눈여겨 본 것은 클래스였다. ‘마법사는 서브 클래스로 넣으면 되겠군. 나야 다른 놈들처럼 이거 저거 건드리지 않았으니.’ 다음 김성철의 시선이 향한 곳은 영혼각인 항목의 5번을 점하고 있는 기만자의 장막이라는 능력이었다. 영혼각인이란 이름 그대로 사용자의 영혼 그 자체에 신 혹은 신에 준하는 존재가 만들어낸 가호를 새기는 것이다. 각각의 가호는 극도로 얻기 어렵지만 얻을 수만 있다면 대단히 강력한 권능을 사용자에게 부여한다. 기만자의 장막의 효과는 사용자 왜곡. 사용자의 능력은 물론 그의 진명까지 감추고 왜곡시키는 효과가 있다. 무지막지한 능력치의 소유자이자 친구는 별로 없고 적만 많은 김성철에게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다. ‘시간 날 때 장난 좀 쳐야겠어.’ 마지막으로 김성철의 시선이 머문 곳은 능력치, 그 중에서도 직관력 항목이었다. ‘직관력 -9라. 10년 전에 걸린 발자크 영감의 저주가 이제 와서 발목을 잡는군.’ 몸을 휘감은 수많은 마법진 속에서 카랑카랑한 언성으로 저주를 내뱉다가 다진 고깃덩이로 화한 노인의 모습이 불현듯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직관력은 마력과 함께 마법의 기본이 되는 능력이다. 마력이 마법의 순수한 파괴력과 마나 보유랑에 관계된다면 직관력은 고차원적인 마법에 대한 이해력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마력이 아무리 높다한들 직관력이 낮으면 고위 클래스의 마법을 익힐 수 없다. 김성철이 기억하기로 마법사 클래스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 10 이상의 직관력이 필요하다. ‘직관력을 올리는 게 시급하다. 그런데 일반 퀘스트로 올릴 수 있는 직관력은 10이 한계군. 힘은 23이나 올릴 수 있는데. 너무 부족한 거 아닌가?’ 예정엔 없었지만 히든 퀘스트를 수행할 필요가 생겼다. 그런데 김성철은 소환 광장에 어떤 히든 퀘스트가 있는지 그 발동 조건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가 얻은 것은 일반 퀘스트 목록이 전부이므로. 하지만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김성철은 생존자 중에 유독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자들을 찾았다. 있다. 주시자의 눈이 딸린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내정자'. 이 녀석들을 따라가면 길이 보일 것이다. 히든 퀘스트를 얻을 수 있는 길이 말이다. ======================================= 2. 버려진 성당 호문클루스들이 생존자 주위를 돌며 숫자를 센다. “살아남은 쓰레기 인간들은 몇 마리인가요? 눈대중으로 보니.. 키키! 천오백 마리 정도?” 호문클루스 중엔 유독 큰 녀석이 하나 있다. 하얀 모자를 쓴 그 녀석은 백광장에 모인 호문클루스들의 우두머리로 훈육실장이라 불린다. 훈육실장 앞으로 호문클루스들이 모여든다. “정확한 숫자는 1,534마리네요!” “저런! 아직 절반도 못 줄였다고요? 이건 실망이네요. 하지만 저는 자비로운 호문클루스지요.” 훈육실장의 목소리는 톤이 높고 깨진 느낌이 나는데다가 크기까지 해서 장내에 쩌렁쩌렁 울린다. 듣기 싫어도 고막 안으로 파고든다. 김성철 또한 그 소리를 들었다.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다. ‘25년 전의 그 녀석이었나? 아직도 살아 있었군.’ 호문클루스의 수명은 짧다고 알려져 있다. 주인인 마법사에게 가혹하게 다뤄질뿐더러 동족끼리 죽이거나 포식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훈육실장처럼 일단 덩치를 키우고 힘을 얻은 놈은 장수하는 모양이다. “자! 자! 쓰레기 인간들! 고귀한 훈육실장이 여러분에게 자비를 베풀겠어요. 그것은 바로 무려 일주일의 휴식! 일주일 동안 새로운 세상에 잘 적응하도록 하세요!” 훈육실장을 필두로 호문클루스들이 떠났다. 얼음물을 끼얹은 분위기가 풀리며 말문이 트였다. “대체 여긴 어디지? 대체 여긴 어디요?” “전화가 안 터져요. 인터넷도 안 되고요.” “이건 꿈이야.... 꿈일 수밖에 없어...” 대부분의 소환자들은 나름대로 그들이 처한 상황을 끼워 맞추려 한다. 무의미한 짓이다. 현명한 자들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인식하고 한 발 앞서 나간다. ‘일주일이란 시간은 자비가 아니야. 오히려 형벌이지.’ 이곳엔 식량도 물도 잘 곳도 없다. 오직 사람, 사람뿐이다. 광장은 주변의 성벽이 외부의 마물로부터 지켜준다는 것 외엔 아무 메리트도 없는 땅이다. 살아남으려면 성벽 밖으로 나가야 한다. 아니면 사람을 먹던가. 김성철은 군중 틈에 머물며 상황을 관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의 시선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어떤 이는 광장을 구보로 한 바퀴 도는가 하면 다른 이는 검도를 하듯 검을 반복해서 휘두른다. 평범한 자들의 시각에서는 무의미한 짓으로 보이겠지만 김성철의 눈엔 달리 비쳤다. 이상행동을 하는 녀석들의 머리 위엔 예외 없이 주시자의 눈이 자리 잡고 있다. 소환물을 통해 조언을 받고 있는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다른 이들이 정체하고 있는 동안 그들은 작고 쉬운 퀘스트를 통해 성장을 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큰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다. 물론 보통 사람 중에 바보만 있는 건 아니다. 몇 명의 눈치 빠른 이들은 현실을 인정하고 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만 혼자십니까?” 후줄근한 양복을 입은 중년 사내가 사람들 사이를 배회하며 일행을 만들려 한다. 거절하는 사람, 대답 없는 사람, 욕으로 응수하는 사람 등 다채로운 사람이 있었지만 그는 열 명이나 되는 소그룹을 만들 수 있었다. 그 신사의 행동을 본 김성철은 문득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도 그랬었지. 쓸데없을 정도로 조곤조곤한 어조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케케묵은 소리나 하며 사람을 불러 모았었지.’ 김성철의 눈동자 깊은 곳에 한 여성의 실루엣이 떠올랐지만 이내 스스로 지워버렸다. 김성철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으며 차가운 빛을 내뿜었다.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다. 김성철은 스무 명 정도의 무리가 성벽 바깥을 향해 걸어가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옆에 멍하니 앉아 있던 사내가 김성철에게 말을 걸어온다. “저기요.” 김성철의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갔다. 안경을 끼고 말쑥한 양복을 입은 젊은 사내였다. “담배 있어요?” “…….” 김성철은 그를 무시하고 밖으로 나갔다. 성벽 바깥을 나가자 마기가 서린 검은 숲이 그를 기다린다.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곳. 먼저 성벽을 나선 이들은 전부 머리 위에 주시자의 눈이 붙어 있는 녀석들이었다. 한 명도 아니고 스무 명이나 한데 모여 있는 걸 보니 평범한 내정자들은 아닌 것 같았다. ‘거대 길드의 비호를 받는 사람들인가.’ 소환 궁전은 질서신의 보호를 받는 중립세력이다. 아무리 힘 있는 세력도 강제력을 행사할 수 없다. 따라서 궁전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는 궁전에 속한 자들을 막대한 뇌물로 구워삶아야 하는데 이게 보통 돈이 많이 드는 일이 아니다. 한 번에 수십 명 단위의 내정자를 확보하려면 어지간히 큰 세력이 아니고서는 어림도 없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들이 김성철이 찾던 바로 그 내정자들이라는 이야기다. 김성철은 은근슬쩍 군중 사이에 끼어들었다. 옆에 있는 젊은 여성과 남성이 힐끗 쳐다보긴 했지만 딱히 반감을 표시하진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한동안 흐르는 가운데 두 명의 사람이 더 합류했다. “스물다섯 명이라... 전부 모인 것 같군요.” 슈트를 입은 미남형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긴장이 될 법 하지만 그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뜬금없이 나서게 되서 죄송합니다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무튼 저는 이여훈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나쁘지 않았다.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눈이 작아 인상이 사나워 보이는 사내를 제외하면 다들 우호적인 반응이었다. 힘을 얻은 이여훈은 계속해서 상황을 주도했다. “모두들 안내인의 목소리를 듣고 계시죠?” 이여훈의 물음에 사람들은 모두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 김성철도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서 그는 각각의 주시자의 눈을 관찰했다. 대부분 조금씩 형태가 미묘하게 다르다. 각각 다른 마법사에 소환된 것이다. 김성철의 눈이 묘한 빛을 발했다. ‘하찮은 마법사들이 달라붙은 것 같군. 아마도 비전도, 텔레파시도 조잡하겠지.’ 김성철이 상대하던 ‘마법사’들은 나름 고위 마법사라는 꼬리표를 가지고 있던 자들이었다. 복날 개잡듯 때려잡던 네크로맨서들만 해도 홀로 천 기 이상의 언데드를 부렸다. 거기 비하면 주시자의 눈을 부리는 자들은 초보, 아니 견습 정도 수준이다. ‘나쁘지 않군. 일단은 이놈들과 어울리자.’ 김성철의 예상이 맞다면 여기 모인 24명의 사람들은 안내 역할을 하는 마법사의 지도를 따라 고속 성장 코스를 밟을 것이고 그 안에 히든 퀘스트가 포함될 가능성 또한 높을 것이다. “아무튼 제 안내인 분은 시간은 금이라고 하시네요. 머뭇거릴 시간은 하나도 없다고. 모두들 간단하게 통성명이나 한 후, 안내인이 시키는 일을 후딱 끝내죠.” 이여훈이 먼저 주변의 사람들에게 다가가 친근하게 이름을 묻자 자연스레 통성명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김성철에게 먼저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김성철의 행색이 너무 추레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계에서 상태 좋고, 거기다 메이커까지 좋은 현대인의 옷은 대단히 구하기 어렵다. 나름 열심히 찾아다녔지만 김성철이 얻은 옷은 다 떨어진 청바지에 노가다 판에서 자주 보이는 빛바랜 군복 상의였다. 영락없는 노숙자의 차림새다. 게다가 오랜 기간 향긋한 화학제품으로 몸을 씻지 못해 몸에서 좋지 않은 냄새가 나는 것도 한몫했다. 김성철 옆엔 십대 후반의 힙합 풍으로 꾸민 사내와 명품으로 몸을 휘감은 예쁘장한 20대 여성이 있었는데 둘은 서로에게만 통성명을 할 뿐 김성철은 철저히 외면했다. 자리를 피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아주 대놓고 무시하겠다는 것이다. “…….” 김성철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쓸 이유도 없다. 그가 원하는 건 히든 퀘스트뿐이다. 그런데 누군가 김성철을 지켜봤는지 먼 곳에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거기 선생님. 왜 아무 말씀도 없이 혼자 서 계세요?” 누군가 했더니 이여훈이다. 그는 미소 띤 얼굴로 김성철과 아이 컨택을 하며 악수를 청했다. ‘훈련된 친절이군.’ 너무 많은 사람들을 겪었다. 김성철은 한 눈에 이여훈이 마냥 좋은 사람만은 아닐 거라는 인상을 받았지만 악수에 응했다. “그냥 김 씨요. 김 씨라고 불러주시오.” “그럼 김 선생님이라고 부를게요.” 통성명이 끝나갈 때 즈음 숲속 깊은 곳에서 음침한 섬광이 빛을 발했다. 사람들은 일제히 위축되며 그 섬광을 응시했다. “키키키키....” 낯익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아니나 다를까 어둠 속에서 호문클루스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섬광의 정체는 들고 있는 호롱불이었다. “거기 모여 있었네요! 인간들!” 목소리를 듣고 김성철은 그 호문클루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훈육실장이군.’ 보통 호문클루스보다 월등히 큰 체구, 그래서 보다 흉측한 훈육실장이 날카로운 톱니 같은 이를 드러내며 사람들 앞에 섰다. 자기 키 반절에도 못하는 작은 녀석이지만 사람들은 저 호문클루스가 얼마나 악독하고 강한 생명체인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물며 가장 크고 강해 보이는 훈육실장이랴. 훈육실장은 인간들의 공포를 음미하듯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돌아보았다. “모두들 너무 겁먹지 마세요! 인간들! 저 훈육실장은 현명한 호문클루스인 거예요! 쓰레기 인간은 함부로 죽이지만 선택 받은 인간에겐 서비스를 해줄 거예요.” 훈육실장은 호롱불을 들고 아장아장 숲속으로 걸어갔다. “따라오는 거예요! 선택 된 인간들! 뒤처지면 숲속의 몬스터에게 죽을지도 모르니까! 키키키!” 영문을 알 수 없지만 벌어진 일이다. “따라가도 될 것 같아요.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네요.” 이여훈이 먼저 호문클루스를 따라 나섰다. 은연중에 리더가 된 그가 나서자 다른 이들도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따라나섰다. 단 두 명만이 끝까지 자리에 남았다. 김성철과 메기처럼 생긴 험상궂은 남자였다. “아 씨발. 저 새끼 아까부터 마음에 안 드네.” 메기남은 욕지기를 내뱉고는 뒤를 따랐고 김성철도 조용히 일행의 뒤를 따랐다. * 호문클루스가 일행을 인도한 곳은 버려진 성당이었다. 성당의 첨탑 위엔 정사각형의 장식물이 있었다. 정사각형은 질서신의 상징. 질서신은 이계의 삼라만상을 지배하는 다섯 주신 중 하나다.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인간들!” 훈육실장이 먼저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성당 안에 들어가자 첨탑 위의 정사각형이 묘한 빛을 발했고 성당 안이 빛으로 가득 찬다. “우와.. 뭐야? 이건.”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성당 안에 들어가자 뚜껑 열린 석관들이 있다. 숫자는 전부 스물다섯. 훈육실장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자. 자. 인간들!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마음에 드는 관 하나를 골라잡아 눕는 거예요!” 하나 둘 자기 관을 선택해 눕기 시작했다. 김성철도 적당히 중간쯤에 관을 찾아 누웠다. 관안에 들어가자 진공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닷없는 적막이 찾아들었고 이내 육중한 석관이 저절로 떠올라 관을 덮어버렸다. 칠흑 같은 어둠과 숨 막힐 것 같은 적막 속에서 김성철은 환한 빛을 머금은 문장이 눈앞에 떠오르는 걸 지켜보았다. [ 당신은 순교자의 관을 찾아냈고 경건한 마음으로 누웠다. ] [ 순교자의 의지가 당신의 몸에 깃든다. ] 효과 : 힘, 민첩, 체력 +10(지역제한: 소환 궁전) ======================================= 2. 버려진 성당 (2) 일종의 초보자용 버프로 보인다. 하지만 그 수치가 말이 되지 않는다. 건강한 성인 남자의 힘 평균 수치가 6이다. 민첩이나 체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에 평균을 상회하는 숫자인 10을 더한다면? 아무리 연약한 여성이라도 인간의 한계를 가볍게 초월하는 힘과 체력의 소유자가 될 것이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내정자 이야기는 들었지만 처음부터 이 정도 특혜를 받고 시작할 줄이야.’ 그는 최초의 이계 소환자 중 한 명이다. 따라서 그가 소환 궁전에 있을 때만 해도 내정자 따위 고까운 녀석은 단 하나도 없었고 모두가 무지 속에서 하루하루의 역경과 시련에서 자신의 운과 실력을 시험 받아야 했다. 그 점에 있어서 이계는 공평했다. 실력이 없는 자는 결코 살아남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버려진 성당에서 벌어지는 작태는 김성철이 경험한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자! 자! 일어나세요! 훌륭한 인간들!” 관 앞엔 어느새 무기와 식량이 준비되어 있었다. 식량은 일주일 분이었는데 무기는 처음 제공되는 시작의 검과 똑같이 생긴 녀석이었다.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김성철만은 어렵지 않게 차이점을 발견해냈다. ‘이건 강화한 무기군.’ 같은 무기라고 해도 강화시킨 것과 하지 않은 것은 겉모습은 같지만 성능에 있어선 차이가 난다. 특히 시작의 검 같은 하급 장비일수록 강화의 효과는 절대적이다.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도 이 시작의 검과 광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지닌 시작의 검과는 차원이 다른 무기인 셈이다. “자자, 인간들! 원래 가지고 있던 쓰레기 무기를 버리고 새로운 무기를 드세요! 그 녀석이 열 배는 좋으니까요!” 사람들은 주섬주섬 기존의 무기를 버리고 새로운 무기로 바꿔 들었다. “우와. 생긴 건 똑같은데 이게 좀 더 좋아 보여.” “그러게. 더 가볍고 더 강한 느낌적인 느낌?” 훈육실장은 사람들을 웃는 눈으로 보며 듣기 싫은 목소리로 소리 높여 말했다. “여러분은 선택된 인간들인 거예요! 따라서 쉽게 죽게 하지 않아요! 이 훈육실장의 정성스런 인도 하에 여러분들은 단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안전하게 소환 궁전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입가에 득의만면한 미소가 떠올랐다. 완전히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선택 받은 존재라는 것을. “여러분은 곧 소환 광장에 돌아가게 될 거예요!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는 거예요! 여러분은 이제 쓰레기 인간들과는 다른 힘을 지녔으니까요! 키키킥!” 훈육실장의 말은 내정자들의 자부심을 부추겼다.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김성철은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호롱불이다. 그리고 호롱불을 든 또 다른 호문클루스와 그 안내를 받는 인간 한 명이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테에엥? 저건 뭔가요?” 훈육실장이 톱니 같은 이를 드러내며 새로운 호문클루스에게 물었다. “선택받은 인간인 거예요! 실장님!” “뭐? 선택 받은 인간...?!” 훈육실장의 눈동자가 붉은 빛으로 번들거렸다. “여기에 틀림없이 스물다섯 마리 전부 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조수!” 훈육실장은 씩씩거리며 자기보다 작은 호문클루스 앞에 서서 위협적으로 말했다. 작은 호문클루스는 두려워하며 대답했다. “그.. 그게.. 이 인간이 잠시 똥을 싼다고 늦었다고 합니다.” “똥..? 그게 말이나 돼요?” 훈육실장은 눈을 번쩍이며 새롭게 나타난 인간을 노려봤다. 나이는 이십 대 중반, 준수한 외모에 균형 잡힌 몸매를 지닌 청년이다. 성격도 대담하고 밝은 지 훈육실장이 앞에서 길길이 날뛰고 있어도 그저 미소 짓기만 한다. 몇몇 여성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아무튼 안 될 일이에요! 이미 여기 인간 스물다섯 마리가 전부 모여 있고 순교자의 축복도, 사기 무기의 지급도 끝냈어요. 지각한 사람은 그런 걸 받을 자격이 없는 거예요!” 훈육실장은 사탕을 깨먹으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하지만 작은 호문클루스의 태도도 완강했다. “하지만 실장님... 이 인간은.... 보통 인간이 아닌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조수?” “이 인간은 철혈기사단 단장이 직접 지목한 내정자라고 하는 거예요!” “처.. 철혈 기사단?!” 훈육실장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입 안에 있던 사탕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철혈 기사단이라.’ 김성철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한때 마계 최전선에 섰던 인류의 방패들. 하지만 지금은 타락해 같은 인간들을 때려잡는 기득권의 방패가 되었다. 반백의 수염을 기른 완고한 인상의 기사단장의 얼굴이 김성철의 눈앞을 스쳤다. “어이. 훈육실장이라고 했어? 너무 까칠하게 굴지는 말아. 나 아직 이 쪽 세상에 적응도 안 했으니까.” 지각생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눈앞의 훈육실장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그는 벙 쩌 있는 훈육실장을 지나쳐 인간들 앞으로 오더니 반갑게 손을 흔들며 눈웃음을 지었다. “모두들 안녕? 늦어서 미안해. 난 박아람. 보다시피 너희들과 같은 내정자야.” 대단한 자신감 이전에 대단한 적응력이었다. 이계에 소환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것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무엇을 하든 무슨 말을 하건 훈육실장 따위는 자기에게 손끝 하나 건드릴 수 없음을. 훈육실장은 분노로 온 몸을 떨며 그저 사탕을 우적우적 깨먹을 뿐이었다. 잠시 후, 훈육실장이 박아람을 제외한 나머지 스물다섯 명 앞에 섰다. “이 중에 한 명 이 훈육실장을 속인 나쁜 인간이 있어요. 지금 당장 앞으로 나오세요. 이 훈육실장이 진짜 화나기 전에 말이에요.”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의심이 잔뜩 서린 시선들이 오갔다. 김성철의 경우엔 두 개의 적대적인 시선과 마주쳤다. 처음 무리에 합류할 때 옆에 있었던 명품녀와 힙합 소년이었다. “저 인간 아니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곧 두 남녀가 김성철 앞에 섰다. “야. 꼰대.” 힙합 풍의 소년이 김성철에게 시비조로 말을 걸었다. “너지? 딱 봐도 넌데.” 바로 앞에서 눈을 부라리며 시비를 걸어대는 꼴을 본 김성철은 속으로 웃었다. ‘내가 만만해 보이는 모양이군.’ 그때 훈육실장의 듣기 싫은 목소리가 귓전을 찔러왔다. “거기. 당신. 왜 손을 들었나요?” 훈육실장이 바라보고 있는 건 이여훈이었다. “당신이 몰래 숨어든 쥐새끼라는 건가요?” 훈육실장의 살기어린 물음에 이여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그런데 왜 손을 든 건가요?” “정확한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제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이중에 한 명 내정자가 아닌 사람이 섞여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까?” 훈육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훈육실장의 것과는 대조적으로 듣기 좋은 목소리를 지닌 이여훈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응시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방금 제게 목소리를 들려주는 분이 좋은 의견을 내놓으셨는데요. 각자 자신에게 목소리를 들려주는 사람의 이름을 한 번 대어 보라고 하시네요.” 원시적이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각각의 내정자의 머리 위엔 주시자의 눈이 떠올라 있다. 주시자의 눈은 투명화 마법이 걸린 상태라 다른 상대방은 물론 주시자의 눈을 통해 내정자를 이끄는 마법사의 눈에도 보이지 않지만, 그 이면에 숨은 마법사들의 이름을 대라고 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주시자의 눈을 조종하는 마법사의 목소리는 오직 내정자들에게만 전달되고 따라서 내정자들만이 정확한 답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요행, 끼워맞추기 따위는 일체 통용되지 않는다. “참고로 제게 도움을 주시는 분의 성함은 레오니스라고 하시네요!” 이여훈이 먼저 자신의 패를 꺼내놓았다. 기민하고도 영리한 선택이었다. 분노로 떨던 훈육실장의 얼굴에 비로소 흉측한 미소가 떠올랐다. “거기 인간! 정말로 훌륭하네요! 이 훈육실장의 점수를 딴 거예요! 영광으로 아는 거예요!” 이여훈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저 녀석...’ 김성철은 문득 방금 그 아이디어가 마법사의 생각이 아닌 이여훈 본인의 생각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돌대가리 견습생이 순간적으로 저런 아이디어를 생각하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 담당은 돌로레스 원터러라고 하는데? 초보들하고는 격이 다른 마법사라고 하시네!” 뒤이어 박아람이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훈육실장은 그를 무시하고 나머지 인간 앞에 서서 차례로 담당 마법사의 이름을 물었다. “인간. 담당 마법사의 이름은?” “최희연.” 사람들은 하나씩 자신의 담당 마법사의 이름을 말했고 작은 호문클로스는 훈육실장의 뒤를 따르며 그 이름을 양피지에 부지런히 기재했다. 반 정도 차례가 지났을 때 김성철 옆에 있던 젊은 남녀가 그를 노려보며 이죽거렸다. “어이. 꼰대. 지금 튀는 게 어때? 구라 친 거 들통 나면 저 괴물이 니 새끼를 반으로 찢어놓을 거 같은데.” “그래?” 김성철이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그의 시선은 사내의 얼굴이 아닌 그 위에 떠오른 주시자의 눈을 향하고 있었다. 주시자의 눈은 움직이지 않은 채 어두운 숲속 저 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걸 한 번 뺏어볼까.’ 어차피 초보적인 결합이다. 대상과의 교신 방법도 가장 가까이 있는 상대방에 대한 텔레파시가 고작일 것이다. “그럼 내가 네 앞에 서지.” 그렇게 말하며 김성철은 오른손을 움직였다.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소년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주시자의 눈이 김성철의 손아귀에 붙잡혀 낚아 채였다. - 다른 내정자와 싸우지 마라... 싸우지 마라... 텔레파시가 들려온다. 희미하고 멀리서 들려오는 조잡한 텔레파시였다. “니가 왜 내 앞에 서는데?” 주시자의 눈을 빼앗긴지 꿈에도 모르는 소년은 눈을 부라리며 김성철에게 다시 시비를 걸었다. 김성철은 주눅이 든 척 그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소년은 김성철을 노려보더니 피식 웃었다. “먼저 죽겠다 이거지? 말리지 않겠어.” 그는 뒤에 서 있던 명품녀와 희희덕거리며 으스댔다. 마치 김성철의 예정된 죽음을 축하라도 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는 김성철의 오른손이 뭔가 움켜쥔 것처럼 갈고리 모양을 한 건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 풍경이 이상하다.... 무슨 문제... 있는가....? 원시적인 텔레파시가 주시자의 눈으로부터 들려온다. 김성철은 잠자코 그동안 내정자가 보인 행태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내정자 중에 입으로 주시자의 눈과 대화를 나눈 녀석은 하나도 없었군.’ 그의 시선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훈육실장과 그 앞에 선 여성을 눈에 담았다. “엘리파스... 라고 하네요.” 그 여성도 그렇고 이여훈도 그렇고 혼잣말 같은 걸 하지 않고 바로바로 대답한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텔레파시에 대한 회신 방법이 하나라는 이야기다. 속으로 강하게 생각하는 것. ‘당신 이름은 무엇인가?’ 김성철은 가장 간명하고 강한 형태의 생각을 주시자의 눈을 통해 흘려보냈다. 곧 답이 도착했다. - 아까 말하지 않았나.....? 내 이름은 크릴.. 크릴 리갈이라고...... 크릴 리갈.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김성철은 손안에 들고 있던 주시자의 눈을 움켜쥐고 허공을 향해 던져버렸다. 멀리 못 가 허공 위에서 작은 폭발음과 함께 피가 사방에서 튀었지만 그 사실을 눈치 챈 건 적어도 이 중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윽고 김성철의 차례가 왔다. “거기.. 알록달록 옷을 입은 인간! 담당 마법사의 이름을 대는 거예요!” 훈육실장이 톱니바퀴 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대답을 종용했다. 옆에 서 있던 힙합 소년과 명품녀가 기대반, 비웃음 반으로 김성철을 주시했다. 김성철은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크릴. 크릴 리갈.” 그 말을 들은 힙합 소년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진다. “뭐.. 너 방금 뭐라고 그랬어?” 놀라는 게 당연하다. 왜냐하면 크릴 리갈이라는 이름은 자신이 댈 예정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훈육실장에게 있어 그의 경악은 고려의 요소가 아니었다. 무정하게 이름을 빼앗긴 소년 앞에 서서 대답을 종용한다. “자 거기! 귀걸이 한 인간! 담당 마법사의 이름을 대는 거예요!” “그.. 그게...” 힙합 소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그는 이내 김성철을 손가락질 하며 소리쳤다. “저 새끼가! 내 담당 이름을 댔어요!” “뭐라고요? 인간?” 훈육실장이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그 아래 종이와 펜을 든 작은 녀석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 씨발. 저 새끼가! 내 마법사 이름 대신 댔다고요! 크릴 리갈은 내 꺼라고요!” 그러나 그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아니 호문클루스는 하나도 없었다. 훈육실장의 감자 같은 손이 힙합 소년의 멱살을 붙잡았다. “잡았다! 요놈! 범인을 발견한 거예요!” “아니야...! 내가 아니라고오오오오!” 김성철은 끌려가는 힙합 소년을 무심한 눈으로 보며 조용히 중지를 세워 보였다. 그제야 소년은 모든 걸 알아차렸지만 일을 되돌리기엔 너무나도 늦은 뒤였다. “야... 야!!!!!” 잠시 후 소년은 두 호문클로스의 손에 잡혀 두 개로 찢어졌다. 처절한 비명이 버려진 성당 주위에 오싹하게 울려 퍼졌다. ======================================= 3. 베스티아레의 악몽 대규모 소환이 일어난 지 4일이 지났다. 백광장엔 불길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물도 식량도 없는 곳에 천오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머지않은 곳에서 풍겨 오는 시체 썩은 냄새를 맡으며 고립되어 있다. 사람들의 말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고 불길한 시선만이 쉴 새 없이 오갔다. 푸스럭! 광장 한 구석에서 비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수백 쌍의 눈들이 일제히 그곳을 향한다. 한 사내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빈 담뱃갑이었다. “누구... 담배 있는 사람...?” 그 사내는 텅 빈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몇 명의 사내가 쌍욕을 내뱉으며 그 사내를 구타했다.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애처롭게 비명을 질러도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구타가 끝난 후 사내는 엎어진 채 중얼거렸다. “다.. 담배 좀....” 김성철은 그 사내의 얼굴을 무심코 응시했다.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소환 첫날 김성철에게 담배를 달라고하던 철없던 사내였다. 코가 삐뚤어지고 눈자위가 퍼렇게 멍든 그 사내의 목숨은 길어봐야 이틀. 어쩌면 오늘 하루도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몸의 상처보다 마음의 절망이 보다 심각해보이니. 물론 김성철에게 있어 그 사내의 운명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에겐 훨씬 중요한 일이 있다. ‘결국 히든 퀘스트는 받지 못했다.’ 버려진 성당에서 나간 후, 더 이상의 내정자 소집은 없었다. 기대 이하의 성과였다. 혹시나 다른 내정자가 개인적으로 부름을 받아 나가는 건 아닌가 싶어 각 내정자들은 시야에 넣고 치밀하게 감시를 했지만 그런 기미는 없었다. 대신 눈에 들어오는 건 내정자들의 규합이었다. 내정자들은 광장 북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훈련장 주변에 자신들의 영역을 만들고 훈련장 시설을 독점했다. 훈련장엔 허수아비에서부터 회전하는 나무 칼날 같은 잡다한 시설이 있었는데 내정자들은 부지런히 훈련장에서 땀을 흘리며 몸을 만들었다. 일반 소환자들은 내정자들을 보고 정신 나간 녀석들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쯧쯧. 당장 먹을 것도 없는데 몸을 움직여 명을 재촉하는군.” “단체로 미친 모양이지. 병신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건 그들이었다. 내정자들은 훈련장에서 하루가 다르게 강해졌다. “이야. 허수아비 패는 소리가 장난이 아닌데? 힘 지금 얼마나 찍었어?” “지금 22. 20부터 소리가 달라지더라.” “난 아직 20도 못 넘겼는데. 열심히 해야겠네!” 작지만 확실한 차이가 차근차근 벌려지고 있다. 그 차이는 조만간 다가올 시련에서 확실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퍽. 퍽. 김성철은 훈련장 구석에서 허수아비를 치며 주변 동향에 이목을 기울이고 있었다. 내정자 그룹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은 둘이었다. 이여훈. 아나운서를 연상케 하는 정돈된 톤의 목소리로 사람들을 이끌고 번쩍이는 재치로 길을 제시하는 리더형의 인물이다. 그리고 박아람. 첫날부터 화려하게 등장한 그 사내는 모든 내정자 중에서 가장 강력한 후원자를 두고 있고 훈육실장을 통해 위세를 증명해보였다. 이중 보다 주목할 만한 녀석은 박아람이었다. 이 바닥에서 뒷배경이 좋다는 건 소환 궁전 안에 존재하는 갖가지 히든 퀘스트에 접근할 가능성이 높은 걸 의미한다. 그런데 박아람은 염불보다 잿밥이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남자친구 있어? 있을 거 같은데. 아 지금은 없나? 키킥.” 그는 일체의 훈련도 하지 않았다. 허수아비 때리기 같은 단순한 것조차 기피했다. 대신 예쁜 여자만 보면 달라붙어 귀찮을 정도로 작업을 걸었다. 처음에 여성들은 그의 화려한 배경과 어느 정도 수려한 용모에 호감을 보였지만 이 여자 저 여자 가리지 않고 들이대는 행태와 천성적인 경박함에 환멸을 느끼고 이제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아... 왜 다들 날 싫어하지? 어차피 짧은 인생. 즐기고 가면 그만인데.” 결국 내정자 그룹의 모든 여자에게 거절당한 그는 내정자 그룹 바깥의 여성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지치고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조금만 꾸며도 꽃처럼 피어날 것 같은 젊은 여성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박아람은 품안에 든 식량을 만지작거리며 군침을 흘렸다. “아..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하나.” 안절부절 못하며 우리 안의 동물처럼 서성이는 박아람을 보며 김성철은 조만간에 이 사내가 사고를 단단히 저지를 것이라 내다봤다. 사고는 머지않아 일어났다. 박아람은 예쁘장한 젊은 여성에게 다가갔고 그녀와 함께 성문을 빠져나갔는데 돌아온 것은 박아람 혼자였다. 그가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김성철 하나뿐이었다. “…….” 수풀과 덤불로 가려진 구석진 곳. 벌거벗은 여성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시체를 응시했다. 사인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목 부분. 강한 악력에 의해 목이 졸려 죽었다. 필사적으로 저항한 듯 손톱 아래엔 약간의 피와 살점이 묻어 있었고 시신 옆엔 고인을 조롱이나 하듯 식량 한 토막이 버려져 있었다. ‘망가진 인간이다.’ 처음부터 느꼈지만 어딘가 삐뚤어진 녀석이었다. 그런 인간이 갑작스런 힘을 얻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 지는 불 보듯 뻔하다. 앞으로 몇 명이 더 희생될지 알 수 없다. 빨리 이용하고 처분해야 한다. ‘녀석의 담당으로 하여금 몸이 달게 할 이벤트를 준비할 필요가 있겠군.’ 김성철은 부릅뜬 시체의 눈을 감겨주며 조용히 속삭였다. “내세에선 행복하길.” 그는 어두운 숲속을 돌아보았다. 숲속에 도사린 위험 또한 그를 보았다. * 내정자들은 해질녘 즈음 단체로 성벽 바깥에 나가 어두운 숲 구석 인근에 모여 식사를 한다. 식량은 훈육실장에게 받은 딱딱한 빵과 입안에 넣으면 물 한 모금으로 변하는 작은 구슬. 맛은 없지만 이곳에선 귀한 식재다. 백광장에 운집한 천오백 명 중에서 이 정도 식사와 물을 먹을 수 있는 건 내정자 그룹뿐이었다. 김성철은 일행에서 거리를 두고 홀로 식사를 하며 오가는 대화를 들었다. “그쪽은 뭐하다 왔어요?” “저는 대학생이었어요. 학교 다니던 와중에 갑자기 여기로 끌려왔죠.” “저하고 비슷하네요. 저도 대학생이에요.” “오. 그래야? 무슨 과세요?” “음대 다녔어요.” 라고 한때 김성철을 비난했던 명품녀가 다소곳하게 말한다. 식사를 할 때엔 사람들이 말이 많아진다. 달리 오락거리도 없는 상황에서 대화는 위안을 주고 기운을 북돋게 하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인기척이 머지않은 곳에서 느껴졌다. 식사를 하던 내정자들은 일제히 식사를 멈추고 인기척이 느껴진 방향을 노려봤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숫자는 세 명. 내정자들이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섬뜩한 살기를 담은 시선들이었다. 암묵적인 살인의 의사가 한마디 말도 없이 합치에 이르고 있었다. 하지만 의문의 불청객은 숲의 초입에서 멈췄다. “우와. 진짜다. 여기 먹을 게 있어!” 앳된 목소리의 환호가 들리는 것도 잠시, 누군가 그 입을 막아버린 듯 침묵이 찾아왔다. 잠시 후, 무언가를 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걱쩝쩝. 소리는 곧 사라졌고 의문의 불청객들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자리를 떠났다. “뭐야.” “그러게.” 잔뜩 독이 올랐던 내정자들은 살기를 거두고 식사를 재개했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끊어진 대화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들 중 김성철의 부재를 눈치 챈 자는 아무도 없었다. “…….” 김성철은 무거운 돌에 눌린 붉은 색 슬라임을 무심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슬라임의 이름은 블러드 푸딩. 성인 여성만한 크기의 거대종으로 보통은 녹색을 띠고 초식을 하며 평화롭게 살아가지만 번식기에 이르면 붉은 색으로 변해 살아 있는 모든 걸 덮친다. 문제는 이 종의 번식기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김성철은 슬라임을 누르고 있는 돌을 가볍게 밀어 치워버렸다. 속박에서 풀려난 블러드푸딩은 사납게 김성철을 향해 달려들었다. 퍽! 주먹 한 방에 블러드푸딩은 공중에서 터져버렸다. “또 덤빌 새끼?” 김성철은 어두운 숲속에 너머 도사린 미끈거리는 붉은 색 점액들을 향해 싸늘하게 말했다. 수백 마리에 달하는 블러드 푸딩이 숲 너머에 운집해 있었다. 블러드푸딩을 불러 모은 것은 구덩이 안에 버려진 벌거벗은 여성의 시체. 김성철은 그 앞에 태산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두 마리가 재차 김성철을 향해 달려들었다. 퍽! 퍽! 결과는 같았다. 다음엔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혹은 순차적으로 달려들었다. 강렬한 파공음이 연이어 울려 퍼지며 붉은 점액이 사방에 튀었다. 수십 마리의 블러드푸딩이 터져버렸다. 그야말로 대량 학살. 이대로는 숲속의 모든 블러드푸딩의 씨가 말라 버릴 기세다. 이윽고 김성철을 둘러싼 블러드푸딩들이 반으로 갈라졌다. 반으로 갈린 괴물들은 김성철을 지나쳤다. 단순한 이치였다. 이지가 없는 괴물조차 깨달은 것이다. 자신들의 천적이 바로 앞에 있음을. 김성철은 강하게 발을 굴러 구덩이 안의 시체를 흙으로 메운 후, 블러드푸딩이 향하는 방향을 응시했다. “응? 저건 뭐지?” 내정자들이 블러드푸딩의 존재를 발견한 것은 숲속의 불청객들이 떠나간 직후였다. 막 식사를 끝낸 호기심 많은 남자들이 블러드푸딩에게 다가갔다. - 위... 위험하다..... 물러서라.... 그들이 블러드푸딩에게 접근하는 순간 주시자의 눈을 통한 마법사의 텔레파시가 들려왔다. 하지만 한 발 늦었다. 가만히 있던 블러드푸딩은 하늘 높이 날아올라 그들을 바라보는 한 사내를 덮쳤다. “으엑! 사.. 살려줘!” 붉은 색 점액질에 깔린 사내의 옷이 서서히 용해되어갔다. “이거 놔! 놓으라고!” 바로 옆에 있단 사내가 검을 휘두르며 블러드푸딩을 공격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슬라임 계열은 선천적으로 물리공격에 강한 내성을 지니고 있었고 거기다 블러드푸딩은 초심자가 상대하기엔 제법 강한 괴물이다. 무의미한 칼질이 오가는 와중 슬라임의 미끈거리는 동체가 절규하는 사내의 얼굴마저 삼켜버렸다. “끄르르르륵!” 질식 속에서 녹아내리는 사내의 얼굴이 반투명한 슬라임의 점액질 사이로 고스란히 비친다. “우아아아아!” 검을 휘두르던 사내는 검을 버리고 그대로 뒤로 달아났다. “무슨 일이야?” 그제야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을 깨달은 나머지 일행들은 벌떡 일어섰다. 어느새 숲속이 붉은 색의 슬라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정자들의 눈동자 비로소 공포가 떠올랐다. 정신을 못 차린 건 박아람 뿐이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쓸데없이 명랑한 어조로 묻는 박아람은 버리고 내정자들은 미친 듯이 숲의 출구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박아람도 무언가 낌새가 수상한 걸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에 등을 보이고 앉은 사내가 눈에 띄었다. 추레한 청바지에 쌍팔년도 예비군 군복 상의를 걸친 사내. ‘아. 그 냄새나는 왕따 새끼.’ 여간하면 상대하고 싶지 않은 놈이지만 박아람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이. 거기 아저씨. 지금 무슨 일이...?” 순간 그의 시야가 노랗게 변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무성하게 자란 풀이었다. 땅에서 솟는 흙 내음 또한 느껴졌다. ‘뭐..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지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윽고 그는 발목에 강렬한 고통을 느꼈다. “아아악! 씨발! 뭐야 도대체!” 발목이 무언가에 의해 부러져 있었다. 간신히 두 팔을 뻗어 상체를 일으켰을 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그를 향해 서서히 기어오는 수많은 블러드푸딩이었다. “아... 아...!!!” 블러드푸딩의 미끈거리는 몸체가 박아람의 운동화를 올라탔다. 푸쉬쉬- 운동화 섬유가 용해되는 걸 본 박아람은 그대로 눈동자를 하얗게 뒤집더니 입에 거품을 물고 혼절해버렸다. 그 순간 허공 위에서 마법진이 나타났다. “아이스 볼트.” 마법진이 열린 곳에서 가벼운 차림을 한 젊은 여성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나타났다. 빨강 색 머리카락과 얼음처럼 차가운 눈매를 지닌 여자 마법사다. 그녀가 지팡이를 흔들자 얼음덩이가 튀어나오더니 박아람을 삼키려던 블러드푸딩을 꽁꽁 얼려버렸다. “나참. 진짜. 짜증나는 새끼한테 걸려서.” 젊은 여성은 박아람의 얼굴에 침을 뱉고는 지팡이를 재차 휘둘렀다. 파멸적인 얼음폭풍이 일어나 사방의 블러드푸딩을 얼리고 박살내버렸다. “하아.. 진짜 이 개새끼 어떻게 해야 되나. 죽일 수도 없고.” 의문의 여인은 박아람을 경멸어린 시선으로 노려보더니 이내 박아람의 입을 억지로 벌려 힐링포션을 먹인 후 마법진을 열고 사라져버렸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출현과 퇴장이었지만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이가 하나 있었다. “…….” 다름 아닌 김성철이었다. ‘돌로렌스 윈터러라고 했던가. 최소 중급 마법사정도는 되겠군.’ 이계에서 숙련된 마법사는 숫자가 적다. 따라서 귀한 대접을 받는다. 중급 마법사 정도면 여간한 군소길드의 장을 맡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다. 그런 인물을 내정자 유모로 붙여줬다는 건 그만큼 박아람이 중요하다는 인물이라는 반증. 김성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박아람을 들쳐 업고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 이튿날. 박아람은 아무도 모르게 일행을 빠져 나간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숲 속엔 훈육실장이 특별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훌륭한 인간!” 훈육실장은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박아람을 숲을 둘러싼 가파른 절벽 쪽으로 안내했다. 절벽 아래엔 나무 사이에 가린 동굴 입구가 있었다. 박아람은 말없이 동굴 입구를 응시하다가 안으로 들어갔고 1시간 만에 동굴 밖으로 뛰쳐나왔다. “헉헉... 씨발.. 너무 힘들잖아. 이건.” “키키킥! 훌륭한 인간!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는 거예요! 내일 다시 와서 도전하면 충분히 성과가 있을 거예요!” 박아람과 훈육실장이 사라진 동굴의 입구에 김성철이 모습을 드러냈다. “…….” 그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빛나는 문자가 눈앞에 떠올랐다. [ 칠영웅 베스티아레의 자취 ] [ 당신은 베스티아레의 꿈의 세계에 입장했다. ] [ 당신은 칠영웅의 어떤 꿈을 보기 원하십니까? ] [ 꿈에 따라 시험의 난이도가 변합니다. ] 꿈의 종류는 6개가 있었는데 아래로 갈수록 난이도가 높다고 한다. [ 한 여름날의 꿈 ] [ 봄날의 개꿈 ] [ 잠을 이루지 못해 새벽녘까지 뒤척인 날의 꿈 ] [ 유년기 ] [ 신마전쟁의 추억 ] [ 영원한 악몽 ] “7영웅 베스티아레라.” 칠영웅. 한 번 이계를 구했다는 전설적인 인물들. 하지만 그들은 곧 다가올 다섯 재앙 중 두 번째 재앙에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김성철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그는 여섯 개의 꿈 중 하나를 선택했다. [ 당신은 감히 칠영웅 베스티아레의 영원한 악몽을 선택했다. ] [ 영원한 어둠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 ] ======================================= 3. 베스티아레의 악몽 (2) 지금은 가늠할 수도 없던 먼 과거였다. 이계에 인간들이 대규모로 소환된 적이 있었다. 무책임한 신들은 이계의 운명을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손에 맡겼다. 아직 덜 성숙되고 야만적이었지만 고결했던 인간들은 엄청난 희생 끝에 이계의 재앙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 중심에 일곱 명의 영웅이 있었다. 통칭 칠영웅이라 불리는 구세계의 구원자들은 세상을 구한 후 홀연히 사라졌다. 이계가 다시금 혼란이 찾아올 때 다시 찾아온다는 전설만을 남긴 채. 그러나 그 전설은 얄궂은 형태로 이루어졌다. [ ...마계의 악마 군세가 짓밟고 간 전화 위에 일곱 명의 잊힌 존재가 오래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재림하리라. 피와 죽음, 역병과 전쟁과 함께. ] 과거의 잊힌 구원자는 이제 멸망을 불러오는 재앙으로 다시금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하지만 칠영웅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냐는 질문에 대해 제대로 답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칠영웅 개개인에 대한 정보는 오직 이계의 가장 깊은 비밀을 다루는 이들만이 얻을 수 있는 일급의 정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성철이라면 그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홀로 수많은 시련을 극복한 그는 세상의 가장 깊은 비밀에도 근접했기 때문이다. ‘베스티아레라. 분명 칠영웅 중에서도 마법사 영웅이었지. 종족은 하이엘프. 메아리라는 특별한 영창을 만들어 낸 걸로 알고 있다.’ 동굴 속에서 베스티아레란 이름을 봤을 때부터 김성철의 피는 가볍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베스티아레는 마법사의 정점에 이른 인물. 이 동굴은 그녀가 후학들에게 자신의 기술과 재능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아마 타락하기 전에 만들어 놓은 장소겠지. 아직 인간들에 대한 일말의 신뢰가 남아 있을 때...’ 인간에 대한 믿음. 입안에 쓴 맛이 밴다.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다. 너무나 많은 배신과 변절 그리고 타락을 봤다. 악마조차 진저리 칠 악덕 또한 두 눈으로 보았다. 포기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모든 걸 버리고 다른 이처럼 현실세계로 귀환하고 싶은 열망 또한 느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맹약이 그를 묶어놓고 있었다. 인간 김성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약속이. “후우...” 폐부 깊은 곳에 서려 있던 한숨이 흘러 나왔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어느새 서려 있던 흐릿한 기운이 걷히고 새벽의 별처럼 맑은 빛이 중심을 지켰다. 곧 빛나는 문자가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 준비하라. 마법사의 악몽이 시작된다. ] 주변의 풍광이 차츰 피처럼 붉은 빛을 띠어간다. 비릿한 혈향이 코끝에 스며들었다. 김성철은 느릿하게 앞을 향해 걸어갔다. 혈향 속에서 인간의 뇌 그 자체를 적출한 것처럼 보이는 부유생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명화 마법이 걸리긴 했지만 김성철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서큐버스. 혹은 인큐버스라 불리는 몽마들이다. 이 마물들은 뇌처럼 생긴 동체 아래서 너덜거리는 빨판을 인간의 머리에 갖다 대고 달콤한 꿈을 꾸게 하면서 정기를 빨아 먹는다. 마치 모기가 마취성분을 주입하고 인간의 피를 빨아 먹듯이. 빨판 하나가 김성철의 정수리 위에 달라붙었다. 김성철은 미동도 하지 않고 전진을 계속했다. 몽마는 빨판을 통해 그 자신이 갖고 있는 달콤한 꿈을 김성철의 정신에 흘려보냈다. 하지만 김성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몽마의 눈이 일그러지는 가운데 다른 몽마들의 빨판이 김성철의 머리 위에 차례로 부착됐다. 어느새 그의 머리 위엔 수십 마리의 몽마들이 뭉쳐 그로테스크한 기구 같은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그 수많은 몽마들은 김성철에 의식에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퇴폐적인 꿈을 불어넣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을 지복의 꿈의 향연이 펼쳐졌다. 김성철의 발걸음이 멈춘 건 그 즈음이었다. “어디 보자. 전부 다 달라붙었나.” 김성철의 손이 머리 위를 가볍게 훑었다. 한 손아귀에 다섯 마리의 몽마가 빨판 채로 그의 손에 붙잡혔다. “…….” 김성철은 미끈거리는 빨판을 잡은 채 힘껏 지면에 휘둘렀다. 퍽! “키아아아악!” “키이이이이!” 너댓 마리의 몽마가 지면에 부딪쳐 글자 그대로 피떡이 되어 사라졌다. 김성철은 재차 머리 위를 훑어 또 다른 몽마들을 낚아챘다. “키이이이!” 몽마들이 위협적인 소리를 내보지만 무의미한 저항일 따름이었다. 김성철의 손이 힘차게 풀스윙을 했고 바닥엔 또 다른 핏자국이 새겨졌다. 김성철의 머리 위에 흉측한 빨판을 올리고 있던 몽마들의 눈동자에 일제히 공포라는 감정이 새겨졌다. 일부 몽마는 더욱 자극적인 꿈을, 또 다른 몽마는 아예 몸서리처지는 끔찍한 악몽을 김성철의 정신에 주입했지만 무의미한 발악이었다. 픽! 한 무더기의 몽마가 딱지치기를 당해 무참하게 부서졌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순식간에 몽마 무리가 전멸했다. 김성철은 마지막 살아남은 한 마리를 양 손으로 합장하듯 붙잡고 자신의 눈높이에 위치시켰다.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형형한 눈이 서큐버스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똑똑히 봐둬라. 네놈들의 최악의 악몽을.” 김성철은 그대로 몽마를 찌부러뜨렸다. “키이이이이!!!!!!” 몽마는 고통스런 비명소리와 함께 뇌수를 흘리며 뒤틀렸고 이윽고 터져버렸다. 후두둑. 피와 뇌수가 섞여 아래로 흘러내린다. 몽마들이 패배한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불요불굴. 모든 정신공격을 무위로 돌리는 궁극의 축복. 그 축복을 손에 넣은 김성철에겐 그 어떤 형태의 정신공격도 통하지 않는다. 김성철의 손에 죽임 당한 몽마는 최후까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듯 했지만. 모든 몽마를 가볍게 처리한 김성철 앞에 희끄무레한 인영이 유령처럼 어른거렸다. 강력한 기운이 그 인영으로부터 느껴졌다. 범상치 않은 기운. 김성철은 이윽고 그것이 마나의 소용돌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마법사군.’ 희끄무레한 인영을 느릿하게 김성철에게 다가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을 머금은 듯한 긴 금발, 내리 깐 별처럼 아름다운 눈, 그리고 뾰족한 귀. 하이엘프 여성이다. “제 사역마를 전부 죽여 버렸네요.” 낯선 여성은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성의 생김새에 더해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낯선 여성의 정체에 대한 확신을 품을 수 있었다. “네가 베스티아레인가?” 낯선 여성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순간 김성철은 그 여자에게서 어떤 생명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저건 베스티아레 본인이 아니군. 베스티아레가 남겨 놓은 기억의 파편에 불과하다.’ 파편이라고 해도 상당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베스티아레 본인에 대한 경외감이 느껴질 정도로. “이래가지고는 시련을 치를 수 없잖아요? 삼십 두 가지의 쾌락의 꿈과 스물일곱 가지의 고통의 꿈을 극복하는 자만이 제가 준비한 보상을 얻을 수 있는데. 시련의 도구가 전부 없어져버렸으니.” “전부 해결한 것 아니야? 꿈을 주입하는 것들을 전부 처치했으니까.” 김성철의 말에 베스티아레의 환영은 피식 웃었다. “재밌는 사람이네요.” “파편이지만 어느 정도 이지는 있는 모양이군. 희로애락이 있는 걸 보니.” “저의 정체에 대해 눈치 채셨나 보네요?” 베스티아레의 물음에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 쪽 팔을 측면으로 뻗었다. 쭉 뻗은 그의 손아귀 안에 육중한 망치 하나가 나타났다. 팔 가라즈. 드워프의 신들이 하늘을 벼려 만들었다는 최강의 망치. 마계의 오만한 악마들을 벌벌 떨게 만든 그 신의 무기가 동굴 안에 그 용자를 드러냈다. “널 처치해도 보상을 주나?” 김성철의 당돌한 말에 베스티아레의 파편은 놀라워하면서도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다면.” 그 말이 끝난 직후 김성철이 섬전처럼 베스티아레의 파편에게 달려들었다. 베스티아레의 파편은 놀라면서도 즉시 그 앞에 마법 트랩을 설치하며 뒤로 순간이동을 했다. 파아아악! 트랩에 걸려든 김성철의 몸이 푸른 불길에 휩싸이며 움직임이 둔화됐다. 베스티아레의 파편은 연속적인 단거리 텔레포트로 거리를 벌리며 정신 집중을 했다. 그녀의 머리 위에 불로 이루어진 거대한 화염창이 이글거리며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김성철이 재차 그녀에게 달려들자 여러 개의 마법 트랩이 김성철의 경로에 동시에 설치됐다. 파아아악! 푸른 불길이 터져 나왔다. 김성철이 재차 트랩을 건드린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같지만 과정은 판이하게 달랐다. 김성철은 트랩을 지나치며 트랩의 끝부분을 발끝으로 살짝 건드려 기동시킨 것에 불과했다. 파아아악! 동시다발적으로 설치한 수십 개의 트랩이 제멋대로 혹은 동시에 폭발하며 허공에 떠오른 베스티아레의 파편의 눈을 어지럽혔다. 그녀가 만들어낸 화염창이 표적을 못 찾는 가운데 솟구치는 푸른 화염들이 일으키는 각란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시야를 뒤덮었다. 퍽! 한 방의 경쾌한 타격. 베스티아레의 파편은 지면에 내동댕이 처졌고 머리 위에 떠오른 화염의 창은 형체를 잃고 소멸했다. “…엄살 피우지 마. 죽을 정도로 팬 건 아니니까.” 털끝 하나 상하지 않은 모습으로 김성철이 그녀 앞에 섰다. 베스티아레의 파편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강하네요. 당신은.” 김성철은 파편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칠영웅은 어디에 있나?” 칠영웅의 소재 파악. 그것이 그가 파편을 살려둔 이유다. 베스티아레의 파편은 체념한 듯 두 눈을 감으며 바스러지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은 때가 되면 당신 앞에 나타날 거예요. 파멸의 예언서가 점지한대로. 굳이 당신이 찾지 않아도.” “그렇군.” 김성철의 망치, 팔 가라즈가 높이 올라갔다. 망치의 그림자가 파편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파편은 웃고 있었다. “당신은 우리와 같군요.” “내가?” 김성철의 망치가 살짝 흔들렸다. “몽마를 통해 느낄 수 있었어요. 당신 안에 우리가 가진 것, 아니 그 이상의 실망과 분노가 축적되어 있음을.” “난 너희들처럼 되지 않는다. 칠영웅.” “과연 그럴까요? 당신을 지탱하는 그 헛된 소망이 무위로 돌아간다면...” “닥쳐라.” 망치가 아래로 내려갔다. 베스티아레의 파편은 유리조각처럼 깨져 사방에 흩어졌다. 주변을 둘러싼 혈향이 옅어지고 핏빛으로 물든 주변이 원래의 총천연색을 빠르게 되찾았다. 침묵 속에서 김성철은 조용히 기다렸다. 그의 앞에 나타날 보상을. [ 당신은 베스티아레의 꿈을 파괴했다. ] [ 당신은 위업 ‘꿈의 파괴자(히든 - 에픽)’을 달성했다. ] 보상 : 1. 궁전 토큰 30개 2. 마력, 직관력, 마법저항력 각 +10 3. 마력 스태프 월광(레어) “…….” 김성철의 눈동자에 실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생각 보다는 너무 미미한 보상이다. 퀘스트도 아니고 ‘위업’을 달성했는데. 위업은 퀘스트와 유사하나 일회성이고 그 성격적인 측면에서도 상위호환격인 임무다. 따라서 달성하기가 극히 어려운데 만약 그 위업을 해낼 수 있다면 엄청난 보상을 얻는다. 그런데 베스티아레가 남긴 위업의 보상은 빈약하기 그지 없다. ‘소환궁전 안인 걸 감안한 건가. 하긴 베스티아레의 파편도 막상 전투력은 중급 마법사 수준이었지. 초심자에게 월광 같은 마력 스태프 만큼 유용한 것도 없기도 하고.’ 게다가 김성철에겐 나름 의미가 있는 보상이었다. 가장 필요로 하는 직관력을 무려 10이나 얻을 수 있었으니. 김성철은 자신의 능력치 창을 열었다. [능력치] 힘 999+ 민첩 853 체력 801 마력 13 직관력 1 마법저항 621 의지 501 매력 18 운 18 직관력이 드디어 마이너스 수치에서 벗어났다. 그 이야기는 이제 호문클루스에게 얻어 낸 일반 퀘스트 수행만으로도 필요한 직관력 수치에 도달, 마법사 클래스를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클래스를 받기 위한 필수품인 궁전 토큰도 넘치도록 있고. ‘슬슬 내정자 놀음을 끝낼 때가 온 것 같군.’ 목적은 달성했다. 당분간은 쉬면서 소환 궁전의 마지막날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뒤로 돌리려고 할 때였다. 김성철의 눈앞에 떠 다른 문자들이 떠올랐다. [ 칠영웅이 당신의 존재를 인식했다. ] [ 칠영웅의 시선이 당신을 향한다. ] “이딴 건 필요 없는데.” 김성철의 입가에 비릿한 냉소가 맺혔다. 문자열은 계속해서 떠올랐다. [ 칠영웅 베스티아레가 당신의 위업 달성에 즐거워합니다. ] [ 칠영웅 베스티아레가 당신에게 위업 달성에 따른 특별한 보상을 내리기로 결정했습니다. ] 보상 : 메아리술사의 서(書) “메아리술사...?!” 김성철은 알고 있었다. 메아리 술사. 칠영웅 천둥메아리 베스티아레의 고유 클래스. 일반 마법사가 한 번의 영창으로 한 번의 마법을 사용한다면 메아리술사는 자신의 영창을 특별한 메아리 형태로 복사해 한 번에 여러 번의 마법을 반복해서 구사할 수 있다. 그 능력을 통해 베스티아레는 단순한 화이어볼만으로도 파멸적인 헬파이어 급의 위력을 낼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 전설적인 비전이 김성철의 손아귀 안에 들어온 것이다. “…….” 김성철은 말없이 메아리술사의 서를 만졌다. 메아리술사의 정보가 눈앞에 떠올랐다. <메아리술사의 서 > 등급 : 전설 분류 : 클래스 전직(소모형) 효과 : 전설 클래스 메아리술사 획득 비고 : 소환 궁전의 마지막 날. 서를 펼쳐라. 베스티아레의 비전이 깃들 것이다. 제한 : 마력 20, 직관력 20, 마법저항 20 이상. 필요 : 궁전토큰 50개 “이런.” 아직 쉬기엔 이른 모양이다. ======================================= 4. 크릴 리갈 “빌어먹을! 빌어먹을...!” 크릴 리갈은 일생일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죽을 위기는 처음 이계에 소환 됐을 때 몇 번이고 넘겼지만 지금 그가 직면한 위기에 비하면 가소로운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곧 일주일이 지난다. 각 마법사들은 피보호자들의 육성 상태를 체크하여 내일 해가 뜨기 전까지 보고하도록.” 걸걸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는 근육질의 사내는 철혈기사단의 고위 기사로 알려져 있다. 철혈기사단이라면 대륙 북부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대 길드. 절정기 때는 남하하는 마족의 주력부대를 홀로 막아낼 정도의 막강한 전투력을 지녔다고 알려져 있다. 이계에 소환된 지 이제 겨우 1년째, 크릴 리갈은 그 철혈기사단과 척을 지게 생겼다. 철혈기사단 측에서 보호와 지도를 부탁한 신입 소환자 장현석과 교신이 끊겨버렸기 때문이다. 죽음이 횡행하는 소환 궁전에서 신입 소환자와의 교신이 끊긴다는 것은 높은 확률로 죽음을 의미한다. 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크릴 리갈은 찬찬히 교신이 끊긴 날의 기억을 되새겼다. 장현석은 그의 이름을 물었었다. 특이한 일이었다. 내정자가 담당 마법사의 이름을 묻는 것은. 크릴 리갈은 내정자의 요청에 따라 그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손해 볼 건 없는 거래였다. 거대 길드의 비호를 받는 내정자가 소환 궁전에서 나오면 고속 성장하기 마련이고 운과 실력이 따르면 길드의 중책이 될 수도 있으니까. 장래에 큰 인물이 될 수도 있는 자와 연을 맺어두는 건 미래를 위한 투자다. 그런데 그의 피보호자는 두 번에 걸쳐 그의 이름을 물었다. 소환물의 통제 및 텔레파시 쪽에 조예가 깊지 않은 관계로 확신할 수 없지만 크릴 리갈은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질문 사이에 피보호자의 신변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추측했다. ‘주시자의 눈을 통해 공급되던 시야가 갑자기 암전됐어. 어쩌면 그때 주시자의 눈이 당해버린 건 아닐까?’ 주시자의 눈은 빠르고 편리하긴 하지만 전투력은 전무한 하급 소환수다. 얼마나 약하냐면 어슬렁거리는 도둑고양이한테도 죽어나갈 지경이다. 그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투명화를 걸긴 하는데 투명화가 만병통치약인 건 아니다. 재수가 없는 경우 지나가는 새와 부딪치거나 누군가 무심코 던진 돌 따위에 맞고 소멸될 수도 있다. 크릴 리갈은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즉, 장현석은 아직 살아 있고 단지 주시자의 눈만을 잃은 채 내정자 그룹과 함께 있다. 장현석의 생존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다른 마법사들에게 묻는 것이다. 그들이 담당하는 내정자들은 장현석과 함께 있을 것이고 다른 주시자의 눈을 통해 장현석의 건재를 확인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 바닥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백광장을 조망하는 북쪽 전망대에 머물고 있는 48명의 마법사 중 내정자를 관리하는 마법사들은 25명. 그중 크릴 리갈에 우호적인 인물은 하나도 없다. 내정자 관리는 하급 마법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경쟁이 치열하고 따라서 남들과 나누려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은 크릴 리갈을 돕기는커녕 잘못을 알면 주저 없이 위에 보고해 경쟁자를 제거하려 들 것이다. 그래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손을 비벼볼만한 인물이 하나 있긴 있었다. “뭐라고? 내 주시자의 눈을 빌려달라고?” 돌로렌스 윈터러. 전망대 유일의 중급 마법사. 그녀는 같은 마법학교의 선배이자 같은 마법사길드의 회원이다. 물론 평소엔 감히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의 격의 차이가 있지만 지금은 그녀가 유일한 희망이다. “네... 제발 부탁드립니다!” 크릴 리갈은 모든 염원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맡기고 대답을 기다렸다. 촌각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코웃음이 들려왔다. 불길한 예감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 싸늘한 언동은 크릴 리갈의 간절한 소망을 산산히 부셔버리기에 충분했다. “주시자의 눈조차 관리 못하는 인간을 내 후배로 봐달라고? 난 그런 거 인정 못해.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 불쾌하니까.” “죄.. 죄송합니다!” “위에는 보고 하지 않을게. 어차피 내일이면 들통 나게 될 테니까.” 경멸어린 시선으로 온 몸을 훑어본 후, 돌로렌스 윈터러는 도도한 걸음걸이로 전망대를 떠났다. 멀리 복도 속에서 싸늘한 한 마디가 들려온다. “병신 새끼.” “…….”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이마에선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모멸감과 수치심에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빌어먹을! 개 같은 년!” 힘만 있다면 죽여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그리고 그전에 자신에게 닥칠 비참한 운명을 알기에 그는 바닥에 주저앉았고 소리 없이 울었다. 그를 발견한 것은 중년의 마법사였다. “응?” 눈이 마주쳤다. 이름은 모르지만 아는 얼굴이다. 크릴 리갈은 그 사내의 정체를 알고 있다. 노예 사냥꾼. 소환 궁전에 소환된 신입 중에 용모가 뛰어난 남녀를 미리 선점해 빼돌리는 역할을 하는 족속들이다. 크릴 리갈이 하는 일도 떳떳하다고 할 순 없지만 노예사냥꾼들이 하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노예사냥꾼들이 하는 일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악마들이나 할 법한 짓이니까. 그 노예사냥꾼 하나가 크릴 리갈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젊은 친구가 뭘 그리 한스럽게 우나? 밥이라도 굶었나?” 평소 같았으면 상종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연배가 위라고 해도 이미 타락한 마법사고 마법사 길드 명부에서도 제명된 인간들이다. 같은 마법사로 취급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하지만 모든 건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혹시 집토끼를 잃어버리셨나?” 중년 마법사는 씨익 웃으며 크릴 리갈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댁하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크릴 리갈이 싸늘하게 말했다. 중년 마법사는 살짝 놀라워하면서도 이내 푸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꼬락서니를 보니 집토끼를 잃어 버리셨구만.” “…….” 크릴 리갈은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표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등 뒤로 중년 마법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타깝군.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말이야.” 그 한마디는 크릴 리갈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윽고 크릴 리갈이 뒤돌아서서 중년 마법사를 응시했다. 여전히 붉게 충혈 된 눈이었다. “자넬 보니 날 보는 거 같군.” 그렇게 말하며 중년 마법사가 왼팔을 쭉 뻗었다. 로브의 긴 소매에 가려져 있던 왼팔의 모습이 드러났다. 의수. 그의 왼팔은 팔꿈치 아래부터 싹둑 잘려 나갔다. “다행히 폭풍 길드는 너그러운 길드라 팔 하나 잘라내는 걸로 그쳤지. 다른 길드였다면 팔 대신 혀를 뽑아내거나 그것도 아니면 목을 쳤을지도 모르겠지.” 가볍게 이야기하지만 그의 음성엔 짙은 회한이 묻어 있었다. 크릴 리갈이 신형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럼... 당신도...?” “그래. 나 또한 내정자 시터를 했어. 운이 없었어. 등급전에서 같은 편한테 등 뒤를 찔릴 지 누가 알았겠냐고?” 노예 사냥꾼의 고백은 크릴 리거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오로지 편견으로 성립된 방어기제가 무너지자 기댈 곳 하나 없던 크릴 리갈은 적극적으로 노예사냥꾼에게 매달렸다. “아깐..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도와주십시오. 시간이.. 시간이 없습니다!” 노예사냥꾼은 그런 크릴 리갈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두 눈을 지그시 감더니 열쇠 하나를 건넸다. “아래 노예 반입용 통로가 있는 건 알고 있지? 눈 뜨고 보기 어려운 것들이 좀 있겠지만 눈 딱 감고 쭉 나가. 그럼 소환 광장으로 통하는 문이 있을 테니.” “…직접 찾으라는 겁니까?” “그게 가장 확실할 거야. 어차피 아무도 안 빌려주잖아? 주시자의 눈.” 중년 마법사의 말은 정론이다. 달리 뾰족한 방법도 없었다. 크릴 리갈은 열쇠를 손에 들고 고민하더니 이내 중년 마법사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장현석의 건재를 내가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장현석만 살아 있다면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다. 투명화 마법이 걸린 주시자의 눈을 다시 소환하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하긴 하지만 지금 돈 따위가 문젠가? 크릴 리갈은 종종걸음으로 노예 반입용 통로에 들어섰다. “읔...” 끔찍한 냄새가 난다. 인간의 분변과 구정물, 썩어가는 살점의 악취가 뒤섞인 그 냄새는 순간 정신을 아찔하게 할 정도로 지독했다. 좀 더 걸으니 통로의 양옆에 쇠사슬로 묶인 노예들이 보인다. 노예들 앞엔 잔인한 노예사냥꾼들이 향을 피워놓고 노예의 이성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선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붉게 달군 인두가 살갗을 지지는 소리였다. “크크크! 이 녀석. 발버둥치는 거 좀 봐. 좋은 물건이 되겠군.” 광기로 번득이는 노예사냥꾼들의 눈이 불청객을 응시했다. “크크크.... 햇병아리 마법사가 재미라도 보러 온 건가? 여기 노예들 있으니까 쭉 골라 봐.” “…….” 크릴 리갈은 이를 꽉 깨물고 그들을 모른 체 했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뒤에서 또 하나의 구슬픈 비명 소리가 살타는 소리와 섞여 들려오는 걸 들으며 크릴 리갈은 몸서리를 쳤다. ‘쓰레기 새끼들.’ 좀 더 걸어가니 한 무더기의 시체가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시체들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번들거린다. “키키키... 거기 인간! 사탕 가지고 있는 거예요?” “사탕이 있으면 당장 내놓는 거예요!” 호문클루스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일반 호문클루스보다 더욱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나 같이 옷이 찢겨 있었고 얼굴이 일그러졌거나 사지 중 하나 혹은 둘 이상이 없다. 무리에게 따돌림 당한 호문클루스들이다. “거기 인간! 왜 우리말을 무시하는 거예요!” 눈알 하나와 다리 하나가 없는 호문클루스가 두 팔로 기어와 크릴 리갈의 바지자락을 잡았다. “사탕을 내놓는 거예요!” 크릴 리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그대로 발을 굴러 호문클루스의 머리통을 으깨버렸다. “테챠아아아아아!” 견습 마법사라고 하나 크릴 리갈 또한 소환 궁전의 모든 시련을 이겨낸 사람이다. 호문클루스 따윈 더 이상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썩 꺼져! 더러운 것들아!” 호문클루스들은 바퀴벌레처럼 흩어져 시체 속으로 숨어들었다. 시체들이 쌓인 복도를 지나자 녹슨 철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크릴 리갈은 손바닥 위의 열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며 철문 너머를 노려보았다. ‘반드시 찾아낸다. 반드시.’ * 시련이 끝난 동굴에선 이제 어떤 마법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김성철은 애병 팔 가라즈와 메아리술사의 서를 영혼 창고에 집어넣고 남은 보상을 응시했다. 궁전 토큰 30개와 마력 스태프 월광. 궁전 토큰은 주머니에 넣으면 그만이지만 마력 스태프 월광의 경우는 애매한 녀석이다. 김성철은 월광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월광의 능력치가 눈앞에 떠올랐다. <월광 > 등급 : 레어 - 하급 분류 : 마력 스태프(충전형) 효과 : 사용 시 전방을 향해 에너지 볼트 발사 충전 : 100% 비고 : 달빛을 받은 편백나무의 껍질만을 모아 만든 지팡이. 마력이 깃들어 있지만 내구도는 약하니 요주의! 능력치는 솔직히 보잘 것 없고 겉모양도 단순한 나무 막대기다. 평소 같았다면 망설임 없이 던져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등급전이 벌어지기 전인 지금 시점에서 이 아이템이 갖는 가치는 상당히 크다. ‘어떻게 한다. 그냥 가지고 있을까. 아니면 영혼 창고에 넣을까.’ 한참동안 심사숙고 한 후 김성철은 월광을 그냥 가지고 있기로 결정했다. 월광이 비록 지금 수준에선 구하기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소환 궁전의 시련이 거듭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손에 넣을 정도 수준의 무기고 그리고 유사시엔 굳이 진짜 힘을 쓰지 않아도 월광만으로 대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물어보는 놈도 없겠지만 월광을 얻게 된 경위 따위야 꾸며내기 나름이다. 김성철은 월광을 들고 동굴을 나섰다. ‘그나저나 직관력이 9나 더 필요하군. 궁전 토큰 숫자도 아슬아슬하고. 궁전 토큰은 등급전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하면 어떻게 되겠지만.. 그러고 싶진 않아.’ 동굴에서 직관력 10을 얻었을 때만 해도 내정자 그룹을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메아리술사의 서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선 추가적인 히든 퀘스트 수행이 필요하다. ‘어쩔 수 없다. 조금 더 어울려주는 수밖에.’ 박아람의 명줄은 그가 모르는 사이에 늘었다 줄어들었다 하고 있었다. 김성철이 월광을 들고 광장에 들어섰을 때였다. 광장 안에서 노한 고함과 비명 소리가 산사태처럼 들려왔다. ======================================= 4. 크릴 리갈 (2) 혼란의 중심에 호문클루스들이 있었다. “자! 자! 인간들 내일 있을 등급전을 위해서 특별히 사료를 배급하는 거예요! 인간들! 많이 주워 먹고 힘내는 거예요!” 염소 여덟 마리가 이끄는 거대한 수레를 끌고 나타난 호문클루스들은 굶주린 인간들을 향해 알 수 없는 고기가 들어간 딱딱한 빵을 던졌다. 며칠 간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한 사람들은 먹을 것을 보자 눈이 뒤집혔다. 천오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수레를 에워쌌고 아귀다툼을 벌였다. 급기야 곳곳에서 음식을 두고 칼부림이 일어났고 피가 튀고 사람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과 별개로 김성철은 호문클루스의 말에 주목했다. ‘등급전이 내일이라고? 일정이 앞 당겨졌나?’ 등급전은 소환 궁전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이자 주가 되는 시련이다. 소환 궁전엔 청, 홍, 백, 적 4개의 광장이 있다. 소환 궁전 측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각 광장끼리 특수한 조건을 건 죽음의 경기를 실시한다. 그것이 등급전이다. 김성철이 있던 시절엔 등급전을 한 번 치를 때 마다 최소 백 명 단위로 사람들이 죽어 나갔고 심한 경우 거의 절반이 한 번의 등급전에 쓸려나가곤 했다. 하지만 등급전에서 살아남고 활약만 할 수 있다면 충분한 보상이 주어진다. 지옥과 다를 바 없는 이계에서도 충분히 자립하여 살아갈 수 있는 인간들을 길러내는 것. 그것이 소환 궁전이 목적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목적이 변질됐다. 훈련장에 모여 있는 내정자들이 그 부정할 수 없는 증거다. “야. 저거 좀. 봐. 더럽게 웃기지 않냐? 썩은 빵 먹겠다고 개떼처럼 달라붙는 꼴이란.” “어쩌겠어? 저 인간들은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일반 소환자들이 목숨을 걸고 빵을 위해 싸우고 있을 때 내정자들은 훈련소 그늘에 모여 평범한 자들을 비웃고 있었다. 일부는 묵묵히 훈련에 매진했지만 대부분은 간만에 볼만한 구경꺼리 감상에 여념이 없었다. 김성철은 조용히 훈련장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눈을 감고 명상을 했다. 직관력을 올릴 수 있는 일반 퀘스트 중 일정 시간 명상을 하면 직관력을 2나 올려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명상이 끝난 다음엔 소환 궁전을 돌며 벽면 구석구석 숨겨져 있는 문구를 찾아 입으로 소리 내어 읽는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소환 궁전 벽면에 새겨진 문구들은 하루가 지날 때마다 바뀐다. 가령 김성철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소리 내어 읽었던 ‘죽음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문구는 이제 ‘삶은 고통스럽지만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문구로 바뀌어 있었다. 이 또한 직관력과 관계된 일반 퀘스트다. 게다가 이제는 직관력뿐만 아니라 마력을 올리는 퀘스트도 수행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가 목표로 한 히든 클래스 메아리술사를 얻기 위해서는 직관력 20에 더해 마력 20이라는 조건도 클리어해야 되니까. 김성철은 호문클루스에게 얻어 낸 일반 퀘스트 목록을 뒤져 마력을 주는 퀘스트들 하나하나 찾아 그 조건들을 암기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에 빈둥거릴 시간이 없다. 특히 장기간의 시간과 반복적인 작업을 필요로 하는 일반 퀘스트를 우선적으로 달성해야 한다. 김성철은 일분일초도 허투루 쓰지 않고 그가 해야 할 계획을 차근차근히 밟아나갔다. 물론 각 내정자, 특히 박아람에 대한 감시의 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 녀석 덕에 베스티아레의 자취를 발견했듯이 앞으로도 비슷한 기회를 얻을지도 모르니까. 당장 베스티아레의 자취를 위업 달성을 통해 소멸시켰으므로 박아람을 봐주는 마법사 혹은 그 윗선은 박아람을 위해 새로운 성장 장소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박아람이 보호를 받는다고 해도 거듭되는 등급전에서 생존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정자들이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하나 소환 궁전은 정글과 같은 곳이고 일만 명의 인간 중엔 번득이는 천재들이 필연적으로 숨겨져 있다. 조금만 정신 줄을 놓아도 목숨이 날아가는 곳이 바로 이 소환 궁전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저물어 가는 하늘을 응시했다. “슬슬 식사하러 갑시다.” 하루 종일 회전 칼날 앞에서 땀을 흘리던 이여훈이 일행을 불러 모았다. 싸움 구경도 슬슬 지겨워진 내정자들은 군소리 없이 이여훈의 뒤를 따랐다. 하루 종일 명상을 거듭하던 김성철도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있을 때 한 사내가 김성철에게 접근했다. “거기... 형씨.” 누군가 했더니 첫날, 이여훈에게 반감을 표시하던 메기처럼 생긴 사내였다. 그는 김성철과 마찬가지로 내정자 그룹에서 소외 받고 있었다. 김성철처럼 대놓고 겉돌진 않았지만 생긴 게 험악하고 항상 틱틱 거려 사람들이 먼저 그를 피해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이여훈에게 강렬한 경쟁의식을 품고 있었는데 능력도 없고 재주도 없는지라 지금 와서는 그저 열등감 강한 사내 정도로 김성철에게 인식되고 있었다. “괜찮으면 같이 밥 먹지 않을래요?” 그 사내는 힘들게 한 마디를 꺼냈다. 강한 체를 했지만 결국 그도 사람인지라 사람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하지.” 블러드푸딩 사태가 일어난 이후 이여훈은 식사 장소를 숲속 대신 멀리 떨어진 성벽 아래로 바꾸었다. 사람들에게 들킬 위험성이 높긴 하지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김성철은 늘 그랬던 것처럼 일행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딱딱한 빵을 꺼내 씹었다.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그의 옆에 일행이 있다는 점이었다. 메기처럼 생긴 남자의 이름은 하영종이라고 했다. 현실 세계에 있을 때 직업은 공무원 응시생. 스물다섯 짧은 인생이지만 제대로 풀린 게 하나도 없다며 쓴 웃음을 흘리며 솔직하게 말했다. “경쟁률이 워낙 빡세니까. 대한민국 청년 절반 이상이 달라붙는데 쉽게 덤벼들 것도 아니지.” “그래?” 최근 현실 이야기를 듣는 건 오랜만의 일이다. 그의 얼굴은 몇 번의 각성과 환골탈태 덕에 이계에 처음 왔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지나온 세월의 흐름은 결코 짧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군. 공무원 시험이 그 정도까지 인기 있는 건 아닐 텐데.” “아니 형씨는 어느 별나라에서 왔길래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세상사에 별 관심이 없어서 말이야.” 이계로 소환된 지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다. 강산이 몇 번을 변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회수권과 토큰을 써서 버스를 타고 롤러장에서 디스코 음악에 맞추어 롤러스케이트를 타던 과거 장면이 아련히 떠올랐다. ‘그나저나 귀환자를 선택한 녀석들은 저쪽 세상에서 잘 살고 있으려나.’ 소환자 중 위대한 업적을 여러 차례 쌓은 자들은 현실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곤 한다. 귀환자라고 불리는 존재들이다. 김성철의 옛 동료 중 몇 명은 이계에 환멸을 느끼고 현실로 돌아가는 선택을 했다. 이계에서 얻은 힘을 상당 부분 포기하고 말이다. 김성철도 여러 번 현실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를 느꼈지만 지금은 깨끗이 접은 상태다. 현실 세계에 대한 향수는 가끔 남의 입을 통해 듣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김성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박아람이 홀로 떨어져 빵을 씹고 있는 게 보였다. 특별한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김성철의 눈에 뜻하지 않은 존재가 포착됐다. 한 사내가 먼 거리에서 우두커니 서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에 띄는 건 복장이다. 현대인의 옷을 입은 다른 소환자와 달리 그 사내는 이계인들의 옷, 특히 마법사 풍의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마법산가? 소환 궁전에 소환자 이외에 인간이 돌아다니다니. 기이한 일이군.’ 김성철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 “없어... 없잖아. 장현석.. 그 개자식이...” 멀리서 내정자를 지켜보는 마법사의 정체는 다름아닌 크릴 리갈. 그는 광장 바깥으로 통하는 노예반입용 통로를 통해 소환자들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고 오랜 시간을 기울여 내정자들을 찾는데 성공했다. 내정자들의 얼굴 중 아는 건 하나 뿐이지만 내정자 머리 위에 주시자의 눈이 떠올라 있는 걸 십분 활용하는 방법을 써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찾은 내정자 중에 자신이 기억하는 유일한 얼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장현석. 싸가지 없게 생긴 어린 동양 놈. ‘설마 진짜 죽은 건가?’ 그는 공포가 차오르는 걸 느끼며 내정자들의 숫자를 셌다. 빙 둘러 앉아 식사를 하는 내정자의 숫자는 스물세 명. 정원보다 두 명이 부족하다. 백광장에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지금으로선 죽었다고 보는 게 옳다. ‘젠장. 어떻게 된 일이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문득 그의 눈에 한 가지 간과했던 사실이 포착됐다. 스물 세 명의 내정자 중 단 한 명. 주시자의 눈을 달고 있지 않은 녀석이 있었다. 중키에 마른 체구. 얼룩무늬 군복에 낡은 청바지를 입은 무표정한 사내였다. 혹시 투명화 마법이 미처 해제되지는 않았을까 미리 준비한 투시의 안경을 통해 재확인했지만 역시 그에겐 다른 이에게 있는 주시자의 눈이 없다. ‘설마 저 자식이..? 뭔가 수작을 부린 건 아니겠지?’ 크릴 리갈의 눈동자에 차가운 살기가 감돌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내정자 그룹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지목했던 그 군복 - 청바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숲 쪽을 향해 홀로 걸어갔다. 찬스다. 크릴 리갈은 입안이 바짝 타는 걸 느끼며 그 사내의 뒤를 쫓아 숲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지만 전부 불게 만들어주지.’ 잔인한 것을 싫어하는 유약한 성격이지만 지금은 물불 가릴 때가 아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는 위기를 넘겨야 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드잡으며 크릴 리갈은 영혼 창고에서 마법 지팡이를 꺼내 사내의 자취를 쫓았다. “날 찾았나?” 예상치 못한 음성이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돌려왔다. ‘뭐야. 이 자식.’ 뒤를 잡혔다. 하지만 신입 소환자일 뿐이다. 굳이 마법을 쓰지 않아도 소환 궁전의 퀘스트를 수행하며 올린 기본적인 육체의 힘만으로 능히 상대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크릴 리갈이 뒤돌아서는 순간 그야말로 무식한 일격이 그를 일격에 때려눕혔다. 퍽! 한 방에 골이 떨리고 눈앞에 노랗게 보일 정도의 일격이었다. “으엑!” 정신을 차렸을 때 크릴 리갈은 미지의 사내가 자신의 가슴을 발로 밟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못에 박힌 듯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제서야 크릴 리갈은 저 군복 사내가 평범한 신입 소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어. 마법사. 뭣 때문에 날 찾았나?” 그 사내, 김성철이 싸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 그건....” “피보호자를 찾으러 오셨나?” 크릴 리갈의 동공이 급격하게 수축됐다. 한 번에 정곡을 찔린 것이다. “그 녀석은 어떻게 됐습니까?” 크릴 리갈이 다급하게 물었다. 이미 대부분의 희망이 사라진 상태지만 혹시나 하는 한 줄기 희망에 모든 걸 걸면서 말이다. 이에 대한 김성철의 답은 묵직했다. “죽었다.” “으... 으...” 크릴 리갈이 고개를 옆으로 떨구었다. 종말이라는 단어가 뇌리를 가득 채워나갔다. 희망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자신을 돕던 노예사냥꾼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한쪽 팔이 잘려나가 의수를 찬 그 중년 마법사. 최악이라 생각했던 그 모습이 이제는 최선으로 보였다. 그때 기적 같은 한마디가 위에서 떨어졌다. “살 구멍을 찾나?” 김성철이었다. 그는 크릴 리갈을 밟은 발을 떼며 조용히 말했다. “날 도와라. 그럼 너에게 살 길을 마련해주겠다.” 툭. 크릴 리갈의 머리 맡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떨어졌다. 푸른 빛으로 번쩍이는 에메랄드였다. ======================================= 4. 크릴 리갈 (3) 돈만 있으면 뭐든 가능하다. 이계와 현실의 공통점이다. 철혈기사단의 내정자 중 두 명이 죽었다. 하지만 실제로 보고된 것은 하나 뿐. 자신의 내정자를 잃은 또다른 마법사는 우락부락한 철혈기사단원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크릴 리갈의 길지 않은 생애를 통틀어 가장 아찔한 순간이었다. 크릴 리갈은 철혈기사단 고위 기사의 집무실에 소환되어 갑주를 걸친 사내 앞에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현명한 친구군. 크릴 리갈이라고 했나?” 철혈 기사단의 고위 기사는 굵직한 에메랄드를 눈에 가까이 대고 한 눈으로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얼굴에 난 흉터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공적을 세운 그의 이름은 철혈기사단 제3공격대 대장 마상길. 이번 대규모 소환에서 내정자 육성 관리를 맡은 총책임자다. “푼돈으로 날 매수하려고 했다면 호된 꼴을 당했을 거야. 아마도 아까 끌려 간 녀석보다 더 심한 꼴을 당했을지도 모르지. 자네가 잘 모르는 대한민국엔 괘씸죄라는 중죄가 있거든.” 마상길은 그렇게 말하며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 제가 어찌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알고 있어. 그러니 자네를 여기 부른 거지.” 마상길은 에메랄드를 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은 전망대에 복귀하게.” “네? 복귀.. 하라고요?” 그의 담당 내정자는 죽었다. 할 일도 없는데 그 끔찍한 장소에 있어서 무엇을 하겠는가. 마상길은 손톱 소제기로 손톱을 가다듬으며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친구인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군.” “…….” “장현석이는 살아 있는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크릴 리갈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 남자의 말 대로야!’ 이름을 밝히지 않은 그 사내는 크릴 리갈에게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그걸 넘기면 당장은 살려주는 모양새는 취할 거야. 하지만 명심해라. 놈들은 결코 널 놓아주지 않을 것이고 용서하지도 않을 것이야.” 이름 모를 사내의 말 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다. 마상길은 크릴을 다시 전망대로 올려 보냈고 대기시켰다. 자신의 거처로 돌아간 크릴은 창가에 매단 작은 새장 안을 바라보았다. 새장 안엔 하얀 줄무늬 털을 지닌 작은 날다람쥐 한 마리가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크릴 리갈은 날다람쥐의 발에 깨알처럼 쓴 편지를 묶은 뒤 창문을 열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걸 그 사람에게 전해 줘.” “뀨뀨!” 영특한 날다람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열린 창문을 향해 작은 몸을 날렸다. * “뀨뀨!” 김성철은 다람쥐의 발에 묶인 종이를 풀어 내용을 확인했다. [ 내일 등급전은 알라모 룰. 술래는 좀비 ] [ 보상 커트라인은 1/3/10/30마리 ] [ 보너스 몬스터는 빨간 모자를 쓰고 있음 ] “…….” 김성철은 내용을 머릿속에 담고 종이를 두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종이조각은 가루가 되어 바람결에 흩날렸다. “잘했다.” 김성철은 품속에서 빵조각 하나를 떼어 날다람쥐에게 내밀었다. “뀨잉?” 날다람쥐는 빵조각을 맛있게 먹고는 김성철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영특한 녀석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크릴 리갈이 전달한 정보를 되새겼다. “좀비가 나오는 알라모 룰이라. 나쁘지 않은 시작이군.” 등급전의 방식엔 여러 개가 있다. 각 광장의 소환자끼리 싸움을 벌이게 하는 데스매치라던가 소수의 엘리트를 뽑아 광장을 대표해 싸우게 하는 대장전, 혹은 일방적으로 괴수를 피해 도망다녀야 하는 팩맨 등등. 이름의 유래와 출처가 불분명한 잡다한 룰이 존재한다. 곧 시작될 알라모 룰은 소환자들이 힘을 합쳐 다수의 마물을 막는 시련이다. 등장하는 마물의 강함은 초보 소환자도 충분히 상대가능한 수준으로 맞춰지긴 하는데 그 숫자가 대단히 많다. 막는 입장으로선 끝도 없이 밀려드는 몬스터를 막는 기분이 들 정도로 말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건 기회다. 약한 몬스터라고 하나 처치만 가능하면 보상을 얻을 수 있으니까. 크릴 리갈은 보상 커트라인을 명시했는데 그에 따르면 1, 3, 10, 30마리마다 보상이 달라진다. 즉, 30마리 이상만 처치하면 가장 괜찮은 보상을 손에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 물론 처치 순위권 3위 안에 들어가면 특별한 보상이 주어지지만 김성철은 3위 안에 들 마음은 없었다. 적당히 활약하면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을 모두 얻는 것. 그것이 김성철이 목표다. 김성철이 주목하는 건 보너스 몬스터의 존재였다. 빨간 모자를 쓴 좀비. 그 보너스 몬스터는 일반 몬스터보다 조금 강하지만 처치할 수 있다면 즉발적인 보상을 준다. 그 보상으로 무엇이 주어질 진 알 수 없지만 김성철의 경험에 의하면 궁전 토큰은 반드시 포함된다. 그것은 열아홉 개의 궁전 토큰이 더 필요한 김성철에겐 꿀 같은 정보가 아닐 수 없었다. 이튿날 새벽. 김성철은 익숙한 마기를 느끼고 눈을 떴다. 네크로맨서들이 소환 궁전에 도착했고 시체들을 불러일으키는 의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끄어어어어어.....” 소환 궁전 지하, 시체 안치실에선 시체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대규모 소환 첫날 각 광장에서 죽임당한 소환자들의 것이다. 수천 구의 시체들은 네크로맨서의 명령을 따라 지하통로를 따라 백광장 바깥 성문 쪽과 통하는 출입구에 머물렀다. 일반 소환자들은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지만 내정자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김형! 목소리 들었지?” 부쩍 친한 척을 하는 하영종이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늘 등급전이 시작된다는 이야기 말인가?” “응. 담당 말로는 뒤로 빠지지 말고 앞에서 싸우래. 힘닿는 데까지.” “그래?” “최소 서른 마리 이상은 죽이라고 하던데. 어휴 씨벌.... 조금 떨리네.” 서른 마리 이상이라는 조건은 최고 등급의 보상을 얻기 위한 조건. 크릴 리갈의 정보는 믿을만하다. 잠시 후 아침 해가 떠오른 뒤 훈육실장을 비롯한 호문클루스들이 백광장에 나타났다. “자자! 인간들 일어나는 거예요! 지금부터 가장 중요한 등급전이 시작되는 거예요!” 굶주림과 갈증에 지친 사람들은 이제는 텅 비어버린 눈으로 호문클루스들을 쳐다봤다. 훈육실장은 톱니 같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으며 특유의 듣기 싫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곧 여러분과 같이 이곳에 왔던 친구들이 여길 덮칠 거예요! 조건은 간단해요! 1시간 동안 옛 친구들과 놀아주기! 하지만 명심하세요! 친구를 죽이면 물과 식량을 얻을 수 있다는 걸! 많이 죽이면 많이 죽일수록 얻는 보상도 커진다는 것을!” 호문클루스들이 사라진 후 성벽 너머에서 낮은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늘 닫혀 있던 거대한 성문이 활짝 열렸다. 군중들은 저마다 검을 든 채 긴장한 얼굴로 서서히 열려가는 성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성문 바깥엔 수천 명에 달하는 인간들이 서 있었다. 비틀거리고 기괴하게 걷는 인간들이 말이다. 사람들의 웅성임이 여기저기서 이는 가운데 김성철은 눈앞에 떠오르는 장문의 글을 읽어나갔다. [ 첫 번째 등급전을 시작합니다. ] [ 룰 : 알라모 ] [ 등장 몬스터 : 좀비 ] [ 검을 들고 싸워라. 적을 베어라. 이곳에서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서만 증명될 터이니. ] “검이라.” 김성철은 피식 웃으며 손에 든 지팡이를 꾹 잡았다. 월광. 베스티아레의 선물 중 하나. 오늘 김성철은 검 대신 월광을 쓸 생각이다. 그 이유는 전망대에 자리 잡은 구경꾼들 때문이다. 등급전이 있는 날에 이계의 실력자들은 전망대에 올라 어느 광장이 이길 것인지 큰돈을 걸고 내기를 한다. 그중엔 검을 제법 다루는 놈도 있고 싸움에 빠삭한 놈도 있다. 월광을 쓰면 당장은 눈에 띄겠지만 높은 곳에 위치한 녀석들은 관심을 빠르게 잃어버린다. 그들이 보고 싶은 건 아이템에 의지하는 약골이 아니라 진정한 싸움꾼으로서 싹을 보이는 원석들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오늘 전장에서도 묻혀 있던 실력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유감없이 피로할 것이다. “김형. 잘해봅시다.” 내정자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선두그룹에 섞여 있었다. 김성철은 그중 박아람을 찾았다. 박아람도 선두에 서 있었다. 그런데 그가 들고 있는 건 검이 아니라 지팡이었다. 김성철의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마력이 충전된 마력스태프로 보였다. ‘제대로 된 수련을 하지 않았으니 결국 저걸 손에 쥐어 준 것인가.’ 베스티아레의 자취까지 김성철이 소멸시켰으니 담당 마법사로도 별 뾰족한 수가 없었을 것이다. 눈치 보이긴 하지만 실적을 올려주기 위해선 당장 쓸 수 있는 아이템을 쥐어주는 것밖엔. 오히려 김성철에겐 잘된 일이다. 눈치 보지 않고 월광을 마음껏 쓸 수 있으니까. [ 등급전을 시작합니다. ] [ 결계가 해제되었습니다. ] [ 조심하세요! 당신은 죽을 수도 있습니다! ] 메시지가 사라지며 성문 바깥에 있던 좀비들이 광장안으로 일제히 밀고 들어갔다. “우워워워워!” 물밀 듯이 들어오는 좀비의 공세에 소환자들은 대체로 두려워하며 뒤로 물러나는 선택을 했다. “으으...! 살려줘!” “이게 뭐냐고 도대체...” 반면 좀비들의 대군에 맞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이들도 있었다. “자! 갑시다! 여러분!” 일반 소환자 중에서 일부 뜻 있는 사람들이 진형을 갖추고 좀비들을 맞상대했다. 김성철은 그들을 이끄는 사내가 첫날 본 중년의 회사원이라는 걸 기억했다. 사람들에게 면박을 받아가며 일행을 모으던 바로 그 사내였다. 그는 힘에 부치긴 하지만 필사적으로 싸우며 좀비들과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다. 그들과 별개로 자신의 위치에서 묵묵히 싸우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 또한 내정자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투지와 전투에 대한 센스가 있었고 좀비 하나를 처치할 때마다 감각을 익히고 강해지는 타입이었다. 아마도 전망대 위에서 지켜보고 있을 실력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유형일 것이다. 물론 내정자들도 뒤에서 구경만 한 건 아니었다. “자! 갑시다! 여러분!” 이여훈을 비롯한 내정자들도 싸움에 합류했다. 스걱! 너무나도 간단하게 좀비가 썰린다. 당연한 결과다. 좀비들의 수준은 일반 소환자에 맞춰져 있었다. 일주일 동안 버려진 성당의 축복에 강화된 시작의 검, 거기다 수련까지 거듭한 내정자들 앞에선 그저 냄새나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우.. 우와! 내가 한 새끼 처치했어!” 내정자들 중에서도 특히 겁 많은 하영종이 가볍게 한 녀석을 베어 넘겼다. 여성 중 몇 명은 눈치를 보며 끝끝내 나서지 않았지만 내정자들은 충분히 자신의 몫을 해주고 있었다. 한편 박아람은 내정자 그룹에서도 후미에 여자들과 함께 눈치를 보다가 때가 되자 지팡이를 유감없이 휘둘렀다. 그의 지팡이에선 두 마리의 스피릿 울프가 나타나 주변의 좀비들을 사이로 뛰쳐 들어가 피바람을 일으켰다. “잘한다! 잘해!” 박아람이 깔깔되며 웃는 소리가 전장 위에 높게 울려 퍼졌다. “…….” 김성철은 잠시 싸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 때까지 전투를 사리다가 적절한 때가 왔을 때 월광을 사용했다. 지팡이를 좀비 쪽에 겨누고 강한 힘을 주입만 하면 지팡이 끝에서 에너지 볼트가 뿜어져 나와 좀비의 몸통을 꿰뚫는다. “우와! 김형! 그거 뭔가요?” 하영종이 깜짝 놀라며 묻자 김성철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이거? 숲속에서 주은 거야.” 그렇게 말하며 김성철은 빠르게 좀비들을 처치해나갔다. 열 마리, 스무 마리, 스물아홉 마리. 마지막 한 마리를 남겨두고 김성철은 밀려오는 좀비들을 지그시 응시했다. 이윽고 그의 눈에 찾던 녀석이 포착됐다. 빨간 모자를 쓴 녀석. 보너스 몬스터다. 김성철은 지팡이를 들고 보너스 몬스터를 향했다. 그런데 그에 앞서 두 마리의 스피릿 울프가 그를 지나쳐 빨간 모자를 쓴 좀비에게 먼저 달려들었다. 경박한 웃음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다. “하하하하하! 그건 내꺼야! 아무도 손대지 말라고! 박아람이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살기가 떠올랐다. ‘이 새끼가. 뒤지려고..’ 하지만 아직 죽이긴 아까운 놈이다. 앞으로 여러모로 쓸모가 많으니. 김성철은 바닥에 엎어진 좀비의 머리통을 잡고 뒤로 던졌다. 쏜 살처럼 날아간 머리통은 그대로 박아람에 적중했다. “켁!” 박아람이 혀를 깨물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놓으며. 그가 지팡이를 잃어버리자마자 앞서가던 스피릿 울프가 사라졌다. 마법의 힘을 잃은 것이다. 이제 빨간 모자를 독식할 기회다. 그렇게 생각하며 월광을 겨누던 순간 김성철의 눈에 표범처럼 빨간 모자에게 달려드는 여성이 포착됐다. 겉은 평범한 소환자다. 하지만 달려드는 기세와 실력, 무엇보다 오롯한 눈동자가 지닌 기운은 평범치 않다. 하마터면 빨간 모자를 놓칠 수도 있다. “…….” 김성철의 온 몸에 신적인 힘이 깃들었고 어느새 그는 빨간 모자와 달려드는 의문의 여성 사이에 서 있었다. 푹! 김성철의 검이 빨간 모자를 쓴 좀비의 심장을 꿰뚫었다. 김성철과 의문의 여성의 눈이 마주쳤다. 경악으로 물들어있지만 역시 범상치 않은 눈빛이다. 필경 수많은 수라장을 해치고 살아남았으리라. 하지만 이윽고 나타난 메시지는 여성의 눈빛을 덮어버렸다. [ 당신은 보너스 몬스터를 처치했습니다! ] 보상 : 1. 궁전 토큰 3개 2. 기운의 연 방패(일반) ======================================= 5. 연금술사 첫 번째 등급전이 끝났다. 광장엔 수많은 사람과 좀비들이 시체에 널려 있었다. 상대적으로 쉬운 시련이라지만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광장에 있는 소환자의 숫자가 천 명 밑으로 줄었다. 사상자의 대부분은 후반에 집중됐다. 끝없이 밀고 오는 좀비들의 숫자에 선두 그룹이 무너지자 그 틈으로 좀비들이 비집고 들어왔고 학살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소환자 그룹의 전체적인 힘은 전보다 강해졌다. 좀비를 쓰러뜨린 자들은 그 기여도에 상응하는 능력치 상승과 보상을 받았다. [ 첫 번째 등급전이 끝났습니다. ] [ 백광장이 처치한 마물의 숫자는 852마리 ] [ 청홍백적 4 광장 중 4위입니다. ] [ 전체보상이 순위에 따라 조정됩니다. ] [ 소환 궁전의 운영위가 보상을 심사합니다. ] 생각지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아니 기억은 하고 있었지만 망각했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등급전의 전체 보상이 광장 간 순위에 따라 차등지급 된다는 것은 25년 전에도 알고 있었다. 기억해내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고 곧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백광장은 언제나 1등만 했었지.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다른 광장에 뒤처진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어. 그래서 다시 여기 왔을 때 백광장을 택했고 간과해버린지도 모르겠군.’ 약 25년 전. 백광장엔 유능한 인물이 많았다. 리더십이 강해 흩어진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던 녀석, 머리가 좋아 어려운 시련에 대한 기발한 해결책을 발견해내던 녀석, 선두에서 묵묵히 싸우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던 녀석. 김성철의 경우엔 3번째에 해당했다. 그는 언제나 최전선에서 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덕분에 예상치 못한 보상을 얻어 강해졌다. 그때의 얼굴들이 차례로 뇌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죽은 녀석도 있고 산 녀석도 있다. 산 녀석들은 대부분 이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인이 됐다. “…….” 회상은 곧 이어 떠오른 문자에 의해 중단됐다. [ 각 광장에 대한 보상심사가 종료됐습니다. ] [ 축하합니다! 당신은 첫 번째 등급전을 수료하였습니다! ] [ 당신의 마물 처치 수는 35마리(순위권 외). ] [ 보상등급 A급으로 평가되었습니다. ] 기본 보상 : 1. 궁전토큰 2개 2. 신선한 고기 한 토막 3. 사과 5알 4. 식량 일주일 치 선택 보상 : 1. 퇴마의 성수 2. 익스플로전 스크롤 3. 바람술사의 단검 중 택일 기본 보상은 처음 등급전인 만큼 단출했다. 김성철의 시선을 끄는 쪽은 선택 보상이었다. 어느 하나가 우월하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막상막하의 구성이다. 퇴마의 성수와 익스플로전 스크롤은 둘 다 일회성 소모 아이템이긴 하나 전자는 등급전 룰 중에서 최악의 룰로 손꼽히는 팩맨 룰에서 생존을 보장하고 후자는 알라모 룰이나 데스매치 룰에서 대량 득점을 하는데 특화되어 있다. 개인의 실력을 믿고 보다 좋은 장비를 원하는 경우엔 바람술사의 단검도 좋은 선택이다. 민첩성을 5나 올려주는데다 치명타 효과까지 붙어 소환 궁전을 졸업할 때까지 쓰고도 남을 정도의 성능이니까. 25년 전 김성철이 선택한 것도 바람술사의 단검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김성철은 익스플로전 스크롤을 선택했다. 단검은 김성철에게 필요 없는 물건이고 퇴마의 성수보단 익스플로전 스크롤이 범용성이 높았다. 퇴마의 성수가 오직 마물 상대로 통하는데 반해 익스플로전 스크롤은 마물은 물론 인간상대로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익스플로전이 정타로 들어가면 팩맨 룰의 팩맨 역을 맡는 괴수에게도 유효타를 먹을 수 있으리라. 김성철은 보상들이 담긴 보따리가 나타나는 걸 응시했다. 궁전 토큰과 식량, 익스플로전 스크롤. 김성철은 보상을 갈무리 한 후 자리를 떠나 훈련소로 돌아갔다. 당연한 일이지만 내정자는 전부 건재했고 일부 내정자는 순위권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했다. “택수. 멋진데? 순위권 3위에 오르다니. 최고 기록이잖아?” 등급전 결과는 소환 궁전 곳곳에 자리 잡은 기록의 돌을 통해 열람할 수 있다. 김성철은 재미 삼아 기록의 돌을 열람했다. 그에 따르면 이번 등급전 순위는 아래와 같았다. [ 1. 아무개 - 142마리 ] [ 2. 천정식 - 100 마리 ] [ 3. 김택수 - 85 마리 ] ... [ 6. 이여훈 - 64 마리 ] ... [ 21. 하영종 - 44마리 ] [ 22. 김성철 - 35마리 ] [ 23. 박아람 - 29마리 ] ... 김성철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개와 천정식이라. 모르는 이름인데.’ 김성철의 뇌리에 전장에서 마주쳤던 여성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보너스 몬스터를 두고 경쟁하던 그녀의 솜씨는 범상치 않았다. 어쩌면 저 두 명 중 그 여자의 이름이 저기 올라 있을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시선을 내려 아래 순위를 응시했다. 눈에 띄는 이름이 있다. ‘박아람. 공교롭게도 29마리군.’ 의도한 건 아니지만 김성철이 전투 중에 던진 좀비 대가리에 맞고 박아람은 혼절했고 그 이상의 스코어를 기록하지 못했을 뿐더러 스피릿 울프를 소환하는 지팡이마저 누군가에게 도난당한 모양이다. 김성철은 훈련장 한 구석에서 침울한 얼굴로 앉은 박아람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김성철은 계속해서 기록의 돌을 조작했다. [ 역대 기록도 보시겠습니까? ] 승낙이라고 강하게 생각하자 김성철 눈앞에 방대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 역대 첫 번째 등급전 기록 순위 ] [ 1. 윌리엄 퀸튼 말버러 - 301 마리 ] [ 2. 샤말 라지푸트 - 275 마리 ] [ 3. 김성철 - 256 마리 ] ... 그 순위를 본 김성철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윌리엄.. 샤말.. 지금은 그리운 이름이군. 게다가 내 이름까지 순위권에 있다니. 어떻게 된 거지? 과거보다 지금이 훨씬 기록 세우기 좋은 때가 아닌가?’ 과거엔 내정자라는 게 존재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순수한 육체의 힘만으로 밀려드는 마물에 맞서야 했다. 과거보다 지금 성적이 더 잘 나와야 되는 게 인지상정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안락에 길든 내정자들이 열심히 하지 않거나 아니면 현재의 소환자들의 수준이 과거보다 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겠지. 김성철은 기록의 돌을 떠나 훈련소로 다시 돌아갔다. 내정자들은 이제 각자의 보상들을 펼쳐놓고 품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표정이 어두운 몇 명이 보인다. 보상을 받지 못한 자들이다. 내정자라는 혜택을 안고도 전투에 대한 두려움 혹은 거부감으로 뒤에 있다가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들은 다른 내정자들이 보상들을 꺼내놓고 자랑을 할 때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김형! 이거 봐!” 눈치 없는 하영종이 큰 소리로 김성철을 부르며 말을 걸어 왔다. 그의 오른 손바닥 위엔 투명한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있었다. 퇴마의 성수다. “김형도 있지?”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어? 왜?” “왜라니?” “아까 보니 김형도 30마리 넘게 죽였던데. 뭘 고른 거야? 설마 담당 말 무시하고 다른 거 고른 거야?”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영종이 펄쩍 뛴다. “아니.. 간도 크지. 그거 없으면 다음 등급전에 죽을 수도 있다는데. 그 팩맨인지 뭔지 하는 게임에서 말이야.”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아.” 하영종의 말을 듣고 다른 내정자들을 보니 모두들 선택 보상으로 퇴마의 성수를 선택한 모양이다. 아마도 담당 마법사가 1순위로 권했으리라. 팩맨 룰에서 확실히 살아남기 위해선 말이다. 보상을 얻지 못한 내정자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운 것도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으.. 시벌...” 기세등등하던 박아람조차 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손톱을 뜯고 있을 정도면 말이다. 녀석의 경우엔 밥줄인 마력 스태프까지 분실한 또 다른 죄도 있긴 하지만. 한편 내정자 중에서도 엑스맨은 존재했다. 김성철이 잘 아는 얼굴이다. 첫날, 지금은 죽은 십대 소년과 함께 김성철을 무시하고 험담을 일삼던 명품으로 몸을 휘감은 여자. 배성혜. 그녀는 단 한 마리의 좀비도 처치하지 못했다. 힘이 부족한 건 아니다. 무기도 다른 내정자보다 월등히 좋은 걸 쓰고 있다. 그럼에도 스코어가 0에서 머무른 이유는 좀비를 벨 정도의 용기를 내지 못한 탓이다. 어쩌면 귀찮아서, 혹은 하기 싫어서 불살이란 길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어떤 보상도 얻지 못한 그녀는 이제 당장의 끼니조차 걱정해야 될 지경이다. 김성철은 아까부터 배성혜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김성철을 응시했다. 가까이 오지 못하는 이유는 김성철 옆에 하영종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김성철은 물론 하영종도 무시했다. 얼굴이 못 생기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소심한 사내는 조롱하기 딱 좋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뒤 바뀌었다. 화려한 외모와 현실 세상에서 부잣집 따님이라는 신분이 주던 후광은 퇴색되고 대신 스코어 0이라는 초라한 딱지를 달고 있다. 식사를 하며 함께 담소를 나누던 그녀의 동료들은 이제 배성혜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다. 배성혜가 김성철에게 직접 말을 걸어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자! 자! 인간들! 좀비와 좀비에 죽은 시체를 방치하면 전염병이 돌지도 모르는 거예요! 어서 빨리빨리 움직여서 일을 하는 거예요!” 호문클루스들이 염소가 끄는 수레를 끌고 나타나 소환자들에게 시체를 수레에 실을 것을 요구했다. 김성철도 작업에 동참해 시체 한 구를 번쩍 들어 올려 수레 위에 올려놓았다. “저기.” 주저하는 낯익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김성철은 뒤를 돌아보아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배성혜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적대적인 눈빛은 아니지만 호의적인 눈빛도 아니다.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무심한 눈빛을 받으며 배성혜는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이런 녀석에게... 구걸을 해야 하다니...’ 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배성혜는 모든 힘을 쥐어짜내 얼굴 위에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냈다. “안녕하세요?” “용무가 뭐지?” 이런 여자에게 일분 일초도 할애할 시간도 없다. 김성철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배성혜는 가슴이 턱하고 막히는 느낌이 들었으니 이미 기호지세다. 그녀는 김성철의 싸늘한 눈길을 피하며 준비했던 말을 입밖에 내었다. “저기... 첫 날엔 미안했어요. 그땐 모든 게 당황스럽고 황당해서.. 제 정신이 아니었나 봐요.” “그래서 용건이?” 김성철이 배성혜의 말을 끊어먹었다. 어릴 때부터 항상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수많은 남자들을 거느린 과거를 지닌 배성혜는 다른 이보다 남자라는 생물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 감각이 그녀에게 말해주고 있다. 이 남자는 그녀에게 일말의 흥미조차 없다는 걸.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다. 배성혜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솟는 걸 느꼈다. “할 말이 없으면 이만.” 김성철은 돌아서서 다른 시체 쪽으로 걸어갔다. 배성혜는 몸이 달았고 결국 비장의 수를 뒀다. 그녀는 김성철 앞을 가로 막고 서며 코웃음을 치며 달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도 남자죠? 그것도 젊은. 전 어때요?” 자존심도 벗어던지고 추파를 던졌다. 김성철은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묵직하게 말했다. “뭐가?” “모른 척 하지 않으셔도 되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절 도와주세요.” “무엇을 원하지?” 배성혜는 김성철이 등 뒤에 매고 있는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에너지볼트를 발사하는 마력스태프 월광. 그것만 있으면 비위가 약한 그녀도 스코어를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배성혜는 김성철에게 접근한 것이다. “그 지팡이. 그것만 빌려주시면 제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뭐든 다 해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며 배성혜는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검은 브래지어 사이에 은밀히 드러난 가슴골이 탐스런 자태를 드러냈다. “오랫동안 많이 쌓이셨죠? 그쪽에서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도 가능해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녀를 놀란 혹은 경멸 어린 눈으로 응시했지만 배성혜로서는 물러설 길이 없었다. ‘저 남자 지팡이만 뺏어올 수만 있다면.. 누가 뭐래든 관계없어.’ 그런데 김성철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최영 장군이 황금 보는 듯한 눈으로 무심하게 배성혜의 가슴골을 응시했다. 순간 배성혜는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이 자식.. 그 메기처럼 생긴 놈과 어울리더니.. 혹시...?!’ “아가씨.” 김성철이 말했다. 배성혜는 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김성철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아래쪽을 가리키며 담담하게 말했다. “용기는 가상한데 내껀 더 이상 서지 않아.” 그리고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배성혜를 떠났다. 배성혜로서는 머리가 핑핑 돌 정도로 혼란한 순간이었다. ‘저런 놈에게 거절당하다니... 저런 촌티 나고 냄새나는 놈한테!’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오랫동안 제대로 씻지 못한 자신의 몸에서도 김성철의 것과 비슷한 아니 더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그런데 배성혜는 끈질긴 여자였다. 그녀는 기어코 김성철을 따라 잡아 다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김성철은 이번에 자비심이 없었다. 무심한 눈에서 오금을 저리게 할 정도의 살기가 뿜어져 나오자 배성혜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고 목이 메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그 지팡이를.... 빌려주세요.. 제발...” 배성혜는 흐느끼며 그에게 매달렸다. “내게 뭘 줄 거지?” 김성철이 돌아섰다. 값싼 동정심 때문이 아니다. 행여라도 이 여자에게 조금이라도 이용가능성이 있는 걸 확인해보기 위함이다. “뭐.. 뭘 원하시는데요?” 그녀의 물음에 김성철은 자신의 머리 위를 가리키며 제법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물어 봐. 내게 뭘 줄 수 있는지.” 마법사들은 내정자가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 배성혜만큼이나 절박한 건 그녀의 담당 마법사인지도 모른다. 크릴 리갈의 절박한 얼굴을 떠올리며 김성철은 속으로 웃었다. ======================================= 5. 연금술사 (2) “자. 이곳이에요. 이제 약속을 지키세요.” 다른 건 몰라도 배성혜의 행동력 하나만은 인정 할만 했다. 그녀는 1시간도 지나지 않아 김성철에게 새로운 ‘줄 것’을 구해 왔고 재차 교섭을 시도했다. 그 줄 것이란 김성철이 바라마지 않는 것. 즉, 히든 퀘스트였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구미가 당기는 녀석은 아니다. 배성혜가 가지고 온 히든 퀘스트는 새로운 클래스를 주는 일명 직업 퀘스트인데 문제는 그 직업이 썩 좋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가장 안 좋은 직업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연금술사 클래스. 소위 개도 안 가지는 클래스. 연금술사가 천대받는 건 이유가 있다. 마법사가 화이어볼을 쓰려면 화염학파의 마법학교에 들어가 직관력과 마력을 높인 후 마법을 습득, 마나를 소모해 쓰기만 하면 그만이다. 연금술사도 시작은 마법사와 비슷하다. 마법사처럼 연금학파의 마법학교에 들어가 직관력과 마력을 높인 후, 화이어볼 급의 파괴력을 지닌 마도폭탄의 제조기술을 습득해야 한다. 그런데 연금술사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값비싼 재료를 사거나 구해야 하고 그 재료를 가공할 도구도 구해야하며 또 오랜 시간을 들여 준비한 재료를 연성해야 한다. 연성중에 실패할 확률이 있는 건 덤. 사람들은 보다 간단한 투자를 통해 같거나 우월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마법사를 선호했고 연금술사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연스레 연금술사는 비인기 클래스가 됐다. 특히 연금술사를 메인 클래스로 택한 소환자는 피학성 변태, 즉 마조히스트라고 놀림 받기까지 했다. “이 마른 우물 안 쪽으로 들어가면 연금술사 클래스를 주는 히든 퀘스트를 받을 수 있어요.” 히든 퀘스트라는 걸 강조하곤 있지만 김성철이 누군가? 산전수전 다 겪은 그는 연금술사가 쓰레기 클래스라는 걸 익히 잘 알고 있다. “연금술사는 사양이야.” 김성철이 말하는 상대방은 배성혜가 아니라 배성혜 뒤에 붙은 마법사다. “왜죠?” 배성혜가 따지듯 물었다. “마음에 안 들어. 연금술사라는 거. 난 부수는 건 잘하지만 만드는 건 딱 질색이거든. 다른 히든 퀘스트를 가지고 와. 특히 직관력을 올릴 수 있는 녀석으로. 아니면 이 지팡이는 넘겨줄 수 없어.” “…잠깐만요.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배성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뒤돌아섰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있는 걸 보니 전망대에 있을 마법사와 피 말리는 교신을 하는 모양이다. 이윽고 배성혜가 뒤돌아섰다. 그녀의 입가엔 어색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직관력을 올려주는 퀘스트를 원하신다고 했죠?”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됐네요. 제가 제시하는 히든 퀘스트를 수행하면 직관력을 15나 올릴 수 있으니까요.” “15?” 지나치게 큰 수치다. 히든 퀘스트 아니 위업을 달성해도 한 번에 획득할 수 있는 능력치 상한은 기껏해야 10 안팎. 그런데 위업도 아닌 히든 퀘스트 주제에 단일 능력치 15나 올려준다니. 나가도 너무 나갔다. “그건 좀 믿기가 곤란한데.” “진짜예요! 모든 조건을 만족했을 경우의 최대치긴 하지만....” “최대치?” “네. 제 담당 말씀으론 보통 3~4정도 많으면 5까지 올릴 수 있지만 모든 조건과 시련을 클리어하면 15까지 올릴 수 있다고 하시네요.” “그거 믿어도 되나?” 김성철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배성혜의 눈동자가 한 차례 흔들렸지만 거짓이라기보다 김성철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동요를 보인 걸로 보인다. “네. 믿어도 되요.”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성철은 마력스태프 월광을 배성혜에게 내밀었다. “만약 그 말이 거짓이면 대가를 묻겠다.” “마.. 마음대로 하세요.” 배성혜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 후 지팡이를 들고 도망치듯 우물가를 떠났다. 이제 홀로 남은 김성철은 메마른 바닥을 지닌 깊은 우물 안을 무심한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 쿵! 우물 바닥으로 통하는 도르래가 있긴 하지만 김성철은 그냥 뛰어 내렸다. 말라붙은 바닥에 들러붙은 먼지가 일어나 주변이 자욱해졌지만 김성철의 눈은 먼지 너머에서 반응하는 미약한 마력 반응을 주시하고 있었다. [ 시대의 경이. 8영웅 에크하르트의 자취 ] ‘8영웅...? 에크하르트?’ 김성철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7영웅은 있지만 8영웅은 금시초문이다. 에크하르트란 이름도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다. [ 당신은 시대의 경이를 보고 있다. ] [ 진정한 영웅 에크하르트의 기말 시험. ] 김성철은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눈앞에 연이어 떠오르는 이름은 김성철의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누구야?” 순간 우물 전체가 미약하게 떨렸다. 멀리서 벽을 치는 것 같은 감각 또한 느껴졌다. 잠시 후 우물의 벽이 저절로 열렸다. 마법이 아니라 고전적인 기계장치에 의한 것이다. 그것도 기계장치 일부분이 녹슬었는지 열리다 만다. 그걸 본 김성철은 과연 이 퀘스트를 해야 마나 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베스티아레의 꿈과 비교하면 지나치게 조잡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안하는 게 좋겠군.’ 안 그래도 연금술사 클래스 자체가 에러다. 직관력을 얻는다고 해도 귀중한 서브 클래스 슬롯을 쓰레기 클래스로 채워 넣는 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손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필요 없는 클래스야 나중에 지식의 신전에서 지울 수 있다지만 그건 그거 나름대로 수고스런 일이기도 하고. 김성철은 얕은 한숨을 내쉬고 뒤돌아섰다. 그런데 뒤돌아서기 무섭게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 정말 시대의 경이를 그냥 지나치겠는가? ] 김성철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또 다른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른다. [ 시대의 경이 팔영웅(칠영웅 아님) 에크하르트의 기말 시험 ★ 도전만 해도 직관력 1 무료 상승(최대 15!!!) ★ 고대의 유산 탐방 ★ 특정조건 완료시 사역마 획득 ★ 위업 달성 기회 /// 지금 도전하면 이 모든 게 공짜! ] “…뭐야. 이건.” 지금까지 수천 가지가 넘는 퀘스트와 위업을 수행했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퀘스트는 처음이었다. 뭐랄까. 퀘스트를 만든 자의 절박함이 느껴졌다. 얼마나 도전하는 사람이 없으면 이렇게 하겠는가. ‘그나저나 직관력을 15나 올릴 수 있다는 건 이걸 보고 말한 건가.’ 배성혜 너머에 있을 마법사도 여기 들어왔다가 한 번 뒤돌아선 모양이다. 연금술사 클래스를 얻었는지 안 얻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음...” 제법 고민이 되는 순간이다. 김성철은 과장 광고에 약했다. 그런 일에 직면할 때마다 속는다기보다는 속아준다는 느낌으로 무심코 도전하곤 했다. 꽝이면 어쩔 수 없지만 운 좋게 좋은 물건을 손에 넣으면 그야말로 횡재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폐허 같은 삶을 이어온 김성철이 소소한 만족을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취미라고 할까. 김성철은 주먹을 꾹 쥐고 다시 한 번 뒤돌아섰다. 도전만 해도 공짜 직관력 1도 끌리지만 사역마 무료 획득이라는 말이 구미를 당겼고 결정적으로 위업 달성 기회라는 말이 김성철의 심금을 울렸다. 위업일지 일반 퀘스트에서 그칠지는 이 퀘스트를 만든 퀘스트 호스트의 수준에 따라 갈리겠지만. “…….” 김성철은 미처 열리지 않은 벽을 양 손으로 붙잡고 열어젖혔다. 통로 안으로 들어서자 양옆에 줄지어 달린 촛대가 저절로 켜져 어둠을 몰아냈다. 촛대의 행렬을 따라 걷기를 1분여, 곧 막다른 곳이 나타났다. 돌로 쌓은 작은 제단 위에 청색과 적색을 지닌 2개의 유리병이 있었다. [ 팔영웅 에크하르트의 첫 번째 시험 ] [ 병을 취하라 ] 메시지가 시키는 대로 포션들을 취했다. 청색 병은 냉기의 정수, 적색 병은 화염의 정수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2개의 병을 모두 손에 쥐자 퀘스트 성공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 그대는 시대의 경이 에크하르트의 유산을 손에 넣었다. ] [ 당신은 에크하르트의 유산에서 압도적인 지식의 숨결을 느꼈다. ] 보상 : 직관력 +1 ‘느낀 적 없거든.’ 더럽게 말 많은 퀘스트다. 그래도 직관력 1을 준다는 건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다. 김성철은 능력치 창을 열어 직관력이 1에서 2로 늘어났음을 확인했다. 곧 막다른 곳의 벽이 열렸다. 그런데 또 기계장치가 말썽인지 열리다 만다. 김성철은 다시금 양 손으로 벽의 모퉁이를 붙잡고 힘껏 열어젖혀 길을 열었다. 벽 너머엔 원형의 공간이 있었고 그 중심부엔 인간 크기의 돌 인형이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골렘이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저렇게까지 작은 골렘은 본 적이 없었다. 골렘은 필연적으로 대형이다. 근간을 이루는 내핵을 작게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골렘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인간 정도의 크기로 만들려면 돌로 된 골렘 대신 마리오네트라는 나무 주술 인형을 쓰는 게 일반적이다. 전투력이나 범용성은 골렘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말이다. ‘진짜 골렘인가?’ 반신반의하며 들어온 던전이지만 조금은 흥미가 생겼다. 곧 메시지들이 김성철의 눈앞을 덮었다. [ 팔영웅의 위대한 기술로 창조한 마도골렘은 지금의 그대로서는 대적하기 어려운 존재다. ] [ 그러나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것이 연금술사로서의 책무! ] [ 각기 다른 2가지 색의 병을 사용해 마도골렘의 공격을 막아라! 시대의 경이 팔영웅 에크하르트의 첫 번째 시험이다! ] 부스스스- 마도골렘의 눈이 번쩍이며 기동을 시작했다. 움직임은 느릿하고 굼떴지만 확실한 골렘이다. 마도골렘은 김성철 쪽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가만히 있었다. 무엇을 하나 지켜보고 있자니 마도골렘의 몸이 붉은 색을 띄며 뜨겁게 달아오른다. 김성철은 2개의 병 중 하나인 냉기의 정수를 오른손에 쥐었다. ‘이걸 쓰라는 건가.’ 병의 뚜껑을 열자 주변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 정도의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김성철은 냉기의 정수를 마도골렘을 향해 던졌다. 푸쉬쉬쉬-- 혹한의 냉기가 뜨겁게 달아오른 마도골렘을 감싸며 하얀 증기를 만들어냈다. 맹렬한 기세로 뿜어져 나온 증기가 사방을 뒤덮었고 서서히 가라앉았다. 걷혀가는 증기 속에서 원래의 색을 되찾은 마도골렘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도골렘이 다시금 기동했다. 이번엔 냉기를 뿜으며 푸른색으로 변한다. 마찬가지로 화염의 정수를 던져 마도골렘의 냉기를 중화시켰다. 또 한 번의 증기가 방을 뒤덮은 뒤, 상황은 일단락됐다. 마도골렘은 기동을 멈췄고 번쩍이든 눈도 빛을 잃었다. 침묵 속에서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른다. [ 당신은 완벽하게 마도골렘을 진정시켰다! ] [ 당신은 내면에 숨겨진 연금술사의 소질이 눈을 뜨는 걸 느꼈다! ] 보상 : 1. 직관력 +1 2. 연금술사 전직서 “…….” 쉽다. 쉬워도 너무 쉽다. 사람이 아니라 돌고래나 침팬지를 가져다놔도 할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다. 오히려 시련이라기보다 그냥 연금술사 클래스를 거저 가져가라는 무료초대권에 가깝다. ‘바깥에서 연금술사를 메인 클래스로 택한 녀석들이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궁금했는데 답은 여기에 있었군.’ 필경 속아서 된 것이리라. 나름 히든이랍시고 남들과 구분 될 거 같아 덜컥 전직의 서를 사용하고 덤터기를 쓴 것이다! 재밌는 녀석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도골렘 너머의 벽을 응시했다. 벽이 스스로 열리며 또 다른 통로를 드러내고 있었다. 붉은 빛이 일렁거리는 통로 너머에서 스산하고 음산한 울림이 들려왔다. [ 진정한 시련은 지금부터다. ] [ 진리를 알고 싶은 자, 담대하게 전진하라. ]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영혼창고를 열어 그 안에 연금술사의 서를 넣고 애병 팔 가라즈를 꺼냈다. 퍽! 팔 가라즈의 일격에 마도골렘은 산산조각이나 흩어졌고 김성철은 쪼그려 앉아 마도골렘의 파편들을 눈으로 담았다. 김성철은 그중 하나를 손으로 집어 올렸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의 손아귀 안의 든 인간의 심장 모양의 골렘의 내핵 안엔 무수한 톱니바퀴로 이루어진 기계장치가 영롱한 빛을 발하며 째깍거리고 있었다. ‘역시 이건 마리오네트 따위 저급한 창조물이 아니야. 완벽한 골렘의 내핵이다. 그것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을 정도로 정교한.’ 내핵을 내려놓고 김성철은 일어섰다. 자칭 팔영웅 에크하르트. 그 녀석이 누구인지 김성철은 모른다. 하지만 이 마도골렘을 만든 게 그 에크하르트라는 녀석이라면...? 오랜만에 느끼는 횡재의 냄새다. 모처럼 메마른 영혼이 적셔질 것을 기대하며 김성철은 통로 안으로 걸어갔다. ======================================= 5. 연금술사 (3) 앞으로 나아가니 제단이 보였다. 돌과 강철과 구리로 쌓은 투박한 제단. 양옆으로 마도골렘 2기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제단으로 다가가자 메시지가 떠오른다. [ 연금술사 전직서를 제단 위에 펼쳐라. ] 김성철의 눈이 제단으로 향했다. 제법 상당한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런데 마법사의 것과는 다르다. 마법사의 것이 호흡 혹은 기류처럼 일정한 등락을 반면 제단에게서 느껴지는 마법의 기운은 마치 평행선처럼 변동 없이 일정하다. 김성철은 문득 중환자실에서 들은 적이 있던 기계음을 연상했다. 제단을 지키듯 서 있는 마도골렘에게도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다. ‘제대로 된 제단이군. 홀로 능히 클래스를 부여할 수 있을 정도로.’ 에크하르트에 흥미가 있는 건 맞지만 연금술사 클래스 자체엔 아무 흥미도 없다. 김성철은 제단을 그냥 지나쳐 제단 너머의 통로로 향했다. 그런데 통로에 들어서자마자 붉은 색의 메시지가 앞을 가로막았다. [ 여기서부터는 오직 연금술사의 능력을 지닌 자만이 시련에 도전할 수 있다. ] 그와 동시에 쭉 뻗은 통로 곳곳에 천정에 숨겨진 거대한 칼날이 내려와 살벌하게 좌우로 오갔고 숨겨진 함정들이 째깍거리며 기동을 시작했다. 그걸 본 김성철은 실소를 터뜨렸다. 더 앞으로 가려면 일단 연금술사가 되고 보라. 이 얼마나 유치한 술수인가. 함정 따윈 힘으로 뚫고 나갈 수 있지만 김성철은 일단은 이 재밌는 놀음에 한 번 응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영혼창고를 열어 연금술사의 서를 다시 꺼내 그것을 가만히 응시했다. < 연금술사 전직서 > 등급 : 레어 - 히든 분류 : 클래스 전직(소모형) 효과 : 히든 클래스 연금술사 획득 비고 :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 제한 : 없음. 필요 : 궁전토큰 20개 다른 건 다 좋다. 하지만 궁전 토큰을 스무 개나 요구하는 건 마음에 걸린다. 현재 김성철이 가지고 있는 궁전 토큰은 33개. 메아리술사 클래스를 얻기 위해서는 17개의 궁전 토큰을 더 모아야 한다. 그런데 궁전 토큰 얻는 게 쉬운 것도 아니고 여기서 스무 개나 써버린다면 재수가 없다면 정작 목표한 메아리술사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고급 음식점 가기 전에 라면을 끓여먹어 정작 고급 음식점에서 배가 불러 먹지 못하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음.. 어떻게 할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김성철은 주머니에서 궁전 토큰 스무 개를 꺼내 연금술사 전직서와 함께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인간 중 최강의 전사다. 앞으로 등급전은 최소 2개 이상은 남았고 거기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만 있다면 충분히 벌충할 수 있는 숫자다. 실력자들의 눈에 띄는 건 사양이지만 그렇다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절호의 기회를 그냥 놓친다면 두고두고 생각이 날 것이다. ‘인생 뭐 있나. 확 질러버리는 거지.’ 친구는 별로 없고 적만 많은 사내의 눈앞에 장문의 문자가 떠올랐다. [ 당신은 진리의 숨결을 느꼈다. ] [ 축하합니다! 히든 클래스 연금술사를 획득하였습니다! ] 보상 : 클래스 - 연금술사 획득 제단으로부터 마법을 품은 바람이 불어나와 김성철의 몸을 휘감았다. 바람은 점차 스스로 빛나며 무수한 문자열을 드러내며 흐름을 빨리하다 결국 김성철의 몸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김성철은 바로 클래스 창을 열었다. [클래스] 메인 클래스 - 태초의 전사(신화) 서브 클래스 - 상급 요리인(희귀) 서브 클래스 - 연금술사(희귀) *추가로 2개의 서브 클래스 취득 가능. 연금술사 클래스를 손에 넣었다. 남은 서브 클래스 슬롯은 둘. 메아리술사 클래스 들어갈 자리는 충분하다. 귀중한 서브 클래스 슬롯 중 두 자리가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허비되고 있는 건 마음에 걸리지만 지금까지 서브 클래스 없이도 잘 해오지 않았던가. 김성철은 스스로에게 말하듯이 생각하며 다시 제단 너머의 통로 앞에 섰다. 전과 달리 일체의 함정도 발동되지 않았다. 적막이 흐르는 복도를 지나자 돌로 만든 탁자와 가마가 놓여 있었다. 가마에 다가가자 가마 아래에 난 구멍에서 주황색 불꽃이 저절로 피어오르며 가마를 달구었고 탁자 위엔 풀과 돌, 이름 모를 생물의 껍질 같은 것들이 나타났다. 정면엔 보라색 마도골렘이 나타났는데 그 마도골렘의 동체엔 거미줄 같은 게 칭칭 감겨 있었다. [ 연금술사의 기본은 연성. ] [ 탁자 위의 재료를 조합하여 마도골렘의 속박을 풀 수 있는 아이템을 연성하라. ] [ 마도골렘의 속박을 풀면 합격, 풀지 못하면 불합격이다. ] [ 제한시간은 10분, 두 번의 기회는 없다. ] 연금술사다운 시련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탁자 위의 재료들을 눈으로 훑었다. 풀, 돌멩이, 병에 담긴 물, 소라게의 껍질 등등 잡다한 물건들. 단순히 겉만 봐서는 뭘 어떻게 하라는 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김성철은 곰곰이 재료를 노려보다가 그중 풀떼기를 손에 들고 냄새를 한 번 맡아보았다. 그냥 풀냄새. 그런데 냄새를 맡는 순간 김성철의 눈앞에 의도치 않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 맹인의 풀 > 레벨 : 1 등급 : E 속성 : 목(木) 효과 : 없음 비고 : 길가에 흔히 볼 수 있는 풀이지만 온건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 상극이 되는 연금재료의 성질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계에서 아이템 감정의 대상은 무기나 포션 같은 사용 가치가 있는 것에 한한다. 풀이나 돌, 물 같은 무가치한 자연물 등은 감정의 대상이 아니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정보는 몇 없는 식물학자나 지질학자들의 책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김성철 앞에 떠오른 건 분명한 자연물에 대한 정보다. ‘연금술사의 기본 능력인가.’ 김성철은 클래스 창의 연금술사 항목을 선택 세부적인 정보를 확인했다. < 클래스 : 연금술사 > 클래스 스킬 : 연성 클래스 스킬 : 채집 채집 항목을 확인한 후에야 김성철은 방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연금술사의 채집 스킬 때문에 이런 풀떼기에 대한 정보가 나타난 것이군.’ 설명에 따르면 연금술사는 재료가 되는 아이템의 냄새를 맡으면 그 재료에 대한 성질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김성철은 같은 방식으로 다른 것들을 감정했다. 증류수, 강가의 돌, 빙해 소라게의 패각 등등 각 사물들은 고유한 이름과 효능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정보를 취합한 김성철은 묵묵히 서 있다가 먼저 증류수를 연금 가마 위에 넣었다. 증류수는 재료의 기본이 되는 베이스. 여기다 마찰의 성분을 지닌 강가의 돌을 주먹으로 으스러뜨려 연금 가마 안에 넣어준다. 돌가루를 머금은 증류수가 하얀 빛으로 변했다. 그 다음 붉은 색을 띄는 나비의 날개를 손으로 으스러뜨려 그 위에 더한다. 그것은 용암나비의 날개라는 것으로 불의 속성을 띄며 약한 물질을 용해시키는 효과가 있다. 강가의 돌을 머금은 액체 위에 붉은 가루가 들어가자 연금 가마 안이 화르륵 타오르며 붉은 빛으로 변한다. 그런데 먼저 넣은 강가의 돌은 대지의 속성을 지닌 것으로 불의 속성을 띈 용암날비와 섞이자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이를 중화시키기 위해 김성철은 나무의 속성이자 중화역할을 하는 맹인의 풀을 넣었다. 연금 가마에서 뿜어져 나오던 연기는 사라지고 연금 가마는 이제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김성철은 가마 옆의 거대한 주걱을 들고 가마 안을 빙글빙글 저었다. 연금술사의 또 다른 클래스 스킬, 연성(鍊成)을 위한 작업이다. 가마를 한 번 저을 때마다 김성철은 체내의 머물고 있는 마나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이래서 연금술사가 인기 없는 모양이군.’ 가마를 젓기 시작한 지 수분 째, 연금 가마 안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 연성 성공! ] 김성철은 모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가마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잿빛을 띄는 점액질의 물체가 있었다. 그것을 증류수가 담긴 통에 집어넣고 감정을 실시했다. < 하급 용해액 > 레벨 : 1 등급 : F 속성 : 화(火) 분류 : 일상잡화 효과 : 끈끈한 물질을 녹인다. 정확하다. 탁자 위의 널린 12개의 재료 중 극히 일부분만 써서 만든 점이 걸리긴 하지만 김성철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만들어냈다. 김성철은 하급 용해액이 든 병을 가지고 보라색 마도골렘으로 걸어가 용해액을 뿌렸다. 스스스스--- 마도골렘을 묶은 거미줄에서 흰 연기가 나며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김성철은 흐뭇한 눈으로 자신의 성과를 바라보며 거미줄이 전부 녹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더 이상 차도가 없다. 용해액을 전부 썼는데도 거미줄의 일부분만 녹이는데 그친 것이다. 아무래도 재료 몇 개가 더 필요했던 모양이다.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조롱이나 하듯 새로운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 시간 종료 30초 전. ] [ 거미줄을 녹이기 위해서는 등급 D 이상의 용해액이 필요하다. ] [ 진리의 길에 이르기 위해서는 비범한 두뇌가 필수적인 바, 재능이 없는 자는 돌아갈지어다. ] 이제 남은 재료는 없고 시간도 없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긴 아쉽다. “…….” 또 한 번의 문자가 그를 종용하듯 떠올랐다. [ 시간 종료 10초 전. ] [ 돌아가라! 재능 없는 자여! ]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더니 완전 그 짝이다. 김성철은 우두커니 서서 마도골렘을 묶은 거미줄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한마디 거칠게 내뱉었다. “에라이! 시벌!” 그는 그대로 마도골렘을 묶은 거미줄을 잡고 힘으로 뜯어버렸다. 투둑! 보통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끊을 수 없는 거미줄이지만 김성철의 신적인 힘 앞엔 한낱 거미줄에 불과하다. 마도골렘을 칭칭 동여맨 거미줄은 무자비하게 분쇄되어 사라졌고 마도골렘의 눈동자에 빛이 들어왔다.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연금술 재능은 대단하군요. 바로 다음 시험으로 안내하겠습니다.” [ 그대는 어떤 명검으로도 잘라낼 수 없는 거미여왕의 거미줄을 연금의 지식을 통해 끊어냈다. ] 보상 : 직관력 +2 모로 돌아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이다. 시험의 달성 조건은 어디까지나 마도골렘의 속박을 푸는 것이다. 용해액을 만들라는 건 속박을 푸는 옵션 중 하나를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 물론 이 상황은 퀘스트를 만든 퀘스트 호스트가 의도한 일은 아닐 것이다. 거미줄의 점성은 아무리 강하고 날카로운 무기를 쓴다고 해도 10분 안엔 절대 풀 수 없는 것이니까. 다만 그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면 김성철의 힘이 너무 강하다는 것. 단지 그뿐이다. 가볍게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한 김성철은 다음 코스로 향했다. 비슷한 형태의 비슷한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 실패하긴 했지만 같은 실수는 하지 않는다. 김성철은 이계에서의 오랜 경험과 기지로, 때로는 번득이는 재치로, 수틀릴 경우엔 봉인한 힘까지 써가며 에크하르트가 준비한 시험을 하나하나 통과했다. 그리고 마지막 시련. 3개의 머리를 지닌 거대한 골렘이 그를 막고 있었다. [ 팔영웅 에크하르트의 최후의 기말시험 문제 ] [ 그대 앞에 놓인 것은 재료는 가능성의 씨앗. ] [ 수단과 방법은 묻지 않는다. 삼 두의 골렘을 파괴하라! ] 조건은 간단. 그런데 이제는 조금은 귀찮아졌다. 생각하고 궁리해서 만든다는 게 말이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꺼내 골렘을 냅다 후려쳤다. 퍽! [ 그대는 팔영웅 에크하르트의 기말 시험을 모두 해결해 위대한 연금술사로서의 자질을 입증했다. ] [ 팔영웅 에크하르트는 더 이상 기뻐할 수 없는 몸이 되었지만 모든 시험을 통과한 그대를 위해 유물을 남긴다. ] 보상 : 1. 창조술사의 서 2. 사역마 리빙 북 베르텔기아 3. 에크하르트의 휴대용 연금 가마 4. 직관력 +5 보상이 김성철 앞에 떨어졌다. 두 개의 책. 그중 하나는 대단히 컸는데 김성철이 손을 뻗자 그 손길을 거부라도 하듯 하늘 위에 두둥실 떠올랐다. “이런... 파렴치한 사기꾼....” 우울하고 냉소적인 여자아이의 목소리. 하지만 사람의 것이 아니다. “…최악이야. 이런 인간이 내 주인이라니.” 책이 말했다. ======================================= 6. 팩맨 룰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야. 그 단단한 머리로 어떻게 그 까다로운 첫 시험을 통과했는지는 못 봤지만 에크하르트가 직접 만든 전투 골렘을 가볍게 처리하는 거 보면.....” 하늘 위에 떠오른 책은 생명을 가지기라도 한 듯 스스로 책장을 펄럭이며 말했다. “최소 중급 길드 마스터급이거나 소국의 전사장 정도는 되겠네?” “…….” 사역마를 보는 건 처음은 아니다. 지금은 사라진 동료들로부터 몇 마리의 사역마를 선물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가 키우는 것은 동식물을 불문하고 빨리 죽는다. 사역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넌 뭐냐?” 김성철이 책을 향해 물었다. “나?” 거대한 책이 움직임을 멈췄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책을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베르텔기아. 보다시피 생명을 가진 책, 리빙 북. 당신의 사역마를 맡게 됐어. 솔직히 마음에 안 들지만.” 베르텔기아는 초면부터 계속 틱틱 거렸지만 그런 미물의 태도는 김성철의 안중에도 없었다.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냐?” 그는 필요한 것만 묻는다. 베르텔기아는 잠시 말문이 멈춘 듯 멍하니 있다가 이내 우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날 물건 다루듯 하는 건 기분이 나쁘긴 하지만 당신하고 인격적으로 친하게 지낼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까 응해줄게. 나는 보다시피 생명을 가진 책이야.” 베르텔기아가 스스로 책장을 펼치며 그 안에 기재된 내용을 김성철에게 내비쳤다. 베르텔기아의 각 페이지 안엔 화려하게 수놓은 글자와 도표, 그림들이 가득 담겨 있었는데 하나 같이 연금술의 비전을 담고 있었다. “내 안엔 자칭 팔영웅 에크하르트가 살아생전 남겨 놓은 연금술의 지식이 담겨 있어. 뭐, 에크하르트 본인이 썩 똑똑한 사람은 아니라서 담긴 지식은 형편없지만. 아! 만지지마!” 어느새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억센 두 손으로 붙잡아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뭐 보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보라고! 내가 직접 색인해서 펼쳐줄 테니까!” 베르텔기아는 필사적으로 발악하며 김성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애를 썼다. “그래?” 김성철이 베르텔기아를 놓아주었다. 무시무시한 힘에서 해방된 베르텔기아는 천정까지 두둥실 떠올랐다가 원래의 자리를 향해 서서히 낙하했다. “응, 뭐든 말해 봐. 에크하르트는 시원찮은 연금술사긴 하지만 그래도 잔재주 부리는 솜씨는 있으니까.” “으음...” 김성철은 시선을 하늘 위로 두었다가 이내 베르텔기아를 날카롭게 노려보며 물었다. “절멸의 저주도 풀 수 있나?” 순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장면이 김성철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베르텔기아는 좌우로 몸을 돌렸다. “아? 그거? 그 인간도 노력은 했었지. 하지만 결국 실패했어.” “그렇군.”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실망할 일도 없다. 김성철은 바닥에 떨어진 또 다른 책을 집었다. <창조술사의 서 > 등급 : 전설 분류 : 클래스 전직(소모형) 효과 : 전설 클래스 창조술사 획득 비고 : 내 사랑하는 딸이 그대를 진정한 진리의 길로 이끌 것이니라. “이건 뭐지?” 창조술사. 전설급 클래스. 이계의 역사와 지식에 잔뼈가 굵은 김성철이지만 들어본 적이 없는 클래스다. 뿐만 아니라 조건도 기이하다. 적어도 수천 년 전의 사람으로 보이는 에크하르트의 딸을 찾으라니. 어불성설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베르텔기아 쪽을 쳐다보고 있자니 곧 퉁명스런 목소리가 화살처럼 날아온다. “보면 몰라? 창조술사의 서잖아.” “에크하르트의 딸은 어디 있지? 이미 죽지 않았나?” “죽긴 누가 죽어. 여기 있잖아.” 베르텔기아가 새처럼 책장을 파닥거린다. 김성철은 호흡을 멈추고 날카로운 감각으로 인기척을 감지했다. 느껴지는 생명의 기운은 달리 없다. “어디 있다는 거야?” 김성철이 다시 묻자 베르텔기아는 김성철 앞으로 불쑥 종이로 이루어진 자신의 몸을 내밀더니 한숨 소리를 내며 말했다. “바로 앞에 두고도 모르네. 다시 소개할게. 내가 바로 자칭 팔영웅 아인 에크하르트의 딸 베르텔기아야. 당신의 사역마로서 당신을 창조술사의 길로 안내할게.” 직관력 15에 처음 보는 전직서. 거기다 에크하르트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사역마. 아직 창조술사의 서와 베르텔기아의 쓰임새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게 달리 횡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저기? 부정행위자 씨. 내 말 듣고 있어?” 틱틱 거리는 베르텔기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김성철은 씨익 웃었다. * 광장으로 돌아갔을 때 이미 바깥은 밤의 어둠에 잠겨 있었다. 김성철은 내정자들이 머무는 훈련장 외곽의 공터로 향했다. 이여훈을 비롯한 내정자들은 눈을 감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배성혜는 마력 스태프 월광을 두 손으로 껴안은 채 잠에 빠진 걸로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혼자 실눈을 뜨고 김성철 쪽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김성철은 멀찍이 떨어진 자신의 지정석으로 향했다. 죽은 자의 옷감을 대충 모아 만든 잠자리엔 반가운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뀨뀨!” 크릴 리갈이 부리는 하늘 다람쥐다. 오늘도 하늘 다람쥐의 앙증맞은 앞발엔 쪽지가 담긴 자루가 묶여 있었다. 김성철은 하늘 다람쥐에게 빵조각을 내밀며 자루 안의 쪽지를 단숨에 읽어나갔다. [ 1. 뇌물이 더 필요합니다. 급합니다. 2. 다음 등급전 룰이 정해졌습니다. 팩맨 룰 / 탐탐 3. 요청하신 전체보상 차등지급 기준입니다. 1 - 100% / 2 -80% / 3 - 60% / 4 - 40% 추신. 뇌물을 상납 못하면 더 이상 이 녀석을 못 보낼 수도 있습니다. ] 쪽지를 읽은 김성철은 힘을 줘 쪽지를 가루로 바스뜨린 뒤, 나무 인형에 등을 기대고 생각에 잠겼다. ‘팩맨 룰이라. 그것도 탐탐.’ 최악의 룰에 최악의 괴수다. 팩맨 룰은 등급전의 방식 중 하나로 각 광장에 상대하기 버거운 괴수 한 마리를 풀어 넣고 일정 시간 동안 사상자가 가장 적은 쪽이 높은 점수를 얻는 방식이다. 다른 룰이 적어도 상대방에 대해 최소한 저항이라도 가능한 것에 비해 팩맨 룰은 그런 것도 없다. 신입 소환자는커녕 여간한 중급자도 홀로 상대할 수 없는 괴수를 풀어 넣는다. 괴수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괴수의 배가 부를 때까지 도망 다니는 것뿐. 탐탐은 소환 궁전이 보유한 괴수 중에서 가장 약한 놈이다. 실제로 괴수 중에서는 심심찮게 사냥되는 사냥감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입 소환자 입장에선 최악의 괴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괴수들이 배를 채우기 위해서 인간을 사냥하는 반면, 탐탐은 재미로 인간을 죽이기 때문이다. 사상자의 규모가 다른 괴수들에 비해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백광장에 있는 내정자들의 배경이 약한 편인가. 그래도 철혈기사단은 한 가닥 하는 세력인데. 마계의 2차 공세 때 입은 피해를 아직도 회복하지 못한 것인가?’ 내정자가 있는 건 백광장뿐만은 아니다. 청홍백적 모든 광장에 거대 세력의 비호를 받는 내정자들이 있다. 각 광장에 속한 내정자들은 자신의 광장에서는 특별한 대접을 받지만 이 문제를 소환 궁전 전체로 확대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내정자끼리도 격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이야기다. 가장 강력한 세력을 등에 업은 내정자가 있는 광장엔 상대적으로 편하고 안락한 시련이 떨어지는 반면, 그렇지 못한 광장엔 가혹한 시련이 떨어진다. 그런데 소환 궁전의 모든 시련을 통틀어 가장 가혹하다고 알려진 시련이 백광장에 떨어졌다. 탐탐. 김성철은 그 흉포한 거대 원숭이가 사람들을 얼마나 잔인하게 갖고 놀고 또 어떻게 처참하게 죽이는 지 똑똑히 기억한다. 500명이 넘던 동료가 그 녀석 하나 때문에 50명 이하로 줄었다. 광장 전체가 흩뿌려진 피와 내장에 물들었던 참담한 광경은 지금이라도 선명하게 상상할 수 있다. 어쩌면 크릴 리갈이 뇌물을 달라고 두 번이나 강조한 것도 탐탐 때문인지도 모른다. 크릴 리갈이 보기에 탐탐의 등장이 확실해진 이상 김성철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으니 말이다. 김성철은 붉은 색의 루비를 꺼내 하늘 다람쥐의 주머니에 넣고는 손가락 끝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뀨뀨!” 하늘 다람쥐는 잽싸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내정자 하나가 몸을 뒤척이며 잠꼬대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성철은 두 눈을 감은 채 다음 일을 생각했다. ‘순위에 따른 전체 보상의 차가 예상보다 크다.’ 크릴 리갈의 정보에 의하면 등급전에서 1등을 한 광장은 꼴등을 한 광장 보다 2배 이상의 보수를 받는다. 4등을 한 광장의 보상은 1등을 한 광장의 40% 수준 밖에 안 되는 셈이니 광장 전체를 승리로 이끌지 못하는 한 아무리 개인 차원에서 열심히 움직여봐야 받을 수 있는 보상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치명적인 일이다. 광장의 순위가 나쁠 경우엔 귀중한 궁전 토큰의 숫자로 그만큼 줄어들 수 있으니까. 에크하르트의 퀘스트를 수행해 가장 미비하던 직관력을 상당 부분 올리는데 성공했지만 궁전 토큰이 없다면 말짱 꽝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탐탐이다. 그냥 놔두면 꼴등을 면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곧 있을 데스매치 룰에서도 고전할 것이다. 예정된 파국을 막기 위한 방법은 하나 뿐. 탐탐을 처치하는 것. 하지만 직접 나서는 건 곤란하다. 팩맨 룰이 있는 날엔 어김없이 근처의 실력자들이 모여 막대한 판돈을 들고와 소환 궁전에 펼쳐지는 잔혹극을 즐기러 올 테니까. 본신의 힘을 드러내면 즉각 소환 궁전의 모든 의식은 중지되고 각 국과 길드에서 보낸 토벌군이 그를 잡으러 올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다. 김성철은 실눈을 뜬 채 가슴을 졸이면서 자신을 훔쳐보는 배성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 분명한 기준은 없지만 통상 거대한 마물은 괴수라고 불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대한 마물 중에서 지능이 떨어지고 하등한 짐승을 괴수라고 부른다. 탐탐의 지능은 일반적인 괴수보다는 높지만 결국 그 지능이라는 것도 야수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괴수로 분류된다. 탐탐은 신장이 12미터에 이르는 거대 유인원이다. 아래로 뻗은 긴 팔을 다리와 함께 사용해 빠르게 이동할 수 있고 두 팔을 인간처럼 자유롭게 다룰 수도 있다. 다른 야수의 것엔 못 미치지만 창끝처럼 뾰족한 이빨을 가지고 있고 턱 힘도 인간을 한 번에 반 토막 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신입 소환자가 쓰러뜨리지 못할 상대는 아니다. 갓 소환된 소환자라면 모를까 첫 번째 등급전을 거치면서 제법 힘을 축적한 이도 있고 자신의 처한 현실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수련하거나 숲을 탐험하는 인물도 늘었다. 물론 그 가능성이란 것이 무한히 0에 수렴되는 수준이지만 김성철은 그 가능성을 한 번 크게 키워볼 작정이었다. ‘많이는 필요 없다. 쓸 만한 녀석들을 모아야 한다. 탐탐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수 있는 녀석들을 모아 피해를 누적시킨 후, 익스플로전 스크롤로 끝장을 내면 의심받지 않고 탐탐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쓸 만한 녀석들을 어떻게 찾느냐다. 일단 내정자들은 그런 점에 있어서 최적의 후보들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내정자들은 지난 등급전에서 퇴마의 성수를 보상으로 얻었다. 아마도 등급전이 시작되면 그들은 몸에 퇴마의 성수를 뿌리고 구석진 곳에 숨어 등급전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것이다. 그들은 전력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정자 중에서도 퇴마의 성수를 얻지 못한 자들이 있다. 박아람과 배성혜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들을 포함해 내정자 중엔 4명 정도가 퇴마의 성수를 얻지 못한 걸로 보인다. 김성철은 먼저 그나마 안면이 있는 배성혜에게 접근했다. “…나한테 무슨 볼 일이죠? 약속이라면 이미 지켰을 텐데요?” 그녀는 지팡이를 뒤로 숨기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게다가 배성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이름을 모르는 내정자 사내 두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배성혜와 김성철 쪽을 예의주시했다. 아무래도 배성혜 쪽에서 미리 이런 일이 생길 걸 대비해 보디가드를 만들어 둔 모양이다. 늘 그렇듯 김성철은 이런 식의 작은 협잡은 철저히 무시했다. “지팡이를 돌려받으러 온 건 아니야.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건 바로 이거야.” 김성철은 자신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배성혜의 경계심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 “담당이 말하지 않던가? 곧 있을 등급전이 뭔지.” “들은 적이 있어요. 팩맨? 팩맨 룰이라고 하던데.” “팩맨 룰에 어떤 괴물이 등장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글쎄요. 그것까지는...” “탐탐.” “탐탐? 웃긴 이름이네요.” “이름은 웃기지만 녀석이 하는 행동은 웃기지 않지. 퇴마의 성수를 대체할 아이템은 있나?” 그러자 배성혜는 월광을 내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면 충분하지 않나요?” 김성철은 싸늘한 눈으로 지팡이를 노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딴 걸로는 생존을 담보할 수 없어.” 김성철은 뒤돌아섰다. 떡 벌어진 그의 등 뒤로 묵직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숲에 있겠다. 살고 싶으면 찾아와라. 성수를 가지지 못한 녀석들과 함께.” 소환 첫 날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정자 25인 중 가장 가난하고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사내가 가장 화려한 여성에게 하대를 하며 명령을 내리는 일 따위는. 하지만 일주일이 훌쩍 지난 지금 모든 것이 변했다. “저기... 안녕하세요?” 김성철은 머뭇거리며 숲의 초입에 나타난 3명의 내정자를 무심한 눈으로 응시했다. ======================================= 6. 팩맨 룰 (2) [ 검 휘두르기 일만 회(매일), 허수아비 때리기 일만 회(매일), 훈련장의 모든 근력기 각 천 회 이상 실시(매일), 나무칼날 피하기 팔천 회(매일), 광장 구보 천 바퀴(매일), 숲속의 하급 몬스터 사냥, 숲속의 하급 몬스터 열 마리 사냥, 숲속의 중급 몬스터 사냥... ] 김성철이 내정자들을 만나자마자 나뭇가지로 바닥에 쓴 내용의 일부다. 목록은 끝도 없이 이어져 항목이 30개를 채운 이후에야 끝이 났다. 내정자들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이게 내 담당에게서 받은 힘, 민첩, 체력. 기본 3대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일반 퀘스트 목록이다. 목록에 이의가 있다면 내게 묻지 말고 당신들의 담당에게 직접 물어봐라.” 일부에 허구가 섞여 있긴 하지만 그의 말은 대부분 진실이었고 그 권위 또한 자신이 아닌 마법사한테 빌렸다. 검증에 관해서도 자신은 회피하고 상대방의 담당을 교묘하게 끌어 들이고 있다. 3명의 내정자들은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정작 김성철 본인에겐 토를 달 수 없었다. “강요하진 않겠다. 여기 있는 목록을 보고 죽도록 수련하며 땀을 흘리던지, 아니면 등급전 당일 다른 내정자 녀석들이 보는 앞에서 죽어 피를 흘릴 지. 그것은 너희들에게 달린 일이니까.” 지금 이 자리에 온 내정자는 전부 4명. 박아람, 배성혜, 그리고 이름을 모르는 남자 두 명이다. 김성철은 남자들의 얼굴을 빠르게 기억해냈다. ‘전에 배성혜 보디가드 역을 맡던 녀석들이군.’ 박아람은 지각한 주제에 설명을 좀 듣더니 하품을 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러고는 멀찍이 떨어진 나무 등걸에 등을 기대고 노래를 흥얼거리더니 낮잠을 청했다. 그야말로 방약무인, 자유분방 그 자체. 훈육실장마저도 우습게 보는 놈인데 뭐가 무섭겠는가. 따라서 실제로 김성철의 설명을 듣고 있는 건 최초에 모인 3인 뿐인 셈이다. “저기.” 불편한 침묵 손에서 하얀 손이 올라갔다. 배성혜다. “이거 다하면 진짜 효과 있는 거 맞아요?” “능력치 창을 한 번 열어봐라. 다른 능력치는 빼고 힘, 민첩, 체력만. 아마도 셋 다 20을 못 넘었을 것이다.” 배성혜를 비롯한 내정자들의 시선이 앞으로 향한다. 능력치 창을 살펴보고 있는 모양이다. 김성철은 그중 배성혜를 바라보며 물었다. “힘, 민첩, 체력이 어떻게 되지?” “에... 15, 16, 16. 이렇게 되네요.” 배성혜 뿐만 아니라 다른 두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셋 다 힘, 민첩, 체력의 평균이 20을 넘어가지 못했다. 일반 소환자야 평균 10도 못 넘는 인간이 대부분이지만 내정자의 수치가 그것 밖에 안 된다는 심각한 일이다. “난 평균 20 넘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아람의 것이다. 나무 등걸을 기대고 앉아 낮잠을 청하는 척 하더니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 20 넘는다고! 20! 그럼 저딴 메뉴 안 해도 되는 거지?” 김성철은 그를 철저히 무시했다. 대신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나와라.” 숲속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정자 그룹의 왕따 2호. 하영종이다. “아. 이거 쑥스러운데. 이런 일 해야 하나.” 내정자들의 얼굴이 굳었다. 안 그래도 김성철 하나만도 고까운데 꼴 보기 싫은 게 하나 더 늘었으니. 싸늘한 시선이 둘에게 꽂혔지만 김성철은 신경 쓰지 않고 하영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영종. 네 능력치는 어떻게 되지?” “아. 김 형. 나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어려울 거 없잖아? 약속한 고기 구워줄 테니까.” 고기라는 말에 하영종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능력창을 열고 거기 기재된 수치를 가감 없이 말했다. “어디 보자. 힘이 28, 민첩이 27, 체력이 25. 이렇게 되네.” 그 수치를 들은 내정자들의 얼굴에 경악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럴 리가. 저 새끼가 나보다 높다고?” 박아람이 나무 등걸에서 기지개를 펴며 일어났다. 그의 입가엔 야릇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저딴 새끼가 나보다 높다고? 응? 구라까지 마! 씨발! 저 면상 썩어 문드러진 놈이 나보다 높다고?” 뭐가 그렇게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박아람은 화가 나 있었다. “안 그래도 지팡이 잃어버렸다고 쿠사리 먹어서 기분 더러워 죽겠는데 별 개 같은 것들이 시비를 걸어대네.” 잘 생긴 얼굴 아래 숨겨진 흉측한 이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광기에 찬 눈동자로 모두를 돌아보며 빈정거리거나, 때로는 악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야. 전부 그만 둬! 집어치우라고! 이딴 새끼들이 뭘 안다고. 좆도 없는 새끼들인데. 니들 내 담당이 누군지 알기나 해?” 모두가 그의 시선을 무시하거나 못 본 척 했다. 술 취한 사람처럼 떠들던 박아람의 눈알이 또다시 헤까닥 돌더니 갑자기 가만있는 배성혜의 손목을 확 잡았다. “뭐야?” 배성혜가 기겁하며 손을 뿌려 쳤다. 박아람은 씨익 웃으며 다시 손목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내 담당이 누군지 아냐고? 배성혜. 응?” “그딴 거 내가 알아서 뭐하게.” “어쭈. 말대답하는 거 봐라. 좋은 게 좋은 거지. 몸 파는 창녀 주제에.” “뭐?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배성혜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나며 월광을 그에게 겨누었다. 여차하면 쏘아 죽일 기세다. 박아람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지팡이 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죽거렸다. “내가 틀린 말 했냐? 너. 저 노숙자 새끼한테 한 번 몸 대주고 지팡이 받았잖아?” “너 미쳤어?” “나한테도 한 번 대주라. 도도한 척 하지 말고. 내 담당 돌로렌슨가 돌대가린가 그 년한테 말해서 저거보다 더 좋은 거 구해줄 테니까. 어서!” 박아람의 손이 다시금 배성혜의 지팡이를 쳐내고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거 놔! 죽고 싶어?” 배성혜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그녀의 능력은 박아람엔 미치지 못했다. 박아람은 배성혜의 팔을 잡은 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배성혜를 수풀로 끌고 갔다 그 순간, 박아람은 웃고 있었다. 미친개의 고삐가 풀린 것이다. 하지만 보통 미친개가 아니다. 무시무시한 주인을 둔 미친개다. 배성혜의 보디가드를 자처하던 두 사내는 정작 나서야 할 순간에 고개를 숙였다. “…….” 김성철이 슬슬 나서려고 마음을 정했을 때였다. 한 사내가 나섰다. 하영종이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아그야. 그만 좀 해라잉? 아구창 날라 가는 수가 있으부렁게.” 언제나 작은 일에 분노하며 투덜거리는 그였지만 오늘은 큰일에 진정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뭐?” 박아람의 눈알이 돌아갔다. 그는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빠른 걸음으로 하영종을 향해 걸어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시 한 번 지껄여 봐. 씹새야. 이 냄새나는 쓰레....” 퍽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영종의 주먹이 박아람의 얼굴을 통쾌하게 강타한 것이다. 박아람은 얼굴이 돌아간 채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레뺘아아앗!” 욕을 하려는 순간에 얻어맞아 기이한 소리를 낸 모양이다. 제대로 한 방을 얻어맞은 박아람은 살충제를 맞은 바퀴벌레처럼 몸을 바들바들 떨며 손으로 흙을 자꾸만 움켜쥐었다. “으.. 으....” 이렇게 미친개의 준동은 미친개에겐 몽둥이가 약이라는 전통적인 교훈을 남기며 싱겁게 끝이 났다. 잠시 후, 박아람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쓸쓸히 자리를 떠났다. “두고 보자고. 니들. 얼굴 모르는 우리 애비한테 일러서 전부 아주 그냥 아작을 내 줄 거야. 개새끼들.... 두고 봐... 두고 보라고...” 치졸하기 짝이 없는 협박이 나무들 사이로 흐릿하게 들려온다. 박아람이 사라진 후 김성철은 다시 일행들을 불러 모아 입을 열었다. “난 광장에 있겠다. 일반 퀘스트 수행에 관해 궁금한 게 있다면 언제든 주저 않고 질문하기를 바란다.” 김성철은 내정자들을 남겨두고 하영종과 함께 숲을 떠났다. 하영종이 김성철에게 다가오며 귓속말을 했다. “아. 씨발. 저질러버렸네. 때리면 안 되는 새낀데.” 홧김에 패긴 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아. 어쩌지? 씨발. 나중에 사과라도 할까.” 하영종은 의외로 괜찮은 녀석이었다. 입도 걸걸하고 인상도 더럽지만 한 번 친해지면 쉽사리 배신하지 않을 타입. 인간의 진면모가 드러나는 소환 궁전에서 저런 성격은 찾기 어렵다. “그러게 왜 나섰냐? 내가 직접 손봐주면 되는 일인데.” “아.. 그 새끼가 너무 설치더라고. 진짜. 하는 게 진짜 어휴...” “괜찮아. 걱정하지 마라. 방금 박아람이 자기 담당한테 돌대가리라고 하는 거 들었지? 아마도 그 마법사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솟았을 게다. 오히려 너한테 고마워할지도 몰라.” “그.. 그렇게 생각하지? 그랬으면 좋겠네.” 하영종은 그제야 후련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홧김에 주먹질을 하긴 했지만 천성적인 소심함을 고치기엔 아직 이른 모양이다. “그나저나. 김 형. 저 새끼들 시킨다고 할까? 아주 농땡이만 지기는 애들인데.” “안 하면 자기 손해지. 게다가 너의 교육이 약이 될 것이다.” “오케이. 그나저나 아까 말한 그 기 막히는 고기 꼭 맛보여줘. 여기 와서 쓰레기 빵만 먹었는데 간만에 진짜 육즙이 흐르는 거 실컷 씹고 싶거든.” “자랑은 아니지만 요리엔 자신이 있다. 오늘 저녁에 구워 줄 테니까 호문클루스 빵 따위로 배 채우는 멍청한 우는 범하지 마라.” “당연하지. 기대할게!” 하영종은 엄지를 치켜세워 보이고는 훈련장으로 돌아갔다. 이제 다시 혼자가 된 김성철은 광장 중앙에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그가 찾는 것은 일반 소환자 사이에 형성된 파벌이었다. ‘소수의 내정자만으로 부족하다. 전체적인 수준을 끌어 올려야 한다.’ 김성철의 무심한 눈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훑었다. 곧 찾는 얼굴이 김성철 눈에 들어왔다. 첫날부터 사람들을 모아 그룹을 만들던 사람 좋아 보이던 중년 회사원. 그는 어느새 백광장에서 가장 커다란 파벌의 수장이 되어 있었다. ======================================= 6. 팩맨 룰 (3) 그 중년 회사원의 이름은 김학출. 현실에 있을 땐 중소기업 부장을 했다는 이 사내는 힘도 지혜도 없었지만 올곧은 마음과 정의를 관철하려는 굳은 의지가 있었다. 그는 갑작스레 이계로 소환된 사람들을 불러 모아 혼란과 폭력이 지배하는 광장에서도 나름의 질서가 갖춰진 사회를 구축하기를 원했다. 처음에 미미하게 출발했던 그의 동료들은 완만하게 불어나다가 첫 번째 등급전 이후 크게 팽창해 현재는 5백 명 정도의 사람이 그와 뜻을 함께 하고 있었다. 명실상부한 백광장 최대의 파벌. 그러나 결정적인 흠이 있다. 잡다한 사람마저 전부 받아들인 탓에 집단의 결속이 약하고 전투력도 보잘 것 없다. 게다가 김학출은 각자의 힘을 통해 얻은 수확물을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는 상부상조를 강조하고 있는데 그의 바람와 달리 너무 많은 무임승차자들이 그의 조직에 기생하고 있었다. 특히 지난 등급전에서 좀비를 한 마리도 처치 못한 다수의 사람들이 굶어죽을 지경에 처하자 식량을 준다는 말에 무더기로 김학출의 파벌에 가입한 게 컸다. 덕분에 인원수는 폭발적으로 늘릴 수 있을지언정, 조직의 안정성과 내부 불만은 악화일로를 걷기 시작한 것이다. 벌써부터 삐걱대기 시작한 조직이지만 김성철은 가장 먼저 그들을 찾았다. 단순히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숫자가 많은 만큼 구성원들이 조금씩만 분발해도 전투력 총합을 크게 늘릴 수 있다. 500명이 힘 수치를 1씩만 올린다고 해도 힘 500의 상승효과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 500이라는 것이 실제 등급전에서 그대로 반영되는 건 아니겠지만 김성철로서는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높이는 게 중요했다. “할 말이 있소.” 김성철은 기회를 봐 김학출에게 접근했다. 김학출은 갑작스런 김성철의 등장에 놀라워하면서도 친절한 태도로 대응했다. “훈련소에 있던 분이군. 그래 제게 할 말이 뭡니까?” 가까이서 본 김학출은 생각보다 더 유약하고 더 초라했다. 눈동자 속에 품은 뜻은 여전히 확고했지만 그의 주름진 얼굴 너머엔 망설임과 불확신,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남자... 능력 이상의 짐을 지고 있군.’ 이계에 소환된 이래 수많은 사람들을 보아 왔다. 고결한 뜻을 자가 어떻게 몰락하고 타락하는지 몇 번이고 보아 왔다. 숭고한 목표라는 건 하늘 높이 있어 잘 보이는 것 같지만 정작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길은 의혹과 불확신이라는 짙은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김학출은 안개 속에 있었다. “이걸 봐주시오.” 김성철은 김학출에게 내정자들에게 보여줬던 것과 동일한 일반 퀘스트 목록을 넘겼다. “조만간에 또 등급전이 일어날 거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등급전이. 미리 당신의 동료들에게 일러 힘을 키워두게 하시오.” “감사합니다. 이런 것을 다...” 김학출은 크게 기뻐하는 눈치였지만 김성철이 본 목록을 눈으로 훑고는 이내 난색을 표혔다. 김성철의 날카로운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목록을 읽어나가는 김학출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진다. “잘 봤습니다.” “잘 본 걸로는 부족하오. 사람들에게 일러 최소한 힘에 관한 퀘스트라도 수행하게 해야 하오. 지금 당장.” “힘에 관한 퀘스트라... 검 휘두르기 만 번이 있네요. 그런데 만 번이라...” “문제라도 있소?” “말이 만 번인지 누가 그걸 하려 하겠습니까? 속된 말로 빡세다고 해야 하나. 일단 우리 사람들에게 일러는 두겠습니다만 잘 해줄 지 의문이 듭니다.” 친절하게 말하지만 회의적인 반응이다. 김학출과 동석한 간부로 보이는 사람들도 그저 피식 웃기만 한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거 누가 하겠어요?” “못해요. 식량도 다 떨어져 가는데 움직이려고 할까요?” “절대 못할 걸요. 어림도 없어요.” 예상했던 대로다. 김학철 파벌은 가장 많은 숫자를 지니고 있지만 그 많은 숫자에 대한 통제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김학출은 자신의 구성원에게 권유는 가능할지언정 강요할 수 없다. 그것이 김학출 파벌의 한계다. ‘어렵겠군. 이들은.’ 김성철은 멀리 광장 끝에 자리 잡은 전망대를 가리키며 싸늘하게 말했다. “우리의 의문은 저쪽의 사람에겐 고려의 대상이 아니오.” “으음...” “당신을 가장 따르는 사람들에게라도 억지로라도 시키시오. 그렇지 않으면 지옥을 보게 될 테니까.” 할 말은 전부 전했다. 반응은 여전히 미적지근하기만 하다. 김학출 파벌에겐 그다지 기대할만한 게 없다. 예상 이하의 성과다. 하지만 김성철은 낙심하지 않고 다음 장소로 향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광장 서쪽 끝 호문클루스들이 타고온 식량 수레가 세워진 곳이었다. “자! 자! 인간들! 사료를 나눠주겠어요! 흘리지 말고 전부 받아먹는 거예요!” 호문클루스들이 언제나처럼 인간을 조롱하며 썩은 빵을 던지고 있었다. 그런데 수레 앞엔 한 무리의 건장한 사내들이 일렬로 서서 사람들을 막고 서 있었다. “저리 꺼져! 안 꺼져?” “가까이 오면 죽는다. 야! 거기 빨간 후드! 죽고 싶어? 어!” 그들은 수레 주위를 에워싸고 무력을 앞세워 식량을 독점하고 있었다. 굶주린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고함을 지르거나 검을 휘둘러 쫓아낸다. 그들의 숫자는 겨우 백여 명에 불과했지만 사람들은 멀리 서서 침만 삼킬 뿐이었다. 이들이 김성철이 찾는 두 번째 파벌. 김학출의 파벌과 달리 오직 이익에 의해 뭉쳤고 힘에 의해 지배되는 조직이다. ‘저 녀석이 우두머리였지.’ 식량을 독점하는 그룹 중심에 옆에 미녀를 낀 사내가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나이는 대략 삼십 대 초반. 체격도 평범하고 힘도 그다지 강해보이지 않았지만 눈동자 이면에 흐르는 광기가 돋보였다. 잔근육이 붙은 상체 위를 뒤덮은 야쿠자 풍의 문신은 그가 살아온 행적을 말해주는 듯 했다. 김성철은 그 사내에게 향했다. “넌 뭐냐?” 험상궂은 부하 하나가 앞길을 막는다. “너희 두목에게 할 말이 있다.” “네깐 놈이 뭔데.” 김성철은 앞을 막는 사내를 가볍게 땅바닥에 눕힌 다음 사내 앞에 섰다. 거만하게 앉은 사내가 옆에 앉은 여자를 손짓해 물러가게 한 후 싸늘하게 노려봤다. “누구냐?” 김성철은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 천정식. 첫 번째 등급전에서 아무 능력도 없으면서 오직 깡만으로 좀비 100 마리를 처치한 사내. 이는 갖은 특혜를 받은 내정자 전원을 넘어선 성적이다. 그야말로 타고난 전사의 자질. 천정식 자신은 모르겠지만 그의 머리 위엔 누군가 붙여 놓은 주시자의 눈이 떠올라 있었다. 침을 발라 놓은 것이다. 이 녀석은 우리가 먼저 가져가겠다는. 겨우 첫 번째 등급전을 치렀을 뿐인데 이 정도로 인정받는 인물은 극히 드물다. “할 말이 있다.” 김성철은 김학출과 했던 것과 동일한 말을 했다. 천정식은 김성철의 말을 흥미롭게 경청했다. 동일한 퀘스트 목록이 천정식 발밑에 적혔다. “그러니까 네가 말한 이것들을 수행하면 능력치를 올릴 수 있다는 거지?” “그렇다. 하지만 명심해라. 매일 수행할 수 있는 퀘스트로 올릴 수 있는 상한은 25니까.” “25라. 내 부하 평균이 10에서 12 사인데. 이거 매일 굴리면 두 배 정도 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소리 아냐?” 김학출과는 전혀 다른 반응. 그는 자신의 패거리가 기정 자신의 말에 복종하리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말하고 있었다. ‘위험한 놈이군.’ 기본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천성적인 폭군의 자질을 지닌 사내다. 김성철은 천정식의 번들거리는 눈동자 속에서 과거 함께 했던, 하지만 지금은 적이된 한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좋아. 그렇다 이거지? 그럼 어디 한 번 시험해볼까?” 천정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하를 향해 소리쳤다. “야. 내 칼 가져와.” 천정식의 부하가 공손하게 검을 가지고 와 두 손으로 천정식에게 바쳤다. 신속의 단검이다. 천정식은 검을 왼손에 쥐고는 김성철을 야수와 같은 눈으로 노려보며 경고했다. “여기 딱 있어. 만약 거짓말이면 네 껍질을 산 채로 벗겨버릴 테니까.” 이에 김성철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아까 말했듯이 힘 25가 넘으면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아. 그건 명심해.” “그래? 그건 잘됐군. 내 힘은 딱 24니까.” 김성철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 말이 맞다면 놀라운 성장세다. ‘이 녀석. 엄청난 물건이군.’ 천정식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속의 단검을 무서운 속도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가 검을 휘두르는 동안 천정식의 부하가 김성철의 주변을 은밀하게 에워쌌다. 이윽고 만 번의 휘두름이 끝났다. 천정식은 부하가 내온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자신의 능력치를 응시했다. “오우야.” 천정식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당장 부하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모두 모여 봐. 지금부터 지옥 훈련을 시작한다.” 이미 그에겐 김성철 따윈 안중도 없었다. 자신의 파벌을 강하게 만들 방법을 얻었다는 기쁨에 젖은 나머지 김성철 따위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이다. 김성철은 죽어라 검을 휘두르는 천정식의 부하들을 뒤로 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런 인간도 때로는 필요하지.’ 아마도 천정식 패거리는 천정식의 지휘 아래 무시무시하게 성장할 것이다. 힘을 키울 수 있는 체계적인 방법을 손에 쥐고 말이다. 그러나 같은 패를 쥐고도 김학출 패거리는 별 다른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들은 닭 소 보듯 멍한 얼굴로 천정희 패의 훈련을 멀찍이 지켜볼 뿐이었다. 그들의 숫자는 천정희 패보다 다섯 배나 많지만 이대로 가면 등급전이 오기 전에 두 집단 사이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자! 쉬지 말고! 빨리! 빨리 해서 저 재수 없는 것들 쓸어버리자고.” 천정희의 날카로운 외침을 들으며 김성철은 곧 다가올 미래가 고스란히 눈앞에 그려지는 것을 보았다. ‘조만간 김학출 패는 천정희 패에게 먹히게 될 것이다.’ 일반 퀘스트 목록을 넘기지 않았다면 아무리 천정식이 강하고 그 부하들을 잘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등급전 전후에 광장엔 소환자끼리 패권을 둘러 싼 혈풍이 일어날 것이다. 그 또한 인간들의 천성 중 하나이므로. 하지만 그들의 다툼은 김성철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의 목표는 확고하니까.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한다. 탐탐을 해치우고 남은 등급전도 모조리 백광장이 1등을 독식하게 한다. 그리고 필요한 궁전 토큰을 안전하게 손에 넣는다.’ 흩어지는 천정식 패거리의 외침을 들으며 김성철은 광장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등급전은 이제 코앞으로 다가왔다. 고된 훈련의 연속이었다. 내정자들은 처음엔 몹시 힘들어했지만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심과 김성철의 지도 덕에 5일이 지났을 땐 각자 1인분을 할 수 있는 전사로 변모해 있었다. 평균 힘, 민첩, 체력의 수치가 25이상을 넘어가는 전사들. 다가올 등급전에서 김성철이 쥔 최고의 전력이다. 김성철은 적절하게 커 준 내정자들을 흐뭇한 바라보며 미리 준비한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나뭇잎에 싸인 고깃덩이. 6일 전 등급전에서 보상으로 받은 것이다. 다른 소환자들은 고기를 받은 당일 불에 구워 게걸스럽게 먹어치웠지만 김성철은 달랐다. 그는 고기를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뒤 나뭇잎으로 싸서 건조한 곳에서 잘 숙성시켰다. “그거 일주일이나 된 거 아니에요? 상했을 거 같은데.” 배성혜가 땀을 닦으며 나뭇잎에 싼 고기를 응시했다. 김성철은 말없이 고기를 싼 나뭇잎을 벗겼다. 겉보기엔 바짝 마르고 일부 표면이 검게 변색된 것 같지만 고기를 좀 안다는 자의 눈엔 다르게 비칠 것이다. “드라이에이징?” 배성혜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고기를 나뭇잎에 쌌다. “자랑은 아니지만 요리엔 자신이 있는 편이지.” 실제로 김성철은 요리의 달인이다. 그의 서브 클래스 중 하나는 고급 요리인. 여간한 왕실 주방장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의 요리사라는 이야기다. 김성철은 넓찍한 돌판 아래 불을 피워 달군 다음 나뭇잎에 싼 고기를 올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구웠다. 향긋한 냄새가 버려진 성당 안을 가득 채웠다. “우와. 냄새 끝장나네.” 하영종이 소매로 침을 닦으며 안달을 한다. 다른 두 명의 사내도, 부잣집 아가씨 출신인 배성혜도 예외는 아니다. 모두 고기에 넋이 빠진 채 조리가 완료되기를 목이 빠지길 기다린다. 대규모 소환을 통해 이계로 온 지 벌써 이주가 다 되어간다. 그 동안 먹은 음식이라곤 딱딱한 빵과 사과, 제대로 된 음식은 입에 댄 적이 없다. 거기다 고급 요리인이 직접 요리하는 최상의 요리가 서빙 되니 어찌 위장이 동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김성철은 고기를 싼 나뭇잎을 시작의 검으로 잘라 안에 싸인 고기를 드러냈다. 치이이익- 나뭇잎 안에 묶여 있던 육즙과 육즙을 품은 향기가 뿜어져 나오며 구경하는 이들의 마지막 냉정마저 앗아가 버린다.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기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먹어도 좋다.” 환호성과 함께 식사가 시작됐다. 맛있는 음식은 사람을 행복으로 초대하는 초대장. 김성철의 요리 앞에서 4명의 내정자들은 그동안의 앙금을 털어버리고 김성철이 만든 맛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격의 없는 이야기꽃이 피고 편견 없는 시선들이 오간다. “정말 고마웠어요. 영종 씨. 절 구해줘서.”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 해야 할 일을 한 걸요.” 김성철도 모르는 사이 하영종과 배성혜가 친한 사이가 된 모양이다. 김성철은 하영종이 얼굴을 붉히며 뒤로 숨긴 손으로 축복의 성수가 든 병을 만지작거리는 걸 흥미롭게 지켜보며 고기 한 점을 입으로 뜯어 삼켰다. ‘남자라는 생물은 여자에 반하면 간도 쓸개도 다 내어준다더니.’ 그런 점에서 김성철은 우월하다. 자랑은 아니지만.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절로 머금어진다. 그런데 문득 김성철은 뒤에서 지켜보는 시선을 감지했다. 박아람이다. 하영종에게 두들겨 맞은 이후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녀석이 등급전 전날,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는 한동안 고기를 먹는 하영종와 배성혜들을 노려보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김 형! 무슨 일 있어?” 한껏 기분이 들뜬 하영종이 김성철을 불렀다. 김성철은 박아람이 사라진 방향을 가만히 응시하며 하영종을 불렀다. “무슨 일이야? 김 형.” “박아람이 아까 너와 배성혜를 보고 갔다.” “그 새끼가? 날? 왜?” “이유는 모르겠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에이. 그 새끼가 날 어떻게 하겠어? 이제는 성혜 씨도 강해져서 그 새끼 만나면 자근자근 밟아줄 텐데.” 하영종은 자신을 바라보는 배성혜의 시선을 느끼고는 더욱 허세를 부렸다. 불가에서 하영종을 바라보는 배성혜가 베시시 웃으며 그에게 오라고 손짓한다. 확실히 하영종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지난 5일간 하영종은 더욱 강해졌고 반면 박아람은 훈련장 구석에 멍하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걸리는 게 하나 있긴 하다. 김성철은 이전에 본 적 있던 박아람의 담당 마법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빨간 머리에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을 지닌 여자 마법사. 상당한 수준의 실력자로 기억한다. ‘설마하니 그 여자를 내세워 복수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런 일은 없겠지.’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소환 궁전에서는 소환 궁전의 인가를 받지 않은 인물이 소환자들의 신변에 몸을 대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내정자니 뭐니 하는 것도 엄밀히 따지면 불법이긴 하지만 적어도 내정자를 관리하는 마법사들이 직접 소환자들에게 힘을 직접 행사하는 경우는 없다. 그것은 소환 궁전의 권위 자체에 직접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탈법과 위법의 차이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하지만 선을 넘어선 대가는 가혹하다. 중급 마법사 수준 정도 되는 자가 겨우 남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는 일을 벌일 리가 없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건 언제나 있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하영종에게 말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에이. 형이나 조심하쇼. 그 새끼 우리 둘 다 안 좋아하잖아?” 하영종은 씨익 웃은 후 자리로 돌아갔다.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버려진 성당 위로 가볍게 울려 퍼졌다. * 철컹! 숨막힐 듯한 적막 속에서 광장 안쪽의 철문이 열린다. 수백 명의 소환자들은 숨을 죽인 채 거대한 철문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괴수의 모습을 목격했다. “저.. 저건 뭐야?” “이런.. 미친...” 그것은 붉은 빛이 감도는 털을 지닌 거대한 유인원이었다. 인간들은 압도적일 정도로 거대한 괴수 앞에서 몸을 떨며 한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 흉측한 괴물의 바퀴만한 눈동자가 자신의 발밑에 놓인 인간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두려워하는 얼굴들이 푸른 색 동공에 촘촘하게 맺힌다. “우끼끼끼끼끼!” 괴수가 활짝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탐탐. 팩맨 룰 최악의 괴수가 백광장에 발을 내딛었다. ======================================= 6. 팩맨 룰 (4) 모든 사람의 눈앞에 같은 문자가 떠올랐다. [ 등급전이 시작됩니다. ] [ 탐탐은 매우 흉폭하고 잔인한 괴수입니다. ] [ 탐탐의 추격으로부터 1시간 동안 달아나세요. ] [ 단, 탐탐을 처치할 경우엔 처치와 동시에 승리조건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럴 수 있다면. ] “영종 씨가 안 보이네요.” 배성혜가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연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우리를 돕기로 했는데...” 배성혜는 말끝을 흐리면서도 필사적으로 하영종을 찾았다. 하지만 천 명에 가까운 사람이 모인 거대한 광장에서 한 사람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영종 씨.. 어디 있는 거야?” 그녀가 하영종을 애타게 찾는 건 단순히 하영종이 좋아서 그런 것만을 아닐 것이다. 김성철은 하영종이 배성혜와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등 뒤로 만지작거리던 퇴마의 성수를 기억한다. 아마도 여러 남자들이 그러하듯 무리한 약속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무리한 약속을 이행할 때가 왔을 때 종적을 감추는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자주 있는 이야기다. 김성철은 배성혜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광장 안에 자리 잡은 사람들의 배치를 봤다. 오른쪽엔 파벌이 없는 자와 김학출의 파벌이 무질서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왼쪽엔 천정식의 파벌이 비스듬한 일자형을 치고 있었다. 탐탐과의 거리는 천정식 쪽이 좀 더 가까웠지만 그는 당장 부하들을 물리지는 않았다. 내정자의 무리도 둘로 갈렸는데 퇴마의 성수를 지닌 자들은 오른쪽 구석에 사이좋게 모여 있었고 성수를 가지지 않은 김성철 패는 천정희 파벌 측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 내정자 그룹에 박아람이 끼어 있는 것이다. 그것도 대단히 유쾌한 표정을 지으며 사람들과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저 녀석이 왜 저기 있지?’ 의문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갈 무렵 앞쪽에서 비명과 아우성이 튀어나왔다. 드디어 탐탐이 기동을 시작한 것이다. “우끼끼끼!” 탐탐은 두 개의 팔을 앞발 삼아 가공할 속도로 인간들을 향해 덮쳐왔다. 탐탐이 향하는 곳은 오른쪽. “모두 도망가세요! 어서!” 김학출의 고함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왕겨처럼 흩어졌다. 탐탐의 거대한 손이 비로 쓸듯 광장의 바닥을 크게 훑으며 3명의 인간을 한 번에 붙잡았다. “으아악! 사.. 살려줘!” “끄아아아악!” 거대한 손아귀에 잡혀 아우성치던 사람들은 크게 벌린 괴수의 입에 들어갔다. 우직! 콰지직! 거대한 이빨이 닫히고 인간들은 핏물과 다진 고기 덩이로 화해 탐탐의 목구멍을 타고 위장으로 들어갔다. “…….” 배성혜는 온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저.. 저건 뭐야? 저건 대체.. 뭐냐고?” 배성혜 뿐만이 아니다. 다른 내정자들도 압도적인 탐탐의 위세 앞에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일단은 뛰어. 말할 시간 따윈 없어.” 김성철은 솔선수범이라도 하듯 전력으로 앞을 향해 달렸다. 그의 뒤로 수백 명의 군중들이 겁에 질려 일제히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고 그 뒤엔 거대한 유인원이 쫓으며 닥치는 대로 인간들을 낚아 채 입안으로 부지런히 가져가고 있었다. 압도적인 괴수의 일방적인 포식극. 이것이 등급전 - 팩맨 룰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한편 성벽 위엔 이계의 실력자들이 빼곡히 자리를 잡고 산해진미를 펼쳐 놓고 아래 광장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학살극을 보고 웃고 즐기고 있었다. “백광장은 운도 없군요. 2차 등급전부터 팩맨 룰인 것도 모자라 탐탐까지 걸리다니.” 핏빛에 가까운 와인 잔을 든 중년 사내가 미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옆에 앉은 갑주를 앉은 사내를 응시했다. “…….” 갑주를 입은 사내의 얼굴은 와인 잔을 든 사내와 대조적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개 같은 소환 궁전 새끼들. 아주 노골적으로 우리 철혈기사단의 씨를 말리려고 하는군. 제국의 사주라도 받은 건가?’ 그 사내의 정체는 철혈기사단 소속 고위기사인 마상길. 그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전망대를 향해 걸어갔다. 두 명의 기사가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호위했다. “돌로렌스 윈터러!” 전망대의 문을 열자마자 마상길은 노호성을 내질렀다. 전망대에 모여 있던 마법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마상길을 향해 쏠렸다. 침묵 속에서 한 마법사가 마상길을 향해 도도한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여느 마법사와 달리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낸 옷을 입은 적발의 여인. 돌로렌스 윈터러. 그녀는 주근깨 가득한 얼굴에 웃음을 머금은 채 분노한 철혈기사단의 고위기사를 맞이했다. “절 찾으셨나요?” 마상길은 경멸어린 눈초리로 돌로렌스를 노려보며 딱딱하게 물었다. “단장님의 아드님은 어떻게 됐지? 첫 등급전에서 퇴마의 성수를 얻지 못했다는 보고를 들었는데.” 분노로 이글거리는 마상길과 달리 돌로렌스 윈터러의 얼굴엔 여유가 넘쳤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무슨 의미지?” 마상길의 손이 검의 손잡이에 올라갔다. 눈동자에선 숨김없는 적의와 살기를 뿜어냈다. 전망대의 마법사들은 마상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돌로렌스 윈터러는 견습 마법사 따위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인양 태연한, 여유마저 넘치는 얼굴로 마상길을 상대했다. “철혈기사단장님의 아드님은 퇴마의 성수를 손에 넣었어요.” “그럴 리가.” 마상길은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다. ‘퇴마의 성수는 소환 궁전을 관할하는 질서신의 축복 중 하나. 어떤 마법과 연금술로도 만들어낼 수 없으며 오직 시련을 치르는 신입 소환자만이 소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걸 저 빨강머리가 구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마상길은 그렇게 생각하며 돌로렌스를 더욱 강하게 몰아 세웠다. “네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지?” 이에 돌로렌스 윈터러는 잔혹한 미소를 머금으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시면 알아요. 하지만 저를 책망하진 말아주세요.” “무슨 뜻이지?” “철혈기사단의 법도를 따랐죠.” “알아듣게 설명해라. 마법사.” 마상길이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돌로렌스 윈터러는 품속에서 수정구를 꺼내며 하나의 상을 비추며 말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라. 철혈기사단의 유명한 구호 중 하나 아닌가요?” 수정구 안에는 박아람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수정구는 박아람을 클로즈업하여 그의 손을 크게 담았다. 꾹 쥔 박아람의 손엔 퇴마의 성수가 들려 있었다. * “으아아악!” 스무 명 째가 당했다. 탐탐은 사람을 으적거리며 씹으면서 바로 흉측한 눈동자를 돌려 다음 상대방을 물색했다. 미친 사람 마냥 괴성을 지르며 도망가는 인간들. 그중 탐탐은 머리카락이 긴 인간을 눈으로 찍었다. 놈이 노리는 건 여자다. 근육량이 많고 질긴 남자에 비해 근육량도 적고 지방도 풍부해 보다 맛이 좋다. 탐탐은 피가 흘러내리는 입가를 거대한 손으로 닦은 후 바로 다음 희생양을 향해 질주했다. “꺄아아악!” 노렸던 인간이 손아귀에 들어왔고 그대로 탐탐의 입에 들어갔다. 탐탐은 다시 인간을 씹으면서 탐욕스럽게 다음 먹이를 눈으로 훑었다. “언제까지 도망 다녀야 하나요?” 배성혜가 가쁜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놈의 배가 찰 때까지.” “그 배는 언제 차는데요?” “서른 명 정도 먹으면 배가 찰 거야.”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굶주린 야수가 배부른 야수가 될 때까지. 김성철의 손엔 익스플로전 스크롤이 있었다. 그 반격의 칼날은 야수가 야성을 버리고 방심을 들이는 순간 휘둘러질 것이다. “으아아악!” 그리고 그 순간은 빠르게 왔다. 10명의 사람이 탐탐의 입안으로 더 들어갔다. 거대한 유인원은 배가 부른 뒤 멍하니 앉아 있다가 트림을 했다. “꺼어어어억!” 소리도 소리지만 끔찍한 악취가 광장에 깔렸다. 탐탐은 머리를 긁적이며 곁눈지로 인간들을 보다 잔인한 눈으로 노려봤다. “우끼?” 유희의 시간이다. 탐탐은 재미로 사람을 죽인다. 불행한 인간 둘이 탐탐의 손에 붙잡혔다. 탐탐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발버둥치는 인간들을 쳐다보다가 어린애들이 장난감 싸움을 하듯 두 인간을 허공에서 맞부딪치게 했다. “그.. 그만!” “으엑!” 살벌한 몇 번음의 파공음이 울려퍼진 후 두 인간은 으깨진 채 탐탐의 손아귀 안에서 시체로 변했다. “우끼끼끼끼!” 탐탐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놈은 곧 다른 장난감을 물색했다. “우끼끼?” 무턱대고 도망가는 인간들과 달리 한데 모여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인간들이 있다. 내정자들이다. “빌어먹을. 이쪽을 보고 있어.” 내정자 중 한 명이 다급히 말했다. “모두들 준비하세요.” 이여훈이 뒷걸음 질 치며 주머니에서 퇴마의 성수를 꺼냈다. 탐탐이 내정자들을 향해 슬그머니 다가왔다. “지금!” 이여훈이 먼저 퇴마의 성수의 뚜껑을 열고 자신의 머리 위에 뿌렸다. 나머지 내정자들도 재빠르게 퇴마의 성수를 자신의 머리 위에 뿌렸다. 다가오던 탐탐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우끼?” 탐탐은 빠르게 흥미를 잃었다. 그런데 내정자 중에 퇴마의 성수를 사용하지 않은 녀석이 하나 있었다. 박아람이다. 그는 탐탐이 무섭지도 않은지 갑자기 내정자 무리를 뛰쳐나가며 김성철 쪽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여기야! 여기! 이 멍청한 원숭아! 여기라고!” “우끼?” 탐탐이 반응했다. 박아람은 더욱 날뛰며 소리쳤다. “저 개새끼들을 찢어서 죽이라고 당장!” 탐탐이 다시 움직였다. 박아람을 향해. 박아람은 탐탐이 다가오자마자 무언가를 꺼냈다. 그걸 본 김성철의 눈이 반짝였다. ‘저건, 퇴마의 성수. 놈이 어떻게.’ 그런데 그 병의 모양. 어디서 본 기억이 있다. 김성철은 빠르게 과거를 회상했고 그리고 한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것은 어젯밤 피워놓은 화톳불 옆에 둘러앉은 두 남녀의 모습이었다. 적극적인 남자와 노련한 여성, 그리고 등 뒤로 만지작거리던 작은 병. ‘저건 하영종의 것이다.’ 박아람은 그 하영종의 성수를 자신의 몸에 뿌리며 광고했다. “캬하하하하하! 자! 이 원숭이새끼야! 어서 저 새끼들을 죽여 버리라고!” 박아람을 향해 가던 탐탐은 박아람의 몸에 성수가 뿌려지자 즉시 그를 피해 그 너머로 달려갔다. “우끼끼끼끼!” 흥미 대신 분노를 담은 포효를 내지르며. “영종 씨.. 영종 씨는 어디로 간 거야?” 다시금 위기가 닥쳐오자 배성혜는 하영종을 찾았다. 김성철은 그녀의 등뒤를 향해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영종은 오지 않으니까 시킨 거나 제대로 해라.” 김성철은 익스플로전 스크롤을 손에 쥐고 앞으로 나섰다. 사람들을 개미처럼 짓밟으며 육박하는 탐탐은 담담한 눈으로 노려보며 그는 때를 기다렸다. 모든 사람들이 공포에 질리며 대적할 수 없는 괴수로부터 달아나는 그 순간 김성철은 스크롤을 펴며 낭랑하게 소리쳤다. “익스플로전!” 스크롤이 빛으로 물듬과 동시에 탐탐의 발밑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콰쾅! 신나게 달려오던 탐탐의 왼발이 폭발의 충격으로 이상한 방향으로 꺾임과 동시에 관성이 실린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끼이이이익!” 광장 전체가 들썩거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하지만 탐탐은 죽지 않았다. 놈으로선 그저 쓰러졌을 뿐이다. 하지만 그 또한 김성철의 안배에 들어 있었다. “지금이다!” 김성철은 검을 높이 들어 올리며 쓰러진 채 정신을 잃은 탐탐을 향해 달려갔다. “아.. 영종이 어디 갔냐고 씨발!” 배성혜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월광을 엎드린 탐탐의 눈을 향해 발사하는 걸 신호로 수많은 소환자들이 일제히 탐탐을 향해 달려들었다. “가자! 새끼들아! 원숭이 회칠 시간이다!” 천정식과 그의 부하들이 필두에 섰다. “여러분! 지금입니다! 우리도 공격합시다!” 김학출도 나름 검을 들고 달려들려고 하지만 그를 따르는 건 500명 중에서 한 줌도 안 되는 그의 측근뿐이었다. 푹! 푹! 푹! 정신을 잃은 탐탐의 몸을 노리고 수십 개의 검이 일제히 찔러 들어갔다. 그런데 탐탐의 가죽은 질겼고 그 안에 자리 잡은 근육은 가죽보다 더욱 강했다. 평범한 자들이 아무리 강한 힘으로 검으로 찔러봐야 겨우 살갗에 상처를 내는데 그칠 뿐이었다. 유의미한 타격을 가하는 것은 내정자들과 천정식 패거리의 검. 그들의 검은 다른 이들과 달리 살갗은 물론 근육가지 뚫고 들어가 탐탐의 몸을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그들의 검은 단단한 근육질을 가를 뿐, 그 안에 숨겨진 동맥과 뼈까진 미치지 못했다. 김성철 또한 그들과 비슷한 수준의 공격을 보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타격은 평범한 자와 유사한 듯 보이나 유사하지 않다. “…….” 푹! 다른 이처럼 검의 절반 이상이 뚫고 들어가는 건 같지만 그는 여기서 한 가지 공정을 추가했다. 검의 손잡이를 잡고 돌려버리는 것. 강철처럼 튼튼하고 질긴 탐탐의 근육조직이 김성철의 칼날에 감겨 그대로 파열되어 버렸다. 김성철은 느릿느릿하면서도 확실하게 탐탐의 왼쪽 다리를 공략했다. “우끼!” 김성철의 검이 근육을 헤집어 놓을 때마다 탐탐은 몸을 벌떡거리며 끔찍한 고통을 호소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공로로 착각하며 더욱 칼질에 매진했다. 이윽고 탐탐이 정신을 차리고 두 눈을 떴다. 배성혜가 월광으로 탐탐의 눈을 노리고 에너지볼트를 발사하자 탐탐은 축 늘어진 두 팔을 올려 얼굴을 가리며 몸을 일으켰다. “우와와와! 저 괴물, 아직 살아 있어!” “모두 물러나!” 신나게 탐탐을 찌르던 천정식의 패거리를 필두로 소환자들은 일제히 물러났다. 탐탐은 분노한 얼굴로 인간들을 노려보며 천천히 직립하며 두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그것은 탐탐이 가할 수 있는 최대의 위협. 모두 죽여 버리겠다는 의사의 표시였다. 피로 번들거리는 유인원의 시선에 직면한 인간들을 모두 영혼이 달아날 정도의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그 유인원을 바라보는 김성철의 얼굴은 편안하기만 했다. “우끼?” 아니나 다를까 신나게 가슴을 두드리던 탐탐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곧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사람들은 영문을 모른 채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오직 한 명 김성철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네 놈의 다리 근육은 모두 찢어놓았지. 넌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다.’ 일견 평범해 보이던 김성철의 공격이 탐탐의 왼다리를 영영 쓰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자! 다시 달라붙자! 저 원숭이 새끼가 뒤질 때까지!” 천정식의 포효와 함께 인간들이 다시금 탐탐에게 달려들었다. 탐탐은 쓰러진 채 양 팔을 휘저어 반항해보지만 그 팔놀림은 수십, 수백 번의 칼질이 이어짐에 따라 점차 희미해졌고 결국 아래로 축 늘어졌다. [ 놀랍습니다! ] [ 괴수를 쓰러뜨렸습니다! ] [ 시련 이상의 업적을 달성했기에 성적에 관계없이 최고등급의 보상을 백광장에 수여합니다. ] [ 축하합니다! 당신은 두 번째 등급전을 수료하였습니다! ] 최악의 시련은 이렇게 최상의 결과로 끝났다. 하지만 김성철의 용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기뻐 날뛰는 한 사내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박아람. 김성철이 그에게 손대기로 마음먹었다. ======================================= 7. 참교육 [ 탐탐을 쓰러뜨렸기에 개별 보상 지급 기준은 기여도에 따라 차등으로 지급됩니다. ] [ 현재 소환 궁전의 집행부에서 개별 소환자의 기여도를 심사 중입니다. ] 소환자들은 탐탐이 쓰러진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나도록 광장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소환자들은 높은 성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울음소리와 지축을 흔드는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지난 후, 각 소환자들의 눈앞에 장문의 문자가 떠올랐다. “뭐야. 0.2%? 그거밖에 안 돼? “난 0.1%에 불과한데?” 대부분의 소환자들의 기여도는 1%를 밑돌았다. 하지만 김성철 앞에 떠오른 수치는 남달랐다. [ 당신의 기여도는 18.4%. ] 압도적인 수치. 보상 또한 압도적이다. [ 보상등급 S급으로 평가되었습니다. ] 기여 보상 : 1. 전갈꼬리 채찍 기본 보상 : 1. 궁전토큰 14개 2. 신선한 고기 세 토막 3. 사과 15알 4. 식량 이주일 치 선택 보상 : 1. 퇴마의 성수 5개 2. 광기의 물약 1개 3. 병사의 석궁 중 택일 선택보상을 두고 김성철은 이번에는 병사의 석궁을 골랐다. 채찍과 석궁을 위시한 대량의 아이템이 김성철 앞에 떨어졌다. 김성철은 먼저 가장 중요한 궁전 토큰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앞으로 남은 등급전은 둘. 필요한 토큰의 숫자는 스물세 개. 빠듯하군.’ 아슬아슬한 숫자다. 이번 보상으로 인해 백광장을 1위로 올려놓고 대 활약을 펼쳐도 얻을 수 있는 궁전 토크의 상한치는 14개라는 소리니까. 비슷한 보상을 얻기 위해서는 백광장을 최소한 1회 이상 1위에 올려놓은 상태에서 높은 활약을 펼쳐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남은 등급전은 데스매치 룰, 대장전 룰 두 가지가 되겠지. 대장전이야 복불복이라 해도 데스매치 룰은 반드시 백광장을 1위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김성철이 무기를 선택한 이유다. 익스플로전 스크롤 같은 대량 학살이 가능한 아이템이 최적의 선택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보상에 스크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싸울 전사 개개인을 강화시키는 편이 낫다. 병사의 석궁 같은 원거리 무기는 다수의 소환자가 맞붙는 데스매치 룰에서 언제나 높은 효율을 발휘하니까 적당히 침착한 인물을 물색해 나눠주면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아이템을 전부 챙긴 후, 김성철은 기록의 돌에서 전적을 확인했다. 전적은 예상대로의 결과를 담고 있었다. [ 1. 김성철 - 18.4% ] [ 2. 아무개 - 5.2% ] [ 3. 천정식 - 4.3% ] ... [ 12. 배성혜 - 3.3% ] ... [ 782. 이여훈 - 0% ] [ 783. 김택수 - 0% ] ... 김성철이 1등이다. 실제로 기여도를 따지자면 80% 이상의 공을 김성철의 공으로 돌려야겠지만 평가자들은 어디까지나 김성철이 익스플로전 스크롤을 사용해 탐탐을 바닥에 쓰러뜨린 부분만을 평가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쓰러진 탐탐을 공격에 대한 공격횟수는 많다고는 알 수 없고 머리나 몸통 등의 치명적인 부분에 대한 공격을 아예 시도하지 않았으니까. 한편 퇴마의 성수를 몸에 두르고 멀리서 구경만 한 내정자들의 기여도는 죄다 0%였다. 김성철은 기뻐 날뛰다가 의외로 박한 보상에 쌍욕을 퍼붓는 박아람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원하는 건 아니지만 눈에 띄는 활약을 해버렸군. 하지만 주목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활약은 내 실력이 아닌 아이템의 힘을 빌어서 한 것이니까. 하지만 같은 활약이 반복되면 그때는 자연스레 구경꾼들의 관심을 받게 되겠지.’ 어려운 조건이 붙었다. 눈에 띄는 활약을 하지 않고도 백광장을 순위권에 올려놓는다는. 광장을 달구고 있는 승리의 여운이 서서히 식을 무렵 김성철은 내정자들의 캠프로 돌아갔다. 가장 먼저 이여훈을 찾았다. “하영종은 어디로 갔지?” “영종 씨요? 글쎄요. 어디 간 걸까요. 저도 한참 찾았는데.” 이여훈의 눈동자가 한 차례 이상 저편에 서 있는 박아람을 향했다. 뭔가 숨기고 있다. 리더 역할을 자처하는 이여훈이 이럴지언데 다른 인간들은 안 봐도 뻔하다. 미끼가 필요하다. 김성철은 고기 한 토막과 사과 두 알을 들고 다른 내정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하영종은 어디로 갔지?” 다들 묵묵부답이다. 하지만 여러 시선들이 고기 토막을 향했다. 내정자들은 백광장이 1위를 차지한 덕에 궁전 토큰과 식량을 얻기는 했지만 기여도가 0%인 관계로 고기 같은 귀중한 식재는 얻지 못했다. 다들 김성철은 적대시해서 그렇지 필경 시간이 누군가 고기를 노리고 찾아올 것이다. 그 기회는 머지않아 찾아왔다. “저기...” 이름을 모르는 남자가 홀로 있는 김성철을 은밀하게 찾아왔다. “말해주면 그거 줘?” 김성철은 먼저 고기와 사과를 내밀었다. 빠른 일처리. 이름 모를 사내는 조심스레 고기를 챙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투 전에 훈육실장이 찾았어. 훈육실장과 함께 성문 바깥으로 나간 걸로 기억해.” “어디로 간 지 아나?”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야. 더 이상 묻지도 말고 아는 체도 하지 마.” 그 내정자는 고기를 안고 도망치듯 김성철을 떠났다. 하지만 이내 두고 온 사과가 아쉬운지 상기된 얼굴로 다가와 김성철의 시선을 회피하며 바닥에 구르고 있는 사과를 챙겼다. ‘훈육실장이라.’ 김성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문 쪽으로 걸어갔고 이내 흔적을 찾았다. 어지러이 널린 수많은 발자국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호문클루스의 독특한 족적. 등급전이 계속되는 내내 성문이 닫혀 있었기에 흐려진 가능성도 적다. 김성철은 발자국을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발자국은 숲속 깊은 곳까지 이어져 있었고 곧 김성철은 낯익은 건물 안으로 데려다 놓았다. 버려진 성당. 내정자들의 첫 번째 회합장소다. 김성철은 성당 전체에 흐르는 을씨년스러운 기운을 느끼며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 불을 피워 놓은 흔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은은한 불냄새와 고기향도 공기 미세하게 느껴졌다. 김성철은 느릿하게 주변을 돌아보다가 이내 무언가 발견했다. 그것은 관 밖으로 삐져나온 사람의 손이었다. “…….” 김성철은 조용히 관 쪽으로 접근해 뚜껑을 열었다. 관안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긴 사내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그나마 온전한 하반신을 보고 김성철은 시신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영종.’ 김성철은 다진 고깃덩이에 가까운 얼굴 위에 손을 뻗어 작은 털을 집었다. ‘늑대의 털.’ 늑대인간의 짓이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성당 입구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짜증나는 거예요. 인간들 뒤치다꺼리 하는 건!” 오래 전부터 들어오던 듣기 싫은 목소리. 훈육실장의 것이다. 과연 훈육실장이 작은 호문클루스와 함께 성당 안으로 외바퀴수레를 끌고 아장아장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사탕을 많이 얻을 수 있으니 쌤쌤인 거예요! 나의 자식도 이걸 먹어보는 거예요!” 훈육실장은 작은 호문클루스에게 사탕을 내밀었고 작은 호문클루스는 사탕을 맛있게 받아먹었다. “맛있는 거예요. 마마! 하나 더 주는 거예요!” 사이좋은 호문클루스들 앞에 인간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응? 낯익은 인간이 여기 있네요.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 훈육실장의 시선이 열린 관을 향했다. “뭘 본거죠? 인간?” 훈육실장이 톱니바퀴 같은 이빨을 드러냈다. “대답하세요. 인간! 뭘 본 거죠? 설마 저 안의 것을 본 건가요?” “그 수레는 시체를 실으러 온 건가?” 김성철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에 훈육실장 옆에 있던 작은 호문클루스가 앞으로 나서며 김성철을 위협했다. “인간 주제에 건방지게. 어디서 말대답하는 거예요? 조금 강해졌다고 우리를 이길 수....” 김성철의 손이 호문클루스의 다리를 붙잡았다. “어.. 어..?!” 허공에 들린 호문클루스는 영문을 모른 채 주변을 돌아보다가 그대로 바닥에 부딪쳐 피떡이 되었다. 훈육실장이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자식! 내 자식!!!!!” 훈육실장의 고개가 태엽시계의 초침처럼 천천히 김성철을 향해 꺾였다. “가.. 감히 내 자식을 죽이다니... 내가 낳은 건 아니지만 용서 못하는 거예요. 절대로 용서 못하는 거예요. 아무리 당신이 내정자라고 해도 어차피 그 시체를 본 이상 살아남지 못하는 것... 이 훈육실장이 죽여 드리겠어요!” 훈육실장은 마치 무술인처럼 자세를 잡으며 김성철에게 손짓했다. “꾸이꾸이.” 그러고는 두 주먹을 풍차처럼 돌린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소환 궁전에서 20년 넘게 버티면서 체술을 익혀둔 모양이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내 노예로 만들어 주겠어요!” 하지만 오늘은 상대를 잘못 만났다. 그의 적수는 모든 인간을 통틀어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자. 호문클루스 따위가 만 년을 살아도 상대할 수 없는 존재다. 잠시 후, 끔찍한 비명이 성당을 메웠다. “하영종을 죽인 건 누구지?” 김성철의 손이 훈육실장의 손가락을 뽑아내고 그 자리를 엄지로 눌러 짓이겨버렸다. “레뺘아아아아! 훈육실장은 모르는 거예요! 인간! 제발 날 놔주는 거예요! 자식 따위 죽인 건... 테에에엥!” 김성철은 쉬지 않고 호문클루스의 손가락을 모두 뽑아버리고 다음엔 손으로 살점을 조금씩 뜯어냈다. “다시 묻겠다. 하영종을 죽인 건 누구지?” 그제야 훈육실장은 깨달았다. 자신 앞에 있는 인간이 답이 없는 존재라는 걸. “박아람... 박아람이예요! 인간! 살려주세요... 제발...” “박아람? 박아람 따위가 하영종을 죽일 수 없을 텐데.” “아니에요! 박아람은 늑대 인간인 거예요! 인간! 그 빨간머리 마법사가 박아람에게 늑대인간으로 만든 거예요!” “그렇다 이거군.” 이제야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다. 힘이 약한 박아람이 하영종을 죽일 수 있었던 이유가 마침내 드러난 것이다. 늑대 인간. 성장 기대치는 절망적이지만 당장 빠르고 쉽게 힘을 얻을 수 있는 수단. ‘마법사는 개입하지 않고 그저 수단만 줬군. 교활한 여자야. 아주 교활한 여자야.’ 마지막으로 김성철은 훈육실장에게 퀘스트 목록을 요구했다. 훈육실장은 몸을 바들바들 떨며 입에서 빛나는 원구를 토해냈다. 퀘스트 목록을 받아든 김성철의 눈동자에 실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일반 퀘스트 뿐이군. 결국 이 녀석도 그것밖에 안 되는 존재라는 이야기겠지.’ “이제.. 살려주는 거예요? 인간? 인간님? 네?” 김성철은 훈육실장을 노려보며 얼굴을 덮은 머리카락을 위로 올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내 얼굴 기억하나?” “당연히 기억하죠. 인간! 당신은 훌륭하고도 자비로운 내정자 중 으뜸인걸요!” 이에 김성철은 일소하며 손아귀로 얼굴을 매만졌다. 뚜둑! 뚜둑! 뼈가 맞부딪치고 근육이 뒤틀리는 소리가 들린 후, 훈육실장 앞엔 전혀 다른 얼굴이 나타나 있었다. “25년 전, 날 본적이 있을 텐데.” 그 말을 들은 훈육실장의 눈동자에 지난날의 풍경이 주마등처럼 흘러갔고 이윽고 하나의 얼굴을 찾아냈다. 훈육실장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서.. 설마.. 당신은... 세계의 적?! 그럴 리가. 당신은 분명 5년 전 죽었을 텐데... 인간 - 드워프 연합군에 의해서...” “유감이군. 죽지 않아서. 그리고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사실이 있는데 말이야. 내가 안 죽은 게 아니라 내가 그들을 안 죽인거야. 알아 둬.” 김성철은 훈육실장의 주머니를 부풀게 만드는 사탕 주머니를 꺼내 그대로 훈육실장의 입에 밀어 넣었다. 톱니 같은 이빨이 부서지며 사탕과 함께 훈육실장의 기도를 막아버렸다. 김성철은 고통스러워하며 버둥거리는 훈육실장을 성당 밖으로 끌고 가 바닥에 몇 번 메치고는 숲속 멀리 던져버렸다. “……,” 불타는 성당을 뒤로하며 김성철은 품속에 있는 작은 피리를 꺼내 불었다. 이윽고 작은 다람쥐 하나가 하늘에서 날아와 김성철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뀨뀨?” 크릴 리갈의 하늘 다람쥐다. - 돌로렌스 윈터러에 대해 알고 싶다. 김성철은 작은 보석과 함께 갈겨 쓴 쪽지를 하늘 다람주의 주머니에 집어넣고 다람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늘 다람쥐는 밤하늘 너머로 민첩하게 사라졌다. ======================================= 7. 참교육 (2) 광장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전운을 불러온 것은 천정식과 그의 패거리였다. 그는 이른 아침 탐탐 전에서 죽은 동료들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 100명에 이르던 그의 부하들 중 30명이 넘는 부하가 탐탐 전에서 희생됐다. 그때만 해도 광장의 사람들은 천정식이 일으킬 사태에 대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김학출 패도 피해를 입긴 했지만 천정식 패에 의하면 경미했고 따라서 천정식이 감히 행동에 나서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제사가 끝난 직후 천정식은 그대로 집결한 부하들을 이끌고 김학출 패로 들이 닥쳤다. “할 말이 있다!” 식은 김학출 면전에서 피 묻은 단검을 바닥에 꽂고는 주위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는 일갈을 날렸다. “오늘부터 이 광장은 우리가 지배한다.” 전광석화 같은 선전포고. 김학출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으나 침착성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대체 왜 이런 말을 하는 겁니까?” “몰라서 물어? 너희들이 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잖아.” 천정식이 보기에 백광장엔 날로 먹는 놈들이 너무 많았다. 첫 번째 등급전도 그렇고 두 번째 등급전도 그렇다. 언제나 싸우는 놈만 목숨 걸고 싸우고 싸우지 않는 놈들은 뒤에서 구경한다. 구경만 하면 다행이다. 최소한의 용기조차 내지 않은 주제에 남들 보상엔 어찌나 관심이 많은 지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건 물론 기회가 되면 도적질도 서슴지 않았다. “끌고 와라.” 천정식이 손짓하자 그의 부하가 뒤로 손이 묶인 두 사내를 김학출 앞에 끌고 왔다. “당신 부하가 겁도 없이 우리 식구들 물건에 탐을 냈더군.” 천정식의 부하가 각각 두 사내의 얼굴의 뒷머리를 잡고 얼굴을 들어올렸다. 어찌나 두들겨 맞았는지 얼굴이 벌겋게 부어올라 원형을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김학출의 얼굴이 순간 당혹감에 물들었다. 당혹감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정을 듣지도 않고 사람을 이렇게까지 때려도 되는 겁니까?” 김학출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측근들이 고개를 끄덕였고 몇 명이 슬그머니 자리를 떠났고 각 측근은 수십 명의 사람들과 함께 돌아왔다. 천정식 패는 압도적인 숫자의 김학출 패에 포위됐다. 그럼에도 천정식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김학출이 패거리를 불러 모으는 걸 기다리기라도 한 듯 빙그레 미소 지으며 바닥에 꽂았던 신속의 단검을 뽑으며 현란한 손놀림으로 돌렸다. 핑그르르 회전하던 칼끝이 김학출을 향했다. “해볼까?”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언제라도 싸움이 일어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한 사내가 거만한 걸음걸이로 콧노래를 부르며 천정식과 김학출 양 진영의 중간으로 걸어들어왔다. 수백 명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사내에게 쏠렸다. 사람들은 처음엔 그의 준수한 외모와 큰 키, 균형 잡힌 몸매에 눈길을 주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뿜어내는 독특한 분위기에 경도되었다. 그렇다. 그는 오만함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싸우지들 말자고. 러브 앤 피스라고 하잖아. 안 그래? 예쁜 아가씨?” 그는 수백 명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위축되기는커녕 그것을 즐기며 대치하는 양 지도자를 향해 걸어갔다. “…….” 김성철은 먼발치에서 그 사내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내정자들도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박아람? 갑자기 쟤. 왜 저래?” “그러게. 지팡이 잃어버렸다고 징징거리더니 결국 맛이 간 건가.” 겁도 없이 김학출과 천정식 사이로 걸어가고 있는 인물의 정체는 박아람이었다. 천정식과 김학출 주변엔 각각 수십 명에 달하는 부하들이 있었지만 박아람의 태도가 워낙에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탓에 감히 그를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고 결국 박아람은 천정식과 김학출 사이에 이르게 되었다. “왜들 그리 심각해? 응? 등급전도 이겼는데 축제는 못할망정 같은 인간끼리 싸우면 되겠어?” 박아람은 처음엔 김학출을 다음엔 천정식을 바라보며 말했다. 천정식의 차가운 시선이 박아람의 얼굴 정면에 비수처럼 꽂혔다. 그 눈빛을 받은 박아람은 입을 살짝 벌리며 놀라는 시늉을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마치 아이를 달래는 태도로 천정식에게 다가가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워워- 머리 좀 식히라고. 친구. 응?” 그때 천정식의 어깨가 살짝 움직였다. 그 순간 박아람의 상의 옷자락이 찢어졌다. 대단한 스피드에 정확도였다. 조금만 칼날을 위로 올렸다면 목의 동맥을 베어버렸으리라. “다음엔 모가지를 쳐 줄 테니 좋은 말로 할 때 꺼져라.” 천정식이 싸늘하게 말했다. 박아람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참, 이 사람, 다혈질이네.” 어이가 없는 일이 일어났다. 모두가 박아람이 간이 부었다고 생각했다. 천정식은 자타가 공인하는 백광장의 최강자 중 한 명이니까. 하지만 오직 한 명, 김성철만은 박아람의 자신감의 배경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거저 얻은 힘을 자랑하려고 안달이 났군.’ 곧 박아람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몸이 뒤틀리고 드러난 팔과 얼굴이 털로 뒤덮였다. 군중들은 두려움과 놀라움 속에서 박아람의 변신을 지켜봤다. 변신이 끝난 후, 박아람이 있던 자리엔 인간보다 크고 강한 괴물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늑대인간. 흡혈귀처럼 개인의 선택에 따라 얻을 수 있는 종족으로 종족 변환을 마침과 동시에 힘, 민첩, 체력에 30이라는 수치를 즉각적으로 안겨다준다. 성장 가능성이 절망적이고 마법을 일체 익힐 수 없다는 등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신입 소환자가 모인 곳에서 늑대인간의 존재는 그야말로 양떼 가운데 늑대를 풀어 놓은 것과 다름없다. “자, 이제 좀 머리가 식어? 응?” 괴물로 변한 박아람이 껄껄 웃으며 천정식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천정식은 순간적으로 저 괴물이 대적하기 어려운 존재라는 걸 간파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박아람은 그를 노리고 있었고 그리고 살려 줄 마음도 없었다. “왜? 말이 없어? 내 본 모습을 보니 저절로 분노조절이 돼? 응? 다혈질이 고쳐 져? 응?” 조롱의 말을 끝없이 흘리며 박아람은 천정식에게 또 한걸음을 내딛었다. 천정식의 부하들이 검을 들고 천정식 앞을 막았다. “형님. 저희들이 막겠습니다.” “어서 뒤로 물러나십시오!” 그 순간 박아람의 앞발이 움직였다. 허공을 가른 발톱은 그 앞에 놓이 인간의 육신을 두부 가르듯 갈라 놓았다. 피와 육편이 사방에 튀며 두 사내가 순식간에 눈 뜬 시체가 되어 바닥에 처박혔다. 천정식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됐다. 박아람은 피묻은 손톱을 혀로 핥으며 이죽거렸다. “그러고 보니. 너. 몸에 그림이 아주 많네. 그거 용이야? 응? 왜 말이 없어? 말이 없는 걸 보니 몸에 그림을 좀 더 그려주면 입을 열려나.” 박아람은 이제 거칠 게 없었다. 단 일격으로 자신의 힘을 드러내보이자 감히 나서려는 부나방도 나타나지 않았다. 천정식은 대적할 수 없는 괴물에 직면했고 예정된 죽음을 느꼈다. 그런데 천정식을 살린 것은 박아람 본인이었다. “뭐? 왜?” 박아람이 갑자기 혼잣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인처럼 허공을 응시하며 털로 수북한 팔을 휘두르면서. “아니, 씨발 내가 죽이고 싶다는데 뭐? 몰라 씨발. 모른다고!” 그걸 본 김성철은 그 뒤에 빨간 머리 마법사가 있음을 직감했다. ‘천정식은 선택 된 소환자. 누가 그를 선택했는지 알 수 없지만 돌로렌스 윈터러가 직접 나설 정도면 제법 거물이 점찍은 모양이군.’ 하지만 박아람은 말릴 수 없는 인간이다. “괜찮아. 뒷수습은 우리 애비가 알아서 하겠지. 얼굴도 모르는 우리 애비가.” 박아람의 노란 동공이 광기로 물들었다. 그 괴물은 천정식을 향해 달려들었고 앞발을 휘둘렀다. 천정식은 검을 들어 발톱을 막는데 까진 성공했지만 발톱에 실린 힘까지는 막지 못했다. 저만치 날아가 옆으로 꼴사납게 굴러야 했다. “칫!”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천정식은 재차 달려드는 늑대인간을 노려봤다. “?!” 다리가 갑자기 움직이지 않는다. 착지 시에 다리 근육이 다친 모양이다. 금방 회복되겠지만 다음 공격을 막을 순 없다. 그는 속절없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늑대인간을 지켜봐야 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박아람의 양 옆에서 늑대가 나타났다. 그것은 군중들 사이를 질풍처럼 달려 천정식의 숨통을 끊으러 가던 박아람의 다리를 물어뜯었다. “아니, 씨발 이건 뭐야?” 그것은 스피릿 울프였다. 첫 번째 등급전에서 박아람이 선보였던 바로 그것. 그 두 마리의 스피릿 울프가 원래 주인이었던 박아람을 물어뜯고 있는 것이다. “이 새끼들이!!” 박아람은 미친 듯이 발톱을 내저어 스피릿 울프들을 발톱으로 짓이겨버렸다. 스피릿 울프들은 구슬픈 울음소리와 함께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어떤 새끼야!!!” 박아람은 주위를 돌아보며 광기에 물들 눈으로 인간들을 훑었다. “방금 누구야! 어떤 새끼가 내 지팡이를 쓴 거야? 어!!!” 박아람의 관심이 천정식에게서 멀어졌다. 천정식의 부하들은 그 틈에 다리를 다친 그를 데리고 신속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상황이 종료된 건 아니었다. 불이 천정식에게 일반인에 옮겨 붙은 것에 불과했다. “어떤 새끼냐고!!!” 박아람이 길길이 날뛰며 군중들을 향해 달려갔다. 공포에 질린 군중들은 늑대인간이 다가오자 혼비백산하며 왕겨처럼 흩어졌다. 그 과정에서 수십 명의 사람이 넘어지고 짓밟혔고 불운한 몇 명은 박아람의 발톱에 육편으로 화했다. 장내는 아수라장으로 화했다. 혼돈의 중심에 선 박아람은 숨을 헐떡이며 서서히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늑대인간의 변신이 풀린 것이다. 그의 변신 시간은 5분에 불과했지만 5분 동안 그는 혼자서 광장의 판도를 뒤바꿔놓았다. 기세가 올랐던 천정식은 꼴사납게 패주했고 소극적인 김학출은 공포감에 젖어 무력하게 늑대인간이 자신의 동료들을 해치는 걸 지켜봐야 했다. 불길한 침묵 속에서 박아람은 씨익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고 비난하지도 못했다. 지금 이 광장에서 그는 절대자다. 박아람은 그 여운을 음미라도 하 듯 웃는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모두가 숨죽인 그 순간, 김성철은 박아람이 아닌 한 여성을 지켜보고 있었다. 스피릿 울프 두 마리를 몰래 불러 낸 직후, 지팡이를 외투 속에 숨기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유유하게 군중들 속에 섞여 달아나는 여성을 말이다. 그녀의 얼굴은 김성철이 아는 얼굴이었다. ‘저 여자. 틀림없다. 그때 그 여자군.’ 첫 번째 등급전 때 보너스 몬스터를 노리던 여성이 있었다. 간발의 차로 놓치긴 했지만 그녀는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능력치 이상의 전투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얼핏 보긴 했지만 현실에서 익힐 수 있는 감각과 솜씨가 절대 아니다.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뼈를 깎는 노력과 수백 번의 사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그땐 그저 그러려니 추정했을 뿐이지만 방금 그 여성이 보여준 적절한 타이밍의 은밀한 소환과 귀신같은 도주를 보고 확신했다. ‘저 여자, 처음부터 느꼈지만 단순한 신입은 절대 아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김성철은 소환 궁전과 관련하여 재밌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신 혹은 신에 필적한 존재들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 시간을 거슬러 소환 궁전에 신입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회귀자. 전생의 기억과 경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과거로 되돌아 온 존재들. 김성철은 그 여성에게서 잊고 있던 개념을 끄집어냈다. 관찰할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김성철의 어깨 위에 하늘 다람쥐가 사뿐히 내려 앉았다. “뀨뀨!” 김성철은 하늘 다람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앞발에 단 주머니를 끌러 그 내용을 확인했다. [ 돌로렌스 윈터러. 나이 24세. 빙결학파. 에어푸르트 마법대학 출신. 돈과 권력을 밝히는 속물로 평판이 좋지 않지만 실력 하나만은 동기들 가운데 최상급. ] “호오. 에어푸르트 출신이라. 좋은데 나왔군.” 김성철은 흥미로운 눈으로 다음 내용을 읽어 나갔다. [ 그 여자는 주야를 불문하고 자신의 내정자를 관찰하지만 단 한 순간 내정자에게서 눈을 떼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무고한 여성을 숲으로 꾀어낼 때입니다. ] 그 문구를 본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 7. 참교육 (3) 기회는 빠르게 찾아왔다. 모든 소환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얼굴을 알린 박아람은 이제 전보다 적은 노력으로 여성을 유인할 수 있었다. 흔한 칭찬의 말도 비위 맞추기도 필요 없었다. 비음 섞인 한 마디면 충분했다. “늑대인간이 되는 비밀에 대해 알고 싶어?” 김성철은 일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3번을 참았다. 해가 기울고 땅거미가 질 무렵 크릴 리갈이 보낸 사자가 김성철의 어깨 위에 재차 내려앉았다. [ 지금입니다. ] 짧은 문장. 크릴 리갈은 지금 이 순간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전망대를 박차고 나가는 돌로렌스 윈터러를 보고 있었다. “또 시작이야. 그 개 같은 새끼. 역겨워서 더는 못 봐주겠어. 철혈기사단장 아들 새끼라고 나름 인간이 된 인간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이런 쓰레기 새끼도 없네.” 돌로렌스가 나서자 신입 소환자 몇 명이 따라와 그녀의 비위를 맞춘다. “정말 고생이 많겠어요. 하필이면 그런 놈이 걸리다니...” “이제 등급전 2번 밖에 안 남았잖아요? 역겨워도 조금만 더 참으시면 복이 올 거예요.” 입 발린 소리들. 진심으로 그 말을 하는 인간은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돌로렌스 윈터러처럼 강자에게 굽실되고 약자에게 가혹한 인간은 아랫사람에게 인기가 없는 법이므로. 그럼에도 사람들이 구차하게 앞 다투어 그녀에게 아부를 하는 건 좁은 마법사 바닥에서 연줄이라는 것이 가지는 힘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재능이 있는 인간이라도 연줄이 없으면 주문하나 배울 수 없다. 그래서 필사적인 것이다. “내가 만약 저 광장에 있었다면 그 새끼를 그냥 죽여 버렸을 거야.” 아첨꾼에 둘러싸인 돌로렌스 윈터러는 술잔에 술을 따라 조금씩 홀짝였다. 많이는 아니고 입술을 적실 정도만. 그녀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종종 하는 행동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마법사 사이에 있는 크릴 리갈을 발견했다. “어. 너. 왜 아직 여기에 있어?” 돌로렌스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네..? 저요?” 크릴 리갈의 소스라치게 놀랐다. 갑작스런 관심도 그렇지만 그가 하고 있는 행동이 돌로렌스와 직결되기 때문에 긴장의 강도가 가파르게 올라간 것이다. “그래. 너. 네 내정자 잃어버렸다던데 찾았어?” 낭패다. 이 사실을 아는 건 크릴 리갈과 마상길 뿐이다. 다른 이들은 아직 크릴 리갈이 담당하던 내정자가 죽은 사실을 모르고 있다. “네. 찾았죠. 멀쩡하더군요.” 그 말을 들은 돌로렌스가 묘한 미소를 머금더니 술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술잔 안에 담긴 핏빛 액체가 소용돌이치며 출렁거린다. “진짜야?” 돌로렌스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응?” 마치 뱀과 같은 시선이 크릴 리갈을 옥죄었다. “그.. 그게...” 돌로렌스는 크릴 리갈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다시 술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내뱉듯이 말했다. “난 말이야. 신선한 신입들은 꽤 좋아하는 편이지만 신입 주제에 사람 간 보고, 사람 가려가면서 대우해주는 신입은 아주 질색이야.” “…….” “날 꿔다 놓은 보릿자루로 여길 거면 좋아. 그렇게 해. 상관하지 않을 테니. 하지만 명심해. 철혈기사단 고위 기사는 여기 나가면 다시 볼 일 없는 인간이지만 나는 마법사 생활 하면서 한두 번쯤은 다시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니까.” 둘러말했지만 요지는 하나다. 나는 너의 잘못을 알고 있다. 그러니 나에게도 뇌물을 바쳐라. 크릴 리갈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솟는 걸 느꼈다. 뱀과 마주친 개구리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가까스로 자리를 빠져나오며 크릴 리갈은 진심으로 돌로렌스의 파멸을 기원했다. 그 과정에서 크릴 리갈은 한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입 소환자. 크릴 리갈이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그 사내에겐 보석이 많다는 것과 신입 소환자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가능성은 여럿이지만 크릴 리갈은 그의 정체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알아봐야 좋은 건 하나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의 행동엔 신경이 쓰였다. ‘그 남자. 대체 왜 돌로렌스의 정보를 물어본 것일까. 설마, 돌로렌스 윈터러를 엿 먹이려 드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크릴 리갈은 하늘에 뜬 붉은 달을 올려다보며 막연한 기대감에 사로 잡혔다. “…….” 같은 달을 바라보는 사내가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 속에 형형한 눈빛을 간직한 사내. 김성철은 자신의 발밑 아래에 벌어지고 있는 참상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늑대인간으로 변한 박아람은 방금 자신과 관계한 여성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김성철은 촛점 잃을 채 흔들리는 여성의 눈동자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지막 이성의 끈마저 풀어버린 폐륜아 앞에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박아람.”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숲속의 적막을 일깨웠다. 인간의 살을 씹던 늑대인간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피로 범벅이 된 입가에 놀라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게 누구야?” 박아람은 시체를 내던지고 일어났다. 2.5미터에 달하는 육중한 신체가 김성철의 앞을 가로 막았다.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이게 바로 그 꿩도 먹고 알도 먹는 그건가? 응?” 위압적인 물음에 김성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천천히 고개를 올려 다가오는 늑대인간의 눈을 노려봤을 뿐이다. 득의만면하던 박아람은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감각을 느꼈다. 갑자기 다리가 오들거리고 몸이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뭐.. 뭐야?! 왜 이래. 내 몸.’ 처음엔 늑대인간 변신의 부작용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는 그 원인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공포였다. 김성철의 눈을 본 순간 죽을 수도 있겠다는 본능의 경고가 강하게 울려 퍼진 것이다. “이.. 이 새끼가!” 박아람은 즉시 자신이 느꼈던 공포를 부정하고 김성철에게 달려들었다. 순간 시야가 갑자기 혼란스럽게 회전했다. 정신을 차린 순간 박아람은 자신이 땅에 처박혀 있는 걸 인지했다. 또 그는 뒤집힌 세상에 서 있는 사내가 손아귀에 무언가를 쥐고 터뜨리는 것 또한 보았다. ‘내.. 내가 당한다고? 어떻게 이런 일이...?! 빨강머리 말로는 늑대인간이 되면 광장에서 최강자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돌로렌스의 말은 어디까지나 광장에 힘을 숨긴 강자가 없다는 전제 하에서나 통하는 말이다. “…….” 김성철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손이 뻗는 자리에 있는 굵은 가지를 손으로 꺾었다. 제법 그럴싸한 몽둥이가 만들어졌다. 박아람은 김성철이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퍽! 퍽! 퍽! 퍽! 무자비한 구타가 늑대인간의 육신을 복날 개 패듯 두드렸다. 털가죽이 갈라지고 피와 살점이 사방에 튀었다. 박아람은 비명을 내지르며 속으로 강하게 염원했다. ‘빨강머리! 도와줘! 도와줘! 씨발! 도와달라고!“ 하지만 그의 조력자는 바깥에서 아첨꾼에 둘러싸여 술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무자비한 구타 끝에 박아람은 늑대인간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온 몸은 피멍으로 물들어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고 조력자는 응답조차 하지 않는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박아람의 눈동자에 몽둥이를 든 사내가 떠올랐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처한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했다. 그는 주저없이 고개를 숙이고 목숨을 구걸했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툭. 김성철이 몽둥이를 떨어뜨렸다. 작은 희망의 꽃이 박아람의 가슴에 싹을 틔웠다. 하지만 이윽고 눈앞을 가린 군홧발은 그 싹을 완전히 짓밟아버렸다. 퍽! 퍽! 퍽! 몽둥이 다음에 발길질이 이어진 것이다. 특히 그 발길질은 집요하게 얼굴만 노려 박아람의 이빨을 모두 깨 부셔 놓았다. “으.. 으어억!” 고통을 이기다 못한 박아람이 벌러덩 몸을 뒤집으로 허리를 곧추 세웠다. 김성철은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약간의 시간이 주어지자 박아람은 다시 한 번 목숨을 애걸했다. “으... 사.. 살려줘. 제발.. 살려만 주면 뭐든 다 할게.” 이에 김성철은 손가락으로 숲속 한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엔 박아람에 의해 죽임당한 여성의 시신이 있었다. 촛점 잃은 시신의 고개는 섬뜩하게도 박아람을 향하고 있었다. “저 여자가 살려달라고 했을 때 넌 어떻게 했지?” “그... 그건...!” 김성철이 천천히 다가왔다. 박아람은 숨이 멎는 듯한 공포를 느끼며 소리 질렀다. “가까이 오지 마! 너.. 날 건드리면... 너도 살아남지 못해!” “죽어? 내가?” 김성철은 실소를 터뜨렸다. “내 아빠가... 누군지 알아? 철혈기사단장이야. 철혈기사단장!” “철혈기사단장?” “그.. 그래! 잘은 모르지만 이계에선 아주 힘 있는.. 그래 권력자야! 권력자! 만약 니가 날 죽이면 너도 살아남지 못한다고?” “그래? 그런데 넌 방금 소환됐는데 어떻게 기사단장이 네 부친이 될 수 있는 거지?” “나.. 나도 몰라 씨발. 귀환자인지 뭔지 하는 새끼가 어느 날 찾아와서 말했어! 내가 그 인간 아들이라고. 이계로 오면 갖은 부귀영화에 현실에선 누릴 수 없는 모든 걸 누리게 해주겠다고!” “귀환자라.” 흥미 있는 주제는 아니지만 의문 하나가 풀렸다. 박아람 같은 내정자를 선발하는 조건 말이다. ‘귀환자를 이용했었군. 하긴 조성택이라면 귀환자가 될 정도의 실력자를 여럿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나저나 아무리 세상이 재앙에 직면했다고 해도 저런 개새끼를 데리고 오다니.’ 철혈기사단장 조성택은 이계로 와 3명의 자식을 두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자식도 모두 열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자신의 아들인지 아닐지도 모를 박아람을 이계로 데리고 온 것은 궁여지책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기준 미달이다. 김성철은 다시 몽둥이를 들었다. “제.. 제발...! 설마 하영종이 때문에 이러는 거야?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그 자식이 먼저...” 박아람이 버둥거리며 뒤로 기었다. “…….” 김성철은 주변의 나무줄기를 손으로 낚아채더니 그걸로 박아람의 양발을 묶어 나무줄기 위에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한 가지 알려주지. 여기는 이계다. 반드시는 아니지만 힘이 모든 걸 지배하는 세상이지. 그런 곳에선 말이야. 아무리 힘이 강해도 설치면 곤란해. 왜냐? 너보다 강한 녀석이 하나 둘 있을지도 모르거든.” “아.. 알겠어. 무슨 말인지 알겠다고. 반성하고 있어. 진짜 반성하고 있다니까!” “그리고 또 하나. 이 바닥엔 집행유예도 선처도 없어. 한 번 실수하면 끝이야.” 몽둥이가 위로 올라갔다. 박아람이 뭐라고 소리 지를 틈도 없이 몽둥이가 주둥이를 강타했다. “곧 피 냄새를 맡고 숲속의 짐승들이 몰려올 거다. 너 같은 인간쓰레기도 받아주는 대자연의 섭리에 대해 감사해라.” 김성철은 몽둥이를 떨어뜨리며 조용히 말했다. “이계에 온 걸 환영한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숲속에서 작은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괴물들은 싱싱한 피를 흘리는 박아람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박아람은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발버둥치지만 그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 김성철은 조용히 숲 밖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몇 발자국 걷기도 전에 김성철 앞에 희끄무레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성철은 약간의 놀라움을 느꼈다. ‘드문 일이군. 내가 기척을 놓치다니.’ 곧 어둠을 뚫고 한 여성이 나타났다. 낯익은 지팡이를 든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여성이었다. 김성철이 멈춰 서서 조용히 응시하자 그녀는 두건을 벗으며 얼굴을 드러냈다. 그 얼굴을 본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 여자.’ 이미 여러 번의 인연이 있다. 보너스몬스터를 두고 다퉜고 또 낮엔 폭주하는 박아람을 스피릿 울프로 막았다. 이름 모를 여성은 스피릿울프 스태프를 빙글빙글 돌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처치하려고 했는데 그쪽이 먼저 저질러버렸네.” “…….” 김성철은 말없이 다가오는 여성을 응시했다. “늑대인간을 아무렇지 않게 홀로 처치하는 걸 하니 보통 신입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김성철은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김성철은 자신의 능력과 안목을 이용해 낯선 여인의 정체를 캐고 있었다.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었다. 영혼각인 중 하나인 진실의 눈을 통한 확인에서도 특이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겉은 전형적이지만 속은 전형적이지 않은 신입 소환자다. 전에 품었던 추측이 점점 확신으로 굳어졌다. ‘역시 회귀자인가.’ 의문이 여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과묵한 사람이네. 아니면 날 나쁘게 생각하거나.” “용건을 말해라.” 마침내 김성철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조금이지만 여성의 눈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김성철을 유심히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짧게 이야기 할게. 난 방금 당신이 저 개자식을 죽이는 걸 봤고 당신이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또한 당신이 평범한 소환자가 아닐 것이라고도 생각했지.” 조리 있으면서도 영리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이야기를 하면서 시선의 흐트러짐도 없고 미리 생각한 대본을 읽는 것처럼 호흡도 자연스러웠다. “너 또한 평범해 보이지 않는데?” “정확하게 짚었어. 하지만 난 당신에게 아무것도 이야기 해주지 않을 거야. 물론 나 또한 당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고.” 의문의 여인은 김성철에게 손을 내밀었다. 굳은살이 막 자리 잡기 시작한 연약한 여성의 손이었다. “난 아무개야. 기록의 돌을 봤다면 내 이름을 본 적이 있을 테지.” 첫 번째 등급 전에서 압도적인 수치로 내정자를 제치고 1등을 차지한 인물. 그 정체는 뜻밖에도 가냘픈 여인이었다. “난 소환 궁전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 나가야 될 이유가 있어. 소환 궁전의 특성상 혼자서는 힘들겠지. 따라서 한 명이라도 조력자가 필요해. 얼치기 쓰레기가 아닌 진짜 실력자가.” “그래서 천정식을 구한 건가?” 김성철의 날카로운 질문에 아무개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훌륭한 인재야. 리더십도 있고.” “그렇다면 박아람은 왜 죽이려 들었지? 녀석은 늑대인간이잖아? 남은 등급전에서 큰 전력이 될 텐데.” 이에 아무개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인간은 오직 조직에 해가 될 뿐이야. 얻는 것도 있겠지만 잃는 게 더 많을 걸. 당신이 손대지 않았다면 내가 죽여 버렸을 거야.”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견해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김성철이 박아람을 죽인 것은 그의 악행도 악행이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목적 달성에 있어 장애물 밖에 안 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소환 궁전에 온 이래 자신의 목적을 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좋다. 손을 잡지.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다.” “이상한 조건은 곤란해.” 아무개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걱정마라. 서지도 않으니까. 그보다 알고 있는 히든 퀘스트를 알려줬으면 하는데. 특히 마력과 관계된 녀석을.” “마력이라. 좋아. 하나 알려줄게.” 아무개는 다시 손을 내밀었고 김성철은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당신 이름이 뭐지?” “김성철이다.” “김성철...?!” 아무개의 얼굴과 목소리가 돌변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무개는 빤히 김성철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특별한 문제는 없어.” “좋아. 그럼 슬슬 빠져나가지. 곧 손님이 올 테니까.” 숲에서 기어 나온 짐승들이 거꾸로 매달린 박아람의 시체로 포식하는 동안 김성철과 아무개는 은밀하게 현장을 빠져 나갔다. 돌로렌스 윈터러가 현장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마법으로 짐승들을 학살한 후, 돌로렌스는 일그러진 얼굴로 박아람의 처참한 시체 앞에 섰다. “이런.. 이런 개 같은...!” 그녀는 반쯤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지르고 돌아다녔고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어 헝클어뜨렸다. 숲 속의 마물들은 미친 마법사가 내뿜는 광기에 위축되어 감히 접근할 생각조차 못할 지경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돌로렌스는 싸늘하게 식은 박아람의 시체를 다시 응시했다. 그나마 멀쩡한 부분이 한 군데 있었다. 얼굴이다. 그걸 본 돌로렌스 윈터러의 뇌리에 계시와 같은 흉계가 떠올랐다. 처음엔 모호했던 그 흉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고를 거듭할수록 확연한 형태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대로 끝낼 순 없어. 어떻게 올라온 자린데. 어떻게 굴욕을 참아가며 얻은 자린데...” 돌로렌스 윈터러의 입가에 소름끼치는 광소가 떠올랐다. * 별 것도 없는 평범한 아침이었다. 중천을 향해 떠오르는 태양 빛에 안개가 걷히는 가운데 소환자들은 식사를 하거나 훈련을 하며 또 다른 하루를 맞이했다. 김성철은 마력과 직관력을 얻기 위한 일반 퀘스트를 수행한 뒤 식사를 하러 내정자 캠프로 돌아왔다. 그런데 내정자 캠프엔 이상한 무언가가 있었다. “저 녀석. 왜 저래?” “가까이 가지 마.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내정자들은 두려워하면서 혹은 껄끄러워하면서 한 인물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김성철은 내정자 틈으로 걸어가 그들이 바라보는 인물을 주시했다. “…….” 김성철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새겨졌다. “으으으.....” 그것은 박아람이었던 시체였다. “으으....!!” 거지처럼 모포를 뒤집어쓰고 얼굴만 드러낸 그 시체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자리에 앉아 몸통을 양옆으로 흔들어대고 있었다. ‘사령술을 써서 넋이 없는 인형으로 만들었군. 그리고 대단히 공을 들여 부패 방지의 마법 또한 걸어 놓았다.’ 느낌이 좋지 않다. 그리고 나쁜 예감은 높은 확률로 들어맞는 법이다. 크릴 리갈이 급히 보낸 쪽지엔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 돌로렌스 윈터러가 마침내 미쳤습니다! 그 여자가 백광장의 모두를 죽이려고 해요! ] ======================================= 8. 꺼지지 않는 불 “너, 나 좀 도와줘야겠어.” 크릴 리갈은 불똥이 이런 식으로 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동일한 마법학교라는 출신과 같은 죄를 범했다는 사실이 돌로렌스 윈터러로 하여금 크릴 리갈에게 접근하게 만들었다. 처음에 크릴 리갈은 강한 반감을 느꼈다. 자신이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걸 들어 도와달라고 했을 땐 매몰차게 거절한 주제에 정작 자기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동창임을 내세워 뻔뻔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돌로렌스가 실각하기 전까진 크릴 리갈에게 선택권은 별로 없었다. 마상길에게 박아람의 죽음을 보고하는 것이 유일한 대책이지만 돌로렌스는 보안을 이유로 들어 마상길이 머무는 거처와 전망대 사이에 수많은 주시자의 눈을 깔아놓고 마법사들을 관리하고 있다. 섣불리 보고를 하러 가다간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주 기회가 없는 건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등급전이 있기 전날, 마상길은 전망대로 찾아와 내정자들의 성장 상황을 보고 받는다. 보고를 받으면서 마상길은 겸사겸사 크릴에게 뇌물을 요구하곤 하는데 그때가 가장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등급전까지는 4일이 남아있다. 그때까지는 돌로렌스 윈터러가 거역할 수 없는 법 그 자체다. “같이 청광장에 가줘야겠어.” 크릴 리갈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궁지에 몰린 돌로렌스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니. 크릴 리갈은 돌로렌스를 따라 노예사냥꾼용 통로를 지나 청광장에 도달했다. 돌로렌스는 두건을 뒤집어쓰며 크릴 리갈에게 검붉은 피가 담긴 유리병을 내밀었다. “갖고 있어. 귀중한 거니까 흘리지 말고.” “이건... 뭡니까? 선배.” “뭐긴 뭐겠어. 발정기에 이른 늑대인간의 피지. 발정기에 이른 늑대인간의 피는 평범한 인간을 늑대인간으로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어.” “그렇습니까...?” “학교에선 안 가르쳐주는 거야. 잘 기억해 둬. 나중에 시간이 나면 늑대인간의 피를 어떻게 채취하는 지 알려줄게.” 필요가 있어서 그런 것일까. 전에는 그렇게 쌀쌀맞았던 돌로렌스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마냥 살갑게 대한다. 크릴 리갈은 구토 할 것 같은 역겨움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마음도 들었다. 중급 마법사의 반열에 접어든 돌로렌스의 지식을 얻고 싶다는 마법사 공통의 지식욕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 것이다. 하지만 크릴 리갈은 그때까지 돌로렌스에게 당했던 치욕을 되새기며 마음을 다잡았다. 돌로렌스 윈터러는 청광장의 이름 없는 소환자에게 은밀히 접근해 늑대인간의 혈청을 넘기면서 최면을 걸었다. “등급전이 있는 날, 너는 너의 동료들과 함께 백광장의 모두를 죽여야 할 것이다. 특히 우선적으로 죽여야 할 인간들의 얼굴을 알려주겠다.” 곁에서 지켜보던 크릴 리갈은 돌로렌스의 흉계를 눈치 챘다. ‘탐탐전처럼 불가항력의 상황을 만들어 내정자를 전부 죽여서 책임을 면피하려고 하는군. 그러면 책임은 자연스레 마상길 혹은 그 윗선으로 넘어가겠지. 책임소재가 관리 소홀에서 궁전과의 협상 실패로 넘어가게 될 테니.’ 다른 건 몰라도 돌로렌스의 그 능력과 과감한 행동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와 제대로 연줄만 만들 수 있다면 충분히 배울 게 많다는 생각이 무심코 들었다. 전망대로 돌아오는 길에서 크릴 리갈은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팔이 하나 없는 노예사냥꾼이었다. 그는 크릴을 앞서 가던 돌로렌스의 얼굴을 본 후 크릴을 잡아 세웠다. “저 여자와 한 패신가?” 크릴 리갈은 무시하고 싶었지만 전에 받은 은혜도 있는지라 얼버무리는 듯한 어조로 짧게 대답했다. “그런 셈이죠.”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시험에 들게 하는 여자만큼 위험한 것도 없지.” 노예사냥꾼은 쓸쓸한 웃음을 흘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크릴 리갈은 기분이 상당히 나빠졌다. * [ D가 청광장에 늑대인간 6기 생성, 늑대인간들은 내정자를 주목표로 공격할 예정 ] 하늘 다람쥐가 가지고 온 정보는 김성철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늑대인간 한 마리에 백광장이 들썩였다. 그런 게 여섯 마리나 나타나면 무슨 사단이 나올 지 뻔하다. 일방적인 살육극이 펼쳐질 것이다. “음....” 수많은 전장에서 사투를 펼쳐온 김성철이지만 지금 상황에선 별 뾰족한 해법이 보이지 않았다. 한 달 정도 시간이 있다면 모를까 고작 4일 정도의 시간으로 소환자들을 만족할 수준으로 올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우연을 가장해 늑대 인간 한 두 마리를 때려죽일 수는 있겠지만 여섯 마리 전부 그런 식으로 처리하면 지금까지 기울였던 노력이 전부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 무언가 획기적이고 결정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그때 김성철의 뇌리에 잊고 있던 존재가 하나 떠올랐다. ‘그게 있었지.’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 처박아 놓았던 거대한 책을 꺼냈다. 바로 말하는 책 베르텔기아다. 미덥지 않은 녀석이긴 하지만 그 녀석 안엔 연금술사 에크하르트의 수많은 비전이 적혀 있다. 그중에 어쩌면 현 상황을 타개할 비법이 적혀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날 왜 불렀지?” 베르텔기아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책 주제에 하품을 한다는 게 조금 걸렸지만 김성철은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대신 담담한 목소리로 의뢰사항을 이야기했다. “다음 등급전에 늑대 인간 여섯 마리를 상대하게 됐다. 현재 가진 자원만으로 늑대인간을 처치할 수 있는 연금술의 지식이 필요하다.” “늑대 인간? 아빠의 골렘을 해치울 정도의 실력자가 고작 늑대 인간 따위로 날 불러?”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이 미덥지 못한 지 스스로 책장을 덮고 바닥에 떨어지는 시늉을 했다. “모종의 사유로 인해 나는 힘을 숨겨야 한다. 따라서 나는 소환자들의 힘과 기량만으로 늑대 인간을 처치할 수 있는 물건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흐음. 그런 사정이 있다 이거지?” “할 수 있겠나?” “당연하지. 난 베르텔기아야. 연금술의 총화 그 자체지. 이번 기회에 내 실력을 한 번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네.” 베르텔기아는 책장을 펄럭거리며 날아오르더니 김성철 주위를 빙빙 맴돌았다. 잠시 후 베르텔기아는 얕은 탄성을 내지르며 책장을 펼치더니 그 중 하나를 김성철에게 보였다. < 꺼지지 않는 불 > “이건, 뭐지?” 김성철이 물었다. “이름 그대로 꺼지지 않는 불이야. 물을 뿌리면 더욱 강하게 타오르는 녀석이지. 게다가 불에 약한 늑대인간의 상성에도 좋고. 무엇보다 이걸 선택한 이유는 이 주변에 재료가 많고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야.” “호오.” 말 많은 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제법 일처리가 똑똑하다. 김성철은 꺼지지 않는 불의 항목에 적힌 재료들을 눈으로 훑었다. 꺼지지 않는 불을 만들기 위한 재료는 황금석, 연금 목탄, 블러드 푸딩의 체액 크게 3가지. 그중 연금 목탄은 다른 재료와 달리 다른 재료를 가공해야 되는 조합 아이템이고 나머지 둘은 채취 혹은 사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물건. 필요한 기구로는 유발(乳鉢), 풍로 같은 것들이 있지만 김성철의 힘으로 충분히 대체가능하므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아빠의 휴대용 연금 가마는 가지고 있지? 아직 안 버린 거지?” “안 버렸다.” “좋아. 그럼 황금석부터 찾아보자. 황금석은 절벽 쪽에서 채취할 수 있어.” 베르텔기아는 신이 나서 펄럭거리며 먼저 앞으로 날아갔다. 김성철은 그녀를 뒤에서 붙잡고 덮어버렸다. “아니, 뭐하는 짓이야? 모처럼 산보 좀 하겠다는데!” 베르텔기아가 몸을 요동치며 반항하는 순간, 김성철이 움직였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스피드. 김성철은 순식간에 절벽 아래에 이르렀다. 앙탈을 부리던 베르텔기아는 깜짝 놀랐는지 말이 없다. “다.. 당신. 대체 뭐야? 뭘 먹었길래 그렇게 빠른 거야?” 베르텔기아는 잠시 멍하니 있은 후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황금석은 어디 있지?” “으음... 이상한 사람이네. 나 정말 이상한 사람에게 걸린 거 같아. 뭐야. 도대체....” “황금석은 어디 있냐고 물었다.” “정말 재미도 없고 고압적인 사람이네. 진짜 난 운도 지지리도 없어.” “황금...” “알았어! 찾아주면 그만 아니야. 여기야.” 베르텔기아는 절벽 쪽으로 날아가더니 절벽에 매달린 작은 돌무더기 사이에 멈춰 파닥거렸다. “이거야. 이게 황금석이야.” “음? 이게 황금석이라고? 겉보기엔 그냥 돌인데.” “한 번 채취해 봐.” 김성철은 절벽으로 훌쩍 뛰어올라 황금석을 손으로 낚아챘다. ‘응. 이건, 돌이 아니군.’ 그것은 돌이라기보다는 이끼 혹은 버섯에 가까웠다. 돌가루 같은 겉면 안엔 황금처럼 빛나는 포자와 가루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황금이라고 착각을 일으킬 정도의 눈부심이었다. 김성철은 기이하다 생각하며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냄새를 맡자 김성철 앞에 재료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 황금석 > 레벨 : 2 등급 : D 속성 : 목(木) 효과 : 연료 비고 : 이름은 돌이지만 그 정체는 버섯. 불이 잘 붙고 화력이 강해 드워프들의 연료로 주로 쓰인다. 군집을 이루고 사는 종으로 연령이 많고 군집이 클수록 효과가 탁월. “호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흥미롭다. 모르는 무언가를 찾아가는 즐거움을 느낀 게 얼마 만인가. “다음은 블러드 푸딩. 블러드 푸딩의 점액질은 불을 붙이기 어렵지만 일단 붙이면 잘 꺼지지 않거든! 이것이 꺼지지 않는 불의 알파이자 오메가!” 베르텔기아는 다음 차례를 재촉한다. 김성철은 황금석을 주머니에 넣고 즉시 베르텔기아를 쥐고 다음 장소로 향했다. 블러드푸딩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버려진 동굴 안에 작은 동물의 사체의 피를 흘리자 득달처럼 기어 나왔다. “조심해. 블러드푸딩은 슬라임계열이고 따라서 물리저항이 있으니까.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 녀석에게 둘러싸이면 위험해질 수도....” 베르텔기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왜냐하면 김성철의 주먹이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퍽! 퍽! 퍽! 무심한 주먹질 한 방 한 방에 블러드푸딩은 글자 그대로 터져 버려 사방에 파편을 흩뿌렸다. “뭐.. 뭐야... 당신.. 대체 뭐냐고.....!” 베르텔기아는 그대로 공중에 얼어버렸다. 김성철은 보자기를 꺼내 블러드푸딩의 파편을 주워 담으며 퉁명스레 말했다. “연금 목탄은 어떻게 만들지?” “당신.. 뭐냐고. 도대체...” 베르텔기아는 이번에도 또 놀란 모양이다. 그럴 법도 하다. 일반적인 상식으론 슬라임 계열을 주먹으로 때려죽인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대체 뭐 이딴 놈이 다 있어. 이 놈 정체가 뭐야?!’ 베르텔기아는 그제야 자신의 주인이 범상치 않은 인간인 걸 깨달았지만 또한 그는 인내심도 없었다. “연금...” “알았어! 가르쳐주면 될 거 아냐!” 연금 목탄의 재료는 주변에 널려 있었다. 지천에 널린 낙엽과 목재를 섞여 가열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연금 목탄까지 완성한 김성철은 이제 영혼 창고에서 에크하르트의 휴대용 연금 가마를 꺼냈다. 그것은 손바닥 안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귀여운 가마였지만 그 봉인을 풀면 거대한 황동 빛의 그럴싸한 연금 가마가 모습을 드러낸다. “자, 준비는 다 됐어. 이제부터는 만들기만 하면 돼.”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연금 가마 앞에 섰다. 연금 목탄과 황금석을 섞어 태운 불이 가마를 뜨겁게 달구었다. ======================================= 8. 꺼지지 않는 불 (2) 펑! 연금 가마 안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우두커니 선 채 매캐한 연기를 들이 마시는 김성철의 눈앞에 문자가 떠올랐다. [ 연성 실패! ] “에라이!” 아마도 이번이 3번째일 것이다. 자연스레 김성철의 시선은 연금 가마에서 둥둥 떠 있는 베르텔기아로 옮겨갔다. “베르텔기아.” “응?”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어떻게 되기는.” 베르텔기아는 퉁명스레 대답하며 자신의 페이지 하나를 펼쳐 김성철에게 보였다. “책을 똑바로 읽지도 않고 재료만 보고 만들려드니까 자꾸 실패하는 거지.” “…….” 김성철은 할 말이 없었다. 베르텔기아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자, 다시 천천히 페이지를 읽어. 분량 및 재료를 다루는 방법을 천천히 읽고 그대로 따라해. 전처럼 야매로 하지 말고.” “야매라니...” 김성철은 고급 요리인이다. 고급 요리인에게는 그에 걸 맞는 자존심이 있다. 김성철은 마음을 추스르고 베르텔기아가 펼친 페이지를 신중하게 읽었다. 김성철의 눈빛에 모처럼 진지함이 깃들었다. ‘다시 보니 이건 마치 요리책과 같군.’ 연금술과 요리는 만들려고 하는 지향점만 다를 뿐이지 과정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각 재료를 용도에 맞게끔 잘 다듬고 정해진 분량을 준수하여 정성스레 제작에 임한다. 김성철은 완전 집중하고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달라진 김성철의 태도를 보고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주 소질이 없는 건 아니네.” 이윽고 연금 가마 안에 푸른빛이 은은히 감돌기 시작하며 가마 안의 재료들이 한데 섞여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검고 끈적이는 점액질의 액체였다. [ 연성 성공! ] 오랜 노고가 보상 받자 김성철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마 안의 제작물을 확인했다. <꺼지지 않는 불 > 레벨 : 2 등급 : D 속성 : 화(火) 분류 : 조합재료, 일상잡화 효과 : 가연성 물질. 물을 끼얹으면 더욱 강하게 타오른다. 제대로 만들어졌다. 김성철은 시험을 위해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꺼지지 않는 불을 끼얹었다. “설마 그렇게 시험하려고?” 베르텔기아가 참견을 해오자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뒷수습이 쉽지 않을 건데.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서 불을 붙이는 게 좋을 거야. 운이 없으면 숲 전체를 태울 수도 있으니까.” 베르텔기아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김성철은 연금 가마아래서 타고 있는 연금 목탄을 손으로 집더니 장작더미 위에 던졌다. 화르륵! 작은 불씨는 꺼지지 않는 불과 반응해 맹렬하게 타올랐다. ‘불이 붙는 속도는 준수하군. 이 정도면 실전에도 쓸 수 있다.’ 앞을 가로막던 뿌연 안개가 드디어 걷힌 기분이다. 아직 산적한 문제는 산더미처럼 있지만 방법을 찾은 것만 해도 김성철에겐 다행이었다. “저기, 저거 어떻게 할 거야? 꺼지지 않는 불이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다. 이대로 놔뒀다간 산을 전부 태워버릴 기세다. “……” 김성철은 불 앞에 서서 일렁이는 불꽃들을 무심한 눈으로 응시했다. “뭐하는 거야? 지금.” 그때 김성철이 불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에 실린 어마어마한 풍압에 꺼지지 않는 불꽃이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히이...” 베르텔기아가 기겁을 하는 사이 김성철은 주먹을 몇 번 더 휘둘렀고 꺼지지 않는 불은 그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싱겁게 진화됐다. 불을 끈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붙잡았다. “뭐.. 뭐하는 짓이야?” 베르텔기아가 필사적으로 파닥거리며 저항했다. “이제 다 썼으니 창고에 넣어야지.” “다 쓰긴. 뭘 다 써. 아직 내 지식은 해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이 남았는데. 그냥 내버려두면 안 돼? 창고 안은 어둡고 습해서 싫다고.” “넌 너무 눈에 띄어.” “눈에 안 띄면 될 거 아냐?” “덩치가 크잖아. 게다가 날아다니고.” “숙녀에게 덩치라니. 말이 심하네.” “그럼 숙녀 분. 창고에 들어가 주실까?” “주.. 줄일 수 있어! 날지 않아도 되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베르텔기아는 반짝이는 빛과 함께 손바닥만 한 크기로 쪼그라들었다. “됐지?” 크기가 줄어서 그런지 목소리도 모기소리만큼 작아졌다. 김성철은 작아진 베르텔기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크기면 적당하군.”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군복 상의 안에 집어넣었다. 깔 맞춤이라도 한 것처럼 베르텔기아가 쏘옥 들어갔는데 베르텔기아는 주머니 안에 들어가자마자 슬그머니 주머니 바깥으로 삐져나왔다. 김성철이 힐끗 쳐다보자 베르텔기아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새침하게 말했다. “나도 바깥 구경 좀 하고 싶거든.” 거기까진 김성철도 말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일단 무기는 만들기는 했는데 이걸 어떻게 늑대 인간에게 뿌려야 할까.’ 늑대 인간은 마법을 쓸 수 없는 대신 야성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다. 촉이 얼마나 좋냐면 사각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무심코 피할 정도다. 게다가 민첩성도 인간 보다 훨씬 높아 엉성한 투척 수단으론 늑대 인간을 불태우기는커녕 몸에 꺼지지 않는 불 한 방울도 묻힐 수 없을 것이다. “뭘 그리 생각해?” 잠자코 있자니 주머니 안에 있던 베르텔기아가 불쑥 말을 걸었다. “꺼지지 않는 불을 어떻게 늑대인간에게 묻힐 지 생각하고 있다.” “아빠는 그걸 용의 머리를 한 관속에 넣고 용이 불을 뿜듯이 뿜어내거나 아니면 심지를 박은 도기 안에 넣고 던지는 식으로 이용했어.” “하지만 그건 느려. 상대방이 바보가 아닌 이상 당해주지 않겠지.” “당하게 만드는 게 실력이겠지.” 그 말을 듣는 순간 김성철의 뇌리에 무언가 스치고 지나갔다. 크릴 리갈의 쪽지와 박아람의 살아 있는 시체다. 전혀 관계없어보였던 그 두 사안은 생각을 달리하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끈끈한 접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군. 돌로렌스 윈터러가 노리는 건 내정자의 전멸이다. 그리고 그 내정자 중에서도 가장 1순위로 노릴 녀석은 바로 박아람이겠지.’ 늑대인간은 무조건 박아람을 노릴 것이다. 그것도 시체의 형체조차 남기지 않도록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돌로렌스 윈터러의 실수를 덮어버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김성철은 바로 그 점을 노리기로 마음먹었다. * “여어. 이름 모를 형씨. 이번엔 또 내게 뭘 주려고 찾아온 거야?” 박아람에게 기가 꺾이긴 했지만 천정식은 여전히 백광장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다. 확실히 전보단 날카로움과 자신감이 죽었다. 본진의 위치도 내정자들의 캠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겼고 보초를 늘려 박아람 쪽을 예의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다음 등급전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다.” 김성철은 다음 등급전에서 일어날 일에 대해 간략하게 말했다. 다음 등급전이 데스매치 룰이고 인간 대 인간 끼리의 싸움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점, 많은 인간을 죽이면 보다 높은 점수를 얻는다는 점 등등. 하지만 상대측에 늑대인간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호오. 정보가 빠르군. 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묻는 거지?” “그건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이 내게 협조한다면 언제나 공유할 의향은 있다.” “공유라....” 천정식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뭐,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나저나 내게 부탁할 건이란 대체 무엇이지?” 김성철이 천정식에게 요청한 것은 등급전 당일날 천정식 패거리의 배치였다. 김성철은 천정식 패가 전면에 나서지 말고 되도록이면 안전한 측면에 있을 것을 주문했다. “호오. 우리를 신경 써주는 건가? 아니면 우리 패가 점수를 올리는 게 신경 쓰여서 그런 건가?” “굳이 점수에 연연한다면 내 말을 무시해도 좋다.” 김성철은 거기까지 말한 후 천정식 앞을 떠났다. 할 말을 전부 끝낸 이상 이야기를 더해 봐야 입씨름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정식은 김성철의 말에 따를 것이다. 이미 김성철의 말에 한 번 재미를 봤고 최근엔 많은 피해를 입었을 뿐더러 기세까지 꺾였다. 게다가 천정식은 보기보다는 똑똑한 인간이다. 귀중한 부하를 하나 둘 잃어버리다간 김학출 패거리에게 도리어 주도권을 내줄 수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이걸로 우리의 주력이 늑대인간에게 썰리는 일은 막을 수 있겠군.’ 아주 날카로운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잘 드는 칼날은 준비됐다. 남은 것은 우리의 칼날보다 수십 배는 날카로운 적의 칼날을 막을 방패다. 김성철은 훈련소 바깥에 멍하니 앉아 있는 박아람을 쳐다보았다. “으으.... 으으....!!” 모포로 뒤집어쓰고 앉은 박아람은 이를 딱딱 거리며 오뚝이처럼 몸을 위 아래로 흔들어대고 있었다.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닌 상황에 소름끼치는 신음까지 계속해서 흘려대는 통에 아무도 그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김성철은 박아람 너머 자리 잡은 내정자 패거리 쪽으로 걸어가 이여훈을 찾았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요?” 공손한 척 하지만 상대하기 싫다는 불쾌감을 얼굴과 태도로 역력하게 드러내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이여훈은 김성철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 시기가 두 번째 등급전이 끝난 직후로 파악했다. 두 번째 등급전에서 김성철은 떨거지 내정자들을 이끌고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반면, 퇴마의 성수에 의지한 나머지 내정자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자연스레 두 집단의 리더에 대한 비교가 구설수에 오르게 되고 그것이 이여훈의 심기를 긁고 만 것이다. “짧게 말하시죠. 훈련해야 되니까요.” 늘 그렇듯 김성철은 작은 사람들의 시기나 괄시 따위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준비한 말을 했다. “방금 마법사에게 들은 따끈따끈한 정보가 있어서 공유하러 왔다.” “어떤 정보입니까?” 김성철에게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고 이여훈이지만 마법사 이야기가 나오자 태도가 조금 유해졌다. 김성철은 주위를 둘러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한 건 아닌데 이번 상대 중에 우리를 노리는 녀석들이 있다고 하더군.” “우리를 노려요?” “우리 뒤를 봐주는 녀석들과 적대관계인 녀석들이 있는 모양이야. 녀석들이 우리를 죽인다면 우리 뒤를 봐주는 녀석들도 타격을 입게 된다고 하더군. 뭐 어디까지나 소문이긴 하지만.”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우리 내정자들을 뒤쪽에 배치하고 싶은데.” 적은 늑대인간만 있는 게 아니다. 늑대인간 뒤로는 백광장에 존재하는 인원만큼의 적들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늑대인간을 손쉽게 처리하려면 늑대인간과 일반 소환자를 떨어뜨려 놓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김성철은 이여훈을 찾아가 배치에 대해 의논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여훈의 태도는 냉랭하기만 했다. “그건 어렵겠는데요?” 시기, 혹은 질투 따위의 사소한 감정으로부터 촉발된 반감이 이여훈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김성철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노려보며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로 유창하게 말했다. “저는 이번 등급전에서 무조건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합니다. 당신이야 저번 등급전에서 최고 등급의 보상을 얻어서 넉넉하실지 모르겠지만 저와 제 뒤에 있는 친구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반드시 이번 등급전에서 만회를 해야 합니다. 따라서 저와 제 동료들은 최전선에 설 겁니다.” “그런가? 죽을 수도 있을 텐데?” “지금 겁주는 겁니까?” 이여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이를 드러냈다. 언제나 서글서글하던 얼굴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섬뜩한 얼굴이었다. 처음 이여훈을 만났을 때 김성철이 느꼈던 촉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이게 이여훈의 본모습인가. 정말로 추악하군. 작은 권력에 연연하는 꼬락서니라니.’ 더 이상 이여훈에게 협력을 바랄 순 없다. 김성철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정 그렇게 나오겠다면 더는 당신에겐 권유하지 않겠어. 당신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 이야기하면 되니까.” “몇 명이나 당신 따라갈지 의문이군요.” “적어도 박아람 하나만은 내가 데려갈 거야.” 그 말을 들은 이여훈은 노기를 풀고 실소를 터뜨렸다. “데리고 가세요. 데려갈 수 있으면.” 이에 김성철은 빙그레 웃으며 박아람을 향해 걸어갔다. “자, 아람아! 가자!” 김성철이 가까이 오자 오뚝이처럼 몸을 떨던 박아람이 고개를 돌리며 이를 드러냈다. “캬아아아아!” 모포 사이로 늑대 인간의 흉측한 팔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어본능. 돌로렌스 윈터러가 박아람의 시체에 주입한 유일한 본능이다. 여간한 소환자는 간단하게 찢어발길 수 있겠지만 상대가 김성철이다. “가자! 아람아! 약 먹을 시간이다!” 김성철은 박아람을 자연스럽게 부축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치 아픈 사람을 뒤로 부축하는 모양새다. 이여훈과 나머지 내정자들은 그 모습을 보며 언제 두 명이 저렇게 친한 사이가 됐는지 궁금해 하며 뒷 담화를 했지만 진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살아 있는 시체에 내장은 불필요하다. 어둠 속에서 김성철은 박아람의 텅 빈 복부 안에 가득 채워 넣은 꺼지지 않는 불을 조용히 응시하고는 다시 박아람의 썩어가는 몸에 모포를 두른 후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으으...” 평정을 되찾은 박아람의 몸통이 위 아래로 흔들린다. 준비는 끝났다. ======================================= 8. 꺼지지 않는 불 (3) [ 세 번째 등급전을 시작합니다. ] [ 룰 : 데스매치 ] [ 다른 광장의 소환자를 죽여라. ] [ 이곳에 선과 악은 없다. 오직 죽음과 삶만이 있을 뿐이다. 적을 베는데 주저하지 마라. 타인을 벨 각오가 없는 자는 이 세상에 불요할지어니. ] 궁전 중앙부의 문이 열리자 그 너머에 있던 다른 광장의 소환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숫자는 약 700명. 백광장에 있는 소환자들과 대동소이한 평범한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런 점에서 데스매치 룰을 최악의 등급전으로 꼽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른다. 같은 사람을 벤다는 건 괴수, 몬스터를 베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이므로. 주저 하는 사람들 앞에 또 다른 문자가 떠올랐다. [ 등급전 종료 기준으로 한 명도 베지 않은 소환 자에겐 생존률 2.4%의 특별 시련이 기다리고 있으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 [ 반면 높은 스코어를 올린 자에겐 그에게 상응하는 보상이 내려질 터이니 분발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 가혹한 처벌과 보상. 많은 사람들을 통제하는데 있어 확실한 신상필벌만큼 직관적이고 효율적인 수단은 없다. 소환자들은 이제 궁전의 법칙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성과를 올린 자들은 그에 걸 맞는 보상을 받고 성장을 거듭하는 반면, 뒤에서 숨는 자들은 영원히 뒤처져 그저 연명하는데 그친다는. 연명만 하는 자는 결국 살아남지 못한다. 소환자들은 뒤늦게나마 잘못됐던 과거를 되잡고자 이번 등급전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광장 전면엔 소환자의 절반에 가까운 인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 대부분은 김학출과 그의 무리들이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번 등급전에서 우리는 기필코 좋은 성적을 거둬 만회를 해야 합니다.” 김학출은 몸소 선두에 서서 그다지 세련되지는 못한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대부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이여훈을 위시한 내정자 무리도 최전선에서 선두그룹을 형성하며 다가올 전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하지 마세요. 어차피 우리보다 강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강한 사람이 나타나면 피하거나 같이 싸웁시다. 하지만 명심하세요. 강한 자를 죽이거나 약한 자를 죽이거나 올라가는 스코어는 똑같다는 걸.” 이여훈은 듣기 좋은 목소리로 그럴듯한 의견을 내놓았다. 내정자들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지만 모두들 하나 같이 이번 등급전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우리보다 약한 자를 죽인다.’ 데스매치 룰에서 최고 등급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5명을 제거해야 한다. 검을 쥔 내정자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반면 천정식 패는 싸움과는 동 떨어진 후방 측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두를 필요 없어. 어차피 쓰레기들이 앞에 선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저 고기방패나 하겠지. 우리가 나서는 건 고기방패들의 힘이 슬슬 빠지기 시작할 때다.” 자신 있는 말과 달리 천정식의 마음속엔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과연, 그 놈 말대로 돌아갈까?’ 천정식은 곁눈질로 최후방에 위치한 김성철을 응시했다. 김성철은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박아람을 포함한 소수의 사람과 함께 있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성철은 자진해서 후방에 위치했다. 즉, 스스로 자신의 의견을 믿고 있다는 이야기고 같은 위험을 부담했다는 이야기다. 천정식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며 곧 시작될 등급전을 기다렸다. “…….”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였다. 작열하는 태양은 중천에 솟아 짧고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산등성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햇빛이 만들어낸 열기를 기분 좋게 식히고 있다. “아.. 긴장 되네. 영종이는 대체 어디에 간 거야.” 폭풍전야의 고요 속에서 배성혜가 중얼거렸다. 배성혜는 이여훈과 김성철 중 김성철을 선택했다. 소위 말하는 여성의 날카로운 감각이라기보다는 억지로 떠밀려 김성철 측에 가담한 것에 가깝다. 이유야 어찌됐든 그녀는 김성철이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가지고 있고 김성철과 같은 팀으로 행동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내정자 대부분은 배성혜에 관해서 박아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김성철에게 몸을 팔아 지팡이를 얻어 낸 한심한 여자라는. 반면 새롭게 김성철 쪽에 합류한 박정식과 김우정은 자의에 의해 김성철을 선택했다. 현실에서 중고차영업을 했다는 연결고리를 가진 이 두 사내는 이여훈에 대한 반감이 있었고 이전에 김성철과 함께 하며 재미 본 게 있는지라 기꺼이 김성철 쪽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저 앞에 모포를 뒤집어쓰고 몸을 흔들어대는 박아람의 존재엔 우려를 표했다. “김 프로. 저 분 저렇게 놔둬도 됩니까?” 중고차 딜러 듀오는 김성철을 어째서인지 김 프로라고 불렀다. “관계없다.” 김성철은 싸늘하게 말한 다음 무심한 눈으로 광장 전체를 살폈다. 그가 찾고 있는 한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개. 회귀자로 추측되는 존재. 함께 잘해보자고 손잡았던 그 여성은 어찌된 영문인지 등급전 직전에 종적을 감추었다. ‘기이하군. 내 시선으로도 찾기 어려운 인간이 있다니.’ 그림자가 엷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기척이 약해 잘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아무개도 그런 과로 보이는데 그녀의 경우엔 그림자가 엷은 정도가 아니라 없는 수준에 가까웠다. 오감이 극도로 발달한 김성철의 감각으로도 느낄 수 없는 건 물론이고 그의 경계를 뚫고 나타난 적도 한 번 있으니 말이다. ‘뭔가 숨겨진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회귀자는 보통 전생의 기억만을 가지고 돌아오는 걸로 알려져 있지만 김성철이 모르는 비밀도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계는 신비와 경이로 가득 찬 세계니 말이다. 멀리서 호문클루스들이 부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성철은 즉시 자신의 패로 돌아갔다. 그는 가지고 있던 자신의 무구를 동료들에게 나눠주었다. “박정식. 너에겐 이 방패를 주겠다. 이 방패를 들고 박아람을 지켜라.” 박정식은 덩치는 작지만 깡다구가 있고 힘 수치와 체력 수치도 일행 중에선 가장 높다. 다만 시체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 첫 번째 등급전에선 영 힘을 못 썼다고 한다. 그는 주기적으로 자신의 항문에 손가락을 갖다 대 냄새를 맡는 버릇이 있는 걸 제외하면 전력으로 써도 나쁘지 않은 인물이었다. 김성철로부터 기운의 연 방패를 받은 박정식은 엉덩이 안쪽을 손가락으로 긁으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 인간을 지키라고요? 저 인간. 지금은 맛이 갔지만 우리 중에 가장 강한 거 아닙니까?” “늑대 인간 변신으로 인한 부작용을 겪고 있는 모양이야. 아람이가 변신할 때까지 지켜주기만 하면 충분해. 신호는 내가 할 테니 그때까지 앞을 봐줘.” “알겠습니다. 김 프로가 하는 말이니 들어줘야죠.” 박정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혐오감이 서린 눈동자로 박아람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다음으로 김성철은 김우정에게 병사의 석궁을 내밀었다. “마찬가지로 이걸 들고 박아람을 지켜라.” 그는 박정식과 달리 덩치는 크고 위협적인 용모를 지니고 있지만 의외로 성격은 소심한지라 접근전엔 자신이 없다고 한다. 탐탐 전이 끝난 다음엔 심장이 터져 죽을 뻔 했다고. 하지만 군대에 있을 땐 특등사수였고 일방적으로 때리는 건 또 잘한다고 한다. 그런 김우정에겐 원거리 무기를 쥐어주면 1인분 이상의 힘을 할 것이다. “어이고. 이런 걸 다. 그런데 김 프로는 대체 뭐가지고 싸울 겁니까?” 김우정의 물음에 김성철은 조용히 시작의 검을 들어보였다. “아... 네...” 배성혜는 이미 김성철에게 받은 무기가 있다. 마력스태프 월광. 소환 궁전 내에선 단연 최고의 효율을 지닌 무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김성철은 배성혜에겐 별 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배성혜가 박아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씻을 수 없는 반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지시를 마친 김성철은 전면을 바라봈다. 청광장과 백광장 사이에 쳐진 결계가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다. [ 전투가 시작됩니다. ] [ 중립신의 제전에 어울리는 싸움을 해주시길. ] 결계가 사라지고 이제 광장과 광장 사이에 난 활짝 열린 성문 사이로 수백 명의 소환자들의 대치가 시작됐다. 본격적인 전쟁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라 전열은 무질서했고 불필요할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한쪽이 기세 좋게 밀고 나가면 다른 한쪽이 물러서고 다른 한쪽이 발끈해 역으로 밀고 나가면 도로 밀고 들어간 쪽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식의 대치가 한동안 이어졌다. 다들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일단 피가 한 방울이라도 튀면 그때는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난전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난 이래서 데스매치 룰이 싫다니까. 진짜 못 봐주겠어. 겁쟁이 새끼들.” 전망대에서 등급전을 지켜보는 이계의 권력자들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겁쟁이가 범죄자보다 경멸 받는 이계에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돌로렌스 윈터러는 평소엔 볼 수 없던 화려하게 장식된 로브를 입고 권력자들 사이를 나비처럼 배회하고 다녔다. 그녀는 눈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정제된 미소를 머금으며 목례를 했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에겐 유창한 언변으로 말상대를 해주었다. 그중 한 명이 아직도 피가 튀지 않은 광장을 보고 불평을 했다. “아! 답답해서 못 보겠네! 백광장에서 탐탐을 죽였다고 해서 어떤 괴물 신인이 있나 잔뜩 기대했는데 직접 보니 오합지졸뿐이군. 이래서야 영락없이 누군가가 나서서 걸러내기를 해야 할 거 같아.” 이에 돌로렌스는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감미로운 목소리로 비위를 맞췄다. “이 참에 청광장에 베팅하시는 건 어때요? 적광장보다야 못하지만 청광장도 나름 강한 세력이 밀어주고 있는데요. 탐탐 전 소식을 듣고 아마도 비장의 수를 준비했을지도 모르죠.” “으음.. 청광장이라...” 사내가 고민을 하는 동안 돌로렌스 윈터러는 창문 너머로 펼쳐진 광장의 광경에 눈길을 옮기며 품속에 넣어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이제 쇼 타임이네.’ 돌로렌스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오르는 그 순간, 청광장 측에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으으...!” “끄으으으...!!!” 선두에 서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주저앉으며 당장이라도 숨넘어갈 것 같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한 명도 아니고 여섯 명이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발작을 일으키자 청광장, 백광장 할 것 없이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 쏠렸다. “뭐야. 갑자기 왜 저래?” 갑작스런 사태에 청광장 측에선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백광장은 달랐다. 백광장 중 많은 사람들이 이전에 비슷한 현상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불길한 회상은 현실화된 악몽으로 드러났다. “끄아아아아아!!!!” 골격이 뒤틀리고 온 몸에 털이 수북하게 자라난다. 부릅뜬 눈동자의 동공은 노란 색으로 물들고 쩍 벌린 입안의 이는 짐승의 이빨로 자라난다. 늑대 인간. 무시무시한 공포가 다시 한 번 백광장 앞에 보다 절망스런 형태로 우뚝 선 것이다. “느.. 늑대 인간이다!!” 치열하게 밀고 당기기를 하던 백광장의 전열이 쭉 뒤로 밀려났다. “크르르르....” 늑대 인간 6마리가 이를 드러내며 전진했다. 그러자 이미 뒤로 한계까지 밀려난 백광장의 전열에 균열이 일어났다. 앞에 선 사람들을 뒤로 가기 위해 밀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밀고 밀리면서 백광장의 전열은 싸우기도 전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저기, 여훈 씨! 이제 어떻게 합니까?” 이여훈을 믿고 선두에 섰던 내정자들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이여훈을 일제히 책망했다. “일단은 진정들 하시고 최대한 옆으로 빠집니다. 제가 앞을 뚫을게요!” 이여훈은 이를 꽉 깨물고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뒤를 가로 막은 사람들을 완력으로 밀어젖혔다. “뭐하는 거야! 이 새끼가!” 우악스런 손길에 밀어젖혀진 사람이 반발을 하자 이여훈은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피가 튀고 사람 하나가 죽었다. 사람들의 놀란 시선이 이여훈을 향하자 이여훈은 악귀야차 같은 본모습을 드러내며 일갈했다. “꺼져! 꺼지라고! 더 죽고 싶어? 응?” 눈을 희번덕거리며 피 묻은 검을 휘두르는 이여훈의 기세에 사람들은 겁을 집어 먹고 길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혹한 운명은 그들을 향해 오고 있었다. “이... 이리로 온다!” “온다!!!!!” 늑대인간들은 그 수많은 사람들을 제쳐두고 바로 이여훈 및 내정자 패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살의에 찬 12쌍의 노란 눈동자들이 오직 그들만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순간 이여훈은 털썩 주저앉았다. “이런....” 이여훈의 뇌리 속에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 속을 알 수 없는 사내. 겉모습이 초라하고 그래서 가장 우습게 봤던 그 사내는 진짜였다. 운이 따른 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 새끼 말을 들을 걸.’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늑대 인간의 발톱이 이여훈을 할퀴고 지나갔고 뒤이어 걸신들린 이빨이 그의 육체를 짓이겼다. “어머나 씨발!”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배성혜는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 정도로 처참한 광경이 내정자들에게 일어난 것이다. 간은 순식간에 내정자들을 모두 걸레짝으로 만들어놓고 다음 목표를 찾았다. [ 주된 목표 ] 늑대 인간들의 시야에 뭔가 표시됐다. 그것은 저 멀리 있는 나머지 내정자, 그리고 가장 우선적으로 처치해야 될 녀석의 위치를 알리고 있었다. “크릉...!” 여섯 마리의 늑대 인간은 사람들을 찢어발기며 백광장의 전열을 반으로 갈라놓으며 뒤쪽으로 쇄도했다. 그들이 노리는 방향에 바로 김성철이 있었다. “김 프로. 김 프로!” 방패를 든 박정식이 불안한 목소리로 반복적으로 외쳤다. “무슨 일인가. 박정식.” “나... 심장 쫄리는데 도망가면 안 되나요?” “버텨. 똥꼬 냄새 맡으면 진정될 거야.”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들고 박정식 왼쪽을 지키듯이 섰다. “자, 조금만 버텨주자고. 박아람만 깨어나면 저런 하급 늑대 인간은 아람이가 전부 죽여줄 테니까. 우린 뒤에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고.” 순간 박정식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단순히 옆을 지키고 있을 뿐인데 절대 죽지 않으리라는 안도감이 그의 마음 위에 굳건히 내려앉은 것이다. 아마도 꿈에도 모를 것이다. 자신의 옆을 지키고 있는 자가 인간 아니, 이계를 통틀어서 가장 강력한 전사라는 사실을 말이다. “쏴라!” 김성철이 검을 흔들며 소리쳤다. 처음엔 김우정이 다음엔 배성혜가 시간차를 두고 각자의 사격무기를 달려오는 늑대 인간을 향해 발사했다. “크르르르!” 하지만 늑대 인간은 늑대 인간. 멀리서 날아오는 투사체들에 쉽게 맞아주지 않는다. 늑대 인간들은 날아오는 화살과 에너지 볼트를 피하며 마침내 박정식의 방패벽 앞에 섰다. “크르르르!” 늑대 인간 한 마리가 먼저 나서 방패벽을 후려쳤다. 박정식은 순간 몸이 공처럼 날아갈 것 같은 거대한 충격을 느꼈지만 가까스로 두 발을 땅에 붙이고 늑대 인간의 공격을 막아냈다. 성공적인 방어가 있는 직후, 김성철이 검을 휘둘러 늑대 인간의 몸통을 베었다. 늑대 인간은 가볍게 뒤로 물러나 김성철의 검을 피하고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크르르르르!” 뒤 이어 이번엔 두 마리의 늑대 인간이 동시에 나섰다. 나머지 녀석들도 넓게 퍼져 천천히 방패벽을 포위하고 있었다. 배성혜와 김우정의 사격이 빗발쳤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덮치고도 남았으리라. “지금이다.” 박정식의 공포가 절정에 달한 그 순간, 김성철은 박정석의 뒷덜미를 잡고 자리에서 이탈함과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 무언가를 꺼내 늑대 인간을 향해 흩뿌렸다. 검게 변색된 그 액체는 박아람의 썩은 피였다. 늑대 인간들을 공기 중에 흩날린 그 피 냄새를 맡고 돌로렌스 윈터러가 그들에게 각인시켰던 목표를 다시 한 번 상기해냈다. 박아람. 방패벽 뒤에 있던 그 존재는 이제 늑대 인간들 앞에 아무 장애물 없이 노출되었다. 늑대 인간들은 앞 다투어 몸을 흔들어대는 박아람에게 달려가 그의 몸을 찢어발겼다. 아주 갈기갈기, 흔적도 남지 않을 정도로. 그 와중에 박아람의 체내에 가득 담겨 있던 꺼지지 않는 불이라는 액체가 그들의 몸을 덮는 것도 모른 체. 전망대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상길의 얼굴엔 경악이 돌로렌스 윈터러의 입가엔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어느새 김우정의 뒤에 서 있었다. “가만있어.” 그는 김우정의 화살에 천을 재빨리 묶고는 황금석과 연금목탄을 힘으로 마찰시켜 불을 피웠다. 불화살 일발장전. 김성철이 검을 휘두르며 조용히 말했다. “쏴라.” 김우정의 손끝이 방아쇠를 당겼고 불화살은 박아람의 시체를 짓이기고 있는 늑대 인간을 향했다. 늑대 인간들은 민첩하게 화살을 피해냈지만 화살이 바닥에 닿는 순간, 화르륵 타오른 불길이 그들의 몸에 옮겨 붙는 건 피하지 못했다. “아우우우우우!!!” 꺼지지 않는 불길 속에서 늑대 인간들은 불타올랐다. 처음엔 살과 털을 그리고 안구까지.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피어올랐다. “와우. 저 인간 보소.”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정식은 기다렸다는 앞으로 달려가며 그의 부하들을 이끌었다. “가자! 가서 전부 죽여 버리자!” 전투의 국면이 바뀌었다. 기율 없는 집단끼리의 전투에서 사기가 주는 역할은 절대적. 청광장에 기세를 안겨다주었던 늑대 인간들이 무력하게 불타는 순간, 백광장의 승리는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 9. 아무개 모든 이들이 같은 꿈을 꾼 날, 신의 저주가 이 땅을 뒤덮었다. 그 이후 세상엔 더 이상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절멸의 저주. 재앙의 전조로 해석되는 가증스런 저주가 퍼진 땅에 모든 아이들은 치료 불가능한 괴질에 걸려 죽는다. 천하거나 가난한 자, 고귀하거나 부유한 자를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그래, 그 녀석은 잘 하고 있나?” 철혈기사단장 조성택. 대륙 북부의 3강이라 불리는 실력자이자 한때 대륙 최강이라 불렸던 철혈기사단을 수하에 거느리는 이 초로의 사내는 절멸의 저주로 인해 모든 자식을 잃었다. 현실 세계에 놔두고 온 그의 사생아는 이제 조성택의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정기적으로 올라오는 보고에 의하면 어미의 성을 딴 그 아들놈은 아주 잘하고 있었다. 타고난 리더십으로 사람들을 솔선수범해서 이끄는 건 물론이고 전투에도 용맹과감함을 발휘해 등급전 최악의 재앙이라는 탐탐 마저 쓰러뜨릴 정도란다. 별 기대하지도 않았던 다른 세계의 아들이 이렇게까지 잘해내자 조성택의 관심은 점점 소환 궁전에 있을 자신의 아들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아드님은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이번 등급전에 상대 측에서 늑대 인간 6마리가 나왔는데 그걸 기발한 책략으로 쓰러뜨리셨습니다. 하하.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연금술사 클래스를 이용할 줄은.” 수정구 너머로 고위기사 마상길이 보고를 하고 있다. “그런가? 그나저나 늑대 인간을 6마리나 풀다니. 대체 상대방의 뒤를 봐주는 세력이 누구길래 그런 비도한 짓을 하는가?” 조성택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소환 궁전에서 늑대 인간 종족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극히 한정 되어 있는데 한 명도 아니고 여섯 명이나 늑대 인간으로 변했다는 건 외부의 개입이 있지는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마상길은 자신 없는 태도로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검은 여단이라고 합니다.” “검은 여단? 샤말이 그런 짓을 했다고?” 조성택의 반백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마상길은 똥줄이 타는 기분이었다. “그.. 그게 확인된 건 아닙니다. 저희로서는 그저 추측만 할 뿐이죠.” “그래? 윌리엄이라면 모를까 샤말은 그런 짓을 할 놈이 아니다. 샤말한테는 내가 직접 이야기하지.” “아직... 확정된 게 아니니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아니. 네가 말하지 않았나? 박아람은 훌륭한 놈이라고. 비록 내가 키우진 않았지만 내 핏줄을 이은 놈이 그 정도 걸물이라면 내 고개를 숙여가며 부탁을 할 필요성이 있겠지.” 조성택은 그렇게 말하고는 권좌에서 일어나 팔을 내저었다. 밝게 빛나던 수정구가 암전됐다. “아.. 빌어먹을...” 수정구 너머의 상대방, 고위기사 마상길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의자에 쓰러지듯 몸을 앉혔다. 그의 뒤로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 마법사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고위기사님. 너무 심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차피 일은 벌어졌고 우리는 이제 같은 배를 탔으니까요.” 지난 등급전에서 마상길은 거의 모든 내정자를 잃었다. 반드시 지켜야 할 박아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상길은 궁지에 몰렸고 궁지에 몰린 마상길 앞에 독사 같은 돌로렌스가 나타났다. “네 말 대로 일단은 거짓 보고를 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되나? 돌로렌스 윈터러.” 마상길은 고개를 숙인 채 양손바닥으로 얼굴을 괴롭게 쓰다듬으며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법이 아주 없는 아니에요. 고위 기사님. 우리에겐 아직 한 가지 카드가 남아 있잖아요?” “그게 뭐지? 그 카드라는 게?” 마상길이 다급히 고개를 들어 올려 돌로렌스를 애타는 눈으로 응시했다. 돌로렌스는 약간의 시간을 두고 대답했다. “제 예측이 맞다면 기사단장님은 아드님의 얼굴을 모를 것 같은데. 제가 여기에 있은 뒤로 마법인화사가 여길 찾은 건 한 번도 못 본 거 같거든요.” “인상착의는 대충 말했다.” “뭐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아주 잘생긴데다가 호감형이라고....” 그 말을 들은 돌로렌스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됐네요.” “뭐가 됐다는 거지?” “대역을 세워요. 적당한 녀석으로. 어차피 자기 자식이라면 부모 눈엔 다 잘생겨 보일 테니까. 오우거도 자기 새끼는 귀여워한다잖아요?”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인가? 대역을 세우자고? 단장님과 대역이 마주치면 금방 들통이 날 텐데.” 마상길은 억누르고 있던 분노를 살짝 드러냈다. “누가 만나게 해준대요? 대역을 세우고 죽여 버리면 그만이죠. 다음 마지막 등급전이 대장전이라는 걸 잊으신 건 아니겠죠?” “대장전에서.. 죽이겠다고? 대역을..?” 마상길의 둔한 두뇌에 어렴풋이 돌로렌스의 비전의 윤곽이 드러났다. 돌로렌스 윈터러는 의미심장을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흉계를 이어나갔다. “영웅을 만드는 거죠. 치졸한 상대방의 수에 맞서서 의롭게 싸우다가 죽어간 영웅을. 다음 적수가 적광장이라는 걸 상기하세요.” “적광장이라.. 적광장이라면 암살교단이 뒤를 봐주는 곳 아닌가?” “네. 행운이 따르는 거죠.” 그제야 마상길은 돌로렌스의 계획을 모두 이해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짓을 하면 암살교단과 철혈기사단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거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전쟁이란 게 고위기사님의 목숨만큼 중요한가요?” 마상길은 돌로렌스의 당돌한 질문에 버럭 눈을 부릅떴지만 결국 그녀를 책망하지는 못했다.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크릴 리갈의 눈동자에 비친 마상길은 돌로렌스라는 뱀에 칭칭 감겨 옴짝달싹하지도 못하는 존재로 비춰져 있었다. ‘대단하군. 돌로렌스 선배... 설마하니 저 오만한 고위기사마저도 가지고 놀다니.. 대단해. 정말로 대단해...!!’ 마상길을 손아귀 안에 넣은 돌로렌스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크릴 리갈에게 다가오며 제법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봤어? 후배? 우리처럼 연줄도 빽도 없는 인간이 마법사로 이름을 날리려면 말이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면 안 되는 거야.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을 해야지.” “대단합니다. 정말로.. 대단합니다. 선배.” 크릴 리갈은 진심을 담아 돌로렌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은 철혈기사단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고위기사 마상길. 평상시라면 돌로렌스 따위는 감히 먼저 말을 붙이지도 못할 정도의 높은 위치에 있는 강자다. 힘이 전부인 이계에서 그 상성을 무시하고 역으로 그 강자를 교묘한 술책으로 자신의 손아귀 안에 넣는 솜씨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사람 밑에서 배울 수만 있다면... 내 구질구질한 인생이 어쩌면... 풀릴 지도 모르겠어...!’ 처음에 품었던 악감정의 앙금 따윈 이미 풀린 지 오래다. 크릴 리갈은 자진해서 돌로렌스의 술잔을 술을 따랐다. 돌로렌스는 피식 웃으며 입술에 독한 술을 적셔 혀로 살짝 핥고는 전망대 너머를 응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대역이 필요해. 가급적이면 내정자 혹은 성과를 낸 녀석 중에서 대역으로 쓸 만한 녀석을 골라 줘. 훈육실장이 있다면 녀석을 보냈겠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녀석과 연락이 닿지 않아.” 돌로렌스가 물끄러미 크릴 리갈을 올려다보았다. “갔다 와.” 크릴 리갈은 잠시 잊고 있던 한 인물을 떠올렸다. 허름한 야상을 걸친 추레한 사내의 모습이. ‘그 인간. 정체가 뭘까.’ 마상길이 더 이상 뇌물을 요구하지 않는 시점에서 그 의문의 사내는 더 이상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 돌로렌스가 마상길의 치부를 잡고 뜻대로 하는 것처럼 그 사내 또한 크릴 리갈의 치부를 알고 있으니까. “아참. 그리고 또 하나.” 전망대를 나서려는 크릴 리갈을 돌로렌스가 돌려 세웠다. “네. 선배.” “전부터 걸리적거리던 녀석이 하나 있어.” “어떤 녀석이 걸리적거리게 합니까?” “내가 박아람에게 준 지팡이를 주워서 쓰는 여자가 있어. 이름은 모르겠는데 마음에 안 들어. 그것도 아주.” 돌로렌스는 들고 있던 술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산산조각 나는 유리 파편을 지켜보는 크릴의 귓전에 돌로렌스의 은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내 밑에서 일하고 싶지?” 그 한 마디는 크릴 리갈의 심장을 관통했다. 숨이 턱하고 막혔다. “내 밑에서 배우면서 일하고 싶다면 가치를 증명해 봐.” “즈.. 증명요..? 어떤..?” “다 알면서 모른 척 하는 거, 좋아하지 않아.” 돌로렌스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의 말 대로다. 크릴 리갈은 돌로렌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 치열했던 전투가 끝났다. 살아남은 자들은 저마다 눈앞에 뜬 문자를 보며 길고 처절했던 등급전이 끝났음을 인지했다. 김성철은 검에 묻은 피를 닦으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 세 번째 등급전이 끝났습니다. ] [ 백광장이 처치한 적의 숫자는 452명 ] [ 백광장이 입은 피해는 242명 ] [ 청홍백적 4 광장 중 1위입니다. ] 목적했던 성적은 거두었다. 김성철은 다음에 나타날 보상에 관한 문자가 뜨기를 기다렸다. [ 전체보상이 순위에 따라 조정됩니다. ] [ 당신의 처치 수는 7명(순위권 외). ] [ 당신의 기여도는 9.2% ] [ 보상등급 S급으로 평가되었습니다. ] 기본 보상 : 1. 궁전토큰 12개 2. 신선한 고기 한 토막 3. 포도주 1병 4. 식량 일주일 치 선택 보상 : 1. 황동 가슴받이 2. 기사의 건틀렛 3. 힐링 포션 2개 4. 전사의 전직서 중 택이. 나쁘지 않은 보상. 전직서가 보상에 나오기 시작했다는 건 소환 궁전의 나날도 거의 끝나간다는 신호다. 김성철은 그중 황동 가슴받이와 힐링 포션 2개를 택했다. 잘 쓸 수만 있다면 기사의 건틀렛은 두 아이템을 합친 것보다 높은 효율을 보여주지만 김성철은 이번에도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범용성읕 택했다. 어차피 김성철에겐 필요 없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김성철은 이번 등급전에서 7명의 소환자를 처치했다. A등급 보상을 얻기 위한 조건인 5명 처치에서 2명을 더한 수치다. 최상위인 천정식과 아무개가 홀로 30명 이상을 도살한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지만 기여도가 대단히 높아 S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 김성철뿐만 아니라 늑대 인간에 처치한 모든 이들은 S등급의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중 늑대 인간을 직접 처치한 것으로 인정된 김우정은 좀처럼 받기 힘든 SS등급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성철은 딱히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결과만 놓고 보면 최상급이다. 눈에 띄지 않고 적당히 활약했고 목표로 하던 대량의 궁전 토큰을 획득했다. ‘현재까지 손에 넣은 토큰은 37개. 얼마 남지 않았다.’ 매일 하고 있는 일반 퀘스트도 곧 끝이 난다. 그걸로 얻을 수 있는 궁전 토큰의 숫자는 8개. 앞으로 남은 한 번의 등급전에서 중간 이상의 활약만 펼쳐도 목표했던 궁전 토큰의 숫자를 채우고 원하던 메아리술사 클래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전투가 끝난 후 아무개가 김성철을 찾아왔다. 이번엔 제대로 아무개의 기척을 느꼈다. 하지만 생각한대로 그림자가 엷은 여자다. 제대로 집중하지 않으면 포착하기 어려우리라. “왜 그런 눈으로 절 보시나요?” 이번 등급전에서 아무개가 처치한 소환자의 숫자는 64명. 모든 소환자를 통틀어 1위를 차지했다. 몸에 지닌 검술도 검술이지만 스피릿 울프 스태프를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처치 수를 올려나갔고 천정식을 10개 이상 차이로 따돌리고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무슨 용무로 찾아왔지?” 김성철의 물음에 아무개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전에 한 약속을 지켜러 왔죠.” “마력에 관한 히든 퀘스트 말인가?” “네. 아마도 마음에 들어 하실 거예요.” 소환 궁전 내에선 일반 퀘스트 수행만으로 원하는 마력치를 올릴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다면 그 이상의 마력 수치가 필요할 것이다. 마왕 해서니우스 맥스 정도를 처치하려면 꽤나 높은 수치의 마력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김성철은 주어진 기회는 모두 활용할 작정이었다. “좋다. 안내해라.” 아무개는 김성철을 성벽 밖 깊은 숲속으로 데리고 갔다. 뚜렷한 표지도 없고 울창한 숲이라 길 찾기가 쉽지 않아 보였는데 헤매지도 않고 한 번에 길을 찾는 게 한 번 이상 들린 적이 있는 걸로 보였다. “혹시 연금술사 클래스세요?” 나무 사이를 헤쳐 나가며 아무개가 물었다. “서로에 대해 묻지 않기로 한 거 아닌가?” “그건 그렇죠. 하지만 대단히 인상 깊었거든요. 함정 클래스라고 불리는 연금술사 클래스의 능력을 이용해 그런 위기를 타개할 줄이야.” “…….” 김성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개는 그런 김성철을 곁눈질로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정직하게 말하면 평범한 히든 퀘스트를 주려고 했는데 당신의 활약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이번엔 당신한테 신세 진게 있으니까 최상급의 퀘스트로 준비했죠.” 숲의 끝자락엔 작은 연못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연못중앙엔 고개를 숙인 천사의 석상이 있었다. 아무개는 석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석상을 만지면 퀘스트가 시작되요. 난이도를 선택해 보상을 얻을 수 있죠. 하지만 조심하세요. 너무 높은 난이도를 선택했다간 당신이 아무리 강한들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가?” 김성철은 아무개를 돌아보고 석상을 향해 걸어갔다. 아무개는 연못가에 가부좌를 틀고 앉으며 명랑하게 말했다. “3시간 기다려줄게요. 그때까지 안 나오면 죽은 걸로 간주할 테니 행여나 살아 나오더라도 혼자 광장으로 돌아가세요.” “…….” 김성철은 말없이 석상으로 다가갔다. 고개를 숙인 천사상에 손을 대는 순간 김성철 앞에 빛나는 문자가 떠올랐다. [ 칠영웅 사자토스의 잊힌 길 ] “사자토스?” 김성철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 9. 아무개 (2) 문자가 떠오른 직후 김성철은 다른 공간으로 전이됐다. 그곳은 사방팔방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 지대였다. 끝없이 이어진 지평선이 서 있는 대지와 그 이외의 영역을 구분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곧 김성철의 눈앞에 또 다른 문자가 떠올랐다. [ 당신은 사자토스의 잊힌 길에 들어섰다. ] 사자토스. 베스티아레와 함께 칠영웅을 구성하는 두 명의 마법사 중 하나로 같은 마법사지만 둘의 스타일은 판이하게 다르다. 베스티아레가 메아리를 통해 하나의 마법을 연속적으로 사용하는 능력을 지닌 반면, 사자토스는 한 번에 여러 개의 각기 다른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다중 영창 능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 얻은 별명은 다구(多口)의 마법사. 그는 수많은 마법을 동시에 구사하며 적의 공격을 피하거나 움직임을 묶은 후, 파괴적인 마법 포격으로 한 번에 적을 섬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은 다중 영창도 산을 꿰뚫는다는 가공할 마법 포격도 실전됐지만 그중 하나라도 배울 수 있다면 김성철의 계획에 커다란 보탬이 될 것이다. ‘운이 좋군. 베스티아레에 이어 사자토스의 흔적까지 마주치게 되다니.’ 그 대목에서 김성철은 어쩌면 다른 칠영웅의 흔적도 소환 궁전 주변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칠영웅이 결성된 이후, 그들은 최후의 여정을 끝내기 전까지 늘 함께 행동했으니까. “으으... 숨막혀.. 괴로워...” 상의 포켓에 넣어두었던 베르텔기아가 갑자기 몸부림을 쳤다. “무슨 일이냐? 책.” “숨이 막혀요.. 이 공간.. 마치 물밖에 나온 물고기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네요. 어서 창고.. 영혼 창고에 넣어주세요.” 아무래도 이 아공간은 사역마에겐 좋지 않은 장소로 보인다. 사역마를 영혼 창고 안에 집어넣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성철 앞에 커다란 반딧불 같은 빛이 나타났다. 윌 오 위스프. 위습이라고 하는 원시적인 정령이다. 소리 없이 떠오른 위습은 이내 문자로 변했다. [ 당신은 칠영웅의 어떤 길을 걷기 원하십니까? ] [ 꿈에 따라 시험의 난이도가 변합니다. ] 길의 종류는 5개가 있었는데 아래로 갈수록 난이도가 높다고 한다. [ 완만한 내리막길 ] [ 평탄한 길 ] [ 완만한 오르막길 ] [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 ] [ 만들어지지 않은 길 ] 김성철은 가장 어려운 난이도를 선택했다. 그러자 지평선 너머에서 수많은 구름이 나타나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었고 지면은 말라비틀어진 풀로 가득 찬 황량한 대지로 변했다. 무심한 눈으로 바뀐 풍경을 바라보던 김성철은 펼쳐진 광경이 왠지 눈에 익었다는 걸 발견했다. ‘이건. 비탄의 길 아닌가.’ 틀림없다. 이것은 마계의 입구로 통하는 악마의 진군로다. 악마들의 발굽이 닿는 대지엔 어떤 생명도 잉태하지 못하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비탄의 길 주변엔 풀 한 포기조차 자라지 않았다. 무심히 내리는 비만 이따금 죽어버린 대지를 적실 뿐. 김성철은 흐르는 구름을 보고 방향을 잡았다. 진로는 북북서. 황폐한 대지를 말없이 걸어 나갔다. 문득 발밑이 무너져 내리고 소용돌이치는 유사가 김성철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사람을 먹는 모래 지옥. 마계의 괴물이다. 눈앞에 사자토스의 문자가 떠올랐다. [ 땅을 빨아들이는 괴물 앞에서 우리는 다수의 조력자와 식량을 실은 노새를 잃었다. ] 김성철은 당황하지 않고 원뿔형으로 패인 구덩이의 가장자리를 따라 구보로 달리며 거대한 이빨이 드러난 중심부로 접근했다. “아하하하하하!” 중심부에선 영혼 없는 여성의 웃음이 들려왔다. 김성철은 쩍 발린 아가리 옆 톱니모양의 뿔을 붙잡고 흘러내리는 유사에 저항했다. “아하하하하하!” 그러자 거대 모래 지옥이 강하게 요동치며 지축을 흔들어놓았다. 수 톤의 모래가 하늘로 떠올랐다고 아래로 처박혔다. 어마어마한 힘이다. 그럼에도 김성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모래 지옥의 뿔을 붙잡은 채 단단하게 버텼고 모래 지옥의 움직임이 둔화될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모래 지옥이 지면을 두들기는 걸 멈췄을 때 김성철은 잡고 있던 뿔을 그대로 꺾어버리고 쩍 벌린 모래 지옥의 아가리 깊숙이 꽂아 넣었다. “아하하.. 갸르르르륵!” 모래 지옥은 보랏빛 피를 내뿜으며 발광을 하다가 뒤집어 졌다. 김성철은 모래 구덩이에서 가볍게 나와 앞길을 재촉했다. 다음으로 김성철 앞을 가로 막은 것은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해골이었다. 왕관. 왕홀, 번쩍이는 갑주. 생전의 고귀함을 증명이라도 하듯 군왕에 걸 맞는 장비를 걸친 해골 전사는 턱을 딱딱거리며 김성철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김성철 눈앞에 문자가 떠올랐다. [ 어리석은 왕은 영생을 얻기 위해 악마와 손을 잡았고 그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가 원한 형태는 아니지만. 이 어리석은 왕 앞에서 우리는 귀중한 동료를 여러 명을 또 잃어야 했다. ] 그제야 김성철은 알아챘다.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은 사자토스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라는걸. 사자토스가 마계로 떠날 때의 여정을 이 결계 안에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멸자는... 못 지나간다....!!” 해골의 왕 주위로 수백, 수천 구의 해골 전사들이 일어섰다. 그야말로 해골의 군세. 왕관을 쓴 해골이 검을 휘두르자 수천 마리의 해골 전사들이 노도처럼 김성철을 덮쳤다. 처음에 김성철은 시작의 검으로 하나 둘 해골 전사들을 베어내다가 결국 영혼 창고에서 애병 팔 가라즈를 꺼내 들었다. 퍽! 망치질 한 방에 수십 마리의 해골 전사가 일제히 박살이나 뒤로 나뒹굴었다. 퍽! 퍽! 해골 군세의 진영 곳곳에 구멍이 뚫렸다. 해골들은 박살이 나도 곧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하는 능력이 있었지만 그들이 회복하는 속도보다 김성철이 박살내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곧 김성철은 왕관을 쓴 해골 앞에 섰고 한 번의 휘두름으로 사태를 종결지었다. 왕관은 땅에 떨어지고 불사의 저주에 걸린 망자들은 지면 아래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이후로도 김성철 앞엔 마계로 들어가기 위한 장애물들이 여러 개 나타났지만 김성철은 별 어려움 없이 모든 장애물을 극복했다. 마지막에 나타난 것은 고위 악마 발록이었다. [ 모든 발록들의 왕. 악마군 대원수 어그리포스의 발굽 아래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는가? 103명에 이르렀던 원정대 중에 살아남은 건 우리 칠영웅과 그리고 이름 모를 꼬맹이 하나였다. ] “…….” 김성철은 눈앞의 악마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발록과는 다르다. 보다 크고 보다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으하하하하하!” 어그리포스가 천둥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들고 있던 거대한 도끼를 풍차처럼 돌렸다. 사방에 광풍이 휘몰아치고 곳곳에 지옥이 불길이 지면을 뚫고 나와 사방을 붉은 색 일색으로 물들였다. 불길과 바람 속에서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쥐고 오롯이 발록의 왕에게 맞섰다. 퍽!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성철의 망치가 어그리포스를 강타했다. 그런데 망치가 적중하는 순간, 어그리포스의 전신이 불길에 휩싸였다. 팔 가라즈에 적중당하는 순간, 매미가 허물을 벗듯 불길만을 남기고 본체는 쏙 빠져나온 것이다. “너의 공격은 나에게 통하지 않는다.” 악마가 말했다. 하지만 김성철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어그리포스에게 쇄도해 망치를 날렸다. 한 번의 휘두름이 아니다. 수십 개의 망치가 동시에 날아오는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킬 정도의 연타였다. 어그리포스는 다시 한 번 불꽃만을 남기는 탈각(脫殼)을 통해 회피를 시도해보이지만 정확히 3번만의 탈각이 동시에 일어난 후, 김성철의 망치에 정직하게 몸을 대야 했다. “아.. 안 돼! 살려줘! 안 돼!!!!” 무자비한 연타 속에서 발록의 왕을 웅크린 손을 위로 치켜 올리며 곤죽이 되어 죽었다. “…….” 김성철은 피 묻은 망치를 축 늘어뜨린 채 호흡을 고르며 악마의 시체 너머를 응시했다. 검은 구름 너머 펼쳐진 불타오르는 대지를. 마계. 악마들의 땅. 사자토스의 길은 거기서 끝이 났다. 김성철을 둘러 싼 마계의 풍경은 갑작스레 사라지고 다시 한 번 아무것도 없는 무의 지대가 김성철 주위를 감쌌다. “놀라워. 이 길을 이토록 쉽게 돌파할 수 있는 인간이 있다니.” 목소리는 뒤에서 들려왔다. 젊고 패기가 넘치는 음성이었다. 김성철을 뒤를 돌아 목소리의 주인공을 응시했다. 순백의 로브를 입고 자신의 키보다 큰 지팡이를 든 젊은 마법사였다. 인간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으로 만든 허상이다. 그럼에도 김성철은 약간의 놀라움을 느꼈다. ‘저 자가 사자토스인가.’ 생각보다 젊다. 아니 어리다는 표현이 적합하리라. 원숙함과 완미함으로 스스로를 단련한 노마법사라기보다는 타고난 강한 힘을 주체 못하는 천방지축 마법사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네가 베스티아레가 말한 그 인간인 모양이네. 듣던 대로 전율이 일 정도로 강하고 주저함이 없군. 정말이지 최고의 그릇이 될 자질이 보이는 걸?” 김성철은 그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주절주절 짖지 말고 보상이나 내놓고 꺼져라.” 사자토스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보상은 줄 거야.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런데 하나만 묻자. 넌 무엇을 위해 싸우냐?” 그는 허공에서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며 김성철을 내려다보았다. “네놈 골통을 박살내주려고.” 김성철은 망치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하하! 정말 재밌는 친구네. 좋아. 성격이 급한 거 같으니 먼저 보상부터 줄게.” 사자토스는 히죽 웃으며 양 손을 합장했다. 합장한 양손 주위로 잡다한 마법진이 꽃처럼 피어났다 사라졌고 합장한 손을 떼는 순간 여러 개의 아이템의 손바닥 사이에서 나타났다. 사자토스는 그 중 하나를 집어 김성철에게 내밀었다. “이건 어때? 친구?” “그게 뭐지?” 김성철의 물음에 사자토스는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파이널 엘릭서.” 김성철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파이널 엘릭서라고..? 저게..?!’ 파이널 엘릭서. 죽은 자마저 되살린다고 알려진 약 중의 왕. 하지만 파이널 엘릭서의 진정한 가치는 다른 데에 있다. 파이널 엘릭서는 절멸의 저주를 풀어낼 2가지 방법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게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것도 있으니 천천히 골라 보라구.” 사자토스가 풀어 놓은 아이템은 전설의 명검, 신비를 품은 마도서 등 하나 같이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휘황찬란한 것들뿐이었지만 지금 김성철 눈엔 오직 하나 파이널 엘릭서만이 들어왔다. “…….” 김성철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파이널 엘릭서를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김성철의 손이 마침내 파이널 엘릭서에 닿는 순간 사자토스의 잔혹한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어이쿠. 꽝이네.” 파이널 엘릭서에 손이 닿는 순간 전설의 약제는 모래가 되어 바닥에 흩어졌다. 차가운 웃음소리와 함께 사자토스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걸로 네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 지 알아냈군. 부성애라... 참 가슴 아픈 단어지. 안 그래?” “…….” “왜 말이 없어? 설마 화 난 거야? 응?” 그 순간 사자토스의 환영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중압감이 자신을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어라..?” 순수한 분노로 이루어진 맹렬한 투기가 허름한 옷차림의 사내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천천히 망치가 위로 올라갔다. 사자토스의 환영은 도망치려고 했지만 무형의 투기가 자신을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뒤이어 망치가 사자토스의 환영을 내리쳤다. 환영은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졌다. 하지만 얄밉게도 박살나는 그 순간까지 사자토스의 환영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다음에 보자고. 친구. 그때는 지금처럼 되진 않을 테니까!” 차가운 웃음소리가 박살나는 파편 사이에서 희미하게 울려퍼졌고 이윽고 빛나는 문자가 김성철 앞에 떠올랐다. [ 당신은 사자토스의 길을 완주했다. ] [ 당신은 위업 ‘알려지지 않은 길의 완주자(히든 - 에픽)’을 달성했다. ] 보상 : 1. 마력 +25 2. 마법검 화염심장(레어) ======================================= 9. 아무개 (3) 첫 보상은 전과 마찬가지로 평이하다. 그래도 마력 25 상승은 상당한 호재. 아무리 기본 능력치가 낮다고 해도 한 번에 단일 능력치를 20이상 올릴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다만 불만점도 하나 있었다. ‘궁전 토큰은 안 주는 모양이군. 이 검 때문인가?’ 김성철은 마법검 화염심장을 들어올렸다. <마법검 화염심장 > 등급 : 레어 - 중급 분류 : 도검 - 마법부여 효과 : 잘 제련된 칼날, 힘 +10, 화염 속성 비고 : 미치광이 대장장이가 불의 정령들이 사는 용암 호수에서 제작한 검. 검을 완성한 직후 대장장이는 불에 타 죽었다. 제법 괜찮은 검이다. 마력 스태프 월광처럼 초심자용이긴 하나 월광과 달리 초심자 레벨을 넘어 중급자 레벨에서도 충분히 쓸 수 있는 훌륭한 검이다. 아마도 소환 궁전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 등급의 무기는 아닐까. 잘 제련된 칼날 안에 은은히 머금은 화기가 검의 수준을 말해주고 있었고 검의 전체적인 밸런스도 잘 잡혀 있어 무게감을 느끼지 못하게 해주었다. 김성철이 시험 삼아 검을 휘두르자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아마도 실전에서 쓰면 베어내고 지져버리는 이중의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나쁘지 않군.” 그리고 김성철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베스티아레 때도 그랬다. 칠영웅은 보상을 두 번 준다는 걸. 김성철은 애병 팔 가라즈와 보상을 품속에 갈무리 한 후 다음에 나타날 문자를 기다렸다. 곧 기다렸던 또 다른 문자들이 눈앞에 떠오른다. [ 칠영웅 사자토스가 당신의 위업 달성에 크게 웃습니다. ] 김성철의 눈동자가 차가운 빛을 발했다. “웃을 수 있을 때 웃어 둬라.” [ 칠영웅 사자토스가 당신에게 위업 달성에 따른 특별한 보상을 내리기로 결정했습니다. ] 보상 : 1. 고블린 가죽으로 만든 지도 2. 청루석 반지 위업 달성에 따른 진정한 보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도 하나와 반지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베스티아레 때와 달리 직관적이지 못하다. 김성철은 먼저 고블린 가죽으로 만든 지도를 들어올렸다. < 고블린 가죽으로 만든 지도 > 등급 : 일반 분류 : 잡화 효과 : 없음 비고 : 대장이 시켜서 급하게 만듦. 사자토스 다운 설명이라고 해야 하나. 보존 마법 이외엔 별 다른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지도다. 악취를 풍기는 고블린 가죽 위에 그린 지도도 얼치기 해적 선장이 술김에 펜으로 대충 그린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지도는 칼날 비명 산맥이라 불리는 산맥 아래 펼쳐진 울창한 우림지대 일대를 가리키기 있었다. 칼날 비명 산맥은 대륙 최남단, 탐험되지 않은 영역에 속해있다. 돈은 안 되고 보상은 코딱지만큼 주는 반면 갖은 상태이상, 악취, 병을 옮기는 귀찮은 마물이 득실거리는데다가 침입자를 용납 못하는 리자드맨 왕국의 영토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계의 경력으로 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김성철도 상기한 이유로 인해 아예 가 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곳이다. ‘칼날 비명 산맥이라... 지랄 같은 땅인데.’ 지도 하단엔 갈겨 쓴 문구가 하나 있었다. - 내가 왜 화염심장을 줬을까? 머리가 있으면 잘 생각해보라구. 그 아래 펜으로 끄적거린 자국이 남았다. 다만 잉크를 쓰지 않았는지 펜으로 긁은 흠집만 있을 뿐 뭐라고 썼는지는 해독하기 어려웠다. 코웃음이 절로 나온다. “생긴 대로 논다더니 참... 유치하네.” 그냥 줘도 될 걸 굳이 되먹지도 않은 장난질을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목마른 놈이 우물 파는 법. 김성철은 양 손에 각각 지도와 화염심장을 들고 궁리를 하다가 결국 비밀을 파헤치는데 성공했다. 화염심장에 담긴 화기가 지도 하단에 닿자 숨겨진 문구가 화기에 반응해 원형을 드러낸 것이다. 새로운 문장은 생소한 문자로 적혀 있었다. 고대어다.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까마득한 옛날의 문자로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극히 드문 문자. 김성철은 고대어에 관한 지식을 지닌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지도 하단의 고대어를 해석했다. ‘힘세고... 강한 ...아침... 만약... 묻는다면... 귀엽다... 소동물.. 반지... 좋아하는... 햇살... 비춘다... 대지... 풀린다.. 함께... 영창.... 비밀... 통해서.. ’ 비록 고대어를 해석할 수 있다고 하나 그의 해독 능력은 훌륭한 편은 아니다. 오히려 조악한 편이다. 그의 해석능력은 알아볼 수 있는 단어를 끼워맞추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음….” 그러나 김성철은 끼워맞추기의 달인이다. 그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단어 사이에서 얻고자 하는 중요한 단서를 찾아내는 능력이 있었다. ‘함께, 영창.. 이건.. 다중 영창을 말하는 건가. 아무래도 이 지도는 다중영창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기록한 모양이군.’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리고 또 하나의 아이템이 있다. 천사의 눈물로 불리는 청루석으로 만들어진 반지. 김성철은 다음으로 반지를 집었다. < 청루석 반지 > 등급 : 레어 분류 : 잡화 효과 : 고가품 비고 : 청루석은 최고의 마법 매질 재료이나 강도가 약해 쓰이지 않는다. 아름다운 빛과 문양으로 장식품의 재료로 주로 쓰이는 편. 고블린 가죽으로 만든 지도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물건이다. 안을 살펴봐도 특별한 술식은 없었다. 진실의 눈으로 들여 봐도 결과는 마찬가지. 지도처럼 숨겨진 메시지는 일체 없다. 하지만 그 지도와 반지는 다구의 마법사 사자토스의 가장 심오한 비밀인 다중영창에 대한 실마리를 풀 열쇠로 보인다. 베스티아레가 그러했듯이 사자토스 또한 허투루 진정한 보상을 남기지 않았을 터이니. ‘사자토스가 남긴 진정한 보상은 아무래도 칼날 비명 산맥을 넘어서야 알 수 있을 것 같군.’ 김성철은 두 개의 아이템을 영혼 창고에 넣으며 자신을 둘러싼 결계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무의 지대가 사라지고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작은 연못의 풍경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낯익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벌써 끝났어요?” 아무개다. 가부좌를 아직까지 하고 있는 걸로 보아 그동안 계속해서 일반 퀘스트 쪽을 수행하고 있는 걸로 보였다. 김성철은 하늘을 바라봤다. 해는 어느새 서쪽을 향해 기울고 있었다. “얼마 정도 시간이 흘렀지?” “2시간 정도요.” “그렇군.” 김성철은 석상에서 물러나 연못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가 연못 밖으로 나가는 순간, 연못 중앙의 석상이 무너져 내렸다. “응?” 아무개가 깜짝 놀라 부서진 석상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옷이 젖는 것도 마다하고 무릎을 굽혀 파편을 건져 올려 손으로 살폈다. ‘응? 퀘스트가 없어졌어? 이럴 리가. 칠영웅이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은 내친다는 소문은 있지만 이런 식으로 핵심 구조물이 부서지는 경우의 수는...’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놀라움이 더욱 커졌다. 아무개의 고개가 김성철을 향해 돌아갔다. “어떻게 된 거죠? 이건.” “글쎄.” 김성철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위업 달성이니 뭐니 떠들고 다녀봐야 좋은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 아무개는 상기된 얼굴로 김성철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설마... 위업을 달성했나요?” “…….” 김성철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무개를 노려보며 담담하게 한 마디 던졌을 뿐이다. “서로 간에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한 거 아니었나?” 그것은 처음 만날 때 상호 간에 한 가장 중요한 약속이다. 아무리 흥분했다고는 하나 아무개 또한 그 약조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아.. 네... 그랬었죠.” 아무개는 심호흡을 몇 차례하고 원래의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미안해요. 괜한 걸 물어서.” “관계없어.” 김성철은 광장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배에서 의도치 않은 소리가 울렸다. 꼬르륵. 모처럼 날뛰었더니 허기가 진 모양이다. 그 소리는 아무개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배가 좀 고프신 모양이네요?” 자연적인 생리현상이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어색한 미소가 아무개의 입가에 떠올라 있었다.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개를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 식사나 할 참인데 같이 할 텐가?” “괜찮아요. 벽돌 조각 같은 빵 같이 씹는 취미는 없어서요.” 아무개는 정중하게 사양하고 먼저 돌아가려 한다. 앞서가는 아무개를 향해 김성철이 말했다. “그래? 등급전에서 받은 고기도 있겠다, 모처럼 솜씨를 발휘할까 했는데...” 김성철이 세상과 등지면서 가장 힘들어 했던 것은 바로 먹는 부분이었다. 처음에야 대충 익힌 고기, 과일, 풀 따위로 끼니를 채웠지만 그런 생활도 하루 이틀이지 맛있는 걸 먹고 싶다는 욕구는 점점 커져 마침내 억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결국 김성철은 첫 서브 클래스로 요리인을 취득, 이계를 유랑하며 고독한 요리인의 길을 걸었다. 부단한 수련 끝에 아무나 얻을 수 없다는 고급 요리인의 자격까지 손에 넣는 동안 김성철의 내면엔 한 가지 인생철학이 자연스레 자리 잡게 되었다. 배가 고플 땐 맛있는 걸 먹는다. 지금 모처럼 배가 고프니 맛있는 걸 먹을 최상의 기회다. 괜찮은 식재도 있고 좋은 퀘스트를 준 우호적인 손님도 있으니까. “고기라면.. 뭘 말하시는 거죠? 설마 등급전에 나온 그 정체모를 새고기요?” 아무개에게도 당연히 고기가 나왔을 것이다. 데스매치 룰에서 당당하게 1위를 차지했으니. 하지만 그 고기는 조리하기 쉬운 게 아니다. “냄새나고 질겨서 못 먹겠던데요? 차라리 사과나 몇 알 더 주면 좋았을 텐데.” 이미 시식을 해 본 모양이다. 어설픈 요리 실력으로 조리해서 말이다. 김성철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서렸다. “왕 산 닭은 조리하기에 따라 왕의 식탁에 오를 수도 거지의 밥상에 오를 수도 있는 식재지.” “왕.. 산.. 닭..? 그게 그 고기의 이름인가요?” “믿고 맡겨 봐. 요리라면 자신이 있으니까.” * 김성철은 아무개는 절벽 가까이 있는 동굴 쪽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동굴 주변에 익숙한 냄새가 난다. “이건.. 사람의 피 냄새?” 아무개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김성철은 손을 들어 올리며 앞서갔다. “기다려봐. 불청객이 찾아온 모양이군.” 김성철은 천천히 동굴로 향했다. 동굴 입구 쪽에 핏자국과 피로 새긴 발자국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발자국들의 형태로 보아 필경 동굴의 주인에게 혼쭐이 나고 줄행랑을 친 게 틀림없다. “크르르르르!” 곧 동굴의 주인이 어둠 속에서 두 눈을 번쩍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곰. 형상은 곰이지만 호랑이 무늬를 지녔다. 호랑이 곰. 소환 궁전 주변에 출몰하는 무시무시한 마물로 생긴 것과 달리 식성은 초식성. 꿀을 특히 좋아한다. 하지만 이 거대한 야수는 덩치만큼이나 강력해 신입 소환자 수십 명이 달라붙어야 간신히 상처 입힐 수 있을 정도의 괴물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신입 소환자의 기준. 김성철은 호랑이 곰을 노려봤다. 의기양양하게 모습을 드러낸 호랑이 곰은 김성철과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꺼져라.” 서릿발 같은 한마디가 떨어지자 거대한 야수는 부리나케 동굴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그 광경을 본 아무개가 조심스레 묻는다. “혹시... 드루이드세요...?” “…….” 복날 개 패듯 두들겨 패 얼굴만 봐도 도망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말할 수 없다. 김성철은 동굴 안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곰굴 안에 넣길 잘했군. 3주차나 되니까 슬슬 소환자들도 몸에 힘도 붙었겠다, 여기까지 진출할 때니.’ 동굴 안쪽에 모셔둔 고기들은 당연히 무사했다. 동굴 구석에 벌벌 떨며 자신을 곁눈질로 쳐다보는 호랑이 곰을 뒤로 하고 김성철은 서늘한 동굴 안에서 잘 숙성시킨 고기 한 토막을 가지고 나왔다. 그것은 나뭇잎에 싼 닭고기였다. “잠깐, 식재 좀 구해오지.” 김성철은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떠난 다음 영혼창고를 열어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엔 필수적인 조미료부터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비싼 귀중한 향신료까지 요리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김성철은 그중 비교적 표가 안 나고 자기주장이 약한 것들을 추려 나뭇잎에 싸 버무린 후 영혼 창고 안에 있는 다른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엔 갖은 말린 채소와 버섯 같은 보존 식품이 가득했다. 김성철은 그중 버섯 몇 종을 추려 다시 아무개가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왔다. “1시간 반 정도 걸릴 건데 기다려줄 수 있나?” 아무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성철은 즉시 가지고 온 재료를 닭의 속 안에 채워 넣고 넓적한 잎사귀를 구해 닭을 싼 후 거기다 진흙을 바르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죠?” 김성철을 지켜보던 아무개가 질문을 던졌다. “요리.” 진흙을 두텁게 바른 김성철은 불을 지피고 그 위에 진흙 바른 닭을 올려놨다. 요리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간단했다. 적어도 아무개의 눈엔 말이다. 1시간 반이 지났다. 김성철은 바싹 구워진 진흙더미를 꺼내 시작의 검 손잡이로 흙껍질을 깨기 시작했다. 투둑. 진흙 더미가 빼어져 나가며 그 안에 깃들어 있던 육향이 사방으로 퍼졌다. 아무개의 눈동자엔 경악이 입가엔 침이 흘렀다. ‘세상에.. 뭐지? 이 향기는...?!’ 김성철은 묵묵히 껍질을 깬 후 닭의 반을 잘라 아무개에게 내밀었다. “변변치 않지만 맛보시게.” 아무개는 자신 앞에 속살을 드러낸 황금빛 속살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킨 후 손으로 찢어 입안으로 가져갔다. “...아!!” 입 안에 고기를 넣는 그 순간, 아무개의 눈앞에 왕 산 닭이 살아온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알을 깰 때의 사투, 형제자매간의 먹이 다툼, 솜털을 벗고 제법 볏이 돋던 청소년기, 건넛산 암컷과의 운명적인 조우 그리고... 도축. ‘엄청 맛있어.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이야...!!’ 흘러나오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아무개는 모처럼의 정찬을 게걸스럽게 먹었다. 체면도 격식도 절대적인 맛 앞엔 무용이었다. 반면 김성철에겐 평범한 음식이었다. ‘58점이라. 하긴 재료도 도구도 변변찮은 곳에서 50점 이상의 음식을 만들어내긴 어렵겠지.’ 요리인 클래스는 맛을 본 요리의 점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김성철에겐 별 필요없는 능력이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은 식사. 식사가 끝난 후, 둘은 광장을 향해 떠났다. 오랜 침묵이 있은 후 아무개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뒤를 따라잡으며 말을 걸었다. “우리 거래 하나 하지 않을래요?” ======================================= 10. 선발전 “거래?” 김성철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무개는 김성철의 등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다음 등급전 룰이 뭔지 알고 계시죠?”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등급전은 대장전 룰. 소환 궁전 최후의 등급전이다. 방식은 간단하다. 광장 당 서른 명의 전사를 선발해 다른 광장에서 선발 된 서른 명의 전사와 일 대 일의 승부를 펼쳐 승자 수가 많은 광장이 승리를 얻는 방식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대장전에서는 기권과 무승부도 인정된다는 것이고 그 패널티도 적다는 것이다. 불이익이라고 해봐야 승자 보상을 얻지 못하는 것이 전부. 가장 중요한 목숨은 기권만 해도 지킬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대장전이 다른 엄격한 등급전 룰에 비해 물렁한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지만 내막을 알고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마지막 등급전의 진정한 어려움은 대장전 그 자체가 아니라 대장전에서 싸울 서른 명의 전사를 추리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 백광장에 살아남은 인원은 6백에서 7백 명 사이. 이중에서 오직 서른 명만이 대장전에 참가할 기회를 얻게 되고 나머지는 강제적으로 목숨을 담보로 한 도박을 해야 한다. 30연속 승자 예측이라는 죽음의 확률 게임을 말이다. 소환 궁전이 만들어진 이래 30연속 승자 예측에서 살아남은 소환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런 이유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으로 선발전이라 불리는 지옥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곧 있을 선발전과 관련한 이야기예요.” 짧은 침묵을 깨고 아무개가 입을 열었다. “당신하고는 이미 손을 잡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저만의 생각일 수도 있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이계에서는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맛있는 식사 한 끼를 대접받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전적인 믿음을 주는 것은 경솔한 일이다. 어제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는 곳이 이계니까. 게다가 그 상대방이 만만치 않은 적수라면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아무개의 눈에 비친 김성철의 첫인상은 평범했다. 아무 특징이 없는 사람 같았다. 검술도 평범하고 스피드와 힘도 대단치 않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개는 김성철에게서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탐탐 전 때도 그러했고 늑대 인간 전 때도 그러했다. 뭔가 어설픈 것 같지만 언제나 감쪽같이 해냈다. 게다가 그는 홀로 늑대 인간 박아람을 처치했고 사자토스의 위업을 완수해 사자토스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아무개의 경계심을 끌어올린 건 단연 후자였다. ‘칠영웅이 소환 궁전에 남긴 난제들은 난해하기 그지없어 지난 수천 년간 아무도 해결한 사람이 없었어. 그걸 저 사람은 단 2시간 만에 풀었어.’ 칠영웅의 위업은 궁전 바깥에서 상당한 단련을 쌓고 와도 해결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칠영웅의 흔적은 시련을 치르는 자의 능력치를 보고자 하는 게 아니라 시련을 치르는 자의 자질을 보고자 하는 것이기에. 외부에서 능력치를 쌓고 온 자가 자신의 힘만을 믿고 억지로 퀘스트를 진행 할 경우, 퀘스트 진행이 거부되거나 칠영웅이 심어 둔 함정에 당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특히 사자토스는 칠영웅 중에서도 괴팍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영웅. 그 사자토스의 시련을 2시간 만에 해결했다는 건 둘 중 하나다. 김성철의 자질이 사자토스를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거나 아니면 김성철 자체가 사자토스의 마음에 들었다거나. ‘어떻게 위업을 달성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보통 사람은 절대 아니야. 따라서 적으로 돌려서는 안 돼.’ 아무개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자신이 쥐고 있는 최고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제가 선발전에서 위기에 처할 경우 저를 도와주세요. 제가 대장전의 일원으로 무사히 선발될 경우, 사자토스 이외에 다른 칠영웅이 남긴 흔적이 있는 장소를 알려드릴 테니.” 김성철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다른 칠영웅의 흔적? 그 말은 사자토스 이외의 칠영웅의 퀘스트가 이 주변에 있다는 이야기인가?”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다. 하지만 김성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무개를 응시했다. 아무개는 고개를 끄덕이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최후의 전투를 벌이기 전, 칠영웅이 소환 궁전에 모여 각각의 비전을 담은 흔적을 만들었죠. 혹 그들이 실패할 경우, 후손들에게 그들이 떠안은 짐을 맡기기 위해서.” 김성철은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손해 볼 게 없는 제의다. 어차피 아무개와 싸울 생각도 없었고 아무개 정도의 인물이 선발전에서 위기에 처한다는 게 쉬운 일도 아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조건은 만족될 것이다. 게다가 이건 기회다. 칠영웅의 자취를 통해 그들의 얼굴을 눈으로 익힐 수 있는. 상대방을 찾아서 죽이려면 얼굴을 아는 편이 훨씬 수월하니 말이다. 생각을 정리한 김성철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승낙을 하려고 할 때였다. 김성철은 문득 싸늘한 적의가 가까운 곳에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오고 있어.” 마물이 아니다. 인간의 기척이다. 김성철은 급히 숲속 덤불 아래 모습을 감추었다. 아무개도 뒤늦게 인기척을 느끼고 김성철 옆에 숨어 기척을 지웠다. 아무개가 기척을 지우는 그 순간 김성철은 놀라움을 느꼈다. ‘이 여자...’ 바로 옆에 있음에도 존재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를 지워버렸다. 훈련이라기보다는 타고난 능력으로 보였다. 곧 숲 너머에서 나타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의수와 의족을 걸친, 개가죽으로 만든 로브를 걸친 추악한 자들이 호롱불을 들고 나타났다. 그 숫자는 일곱 명. 그들 아래엔 불구가 된 호문클루스들이 개목걸이에 묶여 노예사냥꾼들의 발에 채여 가며 기어 다니고 있었다. 김성철은 한 눈에 그들의 정체를 파악했다. ‘노예사냥꾼들이군.’ 기이한 일이다. 노예사냥꾼들은 대규모 소환이 일어난 첫 주에 노예를 확보하러 광장에 발을 들여놓지만 그 이후로는 광장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괴팍한 의뢰인의 특별한 의뢰가 없는 이상엔 말이다. “이쪽인 거예요! 주인님! 이 신발 자국이 절벽 쪽으로 향해 있는 거예요!” 팔이 하나 없는 호문클루스가 바닥을 살피며 시끄럽게 소리쳤다. 노예사냥꾼들은 서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호문클루스가 안내하는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이 사라진 후 김성철과 아무개는 은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뭐였던 걸까요?” “글쎄.” 김성철은 방금 노예사냥꾼들이 있었던 자리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바닥을 살폈다. 신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혀 있었지만 그는 호문클루스가 가리키던 신발자국이 무엇인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 아는 신발 자국이다. 김성철은 아무개의 발밑을 응시했다. ‘그렇군.’ 예상한대로 호문클루스가 지적했던 신발자국은 아무개의 것과 일치하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개는 노림 받고 있다. ‘역시 회귀자라는 걸 들킨 건가.’ 지금처럼 위험한 시대에 회귀자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고 그리고 세상은 그들이 단순히 미래의 지식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정도로 녹록하지가 않다. 김성철은 회귀자들이 이계의 권력자들에게 어떻게 다뤄지는지 알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를 알려주는 고기 토막.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대부분의 회귀자가 그 높은 이상에도 불구하고 조기에 붙잡혀 고문실에 감금, 죽을 때까지 고문당하며 미래에 대한 정보를 털어놓는 신세로 전락한다. 아무개도 그런 운명에 처할 가능성이 높으리라. “…몸조심 하는 게 좋겠군. 저들은 너를 노리고 있다.” 그것이 김성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충고. 회귀자 사냥과 관련하여 김성철은 아무개를 도울 생각이 없었다. 회귀자 사냥을 지시할 정도라면 그 뒷배경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소리니까. “궁금하네요. 왜 그들이 절 쫓는지. 제 입으로 말하긴 조금 그렇지만 그렇게 예쁜 얼굴도 아닌데... 하지만 걱정하진 마세요.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건 자신 있으니까요.” 아무개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광장으로 향했다. “여기서부터 갈라지지. 먼저 광장으로 가겠다.” “저기.. 혹시 아까 제 말씀은...?” 떠나는 김성철을 아무개가 불러 세웠다. 김성철은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방금 제의는 승낙한 걸로 하지. 선발전에서 도와주겠다. 대신 약속한 것을 지키기 바란다.” 그 말을 남기고 김성철은 빠른 걸음으로 숲을 빠져나갔다. 광장 입구엔 작은 손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손님은 광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하늘에서 훌쩍 뛰어내려 김성철의 어깨 아래에 내려앉았다. “뀨뀨!” 크릴 리갈의 하늘 다람쥐였다. 김성철은 다람쥐 목에 걸린 작은 주머니 안에 든 쪽지를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 외벽 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제 작은 친구가 길을 안내할 것입니다. ] * 다시 만난 크릴 리갈은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처음 본 크릴 리갈이 어리숙하고 순진했던 신입 마법사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면 성벽 아래 재회한 크릴 리갈은 제법 노회한 마법사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김성철 씨.”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여유라기보다는 훈련으로 만들어낸 뻔뻔함이 젊은 마법사의 전신을 감싸고 있다. “…내게 무슨 볼 일이지?” 김성철의 태도는 냉랭했다. 크릴 리갈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말입니다. 조금 문제가 생겨서요. 네, 돈이 좀 더 필요하게 됐습니다. 평소보다 많이요. 위쪽에서 점점 압박이 심해지는데 참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요즘은 그냥 작심하고 절 털어먹으려고 쪼아대더군요.”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크릴 리갈을 노려보고 있었다. 김성철이 아무 말도 하지 앉자 크릴 리갈은 무안함을 느꼈는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한 번만 더 도와주세요.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 “네. 그 인간이 더 요구해도 이번이 마지막이 되게 할 게요. 제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습니다!” 크릴 리갈은 다짐이라도 하듯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두드리며 강하게 호소했다. “네 이름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거지?” 김성철의 반응은 냉담했다. 크릴 리갈의 입술이 일순 씰룩거렸다. ‘이 새끼가...’ 잠깐이었지만 김성철이 그 모습을 놓칠 리가 없다. ‘제법 그동안 머리가 큰 모양이군.’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김성철은 품속에서 보석 3개를 꺼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크릴 리갈은 두 손으로 보석을 넙죽 받았다. “어이쿠! 이런 귀한 걸 3개씩이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크릴 리갈은 싱글벙글 웃으며 김성철에게 팔찌 하나를 건넸다. “사실 제가 여기 나온 건 이걸 전해주기 위함입니다. 이 녀석은 제 작은 친구가 운반하기엔 너무 무겁거든요.” 구리로 만든 낡은 팔찌였다. 받고 보니 꽤나 묵직한 게 크릴의 말 대로 하늘 다람쥐로서는 운반하기 버거웠으리라. “이건 뭐지?” 김성철이 팔찌를 쥐며 물었다. “소환 궁전의 안전한 수료를 보장하는 통행증 정도로 보면 될 것 같군요.” “구체적으로 말해라.” “네. 네. 다시 설명 드리죠. 그 팔찌를 차고 있으면 당신은 선발전에서부터 대장전까지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승리를 얻는 기적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팔찌다. 감정도 되지 않는 걸 보니 어떤 마법효과도 들어가 있지 않은 평범한 물건으로 보인다. 크릴 리갈은 보석 세 개를 자신의 품속에 챙기고는 손가락을 퉁겨 김성철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는 자신의 애완동물을 자신의 어깨 위로 불러왔다. “선발전에 그 팔찌를 끼고 참가하시면 진가를 아실 겁니다. 하지만 돌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너무 놀라지는 마시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남들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으니 말입니다!” 크릴 리갈은 꾸벅 인사를 한 후, 로브의 두건을 뒤집어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김성철은 말없이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팔찌를 눈으로 살폈다.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팔찌. 하지만 김성철의 고유능력. 영혼각인 - 진실의 눈이 발동되자 팔찌 안에 숨겨진 정보가 김성철 앞에 낱낱이 드러났다. < 익명의 팔찌 > 등급 : 레어 - 중급 분류 : 장신구 효과 : 중급 도구 은닉, 익명 부여 익명 : 박아람 비고 : 사용자의 성명을 원하는 이름으로 위장할 수 있다. 단, 능력치는 위장할 수 없다. 두 가지 장난을 쳤다. 하나는 팔찌에 건 도구 은닉. 도구 은닉이 걸린 장비는 다른 아이템과 달리 집거나 쳐다보는 것만으로 아이템 정보를 볼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익명 부여. 팔찌를 낀 자는 팔찌의 익명란에 기재된 인물의 이름으로 타인에게 인식된다. 이 두 가지 장난질을 통해 얻고자 하는 건 김성철을 박아람으로 인식되게 만드는 것. 김성철은 실소했다. 참으로 유치하고 가소로운 수법이다. 아마도 그 이면에 어떤 비열하고 더러운 수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김성철은 팔찌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착용했다. “…좋은 마법사는 죽은 마법사뿐이지.” 크릴 리갈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그가 속이려는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마법사를 죽인 사람이다. ======================================= 10. 선발전 (2) 이튿날. 호문클루스들은 이른 새벽부터 백광장에 나와 광장 중앙에 둥글게 모여 기분 나쁜 주문을 외웠다. “뎃데로데로... 뎃데로데로....” 잠에 취해 있던 소환자들은 갑작스런 호문클루스들의 기행에 하나 둘 눈을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곧 그들은 호문클루스들이 서 있는 지점을 기점으로 광장의 지면이 융기하는 것을 발견했다. 떠오른 지면은 서서히 농구장 규모의 원형 경기장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자, 자, 인간들! 주목하는 거예요! 여기 새로운 훈육실장의 등장인 거예요!” 호문클루스들이 의식을 진행하는 동안 새로운 훈육실장이란 녀석이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유난히 거대했던 전임자엔 못 미치는 덩치지만 일반 호문클루스보다는 큰 녀석으로 검은 모자를 스고 있었다. 새 훈육실장은 단상에 올라 헛기침을 하고는 어디서 본 듯한 말을 시작했다. “본 훈육실장은 소환 궁전 10년 차의 베테랑 호문클루스로 풍부한 경험과 경륜,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인간들을 지켜보고 이끌어 왔으며 나태한 인간들의 이계 적응에 필요한....” 훈육실장 취임사였다. “너무 멋진 거예요!” “나도 꼭 저런 훈육실장이 되고 싶은 거예요!” 호문클루스들만 선망어린 눈빛을 보낼 뿐 인간 중에 귀 기울여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경기장이 완성되자 신임 훈육실장은 주제를 바꿔 오늘 실시될 이벤트에 관한 설명을 시작했다. “자! 인간들! 지금부터 귀 쫑긋 세우고 듣는 거예요! 오늘부터 최후의 등급전에서 우리 백광장을 대표해 싸울 30인의 대장을 선발하는 거예요!” 취임사는 대충 흘려듣던 소환자들이었지만 이어진 선발전에 대한 설명은 바짝 집중해서 들었다. 설명이 끝난 후 소환자들이 보인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삼십 명 안에 포함이 되지 않으면 목숨을 건 도박을 해야 한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선발전이라는 거 결국 우리끼리 싸워야 한다는 소리잖아? 마음에 안 들어.” “하지만 살기 위해선 대장전까지 올라가야 되는 거 아니야? 난 무조건 하겠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아암, 죽을 순 없지!” 광장 전체가 수근거림으로 들썩거렸다. 신임 훈육실장은 야릇한 미소를 지은 채 소환자들을 지켜보다가 곧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징~~~~~ 고막을 뒤흔드는 징소리가 경기장 안쪽에서 울려 퍼졌다. 귀에 귀마개를 한 호문클루스 한 마리가 자기 몸통보다 수배는 큰 징 옆에 서 점잖게 북채를 쥐고 있었다. 거대한 울림은 장내의 소란을 진정시켰다. 훈육실장은 다시 사람들 앞에 나섰다. “자! 자! 설명은 그만! 지금부터 바로 선발전을 시작하는 거예요! 방식은 아까 설명한 대로 비무 방식! 경쟁전에 참가할 인간들은 경기장 위로 올라오는 거예요!”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서로를 쳐다봤다. 비무라는 방식에 익숙하지 않아서다. 비무 방식은 기본적으로는 일 대 일 승부라는 점에서 현대의 격투기 룰과 비슷한 듯 보이지만 격투기와 달리 단판 승부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도전자가 나타나지 않을 때까지 계속 싸워야 한다. 감히 도전할 생각조차 품지 못하는 실력자가 나온다면 빨리 끝나겠지만 어중간한 실력자가 나설 경우 경기가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질 수도 있는 방식인 것이다. 대부분의 소환자는 어중간한 실력을 지닌지라 빨리 나가봐야 득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도록 참가자가 나오지 않자 훈육실장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자, 인간들! 선발전에 안 나가면 후회할 수도 있는 거예요! 빨리빨리 나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한 사내가 용기를 내어 둥그런 경기장 위로 올라갔다. 별 특징 없는 평범한 사내였다. 입고 있는 복장은 낡아 떨어진 캐주얼. “자, 첫 번째 대장 후보가 나타난 거예요! 이에 도전할 인간 없나요? 30초를 주겠어요! 그 안에 이 대장 후보에게 도전 하는 거예요!” 징~~~ 시작을 알리는 징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장내엔 정적이 흘렀다. 놀랍게도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모두 눈치를 보고 각을 재고 있었던 것이다. ‘저 정도는 나도 이기겠는데...’ ‘일단 한 번 돌아가는 꼴을 볼까?’ ‘삼십 명이나 선발한다고 하니 처음은 걸러도 관계없겠지.’ 저마다의 계산이 치열하게 이루어지는 가운데 30초라는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마감을 알리는 징소리가 다시 한 번 장내에 울려 퍼졌고 첫 번째 대장이 탄생했다. “자! 자! 인간들! 첫 번째 후보가 선발된 거예요! 남은 자리는 스물아홉 개! 인간들 눈치 보지 말고 분발하는 거예요!” 너무나도 싱거운 결말이었다. 대장 선발 방식이 이토록 간단하고 쉬운 것일 줄이야. 가장 먼저 작은 용기를 낸 사내는 얼떨떨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주저한 사람들의 얼굴에 실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갖가지 생각이 그들 내면에 깃든다. ‘아.. 내가 나갈 걸 그랬나.’ ‘저 정도는 나도 이길 수 있었는데...’ ‘뭐, 이제 첫 번짼데. 다음부턴 기회가 있겠지!’ 하지만 인간들의 생각이란 대저 비슷한 법이다. 두 번째 대장 선발이 시작되자 한꺼번에 수십 명이 단상에 오르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순식간에 경기장 안은 콩나물시루처럼 가득 차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한 명씩! 한 명씩 입장 하는 거예요! 쓰레기 인간! 질서를 따르는 거예요!” 훈육실장이 소리를 쳐보지만 아무도 듣는 이는 없었다. 서로 밀치고 욕을 내뱉으며 자신의 자리를 어떻게든 지키려고 했다. 그때 한 사내가 나섰다. “야! 야! 비켜! 새끼가..” 깡마른 체격, 형형한 눈빛과 단연 눈에 띄는 전신을 뒤 덮은 용 문신. 천정식이다. 그가 단상에 올라서자 단상 위엔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훈육실장의 말엔 미동도 하지 않던 인간들이 천정식을 보고 고양이 앞의 쥐처럼 얼어붙은 것이다. 천정식은 신속의 단검을 빼어들고는 훈육실장 쪽으로 곁눈질 했다. “지금 죽여도 돼?” 훈육실장이 입을 벌리며 톱니바퀴 같은 이빨을 드러냈다. “말이 잘 통하는 인간은 언제든 환영인 거예요!” 허락이 떨어지자 천정식은 일체의 망설임 없이 검을 들고 군중들을 향해 달려갔다. 한 사내가 검을 뽑아 어설프게 막아보려 하지만 순식간에 단칼에 목줄이 그여 피분수를 내뿜으며 쓰러졌다. “끄아아아악!” 한 명이 죽어 나자빠지자 단상 위에 올라가 있던 사람들은 앞 다투어 밑으로 뛰어내렸다. 사자 한 마리의 난입으로 개들이 모두 쫓겨난 것이다. 홀로 남은 천정식은 싱겁다는 듯 아래를 굽어보며 입맛을 다셨다. 종료를 알리는 징소리가 울려 퍼진 후 천정식은 두 번째 대장으로 선발됐다. 이후로도 비슷한 흐름이 이어졌다. 기가 세고 전투력도 강한 천정식 패들이 잇따라 대장으로 선발됐다. 연달아 여덞 명이 천정식의 패로 채워졌다. 이대로 가다간 천정식 패거리가 전부 대장을 차지할 기세다. 그리고 열 번째 대장 선발전. 구석에 있던 김성철이 조용히 단상 위에 올랐다. 천정식 패거리는 살벌한 눈빛과 야유로 위협했지만 김성철은 초연하기만 했다. “…….” 김성철은 왼팔에 찬 익명의 팔찌를 가만히 응시했다. 팔찌 자체에 부여된 효과는 익명뿐이지만 어떤 결과를 불러오게 될 지는 지금부터 지켜 볼 일이었다. “내가 나서겠다.” 곧 한 사내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눈에 칼자국이 있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로 천정식 패거리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의 체격에는 걸 맞는 큼직한 도끼를 들고 있었다. “도전자가 등장했네요! 그럼 선발전을 시작하는 거예요! 김성철이 시작의 검을 뽑으며 준비를 하려고 할 때 갑자기 누군가 경기장에 난입했다.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 쓴 추레한 차림의 사내였다. 그는 김성철의 것만큼이나 낡은 청바지와 넝마에 가까운 붉은 색 티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특히 붉은 셔츠엔 ‘2002 Be the Reds!’란 빛바랜 문구가 적혀 있었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 녀석... .’ 새로운 난입자는 김성철을 지나 천정식 패의 도전자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뭐야? 넌?” 도끼를 든 천정식의 부하가 눈을 부릅뜨며 위협을 해보지만 그에 대한 답으로 돌아온 것은 번쩍이는 칼날이었다. 챙캉! 칼날과 도끼날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천정식의 부하의 눈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도끼가 뒤로 속절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도끼를 든 사내는 있는 힘을 쥐어 짜내 사내의 칼날을 힘껏 밀어내며 포효했다. “으라챠!!” 하지만 밀려난 칼날은 부드럽게 궤도를 수정해 사내의 사각에서 날아들었다. 스걱-. 고함을 지르던 천정식 부하의 목이 단칼에 잘려 허공 위에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툭! 목이 바닥에 떨어지는 그 순간 목을 잃은 시신은 부들거리다가 이내 지면 아래 엎어졌다. “…….” 광장 전체에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이윽고 분노에 찬 노호성이 침묵을 깨 부셨다. “이 새끼가!” “감히 종길이를 죽여? 넌 오늘 나한테 뒈졌어!!” 천정식 패거리가 들불처럼 들고 일어났다. 동시에 열 명의 남자가 무기를 들고 경기장으로 올라갔다. 벙거지를 쓴 남자는 위기에 처한 걸로 보였다. 김성철은 그때까지 조용히 상황을 관망했다. 김성철은 벙거지를 쓴 남자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다. 마법이나 술식이 걸린 건 아니다. 그보다 근원적인 단계에서의 이상이 느껴졌다. 이윽고 김성철은 그 원인을 발견했다. ‘이 녀석들...’ 광장 위로 또 두 명의 사람들이 올라왔다. 하나 같이 벙거지나 등산모로 얼굴을 가리고 옷보다는 넝마에 가까운 낡은 옷을 걸친 자들이었다. 그들의 호흡은 기계처럼 일정했고 서로 간에 단 한 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았다. 스르릉- 두 개의 검이 추가로 뽑혔다. 넝마를 걸친 자들은 천정식 패거리를 향해 느릿하게 걸어갔다. “해볼까? 응?” “어디서 굴러먹은 새끼들이야!” 겁먹은 개가 짖는 법이다. 천정식 패거리는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증원을 불렀다. 열 명의 사내가 추가로 경기장 위로 올라왔다. 숫자는 이십오 대 삼. 누가 봐도 천정식 패의 승리였다. 천정식 패는 소수정예를 지향하는 정예 전사들의 집단이고 지금은 그 숫자마저 적보다 많으니.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스걱! 푹! 넝마를 걸친 자들의 검술은 신기에 가까웠다. 그들의 검은 적의 검을 흘리고 받아치고 튕겨내 무력화시키면서 자신의 칼날 혹은 검 끝을 어김없이 적의 급소에 박아 넣었다. 몇 개인가의 머리가 바닥에 나뒹굴고 경기장 바닥이 피로 범벅이 되는 데는 오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단 1분 만에 천정식 패는 삼분의 이 이상을 잃고 경기장 아래로 혼비백산하며 도망갔다. “…….” 넝마를 걸친 자들은 아무 말도 없이 아래를 주시하다가 김성철을 남겨두고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이윽고 신입 훈육실장의 유쾌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남은 시간 30초!” 시간 종료를 알리는 징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안 김성철은 넝마를 걸친 자들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역시... 검노(劍奴)들이군.’ 소환 광장에서 잡은 노예가 전부 팔리는 건 아니다. 일부는 의뢰인의 단순 변심으로 인해 의뢰인에게 인도되기도 전에 반품 당한다. 그런데 노예로 예정된 소환자들은 노예사냥꾼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신입 소환자도, 이계의 주민도 아닌 이상한 지위에 놓이게 된다. 속된 말로 붕 떠버린 것이다. 오갈 데 없는 그 존재들은 높은 확률로 처분당하지만 일부는 타고난 재능을 인정받아 다용도로 쓰이곤 한다. 검노라 불리는 노예 검투사도 그중 하나다. 능력치는 보잘 것 없지만 검 하나만을 익히게끔 강제 당했기에 대단히 높은 검 숙련도를 지니고 있고 공포와 감정이 거세되었기에 자신보다 강한 적도 가볍게 베어버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검노가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나타났다. ‘머리를 썼군. 검노는 도구에 불과한 존재니 소환 궁전 측에서 눈감아주기도 쉽고 설령 제재에 나서봐야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 검노들의 비호 아래 김성철은 검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대장전 참가 자격을 손에 넣었다. 경기장 단상에서 내려오자 천정식이 기다렸다는 듯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김성철을 찾아왔다. “어이. 너 뭐하는 새끼야?”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 안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품고 있었다. 감히 똑바로 쳐다보기도 힘든 살기어린 시선이 눈앞에 도사리고 있었지만 늘 그렇듯 김성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으로 어깨너머를 가리키며 조용히 말했다. “나한테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당사자한테 직접 이야기해라.” 김성철의 손끝은 경기장 아래 우두커니 서 있는 검노들을 가리켰다. 천정식은 검노 쪽을 힐끗 쳐다보고는 부하들을 데리고 김성철 앞에서 물러났다. 그 이후로도 선발전은 이어졌다. 천정식 패거리의 기세가 꺾인 것이 확연이 도드라졌다. 김학출 패거리 측에 속한 소환자가 앞 다투어 경기장에 나섰고 사태를 관망하던 내정자들도 하나 둘 선발전에 뛰어들었다. 활발한 경합이 펼쳐졌지만 승자는 보다 우월한 능력치와 장비로 무장한 내정자들이었다. 박정식, 김우정, 배성혜 등 김성철을 따르던 내정자는 물론이고 늑대 인간의 습격으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은 두 명의 내정자도 선발전을 통과했다. 순식간에 서른 개의 자리 중 스무 개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열자리. 아무개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장내엔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천정식이 부하들을 결집해 검노들을 치려고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문클루스들이 사방에 깔려 있었지만 이미 천정식 눈엔 보이는 게 없었다. 이대로 저 검노들을 방치하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한 무리를 이끄는 리더로서 부하들의 죽음조차 갚지 못하는 무능한 자로 낙인찍히고 나아가 그의 파벌까지 해체될지도 모른다. 천정식은 신속의 단검을 뽑아 검노 중 한 명에게 결투를 청했다. 벙거지를 쓰고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은 사내였다. “한 판 뜨자.” “…….” 검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대방이 검을 뽑는 걸 보고 반사적으로 자신의 검을 뽑았다. 천정식이 고함을 지르며 검노를 향해 돌진했다. 챙캉!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검을 맞부딪친 결과 천정식은 상대방의 힘이 자기보다 나을 게 없다는 걸 느꼈다. 오히려 힘은 이쪽이 앞선다. 용기를 얻은 천정식은 폭풍 같은 연쇄 공격을 퍼부었다. 신속의 단검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검노의 급소 여러 곳을 동시에 노렸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검노의 수비에 막혔고 이윽고 공격은 한계점에 부딪쳤다. 공격의 주도권이 천정식에게서 검노로 넘어갔다. 그 순간 천정식은 단순히 힘으로 따질 수 없는 실력의 차이가 자신과 검노 사이에 있는 것을 깨달았지만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녹슬고 군데군데 이가 빠졌지만 피를 잔뜩 머금은 검노의 검이 자신의 복부를 노리고 찔러 들어오고 있었다. 막을 방법은 전무. 천정식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씨발!”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복부를 꿰뚫어 버릴 기세로 찔러 들어오던 검 끝이 누군가의 검에 가로 막힌 것이다. 아무개였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 “잘 봐 저들의 눈을. 사람이 아니야.” “…….” 그제야 천정식은 벙거지 아래에 감춰진 검노의 눈을 봤다. 동공은 사라지고 흰자만이 남은 유령 같은 눈이었다. ‘뭐.. 뭐야.. 이 새끼.. 인간이 아니야?!’ 천정식은 공포를 느끼고 몸을 움츠렸고 검노는 천정식을 놔둔 채 뒤돌아섰다. 아무개가 다음 타자로 나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무개의 실력을 잘 아는 소환자들은 아무도 감히 도전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도전자 없는 거예요? 그럼 30초를 세는 거예요!” 신 훈육신장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아무개는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다가 아래서 자신을 보고 있는 김성철을 발견하고 살짝 손을 흔들었다. 카운트다운이 십 초를 남겨뒀을 무렵이었다. 3명의 사내가 경기장 위로 올라왔다. 넝마를 걸친 자들. 검노들이다. ======================================= 10. 선발전 (3) ‘기이하군.’ 김성철의 미간에 짙은 주름이 새겨졌다. 갑작스럽게 검노가 등장해 자신을 도울 때만 해도 김성철은 어렵지 않게 검노의 뒤에 누가 있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크릴 리갈이다. 크릴 리갈은 익명의 팔찌를 넘길 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마도 검노의 등장은 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리라. 그런데 그 검노들이 아무개를 공격하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회귀자 사냥을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한다고? 그것도 크릴 리갈 따위가?’ 회귀자 사냥은 최상위 권력자들만이 아는 은밀한 비밀이다. 따라서 사냥의 총책임자는 권력자들이 믿고 맡길 수 있는 명성 높고 검증된 강자들이다. 그런 중요한 일에 풋내기 마법사를 쓸 리가 없다. ‘뭔가 잘못 됐군. 내가 잘못 짚은 건가.’ 김성철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단순히 지팡이를 주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은. 김성철은 일단 상황을 관망하기로 마음먹고 경기장을 주시했다. 검노들의 검이 일제히 뽑히고 있었다. 스르릉- 제대로 손질되지 않은 흉측한 칼날들이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아무개는 뒤로 물러나며 신입 훈육실장에게 말했다. “선발전은 일 대 일의 승부 아닌가요?” 훈육실장은 사탕을 으적으적 씹고 있었다. “지금 간식 먹는 중인 거예요. 간식 시간이 끝난 다음에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의도적인 무시. 아무개는 피식 웃고는 경기장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러자 훈육실장은 기다렸다는 듯 톱니바퀴 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 “한 번 경기장에 올라간 사람이 내려가면 실격처리 인거예요! 실격 처리된 사람들은 무조건 30연속 승자 예측 승부에 들어가는 거예요!” 아무개에겐 사형선고와 같은 한 마디였다. ‘이거 설마...?’ 부정적인 추측이 머릿속에서 꿈틀거렸다. 함정이다. 그것도 신입 소환자가 아닌 외부 세력이 개입해서 만든. 저벅저벅. 검노들이 다가오고 있다. 아무개는 스피릿울프 스태프를 꺼내 들었다. 두 마리의 영혼 늑대가 포효하며 아무개 앞에 포진했다. 그녀는 한 손엔 지팡이 한 손엔 검을 들고 다가오는 검노들을 싸늘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검노 하나가 달려들었다. “크르릉!” 스피릿 울프들의 이빨이 다가오는 검노를 노렸다. 검노는 순간적으로 전진을 멈추고 뒤로 몸을 날려 뒤따라오던 나머지 검노들과 합세해 스피릿 울프 두 마리를 간단하게 처리했다. 의도된 협격이 아니라 우연에 의한 협격이다. 군중들은 탄성을 터뜨렸지만 아무개는 아랫입술을 씹으며 자신의 실책을 후회했다. ‘너무 성급했어. 그리고 이 늑대는 3분이 지나야 다시 소환할 수 있는데.’ 측면을 지켜 줄 소환물들이 너무 쉽게 잡혔다. 남은 건 자신의 검을 믿는 것뿐인데 그러기엔 상대방이 지나치게 까다롭다. 이성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검노들에겐 협상도 잔꾀도 통하지 않으니까. 오직 절대적인 힘만이 검노들을 해치울 유일한 수단이지만 지금 아무개에겐 그런 힘이 없다. 쉭! 쉭! 검노들의 검이 아무개를 노리고 날아왔다. 검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아무개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칼날이 조금만 더 옆으로 향했어도 아무개의 목에 구멍을 뚫고도 남을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 김성철 또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관객 중 하나였다.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싸움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그 이면에 깔린 것들을 되짚어보고 있었다. ‘저건 포로로 잡고자 하는 게 아니야. 그랬다면 팔이나 다리만 집요하게 노리도록 명령을 내렸겠지.’ 그때 검노의 검이 다시 아무개의 목을 노렸다. 아무개는 다시 한 번 검을 피해냈지만 머리카락 몇 올이 검에 베여 나풀거렸다. 이걸로 한 가지 의혹은 해결됐다. 검노들이 노리는 건 아무개의 생포가 아니라 아무개의 죽음이다. 하지만 대체 왜? 김성철은 군중 사이로 시선을 옮겼다. 어딘가 검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가 있을 것이다. 마법이든 원시적인 신호든. 곧 김성철 눈에 한 사내가 포착됐다. 낡은 트레이닝 복을 입고 회색 비니를 뒤집어 쓴 사내였다. 옷차림은 생소했지만 그 얼굴은 김성철이 아주 잘 아는 얼굴이었다. ‘크릴 리갈. 저 녀석이 검노를 부리고 있었군’ 크릴 리갈의 손엔 작은 피리가 들려 있었다. 노예사냥꾼들이 쓰는 피리다. 그 것을 본 순간 김성철은 그동안 자리 잡았던 의혹들의 안개가 일시에 걷히는 기분을 느꼈다. ‘크릴 리갈이 노예사냥꾼과 손을 잡았군. 검노들은 노예사냥꾼에게 빌린 것이겠지. 하지만 저 녀석이 왜 아무개를 노리는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군. 적어도 저 놈은 회귀자 사냥과는 관련이 없다는 건 말이야.’ 그렇다면 아무개를 돕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경기장 위의 아무개는 생각보다 훨씬 잘 싸웠다. 사람들의 눈엔 당장이라도 아무개가 살해당할 것처럼 위태로워보였지만 김성철은 다르게 봤다. 간발의 차로 공격을 피하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위기는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럼 어디 실력 구경이나 해볼까.’ 그는 팔짱을 끼고 한결 여유롭게 전투를 감상했다. “하아...” 같은 시각, 아무개는 또 한 번의 검을 피해냈다. 검을 받아낼 수도 있지만 그녀는 검을 섞는 대신 최대한 거리를 두는데 중점을 뒀다. 검노들의 검은 예측하기 어려운 반면 검노들의 발은 느리기 때문이다. 검노들의 맹공을 한 차례 막아낸 아무개는 이제 검노들과 거리를 벌리고 경기장의 공간을 넓게 활용하기 시작했다. 싸움은 양상은 이제 포위전에서 쫓고 쫓기는 추격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경기장의 가장자리를 따라 아무개가 돌면 검노들이 느릿하게 쫓는 꼴이다. 검노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다 함께 몰려다니는 대신 퇴로를 막는 등의 전술을 구사할 수도 있었겠지만 생각이 거세된 검노에게 그건 너무나도 어려운 주문이었다. 덕분에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아무개는 영리한 움직임으로 검노들의 공격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그 광경은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열세에 처한 가냘픈 여성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함성 속에서 피를 말리는 3분이 지났다. 이번에 아무개는 바로 늑대들을 불러내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경기장 외곽을 돌며 검노들의 진형이 무너지기를 기다렸다. 기다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아무개가 선두의 검노에게 일부러 거리를 줬다. 그러자 검노 하나가 진형에서 벗어나 아무개를 향해 검을 찌르며 들어 왔다. 아무개는 검을 피함과 동시에 지팡이를 들어 늑대를 불러냈다. “아오오오오!” 두 마리의 스피릿 울프가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아무개의 발밑에 나타났다. “물어!” 아무개는 늑대들과 함께 돌출된 검노를 덮쳤다. 방향은 삼방향. 검노는 기계적으로 검을 휘둘러 방어를 시도했지만 먼저 덮친 아무개가 맹공을 퍼부어 검노의 신경을 모두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 사이 스피릿 울프의 이빨이 무방비로 노출 된 검노의 목과 발목을 물어뜯었다. 뒤늦게 다른 검노들의 검이 늑대와 아무개를 노려보지만 아무개는 늑대들과 함께 재빨리 뒤로 물러나 치명상을 입은 검노를 지켜봤다. “끄.. 끄윽...” 허옇게 변색된 검노의 동공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어머니...” 죽기 직전 검노의 세뇌가 풀렸다. 그는 팔을 힘겹게 뻗더니 그대로 고꾸라졌다. 이제 남은 검노는 둘. 호흡은 거칠어졌지만 아무개의 표정엔 여유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의 여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뭐.. 뭐야? 저것들.” 또 다른 무리가 경기장으로 올라왔다. 넝마를 걸치고 모자 따위로 얼굴을 감춘 자들. 또 다른 검노들이다. 숫자는 무려 다섯. 아무개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틀렸어. 이건 승산이 없어.’ 몸에 힘이 풀리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러려고 다시 돌아온 게 아닌데.. 나에겐 완수해야 될 사명이 있는데...!’ 세 명과 일곱 명은 그 무게감이 다르다. 물량으로 아무개를 포위하다시피 한 검노들은 느릿하게 아무개를 향해 접근했다. 늑대들이 으르렁거리며 달려 들어보지만 검노들의 공격에 갈가리 찢겨 소멸됐다. 아무개로서는 이제 검을 든 채 뒤로 물러서는 것 이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곧 그녀는 막다른 곳에 몰렸다. “경기장 밖으로 나가면 실격 처리인 거예요!” 사탕을 으적 씹으며 훈육실장이 조롱했다. 절체절명의 상황. 아무개는 잠시 잊고 있던 한 인물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 그 사람! 그 사람은 뭐하는 거지?’ 마치 기다렸다는 듯 구원은 찾아왔다. 아무개는 바로 뒤쪽에서 누군가가 경기장 안으로 올라오고 있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추레한 옷차림에 산발한 더벅머리. 말 수 적고 무뚝뚝하지만 손맛 하나는 기막히게 살아 있던 사내. 김성철이다. “내 뒤에 서라.” 김성철이 검을 뽑아들며 짧게 말했다. 아무개는 고개를 끄덕이고 김성철 뒤로 물러났다. 김성철이 나서자 검노들이 주춤거렸다. 김성철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역시...’ 검노들은 팔찌를 찬 자를 공격하지 않는다. 아니 못하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왜냐하면 팔찌를 찬 사람은 검노를 조종하는 자들에게 있어 반드시 지켜야 할 존재니까. 하지만 이지를 상실한 검노들에게 그런 복잡한 사정 따위가 이해될 수 있을까? 김성철의 검이 검노의 심장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검노는 피하지도 막지도 않았다. 검이 심장에 박혔다. “끄윽....” 사리를 판단할 이지를 상실당한 존재의 한계였다. 오직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는 각기 다른 명령이 충돌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스스로 판단내리지 못한다. 김성철의 검은 그 맹점을 검노의 심장과 함께 찔러버린 것이다. “끄.. 끄으... 집에 가고 싶어...” 심장이 찔린 검노가 제 정신을 찾으며 죽어갔다. 장내는 일순 술렁거렸다. “아니.. 어떻게 된 거야?” “저 인간은 대체.. 뭐지? 저 거지들의 두목인가?” 김성철은 팔에 차고 있던 팔찌를 풀어 아무개에게 건네며 조용히 말했다. “이걸 차라. 그럼 공격받지 않을 것이다.” 짧은 한 마디를 남기고 김성철은 경기장 밖으로 내려갔다. 아무개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던 훈육실장은 여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김성철은 30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됐고 그리고 팔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훈육실장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크릴 리갈을 쳐다봤지만 크릴 리갈도 답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혼란이 이어지는 동안 검노들이 아무개를 향해 다가왔지다. 하지만 아무개가 팔찌를 차자 다가오던 검노들은 석상처럼 굳어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아무개는 김성철처럼 정지한 검노의 심장을 찔렀다. “가자.. 결승으로...!!” 붉은 셔츠를 입은 사내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반항도 저항도 없다. 힘을 얻은 아무개는 재빠르게 검노들을 해방시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3명의 검노가 쓰러졌다. 그리고 아주 낮은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지했던 검노들이 뒤로 물러났고 경기장 아래로 내려갔다. 숨을 죽이며 아무개의 사투를 지켜보던 군중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천정식도 예외는 아니었다. “와 씨발! 끝내 주는데!” 환호의 도가니 속에서 김성철은 군중 사이에 숨어 있는 한 사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트레이닝 복으로 정체를 감추긴 했지만 당혹과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은 크릴 리갈이었다. 김성철은 손을 흔들었다. 크릴 리갈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검노들과 함께 광장 저편으로 사라졌다. “고마워요.” 떠나가는 크릴을 지켜보던 김성철의 등 뒤로 아무개가 다가왔다. 그녀는 빛바랜 구리 팔찌를 건네며 김성철을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정말로 고마웠어요.” 진심이 담긴 감사는 갖은 미사여구로도 전할 수 없는 진실성을 품고 있는 법이다. “…약속을 지킨 것뿐이다.” 김성철은 아무개를 뒤로 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방금 하늘 다람쥐를 통해 받은 쪽지 쪽이 좀 더 김성철의 구미를 당겼다. [ 긴히 할 이야기가 있음. 지금 당장 버려진 성당으로 오시오. ] ======================================= 11. 수료 “개 같은 새끼가...” 크릴 리갈은 반쯤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경애하는 돌로렌스 선배가 직접 맡긴 중요한 임무를 목전에서 실패했으니까. 그의 뒤엔 노예사냥꾼들이 있었다. “그 검노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값은 톡톡히 쳐주셔야 할 겁니다.” 달라는 것도 많고 추악하기 짝이 없는 족속들이지만 지금 크릴 리갈에게 이들보다 든든한 지원군은 없었다. 크릴 리갈은 보석 두 개를 내밀어 노예사냥꾼들에게 건넸다. “선심 한 번 썼습니다. 여러분. 빨리 처리합시다.” 노예사냥꾼의 얼굴에 득의만면한 미소가 떠올랐다. 머리 수 대로 나눠도 최고급 매음굴에서 한 달이나 왕 대접을 받고 살 수 있을 정도는 받을 수 있으리라.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는 노예사냥꾼들에게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 하지만 우려하는 이도 있었다. “이건 좋지 않아.” 과거 크릴 리갈에게 도움을 줬던, 팔 하나가 잘려나가 의수를 단 사내였다. 그는 크릴 리갈의 제의를 거절했지만 다른 노예사냥꾼들이 크릴 리갈의 제의를 수락하자 마지못해 따라왔다. 어쩔 수 없었다. 만약 따라오지 않았다면 그는 동료들에게 죽임 당해 호문클루스의 먹이로 던져졌을 테니까. “소환자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궁전에서 엄금하는 일이야.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 그는 크릴 리갈에게 연거푸 충고를 했다. 처음에 크릴 리갈은 그에게 신세진 것도 있겠다 그가 말하게 내버려두었지만 목전에 목표물이 있는데도 계속 쫑알거리자 마침내 참았던 화를 터뜨리고 말았다. “당신도 손대잖아? 응? 갓 건너온 소환자 잡아서 생각도 못하는 노예 만드는 인간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 외팔 사내는 침묵했다. 명분이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침묵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는 간절한 바램을 담아 최후의 충고를 던졌다. “…나도 에어푸르트 출신이야. 자네 선배지.” 이에 크릴 리갈은 싸늘한 눈으로 외팔 사내를 노려보며 일갈했다. “노예사냥꾼을 선배로 둔 기억은 없습니다.” 외팔 사내는 고개를 숙였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곧 버려진 성당이 목적에 있었다. 크릴 리갈은 버려진 성당 앞에 자신이 찾던 사내가 서 있는 것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여어. 김성철 씨.” 크릴 리갈은 여섯 명의 노예사냥꾼들과 함께 김성철 앞에 섰다.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크릴 리갈과 그 너머의 노예사냥꾼을 바라봤다. “이 자들은 뭐지?” “보면 몰라요? 바깥에서 오신 분이.” 크릴 리갈은 히죽 웃었다. “…….” “그나저나 힘 조금 있다고 세상 너무 우습게보시는 거 같은데.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어요?” 크릴 리갈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그는 만만해 보였어요 라는 말을 할 땐 거의 고함을 지르다시피 했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고! 응? 이 냄새나는 동양인 새끼가!” 크릴 리갈의 뒤에 서 있던 노예사냥꾼들 사이에 조소가 흘러 나왔다. 김성철의 굳게 닫힌 입이 천천히 열렸다. “여기 온 건 너희들뿐인가?” 평소와 별 다를 바 없는 담담한 음성. 크릴 리갈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여기에 있는 우리와 너 뿐이야.” “그래?” 김성철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그게 또 크릴 리갈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크릴 리갈은 잔뜩 흥분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뭘 하려는 지 알려줄까? 일단 여기 뒤에 있는 형씨들과 힘을 합쳐 널 잡을 거야. 그런 다음 네 입에서 죽여 달라는 애원이 나올 때가지 고문을 하고는 노예로 만들 거야. 어떤 노예로 만들지는 생각 좀 해봐야겠지만 말이야.” “훌륭한 계획이군.” 김성철은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크릴 리갈은 옆으로 비켜서며 노예사냥꾼들에게 눈짓했다. “자, 시작하세요.” 노예사냥꾼들이 제각기 무기를 들고 김성철을 향해 걸어갔다. 비록 지금은 노예사냥꾼 신세지만 그들 또한 노예사냥꾼이 되기 전엔 한 가닥 하는 전사요 마법사들이다. 싸움에 대한 경험이 남다르고 능력치도 다르다. 얼굴에 큼지막한 칼자국이 난 사내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바깥에서 힘 좀 쓰셨다는 분이 초보 훈련소로 와서 힘자랑이나 하고. 쪽팔리지도 않아?” 김성철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짧게 대답했다. “응.” 김성철의 신형이 가볍게 흔들렸다. 크릴 리갈의 눈동자에 의문 부호가 떠오른 순간 둔탁한 파공음이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켁!” 김성철의 주먹이 노예사냥꾼의 턱을 강타하고 있었다. 크릴 리갈은 주먹에 강타당한 노예사냥꾼의 얼굴이 어떻게 되는지 생생하게 지켜봤다. 얼굴 전체가 글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헉!” 김성철은 멈추지 않았다. 한 놈을 아직 낸 그는 검을 뽑고 나머지 노예사냥꾼들을 글자 그대로 도살하기 시작했다. 상대가 되지 않았다. 노예사냥꾼들은 자신이 어떻게 어떤 식으로 죽는지조차 모른 채 죽음을 맞이했다. 학살은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사.. 살려주세요!” 외팔이 노예사냥꾼이 재빠르게 현실을 파악하고 무릎을 꿇고 목숨을 애걸했다. 그럼에도 김성철이 다가오자 그는 멀쩡한 손으로 붉은 헝겊이 달린 작은 말뚝을 꺼내더니 그걸 자신의 심장에 박았다. 사내의 눈이 격하게 흔들렸지만 그는 이를 꽉 깨물고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급하게 말했다. “매.. 맹세합니다! 이.... 크리스티안 애쉬우드는 오늘 본 광경을 어느 누구에게 발설하지 않을 것을.. 만약 그 맹약을 어길 때의 대가는.. 죽음으로 치르겠다는 것을... 중립신에게 맹세합니다!” 맹세가 끝나자 그의 심장에 박힌 말뚝이 마술처럼 사라졌고 붉은 헝겊은 불에 타 재가 되었다. “호오? 맹약이라. 현명한 친구군.” 김성철은 그를 버려두고 크릴 리갈에게 향했다. 크릴 리갈의 눈이 공포로 휘둥그레 커졌다. 김성철의 우악스런 손이 그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김성철의 손아귀에 실린 감당할 수 없는 힘이 두개골에 전해지자 비로소 크릴 리갈은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었다. ‘줄을 잘못 탔어... 진짜 괴물은... 돌로렌스가 아니라... 바로 이 인간이었어...’ 하지만 낙장불입이다. 김성철은 손아귀에 힘을 주며 늘 그렇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디 한 번 들어볼까. 네 놈의 자초지종을?” * 크릴 리갈은 자신이 아는 모든 사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처음 공고를 보고 소환 궁전에 왔을 때부터 시작해 돌로렌스 윈터러와의 만남, 그녀가 어떻게 마상길을 휘어잡고 아무개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는지. 전망대 안에서 펼쳐지던 모든 사건의 전말이 김성철에게 낱낱이 밝혀졌다. 김성철은 담담하게 크릴 리갈의 이야기를 들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릴 리갈은 몸을 덜덜 떨며 조심스레 김성철을 올려다봤다. “모.. 모든 건 돌로렌스 그 년.. 그 빨강머리가 꾸민 겁니다.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그래?” “그렇고말고요. 저를 살려주면 제가 돌로렌스를 꾀어내 당신 앞에 대령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요.” “네 도움 따윈 필요 없다. 어차피 돌로렌스 윈터러는 내 앞에 스스로 나타날 테니까.” 퍽! 김성철의 주먹이 크릴 리갈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젊은 마법사의 두 눈동자가 각자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더니 칠공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뀨뀨....” 하늘 다람쥐가 죽은 주인의 발밑을 핥으며 주위를 맴돌았다. 김성철은 두려운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노예사냥꾼에게 손짓했다. “어이.” 김성철은 노예사냥꾼과 함께 시체들을 한 곳에 모아 불을 질렀다. 이미 불에 타 폐허가 된 성당 위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시체들을 태우던 중 김성철은 힐끗 노예사냥꾼을 응시했다. 그는 주저앉은 채 움직일 줄 몰랐다. 방금 본 살육극을 보고 온 몸의 힘이 풀려버린 모양이다. 허나 김성철은 그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살려놔도 평생 이 사실을 다른 이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혹 그가 다른 이에게 그 사실을 발설하려 들면 스스로 건 맹약이 발동해 그를 황천으로 안내할 것이다. 그것이 맹약이 가지는 힘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런 순간에 보란 듯이 맹약을 하다니. 김성철의 입가에 실소가 떠올랐다. 다른 건 몰라도 결단력과 판단력 하나만은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노예 사냥꾼이 김성철에게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이름 모를 전사님.” 김성철은 지긋이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나이보다 늙은 얼굴을 지녔지만 나이는 삽십 대 중반. 제법 똘똘한 눈빛을 지닌 사내다. “내게 무슨 볼 일이지?” “전사님이 어디의 누구신지 저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방금 전 보았습니다. 전사님이 보통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요.” “짧게 말해라. 난 광장에 돌아가야 하니까.” “저를 부하로 써주시지 않겠습니까?” “너를?” “크릴 리갈과 거래를 하신 거 같은데.. 제가 다른 건 몰라도 크릴 리갈 같은 풋내기보다는 훨씬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크리스티안 애쉬포드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는 보았다. 제국 기사 출신이던 브룩을 일격에 두 동강 내고 도둑길드의 고위 간부 출신이라는 애꾸눈 기론을 한 주먹에 목이 돌아가게 만드는 것을. 단순히 강하다고 할 레벨이 아니다. 거물이다. 못해도 제국의 근위대 수준이고 철혈 기사단으로 치면 고위 기사의 한 자리를 능히 차지할만한 실력이다. 그런 강자와 연줄만 댈 수 있다면 구질구질한 생활도 청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발.. 저를 써주십시오. 뭐든.. 뭐든 하겠습니다.” 그런데 김성철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딱히 사람이 필요하진 않은데. 노예사냥꾼 되기 전엔 뭘 했지?” “마법사.. 마법사였습니다. 그것도 에어푸르트 출신이죠. 지금은 마법을 쓰지 못하지만 마법에 관한 거라면 뭐든 알고 있습니다.” “마법사라...” 약간의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법사 출신이라면 앞으로 진로설정을 함에 있어 이정표를 제시해줄지도 모르니 말이다. 김성철은 불더미 주위에 처량하게 앉아 있는 하늘 다람쥐를 손으로 감싸 쥐더니 크리스티안에게 내밀었다. “이 작은 녀석을 잘 돌봐줘라. 그리고 수료식 때 이 녀석을 데리고 날 찾아와라.” 그리고 품속에서 보석 하나를 꺼내 크리스티안을 향해 던졌다. 김성철이 크리스티안에게 보내는 신뢰의 표시다. 크리스티안은 두 손으로 보석을 감싸 쥐고 떠나가는 김성철의 뒷모습을 두려움과 기대가 섞인 눈으로 응시했다. * 선발전은 성황리에 끝이 났다. 30명의 대장이 전부 선정됐다. 남은 시간 동안 김성철은 아무개와 함께 소환 궁전 주변에 널려 있는 칠영웅의 자취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처음 찾아간 칠영웅 달타니어스의 자취부터 시작해 다른 영웅들의 자취가 사라져 있었다. 기대하던 칠영웅의 리더 데스포트의 자취도 무너진 기둥만 남아 있을 뿐 가동하지 않았다. “이럴 수가.. 모두 공략을 당했네요.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성철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데스포트를 제외한 남은 칠영웅은 전사계열. 전사의 정점에 이른 김성철이 그들에게 얻을 것은 별로 없다. 김성철로서는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멍하니 무너진 기둥을 응시하던 김성철은 아무개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아직 한 군데가 남아 있지 않나?” “아.. 그렇죠. 그 영웅이 남았죠.” 아무개와 김성철이 말하는 칠영웅. 백영(白影). 칠영웅을 통틀어 가장 베일에 싸인 인물. 암살자라는 것 이외엔 어떤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데 그 이면엔 섬뜩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암살자가 자신을 기록하는 사가들을 모두 죽이고 그 책을 불태웠다는 이야기가 말이다. 다행히 백영의 자취는 살아남아 있었다. 김성철과 아무개는 깊은 숲 목을 맨 백골 사체에서 백영의 자취가 살아남아 있는 걸 확인했다. 그런데 아무개의 반응이 이상하다. 그녀는 퀘스트를 시작하려는 김성철을 가로막고 다급하게 말했다. “정말로 죄송한데.. 이 퀘스트. 제가 하면 안 될까요?” “이유를 말하라.” “다른 건 몰라도.. 이 백영의 위업만큼은 제가 달성해야 해요. 그렇게 해야만 세상을 구할 수가 있어요.” “납득이 잘 안 가는데?” 김성철이 계속해서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아무개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내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으로 김성철을 응시했다. “당신에게만 말씀드리는 거예요. 절대 다른 곳에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괜찮아. 말할 친구도 없으니까.” “친구가.. 없으시다고요?”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군요.” “하던 말을 계속해라.” 아무개는 침착을 되찾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말해도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전 미래에서 왔어요.”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회귀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걸 또 스스로 말하다니. 대단한 각오다. 그 정도로 백영의 위업은 그녀에게 중요한 걸로 보인다. “그 말은 네가 회귀자라는 건가?” 아무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 제 본명은 이수진.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의 미래에서 왔죠. 믿고 안 믿고는 당신에게 달린 일이지만.” 이수진. 예쁜 이름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소 퉁명스러운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뭣 하러 그 미래에서 이 지옥 같은 소환궁전으로 다시 돌아온 거지?” “멸망의 재앙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요.” 이수진은 흔들림 없이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엔 한 줄기의 더러움도 거짓도 찾을 수 없었다. 오직 각오를 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올곧은 눈빛이다. 김성철은 깊은 흥미를 느꼈다. ‘내가 있는데도 세상이 구원되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내가 실패했다는 것인가?’ 실망스런 이야기다. 하지만 회귀자가 말하는 건 불확정한 미래다. 그들이 말하는 미래는 언제든 부정되고 번복될 수 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호기심은 누구나 가지는 법. 김성철은 크게 기대하지 않고 이수진에게 물었다. “무엇으로부터? 설마 그게 칠영웅은 아니겠지?” 적어도 칠영웅이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겨우 그 정도 적을 상대로 패배한다면 세상을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얻은 힘 전체가 부정되는 결과에 지나지 않으니까. 잠시 후, 이수진은 조심스럽게 김성철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두 번째 재앙은 극복됐어요. 세 번째도 마찬가지고요.” 김성철은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자토스 놈의 골통은 부셔졌겠군.’ 그러나 아직 이수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칠영웅 따위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대재앙에 직면했죠....” 순간 김성철은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몸을 위축시키는 끔찍한 불길함이 불길처럼 그를 감쌌다. “그.. 대재앙은... 뭘 말하는 거지?” 불안과 초조 속에서 이수진이 말했다. “…세계의 적. 김성철.” “…?!” 김성철의 눈이 부릅떠졌다 김성철의 격한 반응을 본 이수진이 쓴웃음을 지으며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 오해 마세요. 당신과 다른 동명이인이니까요. 덩치도 얼굴도 전혀 딴 판인데요.” 하지만 김성철의 얼굴은 결코 밝아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말한 세계의 적은 바로 김성철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을 멸망시킨다고...?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갑자기 왜 멍하니 있으세요?” 이수진이 말을 걸어 왔다.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스스로에게 말하듯 읊조린 후 김성철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꺼풀이 만들어낸 어둠 속에서 김성철은 지켜야 할 소중한 존재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 ‘나는 타락하지 않는다.’ ======================================= 11. 수료 (2) 회귀자의 미래는 확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자들의 행동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아무개가 남긴 한 마디는 김성철은 깊은 충격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김성철은 깊은 숲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불면과 불식의 나날을 보냈다. ‘내가.. 이 세상을 멸망시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권력자들이 다가오는 재앙을 그저 지연시키며 후대의 짐으로 떠넘기려고 하고 있을 때 홀로 분연히 떨쳐 오른 사람이 누군가? 김성철이다. 그 이후 세상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는가. 평생의 지기도 잃었고 쌓아올린 명예도 잃었다. 힘을 얻기 위해 세상 그 자체를 적으로 돌려야 했다. 지금 소환 궁전에 숨어 초심자 흉내를 내는 것도 세상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다행히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강철보다 강한 의지를 지닌 사내다. 악령처럼 그를 괴롭혔던 혼란은 등급전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와 함께 씻은 듯 사라졌다. “자! 자! 인간들. 최후의 시련이 온 거예요! 오랜 기간 백광장에서 활약하느라 수고 한 거예요. 이제 저 문을 통해 중앙 광장으로 이동하는 거예요!” 호문클루스들의 안내에 따라 소환자들은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대체 어디 있었던 거죠?” 이수진이 김성철을 발견하고 말을 걸어 왔다.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김성철은 냉랭하게 말했고 이수진과 거리를 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수진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미래에서 온 존재.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김성철의 심기를 껄끄럽게 만들었다. “…….” 이수진은 더 이상 김성철에게 말을 걸지 않았지만 그의 주변을 말없이 맴돌았다. 중앙 광장은 이미 다른 광장에서 온 수백 명의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중심부엔 두 개의 둥근 경기장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다수의 호문클루스들이 경기장 주변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대장으로 선발 된 자들은 경기장 위로 당장 올라오는 거예요.” 김성철을 비롯한 30명의 대장들은 경기장 위로 올라갔다. “예측불가! 흥미진진! 30연속 승자예측 시련에 당첨된 인간들은 이쪽으로 오는 거예요!” 대장에 포함되지 않은 자들은 경기장 아래, 바닥에 돌로 끼적인 O, X, 그리고 공백으로 표시된 커다란 칸 위로 안내됐다. 스스로 싸울 용기가 없는 자, 그저 남들 뒤에 서서 묻어가기만 한 부정탑승자, 약한 자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각각의 칸 위에 섰다. 모두가 침묵한 가운데 한 사내가 갑자기 사람들 앞에 나서더니 소리를 쳤다. “여러분. 진정합시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습니다!” 김학출이다. 그는 결국 대장이 되지 못했다. 어중간한 약자만 남은 선발전 후반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도록 치열했다. 선발전에서 죽은 150여 명의 사망자 중 팔 할 이상이 마지막 다섯 자리를 놓고 발생했다. 김학출도 경기장에 올라가긴 했지만 살벌한 난투극 때문에 금방 내려오게 되었다. 그 와중에 김학출의 얼굴을 체크 못한 호문클루스의 실책을 노려 경기장에 3번이나 올랐다는 건 김학출만이 아는 비밀이지만. 하지만 3번이나 올라도 안 될 놈은 안 되는 법이다. “여러분! 모두 합심해서 반드시 이 시련을 통과합시다! 지혜를 모으면 이겨내지 못할 게 없는 겁니다!” 김학출의 공허한 외침이 잦아들 무렵 최후의 등급전 시작을 알리는 징 소리가 울렸다. “1번 대장들 앞으로!” 적광장과 백광장에서 각각 1번에 선정된 자들이 서로 마주보고 섰다. 백광장의 1번 타자는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나서 운 좋게 대장 자리를 거머쥔 행운의 사나이였다. 각 대장들이 서로 마주 보는 동안 뒤쪽에서 수백 명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두근두근 승자 예측을 시작하는 거예요! 백광장이 이길 것 같으면 O! 질것 같으면 X! 비길 것 같으면 공백 위에 서는 거예요!” 진행을 맡은 훈육실장이 흥겨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광장 전체가 들썩였다. 군중들은 경기장 위에 선 각 대장들의 생김새를 관찰했다. 누가 더 쌘 지 알 길이 없는 현 상황에서 그들이 보고 판단내릴 근거는 대장들의 생김새뿐이었다. 소환자들은 보다 싸움 잘하게 생긴 측에 목숨을 건 베팅을 했다. 물론 머리를 굴려서 베팅 하는 쪽도 있었다. “저 사람! 처음 대장이 된 사람이죠?” 김학출이다. “저 사람은 단순히 운이 좋아 대장이 됐으니 필패할 겁니다. 모두들 X를 향해 갑시다! 저를 믿고 따라오세요!” 김학출이 소리치며 먼저 X칸으로 갔다. 김학출의 말을 무시하던 사람들도 지금만큼은 김학출의 말이 그럴 듯 해 보였다. 전 측근들이 먼저 X칸으로 향했고 그것은 군중심리를 일으켜 대부분의 사람이 X칸으로 몰리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나중엔 칸이 부족해 X칸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도 있을 지경이었다. 잠시 후, 중앙 광장의 철문이 열리며 호문클루스들이 거대한 괴수 한 마리를 끌고 왔다. 9개의 머리를 지닌 공룡 같은 괴수였다. 덩치만 놓고 보면 탐탐보다 훨씬 컸고 생김새도 비할 바 없이 무시무시했다. 그 괴수는 등에 탑승한 호문클루스의 조종을 받아 승자예측조에 속한 인간들 뒤에 섰다. “크르르르르....” 거대한 입에서 떨어진 침이 바닥을 적시는 걸 보고 몇 몇 사람들이 혼절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저쪽에 사람이 많이 몰렸네. 다들 내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적광장에서 나온 1번 대장은 20대 초반의 젊고 자신만만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는 긴장감에 몸이 얼어붙은 백광장의 1번 대장을 향해 씨익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제대로 보긴 한 것 같은데 이걸 어쩌나. 내 심술기가 발동한 거 같은데.” 알 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린 그 사내는 뒤로 돌아서며 심판을 맡은 호문클루스에게 짧게 말했다. “기권하겠어.” 그 말을 들은 심판 호문클루스가 백광장의 대장을 쳐다보며 불쑥 물었다. “거기 인간. 상대방의 기권에 동의하는 거예요?” 백광장의 행운남으로서는 거절 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호문클루스는 하얀 깃발을 높이 들어올렸다. “백광장의 승리.... 인 거예요!” 싱겁지만 그걸로 첫 번째 대장전은 끝이 났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사실 대장전은 어디까지나 보너스 게임적인 성격을 지닌 이벤트다. 네 번째 등급전에서 소환 궁전이 소환자들에게 원하는 것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한정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용기와 진취성을 지닌 사람이니까. 사실상의 등급전은 선발전에서 모두 끝이 난 것이다. 호문클루스가 든 흰 깃발이 들리자마자 9개의 머리를 지닌 괴수가 포효를 했다. 불길한 포효가 이어진 후 괴수는 X칸 위에 선 자들을 짓밟고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야 이 씨발놈아! 적광장이 이긴다며!” 김학출의 측근들이 김학출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어보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다. “어떻게 할 거냐고! 이제! 어!” 김학출은 반쯤 정신 나간 얼굴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가나다라마바사, 아자차카타파하.. 하하!” 곧 괴수의 머리가 그를 집어 삼켰고 그의 노랫말은 괴수의 입 안에서 끊겼다. 수백 명의 생존자가 괴수에게 먹히거나 육중한 발게 짓밟혀 운명을 달리 했다. 한바탕 광풍이 지나간 X칸 위엔 피와 시체만이 남아 있었다. 적광장의 1번 대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어라? 장난이 너무 과했나.” 그걸로 1번 대장전은 끝이 났다. 다음에도 비슷한 흐름이 이어졌지만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도 적지 않았다. 대장전 승리에 대한 보상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특히 선택 보상으로 전직할 클래스의 전직의 서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컸다. 치열한 싸움과 싱거운 부전승이 지나간 후 순서는 김성철 차례에 이르렀다. 김성철은 기권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큰 칼을 든 키가 큰 사내가 김성철 앞에서 이죽거렸다. “하필이면 내 상대라니 운이 나쁘군.” 그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으며 검을 뽑았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하나? 이건 비밀인데 난 여기오기 전에 승리의 여신님을 만났걸랑.” 김성철은 그의 전신에 마법에 의한 축복이 감돌고 있음을 발견했다. ‘버프로 떡칠을 했군. 이 버프를 걸어준 녀석은 아마 저쪽에 있을 빨강머리겠지?’ 김성철은 팔에 찬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이를 드러내고 웃는 상대방을 향해 무뚝뚝하게 물었다. “혹시 그 여신의 머리칼 색깔이 빨간색이던가.” 상대방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 물음에 김성철은 성벽 위, 전망대 쪽을 응시했다. 백광장 측과 연결된 전망대 안엔 돌로렌스 윈터러를 위시한 철혈기사단의 관계자들이 모여 있었다. 크릴 리갈의 연락두절에 마음을 졸이던 돌로렌스는 예정된 팔찌를 찬 사내의 출현에 크게 마음을 놓았다. ‘바보 같은 새끼. 대체 어디로 간 거지? 다른 곳에 갈 거면 미리 연락을 하던가. 아무튼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지만 일단 다시 만나면 가만 두지 않겠어...’ 그녀 옆엔 마상길과 다른 고위 기사들이 담소를 나누며 경기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오. 저 분이 기사단장님의 자제분입니까?” “소문대로 아주 잘 생기신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늠름하군요.” “네. 늠름하군요.” 돌로렌스와 한 패인 마상길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맞장구를 치다가 돌로렌스 쪽을 향해 매섭게 고개를 돌렸다. 마상길과 눈이 마주친 돌로렌스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다. 곧 경기시작을 알리는 징 소리가 울려 퍼졌고 고위 기사들은 숨을 죽이고 싸움을 지켜봤다. 잠시 후, 고위 기사들 사이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철혈기사단장의 아드님이 단 칼에 적광장에서 온 상대방의 심장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 힘을 주체 못하고 달려들던 사내가 침착한 일검에 스스로 꿰여 죽었다는 표현이 어울리겠지만 말이다. “이럴수가..!! 최소 제 눈으로만 헤이스트, 레비테이션, 피어리스 이렇게 3개의 주문을 걸린 상대방을 저렇게 간단하게 쓰러뜨리다니...” “믿을 수 없군요. 저 침착함과 냉정함. 그리고 주저없는 일격. 마치 철혈기사단장님의 신입 소환자 시절을 보는 기분입니다.” 전망대를 가득 채운 환호 속에서 마상길과 돌로렌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상길은 틈을 타 돌로렌스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다그쳤다. “어떻게 된 건가? 마법사.” 마상길은 돌로렌스를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돌로렌스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제가 처리하고 올 게요. 저 인간이 다른 자를 만나기 전까지.” “아니.. 그걸 말이라고...” 그때 고위 기사 두 명이 마상길에게 다가왔다. 마상길의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이내 그는 얼굴을 펴고 동료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여어. 상길이 축하하네. 이 어려운 과업을 제대로 해내다니 승진은 따놓은 당상이구만. 이걸로 우리 철혈기사단은 창시자의 대를 이을 수 있는 유일한 주요 세력이 되겠군.” “아.. 아니. 뭐 그런 거 가지고.” 마상길은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그 틈을 타 돌로렌스는 종종걸음으로 전망대를 빠져나갔다. 도둑고양이처럼 도망치는 돌로렌스의 뒷모습을 보며 마상길은 속으로 생각했다. ‘마법사 나부랭이만 믿고 맡겨서 이런 꼴이 된 거지. 역시 처음부터 내가 직접 나섰어야 했어.’ 마상길은 주변에 양해를 구하고 전망대를 빠져나갔다. 그가 전망대는 나서는 순간, 광장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또 한 명의 대장이 목숨을 건 승부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이수진이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적수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져.. 졌습니다.” 상대방은 항복을 선언했고 이수진은 고개를 끄덕여 받아들였다. 백영의 비전을 흡수한 그녀의 검은 한결 날카로웠고 이제 소환 궁전 안에서는 적수를 찾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가볍게 승리를 딴 이수진은 경기장 아래로 내려가 김성철 쪽으로 향했다. “뭐하세요?” 대답을 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김성철은 이수진을 힐끗 쳐다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는 대로.” 김성철은 궁전 토큰을 하나하나 세며 주머니 안에 집어넣고 있었다. 주머니 안에 들어간 토큰의 숫자는 모두 53개. 목표치를 넘어섰다. “다행이네요. 기분이 좋아지신 거 같아서.” 이수진은 김성철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김성철은 반응하지 않았다. “혹시 제가 잘못한 게 있어요?” 이수진이 기회를 보며 조심스럽게 하지만 감정을 살짝 담아 물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다만, 혼자 있고 싶을 뿐이야.” 모든 궁전 토큰을 주머니 안에 넣은 김성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시작될 시간이군.” 곧 성벽 위에서 광장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커다란 종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소환 궁전의 모든 시련의 종료를 알리는 결말의 종소리였다. ======================================= 11. 수료 (3) “자, 그럼 모두 각자의 전직의 서를 들고 제단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모든 시련을 마친 소환자의 숫자는 83명. 평균보다 수료자가 많다고는 하나 대규모 소환 의식을 통해 소환된 사람의 2,418명이라는 걸 감안하면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니다. 김성철은 품속에 있는 전직의 서를 응시했다. 메아리술사의 서. 칠영웅의 비전이 드디어 김성철의 손에 들어올 순간이 온 것이다. 김성철은 메아리술사의 서를 들고 다른 소환자들과 함께 제단 위에 올라섰다. 두터운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소환 궁전 소속의 마법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나타나 제단 주위를 둘러싸듯 서며 중저음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영창을 시작했다. 제단 곳곳에 새겨진 문양이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며 제단 위에 서 있는 소환자 사이로 빛의 기둥을 쏘아 올렸다. 소환자들은 생전 처음 보는 장관에 입을 벌린 채 넋을 놓고 빛의 기둥을 응시했다. 그 사이 세상 전체는 급속도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태양이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삼켜진 듯 소환 궁전 전체가 갑작스런 어둠에 덮였다. 소환자들은 또 한 번 놀랐지만 김성철은 미동도 없이 하늘을 응시했다. 일식이 일어나고 있었다. 클래스 부여는 통상 시기를 맞춰야 하는 법.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일식은 대규모 클래스 부여를 함에 있어 최상의 순간이다. 태양이 달에 완전히 가려진 그 순간, 마법사들의 영창은 더욱 더 커졌고 이윽고 김성철 앞에 하나의 문자가 떠올랐다. [ 전직의 서를 펼쳐라. ] 김성철은 메아리술사의 서를 펼쳤다. 그러자 제단 위에 머물던 빛의 기둥이 김성철을 향해 다가오더니 그를 빛으로 감쌌다. 메아리술사의 서에 적혀 있는 수만 가지 문자가 책에서 분리되어 빛의 기둥 안에서 떠돌다가 김성철의 몸으로 일제히 쇄도했다. [ 당신에게 메아리의 축복이 깃들었다. ] [ 축하합니다! 전설 클래스 메아리술사를 획득하였습니다! ] 보상 : 클래스 - 메아리술사 획득 김성철은 즉시 클래스와 능력치 창을 띄웠다. “능력치 그리고 클래스.” [능력치] 힘 999+ 민첩 853 체력 801 마력 32 직관력 25 마법저항 621 의지 502 매력 18 운 18 [클래스] 메인 클래스 - 태초의 전사(신화) 서브 클래스 - 메아리술사(전설) 서브 클래스 - 상급 요리인(희귀) 서브 클래스 - 연금술사(희귀) 메아리술사를 드디어 손에 넣었다. 능력치 적인 면에서도 마법과 관련된 수치가 제법 높아졌고 의지도 깨알 같이 1이나 올랐다. 이제 모든 목표를 달성했다. 김성철은 마계의 악마를 떠올렸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일식이 끝나고 세상에 다시 빛이 돌아오자 소환자들은 달라진 그들의 위상을 실감했다. 수백 마리에 달하는 호문클루스들이 모자를 벗으며 인간들을 향해 예의와 존중을 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 자! 인간들! 수고한 거예요! 오늘만큼은 우리 호문클루스들도 살아남은 인간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거예요!”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소환자들은 마침내 이 길고 길었던 지옥이 끝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남쪽의 거대한 성문이 열리고 있었다. [ 소환 궁전을 수료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 [ 당신은 소환 궁전의 모든 시련을 통과했고 이계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자격을 증명했다. ] 모든 생존자들의 눈에 같은 메시지가 나타났다. 눈물을 흘리는 이, 이를 드러내며 웃는 이,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한 가지 사실은 확실했다. 그 지옥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 사람들은 저마다의 걱정과 기대를 안고 활짝 열린 소환 궁전의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성문 너머엔 탁 트인 푸르른 평원이 펼쳐져 있었고 그 너머엔 황금빛으로 빛나는 도시가 그림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실 작정인가요?” 이수진이 다가와 물었다. “…….” 김성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수진의 눈빛에 잠시 쓸쓸함이 머물렀지만 그녀는 이내 떠나가는 그의 등을 향해 깍듯이 인사했다. “연이 닿는다면 다시 만나기를.” 그 말을 남긴 직후 이수진은 동쪽으로 향했다. 김성철의 입에서 얕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로부터 미래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볼까 하는 후회 혹은 망설임이었다. 왜 자신이 타락을 했는지. 어떤 사건들이 나타나게 될 것인지. 하지만 김성철은 그 달콤한 유혹을 결국 이겨냈다. ‘네가 본 미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타락은 아주 작은 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 불확정한 미래 따위에 휘둘려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의문만을 갖게 된다면 아예 그 싹을 잘라버리는 게 옳다. 김성철은 자신을 믿는다.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 당장 이수진과 떨어져야 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성문 너머, 무너진 돌기둥 옆에 붉은 머리칼을 지닌 여자 마법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녕. 귀여운 신입 씨.” 돌로렌스 윈터러가 살갑게 말을 걸었다. “잠시 나랑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고 돌로렌스는 김성철을 외진 숲속으로 데리고 갔다. “순순히 따라와 줘서 고맙네.” 사람들의 시선에 닿지 않는 장소로 간 그녀는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적어도 고통 없이 보내줄게.” 돌로렌스 윈터러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바닥 위에 소용돌이치는 얼음 폭풍을 만들어냈다. 그녀가 손을 뻗자 손바닥 위의 얼음폭풍이 기하급수적으로 거대해지며 김성철을 덮쳤다. 얼음폭풍이 지나간 자리엔 사람 형상의 얼음 덩어리만 남아 있었다.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어떻게 해. 이게 내 일인걸.” 돌로렌스는 지팡이를 고쳐들고 얼어붙은 김성철을 향해 걸어갔다. 얼어붙은 김성철을 후려쳐 산산조각 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녀가 김성철의 시체 앞으로 다가갔을 때 그녀는 예상치 못한 살기가 등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적?!’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넋이 나갈 정도로 묵직한 타격이 돌로렌스의 등허리를 강타했다. 퍽! 단 한 방에 돌로렌스는 그대로 지면에 처박혔다. “크헉!” 돌로렌스는 잠시 숨이 멎었다가 이내 격한 기침을 하며 붉은 피를 기침과 함께 토해냈다. “아아아악!” 방심했다. 눈앞의 손쉬운 먹이를 잡는데 모든 정신이 팔려 예상치 못한 기습을 허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누가. 돌로렌스 윈터러는 등줄기가 끊어질 것 같은 격통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떨려 뒤를 응시했다. 뜻밖의 인물이 그녀의 뒤에 사신처럼 서 있었다. “당... 당신이 왜...?” 돌로렌스를 급습한 건 철혈기사단의 고위기사 마상길이었다. 육중한 전쟁망치를 든 그는 살기 띈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돌로렌스의 머릿속에 오래 전에 본 마법서에서 본 문구 하나가 그림처럼 떠올랐다. 세상에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물은 시시각각 변한다. 빠르든 늦든. “감히 너 따위가 날 가지고 놀 수 있다고 생각했나?” 한때 그녀의 손아귀에 놀아났던 맹수는 줄을 끊고 이제 그녀에게 이빨을 들이대고 있었다. 마상길은 쓰러져 저항하지 못하는 돌로렌스에게 다가가 철퇴를 들어 올렸다. “그.. 그만 둬!”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돌로렌스가 팔 다리를 내저으며 구슬프게 외쳤지만 무의미한 발악일 뿐이었다. 마상길은 철퇴로 그녀의 팔, 다리를 차례로 찍어버렸다. 팔 다리의 관절이 부서지고 이상한 방향으로 꺾였다. 돌로렌스는 그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했지만 눈에 품은 독기만큼은 결코 지우지 않았다. “저주를 내릴 거다.. 마상길!!” “마음대로 해라. 마법사.” 마상길은 사지가 모두 으스러진 돌로렌스의 앞에 서서 군홧발로 머리를 짓밟았다. 돌로렌스의 얼굴이 지면에 처박혔다. 마상길은 돌로렌스를 짓밟은 채 품속에서 파이프를 꺼내 입에 물고는 만족스런 얼굴로 연기를 음미했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나도 참 너무 물렁하다니까. 안 그래? 마법사?” 그러면서 마상길은 서서히 머리를 짓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돌로렌스는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의 비명은 곧 흙속에 파묻혀버렸다. 마상길은 여유롭게 연기를 내뿜으며 얼어붙은 김성철 쪽을 응시했다. “이 자식이 박아람 대역인가? 운 하나는 있는 놈 같던데.” 마상길은 돌로렌스의 머리를 가볍게 걷어찬 후 김성철을 향해 걸어가 얼어붙은 김성철을 눈으로 살폈다. “불쌍하게 됐군. 하지만 이계는 이런 곳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곳이지.” 마상길이 철퇴를 들어 올렸다. 돌로렌스가 하려고 했던 일을 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가 철퇴를 내리치려는 순간, 뜻밖의 목소리가 면전에서 흘러나왔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마상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다음 순간 얼음을 부수며 나타난 우악스런 손길이 마상길의 목을 움켜잡았다. “끄.. 끄어억...” 마상길이 발이 허공으로 올라가며 버둥거렸다. 경악에 물든 눈은 얼음을 깨고 나오는 괴인을 향해 있었다. ‘뭐.. 뭐야. 이 자식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힘 수치만 300을 넘어가는 이른바 초인의 반열에 든 고위기사가 이토록 간단하게 제압당하다니. 그는 있는 힘을 다 해 자신의 목줄을 움켜 쥔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끄.. 끄으윽...” 흐려가는 시야 속에서 의문의 사내는 자신의 얼굴을 만지고 있었다. 얼굴의 골격과 근육이 끔찍한 소리를 내며 뒤틀리고 있었다. 그 순간 마상길은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서.. 설마...?!’ 이윽고 제 모습을 드러낸 괴인의 얼굴을 본 마상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발광했다. “세.. 세.. 세계.... 적... 기... 김!!” 우두둑. 김성철의 아귀가 마상길의 목줄을 글자 그대로 으스러뜨렸다. 허공에 뜬 고위 기사의 시체가 축 늘어졌고 번쩍이는 철갑 아래 똥오줌이 섞인 오물이 흘러나왔다. 김성철은 마상길의 목에 밧줄을 감아 나무에 건 다음 이제 사지가 부러진 채 죽음만을 기다리는 빨간 머리 마법사를 향해 걸어갔다. “장난을 좋아하더군.” 돌로렌스는 입으로 흙을 뱉어내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를 보았다. ‘누구...?’ 돌로렌스 따위 잡배가 김성철의 얼굴을 알 리가 없다. 김성철은 그녀 앞에 서서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운이 나빴어.” 김성철의 손에 거대한 망치가 나타났다. 하늘을 벼려 만든 전쟁 망치 팔 가라즈. 그 전설적인 무기를 본 돌로렌스의 뇌리에 잊고 있던 한 이름이 떠올랐다. ‘설마... 이 인간이 그...!!’ 퍽! 경쾌한 파공음이 숲속 위로 울려 퍼졌다. 놀란 새 몇 마리가 푸드덕 거리며 하늘 위로 날아갔다. 김성철은 익명의 팔찌를 돌로렌스의 으깨진 머리 앞에 버려둔 채 숲을 떠났다. 평원 사이에 난 굽은 도로로 소환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황금도시로 가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어떻게 한다?’ 마법사 클래스를 손에 넣었지만 그것은 또 다른 시작에 불과하다. 김성철은 마법사를 상대하는 일엔 익숙하지만 마법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은 전무 했다. 제대로 된 마법을 기초부터 배우기 위해서는 마법학교나 길드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김성철에겐 영 좋지 않은 저주가 걸려 있다. “상태창. 저주.” 김성철은 자신에게 걸린 저주들이 표시된 창을 떠올랐다. 눈앞을 무수한 문자들이 뒤덮었다. [저주] 대마법사 발자크의 최후의 전언(직관력 -10) ... 유령 들린 숲의 마녀 아델화이트의 평범한 저주(힘 -5, 발기부전의 저주) 제국의 적(세력 : 인간제국의 주적, 백지 현상금) ... 마법사 연합길드의 적(세력 : 마법사 연합길드 및 그 하위길드의 주적) ... 여기서 지금 당장 문제되는 것은 마법사 연합길드의 적이라는 저주다. 마법사 연합길드는 일부 방랑 마법사, 파문된 마법사를 제외한 모든 마법사와 길드, 학교, 용병단 따위의 단체가 망라된 연합체다. 그런 집단으로부터 김성철은 적으로 선언 당했다. 기만자의 장막으로 정체를 숨길 수 있다지만 의심 많고 음험한 마법사들을 속이고 학교나 길드에 들어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 잠시 고민을 하고 있자니 낯익은 작은 친구가 발밑에서 알짱거리고 있었다. “뀨뀨!” 이제는 고인이 된 크릴 리갈의 하늘 다람쥐다. 김성철은 손을 뻗어 하늘 다람쥐가 자신의 손을 타고 어깨 위에 오르게 해주었다. “거기 계셨군요!” 멀리 북쪽에서 개가죽 로브를 입고 의수를 찬 사내가 해맑게 웃으며 뛰어오고 있었다. 노예사냥꾼 크리스티안 애쉬우드. 무심한 눈으로 노예사냥꾼의 접근을 응시하던 김성철은 곧 그의 전직을 떠올리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 12. 입학 “마법을 배우시겠다고요?” 크리스티안은 놀란 눈으로 김성철을 응시했다.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꺼낸 장독에서 고추장을 주걱으로 떠 끓고 있는 냄비에 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을 배우려고 한다. 신인의 신분으로.” “그.. 그렇군요.” 크리스티안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그는 김성철 같은 유형의 인물이 왜라는 질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기회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황금 도시엔 수많은 마법 길드와 마법학교가 있지만.. 에어푸르트 마법학교에 견줄만한 곳은 별로 없죠.” “에어푸르트 마법학교의 이름은 들어 봤다.” 그 학교 출신을 많이 죽여도 봤고. 김성철은 시냇가에서 잡은 피라미를 된장과 고추장을 풀어 끓인 물에 집어넣고는 숟가락으로 간을 봤다. “음, 좋군.” 주변 농장에서 뜯은 갖은 채소가 모닥불 위에 올려놓은 냄비 안으로 들어갔다. 모닥불 옆엔 뜨겁게 달궈진 돌솥 하나가 구수한 향기를 풍기며 뜸을 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김성철의 행동에 크리스티안은 조금은 당황하고 있었다. ‘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저 귀한 영혼 창고에 식재만 잔뜩 넣어 다니다니... 그것도 어디서 구경하기도 쉽지 않은 기괴한 식재를 말이야.’ 영혼 창고는 영혼 각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자신만의 창고다. 영혼 창고를 지니고 있는 자는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영혼 창고를 열어 원하는 아이템을 수납 및 보관이 가능하다. 하지만 다른 영혼 각인이 그러하듯 영혼 창고를 얻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거액의 돈이 필요하다. 가장 대중적인 10개의 아이템을 보관할 수 있는 영혼 창고(일반)의 경우, 주요도시의 내의 주택 가격과 맞먹는 정도니 그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굳이 강조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저 이름 모를 사내는 그 귀한 영혼 창고를 식재 창고로 쓰고 있었다. 그런 사례는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크리스티안으로서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또 다른 식재 - 에메랄드를 가공해 만든 술병과 소주잔을 꺼내더니 소주잔에 술을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캬!” 그러고는 앞에 떡하니 놓고는 팔팔 끓인 매운탕을 숟가락으로 큼직하게 퍼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돌 솥 밥 위에 비벼 입으로 가져갔다. “…….” 김성철은 눈을 감으며 자신의 요리를 음미했다. [ 이 요리의 점수는... 24점 ] 형편없이 낮은 점수다. 하지만 김성철은 개의치 않았다. 요리인 클래스를 통해 볼 수 있는 음식 점수는 어째서인지 몰라도 한국 전통 요리에 대해선 박한 점수를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특히 젓갈은 아무리 맛있게 담궈도 10점 이상을 받기가 어려웠다. ‘요리인 클래스를 어떤 놈이 관장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초딩 입맛이라는 것이겠지.’ 초록 병에 담긴 증류주와 함께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운 김성철은 자신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크리스티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에어푸르트는 입학하기 까다롭다고 들었다. 사실인가?” “네... 사실 입학하기 조금 까다롭습니다. 일단 나이가 어려야 하고 용모도 단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추천인의 추천이 높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시험은?” “시험도 치긴 하지만 별 비중은 없습니다.” “그래?” 김성철은 나이도 많고 용모도 단정하지 않을 뿐더러 추천인도 없다. “다른 곳은 없나? 들어가기 쉽고 마법을 많이 가르쳐주고 빠른 성장을 보장하는 곳을 원한다.” 김성철이 다시 묻자 크리스티안은 미리 생각한 말을 지체 없이 꺼내 놓았다. “황금 도시에서는 에어푸르트 만한 곳이 없습니다. 나이야 속이면 그만이고 용모는 머리만 조금 다듬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추천인은 제가 어떻게 한 번 구해보겠습니다.” 크리스티안은 품속에서 보석 하나를 꺼내 보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보석은 김성철이 크리스티안에게 신뢰의 증표로 준 것이었다. “이 정도 보석만 있다면 추천인 만드는 것도 누워서 떡먹기죠. 입학심사를 맡고 있는 교수가 저하고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입니다. 이걸로 협상을 해보죠.” 크리스티안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김성철은 품속에서 작은 자루 하나를 꺼내 크리스티안에 내밀었다. 자루를 받자 찰랑 하는 청량한 소리가 자루 속에서 들려왔다. 크리스티안은 자루를 살짝 끌러 그 내용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자루 안엔 순도 99.9%에 달하는 금화들로 가득 차 있었다. “써라.” “처.. 천만의 말씀입니다. 보석 하나만해도 충분한데 이런 거금을...” 김성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금 도시로 먼저 가 있겠다. 언제쯤 결과가 나오겠나?” “이 정도 돈이면 순식간이면 끝날 겁니다. 당장 오늘 저녁이라도 보고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오늘 밤 해가 지면 시계탑 아래 있을 테니 진척 상황을 보고해라.”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설거지 좀 해놓고. 특히 냄비는 빡빡 닦아 놓도록.” 깨끗이 비운 그릇을 남겨 둔 채 김성철은 크리스티안을 뒤로 하고 멀리 보이는 황금빛 도시를 향해 걸어갔다. * 황금 도시. 어떤 세력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 도시이자 모험자들의 산실로 신입 소환자들이 이계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요람이기도 하다. 지금 황금 도시에서는 소환 궁전의 모든 과정을 수료한 신입 소환자 맞이를 위한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삼삼오오, 혹은 홀로 황금 도시에 들어온 신입 소환자들은 도시 입구에서부터 마중 나온 환영인파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이계의 새로운 피를 위하여!” “어서 오세요. 이계로. 우리들은 당신을 환영합니다.” 화관을 쓴 여인들이 화사하게 웃으며 소환자들을 광장으로 안내했다. 소환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도시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광장으로 향했고 몰려나온 인파들이 보는 가운데 뜻하지 않은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술과 음식이 소환자들에게 제공됐고 흥겨운 음악과 춤의 향연이 광장 곳곳에서 벌어졌다. 사람들은 이 축제를 시작의 제전이라고 불렀다. 현실 세계로부터 도착한 새싹들이 소환 궁전의 가혹한 시련을 이겨내고 이계에 첫 발을 내딛는 기념비적인 순간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다. 이 자리엔 황금 도시의 시민뿐만 아니라 뜨내기 모험자들, 성직자, 그리고 이계를 좌지우지 하는 권력층까지 각계각층의 인사가 참가한다. 명목상의 목적은 신입 소환자에 대한 환영과 진심어린 축하지만 실제 목적은 신입 소환자들의 관찰과 채용이다. 대륙 중부의 강국, 인간 제국의 총신인 드미트리 메디오프도 그런 목적을 띄고 이 자리에 왔다. 그는 웃고 떠들며 음식과 술을 먹어 치우는 소환자들을 지루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가? 쓸 만한 인간이 있나?” 화려한 로브를 걸친 중년 사내가 드미트리 옆 좌석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그 사내의 이름은 아르무크 바크르 대륙 북부 3강을 형성하는 거대 세력인 폭풍전선의 연합 군단장이다. 하나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질 이계의 실세가 두 명이나 모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그들에게 쏠렸고 거물들이 온 목적이 무엇인지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수군거렸지만 막상 본인들은 그런 관심 따윈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글쎄. 딱히 쓸 만 한 녀석은 보이지 않아.” 드미트리는 와인 잔을 흔들며 미간을 찌푸렸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정자라는 것들이 생긴 이후부터 소환 궁전에선 제대로 된 원석들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잖나?” 드미트리의 날선 물음에 아르무크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면서도 한 인물을 가리켰다. 천정식이다. “그래도 백광장에서 괜찮은 물건이 하나 나왔더군. 투지와 재능, 근성까지 모두 갖춘 요즘 보기 드문 인재야.” “그러면 뭐해? 이미 고대왕국이 채 간 녀석인데. 제전이 끝나자마자 그 낡아빠진 왕궁으로 데려 가 먼지나 들이마시게 하겠지.” “그렇군. 하지만 그건 아나?” 아르무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운을 뗐다. 드미트리는 시큰둥한 얼굴로 와인 잔을 기울였지만 뒤에 흘러나온 아르무크의 말은 그를 경악으로 몰아넣었다. “칠영웅의 자취가 사라졌다고 하더군. 그것도 하나가 아닌 셋이나.” “말도 안 되는군. 남은 자취는 하나 같이 괴팍하기 이를 데 없어 수천 년간 위업을 달성한 자가 없었고 앞으로도 달성이 불가능한 것으로 결론나지 않았나?” 특히 베스티아레의 시련을 떠올리며 드미트리는 몸서리를 쳤다. ‘그 미친 여자의 미친 생각을 들여다보는 게 얼마나 고역인데. 맨 정신으로는 절대 통과할 수가 없지. 아암. 그렇고말고.’ 그런데 아르무크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랬었지.” 명백한 과거형. “…….” 드미트리는 정색한 얼굴로 비어 있는 지면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술잔을 한 번에 들이켰다. “그게 정말인가?” “내가 왜 거짓을 말하겠나.” 드미트리의 시선은 다시금 연회를 즐기고 있는 신입 소환자를 향했다. “이 중에 칠영웅의 비전을 이어 받은 녀석이 셋이나 있다는 이야기겠군? 그것도 그 끔찍한 베스티아레의 악몽을 끝까지 지켜 본 놈이….” “하나일수도 있어. 회귀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 “회귀자라...” 다른 권력자들이 그런 것처럼 드미트리도 회귀자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한 번 실패한 놈은 계속 실패하는 게 그들이 겪어온 세상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아르무크는 그런 드미트리의 얼굴 표정을 살피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뜬소문이긴 한데 신입 소환자 중 하나가 황금 도시로 들리지 않고 동쪽 황무지로 사라졌다고 하더군. 그것도 상당히 좋은 성적을 거둔 녀석이 말이야. 이거야말로 전형적인 회귀자의 패턴 아닌가?” “회귀자는 아닐 거야. 칠영웅은 한 번 실패한 한심한 것들을 받아들일 정도로 너그러운 존재가 아니니. 설령 회귀자라고 해도 오래 가진 못할 거야. 교단의 추적자들이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니까.” 드미트리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는 한 여성을 응시했다. 제법 아름다운 동양인 여성이었다. 그는 시종을 불러 그녀의 이름을 확인하게 했다. “배성혜라고 합니다. 철혈기사단 고위기사의 조카라고 하더군요.” 철혈기사단의 이름을 들은 드미트리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철혈기사단? 한 물 간 줄 알았는데 용케도 소환 궁전에 찔러 넣을 돈을 마련한 모양이군.” 흥미를 잃은 그의 시선은 다른 인물로 향했다. ‘저건 뭐야. 거지새끼도 아니고.’ 물 빠진 야전상의에 낡은 청바지를 걸친 추레한 분위기의 사내였다. 드미트리는 그를 가리키며 농담조로 말했다. “저 친구는 혼자 소환 궁전에서 10년이나 구른 분위기네. 입은 옷 좀 보라고.” “그러고 보니 저 사내 복장이 기이하군. 잠깐 있어 봐.” 아르무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주먹에 푸른 불길 같은 것이 나타나며 주먹 주위를 돌더니 이내 한 권의 책을 토해냈다. 아르무크는 그 책을 넘겨 가만히 응시하다 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별 볼 일 없는 놈이네. 하지만 이름 하나는 비범하군.” “이름이 뭔데?” “말해서는 안 되는 이름이야. 세계의 적과 같은 이름이지.” “하! 그거 한 번 무시무시한 이름이군그래. 하지만 생긴 것도 딴 판이고 체격 자체가 다른데?” “동명이인이라는 것이겠지. 한국인 중에 김이란 성씨는 흔하고 흔하니까.” “어디 한 번 우리 세계의 적님 능력치 좀 볼까.” 드미트리의 눈이 번뜩였다. 순간 소형 마법진이 그의 안구 앞에 나타나 바퀴처럼 회전하더니 그의 앞에 원하는 정보를 펼쳐 놓았다. <김성철의 능력치 및 클래스 > [능력치] 힘 24 민첩 25 체력 26 마력 32 직관력 25 마법저항 21 의지 18 매력 18 운 18 [클래스] 메인 클래스 - 마법사(일반) 서브 클래스 - 연금술사(희귀) 드미트리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이름만 김성철이군. 하긴 그 자가 이런데 올 리가 없지.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이계의 모든 군세가 총 출동 할 테니까.” 추레한 야전상의를 입은 사내는 이계의 권력자들이 자신을 거론하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술잔만을 기울이고 있었다. 축제가 끝난 후, 그는 도시의 시간을 알려주는 거대 시계탑 아래 서서 곧 찾아올 손님을 기다렸다. 기다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전사님.” 크리스티안 애쉬우드. 개가죽 로브에서 은은한 광택이 서린 검은 로브로 갈아입은 그 사내는 조금은 자신 없는 얼굴로 김성철 앞에 나타났다. “결과는?” “전사님의 입학이 보장됐습니다. 그것도 금화의 절반만을 써서요. 그런데...” 크리스티안은 말끝을 흐렸다. 김성철의 서릿발 같은 음성이 지체 없이 터져 나왔다. “말하라.” “학교에 관해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어떤 소문이지?” 크리스티안은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재앙의 추종자. 그들이 학교 내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고 합니다. 덕분에 쉽게 일이 해결될 수 있긴 했지만...” “재앙의 추종자라...” 김성철은 그 이름을 음미라도 하듯 읊조렸다. 마법사들은 천성적으로 진리라 불리는 마법의 원천을 탐구한다. 그 진리탐구가 적절한 수준에서 그친다면 마법사 개인으로나 이계 전체를 위해서나 모두 이로운 것이 되겠지만 늘 그렇듯 극단이란 존재하는 법이다. 어떤 자들은 진리 탐구를 모든 가치 위에 두고 다른 가치들, 재산, 육체, 심지어 자신의 생명조차 헌신짝처럼 던진다. 리치 같은 살아 있는 시체 마법사가 대표적인 경우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아간 존재들도 있다. 재앙의 추종자. 신의 권능으로 집행되는 재앙 속에 진정한 마법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가 있다고 믿는 정신병자들이다. 김성철이 숱하게 죽였던 마법사들은 바로 그 재앙의 추종자들이었다. 크리스티안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제 모교지만... 지금은 그곳에 가지 않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아시겠지만 재앙의 추종자들이 활동하는 곳엔 배신과 음모, 죽음과 저주가 횡행하니까요.” 그러면서 그는 힐끗 김성철의 얼굴을 살폈다. 놀랍게도 김성철은 웃고 있었다. “그거 마음에 드는군.” ======================================= 12. 입학 (2) 에어푸르트 마법학교. 황금도시 북서부를 둘러 싼 바위산 기슭에 자리 잡은 그곳은 학교라기보다는 성채에 가까운 규모와 외관을 지니고 있었다. “…….” 김성철은 크리스티안에게 건네받은 입학 확인증을 펼쳐 확인했다. 명문이라 불리는 학교의 문서답게 정갈한 필체와 화려한 정장으로 잘 꾸며져 있었지만 정작 학교의 현재 사정은 좋지 않다. 김성철은 학교 정문 옆 높게 솟은 참나무 가지에 교수형 당한 시체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것을 무심한 눈으로 응시했다. 참나무 앞엔 섬뜩한 붉은 색 물감으로 쓴 푯말이 자리 잡고 있었다. [ 이단의 무리에겐 오직 죽음뿐이다. ] [ 이단심문관 마그누스 막시마 ] “이단심문관까지 나선 모양이군.” 생각보다 학교의 상황이 심각하다. 덕분에 돈 몇 푼 찔러주는 것으로 쉽게 입학할 수 있었지만 김성철은 학교 전체에 드리워진 짙은 어둠을 볼 수 있었다. “크리스티안으로부터 이야기는 들었소.” 입학처장 로베르트 단턴은 깡마르고 지쳐 보이는 중년이었다. 그는 대충 김성철의 서류를 눈으로 훑고 덮어버린 후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소환 궁전 출신이라고 하던데.” “그렇소.”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요? 황금도시 외곽이라 찾기 쉽지 않았을 텐데.” “난 내정자 출신이오. 내 뒤를 봐주는 사람이 누군지 말할 순 없지만 날 돌봐주던 마법사에게 이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소.” 김성철은 늘 그렇듯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내정자라는 말을 듣자 로베르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랬었군. 어쩐지 느낌이 평범한 신입 소환자와 다르다고 했더니.” 로베르트는 다시 서류철을 뒤적거려 김성철의 서류를 펼친 후 망치모양의 도장을 들어 서류 구석에 날인을 했다. 두 번의 망치질이 끝난 후, 로베르트는 파이프 담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퉁명스레 말했다. “이걸로 입학 수속은 끝났소. 생활전반에 필요한 사항은 바깥에 기다리고 있을 생활조교가 알려줄 것이니 그 녀석의 말을 따르면 되오.” 김성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로베르트에게 목례를 했다. 김성철이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그나저나, 소문은 듣고 오셨겠지?” 로베르트의 날카로운 음성이 뒤에서 몸을 휘감듯 들려왔다. 김성철은 살짝 고개를 돌려 로베르트의 얼굴을 곁눈질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재앙의 추종자인가 뭔가 하는 자들이 교내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그걸 알고도 용케도 지원하셨군.” 로베르트는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반짝이는 금화 한 닢을 꺼내 보이며 씨익 웃었다. “망해가는 학교에 오신 걸 환영하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김성철이 크리스티안에게 건넸던 금화였다. 로베르트의 집무실을 바깥엔 낯익은 괴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 생도. 이쪽으로 오는 거예요.” 호문클루스다. 소환 궁전 때와 달리 학사 풍의 옷을 걸친 것만 빼면 추악한 외모, 앵앵 거리는 목소리, 거만한 행동거지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김성철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호문클루스를 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 괴물들은 마법사의 플라스크에서 만들어진 것들이었지. 그것도 요정들을 흉내 내서.’ 호문클루스는 요정의 모방품이다. 크기도 비슷하고 말투도 요정의 것을 흉내 낸다. 하지만 요정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외모를 지닌 것에 비해 호문클루스는 흉측하고 혐오스러운 외모를 지니고 있고 마법적인 능력에 있어서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열악하고 조잡한 복제품이지만 잘만 교육시키면 편리한 녀석들이므로 결국 많이 쓰이는 모양이다. “생도! 본 조교는 귀하의 학교생활의 전반적인 사항을 지도, 편달하는 임무를 맡은 생활조교인 거예요. 본 조교는 딱 한 번만 말하니까 항문에 힘 꽉 주고 본 조교의 가르침을 귀 기울여 듣는 거예요!” 생활조교는 먼저 김성철을 교무과로 안내했다. “이곳 교무과에서는 자신이 배우길 원하는 마법학파를 선택할 수 있는 거예요! 어서 빨리 직원에게 자신이 원하는 마법학파를 말하는 거예요!” 의도치 않는 호문클루스의 개입에 페이스가 조금 흐트러지긴 했지만 여기서부터는 김성철도 무엇을 해야 할 지 잘 알고 있었다. ‘여기가 교무과군.’ 서류가 수북하게 쌓인 서가들. 그 앞에 책상을 두고 앉은 엘프 여성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에 가기 전 김성철은 크리스티안에게 에어푸르트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에 대해 물었다. 이에 크리스티안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마법의 위력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게 화염학파이긴 하지만 정작 가장 강력한 마법을 지닌 학파는 하늘의 힘을 끌어다 쓰는 천공학파입니다.” “천공학파? 메테오를 쓰는 무리들 말인가?” 크리스티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성철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천공학파라. 확실히 위력은 인정해. 하지만 그들의 마법은 대규모 전쟁에서나 쓸 법한 물건이 아닌가?” 김성철이 처치해야 될 악마들의 왕 해서니우스 맥스는 노련한 전사이자 교활한 마법사다. 메테오 같은 시전시간이 길고 발동도 느린 마법에 정직하게 맞아줄 리 만무하다. “천공학파는 흔히 집단전에만 강하고 대인전엔 약한 존재로 그려지곤 하는데 실상은 조금 다릅니다.” 그러자 크리스티안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소수 숙련된 천공학파의 마법사들은 천상의 순수한 빛을 불러내 대부분의 적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그런 마법은 본 적이 없는데.” 적어도 김성철이 지금까지 상대한 마법사 중에 그런 마법을 쓰는 자는 없었다. 이에 크리스티안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배우기가 극히 어렵거든요. 요구로 하는 직관력과 마력이 워낙 높아서 입문 마법을 익히는 데만 해도 꼬박 5년이 걸립니다.” “5년씩이나?” “네. 평범한 신입생을 기준으로요. 아무 베이스도 없는 상태에서 책 읽기와 명상만으로 마력 130과 직관력 100을 뚫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아시다시피 기초적인 행동으로 능력치를 올리는 건 수치가 높아질수록 효율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렇지. 그래서 전투나 퀘스트, 혹 위업이라도 있으면 거기에 목을 매는 거지.” “하지만 전사님은 대단히 강한 전사 아닙니까? 전사님이라면 주 전공을 천공학파로 두고 부 전공을 마법검학파를 택해 학교 내에 존재하는 각종 이벤트와 퀘스트를 달성해 빠르게 성장하실 수 있을 겁니다.” 크리스티안의 계획은 치밀했고 빈틈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퀘스트와 정례 행사들이 기재된 소책자를 김성철에게 건넸다. 소책자를 읽어 본 김성철은 확실히 크리스티안이 그의 말 대로 돈값을 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크릴 리갈 같은 위인이었다면 별 생각도 하지 않고 대뜸 화염학파를 권했으리라.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김성철의 마음속에서 일었다. “부전공을 왜 마법검학파 같은 걸로 하는 거지? 부전공을 화염학파나 빙결학파 같은 걸로 선택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이에 크리스티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논리정연하게 그 이유를 밝혔다. 화염학파, 빙결학파, 금속학파, 사령학파, 천공학파 등의 주가 되는 마법 계열엔 고유의 파동과 흐름이 있고 쓰면 쓸수록 고유한 파문이 시전자의 몸에 나이테처럼 쌓여간다. 이를 마법 지문이라고 한다. 한 마법사가 두 개 이상의 마법 지문을 가질 경우 그 마법 지문들은 다른 마법 지문과 충돌하고 갖은 악영향을 낳게 된다. 경미한 경우엔 상위 마법을 쓸 수 없게 되는데 그치지만 심각한 경우엔 폭주로 이어져 생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마법 학교에서 가르치는 부전공은 마법 지문이 발생하지 않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마법검, 차원, 드루이드, 점성술, 감응, 연금술 같은 것들이 이에 속한다. “주 전공은 뭘로 선택하시겠어요? 우리 학교에서 현재 명성을 떨치는 영역은 빙결학파와 화염학파랍니다.” 엘프 여성은 김성철에게 현재 에어푸르트에서 가르치는 주 전공 목록을 내밀었다. 화염학파, 빙결학파, 사령학파, 뇌전학파, 그리고 천공학파 다섯 종이 있었고 각 주 전공 밑엔 현재 유명한 학교 출신 마법사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 ‘확실히 화염학파와 빙결학파에 인물이 많군. 거대 마법길드 중책에 왕실 마법사까지...’ 반면 천공학파엔 단 한 명의 이름만이 기재되어 있었다. 알투지우스 제로. 에어푸르트 마법 학교의 교수. 교장도 아니고 일개 교수다. 선배들의 이름값이 갖는 무게가 다른 곳에 비해 더할 나위 없이 가볍다. 그럼에도 김성철은 망설이지 않고 처음 선택했던 길을 밟아 나갔다. “천공학파로 정했소.” “어머, 천공학파를 하시겠다고요? 아무리 그쪽이 궁전 출신의 소환자라고 해도 쉬운 길은 결코 아닐 텐데요.” “…….” 김성철은 뜻을 꺾지 않았다. 그의 올 곧은 눈빛을 본 엘프 여성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서류에 무언가를 기재했다. “부 전공은 무엇으로 하시겠어요?” 마찬가지로 엘프 여성은 에어푸르트에서 가르치는 부 전공 학문의 목록을 김성철에게 내밀었다. 이중엔 크리스티안이 추천했던 마법검학파를 필두로 차원학파, 환영학파, 감응학파, 고고학파, 연금학파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김성철은 이중 마법검학파와 연금학파를 두고 잠시 고민을 했다. 마법검학파의 경우엔 김성철은 처음부터 더 이상 배울 게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김성철이 그동안 상대한 이른바 마법검사라는 자들은 결국 마법을 쓸 줄 아는 검사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중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는 자와 겨뤄봤고 그 한계를 이미 눈으로 확인한지라 김성철은 마법검학파에 관해서는 어떤 흥미도 느낄 수 없었다. ‘잔재주는 막상막하의 싸움에선 통할 진 몰라도 절대적인 힘 앞에선 무의미하다.’ 마법검학파를 선택한다면 이후 학교 내에 존재하는 퀘스트와 정례 행사에서 쉽고 정당하게 보상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김성철은 왠지 그런 쉬운 길을 걷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왕 배움의 전당에 왔으니 하나라도 배워가는 게 이후의 싸움에 있어서 보다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장고 끝에 김성철은 하품을 해대는 엘프 여성을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금학파로 하겠소.” 엘프 여성은 곁눈질로 김성철을 힐끗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어머, 하나 같이 비인기 과목만 선택하시네. 취향 한 번 독특하셔라.” “…….” 김성철은 개의치 않고 교무과를 나섰다. 교무과 바깥엔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생활조교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인간! 아니 생도! 경로당 화투 치는 것도 아니고 왜 이렇게 늦는 거예요! 이 생활조교가 얼마나 바쁜 호문클루스인지 알고 있는 거예요?” 김성철은 딱히 하등한 생물에 대응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대신 그는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다음 코스.” “저.. 정말 신입 주제에 건방진 생도군요. 조.. 좋아요. 이 생활조교 그동안 쌓아온 체면이란 게 있으니 이번 한 번만 참는 거예요. 빨리 따라오는 거예요!” 다음으로 호문클루스가 안내한 곳은 커다란 마법사의 모자가 놓인 좁은 방이었다. 그런데 모자에 사람의 눈, 코, 입과 비슷한 게 달린 점이 범상치 않다. 김성철은 그 모자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었다. 늙은 조그바트. 살아 있는 모자로 머리 위에 씌우면 학생의 적성과 자질을 순간적으로 판단해 적절한 기숙사의 이름을 말해주는 에어푸르트 마법학교의 명물이라고 한다. “저. 어서 저 모자님을 쓰는 거예요! 모자님을 쓰면 모자님이 생도에게 적합한 기숙사를 추천해주는 거예요!” 생활조교가 김성철의 주위를 돌며 보채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의자에 앉은 후 눈코입이 달린 모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응시했다. ‘이 녀석을 쓸 때 팁이 있다고 했었지.’ 크리스티안의 말에 의하면 늙은 조그바트를 머리 위에 쓸 때 가기 원하는 기숙사의 이름을 3번 마음속으로 외치면 늙은 조그바트는 귀신처럼 그 뜻을 깨닫고 원하는 기숙사의 이름을 말해준다고 한다. 어째서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지만 김성철은 늙은 조그바트를 머리 위로 가지고 갔다. 다음 순간 정수리 위에 낯익은 감촉이 와 닿는 게 느껴졌다. 김성철의 입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건... 몽마군.’ 김성철은 순간적으로 모자의 정체를 파악했다. 모자 안에 몽마를 집어넣고 말하는 모자랍시고 사기를 친 것이다. 몽마에 무슨 장난을 쳐서 말을 하게 하는지 까지는 알 수 없지만 김성철은 불쾌한 기운이 촉수를 타고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감각을 느꼈다. 그 순간 김성철은 생각을 일체 멈추고 한 가지 뚜렷한 목적이 담긴 한 마디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죽인다...!’ 다음으로 김성철은 피 떡이 된 몽마들의 시체를 떠올렸다. “히.. 히이이이!!!!” 말하는 모자가 비명을 질렀다.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짐승의 울음에 가까운 소리였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늙은 조그바트가 비명을 지르다니! 이건 전대미문의 사고인 거예요!” 지켜보던 생활조교가 기겁을 하며 동분서주하는 걸 김성철은 생각을 고쳐먹고 정신을 느슨하게 하여 틈을 준 후, 하나의 단어를 3번 반복해 생각했다. ‘회오(回悟)의 관, 회오의 관, 회오의 관.’ 조건을 만족시키자 비명을 지르던 몽마는 비명을 그치고 김성철이 원하는 이름을 기괴한 목소리로 토해냈다. “회오의 관!” 그걸로 막간의 해프닝은 끝이 났다. 몽마는 단순하고 무지한 생물이다. 김성철이 늙은 조그바트를 벗고 의자 위에 올려놓자 그 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물처럼 가만히 존재했다. 김성철은 여전히 충격에 사로잡힌 생활조교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회오의 관이라고 하는데?” “저.. 저도 들은 거예요! 그런데 회오의 관이라니.. 이건 좀 뭔가 잘못이 있는 거예요!” 생활조교의 반응이 이상하다. “회오의 관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기숙사인데...” “그런데 어쩌나. 이미 저 모자가 그 기숙사를 말했는데.” 다른 건 몰라도 기숙사 선정에 있어서 늙은 조그바트가 호문클루스 따위보다 높은 결정권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 생활조교는 반신반의 하면서도 곧 김성철을 회오의 관으로 안내했다. 곧 성벽의 그늘에 가린 을씨년스러운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듯 건물은 빛바랜 색채를 띠고 있었고 정원은 말라붙은 덤불로 가득했다. “여.. 여기가 회오의 관인 거예요! 저..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 테니까 알아서 방을 잡는 거예요!” 생활조교는 겁에 질려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회오의 관은 그 범상치 않은 외관도 외관이지만 한 여름에도 듣는 이의 소름을 돋게 만드는 섬뜩한 소문들의 진원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성철이 회오의 관을 자신의 기숙사로 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회오의 관은 에어푸르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로 건물 곳곳엔 학교의 선현들이 남겨 놓은 자취가 숨겨져 있다. 물론 그 자취는 평범한 학생으로는 감당하기 어렵고 순수한 악의로 뭉친 것들도 더러 존재하기도 하지만 그 난관을 해결할 수만 있다면 김성철이 원하는 빠른 성장을 일구어낼 수 있을 것이다. “…….” 김성철은 망설임 없이 회오의 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12. 입학 (3) 문을 열자 퀴퀴한 곰팡내가 코끝을 찔러왔다. 목재를 이어 붙인 마룻바닥은 걸을 때마다 비명 소리를 방불케 하는 삐걱거리는 소음을 내질렀다. 김성철은 한 단계 위층에서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척을 감지했다. 그 기척은 소리 없이 빠른 속도로 계단을 내려와 기숙사 안에 드리워진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꼬락서니를 보니 몰래 김성철을 관찰이라도 할 요량인 모양이다. 김성철은 모른 체를 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몇 개의 거미줄을 손으로 해치자 곧 촛불들이 밝혀진 식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식당엔 4명 정도가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목재 테이블이 5개 있었는데 그 중 4개는 사용하지 않는 듯 하얀 천으로 덮여진 반면 나머지 하나엔 아직 싱싱함을 잃지 않은 백합이 담긴 꽃병이 놓여 있었다. “감히 누가 감히 나의 안식을 방해하는가?” 숨어서 김성철은 지켜보던 인물이 입을 연 건 그 즈음이었다. 마치 유령의 것처럼 으스스한 울림을 담은 여성의 목소리다. 아마도 그쪽에선 김성철이 자신을 유령 따위로 착각해 물러나게 하려는 심산이겠지만 김성철에게 그런 하찮은 장난 따윈 통용되지 않는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앞으로 나아갔고 이윽고 의문의 여성이 숨은 방을 지나쳐 계단 위로 올라갔다. “겁도 없군! 감히 나의 경고를 무시하다니!” 다시 한 번 여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그와 동시에 묘한 파동이 기숙사 전체에 퍼지더니 주변의 사물들이 두둥실 떠올라 불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울러 축축한 한기가 복도 전체에 퍼졌고 떠오른 사물들이 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멋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줄행랑으로 치고도 남을 정도로 불가사의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김성철은 그걸 보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고 계단을 걸어 앞으로 올라갔다. 떠올랐던 사물이 내려앉고 한기가 걷힌 건 김성철이 계단에 첫 발을 올려놓았을 때였다. “거기, 당신 진짜 죽고 싶어!”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다. 김성철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 옷을 입은 금발의 소녀가 화가 난 얼굴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연령대는 열다섯 혹은 여섯. 조금만 더 자라면 남자의 혼을 쏙 빼놓을 수 있을 정도의 미모의 싹을 지닌 소녀였다. 그런데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지금 세상에 그 나이 대 소녀는 존재할 수 없다. 종말 세대라 불리는 절멸의 저주를 가까스로 피한 세대의 평균 연령대는 이십 대 초반. 그 밑의 모든 이계의 어린 양들은 신이 내린 저주 아래 고통 받으며 죽어갔다. 혹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김성철이 보기에 저 금발의 소녀는 후자에 해당되는 유형으로 보였다. 곧 김성철은 그 이유를 알아냈다. ‘이 녀석.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군.’ 소녀에게선 불규칙한 호흡만이 들려올 뿐 심장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즉 이미 운명을 달리 한, 살아 있는 시체다. 영혼각인 - 진실의 눈을 가동하자 김성철은 소녀의 몸에 숨겨진 보다 심각한 문제점을 엿볼 수 있었다. 소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십 종에 달하는 보존마법이 소녀의 몸을 뒤덮다시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소녀의 원래 모습을 지키고 싶어 하는 술자의 집념을 느낄 수 있는 광경이었다. 순간, 김성철은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오는 걸 느끼고 얼굴을 찌푸렸다. 소중한 이의 목숨을 붙들어 놓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그 절박한 광기를 이름 모를 소녀에게서 다시 한 번 느꼈던 것이다. 형태는 다르지만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동일하다. “…….” 김성철이 침묵한 가운데 소녀는 김성철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는 찌푸린 김성철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짓궂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야 좀 놀란 척을 하네.” 김성철은 말없이 소녀를 응시했다. “자, 이제 나가주실까? 여긴 내 집이니까. 당신 같은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오면 곤란해.” 소녀는 손을 휘휘 저으며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그 손짓은 무거운 회상에 잠겨 있던 김성철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잠시, 딴 생각을 했었군.’ 입안에 진하게 퍼지는 씁쓸함을 느끼며 김성철은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소녀를 다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난 외부인이 아니야.” “응? 그게 무슨 뜻이지?” 소녀는 팔짱을 끼고 양 발을 살짝 벌린 채 어디 한 번 이유를 말해보라는 태도를 취했다. 김성철은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이 여기 온 이유에 대해 말했다. “난 오늘 입학한 신입생이야. 그리고 늙은 조그바트가 회오의 관을 내 기숙사로 지정했어. 그 이외의 사유가 필요한가?” “정말? 그 늙은 조그바트가 그랬다고?” 효과가 있다. 소녀는 살짝 놀란 태도를 보였다. 김성철은 기세를 몰아 한 마디 덧붙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많은 평범한 기숙사를 놔두고 왜 이런 음침한 기숙사까지 왔겠나?” “으음... 그것도 일리가 아주 없는 건 아니네. 다른 건 몰라도 늙은 조그바트가 여길 지정했다면 내겐 거부할 권리가 없어. 호문클루스들에게 확인을 해보겠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기도 하고...” 당장이라도 김성철을 쫓아내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을 것처럼 행동하던 소녀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체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으음.. 어쩔 수 없지. 나도 에어푸르트의 학생이니까. 늙은 조그바트의 의견을 존중하겠어. 그것이 전통이니까.” 이름 모를 소녀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뒤돌아서더니 이내 다시 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김성철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내 이름은 사라사. 빙결학파야. 혹 내 모습이 어려보인다고 무시 할 생각은 접는 게 좋아. 왜냐하면 나는 당신보다 무려 5년 선배니까.” 소개를 마친 사라사는 휙 뒤돌아서서 계단을 올라갔다. “방은 1층에 있는 방 아무거나 써. 조금 지저분하겠지만 청소도구는 식당 옆 창고에 있으니까 그걸 쓰도록 해. 쓰고 난 후 반드시 제자리 가져 놓도록 하고. 그리고 2층부터는 여학생 구역이니까 용무가 있으면 이 계단 아래서 내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걸 잊지 마. 난 별로 성격이 좋지 못하거든.” 시어머니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은 뒤 사라사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계단을 올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찾아온 정적 속에서 김성철은 소녀가 사라진 방향을 한동안 응시했다. ‘아직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언데드라.’ 김성철은 다시 복도를 돌며 자신의 방을 찾기 시작했다. 곧 그는 복도 끄트머리에 빈 방을 발견하고 그곳을 자신의 방으로 삼았다. 사라사의 말 대로 거미줄이 가득하고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지저분한 방이었지만 김성철은 개의치 않았다. 적어도 이곳엔 비와 바람을 박아줄 벽과 지붕도, 고단한 몸을 부드럽게 감싸줄 수 있는 침대도 있으니까. “청소는 내일 하자.” * 이튿날. 김성철은 생활조교의 안내를 받아 천공학파의 교사(校舍)로 향했다. 천공학파의 교사는 성벽과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에어푸르트 학교 내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북동쪽 가파른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듯이 자리 잡고 있었다. “원래는 마법으로 가동 되는 승강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가동되지 않고 있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김성철과 생활조교는 절벽 위에 난 아슬아슬한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특히 중간에 계단이 끊겨 목숨을 건 점프를 통해 넘어가야 하는 구간이 있었는데 생활조교는 솔선수범하여 끊긴 구간을 뛰어 넘고는 으스대며 말했다. “자! 생도! 용기를 보이는 거예요! 저보다 다리도 길고 따라서 점프력도 좋은 인간이 이런 것도 못 뛰어 넘으면 응가 같은 인간 밖에 되지 못하는 거예요!” 생활조교의 말이 무색하게 김성철은 가볍게 틈새를 뛰어 넘었다. 싱글벙글하던 생활조교의 얼굴에 즉각 웃음이 걷혔다. “여.. 역시 궁전 출신 소환자네요. 얼치기 이계인하고는 다른 거예요! 뭐, 이젠 더 이상 들어오지도 않지만.” 암벽등반을 방불케 하는 가파른 계단을 모두 오른 후 김성철과 생활조교는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천공학파의 교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교사는 중간 정도 규모의 석조 건물로 꼭대기에 커다란 망원경이 달린 원형의 돔을 얹은 게 특징이었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생도!” 김성철은 생활조교를 뒤로 하고 묵직한 문을 밀어젖혀 천공학파의 교사로 들어갔다. 탁 트인 비취빛의 전경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교사 안엔 소수의 기둥만 있을 뿐 공간을 나누는 벽도 층계도 없이 천정의 돔을 중심으로 하나의 공간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선 작은 소리도 크게 들렸고 같은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서로를 볼 수 있었다. 김성철은 회당이라고 불러야 할 교사 안에서 두 명의 사람을 발견했다. 한 명은 반백의 머리칼과 수염을 가진 노인이었다. 세월이 새겨 놓은 주름살엔 관록보다는 고집스러움이 묻어 나왔고 꾹 다문 입술은 좀처럼 열릴 것 같지 않은 무거움을 품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노인과 대조적으로 활달해 보이는 수려한 청년이었다. 그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연결된 해먹 위에 누워 마치 잡지를 보듯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김성철의 등장에 먼저 반응을 한 것도 청년 쪽이었다. “이게 누구야. 못 보던 손님이 오셨네.” 그는 해먹에서 일어나 김성철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오셨어요?” 김성철은 청년 너머에 자리 잡은 노인 쪽을 응시하며 짧게 대답했다. “배움을 구하기 위해 왔소.” 청년이 빙그레 웃었다. “오랜만의 신입이네요.” 그는 김성철에게 손을 내밀며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이곳에서 알투지우스님에게 천공의 마법을 배우려고 노력중인 부족한 마법사 레나드 상텀이라고 합니다.” “…김성철이오.” 김성철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사내의 손을 마주 잡았다. “어이쿠. 무시무시한 이름을 가지고 계시네요. 혹 소환자 출신인가요?”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소환자 출신이라. 어쩐지 오랜만의 신입이라고 했더니 그런 내막이 있었군요. 아무튼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스승님이 너무 기다리신 거 같으니 안쪽으로 가시지요.” 레너드는 공손하게 앞을 열어주었다. 김성철은 레너드에 대해서 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붙임성이 좋다는 것 외엔 평가할 거리가 적다. 적어도 특정 부위를 반복해서 쳐다본다거나 은근히 자신의 자랑을 섞어 말하는 등의 눈에 띄는 천박함은 보이지 않았다. 김성철은 마치 나무처럼 돌로 만든 층계 위에 앉아 있는 노인 앞에 섰다. “배움을 구하러 왔습니다.” 김성철이 저 노인보다 못할 건 하나도 없지만 이번만큼은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배움을 구하는 자의 기본적인 자세다. 노인은 고집스런 눈동자로 김성철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손가락을 세워 허공 속에서 한 권의 책을 꺼냈다. 영혼 창고 안에 있던 책을 끄집어 낸 것이다. 그 노인은 두터운 책을 김성철에게 내밀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은퇴한 노인이고 더는 가르칠 게 없는 사람이오. 안타깝지만 당신은 많은 선택지 중에 잘못된 선택지를 고르게 됐고 결과적으로 날 만나는 불운을 맞이했소.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 책뿐이오.” 그 노인은 다시 한 번 책을 내밀었다. “늙어서 팔 힘이 예전만 못하다오. 어서 받으시오.” 김성철이 책을 받자 노인은 김성철에게 등을 돌려버리고는 품속에서 파이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일주일 뒤, 주 전공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될 거요. 그때까지 허송세월할 순 없으니 그 책이라도 읽고 기본적인 능력치라도 키워두는 게 향후에 당신이 그리는 진로 달성에 있어서 도움이 될 거요.” 그게 노인의 마지막 말이었다. 단순한 떠보기도 시험도 아니다. 그는 더 이상 김성철과 대화를 하지 않으려 했다. 아마도 무슨 말을 하건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알투지우스 제로라고 했나. 세상과 단절한 노인이군.’ 예상외의 복병을 만났다. 크리스티안으로부터 천공학파의 교수 알투지우스 제로가 괴팍한 노인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아예 교수의 임무까지 방기한 인물인지는 예상치 못했다. “…….” 책을 받아든 김성철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해먹 위에 비스듬히 누운 레너드가 흥미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김성철을 지켜봤다. 이제 천공학파를 찾아오는 학생도 극소수지만 그 극소수의 학생마저도 완고한 알투지우스를 만나는 순간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이쪽 세상 기준으로 이계에서 온 저 소환자도 비슷한 선택을 할 것이다. 가르치려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 밑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다른 신입생과 달리 허름한 야상과 낡은 청바지를 입은 검은 머리의 사내는 그대로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교수가 넘긴 두꺼운 책을 넘기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그마저도 잠깐이면 질려버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사내는 도통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몰랐다. 작은 소리마저 크게 들리는 회당 안에선 하나의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도 모두의 귀에 고스란히 전달된다. 김성철이 서른 번의 페이지를 넘겼을 때 뒤를 돌아보고 앉은 노인이 마침내 고개를 돌려 의문의 신입생을 눈동자에 담았다. ======================================= 13. 알투지우스 책의 겉면은 평범했지만 책을 펼치자 그 안에 숨겨진 마법적인 신비함이 한 눈에 드러났다. 검은 잉크로 그린 삽화가 살아서 움직였다. 첫 페이지에 기재된 삽화는 무질서하게 나열된 도형과 선, 점들이 불규칙한 형태에서 규칙적인 형태로 완성되는 궤적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완성된 모양은 마법진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첫 페이지 하단의 설명은 아래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 어떤 마법을 안다는 것은 전체의 형태를 어렴풋이 그려내는 것이 아닌 전체를 이루는 구성요소 전부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 하나의 삽화 뒤엔 그 삽화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묻는 백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 백지는 삽화와 마찬가지로 마법적인 힘을 품고 있어 김성철의 손짓 혹은 강한 생각에 의해 채워지거나 지울 수 있었다. 처음에 김성철은 생소한 책과 그것이 요구하는 사항에 생경함을 느꼈지만 이내 흥미를 느끼고 문제풀이에 임했다. 김성철은 변화하는 삽화의 반복적인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하고 어떤 논리로 구성되는지 이해하는데 주력했다. 잠시 후, 그는 자신이 이해한 바를 백지 위에 상상을 통해 그려냈다. 결과는 바로 가시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 훌륭합니다! 당신은 마법진의 이해(초급)의 첫 번째 문제를 푸는데 성공하였습니다. ] 보상 : 직관력 +1 간단한 문제 풀이만으로 직관력 하나가 상승했다. 김성철은 마지막 책장을 넘겨 책에 존재하는 문제가 총 51개라는 것을 확인한 후, 차근차근 다음 문제들을 풀어나갔다. 13번 문제까지 풀었을 때 김성철은 어느새 회당 주변이 어둠에 잠긴 것을 천정에 나 있는 무수한 창문들을 통해 알아차렸다. 해먹 위에 팔자 좋게 누워 있던 레너드 상텀도 문제를 푸는 동안 회당을 나간 것 같았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군.’ 그래도 하루 만에 직관력을 5나 올렸다. 단순히 문제를 푸는 것만으로 말이다. 특히 조금 어렵다고 싶은 문제를 풀면 어김없이 직관력이 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문제를 좀 더 풀고 싶지만 오늘 밤엔 크리스티안 애쉬포드와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김성철은 현재까지 풀이한 페이지에 책갈피를 넣어 표시한 후 알투지우스에게 돌려주었다. “용무가 있어 이만 가봐야 할 것 같군요. 책은 반납하겠으니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 알투지우스는 못마땅한 얼굴로 김성철을 쳐다보다가 앙상한 손을 내밀어 책을 받았다. 김성철이 목례를 하고 출구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늙은 마법사는 책을 펼쳐 김성철이 책갈피로 표시한 지점을 슬쩍 펼쳐보았다. 알투지우스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거기.” 그는 막 문을 열려는 김성철을 불러세웠다. 김성철이 뒤를 돌아보자 알투지우스는 퉁명함이 진하게 묻어나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여기까지 푼 거 맞나?” 알투지우스는 김성철이 최후까지 본 페이지를 펼쳐놓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김성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별 일 없어.” 알투지우스는 책을 덮고 자리에 앉았다. 노인이 침묵하자 김성철은 문을 열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바깥을 향해 걸어갔다. 시종일관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노인은 그러나, 문이 닫히자 눈동자 가득 경악에 가까운 빛을 띠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김성철이 표시한 페이지를 응시했다. ‘신입생이 단 반나절 만에 13번 문제까지 풀어냈다고? 믿을 수 없군. 이건 최근 백년 간 본 적이 없던 재능 아닌가?’ 재능이라기보다는 경험에 가깝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김성철이 아직 초월적인 힘을 얻기 전에도 그는 타락한 마법사들과 목숨을 건 승부를 펼쳤다. 생과 사가 왔다 갔다 하는 긴박한 순간이 무수히 반복됐고 그 속에서 김성철은 직접적 경험을 통해 마법에 대처하는 감각을 길렀다. 어느 순간 그는 마법사가 영창을 할 때 나타나는 찰나의 깜빡임, 즉 마법진의 형상을 보고 상대방이 대충 어떤 마법을 쓸지 예상하는 법을 터득했다. 처음엔 애도 먹고 마법을 잘못 예상해 목숨을 잃을 뻔도 했었지만 쌓여가는 경험이 그를 점차 완벽하게 만들어갔다. 악명 높았던 재앙의 추종자의 수장이자 혼을 먹는 자, 대마법사 발자크와 펼쳤던 일전에서도 김성철은 그의 마법을 미리 예상하고 먼저 행동해 자신보다 명성 높은 적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0.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 명멸하는 마법진의 형상만을 보고 그것의 의미를 순간적으로 예상하는 김성철에게 있어 알투지우스의 책은 쉬운 통과의례에 불과했다. “으음....” 알투지우스는 에어푸르트 마법학교 전역과 연결된 마법네트워크에 접속했다. 그가 찾는 것은 방금 자신을 놀라게 했던 이름 모를 학생에 대한 정보였다. 처음 그는 학생의 이름을 보고 적잖이 놀랐고 그에게 배정된 기숙사의 이름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뭐라고...? 회오의 관에 배정됐다고?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두 개의 충격적인 사실 속에서 알투지우스를 보다 격동시킨 것은 후자였다. 노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즉시 허공에서 지팡이를 꺼내 지면을 두드렸다. 기동을 중지했던 마법 승강기가 신비로운 빛을 내뿜으며 재기동했고 늙은 마법사는 승강기를 타고 절벽 아래로 내려가 즉시 회오의 관으로 향했다. “사라사. 사라사!” 굳게 닫힌 음산한 기숙사의 문을 열자마자 노마법사는 다급한 목소리로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금발의 소녀는 유령처럼 복도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은 소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꼬옥 붙잡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사라사. 별 일... 없었냐?” 금발소녀는 다급하게 묻는 노인의 얼굴을 생뚱맞다는 듯 쳐다보더니 이내 손을 뿌리치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응?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별 일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다소 허탈한 얼굴로 노인을 바라보던 소녀는 이윽고 뭔가를 떠올리고 다시 말했다. “아, 이상한 녀석이 이곳에 왔어. 늙은 조그바트가 이곳을 지정했다지 뭐야. 겁 줘서 쫓아 보내려고 했는데 소환자라 그런 지 잘 안 먹히네.” “그렇구나. 사라사. 하지만 나는 걱정이란다. 그 녀석 때문에 우리 사라사에게 별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싶어서...” 알투지우스는 다시 한 번 걱정스런 시선으로 사라사를 응시하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사라사는 그런 노인을 조금은 귀찮다는 눈으로 보며 대꾸했다. “별 일 있을 게 뭐가 있어. 학교 최강의 휴학생이 바로 난데. 실감은 안 나지만 나도 일단은 리치잖아?” 순간 소녀의 두 눈에 퀭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고 사방의 공기가 일순 얼어붙었다. “그.. 그렇지.” 노인의 눈에 후회가 서렸다. 과한 걱정이 소녀의 상처를 후벼 판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고개를 들고 일어난 것이다. 사라사는 그런 노인을 빤히 쳐다보다가 지팡이를 짚은 노인의 손을 두 손으로 마주 잡았다. “내 걱정은 하지 마. 할아버지. 지금 걱정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할아버지 쪽이잖아?” 소녀의 손은 그녀가 내뿜는 입김만큼이나 차가웠다.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에어푸르트에서 나와 로고테테로 가시는 게 현명할 듯 싶습니다.” 다시 만난 크리스티안은 한층 더 때깔이 좋아져 있었다. 특히 그는 기존의 손이라기보다는 집게발 형태에 가까운 투박한 나무 의수 대신 제법 사람의 손 모양을 하고 있는 의수로 바꿔 끼고 있었다. 김성철은 크리스티안이 새로운 의수를 조작해 술잔을 잡는 걸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며 입을 열었다. “에어푸르트의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은가?” “네. 전임 교장이었던 대 마그누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후, 교장 자리가 3년 째 공석으로 남아 있습니다. 교수회에서 새로운 교장을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몇 번 있었지만 주요파벌인 빙결학파와 화염학파의 격렬한 대립으로 번번이 무산됐고 그동안 학교는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재앙의 추종자들마저 나타났으니... 에어푸르트의 운명은 끝이 났다고 봐야 합니다.” 크리스티안은 고개를 숙이고 김성철에게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정중하게 사과했다. 김성철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관심 있는 건 한 가지였다. “에어푸르트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많은가? 로고테테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많은가?” 이에 크리스티안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로고테테는 신흥 명문입니다. 수천 년 전 부터 존재했던 에어푸르트와는 비할 바 없죠. 하지만 보다 안정되어 있고 체계가 잡혀 있습니다. 게다가 로고테테는 최고의 사령학파 교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령학파라...” 김성철에겐 별 필요 없는 마법이다. 그에게 필요한 건 강력한 한 방이지 시체로 이루어진 군대가 아니다. “추천한 제가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이제 에어푸르트는 학교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곳입니다. 미리 그걸 알았어야 했는데...” 크리스티안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런 것이다. 적어도 그는 허풍이나 사실을 과장해서 말하는 인간은 아니니까. 그 시점에서 김성철의 마음은 에어푸르트에서 로고테테로 상당수 넘어갔지만 그래도 한 가지 확인하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었다. “알투지우스 제로라는 노인에 대해 알고 있나?” “네, 알고말고요. 그렇게 큰 명성을 떨치진 못했지만 에어푸르트 천공학파가 낳은 최강의 마법사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호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시간의 흐름에 묻혀 퇴색된 잊힌 존재 정도로 보였는데 그런 과거를 지니고 있었다니. 김성철은 텅민 홀 안에 홀로 앉아 있던 노인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명성을 떨치지 못했지?” 실력이 있으면 이름값은 자연스레 올라간다. 그것이 명성이든 악명이든. “글쎄요.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풍문에 따르면 알투지우스 교수가 젊은 시절 큰 사고를 쳤다고 하더군요.” “사고?” “네. 무려 암살교단의 부교주를 결투에서 죽였다고 합니다.” “믿기 어려운 일이군.” 김성철의 머릿속에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암살자 클래스는 마법사 클래스의 천적으로 알려져 있다. 동 실력의 마법사와 암살자가 일 대 일의 승부를 펼치면 마법사는 암살자에게 압살 당한다. 암살자는 마법사의 공격을 파훼하는 기술을 많이 지니고 있고 순간적으로 마법사에게 파고들어 치명적인 공격을 날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상대방이 암살자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암살교단의 부교주라면? 그것도 일 대 일의 승부에서? 평범한 마법사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정녕 사실인가?” “글쎄요. 진실은 저도 모릅니다. 저도 어디까지나 떠도는 풍문으로 들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암살교단이 알투지우스를 그냥 놔두진 않았을 텐데?” 크리스티안의 말이 사실이라면 알투지우스 교수는 살아 있을 수가 없다. 암살교단은 한 명의 형제를 잃으면 열 명의 형제가 복수를 하는 것을 철칙으로 하는 집단이기에. 그리고 부교주 급이 죽었다면 암살교단의 우두머리인 교주가 직접 추살령을 내릴 수도 있다. 김성철은 흐릿한 기억 속에서 검은 피부를 지닌 한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샤말 라지푸트. 그 녀석이 직접 나선다면 알투지우스는 물론이고 에어푸르트의 모든 교수를 하룻밤에 처치할 수도 있겠지.’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무심한 눈으로 크리스티안을 응시했다. 추궁하는 듯한 김성철의 시선을 받은 크리스티안은 자신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확답은 못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당시 부교주를 잃은 암살교단과 에어푸르트 마법학교 간에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졌고 그 이후 알투지우스 교수는 대외적인 활동은 일체 없었다는 점입니다.” 김성철은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듯한 이야기다. 최고의 암살자들만이 모였다는 암살교단의 2인자가 무명의 마법사에게 그것도 일 대 일의 대결에서 패배했다는 것은 교단의 명성을 바닥에 처박히게 만들기에 충분한 일이다. 그 사실을 숨기는 조건으로 알투지우스를 학교에 처박아 두는 건 암살교단으로서도 손해 보는 장사인 건 아닌 셈이다. “아무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로고테테로 가신다면 수속을 밟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남은 금화도 있고 보석도 있으니까요.” 김성철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에어푸르트는 학교의 기능을 잃었고 알투지우스를 둘러 싼 소문은 확실치 않다. 즉, 에어푸르트에 남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다. 그럼에도 김성철은 에어푸르트에 마음이 끌리는 걸 느꼈다.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김성철은 처음 에크하르트의 시험에 들어설 때와 비슷한 기대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득이 될지 실이 될 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을 테지만 김성철은 성장에 관해서만큼은 말릴 수 없는 욕심쟁이다. 그는 위험부담이 크지만 얻을 수 있는 보상이 많은 길을 택했다. “에어푸르트에 남겠다. 암살교단의 부교주를 결투에서 처치한 사내에게서 마법을 배울 수 있다면 그것보다 남는 장사는 없겠지.” 다음날 천공학파의 교사엔 새로운 얼굴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학생이라기보다는 노숙자에 가까운 옷차림을 한 그 사내는 매일 아침 절벽을 기어올라 회당에 출근, 늙고 고집스런 교수에게서 책을 빌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한 마디 말도 없이 책을 읽어나가는 일을 계속했다. 일주일 지났을 때 그는 노인에게 받은 책을 모두 독파했고 그 책을 노인에게 내밀며 말했다. “또 다른 책은 없습니까?” “…….” 노인은 말없이 자신의 영혼창고에서 책을 꺼냈다. 한 권, 두 권, 세 권... 창고에서 꺼내는 책의 숫자가 점차 늘어났다. 그리고 18번째의 책을 꺼낸 알투지우스는 아직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은 의문의 사내를 노려보며 짤막하게 말했다. “책은 빌려주겠네. 하지만 책만 빌려줄 뿐이야.” 김성철은 자신의 키만큼 쌓아올린 책들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그 중 한 권을 집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책을 독파하기 시작했다. ‘기이한 놈이군.’ 보여주고자 하는 시늉도 연극도 아니다. 김성철은 진지하게 마법서를 들고 그 내용을 읽어나가며 마법서에 적힌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그 꾸밈없는 순수한 열정은 알투지우스가 잊고 있던 어떤 감정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김성철을 향한 알투지우스의 시선이 달라졌다. 하지만 그는 그 감정을 바깥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해먹에 몸을 뉘인 늑대 같은 놈이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이 마주치자 레너드 상텀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아아! 나한텐 언제쯤 천공마법을 가르쳐 주시려나. 오매불망 스승님만 바라보는 제자가 불쌍하지도 않으신가.” 그의 옛 제자는 이제 재앙의 추종자다. ======================================= 13. 알투지우스 (2) “거기. 자네.” 알투지우스가 김성철에게 먼저 말을 거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 하지만 김성철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책을 읽는데 모든 신경을 쏟고 있었다. “거기. 소환자.” 김성철은 두 번째의 부름에 비로소 고개를 들고 늙은 마법사를 응시했다. 멀리 해먹 위에 누운 레너드 상텀이 목소리를 듣고 슬며시 몸을 일으키더니 알투지우스 쪽을 쳐다봤다. 알투지우스가 말했다. “내가 보기엔 자네는 이 학교에 입학한 이래 이곳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걸로 보이는데. 지도교수는 있나?” “없습니다.” 그런 건 들은 기억조차 없다. 알투지우스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학교 꼴이 말이 아니라고 해도 이런 기본적인 것조차 하지 않다니...’ 레너드도 비슷한 생각을 품은 것 같았다. “어이쿠. 이런! 입학한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아직 지도교수도 안 정했다고요?” 가벼운 목소리가 텅 빈 공간에 메아리쳤다. 잠시 후, 김성철이 물었다. “지도교수가 뭡니까?” 그 말을 들은 알투지우스의 하얀 눈썹이 미약하게 떨렸다. 신입생이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을 모른다는 것. 학교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다. 적어도 알투지우스 아니, 레너드가 신입생 때만 해도 이런 일은 과거의 에어푸르트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회당 높이 레너드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 원 참. 지도교수도 모르는 신입이라니. 정말 갈 때까지 갔네.” 그는 다시 해먹에 드러누우며 눈을 감고는 씨익 웃었다. 다시 찾아온 침묵 속에서 알투지우스는 김성철을 노려보며 조용히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처음에도 말했다시피 누구도 가르치지 않을 생각이고 따라서 자네의 지도교수가 되어 줄 수도 없어. 지도교수는 다른 곳에서 찾게.” “알겠습니다.” 김성철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한 후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늘 그렇듯 아주 집중해서. 쉬지 않고. 가르치는 자의 입장에서 면학 태도가 훌륭한 학생을 보는 것만큼 기쁜 일도 없지만 지금 현재 김성철의 그런 태도는 알투지우스의 애간장을 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니 이 친구. 지도교수를 정하지 않았을 때 어떤 벌칙을 받는지 모르는 건 아닐까?’ 모든 입학생은 입학 이후 10일 내에 자신의 지도교수가 될 교수를 찾아야 하며 만약 10일 동안 자신을 돌봐줄 스승을 구하지 못했을 경우 학생의 자격을 잃는다. 자질 없는 학생이 부정한 수단으로 입학 했을 때 교수들이 뜻을 모아 그 학생을 내치려던 좋은 취지의 제도였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학교가 정상적으로 돌아갔다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실시했을 것이고 그 행사를 통해 신입생이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 주지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신입생의 명맥이 끊어진 현재 입학식이나 환영회 같은 행사는 없어진 지 오래고 달리 가르칠 사람도 없다. 그나마 사람이 몰리는 화염학파나 빙결학파에 들어갔다면 조교들이 알아서 수속을 밟아줬겠지만 천공학파엔 그런 서비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김성철은 아무것도 모른 채 오늘도 하루 종일 책과 씨름하다가 회당을 떠났다. 알투지우스의 근심이 짙어졌다. ‘저 친구. 이대로는 3일 뒤면 제적 처분이다.’ 문제는 저녁만 되면 회당을 뜨던 레너드 상텀이 얄밉게도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김성철이 회당을 나선 이후에야 해먹에서 일어나 회당을 나섰다. 그의 의도는 명확하다. 레너드는 회당에 나타난 귀찮은 존재를 쫓아내고 싶어 한다. 굳이 험한 수단을 쓰지 않고서도 말이다. 다음날에도 비슷한 상황은 이어졌다. 교복조차 맞추지 않은 추레한 사내는 자신의 키만큼 높이 쌓아올린 책의 탑 아래에서 공부삼매경에 빠졌다. 그는 점심에 한 번 식사를 하러 자리를 비우는 것 이외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공부에 매진했다. 알투지우스는 기회를 봐서 김성철에게 닥친 위험을 이야기해주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레너드가 해먹에서 일어나 자신을 예의주시했다. 겉모습은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알투지우스는 레너드 안에 숨겨진 흉악한 인격을 잘 알고 있다. 알투지우스가 김성철을 챙겨주는 모습을 보인다면 레너드는 그를 빌미삼아 알투지우스만이 알고 있는 천공학파의 비전을 내놓으라고 야료를 부릴 것이다.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대를 이어 지켜 온 에어푸르트의 진정한 비전이 재앙의 추종자들에게 넘어간다면 세상의 붕괴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손을 더럽히는 건 나 혼자만으로 충분하다.’ 알투지우스는 결국 침묵했고 나서지 않았다. 이틀이 더 흘러갔다. 남은 건 이제 단 하루. 김성철은 여전히 책만을 부여잡은 채 눈 하나 껌뻑이지 않고 책을 읽어 나갔다. 알투지우스는 그런 김성철의 모습에서 수재의 영민함보다는 어떤 집념 같은 것을 보았다. 알투지우스는 궁금해졌다. 왜 다른 세계에서 온 소환자가 그토록 낯선 마법에 집착하는지. 해서 물었다. “그 책, 이해는 하고 읽는 건가?” 그의 질문엔 어떤 결심이 담겨져 있었다. 내막을 알고 있는 레너드 상텀은 빙그레 웃었다. “스승님도 참 짓궂으시지.” 그는 김성철이 읽고 있는, 그리고 그의 옆에 쌓인 책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공은 김성철에게 넘어갔다. 고개를 숙인 채 책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김성철은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고개를 들어 알투지우스를 응시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주일 째 파고들고 있습니다만, 솔직히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알투지우스의 입에서 한줄기 한숨이 흘러나왔다. 김성철의 무지에 대한 책망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책망이다. 그가 김성철에게 빌려 준 책은 처음부터 이해하라고 던져 놓은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사전의 지식과 필요한 직관력이 있어야 그 내용을 볼 수 있는 책이었다.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독자는 그저 글자로 만든 미로 속에서 헤맬 뿐이다. 그러므로 김성철이 내놓은 답은 가장 이상적인 정답이다. ‘이 친구...’ 더디게 가던 시간이 갑자기 빠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알투지우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왜 내게 질문을 하지 않는가?” 이에 대하 김성철은 책을 덮으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당신은 내 스승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줄기 흐트러짐이 없는 눈빛과 마주한 순간 알투지우스는 치욕감과 함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마주하게 되었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의 위장은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고 다리마저 약간의 후들거리려고 하고 있었다. 알투지우스는 말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등 뒤에 레너드의 시선이 따갑게 꽂히는 걸 느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고 김성철에 대해 생각했다. 이윽고 그는 잠시 잊고 있던 불쾌하지만 이제는 유용하게 될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그랬었지. 저 자는 회오의 관에 있었지!’ 그날 점심, 알투지우스 제로는 회오의 관에 거주하고 있는 그의 손녀를 찾아갔고 수많은 감시의 귀들이 엿듣는 가운데 정겨운 목소리로 손녀와 담소를 시작했다. “새로 온 학생은 어때? 잘하고 있는 거 같아? 내가 볼 땐 그 자식, 아주 빠졌어. 교복도 안 입고 말이야. 아무리 소환자 출신이라고 해도 기본도 안 지키는 놈이 무슨 놈의 에어푸르트 학생이라고 원!”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던 사라사 제로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날 밤, 김성철은 자신의 방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과 조우했다. 사라사가 김성철의 방안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별 정신교육 시간이야. 신입.” 리치 소녀의 눈이 푸른빛을 내며 번득였다. * 김성철은 갑작스런 소녀의 방문에 의아해하면서도 잠자코 말없이 소녀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사라사는 김성철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당신. 이거 받았어? 안 받았어?” 그것은 양가죽으로 정장한 빛바랜 학생수첩이었다. 꽤 오랫동안 사용했는지 반들반들 닳아있고 끄트머리가 마모된 그 수첩의 첫 면엔 수첩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사라사 제로 ] ‘호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받지 못했다.” 사라사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했다. “그거 빌려줄 테니까 두 번째 장에 적힌 신입생의 마음가짐에 대해 정독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최근 독해 불가능한 난해한 문장만 봐서 그런지 오랜만에 알아볼 수 있는 문장을 읽어보고 싶은 욕구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김성철은 잠자코 사라사가 시키는 대로 했다. < 신입생의 마음가짐 > [ 1. 에어푸르트 학생으로서 품위를 유지한다. ] [ 2. 불필요한 싸움에 휘말리지 않는다. ] [ 3. 과식하지 않는다. ] [ 4. 도서관의 책은 기한 내에 반납한다. ] [ 5. 교수님들에 대해 항상 존경하는 마음을 갖는다. 전공이 다르다고 해서 무시하지 않는다. ] ... 거기까지 본 김성철은 수첩에서 눈을 떼고 사라사를 응시했다. “딱히 정독할 필요성은 못 느끼겠군.” “그 밑의 것이 더 중요하거든?” 사라사는 다 안다는 양 팔짱을 낀 채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성철은 다시 수첩으로 눈을 옮겼다. 신입생의 마음가짐 아래엔 또 다른 항목이 깨알처럼 기재되어 있었다. < 중요! 신입생이 반드시 해야 할 일 > - 빙튼 씨의 의상실에서 교복을 받을 것 - 늙은 조그바트에게 기숙사를 배정받을 것 - 로베르트 단턴 교수의 예의범절 교실의 기초과정을 수료할 것 - 상급생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할 것. - 교무과에서 전공 정하기 - 각 전공 교수님 정하기 및 인사드리기 -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할 것 - 담당 지도교수 정하기 ... 김성철의 시선은 지도교수라는 항목에서 멈췄다. 그 항목 옆엔 별이 다섯 개나 그려져 있었고 귀여운 필체로 안 하면 퇴학! 이라는 글귀도 적혀 있었다. “이제야 자신이 뭘 잘못하고 있는지 알겠지?” 사라사는 눈을 번뜩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도교수를 정하지 않은 것 말이냐?” 김성철이 묻자 사라사를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수첩의 첫 번째 항목을 가리켰다. “아니, 교복도 안 입은 거!” “…….” “아무리 학교가 기울어도 그렇지 명문 에어푸르트 학생이라는 사람의 복장이 그게 뭐야? 옷은 자신을 드러내는 최소한의 예의인데. 그러니 할아버지가 잔소리를 늘어놓지.” “네 할아버지가 누구신데?” “누구긴 누구야. 알투지우스 제로 교수님이시지. 미친개처럼 교정에서 날뛰던 암살교단의 부교주를 일격에 처치한 전설적인 일화도 못 들어 본 거야?” “아, 그래?” 김성철의 말에 사라사를 고개를 끄덕이며 잔소리를 계속해서 늘어놨다. 구구절절 말은 많았지만 그녀의 말은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교복을 입고 다닐 것. 하지만 김성철은 그보다 다른 부분에 관심을 가졌다. “주 전공 교수가 지도교수를 맡으려 하지 않을 땐 어떻게 해야 하지?” “교복을 안 입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지. 뭐, 부전공 교수님에게 가서라도 부탁해 봐. 물론 빙튼 씨의 의상실에서 교복을 받은 뒤에 말이야!” 이튿날 김성철은 입학과를 찾아갔다. 입학과엔 생활조교가 있었다. “빙튼 씨의 의상실이란 곳이 어디지?” 김성철은 사라사의 말을 아주 무시할 작정은 아니었다. 교정에 사람은 별로 없지만 일단 현재 입고 있는 노가다 패션이 눈에 띄는 건 엄연한 사실이니 말이다. 그런데 생활조교는 기대와 다른 답을 내놓았다. “생도! 지금 빙튼 씨를 말한 거예요? 그 인간 잘린 지가 언젠데 찾고 있는 거예요?” “그럼 교복은? 안 입어도 되는 건가?” “교복은 자기가 입고 싶으면 자기 돈 들여서 바깥의 양복점에서 맞춰 입는 거예요!” 신입생이 해야 할 일 첫 번째 목표가 간단하게 좌절됐다. 김성철은 사라사의 수첩을 베껴 쓴 다음 목록에 관해서도 질문했다. 그 결과 김성철은 사라사가 경험했던 많은 일들이 지금은 사라지거나 유명무실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생도 없는데 무슨 오리엔테이션인 거예요? 남아 있는 학생이라곤 간혹 들어오는 궁전 출신을 빼면 머리 나쁜 열등생 종말세대 밖에 안 남아 있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김성철은 자신이 하고자 했던 다음 코스로 직행했다. 연금학파의 교사, 연성의 관. 천공학파의 교사와 달리 이름은 제대로 붙어 있었지만 그것은 건물이 아니라 쓰러져 가는 천막이었다. “…….” 김성철은 천막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바깥에서 찾아 볼 수 없던 몇 명의 학생이 모여 있었다. 이십 대 초반의 얼굴들. 종말 세대다. “여긴 어떻게 오셨나요?” 낯선 이의 등장한 한 학생이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김성철은 지체하지 않고 용건을 말했다. “지도교수를 찾고 있소.” 천막 깊숙한 곳에서 퀭한 눈빛을 지닌 사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나타났다. “신입생인가? 응? 소환자 출신이군.” 그는 김성철을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씨익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당신, 혹시 소환 궁전에 있다는 에크하르트의 퀘스트를 받아 연금술사가 된 건 아니겠지?” 김성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사내는 박장대소하며 한참 동안 배를 잡고 웃었다. “아이고 배야. 진짜 요즘 웃을 일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재밌는 일을 만났네. 아무튼 지도교수를 구하신다고? 그럼 좋소. 나는 바실 필루스. 기꺼이 당신의 지도교수가 되어드리리다.” 그는 김성철의 신상명세를 물은 다음 교내의 마법 네트워크를 열어 김성철의 기록을 열람했다. “어이쿠, 무서운 이름을 지니신 분이구만. 그나저나 아슬아슬했소. 하루만 더 지났더라도 이 학교에서 짐 싸고 나갈 뻔했으니까!”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천공학파의 회당 안에 있는 알투지우스와 그리고 레너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교수는 그렇다 치고 그 녀석은 왜 이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지?’ 그 의문은 다음 날 어느 정도 해소됐다. “어이. 신입생 씨. 당신은 여기 못 들어와요.” 레너드 상텀이 생글생글 웃으며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김성철이 이유를 묻자 레너드 상텀은 마치 김성철의 불운을 동정하는 듯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제적처분 당했으니까요. 통지가 곧 가겠지만... 일단 사유를 말씀드리자면 당신은 입학 후 10일 동안 당신을 받아 줄 스승, 즉 지도교수를 찾지 못했어요.” “지도교수라면 이미 찾았소.” 김성철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순이지만 레너드의 입가에 묘하게 비틀렸다. “지도교수를.. 찾았다고요?”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분이 아니오.” 김성철이 말했다. “연금학파의 교수 바실 필루스요.” “아.. 그래요?” 레너드의 수려한 얼굴에 불쾌감이 묻어났지만 김성철은 신경 쓰지 않았다. 김성철은 고개를 숙인 레너드를 지나쳐 늘 자신이 앉던 자리로 가 쌓인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조그만 소리도 크게 들리는 회당 안에 다시금 책 넘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알투지우스는 그 소리를 들으며 안도의 한숨을 숨 죽여 내쉬며 두 눈을 감았다. ======================================= 14. 연금학파 (1) “그건 아마도 아직 전사님께서 그 책을 볼 수 있는 요구사항을 취득하지 못해서일 겁니다.” 크리스티안 애쉬우드는 한 번에 김성철의 해묵은 난제를 해결해주었다. “어떤 마법서는 그것과 연관된 다른 마법서를 미리 숙지할 것을 요구합니다. 직관력이 아주 높은 경우엔 그런 과정 없이도 읽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전사님께서 겪으신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구석에서 견과류를 먹고 있는 하늘 다람쥐를 응시했다. “그렇군.” 초반에 잠깐 소폭의 직관력을 올린 걸 제외하면 거의 일주일 간 성장이 멈췄다. 일각이라도 빨리 성장을 해야 하는 김성철로서는 뼈아픈 시간 낭비였다. ‘좀 더 빨리 이 자를 만나서 물어봤어야 했는데.’ 김성철은 누군가의 도움을 빌리기 전에 앞서 우직하게 한 번 해보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이제 알투지우스가 해독할 수 없는 책들을 내놓은 걸 알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크리스티안은 자기 나름대로 방안을 찾겠다고 공언했다. “…그 책들에 관해서는 제 인맥을 통해 조사해보겠습니다. 사전에 어떤 책을 읽어야 하고 얼마 정도의 직관력이 필요한지 알게 된다면 그 책을 해독하실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시간이다. 그동안 허송세월하는 건 김성철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는 똑바로 크리스티안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동안에 뭘 하는 게 좋겠나?” “부전공으로 연금학파를 고르셨으니 제가 책을 해독할 방법을 찾는 동안 그쪽에서 배움을 얻는 건 어떻겠습니까?” “연금학파에서?” 김성철의 뇌리에 허름한 천막과 그 안에서 한량처럼 노닥거리던 학생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네. 비록 에어푸르트 교내에선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지만 들어오는 학생을 내치지는 않을 겁니다. 게다가 그쪽에서도 마력과 직관력을 얻을 수 있어요. 어차피 마력과 직관력은 마법사에게 있어 필수적인 능력치는 어떤 경로로든 올릴 수만 있다면 득이 됩니다.” “그건 좋은 의견이군.” 김성철은 영혼 창고 안에 처박아놓고 완전히 잊어버렸던 말하는 책을 떠올렸다. 다른 건 몰라도 연금술에 관해선 그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김성철은 상태창을 열어 능력치를 확인했다. [능력치] 힘 999+ 민첩 853 체력 801 마력 32 직관력 35 마법저항 621 의지 502 매력 18 운 18 ‘최대한 빨리 마력과 직관력을 100 이상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 천공학파의 초급 마법은 마력 130, 직관력 100 이상을 요구한다. 지금 능력치로는 알투지우스가 가르쳐준다고 해도 익힐 수가 없다. 목표달성을 위한 계획을 수정해야 할 때다. 김성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일단 연금학파로 들어가 그곳에서 능력치를 올리면서 회오의 관에 존재하는 퀘스트를 수행한다. 그리고 마력과 직관력이 100을 넘겼을 때, 다시 천공학파로 찾아간다.’ 잠시 헤매긴 했지만 다시 방향을 잡으니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보였다. 김성철은 포상의 의미로 크리스티안에게 하나의 보석을 내놓았다.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크리스티안은 넙죽 보석을 받으며 활짝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용무를 마치고 돌아가려던 김성철의 뇌리에 문득 한 인물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레너드 상텀이라는 자를 알고 있나?” 지금까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해를 끼친 것도 아니고 부딪칠 건수도 없었다. 그랬던 그가 오늘 아침 본색을 드러냈다. 레너드는 김성철에 대해 상상 이상의 관심을 갖고 있었고 또 김성철이 퇴학당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유 있는 적의인지 아니면 단순히 남들의 불행을 즐기는 유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그가 김성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하다. 미리 알아둬서 나쁠 건 없다. “레너드.. 레너드 상텀이라.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크리스티안은 머리를 싸매고 한동안 고심하다 이내 고개를 쳐들고 손가락을 튕겼다. “혹시 그 녀석 갈색 빛이 도는 금발 아닙니까? 코가 약간 매부리코 형태로 굽은 느낌이 돌고.” “글쎄.” 크리스티안은 펜과 종이를 꺼내더니 의수로 종이를 붙잡고 펜으로 빠르게 한 인물의 얼굴을 스케치했다. 전체적으로 괴발개발인 그림이었지만 특징 하나만은 명확하게 잡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림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군. 바로 이 사내야. 그림에 소질이 있는지는 몰랐는데?” “부전공으로 차원학파를 했거든요. 거기선 놀랍게도 그림과 음악을 가르친 답니다. 아무튼... 이 녀석은 직접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유명인이었죠. 갑자기 그는 왜 찾으십니까?” “그 자가 천공학파의 교사 안에 있더군.” 그 말을 들은 크리스티안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녀석이 아직도 학교를 다닌다고요? 이상하군요. 제가 그 녀석을 아는 이유도 대자보에 이 녀석에 얼굴이 실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유로?” “출교처분을 받았거든요. 건틀렛이라 불리는 교내 결투에서 고의적으로 5명의 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죄를 인정받아서요. 그리고 출교처분은 받은 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학교로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 녀석이 천공학파의 교사 안에 있더군.” 그 말을 들은 크리스티안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누군가 그의 뒤를 봐주는 것 같군요.” “그쪽도 알아봐주게.” 김성철은 보석 하나를 더 꺼내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전사님. 예전부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뒤에서 크리스티안이 머리를 긁적이며 조심스레 말했다. “말해라.” “아깝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많은 돈을 줘도... 돈 받는 입장에서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지나치게 보수가 많은 거 같아서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크리스티안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8년 전, 상인길드 연합이 자랑하는 무한 금고를 깡그리 털어간 사내가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을 줄은. 영롱한 보석 두 개를 남겨둔 채 김성철은 다음 장소로 향했다. * “네~. 제가 에어푸르트에서 일하던 재단사 빙튼입니다.” 원래 교복을 입을 마음은 없었지만 사라사가 워낙 강조한 탓에 흥미가 생겼다. 김성철은 금화 한 닢을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교복 한 벌을 맞추려고 한다.” “어이쿠, 신입생이시군요. 좋습니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앙상한 체격에 외눈 안경을 낀 재단사는 외눈 안경으로 뚫어지게 김성철을 쳐다봤다. 김성철의 영혼각인 - 진실의 눈은 그 사내가 마법적인 힘으로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는 것을 감지했다. “좋습니다. 치수는 쟀고요. 조금 헐렁한 옷이 좋습니까? 아니면 몸에 달라붙는 옷이 좋습니까?” “적당한 것.” “아, 그건 정말 어려운 요청인데. 뭐, 간만에 솜씨 발휘를 해보죠.” 빙튼은 에어푸르트의 전직 재단사라는 직함을 가진 자답게 살아 움직이는 가위와 바늘을 잇달아 꺼내더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능란한 솜씨로 교복을 만들기 시작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묘기에 김성철은 오랜만에 흥미를 느끼고 빙튼의 작업을 지켜봤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사내. 한 방면엔 정점에 이르렀군. 달인이라 할만하다.’ 한 벌의 교복이 만들어 지는 데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최고급의 원단과 최고급 장인의 실력이 결합되어 만든 명문 에어푸르트 마법학교의 교복입니다. 한 번 입어보시지요.” 교복이라고 하나 원형은 로브다. 김성철은 야상을 벗고 학교의 로브를 걸치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았다. “어이쿠. 손님! 아주 때깔이 그만이군요. 내일의 대마법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비범한 기운이 전신에서 흐르는 것 같습니다!” 빙튼은 두 손을 싹싹 비비며 틀에 박힌 아부를 했다. 그런데 김성철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게 뭐야.’ 로브라고 하기에는 너무 꽉 끼는 스타일이다. 몸에 맞춘 듯 근육질의 상체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는 게 과거 현실 세계에 있을 때 쫄티를 입고 돌아다니던 양아치들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소매도 뭉텅 잘려나간 민무늬. 누렇게 변색된 반팔 티셔츠 해진 팔부분이 민무늬 너머로 그대로 드러나는 게 흉물이 따로 없었다. 빙튼도 그 점이 걸리는지 실실 웃으면서 손을 비벼대며 김성철 옆에서 살랑거렸다. “이계의 셔츠가 많이 낡으셨네요! 우리 가게엔 이계의 셔츠와 비교해도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민소매 셔츠가 있답니다.” 하지만 김성철의 귀에 그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는 거울을 보며 냉담하게 말했다. “이거 너무 작지 않나? 게다가 소매는 왜 없나?” “이게 요즘 최신 유행입니다!” 빙튼은 자랑스레 떠들었다. “최신 유행?” “마법사라고 해서 골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던 시절은 이미 지났죠. 대세는 문무겸비의 마법검학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보니 손님은 남자로서 아주 좋은 몸을 지니고 계시더군요. 그래서 손님의 매력을 최대한 어필하기 위해 이렇게 만들어봤습니다.” “…….” 김성철은 로브를 벗고 다시 야전상의를 걸쳤다. 익숙한 허름함이 그의 몸을 편안하게 했다. ‘역시 이게 최고군.’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최신유행의 교복을 버려둔 채 가게를 나섰다. * 이튿날, 김성철은 천공학파의 회당 대신 연금학파의 천막으로 향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야전상의 포켓이 꽤나 묵직하다는 점. “아니, 정말로 숙녀를 그런 곳에 며칠이나 처박아두고 돌아보지도 않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베르텔기아는 단단히 삐쳐 있었다. 그녀는 사자토스의 자취에 들어간 이래 줄곧 영혼 창고 안에 처박혀 있었다. 김성철은 그녀의 존재를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가 최근에 와서야 다시 꺼내 준 것이다. “정말로! 최악이야. 최악! 처음부터 부정행위로 시련을 통과한 것도 그렇게 어떻게 그렇게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을 수가 있어? 소환자들은 모두 그 모양 그 꼴이야?” 베르텔기아는 끝도 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주머니 안에서 길길이 날뛰었지만 김성철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베르텔기아의 말에 대꾸를 한 것은 연금학파의 천막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조용히 안하면 다시 영혼 창고에 집어넣겠다.” “…….” 단 한 마디로 베르텔기아를 침묵시켰다. 주머니 안에서 꿈틀거리던 요동도 잦아들었다. 베르텔기아를 진정시킨 김성철은 연성의 관이라 명명된 천막의 거적때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대 천막 안에 들어가자마자 매캐한 향이 코끝에 스며들었다. 대마초를 태우는 냄새다. 김성철은 천막 안 앉은뱅이 방석을 깔아놓은 자리에 학생 몇 명이 모여 대마초를 피우고 있는 것을 눈동자에 담았다. 그들은 김성철 쪽을 힐끗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뭐라고 수군거리더니 킥킥 웃어댔다. 김성철은 그들을 무시하고 바로 연금학파의 교수인 바실 필루스를 찾았다. “어허. 이게 누구야? 신입생 아니신가?” 건장한 체격을 지닌 사내가 불쑥 김성철 앞을 가로 막았다. 복장으로 미루어보아 학생의 신분으로 보였지만 대마에 취해 몽롱한 눈빛을 하고 실실 웃고 있었다. ‘아침부터 사이좋게 대마초나 피우다니.’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나머지 절반은 바닥에 빈 술병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누가 술병인지 사람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김성철은 앞을 가로막은 사내를 노려보며 조용히 말했다. “바실 필루스 교수는 어디에 있나?” “바실 형? 바실 형이라면 저 안에서 술집 여자랑 자고 있어.” 건장한 학생은 키득거리며 천막 안쪽을 가리켰다. 김성철은 칸막이로 가린 천막 안에서 두 남녀가 알몸으로 뒤엉킨 채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개판이군. 상상한 이상으로.’ 아침 일찍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 ======================================= 14. 연금학파 (2) 하지만 이왕 찾아온 거 허송세월은 할 수 없는 노릇. 김성철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앞을 가로막은 사내에게 말했다. “연금술을 배우고 싶은데 뭐부터 하면 되지?” “바닥에 교과서 널려 있을 거야. 재료와 연금 가마는 천막 바깥에 있고.” 사내는 껄껄 웃으며 자신의 친구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가 무용담을 말하듯 큰 소리로 떠들었다. “저 사람 엄청 진지한데? 나한테 뭐라고 한 줄 알아? 글쎄 연금술이 배우고 싶다지 뭐야!” 그는 뭐가 그리 웃긴지 폭소를 터뜨렸다. “그런 인간이 여긴 왜 왔대!” 나머지 학생들도 대마를 말아 만든 연초를 빨아들여 코와 입으로 뱉어내며 낄낄거렸다. 다른 의미로 천공학파와 비슷한 분위기. 김성철은 자신을 조롱하는 학생들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천막 안에 술병, 쓰레기들과 함께 널린 책들을 뒤적거렸다. “저기, 저 책.” 품안의 베르텔기아가 소곤거렸다. 김성철은 술병 사이에서 얇게 정장된 책 한 권을 발견하고 손으로 들어올렸다. < 오우거도 따라 할 수 있는 기초 연금술 > 김성철의 행동을 유심히 주시하던 학생 패들이 그걸 보고 또 박장대소했다. “저거 봐. 진지한 소환자 씨가 무슨 책을 들었는지!” “에크하르트의 수제자답네!” 제목이 확실히 눈에 띄는 게 어린애들 대상으로 만든 책으로 보였다. 책을 펼치니 우스꽝스럽게 생긴 오우가가 연금 가마를 젓는 삽화도 들어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이 저렇게 비웃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김성철은 언제나 그렇듯 작은 자들의 비난은 터럭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조롱을 뒤로 한 채 천막을 나서 뒤로 돌아갔다. 천막 뒤엔 여러 개의 연금 가마와 판자를 이어 붙여 만든 재료창고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가마는 쓰지 않은 지 오래된 듯 먼지와 거미줄로 뒤덮여 있었고 창고도 관리되지 않은 상태로 방치되고 있었다. “어휴. 그 자식들 뭐야. 진짜. 그런 것들도 연금술사라고!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네!” 베르텔기아가 다시 꿈틀거렸다. “예나 지금이나 연금술사 대접은 최악이라니까! 연금술의 멋짐을 모르는 불쌍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의 투정을 들으며 연금 가마 옆 적당한 나무 등걸에 앉아 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를 넘겼을 때 김성철은 느꼈다. 쉽다. 너무나도 쉽다. 김성철은 한 달음에 오우거도 따라할 수 있는 기초 연금술을 읽어나갔다. 분량이 꽤 되긴 했지만 김성철에겐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글자의 미로 속에서 헤맨 것이 오히려 득이 되는 순간이었다. “전사인 당신도 알겠지만 전사가 전투를 거듭하면 할수록 능력치가 오르듯이 연금술과 마법도 쓰면 쓸수록 그 능력치가 올라.” 김성철이 책을 덮자 베르텔기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김성철은 주머니에서 베르텔기아를 꺼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베르텔기아는 마치 사람처럼 김성철 손바닥 위를 아장아장 걸으며 선생님처럼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책과 저 연금 가마는 나름의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아. 다시 말해 에어푸르트 마법학교라는 공간에서 지정된 책을 읽고 그곳의 연금 가마를 통해 연성을 성공해내면 그 자체가 하나의 퀘스트로 인식되어 보상을 얻게 되는 방식이지. 마법 학교에서 흔히 쓰는 방식이라고는 할까.” “그래?” “응. 마법 학교는 그 자체로 선현들이 만들어놓은 거대한 퀘스트의 집합소거든. 아무리 그것이 남들이 깔보는 연금술이라고 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아.”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베르텔기아. 의외로 도움이 되는 녀석이군.’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제부터 실습 시간이다. 김성철은 나무 등걸에서 일어나 주변에 적당한 나뭇가지를 골라 손으로 무식하게 잡아 꺾었다. 그것은 성인 팔뚝만한 굵기였지만 김성철 손아귀 안에 들어가자 수수깡처럼 뚝뚝 꺾였다. 김성철은 아무 도구도 쓰지 않고 오직 손아귀 힘만으로 잔가지들을 모두 비틀어 뽑아버린 후 영혼 창고에서 시작의 검을 꺼냈다. 소환 궁전에서야 요긴하게 쓰이던 녀석이지만 지금은 영혼 창고 한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 김성철은 연금가마 아래 타오르는 불길 아래 검을 넣어 칼날을 벌겋게 달군 뒤 주먹으로 검날을 후려쳐 검날을 납작하게 만들어버렸다. “맙소사...” 베르텔기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김성철은 납작하게 만든 달구어진 검날을 아까 만들어 놓은 나뭇가지 위에 테를 두르듯 두르고 그 위에 잔가지 몇 개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분주한 손놀림이 몇 번 오간 후 제법 그럴 듯한 책받침대가 만들어졌다. 김성철은 책 받침대를 연금 가마 옆에 깊숙이 박아 넣고는 오우거도 따라할 수 있는 기초 연금술을 펼쳐 올려놓았다. “…짝. 짝. 짝.” 그 광경을 지켜보던 베르텔기아의 소감이었다. 김성철은 한 발짝 물러나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고는 판자로 이어 만든 창고로 걸어갔다. 창고의 문엔 녹슨 쇠사슬이 걸려 있었지만 김성철이 두 손을 잡고 잡아당기자 거미줄처럼 간단하게 끊어졌다. “많이 해본 솜씨네?” 베르텔기아가 조심스럽게 빈정거렸다. 이에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지.” “…….” 창고 안엔 수많은 재료들이 진열대 위에 나열되어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재료들을 보자 물 만난 고기처럼 창고 안을 날아다니며 재료들을 관찰했다. 눈도 코도 입도 없는 책이 어떤 식으로 재료들을 감정하는지 김성철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곧 그녀는 감정을 끝내고 김성철의 어깨 위에 내려 앉았다.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런지 보존상태가 썩 좋지 않네. 그래도 최하급의 연성물은 만들어낼 수 있겠어. 일단 이거하고 그리고 저거. 응. 그것도 골라 봐.” 김성철은 베르텔기아가 지목하는 연금재료를 집어 냄새를 맡았다. < 맹인의 풀 > 레벨 : 1 등급 : F 속성 : 목(木) 효과 : 없음 비고 : 길가에 흔히 볼 수 있는 풀이지만 온건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 상극이 되는 연금재료의 성질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건 전에 다뤄본 재료군.’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조금 아는 것 사이엔 커다란 차이가 있다. 특히 흥미 유발의 차원에서 보면 후자 쪽이 보다 압도적인 장점을 지닌다. 김성철은 잠들어 있던 흥미가 다시 살아나는 것 느끼며 다른 재료도 함께 채취해 냄새를 맡아 연금재료의 정보를 확인했다. “매사 냄새를 맡아보는 건 좋은 습관이야. 사자가 토끼를 잡을 때 전력을 다하는 것처럼 훌륭한 연금술사는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재료라도 놓치지 않는 법이거든!” 베르텔기아의 독려 속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확보한 김성철은 야상을 벗어 연금 가마 옆에 깔고는 그 위에 재료들을 올려놓았다. ‘그럼 시작해볼까.’ 오랜만의 연성이다. 김성철은 손수 만든 받침대 위에 펼쳐 놓은 교과서를 보며 야상 위에 올려 둔 재료를 골랐다. “맹인의 풀은 뿌리를 떼고 넣는 게 효과가 좋아. 뿌리엔 맹인의 풀이 지닌 중화효과를 저해하는 불순물이 섞여 있거든.” 베르텔기아가 옆에서 훈수를 뒀다. 김성철은 그녀가 시키는 말라붙은 맹인의 풀을 잡고 뿌리 부분을 조심스레 박리했다. 다른 재료들도 비슷한 손질 과정을 거쳐야 했다. 가령 말린 행복 꽃이란 재료는 수술과 암술을 떼어내야 했고 그림자 버섯 같은 경우엔 검은 삿갓 부분만을 재료로 써야 했다. “재료 다듬는 솜씨가 제법인데? 때려 부수는 것만 잘 할 줄 알았는데.” 옆에서 둥둥 뜬 채 김성철을 지켜보던 베르텔기아가 흔치 않은 칭찬을 했다. 재료를 더듬던 김성철은 문득 연금술의 연성을 하는 과정이 요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품었다.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선 좋은 재료가 필요하고 재료를 다듬는데도 정성을 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시간을 들여 재료를 다듬어 가마 안에 넣고 주걱으로 가마 안을 힘차게 저었다. 주걱을 저을 때마다 마나가 빠져나가기 수차례, 곧 연금 가마 안에 환한 빛이 가득 찼다. [ 연성 성공! ] 연금 가마 안엔 초록빛의 액체가 담겨 있었다. 김성철은 그 액체를 병에 담고 감정을 실시했다. < 치유 연고 > 레벨 : 1 등급 : E 속성 : 목(木) 분류 : 치료약 효과 : 상처에 바르면 좋다. 감정을 마친 김성철 앞에 문자가 떠올랐다. [ 훌륭합니다! 당신은 에어푸르트의 연금술사로서 첫 번째 연성에 성공하였습니다. ] 보상 : 마력 +1, 직관력 +1 그걸 본 김성철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직관력뿐만 아니라 마력도 함께 올려주는군?” “당연하지. 연성을 할 때 마력도 소모하니까. 단순히 책만 읽고 이해하는 것도 아니니.” 마력 1과 직관력 1. 미약한 수치지만 성장에 목말랐던 김성철엔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다. 그는 즉시 다음 페이지를 펼쳐 다음 연금 과제에 도전했고 베르텔기아의 도움을 받아 순식간에 과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 김성철은 한 권의 책을 모두 독파하고 그 안에 담긴 모든 과제를 해결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책답게 한 권을 모두 독파해도 성장한 능력치는 마력 5, 직관력 3에 지나지 않았지만 김성철은 개의치 않았다. 배울 책이라면 천막 안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까. 김성철은 다시 천막에 들어가 다음에 익힐 책을 찾고는 다시 천막을 나섰다. 이제 슬슬 하루 일과를 시작하려던 연금학파의 학생들은 야전상의를 걸친 낯선 사내가 들락날락하는 걸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하는 사람이지?” 대마를 피우던 학생들은 모두 자리를 비운 상태라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신경 쓰는 사람도 없었고. 연금학파의 교수와 학생의 무관심 속에서 김성철은 차근차근 베르텔기아의 지도를 받아 교과서를 차례로 고속도로 독파하기 시작했다. 대마를 피우던 학생들이 다시금 김성철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김성철의 손에 들린 책을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뭐.. 뭐야? 벌써 고급 연금술을 보고 있다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불과 일주일 전에 저 허름한 복장의 사내는 어린애들이나 보는 입문용 서적을 들고 있었는데. 단 일주일 만에 자신들도 감히 손도 못 대는 고급 연금술을 들고 있는 걸 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냥 겉멋으로 들고 다니는 것이겠지.” 한 학생이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다른 학생들도 피식 웃으며 동조했다. “그래, 자기가 무슨 수로 우리도 못 보는 책을 보겠어. 초급 연금술은 그렇다 치고서라도 중급 정도만 되도 피똥 싸는데 말이야.” “동감이야. 게다가 초급 연금술부터는 연금도구의 사용법도 알아야 하잖아? 그런데 도구 사용법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모를 건데 자기가 무슨 수로 독학을 해?” 그들의 스승인 바실 필루스는 오늘도 술에 쩔어 알몸으로 방에 누워 있다. 마음씨 착한 학생들이 김성철을 애틋이 여겨 가르칠 수도 있겠지만 연금학파엔 마음씨 착한 학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은 결국 김성철이 관심을 받기 위해 고급 연금술 책을 가지고 다니는 걸로 결론을 내려버렸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천막 한 구석에 모아둔 연금도구들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김성철에겐 어떤 연금술사보다 훌륭한 스승이 있다는 것도 말이다. “옳지. 옳지. 그렇게 붓고 쭉쭉 짜내는 거야. 너무 세게는 하지 말고.” “…….”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의 독려를 받으며 원심분리기의 손잡이를 조심스레 돌렸다. 자칫하면 손잡이가 박살날 수도 있으니 힘 조절을 하며 최대한 빠르게 돌리자 원심분리기 안에 담긴 액체가 그 성질에 따라 두 개의 층으로 나뉘었다. “옳지. 거름망을 대고 위에 뜬 액체를 걸러내!” 김성철은 시키는 대로 했고 곧 맑은 하얀 액체를 병 안에 담을 수 있었다. 연금술사의 장점 중 하나는 성공 여부를 즉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연성 성공! ] 김성철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학생들의 염려와 달리 김성철은 중급 연금술을 독파하고 이제 고급 연금술의 영역까지 발을 담그고 있었다. 일주일 간 김성철의 마력과 직관력은 각각 50을 넘어섰다. 그 과정에서 유일한 장벽은 마나의 부족. 연성을 하도 많이 하다 보니 마나가 부족해 연성이 진행되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하지만 이것도 돈의 힘으로 해결 가능했다. 고갈 된 마력을 보충하기 위해 값 비싼 마력의 정수를 벌컥벌컥 들이켜 가며 연마를 거듭하자 김성철의 성장을 막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기대한 이상의 성장을 이루어냈지만 아직 김성철은 자신의 성장세에 만족하지 않았다. 아니 이제 시작일 뿐이다. 마력 및 직관력 50을 넘어선 김성철의 시선은 이제 회오의 관을 향하고 있었다. ======================================= 15. 회오의 관 (1) 인간이 늙으면 주름이 생기듯 건물도 수백 년이 지나면 섬뜩한 괴담 한두 가지는 훈장처럼 지니게 된다. 준공된 시점이 최소 천 년 이상이 넘고 그동안 셀 수 없는 학생들이 거쳐 간 회오의 관이 수많은 괴담의 주인공이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학생이 몇 남지 않아 그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지만 유서 깊은 회오의 관엔 일곱 개의 괴담이 존재한다. 첫 번째 괴담은 지하 복도 맨 끝에 자리 잡은 열리지 않는 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회오의 관은 기숙사로 개조되기 전에 감옥으로 쓰고 있었는데 다른 감옥이 그러하듯 회오의 관의 지하에도 음침한 고문실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문실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끔찍한 고문을 받아가며 죽어갔고 거기서 죽은 자들이 악령이 되어 고문실을 헤매고 있다는 것이다. 김성철은 바로 그 첫 번째 괴담의 주인공인 지하의 열리지 않는 문 앞에 서 있었다. [ 그믐달이 뜬 날, 자정에 열리지 않는 문틈에서 피를 연상케 하는 쇳물이 흘러나올 때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 김성철의 손엔 크리스티안이 넘긴 쪽지가 있었다. 그는 쪽지를 다시 한 번 숙지하고 열리지 않는 문에서 쇳물이 흘러나오기 기다렸다. 잠시 후, 문 안쪽에서 스산한 기운이 감돌더니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으.. 으... 으으...” 담이 약한 사람이라면 줄행랑을 치고도 남을 정도로 섬뜩한 신음이었다. “우리 그냥.. 돌아가면 안 돼?” 베르텔기아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듯 주머니 안쪽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반면 김성철은 눈썹 한 까딱하지 않고 문틈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곧 문틈에서 붉은 쇳물이 피처럼 흘러나왔다. 김성철은 기다렸다는 듯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문고리는 놀랍게도 온기를 품고 있었다. 곧 김성철 앞에 빛나는 문자가 떠올랐다. [ 무엇이 그대로 하여금 이 문고리를 잡게 하였는가? ] 뒤이어 선택지가 나타났다. [ 1. 호기심 ] [ 2. 용기 ] [ 3. 객기 ] 김성철은 3번을 고르고 싶었지만 여기서는 크리스티안이 알려준 모범답안인 1번을 선택했다. [ 호기심인가? 훌륭한 마법사에게 호기심은 지식의 불꽃과도 같지. 하지만 조심하라. 호기심의 대가는 때때로 죽음이 될 수 있을 터이니. ] 김성철은 귀를 파며 흘러나오는 문자를 읽어 나갔다. 잠시 후, 문틈에서 흘러나오던 쇳물이 마치 생명을 가진 듯 스스로 떠오르며 문 앞에 피처럼 붉은 색의 문자와 도형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 대답하라. 이 마법진이 무엇을 말하는 지. ] 변화무쌍한 쇳물의 움직임의 목적은 하나다. 시험에 도전하는 자의 능력 측정. 특히 직관력을 시험했다. 일주일 전의 김성철이라면 쇳물이 그려내는 형상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김성철은 눈을 현란하게 하는 쇳물 속에서 일정한 패턴과 그 의미하는 바를 꿰뚫어 보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행운.” 그 음성이 울려 퍼지자 허공을 춤추던 쇳물은 불에 타 없어졌고 또 하나의 문자가 김성철 앞에 나타났다. [ 그대는 이 문에 들어올 자격이 있다. ]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고문실이라 부르며 두려워하던 열리지 않는 문 너머가 김성철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성철은 약간의 실망을 느꼈다. 열리지 않는 문 안에 있던 것은 쇠사슬에 묶인 악마 한 마리였다. 산양의 머리와 박쥐의 날개. 인간의 몸통과 염소의 발굽을 지닌 그 악마의 정체는 바알. 발록 보다는 한 단계 위급의 고급 악마로 알려졌지만 김성철 망치 앞에선 발록과 크게 다르지 않는 최후를 맞이하곤 했다. “크크크크..... 오랜만의 손님이군. 잘 왔다. 안 그래도 심심해서 탈출하려는 참이었는데.” 쇠사슬에 묶인 악마가 말했다. 자세히 보니 그 악마는 한 쪽 눈이 멀어 있었고 마법의 힘도 미약했다. 인간 혹은 악마에게 패배해 힘을 잃은 상태에서 구금 된 모양이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악마를 지켜보다가 퉁명스레 말했다. “…시작하자.” 악마의 입가에 흉악한 미소가 떠올랐고 이윽고 큰 소리로 웃었다. 악마가 움직일 때마다 그 몸을 묶은 수십 개의 쇠사슬이 철렁거리며 소리를 냈다. “당돌한 인간이구나. 좋다. 그럼 악마의 게임을 시작하지!” 악마의 손끝에서 마법진이 피어오르더니 이윽고 하나의 책상이 나타나 김성철과 악마 사이에 내려 앉았다. 책상 위엔 주사위 하나와 3개의 컵이 놓여 있었다. 악마는 컵들을 엎더니 그 중 하나에 주사위를 놓고 능수능란한 움직임으로 컵들 돌렸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건 야바위군.’ 크리스티안의 쪽지엔 주사위 놀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김성철의 지식에 의하면 이건 야바위다. “자, 규칙은 간단해. 나는 컵을 돌리고 너는 주사위의 위치를 맞춘다. 만약 주사위가 있는 컵의 위치를 알아맞힌다면 너에게 보상을 주겠다.” 악마는 교만한 눈으로 김성철을 내려 보며 시험하듯 물었다. “하겠느냐?”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컵을 잡은 악마의 손이 부드럽게 움직였고 눈을 현혹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주사위가 멈추고 악마가 물었다. “자, 어느 컵에 운명의 주사위가 들어 있을까?”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었다. 김성철은 중간에 있는 컵을 가리켰다. 악마가 컵을 들어 올리자 과연 주사위가 들어 있었다. “제법이군. 인간 주제에. 이 크루스테스님의 속임수를 간파하다니!” 악마는 분한 듯 두 주먹을 흔들었다. 몸에 걸린 쇠사슬들이 격렬하게 요동치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보상을 주지.” 쇠사슬 소리가 그친 후 악마는 김성철을 향해 뾰족한 손톱이 솟아나온 손가락을 가리켰다. [ 놀라운 승부사군요! 당신은 악마 크루스테스와의 내기에서 승리했습니다! ] 보상 : 마력 +1 마법과 친한 악마답게 주는 보상도 직관력이 아니라 마력이다. 비록 그 수치는 악마와의 내기에서 승리한 대가치고는 지나치게 낮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크루스테스는 미소를 지으며 은근하게 말했다. “솔직히 이번엔 내가 실수를 했어. 오랜만에 하려니 손이 꼬이지 뭐야. 그래서 그런데 한 번 더 도전하지 않겠나? 이번엔 내 마력 2를 걸겠어. 물론 인간 너는 아무것도 걸지 않아도 되고.” 달콤한 제안. 거절할 이유가 없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고 두 번째 게임이 곧 시작됐다. 결과는 또 다시 김성철의 승리. ‘역시, 크리스티안이 알려준 대로군.’ 회오의 관 지하에 갇힌 악마는 악마들 간의 세력 다툼에 패해 인간계로 떨어진 패배자다. 그 악마, 크루스테스는 마법사들을 돕는 대가로 학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 아래 비밀스런 공간을 만들고 학생들을 내기로 유혹해 구차한 삶을 이어나갔다. 그 악마의 방식은 전형적인 사기꾼들이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 몇 판을 일부러 져줘 학생의 방심과 욕망을 함께 키운 후, 가장 큰 판돈이 걸린 한 판에서 학생의 영혼을 먹어 치운다. [ 4번째 게임까지 한 후, 즉시 방에서 달아나십시오. 악마가 매우 화낼 테니까요! ] 크리스티안은 학생 측에서 판돈을 걸지 않는 4번째 게임만을 하라고 당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다섯 번째 게임부터는 악마도 학생에게 판 돈을 걸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이런 인간 같은 일이 있나! 이 크루스테스가 4번이나 연달아 패하다니!!!” 쇠사슬 소리가 전에 없이 커졌고 악마는 분노로 몸을 바들바들떨었다. “마력 10. 마력 10을 놓고 대결을 하자! 이대로는 네 놈을 떠나보낼 수가 없으니까!” 이미 김성철은 지난 4번의 승부에서 무려 마력 10을 얻었다. 능력치 자체가 낮아 올리기 쉽다는 걸 감안해도 일반 퀘스트로는 최고 등급의 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건 일반적인 퀘스트라기보다는 저 악마가 말하는 대로 내기 그 자체인 모양이군.’ 퀘스트는 보통 일방적이다. 퀘스트는 신 혹은 신에 준하는 존재, 아신(亞神)의 축복을 받은 존재가 세계를 관장하는 자들의 허가를 얻어 만들어내는 일방적인 시련과 보상의 집합체다. 퀘스트를 만들어내는 자를 퀘스트 호스트라고 부르는데 퀘스트의 시련의 난이도와 그 보상의 크기는 퀘스트 호스트의 강함에 정비례한다. 칠영웅 정도 되는 전설적인 존재들은 퀘스트 상위에 있는 위업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 아래의 존재들은 자신에 걸 맞는 퀘스트만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 악마의 내기는 하급 퀘스트라고 하기엔 지나친 보상을 준다. 그것은 이 퀘스트가 다른 퀘스트처럼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그 결과에 따라 퀘스트 호스트에게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설계됐다는 것을 뜻한다. “자! 인간! 마력 10을 놓고 승부를 하겠는가? 그렇다면 덤벼라.” 승부에서 이길 수 있다면 마력 10을 추가로 얻을 수 있다. 하룻밤 만에 별 수고를 들이지 않고 마력 20을 순식간에 올릴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하지만 악마는 손해보는 장사는 결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승부는 나라고 해서 공짜로 줄 순 없어. 내가 지금까지 걸은 게 있으니 너도 걸 게 있어야지.” “뭘 걸길 원하나?” 김성철이 묻자 악마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가 걸만한 게 영혼 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지금까지 악마의 손놀림은 주의만 조금 기울여도 누구나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쉽고 평이했다. 멋모르는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성공에 취해 무모한 도전을 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자신을 파멸시키는 유혹인지도 모른 채. “하겠다.” 하지만 김성철은 지금까지 악마에게 희생당한 자들과 전혀 다른 마음가짐으로 악마와의 게임에 임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영혼각인 - 진실의 눈을 가동시킨 채 악마를 응시했다. “그렇다 이거지?” 쿵! 열리지 않는 문이 닫혔다. 방안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악마는 미소 지었고 이윽고 천정이 떠나갈 정도로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럼 시작해볼까? 인간? 내 마력 10과 네 영혼을 건 최후의 승부를?” 컵을 쥔 악마의 손이 움직였다. 빠르다. 지금까지 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고 주사위는 총알처럼 이 컵과 저 컵을 넘나들며 보는 이의 눈을 현혹시켰다. “크하하하하하!” 악마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 빠르기를 더했다. 마침내 악마의 손과 컵은 더욱 빨라져 인간의 눈으로는 잔상만을 볼 수 있는 상태로 변했고 목재 테이블은 그 빠르기를 감당하지 못해 마찰열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악마의 손이 멈췄다. 책상 한 구석이 불타오르는 가운데 악마는 하나 남은 눈으로 김성철을 내려다보며 고압적으로 물었다. “자, 인간. 운명의 시간이다. 선택해라.” 악마는 웃고 있었다. 절대 맞출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지금 이 내기는 행운의 여신이 인간에게 미소를 짓는다고 해도 이길 수 없는 것이기에. 주사위는 컵 안이 아닌 악마의 손아귀 안에 감춰져 있었다. ‘오랜만에 인간의 영혼으로 포식하겠군.’ 악마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선택을 종용했다. “자, 인간! 뭘 그리 고민하나. 나는 인내심이 없다.” 그때 악마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김성철의 손이 악마의 손등을 움켜잡은 것이다. “동작 그만.” 하나 남은 악마의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어.. 어떻게?!’ 손을 움직일 수가 없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자신이 힘을 잃은 몰락 악마라고 해도 평범한 인간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의 소유자다. 그런 그의 힘이 간단하게 압살당했다. “끄아아아아악!” 악마는 손이 으스러뜨릴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컵을 쥔 손아귀를 활짝 폈다. 떼구르르. 손아귀 안에 숨어 있던 주사위가 불타는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뭐.. 뭐야. 이 자식...’ 그제야 악마는 알 수 있었다. 내기에 속은 건 저 인간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걸. 김성철은 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눈으로 크루스테스를 노려보며 담담하게 묵직힌 살의를 담아 말했다. “약속을 지켜라. 악마.”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크루스테스는 몇 남지 않은 자신의 마력을 쥐어 짜내 김성철에게 양도했다. 퀘스트의 성공을 알리는 문자가 그 앞에 떠올랐다. [ ] 보상 : 마력 +10 아무 문장도 없는 걸 보니 악마는 아마도 자신이 다섯 번째 내기에서 지리라는 걸 상정조차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김성철은 벙찐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악마를 남겨 둔 채 조용히 말했다. “내가 다시 여기 찾아오는 날이 네 제삿날인줄 알아라.” 악마를 묶은 쇠사슬이 미약하게 떨렸다. 김성철은 그 쇠사슬이 일으키는 여음 속에서 악마의 공포를 느끼고는 문 앞에 섰다. 열리지 않는 문이 활짝 열렸다. 김성철은 문을 나서며 자신의 능력치를 확인했다. [능력치] 힘 999+ 민첩 853 체력 801 마력 71 직관력 58 마법저항 621 의지 502 매력 18 운 18 ‘회오의 관에 남은 퀘스트는 이제 6개. 낮에는 연금학파에서 연금서적을 독파하고 밤에는 회오의 관의 퀘스트를 진행한다. 기한은 일주일. 일주일 안에 목표를 달성한다.’ 김성철이 신적인 육체를 얻은 건 우연이 아니다. 그는 성장하는 법을 알고 있다. ======================================= 15. 회오의 관 (2) 에어푸르트 마법학교 바깥엔 카벙클이란 상호를 지닌 마법 도구 상점이 하나 있다. 무려 8대 째 영업을 이어온 유서 깊은 가게는 최근 다가오는 재앙과 에어푸르트 마법학교의 쇠퇴로 인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오늘 상점 주인의 입은 함지박 만하게 벌어져 있었다. “이걸.. 전부 사신다고요?” 큰 손이라는 건 타인에게 해당하는 행운이라고만 생각했다. “전부 다 하겠소. 다해서 얼마요?” 하지만 예고도 없이 나타난 검은 머리 소환자는 몇 년째 누적된 적자를 한꺼번에 메꾸기에 충분한 이득을 주인에게 안겨다 주었다. “금화 서른 한 닢인데.. 손님은 단골이시니 서른 닢으로 깎아드리지요.” 사내가 구입한 것은 하급 마력 정수 31개. 속칭 마나 드링크. 마시면 잃어버린 마력을 보충하는 아이템으로 그 효능보다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악명이 높다. 그런데 그 사내는 그런 걸 31개나 샀다. 재고는 2개뿐이었지만 시내의 다른 마법 도구상과 아는 연금술사들을 총동원해 29개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이전에도 11개의 마나 드링크를 구입한 적이 있는데 그때와 지금의 공통점이라면 그는 일체 흥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금화 몇 십 개가 오가는 거래임에도 사내는 값을 부르는 대로 돈을 지불했다. 이번 거래만 해도 그렇다. 사내에게 판 마나 정수 31개의 실제 매입가는 금화 열두 닢에 불과했다. 주인은 흥정이 시작되면 금화 스무 개까지 깎아줄 용의도 있었다. 그런데 그 사내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금화 서른 닢을 망설임 없이 넘기니 주인으로서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 사내의 금화는 순도가 워낙 높아 다른 금화보다 훨씬 값을 잘 쳐서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은 금화라고 해도 제조시기에 따라, 특히 무게와 순도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게 금화라는 녀석이므로. “그럼 이만 실례하겠소.” 사내가 떠난 뒤에 주인은 사내가 남기고 간 금화 한 닢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틀림없다. 순도 99.9%의 완벽한 금화다. 주인의 입가가 다시금 함지박 만하게 벌어졌다. “거참, 뭐하는 양반인지.” 그는 금화 뒷면을 살펴 발행처를 확인했다. 통상 주화엔 주조한 곳이 표시되기 마련이니. 그런데 주인의 손에 들린 금화엔 어떤 표시도 없었다. 무인(無印) 주화다. 평생 학생들 상대로 소도구나 팔던 도구점 주인으로선 알 턱이 없었지만 이계에서 무인 주화를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세력은 단 하나 뿐이다. 상인 연합 길드. 정면에 나서지 않지만 화수분 같은 경제력과 상인들을 이용한 정보망으로 이계의 숨은 실력자로 군림하는 거대 세력이다 무인 주화의 유통은 그들이 꽤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지던 주제였다. “무인 주화의 유통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상인 연합 길드의 수장인 호르네코 총독이 무인 주화의 유통에 관한 보고를 들은 것은 늦은 저녁이었다. 식탁 위에 올려진 것은 검은 빵과 버터 한 조각. 억만 금을 쥐락펴락한다는 상인 연합 길드의 총독으로선 어울리지 않는 검박한 식사다. 호르네코 총독은 딱딱한 빵을 우물우물 씹으며 부관을 졸린 눈으로 응시했다. “…그래?” 그는 보고를 듣고도 식사를 마저 했다. 검은 빵에 버터를 올린 후, 미지근한 물을 입에 머금고는 버터를 묻힌 빵을 꼭꼭 씹어 물과 함께 넘긴다. 소의 되새김질을 연상케 하는 긴 식사가 끝난 후 호르네코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디서 무인 주화의 유통이 확인됐나?” “황금 도시입니다.” “황금 도시?” 호르네코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 아는 보석 몇 개도 황금 도시 일대에서 유통이 되고 있다는 정보도 확인했습니다.” “무인 주화에 이어 보석이라.” 보석은 그렇다 치고 무한 금고에 꽁꽁 숨겨 두었던 무인 주화가 유통되기 시작됐다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8년 전, 무한 금고를 털어간 사내가 다시금 인간의 영역에서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 이전엔 아슬아슬하게 놓쳤지만 이번엔 놓칠 수 없다. “암살교단에게 연락해라. 가격은 묻지 않을 터이니 그쪽에서 동원 가능한 최고의 정예들을 보내라고.” * 마력 정수를 대량으로 구입한 이유는 간단하다. 회오의 관에 숨겨진 두 번째 히든 퀘스트는 대량의 마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공실이 된 사감실의 책상 위엔 불길한 검은 빛을 띠는 보주가 놓여 있다. “이건, 흡혼석(吸魂石)이네.” 베르텔기아가 한 눈에 돌의 정체를 알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군.” 김성철도 알고 있다. 마법사를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전사들 중에 흡혼석을 무기에 박아두는 무리들이 종종 있었다. 사감실의 흡혼석은 그것들보다 훨씬 컸고 많은 학생들의 손을 거친 것을 증명이라 하듯 표면이 반질반질했다. “흐음. 예나 지금이나 학교라는 곳은 비슷하네.”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주머니에서 튀어나오며 말했다. 김성철이 잠자코 있자 베르텔기아는 흡혼석 주위를 빙빙 돌며 말을 이었다. “내가 다니던 마법 학교에도 기숙사마다 흡혼석 하나씩을 뒀어. 가끔 신입생 중에서도 타고난 마력을 지닌 애들도 있거든. 그런 애들을 솎아내기 위해 흡혼석을 놔두는 거지. 진짜배기들은 흡혼석을 마력만으로 깨 부숴 버리거든.” “내가 하려고 하는 게 그거야.” 김성철은 영혼창고에서 보자기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엔 서른 개에 달하는 마력 정수가 담겨져 있었다.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베르텔기아가 몸을 축 늘어뜨렸다. “완전 사기잖아. 사기!” “…….”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흡혼석에 손을 올렸다. 마력이 빨려 들어감과 동시에 눈앞에 환한 문자가 떠올랐다. [ 에어푸르트 마법학교 마력 측정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 당신은 지금 마력을 빨아들이는 돌, 흡혼석을 만지고 있습니다. 지금 오한이 느껴지거나, 눈앞이 아찔하거나, 다리가 후들거리고, 당장이라도 드러눕고 싶은 기분이 느껴지시는 분은 당장 흡혼석에서 손을 떼어 주시길 바랍니다. ] “…….” 눈앞이 아찔해진다. 김성철은 마력 정수를 하나 까서 입안에 털어 넣었다. 병아리 눈물만한 양이지만 몸에 들어가자마자 즉시 마나가 회복되는 게 느껴졌다. [ 좋습니다! 당신은 강한 마력의 소유자군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마력 측정을 시작하겠습니다. ] [ 마력 측정은 지금부터 5분간 이어지며 그 동안 손을 떼거나 마력이 고갈되었음이 확인됐을 땐 즉시 테스트가 종료됩니다. ] [ 그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5...4..3...2...1 ] [ 시작! ] 카운트다운이 끝남과 동시에 흡혼석이 김성철의 마력을 맹렬하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한 손에 흡혼석을 댄 채 다른 손으로 부지런히 마력 정수를 까 입안에 털어 넣었다. 마력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들어왔다. 마력을 머금은 흡혼석은 점점 하얀 빛으로 충만해져 갔다.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라고....” 베르텔기아는 할 말을 잃은 채 김성철의 방식을 지켜보았다. 31개에 달하던 마력 정수의 절반이 비워졌을 때 테스트는 끝이 났다. [ 훌륭하군요! 당신은 아마도 500명에 이르는 당신의 동기 중에서 상위 1%에 달하는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을 겁니다. ] [ 마법사의 가장 중요한 자질인 타고난 마력을 지닌 그대를 위해 에어푸르트 마법학교 12대 교장 마르다이스테스가 경의를 담아 선물을 내립니다. ] 보상 : 마력 + 5, 직관력 +5, 쏠쏠한 보상.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김성철은 흡혼석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잠시 후, 우윳빛으로 충만한 흡혼석의 내부에 격랑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 아직 모자라신가요? ] 김성철은 다른 한 손에 마력 정수를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면 좋습니다. 진정한 시련을 시작하겠습니다. 단, 지금부터 진행되는 시험은 대단히 위험할 수 있으니 꼭 기숙사 사감의 참관 하에 진행하여주시길 바랍니다. ] 사감은 없다. 대신 파닥거리는 베르텔기아는 있다. 김성철이 베르텔기아를 쳐다보자 베르텔기아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시작!” 그와 동시에 또 다른 시험이 시작됐다. 흡혼석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기세로 김성철의 마력을 빨아들였다. “응? 이거 위험하지 않아?” 베르텔기아가 걱정스레 말했지만 김성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에겐 아직 15개의 마력 정수가 남아있다. 체내의 마나가 거덜 나면 정수를 재빨리 들이켜 마나를 보충하고 다시 마나가 빠져나가면 또 다른 정수를 들이키는 기계적인 작업이 쉴 새 없이 진행됐다. 툭! 툭! 툭! 툭! 툭! 순식간에 10개의 빈 병이 책상 위에 경쾌한 소리를 내며 올려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베르텔기아는 또 다시 깊은 충격에 빠졌다. “이게... 인간이 할 짓이야?” 마나 정수가 4개를 남겨 놓고 있을 때 흡혼석의 표면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기계적으로 마나 정수를 들이키던 김성철의 움직임도 멈췄다. [ 대단하군요. 당신은 10년에 한 번 나타나는 강대한 마력의 소유자입니다. ] [ 에어푸르트의 미래를 책임질 위대한 마법사의 탄생을 미리 축하하며 그 앞날에 무궁한 영광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 보상 : 마력 +5, 직관력 +5 추가적인 보상을 손에 넣었다. 당분간 사감실의 흡혼석과 관련된 퀘스트는 발동하지 않을 것이다. 부서진 흡혼석이 회복되려면 꽤 오랜 시간이 흘러야 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김성철에겐 그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그는 문밖에서 낯익은 인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리치 소녀. 결국 낌새를 눈치 채고 나타났군.’ 언젠간 다시 마주칠 운명이었다. 싫든 좋든 그 소녀는 회오의 관 안에 일어나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으니까. 김성철은 날아다니는 베르텔기아를 덥석 잡아 주머니 안에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잠깐 입 좀 닫고 있어.” “…….” 베르텔기아는 긍정이라도 하듯 품속에서 한 차례 꿈틀거렸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예상 그대로의 인물이었다. “거기서 뭐해?” 그녀는 푸른빛이 감도는 형형한 눈빛으로 김성철을 쏘아보면서 힐끔힐끔 김성철 너머의 풍경도 훔쳐봤다. “잠깐 흡혼석과 관련된 퀘스트를 하고 있었어.” 뻔히 들킬 일을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숨길 필요는 없다. 김성철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사라사는 김성철은 지나쳐 사감실의 책상 위에 올린 보주를 응시했다. “어라.” 흡혼석의 표면이 가뭄으로 말라붙은 논바닥 마냥 쩍쩍 갈라져 있다. 사라사는 깜짝 놀라며 김성철을 응시했다. “이거... 당신이 한 짓이야?”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사의 신형이 파초처럼 가늘게 흔들렸다. “그럴 리가!” 사라사는 깨진 흡혼석에 손을 대며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비전.’ 그러자 그녀 앞에 표시된 정보가 김성철과 사라사 앞에 가시화된 문자 형태로 떠올랐다. < 껍질을 깨고 나온 자 > 1. 마르다이스테스 2. 대 라그랑쥬 3. 비토 4. 아민 크루스 ... 영화의 스탭롤처럼 흐르던 문자의 나열 속에서 곧 김성철이 아는 이름이 나타났다. 142. 알투지우스 제로 ... 148. 레너드 상텀 149. 사라사 제로 그리고 마지막엔 김성철의 이름이 나타났다. 151. 김성철 사라사는 그 이름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김성철을 주시했다. 차가운 푸른빛이 일렁거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자그마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김성철의 능력치 > [능력치] 힘 24 민첩 25 체력 26 마력 81 직관력 68 마법저항 21 의지 18 매력 18 운 18 “마력이 100도 못 넘는데 흡혼석을 깬다고?!”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의 상식으론. 그런데 사라사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김성철은 작은 병을 하나 집어 툭 던졌다. 사라사는 병 안의 액체를 즉시 알아보았다. “이건 마력 정수..?!”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사라사는 보았다. 사감의 테이블 위에 수북하게 쌓인 마력 정수의 빈병을. ‘세상에...이게 다 얼마야.’ 사라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고 그녀의 폐부 깊숙한 곳에서 차가운 숨결이 새어 나왔다. “이건 사기야.” 사라사가 부들거리며 말했다. “사기 맞아.” 김성철은 무덤덤한 눈으로 사라사를 응시하며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스승이 내게 마법을 가르쳐들려 하지 않기에 나로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능력치를 올리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었거든.” “그.. 그건!” 사라사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알투지우스 제로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성철은 그런 사라사를 무심하게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2층에 잠깐 들리겠다. 해야 할 퀘스트가 있어서 말이야. 나쁜 의도는 없으니 원한다면 옆에서 지켜봐도 무방하다.” “…….” 사라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방조의 의미. 김성철은 기세를 타 사라사를 지나쳐 2층의 계단에 발을 올렸다. 2층에 들어서자 회오의 관 전체에 머물러 있던 한기가 한층 더 짙어진 느낌을 받았다. 그중, 가장 강력한 마법의 기운이 몰려 있는 곳은 사라사의 방이었다. ‘빙결마법으로 도배를 했군.’ 사라사의 방을 지나쳐 김성철은 회오의 관에 숨겨진 다음 퀘스트로 향했다. 회오의 관에 존재하는 퀘스트들은 높은 난이도와 위험성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공략법을 이미 숙지한, 그리고 공략법 이상의 성과를 얻는 법을 알고 있는 김성철 앞에선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낮에는 연금학파, 밤에는 회오의 관을 돌며 조석으로 연마를 거듭한 지 일주일 째. 김성철은 자축의 의미로 오랜만의 자작요리를 즐기며 자신의 상태창을 살펴봤다. [능력치] 힘 999+ 민첩 853 체력 801 마력 130 직관력 101 마법저항 621 의지 502 매력 18 운 18 김성철은 소주잔을 단숨에 기울였다. “캬!” 술이 달다. 특히 마력을 올리는 게 어려웠다. 초급자의 장벽인 100이라는 수치를 넘으면 성장세에 제동이 걸리기 때문이다. 덕분에 회오의 관에 존재하는 숨겨진 퀘스트를 모두 달성하고도 연성에 매달렸다. 하루 종일 연성을 해봐야 간신히 마력 1 혹은 2 정도 올리는 고생을 하고서야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슬슬 그곳으로 다시 가볼까.’ 아직 크리스티안으로부터 희소식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김성철은 오랜만에 천공학파의 회당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 “이게 누구야? 연금학파로 전향한 거 아니었어? 아니 친구가 하나도 없어서 다시 여기로 왔나. 그런데 어쩌나. 여기도 친구가 없을 거 같은데.” 천공학파의 회당으로 돌아가자마자 레너드가 열렬히 환영했다. 김성철은 레너드를 철저히 무시하고 회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나처럼 기둥 아래 등을 돌리고 앉은 알투지우스가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모른척하며 고개를 숙였다. “…….” 김성철은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책의 탑 옆에 앉아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가장 두껍고 머리를 복잡하게 하던 녀석이었다. 해먹에 누운 레너드가 김성철을 응시하며 조롱조로 말했다. “노파심에서 말해두겠는데 그거 당신 같은 초보가 아무리 본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미리 말해줬으면 좋은 충고가 될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김성철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문구들이 하나의 규칙을 가지고 자신의 눈앞에서 스스로 조립되며 이해할 수 있는 무언가로 재구축되는 광경을 목도하고 있었다. “…….” 마법서가 스스로 떠오르며 김성철 앞에 펼쳐졌다. 레너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뭐.. 뭐야 저 자식!’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는 회당 안에선 어떤 일도 숨길 수 없다. 허공에 떠오른 책이 스스로 책장을 고속으로 넘기며 그 안에 담긴 지식을 김성철에게 전달하는 그 순간, 알투지우스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고 곧 그의 노안에 경악이 떠올랐다. ‘아니.. 저 사내가...?!’ 충격 속에서 김성철에게 작은 변화가 나타났다. 그 변화는 곧 문자의 형태로 제시됐다. [ 당신은 천공학파의 기본서 ‘먹구름 사이로 비치는 빛’을 독파했다. ] [ 하늘과 우주의 지식이 당신 안에 깃든다. ] 보상 : 마법 - 글레어 ======================================= 16. 어려운 과제 (1) 김성철은 자신의 몸에 깃든 새로운 능력을 인지하고 그것을 살펴보았다. “상태창, 마법.” [ 마법 ] 1. 글레어 김성철은 글레어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러자 마법에 대한 정보가 그 앞에 떠올랐다. <글레어 > 위계 : 3 분류 : 공격마법 속성 : 무 속성 효과 : 적 개체 공격 비고 : 천공의 빛을 불러내어 적을 태운다. 가장 기본이 되는 마법이 무려 3위계(클래스)에 속했다. 과연 천공학파라고 해야 하나. 김성철은 새로 익힌 마법을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전에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다. 천공학파의 사람들이다. “아니.. 당신. 어떻게 된 건가? 어떻게.. 그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지?” 알투지우스가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간간이 입에 물던 파이프를 바닥에 떨어뜨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흥분한 사람이 있었다. 레너드 상텀이다. “이건 말도 안 돼. 분명 저 신입 직관력은 원숭이 수준이었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너드의 눈동자에 마법진이 펼쳐졌고 김성철의 능력치가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새롭게 나타난 수치는 레너드의 의혹은 사실로 확인시켜줄 뿐이었다. ‘말도 안 돼! 직관력이 101이라고?! 언제 저렇게 올린 거지? 대체 뭐하는 놈이야?’ 알투지우스도 같은 마법으로 김성철의 능력치를 보고 있었다.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성장 속도다. “대체.. 어떤 마술을 부린 건가?” 알투지우스가 물었다. 김성철은 거짓 없이 말했다. “낮에는 연금학파에서 연성을 하고 밤에는 회오의 관의 퀘스트를 섭렵했습니다.” 불충분한 설명. 하지만 김성철이 빠른 성장을 이루어낸 것은 진실이다. 그 방법이 어떻든 간에. 알투지우스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놀랍군. 내 지금까지 수많은 학생들을 보아왔지만 이렇게까지 빠르게 성장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아무리 타인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성장의 주체는 결국 본인이다. 본인의 노력과 수고가 없으면 아무리 조력자가 호화로운 밥상을 차려줘도 성장을 일구어낼 수 없다. “대단하군.” 좀처럼 칭찬을 하지 않는 알투지우스의 입에서 오랜만에 나온 찬사였다. 레너드의 눈이 희번뜩 돌아갔다. 그는 해먹에서 몸을 벌떡 일으켜 알투지우스에게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래서 저 새끼한테 가르침을 주실 겁니까?” 날카로운 목소리가 회당에 울려 퍼졌다. 알투지우스는 레너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제자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말은 일언반구도 한 적이 없네.” “그런데 왜 저 자식에게 기본서를 내민 겁니까? 하고 많은 책 중에 왜 그 책을 줬냐고요? 제가 모르는 내막이 있는 거 아닙니까?” 레너드의 목소리는 그가 알투지우스에게 한 발 한 발 다가갈수록 크고 난폭해졌다. 그 장면을 본 김성철은 레너드가 알투지우스의 단순한 제자가 아니라는 심증을 굳혔다. 레너드는 제자라기보다는 고리대금업자처럼 행동했다. ‘크리스티안의 말에 의하면 놈은 에어푸르트에서 한 번 출교처분을 받았다. 그런 자가 다시 학교에 발을 들인 것도 모자라 스승을 핍박하고 있다.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모종의 사연이 있는 모양이군.’ 망해가는 집단에선 모든 것이 무너진다. 하지만 김성철이 나설 필요는 없다. 나서야 될 이유도 없고. 김성철은 상황을 계속해서 관망했다. 레너드는 계속해서 스승이라는 자에게 포악한 송곳니를 들이대고 있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스승님! 제 인내심이 그렇게 강하지 않은 거 알고 계시잖습니까?” 알투지우스는 고개를 숙인 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스승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레너드는 한숨을 내쉬고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핏발 선 눈동자에 김성철의 모습이 맺혔다. “야. 신입.” 레너드가 김성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김성철이 가만히 이쪽을 응시하자 레너드는 야릇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나, 너 싫은데. 여기서 나가주면 안 돼?” 가벼운 것 같지만 엄연한 협박이 섞인 한 마디. “…….” 김성철은 입을 다문 채 레너드를 노려봤다. 처음에 레너드는 그런 김성철이 가소로워 어깨를 들썩이며 쓴웃음을 지어보였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뭐.. 뭐야? 이 새끼.’ 분명 별 볼 일 없는 놈이 한 마디 말도 못하고 가만히 이곳을 바라볼 뿐이었는데 자기도 알 수 없는 막연한 섬뜩함을 느낀 것이다. 레너드는 즉시 그 섬뜩함을 강하게 부정하고 흩어버렸지만 기분이 찝찝한 것까진 어찌할 수 없었다. 속이 끓어올랐다. ‘이래서 소환자 출신 새끼들은 마음에 안 든다니까.’ 이계에서 나고 자란 사람과 달리 소환자들은 이계에 처음 오는 순간부터 지옥을 경험한다. 그 지옥 속에선 아무나 살아남지 못한다. 그래서 이계 출신에 비해 독종의 비율이 월등하다. 레너드는 그런 소환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이는 족족 압도적인 힘으로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할 정도로 밟아놔야 직성이 풀렸다. 레너드는 지금까지 자신이 죽였던 건방진 놈들의 얼굴을 하나 둘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혹시 내 소문 못 들었냐? 이 레너드 상텀이 에어푸르트에서 어떤 사고들을 일으켰는지? 아, 친구가 없어 못 들으셨나?” “결투에서 학생들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더군.” 잠자코 있던 김성철이 입을 열었다. 표정만큼이나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레너드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네? 그런데 왜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똑바로 쳐다보지? 객기야? 만용이야?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이러는 거야?” “…….” “뭐, 어느 쪽이든 좋아. 기회를 주지.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주면 그리고 두 번 다시 내 눈에 안 띄면 봐주겠어.” 살벌한 협박에도 김성철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먼저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원한다면 한 판 붙어보자는 의사표시였다. 레너드는 폭소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배를 잡고 한참이나 깔깔대며 웃었다. 회당 안이 그의 웃음소리로 가득 찰 무렵, 침묵을 지키던 알투지우스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레너드 상텀.” 알투지우스의 음성이 회당 안에 울러퍼졌다. 레너드는 여전히 깔깔 웃으며 곁눈질로 알투지우스의 근엄한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알투지우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아직 완전히 사면 받은 게 아니잖은가?” 레너드의 웃음소리가 끊겼다. 대신 툭 튀어 나온, 핏발 가득한 눈동자로 자신의 스승일 죽여 버릴 것처럼 노려봤다. “사면 받았습니다. 제 두 번째 스승이신 화염학파 학장님한테.” “빙결학파 학장은 사면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 “그쪽은 학교를 대표하지 않습니다.” 레너드가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알투지우스는 시종일관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화염학파도 학교를 대표하지 않는 건 매한가지 아닌가?” 그 말을 들은 레너드는 짧은 노호성을 터뜨렸다. “지금 저 새끼 편을 드는 겁니까?” 레너드가 손가락으로 김성철을 가리켰다. 알투지우스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온화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내가 걱정하는 건 내 제자도 아닌 저 친구가 아닌 자네일세.” 그 한 마디는 불처럼 타오르던 레너드의 기세를 살짝 꺾어놓았다. 알투지우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기껏 학교에 돌아왔는데 작은 일 때문에 일을 그르치면 쓰나? 자네는 껍질을 부순 자이자 두 개의 지문을 지닐 수 있는 축복을 받은 에어푸르트의 보배로운 존재 아닌가?” 흔치 않은 칭찬에 레너드의 사나운 눈빛이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한 발 물러서면서도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천공학파의 비전을 알려주지 않는 겁니까?”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네.” 잘 대화를 이끌었던 알투지우스였지만 그 질문만큼은 얼버무리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잠시 멈칫했던 레너드는 다시금 비릿한 냉소를 머금었다. ‘입 발린 소리 하고는.’ 하지만 기세도 한풀 꺾였겠다, 레너드도 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뭐,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잘 알았습니다. 제가 너무 흥분한 것 같군요. 사과드립니다.” 건성건성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한 후 레너드는 김성철에게 다가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 이거 미안하게 됐네요. 신입 씨. 제가 조금 성격이 불같은 측면이 있어서요. 흥분을 조금 한 거 같은데 악수 한 번 하고 퉁 칩시다.” “…….” 김성철은 가만히 레너드의 손을 바라볼 뿐이었다. 레너드는 휘파람을 불며 살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손을 거두고 자신의 지정석인 해먹으로 돌아가며 빈정거렸다. “생긴 거 답지 않게 쪼잔하네.” 자기 딴엔 김성철을 자극시키려고 한 말이겠지만 늘 그렇듯 김성철은 하찮은 자의 시비엔 어떤 작은 분노도 느끼지 않는다. 그는 지금 당장 얻은 마법을 한 번 써보고 싶을 뿐이었다. 김성철은 등을 돌리고 앉은 알투지우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천공학파의 교사를 나섰다. 문이 닫히자마자 레너드는 알투지우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가만히 생각해봤는데 저 녀석, 아무래도 쫓아내야 할 거 같아요.” 알투지우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투... 특히 건틀렛은 안 돼. 만약 저 자와 건틀렛을 벌이게 된다면 빙결학파 쪽에서 자네와 자네의 두 번째 스승을 공격할 걸세. 그건 자네의 진정한 스승도 바라지 않는 일이 아닌가?” 알투지우스의 말에 레너드는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해먹에 뉘인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저의 진정한 스승은 알투지우스 교수님뿐이죠. 화염학파의 프레기우스 교수님은 좋은 분이고 저에겐 은인이기도 하지만 아시다시피, 진정한 마법사의 길을 이끌어주기엔 조금 부족한 분이 아니겠습니까?” 알투지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레너드는 계속해서 말했다. “건틀렛을 벌일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보다 좋은 생각이 있거든요.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이 말입니다.” “어떻게 하려고?” 알투지우스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지자 레너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놈이 있을 자리를 없애버릴 겁니다.” 레너드의 시선은 약간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 천공학파의 첫 마법 글레어. 그것은 천공의 빛을 소환해 눈앞의 적을 태워버리는 공격 마법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회오의 관의 뒷마당에서 김성철은 기숙사 안에 굴러다니던 오래된 갑주를 허수아비와 결합해 세워놓고 새롭게 익힌 마법을 시험하려 하고 있었다. 마법의 사용법은 선험적으로 그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먼저 자신이 사용할 마법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면 그의 의식 속에 마법서를 통해 보았던 복잡다단한 마법진과 그를 둘러 싼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설명을 할 수 없는 문구들이 시계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의식 속을 흐르며 마법의 힘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입으로 혹은 마음 속으로 마법의 이름, 주문을 외치면 마법의 힘이 발동된다. 그 일련의 과정을 영창이라고 한다. 영창에 걸리는 시간은 마법마다 조금씩 다르고 그 차이도 상당히 크다. 김성철의 첫 번째 마법 글레어의 영창 시간은 그의 즉발성이라고 해도 좋은 정도로 짧았다. ‘그럼 시작해볼까.’ 마치 빨리 감기를 누른 화상처럼 마법진의 형상이 머릿속에 순식간에 지나가며 그에게 마법이 준비되었다는 감각을 전달한다. 김성철은 25미터 거리에 세워 놓은 갑주를 응시하며 마법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글레어.’ 그 순간 그의 손가락 끝에서 한 줄기 광선이 폭사됐다. 짧은 순간, 빛의 기둥처럼 보였던 그 빛줄기는 녹이 슨 갑주의 심장부분에 적중, 검은 연기를 피워 올렸다. “…….” 김성철은 갑주로 가 자신의 마법의 위력을 점검했다. 갑주의 심장 부분에 동전만한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기념비적인 첫 번째 마법의 시연이었지만 김성철의 평가는 싸늘했다. “에라이!” 약하다. 그것도 상당히. 겨우 이 정도 위력으로 마족의 왕 해서니우스 맥스를 죽이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상대방은 6 위계의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마법사에다 마법 내성도 상당하니. 글레어를 쓴다고 해봐야 살갗을 조금 태우는 수준에서 그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첫술에 배가 부를 수는 없는 법. 김성철은 바로 생각을 고쳐 먹었다. 처음 배운 마법으로 산을 가르고 바다를 가르리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도둑놈 심보다.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평가해볼 때 마력도 직관력도 초보를 벗어난 수준이고 글레어의 위계도 3 위계에 지나지 않는 하급 마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마법이 약하다는 것도 세계의 적 김성철 기준에서 약한 것이지 평범한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보면 글레어란 마법은 충분히 쓸 만한 마법으로 보였다. 영창이 짧고 순간적으로 빛줄기를 폭사하는, 피하기 어려운 공격방식은 상당한 강점이다. 조준만 정확하다면 상대방에게 지속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고 견제를 할 때도 유용하다. 게다가 마력이 강해지면 마법의 위력도 늘어나는 마법사의 특성상, 마력을 높일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파괴광선을 적에게 퍼부을 수 있을 것이다. 종합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지금은 약하지만 향후에 마력이 늘어나면 주력기로 써도 될 정도로 유용한 마법. 김성철은 글레어를 그렇게 정의내렸다. ‘마력을 높이면 높일수록 도움이 될 마법이다.’ 김성철은 두어 차례 글레어를 추가로 시전했다. 자신의 클래스인 메아리술사의 능력, 메아리를 테스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메아리는 울리지 않았다. 베스티아레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강하게 메아리를 염원해봤지만 그의 마법은 한 번의 조사(照射)로 끝났다. 그래도 염원이 통했는지 메아리를 쓸 수 없게 된 이유가 눈앞에 나타났다. [ 혼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는 메아리를 품을 수 없습니다. ] 그걸 본 김성철은 대강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직 마력이 부족한 탓인가.’ 작은 목소리는 메아리를 품기 어렵다. 산정에서 목청껏 내지른 소리만이 산 전역을 들썩이게 하는 메아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김성철의 현재 마력은 목소리의 크기로 보면 이제 겨우 소리를 내는 정도. 칠영웅 중 한 명이었던 베스티아레의 수준에 비하면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보다 많은 수련과 성장이 있어야 메아리술사의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서두르지 말자.’ 김성철은 잠시 들떴던 마음을 다잡았다. 평온이 찾아오자 잊고 있던 산적한 문제들이 차분하게 머릿속에 내려앉았다. 해야 할 일들이 생각났다. 주변을 정리한 후 김성철은 오랜만에 에어푸르트를 나서 황금 도시의 도심지를 향해 걸어갔다. 좀처럼 소식이 없는 크리스티안을 만나기 위해서다. ======================================= 16. 어려운 과제 (2)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찬란한 황금 도시의 뒷골목에도 어두운 영역은 존재하고 있다. 노예 거리라고 불리는 뒷골목이 바로 그곳이다. 김성철이 노예 거리로 들어섰을 때 지저분한 광장에선 한 무리의 노예상인들이 노예들을 경매에 붙이고 있었다. 김성철은 경매장을 지나치며 곁눈질로 노예들의 얼굴을 응시했다. 검은 머리칼에 익숙한 두상. 이번 대규모 소환에서 이계로 소환된 이들이다. 이지를 상실한 그들은 흐리멍텅한 눈으로 그들의 새로운 주인이 될 자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경매장을 지나쳤다. 경매장을 지나가자 건달과 주정뱅이, 창녀로 가득 찬 흥청망청한 거리가 펼쳐졌다. 김성철은 한 가게를 찾아 그 앞에 섰다. 열락의 궁전이라는 상호를 지닌 화려한 여관이었다. 크리스티안 애쉬우드는 그 열락의 궁전의 사치스런 방안에서 여러 미녀들에게 둘러싸여 흥겨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어이쿠. 이게 누구십니까? 전사님 아닙니까!” 얼큰하게 취한 크리스티안은 헤벌쭉 웃으며 김성철을 맞이했다. “마침 잘 됐군요. 이리로 앉으시지요. 때마침 이쁜이들도 있으니!” 그러고는 그는 짐짓 화난 목소리로 여자들에게 호통쳤다. “뭣들 하는 게냐. 전사님의 시중을 들지 않고?” “전부 내보내라.” 김성철은 짧지만 힘 있는 어조로 말했다. 눈치 하난 기가 막히게 빠른 크리스티안은 단 한 마디만 듣고도 김성철의 심기가 좋지 않음을 간파했다. 그는 서둘러 여자들을 내보낸 후, 의수를 만지작거리며 달라진 태도로 더듬더듬 말했다. “그.... 알투지우스 교수의 책에 관해서는... 로고테테 쪽 지인을 통해 알아보는 중입니다. 그쪽에서 열심히 조사 중이니 곧 결과가 나올 겁니다.” “그건 됐어.” 김성철은 테이블 위에 올려 진 술잔 하나를 들어 냄새를 맡아보더니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술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몇 명의 침이 섞였는지 분간조차 할 수 없군. 팔다 남은 술을 뒤섞어 파는 가게인 것 같으니 비위가 좋지 않은 이상 이 가게에서 술을 먹는 건 삼가라.” “며..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찾아온 건 다른 걸 듣기 위해서다.” 김성철이 알고 싶은 것은 레너드 상텀이라는 인물에 관한 상세한 정보였다. 처음 크리스티안에게 정보 의뢰를 했을 때 레너드 상텀은 부차적인 과제였지만 지금은 주된 과제로 급부상해 있었다. 의기소침하던 크리스티안은 그 주제에 관해선 자신이 있는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아, 레너드 상텀. 그 개자식에 관한 정보라면 충분히 수집했습니다.” 크리스티안은 명쾌하게 결론부터 말했다. “그 놈은 재앙의 추종자로 의심 받고 있습니다.” “재앙의 추종자라고?” 김성철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렇습니다. 놈의 뒤에 화염학파의 학장 프레기우스 교수가 있습니다. 프레기우스는 이미 공공연하게 재앙의 추종자로 지목받고 있는 인물이죠.” “자세히 듣고 싶군.” 에어푸르트에 적을 둔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학교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아야 할 때다. 크리스티안은 자신이 알고 있는 그리고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현재 에어푸르트의 사정에 대해 설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에어푸르트의 쇠락은 3년 전 교장 대 마그누스의 의문의 죽음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한다. 학교를 이끌 교장이 사라지자 교내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화염학파의 학장 프레기우스와 빙결학파의 학장 로버트 단턴이 교장 자리를 두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어느 한쪽이 상대방을 압도했다면 작은 해프닝으로 끌날 일이었지만 화염학파와 빙결학파, 두 세력은 용호상박이라 할 정도로 대등했다. 두 쟁쟁한 학파 간의 반목의 골이 깊어지는 가운데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그동안 명문 에어푸르트는 학교의 기능을 상실하고 철저하게 무너져 내렸다. 학교 내에 재앙의 추종자가 득실거린다는 소문이 퍼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리고 전임 교장인 대 마그누스를 죽인 것도 재앙의 추종자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누가 어떻게 전 교장을 죽였는지는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지만. “…레너드 상텀은 그 프레기우스의 수제자입니다. 원래는 알투지우스의 밑에 있었지만 불미스런 일로 출교를 당한 이후 프레기우스를 섬기기 시작한 겁니다. 그 프레기우스가 학교 내에 서식하는 이단의 수괴이니 레너드 상텀이 재앙의 추종자라는 건 누가 봐도 뻔한 사실이겠죠.” “그렇군.” 대충은 알 것 같다. 에어푸르트라는 곳의 분위기가 어떤 지. 구토를 할 것 같은 역겨움이 느껴졌다. “아 그리고 흥미로운 정보가 하나 더 있습니다.” 크리스티안이 김성철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말하라.” “확실치는 않지만 천공학파의 알투지우스 교수는 프레기우스교수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빚?” “네. 용도는 알 수 없지만 천문학적인 금액을 빌렸다는 풍문입니다. 그래서 알투지우스 교수는 프레기우스 교수에게 꼼짝 못한다고. 뭐, 어디까지나 소문이지만 말입니다.” “그렇군.” 알고 싶은 정보는 알아냈다. 김성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자 위엔 이전에 김성철이 준 금화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김성철은 그중 하나를 집어 눈으로 살폈다. 발행처가 없는 금화. 무인 주화다. 김성철은 흥미 없는 눈으로 주화를 바라보다 방을 나섰다. “저기 전사님. 달리 명을 내릴 일은 없습니까?” “에어푸르트에 터 잡은 재앙의 추종자로 의심되는 자들을 알아내라.” “재앙의 추종자들이라. 어려운 주문이군요. 하지만 이 크리스티안. 전사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성철은 보수로 보석 하나를 내밀었다. 크리스티안은 크게 기뻐하며 넙죽 보석을 두 손으로 받았다. “혹, 무슨 일이 생기면 하늘 다람쥐를 보내라.” “알겠습니다!” 방을 나서자 퇴폐적인 붉은 불빛이 눈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그를 진정 어지럽히게 만드는 것은 현란한 불빛이 아니라 그 앞에 놓인 상황이다. 천공학파의 비전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쉬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얽히고설킨 문제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선 아무래도 학교 내에 존재한다는 재앙의 추종자들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로 보인다. 특히 레너드 상텀과 그 도당을 말이다. 하지만 섣불리 건드린다면 좋지 못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재앙의 추종자들은 여러 개의 머리를 지닌 뱀처럼 교활한 존재들이니까. 치려면 모든 머리를 한 번에 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은 다른 머리의 독니에 물리게 될 것이니. ‘당장 재앙의 추종자로 알려진 놈은 프레기우스와 레너드 상텀이지만 좀 더 파고들면 숨어 있는 놈들이 있을 것이다. 학교의 이단을 이끄는 실세가.’ 김성철은 재앙의 추종자들의 학살자다. 그는 적의 수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재앙의 추종자를 상대함에 있어 첫 번째 철칙은 모든 이를 의심하라는 것이다. 어쩌면 알투지우스도 재앙의 추종자일지도 모른다. 혹 그런 일이 생긴다면 김성철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 같은 시간, 회오의 관에서는 여러 명의 마법사들이 모여 의식을 펼치고 있었다. 마법진의 정중앙에 선 것은 사라사 제로였다. 늘 입던 몸을 둘러싼 두꺼운 로브 대신 하늘하늘한 얇은 속옷 하나만을 걸친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주위를 둘러싼 마법사들의 주술이 자신의 몸에 스며드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 알투지우스 제로는 걱정스런 눈으로 자신의 손녀를 응시했다. 눈을 감고 있던 사라사는 그런 조부의 시선을 느끼고는 눈을 살짝 떠 윙크를 해보였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입되는 주술이 더욱 강해지자 그녀는 이내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알투지우스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그의 곁에 선 사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통은 잠시지만 손녀분의 사랑스러움은 영원히 보존 될 테니까요.” 그의 로브엔 선명한 해골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사령술사다. 그들은 죽은 자를 부패로부터 막는 방법을 알고 있고 고액의 돈이나 선물과 바꿔 그들의 지식을 팔곤 한다. 사라사 제로의 모습은 이들의 주술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음, 금액이 조금 부족한 것 같습니다만?” 사령술사는 귀신 같이 돈주머니의 무게만 느끼고도 금액이 모자란 것을 알아차렸다. 알투지우스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어디 보자, 금화가 세 닢이나 부족하군요. 어떻게 된 건지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 그게. 부족분은 다음에 드리겠습니다.” 사령술사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그는 마치 죽은 자를 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알투지우스를 노려보며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저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땐 교수님의 명성을 믿고 한 번 넘겼었지만 같은 일이 반복되면 다른 사령술사를 알아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령술사는 알투지우스를 돕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 사령술사는 황금 도시에서 으뜸간다는 로고테테 마법학교의 실세들이니까. 저 자와 틀어지면 로고테테 아니, 황금 도시 전역의 사령술사들과 척을 지게 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부족분은 최대한 빠르게 구해서 마련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알투지우스는 체면도 불사하고 타 학교의 사령술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령술사는 그런 알투지우스를 무심한 눈으로 보다가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한 번 뿐입니다. 그 이상은 저희도 어렵습니다.” 의식은 정상적으로 진행됐다. 사라사의 몸에 걸린 보존마법은 원래의 활기를 되찾았고 그녀의 모습은 짧은 시간 동안은 원형을 유지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알투지우스에겐 돈이 필요했다. 그것도 큰돈이. 그런데 알투지우스가 단기간에 목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내를 찾아갔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하얀 법복 위에 까마귀 두상의 마스크를 쓴 인물이었다. 뒷짐을 진 채 햇살이 들어오는 창밖을 응시하던 그 사내는 알투지우스의 기척을 느끼고 돌아서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학교를 구할 결심이 서셨습니까?” 그 사내의 정체는 이단심문관 마그누스 막시마. 에어푸르트 마법 학교에 감도는 이단의 기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그 사내는 이단을 박멸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 “연금학파로 가는 거야?” 품안에 든 베르텔기아가 불쑥 말을 걸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연금학파에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 천공학파로 가봐야 레너드 상텀이 전처럼 시비를 걸어올 것이다. 싸움을 걸어온다면 피하진 않겠지만 굳이 대립각을 세워 문제를 일으킬 필요는 없다. 움직이는 건 크리스티안이 재앙의 추종자들에 관한 정보를 가져온 뒤에 해도 늦지 않다. “훌륭한 선택이네!”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안에서 몸을 흔들며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보니까 마력이 형편없어서 마법도 약해빠졌던데 연금학파에서 오래 머물면서 마력을 익힐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많이 오르진 않겠지.” 마력 130의 언저리에서 김성철은 연성 노가다를 통해 부족한 마력을 올렸다. 그런데 능력치가 100을 돌파한 탓에 성장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효율이 부족한 성장은 김성철이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연성은 손 가는 것에 비해 성장이 너무 느려.”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야.” 베르텔기아가 즉시 반박했다. “모든 연금아이템엔 고유 레벨이 있거든? 낮은 레벨의 연금아이템을 만들면 성장이 더디지만 높은 레벨의 아이템을 만들면 빠른 성장을 할 수도 있다구!” “그래?” “응! 하지만 재료가 구하기 어렵고... 재료가 비싸다는 단점이 있지만 말이야!” 김성철에게 재료가 구하기 어려운 건 문제가 되지만 재료가 비싼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김성철은 연금학파에 도착하면 한 번 베르텔기아가 말한 고레벨의 연금아이템의 연성해 도전해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연금학파가 있던 천막으로 갔을 때 김성철은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목격했다. “…….” 연금학파의 천막이 없어졌다. ======================================= 16. 어려운 과제 (3) 김성철은 천막 뒤에 가려져 있던 허름한 창고 주위에 낯익은 얼굴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연금학파의 교수 바실 필루스와 그의 제자들이다. 지금쯤이면 이맘때 잠을 자거나 대마를 피워야 할 녀석들이 나라 잃은 얼굴로 공터에 모여 있었다. 김성철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된 일이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모두 고개를 숙인 채 한숨만 내쉴 뿐. 김성철은 그나마 말이 통할 것 같은 바실 필루스에게 다가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맘때면 언제나 알몸으로 잠을 자고 있던 그 사내는 오늘은 제대로 된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실의에 빠진 얼굴로 김성철을 올려보더니 쓸쓸히 말했다. “학과가 폐부 통보를 받았어요.” “폐부?”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연금학파는 언제부터인가 다른 학파에서 쫓겨난 열등생들만이 모이는 에어푸르트의 쓰레기장으로 변해 있었다. 학생의 수준도 교수의 수준도 바닥 그 자체. 그 부분은 김성철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에어푸르트의 사정이 어려워지자 불필요한 학파를 폐지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나마 명망이 있던 바실 필루스의 전임자가 죽은 후 연금학파는 급격히 몰락했고 최근 몇 년간 제대로 된 성과를 하나도 내지 못했다. 결국 연금학파는 천막으로 쫓겨났고 폐부 될 만한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성철이 연금학파에 들어온 게 그 맘 때였다. “교수님. 아직 폐부된 건 아니잖아요.” 다크 서클이 진하게 낀 여학생이 교수를 응시하며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그렇지. 아직 확정 난 건 아니지. 하지만 그것도 일주일뿐이야!” 바실 필루스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개를 숙였다. “만약 폐부가 확정이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김성철이 물었다. “일단 저는 쫓겨나는 게 확실하고 제 학생들도 다른 지도교수를 구하지 않는 한 저와 같은 운명을 맞습니다.” “우리도 쫓겨나. 이미 한 번 이상 거절당한 애들만 여기 모였거든.” 다크 서클이 낀 여학생이 퉁명스레 말했고 바실 필루스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호응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말입니다.” 그 말을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혹, 방법이 있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돈 문제라면 해결해줄 수 있다. 그런데 바실 필루스의 입에서 나온 해결 방안이란 뜻밖의 것이었다. “비상운영위에서 말하길... 만족할만한 성과물을 우리 연금학파에서 만들어낸다면 폐부를 유예하겠다고 합니다.” “만족할만한 성과물?” 쉬워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바실 필루스가 말을 이었다. “네. 그들은 5레벨 이상의 연금아이템의 연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우리 중에 그런 걸 만들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때였다. 김성철의 호주머니 안이 강하게 요동친 것은. 베르텔기아는 마치 전화가 온 휴대폰이 진동하듯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김성철이 양해를 구하고 조용한 장소로 가자 베르텔기아는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서 튀어나오며 묵힌 말을 쏟아냈다. “뭐? 5레벨 아이템도 못 만든다고? 어휴 뭐 저런 것들이 다 있어!” 베르텔기아는 격노하고 있었다. * 연금가마를 통해 연성할 수 있는 연금아이템은 다른 아이템과 다른 고유의 레벨을 가진다. 그 레벨은 1에서 9까지 총 아홉 개의 등급으로 구분되는데 1이 가장 낮은 등급이고 9가 가장 높은 동급이다. 그런데 인간이 연성할 수 있는 최고등급의 연금아이템은 7레벨까지로 알려져 있고 그마저도 지금은 만들어낼 수 있는 연금술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5레벨 등급의 연금아이템은 레벨만 놓고 보면 중간 정도에 속할 것 같지만 실제로 가지는 위상은 대단히 높은 것이다. 괜히 비상운영위에서 연금학파에게 5레벨 이상의 연금아이템을 만들어내라고 주문한 게 아니다. “어휴. 말세야 말세. 세상에 명색이 명문이라는 곳의 연금학파 교수라는 인간이 5레벨 연금아이템도 연성하지 못하다니. 이건 언어도단이야.” 베르텔기아는 어째서인지 화가 나 있었다. 김성철은 그런 베르텔기아를 흥미로운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방도라도 있나?” “당연하지. 나는 연금지식의 보고인걸. 5레벨 아이템 정도야 당연히 수록하고 있지!” 베르텔기아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스스로 페이지를 펼쳐 각종 연금 아이템의 레시피를 김성철에게 보여줬다. 그런데 어째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다. 마법서에 익숙해진 김성철은 그 원인이 자신의 부족한 직관력에 있음을 인지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타깝게도 네 페이지를 이해할 수 없군.” “아, 당신 직관력이 지금 얼마지? 100 조금 넘겼었지?”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럼 지금의 당신으론 이해하기 어렵겠네. 그럼 내가 직접 레시피를 알려줄게. 원래는 창조술사의 비전을 안내하는 길잡이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아. 창조술사라는 것도 있었지.” 에크하르트의 퀘스트를 수행한 이래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뭐야? 설마...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야? 당신이 창조술사의 길을 걷고 있다는 걸?” 베르텔기아는 충격을 받은 듯 추락하다가 지면에 부딪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상승해 김성철의 눈높이에 올라사며 책장을 파닥거렸다. “다시 생각해냈으면 된 거 아닌가?” “정말.. 뻔뻔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네! 뭐, 관계없어! 당신이 창조술사의 길을 걷든 말든 그건 안내자에 불과한 내가 강요할 문제가 아니니까.” 베르텔기아는 살짝 삐친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할 일은 제대로 했다. “아무튼 지금부터 내가 알고 당신도 만들 수 있을만한 5레벨 아이템의 이름을 불러줄게. 만만해 보이는 걸 골라 봐.” 베르텔기아는 연금아이템의 이름을 나열했다. 황혼 촛대, 무지개 주괴, 부유석 결정, 연금폭탄(흑), 에르피르 약제. 총 5종의 연금아이템. 천하의 김성철도 부유석 결정 이외엔 전부 들어보지 못한 아이템이다. “이중 뭐가 제일 쉽지?” “글쎄. 솔직히 전부 어려워. 수십 번의 실패를 각오해야 할 거야. 이것들을 선정한 기준은 그나마 재료를 구하기 용이한 것들이니까.” 베르텔기아의 말 대로 5레벨 연금아이템의 연성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재료 수집의 어려움은 돈의 힘으로 극복했다고 하나 각 아이템은 수치상 표현되기 어려운 연금술사의 고유의 숙련기술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황혼 촛대는 아이템의 특성상 연금술사에게 세공의 기술을 요구했고 무지개 주괴는 열에 대한 이해를, 연금폭탄(흑)은 세심한 손놀림과 천칭의 사용법의 숙달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머지 것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각각의 필요한 스킬을 요구한다. “이중 어떤 걸 만들어 낼 거야?” 베르텔기아의 질문에 김성철은 한참이나 고민을 하다가 연금폭탄(흑)을 골랐다. 아무래도 학교 상층부에 어필하기 위해선 때려 부수는 게 최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좋아. 그럼 이 사실을 그 머저리들에게 말하러 가자! 만드는 건 우리가 만들더라도 심사를 신청하는 수속은 그 바보들이 밟아줘야지!”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의 말을 따랐다. 바질 필루스는 여전히 실의에 잠긴 채 쫓겨날 운명의 제자들과 울상을 짓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 앞에 서서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5레벨 연금아이템을 지금부터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기한은 지금부터 일주일 뒤. 비상운영위에 심사 신청을 부탁드립니다.” “네? 당신이 5레벨 연금아이템을 만들겠다고요? 축 늘어진 바실 필루스가 고개를 벌떡 들어올렸다. “네. 한 번 도전해버려고 합니다.” “당신은 연금학파에 들어온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3레벨, 아니 2레벨 아이템은 만들어보시기라도 했습니까? 적어도 전 가르쳐준 기억이 없는데.” “내 지인 중 한 명이 솜씨 좋은 연금술사요. 그에게 개인적인 강습을 받고 있소.” “으음...” 바실 필루스는 시종일관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알겠습니다. 신청은 이쪽에서 해두죠. 하지만 그건 명심하세요. 비상위에서 나올 심사관들은 화염학파와 빙결학파의 학장님들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그분들 상대로 장난 같은 걸 쳤다간 무사하기 어려울 겁니다.” 바실 필루스는 신청은 자신이 하겠지만 신청주체는 김성철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책임은 하나도지지 않겠다는 소리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관계없습니다.” 그 길로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와 함께 황금 도시 시내에 있는 연금재료 상점으로 향했다. “전부 주시오.” 김성철은 연금폭탄(흑) 뿐만 아니라 나머지 4개 아이템 연성에 필요한 재료도 싹쓸이했다. 연금폭탄 제작이 생각처럼 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한 포석이었다. 물론 어마어마한 금액을 지출해야 했지만 아직 김성철의 잔고는 든든했다. 그는 각 연금재료 상점을 돌며 재료가 될 아이템을 싹쓸이한 후 학교로 돌아갔다. 창고 옆에 죽치고 있던 연금학파 학생들은 대낮부터 술병을 까고 있었다. 창고 안에선 고약한 대마향도 풍겨왔다. 그들을 지도해야 할 바실 필루스는 학생들 사이에 껴서 박장대소하며 웃고 있었다. 김성철은 원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대화 일부분을 엿들을 수 있었는데 모두 성과 관련된 저속한 농담이 대부분이었다. 김성철은 그들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연금 가마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쌓아올린 탁자를 꺼내 그 위에 식탁보를 깔고 시내에서 구입한 연금재료와 제작에 필요한 기자재를 올려놓았다. “그럼 시작해볼까?” 호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뭐부터 해야 하나?” “일단 폭죽나무의 포자씨앗부터 다듬어야 해.” 김성철은 탁자 위에 늘어놓은 재료 중 굵은 털로 뒤덮인 씨앗을 집어 올렸다. 크기는 복숭아 씨앗 정도, 질감은 거슬거슬하다. 김성철은 씨앗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전체적으로 식물 특유의 풀내음이 났지만 그 안에 매캐한 화약내를 감추고 있었다. < 폭죽나무의 포자씨앗 > 레벨 : 4 등급 : C 속성 : 목(木) 효과 : 충격이나 불에 닿으면 폭발. 비고 : 동부 대초원 지대에 서식하는 폭죽나무의 씨앗. 씨앗이 무르익으면 화기가 강해져 스스로 폭발, 그 포자를 멀리 내보낸다. 씨앗 하나에 은화 20개나 요구하는 녀석이다. 김성철에겐 껌 값에 지나지 않지만 에어푸르트 학교 평직원 한 달 월급에 맞먹을 정도의 금액이다. “일단 씨앗의 껍질을 조심스레 잡고 겉면의 결대로 조심스레 칼질을 한 후 그 안에 담긴 폭발의 정수를 추출해야 해.” 김성철은 즉시 작업에 들어갔다. “조심해. 폭발할 수도 있으니까. 재수 없으면 손가락이 날아갈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녀석이야.” 베르텔기아가 조심하라고 경고를 했지만 요리의 달인인 김성철의 칼질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처음 다뤄보는 작물임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씨앗을 절개 그 안에 감춰진 붉은 색을 띄는 굵은 고형 가루를 추출해냈다. ‘잘하네. 이 사람.’ 베르텔기아는 약간의 감동을 받았다. 전부터 느꼈지만 재료를 다루는 김성철의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제대로 교육받은 연금술사도 다루기 어려워하는 게 이 폭죽나무 포자씨앗 다듬기인데. “다음은 뭘 하면 되나?” “주.. 유발 안에 담고 으깨면 돼. 하지만 지금은 하지 말고 씨앗 다섯 개 분의 정수를 담은 후에 으깨는 게 좋아.” 김성철은 바로 다음 작업으로 들어갔다. 그는 대단히 빠른 손놀림으로 씨앗을 손질했고 곧 정수 안엔 다섯 개 씨앗 분의 정수가 담겨져 있었다. “이제 으깨면 돼나?” “아니! 그냥 으깨면 큰일 나. 으깨기 전에 중화제를 만들어 첨가해야 돼.” “중화제라. 맹인의 풀로 만드는 그거 말인가?”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주머니 안에서 강하게 몸을 한 차례 흔들었다. 김성철은 즉시 맹인의 풀에 손을 뻗었다. 베르텔기아는 그런 김성철의 손끝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전에 재료를 넣을 땐 반드시 손질하라고 가르쳤는데 어디 제대로 하는가 한 번 볼까?’ 김성철은 연금 가마에 불을 지피고 증류수를 집어넣었다. 거기까진 일반적인 수순. 중요한 건 다음부터다. “…….” 김성철은 아까 선별한 맹인의 풀을 다시 집어 들며 가만히 지켜보더니 이윽고 뿌리와 말라붙은 끝부분을 하나하나 손으로 떼는 작업을 시작했다. ‘헉! 제대로 하잖아. 이 사람!’ 베르텔기아가 기대한 이상의 결과였다. ======================================= 16. 어려운 과제 (4) 기이한 일이었다. 성실과 꼼꼼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내가 재료 하나를 다듬는 걸 저토록 자연스럽게 하다니 말이다. 김성철은 하나하나 다듬은 맹인의 풀과 다른 재료를 섞어 연금 가마 안에 조심스레 넣었고 주걱으로 정성스레 저었다. 곧 초록색을 띠는 중화제가 가마 속에서 탄생했다. “이걸 유발 안에 부으면 되나?” “으.. 응! 양은 연금스푼으로 3스푼 정도.” “…….” 김성철은 중화제를 유발 안에 투입하고 중화제를 머금어 유해진 폭죽나무 씨앗의 정수를 유봉으로 조심스레 으깼다. 작업을 시작한 지 5분 정도가 지나자 중화제의 물기는 날아가고 유발 안엔 붉은 색 가루만이 남았다. “이걸로 충분한가?” 김성철이 묻자 베르텔기아는 몸을 한 차례 흔들었다. “응. 충분해. 다음은 천칭을 이용할 거야.” “천칭이라.”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천칭을 응시했다. 익숙하지 않은 기구다. “연금폭탄 종류는 양의 배분이 아주 중요해. 그래서 정확한 계량을 할 수 있는 천칭은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거든?” 그 대목에서 베르텔기아는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한 번에 성공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다른 건 몰라도 천칭을 처음 다루는 건 초보의 운만으로 가능하지 않으니까!’ 곧 천칭을 통한 계량작업이 시작됐다. 김성철은 붉은 가루를 천칭의 한 팔 위에 올려놓고 다른 팔위에 조그만 추를 달아 무게를 가늠했다. 처음 하는 작업이라 그 속도는 느렸지만 김성철은 집중력과 정확도를 가지고 임했다. “자, 다음은?” 베르텔기아는 흔들리는 천칭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흠잡을 데 없는 완전한 계량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김성철에겐 연금술사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인 기본에 충실한 꼼꼼함을 지니고 있는 걸로 보였다. 하지만 그런 재능에도 불구하고 연금폭탄(흑)의 연성은 최종단계에서 실패로 끝이 났다. 펑! 가마를 젓는 와중 김성철은 대량의 마나가 빠져나가는 걸 느꼈고 마나정수를 마셔 마나를 회복하긴 했지만 가장 중요시해야 할 정신집중이 무너져 연성이 실패로 끝나버리고 만 것이다. [ 연성 실패! ] 김성철의 입에서 얕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간한 일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로서도 대량의 마나를 뺏고 엄청난 정신력을 피로로 하는 고레벨 연금아이템의 연성은 좀처럼 맛보기 힘든 고역이었다. ‘나 정도 되는 자가 애를 먹다니. 연금술도 아주 만만한 건 아니군.’ 멀리 창고 옆에 술판을 벌이고 있는 학생들이 이쪽을 쳐다본다. 그들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금 가마 쪽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웃어대고 있었다. “어휴. 저 병신들. 진짜 왜 저렇게 살까?” 베르텔기아는 툴툴거렸지만 김성철은 달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능력치가 상승한 것 같다. 마치, 한바탕 힘든 전투를 벌인 직후의 보람 섞인 피로감이라고 할까.’ 김성철은 즉시 상태창을 열어 능력치를 확인했다. [능력치] 힘 999+ 민첩 853 체력 801 마력 132 직관력 103 마법저항 621 의지 502 매력 18 운 18 마력과 직관력이 소폭이지만 상승했다. 비록 연성은 실패했지만 완전한 실패는 아닌 셈이다. 김성철은 몸에 다시 힘이 솟는 걸 느꼈다. 그는 마력 정수를 몇 개 들이키고는 다시 연금폭탄(흑)의 제작에 돌입했다. 막 작업을 재개하려고 할 때였다. 베르텔기아가 그를 제지했다. “잠시 몸을 쉬어두는 게 좋아. 지금 당신 수준으로 5레벨 아이템을 연속해서 만드는 건 무리한 일이니까.” “그래?” “연금술은 마법과 별개로 취급되곤 하지만 본질을 살펴보면 어떤 물질을 자신의 의지와 기술로 전혀 다른 무언가로 변화시키는 엄연한 마법의 일종이야. 따라서 다른 마법처럼 몸이 버틸 수 있는 이상의 마력을 마구 써대다간 체내에 자리 잡은 마법 지문이 망가질 수가 있어. 마법 지문이 망가지면 그 사람은 마법을 쓸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베르텔기아의 충고는 흘려들을 성질의 것이 아니다 김성철은 즉시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조용히 물었다. “하루에 몇 번까지 시도할 수 있나?”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물었다. 베르텔기아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3번. 3번 이상은 곤란할 거 같아.” “좋아. 참고하지.” 김성철은 이후 2번의 연성을 더 시도했다. 결과는 모두 실패. 둘 다 아슬아슬하게 마지막 순간에 마력이 부족하고 집중력 저하에 따라 실패했다. 하지만 김성철은 낙담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감각을 잡은 것뿐이고 실패를 했다고 하나 고레벨 아이템의 연성 시도로 인해 능력치도 소폭 상승했다. ‘좋아. 이 느낌이라면 적어도 3일안엔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김성철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연금학파의 학생들은 멀리서 연거푸 폭발을 일으키고 있는 괴짜 신입생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에헤! 저 인간. 5레벨 연금아이템 만든다고 큰 소리 치더니 뭐하는 거야? 학교 전체를 터뜨리기라도 할 작정이야?” “그러게 말이야. 겉멋만 들어서. 천칭 쓰는 꼬라지 보라고.” 그때 한 인물이 뒤에서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실실 웃으며 술을 마시거나 대마를 피우던 학생들은 그 인물의 얼굴을 보자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어휴. 쓰레기 냄새. 정말로 역겹네요. 그렇죠?” 화염학파를 상징하는 붉은 색이 감도는 로브를 걸친 그 사내의 정체는 레너드 상텀. 그는 연금학파 학생들을 마치 벌레를 보듯 쳐다보며 지나쳤고 이윽고 멀리서 검은 연기를 피어올리고 있는 연금 가마 옆에 서 있는 김성철을 쳐다보고 방긋 웃었다. “아하!” 순간 그의 모습은 마법진과 함께 사라졌고 잠시 후 김성철 바로 앞에서 출현했다. “여어! 천공학파의 불청객씨. 여기서 뭐하세요?” 그는 연금 가마에 얼굴을 가까이대고 김성철의 실패한 연성물을 살펴보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이쿠. 설마, 연금학파의 과제물을 만들고 있는 건가요?” “보는 대로.” “그런데 실패했네요?” “…….” 김성철이 입을 다물자 레너드는 코웃음을 치며 김성철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 “시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열심히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제적처리 될 테니까요.” 김성철은 연금학파의 갑작스런 폐부결정의 뒤에 레너드가 있음을 간파했다. ‘마법사들은 항상 이런 식이지. 잔머리 굴리는 걸 너무 좋아해.’ 그러나 그가 뭐라고 하든, 무슨 짓을 하건 김성철에겐 크게 상관이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점에서 김성철은 5레벨 연금아이템을 연성할 수 있다는 확신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김성철의 예상보다 하루 늦은 4일차에 나타났다. 김성철이 연성을 시도한 아이템은 연금폭탄(흑)도 부유석결정도 아닌 에르피르 약제였다. 에르피르 약제를 만드는 과정은 그가 좋아하는 요리를 만드는 과정과 형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유사했다. 귀한 약재를 달여 즙을 내고 그 즙 위에 갖가지 진귀한 약재를 섞어 약탕을 만들어낸다. 마지막에 약탕과 마법적인 힘을 간직한 연금재료를 주걱으로 섞는 부분만이 요리와 달랐지만 김성철에겐 그동안 겪은 시행착오를 통한 경험이 있다. 부족한 마법은 마력의 정수로, 정신집중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 각각 대처한다는 전략을 가지고 연성에 덤벼든 지 2회차. 김성철은 오랜만에 연금 가마 안이 환한 광휘로 빛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 연성 성공! ] “와우!” 베르텔기아가 격렬히 몸을 떨었다. 아무래도 습관이 된 모양이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가 난동을 부리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만큼은 그 떨림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성취감이 그의 메마른 가슴을 적시는 걸 느끼며 김성철은 자신의 첫 5레벨 연금아이템을 유리병 안에 담은 뒤 바실 필루스에게 갔다. “약속한 5레벨 연금아이템이오.” * 심사는 신속하게 진행됐다. 심사엔 빙결학파의 학장인 로버트 단턴과 화염학파의 학장인 프레기우스 각각 참석하기로 했으나 프레기우스는 연락이 닿지 않아 그 차석인 아민 말루프 교수가 대신해서 참석했다. 아민 말루프 옆엔 김성철이 잘 아는 얼굴도 있었다. 레너드 상텀이다. 그는 바실 필루스와 함께 비상위의 회의실에 들어온 김성철을 보더니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해보였다. “그럼 심사를 시작하겠소.” 심사를 담당한 교수들은 김성철이 만들어낸 아이템을 각각 고유의 방법을 감정했다. 감정의 방법은 그 연금아이템의 종류와 성질, 그리고 진위 연부에 관해 조사하게 된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건 5레벨 연금아이템이군.” 로버트 단턴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고 아민 말루프도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레너드 상텀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그를 향해 김성철은 여분의 에르피르 약제를 담은 병을 가볍게 던지며 특유의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직접 확인해 보시던가.” 레너드 상텀은 김성철이 시킨대로 했다. 결과는 뻔했다. 김성철이 만들어낸 건 진짜다. “이건... 말도 안 돼!” 심사를 끝낸 그의 엄연한 상급자들이 결과를 발표하는 와중에 레너드는 안하무인격으로 소리를 질렀다. 로버트 단턴이 냉담한 눈으로 길길이 날뛰는 레너드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싸가지 없는 새끼. 프레기우스만 아니면 진작에 손봐줬을 놈인데.” 아민 말루프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지. 레너드가 중얼거리며 분위기를 어지럽히는 와중에 결과는 발표됐다. “연금학파는 정한 과제를 해결한 것이 인정되었기에 그 폐부를 유예한다. 단 그 기한은 1년이고 1년안에 연금학파는 그들이 에어푸르트에 남아 있어야 할 또 다른 이유를 몸소 증명해야 할 것이다.” 승리의 순간. 바실 필루스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회의실 뒤에서 숨을 죽이고 안의 동정을 엿듣던 학생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울렸다. 복도가 우렁찬 환호로 뒤덮인 가운데 김성철은 뒤돌아섰다. 그때 레너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야!” 레너드는 이성을 잃고 있었다. “너 이 새끼! 김성철! 일로와! 너 그냥은 못 보내.” 김성철은 조용히 뒤돌아서서 레너드를 노려봤다. “?!” 레너드는 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의 공포를 느꼈지만 이내 내면의 광기로 지워버리고 소리 질렀다. “결투다! 건틀렛으로 승부를 내자! 남자새끼라면 거절하지 않겠지?” 로버트 단턴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아민 말루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닫힌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화염학파의 로브를 걸친 학생이 다급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로버트 단턴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응시했다. “무슨 일인가?” 그의 물음에 화염학파의 학생은 울먹거리며 대답했다. “프.. 프레기우스 교수님이.... 살해당했습니다!” 그 한마디는 좌중을 깊은 충격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것은 기세등등한 레너드 상텀이었다. 프레기우스의 비호를 받아 학교로 돌아온 건 물론 빙결학파의 학장이 있는 곳에서 큰소리를 치던 학교의 권력자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한 순간에 잃어버렸다. 로버트 단턴의 싸늘한 눈동자가 레너드 상텀을 향했다. “당장 내 앞에서 꺼져! 쓰레기 같은 새끼야.” 레너드의 얼굴은 눈에 띨 정도로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그는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도망치듯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에어푸르트를 둘러 싼 국면은 급격하게 바뀌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선 김성철은 입을 다문 채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폭풍의 예감이 드는군.’ 그 예감은 어김없이 적중했다. 김성철이 회오의 관으로 돌아왔을 때 낯익은 소동물이 그를 향해 뛰어들었다. “뀨뀨!” 하늘 다람쥐다. 그런데 하늘 다람쥐의 상태가 이상하다. 어떤 쪽지도 메시지가 가지고 오지 않은 그 녀석의 앞발엔 붉은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김성철은 그 냄새를 맡았다. 하늘 다람쥐의 것이 아니다. 인간의 피 냄새다. ======================================= 17. 몰려드는 먹구름 (1) 퀴퀴한 어둠 속.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 손이 뒤로 묶여 의자에 결박된 시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라기보다는 피로 절인 고깃덩이에 가까운 참혹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청년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시신을 쳐다보다가 시신 옆에 놓아둔 끔찍한 고문기구 중 하나를 집어 시신의 몸통을 푹 쑤셨다. 죽은 자는 움직임이 없다. 청년은 뒤를 돌아보며 순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이 녀석 왜 죽은 거야?” 청년의 물음이 어둠 속에 울린 직후 그림자 속에서 두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일남일녀. 둘 다 검은 로브를 입고 고양이 형상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 녀석의 심장에 맹약이 걸려 있었단다.” 여자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맹약?” 청년이 묻자 그 여성은 의자에 묶인 시신에 다가가더니 사내의 오른팔에 부착된 의수를 떼어내고는 그 끝으로 뻥 뚫린 사내의 심장 부분을 가리켰다. “중립신의 이름을 걸고 한 맹약은 깨지는 순간 목숨을 앗아가지. 아마도 이 녀석은 네가 원하는 이름을 실토하는 순간 맹약을 어겼을 거란다. 그래서 심장이 터져버린 것이지.” 여성의 설명을 들은 청년은 김빠진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나이프를 떨어뜨렸다. “아, 재수 없어. 첫 심문이었는데! 저런 놈을 만나다니.” 청년의 뒤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검은 로브를 입고 고양이 가면을 쓴 키가 큰 청년이었다. 그는 풀 죽은 청년의 뒤통수를 가볍게 후려치고는 짓궂게 말했다. “가문의 수치! 넌 하는 거마다 왜 그러냐? 고문 하나 제대로 못하고. 나 같았으면 1분 안에 저 새끼 입에서 우리가 원하는 이름을 토하게 만들었을 거야.” “오빠. 너무 그러지 마. 우리 픽트는 이제 첫 시작인데.” 청년의 뒤에선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안개는 곧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젊은 여성의 형상으로 변했다. 검은 머리칼과 핏빛 눈동자 그녀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고양이 가면을 썼다. “모두 들어라.” 처음 나타났던 사내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네 명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절도 있는 자세로 왼손을 뻗어 손등을 보였다. 손등 위엔 두개골을 꿰뚫는 번개 형상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평범하고 어떻게 보면 조잡한 형태의 문신이었지만 그 표식이 의미하는 바를 아는 자라면 절대로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표식은 암살교단을 좌지우지 하는 4대 가문 중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알메리아 가문. 암살교단의 4대 가문 중 가장 강하지 않지만 가장 악랄하다는 평가를 듣는 존재들. 그들은 가족 단위로 움직인다. “이번에 우리가 상대할 자는 세계의 적이다. 힘 수치 600을 돌파했다는 괴물 중의 괴물이지.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경계를 늦추지 마라. 그리고 항상 조심하라. 나는 아비 된 입장으로 단 한 명의 가족도 잃고 싶지 않으니까.” 현 알메리아 가문의 당주 드비시 알메이라는 짧은 훈시를 마치고 그의 아내와 함께 어둠 저편으로 사라졌다. 장남과 장녀인 카즈 알메이라와 마이라 알메이라도 묵묵히 부친의 뒤를 따랐다. 마지막에 남은 건 막내인 픽트 알메이라였다. 그 청년은 아까 당한 놀림의 분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찌푸린 얼굴로 남아 있다가 이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의수를 집어 들더니 죽은 사내의 턱을 벌리고 그대로 의수를 쑤셔 박아 버렸다. 의자에 묶인 시신이 거칠게 요동쳤다. “씨발...! 이 새끼 때문에!” 처참하게 망가진 시체를 놔두고 청년은 자리를 떠났다. 피 냄새만이 가득한 방 안에 한 사내가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 김성철은 참혹하게 망가진 시체를 가만히 응시했다. ‘크리스티안.’ 끔찍한 고문으로 인해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의 입에 박힌 의수가 그의 신분을 알려주고 있었다. “으... 뭐야.. 이건... 못 보겠어.” 베르텔기아는 주머니 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김성철은 주변을 살폈다.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끔찍한 고문 기구와 핏자국 외에는. 평범한 자들의 솜씨는 아니다. 김성철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왜? 김성철은 잠시 크리스티안의 시체 옆에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피로 절여진 고문 기구 옆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금화. 무인 금화다. ‘설마 이걸 단서로 찾아서..?’ 상인들의 세계는 잘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유능한 상인은 동전 하나만으로 거기 얽힌 모든 사정을 알 수 있다는 조금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그때는 일소에 부쳤지만 지금 현재 남겨진 단서는 그것뿐이다. ‘날 노리는 자들의 소행인가?’ 그것 외에는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 노예사냥꾼 같은 하찮은 인간 하나 잡으러 이런 수단까지 쓸 할 일 없는 녀석은 찾아보기 어려우니. 그리고 김성철은 아직 우월한 지위에 있다. 왜냐하면 미지의 적들은 크리스티안으로부터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기에. 맹약의 효과는 그러한 것이다. 김성철은 입안에 의수를 뽑아 크리스티안의 잘린 팔에 동여 맨 후,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나쁘지 않은 친구였다. 듣고 싶은 이야기도 있었다. 어째서 노예사냥꾼이 됐는지. 학교에선 어떤 삶을 보냈는지. 그러나 이야기 할 시간이 없었고 이제는 그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왱왱! 시체 냄새를 맡고 파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시신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였다. 활활 타오르는 방을 뒤로 한 채 김성철은 화려한 불빛으로 번쩍이는 노예 거리로 섞여 들었다. 불이 났다는 고함이 뒤에서 들려왔다. “…….” 그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무심한 달빛마저 갈라버릴 정도의 서늘한 살기를 담고 있었다. * 회오의 관에 돌아왔을 때 김성철은 현관에 나와 있는 사라사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사라사의 표정이 이상하다. 평소엔 도도한 표정으로 시종일관 매몰차게 대하던 그녀였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성철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뀨잉....” 사라사의 등 뒤에서 낯익은 울음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아.. 바깥에 나와 돌아 다니길래.” 사라사는 김성철의 시선을 피하며 하늘다람쥐를 놓아주었다. 사라사의 차가운 손아귀에 잡혀 있던 하늘다람쥐는 풀려나자마자 부리나케 뛰어와 김성철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뀨뀨!” 사람의 손길을 좋아하는 하늘다람쥐였지만 차가운 사라사의 손길은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라사는 그런 하늘다람쥐를 원망스런 눈으로 보더니 매몰차게 말했다. “우리 기숙사에 애완동물 사육은 금지야.” “…잠깐만 돌봐주겠다.”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고는 사라사를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사라사는 그의 등 뒤를 노려보다가 종종걸음으로 쫓아왔다. “금지라고 말했잖아. 이 기숙사의 주인은 나야.” “이 다람쥐의 주인이 죽어서 어쩔 수가 없다. 하루만 맡지.” 기세등등한 사라사였지만 주인이 죽었다는 말에 한 발 물러섰다. “그.. 그래?”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사를 뒤로 하고 김성철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너저분한 실내가 그를 반겼다. 김성철은 하늘 다람쥐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는 잠시 자리에 앉아 현 상황을 정리했다. ‘만약 암살자가 나를 노리는 거라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일수도 있겠지만 적은 황금 도시까지 손길을 뻗쳤다. 무엇보다 걸리는 것은 무인 금화의 존재. 김성철은 회오의 관에 오기 전에 학교 앞의 도구상을 한 번 들렸었다. 도구점의 주인은 가게 바깥에서 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안에선 사람의 기척이 없었고 누군가 침입한 흔적도 없었다. 게다가 한 밤 중이라 어디 물어볼 곳도 마땅치 않았다. 자초지종을 알기 위해서는 내일의 해가 뜬 다음에야 뭐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크리스티안이 죽은 이상, 정보를 얻을만할 곳이 마땅치 않군.’ 한편 사라사는 아까부터 김성철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뭐라도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일까. 김성철은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젖혔다. “무슨 일이냐?” 김성철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라사는 김성철의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눈빛을 달리하고 김성철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까 일 말인데. 딱히 악의는 없었어. 어른답지 않게 화를 낸 거 같아서.” “사과 할 일은 아니다.” 김성철은 문을 닫았다. 그런데 문을 닫으려고 하자 사라사의 창백한 손이 닫히는 문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자.. 잠깐만!” 김성철은 다시 문을 열었다. “…….” 김성철의 싸늘한 눈빛이 사라사의 얼굴에 꽂혔다. “그런 눈으로 볼 거 없잖아. 내 말은 음... 여기 온지도 오래 된 거 같은데. 그러니까 같은 기숙사를 쓰는 사람으로서 가끔은 대화를 해야 된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녀는 김성철 너머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는 하늘다람쥐를 눈에 담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람쥐가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김성철은 문득 가슴에 사무친 어떤 광경을 떠올렸다. ‘그 녀석도 유난히 동물을 좋아했었지.’ 잠깐 찾아온 상념은 뒤이은 사라사의 목소리에 의해 깨어졌다. “그나저나, 당신. 회오의 관의 퀘스트를 찾아다니는 거 같던데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 봐도 좋아. 오늘은 내가 실수한 것도 있으니 특별히 알려줄 테니까.” “뭘 가르쳐 줄 수 있지?” “열리지 않는 문의 악마 공략법.” 사라사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김성철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야바위 하던 악마 말인가? 그 녀석은 이미 공략했어.” “그래? 그럼 지하우물의 해골병사 퀘스트는?” “그것도 이미 공략했다.” “그으래..?!” 이후에도 사라사는 몇 개의 퀘스트를 더 열거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이럴 수가... 거짓말이지?” 그녀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김성철을 응시했다. 그런 사라사를 보던 김성철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말했다. “학교 바깥 마법도구점에 대해 아나?” “아. 카벙클? 응. 당연히 알지.” “주인에 대해서도?” 사라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살집 좋고 목소리 큰 아저씨 말이지? 응 알아. 저학년 때부터 알고 지냈는걸.”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쪽 주인이 어디 사는지 알고 있나?” “알긴 아는데 그건 왜 물어?” “그 사람한테 전해 줄 물건이 있어서 말이야. 위치를 안다면 내게 알려줬으면 하는군.” 그렇게 말하며 김성철은 휘파람으로 하늘 다람쥐를 불렀다. “뀨뀨!” 사라사의 눈동자가 하늘 다람쥐에게 고정됐다. 하늘 다람쥐는 사라사의 관심이 무서운지 몸을 떨었지만 이내 자신을 움켜쥔 김성철의 손에 의해 사라사에게 운반됐다. “이 녀석을 잠시 맡아줘. 지금 당장 그쪽으로 전해줘야 할 물건이 있다.” “아... 알았어.” 그녀는 두 손을 모아 하늘 다람쥐를 받았다. 하늘 다람쥐는 경악을 했지만 김성철이 땅콩을 내밀자 곧 진정됐다. 김성철은 사라사에게 땅콩이 담긴 작은 종이봉지를 내밀며 대답했다. “동물과 친해지려면 먹을 것을 주는 게 가장 빠르지.” “으.. 응!” 사라사가 마법도구점 주인에 관한 정보를 내놓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길로 김성철은 어둠을 해치고 도구상점 주인이 산다는 다세대 건물로 향했다. 실내는 온통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김성철은 기척을 죽인 채 진실의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만일의 위협에 대비하며 천천히 집안으로 접근했다. “…….” 늦지 않았다. 아직 여기까지 살인자들의 손길은 뻗치지 않았다. 주인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김성철은 주인을 흔들어 깨웠다. 잠꼬대를 하던 주인은 눈을 비비고 일어났고 그리고 야밤의 불청객과 마주했다. “무.. 무슨 일이오?” 김성철은 소스라치게 놀라는 주인에게 피 묻은 금화를 내밀었다. “이걸 기억하는가?” 그제야 주인은 불청객의 정체가 대박을 안겨다 준 사내라를 것을 인식했다. 머릿속에 별별 생각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어떤 상상도 사내의 입에서 나온 것만큼 충격적이진 않았다. “나는 부수는 자 김성철이다. 세간에선 날 세상의 적이라 부르더군.”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김성철은 드워프들이 그들의 신에게서 하사받았다는 전설을 지닌 팔 가라즈를 꺼내 보였다. 찬란한 광휘에 휩싸인 신물을 본 주인은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끄... 끄어어어....” 김성철은 그를 노려다보며 작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짐을 싸서 황금 도시를 떠나라. 그리고 인간제국의 제도로 가 황제에게 알현을 청해라.” “으... 으어어....” 말을 잇지 못하는 주인에게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상아자루로 만든 단검 하나를 꺼냈다. “이걸 보여주면 황제는 널 만나줄 것이다. 하지만 명심해라. 만약 이 사실을 다른 누구에게 발설한다면.....” 김성철의 손이 주인 너머 침대의 장식장을 움켜잡았다. 구리로 만든 장식은 김성철의 손아귀 속에서 으스러졌고 이윽고 그의 손가락 틈 사이에서 엿가락처럼 삐져 나왔다. “히.. 히이!!!” “혹 내게서 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면 저질러도 좋다. 운명을 시험해보고 싶다면 말이다.” 김성철은 피 묻은 금화를 사내 앞을 내려놓은 채 뒤돌아섰다. “지금 당장 떠나라.” “아.. 알겠습니다!” 사내는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듯 내려와 허겁지겁 옷을 집어 입었고 짐을 챙겼다. 잠시 후, 마차 한 대가 빠르게 차가운 밤공기를 해치고 먼 곳으로 사라졌다. “…….” 김성철은 마차가 사라지는 걸 보고서야 돌아섰다. “의외네?” 품속의 베르텔기아가 말했다. “뭐가?” 김성철이 묻자 베르텔기아는 주머니 속에서 빠져나오더니 그의 어깨 위에 하늘 다람쥐처럼 내려앉았다. “죽일 줄 알았거든. 당신이라면.” “나는 죄 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그게 의외라는 거야. 난 당신이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으로 봤거든. 마치 칠영웅처럼.” “…난 그들과 다르다.” 김성철은 마치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하고는 하늘을 봤다. 동녘엔 어느새 미명이 비치고 있었다. ‘시간을 조금 벌긴 했지만 남은 시간은 별로 없다. 계획을 수정해서 빠르게 천공학파의 비전을 손에 넣은 후 이곳을 떠나야 한다.’ 그의 시선은 산정 높이 자리 잡은 둥근 돔을 얹은 건물을 향하고 있었다. ======================================= 17. 몰려드는 먹구름 (2) 화염학파 학장 프레기우스의 죽음은 에어푸르트 마법학교를 커다란 충격속으로 몰아 넣었다. 이른 아침, 김성철은 보기 드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교정에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새로운 신입생의 수혈이 끊긴 학교에서는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광장 게시판에 붙여 놓은 대자보를 응시하고 있었다. 대자보 안엔 화염학파 학장의 죽음에 관한 소식이 적혀 있었다. “세상에... 프레기우스 교수님이 죽다니.” “우리 학교를 떠받치는 쌍벽 중 하나가 무너졌어.” “에어푸르트는 이제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 이는 대화를 들으며 걸어가던 중 김성철은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여어! 일류 연금술사!” 교수라기보다는 동네 형에 가까운 외모를 지닌 바실 필루스였다. 그는 김성철을 마치 평생지기를 보는 듯한 그윽한 눈으로 보며 악수를 청했다.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실 필루스의 손을 응시했다. 무안해진 바실 필루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 참. 얼굴이 뜨겁네.” “무슨 일이오?” 바실 필루스의 바닥은 이미 본지라 김성철은 그에게 존대를 해줘야 할 어떤 이유도 찾지 못했다. “반가워서요. 그보다 저 대자보 보셨어요?” 바실 필루스도 자신의 못남을 아는지 김성철의 태도에 개의치 않았다. 김성철은 실실 웃는 바실 필루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프레기우스 교수의 죽음 말이오?” “네! 그렇죠. 하지만 저게 전부가 아닙니다. 보다심각한 내막이 있지요!” “내막?” 이번엔 김성철도 흥미를 보였다. 크리스티안의 죽음 쪽이 더 큰 사건이라 신경을 쓰지 못했을 뿐이지 재앙의 추종자의 수장으로 지목받는 자의 죽음은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였다. 김성철의 냉담한 태도가 그나마 누그러지자 바실 필루스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아 네. 들으면 깜짝 놀랄 겁니다. 이리로 오시지요.” 그는 구석진 곳으로 김성철을 데리고 가더니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교수 회의에서 엿들은 내용인데 말입니다. 세상에 프레기우스 교수의 살해당한 방식이 3년 전 교장인 대 마그누스 교수님과 동일하다고 하더군요. 다시 말해 동일범의 소행이라는 거죠.” “살해방법이 어떻다는 거요?” 김성철의 물음에 바실 필루스는 잠시 머리를 굴리더니 이윽고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이었다. “시신의 절반이 마치 엄청난 힘에 얻어 맞은 것처럼 찌부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마치 메테오를 정면으로 맞은 것 마냥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참상이라고 하더군요.” “메테오?” 메테오라면 천공학파의 주력 마법이다. 하늘의 혜성을 소환해 지상의 적을 강타하는 강력한 마법.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쪽도 알다시피 메테오라는 건 실내에서는 쓸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실내에서 썼다가는 교수뿐만 아니라 건물 전체가 박살이 났을 터이니.” “실내에서 죽은 거요? 프레기우스라는 자는?” 바실 필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전 경험이 누구보다 풍부한 김성철이었지만 그런 종류의 마법을 경험한 적이 없다. ‘일종의 소환 마법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군.’ 각종 마법이 넘치는 마법학교에서조차 원인을 짐작하지 못하는 수준이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범인은 대체 누굴까요? 대 마그누스를 죽인 자가 또 다시 교장 후보인 프레기우스 교수를 죽이다니. 적어도 평범한 마법사는 절대 아닐 겁니다.” “범인은 마법사요?” “네. 마법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더 난리죠. 과연 어떤 마법사가 그들을 죽였는지. 적어도 그 쟁쟁한 교수들과 승부가 될 정도의 강력한 마법사인 건 분명하죠. 사람들은 범인이 빙결학파의 학장인 로버트 단턴 교수를 지목하기도 하는데 글쎄요. 제가 볼 땐 빙결마법의 소행과는 거리가 먼 거 같아요.” 그때 광장 저 편에서 번쩍이는 은빛 갑주를 걸친 병사들이 열과 오를 맞춰 교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서자 광장에 안에 모인 수많은 학생들은 눈치를 보며 하나 둘 자리를 떠났고 광장은 병사들의 차지가 되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떠들썩한 소란을 보고 바실 필루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휴. 또 왔네. 정화교단의 사냥개들.” 김성철의 시선도 병사들을 향하고 있었다. 뒤이어 그는 병사들의 호위를 받고 있는 한 사내를 눈에 담았다. 하얀 법복과 까마귀 가면을 쓴 그 사내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성물에 가까워 보이는 존재였다. ‘저 자가 이단심문관인가?’ 이단심문관은 이계의 다섯 주신 중 하나인 질서신을 모시는 두 개의 교단의 성직자 중에서 선발되는 가장 신심 깊은 신앙의 투사다. 하지만 그들의 맹목적인 신앙은 좋지 않은 에너지를 발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성철은 마계 최전선이라 불리는 북부의 어떤 마을 하나가 아무 죄도 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3명의 이단심문관을 죽인 적이 있다. 그다지 강한 상대는 아니엇다. 그들에 대해 김성철이 느낀 감상은 바퀴벌레처럼 끈질기다는 게 전부였다. ‘이왕이면 저쪽까지 상대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바실 필루스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저 이단심문관, 전 교장인 대 마그누스의 이복동생이라는 소문이 있더군요.” “이복 동생?” “네. 마그누스 가문은 유서 깊은 마법사 가문으로 이름 높은데 정실 소생인 저 이단심문관은 머리가 나빠 교단으로 보내진 반면, 첩의 자식인 대 마그누스는 머리가 좋아 대(大)라는 칭호까지 얻었지요. 그래서 둘 사이가 아주 좋지 않았다는. 뭐, 어디까지나 소문이지만 말입니다.” 그 이후로도 바실 필루스는 이야기를 더 늘어놓았지만 시덥잖은 이야기였다. 김성철은 적당히 말을 끊고 이제 천공학파로 향하려 몸을 돌렸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 한 무리의 마법사들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푸른색이 가미된 교복을 걸친 한 무리의 학생과 중년의 마법사였다. 선두에 선 마법사와는 면식이 있다. 다부진 턱과 날카롭게 솟은 콧날, 무심한 푸른 눈을 지닌 얼굴. 빙결학파의 학장인 로버트 단턴이다. 김성철은 화염학파의 학장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레너드 상텀을 비참하게 쫓아 보내던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그 로버트 단턴의 시선은 지금 현재 똑바로 김성철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김성철 앞에 멈춰 섰다. “잠시 이야기를 좀 할 수 있을까?” “아주 잠시라면.” 김성철의 당당한 태도에 로버트 단턴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뒤에 선 학생들이 격앙하고 나섰다. “예의가 없군. 감히 이 분이 누구라고 고개조차 숙이지 않는단 말이냐?” “연금학파 따위가.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로버트 단턴은 손을 들어 부하들의 입을 닫게 만든 다음 다시 김성철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아주 잠시라도 좋으니까 내 방으로 오게.” “긴 시간은 할애할 수 없소.” 로버트 단턴의 입 끝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는 먼저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김성철은 로버트 단턴의 제자들의 눈총을 받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갑작스런 상황에 휩쓸린 바실 필루스는 멍한 얼굴로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중얼거렸다. “어이쿠 이런. 벌써 오는 게 어딨어? 아직... 부탁은 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부탁이란 연금학파의 교수 자리를 빼앗지 말아달라는 소박한 것이었다. * “소문은 들었네. 내정자 출신의 소환자라고 하더군.” 로버트 단턴은 자리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내정자 출신일세. 15년 전에 이곳으로 왔지.” 꽤 오래된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김성철보다 한참 후배다. 김성철은 대략 25년 전쯤에 소환됐으니 말이다. 외모에서 느껴지는 연륜은 완전 딴판이지만. “아무튼 거두절미하고 그쪽에서 시간이 없다고 하니 본론으로 넘어가겠네.” 로버트 단턴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의 커튼을 모두 닫고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본 후 김성철 뒤로 천천히 돌아가며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후견인이 누군가? 말하기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관계없지만, 자네를 이해하는데 오해를 할 수 있을 수도 있으니 신중히 생각해서 한 번 말해보게.” 처음부터 김성철의 뒷배경을 물어본다. 참 정직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김성철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김성철은 몇 개의 후보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가 선택한 기준은 어느 정도 힘이 있으면서도 로버트 단턴 측에서 먼저 연락을 취하기 어려운 세력이다. 곧 김성철은 한 세력을 떠올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대왕국이오.” “고대왕국...?!” 로버트 단턴이 입맛을 다셨다. “고대왕국은 마법을 금하는 곳 아닌가? 마법 자체를 배척하는 집단에서 어째서 자네를 보낸 거지?” “뒤로는 잘만 쓰고 있는 거 그쪽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 말을 들은 로버트 단턴은 실소를 터뜨렸고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김성철의 말을 믿는지 안 믿는 지까지는 알 수 없다. 불안한 기류가 흐르는 가운데 로버트 단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의 실력은 확실히 봤어. 엄밀히 말하자면 자네 뒤를 봐주는 세력의 힘이라고 해야겠지만.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의 힘이 되 주지 않겠나?” “무슨 뜻이오?” 김성철은 선 채로 질문을 던졌다. “내 편이 되란 이야길세. 프레기우스가 죽은 지금 학교를 이끌 건 나밖에 없어. 비록 껍질만 남은 학교지만 우리는 이 학교를 보다 좋은 곳으로 이끌려고 하지. 그 목적을 위해서는 많은 지원이 필요해.” 김성철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이야기를 한 로버트 단턴은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다시 말했다. “이름은 본명인가?”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가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자네가 5레벨 연금아이템을 만들어냈을 때 확신까지 했어. 아, 이 친구가 굳이 그 이름을 쓴 것은 학교의 시선을 받고 싶은 게 아닌가 하는.” 꿈보다 해몽이다.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로버트 단턴이 펼치는 상상의 나래를 들었다. 그 지루한 이야기 속에서 김성철은 로버트 단턴의 생각 하나를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김성철이 제출한 에르피르 약제가 김성철이 만들지 않았다고 전제하고 있었다. 실제로 만든 건 김성철 본인이 맞는데도 말이다. 그가 연금술을 잘 몰라 그럴 수도 있고 주변에 달리 조언해줄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건 김성철에겐 호재다. 로버트 단턴은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친구도 벗도 없는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사내와 교섭을 하려고 들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자네 뒤를 봐주는 친구들이 누군지 몰라도 그들이 자네에게 아주 심혈을 기울이는 것을 알 수 있어. 나도 내정자 출신이니까. 내정자 사이에 느껴지는 온도의 차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걸 보다 잘 알 수 있거든.” 로버트 단턴은 계속해서 모호한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 그가 원하는 것을 똑똑하게 말했다. “금전이 필요하네. 그것도 상당한 금전이. 어차피 내가 교장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지만 보다 빠른 승진을 위해서는 힘 쓸 때가 많거든.” “그쪽은 내게 뭘 줄 수 있소?” 김성철이 날카롭게 물었다. “힘이 되면 당신에겐 에어푸르트 내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줄 걸세. 물론 당신의 뒤를 봐주는 쪽에서도 충분히 즐거워할 자리를 말이야. 비록 에어푸르트는 망했다고 하나 이름값은 아직 남아 있으니 나쁜 거래는 아니지.” 이에 대해 김성철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로버트 단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구체적으로 듣고 싶은데.” “교수 자리를 원하면 주겠네. 현재 연금학파를 맡고 있는 바실 필루스는 자네도 알다시피 무능력한 인간이야. 반드시 쫓아내야 할 인물이지.” “너무 이른 거 아니오? 난 여기 온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이방인인데?” “당장 주겠다는 건 아니야. 몇 가지 밑밥을 깔아야지. 내가 교장이 되는대로 자네에겐 수석졸업을 위시한 에어푸르트가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엘리트코스를 밟게끔 조치하겠네. 어떤가?” “…….” 김성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버트 단턴은 그런 김성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지만 인내심을 발휘, 부드럽게 말했다. “마음에 안 드는가?” “내가 원하는 건 천공학파의 비전뿐이오. 당신이 알투지우스 교수에게 일러 천공학파의 비전을 넘겨주게 할 수 있다면 내 후견인에게 부탁해보리다.” “알투지우스라.” 로버트 단턴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뭔가 고민하는 듯한 태도였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이내 얇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힘써 보지. 하지만 당장은 어려울 거야.” “그건 무슨 뜻이오?” “알투지우스의 고집은 대단하지. 말이야 해두겠지만 애당초 그는 남의 말을 듣는 사람이 아니야. 그 포악한 프레기우스 말도 안 듣는 인간인데 내 말이라고 제대로 듣긴 하겠나?” “그렇다면 곤란한데.” “하지만 그에게도 약점이 있어. 시간이지. 애지중지하는 소녀가 썩기 시작할 때 즈음엔 무슨 말이라도 들어주겠지. 그러니 기다려 줄 수 있겠나?” 김성철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그가 고개를 가로젓는다고 해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한 판단이다. 기분이 좋아진 로버트 단턴은 김성철을 유심하게 응시했다. 독심술사처럼 눈을 찡그리며 그의 얼굴을 관찰하던 그 사내는 갑자기 불쑥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내 가만히 보니까 힘을 추구하는 거 같군. 천공학파의 비전을 원하는 걸 보니.” “이계에선 힘이 전부 아니오?” 그러자 로버트 단턴은 기다렸다는 듯 눈동자를 굴리며 은근히 말했다. “천공학파의 비전은 내 직접 본 바가 없어 뭐라 평가할 수 없어. 내가 볼 땐 솔직히 과대평가 된 거 같아. 알투지우스가 암살교단의 부교주를 죽였다는 것도 과장이 많이 섞인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어쩌면 그 부교주가 몸이 안 좋은 상태였을 수도 있겠지.” 주저리주저리 말을 길게 늘어놨지만 로버트 단턴이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천공학파 말고 빙결학파의 비전은 어떤가?” 김성철은 칼 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버트 단턴의 표정이 미묘하게 틀어졌다. 그걸 본 김성철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한 번 시험해볼까.’ 김성철이 재앙의 추종자를 상대하던 시절, 익힌 것은 전투기술만은 아니었다. 그는 마법사들의 공통적인 심리상태와 습성들을 또한 두루 경험했고 그들을 자극시키는 방법, 화를 내게 하는 방법 그리고 기분 좋게 하는 방법 또한 터득하고 있었다. “내가 받은 명은 천공학파의 비전을 배우고 오라는 거요. 아니면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걸 배우던가.” 밑밥을 깔았다. “빙결학파는 대체재가 되기 어려운가?” “화염학파와 빙결학파는 대체재가 될 수 없소.” “왜 그렇게 생각하지?” “너무 흔해서.” 그 말은 로버트 단턴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마법사들은 음험하기도 하지만 자존심이 대단히 강하기로도 소문 높은 족속들이다. 과연 로버트 단턴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지금까지 김성철이 수도 없이 경험했던 시나리오와 흐름이 유사하다. 로버트 단턴은 심호흡을 한 차례하고 김성철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진정한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면 내가 조금은 지도해줄 수 있네. 너무 깊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 당신과 당신 후견인이 만족할 정도로 말이야.” “그게 뭐요?” 김성철이 묻자 로버트 단턴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주 살짝 멸망을 보는 거지. 아주 조금만.” 나쁜 예감은 꼭 들어맞는다. 김성철은 달라진 눈빛으로 로버트 단턴을 응시했다. ‘역시 이놈도 재앙의 추종자인가?’ 학교 전체가 썩어 있었다. 어쩌면 학교 구성원의 대부분이 재앙의 추종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김성철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의 표정엔 어떤 변화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로버트 단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게 바로 제가 에어푸르트에 온 이유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영혼창고을 열어 그 안에서 궤짝 하나를 꺼냈다. ‘아니, 벌써부터 영혼창고를 가지고 있다니. 이 자식 상상 이상의 거물이군?’ 로버트 단턴은 가슴이 약간 뛰는 걸 느끼며 궤짝이 열리길 기다렸다. 이윽고 김성철은 투박한 손놀림으로 궤짝을 열었다. 눈부신 황금빛이 궤짝안에서 흘러나와 로버트 단턴의 시선을 어지럽혔다. 김성철은 로버트 단턴의 입에 함박웃음이 떠오르는 걸 느끼며 그 중 하나를 손으로 집었다. 발행처가 없는 금화 무인 금화다. 김성철은 그 금화를 로버트 단턴에게 건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 이것을 제게 받았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고대왕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면 .”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로버트 단턴을 쾌활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대어가 미끼를 물었다. ======================================= 17. 몰려드는 먹구름 (3) 다시 천공학파로 찾아갔을 때 회당의 분위기는 많은 의미에서 달라져 있었다. “왔는가?” 회당에 들어서자마자 알투지우스가 굵직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옆을 응시했다. 레너드 상텀의 해먹이 철거되어 있었다. 대신 그는 바닥에 정좌한 채 열심히 책을 읽는 체를 하고 있었다. 그는 책을 읽는 와중 슬쩍 책을 내려 김성철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김성철은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다시 알투지우스 쪽으로 다가갔다. “날 부르셨습니까?” 알투지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김성철은 알투지우스의 모습이 10년은 더 늙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건강상의 문제는 아니다. 그는 대단히 피로해보였다. “내 지금까지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자네를 멀리했지만 지금부터는 성심성의껏 가르치려하네.” 알투지우스는 김성철에게 목걸이 하나를 건넸다. 태양을 순회하는 행성과 그 중심을 관통하는 빛줄기를 형상화한 황동 메달이었다. “이것은 천공학파의 표식. 그걸 목에 걸도록 하게.” 김성철은 시키는 대로 했다. “원래는 아주 멋진 메달인데 그 복장과는 잘 안 맞는군?” 알투지우스는 김성철의 노가다 패션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일단, 교복부터 맞추는 게 좋을 거 같군. 사실 전부터 신경이 많이 쓰였어.” 김성철은 알 도리가 없지만 한때 알투지우스는 학생들의 풍기문란을 감시하던 호랑이 교수로 이름을 떨친 적도 있었다. 옆에서 둘의 대화를 엿듣던 레너드가 피식 웃었다. 알투지우스가 고개를 돌려 레너드를 노려봤다. “그나저나, 불청객이 하나 있군.” 알투지우스의 손가락이 레너드의 면상을 가리켰다. “제자로 둔 적이 없는 놈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싸늘한 일갈이 회당을 쩌렁쩌렁 울렸다. 레너드의 안색이 변했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자신을 받아준 지 알고 있었는데 이제보니 김성철이 온 다음 자신을 쫓아내려고 참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 새끼를 죽였어야 했는데...’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반전의 기회를 노려보았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프레기우스 교수의 꾐에...” “다 필요 없고. 당장 나가게.” 알투지우스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가 손을 뻗자 그의 영혼창고에서 다섯 가지 보석이 박힌 영롱한 지팡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면 나랑 건틀렛 한 판 해볼 텐가?” 아무리 레너드 생텀이 학교에서 소문난 강자라고 해도 전설적인 일화를 남긴 알투지우스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 그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고 알아듣지 못할 고함을 지르면서 도망치듯 회당을 빠져나갔다. 알투지우스는 그 모습을 보며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는 오지마라! 넌 퇴학이야!” ‘이 노인.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미처 보지 못했다. 언제나 등만 보이던 말없던 노인이 이토록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저 녀석은 재앙의 추종자야. 자네도 재앙의 추종자가 뭔지는 알고 있겠지?”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망할 놈들이지. 아주 쓰레기 같은 놈들이야. 성질 같아선 죽여 버리고 싶지만 옛 제자라 내 손으로 죽이기는 조금 껄끄럽군.” 알투지우스는 파이프를 입에 물고 연기를 한껏 빨아들이고는 회당의 천정을 응시했다. 허옇게 회벽칠을 한 반구형의 천정엔 아무것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소환 궁전은 어땠나?” 알투지우스가 파이프를 입에서 떼며 불쑥 말했다. “좋은 곳은 아니죠.” 김성철이 대답했다. “그렇지. 지옥과 같은 곳이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과정이야. 당신 세상에서 온 사람들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과 생각이 너무 다르거든. 생각이 다른 사람이 많아지면 그 세상은 필연적으로 변하게 돼.” 흥미로운 관점이다. 김성철은 지금까지 소환 궁전에선 이계를 구원한 최고의 인재들만을 가리는 특별한 의식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소환자 출신들은 어딜 가나 평균 이상의 대접을 받는 편이고. 알투지우스는 연기 섞인 한숨을 내쉬며 천정에서 눈을 뗐다. “하지만 이곳도 곧 지옥으로 변하겠지. 누가 무슨 생각을 하건 관계없이.” “재앙의 추종자에 관한 이야깁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중요한 건 그들이 아니야.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재앙 그 자체지. 재앙은 지금도 서서히 우리를 좀먹고 있고 결국 미쳐버리게 만들지. 가장 고결한 자마저도 타락에 빠뜨리게 할 정도로 말이야.” 알투지우스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영혼 창고에서 2권의 책을 꺼냈다. “일단 받아두게.” 김성철은 책을 받자마자 책을 펼쳤다. 하지만 지금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책이었다. “메테오에 관한 책이야. 모두가 잘 아는 천공학파의 주력 마법. 그것을 익히려면 최소 210 이상의 직관력을 필요로 하지.”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위험한 세상이야.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 교장이 그랬고 프레기우스가 그랬듯 나도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알투지우스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의 모습에서 불안과 근심을 발견했다. “자네 같은 끈기 있는 학생은 오랜만이야. 좀처럼 보기 힘든 학생이지. 자네의 본심이 뭐든, 자네 뒤에 누가 있건 그런 사소한 문제는 접어두고서 말이야.” 로버트 단턴이 그러했듯 알투지우스도 김성철을 평범하지 않은, 뒤에서 누군가의 지원을 받고 있는 학생으로 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토록 단기간에 고속의 성장을 하는 게 불가능한 것이니까. “그래서 이걸 선물로 주는 걸세. 언제 메테오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게 될 지 알 수 없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알투지우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원래 있던 지정석으로 걸어가더니 전처럼 등을 돌리며 앉았다. 그는 자신의 등을 바라보는 김성철을 향해 뜻밖의 말을 쏟아냈다. “자, 자네가 원하는 걸 줬으니 이제 가보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자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야. 그 책은 자네에게 줄 테니 가지고 가.” 예상치 못한 전개다. 김성철은 괴팍하기 짝이 없는 알투지우스의 돌변에 약간의 짜증을 느꼈다. ‘이 노인이 진짜.’ 그는 마음을 다스리며 조용히 말했다. “겨우 이런 걸 가지고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럼?” “내가 원하는 건 비전입니다. 천공학파의 비전을 얻기 전까진 여길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그 순간 김성철은 알투지우스에게서 마력 반응을 감지했다. 그와 동시에 김성철을 향해 빛줄기가 쏘아져 들어왔다. 번쩍이는 섬광. 글레어다. 글레어의 빛줄기는 김성철의 얼굴을 아슬아슬 비껴난 지점을 노렸다. 같은 마법이었지만 김성철과의 마력 차가 워낙 나 빛줄기도 보다 강하고 화력도 막강했다. 빛줄기는 천공학파의 테두리에 배치된 서가를 뚫고 들어가 벽까지 구멍을 냈다. “…….” 그럼에도 김성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알투지우스가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심이 많은 친구군. 메테오와 메달만으로 만족하기 어렵나? 이건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그 메달이 있는 한 다른 쟁장한 학교의 천공학파에서 기꺼이 제자로 받아줄 걸세.” “비전이 아니면 안 됩니다.” 김성철은 일체의 물러섬도 없었다. 알투지우스는 탄식했다. 그의 눈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과욕은 자신을 파멸시킬 수도 있지. 재앙의 추종자처럼 말이야.” “과욕을 부리는 게 아닙니다. 난 당신의 비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무엇을 위해?” 알투지우스가 물었다. 김성철은 터럭만큼의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재앙을 막기 위해.” 그 말을 들은 알투지우스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재앙은 막을 수 없어.” “칠영웅도 해낸 일이오. 불가능은 없소.” 김성철은 단호하게 말했다. 알투지우스는 그런 김성철을 복잡미묘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가게. 내가 진짜 화내기 전에.” “당신이 화나고 말고는 내 알 바가 아니오.” 김성철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알투지우스는 한숨을 내뱉었다. ‘손대고 싶지 않은 친구지만 어쩔 수 없군. 상처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제압해야겠다.’ 그 순간 김성철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어느새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알투지우스는 갑작스런 김성철의 행동에 순간 혼란을 느꼈으나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기척?!’ 심상치 않은 기척이 문 너머에 있다. 알투지우스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왜냐하면 저 문 너머에 있는 기척은 과거 그가 상대했던,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줬던 인물에게서 느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이쿠. 들켜버렸나. 감이 좋은 분들이네.”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 열린 문 너머엔 검은 로브를 걸치고 고양이 가면을 쓴 불청객이 하나 서 있었다. 그는 김성철과 알투지우스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명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만, 여기가 천공학파 맞나요?” 그렇게 말하며 가면의 사내는 가면을 벗었다. 왼쪽 눈에 깊은 칼자국이 새겨진 날카로운 인상의 얼굴이 드러났다. 김성철은 그 젊은 사내에게서 죽음의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암살잔가.’ 전신에 노골적인 살기를 흘리고 있었다. 이것은 자신의 실력에 절대적인 자신을 지닌 자만이 가진 여유였다. 통상 암살자는 암습에 강할 뿐, 정면 승부에선 약점을 노출하는 게 일반적이니 말이다. 그 의문의 청년은 김성철과 알투지우스를 번갈아 봤다. “흠, 내가 찾는 사람은 없는 거 같네요. 잠시 두 분 능력치 좀 보겠습니다.” 그는 알투지우스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스크롤을 꺼내더니 찢어버렸다. 그 순간 그의 눈동자에 마법진이 떠오르며 천공학파에 자리 잡은 두 사내의 능력치가 그의 동공 위에 떠올랐다. ‘젊은 놈은 평범. 노인은 비범.’ 문득 그 청년의 뇌리에 한 일화가 떠올랐다. 암살교단 내부에서 쉬쉬 하던 치욕적인 일화가 말이다. “아, 당신이 설마 그 알푸지우스라는 사람이에요?” “건방지구나. 나이도 어린 것이. 여기가 어디라고 망발을 일삼는 거냐?” 알투지우스가 하얀 수염을 곧추 세우며 일갈했다. 청년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그것 뿐이었다. “에이. 젊은이를 너무 괴롭히지 맙시다. 잠깐 이야기만 하겠다는데.” 그 순간 알투지우스가 그를 향해 글레어를 시전했다. 순간적으로 쏘아낸 맹렬한 섬광은 그대로 사내의 관자놀이 바로 옆을 겨냥하며 쏘아졌다. 김성철과 마찬가지로 청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응은 달랐다. 청년은 이를 드러냈다. “어쭈. 지금, 나랑 해보자는 겁니까?” 그가 로브자락을 펼쳤다. 그러자 그 안에 숨겨진 수십 개의 암기가 드러났다. 알투지우스는 코웃음을 쳤다. “암살교단의 똘마니냐? 어떻게 그렇게 그 빨간 머리 병신하고 하는 짓이 같은지 모르겠네. 그 자식이 어떻게 죽었는지 시체를 봤다면 이렇게 나오진 못할 터인데.” “나는 그 인간보다 강해요. 영감님.” 청년은 조금도 지지 않았다. 분위기는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나쁘지 않군. 이 기회에 알투지우스의 실력을 보는 것도.’ 김성철은 한 발 물러서 상황을 관망했다. 하지만 김성철이 바라는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열린 문 너머에서 간드러지는 여자의 목소리가 청년을 제지한 것이다. “카즈 오라버니. 이런 곳에서 장난을 쳐서 뭐하자는 거예요?” 뒤이어 검은 로브를 입고 고양이 가면을 걸친 또 다른 인물이 회당에 들어섰다. “어차피 여긴 없는 거 같은데. 그냥 가요.” “왜 그래? 마이라. 잠시 좀 놀고 가려고 하는데.” 청년은 짜증을 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는 알투지우스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뒤돌아섰다. “미안하지만 영감님. 승부는 다음에 냅시다.” 알투지우스는 팔짱을 끼고 코웃음을 쳤다. 회당을 떠난 두 남녀는 완만한 산비탈을 느릿한 걸음으로 내려갔다. “아, 짜증나네.” 알메이라 가문의 장남 카즈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어려운 임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단서가 없어도 너무나 없었다. 처음에 무인 금화를 물 쓰듯 쓰던 노예사냥꾼을 잡을 때만 해도 그 전설적인 악당이 손아귀에 들어오는가 싶었는데 노예사냥꾼의 몸에 걸린 맹약이 모든 걸 망쳐버렸다. 고문을 이기다 못한 그 사내가 마지막에 내뱉은 말은 한마디였다. 천공학파. 그 말을 남긴 직후 그의 심장을 불길로 타들어갔고 질서신의 공물로 바쳐졌다. “하지만 왜 천공학파일까?” 카즈 알메이라는 둥근 돔을 얹은 건물을 뒤돌아봤다. 세계의 적과 천공학파. 둘 사이엔 어떤 연관점도 접점도 없다. 막상 천공학파에 찾아갔지만 유명한 늙은이 외엔 딱히 제대로 된 인물은 없었다. “그나저나 마이라. 부모님 쪽은 어떻게 됐어? 무인 금화를 쓰고 다닌다는 또 다른 녀석은 잡은 거야?” 그의 물음에 마이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라졌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으음. 설마 냄새를 맡은 건가?” “글쎄. 어쩌면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어.” 그런 대화를 하고 있던 중 카즈 알메이라의 눈에 한 인물이 포착됐다. 붉은 색으로 염색된 교복을 걸친 수려한 외모의 사내였다. 그는 어째서인지 천공학파 교사 바깥의 숲속에 홀로 앉아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뭐야? 저 놈은?” “글쎄. 미친 거 같은데?” 마이라는 흥미없다는 투로 말했지만 카즈 알메이라는 달랐다. “잠깐 저 놈 좀 보고 올게.” 카즈 알메이라는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 같은 눈빛으로 고함을 지르고 있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개 같은! 씨발!!!!!” 숲에서 고성을 지르고 있던 사내의 정체는 다름아닌 레너드 상텀이었다. ======================================= 18. 노린재 (1) 자기보다 약한 놈은 수도 없이 죽였다. 걸린 횟수는 5회지만 드러나지 않은 죄는 수를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던 레너드 상텀이 오늘 임자를 만났다. “끄.. 끄으으....” 그는 거꾸로 매달린 채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됐다. 채찍과 몽둥이가 몸 구석구석을 할퀴고 지나갔고 정신을 잃을 때마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끼얹어졌다. 상대방은 일면식도 없는 인간이었다. 레너드 상텀은 반송장이 되도록 맞으면서 왜 자신이 이런 꼴이 됐는지 의문을 가졌다.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운이 없다는 것 외에는 말이다. “이제 슬슬 이야기를 해볼까.” 카즈 알메이라가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의 손엔 몽둥이 대신 번쩍이는 단도가 들려 있었다. 그걸 본 레너드 상텀은 거꾸로 매달린 상태에서 격렬히 몸을 흔들었다. “아까 보니 잘생긴 얼굴이던데 그래서 샘이 조금 났거든. 그러니 선택해. 눈, 코, 입, 귀 중에 어느 걸 하나 포기할 건지.” 단검이 레너드 상텀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레너드는 알 수 없는 비명을 지으며 몸을 흔들거렸다. 카즈 알메이라는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운 듯 배를 잡고 웃더니 레너드 상텀의 오른쪽 귀를 붙잡고 베어 내버렸다. “으아아아아악!” 처참한 비명이 울려 퍼졌지만 레너드를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무 주변에 처진 무음 결계가 그의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는 걸 막았다. 철저한 고립 속에서 레너스 상텀은 그가 지금까지 죽였던 자기보다 약한 놈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데 카즈 알메이라는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연고를 꺼내 피를 내뿜는 레너드의 상처에 발라주었다. “살고 싶어?” 레너드 상텀은 고통을 참으면서 필사적으로 고개를 버둥거렸다. “그럼 내가 하는 말을 들으면 살려줄게.” 카즈 알메이라는 나무그늘 옆에서 그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던 마이라 알메이라에게 손짓했다. “마이라. 그걸 좀 빌려줘.” 마이라는 말없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긴 소매 안쪽에서 자두만한 크기의 화려한 색상을 지닌 벌레가 기어 나왔다. 사다리꼴 형태의 몸통을 지닌 노린재였다. 카즈는 그 벌레를 조심스레 집어 들고는 레너드의 상의를 잡아 찢었다. 채찍질과 몽둥이찜질로 피멍이 든 등판이 드러났다. 카즈는 노린재의 꽁무니를 등판에 갖다 댔다. 노린재를 여섯 개의 다리를 버둥거리며 날카로운 꽁무니를 레너드의 등판에 박아 넣었다. “끄아아아악!” 레너드가 거칠게 요동치며 몸부림쳤다. 노린재는 레너드의 생살을 찢고 알을 낳고 있었다. 한 개, 두 개, 세 개, 그리고 열 개가 되어서야 카즈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벌레를 다시 마이라에게 돌려주었다. “고마워. 마이라.” 마이라는 소매 안에 노린재를 다시 회수하고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님이 알면 별로 안 좋아할 거야. 책임은 오라버니가 져.” “내가 질게. 걱정 하지 마. 그런데 말이야. 솔직히 아버지의 방식은 너무 고리타분하지 않냐? 연관된 인물만 손을 대자는 방식은 효율성이 떨어져.” 카즈는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어대는 레너드를 응시하며 잔혹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차피 모두 죽을 재앙의 시대.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해야지.” * 김성철과 알투지우스는 대치를 이어나갔다. 먼저 기를 꺾은 것은 알투지우스였다. “마음대로 해. 여기 있다가 봉변을 당해도 난 책임을 지지 않을 터이니!” 그는 버럭 역정을 내고는 자신의 지정석에 앉아 파이프를 뻐끔거렸다. 하지만 지독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게 바로 김성철이다. 그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줄기차게 자신의 원하는 걸 관철했다.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비전이나 알려주시지요.” 알투지우스는 얼굴을 구긴 채 파이프를 뻐끔거리다가 이윽고 영혼창고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성운의 형상이 새겨진 자그만한 상자였다. 주름진 손이 상자를 열자 금, 은, 동 갖가지 금속으로 만든 구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동.” 알투지우스가 부드럽게 구슬 위를 어루만지자 구슬들을 생명을 가진 듯 저절로 떠올라 알투지우스 주변을 떠돌기 시작했다. “이건 천공학파의 마법사들이 수련용으로 쓰던 수련 도구지. 옛 사람들은 천공의 별로 부르고 최근 사람들은 핀 볼이라고 부르긴 하는데 뭐라 부르던 간에 이 녀석은 자네가 익힌 글레어의 숙련도를 측정하는 물건이지.” 알투지우스는 영혼 창고에서 또 다른 아이템을 꺼냈다. 마법 스크롤이었다. 그는 구슬이 담긴 함과 스크롤을 김성철에게 가볍게 던졌다. “노력도 재능의 일종이지. 자넨 노력에 재능이 있다는 걸 입증했어. 하지만 재능의 종류는 여러 가지지. 내가 준 도구엔 선현들이 반복해서 연마해 온 퀘스트가 담겨 있어. 그 퀘스트는 천공학파의 마법사로서 요구되는 또 다른 재능을 시험할 걸세. 내게 천공학파의 비전을 배우고 싶다고? 그럼 그 퀘스트를 깬 다음부터 이야기 해.” 김성철은 구슬과 마법 스크롤을 각각 받아들었다. 구슬엔 마법적인 힘이 서려 있었고 마법 스크롤은 마법방어 결계 스크롤이었다. “그리고 퀘스트를 하기 전에 반드시 그 스크롤을 쓴 다음 하도록. 우리 천공학파의 유서 깊은 교사가 자네의 서투른 마법에 훼손되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야.” 알투지우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제법 여유로운 표정으로 김성철을 지켜보며 파이프 연기를 입안에 머금었다. ‘수백 년만의 천재라 불리던 나조차 저 핀 볼을 수료하는데 1년하고도 두 달이 걸렸다. 10년 만의 천재라 불리던 레너드 놈은 아예 해결할 엄두도 못 냈고. 아무리 저 친구가 근성이 뛰어난 인간이라고 해도 재능의 영역이란 엄혹한 법. 쉬이 해결할 순 없겠지.’ 힘으로 내칠 수 없는 놈이라면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를 줘서 그 안에서 헤매게 하라. 고대로부터 이어진 강력한 비전을 계승하고 있는 에어푸르트 천공학파에 대대로 이어져 오고 있는 금언이었다. “…….” 김성철은 먼저 구슬을 살펴보았다. “기동.” 시동어를 외치자 금, 은, 동, 철, 주석, 백금으로 이루어진 6개의 구슬이 하늘 위로 떠오르며 김성철 주위를 천천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곧 김성철 앞에 빛나는 문자가 떠올랐다. [ 천공의 별 ] [ 천공의 별들이 당신 주위를 공전한다. ] [ 행성의 주인인 당신은 빛의 권능으로 당신을 거역하는 별을 쏘아 떨어뜨려야 한다. ] [ 당신에게 거역하는 별은 어둠에 물든 것이니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주시하라. ] [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주변을 잘 확인하여 부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유의하도록 ] 지금까지 에어푸르트에서 경험했던 것들과 유사한 형태의 퀘스트다. 늘 그렇듯 에어푸르트의 퀘스트는 모호한 단어를 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빛의 권능은 뭘 말하는 거지. 글레어를 말하는 건가?’ 그때 김성철을 지켜보고 있던 알투지우스가 큰 소리로 소리쳤다. “글레어로 시커멓게 변한 구슬을 맞추는 시련이야. 그리고 마법방어 결계는 한 번만 특별히 주는 거니 다음 수련을 하기 전엔 자비로 사서 수련에 임하도록!” 마법방어 결계의 가격은 상당하다. 가격만 은화 50닢에 호가하고 그마저도 매물이 별로 없어 구하기도 쉽지 않다. 알투지우스의 또 다른 노림수였다. ‘이 시련은 노력만 좀먹는 게 아니지. 시도하는 자의 재력도 같이 파먹지. 그럼 어디 한 번, 저 친구의 천공학파 마법사로서의 재능을 감상해보실까.’ 알투지우스는 편안한 자세로 고쳐 앉고 김성철 쪽을 주시했다. 김성철은 결계를 펼치고 자신 주위를 회전하는 구슬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 준비가 되면 시작이라는 말을 육성으로 외쳐주세요. ] 김성철은 자신의 몸에 각인된 마법의 기운을 가다듬고 시험 삼아 결계를 향해 쏘아보냈다. ‘글레어.’ 그의 손끝에서 빛줄기가 발사되며 결계 일부분과 부딪쳐 사라졌다. 알투지우스는 눈웃음을 지었다. ‘아직 마력은 약하군. 140 정도 되려나.’ 자신의 마법을 시험한 김성철은 이제 자신의 주위를 도는 구슬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시작.” [ 1단계 ] 주위를 회전하는 구슬들의 궤적이 변하기 시작했다. 순간 황금 구슬이 어둠으로 물들며 그 앞을 스쳐 지나갔다. 김성철은 지체하지 않고 글레어를 사용했다. 손끝에서 나온 빛은 황금 구슬에 그대로 적중했고 어둠을 걷어냈다. 알투지우스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운인가...?!’ 하나의 구슬을 적중한 김성철은 사각에서 갑자기 밀려오는 동 구슬을 응시했다. 사각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그 구슬은 김성철의 눈앞을 지나쳐 곧바로 또 다른 사각으로 접어들었는데 그 순간 그 구슬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김성철의 눈은 반응했지만 아직 마법에 익숙하지 못한 그의 손끝은 구슬을 적중시키지 못하고 결계 벽만을 허무하게 두드렸다. ‘역시. 초심자의 운이었군. 그럴 리가 없지. 아암.’ 알투지우스는 파이프를 빨아들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첫 번째 단계가 끝났다. [ 당신의 스코어 ] [ 3/10(적중한 행성의 수/당신을 거역한 행성의 수) ] [ 판정.... 불합격! ] “…….” 김성철로서는 굴욕적인 결과다. 알투지우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천공학파의 비전을 요구하기엔 재능이 많이 부족해 보이는군!” 김성철 주위를 떠돌던 구슬들은 함으로 들어갔다.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마력 정수를 꺼냈다. 기뻐하던 알투지우스의 눈동자에 경악이 떠올랐다. ‘뭐야? 저 친구 영혼 창고도 갖고 있었나?!’ 김성철은 마력 정수 2개를 단숨에 들이 키고 빈 병을 바닥에 떨어뜨린 뒤 다시 구슬을 매만지며 말했다. “기동.” 단순한 오기는 아니다. 김성철로서 첫 번째 시험은 영점을 조정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위대한 전사로서 수십 년을 싸워 온 경험과 극한으로 달련한 감각은 헛것이 아니다. 첫 시도에서 김성철은 2번째의 실패 뒤엔 구슬을 맞추기보다 글레어의 광선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했다. 그리고 마지막 시도에서 그는 자신의 뜻대로 통제할 수 있는 광선으로 구슬을 맞췄다. “시작.” 감을 잡은 김성철 앞에 거리낄 건 없었다. 그는 자신을 어지러이 도는 구슬들을 응시했다. 알투지우스는 김성철에게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지만 애써 외면하며 파이프를 빨아들였다. 잠시 후, 첫 번째 구슬이 암흑으로 물들며 빠른 속도로 김성철의 눈앞을 지나쳐갔다. ‘글레어.’ 그의 손끝에서 발사된 광선은 정확하게 구슬의 정중앙에 적중, 암흑을 걷어냈다. 그리고 두 번째. 전처럼 눈앞에서 나타나 사각에서 사각으로 향하는 까다로운 궤적을 지닌 녀석. 김성철은 당황하지 않고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부드럽게 그 구슬을 쏘아 암흑을 걷어냈다. 알투지우스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니, 저걸?!’ 첫번째 단계에서 두 번째 구슬은 가장 어려운 난관이다. 시작부분부터 난이도가 높은 궤적의 구슬을 내보냄으로서 시험자의 밸런스를 무너뜨리고 차후의 시도에 영향을 미치게끔 하는 것이 퀘스트 호스트의 의도였다. 그런데 그 난관을 저 의문의 사내는 단 2회차에 간단하게 해결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연거푸 까다로운 궤적들을 모두 속속 적중시켜나갔다. 폭풍과 같은 짧은 시간이 흐른 뒤 알투지우스는 그만 입에서 파이프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 당신의 스코어 ] [ 10/10(적중한 행성의 수/당신을 거역한 행성의 수) ] [ 판정.... 합격! ]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자신의 눈앞에 떠오른 스코어를 보며 마력 정수를 들이켰다. [ 대단하군요! 당신은 첫 번째 단계를 완벽한 성적으로 완료했습니다. ] 보상 : 마력 +3, 직관력 +3, 민첩성 +3 마법사 퀘스트 답지 않게 민첩성도 올려준다. 하지만 그 퀘스트는 김성철의 민첩성을 올려줄 수 없을 것이다. [ 오류! 당신의 민첩성이 퀘스트 호스트의 민첩성보다 높으므로 당신은 민첩성 향상 효과를 얻지 못합니다. ] 퀘스트는 불특정한 다수에게 능력치를 올려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긴 하지만 지하실의 악마처럼 자신의 능력치를 다른 이에게 몰아주는 등의 방식이 아닌 한, 자기보다 능력치가 높은 자의 능력치를 올려줄 수는 없다. 한편 육체에 관한 부분에서 김성철을 능가할 존재는 거의 없다. 그것이 김성철이 마법사 영웅을 제외한 칠영웅의 퀘스트를 소홀히 한 이유이기도 하다. 칠영웅 따위가 육체적인 부분에서 자신을 능가할 리 없다고 확신하고 있으니까. [ 2단계를 시작하시겠습니까? ] 이제 김성철의 눈은 다음 단계를 향하고 있었다. 알투지우스는 경악한 눈으로 불가사의한 사내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18. 노린재 (2) 통상 마법사들은 고상하고 상처입지 않고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상황에서의 싸움을 상정하고 그에 따른 방식을 배운다. 동체 시력, 기민함, 싸움에서 심리전, 어떤 돌발 상황에서도 대처할 수 있는 유연함, 반사 신경. 이러한 땀 냄새 나는 전투지향적인 덕목들은 마법사들 세계에선 그다지 강조하지 않는 덕목들이다. 하지만 천공학파, 적어도 알투지우스가 지켜 온 학당에선 다른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천공의 별, 혹은 핀 볼이라 불리는 초급 수련 과정은 마법의 수련이라기보다는 극한의 반사신경과 임기응변을 추구하는 육체적인 수련에 가까웠다. 천공의 별이 3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김성철은 확신을 굳혔다. 검은 별들은 이제 더 이상 김성철 주위를 멤돌지 않았다. 그것들은 저돌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김성철을 향해 부딪쳐 왔고 때로는 쉬지 않고 맹렬하게 김성철을 몰아세우기도 했다. 천공의 별에서 시험하고자 하는 항목은 반사신경과 임기응변 뿐만은 아니었다. 어떤 검은 별은 너무나도 빠르고 불규칙적인 움직임을 지니고 있어 도저히 맞출 수 없는 목표로 설정됐다. 김성철은 처음 그 별을 보고 의아함을 느꼈지만 이내 그는 그 별이 한정 된 구역에서 움직이는 점, 불규칙 속에 일정한 규칙을 숨기고 움직이는 점을 발견하고 여러 번의 견제사격으로 검은 별을 움직일 수 있는 한계로 몰아넣은 뒤 최후의 일격을 날려 가볍게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군.” 김성철이 승리를 거듭할 때마다 알투지우스의 숨소리는 거칠어졌다. 그의 눈에 비친 김성철은 갓 소환 궁전에서 나온 신인이라기보다는 수십 년 간 검술을 단련한 대가와 가까운 풍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천재인가. 아니면 진정한 검사인가?’ 표시된 김성철의 능력치는 시원찮은 수준으로 전형적인 견습 마법사에 불과하다. 게다가 김성철의 신묘한 움직임은 능력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경험에 의한 걸로 보였다. 회당 안에 마침내 정적이 찾아왔을 때 알투지우스는 직감했다. 저 의문의 검은 머리 사내는 에어푸르트 천공학파의 창건 이래 천공의 별을 단 하루 만에 돌파한 최초의 인물이 된 것을. 김성철은 눈앞에 떠오르는 보상들을 무심한 눈으로 흘려보내며 상태창을 열었다. [능력치] 힘 999+ 민첩 853 체력 801 마력 151 직관력 131 마법저항 621 의지 502 매력 18 운 18 아직은 성에 안 차는 수치. 하지만 타인의 눈에 비친 그의 성장 폭은 경이롭다는 이외에 달리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알투지우스도 그러했다. ‘이 자는... 괴물인가?!’ 그 괴물이 천천히 알투지우스에게 다가와 구슬이 담긴 함을 내밀었다. “자, 원하는 대로 이 시련을 통과했습니다. 이제 비전을 주시겠습니까?” “아... 아직 모든 시련을 끝낸 게 아니야!”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 엄청난 결과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알투지우스는 어린 아이가 떼를 쓰듯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김성철을 돌려보냈다. “일단은 돌아가게. 내 잠깐 생각할 일이 있으니까!”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알투지우스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한 번에 통과하긴 했지만 제법 많은 마력을 소모하는 시련이었다. 김성철은 슬슬 베르텔기아가 말한 마력의 한계가 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순순히 알투지우스의 말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내일 다시 찾아올 때 당신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김성철이 회당을 떠난 후, 홀로 남은 알투지우스는 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시간만이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약이 되겠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똑! 똑! 똑! 누군가 회당의 문을 두드렸다. “누구신가?” 알투지우스가 묻자 맞은편에선 감정이 배제된 차가운 목소리가 대답했다. “이단심문관님께서 보내신 물건을 가지고 왔습니다.” “앞에 두고 가시오.” 기척이 멀리 사라진 후, 알투지우스는 늙었지만 여전히 힘이 넘치는 노구를 끌고 문을 열어젖혔다. 문 앞엔 금화가 가득 담긴 자루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알투지우스는 한숨을 내쉬고 그 자루를 자신의 영혼 창고에 집어넣었다. 자루를 집어넣으면서 그는 무심코 절벽 아래 펼쳐진 학교의 전경을 눈동자에 담았다. 발밑에 펼쳐진 풍경은 그가 처음 천공학파의 교사에 발을 들여놓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알투지우스는 현재의 학교와 과거의 학교 사이엔 돌이킬 수 없는 단절의 벽이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흐릿한 풍경 너머 한 인물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반백의 수염을 멋지게 기른 그 사내는 온화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개성 강한 에어푸르트의 교수진을 이끌었다. 세상은 그를 대 마그누스, 에어푸르트의 마지막 교장으로 기억한다. 알투지우스는 평생 지기였던 그 사내와 나눴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전직 교장은 알투지우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바다고 우리는 그 위에 떠오른 조각배네. 조각배는 바다 위를 항해할 순 있어도 바다 자체를 바꿀 수는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세상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 그 뿐이네.”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대 마그누스는 재앙의 추종자였다. 그는 재앙의 추종자로서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을 쌓으려 했고 그리고 알투지우스의 손에 죽었다. 당시 알투지우스는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고 판단했지만 3년이 지난 지금 그의 생각은 조금은 흔들리고 있었다. “차라리 그때 그 녀석 손에 죽었다면...” * 회오의 관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꼬르륵. 모처럼 집중을 해서 그런지 김성철은 강한 허기를 느꼈다. 배가 고플 때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은 그의 신념. 황야에 있을 땐 직접 솜씨를 발휘해 먹지만 원래 미식가들의 도락 중 하나는 맛 집 탐방이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황금 도시의 숨겨진 맛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가 기억하는 맛 집은 듣도 보도 못한 길드의 사무실로 바뀌어 있었다. “여긴 무슨 일이야? 소환자 양반! 설마 우리 길드에 가입하러 온 거야?” 길드 앞을 지키던 뻐드렁니 사내가 김성철에게 말을 걸어왔다. “…일 없소.” 김성철은 그를 무시하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대로변을 걷다보니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연금학파의 교수인 바실 필루스와 그 제자들이었다. “앗! 쓰레기들 발견!” 베르텔기아가 몸을 삐쭉 내밀고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곧 바실 필루스도 이쪽을 발견했다. 그는 갑자기 친한 척을 하며 말을 걸었다. “여어 이게 누구야? 나의 수제자 아니신가?!”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김성철 기억에 바실 필루스의 제자가 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바실 필루스는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하하! 얼굴이 뜨겁네.” “이만 실례.” 김성철은 바실 필루스와 연금학파 학생들을 지나쳤다. 연금학파 학생들이 김성철을 바라보는 시선은 처음 쓰러져가는 천막에 들어섰을 때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일종의 선망, 부러움, 질투 같은 감정들이 느껴졌다. 김성철은 그중 어느 누구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가던 빠르게 걸어갔다. 그때 바실 필루스가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아와 살갑게 말을 걸었다. “어디 가는 겁니까?” “식사하러.” “그렇다면 우리랑 같이 하는 게 어때요? 일단 같은 연금학파인데.” “…….” 김성철이 아무 말 하지 않자 바실 필루스는 조심스레 김성철을 살피며 물었다. “왜요? 혹시... 우리랑 같이 식사하기 싫으신 건...” “입맛이 꽤 까다로운 편이오. 맛없는 식당이라면 가고 싶지 않소.” 그러자 바실 필루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김성철의 소매를 가볍게 잡아끌었다. “그럼 잘됐군요. 오늘 우리는 엄청난 요리인이 있는 곳에서 식사를 할 예정이거든요!” “그래요?” 김성철의 얼어붙은 마음이 살짝 녹았다. 다른 건 몰라도 바실 필루스는 황금 도시에 쭉 머무른 인간. 찾고 있는 맛 집에도 빠삭할지 모른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흔쾌히 승낙했다. “좋습니다. 한 번 믿어보죠.” “제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죠. 믿어도 좋습니다.” 바실 필루스의 눈동자엔 어느 때마다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 이 요리의 점수는.... 18점! ] 요리인 클래스는 자신이 맛 본 요리의 점수를 볼 수 있다. “음...” 점수가 낮은 건 어느 정도 감수했었다. 호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바실 필루스가 식당 메뉴 중에서 제일 싸고 양 많은 것들만 고르던 시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아무리 싼 메뉴라고 해도 지켜야 할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그는 다른 음식을 맛보았다. [ 이 요리의 점수는... 17점! ] “…….” 김성철의 얼굴에 미약한 노기가 떠올랐다. 레너드 상텀에게 갖은 모욕을 듣고도 단 한 번도 보이지 않던 분노였다. ‘이건 음식이 아니다.’ 김성철 앞에 놓인 것은 감자와 돼지 내장을 주재료로 혀가 얼얼해질 정도로 강한 향신료를 섞어 끓인 내장 스프였다. ‘손질을 대충했어. 그래서 내장의 잡 내를 조금도 지우지 않았어. 강한 향신료의 맛에 의존해 잡 내를 잡으려고 한 게 요리사가 한 노력의 전부고 그마저도 실패했다.’ 다른 요리도 마찬가지였다. 겉은 그럴싸하게 꾸몄지만 그 맛은 전적으로 강한 향신료에 의존했다. ‘마약 성분은 없지만 그에 준할 정도로 중독성이 있는 약재를 섞어 맛을 냈군.’ 두어 번 정도 음식을 씹은 뒤 김성철은 맛의 비밀을 완전히 파헤쳤다. 그의 기준으로 이것은 요리로 부를 수 없는 물건이었다. 요리에 담긴 정성, 무엇보다 먹는 이를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부족했다. 전형적인 팔아서 이윤만 남기면 그만인 요리였다. 그런데도 식당 안은 만석이었다. 황금 도시 사람들의 미각이 투박한 것인지 아니면 자극적인 요리에 적응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가게가 성업 중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음식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황금 도시 최고의 식당의 요리가?” 게걸스럽게 자신의 몫을 해치우던 바실 필루스가 김성철이 음식을 거의 먹지 않는 걸 보고 물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잠깐 바람 좀 쐬러.” 김성철은 그 길로 식당 뒤로 돌아가 주방을 엿보았다. 주방 안엔 충격적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경악이 떠올랐다. “자! 자! 인간들 먹일 사료를 더욱 빨리 만드는 거예요!” “돼지 내장은 대충 안에 똥만 빼내고 두 번만 헹궈도 되는 거예요! 이 도시의 인간의 입맛은 돼지 똥에 길들여져 있는 거예요!” 재료를 손질하는 것은 호문클루스들이었다. 제 딴에도 요리사랍시고 요리사의 모자를 쓴 호문클루스들은 그 아래의 호문클루스를 감독하며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식당의 요리사는 호문클루스들이 대충 손질한 재료를 내오면 미각을 마비시킬 정도의 강한 향신료를 적절히 배합해 자극적인 요리로 만들어내 손님들에게 내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돼지 똥물을 끼얹은 요리의 맛을 보는 거예요! 더러운 인간들!” 호문클루스 하나가 야채를 내장을 씻은 물에 풀어놓으며 소리쳤다. 다른 호문클루스들이 옆에 받쳐 놓은 대야에 헹구긴 했지만 김성철의 일그러진 표정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음....” 입맛만 버렸다. ‘역시 내가 만들어 먹었어야 했는데.’ 김성철은 바실 필루스에게 작별을 고하리라 마음 먹고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식당 입구 쪽에서 김성철은 낯익은 옷을 입은 한 무리의 마법사들을 발견했다. 푸른빛이 감도는 제복. 빙결학파의 마법사들이다. “이야. 오랜만에 여기서 먹네.” “위장이 요동을 치네. 간만에 정찬을 즐겨보자고.” 빙결학파의 마법사들은 들뜬 분위기였다. 그들은 입맛을 다시며 식당 안에 흐르는 향신료의 냄새를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음미했다. 그들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사내가 식당의 지배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김성철은 한 발 뒤로 물러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여기 10명. 자리 있나?” 그의 물음에 지배인은 난색을 표했다. “그.. 그게. 보시다시피 만석이라.” 빙결학파의 마법사는 불쾌한 표정으로 지배인을 노려보다가 식당 안을 한 바퀴 둘러봤다. 이윽고 그 사내는 히죽 웃으며 지배인을 돌아봤다. “저기 자리가 있네.” 그의 손가락은 식당 구석에서 식당에서 가장 싼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는 한 무리의 학생들을 가리켰다. 연금학파의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손님. 저 손님들은 아직 식사가 끝나지...” “내가 잘 말해둘 거니까 음식부터 준비 해. 가장 비싼 걸로. 술도 가장 좋은 걸로 내 와. 돈은 여기 있으니까.” 그 사내는 씨익 웃으며 지배인에게 반짝이는 금화 하나를 내밀었다. 그 금화를 본 김성철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무인 금화군.’ 벌써부터 로버트 단턴은 김성철에게 받은 금화를 부하들에게 풀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곧 크리스티안을 죽인 자들과 재앙의 추종자들의 다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이야기. 김성철은 한 발 물러서 그들 사이의 싸움을 지켜 볼 작정이었다. 그리고 때가 오면…. 김성철이 머릿속으로 장래의 계획을 그리고 있을 때 저편에서 비참한 울상을 짓고 있는 한 무리의 학생들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신나게 처먹다가 자리를 빼앗기 연금학파 교수와 그 제자들이었다. “이런 개 같은. 아니,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더니.” “연금학파에서 벗어나고 싶어...” 김성철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푼 돈 받고 쫓겨난 바실 필루스와 그 제자들을 가만히 응시하다 그들이 다가오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잘 먹었습니다.” 음식은 최악이었지만 그보다 가치 있는 정보를 확인했다. 음식이야 기숙사로 가서 해 먹으면 그만이고. 그런 가벼운 기분으로 기숙사로 돌아온 김성철은 그러나, 심상치 않은 기운이 기숙사 전체에 흐르고 있음을 감지했다. ‘이건 무음 결계?!’ 암살자들이 주로 쓰는 결계가 기숙사 전체를 대상으로 퍼져 있었다. 같은 시작. 알투지우스 앞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회오의 관의 경계결계가 끊겼다고?! 사라사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인가.’ 알투지우스는 서둘러 노구를 일으켜 영혼창고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그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천공학파 외부에 설치된 마법 승강기에 새겨진 마법진에 빛이 들어오며 가동을 시작했다. 알투지우스는 서둘러 승강기로 걸어갔다. 그런데 몇 발 걸어가기도 전에 눈앞에서 서늘한 빛이 번쩍거렸다. 알투지우스는 반사적으로 글레어를 시전, 날아오는 빛을 쳐냈다. 떨그럭. 바닥에 반쯤 타버린 단검이 나뒹굴고 있었다. 알투지우스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어느 순간 자신 앞을 막아선 검은 로브를 걸친 괴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나. 알푸지우스?” 고양이 가면을 쓴 사내의 목소리는 전에 들은 적이 있다. 카즈 알메이라. 그 녀석이 다시 한 번 이곳에 찾아왔다. ======================================= 18. 노린재 (3) “비켜라. 네 놈 따위 상대할 시간은 없다.” 알투지우스는 속이 타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카즈 알메이라는 그런 알투지우스의 기분을 알기라도 하는 양 느릿한 걸음으로 천천히 걸으며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전부터 궁금했어. 마법사 따위가 어떻게 암살교단의 부교주를 죽일 수 있는지 말이야.” 일분일초가 급한데 저 카즈라는 이름을 지닌 암살자는 그런 알투지우스의 급한 심정을 알고라도 있는 양 느긋하게 앞을 막아섰다. “죽기 싫다면 내 앞에서 사라져라.” “그 마법사의 말이 맞는 모양이네. 약점이 잡히니까 초조해야하는 걸 보니 말이야.” 카즈 알메이라는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알투지우스에게 다가왔다. “그 마법사? 누굴 말하는 거지?” 알투지우스의 얼굴이 뒤틀렸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레너드. 그 자식이 설마...?!’ 암살자는 대답대신 냉소를 흘리며 두 개의 단검을 뽑았다. 스르릉. 서늘한 칼날이 알투지우스 눈앞에서 번득였다. * 무음 경계를 뚫고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와장창! 2층 한 구석이 박살났다. 김성철은 사방에 나무 파편이 휘날리는 것을 지켜보며 회오의 관에 전투가 일어났음을 인지했다. ‘누구와 누가 싸우는 것이지?’ 박살난 구멍 사이로 두터운 로브를 걸친 금발 소녀가 마법진을 펼치며 뒤로 물러서는 게 보였다. 사라사다. 그 뒤를 쫓아오는 것은 붉은 빛이 도는 교복을 입은 남자였다. ‘저놈은 레너드?’ 그는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글레어를 사라사에게 마구잡이로 퍼붓고 있었다. “이히히히히! 죽어라! 죽어!” 그들은 구멍 저편으로 사라졌고 이윽고 또 다른 파공음이 귓전을 때렸다. “…….” 김성철은 그 부서진 구멍을 뚫고 2층 복도에 진입했다. 그리고 보았다. 사라사와 레너드가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직 싸움의 균형이 무너진 건 아니다. 따라서 개입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김성철은 기척을 지우고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당신이 왜 날 공격하는 거지?” 사라사가 차가운 숨결을 내뱉으며 질문을 던졌다. 레너드 상텀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너한텐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이미 죽은 시체인 너에게 무슨 원한이 있겠냐?” 그 대목에서 김성철은 생각했다. 레너드의 갑작스런 행동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원래부터 심리상태가 불안한 인간이긴 했지만 나름 잔머리를 굴리는 놈이다. 적어도 그는 사라사의 거소를 지키는 경계결계의 존재를 인지했을 것이고 그 결계를 건드리면 무시무시한 알투지우스가 바로 달려오리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일을 자행했다는 것은 응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리라. 김성철은 그 이유를 레너드의 외견상의 변화에서 찾아냈다. 레너드 상텀의 얼굴은 어째서인지 죽은 좀비처럼 푸르스름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또 어깻죽지부터 찢어져 나가 훤히 드러난 등판엔 올록볼록한 구멍이 나 있었다. 김성철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누군가 저 놈의 몸에 독충의 알을 심었군. 암살교단의 4대 가문 중 하나인 그리말다 가문의 솜씨군. 그런데 저 녀석. 왜 귀가 하나 없지?’ 몸에 심은 독충의 알. 잘려나간 귀. 김성철은 순간적으로 두 가지 사실을 조합해 한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암살교단이 개입했군.’ 그들이 개입한 이유는 알 수 없고 추측하려 해서도 안 된다. 적절한 보수만 주면 뭐든 하는 집단이라 별 시덥지 않은 이유로도 암살행에 나서기 일쑤니 말이다. “내가 나쁜 게 아니라 니 조부가 나쁜 거야. 알투지우스 그 늙은 능구렁이가 내게 천공학파의 비전만 알려줬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레너드 상텀은 지팡이에서 위협적으로 불을 뿜어내며 이죽거렸다. 반면 냉기에 감싸진 사라사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적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사라사는 자신의 모든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유는 그녀의 얼굴에 새겨진 작은 생채기였다. 레너드는 기습적으로 사라사의 얼굴을 공격했고 그녀의 몸에 걸린 보존 마법의 일부를 깨뜨렸다. 가벼운 어떻게 보면 무의미한 일격처럼 보이지만 사라사에겐 결정적인 타격이었다. 보존 마법의 균형이 쓰러진 상태에서 마력을 끌어다 쓰다가는 그녀의 얼굴은 급속도로 시들어가게 될 터이니. 레너드다운 비열하고 야비한 술수였다. “…….” 얼굴을 잃어버리는 걸 원하지 않는 사라사는 미온적일 수밖에 없었다. ‘시간만 벌면 내가 이기는 싸움이야.’ “뀨잉...” 주머니 안에 있던 하늘 다람쥐가 사라사가 내뿜는 냉기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참아.” 그녀는 앞에서 이죽거리는 레너드를 노려보며 순간적으로 마력을 집중했다. “아이스 월!” 얼음장벽이 사라사와 레너드 사이에 펼쳐졌다. 그 틈을 타 사라사는 뒤로 재빨리 달아나려했지만 레너드는 그 수를 의식한 것처럼 벽이 세워지자마자 축적하고 있던 마력을 쏘아부터 장벽을 단 번에 부쉈다. “어딜 가?! 나랑 좀 더 놀자구! 시체 인형!” 사라사는 아직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았지만 제법 노련하게 레너드의 공격을 받아쳤다. 하지만 싸움이 거듭될수록 그녀의 피부는 생기를 잃고 쭈그러들기 시작했다. 한 바탕 공방이 오간 후 약간의 휴지기가 찾아왔다. 두 명 모두 몸엔 큰 상처는 없었지만 사라사 쪽이 보다 힘들어 보이는 건 자명했다. “후우...” 하지만 사라사는 전의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조금만 버티면 할아버지가 올 거야.’ 그때 레너드가 입을 열었다. “시간만 끌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 정곡을 찔렀다. “…….” 사라사는 형형한 푸른빛이 도는 눈동자로 레너드를 노려봤다. 레너드는 히죽 웃으며 여유를 부렸다. “바보. 아무리 시간 끌어도 알투지우스는 오지 않아.” 그 말을 들은 사라사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아주 무서운 놈이 그 노인을 막고 있을 예정이거든. 게다가 바깥엔 무음결계를 쳐놨어. 따라서 아무도 널 도우러오지도 구하러오지도 않는다는 이야기.” 두 개의 마법지문을 지닐 수 있는 레너드는 한 손엔 광휘를 다른 한 손엔 불길을 각각 머금었다. 그는 이제 사라사를 끝장내려고 하고 있었다. “내가 왜 널 덮쳤겠어? 덮치려면 진작 덮쳤겠지? 하지만 이왕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너에겐 조금도 자비를 베풀지 않을 거야.” “마음대로 해봐.” 사라사의 눈빛이 형형한 한기를 내뿜었다. 레너드는 피식 웃었다. “내가 너에게 뭘 하려는지 알려주지. 잘 들어둬. 난 널 쓰러뜨리고 숨이 붙어 있는 상황 속에서 작품을 하나 만들 거야.” “작품?” “응. 그 노인이 널 봤을 때 바로 졸도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멋진 작품을 말이야.” 레너드의 눈빛이 광기로 물들었다. “미쳤네.” 사라사는 차갑게 내뱉었지만 격한 공포를 느꼈다. 레너드의 눈에 담긴 광기는 일체의 거짓도 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넌 죄가 없어. 원망을 하려면 그 노인에게 해. 날 이렇게 만든 그 노인에게 말이야!” 레너드 상텀이 전력으로 마법을 전개했다. 사라사는 가용 가능한 마력을 총동원하여 그의 빛과 열기를 막아냈지만 힘에 부쳤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뀨잉...” 주머니 안의 하늘다람쥐가 한기를 견디지 못하고 고꾸라진 것이다. 그걸 느낀 사라사의 집중이 흐트러졌고 그녀는 폭음과 함께 가볍게 뒤로 날아가 벽에 부딪쳐 쓰러졌다. 싸움의 결말이 났다. “이히히히히!” 레너드 상텀이 사라사를 향해 걸어갔다.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그 개자식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몸에 알이 심어지고 귀가 잘릴 때만 해도 세상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이렇게 상쾌한 복수로 가는 지름길이었을 줄이야.” 레너드 상텀은 자신의 귀를 자른 암살자보다도 알투지우스 일가를 더욱 증오하고 있었다. 알투지우스에 대한 배신감에 더해 그가 자신을 내치지만 않았다면 이런 상황에 처하지 않았으리라는 억하심정이 그 원인이었다. “하지만 걱정 마. 니들이 죽으면 나도 곧 따라 갈 테니까.” “뭐라고?” 사라사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니들이 세계의 적과 관련이 없다는 걸 알면 그 개자식이 날 가만히 둘 리가 없거든. 뭐, 오히려 잘 된 일이야. 죽어서도 니들 일가를 괴롭혀줄 수 있으니까.” 레너드는 품속에서 단검 한 자루를 꺼냈다. “자, 그럼 어떤 작품을 만들어볼까!” 레너드의 검이 번득이던 그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 레너드는 갑작스런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광기의 찬 그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김성철이다. “이게 누구야?” 레너드는 보다 맛있는 먹이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사라사를 버려두고 김성철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안 그래도 널 잡아서 재미 좀 보려고 했는데 말이야.” “묻는 말에 대답해라.” 김성철이 말했다. “뭐?” “암살자가 세계의 적을 찾고 있다고 들었다. 사실인가?” 레너드 상텀은 대답하는 대신 피식 웃었다. “니깐 놈이 그걸 알아서 무엇...” 레너드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김성철의 우악스런 손길이 레너드의 얼굴을 감싸쥐고 그대로 마룻바닥에 처박아버렸다. 바닥이 박살이 나며 레너드의 뒤통수가 반쯤 마루 안으로 파고들었다. 레너드의 눈동자에 경악이 떠올랐지만 이미 늦은 후회였다. 김성철은 그의 머리를 잡은 채, 들어 올려 재차 마룻바닥에 처박았다. 퍽! 퍽! 퍽! 그러기를 수차례. 레너드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 살려줘! 살... 혀! 줘!” 김성철은 그의 얼굴을 잡은 손에서 힘을 풀었다. 대신 레너드의 몸을 뒤집더니 발로 독충이 알을 낳은 자리를 군홧발로 밟았다. 뽀각! 뽀각! 레너드의 몸 안에 파고든 유충이 김성철의 군홧발에 짓눌려 격하게 몸부림쳤다. 그 몸부림은 그대로 레너드의 고통으로 전환됐다. “끄아아아아악!” 레너드는 벼락을 맞은 산짐승처럼 몸을 격하게 비틀었다. 사라사는 하늘다람쥐를 양손으로 안은 채 불안과 놀라움이 서린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한바탕 고문이 끝난 후 김성철은 다시 한 번 레너드에게 물었다. “대답해라. 마법사. 내 질문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다시 기억나게 해주겠다.” 김성철의 엄혹한 말이 떨어지자마자 레너드는 헛숨을 삼키며 필사적으로 내뱉었다. “마.. 맞아요! 그놈이... 세계의 적을 찾았어요! 나더러.. 세계의 적이 어디 있냐고 찾아내라고.. 그래서...” 이미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김성철은 그의 오른팔을 붙잡고 글자 그대로 뽑아버렸다. “끄아아아아악!” 마법의 기운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통상은 오른손에 모여든다고 한다. 오른손을 잃은 사람은 따라서 마법을 쓸 수 없다. 김성철은 불구가 된 레너드를 내팽겨 치고 사라사 쪽으로 다가갔다. “상처는 없나?” “상처는 없는데.... 당신은 대체 누구?” 사라사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지나가는 신입생이다.” 그때 바깥에서 낯익은 외침이 들려왔다. “사라사! 사라사! 거기 있느냐!” 알투지우스의 것이다. 숨이 차고 헐떡이긴 했지만 목소리에 실린 기세는 변함이 없다. 김성철은 그의 뒤에 검은 안개가 뒤따르고 있음을 발견했다. ‘저놈이 암살자인가? 김성철은 사라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서 너의 조부에게 너의 건재를 알려라.” 사라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김성철의 손을 잡았다. 투박하고 거칠지만 크고 듬직한 손이었다. 김성철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킨 그녀는 창가에 서서 기숙사 앞을 서성이는 자신의 조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할아버지! 여기야! 여기! 나 무사해요!” 정원을 헤매던 알투지우스는 그 목소리를 듣고 번쩍 고개를 돌렸다. 손녀의 무사한 모습을 확인한 알투지우스의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으며 뒤돌아섰다. “그럼, 이제 본실력을 발휘해볼까?” 알투지우스의 뒤를 따르던 검은 안개는 그 말을 듣자마자 뒤로 물러나며 흩어졌다. “으음. 그 머저리 자식, 실패한 모양이네.” 안개로 변신해 알투지우스를 괴롭히던 카즈 알메이라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흥미를 잃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라사 쪽을 쳐다봤다. ‘어라.’ 한 사내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카즈는 기억을 더듬어 그 사내가 천공학파의 학당에 있던 자라는 걸 기억해냈다. 셋 중에 가장 별 볼일 없는 놈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사내에게서 뭐라고 딱히 꼬집어말할 수 없는 오묘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갈 수 없었다. 알투지우스가 쏘아낸 강렬한 글레어가 그의 목숨을 노리고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카즈는 안개의 형태로 다시 스스로를 변화시키며 유유히 자리를 빠져나갔고 적이 사라졌음을 확인한 알투지우스는 사라사 쪽으로 달려갔다. 뒤이어 감격적인 상봉이 일어났다. 김성철은 한 발 물러서 조손의 재회를 무심한 눈으로 지켜봤다. “레너드 상텀. 네 녀석이 이런 짓을 하다니.” 자초지종을 들은 알투지우스는 이미 반쯤 죽어가는 레너드를 안타까운 눈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처음 네놈을 보았을 땐 나는 너를 보석의 원석 같은 놈이라 생각했다. 너는 뛰어난 재능과 가능성을 품고 있었고 장차 나의 뒤를 이어 에어푸르트를 능히 떠받을 큰 인재라고 생각했다.” 옛 제자의 죽음이 머지않은 것을 알고 있는 알투지우스는 흉중의 말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엎어진 채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을 흘리던 레너드의 몸이 미약하게 떨렸다. “하지만 너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했고 너무 많은 죄를 저질렀다. 신은 너에게 재능을 줬지만 막상 재능을 담기엔 지나치게 작은 그릇을 준 것이다. 레너드 상텀. 내가 너에게 할 말은 그게 전부다.” 알투지우싀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레너드 상텀은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렀다. 그의 등짝에서 무언가 비집고 나왔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무늬를 지닌 노린재였다. 김성철은 지체없이 레너드의 시체에 다가가 노린재를 발로 짓밟았다. “당신이... 내 손녀를 구한건가?” 알투지우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김성철에게 말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신이 어떻게... 그는 당신이 이길 수 없는 상대일 텐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오.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천공학파의 비전뿐이오.” 알투지우스는 다시 한 번 볼 수 있었다. 김성철이란 사내의 눈동자에 자리 잡은 흔들림 없는 오롯함을. ‘대체 이 사내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수십 년의 지혜로도 알아낼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사내에겐 마술적인 운명이 뒤따르고 있다는 것. 알투지우스는 더 이상 그 운명에 저항하지 않기로 다짐했고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 손녀를 구한 은혜. 갚지 않을 수가 없지. 이미 끝나버린 학교에서 비전 하나가 넘어간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천공학파의 비전은 이제 목전에 있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김성철은 무음결계를 뚫고 들어오는 수많은 군홧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뀨뀨!” 사라사의 손위에서 하늘다람쥐가 불안한 목소리로 울었다. 이윽고 김성철 일행은 난데없는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알투지우스 제로!” 이단심문관과 그 부하들이다. 긴 두루마리를 펼친 사내가 우렁차게 말했다. “귀하를 이단 및 이단방조. 신실한 신도에 대한 살인죄등 13가지 죄목으로 기소하고 이에 그 신병을 구속하러 이곳에 왔다.” ======================================= 19. 사냥 (1) 알투지우스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이단심문관을 바라봤다. “아니.. 당신이 어떻게...” 그러자 이단심문관은 주변의 사람을 물리치고 알투지우스에게 걸어갔다. 그는 알투지우스에게만 들을 수 있을 정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일종의 연극이오. 귀하의 학교를 정화하기 위한.” 청천벽력 같은 일이지만 이단심문관이 그렇게 말했다고 그런 것이다. 그의 눈동자는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이윽고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오라를 받았다. 이단심문관의 부하들이 알투지우스를 묶고 입에 마개를 씌웠다. “할아버지!” 사라사가 슬픈 얼굴로 그의 조부에게 달려갔지만 알투지우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부의 말은 입을 씌운 마개 때문에 할 수 없었지만 대신 그는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알투지우스는 김성철을 응시했다. 그는 김성철에게 뭔가 눈빛을 전달하려 했지만 정작 자신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려는 이는 김성철이었다. 그는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가로젓고는 이단심문관을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이단심문관을 믿지 말라는 의민가?’ 생각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단심문관 마그누스 막시마는 자리를 떴고 그 부하들은 거칠게 알투지우스를 잡아 끌었다. 한 무리의 사람이 퇴장한 자리엔 창백한 소녀와 말없는 사내, 그리고 싸늘한 시체 한 구만이 남았다. “어.. 어떻게 하지? 이제?”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사라사는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졸지에 혼자가 되었다. 더 이상 그녀를 돌봐주는 사람도 지켜주는 이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왼뺨에 걸린 보존 마법 일부가 파괴되어 피부가 천천히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한다. 곧 그녀는 미모를 잃고 다른 리치와 마찬가지고 미라 화된 망자의 얼굴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그녀를 흔들고 있는 것은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이었다. 절망이 슬픔으로 치환되는 순간, 그녀는 가슴이 시릴 정도의 아픔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죽은 자는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그때였다. “일어서라.” 의문의 사내가 담담하지만 힘 있는 어조로 말했다. “일어서서 현실에 맞서라.” 단순한 명령이었지만 그의 말은 묘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사라사는 그의 말에 이끌려 몸을 일으켰다. 전투 중에 오른팔에 걸린 보존 마법 일부도 파괴되어 오른팔 살결은 시체의 그것처럼 말라비틀어져 가고 있었다. “어떻게 현실에 맞서야 하지?” 반쯤 시체의 모습으로 변한 사라사의 말에 김성철은 회오의 관을 가리켰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때로는 자신이 의지해야 할 사람을 믿고 기다리는 것도 한 방편이다.” 김성철은 그 말을 남기고 앞으로 걸어갔다. “기다려라. 의연하게. 시간은 너에게 답을 줄 것이다.” 사라사는 주먹을 꼭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김성철은 부서지기 시작한 무음경계로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한마디 덧붙였다. “하늘 다람쥐 사료 주는 거 잊지 말고.” 그리고 그는 결계 너머로 걸어갔다. ‘그 암살자. 나를 찾고 있었다.’ 오늘 그는 빈손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 * 카즈 알메이라는 알메이라 가문에서 수십 년 만에 배출한 천재 중 천재였다. 아슬아슬하게 종말세대의 경계를 벗어난 그는 암살자가 가져야 할 잔혹성, 정밀함, 인내의 덕목을 골고루 가졌고 타고난 재능으로 부계의 가문 및 모계의 가문에서 전승된 암살기술들을 두루 섭렵해나갔다. 다른 천재들이 그렇듯 카즈 알메이라 또한 교만이라는 좋지 않은 속성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교만은 자신의 실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데서 출발하고 있는 일종의 자신감에 가까웠다. 그는 극한의 상황으로 자신을 밀어 넣어 그 난관을 해결하는 걸 즐겼고 그런 위험한 방식을 통해 더욱 높은 성취를 이루어내는데 성공했다. 알메이라 가문에서는 그런 그의 행동에 주의를 주면서도 결과적으로 그를 제지하진 못했다. “네가 에어푸르트에서 벌인 소동 덕분에 우리의 존재가 이단심문관에게 알려졌다. 내가 이단심문관에게 담판을 짓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는 정화교단과 세계의 적 그리고 재앙의 추종자까지 3개의 적을 상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드비시 알메이라는 근엄하게 설교를 했지만 자신의 아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 몰랐어요. 아버지. 전 그 마법사 자식이 알투지우스가 세계의 적과 손을 잡았다는 소리를 하기에 한 번 찔러본 거죠.” “그래서 알투지우스는 상대할 만하더냐?” “제법 강했어요. 솔직히 지금의 저로선 질 것 같았죠. 그 인간은 마법사지만 궁수 수준의 민첩성을 가지고 움직였고 끊임없이 피하기 어려운 마법으로 견제를 하면서 뒤로는 묵직한 한방을 날리는 방식을 썼어요.” 카즈 알메이라는 명랑하기 그지 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막내 픽트 알메이라는 자리를 떠나버렸다. 실제로 잘났고 거기다 잰 체까지 하는 형이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카즈는 그런 막내의 뒷모습을 힐끗 보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저 알아냈어요. 알투지우스의 비밀이 뭔지.” “그래?” “그 인간은 차원마법이란 칼날을 숨기고 있더군요. 아주 기가 막혀요. 중간부터 도망 다녀서 피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 부교주처럼 납작한 포가 됐겠죠.” “그건 나중에 차차 설명해도 늦지 않다. 일단은 처소에 가서 잠시 근신을 하고 있거라.” “네. 알겠습니다.” 훈계를 듣고 돌아오는 길에 카즈는 막내인 픽트를 다시 만났다. 픽트는 카즈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카즈를 보자마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난 지금부터 재앙의 추종자들을 사냥하러 갈거야.” “아? 그래? 네 실력으로?” 카즈가 비웃자 픽트의 눈에 싸늘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언제까지 비웃을 수 있는지 보자고. 10년. 10년 안에 네 놈을 따라잡아주겠어.” “형보고 놈이라니. 이 자식.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웠냐?” “형처럼 굴어야 형 대접을 해주지. 아무튼 기다리고 있어. 내가 세계의 적의 목을 가지고 오는 걸 말이야.” 픽트는 혓바닥을 내밀고는 어둠 속으로 서둘러 사라졌다. 카즈는 그런 막내의 얼굴을 미소를 지은 얼굴로 응시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날 따라잡겠다고? 1,000년은 수련해야 할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카즈는 자신의 남동생이 대단한 잠재력의 소유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녀석은 첫 고문을 아주 훌륭하게 처리했다. 암살자의 기본인 잔혹성과 타인에 대한 무감각함만큼은 타고난 게 틀림없었다. ‘짜식. 조금만 더 크면 내가 직접 지도해주지.’ 아직 픽트는 카즈가 가르치기엔 부족함이 많다. 경험이 쌓이고 어느 정도 감각을 익혔을 때 카즈는 픽트와 함께 암살행에 나설 생각이었다. 그런 형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픽트는 그저 형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천재 좋아하네! 진짜 천재는 대기만성이라는 걸 내가 직접 보여주겠어.” 오늘 픽트가 맡은 임무는 이단심문관이 추려 낸 재앙의 추종자들을 사냥하는 것이다. 드비시 알메이라는 한 명을 잡아 족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했지만 픽트는 오늘 3명을 찾아 한꺼번에 심문을 할 생각이었다. 첫 심문은 상대방이 맹약에 걸려 있어 목적 달성엔 실패했지만 이번엔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의 손은 타인의 살갗을 가르던 칼날의 촉감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어디 보자.” 거리 저편에서 푸른색 빛이 도는 로브를 걸친 마법사들이 걸어나왔다. 픽트 알메이라의 눈으로 보기엔 하찮은 수준. 칼질 한 번에 하나 씩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약한 놈들이지만 픽트의 목적은 그들의 생포다. 그는 마법사들을 추적하며 기회를 엿봤다. 그는 민첩한 움직임으로 골목 골목을 누비며 마법사들을 끈질기게 추적했고 이윽고 마법사들이 각각의 숙소에 들어가는 것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동물이 보금자리에서 가장 경계를 풀 듯 인간도 자신의 침대에서 가장 경계를 푼다. 크리스티안이라는 노예사냥꾼을 잡은 장소도 그의 침대 위였다. 픽트 알메이라는 그때의 감각을 떠올리며 천천히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였다. 달빛에 비친 희끄무레한 형체가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한 것은. “…?!” 뭐라고 반응할 사이도 없이 우악스런 손이 그의 목줄을 움켜 잡았다. 엄청난 힘이었다. 손아귀의 힘이 목줄을 죄자 픽트는 눈알이 튀어나오고 뇌가 터져버릴 것 같은 끔찍한 충격을 느꼈다. “끄억!”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못 생긴 새가 우는 듯한 소리가 목 끝에서 터져 나왔다. 잠시 후, 자신의 목을 죈 사내가 입을 열었다. “크리스티안이라는 노예사냥꾼을 죽인 건 너희들인가?” 그 사내의 정체는 바로 김성철. 그는 무심한 눈으로 어린 암살자의 목을 틀어 쥔 손에 살짝 힘을 풀며 말했다. “대답해라.” 그러자 픽트 알메이라는 온 몸의 힘을 쥐어짜내 고함을 지르려고 했다. 주변에 포진한 그의 가족들을 부르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의 성대에서 울려 퍼진 목소리가 튀어나오는 것보다 김성철의 손이 그의 목을 틀어쥐는 속도가 빨랐다. “끅!” 소리가 안에서 삼켜지는 걸 느끼며 픽트 알메이라는 다시 한 번 세상이 노란빛으로 물드는 걸 느꼈다. ‘역시 암살자들은 독종이군.’ 암살교단의 암살자들은 어릴 때부터 고통에 적응하는 법을 배운다. 그 결과 그들은 여간한 고문으로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정도로 내성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암살자로서 중요한 덕목은 자신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다. 중요한 비밀이 새어나갈 우려가 있을 경우 그들은 그에 대비해 수많은 자진 방법을 개발했고 적극 활용했다. 픽트 알메이라 또한 스스로 목숨을 끊을 방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게.. 내 한계인 모양이네.’ 그는 기회가 닿는다면 어떤 방법을 쓰던 간에 스스로 죽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김성철이 그렇게 쉽게 암살자에게 쉬운 죽음을 선사할 리 없다. 김성철은 픽트 알메이라의 몸을 수색해 고문도구와 상처에 잘 듣는 치료 연고를 발견했다. 김성철은 픽트의 옷자락을 찢어내 입안 깊숙이 쑤셔바은 후 그의 오른팔을 손등으로 내려쳤다. 픽트의 오른팔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이며 지저분하게 뜯겨져 나갔다. 픽트는 격렬하게 몸부림쳤지만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고문할 생각은 없다. 암살자.” 김성철은 픽트의 상처에 연고를 바른 후 그가 지니고 있던 고양이 가면을 벽에 걸고 그 아래 픽트의 잘린 팔을 헝겊으로 걸어놓았다. 그리고 픽트의 잘린 팔에서 흐르는 피로 아래와 같은 문구를 썼다. [ 이 녀석을 살리고 싶다면 이 안으로 들어와라. 단, 혼자 들어와야 한다. ] 김성철은 픽트의 고개를 억지로 돌려 자신의 피로 쓰게 한 문구를 보게 했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잔혹성이 뭔가 대단한 것처럼 포장하더군.” 김성철은 연고를 발랐지만 피범벅이 된 피트의 오른 팔이 지면에 닿게끔 그를 질질 끌고 다니며 창고 안쪽에 처박았다. 핏자국은 고양이 가면이 있는 곳에서 창고 안까지 카펫처럼 쭉 이어졌다. “오늘 내가 너희들에게 한 수 알려주지.” 김성철은 창고와 가면이 잘 내려다보이는 건물 지붕으로 몸을 훌쩍 날려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윽고 또 다른 암살자가 나타났다. 독충을 다루는 마이라 알메이라다. 그녀는 픽트의 가면과 잘린 오른팔을 보고 흠칫했다. 자신의 고통엔 무감각한 암살자들이지만 그들도 결국 인간. 그들은 타인에겐 한없이 비정하지만 자기 사람들에겐 따뜻하다. 마이라 알메이라는 피로 쓴 문구를 보고 흠칫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 돼! 누나! 들어오면 안 돼!’ 픽트 알메이라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몸부림을 쳤지만 무의미한 짓이었다. 마이라 알메이라는 전투준비를 하며 천천히 창고 안으로 한 발 한 발 깊숙이 들어갔다. 그녀의 뒤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눈 하나 깜짝할 사이에 그 사내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는 여전히 앞을 보는 마이라 알메이라의 뒤통수를 부여잡더니 그대로 그녀의 몸을 들여올려 거친 바닥 위에 얼굴을 갈아버렸다. 고양이 가면이 산산조각나고 피투성이가 된 마이라의 얼굴의 드러났다. “아아아악!” 마이라의 얼굴을 갈아버린 김성철은 그녀의 목에 밧줄을 걸고 머리 위로 돌렸다. 인간의 몸이 장난감처럼 붕붕 돌아갔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몸에 숨겨진 갖은 독충들이 창고 바닥 위에 비처럼 쏟아졌다. 마이라 알메이라는 자신의 목을 건 밧줄을 두 손으로 붙잡고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이윽고 의식을 잃고 혼절했다. 김성철은 그녀에게도 편한 죽음을 선사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마이라의 얼굴을 후려쳐 깨운 뒤 픽트 알메이라의 눈앞에 거꾸로 매달아놓았다. 김성철은 픽트 알메이라를 노려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리스티안이라는 노예사냥꾼을 죽인 건 너희들이냐?” 픽트 알메이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성철은 바닥에 떨어진 독충들을 발로 짓이기며 찾아다니다 그중 적당한 녀석을 하나 발견했다. 인간의 몸에 알을 낳는 노린재였다. 그는 그 노린재를 붙잡아 마이라 알메이라의 몸에 붙이고는 알을 낳게끔 했다. 마이라의 몸뚱이가 들썩거렸다. 김성철은 재차 픽트 알메이라 쪽을 응시했다. 그의 눈을 본 순간 픽트 알메이라는 깨달았다. 저 사내는 어떤 자비도 베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다음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였던 마이라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번쩍 뜬 것이다. “픽트! 먼저 간다.” 피로 뒤덮인 마이라의 눈이 격렬하게 떨리더니 이내 흰 자를 드러내며 까 뒤집혔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마이라의 죽음을 확인했다. 누나의 모범적인 죽음에 픽트는 잃어가던 용기를 되찾고 다시 한 번 결연한 눈빛으로 김성철을 노려봤다. ‘어떤 고문이든 해봐라. 달게 받아주지. 알메이라 가문의 이름을 걸고!’ 그런데 김성철은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였다. 그는 마이라 알메이라의 시체를 바닥이 내동댕이치더니 시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 작업을 했다. 비릿한 혈향이 사방에 퍼졌다. 이윽고 김성철이 마이라 알메이라의 시체를 들고 창고 바깥으로 걸어갔다. 그의 양손이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시체를 강하게 눌렀다. 다음 순간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아아아아.” 마이라의 시체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마이라의 특유의 음색은 그대로 살아 있었다. 김성철은 시체를 붙잡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하려니 잘 안 되는군.” 그는 재차 시체를 들어 올려 그의 방식으로 조작했다. “아아아아!!!” 마이라의 입이 떡 벌어지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더욱 강하게. 그걸 본 픽트 알메이라는 저 괴인의 의도를 깨달았다. ‘저 놈. 부르고 있어. 우리 가족을...!’ 이이상의 희생자가 나오면 곤란하다. 픽트 알메이라는 격렬하게 몸부림을 쳐 김성철의 주의를 자신 쪽으로 끌었다. 이윽고 김성철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 노예사냥꾼을 죽인 건 나다. 됐냐? 이제 됐냐고?” 이에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노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질문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 19. 사냥 (2) 높이 솟은 권좌 위엔 금빛으로 빛나는 갑주를 걸친 사내가 앉아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는 삼십대 초반. 짙은 금발과 흐릿한 푸른 눈동자를 지닌 강인한 인상의 사내였다. 윌리엄 퀸튼 말버러. 세상은 그를 인간제국의 황제라 부른다. 이계에서 가장 강성한 국가의 수장인 그는 오늘 보잘 것 없는 남자가 알현을 청해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평소 같으면 문지기 선에서 정리됐을만한 하찮은 존재인데 그는 필사적으로 어떤 물건을 황제에게 보여 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황제는 마음이 동하진 않았지만 호기심을 느꼈다. 그는 그 자를 자신의 권좌 아래 대령할 것을 명했다. 어리숙해 보이는 중년 사내가 권좌로부터 100보 거리에 안내되어 무릎 꿇었다. 근위병들이 사내에게서 어떤 물건을 받았고 황제에게 다시 공손하게 진상했다. 윌리엄 퀸튼 말버러는 근위병들이 공손하게 올린 천에 쌓인 물건을 손가락을 움직여 허공에 띄워 올렸고 자신 쪽으로 가지고 갔다. 그 물건은 비단천에 싸여 있었다. 천을 풀자 상아 자루로 만든 단검이 한 자루 들어 있었다. “음.” 황제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25년 전, 소환 궁전을 수료하고 황금 도시로 진입했을 때의 풍경이 그린 듯 눈앞에 펼쳐졌다. 잠깐의 회상이 끝난 후 황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자를 50보 안으로 들여라.” 중년 사내는 황망해하며 앞으로 걸었고 붉게 표시된 선까지 가 엎드렸다. 황제가 물었다. “누가 너에게 이 단검을 주었나?” 그의 물음에 중년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세... 세계의 적입니다. 황제 폐하시여!” 중년 사내는 자신이 목격한 바에 대해 두서없이 이야기했다. 윌리엄 퀸튼 말버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드디어 나타났군. 김성철.’ 그는 권좌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황금 도시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우리 군의 주력은 어느 부대인가?” 이에 먼 곳에서 갑주를 걸친 사내가 부복하며 대답했다. “총신 드미트리 메디오프가 이끄는 제2함대입니다.” “2함대라.” 황제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팔을 힘차게 저으며 호령했다. “2함대를 황금 도시에 보낸다. 목표는 부수는 자, 김성철.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그 자를 제거하라.”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제국의 군령부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얀 제복을 입은 마법사들이 감응의 돌을 이용해 먼 곳에 교신을 시도했고 와이번을 탄 비룡기사 편대가 속속 하늘을 가르며 북쪽으로 날아갔다. 제국 전체가 들썩이는 가운데 황제는 흐릿한 푸른 눈동자로 먼 북쪽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8년만이군.’ 8년 전. 다가오는 재앙을 막기 위해 대륙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지닌 존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름 하여 대륙십삼걸(大陸十三傑) 지금은 유명무실해져 소수만이 기억하지만 당시엔 재앙을 구할 유일한 희망으로 모든 이계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기대를 보기 좋게 배신했다. 오직 단 한 명이 반대의 목소리를 냈지만 그의 말을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사내는 얼마 후, 세계의 적이라는 혐오스런 이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김성철. 왜 다시 돌아왔느냐?” 황제의 눈동자엔 짙은 의문이 떠올랐다. * 어두컴컴한 지하실. 알투지우스는 그 중앙에 정육점의 고기처럼 묶여 있었다. 철썩! 낚시바늘처럼 날카로운 갈고리가 달린 채찍이 그의 등을 찢고 지나갔다. “끄으으윽!” 알투지우스는 눈앞이 노래지는 걸 느끼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고문 기술자의 채찍은 자비가 없었다. 그들은 10초 간격으로 무자비한 태형을 집행했다. 알투지우스의 등은 이미 찢겨나간 살점과 말라붙은 피로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상해 있었고 그의 의식도 백척간두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이단심문관 마그누스 막시마가 등장한 것은 알투지우스의 숨이 막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이 자에게 질서신의 은총을 하사하라.” 까마귀 가면을 쓴 시종들이 알투지우스의 몸에 회복마법을 사용했다. 갈라진 등의 상처가 아물고 통증이 완화됐고 죽어가던 알투지우스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정신을 어느 정도 차린 그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인물을 알아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당신이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이단심문관은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고문기술자가 채찍의 단단한 자루부분으로 알투지우스의 복부를 뚫어버릴 것 같은 기세로 강타했다. “크억!” 알투지우스는 검은 피를 한 사발 토해냈다. 그를 묶은 쇠사슬이 흔들리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좁은 방안에 퍼뜨렸다. 이단심문관은 어느 정도 침묵이 내려앉자 다시 한 번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투지우스 제로. 그대는 지금까지 에어푸르트의 부흥을 위해 잘 싸워 주었다.” “그... 그런데 어째서 내게 이런...?!” 알투지우스는 가쁜 숨을 몰아내쉬며 필사적으로 말했다. 이단심문관은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고문실 안에 있던 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단 둘만이 남은 오싹한 고문실 안에서 이단심문관은 뒷짐을 지고 천천히 알투지우스의 주위를 멤돌았다. “상황이 급박해졌어. 알투지우스. 이곳에 세계의 적이 나타난 건 알고 있나?” “세.. 세계의 적...?!” “세계의 적이 나타나면 인간제국을 위시한 대륙의 강자들이 앞 다투어 그들의 군세를 보낼 걸세. 재세(再世)의 십자군이 결성된다는 이야기지. 나는 그들이 나타나기 전에 여기 일을 마무리 지을 의무가 있어. 다시 말해서 박자를 빠르게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오?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오?” 쇠사슬에 묶인 알투지우스의 팔이 요동쳤다. 반면 이단심문관은 그림 속의 사물처럼 미세한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면 너머에서 중얼거리는 듯 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는 당신을 처형대에 올리기로 결심했어. 그것만이 에어푸르트 내에 산재한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지.” “그게 어째서 유일한 방법이란 말이오?” 알투지우스의 물음에 마그누스 막시마는 기괴한 웃음소리로 대답했다. “끅끅끅....” 마치 전염병에 걸린 자가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내는 신음 같은 웃음소리였다. 알투지우스는 눈을 크게 뜨고 이단심문관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이단심문관이 말했다. “곧 로버트 단턴을 위시한 교수진들은 암살교단의 손에 모두 처리될 거야. 그렇게 되면 에어푸르트에 남은 기둥은 당신 밖에 없게 되겠지. 그 마지막 기둥을 뽑아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제야 알투지우스는 저 이단심문관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어푸르트를 없애버리겠다는 거요?” 이단심문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20년 전 나는 에어푸르트에서 범재라는 평가를 받고 스스로 학교를 뛰쳐나왔지. 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첩년의 자식이 승승장구 하는 걸 지켜보며 불면의 밤을 지새워야 했다.” “겨우 그런 이유로...?!” 알투지우스의 말에 이단심문관의 몸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그는 태엽인형처럼 기괴한 움직임으로 알투지우스에게 몸을 돌리더니 얼굴을 덮은 까마귀 가면을 천천히 벗었다. 알투지우스는 짤막한 신음을 내뱉었다. 가면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은 미라화 된 시체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죽은 사람이 아니다. 그의 심장은 제대로 뛰고 있고 그의 몸 안엔 더운 피가 흐른다. 집념과 광기어린 고행에 의해 얼굴이 저렇게 변하고 만 것이다. 자신의 진면목을 알투지우스에게 보인 이단심문관은 다시 가면을 쓰며 읊조리듯 말했다. “내 동기가 네겐 하찮아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겐 운명을 걸 만큼 중요한 일일 수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너의 그 잘난 동기 또한 내 눈엔 하찮아 보이긴 피차일반이다.” 이단심문관은 박수를 쳤다. 물러가 있던 고문관들과 간수들이 줄지어 고문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단심문관은 그들을 지나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처형은 내일 정오에 실시한다.” 알투지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홀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사라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를 묶은 쇠사슬은 너무나도 견고했다. 고문관들이 채찍을 들었다. *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칼날이 잠에 빠져든 마법사의 목줄을 순간적으로 그어버렸다. 마법사는 눈을 부릅뜬 채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드비시 알메이라는 방금 죽인 마법사의 얼굴 위에 베개를 올리고 재차 확인 사살을 했다. 마법사의 손이 베개를 잡은 손을 격렬하게 움켜쥐더니 이내 힘을 잃고 미끄러졌다. 이걸로 다섯 명 째. 드비시 알메이라는 화염학파의 교수진들을 하루 만에 전멸시켰다. 건넛방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말다 가문에서 시집 온 그의 아내인 일리아 알메리아는 맹독을 지닌 전갈을 풀어 화염학파의 주요 제자들의 숨통을 침대 위에서 끊었다. 꿈속에서 수십 명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다. 소리 없는 살육을 끝낸 부부는 화염학파의 입구 앞에서 합류했다. 화염학파의 입구엔 목이 잘린 채 뒹굴고 있는 두 구의 시체가 식어가고 있었다. 드비시는 어두운 밤하늘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전부 처리했나?” “네. 전부 처리했어요. 하나도 남김없이.” 일리아 알메이라는 소매 밖으로 삐져나오려고 하는 전갈을 다시 안으로 잡어 넣으며 잔혹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드비시는 피 묻은 단검을 천으로 닦으며 생각했다. ‘남은 건 빙결학파군. 픽트와 마이라 녀석. 잘 하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드비시는 아내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나저나, 마이라 쪽은 잘 되고 있는지 모르겠군.” “한 번 알아봐드려요?” 일리아의 물음에 드비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전통적인 암살자로 대단히 신중하고 조심스런 성격이었다. 최소한의 위험조차 부담하지 않으려 않는 성격 덕에 언제나 무손실로 임무를 완수해왔지만 그 반대급부로 그의 가문은 낮은 실적이라는 고질병에 걸려 4대 암살가문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순위권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드비시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법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가족은 순위 따위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잘 아는 일리아 알메이라는 품속에서 작은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선 푸른 날개를 지닌 나방 한 마리가 나와 더듬이를 꼼지락거리더니 밤하늘 어딘가로 날아갔다. 그 나방은 원앙 나방이라고 불리는 녀석으로 일리아가 거느린 다른 벌레와 달리 독도 공격성도 없지만 대단히 유용한 능력을 하나 지니고 있다. 바로 원앙 나방의 수컷이 자신의 짝을 찾아가는 능력이다. 원앙 나방의 수컷은 그 짝이 어디에 있건 반드시 찾아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리아 알메이라가 보낸 원앙나방의 수컷도 밤하늘을 가르며 자신의 짝이 있는 곳을 향해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이윽고 그 나방은 어두컴컴한 창고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짝을 찾았다. 그런데 원앙 나방의 짝은 이미 형체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납짝하게 눌려 있었다. 원앙 나방이 고개를 들고 다시 날갯짓을 하고 창고를 떠났다. “…….” 어둠 속에서 한 인물이 나방이 날아가는 방향을 지켜보고 있었다. 김성철이다. 그의 뒤엔 두 구의 시체가 사이좋게 매달려 있었다. 픽트 알메이라와 마이라 알메이라의 시체다. 잠시 정지한 것처럼 있던 그는 두 구의 시체를 놔둔 채 나방의 방향을 따라 섬전처럼 움직였다. 원앙 나방의 수컷은 밤하늘을 갈라 다시금 원래의 주인의 손 위에 내려 앉았다. 일리아 알메이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여보. 문제가 생겼어요.” 드비시 알메이라는 동요하지 않았다. “확실한가?” “네. 짝을 잃었어요.” 드비시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물러납시다.” 그의 몸이 서서히 안개로 변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일리아 알메이라는 그 안개 속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리아는 적대적인 기류가 머지않은 곳에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사방에 펼쳐놓은 거미줄에 적재적인 진동이 감지된 것이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여보. 적이에요.” “그 존재인가?” “아마도.” 드비시는 자신이 지닌 힘과 가지고 있는 자산의 득실을 순간적으로 계산했다. ‘세계의 적. 그 놈의 힘 수치는 600가량. 민첩과 체력은 500대에 머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전술은 단 하나. 압도적인 능력치로 찍어 누르는 것. 가장 단순하지만 효율적인 전술이지.’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려본 결과 지금 현재로선 승산이 없다. 가장 강력한 장남 카즈가 있다면 시간을 끄는 건 물론이고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겠지만 지금 이대로는 개죽음 이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어보였다. “여보.” 드비시의 표정은 비장했다. 그의 뜻을 알아 챈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여 슬픈 눈으로 자신의 남편을 응시했다. “내가 시간을 끌리다. 3분 정도는 놈의 발목을 잡아둘 수 있을 것 같소.” “…….” “당신 혼자라도 빠져나가 카즈와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시오. 그리고 의뢰인에게 전하시오. 그 놈은 여기 있다고.” “알겠어요.” 일리아는 그의 뺨에 키스를 한 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암살자 부부의 마지막 작별이었다. 혼자가 된 드비시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곧 나타날 압도적인 적을 기다렸다. 이윽고 어둠을 해치고 허름한 복장을 한 사내가 나타났다. ‘모습이 다르군. 그 자는 2미터가 넘는 거한이라고 들었는데.’ 어둠 속에서 나타난 사내가 입을 열었다. “네가 암살자의 우두머리인가?” “그렇다. 내가 알메이라 가문의 32대 당주 드비시 알메이라다.” 드비시는 의연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3분. 내 생애 마지막 순간이라 생각하고 무조건 버틴다.’ 하지만 3초도 채 지나기 전에 드비시 알메이라는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사내는 자신이 상정하던 것보다 더욱 괴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주먹 한 방에 드비시 알메이라는 두개골이 박살난 채 절명했다. 한 명을 해치운 김성철은 이제 달아나는 여성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추적하지는 않았다. 놓아준 사냥감이 본거지로 돌아갈 때까지 인내 있게 뒤를 밟았다. 그런데 그 사냥감은 아무래도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외딴 곳에 이르자 뒤돌아섰다. “나도 죽여라. 세계의 적.” 눈물과 원한이 뒤섞인 처절한 눈동자로 노려보며 일라아 알메이라는 체내에 숨은 모든 독충을 일제히 개방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그녀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나는 것 같았다. 김성철은 그 모습을 보더니 애병 팔 가라즈를 꺼냈다. 일리아의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넌 오늘 우리는 죽일 수 있어도 우리 가문을 멸할 수 없을 것이다!” 김성철이 팔 가라즈를 휘둘렀다. 일리아 알메이라의 신형은 그녀의 독충들과 함께 사라졌다. 곤충과 인간의 피가 섞여 발치에 흐르는 걸 무심히 지켜보며 김성철은 밤하늘 저편을 응시했다. ‘그때 그 놈을 말하는 건가?’ 이미 얼굴은 알고 있다. 암살자들의 의뢰인도 이미 알고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김성철은 시체를 뒤로 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대륙 전역에 악명을 떨치던 알메이라 가문은 장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같은 시각. 에어푸르트의 입구에 까마귀 가면을 쓴 자들이 화형대를 세우고 있었다. ======================================= 20. 원시의 빛 (1) 미명이 트자 에어푸르트는 통곡의 장으로 변했다. 몰락한 학교를 이끌던 화염학파의 교수진이 몰살당했고 촉망받던 학생들 다수도 죽음을 맞이했다. 살아남은 자 가운데 기력이 있는 자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횃불을 들고 신경질적으로 교내를 휘젓고 다니며 암살자들을 찾아 나섰고 나머지는 줄줄이 누운 시체 앞에 서서 망자에 대해 애도했다. 김성철이 학교에 도착한 건 그맘때였다. 횃불을 든 한 무리의 학생이 그 앞을 막아섰다. 행색이 특이하기 때문이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한 사내가 호기롭게 소리쳤다. 다섯 개의 지팡이가 일제히 김성철을 겨누었다. 김성철은 그들을 노려보며 짤막하게 한 마디 했다. “이 학교 학생이다.” 그러자 학생 중 한 명이 곧 김성철을 알아봤다. “잠깐, 저 사람. 본 적이 있다. 모두 지팡이를 거둬라.” 푸른빛이 도는 교복을 입은 학생이었다. 그는 다른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김성철에게 다가와 은밀하게 말했다. “당신이 그 연금학파의 그 분이죠? 인사드립니다. 저는 빙결학파의 말학인 시돈이라고 합니다. 이 무시무시한 밤에 무사해서 무엇보다 다행이군요.” 그는 아무래도 김성철과 연줄을 만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김성철이 잠자코 있자 그는 로버트 단턴 교수에게 김성철을 데려다 주겠다고 자청했다. “그는 아직 살아 있는가?” 아직 김성철은 학교의 정확한 피해상황에 대해 알지 못했다. 알메이라 가문이 학교를 공격한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 칼끝이 어디를 향한 지까지는 알 도리가 없다. 시돈은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상황을 말해주었다. “일단, 화염학파는 전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교수진 전부가 몰살당했죠. 소문이 분분합니다만 제 개인적으론 암살교단이 개입한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빙결학파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알메이라 가문이 본격적으로 빙결학파를 공격하기 전에 김성철에게 포착되어 전멸 당했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그것이 호재인지 악재인지 김성철은 판단을 보류했다. 대신 그는 시돈의 안내를 받아 학교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알려진 빙결학파의 건물에 입성했다. “운도 좋군. 그 끔찍한 밤에 상처 하나 없이 무사했다니.” 로버트 단턴은 김성철을 반갑게 맞이했다. 김성철은 목례를 하고 자신이 에어푸르트 입구에서 보았던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화교단이 오늘 내로 알투지우스 교수를 불태울 것 같소.” 하지만 로버트 단턴은 알투지우스의 운명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 고집스런 사내가 죽든 말든 그건 우리에게 있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야. 중요한 건 암살교단이 우리를 공격했다는 것. 즉, 이단심문관이 먼저 칼을 뽑았다는 이야기지.” 그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이글거렸고 입가엔 뒤틀린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단심문관이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에게도 방법은 있어.” “방법?” 김성철의 물음에 로버트 단턴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격을 하는 거지.” 로버트 단턴 밑엔 한줌 밖에 안 되는 마법사가 전부다. 그마저도 로버트 단턴과 일부 교수진을 제외하면 전투력엔 의문부호가 붙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김성철이 보기엔 그들만으론 정화교단의 잡병들을 처리하는 게 한계로 보였다. “따라오시오. 고대왕국의 비호를 받는 친구. 내 특별히 우리의 비밀스런 무기를 보여주리다.” 그는 김성철과 소수의 측근을 데리고 지하실로 향했다. 퀴퀴한 공기가 흐르는 지하실의 막다른 곳에 서서 로버트 단턴은 지팡이를 휘둘렀다. 오래된 벽들이 움직이며 비밀통로가 드러났다. 김성철은 그 비밀통로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아보았다. “전임 교장인 대 마그누스가 재앙의 추종자라는 건 극히 일부분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 시궁쥐 몇 마리가 놀라 도망가는 걸 보며 로버트 단턴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은 모두 짐작하고 있었을 거야. 대마법사 발자크가 재앙의 추종자들을 결집해 들고 일어섰을 때 그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은 마법사들은 찾기가 어려웠거든.” “그렇소?” “특히, 배움이 깊은 자일수록 도드라졌지. 그들은 이미 한계에 부딪쳤거든. 한계를 부수기 위해선 어떤 기폭제가 필요했지. 이를테면...” 통로의 끝이 나타났다. 거대한 골렘이 앞을 막아섰다. 로버트 단턴이 지팡이를 흔들자 골렘은 물러섰고 그 너머의 광경이 김성철 눈앞에 펼쳐졌다. 어둠에 싸인 통로와 달리 빛으로 가득 찬 영역이었다. 멀리서는 희끄무레한 빛무리 밖에 보이지 않는 그 영역에 발을 들이자 김성철은 볼 수 있었다. 거대한 공동과 그 중앙에 자리 잡은 원형의 구조물을. “이런 것이지!” 로버트 단턴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저건 차원문이군.’ 인간제국이나 고대왕국 등 강력한 세력들은 거대한 차원문을 곳곳에 건설해두고 그것을 이용해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키곤 했다. 그런 차원문이 왜 마법학교의 지하에 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곧 김성철은 로버트 단턴의 입을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차원문은 마계로 통하는 것이지.” “호오?” “전임 교장이 대부분 완성을 했지만 중요한 재료가 몇 개 빠져 있었지. 하지만 자네가 보내준 지원금 덕분에 마계 차원문을 완성할 수 있었어.” 로버트 단턴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김성철은 싸늘한 눈으로 차원문과 로버트 단턴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계획이 뭐요?” 이에 로버트 단턴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차원문을 가리켰다. “오늘 정오. 이단심문관이 알투지우스에 대한 처형을 집행한다는 공문을 보내왔네. 아마도 이단심문관 및 그 아래 잔뜩 모이겠지. 그때 이 차원문을 가동 시킬 거야.” 로버트 단턴은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허공에 얼음 꽃이 피어났다가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졌다. “그렇게 되면 전부 이렇게 되는 거지. 황금 도시에 느닷없이 나타난 악마의 군세에 의해.” 거대한 공동 안에 로버트 단턴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성철은 가만히 그가 웃는 것을 지켜보다 조용히 물었다. “이 차원문. 어떻게 가동시킵니까?” * 이단심문관의 지하 감옥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를 충족해야 하는데 첫째는 이단심문관의 판단을 얻는 것이고, 두 번째는 간수들이 만족할만한 뇌물을 바치는 것이다. 김성철은 두 번째 방법을 통해 어두컴컴한 지하감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빨리 끝내시오. 심문관님의 새벽기도가 끝날 때까지.” 까마귀 가면을 쓴 간수는 망을 보여 뒤로 물러났다. 김성철은 열린 문을 열어젖히고 고문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고문실 중앙엔 무참하게 고문당한 노인이 의식을 잃고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 김성철은 그에게 다가갔다. 알투지우스가 기척을 알아차리고 퉁퉁 부어오른 눈을 힘겹게 떴다. 가늘게 뜬 그의 눈동자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가혹한 고문에 의해 주눅이 들어버린 것이다. 카즈와 한바탕 싸울 때, 레너드를 쫓아낼 때 호방함을 기억하던 김성철은 그런 알투지우스의 변화에 약간의 연민을 느꼈다. “당신의 제자요.” 김성철은 그가 자신을 눈동자에 담기 전에 미리 말했다. 알투지우스의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기.. 김성철? 자네가 여기 온 건가?” 김성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알투지우스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무... 물을 좀 주게. 물을...” 김성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통에 물이 가득 담겨 있긴 하지만 피와 땟국물이 섞인 구정물이다.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공기처럼 투명한 병을 하나 꺼내 알투지우스의 입으로 가지고 갔다. 병안의 담긴 물방울이 하나 알투지우스의 혀에 닿는 순간, 알투지우스는 눈을 번쩍떴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청량감이 혀끝을 타고 온 몸에 전달된 것이다. 김성철은 그 병안에 담긴 액체를 모두 알투지우스의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엄청난 물맛이군. 고.. 고맙네! 원기가 되살아나는 기분이야!” 알투지우스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김성철이 건낸 것은 요정들의 땅에서 자라는 세계수의 수액이라는 것을. “그래. 여긴 어떻게 왔나?” 정신을 차린 알투지우스는 김성철을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김성철은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천공학파의 비전을 배우기 위해 왔소.” 알투지우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안타깝군. 그건 내가 지금 갖고 있지 않아.” “그렇다면?” “비밀은 내가 평생에 걸쳐 지키던 그곳에 있어. 천공학파의 회당에.” “천공학파의 회당에?” “내가 영어(囹圄)의 몸이 아니라면 자네 옆에 붙어 비전을 전해줄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어려워.” “내가 당신을 탈출시켜드리리다.” 이에 알투지우스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탈옥을 하면 내 목숨은 건지겠지. 하지만 자네에게 천공학파의 비전은 전수할 수 없을 거야. 왜냐하면 천공학파의 비전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있어야 되는데 마그누스 막시마가 내 탈옥을 알고도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지.” “당신은 정직하군요.” 다른 마법사라면 다짜고짜 자신을 여기 꺼내달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런 다음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말을 바꿀 것이다. 지금까지 김성철이 지긋지긋하게 경험한 마법사라 불리는 작자들의 작태였다. 이에 알투지우스는 눈을 크게 뜨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곧 들킬 거짓말을 해서 뭐하겠나?”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곧 들킬 거짓말을 하는 무리들이 적지 않아서 하는 소리요.” 알투지우스는 실소를 터뜨렸다. 잠시 후, 그의 주름진 얼굴 위에 깊은 근심이 서렸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되나?” “당신의 손녀 말이오?” “그래. 사라사를 나대신 맡아주게. 영원히 맡아달라는 이야기는 아니야. 먼 북쪽. 마계 최전선에 사라사의 부친이 있네.” “사라사의 부친?” “지금은 데커드란 가명을 쓰고 폭풍전선의 용병 마법사로 활동하고 있을 거야. 자네처럼 세상을 구하겠답시고 험난한 마계에서 동분서주하는 애늙은이지. 그 자에게 사라사를 인도해주게. 천공학파의 비전까지는 아니겠지만 상당한 보수를 자네에게 지급할 걸세.” “…….” 김성철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 “시간이 다 됐소. 새벽기도가 끝날 시간이오.” 멀리서 간수의 짜증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성철은 다시 고개를 들어 알투지우스를 응시했다. 흔들림 없는 하늘의 별빛 같은 눈빛이었다. “미안하지만 난 천공학파의 비전을 배워야겠소.” 알투지우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돌아오겠소. 적절한 시간에.” 모호한 한마디를 남긴 채 김성철은 어두컴컴한 고문실을 나섰다. 알투지우스는 그런 김성철의 뒷모습을 경악과 기대가 서린 복잡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대체.. 저 사내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이미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체가 도대체 무엇일지는 알투지우스의 지혜로도 가늠할 수 없었다. 김성철이란 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 사라사는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얼굴의 절반은 살아 있을 때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말라붙은 시체의 혐오스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라사는 조금도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았다. 그녀는 의연한 얼굴로 등을 보이고 있는 사내를 향해 말했다. “짐을 싸라고?”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정오. 너와 너의 조부를 함께 이곳에서 탈출시킬 것이다.” “당신의 힘으로 그게 가능하겠어? 나의 힘이 필요하면 나도 돕겠어.” 시체로 변한 반쪽 얼굴의 눈동자가 형형한 빛을 발했다.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너로서는 짐만 될 뿐이다.” “내가 그렇게 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사라사는 피식 웃었다. 이에 김성철은 조용히 자신의 애병을 꺼냈다. 팔 가라즈. 드워프들의 신이 만들었다는 최강의 망치는 단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주변의 공기를 불안한 형태로 떨리게 했다. 그것을 본 사라사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팔.. 가라즈?” 아직 그녀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하나 있었다. 세계의 적이라 불리는 악마 같은 사내가 드워프들의 신전을 박살내고 드워프들이 신성시여기는 무기를 훔쳤다는 경천동지할 소식이었다. 그녀는 그때 팔 가라즈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도서관에서 그 무기의 삽화와 유래에 대해 조사하기도 했다. 책에서 보았던 신병이기가 지금 그녀 앞에서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책에서 본 것 이상의 위엄과 경이가 느껴졌다. 그 무기를 든 사내가 입을 열었다. “나는 김성철이다.” 가명도 동명이인도 아니다. 그는 글자 그대로 전 대륙십걸. 지금은 세계의 적이라 불리는 그 김성철이다. “세상에... 믿을 수가 없어. 그 김성철이 어째서... 우리에게...” “나는 내 이름을 걸고 너와 너의 조부를 구해주기로 약속했다.” 사라사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달리 할 말이 어디 있겠는가. 다른 누구도 아닌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사내가 자신들을 지켜주겠다고 하는데. “뀨뀨!” 사라사의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품속의 하늘 다람쥐는 먹이를 달라고 보챈다. 사라사는 눈자위를 소매로 훔치며 하늘 다람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20. 원시의 빛 (2) 카즈 알메이라는 처참하게 죽은 가족들의 시신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단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동생, 누이, 부모 모두 가릴 것 없이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가족의 시체가 맞나?” 번쩍이는 황금 투구를 쓴 사내가 사무적인 어투로 물었다. 시체를 수습한 것은 지난 새벽 황금도시에 파견된 인간 제국의 비룡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신속하게 황금 도시 전역에 전개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내의 흔적을 찾아다녔고 눈 뜨고 볼 수 없는 4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내 가족의 시체다.” 카즈 알메이라는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세계의 적은 어디 있지? 그 개자식은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세계의 적은 우리의 선발대가 추적 중이다. 하지만 걱정하지마라. 곧 총신 드리트리 메디오프님이 이끄는 공중 함대가 이곳에 당도할 것이다. 함대의 전력이 전개되면 제 아무리 세계의 적이라고 해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 카즈 알메이라는 손톱을 자근자근 씹으며 침묵에 잠겼다. 분노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차가운 암살자의 안목으로 생각해 보건데 저 비룡기사의 말은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의 적과는 별개로 정화교단의 이단심문관이 오늘 에어푸르트 마법 학교에 대한 정화를 실시한다는 통지를 보내왔다. 에어푸르트의 이단들이 세계의 적과 손잡은 정황이 있는 만큼 어쩌면 오늘 세계의 적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겠지.” 비룡기사는 투구를 고쳐 쓰고는 자신을 기다리는 거대한 와이번 위에 올라탔다. “끄뢰에에에에에!!” 와이번은 힘찬 포효를 내지르며 거대한 날갯짓으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와이번이 일으킨 바람이 카즈 알메이라의 머리칼과 옷자락을 거칠게 흔들었다. “…….” 홀로 우두커니 서 있던 카즈 알메이라는 가족의 시체를 보고 묵념을 한 후 자리를 떠났다. ‘김성철. 넌 반드시 내가 죽인다.’ 그의 눈빛은 어느때보다 짙은 살기로 번득이고 있었다. * 해가 정오에 떠오르자 번쩍이는 갑주를 걸친 자들이 에어푸르트 마법 학교 앞에 집결했다. 썩어가는 시체가 주렁주렁 매달린 고목 옆엔 장작을 높이 쌓아올린 화형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까마귀 가면을 쓴 이단심문관이 가마를 타고 삼엄한 경계속에서 형장에 도착했고 그 뒤엔 손이 뒤로 묶인 피투성이가 된 노인이 나귀 위에 앉혀 끌려오고 있었다. 형리들이 노인을 나귀에서 끌어내 화형대에 매달았다. 노인의 팔엔 마법의 운용을 막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화형대에 묶인 노인 앞에 까마귀 가면을 쓴 사제가 긴 두루마리를 들고 나타나 그의 죄를 낱낱이 고했다. “죄인 알투지우스 제로는 지식의 수호자라고 해야 할 마법 학교의 교수임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지식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타락, 재앙의 추종자의 일원으로서 지금까지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상관인 대 마그누스를 살해한 것을 필두로......” 알투지우스는 눈을 감은 채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뭐라고 하건 그의 말을 들을 리도 없기도 하고 소리를 질러봐야 꼴볼견에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적어도 죽는 순간엔 유서 깊은 에어푸르트의 학생이자 교육자로서 명예롭게 죽기를 원했다. 비록 까마귀 가면을 쓴 하수인이 지금 이 순간에도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붙여가며 자신을 능멸하고 있지만 그는 의연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한 가지 미련은 있었다. 그는 가늘게 실눈을 뜨고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 가운데 아는 얼굴을 찾았다. ‘사라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회오의 관에 홀로 틀어박혀 소문을 듣지 못했거나 아니면 김성철이란 사내가 데리고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에 알투지우스 제로에게 정화의 불로 심판하는 형을 내리도록 하겠다.” 잠시 잊고 있던 형리의 사형 선고가 귀에 생생하게 들어왔다. 알투지우스는 낮은 한숨을 내쉬고 자신을 응시하는 자들을 바라봤다. 갖가지 색깔을 입힌 교복을 입은 학생들, 인기 없는 학과의 교수들, 이름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한 두 번은 교정을 거닐면서 마주친 얼굴들이다. 그런데 알투지우스는 그들의 얼굴에 무기력하고 우울한 절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새삼스레 발견했다. 지난 몇 년간 끝없는 쇠락으로 인한 결과인지 아니면 문언 그대로의 멸망에 직면한 공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알투지우스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평생을 봐왔던 학교는 보다 명예롭고 가치있고 그리고 오만했다. 굳게 닫힌 알투지우스의 입이 열린 건 그의 사형선고가 울려퍼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왜 다들 그런 썩어빠진 동태 눈알로 보고 있는 게냐!” 알투지우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죽어가는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였다. “내가 죽어도, 학교 안에 있을 재앙의 추종자 나부랭이가 죽어도 에어푸르트는 끝나지 않는다. 너희들 또한 에어푸르트의 자랑스런 학생이자 교육자가 아니던가? 저 대마법의 문이 닫히더라도 에어푸르트는 끝나지 않는다! 에어푸르트라는 이름을 심장에 새긴 자가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는 한!” 알투지우스의 일갈은 남아 있는 자들의 수치심을 자극했다. 그들은 부끄러운 얼굴로 바닥을 바라보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알투지우스는 고개를 돌려 형장 구석에 자리를 잡고 거만하게 앉아 있는 이단심문관을 노려보았다. 이단심문관은 늘 그렇듯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알투지우스는 그런 이단심문관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며 소리 없이 뻥긋 거렷다. “못난 놈.”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그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는 이단심문관의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이단심문관의 손이 올라갔다. 그런데 그 순간 하늘 아래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하늘을 가리켰다. “저걸 봐! 공중함대야!” “인간제국의 깃발이다! 인간제국의 공중함대가 이곳에 당도했어!” 거대한 쟁반을 연상케 하는 공선이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것을 필두로 모두 6척의 거대한 공선이 차례차례 차원문을 뚫고 황금 도시의 상공 위에 출현했다. 인간제국의 힘을 상징하는 막강한 공중함대의 출현이었다. 그 기함 뱅가드의 함교엔 인간제국의 실력자 드미트리 메디오프가 거만한 눈으로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 보고 있었다. “여기에 세계의 적이 나타났다고? 간도 크군. 마계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얼굴을 들이미는 거지?” 그는 지휘방을 힘차게 휘두르며 일갈했다. “육전대를 파견해 도시를 봉쇄해라!” 같은 시각, 로버트 단턴의 서재 안에선 한 사내가 그 광경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김성철이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숨겨진 비밀 통로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는 에어푸르트 지하에 숨겨진 거대한 공동, 그 중심에 자리 잡은 차원문을 한 눈에 담았다. 차원문의 시동장치엔 몇 구의 시신이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김성철은 그 수많은 시체 가운데 중앙에 쓰러진 로버트 단턴의 시체로 다가가 그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잡아 뜯었다. 차원문의 시동 열쇠다. 자수정으로 만든 열쇠를 차원문의 시동장치에 넣자 차원문을 둘러싼 원형의 석판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석판의 회전은 점점 빨라지며 차원문 중앙에 공간의 균열을 일으켰다. “우... 정말 저지를 거야?” 품속의 베르텔기아가 물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원문 너머를 응시했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다. 나보다는 악마가 수월한 상대거든.” 김성철은 그 균열 너머에서 낯익은 붉게 타오르는 대지의 화염을 엿보았다. “크르르르르르!” 아울러 먼곳에서 들려오는 야수의 울음소리 또한 들을 수 있었다. “…….” 김성철은 차원문을 가동시킨 채 공동을 빠져나갔다. 형장에선 막 형이 집행되려고 하고 있었다. 까마귀 가면을 쓴 자들이 장작에 기름을 붓고 있었고 횃불을 든 집행인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이단심문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올렸다. 그가 손을 내리는 순간 알투지우스의 밑에 쌓아올린 장작에 불이 붙을 것이다. 곧 이단심문관의 손이 내려갔다. 횃불이 장작 아래 떨어졌고 불길은 검은 연기를 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알투지우스는 두 눈을 감고 죽음을 준비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알투지우스의 수염은 물론 피부까지 휘날릴 정도의 강풍이 형장에 불어 닥쳤다. 기세 좋게 타오르던 불길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졌고 형장 주변은 일순 정적에 잠겼다. 한 학생이 용기를 내어 바람이 불어온 방향을 응시했다. “저.. 저 사람은?!” 연금학파의 학생 중 하나가 손가락으로 의문의 사내를 가리켰다. 다 떨어진 야전상의에 허름한 청바지를 걸친 그 사내는 적어도 연금학파 사이엔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오늘은 평소에 들고 다니지 않았던 물건을 하나 들고 있었다. 긴 자루를 지닌 아름답고 경이로운 망치를. “누구냐!” 이단심문관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김성철이 움직였다. 그의 발걸음은 빠르지도 늦지도 않았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덤벼들 수 없는 거대한 위용을 지니고 있었다. 번쩍이는 갑주를 입은 이단심문관의 병사들이 주저하자 하사관과 장교들이 일갈했다. “뭣들 하느냐! 저 자를 막아라!” 불호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창칼을 빼들고 김성철 앞을 막아섰다. 퍽! 둔탁한 소리가 형장 위로 울려퍼졌다. 사람들은 하늘 위에 떠오른 십 수 명의 병사들을 볼 수 있었다. 단 한 방에 수십 명이 나가떨어진 것이다. 김성철은 마치 무인지경을 해치듯 병사들을 뚫고 앞으로 전진했다. 그 모습을 본 구경꾼 하나가 무언가를 떠올리고 소리 높여 외쳤다. “저.. 저건 세계의 적이다!” 그 한 마디는 모든 이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병사들은 더 이상 장교의 독려에도 움직이지 않았고 군중들은 뒷걸음질 쳤고 형장의 형리들은 앞다투어 화형대에서 뛰어내렸다. 오직 한 명 이단심문관만이 오롯이 일어서 김성철의 앞길을 막았다. “누가 감히 신성한 질서신의 법정을 어지럽히는가!” 그에 대한 김성철의 답례는 망치 한 방이었다. 퍽! 이단심문관의 상반신이 그대로 으깨져 지면에 처박혔다. 하지만 이단심문관은 질서신의 가호를 받는 자. 성스런 힘으로 뭉쳐진 결정체다. 부서진 그의 시신은 빛나는 광휘속에 제 모습을 갖추며 부활했다. 정화교단의 병사들이 그 거룩한 광경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오오! 보라! 이단심문관 마그누스 막시마님께서 신의 은총을 받으셨다!” 하지만 단순히 되살아나는 것만으로 문제의 원인을 막을 순 없는 법이다. 김성철은 마그누스 막시마의 부활해 아주 단순한 방법으로 화답했다. 퍽! 퍽! 퍽! 죽을 때까지 후려치는 것이다. 마그누스 막시마가 마지막에 본 것은 불합리한 너무나도 불합리한 망치질과 거기에 담긴 힘이었다. 마그누스 막시마는 일곱 번 부활했으나 더 이상 살아나지 못하고 납작한 쥐포신세가 되어 절명했다. ‘역시 이단심문관들은 바퀴벌레 같다니까.’ 이단심문관을 때려죽인 김성철은 이제 형장에 묶인 알투지우스를 향해 나아갔다. 어느 누구도 그를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알투지우스는 놀란 눈으로 김성철을 바라보았다. “다... 당신은... 세계의 적인가?”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퉁명스레 말했다. “그런데 그게 뭐가 중요하오?” 단순한 한 마디였다. 알투지우스는 너무나도 당당한 그 한마디에 어이없어하면서도 미소 지었다. 그런데 아직 위협은 끝나지 않았다. 인간제국의 육전대가 순간이동 혹은 작은 공선을 타고 속속 형장으로 강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기! 세계의 적이 있다!” “모두 전력을 다해 막아라!” 수백 명에 달하는 정예 전사와 마법사들이 김성철을 노리고 모여들었다. 알투지우스는 그들을 바라보며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젠장. 날 버리고 그냥 가시오. 당신이라면 적어도 내 손녀는 살릴 수 있겠지? 안 그렇소?” 이에 김성철은 알투지우스의 결박을 풀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누구도 내가 하려는 것을 막을 순 없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학교 너머에서 소름끼치는 울음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졌고 그를 신호로 메뚜기 떼를 방불케 하는 검은 무리들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차원문을 통해 소환된 마계의 첨병들이다. 기세 좋게 김성철을 포위하던 공중함대의 병사들은 서둘러 방어태세를 갖추며 소리쳤다. “마족이다! 마족이 왔다! 경보를 울려라!” 급박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에어푸르트 경내는 거대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 틈을 타 김성철은 알투지우스를 데리고 홀연히 사라졌다. “세계의 적! 넌 도망 못 간다!” 김성철의 뒤를 쫓는 자가 하나 있었다. 가족을 잃은 카즈 알메이라다. 그는 일족에게 전해 내려오는 안개 변신, 일명 미스트폼을 구사하여 김성철을 추적했다. 하지만 겨우 안개로 변한다고 해서 김성철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김성철이 가볍게 팔 가라즈를 휘두르자 안개는 둘로 갈라졌고 다시 뭉치지 못했다. 안개는 곧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고 바닥에 쓰러졌다. 방해꾼을 모두 제거한 김성철은 이제 알투지우스와 함께 천공학파의 회당에 갔다. 알투지우스는 약속을 지켰다. “당신이 누구든 상관하지 않겠소. 설령 당신이 악마 그 자체라고 해도 난 당신을 도왔을 것이오.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친 건 누가 뭐래도 당신밖에 없으니.” 알투지우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팔에 묶인 마력억제 수갑을 풀었다. 그의 몸에 마법의 힘이 다시 돌아온 것을 느낀 후 그는 손끝으로 회당의 천정을 가리켰다. “글레어.” 그의 손끝에 뻗어 나온 섬광은 천정에 바른 회벽칠을 가볍게 벗겨냈다. 흙먼지가 아래로 부수수 떨어져 내리는 가운데 김성철은 회벽칠 아래 숨겨진 빛나는 성좌들의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알투지우스는 모든 성좌를 밝힌 후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이 천공학파에 전해 내려오는 비전이오.” 알투지우스가 다시 한 번 글레어를 시전했다. 그의 손끝에서 나온 섬광은 보석으로 장식된 성좌에 적중했고 성좌를 충만한 광휘로 뒤덮게 했다. 이윽고 빛을 머금은 성좌는 그 빛을 토해내듯 다른 성좌로 향해 빛을 폭사했다. 전갈 무늬의 성좌에서 유니콘 모양의 성좌로, 유니콘 모양에서 조개 무늬의 성좌로. 천정에 새긴 12개의 성좌 모두가 빛으로 충만해졌을 때 김성철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비밀이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듯한 기이한 격정에 사로잡혔다. [ 원시의 빛 ] 천공학파의 진정한 비전이 손에 들어왔다. ======================================= 20. 원시의 빛 (3) “마음을 놓지 마시오. 난관은 이제부터 시작이니.” 알투지우스가 경고했다. 김성철은 곧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지식의 해일이 그의 의식을 덮쳤다. 그 속에서 김성철은 여러 가지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먼저 그는 무한한 우주를 유영하는 혜성이 되었다. 얼음보다 차갑고 완벽한 적막에 잠긴 세계 속에서 그는 끝나지 않는 여정이라는 것이 주는 두려움을 알게 되었다. 풍경이 갑작스레 바뀌었을 때 그는 이름 모를 행성의 암석이 되어 있었다. 암석의 시간은 빨리 갔다. 해와 달이 시계추처럼 빠르게 가고 세상은 끝없는 빛과 어둠의 순환을 계속하는 것으로 보였다. 느닷 없는 붕괴 후 풍경은 바뀌었지만 시간의 흐름은 변함이 없었다. 비슷한 형태의 잡다한 체험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수많은 그리고 잊지 못할 환상의 세계에서 김성철이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거대한 태양의 존재였다. 어느 순간 그는 작렬하는 태양 앞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것은 태양 같기도 하고 태양과 닮은 다른 별 같기도 했다. 별은 처음엔 불게 타오르는 듯 했으나 눈이 멀 것 같은 빛 속에서 편견이 녹아내리자 그 빛은 푸른색으로 보이기도 했고 눈처럼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순백색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색이 어떻든 간에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타오르는 별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한한 빛. 원시의 힘을 간직한 그 순수한 빛을 보는 것으로 김성철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힘의 원천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뒤로도 잡다한 지식이 환각을 일으키며 다른 체험을 강제했지만 김성철이 기억하는 것은 오직 빛. 원시의 빛 하나뿐이었다. “…….” 김성철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부릅떴다. 머릿속에 밀려들던 지식의 격류는 사라지고 이제 그는 현실 세계 속에 있었다. “빛을 보았소?” 그의 옆을 지키고 있던 알투지우스가 부드럽게 보았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빛이었소?” “아주 밝은 빛.” “당신은 거기서 무엇을 느꼈소?” “모든 것을 태워버릴 수 있는 압도적인 힘.” 김성철의 말에 알투지우스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빛은 보는 이의 입장에 따라 해석이 분분하다고 알려져 있지. 내가 본 그 빛은 진리 그 자체였소. 하지만 당신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겠지.” 알투지우스는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켜 여러 개의 마법진을 띄우더니 알 수 없는 주문을 중얼거렸다. 천공학파의 회당에 빛나는 12개의 성좌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희미해지더니 그 안에서 하나의 책이 나타났다. 알투지우스는 지팡이로 그 책을 천천히 내려앉게 해 받아든 후 그것을 김성철에게 내밀었다. “받으시오.” “이건...?” “원시의 빛. 당신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에어푸르트 천공학파의 비전이오.” “고맙습니다.” 김성철은 그 책을 받아들었다. 빛나는 문자가 동공 위에 떠올랐다. <원시의 빛 > 등급 : 전설 분류 : 마법서 효과 : 원시의 빛 습득(천공학파) 비고 : 당신이 보았던 빛은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의 것들을 담고 있다. 제한 : 직관력 500 필요 : 빛 앞에 설 것. 아직 천공학파의 비전은 아직 그가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 책을 보기 위해선 두 개의 조건이 필요하다오. 하나는 언제나 강조되는 직관력. 500 이상의 수치가 필요하오.” 까마득한 숫자다. 과연 천공학파의 비전이라고 할 정도의 요구치. “7위계 마법입니까?” 김성철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알투지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시는군. 세계의 적답게.” “다른 조건은 뭡니까?” “그건 이미 달성했소. 당신은 빛을 봤잖소?” 알투지우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약간의 걱정을 담아 바깥쪽을 응시했다. 먼 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소리가 들려왔다. 마족 북소리, 공중 함대의 마법 포격, 인간들의 노호성과 마족들의 포효. 또 김성철은 창가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붉은 빛을 띤 것 또한 보았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찰나의 외유로 생각했던 체험은 알투지우스의 말 대로 만만치 않은 시간을 소모했던 것이다. “내 역할은 끝났소. 남은 건 이제 당신에게 달렸소.” “고맙습니다.” “천만의 말씀. 그나저나 사라사는 어디에 있소? 안전한 곳에 있다는 말은 들었소만.” “그녀는 이미 도시 외곽에 있습니다. 내가 직접 안내하지요.” 김성철은 애병 팔 가라즈를 꺼내며 앞장섰다. 알투지우스는 그의 뒤에 서며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설마하니 당신이 세계의 적이었을 줄이야. 비범하다곤 생각했지만 그렇게까지 엄청난 사람인지는 몰랐소.” “난 평범한 사람이오.” 김성철은 천공학파의 문을 열어젖히며 말했다. 문을 열자 아수라장이 된 에어푸르트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늘을 뒤덮은 마족과 그에 맞서는 인간제국의 함대가 명운을 건 결전을 벌이고 있었다. “키이이이이!!!” 김성철과 알투지우스는 발견한 괴조 무리가 날카로운 발톱을 아래로 세우며 덮쳐왔다. 퍽! 김성철이 망치를 휘두르자 괴조들은 피떡이 되어 지면에 우수수 떨어졌고 단 한 마리만이 살아남아 하늘 위로 다시 상승했다. 그런데 그 괴조의 등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청객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김성철과 알투지우스였다. “꽉 잡으시오.” 김성철은 괴조의 목을 조르며 옆으로 틀었다. “키이이이이이!” 괴조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김성철이 원하는 곳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김성철은 계속해서 괴조의 목을 움켜쥔 채 괴조를 자유자재로 조종했다. 알투지우스는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물었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거요?” “마계에서 오래 구르다 보니 저절로 배워지더군요.” 그때 와이번을 탄 비룡기사 편대 하나가 괴조를 지나쳤다. 황금투구를 쓴 자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경악에 물든 눈으로 김성철과 알투지우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괴조를 쫓을 순 없었다. 마족 한 마리가 공중함대의 전함의 갑판에 난입해 백병전을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적을 잡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지만 모든 군대엔 임무보다 중요한 사명이 있었다. 바로 군대의 보존이다. “빌어먹을! 끝도 없이 밀려오는군. 대체 어느 정도 규모의 차원문이기에 이렇게도 많은 마족이 몰려온단 말인가?!” 인간제국의 제2함대의 함대 사령관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바로 눈앞에 온 세계가 죽기를 바라마지 않는 세계의 적이 나타났건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파리 떼 같은 마족들이나 상대하고 있다니. 단순한 마족의 무리라면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겠지만 상대방은 오랫동안 준비한 마계의 정예사단으로 보였다. 병력의 질이나 수적인 면에서 평범한 병사들로는 대적하기 어렵다. 인간제국의 정예인 공중함대의 전력 정도는 되니까 어떻게든 호각지세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크크크크크! 네 놈이 우두머리냐!” 기함의 갑판 위에 육중한 체구를 지닌 발록 한 마리가 올라탔다.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레이피어를 꺼내 마족에 맞서며 일갈했다. “빌어먹을! 빨리 육전대를 보내 차원문을 폐쇄해! 놈들이 더 이상의 증원을 부르기 전까지!” 발록의 도끼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드미트리는 레이피어로 육중한 도끼날을 받아내며 힘차게 기합을 내질렀다. 전투가 이렇게 혼전 양상을 띠는 가운데 김성철과 알투지우스를 태운 괴조는 목적했던 도시 외곽에 내려앉았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목적지점에서 김성철이 괴조의 목을 비틀어 추락시킨 것이지만.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괴조의 시체를 뒤로 하고 김성철과 알투지우스는 낡은 사당 앞으로 걸어갔다. 그곳엔 얼굴의 반이 시체로 변한 소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사라사였다. 알투지우스는 흉측하게 변한 손녀는 애틋한 눈으로 보더니 그녀를 감싸 안았다. “고생 많았다.” 알투지우스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내가 무슨 고생을. 고생은 할아버지가 다 했지.” 사라사는 의연하게 할아버지의 등을 잡은 손을 움켜쥐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김성철이 말했다. 그는 영혼 창고에서 금괴와 보석이 담긴 자루를 꺼내 알투지우스에게 내밀었다. “이게 다 뭐요?” “수업료요.” “하지만 이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내 돈도 아니니.” “그렇다고 하나...” “금괴를 팔 땐 금괴 표면에 새겨진 발행처를 지워두는 게 좋을 겁니다. 운이 나쁘면 상인 연합의 암살자가 추적할 수도 있으니.” 김성철은 그 말을 남기고 앞으로 걸어갔다. 알투지우스가 그를 불러 세웠다.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소?” 김성철은 멈춰 섰다. 하지만 돌아서진 않았다. 알투지우스는 그의 등을 응시하며 질문을 던졌다. “당신처럼 강한 자가 어찌하여 나 같은 자 밑에서 마법을 배우려고 한 것이오?” “마족의 왕 해서니우스 맥스를 처치하려면 마법이 필요하오. 단지 그뿐이요.”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신입 소환자 행세를 하며 에어푸르트에 입학까지...?!”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터무니없다. 하지만 저 사내라면 설득력이 있다. 알투지우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머리를 굴렸다. 잠시 후 그의 뇌리에 무언가 떠올랐다. “당신의 마력과 직관력은 내가 본 것과 일치하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수치는 내 현재 상태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해서니우스 맥스를 쓰러뜨리기 위해선 당분간 수련을 해야겠지만.” “그렇다면 마계 최전선에 있는 내 아들을 찾아가시오.” “당신의 아들?” “그 녀석은 당신처럼 세상을 구하겠다고 마계 최전선에서 마력을 올릴 수 있는 극의를 찾아다니고 있소. 당신이라면 굳이 알아서 어련히 성장하겠지만 그 녀석의 작은 지혜를 빌리면 보다 빠른 성장이 가능할지도 모르겠구려.” “데커드라.” 김성철이 살짝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는 성장에 관한 것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알투지우스는 책 한 권과 그리고 자신의 끼고 있던 반지를 건넸다. “이 책은 부끄럽지만 내가 저술한 것이오. 재능 있는 제자가 나타날 때 가르쳐주려고 남긴 물건이지요. 그리고 이 반지. 이 반지는 데커드를 찾으면 보여주시오. 그렇다면 당신이 누구든 당신 말을 들어줄 것이오.” 김성철은 알투지우스의 책과 반지를 받아들고 목례를 했다. 사라사가 할 말이 있는 듯 앞으로 나섰다. “지금까지 무례를 저지른 거 전부 사과드리죠. 그리고 이 아이 돌려드릴께요.” 그녀의 손엔 하늘 다람쥐가 놓여 있었다. “뀨뀨.” 이제는 사라사의 손에 익숙해진 듯 더 이상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 눈치였다. 사라사도 다람쥐와 헤어지기 싫은 듯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녀를 노려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다람쥐를 잘 돌봐줘라.” “네? 안 데려가는 건가요?” 사라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실례하리다.” 김성철은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폭풍과 같은 기세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한줄기 광풍이 알투지우스와 사라사를 거칠게 휩쓸고 지나갔다. “할아버지. 세상의 소문이란 믿을 게 못 되는 건가봐요.” 사라사 조용히 말했다. “어떤 점에서?” “세계의 적은 누구보다 인간을 증오한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그는 우리에게 이토록 잘해주는 거죠?” “글쎄다.” 알투지우스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김성철이란 사내에 대해 조금을 알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세상의 평가가 잘못됐을 지도 모르겠군.” 세계의 적이라 불리는 사내는 마족과 비룡기사들이 혈전을 벌이는 전장의 한 가운데로 돌입하고 있었다. 그 앞엔 수천 수만의 대군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 사내는 마치 그 군세의 한 복판은 무인지경 지나듯 유유하게 돌파했고 활짝 열린 차원문 안으로 들어갔다. “세계의 적이 차원문 안으로 진입했다!” 인간제국의 병사들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김성철을 막을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한 가지 변화가 있다면 김성철이 차원문에 들어간 이래 더 이상의 마족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 “…와라.” 김성철은 차원문 앞에 진을 친 수천 마리의 마족들 앞에 우뚝 서서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떤 마족도 감히 김성철에게 덤비려 하지 않았다. 에어푸르트의 차원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능을 잃었다. * 황금도시에 일어난 사건은 이계 전체를 격랑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마족들의 준동과 세계의 적의 재출현. 이계의 권력자들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한편 그 권력자 중 하나. 암살교단의 교주인 샤말 라지푸트는 만신창이가 된 채 실려온 젊은 암살자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카즈 알메이라. 심하게 당했군.” 카즈 알메이라는 어깻죽지부터 팔 전체가 단 번에 잘려나간 처참한 부상을 입었다. 조금만 깊었어도 목부터 두 동강이 나고 남을 상처였다. “…….” 카즈 알메이라는 고개를 숙인 채 교주에 부복했다. 잘려나간 그의 상처 부위엔 문어의 다리를 연상케 하는 기이한 촉수가 꾸물거리고 있었다. “너는 좀 더 수련을 쌓아야 한다. 너는 내가 당했을 때 암살교단 전체를 이끌 재목이기에.”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널 위해 사람 하나를 붙여주겠다.” 샤말 라지푸트가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여성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즈 알메이라는 놀란 눈으로 그 여성을 노려봤다. ‘누구지? 이 녀석. 4대 가문의 후계자 중에 이런 놈은 없었는데.’ 그의 의문은 샤말 라지푸트의 말에 의해 해소됐다. “그녀는 회귀자다.” “회귀자...?!” “그래. 앞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미래에서 온 회귀자지. 아직 힘은 약하지만 잘만 키우면 앞으로 우리를 위해 대단한 일을 할 존재다.” 샤말 라지푸트는 손짓을 해 그녀를 카즈 앞에 서게했다.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카즈 알메이라 앞에 서서 암살자 답지 않은 단아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아무개라고 합니다.” ======================================= 21. 마계 최전선 (1) 마계라 불리는 마족의 땅은 먼 북쪽, 얼음과 불이 공존하는 땅에 자리 잡고 있다. 마족들은 나면서부터 사악하고 무자비한 존재로 오직 힘만을 숭상하고 속임수를 미덕으로 여기는 족속들이다. 마족들은 평상시엔 자기들끼리 서열 투쟁을 하느라 자기들의 영내에 머물러 있지만 간혹 마족들 가운데 절대자가 나타나면 그들은 무리를 지어 조직적으로 대륙을 침공한다. 해서니우스 맥스는 수백 년 만에 나타난 마족들의 진정한 왕이자 마신이 선택한 용사로 알려진 존재로 강력한 힘과 사악한 꾀로 마족들을 규합, 재앙의 예언서에 기술된 첫 번째 재앙 그 자체가 되었다. 하지만 인간들과 다른 이계의 종족들이 마족들의 준동을 가만히 보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철혈기사단, 폭풍전선을 필두로 한 강력한 힘을 갖춘 무력집단이 마계의 입구인 대륙 북부에 포진했고 이들은 마계의 접경선에 수많은 요새를 사슬망처럼 건설해 마족들의 침입을 막고 있었다. 이 마계와 인간계가 충돌하는 지점을 세상에서는 마계 최전선이라고 부른다. “…….” 김성철은 그 마계 최전선에 이르렀다. 수많은 악마를 해치우고 얼음과 불이 공존하는 죽음의 땅을 지나 이곳에 발을 들인 것이다. ‘결국 이곳으로 돌아왔군.’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눈에 익은 정경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기분 나쁜 적막에 쌓인 살풍경한 대지였다. 북쪽 먼 곳에서 천둥 같은 굉음이 들려오더니 지반이 가볍게 흔들렸다. 지독한 유황 냄새가 바람결에 실려 코끝을 스친다. 김성철은 산비탈을 따라 인간의 영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품속의 베르텔기아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김성철은 성큼 성큼 앞으로 걸으며 대답했다. “휴식을 취한 후, 마계로 다시 가 악마들과 싸운다.”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지만 김성철은 먼저 에어푸르트에서 얻은 마법의 힘을 직접 시험해보고 싶었다. 마법사로서의 자신이 악마들에게 어디까지 통하는지 말이다. 성장을 하려는 자는 자신의 한계가 어디이고 단점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김성철은 얼어붙은 바다가 바라보이는 바위산의 중턱에 올랐다. 멀리서 볼 땐 흔한 바위산 중 하나처럼 보였지만 가까이가자 그을린 흔적, 잿빛 천 아래 가려놓은 땔감, 여기저기 널린 용도불명의 쇠붙이 등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김성철은 그곳에 이르자마자 마치 제 집 안 방인 양 숨겨져 있는 땔감을 찾고 바닥에 널린 쇠붙이를 이어 붙여 그럴싸한 요리대를 만들어냈다. 이곳은 김성철이 오랫동안 애용한 캠프 중 하나였다. 인간에게도 악마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그는 마계 최전선에 이와 비슷한 자신만의 은신처를 여러 개 만들어두고 돌아가며 휴식을 취하곤 했다. 물론 좋아하는 요리도 이곳에서 만들었다. 그는 캠프 너머 거대한 바위로 입구를 막은 동굴 앞에 섰다. 침입 흔적은 없었다. 마계 갯강구라 불리는 자그만한 벌레들이 화들짝 놀라 달아날 뿐. 김성철은 바위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한 후 두 손으로 바위를 움켜잡았다. 손잡이 따위는 필요 없었다. 푹! 그의 손가락이 꽂히는 곳이 바로 손잡이니까. 김성철은 바위에 손가락을 꽂아 넣은 채 잠시 대기하더니 이윽고 그 거대한 바위를 번쩍 들어올렸다.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아.” 베르텔기아는 머지 않은 곳에서 파닥거리며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쿵! 입구를 막은 바위가 약간 떨어진 자리에 내려 앉았다. 지면이 가볍게 흔들릴 정도의 묵직한 충격이 발밑을 통해 전해졌다. 김성철은 요리대에서 불타는 장작 하나를 꺼내 횃불로 삼아 모습을 드러낸 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엔 도기를 빚어 만든 갖가지 항아리로 가득 차 있었다. 김성철이 손수 진흙을 이겨 만든 장독들이다. 그는 그 장독 중 유독 큰 돌멩이를 올린 장독 앞에 서서 돌멩이를 치우고 뚜껑을 열었다. 장독 안엔 인간 어린 아이만한 크기의 뿌리식물이 벌겋게 절여진 채 익어가고 있었다. 김성철의 입안에 침이 고였다. “이.. 이건 만드라고라?!” 어느새 동굴 안으로 따라들어온 베르텔기아가 장독 안에 담긴 괴생물체를 보고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으로 김치를 만들면 별미가 따로 없지.” 그는 만드라고라 김치의 절인 잎사귀를 하나 떼 입안에 넣고 그 맛을 음미했다. [ 이 요리의 점수는.... 12점! ] 점수는 개판으로 나왔지만 김성철의 입맛엔 어떤 진미보다 황홀한 맛이었다. “음.” 그가 눈을 감고 맛을 음미하는 동안 베르텔기아는 도망치듯 동굴을 빠져나가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그 귀한 걸로 저렇게 이상한 음식을 만들다니...” 김성철은 활활 타오르는 조리대에 불린 쌀을 넣고 밥을 지었다. 다른 반찬은 필요 없었다. 그는 마계 경치를 지켜보며 만드라고라 절임을 반찬 삼아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배불리 밥을 먹은 뒤 그는 넓적한 바위에 걸터앉아 눈을 감았다. 마계에서 불어오는 유황 섞인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가볍게 흔들었다. 잠깐의 휴식이 끝난 후 김성철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곧장 마계로 향했다. 마계로 통하는 회랑에 들어서자 하등한 악마들이 그의 앞을 막았다. 임프라 불리는 저능한 생명체다. 털 없는 원숭이 같은 작은 대가리 안엔 오직 식욕과 악의만이 가득 차 있다. “키이이이이!!!” 임프들이 날카로운 꼬챙이를 찌르는 시늉을 하며 위협을 가했다. “으으... 난 저런 거 딱 질색인데.” 어느새 원래 크기로 돌아온 베르텔기아는 임프들이 닿지 않을 정도로 높은 곳으로 날아올랐다. 김성철은 다가오는 임프들을 노려보며 조용히 손가락을 뻗었다. ‘글레어.’ 그의 손끝에서 섬광이 폭사되며 임프의 몸통에 적중했다. “키이이이이이!!!!!” 섬광에 맞은 임프는 몸이 타들어가며 갖은 몸부림을 치며 죽었다. 그러자 위협을 가하던 임프들이 일제히 김성철을 향해 달려들었다. 쉭! 쉭! 녹이 묻은 치명적인 꼬챙이가 김성철의 몸을 향해 날아들었다. 김성철은 어렵지 않게 그 창을 피하며 연거푸 글레어를 시적했다. 치이이익- 치이이익- 여기저기서 빛에 꿰 뚫린 임프들이 버둥거리며 죽어갔다. 연속해서 열 마리의 임프를 죽이자 기세 좋게 달려들던 임프들도 마침내 멈칫거렸다. 김성철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슬슬 모습을 드러내는군.’ 쿵! 땅이 갈라지며 그 아래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겉으로 드러난 크기만 약 5미터. 생선 대가리에 남성의 상반신을 지닌 기괴한 모습의 거대 악마였다. “갸아아아아아!!!!” 심해 마종. 마계의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 중 하나다. 김성철이 약해빠진 임프들을 처치한 것은 바로 이놈을 불러내기 위함이었다. 심해 마종의 지능은 물고기수준이지만 강한 힘과 민첩성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악명이 높다. 왕실 마법사들도 고전을 면치 못한다는 이 괴물을 마법만으로 죽일 수 있다면 해서니우스 맥스에게도 유의미한 일격을 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김성철의 판단이었다. “갸아아아아아!!!” 심해 마종은 상반신만을 드러낸 채 천지가 떠나갈 것 같은 포효를 내질렀다. 그 포효가 어슬렁거리던 임프들은 혼비백산 그들이 숨어 있던 좁고 비좁은 굴로 도망치듯 사라졌고 이제 황무지엔 김성철과 심해 마종만이 남았다. 텅 빈 생선의 눈알이 김성철을 노려봤다. 이윽고 하늘 높이 들어 올린 거대한 팔을 내려쳤다. 쿵! 비늘이 덮인 주먹이 지면을 강타하자 지축이 흔들리며 바위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저기, 우리 도망가는 게 좋지 않을까?” 어느새 김성철 등 뒤에 딱 달라붙은 베르텔기아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 김성철은 오히려 앞으로 한 발짝 걸어갈 뿐이었다. “으... 이 사람과 함께 하다가는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르겠어.” 베르텔기아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크기를 축소 가장 안전해보이는 김성철 상의 포켓 안으로 자진해서 들어갔다. ‘과연 어디까지 통할 것인가.’ 김성철은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마력이 200도 채 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고 그가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마법 또한 3위계에 속하는 마법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심해 마종에 맞서는 것은 직접 자신의 한계를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자 위함이다. 김성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고기의 눈동자가 김성철의 궤적을 쫓았다. 김성철은 옆으로 달려가며 심해 마종을 향해 손가락을 뻣었다. ‘글레어.’ 창과 같은 빛줄기가 그의 손가락 끝에서 뻗어 나오며 심해 마종의 팔에 적중했다. 치이이익- 심해 마종의 피부에 거무스름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갸아아아아아!!!” 심해 마종은 포효를 지르더니 미친듯이 팔을 휘두르며 김성철을 공격했다. 쿵! 쿵! 쿵! 쿵! 지축이 들썩이고 파편이 분수처럼 솟았다. 하지만 김성철에게 그런 심해 마종의 공격이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 산책을 하듯 느긋한 움직임으로 심해 마종의 공격을 모두 회피하며 심해 마종의 신체 곳곳에 자신의 유일한 공격 마법을 시험했다. 팔, 다리, 몸통, 얼굴, 그리고 눈알. 치이이익- 빛줄기가 심해 마종의 생선 눈알을 지졌다. 생선의 눈꺼풀은 아래에서 위로 감긴다. 심해 마종으로선 눈 한 번 떴다 감은 것만으로 김성철의 공격을 가볍게 상쇄시켰다. ‘아직 너무 약하군.’ 알고는 있었지만 생채기조차 내지 못한다는 사실은 김성철에게 있어 우울한 소식이었다. 좀 더 강한 마력이 필요하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뒤로 물러났다. 멀리 심해 마종이 포효를 하며 지면을 두들겼다. 그것이 승리의 포효인지 아니면 단순히 본능에 의한 위협의 연장선인지 김성철은 알지 못한다. “어이. 베르텔기아.” 김성철이 품속에 있던 베르텔기아를 억지로 끄집어냈다. “안 들려! 안 보여!” 베르텔기아는 귀 막고 눈을 감고 있었던 모양이다. 책 주제에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는 문제지만 말이다. “정신 차려.” 김성철이 몇 차례 베르텔기아를 흔들자 베르텔기아는 그대로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응? 그 생선 대가리는?” “저기 있다.” 김성철은 멀리 포효하고 있는 심해 마종을 가리켰다. 베르텔기아는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김성철의 손아귀에서 흘러내리듯 쓰러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위험한 놀이는 이제 그만두길 바래.” “전혀 위험하지 않아. 그보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뭔데?” “네가 아는 연금 퀘스트 중에 마력을 크게 올려주는 것이 있나?” “연금 퀘스트?” 축 늘어져 있던 베르텔기아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원래 크기로 펑 하고 팽창했다. 그리고 기세 좋게 김성철 앞에 펄럭이며 달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창조술사의 길을 걷겠다는 이야기야?” “창조술사든 뭐든 좋아. 마력을 올릴 수 있는 퀘스트만 있다면.”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김성철은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작정이었다. 그것이 당면한 목표에 큰 상관이 없어 보이는 연금술사 관련 퀘스트라고 할지라도. 베르텔기아는 하늘 위에서 둥둥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생각을 거듭하다 이윽고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으음.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퀘스트라고 해봐야 몇 개 없어.” “그래?” “당신은 5레벨 연금 아이템을 만들었다고 해도 당신은 경험이 너무 부족해. 일단은 4레벨 이하의 모든 연금 아이템을 한 번씩 만들어보는 걸 추천할게.” “4레벨 이하의 연금아이템의 숫자는 모두 몇 개지?” “82개.” 까마득한 숫자다. “으음. 방금 그 말 취소하지.” 김성철은 시원하게 포기했다. 그러자 몸이 단 건 베르텔기아였다. “앗! 잠깐! 당신이 지금까지 만든 4레벨 이하 연금아이템의 숫자는 모두 12종이야. 즉 70종만 더 연성하면 된다는 이야기!” “그것도 너무 많은데.” “많은 게 아니야! 절대 많은 게 아니야! 연금술을 생활화하면 금방 달성할 수 있는 수치라고!” “으음...” 김성철은 미덥지 못한 눈치였지만 일단은 베르텔기아의 말을 따르기로 속으로 생각했다. ‘연성을 성공하면 소폭의 마력과 직관력이 상승하니. 기분전환 하는 기분으로 하루에 조금씩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하겠다는 것이 김성철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연금술에 관한 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목표에 불과하다. 김성철은 심해 마종과의 싸움을 벌인 직후, 한 사내를 찾기로 다짐하고 있었다. 알투지우스의 아들이자 사라사의 부친. 데커드라는 가명을 지닌 사내를. 그가 정확히 어느 정도 수준의 마법사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보통은 넘을 것이다. 강력한 알투지우스의 아들이니 말이다. 무엇보다 그 사내는 재앙을 막을 방법을 찾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필사적일 것이다. 자신의 힘을 갈고 닦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마치 8년 전의 김성철 본인처럼 말이다. ‘그는 폭풍전선의 용병마법사로 활동한다고 했었지?’ 폭풍전선. 철혈기사단, 바란아란 부족연맹과 더불어 대륙 북방의 3대 세력 중 하나. 다른 집단과 달리 드워프를 주축으로 하는 폭풍전선은 드워프의 막강한 축성술로 곳곳에 강력하고 유기적인 요새를 세워 마족을 침입을 최전선에서 막아왔고 현재는 쇠락한 철혈기사단을 제치고 북방 제일의 세력으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김성철은 드워프와 사이가 좋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는 드워프들이 신성시하는 팔 가라즈를 신전에서 훔친 전과가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본명을 쓸 수 없겠군.’ 드워프들은 그들에게 죄를 지은 존재의 이름을 원한록에 작성하는 풍습이 있다. 그 원한록의 첫 줄을 당당하게 차지한 이름은 다름 아닌 김성철이었다. ======================================= 21. 마계 최전선 (2) “어떤 가명이 좋을까.” 김성철도 가끔 고민을 한다. 그는 폭풍전선에서 쓸 가명을 두고 장고에 돌입했다. 일견 유치해 보이는 고민이지만 김성철에겐 의미 있는 고민이었다. 그는 이름에 힘이 깃든다고 믿고 있었다. 가령 김성철이란 이름은 아마도 세상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 그 자체만으로 이름엔 힘이 붙는다. 하지만 다른 이름, 이를테면 박아람이나 크릴 리갈 같은 이름을 선택한다면? 그냥 듣지도 보지도 못한 무명소졸 A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어때?” 베르텔기아가 고민하던 김성철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거절하겠다.” 김성철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베르텔기아의 색깔이 잠깐이지만 붉게 변했다. 그동안 김성철은 3가지 후보를 추리고 추려 손가락 끝으로 바위에 새겼다. 그 3개의 이름은 아래와 같았다. 에스퍼 김, 철인 김, 파브르 김. “우....” 베르텔기아는 야유를 보냈다. “뭐가 문제지?” “뭔가 좀 이상해. 게다가 대체 파브르는 뭐야. 혼자 따로 노는 느낌인데!” “네 아버지보다 훨씬 유명한 학자란다.” “그런 가슴 아픈 이야기는 그만해. 어쨌든 내가 보기엔 3개 다 별로야.” 김성철의 눈이 번득였다. “뭐가 문제지?” “아니, 왜 이름에 전부 김이 붙는 건데? 김 좀 빼면 안 돼? 애당초 가명을 쓰는 이유가 뭔데? 정체를 숨기기 위함 아니야?” 베르텔기아는 정신없이 파닥거리면서도 할 말은 다했다. “…….” 김성철은 침묵했다. 베르텔기아의 말에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 할 거 없으면 마법사다운 이름을 써. 어차피 폭풍전선인가 뭔가 하는 곳에서 마법사 행세 한다며?” “정확히 말하자면 연금술사 겸 마법사지.” “그럼 이름 끝에 ‘스’나 ‘트’가 붙는 이름이 좋겠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유명한 마법사들은 대부분 이름이 ‘스’나 ‘트’로 끝나니까 말이야.” 베르텔기아의 말을 들은 김성철은 즉시 자신이 아까 바위 위에 새긴 이름 뒤에 스를 덧붙이고 김을 지웠다. 그리고 3개의 이름을 더 기재했다. 바위 위엔 6개의 새로운 이름이 새겨졌다. 에스퍼스, 철인스, 파브르스. 에스퍼트, 철인트, 파브르트. 김성철은 턱매무새를 만지며 이름들을 입속으로 음미하며 어감을 확인했다. 한편 베르텔기아는 격노하고 있었다. “아니 왜 자꾸 그 이름들에 집착하는 건데? 3개다 별로라고!” “뭐가 됐든 에크하르트보단 나아 보이는데?” “으이고. 잘나셨어. 정말. 그럼 아예 칠영웅의 이름을 대는 건 어때?” “칠영웅?”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칠영웅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들의 이름엔 먼 고대로부터 이어진 힘이 깃들어 있다. 김성철은 머릿속으로 칠영웅의 이름을 떠올렸다. 데스포트. 칠영웅의 리더. 드라고만. 검의 극에 이른 자. 달타니어스. 무한한 힘의 도전자. 사자토스. 다구의 마법사. 백영. 기록 없는 암살자. 베스티아레. 메아리의 마법사. 가시옹. 영혼을 먹는 자. 이 중에 어떤 이름을 택하느냐. 김성철은 잠깐 동안 고민한 끝에 한 이름을 선택했다. “백영으로 하겠다.” “백영? 그 허연 천 같은 거 온 몸에 뒤집어 쓴 이상한 사람 말하는 거야?” “백영을 본 적이 있나?” “응. 하지만 멀리서 본 게 전부야. 말하는 건 들은 적도 없고. 다른 칠영웅처럼 그 인간도 정신병자라 멀쩡한 혓바닥 놔두고 필담으로 말하는 이상한 습벽이 있거든.” “그렇군. 그런데 어떻게 그를 볼 수 있었지?” 베르텔기아와 에크하르트가 칠영웅과 같은 시대를 살아갔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같은 시대를 산다고 해서 어떤 인물을 반드시보리라는 보장은 없다. 특히 칠영웅 정도 되는 당대의 위인들은 말이다. 이에 베르텔기아는 별 고민하지 않고 즉답했다. “칠영웅은 우리 아빠 가게 단골이었는걸. 싸움에 나서기 전에 항상 뭔가를 잔뜩 주문해놓고 그걸 사갔어.” “호오. 그래?” “응. 그래서 아빠가 자칭 팔영웅이라고 떠들고 다닌 거야.” “칠영웅이 뭘 사갔지?” “글쎄. 아주 어릴 때라 생각이 안 나지만 엘릭서 같은 포션 종류와 그리고 고화력 연금폭탄 같은 걸 사간 거 같아. 성질 더러운 땅꼬마 마법사와 기분 나쁜 여자는 마력 정수와 흑수정을 주로 사간 걸로 기억하고.” “그건 지금 내 힘으로 만들 수 있을까?” “만들 수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어.”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금술 자체엔 재미를 느끼고 있었지만 의미 없는 연금 아이템을 만드는 데는 진력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칠영웅이 애용할 정도의 아이템이라면 만드는 입장에서 목표의식을 가지고 부딪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베르텔기아의 말 대로 틈이 나면 연성을 하며 연금술의 기술과 지식을 높이는 쪽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다.’ 이름도 정했고 뜻도 정해졌다. 김성철은 황량한 바위산에서 내려가 멀리 보이는 요새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마계 최전선은 크게 4가지 영역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영역은 서쪽에 면한 평탄한 황무지 지대다. 모든 영역을 통틀어 가장 수비 범위가 많은 그 지역을 관할하는 것은 철혈기사단이다. 그들은 막강한 기동 요새와 높은 기동력과 강력한 힘을 지닌 기사들의 힘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지킨다. 두 번째 영역은 험준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 처진 산악지대다. 이 영역을 관할하는 것은 폭풍전선이다. 산맥의 자식이라고 자칭하는 드워프가 주축이 된 그 집단은 산맥 요소요소에 난공불락의 요새를 세워 마족들로 하여금 감히 쳐들어 엄두조차 낼 수 없게 만든다. 다음 영역은 산맥 아래 펼쳐진 나무의 바다다. 이 영역은 엘프 부족의 연합인 바란아란 부족연맹이 관할한다. 이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숲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과 같다. 적대적인 숲속에서 살아나간 마족은 지금까지 전무하다. 마지막 영역은 나머지 세 영역 뒤에 자리 잡은 후방 지대다. 엄밀한 의미로 최전선이라 할 수 없는 이 영역엔 인간제국의 파견 함대, 상인 연합의 용병단, 고대 왕국의 소드마스터 등 잡다한 지원세력으로 구성된 예비대가 자리 잡고 있는데 한때 대륙십삼걸 중 육걸, 변경백 마르틴 브레가스가 변경의 관리자로 모든 파견 군대에 대한 지휘권을 지니고 있다. 김성철은 이중 후방지대에 위치한 트로윈이란 도시로 방향을 잡았다. 바로 폭풍전선에 가지 않고 후방지대로 간 이유는 간단하다. 후방지대에 가장 사람이 많고 번성했으며 따라서 마계 최전선의 모든 정보가 이곳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용병 모집도 후방에서 이루어진다. 자유도시 트로윈은 후방지대에서 가장 번성한 곳으로 김성철이 원하는 조건에 가장 부합했다. “…….” 김성철이 트로윈의 성벽 아래에 도착한 것은 이른 새벽. 그런데 도시의 경계가 평소보다 사뭇 삼엄하다. 늑대인간을 필두로 한 경계 병력이 끊임없이 도시 주변을 순찰하고 있었고 하늘 위엔 그리폰을 탄 기사들이 하늘을 천천히 활강하며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김성철 정도라면 강행돌파도 가능하지만 그는 왠만하면 이곳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온건한 방법으로. 그렇게 방침을 정한 김성철은 일단 갈대밭에 숨어 상황을 관망했다. 정오가 되자 그는 지나다니는 상인, 아낙네, 병사들의 말소리를 듣고 현재 도시의 상황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도시의 경계가 삼엄한 이유는 오직 단 하나뿐이었다. 세계의 적이다. 세계의 적이 마계로 갔으니 언제 어떻게 마계 최전선에 모습을 드러낼지 아무도 모르니 각자 경계에 힘쓰라는 각 권력자 명의로 된 포고문이 마계 최전선에 하달 된 것이다. “정말로. 당신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도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 거야?” 보다 못한 베르텔기아가 한마디 했다. “사고를 조금 치긴 했지. 금고도 털고 망치도 훔치고 왕성도 하나 박살내고 망나니 왕자도 때려죽이고...” “아니, 이야기를 듣고 보니 결코 조금은 아닌 거 같은데?” 베르텔기아가 토를 달자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그들이 날 증오하는 건 첫째로 내가 강하기 때문이고 그리고 둘째로 나와 그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 그 두 가지가 적절히 섞여 지금 같은 증오와 두려움을 만들어 낸 것이지.” 김성철은 영혼창고에서 옷 한 벌을 꺼냈다. 낡은 감색 코트와 물이 빠져 흑색으로 다시 염색한 군복 바지. 김성철은 입고 입던 옷을 훌훌 벗어 창고 안에 넣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으. 아무리 내가 책이라고 해도 알맹이는 숙녀니까 그렇게 탈의는 함부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탈의 중 베르텔기아가 정중하게 항의했다. 물론 그녀의 항의는 김성철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눈 감으면 되는 거 아닌가?” 김성철은 근육질의 몸에 체크무늬 똑딱이 남방을 걸쳤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체크무늬에 똑딱이는 어울리지 않는다. 소환 궁전에 들어가기 전, 황금 도시에서 소환자들의 옷을 훔칠 때 몸에 맞는 걸로 아무렇게나 골라 잡다보니 이런 것도 걸리는 모양이다. 김성철은 똑딱이 체크남방을 일말의 망설임 없이 찢어 땅에 파묻고 비슷한 무늬를 지닌 남방셔츠를 꺼내 몸에 걸쳤다. “음.” 나름 신경 쓰긴 했지만 기존의 노가다 패션에서 단 한 걸음도 발전하지 않은 복장이었다. “소환자들의 옷은 눈에 띄지 않을까?” 베르텔기아는 김성철 주위를 한 바퀴 돌고는 그의 복장을 평가했다.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환자들 중엔 일부러 자기 세계의 옷을 입는 부류가 많아.” “왜?” “이계에 와서도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함이지. 물론 저쪽 세상의 옷을 입고 다니던 녀석들은 대부분 귀환자의 길을 택하긴 하지만.” 김성철의 눈앞에 쓰라린 광경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귀환을 택했다면 이럴 일도 없었겠지.’ 지난 일은 지난 일이다. 김성철은 서둘러 그 광경을 흩어버리고 대로를 응시했다. “그나저나 저 도시엔 어떻게 들어갈 거야? 꼬락서니를 보니 아무나 들여보내 줄 거 같지 않은데.” “트로윈에 하루에 드나드는 사람이 몇 명이라고 생각하나? 최소 수천 명에서 많게는 만 명도 넘게 드나든다. 문지기 몇 명이서 그 많은 사람을 검문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 김성철은 대로변에 서서 오가는 마차, 특히 도시로 진입하는 마차를 기다렸다. 머지않은 곳에서 마차 한 대가 오고 있었다. 볼품없는 노인과 삐쩍 마른 늙은 말 두 마리가 끄는 짐마차였다. 김성철은 그 마차를 유심히 보다가 그냥 옆으로 보냈다. “저건 왜 그냥 보내? 짚더미 안에 숨으면 안전하게 갈 수 있을 거 같은데?” 주머니 안에 들어간 베르텔기아가 말했다.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차가 허름하고 마부가 없어보일수록 검문의 강도는 강해지는 법이다.” 김성철은 다음 마차를 기다렸다. 여덟 마리의 천마, 페가수스가 쌍별로 묶인 대형 역마차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끄는 마필도 페가수스고 바퀴 대신 부유석을 단 것으로 보아 비행도 가능한 고급 역마차로 보인다. “흐음. 저건 돈 좀 있는 사람이나 탈 거 같은데?” 베르텔기아의 말에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길 앞을 막았다. “잠깐 좀 태워줄 수 있겠소? 저기까지 걸어가기 귀찮아서 그런데.” 김성철은 은화 한 닢을 마부에게 내밀었다. 마부는 코웃음 치며 김성철을 싸늘한 눈으로 쏘아봤다. “은화 한 닢 따위로 이 마차를 탈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썩 물러가시오!” 그는 채찍을 높이 들어 마차를 움직이려 했다. 그때 김성철이 다시금 그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이번엔 마부의 눈빛이 달라졌다. 번쩍이는 금화가 그의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물정을 잘 몰라서 그런데, 이 정도면 충분한가?” 김성철이 금화를 내밀며 말했다. 마부는 김성철을 쳐다봤다. 행색은 전형적인 소환자.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나이는 이십대 중반에서 후반 사이로 젊어보인다. 마부는 최근 소환자들 가운데 내정자라는 것들이 있어 이계로 오자마자 갖은 진귀한 대접을 받으며 산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 녀석도 그런 것 중 하난가. 나야 뭐 돈만 벌면 그만이지.’ 마지막으로 그는 금화를 받아들고 표면을 유심하게 살폈다. 발행처가 있어야 될 부분엔 인간제국 중앙주조소라는 문구가 정확하게 새겨져 있었다. ‘깨끗하군.’ 최근 위에서 줄기차게 내려오는 하달 사항이 하나 있다. 무인 금화를 들고 다니는 자는 반드시 상부에 신고하라. 상인 연합 소속에 속하는 운수회사의 직원인 마부로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작업이다. 그리고 금화도 문제없다는 게 확인되었다. 마부로선 김성철을 태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두 번째 뒷문을 열고 타세요. 다른 손님들에게 폐 끼치지 말고요.” 김성철은 목례를 한 후 객실로 들어갔다. 객실 문을 열고 있자니 베르텔기아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많이 해본 솜씬데?” “…….” 김성철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객실 안은 의외로 텅 비어 있었다. 승객이라고는 진귀한 새의 꼬리깃털로 만든 부채를 연신 부쳐대는 중년의 귀부인, 외눈 안경을 끼고 책을 읽고 있는 신사풍의 사내, 그리고 마차바닥에 다리가 닿지 않는 완고한 인상의 드워프 남자. 이렇게 단 세 명뿐이었다. 그들은 김성철이 마차에 올라타자 힐끗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성철은 그들의 얼굴에서 특히 귀부인의 얼굴에서 짙은 혐오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출발 합니다.” 마차는 경쾌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차창 밖으로 나름 푸른색을 띈 후방지대의 농촌 모습이 지나쳐갔고 이윽고 마차는 성문 앞에 이르렀다. 성문 쪽에선 다섯 명으로 구성된 문지기들이 마차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마차의 각도가 조금 옆으로 틀어져 있는 덕에 김성철은 아슬아슬하게 창밖을 통해 검문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지금 검문을 받고 있는 건 아까 지나쳤던 늙은 마부가 탔던 허름한 짐수레였다. 4명의 경비병이 둘러 나뉘어 짐칸 옆에 서더니 삼지창을 겨누었다. 품속의 베르텔기아도 그 모습을 보고 있는지 주머니 안에서 꿈틀거렸다. 이윽고 수문장이 경쾌한 목소리로 호령했다. “특별 검문 실시!”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짐수레 양옆에 선 4명의 경비병의 삼지창이 무서운 기세로 수풀더미를 쑤시기 시작했다. “백열창격!” 안에 사람이 있었다면 꼬치구이 신세로 끝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진 고깃덩이가 될 정도로 무시무시한 검문이었다. 김성철은 품속의 베르텔기아를 매만지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제 알겠나?” 베르텔기아는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이윽고 김성철이 탄 마차의 검문 차례가 왔다. 전과 달리 수문장도 경비병도 태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는 감히 마차의 문을 열어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마부하고만 대화했다. 마부가 뭐라고 하자 수문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내저었다. “통과!” 귀부인의 인상이 틀어졌지만 그녀는 별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보기 싫은 인간을 신고하는 수고를 하느니 조금만 더 참는 길을 택한 것이다. 덕분에 김성철은 안전하게 트로윈 시내로 입성할 수 있었다. 금화 한 닢과 약간의 시간을 들인 경제적인 전과였다. 시내로 들어간 김성철은 곧장 뒷골목으로 걸어가 정보상을 찾았다. 그는 정보상에게 수소문해 전장의 상황에 빠삭한 정보상을 소개받았다. 전장의 지역을 전담하는 정보상은 다리 하나와 눈 하나를 잃은 상이군인이었다. 김성철은 그에게 은화 몇 닢을 내밀며 물었다. “데커드란 용병 마법사를 찾고 있다.” “데커드?” 외눈의 전직 병사가 하나 남은 눈으로 김성철을 올려다봤다. 김성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사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데커드가 폭풍전선에 속한 그 용병마법사 데커드를 말하는 것이라면 글쎄. 지금쯤 죽었겠지? 아마도.” “그건 무슨 뜻이지?” “그는 죄를 짓고 형벌부대로 떨어졌소.” ======================================= 22. 형벌부대 (1) 죄를 지은 병사나 사병을 위험한 임무에 투입시켜 죗값을 치르게 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런데 마계 최전선은 다른 전장과 달리 사안의 중대성이 심각하고 상대하는 적들도 인외의 존재들이다. 적전 도주자의 비율도 다른 전장에 비해 월등히 많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엄정한 군율을 필요로 한다. 형벌부대는 마계 최전선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 중 하나다. 마계 최전선의 병사들에게 형벌부대 배속은 사형선고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 사망률이 90%에 이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90%라는 숫자도 어디까지나 통계적인 수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형벌부대는 전멸로서 그 오점에 종지부를 찍는다. 아마도 마계 최전선에 가장 오랫동안 복무한 사람 중 하나인 김성철이 이런 제도를 모를 리가 없다. “형벌부대가 뭐야?” 그는 베르텔기아의 질문에 한마디로 답했다. “도마 위의 생선.” 김성철은 그 길로 모병소로 가 용병으로 자원했다. 언제나 병사가 모자란 마계 최전선이나 신분 확인은 허술하게 했다. 어차피 마계 최전선에서 싸우는 용병들의 대부분은 범죄자 혹은 채무를 피해 달아난 채무자들이니. 괜히 신분확인을 까다롭게 해봐야 전선에서 싸울 병사만 줄어든다. “병과는 뭐로 할 거요?” 얼굴에 악마의 손톱자국으로 보이는 흉측한 흉터가 난 험상궂은 모병관이 걸걸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마법사.” “마법사도 종이 한 둘이어야지. 차원이 특기요? 감화가 특기요? 아니면 전투가 특기요?” “전투.” 김성철은 그리고 하나를 더 말했다. “연금술.” “연금술 그거 어디에 쓴다고. 그건 빼쇼. 공장에서 포션이나 만들고 싶지 않다면.” “…….” 병과가 정해진 다음에 모병관은 희망하는 전선에 대해 물었다. 물론 이 모병관이 권하는 전장은 가장 위험한 곳이다. “바란아란 부족연맹이 담당하는 전선은 어떻소? 어여쁜 엘프 아가씨들과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거요.” “미안하지만 서지 않아서요.” “오. 그건 끔찍한 일이군.” “폭풍전선으로 가고 싶소.” “폭풍전선이라.. 그래. 어차피 서지 않는 남자라면 드워프가 우글거리는 곳이 차라리 낫겠지.” 일은 일사천리로 예정됐다. 김성철은 용병 마법사로서 폭풍전선으로 파견됐다. 그가 배치된 곳은 검은 구릉이라 불리는 작은 요새였는데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왜냐하면 김성철은 요새부임 첫날부터 사고를 쳤기 때문이다. “백영! 너를 상관 폭행 및 항명, 기물파손죄로 형벌부대로 즉시 전속시키는 바이다!” 판결이 떨어진 직후, 김성철의 낡은 코트의 가슴부분에 34라는 숫자가 적힌 아직 채 마르지도 않은 천이 강제적으로 부착됐다. “이건 뭐요?” 김성철의 물음에 바느질을 하던 병사는 퉁명스레 말했다. “뭐긴 뭐야? 죄수번호지.” 김성철은 신속하게 최전방의 형벌부대로 보내졌다. 이동수단도 무려 그리폰이었다. 김성철을 뒤에 태운 그리폰 기사는 김성철을 내려놓자마자 껄껄 웃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네 무덤이다. 신입. 너처럼 오자마자 사고나 치는 놈들이 죽기에 딱 안성맞춤인 곳이지!” “…….” “아마도 보름 뒤에 올 거 같은데 그때도 어디 살아 있는가 보자구!” 그리폰 순찰대는 돌개바람을 일으키며 하늘로 상승, 먼 북쪽을 향해 날아갔다. 김성철은 주변을 돌아봤다. 고지대에 위치한 분지지형으로 움푹 들어간 부분엔 형벌부대의 것으로 보이는 천막들이 몇 개 있었다. 김성철은 천막의 숫자와 부뚜막의 숫자를 종합해 현재 형벌부대의 인원수를 가늠했다. ‘대략 300명 내왼가.’ 하지만 실제로 드러난 숫자는 100명 내외. 최근 있었던 큰 전투에서 부대 절반 이상이 휩쓸려나갈 정도로 큰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형벌부대의 부대장은 강가스 아론이라는 중년 사내로 마치 표범처럼 사납고 날렵한 풍채를 지니고 있었다. 겉으로만 보면 한 가닥 할 것 같은데 실제로도 그렇다. 그는 고대왕국 출신의 소드마스터로 힘민체 수치가 모두 300이 넘는 초인의 반열을 넘긴 전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형벌부대원 사이에서 그의 별명은 돌 머리였다. 그것도 더하고 뺄 것도 없는 순수한 돌 머리. “반갑다. 34호. 형벌부대에 온 것을.” “…….” 그는 김성철이 가지고 온 서류를 눈을 더듬더듬 살피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어디 보자. 상관 폭행과 항명이라. 기물파손은 덤이군그래? 한 가지만 일러두지.” 돌 머리가 씨익 웃으며 자신의 검의 일부를 뽑아보였다. 스르릉. 보랏빛이 감도는 범상치 않은 빛을 칼날에 품은 칼날이 드러났다. “내 앞에서 항명은 모가지 댕강이다.” “…….” 신고가 끝나자 땅딸막한 드워프 하나가 김성철에게 다가왔다. “신고는 끝났나? 34호?” 전시도 아닌데 육중한 중갑을 걸친 그 드워프의 가슴부분엔 0이라는 숫자가 적힌 천이 부착되어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형벌부대 최고참. 지옥주먹 아카드네.” 아카드는 자랑스레 자신의 주먹을 김성철에게 보여줬다. 손가락을 덮은 강철갑주엔 지옥주먹이라는 도금된 글귀가 번쩍이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선 0호라고 불러주게. 그게 이 형벌부대의 전통이니 말이야!” “…….” “좌우지간, 여긴 하사관도 장교도 없어. 사실 장교도 있었고 하사관도 있었지만 저번 전투에서 전부 뒤졌거든.” “데커드라는 용병 마법사를 찾고 있소만.” “데커드? 아, 22호를 말하는 건가?” 아카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설마 죽은 거요?” 김성철이 즉시 질문했다. 그러자 아카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김성철 대신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안에서 몸을 흔들어 기쁨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 친구.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거야.” “치명적인 부상이라도 입은 거요?” 아카드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는 위험한 임무만 자진해서 지원하거든. 마치 죽기 위해 이곳에 온 사람처럼 말이야.” “그를 한 번 만나보고 싶군요. 어디로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습니까?” 아카드는 천막 하나를 가리켰다. 창날처럼 뾰족하게 튀어 나온 바위 옆에 자리 잡은 아담한 천막이었다. 김성철은 아카드에게 예를 표하고 데커드가 있다는 천막으로 향했다. 천막에 가까이가자 거친 숨소리와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명의 사내가 대련을 하고 있었다. 한 명은 검을 들었고 다른 한 명은 지팡이를 들고 있었는데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한 대련을 펼쳤다. 승리를 거둔 것은 검을 든 사내였다. 지팡이를 든 사내는 지팡이를 떨어뜨리고 주저앉은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만 하면 된 거 아닌가? 데커드?” 검을 든 사내가 말했다. 김성철의 시선은 데커드라 불린 사내를 향했다.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기긴 했지만 그의 얼굴엔 젊은 날의 수려함이 남아 있었다. 알투지우스보다는 사라사에 가까운 외모였다. 그는 제 한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지쳐있음에도 다시 대련을 청했다. 검을 든 사내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싸우기 전에 힘 빼는 건 사양이야. 언제 임무에 투입될지 모르는데 이 정도만 하자고.” 대련이 끝난 후 구경꾼들은 물러났다. 김성철은 구경꾼이 물러나길 기다렸다 홀로 남은 데커드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데커드요?” 데커드는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김성철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누구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김성철은 이에 알투지우스에게 받은 물건을 건넸다. 데커드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당신이 이걸 어떻게?” “알투지우스 교수가 날 당신에게 보냈소. 짧은 시간 동안 마법사의 능력을 대폭 향상시키고 싶다면 당신을 찾아가라고.” “아, 그런 용무로 이곳 형벌부대로 자진해서 오셨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상황이 아니오.” “잠시 능력치 좀 봐도 되겠소?” 데커드의 말에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커드는 스크롤을 하나 꺼내더니 그걸 찢고 김성철의 능력치를 살펴보았다. 이윽고 데커드의 입가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간도 큰 양반이군. 면전에서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겨우 그 정도 실력으로 마계 최전선에 온 거요? 현실을 말해주자면 지금 당신 실력으론 능력치를 키우기는커녕 남의 발목만 잡을 뿐이오.” 데커드는 신랄하게 김성철을 쏘아붙였다. “하지만 이곳에 온 이상 돌아갈 순 없는 노릇 아니오?” 김성철은 형벌부대원으로서 5번의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전에는 형벌부대를 나갈 수 없으며 혹 나가게 된다면 탈영으로 간주된다. 김성철은 그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데커드는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였다. 그는 천막 아래 매달아놓았던 셔츠를 다시 걸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곳에 온 건 나 자신을 극한으로 밀어붙이기 위함이었소.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빠른 성장을 이끌어내기 위함이었지. 지금은 세계의 적이라 불리는 사내가 그러했듯이.” 데커드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자신이 말하고 있는 세계의 적이라는 사내가 자신 바로 앞에 있다는 사실은 말이다. 데커드는 계속해서 말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제법 강력한 마법사고 전사로서도 상당한 숙련도를 쌓은 몸이오. 덕분에 임무 중 치명적인 위기가 닥쳐와도 내 한 몸은 건사할 수 있지. 그런데 당신은? 아마도 살아남기 어려울 거요.” “살아남으면?” 김성철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만약 내가 살아남는다면 그땐 당신이 아는 지식을 알려주겠소?” 데커드는 그런 김성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퉁명스레 말했다. “당장 내일 우리 돌 머리가 또 멍청한 작전을 계획하고 있소. 거기서 한 번 살아남아 보시오. 그럼 당신이 할 수 있는 퀘스트 하나를 알려주리다.” 이튿날. 데커드의 말 대로 돌 머리가 모든 부대원을 소집했다. 부상자를 제외하고 80명의 형벌부대원들이 모였다. 돌 머리는 연단 앞에 서서 쓸데없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지난 달, 악마 척후병들이 우리 폭풍전선에 속한 경계초소 한 군데를 점령했다. 그 초소 자체는 대단할 것 없지만 중요한 건 초소의 위치다. 사령부에서는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그 초소를 탈환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돌 머리는 자신의 작전을 이야기했다. “현재 남아 있는 우리 부대원의 숫자는 83명. 20명은 북쪽에서, 20명은 동쪽에서, 20명은 서쪽에서 그리고 나머지 스무 명과 나는 남쪽에서 요새를 공격한다.” 놀랍게도 그것이 그의 작전의 전부였다. 각각 편성된 부대가 어떻게 이동하고 어떤 식으로 협조할 것인지에 대해서 돌 머리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포위공격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사방에서 공격하면, 악마들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작전이었지만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돌 머리가 무서운 것도 있지만 그가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걸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돌 머리는 곧 전 부대를 4개로 나누고 고참병을 각 조의 조장으로 임명했다. 스무 명 단위로 편성된 각 부대에겐 신호용 마법 스크롤이 지급됐고 곧 죽음의 행군이 시작됐다. 김성철은 3번조라 명명된 부대원으로 들어갔다. 작전은 의외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형벌부대는 큰 저항 없이 초소 정면에 도착했고 초소를 지키는 악마들 앞에서 포위망을 구축했다. “가자! 죄 지은 형제들아!” 돌 머리가 검을 빼들었다. 우우웅-- 보랏빛 검에 푸르스름한 광휘가 서렸다. 소드마스터 특유의 소드오라다. 그는 선두에서 서서 공격을 이끌었다. “나를 따르라! 다 같이 속죄를 하는 거다!” 초소를 지키던 마족들은 약한 놈들이 대부분이었고 숫자도 적었다. 돌 머리가 초소의 벽을 타고 망루 위로 올라오자 마족들은 속수무책으로 돌 머리의 검에 썰려 죽음을 맞이했다. 초소는 간단하게 점령됐다. 피해도 전무. 아직 동쪽과 북쪽의 병사들이 공격을 시작하기도 전이었다. “너무 쉬운데?” 고참병들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나름 요충지라 불리는 초소에 알맹이는 쏙 빠지고 미끼만 남아 있었다. 악마들이 초소를 지킬 의도가 있었다면 최소한 발록이나 바알급의 악마를 한 마리라도 배치했을 것인데 초소에 있던 것은 타락한 고블린과 임프가 대부분이었다. 병사들은 불길한 데쟈뷰를 느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저번 전투, 부대원의 절반 이상이 죽어나간 그 끔찍했던 전투와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참병 중에 고참병인 아카드가 돌 머리에게 진언을 했다. “대장님. 악마들이 초소를 너무 쉽게 내어준 것 같습니다. 함정의 냄새가 납니다. 일단은 후퇴한 후 적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말이 통할 것 같으면 돌 머리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역정을 내며 아카드를 나무랐다. “무슨 약해 빠진 소리를 하는 건가? 0호! 그러고도 형벌부대의 병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지난 전투에서도 비슷한 수법에 걸려 부대의 절반을 잃지 않았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치명적인 실책을 언급하면 기세가 죽길 마련인데 돌 머리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한 점 부끄럼이 없다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 “설령 이것이 악마의 함정이라고 해도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사수해야 한다!” 그는 한술 더 떠 전 병사를 불러모아놓고 비장한 목소리로 일장연설을 실시했다. “우리의 임무는 본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초소를 확보하는 것. 첫 번째 단계는 무사히 넘겼다. 남은 것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이 초소를 사수하는 것뿐. 버티자! 나의 형제들아.” 그 말을 듣던 데커드는 냉소를 머금으며 중얼거렸다. “저런 형제는 둔 기억이 없는데.” 김성철도 동감이었다. 이윽고 불길한 예감은 현실로 다가왔다. 다섯 명의 병사가 탈영을 했다. 그중 한 명은 돌 머리에게 잡혀 본보기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해가 지자 사방에서 악마들의 반응이 나타났다. 척후병들이 불길한 소식을 계속해서 전해왔다. “지옥공성기로 추정되는 물체 발견! 북쪽에서 접근 중!” “수백 마리로 추정되는 임프 떼가 산등성이를 타고 서쪽에서 오고 있습니다!” “발록 1기 확인! 바알급도 2기 이상으로 보입니다.” 어둠이 깔리자 80여명에 달하는 형벌부대원들은 천 마리가 넘는 악마와 마수들에게 포위됐다. “내가 말하지 않았소? 여기서 살아남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폭풍전야와 같은 고요 속에서 데커드가 김성철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는 김성철에게 스크롤 하나를 내밀었다. 장거리 텔레포트 스크롤이었다. “이 스크롤을 찢으면 폭풍전선의 본거지인 주황빛 봉우리로 순간이동 될 거요.” “이걸 내게 주는 이유가?” 김성철은 퉁명스레 질문을 던졌다. 데커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당신 클래스 중에 연금술사도 있더군.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스크롤을 찢고 폭풍전선의 관계자에게 싹싹 엎드려 비시오. 연금술사는 형벌부대에서 복무하는 대신, 포션 공장에서 강제노역으로 죄를 사면 받을 수 있으니. 한 2년 정도 죽도록 일해야겠지만 여기서 죽는 것 보단 낫지 않겠소?” 아무래도 데커드는 김성철을 신경써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기우다. 김성철은 그 스크롤을 데커드에게 돌려주며 담담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아까 한 약속. 아직도 유효하오?” 데커드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유효하오.” 데커드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마족들의 북소리다. 이윽고 소름끼치는 뿔피리 소리가 밤하늘의 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마족들의 군세가 공격을 시작했다. ======================================= 22. 형벌부대 (2) 강철로 만든 거대한 전갈 형상의 전쟁기계가 꼬리부분에서 녹색의 불을 내뿜으며 산등성이에 자리 잡았다. 악마들의 대규모 공세에 종종 볼 수 있는 지옥공성기다. 악마들의 웃음소리가 메마른 하늘 위에 울려 퍼짐과 동시에 지옥공성기가 불을 뿜었다 전갈의 아가리 부분에 설치된 악마의 마법대포가 초록색 화염구를 토해낸다. 그 화염구는 밤하늘 위에 포물선으로 그리며 낙하해 초소의 벽면을 강타했다. 콰콰쾅! 초소 전체가 흔들렸고 탄착점 주변엔 꺼지지 않은 초록불이 사납게 타오르며 그 안에서 불로 만들어진 작은 악마들이 개미처럼 사방에 튀어나와 뛰어다녔다. “키키키키키!!!” 불씨 소귀라 불리는 열등한 마족이다. 할 줄 아는 건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사람에게 뛰어 들어 불을 붙이는 게 전부지만 혼란스런 전장에선 이 작은 악마도 위협이 될 수 있다. 돌 머리라 불리는 강가스 아론의 강철군화가 불씨 소귀 하나를 짓밟아 없애버렸다. “저 작은 잡것들을 전부 밟아 없애라! 나중에 활활 불타기 싫다면!” 병사들은 강가스의 지휘를 따라 서둘러 불씨 소귀들을 제거했다. 하지만 지옥공성기가 재차 포격을 가해오자 또 다른 수십 마리의 불씨 소귀가 초소 안을 휘저었고 바깥에선 임프와 마수로 구성된 선발대가 북소리에 맞춰 접근하고 있었다. “인간들! 죽여라!” 5미터에 달하는 괴물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타락한 트롤들이다. 앞을 볼 수 없게끔 살갗과 두개골에 단단히 고정한 강철 안대를 씌우고 마족의 사악한 마법으로 육신을 강화한 그 마수들은 대규모 공세에서 선봉을 종종 맡는다. “마법사와 궁수 앞으로! 저 덩치 큰 괴물을 집중 공격해라!” 활을 든 남성 엘프 병사 하나가 화살통에서 은빛으로 번쩍거리는 화살 한 대를 뽑아 활에 재고 시위를 당겼다. 보통의 트롤이었다면 눈동자를 노리는 게 정석이겠지만 강철 안대를 씌운 트롤에게 별 다른 약점은 보이지 않는다. 엘프 병사는 타락한 트롤 목 뒤에 단단히 고정한 가마 위에 탄 임프를 조준했다. 그 임프는 트롤의 살갗을 파고들어 목뼈까지 닿고 있는 말뚝을 만지작거리며 트롤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는 일종의 운전수였다. 쒜에에에엑- 엘프의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날아가 그 임프의 목줄을 그대로 꿰뚫었다. “키에에에엑!!!!!” 화살은 정통으로 임프의 목을 꿰뚫어버렸다. 임프는 말뚝을 잡은 채 옆으로 왼쪽으로 쓰러졌고 그에 따라 자연스레 타락한 트롤도 임프를 따라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어어어어-.” 트롤은 점점 왼쪽으로 돌더니 급기야는 뒤쪽에 따라오던 다른 트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잡아! 그걸 잡아!” 다른 임프들이 다급하게 죽은 임프를 떼내고 조종간을 잡으려고 하지만 그때 또 다시 엘프의 화살이 그 임프의 몸통을 꿰뚫었고 눈먼 트롤은 다른 트롤과 부딪쳤다. “그어어어어!!!!” 만성적인 학대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던 트롤은 무언가와 부딪치자마자 미친 듯이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다른 트롤도지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쿵! 쿵! 거대한 트롤 두 마리가 선두 한 복판에서 피와 살점이 튀기는 혈투를 벌이자 적의 선두는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당장 트롤의 발밑에서 진군하는 임프 수십 마리가 트롤의 발에 밟혀 죽었고 후속 병력들의 진군이 일제히 멈췄다. “잘했어! 파간.” 데커드가 엘프 남성에게 칭찬을 한 후 지팡이를 들고 초소 정면에 나섰다. 건장한 사내 두 명이 방패를 들고 데커드를 지켰다. 이윽고 데커드의 두 눈이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천공의 힘을 느낄지어다!” 그의 지팡이에서 복잡다단한 마법진이 피어올랐다. 김성철은 그 마법진의 의미를 100%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무슨 마법을 쓰려고 하는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메테오를 쓰는 건가?’ 곧 북녘 하늘에 끼어있던 검은 구름이 걷히며 무언가가 하늘로부터 떨어져 내렸다. “메.. 메테오다!!!” 악마들이 하늘을 가리키며 비명을 질렀지만 그들이 구원 받을 길은 없었다. 뒤에는 후속병력, 앞에는 싸움박질을 벌이는 트롤로 중간에 끼어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된 그들의 머리 위로 긴 꼬리를 지닌 푸른 혜성이 떨어져내렸다. 콰콰콰콰쾅!!!!! 엄청난 폭발이 적의 전열에 일어나며 주변의 모든 것을 쓸어버렸다. 먼지가 걷히자 동심원으로 보기 좋게 드러누운 셀 수 없는 악마들의 시체들이 드러났다. 천공학파의 존재이유라 할 수 있는 메테오의 위력이었다. 강가스 아론은 흐뭇한 눈으로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의 구렛나룻을 쓰다듬었다. “역시 22호. 우리 형벌부대의 에이스다!” 하지만 이제 마족들의 공세는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지옥공성기 너머 불길한 존재감을 드리우며 버티고 있는 발록과 바알 등의 상급 마족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전투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급 마족들로선 겨우 소모품 몇 마리가 죽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벌레들을 계속 보내라.” 하급 악마를 내보내 적의 전열을 지치게 한 뒤 강력한 상급 악마로 묵직한 일격을 날리는 것이 악마들의 주된 전술이다. 아직 소모품은 많고 밤 또한 길다. 산등성이 너머 가려진 둔덕 아래선 지금 이 순간에도 수백 마리의 하급 마족들이 줄줄이 진군하고 있다. 형벌 부대의 병사들은 노련한 솜씨로 다가오는 적들을 물리쳤지만 시간이 흐르자 예리함을 잃고 지쳐가기 시작했다. “끝이 없습니다!” 전선에 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활 솜씨로 트롤들의 발목을 연이어 잡던 젊은 엘프도 화살이 떨어져 이제는 검을 들고 싸우고 있었고 마법사들도 마력이 전부 소모되어 탈진 직전에 몰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데커드는 가쁜 숨을 내쉬며 가죽주머니 안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것이 마력의 정수였다면 메테오 한 방을 더 적들의 머리 위에 꽂아 넣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지원군은 언제 오는 건가? 지금 우리는 전진 초소를 목숨으로 사수 하고 있는데!” 한편 강가스 아론은 파란 꼬깔 모자를 쓴 마법사의 손에 펼쳐진 푸른빛의 마법진을 향해 고성을 지르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 마법진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통신 마법진이다. 무선전화처럼 먼 거리에 떨어진 상대방에게 목소리를 주고받을 수 있는 편리한 마법으로 감화학파의 마법사들의 주력기술이기도 하다. 마법진 너머에선 어딘가 주눅이 든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들려왔다. “죄송합니다만 저희는 그쪽의 공격 계획에 대해 사전 고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미리 계획을 알려주셨다면 신속히 지원군을 보내도록....” ‘아니! 초소를 점령하라고 한 건 그쪽이잖아!!“ 강가스 아론은 초소가 떠나갈 듯한 고성을 질렀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전장의 소음이 일순 멎어버린 듯한 감각마저 줄 정도였다. “개 같은 새끼들이 진짜. 초소 점령하라고 할 땐 어쩌고 뭐? 사전 계획 고지? 지랄하고 자빠지네. 개놈의 자식들아! 여기 내 부하가 전부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할 거야? 누가 책임 질 거냐고!” 강가스의 기세에 눌렸는지 마법진 너머에선 침을 삼키는 소리만 들려왔다. 강가스 아론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일단 알겠어. 난 일단 시킨 대로 초소를 점령했고 지금도 지키고 있어. 하지만 너희들이 약속한 지원군을 보내지 않아 초소를 잃고 부하도 잃게 생겼어. 인정하지?” “아니. 강가스님. 그건 아닌 거 같은데요. 애당초 그쪽에서 사전 고지만 했더라도 정확한 시간에...” “아가리 닥치지 못해?!” “…지금 사령관님을 불러오겠습니다.” 마법진 너머의 목소리도 참을 만큼 참은 듯한 눈치였다. 그러자 버럭 하던 강가스 아론도 수그러드는 눈치였다. “됐고. 일단 이번 일은 나중에 따지도록 하겠다. 지금 상황이 급박하니. 이상.” 강가스는 푸른 모자를 쓴 마법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강가스님!” 마법진에서 소리가 들려왔지만 강가스는 팔을 휘저었고 마법사는 마법진을 소멸시켰다. “빌어먹을. 항상 이런 식이라니까! 이러니 거점들을 모조리 뺏기는 거지!” 강가스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다시 전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전황은 악화일로를 겪고 있었다. 트롤들은 모두 처리했으나 지옥공성기가 남긴 구멍 사이로 임프들이 물밀듯이 들어왔고 하급 마족으로 이루어진 병사들이 망루의 벽면에 사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아직 병사들의 피해는 적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답은 뻔했다. 아카드가 다급하게 말했다. “대장님. 후퇴를 해야 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후퇴가 아니다. 퇴로를 열기 위한 최후의 공격을 펼쳐야 한다. 강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렇게 된 이상 초소를 포기한다. 내가 앞길을 열테니 모두 나의 뒤를 따라라!” 강가스가 보랏빛 마검을 들고 전면에 섰다. 타이밍은 적의 맹공을 한 차례 막은 직후. 임프들과 마족 병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망루 위로 기어올라왔다. 80명에 달하는 병사들은 사력을 다해 공격을 막았다. 김성철 또한 그 중심에 있었다. “…….” 임프 두 마리가 날카로운 쇠꼬챙이를 들고 김성철을 노렸다. 김성철은 글레어를 시전하며 두 마리 임프를 태워버렸다. 다음은 마족 병사였다. 뿔이 달리고 자줏빛 피부를 지닌 이 하급 마족은 마력은 약하지만 지능이 제법 높고 인간 이상의 완력과 체력을 지니고 있어 마족 군대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크아아아아!!” 마족 병사가 김성철을 향해 수십 킬로그램이 넘는 거대한 낫을 휘둘렀다. 김성철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낫을 피하며 마족의 쩍 벌린 아가리 안에 빛줄기를 꽂아넣었다. “끄아아아악!” 글레어의 섬광은 마족의 입천정을 뚫고 들어가 그 너머의 뇌수를 태워버렸다. 비록 마족의 투구를 뚫진 못했지만 마족의 붉은 눈은 하얗게 변했고 마족 병사는 김성철의 발밑 아래 쓰러졌다. “제법인데?” 데커드가 다가와 김성철의 뒤를 엄호했다. “별 거 아니오.” 그때 또 다른 마족 병사가 덮쳤다. 이번엔 하늘에서의 습격이었다. “죽어라! 인간!” 날개가 달리고 새의 두상을 지닌 조인이 급강하하며 소리쳤다. 철갑을 두른 손에 쥔 것은 긴 창으로 김성철의 정수리를 노리고 있었다. “조심해!” 데커드는 지팡이를 뻗어 마법을 시전하려 했지만 이미 마력이 바닥난 상황이다. 글레어는 시전 되지 않았다. 데커드는 경악한 눈으로 조인병이 김성철을 습격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김성철은 조인병이 오는지 모르는지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조인병의 창이 김성철의 정수리를 꿰 뚫어버리려는 찰나 김성철의 신형이 물 흐르듯 부드럽게 뒤로 움직였다. 조인병의 눈엔 김성철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신기루처럼 비춰졌다. 창날이 닿아야 할 지점에서 아무 느낌도 나지 않았고 먹이감은 어느새 저편에 서 있었던 것이다. 챙캉! 힘껏 내리 찌른 창은 애꿎은 망루의 바닥에 불꽃을 일으켰고 창을 쥔 조인병은 가속력이 실린 채 바닥체 철푸덕 떨어졌다. “끄으으윽...” 조인병은 큰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다시 날아보려 했지만 그전에 김성철의 글레어가 그의 양날개를 날려버렸다. “끄아아악!” 날개를 잃은 조인병은 바닥을 떼굴떼굴 굴렀다. 김성철은 바닥에 굴러다니던 철퇴를 집어 들고는 조인병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뽀각. 조인병의 두상은 부리와 함께 박살이 났다. “대단하군.” 데커드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김성철을 지켜봤다. “당신, 초심자는 결코 아닌 거 같은데? 대체 정체가 뭐요?” 김성철이 돌아서며 뭔가 말하려는 찰나 바로 옆에서 강가스의 고함소리가 폭풍처럼 덮쳐왔다. “지금이다! 병사들! 내가 퇴로를 열겠다. 모두 나의 뒤를 따르라!” 강가스가 보랏빛 마검을 휘두르며 망루 아래로 뛰어내렸다. 마족 병사들이 긴 창을 들고 맞서려 해보지만 강가스의 검이 번쩍하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가자!” 달려드는 마견과 임프들을 발로 차며 강가스는 앞길을 열었다. “이야기 할 시간은 없는 거 같군. 지금부터가 진정으로 위험하니 몸 간수 잘하시오.” 이제는 병사들 차례다. 병사들은 강가스의 뒤를 따라 망루에서 뛰어내려 그가 열어놓은 길을 좇았다. 운 없는 병사 몇 명이 마족병사가 세운 창에 걸려 꼬챙이 신세가 되었고 남겨진 부상병들은 달려드는 임프와 마견에 의해 끔찍한 운명을 맞이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사방에서 덮쳐오는 마족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마족을 베면서 보랏빛 검기를 번득이는 강가스의 뒤를 필사적으로 따랐다. 데커드는 지팡이 대신 검과 방패를 들고 싸우고 있었다. 푹! 마족 병사 하나가 초록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오른쪽엔 아카드가 도끼를 풍차처럼 휘두르며 임프들을 도륙하고 있었고 왼쪽엔 엘프 병 파간이 춤추는 듯한 몸놀림으로 마견의 목을 베어나갔다. 데커드는 뒤를 응시했다. 34라는 숫자를 허름한 코트 위에 단 검은 머리 사내는 묵묵히 따라오고 있었다. 일체의 공포도 당혹도 없이. 그리고 자연스럽게. ‘대체 저 사내. 뭐하는 사람이지?’ 평범한 신입은 절대 아니다. 저런 여유와 몸에 밴 실력은 결코 하루아침에 길러진 것이 아니다. “가자! 끝이 보인다! 모두 힘을 내라!” 앞에서 강가스 아론이 시끄러운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뒤에선 악마들의 소름끼치는 웃음소리와 함성이 들려왔다. 초소는 다시금 악마의 손에 떨어졌고 멀리 달빛을 받은 거대한 발록과 바알이 오만하게 날개를 펄럭이며 초소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죽은 인간들의 목이 꼬챙이에 꽂혀 효수됐고 그들의 육신은 마견과 임프들의 먹이가 되었다. 80명에 달하던 형벌부대 중 살아남은 자는 스물 다섯 명에 불과했다. “하아... 하아...” 생존자 중 한 명인 데커드는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쉬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났는지 알 수 없었던 정신없는 탈주였다. 어느 정도 숨을 돌린 후, 그는 자신들의 뒤를 따르던 사내를 찾았다. 그 사내. 34호는 어느새 데커드 바로 앞에 있었다. “약속대로 전장에서 살아남았소. 이제는 당신이 약속을 지킬 차례요.” 생채기 하나 나지 않고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태연한 모습으로 말이다. ======================================= 22. 형벌부대 (3) 부대의 절반 이상이 죽은 대참사 속에선 어지간한 베테랑도 공황상태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저 34호라는 사내는 그렇지 않았다. 신병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대체 뭐요?” 데커드는 진지한 항의를 눈동자에 담아 말했다. 김성철은 데커드의 의도를 파악했다. ‘너무 서둘렀나.’ 괜한 의심을 산 모양이다. 무마할 말이 필요하다. 순간 기적적으로 좋은 생각이 반짝였다. 김성철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귀환자 출신이오.” 귀환자 출신 중에 이계로 다시 돌아오는 선택을 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현실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뼈아픈 실패를 맛 본 자들이다. 어떤 이들은 이계에서 휘두르던 강력한 힘을 잊지 못해 이계로 돌아오는 선택을 한다고 한다. 이유에 어찌됐든 귀환자들은 눈으로 보이는 능력치보다 강한 존재로 인정받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귀환자 출신이라....” 데커드는 귀환자라는 말을 듣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귀환하기 전에도 마계 최전선에 있었소. 바란아란 부족연맹의 이끼안개 숲에서 싸웠지.” “그 숲은 이미 마족에게 넘어간 지 오래요.” “어찌됐든 방금 있었던 전투는 내가 밥 먹듯이 경험한 상황 중 하나요. 게다가 마족들의 목표도 우리의 전멸이라기보다는 초소의 탈환으로 보인 점도 컸고.” 실제로 마족을 이끌던 발록과 바알은 끝까지 전투에 나서지 않았고 정예병력 또한 풀지 않았다. 마족들로선 간단히 충원할 수 있는 소모품만 써서 껄끄러운 인간을 몰아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미쳐 날뛰는 강가스 아론을 잡으려면 발록 자신이 나서야 했겠지만 말이다. “음....” 데커드는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 눈치였지만 김성철이 한 말엔 일리가 있었다. 김성철은 덧붙여서 말했다. “내가 빨리 강해지는 법을 찾는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요.” “살아남으려면 이런 곳에 오면 안 되는 거지.” 데커드가 퉁명스레 말했다. “원수에게 쫓기고 있소. 빨리 강해지지 않으면 목숨을 잃게 될 것이오.” 김성철이 그렇게까지 나오자 데커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빛나는 구슬 하나를 만들어 그걸 내밀었다. 지식의 구슬이다. 그것을 손에 넣은 자는 안에 담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받으시오. 지금 당신이 할 만한 퀘스트는 이게 전부니.” 김성철은 지식의 구슬을 만져 그 안의 정보를 취득했다. 곧 그의 눈앞에 퀘스트 하나가 빛나는 문자의 형태로 떠올랐다. [ 무제 ] 무덤청소 - 엘프 전사들의 무덤을 어지럽히는 임프 떼를 청소하라. / 보상 - 마력 5, 중급 마력의 정수 데커드는 지팡이를 들어 멀리 떨어진 바위산을 가리켰다. “아란족 엘프 궁수들의 무덤은 저쪽이오. 퀘스트 자체는 당신도 분발하면 달성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저 바위산까지 가는 것이지.” “마족의 영역이오?” 김성철의 물음에 데커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등을 돌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눈 좀 붙여두시오. 당장 오늘 밤에 무슨 일이 또 생길지 모르니.”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김성철은 그날 정오 홀로 건너편의 바위산으로 향했다. 악마의 영역이라고 하나 돌아다니는 건 소수의 정찰대뿐이었다. 김성철은 가볍게 그들의 이목을 벗어나 목적지인 아란족의 무덤으로 갔고 그 안에 둥지를 튼 임프들을 청소했다. 모든 임프를 처리하자 아란족의 무덤에 서린 혼령이 김성철에게 보상을 주었다. 마력 5와 중급 마력의 정수. 대단할 것 없는 퀘스트였지만 김성철은 그 대단할 것도 없는 것들이 쌓였을 때의 장점을 알고 있다. 그는 유유히 본진으로 돌아와 잠에 곯아떨어진 동료들 사이를 지나 또 다른 작업을 시작했다. 연금술이다. 에크하르트의 휴대용 연금 가마를 막사 뒤편에 꺼내놓고 김성철은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연금 재료를 베르텔기아의 지휘에 따라 수집, 닥치는 대로 연성을 시작했다. 3가지 새로운 연금아이템을 만들고 있자니 강가스 아론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쭉 펴면서 이쪽으로 걸어온 건장한 체격의 사내는 김성철을 신기한 눈으로 보며 불쑥 말했다. “신입? 거기서 뭘 하는 건가?” “보다시피. 연금술 중입니다.” “연금술 하는 건 알고 있어. 내가 묻고 싶은 건 왜 연금술을 하냐는 거지.” 돌 머리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눈에 거슬리는 모양이다. 김성철이 연금술을 연마하고 있는 것이. “전투에 도움이 될 아이템을 만들어보고 있습니다. 저번 전투에서 느낀 게 많아서요.” 모범답안에 가까운 답에 돌 머리는 더 이상 화를 내진 않았다. 대신 그는 겸연쩍한 표정을 지으며 훈계조로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살고 싶다면 체력관리나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래도 오늘 저녁밥은 푸짐하겠군그래? 입이 줄어서 말이야.” 생각 없이 툭툭 내뱉는 게 돌 머리란 별명을 얻을 법하다. 하지만 김성철은 강가스 아론이 눈으로 보이는 것만큼 단순한 사내가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사령부에 보고를 할 때 강가스 아론은 돌 머리라기보다는 여우처럼 행동했다. 그는 마계 최전선의 해묵은 문제인 썩어빠진 조직체계의 문제점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그것을 적극 활용하려는 모습까지 보였다. 돌 머리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생각이다. 저녁이 되었다. 강가스 아론은 떠들썩한 연회를 열었다. 죽은 이의 몫으로 줄 예정이었던 여분의 식량과 술이 병사들에게 지급되었다. 죽은 이들에 대한 애도는 10초간 이루어졌다. 김성철은 맛없고 양만 많은 음식을 우물우물 씹으며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마계 최전선의 밤하늘은 불그스름한 빛이었다. 마계에서 항시 타오르는 지옥불의 빛을 받았기 때문이다. “상태창.” 오랜만에 그는 자신의 상태창을 떠올렸다. 가감 없는 전체 상태창이 그의 시야를 뒤덮었다. <'부수는 자' 김성철의 상태창> [축복] 맹약(알 수 없음) 불요불굴(정신공격 면역) 혼돈신의 가호(힘, 민첩, 체력 10% 증강) 헤라클레스의 후계자(힘 +100) 광전사의 핏줄(체력 10% 이하 시 대량 회복) 인류의 챔피언(의지 +50) 하이엘프 왕국의 빠른 활(민첩 +30) 고대전사의 심장(힘, 의지, 체력 +5, 강인함) [저주] 맹약(알 수 없음) 대마법사 발자크의 최후의 전언(직관력 -10) 검성 카라카드라의 찬사(민첩 +1, 힘 -1) 고대신의 챔피언 아락-가르의 규탄(힘 -3) 암흑룡 그로티우스의 영겁의 저주(힘 -20, 체력 -20) 유령 들린 숲의 마녀 아델화이트의 평범한 저주(힘 -5, 발기부전의 저주) 제국의 적(세력 : 인간제국의 주적, 백지 현상금) 호라산 교단의 파문자(세력 : 호라산 교단의 주적, 파문) 뮤라 교단의 파문자(세력 : 뮤라 교단의 주적, 파문) 마법사 연합길드의 적(세력 : 마법사 연합길드 및 그 하위길드의 주적) 붉은 오크 대족장 드라쿨 무쇠주먹의 저주(종족: 오크에게 호감도 -30) 드워프 원한록 등재(종족: 드워프에게 호감도 -200) 상인연합길드 블랙리스트 등재(세력: 상인연합길드 및 모든 하위 세력과 거래 불가능) [클래스] 메인 클래스 - 태초의 전사(신화) 서브 클래스 - 메아리술사(전설) 서브 클래스 - 상급 요리인(희귀) 서브 클래스 - 연금술사(희귀) [능력치] 힘 999+ 민첩 853 체력 801 마력 183 직관력 173 마법저항 621 의지 502 매력 18 운 18 [영혼각인 - 6 슬롯 ] 1. 영혼 수확자(전설, 체력 흡수 15%, 죽인 상대방으로부터 체력 회복) 2. 천둥방패(전설, 모든 종류의 마법에 50% 피해 반감, 전설급 이하 정신공격에 면역) 3. 진실의 눈(전설, 에픽 이하 모든 환영마법 무효화, 에픽 이하 모든 아이템, 마물, 스킬 감정) 4. 영혼 창고(에픽, 1,500종의 아이템 보관) 5. 기만자의 장막(희귀-상급, 상태창 위장) 6. 공백 [무기 숙련도] 둔기 - 초월자 검 - 마스터 (다음 레벨까지 85%) 도끼 - 달인(다음 레벨까지 22%) 창 - 달인(다음 레벨까지 18%) 활 - 마스터(다음 레벨까지 82%) 폴암 - 달인(다음 레벨까지 11%) 지팡이 - 숙련자(다음 레벨까지 44%) 체술 - 그랜드마스터 [업적 - 총 592건 ] 1.최초의 500인 2.최초의 전사 3.코볼트 족장 갈라구의 토벌자 4.아바론 전장 참전장 외 588건 상태창은 한 사람이 지금까지 이계에서 걸어온 길을 알려주는 일종의 인생역정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투를 벌여야 했는가. 누군가에게 일생일대의 혈전이라 할 만한 싸움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복해왔다. 수많은 축복을 받았고 그에 못지않은 저주 또한 받았다. 그리고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아직 드러내서는 안 될 힘 또한 감추고 있다. ‘나는 목적의 도구다.’ 김성철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한 차례 번득였다. 데커드가 김성철 옆으로 다가온 건 그 무렵이었다. 그는 대뜸 김성철 옆 흙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더니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사라사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 어때요? 예쁘죠?”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으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성철의 머뭇거림을 보지 못한 데커드는 여전히 하늘을 본 체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녀석, 그 모습이 되기 전엔 더 예뻤답니다. 학교 전체가 그 녀석만 나타나면 들썩거릴 정도로. 마력도 강력해 흡혼석을 부셔버리기도 했고요. 녀석, 나도 못한 걸.” 딸의 이야기를 하는 데커드는 행복해보였다. 하지만 지금 변해버린 딸의 얼굴을 변하면 상심이 클 것이다. 김성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당신은 귀환자라고 하던데?” 데커드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김성철이 그를 응시하자 데커드는 술을 한 모금 들이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군. 이런 곳에서 스스로를 단련하려고 하다니.” “여기보다 더 한 곳도 갈 수 있소.” “대단한 각오군요.” “당신도 강해지기 위해 이곳에 온 거 아니오?” 데커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강함을 찾아 이곳에 왔죠.” “마족 때문에?” “그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데커드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붉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 어딘가에 고대의 마법사가 만들어놓은 던전이 있다는 풍문이 있소. 어마어마한 마력으로 가득 찬 던전이.” “그 던전을 만든 건 누굽니까? 혹시 칠영웅?” 데커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이 나타나기 이전의 존재요. 칠영웅이 해결한 재앙 전의 재앙. 지금은 기록조차 찾을 수 없는 잊힌 시대의.” “그건 흥미롭군요?” 칠영웅의 시대만 해도 이미 고대로 취급되고 있고 남은 기록도 거의 없다. 칠영웅의 이름조차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그들의 이름을 전부 아는 이들을 손에 꼽을 지경이니. 그런데 칠영웅 이전 세대의 사람이라니. 그야말로 까마득한 먼 과거의 존재인 것이다. “나는 그 흔적을 찾아 이곳에 왔소. 굳이 형벌부대로 떨어진 것도 그 이유 중 하나고. 형벌부대는 언제나 최전선에서 활동하거든. 던전에 접근하기 편리하지. 게다가 형벌부대엔 또 다른 장점이 있소. 실력을 기르기엔 여기보다 좋은 곳이 없지.” “동감이오.” 마족들은 강하고 그 숫자 또한 끝이 없다. 그 이야기는 죽지만 않는다면 몇 번이고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싸움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전사의 격은 싸움 속에서 꽃을 피우는 법이니 말이다. 김성철 또한 수많은 악마들을 도살하며 스스로를 단련시켰다. 그리고 그는 그 능력치를 토대로 숨겨진 위업에 도전했고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강함을 차근차근히 쌓아나갔다. 데커드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제법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오른 거 같아요. 슬슬 그곳에 도전할 때가 된 거지.” “그곳은 대체 어디요?” 김성철의 물음에 데커드는 손가락으로 발밑을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이곳 지하 어딘가에 있소. 잊힌 시대의 지하왕국이라고 불리는 곳이지요. 입구는 저도 잘 모릅니다그려. 그저 몇 개의 실마리만 가지고 있을 뿐.” “지하 왕국이라.”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다. 아주 먼 과거. 잊힌 시대의 사람들 중 일부가 재앙을 피해 땅을 파고 들어가 그들만의 지하왕국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동화나 우화 정도로밖에 취급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데커드는 그 이야기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모양이다. “슬슬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니 마족들의 공세가 뜸해 질 거요. 당신이나 나나 강함에 목마른 사람이니 언제 시간이 되면 같이 찾아봅시다.” 좋은 사람이다. 천성도 그렇고 곳곳에서 배려심이 느껴졌다. 김성철은 데커드를 그렇게 평가했다. 하지만 이계에서 좋은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한다. 새벽에 마족들이 야음을 틈타 기습을 가해왔다. 마족들의 공세는 강가스 아론의 분전으로 가볍게 격퇴됐지만 몇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 데커드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의식불명에 빠졌다. 김성철이 미처 손 쓸 틈도 없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 23. 지하 왕국 (1) 데커드의 상태는 심각했다. 파간이라는 엘프 사내가 약초를 가지고 있어 응급처리를 해서 한 차례 고비는 넘겼지만 아직 데커드는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너무 무리를 했어. 적절한 휴식도 필요한 법인데. 이번에도 결정적인 순간에 마력이 부족했어.” 아카드는 데커드가 당할 때 옆에 있었다. 글레어만 쓸 수 있었더라도 간단하게 처리할 녀석들인데 중요한 순간 마법이 나가지 않아 수세에 몰렸고 치명상을 허용했다. “독이 문젭니다. 임프들의 무기엔 트롤의 똥을 썩혀 만든 더러운 독이 묻어 있습니다. 일단 독을 전부 씻어내긴 했지만 일부가 데커드 씨의 몸 안을 돌며 그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악마들과 싸워 왔다는 파간은 정확하게 데커드의 상태를 진단했다. 김성철의 의견도 파간과 같았다. 그는 즉시 바깥으로 나가 땅 밑을 훑으며 무언가를 찾아다녔다. 이윽고 그는 바위틈에서 자라는 질경이 같은 식물을 발견했고 그것을 한 움큼 채취했다. 그것은 고독초라고 불리는 것으로 이 일대에 드물게 볼 수 있는 식물이다. 그 식물을 갈아 환부에 투약하면 임프들의 독을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있다. 마계 최전선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며 터득한 지식 중 하나다. 비록 효과는 미미하긴 하지만 의사도 없고 사제도 없는 이곳에선 천금 같은 존재다. “그걸 그냥 쓸거야?” 고독초를 빻고 있자니 베르텔기아가 불쑥 말을 걸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베르텔기아가 다시 말했다. “그냥 쓰면 효과가 떨어질 건데. 식물에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도 모르고. 이왕이면 연금술사답게 솜씨를 발휘해서 쓰는 건 어때?”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베르텔기아는 한가해보이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녀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김성철은 데커드의 상태를 확인했다. 조금은 더 버틸 수 있는 걸로 보였다. 다시 막사 밖으로 나온 김성철은 유발에 빻은 고독초의 냄새를 코로 맡았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고독초에 관한 연금 정보가 떠올랐다. < 천년 고독초 > 레벨 : 3 등급 : B 속성 : 목(木) 효과 : 해독, 독 피해 비고 : 마계 근처에 바위산에서 볼 수 있는 귀한 다년생 풀. 마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해독 성분이 있다. 하지만 자체적인 독성도 있으니 사용할 때 주의! “고독초에 독이 있었군.” 고독초를 여러 번 사용했지만 그 안에 자체적인 독이 있다는 건 김성철도 알지 못한 사실이었다. 귀하기도 할 뿐더러 워낙 쓰고 특유의 냄새가 있어 약으로 쓰는 것 외엔 거의 쓰이지 않는 풀이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마계에서 흘러들어오는 마기와 맞서서 자란 풀인데 스스로 독기를 품지 않으면 살아날 수가 없지. 그건 마계와 인접한 지대에서 자라는 다른 모든 식물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특징이야.” 그렇다면 독을 중화할 필요가 있다. 김성철은 영혼 창고를 꺼내 기존에 수집해놓았던 연금 재료를 펼쳐놓고 고심을 했다. 가장 만만한 것은 언제나 주로 쓰는 맹인의 풀이다. 나무 속성인 맹인의 풀은 똑같은 나무 속성인 고독초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맹인의 풀을 손으로 잡자 베르텔기아는 즉시 그의 손 위에 내려앉으며 몸을 도리도리 돌렸다. “땡!” “…뭐하는 짓이냐?” “편한 길을 찾지 말고 생각을 해 봐.” “무슨 생각?” “당장 고독초 안에 있는 독만 빼낼 생각하지 말고 상황을 전체적으로 보라는 거야. 이를테면 데커드의 아저씨의 몸에 걸린 독의 성질이라든지.” “트롤의 똥독 말인가?” “응. 어차피 해독시킬 대상은 바로 그거잖아?” 트롤의 똥독이 묻은 꼬챙이는 바닥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김성철은 그중 하나를 집어 냄새를 확인했다. 끔찍한 악취에 김성철은 그만 헛구역질을 하며 인상을 구겼지만 똥독에 담긴 연금정보는 확실히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 트롤의 변(북부) > 레벨 : 3 등급 : A 속성 : 금(金) 효과 : 없음 비고 : 전설에 의하면 북쪽의 트롤들은 지금은 멸망한 조인 왕국의 가축 같은 존재라고 한다. 조인들은 그 가축의 똥을 여러 용도에 사용했는데 그중 하나는 똥을 모아 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조인들은 후각이 그다지 발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그 정보를 본 김성철의 뇌리에 무언가 떠올랐다. “트롤의 똥은 녹슨 쇠의 독성을 지니고 있군.” 베르텔기아가 몸을 위 아래로 흔들었다. “응. 맞아. 바로 그거야!” 고독초, 맹인의 풀, 트롤의 똥. 세 가지 상반되는 재료들을 보던 김성철은 다른 재료로 눈길을 돌렸다. 연금아이템은 모두 다섯 개의 속성이 있다. 불, 물, 나무, 금속, 그리고 허무 속성.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허무 속성을 제외하면 실제로 통상의 연금술은 4가지 속성으로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각각의 속성 사이엔 상성이 존재한다. 불은 나무와 금속을 모두 이기지만 물 속성엔 약하고 반면 물 속성은 금속과 불엔 강하지만 나무 속성엔 약하다는 등의 다소 복잡한 상성이다. 상성은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게 아니라 각 속성의 강도에 따라 변화할 수도 있다. 김성철은 트롤의 똥이 금속 속성을 띠는 데 주목했다. 금속 속성을 언제하려면 금속을 이기는 불 속성의 연금아이템이 필요하다. 하지만 금속 속성을 이기려면 불 속성 중에서도 화기가 강한 녀석이 필요하다. 그런데 김성철이 가진 재료 중에 여간한 금속을 이길만한 불 속성 재료는 없었다. 그나마 금속 속성을 이길 정도의 화기를 보유한 연금아이템은 나무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에어푸르트에서 연금폭탄(흑)을 만들 때 사용했던 폭죽나무의 포자씨앗이 바로 그것이다. “음...” 김성철은 거츨거츨한 씨앗을 매만지며 신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베르텔기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 재능이 있는 건 확실하네. 그 많은 재료 중에 한 번에 정답을 찾아내다니. 감각적인 걸까. 아니면 우연인 걸까.’ 베르텔기아는 좀 더 김성철을 생각하게 내버려두고 싶었지만 그녀도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바로 조언을 던졌다. “어떤 아이템은 가공하면 속성이 바뀐 답니다.” “그렇군.” 김성철의 눈이 번득였다. 단 한 마디에 안개가 싹 걷히는 상쾌한 기분이다. 김성철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하지만 그는 급한 와중에서도 신중하게 씨앗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고 꼼꼼하게 다듬었다. 그 또한 베르텔기아의 눈엔 플러스로 작용했다. ‘역시. 재능이 있긴 있어...’ 급박한 상황에서도 저런 여유를 발휘하는 건 적어도 연금술사들에겐 재능의 영역이다. 게으르고 매사 대충하는 놈은 절대 훌륭한 연금술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씨앗을 다듬은 김성철은 유발에 씨앗을 빻고 몇 가지 재료를 추가, 연금 가마를 통해 붉은 가루를 연성해냈다. < 포자씨앗의 정수 > 레벨 : 3 등급 : B 속성 : 화(火) 분류 : 폭약 효과 : 폭탄의 재료. 취급주의. 나무 속성을 불 속성으로 변화시키는데 성공했다. 김성철은 다시 한 번 자신이 지닌 재료들을 보았다. 고독초, 맹인의 풀, 포자씨앗의 정수. 레시피는 제시되지 않았지만 그의 머릿속에 어떤 형태의 연금 아이템이 미리 그려졌다. 지금까지 연마했던 경험과 지식이 창의력과 결합되어 자신만의 것으로 재구축되고 있었던 것이다. 김성철은 즉시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급하게는 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고독초를 빻은 원액에 증류수를 넣고 끓여 물을 증발시킨 후 거름망으로 걸러 원액만을 담아냈다. 누가 가르쳐준 게 아니다. 지금까지 연성했던 나무 속성 아이템의 용법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불순물은 사라지고 원하는 성분이 담긴 진액만이 남는다. 김성철은 맹인의 풀을 가마 안에 넣고 끓여 별도의 중화제를 만든 후 그 위에 고독초 진액과 포자 씨앗의 정수를 투입했다. 그가 망설인 부분은 포자씨앗의 정수의 분량을 얼마만큼 넣을지 였다. “조금만 넣어도 돼. 그건.” 결정적인 순간에 베르텔기아는 다시 조언을 했고 김성철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소금을 치듯 미약한 양을 연금가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연성. 연금 주걱을 잡고 가마 안을 휘저는다.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결과가 나왔다. [ 연성 성공! ] 고생에 걸맞는 보상. 그런데 보상은 그것만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 당신은 어느 누구의 가르침 없이 스스로의 경험과 지식만을 밑천 삼아 스스로의 연금 아이템을 만들어냈다. ] [ 위대한 연금술사에겐 레시피가 필요 없는 법. ] 보상 : 마력 +10, 직관력 + 15 생각지도 못한 문구와 함께 베르텔기아의 몸에서 기이한 빛이 발했고 그 빛은 자석에 끌린 쇠붙이처럼 김성철을 향해 그 안으로 들어왔다. “베르텔기아. 이건 뭐지?” 김성철이 베르텔기아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그건, 창조술사의 시련 중 하나야. 내가 조금 옆에서 돕긴 했지만.” “…….” 단순한 시련은 아니다. 김성철은 자신의 몸에 주입된 새로운 힘이 다름 아닌 베르텔기아의 몸에서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마치 회오의 관 지하에 있던 바알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껄끄러운 점이 있긴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다. 김성철은 가마 안에 완성된 아이템을 확인했다. < 해독제 > 레벨 : 3 등급 : A 속성 : 화(火) 분류 : 약제 효과 : 독을 치료한다. 금속성의 독에 특효. 적절한 아이템이다. 게다가 등급도 A를 받았다. “우와! A등급이잖아? 처음 만드는 자신만의 레시피임에도 불구하고.”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속에서 몸을 흔들어댄다. 김성철은 즉시 해독제를 가지고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막사 안엔 아카드와 파간이 데커드의 병수발을 들고 있었다. “잠깐만 괜찮겠소?” 김성철은 양해를 구하고 데커드에게 다가갔다. “그건 뭔가?” 아카드가 김성철의 손에 들린 걸 보고 퉁명스레 물었다. “이 자를 살릴 약이오.” 김성철은 해독제의 뚜껑을 열고 데커드의 목 주변에 난 상처에 해독제를 흘려보냈다. 데커드가 강한 신음을 흘리며 괴로워했다. “으음...” 아카드의 눈길이 곱지 않다. 하지만 옆에 있던 파간이 그를 제지했다. 대신 그는 아카드와 달리 차가운 목소리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뭘로 만든 거요?” 김성철은 눈길하나 주지 않고 대답했다. “천년 고독초.” 파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드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토를 달았다. “지금 고독초를 쓰면 데커드는 견디지 못할 거야. 고독초에 독이 있는 건 알고 있나?” “그걸 제거한 게 바로 이거요.” 김성철은 데커드의 입을 벌리고 해독제를 먹였다. 대부분 토해냈지만 데커드는 몇 방울의 해독제를 삼켰다. 그리고 잠시 후. 데커드의 열이 내렸다. 또 한 번의 고비가 다시 지나갔다. * 겨울이 오면 마족들은 칩거에 들어간다. 마족들은 추위에 약하기 때문이다. 물론 고위 마족들은 여간한 추위엔 끄덕도 하지 않지만 그 아랫것들. 마족 병대의 주력이 될 하급 마족이 추위를 버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주둔지 안에 머무른다. 마족들이란 솔선수범과는 거리가 먼 족속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긴 겨울 동안 마계 최전선엔 짧은 평화가 찾아온다. 형벌부대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번의 기습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은 걸 끝으로 일주일 간 마족은 공격해오지 않았다. 간간이 순찰을 도는 정찰병들도 마족들이 얼음과 불로 뒤덮인 그들의 땅으로 돌아갔음을 알려오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시기 속에서 김성철은 홀로 마계 최전선의 바위산을 누비고 있었다. 그가 찾는 것은 이곳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지하 왕국의 입구. 지금은 후방으로 후송된 데커드가 말했다. 지하 왕국의 입구는 마계와 인간계 사이의 험준한 바위산 어딘가에 있다고. 일식이 찾아오면 그 위치가 확연하게 드러난다고 하지만 아직 일식이 찾아오려면 두 달이라는 시간이 더 남아 있다. 김성철은 그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홀로 바위산을 뒤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끔 만난 마족 잔당들을 마법으로 처리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바위산을 누비던 나날을 보내던 중 김성철은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그것은 하늘을 나는 배, 공선 한 척이 마계 최전선의 하늘을 유유히 비행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인간제국의 배는 아니군. 저 깃발은 고대왕국의 것인가?’ 고대왕국. 대륙에 존재하는 인간의 나라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군사대국이다. 고대왕국에서는 마법을 부정한 것으로 보고 마법의 사용을 엄격히 금지한다. 대신 그들은 검에 극에 이른 자들을 체계적으로 키워내고 그들의 주력으로 쓰고 있다. 소드마스터라 불리는 존재들이 바로 그것이다. 강가스 아론 같은 강력한 무력을 지닌 소드마스터들은 고대왕국을 대륙 중부에서도 강력한 국가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김성철은 알고 있다. 겉으론 마법을 금지하는 고대왕국이지만 뒤로는 마법사를 몰래 고용해서 쓴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대왕국의 공선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렸다. 13명에 이르는 소규모의 무리. 김성철은 그들 절반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대체 고대왕국의 공선이 어째서 이런 곳에 온 것이지?’ 의문은 오래가지 않아 풀렸다. 발밑에 호문클루스 다섯 마리를 거느린 여자 마법사 하나가 바위틈 아래에 서서 무언가 주문을 외쳤다. 바위틈이 열리며 우물처럼 아래로 뚫린 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 23. 지하 왕국 (2) 하늘을 향해 뚫린 입구 주위엔 삼엄한 경계가 펼쳐졌다. 하늘 위엔 공선이, 입구 주위엔 고대왕국의 병사들이 각각 지키고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일부 마법사들은 결계까지 펼쳤다. 김성철은 끈기 있게 상황을 관찰하며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해질녘이 되자 검은 구멍 안에서 사람들이 도르래로 작동되는 간이 승강기를 타고 지면으로 올라왔다. 내려갈 때 그들의 숫자는 열세 명이었지만 지면으로 돌아온 숫자는 일곱 명에 지나지 않았고 그중 한 명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빌어먹을. 마물이 너무 많아. 이 정도면 탐사대가 아니라 군대를 투입해야 할 거 같아.” 훤칠한 키와 훌륭한 체격을 지닌 청년이 피로 흥건한 검을 천으로 닦으며 말했다. 그 옆엔 음침한 분위기의 여자 마법사가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제가 말했잖습니까? 저곳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소드마스터 다섯 명은 필요하다고요.” 발밑까지 와닿는 그녀의 치맛자락 주변엔 철가면을 쓰고 갑주로 온 몸을 감싼 호문클루스 다섯 마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들의 힘만으론 부족한 거예요!” “소드마스터를 더 데려오는 거예요!” “미미님의 명령은 절대적인 거예요!” 호문클루스 다섯 마리는 정신 사납게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때 한 사내가 공선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공선과 지면 사이엔 수십 미터의 거리가 있었지만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면에 낙하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지면이 가볍게 흔들렸고 그 흔들림은 모두의 시선을 그에게 향하게 만들었다. “탐사대장. 미미 아즈라엘! 진척 상황을 보고하라.” 사자를 방불케 하는 갈기와 풍성한 수염을 지닌 백발의 검사였다. 백금으로 장식된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친 그 사내는 겉으로 보기에도 대단히 고귀한 사내로 보였다. 김성철은 그 사내의 얼굴을 알아봤다. ‘윌리 길포드군.’ 대륙십삽걸 중 한 자리를 차지한 사내. 대륙칠걸 윌리 길포드. 그는 소환자 출신 최초의 소드마스터로 막강한 검술과 사자 같은 투혼으로 대륙 전역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김성철과는 물론 구면. 마계 최전선에서 함께 마왕토벌을 했던 전력이 있다. 이야기는 몇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김성철은 그 사내가 호방한 겉모습과 달리 치밀하고 꼼꼼한 책략가 유형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탐사대의 절반을 잃었습니다.” 미미라 불린 음침한 여자 마법사는 우울한 눈빛으로 윌리 길포드를 응시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이유는?” 윌리 길포드가 하얀 구레나룻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무 많은 적이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소드 마스터 한 명과 소드 어뎁트 다섯 명을 붙여주셨지만 그들의 힘으론 중과부적이었습니다.” 윌리 길포드는 거기까지 듣고 난 후 손을 들어 올려 미미의 말을 가로막은 뒤 젊은 남성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미하엘 길포드. 그 말이 사실인가?” 미하엘이라 불린 젊은 검사는 어두운 얼굴로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생략이 있지만 저 마녀의 말은 대부분 진실입니다.” 목소리도 생김새도 윌리엄과 닮은 구석이 있다. 김성철은 저 미하엘이라 불린 사내가 윌리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그래. 네 새끼들은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으니 반대하고 나선 것이겠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그 장면을. 사람들은 대륙십삼걸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실제로 역사서에서도 대륙십삼걸의 회합은 무위로 끝났다고 기재되어 있지만 사실은 다르다. 대륙십삽걸은 마계를 한 차례 침공했다. 그리고 파죽지세로 마계를 유린하고 마왕 해서니우스 맥스의 궁전까지 갔다. 그대로 궁전의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갔다면 첫 번째 재앙은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대륙십삼걸의 균열은 거기서 일어났다. 누군가 말했다. “만약 우리가 마왕을 죽인들, 칠영웅이 다시 나타날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그 칠영웅을 상대할 수 있을까요? 혹 그들을 상대할 수 있다고 해도 그 다음에 올 재앙은?” 그 한마디는 모든 것을 망쳐놓았다. 김성철은 그 발언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하고 있다. 대륙이걸이자 부유제도의 도주. 중재자 아퀴로아. 다른 놈은 몰라도 그 노파만은 직접 죽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녀가 기거하는 부유제도는 베일에 싸인 비밀의 장소다. 아무도 그 위치를 모르고 찾아갈 수도 없다. 김성철은 그 위치를 알아내려고 갖은 시도를 했지만 결국 부유제도로 가는 방법은 찾지 못했다. 김성철이 상념에 잠긴 사이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너희들은 여기서 캠프를 차리고 대기해라. 내 가까운 곳에 있는 실력자들을 끌어 모아 너희들에게 붙여주겠다.” 윌리 길포드가 큰 소리로 말했다. 미미 아즈라엘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번엔 미하엘 길포드가 반대하고 나섰다. “아버님. 이번 계획은 비밀리에 진행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외부인을 함부로 끌어들이면 비밀이 새어나갈 우려가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미하엘.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윌리 길포드는 자신의 검을 살짝 뽑아보였다. 푸르스름한 귀기가 서린 칼날이 푸른빛을 사방에 흩뿌렸다. 그 모습을 본 김성철은 생각했다. ‘죽어도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는군.’ 윌리 길포드 정도의 실력이면 지하에 뭐가 있건 가볍게 청소가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직접 나서지 않는 건 타고난 조심성 때문이다. 윌리 길포드는 승산이 있는 싸움만을 한다. 조금의 불확실성도 허용하지 않는게 그의 주의다. 그 덕에 그는 많은 기회를 놓쳤지만 단 한 번도 심각한 위기에 빠진 적도 없었다. “일주일 뒤에 돌아오겠다. 너희들은 이곳에 캠프를 차리고 이곳을 지켜라.” 그는 대부분의 수비 병력을 캠프 주변에 배치한 후 공선과 함께 남쪽으로 향했다. 남쪽으로 떠나며 그는 기분 탓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진짜로 느낀 것인지 김성철이 숨어 있는 골짜기 쪽을 힐끗 응시했다. 하지만 기척을 완전히 죽인 김성철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기분 탓인가. 무언가 대단히 껄끄러운 게 있는 느낌이 들었는데.” 공선은 사라졌다. 김성철은 캠프 쪽을 관찰했다. 미미 아즈라엘이라는 여자 마법사는 자신의 호문클루스들과 함께 자신의 막사로 들어갔고 미하엘 길포드는 부하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며 휴식을 취했다. 공선은 떠났지만 경계는 대단히 삼엄했고 캠프에 주둔한 마법사 중엔 언제든 외부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감화학파의 마법사도 배치되어 있었다. 김성철은 직접 나설까 하는 유혹을 느꼈지만 참아냈다.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구태여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게다가 하루에 두 번 있는 점호시간이 돌아오고 있다. 점호 시간에 불참하면 즉각 탈영으로 간주된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강가스 아론은 김성철의 상대가 아니지만 김성철은 지금은 형벌부대 속에서 활동하길 원했다. 김성철은 약간의 아쉬움을 안고 자리를 떠났다. * 다시 부대로 돌아왔을 때 군막 안은 떠들썩했다. 세 명의 병사가 형틀에 묶여 있었고 강가스 아론이 이들에게 매질을 가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곧 이들이 이전 전투에서 탈영했던 다섯 명의 병사 중 하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마계 최전선에서 탈영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후방영역이라면 모를까 3개의 전선에서, 거기서도 최전선에 위치한 형벌부대에서 탈영을 한다는 건 홀 몸으로 마계에서 생존하라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사방에 마물이 득실거리는 이 땅에서 살아남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이 척박하고 낯선 땅에서 헤매다가 죽거나 사라지고 간신히 적응한 이도 원시시대 이하의 야생동물 같은 삶을 이어나가야 한다. 김성철 정도 되니까 자유롭고 풍족하게 먹고 살 수 있는 것이지 다른 평범한 자들에게 마계란 죽음과 늘 맞닿아 있는 곳이다. “너희들은 제 한 몸 살겠다고 동료를 버린 배신자들이다. 이미 지은 죄가 더 큰 죄가 얹어졌다. 나는 너희들을 용서할 수 없으며 다른 모든 전사자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너희들을 죽일 것이다.” 강가스 아론은 붙잡힌 3명의 탈영병을 매질,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다. 하지만 탈영병들은 죽지 않았다. 딱 죽을 만큼 맞았을 때 의외의 손님이 남쪽에서 찾아왔기 때문이다. 남쪽에서 지원군이 도착했다. 숫자는 대략 삼백 명. 소문에 의하면 철혈기사단이 담당하는 전선에서 무려 천 명 이상의 대규모 탈영이 발생했는데 그중 일부가 이곳에 보냈다고 한다. 김성철은 신병 중 한 명을 눈여겨 봐 놓았다가 적당한 때가 무르익자 그에게 따뜻한 음료를 건네며 질문을 던졌다. “무엇 때문에 대규모 탈영이 일어난 거요?” “해서니우스 맥스. 마족의 왕이 직접 전선에 출현했소.” 신병은 손을 덜덜 떨며 두려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렇다면 수긍이 간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해서니우스 맥스는 최강의 악마와 마수로 이루어진 정예 병력을 이끌고 서쪽의 철혈기사단의 전진기지를 공격, 삼할 이상의 요새를 초토화시켰고 돌발적으로 일어난 회전에서 철혈기사단에게 심각한 패배마저 안겨주었다고 한다. 마계최전선 중 한 축을 지탱하는 철혈기사단의 전선이 위태로워 진 것이다. 당장은 동절기에 접어들어 철혈기사단이 당장 무너질 일은 없겠지만 그들은 요충지를 전부 빼앗겼고 다음 봄이 오면 버티기 어려우리라. “영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있어.” 점호가 끝난 후, 김성철은 아카드로부터 부대 내에 돌고 있는 좋지 않다는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변경백 마르틴 브레가스가 철혈기사단을 구원하기 위해 동계 총공세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더군.” 그것이 사실이라면 형벌부대로선 사형선고와 다를 바 없는 일이다. 공세가 시작되면 형벌부대는 가장 위험한 곳에서 가장 절망적인 임무에 투입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성철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정보를 쥔 데커드는 이미 후방에 가 있고 자신은 제 한 몸만 챙기면 그만이니. 게다가 김성철은 일주일 안에 고대왕국의 탐사대가 지키고 있는 던전을 공략해볼 작정이었다. 그 안에 무엇이 있든.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말이다. 문제는 캠프를 지키는 탐사대의 존재지만 김성철은 거기에 대해서도 해법이 있었다. 이튿날 김성철은 떠들썩한 부대를 뒤로 하고 마계로 행차했다. 그곳에서 김성철은 악마 영주 중 하나에게 싸움을 걸었고 패배한 척 뒤로 달아났다. 해서니우스 맥스가 육신을 버리게 할 정도로 강하다던 김성철을 자기도 모르게 패퇴시킨 악마영주는 신이 나서 전군을 이끌고 김성철을 추격했다. 김성철은 뒤에 수천 마리의 악마들을 달고 탐사대의 캠프가 있는 곳까지 달아났다. 그 뒤의 일은 뻔했다. 김성철을 찾아 헤매던 악마들은 김성철 대신 탐사대를 발견했고 그들을 공격했다. 김성철은 눈에 띄지 않는 협곡에 숨어 삶은 감자를 덥썩 입에 물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김성철은 당연히 탐사대가 그냥 물러가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탐사대는 의외의 선택을 했다. 그들은 던전을 버리고 뒤로 물러나는 대신, 그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던전 안으로 들어가는 선택을 했다. 악마들은 뒤를 쫓지 않았다. 고위 마족들은 그 입구를 보더니 고개를 흔들며 병력을 뒤로 물렸다. “신들의 제물로 바쳐진 종족의 땅이다. 들어가면 우리 또한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마족들은 물러났다. 김성철은 다시 한 번 강한 흥미를 느꼈다. 마족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러나는 그 던전의 정체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김성철은 여기서 다시 한 번 물러나는 선택을 했다. 대신 그는 남쪽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데커드가 신세를 지고 있는 야전병원의 병실로 숨어들었다. “대체 그 던전의 정체는 뭡니까?” 김성철이 물었다. 그는 고대왕국의 탐사대가 던전의 입구를 발견했고 이미 탐사되고 있다는 사실까지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듣자 데커드는 더는 사실을 숨길 수 없었다. “뭐라고요? 고대왕국의 탐사대가 이미 도착했단 말이오? 이런 빌어먹을...!” 그는 솔직하게 자신이 아는 걸 털어놓았다. “그 던전은 재앙에 의해 먹혀버린 종족의 땅이오.” “재앙에 먹힌 종족?” “재앙을 극복하지 못한 종족은 신의 노예로 전락하오. 지하 왕국을 건설했던 조인의 경우엔 고대신의 노예가 되었지요.” “고대신의 노예라.” 김성철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이계엔 다섯 명의 주신이 있다. 선과 올바름을 관장하는 질서신. 악과 무질서를 추구하는 혼돈신. 세상을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 중립신. 유구한 시간의 흐름 그 자체가 체화된 고대신.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예정된 신. 이중 고대신은 모든 신중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김성철은 고대신의 종복들과 싸운 적이 있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역겹고 뒤틀린 존재들이었다. ======================================= 23. 지하 왕국 (3) 하루가 지났다. 악마군의 대규모 이동이 보고됨에 따라 잠깐의 평온을 찾았던 형벌 부대에 경계령이 내려졌다. 강가스 아론은 부대원을 불러모아놓고 말했다.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 어제 예상치 못한 마족의 대군이 남하했다. 그리폰 정찰대의 말에 의하면 마족들은 물러났다고 하나 매복을 준비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정찰이 필요하다. 자원자를 찾는다.” 대부분의 신병으로 이루어진 부대에서 자원자를 찾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강가스 아론의 눈은 자연스레 기존의 생존병들을 향했다. 김성철이 손을 들었다. “34호? 자네도 신병 아닌가?”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 친구들보다는 짬이 좀 됩니다. 그리고 매일 같이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믿고 맡겨도 될 겁니다.” “그래?” 직접 나선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다. 강가스 아론은 김성철을 정찰병으로 낙점하고 추가로 김성철을 보조할 병사를 찾았다. 하지만 지원병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족들이 깨끗하게 후퇴하는 일이 없다는 것은 마계 최전선에 있는 모든 병사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마족들이 물러난 곳 주변엔 어마어마한 숫자의 함정과 매복, 그리고 인간을 먹는 마수들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전군이 함께 움직인다면 모를까 소수 정찰대만 가면 마족의 장난감이 되거나 마수의 먹이로 전라할 것이다. “정찰을 한 번 성공하면 임무에 한 번 성공한 걸로 쳐주겠다. 따라 나설 사람?” 강가스는 형벌부대원이라면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럼에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만큼 그 임무는 위험한 임무였다. 침묵 속에서 김성철은 강가스 아론에게 말했다. “저 혼자서 충분합니다. 3일안에 돌아오겠습니다. 3일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죽었다고 생각하십시오.” “자넨 자원했으니까 정찰에 성공해도 임무숫자를 빼줄 생각이 없네. 그래도 괜찮겠나?” 강가스 아론이 넙적한 얼굴에 비열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정찰에 실패하면 전부 죽는 건 매한가지 아닙니까?” “잘 아는 친구군. 그래. 가게. 34호.” 김성철은 강가스의 측근에게 신호용 스크롤 및 식량과 물을 지급받고 길을 나섰다. 다른 병사들이 보기엔 자살행위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지만 김성철에겐 그야말로 호재였다. ‘3일동안 점호를 받지 않아도 될 것 같군. 그 던전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진 알 수 없지만 3일 정도면 어느 정도 가치를 지녔는지 정도는 알 수 있겠지.’ 김성철은 그대로 길을 떠나 던전으로 향했다. 예상한 대로 던전 주변엔 제법 많은 함정과 감시자들이 있었다. 김성철은 함정과 악마들을 피해 목적지로 숨어 들어갔다. 퍽! 그리고 던전으로 향하는 길목에 매복한 악마 한 무리를 짱돌로 찍어 죽인 후 김성철은 바위산 아래를 응시했다. 던전 주변엔 버려진 막사만 있을 뿐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도처에 쳐진 경계결계도 이미 박살나 그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던전으로 향하는 도르래 장치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런데 마족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도르래 장치에 얄궂은 장난을 쳐놨다. 누군가 도르래를 가동하는 순간 폭발하게끔 하는 함정이 설치된 것이다. “…….” 김성철은 함정에 손대지 않았다. 대신 그는 까마득한 구멍 안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시커먼 어둠이 그를 덮쳤고 발끝을 저리게 하는 추락감이 전신의 감각을 지배했다. 끝없는 추락 속에서 김성철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미명을 포착하고 어둠을 향해 두 주먹을 내질렀다. 푹! 단단한 바위가 두부처럼 뭉개지며 그의 팔이 절반 이상 박혔고 추락하던 그의 몸은 벽면에 단단하게 고정됐다. 김성철은 팔을 빼내며 밝은 빛이 서린 곳으로 뛰어내렸다. 그곳은 끝이 보이지 않는 회랑이었다. 벽면은 스러진 벽돌과 흙, 푸른 이끼가 적절히 섞여 어두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고 코끝으론 납골당에서 맡을 수 있는 퀴퀴한 냄새가 파고들었다. “여기, 느낌이 좋지 않아.”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속에서 몸을 흔들었다. 김성철을 베르텔기아를 꺼내며 말했다. “여기서부턴 바깥에 나와도 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주머니 속에서 튀어나와 원래의 크기로 팽창하며 활기차게 주변을 날아다녔다. “아, 상쾌하고 싶지만 상쾌하지 못한 기분!” “여기가 어딘지 아나?” 김성철의 물음에 베르텔기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처음 와보는 곳이야. 하지만 당신들이 조인이라 부르는 나하크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있어.” “나하크? 그건 뭐지?” “과거 이계에 융성했던 족속들이야. 지금은 멸망해서 찾아볼 수 없지만 전설에 의하면 그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커다란 날개를 지녔고 룬 문자를 새긴 부리로 파멸적인 마법의 힘을 마음껏 구사했다고 하지.” “마족 군대에 볼 수 있는 조인과는 다른 종자들인가?” “아마도 먼 친척이 아닐까? 나하크는 그렇게 열등한 존재는 아니거든.” 베르텔기아와 이야기를 나누며 김성철은 던전 안으로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갔다. 탐사대의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김성철은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진실의 눈이 어둠 너머에 있는 마법의 존재를 감지했다. 마법 함정이다. 속성은 빙결 속성. 잘못 밟으면 온 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한기가 덮칠 것이다. ‘이건 인간 마법사의 소행이군.’ 발밑에 찍힌 발자국이 함정 주변에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아마도 이 주변에서 큰 소란이 일어난 모양이다. 발자국의 숫자로 보아 대략 던전 안에 있는 인간의 숫자는 서른 명. 탐사대와 수비 병력의 숫자를 합친 숫자이리라. 김성철은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핏자국이 보였다. 핏자국을 따라가자 두 구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게 보였다. 병사들의 시신이다. 시체에 대한 예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걸로 보아 대적하기 어려운 적을 만났음이 틀림없다. 김성철은 눈을 부릅뜨고 죽은 시체를 버려두고 계속 앞으로 전진 했다. “적이야.” 베르텔기아가 짤막하게 말했다. 김성철도 알고 있었다. 머지않은 곳에 끈적한 적의가 도사리고 있음을. 김성철의 손에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그는 어둠 너머에 선 존재를 노려보며 짤막하게 말했다. “기어 나와라.” 이윽고 어둠 속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몸은 인간이오, 얼굴은 새의 두상을 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녹색 점액질의 피부를 지닌 괴물이었다. 눈도 없고 코도 없었지만 그 괴물은 김성철을 쳐다보는 것처럼 행동했다. 마치 평범한 사람처럼. 김성철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고대신의 종복이군.’ 이기지 못할 상대는 아니다. 하지만 상대하고 싶지 않은 적이다. 김성철은 망치를 휘두르며 짧게 말했다. “꺼져라.” “…….” 점액질의 괴물은 우두커니 선 채 김성철을 응시하다가 몸을 돌려 소리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대체 저건 뭐야?” 김성철의 등 뒤에 숨어 있던 베르텔기아가 슬그머니 튀어나오며 말했다. “심연의 나락이다.” “심연의 나락?”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만나면 자신이 속한 구렁텅이로 끌고 가려는 녀석이지. 인간이든 마족이든.” 그리고 죽은 자까지도. 심연의 나락이 자리 잡은 곳엔 죽음과 같은 정적만이 흐른다. “으... 무슨 말인지 알거 같아서 더 무섭네.” 베르텔기아가 몸을 한 차례 크게 떨었다. “방금 그 병사들도 저 괴물이 한 짓이야?” “그건 아닐 게다. 심연의 나락에게 끌려 간 자는 이 세상에서 존재 자체가 지워진다. 시체조차 남지 않지.” “그럼 다른 괴물들도 있다는 이야기?”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도 심연의 나락은 내 몸에 실린 막강한 힘에 이끌려 내 앞에 나타났을 것이다. 아직 탐사대 앞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겠지.’ 김성철은 이전에 탐사대가 윌리 길포드에게 한 보고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이 심연의 나락과 마주쳤다면 단 한 명도 살아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김성철은 심연의 나락이 얼마나 공포스런 존재인지 경험한 적이 있다. 지금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지만 말이다. 김성철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병사들의 시체가 계속 발견됐다. 한 구, 두 구, 그리고 열 구. 김성철은 시체가 널린 자리 주변에서 치열한 싸움의 흔적을 발견했다. 마법의 불길이 바닥을 태운 흔적, 소드마스터의 검기가 벽면을 베어버린 흔적이 있었고 부러진 창칼의 파편이 바닥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병사들이 상대한 괴물의 모습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이만큼 대규모의 전투가 있었다면 약간의 단서 정도는 있을 법 한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 김성철은 기척을 숨기는 걸 그만뒀다. 그는 영혼창고에서 횃불을 꺼내 불을 붙였고 일부러 들리게끔 큰 발소리로 던전을 걸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곧 김성철 주변에 귀에 거슬리는 소리들이 나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어둠 너머에 우글거리는 괴물들을 볼 수 있었다. 두 다리와 양 팔, 그리고 양 날개. 합해서 여섯개의 다리로 걷는 뒤틀린 조인들의 시체였다. “…….” 소리 없는 조인의 시체가 지네처럼 기어와 김성철에게 달려들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를 지닌 두상으로 김성철 쪽을 사납게 쪼아대며. 김성철의 팔 가라즈가 허공을 갈랐다. 퍽! 팔 가라즈의 파멸적인 일격에 얻어맞자 조인의 시체는 그 자리에서 먼지로 화해 사라졌다. 그제야 김성철은 왜 마물의 시체가 없는 지 알 것 같았다. ‘이 던전 안에 도사린 퀴퀴한 냄새의 정체는 바로 이 시체 가루의 냄새였군.’ 수십 마리에 달하는 조인의 시체가 지네처럼 기어 다니며 김성철을 호시탐탐 노렸다. “으! 나 돌아갈래!”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주머니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김성철의 망치는 더욱 활개를 쳤다. 퍽! 퍽! 퍽! 흉물스런 마물들은 김성철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것들은 차례차례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살아남은 마물들은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마물들이 사라진 던전 안에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싸움이 끝나자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바깥으로 나오며 자신의 페이지 하나를 펼쳐보였다. “그건 뭐냐?” 그녀의 페이지엔 마치 갓 펜으로 그린 것 같은 간략한 지도가 나타나 있었다. “지도를 한 번 만들어봤어.” “지도?” “응. 이 던전, 결코 작은 것 같지 않거든.” 김성철도 그 점은 동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던전을 가볍게 돌파하는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퍽! 앞을 가로막은 벽이 박살이 나며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그 구멍 너머로는 또 다른 통로가 놓여 있었다. 김성철은 그 통로로 걸어가 다시 벽을 후려쳤다. 그는 같은 작업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던전의 막다른 끝이 나올 때까지. “으음...” 나름 열심히 자신의 페이지에 지도를 그려나가던 베르텔기아의 입에서 결국 한숨이 흘러나왔다. “힘이 강하면 정말 편하지? 응?” “…….” 김성철은 망치를 고쳐 잡고 이번엔 방향을 틀어 북쪽으로 굴착작업을 시작했다. 대략 4개의 벽을 박살냈을 때 김성철 앞에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어둠에 싸인 낭떠러지 쪽은 정체모를 녹색의 안개가 끼어 있어 그 너머가 보이지 않았다. 김성철은 돌멩이를 던져 소리를 들었다. 꽤 깊은 낭떠러지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이렇게 구멍을 뚫으면 뭐가 좋아?” 베르텔기아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나만의 길을 만드는 거지. 이런 미로 속에선 길을 잃어버리기가 쉬운 법이니까.”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 김성철식 던전 공략법이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소란스럽게 던전을 두들기다보면 굳이 자신이 찾아나서도 되지 않을 존재를 이쪽으로 불러올 수도 있다. 저벅. 곧 머지않은 곳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인간의 기척이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영혼 창고에 집어넣고 곧 나타날 인물을 기다렸다. 어둠 너머에서 투명한 안개에 둘러싸인 여자 마법사가 나타났다. 그녀의 발밑엔 철갑을 두른 다섯 호문클루스들이 있었다. 김성철은 그녀의 존재를 눈치 챘지만 짐짓 모른 척하고 멍하니 앞을 응시했다. 그녀는 시간을 들여 김성철을 관찰했다. 김성철의 모습, 복식, 무장, 그리고 능력치까지. 몰래 숨어서 볼 수 있는 모든 걸 확인했다. 꼼꼼한 정찰이 끝난 후 여자 마법사는 김성철 앞에서 마법의 장막을 벗고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은 누군가요?” 미미 아즈라엘. 조사대의 대장이다. ======================================= 24. 나하크를 삼킨 자들 (1) 겉으로 보이는 미미 아즈라엘의 나이는 이십대 중반. 뒤집어 쓴 두건 너머로 차갑게 번득이는 푸른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묻겠어요. 당신은 누군가요?” 그녀는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34호.” 김성철은 자신의 코트에 부착된 천으로 만든 번호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미미 아즈라엘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34호 씨군요. 그래. 이곳엔 어떻게 왔나요?” 미미 아즈라엘은 김성철 뒤에 날아다니는 베르텔기아를 응시했다. “미미님! 책이 날아다니고 있는 거예요! 신기한 거예요!” “저건 사역마라고 하는 거예요. 무식하면 입을 놀리지 말라는 거예요!” 그녀의 치마폭 아래 뛰어놀던 호문클루스들이 왁자지껄 떠들었다. 그녀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자 호문클루스들은 고개를 숙이고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다시금 던전 안에 정적이 흐르자 미미 아즈라엘은 대답을 갈구하는 눈빛을 김성철에게 보냈다. “자, 대답은?” 김성철은 한 점도 흐트러지지 않은 눈동자로 미미를 응시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던전 안에 무엇이 있는지 조사 중이다.” 그 말을 들은 미미 아즈라엘은 냉소를 머금었다. “간도 크셔라. 어디서 오신 분인지 몰라도 일주일 안에는 여기서 물러나는 게 좋을 거예요.” “이유는?” “대륙칠걸. 윌리 길포드가 이쪽으로 오기 때문에.” “…….” 그가 온들 달라지는 건 없다. 김성철은 침묵했다. 미미 아즈라엘은 김성철 너머에 난 구멍들을 응시했다. “이건 뭐지? 혹시 당신이 한 일인가요?” 김성철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리빙 북 타입의 사역마라. 마법사로 보이네요.” 이미 그녀는 투명한 안개 속에서 김성철의 능력치를 살펴봤다. 별 대단할 것도 없는 능력치였다. 그래서 그녀는 혼자임에도 김성철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내가 마법사건 아니건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지?” 김성철이 입을 열었다. 미미 아즈라엘은 그런 김성철을 싸늘한 눈으로 응시하다 목례를 한 후 등을 돌렸다. “조사실장 우지라. 장막을 씌워라.” 미미와 다섯 호문클루스들은 투명한 안개에 싸였고 김성철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경고하겠는데 빨리 여기서 떠나는 게 좋을 거예요. 여긴 나 말고도 서슬 퍼런 소드 마스터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일주일 뒤엔....” 협박 섞인 말을 던지며 그녀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김성철에겐 영혼각인 진실의 눈이 있다. 투명한 안개 속에 가려진 미미 아즈라엘과 다섯 호문클루스들의 모습은 김성철의 시야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 김성철은 기척을 숨기고 미미 아즈라엘의 뒤를 조용히 밟았다. * 그녀는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걸어 어느 한 지점에 도착했다. 사방이 급조한 방어벽으로 둘러싸인 공터였다. 그곳엔 대략 열다섯 명 정도의 병사와 조사대가 숨을 돌리고 있었다. “끄으윽...” 부상병도 제법 있었다. 그 중 한 병사는 치명상을 입었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허공에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돌봐주는 마법사마저도 포기한 그는 싸늘한 공터 구석에 방치되어 서서히 죽어갔다. 미미 아즈라엘이 투명한 장막을 벗은 건 그 시점이었다. “인간 하나가 죽은 거예요!” “우리를 괴롭히던 인간인데 꼴좋은 거예요!” 잠자코 있던 호문클루스들이 다시 설치기 시작했다. “미미님은 유적을 버리고 후퇴하자고 했는데 왜 이 멍청한 인간들은 미미님 말을 안 듣는 거예요?” “멍청하니까 그런 거예요!” “그래도 덕분에 우리도 빨리 진짜 요정이 될 수 있는 날이 빨리 찾아온 거예요!” 듣기 싫은 시끄러운 목소리가 공터에 중구난방으로 울려 퍼졌다. 그때였다. “닥치지 못해!” 한 사내가 소리 질렀다. 윌리 길포드의 아들인 미하엘 길포드다. 당당한 풍채에 몸에 딱 달라붙는 미려한 갑주를 걸친 청년은 미미 아즈라엘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노한 얼굴로 그녀에게 성큼 다가가 소리쳤다. “그 빌어먹을 호문클루스 주둥아리 좀 닥치라고 몇 번을 말했어? 응? 마물들이 다시 나타나면 어떻게 할 거냐고? 이 빌어먹을 마녀가.” “…그쪽 목소리가 더 큰 거 같은데요?” 포악하게 날뛰는 미하엘 앞에서도 미미 아즈라엘의 얼굴엔 한 점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미하엘 길포드는 그런 미미를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으로 한동안 노려보다가 이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검을 휘둘러보이는 시늉을 했다. “이래서, 마녀 따위를 데리고 오는 게 아닌데! 불경한 마법이나 쓰는 쓰레기 같은 족속들은 보이는 족족 검으로 베어버려야 한다고!” “절 베면 이번 탐사도 끝이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길을 아는 건 저밖에 없으니까요.” 미하엘 길포드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그때 한 사내가 그를 제지했다. 얼굴에 큼지막한 칼자국이 난 초로의 사내로 근엄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집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도련님. 여기서 화를 내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습니다.” “으음... 오드 영감.” 놀랍게도 그 사내가 나서자 미하엘 길포드의 화를 씻은 듯 사라졌다. 그는 보는 상대방이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른 감정의 변화를 보이더니 이내 싱긋 웃으며 미미 아즈라엘에게 사과를 청했다. “미안하게 됐어요. 탐사대장님. 상황이 너무 답답해서 나도 내 화를 주체 못한 거 같네요. 어른답지 못하게.” 미미 아즈라엘은 그의 사과를 듣고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마치 사물을 보는 것 같은 딱딱한 시선과 목소리로 자신의 정찰결과를 보고했다. “…방금 정찰 결과에 대해서 보고 드리겠어요.” 미하엘 길포드는 바위에 걸터앉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나는 곳엔 마법사로 보이는 한 인간 남자가 있었습니다.” “인간 남자? 소속은?” 미하엘이 깜짝 놀라며 서둘러 질문했다. “소속은 알 수 없었어요. 그는 자신을 34호라고 부르더군요. 걸인처럼 초라한 소환자의 복식을 하고 있었고 리빙 북을 사역마로 거느리고 있었어요.” “리빙 북이라. 그 귀한 것을. 그 자의 힘은 어느 정도 되지? 중급 마법사 수준인가?” “능력치를 한 번 보긴 했는데 대수롭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가 능력치를 숨기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지요. 어쩌면 인간으로 변장한 악마일 수도 있고요.” “악마들은 이곳에 오지 않아. 올 수가 없지. 놈들의 상극이 도사린 곳이니까.” 미하엘은 씨익 웃었다. “그리고 그의 일행도 한 번 찾아봤는데 찾지 못했어요.” 보고는 거기까지였다. 미하엘 길포드는 미미 아즈라엘에게 손짓해 물러가라고 한 후 자신의 집사와 부하들과 함께 숙덕대기 시작했다. “또 다른 탐사자라. 어디서 보낸 것일까?” “지하왕국에 관한 정보는 새로울 게 없어.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야지. 인간제국의 가능성이 가장 크지만 에테리아 왕국도 고려의 대상이야. 누구보다 마법에 목말라 있는 게 엘프니까.” “하긴 그것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쪽에서도 세계의 적 급의 괴물이 하나 나올 수도 있겠지.” 김성철은 어둠 속에 숨어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탐사대가 유적에서 찾는 것은 어떤 물건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지하왕국에 관한 정보가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다는 것. ‘아무래도 지하왕국의 존재는 데커드가 독자적으로 찾아낸 건 아닌 모양이군.’ 오히려 데커드의 정보는 걸음마 수준에 머물렀다. 그는 지하왕국의 입구조차 찾지 못했으니. 반면 이 탐사대는 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걸로 보였다. 그들은 던전 안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었고 어떤 위험이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김성철은 왜 윌리 길포드가 이곳에 들어가는 걸 주저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심연의 나락이 이곳에 출몰한다는 걸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김성철은 그 자리를 떠나 다시 던전의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그는 입구로부터 던전을 양분한 자신만의 길로 들어섰다. “그 호문클루스들. 인공적으로 강화가 된 거 같아.”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자 베르텔기아가 입을 열었다. “그래?” 김성철도 그 호문클루스들이 평범한 호문클루스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특별히 신경 쓰진 않았다. 어차피 그의 기준으론 호문클루스는 호문클루스니까. “그런데 그 여자 대단하네.” 베르텔기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호문클루스들 몸에 끔찍한 장난을 쳤을 건데 그렇게까지 자기를 따르게 하는 걸 보면 말이야.” “몸에 장난을 쳐?” “그 호문클루스들. 온 몸을 가리는 갑주를 입고 있었지? 그건 호문클루스를 보호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야. 그들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볼 수 없게 하는 게 아마도 진정한 목적이겠지.” 김성철의 시대엔 거의 없지만 베르텔기아의 시대엔 강화 호문클루스라는 게 꽤나 유행했다는 모양이다. 사람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마법의 힘은 필요하고 어쩔 수 없이 인간과 유사한 지능을 지니고 양산 가능한 호문클루스들을 개조해 전투 혹은 보조용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강화시술이란 것이 호문클루스의 외관을 뒤틀리게 할 정도로 끔찍하다는 것이지만. “그런 것도 있었군.” 김성철은 지금껏 수많은 마법사들을 상대해봤지만 강화 호문클루스를 데리고 다니는 이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마도 금지됐겠지. 그런 끔찍한 방법은 금주(禁呪) 목록에 들어갈 운명이거든.” “…….” 베르텔기아의 말을 묵묵히 들으며 앞으로 걸어가던 김성철은 이윽고 어둠 너머에서 빛나는 붉은 빛을 발견했다. 한 무더기의 사람의 시체가 있었다. 붉은 빛은 그 중 한 구가 지니고 있는 마법지팡이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김성철은 시체들을 살폈다. ‘1년? 혹은 2년? 조인들의 시체에 비하면 상태가 양호하군.’ 시체들은 죽은 상태 그대로 미라가 되어 생전의 모습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다. 사인은 자살로 보였다. 독을 먹어 푸른색을 띈 시체도 있고 검으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은 시체도 있다. 김성철은 시체들 가운데 가장 고귀해 보이는 남자 마법사의 시체에서 낡은 일지를 발견했다. 일지의 대부분은 시체에서 흘러나온 진액에 훼손되어 읽을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마지막 페이지는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김성철은 역겨운 시체의 냄새를 맡으며 마지막 페이지를 눈으로 읽어 나갔다. [ 14일 ] 모든 것이 순조롭다. 황제 폐하에게 승전보를 울릴 그 날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 15일 ] 전부터 눈이 맞았던 웨슬리와 자라가 내게 주례를 서달라고 요청했다. 나하크 왕의 알현실에서 식을 올리겠다니 소환자들의 과감한 발상은 가끔 나를 당혹하게 한다. [ 16일 ] 자라가 사라졌다. 웨슬리가 그녀를 찾겠다고 무단이탈했다. 큰 일이 아니길 질서신께 빌 뿐이다. [ 17일 ] [ 18일 ] 42325 54423 99832 31125 34238 88823 42321 11232 44235 19321 88768 11132 08323 13578 69180 일지는 거기까지였다. 김성철 바로 뒤에서 함께 일지를 읽던 베르텔기아가 몸을 갸우뚱거리며 묻는다. “마지막 저 숫자는 뭐지?” “난수다.”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고는 영혼 창고에서 빛바랜 책자를 꺼냈다. “난수?” 현실세계의 윤전기에서 인쇄된 책자다. 그 낡은 책자 안엔 수많은 숫자와 그에 따른 설명이 기재되어 있었다. 난수방송을 위한 난수와 그 해독문이다. 김성철은 그것을 인간제국의 황제인 윌리엄 퀸튼 말버러에게 직접 받았다. 아직 사이가 틀어지기 전에. 김성철은 책자를 펼쳐 해당되는 난수를 찾고 그에 기재된 설명을 조합해 일지에 적힌 숫자들을 해독했다. 해독문은 다음과 같았다. [ 3층 하부, 거대 공동 존재, 눈이 없는 괴인 다수, 공격당함, 상황 절망적, 가족 안부, 부탁합니다. ]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어깨를 쿡쿡 누르며 보챘다. 김성철은 책장을 덮어 영혼 창고에 넣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 지하에 뭔가 있는 모양이군. 눈이 없는 괴인이라는 것들이 사는 모양이야.” 조인의 시체들은 서곡에 불과했다. 그 너머엔 더 기이하고 끔찍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으리라. 김성철은 일지를 내려놓고 던전 탐색을 계속했다. 이윽고 그는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고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경로를 자신의 페이지에 빠짐없이 기재했다. “지도 완성!” 김성철은 나선형의 어두운 층계를 따라 내려갔다. 계단 곳곳에 조인들의 백골이 널려 있었다. 계단의 끝엔 굳게 닫힌 흑요석 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진실의 눈이 문에 걸린 마법에 반응했다. ‘이건 위험하군.’ 섣불리 건드리면 던전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을 정도의 파멸적인 마법이 걸려 있다. 망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김성철은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빛나는 문자가 곧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 이곳은 신성하고 위대한 조인, 나하크만이 들어갈 수 있다. ] [ 나하크의 증표를 제시하라. ] “어떻게 하지? 아무래도 그냥은 안 들여보내줄 거 같은데?” 베르텔기아가 김성철 주위를 돌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김성철은 문 주위를 살폈다. 문 앞에 작은 홈이 있는 작은 제단 같은 것이 서 있었다. 김성철은 그 제단 아래 부서진 흑요석 조각을 하나 발견했다. 여전히 마법의 힘이 담긴 그 조각의 일부분은 제단에 난 구멍 부분과 아귀가 맞아 보였다. 김성철은 시험 삼아 그 조각과 홈을 맞대보았다. 그러자 마법적인 힘이 즉시 조각을 감쌌고 이윽고 스러졌다. [ 제대로 된 증표를 제시하라. ] 문 옆에 난 조인 형상의 조각상의 두 눈이 붉은 빛을 발했다. “…….” 김성철은 일단 뒤로 물러났다. “이제 어떻게 하지?” 그는 따라다니면서 종알종알 거리는 베르텔기아의 말을 무시하며 앞으로 걷다가 어느 한 지점에 멈췄다. ‘여기가 좋겠군.’ 어떤 마법의 반응도 없는 평범한 암반이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꺼내 밑바닥을 후려쳤다. 망치가 한 지면을 강타할 때마다 두터운 암반이 박살나고 깎여나갔다. 던전 전체가 흔들리는 가운데 조인 시체 수백 마리가 김성철 앞에 나타났다. 일방적인 학살이 끝난 후 김성철은 작업을 재개했다. 곧 그가 두드리던 곳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김성철은 그 구멍 안으로 뛰어내렸다. 쿵! 묵직한 착지. 김성철 뒤에는 결코 열리지 않던 흑요석 문의 뒷면이 자리 잡고 있었다. “베르텔기아. 여기서부터 2층의 지도를 그려라.” ======================================= 24. 나하크를 삼킨 자들 (2) 쿵! 쿵! 1층과 마찬가지로 김성철은 벽을 부수며 전진했다. 그런데 1층과 달리 벽을 부술 때마다 보이는 게 하나 있었다. 동물 혹은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 뼈다. 벽돌을 쌓고 회반죽은 바른 벽과 벽 사이에 뼈가 한 무더기씩 나왔다. 한 두 개도 아니고 부술 때마다 이런 것이 나오자 김성철은 깊은 의문을 느꼈다. 그는 잠시 작업을 멈추고 벽면의 부서진 부위 안을 유심히 들여 보았다. 벽 안엔 수많은 백골들이 쌓여 있었다. 김성철은 벽면 하나를 손으로 잡고 가볍게 뜯어냈다. 그러자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백골을 발견할 수 있었다. “…….” 김성철의 동공이 일순 수축됐다. 벽면과 벽면 사이에 있던 것은 벽 사이에 끼여 있는 인간 형태의 백골이었다. 조인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 던전을 만들 때 산 채로 벽 사이에 갇혀 그대로 매몰된 것으로 보였다.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니라 수천에서 수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나하크라는 종족은 제법 잔인한 종족이었던 모양이군?” 김성철이 입을 열었다. “전설에 따르면 나하크는 오만하고 잔혹한 종족으로 알려져 있어. 무엇보다 다른 종족에게 일말의 자비도 없었고. 아마도 이 시체들은 노예의 것으로 보이네.” 베르텔기아는 원형을 간직한 백골 주위를 돌며 말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이렇게 많은 생명들을 산 채로 벽에 생매장하다니. 상상도 못할 짓을 저질렀네. 그 새대가리들은.”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김성철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엔 은은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아마도 그들의 마법의 힘을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서서히 죽어가는 자들의 고통과 비탄을 양분 삼아.” “살아 있는 나하크를 한 번 보고 싶군.” 김성철이 망치를 고쳐 잡으며 중얼거렸다. 다시 작업이 재개됐다. 벽이 무너졌고 그 안에 들어 있던 백골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러기를 수차례. 김성철은 2층의 끝에 이르렀다. 두터운 암반을 등뒤로 하고 김성철은 자리에 걸터 앉아 약간의 휴식을 취했다. 모처럼 힘을 썼더니 허기가 지기도 했고. ‘슬슬 밥이나 먹을까?’ 하지만 식사하기에 좋은 곳은 아니다. 김성철은 아무데서나 식사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만든 길을 되돌아갔다. 그런데 길을 걷던 중 김성철은 기이한 광경을 목도했다. 어둠 저편에서 무언가가 웅크린 채 바닥에 떨어진 뼈를 허겁지겁 주워 먹고 있었다. 와작와작 뼈를 씹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걸 들으며 베르텔기아는 몸을 움츠렸다. “으... 저건 또 뭐야? 이젠 여기서 나가고 싶어.” 김성철은 말없이 의문의 괴인에게 다가갔다. 그 괴물은 김성철이 다가오자 고개를 쳐들더니 고막이 찢어질 것처럼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키-----!!!” 인간의 것도 짐승의 것도 아닌 기계음에 가까운 소리. 김성철은 그 소리도 소리지만 괴물의 생김새에 주목했다. 그것의 생김새는 인간과 유사했다. 그러나 피부는 보기 흉할 정도로 창백한 흰색이었고 얼굴 두상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으며 결정적으로 두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보다는 이빨이라고 불러야 할 치아의 배열은 더 끔찍했다. 그 괴물의 이빨은 잇몸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보기 흉하게 삐져나왔고 어떤 것은 아랫입술을 뚫고 튀어나오기도 했다. “히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추한 모습에 베르텔기아는 실신이라도 한 듯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잡아 주머니에 쏙 집어 넣고는 괴물을 노려봤다. “꺼져라.” 하지만 괴물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의 그 굉음을 내뱉으며 김성철에게 달려들었다. 퍽! 김성철의 망치가 괴물의 골통을 박살내며 먼 곳으로 날려버렸다. 박살난 이빨들이 바닥에 튀며 쓸데없이 청량한 소리를 냈다. “…….” 김성철은 어둠 저편을 노려봤다. 숫자를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괴인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소리 없이 그리고 은밀하게. 김성철은 잠시 고민했다. 이 괴물들을 전부 처치하고 갈 것인가 아니면 그냥 물러갈 것인가. 잠시 후 그는 기척을 지우고 자리를 떠나는 선택을 했다. 배도 고프기도 하고 식사 전에 그런 역겨운 괴물들을 상대했다간 모처럼 돌아온 식욕이 줄어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몰려드는 괴인들을 뒤로하고 아까 파놓은 구멍 위로 올라왔다. 구멍 바깥엔 탐사대원 몇 명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은 김성철을 보자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뭐.. 뭡니까? 당신은 대체.” 김성철은 그들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숫자는 다섯. 마법사 두 명, 병사 3명의 단출한 구성. 미하엘 길포드와 미미 아즈라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김성철은 자신의 코트에 부착된 천을 가리키며 말했다. “34호요.” “삼십사 호..? 그보다 당신은 아래서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구멍이 뚫렸기에 잠시 내려갔다 왔을 뿐이오. 재밌는 것들이 돌아다니더군.” “재밌는 것...? 나하크 스켈레톤 말이오?”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처럼 생겼는데 사람은 아니고 눈이 먼 괴인들이 돌아다니더군. 그것도 무리를 지어.” 그 말을 들은 탐사대원의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동굴 엘프를 본 모양이군요.” “동굴 엘프?” “정확히는 동굴 엘프였던 존재지요. 나하크 족이 노예로 부리며 학대를 일삼던 종족이었습니다. 하지만 나하크가 멸망한 이후 그 종족이 이제 이 던전을 지배하고 있지요. 강하고 끈질기며 그리고 지성이 남은 존재들입니다. 대단히 위험한 것들이죠.” 그때 구멍 아래서 소름끼치는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키이이이------!” 눈 먼 괴물의 포효다. 그 소리를 들은 탐사대원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리더니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빠.. 빨리 돌아갑시다. 조사고 나발이고 지금 전부 다 죽게 생겼으니까!” 탐사대원들은 부리나케 던전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김성철은 그들을 위해 작은 서비스를 베풀었다. 커다란 바위로 구멍을 틀어막았다. 혹시 눈 먼 괴인들이 구멍으로 나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자신만의 입구를 틀어막은 김성철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던전 바깥으로 향했다. * 오늘의 점심 겸 저녁은 물고기였다. 김성철은 작살 하나 들고 차가운 물속에 뛰어 들어갔다. 흐릿하고 어두운 수중 속엔 시커멓고 거대한 것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마계어라 불리는 마계 최전선 일대 해역에서 살고 있는 거대 물고기다. 크기는 인간성인 남성의 크기. 그 물고기 중 하나가 김성철을 발견하고 아가리를 쩍 발리며 공격해왔다. 푹! 작살이 생선의 미간을 꿰뚫었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주위에 연기처럼 퍼졌다. 거대 물고기는 두어 번 몸부림을 쳤지만 김성철의 주먹이 연거푸 머리에 꽂히자 이내 잠잠해졌다. 김성철은 자신의 덩치만한 물고기를 끌어안은 채 물 밖으로 나왔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상어 떼들이 주위를 맴돌았다. 김성철은 마계어의 아가미를 잡고 머리를 떼어내어 상어 떼에게 던져준 후 자신은 몸통만을 들고 유유히 해안가로 나왔다. 해안가엔 이미 김성철이 만들어놓은 조리대와 커다란 냄비가 놓여 있었다. “참, 먹는 거 하나만은 참 잘 차려먹네.” 음식을 먹지 못하는 베르텔기아가 파닥파닥 거리며 말했다. “…….” 김성철은 영혼창고에서 검 하나를 꺼냈다. 푸르스름한 빛이 서린 게 선뜻 봐도 대단한 명검이었다. 칼날 손잡이 부분엔 인간제국을 상징하는 사자 문양이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었다. 인간제국의 기사라면 누구나 갖기를 원하는 황제의 하사품이다. 하지만 김성철에게 그 검의 용도는 조리용에 지나지 않았다. 푸르스름한 검날이 마계어의 은빛 비늘 사이로 푹 박히더니 이윽고 현란하게 떨리며 비늘을 빠르게 벗겨냈다. 생선의 비늘을 모두 벗겨낸 김성철은 잠시 생선을 내버려두고 펄펄 끓고 있는 냄비로 향했다. 냄비 안엔 갖은 말린 채소와 생선, 버섯 등이 들어간 육수가 끓고 있었다. 김성철은 작은 사발에 국물을 올려놓고 맛을 음미했다. “음.” 적절한 맛이다. 김성철은 생선의 살을 한 뭉텅이 발라내 종이처럼 얇게 썰어 접시 위에 올려놓고 냄비 앞에 앉았다. 젓가락이 영혼창고에서 등장했다. 김성철은 생선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끓고 있는 육수에 살짝 담갔다가 들어올려 입안으로 가져갔다. 육수의 진한 맛이 베어든 담백한 생선의 살결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 이 요리의 점수는.... 63점! ] 점수가 눈앞에 떠올랐지만 김성철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마계의 풍경을 바라보며 혼자만의 식사를 계속했다. 어느 정도 배가 차오르자 김성철은 생선의 맛이 어느 정도 베어든 육수에 건면을 넣고 푹 끓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냄비 안에 면이 적당히 풀어지자 김성철은 사발에 면을 담고 국물을 끼얹은 후 입으로 후후 불며 후루룩 국수를 흡입했다. “음.” 훌륭한 맛이다. 몸도 마음도 채워지는 기분. “참 잘 차려먹어요. 정말로. 끼니마다.” 식사가 끝나자 베르텔기아가 기다렸다는 듯 툴툴 거렸다. “밥은 잘 먹어야지.” 김성철은 반도 못 먹고 남긴 마계어의 꼬리를 잡고 바다 쪽을 향해 던졌다. 풍덩 하고 물보라가 크게 일었다. 김성철은 조리대의 불을 끄고 냄비를 바닷물에 씻었다. 요리하는 건 즐겁지만 설거지는 언제나 귀찮은 일이다. 김성철은 설거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설거지 하는 사역마가 있었으면 하는데.” 냄비를 깨끗이 닦아 영혼창고에 집어넣으며 김성철이 중얼거렸다. “흥! 어림도 없는 소리! 나는 지금까지 손에 물 한 번 안 묻혀본 여자라고!” “그건 자랑이 아닌 거 같은데.” “설거지 대신 해주는 걸 원한다면 호문클루스 한 두 마리 데리고 다니던가.” “그런 시끄러운 녀석들 데리고 다니는 취미는 없다.” “그럼 동굴 엘프는 어때? 소리만 안 지르면 조용한 거 같던데.” “글쎄. 어쩌면 호문클루스보단 그 괴물이 정숙성 면에서 나을지도 모르겠군.” 김성철은 문득 다섯 호문클루스를 데리고 다니던 여자 마법사를 떠올렸다. 탐사대의 대장이라는 직책을 지니고 있었지만 실제론 허수아비. 실권은 윌리 길포드의 아들인 미하엘 길포드가 쥐고 있는 걸로 보였다. ‘그 여자. 눈빛이 사나웠다.’ 아직 실력은 보지 못했지만 윌리 길포드가 직접 탐사대장을 맡길 정도라면 궁정 마법사 수준은 될 것이다. 그 정도의 인물이 새파란 소드 마스터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 가만히 있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아무리 그쪽이 고대왕국이라는 특수성이 있다는 걸 감안하고라도 말이다. 언젠가는 문제가 불거질 조합으로 보인다. 김성철에겐 별 관계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배를 채운 김성철은 다시 던전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다시 돌아온 던전의 상황은 여러 가지 의미로 많이 달라져 있었다. 눈 먼 괴인들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 바로 앞에 있어도 괴인들은 김성철을 보지 못했다. 눈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그 괴인들은 소리와 냄새로 물체를 식별한다. “킁킁!” 괴인의 들창코가 벌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김성철은 마치 유령처럼 그들 사이를 빠져나가 2층의 입구로 향했다. 바위는 아까 올려놓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즉, 이 구멍을 통해 빠져나간 것이 아니다. 김성철은 즉시 발길을 돌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주위엔 다수의 동굴 엘프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 괴물 사이를 소리 없이 통과해 2층으로 내려갔다. 2층으로 내려간 김성철은 어디를 통해 동굴 엘프들이 1층으로 올라왔는지 알게 되었다. 열리지 않았던 흑요석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제단 위엔 원형을 갖춘 나하크의 증표가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김성철이 제단에서 나하크의 증표를 빼내자 흑요석 문이 굳게 닫혔다. 김성철은 나하크의 증표를 주머니 안에 넣으며 한 가지 의문을 느꼈다. ‘대체 누가 이 문을 연 것이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때였다. 위층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 24. 나하크를 삼킨 자들 (3) 김성철은 즉시 1층으로 달려갔다. 눈 먼 괴인들이 기척을 느끼며 팔을 휘저어보지만 이미 김성철의 신형은 저만치 앞에 나가 있었다. 질풍처럼 동굴 엘프 사이를 지나쳐 현장한 김성철의 눈앞엔 눈을 부릅뜬 탐사대원의 시체가 남겨져 있었다. 그중 하나는 아까 김성철에게 동굴 엘프에 대해 설명해주던 사내였다. 눈을 부릅뜬 채 죽은 그 사내의 얼굴 아래엔 2마리의 동굴 엘프가 달라붙어 그의 살을 씹고 피를 마시고 있었다. 동굴 엘프의 흉측한 턱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사내의 시체는 가볍게 흔들렸다. “…….”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채찍 하나를 꺼냈다. 채찍 마디마디 사이에 붉은 빛을 띤 쇠 징을 박아 넣은 길이 10미터에 달하는 긴 채찍이었다. 마편(魔鞭) 카산드라. 발록의 우두머리가 들고 다니던 악명 높은 마병. 그 위력은 성기사의 갑주와 육신을 한꺼번에 짓이겨버릴 정도며 가격당한 상대방을 지옥의 불로 지져버리는 마법효과도 부여되어 있다. 김성철이 팔 가라즈를 놔두고 카산드라를 꺼낸 이유는 간단했다. 휘리릭! 길이 10미터에 달하는 채찍이 허공에 휘둘러지자 주변에 있던 십여 마리의 동굴 엘프가 가공할 힘이 실린 채찍에 얻어맞고 바닥에 처박혔다. 단 한 번 휘두른 것만으로 일망타진이다. 게다가 카산드라에 부여된 마법 효과로 인해 동굴 엘프들의 시체가 지옥의 불로 타들어갔다. 악행에 걸 맞는 적절한 최후다. 동족의 시체가 타는 냄새를 맡으면 동굴 엘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발밑에서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살피던 동굴 엘프 두 마리를 군화발로 걷어찼다. 골통이 박살난 괴물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저만치 나가떨어져 죽었다. “…….” 김성철은 어둠 속을 응시했다. 수십 마리의 동굴 엘프들이 냄새와 소리에 이끌려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들이 들을 수 있게끔 마편 카산드라로 바닥을 날카롭게 후려쳤다. 찰싹! 착착 감기는 경쾌한 소리가 던전 안을 떨치고 지나갔고 이윽고 동굴 엘프 무리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카산드라가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채찍질 한 번에 수십 마리의 동굴 엘프들이 짚단처럼 쓰러졌다. 5분도 되지 않아 김성철 주변엔 타들어가는 동굴 엘프들의 주검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그제야 동굴 엘프들은 저 채찍을 든 인간이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쉬익! 카쉬익!” 뒤에서 동굴 엘프 한 마리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동굴 엘프들은 동족의 시체를 버리고 어둠 속으로 부리나케 달아났다. 한바탕 학살극을 펼친 김성철은 우두커니 서서 던전 안에 울려퍼 지는 소리를 들었다. 머지않은 곳에서 전투의 여음이 들리고 있었다. 김성철은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고대 왕국의 검사들이 동굴 엘프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숫자는 동굴 엘프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인간 측엔 소드마스터 한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하엘 윌포드가 푸른 검기를 뿜어내는 검을 휘두르며 동굴 엘프들 진영 한 가운데로 파고 들어갔다. “3... 2... 1.... 고 슛!” 미하엘 길포드는 마치 팽이처럼 회전하며 주위의 동굴 엘프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그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토막 난 동굴 엘프들의 시신만이 널려 있었다. 하지만 동굴 엘프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얼굴 곳곳에 뼈로 피어싱을 한 늙은 동굴 엘프 한 마리가 미하엘 길포드의 회전이 점점 약해지는 순간을 노려 뼈로 만든 화살을 그에게 발사했다. 가공할 힘이 실린 화살은 미하엘 길포드의 목 줄기를 노리고 섬전처럼 날아갔다. 그 순간, 한 사내가 비호처럼 나타나 지팡이로 화살을 쳐냈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상당한 실력자군.’ 누군가 했더니 집사풍의 복장을 한 초로의 사내였다. “도련님. 마지막 5초를 잡는 자가 승리를 거머쥐는 겁니다. 잊지 마십시오.” “고마워. 오드리아스.” 미하엘 길포드는 예를 표한 후 휘하의 소드 어뎁트와 함께 최후의 공세를 개시했다. 피어싱을 한 늙은 동굴 엘프가 쓰러지자 전투는 끝이 났다. 동굴 엘프들은 일제히 뒤로 후퇴했고 두 번 다시 공격하지 않았다. 미미 아즈라엘이 모습을 드러낸 건 막 전투가 종료된 시점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호문클루스를 감싸던 투명한 장막을 스스로 벗겨내고는 종종걸음으로 미하엘 길포드에게 다가갔다. 짝! 그녀의 손이 미하엘 길포드의 뺨을 후려쳤다. 미하엘 길포드의 눈빛에 살기가 떠오르는 그 순간 오드리아스가 그를 제지했다. 그는 미미 아즈라엘의 뒤에 서서 고개를 흔들어보였다. 미하엘 길포드의 눈동자에 서렸던 살기가 일순 사라졌다. “왜 문을 열었죠?” 미미 아즈라엘이 사납게 다그쳤다. “왜 문을 열었냐고요?” “어차피 열게 될 문이잖아.” 미하엘 길포드가 얻어맞은 뺨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미미 아즈라엘의 눈동자에 소름끼치는 적의가 떠올랐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당신 때문에 어떤 참사가 일어났는지 보고도 그렇게 뻔뻔하게 이야기 할 수 있나요?” “참사는 무슨 참사. 진짜 참사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미하엘 길포드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뒤돌아섰다. 그는 자신을 노려보는 미미 아즈라엘을 곁눈질로 응시하며 싸늘하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 윌리 길포드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는 거 같은데 우리 아버지의 말씀은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안 돼.” “…그게 무슨 소리죠?” “아버지 말씀은 그랬지. 일주일 동안 던전 주변만 확보하라고. 하지만 말이야. 그게 정말 아버지의 진정한 뜻이었을까? 난 그게 아니라고 보거든.” “…….” “아마도 아버지는 우리가 던전 깊숙한 곳까지 미리 사전 공략을 끝내는 걸 내심 바라고 계셨을 거야. 일주일 동안 허송세월하지 않고 말이야.” “시키지도 않은 명령을 왜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요?” “그게 당신이 아직 고대왕국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증거야.” 미하엘은 마치 어린 아이에게 핀잔을 주듯이 말했다. 미미 아즈라엘은 미하엘 뒤에 서 있는 오드리아스를 응시했다. 집사풍의 그 사내는 미미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 말씀대로 우리는 서둘러야 합니다. 만약 윌리 길포드님께서 돌아왔을 때 우리가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 걸 발견한다면 필경 대로하실 겁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여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미미 아즈라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하엘 길포드의 패거리가 던전 먼 곳으로 사라진 이후에도 미미 아즈라엘은 우두커니 선 채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성철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이계는 불합리로 가득 찬 세상이다. 이상한 사고방식을 지닌 집단 하나 둘은 있기 마련이다. “미미님. 화를 내고 있는 거예요?” 미미 아즈라엘의 발밑을 어슬렁거리던 호문클루스 하나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숨을 죽이고 있던 다른 호문클루스들이 하나 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미미님. 우리들이 있는 한, 이 던전 공략은 어려운 것도 아닌 거예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 공략을 끝내고 우리끼리 그것을 차지해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들을 호문클루스가 아닌 진짜 요정으로 만들어주는 거예요!” 그때 한 사내가 어둠 속에서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름 아닌 김성철이다. 미미 아즈라엘은 순간 당혹했으나 이내 태연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며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당신. 아직 살아 있었네요?” “…….” 김성철은 그녀를 지나치며 그녀의 얼굴, 표정, 눈동자 안에 담긴 감정, 두터운 로브 안에 감추고 있는 마법, 그리고 그녀의 발밑에 웅크리고 있는 호문클루스들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 ‘역시 만만한 여자는 아니군.’ 준비되어 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능력치는 볼 수 없었지만 굳이 그걸 보지 않더라도 미미 아즈라엘이 노련한 마법사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철갑 너머 눈을 번쩍이는 호문클루스들도 그렇고. 대략적인 정찰을 마친 후 김성철은 입을 열었다. “동굴 엘프 따위에겐 죽지 않는다.” “그렇군요. 그런데 기척을 숨기는 게 제법이네요? 제 아이들이 눈치를 못 채는 거 보니.” 김성철은 불필요한 말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이유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것이란 뭐지? 네 호문클루스가 말한 그것이.” 미미 아즈라엘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그것도 모르고 이곳에 온 건가요? 아니면 절 그냥 떠보시는 건가요?” “…….” “뭐 아무래도 좋겠죠. 저와 당신은 처음부터 입장이 다르니까. 하지만 입장이 달라도 친구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니 특별히 알려드리죠. 그것에 대해서.” 미미 아즈라엘은 작은 원구를 만들어내 김성철에게 보냈다. 지식의 구슬이다. 김성철은 구슬을 낚아 채 그 안에 담긴 정보를 받아들였다. 곧 그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떠올랐다. [ 나하크 왕의 왕관 ] 하늘과 땅위에 군림하던 위대한 조인들은 지하에 파묻혀 사라졌다. 오직 단 한 명, 조인들의 왕은 자신의 동족의 파멸을 대가로 미증유의 힘을 손에 넣었지만 결국 그 자신도 파멸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을 찾아라. 그리고 그의 왕관을 찾아라. 그 왕관을 얻은 자는 나하크 족에게만 알려진 진리의 편린을 얻을 수 있으리라. / 보상 - 불명 장문의 글을 읽은 김성철은 미미 아즈라엘을 냉담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퉁명스레 말했다. “나하크 족의 왕관이 당신이 찾는 그것인가?” 미미 아즈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왕관엔 엄청난 마력이 깃들어 있어요. 그 왕관을 손에 넣는 자는 엄청난 힘을 얻게 된다는 전설이 있죠.” “그걸 왜 내게 알려주는 거지? 이유가 궁금하군.” “글쎄요. 어차피 당신에게 알려줘도 손에 넣지 못할 게 뻔하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미미 아즈라엘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제 머리 안에 든 지식이 없다면 말이죠.” 미미 아즈라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말했다. “당신. 힘을 숨기고 있죠?” 단도직입적인 질문이다. 이제 와서 숨길 이유는 없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솔직해서 좋네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솔직해지는 건 어떨까요?” 미미 아즈라엘의 분위기가 변했다. 싸늘했던 목소리는 이제 제법 명랑한 빛을 띠었고 적대적인 시선은 중립적인 시선으로 변해 있었다. 미미 아즈라엘이 달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얼마나 강한가요?” 그녀의 물음에 김성철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마도 이 던전에 있는 인간 중에서 가장 강할 것이다.” 미미 아즈라엘은 살짝 놀라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윌리 길포드 보다?” 그 물음에 김성철은 침묵을 택했다. 미미 아즈라엘이 희게 웃었다. “방금 발언은 그냥 해본 거예요. 하지만 조금은 놀랐네요. 당신이 저 바보 같은 소드마스터보다 강하다니.”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호문클루스를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 “아직 할 이야기가 남은 거 아닌가?” 김성철이 그녀의 등을 노려보며 물었다. 미미 아즈라엘은 살짝 뒤돌아서서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당신 말 대로 당신이 그렇게 강하다면 곧 우리는 어느 한 지점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남은 이야기는 그때마저 하도록 하죠.” 미미 아즈라엘은 호문클루스들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김성철은 어둠 너머로 사라지는 미미 아즈라엘을 무심한 눈으로 응시했다. ‘아무래도 이 던전. 내가 상상한 이상의 무언가가 숨겨진 것 같군.’ 김성철 내면의 불길이 조금씩 타오르기 시작했다. ======================================= 25. 조인 왕의 묘실 (1) 준비를 갖춘 김성철은 지하 2층의 공략을 재개했다. 다수의 동굴 엘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찰싹! 찰싹! 몇 차례의 학살이 일어난 후 동굴 엘프들은 김성철의 마편 카산드라가 바닥을 후려치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그들은 나름 지성이 있는지 매복을 준비해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덮치는 물량전도 구사했고 소수의 정예를 모아 정면 승부를 하는 정공법도 구사했지만 김성철의 마편 카산드라 앞엔 무의미한 발악에 지나지 않았다. 찰싹! 찰싹! 눈 먼 괴물들은 낯선 이방인이 휘두르는 죽음 그 자체와 같은 소리에 몸을 떨었고 그 옆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많이 해 본 솜씨네.” 잠자코 뒤에서 구경하던 베르텔기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야만 종족을 상대할 땐 얕보여선 안 돼. 그들은 정직할 정도로 교활하고 야비하거든. 자기보다 약하거나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끝없이 싸움을 걸어오지.” 찰싹! 김성철이 마편 카산드라로 바닥을 후려치며 말했다. “이런 일 자주 경험했나 봐?” 베르텔기아의 물음에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던전과 미궁을 돌아다녔지.” 이제는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 던전들의 을씨년한 정경들이 주마등처럼 김성철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중엔 그 모습을 그리는 것만으로 애틋함이 밀려오는 것도 있었고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것도 혼재되어 있었다. “그나저나 이 던전, 바깥과 달리 대단히 풍부한 마나가 흐르고 있어. 느껴져?” “조금은.” 확실히 이곳 나하크의 지하궁전 안엔 바깥보다 훨씬 짙은 농도의 마나가 존재하고 있었다. 마나가 풍부하다는 것은 같은 마법을 쓰더라도 더욱 강한 위력을 낼 수 있고 잃어버린 마나의 회복 더 훨씬 빠르다는 걸 뜻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채찍 말고 그냥 마법으로 앞을 뚫는 건 어때? 어차피 당신은 마법 단련이 목적 아니었어?” “고려해볼만한 이야기군.” 확실히 마편 카산드라 쪽이 진행하는데 편하긴 하지만 수련의 측면에서 보면 마법을 사용하는 쪽이 훨씬 나아 보인다. 마법이라는 건 몸처럼 쓰면 쓸수록 능력치가 오르는 것이기에. “연금술을 하기도 좋은 환경 같아. 고레벨 연금 아이템은 엄청난 마나를 필요로 하거든. 여기서 라면 5레벨 연금아이템을 만들 때 전처럼 마력의 정수를 벌컥벌컥 들이키지 않아도 될 거야.” “그건 좋은 지적이군.” 흔치 않은 김성철의 칭찬에 베르텔기아는 높이 솟아올랐다 내려오며 엣헴 하는 비음을 내며 으스댔다. “당연하지. 이 베르텔기아님이 어떤 분인데. 진리 그 자체를 품은 몸인데!” 채찍을 영혼 창고에 넣고 탐험을 계속했다. 한 무리의 동굴 엘프들이 서성이는 게 보였다. 김성철은 지체 없이 글레어를 동굴 엘프들에게 시전했다. 빛줄기가 동굴 엘프의 살갗을 뚫고 들어가 내부의 장기를 빛으로 불태웠다. “키이이이이!!!!” 글레어를 정통으로 맞은 동굴 엘프는 발광을 하다가 쓰러졌다. 나머지 동굴 엘프들이 김성철의 위치를 알아내고 공격을 가해왔다. 김성철은 그들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며 턱 아래, 심장 등의 급소를 향해 글레어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꽂아 넣었다. 김성철의 손끝에서 빛줄기가 솟아나올 때마다 동굴 엘프 한 마리가 쓰러졌다. “키이!!!” 남은 건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 한 마리. 다른 녀석과 달리 강철 소재로 보이는 흉갑을 걸치고 새의 부리 같은 걸 엮어 만든 손톱 모양의 무기와 방패를 들고 있었다. ‘지금 내 힘을 시험하기에 적합한 대상이군.’ 김성철은 천천히 손가락을 뻗어 글레어를 시전 했다. 동굴 엘프는 본능적인 감각으로 김성철의 손이 움직이는 걸 인지하고 방패를 들었다. 치이이익- 글레어의 섬광이 방패 정면에 꽂혔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키이?” 글레어의 빛줄기는 방패는 물론 흉갑까지 뚫고 들어가 동굴 엘프의 살갗을 지졌다. 비록 전체를 관통하진 못했지만 동굴 엘프의 혼을 쏙 빼놓기에 충분한 공격이었다.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나가 충만한 곳이라 공격력이 오른 것 같군.’ 한 방 먹은 동굴 엘프 우두머리가 부리로 만든 발톱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발톱이 몸에 닿는 순간 김성철은 옆으로 한 걸음 비껴서 동굴 엘프의 발을 걷어찼다. 동굴 엘프는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고 김성철은 버둥거리는 동굴 엘프의 투구와 갑주 사이 뒷목을 정확히 겨눠 글레어를 시전 했다. “키이....!!” 동굴 엘프는 한 차례 격렬하게 몸을 떨더니 고개를 떨어뜨렸다. 김성철은 방금 전투의 감을 머릿속으로 복기하며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후 두 차례의 전투가 더 이어졌다. 김성철은 글레어만을 사용하여 동굴 엘프 무리를 모두 쓰러 뜨렸고 어떤 커다란 방안에 이르렀다. 그곳은 알현실 정도로 보이는 웅장한 방이었다. 사방을 뒤덮은 장식은 썩어서 사라지거나 다 사라지고 곳곳에 장식된 보석들은 누군가에 약탈되어 사라졌지만 중앙에 자리 잡은 흑요석으로 만든 권좌와 그 주변에 자리 잡은 거대한 조인의 조각상은 한때 이계를 호령한 나하크 족의 기상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한 장엄함을 갖추고 있었다. “여기가 나하크 왕의 알현실인 모양이네. 우와. 뭔가 색달라. 인간의 것과는.” 베르텔기아는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며 주변을 돌아다녔다. 김성철도 알현실을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특별히 눈에 띠는 유물은 없었다. 김성철은 왕의 권좌를 응시했다. 조인의 의자답게 날개를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권좌에 붙어 있던 보석과 황금붙이는 모두 약탈당한 뒤였다. 김성철은 권좌 밑에 먼지 덮인 채 방치된 자루를 발견했다. 자루를 열자 빛나는 보석과 황금이 먼지 속에서 영롱한 빛을 발했다. 누군가가 알현실에 부착된 것들을 전부 뜯어내 자루 안에 넣어 둔 모양이다. 비록 바깥으로 갖고나오지는 못했지만. “…….” 김성철은 자루의 먼지를 털어낸 후 그 자루를 영혼 창고 안에 집어넣었다. “우... 이건 비합리적이야.” 베르텔기아가 야유를 보냈지만 김성철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보석을 챙긴 김성철은 권좌 뒤에서 두 개의 백골을 발견했다. 마치 연인처럼 껴안은 그 백골은 뼈로 만든 창에 하나에 꿰뚫려 있었다. 김성철은 해골의 목에 걸린 팬던트를 집었다. 황동과 은을 섞어 만든 싸구려 팬던트 안엔 한때 사이좋았을 두 남녀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김성철은 팬던트를 내려놓고 두 연인을 꿰뚫은 창을 뽑아 저편으로 던졌다. 알현실을 나선 김성철은 곧 지하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발견했다. 지하 3층엔 2층에 있던 것과 유사한 흑요석 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문 앞에 서자 문에 부착된 조각상은 김성철 앞에 빛나는 문자를 표시했다. [ 나하크의 증표를 제시하라. ] 김성철은 아까 손에 넣었던 나하크의 증표를 꺼냈다.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마법이 깃든 물건이었다. 김성철은 그 나하크의 증표를 제단의 홈에 꽂았다. 그러자 나하크의 증표 주변에서 은은한 초록빛이 흘러나오더니 굳게 가로막은 흑요석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안에 갇혀 있던 공기가 김성철의 면전에 퍼졌다. “우와. 2층보다 마나 농도가 더 짙어.” 김성철도 같은 생각을 했다. 이 조인의 지하왕국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짙은 마나의 농도를 품고 있었다. 김성철은 시험 삼아 벽을 부셔보았다. 벽안엔 2층과 마찬가지로 다수의 백골이 나왔다. “대체 몇 천 명을 던전 안에 갈아 넣은 거야?” 베르텔기아가 살짝 몸을 떨며 말했다. “몇 천 명 수준이 아니야. 몇 만 명 수준이냐고 묻는 게 타당해 보이는군.” 어쩌면 십만 명 단위일지도 모른다고 김성철은 문득 생각했다. 3층의 구조는 비교적 평이했다. 이미 문 너머 커다란 일자형 회랑이 나 있고 그 주위로 수백 개의 방실이 자리 잡은 구조다. 따라서 벽을 부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김성철은 회랑을 따라 걸었다. 3층은 2층과는 분위기가 또 달랐다. 마나의 농도도 마나의 농도지만 3층엔 동굴 엘프가 단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곧 김성철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회랑에 거대한 무언가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새의 두상을 한 흑요석 골렘이다. 그 골렘은 김성철을 발견하자마자 장거리에서 마법 공격을 가해왔다. 다섯 개의 화염구가 나선형으로 회전하며 김성철에게 날아왔다. “히이!” 베르텔기아가 부리나케 크기를 줄이고 김성철의 주머니 안으로 파고들었다. 베르텔기아를 수납한 후 김성철은 늘 하던 대로 팔 가라즈를 꺼냈다. 그런데 망치를 꺼내들고 보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이 골렘. 글레어만으로 처리해보는 건 어떨까.’ 골렘은 강한 마법 내성을 지니고 있다. 평상시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 공간 안엔 마나가 흘러넘치지 않은가? 김성철의 마력은 이제 초급 마법사를 벗어나 중급 마법사를 향해가는 수준의 범상한 것이지만 적어도 이 지하던전 안에서는 평소보다 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쿠쾅쾅쾅!!! 방금 골렘이 쏘아 보낸 화염구의 맹렬한 폭발처럼 말이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다시 영혼 창고에 집어넣고 빠르게 달려 흑요석 골렘에게 접근했다. 멀리서 봤을 때도 꽤 큰 크기였지만 가까이서보니 키만 8미터에 이르는 대형 골렘이다. 마법사들이 전쟁 골렘이라 분류할 정도의 크기다. “나하크의 적. 죽인다.” 흑요석 골렘은 금속성의 음성을 내며 김성철을 향해 바위로 만들어진 손을 뻗었다. 흑요석 손바닥 중심엔 커다란 마석결정이 박혀 있었다. 그 마석결정에 복잡한 마법진 문양이 꽃처럼 피어났다. 김성철의 동공이 조건반사적으로 마법진의 문양을 읽어냈다. ‘빙결 마법.’ 김성철은 즉시 옆으로 몸을 피했다. 하얀 냉기가 김성철이 있던 자리를 덮치며 주변의 모든 것을 얼려버렸다. 김성철은 흑요석 골렘의 뒤를 둥글게 돌았다. 냉기를 내뿜던 팔이 김성철을 쫓아갔지만 그의 속력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냉기가 미치는 한계점에서 김성철은 발걸음을 멈추고 골렘의 어깨와 팔 사이, 바위와 바위가 맞물리는 연약한 부분을 향해 한 줄기 빛을 발사했다. 글레어의 섬광은 평소보다 훨씬 강하고 두터운 굵기로 발사됐다. 그 위력 또한 평소의 수배. 섬광은 골렘의 약한 관절부를 뜨겁게 달구었지만 관통 하는 덴 실패했다. ‘좀 더 위력이 강했다면.’ 하지만 매에는 장사 없는 법이고 글레어의 장점은 짧은 영창과 연사다. 김성철은 연거푸 글레어를 관절부에 시전 했고 마침내 골렘의 오른팔을 몸통으로 부터 끊어냈다. 쿵! 팔 하나를 잃은 골렘은 하나 남은 팔을 마구 휘두르며 육박전을 가해왔고 입에서는 푸른 업화의 불길을 내뿜었다. 김성철은 계속해서 글레어로 대항했으나 이윽고 그는 마력의 고갈을 느끼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곳은 마나로 가득 찬 공간. 마력은 빠르게 회복됐다. 김성철은 기둥 뒤에서 마력을 회복시킨 뒤 재차 골렘에게 도전했다. 그러기를 3차례. 무려 40분이 넘는 사투 끝에 김성철은 마법만으로 만만치 않은 골렘을 쓰러뜨렸다. “나하크의 적... 죽인....” 사지가 해체된 체 쓰러진 골렘의 핵이 빛을 잃었다. 김성철은 산산조각이 난 골렘 앞에서 김성철은 고갈됐던 마력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는 걸 느끼며 능력치 창을 열었다. [능력치] 힘 999+ 민첩 853 체력 801 마력 191( +52) 직관력 173 마법저항 621 의지 502 매력 18 운 18 단순히 이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마력이 무려 50이 넘는 수치가 올랐다. 뿐만 아니라 마력의 성장 폭이 대단히 크다. 분명 최근에 봤을 땐 180 중반이었는데 어느새 190대를 넘어선 게 아닌가? 이 기세라면 중급 마법사의 지표라는 마력 200을 넘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상상 이상의 성장 속도군. 마나의 농도가 마력 회복과 강화는 물론 성장에도 효과를 미치는 건가?’ 김성철은 문득 다른 마법도 쓰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마나 소모가 더 많고 더 강력한 마법으로 막강한 적을 상대하면 더욱 빠른 성장이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하지만 천공학파의 다음 공격마법인 메테오를 담은 마법의 서는 직관력이 210을 넘어야 해독할 수 있다. “슬슬 쉬는 게 좋을 거 같아.” 뒤에서 김성철을 지켜보던 베르텔기아가 말했다. “아무리 마력 회복이 빠르다고 해도 결국 그걸 사용하는 건 당신의 몸이거든. 채워지는 게 빠르다고 해서 잔 자체가 강해지는 건 아니야.” “동감이다.” 김성철은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탐험하기로 마음 먹었다. 아직 그에겐 이틀이란 시간이 남아있다. 하루만에 3층까지 돌파했으니 나머지 이틀 동안엔 더욱 깊숙이, 어쩌면 나하크의 왕의 왕관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미련 없이 골렘의 파편을 뒤로 하고 던전 바깥으로 나섰다. 찰싹! 마편 카산드라로 바닥을 후려쳐 동굴 엘프들에게 경고하면서. 일사천리로 던전을 빠져 나온 김성철은 던전의 입구를 조망할 수 있는 바위산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했다. 잘 쉬는 것도 수련의 일환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편안한 자세로 누워 눈을 감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웅웅거리는 소리가 하늘 위에서 들려왔다. 김성철은 눈을 뜨고 하늘을 응시했다. 공선 한 척이 남쪽으로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윌리 길포드의 공선이다. ‘아니,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돌아왔다고? 말이 안 되는데.’ 공선은 던전 가까운 지상까지 하강했다. 공선의 갑판에서 그물 줄이 내려오고 그 줄을 타고 사람들이 지면으로 내려왔다. 수십 명은 될 법한 사람들이 일제히 지면에 착지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본 김성철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니, 저것은... 형벌부대원?’ 틀림없다. 낡은 옷에 덧댄 죄수번호를 나타내는 허름한 천. 틀림없는 형벌부대의 것이다. ‘어째서 저 자들이 저 배에 탄 것이지?’ 이윽고 김성철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윌리 길포드의 옆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형벌 부대의 대장. 돌 머리 강가스 아론이었다. 그 평소답지 않게 다소곳한 자세로 대륙칠걸의 옆 자리에 서 있었다. 윌리 길포드가 강가스 아론을 돌아보며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이곳에 있는 줄 알았다면 진즉 도움을 요청했을 텐데.” “저야말로 공작님이 이곳에 오신 줄 알았다면 불과 물을 건너서라도 왔을 겁니다!” 그걸 본 김성철은 잠시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저 녀석도 고대왕국 출신의 소드마스터였지.’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두 소드마스터가 작당을 꾸미고 있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작은 폭음이 입구 쪽에서 났다. 형벌부대원 일부가 도르래 장치로 연결된 승강기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던 중, 악마들이 걸어놓은 폭발 함정이 발동한 것이다. “으아아아아아아!!” 다섯 명의 형벌부대원이 승강기와 함께 무저갱 밑으로 떨어졌다. “이런. 처음부터 아까운 병사를 잃었구만?” 윌리 길포드가 혀를 차며 말했다. 하지만 강가스 아론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힘주어 말했다. “아직 병사는 많이 남아 있습니다!” ======================================= 25. 조인 왕의 묘실 (2)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지만 김성철은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잘 쓰지 않는 침낭까지 영혼 창고에서 꺼내 편안한 휴식을 취했다. 하루가 지난 후 김성철은 던전이 아닌 형벌 부대 주둔지로 향했다. 그는 곧장 안면이 있는 죄수번호 0번 아카드를 찾아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카드는 형벌부대원 일부가 지하 던전으로 향한 사실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그가 아는 건 강가스 아론이 또 그 돌 머리를 굴려 자살에 가까운 무모한 공격을 한다는 게 전부였다. “그는 마족의 요새에 공격을 한답시고 신병들을 끌고 나갔어. 뭐? 한 번 임무 달성하는데 3회를 까준다나? 말도 안 되는 개소리지만 얼치기 신병 대략 80명 정도가 그 놈을 따라 공선을 탔지.” 일단 목적지가 다르다. 이곳에 남은 자들은 강가스 아론과 함께 떠난 병사들이 지하 던전이 아니라 마족의 요새로 간 것으로 알고 있다. 병사들의 숫자도 다르다. 아카드의 말에 의하면 80명의 병사가 강가스 아론과 함께 했지만 김성철이 본 건 대략 50명 정도다. 30명의 행방이 묘연하지만 김성철은 그 30명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협박과 회유로 부대원을 억지로 던전에 밀어 넣은 모양이군.’ 김성철은 다시 지하왕국으로 향했다. 지하왕국의 입구 주변엔 공선 한 척과 소수의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윌리 길포드와 강가스 아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경계결계도 걸려 있지 않았다. 결계를 칠 마법사 대부분이 던전 안에 들어가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김성철은 터벅터벅 던전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고대왕국의 병사들이 그에게 창을 겨누며 소리쳤다. “누구냐?” 그들의 물음에 김성철은 자신의 상의에 부착된 숫자가 기재된 헝겊을 가리켰다. “형벌부대원이요.” “형벌부대원? 형벌부대원은 이미 공작님과 함께 던전 안에 들어갔는데 무슨 개소리냐?” 병사들 두 명이 김성철에게 다가가 당장이라도 창을 찌를 듯이 위협했다. 김성철은 눈썹하나 꿈쩍하지 않고 말했다. “나는 강가스 아론님이 보낸 정찰병이오. 나는 그분에게 보고할 것이 있고 따라서 여기 온 것이오.” 강가스 아론의 이름이 나오자 병사들의 서슬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들은 창끝을 하늘로 세우며 여전히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정찰병이 맞나?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은 잠시 서로 머리를 맞대다가 이내 김성철을 들여보내는 방향으로 결론을 냈다. 괴물로 가득 찬 던전에 자진해서 들어가는 걸 보아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보였고 또 설령 작당을 꾸민다고 해봐야 던전 안에 있는 건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대륙칠걸 윌리 길포드다. 일개 형벌부대원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병사들은 김성철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고맙소.” 반쯤은 진심이 깃든 목소리였다. 혹 그들이 감화학파의 마법사를 통해 직접 교신을 시도한다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확인하려 했다간 모두 김성철 손에 죽었을 터이니. 김성철은 도르래와 연결된 승강기에 탑승해 던전으로 들어갔다. 다시 진입한 던전의 풍경은 많은 부분에서 바뀌어 있었다. 곳곳에 횃불이 설치되고 길을 표시하는 굵은 밧줄이 돌멩이 등으로 고정되어 길을 나타내고 있었고 곳곳에 식량과 무기들이 놓여 있었다. 소수라고는 하나 군대가 다녀간 분위기가 확연히 느껴졌다. 밧줄은 2층으로 곧장 이어졌다. 2층으로 내려가자 김성철은 익숙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으으으.... 무.. 물좀 주시오.” “살려주시오! 제발!” “아악! 내 다리! 내 다리!” 피투성이가 된 부상병들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두 명의 신관들이 그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숫자가 부족해보였다. 김성철은 부상병동이 된 2층 입구를 지나 계속 밧줄을 따라갔다. 밧줄을 가는 동안 김성철은 치열한 전투의 흔적과 그리고 산처럼 쌓인 동굴 엘프의 시체들을 볼 수 있었다. 김성철이 꿀맛 같은 잠을 자는 동안 형벌부대원들과 고대왕국의 소드마스터들은 던전 안을 장악한 잊힌 종족들과 혈전을 벌였고 결국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보였다. 밧줄은 3층 입구까지 연장되어 있었다. 3층 입구에서 김성철은 윌리 길포드와 강가스 아론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장내의 분위기가 좋지 못하다. “그거 밖에 안 되니까 내가 널 못 믿겠다는 거야!” 윌리 길포드의 노호성이 쩌렁쩌렁 던전 내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김성철은 발걸음을 멈추고 상황을 관망했다. 윌리 길포드 앞엔 미하엘 길포드와 미미 아즈라엘이 고개를 숙인 채 불편한 자세로 서 있었다. 윌리 길포드가 꾸짖고 있는 것은 미하엘 길포드였다. “대체, 너란 놈한테 얼마나 많은 실망을 해야 되냐?” 미하엘 길포드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의 경솔함 때문에 하루 만에 탐사대의 대부분을 모두 잃어버렸다. 얼마를 들여서 고용한 마법사들인데.” “면목 없습니다.” 그리고 윌리 길포드의 분노는 옆에 있는 미미 아즈라엘에게도 튀었다. “미미 아즈라엘. 나는 네가 작년 인간제국 탐사대에서 중책을 맡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거액을 들여 널 고용했고 네가 지정하는 마법사들도 마찬가지로 거액을 들여 붙여주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뭔가? 겨우 이건가?” 미미 아즈라엘은 미하엘과 달리 잠자코 있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즉시 고개를 쳐들고 반박했다. “2층의 문을 연건 제가 아닙니다. 저 사람이, 당신 아들이 한 짓입니다. 왜 제가 도매금으로 묶여 책망 받아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는데요?” “너는 탐사대장 아닌가? 대장이 뭔가? 책임지는 위치에 있다는 거 아닌가?” 그 말을 들은 미미 아즈라엘의 얼굴이 겉으로도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일그러졌다. 윌리 길포드도 알고 있을 것이다. 미미 아즈라엘 본인에게 아무 실권도 없다는 걸. 그럼에도 그는 미미 아즈라엘의 직책을 들어 그녀를 꾸짖고 있었다. 미미 아즈라엘은 그것이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품속에서 어떤 증표 하나를 꺼내더니 윌리 길포드 발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고대왕국의 우군임을 증명하는 황금으로 만든 사치스런 증표였다. “네. 그럼 책임을 지고 물러날게요.” 그런데 윌리 길포드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뭘 책임을 진다는 거냐?” “제가 그만두면 되는 거 아닌가요? 전에 받은 계약금도 돌아 가는대로 모두 돌려드리겠어요.” 그 순간, 미미 아즈라엘은 자신의 혀 바로 앞에 싸늘한 칼날이 자리 잡고 있음을 느꼈다. 쉬지 않고 말하는 찰나의 틈을 노려 윌리 길포드가 어느새 미미 아즈라엘의 혀 바로 앞에 날카로운 칼끝을 갖다 댄 것이다. 미미 아즈라엘의 얼굴에 파랗게 질렸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혀를 조금이라도 움직였다만 윌리 길포드의 검기가 실린 칼날에 혀가 토막 나게 될 것이니까. “…….” 미미 아즈라엘이 타의에 의해 침묵하자 윌리 길포드는 오만한 시선으로 자신 아래의 여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고대왕국에서 말이야. 책임을 진다는 건 목숨을 건다는 말과 일맥상통해 마법사. 너 하나 그만둔다고 해서 내가 그냥 고개를 끄덕여줄 거 같았나? 절대 아니야.” 윌리 길포드는 미미 아즈라엘의 입안에 살짝 밀어 넣었던 검을 서서히 빼며 말을 이었다. “다시 알아듣게 말하지. 닥치고 내 말 끝까지 들어. 그리고 내 말이 끝나면 당장 내 발밑의 역겨운 호문클루스들 데리고 조인왕의 묘실을 찾아 날 그곳으로 안내해라.” 미미 아즈라엘으로선 고개를 끄덕이는 수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굴욕감으로 얼굴이 벌겋게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절대적인 힘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윌리 길포드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미미 아즈라엘을 앞에 두고 길고 반복적이며 모욕적인 언사로 꾸중을 내렸다. 훈계는 밑도 끝도 없어 이어졌다. ‘아무래도 저게 저 사내의 취미인 모양이군.’ 윌리 길포드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의 훈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뒤편에서 터져 나온 짤막한 비명소리가 그의 훈계를 멈춰버린 것이다. 같은 순간 김성철은 섬뜩한 기운이 등 뒤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걸 느꼈다. “저.. 저건 뭐냐!” “보지 못한 괴물이다!” 어둠 저편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는 녹색 점액질로 뒤덮인 조인 형상의 괴인이 나타났다. 심연의 나락. 그 괴물이 다시 한 번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심연의 나락이 대상으로 잡은 건 김성철이 아니라 다른 이였다. 윌리 길포드다. 그 괴물은 남의 자식을 앞에 세워두고 훈계를 늘어놓던 윌리 길포드를 향해 걸어갔다. 윌리 길포드는 그 괴물의 접근을 깨닫고 검을 뽑았다. “빌어먹을. 진짜로 저게 있었군. 헛소린줄 알았더니.” 그는 크게 당황했다. 미미 아즈라엘에겐 한없이 강한 윌리 길포드였지만 심연의 나락 앞에선 겁을 집어먹은 일개 병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대륙칠걸답게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검에 검기를 실은 채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다른 한손으로 영혼창고에서 무언가를 찾아 꺼냈다. 곧 그는 푸른빛을 머금은 작은 등불 하나를 영혼창고에서 꺼냈다. 그는 등불을 심연의 나락에게 갖다 대며 큰소리로 말했다.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자신이 어디 있는지조차 망각한 방황하는 영혼이여. 눈이 있다면 고개를 들어 고대의 달빛을 머금은 이 불빛을 보아라!” 푸른빛이 앞에 와 닿자 묵묵히 전진을 거듭하던 심연의 나락이 일순 발걸음을 멈췄다. 그 괴인은 등불에 맺힌 푸른빛 앞에 매료된 듯 한 동안 움직일지 몰랐고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제야 사람들은 하나 둘 정신을 차리고 심연의 나락이라 불리는 전설에서조차 전하지 않는 어두운 존재를 직시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김성철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평범한 자들은 심연의 나락을 보면 안 되는데.” 심연의 나락이 무서운 건 그 괴존재가 단순히 인간의 존재를 소멸시키는 것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약한 자들은 심연의 나락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만으로 미쳐버린다. 그만큼 그 괴이한 존재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로 뭉쳐진 존재였다. “끼야야야야야!” 우두커니 서서 심연의 나락을 지켜보던 소드 어뎁트 하나가 갑자기 머리를 감싸 쥐고 소리를 질렀다. 심연의 나락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 윌리 길포드는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모두, 물러나라! 저 괴물에게서 눈을 떼라!” 하지만 그의 명령은 한 발 늦은 것이었다. 이미 많은 자들이 심연의 나락을 직시했고 그리고 정신이 붕괴됐다. “으아아아!!!” 드워프 형벌 부대원 하나가 도끼를 들고 방금 전까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싸웠던 전우의 목을 쳐버렸다. 피 분수가 사방에 튀었고 노호성과 광기에 찬 고함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혼란 속에서도 윌리 길포드는 평정을 잃지 않고 심연의 나락을 맞상대했다. “물러갈 지어다! 끝없는 시간의 흐름에 매몰된 이여!” 심연의 나락은 푸른빛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몸을 돌려 어둠 저편으로 사라졌다. 원인을 제공한 괴이의 존재는 사라졌지만 그것이 남기고 간 혼란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모두 진정해라! 제 정신을 지닌 자는 내 뒤로 숨어라! 어서 당장!” 윌리 길포드는 우렁차게 소리치며 혼란한 상황을 수습하려했지만 늦은 감이 있었다. 이미 제 정신을 잃어버린 광인들은 미친 듯이 날뛰며 주변의 동료를 해쳤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혼란 속에서 김성철은 두 명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 명은 강가스 아론이었다. 그는 늘 대동하던 감화학파의 마법사와 함께 재빠르게 밧줄을 따라 던전 바깥으로 부리나케 달려가고 있었다. “대물을 낚았나 싶었더니 괴물을 낚았군!” 그는 부하를 버리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는데 알고 보니 상관을 버리는데도 망설임이 없었다. 혼란 속에서 달아난 또 다른 이는 윌리 길포드에게 팔자에도 없는 꾸중을 듣던 여자 마법사였다. 미미 아즈라엘은 투명한 장막으로 몸을 감싸고 던전 너머로 사라졌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 김성철도 더 이상 이곳엔 볼 일이 없었다. 그는 혼란 속에서 날아오는 칼날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하며 윌리 길포드를 지나쳤다. 그를 지나치던 중 윌리 길포드의 얼굴이 자기도 모르게 김성철 쪽을 향했다. ‘저 녀석?’ 곧 그는 김성철의 얼굴과 그의 코트에 붙은 형벌부대의 상징을 보고 관심을 껐다. 대신 그는 위엄 있는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이성이 남아 있는 자들은 들어라! 2층 입구까지 후퇴를 실시한다! 살고 싶은 자 모두 내 등 뒤에 서라!” 그 외침을 뒤로하고 김성철은 던전 3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섰다. 앞을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이전에 골렘과 함께 사투를 벌였던 거대한 회랑에 재진입 했다. “크르르르...” 멀리서 또 다른 마법골렘 한 기가 몸을 일으켰다. 여기까지는 전과 상황이 같다. 하지만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퍽! 김성철의 팔 가라즈가 골렘의 골통을 후려쳤고 골렘은 한 방에 박살이나 쓰러졌다. “…….” 이번에 김성철은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놀아줄 생각은 없었다. ‘수련도 좋지만 빨리 해치우는 게 좋겠군.’ 손님이 너무 많다. 김성철은 손님이 많은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빠른 걸음걸이로 회랑을 걸어가며 앞길을 가로막는 마법골렘 다섯 기를 모두 일격에 박살했다. 어제 그가 마법골렘을 마법으로 상대하는 데는 40분이 걸렸지만 이번에 그가 모든 마법골렘을 박살내고 흑요석으로 만든 거대한 문 앞에 이르기까지는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 앞을 가로막는 문 앞에서 김성철은 발걸음을 멈췄다. 파멸적인 수식이 걸린 문이다. 전처럼 천정을 뚫기도 용이하지 않다. 수식이 문은 물론 주변 10평방미터 전체 공간에 두루 걸려 있었다. 아마도 아래로 향하는 계단 전체를 보호하는 장벽으로 보였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집어넣고 제단에 나하크의 증표를 꽂아보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 미천한 자의 증표로 이곳에 들어 올 수 없다. ] [ 고귀한 자의 증표를 가지고 와라. ] 김성철은 난감함을 느꼈다. 그때였다. 김성철 등 뒤에 희미한 기척이 느껴진 것을. 김성철은 우두커니 선 채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후드를 쓴 여자 마법사가 투명한 안개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 정말 강한가 봐요?” 미미 아즈라엘이 그녀의 호문클루스들과 함께 나타났다. ======================================= 25. 조인 왕의 묘실 (3) “이 문을 지나면 우리도 요정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요정이 되면 이 무겁고 쇳내 나는 투구를 벗어도 되는 거예요! 빨리 인간을 부리는 영주가 되고 싶은 거예요!” “미미님! 저 인간은 무시하고 우리 갈 길을 가는 거예요!” 호문클루스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미미 아즈라엘은 지팡이로 지면을 강하게 후려치며 싸늘하게 말했다. “모두 조용히 해.” 그녀의 일갈에 다섯 호문클루스들은 일제히 겁을 집어 먹고 입을 다물었다. “실례했네요. 제 사역마들이 지나치게 시끄러워서.” 미미 아즈라엘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김성철에게 목례를 했다. 김성철은 흑요석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문을 열 수 있나?” “네. 열 수 있어요. 저 문 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 자리 잡은 태고의 문들도.” 미미 아즈라엘은 김성철에게 백금을 입힌 손가락마디 만한 막대기를 내밀었다. “이건 나하크 귀족의 증표예요. 귀찮은 골렘들을 처리해주셨으니 선물로 드리죠.” 김성철은 손을 뻗어 증표를 받고는 바로 제단의 홈에 끼웠다. [ 고귀한 자여. 안으로 들라. ] [ 폐하께서 몹시 기다린다. ] [ 나하크의 건재를. ] 문 옆의 조인 조각상의 눈이 번쩍였고 이윽고 가벼운 진동과 함께 문이 열렸다. “지하4층부터는 위험한 영역. 행운을 빌어요. 혹, 왕의 묘실에서 만나더라도 우리 싸우지 말아요. 당신과 저는 추구하는 게 다르니까요.” 그때 먼 곳에서 군홧발소리가 들려왔다. 김성철과 미미 아즈라엘은 뒤를 돌아봤다. 고대왕국의 소드마스터들과 살아남은 형벌부대원들이 3층에 진입했다. “미미 아즈라엘을 찾아라! 분명 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무리를 이끄는 건 윌리 길포드가 아닌 그 아들인 미하엘 길포드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생 놈에게 밀려 영원한 찬 밥 신세가 될 것이다!’ 윌리 길포드에겐 3명의 아들이 있다. 모두들 훌륭한 소드마스터로 성장했지만 형제간의 우의는 돈독하지 못했다. 삼형제 중 2남인 미하엘 길포드는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술도, 인품도, 그리고 머리도. 미하엘은 남의 말을 듣는 성격이 아니지만 아버지가 자신에게 쏟는 애정과 기대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던전행에 자진했다. 막강한 전사와 마법사로 구성된 인간제국의 탐사대가 거의 전멸할 정도로 끔찍한 참사를 겪은 그곳에 말이다. “도련님. 서두르지 마십시오. 어차피 윌리 길포드님께서 입구를 틀어막은 이상 미미 아즈라엘은 독안에 든 쥐 신세입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추적하면 그 여자 마법사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집사 오드리아스는 미하엘의 유일한 편이다. 아버지를 닮아 오만하고 독선적인 미하엘 길포드도 오드리아스의 말엔 군말 없이 따랐다. “불청객이 왔네요. 빨리 흩어지는 게 좋겠어요.” 미미 아즈라엘이 손짓하자 그녀의 호문클루스 하나가 주문을 외워 투명한 안개로 감쌌다. 안개 속에서 그녀는 순간이동마법을 써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목적지는 불명. 김성철도 기척을 감추고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나선형으로 길게 뻗은 지하 4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성철은 빠르게 계단을 걸어 지하 4층에 입성했다. 마지막 계단을 내딛는 순간, 사방에서 에메랄드빛 광휘가 비쳐왔다. “우와....” 베르텔기아의 탄성이 들려왔다. 지하 4층의 천정, 벽면 곳곳에 스스로 빛을 발하는 녹색 보석들이 즐비하게 박혀 있었다. “이건, 녹색 발광석. 전부 연금술로 만들어낸 거야!” 베르텔기아는 빛을 발하는 녹색 보석 바로 앞에서 그걸 살피며 말했다. 김성철은 에메랄드 빛으로 가득 찬 낭하를 느릿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앞에 무언가 있다. 무언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김성철은 발걸음을 멈추고 앞을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라.” 그의 말에 환한 빛 너머로 한 무리의 인영이 나타났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녹색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존재였다. 눈이 먼 괴인. 동굴 엘프가 나타났다. 그것도 머리에 부리로 만든 관을 쓰고 깃털로 장식된 외투를 걸친 겉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동굴 엘프가. 그 순간, 김성철의 영혼각인인 진실의 눈이 발동했다. ‘환영인가?’ 눈앞에 나타난 것은 동굴 엘프의 환영이다. 하지만 평범한 환영은 아니다. 악취도 느껴지고 숨소리도 들려오는 아주 제대로 된 모방품이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주문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가오는 동굴 엘프를 노려보며 말했다. “정체를 밝히라고 했다.” 김성철이 싸늘하게 말하자 동굴 엘프를 지팡이를 휘두르며 입을 열었다. “키... 싸..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그 동굴 엘프는 놀랍게도 이계의 언어를 말하고 있었다. 비록 발음은 바람처럼 샜고 음성자체도 금속성에 가까워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저 관을 쓴 동굴 엘프는 분명 이 세계에서 두루 통용되는 언어를 말하고 있다. 김성철은 그 동굴 엘프를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용건이 뭐냐?” “그.. 그대의 강함은... 익히 확인했다... 그대는 우리로서는 대적할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가면 안 된다....” “이유를 말하라. 맹인.” 이에 그 동굴 엘프는 마치 두려워하는 듯 몸을 격하게 떨며 금속성의 목소리로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이... 너머엔.... 날개와 부리를 지닌... 왕이 있다....” “왕? 조인들의 왕 말인가?” “그.. 그렇다... 우리 동족.... 수십 만 명을... 생매장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종족마저... 모두 삼켜버린... 저주받아 마땅할 왕이....” “조인의 왕이 살아 있단 말인가?” 김성철의 물음에 낯선 동굴 엘프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은 김성철로서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해독 불가능한 웅얼거림이 끝난 후 동굴 엘프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부리와.. 날개를 지닌 왕은... 그대로서도... 상대할 수가 없다... 그것은... 이미 초월자를 넘어서... 아신(亞神)의 경지에... 접어든 존재... 혹 그것을.. 깨운다면... 엄청난 재난이... 덮칠 것이다....” 그것이 관을 쓴 동굴 엘프의 최후의 말이었다. 그 한마디를 마친 후 동굴 엘프는 쓰러졌고 검은 연기를 온 몸에서 피워올렸다. 연기가 지워지자 관을 쓴 동굴 엘프와는 다른 모습을 한 동굴 엘프가 쓰러져 있었다. ‘살아 있는 동족 몸 자체에 환영 마법의 술식을 건 모양이군.’ 들어보지 못한 주술이다. 아마도 까마득한 먼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동굴 엘프들만의 비밀스런 마법이리라. 그런 마법을 써서 김성철에게 경고를 할 정도로 동굴 엘프들은 다급한 것이다. ‘기이한 일이군. 동굴 엘프들의 말에 의하면 조인의 왕은 살아 있다. 하지만 미미 아즈라엘은 그런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 거짓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성철에게 그런 사소한 문제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앞에 강력한 마법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김성철은 모든 의혹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전진했다. 곧 새로운 적이 나타나 앞길을 막았다. 미라처럼 말라붙은 조인의 시체들이다. 1층에 단체로 돌아다니는 뼈다귀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한 마기를 뿜어냈다. 김성철은 그 시체들에게서 사악한 흑마법의 기운을 느꼈다. 마편 카산드라가 영혼창고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철썩! 묵직한 채찍의 일격에 시체들은 박살나고 토막이 나 쓰러졌다. 같은 시각. 전투가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머지않은 곳에서 폭발음이 들렸고 곧 호문클루스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김성철은 그곳으로 향했다. 미미 아즈라엘이 차가운 눈으로 발밑에 너부러진 조인들의 시체들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몸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지만 피해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호문클루스 한 마리가 다리를 잃고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미미님... 미미님... 이 조사실장 우지라를 버리고 가세요! 저는 더 이상 갈 수 없어요.” 그 호문클루스는 잘린 다리에서 피를 흘리며 미미 아즈라엘에게 기어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미 아즈라엘은 망설이는 눈치를 보였지만 곧 결단을 내렸다. “미안.” 미미 아즈라엘은 다른 호문클루스를 응시했다. “신임 조사실장 우지추! 이번엔 네가 장막을 펼쳐라.” 그녀는 나머지 네 마리 호문클루스들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김성철은 그들의 기척이 사라진 후 다리를 잃은 호문클루스에게 다가갔다. 호문클루스의 얼굴에 씌운 철갑부분이 일그러져 그 안에 감쳐진 뒤틀리고 짓이긴 끔찍한 몰골 일부가 드러나 있었다. 그걸 본 김성철은 그 호문클루스들이 자신이 아는 것과는 뭔가 다른 걸로 이루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었다. “강화 호문클루스.... 불쌍하네.” 베르텔기아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들은 호문클루스는 김성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날 쳐다보는 거예요? 설마 인간 주제에 날 동정이라도 하는 거예요?” 그 호문클루스는 미미 때완 다르게 반항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 김성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호문클루스에게 연고 하나를 던졌다. 싸구려 지혈제였다. “이딴 거 필요 없는 거예요! 이딴 값 싼 동정 필요 없는 거예요!” 철갑 사이로 드러난 호문클루스의 소름끼치는 눈동자가 경련을 일으켰다. 하지만 연고는 받아 챙겨 피를 흘리는 절단부에 발랐다. 끔찍한 고통을 느꼈는지 호문클루스에겐 기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테에에에에에!!!!!!” 지혈제를 바른 호문클루스는 두 팔로 엉금엉금 기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반드시... 반드시 이 우지라는 우리에게 생명을 준 미미님에게 은혜를 갚는 거예요. 반드시...” 어둠 너머에서 스산한 호문클루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김성철은 자리를 떠났다. 던전 앞엔 무수한 조인들의 시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사악한 흑마법에 의해 영혼이 약탈당하고 껍질만 남은 그 고대의 존재들은 생각이 없었고 따라서 두려움도 없었다. 그저 왕의 묘실에 침입하려는 존재들을 처단할 뿐. ‘끝이 없군.’ 하루 종일이라도 싸울 수 있지만 시간이 많이 끌리고 있다. 김성철은 방식을 바꾸었다. 팔 가라즈를 영혼창고에서 꺼냈다. 오른손엔 마편 카산드라, 왼손엔 팔 가라즈. 퍽! 망치는 조인이 아닌 던전의 석벽을 후려쳤다. 벽이 박살나며 길이 열리고 그 너머에 있던 무수한 조인들이 공격해왔다. 철썩! 마편 카산드라가 고막을 찢어버릴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공기를 갈랐다. 수십 구의 시체가 압도적인 힘이 실린 채찍을 맞고 공중에서 분해됐다. 퍽! 한 무리를 쓰러뜨린 다음엔 다시 벽면을 박살냈다. 또 다른 조인의 무리가 나타났고 마편 카산드라가 비명을 지르며 그의 적을 분쇄했다. 김성철은 이 과정을 반복했다. 그러자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던 작업에 서광이 비쳤다. 파멸적인 술식이 걸린 검은 정사각형의 방이 그 앞에 나타난 것이다. 김성철은 달려드는 모든 조인의 시체를 처리하고 그 앞에 섰다. 그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떠올랐다. [ 불사왕의 묘실 ] [ 나하크의 뜨거운 피를 뿌려라. ] [ 그리하면 왕은 그대의 물음에 답할 것이다. ] 김성철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왜냐하면 왕의 묘실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하크는 이미 멸족했다. 살아 있는 나하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 26. 멸세의 왕 (1) “…….” 낭패다. 김성철은 주변을 돌아봤다. 너부러진 나하크 중 뜨거운 피를 지닌 나하크는 단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하기엔 그동안 들인 노력과 시간이 너무나도 아깝다. 김성철은 검은 묘실 주위를 한 바퀴 돌며 혹시라도 틈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힘으로 억지로 열다가는 던전 전체를 묻어버릴 정도의 폭발만이 일어날 것이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방법을 알 만한 사람이라면 알고 있다. 미미 아즈라엘. 그녀가 필요하다. 김성철은 즉시 행동에 나섰다. 망치로 부수며 열어젖혔던 길을 되돌아가 다섯, 아니 이제는 네 마리 호문클루스를 거느린 젊은 여자 마법사를 찾아다녔다. 곧 김성철은 단서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검게 타 숯덩이처럼 변한 호문클루스 한 마리였다. 그 호문클루스 옆엔 마찬가지로 타 들어간 소드 어뎁트의 시체 두 구가 너부러져 있었다. “그 여자, 결국 꼬리가 밟힌 모양이야.” 베르텔기아가 말했다. 김성철은 바닥에 어지러이 널린 발자국들을 관찰했다. 미미 아즈라엘은 북쪽으로 달아났고 그 뒤를 최소 10명 이상의 사람이 추격했다. 김성철은 발자국을 따라 밝은 녹색의 광휘에 쌓인 던전을 빠르게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성철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쉬고 있는 병사 두 명을 발견했다. 형벌부대의 병사다. 그들은 말할 기력조차 없는 듯 김성철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김성철은 그들을 지나쳤다. 곧 김성철은 또 하나의 호문클루스 시체를 발견했다. 이번엔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흩어진 잔해만 남아 있었다. 김성철은 이런 식으로 죽은 호문클루스를 한 마리 더 발견했고 곧 호문클루스의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으으으.....” 그곳엔 살아 있는 것이 형벌 그 자체일 정도로 처참한 모습을 한 미미 아즈라엘이 있었다. 양 손에 검이 대못처럼 박혀 벽면에 고정된 그녀의 몸뚱이 아래엔 핏물이 우물처럼 고여 있었다. 그녀 주위엔 고대왕국의 소드 어뎁트 세 명이 히히덕 거리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 김성철은 그녀 앞에 다가갔다. “누구냐!” 소드 어뎁트 세 명이 김성철의 기척을 발견하고 일제히 검을 빼들었다. 이에 대한 김성철의 답은 팔 가라즈였다. 퍽! 퍽! 퍽! 머리통이 박살 난 세 구의 시체를 뒤로하고 김성철은 미미 아즈라엘에게 다가갔다. “세상에... 너무 해. 어떻게 사람이 이런 짓을...” 베르텔기아는 차마 보기 볼 수 없는 듯 김성철 등 뒤에 숨었다.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힐링 포션을 꺼내 미미 아즈라엘에게 먹였다. “으.. 으...” 다른 사람이라면 당장 죽어도 무방했겠지만 미미 아즈라엘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하.. 하나 더...!” 그녀는 젖을 빠는 굶주린 아기처럼 포션의 병입구를 물고 한 방울까지 마시려고 몸부림쳤다. 김성철은 그녀의 주문대로 포션 하나를 더 꺼내 그녀에게 먹였다. “고... 고마워요... 그런데 누구시죠?” 그제야 김성철은 알 수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에 반짝여야 할 두 눈동자가 이미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려 기능을 상실했음을. ‘어둠은 공포로 연결되지. 참으로 잔혹한 고문 방법이군. 어떤 녀석이 이런 짓을 한 지 모르겠지만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게 그녀에게 자신을 신분을 밝혔다. “34호다.” “아.. 당신이었군요. 왠지 그럴 거 같았어요. 잠깐만요.”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걸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릎을 펴기도 전에 주저앉았다. 김성철은 그녀의 두 발목 뒤에도 무언가 날카로운 것으로 후벼 판 듯한 상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킬러스 건을 끊어놨군. 그 상처는 포션으로는 치료할 수 없어. 고위신관에게 직접 치료를 받던가 해야 돼.” “빌어먹을... 빌어먹을.. 개 같은 새끼들...” 미미 아즈라엘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저주 섞인 말을 중얼거렸다. 김성철은 그녀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말했다. “누가 이런 짓을 했나? 윌리 길포드? 아니면 미하엘 길포드?” “둘 다 아니에요. 미하엘 길포드는 그저 뺨이나 때릴 줄 알았죠. 미하엘 길포드가 데리고 다니던 집사가 이런 짓을 했어요. 점잖아보이던 인간이 그런 악마 같은 고문기술자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녀는 눈앞에 방금 있었던 악몽 같았던 순간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서둘러야 해요. 그들은 모든 걸 알아냈어요!” “어떤 것을?” “나하크 왕의 묘실을 알아낼 방법을 말이에요. 순식간이었죠.” “나하크 왕의 묘실을 열려면 살아 있는 나하크의 피가 필요한데. 그것이 가능하다고?” “그들에게 살아 있는 나하크가 있는 장소를 알려줬어요. 그들은 지금쯤 그곳에 향했을 거예요.” “대체 거기가 어디지?” 김성철의 눈이 반짝였다. 미미 아즈라엘은 이마 위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소매로 닦아내며 말했다. “절 데리고 가세요. 제가 안내해드리죠.” 김성철은 바로 그녀를 들어 등에 업었다. “매달릴 수 있겠나?” “그 정도 힘은 남아 있어요.” 이윽고 미미 아즈라엘은 김성철에게 자신이 아는 정보를 말했다. 살아 있는 나하크들이 있는 장소를.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동굴 엘프의 거주지에 있다고?” 믿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믿을 수 없더라도 미미 아즈라엘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 김성철은 미미 아즈라엘을 안은 채 지하 4층의 입구, 구석에 난 조그만 틈새 앞에 섰다. 이미 틈새 안엔 한 줄기 광풍이 몰고 지나간 뒤였다. 바닥에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동굴 엘프의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김성철은 핏자국을 따라 인간들의 발자국으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동굴 너머엔 커다란 공동이 있었다. 빛 한줄기 비추지 않는 절대 암흑의 공동 안엔 깃털과 뼈, 그리고 뱀과 벌레의 껍질로 지은 무수한 천막이 서 있었다. 동굴 엘프의 도시다. “동남쪽에 사육장이 있어요.” 미미 아즈라엘이 말했다. “사육장?” 어감이 이상하다. “저기 적이야!” 베르텔기아가 소리쳤다. 과연 김성철 앞에 한 무리의 동굴 엘프 전사들이 나타났다. 김성철은 마편 카산드라를 꺼내 바닥을 후려쳤다. 그 특유의 울림이 날카롭게 울려 퍼지자 동굴 엘프들은 싸워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뒤로 달아났다. 눈앞의 인간이 대적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성철은 비슷한 방법으로 수많은 동굴 엘프 전사들 사이를 무인지경으로 뚫고 문제의 사육장이라는 곳으로 달려갔다. 비릿한 분변의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새의 울음소리 같은 것도 들리는 듯 했다. 김성철은 뼈와 깃털로 만든 커다란 천막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보았다. “꼬꼬... 꼬꼬...!” 뼈로 만든 커다란 닭장 안에 갇힌 이형의 존재를. 그것은 새의 부리와 날개, 그리고 인간의 몸을 지니고 있었다. 나하크다. 그런데 그 전설 속의 존재는 제 한 몸 가눌 수 없는 닭장 안에 갇혀 짐승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꼬꼬.. 꼬꼬...” 그 녀석뿐만 아니다. 천막 안에 자리 잡은 수백 개의 닭장 안에 갇힌 모든 나하크는 땅과 하늘을 지배했던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 한낱 가축에 불과했다. 천막 구석에 놓인 도축대와 목이 잘린 채 대롱대롱 매달린 나하크의 시신이 김성철의 생각을 확고하게 증명했다. 등에 업힌 미미 아즈라엘이 코끝에 고약한 새똥 냄새가 감도는 걸 느끼고 입을 열었다. “나하크 왕국이 멸망한 후... 동굴 엘프들은 살아남은 나하크 족의 아이들을 잡아 가축으로 기르기 시작했어요. 여기 있는 나하크 족은 나자마자 닭장에 갇혀 짐승처럼 사육당하며 알을 낳고 그리고 나이가 차면 도축 당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죠.” “어떤 의미로 최상의 복수일지도 모르겠군.” 김성철은 던전의 벽에 생매장 당했던 무수한 동굴 엘프들의 시체를 기억하며 말했다. “어디서 단서를 찾았지?” 김성철은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나하크 족들 중 일부가 쓰던 무기에 주목했죠. 그들은 새의 부리와 깃털로 장신된 무기를 쓰고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아까 김성철 앞에 나타나 경고 했던 동굴 엘프도 비슷한 장식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깊숙한 지하에서 새가 어디 있겠어요? 혹 동굴 엘프들이 던전 밖으로 나온다고 한 들 눈도 보이지 않는 그것들이 어떻게 자유로이 하늘을 나는 새를 잡을 수 있겠어요? 그런 의문이 하나의 가설로 연결됐죠.” “그건 훌륭하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김성철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당신은 전에도 한 번 이곳에 온 적이 있었지?” “네.” “왜 실패했던 거지?” “시간을 너무 오래 지체했거든요. 이 사실을 알아내기 전까지.” “그렇군.” 김성철은 닭장 안에 있는 나하크 하나를 끄집어냈다. “꼬꼬! 꼬꼬!” 아직 어린 유체였다. 다른 나하크와 마찬가지로 지성은 없다. 베르텔기아가 그 나하크 주변을 돌며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흐음. 이게 그 전설의 나하크? 이렇게 보니 그냥 양계장의 닭과 다를 바가 없네.” “꼬꼬!” 그때 갑자기 어린 나하크가 버럭 하며 부리로 베르텔기아를 쪼았다. “아야! 아프잖아! 이 새대가리가!” 김성철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베르텔기아. 내 주머니 안으로 들어와라.” “왜?” “전속력으로 갈 거니까.” 베르텔기아는 군말 없이 김성철의 주머니 안으로 쏙 들어갔다. 김성철은 심호흡을 한 차례하고 몸에 깃든 신적의 힘을 발휘하며 앞으로 질주했다. 동굴 엘프들은 비록 눈으로 볼 수 없었지만 대적할 수 없는 어떤 존재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자신들의 영지를 가로질러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시 틈새를 통해 던전으로 돌아온 김성철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방향을 가늠했다. “저기.” 그에게 업힌 미미 아즈라엘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김성철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당신. 정말 강하네요. 느낄 수 있어요. 비록 눈은 보이지 않지만.” 등 뒤에 맞댄 미미 아즈라엘의 상체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오는 걸 김성철은 느낄 수 있었다. “잡담이라면 사양하겠다.” “지금 잡은 나하크. 깃털 색이 어떤 색이에요?” 그녀는 달라진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하얀 색.” “아, 그렇군요.” “그건 왜 묻지?” “갑자기 궁금해서요. 전에 저희들이 잡아온 것 중엔 파란 색도 있었고 하얀 색도 있었거든요.” “…….” 김성철은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미미 아즈라엘은 또 다시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는데요?” “이번이 마지막이다. 더는 잡담할 시간은 없다.” “혹시 제 호문클루스 못 보셨나요? 죽은 녀석 말고 살아 있는 녀석요.” “내가 본 건 3마리의 시체뿐이었다.” “그렇군요. 아직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는 거네요. 아니, 두 마린가?” 미미 아즈라엘은 김성철의 목을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툭. 그녀의 신형이 김성철 발 아래로 떨어졌다. “뭐냐?” 김성철이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전 여기 있을게요. 절 이렇게 만든 사람과 다시 만나고 싶지 않거든요.” “그들은 내 상대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제 몸에 찍힌 공포라는 낙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네요.” 눈멀고 걸을 수 없게 된 미미 아즈라엘은 주위를 둘러보며 구슬픈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지차! 우지차! 어디 있니! 우지차!” “…….” 김성철은 그녀를 버려두고 나하크 왕의 묘실을 향해 달려갔다. 그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가자 곧 검은 정사각형 형태의 묘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묘실 앞엔 불청객들이 있었다. 고대왕국의 검사들이다. 그 중심엔 미하엘 길포드와 오드리아스란 이름을 지닌 사내가 서 있었다. “자, 이 제단에 이 병아리의 피를 뿌리자고!” 오드리아스의 피 묻은 손아귀엔 어린 조인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버둥거리고 있었다. 김성철이 데리고 온 것과 마찬가지로 하얀 깃털을 지니고 있었다. 오드리아스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검으로 조인의 목을 그었다. “꼬꼬-!!!” 조인의 몸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오드리아스는 피를 흘리는 조인의 시체를 제단 위에 올렸다. 움푹 들어간 제단 위에 나하크의 피가 채워졌다. ‘한 발 늦은 건가.’ 김성철은 뒤에 서서 상황을 관망했다. 검은 묘실의 표면에 기하학적인 무늬가 나타났다. 마법진, 아니 그와 유사한 무언가 였다. ‘내가 모르는 마법진이군. 나하크의 마법술식인가.’ 지면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묘실이다. 정사각형의 검은 묘실이 정확히 반으로 쪼개지며 그 안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미하엘 길포드는 두 주먹을 꾹 쥐고 벅찬 얼굴로 검은 묘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해냈어! 드디어 내가 해냈어!” 그는 조인의 시체를 들고 있는 오드리아스에게 다가가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오드리아스 영감! 우리가 해냈어! 우리가 해냈다고.” “아직, 긴장의 끈을 놓을 때가 아닙니다. 도련님.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마지막 마무리를 잘해야 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 그랬었지.” 미하엘 길포드는 어색하게 웃으며 짐짓 긴장하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이윽고 지면의 떨림이 멈췄다. 묘실이 열렸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활짝 열린 묘실로 다가갔다. 김성철도 조용히 그들 가까이 접근했다. 묘실 안엔 세로로 세운 두 개의 관이 있었다. “관이 두 개라고? 조인의 왕은 둘인가?” 미하엘 길포드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그는 이내 쾌활하게 말했다. “관이 두 개면 더 좋지. 가져갈 것도 많으니.”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개의 관 뚜껑이 저절로 열렸다. 고대왕국의 검사들은 숨을 죽이고 관 뚜껑이 열리는 걸 지켜보았다. 이윽고 모든 이들의 눈에 의아함이 일제히 떠올랐다. 두 개의 관 안에 있던 시체는 대단히 화려한 복장을 입고 갖은 보석으로 치장된 무구를 지니고 있어 누가 봐도 고귀한 자로 보였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관 안에 있던 것은 조인이 아니었다. 부리와 날개가 없는 자. 동굴 엘프들이다. ======================================= 26. 멸세의 왕 (2) 그들의 생김새는 쌍둥이처럼 똑같았지만 갖고 있는 무기가 달랐다. 하나는 검을 들었고 다른 하나는 지팡이를 들었다. 그들에겐 다른 동굴 엘프들과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눈이다. 그들은 인공적으로 박아 넣은 루비처럼 반짝이는 눈을 지니고 있었다. “너희들이냐?” 검을 든 동굴 엘프가 붉게 빛나는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음산하고 압도적인 목소리였다.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어딘가 짓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도련님.” 오드리아스가 미하엘 길포드에게 속삭였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미하엘 길포드가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느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미하엘 길포드는 기껏 마련한 이 훌륭한 기회를 차버리는 우를 범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빠르게 성공의 수확물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승리가 눈앞이다! 조금만 더 하면 마침내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 이대로 돌아갈 성 싶으냐!’ 평범하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차별 받고 형과 누이에게 비교 당했던 굴욕적인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너희들이 조인들의 왕이냐?” 미하일 길포드는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외쳤다. 눈을 번득이던 동굴 엘프 두 마리가 움직임을 멈추고 미하엘 길포드를 응시했다. “내가 너희들을 부활시켰다. 따라서 나는 너희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요구한다. 설마 왕을 칭하는 자가 약속조차 지키려 하지 않는 건 아니겠지?”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동굴 엘프들을 노려봤다. 동굴 엘프들은 한동안 가만히 미하엘 길포드를 마주 보았다. 침묵 속에서 미하엘 길포드의 심장은 터질 듯이 강하게 뛰었다. ‘어서, 어서 내게 보상을 다오. 모두를 납득시킬 나하크의 왕관을!’ 검을 든 동굴 엘프가 손가락을 들어 미하엘 길포드를 가리켰다. 미하엘 길포드의 눈동자에 기대와 환희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리는 왕이 아니다. 우리는 왕의 가장 충실한 종복이다.” 그리고 지팡이를 든 동굴 엘프가 이어 말했다. “우리는 위대한 왕의 묘실을 지키는 수호자다. 우리는 거짓된 자들을 가려내고 그들을 멸한다.” 미하엘 길포드의 입모양이 이상하게 변했다. 기대가 산산조각 난 것이다. 옆에서 오드리아스가 다급히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도련님.” 일이 틀어졌다. 미하엘 길포드는 그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심장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충격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두 동굴 엘프가 동시에 손가락으로 미하엘 길포드와 그 도당을 가리켰다. “감히 지엄한 하늘과 땅의 군주 앞에 한낱 천한 평민의 피를 바치다니!” 동굴 엘프 둘이 동시에 같은 노호성을 터뜨렸다. 주변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적의로 가득 찬 정적이 주변을 감쌌다. 멀리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고대 왕국의 검사들은 그제야 일이 틀어졌음을 알고 무언으로 눈빛을 교환했다. “왕의 안식을 더러운 피로 방해한 자들에겐 오직 죽음뿐이다.” “더러운 피를 너희들의 또 다른 더러운 피로 씻어낼 것이다.” 두 마리의 동굴 엘프가 일제히 검을 뽑았다. “도련님!” 오드리아스가 검을 빼들고 미하엘 길포드 앞을 막아섰다. “지금! 도마....!!” 그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마법적인 족쇄가 그의 몸을 묶었고 다음 순간, 보석으로 장식된 검이 그의 목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여... 영감!!!!” 날카로운 비명이 조인왕의 묘실 위로 울려 퍼졌다. 강력한 소드마스터인 오드리아스가 단 칼에 죽임 당하자 장내에 있던 모든 고대왕국의 검사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미하엘 길포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상대가 안 돼! 아버지.. 아버지를 불러와야 돼!’ 그는 즉시 등을 돌리고 달아났다. 하지만 나하크 왕의 종복들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마법의 족쇄가 그의 사지를 묶었고 날카로운 검이 그의 다리를 베었다. “끄아아아악!” 두 다리의 힘줄이 잘려나간 미하엘 길포드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왕의 묘실 앞에서 떼굴떼굴 굴렀다. 미하엘 길포드를 제압한 두 동굴 엘프는 나머지 고대 왕국의 검사들을 공격했다. 정리가 끝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드리아스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의 검사들이 다리가 잘린 채 검은 묘실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너희들에게 편한 죽음은 사치다.” “너희들은 빛 한 줄기 비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너희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질식해 죽을 것이다.” 지팡이를 든 동굴 엘프가 뭐라고 주문을 외우자 벽면 하나가 무너지며 그 안에 담겨 있던 백골이 와르르 쏟아졌다. 검을 든 동굴 엘프는 산 자들을 잡아 벽 안에 차례로 던져 넣었다. “아.. 안 돼!” “그만 둬!” “잘못.. 잘못 했습니다! 자비를!” 그들의 아우성은 마법적인 힘에 의해 스스로 매워진 벽면에 막혀 사라졌다. 벽면 너머에서 음산한 흐느낌과 절규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 김성철은 그 광경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미미 아즈라엘은 같은 광경을 본 모양이군. 그리고 혼자만 빠져나왔겠지.’ 그때 검을 든 동굴 엘프가 김성철이 숨은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기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김성철은 어둠 속에 숨은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동굴 엘프들은 한동안 그쪽을 응시하다가 그들의 묘실을 향해 걸어갔다. 왕의 종복들은 김성철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 정도 수준이군.’ 김성철은 얕은 한숨을 내쉬고 어둠 속에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꼬꼬! 꼬꼬!” 손에 꽉 잡혀 있던 어린 나하크가 새처럼 버둥거리며 울었다. 그 소리를 들은 동굴 엘프들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눈 부분에 박아 넣은 붉은 루비가 스산한 빛을 발했다. “넌 누구냐?” 두 동굴 엘프는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김성철은 손에 들고 있는 어린 나하크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보다시피. 제물을 바치러 온 사람이지.” 동굴 엘프들은 김성철에 손에 들린 나하크를 응시했다. 하얀 깃털을 지닌 유체다. 동굴 엘프들의 눈동자가 다시금 번득였다. “하찮은 하얀 깃털을 가지고 오다니. 방금 네 종족이 우리에게 죽는 걸 보고도 깨달은 게 없었나?” “하등한 인간의 수준은 겨우 그 정도라는 것이겠지.” 김성철은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하얀 깃털이 문제였군.’ 김성철은 아까 사육장에서 봤던 광경을 되새겨 보았다. 어둠이 한 꺼풀 쳐져 있어 확실하진 않지만 그의 기억 속에 있던 닭장 안엔 하얀 색의 깃털을 지닌 나하크만이 있었다. 즉 하얀 색 이외의 깃털을 지닌 나하크는 드물다는 이야기. ‘역시 그 여자는 모든 걸 알고 있었어.’ 그것과는 별개로 지금 해결해야 될 문제가 하나 있다. 그를 향해 적개심을 뿜어내는 조인왕의 종복들이다. 김성철은 들고 있던 나하크를 내려놓았다. 어린 나하크는 낯선 환경이 신가한 듯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이내 오드리아스의 시체를 발견하고 날카로운 부리로 그의 눈알을 파먹었다. 새가 눈알을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짧은 시간 동안 김성철은 천천히 오른손을 뻗었다. 이윽고 팔 가라즈가 영혼 창고에서 나타났다. 하늘의 파편을 벼려 만든 신물. “…!!” 그 위용을 본 두 동굴 엘프들은 주춤거렸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저 망치엔 결코 범상치 않은 힘과 사연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너희들! 전부 다 죽었어!” 이제는 익숙해진 베르텔기아가 김성철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김성철은 느긋하게 망치를 어깨 위에 올린 채 동굴 엘프들을 향해 걸어갔다. 지팡이를 든 동굴 엘프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으로 외웠다. 불가해한 마법진이 그의 입 주변에 파문처럼 퍼졌다. 처음 이곳에 올 때 김성철은 그것이 뭔지 몰랐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속박인가.’ 보이지 않는 족쇄가 김성철의 두 팔과, 두 다리를 단단하게 묶었다. 영혼각인 진실의 눈은 김성철을 묶은 것이 죽은 자의 원혼이라는 것을 꿰뚫어보았다. ‘참으로 지저분한 마법이군.’ 그리고 검을 든 엘프가 그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오드리아스가 당했던 것과 똑같은 수법이다. 하지만, 그들의 방식은 김성철에게 통하지 않는다. 김성철의 몸에 신적인 힘이 흐르고 지나갔다. 그 힘의 파동을 느낀 김성철은 사지에 힘을 주고 몸을 가볍게 움직였다. “끄아아아아아아!” “가아아아아악!!” 김성철의 사지를 묶은 영혼 속박이 사슬이 끊기듯 끊어지며 저승에서 들을 법한 귀공성을 내지르며 흩어졌다. “…?!” 지팡이를 든 동굴 엘프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같은 순간 김성철에게 쇄도하던 동굴 엘프는 이미 모든 신경을 검에 집중해 김성철의 심장을 노리고 찔러들어가던 중이었다. 심장을 관통하는 그 찰나의 느낌을 기대하면서. 하지만 그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둔탁한 충격이 그의 신형을 가볍게 흔들었다. 덥썩. 억센 인간의 손이 동굴 엘프의 목줄을 움켜쥐었다. 동굴 엘프의 붉은 눈동자가 충격과 경악이 스치고 지나갔다. 목을 움켜잡은 손에 힘이 실리자 동굴 엘프는 검을 떨어뜨리고 두 팔을 움직여 자신의 목을 쥔 손을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날카로운 손톱으로도 마구 긁어봤지만 억센 인간의 손은 그의 손톱으로는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우두둑!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동굴 엘프의 의식은 한 차례 꺼졌고 뒤이어 들려온 둔탁한 파공음과 함께 영원히 사라졌다. “…….” 김성철은 머리가 박살 난 동굴 엘프의 시신을 뒤로 하고 다음 상대를 향했다. 지팡이를 든 동굴 엘프는 팔을 내저으며 뒤로 물러서며 다급히 말했다. “기다려라. 인간! 방법을 알려주겠다. 파란 깃털을 지닌....” 퍽! 머리가 박살 난 시신이 한 구 늘었다. “파란 색이라 이거지?”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남은 건 사육장에 다시 찾아가 파란 깃털을 지닌 나하크를 구해오는 것뿐. “저기, 저 녀석은 어떻게 할 거야?” 베르텔기아가 오드리아스의 시체를 뜯고 있는 어린 나하크를 보며 말했다. “…….” “설마 요리 재료로 쓸 건 아니지?” “지성을 지닌 종족은 먹지 않는다.” “정말…?” “…드래곤 빼고.”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영혼 창고 안에 집어넣고 사육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묘실이 있던 방을 나가려는 찰나 묘실의 다른 입구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미님! 여기 인 거예요! 여기에 검은 네모가 있는 거예요!” 호문클루스의 목소리다. 김성철은 걸음을 멈추고 그쪽을 응시했다. 가려진 입구의 모퉁이 쪽에서 철갑을 두른 호문클루스 하나가 피투성이가 된 여인을 끌고 나왔다. 두 눈이 먼 미미 아즈라엘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는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지차. 진짜 그 소드마스터 죽은 거 맞아?” 그녀의 목소리엔 진한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네! 이 우지차의 눈으로 직접 보고 온 거예요! 미미님! 그 소드마스터는 반짝이를 단 동굴 엘프에게 죽은 거예요! 저기 그 나쁜 놈의 시체가 있는 거예요!” “묘실의 수호자들은?” “어라? 아까 묘실로 들어가는 거 같았는데 전부 죽어 있는 거예요.” “죽어? 수호자가?” “네. 모두 머리가 박살 나 죽은 거예요.” “어떻게 된 일이지? 그 수호자를 죽이다니... 설마 윌리 길포드 본인이...?!” 그녀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던전 안에는 죽음과 같은 정적만 흐를 뿐, 인기척은 없다. “빨리 움직이자. 우지차.” “알겠는 거예요!” 호문클루스는 미미 아즈라엘을 제단 앞으로 끌고 갔다. 미미 아즈라엘은 손을 더듬어 제단을 찾았다. 이윽고 제단을 찾아 낸 그녀는 영혼 창고에서 마법 지팡이 2개를 꺼낸 다음 그것을 목발 삼아 안간힘을 다해 일어났다. “끄으으윽....” 제단 앞에 선 미미 아즈라엘은 자신의 발밑에 있을 호문클루스를 내려다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지차. 잠시 나한테 안겨볼래?” “네? 미미님이 절 안아주시는 거예요?!” “마지막 부탁이 있단다.” 호문클루스는 감동한 듯 울먹이며 말했다. 김성철과 베르텔기아는 멀리서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뭘 하는 걸까?” 베르텔기아가 물었다. 김성철도 그게 의문이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저 여자?’ 그는 계속해서 미미 아즈라엘의 행동을 지켜봤다. 호문클루스는 미미 아즈라엘의 품속에 안겨 있었다. “철갑을 벗으렴.”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거예요?” 호문클루스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녀는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호문클루스는 머리에 쓴 철갑을 벗었다. 그러자 그 안에 가려져 있던 끔찍한 모습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것은 누군가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살가죽을 이어 붙여 만든 흉측한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읔...” 베르텔기아는 도저히 그 모습을 볼 수 없는지 김성철 뒤로 돌아갔지만 김성철은 똑똑히 강화 호문클루스의 맨얼굴을 직시하고 있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보통 호문클루스와는 생김새가 다르다. 흉측한 흉터와 무수히 난 종기, 그을린 화상자국 너머로 가려진 무언가가 김성철의 눈에 포착됐다. ‘역시 평범한 호문클루스가 아니었군. 그걸 그렇고 저 입, 설마... 부리를 베어낸 자국인가?’ 그 순간 호문클루스의 몸이 갑자기 경직됐다. 날카로운 단검이 호문클루스의 목을 찔러 버린 것이다. “미... 미미님..,?” 목에서 붉은 피를 쏟아내며 호문클루스가 태엽인형처럼 덜덜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미미 아즈라엘은 그 호문클루스를 제단 위에 처박고 단검을 더욱 깊숙이 쑤시며 부드럽게 말했다. “정말 미안. 어쩔 수 없는 일이란다.” “어차피 미미님에게 얻은 생명이에요. 그러니 미미님이 거둬가는 게 옳은 거예요. 그런데 눈앞이 깜깜해지는 거예요. 너무 아픈 거예요...” “…내가 힘을 얻으면 너희들을 다시 살려줄게.” 미미 아즈라엘은 목 줄기에 쑤셔 박은 단검을 옆으로 돌렸다.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나며 호문클루스는 절명했고 죽은 호문클루스에서 쏟아져 나온 피가 제단을 채우고 있었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설마 저 호문클루스. 푸른 깃털을 지닌 나하크의 피를 주입해 만들어낸 건가?’ 다음 순간, 지면이 흔들렸다. 그리고 던전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울림이 던전 안에 있는 모든 존재에게 전달됐다. 검은 묘실이 하늘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묘실 안에 위치한 진정한 조인왕의 묘실이 지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산 자와 죽은 자 모두 무릎 꿇어라. ] [ 멸세의 왕 마라키아의 행차시다. ] 같은 시각. 은자의 탑. 이계에서도 가장 거룩하고 신비로운 곳으로 추앙받는 고대의 탑엔 기원을 알 수 없는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물이 하나 있었다. 이름 하여 재앙의 서. 인간이 아닌 신의 의지에 의해 스스로 그 내용이 기재된다는 그 유물에 지금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바보 같은...! 재앙의 서에 새로운 글귀가 추가되고 있다고?!” 탑의 주인인 성자 포르피리우스는 옷매무새가 흐트러지는 것조차 상관하지 않고 서둘러 재앙의 서를 모신 거룩한 성소로 향했다. 그리고 보았다. 재앙의 서에 기재된 일곱 재앙의 내용이 수정됨과 동시에 새로운 재앙이 첫 번째 열에 기재되고 있는 것을. [ 자신의 종족을 먹어치운 부리와 날개를 지닌 왕이 다시 한 번 죄악의 날개를 펼쳐 세상을 어둠으로 덮으리라. ] ======================================= 26. 멸세의 왕 (3) 안개가 걷히고 묘실 안에 서 있던 존재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매의 얼굴과 날개, 인간의 육신을 한 존재. 조인. 그 조인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나하크의 왕이다. 그는 칠흑처럼 검은 날개와 황금빛으로 빛나는 부리, 그리고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처럼 깊은 보랏빛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묘실에서 걸어 나온 그는 제단 앞에 두 지팡이를 지탱해 위태롭게 서 있는 미미 아즈라엘을 응시했다. “나는 마라키아다. 너는 누구인가? 이방인.” 그의 목소리는 전신을 휘감고 있는 압도적인 위용에 비하면 어딘가 젊었고 앳되기까지 했다. 미미 아즈라엘은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자신 앞에 전설 그 너머에 있는 위대하고 파멸적인 존재가 서 있다는 사실을. “지엄하신 하늘과 땅의 왕이시여.” 미미 아즈라엘이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하찮고 비루한 인간족 미미 아즈라엘이 인사드립니다.” 마라키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미미 아즈라엘을 응시했다. “그대. 두 눈이 멀었구나.” 마라키아는 보석 박힌 반지로 가득한 손을 뻗어 미미 아즈라엘의 눈앞을 스치듯이 어루만졌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미미 아즈라엘의 두 눈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아...! 폐하!” 그녀는 앞이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격하며 마라키아 앞에 엎드렸다. 마라키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나의 신하와 백성들은 어디 있느냐? “폐하의 신하와 백성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뭐라고?” 그때 마라키아의 눈에 꾸물거리는 작은 물체가 포착됐다. 오드리아스의 시체를 뜯어먹고 있는 하얀 깃털을 지닌 어린 나하크였다. “저건 내 백성이 아닌가? 비록 천하디 천한 하얀 깃털을 지녔다고 하나 저것은 나의 백성이다. 그런데 푸르고 붉은 깃털을 지닌 내 중신들과 조언자들은 어디 있는가?” “그들은... 이미... 소멸했습니다. 폐하를 신에 근접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아.” 마라키아는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그는 억겁의 세월을 거슬러 그의 동족이 건재하던 시절을 기억해냈다. 재앙이 닥쳐오던 암울한 시기. 원로원과 부왕은 나하크 족에 전해 내려오는 일족을 구원할 검은 깃털을 가지고 태어난 마라키아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최후의 주술을 시전 했다. 그의 기억은 거기서 머물러 있었다. “그렇군. 나는 그때부터 영원한 잠에 빠져든 것이군.” “그렇습니다. 폐하.” 미미 아즈라엘은 불편한 다리를 억지로 굽혀 마라키아 앞에 엎드렸다. 그녀는 마라키아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리고 제가 폐하를 그 영원한 잠에서 깨웠습니다. 수많은 위험과 협잡꾼들의 위협을 뚫고요.” “그런가? 그러면 보상을 주는 게 인지상정이겠지.” 마라키아가 손을 들어올렸다. 막강한 힘이 그의 손끝에 맺혔다. 그때 느릿하지만 묵직한 발소리가 어둠 저편에서 울려 퍼졌다. “…….” 김성철이다. 마라키아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저건 또 무엇인가?” 그의 물음에 미미 아즈라엘은 김성철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입을 열었다. “저 자는 폐하의 부활을 원하지 않는 무리입니다. 저 자를 멸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베르텔기아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아니, 이 여자가. 진짜!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도 유분수지. 죽기 직전에서 구해줬더니 뭐라고? 그게 사람이 할 소리야!” 김성철은 길길이 날뛰는 베르텔기아를 향해 손짓을 해 그녀를 진정시킨 후, 마라키아와 미미 아즈라엘을 번갈아 보며 담담히 말했다. “미미 아즈라엘. 약속대로 왕관을 받으러 왔다.” 미미 아즈라엘은 김성철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그녀는 조인왕 앞에 엎드리며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십시오. 폐하. 저 자는 폐하의 왕관을 노리는 무리입니다. 날개도 부리도 없는 주제에 나하크의 왕관을 노리는 저 불경함을 용서하시면 아니 됩니다.” 마라키아는 미미 아즈라엘의 말을 거의 듣고 있지 않고 있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허름한 코트에 다 떨어진 청바지를 걸친 기이한 복식의 이방인에게 쏠려 있었다. ‘이 인간. 평범한 인간은 아닌 것 같군.’ 그때였다. 또 다른 인물이 묘실이 있는 공간으로 뛰어 들어왔다. “대체 무슨 일이냐?! 미하엘 길포드! 오드리아스!” 대륙십삼걸 중 칠걸. 윌리 길포드다. 잠시 던전 밖을 떠나 있던 그는 던전 전체가 흔들리고 기이한 울림이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심상치 않은 일이 던전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직감, 즉시 소수의 측근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왔다. 그런데 묘실 안엔 그가 찾는 아들은 없었다. 묘실의 전당 안엔 형벌 부대원으로 보이는 낯선 청년, 탐사대장 미미 아즈라엘, 그리고 검은 날개를 지닌 조인이 전부였다. 그의 시선은 이내 마리키아에게 고정됐다. 온 몸을 휘감은 화려한 장식과 의복. 전신에서 느껴지는 막강한 위압감. 그리고 조인의 용모. 짐작 가는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설마. 미미 아즈라엘. 조인의 왕을 깨운 것인가. 그나저나 대체 미하엘 이 바보 놈은 어디 있는 거냐?’ 아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저건 또 무엇이냐?” 마라키아가 미미 아즈라엘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미미 아즈라엘은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작심하고 말했다. “저 자는 우리의 적입니다.” “헛소리! 저 자는 나의 고용인이다.” 윌리 길포드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막강한 힘에 미미 아즈라엘은 공포를 느끼고 몸을 떨었다. 대륙칠걸 윌리 길포드란 이름이 가지는 힘이란 그런 것이었다. 윌리 길포드는 미미 아즈라엘을 노려보며 추궁했다. “미미 아즈라엘! 내 아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때 벽 쪽에서 미약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끄으으... 사.. 살려줘...” 왕의 종복들에 의해 갇힌 미하엘 길포드와 그의 부하들이다. 윌리 길포드는 즉시 그곳으로 다가 검으로 벽을 갈랐다. 깔끔하게 벽이 갈라지며 그 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엔 미하엘 길포드도 있었다. “미하엘!” 윌리 길포드가 미하엘의 몸을 급히 안고 흔들었다. 미하엘 길포드의 숨통은 이미 끊어진 뒤였다. 어둠과 절망 속에서 정신이 육체보다 먼저 죽어버렸고 결과적으로 죽음을 앞당긴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윌리 길포드의 두 눈에 뜨거운 불길이 타올랐다. 하지만 그는 대단히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다. 힘을 측량할 수 없는 나하크의 왕과 싸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조인왕과 교섭해 이익을 얻거나 아니면 손실 없이 아들의 시체를 데리고 이 자리를 빠져나가겠다는 계산을 속으로 끝냈다. 그런데 가장 쓸 만한 패가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오드리아스는 어디에 있는 거지? 아들을 지키라고 붙여줬건만 대체 뭘 한 건가?’ 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구석에 처박혀 잘 보이지 않던 시체 한 구가 그린 듯 눈에 들어왔다. ‘저 복장은...?’ 익숙한 복장에 이끌려 시체의 얼굴을 살피던 윌리 길포드는 아연실색했다. “오드리아스 시로코!” 오랜 전우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부하는 두 눈알이 후벼 파진 채 하얀 깃털을 지닌 새끼 조인에게 파 먹히고 있는 중이었다. “이놈!” 윌리 길포드의 두 눈이 뒤집혔다. 오드리아스가 누군가? 모두가 경원시하던 소환자 출신인 자신을 가장 먼저 따른 충복이면서 수많은 전투에서 등을 맞대고 싸운 사내다. 은퇴한 이후에도 그는 못난 자식인 미하엘 길포드의 스승으로 붙일 만큼 끈끈한 관계다. 그런 사내의 시체를 한낱 빌어먹을 새대가리가 처참하게 훼손하고 있으니 제 정신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윌리 길포드는 크게 노하여 시체 달라붙은 새끼 조인을 발로 걷어찼다. “꼬꼬!!!” 조인은 공처럼 날아가 바닥에 처박혀 몇 차례 버둥거리다가 이내 숨이 끊어졌다. “감히, 내 전우의 시체를 뜯어먹다니. 하찮은 새대가리 새끼가.”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저지른 짓이었다. 그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속정은 깊었고 자기 사람은 철저히 챙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의 행동이 잠잠하던 묘실의 전당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나하크의 왕 마라키아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다. 멸세의 왕이란 이명에 걸맞지 않게 안온하고 정중하던 마라키아의 전신에서 어둡고 서늘한 기운이 흘러 나왔다. “감히 내 앞에서 내 백성을 죽여?” 마라키아가 분노했다. 그 아래 조인왕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미미 아즈라엘은 그를 돌아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뿔싸!’ 윌리 길포드는 결정적인 실책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절대 만나고 싶지 않는 존재가 어둠 속에서 그림자처럼 떠올랐다. 심연의 나락이 구석 한 복판에 원래부터 있었던 양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 저거!” 이미 한 번 혼쭐이 난 적 있던 그의 측근들은 일제히 심연의 나락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 김성철은 말없이 주변을 돌아봤다. 중앙에 서 있는 마라키아와 그 발밑에 엎드린 미미 아즈라엘, 입구 쪽에 자리 잡은 윌리 길포드와 그의 측근들, 그늘진 모퉁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심연의 나락, 그리고 그 대칭점에 서 있는 그 자신. 지하왕국을 둘러 싼 모든 중요한 존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비구름이 모이면 폭우를 쏟아내듯 곧 이곳에서도 평지풍파가 휘몰아칠 것이다. 먼저 움직인 것은 마라키아였다. “지금 이 세상을 지배하는 종족은 누구냐?” 그는 발밑의 미미 아즈라엘을 향해 차갑게 물었다. 미미 아즈라엘은 고개를 엎드린 채 대답했다. “여러 종족이 나누어 다스리고 있습니다만, 지금 가장 지배적인 종족은.... 인간입니다.” “그래?” 마라키아가 싸늘한 코웃음을 터뜨렸다. 마라키아의 별빛 같은 눈동자는 윌리 길포드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가 하늘을 날 때 땅을 기던 하찮은 것들이 힘을 조금 얻었다고 기고만장해진 모양이구나. 지엄한 나하크의 왕 앞에서 감히 그 백성을 함부로 해하다니.” “…….” 윌리 길포드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자세를 취했다. 그것을 본 마라키아는 조소했다. “그깟 싸구려 검으로 내 깃털 하나라도 건드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내가 당신의 백성을 해한 건 맞지만 내 부하의 시체를 먼저 모욕한 건 당신의 그 작은 백성이오.” 윌리 길포드도 지지 않고 말했다. 조인왕이 크게 웃었다. “한낱 땅을 기는 먹이감이 잘도 짖어 되는 구나. 그렇다면 좋다. 인간. 긴 시간 동안 잊어버린 공포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겠다.” 마라키아의 날개가 활짝 펴졌다. 활짝 핀 검은 날개에 서려 있던 어마어마한 마력이 장내에 퍼지며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내 이곳을 나가 인간들의 나라를 하나하나 무너뜨리고 멸하겠다. 하찮은 자들은 정화의 불로 태워 죽일 것이며 인간들의 왕은 그들의 간이 내 부리에 의해 쪼아 먹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걸 반복하면 인간들은 다시 알게 되겠지. 이 검은 날개가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미미 아즈라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인왕의 발밑에서 그저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한편 조인왕의 분노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윌리 길포드는 극한의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이길 수 없는 적이다.’ 심연의 나락은 그저 구경꾼으로 치부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위협이 눈앞에 자리 잡고 있다. ‘대륙십삼걸을 전부 모은다면 모를까... 나 혼자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이미 그의 머릿속엔 아들과 전우의 시체를 가지고 나오겠다는 생각 따윈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마라키아의 날개가 움직였다. 단 한 번의 날갯짓만으로 마라키아는 천정까지 떠올랐다. 머리 위에 떠오른 나하크의 왕의 검은 날개를 본 순간 윌리 길포드는 어떻게 해야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윽고 하늘 위에서 검은 빛줄기가 깃털과 함께 폭사됐다. ‘글레어와 비슷하지만 글레어는 아니다. 저건 매직 애로우의 강화판이다.’ 김성철은 묵묵히 둘의 싸움을 지켜봤다. 윌리 길포드는 검을 휘두르며 빛줄기와 검은 마법의 화살을 쳐내거나 피했다. 하지만 비처럼 쏟아지는 죽음의 화살 세례 속에서 그의 몸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가 났다. 그의 부하들은 난전 속에 죽은 시체가 되었다. “헉... 헉...” 윌리 길포드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천천히 죽을 것이고 그렇다고 하늘 위의 조인왕을 향해 도약하자니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방법. 방법이 없는 건가? 가장 가능성 높은.’ 가능성 없는 싸움에선 모든 걸 걸어야 한다. 가능성 있는 싸움만을 거듭한 윌리 길포드로선 처음부터 지고 들어간 싸움이었다. 무수한 화살 세례 속에 뒤늦게 반격을 시도했지만 이미 지치고 상처 입은 그의 몸은 그의 생각에 따라가주지 못했다. 윌리 길포드의 복부에 검은 마법 화살이 박혔고 그는 쓰러졌다. 치명상이다. 윌리 길포드는 입술을 씹으며 숨을 헐떡였다. 죽음의 그늘이 그 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벌레 같은 놈.” 조인왕은 대륙칠걸의 숨통을 몸소 끊기 위해 서서히 하강했다. 그의 손에 검이라기보다는 꼬챙이에 가까운 짧은 스틱이 나타났다. 조인왕의 왕홀이다. 마라키아는 엎드린 채 숨만 간신히 붙은 윌리 길포드에게 다가가 왕홀을 높이 들어올렸다. “죽어라.” 그때였다. 그 앞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아무 존재감도 없어 망각하고 있던 사내였다. 그의 손엔 낯선 망치가 하나 들려 있었다. 김성철이다. 조인왕의 앞을 자연스럽게 가로막은 그 사내는 쓰러진 윌리 길포드에게 다가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윌리 길포드. 날 기억하나?” ======================================= 27. 메아리 (1) “넌 누구냐?” 모르는 얼굴이다. 윌리 길포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낯선 사내의 손에 들린 망치를 본 순간 그는 한 얼굴을 기억해냈다. 마왕의 궁전 앞. 기라성 같은 이계의 영웅 앞에서 길길이 날뛰며 영웅들에게 저주의 말을 쏟아내던 한 사내를. ‘세계의 적 김성철? 아니 그럴 리가... 얼굴이 다른데? 그때 보다 젊어. 체격도 다르고.’ 중요한 것은 얼굴이 아니다. 손에 든 신물인 팔 가라즈다. 김성철은 윌리 길포드를 싸늘하게 내려 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8년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군. 오히려 퇴보했어.” 그때 하늘 위에 떠 있던 마라키아에게서 수십 개의 마법화살이 비처럼 쏟아 내렸다. 김성철은 망치로 대지를 후려쳤다. 지면이 박살나며 커다란 암반이 통째로 튀어 올랐다. 김성철은 그 암반을 다른 한 손으로 들었다. 집채 만한 크기였지만 암반을 떠받치는 그의 손엔 작은 흔들림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퓻! 퓻! 퓨퓨퓻! 김성철이 들어 올린 암반 위에 마법화살이 줄지어 박히지만 그 어느 것도 두터운 암반을 끝까지 관통하지 못했다. 한 차례 공격을 막아낸 김성철은 암반을 옆으로 내던지며 망치를 강하게 휘둘렀다. 폭발음을 방불케 하는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풍압이 휘몰아쳤다. 그 가공할 바람을 정면으로 받은 조인왕의 신형이 흔들리는 사이 김성철이 던진 암반이 떨어졌다. 쿵! 지면이 거칠게 흔들렸다. 하지만 지면보다 더욱 크게 흔들린 것은 대륙칠걸 윌리 길포드의 눈동자였다. ‘무슨 힘이냐? 저 것은... 예전부터 모든 걸 도외시하고 육체적 능력치에 모든 걸 쏟은 인간이란 걸 알고 있지만 지금 저 힘은... 대체 뭐란 말인가?!’ 순간 윌리 길포드는 예전에 가슴에 담아뒀던, 지금은 망각의 저편에 있던 단어 하나를 떠올렸다. ‘설마, 저 자는... 초인을 넘어 초월자의 경지에 오른 것인가?’ 초월자. 필멸자가 이를 수 있다는 최고의 경지. 대륙십삼걸 중에 초월자의 경지에 이른 자는 현재까지 3명으로 알려졌다. 대륙일걸. 황제 윌리엄 퀸튼 말버러 대륙이걸. 중재자 아퀴로아. 대륙오걸. 암살교단 단주 샤말 라지푸트. 대륙십걸이던 김성철은 강력한 전사였지만 단순하고 한계가 뚜렷하다는 평을 받았다. 특별한 능력도 기술도 없이 오직 맨몸만으로 싸움에 뛰어드는 그의 방식은 구식이었고 파훼당하기도 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김성철이 짧은 시간 보여준 무용은 예전에 보았던 그것과는 격이 달랐다. ‘설마. 저 자는 그 벽을 넘어선 것인가?’ 순간 붉은 피가 식도로부터 역류했다. 윌리 길포드는 붉은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내며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저벅. 김성철의 군홧발이 그의 앞을 지나갔다. “이기심이 너의 판단을 흐렸고 너를 안주라는 수렁 속에 몰아넣었다.” 쿵. 팔 가라즈의 머리 부분이 지면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잘 봐라. 윌리 길포드. 세계의 적이 어떻게 싸우는지.” 김성철은 망치를 든 채 앞으로 달려 나갔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조차 없는 윌리 길포드는 그저 머리를 지면에 댄 채 흙먼지를 들이 마시며 김성철의 싸움을 지켜보는 것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윽고 전투가 시작되자 윌리 길포드는 거대한 충격 속에 빠졌다. 김성철은 마라키아와 대등하게 싸웠다. 아니 오히려 김성철에겐 여유마저 느껴졌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낱 소환자이자 필멸자인 인간이 전설 그 자체인 존재와 호각으로 싸운다는 것은. ‘김성철. 분명히 나보다 약했는데. 언제 어디서 저렇게 커다란 힘을 손에 넣은 거지? 대체. 대체 뭘 위해서?’ 김성철의 말은 정확했다. 그가 대륙칠걸과 고대왕국의 섭정이라는 지위에 안주하는 사이, 세계의 적은 측량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해졌다. 아마도 지난 팔 년간. 오히려 죽음이 더 축복으로 여겨질만큼 치열하고 처절한 하루하루를 보내왔으리라. “하늘의 분노를 받아라!” 마라키아가 천정 곳곳에 마법진을 펼쳐 그 안에서 검은 먹구름의 일부를 소환, 무자비한 번개로 사방을 초토화시켰다. 일찍이 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마격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김성철의 대응은 지극히 단순했다. 그는 닥치는 대로 팔 가라즈를 휘둘러 무수한 파편을 만들어낸 뒤 눈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속도로 파편을 후려쳐 마라키아가 만들어낸 마법진을 모조리 박살내고 먹구름을 흩어버렸다. 마라키아도 마라키아지만 김성철의 응수는 윌리 길포드의 숨을 막히게 하기에 충분했다. ‘대체 저 자는.. 무엇을 위해서 저렇게까지...’ 그 순간, 윌리 길포드의 시야가 흐려졌다. 죽음이 찾아오고 있었다. 들리는 것은 싸움의 잡음뿐이지만 그마저도 흐려지고 있었다. 어둠과 고요 속에서 윌리 길포드는 치욕과 후회를 느끼며 죽어갔다. 마지막에 그가 들은 것은 마라키아의 노호성이었다. “벌레 같은 인간 따위가!” 전력전개다. 마라키아는 자신의 검은 깃털 속에 서린 저주 받아 마땅할 어둠의 술식을 부리 안에서 웅얼거리며 두 손과 두 날개를 힘차게 뻗었다. 그의 온 몸에서 검은 마기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 마기는 격류처럼 지하왕국으로 뻗어나갔고 그 물결이 지나가는 곳에 있는 모든 시체들을 일으켜 세웠다. 딱. 딱. 딱. 지하왕국의 벽면에 묻혀 있던 무수한 동굴 엘프의 해골들이 벽을 부수고 걸어 나왔다. 수천, 아니 수만에 이르는 죽음의 군세였다. “나의 종들아. 저 저열한 벌레를 해치워라!” 해골의 군세들은 마치 분류처럼 김성철에게 달려갔다. “…….” 김성철은 자신의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해골로 이루어진 해일이 자신에게 덮쳐오는 걸 지켜봤다. 마라키아는 천정과 가까운 곳에서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 하얀 백골의 물결은 김성철 주변을 에워쌌고 이윽고 그를 덮어버렸다. 그 죽은 자들은 단순히 자신의 백골을 산 자의 몸에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 산 자의 생명력을 뺏는 마법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비록 그 개개인의 힘은 미약할지언정, 수십,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생명력을 빨아댄다면? 아무리 강한 인간의 전사도 버텨내지 못하리라. 게다가 마라키아가 거느린 해골 무리는 만 마리 이상. 날개가 있다면 모를까 날개가 없는 자에게 죽은 자들의 물결은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외통수 그 자체다. 그런데 잠시 후. 묵직한 파공음이 해골 무리 사이에서 울려퍼졌다. 마라키아의 눈동자가 무언가 포착했다. 쒜엑- 발밑을 뒤덮은 하얀 물결 아래서 또 다른 작고 하얀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즉시 날개를 움직여 뒤로 물러났다. 픽! 픽! 날카로운 무언가가 그가 있던 자리를 지나 천정에 박혔다. 마라키아는 고개를 들어 그것을 응시했다. 백골의 파편이다. 쿵! 지면 아래서 또 다시 묵직한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이 녀석이 설마?!’ 마라키아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하며 아래로 급강하했다. 백골의 파편들이 산탄총처럼 주변에 박혔다. 쿵! 쿵! 쿵! 해골 무리들이 순차적으로 들썩였다. 보다 많은 파편이 마라키아를 향해 날아갔다. “끄윽!” 파편 하나가 마라키아의 상체에 박혔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짜릿한 고통이 느껴졌고 그리고 피가 흘러내렸다. 마라키아는 전율했다. 신에게 선택 받은 종족이라 불리는 나하크. 그 나하크 중에서도 가장 신성하고 강력한 존재라 불리는 자신에게 한낱 인간 따위가 상처를 내다니. 하지만 그 공격은 이제 시작일 따름이었다. 쿵! 쿵! 쿵! 쿵! 쿵! 백골 무리 안에서 연거푸 둔탁한 파공음이 울려퍼졌다. ‘대체 저 놈은 뭐지? 왜 저 죽음의 군단 안에서도 멀쩡하단 말인가?’ 한때 검은 화살을 비처럼 쏟아내던 그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반대쪽에서 날아오는 백골의 파편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마라키아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죽음의 군세를 풀고 방어막을 펼쳐야 하나. 아니, 그러면 내겐 공격할 수단이 하나 줄어든다. 죽음의 군세의 위력은 즉발적이지 않지만 지속적. 저 인간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나 죽음이 군세에서 무한대로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마라키아는 강력한 마법사이지만 또한 강력한 전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날개를 이용한 비행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그는 죽음의 군세를 유지한 채 지면을 내려 보았다. 쿵! 한 번의 파공음. 이윽고 백골의 파편이 산탄총처럼 날아온다. 마라키아는 그 모든 파편의 궤적을 눈으로 좇으며 날갯짓을 했다. 한 번의 날갯짓과 함께 그의 신형은 우아하고도 민첩하게 하늘을 갈랐고 모든 파편을 가볍게 피해냈다. 쿵! 쿵! 해골 속에 파묻힌 김성철은 계속해서 파편을 쏘아 보냈다. ‘발악을 하는군. 하지만 네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마라키아는 자신의 날개와 눈의 정확도를 신뢰하며 가볍게 공격을 피해냈다. 쿵! 쿵! 쿵!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마라키아는 화려한 비행으로 파편들을 모두 피해냈다. 그런데 세 번째 파편을 피하는 순간, 시간차를 두고 또 한 번의 공격이 튀어나왔다. 마라키아는 조소하며 급강하했다. ‘이딴 공격에 당할 성 싶으냐.’ 파편은 그의 머리 위를 허무하게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마라키아는 확신했다. 이 싸움의 승자는 자신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그 순간, 발밑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그가 날갯짓을 하며 급강하 하는 그 틈을 노려 무언가가 혜성처럼 백골들을 뚫고 튀어나온 것이다. 너무나 급작스런 공격에 마라키아는 반응할 수 없었다. ‘설마?!’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지에 대해선 어렴풋이 눈치챘다. 자신이 가볍게 피해냈다고 생각했던 공격이 사실은 자신을 외통수로 몰아넣기 위한 함정이었다는 사실을. 덥썩! 인간의 손이 조인왕의 날개를 붙잡았다. 마라키아는 급히 반전하며 인간을 떼어내려해지만 그보다 인간의 손이 더 빨랐다. 쫘아아악! 우악스런 손길이 그의 날개를 몸통으로부터 분리시켰다. 끔찍한 고통과 함께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나왔다. 마라키아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걸 느끼며 지면으로 추락했다.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이 일으켜 세운 죽음의 군세들이었다. 천하다는 말조차 아까울 정도로 하찮은 동굴 엘프들의 시체들이 그의 시야를 뒤덮는 순간 그의 의식은 끊어졌다. 쿵! 조인왕은 해골무더기 한 복판에 추락했다. 살아 움직이던 해골들은 왕이 힘을 잃자 일제히 무너져내렸다. 백골로 이루어진 대지 위에 김성철은 사뿐히 착지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옷 자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 그는 고개를 돌려 한 지점을 바라봤다. 그곳에 있던 윌리 길포드는 이름 없는 동굴엘프의 백골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대륙칠걸이자 5백년만의 그랜드 소드마스터라 칭송받던 사내의 허망한 최후였다. 김성철은 느릿한 걸음걸이로 백골 무더기 위에 쓰러진 마라키아를 향해 걸어갔다. “으으... 크으으으....” 날개가 하나 떨어져나간 마라키아는 고통에 온 몸을 떨며 신음하고 있었다. 부스럭. 김성철의 군홧발이 가까운 곳의 백골을 밟고 지나갔다. 마라키아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공포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그는 고통도 잊고 다급히 돌아누워 자신을 향해 말없이 다가오는 사내를 보랏빛 눈동자로 응시했다. ‘이럴 수가. 이건 말도 안 된다. 내 일족과 시대를 바쳐가며 얻은 힘이 고작 이런 열등한 인간 하나조차 이길 수 없단 말인가?’ 김성철은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조인왕은 치욕스럽게도 날개가 아닌 두 팔과 다리로 뒤로 기어 운명의 순간을 유예하려 했다. 순간 그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이놈은 오직 물리공격 일변도였어.’ 그이 몸 안엔 아직 무한에 가까운 마력이 있다. 문제는 그 가공할 마력을 발산해 줄 지지대가 될 육체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는 점. 지금 상태로는 자력 회복은 어렵다. 즉발적으로 쓸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포션이라던가 아니면 살아 있는 다른 생명이라던가. 뒤로 기어가던 마라키아의 눈앞에 문득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인간이다. 자신을 부활시켰다고 주장하는 여자 마법사. 비록 그녀를 통해 살아나긴 했지만 마라키아에게 인간은 한낱 먹이감에 지나지 않았다. ‘저게 좋겠군. 게다가 마법사니 훌륭한 영양분이 될 것이야.’ 자신의 백성마저 희생시킨 마라키아다. 그런 그가 자신의 동족도 아닌 다른 이종족에게 자비를 베풀 리가 만무하다. 그는 먹이감을 보는 맹수의 눈을 하고 있었다. “무... 무슨...?!” 그제야 미미 아즈라엘은 마라키아가 무슨 의도로 자신을 보는지 눈치 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날카로운 부리가 그녀의 살갗을 찢고 들어가 심장에 박혔다. 마라키아의 목젖이 꿈틀거리며 갓 죽인 인간의 더운 피를 빨아들였다. “…….”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 27. 메아리 (2) 김성철은 마라키아 앞에 섰다. 그리고 팔 가라즈를 어깨 위에 올리며 말했다. “아신급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신은 아닌 모양이군.” “…네가 원하는 게 뭐냐?” 부리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마라키아가 질린 얼굴로 말했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조인왕을 내려 보며 손을 내밀었다. “왕관.” 어마어마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고 전해지는 나하크 왕의 왕관. 그것이 김성철이 마라키아를 바로 찢어죽이지 않은 유일한 이유였다. 그런데 마라키아는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이었다. “나하크 왕은 왕관을 쓰지 않는다. 깃털의 색이 곧 고귀함의 표시니까. 그리고.” 생명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마라키아는 속으로 재빨리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그의 주변을 둘러싼 정사각형의 불가사의한 방어벽이 펼쳐졌다. 방벽 안에서 마라키아는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하하! 네 공격이 물리공격 일변도라는 건 이미 눈치 챘다. 내 무한한 마력이 버티는 한 너는 이 벽을 결코 파괴할 수 없을 것이다!” 김성철은 시험 삼아 팔 가라즈를 들어 방벽을 후려쳤다. 진동도 타격의 반향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의 망치는 마법의 방벽 앞에서 한 치도 더 나아가지 않았다. 김성철의 영혼각인 - 진실의 눈이 발동했고 그는 그 방어벽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모든 물리적인 공격을 무효화 하는 방어술식이다. 그것도 술자가 원하는 시간 동안 존속되는.’ 그야말로 완벽한 방어. 하지만 신이 아닌 이상 완벽한 주문은 만들어낼 수 없다. 마라키아 펼친 방어술식은 모든 물리공격을 자신이 원하는만큼 존속시키는 것을 대가로 방어술식에 치명적인 제약조건을 집어넣어야 했다. 김성철의 진실의 눈은 그 제약조건을 꿰뚫어봤다. ‘저 방벽은 모든 물리공격을 무효화시키지만 그 대가로 마법공격에 대한 피해를 몇 배나 입는 제약조건을 걸었군.’ 즉, 가장 하찮은 마법이라고 해도 저 방벽을 통과하는 순간 무시무시한 마법 공격으로 변한다. 그것이 마라키아가 자신의 술식에 건 제약조건. 제약이 클수록 그 주문이 가지는 힘은 강해진다. 마라키아도 같은 방법을 썼다. 1년 전이라면 같은 방법이 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성철은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고 지금까지 그 파훼법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 노력해왔다. 지금 그 노력의 결실을 시험해볼 때다. 김성철은 망치를 내려놓고 손가락을 뻗었다. “글레어.” 그의 손가락 끝에서 순간적으로 마법진이 번득였다. 그것을 본 마라키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이 놈. 마법도 쓸 수 있단 말인가?’ 다음 순간 김성철의 손가락 끝에서 빛줄기가 방벽 너머의 마라키아를 향해 폭사됐다. 빛줄기는 그대로 마라키아에게 꽂혔다. “크으으윽!” 마라키아는 하나 남은 날개로 몸을 덮어 글레어의 섬광으로부터 자신의 급소를 보호했다. 뼛골이 저릴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적의 마법 공격 피해를 증폭하는 방벽. 거기다 주변에 넘치는 풍부한 마나. 하나는 자신을 약화시키고 다른 하나는 적을 강화시킨다. 최악의 조건이다. 하지만 마라키아는 마라키아다. 멸세의 왕이라 불리는 마라키아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이 놈의 마력은 형편없군. 마법 위계도 3클래스에 불과한 하급 마법. 죽을 듯이 아프지만 진짜 죽을 정도는 아니다.’ 그의 생각대로 김성철의 마법 공격은 따끔하긴 했지만 생명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이유는 마라키아가 지닌 막강한 마법저항력 때문이다. 통상 마법사는 강한 마력만큼이나 강한 마법저항 또한 지닌다. 마라키아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마법저항은 초월자의 벽이라는 600 단위에 근접했다. 여간한 마법 따위는 정통으로 맞아도 흠집도 나지 않을 수준이다. 아마도 방벽 밖에서, 그리고 지하미궁이 아닌 지상에서 김성철의 마법을 맞았다면 마법이 닿기도 전에 그의 전신에 걸린 저항력이 마법을 무효화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방벽 안이니까, 그리고 마력으로 가득 찬 지하미궁 안이니까 이 정도의 피해를 입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피해로 마라키아는 죽지 않는다. 그는 구석에 너부러진 미미 아즈라엘과 호문클루스의 시체에 감사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김성철의 글레어가 태우고 간 자리에 암흑의 기운이 감돌더니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저 두 마리 짐승으로 응급처치를 하지 않았다면 진짜로 위험했을 지도 모른다.’ 방벽 밖의 김성철이 연이어 글레어를 퍼부었다. 그때마다 마라키아는 격렬한 고통을 느꼈지만 그의 상처는 암흑의 기운으로 그때그때 바로 치유됐다. “…….” 김성철은 성가심을 느꼈다. ‘이 녀석. 마법지문을 복구했군.’ 날개를 뜯어낼 때 김성철은 마라키아의 마법체계를 떠받드는 기둥 한 축이 무너진 걸 느꼈었다. 그걸 미미 아즈라엘과 호문클루스를 뜯어먹음으로서 복구한 것이다. “왜 저 녀석이 저 불쌍한 호문클루스와 못된 여자를 먹는 걸 그냥 지켜만 본 거지?” 어느새 주머니 바깥으로 삐져나온 베르텔기아가 퉁명스레 말했다. 김성철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가능성을 보고 싶었다.” “가능성?” “…….” 김성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방벽을 펼친 마라키아 주변을 돌며 글레어를 여러 차례 시전 했다. 마라키아는 그때마다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잃어버렸던 자신감을 되찾았고 급기에 김성철에게 조롱의 말을 던지기에 이르렀다. “네 육체는 경탄할 수준이지만 마력은 형편없다. 아무리 이곳에 풍부한 마나가 있다고 한들, 네 녀석의 한심한 마법적 소양으로 언제까지 마법을 난사할 수 있을까?” 일리 있는 지적이다. 김성철도 그 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답도 알고 있었다. 그는 영혼창고에서 침낭을 꺼내 백골 위에 깔았다. 침낭이 뭔지 모르는 마라키아는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김성철이 침낭 위에 편하게 드러눕는 걸 보고 그 의도를 눈치 챘다. ‘설마! 이 인간...’ 그의 불길한 짐작은 곧 현실이 되었다. 김성철은 돌아누우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시간은 많으니까. 좀 쉬고 또 두들기지.” 빈말이 아니다. 마라키아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저 무식하게 힘만 쌘 놈은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얻기 전까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해서 물었다. “내게 왕관은 없다. 하지만 왕관 이외에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거래를 하길 원한다. 내게 뭘 원하는가? 인간.” 돌아 누워있던 김성철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무심한 눈빛으로 마라키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마법의 힘.” “마법의 힘?” “그래. 딱 너처럼 구는 치졸한 놈이 하나 있지. 수준도 아마 너와 비슷할 거야. 난 그 녀석을 마법으로 처치하려고 한다.” “설마 내 마력을 달라고 하는 것인가?” “뭐든 좋다. 마력이든 유물이든. 내가 납득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받아들이마.” 김성철은 그 말을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마라키아는 부리를 다문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납득할 수 있는 것. 그 말의 무게가 마라키아를 짓눌렀다. 눈앞의 인간은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존재. 그런 자를 납득시키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대가가 필요할 것인가. 생각을 거듭하던 마라키아는 숨이 턱하고 막힐 정도의 충격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설마. 이 인간. 내 마력 그 자체를 원하는 것인가.’ 즉, 능력치의 전이. 저 사내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눈에 그린 듯 떠오른 것이다. 이계에서 특정 인물이 다른 인물에게 자신의 능력치를 넘겨주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퀘스트를 통한 것이다. 하지만 퀘스트라는 약속 자체가 신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기에 필연적으로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고 줄 수 있는 능력치 또한 한정적이다. 퀘스트의 상위 존재인 위업을 만들어 내거나 아니면 퀘스트를 매개로 도박 형식으로 능력치를 거는 방법을 통해 상한치를 올릴 순 있겠지만 김성철의 성엔 차지 않을 것이다. 납득 가능한 넉넉한 능력치를 넘겨주려면 또 하나의 방법을 써야 한다. 혼의 망해(亡骸)를 이용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 방법엔 필수적인 전제조건이 있다. 능력치를 넘겨주고자 하는 자의 죽음이다. 혼의 망해는 능력치를 계승하고자 하는 자의 강한 의지와 염원, 그리고 죽음으로서 완성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계에서 한 인물이 후대에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으로 취급된다. 설령 그 혼의 망해로 넘겨받을 수 있는 능력치가 망자가 생전에 지녔던 힘의 십분지일도 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초인을 넘어선 강자들의 세계에서 능력치 단 하나를 올리는 것조차 힘든 일임을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혜택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전술했듯이 그 방법은 계승자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 마라키아로선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다. ‘내 자식도 아닌 너 같은 하등생물에게 혼의 망해를 넘겨줄 거 같으냐.’ 아니, 자식이라고 해도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마라키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방벽 안에서 마음을 다잡았다. ‘일단 이 안에서 상처를 치료한다. 날개가 재생될 때까지. 날개가 재생되면 어떻게든 길이 보일 것이다. 인간. 시간은 너의 편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지.’ 그때 그의 시야 가장저리에 어두운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조인의 두상을 지닌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녹색 괴물. 심연의 나락이다. ‘저 저주받은 괴물이 왜 내 왕국에 있는 거지? 그것도 나하크의 형상을 하다니. 이상한 일이군. 우리 왕국은 고대신과는 아무런 접점도 없는데.’ 심연의 나락은 지면을 뒤덮은 백골을 파헤쳐 시체 한 구를 끌어냈다. 윌리 길포드의 시신이다. 심연의 나락은 윌리 길포드의 시신을 들어 올리더니 입을 쩍 벌려 자신의 덩치만한 시신을 삼켰다. 눈을 뜨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광경에 마라키아는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잠깐의 시간이 흘러간 후 김성철은 침낭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휴식을 어느 정도 취한 김성철은 예고 없이 글레어를 시전 했다. 마라키아는 꿋꿋하게 김성철의 공격에 버텨냈고 필사적으로 자신을 지켰다. 짧은 공방이 이어진 후 김성철은 이대로는 진척이 없음을 깨달았다. ‘데커드라도 데리고 와야 하나. 아니, 그는 너무 약하다. 마법을 쓰기도 전에 정신공격류에 무너질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늘 데리고 다니는 네모난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베르텔기아.” “응? 이 베르텔기아에게 무슨 용무야? 무시무시한 아저씨.” “지금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방벽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마라키아는 고개를 들어 김성철 뒤를 팔락거리며 날고 있는 베르텔기아를 응시했다. ‘저건 리빙 북인가. 그런데 잠깐. 저 녀석 보아하니 평범한 리빙 북은 아닌 모양이군. 미약하지만 생명과 영혼의 기운이 느껴진다.’ 마라키아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러는 동안 베르텔기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망치로 마구 두들기는 거? 저 새대가리 의 마력도 무한은 아니니까 마구 두들기다 보면 언젠가는 깨질 거 같은데.” “잠깐!” 마라키아가 베르텔기아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런 방법이 내게 통할 거 같냐? 내 마력은 무한이다.” 이에 베르텔기아는 그런 마라키아가 한심하다는 듯 김성철 주위를 힘없이 날며 말했다. “이 아저씨 힘도 무한이네요.” “그거 좋군.” 김성철이 팔 가라즈를 다시 집어 올렸다. 마라키아의 눈동자에 경악이 떠올랐다. ‘이런 빌어먹을.’ 베르텔기아의 말은 정론이었다. 그의 마력이 말로는 무한대라고 하나 어디까지나 동굴 엘프 수십 만과 일족의 목숨을 대가로 얻은 것. 결국 끝이 있다. 그런데 저 남자는 어떠한가?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을 손에 넣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망치질 한 방 한 방엔 신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놈 상대로 무한대 대 무한대의 싸움을 한다면? 누가 이길지는 누구보다 마라키아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저벅. 김성철이 망치를 가지고 방벽 앞에 섰다. 마라키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런데 방벽 바로 앞에서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내려놓았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다른 방법을 쓰는 게 좋겠어.” 모처럼의 기회다. 김성철은 자신이 힘이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 저 조인왕을 굴복시키고 싶었다. 마라키아는 혼신의 힘을 다해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그러나 아직 그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망치를 내려놓은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베르텔기아. 너의 연금술 지식으로 내 마법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왜 없겠어?” 베르텔기아가 힘차게 하늘을 회전하며 대답했다. 마라키아는 저 날아다니며 조잘거리는 책을 찢어버리고 싶은 간절한 욕망을 느꼈다. 그의 소망과는 별개로 베르텔기아의 입은 쉬지 않았다. “마시는 것과 뿌리는 게 있는데 어떤 걸로 할래?” “도핑이라. 개인적으로 뭔가 마셔서 일시적으로 강해지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난 약하지 않거든.” “그럼 뿌리는 건 어때?” “적의 마력저항을 약화시키는 종류의 아이템인가?” “아니. 마법의 위력을 증폭시키는 가루야.” “설명만 듣고 보면 좋아 보이지 않는데.” “무슨 실례되는 소리! 당신이 좋아하는 그 칠영웅도 아빠 가게에서 항상 찾을 정도로 인기 있는 녀석인데!” “호오?” 김성철의 눈이 번득였다. 마음에 안 드는 구차한 방식이지만 칠영웅이 즐겨 썼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김성철은 뭔가 일이 풀리는 걸 느끼며 살짝 달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재료는?” 연금술의 결정적인 문제 중 하나다. 아무리 잘난 연금술사라도 재료가 없다면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된다. 그런데 다행히 이번엔 그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머리 위를 날며 책장을 크게 펄럭였다. “모든 재료가 있는 건 아니지만 필수적인 녀석은 여기 지천에 널려 있어. 응. 바로 당신 머리 위에 반짝이는 것들.” 김성철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그의 머리 위, 지하왕국의 천정엔 녹색 빛을 발하는 빛나는 보석이 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박혀 있었다. ======================================= 27. 메아리 (3) 스스로 만들어낸 감옥 안에서 마라키아는 김성철이 살아 움직이는 책과 함께 뭔가를 만드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먼저 김성철이 꺼낸 것은 에크하르트의 휴대용 연금가마였다. 평소엔 주머니 안에 들어갈 정도로 앙증맞은 크기지만 그 안에 숨겨진 능력을 사용하면 성인 세 명이서 간신히 옮길만한 커다란 가마로 변한다. 영혼 창고를 참고해 자신만의 논리로 구현한 에크하르트의 천재적인 발명품 중 하나다. 그 연금 가마 안에 김성철은 천정에서 캐낸 녹색 발광석을 손으로 잡고 으스러뜨린 가루를 집어넣었다. 평범한 연금술사라면 유발이라던지 분쇄기 등의 도구가 필요했겠지만 김성철에겐 별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자, 발광석을 마구마구 가루로 내는 거예요!” 베르텔기아가 김성철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왜 호문클루스 흉내를 내는 거지?” 호문클루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노려보며 퉁명스레 말했다. 그런데 베르텔기아는 아직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호문클루스가 아닌 거예요! 요정 흉내를 낸 거예요!” 계속해서 호문클루스의 흉내를 낸다. 김성철은 또 다른 발광석을 아귀힘으로 으스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자꾸 그러면 영혼 창고 안에 집어넣겠다.” 담담한 목소리지만 그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베르텔기아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아.. 알겠는 거예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연금 가마 안엔 제법 많은 양의 녹색 발광석 가루가 쌓였다. “자, 이젠 뭘 하면 되는 거지?” “흠흠. 발광석은 그 자체로 강한 마나를 품고 있는 녀석이야. 즉, 그 풍부한 마나로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이라는 말씀!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어! 그게 뭔지 알 수 있겠어?” “…….” 김성철은 결론만이라고 말하려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베르텔기아의 질문에 대해 잠시 생각을 했다. “발광석의 재료엔 마나를 머금는 성질이 있는 모양이군.” “다른 하나는?” “음..” “왜 스스로 빛을 발할까?” “마나를 머금을 뿐만 아니라 그 축적된 마나를 어떤 형태로 발산하는 성질도 있다는 것?” “정확해.” 베르텔기아는 휘파람을 불며 김성철 주위를 한 바퀴 비행했다. “뭐, 내가 힌트를 주긴 했지만.” 김성철은 발광석 가루를 한웅큼 손으로 집어 냄새를 맡았다. 연금술사의 스킬인 재료 감정을 사용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가 가루로 만든 발광석은 재료가 아니라 이미 어떤 재료를 가공해 만든 연금아이템이다. 따라서 냄새를 맡음으로서 실시하는 재료감정의 대상이 아니다. 김성철은 멀쩡한 발광석 하나를 집어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자 곧 녹색 발광석에 관한 정보가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 발광석(녹) > 레벨 : 4 등급 : B 속성 : 지(地) 분류 : 귀중품 효과 : 스스로 녹색 빛을 내는 보석. “4레벨 연금아이템이군.” 제법 고레벨의 아이템이다. 5레벨 연금아이템만 만들어도 교수님 소리를 듣는 지금 세상에서는 말이다. “응. 맞아. 4레벨 연금 아이템이지. 재료도 꽤나 귀하고 만들기도 까다로운데 저런 걸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이 만든 거 보면 나하크 족의 전설은 괜히 전해 내려오는 건 아닌가봐.” 그때 연금 가마 저편에서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벽 안의 마라키아다. “우리 나하크 족은 필멸자 중에서 가장 고귀한 종족. 이 지하왕국은 우리가 만들어 낸 수많은 경이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 궁전의 장식품 중 하나인 발광석 따위를 보고 놀라다니. 가소로울 지경이군.” 영락없이 새장 안에 갇힌 새 꼴이지만 마라키아의 자부심은 꺾이지 않았다. 비록 자신은 패했지만 나하크 족은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 안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베르텔기아는 그런 마라키아를 쳐다보며 퉁명스레 말했다. “그러면 뭐해? 지금은 완전히 망했는데.” “망했다고? 나하크 족이? 하하하! 웃기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군. 책의 모습을 한 불쌍한 인간아.” “누가 불쌍하다는 거야? 이 새대가리가!” “내 눈엔 다 보인단다. 눈으로 보이는 모습 뒤에 감춰진 가련하고 비참한 모습이.” “그래? 뭐가 보이는데?” 베르텔기아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마라키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베르텔기아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보랏빛으로 물든 그의 동공에 대단히 복잡하고 기이한 마법진이 교차했고 이윽고 하나의 마법진이 그의 동공 바로 위에 자리 잡았다. 모든 것을 궤 뚫어 보는 전지의 눈이다. ‘어디 보자.’ 그는 먼저 베르텔기아를 응시했다. 커다란 책이라는 모습 너머 희미한 형체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작고 연약한 팔다리를 지닌 인간의 소녀였다. 그 소녀는 두 눈을 감은 채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저게 저 책의 본 모습인 모양이군. 현실과 유계 사이의 틈 속에 본체를 숨기고 거짓된 모습을 내세워 세상과 소통하려드는군. 인간치고는 제법 창의적이고 복잡한 마법술식이야. 칭찬해주지.’ 다음으로 마라카이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김성철이었다. 그런데 전지의 눈으로 김성철을 쳐다보는 순간, 마라키아의 부리가 떡 벌어졌다. ‘뭐... 뭐야. 저건...?!’ 온 몸의 힘이 순간적으로 풀렸다. 심장이 일순 멈출 정도의 충격 또한 느껴졌다. 마라키아는 즉시 고개를 돌렸다. 왜냐하면 저 사내의 몸 안엔 필멸자가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장의 떨림은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거기 인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마라키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걱으로 가마 안을 젓던 김성철은 눈동자를 돌려 그를 노려봤다. 눈이 마주치자 마라키아는 작심 한 듯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뭘 꾸미는 거지?”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대체 뭘 꾸미기에 그 육신 안에 그토록 끔찍한 짐을 지고 있단 말이냐?” “…….” 김성철은 침묵했다. 마라키아는 눈을 번득이며 추궁하듯 물었다. “너, 신 앞에 선 적이 있구나?” 이에 김성철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마라키아는 힘없이 웃으며 하나 남은 날개를 움츠렸다 폈다. 흘러나온 검은 깃털 하나가 천천히 바닥에 내려앉을 때 마라키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야 할 말은 없지. 내 비록 멸세의 왕을 칭하지만 신 앞에 설 자격까진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나도 한 가지 알고 있는 게 있지.” 마라키아는 음산한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고는 말을 이었다. “신 앞에 선 자는 모두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 “필멸자가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본 죄,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을 들은 죄, 그리고 소통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과 소통을 하려든 죄. 그 죄에 대한 신벌은 죽음보다 가혹할 것이며 그리고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오랜 가르침을 말이야.” 마라키아는 말을 마친 뒤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그가 웃는 동안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의 지시를 받아 묵묵히 가마를 저었고 이윽고 가마 안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 연성 성공! ] 김성철은 가마 안에서 생성된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어둠을 머금은 것처럼 시커먼 수정이었다. 광택 하나 없는 그 수정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쇳덩이처럼 묵직했다. 베르텔기아가 완성물에 가까이 다가가 관찰을 시작했다. 곧 평가가 나왔다. “흠흠. 제법이네. 간단한 요령을 알려줬는데도 4레벨 아이템을 가볍게 만들어 내다니.” 김성철은 손안의 검은 수정에 대한 감정을 즉시 실시했다. < 흑수정 > 레벨 : 4 등급 : C 속성 : 화(火) 분류 : 마법 도구 효과 : 가루로 만들어 살포하면 그 주변 영역에 대한 마법 피해가 증대된다. “이런 거군.” 김성철이 흑수정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런 거지. 연금술은 어떤 것을 창조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어떤 물건을 다른 것으로 변환시킬 수도 있거든.” 김성철은 손 안의 흑수정을 들여 보았다. 환하게 반짝이던 발광석과는 달리 주변의 모든 빛을 흡수할 것 같은 무광택의 검은 표면을 지니고 있다. 간단한 연금 과정만을 밟았을 뿐인데 물건의 성질이 극에서 극으로 변한 것이다. 김성철은 연금 과정에서 상당한 마나가 소비된 것을 느꼈지만 내친 김에 한 번 보다 강력해진 자신의 마법을 시험해볼 기회라 여겼다. “그럼. 마라키아. 다시 한 번 가마. 이번은 다를 거다.” “어디 해봐라. 신 앞에 선 자여.” 방벽 안의 마라키아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빠직. 손안의 흑수정이 으스러지며 파편으로 화했다. 김성철은 그 파편을 머금은 손을 마라키아를 향해 휘둘렀다. 손안의 파편이 가루처럼 휘날리며 마라키아 주변 영역에 살포됐다. “웃기지도 않군. 그깟 가루 하나 뿌린다고 결과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나?” 마라키아는 조롱조로 말했다. 그러자 김성철 뒤에 있던 베르텔기아가 가볍게 몸을 흔들며 새침하게 중얼거렸다. “이번 건 많이 따끔할 걸?” 흩날리는 검은 가루 속에서 김성철이 손가락이 마라키아를 향해 뻗었다. ‘글레어.’ 김성철은 속으로 마법의 시동어를 영창했다. 다음 순간, 그의 손가락 끝에서 하늘이 빛이 뿜어져 나와 마라키아를 향해 날아갔다. 여기까지는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빛줄기가 공기 중에 떠도는 검은 가루와 반응하자 변화가 일어났다. 가느다란 그의 빛줄기가 가루 사이를 투과하며 점점 굵고 맹렬하게 변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찰나의 순간 동안 이루어진 변화는 마라키아의 눈에도 고스란히 들어왔다. ‘이건, 뭐야? 마법이 또 증폭됐다고?!’ 빛줄기가 방벽을 뚫고 마라키아에 꽂혔다. “끄으으윽!” 마라키아는 하나 남은 날개로 자신을 가리며 몸을 보호했다. 빛줄기는 날개를 뚫고 그의 몸뚱이를 강타했다. 어마어마한 충격과 고통이 몸에 전달됐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마라키아는 냉정하게 상대방의 주는 피해량과 자신의 회복량을 계량해냈다. ‘이 정도는 버틸 수 있다. 버틸 수 있다!’ 한편 김성철도 마라키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흑수정을 통해 마법의 위력을 증대시키긴 했지만 마라키아를 무릎 꿇리기엔 부족하다. 설령 그게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할 지라도 벽을 넘는 것과 넘지 못한다는 것 사이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존재한다.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위력을 보충해줄 무언가를 말이다. 하지만 당장 마력을 올릴 방법은 달리 존재하지 않는다. 빛줄기가 가늘어져 간다. 글레어의 시전이 끝나가고 있다는 증거다. 그 순간에도 마라키아의 몸에 머금은 암흑의 기운은 자신의 상처를 빠르게 회복하고 있다. 또 다른 글레어를 시전한다고 해도 마라키아를 굴복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진한 실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나로서는 이게 한계인가?’ 그때였다. 김성철의 마력이 급격하게 빠져나간 것은. 그와 동시에 김성철 앞에 빛나는 문자가 떠올랐다. [ 첫 번째 메아리. ] 그 문자가 떠오른 직후 꺼져가던 빛줄기를 쏘아내던 김성철의 손가락에서 또 다른, 보다 강하고 활기찬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영창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마법 스스로가 의지를 가진 것처럼 발현된 것이다. 그걸 본 순간 김성철은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자신의 클래스를 기억해냈다. 메아리술사. 전설의 칠영웅 중 하나. 베스티아레의 메아리가 긴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다시 한 번 김성철을 통해 재현된 것이다. ‘이것이 메아리인가...?!’ 가늘어져 가는 빛줄기를 제치고 뿜어져 나온 새로운 빛줄기는 마라키아의 회복되어 가고 있는 날개를 연거푸 강타했다. “이건 뭐야?!” 마라키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시간차를 둔 공격이라면 모를까, 하나의 주문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공격이라니. 이건 상정 범위 밖이다. 설상가상으로 김성철은 다시 한 번 속으로 주문을 영창했다. ‘글레어.’ 이미 빛줄기를 쏘아내고 있는 손가락에서 또 다른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온 몸의 마력이 바닥나는 진한 갈증을 느꼈지만 김성철은 쉬지 않았다. 꺼져가는 빛줄기, 그 빛줄기 속에서 새롭게 나타난 빛줄기, 그리고 그것과는 무관하게 새롭게 나타난 빛줄기. 도합 세 개의 글레어가 동시에 조인왕의 몸을 공격하자 멸세의 왕이라 불리던 존재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 그만! 그만!!!! 내가 졌다! 그만!!!” 다급한 항복 선언이 묘실 위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방벽이 무너졌다. 김성철은 무방비 상태로 무릎 꿇은 나하크의 왕 앞에 우뚝 섰다. “자, 그럼 내가 원하는 걸 받겠다.” ======================================= 28. 왕의 부탁 (1) “대체 내게 뭘 원하냐? 혼의 망해는 넘겨줄 수 없다. 그걸 넘겨줄 바에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마라키아는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무너진 자세에서, 가늘어진 목소리에서 황폐한 그의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런 마라키아를 내려 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혼의 망해를 달라고 한 적은 없다. 준다면 감사하게 받겠지만 내가 원하는 건 내가 납득할만한 마력과 직관력의 상승. 그 둘 뿐이다.” “그걸 줄 수가 없어서 이러는 거 아닌가? 너 정도 되는 인간이 능력치의 전이라는 게 얼마나 어렵고 비효율적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정녕 왕관은 없단 말인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힘을 준다는.” 이미 김성철은 조인왕의 왕관이 미미 아즈라엘이 꾸며낸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한 번 말해보았다. 헛된 기대는 언제나 부정되는 법이다. 마라키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없다고 말했다. 거짓이 아니다.” “그렇군.” 허망한 결과다. 각고의 노력을 통해 마라키아를 굴복시키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니. 하지만 상대방이 아무것도 주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를 죽일 순 있어도 그가 지닌 힘과 성취를 뺏을 순 없는 것이니. “내가 줄 수 있는 건 없지만 네가 원한다면 너에게 힘을 줄 의식을 치러줄 수는 있다.” 석상처럼 굳은 김성철의 옆모습을 보며 마라키아가 말했다. 김성철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돌아갔다. “어떤 의식을 말하는 거지?” 이에 마라키아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미 보지 않았나? 이 지하왕국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제물을 바치라는 것인가?” 마라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지하왕국엔 아직 다수의 동굴 엘프들이 있는 걸로 보인다. 그들의 생명을 신을 위한 제물로 바친다면 네가 원하는 성취는 충분히 얻을 수 있지 않을까?” “…….”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지? 왜 거절하는 건가?” 마라키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제의를 했는데 그걸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한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김성철은 곧 그 이유를 말했다. “너처럼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강해지고 싶지 않다.” “현명한 줄 알았더니 어리석은 구석도 있었군. 자신의 종족도 아니고 다른 하등한 종족을 제물로 바치는 게 뭐가 그렇게 거슬리는 거지?” 그의 물음에 김성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마라키아와 자신 사이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생각의 차이가 자리 잡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성철이 침묵하자 대신 베르텔기아가 나섰다. “그 잘난 당신 부족도 당신 때문에 멸망했잖아.” “뭐라고? 우리 나하크가 멸망했다고? 내가 살아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아직 당신은 당신 종족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모르는 모양이네.” 베르텔기아와 마라키아가 무의미한 언쟁을 하는 동안 김성철은 한 걸음 물러서 생각을 했다. ‘결국 수련만이 답인가. 적어도 이 녀석을 이용하면 높은 성취를... 아니 잠깐.’ 김성철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눈동자는 마라키아를 향했다. 검은 깃털을 지닌 나하크의 왕은 비록 김성철에겐 못 미치지만 대단히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존재다. 특히 마법의 힘은 마왕보다 뛰어난 게 확실하다. ‘이 녀석을 이용한다면, 굳이 힘들게 마법을 배우지 않아도 마왕 해서니우스 맥스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서니우스 맥스를 눈앞에서 놓친 이후 김성철은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놓고 궁리했었다. 그중엔 마법사를 데리고 가서 결정타를 먹이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두 가지 이유에 의해 좌절됐다. 하나는 그를 도울 마법사가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법사를 구한다고 해도 마왕의 궁전까지 안전하게 호위할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마계엔 수천, 수만의 악마들이 우글거린다. 악마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김성철이 만약 마법사, 가령 예를 들어 알투지우스 제로 같은 마법사를 데리고 간다면 악마들은 알투지우스만을 집요하게 노릴 것이다. 정신 공격, 기습, 지각 변동, 광역 마법 공격, 그리고 대군을 동원한 인해전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서 말이다. 하지만 마라키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라키아 정도의 실력자라면 그 악마들의 위협으로부터 능히 제 한 몸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고 혼자만의 힘으로 영체화 된 해서니우스 맥스를 멸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김성철은 가슴이 가볍게 뛰는 걸 느꼈다. ‘이 방법이 가장 확실하다.’ 김성철은 즉시 마라키아 앞으로 걸어갔다. “거래를 하자.” 베르텔기아와 입씨름을 하던 마라키아는 부리를 다물고 김성철을 올려다 보았다. “거래?” “나와 함께 마계로 가서 마왕을 처치하자.” “마왕이라. 불을 먹는 자 퓨르스트 말인가?” “그 악마는 없어진지 오래다. 내가 말하는 악마는 해서니우스 맥스라는 놈이지.” “해서니우스 맥스? 못 들어본 악마군. 그래. 그 악마는 강한가?” “너보다 약하다.” “그런데 왜 날 데리고 가려는 것이지?” 이에 김성철은 자신과 해서니우스 맥스와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하게 말했다. 이야기를 들은 마라키아는 큰 소리로 웃었다. 웃음소리가 잦아든 후 마라키아는 보랏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내 마법으로 그 야비한 악마를 처치해 달라 이거군. 물론 대가는 있겠지?” “해서니우스 맥스를 처치하는데 협력한다면 너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마.” “생명과 자유라.” 마라키아는 조소했다. 그러자 김성철의 눈이 한 차례 서늘한 빛을 발했다. “나는 지금 널 여기서 죽일 수도 있다.” 작고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엔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조소하던 마라키아는 진짜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실제로 김성철이란 사내는 자신을 가볍게 죽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녔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마라키아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대체 왜 마왕을 죽이려고 하는 거지? 개인적인 원한관계라도 있는 것인가? 아니면 네가 다스리는 왕국의 안위를 위해서인가?” 마라키아의 물음에 김성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재앙을 끝내기 위해서다.” 마라키아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날 패배시킨 자가 세상의 구원자를 자처하는 존재인지는 몰랐군.” “대답은?” 김성철의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졌다. 마라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널 돕겠다. 인간. 나하크 왕의 이름으로 약속하지.” 마라키아는 자신의 검은 깃털 하나를 뽑더니 김성철에게 내밀었다. “내 약속의 증표다. 위대한 나하크 왕이 하사품이니 고맙게 받도록.” “그런 건 필요 없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들여 보였다. 그걸 본 마라키아는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럼 바로 처리하지.” 김성철은 민첩한 몸놀림으로 묘실을 나섰다. 베르텔기아가 책장을 펄럭이며 그를 따랐고 마라키아도 하나 남은 날개를 오무린 채 두 발로 걸어 김성철의 뒤를 따랐다. 묘실에 홀로 남겨진 심연의 나락은 일행들이 사라진 방향을 말없이 응시하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지하 2층의 입구엔 어느새 수많은 동굴 엘프들이 깔려 있었다. 목적은 알 수 없지만 성가신 존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김성철은 마편 카산드라를 영혼 창고에서 꺼냈다. 그런데 그걸 본 마라키아가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더니 부리를 벌리고 맑고 청량한 소리를 냈다. 마치 솔개의 울음처럼 길게 이어지면서도 청아한그 소리가 던전 안에 울려 퍼지자 지천으로 널려 있던 동굴 엘프들은 동일한 반응을 보였다. 공포였다. “키... 키이이이이!!” 김성철의 마편 카산드라의 소리엔 그냥 도망치던 동굴 엘프들은 마라키아의 울음소리를 듣자 발광을 일으키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머리로 생각한 공포가 아니다. 핏줄에 각인 된 공포심이 반응한 것이다. 그들의 상전이자 포식자인 비정한 조인의 진정한 울음소리에 말이다. “어떤가?” 공황 상태에 빠진 동굴 엘프들이 왕겨처럼 흩어지는 걸 보며 마라키아가 제법 즐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쁘지 않군.” 필요가 없어진 마편 카산드라를 다시 영혼 창고에 넣으며 김성철은 앞으로 걸어나갔다. 길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 일행은 지하 왕국의 출구에 이르렀다. 도르래 장치와 연결된 승강기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앞에 달갑지 않은 또 다른 손님이 김성철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연의 나락이다. “…….” 그 기이한 존재는 마치 김성철 일행에게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통로 중앙에 서 있었다. “왜 저런 게 내 왕국에 있는 거지?” 마라키아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팔 가라즈를 든 김성철이 심연의 나락 앞으로 걸어갔다. “꺼져라. 망각의 괴물아.” 껄끄러운 상대긴 하지만 앞을 가로막는다면 김성철로서는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심연의 나락은 비틀비틀 역겨운 걸음걸이로 김성철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 전과 마찬가지로 물러서는 것처럼 보였지만 심연의 나락은 한 인물의 앞에 멈춰섰다. 마라키아의 앞이다. “어이. 이 괴물. 어떻게 못 해?” 마라키아가 뒷걸음질 치며 김성철을 불렀다. 김성철이 팔 가라즈를 들고 다가가는 그 순간, 마라키아는 보았다. 흘러내리는 심연의 나락의 부리가 서서히 열리는 것을. “가... 안... 안 돼....” 말이다. 심연의 나락이 말을 하고 있다. 마라키아도 망치를 들고 다가오던 김성철도 예상치 못한 사태에 그 자리에 멈춰섰다. 모두가 경직한 가운데 조인의 두상을 한 심연의 나락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그렇기에 더욱 섬뜩한 소리를 이어서 말했다. “나... 나... 가면... 안 돼....” 다음 순간 팔 가라즈가 심연의 나락의 머리를 강타했다. 힘없는 파공음과 함께 심연의 나락은 먼 곳으로 처박혀 형체도 없이 일그러지더니 이내 서서히 원래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대체 저건 뭐야?” 마라키아가 화를 내며 말했다. 김성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심연의 나락이 말을 하다니. 믿을 수 없군. 분명 고대신의 종복이 되어 생명과 육신, 혼마저 빼앗겼을 텐데 아직까지 의식이 남아 있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알려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승강기에 올라탔다. 마라키아도 뒤 이어 승강기 위에 올라탔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군.” 방금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려는 듯 그는 제법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이윽고 도르래 장치가 가동하며 승강기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우물처럼 파인 구멍을 거슬러 올라가자 점점 그 위에 서린 밝은 태양빛이 눈을 부시게 했다. 그런데 출구 직전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퍼졌다. “끄아아아아악!” 마라키아의 것이다. 그는 끔찍한 고통을 호소하며 바닥에 무릎 꿇었고 이내 황소의 울음소리 같은 처참한 비명을 내질렀다. 김성철은 즉시 도르래의 가동을 멈추고 그의 상세를 살폈다. “무슨 일인가?” 다음 순간 김성철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반점이다. 마라키아의 육신에 핀 죽음의 꽃과 같은 검은 반점이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이건... 절멸의 저주 아닌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장면이 불현듯 그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끄아아아악!!!” 마라키아는 격통을 호소하며 몸부림쳤다. 잘린 날개 부분에선 썩은 진물이 샘물처럼 솟아나왔고 끔찍한 악취를 풍겼다. 김성철은 즉시 승강기를 하강시켰다. 지하왕국으로 돌아가자 다행히 마라키아의 병세는 안정됐다. 온 몸에 퍼진 검은 반점이 사라졌고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진물도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마라키아에겐 악몽 같던 고통의 여운이 남아 있는 듯 그는 두 손과 날개를 오므린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김성철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절멸의 저주에 걸렸었나?” 그의 질문에 마라키아는 가볍게 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신이 내린 재앙은 우리 종족에게도 예고 없이 닥쳐왔다. 그것이 하늘이 날던 우리 나하크 족이 두더쥐처럼 땅을 파고 지하로 숨어들어간 이유였지.” “보기보다 어린 모양이네?” 베르텔기아가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마라키아에게 말을 걸었다. 마라키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1년. 단 1년 차이로 절멸의 저주에 걸렸다. 형들은 무사했지만 나와 내 동생들은 죽을 위기에 놓였지. 하지만 부왕께서는 검은 깃털을 가지고 태어난 나에게 왕위를 물려주시길 원했다. 그래서 의식을 치렀고 현재의 내가 있는 것이지. 하지만....” 마라키아의 보랏빛 눈동자에 짙은 근심이 드리워졌다. “어째서 그 저주가 남아 있는 것이지?” “…신은 가혹하니까.” 김성철이 대답했다. 마라키아는 코웃음을 쳤지만 그의 몸에 저주가 남은 건 사실이다. “아무래도 난 곧 죽을 운명인 모양이군.” 그의 몸에 난 반점은 희미해졌지만 사라지진 않았다. 마라키아는 쓸쓸히 웃으며 하늘을 응시했다. “수천 년의 세월을 건너왔건만 내 운명은 달라진 게 하나 없군.” 이윽고 그의 눈동자엔 무시무시한 분노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죽기 전에 실컷 날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 “인간들을 불태우고 그들의 왕국을 멸하는 거지. 혹시 알아? 그렇게 하면 그들이 나를, 우리 나하크를 기억해줄지?” 아마 김성철이 옆에 없었다면 그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옆엔 김성철이 있다. “그렇게 두지는 않겠다.” 그는 마라키아를 노려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라키아는 크게 웃었다. “어차피 나는 죽을 목숨이다.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재앙은 내가 막는다. 날 도와라. 그러면 네 몸에 걸린 저주 또한 풀릴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필멸자는 신의 시련을 이겨낼 수 없다. 따라서 재앙은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계절처럼 지나가는 것이지.” “이겨낸 존재가 있다.” “뭐?” 마라키아는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김성철은 베스티아레의 웃음소리를 떠올리며 말했다. “네가 그토록 무시하던 인간들이다.” ======================================= 28. 왕의 부탁 (2) 뒤이어 김성철이 말했다. “칠영웅이라 불리는 존재들이지.” “뭐? 인간 따위가 신의 시련을 이겨낸다고. 나는 믿을 수 없다.”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다. 하지만 한 가지 말해두지. 나는 칠영웅의 총합보다 강하다. 그리고 너는 이미 나를 들여다보지 않았나? 내가 어떤 각오를 한 지 너라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 마라키아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서서 안에서 들끓고 있는 목적 없는 분노가 소진되기를 기다렸다. 늘 그렇듯 시간이 해결책이 되었다. 내면의 불꽃을 잠재운 마라키아는 조금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재앙을 극복할 것이지? 재앙은 너 혼자서 막기에 부족할 터인데.” “다섯 가지 재앙이 있다. 적어도 그중 세 가지는 나 홀로 확실하게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김성철은 담담한 목소리로 지금 세상에 닥쳐 올 재앙에 대해 이야기했다. 첫 번째 재앙은 마계에서 온다. 재앙의 서에 따르면 마계의 악마 왕이 전례 없는 악마의 대군을 이끌고 남하해 모든 것을 불태울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두 번째 재앙은 과거로부터 온다. 과거에 이 땅에 닥친 재앙을 물리친 일곱 명의 영웅들이 재림, 이번에는 필멸자들의 적으로 나타나 세상에 비탄과 의심, 죽음을 뿌리고 다닐 것이라고 재앙의 서는 예언하고 있다. 세 번째 재앙은 의심으로부터 온다. 두 개의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황폐한 대지 위에 살아남은 자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모두가 죽어야 끝이 날 처절한 전쟁을 시작한다. 네 번째 재앙부터는 전해지지 않는다. 혹자는 네 번째 재앙으로 아신들의 강림을 들거나 아니면 용족들의 준동 따위를 들곤 하지만 정확한 내용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재앙의 서에 네 번째 재앙 부분부터는 공백으로 기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재앙의 서에 내용이 채워지는 것은 재앙의 단계가 어느 정도 진행된 이후이리라. “재앙의 절반을 혼자 해결한다라? 대단한 자신감이군.” 마라키아는 냉소적인 반응이었다. 김성철은 계속해서 그를 설득했다. “내겐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왕만 처리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재앙들은 일사천리로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김성철의 말로는 마라키아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마라키아는 코웃음 치며 김성철을 다그치듯이 질문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네 번째 재앙은? 혹은 다섯 번째 재앙이 네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게 나온다면?” “…….” 김성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입을 열어봐야 궁색한 변명에서 벗어나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라키아는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말이 없으면 잠시 쉬러 가마. 휴식을 취한 후엔 지상으로 나가 인간들의 왕국을 멸하겠다. 그렇지 않고서는 모욕 받은 나하크의 분노가 풀리지 않을 것 같으니.” 마라키아는 맑고 청량한 소리를 내며 유유히 던전 깊숙한 곳으로 걸어갔다. 아마 그는 자신의 말을 지킬 것이다. 그는 이미 자포자기했고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으니. 김성철의 두 눈에 짙은 근심이 떠올랐다. ‘힘으로 할 수 없는 건 정말로 어렵군.’ 그의 눈에 남은 선택지는 하나로 보였다. 폭주한 마라키아가 바깥에 나가기전에 자신의 손으로 처치하는 것. 지금까지의 노고와 시간이 물거품이 되는 최악의 결말이다. 김성철이 속으로 그렇게 실패를 예견하고 있을 때였다. 의외의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거기. 새대가리! 할 말이 있어!” 베르텔기아다. ‘이 녀석이?’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제지해볼까도 생각했지만 뒤이어 떠오른 막연함 기대감이 그로 하여금 상황을 관망하게 만들었다. “내 말 안 들려? 새대가리! 할 말이 있다고!” 베르텔기아는 계속해서 소리쳤다. 결국 마라키아가 멈춰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책. 입이 험하군. 아무리 옆에 지켜주는 인간이 있다고 해도 자기 주제는 파악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 깃털을 동반한 마법 화살이 베르텔기아를 향해 날아갔다. 창졸간에 벌어진 사태에 베르텔기아는 그대로 얼어붙으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마법화살을 우두커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화살이 그녀에게 박히려는 찰나, 우악스런 손이 나타나 베르텔기아를 막아섰다. 베르텔기아를 막아선 것은 김성철의 강철 같은 팔뚝이었다. 마법화살은 김성철의 옷을 뚫는데는 성공했지만 그의 몸에 서린 막강한 투기와 마법저항력에 직면하자 그대로 산화하여 없어져버렸다. “계속 말해라.”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을 향해 한 차례 몸을 흔들어 보인 후,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모욕 받은 나하크라고 했지?” “그런데?” 마라키아는 뒤돌아서며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하크의 자존심이 소중하다는 인간이 왜 정작 자기 백성은 돌보지 않는 거지?” “뭐? 내 백성?” “응. 너희 같은 나하크 족이 지금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알고 있어?” “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마라키아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냉소하자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팔뚝을 벗어나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럼 날 따라와. 아주 잘나신 나하크의 왕님!” 그녀는 김성철의 품을 벗어나 먼저 던전 안쪽으로 날아갔다. ‘이 녀석. 제법인데?’ 베르텔기아의 뒷모습을 보던 김성철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는 곧장 베르텔기아의 뒤를 따라 그녀를 호위했다. 마라키아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베르텔기아의 말이 마음에 걸리는 듯 터벅터벅 뒤따라왔다. 베르텔기아가 마라키아를 안내한 곳은 다름 아닌 동굴 엘프의 도시였다. 지저분하고 음습한 동굴 엘프의 도시를 본 마라키아는 눈쌀을 찌푸렸다. “하등한 종족에 걸맞는 하등한 주거지로군. 내 지하왕국을 떠나기 전에 이 벌레들을 모두 불태우고 가리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높은 새의 울음소리를 냈다. 청량하고 높은 나하크의 음색이 전역에 울려 퍼지자 동굴 엘프들은 안절부절 못하며 공포에 떨었다. 어떤 동굴 엘프는 벌레처럼 몸을 뒤집고 입에 거품을 무는가 하면은 어떤 동굴 엘프는 아무 곳에나 똥을 갈겼다. 마라키아는 도시 사이를 지나던 중 재미삼아 동굴 엘프 몇 마리를 염동력으로 떠올려 그 자리에서 폭살시키는 등의 유희를 즐겼다. 베르텔기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목적지로 안내했다. 그곳은 사육장 앞이었다. 분변의 악취와 썩은 피비린내가 동시에 풍겨오는 기분 나쁜 커다란 천막 앞에서 마라키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여기 뭐가 있다는 거냐?” 그때 그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천막을 장식한 하얀 색의 깃털들이었다. 그것들은 작고 윤기가 덜하긴 하지만 마라키아가 잘 아는 것과 유사했다. 마라키아가 손을 뻗어 깃털 하나를 손에 쥐고 살폈다. ‘이건... 나하크의 깃털...?!’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온 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아찔함을 느끼며 마라키아는 천막 안쪽을 응시했다. 새의 낮은 울음소리, 부리로 쇠붙이를 지속적으로 두들기는 소리, 푸드덕 거리는 날개 소리가 뒤섞여 들어왔다. 김성철과 베르텔기아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라키아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고 그리고 보았다. 가장 고귀하다고 자부했던 종족이 노예로 불리던 하등 족족의 가축으로 전락한 광경을. 마라키아의 내면에서 그를 지탱하던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분노와 충격이 뒤섞인 괴성이 천막 안쪽에서 한동안 울려 퍼진 후, 안쪽의 기물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마라키아가 달라진 모습으로 천막 밖으로 나왔다. 베르텔기아가 탄식을 내뱉었다. “반점이... 더 진해졌어.” 충격 때문일까. 마라키아의 반점은 더욱 짙어져 있었다. 김성철은 그의 몸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이지?” 마라키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의 종족은 너를 위한 의식과 함께 멸망했고 남겨진 자들은 동굴 엘프에게 잡혀 보는 대로 가축이 되었다.” “가축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때 천막 안에서 어린 나하크 한 마리가 기어나왔다. 그 수많은 하얀 깃털 속에서도 드물게 푸른 깃털을 지닌 나하크였다. 마라키아는 그것이 일종의 계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어린 나하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가 있는 이상, 이 나하크들은 다시 한 번 부활해 하늘 위를 누빌 것이다.” 마라키아가 지식의 구슬을 만들어냈다. 나하크 족의 언어와 비전이 담긴 지식의 결정체였다. 그 구슬은 곧장 푸른 깃털을 지닌 어린 나하크의 몸에 들어가 흡수됐다. 짐승의 소리를 내던 푸른 나하크는 몸을 한 차례 떨더니 이내 달라진 눈빛으로 주변을 응시했다. 이전과 달리 어느 정도 지성을 갖춘 듯한 그런 자세로 말이다. 하지만 그 어린 나하크가 지성을 갖는 순간, 그 몸에 검은 반점이 독버섯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김성철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축에서 벗어나 지성체가 되는 순간, 절멸의 저주가 어김없이 찾아오는군.” 온 몸이 반점이 덮인 채 어린 나하크는 비명을 지르다가 이내 그들의 왕의 품안에서 축 늘어졌다. 마라키아는 우두커니 선 채 자신이 손아귀에 들린 어린 나하크의 시체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응시했다. “이것은 너무나도 가혹하다. 너무나도...” 마라키아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그는 어린 나하크의 시체를 안은 채 무릎 꿇었다. 침묵 속에서 베르텔기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축이 됨으로서 종족이 보존되다니...” “…….” 김성철은 무릎 꿇은 마라키아를 향해 걸어갔다. 김성철의 기척을 느끼고 마라키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엔 한 방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것이 재앙인가?” 마라키아가 물었다. “그것 또한 재앙이다.” “그것 또한?” “그러하다. 모든 희망을 부수고 잔혹한 현실만을 남기는 것이 재앙의 본질이다.” 김성철이 대답했다. “그렇기에 나는 재앙을 부수려고 한다.” 김성철의 손에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그가 팔 가라즈를 휘두르자 사육장을 덮은 천이 날아가고 그 아래 감춰져 있던 해방된 수천 마리의 나하크를 한꺼번에 드러냈다. 어리고 호기심 많은 짐승들은 그들의 시야를 가리는 천이 사라지자 사육장에서 뛰쳐나가며 사방으로 퍼졌다. 하얀 깃털을 지닌 나하크들은 마라키아에게 흥미를 보였다. 그 나하크들은 미성숙한 날개를 펄럭이며 마라키아에게 하나 둘 달라붙었다. 마라키아는 그들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 앞에 우뚝 섰다. 그리고 김성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너를 믿겠다. 인간.” “…….” 김성철은 말없이 손을 뻗어 마라키아의 손을 붙잡았다. 인간처럼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손이었다. “네 이름은 뭔가?” 마라키아가 물었다. “김성철.” “김성철이라. 이상한 이름이군. 하지만 기억하긴 쉽겠어.” 마라키아는 어린 나하크들을 둘러본 뒤 다시 김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종족을 부탁한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라키아는 두 눈을 감았다. 그의 하나 남은 날개는 그의 상반신을 덮었고 이윽고 그의 몸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은 생명력을 불태워 몸 안에 깃든 막대한 힘을 하나의 물질로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눈부신 빛에 싸인 마라키아는 소멸했고 그 자리엔 커다란 알 하나와 검고 하얀 기운이 뒤섞인 주먹 크기의 보주가 놓여 있었다. “…….” 김성철은 먼저 커다란 알을 집었다. 검은 색의 알이었다. 그것을 집어 든 순간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 마라키아의 알 ] “어떤 나하크는 죽음의 순간 불사조처럼 다시 알로 환원 가능하다는 전설을 들은 적이 있어.” 베르텔기아가 옆에서 말했다. 김성철은 조심스레 알을 영혼 창고에 집어놓고는 다음으로 그 옆에 있던 보주를 들어올렸다. [ 혼의 망해 ] 마라키아의 의지가 깃든 물건이다. 김성철은 고개를 숙여 마라키아에게 예를 표한 후, 혼의 망해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그러자 보주가 부서지며 그 안에 담긴 힘이 김성철에게 빨려 들어갔다. 빛 속에서 문자들이 눈앞을 덮어나갔다. [ 당신의 힘이 계승자보다 강하기에 힘은 계승되지 않습니다. ] [ 당신의 민첩성이 계승자보다 강하기에 민첩성은 계승되지 않습니다. ] [ 당신의 체력이 계승자보다 강하기에 체력은 계승되지 않습니다. ] ... 기대하지 않은 것들이 흘러간 후, 김성철이 기다리는 문자가 떠올랐다. [ 계승자의 마력이 당신에게 계승됩니다. ] [ 계승자의 직관력이 당신에게 계승됩니다. ] ... 계승의 의식이 끝난 후 김성철은 상태창을 열었다. 환경에 의해 적용받는 모든 걸 배제한 순수한 능력치 창을. [능력치] 힘 999+ 민첩 853 체력 801 마력 323 직관력 334 마법저항 621 의지 502 매력 18 운 18 마력과 직관력 300을 돌파했다. 초인의 벽이라 불리는 300을 단번에 돌파한 것이다. 당장 가능해진 변수들이 김성철의 눈앞에 잇따라 떠올랐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 “이 나하크들을 잘 보살펴라. 만약 내가 다시 이곳에 돌아왔을 때 나하크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그 날이 너희 종족이 절멸을 맞이하는 날이 될 것이다.” 동굴 엘프들의 장로들 앞에서 김성철은 경고 섞인 명령을 하달했다. 그의 신적인 힘을 이미 경험한 동굴 엘프들은 그저 김성철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약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하왕국을 떠나기 전에 김성철은 다시 사육장을 찾았다. 사육장 앞엔 마라키아가 남긴 잔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달갑지 않은 손님이 그곳에 있었다. 심연의 나락이다. 그런데 심연의 나락의 행동이 이상했다. 그 흘러내리는 괴물은 마라키아의 잔해 앞에 서서 우두커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지켜봐도 미동도 없었다. 그 괴물은 마치 동상처럼 마라키아가 사라진 그 땅을 하염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김성철과 베르텔기아는 자리를 떠났다. “대체 그건 뭐였을까?” 지상으로 향하는 승강기 안에서 베르텔기아가 불쑥 말했다. 지상에서 불어온 소금기 섞인 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사납게 흔들렸고 베르텔기아는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김성철 등 뒤에 몸을 숨겼다. 어둠에 가려 있던 한줄기 서광이 김성철의 눈동자를 찔러왔다. “글쎄.” 김성철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나 같은 놈일지도 모르겠군.” 멀리서 친숙한 마족들의 포효가 들려왔다. ======================================= 29. 구세 십자군 (1) 고즈넉하던 은자의 탑 주변은 이례적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탑의 하늘 위엔 각국의 깃발이 걸린 공선들이 당과 연결된 기구에 묶여 정박해 있었고 지상엔 육중한 이동요새들이 줄지어 자리 잡고 있었다. 이토록 쟁쟁한 강대국들의 상징이 은자의 탑 주변에 모인 이유는 한 가지 소식 때문이었다. [ 재앙의 서의 내용에 변화가 일어났다. ] 은자의 탑의 주인 포르피리우스 명의로 발한 서신은 각국의 왕과 제후들에게 전달됐고 그들을 은자의 탑에 불러 모았다. 왕과 제후들은 걱정과 염려 속에서 재앙의 서가 위치한 성소로 들어섰다. 그리고 보았다. 새롭게 추가 된 재앙의 내용을.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성소 안엔 수근거림이 일었다. “응?” 한 사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냐하면 재앙의 서에 적힌 내용은 이전에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왕의 재앙, 칠영웅의 재앙, 전쟁의 재앙 등이 전과 다름없는 문구로 나란히 열거되어 있었고 새로운 건 없었다. 포르피리우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즉시 성소를 관리하던 부하를 불러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겐가?” “그.. 그게... 없어졌습니다.” “무어라?” “갑자기... 조인왕의 재앙이 사라졌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하지만 재앙의 서는 그 부하의 말이 맞다는 걸 말없이 그리고 확고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장내의 분위기가 점점 어수선해지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왕과 제후들의 책망의 눈길이 하나 둘 포르피리우스를 향하고 있었다. 화살보다 날카롭고 고통스러운 그 시선 속에서 포르피리우스는 침을 꿀꺽 삼키고 나름의 해명을 해야 했다. “그.. 그게 말입니다. 예상치 못한 변수의 발생으로 인해... 재앙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은자 포르피리우스는 졸지에 양치기 소년이 되고 말았다. 반세기 동안 쌓아온 명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평생 먹은 것보다 더 많은 욕을 먹었던 그날, 포르피리우스는 자신이 가진 카드 중 가장 강한 패를 꺼내 들어야 했다. “재앙의 서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본 것은 거짓이 아니며 우리가 알 수 없는 힘이 재앙의 서에 관여한 게 틀림없다. 너는 그것을 알아내야 할 것이다.” 포르피리우스 앞에 부복한 자가 고개를 들었다. 깊게 눌러 쓴 두건 안엔 용의 눈을 연상케 하는 붉은 눈이 번득이고 있었다. “…알겠다. 무능한 늙은이.” 반인반용 카네스. 그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최강의 종족 드래곤의 피가 섞인 그녀는 소위 말하는 규격 외의 존재라는 것을. 그 규격 외의 존재가 오늘 특명을 받고 수백 년 만에 은자의 탑을 나섰다. 하지만 카네스는 성실함과는 거리가 먼 성격의 소유자였다. “오랜만에 바깥에 나왔으니 맛있는 걸 먹어주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어?” 최강의 은자 카네스의 맛집 탐방은 그렇게 시작됐다. * 마계 최전선. 형벌 부대의 캠프는 불길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부대장 강가스 아론의 심기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100명에 이르던 부대원을 이끌고 공선을 타고 떠났던 그는 늘 데리고 다니던 마법사 한 명만을 데리고 부대로 귀환했다. 생존자는 전무. 항상 있던 일이지만 이번만큼은 강가스 아론도 충격이 큰지 자신의 천막에서 무려 한 달 동안 두문불출했다. 그걸 본 형벌부대의 베테랑들은 드디어 강가스 아론이 자신의 무능을 깨달았다고 자평했지만 오직 단 한 명, 34호라 불리는 사내만은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었다. ‘윌리 길포드를 버리고 도망갔으니 겁이 날만 하지. 윌리 길포드는 그다지 속이 넓은 양반이 아니니까.’ 그 사내. 김성철은 형벌 부대로 돌아왔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생활이 비교적 자유롭고 정보 얻기에 용이하다는 장점도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되지 못했다. 그는 별 생각 없이 형벌 부대에 복귀했고 그곳에서 규칙적인 일과를 수행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최근 그는 연금술사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아 병사들을 위해 연금 아이템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른 아침 부대를 떠나 재료를 수집하고 부대로 돌아와서는 연금 가마에 재료를 넣고 연성을 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가 만드는 연금 아이템은 해열제에서 불빛 장식까지 그야말로 잡다했는데 그가 만드는 품목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재료 조달에서부터 연성까지 전부 혼자서 도맡아하기 때문이다. 가끔 그는 상부의 지시를 받아 힐링 포션 따위의 약제를 만들곤 했는데 그가 만드는 약제는 대단히 효능이 뛰어나 큰 호평을 받았다. 이렇게 단 한 달 사이에 대담한 정찰병에서 솜씨 있는 연금술사로 탈바꿈한 김성철에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 마계의 입구로 몰래 들어가 마계의 문지기라 알려진 심해 마종을 상대로 주문의 위력을 시험한다. 마라키아의 힘을 흡수한 김성철은 최근 새롭게 익힌 주문이 있었다. 메테오. 천공학파를 상징하는 강력한 공격 마법이다. 파괴력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 공격마법은 무자비하게 심해 마종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그어어어어!!!!” 글레어를 사용할 땐 피부에 약간의 상처를 입히는 게 고작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은 심해 마종의 거대한 육신을 휘청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마력이 강해지면서 김성철에게 나타난 또 하나의 축복이 있었다. [ 메아리 - 1 ] 마력의 상승으로 인해 그동안 발동하지 않던 메아리술사의 능력인 메아리가 발동되었다. 아직 메아리는 한 번에 그쳤지만 연거푸 떨어지는 운석의 위력은 그야말로 파괴적이었다. 한 달 전엔 마법으로 어떤 타격도 가할 수 없었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마법의 힘만으로 심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본 마법인 글레어의 위력도 메아리와 함께 일취월장하여 피부를 궤 뚫고 안의 연약한 살을 태워 고소한 생선 굽는 냄새를 나게 할 정도로 강해졌다. 김성철은 심해 마종을 죽지 않을 만큼만 두들긴 후 자리를 떠났다. “흠. 나쁘지 않은데?” 하늘 위에 둥둥 떠서 싸움을 감상하던 베르텔기아가 소감을 말했다.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마력의 정수를 들이켰다. “아직 부족하다. 이 정도는 겨우 궁정 마법사 수준에 지나지 않아.” 소환 궁전에서 만난 적 있는 돌로렌스 윈터러의 수준은 가뿐히 뛰어넘은 건 확실하지만 에어푸르트에서 만났던 학장 급의 마법사에 비하면 부족한 점이 많다. 김성철이 추정하기에 알투지우스 제로의 마력은 최소 450 이상. 김성철은 그 수치를 넘어 최소 마력 500을 넘긴 이후에야 마왕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단 한 번에 끝낼 생각이었다. 어설픈 수치로 덤벼들었다가 막혀버리면 뒤가 없어진다. 마왕은 교활하니까. 따라서 마왕이 생각지도 못한 때에 불시에 찾아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한 번에 끝내는 것. 그것이 김성철이 생각하고 있는 대략적인 계획이었다. ‘원시의 빛. 그것만이 답이 될 것이다.’ 그 척도가 심해 마종이다. 심해 마종을 일격에 처리할 수 있다면 마왕 또한 일격에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성철이 파악하기에 심해 마종의 내구력은 마왕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으로 보이니 말이다. 하지만 원시의 빛을 배우기 위한 직관력 필요치는 500. 그에 반해 지금 김성철의 직관력은 340이다. 아직 직관력 수치 160이나 더 필요하지만 김성철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연금술과 전투를 병행하며 천천히 자신의 능력을 키워나갔고 착실하게 정보를 수집하며 주변의 동향을 살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영내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전부터 돌고 있던 소문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새로운 정황이 보태져 새롭게 생명력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마계에 대한 공세가 곧 시작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구세 십자군이 결성됐다고 하더군.” 죄수번호 0번을 단 드워프 아카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구세 십자군이라.” 김성철의 눈동자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구세 십자군의 기원은 칠영웅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재앙을 막기 위해 이계의 각 국은 해묵은 싸움과 대립을 멈추고 합심, 그들이 가진 최정예의 전사들을 보내 재앙에 맞서게 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칠영웅.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 닥친 재앙을 막아냈다. 그것을 본 따 만든 것이 이 시대의 구세 십자군이다. 수천 년과 마찬가지로 이계의 각 국에서 정예를 추려 재앙에 맞설 토벌대를 만들어 재앙에 맞서게 하는 것까진 과거와 같다. 하지만 문제는 병력의 질이다. 더 이상 이계의 권력자들은 최정예의 병력을 보내지 않는다. 정상에서 조금 떨어진 어중간한 전사나 아직 검증되지 않은 신예들을 파견한다. 그리고 생색낸다. 우리들은 할 만큼 했다고. 그렇게 불안에 떠는 이계의 주민들에게 떠벌이는 것이다. 잠자코 듣고 있던 김성철이 불쑥 아카드에게 물었다. “이번이 몇 차요?” 아카드는 이번 구세 십자군이 13차라고 말했다. “13차라.” 그 이야기는 지난 열두 번의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갔음을 뜻한다. 얼마나 많은 자들이 구세라는 미명 하에 죽거나 희생당했는지 눈앞에 그려지는 대목이었다. ‘아직도 이런 짓을 하는군. 그 녀석들은.’ 아마도 앞으로도 비슷한 짓을 할 것이다. 지금의 권력자들은 그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세상이 유지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니. 오히려 구세 십자군은 값싼 희생 정도로 여길 것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자리를 떴다. 그런데 이튿날, 강가스 아론이 전 형벌 부대원을 불러 모았다. 한 달 이상을 집무실에서 칩거했던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지만 그의 밑에 오래 있었던 부대원들은 저 돌 머리라 불리는 사내가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입가에 감도는 자신감이 깃든 미소는 비극적인 작전을 펼치기 전에 늘 보이던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가스 아론은 3백여 명의 병사 앞에서 큰소리로 말했다. “변경백 마르틴 브레가스님께서 제13차 구세 십자군이 마계 최전선을 지나 행군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수많은 마계 최전선의 부대들이 앞 다투어 구세 십자군을 돕기를 희망했지만 모두들 기뻐해라. 우리 제8 형벌 부대가 구세 십자군의 보조를 맡게 되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늦은 오후. 구세 십자군이 형벌 부대의 영내로 들어섰다. 연금 가마 앞에서 연성을 하던 김성철은 십자가 형태의 대검이 그려진 거대한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고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 ‘빨리도 오는군. 이미 사전에 협의가 되었다는 이야기겠지.’ 강가스 아론 다운 음험하고 더러운 일처리다. 김성철은 구세 십자군의 규모를 대충 눈으로 훑었다. 숫자는 대략 300여명. 형벌 부대와 비슷한 규모다. 하지만 전투원의 숫자는 100명을 간신히 넘기는 걸로 보였다. 경륜이 풍부해 보이는 사람은 드물고 하나 같이 어리고 앳된 청년들이다. 아마도 권세 있는 가문의 차남이나 차녀 등이 대부분이리라. 김성철은 착잡한 심정을 느끼며 강가스 아론이 구세 십자군의 우두머리에게 인사를 하러 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이쿠. 오셨습니까? 먼 길을 오시느라 정말로 수고 많았습니다.” 강가스 아론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리고 허리와 머리를 연신 조아리며 구세 십자군의 우두머리를 향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데 그 구세 십자군의 우두머리는 이제 겨우 갓 약관을 넘긴 것처럼 보이는 새파란 청년이었다. “당신이 강가스 아론이오? 당신이 우리의 길 안내를 맡겠다고 그렇게 부탁을 했다던데.” 잡티 하나 없는 백마를 탄 그 청년의 얼굴엔 고상한 기품과 그에 어울리는 오만함이 혼재되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주위 인물이 듣던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드워프가 관할하는 폭풍전선이 아니라 엘프 쪽 전선을 통해 마계로 진입하고 싶었소. 난 개인적으로 드워프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그 청년의 말에 강가스 아론의 얼굴은 눈에 띨 정도로 일그러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청년은 황량한 형벌 부대의 진지를 한 번 뒤돌아보고는 내뱉듯이 말했다. “참, 볼 품 없는 곳에 볼 품 없는 부대군. 이런 자들이 구세 십자군의 안내를 맡는 게 가당키나 할까?” 조용하던 형벌부대에 파란이 예고되는 순간이었다. ======================================= 29. 구세 십자군 (2) 구세 십자군은 형벌 부대의 진영 가장 자리에 캠프를 차렸다. 노동은 수행원의 몫이었다. 여기저기서 말뚝 박는 소리와 일꾼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할 일 없는 구세 십자군은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주변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김성철이 연금술을 하고 있는 천막에도 구세 십자군 몇 명이 찾아왔다. 남자 셋, 여자 둘. 어리다. 절멸의 저주를 간신히 피한 종말 세대로 보였다. 그들중 하나가 연금 가마를 발견하고는 신이 나서 자신들의 동료를 천막 안으로 불러 들였다. “이것 좀 봐! 여기 연금술사가 있어!” “뭐? 이런 곳에도 연금술사가 있다고? 신기하네.” “뭘 만드는지 볼까?” 김성철이 떡 버티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김성철의 허름한 코트에 붙은 죄수번호를 보았기 때문이다. 김성철은 낯선 이방인들을 힐끗 쳐다보고는 자신의 일을 계속했다. 그가 만들고 있는 것은 4레벨 연금 아이템인 정수 항아리였다. 마계에서 나는 점토와 남쪽에서 얻을 수 있는 고령토를 주재료로 만드는 그 항아리는 어떤 더러운 물도 먹을 수 있는 물로 정화시키는 힘이 있다고 한다. 깨끗한 민물을 구하기 어려운 마계에선 대단히 요긴한 아이템인 것이다. 게다가 연금 아이템의 레벨은 무려 4. 연금술이 경시당하는 이계에선 대단히 높은 레벨의 아이템이다. 후욱후욱.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풍로를 밟으며 연금 가마아래서 불타고 있는 불길을 강화시켰다. 뚜껑을 덮어 놓은 가마 안에 있는 항아리가 바싹 구워지며 단단한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다. 항아리가 어느 정도 구워진 후 김성철은 뚜껑을 열었다. 화악하고 안에 있던 증기가 무서운 기세로 빠져 나왔다. 김성철은 그 항아리가 든 가마 안에 주걱을 넣고 저었다. 연금술사가 주걱으로 연금 가마를 젓는 행위는 단순히 재료를 섞이게 한다는 것보다 연금술사로서 연금 아이템에 마나를 부여, 그 아이템에 생명을 불어넣는 행위 그 자체였다. 처음엔 몰랐지만 경험이 쌓이다보니 자연스레 터득한 사실. 실제로 주걱은 항아리에 닿았지만 항아리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주걱은 마치 항아리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항아리를 투과해 그저 가마 바닥을 저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작은 가마 안에서 벌어지는 기적이었지만 구경꾼들 눈엔 별 대수롭지 않게 보인 모양이다. “재미없네.” “뭔가 했더니 쓸모없는 항아리 아니야?” “폭탄이라도 만드는 줄 알았더니.” “싸구려 같아.” 구경꾼들은 저마다의 품평을 늘어놓으며 자리를 떠났다. “…….” 최근 상승가도였던 김성철의 자존심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결과에 반영됐다. [ 연성 실패! ]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가마 안의 항아리가 산산조각 나며 검은 가루로 화했다. “이런 개자식들이....!!” 김성철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구세 십자군이 사라진 방향을 향했다. “워워-. 진정해.”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가 몸을 흔들며 말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인 법! 진정한 연금술사는 시끄러운 시장 통에서도 현자의 돌을 만들어내는 법이야!” “…….” 김성철은 입을 꾹 다물고 천막 바깥으로 나갔다. 지나가던 하사관들이 김성철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 “여어. 연금술사! 잘 되고 있나?” “그럭저럭.” 김성철은 천막 뒤로 갔다. 천막 뒤엔 또 다른 화로와 조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가끔 김성철이 요리를 해먹는 전용 주방이었다. 그는 주변을 힐끗 돌아본 후 영혼창고에서 재료를 꺼냈다. 작은 항아리 안에 담가 놓은 만드라고라 김치와 마계에서 때려죽인 인면수의 피를 굳혀 만든 선지였다. 인면수 고기는 가죽처럼 질기고 입안에 넣으면 탁 하고 터지며 불쾌한 맛을 내는 종양이 듬성듬성 있어 먹을 수 없지만 갓 잡은 인면수의 신선한 피를 굳혀 만든 선지는 대단히 훌륭한 식재다. 그는 일단 재료를 조리대 옆 간이 선반에 올려놓은 뒤 하급 힐링 포션 3병을 가지고 식량 창고로 향했다. “뭔가? 또 교환인가?” 132번이라는 죄수번호를 단 창고 관리자는 김성철의 힐링 포션을 보고는 슬쩍 주변을 뒤돌아 본 뒤, 김성철에게 식재 일부를 내주었다. 말린 소시지와 햄, 그리고 인근에서 잡은 이름 모를 산새의 시체가 힐링 포션 3병과 교환됐다. 김성철은 교환한 재료를 가지고 자신의 막사로 가 요리를 시작했다. 요리라고 해봐야 별 거 없었다. 산새의 뼈로 육수를 내 따로 쟁여 놓고 연금 가마의 뚜껑을 솥뚜껑처럼 뒤집어놓고 인면수 선지를 볶는다. 인면수 선지가 어느 정도 익으며 육즙을 쏟아내면 그 위에 만드라고라 김치와 아까 받은 소시지, 햄을 잘라 넣고 그 위에 산새의 뼈를 우려 만든 육수를 넣어 보글보글 끓인다. 어느 정도 끓기 시작하면 조미료를 넣고 간을 맞춘다. 마계 최전선 식 부대찌개다. 하지만 김성철의 요리는 영내에서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이계인들이 낯설어 하는 향신료를 듬뿍 썼기 때문이다. 한 번 맛보면 평가가 달라지겠지만 형벌부대의 병사들은 새로운 먹거리를 찾는데 모험심을 발휘하지 않았다. 김성철은 이런 평가에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의 요리는 혼자 먹기 위해 하는 거니까. 그런데 막 요리를 완성하려고 하니 낯선 구경꾼들이 나타났다. 누군가 했더니 아까 연금술을 할 때 초를 치던 5인조다. “응? 이건 무슨 연금술이지?” 주근깨 가득한 금발 소녀가 보글보글 끓는 마계 부대찌개를 보고 불쑥 입을 열었다. ‘연금술이라니....’ 어엿한 일품요리보고 연금술이라고 말한다는 건 저 여자가 김성철의 요리를 요리로 안 본다는 뜻이다. “뭔가 좋지 않은 냄새가 나는데? 위험한 물체라도 만드는 건가?” 얼굴에 귀티가 줄줄 흐르는 금발 청년이 코를 막으며 역겨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옆에 있는 녀석들도 한 소리씩 했다. “먹는 거 같은데? 저거 봐. 시뻘건 국물 위에 햄과 소시지 조각이 떠다니잖아.” “우웩.” 그 5인조의 대화는 고스란히 김성철의 귀에 들어갔다. 김성철은 전례 없는 굴욕감을 느꼈다. ‘감히 고급 요리인의 요리 앞에서 저런 평가를 하다니. 기껏해야 귀족 나부랭이 주제에 건방지기 짝이 없군.’ 요리 실력으로 따지면 김성철은 여간한 왕실의 궁정 주방장보다 위급이다. 희귀 클래스인 요리인. 그 요리인 중에서 상급 클래스인 고급 요리인을 따내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니. 실제로 김성철은 고급 요리인이 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고 자신의 요리에 커다란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김성철의 요리를 저 5인조는 비웃고 있는 것이다.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심경에 중대한 반응이 일어나는 걸 눈치 채고 몸을 강하게 흔들며 속삭였다. “참아. 워워-. 릴렉스.” 하지만 베르텔기아의 말은 김성철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김성철은 5인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범접할 수 없는 무거운 기운이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갑작스런 분위기의 변화에 5인조는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흠칫 놀랐다. 김성철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 “어디 한 번 잡숴봐.” 그는 국자에 인면수 선지와 햄, 소시지 조각을 떠 5인조에게 권했다. “어디 한 번 먹어보라고.” 갑작스런 김성철의 권유에 5인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김성철은 계속해서 권했다. “어이. 한 번 먹어보고나 말해. 내 요리가 맛이 있는가 없는가.” 김성철의 거듭된 권유에도 불구하고 5인조의 분위기는 냉랭하기만 했다. “가자.” 금발 청년이 차갑게 말하며 뒤돌아서자 나머지 4인도 일말의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그들의 등 뒤로 야멸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걸 어떻게 먹어.” “개를 줘도 안 먹겠다.” 김성철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피식 웃을 뿐이었다. “고급 요리인의 요리를 마다하다니. 일생일대의 기회를 날려버리는군.” 김성철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국자 안의 선지와 소시지를 입김으로 호호 불어가며 꿀꺽 삼켰다. 순두부처럼 부드럽고 감칠맛이 넘치는 인면수 선지가 혀 위에서 사르르 녹으며 단단한 씹는 맛이 있는 소시지와 햄의 맛을 배가 시키고 그 위를 만드라고라 김치의 시큼하면서도 깊은 풍미가 있는 국물이 뒤덮는다. 그야말로 입안에서 펼쳐지는 맛의 향연. 김성철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 점수는 87점.’ 하지만 클래스에 의한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 이 요리의 점수는.... 34점. ] ‘클래스 관장하는 놈이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면상 한 번 보고 싶군.’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보급품으로 받은 증류주를 꺼내 한 모금 들이켰다. 입안에 남은 맛있는 기운과 독주가 섞여 위장 안으로 내려가 찌르르 울리는 느낌은 그야말로 극락. 그동안의 피로가 한 번에 달아나는 느낌이다. ‘이렇게 맛있는 걸 마다하다니. 정말로 불쌍한 것들이군.’ 그렇게 식사를 하고 있자니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김성철은 아까 그 5인조가 다시 찾아온 건 아닌가 싶어 고개를 돌렸는데 거기엔 5인조가 아닌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이 녀석은...’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건 구세 십자군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금발 청년과 그와 꼭 빼닮은 여성이었다. “이상한 냄새가 풍긴다 싶었더니 소환자의 요리였군.” 그 청년은 김성철 쪽으로 다가와 보글보글 끓는 솥뚜껑 안의 마계 부대찌개를 날카로운 눈으로 응시했다. 김성철은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젊고 섬세한 얼굴이지만 그 눈빛 안엔 신중함과 과감함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꽤 강단 있어 보이는군. 실전에선 어떨지 모르겠지만.’ 김성철은 청년 뒤를 지키듯이 서 있는 여성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청년과 마찬가지로 엷은 금발과 푸른 눈을 지닌 그녀는 이미 김성철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동자가 마주친 순간, 김성철은 잘 갈린 날카로운 검의 날을 떠올렸다. ‘나이에 비해서 만만치 않은 오누이군.’ 김성철이 속으로 그렇게 낯선 불청객에 대한 품평을 하고 있을 때 김성철의 요리를 관찰하던 청년이 입을 열었다. “흐음. 이 빨간 국물. 그리고 자극적인 냄새. 철혈기사단에서 대접받은 요리와 비슷하군.” “…….” “하지만 그 요리는 맛이 없었지. 억지로 먹긴 했지만 맵고 자극적이기만 했어. 마치 겉만 화려하고 내실은 형편없는 철혈기사단 그 자체를 보는 듯 했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김성철이 술을 한 모금 들이키며 불쑥 말했다. 밥 먹는데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옆에서 나불나불 거리니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다. 청년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그 뒤에 선 여성의 손이 검의 손잡이를 향했다. 그녀의 몸에서 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때 청년의 손이 여성을 제지했다. “소피아. 그만 둬. 먼저 실례를 한 건 나니까.” 그는 김성철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자신의 무례에 대한 사과를 표했다. “실례했습니다. 이름 모를 병사님. 워낙 이국적인 냄새라 저도 모르게 결례를 범하고 말았군요.” 형벌부대의 대장인 강가스 아론마저도 벌레 취급하던 사내가 무명소졸에게 사과를 하다니. 의외의 일면이었다. 보기보다 괜찮은 녀석.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국자에 인면수 선지와 소시지, 국물을 퍼서 그에게 내밀었다. “말로만 사과하지 말고 어디 한 번 잡숴보시오.” 갑작스런 김성철의 행동에 그 청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오라버니.” 뒤에 서 있던 여성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청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이내 김성철을 차디 찬 눈빛으로 노려보며 소리쳤다. “거기. 소환자! 감히 이 분이 누구라고 이런 쓰레기 같은 음식을 들이미는 게냐?” 그녀의 검은 어느새 반절 정도 뽑혀 있었다. 김성철은 빛을 받아 번쩍이는 칼날을 보며 쓴 웃음을 지으며 국자를 다시 솥으로 가져갔다. “먹기 싫으면 말던가.” 그 말을 들은 여성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이 놈이...” 그때 청년이 다시 한 번 여성을 제지했다. “소피아. 적당히 해. 언제까지 히스테리 부릴 거야?” 잔뜩 독이 오른 여성과 달리 청년은 편안한 얼굴로 김성철 옆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이거 한 번 맛봐도 되겠습니까?” 김성철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국자 안의 내용물을 작은 그릇에 담아 청년에게 내밀었다. 그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릇 안에 섞인 내용물을 한동안 응시했다. “식으면 맛이 없소.” 김성철이 말했다. “오라버니. 그런 거 먹으면 안 돼.” 여성이 만류했지만 그 청년은 씨익 웃고는 김성철의 요리를 단숨에 들이켰다. 요리를 먹는다기보다는 먹기 싫은 무언가를 억지로 삼키는 듯한 자세였다. 젊은이 특유의 객기라고는 할까나. 입 안에 마계 부대찌개를 넣고 몇 번 씹던 사내의 얼굴이 일순 돌처럼 경직됐다. 그 장면을 본 젊은 여성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오라버니!” 그 순간 사내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 김성철은 팔짱을 끼고 흐뭇한 얼굴로 사내의 변화를 관찰했다. ‘내가 만든 것이다. 맛이 없을 리가 없지.’ 오묘한 표정을 짓던 청년은 기쁜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맛있어!” 분위기가 변했다. ======================================= 29. 구세 십자군 (3) “정말 맛있어! 소피아. 너도 한 번 먹어 봐. 이 검은 덩어리가 입에서 살살 녹는데 천하진미가 따로 없어!” “거짓말.” “진짜야. 정말 맛있다니까.” 오누이의 대화를 들으며 김성철은 말없이 술잔을 들이켰다. 상처 받았던 고급 요리인의 자부심이 회복되는 걸 느끼면서 말이다. 약간의 소요가 끝난 후, 그 청년은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정말 맛있었습니다. 34호님. 이 오지에서 뜻하지도 않은 진미를 대접받았군요. 저는 일리야 브레가스입니다.” 그 이름을 들은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브레가스?’ 한 사내의 얼굴이 눈앞에 그린 듯 떠올랐다. 대륙육걸 변경백 마르틴 브레가스. 마계 최전선을 관장하는 그 사내와 성이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청년이 그 마르틴 브레가스의 친척일 가능성은 드물다. 마계 최전선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마르틴 브레가스가 자신의 친인척을 생환율 10% 미만의 구세 십자군에 보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김성철의 침묵 속에서 일리야 브레가스와 소피아 브레가스는 자리를 떠났다. 김성철은 남은 음식을 마저 해치운 뒤, 곧장 고참병이 모이는 군의관의 천막으로 향했다. 군의관의 천막을 구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천막들이지만 군의관의 천막엔 전사한 병사들의 번호표를 덕지덕지 붙어 놓여 놓아 구분하기 편했다. 천막으로 들어가는 중 김성철은 번호표 중 700번대 번호가 있는 걸 보고 과거 형벌 부대의 규모가 지금보다 훨씬 컸음을 짐작했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한창 도박판을 벌이는 고참병들이 보였다. 무료한 형벌 부대에서 주사위 놀이는 가장 인기 있는 놀이 중 하나였다. “하하! 미안하지만 오늘 내 감은 장난이 아니라고!” 김성철은 주사위 놀이에 열중한 드워프 뒤에 서서 그가 주사위를 굴리는 것을 보았다. 결과는 꽝. “이런 빌어먹을!” 0번 번호를 단 형벌 부대 최고참 아카드는 껄껄 웃으며 자신 몫의 식료품을 상대방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즉시 뒤를 돌아 김성철을 올려다봤다. “무슨 일인가? 연금술사.”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아카드는 부대 최고참에다 넉살 좋은 성격을 지니고 있어 부대에 드나드는 보급대, 상인, 특히 드워프 공병대와 두루 친했다. 덕분에 그에게선 형벌 부대 안에서 들을 수 없는 생생한 바깥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다. 김성철은 미리 만들어둔 숙취 해소제를 아카드에게 건넸다. “내가 원했던 게 바로 이거야.” 아카드는 크게 기뻐하며 김성철에게 바톤을 넘겼다. “그래 궁금한 게 뭔가?” 김성철은 질문을 함에 있어서 지나치게 민감하거나 비밀스러운 주제는 피해갔다.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정보원의 신뢰를 얻고 관계를 원만하게 지속할 수 있는 대화의 기술이다. 김성철은 늘 묻는 최근 마계 최전선의 정세와 함께 새롭게 형벌 부대로 온 구세 십자군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요구했다. 아카드는 숙취 해소제를 단숨에 들이키며 입을 열었다. “으음. 전선의 상황이야 별로 다른 게 없어. 겨울이 찾아왔건만 악마군은 여전히 철혈기사단의 담당 구역 내에 주둔하고 있고 철혈기사단은 이동요새를 총동원하여 악마군을 틀어막고 있지. 힘든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야. 뭐, 우리하고는 관계없지만.” 뒤이어 아카드는 구세 십자군에 대해 이야기했다. “강가스 아론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걱정 말게. 이번 구세 십자군의 단장이 누군지 아나? 바로 일리야 브레가스야. 마계 최전선의 총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변경백 마르틴 브레가스의 맏아들이라고 하더군!” 김성철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가까운 친척을 보낸 것만 해도 놀라운데 자신의 맏아들을 보내다니. ‘마르틴 브레가스는 그렇게까지 사명감이 투철한 인물은 아닌데.’ 마르틴 브레가스와는 여러 번 전장에서 함께 싸운 적이 있었다. 멀게는 15년 전 세상을 경천동지로 몰아넣었던 암흑룡 그로티우스의 준동에서부터 가까이는 8년 전 마왕 토벌전 까지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다. 그 치열한 전투 속에서 김성철이 기억하는 마르틴 브레가스는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사내였다. 그가 마계최전선의 변경백을 맡은 이유는 남들에게 간섭받지 않고 되레 큰소리를 치기 위함이었다. 그런 사내가 자살 공격대와 다를 바 없는 구세 십자군에 자신의 맏아들과 딸을 보낸다? 상식으론 납득이 가지 않는다. 무언가 내막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나?” 아카드가 말을 걸어왔다. 그는 대단히 기분이 좋아보였다. 평소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긴 했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소?” 김성철이 묻자 아카드는 껄껄 웃으며 술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렇고말고! 마르틴 브레가스의 아드님 덕분에 살아서 이 빌어먹을 형벌 부대를 나갈 수 있게 됐지!”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호오. 이번이 마지막이오?” 김성철의 물음에 아카드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9번이나 사지를 왔다갔어. 한 번은 마계 중심부까지 간 적도 있고. 이제는 마음의 고향인 폭풍전선으로 돌아가 검은 바위산을 지킬 때가 된 거지.” 형벌 부대에 들어가는 건 쉽지만 졸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인품이 훌륭하고 지도력이 뛰어난 부대장을 만난다면 그나마 생존 확률이 늘어나지만 강가스 아론 같은 무모하고 무능한 상관을 만나면 살아서 형벌 부대를 나올 수 없다. 그 악조건 속에서 9번이나 버텼다는 것 자체가 아카드가 보통 전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아무리 돌 머리라고 해도 변경백의 맏아들이 있으니 늘 하던 짓거리를 못하겠지.” “늘 하던 짓거리라....” 김성철이 말끝을 흐리며 여운을 두자 아카드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본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긴 뭐야. 부하를 사지로 내모는 짓거리지. 그 녀석 별명은 돌 머리지만 알면 알수록 돌 머리보다는 너구리 같은 인간이야.” 김성철도 알고 있었다. 강가스 아론이 교활하고 비열한 인간이라는 걸. 위험하고 무모한 임무를 벌여 수많은 부하를 희생시켜 내세울 수 있는 전과를 만들어낸 후 그 공을 전부 자신이 차지한다. 부하 입장으로선 무능한 돌 머리에 지나지 않지만 상사의 입장으론 처치 불가능한 능구렁이 그 자체일 것이다. “…아무래도 돌 머리 밑에서 형벌 부대를 졸업하는 건 내가 최초가 될 것 같군. 솔직히 위험한 것만 빼면 여기도 아주 나쁜 곳은 아니지만 ” 아카드는 한참 동안이나 자신의 고향의 아름다움과 드워프 전사의 강인함에 대해 떠들었다. 긴 이야기가 끝난 후 아카드는 뭔가 떠올린 듯 눈을 번쩍 뜨고는 김성철에게 뭔가 내밀었다. “내 정신 좀 봐. 데커드에게 받은 편지가 있는데 전달해주는 걸 깜빡했군. 조심해서 읽으라고. 검열 받지 않은 녀석이니까.” 김성철은 목례를 표한 후 편지를 읽었다. 별 다른 내용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병상에 누워 있고 가족을 생각하고 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편지 말미엔 데커드가 마계 최전선에서 찾아낸 마법과 관련된 퀘스트 목록이 깨알 같이 기재되어 있었다. 데커드 다운 배려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 퀘스트들은 더 이상 김성철에겐 쓸모가 없었다. [ 당신의 마력이 지나치게 높습니다. ] 시험 삼아 시도한 퀘스트의 결과가 모든 걸 말해준다. 김성철은 더 이상 평범한 수준의 마법사가 아니고 따라서 평범한 퀘스트로는 능력치를 올릴 수가 없다. 칠영웅급, 최소한 알투지우스급 정도의 마법사가 만들어낸 퀘스트는 되어야 김성철의 성장에 보탬이 될 것이다. “…….” 김성철은 미련 없이 데커드의 퀘스트를 포기했다. ‘일단은 겨울이 가기 전까진 이곳에 머물며 도감이나 채워야겠군.’ 할 만한 퀘스트는 전부 수료했다. 남은 건 그동안 미뤄두었던 창조술사와 관련된 퀘스트다. 베르텔기아의 말에 의하면 지금 창조술사로서 김성철에게 필요한 것은 경험이라고 한다. 연금술사에게 있어 할 수 있는 것과 해본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의 차이가 존재하는데 따라서 높은 자리를 원한다면 무조건 다양하게 그리고 많이 만들라는 것이다. “당신이 만드는 모든 연금 아이템은 내게 기록돼. 현재까지 당신이 만들어낸 것은 내 도감의 40% 정도. 이 세상 기준으로 당신은 평범한 연금술사를 아득히 뛰어넘었지만 내 기준으로 볼 땐 한참 미달이야. 적어도 도감의 절반 정도는 채워야 진짜배기 연금술사라고 할 수 있지!”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만 하나만은 확실히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다. 도감의 일정 부분 이상을 채우면 능력치 전이가 일어난다는 것. 평범한 퀘스트로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김성철에겐 대단히 중요한 기회다. 김성철은 오전에 실패했던 정수 항아리의 제작에 다시 도전했다. 결과는 성공. 김성철은 정수 항아리를 천막 구석에 놓고 인근에서 떠온 바닷물로 성능을 시험했다. 밝은 회색빛을 띤 정수 항아리의 색깔이 차츰 흐려지면서 항아리 안의 바닷물은 먹을 수 있는 깨끗한 물로 바뀌었다. 김성철은 컵으로 항아리 안의 물을 한 잔 떠 음미했다. “아주 좋은 물맛은 아니지만 마실 수는 있겠군.” 그러자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가 즉각 반발했다. “천만의 만만의 말씀! S등급 정수 항아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맛있는 물을 얻을 수 있을걸?” “그 S등급이란 거, 여간해서 만들기 어렵던데.” “기본적으로 재료가 좋아야 해. 재료의 품질이 곧 연금 아이템의 등급으로 연결되거든. 하지만 좋은 재료는 구하기 어렵지!” “늘 느끼는 바지만 연금술이란 요리와 비슷하군.” 요리도 그렇다. 맛없는 재료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다고 하나 한계가 있다. 최상의 요리는 최상의 식재가 있어야 가능한 법이니. 고급 요리인과 연금술사.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클래스지만 김성철은 두 직업이 동전의 양면처럼 밀접한 관계는 아닌가 하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휴식을 어느 정도 마친 김성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연금 가마 앞으로 향했다. “베르텔기아. 다음 레시피를.” “어머, 오늘은 두 개나 만들려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이왕할거면 빨리 하고 치우는 게 낫지. 마력도 아직 넉넉한 상태고.” 지하왕국에서 얻은 마력 덕에 김성철은 보다 많은 마나를 몸에 지닐 수 있게 됐고 따라서 보다 많은 연금 아이템을 연성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함께 얻은 직관력은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상급 연금 아이템 레시피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마력과 직관력의 상승이 연금술의 향상으로 이어지고 그 연금술의 향상이 다시 마력과 직관력의 상승에 기여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김성철은 서두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여유를 부리지도 않았다. 지금이 정체기라고는 하나 하루에 할 수 있는 할당량은 전부 채우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정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베르텔기아의 연금도감! 다음 아이템은....” 베르텔기아가 우쭐거리며 페이지를 펼치려고 할 때였다. 바깥에서 날카로운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형벌 부대의 소집 나팔 소리다. “아무래도 새로운 연성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군.”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코트 주머니 안에 집어넣고는 천막을 나섰다. “들어라.” 부대를 소집한 사람은 다름 아닌 강가스 아론이었다. 김성철은 그의 옆에 낯익은 얼굴이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제13차 구세 십자군의 단장이자 대륙육걸 마르틴 브레가스의 맏아들인 일리야 브레가스가 강가스 아론 뒤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고 그 옆을 그의 누이인 소피아 브레가스가 호위하듯 지키고 서 있었다. 형벌 부대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강가스 아론은 큰 목소리로 말했다. “3일 뒤, 우리 형벌 부대는 이 세상을 구하고자 대륙 각지에서 모여든 영웅들로 구성된 구세 십자군을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마계 입구까지 호위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번 임무는 마계 최전선의 변경백 마르틴 브레가스님께서 직접 지시한 사항으로 작전에 참가하는 부대원에겐 3회의 임무를 수료한 것으로....” 거기까지 듣던 아카드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투덜거렸다. “아니, 이런 게 어디 있어. 임무 한 번이니까 한 번으로 퉁쳐야지!” 반면 그의 단짝인 엘프 궁수 파간은 즐거운 표정이었다. “우리 사이좋게 여기서 나가겠군요? 드워프 양반.” “이건 불공평해! 제법 투덜거리고 있지만 아카드는 즐거워보였고 파간도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데커드 자식. 이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마계 입구까지 여정은 험난하긴 하지만 아주 어려운 건 아니고 게다가 시기도 마족의 활동이 위축되는 겨울이다. 형벌 부대의 고참들은 이번 임무를 모처럼 주어지는 횡재 정도로 여겼다. “…….” 일리야 브레가스는 그런 병사들을 무표정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앞에선 강가스 아론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뭐라고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귀에 들어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오라버니. 정말로 괜찮겠어?”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소피아 브레가스가 일리야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만약 마계로 가서 실패한다면 그거야말로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야.” 그녀의 얼굴엔 짙은 근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일리야 브레가스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어쩔 수 없다. 소피아.” 그의 눈은 북쪽, 칼날처럼 솟아오른 산맥 너머에 희미하게 자리잡은 붉게 물든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계. 악마들의 땅. 인간들에겐 죽음과 동의어로 여겨지는 금단의 영역이지만 일리야 브레가스의 눈동자에 비친 마계는 유일한 기회 그 자체였다. 그의 섬세한 손은 망토 안에 숨겨진 핏빛으로 정장된 불길한 책을 쓰다듬고 있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이런 방법을 쓰지 않더라도.” 소피아 브레가스는 여전히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일리야 브레가스에겐 한점 흐트러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상대방은 대륙육걸이라 불리는 자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소피아.” 그는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악마들의 퀘스트만이 우리 남매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 30. 마계 출정 (1) 출정 당일.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쾌청했다. 형벌 부대 300여명, 구세 십자군 300여명. 합해서 600명에 이르는 군세가 밝게 내리쬐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마계를 향한 여정 길에 올랐다. 마계의 입구까지는 도보로 3일이 걸린다. 처음 맞닥뜨리는 지형은 폭풍 전선의 관할구역인 험준한 산악지대다. 매복하기 좋은 지형이 도처에 널려 있어 강가스 아론은 특별히 정찰에 신경을 썼다. 김성철도 몇 번 정찰을 다녀오긴 했지만 우려했던 악마들의 매복은 없었다. 혹 있다하더라도 김성철의 손에 박살이 나서 없는 것으로 보고가 됐겠지만 말이다. 신중한 행군 끝에 산악지대의 끝자락에 다다를 즈음 태양은 어느새 서산에 걸쳐 있었다. 악마들이 좋아하는 어둠 속에서 행동하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므로 강가스 아론은 즉각 숙영을 명했다. “…….” 누구보다 빠르게 숙영 준비를 마친 김성철은 영내를 벗어나 산악지대 인근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석양을 받아 붉게 물든 설원 위엔 아무것도 없는 걸로 보였지만 날카로운 김성철의 시선은 붉은 눈 위에 살포시 고개를 든 잎사귀 하나를 발견했다. 김성철은 눈을 털어내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풀을 채취했다. 냄새를 맡자 풀에 대한 정보가 눈앞에 떠오른다. < 맹인의 풀 > 레벨 : 1 등급 : A 속성 : 목(木) 효과 : 없음 비고 : 길가에 흔히 볼 수 있는 풀이지만 온건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 상극이 되는 연금재료의 성질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계 곳곳에 널린 맹인의 풀이다. 김성철도 수도 없이 채취를 한 흔해빠진 녀석이다. 하지만 이곳의 맹인의 풀이 다른 곳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등급이다. 등급이 무려 A등급이다. “호오.” “어때? 내 말대로지? 맹인의 풀은 어디서나 잘 자라는 녀석이지만 환경이 거칠면 거칠수록 보다 효능이 높은 녀석으로 자라나는 법이거든!” 김성철은 채취한 맹인의 풀을 등에 진 마대 자루 안에 던져 놓고 다른 대상을 찾았다. 또 다른 맹인의 풀이 눈 더미 속에 숨겨져 있는 게 포착됐다. 김성철의 우악스런 손이 맹인의 풀을 잡아 뜯었다. “이건.”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번에 채취한 맹인의 풀의 등급은 최고 등급인 S급이었다. 베르텔기아가 책장을 펄럭거리며 말했다. “최상품의 중화제를 만들 수 있겠는걸? 최상품의 중화제는 단순히 상극이 되는 연금 재료를 중화시키는 것만 아니라 아이템의 등급 자체에도 관여하거든.” “나쁘지 않군.” 하루에 1종 이상의 연금아이템을 만들고 있긴 하지만 그 등급은 대부분 B이하로 높다고 할 수 없었다. 고급 요리인의 자부심이라고 할까나. 한 번 쯤은 A등급 이상의 아이템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다. 그러던 찰나에 이루어진 마계 출정은 좋은 연금 재료 채취의 기회였다. 매일 채취에 나서고 있긴 하지만 항상 시간에 쫓겨 느긋하게 고등급의 연금재료를 채취할 여유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A등급 이상의 맹인의 풀을 주워 담고 있자니 눈 더미 저편에서 무언가 빠르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커다란 뿔을 지니고 육중한 덩치를 지닌 사슴이다. 평범한 사슴이지만 마계에 인접한 곳에서 자란 녀석이라 가히 영물이라 할 정도로 힘이 세고 생명력도 끈질긴 녀석으로 고기 맛도 일품이다. 사슴을 본 김성철의 입안에 절로 침이 고이던 그 순간 그의 눈에 무언가 포착됐다. 사슴의 엉덩이에 박힌 화살이다. 붉은 피가 상처 자국에서 뚝뚝 떨어져 하얀 눈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누군가의 사냥감인가?’ 곧 설산 너머에서 사냥꾼이 나타났다. 사냥꾼의 정체는 고급스런 외투를 걸친 호리호리한 체형의 여성이었는데 김성철이 아는 얼굴이었다. “저 녀석. 일리야 브레가스의 동생 아닌가. 이름이 뭐였지?”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김성철보다 기억력이 좋고 그걸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베르텔기아는 즉각 활기 찬 목소리로 말했다. “소피아!” “그래 소피아 브레가스였지.” 김성철은 여자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한다.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소피아는 엘프들이 쓰는 요정목으로 만든 활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대단히 빠른 속도로 질주하며 사냥감을 추적, 시위를 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에서 쏘아져 나온 화살은 일직선으로 날아가 사슴의 목을 한 번에 궤 뚫었다. 날카롭고 군더더기 없는 솜씨였다. “후우.” 소피아 브레가스는 사슴이 쓰러진 걸 보고 활을 등에 걸치며 사슴 쪽으로 다가갔다. ‘이걸로 오늘 저녁엔 괜찮은 식사를 오라버니에게 대접할 수 있겠어.’ 무표정한 소피아의 얼굴에 희미한 홍조가 떠올랐다. 그런데 사슴 쪽엔 이미 손님이 한 명 서 있었다. 다름 아닌 김성철이었다. 무표정하던 소피아의 얼굴에 적개심이 떠올랐다. “아니, 당신. 여기서 뭐하는 거지?” 김성철은 마대에 가득 담긴 맹인의 풀을 보여주며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재료 채취.” “아.” 그녀는 살짝 입을 벌리고는 사슴 쪽으로 들고가 한 번에 큰 사슴을 들쳐 엎었다. 1톤은 족히 넘는 육중한 사슴이 소피아의 호리호리한 몸 위에 얹어졌다. 그야말로 대단한 힘이다. 하지만 사슴의 거대한 크기와 그에 따른 무게중심의 불균형은 무시 못 할 것이었다. 사슴을 들어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소피아의 균형이 무너졌고 그녀는 사슴을 다시 눈 위에 내려놓았다. ‘영혼 창고에 넣어갈까. 아니, 이렇게 큰 건 안 들어가. 게다가 거기 넣었다가는 십중팔구 바싹 말라버릴 테니까.’ 소피아 브레가스는 심호흡을 하며 사슴의 시체를 내려 보며 사슴의 일부분을 잘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담담한 목소리가 그녀 옆에서 울려 퍼졌다. “미안한데 고기 좀 나눠 받을 수 있을까?” 김성철이었다. 소피아 브레가스는 곁눈질로 허름한 옷을 입은 형벌 부대원을 흘겨보며 코웃음 쳤다. “죽고 싶다는 말을 돌려 말할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이었다. 형벌 부대의 우두머리인 강가스 아론조차 브레가스 남매 앞엔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행동하는데 일개 죄수 따위가 고개 빳빳이 들고 건방지게 말하는 것 자체가. 마계 최전선에서 제일 가는 명문인 브레가스 가의 사람들 앞에서 저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둘 중 하나다. 개념이 없거나 아니면 겁이 없거나. 어느 쪽이든 소피아 브레가스에겐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원한다면 고기 손질 하는데 도움을 주지.” 김성철이 다시 말했다. 비록 마음에 안 드는 놈이긴 하지만 그 한마디는 소피아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충분했다. 왜냐하면 소피아 브레가스는 사냥은 할 줄 알지만 사냥감을 손질하는 법은 몰랐기 때문이다. 사냥감 손질은 보통 하인들에게 맡기는데 지역이 지역인지라 오늘은 데리고 오지 않았다. 그런 찰나에 김성철이 한 제안은 제법 고려할만한 것이었다. “좋은 부위는 못 줘.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건 머리와 다리, 그리고 엉덩이 정도?” 그녀는 차가운 눈동자로 김성철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나 같이 맛이 없거나 질겨 인기가 없는 부위다. 김성철은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그거 까진 필요 없어. 내장이면 충분하다.” 소피아는 피식 웃었다. ‘입맛 하고는.’ 거위의 간이라면 모를까 통상 내장은 천민들이나 먹는 음식들이다. 사냥개에게나 던져주겠거니 생각한 부위를 달라고 하니 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좋아. 그런 거라면 마음대로 가져가. 대신 여기서 사슴을 미리 손질 해놔. 나중에 사람을 보낼 테니까.” “내가 직접 가지고 가지. 무거운 것도 아니니.” “아 그래? 그럼 직접 들고 와도 무방하고. 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 하지만 나중에 검사해서 누락된 부위가 있다면 엄벌을 각오해야 할 거야.” 엄포를 늘어놓은 뒤 소피아는 빠른 걸음으로 설원 저편으로 사라졌다. “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네.”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베르텔기아가 불쑥 주머니 밖으로 튀어나오며 입을 열었다. “…….” 언제나 그렇듯 김성철은 평범한 자의 행동엔 개의치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직 싸늘하게 식어가는 사냥감에 쏠려 있었다. “이 지역에선 제법 귀한 녀석인데 말이야. 운 좋게 구했군.” 척박한 땅이다 보니 풀도 나무도 드물고 따라서 사냥감도 드물다. 이 정도 크기의 사슴은 일주일 내내 찾아다녀도 한 마리 볼까말까 한 녀석이다.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인간제국의 보검을 꺼내 사슴의 배를 쭉 갈랐다. 핏물과 함께 안에 가득 찬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김성철은 그중 선명한 붉은 빛이 도는 내장을 높이 들어 올려 표면을 관찰했다. “아주 훌륭한 간이군. 최상품이야.” “으... 간 같은 걸 먹어? 난 그런 거 못 먹는데. 살코기라면 모를까.” 베르텔기아는 김성철 바로 옆에서 내장을 관찰하며 말했다. “꼬마 입맛이군.” “난 당신처럼 먹는데 목숨 걸지 않거든!” “이게 얼마나 맛있는지는 먹어 본 사람만이 알지. 게다가 이 정도의 훌륭한 간이라면.” “흐음.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연금 재료 등급으로 치면 어느 정도지?” “S급.”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고는 생생한 간을 눈 더미 아래 파묻어 놓았다. 그리고 축 늘어진 사슴을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고는 가까이 있는 커다란 침엽수를 향해 집어 던졌다. 1톤은 족히 넘는 거대한 사슴은 가벼운 공처럼 날아가 아름드리 침엽수에 부딪쳤고 뒤이어 날아온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사슴을 궤 뚫고 침엽수 안으로 파고들며 사슴의 시체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히이...” 베르텔기아가 질겁을 했다. 자주 보는 광경이지만 오늘 조리 장면은 평소보다 격렬했다. 김성철은 보검으로 멋진 뿔이 달린 사슴의 목을 베어내 구석에 처박아 둔 뒤 능숙한 손놀림으로 가죽을 벗겼다. 쫘악! 쫙! 안 그래도 강한 힘에 요령까지 더해지자 사슴의 가죽은 마치 바나나 껍질처럼 가볍게 벗겨졌다. 김성철은 벗겨낸 사슴 가죽을 잘라낸 목 위에 던지고는 사슴의 동맥 부분을 잘라 피를 뺐다. 피가 빠지는 자투리 시간엔 맹인의 풀 채취를 실시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베르텔기아가 한마디 꺼냈다. “다른 건 몰라도 부지런한 거 하나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네.” “당연하지.” 김성철은 벗겨 낸 가죽을 마대에 담아 영혼 창고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어느 정도 피가 빠지자 김성철은 사슴 동체를 들쳐 업고 숙영지로 돌아갔다. 십자군 단장의 막사는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김성철이 사슴을 들쳐 업고 막사 앞으로 가자 검을 든 젊은 십자군 단원이 김성철을 막아섰다. “누구냐?” “고기를 배달하러 왔소.” 그때 천막 안에서 소피아 브레가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기다려. 내가 나갈게.” 천막 안에서 소피아 브레가스가 옅은 금발을 쓸어올리며 나타났다. 김성철은 그녀를 보자마자 사슴을 천막 아래에 내려놓았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슴고기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힘 좀 쓰는 거 같네?” “…….” 소피아 브레가스는 김성철이 가지고 온 사슴을 유심히 살피며 혹시라도 김성철이 빼돌린 부위가 있지는 않나 확인했다. 배를 갈라 내장을 빼낸 것 외엔 아무 문제없다. 가장 중요한 꼬리고기도 무사하고 다른 살점에도 도려낸 자국은 없다. 한참을 살피던 소피아 브레가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고했어. 들어가 봐.” 그때 막사 안에서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기, 소피아. 모처럼 손님이 왔는데 그냥 돌려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일리야 브레가스의 목소리다. 소피아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쳇! 들어버렸나.” “…….” 김성철은 사양하지 않고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소피아가 다급히 그를 제지하려고 할 때 이미 김성철은 막사 안에 절반 쯤 들어간 뒤였다. 천막 안은 넓고 아늑했다. 중앙엔 유목민 식으로 불을 피웠고 그 주위로 고급스런 카펫과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브레가스 가문다운 호사스런 풍경이었다. “또 만나게 됐군요. 34호님.” 일리야는 어째서인지 김성철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김성철은 목례를 하며 질문을 던졌다. “내게 무슨 용무요?” 이에 일리야 브레가스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딱히 없어요. 전에 당신에게 대접 받은 요리가 너무 맛있어서 기억에 남았거든요. 특히, 그 입에 살살 녹는 검은 덩어리의 풍미는 아직까지 혀끝에 감돌고 있답니다.” 김성철은 말없이 그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인면수 선지를 이야기 하는 건가? 맛을 아는 놈이군.’ 일리야 브레가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최근 입맛이 없어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적이 없거든요. 자랑은 아니지만 트로윈에 있는 저택엔 보기 드문 요리인 클래스를 지닌 주방장이 있었거든요.” “요리인 클래스?” “네. 들어보지 못한 클래스일겁니다. 미각의 신의 가호를 받은 사람들이죠. 다른 건 몰라도 요리에 있어서만큼은 경지에 이른 사람들입니다. 아무튼 그런 사람들의 요리를 먹다가 바깥에 나오니 음식도 그렇고 풍토도 그렇고 영 입맛이 없어지더군요. 그런 찰나에 그쪽의 요리를 먹고 어느 정도 입맛을 찾게 된 겁니다.” “그렇군요.” 김치의 신 맛은 식욕을 되찾는데 도움을 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전에 대접 받은 것도 있으니 오늘은 이쪽에서 한 번 대접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제 여동생인 소피아가 솜씨를 한 번 발휘해보겠다고 하더군요. 괜찮으시다면 함께 드는 건 어떻겠습니까?” 갑작스런 제의다. 김성철은 혹 일리야 브레가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음모를 꾸미는 건 아닌가 의심했다. ‘어떤 음모의 기미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설마, 이것들이 내 정체를 알아차린 건가.’ 김성철은 호흡을 멈추고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특별히 위협이 될 만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라버니.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지? 저 사람은 일개 죄수일 뿐이잖아.” 김성철이 날카롭게 주변을 경계하고 있을 때 옆에 선 소피아 브레가스의 볼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야 브레가스는 소탈하게 웃으며 누이를 달랬다. “어머니가 그랬잖아. 아무리 미천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베풀면 돌아오는 게 있다고. 전에 내가 요리를 대접받았고 덕분에 입맛도 찾았잖아?” 소피아 브레가스는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오빠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운 좋은 줄 알아! 죄수!” 그녀는 김성철에게 날선 말을 건넨 후 천막바깥으로 나갔다. “제 동생이 조금 모난 점은 있지만 알고 보면 착한 아이입니다.” 일리야 브레가스는 눈웃음을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직까지 김성철은 일리야 브레가스의 저의를 파악하지 못했다. ‘대체. 이 녀석. 왜 날 여기 붙잡아두는 거지.’ 주변에 매복도 없고 그렇다고 본인이 아주 강한 것도 아니다. 무슨 배짱으로 김성철을 여기다 묶어두는 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김성철로서는 모처럼 맛보는 깊은 심계였다. 그 의도조차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안개에 쌓인 심계는 오직 인간제국의 황제 정도나 구사할 수 있는 묘기였다. 하지만 김성철은 차분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그에겐 어떤 간사하고 교묘한 흉계도 깨부수는 신적인 힘이 있으니까. 입을 다물고 시간이 흘러가기를 내버려뒀다. 잠시 후, 소피아 브레가스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뒤엔 하인들이 쟁반에 음식을 가지고 따라 들어왔다. 그 요리를 본 순간 김성철의 눈동자에 경악에 떠올랐다. ‘이.. 이것은...?!’ 요리라기보다는 숯 검댕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김성철은 떨리는 손으로 포크를 잡고 그것을 입으로 가지고 갔다. “…?!” 김성철의 눈에 전보다 더욱 커다란 경악이 스치고 지나갔다. 요리인의 기본 스킬인 미각판정이 발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건 요리가 아니다!’ ======================================= 30. 마계 출정 (2) 일리야 브레가스는 인자한 얼굴로 눈웃음을 지으며 그 요리가 아닌 무언가를 꾸역꾸역 먹고 있었다. 소피아 브레가스가 매의 눈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성철은 일리야가 검은 숯덩이를 입안에 넣을 때마다 눈꺼풀은 미약하게 떨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초인적인 인내심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했다. 절반 정도 음식이 아닌 무언가를 먹어치운 일리야는 김성철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맛있군요. 그런데 뭔가 색다른 것도 먹고 싶은 기분입니다. 손님으로 초대한 분에게 이런 말 드리기 정말 죄송합니다만 그쪽의 요리를 다시 한 번 맛 볼 수 있을까요?” 그 말을 듣고 서야 김성철은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녀석. 사람의 음식이 먹고 싶어서 날 붙잡아 둔 모양이군.’ 그렇다면 좋다. 김성철은 한 입 먹고 입도 안 댄 음식을 내버려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또 그 쉰내 나는 빨간 음식 만들려는 건 아니겠지? 말해두겠는데 난 철혈기사단 식 음식은 딱 질색이거든.” 막사를 나서려고 하니 소피아 브레가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화살처럼 등짝에 꽂힌다. 김성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접시를 응시했다. 그녀의 접시 위에 담긴 숯덩이는 처음 서빙 될 때부터 하나도 줄어들지 않았다. ‘이 여자...’ 할 말은 많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진정한 요리인은 말이 아니라 실력으로 말하는 법이니. 김성철은 바로 바깥으로 막사 밖에 놓아둔 마대 자루에서 신선한 간을 꺼냈다. ‘이게 좋겠군.’ 주방은 막사 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간이주방이라고 하나 권세 높은 귀족의 것 답게 갖가지 향신료와 야채, 포도주 따위가 구비되어 있었다. 김성철은 그중 하나를 집어 들며 불을 지키는 하인에게 물었다. “이거 써도 되나?” 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와인의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상급 와인은 아니지만 싸구려 와인도 아니다. 요리에 쓰기 적합하다. 김성철은 팬에 살짝 버터를 두른 뒤 양파와 토마토를 섞어 볶기 시작했다. 양파와 토마토가 어느 정도 볶아지자 영혼창고에서 예전에 만들어 놓은 우스터소스를 더하고 소스가 어느 정도 졸아들 무렵 적포도주를 아낌없이 부었다. 심드렁하던 표정으로 불을 지키던 하인의 눈길이 김성철의 팬으로 저절로 향한다. 뭐라 말할 수 없는 향긋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김성철은 레드와인이 졸을 동안 곁들일 다른 요리재료를 찾았다. 감자와 쌀이 보였다. 감자는 채 썰고 쌀은 으깨서 가루로 만들었다. 쿵! 쿵! 쌀가루를 만드는 건 단순히 손으로 움켜잡고 으스러뜨리는 것으로 충분했다. 하인의 눈이 휘둥그레 커진다. “힘이 조금 강하신 모양입니다?” “…….” 김성철은 또 다른 팬 기름을 잔뜩 붓고 쌀가루를 입힌 채 썬 감자전을 튀겨내기 시작했다. 감자가 익을 동안 레드와인 소스가 어느 정도 졸아들며 향긋한 냄새를 낸다. 김성철은 그 팬을 불 가장자리에 놓고 이제 대망의 간을 조리하기 시작했다. 강불에 강하게 구워내 표면을 익힌 후에 그 위에 졸인 레드와인소스를 부어 졸이는 게 포인트다. “설탕 있나?” 김성철이 불쑥 하인에게 말했다. “네. 저기 있습니다.” “고마워. 그나저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당신네 아가씨가 좋아하는 음식이 뭐지?” “거 뭐라더라. 이계의 음식이라고 하던데. 대구살에 밀가루를 입혀 감자와 눅눅하게 튀겨낸 걸 좋아하십니다.” “영국 맛이군.” 김성철은 싸늘하게 말한 뒤 요리에 전념했다. 신선한 사슴의 간이 달짝지근한 레드와인 소스를 흠뻑 머금을 때까진 시간이 조금 걸린다. 김성철은 간단한 샐러드를 추가로 만든 뒤 접시에 플레이팅을 시작했다. 쌀가루를 입힌 감자전과 샐러드. 그리고 곧 완성될 와인소스를 입힌 사슴 간요리. 약불에 진득하게 졸이고 있자니 사방 천지가 고요하다. “요리 실력이 대단하신가봅니다?” 하인이 불쑥 말을 걸었다. “당연하지. 나는...” 김성철은 희미하게 웃으며 영혼창고에서 브로치 하나를 꺼냈다. 포크와 나이프를 든 포효하는 앙증맞은 용을 형상화한 그 브로치는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건 뭡니까?” 하인이 물었다. ‘요리인의 증표를 모르는 모양이군.’ 김성철이 꺼내든 것은 요리인 클래스를 얻은 자만이 몸에 지닐 수 있는 요리인의 증표. 다른 이에게 양도할 수 없고 오직 자신에게만 귀속되는 아이템으로 그 자체로는 아무 능력도 없지만 요리인 클래스에겐 자신의 얼굴만큼이나 소중한 아이템이다. 그 증표를 통해 자신의 요리능력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요리인의 경우엔 무쇠 같은 빛깔을 띠지만 실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브로치는 영롱한 빛깔을 띠게 된다. 고급 요리인인 김성철의 경우엔 황금빛. 자부심을 가질만한 레벨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브로치를 자신의 상의 주머니 위에 매달았다. “아야!” 그런데 브로치를 달던 중 주머니 안에 있던 베르텔기아를 바늘로 찌른 모양이다. “무.. 무슨 소리지?” 그 비명을 들은 하인이 벌떡 일어서며 두리번거렸다. “설마, 쥐새낀가?” 하인은 빗자루를 들고 자리를 떠났다. “아프잖아!” 하인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베르텔기아가 격렬히 항의했다. “…….” 김성철은 사과하지 않았다. 대신 묵묵히 팬을 저으며 요리에 전념했다. “으이고 정말! 양심하고는.” 팬 위의 소스는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졸아들고 있었다. 김성철은 서두르지 않고 요리를 지켜보며 마무리에 만전을 기했다. 그렇게 조용한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막사 쪽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리를 준비하면서 철혈기사단의 전선이 완전히 붕괴됐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들이 자랑하는 기동요새 두 채가 완전히 파괴됐고 마을들이 유린당했데.” 소피아 브레가스의 목소리다. 김성철은 팬을 살살 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철혈기사단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병참을 지탱하는 마을까지 함락될 지경에 이르다니. 그야말로 풍전등화로군.’ 이상한 건 마르틴 브레가스의 대응이었다. 상식적으로 전선 한 곳에 구멍이 나면 다른 전선에서 여유병력을 끌어 모아 막는 게 인지상정인데 한가하게 구세 십자군이나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차라리 구세 십자군을 철혈기사단 전선에 투입한다면 모를까. “우리 그냥 돌아가면 안 될까? 난 정직하게 말해서 그 마법사. 마음에 들지 않아.” 소피아 브레가스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뒤이어 낮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김성철은 정신을 집중하여 그 소리를 해독할 수 있었다. 일리야 브레가스의 음성이었다. “…우리에게 남은 기회는 얼마 없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이대로 돌아갔다가는 그 사람 생각대로 돌아갈 뿐이야.” “하지만...” “그 마법사, 나도 솔직히 별로라고 생각해. 하지만 명심해. 지금 우리 남매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마계에 있다는 사실을.” 그들의 대화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소스가 전부 졸여졌다. 희미한 탄내가 김성철의 의식을 일깨웠다. ‘저 남매.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마계로 간 건 아니군.’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마르틴 브레가스의 자식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마계로 향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는 것만 해도 큰 수확이다. 적어도 이번 마계 행은 단순한 연금 재료 채취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으니 말이다. 김성철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와인 소스에 졸인 사슴 간 요리를 마지막으로 플레이팅 했다. “아... 어떻게 이런 맛이....! 정말 감동입니다.” 요리의 효과는 대단했다. 일리야 브레가스는 훈련된 눈웃음을 지으며 여동생의 요리를 먹던 때와 달리 살아 있는 표정으로 김성철의 음식을 먹어치웠다. “어떻게 귀족의 식탁 위에 내장 요리 따위를...” 소피아 브레가스는 그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김성철은 은근 슬쩍 코트 자락에 감춰진 황금빛 브로치를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어디 한 번 잡숴보시지.” 번쩍이는 브로치를 살짝 드러낸 후 김성철은 팔짱을 끼고 브레가스 남매를 여유로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소피아. 뭐해? 들지 않고? 정말 맛있어. 이거. 저택에서 먹던 것보다 훨씬 나은 거 같아.” 벌써 접시의 반을 해치운 일리야 브레가스가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키며 말했다. 소피아 브레가스는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마지못해 검게 익은 사슴의 간을 한 조각 썰어 입으로 가져갔다. “…?!” 순간이었지만 창백한 그녀의 볼에 불그스름한 홍조가 떠올랐다. ‘마.. 맛있잖아?’ 입안에 넣는 순간 사슴의 간이 혀 안에서 녹으며 그 안에 감춰든 사슴의 육즙과 와인의 풍미의 하모니를 연주한다. 한 점만 먹고 접시를 엎어버리려던 못된 생각은 씻은 듯 사라지고 어느새 정신없이 낯선 사내의 음식을 탐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맛있는 건 사슴 간 요리 뿐만이 아니었다. 곁다리로 장식한 쌀가루를 입힌 감자전의 바삭함과 고소함은 살짝 눅눅한 감이 있는 사슴 간 요리와 찰떡궁합을 이루었고 곁들인 샐러드 또한 부족한 청량감을 유감없이 보충해주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브레가스 남매의 접시는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일리야 브레가스가 만족스런 얼굴로 입을 닦으며 소피아에게 말했다. “어때? 정말 맛있지?” 이에 대해 소피아 브레가스는 냉랭한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아주 못 먹을 수준은 아니네.” 말은 삐딱하게 했지만 접시가 깨끗이 비워졌다는 점에서 그다지 설득력은 없었다. 식사가 끝난 후 일리야 브레가스는 김성철의 솜씨는 격찬하면서 그에게 금화 한 닢을 보수로 줬다. “소소하지만 이건 제 성의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에도 요리를 부탁한다는 말을 소피아의 눈총을 받아가면서 꿋꿋이 했다. 김성철은 흔쾌히 승낙했다. 대륙육걸 마르틴 브레가스의 자식들에게 흥미가 생긴 것이다. 이계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의 자식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마계로 향하는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운이 좋다면 쏠쏠한 이득으로 연결될 수 있을지도 모르리라. “언제든 불러주시오. 내 솜씨를 발휘하리다.”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면서 코트 자락에 숨겨진 황금빛으로 빛나는 요리인의 증표를 살짝 드러냈다. 하지만 남매는 그 브로치를 알아보지 못했다. * 하루가 지나가 다시 구세 십자군과 형벌 부대는 마계를 향한 여정을 이어나갔다. 1시간 정도 걷자 험준한 산악지대는 끝이 나고 대신 붉은 빛이 감도는 사막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태양을 삼킨 땅이라고 불리는 이 지역은 일조량도 적은 반면 강우량이 많고 공기도 차가워 사막과는 거리가 먼 조건을 지니고 있었지만 보는 대로 광활한 사막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비밀은 땅에 있다. 지천에 널린 붉은 모래는 일 년 내내 뜨거운 온기를 머금고 있다. 지면 아래 도사린 지열이 붉은 모래를 데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역엔 한 겨울임에도 악마들의 활동이 빈번하고 그리고 마계 최전선에서 악명 높은 죽음의 모래 지옥이 서식하고 있다. 수천 년 전, 사자토스가 보았던 그 무시무시한 괴물이 아직까지 이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이 태양을 삼킨 땅을 그대로 통과하지 않는다. 대신 그나마 기온이 낮고 땅이 굳은 해안가를 따라 걷는 방법을 택한다. 그런데 이번 출정에서 그런 상식은 무시됐다. “시간은 금! 최단 경로로 이 사막을 돌파한다!” 명색이 길잡이를 맡은 강가스 아론은 최악의 진군로, 즉 붉은 사막을 관통하는 코스를 선택했다. 고참병들 중심으로 작은 소요가 일어났지만 그들은 소수였고 늘 그렇듯 강가스 아론은 자신이 선두에 섬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내가 앞에 있는 한! 어떤 난관도 해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큰소리치는 강가스 아론의 연설을 듣는 고참병들의 얼굴이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누가 저 젊은 단장에게 말해줄 사람 없어? 저 돌 머리가 우리뿐만이 아니라 구세 십자군도 모래지옥의 먹이로 던져주려는 모양인데.” 아카드가 주변을 돌아보며 볼멘소리를 했지만 그들은 죄수들이다. 일개 죄수가 브레가스 가문의 맏아들이자 구세 십자군의 단장을 개인적으로 찾아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 예외가 있었다. 김성철이다. 그는 은밀히 일리야 브레가스를 찾아가 이 사실을 고했다. “흐음. 그래요?” 일리야는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지만 그 효과는 확실했다. 김성철을 비롯한 고참병은 일리야 브레가스가 수많은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강가스 아론을 꾸짖는 걸 볼 수 있었다. “날 바보로 아나? 강가스 아론?” 일리야 브레가스의 일갈에 강가스 아론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군로는 해안가로 수정됐다. ======================================= 30. 마계 출정 (3) 해안가엔 부서진 마차와 병장기, 먼지가 잔뜩 쌓인 모포에 덮인 물자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과거 마계로 출정하던 군세들이 남겨 놓은 잔해들이다. 해안가는 붉은 사막을 가로지르는 것보다는 안전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험이 완전히 제거된 건 아니다. 마계의 해안가엔 악마들의 지시를 받는 반인반어의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다. 생선의 동체에 인간의 팔 다리가 달린 어인들이다. 어인들이 습격하기 전에 해안가는 고약한 비린내로 뒤덮인다. 지금도 그러했다. 끔찍한 비린내가 사방에서 풍겼다. 강가스 아론은 어인의 습격이 도래했음을 알고 전 군세에게 준비태세를 갖추게 했다. 김성철은 고참병들과 함께 중간 대열에 서서 해안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물결 사이로 번들거리는 비늘들이 불길하게 모습을 내비친다. 어인들은 물속에서 기회를 엿보며 진형을 갖추고 있는 걸로 보였다. 지루한 대치가 이어지던 중 아카드는 김성철에게 그림 한 장을 내밀었다. 아카드를 꼭 빼닮은 여성 드워프의 초상화였다. “어떤가?” 아카드가 물었다. “내 딸이네. 이쁘지 않은가?” 드워프의 미의 기준은 다른 종족과는 차이가 많이 났다. “…….” 김성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카드는 딱히 김성철의 대답을 바란 건 아닌 듯 끝없이 펼쳐진 붉은 사막을 감회에 젖은 눈으로 응시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 사막을 볼 날도 이번이 마지막이구만.” “…….” “내가 볼 때 자넨 좋은 사람이야. 34호.” 어째서인지 아카드는 당장 오늘 죽을 사람처럼 행동했다. 품속의 베르텔기아가 몸을 흔들며 속삭일 정도였다. “저 드워프. 왜 저래? 곧 죽을 사람들이 할법한 짓만 골라하고 있잖아?” “…놔둬라.” 김성철은 아무래도 좋다는 반응이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였다. 전방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울려 퍼졌다. “어인이다! 어인이 나타났다!” 곧 해안가 가득 거대한 생선대가리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원시적인 쇠꼬챙이와 몽둥이, 잔뜩 녹이 슨 칼 따위를 든 어인들이 뒤틀린 인간의 다리를 백사장에 내딛었다. 어인들의 전투능력은 별 볼일 없었지만 그들에겐 어마어마한 숫자라는 이점이 있다. 해안가는 곧 수천 마리에 달하는 어인들로 뒤덮였다. “두려워 할 거 없다.” 언제나처럼 강가스 아론은 선두에 서 있었다. 그는 검집에 손을 올린 채 어인들이 공격해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뭍으로 올라오면 올수록 어인들의 전투력이 약해지는 것을 적극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구세 십자군은 형벌 부대의 후방에 위치해 있었다. 일리야 브레가스가 함께 싸우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강가스 아론이 이런 한심한 적상대로는 형벌 부대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해 후방에 위치한 것이다. “괜찮을까? 저런 사람에게 맡겨도?” 일리야 옆을 지키고 선 소피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강가스 아론은 속물이지만 실력 하나만은 확실해. 고대 왕국에 있을 때 뇌물만 적당히 받아먹었더라도 왕국의 중책을 맡게 될 평을 받던 인간이었지. 하지만....” 일리야 브레가스의 눈동자가 한줄기 의혹이 스치고 지나갔다. ‘저 강가스 아론을 안내역으로 임명한 건 바로 내 부친. 마르틴 브레가스다. 둘 사이에 어떤 모종의 거래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최후까지 방심의 끈을 놓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일리야 브레가스는 비록 안전한 후방에 위치했지만 구세 십자군 전원에게 언제든 전투에 참가할 수 있도록 전투준비를 해둘 것을 지시했다. 한편 그 시각에도 해안가에선 어인들의 군세가 꾸준히 충원되고 있었다. 어인들의 숫자를 세던 척후병들은 곧 숫자를 세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추정치를 큰 소리로 외쳤다. “어인 5천 마리 이상! 5천 마리 이상!” 그 말을 들은 형벌 부대 신병들은 몸을 떨었다.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던 것이다. 어인들의 추정치는 곧 8천 마리를 넘어갔다. 넓은 해안가 전체가 어인들로 뒤덮였고 주변의 공기는 어인들의 몸에서 나는 고약한 비린내로 가득 찼다. 생선을 먹지 않는 아카드는 헛구역질을 했다. “에이! 빌어먹을 생선 대가리들! 좀 씻고 다닐 것이지.” 어인들의 증원은 8천 마리 선에서 멈췄다. 신병들은 그 숫자에 몸을 떨었지만 강가스 아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큰 소리로 웃었다. “적당한 몸 풀기 상대군!” 그는 해안가 쪽에 돌출된 모래 언덕 위에 부대를 배치시키고 주변에 해안가에 널린 잔해들로 방책을 쌓아 부대를 보호하게 했다. 부대의 전체 배치는 사각형의 방진으로 어인들의 공세가 집중될 것으로 보이는 정면엔 자신과 함께 고참병들을 배치시켰고 나머지 3방면엔 신병들을 배치시켰다. 괜찮은 배치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했다. 곧 어인들의 군세가 기괴한 절규와 함께 시작됐다. 수천 마리의 어인들이 엉금엉금 뜨거운 모래사장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신병들은 두려워했지만 고참병들과 강가스 아론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인들은 그들이 지닌 한심한 무기만큼이나 약할 뿐더러 결정적으로 지능이 낮기 때문이다. “뷰루루루루!!!” 어인들의 공격 방법은 단 하나다. 숫자를 이용한 파상 공세가 바로 그것이다. 어인들은 사방에서 괴성을 지르며 방진을 공격했지만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단단한 방어벽 앞에 쓰러졌다. 푹! 스걱! 어인들의 돌진은 방패벽에 가로 막혔고 그 뒤를 이은 도끼와 창검이 어인들의 살을 갈랐다. 어인들은 피를 뿜으며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며 기어 올라오는 다른 동료들을 덮쳤다. 또 다른 어인 무리들이 방진을 공격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마법을 쓸 수 있는 친구들은 지금이다! 놈들을 마구 공격해라!” 강가스 아론은 적의 전열에 작은 혼란이 일어난 걸 간파하고 가진 모든 자원을 집중할 것을 명했다. 화염구들이 언덕을 기어 올라오는 어인들에게 날아가 맹렬한 폭발을 일으키며 수십 마리의 어인들을 날려버렸다. 주춤하던 어인들의 전열이 단 한 번의 마법공격으로 붕괴됐다. 거기까진 모범적인 지휘였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 일어났다. “좋아! 매우 좋아! 이 기세를 이어 놈들을 바닷가로 다시 몰아넣자!” 강가스 아론이 느닷없이 검을 빼들고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전원! 나를 따르라! 돌격이다!” 그는 철옹성처럼 단단한 방진을 풀고 모든 병력으로 하여금 적 어인의 전열을 일점 돌파할 것을 지시하면서 스스로 어인들의 전열에 부딪쳐갔다. “죽어라!” 검기를 머금은 강가스 아론의 검이 휘둘러지자 어인 수 마리가 피를 내뿜으며 짚단처럼 쓰러졌다. 어인들은 강력한 소드마스터인 강가스 아론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가 가는 곳에 피 분수와 함께 길이 열렸고 죽은 어인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가자! 단 번에 쓸어버리자! 내 눈에 띄는 놈은 당장 형벌 부대를 졸업시켜 주마!” 그 모습을 본 흥분한 신병들이 방진을 깨고 강가스 아론의 뒤를 따라 어인 군대의 중앙으로 돌진했다. 강가스 아론을 필두로 한 형벌 부대는 수천에 이르는 어인들의 군세를 반으로 갈랐다. 그야말로 영웅적인 돌격. 그러나 시기상조인 일격이다. 어인들의 군세는 건재했고 그들로서는 겨우 전위대를 잃었을 뿐이다. “왜 또 저러는 거야?” 언덕 위를 지킨 건 고참병뿐이었다. 강가스 아론과 함께 하면서 늘 느꼈던 고질병과 같은 불길한 예감이 느껴졌다. “…….” 김성철은 냉정하게 판세를 지켜보고 있었다. 전부터 느꼈던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역시 일부러 저런 짓을 하는 건가?’ 언제나 선두에 서서 용맹하게 싸우는 모습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확실히 보인다. 강가스 아론의 용전분투 그 뒤에 가려진 음험한 악의를.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강가스 아론은 의식적으로 자신의 군대를 사지로 내몰고 있다. 이번에도 그랬고 이전의 전투에도 그랬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곧 나타났다. “뷰루루루루!!!!” “뷰루루!!” 반으로 갈라졌던 어인들이 태세를 정비하고 깊숙이 파고든 형벌 부대를 포위했다. 그와 동시에 사자처럼 싸우던 강가스 아론은 거짓말처럼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모두 정비! 정비하라! 윤형진을 갖추고 적에게 맞서라!” 김성철의 눈에 비친 강가스 아론의 힘은 충분했다. 그가 마음먹고 다시 적진을 헤집는다면 자신의 부대원을 살릴 수 있는 돌파구를 열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끄아아악!” “으아아악!” 끝도 없이 밀려드는 어인들의 공격에 형벌 부대원들이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돌격에 동참하지 않았던 고참병들의 전열에도 어인들의 공격이 재개됐다. “빌어먹을 돌 머리 자식!” 아카드는 도끼를 힘차게 휘저어 달려드는 어인 세 마리를 한꺼번에 베어버리며 거칠게 침을 뱉었다. 또 다른 어인들이 아카드에게 달려들었다. 순간 힘이 빠진 아카드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절체절명의 순간. 섬전 같은 화살이 달려드는 어인들의 정수리에 꽂혔다. 아카드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얀 코트 위에 미려한 문양이 새겨진 흉갑을 걸친 여성이 시위를 재고 있었다. 구세 십자군 단장의 여동생 소피아 브레가스다. “계속 싸워. 드워프.” 후방에서 전투를 관망하던 구세 십자군이 전투에 참가한 것이다. 평균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지만 하나 같이 쟁쟁한 가문 출신으로 유년기 때부터 수련을 거듭한 전사들이다. 그들이 전투에 뛰어들자 전황은 다시 일변했다. 하지만 전투는 바로 끝나지 않았다. 어인들이 무수한 시체를 남기고 바닷가로 도망쳤을 때 300명에 달하던 형벌 부대의 숫자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있었다. 강가스 아론은 이번에도 몸에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았다. 비분강개한 어조로 부하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끝낸 후 그는 일리야 브레가스에게 다소 풀이 죽은 듯한 모습으로 다가와 말했다. “면목 없습니다.” 이에 일리야 브레가스는 냉랭하게 답했다. “당신 도움은 이제 필요 없어. 여기서부터는 우리 스스로 갈 것이니 내 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군.” 이미 그의 부대는 절반 이하로 줄었고 무능함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함께 해야 할 이유 따윈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강가스 아론은 고개를 숙인 채 자리를 떠났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모욕을 당한 그의 귓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바로 자신의 군대를 뒤로 물리지 않았다. 해가 지고 있고 따라서 하룻밤 숙영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구세 십자군과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숙영지를 차렸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오자 강가스 아론은 은밀하게 모든 병력들을 한 곳에 불러보았다. 130명 남짓한 초라한 병력이라 전부 모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든 병사의 집결이 끝나자 강가스 아론이 얼굴을 내비쳤다. 아까 일리야 브레가스 앞에서 모욕을 당했을 때와 전혀 다른 당당한 얼굴이었다. “뻔뻔한 놈.” 병사 몇 명이 수군거리며 그의 흉을 봤다. 하지만 강가스 아론은 개의치 않았다. 대신 그는 씨익 웃었다. 하얀 이가 드러날 정도로. 병사들의 머릿속에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드디어 미쳐버린 건가?’ 한 병사의 생각과 달리 강가스 아론은 미치지 않았다. “너희들은 지난 전투에서 살아남았고 따라서 너희들이 가치 있는 전사라는 걸 스스로 증명했다.” 예상치 못한 서설. 몇몇 병사들의 눈동자에 의혹이 떠오르는 걸 보며 강가스 아론은 계속해서 말했다. “오늘 본관은 솎아내기를 실시했다. 그 결과, 무능하거나 멍청하거나 무력한 이들은 대부분 걸러졌다. 그리고 그들이 죽어준 덕에 우리가 받을 몫도 제법 늘었다.” 병사들은 강가스 아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뒤이은 강가스 아론의 발언은 모든 병사들을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오늘 밤. 우리는 구세 십자군을 친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강가스 아론의 얼굴을 노려봤다. 강가스 아론의 얼굴 표정엔 터럭만큼의 변화도 없었다. 한 사내가 손을 들어올렸다. 땅딸막한 드워프인 아카드였다. “마르틴 브레가스의 아들을 친다고요? 우리들을 반역자로 만들 셈입니까?” 누가 봐도 강가스 아론은 일리야 브레가스에게 당한 모욕을 분풀이하려는 걸로 보였다. 그러나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강가스 아론은 품속에서 서류 하나를 꺼냈다. “이 명을 내린 사람은 바로 마르틴 브레가스 변경백. 본인이다.” 그렇게 말하며 강가스 아론은 서류를 펼쳐 부하들에게 내비쳤다. [ 강가스 아론에게 명한다. ] [ 구세 십자군을 한 명도 남김없이 죽여라. ] [ 특히 재앙의 추종자 일리야 브레가스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 [ 트로윈의 변경백 마르틴 브레가스 ] 화려하게 정장되고 갖은 금박으로 꾸민 그 서류는 하루아침에 꾸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김성철은 진실의 눈으로 그 문서에 깃든 마법 서명이 진품인 것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부대 절반을 희생시킨 것은 아까도 말했다시피 약한 자를 추려냄과 동시에 적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함이다.” 강가스 아론이 달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돌 머리라는 별명과 정반대로 교활하고 능구렁이 같은 모습으로 그는 물 흐르듯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밤 구세 십자군 애송이들은 무방비 상태로 우리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강가스 아론은 머지않은 곳에 위치한 구세 십자군의 숙영지를 응시했다. 그쪽에선 흥겨운 음악 소리와 함께 향긋한 음식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보초가 몇 명 서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경계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강가스 아론은 구세 십자군의 숙영지를 노려보며 말했다. “침대 위의 애송이들을 죽여라. 계집은 겁탈해도 좋다. 놈들이 몸에 지닌 금은보화는 전부 그대들의 몫이다. 그리고 이번 임무가 성공한다면 그대들은 즉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변경백의 이름으로.” ======================================= 31. 대악마의 서 (1) 상황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 갈 때 김성철은 자신만의 방법을 쓴다. 문제의 원인을 족치는 것이다. 형벌 부대가 야습을 준비하고 있을 때 김성철을 홀로 강가스 아론을 찾아갔다. 강가스 아론은 진지한 얼굴로 간이 의자에 앉아 자신의 검을 닦고 있었다. 그는 김성철의 기척이 느껴지자 소드마스터 다운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누구냐?” “…….” 김성철은 슬그머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다. 강가스 아론은 곧 김성철을 기억해냈다. “너는 그때 그.... 정찰병?”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하왕국에서 겪었던 사건이 너무나도 치명적이기에 작은 정찰 결과 하나하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 무슨 일인가? 34호.” 강가스 아론은 다시 검을 마른 천으로 정성스레 닦으며 입을 열었다. 이에 김성철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윌리 길포드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떨그랑. 검이 바닥 위에 떨어졌다. 강가스 아론의 얼굴은 이보다 심할 수 없을 정도로 파랗게 질려 있었다. “뭐... 뭐라고 했나?”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윌리 길포드님께서 절 보냈습니다.” 김성철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 강가스 아론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솟기 시작했다. ‘윌리 길포드 공작이... 살아 있었나?!’ 지하왕국에서 그는 고국의 실력자인 윌리 길포드를 버리고 도망쳤다. 윌리 길포드는 그다지 아량이 넓은 성격도 아니고 사사로운 원한을 기억해뒀다가 반드시 되갚는 인간이었다. 누구보다 그런 윌리 길포드의 성격을 잘 아는 강가스 아론은 지하왕국에서 돌아온 한 달간 걱정에 마음을 졸이며 끙끙 앓아야했다. 다행히 한 달간 걱정했던 고대왕국발 소식은 없었고 그는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여기저기 줄을 대기 시작했고 마침내 마르틴 브레가스에게 줄을 대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번 일만 성공하면 윌리 길포드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든든한 지원군이 생기는데 하필이면 거사 직전에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 나올 줄이야. “그... 그... 윌리 길포드님이 왜... 널 보낸 것이냐?” 강가스 아론은 떨리는 손으로 검을 집으며 물었다. 이에 김성철은 다시 한 번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이 주변에 와 계십니다.” “와아아악!” 강가스 아론은 괴성을 질렀다. 그 모습을 본 김성철은 속으로 웃었다. ‘역시. 이 사내 윌리 길포드를 극도로 두려워하는군.’ 김성철은 공포에 질린 강가스 아론을 향해 이번에는 부드럽게 말했다. “윌리 길포드님이 이렇게 전하더군요. 그대를 해칠 의도는 없고 단지 부탁할 게 하나 있으니 마음 편히 오시라고요. 지금 당장.” “부.. 부탁할 게 있다고?” 절망에 빠진 강가스 아론의 눈동자가 되살아났다. 뭔가를 다시 맡기겠다는 건 용서해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니까. “네. 지금 당장말입니다.” 김성철은 지금 당장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강가스 아론은 검을 검집에 넣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계시나? 윌리 길포드님은.” “미하엘 길포드님과 함께 해안가 쪽에 계십니다.” “그래? 알겠다. 지금 그리로 가지.” 그때 문득 강가스 아론의 뇌리에 한 가지 의구심이 떠올랐다. 저 병사가 어떤 연유로 윌리 길포드의 사자가 됐냐는 것이다. 하지만 형벌 부대의 병사 중에서 자신이 윌리 길포드 밑에서 잠시 일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심복인 감화학파의 마법사가 전부다. 나머지는 전부 차가운 지하왕국에서 죽었다. 게다가 지금은 사안의 경중을 따질 때가 아니다. 거짓이든 진실이든 무조건 확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남은 평생 윌리 길포드라는 존재를 영원히 의식하며 고통 받으며 살 것이다. “어디에 있는가? 그분은?” 강가스 아론은 34호를 재촉했다. 34호는 제법 빠른 걸음으로 걷긴 했지만 강가스 아론의 눈엔 거북이처럼 느렸다. “뛰어! 34호! 나는 지금 매우 급하니까!” “좋습니다.” 34호가 뛰기 시작했다. 제법 날쌘 걸음걸이였지만 강가스 아론의 발걸음엔 미치지 못한다. 아니 미치지 못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막상 따라 잡으려고 하니 34호의 발은 더욱 빨라져 거리를 벌렸다. 34호가 빨라진 건 좋긴 한데 뭔가 이상하다. ‘이 새끼 뭐 이리 빨라? 약을 잘못 먹었나.’ 그때 둘은 어인들의 시체가 썩어가는 해안가에 도착했다. “여깁니다.” 하늘 위엔 붉은 달이 떠올라 있었고 백사장 위엔 핏물 섞인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다. 강가스 아론은 주변을 돌아봤다. 두 발로 서 있는 인간은 자신과 그리고 34호가 유일했다. 구름이 달을 가릴 무렵 강가스 아론이 말했다. “윌리 길포드님은 어디 있는가?” 그의 질문에 34호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의 주머니 안에 있던 무언가가 튀어나와 팔락거리며 떠올랐다. 자세히 보니 책이다. ‘뭐야. 이건.’ 뭔가 아니다 싶다고 느꼈을 때 34호가 허공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긴 손잡이를 지닌 망치. ‘영혼 창고?!’ 그때 달을 가렸던 구름이 물러나며 달빛이 다시금 대지를 비추었다. 긴 손잡이를 지닌 망치 또한 달빛을 받아 원래의 형태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 망치를 본 순간 강가스 아론의 뇌 속에서 위험신호가 떠올랐다. ‘도망가야 한다.’ 이미 윌리 길포드 따위는 지워진지 오래다.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은 윌리 길포드 따위가 아니라 세상이 벌벌 떤다는 세계의 적 그 자체니 말이다. 잡 몬스터 상대로는 언제나 선두에서 싸우지만 진짜 강한 적을 상대로는 가장 먼저 도망가는 강가스 아론도 이번만큼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의 도주는 3발짝을 가기도 전에 뒷덜미를 잡힌 채 해안가에 처박히는 걸로 끝이 났다. 상반신 전체가 부드러운 모래에 처박힌 강가스 아론은 필사적으로 몸을 모래에서 빼냈다. 푹! 모래로 엉망이 된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사... 살려주시오!” 그는 바닥에 넙죽 엎드려 목숨을 구걸했다. “…….” 김성철은 그를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내려 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설명하라.” 강가스 아론은 충실하게 명에 따랐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실에 대해 하나도 남김없이 줄줄 풀었다. 여기에서 김성철은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브레가스 가문의 집안 사정이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혼외자를 자신의 후계자로 세우고 싶은 모양이었다. 다른 하나는 일리야 브레가스에 관한 사정이었다. 그는 마르틴 브레가스의 압박이 거세지자 재앙의 추종자들과 접촉을 했다고 한다. 자세한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재앙의 추종자의 우두머리를 만났다는 풍문이다. “재앙의 추종자의 우두머리?” 김성철로서는 처음 드는 이야기다. 재앙의 추종자는 태생적으로 점조직이고 자발적으로 생겨난 무리들로 우두머리가 있을 수 없는 구조다. 기껏해야 오래 전에 김성철의 손에 죽은 대마법사 발자크 정도가 구심점이 될 수 있을 진 모르지만 그 외엔 우두머리라고 불릴만한 자는 없다. ‘이 부분은 일리야 브레가스로부터 직접 들어봐야 겠군.’ 김성철의 눈이 서늘하게 번득였다. 한편 김성철 앞에 넙죽 엎드린 강가스 아론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자신이 아는 모든 걸을 털어놓았다. “네. 이번 마계 출정은 재앙의 추종자와 접촉한 일리야 브레가스님이 직접 마르틴 브레가스님에게 부탁한 겁니다.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마르틴 브레가스님은 만일의 우환을 제거하기 위해서 저에게 일을 맡긴 겁니다.” “그렇군.” 이제는 강가스 아론의 상전이 된 김성철은 망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무시무시한 팔 가라즈가 살짝살짝 움직이며 그림자를 기울일 때마다 강가스 아론의 심장은 콩닥콩닥 뛰었다. 그는 눈치를 보며 김성철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이... 이게 제가 아는 전부입니다. 부수는 자여.” 김성철은 싸늘한 눈으로 강가스 아론을 노려봤다. 교활하고 이기적인 놈이지만 그렇기에 이용할 수 있다. 일단 김성철은 강가스 아론을 살려주기로 마음먹었다. “구세 십자군에 대한 공격을 중단해라.” “네...? 그건....” 강가스 아론은 난색을 표했다. 이에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금은보화가 가득 담긴 상자를 하나 꺼내 강가스 아론 앞에 내밀었다. “이.. 이건?!” 평생 벌어도 다 모으지 못할 재보가 눈앞에 있다. 강가스 아론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고대왕국에서 좋지 못한 일로 쫓겨났다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인가?” 김성철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강가스 아론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 정도면 고대왕국으로 돌아갈 수 있겠나?” “물론입죠!” 이 정도 금액이면 뭐든 가능하다. 그토록 원하던 고대왕국 복귀도 가능한 금액이다. 왜냐하면 지금 그 앞에 놓인 금은보화는 오랜 적도 친구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거액이니까. 김성철은 시시각각 변하는 강가스 아론의 얼굴을 응시하며 싸늘하게 말했다. “덧붙이면 네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윌리 길포드는 지하에서 죽었다.” “부.. 부수는 자께서 해치운 겁니까?” “내가 손을 대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죽었다.” 강가스 아론의 입가에 짧은 환희가 스치고 지나갔다. 가장 걸림돌이 되는 인물이 사라진 것이다. 강가스 아론은 머릿속으로 필사적으로 저울질을 했다. 답은 바로 나왔다. “이 강가스 아론, 이제 부수는 자의 뜻에만 따르겠습니다.” 그걸로 상황은 일단락됐다. 강가스 아론은 구세 십자군에 대한 공격을 중단했고 부대를 회군시켰다. 약탈에 대한 기대에 들뜬 부하들이 투덜거렸지만 강가스 아론은 일체 신경 쓰지 않았다. “저 인간. 그냥 보내도 되는 걸까? 맹약이라도 받아놔야 되는 거 아니야? 당신이 여기 있는 거 떠벌일 거 같은데.” 베르텔기아가 걱정스레 말했지만 김성철은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였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녀석은 자기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을 거니까.” 세계의 적과 거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강가스 아론의 인생은 그걸로 끝이 난다. 아마도 그가 죽기 전까지 이 사실이 새어나올 일은 없을 것이다. 김성철은 회군하는 형벌 부대를 무심한 눈으로 쳐다봤다. ‘이제 저기 몸담을 이유는 없겠군.’ 있을 만큼 있었고 나름의 목적도 달성했다. 오랜 기간 함께 했던 부대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건 세상을 져버린 김성철에게 사치스런 일. 형벌 부대원을 안전하게 돌려보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김성철은 시선은 이제 건너편에 자리 잡은 구세 십자군 쪽을 향했다. * 해가 뜨자 구세 십자군은 마계로 향한 여정을 계속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와 함께 먼 곳에서 그들의 뒤를 밟았다. 반나절이 지나자 구세 십자군은 붉은 사막을 벗어나 암초와 빙하로 이루어진 회랑 지대에 돌입했다. 마계의 입구. 악마의 진군로였다. 구세 십자군은 바짝 긴장했다. 언제 어디서 마족들의 대군과 마주칠지 모르니 말이다. 그런데 악마의 진군로엔 꽤 유명한 문지기가 하나 있다. 심해마종이다. 김성철이 일주일에 한 번씩 마법으로 두들기던 그 괴물은 구세 십자군의 발소리를 듣고 지면 아래서 튀어나와 압도적인 위용을 과시했다. 김성철에겐 샌드백에 불과한 녀석이지만 구세 십자군에겐 버거운 상대였다. ‘어떻게 하나 볼까.’ 김성철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구세 십자군과 심해마종의 싸움을 지켜봤다. 하지만 기대했던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구세 십자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지레 겁에 질려 줄행랑을 쳤다. 무분별하고 비참한 패주였다. 구세 십자군은 다수의 하인과 상당량의 짐을 잃었다. 그런데 아직 그들의 재난이 끝난 건 아니었다. 심해마종 앞에서 간신히 도망친 구세 십자군 앞에 한 무리의 악마 군세가 나타났다. 지옥견을 탄 악마 기병들이었다. 심해 마종을 만나기 전에 만났다면 어렵지 않게 격퇴했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수많은 단원들이 악마견에 물어뜯기고 악마병의 톱니칼날에 목숨을 잃었다. “모두! 제 자리! 제 자리를 지켜라!” 일리야 브레가스는 그들 진영을 유유히 휘젓는 악마 기병 한 가운데 서서 어떻게든 부대를 수습해보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옆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소피아가 없었다면 그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대로는 전멸을 면하기 어렵겠군.’ 보다 못한 김성철이 나섰다. 그는 뒤에서 악마 기병들을 지휘하는 우두머리 뒤에 불쑥 나타나 우두머리의 목을 우악스런 손으로 잡고 꺾어버렸다. 우두머리가 갑자기 나타난 괴인에게 한 번에 죽는 걸 본 악마들은 한 이름을 떠올리고 부리나케 달아났다. “부수는 자다! 부수는 자가 나타났다!” 악마 기병들은 공격을 멈추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김성철은 천천히 구세 십자군이 있던 자리로 갔다. 전장엔 지옥견과 악마, 구세 십자군의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생존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어지러이 찍힌 발자국이 남쪽으로 길게 향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악마들을 죽이는 틈을 타 후퇴를 한 모양이군.’ 아무리 난전이라고 하나 대륙육걸 마르틴 브레가스의 맏아들이다. 이런 곳에서 죽을 리는 없다. 그때였다. “응? 저거 뭐야?” 시체 사이를 걷던 중 베르텔기아가 불쑥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김성철이 고개를 돌리자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바깥으로 튀어나와 어느 한 지점에 머물렀다. 그곳엔 책이 한 권 떨어져 있었다. 피처럼 붉은 가죽으로 정장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이거 말이야. 이거. 아주 사악한 냄새가 나는데?” 책을 본 김성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책은 아닌 것 같군.” 김성철은 무릎을 굽혀 책을 살폈다. 손끝에 만져지는 책의 촉감이 어딘가 낯익다. ‘사람의 가죽으로 정장했군.’ 악마들이나 쓸 법한 책이다. 김성철은 책을 들어 감정을 실시했다. 곧 책의 정보가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 대악마의 서 : 제7권 > 등급 : 에픽 분류 : 장비 - 책 효과 : 장비 시 마력 20, 체력 20 상승. 비고 : 대악마의 힘을 얻고자 하는 자는 만마의 제단 앞에서 이 책을 펼칠지어다. 제한 : 마법사 관련 클래스 에픽 등급의 장비치고는 능력치도 낮고 부가 능력도 없다. 하지만 이 책엔 그냥은 넘어갈 수 없는 문구가 하나 있다. ‘악마의 힘이라고?’ 그때 전장 저편에서 사람들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곧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아직 이곳은 위험해! 어서 돌아가자. 응?” 소피아 브레가스의 목소리다. 김성철은 전장의 안개 속에 몸을 숨기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조용히 관찰했다.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책을 찾아야 돼! 그 책을 찾지 않으면 모든 게 허사가 된다고!” 일리야 브레가스의 목소리다. 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전장의 바닥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김성철은 자신의 손 안에 들린 인간 가죽으로 정장된 책을 응시했다. ======================================= 31. 대악마의 서 (2) 툭. 김성철은 책을 잘 보이는 곳에 떨어뜨렸다. “응? 무슨 생각이야?” 베르텔기아가 바닥에 떨어진 책을 보고 깜짝 놀라 묻는다. “일단은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군.” 김성철은 책을 내려놓은 채 전장의 안개 속에 몸을 숨겼다. 곧 일리야 브레가스가 나타났다. 광인처럼 전장 바닥을 훑던 일리야 브레가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있다! 있어!” 일리야 브레가스는 대악마의 서를 자신의 망토 아래에 넣고 허리띠와 연결된 고정대와 연결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어떻게 되나 싶었어. 정말로. 이게 없으면 모든 게 물거품인데 말이야.” 소피아 브레가스는 일리야의 뒤를 묵묵히 지켰다. 책을 되찾은 남매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전장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언덕 위엔 구세 십자군들이 있었다. 힘없는 눈빛들이 브레가스 남매를 향했다. 이미 팔 하나 움직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그들은 남매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인간이면 족하다. 그것이 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김성철은 살아남은 구세 십자군의 숫자를 눈대중으로 헤아렸다. 전투력이 전무한 비전투원은 전멸했고 100여명에 이르던 단원은 이제 반도 남지 않았다. 무엇보다 모든 물자를 심해마종 앞에서 버리고 온지라 보급 문제가 심각했다. 누가 봐도 더 이상의 진격은 어려운 걸로 보였다. 그런데 일리야 브레가스는 진군을 지시했다.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오자 일리야는 떠날 사람은 떠나라고 윽박질렀다. 그러자 이탈자가 발생했고 곧 구세 십자군은 열 명도 채 남지 않은 초라한 파티로 전락했다. 하지만 일리야 브레가스의 의지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그는 망토 안에 숨겨진 대악마의 서를 쓰다듬으며 마음을 다스린 후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단원들과 함께 마계를 향해 걸어갔다. 물론 그들 앞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난관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당장 마계의 입구를 지키는 심해마종이 지키는 곳을 다시 한 번 통과해야 한다. 그들은 머리를 모아 심해마종이 깨어나기 전에 은밀하게 그곳을 통과하는 계획을 세웠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작전이다. 심해마종 주변엔 임프들이 득실거린다. 임프 자체는 동네 들개만도 못한 약해빠진 녀석이지만 악마가 아닌 생명체만 보면 무조건 달려들고 게다가 죽을 때 큰 소리를 내고 죽는 것들이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방울들. 그것들이 득실거리는 지대를 구세 십자군 수준으로 은밀하게 통과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김성철은 한 발 먼저 심해마종이 있는 땅으로 향했다. 그는 달려드는 임프들을 몇 마리 때려 죽여 심해마종을 불러냈다. “그어어어어어!!!” 높은 포효소리와 함께 지면에서 솟아나온 심해마종은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보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와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패던 그 놈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김성철은 이번엔 마법을 쓰지 않았다. 대신 팔 가라즈를 꺼내 심해마종을 죽지 않을 정도로 후려쳤다. 일방적이고 무시무시한 구타가 시작됐다. 골통이 부서지고 양팔이 박살난 채 심해 마종은 지면 아래로 숨어 들어갔다. “죽은 거 아니야?” 김성철의 살벌한 구타를 본 베르텔기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심해마종은 지능은 낮지만 아주 생명력이 끈질긴 놈이지. 회복력 하나만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놈이다.” 김성철은 고개를 돌려 남쪽을 응시했다. 어중이떠중이 구세 십자군이 암살자처럼 살금살금 걸어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김성철은 자리를 떠났다. “키이이이이이!!!” 임프 하나가 구세 십자군을 발견하고 달려들었다. “제길!” 일리야가 재빨리 검을 뽑아 임프의 목을 베었다. 마르틴 브레가스의 아들답게 날카롭고 정확한 칼솜씨지만 그러나 임프의 단말마를 그치게 하진 못했다. “키이...? 테챠아아아앗!” 일리야의 눈동자에 당혹이 떠올랐다. ‘정확히 목을 베었는데. 어디서 소리가 나는 거지?!’ 은신작전은 시작도 하기 전에 물거품이 됐다. “오라버니. 후퇴하자.” 소피아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들 앞에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임프의 끔찍한 비명이 시끄럽게 울려 퍼진 뒤에도 심해마종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일리야는 반신반의 하며 앞으로 다시 전진했다. 또 다른 임프 떼가 그들을 발견하고 공격을 가해왔고 모두 죽었다. 한 마리가 아닌 여러 마리가 단말마를 지르며 바닥에 엎어져 죽었다. 그런데도 심해마종은 나타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호재 앞에서 일리야는 과감하게 행동했다. “빠르게 돌파한다.” 그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그들은 안전하게 심해마종이 지키는 영역을 지나갈 수 있었다. 곧 얼어붙은 빙산 너머로 붉은 용암이 흐르는 불과 얼음의 땅이 일리야 및 구세 십자군의 눈동자에 들어왔다. “마계다. 드디어 마계에 도착했다.” 일리야는 벅찬 감회를 느끼며 마계의 대지를 한사코 응시했다. 여기저기서 악마들의 포효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망토 안에 숨겨진 대악마의 서를 쓰다듬으며 마계 깊숙이 발걸음을 옮겼다. 한 무리의 악마군대가 멀리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일리야와 그의 단원들은 칼날처럼 솟은 바위 아래 몸을 숨겨 악마군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겼다. 다행히 악마들은 일리야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비슷한 형태의 행군이 이어졌다. 당연히 행군은 지지부진해졌고 흐릿한 마계의 하늘을 밝히던 태양이 떨어지고 있었다. 마계의 밤이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해가 떨어지자 지면 아래 혹은 구름 속에 몸을 숨겼던 갖가지 악마들이 나타나 마계의 대지 위를 거닐었다. 악마들은 코를 킁킁거리며 먹이를 찾거나 자기보다 약한 악마를 찾아다녔다. 오직 약육강식이라는 논리에 지배되는 마계의 일상이 시작된 것이다. 약한 자들은 먹이감이 되거나 죽는다. 일리야 패거리는 인간 중에서는 제법 강한 축에 속했지만 득실거리는 악마들 사이에선 그다지 뛰어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인간의 고기와 혼은 악마들에게 인기가 높다. 적발되는 순간 그들은 황량한 마계에서 육신과 혼을 전부 털린 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 운이 좋았다. “…….” 하늘의 파편을 벼려 만들었다는 신물 팔 가라즈. 그 무시무시한 망치를 든 사내가 그들을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구름 속에서 거대한 면상을 드러내며 흉측한 미소를 짓던 악마가 구세 십자군을 발견하고 아래로 하강하다가 김성철을 발견했다. 그 악마는 김성철의 얼굴은 몰랐지만 그가 들고 있는 무기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 악마는 즉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하늘 위로 다시 올라갔다. 비슷한 일이 칠흑 같은 어두운 밤중에 몇 번이나 반복됐다. 구세 십자군은 무사히 마계의 첫 날 밤을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해가 뜬 이후에 일어났다. 김성철이 최후의 악마를 눈빛만으로 쫓아내고 한숨을 돌리던 그때 구세 십자군의 캠프에서 짤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악!” 일리야 브레가스의 비명 소리다. ‘숨어든 악마가 있었나? 그럴 리가. 어떤 악마도 내 눈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터인데.’ 김성철은 즉시 구세 십자군의 캠프로 달려갔다. 범인은 악마가 아니었다. 같은 인간이었다. 일곱 명의 단원이 남쪽으로 줄행랑치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들 중 한 명이 대악마의 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끄으으으....”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한 일리야의 신음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김성철은 즉시 그곳으로 향했다. 일리야 브레가스는 복부에 큰 상처를 입은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오라버니! 정신차려! 오라버니!” 소피아 브레가스가 그의 옆에서 필사적인 간호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곳곳에 크고 작은 검상을 입었고 하얀 의복 위에 핏자국이 흩뿌려져 있었다. 김성철은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그들 남매 곁에 남아 있지 않았다. 철저히 배신당하고 버림받은 것이다. 김성철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일리야 브레가스의 눈동자가 김성철을 향했다. “당신은...?” 그 말을 들은 소피아 브레가스가 고개를 들어 김성철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김성철은 일리야의 상처를 응시했다. 검격에 당한 그의 상처는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상처의 깊이보다 몸에 묻은 독이 그의 생명력을 빠르게 약화시키고 있었다. “비켜라.” 김성철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엔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담겨 있었고 소피아는 홀린 듯 자리를 비켰다.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날카로운 단검을 꺼내 환부를 길게 찢었다. “끄으윽!” 먹물처럼 검은 피가 상처에서 흘러나왔다. 독에 오염된 피다. 독을 어느 정도 빼낸 김성철은 해독제를 상처에 바르는 한편 회복 연고를 환부에 발랐다. 몸에는 좋지만 대단히 쓴 약이라 일리야는 끔찍한 고통을 호소했지만 명문가의 후손답게 잘 버텨냈다. 곧 일리야 브레가스는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된 후 소피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지?” “…….” 김성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일리야 브레가스를 향하고 있엇다. 김성철이 말했다. “마계에서 찾는 게 뭐지?” “당신은 대체...?” 일리야 브레가스가 물었다. 그러자 김성철이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마계에서 찾는 게 뭐냐고 물었다.” 그의 물음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그때 날카로운 검이 김성철의 목을 겨누었다. 소피아의 검이다. “치워라.” 김성철이 말했다. 소피아는 그 순간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섬뜩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 또한 대륙육걸의 자식이다. 극한의 공포를 맛보고도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하늘 위에서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커다란 괴성이 울려 퍼졌다. “끄뢰에에에에!!!” 하늘 위를 배회하던 거대한 새가 지면의 먹이 감을 발견한 것이다. 하늘을 뒤덮을 듯한 거대한 검은 날개를 본 소피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저건 재앙의 흉조 아냐?’ 재앙의 흉조는 마계에 서식하는 생물 중 가장 악명 높고 무시무시한 존재다. 인간과 악마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그 흉조는 악마의 군세가 출정할 때 그들의 머리 위를 따라다니다가 전투가 벌어진 후 남겨진 악마와 인간의 시체를 먹는 걸로 알려져 있다. 일종의 시체청소부지만 그 거대한 크기와 힘으로 인해 재앙을 상징하는 공포스런 존재로 인간들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 재앙의 흉조가 커다란 날개를 펄럭거리며 곧장 김성철 일행 쪽을 향해 급강하하고 있었다. 소피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막을 수가 없어!’ 이미 대부분의 힘은 배신자들과 싸우느라 잃은 상태다. 크고 작은 부상은 힘이 회복되는 것을 저해했다. 몸을 빼내면 자신 하나는 살 수 있겠지만 일리야는 살리지 못한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소피아의 눈동자에 낯선 사내가 허공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게 들어왔다. 34호라고 불리는 의문의 사내는 영혼 창고에서 타들어가는 숯처럼 검고 붉은 채찍을 꺼냈다. 눈대중으로 10미터에 달하는 기다란 채찍이었다. 그 사내는 채찍을 꺼내더니 일말의 망설임 없이 급강하 하는 흉조를 향해 휘둘렀다. ‘바보. 채찍 가지고는 저걸 막을 수 없어!’ 그녀의 상식으로는 무의미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김성철의 힘은 상식을 파괴한다. 그가 꺼낸 마편 카산드라는 막 날카로운 발톱을 지면을 향해 세우던 흉조의 목에 정확히 감겼다. “끄뢰?!” 흉조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그 순간, 목에 감긴 채찍은 무시무시한 힘으로 흉조를 잡아당기더니 그대로 지면에 처박았다. 쿵! 흉조의 머리통이 단단한 암반에 부딪쳐 박살이 났고 날개는 꺾여 뼈를 드러냈다. 채찍을 잡은 김성철의 손이 다시 한 번 움직였다. 흉조는 반대편으로 날아가 지면에 부딪쳤다. 쿵! “끄레에......” 흉조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지만 김성철은 용서를 모르는 사내였다. 쿵! 쿵! 쿵! 김성철이 손이 오가며 흉조를 딱지처럼 지면에 처박았고 흉조는 온 몸이 박살난 채 절명했다. “히이....” 소피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경이적인 광경에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 인간... 정체가 뭐야?’ 수많은 가능성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고 이윽고 하나의 가능성만이 남았다. 소피아 브레가스의 눈동자가 경악에 물들었다. ‘설마 이 남자...?’ 그녀의 섬세한 손에 들린 검이 지면으로 떨어졌다. 이윽고 소피아 브레가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세계의 적?” 김성철은 그녀를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 31. 대악마의 서 (3) 이계에서 가장 먼저 마법을 깨우친 족속은 마족이다. 마족은 다른 종족에 비해 마법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뛰어난 마법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과도한 마법이 그들을 타락시켰지만 마족의 마법적 지식과 강력한 마력은 오랫동안 찬탄과 경배의 대상이 되곤 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한때 이계엔 수많은 악마숭배자들이 있었다. 악마숭배자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미개하고 천한 인간의 운명에서 벗어나 악마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대악마의 서는 그 악마숭배자들의 비전을 기록한 정수다. “…그 안엔 악마의 퀘스트가 담겨져 있습니다.” 더는 숨길 것도 없고 숨길 이유도 없다. 일리야 브레가스는 세계의 적 앞에서 자신이 아는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 책은 마계의 입구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악마숭배자들의 도시를 안내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 도시 안에 있다는 만마의 제단 앞에서 그 책을 펼치면 그 사람은 한때 인간이었던 대악마의 퀘스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건전하지 못한 퀘스트군. 꼭 그런 짓을 해야 했나?” 김성철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악마의 힘을 얻어서라도 복수를 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우리까지 제거하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리야 브레가스의 눈동자 안엔 차가운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에게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따라와라.” 김성철은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남쪽으로 달아난 발자국을 따라 움직였다. 예상치 못한 세계의 적의 행동 앞에 브레가스 남매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그의 뒤를 따랐다. 곧 그들 앞에 갈기갈기 찢긴 인간의 시체 한 구가 나타났다. 구세 십자군 단원의 시체다. 김성철의 보호를 벗어난 직후 악마의 습격을 받아 악마의 먹이감으로 전락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루카스....” 소피아 브레가스가 그 시체를 알아보고 몸을 가볍게 떨었다. “아는 사인가?” 김성철이 바닥에 너부러진 피 묻은 머리카락을 보며 물었다. “…어릴 때부터 친구였어. 마지막에 배신하긴 했지만.” 김성철은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또 다른 시체가 보였다. 이번엔 한 구가 아니라 두 구였다. 그 시체들은 100개의 이빨을 지닌 악동의 모습을 한 악마에게 붙잡혔고 그 악마의 노리개가 됐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시체를 토막 내고 그 머리와 사지를 각기 다른 시체에 꿰어 붙이려는 악마를 응시했다. 일리야와 소피아의 눈동자가 일제히 일그러졌다. “길, 진트....” 그 단원들도 남매의 오랜 벗이었다. 결국 그들 또한 남매를 배신하긴 했지만 한때의 친우였던 그들의 비참한 최후는 브레가스 남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100개의 이빨을 지닌 악마는 새로운 인간들을 보자 갖고 놀던 인간들의 시체를 집어 던지고 흉측한 이를 드러냈다. “키! 키! 키!” 하지만 그 악마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퍽! 김성철의 주먹이 악마의 면상을 강타했다. 백 개에 달하는 이빨이 산산조각 나며 붉은 피와 함께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김성철은 바닥에 널린 그 수많은 날카로운 이빨을 손으로 움켜잡고 악마의 커다란 눈동자를 향해 비벼 넣었다. “끼이이이이이!!!” 뒤이어 김성철은 악마의 양 팔을 뼈 채로 뽑아버리고 울부짖는 악마를 멀리 던져버렸다. 지면에 틀어박혀 꿈틀거리는 악마의 머리 위로 재앙의 흉조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 악마를 해치운 김성철은 말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브레가스 남매는 그저 놀란 눈으로 말도 안 되는 신력을 지닌 사내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그저 조용히 뒤를 따랐다.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문득 일리야 브레가스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던 건... 저 사내가 가까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의 추측은 정확했다. 김성철이 달아난 단원들을 굳이 자신이 쫓지 않았던 이유도 그와 일맥상통한다. 이승의 지옥과 같은 마계에서 김성철의 보호를 벗어나는 순간, 힘없는 구세 십자군 단원들은 마계 피라미드 밑바닥에 위치한 먹이감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김성철과 브레가스는 남매는 뒤이어 몇 구의 시체를 더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처참하고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살아 있는 사람도 한 명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상태는 차라리 죽는 게 축복일 정도로 처참했다. “죽... 죽여 줘....” 산 채로 몸 안에 거대 식충의 알을 주입당한 사내는 몸 안에서 식충 애벌레들이 살을 파먹는 극한의 고통을 느끼며 죽음을 구걸했다. 퍽! 김성철의 망치가 사내의 머리통을 박살냈다. 박살난 머리 안에서 손가락 크기 만 한 구더기 형태의 식충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꾸물거렸다. “우웩...” 김성철의 품안에 있던 베르텔기아가 몸을 떨었다. “…….” 김성철은 시체를 버려두고 앞으로 향했다. ‘앞으로 남은 건 두 명이군.’ 곧 그 두 명의 소재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남일녀. 아직 살아 있다. 하지만 위태롭다. 그들 앞엔 인간의 팔 다리로 만든 목걸이를 걸친 순백의 피부를 지닌 악마가 구름처럼 떠돌고 있었다. 그 악마는 기계음 같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천천히 하강하며 천둥과 번개를 만들어 냈다. 가공할만한 뇌전이 그들을 강타했다. 김성철의 망치가 악마의 골통을 부셔버렸지만 이미 그 두 남녀는 치명상을 입은 뒤였다. “끄으으으....” 이미 한 명은 즉사했다. 구렛나룻 자국이 길게 난 사내만이 고통에 겨운 신음을 흘리며 흐릿한 시야로 허공을 응시했다. 일리야와 소피아가 다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크루트!” 일리야가 그를 부축해 안았다. 사내의 눈은 이미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일리야. 너냐?” “그래. 나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사내는 그 말을 남기고 숨이 끊어졌다.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침묵 속에서 김성철은 죽은 여성의 시체에서 대악마의 서를 찾아내 회수했다. 대악마의 서를 손에 들자 김성철의 시야에 희미한 선이 나타났다. 의식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섬광이었다. 그 빛줄기는 동쪽을 향해 뻗어 있었다. 김성철은 그 대악마의 서를 일리야에게 내밀었다. “가져라.” “…….” 일리야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대악마의 서를 받았다. ‘대체 이 사람. 무슨 의도로 이러는 거지?’ 그로서는 김성철의 흉중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유도 목적도 전부 불분명하다. 김성철은 일리야의 눈동자 속을 어지럽히는 혼란을 읽고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안내해라. 악마의 퀘스트로.” 그제야 일리야는 김성철이 원하는 게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김성철을 악마의 퀘스트가 기다리는 지점으로 안내했다. 몇 개의 빙산과 화염의 강을 넘자 안개의 바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 안개 지대에 무언가 있었단 말인가.’ 이 안개의 바다는 마계를 헤집고 다닌 김성철의 기억에 있는 장소다. 가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진흙수렁이 있고 지나가는 이들을 수렁으로 잡아당기는 죽은 익사체를 닮은 괴물들이 서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김성철에겐 대악마의 서가 있다. 대악마의 서에서 비추는 한 줄기 섬광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의 바다를 안내하는 등대 역할을 했다. 콰직! 대략 열 마리의 수렁 괴물을 군홧발로 짓밟아 죽일 무렵 지긋지긋한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안개 지대를 빠져나온 김성철와 브레가스 남매 앞에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탑들이 보였다. 탑의 숫자는 여덟 개. 탑과 탑 사이에 거미줄처럼 아슬아슬하게 엮인 통로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현기증을 느끼게 했다. 김성철은 한 발짝 앞으로 걸어가며 탑들을 응시했다. ‘마계에 이런 곳이 있었군.’ 김성철은 탑 아래 꾸물거리는 인영을 발견했다. 그것은 놀랍게도 인간이었다. 가혹한 고문과 신체개조로 뒤틀리고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지만 김성철은 힘겹게 마대 자루를 끄는 그 괴인이 인간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김성철은 뒤를 돌아 일리야를 응시했다. “여기는 어디지?” 그라면 뭔가 알고 있으리라.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대악마의 서. 그 책을 건넨 사람이 이야기 했을 것이다. 김성철조차 알지 못했던 마계의 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김성철의 추측은 들어맞았다. “이곳은... 인간들의 도시입니다.” 일리야가 말했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마계 한 가운데에 인간의 도시라고?” “그렇습니다. 이곳은 악마가 되고 싶었던, 필멸자의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자들의 도시입니다.” “악마숭배자들의 소굴이라는 건가?” 김성철의 물음에 일리야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성철은 흥미로운 눈으로 탑들을 올려다봤다. ‘이런 곳도 있었군.’ 인간 중에서 김성철보다 마계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동 시대의 사람들 중에선 말이다. 그런데 일리야 브레가스, 아니 그에게 책을 건넨 사람은 이 도시의 존재를 알고 있다. 평범한 자는 결코 아니다. 김성철은 일리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책은 누구한테서 받았지?” 언젠가는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다. 김성철은 그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고 그리고 마침내 그 때가 왔다고 느꼈다. 일리야도 언젠가는 김성철이 그 사실을 물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잠시 머릿속을 정리한 후,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우선 양해부터 구하겠습니다. 저는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느닷없이 우리 앞에 나타났거든요. 따라서 우리들은 그녀의 정체가 진실인지 아닌지 알지 못합니다.” 적절한 답이 아니다. 김성철의 팔 끝이 살짝 움직였다.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일리야에겐 터무니없이 크게 느껴졌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녀는 칠영웅의 이름을 댔습니다.” “칠영웅이라고?” 무겁게 닫혀 있던 김성철의 입술이 열렸다. 일리야는 급히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네. 그 여자는 베스티아레라는 이름을 댔습니다.” 베스티아레. 칠영웅 중 한 명. 김성철과는 접점이 있는 인물이다. 김성철의 클래스 메아리술사는 다름 아닌 베스티아레 본인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니. 일리야는 계속해서 자신이 본 것에 대해 말했다. 김성철의 손이 올라갔다. 입을 다물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대신 김성철은 고개를 돌려 소피아 브레가스를 응시했다. 소피아 브레가스의 신형이 가늘게 떨렸지만 이내 그녀는 의연한 눈으로 김성철을 마주 보았다. “너도 그 여자를 봤나?” 소피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려고 하다가 무의미한 시도인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는 어떻게 생겼지?” 김성철의 물음에 소피아 브레가스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금발의 하이엘프였어.”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유령처럼 창백한 피부였어. 혈관 안이 전부 들여다보일 정도로. 그리고 꿈꾸는 듯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어.” 소피아가 말하는 베스티아레는 김성철의 본 것과 대부분 일치하고 있었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김성철은 우두커니 선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직 악마왕의 재앙은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칠영웅이 활동하고 있다고?’ 브레가스 남매의 말을 100% 신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대부분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의혹 속에서 김성철은 높게 솟은 악마숭배자들의 탑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무언가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군.’ 일단은 눈앞의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우선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김성철과 브레가스 남매 앞엔 굳게 닫힌 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열릴 것 같지 않는 거대한 철문이었지만 신적인 힘이 깃든 김성철의 손이 닿자 육중한 철문은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따라와라.” 김성철은 불길한 빛이 새어나오는 탑의 내부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 32. 탑의 영주들 (1) 탑 안엔 좌우로 불투명한 유리창이 있는 벽으로 막힌 짧은 거리가 나타났다. 아무도 없는 거리였지만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거리의 끝엔 또 다른 문이 있었다. 김성철은 그 문을 열어젖혔다. 문을 여는 순간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한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김성철은 호흡을 멈추며 주변을 돌아봤다. 이번엔 교차로다. 각각의 통로가 유리창이 있는 벽면으로 막힌 거리들이 앞에 펼쳐져 있었다. 거리에 안개처럼 깔린 웅성거리는 소리가 이번엔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한 소리로 귀에 들어왔다. “거기 잘 생긴 오빠. 놀다가요.” “금화 열 닢! 금화 열 닢 아래도 가능해!” “다른데 돌아봐야 다 똑같으니 우리 가게에 오라고!” 사창가에서 들려올 법한 이야기다. 일리야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지만 소피아는 깊은 불쾌감을 드러냈다.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소리가 들려오는 벽면을 노려봤다. 불투명한 유리창 안에 거무스름한, 하지만 두 눈만은 붉게 빛나는 인간의 형체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만마의 제단은 어디에 있지?” 김성철이 일리야에게 물었다. 일리야는 책을 펼쳐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탑의 꼭대기에 있는 걸로 보입니다.” “그렇다 이거지?” 김성철은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몇 발 앞으로 걷다보니 간신히 국부만을 거린 아슬아슬한 차림새를 한 가면을 쓴 여자가 나타났다. “어머. 귀여워라. 못 보던 얼굴들이네.” 그 망측한 모습을 본 소피아가 기겁을 했다. “오라버니! 보면 안 돼!” 그녀는 다짜고짜 일리야에게 달려들어 그의 두 눈을 손으로 가렸다. 반면 김성철은 태연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낯선 여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악마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무언가군.’ 가면의 여인의 두 발은 지면에 닿지 않았다. 어떤 마법적인 힘이 그녀를 풍선처럼 떠올리고 있었다. “용무를 말해라.” 김성철은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가면 아래 붉은 입술이 호기심어린 미소를 지었다. “어머. 거기 젊은 오빠는 날 보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네? 혹시 내가 오빠 스타일이 아닌 거야?” “용무부터 말하라고 했다.” 김성철의 목소리에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었다. 잇따른 김성철의 냉담한 반응에 가면의 여인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더니 살짝 위로 몸을 상승시켰다. “딱히 용무가 있는 건 아니야. 단지 못 보던 얼굴이라서 먼저 말을 걸어 봤을 뿐이야.” 그렇게 말하던 가면의 여인의 눈에 일리야가 포착됐다. 여전히 소피아의 손에 눈이 가린 일리야의 품속엔 대악마의 서가 들려 있었다. 그 책을 본 가면 여자의 눈동자가 묘한 빛을 냈다. “어머. 책을 가지고 있네.” 가면녀의 목소리가 변했다. “거기 잘생긴 오빠. 그 책, 잠깐만 볼 수 있을까?” 그녀는 두둥실 일리야를 향해 육감적인 몸을 들이밀었다. “저리가! 이 변태녀야!” 소피아가 기겁을 하며 검을 뽑았다. 그러자 가면의 여인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어머. 젖내도 안 빠진 계집아이가 방해를 하네. 설마 죽고 싶은 거니?” 그녀는 뒤로 날아가더니 매니큐어를 바른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김성철 전후좌우에 붉게 타오르는 불의 벽이 형성됐다. 불길 너머에서 간드러지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고 싶으면 책을 넘기렴. 아니면 책과 함께 타버리던가.” 다음 순간, 김성철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섬전처럼 불의 벽에 뛰어든 그는 순식간에 불의 벽을 돌파해 그 너머에 자리 잡은 가면의 여인을 향해 쇄도했다. 생각지도 못한 김성철의 행동에 가면의 여인은 대경실색하여 주문을 외어보려 했지만 그보다 김성철의 손이 빨랐다. 김성철의 손이 가면녀의 목줄을 틀이 쥐었다. “끄... 끄으으....” 탄력 있는 피부를 훤히 드러낸 팔 다리가 버둥거렸다. 김성철이 좀 더 힘을 주자 가면의 여인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그녀의 목줄을 움켜잡은 채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누구냐?” “나... 나는...! 켁! 켁! 이 탑의... 주민!” “왜 책을 탐내는 거지?” “그 책이... 있으면... 진짜 악마.... 악마가 될 수 있으니까...!!” “그렇군. 마지막으로 묻겠다. 여기는 어디지?” 김성철의 물음에 가면의 여인은 고통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여기는... 지복의 탑... 대악마 미리어도라님의 영지다...!” 김성철의 심문은 그걸로 끝이 났다. 그는 가면의 여인을 벽을 향해 집어던졌다. 그녀는 불투명한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그 너머에 있던 검은 그림자를 흩어버렸고 자신 또한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연기가 걷힌 자리엔 인간의 두상을 한 커다란 구더기 한 마리가 꾸물거리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혐오감을 유발하는 끔찍한 생명체였다. “저게 저 변태녀의 정체였던 모양이네.” 소피아가 검을 들고 벽면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김성철의 손이 그녀를 제지했다. “놔둬라.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형벌인 족속들이니.” 영생의 형태엔 여러 가지가 있다. 이상적인 영생은 원래의 모습을 간직한 채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영생은 필멸자를 넘어선 자들의 특권이다. 따라서 열등한 존재들은 그들의 수준에 걸 맞는 추악하고 구차한 사술을 통해 영생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데 그 결과 갖가지 해괴하고 그로테스크한 결과물이 나타났다. 김성철은 한 번 보는 것만으로 저 구더기가 그러한 구차한 영생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파악해냈다. 불투명한 유리창으로 가득한 거리를 지나자 다른 탑의 주민들을 볼 수 있었다. 압도적인 용모들이다. 하나 같이 수려한 외모의 청년이거나 아니면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미녀들이다. 그들은 김성철 일행을 보며 추파를 던졌다. “거기. 아가씨. 나랑 놀지 않을래? 잠깐만 이야기만 하자고.” “붉은 책을 든 남자아이. 완전히 내 취향인데? 누나랑 식사 한 끼 하지 않을래? 아니면... 다른 것도?” 김성철 일행이 무시하고 지나치자 그 선남선녀들은 자신들끼리 히히덕거리며 음담패설을 주고받았다. 그들 너머에 위로 향하는 층계가 보였다. 다음 층으로 들어서자 갖가지 향기로운 음식 냄새로 가득 찬 공간이 나타났다. 불투명한 유리창 안에선 유리잔을 부딪치는 소리, 음식을 우물우물 씹는 소리, 달군 기름 위에 고기를 굽는 소리 따위가 들려왔다. 거리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높은 요리사의 모자를 쓰고 국자를 든 요리사들이 있었다. “자자! 안 먹고 가면 손해! 인간 세상에선 맛볼 수 없는 최상의 음식과 술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구!” “자, 빈 테이블이 이제 하나 남았습니다! 당신들이 오면 딱 되겠군요!” 그들은 앞 다투어 자신의 가게로 김성철 일행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가면을 쓴 변태녀엔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던 소피아도 이 거리에선 긴장을 놓은 표정이었다. 무엇보다 브레가스 남매는 마계에 돌입한 이후 제대로 된 식사를 한 끼도 먹지 못했다. 꼬르륵. 안 그래도 굶주린 상태에 향긋한 음식 냄새를 맡자 그들의 경계심은 빠르게 허물어졌다. 그때 김성철이 앞으로 나섰다. “이거 한 번만 맛 좀 봅시다.” 김성철은 가게 밖에 내놓은 회전 그릴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새끼 통돼지 바베큐를 가리켰다. “좋고말고요!” 높이만 2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요리모를 쓴 요리사가 껄껄 웃으며 새끼 돼지 다리를 한 점 떼 김성철에게 내밀었다. 김성철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 음식을 입에 넣었다. 꿀꺽. 그 모습을 본 브레가스 남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김성철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 이 요리의 점수는.... 0점. ] [ 날 모욕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런 요리를 두 번 다시 내놓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 단순히 눈앞에 표시된 점수와 협박 섞인 메시지뿐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 요리엔 보다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 고기는 인간의 고기군. 맛은 환술과 마약으로 냈고.’ 김성철은 바로 입안에 든 고기를 뱉어버렸다. “아니! 감히 내 피와 정열이 담긴 일품요리를 뱉어?! 이 맛도 모르는 하등종자가!” 요리사가 대노하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피와 말라붙은 구더기가 덕지덕지 붙은 커다란 식칼이었다. “네 놈을 요리해주지!” “…….” 김성철은 달려드는 요리사의 검을 가볍게 피한 후 요리사의 뒷덜미를 잡고 그의 면상을 회전 그릴 안에 처박았다. 치이이이익- 살이 타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요리사의 몸이 버둥거렸다. 하지만 김성철의 억센 손은 요리사가 그릴에서 탈출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끄아아아악!!!” 절규 속에서 브레가스 남매는 요리사의 몸이 거대한 구더기로 변하는 기괴한 광경을 목도할 수 있었다. 아울러 그릴 안에 탐스럽게 익어가던 새끼통돼지 구이가 인간의 넓적다리로 변하는 것 또한 볼 수 있었다. “쓰레기 같은 음식을 만들고도 요리사라고 자부하다니. 낯짝 한 번 두껍구나.” 김성철은 구더기로 변한 요리사를 벽면에 처박아버리면서 자신의 코트자락을 살짝 펼쳐 보였다. 그러자 그 안에 감춰져 있던 금빛 브로치가 찬란한 빛을 발했다. 그 빛은 김성철 일행을 지켜보던 다른 요리사들의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오... 오오!” “그것은 고급 요리인의 증표...?!”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어!!” 브레가스 남매와 달리 이 바닥의 요리사들은 김성철의 증표를 한 눈에 알아봤다. 그들은 마치 괴물을 보듯 놀란 얼굴로 김성철을 지켜보며 찬탄의 말을 내뱉어냈다. “좋겠네. 좋겠어.”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가 퉁명스레 말했지만 김성철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다음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그 이후로도 여러 가지 구역이 나타났다. 어떤 층은 푹신푹신 침대가 가득 있었다. 김성철 일행은 그 침대 위에서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자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빈 침대로 가 눈을 감고 싶은 권태감과 나른함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또 어떤 층에선 형틀에 사람을 묶어놓고 채찍과 기괴한 도구로 가학적인 형벌을 가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때리는 자도 맞는 자도 모두 즐거워하는 광기로 가득 찬 지역이었다. 마지막으로 지나친 층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도박장이었다. 도박장에 있는 자들은 다른 주민과 마찬가지로 절세미남, 절세미녀를 들은 정도로 아름다운 용모를 자랑했지만 하나 같이 사지 혹은 눈코입 중 하나 혹은 여러 개가 없었다. 도박장을 지나가던 김성철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기에 신체의 일부를 걸고 내기에서 지면 그 신체를 잃거나 아니면 다른 이의 신체를 취하는 것이 그들의 놀이 방식이었다. 불완전하다고는 하나 영생을 얻은 구더기들에겐 그만한 긴장을 줄 정도의 판돈은 달리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것이 악마숭배자들이 원하는 세상인가.’ 적어도 김성철의 눈에 비친 그들은 즐거워보였다. 그것조차 연기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김성철에겐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 문 너머에 있는 걸로 보입니다.” 마지막 층계가 김성철 앞에 있었다. 층계를 오르자 하나의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그 안엔 거대한 고깃덩어리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응? 저건...?!” 베르텔기아가 몸을 가볍게 떨었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그 거대한 고깃덩어리를 응시했다. 흉측하게 출렁거리는 고깃덩어리 너머에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희미한 얼굴의 흔적이 있었다. “어서 와라. 이방인. 처음 보는 얼굴이군?” 고깃덩어리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거대한 공간 전체를 메울 정도의 중량감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이 탑의 주인. 미리어도라다.” 고깃덩이 속에 파묻힌 눈이 일리야의 손에 들린 붉은 책을 발견했다. “책을 가지고 왔구나. 책 안에 숨겨진 의미를 이해하고 있고 기꺼이 수행하기를 원한다면 그 책을 내 앞에서 펼쳐라.” 만마의 제단이란 바로 이 수십 톤은 족히 나갈 거대한 고깃덩어리를 일컫는 말이었다. “책을 펼치기 전에 미리 일러두겠다. 나의 퀘스트는 다른 것과 달리 일방적인 보상만을 주지 않는다. 실패에 대가가 따른다는 이야기지.” 고깃덩어리가 출렁거리는 팔을 움직여 자신의 뱃살을 들어올렸다. 그 뱃살 안엔 인간의 두상을 한 구더기 한 마리가 눌린 채 숨겨져 있었다. 그 구더기는 꾸물꾸물 열심히 살더미 속에서 빠져나오더니 김성철 일행을 향해 씨익 웃었다. “너희들이 가지고 온 대악마의 서는 퀘스트를 받기 위한 입장권이다! 따라서 너희들에겐 단 한 번의 기회가 있으며 다른 기회를 잡고 싶다면 똑같은 대악마의 서를 가지고 와야 한다!” 구더기가 신나게 떠들었다. 김성철은 묵묵히 구더기의 말을 경청했다. “미리어도라님의 퀘스트는 모두 10개가 있고 그중 하나는 위업이다. 위업을 달성한다면 너희들은 미리어도라님처럼 대악마로 변태할 수 있는 권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위업 이외의 퀘스트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이 달성하는 퀘스트의 숫자만큼 탑에서 받게 된 너희들이 지위가 달라지게 될 테니까!” 그렇게 말한 후 구더기는 뭐가 그리 웃긴지 바닥을 구르며 웃었다. 김성철이 입을 열었다. “퀘스트를 하나도 수행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지?” 그의 물음에 구더기는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생조차 얻지 못하고 가축이 된다.” “…….”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단 하나의 퀘스트만 성공해도 너희들은 지복의 탑의 주민이 될 자격을 얻게 될 테니까!” 김성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퀘스트는 우리 전체가 함께 받는 건가?” 구더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받아도 무방해. 다른 놈들을 가축으로 던져주고 싶으면 말이지.”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일행과 함께 퀘스트에 도전하는 건 정말로 오랜만이군.’ 비록 미덥지 못한 동료긴 하지만 김성철은 일리야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책을 펼쳐라.” ======================================= 32. 탑의 영주들 (2) 책을 펼치자 김성철 일행 앞에 빛나는 문자가 나타났다. [ 지복에 이르는 길 #1 ] 자격 - 바보들의 탑의 주민을 처치할 것. / 보상 - 힘 5, 마력 5, 시민권(지복의 탑), 선택보상 있음 문자를 읽고 있자니 미리어도라 옆의 구더기가 꿈틀거리며 소리쳤다. “바보들의 탑은 지복의 탑 바로 옆에 있는 푸른 색 탑이야. 나태의 층에서 바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있긴 하지만 1층부터 가는 걸 추천하지! 4층엔 강한 문지기들이 잔뜩 있거든?” 김성철과 일행은 일단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탐욕과 타락으로 가득 찬 각각의 층을 지나 탑의 외부로 나갔을 때 황량한 마계의 풍경이 일행을 맞이했다. 철문 하나를 지났을 뿐인데 전혀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이었다. “…설마 당신도 대악마가 되려고 하는 겁니까?” 바깥에 나서자 일리야 브레가스가 용기를 내 김성철의 등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딴 쓰레기 같은 존재는 되지 않는다.” 김성철이 말했다. “그렇다면 왜...?” “내가 필요한 것은 마법의 힘뿐이다.” “마법?!” 일리야와 소피아의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저렇게 강한 자가 왜 마법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김성철은 고개를 들어 지복의 탑 옆에 자리 잡은 푸른 색 탑을 응시했다. ‘빠르게 해치우는 게 좋을 것 같군.’ 김성철은 반쯤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선택보상이 있는 걸로 기억한다. 그 조건이 뭔지 알 수 있겠나?” 김성철의 물음에 일리야는 대악마의 서를 뒤적거리더니 침착하게 대답했다. “10명 이상의 주민을 죽이거나 아니면 집행자를 처치할 것. 그것이 선택보상을 받을 수 있는 조건으로 보입니다.” “집행자라.” 김성철은 탑을 향해 걸어갔다. 푸른 탑의 문은 지복의 탑의 문처럼 굳게 닫혀 있었는데 문틈 사이로 희미한 차가운 빛이 서려 있었다. 김성철은 탑의 문 앞에 서서 문을 열어 젖혔다. 백색과 희미한 푸른색으로 장식된 질서정연한 내부가 김성철 앞에 펼쳐졌다. 지복의 탑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김성철은 앞을 가로 막은 또 다른 문을 열어젖혔다. 수많은 기둥이 있는 넓은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홀 안엔 죽음 같은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그토록 넓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고 달리 움직이는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공간. 김성철은 천천히 홀 안을 돌아보며 어딘가 있을 탑의 주민을 찾았다. 이윽고 그의 눈에 무언가 포착됐다. 기둥 아래 자리 잡은 정사각형의 석제 의자 위에 사람 한 명이 부동자세로 앉아 있었다. 김성철 일행은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들의 발소리는 홀 전체를 울릴 정도로 크게 들렸다. 곧 김성철은 탑의 주민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지복의 탑의 주민과 마찬가지로 이상적일 정도로 훌륭한 풍채와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사내였다. 그런데 한 가지 지복의 탑의 주민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성철이 그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어이.” 김성철의 부름에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보아하니 이곳에 처음 온 사람 같은데 사색의 간(間)에서 말을 하는 건 법률 위반이오.” 그는 마치 못 볼 것 봤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김성철 앞을 떠났다. 김성철은 그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군.’ 김성철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봤다. 홀 곳곳에 사람들이 있는 것이 보였다. 홀 전체를 장식한 푸른색과 흰색을 옷을 입은 그들은 마치 정물처럼 일체의 움직임도 기척도 없어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 같이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대체 무엇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김성철은 다른 이에게도 말을 걸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같은 반응을 보였다. 김성철은 여기서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과 법률 위반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을 수 있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일리야 브레가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김성철은 갑자기 영혼 창고에서 마편 카산드라를 꺼냈다. 다짜고짜 채찍을 꺼낸 그는 대리석으로 포장된 홀의 바닥을 매섭게 내려쳤다. 찰싹! 날카로운 소리가 홀 전역에 울려 퍼졌다. 정사각형의 의자 위에 앉아 사색을 하던 탑의 주민들의 시선이 일제히 김성철을 향했다. 하나 같이 경멸과 불쾌를 담은 냉담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나서서 김성철을 제지하는 자는 없었다. 김성철은 계속해서 지면을 내려쳤다. 대리석 타일 몇 개가 박살이 나며 파편이 사방에 휘날렸고 등줄기를 서늘하게 하는 파공음이 연이어 홀 전역을 강타했다. ‘대체 왜 저런 짓을 하는 거지?’ 일리야 브레가스와 소피아 브레가스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소피아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홀 저편에서 검고 거대한 물체 3개가 이쪽으로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저건 뭐지?’ 이윽고 소피아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그 거대한 검은 몸체는 놀랍게도 인간이었다. 신장만 3미터에 이르고 좌우로 떡 벌어진 거대한 체형을 지닌 그 괴인들은 멀리서부터 들을 수 있는 거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들은 사형집행인이 쓰는 두건을 쓰고 교수형을 할 때 쓰는 밧줄과 용도를 알 수 없는 쇠갈퀴를 들고 있었다. “누구냐? 법을 위반한 자가?” 검은 두건 사이로 뚫어 놓은 눈구멍 너머로는 핏발이 잔뜩 선 섬뜩한 눈동자가 번득이고 있었다. “네놈이구나!” 그들이 나타나자 김성철은 비로소 채찍질을 멈추고 그들을 노려봤다. “…….” 쇠갈퀴를 든 거한이 김성철을 향해 쇠갈퀴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신성하고 지엄한 질서의 탑의 법을 위반한 죄에 대한 즉결심판을 내린다!” 한 거한이 소리치자 나머지 두 명의 거한이 김성철 일행을 둘러쌌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브레가스 남매는 일제히 검을 뽑았다. 반면 김성철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거인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곧 중앙에 선 거인이 김성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심판결과는... 사형!” 3명의 거인이 일제히 교수대의 올가미를 던졌다. 그 올가미는 정확하게 김성철 일행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그 올가미가 목에 감기기 직전 마편 카산드라가 날카롭게 움직이며 3개의 올가미를 묶어버렸다. “이 놈이!” 거한들이 소리를 지르며 올가미를 잡아당겼다. 덩치에 걸맞는 어마어마한 힘이 올가미를 잡아당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가미를 묶은 채찍과 그 채찍을 든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구멍 너머에 자리 잡은 핏발 선 눈동자들에 일제히 경악이 떠오르는 순간 채찍을 잡은 김성철의 팔이 가볍게 움직였다. 다음 순간, 거한들이 거대한 몸뚱이들이 하늘 위로 떠올랐다. 김성철의 몸에 실린 신적인 힘이 그들을 하늘 위로 띄워 올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거한들을 떠올린 김성철은 그들이 채찍이 팽팽하게 당겨질 지점까지 떠오른 순간 또 다시 힘을 가해 전력으로 그들을 지면에 처박았다. 쿵! 탑 전체가 울릴 정도로 엄청난 충격이 지면을 강타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지면에 처박힌 거한들은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주민들의 반응이었다. 엄청난 광경이 벌어졌음에도 탑의 주민들은 자리에 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앞만 바라보았다. ‘생각했던대로 이상한 곳이군.’ 김성철은 자신의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무심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 매우 훌륭하다! 그대는 푸른 탑의 바보를 처치하는 것을 넘어 그 탑의 우둔한 사냥개를 처리했다. ] [ 따라서 그대의 보상등급은 S급으로 평가한다. ] 기본 보상 : 1. 힘 5 2. 마력 5 3. 시민권(지복의 탑) 선택 보상 : 1. 닥터 매드의 성형 시술권 2. 닥터 싸코의 성전환시술권 3. 쉐프 미나모토의 요리정 시식권 “…….” 선택 보상이 전부 쓰레기다. 게다가 기본 보상 중 하나는 받을 수도 없다. [ 당신의 힘이 지나치게 높기에 기본보상 중 일부를 받을 수 없습니다. ] 얻은 건 마력 5와 용도를 알 수 없는 시민권이 전부. 김성철은 선택 보상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러자 닥터 매드의 성형 시술권이 자동적으로 지급됐다. 반면 브레가스 남매는 쉐프 미나모토의 요리정 시식권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툭. 김성철 발밑에 붉은 호패 하나가 떨어졌다. 아무래도 그것이 소위 말하는 시민권인 모양이었다. 김성철은 그것을 들어 응시했다. <시민권(지복의 탑) > 등급 : 일반 - 중급 분류 : 소지품 효과 : 없음. 비고 : 시민권을 들고 만마의 제단 앞에 서면 영생의 육체를 얻을 수 있다. 단, 현재의 육체는 제물로 바쳐지고 다시는 찾을 수 없음을 명심하라. ‘구더기 교환권인 모양이군.’ 김성철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시민권을 바닥에 버리고 군홧발로 즈려밟았다. “저기. 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일리야 브레가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말하라.” “두 번째 퀘스트가 책에 표시됐습니다.” 일리야 브레가스는 대악마의 서를 김성철 앞에 펼쳐보였다. 김성철의 동공 위에 또 다른 문자가 떠올랐다. [ 지복에 이르는 길 #2 ] 증명 - 바보들의 탑, 2층에 도처에 있는 천칭 중 하나를 박살내라. / 보상 - 마법저항 10, 직관력 10, 표준 육신, 선택보상 있음 거기까지 본 김성철은 처음 품었던 생각이 맞아 들어가고 있음을 인식했다. ‘역시. 이 퀘스트. 뭔가 있어.’ 어디에도 명시되지 않았지만 김성철은 처음 들어섰던 지복의 탑과 현재 위치한 푸른 탑이 적대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무엇보다 퀘스트의 내용 자체가 그것을 강렬하게 암시하고 있었다. ‘일단은 따라주지.’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2층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푸른 탑의 2층은 순백색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바닥도 벽면도 천장도, 벽에 붙은 장식들도 모두 하얀색을 띄고 있었다. 김성철은 눈이 피로해지는 걸 느끼고 영혼 창고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현실 세계에서 건너온 물건. 빛바래고 낡은 선글라스다. 베르텔기아가 그걸 보고 몸을 흔들며 물었다. “그 색안경은 뭐야?” “선글라스라는 물건이다.” 지금은 귀환자가 된 옛 벗이 준 선물. 그는 이계에 오기 전에 무사고 경력 20년에 달하는 버스기사라고 했다. 다소 다혈질이지만 마음씨가 따뜻하고 무엇보다 뒤를 맡길 수 있었던 사내의 그리운 뒷모습을 떠올리며 김성철은 앞으로 걸어갔다. 곧 그의 눈앞에 문이 하나 나타났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대한 법정 같은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어 올려야 간신히 끝을 볼 수 있는 높은 재판석엔 판사로 보이는 거대한 괴인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고 그 아래 위치한 초라한 의자 위엔 초췌한 얼굴의 인간이 앉아 있었다. 인자한 얼굴을 한 판사들이 피고를 내려 보며 말했다. “샤리크 법률 제 284조에 의거... 피고를 사형에 처한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까 보았던 거대한 사형집행인들이 초췌한 인간의 목에 올가미를 걸고 머리 위로 붕붕 돌리기 시작했다. 매달린 풍선처럼 돌아가던 피고는 가공할 회전 속에서 의식을 잃고 한 마리 구더기로 변했다. 사형집행인들은 그 구더기를 쇠갈퀴로 궤 뚫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곧 피고가 간이의자에 앉았다. 재판정의 판사들이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샤리크 법률 제 53조에 의거... 피고를 사형에 처한다.” 똑같은 장면이 재현됐다. 사형집행인들은 피고의 목에 올가미를 걸었고 구더기로 변한 시체를 쇠갈퀴에 꿰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복의 탑도 갖은 미친 것들이 모인 곳이지만 이 탑도 만만치 않군.’ 재판을 구경하던 김성철은 문득 재판정 위에 금빛으로 빛나는 물체를 발견했다. 천칭이다. 김성철의 손에 망치가 쥐어졌다. 그는 하늘 높이 솟은 재판정을 향해 말했다. “김성철 법률 1조에 의거.... 여기를 개박살 낸다.” ======================================= 32. 탑의 영주들 (3) 김성철의 망치가 재판정을 후려쳤다. 쿵! 거대한 파공음과 함께 거대한 재판정이 산산조각나며 무너져내렸다. 재판정 위에 있던 판사들은 박살난 파편과 함께 지면에 떨어져 처박혔다. “저 놈을 잡아라!” 사형집행인들이 올가미를 휘두르며 김성철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김성철의 상대가 결코 될 수 없다. 퍽! 퍽! 퍽! 경쾌한 타격음이 들릴 때마다 거구의 사형집행인이 머리가 박살난 채 벼락 맞은 개구리처럼 지면에 너부러진다. 살육극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 1분이 지났을 때 법정은 제압됐다. 김성철은 발밑에 떨어진 두꺼운 법전을 주워 중간 부분을 펼쳤다. 그 안엔 작은 글씨로 쓰여진 법률 조항이 깨알처럼 적혀 있었다. 김성철은 그중 몇 개를 읽어 보았다. [ 제234조 사색을 성실하게 하지 않은 자는 사형에 처한다. ] [ 제 235조 탑의 부역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은 자는 사형에 처한다. ] [ 제 236조 벽에 낙서를 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 법전 안엔 시시콜콜한 범죄에 대해 언급하고 이에 대한 처벌은 예외 없이 사형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분류도 기준도 원칙도 없다. 김성철은 바닥에 떨어진 채 신음하고 있는 재판관을 노려보았다. “크르르르....” 더할나위 없이 인자하던 얼굴은 사라지고 고집과 심술만 남은 추악한 얼굴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천칭은 재판관 너머에 뒹굴고 있었다. 김성철은 천칭을 앞에 두고 뒤를 돌아봤다. “선택보상 조건이 뭐지?” 김성철이 묻자 일리야 브레가스는 다급하게 책을 펼치며 대답했다. “재판관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군.” 김성철의 망치가 위로 올라갔다. 그때 재판관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비를!” “…….” 재판관이 그랬듯이 김성철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붉은 핏줄기가 김성철의 군홧발을 향해 흘러내렸다. 김성철은 눈앞에 떠오르는 새로운 메시지를 확인했다. [ 매우 훌륭하다! 그대는 바보들이 공정함의 상징으로 여기는 하찮은 집기를 부수는 걸 넘어 그 탑에서 가장 역겨운 돼지를 처리했다. ] [ 따라서 그대의 보상등급은 S급으로 평가한다. ] 기본 보상 : 1. 마법저항 10 2. 직관력 10 3. 표준 육신 교환권 선택 보상 : 1. 절세미녀 수의 극락서비스 이용권 2. 절세미남 푸의 환상서비스 이용권 3. 홍룡도박장 코인 100길 “…….” 선택보상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쓰레기다. 김성철은 그 대목에서 더 이상 선택보상을 받아야 하나 하는 의문에 사로 잡혔다. 그래도 이번엔 선택보상을 골랐다. 3번 도박장 코인이다. 적어도 되먹지도 않은 서비스 이용권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아 보이니. 표준 육신 교환권이란 구더기 상태에서 이 탑에서 보이는 선남선녀 타입의 육신을 얻을 수 있는 증서 정도로 보였다. 이 탑에 사는 인간 구더기라면 모를까 김성철에겐 필요 없는 물건이다. “다음 퀘스트는 뭔가?” 바닥에 떨어진 푸른색 코인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김성철이 물었다. 일리야는 이제는 익숙해진 듯 준비를 마치고 기다렸다가 김성철이 말하자마자 새로운 페이지를 펼쳐 보여주었다. [ 지복에 이르는 길 #3 ] 증명 - 바보들의 탑, 3층에 있는 장서 스무권 이상을 불태우거나 찢어라. / 보상 - 직관력 10, 마력 10, 모범 시민권(지복의 탑), 선택보상 있음 ]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퀘스트. 일종의 세력 다툼이다.’ 김성철의 생각이 맞다면 이 푸른 탑 상층부에도 대악마 미리어도라에 버금가는 또 다른 대악마가 있을 것이다. 싸움이란 것은 서로 대등한 다음이야 성립되는 것이므로. 김성철 일행은 3층으로 향했다. 지복의 탑의 각 층에 갖가지 형태의 정신병자들이 우글거리던 것처럼 바보들의 탑, 혹은 질서의 탑이라 불리는 이곳에도 층층이 기행을 일삼는 괴인들이 모여 있었다. 다만 지복의 탑이 직접적인 욕망을 지향하는 것과 달리 질서의 탑에서는 지식이니 절제니, 수양이니 하는 고상한 가치를 지향하는 게 다를 뿐. 전과 달리 김성철은 빠르게 퀘스트를 달성해 나갔다. 책으로 가득 찬 서가가 눈에 띠자 말자 글레어로 태워버렸고 선택보상 조건인 사서도 팔 가라즈로 처 죽였다. 김성철이 걸음을 빨리하자 퀘스트 수행은 일사천리도 해결됐다. 마지막 여섯 번째 퀘스트를 해치웠을 때 이제 김성철 일행 앞에 남은 것은 최후의 위업뿐이었다. [ 지복에 이르는 길 #마지막 ] 바보들의 왕 카락 샤리크를 죽여라. 보상 - 힘 30, 체력, 30, 민첩 30, 수정 해골(에픽)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일리야 브레가스가 펼쳐 보이는 대악마의 서를 응시했다. “…….” 보상이 별로다. 특히 능력치 부분은 무용지물 그 자체. 수정 해골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김성철이 원하는 것으론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일리야 브레가스가 물었다. 김성철은 마지막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이 탑의 주인을 만나겠다.” 마지막 층은 거대한 의회였다. 그 안엔 수많은 사형집행인과 재판관들이 각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중앙의 거대한 권좌 위에 파리의 얼굴을 지닌 거대한 악마가 앉아 있었다. “이곳에 온 것을 환영한다. 침입자.” 대악마가 양 팔을 활짝 펼치며 말했다. 그의 권좌 밑엔 수많은 구더기들이 꿈틀거리며 그의 몸에서 떨어지는 각질을 주워 먹고 있었다. 김성철은 선글라스를 벗고 팔 가라즈를 어깨에 얹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일리야 브레가스는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구나. 세상의 적을 만났을 때만 해도 영락없이 죽은 줄 알았더니.. 이 자 덕에 쏠쏠한 능력치 상승은 물론 대악마가 될 수 있는 기회까지 잡게 되다니....’ 세계의 적이라 불리는 자의 무용은 절대적이었다. 자신의 부친인 마르틴 브레가스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세계의 적은 소문보다 강하고 압도적이고 그리고 막을 수 없는 존재였다. 알려진 모든 나라가 그를 두려워하는 것이 절로 이해가 갔다. 이제 그 세계의 적이 질서의 탑의 우두머리 앞에 섰다. 일리야 브레가스의 생각대로라면 김성철은 저 전설적인 팔 가라즈로 대악마와 싸울 것이다. 누가 이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리야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김성철을 도와 싸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김성철은 거대한 파리 대왕 앞에 서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 아나?” 질서의 탑의 주인 대악마 카락 샤리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네가 누군지 모른다. 침입자.” 김성철은 망치를 들어보였다. 마계의 모든 악마들이 두려워하는 물건이지만 이곳의 대악마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그 악마는 껄껄 웃으며 자신의 할 말만을 했다. “그래도 한낱 인간 주제에 여기까지 온 것 보면 실력은 있는 놈 같구나. 일국의 전사장인가? 아니면 용자의 칭호를 얻은 자인가?” 아무래도 저 악마는 김성철이 누군지 모르는 것 같았다. 김성철이 물었다. “너. 다른 악마들과 별로 안 친한 모양이지?” “친해질 수가 없지. 나야 대악마가 되었다고 하나 인간 출신인데. 악마들이란 보기보다 텃새가 심한 종족이거든.” “그렇군.” 그렇다면 저 대악마가 김성철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도 설명이 된다. 안개의 바다 너머에 사는 악마숭배자들은 극도로 폐쇄된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고 그곳에서 살아온 것이다. ‘왜 저렇게 말이 많은 거지? 그냥 죽이면 될 것을.’ 김성철과 대악마의 대화가 길어지자 초조해진 것은 일리야 브레가스였다. 그는 당장 김성철이 저 대악마를 해치우고 위업을 달성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세상일이란 늘 그렇듯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김성철은 망치를 영혼 창고 안에 집어넣었다. 다시 말해 싸울 의사가 없는 것이다. 일리야 브레가스의 입에서 얕은 한숨이 흘러 나왔다. 소피아는 그런 일리야의 뒤를 차분히 지켰다. “내가 여기 온 이유가 뭔지 아나?” 김성철이 대악마를 향해 물었다. 카락 샤리크는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짐승의 탑의 주인이 보내서 온 것이겠지? 네 뒤에 있는 인간이 지닌 책은 그 놈의 것이군.” “그래서 묻는데 네 놈은 책이 없나?” 김성철의 눈이 번득였다. “책?” “그래. 네 놈이 만들어 낸 대악마의 서는 없냐고 묻고 있다.” 일리야 브레가스의 손에 들린 대악마의 서에는 제7권이라는 권수가 기재되어 있다. 김성철이 그걸 처음 봤을 땐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악마숭배자들의 땅에서 잡다한 퀘스트를 수행하고 대악마를 비롯한 잡다한 군상들을 만나면서 그 숫자의 의미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즉, 대악마의 서는 여러 권이 있고 각 권은 악마숭배자들의 땅에 세워진 8개의 탑, 그 최상부에 사는 대악마들이 기재한 건 아닌가 하는. 파리의 두상을 한 악마는 껄껄 웃으며 칼날처럼 날카로운 손톱으로 김성철을 가리켰다. 그 손톱의 끝 지점에 마법진이 떠오르더니 푸른 색 가죽을 입힌 책이 떠올랐고 그것은 저절로 김성철에게 날아가 그의 손바닥 위에 얹어졌다. 김성철은 그 책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대악마의 서 : 제3권 > 등급 : 에픽 분류 : 장비 - 책 효과 : 장비 시 민첩 20, 직관력 20 상승. 비고 : 악마의 힘을 얻고자 하는 자는 만마의 제단 앞에서 이 책을 펼칠지어다. 제한 : 마법사 관련 클래스 김성철의 짐작이 옳았다. 올려주는 능력치만 다를 뿐이지 일리야 브레가스가 지닌 붉은 책과 기능이 동일하다. “당돌한 놈이군. 다른 대악마의 퀘스트를 수행하는 주제에 그걸 버리고 나의 퀘스트를 수행하겠다니.” 대악마는 뭐가 그리도 웃긴 지 끊임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그의 뒤에 앉은 수많은 사형집행인과 재판관들도 그를 따라 낮은, 기계음 같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오싹한 웃음소리가 천지 사방을 뒤덮었다. 일리야 브레가스는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 바로 눈앞에서 원하던 것이 사라졌다는 상실감이 그의 정신력을 크게 꺾어 놓은 상태에서 들려온 불길한 웃음소리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귀를 막은 채 주저앉았다. 일리야보다는 정신이 온전했던 소피아가 걱정스런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오라버니.” 그때 그녀 앞에 푸른 책이 날아왔다. 김성철이 던진 것이다. 그녀는 엉겁결에 책을 받으며 약간의 항의가 깃든 눈으로 김성철을 노려봤다. 김성철은 언제나처럼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짤막하게 말했다. “책을 펼쳐라.” “…….” 내키지는 않지만 그의 말은 거역할 수 없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또 다른 만마의 제단인 카락 샤리크 앞에서 책을 펼쳤다. 또 다른 퀘스트가 시작됐다. 김성철은 눈앞에 새로운 퀘스트 메시지가 떠오르는 걸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 악마숭배자들의 소굴. 소환 궁전 이후의 노다지판일지도 모르겠군.’ 별 기대도 하지 않고 온 곳이었다. 그저 낮은 가능성 하나만을 믿고 온 곳이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상상 이상이다. 그토록 원했던 고속 성장의 열쇠가 이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이다. ‘이 땅에 몇 마리의 대악마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모두 사이가 좋지 않았으면 좋겠군.’ 푸른 탑의 층계를 내려가며 김성철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는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건 모두 얻어 갈 작정이었다. 불이 붙은 김성철의 행보엔 거침이 없었다. 다시 지복의 탑 1층에 들어선 그는 소피아 브레가스가 보여주는 퀘스트를 충직하게 수행했다. 1층에선 포주를 때려죽였고 2층에선 쉐프를 학살했고 3층에선 침대를 때려 부셨다. 다른 층에서도 그는 비슷한 활약을 펼쳤고 푸른 대악마의 서가 주는 능력치를 짭짤하게 챙겼다. 지복의 탑의 최상층 앞에서 김성철은 간만에 자신의 능력치를 점검했다. [능력치] 힘 999+ 민첩 853 체력 801 마력 388 직관력 375 마법저항 622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여기서 마력만 30 넘게 올린 거 같군.’ 하지만 김성철은 아직 목이 마르다. ======================================= 33. 버림 받은 자 (1) 악마숭배자들의 땅에 있는 여덟 개의 탑. 각 탑의 최상부엔 인간에서 대악마로 진화한 존재들이 군림하고 있다. 각 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세상으로 그 색깔과 성격은 탑을 지배하는 대악마의 개성에 따라 정해진다. 쾌락, 질서, 허영, 공작 등등 그 성격은 실로 다양했고 한 가지 범주에 넣기 곤란할 정도로 종잡을 수 없었다. 각 탑의 대악마들에겐 각자의 적이 있는데 그들은 자신의 적을 골탕 먹이기 위해, 혹은 제거하기 위해(가능성은 극히 희박하지만) 대악마의 서를 만들어냈다. 김성철은 그 여덟 개의 대악마의 서를 모두 손에 넣을 작정이었다. 단 하루 동안 그는 4개의 대악마의 서를 손에 넣었고 위업을 제외한 모든 퀘스트를 클리어 했다. 태양이 보이지 않는 마계에서 평범한 인간들은 하늘을 보고 시간을 짐작할 수 없지만 김성철은 대단히 정교한 배꼽시계를 지니고 있다. 배가 고파지면 식사를 하는 것이 그의 사명. 매일 매일의 꾸준함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김성철은 성장만큼이나 휴식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4개의 탑을 돌았을 때 그는 하루 일정을 마무리 짓고 대악마의 여덟 탑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하룻밤을 묵을 캠프를 만들어냈다. 물론 브레가스 남매도 그와 행동을 함께 했다. 타닥타닥. 김성철이 피워 놓은 화롯불이 붉은 재를 흘리며 타들어가는 가운데 남매는 말없이 불가에 앉아 있었다. 김성철은 어디론가 사라져 돌아오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먼저 소피아가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괜찮아?” 그녀의 눈동자 속엔 근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세계의 적이란 존재와 동행하면서 말도 안 되는 능력치 상승을 경험하긴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들 남매는 맹수와 함께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맹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존재다. 갑자기 기분이 나빠져 자신들을 해치울 수도 있고 아니면 그보다 더한 짓을 요구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김성철은 건장한 남자가 아니던가? ‘그 인간 틀림없이 오랫동안 여자를 접하지 못했을 거야.’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소피아의 마음속엔 불길한 예감이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만약 그 사람이 내 몸을 요구하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오라버니 앞에서.. 그런 짓을 당해버리면... 나는 살아 있을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려!’ 몸이 편하면 잡생각이 생기는 법이다. “괜찮아. 소피아.” 한편 일리야 브레가스는 소피아와는 다른 근심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대체 세계의 적. 그 자는 뭘 생각하는 거지? 왜 대악마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목전에서 포기하고 하부 퀘스트만 수행하는 것이지?’ 능력치가 늘어난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마계에 오기 전부터 젊은이 가운데서 촉망 받는 후기지수 소리를 들었지만 단 하루 동안 그는 대단히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 하지만 일리야의 목표는 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대악마. 인간을 넘어선 악마의 힘이야말로 그가 원하던 이상향인 것이다. 그런데 김성철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어보였다. 추이를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그는 대악마보다는 대악마의 서를 원하는 것으로 보였다. 타닥타닥. 말라붙은 장작 하나가 타들어가며 아래로 내려앉았다. 일리야는 옆에 쌓아둔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장작더미를 뒤집어 자기도 모르게 깊은 침음성을 흘렸다. ‘만약 그 자가 대악마를 처치하지 않는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지? 내 스스로 직접 대악마를 상대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자신은 없다. 실제로 본 대악마들은 압도적이었고 도저히 이길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시름은 더욱 깊어져 갔다. 그때 머지않은 곳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저벅. 이제는 낯익은 군홧발 소리. 김성철이 오고 있었다. 등 뒤에 거대한 무언가를 지고서. 쿵. 김성철이 그 물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것은 긴 털을 지닌 소였다. 생김새로 보아 어린 녀석으로 보였는데도 덩치가 만만치 않았다. 김성철은 검을 꺼내 말없이 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저기 혹시 요리를 하는 건.... 가요?” 소피아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 김성철은 형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라면 지복의 탑에서 하는 게 어때요? 퀘스트 보상으로 식사권 받은 게 있는데.” 소피아는 선택 보상으로 받은 쉐프 미나모토의 식사권을 꺼내 들었다. “이 주변에 농장이 있나?” 김성철이 물었다. 소피아는 주변을 돌아봤다. 농장은커녕 논밭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그 많은 인간을 먹여 살리는 재료는 어디서 날까? 그럼에도 그 음식이 먹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김성철은 고기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브레가스 남매는 저마다 복잡한 기분이 담긴 시선으로 김성철의 모습을 지켜봤다. 소피아의 눈동자에 경탄이 서렸다. ‘검술도 보통이 아니네.’ 마법과 검을 동시에 익혔지만 검에 보다 조예가 깊은 그녀는 김성철의 검이 얼마나 높은지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있었다. 김성철의 검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의 검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거대한 소의 시체는 경탄할 정도로 일사불란하게 해체되고 정리됐다. 김성철은 잘 발라낸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집어 냄새를 맡았다. “음... 아주 좋은 고기는 아니군.” 감칠맛은 나지만 누린내가 살짝 섞여 있고 질기다. 김성철은 주변에 굴러다니는 납작한 바위 위에 고깃덩어리를 올려놓더니 칼로 고기를 다지기 시작했다. 빠르게 칼질을 하다 보니 상의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가 걸리적거린다. “나와라.”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끄집어냈다. “싫어! 모르는 애들 눈에 띠는 건 질색이라고!” 베르텔기아는 나가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김성철의 힘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베르텔기아는 주머니 바깥으로 빠져나가 하늘 위를 펄럭거렸다 일리야와 소피아는 놀란 눈으로 베르텔기아를 응시했다. “리빙 북?” 소피아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리빙 북 처음 봐?” 심기가 상한 베르텔기아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한편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비장의 요리 재료를 꺼냈다. 말린 버섯과 야채, 후추와 갖가지 허브들이 담긴 그의 요리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김성철은 그것들을 다진 고기에 넣고 섞은 뒤 다시 칼로 두드렸다. 일리야가 김성철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근심에 잠겨 한숨만 뻑뻑 내쉬던 그는 김성철이 요리를 하는 모습을 보자 눈에 띨 정도로 표정이 밝아졌다. 그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한 것도 있고 예전에 맛 본 김성철의 요리를 떠올리고 자기도 모르게 기대를 하는 것이다. ‘칫...!’ 그 모습을 본 소피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김성철 등 뒤로 다가갔다. “저기.” “뭐냐?” “조금 도와줘도 될까.... 요?” 소피아로서는 일생일대의 결단의 내리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김성철의 반응은 냉담했다. “사양하겠다.”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굶으면 굶었지 너에게 요리를 맡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소피아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김성철이 두렵긴 했지만 그의 뒤에서 버티고 서서 다시 한 번 말했다. “조금만 도와줄게요. 우리도 먹을 거니까.” 이에 김성철은 다듬고 있던 고깃덩어리 일부를 툭 떼내 소피아에게 내밀었다. “네가 먹을 건 네가 만들어라.” 원하던 그림은 아니었지만 소피아는 두 손으로 공손히 고기를 받고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좋았어. 이번 기회에 오라버니에게 내 요리솜씨를 다시 한 번 보여줄 때가 온 거야!’ 하지만 그녀는 보지 못했다. 일리야의 눈동자가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고기를 받아든 소피아는 김성철이 만든 것이 일종의 햄버그 스테이크 종류라는 걸 간파했다. 재료 손질 및 조리도 이미 김성철의 손에 의해 대부분 되었고 남은 건 약간의 추가적인 다지기와 그리고 굽기뿐이다. 다지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문제는 굽기다. 여기서는 적절한 조리도구를 찾기 어렵다. 소피아는 머리를 굴려 주변에 적절한 도구를 찾았다. 굴러다니는 작대기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다 고기를 붙여 뼈다귀 통구이처럼 직화로 구우면 제법 괜찮을 거 같은데?’ 그녀는 어깨 너머로 라이벌인 김성철 쪽을 응시했다. 그는 여전히 고기를 다지고 있었다. 미련할 정도의 끈덕짐이다. 소피아는 최고의 반찬은 시장기라는 걸 떠올리고는 즉시 자신의 발상을 행동으로 옮겼다. 적당히 굵은 나뭇가지를 깨끗이 씻고 그 중간 부분에 다진 고기를 붙였다. 그런데 잘 붙지 않는다. 다지면서 점성이 사라져서 그런지 둥글게 말아 붙여도 툭 떨어지기 일쑤다. 결국 그녀는 마법의 힘을 빌렸다. 빙결학파의 마법을 익힌 그녀의 손에서 냉기가 나오더니 나뭇가지에 익힌 고기를 딱딱하게 굳히는데 성공한 것이다. “…저 여자. 뭐하는 거지?” 김성철의 주머니에서 쫓겨나 주변을 배회하던 베르텔기아가 그 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소피아는 얼린 고기를 그대로 모닷불과 연결된 조리대에 넣고 그대로 불에 구웠다. 그런데 이미 얼린 고기가 제대로 구워질 리 만무하다. 꽁꽁 얼었던 고기는 처음엔 불에 제법 잘 버티는 듯 싶다가 이내 빠르게 타들어가며 검은 잿덩어리로 변했고 하늘 높이 불길한 검은 연기를 피어 올렸다. 소피아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희미하게 인식했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검은 무언가를 불에서 꺼냈다. 그런데 손잡이로 삼았던 나뭇가지에도 그만 불이 붙고 말았다. 그녀는 재빨리 고기를 얼려 불을 끄고 딱딱하게 굿은 잿덩어리를 빠르게 일리야에게 내밀었다. “오라버니. 정말 배고팠지? 들어. 내가 간만에 솜씨를 발휘한 거니까.” “…….” 일리야의 표정은 태연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제발... 도와줘. 저런 건... 먹고 싶지 않아!’ 여동생에게 싫은 말을 못하는 성격이 그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다주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소피아 너머 김성철을 향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불 안에 주먹 만 한 크기의 납작한 돌을 던져놓고 있었다. 돌을 던져 넣으면서 김성철은 힐끗 일리야와 소피아 쪽을 응시했다. “뭐야? 그건 먹는 거야?” 김성철이 퉁명스레 물었다. “당연히 먹는 거지... 요.” 소피아가 약간의 불쾌감을 드러냈다. 김성철은 위기에 처한 일리야를 응시하고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브레가스 남매 쪽을 향해 걸어왔다. “네가 한 번 먹어봐라. 네가 만든 걸.” “뭐라고... 요?” “한 번 먹어보라고. 네가 직접 만든 음식을.” 평상시라면 가볍게 무시했겠지만 상대방은 생사여탈권을 쥔 전설적인 악당 세계의 적이다. 소피아는 자신이 만든 음식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음식이라고 할 수 없는 탄소 덩어리가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마... 맛있겠네?” 하지만 소피아도 깨닫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것이 절대 먹을 수 없는 무언가라는 사실을. 김성철이 다진 고기가 올려진 납작한 돌을 번쩍 들어 불가로 가지고 왔다. 다진 고기는 마치 고봉처럼 둥그렇게 쌓여 있었다. 김성철은 그것을 검으로 잘라 3등분 하고는 자신과 브레가스 남매에게 균등하게 갈랐다. 그걸 본 소피아가 냉랭하게 말했다. “설마 생고기를 먹으라는 건가요?” 이미 자신이 만든 요리를 내던진 소피아였지만 아직은 변명할 구석이 하나 남아 있었다. ‘요리 도구가 변변치 않아서 태워 먹은 거라고. 당신이라고 해서 별 수 있을 거 같아?’ 그때 김성철의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검 위엔 아까 불 안에 던져 놓았던 작고 평평한 돌이 올려 있었다. 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돌을 각자 앞에 놓고서는 단검을 꺼내 다진 고기를 살짝 올려 돌 위에 버터를 바르듯 발랐다. 치이이익- 놀랍게도 다진 고기는 평평한 돌 위에서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익어갔다. 불의 온기를 머금은 돌 자체가 즉석 프라이팬 역할을 한 것이다. 비록 소스도 없고 곁들일 다른 재료도 없지만 갓 구워진 다진 고기는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극상의 맛을 내며 혀 안에서 녹았다. “음...” 먼저 고기를 입안에 넣은 김성철은 두 눈을 감고 자신의 요리를 음미했다. [ 이 요리의 점수는... 68점! ] 소스와 곁들일 부재료가 있었다면 보다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었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평범한 요리인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점수대다. “…!!” 일리야의 입에서 얕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맛이다. “!!” 소피아도 동일한 경탄을 느꼈다. ‘같은 고긴데도 이렇게 맛이 달라?!’ 분한 마음이 몰려오지만 먹는 걸 멈출 수 없다. 김성철은 걸신들린 사람처럼 자신의 요리를 먹는 브레가스 남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요리사로서 자부심이 공허한 가슴을 어느 정도 채워지는 게 느껴진다. 비록 찰나의 위안이라고 할지라도. 김성철의 눈앞에 비슷한 풍경이 떠올랐다. 거지처럼 비루한 옷을 차려 입은 여자아이였다. 다짜고짜 찾아온 그 아이는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한 여자의 이름을 댔다. 하인이 내온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던 여자아이를 보던 김성철은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당시 김성철은 인생의 절정기에 올라와 있었다. 대륙십걸이자 신생 인간제국의 대원수로서 쇠락과 타락 속에 있던 대륙에 질서를 세우고 그 이름을 대륙 전역에 떨치던 시기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제국 내부에 고질병처럼 자리 잡은 권력다툼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우울한 시기이기도 했다. 현실로 돌아간 다른 동료처럼 귀환자의 삶을 조용히 준비하던 그에게 낯선 아이의 출현은 공허했던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 김성철의 상념은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잡음에 의해 깨졌다. “나와라.” 낮지만 묵직한 음성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허겁지겁 음식을 먹던 브레가스 남매가 깜짝 놀라 주위를 돌아보았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안개를 뚫고 거무스레한 형체가 김성철 일행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전에 본 적이 있는 존재였다. 악마숭배자들의 탑 주변을 떠돌며 노역을 하던 바로 그 인간이다. 장의사처럼 검은 옷을 입고 두건으로 추한 얼굴을 가린 그 존재는 조심스럽게 김성철 앞에 걸어오며 추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크크... 오해하지 마라. 적이 아니다. 나는 그저 너희들에게 제안을 하러 왔다.” “제안?” 김성철이 냉담한 어조로 묻자 두건 아래 드러난 뒤틀린 입가에 기괴한 미소가 떠올랐다. “대악마들을 죽이고 싶나? 그렇다면 방법을 알려주지.” ======================================= 33. 버림 받은 자 (2) “꺼져라.” 김성철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괴인은 김성철이 뿜어내는 형형한 기운에 눌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렇게 괴인의 출현은 찰나의 헤프닝 정도로 끝나는 것으로 보였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 일리야 브레가스는 식사조차 중단한 채 멀어지는 괴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 모든 걸 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이튿날. 김성철은 나머지 4개의 탑의 공략을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출발하려고 하니 일리야 브레가스가 강한 통증을 호소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지만 나름 명문가의 자식인 일리야 브레가스가 이렇게까지 체면 불구하면서까지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잘못됐다. 김성철은 악마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 이미 두 눈으로 본 적이 있다. “…….” 직접적으로 말해봐야 듣지 않을 것이다. 힘으로 강제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의리는 없다. 그런 이유로 김성철의 선택은 다분히 간접적인 방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책을 들어 줄 시종이 필요하다. 일일이 펼치기 귀찮으니 말이다. 통증을 잊는 약이 필요하다면 주겠다.” 김성철이 그렇게 말하자 일리야는 일말의 망설임없이 소피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소피아. 미안하지만 네가 가줘야겠어.” “오라버니!” 소피아는 크게 당황했지만 일리야의 눈빛에 깃든 단호함을 이내 파악하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가 가진 대악마의 서를 전부 이 여자에게 넘겨라.” 김성철은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다. 일리야는 김성철의 명대로 자신이 지니고 있던 대악마의 서들을 소피아에게 넘겼다. “내 걱정은 하지 마.” 책을 넘겨주면서 일리야가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아무리 여기가 악마숭배자들의 땅이라고 해도 이 지역은 악마가 횡행하는 마계다. 소피아는 걱정스런 눈으로 일리야를 바라보며 할 말을 생각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해야 할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곧 앞에서 김성철의 엄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꾸물거리나?” 결국 소피아는 뒤를 고개를 숙인 채 따라갔다. 김성철의 뒤를 따라 걸으며 소피아는 일리야가 있을 뒤를 돌아봤다. 일리야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가 보고 있는 곳은 멀리 이름 모를 탑 아래에서 노역을 하고 있는 괴인이 있는 방향이었다. 소피아는 일리야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쪽을 쳐다봤지만 일리야는 결국 사라질 때까지 이쪽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 가슴이 저며 왔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아랫입술을 깨물고 새로운 탑의 문을 열어 젖히는 김성철의 뒤를 응시했다. ‘이렇게 될 거 알고 있었잖아.’ 소피아가 브레가스의 가문의 성을 쓴 건 최근의 일이다. 일리야와 소피아는 어머니가 다르다. 일리야의 모친이 명망 높은 명망가의 영애인 반면, 소피아의 모친은 농장에서 소의 여물이나 주는 시골 처녀였다. 나면서부터 사생아라는 딱지를 달고 살아야 했던 소피아의 유년기는 비참했다. 그런 소피아에게 구원의 빛을 보낸 것이 다름 아닌 일리야 브레가스였던 것이다. 소피아에게 일리야는 오라버니 이상의 존재였다. 소피아는 일리야를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 하나 정도는 기꺼이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악마가 된다는 것은.” 낯선 복도에서 앞을 걸어가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소피아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허름한 코트 자락을 휘날리는 사내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결국 자신을 버리게 되는 것과 같다.” “…?!” 소피아의 동공이 순간 팽창했다. ‘이 사람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김성철은 계속해서 말했다. “악마의 육신은 인간의 육신과 다르다. 인간의 육신이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호수의 표면과 같다면 악마의 육신은 끊임없는 충동의 불길에 타오르는 바다지.” “실례합니다만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가 없네요.” 소피아가 정중하게 항의했지만 김성철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그 악마의 육신 속에서 인간의 마음 따위는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재만 남게 될 것이다.” “…….” 저 사내가 허투루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냉정을 빠르게 되찾고 김성철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힘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죽어요. 마르틴 브레가스. 그 사람이 얼마나 냉혹하고 잔인한 사람인지 당신은 몰라요.” “죽진 않겠지. 모든 걸 포기한다면.” 김성철이 걸음을 멈추더니 뒤돌아섰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나도 살아 있잖아?” “당신은 강하잖아요.” 소피아가 항의하듯 말했다. 김성철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내가 강한 건 아니었다. 내가 세계의 적이 되었을 때 대륙에 나보다 강한 존재는 열 명, 아니 재야의 존재까지 합치면 서른 명도 넘게 있었다.” “…….” 소피아는 입술을 다물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김성철 하나를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력이 동원됐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이 함대급이다. 아니면 암살교단의 최정예급이거나. 기껏해야 2류의 암살자 몇 명이 붙을 브레가스 남매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너희들이 브레가스라는 이름을 버리고 평생 숨어산다면 마르틴 브레가스도 너희들을 더 이상 어떻게 하진 않을 것이다.” 김성철이 말했다. 그의 말은 정론이다. 마르틴 브레가스가 자신의 아들딸을 죽이려고 하는 것도 또 다른, 사랑하는 여자의 자식에게 모든 걸 물려주기 위함이므로. “…이름 없이 야인으로 살 바에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소피아의 말이 결국 바뀌었다. 그것은 일리야 브레가스 본인의 뜻이기도 했다. “…….” 김성철은 다시 입을 다물고 탑의 층계를 따라 최상부로 향했다. 층계를 올라가는 도중에 그는 단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악마가 있을 최상부 앞에서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악마가 된 인간들의 말로가 있지. 이미 몇 번 봤을 테지만 충분한 견본이 될 것이다.” 녹색탑의 최상부에서 김성철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온 몸에 못을 박아 피와 고름을 흘리는 거인 형태의 악마였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엽기적인 외형과 그보다 더 끔찍한 악취 속에서 소피아는 순간 정신을 잃을 뻔했다. 김성철은 그런 악마 앞에 당당히 서서 담담하게 거래를 시도했다. 그의 얼굴엔 터럭만큼의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탑을 내려오면서 소피아는 김성철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오라버니가 저런 괴물이 된다고?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하지만 또 다른 탑에 서식하는 대악마를 봤을 때 흔들리기 시작한 그녀의 마음에 균열이 일었고 점점 의혹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여섯 번째 탑의 퀘스트를 모두 완료하고 탑을 나선 직후, 소피아는 일리야의 모습을 찾았다. 아까 전까지 푸른 탑 아래 웅크리고 있던 그의 모습을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탑 아래서 노역하던 괴인의 모습도 덩달아 사라졌다. ‘설마. 오라버니. 벌써 움직인 거야?’ 소피아는 마음이 조급해지는 걸 느끼며 안절부절못한 모습을 보였다. 불안한 침묵 속에서 김성철이 앞으로 걸어갔다. “다음 탑으로 간다.” “저기.” 소피아가 용기를 내 말했다. 김성철이 고개를 돌렸다. “일리야 오라버니가 보이지 않아요.” 이에 김성철은 손가락을 들어 희뿌연 안개가 서린 지점을 가리켰다. 놀랍게도 김성철이 가리킨 지점에 인간의 형체가 있었다. 일리야였다. 소피아는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걸 느끼고 그곳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어딜 가는 거지?” 김성철이 싸늘하게 물었다. “잠시만, 잠시만 안부 좀 묻게요.” 그녀는 곧장 일리야를 향해 달려갔고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그쪽을 응시했다. “흠. 익숙한 비극의 냄새가 나는데?”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바깥으로 기어 나오며 제법 냉소적인 어조로 말했다. “설마 저런 걸 보고 즐기는 취미는 아니지?”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나 같으면 그냥 힘으로 뜯어 말리거나 했을 텐데. 당신은 언제나 다른 사람이 잘못된 행동을 하게 하는 걸 내버려두고 지켜보기만 하잖아.” “선택은 자신이 하는 거다. 그 선택의 대한 책임 또한 자신이 지는 것이고. 내가 강요해야 할 이유도 명분도 의리도 없다.” 소피아는 한 달음에 일리야가 있는 장소로 달려갔다. 일리야는 땅을 파고 있었다. 여기저기 그가 파헤친 흙더미가 쌓여 있었다. “오라버니.” 소피아가 일리야를 불렀다. “오. 소피아. 왔구나.” 일리야는 삽을 내려놓고 반갑게 누이를 맞이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지만 그의 기분은 들떠 있었다. “들어봐. 소피아. 아까 그 괴물. 꽤나 그럴듯한 제안을 했어.” 그는 흙에서 갓 파낸 검은 구슬을 소피아에게 보여줬다. “이게 뭔데?” 겉보기엔 별 볼 일 없는 검은 구슬이다. “대악마의 힘을 봉인하는 힘을 지닌 봉인의 오브야. 이건 한 번 쓴 녀석이라 색깔이 검게 변했지만 아직 사용되지 않은 녀석은 무색을 띠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것만 찾아내면 어떤 대악마라도 어린아이 팔 비틀 듯 처치할 수 있는 모양이야.” 일리야는 안개 너머 대지에 우두커니 서 있는 김성철 쪽을 힐끗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세계의 적은 어떤 거 같아?” “그냥 뭐. 평소와 같아.” 애써 평소대로 말했지만 소피아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김성철에게 들었던 말이 흉측한 대악마들의 모습과 겹쳐 그녀 앞에 떠오른 것이다. 흥분에 빠진 일리야는 소피아의 작은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계속해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책 가진 거 있지?” “책?” “대악마의 서 말이야.” “응 지금까지 6권을 모았어. 나머지 2권은 아마도 저 자가 곧 찾으러 갈 거고.” “좋아. 그럼 한 권만 빌려주지 않을래? 그... 빨간 색. 빨간 색이 좋을 거 같아.” “하지만 세계의 적에게 들키면...” 소피아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반면 일리야에겐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일생일대의 도박을 하고 있었다. 비록 결점으로 가득 찼지만 죽음에 있어서 초연했던 마르틴 브레가스의 피가 그의 몸에도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괜찮아. 어차피 영혼 창고 안에 전부 놓아둘 거 아냐? 한 권 정도는 괜찮아. 그리고 걱정 하지 마.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니까. 저 자가 눈치 채기 전에 끝낼게.” “…….” 소피아는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일리야의 편을 들었다. 그녀는 붉은 대악마의 서를 은밀하게 일리야에게 넘겼다. 하지만 책을 넘겨주는 순간, 그녀를 괴롭혀왔던 김성철의 말과 대악마들의 끔찍한 모습이 다시 한 번 그녀 앞에 보다 선명한 형태로 떠올랐다. “저기, 오라버니.” 대악마의 서가 일리야에게 넘어가기 직전, 소피아의 손이 대악마의 서를 강하게 쥐었다. “갑자기 왜 그래? 소피아.” 일리야 브레가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우리 꼭 대악마가 될 필요가 있을까?” “무슨 소리야. 그것을 위해 여기까지 온 거잖아. 친구들의 목숨까지 버려가면서까지.” “하지만... 대악마가 된다는 거. 좋아 보이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소피아. 우리에겐 대안이 없어.”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다. 소피아는 심호흡을 조용히 하고는 오랫동안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말을 꺼냈다. “그냥 우리끼리 도망가자.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몇 번이고 하고 싶었던 말이지만 끝내 할 수 없었던 한마디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소피아.” 일리야의 입가에 어이없다는 실소가 걸려 있었다. 소피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지만 이내 그녀도 일리야와 비슷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농담이야. 내 정신이 어떻게 됐나 봐.” 그녀는 책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대악마의 서는 일리야에게 넘어갔다. “나중에 보자.” 대악마의 서를 손에 넣은 일리야는 그것을 자신의 영혼 창고에 넣으며 다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빨리 돌아가. 저 인간이 눈치 챌 수도 있으니까.” “으.. 응.” 소피아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김성철에게 돌아갔다. “…….” 김성철은 돌아온 소피아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음 탑으로 행선지를 옮겼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나머지 2개의 탑도 모두 김성철에게 공략됐다. 대악마들의 퀘스트 48개가 단 이틀 만에 김성철의 손에 의해 해결 된 것이다. 모든 일반 퀘스트를 마친 시점에서 김성철은 상태창을 떠올렸다. [능력치] 힘 999+ 민첩 853 체력 801 마력 429 직관력 422 마법저항 622 의지 502 매력 18 운 18 마력과 직관력이 전부 400을 돌파했다. 남은 것은 위업들 뿐. 각각의 대악마를 처치하라는 의뢰가 담긴 위업 8개가 있다. 김성철이 생각하기에 여기서 달성할 수 있는 위업은 최대 4개가 가능한 걸로 보인다. 위업의 목적이 되는 대악마가 죽은 시점에서 그 대악마가 만들어낸 위업도 사라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각각의 위업은 걸려 있는 보상이 다르다. 김성철은 되도록 마력과 직관력을 주는 위업을 우선적으로 처리하리라 마음먹었다. ‘위업들을 세부적인 부분을 확인하지 않았지만 운이 좋다면 여기서 마력과 직관력 500을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여기서 목표했던 수준을 넘기고 원시의 빛을 배울 수 있다면 김성철은 즉시 심해마종에게 달려가 새로운 마법의 위력을 시험한 후, 마왕을 찾아갈 것이다. ‘드디어 첫 번째 재앙의 해결이 눈앞에 보이는군.’ 돌이켜보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아니다. 대마법사이라 불려도 무방한 정도의 마력을 얻는데 채 1년도 걸리지 않았으니. 오랜만에 생명력이 심장 안에서 약동하는 걸 느끼며 김성철은 소피아를 돌아보며 명했다. “8개의 대악마의 서를 전부 꺼내라.” 그 말을 들은 소피아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 33. 버림 받은 자 (3) 7개의 대악마의 서가 차례로 바닥에 놓였다. 하지만 붉은 색의 서는 보이지 않는다. “하나가 부족하군?” 김성철이 물었다. “그... 그게....” “솔직히 말해라. 책은 어디에 있나?” “…….” 소피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성철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김성철의 다음 행동이 무엇일지 나름대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예쁜 여자 시체는 이상하게 더 끔찍하게 보여서 싫어.’ 하지만 김성철은 소피아에게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두려움에 떠는 소피아를 뒤로 하고 나머지 책들이 놓인 곳으로 걸어가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붉은 색 대악마의 서에 적힌 위업은 힘과 민첩 따위 나에겐 필요 없는 것들만 있었지.’ 처음 얻었던 책이라 그 내용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소피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책들을 펼쳐서 위업을 내게 보여라.” 소피아는 그녀답지 않게 허겁지겁 뛰어가 시키는 대로 했다. 김성철은 각 대악마의 서에 기재된 보상들을 같은 선상에 넣고 비교하게 했다. 최우선순위는 직관력이다. 마력이 조금 부족할지언정 직관력이 없으면 천공학파 최후의 마법을 익힐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 다음은 마력이다. 김성철은 직관력과 마력을 주는 위업을 우선적으로 찾았다. 곧 3개의 책이 추려졌다. 조건은 직관력이 최우선에 마력을 2순위로. 거기서 또 의뢰인과 목표물이 겹치지 않는 것들을 추려냈다. 그렇게 해서 김성철이 우선적으로 달성해야 할 위업은 3개로 축약됐다. 대악마의 서 제1권 - 직관력 30, 마력 15, 매력 15 대악마의 서 제5권 - 직관력 20, 마력 10, 매력 20 대악마의 서 제8권 - 직관력 10, 마력 10, 운 30 위업의 보상엔 능력치 보상뿐만 아니라 잡다한 아이템도 들어 있었는데 이 부분은 김성철의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김성철의 시선은 오직 수치에 머물러 있었다. ‘직관력만 60이군. 이 전부를 해낼 수 있다면 내 직관력은 곧 500대 목전에 이르게 된다.’ 김성철은 발걸음이 빨라졌다. “책을 챙기고 따라와라.” 김성철의 손에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그는 녹색탑으로 들어갔다. 대악마의 방 앞에서 김성철은 소피아에게 명했다. “책을 넘기고 여기서 기다려라.” 소피아는 책을 김성철에게 넘겼다. 김성철의 책은 또 다른 책인 베르텔기아가 자신의 책장에 포개는 방식으로 운반했다. “영차!”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와 함께 대악마의 방으로 들어갔다. 소피아는 김성철이 패배하길 신에게 기도했다. ‘제발. 신이시여. 제발 저 사람을 죽여주세요. 저 사람이 죽어야 우리 남매가 살 수 있어요.’ 생전 처음 하는 기도라 성호를 긋는 법도 기도하는 법도 몰랐지만 마음 하나만은 하늘에 와닿을만큼 간절하기 그지 없었다. 한편 녹색 탑엔 스스로를 해체해 42개의 목각인형으로 만든 대악마 소인극단이 있었다. 하나가 42개이고 42개가 하나인 그 악마는 42개 인형의 입을 통해 김성철에게 합창하듯 말했다. “그 머저리를 처치하라고 분명히 말했거늘 어째서 나의 명을 거부하는 거지?” “말 안 듣는 아이는 인형으로 만들어야지!” “인형은 말을 잘 듣거든!” “바보 아냐? 인형은 말을 듣기 위해 만들어진 거잖아?” “그거 참 명언이네!” 42개의 인형을 묶은 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부산을 떠는 동안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들고 인형들에 묶인 실들이 모이는 천정으로 뛰어 올랐다. 그 위엔 꿈틀거리는 거대한 뇌가 있었다. 김성철의 팔 가라즈가 위로 올라갔다. “싸움이야?” “싸움이라면 우리가 낄 수밖에 없지!” 인형들이 김성철의 뒤를 쫓아와 뛰어오르며 그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 대악마는 처음부터 김성철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퍽! 퍽! 퍽! 망치질 한 방에 대악마의 육신의 일부가 들어 있는 인형들이 허공에서 산산조각 났다. 인형들은 그들 자신이 명령대로 움직이는 존재라는 걸 과시라도 하듯 두려움 없이 계속해서 덤벼들었지만 무의미한 짓이었다. 대악마 소인극단이 지닌 모든 인형이 분쇄됐다. 뇌만 남은 대악마는 그제야 자신 앞에 나타난 인간이 자기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 너는? 대체 뭐냐?” “난 목각인형보다 봉제인형이 좋더라.” 팔 가라즈가 대악마를 강타했다. 김성철은 허공에서 우수수 흘러내리는 뇌의 파편 속에서 빛나는 문자가 떠오르는 것을 목격했다. [ 당신은 위업 응당한 처벌을 달성했다. ] [ 매우 훌륭하다! 그대는 신을 대신해 인형에 미친 연쇄살인마 헤릭 마스에게 응당한 처벌을 내렸다. ] [ 대악마 카덴부르가 대단히 기뻐합니다! ] 기본 보상 : 1. 직관력 30 2. 마력 10 3. 매력 15 4. 마모된 뼈 베르텔기아가 필사적으로 포개고 있던 대악마의 서에서 불길한 빛이 흘러나오며 그 안에 담겨 있던 미지의 힘을 해방시키며 그 안에 담긴 힘과 아이템을 김성철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넘겨받은 것은 아니다. [ 알 수 없는 저주가 당신의 능력치 - 매력의 상승을 막고 있다. ]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김성철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나머지 두 능력치가 상승한 것을 확인하고 보상으로 받은 아이템을 감정했다. <마모된 뼈 > 등급 : 전설 분류 : 권능 부여 효과 : 사용 시,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제물 삼아 대악마의 힘을 얻는다. 비고 : 위대한 악마는 그 시신에도 힘이 깃든다. 제한 : 없음 예상한대로다. 사용하는 것만으로 대악마의 힘을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다. 김성철은 일단 마모된 뼈를 영혼창고에 넣은 뒤 대악마의 방을 나섰다. 방 바깥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소피아가 있었다. “뭘 위해 그리 열심히 기도하지?” 김성철이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물었다. 소피아는 당혹한 눈으로 김성철을 응시했다. ‘이렇게 빨리 하나도 다치지 않고 나왔다고? 말도 안 돼. 아무리 저 자가 세계의 적이라고 해도 상대방은 대악만데...’ 김성철이 강하다는 것은 알지만 얼마나 강한지는 모른다. 김성철이란 사내는 그녀로서는 감히 측량조차 할 수 없는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두커니 서 있는 소피아를 향해 말했다. “뭘 그리 꾸물 되나?” 그는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베르텔기아가 그의 뒤에서 파닥거리며 말했다. “왜 저 여자 안 죽여? 당신 성질이라면 죽이고 남았는데.” “…….” “혹시... 저런 여자 취향이야?” “헛소리 하지 마라. 죽일 필요도 없기 때문에 살려두는 것뿐이다.” 그리고 곧 운명이 그녀의 목숨을 거둬 가리라. 김성철은 미래를 보는 능력은 없었지만 소피아에 관해서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자기보다 타인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오래 살지 못한다. 녹색 탑에 나서자 달라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개미새끼 한 마리보이지 않는 황량한 탑 지대에 무수한 악마숭배자들이 나와서 녹색탑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대악마 소인극단이 죽었다. 누가 새로운 대악마가 되는 것일까?” “이번엔 제대로 미친 대악마가 나타났으면 좋겠어.” “소인극단의 취미는 너무 유치했지. 쓸데없이 잔혹했고.” 그 악마숭배자들은 탑에서 김성철이 나오자 벌떼 같이 몰려들었다. “설마 저 인간이 대악마를 처치한 건가?” “그럴 리가. 대악마를 처치했다면 벌써 새로운 대악마가 되었겠지.” 김성철은 망치를 가볍게 휘둘러 몰려드는 악마숭배자들을 쫓아냈다. “꺼져라.” 대부분 뒤로 물러섰지만 겁 없고 객기만 있는 악마숭배자 하나가 계속해서 김성철에게 다가왔다. 때릴 테면 떼려보라는 심보였다. 그 악마숭배자는 김성철과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었다.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애용하는 밧줄을 꺼냈다. 그리고 씨익 웃는 악마의 목을 붙잡고 밧줄을 목에 빠르게 감아 걸고는 가까이 있는 말라붙은 고목에 매달았다. 겁 없는 악마숭배자는 구더기로 변한 채 나무에 매달려 격렬한 몸부림을 쳤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 김성철이 다시 앞으로 걷자 그를 가로 막고 있던 인파가 반으로 갈라지며 길이 나타났다. 김성철은 다음 목표인 잿빛 탑을 주시하고 있었다. 잿빛 탑의 풍경은 녹색 탑과는 사뭇 달랐다. 1층에서부터 경비병으로 보이는 반인반마의 괴물들이 앞을 막고 있다. “정체를 밝혀라! 인간!” 전에 들어갔을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다. 그 숫자만 물경 백여 마리 아무래도 대악마 하나가 죽임 당해 다른 대악마들이 자체적인 경계를 시작한 모양이다. 소피아의 얼굴이 굳으며 검을 빼들었다. 아무리 김성철이라도 저런 숫자 앞에선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 선 것이다. 팔 가라즈가 빠르게 움직였다. 퍽! 퍽! 퍽! 앞을 가로막던 괴물들은 모두 피 떡이 되었다. 김성철의 망치질엔 용서도 자비도 없었다. 망치가 움직이면 결과가 남는다는 사실만 남을 뿐이었다. 절반 정도의 괴물들이 빠르게 제거되자 다른 괴물들은 전의를 잃고 달아났다. 김성철은 그들의 뒤를 쫓지 않았다. 검을 빼든 소피아는 뻘쭘해 하며 검을 도로 검집에 넣었다. ‘미쳤어. 이건 완전 미쳤어!’ 이곳에 와서 제법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저 사내 앞에선 먼지만도 못한 존재라는 걸 생생하게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김성철은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앞을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파괴하며 잿빛 탑의 최상층으로 올라갔고 대악마를 처치했다. 저번과 다른 점은 이번엔 한 마디 말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성철은 자기 집 안방 드나들 듯 대악마의 방으로 들어가 대악마를 일격에 때려죽이고 보상을 챙겨 아래로 내려가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다음 탑에서도 동일한 일이 반복됐다. 다만 이번 대악마는 다른 두 녀석보다는 제법 현명한 지 소심한 형태로 목숨을 구걸했다. “우리 거래를 하지 않겠나?” 이에 대한 김성철의 대답은 망치 한 방이었다. 퍽! 일격에 박살나는 대악마의 시체를 본 베르텔기아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삐빅! 거래할 깜냥이 안 됩니다!” “…….” 김성철은 또 다른 대악마의 서에서 불길한 빛이 나타나며 그 힘이 자신에게 스며드는 걸 느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장벽이 나타났다. [ 경고! 당신의 직관력이 지나치게 높기에 직관력 일부만이 당신에게 전승됩니다. ] 김성철은 즉시 능력치 창을 확인했다. [능력치] 힘 999+ 민첩 853 체력 801 마력 474 직관력 477 마법저항 622 의지 502 매력 18 운 18 그걸 본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퀘스트의 의뢰주인 대악마의 직관력이 477이었던 모양이군.’ 그 퀘스트의 의뢰주는 온 몸에 대못을 박은 악취를 내뿜는 거인이었다. 그다지 영리하게 생긴 놈은 아니라고 봤는데 실제도로 그런 모양이다. 게다가 능력치 500이상의 영역은 초월자의 영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김성철이 보기에 대악마의 수준은 초월자 언저리에 걸쳐져 있었다. 마법을 장기로 하는 녀석이라면 초월자 수준은 넘어섰겠지만 그렇지 않은 녀석은 초월자 아래 수준의 마력과 직관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김성철은 당초에 목적했던 3개의 위업을 모두 달성했다. ‘여기서 볼 일은 다 봤군.’ 다른 위업은 김성철에겐 필요 없는 것들이다. 약해빠진 대악마가 되는 것 따윈 처음부터 선택지에 없었다. 김성철은 미련 없이 탑을 나섰다. 탑바깥은 아까보다 더욱 많은 악마숭배자들이 있었다. 김성철은 그 앞에 한 사내가 무릎을 꿇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깨달음의 탑이라 불리는 탑에서 종종 볼 수 있던 피골이 상접한, 인간이라기보다는 해골에 가까운 남자였다. “다.. 당신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재세의 용자여!” “뭐냐?”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애용하는 밧줄을 슬며시 꺼내며 물었다. 그 사내는 낮게 머리를 조아리며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단언컨대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비록 악마숭배자라 불리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던 선택입니다. 절멸의 저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간이길 거부하고 악마의 하수인이 되는 선택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왜 내게 이야기하지? 나는 너희들의 사정을 물은 적이 없다.” “대악마들을 해치지 말아주십시오. 재세의 용자여!” 비쩍 말라붙은 사내는 머리로 땋을 찧으며 간절하게 소리쳤다. “그들은 비록 당신 기준에선 멸해야 마땅한 악한 존재일지도 모르나 그들은 다른 악마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필요악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들이 모두 없어진다면 우리는 모두 악마들의 노예가 되거나 먹이가 될 겁니다.”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다.” 김성철은 차갑게 말하며 돌아섰다. 그러나 그 사내는 포기하지 않았다. 김성철의 밧줄이 자신의 목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녀석들과는 다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를 놓아주었다. “어차피 다른 대악마를 멸할 생각 따윈 없었다.” 문득 김성철의 눈에 낯익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장의사의 검은 옷과 두건. 뒤틀린 육신을 한 괴인이 군중 사이에 섞여 있었던 것이다. ‘저 녀석은?’ 대악마를 처치하는 법을 알려주겠다며 꼬드긴 녀석이다. 김성철은 발걸음을 돌려 그 괴인에게 향했다. “너.” 김성철이 괴인 앞에 섰다. 괴인은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김성철의 망치가 그의 앞을 막았다. “일리야 브레가스는 어디 있지?” 김성철이 물었다. 이미 김성철의 힘을 알고 있는 괴인은 몸을 파르르 떨며 다급하게 말했다. “테에에에.... 푸른 탑.. 푸른 탑의 주인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먼저 반응한 건 소피아 브레가스였다. “오라버니!” 당장 앞으로 뛰쳐나가려고 하는 소피아 앞을 김성철의 팔이 가로막았다. “내 뒤를 따라와라.” ======================================= 33. 버림 받은 자 (4) 김성철은 푸른 탑의 최상부로 직행했다. 감히 그를 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최상부에 이르렀을 때 김성철은 푸른 탑의 대악마와 일리야 브레가스의 전투를 지켜볼 수 있었다. 그가 도착했을 때 이미 승패는 난 것으로 보였다. 파리의 두상을 지닌 대악마는 건재했고 일리야 브레가스는 지치고 수세에 몰려 있었다. 그의 발밑엔 검게 변색된 구슬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도 너 정도의 힘으로 날 이길 순 없다.” 하늘을 날던 대악마가 일리야 브레가스 앞에 내려 앉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였지만 일리야는 반응할 수 없었다. 그의 몸엔 이제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젠장. 구슬을 하나 밖에 못 찾아서 이렇게 된 건가? 그 녀석 말 대로 최소 세 개 이상을 모았어야 했는데.’ 대악마의 힘을 봉인하는 구슬의 힘은 진짜였다. 그 구슬은 대악마의 몸을 유지시키는 막강한 마력을 흡수시키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하나만으로 대악마를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뒤틀린 괴인은 세 개 이상의 구슬을 찾은 다음 대악마에게 도전하라고 추천했다. 하지만 탑의 주민들이 대악마 소인극단이 죽었다고 난리를 치는 마당에 마음이 급해졌고 섣부르게 대악마에게 도전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제 패배로 이어졌다. 마력도 체력도 모두 바닥 난 그는 대악마가 다가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대악마의 방으로 통하는 거대한 문이 열렸다. 실내의 공기가 급변했다. 방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세계의 적이었다. “…….”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뒤를 소피아와 날아다니는 책이 따랐다. 소피아는 일리야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오라버니!”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던 대악마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전에 봤을 때 느끼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살기와 투지가 김성철의 몸에서 뿜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저 자가 소인극단을 비롯한 다른 대악마를 해치운 인간인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눈앞의 한심한 인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대악마는 뒤로 물러나며 김성철을 향해 돌아섰다. “무슨 일로 이곳에 다시 왔는가?” 김성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 팔짱을 끼고 대악마와 일리야를 관망했다. 이번 싸움엔 개입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교활한 대악마는 김성철의 의도를 파악하고 다시 일리야를 향해 흉측한 파리의 두상을 돌렸다. 대악마가 웃는지 웃지 않는지는 얼굴을 보고 파악할 수 없었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 웃고 있었다. “크크크... 버림 받은 자라는 건가?” “…….” 일리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버림 받은 쪽이 아니라 버린 쪽이니까. 대악마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법복을 연상케 하는 화려한 로브 사이로 뒤틀린 시체의 손이 튀어 나왔다. 그 손엔 커다란 숟가락이 들려 있었다. “산 채로 골을 빨아주지!” 일리야는 검을 뽑아 대악마에게 맞섰지만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진 승부다. 오래 버티진 못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일리야를 보자 소피아는 짧은 비명을 내지르고는 김성철에게 다가갔다. “부탁이에요. 오라버니를 구해주세요.” 처음으로 그녀는 김성철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 그러나 김성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당황한 소피아의 두 손이 의미 없이 허공을 꼼지락거렸다. 그녀는 심호흡을 빠르게 한 후 다시 김성철을 향해 말했다. “뭐든 할게요. 오라버니를 살릴 수 있다면. 제발. 제발 좀 살려주세요. 당신에겐 힘이 있잖아요?” “…자신의 선택이다. 내가 개입할 의무는 없다.” 김성철이 말했다. 단호한 어조로. 소피아의 두 눈에 짙은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일말의 타협도 없다는 것을 한 눈에 파악한 것이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가느다란 신형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소피아는 고개를 돌려 대악마 쪽을 바라봤고 검을 뽑았다. “…면목 없네요. 추한 모습 보여서.” “…….” “지금까지 도와주셔서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소피아 브레가스는 김성철에게 고개를 돌려 공손하게 목례를 한 후 대악마를 향해 달려갔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의외로 좋은 성격을 지녔군.’ 다른 이였다면 저주의 말을 퍼붓고 떠났을 것이다. 백 번 잘해주다가도 한 번 못하면 원망하는 것이 평범한 인간들의 속성이니. 하지만 그런 점에서 소피아 브레가스는 다른 인간보다는 나은 점이 있었다. 응당 그래야 할 일이지만 이계에 좋은 사람은 많지 않다. “흠.” 베르텔기아가 할 말이 있는지 김성철 뒤를 의미 없이 왕복했다. “뭐냐?” 대악마에 맞서 빙결마법을 구사하는 소피아를 보며 김성철이 물었다. “저 여자 말이야.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는데. 일리야인지 뭔지 하는 사람보다는 사람이 훨씬 괜찮아보였어.” “그래서 할 말이 뭐지?” “살려주면 안 돼? 전에 사라산지 사라다인지 하는 애는 잘도 살려주더니만.” “…….” “설마 취향이 아니야?” “헛소리 집어치워라. 찢어버리기 전에.” “히이...” 김성철이 엄포를 놓자 베르텔기아는 몸을 움츠리며 뒤로 날아갔다. 성가신 녀석이 사라진 후 다시 김성철은 앞을 응시했다. 소피아 브레가스는 분전하고 있지만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다. “크크크! 인간 쓰레기가! 주제도 모르고 설쳐대는 구나!” 대악마의 로브 자락 안에서 무수한 거대파리들이 튀어 나오며 소피아를 덮쳤다. “아이스스톰!” 소피아가 마법을 써 파리 떼를 얼려보지만 대악마의 로브 안에선 계속해서 파리들이 나타나고 있다. 마법을 뚫고 들어온 파리들이 소피아와 일리야를 덮쳤다. 소피아의 검이 춤을 추며 거대 파리들을 떨어뜨렸지만 일리야 쪽은 무방비 상태다. 소피아는 일리야의 위기를 깨닫고는 즉시 그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 뒤를 노리고 거대 파리가 그녀의 등 뒤를 몸통으로 들이받았다. “아흑!” 소피아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지만 이내 자세를 바로 잡고 달려드는 파리 떼를 마법으로 처리하며 일리야 쪽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일리야 쪽은 아직 무사한 상태였다. “괜찮아. 오라버니?” “…….” 일리야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리 떼들이 남매를 둘러쌌다. 소피아는 주위를 회전하는 무수한 파리 떼를 보며 승산이 없음을 직감했다. 막상 죽음이 닥쳐오자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영원히 잊혀 지지 않을 풍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기억해?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돼지우리에서 살던 소녀가 있었다. 아무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 가축을 돌보며 연명을 하던 그녀 앞에 기적 같은 운명이 찾아왔었다. 아직도 소피아는 돼지우리 앞에 서 있던 말쑥하게 차려 입은 소년의 당황한 얼굴을 기억한다. “…….” 일리야 브레가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소피아는 왠지 말을 많이 하고 싶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파리 떼들이 우리 주변을 날아다녔는데. 지금처럼 크진 않았지만!” 그녀는 뭐가 그리도 웃긴지 소리 높여 웃었다. 파리 떼 두어 마리가 매서운 기세로 남매를 덮쳤다. 소피아의 검이 파리들을 베어내 바닥에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 주위엔 여전히 수백 마리의 파리 떼들이 날아다니고 있다. “내가 앞을 뚫을게.” 소피아가 말했다. “내가 앞을 뚫으면 오라버니는 세계의 적에게 달려가. 그리고 그 사람 발밑에 무릎을 꿇고 목숨을 애걸해.” “소피아...” “그게 오라버니가 살아남을 최후의 방법이야.” 말을 마치기 무섭게 소피아가 남은 마력을 모두 쏟아내며 파리떼들을 공격했다. 무시무시한 냉기폭풍이 거대한 대악마의 방 전체를 얼릴 듯한 기세로 휘몰아쳤다. 파리 떼들의 기세가 위축되자 일리야는 앞으로 달려갔다. 소피아는 그런 일리야 쪽을 고개를 돌려 살짝 응시하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지만 이내 달려든 파리 떼들에 의해 가려져버렸다. 일리야 브레가스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남은 힘을 다해 김성철 쪽으로 달려갔다. “…….”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자신의 발밑에 엎드린 일리야 브레가스를 응시했다. “부탁 입니다.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누굴 살려달라는 거지?” 김성철은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일리야는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 했다. 김성철은 손가락을 들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소피아 쪽을 가리켰다. “저쪽이냐? 아니면 이쪽이냐?” “그.. 그건...” 일리야의 동공이 갈 곳을 잃었다.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땅을 쳐다봤다. 김성철은 그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눈동자엔 진한 실망감이 떠올라 있었다. 베르텔기아가 일리야를 지나치며 싸늘하게 말했다. “쓰레기.” 김성철은 대악마를 향해 걸어갔다. 김성철의 접근을 알아차린 대악마는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쳤다. “뭐.. 뭐냐? 설마 너도 내게 도전하겠다는 거냐!” 대악마의 앙상한 손이 움직였다. 그러자 소피아에게 머물러 있던 무수한 파리 떼들이 이번엔 김성철을 덮쳤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격이 다르다. 김성철의 손에 들린 팔 가라즈가 허공을 강타했다. 펑! 신적인 힘에 의해 휘둘러진 망치가 허공을 강타하자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방안에 있던 수천 개의 유리창이 일제히 박살났고 전투를 구경하던 구더기 인간들의 고막이 터졌고 그리고 하늘을 날던 파리 떼들은 허공에서 그대로 핏덩이가 되어 터져 버렸다. “…….” 김성철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대악마 앞으로 걸어갔다. “혀.. 협상을 하자! 협상을!” 대악마가 다급하게 말했지만 이미 늦었다. 팔 가라즈가 높이 올라갔고 내려갔다. 김성철은 박살이 난 대악마의 시체를 뒤로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소피아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온 몸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채. 김성철은 그녀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아직 숨은 붙어 있다. 하지만 아마도 길지는 않을 것이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대악마의 시체에서 떨어진 아이템을 허겁지겁 줍는 일리야를 응시했다. “이거 봐! 소피아! 대악마! 대악마가 될 수 있는 아이템을 얻었어! 드디어, 드디어 그 인간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었다고!” 그는 광인처럼 소리치며 뛰어 다녔다. 소피아는 흐릿한 눈으로 그런 일리야를 바라보며 힘없이 미소 지었다. “…가자.” 김성철은 앞으로 걸어갔다. “살려주는 거 아니었어?” 베르텔기아가 뒤쫓아 오며 물었다. “차라리 저것이 그녀에겐 최선의 죽음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보게 될 지옥도를 보지 않는 것만으로.” 김성철은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공허한 대악마의 방엔 환희에 찬 함성만이 무의미하게 울려퍼졌다. *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수련을 거듭하던 나날이었다. 김성철은 식재를 사기 위해 찾아간 허름한 주점에서 마계 최전선에 새롭게 등장한 강력한 악마의 소문을 듣게 되었다. 폭풍전선 담당 구역에 나타나 드워프들의 방어선을 위협한다는 그 악마는 그 힘도 힘이지만 특이한 외모로 악명이 높았다. 그 악마는 스스로 두 눈을 파내고 두 눈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다니는 소름끼치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등 뒤엔 자신과는 전혀 상반된 아름다운 여성의 시체를 매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악마는 드워프의 성벽을 공격하며 이따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반복해서 소리친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어쩌면 그것이 등에 매단 여성의 이름이 아닐까하고 추측하곤 했다. “…….” 김성철은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술을 한 병 사가지고 돌아갔을 뿐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독한 술이 위장을 울리는 것을 느끼며 김성철은 마계의 하늘을 노려봤다. ======================================= 34. 철혈기사단 (1) 변경백 마르틴 브레가스는 시큰둥한 눈으로 자신 앞에 부복한 기사들을 보고 있었다. 기사들은 고개를 숙인 채 비분강개한 어조로 탄원했다. “우리 측 전선은 이미 붕괴됐습니다. 대부분의 기동요새가 파괴됐고 수많은 기사들을 잃었습니다. 지원이 없으면 우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철혈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철혈기사단이 마족의 집중공세를 받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겨울이면 공세를 하지 않는 것이 마족들의 오랜 전통인데 올해는 그 전례를 깨고 한 겨울에도 맹진을 계속하여 철혈기사단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던 것이다. 철혈기사단은 당연히 마계 최전선을 관할하는 마르틴 브레가스에게 지원요청을 했는데 어째서인지 마르틴 브레가스는 변변찮은 지원 병력 하나 보내주지 않았다. 그리고 시큰둥한 그의 태도로 보아 이번에도 지원군은 보내주지 않을 것이 확실시 되고 있었다. 기사들은 마르틴 브레가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입을 꾹 다문 채 자리를 떠났다. 문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는 기사들의 눈동자엔 깊은 원망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문이 닫히자 마르틴 브레가스는 귀를 파며 하품을 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측근이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저들을 그냥 돌려보내도 되겠습니까? 실제로 철혈기사단은 지금 대단히 위급한 상태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위급한데?” 귀에서 파낸 귀지를 찡그린 눈으로 응시하며 마르틴 브레가스가 물었다. “기사단병력 육 할을 이미 잃었고 철혈기사단 최후의 보루인 철혈십자성 이외의 근거지는 모두 점령당하거나 포기한 상태라 합니다. 곧 봄이 오면 그들은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래? 그건 좋은 일이군. 난 처음부터 철혈기사단이란 종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소환자 주제에 기사단이라니. 이번 기회에 망하는 걸 봐도 나쁘진 않겠군?” 마르틴 브레가스는 제법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컵에 따른 우유를 들이켰다. “하지만 변경백님. 철혈기사단이 무너지면 마물의 군대는 바로 우리 쪽으로 오게 될 겁니다. 그리고 철혈기사단의 붕괴의 책임에 대한 화살도 우리를 향할 거고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렇게 하려고 저 친구들을 비싼 돈 들여 육성하지 않았나?” 마르틴 브레가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눈부신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 너머엔 수천 명에 달하는 군대가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화려한 옷을 입은 청년이 연단 위에 서서 낭랑한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연설을 했다. 연설의 내용은 이쪽까진 들려오지 않았지만 마르틴 브레가스는 그 청년의 뒷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철혈기사단이 망하면 저 녀석으로 하여금 대체하게 하면 그만이야.” 마르틴 브레가스에겐 수많은 사생아가 있다. 변경백이 오랜 세월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트로윈 자경단의 단장 파림 다고트 또한 그의 사생아 중 하나다. 술집의 무희를 모친으로 둔 탓에 아직은 아버지의 성을 쓰지 못하지만 철혈기사단을 위협하고 있는 이 번 악마 공세를 극복할 수만 있다면 파림 다고트는 마르틴 브레가스의 진정한 후계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지원군은 철혈십자성이 무너진 이후에 보낸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에게서 얻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노력을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철혈기사단 측에서는 벼르고 별렀던 최후의 카드를 꺼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철혈기사단장 조성택. 한 때는 대륙 북방은 물론이고 대륙 전체에 위세를 떨치던 불세출의 영웅이었지만 지금은 쇠락해 일개 지방 영주 수준의 위치로 추락한 사내. 되는 일이라고 하나도 없어 최근에는 소환광장에 불러온 친아들마저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게 해서 세간의 빈축을 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둘러 싼 상황이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희들이 그딴 식으로 나온다면 나에게도 생각이 있다.” 조성택은 은밀하게 궁중에 모셔왔던 손님을 자신 앞에 데려올 것을 명했다. 박쥐의 날개와 염소의 발굽, 인간의 두상을 한 괴이한 존재가 그의 알현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그 존재의 정체는 악마였다. “드디어 생각을 정하신 겁니까?” 악마는 듣기 좋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넌지시 물었다. 조성택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그동안 쌓아올린 명성과 전공을 한 번에 날리는 선택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까짓 게 무슨 소용인가. ‘이계에서 얻은 자식들은 저주로 죽었고 소환궁전에서 불러온 아람이도 다른 새끼들 자식들한테 치여 처참하게 죽었다. 거기다 나와 눈도 못 마주치던 마르틴 브레가스 그 쌍놈의 자식은 내게 망하길 바라고 있다.’ 조성택의 고민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는 곧 고개를 들고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는 악마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의 왕에게 협력하겠다. 하지만 약속했던 사항은 충실하게 이행해주길 바란다.” 8년 전, 대륙 십삽걸은 다가올 재앙을 자신들이 관리 혹은 통제할 수 있는 첫 번째 단계에서 지연시키겠다고 결의했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 과정에서 한 명의 영웅이 격렬히 반발하며 이탈했지만 지난 8년 간 재앙은 잘 관리됐고 권력자들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부귀영화를 계속해서 누렸다. 하지만 재앙은 막을 수 없다. 막을 수 없다는 말엔 미룰 수 없다는 것도 포함되지만 사람들은 그 두 가지를 분리해서 생각했다. 그들이 지연시켰다고 착각했던 재앙은 보다 크고 격렬한 형태로 세상에 휘몰아칠 것이다. *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이 심해마종을 강타한다. 운석은 굳이 추가적인 영창을 하지 않아도 연이어 떨어졌다. 마력이 강해지면서 메아리의 숫자도 자연스레 늘어난 것이다. 현재 500에 근접한 김성철은 주문을 한 번 영창할 때마다 최대 2번의 메아리가 추가적으로 붙었다. 다시 말해 메테오를 한 번 시전하면 뒤따라 2개의 메테오가 연이어 떨어지는 것이다. “그어어어어....” 심해마종은 강렬한 메테오의 연격을 버티지 못했다. 덕분에 김성철은 심해마종을 일주일에 한 번 두들기는데서 이 주일에 한 번 정도 두들기는 것으로 방침을 바꿔야 했다. 더 심하게 두들겨댔다간 죽을 수도 있으니까. ‘마왕에게 메테오를 적중시킬 수만 있다면 지금 놈을 찾아가도 무방하겠지.’ 메테오의 위력은 모든 마법을 통틀어 최상급이다. 문제는 맞추기가 어렵다는 것일 뿐이지 일단 맞추면 메아리 효과와 함께 마왕에게 치명타를 날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성철은 서두르지 않는다. ‘곧 직관력 500이다.’ 지금 현재 그의 직관력은 479. 악마숭배자들의 탑을 나온 이후 한 달하고도 보름이 지났지만 직관력은 겨우 2 정도가 오르는데 그쳤다. 그나마 연금술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것조차 없었다면 그의 성장은 계속 멈춰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는 오랜만에 창조술사 퀘스트 하나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김성철은 자신의 몸에서 막대한 마력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주걱을 힘차게 저었다. 에크하르트의 휴대용 연금가마 안에서 독특한 향내가 풍긴다 싶었더니 이윽고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하나의 완성품을 만들어냈다. [ 연성 성공! ] 김성철은 눈앞에 뜬 메시지를 확인하며 연금 가마 안에 담긴 새로운 연금 아이템을 들어 올렸다. 황금빛이 도는 오리상이었다. 김성철의 연금술은 이제 일반적인 재료를 다른 성질로 변환시키는 걸 넘어 연금 가마 안에서 특정한 형태를 만들어낼 정도로 성장했다. < 황금 오리 > 레벨 : 4 등급 : B 속성 : 금(金) 분류 : 일상잡화 효과 : 욕조 안에 넣으면 둥둥 뜬다. “…….” 별 쓸모 없는 아이템이다. 황금빛으로 번쩍번쩍 빛이 나고 귀엽게 생긴데다가 금속 주제에 물에 뜬다는 점이 특별하긴 했지만 잡동사니 이상의 평가를 내릴 수 없는 물건이다. 연금 아이템 중에선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김성철이 이런 것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낸 것은 베르텔기아 안에 기재된 연금 도감을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오랜 노력 끝에 김성철은 마침내 베르텔기아가 기본 연금술이라 불리는 카테고리에 속하는 모든 레시피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보상이 이제 이루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흠흠. 수고했어. 드디어 인간백정에서 창조술사로서의 진지한 한 걸음을 내딛은 거 같네!” 하늘 위를 파닥거리며 날아다니는 베르텔기아의 몸에서 기이한 빛이 뿜어져 나왔고 그 빛은 김성철을 향해 날아와 그의 몸을 감쌌다. 광휘 속에서 김성철은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지가 눈앞에 뜨는 걸을 응시했다. [ 당신은 팔영웅 에크하르트의 위대한 족적을 따라 그의 위대한 발명품 중 일부를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 [ 일반 도감 완성! ] 보상 : 1. 마력 +20, 직관력 + 20 2. 에크하르트의 채집 노트 김성철은 즉시 능력치 창을 눈앞에 떠올렸다. [능력치] 힘 999+ 민첩 853 체력 801 마력 494 직관력 499 마법저항 622 의지 502 매력 18 운 18 “음....” 딱 1이 모자르다. 500이 되기에 딱 1이 모자라다. 연금술로 직관력이 오른 게 3일 전이니 또 하나의 직관력을 올리기 위해선 대충 매일 연금술을 한다는 전제 하에서 짧게는 3주, 길게는 한 달 이상이 걸릴 것이다. “어때? 창조술사의 지식을 받아들인 감상은?” 베르텔기아가 뿌듯해하며 말했다. “더럽군.” “뭐...?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어!” “그 뜻이 아니라 조금 수치가 모자르다는 이야기다.” 김성철은 한숨을 내쉬며 마계의 하늘을 바라봤다. 진한 아쉬움이 몰려온다. 계획대로였다면 오늘 하사니우스 맥스를 죽이고 첫 번째 재앙을 해결했을 터인데. 예상외로 더딘 성장 덕에 계획이 틀어진 것이다. 김성철은 심란한 마음을 다잡으며 발밑에 떨어진 또 하나의 보상을 받아 챙겼다. 그것은 작은 책자였다. 김성철은 그 책자를 펼쳤다. 책자 안엔 살아 움직이는 잉크로 만든 삽화 여러 개와 깨알같이 쓴 작은 글씨들이 담겨 있었다. 김성철은 그중 하나를 읽었다. [ …안개산맥의 오우거들은 돌침대에서 잔다. 인간의 눈엔 이 돌침대가 이 돌침대고 저 돌침대가 저 돌침대 같겠지만 오우거들에겐 그네 나름대로의 돌침대 기준이 있다. 그들은 훌륭한 돌침대에겐 별을 붙이는데 별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돌침대가 된다. 최고의 돌침대는 별이.... ] 김성철은 거기까지 읽고 책을 덮었다. 구구절절 길게 써놓았지만 에크하르트의 채집 노트는 희귀한 연금 재료의 위치를 기재해놓은 안내서 정도로 보였다. 문제는 에크하르트가 살던 시기와 지금 김성철이 있는 시대 사이엔 엄청난 시간의 간극이 있다는 것. “…이건 못 쓰겠군.” 당장 방금 읽은 페이지에서만 시대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김성철 시대에 안개산맥에선 더 이상 오우거들이 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잦은 토벌과 오크의 노예화로 오우거들의 왕국은 사라진지 오래다. 김성철은 책자를 창고에 집어넣고는 갓 만든 오리상을 쥐고 어디론가 떠났다. “왜 아빠의 책자가 마음에 안 들어? 비록 못난 사람이긴 하지만 그의 지식은 진짜인데?” 베르텔기아가 따라오며 볼 멘 소리를 해보지만 김성철은 듣지도 않았다. 그는 곧 유황냄새가 은은히 감도는 뜨거운 천에 도착했다. 가끔 목욕을 하는 온천이다. 김성철은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에그머니나!” 베르텔기아는 다급히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슬그머니 나무 바깥으로 고개를 들이밀자 그 너머로 뿌연 안개에 가려진 탄탄한 남성의 신체가 눈에 들어왔다. 넓은 등 위에 새겨진 수많은 흉터와 화상 자국은 김성철이 살아온 순탄치 않은 삶은 드러내는 훈장처럼 보였다. 김성철은 온천 안에 몸을 담그고 그 옆에 방금 만든 황금 오리상을 올렸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황금 오리상은 놀랍게도 물위에 둥둥 뜨며 김성철 주위를 돌아다녔다. “진짜 물에 뜨는군.” 김성철의 입가에 한줄기 희미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멀리서 악마들의 울음소리가 기분 나쁘게 울려 퍼졌지만 괜찮은 목욕이었다. 김성철은 탕 안에서 눈을 감은 채 시간이 흘러가게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묵직한 폭음이 동남쪽에서 들려왔다. 폭풍전선의 요새가 있는 방향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가려고 했지만 폭음이 연이어 들려왔고 희미하게 북소리도 울리는 것 같았다. ‘전투가 벌어진 건가. 그럴 리가. 북쪽에서 마족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는데.’ 심상치 않은 예감이 느껴졌다. ======================================= 34. 철혈기사단 (2) 김성철은 옷을 차려 입고 인근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한달음에 올라갔다. 종려나무를 닮았다고 해서 종려나무 봉우리로 명명된 가파른 고지 정상에 서면 인근 일대는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동남쪽에 위치한 드워프들의 요새도 그중 하나였다. 김성철은 아래 펼쳐진 끝없는 산지 속에서 드워프들의 요새를 찾았다. 요새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있는 지점에 요새가 있었다. 김성철의 눈동자 속에 한 줄기 의문이 떠올랐다. ‘후방에서 공격을 당한 것인가?’ 전투는 북쪽 정면이 아니라 남쪽과 동쪽 비교적 방어가 취약한 부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쪽 방면은 다른 우군에 의해 보호받는 지역이다. 특히 동쪽은 이웃한 전선을 담당하는 철혈기사단의 담당 구역. 이곳이 공격당했다는 것은 철혈기사단도 당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고 보니 철혈기사단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은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고는 하나...’ 험준한 산맥을 따라 구축된 폭풍전선의 방어종심은 드넓은 황야 전역을 수비해야 하는 철혈기사단에 비하면 턱없이 짧다. 여기까지 악마들이 밀고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철혈기사단 최후방어선인 철혈십자궁을 제외한 다른 방어거점이 모두 궤멸 당했다는 걸 뜻한다. “…….” 마계 최전선이 흔들리고 있다. 마계 최전선이 뚫리면 이계의 인간들은 진정한 지옥이 뭔지 보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할 거야?” 베르텔기아가 불타는 요새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늘 애용하던 팔 가라즈가 아니라 빛바랜 낡은 철검이었다. “드워프들을 돕는다.” “응?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거야? 당신이 다른 사람을 돕다니.” “드워프들에겐 빚진 게 있거든.” 세계의 적이 되기 전에 김성철은 드워프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드워프들이 오랫동안 그들만의 비밀로 숨겨온 팔 가라즈에 대한 정보를 김성철에게 말해준 것도 그 호의의 일환이었다. 결국 그 호의가 드워프들에게 독으로 작용하긴 했지만.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마계 최전선 전체가 무너지는 건 김성철이 원하는 그림이 아니다. ‘다가올 칠영웅과의 싸움까지 현재의 판도가 유지될 필요가 있다. 칠영웅들의 활동지대는 결국 인간과 그 동맹들의 영역이 될 테니까.’ 김성철은 철검을 든 채 불타는 요새로 향했다. 요새 일대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드워프들의 대포가 불을 뿜어 악마의 전열을 강타하면 악마들의 지옥공성기가 파멸의 불꽃을 내뿜어 즉시 응수한다. 드워프들이 자랑하는 포대는 건재하지만 성곽 여기저기가 지옥공성기에 피격당해 무너져 내렸고 그 틈을 노려 악마들의 공성사다리가 걸리고 있었다. 드워프 도끼병들이 필사적으로 사다리를 쳐내려고 하지만 성벽 아래 포진한 하급 악마들이 그냥 놔둘 리가 없다. 수백 발에 이르는 석궁 화살들이 드워프들을 향해 날아갔다. “끄아아아악!” 사다리를 쳐내던 드워프들이 화살을 맞고 까마득한 성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걸 본 악마들은 사기가 올라 함성과 포효를 내질렀다. “밀어 붙여라!” 악마들을 이끄는 것은 거대한 날개를 지니고 백금으로 장식된 투구를 쓴 발록이었다. 마편 카산드라와 유사한 불타는 채찍을 든 그 악마는 하늘 위를 배회하며 아래 악마병들을 독려했다. 지옥공성기가 쉬지 않고 불을 뿜었고 그에 호응하듯 다시 한 번 수십 개의 공성 사다리가 일제히 성벽을 향해 걸쳐졌다. “막아라! 놈들을 막아라!” 드워프 지휘관들은 지금 이 순간이 전투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하지만 중과부적이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가온 적들은 너무나 많고 잘 준비된 반면, 후방의 안전을 믿고 정면만을 몇 안 되는 병사로 수비하던 드워프들은 비록 용감하게 싸웠지만 열세를 면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하늘 위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떠오른 것은. 검은 연기와 여기저기 타오르는 불길로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 위에 홀연히 나타난 마법진은 이 세계 바깥과 연결된 거대한 대우주의 영역을 직접적으로 드러냈고 그 너머로 천공의 파편인 운석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 운석은 성벽 아래를 가득 메운 악마들의 머리 위를 향해 곤두박질쳤다. 쿠콰콰콰쾅! 운석이 남긴 자리엔 무수한 악마들의 시체들이 너부러져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메테오. 모든 마법학파를 통틀어 최강의 파괴력을 자랑하는 천공학파의 주력 마법이 낯선 북쪽의 전장에서 재현된 것이다. ‘오오! 지원군인가?“ 수세에 몰렸던 드워프들은 환희에 찬 눈으로 마법사를 찾았다. 그런데 그들 눈에 비친 건 그들이 원하던 군대가 아니었다. 깎아지른 듯한 산비탈 위에 철검을 들고 허름한 코트를 휘날리는 단 한 명의 사내였다. 그의 뒤엔 사역마로 보이는 펄럭거리는 책 한 권이 더 있긴 했지만 그딴 것은 드워프들로선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김성철은 메아리를 쓰지 않았다. 쓸 수 있는 마나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유효타만을 날리고 싶었다. 현재 김성철의 마나 총량으로 쓸 수 있는 메테오의 숫자는 대략 스무 번.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로 하여금 남은 잔량을 헤아리게 한 다음 전투에 임했다. “앞으로 열아홉 발!”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의 구령을 들으며 위험에 처한 또 다른 구역을 노려 메테오를 시전 했다. 천상에서 떨어진 징벌이 악마들을 강타하며 그들의 공성 사다리와 전열을 박살내 놓았다. 그 위력은 김성철이 직접 팔 가라즈를 들고 설치는 것에 비하면 부족한 점이 있겠지만 적어도 성벽 위의 드워프들이 보기엔 마른하늘에 단비 같은 시원한 일격이었다. “저건 뭐냐! 저 인간을 처치해라!” 백금 투구를 쓴 발록이 날카로운 손톱이 돋는 손가락으로 김성철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전장 위를 배회하던 날개달린 악마들 중 일부가 김성철을 향해 날아갔다. 그 숫자는 여섯. 적은 숫자처럼 보이지만 평범한 인간상대로는 적절한 인원 배분이다. 랩터 가고일이라 불리는 이 악마들은 접근전에 있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전투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게다가 기본적인 체력도 높아 접근전이 비교적 취약한 마법사 상대로는 말 그대로 악마 같은 힘을 자랑한다. 랩터 가고일들은 박쥐의 날개 같은 흉한 날개를 펄럭이며 김성철에게 쇄도했다. 그들의 손에 들린 대낫이 서슬 퍼런 빛을 사방에 흩뿌렸다. “죽어라! 인간!” 성벽 위의 드워프들은 걱정스런 얼굴로 김성철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김성철의 운명은 너무나도 위태로워 당장이라도 꺼질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악마들이 달려드는 순간, 사내의 손끝에서 무수한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달려드는 악마들을 차례대로 그리고 순식간에 태워버렸다. 드워프들은 환성을 내질렀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근접전에 약하다고 알려진 천공학파의 마법사가 근접전에서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는 랩터 가고일을 단순해보이는 마법만으로 전부 무찌른 것은. “…….” 그 비밀은 김성철의 숨겨진 클래스에 있었다. [ 메아리 - 2 ] 마력이 강해졌다고는 하나 글레어 하나의 위력으로 날개 달린 악마 - 가고일을 처리하는 것은 역부족. 하지만 전설 클래스 메아리술사의 기본 능력인 메아리와 더불이 김성철의 초인적인 동체시력과 정교한 조준이 더해진다면? 그 셋이 내는 시너지는 단순한 글레어 3발 이상의 파괴력을 낼 수 있는 것이다. 근접전의 악몽이라 알려진 랩터 가고일들은 하나 같이 입안이나 목, 눈자위 주변의 취약한 부분에 빛줄기 세례를 받고 추락했다. “흠흠. 글레어 18발이라. 남은 메테오에서 3발 정도 차감하는 게 좋겠네!” 베르텔기아가 우쭐대며 말하자 김성철은 악마들의 진영을 내려다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몇 발이 남은 거지?” “그것도 계산 못해?” “나이가 드니 머리가 굳는군.” “귀찮아서 안 센 거겠지!” “…….” “남은 잔량은 열여섯 발!” 김성철은 호흡을 가다듬고 전장을 내려봤다. 여전히 수많은 악마군대들이 성벽 아래 도사리고 있다. 메테오 잔량이 열여섯 발이 아니라 백 발이라고 해도 해치우기 어려울 정도의 숫자다. 김성철의 시선은 악마군 사이에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지옥공성기로 향했다. ‘저걸 박살낸다면 악마군의 공세도 한 풀 꺾이겠군.’ 김성철은 거대전갈 형상의 지옥공성기를 노려보며 속으로 주문을 영창 했다. 말로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술식의 그의 뇌리에 오가며 노래처럼 의식 속을 흐르고 지나간 후 김성철은 속으로 시동어를 되뇌었다. ‘메테오.’ 또 다른 마법진이 하늘 위에 떠올랐다. 그리고 마법진 사이로 푸른 운석이 악마군대를 향해 떨어졌다. 목표는 지옥공성기. 푸른 운석은 초록색 불길을 일렁거리며 성벽을 두들기던 지옥공성기에서 조금 못 미친 지점에 떨어졌다. 하지만 재차 영창을 할 필요는 없다. 영창 직후 빠져나가는 마나의 흐름을 그냥 놔두게 하는 걸로 충분했다. 운석이 지옥공성기를 지근거리를 강타한 직후 또 다른 운석이 연이어 지옥공성기를 향해 떨어졌다. [ 메아리 - 1 ] 운석은 그대로 지옥공성기 상부에 적중했다. 거대한 전갈의 허리가 새우처럼 역이로 꺾이는가 싶더니 무시무시한 초록불을 내뿜으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좋았어! 바로 이거야!” 불꽃들이 폭죽처럼 화려하게 하늘을 수놓은 것을 보며 베르텔기아는 환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김성철이 해치운 것은 3기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김성철은 또 다른 지옥공성기를 노려보며 다시 한 번 영창을 했다. 그러나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악마들이 아니다. “날개가 달린 것들은 전부 저 인간을 찢어 죽여라!” 자신이 직접 나서면 가장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지만 악마군의 수장들은 보통 엉덩이가 무거운 편이다. 악마군을 지휘하는 발록은 나서지 않고 대신 휘하의 모든 공중 전력을 봉우리 위의 마법사에게 투입했다. 하지만 악마들이 김성철에게 닿기도 전에 또 하나의 운석이 이번에는 한 번 만에 정확히 두 번째의 지옥공성기를 강타했다. 중장갑과 고화력으로 악명 높은 지옥공성기였지만 메테오의 일격을 당해낼 순 없었다. 초록색 불꽃들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수놓고 있는 하늘을 뒤로 수십 마리의 날개 달린 악마들이 김성철을 공격했다. 그것을 본 드워프들은 이번엔 가만있지 않았다. “저 자를 도와라! 우리의 은인이다!” 드워프의 성채가 한 차례 술렁이는가 싶더니 이윽고 북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대공화력을 뿜어냈다. 대형 석궁부터 포도탄까지, 드워프들이 자랑하는 갖가지 투사무기가 하늘을 나는 악마들을 향해 날아갔고 그 화망에 걸린 악마들은 글자 그대로 공중에서 분해됐다. 살아남은 악마는 극소수. “여기로 들어와. 베르텔기아.”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회수한 후 깎아지른 산비탈을 마치 스노우보드를 타는 듯한 자세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랩터 가고일을 필두로 한 악마들이 김성철을 노리고 활강해오지만 타이밍을 엇나가 간발의 차로 놓치고 다시 상승해야 했다. 감을 잡은 악마들은 다시 한 번 산비탈을 내려가고 있는 김성철을 덮쳤다. 김성철은 따라오는 악마들을 힐끗 쳐다보고는 악마들이 접근하는 순간을 노려 철검으로 지면을 후려쳤다. 돌무더기가 산탄총처럼 쏘아져나가며 추적하던 악마의 눈알과 얼굴에 박혔다. “키이이이이!!” 피투성이가 된 악마 한 마리가 김성철 앞을 지나쳐 산비탈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또 다른 악마가 이번엔 정면을 노리고 덮쳐오지만 김성철은 손가락을 들어 글레어를 쓰는 걸로 대처했다. 회피 불가능한 엷은 빛줄기에 두 눈알과 입안을 적중당한 악마는 입에서 검은 연기를 뿜으며 김성철이 방금 지나친 바위에 부딪치며 그대로 절명했다. 김성철은 뒤를 힐끗 응시했다. 아직 다섯 마리가 남아있다. 그런데 주변에 추적하는 마법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고 전장으로부터 볼 수 없는 사각이다. 그렇다면 굳이 이런 장난질을 할 필요가 없다. 비스듬한 산비탈을 타던 김성철의 발이 대지를 강하게 두드렸다. 쾌속으로 하강하던 그의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김성철 주위를 배회하던 악마들은 김성철의 움직임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기회라고 여기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힘을 숨기지 않는 김성철 상대로 덤벼든 대가는 참혹했다. 김성철은 마법도 무기도 쓰지 않고 오직 손만으로 달려드는 악마들을 모조리 잡아 바위의 경사면에 갈아버렸다. 순식간에 동료를 모두 잃은 악마 한 마리가 공포에 질려 달아나려고 하지만 뒤에서 날아온 짱돌이 후두부를 그대로 터뜨려버렸다. “나이스 샷!” “…….” 모든 악마들을 해치운 김성철은 이번에는 기척을 숨기고 은밀하게 높은 봉우리로 올라갔다. 전황이 바뀌고 있었다. 화력을 담당하는 3대의 지옥공성기 중 2대가 파괴되자 위축됐던 드워프들의 화력이 되살아났고 악마들을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 남은 지옥공성기는 외롭게 버텨보지만 이내 드워프의 집중포화를 맞고 파괴됐다. 해가 질 무렵 악마들은 결국 무수한 시체만을 남겨둔 채 물러나야 했다. 김성철은 전장을 청소하던 드워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알아본 드워프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김성철의 주위를 둘러쌌다. “정말 고맙소. 이름 모를 마법사여!” “당신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정말로 여기서 끝장났을 거요!” 김성철은 담담한 얼굴로 주변의 드워프들을 돌아보았다. 짜리몽땅한 키에 덥수룩한 수염. 다 그놈이 그 놈 같은 얼굴이지만 다행히 아는 얼굴은 없었다. “지나가는 마법사. 김 아무개요.” 김성철은 스스럼없이 자신을 소개했다. ======================================= 34. 철혈기사단 (3) 드워프들의 환대 속에서 김성철은 요새의 지휘관급 장교들과 만날 수 있었다. 케반 케말의 수비사령관 카알 봄바도 그중 하나였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솥뚜껑처럼 큰 손, 등불처럼 번쩍이는 눈동자를 지닌 그 드워프는 커다란 잔에 담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현재 상황을 이야기했다. 카알 봄바 자신도 어째서 악마군이 후방에서 급습했는지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마계 최전선에서 떠도는 소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얼마 전에 철혈기사단 쪽에서 변경백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소. 실제로 철혈기사단은 겨우내 이어진 악마군의 공세에 심대한 타격은 입은 상태기도 했고. 아무튼 문제는 그 철혈기사단이 자존심을 꺾고 몇 차례나 지원요청을 했는데 그 개 같은 변경백이 모두 묵살했다는 거요. 당연히 철혈기사단으로서는 버틸 수가 없는 거지.” “…….” 김성철은 변경백 마르틴 브레가스라는 남자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제멋대로인 인간이긴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의 의무를 져버릴 정도로 무책임한 인간은 아니었다. 필경 어떤 내막이 있는 게 분명하리라. “아무래도 그 소문이 맞는 모양이군.” 다른 드워프가 입을 열었다. 김성철의 이목이 그를 향했다. “애첩한테 얻은 사생아를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철혈기사단을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 자세하게 듣고 싶습니다만.” 김성철이 관심을 드러냈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던 은인이 이례적으로 입을 열자 드워프들의 시선이 일제히 김성철에게 쏠렸다. 이야기를 꺼낸 드워프는 술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시원하게 트림을 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 그 안에 든 건 한 마리 들개로 미인만 보면 어떻게든 씨를 뿌리려는 더러운 성질을 갖고 있소. 덕분에 수많은 사생아들이 태어났지. 변경백도 모를거요. 자기 새끼가 몇 명인지.” 드워프가 너스레를 떨자 다른 드워프들도 일제히 웃음을 터뜨리며 맞장구를 쳤다. “소문엔 스무 명도 넘는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스무 명이 뭐야? 백 명도 더 된다고 하던데.” 김성철은 그 이야기를 듣고 가련하게 죽은 소피아 브레가스의 마지막 미소를 떠올렸다. ‘그 녀석도 사생아 출신이었을까?’ 마계에서 돌아온 후, 우연한 기회에 마르틴 브레가스 가문의 가계도를 본 적이 있었다. 가문의 창시자로부터 현재의 후계자까지 가계 상황을 끝없이 갈라지는 나무줄기의 형태로 표현한 그 가계도에서 일리야의 이름은 있었지만 소피아 브레가스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가계도에 이름이 없다는 건 가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걸 의미한다. “문제는.” 이야기를 하던 드워프가 큰 소리로 외쳐 주의를 환기시켰다. 웅성이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정돈되자 그 드워프는 말을 이었다. “문제는 그 수많은 사생아 가운데 유독 마르틴 브레가스가 편애하는 자식이 있다는 것이지! 그 사생아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자기 마누라에게서 얻은 자식을 마계로 던져버릴 정도로 사랑하는 자식이.” “그게 누구요?” 김성철이 물었다. “파림 다고트. 하프엘프. 트로윈 일대에 유명한 엘프 무희에게서 얻은 자식이지. 그런데 그 인간에 관해서 또 재밌는 소문이 돌고 있소.” “호오?” 김성철이 관심을 보이자 그 드워프는 씨익 이를 드러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르틴 브레가스가 가장 사랑하는 사생아가 정작 자신의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크하하하하!” 그 드워프는 뭐가 그리 웃긴지 차마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함박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드워프들도 껄껄 웃으며 마르틴 브레가스를 조롱했다. 회장이 떠나갈 정도의 웃음소리가 수그러들자 이야기는 이어졌다. 이번에 입을 연 사내는 줄곧 이야기를 하던 드워프가 아니라 케반 케멜의 지휘관 카알 봄바였다. “좌우지간, 마르틴 브레가스는 그 사생아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한다는 소문이요. 그 인간으로선 거리낄 게 없지. 마누라도 아들도 전부 죽였으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근본 없는 무희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기엔 그 철면피로도 무리라고 생각할 거요. 그래서 희생양을 만드는 거지.” “그게 철혈기사단이라는 거요?” 김성철의 물음에 카알 봄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철혈기사단도 알고 있을 거요. 워낙 유명한 이야기니까.” “철혈기사단이 그냥 참고는 있지 않을 거 같은데.” “하지만 철혈기사단은 힘이 없지. 기껏 이계에서 소환한 단장의 아들을 소환궁전에서 빼내오지 못할 정도로 쇠락했는데 더 무슨 말이 필요 하겠소?”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승냥이 같던 박아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놈을 죽인 건 나다.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박아람은 궁전을 수료하고 철혈기사단에 합류했겠지.’ 모든 원인엔 결과가 따른다. 그 수많은 결과 중엔 의도하지 않은 것도 있기 마련이다. 박아람의 죽음은 안 그래도 쇠락해가는 철혈기사단의 명예에 결정타를 날린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명예를 잃은 집단은 급속도로 와해한다. 김성철은 술잔을 기울이며 오늘 들은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갈무리했다. * 철혈기사단은 소환자들, 특히 한국에서 소환된 자들이 만든 무력집단이다. 단장 조성택을 중심으로 한 기사들은 처음엔 별 볼 일 없는 용병단에 불과했으나 가장 위험하다고 알려진 마계 최전선에 자리를 잡고 강력한 악마들과 목숨을 건 사투를 거듭 이어나갔다. 위험이 클수록 이득도 큰 법이다. 그들의 전투는 일견 무모해보였지만 결과적으로 기사단에 엄청난 성장을 안겨다줬다. 단장 조성택부터 휘하 수십 명의 기사가 초인의 경지를 빠르게 넘어섰고 그들은 철혈이라는 이름을 대기 시작했다. 그것이 한때 대륙 북방은 물론이고 대륙 전체 3강안에 들었던 철혈기사단의 유래다. 하지만 그 쟁쟁했던 철혈기사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조성택은 조직을 만드는 부분에 있어선 일가견이 있었지만 그 거대한 조직을 유지하는 부분에 있어선 평균 이하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르틴 브레가스, 아퀴로아, 그리고 황제 같은 노련한 책략가들의 음모 속에서 그의 조직은 철저히 이용당했고 소모됐다.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보루마저 내주었다는 소식이 폭풍전선의 성채에 들려왔다. “철혈기사단이 무너졌다.” “철혈십자궁이 함락되고 철혈기사단은 소수만 살아남아 마르틴 브레가스에게 몸을 의탁했다.” “마계최전선 동부 전선은 이제 무인지경이다.” “폭풍전선의 붕괴는 시간문제다.” 드워프들의 성채에 빈객으로 머물러 있던 김성철은 속속 날아드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하나 같이 치명적이고 급박한 어두운 소식뿐이었다. 사람들의 걱정이 커지는 가운데 비룡기사 한 기가 요새로 급파됐다. 오는 도중 악마들의 공격을 받은 듯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비룡기사는 마계최전선 총사령관 변경백 마르틴 브레가스의 명을 카알 봄바에게 전달했다. - 마르틴 브레가스 본인이 이끄는 본대가 악마군 본대를 치기 위해 이동 중. 이 소식을 듣는 모든 예하 지휘관들은 방어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을 남기고 병력을 급파할 것. ‘결국 직접 움직인 것인가. 마르틴 브레가스.’ 마계최전선이 만들어진 이래 최악의 위기다. 몇 번의 크고 작은 위기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전선 하나가 완전히 붕괴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마르틴 브레가스로서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만을 없었을 것이다. 이미 서부를 방위하던 바란아란 부족연맹의 엘프족 군대가 폭풍전선의 방위구역을 지나 동쪽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이 속속 들려왔다. 카알 봄바도 부상병과 소수 고참병을 제외한 모든 병력을 동쪽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김성철은 객원 마법사으로 카알 봄바의 군대에 합류했다. 300명에 달하는 드워프 군대가 요새에서 나와 동쪽 황무지를 향한 행군을 시작했다. 자신의 키보다 다섯 배는 긴 장창을 든 드워프 군대는 힘찬 군가를 부르며 죽음이 기다리는 땅을 향해 당당히 나아갔다. 그런데 군가 중엔 김성철과 관련된 것도 있었다. “김성철 개새끼~ 팔 가라즈 돌려내라~ 후레아들놈~” “김성철 고자놈~ 팔 가라즈 돌려내라~ 세계의 똥~” 무려 2절이나 있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김성철은 드워프 원한록 첫 번째에 등록되어 있다. 아마도 지금 여기서 김성철이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간 여기 있는 모든 드워프들에게 공격당하고도 남을 것이다. “정말 당신, 적이 많네. 친구... 있긴 있어?”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가 몸을 부르르 떨고는 놀리듯이 말했다. “…….” 김성철은 이에 대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를 끄집어 내 바깥에 내팽겨쳤다. “아야! 너무하네! 정말!” 드워프들은 하늘을 나는 베르텔기아를 보고 신기한 듯 감탄사를 터뜨렸다. 베르텔기아는 처음엔 어색한 듯 하늘을 말없이 배회하다 이내 드워프들과 친해져 하나하나 찾아가 말을 걸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난 후, 드워프 군대는 이름 모를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은 이미 악마군에 의해 파괴된 상태였다. 김성철은 불탄 잔해 속에서 반쯤 탄 마을의 표지판을 발견했다. 이계에 온 이래 볼 일이 없던 한글로 써진 현판이었다. [ 신 파주 ] “…….” 마을에 들어서면서 김성철과 드워프는 마을 전체에 감도는 비릿한 혈향을 맡을 수 있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불탄 가옥들에 둘러싸인 광장엔 악마들이 남겨놓은 끔찍한 잔해가 있었다. 사람들의 시체로 쌓아올린 탑이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혹독한 고문을 당한 이후, 살아 있는 상태로 탑의 재료로 쓰였고 거기서 죽었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은 자는 악마들의 먹이가 된 것 같았다. 내장이 전부 비워진 전사의 시체가 식탁 위에 올라간 채 썩어가고 있었다. “…저주 받을 악마 놈들.” 잔혹한 광경엔 익숙한 드워프들이었지만 악마들이 민간인에게 저지른 만행은 그들이 본 것과는 차원이 다른 잔혹성을 지니고 있었다. ‘마계 최전선이 뚫리면 대륙 전체에 이런 재앙이 닥칠 것이다.’ 누구보다 악마들을 잘 아는 김성철의 생각이다. 악마들에게 인간은 먹이감이자 장난감이며 영원한 적이다. 따라서 악마들에겐 타협도 협상도 불필요하다. 처참한 마을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카알 봄바는 행군 속도를 높였다. 이틀이 지나자 김성철 일행은 멀리서 나부끼는 마르틴 브레가스의 군기를 볼 수 있었다. 날개 달린 백골이 검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수놓은 군기는 멀리서도 잘 보였다. 그 군기 아래 수백 개의 군기, 총 삼만 여명에 이르는 병사들이 모였다. 마계최전선의 다른 전선은 물론 대륙 각지에서 모여 든 각양각색의 부대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중 가장 숫자가 많고 핵심을 이루는 부대는 마르틴 브레가스의 사생아로 알려진 파림 다고트가 이끄는 트로윈 자경대였다. 김성철은 그 부대가 이름만 자경대일뿐이지 병사들의 숫자도 질도 여간한 기사단에 못지않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봤다. 파림 다고트는 훤칠하고 당당한 체격을 지닌 선이 굵은 미남자였다. 세간에 도는 소문대로 마르틴 브레가스와 닮은 구석은 없어보였지만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올 정도의 커다란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얼굴은 준수했지만 소심하고 리더쉽이 부족했던 일리야와는 딴 판이다. 김성철은 왜 마르틴 브레가스가 파림 다고트를 더 편애했는지 한 눈에 보고 알 것 같았다. 파림 다고트는 각지에서 모여드는 부대장들을 하나하나 먼저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고 부대의 규모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간결하고도 힘 있는 목소리로 전달했다. “흐음. 저 사람이 그 대악마가 된 사람의 라이벌이야? 솔직히 저쪽이 낫긴 하네.” 베르텔기아도 김성철과 동일한 의견이었다. 반면 병영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철혈기사단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한때 대륙 3강의 세력을 지녔던 철혈기사단장 조성택은 초췌한 얼굴로 존재감 없이 패잔병들과 함께 병영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마계 최전선의 상황을 아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동정을 표했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을 철혈기사단을 가리켜 전선을 포기해 현재의 상황을 자초한 무능하고 무력한 집단으로 매도했다. ‘조성택.’ 김성철은 조성택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다. 재앙이 닥치기 전까지 그는 쾌활하고 용감하며 재능 있는 리더였다. 한때 김성철보다 훨씬 훌륭한 요리 실력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조성택의 모습에서 지난날의 반짝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김성철 앞에 앉아 있는 것은 껍질만 남은 늙은이였다. ‘철혈기사단이 이렇게 몰락하다니.’ 철혈기사단이 몰락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재앙에 맞섰다는 것. 비록 그 저항이 소극적이고 지엽적인 것이라고 하나 재앙에 맞선 결과 철혈기사단은 쇠락했다. 아마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리라.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를 떠났다. 철혈 기사단을 떠난 김성철은 부대 주변을 돌며 혹 아는 사람은 없는지 먼저 확인했다. 김성철의 현재의 얼굴을 아는 자는 극히 드물지만 이런데서 만나기라도 하면 조금은 난처한 상황에 처하니 말이다. 다행히 데커드 등의 형벌부대에서 만났던 인연은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당분간은 김 아무개로서 생활할 수 있다. ‘대략 일주일 안에 결판이 나겠지. 만약 이 싸움에서 인간이 패하면, 적어도 대륙의 삼분의 일이 악마들의 뿔과 발톱 아래 유린당할 것이다.’ 인간제국 같은 강대국은 악마들의 침공을 막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군소 국가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다. 김성철의 눈앞에 전에 보았던 파괴당한 마을의 처참한 광경이 스치고 지나갔다. 한줄기 얕은 한숨이 김성철 입에서 흘러나왔다. ‘직관력 1만 더 올랐어도.’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설 때 누군가 뒤에서 김성철의 어깨를 잡았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경악이 떠올랐다.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성철의 초인적인 감각을 뚫고 그 안에 접근하는 것은. 하지만 예전에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었다. 김성철은 기시감을 느끼며 자신의 어깨를 잡은 여성의 얼굴을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응시했다. “아, 진짜네! 성철 씨였네.” 환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는 여성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아무개였다. ======================================= 35. 홀로 맞서다 (1) ‘이 여자가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김성철은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속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회귀자 이수진. 소환궁전에서 모종의 인연이 있었다. 하지만 죽거나 죽음을 기다리는 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회귀자들의 운명이란 대저 그러한 것이기에. 하지만 다시 만난 이수진은 전보다 건강했고 그리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 몸에 걸친 복장도 허름한 평상복이 아닌 제법 멋을 낸 모험자의 복장이었다. “당신은 정말 하나도 안 변했네요?” 이수진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김성철을 만난 게 퍽이나 기쁜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지?” 김성철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특히 주변에 드워프가 있지는 않나 살폈다. 김성철이란 이름은 드워프에게 있어 금기와 다를 바가 없으니 말이다. “뭐가요?” “…일단 자리를 옮기지.” 김성철은 천진난만하게 되묻는 이수진을 데리고 병영 끝자락으로 이동했다.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를 배경으로 거대한 구형의 풀들이 굴러다니는 곳이었다. 인적이 드문 그곳에서 김성철은 이수진에게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짧게 안부를 물었다. 이수진은 미소를 거두고 낮은 목소리로 질문에 대답했다. “저 암살교단에 들어갔어요.” “암살교단에...?” 옛 동료 샤말 라지푸트의 뜻을 알 수 없는 공허한 눈동자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암살교단엔 어떻게 들어간 것이지? 그 녀석들이라면 회귀자를 그냥 두지 않을 터인데.” “다 방법이 있죠. 그나저나 당신은 회귀자가 어떤 대접을 받는지 알고 있었던 모양이네요?” 이수진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톡 쏘듯이 물었다. “…….” “농담이에요. 그보다 그쪽은 어떻게 지내세요? 왜 이런 사지까지 온 건가요?” 이수진이 화제를 바꿨다. 김성철은 품속에서 갑자기 요동치는 베르텔기아를 손으로 꾹 눌러 잠잠하게 만든 다음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세계의 운명이 달린 전투에 참가하러 왔다.” 이수진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온 거네요.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분과 동명이인인 당신다운 생각이이예요.” “그보다 너는 어째서 여기 온 거지? 암살교단에서 전투에 참가하라고 보내기라도 했나?” “글쎄요.” “소환된 지 1년도 안 된 소환자에게 이 전장은 버거울 텐데?” “딱히 싸우러 온 건 아녜요. 다만, 운을 시험 받으러 왔죠.” 이수진은 한숨을 내쉬더니 허공을 바라봤다. “운을 시험 받는다고?” “네. 제가 본 미래가 맞는지 아닌지 시험 받고 있어요. 회귀자란 게 좋은 것만은 아니더라고요.” “당연하지. 시간 축을 흔들어 놓는 존재인데 그 대가를 치러야지.” 미래는 정해진 게 아니다. 지엽적인 부분에서 회귀자들이 본 미래는 변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 변화의 방향이 회귀자들이 원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이지만. 회귀자의 존재가 알려진 이후부터 회귀자란 존재는 더 이상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치기 어려운 존재로 전락했다. 물론 회귀자라는 게 알려지기 전에 활동한 회귀자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지만 말이다. 김성철은 회귀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본 미래도 믿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김성철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러자 이수진이 김성철에게 한 걸음 다가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제가 시험 받는 미래가 뭔지?” “딱히 궁금하진 않은데.” “한 번 맞춰보세요.” 그때 베르텔기아가 다시 한 번 강하게 요동쳤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다시 진정시킨 뒤 이수진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곧 있을 전투의 승패를 예측하는 건가?” 이수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 부-.” “기이한 효과음이군.” “효과음이야 어찌됐든 틀렸네요.” “그럼 뭘 시험받는 거지?” 김성철의 물음에 이수진은 심호흡을 하며 먼 곳을 응시했다. 즐거워보이던 그녀의 눈동자에 먹구름 같은 근심이 드리워졌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이수진은 한숨을 내뱉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이곳에 나타나요.” 김성철의 눈동자가 이수진을 향했다. 이수진은 계속해서 담담한 어조로 남은 이야기를 마저 했다. “세계의 적이. 그것이 제가 본, 그리고 곧 실현될 미래.” 이수진은 말했다. 그녀가 있었던 세상에서 김성철은 세상을 멸하는 재앙 그 자체가 됐다고. 김성철은 그 말을 가볍게 무시했고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하지만 다시 만난 이수진은 김성철을 다시금 시험대에 올려 넣으려 한다. 그것이 의도한 것인지 아닌 지는 알 수 없지만 김성철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다. 불쾌감은 무거운 침묵으로 이어졌다. “…….” 김성철이 침묵하자 이수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얼버무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뭐, 실현이 안 되면 사기꾼으로 몰려서 암살교단 내에서 처분당하겠죠. 그러기 위한 감시자도 붙어 있고.” 이수진이 곁눈질로 뒤를 응시했다. 그 기척은 김성철도 느끼고 있었다. 아까부터 한 자리에 머물고 있던 희미한 기척이었다. 지금 그 기척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게 느껴졌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김성철은 그 기척이 반갑지 않은, 그리고 낯익은 자의 기척이라는 걸 느꼈다. 검은 터번으로 얼굴 전신을 가리긴 했지만 김성철의 이목을 숨길 수 없었다. ‘저 녀석은 에어푸르트에서 만났던 그 암살잔가.’ 에어푸르트 마법학교를 둘러 싼 전투에서 김성철에게 맞섰던 알메이라 가문의 암살자들. 그 최후의 생존자 카즈 알메이라다. 김성철이 절반으로 쪼개놨다고 생각했던 그 사내는 어깻죽지부터 팔 전체를 덮는 독특한 형태의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고통을 주면서 죽인다는 것이 살려주는 형태가 되어버렸군.’ 이유야 어찌됐든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다. 김성철은 등을 돌린 채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여기서 헤어지지.” 이수진도 카즈 알메리아가 달갑지 않은 건 매한가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기회가 되면 다시 만나요. 당신이 만든 요리 다시 한 번 먹어보고 싶네요. 암살교단 사람들의 미각은 끔찍한 수준이거든요.” “연이 닿으면.” 둘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헤어졌다. 각기 다른 방향을 걷는 둘의 얼굴은 좋지 않았지만 보다 무거운 낯빛을 한 쪽은 김성철이었다. “…….” 단 한 번도 자신을 의심한 적 없던 사내는 메마른 황야를 노려보며 흐트러진 마음을 추슬렀다. * 악마군들이 황무지에 나타났다. 지평선 너머를 까맣게 뒤덮는 어마어마한 대군이었다. 비룡기사를 주축으로 한 정찰대가 위험을 무릅쓰고 정찰을 감행, 악마군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수집했다. 정찰대의 말에 따르면 마계 최전선의 후방지대, 트로윈을 향해 진군하는 악마군의 숫자는 십만 마리에 달한다고 한다. 약 3만 5천명의 인간 동맹 연합군에 비하면 약 3배에 달하는 숫자다. 하지만 연합군의 사기는 드높았고 반드시 이번 전투에서 악마들을 몰아내겠다는 열광으로 충만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패배하는 순간, 이 땅이 악마들의 놀이터로 변한다는 것이 기정사실이기 때문이다. 총사령관 마르틴 브레가스는 트로윈의 입구인 하루파야 고개에 진을 치고 악마군을 기다리는 작전을 택했다. 방어하기 쉽고 후방으로부터 지원도 용이한 이상적인 지형이었다. 다만, 이곳에서 패배할 경우 뒤가 없다. 하루파야 고개 너머엔 비옥한 곡창지대와 풍요로운 촌락과 도시가 무방비로 펼쳐져 있다. 고개를 뺏기는 순간, 악마군들은 그곳으로 물밀 듯 몰려갈 것이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이렇게 대륙 절반의 운명이 다가올 일전에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틴 브레가스는 엉뚱한 곳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내일 펼쳐질 대전투가 너의 화려한 데뷔무대가 될 것이다. 너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길 것이니 그저 용맹하고 그리고 방심하지 말고 싸워라.” 마르틴 브레가스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변경백님.” “다음에 만날 땐 아버님이라고 불렸으면 좋겠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흐뭇한 시선으로 파림 다고트의 듬직한 뒷모습이 떠나가는 걸 지켜봤다. 파림 다고트가 떠난 후, 마르틴 브레가스는 막사 중앙에 놓인 전장의 지도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어떻게 해야 파림 녀석이 활약할 판을 짤 수 있을까.’ 이기고 지는 것 또한 중요한 문제지만 마르틴 브레가스가 보다 신경을 쓰는 것은 파림 다고트의 활약 여부였다. 그는 몇 번이고 부대의 배치를 수정하며 머릿속으로 전투의 경과를 그렸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마르틴 브레가스는 파림 다고트가 가장 활약할 수 있는 이상적인 배치를 발견했다. 하지만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 마르틴 브레가스의 작전은 다른 이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문제는 누구를 희생양으로 고르느냐다. 전장의 지도 위에 올려진 수많은 장기말 중 하나가 마술처럼 마르틴 브레가스의 눈동자에 들어왔다. 마르틴 브레가스의 입가에 득의만면한 미소가 떠올랐다. ‘철혈기사단이 좋겠군. 누구보다 명예회복을 갈구하는 무리들이니. 그나저나 곱씹어볼수록 명안이군. 눈에 가시 같던 철혈기사단의 싹을 없앰과 동시에 놈들을 마지막까지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건 말이야.’ 그는 철혈기사단을 적의 직접적인 공격이 예상되는 우익 돌출부에 배치하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조성택이 과연 그 안을 받아들일 것인지 여부다. 사람들은 불만이 쌓이고 쌓인 조성택이 마르틴 브레가스와 한 판 벌릴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마르틴 브레가스 본인도 조성택과 한 판 설전을 벌일 것에 대비해 명분을 쌓고 있던 차였다. 놀랍게도 조성택은 순순히 그 안을 수락했다. 모두가 예상하지 않은 온건한 결말이었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조성택의 결정에 용기 있는 선택이라는 찬사를 보냈고 쥐꼬리만 한 금은보화를 위로금이라는 명목으로 선물했다. 그걸로 상황은 일단락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다. “우리에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조성택에겐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계획이 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북쪽 황무지에 자리 잡은 악마의 군세를 응시했다. 악마군은 이제 지척에 와 있었다. * 전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모처. 어둠 속에 녹아든 희미한 인영들이 모여 있었다. “한낱 회귀자의 말을 퍽이나 신용하다니. 축축하고 어두운 곳에 오래 있다보니 감이 많이 죽은 모양이군? 샤말 라지푸트.” 적막을 찢고 카랑카랑한 노파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해독할 수 없는 문자로 뒤덮인 가면을 쓰고 금박으로 장식한 짙은 남색의 로브를 걸친 노파였다. 겉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고 있는 그 노파의 정체는 집행자 아퀴로아. 대륙이걸에 위치한 시대의 강자로 대륙 막후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신비인이다. 그녀의 얼굴은 가면에 가려져 알아 볼 수 없었지만 심기가 불편하다는 건 음성과 몸짓에서 충분히 드러나고 있었다. 장갑을 낀 앙상한 손가락이 구석에 선 젊은 여성을 가리켰다. “말해라. 회귀자. 이번 전투에서 세계의 적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 정녕 사실이렷다?” 노인의 지목을 받은 여성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이수진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세계의 적은 하루파야 고개의 전투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말을 들은 아퀴로아는 코웃음을 쳤다. “이 회귀자는 에어푸르트에서 세계의 적이 출현하리라는 사실을 예언했소.” 구석에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담겨 있지 않은 무신경한 음성이었다. 어둠과 동화되어 허무에 가까운 잿빛 눈을 번득이고 있는 그 사내의 정체는 대륙오걸 샤말 라지푸트.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그 이름을 두려워 한다는 암살교단의 교주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 예언이 들어맞는다면 우리는 이 회귀자를 믿어야 할 명분이 생기는 거요.” 샤말 라지푸트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집행자 아퀴로아의 고개가 아무개를 향했다. “그럼 묻겠다. 김성철은 정녕 우리를 멸하는 재앙이 되느냐?” 이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김성철 따위가 어떻게 재앙이 될 수 있단 말이냐? 그런 녀석은 나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실례로 김성철은 재앙을 해결한답시고 세상에서 추방된 후, 아직도 마왕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말 한마디마다 비수로 찌르는 듯한 날카로움이 담긴 음성이었지만 이수진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아퀴로아의 기세를 받아들인 후, 똑바로 아퀴로아를 노려보며 청량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본 김성철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뭐라고?” “그는 신과 인간의 중간쯤에 위치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퀴로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신... 아신이 되었단 말이냐!” 구석에 말없이 검을 짚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투구를 쓰고 갑주로 온 몸을 두른 균형 잡힌 기사였다. 세상은 그를 대륙삼걸이라는 별칭대신 방랑왕이라고 부른다. “김성철이 여기 나타난다고 치자고. 놈의 다음 행동은 무엇이냐?” 방랑왕이 물었다. ‘이 사람이 그... 방랑왕?!’ 이수진은 그에게서 온 몸이 벌겨벗겨지는 듯한 기이한 감각을 느끼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악마왕을 처치해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 35. 홀로 맞서다 (2) “나는 그 말을 믿지 않겠다.” 아퀴로아가 불쾌감을 섞어 말했다. 어둠에 가려진 방랑왕의 투구 안에서 서늘한 빛이 번득였다. “하지만 저 회귀자의 말이 들어맞는다면 그땐 어떻게 하겠소?” 부드럽지만 거역할 수 없는 음성이 투구 안에서 새어 나왔다. “조치를 취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샤말 라지푸트가 그의 말을 받았다. “조치라 함은?” 방랑왕이 묻자 샤말 라지푸트는 집행자 아퀴로아를 노려보았다. 아퀴로아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저 여자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김성철이 여기 나타난다면 그를 막아야겠지.” “어떻게 그를 막을 작정인가? 아퀴로아.” 방랑왕이 다시금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아퀴로아는 가면을 고쳐 쓰며 예의 카랑카랑한 음성에 힘을 담아 말했다. “악마왕이 죽지 않는 한, 재앙은 첫 번째 단계에서 머물게 됩니다. 우리가 관리 가능한 선에서 말이죠. 우리는 지난 8년 동안 제 생각이 옳다는 걸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이미 안정성이 입증된 것이죠. 우리는 애써 만든 이 판을 흔들어서는 안 됩니다. 폐하.” 아퀴로아는 샤말 라지푸트 때와 달리 방랑왕에게 깎듯이 예우했다. 방랑왕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재앙을 늦추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재앙은 막을 수 없고 따라서 늦출 수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종말 교단이라는 이교도들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하지만 그 이교도들이 뭘 알겠습니까? 자기들의 운명조차 예측하지 못하고 나라와 왕관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 도둑질, 매춘, 구걸이나 하는 거지 떼로 변한 족속들입니다. 그들의 말은 하나도 귀담아 들을 필요 없습니다.” 살짝 흥분하긴 했지만 아퀴로아의 말엔 막힘이 없었고 말하는 내내 강한 힘을 뿜어내고 있었다. “경의 생각이 그렇다면 짐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방랑왕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가장 껄끄러운 상대가 침묵하자 아퀴로아는 이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만약 김성철이 이 현장에 나타난다면 모든 힘을 다해 그를 처치한다.” “만약 처치가 불가능하면?” 샤말 라지푸트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이에 아퀴로아는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김성철로부터 그것을 지켜야겠지.” 이수진은 아퀴로아의 음성으로부터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무엇을?” 샤말 라지푸트가 물을 때 이수진이 품었던 불길한 예감은 절정에 달했고 그리고 아퀴로아가 퉁명스레 대답할 때 그녀의 예감은 확신으로 변했다. “지켜야지. 악마왕 해서니우스 맥스를.” * 날이 밝자 어둠에 가려져 있던 악마군의 위용이 드러났다. 악마들은 지평선 끝에서 끝까지 가공할만한 숫자로 뒤덮고 있었다. 군데군데 자리 잡은 지옥공성기와 거대 마수들이 스산한 위압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병사들은 언덕 아래 펼쳐진 악마군의 위용을 보며 웅성거렸다. “저거 봐. 탐탐 변종이야! 옛 문헌에 기록된 무시무시한 모습 그대로군.” “저것이 악마들의 주력 전쟁병기라는 지옥공성기인가? 상상한 것보다 크고 무시무시하군.” “심해마종의 유체도 있군. 새끼가 저 정도로 거대한데 다 큰 성체의 크기는 대체 어느 정도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아.” 병사들은 대체로 두려워하기보다는 신기해하는 반응이었다. 마르틴 브레가스가 통솔하는 연합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고 무엇보다 그들의 어깨 위엔 무거운 사명이 달려 있었다. 자신들의 고향과 가족들을 지켜야 한다는 거룩한 사명이 말이다. 연합군의 상당수가 마계 최전선 일대 및 그 근교지방에서 모여든 전사들이다. 하루파야 고개가 무너지면 그 후방인 트로윈은 말할 것도 없고 측면에 자리 잡은 폭풍전선과 바란아란 엘프 연맹부족의 땅도 위험해진다. 수천 년을 자신의 땅에 터 잡아 살아온 엘프와 드워프들은 인간들보다 강한 사명감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승리 아니면 죽음뿐이다.” 김성철은 드워프 영내를 돌아다니며 같은 소리를 수백 번도 더 들어야 했다. 정찰병들이 새로운 정보를 속속 이쪽으로 전달해왔다. 현재 악마군을 지휘하는 악마는 악마들의 왕 해서니우스 맥스가 아니라 그 아래급인 대악마 프론토로와라는 악마라고 한다. 악마 서열 8위로 서열은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악마들 사이에서 고대 악마라 불리는 수만 년을 살아온 악마로 사악한 흑마법과 책략에 능한 교활한 악마라고 한다. 마르틴 브레가스를 위시한 사령부에선 개인적인 전투력은 약하나 대규모 회전의 경험이 풍부해 생각보다 까다로운 상대라고 평가했다. 김성철은 마르틴 브레가스의 군막 주변을 서성이며 필요한 정보를 모두 수집하고 있었다. ‘프론토로와라. 전에 마왕궁 습격 당시 자리에 없었던 모양이군.’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 자리에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김성철은 눈에 보이는 모든 악마를 처치했으니까. 아무튼 고무적인 것은 이번 하루파야 고개의 전투에서 인간 측의 승산이 높아 보인다는 점이었다. 비록 숫자 자체는 3배에 달하는 차이가 있지만 이쪽은 지형의 유리함을 안고 있고 높은 사기를 지닌 정예 병력들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사령관인 마르틴 브레가스의 의욕 또한 충만했다. 자신의 사생아에게 승리의 공을 돌리려는 욕심이 앞서 있긴 하지만 마르틴 브레가스가 승리를 원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몸소 전선 곳곳을 돌아다니며 진지 및 병사의 상태를 점검했고 푼돈이긴 하지만 사비를 털어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게다가 마르틴 브레가스의 사생아가 거느리고 있는 트로윈 자경단의 전력도 상상 이상으로 높았다. 전성기의 철혈기사단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에 준할 만큼 강력한 전사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이 적재적소에 투입된다면 전황을 한 번에 바꿀 수 있을 정도의 효과를 낼 수 있으리라. ‘아무개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겠군.’ 아무개의 예언 따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긴 했지만 완전히 무시할 순 없었다. 아무리 회귀자들이 불확정적인 미래를 말한다고 해도 그들의 본 미래가 앞으로 펼쳐질 선택지 중 하나라는 건 부정할 수 없으므로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 전투가 벌어진다면 김성철이 정체를 드러낼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김성철은 이번 전투에서 인간 측의 승률이 7할 이상이라고 예측했다. 설령 이기지 못한다고 해도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지는 않을 것이고 악마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강요해 더 이상의 진군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기든 지든, 김성철이 직접 나설 일은 전무한 것이다. 예상치 못한 사태가 일어나서 전선 전체가 일거에 붕괴되는 불상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한편 김성철의 부대는 하루파야 고개에서도 특별히 험준한 지형을 지닌 좌익에 배치됐다. 산악전에 유달리 강한 드워프들이 좌익의 중추를 이루었고 드워프들이 자랑하는 강력한 공성병기가 다수 배치됐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날아올 악마들의 공습을 막기 위해 엘프 족 궁수부대도 다수 배치되어 있었다. 김성철은 이번 전투에서 객원 마법사 김 아무개로 전력을 다할 작정이었다. ‘지옥공성기 10기정도 박살낸다면 충분하겠지.’ 그 정도만 해줘도 좌익에서의 화력전은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리라. 김성철은 마음을 편히 먹고 전투를 기다렸다. 남는 자투리 시간엔 늘 하던 연금술을 실시하며 직관력을 올리기 위해 노력했고 수시로 드워프들과 고개를 오르내리며 인근 지형을 눈에 익혔다. 전투의 날은 곧 다가왔다. 악마들의 전령이 마르틴 브레가스를 찾아온 것이다. 악마들은 의례적인 항복 권고를 했다. 길만 열어준다면 이곳 주변의 안전은 보장하고 더불어 악마들의 마법적 지식도 함께 전해준다는 상투적인 내용이었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일언지하에 악마들의 제안을 거절했고 전투를 준비했다. 각급 지휘관들에게 전투준비명령이 하달됐다. 김성철이 속한 카알 봄바의 수비대도 무기와 갑주를 점검하고 전선에 섰다. 십만 마리에 달하는 악마들이 그들 앞에 있었다. “더럽게 많군.” “어제보다 숫자가 늘은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죽일 악마가 늘어난 건 좋은 일이지.” 드워프들은 저마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들의 대형석궁과 도끼를 다시 한 번 손질했다. 드워프 도끼병 뒤에는 엘프 궁수들이 배치됐다. 그들은 시끌벅적한 드워프들과 달리 차분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손끝을 통해 확인했다. 멀리 떨어진 중군에서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리가 떨어지고 높낮이가 달라 소리가 웅웅거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 목소리가 연합군 총사령관인 마르틴 브레가스의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날개 달린 해골이 그려진 군기 아래에서 화려한 갑주를 걸친 마르틴 브레가스는 자신들의 부하들을 돌아보며 전의를 고양시키는 연설을 실시했다. 그 결과가 과연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겉으로 본 모양새를 그럴 듯 했다. 악마들의 뿔피리 소리가 울려퍼진 건 그 다음이었다. “전투 준비!” 하사관들이 힘찬 구령이 사방에서 시간차를 두고 들려왔다. 척! 드워프들의 도끼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도끼 - 방패 벽을 구축했다. ‘역시, 마계 최전선에서 백전연마된 정예병들이군. 여간한 악마 나부레기도 이들을 뚫어내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김성철은 시야를 돌려 아래에 자리 잡은 중군을 응시했다. 마르틴 브레가스가 지휘하는 중앙군은 주로 인간들로 구성됐는데 막강한 마법사들과 크고 작은 전투에서 경험을 쌓은 용병들과 각지에서 파견된 강력한 전사들을 지니고 있는 연합군의 주력이었다. 게다가 후방엔 마르틴 브레가스의 또 다른 아들인 파림 다고트가 지휘하는 막강한 트로윈 자경단이 예비대로 자리 잡고 있었다. 중군의 전력은 전군을 통틀어 가장 강력하다. 걱정되는 곳은 우익을 맡은 철혈기사단 쪽이었다. 고대의 유산을 파헤쳐 만들어냈다는 독특한 기동요새 두 개를 주 거점으로 방어진을 구축하긴 했지만 철혈기사단의 숫자는 크게 줄어들어 있었고 사기 또한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다. 그 대목에서 김성철은 마르틴 브레가스의 생각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품었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인성은 바닥이지만 능력만은 출중한 사내다. 그런 사내가 왜 중요한 우익을 저런 껍질만 남은 집단에게 맡겼단 말인가?’ 김성철이 보기에 철혈기사단의 붕괴는 시간문제였다. 버티기야 버티겠지만 그걸로 끝이다. 김성철의 뇌리에 문득 마르틴 브레가스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설마. 그 녀석. 일부러 철혈기사단을 저런 사지에 배치했단 말인가?’ 중앙군 뒤쪽에 자리 잡은 트로윈 자경단이 든 창칼이 햇살을 받아 번쩍거렸다. 마르틴 브레가스의 의도가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김성철은 익숙한 메스꺼움을 느꼈다. ‘인류의 존망이 걸린 싸움조차 자기 사리사욕대로 이용하다니.’ 마르틴 브레가스 뿐만이 아니다. 이 땅의 기득권을 틀어 쥔 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같은 선택을 했다. 김성철은 탐욕과 이기심을 혐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절한 탐욕과 이기심은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하지만 지금 이계의 기득권들의 탐욕은 도를 넘어섰다. 그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조차 망각한 채 오로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한 선택만을 반복해서 한다. 몇 명이 죽건 그들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을 통째로 바치고도 남을 인간들이다. “…….” 최근 잊고 있던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 감정의 밑바닥에서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당장 이 싸움에 참가해야 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이 싸움에서 이겨봐야 득을 보는 건 마르틴 브레가스와 그의 사생아가 될 것이니까. 부친에게 버림받고 비참하게 죽은 소피아와 영원히 고통 받으며 남은 생애를 살아갈 운명을 진 일리야의 얼굴이 차례대로 김성철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였다. “뭘 그리 얼어 있나? 인간 친구.” 카알 봄바를 비롯한 드워프들이 어느새 김성철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설마 겁을 집어먹은 건 아니지?” “…….” “뭐, 당신 정도의 사내가 겁을 먹을 리는 없겠지만 이 정도 대군을 보면 압도될 만하지. 하지만 걱정하진 말게.” 드워프들은 김성철을 지나쳐 앞으로 전진 했다. “이 땅은 우리들의 고향이자 터전. 우리들의 피와 목숨으로 반드시 지켜낼 걸세.” 말 수 적은 엘프들이 김성철을 향해 목례를 하며 드워프의 뒤를 따랐다. 악마들의 뿔피리 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퍼지고 지옥공성기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마침내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산등성이 아래에서 불어오는 강풍에 휘날리는 군기 밑에서 김성철은 잠시 흩어졌던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다. 나는 기득권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다.’ 여전히 입안에 메스꺼움과 역겨움이 감돌고 있지만 김성철은 그 감정을 털어버리고 당당하게 전선 앞에 섰다. “베르텔기아.” “응!” “메테오 잔량 계산을 다시 한 번 부탁하지.” “그냥 망치 들고 싸우면 안 돼?” “안 돼.” 이윽고 하늘 위에서 운석들이 떨어졌다. 운석들은 초록색 불을 뿜어내는 지옥공성기를 무자비하게 강타했다. 순식간에 다섯 기의 지옥공성기가 김성철의 메테오에 의해 박살났다. 환호성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고 드워프들의 공성병기가 불을 뿜어 화답했다. 좌익의 화력전은 드워프 측이 절대적인 우세를 점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김성철이 그렇게 생각할 때 전선의 우익에서 예상치 못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이다. 나의 형제들이여. 우리를 져버린 배신자들에게 대가를 치르도록 하자.” 악마군을 향해 창칼을 들이대던 철혈기사단이 반전했다. 철혈기사단의 창칼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마르틴 브레가스의 군기가 있는 방향이었다. ======================================= 35. 홀로 맞서다 (3) 철혈기사단의 배신으로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마르틴 브레가스였다. ‘조성택. 결국 미쳐버린 게냐?’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계획이 한 번에 무너졌다. 파림 다고트의 화려한 데뷔는 고사하고 이 싸움의 승패조차 장담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마르틴 브레가스는 달라진 전황을 응시했다. 철혈기사단이 자랑하는 기동요새들이 여덟 개의 거대한 발을 부지런히 놀려 이쪽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요새 전면에 빼곡히 자리 잡은 대포들의 포구가 이쪽을 향하고 있다. “쏴라!” 기사들의 힘찬 구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십 문의 대포가 일제히 중앙군의 대열을 향해 포탄을 흩뿌렸다. 무자비한 포격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엔 무수한 시체들과 신음하는 부상병이 남아 있었다. 그와 동시에 악마군들이 철혈기사단과 합세하여 우익을 돌파해 중앙군의 측면을 향해 쾌속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엔 마르틴 브레가스도 잘 아는 얼굴이 있었다. “마르틴 브레가스! 개만도 못한 자식! 오늘 여기가 네 무덤이 될 것이다!” 철혈기사단장 조성택. 그가 선두에 서서 기사와 악마와 함께 이쪽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마르틴 브레가스의 사고가 일순 정지됐다. 그의 의식은 다그치는 참모의 목소리에 의해 간신히 돌아왔다. “변경백님! 명령을!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마르틴 브레가스는 잠시나마 정신을 잃었던 사실에 속으로 부끄러워하면서 짧게 명령을 내렸다. “맞받아친다. 트로윈 자경단에게 명을 내려라. 저 빌어먹을 배신자들을 처단하라고.” 파림 다고트가 이끄는 트로윈 자경단이 움직였다. 위풍당당한 갑주와 검을 번쩍이며 배신자들을 향해 진격했다. 그걸 본 조성택의 눈이 뒤집혔다. “좋다! 그 개자식의 사생아가 이끄는 부대구나!” 철혈기사단의 기세가 불붙은 것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거대한 흑마를 탄 조성택이 검을 휘둘렀다. 젊은 자경단원 하나가 자신만만하게 검을 휘두르며 맞받아쳤다. 검과 검이 부딪치길 수 차례. 승패는 빠르게 결정됐다. “끄아아아악!” 자경단원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조성택은 쓰러지는 자경단원의 몸뚱이를 한 손으로 낚아채 그 목을 빠르게 베어낸 후 하늘 높이 치켜 들었다. “이게 네 놈들의 미래가 될 것이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높이 들어 올린 조성택 뒤로 날개 달린 거대한 악마들이 휙휙 지나갔다. 불타는 채찍과 검을 든 발록들이다. 강력한 악마의 대명사로 알려진 상급 악마들이 나타나자 자경단의 사기는 순식간에 꺾였다. 자경단의 전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모두, 모두 진정하세요! 저를 믿고 따라주십시오.” 파림 다고트가 차분하게 병사들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역사도 전통도 없는 신생 부대다. 유리한 상황이라면 모를까 위급한 상황에선 그 한계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자경단원들은 발록과 함께 육박하는 철혈기사단을 보고 달아났다. 그 모습을 본 마르틴 브레가스는 입을 꾹 다문 채 치열하게 머리통을 굴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어쩌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힘들게 키운 자경단의 피해가 극심할 것이고 파림도 전사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득 보는 장사가 아니다. 게다가 이번 전투의 패배는 내 잘못도 아니지 않는가?’ 마르틴 브레가스의 흐릿한 푸른 눈동자가 멀리 전장에서 포효를 내지르고 있는 조성택의 모습을 담았다. 그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어쩔 수 없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하루파야 고개를 포기한다.” 지휘관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아무리 철혈기사단이 통째로 배신했고 자경단이 꺾였다고 하나, 마계최전선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자가 싸움이 불리해졌다고 해서 바로 임무를 방기하다니.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추태였다. 몇 명 뜻있는 지휘관이 솔직한 의견을 말했다. “여기에서 물러서면 변경백님의 영지도 쑥대밭이 될 것이오.” “우리가 여기서 물러서면 마계최전선 이북은 전부 악마들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좌익은 아직 유리합니다. 반전의 기회는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틴 브레가스는 듣지 않았다. 들을 마음도 없었다. “정 여기를 지키고 싶으면 당신들이 남아 지키던지.” 그는 여러 나라의 왕들이 합심하여 만들어준 지휘봉을 미련 없이 던져버리고 막사를 떠났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참모를 향해 소리쳤다. “파림 다고트에게 전해라. 지금 당장 부대를 온전히 보전하고 이곳에서 이탈하라고!” 이미 그는 더 이상 남들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부끄러운 짓이 뭔지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충직한 심복을 불러 귓전에 대고 은밀한 명을 속삭였다. “지금 당장 트로윈에 있는 내 저택으로 가져 돈이 될 만한 모든 것을 챙겨가지고 남쪽으로 피신해라. 하늘 항구에 소피아 브레가스라는 명의의 공선 한 척이 있을 것이니 그걸 이용해라.” 마르틴 브레가스의 행보엔 거침이 없었다. 그는 수많은 병사들과 지휘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임무를 내팽겨 치고 자신의 군단을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총사령관이라는 자가 이 모양이니 제대로 된 싸움이 될 리 없다. 연합군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전력을 보유했던 중앙군은 빠르게 허물어졌다. 몇몇 뜻 있는 지휘관들이 자신의 부대를 추슬러 악마들과 철혈기사단에 맞서려 하지만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악마군은 중앙 본진을 빠르게 장악하고 하루파야 고개 전체를 손아귀에 틀어쥐려하고 있었다. “…….” 김성철은 말없이 절망적으로 변해가는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말이 없는 건 김성철 뿐만이 아니었다. 서전의 승리로 기세가 올라 있던 드워프들과 엘프들도 말없이 참담한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르틴 브레가스가 달아난 직후부터 역전의 가능성은 사라졌다. 우익은 배신했고 본진은 무너졌으며 남은 건 좌익뿐이나 그 또한 적에게 포위당할 운명이리라. 좌익의 지휘를 맡은 폭풍전선의 연합군단장 아르무크 바르르는 전군에게 후퇴를 명했다. 하지만 아무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세월이 만든 바위와 나무처럼 그 자리에 꿋꿋이 버티고 서서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죽어도 여기서 죽는다.” “인간들은 뒤가 있지만 우리에겐 뒤가 없다.” 전황은 극도로 암울했지만 드워프와 엘프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그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전의를 다졌고 다가오는 악마들에 향해 맹렬한 반격을 퍼부었다. 살아남은 중앙군의 인간 부대도 좌익에 합류해왔다. 하지만 이미 기울어버린 전황은 뒤집을 수 없다. 악마들은 여유롭게 높은 산지에 포진한 드워프 - 엘프 연합군을 포위하며 최후의 공격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때 하늘 높이 괴성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일제히 손가락을 가리키며 소리 높여 외쳤다. “드.. 드래곤이다!” “드래곤이 나타났다!” 검은 비늘을 지닌 거대한 흑룡이 악마군의 진형에 나타났다. 그 흑룡의 정체는 반인반용 카네스. 은자의 탑이 지닌 최강의 은자. ‘이제 슬슬 일을 하려고 하니 뭐야. 마계최전선 자체가 무너지고 있잖아.’ 뒤바뀐 재앙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마계최전선으로 파견된 그녀는 맛집 탐방을 하며 농땡이를 치다가 뒤늦게 마계최전선에 이르렀는데 이미 마계최전선은 악마 천지. 결국 악마들이 없는 곳으로 이동하던 중 뒤늦게나마 하루파야 고개의 전투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빌어먹을 인간들은 다 어디 간 거야! 앙?!” 천둥처럼 큰 목소리로 소리치며 카네스는 발톱과 꼬리를 휘둘러 자신보다 열등한 악마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했다. “악마 찌꺼기들 하나 못 막아서 이 몸을 나서게 하는 게 과연 타당한 일이야?!” 최강의 종족인 드래곤의 전투력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인간들 앞에선 공포의 존재로 군림하던 발록 조차 그녀의 브레스에 닿자 시꺼먼 재로 화했다. 하물며 그보다 못한 마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실컷 악마들을 도륙한 카네스는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 위를 배회하며 브레스를 날렸다. 악마공성기와 거대 마수들이 불에 타 녹아버렸다. 악마들이 석궁과 쇠뇌를 발사해 저항해보려 하지만 카네스의 비늘을 뚫지 못했다. 그야말로 무인지경. 그러나 카네스라고 해서 무적은 아니다. ‘이런 배가 고파지네.’ 반인반용인 그녀는 언제든 용으로 변신할 수 있지만 제한시간이 있다. 카네스는 비축한 힘이 급속도로 떨어지는 걸 느끼며 전장에서 물러났다. “나중에 보자! 악마들아!” 한바탕 신나게 날뛴 카네스는 훌훌 날갯짓을 하며 남쪽으로 날아갔다. 무수한 악마와 전쟁병기의 잔해를 남기고서. 하지만 그녀가 해치운 악마는 일부분에 불과했다. 악마들로선 진격이 살짝 지연시킨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카네스가 사라진 후, 악마들은 다시 전열을 추스려 남은 연합군의 잔당을 섬멸하기 위한 진격을 시작했다. 선두에 선 것은 한때 인간들의 든든한 보루였던 철혈기사단의 기동요새였다. 글자 그대로 성채 아래 마도공학으로 만들어낸 여덟 개의 다리를 부착,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게 만든 거대한 기동요새는 막강한 방어력과 화력을 동시에 보유한 철혈기사단 최고의 자산이다. 기동요새는 드워프들의 포격을 몸으로 받아내며 산등성이 바로 아래까지 이동해 자리 잡은 뒤, 모든 포문을 드워프 포대로 향했다. 수십 문의 화포가 일제히 불을 뿜으며 드워프 진지를 강타했다. 드워프들은 있는 힘을 다해 응사를 해보지만 처음부터 중과부적인 싸움이었다. 다른 전선에 있던 지옥공성기가 포격전에 합세하자 드워프들이 자랑하는 공성병기들은 하나씩 파괴되기 시작했다. 김성철의 메테오가 몇 개의 지옥공성기를 추가로 격파하긴 했지만 그 혼자로 전황을 뒤집기는 무리였다. 드워프들의 공성병기가 무력화되자 하늘로부터의 공격이 시작됐다. 날개 달린 악마들이 무리를 지어 강습을 감행했다. 엘프족 궁수들의 화살이 악마들을 곤두박질치게 만들었지만 엘프들이 하늘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악마의 대군이 방해받지 않고 산등성이를 향해 진군했다. 드워프들은 지평선을 까마득하게 채운 악마의 물결이 이쪽을 향해 포위하듯 올라오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인 모양이군.” 그리폰 몇 마리가 악마들을 뚫고 하늘을 향해 비상했다. 반드시 살아나가야 될 지휘관과 중요인물들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카알 봄바는 기꺼이 자신의 그리폰을 김성철에게 내주었다. “이걸 타고 가시오. 인간 마법사.” “왜 이걸 내게?” 김성철이 놀라워하며 묻자 카알 봄바는 도끼를 번쩍 들며 씨익 웃어보였다. “나보다는 당신이 장래의 전쟁에 도움이 될 것이오. 지옥공성기를 그토록 잘 부수는 마법사는 전에 본 적이 없으니까!” 그는 김성철을 돌아보지도 않고 최전선으로 뛰어갔다. 피와 살점이 튀는 전장으로 고함을 지르며 합류했다. “…….” 김성철은 그쪽을 향해 목례를 해서 예를 표하고 그리폰에 올라탔다. 그리폰은 한 차례 날카롭게 울부짖은 뒤 육중한 날개를 펄럭여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날개 달린 악마들이 그리폰을 덮쳐보지만 그리폰은 가볍게 악마들을 발톱과 부리로 찢어발기며 순조롭게 창공 위로 비상했다. 하늘 위에서 김성철은 보다 뚜렷하게 전황을 볼 수 있었다. 드워프 엘프 연합군이 머무른 산등성이는 완전히 포위당했고 마계최전선 최후의 보루인 하루파야 고개는 악마들에게 점거 당했다. 악마들의 침입은 이제 막을 수 없는 걸로 보였다. 김성철을 태운 그리폰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호숫가에 안착했다. 호숫가엔 이미 전장에서 탈출한 지휘관과 중요인사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좌익의 지휘를 맡았던 아르무크 바크르 또한 그중 한 명이었다. 인간의 몸이면서도 드워프의 인정을 받아 연합군단장의 자리에 오른 그 사내는 진심으로 분노하며 지금 죽어가고 있을 산등성이의 동료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죽여 버리겠다. 마르틴 브레가스. 그 놈만큼은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전장의 하늘 위엔 재앙의 흉조들이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펼쳐 유유히 활공하며 떠돌고 있었다. 후방지대에 재앙의 흉조들이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극히 오랜만의 일이다. 그만큼 재앙은 이 땅 가까운 곳에 있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돌려 대로변을 응시했다. 남쪽으로 뻗은 대로엔 끝없는 피난민의 행렬이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재앙의 흉조 한 마리가 피난민 무리를 발견하고 발톱을 세워 하강해 피난민 무리에 뛰어 들었다. 무력한 피난민들은 마계의 짐승 앞에 먹이감에 지나지 않았다. 재앙의 흉조는 거대한 발톱으로 피난민 하나를 눌러놓고 부리로 피난민의 허리를 물어 반으로 동강내 부리 안으로 삼켰다. 피난민들은 괴성을 지르며 달아났지만 그것 이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경비병들이 재앙의 흉조에게 달려 들어보지만 재앙의 흉조는 귀찮다는 듯 날갯짓 몇 번을 하며 하늘로 달아날 뿐이었다. 멀리 산등성이에서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악마들의 공격신호다. “…….” 다른 패잔병처럼 바위 위에 힘없이 앉아 있던 김성철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르틴 브레가스를 저주하던 아르무크 바크르의 시선이 김성철을 향했다. ‘응 저 녀석은?’ 분명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그는 기억을 되새겨 과거 황금도시에서 벌어진 소환자 맞이 축제에서 비슷한 얼굴과 복장을 한 사내를 본 것을 떠올렸다. “당신. 기억나. 분명 황금도시에 있던 소환자. 그중 하나였지?” 그는 김성철에게 아는 체를 하며 다가갔다. 그런데 다음 순간 김성철의 손에 긴 손잡이를 지닌 미려한 망치가 나타났다. 그 망치를 본 순간 아르무크 바르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왜냐하면 그 망치는 드워프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신물, 하늘의 파편을 벼려 만든 팔 가라즈였기 때문이다. “허... 허걱!” 반갑게 다가가던 아르무크 바크르를 깜짝 놀라 뒤로 자빠졌다. “…….” 김성철의 무심한 시선이 그를 힐끗 응시했다. 아르무크 바크르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팔 가라즈를 든 김성철은 앞으로 걸어갔다. 뿔피리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신적인 힘이 그의 발에 서렸다. 느릿하게 걷던 그의 발은 그를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전장으로 다시 인도했다. 쿵! 흙먼지를 일으키며 김성철의 신형이 하루파야 고개 길목에 안착했다. “응?” 고개를 지키던 악마들이 심상치 않은 기척을 눈치챘지만 그들을 향해 날아오는 망치까지는 보지 못했다. 퍽! 퍽! 피떡이 된 두 구의 시체를 밟고 한 사내가 악마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악마들은 그 망치를 든 사내의 얼굴은 알지 못했지만 그 망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망치를 든 사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부... 부수는 자다!” 그 외침은 악마들 사이에 순식간에 퍼졌다. 십만 악마들의 눈에 전례 없는 공포심이 서리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그 십만 마리 악마 앞에 홀로 서서 그들을 굽어보았다. “…….” 부수는 자, 혹은 세계의 적이라 불리는 사내는 그렇게 홀로 언덕 위에 서서 십만의 악마들과 대치했다. 언덕 위에 서 있는 것은 단 한 명이었지만 십만 악마 중 어느 것도 감히 망치를 든 사내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수정구 안에 비친 오롯이 선 사내의 얼굴이 비추자 자리에 모인 자들은 저마다의 반응을 보였다. 그중 한 명 유독 충격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세상에... 말도 안 돼...!’ 이수진은 경악 서린 눈동자로 수정구 안의 인물을 노려보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당신이 세계의 적이라고?!’ ======================================= 35. 홀로 맞서다 (4) 김성철의 등장은 반인반용 카네스의 출현과 무게가 달랐다. 전장에 부는 바람의 방향이 일변했다. 승리에 취해 기고만장한 악마들은 그들의 재앙의 출현에 공포에 질려 움츠러들었고 드워프-엘프 연합군의 숨통을 끊으려던 악마군 또한 공세를 멈추고 돌연 등장한 시대의 초인을 향해 기수를 돌렸다. 마계 서열 8위 프론토로와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뭘 그리 겁을 집어먹는 게냐? 상대방은 그저 일개 인간이다. 긍지 높은 마족이 인간 따위에게 공포를 느끼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만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그 악마는 김성철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 악마는 다른 악마들에 비해 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프론토로와는 앙상한 손을 휘두르며 서릿발 같은 명령을 내렸다. “마수 부대를 내보내라!” 악마들 사이에서 거대한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에 선 것은 탐탐 변종이었다. 거대 원숭이 탐탐을 악마식으로 개조한 그 마수는 피로 물든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했다. “가라!” 하급 악마병들이 탐탐 변종을 묶은 쇠사슬을 끊었다. 탐탐 변종은 가장 먼저 자신을 학대하던 사육사를 커다란 손으로 잡아 반으로 찢어 그 피를 입안에 집어 넣은 뒤 김성철을 향해 뛰어 올랐다. 쿵!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커다란 충격과 함께 착지한 탐탐 변종은 우뚝 선 조그만한 인간을 향해 두 주먹을 모아 후려쳤다. 탐탐 변종의 두 주먹이 김성철에 닿는 순간, 팔 가라즈가 움직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빠르기. 그 휘두름의 결과는 탐탐 변종의 눈보다 두개골이 먼저 반응했다. 퍽! 거대 원숭이의 골통이 한 번에 박살나며 뒤로 나자빠졌다. 김성철은 자신보다 수십 배는 큰 탐탐 변종의 시체의 다리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이 광경을 지켜보는 악마들을 향해 집어던졌다. 신적인 힘이 실린 탐탐 변종의 시체는 낮은 각도로 날아가 지면에 부딪쳐 튕겨 오르며 마치 물수제비처럼 악마군을 향해 날아갔다. 쿵! 쿵! 쿵! 탐탐 변종의 시체는 수많은 악마들을 수차례에 걸쳐 깔아뭉개고서야 멈췄다. “저... 저건 대체 뭐냐?” “인간이냐? 저런 게 인간이냐?” 소문으로만 듣던 부수는 자의 힘에 악마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숫자로 밀어붙여라! 놈도 인간이니 아까 그 드래곤처럼 지칠 것이다!” 프론토로와는 김성철의 무위에 움찔했지만 아직 완전히 압도당한 건 아니었다. 그는 전군을 동원해 김성철을 칠 것을 주문했다. 드워프-엘프 연합군을 공격하던 본대가 산등성이를 내려와 김성철 앞에 진을 쳤다. 하늘 위를 배회하는 재앙의 흉조 아래엔 날개 달린 갖은 악마들이 먹구름처럼 모여 하늘을 뒤덮었다. “악마왕께서 말씀하셨다. 부수는 자를 죽이는 자에겐 마계 서열 2위의 자리와 그에 걸맞는 힘을 하사하겠다고! 누구든 부수는 자의 목숨을 끊어라! 그러면 영광이 따를 것이다!” 프론토로와는 김성철을 향해 총공세를 명했다. 호화로운 보상에 대한 욕망은 공포를 어느 정도 희석시켰다. 게다가 그들의 뇌리엔 아까 맹위를 떨치다 제풀에 지쳐 나가 떨어졌던 드래곤에 대한 기억도 남아 있었다. 김성철도 인간인 이상 한계가 있을 것이고 지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리고 이쪽은 무려 십만 마리의 악마들이 있다. 프론토로와의 계산에 따르면 만 마리만 희생해도 김성철의 전설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부우우우우--- 진군을 알리는 악마의 뿔피리가 황량한 하루파야 고개 전역에 스산한 울림을 가지고 왔다. 김성철을 포위한 악마들의 군세가 공격을 시작했다. 선두에 선 것은 마수만큼은 아니지만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타락한 트롤들이었다. 인간 성인만한 몽둥이를 지닌 그 거인들은 닥치는 대로 몽둥이를 휘두르며 김성철에게 덤벼들었다. 거대한 덩치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니 지축이 흔들릴 정도였다. “히이이... 나 왜 이런 사람에게 선택 받은 걸까.” 품속의 베르텔기아가 기겁을 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반면 김성철은 차분한 눈으로 육박해오는 트롤들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트롤이 지척에 온 순간. 그의 발이 살짝 올라갔다. “…….” 신적인 힘이 그의 발에 서렸다. 살짝 올라간 발이 땅을 한 차례 굴렀다. 쿠구구구궁! 트롤들의 발구름과는 차원이 다른 충격이 지면을 강타했다. 지축이 흔들리는 걸 넘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진과도 같은 거대한 흔들림 속에 트롤들은 균형을 잃고 허우적거렸다. 그 사이를 검은 빛줄기가 섬전처럼 파고들었다. 퍽! 퍽! 퍽! 퍽! 한 방에 한 놈씩. 팔 가라즈의 무자비한 일격이 트롤의 머리통을 차례대로 터뜨렸다. 순식간에 스무 마리나 되는 트롤들이 쓰러졌다. 김성철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트롤 뒤에 숨을 죽이고 전투를 지켜보던 악마들의 본진에 난입했다. 팔 가라즈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퍽! 망치질 한 방에 십여 마리의 악마들이 날아갔다. 그런 망치질이 일초에도 수차례 반복됐다. 단 10초 만에 김성철 주변은 무인지대가 되었다. 남은 것은 핏자국과 알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전부. 김성철의 옷자락엔 피한방울 묻지 않았고 그의 숨결 또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처음 보여주었던 무심한 눈으로 악마들을 굽어보며 망치를 고쳐 잡았다. “…괴, 괴물이다!” “저건... 인간이 아니야.” 그제야 악마들은 깨달았다. 눈앞의 인간이 대적할 수 없고 대적해서도 안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숫자로 어떻게 할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깨달음은 너무나도 늦었다. 김성철은 이번엔 철혈기사단의 대오에 파고들었다. 또 한 차례의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됐다. 철혈기사단이 자랑하는 기동요새는 순식간에 다리 절반을 잃고 지면 아래 흉하게 내려앉았다. 철혈기사단을 침묵시킨 김성철은 하급 악마 사이에 숨은 발록이나 바알 따위의 고급 악마들을 우선적으로 노렸다. 그런 악마들은 죽여도 그냥 죽이지 않았다. 발록은 뿔을 손아귀로 잡고 그대로 목을 뽑아내 죽였고 바알은 뒷덜미를 잡은 채 지면에 얼굴을 갈아 죽였다. 김성철이 가는 곳마다 피분수가 솟았고 시체의 산이 이루었다. 그가 전투에 돌입한 지 채 5분도 지나기 전에 만여 마리의 악마들이 학살당했다. “뭐... 뭐냐! 저건 도대체 뭐냐!” 고대 악마인 프론토로와는 해서니우스 맥스가 김성철을 피해 육신을 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를 겁쟁이에다 근본 없는 악마라고 비웃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었고 김성철이 똑바로 자신을 향해 쇄도할 때 완벽하게 수정됐다. “네 놈이 악마들의 우두머리인가?” 피한방울 묻지 않고,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인간이 프론토로와 앞에 우뚝 섰다.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무심한 시선에 직면했을 때 프론토로와는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지만 고대 악마로서의 자존심이 그것을 막았다. 대신 프론토로와는 제법 자존심을 세우며 입을 열었다. “그... 그렇다. 저열한 인간아!” 그에 대한 김성철의 답은 팔 가라즈였다. 망치가 올라간 순간, 프론토로와는 자신이 아는 모든 마법을 영창하려 했지만 망치는 입보다 빨랐다. 팔 가라즈의 머리 부분이 프론토로와의 입을 후려쳤다. 턱뼈가 통째로 이탈했고 그 아래로 뱀처럼 구부러진 혀가 망치에 말려 그대로 뽑혔다. “끄으으으으....” 십만 악마의 수장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김성철은 망치에 붙은 불결한 물건을 땅을 긁어 떼어낸 후, 자신을 응시하는 악마들을 응시하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다음은 누구냐?” 어떤 악마도 감히 그에게 맞설 수 없었다. 십만 아니, 이제는 그에 못 미치는 숫자가 된 악마의 대군은 뒤로 물러났다. 무인지경 그러나 단 한 명의 사내를 앞에 두고. * “김성철 놈. 언제 저렇게 강해진 것이지? 놈의 힘은 이제 우리가 알던 시기의 김성철과는 궤를 달리 한다.” 집행자 아퀴로아는 저주 섞인 말을 내뱉으며 수정구에서 눈을 뗐다. “…확실히 강하군. 최강의 은자라는 카네스조차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샤말 라지푸트도 비슷한 의견을 피력했다. 지금 현재 김성철은 막을 수 없다. 모처에 은밀히 모인 권력자들의 의견은 하나로 모아졌다. “알려진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 그 짐승 같은 놈을 막아야 할 필요가 있다.” 집행자 아퀴로아의 어조엔 절박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저런 괴물이 악마왕에게 다가간다면 악마왕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재앙의 서에 따르면 악마왕이 죽으면 칠영웅이 깨어난다. 개개인의 힘이 악마왕에 준하거나 강하다고 알려진 존재가 하나도 아니고 일곱이나 동시에 깨어난다. 그들이 불러올 혼란은 미증유의 것이 될 것이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아퀴로아를 비롯한 권력자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품은 채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남은 것은 샤말 라지푸트와 그의 부하였다. 샤말 라지푸트는 어둠 속에 동화된 젊은 사내를 공허한 눈으로 응시하며 말을 걸었다. “…어떤가? 카즈 알메이라.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의 물음에 카즈 알메이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로서는 이길 수 없는 상대입니다. 그런 존재에게 공격을 당하고도 살아남은 것이 오히려 축복이라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복수심에 불타던 카즈 알메이라는 김성철의 신적인 무위를 보고 내면의 복수심이 차게 식는 걸 느꼈다. 그 정도로 김성철이란 존재는 압도적이었다. 샤말 라지푸트는 고개를 돌려 이수진을 응시했다. “그대는 어떤가?” 그의 물음에 이수진은 한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세계의 적의 정체가 그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가 세계의 적이었다니. 대체 난 뭘 한 거지? 왜 그 인간이 세계의 적이라는 걸 알아보지도 못한 거지? 이럴 거면 무엇 때문에 회귀를 한 것일까?’ 자괴감이 그녀의 마음을 어둡게 뒤덮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샤말 라지푸트가 반복해서 그녀의 이름을 부른 다음이었다. “아무개. 너의 생각을 물었다.” 이수진은 그제야 사말 라지푸트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직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수진이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카즈 알메이라와는 달랐다. 샤말 라지푸트를 바라보며 의연하게 말한다. “하지만 기회가 오면, 그의 심장을 궤 뚫을 정도의 힘이 생긴다면, 그가 벌일 재앙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거예요.” 샤말 라지푸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 같은 게 떠올랐다 사라졌다. 샤말 라지푸트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아무개라 불리는 여자와의 첫 만남을. 금단의 구중심처라 불리는 암살교단의 암흑 성소. 그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교주의 침소에 어느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고 침입한 이가 있었다. 그 여자는 대담하게도 모든 암살자들의 왕이라 불리는 샤말 라지푸트의 등 뒤로 다가가 싸구려 단검으로 그의 목을 겨누었다. 샤말 라지푸트는 차가운 검 끝이 목이 닿는 순간에야 아무개의 존재를 눈치 챘다. 재능, 능력 따위로 일궈낸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축복, 신급의 축복 혹은 그에 준하는 영혼각인을 지닌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샤말 라지푸트는 암살자로서 한 눈에 아무개의 효용을 궤 뚫어 보았고 회귀자로서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미래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오직 자기영달을 위해 시간 축을 거스른 자들의 것과는 달랐다. 보다 흥미롭고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특히 오랜 전우, 김성철이 세상을 멸하는 존재가 된다는 주장은 냉혹한 샤말 라지푸트의 흥미를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저는 그를 죽이기 위해 미래에서 왔습니다. 세계의 적. 그 자를 죽이는 것은 타협할 수 없는 저의 사명이고 이 낯선 세계를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아무개, 이수진은 샤말 라지푸트에게 고개를 숙이며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샤말 라지푸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북녘을 공허한 눈으로 응시했다. “때가 되면 기회는 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러나 걱정하지마라. 너의 비원은 금명간에 이루어질 것이다.” 샤말 라지푸트는 그 말을 남기고 한줄기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같은 시각, 하루파야 고개 한 가운데 자리 잡은 김성철은 이제는 두 개의 적대세력 사이에 끼인 형국이 되었다. 앞에는 주눅 들었으나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황무지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악마의 대군이 있다. 그들은 감히 김성철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문제되는 것은 김성철의 뒤에 자리 잡은 세력들이었다. “세계의 적! 팔 가라즈를 돌려내라! 그렇다면 목숨만은 살려줄 것이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던 드워프와 엘프, 그리고 인간 연합군의 생존자들이었다. 그들은 김성철에게 갖은 협박과 모욕을 쏟아내는 건 물론 나중에는 화살과 투석기까지 쏘아댔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한때의 전우들이 자신을 공격하는 걸 지켜보았다. 화살 한 대가 그의 머리칼을 가르며 지면에 꽂혔다. “…….”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주저했다. 한때나마 같은 군기 아래 싸웠던 전우들을 돕는 것을. “너무 해. 정말. 왜들 그러는 거야? 당신은 저들을 구해줬는데?” 베르텔기아가 울분이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당신이 뭘 잘못 했다고?” 그때 드워프 진영에서 쏘아올린 공성포의 포탄이 김성철 옆을 스치고 지나가며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이 휩쓸고 간 자리엔 옷자락 하나 상하지 않은 김성철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높이 들어 올렸고 이윽고 지면을 후려쳤다. 무시무시한 강타에 지축이 강하게 흔들렸고 불안하게 자리 잡은 공성포는 제풀에 넘어져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김성철의 행동에 드워프 - 엘프 연합군은 겁을 집어 먹고 뒤로 물러났다. 한쪽을 침묵시킨 김성철은 여전히 황무지에 자리 잡은 악마군을 노려보며 하루파야 언덕의 정상부에 우뚝 버티고 섰다. 산등성이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옷자락과 머리칼을 가볍게 흔들고 지나갔다. 모처럼의 적막이 전장 위에 내려앉자 김성철은 전장을 내려다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이 내 운명이다.” ======================================= 36. 재앙의 추종자 (1) 세계의 적에 대한 세상의 적의는 절대적이고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성직자들은 그들의 회당에서 매주 세계의 적의 악행을 일일이 열거하며 그를 비난했고 광장의 대자보 한 자리엔 언제나 천문학적인 상금이 걸린 세계의 적의 현상부대 전단이 붙어 있었다. 도서관에서도 김성철의 위업을 거세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의 영웅적인 행적은 모두 삭제됐고 저지르지도 않은 악행이 그의 경력란에 하루가 무섭도록 추가됐다. 인간제국 곳곳에 세워졌던 김성철의 동상은 모두 파괴되고 철거됐다. 따라서 서적과 소문, 다른 사람의 말에 의해 세계의 적이라는 존재를 알게 된 사람들은 김성철이 극악무도하며 극도로 위험한 존재라고 쉬이 결론 내리게 된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세상의 지배적인 평가에 의문을 느끼는 자도 있었다. “과연 우리가 하는 행동이 타당한 것인가?” 카알 봄바는 이틀 째 홀로 하루파야 고개의 정상에 서서 인간과 악마를 양분하고 있는 사내를 복잡한 심경이 어린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간에 세계의 적이 우리와 함께 싸웠고 그리고 우리를 두 번이나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닌가?” 카알 봄바는 경사면 아래에서 강풍을 엎은 파도처럼 매섭게 위로 휘몰아치던 뿔피리 소리의 잔향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김성철이 시의 적절하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는 물론이고 그의 전우들도 깡그리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카알 봄바는 그런 김성철을 향해 저주의 말을 토해내며 공성기의 조준선을 맞추는 동료들을 절반은 이해하면서도 또 다른 절반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드워프의 원한은 하해보다 깊다. 하지만 목숨을 구원당한 은혜의 깊이가 과연 원한의 깊이보다 얕을 것인가? 나는 그게 의문이다.” 하지만 다른 드워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 놈이 무슨 생각으로 우리를 구했는지 알 수 없지만 놈의 손에 들린 걸 보시오. 우리의 신께서 우리 종족을 위해 하사한 신물이 저 더러운 인간의 손에서 더욱 더러운 악마들의 피를 묻히고 있소. 그것은 우리 드워프들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자 모욕이오.” “아암! 드워프라면 참고 넘어갈 수 없는 굴욕이지.” 김성철에 대한 드워프들의 증오는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김성철이 팔 가라즈를 돌려주지 않는 한, 아니 돌려준다고 해도 그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흔히 바위에 비견되는 드워프의 고집이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아무리 강한 힘으로 꺾으려 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카알 봄바는 자신의 동족들의 생각이 쉽게 바뀌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입을 다물었다. 적의로 들끓는 드워프 뒤로 크고 작은 군대가 언덕 뒤로 집결하고 있었다. 하루파야 고개 전투의 패배와 세계의 적 출현으로 부랴부랴 각 국에서 새롭게 급파한 부대들이다. “…….” 김성철은 칼바람이 불어오는 언덕 위에서 인간들의 증원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의무를 포기했고 철혈기사단은 세상에 반기를 들었다. 영주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인지도 모르지.’ 새롭게 급파되는 병력 상당수가 용병단이다. 마계 최전선 후방에 위치한 군소국들의 영주들이 가진 자력을 탈탈 털어내 용병단을 고용했으리라. 지원군이 용병단이건 정규군이건 그건 김성철에게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돌려 북쪽을 응시했다. 김성철에게 크게 당해 기세를 잃긴 했지만 여전히 십만 이라는 숫자에 근접한 악마의 대군이 황무지에 자리를 잡고 있다. 김성철 단 한 명 때문에 발이 묶였지만 김성철이 자리를 뜨면 언제든 남하할 준비를 갖추고서 말이다. 악마들이 저런 여유를 보이는 이유는 하나 뿐이다. 인간과 그 동맹군이 김성철에게 대하는 태도다. 그들은 악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성철에게 산발적인 공격을 가했다. 이에 대한 김성철의 반격은 소극적이었지만 악마들은 확신을 품게 되었다. 김성철은 역시 인간들의 공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이야기는 김성철이 언제든 하루파야 고개에서 인간들이 편을 들지 않고 떠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비록 지휘관과 고급 악마 다수를 잃긴 했지만 악마들은 모처럼 찾아온 이 기회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언제까지 이런 곳에 있을 거야?” 베르텔기아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인간과 그 동맹군이 자력으로 이곳을 막을 병력을 보강할 때까지 여기에 있는다.” 김성철은 가늘게 눈을 뜨고 남쪽을 돌아봤다. 크고 작은 용병대의 보강으로 숫자가 불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악마들을 막아서기엔 부족한 숫자다. 자체적인 방어력을 갖추려면 최소한 이틀 정도는 있어야 할 것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바위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정말 답답하네! 구해준 은혜도 잊고 원수로 갚는 저런 배은망덕한 놈들을 지켜주겠다고? 나 같으면 그냥 여기서 떠나겠다. 어디 한 번 나 없이 뭘 할 수 있는지!” “여기가 뚫려봐야 내게도 좋을 일은 별로 없다.” 김성철이 작은 돌멩이 하나를 줍더니 허공을 향해 던졌다. 픽! 픽! 돌멩이가 지나간 자리에 핏방울이 튀더니 터진 눈알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인간 측의 마법사가 보낸 주시자의 눈들이다. 소환궁전 때 보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고도의 술식으로 소환된 녀석들이지만 김성철 앞엔 심심풀이 놀이 감에 지나지 않았다. “칠영웅을 빠르게 처치하려면 현재의 체제가 유지되어 있는 게 내게 여러모로 이롭다. 행여나 인간들이 전멸한 땅에 칠영웅이 자리 잡기라도 한다면 찾기가 곤란해지거든.” “하지만. 정말로 마음에 안든다고. 특히 저 드워프들! 사람보고 개의 아들놈이라고 하질 않나! 망치 하나 훔쳤기로서니!” “보통 망치가 아니거든.” 언덕 정상에 선지도 이틀째다. 슬슬 허기가 진다. 그동안 말린 대추야자와 물로 배를 채우던 김성철은 십만 악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취사 준비를 시작했다. 딱히 주변에 먹을 만한 식재료는 없었다. 무색무취무미의 이름 모를 버섯이 전부다. 김성철은 어른 머리만한 돌멩이를 들어 하늘 위를 떠돌아다니는 재앙의 흉조를 응시했다. 김성철은 인내심 있게 재앙의 흉조가 이쪽으로 최대한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린 후, 돌멩이를 던졌다. 마치 빛처럼 일직선으로 날아간 돌멩이는 재앙의 흉조 부리를 뚫고 머리통을 박살내고 거대한 새를 지면으로 추락시켰다. 김성철은 바닥에 떨어진 흉조의 시체를 검으로 잘라 고기의 상태를 살폈다. “…이건 못 먹을 음식이군.” 기껏 잡은 사냥감이지만 미련 없이 포기했다. 대신 김성철은 영혼창고를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냈다. 기름에 튀겨낸 면과 가루로 만든 스프. 김성철의 세상에서 인스턴트 라면이라 불리던 녀석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인스턴트 라면은 아니다. 재료손질부터 조리까지 하나하나 김성철의 손끝을 거친 수제 인스턴트 라면이다. 김성철은 굴러다니는 투구를 반합 삼아 깨끗이 씻고 물을 붙고 불 위에 올려 물을 끓였다. 물이 어느 정도 끓자 양철통 안에 봉해 넣은 라면 스프를 한 스푼 떠서 간을 맞춘 뒤, 유탕처리한 면을 집어넣었다. 그 다음은 보글보글 끓는 것을 지켜볼 뿐. 김성철은 라면에 부재료를 쓰지 않는다. 그는 라면의 진정한 맛은 정량 그대로를 따를 때 살아난다고 믿는 원칙주의자다. “음.” 딱딱한 대추야자만 씹다가 오랜만에 요리의 향기를 맡으니 뱃속이 요동친다. 김성철은 젓가락을 꺼내며 펄펄 끓는 투구 안의 면을 저으며 향을 음미했다. 그때 낯선 기척이 머지 않은 곳에서 느껴졌다. 침입자다. “…….” 김성철의 눈동자가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을 노려봤다. 육안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영혼각인 - 진실의 눈이 자동으로 발동하자 김성철은 육안 너머에 자리 잡은 하나의 인영을 볼 수 있었다. 일반적인 마법과는 전혀 다른 원리로 구동되는 마법에 의해 몸을 숨긴 존재였다. 두터운 로브로 몸을 가린 젊은 여자. 집요한 빛을 띤 노란 동공은 파충류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저 녀석은 그저께 전장에서 봤던 드래곤 아닌가?’ 김성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은자의 탑에서 온 카네스였다. ‘저게 세계의 적이라는 남잔가? 평범하네. 옷도 넝마 같은 걸 입고 있고.’ 그녀는 김성철이 자신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평범한 마법도 아니고 가장 고귀한 드래곤들의 마법이라 알려진 용언마법으로 몸을 숨겼으니 한낱 인간 따위가 자신을 볼 수 있다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김성철의 싸움을 직접 보지 못했다. 김성철이 악마를 학살하는 동안 그녀는 트로윈의 이름 모를 호숫가 고운 모래사장 위에 큰 대짜로 뻗어있었다. 간만에 드래곤으로 변해 지나치게 힘을 쓴 탓이다. 후에 김성철이 홀로 악마들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의 무용담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 그런 이유로 카네스는 세계의 적이라 불리는 사내에 대한 은밀한 정찰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몇 발 다가가기도 전에 묘한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라?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과연 김성철은 불가에서 무언가를 끓이고 있었다. 투구 안엔 불그스름한 물이 팔팔 끓고 있었고 그 너머로 하얀 밀가루면이 춤을 추고 있는 게 들여다보였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향과 음식이다. “…….” 김성철은 카네스 쪽에서 별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자 끓고 있는 라면을 한 젓가락 집어 입안으로 가지고 갔다. 후루룩. 짭짤한 국물이 베어든 꼬들꼬들한 면발이 김성철의 입가로 빨려 들어갔다. 김성철 기준으로 나쁘지 않은 맛. 최고의 반찬이라는 시장기에 더해 칼바람 불어오는 산정이라는 장소에서 먹다보니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풍미가 더해진다. [ 이 요리의 점수는... 57점! ] 한국적인 요리에 박한 정체 불명의 요리평가자도 김성철의 수제 라면엔 비교적 높은 평가를 매겼다. ‘당연하지. 황궁진상품인 최상품의 닭으로 만든 육수에 32종의 향신료를 섞어서 만든 스프로 국물을 냈으니까.’ 김성철은 카네스가 지켜보든 말든 묵묵히 식사를 계속했다. “십만 명 이상이 당신만 지켜보고 있는데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모양이지?” 베르텔기아가 빈정거려보지만 김성철의 귀엔 들려오지 않았다. 그만큼 간만에 먹는 라면의 맛은 절품이었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곁들일 김치가 없다는 정도? 숨어서 김성철을 지켜보던 카네스의 입가에 침이 고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꼴깍.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김성철의 모습을 보자 카네스의 위장은 전례 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드래곤으로 변한 이후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도 못했네.’ 드래곤 상태에서 군마 2마리를 먹어치우긴 했지만 카네스는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는 처음 맡아보는 이국적인 음식의 향기에 이끌려 자기도 모르게 김성철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거기 있는 거 다 안다.” 카네스가 10미터 이내로 접근하자 김성철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카네스 쪽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내 용언 마법을 궤 뚫어봤다고?! 그럴 리가. 단순히 감이 좋은 것이겠지!’ 카네스는 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둘러 싼 마법의 장막을 해제했다. 두터운 검은 로브를 걸친 용의 눈을 지닌 젊은 여성의 모습이 김성철 앞에 드러났다. 갑작스런 괴인의 출현에 불평을 늘어놓던 베르텔기아는 부리나케 김성철의 주머니 안으로 숨어들었다. “안녕. 인간.” 카네스가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친근하게 인사말을 건넸다. “네가 세계의 적이라 불린다지?” ======================================= 36. 재앙의 추종자 (2) “내게 무슨 볼일이지?” 김성철은 퉁명스레 말하고는 남은 면발을 후루룩 들이켰다. “그냥 얼굴 한 번 보러 왔지. 세상에서 제일 악명 높은 인간은 어떻게 생겼나 싶어서.” 카네스는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김성철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김성철은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악의가 느껴지지도 않았고 그녀가 김성철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변신을 해야 한다. 가까운 곳에서 카네스는 김성철을 관찰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인간이네. 옷도 허름하고. 주머니 안에 있는 건 사람 같기도 한데 겉모습은 책이네. 그리고 이 사람 능력치. 기만자의 장막이라도 쓰고 있는 모양이지?’ 자세한 힘은 알 수 없었지만 김성철이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건 분명하다. ‘조인왕하고 싸워야 될 지도 몰라. 따라서 이 정도 인간과 힘을 겨루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이겠지.’ 카네스는 속으로 김성철과 싸우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다. 김성철은 카네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식사를 계속했다. 식사를 하는 중에 카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먹어. 당신과 싸우러 온 거 아니니까.” 카네스의 관심은 곧 김성철에서 그의 요리로 넘어갔다. “이건 어떤 음식이지? 낯선 향과 풍미가 느껴지는데.” “변변치 않은 음식이다.” 김성철은 남은 면을 마저 먹고 스푼으로 국물을 떠 음미했다. “음.” 나쁘지 않은 맛. 김성철은 그렇게 자평하고는 투구 째로 국물을 후루룩 들이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네스는 자기도 모르게 입안에 군침이 도는 걸 느꼈다. “저기.” 카네스가 김성철을 불렀다. “응?” 김성철이 퉁명스레 묻자 카네스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활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거, 한 입만 맛봐도 될까?” “…….” 김성철은 말없이 남은 국물을 홀로 모두 들이켰다. “너무 하잖아!” 카네스는 짜증을 부렸다. 그때 불쑥 김성철의 손이 그녀 앞에 무언가를 들이밀었다. 자세히 보니 기름으로 튀긴 면과 정체 모를 가루가 담긴 유리병이다. “먹고 싶으면 직접 끓여먹어라. 모르는 여자에게 라면 끓여주는 취미는 없으니까.” 그러면서 김성철은 은근히 코트 자락을 열어보였다. 코트 안에 숨겨져 있던 황금빛 광채가 카네스의 눈을 어지럽힌다. 카네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저건... 고급 요리인의 증표?! 그것도 황금 클래스 아니야?!’ 300년 만이다. 황금 클래스에 달한 고급 요리인을 만나는 건. 황금 클래스는커녕 고급 요리인 조차 만나기 쉽지 않은 지금 세상에서 저 정도 요리인을 만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카네스는 심드렁했던 용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걸 느끼며 김성철이 내민 유탕면과 스프를 번갈아가며 응시했다. ‘이것은 일종의 군대 보존식으로 보이네. 하지만 지금까지 보지 못한 방식이야. 보존식과 거리가 먼 면이라는 식재를 기름으로 튀겨 보존에 용이하게 만든 것은 독특한 발상.’ 그녀는 유탕면의 끝을 살짝 부셔 입안에 넣어보았다. 바삭하면서도 기름 맛이 감도는 밀가루면의 고소한 식감이 느껴졌다. “콩 기름으로 튀긴 거네?” 카네스가 김성철을 향해 말했다. “그렇다.” 제법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카네스의 행동을 예의주시했다. 카네스는 이번에는 유리병 안에 담긴 스프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스프의 가루를 손가락 끝으로 찍어 살짝 맛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고심에 잠겼다. “흠, 이건 닭 뼈를 고은 육수에 붉은 고추, 마늘, 생강 따위를 넣고 가루로 낸 거네?” 몇 가지 빠진 게 있지만 정확하게 맞췄다. 김성철은 눈앞의 하프 드래곤이 상당한 미식 감각의 소유자라는 것을 인식했다. “잠깐.” 김성철은 카네스가 조리를 하려고 하는 순간 자기가 먼저 투구에 정량의 물을 맞춰 내왔다. “내가 하지. 어려운 건 아니니.” 상대방이 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게다가 카네스는 김성철이 달고 있는 브로치의 의미가 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간단한 요리라고는 하나 맛으로 얕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김성철의 마음이다. “어머 친절도 하셔라.” 카네스는 눈웃음을 지으며 김성철의 요리를 지켜봤다. 라면 끓이는 게 늘 그렇듯 딱히 손이 갈 일이 없다.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고 스프와 면을 넣고 중간중간 휘휘 저어주면 그만이다. 4분이 지난 후 김성철은 카네스에게 완성된 요리를 내밀었다. “맛을 봐라.” 카네스는 활짝 웃으며 옷속에서 포크를 꺼내 식사를 시작했다. 알맞게 익은 탱글탱글한 면말이 그녀의 입속으로 후루룩 들어갔다. 파충류 형태의 동공에 이채가 떠올랐다. “맛있네. 이거.” “당연하지.” 김성철은 팔짱을 낀 채 뒤돌아섰다. 카네스는 정신없이 라면 한 그릇을 입으로 후후 불어가며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정말 잘 먹었어. 세계의 적!” 카네스는 배를 두드리며 예를 표했다. 김성철은 곁눈질로 그녀를 응시했다. 상당히 만족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김성철은 자부심이 촉촉히 가슴을 적시는 걸 느끼며 뒤돌아서며 말했다. “용무가 없으면 여기를 떠나주는 게 좋겠는데.” “알았어. 안 그래도 할 일이 있어서 떠나려는 참이었어.” “…….” “내 할 일이란 거 궁금하지 않아?” 카네스가 김성철의 등을 바라보며 은근하게 말했다. ‘말 많은 드래곤이군.’ 어떤 드래곤은 천년 동안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지만 어떤 드래곤은 천년 동안 입을 쉬지 않고 놀리곤 한다. 카네스도 그런 과로 보였다. “사실 난 좀 더 북쪽으로 갈 예정이야. 거기에 알려지지 않은 재앙의 근원이 있거든.” “재앙의 근원?” 김성철이 관심을 보였다. “응. 새로운 재앙이 재앙의 서에 기재됐다가 사라졌거든.” “그런 일이 가능한가?” “보통은 일어나지 않아. 하지만 지금처럼 인간들이 억지로 재앙의 진행을 멈추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여기저기서 잡음이 생기길 마련이지. 이번에 나타났다고 사라졌다는 재앙도 그 반작용인지도 몰라.” “그 재앙이 뭔지 알 수 있을까?” 김성철의 물음에 카네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윽고 그녀답지 않은 진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멸세의 왕. 검은 날개를 지닌 조인왕의 재앙이지.” “아. 그거.” 김이 팍 새는 기분이다. 조인왕의 재앙이라면 이미 김성철의 손에 해결되지 않았던가. 김성철의 실망은 금세 얼굴에 드러났다. 카네스는 당혹해하며 급히 질문을 던졌다. “응? 갑자기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설마 흥미 없는 거야? 무려 조인왕의 재앙이라구!” “미안하지만 별로 듣고 싶은 주제가 아니군. 그보다 시간이 지체됐으니 슬슬 제 갈 길 가시지?” 김성철은 매몰차게 카네스를 쫓아냈다. 카네스는 억울한 얼굴로 몇 가지 자신이 아는 정보를 더 풀어놓았지만 어느 하나 김성철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없었다. 반인반용 카네스는 라면 한 그릇 얻어먹고 고개에서 내려와야 했다. “언제 은자의 탑에 한 번 들려. 괜찮은 요리 하나 만들어주면 놀랄만한 선물을 줄 테니까.” “그건 기억해두지.” 안 그래도 금명간에 은자의 탑에 들릴 생각이었다. 악마왕 해서니우스 맥스를 해치운 다음, 재앙의 서에 나타난 변화를 직접 보기 위해서 말이다. 시끄러운 카네스가 사라진 후, 하루파야 고개 정상엔 다시금 적막이 찾아왔다. 김성철은 불가 옆에 앉아 불을 쬐며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 김성철이 하루파야 고개에 자리 잡은지 4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김성철은 새벽부터 유난히 많은 주시자의 눈들이 자신을 감시하는 것을 느꼈다. 아침이 되자 한 무리의 마법사들이 머지않은 곳에 순간이동을 써서 이동해왔다. 김성철은 자리에 앉은 그대로 낯선 마법사들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 마법사들은 김성철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접근했고 김성철 앞에 이르자 공손히 예를 갖추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헤라클레스의 영주, 부수는 자에게 인사드립니다.” 김성철은 한 눈에 저 마법사들이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자신에게 다가왔음을 느꼈다. “무슨 일이냐?” 그는 불쾌감이 섞인 어조로 마법사들을 향해 말했다. “일단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저희들을 소개하는 게 우선이겠지요. 저희들은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재앙의 추종자에 속한 무리입니다.” 김성철의 손에 마편 카산드라가 나타났다. “꺼져라.” 마법사들은 김성철의 손에 들린 불타는 채찍을 보며 몸을 한 차례 떨었지만 두려워하면서도 준비한 말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저희들이 여기 온 것은 그분의 말씀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뭐? 그분? 알아듣기 쉽게 말해라.” 마편 카산드라가 성난 뱀처럼 움직이며 주변의 바위를 후려쳤다. 채찍에 닿은 바위는 산산조각 나며 경사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마법사 중 하나가 너무 긴장을 했는지 몸을 휘청거렸다. 침묵 속에서 최연장자로 보이는 늙은 사내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저희들의 주인, 재앙을 인도하는 자께서 당신을 직접 뵙고자 하십니다.” 재앙을 인도하는 자. 들어보지 못한 별칭이다. 하지만 이전에 재앙의 추종자들의 우두머리가 있다는 이야기는 일리야 브레가스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일리야가 말했던 놈이 저들이 말하는 놈과 동일인물인가.’ 김성철의 눈앞에 한 여성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눈처럼 하얀 피부와 몽환적인 눈빛을 지닌 금발의 여성의 얼굴이 연기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베스티아레.’ 김성철은 마법사들을 살기가 담긴 눈빛으로 노려봤다. 마법사들은 감히 김성철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 여자가 왜 날 보고자 하는 것이지?” “그... 그분의 의중은 저희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저희들이 드리고 싶은 말은 그분은 당신을 도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을 보더라도 공격은....” 마법사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마편 카산드라가 마법사들을 반으로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후두둑. 반으로 찢긴 시체들이 경사면을 따라 굴러떨어졌다. 김성철은 비릿한 핏빛이 코끝이 스치는 걸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슬슬 모습을 드러내시지?” 재앙을 인도하는 자는 이미 이 자리에 와 있었다. 바위 뒤에서 하얀 로브를 걸친 금발의 여성이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칠영웅 베스티아레. 다가올 재앙이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김성철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감이 좋으시네요.” 베스티아레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김성철에게 말을 건넸다. “빨리 죽고 싶어 나타난 건가?” “그렇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베스티아레의 손끝에 마법진이 일어나더니 하나의 스크롤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와 암흑을 섞어놓은 듯한 빛깔을 지닌 범상치 않은 스크롤이었다. 그 스크롤은 저절로 하늘 위에 떠오르더니 김성철을 향했다. “악마왕을 처치하는데 어려움이 많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이걸 쓰면 금방 해결될 거예요.” 김성철은 베스티아레가 건넨 스크롤을 손으로 쥐었다. 그러자 곧 스크롤에 대한 정보가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 하르마게돈 스크롤 > 등급 : 에픽 분류 : 스크롤 효과 : 파괴마법 하르마게돈 시전 비고 : 최강의 파괴마법인 하르마게돈을 즉시 시전한다. 김성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르마게돈? 무려 8위계의 마법 아닌가. 이름을 들은 적은 있지만 직접 본 적은 없다.’ 어느 마법학파도 이루지 못한 전인미답의 경지. 그 정수가 김성철의 손에 너무나도 간단하게 들어온 것이다. “영체화한 상태에선 마법 공격에 추가 피해를 입어요. 따라서 굳이 하르마게돈을 쓸 필요도 없지만 확실히 처리하기 위해선 이보다 좋은 도구도 없겠죠?”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베스티아레가 말했다. 스크롤을 쥔 김성철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왜 이걸 내게 주는 거지?” 김성철의 물음에 베스티아레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악마왕이 죽어야 우리들이 나설 수 있으니까요.” ======================================= 36. 재앙의 추종자 (3) 허공 궁궐. 대륙 최강국인 인간제국의 심장이자 황제의 처소. 오늘 허공 궁궐엔 특별한 손님이 황제의 초청을 받고 황제를 알현했다. “말하라. 회귀자.” 황금으로 만든 권좌 위에 앉은 황제가 중저음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앞에 부복했던 젊은 여성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이수진. 그녀는 대륙일걸이자 명실상부한 대륙제일인인 황제를 향해 단호하고도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폐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김성철은 홀로 악마왕을 처단합니다. 이것이 제가 본 미래입니다.” “김성철이 악마왕을 어떻게 죽였나?” 황제가 물었다. 황제가 지엽적인 부분을 묻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는 대륙의 패권을 장악한 거대 제국의 수장으로 그에게 있어 보고랑 대강의 사항을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황제가 시시콜콜해 보일 수 있는 사항에 대해 먼저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수진은 황제의 관심이 억만근처럼 무겁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면서도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건 저도 직접 보지 못해서 알 수 없습니다.” “그래?” 황제의 눈에 한 줄기 실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수진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제 동료들이 본 바에 의하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폭발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소환자들의 세상에서 핵폭발에 비견할만한 엄청난 폭발이 주위를 뒤덮었다고 하죠.” “마법인가? 설마하니 김성철이 핵을 가지고 왔을 리는 없고. 뭐... 그보다 그런 정교한 기계는 저주를 받아 쓸 수 없게 되지만.” “마법으로 사료됩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결과입니다.” “마왕이 죽은 게 결과 아닌가?” 황제의 물음에 이수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계의 적 또한 그 폭발에 휘말려 빈사상태가 됐다고 합니다.” “호오.” 황제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수진은 황제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때 조금만 더 세계의 적을 거세게 밀어붙였다면 제가 본 미래는 없을 수도 있었겠지요.” 이수진은 직접 보지 못했지만 그녀의 시대에 살던 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때가 세계의 적을 해치울 최후의 기회였다고. 조금만 더 병력이 있었다면 조금만 더 강자가 있었다면 김성철의 숨통은 그때 끊어졌을 것이다. 황제는 이수진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엔 한 점 거짓말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악마왕을 살리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미지의 위협이 될 그 녀석을 없애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겠지.’ 뜻은 정해졌다. 황제가 권좌에서 일어났다. 그는 힘차게 팔을 내저으며 주변에 부복한 장수들에게 호령했다. “가용가능한 모든 함대를 출격시켜라!” 그의 명에 인간제국의 제장들은 힘찬 구호를 내뱉으며 일사불란하게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최강국에 걸 맞는 절도 있는 위용이었다. 곧 허공 궁궐 주변으로 인간제국이 자랑하는 공선 함대가 잇따라 하늘을 향해 떠올랐다. “다섯 개 함대를 출진시킨다. 방위는 북북서. 목적은 세계의 적이다.” 하늘에 떠오른 공선들의 기수가 속속 북쪽으로 향한다. 궁궐 전역에서 힘찬 진군나팔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황제는 시종에게 명해 이수진에게 어떤 물건을 내주었다. 붉은 루비가 박힌 단검 한 자루와 검은 액체가 담긴 유리병 하나. 황제는 이수진이 그 물건을 챙기는 걸 보며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너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한다. 이 검은 변변치 않지만 그래도 전설급의 예리함을 갖추고 있고 이 유리병에 든 독 또한 전설급의 치명성을 품고 있다.” 그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명확하다. “기회가 오면 내 오랜 친구를 죽여라.” * “훌륭한 이유군.” 하르마게돈 스크롤을 받아챙긴 김성철은 희미한 웃음을 흘리며 뒤돌아섰다. 다음 순간, 김성철의 신형이 베스티아레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덥썩! 우악스런 손아귀가 베스티아레의 목을 움켜잡았다. 영창할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 김성철은 그대로 목을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가느다란 목이 꽃송이처럼 꺾였다. 그 순간, 베스티아레의 몸에 희뿌연 환영이 일렁였다 사라졌다. 그제야 김성철은 베스티아레가 본체가 아니라는 점을 발견했다. ‘이것도 파편이군. 진실의 눈으로도 한 눈에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교묘한 장난을 쳐놨어.’ 살아 있는 인간 그 자체를 인형 삼아 자신의 의지를 빙의시켰다. 전신에서 피어나오는 안개 같은 아우라와 그 안에서도 확연하게 구분되는 아름다운 외모가 식별을 저해하는데 한몫했다. 김성철에 의해 목이 꺾여 죽은 여성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르는 얼굴이지만 필경 재앙의 추종자 중 하나이리라. 김성철은 시체를 바닥에 던지고 시체에서 빠져 나온 환영을 무심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요.” 베스티아레의 환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결국 우리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될 거예요.” “내가? 네 놈들의 뜻을 따른다고?” 김성철이 말했다. 베스티아레의 환영은 간드러지게 웃으며 허공 위로 떠올랐다. “당신이 마법을 열심히 배우고 있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동안 얼마만큼의 진전이 있었죠? 기껏해야 초급 마법사가 한계겠지요. 마법의 길은 어렵고도 험한 것이니까요.” “…….” “당신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제 인간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재앙은 시간을 끈다고 능사가 아닌 것을 어리석은 인간들을 모르는 거죠.”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는군.” 전에도 몇 번이고 들은 이야기다. 하지만 김성철은 짐짓 모른 척을 했다. 베스티아레의 환영은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상은 무너지고 있어요. 재앙의 물결은 인간들이 만든 제방을 거세게 압박하고 있죠. 어리석은 인간들은 제방 한 군데를 막으면 시간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곳 여기저기 구멍이 날 것이고 재앙의 물결은 삽시간에 이 대륙 전체를 죽음과 비탄으로 휩쓸고 지나갈 거예요.” “하지만 8년 동안 아무 일 없지 않았나? 나에겐 아직 시간이 많아 보이는 걸로 보이는데.” 김성철은 순간적으로 판단 내렸다. 베스티아레 및 칠영웅은 자신의 행적 전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는 정보란 김성철이 마법과 관련된 칠영웅의 위업을 달성했다는 것과 김성철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세상에 알려진 정보 그 두 가지 외엔 없다. 베스티아레가 김성철의 행적을 꿰고 있다면 몇 번이고 모습을 드러낼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김성철이 하루파야 고개에 모습을 드러낸 지 4일 만에 비로소 나타났다. 김성철이 여기 있다는 것이 온 세상에 알려진 이후의 시기다. ‘카네스와 만났을 때 기만자의 장막을 조정해두길 잘했군. 이 녀석들은 나에 대해 알지 못한다.’ 심지어 베스티아레는 김성철이 메테오를 구사한다는 것조차 모르는 걸로 보인다. 그들의 정보력은 형편없다. 김성철은 그렇게 결론 내리고 베스티아레를 노려봤다. 베스티아레는 여전히 자신이 모든 걸 알고 있는 양 신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스크롤은 제가 당신에게 주는 선물이에요. 하루 빨리 악마왕을 처치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재앙의 모습이 어떻게 변할 지 저 또한 짐작 할 수 없으니까 말이죠.” 김성철은 손안에 든 사악한 힘이 봉인된 스크롤을 응시했다. 냄새가 난다. 그것도 심각하게 썩은 악취가. 만약 김성철에게 마법의 힘이 전무 했다면 거절 불가능한, 유일한 선택지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김성철에겐 다른 선택지가 있다. “이 스크롤엔 함정이 있는 거 같은데.” 김성철이 베스티아레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베스티아레는 표정의 한 점 변화도 보이지 않고 능수능란하게 김성철의 말을 맞받아쳤다. “모든 장미엔 가시가 있는 법이죠. 취하고 취하지 않고는 당신의 선택에 달렸어요.” “그렇군.” 김성철은 스크롤을 바닥에 내던졌다. 베스티아레의 입술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게 없으면 당신은 악마왕을 처단할 수 없어요.” “그런가?” 김성철은 별 관심 없다는 눈으로 스크롤을 응시하다가 퉁명스레 말했다. “직관력을 올리고 싶은데.” 산등성이에서 불어온 바람이 김성철의 머리칼과 옷자락을 세차게 흔들고 지나갔다. 반면 베스티아레의 환영엔 한 점 변화가 없다. “이 스크롤은 직관력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베스티아레가 말했다. “아니, 스크롤과는 별개로 내 개인적인 바램이야. 최근 마법을 배우고 있는데 꽤 재밌더라고.” 베스티아레는 김성철의 현 상황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교활한 여우답게 김성철이 말을 꺼내자 바로 경계의 빛을 드러냈다. “설마 마법을 배워 악마왕을 처단할 생각인가요?” “개인적으로 능력치에 연연하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하나라도 올려야 기분이 좋아지거든. 따라서 퀘스트를 하나 주면 스크롤 사용하는 걸 생각해보지.” 이 승부는 처음부터 베스티아레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좀 더 김성철을 빨리 찾아와 같은 제의를 했다면 먹혔을지도 모르겠지만 때를 그르쳤다. “난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거든.” 김성철은 한 두달이 더 걸리더라도 느긋하게 악마왕을 처리할 작정이었다. ‘대체 이 남자. 뭘 생각하는 거지?’ 베스티아레는 김성철의 심중을 헤아리기 위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설마, 벌써 악마왕을 해치울 마력을 지닌 건 아니겠지?’ 김성철의 영혼각인 - 기만자의 장막에 의해 김성철의 능력치는 볼 수 없다. 하지만 베스티아레가 생각하기에 아직 김성철은 그 단계에 이르진 못했을 것이다. 김성철에게 그럴만한 힘이 있었다면 이미 악마왕은 저 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고전적인 허세다. 베스티아레는 허세를 부리는 남자들을 숱하게 보아왔다. ‘하지만, 이 자가 허세를 부린다고 해서 경계를 늦출 순 없어. 어쩌면 이 자의 마력은 악마왕을 처치할 수준에 근접했을지도 모르니.’ 생각을 정리한 베스티아레는 다시 미소를 머금으며 김성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직관력을 올려주는 퀘스트면 충분하다는 거죠?”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베스티아레는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더니 자신의 전면에 수많은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김성철은 그 마법진의 형태가 일반적인 마법이 아닌 신과의 교신 혹은 간청의 의미를 지닌다는 걸 간파했다. ‘퀘스트를 만드는 건가.’ 통상의 인간이 퀘스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신과 멀리 떨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앙 그 자체인 베스티아레에게 신과의 소통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신의 몸을 둘러 싼 수많은 마법진이 사라진 후, 베스티아레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발밑을 가리켰다. 그녀의 발밑엔 베스티아레의 얼굴과 닮은 그림 한 폭이 놓여 있었다. 김성철이 그 그림에 손을 대자 그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들이 떠올랐다. [ 완미에 대한 예찬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베스티아레의 초상화를 33장 그릴 것 / 보상 - 직관력 +1, 보석파피루스에 그린 베스티아레의 초상화 ] 퀘스트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보상 한 번 고약하다. 직관력이 필요하다고 하니 딱 1을 걸었다. 베스티아레 정도라면 한 번에 10 이상을 올려주는 걸 능히 만들 수 있음에도 말이다. 쓰레기 같은 초상화는 덤. 김성철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베스티아레는 그런 김성철을 여유로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의 청대로 퀘스트를 만들어냈어요. 설마 당신 정도의 사람이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건 아니겠죠?” “참, 개 같은 퀘스트를 만들었군.” 김성철은 쓴웃음을 머금은 채 바닥에 떨어진 스크롤을 다시 주웠다. “그럼 기대하고 있겠어요.” 베스티아레는 그런 김성철을 향해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보인 후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자 김성철은 주위를 한 차례 둘러봤다. 멀리서 느껴지는 악마들의 시선 이외에 다른 마법적인 기운은 존재하지 않는다. “베르텔기아.” 오랜 기간 표정을 관리한 탓인지 입가에 미약한 경련이 일었다. “응. 왜 불러?” “그림 공부할 시간이다.” 베스티아레는 꿈에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김성철에게 필요한 게 단 하나의 직관력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남녘에 구름들이 소용돌이치며 거대한 마법진이 속속들어 출현했다. 베스티아레의 그림을 괴발개발 그리고 있던 김성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남쪽 하늘을 노려봤다. 수십 척의 공선이 마법진 속에서 튀어 나왔다. 높이 펄럭이는 황금 태양기. 인간제국의 주력 함대가 하루파야 고개 전역에 모습을 드러냈다. ======================================= 37. 패자부활전 (1) 한 사내가 공선 위에서 긴 장발을 휘날리며 낮은 목소리로 웃고 있었다. “크크크크...” 그 사내의 정체는 인간제국 제4함대 제독 미나모토 다이스케. 그는 지난 수 차례의 전투에서 지금도 시비가 갈리는 불분명한 공적을 여러 번 세워 현재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스스로 책략가라고 주장하는데 실제로 자신을 소개할 때 어릴 때부터 병법서를 하루도 빠짐없이 읽어 머리에는 육도삼략 뱃속엔 임기응변이 들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의 작전은 일차원적이고 졸렬하고 무엇보다 피해가 컸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소환자 출신이라는 것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미나모토는 일본에서 소환됐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내가 진짜 일본인이 맞는지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언젠가 미나모토는 일본 출신 소환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동석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가 한 말은 “요시!”와 “하이!”가 전부라고 한다. 하지만 그 많은 좋지 않은 소문에도 불구하고 미나모토 본인은 대단히 강력한 검사다. 허리까지 닿는 치렁치렁한 장발을 휘날리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일본도를 휘두르는 그는 악귀야차 그 자체. 적은 물론 아군에게도 두려움을 안겨다 주는 존재다. 그 미나모토 다이스케는 오늘 세계의 적 토벌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하루파야 고개 상공에 도착했다. 미나모토 다이스케는 길다란 원통형 망원경으로 김성철 쪽을 관찰하며 중얼거렸다. “음, 홀로 산정에 앉아 대군과 대치하다니. 이것은 김무열 평전 삼국지 7권에 나오는 제갈공명의 공성계가 아닌가?!” 책략가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정신집중은 오래가지 않았다. 세계의 적 토벌대 총사령관 드미트리 메디오프가 각 함대의 지휘관을 자신의 기함 안드라고라스의 갑판에 소환한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따르는 수밖에 없다. 미나모토는 궁시렁 거리며 소형 연락선을 타고 안드라고라스의 갑판 위에 올라탔다. 갑판 위엔 다른 함대의 제독들이 이미 모여 작전회의를 하고 있었다. 회의의 주재자인 드미트리 메디오프가 제독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치며 신중하게 말했다. “듣자하니 세계의 적의 힘은 우리의 예상을 아득하게 뛰어넘는다고 들었소. 홀로 십만 악마를 몰아세울 정도는 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지. 그러므로 우리는 최대한 신중하게 세계의 적을 상대할 방법을 찾아야 할 거요.” 말이 끝난 후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각 제독을 둘러봤다. 제독들은 모두 침묵을 지켰다. 딱히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대는 십만 악마 사이를 제 집 드나들 듯 오가며 적장을 때려죽이는 괴물 중의 괴물이니. 드미트리 메디오프의 시선이 마지막에 도착한 미나모토를 향했다. 미나모트는 잔뜩 기대하며 현재 생각 중인,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작전을 이야기하길 바랐지만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현명하게도 미나모토와 눈이 마주치기 직전에 시선을 먼저 거둬버렸다. 그러나 이 정도로 포기할 미나모토가 아니다. “총사령관님.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드미트리 메디오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 미친놈이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거지?’ 여간해서는 발언권을 주고 싶지 않았지만 상대방도 일단은 함대의 제독 중 하나.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한숨을 내쉬며 퉁명스레 말했다. “말해보세요.” “제가 볼 때 김성철은 공성계를 쓰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훌륭한 의견입니다.”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건성으로 말하며 박수를 치고는 뒤돌아섰다. “아직 제 말은 끝나지 않았는데요?” “아, 할 말이 남았나요? 이거 실례했군요.”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얼굴에 듣기 싫다는 티를 팍팍 드러냈지만 미나모토의 눈엔 들어오지 않았다. “공성계에 걸리지 않는 방법은 쉴 틈을 주지 않고 폭풍처럼 밀어붙이는 겁니다. 마치 조선정벌 때의 야마토족 무사처럼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야 합니다.” 미나모토가 말하는 동안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일부러 다른 제독에게 말을 걸거나 딴청을 피우거나 심지어 눈을 감고 자는 척까지 해보았다. 그러나 미나모토의 발언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올 무렵, 기적처럼 부관이 나타났다. “보고 드립니다!” “무슨 일인가?”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반색하며 부관을 반겼다. 미나모토는 그 와중에서 계속 뭐라고 궁시렁 거리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빠른 걸음으로 미나모토에게서 거리를 벌리며 부관에게 보고하라고 손짓했다. “세계의 적이 사라졌습니다!” “뭐라고?”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즉시 좌현으로 달려가 김성철이 있던 장소를 망원경으로 관측했다. 없다. 방금 전까지 동물원의 맹수 마냥 어슬렁거리던 김성철이 갑작스레 사라진 것이다. “지금 우리는 공격해야 할 때입니다! 메디오프 공!” 미나모토가 쫓아오며 헛소리를 해댔다.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탄식을 하며 손가락으로 좌현 아래 고개의 산정을 가리켰다. “혼자 가시오. 아무도 안 말릴 테니.” 미나모토는 그제야 김성철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의 뇌리 속에 지금까지 주워들은 억만 가지 병법의 지식이 혼란스럽게 떠돌아다녔다. “이건... 김성철의 함정이다! 쫓으면 안 돼!” * 기암괴석으로 가득 찬 바위계곡. 김성철은 바위와 그늘이 가려주는 공터 속에서 치열하게 열심히 그림 그리기에 매진하고 있었다. 주제는 베스티아레의 초상. 하지만 김성철은 그림 재능이 전무하다. 베스티아레가 남긴 견본을 보고 따라 그려도 그가 남긴 화폭 위엔 정체 모를 추상화만이 남아 있다. “에라이 씨벌!” 김성철은 자신도 알아볼 수 없는 추상화를 집어던지며 바위 위에 드러누웠다. 한숨 돌리고 있자니 주머니 안에서 베르텔기아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제 마계 최전선은 안전한 거야?” 잿빛 하늘이 희미하게 들여다보이는 천정을 응시하고 있던 김성철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끄덕였다. “자칭 인류와 그 동맹의 수호자인 인간제국의 주력함대다. 지금까진 아마도 갖은 핑계를 대며 출병을 미뤘겠지만 일단 마계 최전선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눈앞의 위험을 보고 쉬이 물러가진 못할 것이다.” 김성철이 함대를 보고 자리를 뜬 것은 인간과 악마 사이의 힘의 균형이 회복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인간장벽 역할을 할 필요가 없다. 김성철은 그렇게 판단내리고 재빠르게 모습을 감춘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난관이 김성철 앞에 나타났다. 김성철은 질린 눈으로 돌멩이를 얹어 놓은 베스티아레의 초상화를 응시했다. “이 빌어먹을 여자, 진짜 퀘스트 한 번 개 같은 걸 주는군.” 아무리 그려도 초상화 한 장조차 그려낼 수 없었다. 모두 초상화가 아닌 것으로 인식된 것이다. 김성철이 그려야 하는 초상화는 무려 33장. 눈앞이 아득해진다. “요리와 연금술은 잘하는데 그림은 잼병이네.”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이 그리다만 베스티아레 풍의 고블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 김성철은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바위 위에 드러누운 채 바위 틈새 사이로 구름들이 빠르게 흘러가는 걸 멍하니 응시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종이가 바스락거리고 사각사각 무언가 끼적이는 소리가 바람결에 실어 들렸다. 눈을 감고 쉬고 있던 김성철은 눈을 희미하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베르텔기아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책장과 책장 사이에 연필을 끼고 돌멩이로 고정한 도화지 위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며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아이가 크레파스를 갖고 노는 것 같군.’ 김성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베르텔기아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슬며시 훔쳐보았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경악이 떠올랐다. ‘이.. 이건?!’ 김성철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그림이 도화지 위에 떠올라 있었다. “아, 일어났어?” 베르텔기아는 미묘하게 자신의 몸을 움직이며 베스티아레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섬세한 필치로 완성했다. 김성철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할 수 없는 묘기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베르텔기아가 그림을 완성하기를 기다렸다. 곧 그림은 완성됐다. “짜잔!” 베르텔기아는 하늘 높이 떠오르며 자신의 그림을 감상했다. 그런데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흠흠. 비례가 안 맞는 거 같은데. 오랜만에 그려서 그런지 감이 죽었어.” 베르텔기아는 도화지를 고정한 돌멩이를 몸으로 치우며 바람결에 날려 보냈다. 억센 손이 날아가는 그림을 덥썩 붙잡았다. “…….” 김성철이다. ‘역시 보통 솜씨가 아니다.’ “뭐하는 거야? 심심풀이로 그린 그림 가지고. 보지 마. 내 진짜 실력도 아니니까.” 베르텔기아가 볼멘 목소리로 항의하지만 김성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그림을 베스티아레의 초상화 앞에 가지고 갔다. 그러자 놀랍게도 베르텔기아의 그림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떠올랐다. [ 수고하셨어요. 절 그리는 동안 기분은 어땠나요? / 진척율 : 1/33 ] 퀘스트가 그림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건 예상치 못한 호재군.’ 베스티아레의 실력이라면 오직 김성철의 그림만을 받아들이게끔 술식을 짜놓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급조한 퀘스트다. 오로지 김성철을 엿 먹이기 위해 만든 직관력 1짜리 퀘스트에 복잡한 술식을 집어넣는 건 베스티아레 본인으로서도 귀찮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물에 깃든 영혼의 흔적을 확인하려면 퀘스트 자체에 적당히 영험한 사역마도 집어넣어야 하는 등 손이 많이 가니 말이다. ‘아마도 그 여자는 내게 그림을 그려줄만한 사람이 없다고 본 것이겠지.’ 이유에 어찌됐든 김성철은 반나절 동안 그를 괴롭혔더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았다 “베르텔기아.” 김성철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베르텔기아는 불길한 전조를 느끼며 몸을 움츠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으.. 응?” “오랜만에 밥값 좀 해야겠다.” “응? 나 밥 안 먹는데. 보다시피 리빙 북이잖아?” “그러면 보육료 값 좀 해야겠다.” “누가 누굴 돌본다는 거야!” 베르텔기아는 격렬하게 저항해보지만 김성철의 뜻을 꺾을 순 없다. 결국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그림 노예가 되었다. “초상화 32점을 마저 그리기 전까진 쉴 생각하지 말도록.” “너무 해....” 베르텔기아는 앓는 소리를 내며 그림을 그렸다. 김성철은 바위에 편안히 드러누워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받는 건 꼭 갚는 사람이니. 나중에 부탁이 있다면 한 가지 들어주도록 하지.” “그 말 진짜지? 나 기억력 무지 좋으니까 나중에 딴소리 하기 없기?” 베르텔기아는 아예 자신의 페이지에 김성철의 말을 기록해버렸다. [ 다섯 번째 시대, 서른아홉 번째 창룡의 해, 구름마녀의 달, 열여덟 번째 날, 김성철이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약속하다. ] “이왕 약속하는 김에 맹약을 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 자신이 페이지 한 구석에 김성철의 약속과 시일은 기재한 베르텔기아가 질문을 던져왔다. “맹약이라면 이미 맺은 상태다.” 김성철은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누구랑?” “그건 말할 수 없어. 아무튼 약속은 지킬 테니 빨리 그림을 그리도록 해라.” “알았어. 그리면 될 거 아니야!” 사각사각. 베르텔기아가 다시 도화지 위에 베스티아레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베스티아레의 초상이 또 하나 완성될 즈음 베르텔기아가 입을 열었다. “이 여자, 우리 엄마와 많이 닮은 거 같아.” “그래? 설마 네가 베스티아레의 딸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엄마는 인간이야. 그 여자는 하이엘프고. 종족부터 다른데 어떻게 엄마가 될 수 있겠어?” “…….” “아빠가 그 여자를 많이 좋아했다나봐.” “그래?” “응. 아빠가 어릴 때 칠영웅을 따라다니면서 모험을 했거든. 마계, 수해, 지저세계, 죽은 자들의 나라, 부유군도 등등 여기저기.” “그래서 팔영웅이라고 칭한 건가?” “그럴지도. 하지만 칠영웅은 아빠를 단 한 번도 그들의 동료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 그저 편리한 도구나 만드는 도구상자 정도로 여겼지.” “그건 씁쓸한 일이군.” 김성철은 팔영웅을 무던히도 강조하던 에크하르트의 퀘스트를 기억해냈다. ‘같은 적을 상대로 싸우면서 동료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베르텔기아의 말로 미루어보면 수십 년을 알고 지낸 사이로 보이는데도 결국 동료로 인정받지 못한 모양이다. “자. 완성 됐어.” 베르텔기아가 연필을 종이에서 떼며 두둥실 떠올랐다. 그녀가 남긴 자리엔 몽환적인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베스티아레의 초상이 남아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핑그르르 회전하며 싱겁게 말했다. “그래도 우리 엄마가 더 예쁜 거 같네.” 김성철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림을 수거해 견본 위에 올려놓았다. 그림이 눈 녹듯 사라지며 빛나는 문자가 다시금 그의 눈앞에 떠오른다. [ 이제 저의 모습에 익숙해지셨나요? 하지만 너무 빠져들지 마세요. 눈이 너무 높아지면 장가를 못갈 수도 있으니까! / 진척율 : 2/33 ] “…지랄하고 자빠졌네.” 김성철은 칠영웅 중 사자토스를 제일 먼저 죽이려고 했던 자신의 계획을 수정할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시들해졌다. 짧은 평온 속에서 김성철은 문득 생경함을 느꼈다. 타인에게 자신의 일을 맡기는 것이 얼마만의 일인가. 8년? 아니 10년은 흘렀을 것이다. 하루만에 믿음직한 동료가 된 베르텔기아는 열심히 몸을 움직여 그림을 그린다. 사각사각. 바람 소리 외엔 연필이 종이를 찢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김성철은 두 눈을 감은 채 시간의 흐름을 느꼈다. 많은 사람들의 얼굴과 풍경이 주마등처럼 그의 의식 속에 명멸하며 잔영을 남겼다. 어둠 속에서 활기 찬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 노예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반란군의 우두머리야? 응? 우두머리는 아니고 그 오른팔이라고? 그나저나 내 취향은 아니네. 그렇게 호리호리해서야 힘 좀 쓰겠어?” 그 목소리를 떠올리는 순간, 김성철은 가슴을 비수로 후벼 파는 듯한 시린 통증을 느꼈다. 호흡이 순간적으로 멈췄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종이 위에 흔적을 그리던 연필의 움직임이 멈췄다. “꿈에 귀신이라도 나왔어?” 베르텔기아가 퉁명스레 물었다. “아니.” 김성철은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심장 안에 박힌 맹약의 십자가는 약동하는 탁한 혈류 속에서 오롯이 청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 37. 패자부활전 (2) 하루파야 고개 상공에 포진한 인간제국의 연합함대가 한 차례 술렁였다. 원인을 제공한 것은 함대 총사령관 드미트리 메디오프였다. 그는 3개 함대를 악마군 견제용으로 고개 상공에 주둔시키는 한편, 잔여 함대로 김성철의 뒤를 쫓게 시켰다. 그런데 추격대의 사령관으로 전혀 엉뚱한 인물이 내정됐다. 지휘권을 이양 받은 자는 현재 세계의 적 다음으로 욕을 많이 먹고 있는 사내였다. 그 사내는 다름 아닌 마르틴 브레가스. 마계 최전선 총사령관인 주제에 마계 최전선을 깔끔히 포기했던 졸장이다. 사람들은 드미트리 메디오프의 외교적 열병이 또다시 도졌다고 뒤에서 수근 댔지만 그의 결정에 드러내놓고 반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은 황제 폐하의 뜻이다.” 드미트리 메디오프의 결정 뒤엔 황제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내막엔 마르틴 브레가스의 치열한 로비가 있었다. 그는 인간제국의 황제에게 막대한 뇌물과 이권, 향후 개최될 세계 회의에서 황제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를 약속하며 조력을 구걸했다. 마르틴 브레가스가 원하는 건 단 하나, 명예회복이었다. 전장에서 부하고 영지고 모두 버리고 달아난 영주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선 잘못을 덮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전과가 필요하다. 세계의 적 토벌은 그간의 과오를 한 번에 씻을 절호의 기회다. 하지만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이 있었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김성철의 초월적인 강함이었다. 그의 싸움을 본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세계의 적은 초월자 아니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되었다고. 그런데 마르틴 브레가스는 김성철의 싸움을 직접 보지 못했다. “김성철이 어느 정도 강해진 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또한 인간이다. 필멸자인 인간은 완벽하지 못한 존재이고 따라서 반드시 약점이 있을 것이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하늘로는 인간제국의 2개 함대, 땅으로는 트로윈 자경단 및 마계 최전선의 정예병들을 이끌고 동북쪽으로 사라진 김성철에 대한 추적을 시작했다. 마계 최전선의 총사령관답게 인근 지형을 샅샅이 꿰고 있는 마르틴 브레가스는 김성철이 숨어 있을 요소요소를 빠르게 뒤졌다.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김성철은 곧 추적대와 조우했다. 하늘 위에 울려 퍼지는 비룡의 포효. 바위 틈새로 보이는 하늘 위에 십여 기의 비룡기사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육로에도 추적자의 발길이 닿았다.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다! 샅샅이 이 구역을 뒤져서 그를 찾아내라.” 세 개의 뿔이 달린 사슴을 앞세운 엘프족 유격병들이 주변을 비로 쓸듯 훑고 있었다. “으음. 아무리 봐도 도저히 그림을 그릴 형편은 아닌 거 같은데?” 베르텔기아가 작업을 멈췄다. 김성철도 같은 생각이었다. “참 귀찮게도 하는군.” 하지만 그들을 죽일 생각은 없다. 김성철을 추적하는 자들은 그저 기득권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하수인에 지나지 않으니까. 재앙을 추종하는 사악한 무리라면 모를까 무고한 살업은 김성철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김성철은 바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베르텔기아에게 손짓했다. “가자.” “어디로?” “북동쪽으로.” 김성철은 폭풍전선의 담당 방위구역인 산악지대를 생각하고 있었다. 바란아란 부족연맹의 담당 방위구역인 대삼림지대가 몸을 숨기기엔 가장 좋지만 숲에 대해 잘 아는 엘프들의 추적을 받는다면 오히려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목적지를 정한 김성철은 거칠 것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 낯익은 산악지대의 풍광이 눈앞에 펼쳐졌다. 군데군데 자리 잡은 드워프들의 요새들이 석양을 받아 오묘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곳은 폭풍전선의 담당 구역. 모든 산들의 발원지라 불리는 험준한 산악지대다. 김성철은 이 지역 군데군데 자신만의 캠프를 만들어놓았다. 세계의 적으로 몰린 이후 한 곳에 살 수 없게 된 사내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는 자신이 과거 만들어 놓은 캠프 하나로 향했다. 아르칸 크라크라 불리는 폭풍전선의 요새가 내려다보이는 깎아지른 산 중턱이었다. 그곳엔 주변의 독특한 산세로 말미암아 하루 일조량이 1시간도 채 되지 않은 음습한 지형이 있었다. 김성철은 그 음지에 굴을 파고 직접 만든 발효음식을 저장해놓았다. 가을이면 제철이 되는 굴젓부터 시작해 이름 모를 마계의 각종 잡어들로 담근 생선젓까지 김성철의 실험정신이 가득 담긴 젓갈이 굴 안에 가득하다. 김성철은 해가 지길 기다렸다 불을 피우고 식사 준비를 했다. 밥을 지으면서 장독대 안의 젓갈 하나를 손가락을 찍어 맛을 봤는데 기가 막힌다. 김성철이 밥을 짓는 동안 베르텔기아는 희미하게 밝혀 놓은 유등 아래에서 열심히 베스티아레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이제 겨우 다섯 개 째다. 작업 속도는 1시간에 한 장 정도. 베르텔기아는 한 장을 그리면 30분에서 1시간 정도 휴식을 취하므로 사실상 그녀의 작업 속도는 약 2시간에 한 장이고 그마저도 하루에 4장 이상은 못 그리겠다고 땡깡을 부렸다. 김성철은 서두르지 않았다. 직관력 올린답시고 딴 짓 하는 것보단 그림 그려서 퀘스트 달성하는 게 훨씬 빠르다는 걸 알기에. ‘무려 8년을 기다려왔다. 일주일 정도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지.’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갓 지은 밥 위에 젓갈을 올려 크게 한 숟갈을 퍼 입에 넣었다. 고소하면서도 뜨거운 밥알의 풍미와 젓갈의 짭쪼름한 감칠맛이 그의 침샘과 미각을 동시에 자극한다. [ 이 요리의 점수는.... 5점! ] 비록 요리인 클래스 평가는 박하지만 뭐 어떠랴. 김성철은 만족한 얼굴로 밥 한 그릇을 빠르게 비워나갔다. 그런데 식사를 하면서 김성철은 산정 아래 내려다보이는 풍경에 미묘하지만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 것을 발견했다. 이맘때 등불과 횃불로 환하게 밝혀지던 드워프들의 요새가 계속 어둠 속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요새가 당한 건가.’ 최근 악마군의 대공세로 마계 최전선의 상황은 전례 없이 불안정하다. 작은 요새 하나 둘 정도 없어져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시국이다. 이튿날, 김성철은 일곱 번 째의 초상화를 퀘스트에 반납하고 마실 삼아 요새 쪽으로 향했다. 막 그림을 막 완성한 베르텔기아도 휴식 겸 마실에 동참했다. 김성철의 예상대로 아르칸 크라크엔 한 명의 드워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김성철은 요새의 외벽에 마법과 물리공격으로 인한 심각한 손상이 있는 걸 발견했다. 요새 안쪽에 들어가자 형벌 부대원으로 보이는 옷에 숫자가 적힌 헝겊을 단 병사들의 시체들을 몇 구 찾을 수 있었다. 시체는 그게 전부였다. 요새를 지키던 드워프들은 대부분 살아서 요새를 빠져나간 걸로 보인다. ‘악마들의 공격을 받은 것 치곤 깔끔하게 빠져나갔군.’ 김성철은 요새 안을 제 집처럼 거닐다가 익숙한 발걸음으로 지하 창고 쪽으로 향했다. 지하창고 안쪽엔 드워프들이 담군 흑맥주 저장고가 있다. 김성철은 가끔 목이 칼칼할 때 요새 안에 숨어 들어가 흑맥주가 담긴 오크통을 통째로 훔쳐가곤 했다. 다행히 이 사실을 알아차린 드워프는 없었기에 김성철의 흑맥주 도둑질이 드워프 원한록에 오를 일은 없었다. 흑맥주를 들고 요새를 나서던 중에 꺼림칙한 기척이 요새 바깥에서 느껴졌다. 악마 특유의 음습한 기운이 자욱하게 깔렸다. 주변의 공기마저 탁해지는 것이 기운이 사뭇 범상치 않다. ‘평범한 악마는 아닌 모양이군. 악마군주 혹은 대악마급의 악마가 나타난 건가.’ 흔히 강력한 악마들을 구분할 때 대악마와 악마군주급으로 나눠서 구분하곤 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잘못된 표현이다. 대악마는 인간들이 말하는 초인이나 초월자급의 어떤 기준을 넘어선 악마를 일컫는 말이고 악마군주는 영지의 유무를 가지고 판별한다. 즉, 약한 악마라도 영지를 가지고 있다면 악마군주가 될 수 있는 것이고 대악마급의 강력한 악마라도 영지가 없다면 그냥 대악마에 머문다. 하지만 악마들이 72권좌라 부르는 마계의 영주가 되기 위해서는 강한 힘을 필수불가결로 한다. 수백 마리에 달한다는 대악마 중에서도 72위 안에 들어야 비로소 악마들이 인정하는 마계의 영지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72마리의 악마군주들을 굴복시킨 악마만이 악마들의 유일무이한 왕, 악마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악마왕 조차 자신의 발밑에 둔 김성철에게 그런 구분은 무의미한 것이다. 대악마든 세간에서 말하는 악마군주든 간에 김성철 앞에선 망치 한 방에 끝나는 존재가 되어버리니 말이다. 김성철은 강력한 악마의 기운을 느끼면서도 여유롭게 오크통을 든 채 악마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곧 요새 너머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악마가 김성철 눈앞에 정체를 드러냈다. 그런데 악마를 본 순간 김성철의 눈빛에 찰나의 일렁임이 일었다. ‘저 녀석은....?’ 눈으로 보고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모습이 바뀌긴 했지만 틀림없다. 무너진 성벽 앞에 엉거주춤 서 있는 거대한 악마는 김성철이 알던 어떤 존재였다. ‘일리야 브레가스.’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아름다운 여성의 시체를 등 뒤에 매달고 기괴한 소리를 내지르며 드워프의 요새를 공격하던 눈알 없는 악마의 이야기를. ‘이런 곳에 있었군.’ 일리야 브레가스는 김성철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김성철은 성벽이 드리운 그늘 옆에 서서 일리야를 관찰했다. 미소년의 풍모가 남아 있었던 여리여리한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신장만 4미터에 이르는 성난 악마의 모습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고 스스로 파낸 눈이 있던 자리엔 섬뜩한 느낌을 주는 두 개의 깊은 구멍이 어둠을 품고 있었다. 등 뒤엔 한 여성의 시체를 쇠사슬로 묶어 매달고 있었다. 얼굴은 머리카락에 가려 알아볼 수 없었지만 낯익은 정숙한 여기사의 차림을 보고 김성철은 그 시체가 소피아 브레가스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저 악마. 그때 그 남매 맞지?” 소피아의 시체를 본 베르텔기아도 악마의 정체를 알아차린 모양이다. 일리야 브레가스는 부지런히 거대한 손을 놀려 무너진 성벽자리에 돌멩이를 쌓고 있었다. 악마가 말했다. “소피아. 이걸 봐! 우리들의 성이 완성되고 있어. 조금만 더 성벽을 보수하면 우리는 그 인간의 도움 없이도 우리만의 영지를 가질 수 있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등 뒤에 매달린 소피아의 시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악마의 움직임에 따라 파초처럼 흔들릴 뿐이었다. 하지만 일리야 브레가스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계속해서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부터 시작하는 거야. 이 성부터 시작해 주변의 다른 성들을 하나하나 접수할 거야. 그럼 너에게도 성을 줄게. 우리 둘이서 나라를 만드는 거야! 어떤 나라냐고? 그건 생각 중이야. 소환자가 만든 인간제국도 좋지만 개인적으론 사악했던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전횡도 마음에 들거든.” 돌무더기를 쌓던 눈 없는 악마는 머리를 멍하니 서서 머리를 긁적이더니 씨익 흉악한 치열을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떤 나라를 만들 건 그 인간의 나라보단 나을 거야.”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김성철은 일리야 브레가스의 정신이 악마의 육신에 먹혀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흑맥주가 담긴 오크통을 든 채 요새를 소리 없이 떠났다. 캠프를 향해 산길을 오르고 있던 중 베르텔기아가 불쑥 입을 열었다. “소피아라고 했나. 그 여자, 너무 불쌍하네.” “…….” 김성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어깨를 책 모서리로 쿡하고 찔렀다. “그 여자 살려줘도 됐잖아? 못 되가지고!” “차라리 거기서 죽은 게 그녀에겐 최선이었다.” 김성철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때로는 현실이 죽음보다 잔혹한 법이니.’ 그런데 김성철의 눈앞에 달갑지 않은 존재가 눈에 포착됐다. 남서쪽 하늘, 먹구름을 뚫고 인간제국의 함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추적자들이다. 그 아래엔 날개 달린 해골을 수놓은 깃발을 든 군대가 행군하고 있었다. 추적자들을 무덤덤한 눈으로 지켜보던 김성철은 한 인물을 발견하고는 가볍게 혀를 찼다. “세계의 적이 숨을 곳은 여기가 유력하다. 몇날 며칠이 걸려도 관계없다. 바위틈 하나, 동굴 하나 모조리 뒤져라. 우리는 곧 우리의 노고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행군하는 병사들 선두에 서서 연설조로 말하는 사내는 다름 아닌 브레가스 남매가 그토록 저주하던 그들의 부친이었다. 변경백 마르틴 브레가스. 그는 멀리 보이는 드워프의 요새를 향해 자신의 군대를 끌고 들어갔다. 그 앞에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지 못한 채. ======================================= 37. 패자부활전 (3) 사각사각. 폭풍전야의 상황에서도 베르텔기아의 연필은 도화지 위에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김성철은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는 산중턱 위에서 아래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전장에서 잔뼈 굵은 인물답게 소수의 정찰병을 먼저 요새에 보내 혹시 모를 위협을 탐지하게 했다. 드워프와 엘프로 구성된 다섯 명의 정찰병이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10분 정도가 흐르는 후 2명이 혼비백산하여 요새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그들은 피범벅 혹은 피투성이가 된 채 마르틴 브레가스 앞에서 뭔가를 다급하게 이야기했다. 그들의 말은 김성철까지 닿지 않았지만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만난 것이다. 대악마가 된 일리야 브레가스와. 마르틴 브레가스는 전군에게 전투준비를 하는 한편, 하늘 위에 머무르고 있는 인간제국의 함대에게도 신호를 보냈다. 함대는 요새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행여나 대악마의 마법에 귀중한 공선이 격침되기라도 한다면 안 그래도 궁지에 몰린 마르틴 브레가스의 입지는 한없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자신이 거느린 병력만 가지고 요새 안에 숨은 대악마와 한 판 붙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대악마가 혼자 다닐 일은 없다. 무리 짓는 습성을 지니는 악마의 특성상 강력한 악마일수록 많은 하수인을 거느리는 건 널리 알려진 상식. 대악마급이면 최소 천 마리에서 만 마리 사이의 하수인을 거느리고 있을 터인데.’ 생각이 많아질수록 지체하는 시간도 길어져 간다. 측근들이 조심스럽게 결정을 촉구해왔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그럼에도 가진 정찰병력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요새 주변을 돌아보게 했다. 그 과정에서 비룡기사 하나가 의도치 않게 김성철을 발견했다. 비행 중 난기류에 휩쓸려 대열에서 낙오하다 수습하는 과정에서 기암괴석 사이에 숨어 있던 김성철을 포착한 것이다. 김성철은 비룡기사들의 궤적을 보고 절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리라 생각해서 바깥에 나와 있던 것이었는데 우연에 우연이 겹쳐 위치가 발각되고 말았다. 하지만 김성철의 위치를 안다고 해서 마르틴 브레가스가 바로 김성철을 칠 수 있는 건 아니다. 자신의 주력병력인 트로윈 자경단을 김성철이 있는 산중턱으로 이동시키려면 완만한 골짜기 지대를 틀어막은 드워프의 요새 아르칸 크라크를 돌파해야 한다. 그런데 그 요새 안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악마 한 마리가 버티고 있다. 김성철을 치기 위해서는 대악마부터 우선 처리해야 되는 난감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개활지라면 비교적 쉽게 처리할 수 있겠지만 요새 안에 틀어박힌 대악마를 처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마르틴 브레가스 본인이 나서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겠지만 마르틴 브레가스는 위험을 무릅쓰는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여기서 인간제국의 공중 함대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제국의 병력을 잃는 것도 문제지만 공적을 빼앗기는 건 마르틴 브레가스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김성철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인간제국의 함대에 알리지 않았다. ‘파견함대의 제독이 멍청한 게 천만다행이야.’ 파견함대의 지휘를 맡은 것은 광인으로 이름 높은 미나모토 다이스케였다. 그는 자신이 파견함대의 지휘를 맡은 걸 두고 드미트리 메디오프가 자신의 능력을 알아보고 내린 인선이라고 자평했지만 사실은 단순히 꼴 보기 싫어서 바깥으로 내친 것에 불과했다. 미나모토 다이스케는 갑판 위에서 일본도를 본 떠 만든 자신의 애병 - 요도 카마이타치를 정성스레 갈며 다가올 세계의 적과의 일전을 기대하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요도 카마이타치. 곧 김성철, 그 싸가지 없는 놈의 피를 잔뜩 먹여 줄 테니! 크크크크....” 광기로 번들거리는 미나모토의 눈동자 위엔 십년도 훌쩍 넘은 과거의 한 장면이 맺혀 있었다. 시체로 가득 찬 전장, 불타는 하늘, 서로 숨을 가다듬으며 최후의 싸움을 준비하는 전사들. “라그란제에서 끝맺지 못한 싸움의 종지부를 여기서 찍어주지...!” 그렇게 전의에 불타는 미나모토였지만 그는 김성철이 코앞에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미나모토가 지휘하는 함대에 어떤 움직임도 없다는 걸 재차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신은 날 버린 게 아닌 모양이야. 그 많은 제독 중에서 유일한 머저리가 내 동맹인 걸 보면 말이야.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겠지.” 마르틴 브레가스는 잿빛에 가까운 푸른 눈동자로 깎아지른 산중턱에 자리 잡은 김성철을 노려봤다. 김성철은 자신의 위치가 발각된 것을 알고 있음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아르칸 크라크 요새에 도사린 대악마부터 처리해야 된다는 사실을. 미나모토와 비슷한 시기에 소환된 소환자라지만 그릇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김성철은 아예 넓적한 바위 위에 편안하게 앉아 이쪽을 구경하고 있었다. 얼굴 표정까진 알아볼 수 없었지만 아마도 웃고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또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마르틴 브레가스는 똥줄이 타는 기분이었다. ‘김성철. 이 놈..!!’ 그는 즉시 인간제국의 함대에게 전령을 보내 좀 더 먼 곳으로 피난할 것을 권고했다. 김성철이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는데도 미나모토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또 한 번의 천운이었다. 미나모토는 마르틴 브레가스의 보고를 신뢰하고 함대를 아주 멀리 떨어진 공역으로 이동시켰다. “…….” 김성철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또 도망가야 되는 거 아니야? 여기 있는 거 들켰잖아.” 베르텔기아가 그림 한 장을 완성해 책장으로 물어 대령해왔다. “자 이걸로 열한 장 째!” 김성철은 그 초상화를 견본 위에 올려 퀘스트에 납품한 후 눈앞에 떠오르는 시시콜콜한 메시지를 손으로 흩어버리고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마르틴 브레가스가 날 만나려면 저 요새를 통과해야 한다. 자신의 업보를 마주해야 된다는 이야기지. 그리고...” 김성철의 눈은 크고 작은 산악지대 너머 일렁이고 있는 먼지구름을 노려보고 있었다. 먼지구름 사이로 여러 개의 다리가 달린 거대한 성채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철혈기사단의 기동요새다. 악마의 하수인이 된 그들이 이쪽을 향해 똑바로 오고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명백하다. “…그가 여기서 맞이해야 할 업보는 하나는 아닌 모양이다.” 김성철을 발견한 행운이 이제는 변경백에게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앞을 가로막은 대악마와 측면에서 접근하는 철혈기사단 사이에서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한 채 주저하고 있었다. 물러서자니 어렵게 발견한 김성철을 놓쳐버릴 것 같고 그렇다고 여기 있자니 철혈기사단과 무의미한 일전을 벌여야 한다. “미나모토 제독에게 지원을 요청할까요?” 눈치 없는 젊은 부관 하나가 불쑥 말했다. 마르틴 브레가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불쾌감이 주변 공기에 전이되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마르틴 브레가스는 눈치 없는 부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소수의 부하를 주겠다. 요새 안에 도사리고 있는 대악마를 바깥으로 유인해 와라.” “네...?” 그 부관은 트로윈에서 꽤 명망 높은 가문의 자식이었다. 능력과 나이에 비해 높은 위치를 얻은 것도 그의 부모가 마르틴 브레가스를 후원했기에 얻을 수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사정 따윈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당장 떠나 명을 수행해라. 아니면 내 손에 죽던가.” 마르틴 브레가스가 눈에서 차가운 살기를 발하며 손을 검의 손잡이에 갖다 댔다. 무슨 일이 생겨도 자신만은 죽지 않으리라던 생각하던 젊은 부관은 혼비백산하며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수천 명의 군대가 뒤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절망적인 유인작전이 시작됐다. 젊은 부관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어두운 요새의 입구로 소수의 부하와 함께 들어갔다. 잠시 후, 어두운 구멍 바깥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튀어 나왔다. 병사들은 어둠 속에서 쇠사슬 소리를 들었고 또 두 개의 퀭한 빛이 어른거리는 것을 목격했다. “여기는 우리의 성. 누구도 우리들의 성을 침범하게 놔둘 순 없다.” 어둠 속에서 대악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음성은 마르틴 브레가스의 귀에도 똑똑히 전달됐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왜냐하면 그 악마의 음성은 자신이 아주 잘 알던 어떤 목소리와 놀랄 정도로 유사했기 때문이다. ‘설마, 아니겠지.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요새의 입구로 다가가고 있었다. “변경백님! 혼자 들어가시면 위험합니다!” 주변의 부관들이 만류한 후에야 마르틴 브레가스는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입구에서 물러났다. “횃불이든 마법이든 좋다. 어둠을 밝힐 수 있는 모든 걸 가지고 날 따라와라.” 마르틴 브레가스는 수십 명의 마법사와 전사들을 대동하고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같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방금 들었던 목소리가 그를 위험천만한 어둠 속으로 끌어들였다. 악마의 거친 숨소리와 끌고 다니는 쇠사슬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선두에 서 있던 기사가 갑자기 무언가에 빨려들 듯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병사들은 마르틴 브레가스를 중심으로 원형진을 구축해 그들의 주군을 만일의 사태로부터 보호했다. 주변을 훤히 밝힌 횃불과 마법의 불빛 너머로 커다란 검은 형체가 들여다보였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대악마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댄 체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검은 형체를 숨죽여 지켜봤다. 이윽고 그 악마가 불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빛이 감도는 근육질의 팔뚝과 늘어지고 찢긴 옷자락이 먼저 나타났다. 마르틴 브레가스의 시선은 팔랑거리는 옷자락에 고정됐다. 옷자락의 한 구석엔 흑색을 배경으로 옆으로 서 있는 날개 달린 해골의 모습을 수놓은 패치가 달려 있었다. 그것을 본 마르틴 브레가스는 끝없는 수렁으로 빠져드는 기분을 느꼈다. ‘그럴 리가 없다. 그 녀석은... 죽었다. 마계에서.’ 일리야 브레가스의 말살을 맡았던 형벌 부대장 강가스 아론은 도망치듯 마계 최전선에서 달아났지만 일리야 브레가스가 마계 저 너머로 향한 것은 사실이다. 그곳에서 보통의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다. 대악마가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어둠에 가렸던 얼굴이 드러났다. 두 눈알을 파낸 끔찍한 얼굴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또 침입자냐? 누가 감히 나의 영지를 침범하느냐!” 대악마가 말했다. 끔찍한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차분하고 지적인 어조로. “변경백님.” 파림 다고트가 마르틴 브레가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도 느낀 게 있었던 것이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검을 뽑으며 침착한 어조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말했다. “넌, 나가 있거라.” “하지만...!” “바깥으로 나가 북쪽에서 다가오는 철혈기사단의 움직임에 대비해라.” 마르틴 브레가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파림 다고트가 소수의 호위와 함께 요새를 빠져나가는 걸 확인한 후, 마르틴 브레가스가 앞으로 나섰다. “넌 누구냐?” 그의 목소리는 평소답지 않게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 대악마가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깨와 허리에 걸쳐 묶은 쇠사슬이 움직이며 찰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그 쇠사슬 너머로 여성의 머리카락 같은 것이 흔들리는 걸 보았다. 낯익은 금발이다. 농가 주변을 순시하던 중 고개를 숙이며 부끄러워하던 농부 아낙의 얼굴이 불현듯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 말이냐?” 악마가 다시 말했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예상했던 그러나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한 마디를 쏟아냈다. “나는 일리야 브레가스다. 그리고 이쪽은 내가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는 여동생. 소피아 브레가스다.” 악마가 뒤로 돌아섰다. 등 뒤에 매달린 소피아 브레가스의 사지와 고개가 인형처럼 흔들거렸다. 마르틴 브레가스의 눈이 부릅떠졌다. “끄... 끄르륵.” 이윽고 손과 발이 떨렸고 입에서 기괴한 신음이 튀어나왔다. 떨그렁. 손에 쥔 검이 땅 위에 떨어졌다. 그의 신형은 무너져 내려 부하들의 부축을 받았다. “너는 누구냐? 분명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분명 어디서 들은 목소린데. 눈이 없어서 볼 수가 없잖아.” 일리야 브레가스는 손을 더듬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악마의 손톱이 붉은 털로 뒤덮은 머리를 긁적이자 고약한 악취가 나는 돌소금 같은 각질이 떨어져나왔다. “끄으으으....” 마르틴 브레가스는 갑자기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죽음보다 더한 현실이 그의 말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심장이 답답하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1초라도 저 괴물을 보았다간 그대로 승천할 것 같은 위기심이 느껴졌다. 그는 손을 휘둘러 자신을 이곳에서 데리고 나갈 것을 명했다. 병사들이 그를 부축하고 요새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넌 누구야? 왜 대답 없이 그냥 가는 거야?” 대악마가 뒤를 쫓아왔다. 병사들이 막아섰지만 대악마의 발톱에 분쇄되어 다진 고깃덩어리 신세가 되었다. 엄청난 희생 끝에 마르틴 브레가스는 살아서 요새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끄으으... 끄으...!” 병사들의 어깨를 빌려 막사로 향하는 마르틴 브레가스의 얼굴은 어떤 의미로 이미 죽어 있었다. “…….”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 3일이 지났다. “짜잔! 어때? 베르텔기아님의 새로운 제작 기법이?” 장시간의 강제 노동에 시달린 베르텔기아는 자신이 똑똑한 아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새로운 기법을 만들어냈다. 그 기법이란 전처럼 사람처럼 손을 놀려 얼굴, 눈, 코, 입 따위를 차례대로 그리는 게 아닌, 베르텔기아의 상 전체를 염두에 두고 화폭 위를 상하좌우로 오가며 전체를 한 번에 완성하는 기법이었다. 그녀는 알지 못하겠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프린터 와 닮아 있었다. “이걸로 스물여섯 장 째군.” 김성철은 새로운 그림을 견본 위에 올려넣으며 아래 펼쳐진 전경을 응시했다. 충격을 받고 칩거한 마르틴 브레가스의 진지 뒤에 어느덧 철혈기사단의 기동요새가 우뚝 서서 불길한 전운을 드리우고 있었다. 양측 다 숨고르기를 하고 있지만 싸움은 정해진 수순.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응시하며 물었다. “앞으로 얼마나 걸리지?” “새로운 베르텔기아식 표현기법으론 2시간 정도?” “천천히 해도 좋을 거 같군.” 김성철은 말린 대추야자를 우물거리며 발밑의 광경을 지켜봤다. 이마에 악마의 낙인을 새긴 철혈기사단의 기사들이 기동요새 밑에서 진형을 갖추고 함성을 질렀다. “배신자 마르틴 브레가스에게 죽음을!” “당한만큼 갚아준다!” “야 브레가스! 작은 고추의 매운 맛을 보여주마!” 마르틴 브레가스의 패자부활전은 최악의 국면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38. 징벌의 빛 (1) 전투는 철혈기사단이 자랑하는 기동요새의 포격으로부터 시작했다. 움직이는 성의 성벽 위에 빼곡히 자리 잡은 화포들은 각양각색의 포탄을 마르틴 브레가스의 진영에 쏘아 보냈다. 철혈기사단의 포탄엔 철혈기사단 내에서 엄격히 관리되는 비밀스런 기술이 있다. 포탄 안에 시간차를 두고 발동하는 스크롤을 내장하는 기술이다. 그 기술을 통해 철혈기사단의 포탄은 적진에 떨어지며 1차적인 타격을 가하고 내재된 스크롤이 발동하며 2차적인 타격을 가하는 2중 공격이라는 절묘한 장점을 지닌다. 물론 2차 타격의 강약은 내재된 스크롤에 담긴 주문의 위력에 의해 정해진다. 철혈기사단이 강성할 땐 많은 마법사를 고용할 수 있어 강력한 포탄을 다수 보유했지만 철혈기사단이 쇠락함에 따라 그들의 기술은 사장되다시피 했는데 악마와 손을 잡은 지금 그들의 포탄은 예전의 영광, 아니 그 이상의 힘을 얻게 되었다. 쿠콰콰쾅!! 포탄이 떨어진 곳에서 화염으로 이루어진 소용돌이가 나타나 주변을 태웠다. 또 다른 폭탄에선 지축을 흔들 정도의 맹렬한 폭발이 일어났고 또 다른 곳에선 살을 에일 정도의 냉기와 함께 얼음으로 만든 날카로운 파편이 주변의 인마를 무자비하게 살상했다. 포탄에 담긴 것은 하나 같이 악마들의 강력한 마법을 봉한 강력한 스크롤이다. 평균 위계는 4에서 5위계. 심지어 어떤 포탄엔 6위계에 달하는 파멸적인 마법 또한 들어 있었다. “맛이 어떠냐? 변경백의 개들아!” “철혈기사단이 피땀 흘려 만든 자리를 그렇게 간단하게 꿀꺽 삼킬 수 있다고 믿었냐?” “이제 곧 폭풍이 불 것이야!” 철혈기사단은 포격만으로 브레가스 군을 혼란으로 밀어넣었다. 막사 안에 틀어박혀 끙끙 앓던 마르틴 브레가스도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걸 알아차리고 막사 바깥으로 나왔다. 3일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한 그의 안색은 초췌하고 병들어보였다. 하지만 그는 역전의 용사다. 생각지도 못한 충격에 몸과 정신에 큰 충격을 받긴 했지만 완전히 무너지진 않았다. 그는 즉시 치유사와 마녀를 수배해 각성제를 요구했다. 치유사와 마녀가 각각 그들의 레시피로 만들어낸 각성제를 바쳤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2종의 각성제를 전부 시험해본 뒤 마녀의 각성제를 선택했다. “하루가 지난 후에 부작용이 나타날 겁니다.” 마녀가 눈을 껌뻑거리며 말했다. “관계없다.” 그는 각성제를 2병이나 들이키고 혼란 일변도에 빠진 전선에 향했다. “변경백님!” 최전선에선 파림 다고트가 전력을 다해 지휘를 하고 있었다. 옷은 이미 흙먼지로 더러워졌고 이마 곳곳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그런 아들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수 닦아주며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고생했다. 지금부턴 내가 지휘를 맡겠다. 너는 후방의 위협에 대처해라.” “알겠습니다.” 파림 다고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마지막 부분에 와서 머뭇거렸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파림 다고트의 어깨를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지금부턴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다. 더 이상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마라.” 잠시 어두워졌던 파림 다고트의 얼굴이 다시금 환하게 밝아졌다. 뭇 여성은 물론이고 남자들의 마음을 흔들 정도로 시원하고 쾌활한 미소였다. ‘내 선택은 잘못되지 않았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전선으로 향했다. 부관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변경백님!” “오셨습니까?” 누가 뭐래도 마계 최전선의 총사령관은 마르틴 브레가스 그 자신이다. 마지막에 오점이 있긴 하지만 그는 지난 8년간 개성 강한 엘프와 드워프, 소환자들을 중재해 마계 최전선을 철통처럼 수비했고 전선을 안정시켰다. 그런 과업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다. “즉시 미나모토 제독에게 교신을 해라. 우리는 지금 전투 중이고 지원을 필요로 한다고.” 더 이상 잃을 건 없다. 따라서 욕심도 부리지 않겠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욕망이 지금까지 날 이끌어왔지만 결국 그 욕망이 나를 불태워버렸군. 더 이상 욕망에 연연하지 않겠다.’ 이 전투가 끝나면 은퇴하리라. 마르틴 브레가스는 자신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며 흔들리는 전열을 바로 잡았다. 인간제국의 미나모토 다이스케는 적시에 도착했다. 그는 강렬한 포격을 퍼붓는 함대를 뒤로 하고 앞으로 돌진해 철혈기사단의 전열에 파고들었다. “끼요요요요요옷!” 요도 카마이타치가 칼집에서 뽑혔다. 피처럼 붉은 도신이 주변에 형형한 살기를 흩뿌렸다. “나는 테츠진(鐵人)입니다...!” 광기에 물든 미나모토가 죽음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의 칼이 닿는 곳마다 피바람이 일어나고 죽음이 따라다녔다. 미나모토의 압도적인 무용 앞에 철혈기사단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김성철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갔다. ‘김택수. 저 녀석에게 결국 한 자리를 줬군.’ 인간제국이 들어서기 전, 루테기네아라는 시대가 있었다. 위로는 폭압과 전횡이 횡행하고 아래로는 부패와 타락에 빠져 있던 어두운 시대였다. 소환자들은 이 끔찍한 시대를 끝내기로 맹세했고 하나가 되어 거대한 악에 맞섰다. 하지만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은 강력했고 소환자들은 힘에 부친 싸움을 이어나가야 했다. 그 과정에서 배신자들이 출현했다. 김택수. 현재는 미나모토 다이스케라 알려진 사내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동료 소환자들을 팔아먹은 비열한 배신자다. “자, 받아.” 상념에 잠긴 김성철의 흐릿한 의식을 베르텔기아가 일깨웠다. 그녀는 책장 사이에 여러 장의 그림을 수북히 끼워서 가지고 왔다. 받아 들고 보니 무려 6장의 그림이 담겨 있었다. “어? 이렇게 빨리?”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속도다. 베르텔기라는 으쓱거리며 우쭐댔다. “엣헴! 베르텔기아님의 새로운 표현 기법의 힘이지. 차분하게 나 자신을 돌이켜보니 난 현재 인간의 몸이 아니잖아? 그렇다면 굳이 인간처럼 그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에 부딪친 거야. 나는 평범한 인간과 달리 기억 자체를 기록할 수 있고 그 기록을...” 말이 길다. 김성철은 중간부터 귀를 닫고 여섯 장의 복사기로 복사한 듯한 그림을 견본 위에 차례차례 올려놓았다. 여섯 장의 그림들이 눈 녹듯 사라지며 저마다의 문자를 만들어낸다. 김성철은 그 문자를 하나도 읽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 하기 싫은 거, 보기 싫은 거 절대 하지도 않고 보지도 않는다더니.’ “나머지 그림은 1시간 안에 완성 가능할 거 같아! 이 베르텔기아님의 위대한 표현 기법에 의하면 말이지.” “정말 훌륭하군. 베르텔기아.” 칭찬에 인색한 김성철이 모처럼 베르텔기아에게 찬사를 건넸다. 베르텔기아는 더욱 기고만장해져 하늘 높이 두둥실 솟아오르더니 쏜살처럼 내려와 다음 도화지로 향했다. “빨리 끝내고 이 싸움판에서 벗어나자구. 난 전쟁 따윈 딱 질색이니까!” 베르텔기아가 서두르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던 모양이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때 마르틴 브레가스를 거세게 밀어붙이던 철혈기사단이 이제는 양쪽에 협살되어 괴멸하고 있었다. 마르틴 브레가스가 지휘하는 정예병력이 철벽같은 방어를 펼치며 철혈기사단을 잡아두는 동안 미나모토 다이스케가 이끄는 인간제국의 육전대가 철혈기사단의 후방을 휘몰아치며 거세게 밀어 붙었고 하늘 위에선 인간제국의 상징인 공중함대가 맹폭을 가해 철혈기사단의 기동요새를 박살내고 있었다. 싸움은 곧 끝이 난다. 아마도 이 싸움이 끝나면 마르틴 브레가스는 요새를 돌파해 이쪽으로 올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림은 전부 완성되어 간다. 시간은 충분히 끌었고 원시의 빛은 지척에 있다. 그런데 전장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났다. 마르틴 브레가스의 군대 후방에 거대한 무언가가 출몰한 것이다.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일리야 브레가스였다. “누가 감히 내 영지 위에서 건방지게 싸움을 거는 거냐?!” 요새 안에 웅크려 있던 일리야 브레가스는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앳된 목소리로 소리치며 그대로 취약한 트로윈 자경단의 후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입구를 지키던 소수의 경비병력 이외엔 부상병과 치유사, 비전투 학파의 마법을 익힌 마법사로 이루어진 후방 지대에 막강한 악마가 난입하자 대참사가 일어났다. 소수의 경비병들을 필두로 무수한 부상병과 지원병력이 속수무책으로 대악마의 발톱에 찢겨 나갔다. 소수의 마법사들이 어설픈 공격 마법으로 일리야 브레가스를 공격해보지만 그의 화를 돋굴 뿐이었다. “주인님이 당한 거예요!” “우리 식구가 망해버린 거예요!” 처참하게 찢긴 마법사의 시체 주위로 조수로 부리던 호문클루스들이 부산을 떨었다. 한편 일리야 브레가스가 나타났다는 소식은 승리를 눈앞에 둔 마르틴 브레가스의 귀에 곧 들어갔다. “뭐라고? 그 녀석이 요새에서 나왔다고?” 마르틴 브레가스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리긴 했지만 전만큼의 충격을 느끼진 않았다. 그는 의연하게 말했다. “내가 가겠다. 정예 병력 일부를 빼내 그 녀석을 막아라.” “파림 다고트님이 그쪽으로 이미 향하고 있다는 전갈입니다.” “파림이? 아니 그 녀석은 보내지 마라. 즉시 돌려보내라고 전하라.” 그때 전방에서 사자 같은 포효소리가 일며 한 기사가 이쪽을 향해 맹진해왔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멀리서도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철혈기사단장 조성택. 이제는 이마에 악마의 낙인을 새긴 시대의 강자가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몸소 검을 빼내 그를 상대했다. 챙캉! 검과 검이 부딪쳤다. 무시무시한 원념에 불타는 눈빛이 마르틴 브레가스의 얼굴을 매섭게 쏘아봤다. “마르틴 브레가스! 이 후레아들놈의 자식아! 나는 죽더라도 네 놈이 망하는 건 꼭 봐야겠다.” “…….” “한국말엔 이런 속담이 있지. 너 죽고 나 죽자 라는.” “미안하지만 난 여기서 죽을 생각이 없네.” 철혈기사단장과 변경백 사이의 치열한 검투가 펼쳐졌다. 기세는 조성택 쪽이 훨씬 높았지만 절대적인 기본기와 능력치의 총합은 마르틴 브레가스가 위였다. 몇 번의 결정적인 격돌이 있은 후 승패는 빠르게 갈렸다. “크크크크....” 조성택은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잘려나간 오른팔 쪽을 왼손으로 부여잡고 있었다. 잘린 부위 밑으로 붉은 피가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잘 가시게.” 마르틴 브레가스는 먼 곳을 바라보며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검이 조성택의 심장을 단숨에 궤 뚫었다. 조성택의 신형이 한 차례 흔들렸다. 그런데 조성택의 왼팔이 갑자기 자신의 심장을 뚫고 있는 칼날을 붙잡더니 그것을 꽉 붙잡고 자신의 몸뚱이를 마르틴 브레가스 앞으로 잡아 당겼다. “어이. 변경백.”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조성택이 말했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경멸에 찬 눈빛으로 노려볼 뿐 대꾸하지 않았다. “뒤를 봐.” 조성택은 히죽 웃었다.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떨구더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도 느껴 봐. 애지중지하는 자식새끼가 죽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조성택의 호흡이 멈췄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마르틴 브레가스는 검에 달라붙은 조성택의 시체를 발로 차 떨어내고는 즉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자신의 아들 일리야 브레가스가 또 다른 아들 파림 다고트를 붙잡고 반으로 찢어버리는 모습을. “안 돼에에에!!” 멀리서 들려오는 절규를 들으며 김성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말로 인과응보군.’ 마르틴 브레가스는 끝났다. 정신이 죽어버린 육체는 빠르게 시드는 법이니. 아마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베르텔기아.” 김성철이 말했다. 그림을 빠르게 인쇄 중이던 베르텔기아가 작업을 멈추고 대답했다. “응.” “얼마나 걸릴 거 같아?” “대략 10분 정도?” “좋아. 계속 하고 있어.” “뭐하려고?” “잠깐 저 아래에 내려갔다 오게.” 미나모토 다이스케로 개명한 배신자가 일리야 브레가스를 공격하고 있었다. 대악마로 변한 자에게 동정은 베풀지 않는 주의지만 못내 걸렸다. 그 뒤에 매달린 가련한 여성의 시체가. 그리고 또 하나의 목적도 있었다. ‘김택수. 겁도 없이 내 앞에 다시 나타났군.’ 배신자에 의해 죽은 옛 동료들의 얼굴을 추억하며 김성철은 산비탈 아래로 질주했다. 멀리서 본 그의 모습은 한줄기 폭풍과도 같았다. ======================================= 38. 징벌의 빛 (2) “푸하하하하! 겨우 이 정도인 건가요? 악마!” 미나모토 다이스케의 전투력은 소문 이상이었다. 그는 초월자급의 전투력을 지녔다는 대악마를 상대로 조금도 밀리지 않고 오히려 밀어붙이고 있었다. “아파! 아파! 하지 마!” 일리야 브레가스는 대악마의 힘을 지니고도 미나모토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밀리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기술적인 격차다. 노련한 미나모토는 일리야 브레가스의 강력하지만 단순한 공격 패턴을 한 눈에 궤 뚫고 일리야가 뭔가 하려고 하면 한 발 먼저 움직여 그 의도를 무력화시켰다. 뒤이은 매서운 역습은 덤. 또 하나의 이유는 단순히 미나모토 다이스케가 강하다는 것이다. 그는 일리야가 전력을 다해 휘두른 발톱을 팔 하나에 의지해 가볍게 검으로 막아냈다. 일리야 브레가스가 인상을 쓰며 안간힘을 써보지만 미나모토는 단 한 치도 뒤로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손가락을 하나 세워 까딱까딱 흔들어보이며 훈계조로 말했다. “나는 테츠진이니까. 이런 건 통하지 않아요.”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대륙십삼걸의 말석에도 들지 못한 일개 인간제국 함대 제독이 이런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세상에 초월자로 알려진 인간제국의 황제, 집행자 아퀴로아, 암살교단의 교주 샤말 라지푸트 이외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일이 미나모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병사들은 탄성을 터뜨리며 경이로워했다. “세상에.. 대악마와 대등한 힘을 지니고 있다니. 미나모토 제독. 엄청나군.” “이것이 전투력 하나만을 인정받아 황제에게 등용됐다는 사내의 실력인가?!” “세계의 적이 그 실력을 시기해 견제했다는 소문이 허투루 퍼진 건 아닌 모양이군.” 뒤에서 들려오는 찬사에 미나모토는 겉으로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크크크... 좀 더. 좀 더 나를 칭찬해라. 좀 더 큰 소리로 나를 찬양하란 말이다!’ 소환자들에게 대규모 소환은 그 자체로 비극이지만 어떤 소환자에겐 축복이 될 수도 있었다. 특히 인생에 어떤 답도 보이지 않던 김택수 - 미나모토 다이스케 같은 인물에게는. 그는 이지메라는 말이 수입되기 전부터 이지메를 당했고 히키코모리라는 용어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방구석 폐인이 되었다. 그에게 이계는 젖과 꿀이 흐르는 신천지였다. 딱히 노력을 하지 않고도 운만 좋으면 얼마든지 분에 넘치는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으니 말이다. 미나모토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승리에 대한 확신이다. ‘이 악마. 나보다 약해. 예전의 나라면 절대 이기지 못했겠지만 역시 금단주법의 힘은 대단하군!’ 그는 배신을 대가로 손에 넣은 부정한 기운이 몸 안에서 마음껏 날뛰도록 놔두었다. 스스로도 억제 불가능한 파멸적인 힘이 전신에 서렸다. “나는 대악마다! 감히 인간 따위가 대악마에게 맞서다니! 이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야! 내가 왜 대악마가 되었는데!” 일리야 브레가스가 사악한 마기를 풀풀 풍기며 덮쳐왔다. 어느 정도 전투에 단련됐다고 자부하던 노기사들마저도 움츠러들게 할 정도로 빠르고 강력한 돌진이었다. 하지만 미나모토는 그 돌진은 투우사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일리야의 돌진을 피해냈다. 공격을 피하던 중 미나모토 다이스케는 문득 어릴 때 본 프로레슬링의 한 장면을 기억해냈다. 미군 방송에서 방영해줬던 그 레슬링 쇼에서 가장 인기 있던 인물은 노란 팬티를 입은 근육질의 사내를 말이다. 정의의 사도인 그의 경기 패턴은 한결 같았다. 경기 초반엔 사악한 악역에게 두들겨 맞다가 팬들의 응원의 힘으로 각성, 괴력 같은 힘을 내 악당을 한 번에 때려눕히는 것이 그의 레퍼토리였지만 단순하지만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미나모토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적당히 놀아준 뒤, 세게 때려준다.’ 그는 이번 기회에 자신의 함대원들은 물론 마계 최전선들의 병사들에게 저평가된 자신의 실력을 톡톡히 보여줄 생각이었다. ‘대륙십삼걸? 웃기고 자빠지는군. 내가 없다는 점에서 그 목록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는 지치지 않고 달려드는 일리야의 공격을 힘에 겨운 듯 막거나 피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연호할 때까지. 일리야가 숨을 고르며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기다렸던 응원의 함성이 미나모토의 귀에 들려왔다. “인간! 일어나는 거예요!” “어서 빨리 저 악마를 해치우는 거예요!” 그렇게 바라던 칭찬의 말이 들려온다. 미나모토는 링 포스트에 서서 관중의 연호를 받던 노란 팬티의 사내를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어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어째 목소리가 이상하다. 미나모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웃? 호문클루스 투성이?!’ 호문클루스가 한 가득이다. 하나 같이 사지가 날아가거나 옷이 찢어지거나 머리카락이 불타버린 듯 흉악한 생김새다. 일리야 브레가스가 날뛸 때 전사한 마법사들이 부리던 녀석들로 보였다. 호문클루스들은 미나모토가 그들을 쳐다보자 더욱 응원의 환성을 높였다. “일어서는 거예요! 일어서서 저 사악한 악마를 해치우는 거예요!” 그때 일리야 브레가스가 쇠사슬을 철컹거리며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미나모토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그는 요도 카마이타치를 쥔 손에 힘을 주고 달려오는 대악마를 단 칼에 베어버렸다. 핏빛 안개가 카마이타치 주변에 분무기로 뿌린 듯 퍼지는가 싶더니 대악마 일리야 브레가스는 아름드리나무가 쓰러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마... 말도 안 돼.... 대악마인 내가... 내가...” 아직 죽진 않았다. 하지만 치명상을 입은 일리야 브레가스는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거린 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쇠사슬이 끊어지면서 등 뒤에 묶어놓았던 여성의 시체가 바닥 위에 떨어졌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번엔 호문클루스 뿐만 아니라 후열의 병사들도 동참한 것이었지만 미나모토의 귀엔 듣기 싫고 시끄러운 호문클루스의 환호성만 들렸다. 그는 터벅거리는 걸음걸이로 호문클루스들에게 다가갔다. “정말 고마운 거예요!” “미나모토 제독은 우리들의 영웅인 거예요!” 흉측한 미소를 지으며 호문클루스들은 미나모토를 찬양했다. 미나모토는 그중 하나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바닥에 그대로 집어던졌다. 픽! 호문클루스는 바닥에 처박혀 피떡이 되었다. “만들다 만 쓰레기들에게 격려 받은 이 수모. 참을 수 없어요! 보고 있던 놈은 하나도 살려두지 않겠어요!” 요도 카마이타치가 춤을 추었다. 호문클루스들의 목과 사지가 정신없이 허공 위를 날아다니며 붉은 피를 사방에 흩뿌렸다. 광기에 물든 그는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주변을 피로 물들인 그의 검은 다음 상대를 찾아 난폭하게 허공을 휘저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일리야 브레가스가 그 목표가 되었다. “이 쓰레기 악마 따위 때문에 이런 수모를 받은 거였네요.” 그런데 일리야의 움직임이 이상하다. 치명상을 입은 채 숨을 헐떡이던 대악마가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뭔가를 취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미나모토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리고 곧 발견했다. 손이 향하는 방향에 쇠사슬로 묶인 젊은 여성의 시체가 있다는 것을. “소... 소피아...” 미나모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악마라는 게 인간 시체가지고 인형 놀이나 하고 있는 건가요? 약해빠진 데다가 역겹기까지 한 악마네요.” 요도 카마이타치의 칼끝이 소피아의 시체를 가리켰다. “이런 썩은 시체 동강동강 내서 개 사료로 던져 주겠어요!” 요도 카마이타치가 핏빛 안개를 뿜어내며 허공을 갈랐다. 부정한 기운으로 얼룩진 칼날이 시체에 닿으려던 때였다. 챙캉. 무언가가 칼날을 막아섰다. 미나모토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뭐... 뭐야?!’ 그가 알기로 자신을 막아낼 수 있는 존재는 몇 되지 않는다. 악마 중에서 상위 군주 이상, 인간동맹 쪽에선 초월자로 알려진 무리 정도가 그의 공격을 이렇게 가볍게 막아낼 수 있다. 그런데 그 앞에 정작 나타난 것은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었다. ‘기... 김성철?!’ 김성철이 여기 있다는 보고는 듣지 못했다. 그는 당혹한 얼굴로 멀리 떨어진 마르틴 브레가스를 응시했다. 반으로 동강난 아들의 시체 앞에 무릎을 꿇고 넋 잃은 얼굴로 앉아 있는 마르틴 브레가스는 여러 가지 의미로 틀려먹었다. 충격 속에서 검을 막은 사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여어. 김택수.” “세... 세계의 적!” 단 한 명의 등장으로 전장의 분위기는 일변했다. 하늘 위에서 맹폭을 가하던 인간제국의 함대도, 잔당을 청소하던 트로윈 자경대와 육전대도, 그리고 포위 당해 죽을 순서를 기다리던 철혈기사단도 모두 싸움을 그치고 홀연히 등장한 사내를 응시했다. 전장에 거짓말처럼 고요가 찾아왔다. 미나모토는 자신의 요도 카마이타치를 막아선 팔 가라즈에서 칼을 떼며 뒤로 물러섰다. “오랜만이군?” 김성철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미소는 미나모토, 아니 김택수의 마음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아픈 상처를 끄집어냈다. 15년 전 라그란제의 평원, 김성철보다 훨씬 강한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못하고 꽁꽁 묶여버렸던 굴욕적인 순간이 눈에 그린 듯 떠올랐다. ‘이젠 다르다. 내 힘은 더욱 성숙됐고 전에 없었던 기술과 경험도 지니고 있다.’ 비록 지금 김성철의 악명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고 하지만 은밀한 비밀을 간직한 미나모토는 내심 그의 이름값에 거품이 꼈다고 깔보고 있었다. ‘네놈을 죽이고 대륙십삽걸 중 일걸에 이름을 올린다. 아니, 일걸은 무리인가? 내게 힘을 준 놈도 일단은 목록에 있으니 말이야.’ 미나모토는 씨익 웃었다. 잠시 당황했지만 자신감에서 비롯된 용기가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요도 카마이타치! 혈귀검법! 너는 죽은 목숨이다.” 미나모토는 김성철 앞에 당당히 서서 요도 카마이타치를 휘둘렀다. 도신 주위로 핏빛 안개가 흩뿌려졌다. 일리야 브레가스는 단칼에 베었던 바로 그 검이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미나모토를 지켜볼 뿐이었다. 미나모토의 발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때 김성철의 머리 위에서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부 다 완성됐어!” 날카롭게 솟은 산정 위에서 한 권의 책이 김성철의 머리 위를 향해 똑바로 낙하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떨어지는 책을 받아들었다. “기다리라고 했잖아.” “혼자 있으면 무서운걸!” 김성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책장 사이에 끼어 있던 한 장의 그림을 꺼냈다. 그 안엔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미나모토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니, 저건 내 이상형의 여인?!’ 김성철은 미나모토가 보건말건 그림을 꺼내 또 다른 견본 위에 올려놓았다. 마지막 그림이 빛으로 이루어진 파편이 되어 사라졌고 김성철의 눈앞에 문자가 떠올랐다. [ 어떠셨나요? 저를 그리면서 반해버린 건 아니겠지요?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니까. ] 기본 보상 : 1. 직관력 +1 2. 보석파피루스에 그린 베스티아레 의 초상화 김성철은 보석파피루스에 그린 베스티아레의 초상화를 미련 없이 바닥에 집어 던졌다. 미나모토가 번개처럼 땅에 떨어진 그림을 주웠다. “오오...! 스고이!” 미나모토가 그림에 정신이 팔린 동안 김성철은 자신의 달라진 능력치를 확인했다. 직관력 - 500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퍽! 눈에 보이지도 않을 무시무시한 일격이 미나모토의 복부를 강타했다. “데갸야스!” 미나모토는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어졌다. 김성철은 자신을 두려움과 경이로움이 반반 섞인 시선으로 응시하는 병사들을 한 바퀴 돌아본 후 길을 떠났다. 마르틴 브레가스는 껍질인간이 되었고 미나모토는 죽었다. 아무도 그의 앞길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앞으로 걸어가려는 찰나였다. 바닥에 엎어진 미나모토가 꿈틀거렸다. “더는... 못 간다! 김성철!” 그때 김성철은 발견했다. 미나모토 전신을 감싸는 부정한 기운을. 검은 안개 같기도 하고 점액 같기도 한 그것이 죽은 줄 알았던 미나모토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향해 다시 검을 드는 미나모토를 노려보았다. ======================================= 38. 징벌의 빛 (3) 김성철이 알지 못하는 능력이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김택수의 죽음을 저지하고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김택수 자신의 힘이 아니라 외부에서 끌어온 힘이라는 것 정도. 김성철은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다. ‘영혼각인인가?’ 영혼각인이란 이름 그대로 사용자의 영혼 그 자체에 신 혹은 신에 준하는 존재가 만들어낸 가호를 새기는 것이다. 각각의 가호는 극도로 얻기 어렵지만 얻을 수만 있다면 대단히 강력한 권능을 사용자에게 부여한다. 빈번하게 쓰는 진실의 눈과 영혼창고 또한 영혼각인에 의해 부여된 능력. 영혼은 흔히 고유한 것이고 선험적인 속성을 지니기에 인간의 인식으로 재단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적어도 영혼각인의 영역에서만큼은 영혼의 크기의 차이가 존재한다. 바로 한 개인이 지닐 수 있는 영혼각인의 숫자다. 영혼에 새길 수 있는 영혼의 빈자리는 슬롯이라 불린다. 평범한 자들은 하나 혹은 하나의 슬롯도 가지지 못한다. 능력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사람들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 영혼각인의 슬롯 숫자는 늘어난다. 통상 초인이라 불리는 비범한 자들이 3개의 슬롯을 지닌다. 초월자는 대략 4개에서 5개 사이의 슬롯을 지니는 걸로 알려져있다. 그런데 김성철은 6개의 슬롯을 가지고 있다. 그가 지닌 영혼각인은 하나 같이 구하기 어렵고 극강의 시련을 통과해야 얻을 수 있는 귀중한 것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3가지다. 첫째, 영혼 수확자. 상대방에게 가한 타격만큼 체력을 회복하는 전설급 영혼각인. 적을 죽일 때마다 체력이 회복할 수 있는 이 능력 덕에 김성철은 개인이 아닌 군대와 싸울 때 불사의 존재가 된다. 둘째, 천둥 방패. 모든 마법피해량의 절반을 저감시키는 무시무시한 효과와 더불어 전설급 이하 모든 정신 공격에 면역효과를 지니는 영혼각인. 등급은 전설급이다. 전설급 이상의 정신공격을 가할 수 있는 것은 신급 이상의 존재라는 걸 감안해볼 때 김성철에게 정신공격을 가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전무하다해도 무방하다. 셋째, 진실의 눈.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전설급 영혼각인으로 에픽급 이하 모든 환영마법을 무효화하는 건 물론, 아이템, 마물, 스킬을 감정할 수 있다. 세계의 대부분을 적으로 돌린 김성철에겐 필요불가결한 능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세 가지 영혼각인을 갖추기 위해서 김성철은 세계를 은밀하게 떠돌아다니며 목숨, 때로는 영혼을 건 시련을 통과해야 했다. 몇 번이고 죽음의 위기를 넘겨야 했으며 말로서는 이루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과 절망에 맞닥뜨리기도 했다. 그런 고련 끝에 김성철은 3신기라 불리는 영혼각인을 전부 수집해 자신의 영혼에 새겨 넣은 것이다. 그런데 미나모토의 몸에 벌어지고 있는 변화도 김성철 급은 아니지만 만만치 않은 영혼각인에 의한 걸로 보인다. “키키키... 강하구나. 고졸 쓰레기 새끼가...” 뚜둑뚜둑. 부러진 척추가 스스로 붙으며 짜 맞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성철은 미나모토의 눈을 봤다. 그의 육체는 회복되고 있지만 정신은 여전히 저 세상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는 걸로 보였다. 미나모토는 숨을 헐떡이며 잠꼬대 하는 것처럼 지껄였다. “뭐? 세계의 적? 개뿔도 아닌 새끼가... 난 니가 여기 오기 전에 뭐하던 놈인지 알고 있어. 영창에서 썩어 남들보다 14일 늦게 제대한 게 유일한 자랑이라는 고졸 노가다꾼이라며? 너뿐만 아니라 황제 윌리엄 퀸튼 말버러. 그 호로자식이 창녀의 아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미나모토는 뭐가 그리도 웃긴지 실실 웃었다. “스트립바에서 봉 잡고 춤이나 추는 창녀 아들이 황제라니! 이히히히히!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지만 그건 아니잖아?” “…….” 김성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나모토의 말은 대부분 진실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기억난다. 환한 보름달이 뜬 경사스런 가을날 밤이었다. 이계로 진입한 소환자들은 자작자작 타들어가는 화롯가에 앉아 이계에 건너오기 전의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진술한 시간을 가졌었다. 황제가 된 사내도, 암살자가 된 사내도, 지금은 죽어버리거나 원래 세상으로 떠난 자들도 애틋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그들의 이야기를 하곤 했다. 아마도 김택수는 거기 있었을 것이다. 김성철은 그 자리에 김택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당시 김택수는 말 수 적고 숫기도 없고 능력도 없는 눈에 띄지 않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황제가 왜 널 받아들인 거지?” 표면적인 이유는 김택수는 이래나 저래나 같은 소환자 출신이고 반성하고 있으며 강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기에 향후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김성철은 그 말을 믿었다. 아니 의심하지 않았다. 황제의 검이었던 그 시절, 황제의 생각에 의문을 품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므로. 하지만 지금은 물을 수 있다. “다시 묻겠다. 황제가 왜 너를 받아들인 것이지?” “몰라서 묻냐?” 미나모토가 히죽 웃으며 몸을 흔들어댔다. “나는 네가 모르는 사실 알고 있지. 네 놈의 그 잘난 황제가 너에게도 말해주지 않은 사실을 말이야.” “그래?” “그렇고말고. 물론 네놈에게 말해줄 건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만난 인연이 있으니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알려주지.” 김성철이 침묵한 가운데 미나모토는 득의만면한 미소를 지으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김성철에게 속삭였다. “방랑왕은 그 싸움에서 너희들을 이길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방랑왕이?” “그래. 그 증거가 바로 나지. 금단주술의 힘으로 다시 태어난 이 미나모토 다이스케님이 말이야. 키키키키!” 미나모토의 눈동자에서 부정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죽음에서 그를 일으켜 세웠던 것과 비슷한 것이다. 김성철은 자신이 아는 모든 경험에 비추어 그 부정한 기운과 일치하는 것을 찾았다. 일치되는 건 없다. 그나마 가장 유사한 것은 끈적하고 음습한 고대신의 기운. “요도 카마이타치!” 부정한 기운으로 덮인 미나모토가 핏빛 안개를 퍼뜨리며 김성철을 향해 달려왔다. 악귀야차와 같은 모습으로. “나는 테츠진이다... 테츠...!” 하지만 둘 사이의 힘의 차이는 명백하다. 팔 가라즈가 움직이자 미나모토의 신형은 먼지처럼 흩어졌다. “테챠야아아아아아!!!” 모처럼 제대로 휘두른 결과. 영혼각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일지 모르는 부정한 기운은 미나모토의 파편을 붙잡으려 해보지만 이내 뿔뿔이 흩어진 육편과 함께 사라졌다. ‘네놈의 비밀 따윈 아무래도 좋다.’ 구질구질한 모략은 이미 질렸다. 누가 무엇을 꾸미건 팔 가라즈로 박살내면 그만. 그러기 위해서 얻은 신적인 힘이다. “…….” 김성철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한쪽엔 엎드린 채 숨을 헐떡이고 있는 일리야 브레가스가 있었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텅 비어버린 마르틴 브레가스가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김성철은 둘의 중간 지점, 일리야 쪽에 조금 더 치우친 여성의 시체를 들어올렸다. 죽은 지 오래되었지만 소피아 브레가스의 모습은 살아 있을 때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진실의 눈이 발동해 소피아의 몸에 걸려 있는 정성스럽고 수많은 주술들을 발견했다. “여.. 여긴 어디야?” 일리야 브레가스가 말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아파.... 추워....” 그의 목숨은 경각에 달해 있었다. 미나모토의 솜씨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천천히 죽을 정도로 손을 쓴 것이다. 김성철은 그를 버려두고 앞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일리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어디 있어?” 일리야 브레가스는 애타게 손을 뻗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아빠를 찾아 헤맸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제공한 마르틴 브레가스는 어느새 숨이 끊어져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대륙육걸에 오른 풍운아의 최후 치고는 너무나도 어이없고 보잘 것 없는 최후였다. 김성철은 소피아의 시신을 둘러메고 홀연히 앞으로 걸어갔다. 전장엔 수천 명의 병사가 있었지만 어느 누구 하나 그의 뒤를 좇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 양지바른 언덕 위에 엉성한 돌무덤이 만들어졌다. 베르텔기아는 어디서 구했는지 하얀 꽃 하나를 책장으로 물어와 새로 만든 무덤 앞에 바쳤다. “가혹한 세상에서 벗어나 따뜻한 신의 품안에 안기길!” 김성철은 바위 위에 걸터앉아 한 권의 책을 보고 있었다. “…….” 에어푸르트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손에 넣었던 천공학파의 비전, 원시의 빛이다. 책장을 펼치자 무한한 지평선과 이해불가능한 도형과 문자들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고 이윽고 그 수많은 개체들은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형태로 배열되어 갔다. ‘이것이 원시의 빛인가. 말로서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의 난해함과 불가사의함을 갖추고 있군.’ 직관력 500이라는 수치는 아무나 달성하는 수치가 아니다. 최고의 마법학교라 불리는 곳에서도 한 명, 아니면 두 명 정도가 이 정도 경지에 오를까. 능히 대학자의 칭호를 받을 수 있는 경지인 것이다. 그렇게 달성한 직관력은 김성철에게 인간의 머리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 세상의 비밀을 이야기해줬다. 길고 지루한 것 같으면서도 귀를 뗄 수 없는 긴 이야기가 끝난 후, 김성철은 느꼈다. 자신의 앞에 자리 잡은 그 끝을 짐작할 수 없는 빛으로 가득 찬 생명의 원천을. ‘이것이... 원시의 빛인가.’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광휘 속에서 김성철은 새로운 힘이 자신의 몸안에 깃드는 걸 느꼈다. [ 당신은 천공학파의 최후의 비전 ‘원시의 빛 - 징벌’을 독파했다. ] [ 하늘과 우주의 지식이 당신 안에 충만하다. ] 보상 : 마법 “스타 라이트” “뭐하고 있는 거야? 묵념 안하고.”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등뒤로 다가와 책모서리로 쿡쿡 찔렀다. 예전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베스티아레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발언권과 입지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김성철은 달라붙는 베르텔기아를 잡아 주머니 안에 집어넣고는 북쪽 하늘을 바라봤다. 언제나 마계를 덮고 있는 검은 뇌운이 두텁게 덮여 아래로 스산한 붉은 번개를 방전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손가락을 들어 북녘 하늘을 가리켰다. 본능적으로 손가락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글레어 하고는 다르군.’ 메테오를 쓸 때만 해도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천공학파 최강의 마법이라는 원시의 빛이야.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지팡이 하나를 꺼냈다. 낡고 손을 많이 탄 오래된 참나무 지팡이었다. 김성철은 지팡이를 꺼내든 후 한참동안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걸 쓰게 될 줄이야.’ 무심한 눈에 감회가 차올랐다. “킁킁!” 베르텔기아가 못 보던 지팡이에 호기심을 보였다. “여자 냄새가 나는데? 누구 거야?” “…알 거 없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은 뒤 지팡이로 북녘을 가리켰다. 지팡이와 그의 몸 주위로 다채로운 마법진이 떠올랐다. 제법 긴 영창. 하지만 메테오보단 짧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내면을 충만하게 채우고 있는 어떤 마법의 시동어를 마음속으로 내뱉었다. “스타 라이트.” 지팡이 끝에서 마법진 하나가 기계장치처럼 활짝 펼쳐졌다. 그와 동시에 마법진 끝으로 거대한 빛의 기둥이 뿜어져 나왔다. 글레어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순수한 빛의 기둥이. 그 기둥을 허공을 갈라 북녘에 드리운 뇌운을 강타했다. 빛의 기둥이 사라진 후, 북녘 하늘을 덮은 뇌운군 사이에 또렷한 공백이 새겨졌다. 천공학파 최강의 마법 스타라이트가 새긴 궤적이다. 그가 만들어낸 궤적은 이윽고 구름들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전신의 마나가 순식간에 절반 이상 빠져나가는 공허감 속에서 김성철은 모처럼의 환희를 느꼈다. ‘이거라면 할 수 있다!’ 굳이 심해마종에게 실험할 필요도 없다. 원시의 빛은 진짜였고 최선의 해결책이었다. “우와... 저게 당신의 마법이야? 마치 칠영웅의 마법을 보는 거 같아.” 원시의 빛이 일으킨 후폭풍 때문일까. 빛의 기둥에 밀렸던 공기가 수축되며 강한 기류의 형태로 주변에 휘몰아쳤다. 베르텔기아가 소피아의 묘에 올려놓았던 꽃이 기류에 날려 하늘 위로 빨려 올려갔다. “앗!” 베르텔기아가 짤막한 비명을 내지르는 순간 김성철의 손이 꽃을 잡았다. 그는 그 꽃을 소피아의 영전에 바치고 돌로 단단히 고정시킨 뒤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반으로 갈라놓은 뇌운 사이를 향해. ======================================= 39. 악마궁을 향해서 (1) “세계의 적이 마계 최전선에 다시 나타났다.” “세계의 적은 인간제국의 미나모토 다이스케 제독을 일격에 때려죽이고 유유히 사라졌다.” “변경백 마르틴 브레가스는 급사했고 마계 최전선을 지킬 사람은 하나도 없게 되었다.” 마계 최전선에서 일어나는 급보가 세상 곳곳에 전해졌다. 트로윈의 허름한 주점에도 소식이 닿았다. 주점 한 구석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모험자가 답답한 듯 머리 위에 뒤집어 쓴 두건을 벗었다. 단정하게 묶은 검은 머리칼과 부드럽지만 강한 심지가 깃든 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 이수진. 그녀는 세상의 권력자 사이에 아무개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주점 안엔 세계의 적과 북단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떠들썩한 논쟁과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세계의 적, 김성철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 그가 사라진 뒤, 북쪽을 향해 마치 신의 창과 같은 빛줄기가 북쪽에 드리운 뇌운을 갈라버렸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식도 떠돌고 있었다. 아무개는 가볍게 출렁거리는 술잔을 불신에 가득 찬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어째서지?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악마들의 대군을 막아선 직후일 건데.”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조금씩 어긋나고 있다. 그녀가 보았던 미래가. * 이 세상에 집행자 아퀴로아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알려진 3명의 초월자 중 하나이며 대륙이걸, 세계의회의 집행자의 위치를 점한 아퀴로아는 신비롭고 베일에 싸인 부유군도의 도주이자 강력한 마술사로 황제 윌리엄 퀸튼 말버러와 힘을 합쳐 사악한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을 무너뜨린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정작 아퀴로아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서 아는 이는 드물다. 나이 지긋한 노파라는 것, 부유군도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강력한 마법사라는 것 따위의 단편적인 사실 이외에 알려진 기록은 전무하다. 나이도, 젊은 시절의 행적도, 가족 사항도 어느 하나 드러난 것이 없다. 이 세상에 정점에 있다는 대륙십삽걸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저마다 개성 강한 영웅들로 이루어진 대륙십삽걸 중에서도 아퀴로아는 비밀로 이루어진 유령 같은 존재였다. 그 아퀴로아가 은은한 어둠에 싸인 복도를 걸어 적막에 싸인 방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밀짚을 깐 허름한 침대 이외엔 가구도 창문도 없는 초라한 방이었다. 그 침대 위엔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아퀴로아는 그를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 이제 더는 기다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의 압도적인 강함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이미 만나서는 안 될 존재와 만난 것 같습니다.” 아퀴로아는 어둠 속에 앉은 사내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그녀가 고개를 조아리는 대상은 세상을 호령하는 인간제국의 황제도, 만년을 이어온 고대왕국의 왕도, 긍지 높은 드워프나 엘프들의 족장도 아니다. 오직 단 한 명. 대륙삼걸이자 흔히 방랑왕이라 불리는 왕관을 잃은 왕 한 명뿐이다. “…그래?” 과거 그를 일컫는 말이 있었다. 무위(無爲)의 암군(闇君) 크롬갈드. 인간제국이 들어서기 전 대륙 대부분을 지배하던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마지막 왕이다. 어릴 땐 세 개의 지문을 지닌 희대의 천재 마법사이자 무한한 잠재성을 지닌 검사라 불리며 촉망 받았으나 어느 순간부터 모든 일에 흥미를 잃고 방안에 들어박혀 자물쇠 만드는 일에 집착했다. 그가 국정을 돌보지 않는 동안 귀족들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갖은 수탈과 폭압을 일삼았다. 반란의 불길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한 사내가 반란군을 이끌었다. 윌리엄 퀸튼 말버러라는 소환자였다. 반란군은 대담하게도 수많은 거점과 요새들을 우회하고 왕국의 수도인 라그란제 앞까지 일거에 밀고 들어갔다. 한 번의 싸움에 대륙의 운명을 건 것이다. 그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크롬갈드 왕은 돌연 싸움을 포기하고 왕관을 반란군에게 넘겨줬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암군의 행보였다. 그 대가로 왕은 면책되었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 이후의 행적은 불분명하다. 후에 대륙십삽걸이 소집될 때 대륙삼걸이라는 지위를 얻은 것 이외엔 그는 왕국도 백성도 없이 홀로 세상 어딘가를 떠돌아다닌다고 알려져 있다. 세상은 그에게 방랑왕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투구. 온 몸을 가린 육중한 갑주. 그리고 염색되지 않은 희고 누르끼리한 천으로 만든 망토. 이것이 현재의 방랑왕을 나타내는 징표다. “제가 직접 나서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퀴로아는 다시 한 번 방랑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퀴로아의 뒤엔 인간을 닮은 무언가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인간이라기에는 너무나도 투명하고 길쭉한 신체를 지닌 그 괴생물체는 어둠에 반쯤 덮인 채 오직 커다란 길게 찢어진 타원형의 두 눈만을 소리 없이 번득이고 있었다. 커다란 두 눈 안엔 검은 색을 띤 부정한 기운이 맥박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방랑왕의 투구 안에서 한 차례 형형한 빛이 번득였다. “드디어 완성된 것인가? 나의 진정한 병사가?” 그의 시선은 아퀴로아의 뒤에 서 있는 괴인을 향하고 있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아직 완성 단계는 아닙니다. 하지만, 물리공격 일변도의 성장을 한 그 사내 상대로는 좋은 족쇄가 될지도 모릅니다.” “족쇄라...” 방랑왕의 눈앞에 족쇄와 쇠사슬에 묶인 앙상한 사내의 얼굴이 불현듯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앞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그 사내를 살려달라고 간청했던 여성의 얼굴도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때 놈을 죽였어야 했는데.’ 지난 일은 지난 일이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어느 곳으로 굴러갈지는 오직 신만이 알고 있다. 방랑왕은 짧은 상념을 끝내고 다시 아퀴로아 쪽을 응시했다. “…어떻게 할 건가?” “제가 직접 마계로 향하겠습니다. 휘하의 함대를 이끌고.” 결의에 찬 아퀴로아의 청에 방랑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에겐 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감당하기 어려운 재앙이 모든 것을 부셔버리기 전에 우리는 오랜 비원을 완성해야 한다.” “그 명, 받들겠나이다!” 방랑왕은 어둠 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아퀴로아 또한 뒤돌아서며 앞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김성철. 너 같은 어리석은 놈이 우리의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다.’ 가면 너머로 푸르스름한 불길이 스산하게 일렁였다. * “…….” 마계의 입구. 김성철 뒤엔 심해마종이 거대한 체구를 움츠리며 벌벌 떨고 있었다. 지능은 낮지만 그 낮은 지능의 근저까지 각인될 정도의 공포가 새겨진 것이다. 김성철은 심해마종을 내버려둔 채 마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회랑의 끝, 마계의 입구엔 수십 척의 공선이 떠올라 있었다. 인간제국의 함대다. “세계의 적! 너는 못 지나간다.” 그 아래엔 마계 최전선의 잔존병력을 긁어모은 잡다한 종족으로 이루어진 지상군이 방진을 펼치고 있었다. “팔 가라즈 내놔라! 도둑놈 새끼야!” 드워프 몇 명이 우렁찬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뱉어낸다. 이것이 재앙에 맞서기로 한 김성철의 선택에 대한 세상의 대답.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자신의 앞을 막은 이들을 응시했다. “어휴. 저것들 질리지도 않아?” 베르텔기아도 이제는 이런 광경에 익숙한 모양인지 한숨을 내쉬고 만다. 한편 김성철은 속으로 무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기이하군. 심해마종을 뚫고 저 정도의 병력이 집결하다니.’ 그런데 아까 지나쳐 온 심해마종 주위엔 전투의 흔적은 없었다. 시체 한 구도 없었다. 김성철 앞에선 하룻강아지에 불과하지만 원래 심해마종이란 게 그렇게 녹록한 상대는 아니다. 명색이 마계의 문지기다. 구세십자군을 박살냈던 것처럼 어떤 대군도 거대한 육체와 무시무시한 힘, 무엇보다 말도 안 되는 재생력으로 분쇄하는 것이 심해마종이라는 녀석이다. 그런 심해마종을 피해 없이 돌파했다는 건 하나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악마들과 협상을 한 건가?’ 기득권들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건 할 것이다. 사생아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철혈기사단 전체를 희생시킨 마르틴 브레가스가 그러하듯이. 한번 정도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김성철은 하늘 위에 떠오른 공선들을 응시했다. 유독 화려하게 치장된 커다란 공선 한 척이 눈에 띠었다. ‘저것이 기함인가?’ 김성철은 공선 위에 나부끼는 깃발을 확인했다. 인간제국을 상징하는 황금태양기 옆에 번개를 붙잡은 손을 형상화한 깃발 하나가 펄럭이고 있었다. 인간제국의 총신 드미트리 메디오프의 것이다. ‘놈의 기함은 벵가드였을 텐데.’ 김성철이 기억하는 그 배는 에어푸르트 사태 때 악마들과 교전 중에 대파됐다. 현재 드미트리 메디오프가 탑승한 배는 안드라고라스. 최신형의 중전함이다. ‘아무래도 좋겠지.’ 김성철에게 하늘을 나는 힘은 없다. 하지만 김성철은 하늘을 나는 공선에 이르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 생각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힘 또한 지니고 있었다. ‘노리는 건 드미트리 메디오프 단 하나.’ 마편 카산드라가 오랜만에 영혼창고에서 나왔다. 김성철은 마편 카산드라를 든 채 자신을 막아선 육군을 향해 달려갔다. 엘프 족 궁수의 활과 드워프들의 공성병기의 포탄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마편 카산드라가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이며 날아오는 화살과 포탄을 글자 그대로 분쇄시켰다. 상상을 초월한 잠력을 머금은 탓에 닿아버리는 것들을 튕겨내다 못해 아예 가루로 만들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김성철은 지상군 30미터 전방까지 접근했다. “창병 앞으로!” 드워프 장창병들이 자신의 키 다섯 배에 달하는 장창을 일제히 김성철을 향해 겨누었다. 척! 짧지만 단단한 군홧발들이 바닥을 차며 나무뿌리처럼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어떤 드워프도 그들의 방진이 김성철에게 효과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김성철은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장창을 오히려 손으로 잡고서는 그 힘을 이용해 드워프 방진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어딜 감히!” “죽어라!” 인간 기사들과 검사들이 칼과 철퇴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김성철은 그중 중갑을 걸친 기사 한 명의 뒷덜미를 잡고는 기사를 방패삼아 이리저리 휘둘러 다가오는 공격을 막아내며 하늘 위를 둘러봤다. 그의 눈에 뭔가 포착됐다. 공선들과 연결된 기구다. 비전투시에 공선들은 기구를 통해 지상군과 물자와 인력을 교환한다. 공선이 직접 내려갈 수도 있지만 느닷없이 불어오는 강풍에 휩쓸려 추락할 수도 있고 지상에 숨은 매복에게 기습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값 비싼 공선을 잃는 건 국가적으로도 커다란 손해이기 때문에 각 공선들은 기구들을 이용한다. 그런 연락 기구들이 도처에 있다. 휘리릭! 마편 카산드라가 그 중 하나에게서 늘어뜨린 밧줄을 휘감았다. 기구에 탄 병사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순간 기구가 휘청거리며 아래쪽으로 당겨졌다. 김성철이 마편 카산드라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뛰어 오른 것이다. “줄을 끊어라! 당장!” 하지만 그들이 뭔가 명하기도 전에 검은 형체가 기구 위로 올라왔다. 우악스런 손이 기구에 탄 병사들을 붙잡고 지면 아래로 던져버렸다. “우아아아악!” 병사들은 진흙 창에 처박혀 허우적거렸다. 맨땅이라도 죽진 않을 것이다. 제법 단련한 인간제국의 병사들이니. 기구 하나를 차지한 김성철은 기구와 지면 사이에 묶은 줄을 쳐내 기구를 상승시켰다. 아래에서 무수한 화살과 쇠뇌가 김성철을 노리고 날아왔지만 마편 카산드라가 펼치는 힘의 장막을 뚫을 수 없었다. 김성철이 기구에 올라탔다는 소식은 즉각 함대에 전달됐다. 상대적으로 운용이 용이한 소형쾌속 공선들이 기수를 틀어 포문을 김성철이 탄 기구를 향해 정조준했다. “발사!” 일제히 쏘아댄 포탄 몇 개가 기구를 찢고 지나갔다. 구멍 뚫린 기구는 힘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하지만 그 기구 안에 김성철은 어디에도 없었다. 기구 안에 있던 김성철은 적절한 고도가 확보되자마자 가장 가까이 있는 공선을 향해 도약한 것이다. 신적인 힘이 깃든 그의 도약은 그를 어느 공선의 갑판 위로 올려놓았다. 쿵! 팔 가라즈를 든 시대의 괴인이 배 위에 안착했다. 높은 모자를 쓴 함장 이하 모든 승무원의 머릿속에 공포라는 두 글자가 각인됐다. “…….” 김성철은 성큼성큼 함교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말했다. “꺼져라.” 함교 밖으로 십여 명의 승무원이 혼비백산하며 튀어 나왔다. 김성철은 키를 잡고 배의 방향을 틀었다. 목표는 전방에 있는 거대 공선 안드라고라스. 다른 공선들이 김성철이 배 하나를 장악한 걸 알고 포격을 가해왔지만 이미 김성철을 막기엔 늦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마자 김성철은 또 한 번의 도약을 실시했다. 타고 있던 배의 선수가 우지끈하며 박살날 정도의 힘이 실린 도약이었다. 쿵! 새라기보다는 그가 부리는 혜성처럼 날아간 김성철은 안드로고라스의 갑판 위에 안착했다. 그리고 자신을 경악에 가득 찬 눈으로 노려보는 사내를 응시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날 기억하나? 드미트리 메디오프.” “누.. 누구?” 얼굴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김성철의 손에 들린 망치를 본 순간,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김성철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어머니.’ ======================================= 39. 악마궁을 향해서 (2) “마.. 막아라!” 번쩍이는 검을 들고 화려한 예복을 입은 제국의 검사들이 김성철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마편 카산드라가 하늘을 가르자 그들은 파리채를 맞은 파리처럼 갑판 위에 너부러졌다. 김성철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기함 안드라고라스의 함교로 걸어갔다.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도망갈 곳을 찾았지만 눈앞의 김성철 상대로 도망친다는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여어 총신.” 김성철이 운명처럼 그 앞에 섰다. 김성철은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다만 무심한 눈으로 그를 들여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악마왕과 손을 잡았나?” 김성철이 물었다. 그의 질문은 지극히 단순했지만 그렇기에 핵심을 담고 있었다. 드미트리 메디오프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이윽고 그는 혼란스런 생각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도... 동맹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렇지 않소. 우리는 일시적인 필요에 의해...” 두서없이 말하고 있을 때 문득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목에 닿은 차갑고 딱딱한 촉감을 느꼈다. 팔 가라즈다. 팔 가라즈의 머리 부분이 그의 목에 닿은 것이다. “짧게.” 김성철이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헛소리를 지껄이면 죽여 버리겠다는 것이다. 궤변도 사형. 장광설도 사형. 이리저리 꼬는 말도 사형. 세치 혀를 놀리려고 작당하는 순간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바퀴에 깔린 생쥐 꼴이 될 것이다. “혀.. 협상을 했소.”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자포자기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협상?” “다.. 당신을 악마왕에게 가지 않게끔 하는...” “그렇군.” 듣고 싶은 말을 들은 김성철은 목을 겨눈 팔 가라즈를 거두고는 뒤돌아섰다. 게다가 드미트리 메디오프엔 별 다른 원한도 없다. 황금도시에서 본 그는 거만했고 잰 체 했지만 실상은 기득권 밑에 기생한 충직한 사냥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베르텔기아가 물었다. “가던 길마저 가야지.” 김성철은 선수 쪽으로 걸어갔다. 죽다 살아난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자신의 목을 매만지며 김성철의 뒷모습을 멍한 눈으로 응시했다. 선수의 끝에 이른 김성철은 뒤를 돌아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오면 그때는 진짜 죽인다.”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움츠러든 채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김성철을 막기 위해 마계 최전선으로 파견된 인간제국 다섯 개 함대의 임무가 실패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 이제 마계에 인간은 김성철 하나뿐이다.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대지 너머엔 이따금 원인을 알 수 없는 알록달록한 빛이 기괴하게 어두운 하늘을 밝혔고 먼 하늘 위에선 외로운 고함소리가 느닷없이 울려 퍼지곤 했다. 코끝엔 매캐한 유황 냄새가 그림자처럼 따라 붙는다. 유황 내가 어느 정도 사라질 때가 오면 본격적인 악마들의 영지에 선 것이다. 그 말은 지금까지 겪어온 단편적인 습격, 사고에 가까운 조우 대신 조직적인 저항에 부딪치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김성철의 손에 들린 신물은 악마 군세의 습격을 예방했다. 멀리서 대군을 이끌고 오던 악마군주는 김성철이 지닌 팔 가라즈를 보자마자 군대를 돌려 부리나케 자신의 성으로 틀어박혔다. 악마들의 심리를 잘 아는 김성철은 그 악마가 도망친 건 반 쯤은 자신이 무서워서 그런 것이겠지만 나머지 반은 다른 악마에게 어부지리를 주기 싫어서라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악마들은 오로지 순수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생물이기에. 인간의 마음에서 이타심과 배려, 존중과 신뢰 따위의 덕성을 거세하면 악마가 가진 속성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나온다. 먹구름과 유황, 안개로 뒤덮인 마계의 하늘 아래에서는 낮과 밤이 따로 없다. 김성철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악마왕의 궁전으로 향해 걸어갔다. 속도를 높이지 않는 것은 혹시 있을 암습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이고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경우도 있는 법이니. 황야를 걷던 중 김성철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거무스름한 대지에 대롱 같은 것들이 풀처럼 삐죽 나와 있었다. 그 숫자가 어찌나 많은지 멀리서 보면 초원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규모다. 그런데 마계의 지상엔 풀이 자라지 않는다. 군데군데 난 바위틈이나 지하공동이라면 모를까. 김성철은 마편 카산드라를 꺼내 그 대롱 부분을 강하게 후려쳤다. 채찍이 닿자 주변의 공기가 일순 긴장하던 이윽고 빛나는 섬광과 함께 맹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 한 번의 폭발로는 김성철에게 어떤 타격도 주지 못하겠지만 그 숫자가 누적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지평선까지 뻗은 초원으로 보였던 모든 것들이 동시에 때로는 연쇄적으로 폭발을 일으켰다. 어두운 대지는 대낮처럼 훤히 밝혀졌고 지축은 수 분 동안 흔들렸다. “우와... 저기 있었으면 뼈도 못 추릴 뻔했네.” 베르텔기아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 김성철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텔기아는 폭발에 휘말려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폭발이 그친 뒤 김성철은 여기저기 구멍이 파인 달라진 풍경을 걷기 시작했다. “당신은 왜 재앙에 맞서는 거야?” 길을 걷던 중 베르텔기아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 전까진 묻지 않은 주제였다. 그녀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김성철을 창조술사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므로. 그러던 것이 막상 악마왕의 처치에 가까워지자 갑자기 궁금해진 것이다.. “혹시 영웅이 되려는 거야? 칠영웅처럼 세상을 구하려고?” 베르텔기아가 옆에서 귀찮게 하자 김성철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난 영웅이 아니다.” 베르텔기아는 그 뒤로 몇 마디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김성철의 얼굴과 눈빛이 지금까지와 달리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성철의 경직이 풀린 것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는 어둠 속에서 일렁거리고 있는 거대한 검은 바위산을 보았다. 바위산에 점점 가까워지자 지평선에 가렸던 아래 부분이 점차 드러났다. 바위산 아래엔 마치 악마의 얼굴처럼 두 눈과 입이 뚫려 붉은 화염을 토해내고 있었다. 단조롭고 음울한 마계에 새겨진 하나의 경이. 판데모니엄. 그곳에 악마왕이 있다. 악마왕의 궁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김성철이 말했다. “절멸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다.” “으응?” 갑작스런 말에 베르텔기아는 어리둥절했다. “아까 묻지 않았나? 내가 왜 재앙에 맞서는지.” “아... 그거?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아서...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알고 있으라는 의미다.”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고는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느릿한 발걸음이 점차 빠르게 움직이고 이윽고 구보로 변했다. 주변의 풍경이 바람과 함께 휙휙 지나갔다. 하지만 멀리 보이는 악마왕의 궁전은 결코 가까워지지 않았다. 김성철과 궁전 사이엔 대단히 먼 거리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불을 뿜는 얼굴의 형상을 한 산의 크기는 그토록 거대했다. 일국의 모든 산을 쌓아올려도 그보다 클 순 없을 것이다. 또 간헐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화염은 하늘을 흐르는 구름까지 닿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구름은 붉은 번개를 쏘아내며 한 바탕 소나기를 바닥에 흩뿌리지만 날름거리는 거대한 화염은 소나기가 지면에 닿기도 전에 삼켜버린다. 김성철은 그치지 않는 비가 내리는 메마른 땅 위에 진입했다. 그 앞으로 무수한 악마들의 무리가 포진하고 있었다. 기회주의적인 악마군주들의 병사가 아닌 악마왕 해서니우스 맥스의 군세들이다. “…….”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군세를 응시했다. 이름 있는 놈들은 이전 원정에서 모조리 처치한 탓인지 그다지 강해보이는 녀석은 없었다. ‘최대한 빨리 끝낸다.’ 김성철은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앞으로 걸어갔다. 작지만 거대한 한 걸음이 바닥을 내딛는 그 순간 악마들의 군세 위에 빛나는 마법진이 나타났다. 김성철은 그 마법진의 형태가 대단히 정교한 장거리 텔레포트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마법술식이 악마의 것이 아닌 인간의 것이라는 사실 또한 읽어냈다. 마법진 너머에선 순백의 동체를 지닌 미려한 공선이 나타났다. 김성철의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저건 프로크루스테스. 아퀴로아의 기함 아닌가?’ 대륙이걸 집행자 아퀴로아. 8년 전, 판데모니엄 앞에서 다른 열두 명의 영웅들을 돌려세운 흑막이 감히 김성철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김성철의 눈동자 한 구석에 이글거리는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너만은 반드시 죽이려고 했었다.’ 김성철의 뇌리에 나무처럼 잠든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늘 홍조가 감돌고 말랑했던 피부는 이제 나무껍질처럼 딱딱하게 굳었고 표면엔 하얀 곰팡이가 눈처럼 내려앉아 있다. “겁도 없군.” 김성철이 내뱉듯이 말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감정이 담긴 한 마디였다. 김성철의 주머니 안에 있던 베르텔기아는 그의 심장이 평소와는 다르게 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백의 공선은 마법진을 빠져 나와 악마들의 머리 위에 정선했다. 공선 위엔 누구도 독해할 수 없는 문자가 새겨진 가면을 쓴 로브를 걸친 노파가 서 있었다. “김성철! 너는 네가 지금 무슨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는지 모른단 말이냐?!” 아퀴로아가 꾸짖듯이 말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당장 그 어리석은 일을 멈추고 돌아가라. 그러면 너의 목숨을 살려주는 건 물론 너의 명예를 복구해주는 일도 고려해보겠다.” 그 순간 땅이 한 차례 크게 울렸다. 팔 가라즈가 지면을 후려친 것이다. 군집한 악마들은 예상치 못한 진동에 두려워하며 혼란에 빠졌다. 한 악마가 김성철 쪽을 발견했다. “저... 저길 봐라!” 악마의 손끝이 가리키고 있는 곳엔 집채 만한 바위를 든 김성철이 자리 잡고 있었다. “…….” 김성철은 바위를 가볍게 들어올리더니 팔 가라즈로 허공에 뜬 바위를 강하게 후려쳤다. 거대한 바위는 야구공처럼 날아가 순백의 공선을 강타했다. 쿵! 단 일격에 공선의 기수가 옆으로 틀어지고 여기저기 균열이 일어났다. 그리고 거대한 충격으로 선수에 기세 좋게 올라와 있던 아퀴로아 또한 휘청거렸다. “멍청한 놈! 예나 지금이나!” 아퀴로아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뒤로 두 개의 인간을 닮은 기이한 형체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가라! 나의 병사들이여! 저 어리석은 놈이 못난 짓을 못하게 막아라!” 두 개의 형체는 그대로 공선에서 뛰어내려 김성철을 향해 몸을 날렸다. 김성철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저건 뭐지?’ 백전연마된 그의 경험과 지식으로도 알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모른다고 해서 봐주지는 않는 법. 김성철은 지면을 팔 가라즈로 후려쳐 무수한 돌의 파편을 괴생명체에게 날려 보냈다. 가벼운 일격이라고 하나 신적인 힘이 깃든 파편들은 여간한 생명체는 걸레조각으로 만들 정도의 힘을 싣고 있다. 그 파편들이 괴생명체에게 적중했다. 그런데 파편이 적중하는 순간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파편이 그대로 반투명한 신체를 뚫고 지나가는 게 아닌가? 김성철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슬라임 계열인가?’ 그 모습을 본 아퀴로아가 이죽거렸다. ‘크크크... 넌 그저 무식한 전사 나부랭이였지. 검과 마법의 조화라는 유구한 전통을 따라가지 못한 나부랭이. 하나에 치우친 성장을 했다는 건 그만큼 약점이 뚜렷하다는 건 왜 모르는 걸까?’ 그녀가 만들어낸 괴인은 슬라임 이상의 유연함과 강도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날카로운 보검이라면 모를까, 둔기처럼 힘을 전달하는 무기엔 완벽한 내성을 지닌다. 그런데 이전에도 같은 생각을 한 존재가 있었다. 마계서열 2위 칸트 에밀. 그는 육체를 버리고 슬라임 화되어 김성철의 공격을 막아보려 했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잔꾀는 압도적인 힘 앞에 먼지처럼 부셔지는 법이다. 퍽! 김성철의 망치가 달라붙는 놈들을 후려쳤다. 여러 번 후려친 것도 아니었다. 단 한 번. 단 한 번의 타격으로 괴인은 글자 그대로 터져나갔다. 그 잘난 물리내성도 재생력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퀴로아의 몸이 순간 경직됐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실험에서는 힘 수치 700대의 일격도 견뎌냈는데...?!’ 그녀는 아직 김성철의 진정한 힘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고 있었다. 괴인을 처리한 김성철이 다시금 바위를 들어올렸다. 목표는 아퀴로아의 기함 프로크루스테스. 아퀴로아는 현실을 깨닫고 다급하게 팔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김성철! 할 이야기가 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김성철은 팔 가라즈로 바위를 날려보냈다. 순백의 기함이 요동치며 크게 흔들렸고 마스트 하나가 우지끈 부러지며 쓰러졌다. 혼란스런 갑판 위에서 아퀴로아는 다시 말했다. “네가 왜 실망한 지 안다. 우리가 단순히 재앙을 유예하려 해서 실망한 거 아니냐?” “잘 아는군.” “우리는 재앙을 유예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는 다른 방법을 준비하고 있다!” “그걸 왜 이제야 이야기하는 거지?” “그때 넌 보잘 것 없었으니까. 솔직히 그때 황제 덕이 아니었다면 대륙십삽걸에도 끼지 못하는 게 네 수준 아니었나? 그런 너에게 정보를 공유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이제는 방법이 생겼다 이건가?” 김성철이 바위를 내려놓으며 냉소적인 시선을 아퀴로아에게 보냈다. 아퀴로아는 발밑부터 솟아오르는 굴욕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라. 그 방법을.” 김성철이 말했다. “그건 말할 수 없다.” “그래?” 김성철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망치를 내려놓았다. 그걸 본 아퀴로아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리고 우리에겐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실언이다. 해서는 안될 말이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소름끼치는 살의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퀴로아는 크게 당황하며 다급히 말했다. “기다려라!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조금만 기다리면 그것이 완성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간, 시간이라고!” “재앙을 미룰 수 있다고 생각하나? 미룰 수 있다고 한들 얼마만큼의 희생이 더 나타나길 원하는가? 너희들 이외에 모든 이들이 죽은 이후에?” 김성철의 담담한 눈빛을 본 아퀴로아는 더 이상의 협상은 통용되지 않는다는 걸 직감했다. 그녀는 두 주먹을 미친 듯이 휘저으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내뱉듯이 소리 질렀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 김성철!” “…….” “네가 구하려는 그 아이는 네 핏줄도 아니잖아!”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고개를 숙여 주머니 안을 응시하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베르텔기아.” “응.” “잠시 창고 안에 들어가 있거라.” 베르텔기아가 주저하자 김성철은 그답지 않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길지는 않을 것이다.” ======================================= 40. 해서니우스 맥스 (1) 쿵! 쿵! 대지가 포탄이 되어 순백의 공선을 두들겼다. 보는 이의 찬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선체는 무자비한 포격에 요동치고 기울어졌고 이윽고 뒤틀렸다. “어서 텔레포트를 시전하라! 어서!” 공선 중앙에 원형진을 이룬 차원학파 마법사들이 영창을 시전하기 시작했지만 대단위 집단을 텔레포트 하는 것을 쉬운 일이 아니다. 마법진의 형상이 그려지려고 하면 바위가 선체를 거칠게 흔들었고 그때마다 마법사들의 영창이 중단됐다. 쿵! 쿵! 연거푸 두 대의 바위가 선미를 연달아 강타했다. 뒤틀리기 시작한 선체가 마침내 균형을 잃고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대리석을 덧대 만든 갑판이 도미노처럼 무너지며 갑판 위의 사람들을 휩쓸었고 마스트 아래 치렁치렁 늘여놓은 삭구는 이제 가공할 살인무기가 되어 승무원을 덮쳤다. 침몰하는 공선의 선수에서 아퀴로아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자신을 향해 공격을 퍼붓는 김성철을 노려보고 있었다. ‘감히 너 따위 하잘 것 없는 소환자가...’ 아직도 실감나지 않았다. 자신이 저 따위 근본 없는 인간에게 이토록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퀴로아님! 어서 퇴함하셔야 합니다. 배가 침몰하고 있습니다!” 선장이 그녀 뒤로 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퀴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갑판 위엔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중 아퀴로아에게 충격을 준 것은 차원학파의 마법사들의 최후였다. 둥글게 모여 영창을 하던 차원학파의 마법사들은 흉기가 된 삭구에 매달려 마리오네트처럼 매달린 채 죽어 있었다. ‘배를 건지긴 어렵겠군. 이렇게 된 이상 홀로 달아나는 수밖에.’ 그녀는 짧은 영창과 동시에 순간 이동했다. 마법에 숙달된 그녀는 순간 이동 시전과 동시에 영창을 실시했고 그 모습은 마치 그녀가 허공 위를 걸어다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김성철이 그걸 그냥 놔둘 리가 없다. 그는 아퀴로아의 동선을 예측해 바위를 날렸다. “건방지게!” 아퀴로아는 두 개의 지팡이를 꺼내 거칠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녀 앞에 강렬한 폭파가 일어나며 날아오는 바위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얇은 파편이 그녀 주위로 날아들었지만 그녀 주위에 펼쳐진 마법방어막이 파편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했다. 김성철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바위를 내려놓고 아퀴로아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걷던 걸음이 구보로 바뀌고 구보는 곧 질주로 바뀌었다. 한줄기 질풍이 된 그는 수천수만의 악마들을 뚫고 아퀴로아가 달아가는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뒤통수가 서늘한 느낌에 뒤를 응시하던 아퀴로아는 곧 김성철이 자신의 뒤를 바짝 쫓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괴물이!” 두 개의 지팡이에서 각기 다른 마법이 시전됐다. 하나의 지팡이로는 얼음장벽을 만들어 김성철의 앞길을 막았고 다른 지팡이로는 주변에 가득한 번개의 기운을 빌려 김성철을 향해 내려치게 했다. 쿠르릉! 쾅! 번쩍하고 한줄기 번개가 김성철을 향해 내려갔다. 번개가 그를 강타하는 순간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들어올렸다. 하늘의 파편을 벼려 만들었다는 그 망치를 번개를 머금은 채 앞을 가로막은 얼음장벽을 후려쳤다. 천둥보다 더 큰 소리가 나며 얼음장벽이 산산조각 났고 그 사이로 김성철이 한 마리 야수처럼 튀어 나왔다. 아퀴로아는 대경실색하며 다음 수를 생각하려 했지만 그 전에 김성철의 손이 그녀의 멱살을 붙잡았다. “넌 항상 날 깔봤었지.” “이.. 이 소환자 따위가...” “이제는 내가 널 내려 볼 차례다.” 김성철은 멱살을 잡은 채 아퀴로아를 지면에 메다꽂았다. “프.. 플라이!” 아퀴로아가 마법의 날개를 등줄기에 만들어내며 저항해보려 하지만 그녀의 몸에 실린 힘은 급조한 마법 따위로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아퀴로아는 악마들이 모인 곳에 혜성처럼 처박혀 바퀴처럼 엉망으로 바닥을 뒹군 후에야 멈췄다. “끄.. 끄으으....” 가면 일부분이 부서졌다. 부서진 가면 사이론 고집스런 붉은 눈동자가 드러나 있었다. 김성철은 그녀 앞에 죽음의 천사처럼 내려앉았다. “이게 끝인가?” 김성철이 은근한 조롱조로 말했다. 아퀴로아는 이를 악물며 일어서 자신이 아는 모든 마법을 김성철에게 퍼부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김성철에게 타격을 줄 수 없었다. 김성철은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갖고 놀 듯 아퀴로아의 발악을 피하거나 혹은 박살내며 그녀의 모든 시도를 무산시켰다. “이게 전분가? 그 잘난 집행자의 실력이?”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옷자락 하나 상하지 않은 상태로 김성철이 말했다. 아퀴로아의 눈에 비친 김성철은 이제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처럼 보였다. 부서진 가면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에 마침내 절망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김성철은 천천히 팔 가라즈를 들어올렸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악연도 끝내야겠군.” “기다려! 아직 할 말이 있다! 나는... 나는... 하수인일 뿐이야!” “…….” “진짜 이 일을 기획한 건 내가 아니야. 나는 그저 크롬갈드 왕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방랑왕이...?” 창백하고 무기력하던 사내의 얼굴이 불현 듯 김성철의 눈앞에 떠올랐다. 김성철은 방랑왕에 대해 악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반 루테기네아 반란군에 속했던 대부분의 장수들이 그러하듯 은근한 호감마저 갖고 있었다. 방랑왕이 스스로 왕관을 내려놓지 않았다면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을지는 아무도 모르므로. 게다가 김성철은 방랑왕의 명으로 목숨을 건진 적이 있었다. 누군가의 간청의 못 이겨 귀찮다는 투로 내린 명이라고 해도 덕분에 관대한 처분을 받은 건 사실이다. “그리고 나를 죽여도 달라지는 건 없다. 아퀴로아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날 죽여도 날 대신할 아퀴로아가 부유군도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니 이 늙은 노인에게 아량을 베풀어 주시게.” 아퀴로아는 계속해서 말했다. 김성철은 눈을 살짝 감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 했다. 곧 그가 뒤돌아섰다. “내 방랑왕에게 직접 이 사실을 말하겠다.” 김성철이 노리는 바는 명확하다. 깨진 가면 너머로 드러난 아퀴로아의 눈동자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두려움이 교차했다. “꺼져라.” 김성철은 아퀴로아를 버려두고 앞으로 걸어갔다. 아퀴로아는 주저하고 또 주저하다가 이윽고 눈동자에 소름끼치는 살기를 머금었다. 그녀의 전신에 마법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감히 내 앞에서 그런 망발을 하다니 살려두지 않겠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파멸적인 마법 - 썬더 브레이크를 구사하려고 하고 있었다. 7위계에 속하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바람 학파의 최종 마법. 마법지문을 벗어난 마법의 시도에 가면 바깥으로 드러난 아퀴로아의 추한 얼굴 너머로 푸른 선이 스스로 발하며 기하학적인 형태를 드러냈다. 인공 마법지문. 지금은 실전된 고대의 기술이다. 하지만 아퀴로아의 모든 행동은 김성철의 안배 하에 있었다. “역시 사냥개들의 행동은 한결 같군.” 김성철이 뒤돌아섰다. 아퀴로아의 영창이 막 끝나려고 하는 찰나였다. 김성철은 예전에 아퀴로아의 썬더 브레이크를 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이 마왕성 앞에서. 아퀴로아는 자신이 왜 대륙이걸인지 증명하기 위해, 그리고 일종의 무력시위로 그 마법을 사용했겠지만 세월이 지난 현재엔 약점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조.. 조금만 더!’ 마법진으로 가득 찬, 그리고 드러난 얼굴에 푸른 핏줄 같은 마법지문으로 빛내고 있는 아퀴로아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김성철이 다가왔다. “길바닥에 똥을 싸놓은 걸 주인에게 이르겠다고 하면 이런 식으로 덤벼들더군.” “자.. 잠깐!” 아퀴로아는 다급하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김성철은 용서하지 않는다. 퍽! 팔 가라즈가 마법의 광휘로 빛나는 집행자를 찍어눌렀다. 집행자의 시체는 마법진을 안은 채 찌그러졌다. “나는 네 주인보다 무서운 사람이다.”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시체를 무심한 눈으로 노려보며 김성철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체에서 거무스름한 기운이 불길하게 위로 퍼져 나갔다. 그 기운은 걸레짝이 된 아퀴로아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상반신 전체가 한 줌 핏물로 화한 아퀴로아는 부활하지 못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부정한 기운은 아퀴로아의 옷자락만을 살아 있을 때의 형태로 유지하다 이내 하늘 저편으로 날아갔다. 김성철은 그것이 미나모토에게서 풍기던 기운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영혼 각인이 아닌 다른 힘인가.’ 하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김성철은 고개를 돌려 불을 뿜는 악마왕의 궁궐을 응시했다.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악마들이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곳을 향해 홀로 나아갔다. 악마들이 노호성을 지르며 파도처럼 덮쳐왔다. 김성철은 묵묵히 앞으로 전진 했다. 시체의 산과 피의 강을 만들며. 이름이 알려진 쟁쟁한 악마들이 차례차례 김성철의 손에 죽어나갔고 급기야 악마들은 등을 보이고 도망가기에 이르렀다. 이제 김성철을 가로 막은 건 악마의 섬뜩한 형상을 새긴 악마궁의 정문이다. 열쇠는 없고 안쪽에서 열어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답은 가까운 곳에 있다. 육중한 철문이 박살났다. 암벽 그 자체를 깎아 만든 거대한 열주 사이로 깔린 핏빛 융단이 어둠에 싸인 안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김성철은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다. 기둥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갖은 악마가 기습을 해왔다. 독을 뿌리는 악마, 저주를 퍼붓는 악마, 눈에 보이지도 않을 강침을 뿌리는 악마등 종류는 다채로웠지만 결과는 같았다. 암살자가 덤벼들 때 마다 김성철의 망치는 사상자를 늘려나갔다. 곧 융단의 끝이 보였다. 보라색 등불이 타오르는 퇴폐적이고 권태로운 공간 끝에 거대한 옥좌가 놓여 있었다. 옥좌 위엔 김성철이 잘 아는 시신이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죽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새. 김성철은 악마왕의 시신 주변에 자그만 소악마들이 부지런히 오가며 일종의 방부처리를 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악마들의 왕은 박제되고 있는 자신의 시신 옆에 희끄무레한 형태로 자리 잡고 있었다. “또 찾아왔군.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아니 정확한 숫자는 매긴다면 세 번이라고 해야 하나. 이제는 놀랍다못해 정겹기까지 하군.” 악마왕 해서니우스 맥스는 김성철을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제법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양 팔을 벌려 김성철을 환영했다. “마법은 익히고 오셨나? 하지만 네가 아무리 마법의 천재라고 해도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오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힘 자랑 하러 오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해서니우스 맥스의 목소리와 희끄무레한 얼굴엔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김성철이 절대 자신을 해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하지만 너도 참 어리석은 인간이군. 다른 인간들의 미움을 그렇게 받고도 재앙을 해결하겠다고 혼자 달려드는 꼬락서니라니. 나는 최근 인간들의 속어를 연구하고 있는데 우연한 기회에 호구라는 말을 알게 되었지. 너의 얼굴이 바로 떠오르더군.” “…….” 김성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영혼 창고에서 스크롤 하나를 꺼냈다. 베스티아레가 넘긴 하르마게돈 스크롤이다. 해서니우스 맥스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그... 그것은...?!” 해서니우스 맥스 정도의 강력한 마법사는 막강한 주문을 담은 스크롤을 겉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범상치 않은 종이 위에 은은히 흐르는 파멸적인 기운이 악마왕의 눈동자를 어지럽혔다. ‘7위계... 아니 8위계의 주문이 담긴 스크롤인가. 어디서 그런 걸. 인간들의 기술로는 결코 만들어 낼 수 없을 텐데!’ 악마왕의 얼굴에서 여유가 싹 사라졌다. “설마... 칠영웅. 그 놈들이 널 사주한 건가?” “어떻게 그걸 알지?” 김성철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재앙이 되면 알 수 있다. 내 뒤에 선 녀석들이 한시 바삐 세상에 나오고 싶어 한다는 걸 말이야. 왠 줄 아나?” “…….” “우리들은 하나의 실로 묶였기 때문이지. 재앙이라는 신의 권능에 의해서 말이야.” ======================================= 40. 해서니우스 맥스 (2) 해서니우스 맥스는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하며 김성철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보기에 김성철은 지금 당장 싸울 의사는 없어 보였다. 타협의 여지가 있다. 눈치 빠른 악마왕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칠영웅을 믿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아주 어리석은 일이고말고. 놈들의 목적이 뭔 줄 아나?” “합당한 보상.” 김성철의 말은 몇 남지 않은 오랜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세상을 재앙으로부터 구한 칠영웅은 그들의 대가를 요구했지만 그들이 구한 세상은 그들이 원하는 대가를 결코 내주지 않았다. 칠영웅은 쓸쓸히 역사에서 퇴장했다. 때가 되면 그들의 몫을 찾으러 가겠다는 말과 함께. 악마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틀렸어. 놈들이 원하는 건 단 하나다.” 악마왕이 히죽 웃었다. “모든 인간의 죽음. 그리하여 하나의 시대를 끝내는 것.” “과격하군.” “그래. 대단히 과격하지. 우리 선량한 악마들에 비하면 말이야.” 악마왕의 손이 악단의 지휘자처럼 허공을 리드미컬하게 갈랐다. 그러자 김성철과 악마왕 사이에 한 사내의 환영이 떠올랐다. 소년의 키 만한 양손 검을 든 두건을 쓴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사내였다. 악마왕이 말했다. “너는 모르겠지만 대략 20년 전 쯤이었을 거야. 너 말고도 홀로 내게 도전한 자가 있었다. 대단한 강자였지.” 김성철은 다시금 악마왕이 만들어낸 허상을 보았다. “그때 그 녀석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했었다. 날 처치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떤 재앙이 잇따라 가련한 필멸자에게 덮칠 것인지 말이야.” “그래서 결론은?” 김성철이 흥미를 보였다. 악마왕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는 그대로 돌아가더군. 왜냐하면 내 말은 정론이거든.” “그 사내는 누굴 말하는 거지?” 김성철이 흥미를 보이자 악마왕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작당을 꾸몄다. “원한다면 그 자의 정체를 알려줄 수도 있어. 하지만 공짜로는 안 돼. 그 스크롤을 내게 넘겨라.” “이걸?” 김성철이 하르마게돈 스크롤을 흔들어보였다. “그렇다. 그걸 내게 넘겨라. 그러면 1년 뒤에 그 사내의 정체를 알려주겠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김성철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역시 악마들이란 한결 같군.’ 김성철은 잠시 생각을 하는 척하면서 뒤돌아섰다. 툭. 스크롤이 바닥에 떨어졌다. 악마왕의 눈이 번쩍하고 빛이 났다. ‘크크크... 걸려들었군.’ 악마왕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1년이 지나면 나의 강화된 새로운 육체가 태어난다. 그것이 완성되면 최소한 저 괴물에게 전처럼 쉽게 당하진 않을 것이다.’ 그는 김성철을 속아 넘겼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속고 있는 건 그 자신이었다. 뒤돌아 선 김성철의 입은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머리로 기억한 것이 아닌 김성철이라는 존재 자체가 받아들인 주문. 김성철의 의식은 언젠가 보았던 찬란했던 원시의 빛의 기억에 대해 명료하게 접근하고 있었다. 무한한 우주에서 홀로 빛나며 모든 것을 광휘로 물들이는 생명 혹은 죽음의 빛. 김성철의 영창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어이. 부수는 자. 뭐.. 뭐 하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 해서니우스 맥스는 뒤늦게 김성철의 몸에 피어오르는 무시무시한 마법의 기운을 느꼈다. 등을 보이고 있는 김성철 주위로 다채로운 마법진이 꽃처럼 피어났다. 악마왕은 곧 그것이 천공학파의 마법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메.. 메테오라도 쓸 생각인가?! 놈이 언제 이런 걸 익힌 거지?’ 김성철이 뒤돌아섰다. 그의 손이 무언가를 악마왕을 향해 흩뿌렸다. 검게 빛나는 가루. 연금술로 만들어 낸 흑수정이다. 최상의 품질은 아니지만 흑수정을 살포된 지역에서 김성철의 주문의 위력은 대폭 증가한다. “우리. 이러지 말자고!” 악마왕이 손을 내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는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메테오 따위야 피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김성철이 준비한 마법은 메테오가 아니다. 김성철은 악마왕을 노려보며 영창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몸 안에 무한한 별의 기운이 충만한 것이 느껴졌다. 영혼 창고에서 오래 된 지팡이가 나타났다. 지팡이를 쥐는 순간 김성철의 눈동자에 애틋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곧 영창이 끝났다. 한 손엔 팔 가라즈, 다른 한 손엔 오래된 지팡이를 쥔 김성철은 악마왕을 향해 지팡이를 겨누었다. ‘스타 라이트.’ 시동어를 마음속으로 되뇌는 순간, 거대한 빛줄기가 지팡이 끝에서 발사됐다. “포... 폭력 반대!!!!!” 빛줄기는 그대로 영체화 된 악마왕을 덮쳤다. 영체화된 악마왕의 몸이 타들어갔다. 아니, 분해된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스타 라이트는 악마왕의 형체를 절반 이상이나 소멸시켜버렸다. 하지만 상대방은 모든 악마들을 휘어잡은 악마 중의 악마. “으그그그그!!! 끄으으으으!!!” 한 번의 스타 라이트를 기어코 견뎌내려고 하고 있었다. “죽을 수 없다.. 어떻게.. 어떻게 오른 자리인데!” 몸이 분해되는 와중에 필사적으로 회복마법을 펼치며 분해되는 육신을 재구축하는 악마왕의 눈동자엔 무엇보다 강한 생의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다. [ 메아리 X1 ] 하나의 빛줄기가 사그라지자 또 하나의 빛줄기가 지팡이 끝에서 쏟아져 나와 이미 산화하고 있는 악마왕을 덮쳤다. 아무리 악마왕이라고 해도 두 번의 스타 라이트는 견디기 버거운 것이었다. “끄... 키아아아아악!!!!!!” 재생속도가 소멸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악마왕은 빛 속에서 소멸됐다. 악마왕은 사라졌다. 흔한 저주의 말조차 남기지 못한 채. “…….” 빛이 사라진 후 김성철은 심각한 어지러움과 함께 무기력함을 느꼈다. 7위계 마법인 스타라이트를 메아리와 곁들여 사용했기 때문에 체내의 모든 마나가 빠져나간 탓이다.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베르텔기아를 꺼냈다. “빨리 꺼내준다면서!” 김성철을 책 모서리로 툭툭 찌르던 베르텔기아는 문득 주변을 돌아보며 어벙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여긴 어디야?” 김성철은 손가락으로 거대한 옥좌 위에 앉은 악마왕의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악마왕의 궁전이다.” “히.. 히이..! 정말? 악마왕은?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저거.. 죽은 거야?” 베르텔기아의 말에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권좌 위에 앉은 악마왕의 시체가 가루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영체화된 실체가 소멸했기에 육체 또한 따라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첫 번째 재앙을 해결했다.’ 김성철의 눈동자엔 보기 드문 감회가 서려 있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김성철은 숨이 막힐 것 같은 커다란 충격을 느꼈다. 무언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곧 빛나는 문자가 김성철의 시야를 덮어나갔다. [ 당신은 첫 번째 재앙을 해결했다. ] [ 당신은 축복 “재앙에 맞서는 자”를 획득했다. ] [ 신들의 눈이 당신을 향한다. ] 보상 : 1. 축복 “재앙에 맞서는 자” 2. 재앙의 파편 김성철 앞에 무언가 떨어졌다. 짙은 녹색 빛을 띤 차가운 느낌을 주는 넓적한 돌조각이었다. 일견 무가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김성철은 조각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무심코 손이 조각을 향해 뻗어나갔다. 조각의 촉감은 꺼끌꺼끌하고 얼음처럼 찼다. 범상치 않은 물건이다. 김성철은 그것을 감정하려 했지만 진실의 눈으로도 그 조각은 감정할 수 없었다. ‘전설급 이상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이 조각의 등급은 신화급이라는 소리군.’ 일단은 창고에 넣는 것이 옳아 보인다. 하지만 영혼 창고는 그 파편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파편은 창고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지면으로 떨어졌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말도 안 되는 걸 손에 넣은 모양이군.’ 그런데 아직 놀랄 일은 끝나지 않았다. 악마왕의 시체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단순한 연기가 아니다. 연기를 이루는 미립자 하나하나가 끝을 짐작할 수 없는 악의와 허무로 채워진 부정한 기운이다. 김성철은 그런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미나모토와 아퀴로아를 처치할 때 비슷한 것을 보긴 했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순수한 악의로 점철된 거대한 연기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김성철은 그것이 뭔지 몰랐지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이것이... 재앙을 움직이는 힘인가?’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김성철 눈앞에 검은 문자가 시야를 덮어나갔다. [ 재앙의 증인 ] [ 당신은 재앙의 정수를 보았다. ] [ 신의 권능을 본 당신은 세계의 비밀에 한 발 가까이 다가갔다. ] [ 증인의 보상은 직관력에 상응하여 주어진다. ] 보상 : 마력 +88, 직관력 +88, 마법저항 +88 단순히 재앙의 흐름을 본 것만으로 믿을 수 없는 능력치 상승이 일어났다. 김성철은 왜 재앙의 추종자들이 그토록 재앙의 진행을 원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뭐야. 이거. 능력치가... 뭐 이렇게 많이 주는 거야?” 베르텔기아도 비슷한 문자를 본 모양이다. 재앙의 진행을 지켜본다는 것은 그러한 것이었다. 단순히 목격하는 것만으로 증인이 되는 것만으로 신의 권능의 일부를 받을 수 있다. 마법사들이 괜히 미쳐서 재앙의 추종자가 된 것이 아닌 것이다. 검은 연기는 천정 가까운 곳에서 검은 구체 형태로 재구축됐다. 검은 구체는 한동안 천정에 부정형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흔들거렸다. 곧 그 구체는 스스로 의지를 가진 듯 마왕성 바깥으로 날아갔다. 김성철은 급히 검은 구체를 따라갔다. 마왕성을 나서는 순간 김성철의 눈동자에 경악이 떠올랐다. “?!” 마왕성 주변에 운집하고 있던 수만 마리의 악마 군세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죽어 있었던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김성철이 직접 죽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멀쩡하게 살아 있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 악마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죽어 있었다. 검은 구체는 죽은 악마들의 시체로부터 검고 부정한 기운을 빨아들였다. 하나도 남김없이. 김성철은 그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구체로 상대로 무언가를 시도하려고 생각 하는 순간 그 의지는 에탄올처럼 증발되어 사라졌다. 불가사의한 권태와 무기력이 김성철을 사슬처럼 얽어매었다. 대신 한 가지 상념이 눈앞에 그리듯 김성철의 뇌리 안에 떠올랐다. 그가 권태의 사슬에 묶인 동안 검은 구체는 무수한 악마들의 시체로 검은 기운을 가득 빨아들이며 거대하게 팽창하고 있었다. 처음엔 어른 머리만 하던 구체는 이제는 성채만한 크기로 불어났다. 악마들의 정수를 한껏 머금은 구체는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니 갑자기 7개의 파편으로 갈라져 쏜살처럼 남쪽으로 날아갔다. 김성철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것 같았다. ‘칠영웅. 그들의 재앙이 시작되는 것인가?’ 그 생각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바로 옆에서 말한 것 같은 속삭임들이 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악마왕 따위 해치웠다고 우쭐해하지 마라.” “정정당당하게 겨뤄보자! 유쾌한 전사여!” “거짓말쟁이네요. 스크롤을 쓰지 않다니.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어요.” “…기분 나빠.” “크크크.. 네 영혼은 어떤 맛일까?” “기다리고 있겠다. 얼간이.” “…….” 칠영웅들의 목소리다. 그들의 목소리는 점차 멀어지며 희미해졌고 마지막엔 메마른 웃음소리만이 들려왔다. “…….” 김성철은 무심한 시선으로 검은 파편들이 날아간 방향을 응시했다. 팔 가라즈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은자의 탑. 재앙의 서를 보관한 가장 거룩한 성소에 사단이 일어났다. 관리인들은 재앙의 서에 기재된 첫 번째 재앙 - 악마왕의 재앙 관련 부분이 불에 탄 듯 그을리며 사라진 것을 발견했고 이 사실을 탑의 관리인인 포르피리우스에게 보고했다. 재앙의 서를 본 포르피리우스의 동공은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첫 번째 재앙이.. 종결 됐다!” 불타 버린 악마왕의 문구 다음의 문구에 검고 부정한 마치 연기 같은 기운이 스며들었다는 보고는 다음날 이루어졌다. 재앙에 의해 활성화된 문구는 다음의 내용을 적시하고 있었다. [ 배신당한 그리고 그것을 예견했던 과거의 거짓된 영웅들이 다시 이 땅에 돌아오리라. 받지 못했던 그들의 권리를 요구하며. 일곱 개의 흉성이 하늘 위에 빛날 때 세계는 알게 될 것이다. 복수와 원념의 진정한 형상을. ] ======================================= 41. 강 위의 도시 (1) 첫 번째 재앙 악마왕이 죽고 마계의 악마들이 이유 없는 떼죽음을 당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대륙 전역으로 퍼졌다. 재앙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북쪽 변경을 위협하던 악마들이 멸망했다는 소식에 기뻐했지만 정보를 가진 기득권들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위협에 두려움에 떨었다. 환희와 공포 속에서 두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우려했던 칠영웅의 전조는 어디에도 보고되지 않았지만 각 국의 권력자들은 그들의 권력이 미치는 사방곳곳에 눈과 귀가 될 간자들을 풀어놓고 다가올 새로운 재앙에 대비했다. 한편 대륙 모처에선 작고 은밀하지만 의미 있는 움직임이 태동하고 있었다. “우리를 구원한 것은 허공궁궐의 황제도, 대륙십삽걸도, 신을 모시는 교단도 아니다. 단 한 명의 추방당한, 외로운 영웅이다.” 치열했던 하루파야 고개 전역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을 주축으로 터부시되는 한 인물에 대한 숭배가 시작됐다. 전투 당시엔 혼란스러웠고 집단의 열기에 휩쓸려 따라서 냉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지만 시간이 흐르자 혼탁한 흙탕물의 흙이 가라앉듯 단순명쾌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하던 세계의 적 김성철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전장에 나타났고 그리고 모두가 두려워마지않던 악마왕을 홀로 처단했다는 사실을. 이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자들은 결코 해낼 수도 하지도 않을 일이었다. 아무도 감히 시작하려 들지 않았지만 일단 세계의 적에 대한 재평가를 하려는 조직이 만들어지자 김성철의 아래에 있던 자들, 특히 김성철이 이끌던 빈사의 사자대 출신의 병사 - 대부분 강제 퇴역 당해 술주정뱅이가 된 - 들이 울분으로 점철된 오랜 침묵을 깨고 대거 가담했다. 그리고 최근엔 김성철을 직접 만났다는 반미반추의 언데드 소녀와 신비로운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인간제국은 그들의 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불온한 움직임에 대해 엄벌에 처한다는 입장을 표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성철을 숭배하는 조직은 어둠 속에서 조금씩 그 세를 넓혀갔다. 한편 세상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김성철은 지금 북쪽 끝에 위치한 마계에서 벗어나 대륙 남단의 칼날 비명 산맥을 배회하고 있었다. * “에라이. 씨벌.” 김성철의 입에서 욕이 나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그는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대개는 침묵하는 편이다. 하지만 칼날 비명 산맥의 후덥지근한 더위와 끝도 없이 달라붙는 벌레, 그리고 무엇보다 도무지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보이는 정글은 김성철의 초인적인 인내심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무리 복잡한 던전이라도 벽을 때려 부셔 자신의 길을 만들 수 있는 반면 이곳 정글에서는 아무리 덩굴과 나무를 때려 부셔봐야 하룻밤만 지나면 다시 자라나니 말이다. “으으.. 내 몸에 곰팡이가 피려고 하고 있어!” 베르텔기아도 고통스럽긴 매한가지였다. 정글의 눅눅한 습기와 만연한 균들은 책을 보존하기엔 최악의 환경이었다. 하지만 영혼 창고보다는 바깥이 나은지 꿋꿋이 김성철의 뒤를 따르며 버티고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한계로 보였다. “여기서 깜짝 제안!”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앞을 막아섰다. “잠시 휴식. 어때?”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쉴만한 곳을 찾았다. 숲하고는 친하다는 엘프들 마저 정착을 거부한 칼날 비명 산맥에게도 장점은 있다. 곳곳에 양질의 온천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 김성철은 전에 봐둔 온천으로 향했다. 곳곳에 이름 모를 동물의 백골이 널린 것이 걸리긴 하지만 온천 자체로는 상급의 온천이다. 김성철은 옷을 벗어 던지고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궜다. “…….” 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던 황금 오리는 덤. 김성철은 무심한 물결을 둥둥 떠다니는 황금오리를 보며 정글 탐험을 하는 동안 쌓인 피로를 씻었다. 그가 최북단의 마계 최전선에서 최남단의 칼날 비명 산맥으로 향한 이유는 오래 전에 얻었던 비전을 얻기 위함이다. 그것은 바로 다중영창. 칠영웅 중 한 명인 사자토스의 비전이다. 그런데 사자토스라는 녀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약한 놈이었다. 다중영창의 비전이랍시고 준 두 가지 물건이 전부 무쓸모다. 첫 번째 아이템, 고블린 가죽으로 만든 지도는 세월의 흐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치하기는커녕 비슷한 표지조차 찾을 수 없었고 두 번째 아이템, 청루석 반지 또한 용도를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유일한 단서라고 있는 것은 고블린 가죽으로 만든 지도 하단에 적힌 고대문자인데 김성철의 독해능력으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의 나열로 번역하는 게 고작이었다. 김성철이 번역한 문장은 아래와 같다. [ 힘세고... 강한 ...아침... 만약... 묻는다면... 귀엽다... 소동물.. 반지... 좋아하는... 햇살... 비춘다... 대지... 풀린다.. 함께... 영창.... 비밀... 통해서.. ] 혹시나 싶어 베르텔기아에게도 번역을 의뢰했는데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어설프게 아는 것이 독이 되어 김성철이 번역한 문장의 나열보다 더 혼란한 문장이 되었다. “음....” 산맥을 헤매고 다닌 지 벌써 한 달. 무의미한 탐색으로 몸과 마음도 지쳐가고 있지만 달리 할 게 없다. 이미 전사로서도 마법사로서도 높은 경지를 이룬 김성철에게 성장할 기회란 흔치 않기 때문에. 게다가 다중영창은 다가올 칠영웅과의 전투를 대비해서라도 얻어둬야 할 능력이다. 막상막하의 상대방과 싸울 때 고유 능력 하나가 덜 있고 더 있고의 차이는 승부를 가를 정도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말이다. 김성철은 탕안 깊숙이 몸을 밀어 넣으며 상태창을 떠올렸다. “축복, 능력치.” [축복] 불요불굴(정신공격 면역) 혼돈신의 가호(힘, 민첩, 체력 10% 증강) 헤라클레스의 후계자(힘 +50) 광전사의 핏줄(체력 10% 이하 시 대량 회복) 연합왕국의 챔피언(의지 +10) 하이엘프 왕국의 빠른 활(민첩 +20) 고대전사의 심장(힘 +5, 의지+5, 체력 +5) 재앙에 맞선 자(모든 능력치 +10, 자격) [능력치] 힘 999+ 민첩 864 체력 813 마력 592 직관력 598 마법저항 720 의지 513 매력 28 운 28 마왕을 처치하면서 새롭게 얻은 축복은 전 능력치 10을 올려주는 긍정적인 효과 외에 자격이라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부여하고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축복은 아니다. 김성철은 재앙에 맞선 자라는 새로운 축복이 다른 저주를 덮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존재에 의해 내려진 것을 자신의 능력치를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매력과 운의 수치다. 김성철의 매력과 운은 18에서 고정됐고 움직이지 않는다. 모종의 저주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저주마저 풀어버리고 능력치 상승을 이끌어냈다는 것은 축복을 내린 존재가 저주를 내린 존재보다 상위에 위치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다. ‘역시 재앙의 주체는 신들이었군.’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잠시 머리를 쉬게 했다. 쉬려고 이곳에 온 것이다. 복잡한 생각 따윈 할 필요 없다.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니까. 하늘을 바라보니 우거진 수풀 위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구름들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김성철은 몸을 덥히는 뜨거운 물과 느긋한 시간의 흐름이 주는 안락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만큼 지났을까. 느닷없는 기척이 느껴졌다. 대단히 은밀하고 노련한 무언가의 기척이다. 김성철은 눈을 뜨고 기척의 주체를 찾아내고는 피식 웃었다. ‘온천 고양이인가?’ 그것은 구름 빛의 털을 지닌 거대한 고양이었다.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잔혹한 귀족들이 애완동물 및 식재로 종종 키우는 녀석이었다. 크기는 호랑이 크기로 거대하지만 온순하고 온천을 즐기는 느긋한 짐승이다. 거대한 고양이는 온천 앞에 서서 앞발로 조심스레 온천물을 건드려 온도를 확인한 후, 풍덩하고 탕 안에 몸을 담갔다. 그 놈은 김성철이 쳐다보자 물끄러미 쳐다보며 하품을 했다. “우와. 온천 고양이? 저건 좀 귀엽네.” 온천 옆 바위에서 몸을 햇볕에 말리던 베르텔기아가 고양이를 발견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괜스레 날아다니지 않는 게 좋을 게다.” 김성철이 말하기 무섭게 온천고양이가 온천 밖으로 튀어나와 베르텔기아를 향해 질주했다. “히.. 히이!” 베르텔기아는 즉시 뒤로 달아나보지만 고양이가 한 발 빨랐다. 온천 고양이의 젖은 앞발이 베르텔기아를 땅에 짓누르고 있었다. “사.. 살려줘!” 김성철은 그런 베르텔기아를 보고 실소를 머금으며 고양이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저기로 가거라.” 약간의 눈싸움이 있은 후 온천 고양이는 기분이 나쁜 듯 야옹하는 소리를 내고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몸을 담갔다. “죽다 살아났네. 뭐야! 저건. 뭐 저렇게 포악한 놈다 있어? 아빠는 인간은 해치지 않는 녀석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책이잖아. 딱 저 놈이 관심가지기에 적당한 크기고.” “우... 그런가?” 김성철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다시 하늘을 바라보다 영혼 창고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 햇살에 비춰보았다.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청루석 반지다. 햇빛을 머금은 청루석 반지는 쓸데없이 영롱한 빛을 사방에 흩뿌릴 뿐이었다. ‘도저히 이대로는 답이 없겠군.’ 어수선한 시국이다. 그것도 자신이 화제의 중심에 서 있다. 되도록 혼자 힘으로 다중영창의 단서를 찾고 싶었지만 이대로 가단 밑도 끝도 없다. 김성철은 밀림을 떠나 인간의 영역에서 탐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다른 뾰족한 방법은 보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지긋지긋한 밀림을 약간이나마 벗어나고 싶었다. * 강상(江上)도시 판추리아. 북으로는 인간 제국, 남으로는 리자드맨 왕국의 칼날 비명 산맥을 사이에 둔 이 자유 도시는 활발한 교역과 풍부한 물산으로도 명성이 높았지만 지독한 풍토, 대륙 각지에서 흘러 들어온 인간쓰레기들의 소굴이라는 악명 또한 널리 떨치고 있었다. 이 도시는 뭍이 아닌 거대한 강줄기 위에 여러 선박들이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적으로 합쳐 만들어진 물 위의 도시로 도시를 효율적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물 위를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필수적이다. “…….” 김성철은 견고하게 만들어진 5인승 보트에 홀로 앉아 있었다. 보트의 원 주인은 강 위에서 노략질 하는 5인조 살인 강도였는데 김성철을 발견하고 환호성을 지른 것이 그들 최후의 기쁨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강바닥 밑에 처박혀 물고기 밥이 되고 있을 그 시체들은 김성철에게 적절한 배와 도시의 대략적인 정보라는 귀중한 선물을 안겨다 주었다. 판추리아에 초행길인 김성철에겐 금쪽같은 정보였다. 그는 느긋하게 노를 저으며 보트 위에 과일을 올려놓고 파는 상인들에게 과일 몇 개를 사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윽고 그가 찾는 건조물이 눈에 띄었다. 다섯 척의 갤리선의 동체를 이어 붙이고 그 위에 판자를 덧대 세운 커다란 건조물이었다. 대낮인데도 그윽한 술 냄새와 떠들썩한 싸움 소리가 들리는 이 건물의 이름은 황제의 측간. 학자는 없고 도둑과 사기꾼만 득실거리는 판추리아의 한다하는 군상들이 모이는 복마전 같은 곳이다. 김성철은 보트를 황제의 측간에 갖다 대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 옆 게시판엔 커다란 수배전단이 붙어 있었다. [ 세계의 적의 소재를 알리는 자에겐 상당한 보수가 지급될 것이다 - 판추리아 총독 로르메이 추이 ] 살벌한 문구 아래엔 세계의 적이랍시고 그려놓은 흉악한 인물의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다행히 김성철이 얼굴을 숨길 일도, 복장을 바꿀 필요도 없었다. ‘나보다 그림을 더 못 그리는 놈이 있을 줄이야.’ 하지만 흉악하게 그려진 김성철 뒤엔 하늘을 나는 책이 있었다. “뭐.. 뭐야? 이건. 설마 이걸 나라고 그려놓은 거야?” 김성철 뒤에 그려진 리빙북은 조악하고 작고 날개도 볼품이 없었는데 무엇보다 얇았다. “내가 무슨 애들이나 보는 그림책인줄 알아!” 베르텔기아의 분노는 자신의 얇음에 집중되어 있었다. 김성철은 주머니 안에서 요동치는 베르텔기아를 꾹 눌러 진정시킨 뒤 황제의 측간이라 불리는 주점 겸 집회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 41. 강 위의 도시 (2) 문 너머로 흥청망청 웃고 떠드는 주정뱅이들이 보였다. 주정뱅이들을 지나치자 높은 천장에 매달려 번쩍이는 샹들리에가 보인다. 전체적으로 추레한 이곳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오브제라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옆에서 요란한 음악소리를 내는 악단이 옆을 지나쳐 간다. 악단 단원 하나가 김성철을 물끄러미 보지만 이윽고 씨익 웃으며 먼저 시선을 돌린다. 악단이 사라진 자리엔 열과 오를 맞춰 배치한 수많은 탁자들과 의자들과 그 위에 앉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보인다. 의자와 탁자는 커다란 대못으로 바닥에 고정된 상태다. 이유는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멀리 떨어진 탁자 위에서 주정뱅이들이 주먹질을 하고 있었고 그 주변에 둘러 선 구경꾼들이 돈을 걸고 내기를 하고 있었다. “우와.. 여기. 장난 아니야. 내가 지금까지 본 술집 중에 가장 개판이야.”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안에서 몸을 흔들며 말했다. 김성철도 동감이었다. ‘개판이라는 말이 이보다 더 어울리는 장소는 대륙 전체를 통틀어 봐도 찾기 어렵겠어.’ 김성철은 빈 탁자를 찾아 자리에 앉으며 잠시 주변 상황을 관망했다. 우선적으로 위험해 보이는 인물들을 추려냈다. 이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인간제국이라든가 판추리아 상층부에서 보낸 세작 혹은 치안꾼들 한 둘 정도로 반드시 있을 것이므로. 곧 눈매가 더럽고 음침한 얼굴들이 김성철의 눈에 포착됐다. 그들은 커다란 홀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2층 테라스 쪽에 자리를 잡고 맥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숫자는 여섯 명. 2인 1조로 3개조로 구성됐고 분위기가 분위기다 보니 경계는 느슨한 편이다. 그들은 관찰보다는 파트너와 도박에 더 열중했고 이따금 주점 안에 소란이 일어날 때마다 경계어린 시선을 던지곤 했다. 김성철은 뒤이어 주점의 여러 군상들을 관찰했다. 특히 단골로 보이는 자들의 행동과 말을 눈여겨보았다. 어느 정도 관찰이 끝난 후 김성철은 주점 주인에게 다가가 천연덕스럽게 주문을 했다. “응? 못 보던 얼굴인데? 처음 오셨소?” “3년 전에 한 번 들렀는데. 못 알아봐주니 섭섭한데?” “아, 그런가. 뭐 아무래도 좋지. 뭘 주문하겠소?” 김성철은 적당한 술과 음식을 주문하며 주인에게 약간의 팁을 찔러 넣으며 넌지시 물었다. “뜬금없지만 돈 될 만한 정보가 필요한데.” “난 그런 거 취급 안 해. 하지만 저기 구석에 앉은 엘프 도적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주인은 김성철에게 도적 길드의 일원을 소개시켜 줬다. 김성철은 요리를 단숨에 삼키고 도적으로 향했다. [ 이 요리의 점수는 13점입니다. ] 가게의 요리는 맛있다고 할 수 없었다. “소개 받고 왔다.” 김성철은 독한 술로 입 안을 헹구며 말을 걸었다. 도적은 싸늘한 눈빛으로 김성철을 노려보며 경계했지만 노련한 김성철의 행동 덕에 곧 일사천리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김성철이 도적에게 얻고자 한 정보는 크게 3가지였다. 하나는 칠영웅의 준동. 대륙 곳곳에 빠른 정보망을 지닌 도적 길드라면 먼 오지에서도 비교적 빠르게 외부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엘프 도적은 아직 칠영웅이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칠영웅들이 아무리 잘난 인간들이라고 해도 지금 시국에 움직이긴 어려울 거야. 그 잘난 윗대가리들이 모두 눈을 벌겋게 뜨고 칠영웅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거든. 한 녀석이 감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때는 세계의 적 토벌보다 더 거대한 규모의 토벌대가 즉석에서 꾸려질 거야.” 악마왕이 변경을 두들길 땐 무관심하던 기득권들은 정작 자신의 밥그릇이 위협받자 전심전력을 다해 경계에 임하고 있다. 한 발 떨어져서 보면 웃기고도 서글픈 이야기다. 뒤이어 김성철은 2가지 사실을 더 물었다. 남은 두 가지 질문은 각각 이 지역에 전승된 사자토스에 관한 설화와 그리고 다중영창에 관한 전승이었다. 이중 다중영창에 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비슷하거나 연상될 수 있는 단어를 신중하게 선택해서 말했다. 안타깝게도 엘프 도적은 두 가지 사항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눈치였다. 대신 그는 주점 한 구석에서 여종업원 상대로 추태를 부리고 있는 늙은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야 흘러들어온 놈이니 역사 같은 건 잘 모르겠는데 저 늙은이라면 뭔가 알지도 모르지.” 그가 말하기 무섭게 그 늙은이는 젊고 건장한 남자에게 두들겨 맞고 개구리처럼 탁자 위에 너부러졌다. 2층 테라스에 앉아 있는 감시자들의 서늘한 시선이 그쪽을 향하다 이내 흥미를 잃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저래 뵈도 옛날엔 시의 참사회원이었나 봐. 책도 몇 권이나 출판했지.” 감시자의 시선이 모두 거둬진 후 김성철은 그 노인에게 접근했다. 가까이가자 진한 싸구려 독주의 냄새가 풍겨왔다. “힘 100도 못 넘는 놈이 때린 주먹 따위, 내 피부에 흠집도 못 내지!” 자신만만한 말과 달리 노인의 코에선 코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에게 넝마조각을 내밀며 말을 걸었다. “이곳의 역사에 대해 잘 안 다던데.” “역사? 판추리아에? 이런 시궁창 같은 판자 도시에 역사랄 것이 뭐가 있어. 똥과 오물로 가득 찬 박쥐 군집이 사는 동굴에도 역사가 있을까?” 노인은 아직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김성철은 잠시 그를 내버려두고 뒤를 응시했다. 주점 안이 갑자기 찬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기 때문이다. 주점의 문 안으로 한 무리의 인간을 닮은 무언가가 들어오고 있었다. 뱀의 두상, 날름거리는 혀, 그 아래 자리 잡은 떡 벌어진 비늘 돋친 인간의 몸. 리자드맨이다. 칼날 비명 산맥을 기점으로 그 아래 펼쳐진 방대한 습지와 밀림에 강력한 왕국을 세우고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한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 “우와... 리자드맨이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베르텔기아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주머니 밖으로 쏘옥 고개를 내밀었다. 김성철도 리자드맨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김성철의 뇌리에 문득 옛날의 정경이 떠올랐다. “자네가 알 지 모르겠지만 리자드맨은 이계에서 가장 완벽한 사회를 구축하고 있어. 자네도 언젠가 대밀림으로 가서 직접 보고 왔으면 좋겠군. 그들이 얼마나 자신의 본분에 맞게, 조화롭게 사는지. 인간들로선 흉내도 못 낼 거야.” 먼 곳을 바라보며 열띤 음성으로 이야기하던 청년은 훗날 황제가 되었다. ‘이것들이 네가 그렇게 찬탄을 금치 못하는 그 리자드맨들인가?’ 김성철은 과거의 회상을 흩어버리며 주점에 들어온 리자드맨을 응시했다. 제각기 갑주를 걸치고 무장을 한 리자드맨들은 태연하게 카운터 앞에 자리를 잡더니 쇳소리 나는 음성으로 주문을 했다. “여기 밀웜 스페셜 하나. 산초 팍팍 뿌려서.” “신선한 말대가리 있으면 줘봐. 당나귀 대가리로 괜찮고.” “송아지 피를 넣은 증류주 한 잔. 젓지는 말고 흔들어서.” 생긴 것과 달리 주문은 야무지게 한다. 주점의 점원은 리자드맨에 익숙한 지 굽신 거리며 그릇을 하나 내왔다. 볼록한 나무 그릇 안엔 살아서 꿈틀거리는 밀웜이 가득 들어 있었다. 점원은 밀웜 위에 산초 열매를 아낌없이 집어넣고는 갑주를 걸친 리자드맨에게 내밀었다. “여기 산초 팍팍 뿌린 밀웜 스페셜입니다.” “음...” 리자드맨은 까탈스런 성격인지 그릇을 한참동안이나 쳐다보고는 조심스럽게 혀를 날름거리며 맛을 봤다. 쿵! 리자드맨이 탁자를 강하게 후려쳤다. “이건 3령 밀웜이잖아. 난 4령 밀웜이 아니면 안 먹는다고. 당장 바꿔와!” 벌레 먹는 입맛도 급수가 있는 모양이다. 점원은 곤란해 하며 다른 게 없다고 리자드맨을 설득했다. 리자드맨은 투덜거리면서도 한 입에 밀웜들을 산초 가루와 함께 먹어치웠다. “으... 3령 애벌레하고 4령 애벌레하고 뭐가 다르다고 저렇게 까탈스러워. 결국은 다 먹을 거면서!” 아무튼 리자드맨 등장으로 잠시 싸늘해졌던 분위기는 원래대로 떠들썩해졌다. 사람들이 리자드맨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리자드맨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면서부터 강인한 신체와 회복력, 질병저항 따위의 축복을 타고 났고 인간에게 없는 날카로운 이빨과 근육질의 꼬리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삶의 모든 사건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해져 있다는 굳건한 믿음은 리자드맨 전사들을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로 만들었다. 따라서 시비 붙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김성철은 한동안 리자드맨들을 관찰하다 인간들과 별 다를 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뭐가 다르다는 건지 알 수 없군.’ 김성철은 독주를 한 모금 들이키며 뭐 재밌는 게 없나 주변을 돌아보았다. 가까운 곳에서 유난히 시끄럽게 떠드는 한 무리의 남녀들이 있었다. 행색을 보니 전형적인 사냥꾼 같은데 사냥감을 덩치에 맞지 않게 조그만한 설치류로 보였다. 탁자 위에 오늘 잡은 걸로 보이는 짐승들의 사체가 널려 있었다. ‘저건 카벙클인가.’ 살아 있는 녀석을 본 적은 없지만 가죽이나 공예품으로 본 적이 몇 번 있다. 한 마디로 영물이다. 생긴 건 다람쥐 친척처럼 생겼는데 이마에 눈보다 큰 보석이 박혀 있고 그것을 통해 마법을 쓴다. 말하지 못하는 짐승 중에 마법을 쓰는 종은 카벙클이 유일하다고 알려져 있다. 한때엔 이계 전역의 숲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동물이었지만 아름다운 빛과 문양, 거기가 마법의 힘을 지닌 이마의 보석 때문에 무분별하게 남획되어 지금은 거의 멸종됐다고 알려진 종인데 칼날 비명 산맥 근처에 서식지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 김성철은 딱히 자연보호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귀한 동물이 저렇게 죽어 비참하게 널려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반면 베르텔기아는 카벙클의 시체를 보고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우와. 카벙클 결정이네! 저건 대단히 진귀한 연금재료야! 돈도 많은데 이참에 거래해보는 건 어때?” “으음.” 내키진 않지만 구하기 어려운 재료라는 말에 김성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냥꾼들에게 향했다. 책상 위에 놓인 카벙클의 시체는 모두 여섯 구. 사냥꾼 중 하나가 김성철이 뒤에서 어슬렁거리자 뒤를 돌아봤다. 김성철은 바로 용건을 말했다. “카벙클 결정 좀 살 수 있을까?” “카벙클 결정?” 사냥꾼이 김성철의 행색을 아래위로 훑어본다. 허름한 복장, 유복함과는 거리가 먼 얼굴. 눈에 띄는 장신구도 없었다. 하지만 이내 코트 자락 사이로 선뜻선뜻 들여다보이는 정체 모를 황금브로치를 보고 사냥꾼을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건 조금 비싼데. 얼마나 갖고 계신가?” 사냥꾼의 물음에 김성철은 순도 높은 제국 금화를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한 사내가 눈을 번쩍떴다. 술에 취해 코피를 흘리던 그 노인이었다. 반면 사냥꾼들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들은 입을 쩍 벌리고 달라붙는 노인을 손을 흔들어 쫓아 보낸 후 김성철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하나 가지고는 한참 모자란데?” 이에 김성철은 낮은 목소리로 받아치듯 말했다. “여기서 돈 자랑 해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잖아? 몇 개가 더 필요한 지 말해보라고.” 김성철의 말을 이해한 사냥꾼들은 김성철을 다시 보며 득의만면한 미소를 머금었다. 짧은 대화가 오간 후 거래 조건이 정해졌다. 금화 스무 닢에 카벙클 결정 3개. 나머지 3개는 안타깝게도 고귀한 분의 의뢰로 김성철에게 파는 가격보다 싸게 넘기게 생겼다고 한다. “약속을 깨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여기서 밥벌이 하려면 그 양반 눈에 거슬리면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지.” 사냥꾼들은 카벙클의 시체에서 결정을 분리해 김성철에게 내밀었다. 비릿한 혈향이 풍기는 걸 느끼며 김성철은 결정을 받고 금화를 건넸다. 금화를 받아 챙긴 사냥꾼은 끼고 있던 장갑을 벗으며 금화의 감촉과 감도를 확인했다. 그런데 금화를 확인하는 사냥꾼에 손에 낯익은 빛이 번쩍 거린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저건 청루석 반지 아닌가.’ 용도를 알 수 없었던 청루석 반지다. 김성철이 지닌 것에 비해 청루석의 질은 확연히 떨어져 보이긴 했지만. “그건 어디에 쓰는 거지?” 김성철이 물었다. “이거? 그냥 행운의 부적이야.” 사냥꾼은 건성으로 답했다. 김성철은 다른 사냥꾼들의 손도 확인했다. 장갑을 벗은 두 명이 있긴 한데 둘은 반지를 끼지 않았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가.’ 김성철이 생각에 잠긴 동안 금화 확인을 끝낸 사냥꾼들이 탁자를 가볍게 쳤다. “전부 확인했다. 다음에도 또 좋은 거래를 했으면 좋겠군.” 그걸로 거래는 끝났다. 김성철은 자리로 돌아가 카벙클 결정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베르텔기아가 보게 했다. “흠흠. 상품이야. 이 정도면. 숫자가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그걸 만들기엔 부족함이 없겠어?” “그거라니?” “골렘이라던가. 골렘이라던가. 아니면 골렘이라던가.” 베르텔기아는 기분이 좋은 듯 주머니 안에서 강한 진동을 일으켰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꾹 눌러 진정시키며 물었다. “골렘의 주재료라고?” “응! 싸구려 모조품이 아닌 진짜 골렘!”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한 사내가 김성철 앞에서 어슬렁거렸다. 누군가하고 봤더니 얻어맞아 코피를 흘리던 술주정뱅이 노인이었다. 김성철이 싸늘하게 말했다. “무슨 용무지?” 노인은 김성철이 쏘아 보내는 살기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으나 술의 힘으로 용기를 내어 힘겹게 말을 걸었다. “아까 당신, 내게 이 도시의 역사를 묻지 않았나?” “그렇소만?” 김성철은 카벙클 결정을 영혼 창고 안에 집어넣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노인의 충혈 된 눈동자가 번득였다. ‘영혼 창고까지 지니고 있다니.. 역시 이 남자. 엄청난 부자임이 틀림없군!’ 노인은 흐르는 침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아까는 술에 취해 기억이 안 났는데 지금은 술이 깨서 그런 지 확실히 기억이 나는군!” 딱히 신뢰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망가질 수 있다는 걸 알기에 김성철은 시험 삼아 주머니 안에 있던 자신의 청루석 반지를 노인 앞에 꺼내 놓았다. “이걸 어디에 쓰는 지 아시오?” ======================================= 41. 강 위의 도시 (3) 청루석 반지를 본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는 허겁지겁 청루석 반지를 주름진 양손으로 가리며 경고하듯 말했다. “이런 건 함부로 드러내는 게 아니야.” 입에서 고약한 술 냄새가 풍겼지만 악의가 없다는 걸 알기에 김성철은 반지를 주머니 안에 넣고는 자리에 앉아 노인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말해보시오.” 노인은 주변, 특히 사냥꾼 쪽을 예의주시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청루석 반지가 카벙클 사냥의 미끼로 쓰이는 건 저 부류만의 비밀이지.” “금시초문이군.” “그럴 수밖에. 청루석을 이용해 카벙클을 사냥하는 건 판추리아 일대가 유일하니까.” “원리가 뭐요?” “인간들이 짝을 선택할 때 상대방의 얼굴의 생김새를 중요하게 여기듯 카벙클들도 이마의 보석의 밝기와 채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습성이 있지. 그게 놈들로 치면 매력의 척도거든. 햇빛을 받은 청루석이 내뿜는 빛은 카벙클이 가장 좋아하는 색채와 닮아 있다고 하더군.” “요컨데 청루석은 카벙클을 끌어당기는 미끼 같은 녀석이라는 이야기군.” “정확해. 그렇지 않으면 카벙클은 사냥하기는커녕 찾기조차 어렵지. 워낙 작고 마법까지 써서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는 것들이니까.” 첫 인상은 별로였지만 노인의 말은 신뢰가 갔다. 특히 그의 말은 김성철이 야매로 해독한 문장과 연관되는 구석이 있었다. ‘귀엽다... 소동물.. 반지... 좋아하는... 이런 문구가 있었지. 여기서 귀엽다 소동물은 카벙클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겠어. 반지는 청루석 반지를 말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카벙클과 다중영창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여전히 다중영창의 비밀은 안개 너머에 있었지만 작은 단서 하나 찾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김성철은 보상으로 노인에게 금화 한 닢을 넘겨주었다. “술값에 보태 쓰시오.” 돈을 받아든 노인은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금화를 감싸 쥐고는 입을 맞췄다. “얼마만의 금환가? 아, 영원히 변치 않는 매혹의 빛!” 특별히 거슬리는 움직임은 없지만 김성철은 일단 노인과의 대화는 여기서 마무리 짓기로 했다. 이름 모를 노인이 꽤나 여기선 유명한 지 몇몇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 방금 거래를 한 사냥꾼들이 이쪽을 쳐다보며 수근 거리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판추리아처럼 치안이 좋지 않다는 곳에서 낯선 여행자가 돈이 많다는 소문이 나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김성철은 노인의 거처를 물은 뒤 다음을 기약하고 주점을 떠났다. * 해가 지자 김성철은 노인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은 도시 외곽, 하류 쪽 갈대숲 근처에 좌초하다시피 정박해놓은 작은 보트였다. 오물을 그대로 집 아래 연결된 강물에 투척하는 판추리아에서 하류 쪽에 산다는 건 글자 그대로 하류인생이라는 걸 의미한다. 상류에서 떠내려 온 갖은 오물들이 하류 쪽으로 밀려오기 때문이다. 악취는 물론이고 위생에도 좋지 않다. 특히 비라도 오는 날엔 극한의 불결함을 경험할 수 있다. 악취와 쓰레기가 만연한 갈대숲에 사는 이 노인의 이름은 쿠르트 아삼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자유도시 판추리아를 지탱하는 참사회원 가문 출신이었고 예전엔 시정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영향력이 있다는 등의 묻지도 않은 말을 해댔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어슴푸레한 강 위의 도시를 밝히는 등불이 하나 둘 켜질 즈음 시작됐다. “이 도시의 유래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냥 생긴 거지. 혹자는 지난 시대에 있었던 켄타우로스 군대의 침공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강으로 피신했고 그게 도시로 이어졌다는 설을 펴곤 하는데 글쎄. 그냥 내가 보기엔 낭설일 뿐이야.” 노인은 도시의 유래에 대해 도시의 아마추어 학자들이 유추한 여러 개의 설을 차례로 소개하며 말미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노인은 대단히 진지하고 열띤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나갔지만 김성철에겐 아무래도 좋은 주제였다. 별 흥미도 가지 않는 이야기를 장시간 듣고 있자니 절로 하품이 솟아 나왔다. “돈 주고 들을 이야기는 아닌 거 같군.” 그러자 쿠르트 아삼은 잠시 망설이다 무언가 결심한 듯 은근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별 재미가 없는 모양이군. 하지만 이건 어떨까?” 노인은 김성철과 자신 사이에 위치한 화로를 부지깽이로 뒤적거려 불길을 키운 후 주변을 조심스레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들은 타인, 그러니까 별 볼일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의 학설이었지만 지금부터 내가 이야기 할 가설은 이 쿠르트 아삼이 직접 발로 뛰고 라그란제의 공중 서고에서 3일 동안 동안 책들을 뒤져가며 만들어 낸 유일무이한 것이네.” 김성철은 별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쿠르트 아삼은 그가 공언한대로 유일무이한 견해 내놓았다. “지금까지 모든 가설들은 판추리아를 만든 선조들이 북쪽에서 내려온 떠돌이거나 피난민이라고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내가 볼 때 그건 전부 틀렸어.” 쿠르트 아삼은 김성철을 향해 주름 지긋한 얼굴을 들이밀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판추리아를 만든 자들은 남쪽에서 왔어.” “남쪽에서?” 김성철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남쪽은 강력한 리자드맨의 영역이다. 더 남쪽으로 가면 켄타우로스, 오크, 오우거 따위 호전적인 야만종족이 사는 황무지가 나온다. 어느 쪽이든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다. 따라서 노인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 말을 못 믿는 모양이군. 하긴, 모두 같은 반응을 보였지. 하지만 나는 칼날 비명 산맥 너머, 리자드맨의 영역에 사라진 왕국이 존재했을 거라고 믿고 있어.” “증거는?” 김성철의 물음에 노인은 인상을 구기며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보트 구석에 굴러다니는 술병의 뚜껑을 따고 습관적으로 들이킨 후 입을 열었다. “그 증거를 찾기 위해 너무 많은 돈을 썼어. 알다시피 리자드맨의 영역을 탐사하는 덴 엄청난 비용이 들거든.” “용병단이라도 부른 모양이구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어린 어조로 말을 이었다. “덕분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전부 날려버렸지. 지위도 잃어버렸고. 그래서 살릴 수 있는 아들 내외를 살리지 못했고 손녀와는 원수 사이가 되었어.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홀로 남의 똥오줌 냄새나 맡으며 사는 신세가 되었지.”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전형적인 실패담이다. 김성철은 노인에 대해 어떤 동정도 느끼지 않았다. 전부 자신이 자초한 일이다. 누굴 탓한단 말인가. 김성철은 동정심 대신 피곤함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역시 이 도시와 사자토스와는 아무 연관이 없는 건가. 하긴 사자토스는 수천 년 전의 인간이다. 이곳에 잠시 들렀다고 한들 잠깐의 외유에 지나지 않았겠지.’ 일어나려는 김성철의 팔을 노인의 손이 덥썩 붙잡았다. “아직 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 내가 할 이야기는 지금부터가 진짜라구!” “짧게 말하시오.” 김성철은 일어선 채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그 도시를 거의 발견했어. 칼날 비명 산맥 너머, 리자드맨의 영역에 건설된 사라진 도시를!” “…….” “진짜 입구를 발견했다니까! 그때 그 겁쟁이 용병대장 놈이 도망만 치지 않았더라도 지금쯤 그 사라진 도시를 발견해 떵떵거리며 살았을 텐데!” 그러면서 노인은 품속을 뒤적거려 더러운 종이짝을 꺼내 김성철 앞에 펼쳐보였다. 등불에 비춰보니 직접 그린 지도. 지도라기보다는 약도에 가까운 알아보기 어려운 엉성한 지도였다. ‘별 볼 일 없군.’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김성철의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가 맹렬히 몸을 흔들었다. 김성철은 잠시 쿠르트 아삼에게 양해를 구한 후 뱃머리 쪽으로 가 조용히 베르텔기아를 불렀다. “무슨 일이지?” “방금 그 지도!” “응?” “방금 그 지도 말이야. 그거랑 닮지 않았어? 사자토스가 그린 것과 말이야.” “그래?” 김성철은 고블린 가죽으로 만든 지도를 펼쳐 노인의 지도와 대조해봤다. 육안으로 보기에 비슷한 점은 전무했다. 둘 다 축척 없이 괴발개발 그렸고 화풍도 크게 다르다. 하지만 엉성한 지도 위에 표시된 중요한 이정표에 유사점이 있었다. 김성철은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아온 매듭이 풀리는 걸 느끼며 두 지도를 본격적으로 대조했다. 동일한 부분이 여러 부분에서 발견됐다. 외로운 바위, 녹물이 솟는 천, 하얀 원숭이들의 군락지 등등 김성철이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던 표지들이다. “이 지도 당신이 직접 만든 거요?” 김성철이 쿠르트 아삼에게 미묘하게 달라진 음성으로 물었다. 쿠르트 아삼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내가 그린 거야! 내가 찾아서 내 발로 뛰며 그린 것이지.” “안내하시오.” 김성철은 금화가 든 자루를 노인에게 건넸다. 노인은 자루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걸로는 많이 부족한데.” 김성철은 금화 한 자루를 더 노인에게 내밀었다. 노인은 손가락 3개를 피며 말했다. “탐사대를 꾸릴 거요. 최고의 실력자로 구성된.” “탐사대는 필요 없는데.” “어허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 리자드맨들의 공포를 잘 모르는군. 게다가 시시각각 바뀌는 밀림에서 길을 찾으려면 숙달된 길 앞잡이가 필요한 법이야.” 노인은 침을 튀기며 대규모 탐사대가 필요성을 설파했다. 두서없는 이야기 속에서 김성철은 노인이 밀림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음을 알아챘다. 쿠르트 아삼은 숙련된 탐험가라기보다는 경험 있는 고용주에 불과했다. ‘어쩔 수 없군.’ 돈은 충분히 있다. 김성철은 쿠르트 아삼에게 후원자를 비밀로 하는 조건으로 그의 청을 승낙했다. 이튿날, 황제의 측간에 넝마 대신 화려한 정장을 걸친 쿠르트 아삼이 나타났다. 그는 건장한 두 명의 용병을 뒤에 거느린 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목청을 돋워 말했다. “지금부터 제12차 쿠르트 원정대원을 모집한다. 자신이 비범하다고 생각하는 자, 앞으로 나와라!”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베르텔기아가 쓴 소리를 했다. “히이... 11번이나 저런 짓을 했다고? 망할 만하네.” * 김성철이 쿠르트 아삼과 더불어 탐사대를 만들고 있을 무렵, 멀리 떨어진 고대 왕국에선 느닷없는 돌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고대 왕국은 대륙 서부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강국으로 정식 국호는 왕국이다. 알려진 역사 속에서 최초의 왕, 검왕이 탄생했고 최초의 왕국을 만들어냈기에 왕국이라는 명칭을 고수하는 것이다. 마법을 멀리하고 검을 숭상하는 왕국은 소드 마스터라고 불리는 그들 고유의 전사들을 만들어 내 대륙 전역에 힘을 떨쳤다. 그들의 힘이 강성할 때 대륙에선 그들을 왕국이라 불렀지만 대륙의 패권국에서 물러난 이후엔 다른 왕국들과 구분하기 위해 고대 왕국이라는 명칭을 썼다. 오늘 그 고대 왕국의 수도 우르드마르크에 한 명의 불청객이 나타났다. 검의 나라라 불리는 고대 왕국의 명성을 깔보기라도 하는 양 한 자루 낡은 철검을 가지고 나타난 그 사내는 수도로 향하는 대로를 홀로 틀어막고 지나가는 모든 이들을 베어버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 미치광이의 난동쯤으로 생각했지만 괴인의 검에 고대 왕국의 자랑인 왕실근위대의 소드 마스터가 무참하게 썰려나가자 고대 왕국의 왕실근위대장 강가스 아론은 다급하게 세계 전역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가 보낸 통보문은 아래와 같았다. [ 칠영웅, 우르드마르크 앞에 출현. ] 기득권의 수호엔 놀랄 만큼 견해가 일치되어 있던 각 나라들은 즉시 우르드마르크에 지원군을 급파했다. 수십 척에 이르는 공선이 고대 왕국의 수도 상공에 압도적인 위용을 드러내며 포격을 가하고 아래로는 수천 명의 정예 병사들이 퇴로를 위협하자 이름 모를 검사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의 정체는 끝까지 비밀로 남았지만 그를 상대한 고위 지휘관들은 이구동성으로 한 때는 성스러웠던 그러나 이제는 불경한 이름을 입에 올렸다. “칠영웅 드라고만. 검의 극에 이른 자가 고대왕국의 수도에 나타났다.” 그 사내의 정체가 드라고만인지 아닌지에 대해선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지만 그가 칠영웅 중 하나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견도 없었다. 어두컴컴한 공동. 곳곳에서 석회질을 함유한 뿌연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희미한 빛을 받은 종유석이 시선을 어지럽히는 차갑고 음습한 공간이었다. 사내는 폭포로 들어가 피로 젖은 자신의 옷과 몸을 씻어낸 후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그를 맞이했다. “어때요? 드라고만.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저항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죠?” 창백하리만치 하얀 손이 하프를 연주하고 있었다. 음울하고 애절한 곡조였다. “혼자서 처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장의 명이란 게 있으니까 이 정도에서 멈춘 거다.” 드라고만이라 불린 사내는 검집에서 낡은 철검을 뽑았다. 검신은 흥건한 피로 적셔져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많은 피들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검 스스로가 피를 마신 것이다. “대장의 판단은 정확해요. 굳이 우리 힘을 드러낼 필요는 없어요. 한때 우리도 그러했듯이 필멸자들에겐 예상치 못한 잠재성이란 게 있는 법이니까.” 어둠에 반쯤 잠긴 여인이 교태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드라고만은 인상을 구기며 코웃음을 쳤다. “헛소리.” “게다가 우리에겐 그 꼬마가 만들어준 훌륭한 도구가 있잖아요?” 하프의 선율이 멈췄다. 하프를 연주하던 여인이 고개를 돌려 뒤를 응시했다. 거대한 공동한 저편, 희미한 빛이 비추는 영역에 거무스름한 형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인간이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가.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 42. 유적 (1) 11번이나 대차게 말아먹은 경험 속에서도 건질 것은 있는 모양이다. 쿠르트 아삼은 대단히 신속하고 빠르게 자신이 필요로 하는 인재들을 찾아내 탐사대를 구성했다. 수많은 사기꾼들이 돈을 노리고 탐사대에 지원했지만 쿠르트 아삼의 날카로운 안목은 능력 없는 사기꾼들이 자신의 탐사대에 참여하는 것을 용납치 않았다. 그렇게 열두 명으로 구성된 탐사대가 구성되기까지 3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빠르게 탐사대를 구성한 쿠르트 아삼은 물주인 김성철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사기꾼들에겐 특유의 기분 나쁜 분위기가 있어. 계약금만 떼먹고 도망칠 놈들은 눈만 보면 알 수 있어. 용병들 같은 경우엔 계약해지 조건을 까다롭고 상세하게 요구하는 녀석들이 오히려 믿을 만 해. 그렇지 않은 녀석들이 계약서에 그렇게 심혈을 기울일 필요가 없거든. 일 생기면 도시에서 튀어버리면 그만이니 말이야!” 하루아침에 하류에 살던 비렁뱅이에서 탐사대장으로 화려하게 재기한 쿠르트 아삼의 얼굴과 몸엔 나이에 걸맞지 않은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그는 탐사대가 전부 모인 다음 날, 김성철을 비롯한 탐사대를 다섯 명이 탈 수 있는 나룻배 3척에 나눠 태웠다. 각 배엔 어디서 구했는지 리자드맨 사공이 하나 씩 붙어 있었다. 그들은 혀를 날름거리며 파충류의 무심한 눈으로 인간들이 배에 타는 걸 말없이 지켜보았다. 쿠르트 아삼은 허드레 일꾼 3명을 이끌고 선착장에 나타났다. “그럼 슬슬 출발 하자고!” 쿠르트 아삼의 열두 번 째 탐사는 판추리아에서도 제법 화젯거리가 된 모양이었다. 수로 주변에 난 좁은 판자 위에 여러 명의 구경꾼들이 탐사대의 출발을 신기한 구경거리마냥 구경하고 있었다. “어디서 돈이 난 건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망하면 저 인간은 진짜 재기 불능이겠군.” “이미 재기불능 아닌가? 하류에 사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사람들의 평가는 좋지 않았다. 비꼬는 소리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쿠르트 아삼의 얼굴 표정엔 한 점의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얼굴에 철판을 깐 것 마냥 태연자약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비아냥거림을 듣고 있었다. ‘어디 한 번 두고 보라고. 이번 원정만 성공하면 아무도 내 도전을 비웃지 못하게 될 터이니.’ 그런 쿠르트에게도 약점이 하나 있었다. 뱃머리를 나란히 하고 수로를 나아가는 탐사 선단 뒤로 작은 조각배가 빠른 속도로 따라오고 있었다. “또! 무슨 짓을 하러 가는 거야!” 빵집 아가씨일까. 앞치마와 오븐 장갑을 낀 젊은 여성이 필사적으로 노를 젓고 있었다. 힘이 제법 강한 지 노 젓는 속도가 보통이 아니다. 김성철은 물살을 가르고 오는 여성의 보트를 보고 모터보트의 움직임을 연상했다. 그 여성이 탄 조각배는 순식간에 선단을 따라잡아 노인이 탄 나룻배를 뒤에서 들이받은 뒤 노인의 배 위에 가벼운 몸놀림으로 올라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돈은 대체 어디에서 난 거고?!” 노인의 배에 짐꾼 사이에 섞여 있던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노인과 젊은 여성을 관찰했다. 사람들의 그 많은 비판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쿠르트 아삼은 이번만큼은 임자를 만난 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 그게 말이다. 클라라스. 이번 원정은 반드시 성공할 예정이란다. 전과 달리 코스도 완벽히 안전한 방법으로 수정했고 탐사대원도 최고 수준으로 뽑은데다가 성공보수가 넉넉하게 산정...” “시끄러!” 젊은 여성은 노인의 팔을 잡아끌고 자신의 배에 태우려고 악을 썼다. “이런 바보 같은 짓 언제까지 계속할 거야! 당장 취소하고 남은 돈 당장 내놔!” 쿠르트 아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당장 돈 내놓으라고! 어차피 쓰레기통에 처박을 돈인데 그냥 나 달란 말이야!” 소란이 길어지자 용병 중 하나가 클라리스라 불린 여성을 노인에게 떼어 놓았다. 점잖은 노기사로 용병들의 우두머리였다. 쿠르트 아삼은 그 용병을 곁눈질로 응시하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저리 가라고. 아가씨. 당신이 누구든 간에 우리는 우리 일을 해야 하니까.” 제3자가 앞을 막자 클라리스는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하지만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여 훤칠한 용병 뒤에 숨은 쿠르트 아삼을 찾아다니며 원한 섞인 한 마디를 내뱉었다. “기억해 둬. 진작 의절했지만 앞으로 쳐다도 안 볼 거니까. 당장 시청에 가서 당신에게 물려받은 치욕스런 성 바꿔버릴 거라고!” 돌발적인 해프닝으로 인해 잠시 지연됐던 탐사선단이 다시 물살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쿠르트 아삼은 겸연쩍은 얼굴로 물주인 김성철에게 다가가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미안하게 됐어. 못 볼꼴을 보여 줬구만.” “누구요?”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짐짓 모른 척을 하며 물었다. “손녀요.” 손녀라는 짧은 한 마디 속에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렇군.” 김성철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딱히 궁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단이 도시를 벗어나 밀림으로 이어진 상류로 향할 때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노래를 아주 잘하지. 재능이 있어. 본인도 좋아하고.” 먼 곳을 바라보며 쓸쓸히 말하는 노인은 무언가 결심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성공에 대한 결연한 다짐 같은 것이 내비쳤다. 하지만 세상일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다. “어라. 길이 바뀌었나.” 노인은 경악한 표정으로 자신이 만든 지도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대조했다. 다르다. 지도와 표시된 길이. “이럴 리가.. 전엔 분명 이쪽으로 수로가 나 있었는데.” 하지만 그가 말한 뱃길 앞엔 아름드리 커다란 나무와 덩굴이 가로막고 있었다. 도저히 배로 지나갈 길이 아니다. 다른 배에 탑승한 용병과 사냥꾼들이 냉담한 얼굴로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노인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용병들을 태운 배가 노인의 배로 접근했다. 용병들의 대장인 엄숙한 인상의 노기사가 쿠르트 아삼에게 말했다. “계약조건에 따르면 당신은 목적지로 가는 길을 알고 있으며 이를 보장한다고 규정했소. 만약 당신이 당신도 모르는 길로 가겠다면 우리는 여기서 빠지겠소.” 그는 아직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은 계약서를 들이밀며 철두철미하게 쿠르트 아삼을 밀어 붙였다. 실력 있는 용병일수록 계약조건을 꼼꼼히 따진다는 사실은 이제 쿠르트 아삼의 발목을 잡아끌고 있었다. “우회해서 가는 건 좋지 않은 선택 같습니다. 리자드맨들의 표식이 여기저기 있네요.” 사냥꾼들도 쿠르트 아삼의 입지를 나락으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글 여기저기 매여 놓은 청백적홍, 4가지 색깔의 끈을 가리켰다. 리자드맨들이 매어 둔 것으로 이곳에 침입하는 자들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영역표시다. 따라서 직진도 불가하고 우회로도 불가능하다. 사면초가다. 쿠르트 아삼은 침통한 얼굴로 김성철 쪽을 응시했다. 돈을 더 달라는 뜻이다. 김성철은 그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괜한 기대였나.’ 처음부터 큰 기대를 한 건 아니다. 쿠르트 아삼과 용병대장, 사냥꾼들이 모여 새로운 조건을 협상하기 시작했다. 쿠르트 아삼의 성난 고함 소리가 이따금 울려퍼지는 것 외엔 조용하고 지루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들이 협상을 하는 동안 김성철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한 달 간 헤매고 다니던 밀림의 풍경과 별 다를 바 없는 녹색의 지옥. 김성철은 진저리를 느끼며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 협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고독은 싫어하지 않지만 타의에 의해 강요된 지루함은 예전부터 넌더리가 나도록 싫어했다. “역시 저 영감. 사기꾼이었나 봐.”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안에서 투덜거렸다. 김성철도 비슷한 생각이었지만 노인의 열정은 진짜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딱히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가던 중 문득 김성철의 눈에 리자드맨 사공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앞에서 벌어지는 논쟁 따위와 무관하다는 것 과시하는 듯 그들끼리 모여 무언가를 쑥덕이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 봤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리자드맨들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작았고 특유의 쇳소리 섞인 음성이 안 그래도 작은 목소리를 흩어놓았기 때문이다. ‘잠깐.’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왜 그동안 생각을 못했을까? 칼날 비명 산맥을 위시한 대밀림 지역의 진정한 주인은 판추리아의 주민이 아니라 리자드맨들이다. 쿠르트 아삼 같은 판추리아인에게 대밀림은 탐험의 대상이지만 리자드맨에겐 제 집 안방이나 다를 바 없는 곳. 뭔가를 알고 있다면 리자드맨에게 묻는 쪽이 훨씬 빠르다. ‘하긴, 그동안 리자드맨들과 만날 일이 거의 없었지.’ 리자드맨들은 경계심이 강하고 외지인, 특히 다른 종족을 꺼린다. 그런 점에서 놓고 보면 쿠르트 아삼이 생각보다 비범한 능력을 지닌 것일지도 모른다. 어디서 말 붙이기도 힘든 리자드맨 사공을 넷이나 구한 걸 보면 말이다. ‘그나저나 어떻게 저것들과 말을 붙이지?’ 뭔가 명분이 필요하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리자드맨들은 타고난 숙명론자들이다. 노골적인 접근은 리자드맨들의 의심과 적개심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곧 김성철은 자신의 주머니 안에 적절하고 관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물건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김성철은 황금오리를 꺼냈다. 언제나처럼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목욕 친구. 김성철은 그것을 혼탁한 강물 위에 띄웠다. 황금 오리는 물살 위 두둥실 떠서 리자드맨들이 모인 곳까지 떠내려갔다. “어이쿠.” 김성철은 자연스레 리자드맨들의 보트에 옮겨 타며 황금오리를 회수했다. 황금오리를 회수하면서 김성철은 리자드맨들의 대화 일부를 엿들을 수 있었다. “그 가게 밀웜스페셜은 이제 더 이상 최고가 아니야. 산초도 오래 되서 신선하지 않고 밀웜도 덜 자란 걸 쓴다는 풍문이야.” “먹는데 까지 장난을 치다니. 역시 인간들은 구제불능의 족속들이군!”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리자드맨 중 하나가 김성철이 배에 올라탄 걸 보고 고개를 돌려 쳐다보며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얼굴 표정을 알아볼 수 없지만 경계하는 빛이 역력하다. 다른 리자드맨들도 말을 멈추고 김성철을 일제히 노려봤다. 살기까지는 아니지만 적대적인 분위기가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김성철은 천연덕스럽게 황금오리를 회수하며 그걸 리자드맨들에게 보였다. “이거 때문에 말이야.” 김성철은 리자드맨들이 보는 가운데 황금오리를 강물 위에 띄어보였다. 금속으로 만들어져 결코 뜨지 않을 것 같은 황금오리가 물 위에 뜨자 리자드맨들은 흥미를 보였다. “인간. 그건 뭐가? 속임순가?” 리자드맨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속임수는 아니야. 직접 한 번 시험해보라고.” 김성철은 황금오리를 선두의 리자드맨에게 내밀었다. 키는 2미터 남짓, 거대한 작살과 그물을 등에 짊어 매고 있는 녀석이었다. 그 리자드맨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황금오리를 유심히 살폈다. 특히 황금오리를 흔들어 안에 공기가 있는 건 아닌가 중점적으로 살폈다. “음....” 무게도 묵직하고 촉감도 순수한 황금이다. 리자드맨은 혀를 길게 내밀고 몸을 숙여 황금오리를 물 위에 띄어보았다. 퐁 하고 강물 위에 떨어진 황금오리를 위태롭게 흔들거리며 반쯤 물에 잠겼다가 이윽고 불사조처럼 물살 위로 떠올랐다. 리자드맨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라쇼!” 김성철은 리자드맨들이 즐거워하는 걸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이건 정말 대단하군.” “어떻게 만들었지? 인간.” 리자드맨들이 앞 다투어 김성철에 말을 걸어왔다. 리자드맨들에게선 땅콩버터 비슷한 냄새가 풍겼다. 김성철은 황금오리를 늘 가지고 다니는 넝마로 신중하게 닦아 주머니에 넣은 뒤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연금술의 힘이라는 거지.” “연금술이라!” 그렇게 이야기가 돌아가고 있을 때 앞쪽에서 버럭 하는 고함소리가 느닷없이 울려 퍼졌다. 종종 들리던 쿠르트 아삼의 것이 아닌 점잖은 용병대장의 것이었다. “우리를 전부 죽일 셈인가? 우리는 비록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당신을 따라가다 억울하게 죽은 용병들이 몇 명인지는 확실히 알고 있다. 우리는 개죽음 당할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 그렇게 아는 게 좋을 거요.” 노기사를 필두로 용병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빈 배에 올라탔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쿠르트 아삼이 독주를 한 모금 벌컥 들이키고는 용병들을 향해 소리쳤다. “계약금 내놔! 계약금은 내놓고 가라고!” 용병들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계약금이 뭔지도 모르는 한심한 인간 같으니라고. 계약을 어긴 건 당신이오.” “내놓으라고! 내 돈!” 그 말을 들은 베르텔기아가 중얼거렸다. “응? 우리 돈인데?” “내 돈이지.” 김성철이 정정했다. “그렇게 억울하면 돌아가서 소송 하세요. 우리는 법원의 판단에 따를 테니.” 사공은 없었지만 용병들은 자신들이 노를 저어 유유히 도시로 돌아갔다. 쿠르트 아삼은 붉으락푸르락 하는 얼굴로 대책 없이 그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용병들이 떠나자 길 안내를 맡던 정글사냥꾼들도 보트 한 척에 모였다. “지켜줄 용병이 없으면 함께 하기 어려울 것 같수다. 용병을 구해하면 다시 불러주시오.” 사냥꾼들도 떠났다. 쿠르트 아삼에게 남은 건 리자드맨 사공와 짐꾼이 전부. 사실상 홀로 남겨진 노인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한참 동안 질러댔다. 쿠르트 하삼의 열두 번째 탐험은 그렇게 끝이 났다. 애꿎은 짐꾼들만 불쾌한 표정으로 노인을 노려볼 뿐이었다. 리자드맨들은 절규하는 노인을 보며 자기들끼리 중얼거렸다. “나무엄마의 변덕도 모르는 인간이 탐사를 하겠다니. 웃기는 일이지.” “뭐 어쩌겠어? 덕분에 우리 일이 줄어들었으니 그걸로 된 것이지.” 리자드맨들의 표정을 읽는 건 불가능하지만 김성철은 그들이 황금오리를 볼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짓는 것을 발견했다. 즉,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 아인종들. 뭔가 아는 모양이군.’ 움직이지 않던 낡은 나침반이 비로소 움직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이. 친구들.” 김성철이 리자드맨들을 불렀다. 파충류의 눈동자들이 일제히 김성철을 향했다. “생각보다 빨리 일이 끝난 거 같은데 어떤가? 한 잔 사려고 하는데.” 리자드맨들의 눈동자들이 묘한 빛을 발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금술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군. 인간.” 쿠르트 아삼의 모험은 끝났다. 하지만 김성철의 모험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 42. 유적 (2) “이렇게 만드는 거지.” 김성철은 새롭게 만든 황금 오리를 리자드맨에게 건넸다. 리자드맨들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대단하군. 인간의 연금술이란.” 칭찬은 김성철이 들었지만 베르텔기아도 기분이 좋은 지 주머니 안에서 몸을 한 차례 흔들었다. 황금 오리를 만들어 준 대가로 김성철은 대밀림에 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을 구르는 돌이라 밝힌 리자드맨은 이렇게 말했다. “그 노인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대밀림의 길은 수시로 바뀌어. 밀림에 깃든 정령들의 변덕에 따라 말이지. 우리들은 그 정령을 나무엄마라고 부르지. 대밀림에서 길을 찾고 싶거든 나무엄마가 뭘 좋아하는 지 그것부터 알아내는 게 좋을 거야.” 김성철은 또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쿠르트 아삼이 찾는다는 사라진 도시. 그건 정말로 존재하는 건가?” 단도직입적인 질문이다. 리자드맨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말을 아꼈다. “그 질문엔 답할 수 없네. 인간 친구. 대밀림 안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이 스스로 먹이를 찾듯 자네도 원하는 바가 있다면 직접 밀림 안에서 찾아야 할 걸세.” 구르는 돌이 점잖게 이유를 설명했다. 김성철은 크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정글의 길이 수시로 바뀐다는 것, 나무엄마라는 정령이 변화의 중심에 있다는 것. 그 두 가지 사실을 안 것만으로 커다란 수확이다. 리자드맨과 헤어진 김성철은 다시 여행을 할 채비를 했다. 신선한 물과 말린 음식, 독충방지용 향과 몸에 덮는 망사 따위를 구입했다. 밀림을 돌아다니면서 얻은 지혜라고 할까나. 한 가득 짐을 짊어 메고 보트로 돌아가는 길에 낯익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거기, 소환자 양반.” 쿠르트 아삼이다. 고개를 돌려 돌아보니 낭패한 몰골로 비 맞은 견공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투자한 돈은 돌려줄 필요가 없소. 당신을 믿은 건 나의 결정이니.” “고.. 고맙소. 하지만 청이 하나 있는데...” “말하시오.” 김성철이 말하자 노인은 고개를 숙이며 김성철에게 읍소했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내게 투자해주지 않겠소? 이번엔 사람을 잘못 뽑아 일이 어그러졌지만 조금만 더 투자하면 최상의...” “당신과의 거래는 끝났소.” 김성철은 싸늘하게 노인의 말을 끊은 뒤 선착장으로 걸어갔다.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제발 부탁이오.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오.” 쿠르트 아삼은 끈질기게 김성철의 뒤를 따라왔다. 김성철이 배에 타자 쿠르트 아삼도 자신의 초라한 보트를 타고 김성철 뒤를 따랐다. ‘귀찮게 하는군.’ 성질 같아선 배를 부셔버리고 싶지만 도시 안에선 소란을 자제하기로 했다. 눈에 띄는 행동을 해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불안한 동행이 지속되던 중 옆에서 젊은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할아범! 대체 뭐하는 거야?” 물 위에 뜬 건물 쪽에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삐쭉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어제 본 그 빵집 아가씨다. ‘클라리스라고 했던가.’ 가냘픈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힘이 장사라 인상이 강하게 남았다. 그녀는 훌쩍 몸을 날려 노인의 보트 위에 올라탔다. 출렁하는 소리와 함께 보트가 크게 요동쳤다. “또 어디 가는 거냐고? 이번에도 또 말아먹었다면서?” 그녀의 다그침에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만 푹 떨굴 뿐이었다. 베르텔기아는 그 광경이 재밌는지 킥킥 하고 웃었다. 그때 클라리스가 갑자기 뒤돌아서며 김성철 쪽을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자 클라리스는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가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너그러운 아량으로 용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겉보기엔 왈가닥 같지만 내면엔 기품을 감춘 여자다. 또 말은 험하게 하지만 쿠르트 아삼을 챙겨주고 있었다. 김성철은 말없이 노를 저어 자리를 떠났다. 손녀에게 잡힌 노인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다시 대밀림에 들어선 김성철은 노인이 향한 길, 배를 타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뱃길을 택했다. 이 부분에 있어서 김성철은 쿠르트 아삼의 경험이 아주 헛된 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시각각 길이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대밀림 속에서 강은 유일불변의 길이기 때문이다. 곧 김성철은 탐사대가 돌아가야 했던 나무로 막힌 지점에 도착했다. 지형이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강을 가로막던 나무줄기 위치가 미묘하게 뒤틀려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나무엄마라는 건가.’ 김성철은 진실의 눈을 가동해 마법적인 요소가 숨겨져 있지는 않나 찾아보았다. 특별한 마법 술식이나 마법의 힘은 감지되지 않았다. 정령의 기척 또한 없다. 그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영겁에 가까운 시간 동안에 걸쳐 산 오래된 나무다. 하지만 오래된 것은 그 자체로 힘을 갖는다. 그것도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로. 김성철은 뱃머리에 앉아 끈기 있게 거목을 관찰했다.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김성철은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움직이고 있군. 아주 조금씩이지만 이 나무들은 위치를 바꾸고 있다.’ 강을 가로 막은 나무의 벽들의 정체는 거목의 뿌리였다.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를 정도로 거대한 나무의 일부분이 넝쿨처럼 얽혀 거대한 나무의 벽을 만들어낸 것이다. 강을 막은 줄기는 천천히 강물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두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하나는 기다리는 것. 다른 하나는 거목의 뿌리를 부수고 돌파하는 것. 어느 쪽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자는 많은 시간을 요하고 후자는 리자드맨과 불필요한 충돌을 야기할 수 있다. ‘시간을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특별히 뾰족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잠수를 생각해봤지만 곧 그만뒀다. 흙탕물처럼 황토빛을 띈 강물 속에 들어가 봐야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육로로 가자니 시시각각 길이 바뀌는 대밀림의 미로에 다시 갇힐 것 같았다. 장고의 시간이 길어지는 가운데 먼 곳에서 아름다운 운율이 들려왔다. 김성철은 기척을 숨기고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다섯 명의 리자드맨들이 밀림을 헤매고 있었다. 아름다운 음악 소리는 선두에 선 리자드맨이 불고 있는 나무로 만든 피리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들 앞엔 김성철의 앞길을 막은 것과 같은 나무뿌리들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김성철 때와는 양상이 판이하게 다르다. 나무뿌리들은 마치 스스로 생각을 가진 것처럼 리자드맨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게 아닌가? 리자드맨들은 나무뿌리 나이로 난 길을 통해 유유히 걸어갔고 그들이 사라지자 길을 열었던 나무뿌리들이 다시 내려앉아 앞길을 막았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음악 소리에 반응하는 거 같은데?” “동감이다.” 나무엄마는 음악소리에 반응해 길을 열어줄지 말지를 결정하는 걸로 보였다. 그런데 지금 시국에 어디서 음악을 구한단 말인가. “…….” 김성철은 그림도 못 그리지만 노래도 못한다. 다룰 줄 아는 악기는 하나도 없고 그나마 어릴 때 국민학교의 음악시간에 배운 리코더가 다뤄 본 유일한 악기다. “베르텔기아.” 김성철이 베르텔기아를 불렀다. 평소와 달리 어딘가 부드러움이 묻은 음성이었다. 베르텔기아는 어떤 때 김성철이 그런 목소리로 자신을 묻는 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으.. 응? 왜 그래..?” 베르텔기아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천진난만한 태도로 대답했다. “노래 한 곡 뽑아봐라.” “시.. 싫어!” “박수 쳐 줄 테니까 어서.” 김성철은 박수 치는 시늉을 하며 종용했다. “싫다고! 노래 못 한다고!” 베르텔기아의 저항이 상상 외로 거세다. “…….” 어쩔 수 없다. 김성철은 실로 오랜만에 목청을 가다듬고 자신을 가로 막은 나무뿌리들을 향해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결과는 처참했다. 한 소절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무뿌리들은 성이 난 듯 김성철 앞을 더욱 단단히 가로막았다. “…….” 김성철은 미련 없이 뱃머리를 돌렸다. * 가수나 연주자를 구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대밀림에 가려는 연주자를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대밀림이 얼마나 위험한 지 판추리아 시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나이 지긋한 악공은 혀를 차며 말했다. “천만금을 준다한들 목숨보다 귀하겠소? 정 악공이 필요하면 직접 배우시구려.” 하루 종일 발품을 팔았지만 소득은 전무. 중간에 방법을 바꿔 큰돈을 먼저 제시하고 유혹하는 방법도 써봤지만 대밀림에 간다는 말을 하자마자 계약은 그대로 파토 났다. 그나마 관심을 보이는 악공도 최소한 쿠르트 아삼의 탐사대 급의 규모를 요구했다. 김성철은 이참에 악기를 한 번 배워볼까 하는 무모한 상상을 하며 황제의 측간으로 향했다. 언제나 떠들썩한 주점의 풍경이 그를 반겼다. 김성철은 감시자들의 눈이 닿지 않는 자리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잠시 지친 심신을 달랬다. 어느 정도 피로가 풀리자 김성철은 다시 대밀림에 함께 갈 악공을 수소문했다. 굳이 주점을 택한 이유는 매일 주점에 얼굴을 들이미는 인간쓰레기들 중에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서다. 김성철은 주점의 종업원에게 팁을 찔러주고 주정뱅이들 중에 악공 출신이거나 악기를 잘 다루는 사람을 찾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의외의 목돈을 받은 종업원은 양치기 개처럼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김성철은 주점 3층에 있는 객실을 빌려 후보들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이윽고 김성철의 객실에 3명의 주정뱅이들이 나타났다. 하나같이 술 냄새를 풍기고 행색이 초라한 사람들이었다. “어디 한 번 차례대로 해보시오.” 오디션이 시작했다. 문턱은 대단히 낮았다. 그러나 그 낮은 문턱을 넘는 인간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번지수를 다르게 찾아온 인간도 허다했다. “성대모사도 가능합니까? 리자드맨 흉내라면 자신 있습니다! 쉿! 쉬이이! 여기 밀웜스페샬 하나! 산초 가득 얹어서!” “꺼져.” 이후로도 몇 명이고 놈팽이들이 찾아왔다. 그나마 이마에 강간범이라는 문신이 새겨진 사내가 피리를 조금 다룰 줄 알았고 대밀림에 갈 용의도 내비치긴 했지만 김성철의 성에 차진 않았다. 연주 실력도 어중간했고 무엇보다 출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성철이 주저하자 강간범은 넙죽 엎드려 간곡하게 말했다. “저는 개과천선하여 하루하루 반성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는 서민에게 물질적 피해를 끼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리며 사람 하나 만든다는 기분으로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 김성철은 일단 그 사내에게 기다리라고 한 뒤 다음 타자를 불렀다. 다음 참가자는 김성철이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소환자 양반!” 쿠르트 아삼이다. 탐사대장할 때 산 멋들어진 복장은 어디 팔아먹었는지 다시 넝마주이를 걸친 그 노인은 김성철 앞에 엎드려 손에 키스를 하려고 했다. 김성철이 노인을 가볍게 밀어젖히며 바깥에 기다리고 있는 종업원을 향해 말했다. “여기.” 당장 쫓아낼 요량이었다. 낌새를 눈치 챈 쿠르트 아삼이 재빨리 문으로 달려가 문을 잠궜다. “이러면 곤란한데.” 김성철이 처음으로 살기를 내비쳤다. 쿠르트 아삼은 온 몸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준비한 말을 가까스로 해냈다. “음악가를 찾는다고 들었소.” 그는 오랜만에 의연하게 말했다. “악기라도 다룰 줄 안단 말이오?” 김성철이 묻자 쿠르트 아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시오.” “그.. 그게...” 노인이 주저했다. 김성철의 입에서 얕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경고하는데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김성철은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무고한 자는 해치지 않는 주의지만 거듭해서 폐를 끼치는 자까지 살려 둘 용의는 없었다. “클라리스! 내 손녀가 노래를 기막히게 잘하오.” “그럼 데리고 오시오.” “그게 좀 곤란하오. 전에도 말했듯이 사이가 좋지 않아서.” “….…” “하지만 어디 있는지 알고 있소! 아마도 이맘때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오. 같이 한 번 가봅시다. 내 말이 틀리면 그땐 날 때려죽이든 갈아죽이든 뭐든 받아들일 테니.” 김성철은 피로함을 느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젖히고 여관의 복도를 응시했다. 강간범과 크게 다르지 않은 놈팽이들이 술 냄새를 풍기며 건들 건들거리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내와 눈이 마주 친 김성철은 쿠르트 아삼에게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안내하시오.” * 쿠르트 아삼이 안내한 곳은 물 위가 아닌 물가에 지어진 고풍스런 저택이었다. 갖가지 색깔의 장미가 담장에 흐드러지게 핀 담장 너머로는 아름다운 음악과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가까이가자 화려한 옷을 차려 입은 남녀들과 진수성찬이 차려진 수많은 테이블들이 보였다. 저택 안에선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김성철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사교와 연회는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다. 인간제국에 몸을 담을 때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지긋지긋한 사교모임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여성이 있다고 하나 가식적인 미소와 잰 체 하는 기득권들의 거만한 태도를 보면 속이 메스꺼운 역겨움이 느껴졌다. 비록 이곳이 대륙의 심장인 제국의 연회에 비하면 급수가 한참 떨어지는 시골뜨기들의 연회장이라고 해도 선천적인 거부감이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메스꺼움을 참고 입구로 가자 건장한 하인들이 김성철 일행을 보자 앞을 가로막았다. “초대장이 없거나 의심스러운 사람들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의심스러운 사람이란 건 행색이 초라한 사람을 달리 일컫는 말이었다. 김성철에겐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입구 옆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자니 쿠르트 아삼이 손가락으로 연회장을 가리켰다. “저기, 제 손녀입니다!” 김성철은 노인의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을 응시했다. 관중들의 무관심 속에 클라리스가 무대 위에 오르고 있었다. 짓궂은 꼬마 하나가 옆에서 어슬렁거리며 빵부스러기를 던지는 게 관중들이 보인 유일한 관심. 무관심 속에서도 클라리스는 꿋꿋이 악단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와.” 베르텔기아가 나지막하게 탄성을 터뜨렸다. 김성철의 눈동자에도 이채가 떠올랐다. ======================================= 42. 유적 (3) “안 가요. 절대 못 가요. 제가 미치지 않은 이상 절대 가지 않아요.” 당연한 일이지만 클라리스는 김성철의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쿠르트 아삼이 김성철을 대신해 손녀를 설득하려고 시도했다. “클라리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다시는 대밀림에 가지 않을 테니 이번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동행해다오.” 쿠르트 아삼의 설득에 클라리스의 심경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으나 결정적으로 뒤집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어이. 클라리스. 다음 곡 부를 시간이야.” 함께 일하던 악단원이 초조한 얼굴로 시계를 보며 클라리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클라리스는 다시 연회장 쪽으로 사뿐히 걸어갔다. 곧 음악이 들려오고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한 밤의 강가 위에 아련히 울려 퍼졌다. “아름다운 목소리군.” 김성철이 남을 칭찬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연회장의 사람들에겐 그렇게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노래가 절정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을 때 웃고 떠들던 술 취한 귀족 하나가 무대를 향해 유리컵을 집어 던졌다. “야! 시끄러!” 구레나룻을 길게 늘어뜨린 중년의 배불뚝이였다. “뭐 이리 못 불러! 당장 저거 내보내.” 그는 무대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역정을 냈다. 시골 귀족 몇 명이 그 모습을 보고 깔깔 웃었다. 클라리스와 악단들은 이 상황이 익숙한 지 노래를 멈추고 사내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구레나룻 사내는 그윽한 눈으로 클라리스를 보더니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클라리스 양! 왜 내가 선물한 옷을 입고 오지 않았지? 내가 거액을 들여서 라그란제에서 사온 특별 무대복을 말이야!” “아니... 저 놈이...” 지켜보던 쿠르트 아삼의 얼굴이 노기로 물들었다. “어떻게 감히 저 놈이 내 손녀에게 저럴 수 있어.” 쿠르트 아삼은 앞으로 걸어갔다. “어디 가시오?” 김성철이 묻자 쿠르트 아삼은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 집 종노릇이나 하던 놈이 감히 내 손녀를 건드리다니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소.” 그는 연회장 입구로 걸어갔다. 건장한 사내들이 앞을 막아섰다. 쿠르트 아삼은 사내들 사이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갔다. “비켜! 비키라고! 할 말이 있을 뿐이야.” 쿠르트 아삼은 입구 쪽에 또 다른 소란을 일으켰다. 음악이 멈추고 귀족들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 그중엔 클라리스에게 컵을 던지며 조롱했던 사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상적인 구레나룻을 기른 사내는 쿠르트 아삼의 얼굴을 알아보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누구냐. 대탐험가 쿠르트 아삼 양반 아닌가? 듣자하니 대밀림에 또 갔다던데 왜 벌써 돌아온 거지? 설마 또 망한 건가?” 그가 주위를 돌아보며 말하자 다른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가레스 에일! 대대로 우리 집 종노릇이나 하던 놈이 돈 좀 벌었다고 아주 기고만장하구나!” 종이라는 말을 듣자 구레나룻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한 땐 그랬었지.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은 아니지. 명심해. 나는 가문을 일으켜 세웠지만 너는 가문을 몰락시켰어. 그리고 지금 나는 내 업적에 대한 보상을 누리는 거고 너는 대가를 받는 거야. 절멸의 저주만 아니었더라면 대대로 네 가문을 우리 집 종놈, 종년으로 썼을 건데 그건 참 아쉽군.” 말은 얄밉게 하지만 비아냥을 거르고 보면 지극히 옳은 말이다. 옳은 말은 때로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가레스! 이 놈!” 쿠르트 아삼이 문지기를 뚫고 가레스 에일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뒤에서 쫓아온 문지기들이 그를 붙잡았다. 쿠르트 아삼은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 공연이 끝난 클라리스가 다급히 이쪽으로 뛰어와 쿠르트 아삼의 상세를 살폈다. 처음 그녀의 얼굴엔 노기가 가득했지만 엉망으로 얻어맞은 쿠르트 아삼의 얼굴을 보더니 이내 분노는 사그라졌고 크게 걱정하며 그의 몸 상태를 살폈다. “할아범. 괜찮아?” “으으... 미안하다. 클라리스.” 쿠르트 아삼의 눈에서는 꼴사납게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분노와 회한이 섞인, 그리고 너무 아파서 우는 눈물이었다. “내가.. 내가 널 망쳤다. 원래대로라면 라그란제의 음악학교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어야 할 텐데. 나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할아범. 아니.. 솔직히 듣고 보니 열 받긴 하네. 할아범만 아니었더라도...” 클라리스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 김성철이 조손 앞에 나타났다. “…….” 클라리스의 시선이 김성철을 향했다. “아니. 당신. 할아범이 맞고 있는데 보고만 있었죠?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인정머리가...” 쿵. 클라리스 앞에 상자 하나가 떨어졌다. 상인연합회의 봉인이 찍힌 상자. 봉인을 풀고 상자를 열자 주변을 환하게 빛나는 황금빛이 쏟아져 나왔다. 클라리스와 쿠르트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이거면 되나?” 김성철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 대밀림으로 향하는 보트 위엔 4명의 사람이 탑승해 있었다. 쿠르트 아삼과 그 손녀는 선미에 자리를 잡은 채 불안한 눈빛으로 강의 양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마에 강간범이란 문신을 새기고 있는 라이트란 건장한 사내는 선수에 뒤돌아 앉아 오직 클라리스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흐흐흐...” 김성철은 최후미에 서서 키를 잡고 서서 선내에 벌어지는 풍경을 무심한 눈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어이.” 김성철이 라이트를 불렀다. 라이트의 귀엔 김성철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음... 역시 황제의 측간 출신이라는 건가.’ 썩은 사과인줄 알고 골랐지만 이 정도로 썩은 사과였을 줄이야. 설상가상으로 도시를 벗어나자마자 라이트는 벌떡 일어서 목에 걸고 있던 호각을 크게 불었다. 갈대숲에 숨어 있던 작은 보트들이 이쪽을 향해 열심히 노를 저어왔다. “저 소환자 놈이 돈이 많다는 소문이다. 전부 죽여라!” 그와 동시에 강간범이 도끼를 빼들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 내가 개과천선 따위 할 줄 알았냐? 여자는 내 것이니까 아무도 손대지마!” 잠시 후. 배 주변으로 도적들의 시체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도적들은 태운 배는 불에 타 서서히 흙탕물 안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김성철 앞엔 이마에 문신은 새긴 사내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저는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였고 나쁜 마음에 맞서 스스로를 억제할 수 있는 힘 또한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당신을 만나 다시 태어났고 진정한 의미의 개과천선을 이룰 수 있었던 겁니다. 청컨데 한 번만 더 불초소생에게 기회를 주신다면...” 강간범은 조곤조곤하게 자신의 개심을 김성철에게 말했다. 김성철은 일단 그를 살려뒀다. 용도가 있기 때문이다. 보다 놀란 쪽은 쿠르트 아삼과 그 손녀였다. 그들은 김성철이 보여준 압도적인 힘에 열린 입을 닫지 못했다. 뭔가 번쩍하고 휘리릭 하는데 그 많던 살인강도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 “할아범. 대체 저 사람, 뭐야?” “그.. 그게... 마.. 마법산가?” 쿠르트 아삼으로선 알 리가 없다. 자신을 고용한 자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혼란 속에서 김성철의 배는 나무엄마에 막힌 강의 끝단에 이르렀다. “불어.” 김성철이 살려 둔 강간범에게 짤막하게 말했다. “나, 나와도 돼?” 김성철의 주머니 안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성철의 주머니 안에서 자그만한 책이 나오더니 갑자기 하늘 위에서 펑하고 크게 변했다. 하늘을 나는 책 배르텔기아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녀는 클라리스를 향하 팔랑거리며 날아와 그녀 주위를 멤돌았다. “히.. 히이!” 클라리스는 순간 배에서 뛰어내릴 뻔했지만 쿠르트 아삼이 붙잡았다. “거기 예쁜 언니. 노래 좀 하던데. 나보다 조금 못 부르지만.” “책.. 책이 말하고 있어...!” 그때 앞에서 피리 소리가 들렸다. 강간범 라이트가 리코더처럼 생긴 피리를 떨리는 손으로 잡고 피리리 불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조악한 연주 실력으론 나무엄마에 감흥을 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무엄마가 약간 꿈틀거리더니 이내 단단한 벽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 김성철의 그림자가 강간범의 얼굴 위에 드리워졌다. “아.. 개과천선 하는 마음을 담았는데... 잘 안 되네요. 개과천선의 마음을 담아 한 번 더....” 사내는 다시 피리를 불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애용하는 밧줄을 꺼내 라이트의 목에 휘감았다. 그런데 목에 걸고 있던 호각이 거슬린다. 김성철은 호각을 건 줄을 잡아끊고 라이트의 목을 다시 한 번 밧줄로 휘감았다. “으... 으아아아아아!!!” 강간범의 비명이 우거진 수풀 위로 울려 퍼졌다. 그의 비명은 그의 피리소리보다 나무엄마에게 감명을 줬는지 좀 더 많이 나무뿌리들을 움직였다. 멀리 혀를 쏙 빼고 대롱거리는 시신을 배경으로 김성철이 쿠르트 아삼과 클라리스에게 다가왔다. “자. 다음 차례.” “…….” 클라리스는 침을 꿀꺽 삼키고 배 앞전에 섰다. 가슴이 쿵쾅거렸지만 늘 하던 심호흡을 두어 차례 하자 평정이 찾아왔다. 수백 번에 걸쳐 무대에 선 경험이 습관처럼 그녀를 진정시킨 것이다. 비록 관객도 조명도 악단의 반주도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 앞을 가로막은 무수한 나무뿌리들을 향해 입을 벌리고 노래를 불렀다. “…비할 데 없이 우아한 그 광경에 용기를 내어 다가가네. 두 개의 태양에서 비추는 빛은 희미해지다 또 밝아지네.” 처음에는 낮고 우물거리는 것 같은 노래는 하나의 소절이 끝나고 다음 소절로 넘어갈수록 강한 힘과 호소력을 품고 주변의 공기를 휘어잡기 시작했다. 무심한 나무들이 천천히 흔들린다. 비정한 적막에 싸인 대밀림, 그 안에 울려 퍼지는 유일하게 아름다운 소리 속에서 김성철은 배 앞을 가로막은 나뭇가지들이 물살처럼 갈리며 앞을 여는 마술적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역시.’ 길이 열렸다. 무한히 확장된 나무뿌리 사이에 숨겨져 있던 강의 원형이 김성철 앞에 펼쳐졌다. 김성철은 고블린 가죽으로 만든 지도를 들어 주변의 풍경을 확인했다. 뾰족한 칼날 모양의 바위, 하얀 원숭이들이 앉은 커다란 나무, 오렌지색 물이 솟는 온천. 그동안 찾아 헤맸던 그러나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표지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그리고 연속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이거야. 바로 이거라고.” 가장 흥분한 건 쿠르트 아삼이었다. “여덟 번째 원정이었을 거야. 용병 중 한 놈이 무료함을 달래고자 플롯을 불렀었지. 그때 길이 열린 건 그 때문이었던 모양이군.” 앞을 가로 막던 나무의 벽은 이제 사라졌다. 클라리스가 노래를 그쳤을 때 김성철은 볼 수 있었다. 무성하게 솟은 녹색의 지옥 위에 희미하게 솟아 반짝이고 있는 뾰족한 첨탑을. ‘저곳인가?’ 그때 뒤에서 쿠르트 아삼이 걱정스레 주변을 돌아보며 말을 걸어왔다. “조금만 더 가면 이상한 소리가 들릴 거요.” “이상한 소리?”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기계와 소리지. 용병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모두 도망갔소. 황천에서 기어 나온 괴물 혹은 대악마가 숨어 있다면서.” 곧 김성철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덩굴과 수풀 너머로 불규칙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치며 나는 소리 같기도 했고 무거운 절구를 반복적으로 내려찧는 소리 같기도 했다. 좀 더 가까이가자 정체불명의 굉음은 보다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클라리스가 옷소매를 걷어 부치며 쿠르트 아삼을 보호하듯 앞을 지키고 섰다. 그녀의 손엔 강간범이 남긴 도끼가 들려 있었다. 도끼의 자루 부분엔 “출소기념, 새로운 마음으로!”라는 글귀가 음각되어 있었다. 겁 많은 베르텔기아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김성철의 주머니 안으로 피신했는데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명확하게 들려오자 슬그머니 주머니 밖으로 삐져나왔다. “응? 이 소리. 뭔가 낯익고 정겨운 소린데?”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노를 저으며 앞으로 전진했다. 곧 김성철 일행은 소리의 정체와 직면했다. 우지끈. 아름드리나무가 부러지며 그 너머로 회전하는 톱날이 보였다. 톱날의 주인은 돌과 철로 만든 골렘이었다. 키는 5미터 가량, 보석으로 만든 붉은 두 눈을 번득이고 있었고 하얀 화강암으로 만든 이끼 낀 동체 위엔 녹슨 철에서 흘러나온 녹물이 피처럼 섬뜩하게 묻어 있었다. “응? 저건 표준 전투 골렘이잖아. 아빠가 만든 거야!”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밖으로 나와 골렘 쪽으로 향했다. “야! 나야. 나. 못 알아 봐?” 다음 순간 톱날이 회전하며 베르텔기아를 향해 움직였다. “어라..?!” 절체절명의 순간, 경쾌한 파공음이 일더니 검은 무언가가 회전하는 톱날을 휘감았다. 마편 카산드라다. “이리로 와. 베르텔기아.” 베르텔기아가 재빠르게 김성철에게 다가오자 마편 카산드라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어어어...” 골렘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 육중한 골렘의 동체가 위로 들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강물 안에 내동댕이쳐졌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괴력이었다. “…….” 김성철은 흙탕물 위에 떠오르는 기포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 다시 노를 저었다. 쿠르트 아삼과 클라리스는 벙찐 얼굴로 김성철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잠시 후 용기를 낸 쿠르트 아삼이 김성철에게 말을 걸었다. “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김성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노를 저을 뿐이었다. 이윽고 불길한 소리가 밀림 저편에서 들려왔다. 또 다른 골렘들이다. 김성철은 쿠르트 아삼과 클라리스를 향해 짤막하게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시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요.”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볍게 도약했다. 그리고 소리의 방향을 좇아 수풀을 해치고 나갔다. 곳곳에 자리 잡은 리자드맨들의 표식이 눈에 밟히긴 했지만 딱히 중요한 것 아니다. 곧 김성철은 또 다른 골렘을 발견했다. 골렘을 본 김성철의 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한 쪽 팔엔 회전하는 톱날을 단 건 전의 골렘과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팔에 달고 있는 녀석이다. 골렘의 다른 한 팔엔 김성철이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청명하고 맑을 빛을 내는 청루석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골렘 발밑 아래엔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의 작은 동물들이 죽어 있었다. 카벙클들이다. “세상에.. 대체 뭐하는 짓이지?” 베르텔기아는 경악했다. “…….” 김성철은 즉시 팔 가라즈를 꺼내 골렘을 후려쳤다. 일격을 얻어맞은 전투 골렘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잠깐만! 골렘을 살펴봐야겠어.”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밖으로 나와 박살난 골렘의 잔해로 날아갔다. 그녀는 화강함 너머로 빛나는 골렘의 핵에게 다가갔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난 후 베르텔기아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에 조정됐어!” “…….” “최근에 누군가 이 골렘들을 깨워 이 끔찍한 일을 하게끔 명을 내린 거야.” “그런 일이 가능한 사람은?” 김성철이 물었다. “우리 아빠뿐일 텐데...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동 시대를 살았던 자의 가능성은 없나? 칠영웅이라든가.” 김성철이 주변을 날카롭게 주시하며 물었다. “그.. 그건 잘 몰라. 아빠가 그 사람들과 알고 지냈고 몇 번이고 같이 모험을 떠난 적은 있지만.. 아니 어쩌면 골렘의 조정 정도는 알려줬을지도 모르겠어. 그건 특별히 어려운 게 아니니까.” “그렇다면 답은 하나군.” 김성철의 눈이 매섭게 번득였다. ‘사자토스.’ ======================================= 42. 유적 (4) 그 경박한 웃음소리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김성철은 귀를 기울여 밀림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먼 곳에서 또 다른 골렘이 기동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김성철은 즉시 그곳으로 달려갔고 카벙클들을 학살하고 있는 골렘을 발견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베르텔기아가 카벙클들의 시체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다중영창과 카벙클이 관련이 있는 모양이군.” 사자토스의 치졸한 수가 눈에 보이던 선하다. 다중영창을 넘겨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이곳에 와 단서가 될 모든 것을 없애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김성철에겐 기회일 수도 있다. 운 좋게 사자토스를 이곳에서 만난다면 여기서 끝장 낼 수 있는 기회기에. 김성철은 2개의 골렘을 더 처치한 후 쿠르트 아삼이 기다리고 있는 보트로 향했다. “어.. 어디 갔다 오는 길이오? 뭔가 엄청난 소리가 들리던데.”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구려. 하지만 내가 지시하는 대로 따라주면 무사히 판추리아로 갈 수 있을 것이오.” 김성철은 노를 저어 앞으로 향했다. 나무 사이로 삐죽 솟은 첨탑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곧 흐르는 물살 너머로 문명의 흔적이 나타났다. 돌을 쌓아 만든, 유구한 세월의 자취가 새겨진 무너진 선착장이었다. 배를 댈 밧줄은 이미 썩어 없어졌지만 밧줄을 멜 고정대는 남아 있다. 김성철은 밧줄을 꺼내 배를 단단히 고정 시킨 후 선착장 위로 올라서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선착장 주변은 다른 곳과 달리 쥐죽은 듯한 고요에 잠겨 있었다. “이곳에서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군.” 김성철은 보트 위에 떨어진 호각을 주웠다. 강간범이 동료들을 부를 때 쓰던 녀석이다. 김성철은 그것을 클라리스에게 넘겼다. “무슨 일이 생기면 이걸 쓰도록.” 이들은 김성철이 필요에 의해 직접 부른 사람들이다. 김성철은 자신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을 물건 버리듯 버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김성철이 그토록 증오하는 기득권과 다를 게 하나도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단, 예외는 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김성철은 쿠르트 아삼을 노려보며 당부하듯 말했다. 쿠르트 아삼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과 손녀를 뒤에 남겨둔 채 김성철을 앞을 향해 걸어갔다. 우뚝 솟은 첨탑을 표지삼아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나가자 곧 눈동자를 현혹할 정도의 장관이 김성철 앞에 펼쳐졌다. 층층이 쌓아 올려 만든 거대한 피라미드가 온전한 모습으로 대밀림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덩굴 하나, 풀 한포기 하나 유적을 침범하지 못했다. 무한한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대밀림 안에 생명을 가지지 않은 존재가 이토록 완벽하게 유지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여기인 모양이군.” 고블린 가죽으로 만든 지도의 끝에 목적지는 단순히 엑스 자로 표시되어 있었지만 정황상 목적지는 이곳 이외에 달리 생각하기 어려웠다. 김성철은 진실의 눈을 가동해 주변을 돌아보았다. 특별히 마법적인 술식은 없었다. 하지만 이 유적은 어찌하여 그토록 깔끔하게 유지되는가 하는 의문이 솟아올랐다. 의문은 곧 해결됐다. 한 기의 골렘이 먼 곳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처치한 다른 전투 골렘과 달리 인간 정도의 크기, 몸통과 다리가 짧고 뭉퉁한 팔을 지녀 귀여운 느낌마저 주는 그 골렘은 유적 사이를 돌며 보도 위에 솟은 풀, 유적을 향해 뻗친 가지, 떨어져 쌓인 낙엽들을 짧은 팔을 부지런히 놀려 정리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그 골렘이 유적의 관리자인 셈이다. 그 골렘은 김성철이 가까이 와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김성철에게 다가오더니 그의 발밑에 난 잡초를 짧고 뭉툭한 손으로 뽑아 멀리 던져 버리고 김성철 앞을 떠날 뿐이었다. “저것도 아빠가 만든 걸로 보이는데. 저런 소형 골렘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빠가 유일해.” “네 아버지. 대체 뭐하는 사람이었나? 연금술사 아니었나?” “응. 맞아. 연금술사. 내가 아주 어릴 땐 연금아이템만을 만들어 팔았는데 그날이 가까워질 땐 주로 골렘을 만들었어. 바다 아래서 온 어인들이 세계 전역을 위협했거든.” “어인이라. 그것도 재앙의 일부인가?” 김성철의 물음에 베르텔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김성철이 알기로 재앙의 서에 바다 밑에 사는 어인의 재앙 따윈 기재되어 있지 않다. ‘여기의 일을 마무리 지은 뒤, 바로 은자의 탑으로 가봐야겠군.’ 김성철은 작은 골렘을 뒤로 하고 피라미드의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피라미드 안은 짙은 어둠과 그에 걸 맞는 적막으로 가득 차 있었다. 터벅. 발소리는 사방에 부딪쳐 먼 곳까지 이어지며 메아리쳤다. 통로는 길게 이어져 있다.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횃불을 꺼내 불을 붙이고 안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어둠 안으로 한 발 발을 들이는 순간 김성철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나타났다. [ 용케도 이곳을 찾았군. 사자토스의 이름을 걸고 환영한다. ] 문자가 사라지면서 어둠 속에 싸인 통로가 멀리서부터 밝혀지고 있었다. 통로 상단의 등불에 일제히 불이 붙은 것이다. 등불에 의해 밝혀진 통로 벽면엔 아득한 과거에 그린 걸로 보이는 벽화가 남아 있었다. 다만 오랜 시간의 흐름으로 염료가 수명을 다해 원형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김성철은 천천히 걸으며 옆으로 흘러가는 벽화를 응시했다. 사람들과 짐승, 그를 쫓는 악마와 물고기처럼 생긴 인간이 그려져 있었다. 인간들의 얼굴은 대부분 공포에 질린 반면 악마와 어인들의 얼굴은 대체로 무표정했다. 벽화 위로는 군데군데 벗겨저 독해하기 어려운 고대어가 적혀 있었다. 김성철은 그중 일부분을 읽어보았다. ‘온다... 그들... 막기... 어려운... 도움!... 도움!’ 대충 해석해보니 재앙의 무시무시함을 나타내는 글귀로 보였다. 김성철은 좀 더 앞으로 걸어갔다. 또 다른 문자가 눈앞에 떠올랐다. [ 아마 이 글귀를 보고 있을 시점에 우리는 죽음 목숨이 되어 있거나 아니면 세상을 구한 영웅이 되어 있을 것이다. ] [ 하지만, 그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 인간들이란 배은망덕한 존재니까. 대장은 인간들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가지고 있지만 베스티아레와 가시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 나는 일단 중립이지만 과연... 어떻게 될까? ] 그 문구를 본 김성철은 이 유적이 만들어진 시점을 대충 추측할 수 있었다. 소환궁전에 자취를 남겨 놓은 다음 사자토스는 이곳에 왔을 것이다. 즉 세상의 운명을 건 최후의 싸움 전, 칠영웅이 아직 재앙으로 타락하기 전이다. 김성철은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벽화의 형태는 원형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었는데 곧 흥미로운 형상이 김성철의 눈에 들어왔다. 날개가 달리고 새의 부리는 가진 종족. 조인들이다. 고대어는 그들에 대해 기술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어설픈 독해실력으로 그 부분에 적힌 고대어를 해석했다. ‘하늘... 위협... 고대신... 종복... 흘러내리는... 왕.... 도움!’ 이 대목에서 김성철은 의아함을 느꼈다. 악마, 어인, 조인. 칠영웅 시대에 나타난 3가지 재앙. 그런데 그 재앙의 내용은 현재에 도래한 재앙의 내용과는 달랐다. 김성철 시대에 도래한 재앙은 아래와 같다. 악마, 칠영웅, 전쟁. 칠영웅은 그렇다 하더라도 칠영웅 시대에 나타난 두 가지 재앙은 김성철의 시대에 나타나지 않았다. ‘재앙의 내용은 바뀔 수 있는 것인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아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가능성이다. 재앙이란 것은 신의 의지에 의해 스스로 기술되는 재앙의 서에 나타난 걸 말하는 것이므로. 인간의 의지로 결정하는 게 아니고 따라서 받아들이는 이들은 수동적으로 받들 수밖에 없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에게 물었다. “네가 있던 시절의 재앙엔 어떤 것들이 있지?” 처음으로 묻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건 어인들의 재앙이 끝이야. 그 이후 나는 어떤 사정에 의해 깊은 잠에 빠져 들었고. 몸이 별로 안 좋았거든.” 그렇게 말하는 베르텔기아의 목소리엔 어딘가 원망하는 투가 섞여 있었다. “…….” 김성철은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넓은 홀이 나왔다. 홀 안엔 돌로 만든 탁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탁자 위엔 파피루스로 만든 두루마리 책자들이 놓여 있었는데 손을 대자 그대로 바스라져 먼지처럼 흩어졌다. ‘이건 쓸 수 없겠군.’ 김성철은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또 다른 문자가 앞을 가렸다. [ 다중영창은 우연한 기회에 발견한 나만의 비장의 기술이다. ] [ 이곳 칼날 비명 산맥 아래의 밀림 안엔 수많은 카벙클이 살고 있지. 카벙클이야 대륙 전역에서 볼 수 있는 흔한 녀석이긴 하지만 여기 대밀림에서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영특한 녀석을 만날 수 있다. ] 유적 안에 남겨 놓은 사자토스의 메시지는 훗날 이곳에 찾아올 사람들을 위한 것이 분명하다. 적대적인 함정도 일절 없고 흔한 시험도 없었다. 다중영창을 얻기 위한 시험이라면 이미 소환궁전에서 모두 해결해서 그런 지도 모른다. 홀을 지나자 갈래 길이 나타났다. [ 왼쪽으로. 오른쪽에 가도 손해 볼 것은 없다. 재밌는 친구가 남겨놓은 전언을 볼 수 있을 것이니. ] 김성철은 왼쪽을 향했다. 그의 발걸음은 전보다 확연히 빨라져 있었다. 또 다른 홀이 나타났다. 홀 중앙엔 커다란 석판이 있었고 거기에 화공들이 정성스레 그린 한 마리 동물의 그림이 있었다. 카벙클이다. 그런데 평범한 카벙클과는 생김새가 다르다. 털이 흰빛을 띄고 이마의 보석이 청루석과 같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 지금 네 앞의 그림이 다중영창의 비밀을 쥔 녀석이다. ] [ 놈의 이름은 왕 카벙클. 멋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직접 지은 이름이니. 중요한 것은 이 녀석은 몸에 닿는 모든 생물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 [ 잘 생각해보라. 자신과 생각을 공유하는 마법을 쓸 수 있는 녀석을 사역마로 삼는다는 것을. ] 문자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 소환궁전에서 얻은 청루석 반지는 모든 카벙클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 [ 아침 해가 뜰 때 피라미드의 첨탑 위에 올라 반청루석 반지의 빛을 비춰라. ] [ 숲 안의 모든 카벙클이 모여들 것이다. ] 그림 아래엔 수정처럼 반짝이는 보석이 놓여 있었다. 그걸 본 베르텔기아가 입을 열었다. “이건 아빠가 만든 골렘의 핵과 비슷한데?” 김성철은 보석을 손으로 들어올렸다. 특별한 마법적인 힘은 없었다. 대신 또 다른 문자가 나타났다. [ 왕 카벙클을 길들이는 게 이상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솜씨 좋은 사령술사가 있다면 영혼을 뽑아 아래의 영혼석에 담아 도구처럼 부릴 수도 있다. ] [ 하지만 명심해라. 영혼석에 넣는다고 해도 왕 카벙클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바깥에 굴러다니는 녀석처럼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으니까. ] 김성철은 손에 든 보석을 살펴보았다. 평범해 보이지만 범상치 않은 힘을 간직하고 있었다. ‘영혼석이라.’ 현재엔 전해지지 않는 기술이다. 영혼을 뽑아 착취하는 기술 자체는 악마의 것. 현재의 인간계에선 엄금될뿐더러 전해지지도 않는 실전된 기술이다. 아무튼 더 이상 문자는 떠오르지 않았다. 사자토스의 전언은 여기가 끝인 걸로 보였다. ‘사자토스. 이때 당시엔 아주 나쁜 놈만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짓궂긴 하지만 누구보다 친절하고 상세하게 자신만의 고유기술을 후대에 찾아올 이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자들이 깨달음 운운하며 후학들에게 모호한 현학적인 말로 얼버무리는 것보다는 훨씬 상냥하고 친절한 태도인 것이다. 김성철은 방을 나서 갈림길이 있던 지점까지 돌아갔다. 김성철은 이번엔 오른쪽으로 향했다. 몇 개의 벽화를 지나자 어둠 속에 작은 방이 나타났다. 벽화가 있던 사자토스의 방에 비하면 쪽방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방이었지만 방 중앙엔 우뚝 서서 공간을 위압적으로 채우는 무언가가 하나 있었다. 김성철의 횃불이 그것을 비췄다. 골렘과 비슷한 형태의 무언가 였다. “응? 이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베르텔기아가 말했다. 김성철이 골렘에 가까이 가자 기다렸다는 듯 문자가 눈앞에 떠올랐다. [ 어떤가? 이 대천재이자 여덟 번 째 영웅이 만들어 낸 대재앙최종결전병기에 대한 감상은? ]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에크하르트였나. 재밌는 친구라는 것이.’ 문자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 이 대재앙최종결전병기의 모형만 보고 성급하게 결론내리지 말게. 나의 야심작 대재앙최종결전병기 베르텔기아 1호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모든 골렘을 합친 것보다 커다란 크기지. ] [ 이 신을 닮은 거신은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재앙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고... ] 문자기 이어지던 중 갑자기 피라미드가 크게 흔들렸다. 쿵! 엄청난 충격이 외부에서 가해지고 있는 걸로 보였다. ‘지진인가? 아니다. 이것은.’ 김성철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같은 시각. 호루라기 소리가 밀림 위로 날카롭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클라리스는 경악이 서린 눈으로 피라미드의 상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피라미드 상공엔 마법진에 둘러싸인 작은 체구의 사내가 사신처럼 떠올라 있었다. “하하하하하! 거지새끼도 아니고 흘린다고 바로 주워 먹으러 오기는! 여기가 네 무덤이다!” 칠영웅 사자토스. 다구의 마법사는 대밀림에 있었다. ======================================= 43. 사자토스 (1) 무자비한 마법포격이 피라미드를 강타했다. 한 발 한 발의 위력이 마치 신의 분노를 담은 듯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피라미드는 곳곳에 균열이 일어났고 이윽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주변을 자욱하게 덮으며 자신을 향해 올라오는 먼지구름을 보고 사자토스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때 그의 옆에 마법진이 나타나며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칠영웅 베스티아레를 소형으로 축소한 것 같은 여자 꼬마아이였다. 그 꼬마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사자토스를 응시하며 야무지게 말했다. “사자토스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대장님께서 부수는 자와 직접적인 접촉은 피하라고 명하셨잖아요?” “정말 귀찮게 하네. 내가 그런 소환자한테 패배할 일 없잖아? 응? 보라고. 놈의 무덤을.” 먼지가 서서히 걷히며 엉망진창으로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드러냈다. 한때 완벽한 피라미드의 형태의 이루었던 거석들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무너져 내려 그 안에 있던 어떤 것도 살아남을 수 없는 걸로 보였다. “봐라. 이것이 다구의 마법사 사자토스님의 힘이라고!” 사자토스의 로브 안쪽으로 줄줄이 박힌 흰색 보석이 번득였다. 각각의 보석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묘한 광채가 보석 안을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고 그중 하나엔 마법진이 떠올라 있었다. 작은 베스티아레는 건물 잔해를 멍하니 보다가 사자토스를 보며 퉁명스레 말했다. “겨우 그 정도로 부수는 자가 죽을 거 같지 않은데요?” “뭐라고?” 사자토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신 앞에 선 자예요. 우리와는 다른 경로로. 따라서 이 정도 공격으로 죽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죽지 않았다면 놈은 왜 안 나타날까? 돌무더기가 너무 무거워서 못 나오는 건가? 그런데 어쩌나. 저걸 치우고 나오려면 100년을 걸릴 거 같은데.” “만약 살아서 나오면요? 당신은 당신 생각보다 중요한 존재예요. 그걸 아셔야 해요.” “설령 놈이 살아서 나와도 날 잡진 못해. 내가 도망가고자 마음먹으면 아무도 추적하지 못하는 것 정도는 너도 알잖아? 나, 다구의 마법사 사자토스라고.” 사자토스는 우쭐되며 말했지만 작은 베스티아레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대장께서 명령을 내리셨어요. 당장 거신을 작동시키라고. 다른 곳에서도 이미 준비가...” 야무지게 말하던 꼬마 베스티아레의 말이 끊겼다. 사자토스의 손이,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손에서 튀어나온 환영과 같은 거대한 악귀의 손이 꼬마 베스티아레의 몸통을 통째로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잘난 척 하지마라. 베스티아레! 잔꾀 조금 부린다고 대장이 널 중용하는 모양인데 명심해 둬. 칠영웅 최고의 마법사는 바로 이 사자토스님이라는 사실을.” 꼬마 베스티아레를 잡은 손이 더욱 힘을 가했다. 우드득. 우드득. 자그마한 신체가 끔직한 형태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꼬마 베스티아레는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특유의 야무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1등 놀이가 좋으면 그렇게 하세요. 전 아무래도 좋으니까. 하지만 거신은 확실히 가동시키세요. 대장의 명...” 작은 신형이 완전히 부서졌다. 사자토스는 침을 뱉으며 손을 내려놓았다. 환영처럼 떠오른 악귀의 손도 함께 사라지며 뒤틀린 육편을 아래로 쏟아냈다. 바람이 불며 사자토스의 망토 너머에 줄줄이 매단 보석들이 드러났다. 여섯 개의 보석 중 2개의 보석 위에 마법진이 맺혀 있었고 그 중 하나의 마법진의 형태가 희미해지며 사라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좋은 기분 싹 날렸네.” 사자토스는 지면 아래를 내려 보더니 손을 휙 내저었다. “인페르노.” 피라미드의 잔해 위에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고 그와 동시에 허공에서 역한 냄새를 풍기는 가연성의 물질이 양동이로 끼얹듯 피라미드 곳곳에 뿌려졌다. 지옥의 불길에 비할 만큼 무시무시한 불길이 피라미드 곳곳에 피어오르며 검은 연기를 일으켰다. “…….” 사자토스는 의욕 없는 눈빛으로 불길을 가만히 관찰하다가 동쪽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동쪽 아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호루라기 소리였다. “응? 이런 곳에 인간이?” 흙탕물이 흐르는 강변, 선착장 아래 노인 하나와 젊은 여자가 보였다. 사자토스의 눈동자에 잔혹한 빛이 떠올랐다. “마력 보충이나 하고 갈까.” 사자토스는 지면으로 하강해 클라리스의 아삼 앞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갑작스런 괴인의 출현에 클라리스는 더욱 강하게 호루라기를 불었다. “클라리스!” 쿠르트 아삼이 뒤에서 주의를 준 후에야 호각 소리가 멈췄다. “보아하니 평범한 인간 같은데 여긴 어쩐 일로 오게 된 것이지?” 사자토스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걸었다. 하지만 클라리스 일행은 느낄 수 있었다. 낯선 사내에게 풍겨 오는 끝없는 악의를. 아무 대답이 없자 사자토스는 오른손을 살짝 들었다. 그 앞에 거대한 악귀의 손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사자토스가 손을 오므렸다 펴자 악귀의 손도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음. 가만 생각해보니까 한 녀석은 살려주는 게 좋겠어. 그렇게 해야 그 녀석이 내 이름을 이 세상에 다시 한 번 알리게 될 테니까 말이지.” 악귀의 손이 사라졌다. 사자토스는 쿠르트 아삼을 노려보며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은 어떤 사이지?” 순간 사자토스의 눈동자가 노랗게 물들었다. 그 황색의 눈의 직시를 정면으로 받은 쿠르트 아삼은 순간 머리가 하얗게 탈색되는 기분을 느꼈고 저 소년풍의 마법사의 말에 거역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쿠르트 아삼은 자기의 의지에 반해 대답했다. “클라리스는... 내 손녀다.” “오호? 조손 관계라는 건가? 그거 잘 됐군.” 사자토스는 장난꾸러기 같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곧 그는 클라리스가 도끼로 무장한 걸 보고 한 자루 검을 영혼창고에서 꺼내 쿠르트 아삼에게 던졌다. “받아라. 그리고 싸워라.” “뭐..?” 검을 받아든 쿠르트 아삼이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리자 사자토스는 하늘로 날아오르며 경쾌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싸우라고. 조손. 어느 하나가 죽을 때까지. 살아 남는 녀석은 특별히 살려주겠어. 하지만 싸움을 주저하거나 누군가를 살려주거나 하는 따위의 짜증나는 짓거리를 했다간 이렇게 될 거야.” 사자토스가 손을 들어 북쪽 밀림을 가리켰다. 마법진이 그의 몸 위에 떠오르더니 이윽고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이 그친 뒤 빽빽한 숲이 우거져 있던 곳엔 흙더미만이 남았다. 클라리스와 쿠르트 아삼의 두려운 눈이 그를 향하자 사자토스의 입가에 서린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나는 다구의 마법사 사자토스. 칠영웅 최고의 마법사지. 인간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 세상에 재림했지! 그런 내가 니들을 특별히 살려주겠다는 거야. 이 얼마나 관대한 마음가짐이냐? 그러니까 어서 싸워. 조손!” 사자토스는 사납게 일갈하며 싸움을 부추겼다. 쿠르트 아삼과 클라리스는 서로를 응시했다. 클라리스의 눈동자는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는 반면, 쿠르트 아삼의 눈동자는 호수처럼 평온했다. ‘어쩐지 요즘 운수가 더럽게 좋다고 했더니만.’ 평생을 찾아 헤맸던 유적의 첨탑은 사자토스라는 마법사에 의해 무너져 정글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 소환자 뒤를 몰래 따라 갈 걸 그랬어. 유적이라도 보고 죽었으면 여한 따윈 하나도 없었을 테니.’ 쿠르트 아삼은 검을 들었다. “클라리스.” 그는 검을 든 채 클라리스를 향해 걸어갔다. “할아범.” 클라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쿠르트 아삼은 멈추지 않았다. 대신 그는 사자토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손녀에게 속삭였다. “일단 싸우는 척을 해. 방법은 나중에 찾고.” 클라리스는 즉시 그 뜻을 알아차리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갑자기 쿠르트 아삼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가 쥐고 있는 검이 저절로 움직였다. “뭐.. 뭐야?!” 쿠르트 아삼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검을 놓으려고 하지만 팔이 말을 듣지 않는다. 검을 쥔 손부터 어깻죽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뒤에서 경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캬하하하하! 멍청한 노인네야. 내가 너깐 놈 장난질 하나 파악 못할 줄 알았냐? 그 검은 저주 들린 검이야. 상대방을 죽이기 전까진 멈추지 않지!” 사자토스는 시원스레 웃은 뒤 허공 위에 비스듬히 누워 클라리스와 쿠르트 아삼을 내려 봤다. “자, 어서 시작하라고.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신파극 구경 좀 해보게.” 쿠르트 아삼의 팔이 멋대로 움직였다. 평범했던 검의 표면에 기괴한 고대 문자가 떠올랐다. 고대어를 어느 정도 익힌 쿠르트 아삼은 그 뜻을 해독할 수 있었다. [ 피의 갈증이 해소되기 전까진 멈추지 않으리. ] “이건 아니야.” 쿠르트 아삼이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내질렀다. “이건 아니라구! 나는 어떻게 되도 상관없으니 내 손녀만큼은 살려주시오!” 그 모습을 본 사자토스는 깔깔 배를 잡고 웃었다.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리는데? 좀 더 크게 소리쳐보라고! 늙은이.” 붉게 물든 검이 클라리스를 향해 멋대로 찔러 들어갔다. 쿠르트 아삼은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육체 이상의 힘이 실린 일격이 자신의 어깨를 뽑아버릴 정도의 통증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끄아아아악!” 사악한 마검은 클라리스의 심장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클라리스는 도끼를 들어 칼날을 한 차례 막았다. 가까스로 한 번의 공격을 막긴 했지만 검에 담긴 힘은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 도끼날이 종처럼 울리며 부들거렸고 꽤나 단련됐다고 자부한 양 팔이 마비된 듯 저려왔다. 쿠르트 아삼의 힘이 아니다. 마검 자체에 담긴 힘이다. 실제로 검은 거친 움직임으로 쿠르트 아삼의 어깨를 필두로 그의 몸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우드득. 우드득. 검이 저절로 움직일 때마다 쿠르트 아삼의 앙상한 팔에선 뼛조각이 부딪치는 불쾌한 소리가 쿠르트 아삼이 내지르는 비명과 함께 울려 퍼졌다. ‘이대로는 나도 할아범도 같이 죽어.’ 그때 마검이 다시 한 번 클라리스를 덮쳐왔다. 아까와는 움직임이 다르다. 너무 빠른 나머지 잔상이 남을 정도의 쾌검이다. 클라리스는 필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려 검의 궤적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그녀의 능력으로는 검의 움직임을 찾는 것이 불가능했다. “끝내라.” 사자토스가 이제는 흥미를 잃었다는 듯 싸늘하게 말하자 검은 그대로 클라리스를 향해 찔러 들어갔다. 클라리스는 고통과 당황으로 일그러진 쿠르트 아삼의 얼굴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할아범. 나 있지. 사실 성 안 바꿨어.” 그때였다. 밀림 속에서 검은 빛과 같은 무언가가 빠르게 튀어 남아 마검을 휘감았다. 마검은 자신을 묶은 검은 무언가를 떼어내려 요동쳤지만 뒤이어 날아온 망치에 칼날을 얻어맞고 그대로 박살이 났다. 쿵. 지면에 망치 하나가 박혔다. 그 망치를 알아보는 자는 모두 같은 말을 떠올리라. 하늘을 벼려 만든 망치, 팔 가라즈. “응?” 하늘 위에 있던 사자토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밀림 속에서 한 사내가 하늘을 나는 책과 함께 나타났다. 상처 하나,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모습으로. “늦어서 미안하군. 호루라기를 불렀으면 좀 더 빨리 왔을 텐데.” “호루라기는 아까부터 계속 불었거든요!” 클라리스가 도끼를 번쩍 들며 항의했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가 있는 곳으로 걸어 가 자신의 애병을 회수한 뒤 고통에 신음하는 쿠르트 아삼의 어깨를 붙잡고 가볍게 밀었다. 우두둑. “크악!” 쿠르트 아삼의 신형이 활처럼 휘어졌다. 클라리스가 도끼를 들고 김성철에게 달려왔다. “뭐하는 짓이에요?” “클라리스. 멈춰라. 이 양반은 내 빠진 어깨를 맞춰준 것뿐이야.” 사자토스는 불쾌한 얼굴로 자신의 발밑 아래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자식이... 아주 멀쩡해?’ 진심을 실은 일격이었다. 비록 직접적으로 김성철을 타격하는 게 아니라고 해도 어느 정도 충격은 줬으리라 자부했었다. 거기다 확실히 하기 위해 인근을 불태우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작은 상처 하나는커녕 복장마저 멀쩡하게 나타난 것은 사자토스의 심기를 크게 불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경계심도 느껴졌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이 가까이서 보자 확연히 느껴진 것이다. 재수가 없으면 당할지도 모른다. ‘일단은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좋겠군.’ 사자토스는 싸울 마음을 고쳐먹었다. 하지만 그냥 떠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적어도 김성철에게 한 방은 먹여주고 가고 싶었다. 사자토스는 그렇게 생각하고 망토를 손으로 훑었다. 망토 아래 줄줄이 달린 우윳빛의 보석들 위로 각기 다른 마법진의 문양이 떠올랐다. ‘다구의 마법사의 힘이 뭔지 보여주지.’ 그런데 다음 순간 그의 시야에서 김성철이 사라졌다. 서늘한 살기가 등 뒤에서 느껴졌다. 사자토스는 즉시 악귀의 손을 소환해 뒤를 막아섰다. 사자토스의 눈이 부릅떠졌다. 팔 가라즈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악귀의 손을 뻗어 망치를 막아보려 하지만 신적인 힘이 실린 망치에 악귀의 손이 닿는 순간 사자토스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노리고 있는 사내가 답 없는 놈이라는 사실을. “끄아아아악!” 악귀의 손이 박살나며 사자토스는 포탄처럼 지면으로 낙하하며 밀림 위에 처박혔다. 가볍게 뛰어오른 김성철은 얕은 한숨을 내쉬고 사자토스가 추락한 방향을 향해 뛰어내렸다.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지면을 내려다보며 팔 가라즈를 고쳐 잡았다. ‘쉽군.’ ======================================= 43. 사자토스 (2) 너무 방심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운이 좋았다. 사자토스는 나뭇가지에 긁혀 찰과상을 입은 것 외엔 별다른 충격을 입지 않았다. 겉으로는 말이다. 몸을 일으켜 두 발로 섰을 때 사자토스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김성철의 일격을 악귀의 손으로 막아내긴 했지만 그때 받은 충격파만으로 내장들에 보이지 않는 타격을 준 것이다. 무시무시한 힘이다. ‘힘 수치가 천에 근접한다는 달타니어스 따위는 어린아이로 보이게 만드는 힘이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솔직히 자신이 있었다. 사자토스는 마법사지만 일 대 일 싸움에 능했고 즐겨 했다. 타고난 방대한 마나와 명석한 두뇌로 익힌 수많은 마법에 더해 다중영창이라는 비기를 손에 넣자 그를 맞상대할 수 있는 사람을 대륙 중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나마 훗날 칠영웅의 우두머리가 되는 데스포트만이 그에게 약간의 우위를 점한 정도였다. 그런 사자토스에게 김성철은 처음 상대해보는 유형이다. 단순히 빠르고 강하다. 그리고 한 대 맞으면 죽을 수도 있다. ‘분하지만 혼자 상대하긴 버거운 것 같아.’ 사자토스는 노선을 수정했다. 자신감이 지나쳐 종종 실수를 하는 것이 그의 흠이긴 하지만 일단 집중하면 누구도 말릴 수 없을 정도로 맡은 일을 충실하게 해내는 것이 사자토스다. 그는 김성철을 상대함에 있어 2가지 대원칙을 세웠다. 첫째는 싸움을 회피할 것 둘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접근을 허용하지 말 것. 짧게 바꿔 말하면 도망 다니는 것이다. 사자토스는 그런 유형의 임무에도 조예가 깊다. 그는 평범한 마법사와 달리 높은 기동력과 변화무쌍한 기동,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센스를 갖추고 있으니까. 생각을 정리한 사자토스는 망토를 손으로 가볍게 훑었다. 망토 아래 감춰져 있던 여섯 개의 영혼석 중 3개에 각기 다른 마법진이 떠올랐다. 여기서 첫 번째 영혼석은 환영학파의 투명화 마법인빈지블을 영창 했고 나머지 영혼석들은 각각 범용마법인 플라이와 매직 실드를 영창했다. 거의 동시에 영창을 마친 3개의 영혼석들은 사자토스에게 비행 능력, 마법 방어막, 투명화라는 효과를 걸어주었다. 남은 것은 이제 사자토스의 재치와 기동에 달렸다. 그는 투명화를 건 상태에서 수풀 속을 비행해 강 쪽으로 쭉 날아갔다. 강을 택한 이유는 방해되는 지형지물이 없기 때문이다. 상공을 가로지를 수 있지만 위험부담이 크다. 사자토스는 흙탕물이 흐르며 굽이치는 강에 거의 닿을락말락할 정도의 높이로 날며 앞으로 쏜살 같이 날아갔다. ‘일단은 멀어지자.’ 생존만 놓고 보면 최고의 선택지는 아예 지금 당장 장거리 텔레포트를 영창 해 전장에서 멀리 이탈하는 것인데 그렇게까지 해버리면 체면이 살지 않는다. 싸우지 말라고 충고하던 베스티아레의 분신을 죽이면서까지 큰소리를 쳤는데 임무 하나 달성하지 못하고 도망치면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될 것이다. ‘어떻게든 거신은 깨워낸다.’ 사자토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그 앞에 갑자기 넘실되는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거대한 물살이다. ‘응? 저긴 분명한 하류 쪽인데?’ 하류에서 상류를 향해 해일 같은 급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휩쓸리면 낭패가 불 보듯 뻔하다. 사자토스는 고도를 살짝 올려 아슬아슬하게 밀려올라오는 해일을 피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사자토스의 발밑이 어둡게 변했다. ‘그림자?!’ 급히 고개를 위로 돌아본 순간 사자토스는 보았다. 아름드리 큰 나무가 사각에서 자신을 노리고 낙하하고 있는 것을. 영혼석 하나가 번쩍였고 사자토스의 손이 마치 무언가를 밀어내는 듯 가운데에서 바깥으로 미려한 손짓을 했다. 그러자 낙하하던 거대한 나무는 거대한 힘에 튕겨나듯 튀어 올라 사자토스 옆으로 궤도를 바꿔 강물에 곤두박질 쳤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사자토스는 강변에서 질풍처럼 달리는 인영을 발견했다. 그 인영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사자토스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저놈. 내 투명화를 궤 뚫어보고 있다고?!’ 사자토스는 김성철에게 영혼각인 진실의 눈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김성철은 눈이 마주치자 팔 가라즈를 높이 들어 올려 강변에 쌓인 자갈을 후려쳤다. 강변에 굴러다니던 평범한 돌들은 신적인 힘을 받아 무시무시한 살인병기로 변했다. 사자토스의 영혼석 두 개가 번쩍였다. 찰나에 가까운 번뜩임이었지만 백전연마의 김성철의 눈동자는 사자토스의 영혼석들이 시전 하는 마법이 무엇인지 대충 알아볼 수 있었다. [ 초급 바람 마법 ] [ 초급 파괴 마법 ] 사자토스를 향해 날아가는 자갈 앞에 작은 폭발이 일어났고 뒤이어 또 다른 폭발이 굉음을 일으키며 주변에 거센 바람을 몰고 왔다. ‘하나는 스트라이크고 다른 하나도 그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녀석인 모양이군.’ 바람 마법에 관해선 알려져 있지 않아 무슨 마법을 썼는지 알 수 없지만 두 마법이 지향하는 바는 명확하다. 자갈 앞에 두 차례의 인위적인 폭발 혹은 그에 준하는 반발을 일으켜 자갈의 위력을 약화시키고자 함이다. 실제로 자갈은 바람과 폭발에 기세가 크게 줄어든 상태에서 사자토스의 몸을 감싼 매직 실드를 맞고 튕겨져 나갔다. 마법사로선 보기 드문 임기응변이다. 사자토스는 김성철의 일격을 막아낸 데서 그치지 않고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방향을 전환하며 동시다발적인 마법을 시전했다. 사자토스 본인은 물론 여섯 개의 영혼석에 일제히 마법진이 떠올랐다. 김성철의 눈은 그 일곱 개의 마법진의 의미를 순식간에 파악했다. 사자토스 [ 중급 파괴마법 ] 영혼석1 [ 플라이 ] 영혼석 2 [ 화염 속성의 마법함정 ] 영혼석 3 [ 인페르노 ] 영혼석 4 [ 변환학파의 변이마법 ] 영혼석 5 [ 매직 실드 ] 영혼석 6 [ 차원학파의 대규모 소환마법 ] 그걸 본 김성철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것이 다구의 마법사라는 건가.’ 영창시간도 제각각, 용도도 들쑥날쑥이지만 틀림없이 세심한 안배에 의해 배치되었을 것이다. 비행마법 플라이를 상시 영창 중인 소환석 1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영창이 완료된 것은 사자토스 본인의 중급 파괴 마법이었다. “익스플로전!” 김성철 주변의 공기가 순간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폭발의 징조다. 김성철이 자리에서 사라지는 순간, 그가 있던 자리에 강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영혼석 2의 마법함정과 영혼석 5의 매직 쉴드가 준비됐다. 사자토스의 몸에 또 다른 마법의 방어막이 둘러졌고 사자토스 전면에 갖가지 형태의 마법 함정이 빛나는 마법진의 잔상을 남기며 설치됐다. 익스플로전의 폭발로 잠시 뒤로 물러났던 김성철과 사자토스 사이엔 제법 따끔한 함정이 놓여졌다. 김성철이 눈으로 함정들의 배치를 확인할 동안 영혼석 4에서 영창되던 변이마법이 완료됐다. 김성철 주변에서 고약한 역청 냄새 나는 검은 액체가 흩뿌려졌다. 피라미드를 붙 태우기 전에 흩뿌렸던 것과 동일한 녀석이다. 김성철은 지면을 후려쳐 흙먼지를 일으켜 자신을 향해 오는 검은 액체를 막아냈다. 영혼석 3이 영창하던 인페르노가 간발의 차이로 영창을 완료하며 김성철 주변에 파멸적인 불의 장벽을 펼쳐냈다. 모든 걸 뒤덮는 불길 중간 중간 폭음이 들리며 흙먼지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김성철이 날려 보낸 토사가 검은 액체를 머금은 채 터지는 소리다. 이글거리는 불의 벽이 김성철을 덮치기 전, 그는 뒤로 물러났다. 정면 돌파도 가능하지만 마법 함정이 거슬렸다. 옷이 그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김성철은 단벌 신사는 아니지만 한 번 마음에 드는 옷을 해질 때까지 입는 사람이었다. 뒤로 물러나면서 김성철은 사자토스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었다. ‘작정하고 물고 늘어지면 아주 귀찮아 질 녀석이군.’ 흔히 강한 마법사라고 하면 높은 마력 수치를 지니고 고위계의 마법을 구사하는 마법사를 연상하기 쉬운데 김성철은 그런 마법사보다 임기응변이 뛰어나고 전투에 대한 센스가 있는 마법사를 좀 더 까다로운 상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법사들과 수많은 전투를 치러오면서 쌓은 경험이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사자토스는 양자 모두에 해당한다. 따라서 반드시 죽여야 한다. 다른 칠영웅과 합류하기 전에. 김성철의 무심한 눈빛에 확고한 살기가 떠올랐다. 그는 인페르노가 일으킨 화염의 벽을 우회해 강쪽으로 진입하며 사자토스를 시야에 담았다. 사자토스는 화염함정을 깔아둔 채 김성철 역방향 반대쪽 기슭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아직 그의 영혼석 6의 대규모 소환마법의 영창은 끝나지 않은 걸로 보였다. 김성철은 주변의 거목을 팔 가라즈로 후려쳐 부러뜨린 휘 그것을 통째로 사자토스에게 투창처럼 날려 보냈다. 하늘을 빠른 속도로 날던 사자토스는 지그재그 형태로 비행하며 나무들을 모두 피해냈지만 김성철이 노리는 건 마법함정이었다. 화르륵! 사자토스가 펼쳐 놓은 마법함정은 날아드는 거목에 자동적으로 발동되어 나무를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귀찮은 장애물을 제거한 김성철은 그대로 사자토스를 향해 도약했다. 그때 사자토스의 영혼석이 시전하던 대규모 소환마법이 영창을 끝냈다. 그의 주변에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지더니 그 안에서 철과 돌로 만든 골렘들이 쏟아져 나왔다. “응? 저건 아빠가 만든 거잖아. 저걸 왜 저 인간이 가지고 있어?” 베르텔기아가 뾰족하게 소리쳤다. 김성철은 마편 카산드라를 꺼내 왼손에 들고 달려드는 골렘들을 팔 가라즈와 함께 철저히 파괴했다. 김성철이 골렘을 상대하는 동안 사자토스는 다섯 개의 영혼석에 새로운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골렘 하나의 머리통을 팔 가라즈로 으깨며 새롭게 시전 되는 마법들을 눈에 담았다. 사자토스 [ 썬더 브레이크 ] 영혼석 1 [ 플라이 ] 영혼석 2 [ 슬로우 ] 영혼석 3 [ 범용마법 물리방어 술식 ] 나머지 영혼석은 개점휴업상태. 염려되는 것은 바람속성 마법의 최강 마법으로 알려진 썬더 브레이크다. 김성철을 일격에 처치할 순 없겠지만 의미 있는 타격을 가할 수 있다. 영창이 시작되자 김성철과 사자토스 머리 위에 당장이라도 소나기를 뿌릴 것 같은 짙은 먹구름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영혼석 2의 슬로우의 영창이 끝나며 악의에 찬 기운이 김성철을 덮쳐왔다. 하지만 그런 저급한 마법은 김성철의 영혼 각인인 천둥방패의 가호에 튕겨져 나갔고 무효화되었다. 남은 것은 소수의 골렘과 매직 실드, 그리고 현재 영창 중인 이름 모를 물리방어 술식. ‘그렇게 나오시겠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김성철의 압도적인 힘에 질린 나머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김성철은 최후의 골렘을 마편 카산드라로 휘감아 원심력을 실어 사자토스에게 날려 보냈다. 마법진으로 둘러싸인 사자토스가 옆으로 몸을 피하며 나머지 영창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두려워하고 있지만 흔들림은 없는 얼굴.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든 채 사자토스를 향해 쇄도했다. 사자토스의 물리방어 술식이 완료되고 있었다. 사자토스가 그리는 것은 김성철의 공격을 한 차례 술식으로 버텨내고 썬더 브레이크로 역공을 가하는 것이리라. 일단 썬더 브레이크가 시전 되면 여간해선 피하기 어려우니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변수가 일어났다. 잠잠하던 밀림에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가 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먼 곳에서부터 빠르게 나무뿌리들이 주변을 덮어가고 있었다. ‘나무엄마라는 것이 전투에 반응한 건가.’ 김성철은 주변 환경의 변화에 아랑곳 하지 않고 준비한 공격을 가했다. 먼저 왼손에 쥔 마편 카산드라로 공격한다. 카산드라는 뱀처럼 날아가 사자토스를 휘감아갔다. 사자토스를 감싸던 매직 쉴드가 벗겨졌다. 그 다음 팔 가라즈로 일격을 가한다. 썬더 브레이크의 영창은 거의 마무리 단계. 사자토스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날아오는 망치를 노려봤다. 자신이 펼친 물리방어 술식을 신뢰하며. 망치가 모든 물리공격을 무효화시키는 방벽에 부딪쳤다. 사자토스의 신형이 흔들리긴 했지만 거의 충격을 받지 않은 모습. 사자토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썬더 브레이크의 영창이 완료된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김성철의 손가락이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글레어.’ 천공학파의 가는 빛줄기가 사자토스를 향해 쏘아져 들어갔다. “끄아아아악!” 빛줄기는 그대로 사자토스의 몸통에 꽂혀 검은 연기를 피어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 메아리 X5] 다섯 개의 또 다른 빛줄기가 연이어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나와 사정없이 사자토스의 몸을 궤 뚫었다. 영창이 끝나, 따라서 완벽한 모습을 지니고 있던 마법진들이 산산조각 났다. 김성철은 흔들리는 사자토스의 멱살을 잡았다. “내가 말했지?” 사자토스의 눈이 부릅떠졌다.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고.” 김성철은 사자토스의 멱살을 잡은 채 그대로 지면으로 하강해 사자토스의 얼굴을 아름드리나무에 갖다 박았다. ======================================= 43. 사자토스 (3) 우지끈. 사자토스의 얼굴은 나무를 부수고 들어가 절반 지점에 박혔다. 김성철은 사자토스를 부러진 거목에서 끌어냈다. 얼굴이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 아직 숨이 붙어 있다. 김성철은 사자토스를 잡은 채 지면에 연거푸 메다 메다꽂았다. 마치 망치로 대못을 박듯이. 온 몸의 뼈마디가 부러졌고 서서히 생명의 기운이 사자토스에게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사자토스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죽어갔다. 이윽고 뭔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사자토스가 절명한 것이다. 김성철은 사자토스를 내려놓고 팔 가라즈를 들었다. 시체조차 남기지 않기 위해. 그때 사자토스의 몸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김성철은 그것이 사자토스의 것이 아닌 다른 외부의 힘에 의한 것이라는 걸 꿰뚫어봤다. ‘부활의 영혼 각인이군.’ 이단심문관들이 종종 드는 영혼 각인. 에어푸르트의 이단심문관도 동일한 것을 들고 있었다. 여러 번의 목숨을 지닐 수 있는 게 장점이지만 김성철이 볼 땐 아무 의미 없었다. 한 번 패배해 죽는다는 건 두 번 패배해 죽을 수도 있는 것이므로. 김성철은 사자토스를 감싼 권능으로 가득 찬 빛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런데 멀리서부터 주변을 덮어나가던 나무뿌리들이 이쪽을 향해 덮쳐오고 있었다. 아까는 무심코 넘겼지만 막상 닥쳐오고 보니 타이밍이 이보다 좋지 않을 정도로 좋지 않다. 반면 사자토스에겐 천행이었다. 김성철은 한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 ‘사자토스의 운 때문인가?’ 사자토스는 칠영웅 중에서 특히 강운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운수치가 28에서 고정된 김성철과는 수십, 아니 수백 배의 차이가 날지도 모른다. 운은 상대적인 것이고 따라서 행운은 운수치가 높은 자에게 올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승부에 결정적인 역할을 주지 못한다고 해도 가끔은 중대한 변화를 이끌어낸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들어 사자토스를 감싼 빛을 후려쳤다. 그의 망치에 신적인 힘이 깃들어 있다고 하나 질서신의 권능이 서린 영혼각인의 결계까진 부술 수 없었다. 간발의 차로 공격이 무효로 돌아간 순간 나무뿌리들이 사자토스는 물론이고 김성철 쪽까지 휘감아 왔다. 김성철은 하늘 높이 도약해 나무뿌리들이 감겨오는 걸 피한 후 그 위로 착지하면서 무자비하게 나무뿌리들을 두들겼다. 무수한 나무뿌리들이 박살이 나고 가루로 변했지만 억겁의 세월을 살아 온 대자연 그 자체를 파괴할 순 없었다. “끄으으...” 나무뿌리들이 몸에 감겨오는 와중, 사자토스는 강한 진동에 정신을 차리고 김성철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마도 김성철에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실제로 상황이 그러했고 나무뿌리들은 더욱 두텁게 불어나며 김성철과 사자토스 사이를 막아섰다. 지금 스타라이트를 쓴다면 사자토스를 태워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성철은 스타라이트의 시전을 망설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변수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사자토스의 강운. 행운의 여신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행운의 소유자에게 미소를 보내는 습성이 있다. 운과는 거리가 먼 김성철은 그런 상황을 몇 번이고 경험했다. 도저히 상식과 경험칙으로서는 설명될 수 없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 다 된 일을 망친 게 몇 번인가. 그런데 김성철은 강운에 대한 대처법도 알고 있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그걸 써야겠군.’ 김성철은 짙은 한숨을 토해내며 영혼 창고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단창, 아니 단검과 유사했다. 중요한 건 형태가 아니었다. 끝없이 빠져드는 심연이 그 사물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작렬 하는 태양이 세상천지를 빛으로 내리쬐고 있었지만 김성철이 쥔 기이한 무기 주변은 오싹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가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이건.. 설마... ’ 충격에 빠진 건 베르텔기아 뿐만이 아니었다. 만신창이가 된 사자토스는 순간 숨이 멎을 정도로 끔찍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숨 넘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네가 어떻게... 그걸 들고 있는 것이지? 네가 어떻게 그 저주 받을 무기를...?!” 김성철은 단창 혹은 단검에 가까운 무기를 사자토스를 향해 날려 보냈다. 어두운 녹색 빛을 띤 무기는 스스로 의지를 가진 양 사자토스를 향해 날아갔다. 사자토스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복부에 끔찍한 무기가 박히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내게서 달아날 순 있어도 숨지는 못할 게다.” 김성철은 차디 찬 눈으로 사자토스를 노려보며 읊조렸다. 이윽고 소용돌이치는 나무뿌리가 사자토스와 사자토스가 내지르는 절규를 함께 삼켰다. 나무뿌리 속에서 사자토스는 사라졌다. “…….” 김성철의 손에 검은 색에 가까운 녹색 빛을 띤 작은 종 하나가 나타났다. 종을 든 손을 가볍게 흔들자 기이할 정도로 맑은 소리를 내며 울렸다. 스스로 움직이는 단창과 단창이 사라진 이후에 스스로 나타난 불길한 종. 그것을 지켜 본 베르텔기아는 확신했다. ‘저건.. 보통 무기가 아니야. 내가 들은 게 맞는다면 이 사람이 든 것은.. 나와 아빠의 시대에 도래했던 두 번째 재앙인 심해군주의 신물 움 브루크. 재앙의 무기야!’ 베르텔기아는 기억한다. 어두운 바다 속. 작은 빛 하나 비치지 않는 심연 속에 도사리는 영원을 살아가는 고대신의 사제에 대한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뭍으로 기어 올라온 심해의 사제는 불길한 어인들이 끄는 가마 위에 올라 느릿하게 움직이지만 일단 그의 표적이 되면 어느 누구도 그에게서 달아날 수 없다고 전해진다. 그 저주 받을 존재에겐 한 자루 단창과 종으로 이루어진 재앙의 무기, 심판하는 움 브루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 사람이 재앙의 무기를..?’ 전설에 따르면 재앙의 무기는 재앙을 집행하는 신이 직접 하사한 것이고 따라서 재앙 그 자체에게 귀속된다. 즉 재앙이 소멸되면 재앙의 무기 또한 함께 사라지고 어느 다른 누구도 그것을 획득할 수 없다. 재앙을 쓰러뜨린 본인이라고 할지라도. “…….” 김성철은 지천을 뒤덮은 나무뿌리 위에 올라 타 사자토스가 있을 곳으로 추정되는 곳을 무표정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손에 들린 종을 흔들자 아까와 같은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으키는 턱없이 맑은 종소리가 영롱하게 울려 퍼졌다. 사자토스는 가까이 있지만 지금 상황 속에서 그를 찾는 건 난망한 일이다. 그러나 이미 그의 목숨은 김성철의 손아귀 안에 있다. 움 브루크. 재앙의 단창이 몸에 박힌 자는 종소리에서 결코 달아날 수 없으므로. 아무리 강운의 소유자라고 해도 신의 권능에 의해 설계된 제약에선 벗어날 수 없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김성철은 한동안 수해를 둘러본 후 속으로 생각했다.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모르겠군. 사자토스가 지원을 부른다면 찾아다닐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 테니.’ 몇 명이든 좋다. 나머지 여섯 명이 와도 관계없다. 김성철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저기...” 베르텔기아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김성철이 묻자 베르텔기아는 가볍게 몸을 떨며 말했다. “아니야. 아무것도.” 지금은 질문할 때가 아니다. 베르텔기아는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까닭모를 확신을 하며 숨을 죽였다. * 다시 김성철은 유적으로 돌아왔다. 클라리스와 쿠르트 아삼은 무사했다. 다만 쿠르트 아삼의 경우엔 거동이 불편했다. 오른팔 전체가 마검의 움직임으로 인해 크게 손상된 것이다. 하지만 김성철이 보기에 아주 못 쓸 정도는 아니었다. 장기간의 요양과 안정만 취하면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회복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 그 인간은 어떻게 됐죠?” 클라리스가 도끼를 꼭 쥔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치명상을 입고 도주했다.” “죽지 않은 건가요?” 김성철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클라리스는 김성철을 보며 뭔가 물으려고 하다가 그만뒀다. 비록 팔 가라즈를 보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김성철이 소문 속의 문제적 인간이라는 걸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렇게 강한 인간은 찾아보기 어려울뿐더러 무엇보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책이 결정적인 증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둘은 그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현명하군.’ 김성철은 둘에게 보상을 주기로 생각했다. 그는 쿠르트 아삼과 클라리스에게 손짓해 그들을 유적으로 안내했다. 사자토스에 의해 황폐화되고 파괴되긴 했지만 그전까지 완벽한 모습을 갖추고 있던 유적이 흔적은 생생히 남아 있다. 쿠르트 아삼은 입을 떡 벌린 채 자신이 평생 찾아 헤매던 이상을 두 눈 가득 담았다. “내 말이 옳았어! 클라리스! 모두가 나를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 했지만 결국 내가 옳았던 것이야! 대밀림 안에 인간의 왕국은 존재했었다고!” 그는 팔의 고통도 잊고 방방 뛰어다니며 환희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그를 이곳에 안내한 사람이 세계의 적인지 아니지 여부 따윈 아무래도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너무 무리한 모양인지 그는 팔을 부여잡고 거꾸러졌다. “으읔!” 그의 눈엔 눈물이 나오고 있었다. 고통과 기쁨이 뒤섞인 복합적인 눈물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결국 평생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김성철은 그런 사람들을 몇 명이나 보아왔다. 실패하는 사람은 더욱 많이 보았고. 각자의 사연이란 게 있겠지만 김성철은 실패자들의 체념과 절망을 지켜보는 것보다 성공한 사람들의 기쁨을 보는 쪽이 훨씬 좋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노인의 환희도 진정될 즈음 김성철은 쿠르트 아삼 일행에게 말했다. “먼저들 돌아가시오.” “네? 우리끼리요?” 클라리스가 깜짝 놀라 물었다. 쿠르트 아삼도 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비슷한 항의를 눈동자 속에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소. 미안하지만 두 분이서 돌아가 주시오.” “돌아갈 땐 어떻게 하구요?” “대밀림 안에서 무언가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대밀림 자체를 빠져나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오.” “하지만 우리들만으로 대밀림을 빠져나가는 건..” 클라리스가 주저하자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연금폭탄(흑)과 잡다한 연금 아이템을 내밀었다. 공격에서 회복까지 잡다한 상황에서 쓸 수 있는 것들이다. “이게 도움이 될 것이오. 유사시에 쓰시오. 정 원한다면 강가에 머무르는 것도 말리지 않겠지만 추천하진 않겠소.” 김성철은 여전히 사자토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움 브루크의 단창에 찔린 이상 사자토스는 종소리를 따라 김성철 앞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심연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그의 정신을 붕괴시킬 것이고 고대신의 수족들이 그를 심연으로 끌고 갈 것이기에. 그런데 사자토스가 혼자 온다는 보장은 없다. 어쩌면 혼자 올 수도 있겠지만 김성철이 보기에 사자토스는 지원군을 불러 같이 올 것이다. 바라는 바다. 김성철은 되도록이면 빠르게 칠영웅을 처치하길 원하고 있었다. 설령 그가 애지중지 하는 옷이 못 쓰게 된다 하더라도. 쿠르트 아삼 일행은 그런 점에서 걸리적거리는 존재였다. 왜냐하면 사자토스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고 만약 나타나면 필연적으로 전투를 벌이게 될 터인데 쿠르트 아삼 조손은 전투에 휘말려 죽거나 최악의 경우엔 좋지 않은 재료로 김성철의 적들에게 쓰임당할 것이다. 피할 수 있는 희생이라면 피하고 싶은 것이 김성철의 마음이었다. “강을 따라가는 한, 리자드맨들은 습격하지 않을 것이야.” 쿠르트 아삼이 팔에 덧 댄 부목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그는 클라리스에게 소곤거렸다. “저 사람은.. 아마도 그 사람일 것이다..” 클라리스의 눈이 번쩍 뜨였다. 리자드맨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위험한 존재가 바로 옆에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새삼스레 상기한 것이다. 쿠르트 아삼과 클라리스는 김성철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 그들의 보트에 올라탔다. “저기 잠깐만!” 베르텔기아가 둘을 막아섰다. 쿠르트 아삼 조손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베르텔기아 뒤에 거대한 동상 같은 게 자리 잡고 있었다. 골렘이다. 김성철에 의해 팔 하나가 날아나고 핵을 감싼 바위와 철이 대파되긴 했지만 어느 정도 기능이 살아있는 녀석을 베르텔기아가 재조정했다. “이 녀석이 지켜줄 거야! 노래 잘하는 언니.” 베르텔기아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거대한 골렘은 우웅하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눈을 번득였다. 클라리스는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응.” 쿠르트 아삼 조손이 보트를 타고 판추리아를 향해 떠났다. 골렘은 강바닥을 걸으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오랜만에 밥 값했군.”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에게 보기 드문 칭찬을 했다. 매몰차게 보낸 점이 마음에 걸렸는데 그걸 베르텔기아가 보완해준 것이다. “그러니까 밥 안 먹는다니까!” 김성철은 유적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동안 찾아 헤매던 다중영창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유적 주변을 돌던 중 김성철은 파괴된 골렘과 그 주변에 널린 카벙클들의 시체를 응시했다. 그중에 한 마리, 하얀 털과 푸른 보석을 지닌 카벙클이 죽은 채 누워 있었다. 유적 안에 있던 바로 그 왕 카벙클의 시체다. 다중영창의 비밀을 풀 열쇠가 사라진 것이다. 빈 영혼석이 있어봐야 영혼을 뽑아낼 사령술이 없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다. 카벙클은 이미 죽은 지 시간이 흘렀는지 부패가 진행되고 있었다. 파리 떼들이 주변을 부산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나쁜 놈. 다중영창을 안 주려고 이런 짓을 벌인 거네! 진짜 사악한 인간이야. 옛날엔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 오랜 시간을 들인 일이 물거품이 되는 건 여러 번 겪은 경험이다. 김성철은 사자토스를 만났고 그리고 그에게 부상을 입혔다는 사실에서 의미를 찾으며 카벙클의 시체들에게서 눈을 뗐다. 머지않은 곳에서 골렘의 소리가 들려왔다. 전에 보았던, 유적을 돌며 유적 주변을 정리하던 작은 골렘이었다. “불쌍해라. 치울 게 저렇게 많은데..” 베르텔기아가 불쌍한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쓰레기가 지천이다. 당장 무너진 유적의 잔해만 해도 수백 년은 걸려야 그나마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은 골렘은 이쪽을 향해 똑바로 오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니 그 골렘은 카벙클들의 시체가 있는 쪽을 멍하니 응시했다. 김성철은 묵묵히 골렘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쓰레기로 인식하는 건가.’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작은 골렘이 땅을 파더니 죽은 카벙클들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담아 매장하는 게 아닌가? 아무 말도 없었지만 골렘의 행동엔 인간들에게서 볼 수 있는 애도 같은 것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응? 저 골렘.” 베르텔기아가 불쑥 골렘 쪽으로 날아가며 말했다. 그녀는 골렘의 등 쪽 부분, 돌에 가려진 안쪽 주변을 책 모서리로 가리켰다. “여기 좀 봐봐.” “뭐라도 있나?” 김성철은 한숨을 내쉬며 베르텔기아가 바라보는 쪽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왜냐하면 골렘의 가려진 등 부분 안쪽엔 사자토스가 지니고 있던 우윳빛 영혼석과 똑같은 것이 박혀서 빛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어쩌면...?’ 잃어버렸던 다중영창에 대한 실마리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 43. 사자토스 (4) 전 시대의 영웅과 현 시대의 영웅 사이에 벌어진 거대한 전투로 인해 분노했던 나무엄마는 그럼에도 아름다운 노래엔 여전히 관용을 드러냈다. 클라리스의 아름다운 노래 소리는 주변을 빽빽이 덮은 나무뿌리들을 스스로 물러나게 하여 흐르는 흙탕물의 강 위에 그들만의 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다지 위험한 길은 아닌 거 같아.” 연금폭탄을 들고 잔뜩 긴장하던 쿠르트 아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뱃전에 주저앉았다. 나무엄마가 펼친 나무뿌리는 앞길을 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했지만 주변을 외적으로부터 지켜주는 든든한 방패역할을 하기도 했다. 적어도 나무뿌리의 길을 나아가는 동안 위험한 맹수나 적대적인 리자드맨들을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클라리스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다음 소절을 노래했다. 그런데 저절로 열리는 나무뿌리 사이에 무언가가 물속으로 풍덩하고 떨어졌다.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면서 클라리스는 물방울이 이는 수면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고 배는 기포 주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클라리스는 기포에서 눈을 떼고 다시 앞을 가로 막은 나무뿌리들을 위해 힘차게 노래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선미가 요동쳤다. “엌?!” 쿠르트 아삼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엉금 기었다. 손, 시뻘건 피로 물든 손이 뱃전을 붙잡고 있었다. “끄.. 끄으으...” 그 손은 안간힘을 더해 한 사내를 물 밖으로 끄집어냈다. 얼굴 한 쪽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려버린 끔찍한 몰골의 사내가 배에 쓰러지듯 탑승했다. 클라리스와 쿠르트 아삼은 그 사내의 정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입 닥치고.. 앞으로 가라... 그러면 해치지는 않겠다...” 칠영웅, 다구의 마법사 사자토스가 흐리멍텅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낮게 읊조렸다. 그의 심장 부근엔 검은 색에 가까운 녹색 빛을 띤 단창 같은 것이 박혀 주변에 스산하고 몸서리처지는 어둠을 사방에 흩뿌리고 있었다. “어서..!” 종용하는 사자토스의 귓가에 종소리가 들려왔다. 끝 모를 심연 속에서 들려오는 절망의 반주가. * 태어나기 전부터 세상을 구원할 용자로 낙점됐다. 최고의 마법사들이 기꺼이 스승이 되길 앞 다투어 자청했고 늙고 노쇠한 현자들은 기꺼이 그들의 혼의 망해를 바쳤다. 숭배와 기대 속에서 어린 사자토스는 재앙을 이겨낼 진정한 용자로 자라났다. 그가 초월자의 벽을 넘었을 때 마계의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원정대가 결성됐다. 대륙 각지에서 육성된 혹은 스스로 단련한 비범한 자들로 구성된 무리였다. 처참했던 원정길에서 수백 명에 이르던 원정대는 단 여덟 명만이 살아남았다.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만 사자토스 본인에게 심각한 위기가 닥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우월했고 모든 것을 가졌다. 어떤 강적과 위험도 사자토스를 곤경에 밀어 넣지 못했다. 후에 칠영웅의 우두머리가 되는 데스포트와의 싸움도 간발의 차로 패했을 뿐, 흥미를 느끼면 느꼈지 절망 따윈 터럭만큼도 느끼지 않았다. 이렇듯 신과 인간의 축복을 한 몸을 받고 태어난 사자토스에게 세상은 그다지 험난하지 않았다. 그가 재앙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는 그 순간까지도. 하지만 어떻게 알았겠는가? 다구의 마법사, 압솔롬의 현자이자 심해의 사제를 해치운 자인 자신을 그토록 처참하게 부셔놓을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처음 맛보는 완벽한 패배 아니 절망이었다. ‘다시... 싸울 수 있을까?’ 종소리가 의식 깊은 곳에서 들려온다. 복수심을 땔감 삼아 사위여가는 전의를 불태워보려 하지만 또렷하게 들려오는 종소리는 김성철의 거친 손길을 생생하게 연상시켰다. 사자토스의 호흡이 일순 멈췄고 동공이 팽창됐다. 만신창이가 된 온 몸이 벌벌 떨렸다. “으... 으...” 본능적으로 사자토스는 느끼고 있었다. 아마 두 번 다시 김성철에게 도전할 수 없으리라는 끔찍한 현실을. 김성철에 대한 공포심이 뼛속 아니 유전자 단위로 각인된 것이다. “…….” 클라리스와 쿠르트 아삼은 홀로 먼 곳을 멍하니 바라보며 몸을 부들부들 떠는 젊은 마법사를 불안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할아범?” 저 마법사의 상태가 아까부터 극도로 불안하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몸은 물론이고 정신까지도. 잘만 하면 도끼로 뒷덜미를 후려쳐 숨통을 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할아범. 저 놈 상태 안 좋아 보이는데 콱 찍어버릴까?” 클라리스가 곁눈질로 사자토스를 보며 속삭였다. “아서라! 저 놈은 사자토스야.” 쿠르트 아삼이 기겁을 하며 말렸다. “사자토스? 그게 뭔데? 먹는 거야?” “저 인간은 칠영웅 중 하나야. 진짠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유적 탐사를 한답시고 라그란제의 무한서고에 들어가 무려 일주일 동안 공부한 경험은 장식이 아니었다. 그는 사자토스가 대충 어떤 위인인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상처 입었다고 해도 지금은 놈의 말을 따르는 게 좋다.” 쿠르트 아삼에게도 나름의 생각은 있었다. 그가 보기에 사자토스는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치명상을 입었고 지금 현재도 출혈을 일으키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굳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의식을 잃거나 아니면 그대로 숨이 끊어질 것이다. “조금만 더 지켜보자. 시간은 우리의 편이다.” 쿠르트 아삼의 말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독기어린 눈으로 조손을 노려보던 사자토스의 눈이 껌뻑껌뻑 감겼고 신형 또한 휘청거렸다. 실시간으로 의식을 잃어가는 게 눈으로 보였다. 쿠르트 아삼 일행과 사자토스를 태운 배가 대밀림을 벗어나 판추리아가 보이는 넓은 강가에 닿을 무렵 사자토스는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죽은 걸까?” 클라리스는 도끼 자루를 잡은 손에 자기도 모르게 힘을 가하며 사자토스 쪽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죽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사자토스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쿠르트 아삼은 숨을 죽이고 손녀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만에 하나 연금폭탄을 쓸 준비를 하고서. 사자토스에겐 아무 반응도 없다. 숨 쉬는 것조차 느낄 수 없었다. 클라리스는 침을 꿀꺽 삼키고 도끼를 높이 들었다. 도끼질은 능숙하다. 어릴 때 영재교육을 받아 육체적 능력치가 탁월한 그녀는 집안이 망한 이후 도살장에서도 일한 적이 있다. 그녀는 피부가 돌처럼 딱딱한 대밀림의 악어의 머리도 한 번에 동강내곤 했었다. 그때의 경험을 살려 도끼를 힘껏 내리치려는 순간이었다. 쉬익- 쇠뇌 하나가 클라리스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기다! 저것들이야!” 갈대 숲 사이에 네 척의 배가 나타났다. 행색으로 미루어보아 도적 혹은 강도 무리. “저 계집이 조지 ‘개과천선’ 훈트의 도끼를 들고 있다!” 도적 하나가 클라리스를 향해 손가락질 하며 소리쳤다. “그어어...” 보트 뒤를 따르던 골렘이 적을 발견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도적들은 갑작스레 출현한 골렘에 놀라 배를 뒤로 재빨리 저어 후퇴했으나 곧 골렘에 따라 잡혀 뒤를 내주고 말았다. 위이이잉- 하나 남은 골렘의 팔의 팔에 부착된 톱니가 가파르게 회전했다. 그런데 골렘이 도적들을 배와 함께 동강내려는 순간 골렘의 팔이 갑자기 스스로 붕괴됐다. “그어어...” 이유는 단순하다. 김성철의 힘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팔 하나 정도 날아간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다른 팔도 간신히 붙은 상태였고 내부 동력계통에도 빨간 불이 들어온 상태였다. 천천히 배를 따라 다닐 땐 드러나지 않았지만 전투 중에 급격한 기동을 하다 보니 안고 있던 악재가 한꺼번에 드러난 것이다. 양 팔을 잃은 골렘은 이도저도 못하다가 이윽고 생명을 잃고 강바닥 아래로 가라앉았다. “뭐야. 이거.” 혼비백산했던 도적들은 다시 용기를 얻었다. 그들은 다시 뱃머리를 돌렸다. 싸움이랄 것도 없었다. 쿠르트 아삼 일행은 격렬히 저항했지만 도적들은 노련했다. 쿠르트 아삼에겐 김성철이 남긴 여러 아이템이 있었지만 물속에서 잠수해 접근한 도적들의 기습에 단 하나의 아이템도 쓰지 못하고 제압당했다. 클라리스가 그나마 도끼를 들고 저항했지만 애당초 중과부적인 싸움이었다. 막간의 실랑이가 끝난 후 배는 제압됐다. 쿠르트 아삼은 도적들의 군홧발에 깔린 채 고통스런 비명을 쥐어 짜냈고 날뛰던 클라리스 또한 도적들에게 붙잡혀 밧줄로 꽁꽁 포박됐다. 처음부터 정신을 잃고 있던 사자토스는 배 구석에 처박힌 상태로 방치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이것들을?” 삐쩍 마른 도적이 두목으로 보이는 험상궂은 사내에게 물었다. “이것들은 내 오랜 벗인 조지 ‘개과천선’ 훈트의 원수다. 결코 살려두면 안 되겠지.” 험상궂은 얼굴이 클라리스와 쿠르트 아삼, 그리고 사자토스를 차례로 보았다. “계집은 인간제국의 매음굴에 팔고 나머지는 전부 죽여서 강물에 던져라.” 그때 부하 하나가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두목! 여기 엄청난 게 있습니다. 전부 금화예요!” “금화?” 과연 뱃머리 쪽에 가죽으로 덮어놓은 상자 안에 빛나는 금화가 수북이 담겨 있었다. “상인연합회의 금화 아냐? 오늘은 운수가 좋군.” 도적 두목이 군데군데 빠진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부하들의 눈동자에 탐욕이 떠올랐다. “그래서 말인데 두목. 이 계집은 우리가 조금만 갖고 놀아도 될까요?” “아까 보니 힘이 엄청 쌔던데 감당할 수 있겠나?” “그.. 그건...” “일단 노예사냥꾼을 불러 세뇌부터 시켜. 그 전에 눈앞에서 지인이나 가족을 죽이면 효과가 배가 되겠지.” 두목의 말에 도적들은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쿠르트 아삼에게 다가갔다. “이것은 우리들의 벗 조지 ‘개과천선’ 훈트의 몫이다.” 도적 하나가 검을 높이 들었다. “할아범!” 기둥에 묶인 클라리스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도적들의 귀가 가장 즐거워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생각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죽은 줄 알았던 마법사의 복식을 한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피투성이에 만신창이,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고 입으로는 가쁜 숨을 몰아 내쉬고 있었다. 갑작스런 사내의 출현에 깜짝 놀랐던 도적들은 피식 웃으며 그 사내를 무시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 사내가 도적들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눈썰미가 좋은 도적은 그 사내의 망토 아래 줄줄이 매달린 우윳빛의 보석에게서 작은 마법진이 떠오르는 것 또한 보았다. “응?” 도적 하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순간, 사자토스의 전신에서 무수한 투사체가 부챗살처럼 폭사됐다. 쉬익- 퍽! 우드득! 도적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조차 모른 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끄으으.. 빌어먹을 종소리 같으니라고..” 한 바탕 마법을 펼쳐낸 사자토스는 눈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엎어졌다. 쿠르트 아삼이 클라리스의 결박을 풀었다. 클라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사자토스에게 다가갔다. 사자토스가 그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자신들을 살린 건 저 알 수 없는 사내다.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 차례로 그녀의 마음속을 스쳐 지나갔다. 한 차례 풍랑이 지나간 뒤, 클라리스는 사자토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상태를 살폈다. “저기... 괜찮으세요?” “무.. 물을 다오.” 사자토스가 몸을 뒤집으며 쿨럭 거렸다. 기침을 할 때마다 그의 입에선 검붉은 피가 섞여 나왔다. 클라리스는 가지고 있던 가죽부대의 뚜껑을 열어 사자토스의 입에 가져다댔다. “클라리스.” 쿠르트 아삼이 사자토스 앞에 서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클라리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자토스는 클라리스의 물을 전부 들이켠 뒤 눈을 감았다.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그는 애절한 음성으로 꿈꾸듯이 말했다. “에크하르트.. 어째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았지?” 사자토스는 그 말을 남기고 의식을 잃었다. 쿠르트 아삼이 도끼를 들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클라리스의 푸른 눈동자가 번쩍이는 도끼의 날을 빤히 응시했다. ======================================= 44. 사역마 (1) 김성철과 베르텔기아는 작은 골렘을 지켜보고 있었다. 작은 골렘은 유적의 석조 포도 위를 걸으며 포도 위에 떨어진 작은 잔해를 치웠다. 체구에 비해 힘이 강한 지 무거운 돌도 가볍게 들어 올렸고 버거워 보이는 돌은 마법을 이용해 옮기기도 했다. 골렘은 50분 동안 쉬지 않고 일한 후 유적을 떠나 어디론가 향했다. 김성철과 베르텔기아는 골렘의 뒤를 따랐다. 골렘이 도착한 곳은 밀림 속에 숨겨진 비밀의 화원이었다. 수정처럼 맑은 물이 솟는 작은 샘 주위로 오색찬란한 갖가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그 주변을 꽃에 뒤지지 않는 화려한 색을 지닌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골렘은 정원 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정원을 한동안 응시했다. “우와 여긴 정말 예쁜 곳인데. 그렇지 않아?” 베르텔기아는 기분이 좋아진 듯 나비들과 함께 화원 위를 즐겁게 날아다녔다. 김성철의 기분도 썩 나쁘지 않았다. ‘괜찮은 장소군. 언젠가 그 녀석에게 보여주면 좋겠어.’ 엷은 보랏빛의 날개를 지닌 나비가 김성철의 옷자락에 사뿐히 내려앉아 잠시 날개를 펴고 휴식을 취했다. 김성철은 천천히 접었다 펴는 이름 모를 나비의 날개를 곁눈질로 보며 날선 마음을 편안히 했다. 우거진 수풀 위로 구름이 빠르게 흘러 다니고 있었다. 조만간 비가 올 것 같다. 그때 휴식을 취하던 작은 골렘이 다시 기동했다. 김성철 일행도 막간의 휴식을 끝내고 골렘을 따라갔다. 작은 골렘은 다시 작업을 재개했다. 무너진 잔해를 치우고 옮기는 단순하고도 고된 작업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김성철은 의문을 느꼈다. ‘저 녀석은 자아가 있는 골렘으로 보이는데.’ 다행히 김성철 옆엔 베르텔기아가 있다. 김성철은 즉시 질문을 던졌다. “베르텔기아. 저 골렘. 어떻게 생각하지?” “흠. 일단 자아가 있는 건 확실해. 카벙클의 영혼을 집어넣은 영혼석을 핵과 동시에 두뇌로 쓰고 있으니. 하지만 확실히 저 골렘의 행동은 이상해. 자아를 가지고 있음에도 자아를 가지지 않은 골렘과 비슷한 행동을 보이니까 말이야.”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글쎄. 내가 볼 땐 저 개체의 성품 때문이 아닐까?” “카벙클이?” “카벙클 중에 똑똑한 녀석은 사람 머리 위에 있기도 하니까. 하지만 짐승 주제에 저렇게 부지런한 건 글쎄. 개미의 영혼이라도 섞었나? 아니, 그건 불가능해.” “음... 그렇다 이거군.” 일단 중요한 것은 저 골렘과 친해지는 것이다. 사자토스의 설명에 따르면 다중영창의 열쇠는 제2의 마법포문이 될 카벙클과 깊은 유대감을 쌓는 것이니. ‘그나저나 저 골렘은 왜 사자토스의 망토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저런 일을 하는 것이지?’ 김성철은 유적 안에서 보았던 사자토스의 설명을 속으로 복기했다. 곧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자토스가 남긴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 하지만 명심해라. 영혼석에 넣는다고 해도 왕 카벙클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바깥에 굴러다니는 녀석처럼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으니까. ] 사자토스가 말한 바깥에 굴러다니는 녀석이란 건 바로 이 작은 골렘을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저 골렘은 이전 시대의 재앙에서 현재까지 수천 년의 세월 동안 홀로 이 유적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김성철은 문득 저 작고 우둔해 보이는 골렘에 깊은 연민의 정을 느꼈다. ‘수천 년 동안 홀로 이곳에서 유적을 지켰단 말인가? 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운명이란 말인가.’ 영혼석에 들어간 것도 자의에 의해서 들어갈 리 없다. 강제로 영혼이 뽑혀져 나가 영혼석에 갇혔고 쓸모가 없자 무의미한 노역에 동원됐다. 하지만 왜? 김성철은 좀 더 시간을 지켜보고 작은 골렘의 행동을 지켜보기로 생각했다. 작은 골렘은 유적 주변을 돌며 포도 위에 떨어진 잔해들을 치우는 일을 계속해서 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무의미한 작업. 그러던 중, 작은 골렘은 큰 난관을 만났다. 팔의 힘으로도 마법의 힘으로도 들 수 없는 거대한 잔해에 직면한 것이다. “규우우웅.” 처음으로 작은 골렘에게서 소리가 나왔다. 골렘 특유의 웅웅거리는 소리지만 어딘가 모르게 귀여운 구석이 느껴졌다. “저거 봐. 불쌍해.” 베르텔기아가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갑자기 김성철의 어깨를 책 모서리로 쿡쿡 찔렀다. “어이 힘 쌘 아저씨. 착한 골렘 도와주는 게 어때? 힘쓰고 사람 잡는 거 말고 잘하는 거 없잖아?” “요리도 잘하는데?” 김성철은 작은 골렘 쪽으로 걸어갔다. 고개를 수직으로 들어야 그 끝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잔해가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수백 마리의 말을 동원해야 간신히 끌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이 거대한 잔해는 그러나 단 한 사내의 힘에 의해 움직였다. “…….” 김성철은 온 몸에 신적인 힘이 흐르는 걸 느끼며 거대한 잔해를 훌쩍 너머로 던졌다. ‘음.. 아무리 그래도 이 나이에 이런 일은 무리인가.’ 허리가 살짝 뻐근해지는 걸 느끼며 김성철은 작은 골렘을 응시했다. 작은 골렘은 처음으로 김성철에게 흥미를 보인 듯 물끄러미 유리구슬 같은 두 눈동자라 가만히 김성철을 응시했다. “규우우웅?”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골렘은 다시 작업을 재개했다. 잠시 작업을 지켜보던 김성철은 허기를 느끼고 강가로 향했다. 대밀림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 속엔 물고기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음.” 김성철은 민물고기를 즐겨 먹는 편이지만 오늘은 좀 더 다른 게 먹고 싶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강과 연결된 습지가 보였다. 습지엔 사람의 키만큼 길게 자란 목화들이 드문드문 자리 잡고 있었다. 김성철은 목화 아래 기어 다니는 커다란 게를 발견했다. 타닥타닥. 강가에 피운 불 위에 여러 마리의 진흙 게들이 발갛게 익어갔다. 별 다른 조미료도 향신료 쓰지 않았다. 그저 불에 넣고 굽기 만한 자연 그대로의 조리방식이다. 김성철은 잘 익은 집게발을 뜯고 집게 아래쪽을 쭉 잡아 당겼다. 꽉 차 오른 하얀 살이 김을 모락모락 내며 김성철의 위장을 유혹한다. 한 입 베어 무니 지상 천국이 따로 없다. “음.”. [ 이 요리의 점수는... 22점! ] 원재료만으로 이 정도 점수를 얻는다는 건 그만큼 재료가 좋다는 걸 의미한다. ‘칼날 비명 산맥 부근도 나쁘지 않군.’ “맛있겠다.” 김성철의 요리에 아무 관심이 없던 베르텔기아가 웬일인지 김성철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나 게 좋아하는데.” “그건 안타깝군.” 김성철은 건성으로 말하며 또 다른 집게발을 포식했다. 베르텔기아는 한 동안 그 모습을 보다 이내 흥미를 잃은 듯 한숨을 내쉬며 김성철 주위를 떠돌다가 뭔가 생각난 듯 불쑥 입을 열었다. “아 참. 우리 이렇게 여유 부려도 돼? 사자토스 그 나쁜 놈 잡으러 가야 되는 거 아냐?” “찾아가야 되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사자토스 쪽이다.” “혹시 그 무기 때문이야?” 베르텔기아가 짐짓 모른다는 투로 물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안색을 살피며 다시 한 번 물었다. “그거... 어디서 얻은 거야...?” “받은 거다.” “누구한테?” “그건 알 거 없다.” 김성철이 딱 잘라 말했다. “응. 그렇구나! 딱히 궁금하거나 한 건 아니었어!” “…….” 베르텔기아가 침묵하자 김성철은 묵묵히 식사를 이어나갔다. 알이 차오른 진흙 게가 전부 껍질만 남아 바닥에 나뒹굴었다. 김성철은 정글을 돌면서 봐둔 과일을 한 입 베어 물며 다시 작은 골렘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작은 골렘은 여전히 영원히 끝나지 않을 작업을 말없이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와는 달리 차이점이 하나 보였다. 작은 골렘의 경로였다. 그것은 주변 청소에서 그치지 않고 무너진 유적 잔해 속 일정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골렘이 지나간 지역엔 작은 길이 나 있었다. 골렘은 어떤 지점을 향해 길을 뚫으려고 하는 걸로 보였다. “도와주는 건 어때? 밥도 먹었겠다. 시간도 줄이고 호감도도 올리고.” 베르텔기아가 말했다. 김성철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작은 골렘 쪽으로 걸어가 작업을 거들었다. “규우웅?” 작은 골렘은 김성철을 힐끗 쳐다보고는 작업을 계속했다. 김성철이 작업에 가세하자 작업속도는 비약적으로 올라갔다. ‘오랜만이군. 이런 일을 하는 것도.’ 그렇게 얼마만큼 작업을 했을까. 작은 골렘이 움직임을 멈췄다. 김성철과 작은 골렘 앞엔 낯익은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이건..?’ 사자토스의 공격을 받기 전, 에크하르트의 방에서 보았던 바로 그 모형이다. 작은 골렘은 정성스레 그 모형 주변을 정리했다. “규우웅.” 청소를 끝낸 작은 골렘은 김성철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동상을 한 번 만져보라는 뜻 같았다. 김성철은 손을 천천히 뻗어 에크하르트의 모형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희미한 문자열이 눈앞에 떠올랐다. 유적의 파괴로 인해 술식이 흐트러져 문자 일부가 유실된 것 같지만 일부는 여전히 남아 가동 중이었다. 김성철은 눈을 들어 문자열을 읽어나갔다. [ …이 세계 각지에 건조한 베르텔기아들만 있으면 우리는 세계를 위협하는 어인들과 어인군주들의 군세를 가볍게 격퇴하는 건 물론이고 심해의 사제도 처리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심해군주의 처리는 사자토스 형과 베스티아레 누님에게 맡기는 게 좋겠지. ] “베르텔기아 보이나?” 김성철이 물었다. 베르텔기아는 몸을 흔들었다. “응? 무슨 소리?” “이 모형에 한 번 몸을 가져다 대 봐.” 김성철이 말하자 베르텔기아는 반신반의하며 골렘의 모형에 책모서리를 가져다댔다. “앗!” 드디어 베르텔기아에게도 보인 모양이다. 문자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 혹 당신이 연금술사 클래스라면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행동해도 좋아. 연금술사는 신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지만 절망에서 희망을 만들어낼 수는 있으니까 말이야! ] “아빠가 남긴 거잖아?” 베르텔기아가 몸을 가볍게 떨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마지막으로 떠오른 문장을 눈에 담았다. [ 혹, 바깥에 돌아다니는 카벙이를 보면 잘 대해줘. 낯을 가려서 그렇지 아주 착한 녀석이야. 영혼석에 집어넣을 때 말렸어야 했는데. 아무튼 그 녀석은 좋은 녀석이니 나대신 잘 돌봐줬으면 좋겠어. 혹시 알아? 그 녀석이 너에게 마음을 열지? ] 문자는 그걸로 끝이났다. 김성철은 어느새 자신 옆에 서 있는 작은 골렘을 올려다보았다. “규우웅?” 작은 골렘이 유리구슬로 만들어진 눈으로 김성철을 내려다보며 소리를 냈다. ‘이걸 내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곳으로 안내한 것이군.’ 베르텔기아는 어느새 작은 골렘의 어깨 위에 올라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걸고 있었다. “네 이름이 카벙이구나.” “규우웅!” 작은 골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다운 작명 센스야. 하지만 이 사람보단 낫겠지?”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내 작명 센스에 불만이라도 있는 건가?” “또 뭐 파브른가 뭔가 붙일 거잖아.” “파브르는 위인이다.” 그렇게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작은 골렘의 몸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핵을 감싼 동체가 스스로 열리더니 그 안에 감춰져 있던 영혼석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김성철과 베르텔기아는 모두 입을 다물고 작은 골렘의 갑작스런 행동을 지켜보았다. 카벙은 행동으로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취하라고.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설마 당신이 벌써 카벙의 마음을 얻었다고?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베르텔기아가 말했다. 김성철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매력은 운과 동일한 28이니까. 동네 길고양이도 거르는 매력 수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김성철은 작은 골렘의 속마음을 알 것 같았다. ‘외로웠구나. 수천 년의 세월 동안 혼자 있었을 터이니.’ 김성철 또한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고독 속에서 보냈다. 오랜 세월을 홀로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김성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겨우 10년을 홀로 보낸 김성철이 그럴지언데 하물며 천 년이 넘는 세월을 홀로 보냈을 이 작은 골렘이랴. 김성철은 손을 뻗어 골렘 안의 하얀 영혼석을 취했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나타났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 사역마 ] 메르킷 카벙클(영혼석) 상태창에 새로운 카테고리가 열렸다. ‘역시 베르텔기아는 사역마 따위가 아니라는 거군.’ 독립된 개체라는 것 정도는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이걸로 확실해졌다. 놀라운 일은 또 하나 있었다. 영혼석에 담긴 사역마가 김성철의 의식에 직접적으로 뜻을 전달해왔다. 김성철은 영혼석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라고? 널 대신해서 여기를 정리할 골렘을 만들어 달라고?” 영혼석이 긍정하듯 희미한 빛을 냈다. ======================================= 44. 사역마 (2) 부수는 자. 김성철의 칭호다. 현재는 세계의 적이란 멸칭으로 불리지만 그의 정당한, 신탁의 사제에게 인정받은 칭호는 부수는 자 하나 뿐이다. 부수는 자라는 칭호의 소유자답게 김성철은 본시 만드는 것보다 부수는 것에 보다 익숙한 인물이었다. 골렘만 해도 그렇다. 골렘을 부순 횟수는 자신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정작 직접 골렘을 제작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어렵지 않아. 골렘을 만드는 건.” 베르텔기아가 모처럼 우쭐되며 말했다. “연금술로 골렘을 만들 수 있다는 건가?” 문외한인 김성철로선 아니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연금술로 만들어낼 수 있는 건 골렘의 머리이자 심장인 핵뿐이야. 몸통이나 팔 다리 같은 부분은 마법사나 장인의 힘을 필요로 해. 아무리 강한 동력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선 매개가 필요한 법이잖아? 바위 같은 견고한 물체에 생명을 불어 넣는 술식을 새기는 건 연금술의 영역이 아니야.” “그렇다는 이야기는 지금 현재로선 골렘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건가?” 김성철의 물음에 베르텔기아는 훌훌 날아 김성철 뒤에 웅크린 골렘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여기 하나 있잖아. 비어 있는 골렘이.” “핵만 만들면 된다 이거군.” “응!” “그런데 핵은 어떻게 만들지?” 김성철이 질문을 던지자 베르텔기아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레시피다. 김성철은 신중하게 레시피를 읽어 나갔다. [ 소형화된 골렘의 핵 ] 레벨 : 6 속성 : 금(金) 재료 : 카벙클 결정, 소용돌이 영혼, 금속계열, 중화계열 도구 : 풍로, 망치, 빈 영혼석 ... 6레벨 연금아이템이다. 김성철이 단 한 번도 접근해보지 못한 영역. 5레벨 연금아이템만 만들어도 연금술의 거장이라고 칭송받는 현 시대 사람들로선 꿈도 꾸지 못할 새로운 지평이다. 김성철은 약간의 흥미를 느끼면서도 중요한 문제점을 파악해냈다. 그는 베르텔기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다른 건 다 좋은 데 소용돌이 영혼이라는 건 어디서 구하는 것이지?” 처음 보는 재료였고 특히 이름이 영혼이라는 부분에서 쉽지 않다는 인상을 강하게 느꼈다. 베르텔기아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조곤조곤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음. 그건... 영혼의 일종이야. 인간과 달리 제대로 된 영혼을 갖추지 못한 짐승 혹은 거대한 곤충 같은 것들의 잠재의식을 머금은 영혼 이전의 덩어리들이 어떤 계기로 모여 하나로 합쳐진 것이야. 그 모양이 소용돌이 같다고 해서 소용돌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그렇게 희귀한 건 아니야! 큰 마법상점에 가면 사령술사들이 납품한 걸 종종 팔고 있으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주변엔 마법상점이 없지.” “으음.. 그건 그렇네.” 그렇다고 판추리아로 돌아가자니 나무엄마가 거슬린다. ‘진퇴양난이군.’ 김성철은 잔해 위에 걸터앉아 머리를 식혔다. 장고 끝에 김성철은 다시 판추리아로 돌아가기로 방침을 정했다. 안 되는 걸 억지로 붙잡고 있어봐야 시간만 허비한다는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쿠르트 아삼과 그 손녀는 판추리아로 무사히 돌아갔겠지. 다시 찾아가서 안내를 부탁해야겠어.’ 김성철은 움 브루크의 종을 꺼내 가볍게 흔들었다. 음감이 전보다 멀어졌다. 거리가 멀리 떨어졌다는 신호다. ‘역시 살아 있었나. 하지만 오래 버티진 못하겠지.’ 김성철이 종을 잡은 손을 움켜쥐자 움 브루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판추리아로 돌아간다.”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영혼석 카벙에게도 이유를 말해주었다. “골렘을 만들어 줄 재료를 가지러 가는 것이다. 약속은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마라.” 김성철이 걸어가자 베르텔기아가 파닥거리며 뒤를 좇아왔다. 그렇게 유적 잔해의 입구에 이를 때였다. 김성철은 이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시선들이 이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감지했다. ‘꽤 많군.’ 얼핏 느껴지는 기척의 숫자만 백이 넘는다. 인간과 유사하지만 인간과는 어딘가 다른 차갑고 끈적한 기척. 곧 김성철은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무리들의 정체를 파악했다. 도마뱀의 얼굴과 인간의 몸을 합쳐놓은 듯한 외관. 리자드맨들이다. 그들은 카벙이 정리해 놓은 유적의 경계선 너머 우거진 밀림에 숨어 이쪽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김성철이 유적에서 나오자 리자드맨 하나가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큰 소리로 말했다. “거기. 인간. 정체를 밝혀라!” 김성철은 터벅터벅 걸어 리자드맨들에게 걸어갔다. 수풀 속에 숨어 있던 리자드맨들이 두려워하며 몸을 움츠렸다. 김성철은 의아함을 느꼈다. ‘리자드맨도 공포를 느꼈던가? 듣던 것과는 영 딴판인데.’ 그는 비무장이라는 걸 나타내기 위해 아무것도 들지 않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리자드맨 무리 앞에 섰다. 가까이서 지켜 본 리자드맨들은 확실히 무언가 두려워하고 있었다. 공포의 대상이 김성철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곧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된 투구와 갑주를 걸친 리자드맨이 김성철 앞에 섰다. 2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키를 지닌 리자드맨은 김성철을 내려다보며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리자드맨 왕국의 전사장 바르무이다. 묻겠는데 인간, 그대의 정체와 이곳에 있는 이유를 밝혀라.” 두려움과 적대감이 반반 섞인 시선들이 바르무이의 뒤에서 번들거렸다. 김성철은 바르무이와 그의 부하들은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이다. 이곳엔 숨겨진 마법의 비전을 찾기 위해 왔지.” 김성철은 굳이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다면 진실을 이야기하는 편이다. 그는 사소한 거짓말이 어떻게 발목을 잡는 지 어떻게 그 사람의 평판을 바닥까지 떨어뜨리는지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리자드맨 왕국은 대륙의 다른 기득권들과 동 떨어진 독립된 세력. 대륙십삼걸이니 세계의회니 하는 김성철을 적대시하는 집단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존재들이다. 바르무이는 혓바닥을 몇 차례 낼름거리며 생각을 하더니 이윽고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얼마 전, 엄청난 폭발음이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서둘러 정찰대를 꾸려 이곳에 왔다. 그리고 보았다. 저주 받은 유적이 파괴된 것을.” 바르무이는 김성철 너머 무너진 피라미드의 잔해를 노려보았다. “이곳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나?” “사자토스가 이곳에 나타났다.” 김성철은 숨김없이 말했다. 그런데 사자토스라는 말이 나오자 바르무이의 눈동자엔 경악 비슷한 것이 서렸다. 하지만 그것은 약과였다. 수풀 속에 몸을 숨긴 리자드맨 병사들은 경기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며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질렀다. 김성철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리자드맨들이 사자토스에 대해 극도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전설 속의 악귀가 이곳에 나타났다고?” 바르무이가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차크람. 완벽한 원형을 지닌 투척무기다. 비늘로 덮인 그의 굵은 손가락 위로 3개의 차크람이 동시에 돌아가며 서늘한 소리를 냈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차크람의 회전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사자토스는 내게 패했다. 그리고 어디론가 달아나고 있다.” 바르무이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뭐.. 뭐라고? 그 악귀가... 패배했다고? 그럴 리가. 그 인간 악귀는 대적할 수 없는 적인데... 믿을 수 없다!” 불신의 그림자가 리자드맨들의 커다란 눈동자에 떠올랐다. “…….” 김성철은 말없이 팔 가라즈를 꺼냈다. 그리고 모두가 지켜 보는 가운데 지면을 후려쳤다. 쿠구궁-. 천둥 같은 굉음과 함께 지축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 충격이 얼마나 큰 지 멀리 위태롭게 자리 잡고 있던 잔해 일부가 무너져 내리며 자욱한 연기를 피어올릴 정도였다. 리자드맨들은 그 광경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바르무이도 마찬가지였다. “그.. 그대는 누군가?” “나는 김성철이다.” “김.. 김성철?” “다른 인간들은 날 세계의 적이라 부르더군.” “세계의 적!” 바르무이가 소리 높여 외쳤다. 김성철은 몰라도 세계의 적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전투 준비!” 바르무이가 민첩하게 뒤로 물러서며 다른 부하들과 합류했다. 수풀 속에 숨어 있던 리자드맨들이 창과 차크람을 회전시키며 전투태세를 갖췄다. 김성철의 입에서 얕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나의 악명이 여기까지 알려진 건가.’ 그때였다. 리자드맨 사이로 한 나이 지긋한 늙은 리자드맨이 화려한 옷을 입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멈춰라. 바르무이. 저 인간은 우리들의 적이 아니다.” 그 늙은 리자드맨은 다른 리자드맨과 확연히 구분되는 하얀 비늘을 지니고 있었고 바르무이의 것보다 훨씬 화려하고 정제된 의복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한 눈에 봐도 고귀한 족속으로 보였다. 김성철은 흐릿한 기억 속에서 한 단어를 떠올려냈다. ‘이 리자드맨. 사제 카스트인가?’ 윌리엄 퀸튼 말버러. 현재는 황제라 불리는 사내에게 들은 적이 있다. 리자드맨들이란 미지의 종족의 사회구조를. 그에 따르면 사제 카스트는 왕관 카스트 다음으로 고귀한 존재로 피라미드 구조를 지닌 리자드맨 사회에서 거의 최상급에 위치한 존재들이다. “당신의 이름은 예전에 들은 적이 있소. 김성철.” 리자드맨이 말했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내 이름을 알고 있군.” “내가 알고 있는 건 당신 이름뿐만이 아니오. 나는 당신이 비겁한 인간을 대신해 홀로 재앙에 맞서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지.” 그렇다면 이야기가 통할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팔 가라즈를 거두었다. 김성철이 무기를 내려놓자 늙은 리자드맨도 가볍게 손을 저어 모든 리자드맨으로 하여금 무기를 내리게 했다. “나는 무로크. 사제들의 장이요.” 늙은 리자드맨은 두 팔을 벌려 환영의 뜻을 표시했다. * 그것은 산이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기원을 알 수 없는 다른 산과 마찬가지로 그것 또한 수 천 년의 세월 동안 같은 자리에 머물며 헤아릴 수 없는 계절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그것이 산이 아니라고 의심한 자는 일찍이 없었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수십 년 전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마법사들이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인근 지역을 측량할 즈음 처음으로 산에 둘러 싼 묘한 소문이 산을 드나들며 생업을 이어가는 자들 사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 산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이 멸망하고 마법사들이 떠나간 이후 호기심 많은 자들이 산의 얼굴이란 걸 보러 갔지만 얼굴이라 할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산, 수호자의 봉우리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흐지부지한 형태로 흐려졌고 이윽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다. 그런데 지금 현재, 수호자의 봉우리에서는 미증유의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움직이는군! 움직여!” 일남일녀가 높은 산에서 거대한 진동을 일으키고 있는 수호자의 봉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는 두꺼운 옷을 입었음에도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몸이 그대로 드러난 거한이었다. 지금 시대에 그의 얼굴을 아는 이는 드물겠지만 지난 시대를 살아간 이라면 사자가죽으로 걸친 그 사내를 멀리서도 알아보고 경탄의 말을 내뱉었을 것이다. 칠영웅 중 하나인 무한한 힘의 도전자 달타니어스라고. 그 옆엔 백의를 걸친 창백한 여인이 그림처럼 머물러 있었다. 메아리술사 베스티아레. 그녀는 흔들리는 산 위에 붙어 있던 토사와 자갈, 나무들이 까마득한 아래로 낙하하는 걸 눈에 담으며 입을 열었다. “사자토스와의 교신이 끊겼어요.” “사자토스가?” 달타니어스가 한쪽 눈을 찡끗 감으며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달타니어스는 팔짱을 끼고는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사자토스는 원래 제멋대로인 녀석이니. 종종 있는 일 아닌가?” “문제는 아직까지도 대밀림 쪽의 거신이 기동되지 않았던 거예요.” “그래?”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수도 있어요.” “그건 곤란한데? 인성은 둘째 치고 놈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실력자니까.” “그런 이유로 제가 직접 확인해보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그는 저를 싫어하잖아요? 그것도 퍽이나.” 달타니어스는 베스티아레의 말을 이해했다. “내가 가달라는 이야긴가?” 그의 질문에 베스티아레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그 사람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으니까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어도 마지못해 도움을 받아들일 거예요.” “어쩔 수 없지.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권신이라 불렸던 이 달타니어스가 나서는 수밖에!” 달타니어스는 씨익 웃으며 주먹으로 지면을 후려쳤다. 거대한 암반이 흔들리며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진다. 쿵! 박살난 바위 위로 신을 닮은 거대한 형체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일찍이 산이라 불렸던 그것의 정체는 극소수의, 한정된 자에게만 알려져 있다. 대재앙결전병기 베르텔기아. 인류에게 닥친 재앙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거신은 이제 재앙의 일부가 되어 인간에게 신벌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대륙 각지에서 신을 닮은 초거대 골렘의 출현이 보고됐다. 칠영웅의 출현에 모든 신경을 기울이던 세계의 기득권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한 거신들이 그들의 영지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망연자실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44. 사역마 (3) 무로크의 청에 의해 김성철은 자리를 옮겨 유적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리자드맨의 경계 초소로 안내됐다. 유적 주변을 지키는 골렘이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제법 넓은 초소 안에서 무로크는 김성철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다. 김성철은 소용돌이 영혼을 구할 수 있냐고 물었다. 큰 기대 없이 한 요청이었지만 운이 좋았다. 무로크는 바르무이에게 가장 날쌘 병사를 왕국으로 보내 소용돌이 영혼을 가지고 올 것을 명했다. 자연스레 병사가 돌아오기 전까지 시간이 남았다. 그동안 김성철은 무로크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자토스, 아니 칠영웅은 세상을 구한 영웅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그들 또한 우리에겐 또 하나의 재앙이었소.” 무로크는 이야기했다.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악마들의 왕을 쓰러뜨린 칠영웅들은 명예에 있어서나 권력에 있어서나 정점에 올랐다. 모든 왕과 제후들이 기꺼이 일곱 명의 영웅에게 상석을 내주었고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열렬한 찬양과 맹목적인 숭배 속에서 칠영웅은 점차 교만해져갔다. 또 다른 재앙인 심해로부터의 재앙이 몰려오자 칠영웅은 의기양양하게 전장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심해의 어인들은 악마들보다 까다롭고 교활한 상대였다. 칠영웅은 번번이 그들이 지켜야 할 대상을 지키지 못했고 그들의 명성은 하루가 다르게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칠영웅이 변한 건 그때부터였다. 그들은 영웅이 아니라 폭군으로 변했다. 재앙을 막기 위해서 라는 명분을 앞세워 재앙의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자들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했다. 대밀림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무로크는 탄식하며 말했다. “사자토스는 자신의 요청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수많은 골렘을 이끌고 우리 왕국을 침입하여 왕을 죽이고 수많은 조상님들을 학살했소. 그리고 살아남은 조상님들에게 저 저주 받을 유적을 만들게 시켰지.” 무로크는 무너진 유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세상에.. 저것이 리자드맨들이 만든 거라니.” 베르텔기아는 겸연쩍은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조상님들이 가혹한 노동 속에서 죽어갔소. 그렇게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사자토스는 자신의 행동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지.” 무로크의 눈빛이 분노로 번득였다. “재앙을 막기 위해서. 사자토스는 그 한 마디로 자신의 모든 만행을 정당화했소.” 그 순간, 김성철은 늙은 리자드맨의 말에 뼈가 있음을 느꼈다. 무로크의 말은 사자토스 뿐만이 아니라 김성철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이 그의 내심을 대변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그자들과 다르오.” “우리도 그러길 바라오.” 멀리서 리자드맨 병사가 비호처럼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소용돌이 영혼을 가지러 간 병사다. 소용돌이 영혼을 받아 챙긴 김성철은 리자드맨들과 작별했다. “아, 한 가지 더 말해둘 게 있소.” 무로크가 떠나려는 김성철을 향해 입을 열었다. 김성철이 돌아보자 그는 느릿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강 위의 도시. 인간들이 판추리아라 부르는 그 곳을 누가 세운지 아시오?”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자토스요.” “사자토스가?” “도시의 물밑에 무언가가 있소. 그것이 무엇인지는 우리들도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대단히,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하다는 것. 그것뿐이오.” 무로크의 목소리엔 두려워하는 불안한 여운이 남아 있었다. 그는 김성철에게 피리 하나를 건네고는 자리를 떠났다. “언제 물어볼 게 있으면 우리를 찾아오시오. 이 피리의 음색이 당신을 우리의 왕국으로 안내할 것이오.” 김성철은 소용돌이 영혼을 쥔 채 멀어지는 리자드맨들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 김성철이 유적 지대에서 작은 골렘의 뒤를 관찰하고 있을 때였다. 클라리스와 쿠르트 아삼의 보트 위에서는 쥐죽은 듯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클라리스는 자신의 발밑에 엎어진 마법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엔 서슬퍼런 도끼가 쥐어져 있었다. “클라리스.” 쿠르트 아삼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손녀를 불렀다. 클라리스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 도끼를 높이 들어올렸다. “수와!” 그리고 두 눈을 질끈 감고 커다란 기합을 내지르며 도끼를 내려쳤다. 푹. 뭔가 찍히는 느낌이 났다. ‘나... 사람을 죽였어...!’ 죄책감과 함께 짙은 허무감이 마음에 난 구멍을 통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도리어 이쪽이 죽음을 당하니까. 그렇게 클라리스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며 연신 심호흡을 했다. “클라리스.” 뒤에서 쿠르트 아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클라리스.” 계속된 조부의 불음에 클라리스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도끼질을 한 것도 알고 보면 조부 때문이 아닌가. 하나부터 열까지 말이다. “아.. 왜?” 그녀는 짜증을 내며 뒤돌아봤다. 쿠르트 아삼은 앞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가 여전히 도끼로 시신의 목을 내려찍고 있을 보고 싶지 않은 방향을 말이다. “뭐? 뭐?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아니. 그게 아니라 앞을 보라고! 앞을!” 쿠르트 아삼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연신 앞을 가리켰다. 뭔가 반응이 이상하다. 클라리스는 침을 꿀꺽 삼키고 태엽인형처럼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앞을 응시했다. “어라..?” 그녀의 도끼에 찍힌 건 사자토스가 아니었다. 어디서 나타난 지 알 수 없는 작은 소녀였다. “히.. 히이...!”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찰나 도끼에 찍힌 소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스스로 자신의 어깻죽지에 박힌 도끼날을 밀어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클라리스는 그만 도끼에서 손을 놓치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경고하겠는데 한 번만 더 이런 짓을 하면 그땐 당신들을 죽여 버리겠어요.” 창백한 피부의 소녀가 서릿발처럼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쿠르트 아삼과 클라리스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소녀는 쓰러진 사자토스에게 다가갔다. 사자토스의 망토 안에 줄줄이 달린 영혼석 중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그 소녀는 그 영혼석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마워. 카벙벙. 네가 아니었다면 네 바보주인은 지금쯤 죽었겠지. 이름도 명예도 없는 아낙에게.” 소녀는 그렇게 말한 후 다시 클라리스 쪽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클라리스 일행은 숨이 멎을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명하겠어요. 이 사람을 정성껏 간호하세요. 그가 몸을 회복할 때까지. 만약 제가 다시 찾아왔을 때 이 사람이 죽어 있다면... 살아 있는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요.” 거역할 수 없는 명을 남기고 소녀는 마법진 속으로 사라졌다. 쿠르트 아삼과 클라리스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때부터 쿠르트 아삼 조손과 사자토스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됐다. 클라리스는 물위에 뜬 자신의 아담한 집에 절대 들이고 싶지 않은 두 남자를 졸지에 들여놓았다. 그녀는 사자토스의 피를 닦아내고 입술을 젖은 솜으로 적시고 배를 타고 먼 곳에 나가 약을 사서 사자토스의 환부에 바르는 등 갖은 일을 도맡아했다. 이 과정에서 쿠르트 아삼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술을 먹고 어질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사자토스가 의식을 회복한 것은 하루가 지난 다음이었다. 그는 침대 위에서 눈을 뜨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낯선 천장과 침대 옆에서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조는 갈색 머리카락의 여인을. “뭐냐. 이건.” 사자토스는 불쾌감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그는 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고통 속에서 또렷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심연에서 울려 퍼지는 오싹한 손짓. 사자토스의 동공이 일순 수축됐다. ‘그랬었지... 나는...!’ 잊을 수 없는 사내의 뒷모습이 불현 듯 눈앞에 떠올랐다. 연상한 것만으로 온 몸에 힘이 풀리고 숨이 턱하고 막힌다. 그때 클라리스가 눈을 떴다. 그녀는 사자토스가 정신을 차린 걸 보고 외려 자기가 더 놀라 안절부절 못하며 허둥대다가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물었다. “살.. 살아 있어요?” “바보 아냐? 보면 모르겠냐?” 사자토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초췌하고 수더분한 몰골이었지만 타고난 수려한 풍모를 가리진 못했다. “네가 날 치료한 건가?” 사자토스가 물었다. 그는 클라리스가 자신을 향해 도끼질을 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눈동자와 목소리엔 제법 독기가 누그러져 있었다. 클라리스는 눈을 멀뚱멀뚱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자토스는 귀찮다는 얼굴을 지으며 클라리스를 향해 손짓했다. “내 앞에서 사라져라. 추녀. 네 못 생긴 얼굴을 보고 있으면 3일전에 먹은 밥이 올라올 거 같으니까.” “으으...” 액면만 놓고 따지고 보면 연하로 보이는 녀석에게 추녀라는 소리를 들으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지만 클라리스는 이 사내가 얼마나 강한 지 잘 알고 있다. ‘참자. 참아.’ 두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걸 간신히 참으며 클라리스는 바깥으로 나갔다. 사자토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머리를 감싸 쥐고 베게에 얼굴을 파묻었다. “끄으으으...” 육체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멈추지 않는 종소리가 그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의 자아는 완전히 파괴될 것이고 죽음보다 더 끔찍한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나.’ 그러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특히 적대하는 베스티아레나 벌레처럼 여겼던 가시옹 같은 녀석들의 귀에 들어갔다가는 영원토록 이 사실을 들먹이며 흉을 볼 게 틀림없었다. 그건 죽기보다 싫다. ‘빌어먹을. 이럴 때 에크하르트만 있었더라도!’ 하지만 이제 에크하르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칠영웅 중에서 믿을만한 자는 리더인 데스포트와 모두와 친한 달타니어스 둘 뿐인데 이쪽에서 먼저 도움을 청하기엔 체면이 서지 않는다. 평생에 걸쳐 제 잘난 맛에 살며 남들을 무시하던 업보가 결정적인 순간에 돌아온 것이다. 차분하게 생각을 하면 방법이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끝없이 들려오는 종소리는 그마저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사자토스는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졌고 궁지에 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반나절이 시간이 젖어드는 절망 속에서 흘러갔다. 바깥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이 그 금괴를 함부로 쓰지 말라고 했잖아! 그냥 쓰면 위험하니까 녹여서 쓰라고 신신당부 한 거 못 들었어?” 여자의 목소리다. 상대방은 팔에 부목을 대고 있던 노인으로 보였다. “겨우 하나뿐이잖아. 설마 별 일 있겠냐? 금괴 하나 썼다고 겨우 그거 때문에 천리 밖에 있는 친구들이 찾아오겠냐고?” 싸움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사자토스가 이곳에 있다는 걸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문이 한 차례 쾅 닫히는 소리가 난 이후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사자토스는 갈증을 느끼고 침대 옆 탁자에 올려 놓은 물병을 들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두통은 가시지 않았다. ‘빌어먹을. 역시 달타니어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어. 체면이고 뭐고 이대로 가다간 죽음을 면하기 어려우니.’ 마음을 정하고 정신집중을 하려 할 때였다. 바깥에서 곳에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노래가 들려왔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미성과 소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음색이었다. 처음엔 소음처럼 느껴졌다. 사자토스는 머릿속을 짓누르던 두통을 악화되는 걸 느끼고 당장 소리를 질러 멈춰버리고 싶었지만 살얼음 너머 펼쳐진 애절한 멜로디가 서서히 감정을 고조시키며 길게 이어지는 파트에 들어서자 그를 괴롭히던 종소리가 일순 사라지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응? 이건?!’ 엄밀히 말해서 종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문밖에서 들려오는 쓸쓸하면서도 애절한 노래 소리는 몸서리처지는 무박자의 소음을 잠시 잊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숨을 죽인 채, 사자토스는 이어지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아차...’ 노래가 끝났을 때 클라리스는 비로소 자신의 집에 무시무시한 불청객이 있다는 걸 자각했다. 잠시 망각했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는 할아버지의 행동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이를 달래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노래를 하고 만 것이다. 화가 나거나 우울할 때 노래를 부르는 건 오랜 습관이었다. 짧게나마 행복했던 유년기 이후 연이어 몰아친 불행의 파도 속에서 굳건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노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노래 한 번 했다고 죽이진 않겠지?’ 뒤에서 바람이 솔솔 불어와 그녀의 머리칼과 옷자락을 흔들었다. 불청객이 있던 방의 문이 열려 있었다. 클라리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해서 저 흉포한 작은 남자를 달랠지 필사적으로 생각하며. 그런데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질책도 분노도 아니었다. 언제 들었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은 갈채소리였다. “훌륭한 노래다.” 뜻밖의 관중의 출현. 클라리스는 그저 눈을 치켜 뜬 채 낯선 사내의 갈채를 지켜볼 뿐이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 45. 운 없는 여자 (1) “계속 노래를 불러라. 여자.” 사자토스는 거만하게 손짓하며 노래를 주문했다. 딱히 클라리스의 노래에 움 브루크의 마력을 막아내는 효과 따윈 없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안정을 되찾는데 도움을 주는데 불과했을 뿐이다. 하지만 마법사에게 특히 사자토스 정도 되는 강력한 마법사에게 찰나의 안정은 모든 것을 바꿀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클라리스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사자토스는 고위계의 치유마법을 시전 자신의 몸을 말끔하게 치료했다. 부러졌던 뼈는 전부 붙었고 출혈도 멈췄다. 보이지 않던 눈 또한 시력을 되찾자 사자토스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운이 좋군. 나라는 남자는.” 사자토스의 운수치는 542.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손에 쥔 남자에 걸 맞는 수치였다. 그는 쉬지 않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로 생각했다. 내친 김에 달타니어스를 이쪽으로 부르려고 한 것이다. 그는 다시 한 번 클라리스에게 명했다. “노래를 계속해라. 못 생긴 여자.” 그런데 노래가 시작되지 않는다. 짜증난 눈으로 클라리스 쪽을 쳐다보자 클라리스는 주눅이 든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미안한데... 좀 쉬었다 하면 안 될까요? 며칠간 혹사해서 목이 조금 아파요.” “네 목의 사정 따윈 내 알 바가 아니다.” 건강을 되찾은 사자토스는 유감없이 자신의 잔혹함을 드러내보였다. 그는 얼음칼날을 만들어 내 클라리스 쪽으로 위협적으로 날려 보냈다. “정 쉬고 싶다면 영원히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만들어주지.” 얼음 칼날은 클라리스의 목을 그어버릴 듯이 움직이다가 그녀의 목에 닿으며 녹아버렸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가운 느낌이 목을 타고 아래로 흐르는 걸 느끼며 클라리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난 왜 이리 운이 없는 걸까.’ 생각해보면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 노래만 부르지 않았어도 저 인간이 저토록 빨리 회복될 일은 없었을 터인데. 그런 클라리스의 운수치는 7. 숫자만은 행운의 숫자지만 그녀는 평생에 걸쳐 불운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 판추리아 총독 로르메이 추이는 상인연합회 간부로부터 의미심장한 보고를 들었다. “아무래도 이 도시에 세계의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계의 적의 조력자로 추정되는 사내를 잡았습니다.” 근거는 상인연합회의 수장인 호르네코 총독이 각지의 파견 상회에 비밀리에 보낸 명령서였다. 그에 따르면 세계의 적은 연합회의 금고에서 훔친 무인 금화 및 금괴를 멋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무인 금괴가 판추리아에서 발견됐다. 그 이야기는 세계의 적 혹은 그와 연관 있는 자들이 이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상인연합회 간부의 말에 의하면 그는 이미 이 사실을 상인연합회 본부에 보고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부터 발생했다. 상인연합회의 근거지 주변에 산을 연상케 할 정도로 거대한 골렘이 나타나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으며 따라서 상인연합회 본부는 어떤 지원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상인연합회 간부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였다. “총독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공은 판추리아 총독인 로르메이 추이에게 넘어갔다. 그는 결단을 내려야했다. 세계의 적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그런데 그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으음... 사정은 잘 알겠는데... 병사들을 동원해봐야 그를 잡을 수 있을까?” 로르메이 추이는 우둔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냥 못 본 체 넘어갑시다. 안 그래도 세계 각지에 거신이 나타나 도시와 영지를 마구잡이로 파괴한다는데 세계의 적까지 설치면 이 세상이 얼마나 더 혼란해지겠소?” 그는 이계의 기득권답지 않게 현실적인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혼탁한 판추리아의 강물 아래 도시를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는 골렘이 잠들고 있다는 사실을. “…….” 같은 시각 김성철은 도시 아래 혼탁한 흙탕물 안을 유영하고 있었다. 강의 바닥과 가까운 곳에서 김성철은 문제의 거신을 발견했다. ‘상상 이상으로 엄청난 크기군.’ 김성철은 배 위로 올라와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또 다른 베르텔기아가 가동하는 순간, 이 도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 도시의 목적 자체가 거신을 가리는 위장막에 다름 아니기에. ‘어떻게든 저 무기가 가동되는 걸 막아야 한다. 하지만 그 전에.’ 김성철은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을 응시했다. 종소리는 아주 가까이서 들리고 있었다. ‘사자토스를 끝장낸다.’ 그것이 그가 다시 판추리아로 돌아온 이유. 그는 코트 안에 매달아 놓은 영혼석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골렘은 다음에 만들어주지. 카벙.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서 말이야.” 한 손엔 노, 다른 한 손엔 종. 김성철은 거미줄처럼 엮인 판추리아의 수로를 향해 배를 몰고 들어갔다. * 사자토스는 초조한 얼굴로 클라리스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노랫말 사이로 종소리가 엇박자로 울려 퍼지며 집중을 막고 있었다. ‘슬슬 약빨이 떨어지는군.’ 그래도 달타니어스와의 교신은 성공했다. 달타니어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이미 이쪽을 향해 출발했으며 곧 이쪽으로 장거리 텔레포트를 실시할 예정이라고 알려왔다. ‘이 정도만 해도 절반의 성공이다.’ 사자토스는 손을 거칠게 내저어 노래를 멈추게 했다. “그쯤하면 됐다. 여자.” 그는 자신의 외투를 걸치며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클라리스는 그의 의도를 한 눈에 파악했다. “이제 떠나는 건가요?” 사자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클라리스를 응시하다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휘황찬란한 보석이 박힌 고대의 단검이었다. “이건 나를 위한 봉사한 대가다. 감사한 마음으로 받도록,” 클라리스는 흥미 없는 눈으로 그것을 봤다. 금은보화라면 이미 충분하다 못해 필요이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 보상이 마음에 들지 않나?” 사자토스가 클라리스를 곁눈질로 보며 불쑥 물었다. “아니오. 마음에 드네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사자토스는 한 눈에 그걸 꿰뚫어봤다.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코웃음을 치며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뭐, 네가 나의 부활에 약간의 역할을 한 건 사실이지 특별히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지.” 사자토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며 잠시 뜸을 들였다. 클라리스가 지루함을 느낄 즈음 그는 옷깃을 여밀며 냉랭하게 말했다. “내가 떠난 다음 당장 짐을 챙겨 이 도시를 떠나라.” “네? 그게 무슨 뜻이죠?” 클라리스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사자토스는 손가락을 펴 아래를 가리켰다. “곧 이 도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야. 물 밑에 잠든 거신에 의해서.” “그.. 그런....” 여전히 미적지근한 반응이지만 확실히 놀라워하는 게 눈에 보인다. 사자토스는 씨익 웃으며 당당한 걸음걸이로 문밖을 향해 걸어갔다. “잘 살아. 못난이.”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나섰다. 평범한 인간들의 희로애락에 구애받지 않는 실로 칠영웅에 걸 맞는 행보였다. 그런데 사자토스는 바깥에 나가자마자 자연스럽게 뒷걸음질 쳐서 집안으로 돌아왔다. “응?” 클라리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아하아..!” 슬며시 문을 닫은 사자토스의 얼굴을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입에선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밖을 나서자마자 다 떨어져가는 코트를 입은, 입을 꾹 다문 답 없는 얼굴을 한 사내가 나룻배를 타고 앞을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성철이다. 사자토스는 닫힌 문에 기대서서 한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 클라리스가 퉁명스레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요?” “쉿!” 사자토스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깥 동정을 필사적으로 살폈다. 다행히 김성철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실로 천운이었다. 실제로 같은 시각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다른 쪽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종 그거 막 흔들어보는 건 어때? 그거 흔들면 사자토스 귀에도 들린다며? 이왕 괴롭히는 거 본격적으로 괴롭혀보자고!” “…그건 그다지 현명한 의견이 아니다. 베르텔기아. 이 무기는 그렇게 마구잡이로 쓰는 게 아니야.” 김성철은 자신의 손에 들린 재앙의 무기에서 느껴지는 무게를 누구보다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재앙의 무기는 그것을 쓰는 것만으로 대가를 요구한다. 정확히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지는 김성철 본인도 알지 못했지만 그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무언가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미묘한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용을 할 때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베르텔기아는 다르게 생각했다. ‘재앙의 무기는 오래 들고 있어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어!’ 그녀는 김성철에게 본심을 내색하지 않고 대신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계획을 실현했다. 바로 종을 든 김성철의 손에 딱 달라붙어 가능한 한 가장 강한 진동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댕! 댕! 댕! 댕! 댕! 움 브루크의 재앙의 종소리가 속사포처럼 울려 퍼졌다. “베르텔기아. 뭐하는 짓이냐. 품위 없게. 그보다 당장 주머니 안으로 들어와라. 남들 눈에 띄어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으니.” 김성철은 손을 뻗어 베르텔기아를 회수하려 했다.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손목 뒤로 돌아가며 또 다시 종을 잡은 그의 팔을 강하게 흔들었다. 댕! 댕! 댕! 댕! 댕! 그 행동은 김성철은 알지 못했지만 사자토스에게 직격타를 가했다. “끄으으으윽!” 그는 입을 막은 채 그대로 쓰러졌다.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은 고통에 몸도 마음도 용해되어버릴 것 같았다. “저기... 괜찮아요?” 클라리스가 쓰러지는 사자토스를 부축했다. 사자토스는 머리를 격하게 흔들며 정신을 추슬렀다. “노래 불러드려요?” 클라리스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사자토스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대신 그는 계속해서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이명보다 더 끔찍한 종소리의 충격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 행동은 클라리스의 눈에 긍정의 의미로 보였다. 그녀는 목청을 가다듬고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가 시작되자 사자토스는 깜짝 놀라 클라리스에게 튀어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미쳤어?! 제발 조용히 좀 하라고!” 그는 클라리스는 침묵 시키고 출입문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문틈 사이로 눈동자를 가져다댔다. 나룻배가 멈췄다. “…방금 낯익은 소리가 들린 거 같은데?” 베르텔기아 때문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김성철은 뒤에서 들려온 음색이 자신이 아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감지해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베르텔기아는 다시 한 번 진동을 일으켜 종을 흔들어댔다. 댕! 댕! 댕! 댕! 댕! 사자토스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는 입을 틀어막은 채 떼굴떼굴 굴렀다. “오늘 따라 왜 이러냐.”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빠른 손놀림으로 덥썩 잡아 주머니 안에 잡아넣었다. “왜 그래? 빨리 해치우고 끝내버리자고.” 오늘의 베르텔기아는 못 말리는 반항아였다. 김성철은 쓴웃음을 지으며 종을 한 차례 울렸다. 소리가 대단히 가까이서 들려온다. 아마도 이 주변 수상가옥 중 하나에 있으리라. 김성철은 집 하나하나 방 한 칸 한 칸 수색하는 고전적인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일단 김성철이 집안에 들어가면 어느 무엇도 그의 이목에서 빠져나올 수 없으니 말이다. 그는 훌쩍 배에서 뛰어올라 수상 가옥의 출입구 앞에 섰다. 문이 잠겨 있었지만 그건 김성철에겐 아무 의미도 없다. 우지끈. 김성철의 손이 닫자 자물쇠는 과자처럼 부셔졌다. 김성철은 재빠르게 안을 탐색했다. “야옹.” 얼룩고양이 한 마리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양이는 김성철은 보자 털을 곤두세우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김성철은 다음 가옥으로 향했고 같은 작업을 실시했다. 그렇게 3채의 집을 수색하던 중 김성철의 눈에 한 척의 배가 눈에 들어왔다. 험상궂은 사내 다섯 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살기등등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건너편 수상 가옥에 배를 대더니 우르르 올라가 집을 둘러쌌다. ‘저건?’ 하는 짓이 전형적인 도적들의 수법이다. 김성철은 그늘 속에 숨어 그들의 행동을 지켜봤다. 도적들은 제법 손발을 맞췄는지 수신호를 주고받으며 집을 포위했고 체구가 작고 몸이 날랜 사내가 지붕이로 뛰어 올라가 굴뚝으로 쑥 들어갔다. 그걸 신호로 나머지 네 명의 사내도 뒷문을 부수고 안으로 진입했다. “음. 역시 이 동네 치안이 좋지 않긴 하네.” 베르텔기아는 주머니 안에서 강하게 진동을 일으켜 종을 울려 보려했지만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성철은 남의 집 앞에 서서 도적들의 침입을 받은 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딱히 정의감에 불타는 성격은 아니지만 누군가 위협을 받거나 폭력에 노출된다면 기꺼이 개입할 마음은 있었다. 곧 집안에서 남자의 고함이 울려 퍼졌고 그에 상응하여 여성의 짤막한 비명이 들려왔다. “안에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난간에 기대서서 팔짱을 끼고 관찰을 계속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어떤 소리도 잡음도 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집안엔 사자토스가 있기 때문이었다. “…….” 사자토스는 피 묻은 단검을 든 채 쓰러진 건달들을 보고 있었다. ‘재수 한 번 더럽게 없네. 오늘.’ 재수 없는 건 그가 아니었다. 재수 없는 건 김성철보다 운 수치가 낮은 클라리스였다. 사자토스로서는 그저 운 없는 여자 옆에 있었기 때문에 휘말린 것이다. ======================================= 45. 운 없는 여자 (2) 실제로 방금 침입한 인간들은 사자토스와는 하등 관계없는 인물이었다. 굴뚝을 통해 뛰어내렸던 작고 민첩한, 지금은 주방에 피를 흘린 채 죽어 있는 사내는 이렇게 말했었다. “상인연합회 판추리아 지부에서 왔다! 세계의 적은 어디 있나?! 클라리스 아삼!” 또 다른 사내, 뒷문으로 들어왔다 앞문 앞에서 너부러진 사내는 이렇게 말했다. “클라리스 아삼! 네 할애비는 우리가 감금했다. 찾고 싶으면 순순히 우리를 따라와 조사를 받아야 할 것이야.” 그 이야기는 사자토스와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지만 클라리스에겐 중요한 이야기였다. “할.. 할아범이?” 클라리스가 동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녀는 즉시 집밖을 나서려고 했다. 사자토스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재빨리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이미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놔요! 이거!” 클라리스가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김성철과 베르텔기아가 들은 비명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다. “조용히 해! 그렇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사자토스는 그녀에게 달려들어 입을 틀어막으며 협박했다. 클라리스는 격렬하게 반항했다. “아니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바깥에 아주 개 같은 놈이 있기 때문이야!” 클라리스는 포박한 채 사자토스는 문틈을 응시했다. ‘히익!’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김성철이 이쪽으로 배를 몰고 똑바로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다간 저 인간의 손에 잡혀 죽을 판이다.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사자토스는 체면불구하고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정말 면목 없지만 한 번만... 한 번만 날 구해다오.” 평소 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다. 평생에 걸쳐 건방진 이라는 수식어를 몸에 달고 다닌 자존심 강한 사내가 고개를 숙이는 것은. 그만큼 저 김성철이란 사내는 사자토스에게 깊은 충격을 안겨다주었다. 그를 다시 보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이번 일만 넘기면 약속한다. 네 할아버지인지 뭔지 하는 노인을 구해주겠다. 칠영웅 사자토스의 이름을 걸고.” 클라리스는 그런 사자토스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거절할 수도 없는 부탁이었다. 거절하는 순간 저 미치광이 마법사가 어떻게 나올지 모를 일이니 말이다. 그래도 클라리스는 오래 고생한 사람답게 태연작약하게 대처했다. “그 약속 반드시 지키세요.” “사자토스의 이름을 걸고 지키겠다.” 사자토스는 클라리스의 귀에 대고 뭔가 소곤거렸다. 잠시 후. “…….” 김성철은 클라리스의 집 앞에 섰다. 그의 손엔 여전히 종이 쥐어져 있었지만 흔들진 않았다. 이곳엔 다른 용무로 왔기 때문이다. 그는 문을 두드렸다. 아무 반응이 없다. 김성철은 문을 부수려고 주먹을 들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어라?”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가 먼저 반응했다. 베르텔기아는 기회다 싶어 주머니 바깥으로 빠져나와 책장을 파닥거렸다. “노래 잘하는 언니 아냐?” “응..? 너.. 너는?!” 클라리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베르텔기아 너머 묵묵히 선 검은 머리 사내의 얼굴을 응시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아무리 한 번 행동을 함께 한 사이라고 해도 그의 이름이 가지는 힘은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이다. ‘세계의 적...!! 왜 나한텐 이런 이상한 놈들만 달라붙는 걸까? 하긴 난 운이 없지.’ 앞엔 세계의 적, 뒤에는 진짜 재앙. 환장할 지경이지만 클라리스는 필사적으로 냉정을 유지하며 김성철을 맞이했다. “여긴 무슨 일인가요? 또 저에게 무슨 볼 일이라도 있나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뒤엔 숨을 죽이고 있는 사자토스와 엉망으로 너부러진 다섯 구의 시체가 있었다. 김성철은 클라리스 너머 문틈을 무심한 눈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방금 그 집에 불청객이 오는 걸 봐서 말이야.” “아.. 불청객 말인가요? 그 분들은 지금.... 자고 있어요.” “음?” “그러니까 운이 나빴죠. 아무리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고 해도 힘수치 100이 넘는 여자 집에 들어왔으니.” 그러고 보니 실내에서 은은한 피 냄새가 나고 있었다. “정확한 힘 수치가 얼마지?” “132요.” “그렇군. 시체를 옮기는 건 도와주지 않아도 되겠나.” “네.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밤이 오길 기다렸다가 고깃밥으로 던져주면 그만이니까요.” “이런 개 같은 도시에도 장점은 있군.”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습관적으로 종을 한 차례 흔들었다. 댕! 그때였다. 안에서 신음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무슨 소리지?” 김성철이 묻자 클라리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하나 있나 보네요. 나도 참. 마무리가 어설프다니까. 아하하하....” “…….” 김성철은 별 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클라리스는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고 행동도 함께 했으니까. 게다가 그는 그들에게 이익도 제공했다. “전에 말했다시피 그 상자 안에 든 것들은 잘 사용해야 할 거야. 무인주화를 쓰는 순간 상인연합회의 암살자가 당신들을 찾아오게 될 것이거든.” 김성철은 그 말을 남기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혹시 주변에 사자토스와 닮은 사람을 본 적이 있으면 내게 말해라. 나는 황제의 측간에 있을 테니.” “네. 명심할게요.” 팔부능선을 넘었다. 김성철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사자토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한 차례 대비를 했다. 한 번 이상, 김성철이 종을 울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김성철은 클라리스 앞에서 뒤돌아서며 종을 한 차례 흔들었다. 댕! 사자토스는 끔찍한 충격을 받았지만 아까처럼 소리를 내진 않았다.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며 버텼다. ‘빌어먹을...! 아무래도 여기선 내가 이긴 모양이군.’ 달타니어스가 오면 전황이 바뀔 것이다. 그 혼자서 이 상황을 바꿀 순 없겠지만 그는 칠영웅 모두와 친하니 말이다. 그라면 사자토스가 부를 수 없는 다른 칠영웅 전원을 이 자리에 불러 모을 수 있다. 김성철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나 칠영웅 전체와 맞서서 이길 순 없을 것이다. 사자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발소리가 멀어지길 기다렸다. 그런데 다음 순간 끔찍한 종소리가 다시 한 번 끔찍하리만치 연속적으로 울려 퍼졌다. 댕! 댕! 댕! 댕! 댕! 범인은 베르텔기아였다. 잠시 김성철이 방심하는 사이 다시 종을 든 팔에 달라붙어 강렬한 진동을 일으킨 것이다. “에잇! 빈틈 발견!” 댕! 댕! 댕! 댕! 댕! 움 브루크의 재앙의 종은 크리스마스 캐럴처럼 신나게 울려 퍼졌다. 김성철은 쓴웃음을 지으며 베르텔기아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 행동에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 이번에 그는 아까와 달리 베르텔기아가 마음껏 행동하게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곧 베르텔기아의 빈약한 스태미나가 바닥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결정은 한 사내에게 치명타로 다가왔다. “끄아아아아악!!” 안에서 남자의 격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익숙한 비명. 김성철의 눈동자가 번득이며 살기를 뿜어냈다. “안에 누가 있는 거지?” 김성철이 클라리스에게 물었다. 일이 틀어졌다. 클라리스는 단 일초도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협박을 받았어요. 안에 그 사람이 있어요.” “아니 네가 어떻게 내게?!” 사자토스가 짤막하게 소리쳤지만 사실 그가 클라리스에게 해준 건 별로 없었다. “더럽게 못 부르는 노래 참고 들어준 데다 박수까지 쳐줬는데!” “시끄러! 못생기고 키까지 작은 밥맛 떨어지는 놈아!” 클라리스는 이전에 들었던 추녀라는 말을 멋지게 되돌려 주며 김성철 뒤로 몸을 숨겼다. 사자토스는 격노하며 주문을 외우려했지만 허사로 끝났다. 댕! 댕! 댕! 댕! 댕! 움 브루크의 재앙의 종이 정신없이 울려댔다. 지근거리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상대방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다. 김성철이 움 브루크를 꽂는데 성공했을 때 사자토스의 죽음을 기정사실처럼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김성철은 움 브루크의 재앙의 종을 쉴 새 없이 흔들어대며 베르텔기아를 돌아봤다. “잘했어. 베르텔기아.” “의미 없다며?” 베르텔기아가 토라진 투로 말했다. 그런데 아직 사자토스의 운은 다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김성철이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시점에 김성철 뒤에 마법진이 떠올랐다. 차원학파의 문양이다. ‘지원군인가?’ 김성철은 뒤로 물러나며 마법진에서 사자 가죽을 뒤집어 쓴 거한이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거한, 달타니어스는 황소처럼 콧김을 내뿜으며 김성철을 노려봤다. “네가 부수는 자인가?” 수면을 미미하게 떨게 할 정도로 쩌렁쩌렁한 음성. 김성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칠영웅 달타니어스. 무한한 힘의 도전자이지. 그리고 오늘은 권신의 자격으로 이곳에 왔다.” 달타니어스의 근육이 팽창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주변에 흘렀고 그가 지면에 발을 디디자 물 위에 띄어놓은 수상가옥 전체가 흔들렸다. “꺅!” 클라리스의 집안에 쌓아놓은 식기들이 떨어지며 와장창 깨졌다. “덤벼라.” 달타니어스는 마치 권법가처럼 자세를 취하며 김성철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 김성철은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소환자! 네 힘이 그렇게 강하다지?” 달타니어스는 자신이 있었다. 김성철이 강하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자기와 비슷하거나 좀 더 강한 정도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곧 오산으로 들어갔다. 김성철이 주먹을 휘두르는 순간, 정확히 말하면 그 주먹에 실린 어마어마한 힘이 충격파를 생성하며 자신의 면상을 향해 날아오는 걸 본 순간 달타니어스는 깨달았다. 이건 맞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달타니어스는 두 팔을 교차해 김성철의 공격을 막으려했지만 김성철이 주먹이 훨씬 빨리 그의 턱에 꽂혔다. 퍽! 단 한 번의 가격에 거한은 물수제비처럼 강물을 날아가 멀리 있는 수상 가옥에 처박혔다. “크르르르.” 다행히 그의 맷집은 사자토스보다 훨씬 강했고 회복에 강한 영혼각인을 지니고 있어 한 번에 무너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의 턱은 보기 흉하게 뒤틀려 있었다. 달타니어스는 뒤틀린 턱을 붙잡고 스스로 끼워 맞추고는 혀를 내밀어 한 바퀴 돌렸다. ‘다행이다. 혓바닥은 무사하군.’ 김성철은 클라리스의 수상 가옥 입구에 서서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다. ‘사자토스보다는 덜 까다로운 상대군. 자세한 건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김성철은 일단 사자토스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옆에서 클라리스가 절박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기, 미안한데 우리 할아버지가 위험에 처했어요!” “비켜라.” 지금은 그녀를 도울 시간 따위 없다. 김성철은 뭐가 중요하고 덜 중요한 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클라리스를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인간의 편을 들걸 그랬어!” 클라리스가 눈에서 독기를 뿜어내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김성철이 미동도 하지 않자 클라리스는 자신의 배에 올라타 특유의 힘으로 힘차게 노를 저으며 수로 저편으로 사라졌다. 김성철은 집안으로 들어갔다. 클라리스의 집안엔 고통과 공포에 떠는 사자토스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김성철의 군홧발을 보자 강아지처럼 몸을 벌벌 떨었다. 누가 이 사내를 다구의 마법사 사자토스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 김성철은 운명처럼 사자토스 앞에 섰다. “살려줘.” 사자토스가 목숨을 구걸했다. “나는 죄가 없어. 이 모든 건 데스포트의 결정이다. 나는 그저 그의 꼬임에 속아 넘어간 것밖에 없다고!” 이미 전의는 상실한 지 오래다. 김성철에게 패했을 때 그는 두 번 다시 김성철에게 도전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김성철은 그런 사자토스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 그의 목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사.. 살려줘! 제발!” 그때 마법진이 사자토스의 옆에 피어오르며 자그마한 여자아이들이 마법진에서 튀어나와 김성철을 향해 달려들었다. 베스티아레가 만들어 낸 분신들이다. ‘호문클루스 변종인가? 취향 한 번 독특하군.’ 그러나 마편 카산드라가 영혼 창고에서 나오는 순간 분신들은 순식간에 육편으로 변해 클라리스의 집을 피로 물들였다. “약속을 지키러 왔다.” 김성철은 사자토스의 목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사.. 살려... 줘.. 나.. 나는...” 사자토스의 강운도 이제는 그를 살릴 수 없었다. 그의 운은 다했다. 우두둑! 사자토스는 눈을 부릅뜬 채 목이 부러져 죽였다. 세상을 호령했던 비범한 마법사의 어이없는 최후였다. 김성철은 사자토스의 망토 아래 줄줄이 달린 영혼석을 모조리 낚아챈 후 사자토스의 시체를 바닥에 내던지고 팔 가라즈로 찍어버렸다. 사자토스의 시신은 형체도 남기지 않은 채 분쇄되어 수상가옥 아래 흙탕물 아래에 판자와 섞여 떨어졌다. 흙탕물에 떨어진 그의 시신은 비릿한 피를 사방에 흩뿌리며 판추리아의 밑바닥으로 침전했다. 그런데 판추리아를 흐르는 강의 바닥엔 과거 사자토스가 숨겨놓은 거대한 존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음. 사자토스가 당했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달타니어스는 바로 그 거신의 상부 조종석에 있었다. 그는 영혼 창고에서 책의 형상을 한 열쇠를 꺼내 거신의 조종석 중앙에 난 예사롭지 않은 홈에 꽂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서라. 베르텔기아 3호.” 수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발밑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진동을 감지했다. ======================================= 46. 거신 (1) 김성철은 주변을 돌아봤다. 물 위에 띄운 가옥들은 무수히 많은 쇠사슬과 밧줄로 엮어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거신의 크기는 김성철의 머리 안에 있었다. 산에 필적할 정도로 거대한 그것이 깨어나면 이 도시는 글자 그대로 파멸이다. “어떻게 하지? 이제?” 베르텔기아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쩔 수 없지.” 판추리아의 인간들과는 일면식도 없다. 도시의 인간들이 선량한 인간이라는 느낌도 받지 못했다. 따라서 몇 명이 물에 빠져죽건 김성철과는 관계없는 이야기다. 그런데 지금은 달리 할 일이 없다. 거신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기다려야 한다. 수중전은 김성철이 선호하는 게 아니므로. 이런 상황에서 수만 명이 수장되는 걸 지켜본다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적어도 그는 타인의 불행을 보고도 모른 체 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기득권과는 다르다. 아니, 구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김성철은 아퀴로아나 마르틴 브레가스 같은 자들과 똑같은 인간이 되어버리니까. “…….” 김성철은 도시 전체를 관통하는, 강의 양안 사이에 묶여 단단히 도시를 고정시키고 있는 거대한 쇠사슬을 보았다. 저것을 끊어낸다면 거신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파멸적인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상 가옥들은 본시 물에 뜨는 배이므로 배들을 육지로 구실케 하는 속박을 풀어낼 수 있다면 여간한 흔들림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 ‘여기선 그걸 써야겠군.’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거대한 검을 꺼냈다. 검이라기보다는 도부들이 쓰는 도축용 칼을 크게 늘여놓은 형상을 지닌 기이한 검이었다. 그 검의 이름은 크럼부이.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학정에 고통 받는 대륙의 사람들을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을 때 썼던 무기 중 하나다. 검을 들자 검신에서 묘한 빛이 흘러나오며 어딘가 경박하고 가벼워 보이는 사내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오랜만이군. 배신자. 무슨 염치로 날 다시 꺼내든 거지?” 베르텔기아는 깜짝 놀라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변엔 오직 김성철과 베르텔기아 둘 뿐이다. 말을 하고 있는 것은 김성철의 검이었다. 크럼부이는 자아를 가진 검, 에고소드였다. “나는 더 이상 널 위해 일하지 않는다.” 날카롭게 선 칼날에 서리가 끼는가 싶더니 오래된 식칼처럼 무디어졌다. “우와. 저건 뭐야?” 베르텔기아가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크럼부이가 바로 맞받아친다. “그러는 너는 뭐냐. 자기도 말하는 책인 주제에.” 김성철은 뭐라고 대꾸하려는 베르텔기아를 잡아 주머니에 넣고는 자신의 손에 들린 거대한 검을 응시하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잠깐 일해 줘야겠다.” “그 이유는?” “무고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김성철은 흔들리는 물결과 그 위에 뜬 수천 채에 이르는 수상가옥들을 응시했다. “판추리아인가? 오랜만이군.” 검이 말했다. “도시가 곧 파괴된다. 도시를 엮은 쇠사슬을 끊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물살에 삼켜져 죽임을 당할 것이다.” “어설픈 정의감은 여전하군.” 크럼부이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무디어졌던 칼날은 냉담한 말과 달리 예리함을 되찾았다. “이번 한 번 뿐이다.” “어차피 너를 쓸 일도 별로 없다.” 김성철은 번득이는 크럼부이를 한 손으로 쥔 채 건너편의 수상가옥으로 도약했다. 쿵! 꽤 커다란 가옥이었지만 착지의 충격에 출렁하고 흔들렸다. 지붕 위에 올라선 김성철은 지붕 위를 질주하며 도시의 중앙을 연결한 거대한 쇠사슬을 향해 나아갔다. “저.. 저걸 봐라! 저건 뭐냐!” 중형 선박에 타고 도시를 순찰하던 경비병들이 김성철을 발견하고 아연실색했다. “엄청난 속도다. 대체 저 놈은 뭐지?” “설마 그 소문 속의 칠영웅 중 하난가?” 병사들이 어리둥절하며 김성철의 정체를 저마다 추리하고 있을 때 잔뼈가 굵은 고참병이 김성철의 무기를 기억해내고는 황급히 소리쳤다. “멍청한 것들! 저건 세계의 적이야!” “뭐? 세계의 적은 망치를 들고 있는 게 아니었나?”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 저건 크럼부이야. 세계의 적이 드워프 왕국에서 팔 가라즈를 훔치기 전에 썼던 무기라고!” 경비병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경보를 울렸다. 나른한 오후에 조용히 잠겨 있던 도시 전체에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종이란 종은 모두 울렸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도구들이 불협화음을 내며 세계의 적의 예방을 알렸다. 이 전대미문의 사태에 구제불능의 주정뱅이조차 오랜만에 정신을 차리고 바깥으로 나올 지경이었다. 김성철은 지붕 위에서 도시 전체에 혼란이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걸 지켜보며 목적했던 중심부로 향했다. 거대 쇠사슬이 가로지르는 판추리아의 중심부엔 총독 로르메이 추이의 관저가 있었다. 5단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전함을 덧이어 만든 그의 관저는 비교적 낮은 건물들로 이루어진 판추리아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표지였다. 김성철은 총독의 관저 앞에 방해받지 않고 안착했다. 총독을 지키던 병사들은 공포에 질린 나머지 싸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삐쩍 마른 장교가 병사들의 궁둥이를 걷어차며 소리쳤다. “뭐하느냐! 당장 쏘라고! 이 쓸모 없는 밥벌레들아!”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장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김성철의 시선을 받은 장교는 뱀과 마주친 쥐새끼 마냥 딱딱하게 굳더니 이내 줄행랑을 쳤다. 김성철은 거대한 크럼부이를 가볍게 휘둘렀다. 부웅- 어마어마한 풍압이 병사들을 덮치며 그들의 옷과 머리칼을 거세게 흔들었고 몇 개의 모자가 벗겨져 강물 속으로 처박혔다. 김성철은 그들을 노려보며 짤막하게 말했다. “꺼져라.” 판추리아의 오합지졸들은 현명하게도 김성철의 명을 충실히 따랐다. 난장판이 된 관저 앞에서 김성철은 판추리아를 지탱하는 쇠사슬을 응시했다. “으.. 저건 뭐냐?!” 관저의 3층 테라스에 총독 로르메이 추이가 헐레벌떡 뛰어나와 김성철을 발견했다. “그.. 그만 두시오! 제국대원수! 그 쇠사슬을 끊었다간 판추리아는 끝장이오!” “…….” 김성철은 총독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크럼부이를 높이 들어 올렸다 내려쳤다. 콰직! 아름드리 나무만한 두께의 쇠사슬이었지만 크럼부이의 날카로운 칼날과 김성철의 신적인 힘에 직면하자 버터처럼 갈라졌다. 쇠사슬과 연결된 수많은 가옥들이 지진을 만난 것마냥 요동쳤다. “으아아아! 판추리아는 끝장이야!” 총독을 머리를 싸매고 하늘을 쳐다보며 절규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방금의 진동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충격이 그의 관저를 강타했다. 로르메이 추이는 그대로 테라서 아래로 고꾸라져 얼굴부터 떨어졌다. “키아아악!” 평범한 사람이라면 죽거나 중상을 입을 정도의 충격이었지만 총독이라는 직위가 장식은 아닌지 로르메이 추이는 가벼운 찰과상과 타박상만 입고 몸을 일으켰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그의 시야에 시커먼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흙탕물로 항상 뿌연 강물 안에 무언가 비춰 보이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물고기?’ 세상에 그렇게 큰 물고기가 있을 리 없다. 이윽고 총독은 보았다. 강 그 자체를 밀고 올라오는 거신의 형상을. * 같은 시각. 상인연합회 판추리아 지부 앞. “쿠르트 아삼! 세계의 적과 너는 무슨 관계이지?” 그곳엔 상인연합회에 고용된 용병들이 쿠르트 아삼을 기둥에 묶어놓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를 공개적으로 규탄하고 있었다. 상인연합회 판추리아 지부장은 심드렁한 얼굴로 쿠르트 아삼의 심문을 지켜보고 있었다. “로르메이 추이놈. 왜 눈앞의 기회를 놓치는 거지?” 그는 혼자서라도 김성철을 상대해볼 생각이었다. 비록 김성철이 세계 중에 높은 악명을 떨치는 대적할 수 없는 자라고 하지만 자신이 거액을 주고 각지에서 불러 모은 정예용병들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는 진짜 강한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판추리아에서 자라 판추리아의 인간만을 본 촌뜨기의 한계였다. 그가 보기에 김성철은 기껏해야 초인급 열 명 선에서 정리할 수 있는 존재로 보았다. 다행히 그는 검증되진 않았지만 뒷세계에서 암약하는 초인급 암살자 열 다섯 명을 구할 수 있었다. 지부장은 쿠르트 아삼을 이렇게 묶어 놓고 있으면 틀림없이 세계의 적이 모습을 드러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면 초인급의 암살자로 전설의 반열에 이른 사내를 처치할 생각이었다. ‘이번 일만 성공하면 나도 연합회 본부 중역이 될 수 있어. 아니 어쩌면 호르네코 총독의 후계자가 될지도 모르지!’ 지부장이 헛된 꿈을 망상하고 있을 때 수로 저편에서 한 척의 배가 엄청난 물살을 일으키며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세계의 적인가?” 지부장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기대에 찬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변했다. 배를 탄 인물은 하얀 옷을 입은 젊은 여자였기 때문이다. “클라리스 아삼입니다. 쿠르트 아삼의 손녀죠.” 측근들이 그에게 귀띔했다. “저 여자도 잡아서 함께 묶어라.” 지부장은 귀찮다는 투로 명령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클라리스 아삼의 뒤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오며 엄청난 물보라를 사방에 일으켰다. 다음 순간 판추리아를 흐르는 강물이 크게 요동치며 그 위에 뜬 도시 전체를 거세게 뒤흔들어놓았다. 도시를 묶는 쇠사슬이 절단된 것이다. 수천 채의 가옥이 거세게 흔들렸다. “뭐야 이건!”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최초의 흔들림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처음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진동이 판추리아 전체를 흔들었다. 지진 이상의 흔들림 속에서 지부장은 볼 수 있었다. 강물 밑에서 산과 같은 거대한 무언가가 떠오르며 강 위의 도시를 밀어 올리는 것을. “저.. 저건 뭐냐!” 에크하르트의 역작. 대재앙결전병기 베르텔기아 3호가 수천 년에 이르는 긴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 김성철은 수상 가옥을 밀치며 솟아오르는 거신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생각보다 크군.’ 도시를 관통하는 거대 쇠사슬은 끊었지만 아직 배들을 엮는 작은 쇠사슬들은 무수히 남아 있었다. “내 일은 끝났나?” 크럼부이의 질문에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비호처럼 사슬과 밧줄의 병목지대로 날아가 단칼에 그것들을 끊어냈다. “네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각종 더러운 강물의 부유물과 침전물이 달라붙은 밧줄과 쇠사슬을 끊는 덴 팔 가라즈보다 칼날의 면적이 넓은 크럼부이가 훨씬 효과적이다. 바꿔 말하면 크럼부이의 역할은 그야말로 잡동사니 제거에 다름 없었던 것이다. “으음.. 전사 대신 이런 불결한 피조물을 끊게 되다니.” “사람을 구하는 일이다.” 김성철은 쉬지 않고 배들을 엮고 있는 것들을 차례차례 끊어냈다. 도시의 남구 쪽에 출현한 거신은 자신의 머리 위에 있던 모든 가옥들을 밀어 올리며 파괴했다. 수많은 가옥이 그것을 연결한 쇠사슬과 함께 말아 올라가 거신의 이끼 낀 표면 아래로 미끄러지면서 수면에 곤두박질쳤다. 수많은 사람이 영문도 모른 채 비명횡사했고 도시는 김성철이 출현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충격에 휩싸였다. “으.. 저.. 저걸 막아라!” 상인연합회의 지부장은 힘들게 모셔온 암살자들에게 명령을 내렸지만 암살자들이 이런 상황에서 그의 명령에 따를 리 만무했다. “저걸 무슨 수로 막아. 병신아.” 암살자들은 재빨리 작은 배에 올라타 필사적으로 노를 저었다. 지부장은 클라리스가 쿠르트 아삼을 묶은 밧줄을 손으로 끊고 자신의 배에 태우는 광경을 목격했다. “저걸 막아! 저걸 막으라고!” 지부장 곁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클라리스도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엄청난 속도로 노를 저어 자리를 벗어났다. 홀로 남은 지부장은 갑자기 주변이 깜깜해지는 걸 느꼈다. 뒷덜미에 서늘한 감각이 서리는 걸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하늘의 천정에 닿아 보일 만큼 거대한 형상과 그 아래 박살난 가옥과 배, 잡동사니로 뒤섞인 해일이 이쪽을 향해 몰아치는 걸 보았다. “끄아아악!” 검은 물살이 지부장을 삼켜버리는 그 시점에도 김성철은 배와 배를 엮은 것들을 끊어내고 있었다. “모두 신경 끄고 뭍으로 도망치세요! 어서!” 베르텔기아는 김성철 등에 딱 달라붙어 사람들이 보일 때마다 열심히 피난권고를 했다. 김성철의 필사적인 분투는 헛된 게 아니었다. 거신이 나타나며 일으킨 거대한 해일이 도시의 중앙과 북부를 덮쳤을 때 낱개로 흩어진 수상가옥들은 충분한 유연성을 발휘하며 물살에 올라탔다. 그러나 김성철이 끊지 못한 지역에 있던 가옥들은 출렁이는 물살 위에서 서로 부딪치며 박살나며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거친 흔들림으로 인해 건물 안을 밝히던 등불이 박살나 도시의 서쪽 구역이 맹렬한 불길에 휩싸였다. 그 기세는 시간이 갈수록 더해져 강 전체가 불에 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김성철은 한쪽이 불타는 강 위에 서서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 거신을 올려다보았다. 거신 위에서 천둥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수는 자. 너의 실력은 잘 봤다만 이건 어떨까? 신을 닮은 이 거신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달타니어스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네 역할은 끝났다.” 김성철은 크럼부이를 영혼창고 안에 집어넣었다. 대신 팔 가라즈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김성철은 거신을 올려다보며 낮게 읊조렸다. “내가 감당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 46. 거신 (2) 일찍이 이토록 거대한 적을 상대한 적은 없었다. 김성철은 내심 경탄했다. 저 거신을 만든 사내에 대해서. ‘에크하르트. 평범한 사내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것까지 만들어낼 줄이야.’ 에크하르트가 이르렀다는 창조술사 클래스에 대한 흥미가 전례 없이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죽어라! 세계의 적!” 거신의 팔이 하늘을 향해 서서히 뻗었다. 폭포를 방불케 하는 엄청난 수량이 빗줄처럼 쏟아 내리는 가운데 거신의 팔은 태양마저 가리고 하늘의 끝자락까지 닿는 걸로 보였다. 판추리아의 생존자들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복잡한 반응을 보였다. 혹자는 신을 향해 회개의 기도를 중얼거렸고 또 어떤 이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거인의 모습을 홀린 듯 쳐다봤다. 비명과 탄식, 아우성이 왕겨처럼 흩어지는 군중들 사이에서 메아리치는 가운데 거신의 팔이 아래를 향해 떨어졌다. 그 광경은 가장 용감한 사람의 눈을 질끈 감게 할 정도로 미증유의 충격과 공포를 담고 있었다. 오직 한 명만이 그런 거신의 일격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 김성철은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거신의 공격을 똑똑히 지켜보며 측면으로 이동했다. 가라앉는 수상가옥과 아직 멀쩡한 배, 붕괴된 판추리아의 잔해를 발판 삼아 머리 위에서 낙하하는 거인의 팔의 궤적을 피해 달아났다. 그것은 회피라기보다는 장대한 탈출에 가까웠다. 김성철은 강의 반 이상을 돌파한 다음에야 안전권에 들어섰고 간발의 차로 그가 머물던 도시를 박살내는 거신의 팔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나마 멀쩡하던 도시의 북부의 삼분의 일이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사라졌다. 뒤이어 나온 충격파가 이차적인 타격을 가하며 지근 범위의 사물들을 휩쓸 듯 파괴했다. 김성철은 충격파를 그대로 몸으로 받아들였다. “…….” 근래 경험하지 못했던 꽤나 짜릿한 충격.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괜찮아?” 주머니 안에 꼭 숨은 베르텔기아가 충격을 감지하고 조심스레 묻는다. 김성철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아버지라는 사람. 나와 생각이 비슷한 거 같군.” 남들이 균형 잡힌 성장 운운하며 잡다한 영역에 발을 걸치며 중구난방인 성장을 이루고 있을 때 김성철은 오직 힘 일변도의 성장을 묵묵히 밀고 나갔다. 어중간한 힘은 소위 말하는 균형 잡힌 성장을 한 자들에게 약점을 잡히겠지만 그 힘이 상정 가능한 한계를 넘었을 때 김성철은 그 어떤 강적이라도 이길 수 있다고 보았다. 에크하르트의 거신은 김성철의 사상과 무서우리만치 빼닮아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렇게까지 무식할 정도로 거대한 것을 만들어내지 않았을 것이다. ‘가볼까?’ 김성철은 도시를 강타한 강물에 잠긴 거신의 팔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신적인 힘이 그의 발에 감돌며 과감한 도약을 시전하자 그의 신형은 일순 사라졌다 이윽고 거신의 팔위에 다시 나타났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들어 올려 힘껏 거신의 팔을 내리쳤다. 쿵! 천둥을 방불케 하는 어마어마한 소리와 함께 거신의 거대한 신형이 한 순간이나마 요동쳤다. 산에 준할 만큼 거대한 거신에 비하면 개미 한 마리, 아니 티끌에 가까운 작은 인간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흔들리게 한 것이다. 거신의 팔을 감싼 바위들이 크래커처럼 부서지며 무수한 파편을 흙탕물 위에 쏟아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거신은 팔의 일부가 부서진 것 외엔 별 다른 충격을 받지 않았다. ‘역시. 엄청난 크기와 질량으로 여간한 충격은 그냥 무시해버리는군. 훌륭한 발상이야.’ 김성철은 달타니어스가 머물러 있을 주변을 자욱이 덮은 물안개 너머 번득이는 거신의 두 눈을 응시했다. 어딘가 거신을 통제하는 핵이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두들기다보면 언젠가 부서지겠지만 김성철은 가급적이면 빨리 이 싸움을 끝내고 싶었다. 그는 크레이터처럼 난 커다란 구멍을 뒤로 하고 거신의 팔을 타고 위를 향해 질주했다. 목표는 거신의 머리. 한 번에 뛰어올라 끝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곧 작은 문제가 발생했다. 거신의 팔 표면이 생각보다 미끄러웠던 것이다. 수천 년간 강물 속에 잠겨 있으면서 달라붙은 물이끼와 마모된 표면이 발을 미끄러지게 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김성철이 팔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눈치 챈 달타니어스가 팔의 각도를 높여 김성철을 미끄러지게 했다. “어림없다!” “…….” 달타니어스는 아예 거신의 팔을 가볍게 흔들어 김성철의 시도를 확실히 좌절시켰다. 김성철은 도중에서 다시 낙하했다. “꼴좋구나!” 달타니어스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거신을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하면서 다른 팔을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두 번째 타격을 가하기 위한 준비다. “조심해!” 베르텔기아가 뾰족하게 소리쳤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충격파로 인해 박살이 난 수상가옥의 잔해를 뚫고 너덜거리는 쇠사슬을 눈에 들어왔다. 김성철은 그 쇠사슬로 도약해 움켜잡고 힘껏 잡아 당겼다. 수십 미터에 이르는 긴 쇠사슬이 수면 위로 찰랑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쇠사슬의 일정 간격마다 가옥들을 붙들어 매던 끝이 뭉툭한 쇠말뚝이 달려 있었다. 김성철은 그걸 보자마자 지체 없이 쇠사슬을 휘둘려 거신의 몸통을 향해 후려쳤다. 푹! 쇠사슬에 달려있던 쇠못이 거신의 몸통에 박혔다. ‘조금 모자라군.’ 김성철은 다른 잔해로 향해 도약했다. 그때 그의 머리 위로 거신의 팔이 비스듬하게 내려쳐졌다. 전력으로 질주해 앞으로 도약하면 피할 수 있겠지만 그곳엔 발이 디딜 곳이 없는 건 물론이고 타오르는 화염이 맹렬하게 춤추고 있는 곳이다. 진한 기름 냄새로 보아 물 위에 붙은 불은 한 동안 사라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김성철은 어떻게 해야 할 지 잠시 생각했다. 수많은 경우의 수가 그의 뇌리속에서 빠르게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문득 김성철의 눈에 흙탕물 안에 일렁거리는 거무스름한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건 쓸 수 있겠군.’ 김성철은 그 검은 물체를 건져 올렸다. 그것은 김성철이 반으로 동강냈던 판추리아를 붙들고 있던 거대한 쇠사슬이었다. 원래라면 그 무게로 인해 강바닥에 가라앉아야 할 녀석이 도시의 잔해들에 의해 떠받들어져 손으로 건질 수 있는 위치에 머물고 있었다. 그 쇠사슬은 강의 기슭까지 걸쳐져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김성철은 그 사슬을 한 손으로 집어 올려 단단히 움 잡은 뒤 몸을 뒤집으며 뒤를 노려봤다. 그의 머리 위로 거인의 팔이 산사태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으아아아! 나 죽네!” 베르텔기아의 절규가 울려 퍼지는 순간 김성철은 한 손엔 쇠사슬을 움켜쥐고 거인의 팔을 향해 팔 가라즈를 휘둘렀다. 쿠궁! 어마어마한 폭음과 충격파가 가라앉는 도시를 다시 한 번 강타했다. 박살 난 잔해가 가라앉으며 강 여기저기 커다란 물기둥이 솟았다. 강기슭으로 몸을 피한 사람들은 입을 쩍 벌린 채 영원히 회자될 전설적인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세계의 적이 당한 건가?” “아무리 세계의 적이라고 해도 저런 걸 맞으면 살아나기 어려울 거야.” “대체 저 거대한 괴물은 뭐란 말인가? 신이 내린 재앙인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눈이 밝은 사내가 손가락으로 거신 쪽을 가리켰다. “살아 있다! 세계의 적이 살아 있다!” 그 소리를 들은 군중들은 그들에게 닥친 불행조차 잊어버리고 강가로 몰려와 불타는 강 너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의 손끝엔 확실히 희미한 인간의 인영이 있었다. 군중들의 입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져 나왔다. 거신의 손가락이 박살이 나 강물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거대한 쇠사슬로 몸을 휘감은 사내가 가라앉은 수상 가옥의 지붕에 우뚝 서 있었다. “…….” 김성철은 자신의 몸을 감고 있던 쇠사슬을 풀며 온 몸에 신적인 힘을 흘려보냈다. 거대한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우지끈! 김성철이 몸을 의지한 수상가옥이 박살나며 아래로 가라앉았다. 김성철은 그 옆에 있는 한 때 총독 관저로 쓰던 거대한 수상 가옥에 올라가 다시 한 번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저 너머 강의 대안에 쇠사슬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있던 철기둥이 순무처럼 순차적으로 뽑혀나갔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달타니어스는 조종석에서 소리쳤다. “이런 미친놈을 봤냐? 대체 힘 수치가 얼마냐?!” 누구보다 힘이 강하다고 알려진 달타니어스 조차 엄두조차 못 내는 일을 저 사내는 두 번이나 해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충격 속에 잠겨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김성철은 쉬지 않고 공격을 해오니 말이다. 도시를 묶은 거대한 쇠사슬이 거신을 향해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퍽! 수백 미터에 이르는 쇠사슬은 그대로 거신의 어깨를 강타했다. 거신은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았지만 쇠사슬을 고정하던 쇠말뚝이 거신의 어깨 위에 그대로 박혔다. 김성철은 쇠사슬을 한 차례 잡아당겨 고정상태를 확인한 후 그대로 거신을 향해 돌진했다. 미끄럽기 짝이 없는 거신의 표면이었지만 김성철이 두 차례에 걸쳐 박은 쇠사슬이 사다리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김성철은 비호처럼 쇠사슬을 타고 거신의 몸통을 타고 올라갔고 이윽고 거신의 어깨까지 올라갔다. 거신은 이에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세부적인 기능을 전부 포기하고 오직 상식을 파괴한 거대함만을 추구한 창조물이기에. 김성철은 무방비의 어깨 위로 올라가 거대한 거신의 머리를 노려보았다. 그 안에 달타니어스가 있다. “좋다. 이렇게 된 거!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자!” 달타니어스는 조종석 밖으로 뛰어나왔다. 거신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인간이지만 거신의 머리 위에 우뚝 선 그의 풍체는 제법 봐줄만 했다. 실로 칠영웅에 걸 맞는 당당한 풍모였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다시 자세를 취했다. “남자라면 주먹으로 승부하는 게 어떤가?”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영혼 창고에 집어넣었다. 달타니어스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승부다!” 달타니어스는 쏜살처럼 튀어나와 김성철에게 쇄도해 묵직한 주먹을 휘둘렀다. 대포를 쏘는 것 같은 풍압이 실린 강렬한 일격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먹이 닿기 전에 김성철의 손이 먼저 달타니어스의 멱살을 움켜 잡았다. 그걸 본 달타니어스는 직감했다. ‘이 놈. 민첩성도 장난이 아니구나.’ 김성철은 달타니어스를 잡은 채 그대로 한 바퀴 회전하며 골렘의 머리에 집어 던졌다. 내지르던 자신의 주먹의 힘에 더해 김성철의 완력까지 실린 그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거신의 머리 일부분을 뚫고 들어갔다. “끄으으윽...” 그래도 달타니어스의 단단함은 인정해줘야 할 부분이었다. ‘체력만큼은 나와 비슷하거나 미묘하게 더 높군.’ 달타니어스는 입에서 피를 흘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좋군! 좋아! 다시 간다!” 달타니어스는 김성철을 향해 다시 달려 들었다. 아까와 별 반 다를 바 없는 평이한 공격. 김성철은 의구심을 느꼈다. ‘이 정도 공격이 통하지 않는 걸 본인도 알 것인데. 칠영웅의 수준이 이 정도인가?’ “죽어라!” 달타니어스는 주먹을 내지르며 기합을 내질렀다. 그 순간 그의 입안에서 무언가 번득였다. 김성철의 예리한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암기?!’ 김성철의 추측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달타니어스의 혓바닥에 숨겨진 투명한 유리와 같은 암기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김성철을 향해 날아왔다. ‘이건 조금 위험하군.’ 김성철은 달타니어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달타니어스의 주먹이 보다 가까워졌지만 강침은 아슬아슬하게 김성철의 옷자락을 뚫고 지나갔다. 스친 것만으로 김성철은 위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최소 전설급의 보기 드문 암기다. 다음 순간 달타니어스의 주먹이 김성철의 얼굴을 강타했다. “…….” 오랜만에 맞아보는 묵직한 일격. 하지만 김성철의 목은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달타니어스의 주먹을 얼굴로 받으며 다른 한 손으로 달타니어스를 붙잡았다. ‘아뿔싸!’ 주먹이 적중했지만 주공은 어디까지나 암기였다. 게다가 그의 주먹은 강하게 내지른 것도 아니었다. 덕분에 김성철은 그의 주먹을 맞고도 별 다른 타격 없이 즉시 반격을 가할 수 있었고 이제 달타니어스에겐 어떤 방법도 남지 않았다. 쿵! 김성철이 달타니어스를 붙잡고 그대로 골렘의 어깨 위에 처박아 넣었다. “자비를!” 달타니어스가 다급히 소리쳤지만 김성철에겐 자비를 베풀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는 피가 섞인 침을 뱉어내며 싸늘하게 말했다. “주먹으로 싸우자는 놈이 비겁하게 암기나 쓰다니. 칠영웅이란 이름이 아깝군.” “사실 내가 제일 잘 다루는 무기는 도끼다.” 달타니어스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서슬 퍼런 도끼를 영혼창고에서 꺼냈다. “이걸로 정정당당하게 승...” 하지만 김성철의 주먹이 한 발 빠르게 달타니어스의 얼굴에 꽂혔다. 퍽! 퍽! 퍽! 김성철의 주먹은 일말의 자비심도 없이 달타니어스의 얼굴을 철저히 부셔놓았다. 달타니어스의 거대한 신형이 한 차례 부르르 떨더니 새우처럼 거꾸로 뒤집혔다. 죽은 건 아니다. 달타니어스는 비록 의식을 잃었지만 그의 몸은 보통의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사자토스와 달리 회복의 영혼각인을 장착한 걸로 보였다. 그렇다면 시간을 줄 필요가 없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꺼냈고 마무리 지었다. 퍽! 팔 가라즈 앞엔 무시무시한 자연치유력도 무의미했다. 칠영웅 달타니어스는 시신은 원형조차 남지 않은 핏덩이로 화했다. 김성철은 달타니어스가 완전히 죽은 걸 확인하고 그의 도끼를 회수한 뒤 자신의 낡은 코트 자락을 살폈다. 달타니어스의 강침이 뚫어놓은 구멍이 흉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김성철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바느질 좀 해야겠군. 그나저나 두 명 짼가?’ 김성철은 달타니어스의 시체를 응시했다. 사자토스 때와 똑같다. 어떤 반응도 나타나지 않는다. 마왕을 죽였을 때만 해도 재앙의 흐름이 보였는데 칠영웅 때는 그런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일곱 명 전원을 처치해야 재앙의 흐름을 볼 수 있는 건가.’ 아쉽긴 하지만 이토록 빠르게 두 명이나 처치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게다가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쿵! 쿵! 거신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잔존한 판추리아를 파괴하고 있었다. 거신이 이동하는 방향은 북쪽. 이대로 놔두면 판추리아는 물론이고 북쪽의 인간제국의 영역까지 휩쓸어버리리라. 김성철은 달타니어스가 있던 거신의 머리 쪽으로 올라탔다. 머리 위로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어둠에 쌓인 장방형의 공간이 나타났다. 거신 베르텔기아 3호의 조종실이다. 조종실에 들어선 김성철은 거인을 멈출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골렘에 대해 문외한인 그로서는 별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때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주머니 위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응? 여기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베르텔기아는 하늘 위로 떠올라 조종실 중앙으로 날아갔다. 중앙엔 책 한 권이 커다란 홈에 꽂혀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걸 본 베르텔기아가 말했다. “음. 이거 어째 나랑 비슷한 거 같지 않아?” ======================================= 46. 거신 (3) “그러고 보니 닮은 점이 있군.” 재질도 크기도 어딘가 닮았다. 가죽으로 정장된 표지도 베르텔기아와 거의 유사했다. “일단 저 책을 뽑는 게 어떨까? 저것이 거신을 움직이는 열쇠가 되는 거 같은데.” “좋아.” 김성철은 푸른빛에 싸인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김성철의 손이 책에 닿으려 할 때 무형의 결계가 나타나 접근을 막았고 그와 동시에 빛나는 문자가 김성철 앞에 떠올랐다. [ 권한 없는 자는 지식의 열쇠를 뽑을 수 없다. ] [ 권한 있는 자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 ] [ 칠영웅, 그리고 창조술사 에크하르트 ] 당연하게도 김성철은 목록에 없었다. 그는 늘 하던대로 힘으로 책을 잡아 뽑으려 했다. 조금 힘을 주자 무형의 결계가 박살났다. 김성철 눈앞에 또 다른 문자가 떠올랐다. [ 경고한다. 지식의 열쇠를 권한 없이 뽑는다면 거신은 폭주를 일으킬 것이다. ] 그 문구를 본 김성철은 즉시 손을 오므렸다. ‘이건 곤란하군.’ 다행히 아직 문자열은 끝나지 않았다. 김성철은 새로이 떠오른 문자를 천천히 읽어나갔다. [ 다만, 그대가 후대의 사람이라면, 그리고 반드시 이 거신을 멈춰야 할 이유가 있다면 아래의 질문에 대답해라. ] [ 그대는 연금술사인가? ]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어둠에 싸인 조종실 곳곳에 발광석으로 만든 등불이 숨겨진 틈새에서 튀어나와 조종실 전체를 환하게 밝혔고 조종실 곳곳에 자리 잡은 투박한 구조물이 저절로 움직이며 하나의 커다란 탁자를 이루었다. [ 증명해라. ] 그 문자가 눈에 떠오르는 순간, 천정에서 얼음으로 만든 상자가 탁자 위에 놓였다. 얼음은 물 대신 희뿌연 기체만을 남기고 사라졌고 얼음이 녹은 자리엔 갖가지 시약과 각양각색의 광물, 풀과 곤충 등이 담긴 유리병이 남아 있었다. [ 에크하르트 최후의 문제 3번 ] [ 여기 있는 연금재료로 만들 수 있는 연금아이템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만들어내서 앞쪽의 제단 위에 올려놓아라. 그러면 이 거신은 기동을 멈출 것이다. ] [ 첨언. 어떤 도구를 쓰건 무방하다. ] 에크하르트다운 주문이다. 김성철은 탁자 위의 연금소재를 응시했다. 눈에 익숙한 것도 많지만 처음 보는 시료, 광석, 표본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것들로 대체 뭘 만들라는 건가. 김성철은 큰 의문을 느꼈다. 탁자 위의 놓인 재료의 가짓수만 60종이 넘는다. 그것도 직관적으로 어떤 접점도 찾기 어려운 개성 강한 재료들이 말이다. ‘이건 거의 불가능한 주문이군.’ 일단 요행은 기대하기 어렵다. 게다가 각각의 병에 담긴 재료도 딱 1회분.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되지 않는 시험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거신은 움직이고 있다. 조종석 앞쪽엔 골렘의 눈을 통해 바깥을 볼 수 있는 수정구가 놓여 있었다. 거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강물을 거슬러 오르며 판추리아를 파괴하고 있다. ‘내 능력 밖이다.’ 안 되는 건 오래 붙잡지 않는 주의다. 김성철은 곧장 베르텔기아 쪽을 응시했다. “베르텔기아.” 베르텔기아는 이미 책상 위에 올라서서 재료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책장도 파닥거리지 않고 정물처럼 가만히 있는 걸로 보아 베르텔기아도 골똘히 생각에 잠긴 걸로 보였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믿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1분, 1분, 또 다른 1분. 시간은 느릿하게 흘러갔다. 멀리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조종실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앗.” 베르텔기아가 침묵 속에서 입을 열었다. 기대를 담은 김성철이 베르텔기아를 향했다. “깜빡 졸았다.” “…….” “농담이야. 농담. 그런 무서운 얼굴로 보지 말아 줘. 지금 진심으로 분석 중이라고!” 베르텔기아는 다시 장고에 들어갔다. 아무리 베르텔기아라고 해도 탁자 위에 놓인 재료들은 좀처럼 알아내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흠, 가만. 쓸모없는 것들이 몇몇 섞인 거 같은데.” 베르텔기아가 움직여 첫줄 세 번째에 놓인 시약을 옆으로 치웠다. “전부 다 이용해야 하는 거 아닌가?” 김성철이 입을 열었다.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는데 가만히 보니까 그게 아니야.” 베르텔기아는 다음 세 번째 건너 재료를 책장으로 물어 옆으로 운반했다. “보고 있지만 말고 도와줘 봐.” “…….” 김성철은 베르텔기아가 시키는 대로 나열된 재료 중 3번째에 속한 것들을 한 곳에 밀어 넣었다. 그렇게 한바탕 정리가 끝난 후 베르텔기아는 탁자 위에서 파닥거리며 재료들을 내려 보았다. “흠...” 아직 별 다른 진전은 없다. 그렇게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날 무렵이었다. “앗!” 김성철이 아까보다는 덜 기대한 눈빛으로 베르텔기아를 응시했다. “슬슬 보이는데?” 베르텔기아가 들 뜬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보인다는 거지?” 김성철이 묻자 베르텔기아의 몸이 갑자기 붉은 빛을 발했다. 범상치 않은 상서로운 빛. “봐. 봐. 색인에 없는 페이지의 봉인이 풀리려고 해!” 광휘 속에서 베르텔기아의 책장이 스르르 펼쳐지더니 곧 하나의 페이지가 김성철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늘 보던 레시피 중 하나였다. 그런데 평범한 레시피가 아니다. [ 마법사의 돌 ] 레벨 : 7 속성 : - 재료 : 천년조의 깃털, 황금수의 수액, 혜성 가루, 완벽에 가까운 황금, 지저충의 허물... ... 김성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7레벨 연금 아이템이라고?’ 6레벨 연금 아이템도 만든 적이 없는데 졸지에 7레벨 연금 아이템이라니. “대체 이건 뭐지?” 김성철이 레시피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7레벨 연금 아이템이야. 그것도 무속성의. 나도 놀랬어. 내 안에 이런 게 있다는 걸.” “색인되지 않은 페이지라는 건가?” “응. 모종의 이유로 봉인되어 있었나 봐. 인간으로 치면 그런 거 있잖아. 언뜻 생각날 거 같으면서도 아슬아슬하게 나지 않는 거.” “음...” 김성철은 턱 끝을 매만지며 방대한 재료들을 응시했다.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갈피도 잡히지 않았다. “일단, 쫄지 말고 함께 만들어 보자구.” 베르텔기아가 힘차게 말하며 탁자 위로 날아갔다. 그녀는 재료 몇 개를 스스로 책장으로 집어 김성철 앞에 대령했다. “레시피가 있으니까 걱정할 건 하나도 없잖아?” “그럴 수도 있겠군.” 김성철은 베르텔기아가 내민 재료를 건네받으며 늘 하던 대로 섬세하고도 신중한 솜씨로 다듬기 시작했다. 재료를 다듬던 중 김성철은 이미 이 재료들이 위대한 연금술사의 손을 한 번 거쳤다는 걸 발견했다. ‘이건, 이미 완벽하게 준비된 재료들이다.’ 겉보기엔 아무렇게나 방치된 것처럼 보였지만 각 재료는 재료 본연의 효능이 완벽하게 발휘될 수 있게끔 거장의 솜씨로 보존되어 있었다. 김성철은 재료 하나하나를 보면서 그 솜씨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에크하르트를 직접 본 적이 없지만 만약 그가 앞에 있다면 김성철은 기꺼이 위대한 연금술사에게 찬사를 건넸을 것이다. “베르텔기아. 재료 손질은 필요 없을 것 같다.” 김성철이 말했다. “응? 그래? 그럼 바로 한 번 만들어볼까?” 김성철은 주변을 둘러보다 탁자 옆에 연금가마를 둘 정도의 공간을 발견하고 에크하르트의 휴대용 연금가마를 꺼냈다. 놀랍게도 에크하르트의 휴대용 연금가마는 마치 그 공간에 끼워맞추기라도 한 듯 알맞게 들어갔다. 김성철은 그 완벽한 정합에 왠지 모를 쾌감을 느끼며 주어진 재료로 연금술을 시작했다. 이미 완벽하게 손질된 최상의 재료는 단순히 김성철이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 최상의 연금아이템으로 거듭났다. 그렇게 만들어낸 재료가 될 연금아이템의 품질은 무려 S+. 김성철이 단 한 번도 밟지 못한 경지였다. 그 과정에서 김성철은 에크하르트의 따뜻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이 과제는 레시피만 알면 거저먹는 거군.’ 가장 미숙한 자라도 연성 할 수 있게끔 준비된 재료. 실패를 최소화하기 위해 세삼하게 배치한 안정적인 배합. 김성철은 재료가 되는 연금아이템을 만들 때마다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김성철은 재료가 되는 모든 아이템을 연성했고 마지막 마법사의 돌의 연성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좋아좋아. 이 기세로 마지막까지 가보자구!” 김성철은 문득 옆에서 응원하는 베르텔기아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리에 번득였다. ‘어쩌면 이 과제는 이 녀석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 해결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눈으로 보고서는 갈피조차 잡을 수 없는 방대한 재료의 나열과 단 1번의 시도라는 압박 속에서는 제 아무리 경험 많은 연금술사라고 해도 과제를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혹 그렇다면.’ 김성철은 처음엔 모호하게 떠오른 착상이 서서히 형체를 갖춰가는 걸 느끼며 연금 아이템들을 조합, 마법사의 돌을 연성하기 시작했다. 연금 가마 안에 지금까지 만든 최상의 재료들이 차례차례로 들어가자 희미한 빛이 가마를 밝혔고 김성철은 연금주걱으로 그것들을 부드럽고 정성스럽게 휘저었다. 가마를 한 번 휘저을 때마다 제법 많은 마나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과연 7레벨 연금 아이템다운 마나 소비. 과거의 김성철이라면 상당한 시간을 두고 휴식과 연성을 병행해야겠지만 지금의 김성철은 마법사 기준으로도 마력 600에 이르는 대단히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쉬지 않고 주걱을 저으며 가마 안의 아이템이 완성되길 기다렸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김성철의 방대한 마력도 거의 바닥을 드러낼 즈음이었다. 희미한 빛이 머물러 있던 가마 안에 갑자기 눈부신 빛이 폭포처럼 흘러내리며 눈을 부시게 했다. 광휘 속에서 김성철은 전에 없는 두근거림을 느끼며 곧 나타날 문자를 기다렸다. 결과는 곧 나타났다. [ 연성 성공! ] 김성철의 입가에 제법 뚜렷한 미소가 떠올랐다. “우와! 해냈어! 해냈다고!” 베르텔기아가 요란스럽게 날며 주위를 돌아다니는 가운데 연금 가마 안에 하나의 돌이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며 하늘 위로 떠올랐다. 어린아이의 머리 정도의 크기. 표면엔 푸른색으로 빛나는 기이한 도형과 해독불가능한 문자로 뒤덮여 있었다. 김성철은 그 돌을 손으로 가져갔다. < 마법사의 돌 > 레벨 : 7 등급 : S 속성 : - 분류 : 유물 효과 : 다른 다섯 개의 돌을 모아라. 그러면 진리의 길이 그대 앞에 열릴 것이다. “…….” 김성철은 마법사의 돌을 제단으로 가지고 갔다. 마법사의 돌이 제단에 올라가자 갑자기 조종실의 발광석들이 일제히 빛을 잃었다 되찾았다. 미세하게 느껴지던 진동도 멈췄고 조종실 안엔 짙은 적막이 찾아왔다. 판추리아를 파괴하던 거신의 움직임이 멈춘 것이다. 침묵 속에서 김성철 앞에 문자가 떠올랐다. [ 훌륭하다. 그대는 마법사의 돌을 완성했다. ] [ 내 딸과 함께 왔다면 축복을, 그렇지 않다면 경탄과 더불어 저주를 내리겠다. ] 조종실 중앙에 꽂혀 있던 책에서 빛이 사라졌다. 베르텔기아가 그것을 먼저 발견하고 말했다. “저기 저 책. 결계가 사라진 거 같은데?” 김성철의 손이 뽑기도 전에 베르텔기아가 먼저 달려들어 책에게 박치기를 가했다. “에잇!” 놀랍게도 그 책은 평범한 책처럼 힘을 잃고 제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베르텔기아는 환호성을 질렀다. 김성철은 무심히 책이 자리 잡고 있던 홈을 보고 있었다. “베르텔기아.” “응?” “이 안에 들어가라.” “왜?” “뭔가 있을 것 같다. 네 부친이 남겨 놓은.” 김성철의 말은 대체로 듣지 않는 베르텔기아였지만 부친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녀는 순순히 파인 홈으로 날아가 책장을 오므리고 그 안에 자신을 밀어넣었다. 처음엔 별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베르텔기아의 전신에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앗.” “괜찮나?” 김성철이 다급히 물었다. “응. 괜찮아. 그냥 따뜻한 기분이 들어서. 그리고.. 잠깐만.” 베르텔기아가 갑자기 침묵했다. 김성철은 잠자코 베르텔기아를 지켜봤다. “나 알 거 같아. 이 골렘에 관해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골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을 거 같아!” ======================================= 46. 거신 (4) “그래?” “응!” 베르텔기아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후후! 슈퍼 베르텔기아님이 된 기분? 조금만 손보면 당신보다 강해질 거 같은데!” “…….” 그 과도한 자신감이 김성철의 심기를 불편케 했다. “그럼 오른팔을 올려봐라.” 그는 가끔 심술을 부린다. “잠깐만.” 바닥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김성철은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거신의 왼팔이 번쩍 올라가 있었다. 김성철이 아무 말 하지 않고 잠자코 지켜보자 베르텔기아는 이내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아차.” 거인의 왼팔이 내려가고 오른팔이 올라갔다. “팔을 움직여본 지 너무 오래 되서 오른쪽 왼쪽 구분이 안 된 것뿐이야!” 이유에 어찌됐든 베르텔기아가 거신을 조종할 수 있는 것은 사실로 드러났다. “…….” “자. 이제 무엇을 할까요? 세계의 적님?” 베르텔기아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물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주머니 안에 집어넣고 싶은 걸 눌러 참으며 말했다. “…그럼 이 녀석을 대밀림으로 향하게 해라. 고대의 유적이 있는 곳으로.” “나무엄마가 방해하지 않을까?” “아무리 나무엄마라고 해도 이 거신을 막지 못하겠지만 보험으로 이 녀석을 쓰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피리 하나를 꺼냈다. 리자드맨 사제에게 선물 받은 마술 피리다. 김성철이 시험 삼아 불자 피리에선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곡조가 흘러나왔다. “제법 쓸 만하군.” “그거 좋네. 그럼 바로 가볼까?” 베르텔기아는 거신에게 명을 내렸다. 거신은 거대한 몸체를 돌려 강을 따라 상류를 향해 걸어갔고 김성철은 스스로 연주하는 마술 피리를 쇠사슬 틈에 노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판추리아의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도시를 떠나는 거신을 지켜보았다. “설마 세계의 적이 저 괴물을 돌려세운 건가?” “믿기 어렵지만 그건 사실이야. 난 봤다고. 세계의 적이 거신의 머리 위에서 튀어나온 사내와 싸우는 걸.” “나도 봤어! 세계의 적이 거신 안에서 떠들던 거한을 죽이는 걸.”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판추리아의 사람들은 모두 알 수 있었다. 오늘 그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오늘 닥친 재난이 이쯤에서 그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세계의 적이라 불린 사내의 활약 덕택이라고. 가장 보수적이어야 할 판추리아의 총독 로르메이 추이조차 김성철의 활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그 자는 어째서...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하지만 모두가 김성철을 인정하는 건 아니었다. “보나마나 자기 이익을 위해 저지른 거겠지.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야.” 클라리스 아삼은 세계의 적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큰 소리로 떠들고 다녔다. “듣고 있어? 전부 그 인간 때문에 망한 거라고. 그 인간이 여기 나타나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말이야!” 김성철에게 받은 금화 때문에 쿠르트 아삼이 끌려가고 그것도 모자라 금화마저 난리 통에 깡그리 잃어버렸다. 그야말로 클라리스 일가는 깡통을 차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멀어지는 거신을 노려보며 길길이 날뛰었다. “저 인간이 모든 걸 망쳐 놓았다고!” “아서라. 클라리스. 그보다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 걱정하는 게 순서 아니겠느냐?” 쿠르트 아삼이 말려보지만 클라리스의 분노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저런 게 무슨 영웅이야!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인데! 진짜 영웅은 인간제국의 황제뿐이야!” 그 모습은 거신의 머리 위에 앉아 있는 김성철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포착됐다. ‘살아 있었군. 저 여자도 노인도.’ 비록 길길이 날뛰며 김성철에게 욕지거리를 쏟아 붙고 있지만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아직 쌩쌩한 걸로 보이니 말이다. 시대를 이끄는 건 소수의 영웅들이라고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결국 평범한 자들이다. 어리석지만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그들이 없으면 영웅도 없고 세상도 없다. 자칫 간과하기 쉽지만 김성철은 그 점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저 언니. 괜찮을까? 살 곳도 잃고 일할 곳도 잃었는데.” “저 노인과 여자는 어디에 던져놔도 살 사람들이다.” 김성철의 말을 실증이라도 하듯 신나게 김성철의 욕을 하던 클라리스는 어느새 조각배를 타고 강으로 가 물 위에 떠오른 물고기들을 다른 사람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줍고 있었다. ‘나중에 돌아오면 약간의 사례라도 해야겠군.’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종실 안으로 들어갔다. 제단의 홈 안에 머물러 있던 베르텔기아는 홈 밖으로 빠져나와 조종실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거기 없어도 되는 모양이지?” “응. 내가 없어도 움직이게끔 명령을 내려놨어.” “어떻게?” “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냥 잘.” “그건 편리하군.” “그보다 한 가지 보여줄게 있어.” 베르텔기아는 조종실 구석의 돌로 만든 탁자로 향했다. 탁자 위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베르텔기아가 책 모서리로 몇 번 탁자를 두드리자 탁자의 상부가 열리며 작은 상자가 나타났다. “한 번 열어 봐. 내가 열기에 적합한 구조가 아니네.” 김성철은 상자에 달린 자물쇠를 힘으로 잡아 뜯은 다음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엔 장문의 글이 적힌 종이가 놓여 있었다. 활자로 찍은 것 마냥 균일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필체였다. 김성철은 종이에 적힌 글귀를 읽어나갔다. [ 에크하르트의 기록 그 세 번째 ] [ 문득 생각이 들었다. 재앙을 막기 위해 우리에게 허용된 수단은 어디까지인지. 가련한 리자드맨들의 비명소리가 귀에서 도통 떠나지 않는다. 사자토스 형은 우리는 필요악이 되어야 한다고 날 설득했지만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동부 해안의 사람들에게 닥친 재앙에 관한 소식을 듣자 잠깐이나마 품은 의구심은 깨끗이 사라졌다. ] 종이의 문장 거기서 한 차례 끊어져 있었다. 그 아래엔 위의 문장과 다른 급하게 흘려 갈겨 쓴 글이 이어져 있었다. 김성철은 아래의 문장을 읽어나갔다. [ 위에 말 전부 취소! 칠영웅은 모두를 배신했다! 그 저주 받을 악행의 내막을 알고 싶다면... ] [ ... ] [ ... ] [ ... ] [ ... ] [ 유감! 다른 다섯 기의 베르텔기아를 찾으면 알 수 있다! ] [ 그리고 마법사의 돌은 내 딸에게 먹이도록. 먹는 게 아닌 거 같다고?! 과연 그럴까? 어디 한 번 도전해보시라! ] “…이건. 네 아버지의 글이군.” 무엇보다 마지막 부분에서 에크하르트다운 개성을 느낀 김성철이었다. “아빠의 필체와 동일해. 하지만 이런 걸 이 골렘 안에 숨겨두다니. 어떤 이유에서일까?” “뭔가 급박한 사정이 있는 게 틀림없군.” 현재 주어진 정보로 섣불리 재단할 수 없지만 에크하르트는 칠영웅과 상상 이상으로 깊은 협력 관계에 있는 걸로 보였다. 무엇보다 자신의 딸의 이름을 딴 거신은 연금술사로서 에크하르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어쩌면 칠영웅이 에크하르트를 이용한 건 아닐까 하는 의문마저 들 정도로 말이다. “일단은 마법사의 돌부터 먹자고.” 김성철은 제단에서 빛나고 있는 마법사의 돌을 들어 올렸다. “싫어.” 베르텔기아는 급히 도망갔다. 그러나 김성철의 추적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베르텔기아는 곧 김성철에게 붙잡혔다. “편식하면 못 쓴다.” “저런 걸 왜 먹어. 아니 어떻게 먹냐고! 난 일단 책인데!”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잇몸이 없으면 책장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구!” 베르텔기아가 볼멘소리를 하며 책장을 벌릴 때 김성철은 섬전과 같은 빠르기로 마법사의 돌을 베르텔기아 안에 들이밀었다. “으엑?!” 베르텔기아가 마법사의 돌을 삼켰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사의 돌이 베르텔기아의 몸에 닿기도 전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마법사의 돌은 원형을 잃고 대신 그 위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기호와 문자들이 생명을 가진 듯 허공을 떠돌다가 베르텔기아의 몸에 빨려들 듯 들어갔다. “…….”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대체 몇 개의 안전장치를 해놓은 거지?’ 황제의 옥새조차도 이토록 엄중하게 기밀유지 되진 않을 것이다. 한편 마법사의 돌을 흡수한 베르텔기아의 몸은 광휘로 휩싸였다. 그 눈부신 빛에 김성철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광휘 속에 있는 무언가가 김성철의 눈에 들어왔다. 순간 김성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여자아이?’ 빛 한 가운데에 태아처럼 웅크린 여자아이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치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대신 베르텔기아에 머물던 빛의 기운이 김성철을 향해 날아들어 그의 몸에 깃들었다. 김성철은 기시감을 느꼈다. 언젠가 창조술사 퀘스트를 완료했을 때 일어났던 상황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 당신은 마법사의 돌을 만들어 창조술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증명했다. ] [ 나머지 다섯 개의 돌을 만들어 창조술사의 길을 완료하라. 돌의 재료는 각기 다른 거신 안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 보상 : 마력 +20, 직관력 + 20 이제는 큰 의미가 없는 보상. 그럼에도 창조술사의 퀘스트를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해결했다는 것이 고무적인 결과였다. “우...” 베르텔기아가 피곤한 듯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붙잡고 그녀를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기분이 어때? 오랜만에 부친의 자취를 만난 기분은?”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 “하지만 마법사의 돌. 그거 맛있던 걸?”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의 입가에 잠깐이지만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베르텔기아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 사람. 확실히 처음 만날 땐 보단 부드러워졌어. 어째서인진 잘 모르겠지만!’ * 판추리아를 향한 인간제국의 구원 함대는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에야 도착했다. 대부분의 판추리아 사람들은 왜 이제 오냐고 푸념을 했지만 클라리스 같은 일부 주민들은 제국 함대의 등장에 크게 기뻐했다. “역시! 이 세상을 지탱하는 건 인간 제국뿐이라고!” 인간 제국의 함대를 이끄는 것은 아르큐부스라는 이름을 가진 최근에 황제에 의해 함대의 제독에 임명된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판추리아의 고위층들을 영접하며 이 땅에 닥친 비극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그런데 그의 귀에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이야기가 들려왔다. “판추리아를 구한 것은 세계의 적입니다. 그가 없었으면 판추리아는 물론이고 인간제국의 남쪽 변경까지 유례없는 재난을 당했을 것입니다.” 판추리아의 총독 로르메이 추이는 자신이 느낀 바를 기탄없이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아르큐부스의 얼굴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험악하게 변했다. “그러니까 총독님은 세계의 적이 구원자라고 말하고 계시는 거군요?” 그는 서슬 퍼런 질문을 던졌다. 아무리 로르메이 추이가 변경 지방의 영주라고 해도 애송이 제독이 함부로 대할 상대는 아니었다. 그는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범상치 않은 살기에 눌려 우물쭈물 말을 얼버무렸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들려오는 이야기가 그렇다는 거죠.” “아, 소문이 그렇게 났다는 말씀인가요?” 총독과의 면담을 끝낸 아르큐부스는 직접 판추리아 피난민들이 모인 강변을 돌며 그들의 이야기를 청취했다. 피난민들은 총독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르큐부스는 공선으로 올라가 휘하의 부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두 명의 영웅은 있을 수 없다.” 판추리아의 상공 위에 떠오른 함대 주위로 수많은 마법진들이 떠올랐다. 판추리아의 주민들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뭔지 알지 못했다. * 김성철이 거신을 유적으로 끌고 온 이유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것도 있지만 다른 목적이 있었다. “이제 만족하나?” 김성철은 코트 안에 넣어둔 카벙에게 말했다. 그 앞엔 산처럼 거대한 거신이 거대한 두 팔을 움직여 유적의 잔해를 치우고 있었다. 평범한 골렘으론 수천 년이 지나도 하지 못할 일을 거신은 간단하게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성철을 거부하던 영혼석이 결국 김성철을 받아들였다. 눈으로 보이는 변화는 없었지만 김성철은 이제 영혼석 카벙이 자신을 위해 기꺼이 봉사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자토스가 왕 카벙클이라 부르는 메르킷 카벙클은 접촉한 상대방과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김성철은 시험 삼아 두 개의 주문을 동시에 사용해보았다. 김성철 본인은 글레어 연사, 그리고 카벙은 메테오 영창. 김성철이 글레어를 연속해서 사용하는 가운데 카벙클은 착실하게 메테오를 영창했고 곧 시전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놓았다. 김성철이 단순히 뜻을 전하는 것만으로 카벙클은 김성철이 영창하지 않았던 운석을 밀림 저편에 떨어뜨렸다. ‘이건 쓸 만하겠군.’ 다중영창. 사자토스가 자랑하던 비전이 드디어 김성철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사자토스에게서 뺏은 여섯 개의 영혼석들은 김성철의 접근을 거절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 영혼석들에게서 그들의 오랜 주인을 죽인 자에게 힘을 절대 힘을 빌려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느꼈다. ‘그냥 버릴까. 아니 일단은 갖고 있자.’ 구하기 어려운 메르킷 카벙클 영혼석이다. 인간이 마음이 어느 순간 변하듯 사자토스의 영혼석들도 언젠간 김성철을 향해 마음을 돌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다중영창을 손에 넣고 덤으로 두 명의 칠영웅마저 해치운 김성철에게 이제 이곳에 남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김성철은 대밀림을 떠나 판추리아로 향했다. 그런데 판추리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죽음과 절망뿐이었다. 수많은 시체들이 강변을 따라 너부러져 있었다. 시체 썩는 악취가 등천을 했고 셀 수도 없는 파리 떼가 들끓고 있었다. 김성철은 시체더미 한 가운데 팻말과 함께 목이 걸린 시체들을 보았다. ‘로르메이 추이.’ 판추리아의 총독은 고목에 목이 매달린 채 죽어 있었다. 그의 목에 걸린 푯말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 세계의 적이 다녀가다. ] 김성철의 눈동자에 전례 없는 분노에 타올랐다. 그는 끈질기게 탐사해 몇 안 되는 생존자를 찾아냈고 그들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길지 않은 이야기 속에서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얼굴이 처음 봤을 때, 사막처럼 황량했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야기가 끝난 후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돌아보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베르텔기아.” “으.. 응.” “이 세상은 구원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 그건.” 그때였다. 멀리 떨어진 무너진 저택 쪽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며 사람 한 명이 잔해 속에서 벌떡 일어섰다. “으! 재수 한 번 더럽게 없네! 진짜!” 먼 거리였지만 베르텔기아는 그 인물이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노래 잘하는 언니 아니야?’ 클라리스는 잔해 안에 웅크리고 있던 쿠르트 아삼을 끌어냈다. “빨리 움직이라고. 할아범! 언제까지 잠자고 있을 거야! 언제 그 개자식들이 올지 모른다고!” 재와 먼지로 범벅이 된 그녀는 악착같이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강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향해 꿋꿋하게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을 돌아보며 말했다. “세상엔 나쁜 사람만 있는 건 아니잖아?” “그럴 지도 모르지.” 어딘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 후 김성철은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 목적지는 은자의 탑. 그의 등 뒤로 펼쳐진 불타버린 대지 위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 47. 은자의 탑 (1) 수천 년에 이르는 긴 잠을 깨고 일어난 여섯 기의 거신들은 세상을 극도의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수많은 도시가 속수무책으로 파괴됐고 왕성은 무너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거신에 의해 직접 죽임당한 이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거신은 인간의 삶의 터전 그 자체를 파괴했다. 살 곳을 잃은 백성들이 황야를 헤매고 다녔고 궁성을 잃은 왕과 제후들은 무기력에 빠져 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데도 대륙의 기득권은 어떤 대책도 내놓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영지에 거신이 침범하는 걸 막는데 급급했다. 거신에 의한 대량파괴는 여전히 현재진행중이다. 그리고 어두운 모처, 거신을 깨운 자들이 모여 있었다. “달타니어스와 사자토스가 부수는 자에게 당했다.” 칠영웅. 한 때의 구세주이자 이제는 재앙 그 자체가 된 존재들. 그들은 동료의 죽음에 대해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였다. “달타니어스는 그렇다 쳐도 사자토스는 아쉽군.” “우리 칠영웅 중 두 명이 동시에 상대했는데도 이길 수 없었다고? 믿기지 않는군.” “키키키... 사자토스. 그 녀석은 우리 칠영웅 중에 제일 약한 녀석이지.” “제일 약한 건 가시옹 너잖아?” “크윽...!” “사자토스는 제대로 싸우지 못했어요. 그는 겁쟁이처럼 숨어 있다가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죽었죠.” 잡다한 음성이 이어졌다가 한 순간에 멈췄다. 한 사내가 칠영웅들이 머무는 암실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두 자루의 길이가 다른 검을 등에 짊어 맨 그 사내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어둠 속의 원탁의 상석에 앉았다. 칠영웅의 우두머리 데스포트. 마법과 검 모두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불세출의 마법전사는 턱을 괴고 그의 동료들을 응시했다. “사자토스와 달타니어스의 실패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들이 사라진 만큼 우리들의 몫이 커진 것이니까.” “…….” 개성 강한 칠영웅들이지만 데스포트 앞에서 감히 입을 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에크하르트의 잡동사니가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슬슬 우리들도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가 됐다는 이야기겠지.” “그 자는 어떻게 하지?”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담기지 않은 기계음에 가까운 음성. 칠영웅들이 잡담을 나눌 때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사내였다. 그 자의 정체는 백영. 기록 없는 암살자다. “그는 무시한다. 어차피 그쪽에서 우리를 먼저 찾아오게 될 터이니.” “하지만 그 자가 당신을 먼저 죽이면 어떻게 하지? 그때는 모든 게 끝나는 거 아닌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백영?” 데스포트의 눈이 어둠 속에서 번득이는 살기를 내뿜었다. “그 자는 내가 처치하겠다.” 백영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답했다. “…할 수 있겠나?” “나는 암살자다.” 짧은 말 속에 무한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데스포트가 턱에서 손을 떼며 고쳐 앉았다. “정 원한다면 말리진 않겠다.” 데스포트의 허가가 떨어지는 그 순간 백영은 원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칠영웅들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백영 녀석. 신이 난 모양이군.” “하지만 녀석이 당하면 어떻게 하지?” “어차피 집단전엔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잖아. 운 좋게 부수는 자를 처치해준다면 그보다 좋을 리가 없지.” 잡담이 이어지는 가운데 한 사내가 백영이 머물던 자리에 손을 올리고는 히죽 웃었다. “녀석. 여전하군.” 백영이 사라진 자리엔 단 한 점의 온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 수많은 수레를 보아왔지만 그리폰이 끄는 달구지는 처음이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와 함께 푹신한 짚이 깔린 달구지에 올라타 모처럼 유유자적한 여정을 즐겼다. 달구지를 끄는 장년의 수도승은 김성철을 별 경계심 없이 자신의 수레에 타는 걸 허락해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함정이었다. “오랜만이 승객을 태우니 옛날 생각이 나는군. 나와 이 친구는 수십 년 간 전장을 떠돌아다니며 엄청난 전투를 펼쳤었지. 이 친구의 날개가 다치지만 않았더라도 우리는 아직까지 현역이었을 거야. 제길, 남작이나 나나 몸만 멀쩡했어도 마계 최전선에서 우리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을 텐데 말이야.” 그 수도승은 지나치게 말이 많았다. 그것도 팔 할이 자기자랑과 관계된 것이었다. 전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30분 동안 이어지자 김성철은 피로감을 느꼈다. “…수레를 세워주시오.” “어허 젊은 사람이 참을성이 없군그래.” 수도승도 자기가 말이 많은 걸 잘 아는지 그 이후부터는 조금 자중했다. 달구지를 끄는 그리폰은 남작이라고 불렸는데 비록 수레를 끄는 몸이지만 이름답게 주인보다 근엄한 기품과 점잖은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머리도 길들인 그리폰답게 대단히 영특해 수도승이 굳이 조종하지 않아도 알아서 복잡한 산길을 척척 이동했다. 베르텔기아는 남작에게 흥미를 느꼈는지 달구지가 쉬는 동안 김성철의 주머니에서 빠져나와 남작에게 다가갔다. “안녕? 귀염둥이?” 베르텔기아가 친근하게 말을 걸자 남작은 눈동자를 돌려 힐끗 쳐다볼 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김성철도 남작에게 다가왔다. 그는 남작을 한 차례 살피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날개를 심하게 다쳤군. 날개 뼈가 엉망진창으로 부러진 상태에서 잘못된 치료로 인해 날개가 뒤틀렸어.”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리폰의 날개를 쓰다듬으며 퇴역한 그리폰을 위로했다. “그리폰에 대해 잘 아는 모양이지?”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무심한 눈동자 위로 과거의 정경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지금에야 맨발로 돌아다니는 신세지만 과거엔 항상 뭔가를 타고 다녔지. 공선, 말, 절벽 랩터, 그리폰 등등. 그중 그리폰은 가장 많이 타고 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혹시 비룡도 탄 적 있어?” “비룡은 아무나 탈 수 없지. 알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각인을 시키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 녀석이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숲속에서 볼일을 보고 온 수도승이 바지춤을 끌어올리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식사들은 하셨나?” 그는 미묘하게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남작이 커다란 발톱으로 땅을 가볍게 긁자 수도승은 이쪽을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김성철은 저 수도승의 눈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눈치 챘다. 수도승은 달구지 안에 있는 자루에서 검고 딱딱한 빵을 꺼내 김성철에게 나눠주었다. 그것도 방금 볼 일을 보고 온 손으로 말이다. “…….” 김성철은 빵을 받아들고 한참이나 그걸 응시했다. 빵도 먹는 것이라기보다는 벽돌에 가까웠다. “왜 마음에 안 드나?” “이거 말고 다른 건 없소?” “젊은 사람이 아무거나 먹어야지. 반찬 투정하면 쓰나. 바로 먹을 수 있는 건 이거뿐이야. 저기 다른 자루에 식재가 있긴 하지만 난 요리하는 걸 귀찮아하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요리라면 조금 자신이 있소.” 김성철의 코트 안쪽에 숨겨져 있던 브로치가 번득였다. 그는 지체 없이 일어나 지푸라기 아래 깔린 자루 속에서 식재를 확인했다. 감자, 양파, 고약한 냄새가 나는 버터, 말린 고기 등이 있었다. 이것만 해도 간단한 요리를 만들 수 있겠지만 김성철의 성에 차지 않는다. 김성철은 주변을 돌아보고는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떠났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곧 그는 토끼 한 마리를 잡아왔다. 김성철은 익숙한 솜씨로 토끼의 몸을 비틀어 내장을 빼내고 조리를 시작했다. 그가 만든 요리는 있는 재료와 토끼 고기를 이용한 토끼 스튜였다. 처음엔 시큰둥하던 수도승도 향과 냄새를 맛보더니 눈을 크게 뜨고 김성철을 쳐다봤다. “아니 이 맛은! 고향에서 먹던 맛인데...!!” “혹시 고향에 고급 요리인이라도?” “요리를 아주 잘하는 요리사가 한 명 있소. 솜씨가 좋아 멀리서도 먹으러 왔었지.” “그러니까 그 사람이 고급 요리인이라는 거요?” “거기까진 알 수 없는데. 그런데 그 고급 요리인이라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해서 자꾸 묻는지?” “…개인적인 관심이오. 그런데 고향이 어딥니까?” 식사가 끝난 후 다시 여정이 시작됐다. 김성철은 흘러가는 풍경을 보며 은자의 탑이 멀지 않았음을 느꼈다. ‘오랜만이군. 이곳에 오는 것도.’ 멀리 울창한 침엽수림 너머로 거울처럼 맑은 호수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김성철이 기억하기로 은자의 탑은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인 호숫가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목적지가 그만큼 가까워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나저나 은자의 탑엔 무슨 용건으로 가시오?” 수도승이 불쑥 입을 열었다. “개인적인 용무요. 게다가 그쪽에 아는 사람이 있기도 해서.” 김성철은 사람이라는 말을 할 때 잠시 머뭇거렸다. 그가 만나려는 이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한 존재였다. 몸에 흐르는 피 중 절반은 용의 피니 말이다. “최근 은자의 탑에 소환자 출신이 부쩍 많아졌소. 마법사, 전사, 노예를 가리지 않고.” “호오?” “듣자하니 성자님이 소환자들의 지식을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는 모양이오. 소환궁전에서 장인 계층의 소환자를 미리 노예로 빼내온다는 이야기도 있더군. 소환자들의 지식을 적극 활용하기 위해서 말이오.” “그건 별로 소용없을 텐데.” 김성철의 말대로 이계에서 현대의 기술과 지식은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세상을 관장하는 다섯 신 중 하나인 중립신의 제약이 절대불변의 법칙처럼 자라잡고 있기 때문이다. 재료와 설비를 갖추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혹 소환자들이 상기한 것들을 갖추고 그들의 지식을 이용해 복잡한 기계장치를 만들어낸다고 해도 질서신의 제약이 그 기계장치의 구동을 막는다. 그렘린이라 불리는 기괴한 마물은 질서신이 허용하지 않는 기술이 구현되려고 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그것들을 파괴한다. “뭐 결과야 어찌됐든 은자의 탑에 소환자들이 많은 건 사실이오. 그리고 풍문으론 탑 안엔 질서신의 제약을 간신히 비껴난 재밌는 것들이 있다고 하더군.” “나도 그거 보고 싶어!” 베르텔기아가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느닷없는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수도승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김성철에게 물었다. “방금 그거 무슨 소리요?” “본인은 가끔 성대모사를 하곤 합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손으로 꾹 누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기분 나쁜 사람이구만. 고급 요리인 어쩌구저쩌구 할 때부터 기미가 보였지만!” 긴 침묵이 이어진 후 달구지는 천막들이 늘어선 길가에 들어섰다. 천막 안엔 초췌하고 추레한 관상의 사람들이 적대적인 눈빛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뭐요? 저 사람들은.” 김성철이 입을 열었다. “피난민들이오. 거신에 의해 고향을 잃은 자들이 죄다 이곳으로 몰려왔지. 알다시피 은자의 탑은 질서신의 관할에 속한 곳이라서 부정한 존재는 감히 침범할 수가 없으므로 말이오.” 천막의 행렬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불결한 악취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곳곳에서 언성을 높이거나 주먹다짐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김성철은 사람들의 어두운 얼굴 속에서 재앙의 그늘을 볼 수 있었다. 천막의 행렬이 끝나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대록 각지에서 몰려든 공선들이었다. 악마왕이 죽은 이후로 상시 은자의 탑에서 머물며 재앙의 서에 나타난 변화는 예의주시하는 이들이다. 다행히 그들은 자신들의 진지에 머물 뿐 적극적으로 주변을 경계하거나 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다. 그들 또한 이곳의 손님이기 때문이다. 김성철은 각 공선에 나부끼는 깃발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고대왕국, 상인연합, 드워프 왕국, 대륙북부의 군벌, 동부의 부국 등 다양한 세력의 공선이 있었다. 물론 인간제국 소속의 공선도 있었다. 그런데 인간제국의 공선 옆에 낯익은 형태의 공선이 있었다. 순백색의 미려한 동체를 지닌 공선 한 척이 인간제국의 공선 옆에서 전함이라기보다는 예술품에 가까운 자태를 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성철의 미간에 주름이 패였다. ‘저건 아퀴로아의 기함 아닌가? 분명 저 배는 악마왕의 궁전 앞에서 파괴되었을 것인데.’ 있을 수 없는, 아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김성철은 의문을 가지고 수도승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은자의 탑에 아퀴로아가 왔다는 소문이 있습니까?” 김성철의 물음에 수도승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셨소? 그분은 지금 은자의 탑을 방문 중이라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몸소 이곳을 지켜주고 계시지. 명성 높은 대륙이걸의 방문에 마을은 축제분위기요.” 노인의 천진난만한 이야기 속에서 김성철은 얼음과 불의 대지인 악마궁 앞의 섬뜩한 정경을 눈앞에 떠올랐다. 입에서 불을 뿜는 악마 형상의 거대한 화산 앞에서 김성철은 아퀴로아를 직접 처단했다. 그때 아퀴로아가 김성철에게 남긴 한 마디가 생생한 형태로 김성철의 의식 속에서 재현됐다. “아퀴로아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날 죽여도 날 대신할 아퀴로아가 부유군도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당시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소리로 생각했었다. 관심을 끌기 위해 그리하여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 김성철 앞에 새로운 아퀴로아가 나타났다. ‘뭔가 냄새가 나는군. 익숙한 썩은 악취가.’ 재앙의 서를 열람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하지만 순백의 공선을 본 순간 김성철에겐 또 하나의 목적이 추가됐다. ======================================= 47. 은자의 탑 (2) 일단 재앙의 서를 열람하고 그 다음 프로크루스테스에 승선한다. 김성철의 큰 그림이다. 세부적인 부분에 관해서는 판세가 돌아가는 걸 보고 결정해야겠지만 어떤 경우에든 일 순위가 재앙의 서의 열람이라는 건 바뀔 수 없다. 아퀴로아를 만나게 되면 한바탕 난리가 일어나는 건 피할 수 없고 그로 인해 은자의 탑이 일단 문을 굳게 닫고 잠가버리면 김성철로서도 달리 들어갈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은자의 탑은 소환광장처럼 직접적인 신의 가호를 받는 곳이기에. “일단은 저 탑에 들어갈 궁리부터 해야겠군.” 김성철은 잔물결조차 일어나지 않는 잔잔한 호수의 표면 위에 한 폭의 그림처럼 떠오르는 회백색의 탑을 노려보며 앞으로 걸어갔다. 곧 마을의 입구로 통하는 목제 현수교와 그 옆에 자리 잡은 마구간이 나타났다. 마구간 옆엔 늠름한 남작이 수도승의 달구지 옆에서 날개를 펴고 쉬고 있었다. “안녕. 귀염둥이.” 베르텔기아가 인사를 했지만 남작은 본체만체도 하지 않았다. 김성철은 다리의 입구에 걸린 푯말을 눈으로 읽었다. [ 정과 인심의 고장, 토포로 ] 그 푯말을 읽은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안에서 몸을 흔들며 말했다. “여긴 좋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을 거 같은데?” “…….” 김성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스스로 착하다는 놈 치고 착한 놈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성철은 경험으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다리를 건너자 녹슨 못과 창칼로 보강한 목책이 앞을 떡하니 가로 막았다. “여긴 무슨 일로 왔지?” 민병대로 보이는 건장한 청년들이 목책 뒤에서 나타났다. ‘나 때문인가?’ 김성철의 의구심은 곧 목책 여기저기 붙여놓은 경고문에 의해 해소됐다. [ 외부인 출입금지 - 특히 피난민! ] [ 피난민은 너희들 땅으로 꺼져라. ] [ 도둑의 최후 -> ] 마지막 푯말이 가리키는 화살표 옆엔 과연 매를 맞아 죽은 한 사내의 시체가 몰려드는 파리와 꾸물거리는 구더기를 품은 채 썩어가고 있었다. “피난민이냐? 응?” 철모를 쓴 사내가 이를 드러내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그의 눈에 비친 김성철의 행색은 피난민으로 오해할 만큼 충분히 초라했기 때문이다. 김성철은 이들과 싸울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피난민은 아닌데.” 어떻게 이 상황을 무마할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목책 뒤에서 또 한 명의 사람이 튀어나왔다. 키는 작지만 다부진 체격에 짙은 눈썹을 지닌 사내였다. “뭣들 하고 있어! 소환자 상대로!”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완장을 찬 게 다른 청년보다 높은 직급을 지닌 사람으로 보였다. 그가 나서자 청년들은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네? 소환자라고요?” “복장을 보면 모르겠어? 저런 떨어진 얼룩바지는 소환자들이나 입고 다니는 거란 말이야.” 그 사내는 한바탕 청년들을 꾸짖고는 김성철 앞으로 걸어왔다. “음....” 그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김성철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한참을 뜯어보더니 대뜸 입을 열었다. “소환자요?”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자의 탑에 용무가 있는 거요?” 김성철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 사내는 청년들을 물러서게 한 후 김성철을 마을 안으로 들여놓았다. “자세한 공고는 마을광장에 붙여 놓았으니 확인해보시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목책 안으로 들어갔다. 등뒤로 아까 그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행여나 쓸데없는 짓을 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어수선한 시국이니.” “쓸데없는 짓이란?” 김성철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뭐 여러 가지 있겠지만 남의 걸 탐내지 않는 게 좋겠지. 사과 하나, 동전 한 닢에 목숨이 오갈 수 있으니.” 그 사내는 목책 아래서 썩어가는 시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마을 주민과 피난민 사이의 갈등이 대충 어떤 것인지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하긴 저렇게 많은 피난민들이 오면 어떤 형태로든 문제가 생기는 법이지. 제 아무리 인심 좋고 정 많은 고장이라고 할지라도.’ 김성철은 사내의 주의사항을 유념하며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마을의 분위기는 적대적이었다. 마주치는 이마다 김성철에게 여과 없는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에는 김성철의 초라한 행색도 한몫했다. 낡고 해진 코트에 다 떨어진 청바지, 닳도록 닳은 군화를 걸친 그의 차림새는 노숙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베르텔기아도 그 문제를 눈치채고 김성철에게 충고했다. “이 기회에 옷 좀 갈아입는 건 어때? 세련되고 멋진 옷들 얼마든지 있잖아. 전신 판금 갑옷이라던가. 전신 판금 갑옷이라던가. 전신 판금 갑옷 같은 거 말이지!” “그런 건 안 입는다.” “취향은 이해가지만 가끔은 그런 거 걸쳐주면 적어도 여기 사람들 호감을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쉿.” 듣기 싫은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조용히 시키기 위해 걸음을 빨리 했다. 마을을 지나자 은자의 탑으로 향하는 길이 보였다. 은자의 탑은 호수 중앙에 위치한 작은 섬에 우뚝 서 있었는데 탑으로 향하는 길은 육안으론 보이지 않았다. 다리도 없고 흔한 선착장도 배도 없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길이 있다. 거울처럼 많고 잔물결 하나 없는 호수의 표면 바로 아래에 징검다리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탑의 사람들은 이 다리를 기적의 다리 혹은 소금쟁이 다리라고 부르곤 했었다. 김성철은 군화 바닥만 살짝 물에 닿을 정도의 징검다리를 걸어 탑이 위치한 작은 섬으로 향했다. 탑 주변엔 잿빛 로브를 걸친 은자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진실의 눈은 탑 주변을 빽빽히 뒤덮은 삼엄한 방어 결계들을 속속들이 포착해냈다. ‘역시 은자의 탑. 만만치 않군.’ 김성철이 입구로 가자 은자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는가?” 목소리는 공손했지만 두건 너머 흐릿하게 보이는 눈동자는 짙은 경계심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지금이 어수선한 시국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긁어 부스럼 만들 건 없다. 김성철은 준비한 말을 꺼냈다. “은자 카네스를 개인적으로 만나러 왔소.” “카네스님 말인가?” 은자들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분은 지금 성은자 포르피리우스님의 명을 받고 출타 중이시다.” “음.” 김성철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직도 안 돌아왔나. 그 여자. 마계최전선에서 만난지도 꽤 지난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그 여자. 놀기 좋아하는 관상이었지. 드래곤 답게 호기심도 많고.’ 카네스가 없는 것은 크나큰 낭패다. 김성철은 계획을 수정할 필요성을 느끼며 질문을 던졌다. “그 분은 언제 돌아오시오?” “그건 우리도 알 지 못한다. 아마도 충분히 만족할 때까지 유랑한 후 돌아오겠지.” “…음. 탑에 볼 일이 있었는데.” “미안하지만 지금은 비상시국이라 외부인을 탑에 함부로 들일 수 없다. 하지만 그대는 보아하니 소환자로 보이는데.” 은자가 김성철을 눈여겨보며 말했다. 김성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말을 이었다. “소환자라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뭐, 머리 좋은 소환자 한정이겠지만 탑에 도움을 줄 소환자를 모집하고 있거든.” “그게 어떤 겁니까?” “마을 게시판에 가면 공고가 붙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쪽에 관련해 아는 바가 없으니 공고를 읽는 쪽이 이해하는 게 빠를 것이다.” 의외의 정보를 얻었다. 김성철은 은자들에게 예를 표한 후 자리를 떠났다. 자리를 떠나려고 하자 은자 하나가 김성철을 불렀다. “혹 마을에 머물 예정이라면 그분이 돌아올 때 이쪽에서 통지해주지. 누구라고 알려드릴까?” 의도는 좋지만 김성철에겐 거북한 질문. 딱히 대답할 말이 없던 김성철은 습관적으로 대답했다. “파...” 김성철이 그 말을 하는 순간 베르텔기아가 격렬히 진동했다. 어째서인지 극구 꺼리는 것 같았다. 덕분에 김성철은 괜찮은 변명거리를 떠올릴 수 있었다. “라면을 끓여준 사람이라고 하면 알 거요.” “라면....?” 김성철은 어리둥절해 하는 은자들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인 후 자리를 떠났다. * 토포로 마을은 작지만 잘 꾸며진 풍족한 곳이었다. 호수는 물과 물고기를 주고 서늘한 기후는 과일을 키우기 적당했다. 무엇보다 은자의 탑을 옆에 끼고 있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했다. 김성철은 마을을 따라 졸졸 흐르는 시내 주변으로 방대한 포도밭 쪽을 응시했다. 마을 쪽에 위치한 포도밭은 무사했지만 건너편의 포도밭은 멧돼지 떼가 쓸고 간 양 황폐해져 있었다. 김성철은 다시 징검다리를 건너 마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몇 채의 가옥을 지나가니 곧 마을 광장으로 보이는 곳이 나타났다. 로브를 입고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이름 모를 은자의 청동상이 광장 중앙에 위압적으로 서 있는 가운데 갖가지 점포들이 장방형으로 둘러싼 모양새였다. 부촌답게 광장 중심엔 다양한 색채의 포석을 깔아 보기 좋은 문양을 이루고 있었고 그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게시판은 마을 광장인 시계탑 아래에 우뚝 서 있었다. 늘 그렇듯 게시판에서 가장 눈에 잘 띠는 부분엔 세계의 적을 그린 수배전단이 떡하니 붙어 있었다. 그걸 본 베르텔기아가 조용히 말했다. “인기 많아서 좋겠네.”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수배전단을 응시했다. 제법 옛날에 만든 모양인지 현재의 김성철과는 다른 근육질의 우락부락한 몸매에 호화로운 제복을 입은 사내가 묘사되어 있었는데 전단 구석엔 이 자는 전 제국대원수이므로 생포하더라도 예우를 갖출 것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8년 전쯤에 붙인 전단인가.’ 김성철이 세계의 적으로 불리기 시작한 시기에 만들어진 걸로 보였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며 김성철은 아래로 눈을 돌렸다. 게시판 아래엔 잡다한 공고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는데 곧 김성철은 그중에서 자신이 찾는 공고를 발견했다. [ 주목! 소환자 모집! ] [ 1. 개요 - 이계의 뛰어난 기술과 사상이 뛰어난 것으로 판명됨에 따라 이를 적극 연구 및 활용하기 위해 은자의 탑에서는 소환자 중 자신의 세상에서 높은 학식을 지닌 자를 초빙하여 조언을 얻고자 함 ] [ 2. 자격 - 이계의 석사, 박사 혹은 그에 준하는 학력을 지닌 장인 출신 소환자(주의 : 문과라고 불리는 계열의 학문을 배운 자들은 해당사항 없음) ] [ 3. 보수 - 기여도에 따라 최소 은화 10닢부터 금화 1닢 ] [ 비고 - 선발시험이 있으니 무자격자는 지원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 “음....” 공고를 본 김성철은 난감함을 느꼈다. 저쪽 세계에 있었을 때 기술자도, 석박사도 아니었고 심지어 문과였다. 그리고 이계에 온지 반올림하면 30년. 저쪽 세상의 지식은 이미 싹 사라진 지 오래다. “왜 그래?” 김성철이 우두커니 석상처럼 서 있자 베르텔기아가 퉁명스레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김성철은 선발시험이라는 문구를 보며 다시 한 번 작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일단 들어가자. 일단 들어가서 재앙의 서를 열람한 다음, 아퀴로아를 때려잡자.’ 속전속결. 김성철은 방침을 정하고 다시 은자의 탑의 입구로 향했다. 아까 입구를 막아섰던 은자들이 다시 앞을 막아섰다. “공고를 보고 온 건가?”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자들은 자기들끼리 뭐라고 수군거렸다. 김성철은 그저 탑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일어났다. “공고를 제대로 보지 않은 모양이군. 오늘은 선발시험이 있는 날이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요?” “시험 날짜 공고는 다른 게시물에 따로 공지하고 있네.” “…….” 그 말이 사실이라면 결정적인 실책이다. 그런데 실책이라고 볼 수 없는 게 김성철은 그런 게시물을 보지 못했다. 그는 시험 공고를 보면서 다른 모든 공고도 신중하게 확인했다. 시험 날짜를 공지한 게시물이 있었다면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다. 게다가 김성철에겐 베르텔기아도 있지 않은가? 김성철은 뒤돌아서며 베르텔기아에 물었다. 베르텔기아는 몸을 흔들었다. 보지 못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김성철은 은자들을 노려보며 자신의 본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시험 날짜 공고는 보지 못한 거 같은데. 게시판에 그런 건 없었소.” 그는 정중한 어조로 항의했다. 은자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한 은자가 실소를 터뜨리며 양해를 구했다. “또 어떤 놈이 시험 공고를 찢어버린 모양이군.” “…….” “요즘 경쟁이 치열하다오. 은자의 탑에 들어갈려는 소환자들이 워낙 많아서. 아시다시피 바깥엔 거신들이 날뛰고 칠영웅들이 설치고 있으니 전부 다 안전을 찾아 이곳으로 온 거지.” “소환광장이나 차원문, 은자의 탑만큼 안전한 곳도 없으니까.” 은자들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은 뒤 김성철에게 말했다. “일단 마을로 기다리고 계시오. 사람들을 보내 시험 날짜 공고문을 다시 부착하리다.” 돌아가는 분위기로 보아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았다.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시간을 두고 착실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만반의 준비를 해서 완벽하게 끝내는 게 옳다. 김성철은 여기서는 일단 한 발 물러서리라 마음먹고 자리를 떠났다. ======================================= 48. 재앙의 목소리 (1) 일주일 동안 김성철은 은자의 탑을 둘러 싼 제반환경에 관한 정보를 착실히 수집했다. 그중 단연 그의 흥미를 돋우는 것은 아퀴로아의 기함 프로크루스테스와 관련한 섬뜩한 목격담에 관한 것이었다. 주로 다른 공선의 승무원들의 입에 의해 퍼뜨려진 그 소문에 따르면 프로크루스테스의 갑판 위엔 이따금 인간과 비슷하지만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회백질의 괴인이 돌아다닌다고 한다. 그들은 기묘한 생김새만큼이나 오감도 남달라 다른 공선의 승무원에게 발각되는 즉시 이를 알아차리고 유령처럼 자취를 감추는데 그때마다 목격자들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오싹한 속삭임을 듣는다고 한다. 그 괴인의 정체를 두고 갖은 추측과 망상이 난무했는데 어느 하나 진실에 근접한 이는 없었다. 적어도 괴인의 정체를 아는 김성철의 귀엔 그렇게 들렸다. 한 번은 대담한 정찰을 시도했었다. 공선의 정박지에 털레털레 걸어가 프로크루스테스와 지상을 잇는 기구 주변까지 걸어가 각 기구와 공선 사의 거리를 눈으로 가늠해 거사 당일 배에 오를 경로를 짜기도 했고 하루 종일 관목 숲에 숨어 동정을 주시하기도 했다. 한 가지 특별한 점은 아퀴로아의 공선엔 다수의 늑대인간들이 타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략 4인에서 5인으로 구성된 한 조가 하루 단위로 은자의 탑 주변을 돌며 무언가를 열심히 찾아다녔다. 당연히 호기심이 인 김성철은 끈질긴 추적 끝에 늑대인간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어때? 드래곤은 찾았나?” “아니. 전혀 찾지 못했어 그 개 같은 감독관 새끼! 탑에 없는 게 뻔한데 찾길 뭘 찾아.” “그 인간도 위에서 독촉 당하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어여 식사나 하자고.” 늑대인간 옆엔 아직 핏기가 채 가시지 않은 젊은 여성의 시체가 있었다. 초라한 복장으로 보아 피난민으로 보였는데 운 없게도 홀로 숲을 떠돌다가 늑대인간의 먹이감으로 전락한 것 같았다. “…….” 지금 상황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들의 입방정으로 인해 원하던 정보도 얻었다. ‘드래곤이라. 여기서 드래곤이라 불릴 존재는 하나밖에 없지.’ 반인반용 카네스. 최강의 은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퀴로아는 카네스를 찾고 있다. 좋은 의도로 찾는 것은 아니니라. 김성철은 말없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이외엔 딱히 특기할 점은 없었다. 토포로 마을과 피난민 사이의 갈등의 골이 생각보다 깊긴 했지만 당장 충돌로 이어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피난민의 고향을 부순 거신이 다른 지역을 향해 간다는 소문도 있고 탑의 은자들이 억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은 기간 동안 김성철은 모처럼 아름다운 마을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공부 안 해?” 보다 못한 베르텔기아가 한마디 했지만 김성철로서는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공부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어차피 탑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뒷일은 일사천리로 해결될 것이다. 자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지닌 김성철은 무사태평 그 자체였다. 그렇게 시험 날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시험 날을 전후하며 마을엔 대륙 각지에서 온 소환자들로 북적거렸다. 김성철은 오랜만에 그리스, 영국, 인도, 일본 따위의 잊고 있던 나라들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일본 출신의 한 사내가 김성철에게 친한 척을 했다. 검은 머리를 보고 일본인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김성철이 무뚝뚝하게 고향 사람이 아니라고 밝히자 그 일본인의 태도는 눈에 띄게 돌변했다. “아, 한국인이었다고? 한국 같은 낙후된 곳에서도 대규모 소환이 일어날 줄을 몰랐어. 이거 실례했군.” 김성철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바깥에서 온 소환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거기에서 김성철은 거신에 의한 파괴 행위가 상상 이상으로 대륙에 엄청난 파급을 몰고 온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제국 같은 대국은 기민한 대처로 피해를 최소화했지만 군소왕국이 몰려 있는 동남부의 평야지대엔 멀쩡하게 남은 집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란다.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라서 그마나 버틸만하지만 곧 겨울이 닥치면 환란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그 말을 듣고 김성철은 이르지만 다음 행선지를 미리 마음 속으로 정했다. ‘남은 칠영웅의 소재를 파악하기 전까진 거신들을 처리하고 다녀야겠군.’ 해가 정오에 떠오를 무렵 탑의 은자들이 응시자들을 탑으로 안내했다. 탑에 들어가자마자 거사를 치룰 예정이기에 김성철은 프루크루스테스의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조용히 몸을 풀었다. 그런데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시험 장소는 여기입니다.” 은자가 안내한 곳은 탑의 내부가 아니라 탑의 사각에 가려 있던 뒤편의 목조 건물이었던 곳이다. “…….” 김성철의 계획이 시작부터 박살이 났다. “그러게 공부를 좀 해둘 것이지.” 베르텔기아가 핀잔을 했지만 그의 귀엔 들어오지도 않았다. 시험 과정은 김성철의 심리 상태와 무관하게 미리 정한대로 흘러갔다.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이곳에서 시험을 치게 됩니다. 시험 문제는 이전 소환자들이 출제한 문제입니다.” 노예로 보이는 사내 하나가 시험지를 발부했다. 시험 문제를 본 순간 김성철은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감각을 느꼈다. 객관식이라면 운에 모든 걸 걸어보는 도박을 해볼 수도 있겠지만 야속하게 모든 문제는 과정과 결론 모두 점수를 매기는 주관식이었다. ‘하나도... 모르겠다...!’ 김성철이 강행돌파라는 최후의 선택지를 속으로 고려하고 있을 때였다. 감독관을 맡은 은자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시험은 소환자들의 사정을 고려해 오픈 북으로 치러집니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식객들의 말에 의하면 어차피 문외한이 보면 책을 본다 하더라도 풀 수 없는 문제가 대부분이라고 하니까요.” 감독관은 벽면에 꽂힌 책장을 가리키며 참고할 것이 있으면 그 책들을 자유로이 이용하라고 권했다. “…….” 김성철은 오랜만에 피가 가볍게 끓는 걸 느꼈다. 가능성이 보인 것이다. 여기저기서 웅성이는 소리가 일었다. 그 틈을 타 김성철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베르텔기아에게 뭔가 말했다. “응..? 정말? 그런 짓을 하라고?” “부탁한다. 베르텔기아.”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지자 감독관은 박수를 쳐 모두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시험은 자유롭게 치러 질 예정이지만 타인의 답안을 베끼는 행위는 하지 말아주세요.” 감독관의 말대로 컨닝하기엔 좋은 환경이었다. 시험응시자들은 개인 책상이 아닌 커다란 식탁에서 일렬로 혹은 마주 앉아 있으니 말이다. 마음만 먹으면 대놓고 베낄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 점을 염려한 듯 감독관은 덧붙였다. “투명화 된 주시자의 눈이 각 응시자 뒤에서 여러분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부정행위는 즉각 퇴실처리 및 응분의 처벌을 가할 것이니 경거망동은 삼가시길 바랍니다.” 감독관의 말은 그럴싸했지만 김성철의 진실의 눈에 포착된 주시자의 눈은 단 한 기도 없었다. 일종의 허세인 셈이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다른 응시자들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응분의 처벌이라는 말이 가지는 무게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최소한 불구, 심할 경우엔 죽음에 이를 수도 있으리라. 컨닝을 염두에 두고 있던 응시자들의 입에선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그럼 시험을 시작합니다. 시간은 2시간. 문제의 답을 최대한 채워주세요.” 은자들은 그 말을 마치고 바깥으로 나갔다. 가장 직분이 낮아 보이는 은자가 감독관을 맡았다. 스무 명에 이르는 소환자들은 일제히 책장에 가져가 필요한 책을 가지고 갔다. 김성철은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었다. 누가 보면 문제의 해결방법을 깊이 고심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김성철이 생각한다고 해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곁눈질로 여기 모인 인간 중 가장 공부를 잘해 보이는 사람을 찾았다. 두 명이 눈에 띄었다. 인도인으로 보이는 검은 피부의 사내와 아까 김성철에게 친한 척을 했던 일본인이었다. 특히 일본인은 김성철 바로 옆에 앉아 있었는데 시험이 시작되자마자 김성철을 보고 씨익 웃었다. “이계에 온 지 5년 정도는 된 거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이한 문제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 김성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 사내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로 중얼거리며 키득 웃고는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그는 실제로 자신이 있는지 다른 이처럼 책장의 책을 참고하지도 않고 거침없이 답안지를 작성해나갔다. ‘이 놈이 좀 더 실력 있는 모양이군.’ 김성철이 빤히 그쪽을 쳐다보자 일본인은 실실 웃더니 팔로 시험지 측면을 가리고 상체를 기울여 김성철의 시선으로부터 답안지를 완전히 가려버렸다. ‘이런 개새끼를 봤나.’ 김성철은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가 여러 권의 책을 손에 잡히는 데로 뽑았다. “베르텔기아. 네 차례다.” 김성철은 은근슬쩍 베르텔기아를 자신이 뽑은 책 위에 사이에 끼어 넣었다. “좋아. 나만 믿으라고!” 책을 한 무더기 가지고 온 김성철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김성철이 못 보게 답안지를 가리고 신나게 문제를 풀던 일본인이 김성철이 가지고 온 책을 힐끗 보더니 피식 웃으며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문제풀이에 아무 관계도 없는 책은 왜 가지고 오는 거지? 진짜 아는 게 없나.” “…….” 김성철은 자신이 가지고 온 책무더기를 일본인 옆에 쌓았다. 두터운 책은 김성철과 일본인 사이에 적절한 칸막이 역할을 했다. 그걸 본 일본인 소환자는 입을 삐쭉 내밀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한국인치고는 양심적이네.” 그는 답안지를 가리던 자세를 풀고 편한 자세로 문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반면 김성철은 우두커니 앉은 채 백지에 가까운 문제지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참선을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김성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책으로 만든 칸막이 사이엔 베르텔기아가 숨어 있었다. ‘최근 이상한 일만 하는 기분이야. 난 분명 창조술사의 안내인인데 이렇게 컨닝 도구로 쓰이고 있다니. 나중에 톡톡히 생색을 내야겠어!’ 그녀는 바로 옆에서 채워지고 있는 일본인의 답안지를 그대로 자신의 공백에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인이 답안지를 1등으로 작성하고 기지개를 편 순간 베르텔기아는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김성철은 즉시 칸막이에 손을 뻗어 베르텔기아를 취했다. 일본인은 행여라도 김성철이 컨닝을 할까봐 답안지를 뒤집고 그 위에 김성철이 가지고 온 책으로 덮어버렸다. “하나만 빌릴게. 불만 없지?” 김성철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대꾸할 시간도 없었다. 베르텔기아가 고스란히 베낀 일본인의 답안지를 옮겨 적기 바빴기 때문이다. 사각사각. 오랜만에 잡는 펜이 어색하긴 했지만 김성철은 마지막까지 완벽에 가까운 답안지를 작성할 수 있었다. 2시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시험은 여기까지. 모두 답안지를 앞으로 제출해주시오.” 여기저기서 탄식하는 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일본인은 김성철 쪽의 답안지를 힐끗 쳐다보며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오. 그럭저럭 채워 넣으셨네?” 일절만 했어야 했다. 그가 김성철에게 다시 도발 가해 오던 그 순간 김성철의 손이 눈으로 보이지도 않을 빠르기로 책 밑에 숨겨져 있던 일본인의 시험지를 낚아챘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일본인은 희희낙락하며 책 밑에 숨겨놓은 자신의 답안지를 확인하는 순간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고 말았다. “어.. 없어! 내 답안지가.. 답안지가 없어!” 그의 답안지는 이미 김성철의 손아귀 안에서 가루가 된 지 오래다. 김성철은 그 사내를 무심한 눈으로 응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게 공부 좀 했어야지.” 김성철은 머리를 쥐어뜯고 절규를 지르는 사내를 뒤로 하고 유유히 답안지를 제출했다. 결과는 하루 뒤에 나왔다. 두 말 할 것 없이 합격이었다. 은자의 탑의 문이 김성철을 향해 활짝 열렸다. ======================================= 48. 재앙의 목소리 (2) 합격자는 김성철을 포함해 3명이었다. 김성철이 눈여겨보았던 지적인 분위기의 인도인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은 공부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온 몸에 문신을 새긴 금발 남자였는데 외모와 달리 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안내를 맡은 은자는 합격자들을 대기실로 안내했다. 대기실로 향하면서 김성철은 여러 개의 작업실을 볼 수 있었는데 각 작업실에서는 소환자들이 엔진, 발전기, 태엽시계 등 잡다한 장치를 만드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대로 잘 되는 것 같진 않았다. “빌어먹을! 또 그렘린이 나타났어!” “기계 장치의 비율을 줄이고 마법 장치의 비율을 높여보자.” “일단 저것부터 때려잡고!” 소환자들은 작업실 내를 부산하게 뛰어다니는 짓궂은 그렘린들과 치열한 추격전을 벌여야 했다. 작업실을 지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탑 안을 거칠게 울렸다. 시끄러운 여음이 사라질 무렵 은자가 멈춰섰다. “솔직히 포르피리우스님이 왜 너희 같은 자들을 불러오는 지 이해가 가지 않아.” 그의 목소리엔 감정이 담겨 있었다. “너희들의 기술은 이 세계에선 아무 의미도 없는데 말이야.” 그걸 본 김성철은 모든 은자가 소환자들의 기술을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김성철 일행을 고색창연한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방안으로 안내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그 분이 곧 올 테니.” 김성철은 돌로 만든 의자에 자리를 잡고 그 분이라는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대체 누가 온다는 거지. 설마 포르피리우스 본인은 아니겠지?’ 이계에선 별 볼일 없는 소환자를 만나는 자리다. 김성철은 포르피리우스 본인이 이곳에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꽤 오랜 시간이 지나갔다. 그 분은 오지 않았다. 무료한 침묵이 계속되던 중 인도 출신의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이야기나 합시다.” 현실에서 어디서 무엇을 하다 왔는지 이계에 온 지는 얼마나 됐는지 등등 소환자 사이에서 으레 이루어지는 이야기가 오갔다. 김성철은 처음엔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단답으로 대답하거나 맞장구를 치는 등 대화의 흐름에 따라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중 인도인이 소환자라면 모두 흥미를 느낄만한 주제를 꺼냈다. “당신들은 귀환자가 될 생각이 없어? 차원문 신전에서 귀환자 후보들을 선발하고 있다는데.” 문신 사내가 흥미를 보이며 맞장구를 쳤다. “준비는 하고 있지. 하지만 이 끔찍한 이계에선 뭐든 목숨을 걸어야 하잖아? 귀환자가 되려면 최소 초인 이상의 경지는 넘어선 다음에 도전하라고 들었어. 그렇지 않으면 개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그건 그렇지. 그런데 꼭 그런 것도 아닌 가봐. 운과 기지만 가지고도 현실에 돌아간 사람도 있는 모양이야.” “그건 목숨을 건 도박이지.” “하지만 지금 세상에선 그런 도박도 해볼 만하지. 어차피 당장 초인급이 되지 못한다면 결국 이 난리통에 죽고 말 테니.” 인도인의 말에 문신 사내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만큼 어두운 세상이기 때문이다. 두 사내가 약속이나 한 듯 김성철을 돌아봤다. “당신은 귀환에 흥미 없나?” “…….” 김성철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지금 귀환해봐야 그를 기다리는 가족도 알아보는 친구도 없을 것이다. 귀환자에겐 신의 하사품으로 현실에서 쓸 수 있는 막대한 재보와 세상의 균형을 잃지 않을 정도의 강력한 육체가 주어진다고 하지만 김성철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에겐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다. 아무튼 김성철이 입을 닫자 분위기가 잠시 끊겼다.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인도인이 새로운 주제를 꺼내들었다. “그나저나 듣자 하니 옛날엔 여기 들어오기 쉬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예전엔 물로켓만 만들어줘도 여기 들어올 수 있었다던데.” “다 옛날이야기지. 그때와 지금과는 다르잖아? 그리고 악마군이 마계최전선을 돌파했을 때였나. 그때부터 유입이 대단히 많아졌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런지 소문에 의하면 텃새가 장난이 아니라는 소문이야.” “텃새라. 어디에나 있는 거지.” 김성철하고는 딱히 관계없는 이야기다. 어차피 오래 있지도 않을 곳이고 재앙의 서만 열람하면 떠날 곳이니. 김성철은 소환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고개를 들어 방안을 둘러봤다. 처음 이곳에 있을 땐 보이지 않았던 마법 술식이 탑 전역을 덮고 있는 게 보였다. ‘확실히 이곳은 불가해한 신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곳이군.’ 벽돌 하나, 기둥 하나마다 마법 술식이 걸려 있었다. 인간의 것이 아닌 신의 권능에 속한 것으로 보였다. 소환광장도 신의 권능에 의해 보호받는 곳이지만 은자의 탑에 비하면 밀도는 훨씬 떨어졌다. 관찰을 계쏙하던 김성철은 신의 권능 이외에도 인간들이 만들어 낸 술식도 발견했다. 진실의 눈에 비친 그것은 일종의 흐름처럼 보였다. 강줄기와 같은 흐름이 탑 전체를 관조하며 도도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건 뭐지? 독특하군.’ 김성철이 그 흐름에 손을 뻗자 눈앞에 문자가 떠올랐다. [ 은자의 탑 - 무형 집합지성 도서관 ] [ < 개미 위키백과 > ] [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가능 합니다 ] ‘음..? 개미 위키?’ 전투용은 절대 아니고 보조용도 아니었다. 회복 효과도 없고 저주 같은 부정적인 힘도 없다. 단순히 손을 갖다 대는 것만으로 일종의 정보를 공유하는 술식 체계로 보였다. [ 열람을 원하는 지식을 입력해주세요 ] 김성철 앞에 키보드를 연상케 하는 무형의 자판이 떠올랐다. 김성철은 한 눈에 그것이 소환자들의 지식을 응용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김성철은 시험 삼아 독수리 타법으로 자신의 이름을 쳐봤다. ‘기... 임.. 성.. 처...얼.’ [ ‘세계의 적’ 항목으로 옮겨갑니다. ] 이윽고 김성철은 새로운 항목이 그의 눈앞에 떠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김성철 자신에 관한 것들이다. [ 1. 개요 ] [ 2. 소환궁전 ~ 반란군 시절 ] [ 3. 제국대원수 시절 ] [ 4. ‘세계의 적’ ] [ 5. 현황과 비판 ] [ 6. 종말교단? ] [ 7. 가상매체에서의 ‘세계의 적’ ]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자신을 이토록 상세하게 분석해 기술한다는 것은 흔치 않은 경험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김성철의 눈에 비치고 있는 문자는 김성철 눈에만 보일 뿐 다른 사람 눈엔 보이지 않는 걸로 보였다. 김성철은 재미 삼아 자신에 대한 항목 중 하나를 선택해 확인했다. 김성철이 선택한 항목은 6번 항목인 종말교단. 선택을 마치자마자 6번에 관한 설명이 나타났다. [ 최근, 인간제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종말교단이라는 신흥종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다. 자세한 규모와 신앙의 형태에 대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설에 의하면 이 신흥 종교는 세계의 적을 숭배한다고 알려져 있다. ] 설명은 그게 전부였다. 김성철의 눈엔 그저 어디서 들은 걸 종합한 뜬소문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제국의 수도에서 자신을 숭배하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꽤나 신선한 발상이었다. ‘헛소문에 불과하겠지. 나는 존경받을 사람이 아닐뿐더러 숭배의 대상은 더더욱 아니니.’ 6번 항목을 닫고 다른 항목을 열람하려고 할 때였다. 굳게 닫힌 대기실의 문이 드르륵 열리며 3명의 사내가 나타났다. 근엄한 은자들과 달리 평상복을 입었고 전체적으로 가벼운 분위기를 지닌 자들이었다. 소환자들이다. 보기 드문 안경을 낀 것으로 보아 신체의 능력치는 그다지 높지 않은 걸로 보였는데 그중 하나가 다짜고짜 삿대질을 하며 고압적으로 말했다. “너희들이 신입이냐?” 김성철을 제외한 사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안경 사내는 히죽 웃더니 자신들의 소개를 했다. “우리는 너희들 선배이자 고참들이다. 포르피리우스님이 오기 전까지 탑의 선배로서 너희들의 지식을 테스트 해보겠다.” ‘포르피리우스 본인이 온다고?’ 김성철은 놀라움을 느꼈다. 그와 별개로 자칭 선배 소환자들은 인도출신 소환자에게 김성철은 알지 못하는 질문을 던졌다. “뉴턴의 3법칙을 차례대로 설명해라.” 갑작스런 질문 공세에도 인도풍의 합격자는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하는데 성공했으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3명의 사내는 계속해서 질문을 퍼부었다. 하나 같이 김성철이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질문이 오가는 와중 김성철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돌아가며 질문을 퍼붓는 사내들이 하나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식의 흐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것이 의미하는 게 뭔지 알고 있다. ‘설마 개미 위키 백과를 보고 아는 체를 하는 건가?’ 김성철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은 무형의 지식 체계를 이용해 인도 출신의 소환자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아무리 머리에 든 게 많아도 매체에 기록된 것만큼 정확할 수 없는 법이다. 결국 인도인은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없는 질문에 맞닥뜨렸다. 3명의 사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감히 은자의 탑에서 일을 하겠다는 거냐? 기본도 안 된 인간이. 실력이 없으면 염치라도 있어야지!”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합격자를 몰아 세웠다. 보기 거북할 정도로 불쾌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자칭 선배 소환자들은 마각을 드러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다른 녀석도 굳이 테스트 하지 않아도 알 거 같네. 형편없는 것들이야. 너희들 같은 무능력자가 포르피리우스님을 본다는 건 어불성설이야.” “그래. 당장 나가라! 망신 당하기 전에.” 그들은 반강제로 김성철 일행을 쫓아내려 하고 있었다. 그걸 본 김성철은 아까 인도인과 문신남 사이에 오갔던 대화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음, 설마 이게 이 바닥의 텃새라는 건가.’ 상상한 이상으로 치졸하고 비겁하다. 자기가 진짜 실력이 있어서 몰아세우는 거면 몰라도 무형의 정보체계에 의지하고 있는 주제에 잰 체를 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당히 해라.” 결국 김성철이 끼어들었다. 궁지에 몰린 인도인과 문신남이 눈을 크게 뜨고 김성철을 응시했고 자칭 선배라고 칭하는 사내들의 얼굴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뭐야? 이건?” “넌 답을 알고 있다는 거냐?” “어이. 신입. 다음은 너다.” 그들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김성철을 에워싸듯 다가왔다. 김성철의 무심한 눈이 그들을 향했다. 한 사내의 입술이 씰룩이려 하고 있었다. 보나마나 되먹지 않은 질문 공세를 퍼부어 김성철의 기를 꺾어놓을 심산으로 보였다. ‘그렇겐 안 되지.’ 김성철의 담담한 음성이 한 발 먼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꺼라.” “뭐?” 사내들의 언성이 높아졌다. 김성철은 확신을 품고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개미 위키 꺼라.” 그와 동시에 김성철의 눈동자에서 무형의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초인급의 기사조차 정면으로 받으면 견뎌내지 못하는 살기를 허약한 약골들이 견뎌낼 리 없다. “히.. 히이!” 그들은 자신들의 비밀이 탄로 났다는 충격에 더해 김성철의 살기까지 정면으로 받자 견디지 못하고 부리나케 도망갔다. 3명의 사내가 허겁지겁 나간 문으로 검은 로브를 걸친 노인이 활기 찬 걸음걸이로 들어왔다. “응? 노예들이 왜 이런데서 설치는 거지? 알 수 없는 노릇이군!” 김성철은 한 눈에 그 사내를 알아봤다. 은자의 탑의 주인. 성은자(聖隱者) 포르피리우스다. 김성철은 8년 전에 대륙십삼걸과 함께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와 지금과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사정이 바뀌긴 했지만 포르피리우스의 모습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포르피리우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들어오더니 합격자를 한 번 둘러봤다. 그의 시선이 김성철을 지나치던 순간이었다. 포르피리우스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됐다. ‘저.. 저 말도 안 되는 능력치는 설마...?!’ 포르피리우스의 그늘 진 눈동자 깊숙한 곳엔 다섯 개의 꼭지점을 지닌 마법진이 항시 머물고 있었다. 극히 일부에게만 알려진 그 눈은 전지의 눈이라 불리며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힘을 지니고 있다. ‘세계의 적?!’ 포르피리우스는 한 눈에 김성철의 정체를 파악했다. 그리고 김성철 또한 포르피리우스가 자신의 정체를 파악한 것을 알아차렸다. “…….” 김성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포르피리우스를 향해 느릿하게 걸어갔다. 넓지 않은 방 안에 터져버릴 것 같은 긴장의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 48. 재앙의 목소리 (3) 김성철의 압도적인 능력치는 희귀급 영혼각인인 기만자의 장막에 의해 감춰져 있다. 그 장막은 김성철이 영혼각인 중에 비교적 낮은 희귀 등급이지만 소환광장에서부터 현재까지 높은 가성비를 발휘했다. 평범한 무명소졸에서부터 대륙 전역에 이름을 떨치는 명사까지 기만자의 장막은 톡톡히 제 역할을 다했다. 하지만 김성철 본인도 그것이 언제까지고 순순히 통용되리라 생각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때가 이제야 온 거 같았다. “모두 나가라.” 포르피리우스가 팔을 저으며 소환자들에게 말했다. 소환자들은 갑작스런 상황에 일순 당황했지만 그들 또한 지옥 같은 소환광장의 시련을 이겨 낸 자들이다. 그들은 이내 평정을 유지하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이제 방 안엔 포르피리우스와 김성철 둘만이 남았다. “오랜만이군. 제국대원수. 아니 세계의 적이라 불러야 하나.” 포르피리우스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김성철을 노려보았다. 그때 김성철은 포르피리우스의 그늘 진 눈동자 안에 다섯 개의 꼭지점을 지닌 마법진이 항시 머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말로만 듣던 전지의 눈인가. 포르피리우스가 저런 걸 숨기고 있을 줄이야.’ 전지의 눈은 김성철이 지닌 영혼각인 - 진실의 눈과 쌍벽을 이루는 통찰 스킬. 진실의 눈이 모든 마법을 꿰뚫어 보는 힘이 있는 반면 전지의 눈은 하나의 개체가 가진 힘과 능력을 꿰뚫어 볼 수 있다. 김성철 같은 힘을 숨기는 자에겐 가장 껄끄러운 영혼각인이다. 하지만 상황은 김성철에게 나쁘지 않다. 오히려 최상의 상황에서 전지의 눈의 소유자와 만난 셈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완벽하게 기습적인 조우를 이루어냈으니 말이다. 그 점은 포르피리우스와 김성철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주도권을 쥔 김성철이었다. “싸우러 온 건 아니오. 성은자 포르피리우스.” 김성철은 양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며 싸울 뜻이 없음을 명확히 했다. 포르피리우스의 얼굴엔 한 점의 변화도 없었다. 그는 천천히 김성철을 주시하며 옆으로 걸어가더니 단상 옆의 석조의자에 앉았다. “그럴 것 같구려. 당신이 싸우고자 했다면 이미 탑 일대는 아수라장이 됐을 터이니.” 그는 품속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그 안엔 김성철의 세상에서 흔히 보는 필터가 달린 담배가 담겨 있었다. 마감이 투박하고 엉성한 걸로 보아 수작업으로 만든 것 같지만 겉모습을 그럴 싸 했다. 포르피리우스는 손가락 끝에 불꽃을 만들어 내 불을 붙이고는 김성철에게 퉁명스런 어조로 물었다. “그래. 여긴 대체 무슨 일로 왔소? 혹 내게 볼 일이 있는 거요?” 김성철은 매캐한 담배 향이 코에 스며드는 걸 느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그저 재앙의 서를 열람하러 왔을 뿐이오.” “재앙의 서라면 이미 열람하지 않았소? 당신의 황제와 함께 말이오.” 포르피리우스가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했었지. 하지만 이번에 온 것은 재앙의 서에 나타난 변화를 확인하기 위함이오.” “변화라 함은?” “첫 번째 재앙은 내가 해결했소.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오.” “…….” 포르피리우스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 숨겨진 오망성이 번득였다. 전지의 눈이 김성철의 보다 깊은 곳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숨길 게 없었다. 그는 숨지도 뒤돌아서지도 않고 포르피리우스의 주시를 받아들였다. 이윽고 포르피리우스의 눈동자에 김성철에 관한 정보가 떠올랐다. 그중 한 문구가 포르피리우스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 [ 재앙에 맞선 자(모든 능력치 +10, 자격) ] 성은자는 그 높은 수양에도 불구하고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설마하니 세계의 적, 아니 김성철이란 사내가 악마왕을 처치했다는 소문은 진짜였단 말인가?’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다. 김성철은 지금 ‘자격’을 지니고 있으니까. 8년 전에 보았을 때 가지고 있지 않던 그것을 말이다. ‘이로서 자격을 지닌 자는 두 명 뿐인가?’ 그때 김성철의 담담한 목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더 확인할 게 남은 거요?” “그건 아니오. 하지만.. 그건 그렇고 당신은 죄많은 남자로군. 그토록 많은 저주를 한 몸에 지니고 있다니.” “살다보니 그렇게 됩디다.” 포르피리우스는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번에 그의 눈엔 김성철의 주머니 안에 숨어 있는 베르텔기아가 눈에 들어왔다. 포르피리우스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건 그렇다 치고 아주 신기한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구려.” “여러 모로 쓸모가 많답니다.” 그 말을 들은 베르텔기아는 불만이 있는 모양인지 주머니 안에서 강하게 진동을 일으켰다. 김성철이 베르텔기아를 꽉 잡아 진정시키고 있자니 포르피리우스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발에 비벼 끄고는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아무튼 당신의 뜻은 잘 알았으니 본인이 직접 안내하겠소.” 다른 이도 아니고 은자의 탑의 주인이 직접 안내를 한다. 김성철에겐 그보다 좋을 수 없는 결과다. 포르피리우스는 방을 나섰고 김성철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복도 바깥엔 아까 김성철 앞에서 잰 체 하던 자칭 선배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포르피리우스는 그들을 보더니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어이. 노예들. 빈둥거리지 말고 안이나 청소해. 꽁초 하나 버리고 왔으니까.” 그 사내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쪼르르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걸 본 김성철이 불쑥 물었다. “뭡니까? 저 인간들은.” “노예들이오. 소환광장에서 직접 빼내왔지. 당신 세상의 지식인이라고 하기에. 그런데 막상 데리고 오니 아는 게 아무것도 없더군.” “개미를 좋아하는 거 같던데.” “그건 나도 좋아하는 편이라오. 대부분의 항목은 내가 작성했지.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도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 작성한 거요.” 포르피리우스는 탄식을 하며 담배 하나를 더 꺼내 입에 물었다. 오망성을 갈무리한 그의 시선은 텅 빈 공간 저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비록 우리가 신에게 직접 사역당하는 이들이라고 하나 재앙이 마무리되면 우리 또한 모두 사멸할 것이오. 하지만 이 탑은 남겠지.” “…….” “언젠가 다시 이 탑에 찾아올 이들을 향해 우리들의 기록을 남기고 싶었소. 멸망 이전에 살아갔던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을.” 그때 복도 너머에서 한 무리의 은자들이 나타났다. 김성철은 살짝 긴장했다. 포르피리우스가 갑자기 변심을 일으켜 다른 은자들과 함께 자신을 공격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언제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자주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은자들이 인사를 해오자 포르피리우스는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맞이할 뿐, 유유히 그들을 지나쳐 갔다.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 재앙의 서는 은자의 탑 중심부에 철통같은 경계로 방비되고 있었다. 김성철은 재앙의 서 주변에 신의 권능처럼 보이는 술식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했다. 혹 그가 강행돌파를 했어도 쉽게 열람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 보시오. 제국대원수.”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앙의 서에 다가갔다. 포르피리우스는 김성철이 재앙의 서에 다가가자 레버를 당겼다. 그러자 대단히 복잡한 기계장치가 가동하며 재앙의 서를 감싸고 있던 강철막들이 차례로 벗겨졌다. “전엔 이런 게 없었던 거 같은데?” 김성철이 묻자 포르피리우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소환자들의 지식을 응용해서 만들었소. 나름 쓸 만하더군. 보기도 좋고.” 김성철은 고개를 돌려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재앙의 서를 응시했다. 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역시 악마왕은 죽었군.’ 예전에 본 문구가 불에 탄 것처럼 소거된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 현재진행중인 칠영웅의 재앙이 똑똑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육안으로 보이는 문구상엔 아무 변화도 없다. 칠영웅 중 두 명이나 처리했음에도 말이다. ‘역시 전부를 해치워야 사라지는 건가.’ 칠영웅의 재앙 아래엔 대전쟁을 암시하는 재앙이 희미한 색채로 기재되어 있었다. 8년 전 봤을 때와 크게 다를 게 없다. 한 개의 재앙이 지워지고 다른 하나의 재앙이 활성화된 것 이외에는. 4번째 재앙은 여전히 미지에 싸여 있다. ‘그런 것인가. 이쯤하면 됐군.’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포르피리우스를 향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협조에 감사하오.” “별 말씀을.” 포르피리우스는 김성철을 그다지 적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왜냐하면 그는 신의 대행자로 다른 기득권과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았고 굳이 그들의 의견에 구속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포르피리우스는 김성철에게 일말의 호감마저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말로만 재앙과 싸울 때 직접 재앙과 부딪쳐 해결해 낸 것은 김성철이 유일하니 말이다. “빨리 악마왕을 처리해줘서 고맙소.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재앙은 보다 가혹한 형태로 우리를 덮쳐왔을 것이오.” “재앙은 미룰 수 없다는 말은 진실인 모양이군요.” “끓고 있는 냄비뚜껑에 무거운 돌을 올려봐야 더 큰 사단이 나는 것과 같은 이치지. 냄비를 식히려면 불을 꺼야 하는데 말이오. 뭐, 당신이 오기 전에도 약간의 문제가 있었소. 조인왕의 재앙이 재앙의 서에 기록됐다가 사라졌지.”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조인왕의 재앙이?” “갑자기 악마왕의 재앙을 제치고 나타났는데 하루 아침에 사라져버리더군요. 너무나 이상한 일이라 그것을 조사하기 위해 탑의 수호자를 보냈는데 돌아오지 않는군. 보나마나 어디서 맛집 탐방이나 하고 있겠지!” 김성철은 속으로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조인왕의 재앙은 사라진지 오래니. 그보다 이제는 떠날 시간이다. 김성철은 포르피리우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자리를 떠났다. 포르피리우스가 김성철을 지켜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모두가 당신을 비난하지만 나는 당신의 행동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건 고맙군요.” 좀처럼 듣기 어려운 찬사. 김성철은 담담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딱히 기분이 좋은 것도 보람을 느끼는 것도 아니지만 한 명이라도 자신의 행동을 이해해준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여기서 나가면 칠영웅을 처리할 생각이오?” 떠나가는 김성철을 향해 탑의 주인이 물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두 명을 처리했소.” 그 말을 들은 포르피리우스은 낮게 웃었다. 수염 사이로 웃는 입이 드러났다. “참, 못 말릴 양반이로군. 8년 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그저 그런 전사장 급의 사내가. 10년도 안 돼서 재앙과 싸우는 투사로 거듭 날 줄이야.” “미안한데 바깥에 나가서 소란을 피울 생각이오.” 포르피리우스가 흠칫 놀라자 김성철은 부연설명을 했다. “아퀴로아에게 개인적인 볼 일이 있어서. 하지만 탑엔 일체의 피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니 그 점은 안심해도 될 것 같소.” “아, 그 여자 말인가. 카네스에게 볼 일이 있답시고 여기 와놓고 정작 자신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군.” 김성철은 왜인지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어쩌면 포르피리우스의 능력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아무리 그럴듯하게 꾸며봐야 동일인이 아닌 이상 포르피리우스의 이목을 속일 순 없는 노릇이니.’ 김성철은 포르피리우스에게 목례를 한 후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그가 나가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김성철은 뒤에서 거역할 수 없는 음성을 들었다. ‘이.. 이것은?!’ 김성철의 눈동자에 경악이 떠올랐고 그의 심장에 강렬한 고통이 가해졌다. 심장에 꽂힌 맹약의 십자가가 그의 심장을 옥죄고 있는 것이다. 고통 속에서 김성철을 뒤를 돌아보았다. 재앙의 서가 불길한 검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저.. 저건 대체?!” 포르피리우스의 경악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이내 어둠 속에 삼켜졌다. 김성철은 어느 순간 자신이 모르는 세계 한 가운데에 떨어져 있었다. 그 속에서 김성철은 보았다. 불그스름한 새벽의 미명이 초토화된 대지를 밝히며 지평선에 서 있는 검은 거인을 비추는 것을. 검은 거인은 설원 위에 서 있었다. 김성철은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야릇한 감정이 꿈틀되는 걸 느끼며 거인을 향해 다가갔다. 거인의 발밑에 이르렀을 때 김성철은 비로소 깨달았다. 설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인간들의 백골이라는 것을. 거인의 발밑에서부터 지평선까지 뻗은 무한한 백골의 두개골들은 모두 검은 거인 쪽을 향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미증유의 공포를 느끼며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김성철은 거인 앞에 섰다. 거인이 김성철을 응시했다. 거인의 공포스런 시선에 정면으로 맞닥뜨린 김성철은 그 거인이 무엇인지 자기도 모르게 알게 되었다. 용맥 같은 불거진 핏줄과 불타는 눈동자를 지닌 거인의 이름은 바로 김성철이다. 의식 깊은 곳에서 거역할 수 없는 음성이 또렷이 또 다시 울려 퍼졌다. [ 이것이 너의 미래가 되리라. ] [ 누구도 막을 수 없는. ] [ 모두를 멸하는. ] [ 멈추지 않는. ] [ 신의 도구. ] 김성철의 환각은 거기서 끝이 났다. “…헉!” 김성철의 안색이 확연히 눈에 띌 정도로 창백해졌다. “괜찮소?” 포르피리우스가 김성철에게 다가오며 안부를 물었다. “…잠깐 어질했을 뿐이오.” 김성철은 앞으로 꿋꿋이 걸어 탑을 나섰다. 포르피리우스는 영문을 모른 채 김성철의 뒤를 지켜봤다. 탑을 나선 김성철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어지러움을 느꼈다. “괜찮아? 지금 엄청 안 좋아 보이는데?”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변화를 눈치 채고 그를 걱정했다. 김성철은 입을 꾹 다문 채 징검다리를 건넜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김성철은 마을의 거리를 지나갔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보며 대낮부터 술에 취해 비틀거린다고 손가락질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성철은 개의치 않고 마을을 빠져나갔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야 해...!’ 어떠한 극심한 고통도 깊은 절망도 홀로 이겨내야 한다. 누구도 믿지 않고 따라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자의 숙명이다. 김성철은 끊어질 것 같은 의식을 필사적으로 이어나가며 마을을 나섰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울창한 숲이 보였다. 김성철은 숲을 향해 비틀거리며 힘겹게 발걸음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숲의 초입에서 김성철은 감당할 수 없는 졸음이 밀려오는 걸 느끼며 그대로 쓰러졌다. 암전하는 시야 너머로 그리폰이 끄는 수레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이! 요리사 양반 괜찮소?” 같은 시각. 토포로 마을의 입구에 낯선 여행자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차갑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를 지닌 여인이었다. 마을의 입구를 지키던 자경단이 그녀를 막아섰을 때 그녀는 인간제국의 통행증을 꺼내 그들에게 보였다. 자경단이 물러나자 그녀는 품속에서 한 사내의 초상을 꺼내 사람들에게 물었다. “혹시 이렇게 생긴 사람, 본 적이 있어요?” 그녀의 손에 들린 초상화에 담긴 것은 다름 아닌 김성철의 얼굴이었다. 아무개는 자경단의 설명을 들으며 주변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 49. 반인반용의 은자 (1) 칠흑 같은 어둠 속은 역겨운 땀내와 질식할 것 같은 열기로 충만해있었다. 그 속에서 김성철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숨소리를 들었다. 목에 낀 가래 때문에 쇳소리처럼 들리는 숨소리, 황소처럼 거칠게 몰아쉬는 소리, 붙잡힌 토끼처럼 헐떡이는 숨소리. 숨소리의 형태는 인간의 지문만큼이나 다양했다. 김성철은 눈을 감고 자신의 숨소리의 형태를 알아보았다. 언제나처럼 안정되고 끊김없는 숨소리. 간밤 내내 고문을 당해 한쪽 어깨가 말을 듣지 않긴 하지만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시작한다. 검투 노예들아! 피는 흘려도 똥오줌은 지리지 마라. 치우기 빡세니까!” 어둠 너머에서 냉담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숨소리들이 일순 멈췄고 뒤이어 높고 낭랑한 그러나 저주스런 나팔 소리가 어둠 속에 스며든다. 드르륵. 앞을 가로막은 철문이 위로 열렸다. 가려져 있던 환한 햇살이 갈고리처럼 검투 노예들의 눈동자를 찔러 들어왔다. 김성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손바닥으로 빛의 기세를 누그러뜨리며 빛 너머에 자리 잡은 것들을 노려봤다. 우레와 같은 환성이 경기장을 진동시키는 가운데 김성철은 이번 투기장의 상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원숭이처럼 긴 팔, 떡 벌어진 어깨에 멧돼지를 연상케 하는 어금니를 지닌 종족. 오크들이다. 중갑을 걸치고 칼날을 표면에 박아 넣은 방패를 앞세운 그들은 진형을 갖추고 검투 노예들을 맞이했다. 검투 노예들의 눈동자에 절망이 내려앉았다. 그것은 곧 행동으로 나타났다. 겁을 집어먹고 오줌을 갈기는 자, 자리에 주저앉아 엄마를 찾는 자, 뒤로 달아나다 경비 마법사의 마법에 피떡이 되어 관중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자. 아직 채 검도 섞지 않았지만 다수의 검투 노예들이 싸울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이런. 오크 중갑병들이군. 그것도 정예병. 이번만큼은 살아남기 어렵겠는데? 친구?” 손에 들린 의지를 지닌 검, 크럼부이가 빈정거렸다. 확실히 어려운 싸움이다. 아마도 크럼부이의 말대로 이번만큼은 죽을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탈골했던 어깨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크럼부이를 단단히 잡았다. “…가자.” 오크 무리의 우두머리가 김성철을 알아보고 야수와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자신의 검으로 방패를 두들겼다. “와라! 할슈타트의 광견!” 투기장을 가득 매운 군중들이 거대한 격류와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북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김성철은 오크 대장을 향해 달려갔다. 검과 검이 부딪쳤다. 불꽃과 피가 어지러이 사방에 튀었고 적의로 가득 찬 노란 눈동자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전투의 종료를 알리는 북소리가 투기장 위로 아스라이 울려 퍼졌다. 전투의 흥분으로 기립한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시민들은 찬탄과 저주로 얼룩진 평가를 투기장 위에 우뚝 선 사내에게 보냈다. “이번에도 살아남았군? 대단한 친구야. 수많은 얼간이들을 만나봤지만 그 중에서 너만큼 미친놈도 없었다.” 크럼부이의 찬사를 들으며 김성철은 뒤돌아섰다. 그리고 피로 이루어진 시내와 시체를 건너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대기실로 향했다. 지하 감옥으로 향하는 철문이 열리자 청초한 작약 꽃의 향기가 코를 찔러왔다. ‘또 왔나.’ 김성철은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닦아내며 철문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고귀한 여성을 눈에 담았다. 일렁이는 횃불 아래엔 연분홍빛이 연하게 감도는 긴 머리를 지닌 소녀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 덕분에 또 돈을 잃었어. 이번만큼은 반드시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용돈 전부를 걸었는데 또 이겨버렸네! 이 사태, 어떻게 책임 질 거야? 응?” 독설에 가까운 빈정거림이었지만 김성철은 어째서인지 사무치는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목소리.’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전율이 그의 몸에 흘렀고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미소짓는 소녀를 응시했다. 그러나 다시 눈동자에 담은 그 소녀의 얼굴은 유리에 김이 서린 것처럼 뿌옇게 흐려져 보이지 않았다. ‘꿈이었나. 역시.’ 진한 실망이 쓰디 쓴 형태로 입 안 가득 퍼졌다. 김성철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걸 느끼며 사라져가는 소녀의 이름을 소리내어 불렀다. “라이즈 하이메르.” * “…….” 김성철은 소리 없이 눈을 뜨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 맡에 있던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에게 날아와 말을 걸었다. “악몽이라도 꾼 거야? 이상한 잠꼬대를 하던데.” 김성철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먼저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아무 상처도 없고 이상도 없다. 무사하게 무의식의 시간을 넘겼다. 김성철은 속으로 안도하며 주변을 돌아봤다. 모르는 집이다. “여긴 어디지?” 김성철이 물었다. “여기? 여긴 그 남작네 집이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남작을 끄는 수도승의 집이라고 해야 하나.” 김성철은 멍하니 앉아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의 일을 생각해냈다. ‘역시, 마지막에 본 그리폰은 그 수도승의 것이었군.’ 실로 천운이다. 인간제국의 끄나풀과 아퀴로아의 늑대인간이 설치고 다니는 최악의 환경에서 선의의 조력자를 만나는 것은. 김성철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몸을 세심하게 점검하면서 집안을 둘러보았다. 별 볼 일 없는 작고 초라한 집이다. 판자를 덧대어 만든 마룻바닥은 낡아서 발에 힘을 주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천정 구석엔 오래된 거미줄이 먼지처럼 매달려 있었다. 김성철은 시선을 옮겨 침대 옆에 자리 잡은 탁자와 집기들을 보았다. 식기, 그릇, 책 따위 평범한 일상물품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 쪽에 놓인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제외하면 대부분 싸구려들이고 값 비싼 물건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형편이 어려운 모양이군.’ 김성철은 나중에 구해 준 답례로 막대한 보상을 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문득 김성철의 눈에 흥미로운 물건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고개를 뒤로 돌려야 볼 수 있는 벽면에 걸린 낡은 방패였다. 방패 그 자체로는 평이하고 조잡한 느낌이 들 정도의 하품이었지만 그 방패에 새겨진 문양은 허투루 볼 수 없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검은 수평선 위에 반쯤 잠긴 초승달. 김성철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저건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문장 아닌가?’ 일명 쿠쿠린의 달. 한 때 대륙 전체에 공포와 학정의 상징으로 여겨진 저주받을 문장이 다시 한 번 김성철 앞에 생생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때 바깥에서 기침소리가 들렸다. “응? 정신 차리셨나? 요리사 양반?” 일전에 만난 수도승이다. 그는 집안으로 들어오며 익숙한 손놀림으로 탁자를 더듬거려 돋보기안경을 찾아 쓰고는 흔들의자에 앉아 허리를 편안하게 기대며 김성철을 응시했다. “보아하니 멀쩡한 모양이군. 그나저나 젊은 사람이 몸이 그렇게 약해서 어디 쓰겠나?” 그는 품속에서 파이프 담배를 꺼내 주머니 안의 담뱃잎을 털어 파이프 안에 넣고 불을 붙였다. 김성철은 그 장년의 사내가 불을 붙일 동안 잠자코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김성철이 입을 열었다. “신세를 졌군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오. 뭐, 마음이 내키면 이 수도승에게 몇 푼 적선해도 관계없고. 아, 그리고 주머니 안에 돈이 제법 든 거 같던데 하나도 손대지 않았소.” 주머니 안은 뒤져본 모양이었다. 김성철은 쓴웃음을 짓고는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주화를 전부 꺼내 수도승에게 내밀었다. 그중 상인연합회에서 발행한 무인 주화의 경우엔 하나로 모아 손으로 우그러뜨려 금괴 비슷한 형태로 만드는 건 잊지 않았다. “어이쿠. 힘이 장사시네.” 장년의 사내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김성철에겐 푼돈이었지만 수도승에겐 몇 년을 풍족하게 살 수 있는 거액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속마음 같아서는 좀 더 보상을 주고 싶었지만 과도한 보상은 의심만 살뿐이라 김성철은 거기서 멈췄다. 대신 김성철은 방구석에 걸린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문장이 새겨진 방패를 보며 불쑥 물었다. “저건 뭡니까? 장식품입니까?” 수도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뭐 이제 와서 숨길 건 별로 없지만 내 물건이었다오.” “호오. 그 나라의 기사셨나 보군요.” 수도승은 파이프를 깊이 빨아들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혼 표범대의 기사였지. 알고는 계실지 모르겠지만.” “황혼 표범대라.” 무려 5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과 숱한 전투를 벌였었다. 왜 그 이름을 모르겠는가. 김성철은 라그란제 공방전에서 돌출한 우군의 좌익의 측면을 매섭게 몰아치던 그리폰 기사들의 맹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샤말 라지푸트가 장기인 전장 암살술을 발휘해 연대장의 목을 한 번에 그어버렸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전투의 향방은 미궁으로 빠져들었을 것이다. “이름은 들어봤습니다. 대단히 용맹한 기사들이었다고 하더군요.” 김성철은 남에게 들은 것처럼 이야기하며 열린 문 너머에 살짝 들여다보이는 남작의 굽은 날개를 눈동자에 담았다. “그 이름을 기억해주는 거 보니 그쪽도 이쪽 세상의 역사엔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모양이군?” “자랑은 아니지만 이곳에 온지는 보기보다 오래 됐습니다.” “그렇군.” 수도승이 히죽 웃었다. 자신의 과거의 일부가 인정받아서 그런 것일까. 그는 대단히 흡족한 얼굴로 파이프를 빨아들였다 내뱉었다. 희끄무레한 연기가 천정에 매단 연통을 타고 빠져나갈 즈음 수도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보여줄 게 있는 듯 그는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뒤적거리더니 낡은 금반지 하나를 꺼내 김성철에게 보여줬다. 그것은 인장이었다. “지금은 이 모양 이 꼴이지만 한 땐 나도 영지를 지닌 기사였네.” “왕국이 멸망해서 영지를 잃은 겁니까?” 김성철의 물음에 수도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창밖으로 가 격자창을 열고 그 너머로 보이는 마을을 응시했다. 창밖엔 은자의 탑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토포로 마을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저 마을이야. 지금은 더 이상 아니지만.” “토포로 마을은 은자의 탑 소속이 아닙니까?” “재앙이 시작되기 전까지 은자의 탑은 별 볼 일 없는 곳이었어. 지금에야 각국에서 온 특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떠들썩한 곳이지만 옛날엔 진짜 별 볼 일 없는 잊힌 사적이었지.” “호오.” 그건 김성철도 듣지 못한 이야기다. 김성철이 은자의 탑에 온 것도 재앙의 서가 발동한 시점부터였으니. 그 전의 사정 같은 건 당연히 알 리가 없다. “그때만 해도 은자의 탑은 왕국에서 보내주던 원조금으로 간간히 연명하던 곳이었어. 탑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저 마을은 당연히 왕국이 관리하게 되었고 내가 그 담당을 맡게 된 것이지. 하지만...” 수도승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 스스로 멈췄다. 주름진 그의 눈동자에 일순 회한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뭔가 사정이 있는 모양이군.’ 한 때 영주였던 사내가 지금은 불구가 된 그리폰과 함께 거지처럼 살고 있다. 필경 무언가 불미스런 일이 있었으리라. 말로는 풀어낼 수 없는.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여간한 사람의 사정이라면 가볍게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성철은 이 수도승에게 신세를 졌다. 본의는 아니겠지만 대단히 큰 신세를. 따라서 도와줄 수 있는 것이라면 돕는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노인을 담담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런데 김성철이 도울 일은 없어 보였다. 노인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 지난 일이지. 전부 다 내 과오였소. 자신의 영지민 조차 지키지 못하는 자가 어찌 영주를 칭할 수 있단 말이오?” 수도승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이야기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행동과 몸짓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김성철은 떠날 때가 온 것을 깨달았다. 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실례 많았습니다. 이만 떠날 때가 온 거 같군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경을 벗어 탁자에 올려놓고 바깥으로 먼저 걸어 나갔다. 그리고 남작이 끄는 달구지에 올라타고 고삐를 단단히 잡았다. “기회가 닿으면 다시 봅시다. 물론 당신 주머니가 두둑할 경우에만!” 수도승은 유쾌한 웃음소리가 길가에 울려 퍼졌다. “이상한 아저씨네.” 베르텔기아가 퉁명스레 말했지만 김성철은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으로 그를 배웅했다. 수도승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김성철은 고개를 들어 반대편을 바라봤다. 먼 하늘 위엔 순백의 공선이 도도하게 떠올라 있었다. ======================================= 49. 반인반용의 은자 (2) 아퀴로아의 공선을 치러 가는 도중 김성철은 피난민의 캠프를 가로질러갔다. 늘 가던 대로를 마다하고 굳이 피난민의 캠프 쪽으로 동선을 택한 이유는 캠프에서 좋은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다. 화톳불 위에 걸어놓은 냄비 위에서 나는 냄새다. 김성철은 그 냄비로 다가가 내용물을 확인했다. 요리라기보다는 꿀꿀이죽에 가까운 비주얼. 평소 같으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겠지만 시장의 최고의 반찬이라는 말답게 김성철은 한 그릇 얻어먹을 도량으로 냄비를 걸어놓은 천막 앞을 기웃거렸다. 곧 천막 안에서 퀭한 눈빛을 한 창백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김성철은 그 사내로부터는 죽 한 숟갈조차 얻어먹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사내는 김성철을 노려보며 냄비 안에 침을 뱉었다. 김성철의 눈썹이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이 새끼가....’ 피난민 캠프의 분위기는 겉으로 보이는 이상으로 좋지 않았다. 오물과 쓰레기로 범벅이 된 흙길을 걸으면서 김성철은 적어도 열 번이 넘는 적대적인 시선을 받았고 한 번 이상의 시비를 알아서 피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김성철은 피난민들이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알아냈다. 은자의 탑의 먼 동쪽 인스반트라 불리는 광활한 개펄지대에서 온 사람들이다. 그들 극도로 폐쇄적인 자급자족하는 사회를 이루고 사는데 인간들 중에선 보기 드물게 고대신을 섬기는 이교도로 알려져 있다. ‘멀리서도 왔군. 다른 곳에서 받아주지 않아 여기까지 피난 온 건가.’ 예전 반란군 시절에도 인스반트 사람들과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다지 질이 좋지 못한 족속들이었다. 강자에겐 굽신 거리는 척을 하지만 약간의 틈이라도 생기면 배신하기 일쑤고 자기들보다 약한 사람을 만나면 그야말로 골수까지 빨아먹는다. 게다가 그들이 믿는 종교 또한 수상쩍기 이를 때가 없었다. 일각에선 인스반트 사람들이 외지의 아이와 처녀를 납치해 끔찍한 인신공양의식의 제물로 쓴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할 정도였다. “기분 나쁜 사람들이었어.” 한적한 곳에 이르자 베르텔기아가 꿈틀 주머니에서 머리를 내밀며 입을 열었다. “저들을 탓할 건 아니다. 형편이 어려워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얼굴엔 그늘이 드리워지는 법이므로.” “하지만 자기 밥 나눠주기 싫어서 솥 안에 침 뱉는 건 너무 했다.” “…그만큼 지독한 인간들이라는 소리겠지.” 김성철은 피난민의 캠프에서 멀리 떨어진 지점에 자리를 잡았다. 공격시점은 동이 틀 무렵의 새벽으로 정했다. 미명이 꿈틀대는 고요한 그 시기는 김성철이 가장 선호하고 실패를 한 적이 없는, 그에게 행운이 허락되는 몇 안 되는 시간대다. “흠흠. 경치 하난 좋네. 연금술하기에 딱 좋은 곳이야.” 베르텔기아가 모처럼 주머니에서 나와 빈둥거리는 동안 김성철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야영준비를 했다. 서쪽 하늘에선 식은 햇빛을 쏟아내는 햇빛이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그 꿀꿀이죽 안 먹길 잘했지.’ 김성철은 바쁘게 숲을 오가며 식재를 조달했다. 은자의 탑 일대에 펼쳐진 숲은 꽤나 강력한 몬스터가 많은 편이라 제법 노련한 모험가 이상이 아니면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곳이지만 인적이 드문 만큼 식재의 보고이기도 했다. 김성철은 먼저 어린 산양을 잡아 피를 뺐다. 피가 완전히 빠질 동안 그는 숲에서 갖가지 향긋한 버섯과 먹을 수 있는 채소를 채취했고 모자란 식재는 토포로 마을로 가서 돈을 주고 샀다. 특히 마을 입구의 마구간에서 제법 쓸 만한 솥을 구입한 게 고무적이었다. “다 먹은 그릇은 바깥 쪽 시냇가에 놔둘 테니 알아서 찾아가시오.”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언제나 김성철에겐 기분 좋은 호재다. 요리 준비를 끝낸 김성철은 익숙한 솜씨로 피를 뺀 양을 해체했다. “으... 왜 인간은 먹기 위해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걸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르텔기아가 감정을 담아 말했다. 김성철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 말 하는 애들이 제일 잘 먹던데.’ 조리는 착착 진행됐다. 이번에 김성철이 만들어 먹을 요리는 양고기 샤브샤브였다. 신선한 재료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뿐더러 먹기도 편하다. 솥에서 뜨거운 물이 육수꺼리와 함께 부글부글 끓었다. 김성철은 커다란 젓가락으로 육수용으로 쓴 닭 뼈와 말린 생선포, 해조류 따위를 꺼내고 국자와 작은 접시를 이용해 육수의 맛을 음미했다 “음, 좋군.” 직접 만든 새콤함 간장 소스도 본토의 맛엔 미치지 못하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 했다. 남은 건 토막 친 양고기를 종이장처럼 얇게 써는 것 뿐. 김성철은 도마용으로 쓰고 있던 나무 밑둥 위에 살코기를 올려놓고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눈으로 보이지도 않을 빠르기로 고기를 내려쳤다. 순식간에 종이장처럼 얇은 고깃장이 여러개 만들어졌다. “칼도 잘 쓰네.” 옆에서 지켜보던 베르텔기아가 불쑥 말했다. “나는 못 다루는 무기가 없다.” “어련하시겠어.” 김성철은 자리에 앉고 영혼 창고에서 술을 꺼냈다. 술은 초록색 에메랄드 빛깔을 지닌 유리병에 담겨 있었다. ‘이것도 이제 끝인가?’ 철혈주. 철혈기사단의 영지에서 주조한 소주다. 소주라곤 하지만 세심한 공정과 장인정신으로 만든 술로 무색무취 속에 입안에 감도는 중량감과 부드러운 목 넘김, 술이 깨고 났을 때의 개운함을 모두 잡은 고급술이다. 하지만 철혈기사단이 멸망한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아껴서 먹어야겠군.’ 모든 준비는 끝났다. 김성철은 먼저 손질한 채소와 버섯을 솥 안에 집어넣었다. 부글부글 끓던 솥이 한소끔 끓어오르더니 가라앉는다. 은은한 육수 향에 야채의 향긋한 향이 섞여 풍겨온다. 김성철은 타오르는 장작을 몇 개 빼서 화력을 낮춘 후 젓가락으로 채를 썬 양고기를 집어 솥 안에 담궜다. 맑은 육수에 양고기의 핏물이 포자처럼 퍼지며 솥안으로 퍼진다. 위장이 가장 요동치는 순간이다. 김성철은 눈을 감고 양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시식을 하려는 찰나, 가까운 곳에서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무시하고 싶지만 무시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김성철 뒤에 모습을 드러낸 것들은 아퀴로아의 공선에서 내려 보낸 늑대인간들이므로. 그들은 김성철 쪽으로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왔다. 김성철은 약간의 짜증을 느끼며 몸 안에 신적인 힘을 흘려보냈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흔적조차 남기지 않기 위함이다. 그런데 늑대인간들은 김성철에게 바로 오지 않고 멀리 도축한 양쪽으로 걸어갔다. 김성철에게 볼 일이 있는 게 아니라 양의 피 냄새에 이끌려 온 거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김성철이 버린 내장과 머리, 기타 부속 부위를 날카로운 손톱이 솟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걸걸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어이. 검은 머리. 이거 먹는 거야?” “안 먹으면 나눠먹자고.” “우리는 평소엔 친절한 늑대인간들이지만 배가 고프면 맹수로 변하지.” 어차피 안 먹는 고기들이다. 김성철은 가지고 가도 좋다는 뜻을 손짓을 통해 전했다. 늑대인간들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은 냄새나고 더러운 고기 대신 신선한 대자연의 산물로 포식하겠군.” “재주도 좋아. 저 숲에서 양을 잡다니.” 늑대인간들은 기분이 좋은 듯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며 김성철을 지나갔다. 그중 하나가 김성철의 요리를 보더니 퉁명스레 말했다. “거 참 맛없게도 먹네. 고기는 내장을 생으로 씹어 먹어야 제 맛이지. 거지도 아니고 풀떼기하고 섞어 먹으면 무슨 맛이 나나.” “…….” 오랜만에 김성철은 강한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쥐고 있던 돌멩이가 가루로 흩어질 정도로 꽉 쥐었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늑대인간은 껄껄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아무튼 금강산도 식후경. 입맛을 약간 버리긴 했지만 식사를 멈출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김성철은 먹으려다 만 양고기를 다시 끓는 국물에 담가 육수가 스며들게 만든 후 입안으로 가져갔다. 괜찮은 맛이지만 원하던 맛은 아니다. 한 번 익힌 걸 다시 익혀서 조금 질겨졌다. 김성철은 젓가락으로 다른 신선한 고기를 집어 솥으로 가져갔다. 이번에야말로 기대했던 맛을 느낄 수 있게끔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일진이 좋지 못한 모양이었다. 저벅. 또 먹으려고 하는데 방해꾼이 나타났다. ‘그 늑대인간들인가? 아니 조금 다른데.’ 만약 늑대인간들이라면 그냥은 넘어가지 않을 요량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되를 돌아본 김성철은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저 녀석은...?’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과 파충류의 동공, 두터운 로브로도 가릴 수 없는 육감적인 몸매. 반인반용 카네스다. 김성철이 그토록 찾던 그녀는 얄궂게도 모든 용무가 끝난 다음에 비로소 김성철 앞에 나타난 것이다. “킁킁.” 그녀는 늑대인간처럼 야만적으로 냄새를 맡으로 김성철 쪽으로 다가왔다. 늑대인간과 달리 그녀는 양의 부속고기보다는 김성철의 요리에 더욱 더 큰 관심을 가졌다. “낯선 미식의 냄새가 나는데?”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김성철을 향해 다가오다 뒤늦게 바로 앞에서 김성철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다지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뭐야? 세계의 적 아냐?” 오히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동네 사람마냥 시큰둥하게 대하며 김성철 옆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녀의 신경은 모두 김성철의 요리에 쏠려 있었다. “이건 뭐야? 어떻게 먹는 거야?” “…….” 늑대인간보다 더한 방해꾼이 하나 늘었다. 김성철은 내키지 않았지만 먹는 법을 시범으로 보였다. 얇게 썬 양고기를 솥에 담가 살짝 익혀서 특제 소스에 찍어 먹는다. ‘음.’ 시범 차 먹는 것이긴 하지만 음식이 지닌 진미는 진짜다. [ 이 요리의 점수는.... 45점! ] 점수는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지만 이 정도면 김성철 취향의 요리치고는 높은 편이다. “이렇게 먹는 거다.” “그래? 그럼 어디 나도 한 번.” 카네스는 젓가락이 없는 관계로 손가락으로 고기를 집었다. “손은 씻고 먹으시지.” “내 손은 깨끗해.” 카네스의 손가락 부분에 비늘이 돋아났다. 용족다운 묘기라고는 할까. 그녀는 비늘로 감싼 손가락 째로 고기를 담가 김성철처럼 살짝 익힌 뒤 입에 가져갔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카네스의 반응을 기다렸다. 카네스는 눈을 감고 오물오물 고기를 음미하는 듯 싶더니 이내 눈을 번쩍 떴다. “맛있어! 그것도 엄청!” “…….” 그리 놀랄만한 반응은 아니다. 김성철이 만든 음식 중에 맛없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감추고 있던 코트 자락에 숨겨진 브로치를 드러냈다. 석양을 받은 황금 브로치는 찬란한 빛을 사방에 흩뿌렸다. ‘이 정도는 되어야 진정한 요리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런데 김성철이 브로치를 자랑하는 동안 카네스는 정신없이 고기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김성철은 순식간에 썰어놓은 양고기의 절반과 채소 대부분이 거덜난 것을 발견했다. ‘뭐야. 이 녀석은...’ 김성철이 항의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카네스는 눈을 깜빡이며 뻔뻔하게 말했다. “나 뜨거운 거 잘 먹는 편이야. 부럽지?” 그러면서 초록색 에메랄드 병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킨다. 김성철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아니 저 술병은?!’ 병안에 담긴 술이 한 방울도 남김없이 카네스의 식도를 타고 드래곤의 위장으로 들어갔다. 아껴 먹으려고 했던 김성철의 철혈주가 거덜나는 순간이었다. “…….” 툭. 김성철의 손가락에서 젓가락이 떨어졌다. * “정말 미안! 그렇게 아끼는 술인 줄은 몰랐어!” 카네스는 연신 김성철에게 굽신 거리며 사죄를 표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건성으로 하는 게 보일 정도로 입바른 사과였다. “…….” 김성철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여느 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그 점은 누구보다 베르텔기아가 잘 알고 있었다. ‘으.. 진짜 단단히 삐졌나 봐. 이 사람 이러는 거 처음 봐.’ 보다 못한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밖으로 나와 카네스에게 다가갔다. “응? 넌 리빙북?” “저기. 드래곤 언니.” 베르텔기아는 카네스의 귓가로 다가가 사태의 심각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심드렁한 얼굴로 듣고 있던 카네스는 서서히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지 알게 됐다. “으.. 진짜 미안! 나도 모르게 엄청난 실례를 저질러 버렸네.” “…….”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말이야. 솔직히 당신 같은 뛰어난 요리사는 대륙 전체를 찾아봐도 찾기 어렵거든. 무려 황금 브로치를 단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안 그래?” “…그런가?” 숲을 바라보고 있던 김성철이 비로소 몸을 뒤로 돌렸다. 코트 안에 숨겨진 브로치를 드러내며 말이다. 카네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무슨 말을 더 할까 하다가 김성철의 코트 아래에 달린 영혼석을 발견했다. “응? 그거. 메르킷 카벙클 영혼석 아냐?” “이걸 아나?”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 사실을 아는 건, 사자토스 한 명 이외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메르킷 카벙클 영혼석을 알아보는 사람이 등장한 것이다. “직접 보는 건 처음보지만 늙은 드래곤 영감들에게 들은 적은 있어. 아주 먼 옛날, 인간들이 드래곤의 용언 마법을 흉내 낸답시고 만든 물건을 말이야.” 그녀는 손을 쭉 뻗어 영혼석을 만지려고 했다. 김성철이 물러서자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미안. 한 번 만져보고 싶어서.” “…….” 김성철은 자신의 명을 잘 듣는 카벙의 영혼석 대신 말을 잘 안 듣는 다른 카벙클의 영혼석을 내밀었다. “음. 이거 말 안 듣는 카벙클인 모양이네?” 카네스는 즉시 영혼석의 문제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김성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네스는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말했다. “그럼 밥과 술도 잘 얻어먹었겠다, 영혼석 고치는 법이나 알려줘 볼까?” ======================================= 50. 안개여정 (1) 흔히 드래곤이라 불리는 용족은 재앙과는 무관한 존재로 알려져 있다. 신에게 사랑 받는 이 종족은 폭력에 의해 죽지 않는 한 무한한 수명을 누릴 뿐만 아니라 신에게 선물 받은 막강한 권능 또한 지니고 있다. 정확한 사실은 오직 용들만이 알겠지만 일설에 따르면 이 세상에 재앙이 닥칠 때면 드래곤들은 깊은 굴속에 들어가 재앙이 끝날 때까지 기약 없는 잠을 청한다고 한다. 드래곤들이 아예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가 재앙이 끝난 뒤에 다시 이 세상으로 온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진위여부는 확실치 않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몇 번이고 신의 재앙 속에서 살아남은 드래곤이 있다는 것이다. 전설 속의 에인션트 드래곤이나 드물게 모습을 보이는 엘더 드래곤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경우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어떤 에인션트 드래곤은 세상의 멸망을 열 번이나 넘게 지켜봤다는 이야기도 존재하고 있다. 카네스는 그런 용족의 피를 이었고 실제로도 오래 산 드래곤을 만난 적이 있는 걸로 보였다. 그녀는 말했다. “인간들은 오랫동안 용언마법을 따라하려고 노력해왔어. 하지만 용언마법은 신께서 드래곤에게만 허락한 종족의 비전이야. 따라서 아무리 인간이 발버둥 쳐도 근처에도 못 간다는 이야기지.” 이미 식욕을 잃은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었고 베르텔기아는 시냇가에서 반딧불과 놀고 있었다. 카네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 전 시대에 어떤 인간이 용언마법을 비슷하게 흉내 내는데 성공했나봐. 그 인간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용족 사이엔 크나큰 화제가 됐었지. 그래서 어떤 드래곤이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를 해 그 인간에게 접근까지 했나봐. 그래서 알아낸 거지. 그 인간의 꼼수를.” 그 꼼수라는 것이 바로 사자토스의 다중영창이었다. 카네스는 김성철을 받아들이지 않는 영혼석을 만지작거리더니 김성철에게 다시 내밀었다. “꼼수긴 하지만 제법 기발한 발상이었어. 하지만 한계는 뚜렷하지. 메르킷 카벙클은 대단히 희귀한 동물에다가 여간해서는 인간을 따르지 않으니까. 즉, 대를 이어 계승하는 용언마법과 달리 그 인간의 꼼수는 일신전속적이지.” “그래서 답은?” 빙빙 둘러말하는 건 김성철의 취향이 아니다. 김성철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카네스는 눈을 반짝이더니 두터운 로브 안에서 반지를 하나 꺼냈다. 겉보기엔 평범한 은반지. 그러나 범상한 물건은 아니다. 김성철의 오랜 경험이 반지에 서린 묘한 기운을 감지했다. “이건 뭐지?” 김성철의 물음에 카네스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안개여정. 타인의 꿈속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마법의 반지야.”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생뚱맞다고 해야 하나. ‘이걸 어디에 쓰라고.’ 김성철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잠시 생각하며 침묵했다. 그런데 베르텔기아에겐 대단히 놀라운 소식이었던 모양이다. 반딧불과 놀고 있던 베르텔기아가 부리나케 책장을 파닥거리며 카네스 앞으로 날아온 것이다. “우와.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전설의 반지인가요? 남의 꿈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게 진짠가요? 남의 꿈을 들여다보는 걸 넘어서 그 사람의 꿈속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게 진짜인가요?” 속사포 같은 질문에 카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반지를 김성철에게 건넸다. 그런데 김성철의 반응은 여전히 시원찮았다. “남의 꿈 들여다보는 취미는 없는데?” 김성철은 자신에게 내밀어진 반지를 쳐다보기만 할 뿐 취하진 않았다. 카네스는 반지를 내민 채 계속해서 말했다. “취미가 없더라도 말 안 듣는 영혼석을 쓸 수 있게 만들려면 이게 필요할 걸? 이 반지가 있으면 영혼석 안의 카벙클과 직접 만날 수 있거든.” “날 싫어하는 카벙클을 만나서 뭘 어쩌자는 거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김성철은 꿈에서 만난 카벙클이 앙증맞은 주먹으로 자신의 얼굴을 강타하는 상상을 잠깐 했다. 김성철이 카벙클이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자기하기에 따른 거지. 어르던 달래던 단단히 삐친 카벙클의 마음을 풀어주는 건 당신의 몫이야.” “…….” 김성철은 입술을 다문 채 안개여정을 받아들었다. 반지를 뚫어지게 쳐다보자 반지에 대한 정보가 김성철의 눈앞에 떠올랐다. <안개 여정 > 등급 : 전설 분류 : 장신구 효과 : 드림 다이브(타인의 꿈속으로 진입) 비고 : 자신이 만들어 낸 악몽의 미로에 갇힌 가련한 군주를 위해 만들다. 가장 오래된 용으로부터. 김성철의 표정이 변했다. 의문에서 긍정으로. 전설 등급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등급만으로 이 반지의 가치는 증명된다. 전설 등급의 아이템은 전 대륙을 통틀어도 100개, 아니 50개도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미리 말해두는데, 주는 게 아니라 빌려주는 거야.” 반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김성철을 보며 카네스가 다급하게 말했다. “음….” 아이템의 등급을 보기 전까진 미덥지 않았지만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고, 막상 받아든 게 전설 등급인 걸 보니 마음이 움직이는 김성철이었다. ‘한 번 해볼까?’ 김성철은 사자토스처럼 코트 안쪽에 괴발개발 바느질로 줄줄이 달아놓은 일곱 개의 영혼석을 응시했다. 맨 위에 있는 것은 유적에서 얻은 카벙이다. 그 녀석은 유일하게 김성철의 말을 잘 듣는다. 그러나 나머지 다른 여섯 개의 영혼석은 김성철에게 대단히 적대적인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김성철은 그 중 하나를 손으로 집어 들었다. 그 이름이 카벙벙이라는 건 접촉만으로 서로 뜻이 통하는 메르킷 카벙클의 능력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김성철은 그 카벙클이 자신을 향해 위협 섞인 경고를 내보내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 큐르르르....!! ] 작지만 대단히 사나운 놈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카네스를 응시했다. “이 반지는 어떻게 쓰는 거지?” 카네스는 어느새 솥으로 가 남은 국물을 들이 키고 있었다. 베르텔기아가 펄럭펄럭 날아가 그녀를 불러왔다. “응? 그거?” 카네스는 옷소매로 아무렇게나 입을 닦고는 무성의할 정도로 간략한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그냥 반지를 쥐고 영혼석에 손을 대. 영혼석에 갇힌 영혼은 항상 꿈꾸는 상태로 간주되니까 어렵지 않게 꿈속에 들어갈 수 있을 거야.” “꿈밖으로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간단해. 들어온 곳에 문이 있을 거야. 그 문을 통과하면 다시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그건 명심하지.”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화톳불 주변의 풀들을 발로 골라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안개여정을 손에 쥔 채 말 안 듣는 영혼석 카벙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걸 본 카네스가 불쑥 말했다. “조심해. 타인의 꿈을 탐험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니까. 뭐, 카벙클의 꿈이야 별 다른 거 없겠지만 심성이 뒤틀리거나 죄 많은 사람들의 경우엔 아주 기분 나쁘고 섬뜩한 꿈을 꾸거든.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보는 걸 좋아하는 변태들은 또 그런 걸 즐기기도 하지만!” “잠깐 다녀오지.” 김성철의 손이 영혼석에 닿았다. 김성철의 눈앞에 문자가 떠올랐다. [ 이 대상의 꿈으로 여정을 떠나겠는가? ] 김성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감은 채 잠시 시간이 흘러가길 기다렸다. 카네스와 어느 정도 아는 사이가 됐다고 하나 아군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다. 혹 이 반지가 함정이 아니라는 보장도 없고. 다행히 카네스에겐 어떤 악의도 없어 보였다. 그녀는 망을 보고 있는 베르텔기아에게 잠시 마을에 다녀오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가 이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고기를 가지고 와서는 끓고 있는 솥에 집어넣고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그야말로 놀라운 식욕. 본 모습이 드래곤인걸 감안하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만. 그걸 본 김성철은 경계를 풀고 아까부터 시야 한 편에 떠오른 문자에 대해서 뒤늦은 대답을 했다. ‘떠나겠다.’ 그가 뜻을 전하자 반지는 이에 화답하듯 김성철의 눈앞에 수천수만의 흩날리는 꽃잎들을 날려 보냈다. 김성철은 손을 들어 그 꽃잎들을 손등 위에 올려보았다. 붉고 파란 꽃잎은 그의 손등 위에 닿자 눈송이처럼 녹아 없어졌다. 마지막 꽃잎이 사라 없어질 무렵 김성철은 자신이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곳은 김성철이 한 번 와본 곳이었다. 대밀림 한 가운데 숨겨진 유적 부근, 골렘 안에 있던 카벙이 안내했던 비밀의 화원이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그 아름다운 화원 너머에 하얀 색 카벙클 한 마리가 두 발로 일어서서 귀를 쫑긋거리며 김성철을 노려보고 있었다. “뀨우?” 김성철은 그 카벙클이 이 꿈 속의 주인이라는 걸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건 아니다. 김성철은 곧 난관에 부딪쳤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딱히 친해질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현실이라면 먹이나 던져줘서 환심을 샀겠지만 꿈속의 세계에서 그런 기술은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김성철 앞에 공 하나가 덩그러니 나타난 것이다. 하얀 카벙클은 그 공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김성철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자 김성철 옆에 젊은 남성의 형체가 나타났다. 일종의 마법과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 낸 것으로 그림자에 가까운 검은 형체였지만 김성철은 그 모습이 사자토스와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검은 환영은 쾌활하게 웃으며 카벙클에게 공을 던졌다. 그러자 카벙클은 잽싸게 공이 날아가는 방향을 향해 날아가더니 도톰한 꼬리를 휘둘러 공을 다시 사자토스에게 날려 보냈다. 사자토스의 환영은 그 공을 받아 이리저리 손으로 옮기다가 다시 카벙클에게 던졌고 카벙클은 그 공을 받아쳤다. 아무래도 그것이 카벙클이 사자토스와 더불어 생전에 즐기던 놀이였던 걸로 보였다. 김성철은 사자토스의 환영에게 공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공을 낚아챘다. 그러자 사자토스의 환영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뀨우!” 카벙클이 두 발로 서서 한 번 덤벼보라는 식으로 짧고 강한 울음소리를 냈다. 김성철은 평소의 성질머리와 달리 부드럽게 공을 카벙클에게 날려 보냈고 카벙클은 꼬리로 공을 쳐서 김성철에게 되돌려줬다. 그렇게 공이 수차례 오갔다. 하얀 카벙클은 대단히 신난 듯 꼬리를 연신 흔들어대며 놀이에 임했지만 상대하는 김성철의 눈동자엔 진한 회의가 묻어 있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도저히 못해 먹겠다. 불현 듯 그런 생각이 김성철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김성철은 공놀이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황금빛 문고리가 반짝이고 있는 고풍스런 문이 뒤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중에 돌아오지.” 김성철은 하얀 카벙클과 작별을 고하고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뀨우우우...” 카벙클이 실망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김성철은 개의치 않았다. 문을 나서자 또 다시 수많은 꽃잎들이 김성철의 앞을 뒤덮었고 부지불식간에 그는 현실 세계로 돌아와 있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응시했다. 카네스는 솥을 통째로 들어 국물을 들이 키고 있었고 베르텔기아는 시냇가에서 반딧불과 놀고 있었다. 김성철은 카네스에게 다가가 그녀가 마지막 한 방울 국물까지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 입을 열었다. “이 반지. 두 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나?” 김성철의 물음에 카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능해. 단, 함께 가려는 사람과 손이나 도구 등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조건이 있어.” 김성철은 카네스에게 예를 표시한 후 시냇가에서 놀고 있는 베르텔기아를 덥썩 붙잡았다. “응? 벌써 카벙클과 친해진 거야?” “아니, 아직.”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화톳불 옆으로 데리고 갔다. “어디.. 가는 거야?”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의도를 어렴풋이 눈치 채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귀여운 동물, 좋아하나?” “딱히 좋아하진 않는데 갑자기 왜? 이 주변에 있다고?”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며 베르텔기아를 주머니 안에 넣고 안개여정을 가동시켰다. 꽃잎들이 다시금 김성철 앞에 휘날렸다. 마지막 꽃잎이 눈앞을 가리듯 스치며 사라졌을 때 김성철은 다시금 카벙클의 꿈의 세상에 도착해 있었다. “베르텔기아. 할 일이 있다. 네가 좋아할 일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의 옆엔 그가 상정한 것과 전혀 다른 것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일순이지만 김성철의 심장이 싸늘하게 식었다. 은발에 가까운 옅은 금발, 창백하리만치 흰 피부, 그리고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선을 지닌 얼굴. 칠영웅 베스티아레를 구분짓는 특징이 바로 옆에 서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 김성철은 그 여자가 베스티아레와 어딘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베스티아레보다 훨씬 작고 어린 소녀다. “응? 여긴 어디지?” 베스티아레를 꼭 빼닮은 소녀가 놀란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김성철은 그 소녀의 정체가 뭔지 알 수 있었다. ‘베르텔기아였나.’ 베르텔기아도 뒤늦게 자신의 모습을 변한 걸 눈치챘다. 그녀는 자신의 팔과 다리가 있는 걸 큰 눈으로 응시했고 이윽고 자신의 얼굴과 몸을 더듬으면서 환하게 웃었다. “우와! 이거 봐! 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어!” 아무리 높게 잡아도 열 둘 이상은 안 보이는 조그만 여자아이였다. ‘이게 에크하르트의 딸의 진짜 모습인가? 정말 베스티아레와 꼭 빼닮았군.’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눈빛이다. 베스티아레가 꿈을 꾸는 듯한 몽환적인 시선을 지닌 반면 베르텔기아는 짙은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별빛 같은 명료한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여긴 대체 어디야?” 베르텔기아가 자신의 볼을 꼬집으며 물었다. 그걸 본 김성철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꿈.” “꿈? 설마 안개여정을 사용한 거야?” “그런 셈이지.” 그때 덤불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하얀 카벙클이 불쑥 얼굴을 드러냈다. “응? 저건?” 베르텔기아가 묻는 순간 공 하나가 이쪽을 향해 날아왔다. 놀아달라는 것이다. 김성철은 그 공을 베르텔기아에게 건네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베르텔기아. 밥값 할 시간이다.” ======================================= 50. 안개여정 (2) 동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 베르텔기아는 꽤나 즐겁게 하얀 카벙클과 공놀이를 즐겼다. 카벙클도 카벙클이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발과 다리로 움직이는 것 자체가 즐거워보였다. 김성철은 그런 베르텔기아의 모습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꽤나 즐거워 하는군.’ 과거의 정경이 문득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모습이라 그는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어 회상을 떨쳐버리고는 다른 생각을 머릿속에 담았다. ‘역시 이 녀석은 인간이었군. 하지만 어떻게 책의 모습으로 만든 것이지?’ 옆에서 지켜 본 바에 의하면 베르텔기아는 책이면서도 또한 인간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 지는 아직 김성철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창조술사의 지식을 얻는다면 언젠가 이해할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그 순간은 요원하다. 잠시 후, 놀이를 마친 베르텔기아가 이쪽으로 돌아왔다. “카벙벙이 이쯤 하자는데?” 그녀의 말대로 하얀 카벙클은 거울처럼 맑은 옹달샘 옆에서 꼬리로 반신을 덮은 채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무사태평. “수고 했다.” 김성철은 오랜만에 베르텔기아에게 칭찬의 말을 건네며 뒤에 있는 현실로 통하는 문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베르텔기아는 가기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군소리 없이 김성철의 뒤를 따랐다. 다시 돌아온 현실 세계 속에서 김성철은 영혼석을 만져 보았다. 전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완전히 김성철을 따르는 건 아니지만 완벽하게 거절하는 것도 아니었다. 김성철은 상태창을 열어 현상태를 확인했다. [ 사역마 ] 1. 영혼석(메르킷 카벙클) 2. 영혼석(메르킷 카벙클) - 복합적 영혼석 하나가 추가됐다. 다만 신경 쓰이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말이다. 김성철은 시험 삼아 숲속으로 가 새로운 카벙클을 통해 다중영창을 시험해봤다. 그러자 그 영혼석은 아직 김성철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완전히 마음을 열려면 좀 더 꿈의 세계로 가서 놀아줘야 할 필요가 있는 걸로 보였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베르텔기아에게 말했다. “앞으로 종종 저것들과 놀아줬으면 하는데.” “맡겨 줘! 이런 일이라면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베르텔기아도 그녀답지 않게 적극적으로 나섰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식사를 마친 카네스가 또 어디서 구해왔는지 맥주를 커다란 오크통 째로 들고 와 벌컥벌컥 들이키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때? 안개 여정의 힘은?” “솔직히 도움이 됐다. 하지만 내 영혼석들을 전부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거 같다.” “괜찮아. 천천히 돌려줘도.” 카네스는 흔쾌히 김성철의 부탁을 수락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당신이 힘줘서 만든 요리 대접해준다면 말이지.” 그녀는 김성철의 코트 안쪽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브로치를 응시했다.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어렵지 않지.” 김성철은 속으로 자신의 계획에 수정을 가했다. 본인들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공선 크루스테스의 승무원과 아퀴로아의 목숨이 하루 더 연장됐다. 계획을 수정한 김성철은 담담한 어조로 카네스에게 말했다. “괜찮은 주방이 있는 곳만 구해준다면 당장 내일 나의 특제 코스를 대접하려는데.” “오. 정말?” 카네스는 반색했다. 하지만 주방이라는 말이 발목을 잡았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장고에 접어들었다. “흠, 그런데 이 주변에 괜찮은 주방은 별로 없는데.” “은자의 탑의 주방도 괜찮은데.” “거긴 절대 안 돼. 포르피리우스. 그 깐깐한 늙은이가 쓰게 해줄 리가 만무하거든.” “그럼 토포로 마을의 식당은 어떤가?” “거기도 안 돼. 마을엔 은자들의 끄나풀들이 깔려 있어서..... 아! 거기가 좋겠네!” 카네스가 뭔가 좋은 생각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대로변으로 걸어갔다. 카네스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의외의 장소였다. “아니, 당신 왜 또 왔어? 여긴 여인숙이 아니야. 공짜 잠은 하루면 충분하지 않나?” 카네스가 김성철 일행을 안내한 곳은 다름 아닌 수도승의 오두막이었던 것이다. 안경을 낀 수도승은 김성철을 보고 살짝 놀랬고 뒤이어 들어 온 카네스를 보고 뒤로 넘어질 정도로 크게 놀랐다. “아니, 당신은 카네스님 아니십니까?” “오랜만이야! 탕그리트 경!” “당신이 여긴 어쩐 일로...” 세상 무서울 거 없던 수도승은 어째서인지 카네스에겐 주눅이 든 모습을 보였다.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녀는 김성철 일행에게 눈을 찡긋한 후 수도승과 함께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문틈 너머로 수도승의 소곤거리는 목소리와 카네스의 높은 톤의 목소리가 번갈아가며 들렸다. 마지막으로 카네스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한 바탕 울려퍼진 후 문이 활짝 열렸다. “탕그리트 경이 주방을 빌려주기로 했어!” “여기 주방은 내 솜씨를 발휘하기에 최적의 조건이 아닌데?” 오두막엔 주방이랄 게 없었다. 그저 불을 넣는 아궁이와 그 위에 걸어놓은 냄비가 전부였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탕그리트 경의 주방은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으니까!”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탕그리트라고 반복해서 불린 수도승을 응시했다. 수도승은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눈이 마주치자 열쇠 하나를 내밀었다. “이걸 쓰면 될 거요.” 은을 입힌 제법 고급스런 열쇠였다. 카네스는 희희낙락하며 열쇠를 받아 챙기고는 오두막 뒤에 펼쳐진 어둠이 내려앉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숲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맹수 한 마리가 있었다. 곰의 형상에 호랑이 가죽을 지닌 호랑이 곰이다. 소환광장 주변에 서식하든 녀석과 똑같은 종으로 보였는데 카네스와 눈이 마주치자 미리 눈을 깔고 숲속 너머로 사라졌다. “저 녀석 고기는 맛이 별로 없어.” 등불이 없으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숲을 계속 따라가자 멀리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보이는 저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저기야.” 카네스는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서 본 저택은 폐허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군데군데 무너져내린 벽면 위로 덤불이 보기 흉하게 덮고 있었고 한때 아름다웠을 정원엔 흉물스런 동상들이 동강난 채 수북이 자란 잡초 안에서 뒹굴고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김성철이 물었다.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파견 무관의 거처야. 방금 만난 탕그리트가 이 저택의 주인이었지.” “그렇군.” 그 수도승은 한때 자신이 토포로 마을의 영주를 맡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어떻게 쫓겨났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저 모양 저 꼴이지만 꽤 인기가 높은 사람이었어. 루테기네아 왕국이 망하고도 꽤 오랫동안 마을 사람들이 그를 따랐거든.” 카네스가 쓸쓸한 눈빛으로 폐허를 응시하며 말했다. 김성철은 잠긴 문으로 다가가 열쇠로 문을 열었다. 잘 열리지 않는다. 힘을 줘도 꿈쩍하지 않는다. “…….” 김성철은 제대로 힘을 줬다. 그러자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문짝이 통째로 뜯겨나갔고 나무 파편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이건, 문 뒤를 고정해 놓은 건가.’ 누군가 저택에 침입해 잠긴 문 뒤로 판자들로 못질을 한 모양이다. 김성철은 거기에서 막연한 악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나무 파편 중 하나에 박혀 있는 녹슨 못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 “루테기네아 패잔병이 이곳에 온 적이 있었어.” “루테기네아의 패잔병이?” 그 말을 듣는 순간 김성철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방랑왕이 왕관을 넘겨 전쟁이 끝난 뒤에도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이 대륙에 드리운 암운은 쉬이 걷히지 않았다. 각지의 영주들과 군벌들은 조직적인 저항을 계속했고 우두머리를 잃은 패잔병들은 도적이 되어 민초들을 덮쳤다. “당시 나는 이곳에 없었어. 싸울만한 은자들도 모두 다른 곳으로 떠난 상태였고. 결국 탕그리트 홀로 백 명이 넘는 패잔병들을 막아야 했는데 그는 싸움 직전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쳤어.” “마을은 크게 당했겠군.” 카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마을은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어. 살아남은 사람은 절반도 채 되지 않았지. 탕그리트가 패잔병들을 막았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겠지만 그는 사람들의 신망을 잃었고 지금은 저렇게 된 거야.” 카네스는 아쉬워하는 말투로 말했다. “아는 사이였나?” “어릴 때부터 지켜봐 왔으니까. 저 녀석도 이 마을 출신이거든.” “…….” 김성철은 그 수도승이 얼마나 잔혹했던 시간을 보내왔을지 생각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결코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한때 영주였던 자가 과거의 치욕을 안은 채 백성이었던 자들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그런 내막이 있었군.’ 시간으로도 돈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상처라는 것도 있다. 김성철은 입안에 씁쓸한 맛이 감도는 걸 느끼며 저택 내부를 탐험했다. 주방의 위치는 카네스가 알고 있었다. 주방의 상태는 저택과 마찬가지로 폐허에 가까웠지만 음식을 만들 여건은 충실히 갖춰져 있었다. 조금만 손을 보면 김성철이 솜씨를 발휘할 주방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성철은 흡족함을 표시하고는 내일을 기약했다. “그럼 내일 저녁, 이곳에서 보자고.” 김성철은 카네스가 입도 뻥긋 못할 정도의 요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약속한 대로 내일 저녁. 거기서 보는 거야! 잔뜩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 브로치에 걸 맞는 요리를 보여주기를!” 카네스는 활짝 웃고는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 다음날. 김성철은 글자 그대로 고급 요리인에 걸 맞는 최상의 요리를 준비했다. ‘안개여정의 반환 따위는 생각도 못할 요리를 만들어주지.’ 평소 만드는 간편식이 아니다. 고급 요리인 클래스를 관장하는 미지의 존재에게 엄청난 평가를 얻는 휘황찬란한 요리다. [ 이 요리의 점수는... 72점! 훌륭하다! ] 맛, 색깔, 향기 어느 것 하나 뒤지지 않는 정찬이 차례차례 완성되어 갔다. 밥값을 하길 강요받지만 정작 밥은 먹지 않는 베르텔기아조차 김성철이 만드는 화려한 요리에 경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우와... 이런 건 왕들의 식탁에서나 먹는 거 아냐?” “왕 따위가 어찌 내 요리의 풀코스를 즐기겠는가?” 김성철은 그답지 않게 자부심을 섞어 말하며 남은 요리를 마무리지었다. 그렇게 18개의 야심작이 폐허가 된 저택의 식탁 위를 장식했다. 남은 건 주인공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런데 해가 지고 달이 머리 높은 곳까지 떠오른 뒤에도 카네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김성철은 의아함을 느꼈다. ‘그럴 리가. 그 드래곤이 먹을 걸 마다하진 않을 텐데.’ 이미 음식들은 차갑게 식은지 오래다. 김성철의 뇌리에 순간 불길한 상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그 드래곤의 신변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반인반용의 은자 카네스는 대륙십삼걸과 다른 규격의 강함을 지닌 존재로 평가 받고 있으니까. 광기에 물든 드래곤들이 가끔 인간들의 영지를 공격해 토벌 당하곤 하지만 드래곤 토벌은 일반적으로 사냥이라기보다는 전쟁에 가깝다. 토벌대의 최소규모만 수천 명이 넘으며 일개 국가의 수준으로 상대할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카네스가 나타나지 않는 건 사실이다. 김성철은 이전에 몇 번이고 저 하얀 공선의 아퀴로아가 카네스에게 볼 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설마 그 녀석들이 카네스를 어떻게 한 건 아니겠지?’ 김성철은 야심차게 준비한 요리들을 뒤로 한 채 저택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공선 아래에서 김성철은 늑대인간 무리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갓 잡은 피난민을 사이좋게 나눠먹고 있었다. 김성철의 주먹이 무자비하게 늑대인간을 향해 내려 꽂혔다. 김성철은 세 마리를 살려두고 심문을 시작했다. “은자 카네스에 대해 아는 게 있으면 말해라.” 첫 번째 늑대인간이 대답을 거부하자 김성철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늑대인간을 처치했다. 두 번째 늑대인간에게도 김성철은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러자 그 늑대인간은 겁에 질린 얼굴로 날카로운 손톱이 돋은 손가락으로 아퀴로아의 공선을 가리켰다. “저기.. 저 배 위에 있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김성철의 주먹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비참하게 일그러진 늑대인간들의 시체 위에 서서 김성철은 달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나는 공선을 올려다봤다. 하늘의 파편을 벼려 만들었다는 팔 가라즈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 51. 늦은 만찬 (1) 프로크루스테스로 향하는 길은 이미 눈으로 봐두었다. 김성철은 지체 없이 공선과 지상을 연결하는 기구 쪽으로 향했다. “어떤 놈이냐?!” 김성철이 다가가자 늑대인간들이 이를 드러내며 앞을 막았다. 그중 하나가 김성철을 알아보고 아는 체를 했다. “응? 저 놈은 풀떼기나 먹던 누렁이 입맛...” 퍽! 팔 가라즈가 조잘거리는 늑대인간의 머리를 몸통과 분리시켰다. 나머지 늑대인간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조차 알 지 못한 채 고깃덩어리로 화했다. 핏물이 흐르는 방향에 기구를 묶어둔 말뚝과 쇠사슬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김성철은 가볍게 도약해 기구 위에 올라탔다. 기구 안엔 두 명의 병사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들의 멱살을 잡고 지면에 내동댕이쳤다. 둔탁한 파공음이 밤하늘을 가르는 걸 들으며 김성철을 고개를 들었다. 두 개의 기구가 더 있었고 각 기구엔 2인1조의 파수병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김성철은 차례로 기구를 올라 경비병을 제압하고 마침내 순백의 공선의 갑판 위에 사뿐히 올라섰다. 갑판 위엔 무덤과 같은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진실의 눈이 발동해 갑판 곳곳에 걸린 결계와 술식을 눈앞에 드러냈다. 삼엄한 편이긴 하지만 김성철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김성철은 소리 없이 선실 복도로 들어가 카네스와 아퀴로아의 흔적을 좇았다. 김성철의 암습은 은밀히 움직인다는 점에서 암살자와 비슷하지만 암살자들과 근본적인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암살자들은 정면 싸움에 강점을 발휘하기 어려우므로 최대한 은신을 이용해 전투를 회피하고 은밀하게 대상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반면 김성철의 방법은 암살자의 것들과 아득히 다르다. 그의 철학은 간단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김성철은 침입한 지역의 모든 적대 세력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임으로서 은밀성을 유지한다. 그것은 암살이라기보다는 청소에 가까웠다. 복도 너머에서 발광석으로 밝힌 복도 너머로 마법사 한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엔 느릿하게 걷던 그의 신형이 일순 사라졌다. 퍽! 팔 가라즈의 손잡이가 차례로 마법사들을 강타했다. 마법사들은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느닷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시체는 모두 네 구. 가까운 곳에 선실이 있었다. 김성철은 선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선실 안엔 카드게임을 하던 경비병 한 무리가 있었다. 몰래 도박을 하는 모양인지 불을 전부 꺼놓고 희미한 촛불만을 밝힌 채 숨죽여서 승부에 임하고 있었다. “올인! 아무래도 오늘 밤은 행운의 여신이 내게 미소를 짓는 모양이군.” 싱글벙글 웃으며 완성된 패를 감상하던 병사의 눈이 김성철의 눈이 마주쳤다. 팔 가라즈가 허공을 갈랐다. “땡! 사신의 미소였습니다!” 베르텔기아의 작지만 경쾌한 한마디를 들으며 김성철은 복도에 너부러진 시체들을 선실 안으로 차례로 집어던지고는 문을 닫고는 힘으로 문과 문틈을 찌그러뜨렸다. “…….”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스크롤 하나를 꺼냈다. 거점 하나를 청소하고자 할 때 쓰는 유용한 주문이 담긴 스크롤이었다. ‘디텍트 라이프.’ 김성철이 스크롤을 찢자 그의 시야 너머에 살아 있는 사람들의 위치가 희미한 등불의 형태로 떠올랐다. 가까운 곳에 한 무리의 승무원이 있다. 김성철은 선실의 문을 조용히 열었다. 그곳은 승무원들의 침실이었다. 열 명에 가까운 승무원들이 해먹 위에서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김성철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그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취미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대하거나 마음이 약하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김성철은 적으로 간주한 집단에겐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는다. 재앙의 추종자들이 그러했고 아퀴로아의 부하들고 그러하다. 우두둑! 우두둑!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한 채 십여 명의 승무원이 죽었다. 김성철의 눈앞엔 여전히 흐릿한 등불이 떠올라 있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다. 김성철은 같은 층에 있는 모든 승무원을 처치하고 아래 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의 입구엔 하급병사의 출입을 불허한다는 경고문이 발광석 바로 아래에 걸려 있었다. 김성철은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아래층으로 내려서자 복도 전체에 은은하게 서린 부유결정의 울림이 느껴졌다. 공선을 하늘로 띄우는 핵이자 심장이다. 김성철은 부유결정의 울림을 들으며 생명의 등불을 찾아 움직였다. 끼이익- 선실의 문이 열렸다. 초췌한 사관이 정육점의 고기처럼 걸어놓은 푸르뎅뎅한 덩어리 앞에서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의 뒤로 다가가 단숨에 그를 제압했다. 한번에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은 고기처럼 걸린 괴생물체의 정체를 묻기 위함이다. 넓지 않은 방안엔 인간 형태의 하지만 인간과는 명백히 다른 이질적인 존재가 꼬챙이에 꿰인 채 걸려 있었다. 섬뜩한 사실은 이 푸르스름한 괴인들에게서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예전에 아퀴로아를 처치했을 때 상대했던 괴인들이군.’ 그것은 인간도 아니었고 인형도 아니었다. 그 경계선에 선 무언가였다. 김성철은 사관의 목을 감싸 쥐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묻는 말에 대답해라.” “…….” 사관은 한바탕 반항을 시도했지만 김성철 앞에서는 어림없는 행동이었다. 약간의 고통을 주자 그는 곧 잠잠해졌다. “이것들은 뭐지?” “이.. 이것들은... 구세병(救世兵)이다...!!” “구세병?” 인간도 아니고 인형도 아닌 푸르스름한 괴인들에겐 과분한 이름이다. 김성철이 보기에 그것들은 세상을 구하는 병사라기보다는 재앙의 첨병과 비슷한 생김새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 이것들은 누가 만들었지? 아퀴로아인가?” “그.. 그렇다.” “여기 온 목적이 뭐지?” “거기까진 알지 못한다. 나는 하급 장교.... 끄억!” 김성철은 사내의 목을 꺾어버렸다. 문 너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곳을 향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성철은 죽인 사내의 시체를 푸른 괴인들 사이에 걸어놓고 자신 또한 괴인 뒤로 몸을 숨겼다. 곧 문이 열리고 마법사와 승무원들이 나타났다. 숫자는 모두 세 명. 김성철은 움직이지 않고 상황을 관망했다. “바르티에는 또 어디로 간 거지? 또 땡땡이야? 참 그 자식.” 마법사가 투덜거리며 괴인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주머니 안에서 푸른 수정을 꺼냈다. 그 수정은 창백한 달빛 같은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마법사가 수정을 정육점의 고기처럼 꿰인 괴인에게 가져다대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두상 위에 아무렇게나 달린 괴인의 눈이 꿈틀거리더니 깨어나려는 게 아닌가? 김성철이 괴인 틈바구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때였다. 퍽! 퍽! 퍽! 팔 가라즈를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김성철은 몸을 부르르 떠는 마법사의 손에서 푸른 수정을 입수했다. 푸른 수정은 어떤 정보도 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성철은 알 수 있었다. 수정안엔 익숙한, 음습하고 꺼림칙하며 그리고 절대적인 기운이 담겨 있다는 것을. ‘이 느낌은 설마... 재앙의 기운인가?’ 그때 꼬챙이에 매달린 괴인이 생선처럼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지퍼처럼 달린 눈을 희번뜩거리며 긴 팔을 뻗어 김성철의 푸른 수정을 갈구하고 있었다. 수정을 멀리하자 괴인은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활동을 중지했다. ‘대체 이건 뭐지?’ 김성철의 눈동자에 짙은 의문이 떠올랐다. 그 많은 경험과 지식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은 본 적이 없었다. 비슷한 것을 연상하려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김성철의 손에 쥔 수정과 수정에 반응하는 괴인들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것들이었다. “베르텔기아. 이것들이 뭔지 짐작이 가나?” “아니. 나도 이런 끔찍한 건 본 적이 없어. 내 몸안에 기록되어 있지도 않고.” 김성철은 수정을 영혼 창고에 넣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수정은 창고에 들어가지 않았다. 김성철은 그걸 보고 잊고 있던 하나의 물건을 떠올렸다. 김성철은 바지춤을 끌렀다. “히이... 갑자기 왜 그래?” 김성철의 바지춤 안엔 복대가 있었다. 천년 뱀의 가죽을 최정상급의 가죽장인의 손을 거쳐 만든 복대. 튼튼하고 질기며 방수효과도 뛰어난 그 안엔 김성철의 가장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복대를 열자 머리핀, 부적 따위 잡동사니와 그리고 넓고 편편한 암흑을 머금은 듯한 짙은 녹색의 돌조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재앙의 파편. 악마왕 해서니우스 맥스를 처치하고 신에게서 얻은 전리품. 김성철은 마법사에게서 뺏은 수정과 재앙의 파편을 양손에 놓고 비교했다. 형언할 수 없는 음습한 기운은 재앙의 파편이 압도적으로 위였지만 푸른 수정에게서 유사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미약한 경악이 떠올랐다. ‘설마 이 수정은 재앙의 파편을 이용해 만든 건가?’ 확증은 없다. 하지만 왠지 모를 느낌이 든다. 김성철은 수정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수정은 버티지 못하고 그의 손아귀 안에서 산산이 부서졌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그림자 같은 사악한 기운이 연기처럼 하늘 위로 퍼졌다. 그리고 방안의 괴인들이 일제히 경련을 일으켰다. 개구리의 앞발을 닮은 손가락이 오무렸다 펴지고 지퍼처럼 달린 눈이 깜빡였고 불길한 음성이 섬뜩하게 메아리쳤다. 기괴한 분위기 속에서 베르텔기아는 몸을 떨며 말했다. “뭐야. 이것들은.” 김성철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괴인들의 준동이 끝나는 걸 지켜보았다. ‘부유군도에 무언가 있는 모양이군.’ 부유군도에 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이 세계 어딘가를 떠돌고 있는 하늘 위의 섬이라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 그 실상에 대해 아는 사람은 부유군도 출신 이외엔 전무하다. 김성철에게 있어 아퀴로아는 반드시 죽여야 할 적이었지만 1순위는 아니었다. 김성철에게 1순위는 오로지 재앙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김성철조차 알지 못하는 재앙의 힘을 이용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악취가 났다. 권력의 한 복판에 있을 때 맡을 수 있었던 끔찍한 악취가 말이다. 그럼에도 김성철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복도를 나아가며 마주치는 모든 승무원을 하나도 남김없이 처치했다. 그렇게 오십 명 정도를 처치할 무렵이었다. 김성철은 마침내 아퀴로아의 방으로 보이는 고급스런 선실 앞까지 다가왔다. 다른 선실과 달리 고도의 결계와 방어술식이 펼쳐진 것이 심증은 더욱 굳혔다. 김성철은 조심스레 결계를 통과하며 선실로 접근했다. 은밀하게 접근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이르렀을 때 김성철은 문 너머에서 희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재앙의 서에 그의 이름이 기재되는 순간엔 이미 늦었습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강해지고 있고 막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듣지 못한 목소리다. 아퀴로아의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젊다. 뒤이어 또 다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번엔 낯익은 음성이다. “하지만 당신의 심증만으로 나에게 움직이라고 하는 건 조금 아닌 거 같은데.” 카네스의 것이다. 그녀가 무사한 걸 알자 베르텔기아는 기쁜 듯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애당초 나는 은자의 탑의 아래로 들어간 몸. 더 이상 나는 지금 세상에 관여할 명분도 이유도 없어. 지금 세상이 멸망하면 그걸로 끝일 뿐. 우리 드래곤이 재앙과 무관한 존재라는 건 당신도 모르진 않을 텐데? 집행자 아퀴로아.” “하지만 당신의 절반은 인간이지 않습니까? 당신의 피의 절반이 용족이라고는 하나 최후의 재앙이 닥치면 당신도 무사하진 못할 겁니다.” 아퀴로아라고 불린 목소리의 주인공은 처음 김성철이 들었던 음성의 소유주였다. ‘이전의 아퀴로아와는 다른 인간이군.’ 김성철은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이며 안쪽의 대화에 계속해서 예의주시하며 경청했다.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신은 그 사람에게 죽어요.” 김성철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수진? 그 여자가 어떻게 이곳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수진이었다. 지금은 아무개로 알려진 그녀는 결연한 의지가 들여다보이는 맑은 눈동자로 카네스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물론이고 당신의 동족 또한.” 다음 순간, 카네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갑자기 방안의 기류가 격렬하게 요동쳤고 천둥 같은 환청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그 폭풍의 중심에 카네스가 있었다. “웃기지마라. 한낱 인간 따위가.” 파충류의 형상을 한 눈동자에서 용암을 연상케 하는 작렬하는 기운이 꿈틀거렸다. 그걸 본 이수진은 몸이 떨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그보다 더욱 무서운 존재를 본 몸이다. “저는 제가 본 미래만을 이야기합니다. 탑의 수호자여.” 카네스는 그런 이수진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실소를 터뜨리고 살기를 풀었다. 방안에 휘몰아치던 기운이 일순 사라졌다. “회귀자라는 건가? 하지만 회귀자가 뭘 알 수 있다는 거지? 한 번 실패한 인간이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달리 없을 텐데?” 카네스는 다소 맥이 빠진 모습이었다. 기껏 데리고 왔다는 중요한 인물이란 게 겨우 회귀자라니 그럴 법도 하다. ‘회귀자는 절망을 반복하는 존재야.’ 젊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천 년 이상을 살아온 카네스는 신 혹은 신에 준하는 존재들이 얼마나 악의로 뭉쳐진 존재인지 잘 알고 있다. 실패자에게 회귀를 선물하는 이들의 목적은 역사적 사실의 변화나 회귀자의 성공 따위가 아니다. 그 사악한 절대자들이 원하는 것은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은 인간의 또 다른 절망이다. 그것이 회귀의 덫. 운명은 거스를 수 없다. 카네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수진을 다시 보았다. 평범한 여자. 제법 잘 단련되고 의지도 있는 걸로 보이지만 카네스의 눈엔 이수진 또한 또 하나의 초월적 존재의 장난감 이상으로 비치진 않았다. 그러자 이수진이 한 발 앞으로 걸어왔다. 흔들림 없다고 생각한 눈동자가 더욱 또렷하게 카네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가 말했다. “전 다른 회귀자와 다릅니다.” “어디가 다르다는 거지?” 카네스가 빈정거렸다. 그러자 이수진은 작심한 듯 심호흡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 방안에 드리운 어둠이 그녀를 적셨고 곧 이수진은 카네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카네스는 코웃음을 쳤다. “헛된 장난이라도 쳐보겠다는 건가?” 그러자 침묵을 지키던 아퀴로아가 입을 열었다. “저 여자는 다른 회귀자들과 다릅니다.” 카네스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약간의 짜증을 느꼈다. ‘뭐가 다르다는 거지? 실패자가.’ 다음 순간, 카네스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목 끝에 와닿은 번쩍이는 단도의 칼날을. ======================================= 51. 늦은 만찬 (2) 카네스의 눈동자에 경악이 스치고 지나갔다. ‘뭐야? 이 카네스님이 겨우 초인 수준의 인간에게 간단하게 잡힌다고?!’ 피부로 닿는 칼날의 감촉은 평범한 게 아니다. 최소한 전설 등급의 암살단도. 곧 카네스는 그 무기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건 찬탈자의 가시?’ 한때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 소유였던 최강의 암살 단도. 그런 무기라면 인간 형태의 카네스의 여린 목줄을 그어버리고도 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을 수도 있다. 반인반용의 몸이라고 해도. 카네스의 몸 구석구석 전율이 짜릿하게 흘렀다. 다음 순간, 이수진은 단도를 거두었다. 그리고 카네스 앞으로 걸어가 머리를 조아렸다. “무례한 행동을 한 점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그것 이외에 당신을 믿게 할 방법이 없기에 부득이하게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이수진은 살짝 고개를 올려 카네스의 표정을 확인했다. 카네스는 밀려오는 불쾌감을 참으며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라.” “저는 아신의 변덕이 아닌 인간의 의지로 이곳에 왔습니다.” “인간의 의지로 왔다고?” 카네스는 위협 당했던 목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인간 따위가 시간을 거스르는 게 가능하다는 이야기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므로. 그러나 이수진은 태연하게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설명했다. “방금 제가 범한 실례가 부정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당신 정도의 사람이라면 물론 아시겠지만 회귀자 중에 회귀 이전의 힘을 지니고 오는 걸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말을 들은 카네스는 뇌리 속에 커다란 종이 울리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설마 방금 그건...?” 그녀의 물음에 이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낭랑한 목소리로 답했다. “신화급 영혼각인 소실(消失).” 바깥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성철의 눈동자에도 경악이 떠올랐다. ‘신화급 영혼각인이라고? 설마 그것 때문이었나. 내가 지금까지 이 여자의 기척을 감지해지 못했던 것은...?!’ 몇 번이고 이수진은 김성철의 경계를 뚫고 그에게 접근했다. 김성철은 그것이 막연하게 이수진이 타고난 능력 정도로 인식했다. 하지만 그것의 실체가 드러난 이상 김성철의 충격을 클 수밖에 없었다. 김성철조차 손에 얻지 못한 것이 바로 신화급 영혼각인이니 말이다. “그것이 바로 제가 세계의 적을 처치하기 위해 미래로부터 가지고 온 능력입니다.” 이수진은 차분하게 말한 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또 다른 아퀴로아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직 이 분은 힘이 강하다고 볼 수 없어요.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영혼각인을 지니고 있지만 회귀 과정에서 힘의 상당부분을 잃고 영혼각인 하나만을 건진 채 현재의 세상으로 회귀했습니다.” 카네스는 여전히 이수진을 신용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이전 같은 기세는 더 이상 보여주지 못하고 경청하는 모양새였다. 실제로 목숨을 위협 당했으니까. 말로만 협박을 하는 것과 실제로 행동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사이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의 격차가 존재한다. 주도권을 잡았다고 느낀 아퀴로아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서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겁니다. 그 이름조차 담아서는 안 되는 경건한 고룡의 피를 이은 당신은 지금 세계의 적의 비열한 음모를 저지할 유일한 대적자니까요.” “…내가 뭘 해주길 바라는 거지?” 카네스가 물었다. “금명간에 세계의 적이 여기 나타날 거예요. 아니 어쩌면 은자의 탑 일대에 와 있는지도 모르죠.” 그 말을 들은 카네스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실제로 세계의 적은 이곳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 저녁 약속까지 하지 않았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카네스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창밖을 응시했다. 이미 해는 서산에 진지 오래고 시커먼 어둠이 대기를 채우고 있었다. ‘아차! 저녁 약속!’ 카네스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아퀴로아는 계속해서 말했다. “곧 나타날 세계의 적을 처치하는데 힘을 보태주세요. 당신이라면 그와 얼마간 호각세로 싸울 수 있을 겁니다. 혹 내키지 않는다면 가만히 중립을 지키셔도 좋습니다. 그에게 일체의 도움을 주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하면 저희 쪽에서 그에게 그간 저지른 수많은 악행에 대한 업보를 지게 할 것입니다.” “…….” 카네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대단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걸로 보였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카네스가 고개를 들었다. 아퀴로아는 내심 기대하며 카네스의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 거야?” 카네스가 불쑥 말했다. 그 한 마디는 장내에 깔린 무거운 공기를 한 번에 날려버렸다. “그게 나한테 중요한 일이냐고?” “중요하고말고요. 세계의 미래가 달린 일인데 이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아퀴로아는 여전히 부드러운 말투로 이야기했지만 카네스의 심경에 변화가 일어난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래? 그럼 당신의 제안이 내게 무슨 이익이 되는데?” 카네스는 묻고 있었다. 내가 너희들을 도와주면 너희들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아퀴로아는 당혹감에 휩싸였다. ‘뭐 저렇게 천박한 드래곤이 다 있지?’ 제멋대로인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명색이 은자의 탑의 수호자라 불리는 카네스가 저렇게까지 뻔뻔하게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적어도 천 년을 넘게 산 존재가 할 만한 행동이 아니다. 아퀴로아는 감정을 추스리며 항의하는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세상이 멸망하는 걸 그저 지켜보겠다는 겁니까?” 그러자 카네스는 기다렸다는 듯 되받아쳤다. “그러는 당신들은 재앙을 해결하기 위해 뭘 한 거지?” “…?!” 청산유수 같은 언변을 자랑하는 아퀴로아였지만 묵직한 사실 적시에 일순 말문이 막혔다. “우리는 그저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어떤 방법?” 카네스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준비되고 있는 게 있지만 지금 단계에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퀴로아의 답변은 점점 궁색해져 갔다. 분위기는 자연스레 카네스에게 넘어갔다. 그녀는 아퀴로아를 향해 코웃음을 한 차례 치고는 얕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자고.”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아퀴로아는 급한 불을 껐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퀴로아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특유의 경쾌하고 격식없는 어조로 불쑥 말했다. “당신 말 들으면 밥 한 끼 얻어먹을 수 있어?” 파충류를 닮은 노란 눈동자가 묘한 빛을 내뿜었다. 아퀴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식사야 대접해드릴 수 있죠. 프로크루스테스의 식당엔 훌륭한 주방장이...” “내가 원하는 건 고급 요리인인데?” “고급 요리인?!” “응. 고급 요리인.” 세상에 요리인은 많아도 고급 요리인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 드래곤,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아퀴로아의 말문이 재차 막혔다.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자 아퀴로아는 이수진 쪽을 응시했다. 이수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카네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는 당신을 죽이게 될 거예요. 당신은 물론 당신의 위대한 혈족까지도. 그런데도 가만히 좌시하고 있을 건가요?” 이에 카네스는 이수진은 아까와는 달라진 얼굴로 응시하며 쾌활하게 물었다. “네 말대로라면 회귀자. 오늘 당장 그 인간을 만난다고 치자구. 그러면 그 인간이 날 죽이기라도 한단 말이야?” “…….” 말 속에 뼈가 있다는 것 정도는 이수진도 알 수 있었다. 생각 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카네스는 시간을 주지 않았다. “오늘 그 인간을 만나면 그 인간이 날 바로 죽이냐고?” “그건 알 수 없죠.” “그래?” “하지만 한 가지는 장담할 수 있어요. 제가 본 미래에서 당신은 지금으로부터 3년 뒤에 세계의 적에게 죽임을 당해요.” 그 말을 들은 카네스는 코웃음을 쳤다. “3년! 3년이라!” 이수진은 그 의미를 명확히 알 수 없었지만 상황이 그들이 의도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이윽고 청천벽력과 같은 카네스의 발언이 장내에 울려퍼졌다. “미안하지만, 난 당신들의 제안을 거절하겠어.” 카네스는 기지개를 쭉 펴고는 아퀴로아와 이수진을 뒤로 한 채 앞으로 걸어갔다. “후회하게 될 겁니다.” 아퀴로아가 그녀의 등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카네스는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더니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떤 고룡이 이런 말을 남겼지. 두 발로 걷는 이들의 말을 믿지 말지어다. 그들의 약속이란 건 그들의 짧은 인생만큼이나 덧없고 무의미한 법이니.” 그 말을 들은 아퀴로아는 교섭이 완전히 틀어진 것을 느꼈다. ‘역시 아무개의 말대로 이 드래곤은 세계의 적을 편들고 있군.’ 이수진이 본 미래. 그곳에서 카네스는 세계의 적의 몇 안 되는 조력자였다. 그녀가 구체적으로 재앙에 가담한 정황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세계의 적은 그녀에게 모종의 지원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카네스는 세상이 파멸로 치닫는데 협조했다. 세상과 철저히 고립된 김성철이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최강의 은자와 친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이수진은 둘 사이에 모종의 협의가 있다고 추정하고 있었다. 그렇게 믿을만한 정황도 있었다. 악마왕이 죽은 해의 가을, 세계의 적은 은자의 탑에서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니 말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이수진은 아퀴로아와 함께 이곳에 왔지만 카네스의 선택은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단 하나. 제거뿐이다. 아퀴로아는 이수진을 응시했다. 이수진의 눈빛은 이미 달빛처럼 차가운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스르릉. 찬탈자의 가시가 어둠 속에서 어둠을 닮은 시커먼 칼날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방의 어둠 속에 숨어 있던 푸르스름한 괴인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고 집행자 아퀴로아는 그 중앙에 서서 영혼창고에서 긴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카네스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머, 설마 이럴려고 날 부른 것이었어?” 카네스는 언제든 드래곤으로 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아퀴로아 패거리도 그에 대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퀴로아가 영혼 창고에서 푸른 수정을 꺼내자 푸르스름한 괴인들의 몸에 검은 그림자 같운 기운이 서렸다. 카네스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범상치 않은 기운이 담겨 있음을 간파했다. 이윽고 그녀의 동공 위에 짙은 의혹이 떠올랐다. ‘설마 이건 재앙의 기운? 그럴 리가. 한낱 인간 따위가 어떻게 이런 힘을 다루는 거지?’ 괴인들이 수정으로부터 힘을 얻는 동안 이수진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카네스는 만만찮은 싸움이 되리라는 걸 느끼며 자신을 제약하고 있는 봉인을 풀려고 했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상대하는 수밖에.’ 드래곤 대 아퀴로아. 그 일촉즉발의 싸움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출입구 쪽에서 폭발음이 연이어 들려왔고 검은 연기가 방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갑작스런 소음에 현장엔 정적이 찾아왔고 모두의 시선은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이윽고 검은 연기 너머로 한 사내의 인영이 나타났다. 장내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보았다. 해진 코트에 낡은 청바지라는 허름한 복색. 하지만 그 초라한 외견은 손에 쥔 하나의 무기의 존재만으로 모두 상쇄된다. “…….” 팔 가라즈를 든 자, 김성철이 무대에 등장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김성철은 느릿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카네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하는 거야? 밥이 식잖아?” “세계의 적!” 카네스의 입가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김성철은 카네스 앞에 서서 아퀴로아와 그리고 그림자 속에 숨은 이수진을 가리켜 팔 가라즈를 들었다. “대륙이걸이라는 작자가 한다는 짓이 고작 이간질인가? 기도 안 차는군.” 김성철의 몸에 일순 신적인 힘이 흐르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의 전신에서 범접할 수 없는 무형의 투기가 장내를 뒤덮었다. 그 투기에 닿은 아퀴로아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꼈다. ‘이 인간, 대체 얼마나 강한 것이지?’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이수진도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녀는 은신을 풀고 아퀴로아 뒤에 나타나 숨을 헐떡거렸다. 김성철의 동공이 이수진을 향했다 다시 아퀴로아를 향했다. “너와 같은 이름을 쓰는 노파는 내게 죽었다.” 다음 순간 팔 가라즈가 힘껏 바닥을 내려쳤다. 어마어마한 파공음과 함께 공선 밑바닥에 휑한 구멍이 뚫렸다. 김성철은 카네스를 향해 말했다. “여긴 내게 맡기고 식사나 하러가라고. 좀 식긴 했지만 내 이름을 걸고 맛은 보장하지.” “그래도 될까?” “이 친구들한테 진득하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카네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김성철이 뚫어놓은 구멍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잡아라!” 아퀴로아가 앙칼진 목소리로 명하자 푸른 괴인들이 카네스를 쫓아 엄청난 속도로 추적했다. 하지만 그들의 추격은 단 한 번의 휘두름에 의해 좌절됐다. “모처럼 온 손님의 앞길을 막으면 쓰나?” 김성철의 발밑엔 원형을 알아보기 힘든 푸른 점액들이 여기저기 튀어 있었다. 아퀴로아는 지체 없이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전 승무원에게 명해라. 즉시 함교에 집결해 이 저주 받을 재앙의 근원을 처치하라고!” 하지만 그녀의 명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그녀의 명을 수행할 승무원들은 이미 김성철의 손에 죽었기 때문이다. 한참이 흘러도 아무 반응이 없자 아퀴로아는 다시 한 번, 전보다는 작은 목소리로 긴급명령을 발했다. 김성철은 그런 아퀴로아는 무심한 눈으로 노려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안타깝군.” ======================================= 51. 늦은 만찬 (3) 아무리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많아도 그것이 서류상에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아무 의미도 없다. 아퀴로아는 증원을 부르는 걸 보고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김성철을 보고서야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설마, 이 사내. 여기 오기 전에 내 부하들을 전부 해치운 건가?’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 상황을 달리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아퀴로아는 땅 밑이 푹 꺼지며 끝없이 추락하는 감각을 느꼈다. 절망감이다. 하지만 아퀴로아는 간단하게 자신이 무너지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힘차게 내저으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아무개! 저 녀석을 죽여라!” 이수진은 어둠 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아퀴로아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신화급 영혼각인과 전설급 암살 단도를 이용한 변수라면 저 괴물도 쉬이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 틈을 타서 남은 구세병과 내 잔존마력 전부를 이용해 놈을 밀어 붙인 후....’ 그렇게 생각하려는 찰나였다. 김성철이 움직였다. 그는 먼저 주변에 포진한 구세병을 팔 가라즈도 두들겼다. 퍽! 많이 두들기지도 않았다. 단 일격에 물리내성 90%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지녔다는 구세병을 젤리로 만들었다. 구세병들은 원래 공포라는 감각을 거세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그들의 동료를 너무나도 간단히, 그리고 비참하게 도살하는 김성철을 보자 다른 구세병들이 몸을 격렬하게 떨며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우로로.... 우로로....” 그것은 지옥의 문 너머에서 들려올 법한 스산한 합창이었다. 그리고 김성철은 섬전처럼 움직이며 그 합창을 지워나갔다. 아퀴로아는 떨쳐버렸던 절망감이 다시 목을 옥죄는 걸 느꼈다. ‘아무개! 대체 뭐하는 거냐!’ 지금이 절호의 기회인데 아무개는 나서지 않았다. 김성철의 움직임이 눈동자로 쫓아가기 버거울 정도로 빠르다는 건 알고 있지만 김성철은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다. 어둠 속에 숨은 아무개라면 충분히 한 번 정도를 노릴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구세병이 쓰러질 때까지 아무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야 아퀴로아는 아무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지팡이를 휘저으며 미친 사람처럼 허공에 대고 소리를 쳤다. “이 빌어먹을 소환자 계집. 근본도 없는 회귀자를 받아줬더니 이렇게 배신을 해!” 물론 어둠 속에선 어떤 대꾸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이곳을 이미 벗어났는지도 모른다. 신화급 영혼각인 소실의 힘은 김성철조차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없으므로. 모든 구세병을 처리한 김성철은 이제 아퀴로아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퀴로아는 김성철과의 싸움이 성립되지 않는 걸 알고 있었고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 또한 하나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묻겠다.” 김성철이 말했다. “대답 여하에 따라선 너의 목숨도 살려줄 수 있다.” “그래?” 아퀴로아는 희게 웃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메마른 웃음소리였다. “너에게 줄 건 아무것도 없다.” 아퀴로아의 손이 가면을 덮었다. 검은 그림자와 같은 재앙의 기운이 그녀를 덮었다. 김성철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며 팔 가라즈를 들고 아퀴로아에게 도약했다. 팔 가라즈가 아퀴로아에게 닿는 순간 짤막한 목소리로 가면 너머에서 들려왔다. “태어나지 않은 신을 위하여.” 다음 순간 검은 그림자가 아퀴로아를 완전히 삼켜버렸고 뒤늦게 팔 가라즈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옷자락을 후려쳤다. 가면 안의 육신은 그림자에 먹혀 흔적도 남지 않았다. “…….” 아퀴로아는 사라졌다. 손을 쓸 사이도 없이 스스로를 소멸시킨 것이다. 김성철은 바닥에 너부러진 옷가지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걸로 확실해졌군. 아퀴로아 일당은 재앙의 힘을 부린다.’ 안타까운 일이다. 아퀴로아에게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은. 아무튼 최후의 적이 쓰러지자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가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으.. 끔찍하네. 정말. 오늘 도대체 몇 명이나 죽인 거야? 어휴! 당신 같은 사람한테 물들면 안 되는데!” “…….” 김성철은 이미 물든 거 같은데 라는 말을 목구멍까지 하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왠지 모르게 해서는 안 되는 농담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 가면 쓴 여자도 죽었는데.” “생각 중이다.” 하지만 들인 노력에 비해 별 수확은 없다. 기껏해야 살아남은 승무원을 찾아 고문하는 게 김성철이 떠올린 유일한 방법이긴 한데 실효성에 관해선 본인도 의문이었다. 그때 어둠 너머에서 한 맺힌 여성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난 기억해.” 이수진의 음성이다. 김성철의 투기가 미치지 않는 범위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김성철은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공. 이수진의 목소리가 위치를 바꾸며 계속해서 들려왔다. “일곱 재앙의 무기를 휘두르는 당신에게 죽은 내 동료, 친구,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 김성철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나타났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어둠 속에서 조잘거리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라. 당장 죽이진 않을 테니.” “당신은 언제나 거짓말을 이야기하지.” “뭐라고?” “난 들었어. 당신이 어떻게 사람들을 배신했고 그 믿음을 저버렸는지를. 당신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스스로 알 거 아냐? 당신이 뭐로 이루어진 인간인지.” “적당히 해라.” 김성철의 손엔 어느새 녹슨 단창이 들려 있었다. 재앙의 무기 움 브루크다. 어둠 속에서 처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그 저주받을 무기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미쳐 죽게 만든 것도 모자라 끝없는 심연으로 빠지게 내버려뒀지.”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아무개의 마지막 음성이 바람에 실려 희미한 형태로 김성철의 뇌리에 새겨졌다. “난 결코 잊지 않을 거야. 그리고 반드시 갚아줄 거야.” 그때 움 브루크가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날아갔다. 움 브루크는 허공을 가를 뿐, 유효타를 가하진 못했다. 김성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영혼각인 소실은 몸을 숨기는 것뿐만 아니라 형체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건가?’ 어둠 너머 흐릿한 음성이 마지막으로 들려왔다. “증오해 마지않을 신의 도구.” 그 희미한 한마디는 김성철을 일순 얼어붙게 만들었다. 김성철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떨그렁. 그리고 표적을 놓친 움 브루크가 바닥에 떨어지며 묘한 울림을 어두운 선실 안에 떨쳐 올렸다. 아래로 뚫린 구멍 너머로 차가운 밤공기가 스산한 소리를 내며 밀고 들어왔다. * “천 년 동안 갖은 요리를 다 맛보고 다녔지만 이렇게까지 훌륭한 정찬은 태어나서 처음이야.” 카네스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배를 두들겼다. 식탁 위에 수북이 쌓여 있던 접시는 모두 깨끗이 비워진 상태. 30인분에 가까운 요리였지만 카네스한텐 가뿐한 모양이었다. 바라마지 않던 칭찬을 들었건만 김성철의 표정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이수진이 사라지면서 남긴 마지막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무거운 돌처럼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카네스는 그런 김성철을 곁눈질로 보다가 기회를 봐서 슬쩍 입을 열었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고 있어? 설마 회귀자 따위가 본 미래가 실현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전혀.” “그런 것 치고는 기분이 썩 안 좋아 보이는데?” “넌 내가 두렵지 않나?” 그건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김성철 스스로도 내뱉고도 살짝 후회할 정도로. 왜냐하면 그의 질문엔 중대한 결례가 묻어 있으니까. 카네스는 살짝 놀란 것처럼 보였지만 별 신경 쓰지 않는 듯 이를 드러내며 웃으며 말했다. “내가 왜 당신을 두려워해야 돼? 당신은 인간이고 나는 드래곤이야. 드래곤인 내가 당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잖아? 게다가 혹 그 여자 말대로 당신이 재앙이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하고는 관계없는 이야기고.” “그렇군.” 김성철은 짤막하게 말했지만 그의 눈동자 위로는 복잡한 감정이 지나가고 있었다. 재앙과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고 세계의 적이 된 이래 김성철의 정체를 알고도 우호적으로 대한 이는 카네스가 처음이다. 그런데 그녀는 정작 재앙과는 관련이 없는 존재. 김성철이 재앙을 해결하든 해결하지 못하든 그녀로선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런 존재가 처음으로 호감을 표시했다는 사실에 김성철은 기묘한 모순을 느꼈다. “기분 안 좋아?”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딱히. 안 좋을 것도 없지.” 김성철은 담담한 어조로 말하며 탁자 위에 올려 놓은 술잔을 가져가 입에 댔다. 쓰고 비릿한 포도의 끝 맛이 느껴진다. 카네스가 사온 싸구려 술이다. 김성철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카네스는 그런 김성철을 파충류의 눈동자로 예의주시하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당신. 다음 재앙이 뭔지는 알고 있지?” 그녀의 물음에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의 재앙 말인가?” “응. 어떻게 생각해? 세 번째 재앙에 대해서.” 세 번째 재앙은 다른 두 재앙과 명확히 구분된다. 대적해야 될 적이 명확하게 적시된 다른 두 개의 재앙과 달리 세 번째 재앙은 모호한 문구로 점철되어 있고 따라서 그 해석을 놓고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재앙의 서는 세 번째 재앙을 이렇게 기술한다. [ 배신자들이 남긴 폐허 위에서 피어오른 희미한 불꽃은 만연한 절망과 죽음을 집어삼키고 대륙 전체를 전쟁의 불길로 뒤덮으리라. 오직 하나의 깃발만이 전화를 꺼뜨릴 수 있겠지만 왕관을 쓴 자들은 각자의 계산에 따라 움직인다. ] 재앙의 주체는 특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왕과 제후들은 세 번째 재앙을 다른 재앙보다는 위협이 덜하다고 보고 있었다. 세 번째 재앙이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재앙 그 자체라면 인간들의 합의만으로 능히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기에. 대륙십삼걸의 말석에 자격미달의 상인이 들어가고 아퀴로아가 주재하는 세계의회라는 것이 정기적으로 개최되고 각 나라를 움직이는 구속력을 지니는 것도 모두 세 번째 재앙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최강국 인간제국의 황제가 세계의회에 막대한 힘을 실어주는 이상, 인간들의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일은 희박하다. 혹 전쟁이 벌어진다고 해도 하늘을 뒤덮은 공선 함대에 의해 전쟁은 금방 종결될 것이니 말이다. 한때 세계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김성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세 번째 재앙에 관해서는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 재앙은 어렵지 않게 해결 될 것이다.” 그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래?” “이 땅의 권력자들을 칭찬하고 싶진 않지만 적어도 그 부분에 관해서는 성과를 이루어 냈으니까.” 김성철의 눈앞에 과거의 풍경이 그림처럼 스치듯 지나갔다. 제국대원수 시절, 화려하고 꽉 끼는 불편한 정장을 입고 각국을 돌아다니며 왕과 제후들을 설득하던 속된 말로 지랄 맞게 힘든 나날이었다. 하지만 낙이 아주 없던 것도 아니었다. 공허했던 마음에 한 줄기 빛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있었다. 비록 그 고생의 산물을 아퀴로아라는 베일에 싸인 노파가 낼름 삼켜버리긴 했지만 김성철은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세계의회가 만들어짐으로서 세상은 세 번째 재앙을 이겨 낼 면역력을 얻게 되었으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카네스의 견해는 김성철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인간이란 상상 이상으로 어리석은 존재들이야. 어떤 껍질을 걸치고 어떤 모자를 썼건 마찬가지야. 아무리 현명한 자라고 해도 눈앞의 탐욕 앞에선 못난 짓을 저지르기 마련이거든.” “그땐 내가 나서야겠지.”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고는 싸구려 술을 마저 들이켰다. 카네스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뭔가 말하려고 하다가 손을 입으로 가렸다. ‘입이 근질근질하지만 여기선 참아야겠지.’ 대신 그녀는 다른 주제를 내놓았다. 카네스는 품속에서 두 권의 마법서를 꺼냈다. “저기 책 아가씨에게 이야기 들었어. 영혼석은 여섯 갠데 익힌 마법학파가 하나뿐이라며?” 카네스가 마법서를 내밀자 베르텔기아가 기다렸다는 듯 책 두 권을 물고 김성철에게 날아갔다. “변변찮은 하급 마법서지만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거야. 마법 지문에 구애받지도 않기도 하고.” 책을 받아 든 김성철은 즉시 책의 제목을 확인했다. 오우거도 익힐 수 있는 마법 시리즈 : 플라이 자신만의 주문을 만들어보자! 주문술식 입문서 카네스의 말마따나 그야말로 잔챙이 마법서들이다. 하지만 그 효용을 생각한다면 마냥 잔챙이라고 치부할 순 없다.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 같은 시각. 인간제국 동부의 변경. 수백 척에 이르는 공선 함대가 흐린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그 반대편엔 산에 필적할 정도로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에크하르트의 거신 3기가 폐허가 된 도시 위에 나란히 서 있었다. 함대와 공선의 중간지대엔 황금갑옷과 투구를 쓴 건장한 사내가 검으로 땅을 짚고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윌리엄 퀸튼 말버러. 대륙을 대표하는 최강국 인간제국의 황제다. 그 반대편에 선 것은 황제와 대조적으로 왜소한 체구에 넝마주이를 걸치고 도적처럼 천으로 얼굴을 가린 초라한 사내였다. 하지만 그 사내의 이름값은 결코 황제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칠영웅 가시옹인가?” 황제가 위엄 있는 음성으로 질문을 던지자 왜소한 체구의 사내는 등 뒤에 매고 있던 기형적인 형태를 지닌 대검을 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키키... 근본도 없는 소환자가 이 땅의 황제를 칭하다니 세상도 갈 때까지 갔군!” 대검의 칼날이 죽음의 그림자와 같은 암운을 드리우며 기이한 울음 소리를 냈다. 뒤에 도열한 제장과 병사들이 깜짝 놀라 일제히 검을 빼들었지만 정작 그 검 앞에 선 황제는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호오? 제법 황제라고 불릴만한 배짱은 있는 모양이군.” 가시옹은 붉게 충혈된 뒤틀린 눈으로 황제를 노려보며 검은 암운이 드리운 대검을 검집에 넣으며 말했다. “그럼 슬슬 들어볼까? 크크크... 그쪽의 조건이란 걸?” ======================================= 52. 뜻밖의 재회 (1) 현재 김성철의 직관력으로 한 번에 습득하지 못할 마법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김성철은 한 번에 두 권의 책 전부 머릿속에 담았다. 그의 주문 목록에 비행마법인 플라이가 추가됐고 능력 중에 주문술식 구성이 추가됐다. 김성철은 옛 영주의 저택에 기거하며 새로 익힌 능력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 먼저 플라이. 이 마법은 레비테이션과 더불어 마법사에게 하늘을 나는 힘을 주는 비행마법이다. 마법사들은 보통 레비테이션을 선호한다. 엄밀히 말하면 비행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체공에 가까운 능력을 주는데 그치지만 레비테이션은 한 번 시전하면 일정시간 동안 다른 영창 없이도 사용자에게 고속으로 체공한 채 지형을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반면 플라이는 하늘 위를 자유자재로 비행할 수 있지만 비행능력을 이어나가려면 상시 영창할 것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플라이를 통해 비행하는 동안 다른 마법을 일체 쓸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플라이는 그 높은 기동성에도 불구하고 먼 거리를 자주 이동해야 하는 마녀들이나 쓰지 다른 일반적인 마법사들에게 외면 받는 2류의 마법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사자토스의 다중영창은 이 플라이의 치명적인 단점을 완전히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와 함께 저택 주변을 비행하며 다중영창의 다재다능한 기능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마력을 강하게 쓰면 쓸수록 속도가 빨라지는 구조였군.’ 김성철은 가속과 감속이라는 기본적인 기동을 시작으로 급정지와 급가속, 공중에서의 갑작스런 방향 변환, 비행 중의 마법공격, 그리고 마편 카산드라 등의 도구를 이용한 복합적인 기동 등을 연습했다. 그것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었지만 수많은 전투로 단련된 김성철은 하나씩 하나씩, 느릿하지만 확고한 형태로 다중영창 플라이의 이용법을 몸에 익혀 나갔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김성철은 자신이 요구하는 대로 스스로를 움직일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르렀다. 이 새로운 능력은 거신 같은 거대한 적, 사자토스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며 귀찮게 하는 적을 상대로 지금까지 김성철이 하지 못했던 싸움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다음으로 김성철이 도전한 것은 주문술식이라 불리는 설치형 결계의 구축이었다. 흔히 마법 술식이라고도 불리는 이 마법은 일정공간에 주문의 구성요소가 되는 룬을 조합해 술자가 원하는 마법적인 효과를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흔히 주문 트랩이라 불리는 것들이 주문술식의 대표적인 사례다. 주문 술식은 한 번 설치만 하면 별도의 영창과 추가적인 마나 소모 없이도 술자가 의도한 강력한 효과를 부여할 수 있는 반면, 제대로 쓰는 게 어렵고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 등의 제약이 있어 마법사들 사이에선 호불호가 갈리는 마법이다. 김성철도 이전엔 이런 주문술식이 경계 결계 따위 방범용 이상으론 별 쓸모가 없다고 보는 입장이었지만 마라키아나 사자토스 같은 최상위급의 마법사들과 싸우면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적어도 방어적인 측면에서 김성철이 보기에 주문술식을 능가할 마법은 없어보였다. 제약의 가짓수, 주문의 대가 등을 설정하기에 따라 김성철의 신적인 힘이 실린 일격을 막아낼 수 있는 술식도 만들어낼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지금은 초보적인 단계. 김성철이 익힌 주문 술식은 최하급 단계로 조합할 수 있는 룬의 숫자는 3개에 지나지 않고 가지고 있는 룬의 종류도 몇 개 되지 않는다. 상급의 주문 술식 마법서를 구할 수 있다면 조합 가능한 룬의 숫자와 종류를 늘릴 수 있겠지만 김성철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경험 삼아 연습해볼 생각이었다. 현재 김성철이 익힌 주문술식 입문서에 담긴 룬의 종류은 전부 네 가지로 순서대로 나열하면 그릇, 제약, 조건, 강화. 등급은 모두 최하급이다. 여기서 제대로 된 주문술식은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주문술식 방아쇠 역할을 하는 조건의 룬과 핵심이 될 마법을 담는 그릇의 룬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강화의 룬과 제약의 룬은 주문 술식의 위력을 증폭시키는 동일한 역할을 맡고 있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명백히 다르다. 강화의 룬이 추가적인 마력을 소모해 주문 술식의 위력을 증폭시키는 반면 제약의 룬은 술자에게 특정한 불이익을 줌으로써 주문의 위력을 증대시킨다. 주문 강화 효율은 제약의 룬 쪽이 훨씬 높지만 그만큼 위험부담도 높기에 양날의 검과 같다. 이전에 나하크의 왕국에서 마라키아가 펼쳤던 물리방어 술식은 제약 조건을 극도로 강화함으로써 주문의 위력을 비약적으로 증폭했었다. 그러나 현재 김성철에겐 방어 관련한 마법이나 룬이 없는 관계로 지금 그가 만들 수 있는 것은 글레어를 이용한 마법 함정 정도가 전부였다. 만드는 법은 간단하다. 그릇의 룬에 마력을 소모해 글레어를 담은 후, 조건의 룬에 발동조건을 설정한다. 김성철은 가장 기초적인 특정 영역에 대상이 침입할 경우 자동으로 발동되는 조건을 설정했다. 마지막으로 김성철은 마력을 추가적으로 소모해 강화의 룬을 붙여 술식을 완성했다. 설치형 마법 함정의 경우엔 제약의 룬이 들어갈 여지가 없으므로 제외했다. 이제 남은 건 술식을 시험하는 것.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이용하고 싶었지만 베르텔기아가 죽어버릴 수도 있기에 직접 자신이 만든 술식에 뛰어들었다. 효과는 일반적인 마법 트랩과 같았다. 조건의 룬으로 설정한 영역에 들어가는 순간 그릇의 룬에 담긴 글레어가 강화의 룬으로 증폭된 상태로 김성철을 향해 날아왔다. 글레어의 특성상 대단히 피하기 어려우므로 글레어의 섬광은 김성철의 몸에 그대로 꽂혔다. 치이익- 코트 일부분에 조그만 구멍이 났다. ‘이런! 웃통 벗고 할 걸.’ 아무튼 주문 술식의 연습은 플라이 연습보다 훨씬 쉽게 전개됐다. 당장 김성철이 지닌 마법의 가짓수가 얼마 되지 않아 딱히 룬을 더 만진다고 뾰족한 묘안이 생기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주문 술식의 룬 구성을 간발의 차로 목숨이 오가는 전투 속에서 어떻게 빠르고 효율적으로 하냐인데 그 부분에 관해서는 상급 주문 술식을 얻은 다음 생각해볼 문제이리라. 그렇게 대략 10일이라는 시간 동안 김성철은 새로운 마법들을 몸에 익혔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조로운 건 아니었다. 안개여정을 통한 카벙클 환심 사기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무개 때문이었다. 김성철의 초인적인 인지능력으로도 감지할 수 없는 그녀의 위치를 모르는 이상, 사용하는 순간 무방비 상태에 접어드는 안개여정은 쉽사리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찰나에 베르텔기아가 아이디어를 하나 냈다. “그 여자가 못 들어오는 곳에서 안개여정을 쓰면 되지 않을까? 무식하게 힘만 센 당신이라면 그런 장소 얼마든 만들 수 있잖아? 굴을 판다던지. 바위로 집을 짓는다든지 말이야.” 베르텔기아가 평소와 달리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꿈의 세계에서 베르텔기아는 자신의 원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성철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지만 베르텔기아는 인간 상태의 자신의 모습에 대단한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틈만 나면 묻지도 않은 과거사를 은근슬쩍 꺼내곤 했다. “마을 밖으로 나가면 나 따라다니는 남자애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코디아 마을의 여왕벌이 바로 내 별명이라고.” “시끄럽다.” 물론 김성철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만 영혼석을 개방해야 된다는 베르텔기아의 의견엔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숲속을 떠돌다가 그가 좋아하는 적당한 동굴을 발견했다. 동굴 안엔 호랑이 곰 일가가 살고 있었는데 소환궁전 때와 달리 지금은 그다지 미덥지 못한 존재라 전부 쫓겨났다. 거처를 구한 김성철은 장기간 먹을 수 있는 물과 식량을 동굴 안에 비축한 다음 오랜만에 토포로 마을로 향했다. 현재 마을을 가장 뜨겁게 달구고 있는 화제는 아퀴로아의 느닷없는 실종이었다. 기구에 타고 있던 경비병과 늑대인간 시체가 발견됐을 뿐, 대륙이걸 아퀴로아는 물론이고 순백의 공선이 송두리째 사라진 괴이한 사건은 흉흉한 소문이 연이어 들려오는 현재 시국에서도 대단히 큰 사건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물론 그 내막을 알고 있는 건 김성철과 카네스 정도. 아퀴로아의 기함 프로크루스테스는 은자의 탑 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방대한 삼림지대 속에 숨겨져 있다. 문제는 이 사건이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라는 것. 세계 의회에서 이 사건과 연관이 있는 카네스의 소환을 은자의 탑에 정식으로 요구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아퀴로아가 카네스를 부른 건 사실이기 때문에. 아퀴로아와 관련해 세계의 적에 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은폐를 했거나 아니면 유일한 증인인 이수진이 보고를 하지 않았거나 등의 경우의 수가 있지만 김성철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알고 싶은 건 이미 죽은 인간에 관한 소식이 아니라 바깥의 동정, 특히 칠영웅의 행적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 있소.” 김성철은 알음알음으로 어렵게 도적 길드에 몸을 담고 있다는 정보통을 구해 외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보름 전에 들었던 소식과 큰 차이는 없었다. 베르텔기아의 이름을 딴 거신들은 대륙 북동부를 초토화시키고 있고 이를 막아야 할 의무가 있는 제국들은 그저 방관만 하고 있다는 암울한 소식.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았다. 얼굴에 세로로 길게 칼자국이 나 있는 도적은 추가 금액을 요구했다. 김성철이 금화 한 닢을 건네자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돌아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스로를 재앙이라고 일컫는 사내가 인간제국 동부 변경에 거신들을 이끌고 나타났다고 하더군. 이미 동부변경의 관문인 아르카데아는 개박살이 난 모양이야. 인간제국의 황제는 즉각 토벌령을 내리고 전 함대를 끌고 일전을 준비한다고 하더군.” 금화 한 닢으론 빈약한 정보다. 게다가 외지인 출신인 도적 길드원의 말을 곧이곧대로 신용하기도 어렵다. 김성철은 담담한 어조로 도적에게 물었다. “그 거신을 이끈다는 사내의 이름이 뭐요?” 도적은 두건 안에 손을 집어넣어 박박 긁어 이를 한 마리 잡아내더니 그걸 입에 삼키고는 대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가시복. 가시복이라고 하던가?” “가시옹 아니오?”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삐쩍 마르고 볼 품 없는 인간이라고 하더군. 하지만 대단히 무시무시한 검사인 모양이야. 한 자루 대검을 쓰는데 그와 싸운 상대는 모두 삐쩍 마른 미라가 되어 죽어버렸다는 풍문이야.” “…….” 김성철은 턱끝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도적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지만 그가 묘사하는 대상은 칠영웅 중 하나, 영혼을 먹는 자 가시옹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결국 칠영웅들은 동부와 북부의 군소국을 휩쓸고 대륙 중심부의 인간제국을 공격하려 드는 건가.’ 정해진 수순이지만 쉽진 않을 것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했다. 제국엔 황제가 있으므로. 그리고 황제와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대륙의 기득권들이 그를 돕고 있다. 칠영웅에게 강대한 거신이 있다고 하나 황제를 상대로 싸우는 건 지난 오랜 세월 동안 대륙 위에 자리 잡은 범인류의 힘의 총합과 싸우는 것과 같다. 동부와 북부의 군소왕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운이 좋다면 대륙십삼걸들이 칠영웅 중 일부를 처리해줄 수도 있다. 그것은 김성철이 원하는 최상의 결과. ‘하다 못해 시간 정도는 끌어주겠지.’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혼석을 개방하기 위한 긴 칩거로 들어가기 위함이다. 그런데 김성철이 광장을 지날 무렵이었다. 한 사내가 광장 중앙에 서서 마을회관 앞에 위치한 종을 격렬한 기세로 타종하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응? 저 사람은?” 베르텔기아가 얼굴을 알아보고 조용히 속삭였다. 그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수도승 탕그리트였다. 외부인들은 초라한 행색의 그를 보고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지만 마을 출신 사람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저 인간 여기 무슨 낯짝으로 온 거야?” “부끄럽지도 않나.” “노망이라도 든 모양이지.” 싸늘한 비아냥이 광장 여기저기에서 튀어 나왔다. 탕그리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꿋꿋하게 종과 연결된 밧줄을 계속해서 잡아 당겨 종소리를 마을 전체에 울려 퍼지게 했다. 결국 마을 회관 앞에서 촌장과 그 측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하는 짓입니까? 탕그리트 경!” 풍채 좋은 촌장이 탕그리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러자 수도승은 비로소 종을 치는 걸 멈추고 촌장과 그리고 자신을 싸늘한 눈으로 돌아보는 마을사람들을 돌아다보고는 소리쳤다. “지금 이렇게 태평하게 지내고 있을 때가 아니오. 마을이 위험하오!” ======================================= 52. 뜻밖의 재회 (2) 격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아무도 그의 말에 귀담으려 들지 않았다. 수도승에 대한 적의와 혐오가 무거운 침묵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고 기세 좋게 종을 치던 탕그리트의 어깨에 실린 힘도 점점 빠져나갔다. 그럼에도 수도승은 자신을 향한 눈동자들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좌중들을 향해 말했다. “인스반트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소. 그것도 상당한 규모로. 단순한 충돌을 빚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전쟁을 벌일 기세로 준비를 하고 있는 걸 난 봤소.” 수도승의 목소리엔 구구절절이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의 심장엔 닿지 않았다. 사람들은 냉담하다 못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피난민이 우리를 친다고요? 은자의 탑의 가호를 받는 우리들을?” 젊은 사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것을 필두로 탕그리트를 향한 반론이 일제히 쏟아졌다. “카네스님이 있는데 어찌 동부의 이교도가 우리를 공격한단 말이지?” “카네스님이 나설 것도 없이 마을 외곽의 외국 공선 수비병력 선에서 정리될 거 같은데.” 비처럼 쏟아지는 반론은 곧 탕그리트 본인에 대한 비난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마을 사람들이 수도승에 대해 어느 정도의 분노와 적대감을 지녔는지 적나라한 언어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중 나이 지긋한 외팔이 노인의 말은 마을 사람들이 탕그리트에 대해 가진 감정을 한마디로 축약했다. “의무와 서약을 저버리고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무참하게 죽게 내버려 둔 당신의 죄는 마을 사람들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흉터로 남아 있소. 당신이 뭘 하든 뭘 어떻게 하든 그 흉터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오.” 그 말은 어떤 비난보다 탕그리트의 심장을 후벼 판 것 같았다.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쏟아지는 수많은 비난을 묵묵히 받아들이던 탕그리트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두건을 눌러 쓰고는 말없이 광장을 떠났다. 툭. 돌멩이 하나가 뒤에서 날아와 탕그리트의 발치에 떨어졌다. 탕그리트는 고개를 돌려 뒤쪽을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엔 감출 수 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범인은 군중 뒤에 가려져 있었고 찾을 수 없었다. 과거의 영주는 고개를 돌려 그를 따르는 유일한 존재인 남작을 향해 걸어갔다. 탕그리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광장엔 떠들썩한 술렁임이 일었다. 김성철은 잠시 광장에 머물러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변변찮은 이야기만 오갔다. “저 아저씨. 오래 살겠어.” 베르텔기아가 짤막한 감상을 말했다. 반면 김성철은 이 일은 남의 일처럼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다. 의도야 어찌됐든 김성철은 탕그리트에게 목숨을 빚졌다. 아무개까지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판명된 이상 탕그리트의 은혜가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 “…….” 김성철은 누구에게도 손을 벌리지 않고 그리고 손을 내밀지도 않는 주의지만 받은 것은 반드시 갚는 사람이다. 김성철은 조용히 늙은 영주의 뒤를 따랐다. * 마을 외곽의 낡은 오두막은 평소보다 초라하고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김성철은 오두막에 들어가기 전 안의 동정을 소리로 살폈다. 슴슴한 담배 냄새가 흘러나올 뿐 별 다른 기척은 없었다. “그 아무개라는 여자가 우리를 쫓고 있으면 어떻게 하지?” 베르텔기아가 오두막 앞에서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확실히 성가신 존재다. 하지만 이미 그 존재가 알려진 이상 아무개가 평상시의 김성철을 상대로 암습을 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언제 어디서 나타나든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녀는 한 줌 피떡이 되게 될 테니까. 게다가 김성철은 나름의 해결책도 가지고 왔다. 마을의 마법 상점에서 구입한 경계결계 주문서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김성철은 스크롤을 찢으며 나타난 마법진의 문양을 보고 그 스크롤이 최소한 다섯 개 이상의 룬을 조합해 만든 술식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언제 기회가 되면 등급이 높은 주문술식 마법서를 구입해야겠군.’ 경계결계를 펼친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주머니에서 꺼내놓았다. “잠깐 여기서 놀고 있어라.” 베르텔기아는 바로 남작에게 날아가 인사말을 건넸다. “안녕 귀염둥이.” 김성철은 조용히 낡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탕그리트는 흔들의자에 몸을 기대 담뱃대를 물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의외로 평안해보였는데 김성철을 보자 물끄러미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여긴 어쩐 일이오? 떠난 줄 알았는데.” “광장에서 당신이 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성철은 문가에 서서 바로 본론을 꺼냈다. 탕그리트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파이프를 빨아들였다 한숨과 함께 연기를 뿜어냈다. “갈라티아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인스반트 사람들이 쇠붙이를 모아 무기를 만드는 걸 보았소. 피난민 중 하나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사냥에 쓸 무기를 만든다고 둘러댔지만 헛소리지! 나 또한 전장에서 구른 몸인데 그런 거짓말이 통하겠소?” “하지만 그렇게 걱정할 사안이 아닌 것 같습니다. 유사시엔 은자의 탑이 지켜줄 테니. 게다가 사람들이 말하는 카네스도 있고.” 그 말에 탕그리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은자의 탑은 결정적인 순간엔 도움이 되지 않소. 십오 년 전에도 그랬지. 조국의 패잔병들이 마을을 습격했을 때 그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문을 굳게 걸어 잠갔소.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있을 법한 이야기다. 은자의 탑은 기본적으로 세속과 거리를 둔 집단. 그들의 임무는 탑을 원래의 상태로 유지하며 재앙의 서를 지키는 것이다. 탑에 위협을 가할 정도의 외적이 나타난다면 문을 걸어 잠그고 나가지 않는 것이 그들의 최선이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카네스님도 도움이 못 될 공산이 크오. 소문이 파다하거든. 카네스님이 세계의회에 출석하리라는. 인스반트 놈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수호자가 없을 때를 골라 공격을 해오겠지.” 탕그리트는 모든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마을을 떠나는 건 어떻소? 어차피 마을 사람이 당신을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데 망하든 말든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게 아니오?”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여분의 금화를 꺼냈다. “이 정도면 다른 곳에서 얼마든지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 거요.” “돈도 많군.” 탕그리트는 김성철의 재력에 찬탄하는 듯 입을 벌리며 탄성을 내뱉었지만 이내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끌리는 제안이지만 그럴 수는 없소.” “이유가?” 김성철의 물음에 탕그리트는 쓸쓸히 웃으며 말했다. “난 여길 떠나지 않을 것이오.” 그 한 마디엔 말 이상의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김성철은 그제야 수도승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이 남자. 죽을 장소를 찾는 모양이군.’ 김성철은 집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옛 왕국의 문장이 그려진 방패를 응시했다. 비록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은 악의 제국이라 불렸지만 김성철은 멸망해가던 나라를 지키던 기사들의 고결함과 병사들의 끈질김을 기억하고 있다. 그 기사 중 한 명이었던 탕그리트에겐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목숨보다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최선일까? 김성철은 문득 그런 의문을 느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마을을 위해 희생한다고 해서 평가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낙인은 한 번 찍히면 지워지지 않는다. 세계의 적이 된 이후 김성철은 그 점을 쓰라린 경험을 통해 체득했다. 마을의 노인 또한 흉터라는 말을 언급했다. 탕그리트가 마을을 위해 희생한다고 해서 그의 명예는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소수의 사람들이 용기 있는 의견을 내겠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오랜 세월 동안 확대 재생산된 증오와 편견의 큰 목소리에 쉬이 묻혀버린다. 즉, 탕그리트 앞에 기다리는 건 개죽음뿐이다. 게다가 자기만족과 생명 중 어느 것이 중요한 것인지는 굳이 비교할 필요도 없다. ‘취미는 아니지만 한 번 정도는 나설 필요가 있겠군.’ 오두막을 나선 김성철은 곧장 피난민들의 캠프로 향했다. 문제의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서다. 피난민들이 마을을 칠 준비를 한다면 아마도 우두머리가 있을 것이다. 그 우두머리와 협상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예정된 파국을 피할 수 있으리라.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피난민 캠프 일대를 돌아다니며 동정을 살폈다. 적대적인 시선들이 김성철에게 꽂혔지만 드러내놓고 위협을 가하는 이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성철은 캠프 한 가운데서 뜻하지 않은 광경을 목격했다. 캠프 중앙에 한 척의 공선이 높이 자란 나무에 닿을 정도로 아슬아슬할 정도로 낮은 고도에 머물고 있었고 그 주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짐을 하역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곧 화물의 정체를 파악했다. 무기와 갑주들이다. 김성철은 즉시 공선에 걸린 깃발을 찾았다. 하지만 그 공선엔 식별할 수 있는 어떤 깃발도 걸리지 않았다. 즉, 무국적선이다. 해적들이나 하는 짓을 중립지대인 은자의 탑에서 당당히 하고 있는 것이다. 김성철은 당장 배를 박살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좀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마음먹고 가까이 다가갔다. 곧 김성철은 우두머리로 보이는 장년의 사내를 찾아냈다. 여느 인스반트 사람처럼 눈이 움푹 들어가고 편집증적인 시선을 지닌 음울한 관상을 지닌 사내였다. 그 옆엔 마법사로 보이는 화려한 로브를 입은 노인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피난민이라기보다는 공선의 승무원 중 한 명으로 보였다. 그들 사이엔 별 다른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다. 김성철은 계속해서 주변을 관찰했다. 창백하고 음울한 분위기의 인스반트 사람과 확연히 구분되는 관상의 사람들이 캠프 구석에서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겉은 허름한 차림새였지만 김성철은 한 눈에 그들이 숙련된 용병들이라는 걸 파악했다. ‘악취가 나는군.’ 피난민에 대한 대규모 무기 공여, 게다가 숙련된 병력의 파견. 생각보다 일이 커졌다. 탕그리트가 본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모종의 세력이 피난민을 부추겨 일을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다. 우두머리 하나 잡아서 족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일단은 정확하게 현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이는 것이 최선으로 보였다. 특히 우선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 피난민을 지원하는 세력을 파악하는 것이다. 세력의 정체만 알면 그 뒤는 각 세력에 걸 맞는 방법을 쓰면 그만이다. 인간제국이라면 우두머리를 잡아 겁박하는 방법을 쓰면 되고 고대왕국이라면 쟁쟁한 소드마스터 몇 명을 시범으로 죽여 힘의 차이를 느끼게 하면 충분하다. 물론 아퀴로아 측의 공선이라면 한 명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공선을 향해 접근했다. 공선이 드리운 그늘 안으로 들어갈 무렵이었다. 사람을 태운 기구 하나가 장정들이 끄는 밧줄에 끌려 지면으로 하강하고 있었다. 기구 안엔 화려한 의복을 걸친 사람들이 있었는데 피난민의 우두머리와 이야기를 나누던 마법사가 이야기를 중도에 끊고 맞이하러 갈 정도로 중요한 인물들로 보였다. 김성철은 기구에 탄 인물들의 정체만 파악하면 금방 공선의 소속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공선 아래 적재한 화물 사이에 몸을 숨겼다. 곧 기구가 지면에 안착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자들이 차례로 기구에서 내렸다. 그늘 속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김성철은 기이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걸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기구에서 내린 자들은 김성철이 알고 있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한 줄기 의문이 떠올랐다. ‘아니, 저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에?’ 그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에어푸르트의 알투지우스 제로 그리고 그의 손녀 사라사 제로. 김성철과 접점이 있는 두 인물이 은자의 탑 일대에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뀨뀨!”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가면을 쓴 사라사 제로의 품속에서 작은 동물의 소리가 나더니 김성철을 향해 곧장 달려왔다. 하늘 다람쥐다. 그것은 바로 김성철의 다리를 타고 김성철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저리 가! 욘석! 쉬이! 쉬이!” 베르텔기아가 쫓아내려고 해보지만 하늘다람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앗.” 그리고 하늘다람쥐의 주인은 김성철을 발견했다. “당신!” 사라사 제로는 더할 나위 없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김성철을 향해 달려왔고 그 뒤에 서 있던 알투지우스 또한 놀라운 눈으로 김성철을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회는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 52. 뜻밖의 재회 (3) 아늑한 공선의 선실. 사라사가 차를 내왔다. 찻잔에서 풍기는 차의 향기가 범상치 않다. 필경 고가의 품종을 세심하게 손질해 만든 고급품이리라. 선실에 비치된 가구와 집기류도 하나 같이 고가품이었다. “…….” 그 낯선 공간 안에서 김성철은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 지 생각하고 있었다. 장고 끝에 김성철은 한 마디를 던졌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에어푸르트에서 천공의 빛을 익힌 직후 김성철은 마계 최전선으로 떠났고 천공학파의 비전을 전수한 알투지우스와 사라사는 악마군의 난입으로 쑥대밭이 된 에어푸르트를 뒤로 하고 정처 없는 방랑길에 올랐다. 김성철은 그들이 세상의 혼란과 관계없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곳에 들어가 숨어살길 바랐다. 하지만 다시 만난 알투지우스 일가는 김성철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은 형태로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도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 지 모르겠군.” 꽤나 정정하던 알투지우스의 얼굴은 내일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늙어 있었다. 학교를 떠난 이후 겪었던 고초가 주름 진 얼굴 위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반면 사라사는 학교를 떠난 이후 내적인 성장을 이룬 것으로 보였다. 흉하게 일그러진 절반의 얼굴을 은으로 만든 가면으로 가린 그녀에겐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당참과 여유로움, 심지어 은은한 기품마저 묻어 나오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기숙사에서 혼자 살던 철없던 소녀와 동일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던 변화였다. 하지만 김성철 앞에 앉은 그녀는 거추장스런 옷처럼 걸치고 있던 가식을 집어던지고 예전처럼 철없는 소녀로 되돌아갔다. “더럽게 고생 많이 했지. 별의별 시덥잖은 추적자들이 달라붙질 않나. 이름 난 현상금 사냥꾼에게 기습당했을 땐 진짜 죽을 뻔 했다니까.” 사라사는 소매를 걷어 올려 시체처럼 말라비틀어진 팔위에 새겨진 깊은 흉터를 보여줬다. “으...” 그걸 본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베르텔기아는 언데드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라사는 김성철의 주머니 쪽을 힐끗 봤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운 좋게 당신의 부하라는 사람을 만나게 됐어.” “나의 부하?” 김성철의 물음에 사라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슈넬메르커 백작. 기억나?” “슈넬메르커? 그게 누구지? 아, 프리츠를 말하는 건가?” 김성철은 키가 크고 준수한 용모의 금발벽안의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동독 출신의 소환자로 처음엔 적으로 만났었다. 막상막하의 전투에서 김성철에게 패배한 그는 소환광장 동기들과 함께 김성철의 깃발 밑으로 들어왔다. 슈넬메르커는 전면전엔 약했지만 전투를 보조하는 역할에 특출 난 재능을 지닌 마법사였다. 그는 김성철이 지휘하는 빈사의 사자 여단의 부관으로 종군해 여러 차례의 힘든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일조했고 인간제국이 만들어 진 이후엔 군대에서 퇴역, 남부의 비옥한 영지를 경영하는 유유자적하는 삶을 택했다. 그 뒤로는 별 다른 왕래가 없었는데 사라사의 말에 의하면 슈넬메르커는 상관인 김성철이 세계의 적이 되어 실각한 것에 크게 반발했고 김성철의 구명을 위해 음지에서 뜻이 맞는 다른 사람과 은밀히 접촉해 하나의 세력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종말교단. 현재 인간제국의 수도 라그란제의 뒷골목과 지하에서 하나의 유행처럼 자리 잡은 신흥종교다. 그리고 종말교단은 세계의 적 김성철을 숭배한다. 김성철이 마계 최전선에서 십만 악마군을 홀로 물리쳤을 때부터 교세가 팽창되기 시작했고 나아가 김성철이 첫 번째 재앙을 해결했다는 소문마저 돌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져나가고 있다고 한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져버렸군.”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기분이다. 천성적으로 김성철은 누군가 자신을 떠받들어주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자신을 집단적으로 숭배하는 집단이 생기다니. 차라리 세계의 적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라사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성철을 보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건 없어. 당신은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상징이니까. 진지하게 당신에게 기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고.” 더 이상 인간의 음식을 먹지 못하는 사라사는 마력 결정을 식사대용으로 흡수하며 살포시 웃었다. 그녀의 얼굴을 본 김성철은 사라사의 얼굴이 전보다 훨씬 인간다움을 띄고 있는 걸 발견했고 그녀의 몸에 걸린 보호주문이 보다 정려하고 체계적으로 재구성되어 있는 것도 발견했다. ‘잘 관리되고 있군. 부패도 거의 진행되지 않았고 오히려 생기마저 찾은 느낌이야.’ 사라사 제로는 마력 결정을 전부 흡수한 뒤 조곤조곤한 어조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슈넬메르커 백작, 그리고 그와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은 세계의회, 다시 말해 이 세상을 움직이는 기득권에 반발해 일어난 조직이야. 그들은 인간의 해방자를 자처한 소환자 황제가 보인 일련의 행동에 실망하고 그와 대척점에 선 또 다른 소환자인 당신을 황제의 대적자로 내세운 거지.” “그건 참 지랄 같은 일이군.”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일도 아니다. 대륙십삼걸, 세계의회로 대표되는 현 시대의 기득권은 분명 세상에 질서를 가져다주긴 했지만 그에 따른 반발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반란분자들은 기득권이 힘이 너무나 강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기득권의 적으로 낙인찍히는 순간 김성철처럼 또 다른 세계의 적으로 몰릴 테니 말이다. 그런데 김성철은 그 새로운 집단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종말’이라는 단어가 붙은 집단이 자신과 연관됐다는 게 매우 거슬렸다. 김성철은 즉시 그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왜 이름이 종말교단이지? 아무 관계도 없는 날 끌어들여 놓고 종말 운운 하는 건 당사자로서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닌데.” “종말교단은 약칭이야. 정식명칭은 종말을 막으려는 진실 된 자들의 비밀 회합인데 너무 길다보니 언제부터인가 너도나도 종말교단으로 칭하게 된 거지.” “음....” 엉망진창이다. 하지만 김성철은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종말교단의 창시자도 아닌 사라사를 상대로 자세한 걸 물어봐야 그가 원하는 답은 찾기 어려우므로. ‘언젠가 한 번 슈넬메르커를 찾아가야겠군.’ 그렇게 김성철은 종말교단에 대한 의문을 당장은 접어두었다. 지금 그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당신들은 왜 이곳에 온 거지?” 이야기가 잠깐 옆으로 새긴 했지만 사실 이쪽이 본론이다. 김성철은 비록 상대방이 옛날의 친분이 있는 알투지우스와 사라사라고 할지라도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김성철의 달라진 눈빛을 보고 알투지우스와 사라사는 김성철의 내면에 일어난 변화를 눈치 챘다.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눈빛으로 의사를 교환했고 이윽고 사라사가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거두절미하고 결론부터 말할게. 우리는 재앙의 서를 불태우기 위해 이곳에 왔어.” 김성철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 사람들. 아까부터 계속해서 날 놀래 키는군.’ 그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끄러미 응시하자 사라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낭랑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옛 현자들의 말에 의하면 진실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 숨겨져 있다고 하잖아? 재앙의 서만해도 그래.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은 재앙의 서는 그저 다가올 재앙을 미리 기재하는 예언서로 취급했지만 우리들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재앙의 서를 고찰했어.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생각해냈지. 어쩌면 재앙의 서 자체가 재앙을 불러오는 물건이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김성철은 단칼로 베듯 사라사의 주장을 일축했다. “그건 그저 책일 뿐이다.” “하지만 단순한 책은 아니지. 신의 힘에 의해 스스로 기재되는 책이지.” 사라사는 김성철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차분한 어조로 대응했다. “그건 예언서일 뿐이다. 예언서를 불 지른다고 해서 거기 적힌 미래가 실현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어리석기 짝이 없군. 어린아이들이 눈 감으면 밤이라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른 거지?” “당신이 말하는 것이 재앙의 서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이야. 재앙의 서가 그저 예언서라고 못 박아두고 이야기를 짜 맞추지.” “…….” “다른 시각에서 한 번 보자고. 재앙의 서가 예언서라는 투박한 생각 따윈 접어버리고. 뭔가 다른 게 보이지 않아?”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우리는 이렇게 보고 있어. 재앙의 서는 그 자체로 신의 뜻이 기재된, 따라서 거기 적힌 대로 운명적인 힘이 발생하게끔 하는 재앙의 근원이라고.” 중간부터 김성철은 사라사의 말에 흥미를 잃었고 집중하지 못했다. 견해의 차이가 너무 컸고 좁히기에는 너무나 큰 균열이 양자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충격적인 결론을 듣고서도 김성철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날선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땅에 피비린내 나는 용병과 무기를 끌고 왔나?” 사라사와 알투지우스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당황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왜 그렇게 삐딱해?” 사라사가 경직된 얼굴로 물었다. “내가 당신을 다시 만나는 날을 얼마나 기대한 줄 알기나 해?” 사라사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할 무렵 문이 열리며 낯선 사내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나이는 삼십대 중반 가량, 푸른 색 바탕에 노란별의 문양으로 짠 천으로 만든 로브를 걸친 마법사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아서요.” 김성철의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향했다. 모르는 얼굴이다. 반란군에서부터 제국대원수 시절의 기억을 샅샅이 훑어봐도 일치하는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 마법사는 김성철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얼굴에 머무르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인스반트 출신의 마법사 피오니라고 합니다. 변변찮은 몸이지만 종말교단의 목회자 자격을 떠맡고 있습죠.” 그는 방안에 감도는 심상찮은 기류를 느낀 듯 조심스럽게 말하며 김성철과 사라사의 눈치를 살폈다. 김성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천연덕스럽게 자기 자리를 찾아 앉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의도치 않게 바깥에서 잠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라는 점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교단의 목회자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종말의 서를 불태운다고 해서 재앙이 없어진다는 것은 저로서도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라사가 피오니를 노려보며 항의하 듯 소리쳤다. “피오니 씨!” 피오니라는 사내는 사라사를 향해 눈웃음을 지으며 진정하라는 뜻으로 손바닥을 펼쳐 보인 후 김성철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이번 작전의 진정한 목적은 사건을 일으키는 겁니다.” “사건을 일으킨다?” 김성철은 불편한 시선을 던지며 팔짱을 끼고 뒤로 상체를 젖혔다. 피오니란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의 동부와 북부가 속수무책으로 거신들의 발에 짓밟히고 있지만 세계의회와 대륙십삼걸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해야 할 책무를 방기한 셈이지요. 이에 대한 불만이 나날이 증폭됨에도 불구하고 권력자들은 요지부동입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폭발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피오니는 기다렸다는 듯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 판추리아에서 있었던 당신의 활약과 그와 상반된 제국의 만행이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제국은 내게 죄를 뒤집어 씌웠을 텐데?” 김성철은 잿더미로 변했던 판추리아의 정경을 떠올렸다. 판추리아의 총독은 김성철의 이름 아래 죽어 있었다. “인간제국에 정의가 살아 있을 땐 그런 허튼 수작이 먹혔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더는 아닙니다. 민심은 이미 흔들린 지 오래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불을 붙여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죠.” “그 대상으로 은자의 탑을 선택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은자의 탑은 중립세력인데?” “그렇기에 오히려 가치가 있는 것이죠. 세계의회와 대륙십삼걸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역설적으로 재앙의 존재 때문입니다. 재앙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그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을 다른 약소국에 강요했습니까? 그 재앙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은자의 탑에 대한 공격은 이 땅의 권력자들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킬 것이고 나아가 그들의 존재가치를 의심케 할 것입니다.” 피오니는 평범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물 샐 틈 없는 부드럽고 빈틈없는 화법으로 말을 마무리 지었다. 김성철은 달리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럴 이유도 느끼지 못했고. 김성철이 느낀 건 단순했다. ‘닮았군. 20년 전 그때와.’ 김성철이 느낀 건 기시감이었다.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을 상대로 무모한 싸움을 벌이던 시기, 절대적인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어두운 지하실에 모여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쥐어짜내 원대한 계획을 짜내야 했던 장면이 김성철의 눈앞에 그리듯 펼쳐졌다. 그 중심에 섰던 것이 현재의 황제였다. 머리가 명민하고 사람들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 어떤 기상천외한 생각도 무시하지 않았고 함께 장점을 찾으려 애를 썼다. 그랬던 사내가 이제는 타도의 대상이 됐다.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피오니가 회상에 잠긴 김성철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들어 피오니와 그리고 나머지 인물들을 돌아보며 조용히 말했다. “은자의 탑에 대한 공격은 허락하지 않겠다.” 김성철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혹, 당신들이 은자의 탑과 그 앞의 마을을 공격하려 들겠다면 나부터 상대해야 할 것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라사가 번쩍 일어나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알투지우스가 제지했다. 반면 피오니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가 뭔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도 일단 위에서 지시를 받는 입장이라 이런 일이 생기면 위에 보고해야 되는 입장이거든요.” 이에 대해 김성철은 문가로 걸어가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슈넬메르커에게 전해라. 가까운 시일에 찾아가겠다고. 이유는 그때 직접 내 입으로 밝히겠다.” 김성철은 문을 열어젖혔다. 문가엔 수많은 사람들이 서서 김성철을 찬탄과 경배하는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맹목적인 그 시선에 김성철은 메스꺼움을 느꼈다. 뒤에서 피오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당신의 말을 믿고 계획을 취소, 공선을 물리도록 하겠습니다.” “현명한 선택이군.” “과찬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알아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말해라.”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을 믿고 지지해주는 수많은 사람들이 음지에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의 말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웠지만 김성철은 어딘가 모르게 꺼림칙한 감정을 느꼈다. 약속대로 피난민 캠프에 머물던 공선은 하역했던 무기와 용병들을 싣고 은자의 탑을 떠났다. 김성철은 낮은 산등성이에서 종말교단의 공선이 떠나는 걸 눈으로 확인했다. 그의 표정은 썩 밝지 못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모처럼 당신 편이 생겼는데. 응? 예쁘장한 여자애도 당신한테 빠져 있는 눈치고. 뭐 언데드긴 하지만!” 베르텔기아가 주머니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며 입을 열었다. “베르텔기아. 난 저런 자들을 내 편으로 둔 기억이 없다.” 김성철은 단정적으로 말하고는 뒤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 “그보다 베르텔기아. 오랜만에 밥값 할 시간이다.” 영혼석을 개방하기 위한 긴 칩거가 김성철 일행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 53. 백영 (1) 거대한 바위로 입구를 막은 동굴 앞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겉모습은 지극히 평범했다. 어디를 가나 꼭 한 명 있을 것 같은 인상. 그는 뭉툭한 손톱을 지닌 손을 말아 쥐고는 바위에 귀를 갖다 대고 바위를 두들겨보았다. 깊다. 안에 얼마나 많은 바위들이 있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지면을 살폈다. 긁힌 자국, 파헤쳐진 흙. 동굴 입구의 바위는 최근에 옮겨졌다. 그것도 도구를 사용한 것이 아닌 순수한 누군가의 근력만으로. 그의 뒤엔 추레한 인상의 피난민 가족이 관목 숲에 몸을 반절 가리고 불안한 눈빛으로 그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범한 관상의 사내는 품 속에서 스크롤 하나를 찢으며 작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사악한 마법의 힘이 바위 틈 사이에 깃드는 걸 본 다음, 그 사내는 피난민에게 걸어갔다. “아무래도 너희들의 말이 맞는 거 같구나.” 평범한 관상에 걸 맞는 평범한 목소리. 굵지도 가늘지도 않다. 하지만 피난민들은 어째서인지 이 지극히 평범한 모험자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 서서 말을 건네는 사내와 틀에 찍어낸 것처럼 똑같이 생긴 사내들이 피난민 가족 뒤에 드리운 어둠 속에 서서 그들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 약속했던 보수는 주실 수 있는 겁니까?” 가장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불안해 보이는 아들과 딸 앞에 나서서 움푹 들어간 눈으로 평범한 사내를 응시하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평범한 관상의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년 사내의 눈에 희미한 기대가 서리는 순간 뒤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가족들의 입에서 나는 것이다. 중년 사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평범한 사내와 똑같이 생긴 자들이 단도로 그의 가족을 찌르고 있었다. 이미 가족들의 동공에 생명의 불은 꺼진 상태. 중년 사내는 뒤를 돌아다보며 격앙된 얼굴로 노려보며 품속에 숨기고 있던 단도를 꺼내며 평범한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약속이 틀리잖아! 이 악마새끼야!” 그의 검이 사내에 닿기도 전에 차가운 칼날들이 사내의 등짝에 박혔다. 하나 두 개가 아니다. 중년 사내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뒤를 돌아보았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평범한 관상을 지닌 사내 수십 명의 똑같은 무기를 들고 그의 뒤에 서서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기이한 광경을 본 것을 끝으로 피난민의 동공을 그대로 풀어졌다. 평범한 관상의 사내는 그 사내를 위시한 네 구의 시체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스크롤 하나를 꺼냈다. “레이즈 데드.” 사악한 사령술의 주문을 외우자 방금 죽임 당했던 피난민 일가가 죽음에서 부활해 일어났다. 칼에 찔린 자국에선 아직 식지 않은 피가 흘러나오며 지면을 붉게 적셨다. “으으으....” 평범한 관상의 사내는 방금 전까지 살아있던 피난민 가장이 좀비로 화하는 걸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며 입을 열었다. “시대를 결정지을 위대한 과업에 동참하는 것. 그것이 내가 너희들에게 줄 수 있는 보상이다.” 기록 없는 암살자 백영. 칠영웅 중 하나. 그는 자신과 동일하게 생긴 자들과 함께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안개여정을 통한 영혼석의 개방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현재 공략중인 카벙클의 이름은 카벙벙. 사자토스가 거느린 여섯 카벙클 중에 가장 충직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카벙클의 충절은 갈대와 같은 것. 약간 놀아주는 것만으로 카벙벙은 마음을 돌렸고 곧 일주일이 지나자 김성철은 마침내 두 번째의 영혼석을 완전히 개방할 수 있었다. 다만 카벙벙은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자신을 부리려면 반드시 자신과 놀아준 여자아이와 함께일 것이라는. 실제로 카벙벙과 놀아준 게 베르텔기아니 카벙벙으로서는 당연한 조건일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그저 뜻만 오가는 기이한 대화에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카벙벙의 제안을 수락했다. 이로서 김성철은 3개의 주문을 동시에 영창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김성철은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다. 동굴 안에 비축된 물과 식량도 일주일 분이 더 남아 있다. 김성철은 세 번째 영혼석에 대한 개방을 시도했다. 이번에 비위를 맞춰줘야 할 카벙클의 이름은 카벙카벙. 김성철은 말을 아끼는 사람이라 불만을 품어도 밖으로 표출하진 않지만 사자토스의 작명 센스에 대해서만큼은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자토스. 그 놈. 왕 카벙클도 그렇고 카벙이니 카벙벙도 그렇고. 정말로 이름을 못 짓는군.” “당신이 할 소리는 아닌데?” 베르텔기아의 발언권은 나날이 강해지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런 베르텔기아가 아니꼽긴 했지만 그녀가 빈정 상해 파업을 하는 걸 바라지 않았기에 주머니에 집어넣는 대신 대화에 임했다. “뭐가 문제라는거지?” “뭐만 하면 파블로라고 이름 붙이잖아.” “시튼도 있다.” “시튼은 또 누구야!” 반응이 좋지 않자 김성철은 즉시 안개여정을 사용했다. 3번째 카벙클의 세계는 끝없이 펼쳐진 푸르른 초원이었다. 카벙카벙은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초원 너머에 두 다리로 서서 김성철 일행을 응시하고 있었다. “뀨우?” “저기 카벙클이 있군.” “시튼이 도대체 누구냐고?” 모습은 변했지만 베르텔기아는 집요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철저히 무시하고 새로운 카벙클에게 향했다. 카벙클은 김성철이 다가오자 고개를 살짝 기울인 후 초원 너머로 잽싸게 달려갔다. 김성철은 전력으로 쫓아갔지만 카벙클을 따라잡진 못했다. 이 속은 카벙클의 꿈의 세계. 김성철의 신적인 힘도 꿈의 세계 속에선 제약을 받는 것이다. 초원의 주인인 카벙클은 바람을 받아 하늘거리는 수풀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는 김성철과 눈이 마주치자 수풀 속으로 숨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김성철은 카벙클이 원하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숨바꼭질을 하자는 건가.’ 전보다 난이도가 올라간 느낌이다. 게다가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 각각의 카벙클이 좋아하는 놀이가 제각각이라는 김성철은 뒤로 돌아가 베르텔기아를 찾았다. 베르텔기아는 큰 대짜로 풀밭에 누워 빠르게 흐르는 구름을 보고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완전한 육체와 풍경을 만끽하는 베르텔기아의 모습은 더할나위 없이 행복해보였다. 책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땐 절대 볼 수 없는 모습.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부려먹으려던 생각을 접었다. ‘가끔은 쉬게 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김성철의 결심은 5분도 채 가지 않았다. 그것은 김성철의 끈기의 부족이라기보다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 먼 곳에서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가 들려왔고 그때마다 꿈의 세계는 부서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그리고 카벙클은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군.’ 꿈의 세계와 현실 세계는 원칙적으로 구분되는 공간이지만 꿈을 꾸는 주체가 현실 안에 머물러 있는 한 현실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다. 김성철은 서둘러 베르텔기아를 데리고 안개여정이 만들어 낸 꿈의 문을 열어젖히고 현실로 되돌아갔다. “…….” 다시 현실로 돌아 온 김성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살기도 기척도 없다. 물론 몸에 입은 상처도 전무하다. 이윽고 꿈속에서 듣던 소리가 바위 틈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왔다. 둥. 둥. 둥. 북소리다. 느릿하고 엉성하면서도 끊어지는 법이 없는 선율을 들은 김성철의 눈앞에 화염과 철이 교차하며 어른거렸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책으로 돌아온 베르텔기아는 주변을 돌아보며 김성철 주위를 날아다녔다. “낌새가 심상치 않군. 바깥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려는 모양이다.” 김성철은 진실의 눈을 가동하며 팔 가라즈를 들어올렸다. 거대한 바위들이 호쾌한 망치질에 차례로 박살이 나 부서졌다. 바위를 부수며 앞으로 전진 하던 김성철은 이윽고 바위 틈새에 낯선 주문 술식이 깃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주문 함정인가.’ 누군가 걸어놓은 것이다. 박살 난 잔해를 들고 바위를 향해 집어 던지자 거대한 화염이 모든 것을 태워버릴 기세로 동굴 안쪽으로 밀고 들어왔다. 화염이 사라진 후, 김성철은 바위 틈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늘 그렇듯 터럭 하나 다치지 않은 모습으로. 그는 팔 가라즈를 영혼창고에 집어넣으며 뻥 뚫린 동굴의 입구를 노려보았다.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되지도 않은 장난을 치는군.’ 매캐한 연기 너머로 시커먼 어둠과 달빛을 받아 창백하게 어른거리는 숲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뭐지?” 베르텔기아가 숲속에서 꿈틀거리는 형체를 발견하고 짤막하게 소리쳤다. 김성철은 한 눈에 형체의 정체를 파악했다. ‘좀비들인가.’ 상태로 보아 아직 죽은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시체들. 북소리는 이 좀비들에게서 나고 있었다. 둥! 둥! 둥! 김성철은 네 마리의 좀비 중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내의 등에 큰 북이 밧줄과 대목으로 묶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북과 함께 묶인 북채는 죽은 자의 팔 다리와 연결되어 사자가 움직일 때마다 엇박자의 불길한 소리를 냈다. “킁! 킁!” 김성철의 냄새를 맡은 좀비들이 바쁘게 움직이자 북소리의 박자가 돌연 빨라졌다. 그리고 그들이 산 자의 피 냄새를 맡고 김성철으 향해 야수처럼 달려올 때는 마치 보병대들이 돌격할 때 들리던 북소리처럼 빠른 템포로 울려 퍼졌다. ‘악취미군.’ 김성철의 눈동자에 일순 경멸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마편 카산드라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계의 불꽃을 품은 채찍은 달려드는 좀비들을 두 동강 내며 불태워버렸다. 툭. 불길한 울림소리를 내던 북채는 바닥에 떨어져 핑그르르 구르며 김성철의 발 치 앞으로 떨어졌다. 북채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람의 정강이뼈였다. 그것도 사람의 몸에서 적출되지 오래되지 않은 신선한 피가 묻은. “으.. 이건 뭐야?”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안에서 몸을 떨며 말했다. 김성철은 군홧발로 뼈를 짓밟아 가루로 만들어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질이 안 좋은 놈이 나타난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숲속 너머에서 한 사내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돌려 그 사내를 응시했다. 별 다를 거 없는 평범한 얼굴과 체격, 그리고 복장. 생면부지의 얼굴이었지만 어디서 본 것 같은 착각마저 느껴지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내가 입을 열자 그 사내를 둘러싼 평범함이라는 껍질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계집이 말한 대로 여기 있었군.” 그것은 한 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터무니없이 음산한 목소리였다. 무덤에 목소리가 있다면 아마 이와 같을 것이다. ‘죽음의 냄새가 나는 놈이군. 암살자인가?’ 김성철은 한 눈에 그 사내의 정체를 어렴풋이 간파하며 담담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 계집? 누구를 말하는 거지?” 김성철의 물음에 낯선 사내는 음산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대답했다. “너도 모르진 않을 텐데. 미래에서 왔다는 날파리 한 마리 말이다.” “아무개 말인가?” “그건 중요하지 않아. 부수는 자.” 평범한 사내가 미소 지었다. “나는 백영.” “…….”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전까지 없었고 이후로도 존재하지 않을 암살의 극치를 너에게 보여주지.” 끝없는 자부심과 자신에 대한 믿음이 백영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걸 본 김성철은 왜 이 암살자가 다른 동료들의 죽음을 알고도 단신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면서까지 앞에 나타났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암살자는 암살자일 뿐이다. 김성철은 경멸 섞인 어조로 내뱉듯이 말했다. “날파리 주제에 말이 많군.” 백영이 비웃음을 날리며 뭐라고 하려는 순간 마편 카산드라가 날아가 백영의 신체를 반으로 찢어놓았다. 하지만 백영이 사라진 자리엔 피도 살점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카산드라에 닿자 백영의 신형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평범한 환영은 아니군.’ 진실의 눈을 지닌 김성철 앞에서 환영마법으로 술수를 부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방금 백영이 보여준 것은 그만의 특별한 능력이라는 이야기. 그런 능력을 김성철에게 보여줬다는 건 자신이 있거나 아니면 또 다른 포석을 노리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쩌면 둘 모두에 해당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영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싸움에 있어서 김성철이라는 사내에겐 잔재주와 속임수는 일절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부터 절대적인 힘의 우위, 그 한 길을 우직하게 걸어가야 했던 사내가 살아남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었다. 상대방이 힘이 아닌 잔재주로 나온다면 서두를 필요는 없다. 김성철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앞으로 걸어갔다. 우레와 같은 함성과 북소리가 숲속 너머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니 한 무리의 성난 군중들이 횃불을 들고 아우성 치고 있었다. 김성철의 입에서 얕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더러운 싸움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 은자의 탑 일대를 관망할 수 있는 인간제국 공선의 갑판 위. 아무개는 숲 곳곳을 뒤덮고 있는 불길을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화려한 갑주를 걸친 젊은 제독이 아무개 옆으로 다가와 그녀가 응시하는 불길을 함께 바라보았다. “회귀자. 저것이 네가 말하는 칠영웅 백영의 소행인가?” 그 제독의 정체는 아르큐부스. 황제에겐 총애를 일반 백성에겐 경멸을 받은 복합적인 인물로 최근 판추리아에서 대학살에 관여한 걸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인물이었다. 종자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그에게 술잔을 바쳤다. 아르큐부스는 핏빛을 띤 술잔을 거머쥐며 아래에서 들려오는 함성과 북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까진 별 다른 전투가 벌어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이내 지루함을 느끼고 아무개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질문을 던졌다. “무릇 암살자라면 고양이처럼 숨어 들어가 비열하게 암습을 가해야지. 저렇게 판을 크게 벌려서 뭘 어쩌자는 거지? 암살을 하겠다는 건가 말겠다는 건가?” 그 거친 질문에 아무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모호한 말을 시구처럼 읊었다. “…마탄(魔彈)의 사수. 그의 마탄은 모든 걸 꿰뚫는다.” ======================================= 53. 백영 (2) 시위를 떠나는 순간 화살의 미래는 예정된다. 따라서 아무리 강한 화살이라도 상대방이 미리 대비하면 원하는 효과는 얻을 수 없다. 설령 그것이 마탄의 사수라 불리는 최강의 궁수라고 할지라도. 백영이 아직 백영이라는 이름을 얻기 전 그는 다른 칠영웅보다 훨씬 유명했고 높은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솔직히 상대도 되지 않았다. 다른 칠영웅들이 자신의 고향에서 작은 이름값을 얻고 있을 때 마탄의 사수의 이름은 전 대륙을 떨쳐 올리고 있었으니. 그러나 그 높은 명성이 결국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름 난 궁사인 그는 이제 적의 밀정에 의해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는 몸이 되었고 출전하는 전투마다 적에게 그 사실이 알려져 적들은 만반의 대비를 하고 전투를 임했다. 그가 죽여야 할 적장은 이제 거대하고 튼튼한 방패를 든 방패수와 방패에 축복을 걸어줄 사제를 동원했다. 마탄은 겹겹이 둘러 친 방패의 벽을 뚫지 못했다. 파훼법이 알려진 마탄의 사수는 전황을 바꿀 영웅에서 평범한 궁사로 평가가 뒤바뀌었다. 굴욕과 자괴감 속에서 마탄의 사수는 새로운 길을 모색했고 그리고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비보를 손에 넣게 된다. 전설급 영혼각인 분열. 의지가 버티는 한 자신과 동일한, 질량을 지니는 분신을 무한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이적인 능력을 각인의 소유자에게 부여해준다. 분열을 손에 넣게 된 마탄의 사수는 새로운 힘을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될 것인지 고민했다. 결국 그는 암살자의 길을 택한다. 마탄이라고 불리는 최강의 화살이 어떻게 평범한 화살로 전락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 본 사내가 택한 자연스런 결정이었다. 그는 더 이상 전장의 전면에 서서, 자신을 상징하는 깃발 아래서 당당하게 화살을 날리지 않는다. 대신 어둠 속에 녹아들어가 은밀하게 나타나 그가 만들어 낸 분신들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만들어내고 그 혼란 속에서 무방비한 심장을 한 번에 꿰뚫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철저히 경계한다.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기록 없는 암살자 백영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탄생했다. “…….” 그는 무심한 눈으로 광분하는 군중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직접 일으킨 분란이다. 분란을 일으키는 건 어렵지 않다. 소중한 사람을 죽이고 그 죄를 다른 이에게 넘기는 것으로 충분하다. 인간과 원숭이는 단일 개체로 따지면 그 지성에 있어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나지만 집단으로서의 인간과 원숭이는 별 차이가 나지 않는 게 일반적이므로. 이제 백영에게 남은 건 그가 일으킨 혼란이라는 거미줄에 사냥감이 걸려드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남았다. 걸려들지 않으면 미련 없이 자리를 뜰 것이다. 정면 승부는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므로. 대신 끈질기게 추격해 혼란을 일으킬 적당한 장소가 발견되면 다시 거미줄을 펼치고 그를 시험대에 오르게 할 것이다. 그것이 기록 없는 암살자 백영의 싸움. 그 최강의 암살자의 싸움은 그를 닮고자 하는 한 사람에 의해 철저히 관찰되고 있었다. ‘어디 한 번 실력을 보여 줘. 백영. 당신이 지더라도 당신의 의지를 잇는 이가 따라할 수 있게끔.’ 분한 일이지만 지금 현재의 능력과 경험으론 세계의 적이라 불리는 장래의 재앙에 털끝 하나 손을 댈 수 없다. 아무개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움 브루크의 서늘한 울음소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어둠의 장막조차 그녀를 가려주지 못했다. 아마도 김성철에게 뭔가 시도하려는 순간 그녀는 분쇄당할 것이다. 김성철에게 도전했던 다른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역사상 최강의 암살자로 불리는 백영이라면 그녀에게 영감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금까지 돌아가는 꼴을 보면 그럴 듯 했다. 자신이 선 땅을 인위적인 수단으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데 까진 말이다. 그리고 김성철은 그 소용돌이의 중심을 향해 스스로 걸어가고 있었다. “마을 놈들을 전부 죽여라!” “놈들이 우릴 전부 죽이기 전에 우리가 놈들을 죽여야 한다!” 성난 군중들이 횃불을 들고 행진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단 하나. 그들을 경원시 하던 촌락. 해묵은 갈등과 다툼은 아주 간단한 조치를 취하는 것만으로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을 일으켰다. 비록 무기도 부족하고 숙련된 전사도 적지만 숲을 전부 태워버리고도 남을 정도의 복수심과 증오심이 그들의 가슴 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백영은 어둠 속에서 자신이 만들어 낸 작품을 흥미로운 눈으로 감상하고 있었다. ‘운이 좋군. 이런 궁벽한 곳에 완벽한 무대를 만들기 위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을 줄이야.’ 전설급 영혼각인 분열을 통해 만들어낸 의지를 공유하는 분신들이 군중을 향해 걸어가는 김성철 주변에 포진했다. 김성철은 그 사실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계속해서 군중의 뒤를 따랐다. 곧 그는 군중과 다른 공선의 병사들이 대치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타국의 병사들은 완강하게 성난 피난민들이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이들이 곧장 마을로 가면 어떤 참사가 벌어질 지 눈으로 보지 않아도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중재도 한계가 있었다. 횃불을 든 행렬의 후미가 끝도 없이 불어나자 병사들은 용기를 잃고 뒤로 물러섰다. 게다가 다른 동맹에 대한 불만이 결정적으로 그들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인간제국 놈들은 뭘 하는 거지?” “머릿수도 제일 많은 주제에 대체 뭘 하는 거야?” 병사들과 장교는 인간제국에게 모든 탓을 돌리며 군중들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이제 인스반트 사람들과 토포로 마을 간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 그럼에도 김성철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암살자 백영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군중들에 섞여 함께 토포로 마을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마을로 통하는 다리 앞에선 이미 극한의 대치가 이어지고 있었다. 중무장한 마을 민병대가 다리 앞에 목책을 쌓고 다가오는 피난민들에게 석궁을 겨누고 있었다. 그 현장에 은자의 탑 소속의 은자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바로 뒤에 탑이 있는데도 말이다. ‘카네스는 부재중인 모양이군.’ 김성철은 이전에 들었던 탕그리트의 말을 떠올렸다. 지금 상황은 그가 예언한대로 전개되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탑은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리라는 말대로 말이다. 비록 민병대가 지형의 유리함과 장비의 질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긴 하지만 그들은 전문적인 전사가 아니고 그리고 수적으로 절대적인 열세에 처해 있다. 인스반트 사람들이 가벼운 희생을 무릅쓰고 한꺼번에 밀어닥친다면 마을 사람들의 방벽은 과자처럼 부서질 것이다. 그러나 김성철은 행동하지 않았다. 딱히 마을을 지켜야 할 의무는 없다. 그들이 훌륭한 덕성을 보인 것도 아니고 피난민과 갈등도 어떻게 보면 그들의 배타심이 초래한 것이다. 물론 여유가 된다면 이 상황을 중재할 용의는 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김성철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따라붙는 백영의 그림자들을 찾는데 모든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으니까. ‘이걸로 열여덟 마리짼가.’ 실체를 지닌 환영이란 건 고약한 녀석이었다. 진실의 눈으로도 실체를 가려낼 수 없으므로. 하지만 그것도 무적은 아니다. 실체를 지녔다는 건 질량을 가지고 따라서 기척 또한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허깨비인 일반적인 환영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점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것들은 동일한 기척을 지니고 있다. 분신이 지닌 숙명이라고는 할까나. 백영도 이 점을 의식한 듯 최대한 기척을 감추려고 하고 있지만 그동안 아무개를 상대하느라 감각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던 김성철이다. 발소리 하나,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는다. ‘열아홉.’ 분신이 하나 더 늘었다. 북소리와 고함이 만연한 혼란의 중심 속에서도 김성철은 백영의 분신이 하나 둘 씩 늘어나며 자신을 부채꼴 형태로 포위하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암살자와 목표 사이의 수 싸움이 치열하게 일어나는 것과 별개로 마을과 피난민 사이의 분쟁은 서서히 끓어올라 절정에 달하려고 하고 있었다. 피난민 일부가 마을을 향해 쇠붙이를 날려 보내 몇 명의 부상자를 발생시켰고 이를 본 민병대가 쇠뇌를 피난민들의 대오에 쏘아 보냈다. 서늘한 비명 소리와 함께 두어 명의 남자가 바닥에 쓰러졌다. 일순 현장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사망이 확인된 순간 침묵은 깨졌고 차가운 밤하늘은 천지를 뒤덮을 것 같은 성난 고함으로 얼룩졌다. 어둠 속에 도사린 백영의 입가에 실낱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슬슬 절정으로 치닫는군.’ 그의 몸이 분열하며 또 다른 분신 하나를 만들어내 앞으로 보냈다. 공선 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무개도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곧 다가올 결말을 숨죽여 기다렸다. 그리고 백영이 기다리던 절정은 한 사내의 등장으로 비로소 완성됐다. 성난 군중이 밀고 들어오는 다리 위에 그리폰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 날개가 부러져 날지 못하는 그리폰 위에는 과거 대륙을 공포로 몰아넣던, 그러나 찬란했던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방패를 든 노기사가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었다. 김성철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탕그리트.’ 죽을 자리를 찾는 사내가 그토록 원하던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그토록 경원시하던 마을 사람들은 의심과 감탄, 미안함이 섞인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폰 기사가 다리 위에 우뚝 섰다. “어느 누구도 내 허락 없이 이 앞을 지나가진 못할 것이다.” 남작이 두 발로 일어서며 소름끼치는 포효를 내질렀다. 기세등등하던 피난민들은 갑작스런 기사의 출현에 겁을 집어먹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충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구름 속에 숨겨져 있던 달빛이 탕그리트를 환하게 비췄고 어둠 속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그의 결점을 피난민 앞에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다. “잘 봐라! 저건, 그 놈 아니냐? 달구지 끌던 그 수도승 늙은이 말이야!” “저 그리폰은 날지도 못한다. 겁먹을 거 없다! 바로 해치워버리고 마을 놈들을 전부 죽여 버리자.” 찬물을 끼얹었던 피난민의 기세가 다시 끓어올랐다. 그들은 쇠붙이를 탕그리트에게 던지며 당장이라도 마을 향해 밀고 내려올 것처럼 행동했다. “어떻게 하지? 남작하고 저 아저씨 엄청 위험해 보이는데?” 베르텔기아가 가볍게 몸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 김성철도 그 점을 알고 있었지만 좀처럼 행동할 순 없었다. 백영의 분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숫자를 늘리며 자신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얄궂은 상황이군.’ 지금 나서면 탕그리트는 살릴 수 있겠지만 백영을 놓칠 수도 있다. 한편 백영은 반드시 처치해야 될 재앙 중 하나. 은인의 목숨과 재앙의 해결. 두 가치 사이에서 김성철은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김성철은 은근한 분노가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탕그리트는 자신의 등을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담담하지만 회한서린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싸울 동안 은자의 탑으로 가시오. 그리고 문을 두드리시오. 아무리 그들이 냉혈한이라고 하나 눈앞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진 않을 것이오. 물론 그 시간은 내가 벌어 주리다.” “타.. 탕그리트 경.” 그를 박해했던 촌장이 뭐라고 말하려고 하자 탕그리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가로 막았다. “15년 전 못했던 일을 이제 비로소 할 뿐이오. 감사의 말은 필요 없소.” 그 말을 남기고 탕그리트는 고삐를 힘차게 후려쳤다. 남작이 포효하며 앞을 향해 질주했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탕그리트가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김성철은 격돌의 장면을 볼 수 없었다. 탕그리트와 피난민이 격돌하는 순간, 그를 둘러 싼 백영의 분신이 김성철을 향해 일제히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김성철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뒤이어 나타날 또 하나의 분신, 아니 백영의 실체를 기다렸다. 김성철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바로 지금이다.’ 혼란이 절정에 달했을 때 마탄의 사수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등을 보이고 있는 김성철의 심장을 향해 푸른 보석이 박힌 마노(魔弩) 아에게를 정조준했다. 태초로부터 내려온다는 마력결정의 힘을 빌린 이 무기는 개조에 개조를 거듭해 백영을 위한 무기로 거듭났다. 일주일에 한 번을 쏠 수 있는 대신 미증유의 파괴력을 단 하나의 화살에 담은 것. 백영은 자신의 화살을 가리켜 조건만 맞으면 신조차 죽일 수 있는 무기라고 자신했다. 그런 마궁의 화살이 무방비 상태의 김성철의 심장을 겨냥한 것이다. 그런데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김성철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앞쪽에서 그리폰의 포효와 창칼이 울려 퍼지는 소리만 공허하게 들리는 가운데 마탄은 김성철이 있던 곳을 향해 날아갔다. “으악!” “끄아악!” 몇 명의 무고한 이들을 푸른 광선을 꿰뚫으며. “…?!” 백영의 눈이 부릅떠졌다. 마탄은 빗나갔다. ======================================= 53. 백영 (3) 푸른색의 빛줄기가 공허하게 밤하늘을 가르는 가운데 마편 카산드라가 싸늘한 밤공기를 가르며 군중 사이에 섞인 백영의 분신을 흩어버렸다. “끄으으...” 분신이 하나 사라질 때마다 백영은 바늘로 살을 찌르는 통증과 함께 자신의 생명력이 깎여나가는 걸 느꼈다. 그런데 그 통증은 쉬지 않고 연이어 이어졌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셀 수도 없이. 그것은 바늘로 찌른다기보다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이었다. 익숙한 고통이라고 치부했던 것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자 백영은 전례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설마, 이 놈. 내 분신의 위치를 전부 파악하고 있었던 것인가?’ 마지막 분신이 사라졌다. 하늘을 향해 쏘아올린 마탄의 궤적이 채 사라지지도 않은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백영은 끔찍한 피로와 공허감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너무 많은 분신을 한 번에 잃은 것이다. 단순한 환영이 아니기에 분신의 상실은 생명력의 상실로 연결된다. 이제 남은 것은 본체인 백영 하나. 김성철은 군중 사이에 숨은 기록 없는 암살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영의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공포심이 드러났다. ‘빌어먹을.’ 그제야 백영은 느꼈다. 사냥 당하고 있는 것은 김성철이 아니라 그 자신이라는 것을. 김성철이 백영을 노려보며 경멸 섞인 어조로 말했다. “날파리 새끼.” 그에겐 적을 조롱하는 취미가 없다. 아무리 약한 적이라고 해도 두 다리로 서서 자신에게 맞설 용기만 있다면 한 명의 전사로 인정한다. 하지만 비열한 술책과 암습에 의지하는 암살자를 상대로 할 땐 이야기가 다르다. 그는 암살자를 전사로 보지 않는다. 김성철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벌벌 떠는 백영을 노려보며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백영은 영혼창고에서 생명의 정수를 꺼내 들이키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인간이 분열하고 있었다. 하나가 둘로, 둘이 넷으로. 순식간에 백영은 백여 개가 넘는 자신과 똑같은 분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피난민들은 비로소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인들의 싸움을 인지하고 뒤로 물러서며 거인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피난민들이 내준 공터 안에서 김성철과 백영은 서로 대치했다. “왜 인간을 돕는 거지? 너처럼 강한 힘을 지닌 자가 어째서 구제불능의 인간을 돕는 것이냐?” 분신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백영이 이전과는 달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 김성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앞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여전히 탕그리트는 살아있고 분전하고 있다. 남작의 포효가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 속에서 울려 퍼졌다. “성자 소리라도 듣고 싶은 거냐? 아니면 영웅이라도 되고 싶은 거냐? 하지만 소환자여. 명심해라. 인간들은 살아 있는 영웅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그들이 원하는 건 오로지 무덤 속의 영웅뿐이다!” 백영이 계속해서 말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이군.” 김성철은 마편 카산드라를 잡은 손을 오므렸다 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뭐라고? 뭘 착각한다는 거지?” 백영의 물음에 김성철은 얕은 한숨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나는 단 한 번도 내 입으로 인간을 구원하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무어라?” 백영의 물음에 김성철은 마편 카산드라를 잡은 손을 들어 올리며 짤막하게 말했다. “나는 그저 재앙을 해결하려 할 뿐이다.” 지옥의 불길을 머금은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번개처럼 빠르면서도 미증유의 힘을 간직한 채찍은 도열한 백영의 분신이 반응하기도 전에 반으로 찢어놓았다. 백영은 남은 분신을 동원해 김성철에게 단검을 던져 반격을 가해보려 하지만 애당초 암살자가 이름 난 전사를 상대로 정면승부를 펼치게 된 순간부터 그에게 승산은 없었다. 싸움의 향방은 마노 아에게가 쏘아올린 마탄이 빗나간 때 이미 결정 났다. 마편 카산드라는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이며 백영의 분신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백영은 생명의 정수를 연신 들이키며 끝없이 분신을 만들어 내 대항하려 했다. 그걸 본 김성철은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개미가 아무리 많아도 개미핥기를 이길 수 없는 법이지.’ 김성철의 생각대로 마편 카산드라는 김성철이 좋아하는 큰개미핥기의 혀처럼 백영의 분신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켰다. 백영은 필사적으로 분신을 만들어내며 단검을 던지는 등 분전해보지만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분신이 마편 카산드라에 의해 찢겨나갔다. 그리고 우악스런 손이 백영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끝났군.” 백영은 눈을 부릅뜨며 뭐라고 말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목줄을 움켜쥔 손이 힘을 더했기 때문이다. 비열한 암살자에게 명예로운 죽음은 없다. 김성철은 품속에 늘 들고 다니던 밧줄을 꺼내 이미 으스러진 백영의 목에 걸고 나무에 매달았다. 그리고 백영의 팔을 덥석 잡았다. 우두둑! 우두둑! 백영의 팔이 끔찍한 형태로 꺾였다. 이미 저항할 힘도 의지도 잃은 백영은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천천히 질식해 죽어갔다. 전설적인 암살자의 최후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라하고 평범한 죽음이었다. 피난민들은 숨을 죽이고 김성철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면한 재앙을 해결한 김성철은 뒤돌아섰다. “비켜라.” 걷잡을 수 없는 불길과 같았던 피난민의 분노도 진정한 강자의 등장 앞엔 금세 수그러들었다. 김성철은 피난민을 해치고 탕그리트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누구도 감히 그를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고 그럴 마음도 품지 못했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한 여자가 우연하게 종말교단의 공선에서 떠돌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저건.. 세계의 적이야.” “세계의 적이라고...?!” 군중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김성철은 곧 남작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작은 살아 있었다. “귀염둥이!” 베르텔기아가 주머니에서 뛰쳐나와 남작의 상태를 살폈다. 여기저기 칼에 찔리긴 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다. 하지만 남작 위에 타고 있던 탕그리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부러진 창과 피로 물든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방패를 붙잡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낡은 갑주 사이의 틈을 뚫고 들어온 부러진 창날이 치명상의 원인으로 보였다. 상처가 상당히 고통스러웠는지 그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탕그리트.’ 생명의 은인은 죽었다. 그를 죽인 건 이름 모를 피난민이지만 김성철은 탕그리트의 죽음에 자신의 선택과 관련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백영을 포기했다면 탕그리트를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성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막연한 기대의 끝은 늘 이런 식인가.’ 김성철의 눈동자에 실망과 분노가 차례로 교차했다. 불길한 살기가 그의 전신에서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살기에 눌린 피난민들은 어느 누구 하나 입 하나 뻥긋하지 못한 채 그저 공포에 몸을 내맡겼다. “누구 짓이냐?” 김성철은 피난민을 향해 물었다. 감히 대답하는 이 하나 없었다. “누구 짓이냐고 물었다.” 마편 카산드라를 잡은 김성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눈동자에 억제할 수 없는 살의의 파동이 번득이는 순간이었다. “저기. 저것 좀 봐!” 베르텔기아가 몸을 흔들며 주머니에서 나와 탕그리트의 시신 한 쪽을 가리켰다. 상처 입은 남작 위에 엎드린 채 죽은 탕그리트의 시신 한 곳에 무언가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김성철은 시신으로 다가가 그 반짝이는 물건을 확인했다. ‘이것은?’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것은 언젠가 수도승이 자랑하던 자신의 인장이었다. 찬장 깊은 곳에 숨겨두고 결코 꺼내지 않았던 영주의 인장이 오랜 세월의 벽을 넘어 다시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것이다. 김성철은 다시 한 번 탕그리트의 얼굴을 응시했다.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착각 때문일까.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그의 얼굴이 달라 보였다. 잔뜩 찡그린 채 죽은 그의 입가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걸 본 김성철은 탕그리트가 최후에 어떤 생각을 하며 죽어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오랜 방황을 끝내고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으로 간 것이다. “봐? 웃고 있지? 분명 좋은 곳에 갔을 거야!”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이 찾지 못했던 것을 가리키며 약간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 격랑처럼 소용돌이치던 분노가 가라앉았다. 흐려졌던 판단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맑아지는 정신 속에서 김성철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원인이 탕그리트의 죽음 뿐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문득 품었다. 그러므로 더 이상의 피는 필요 없다. 김성철의 손에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김성철은 그 하늘을 벼려 만든 망치로 지면을 강하게 후려쳤다. 지축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먼 곳에서 벌어지는 싸움마저도 그치게 만들었다. 가을밤 본연의 고요 속에서 김성철은 대치한 양 세력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모두 물러나라. 막간극은 끝났다.” “칠영웅도 별 거 아니군.” 공선 위의 아르큐부스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눈에 비친 백영은 그저 기이한 기술을 쓰는 형편없는 사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한 모금 술을 들이키고는 아무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회귀자?” 그런데 아무개를 보는 순간 아르큐부스는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아무개는 공포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손조차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아르큐부스는 피식 웃었다. ‘뭐야? 이 여자. 철의 심장을 지녔다던데 헛소문이었나?’ 갓 소환광장을 수료한 애송이 소환자가 서슬 퍼런 암살교단의 교주 앞에 홀연히 나타나 감히 협상을 시도하려 한 이야기는 기득권 사이에 대단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 대담한 소환자는 암살교단의 교주를 필두로 대륙을 좌지우지 하는 권력자들을 순차적으로 만나며 자신의 대담함을 계속해서 증명해보였다. 그러나 지금 아무개가 보이고 있는 초라한 모습은 명성과는 전혀 걸맞지 않은 것이었다. ‘비 맞은 개처럼 떠는군. 암살교단 교주 앞에서 배포를 부려 제법 배짱은 있다고 생각했더니 천상 계집이었잖아?’ 아르큐부스는 아무개를 남겨둔 채 조소하며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아무개는 백영의 능력에 탄복하고 있었다. 그저 어두운 곳에 숨어 대상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방법이 아니라 직접 암살의 무대를 만들어 대상으로 하여금 스스로 걸려들게 하는 방식은 같은 암살자로서 경탄을 자아낼 지경이었다. 거기다 마지막 한 발을 쏘기 위해 치밀하게 짜두었던 함정은 가히 칠영웅의 이름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하나의 예술작품과도 같았다. 단순히 머리로 이해한 것만 수십 겹의 함정을 파놓았다. 이 싸움의 결과는 김성철의 생존이라는 사실 이외엔 그다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녀가 보기에 백영은 최소한 김성철에게 어느 정도의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눈으로 본 그대로였다. ‘저 백영이 아무것도 못하고 죽었어.’ 그것은 싸움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일방적인 도륙이었다. 은신을 제외하고는 아무개보다 아득히 높은 능력치와 경험, 거기다 암살자의 치밀함을 지닌 백영이 저렇게 무참하게 패배했다는 것은 많은 걸 시사했다. ‘차라리 보지 않았다면....’ 해치울 방법이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를 이곳에 보내기 위해 모든 걸 희생했던 사람의 얼굴들을 떠올리면. 과거로 돌아가기 전, 희미하게 들렸던 목소리가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가서 그 자기만 아는 개자식에게 한 방 먹여! 내 걱정일랑 하지 말고.” 심호흡이 몇 차례 이어진 후 떨림이 멈췄다. 아무개, 아니 이수진은 공선이 서서히 움직이는 걸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일곱 재앙의 무기를 휘두르는 검은 거인의 출현까지는 앞으로 3년. 그 안에 끝을 내지 못하면 이 세상은 다시 멸망해버려!’ 은자의 탑 상공에 머물렀던 인간제국의 공선은 북서쪽으로 날아갔다. * “어째 가는 곳마다 무덤을 늘리는 기분인데?” 베르텔기아는 묵묵히 삽질을 하는 김성철을 보며 풀밭 위에 엎드렸다. 탕그리트의 장례식에 참석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쓸쓸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김성철은 더욱 씁쓸한 광경을 목도했었다. 마을 전체가 옛 영주에게 구원받았건만 아무도 탕그리트의 시신을 맡으려들지 않았다. 결국 촌장이 푼돈을 꺼내 무연고자, 부랑자들을 함께 매장하는 구덩이에 관도 없이 매장하려고 하는 걸 김성철이 가로막고 탕그리트의 시신을 끌고 그가 살던 저택 옆에 매장하게 된 것이었다. “그나저나. 토포로 마을? 그 사람들 정말로 박정하네. 그렇게 이기적인 사람들 인줄 알았으면 그냥 막지 말 걸 그랬나 봐.” “…….” 김성철은 묵묵히 삽질을 하고 있었다. 꽤 큰 구덩이가 완전히 매워졌다. 김성철은 마지막으로 탕그리트의 인장을 넣고 마지막 흙으로 덮고 큰 돌 하나를 묘비 대신으로 세웠다. 묘가 완성되자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남작이 무덤 옆으로 다가와 주인의 마지막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섰다. 김성철은 남작의 목을 한 차례 쓰다듬고는 자리를 떠났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베르텔기아의 물음에 김성철은 북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라그란제.” 추억과 회한이 서린 곳. 김성철은 은인의 무덤을 뒤로 하고 인간제국의 수도를 향해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 54. 대하수도 (1) 제도로 향하는 여정 내내 김성철은 아름다운 풍경과 비참한 피난민이라는 상반된 요소를 볼 수 있었다. 동부에서 몰려든 피난민은 은자의 탑뿐만 아니라 동부 국경을 지나 제국 전역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중 인간제국으로 향하는 피난민이 단연 그 수가 두드러졌는데 제국에선 피난민에 대한 최대한의 구호품을 제공해주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황제의 약속이자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이제 겨울이 코앞이다. 아무리 인간제국의 곳간이 풍족하다고 하나 저 많은 피난민을 먹여 살리는 건 어려울 것이다. 이미 갈등의 불씨는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라그란제를 얼마 놔두지 않은 지점에서 김성철은 자신과 관련된 흥미로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의 재앙은 전부 세계의 적이 일으킨 것이다. 그 자가 첫 번째 재앙을 성급하게 건드리지 않았다면 거신들이 일어날 일은 없었을 것이고 이 세상은 평온했을 것이다!” 염소수염을 기르고 삐쩍 마른 사내가 피난민 앞을 모아두고 김성철의 욕을 신나게 하고 있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제국에서 말단직이나마 맡고 있는 관리로 보였는데 비겁하게도 그냥 김성철을 욕하는 게 아니라 피난민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면서 욕하고 있었다. “지금도 세계의 적은 호시탐탐 때를 노리며 우리 인간들을 멸망시킬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배신자이며 악의 화신이다!” 그렇게 욕질을 하면서 그 관리는 배급을 받으려는 피난민에게 한 마디 씩 시켰다. “자 어서 세계의 적은 재앙 그 자체다! 라고 말해! 안 그러면 배급 없어.” 그 광경을 본 베르텔기아는 몸을 부르르 떨며 한 마디 했다. “우와..... 진짜 치사하다.” “…….” 김성철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걸 본 김성철은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피난민 대열에 끼어 함께 배급을 받았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말을 실천하려는 의지는 없었지만 일이 그렇게 되고 만 것이다. 김성철이 음식을 받을 즈음엔 안타깝게도 그를 신나게 욕하던 관리와 대면할 순 없었다. 그는 음료수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대신 배급품은 붉은 모자를 쓴 호문클루스들이 나눠주고 있었다. “빨리빨리 받고 사라지는 거예요! 쓰레기 피난민 인간!” 오랜만에 호문클루스들의 정겨운 목소리를 김성철은 배급품을 확인했다. 그런데 반합에 담긴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그것은 음식이라기보다는 토사물에 가까웠다. 김성철은 호문클루스를 노려모며 물었다. “이건 뭐지?” “뭐긴 뭐예요! 라그란제의 구르메들도 극찬을 아끼지 않는 영양이 듬뿍 담긴 영양죽인 거예요!” “영양죽이라....” “개수작 부린다고 해서 죽 한 국자 더 주는 거 아니니 냉큼 사라지는 거예요!” 김성철은 호문클루스의 타박을 들으며 수레 앞을 떠났다. 김성철의 시선은 온통 반합 안에 쏠려 있었다. 그 영양죽이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음식은 고기와 야채를 갈아 만든 것으로 보였다. “흠. 밥을 안 먹는 몸이 되어버린 게 지금처럼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은 처음이야.” 영양죽의 모습을 본 베르텔기아의 의견이다. 하지만 주변에 영양죽을 배급받은 사람들은 제법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것도 허겁지겁 마지막 남은 한 점까지 싹싹 긁어먹으며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김성철이 배급을 받게 된 이유 중 하나다. 나머지 절반은 인간제국의 관리가 어떻게 자신의 흉을 보는 지 듣기 위함이고. 때마침 음료수를 마치고 휴식을 마친 관리가 열정적인 태도로 김성철의 욕을 다시 시작했다. “…세계의 적의 만행에 관해서 전부 다 말하려면 일주일 낮, 일주일 밤 동안 이야기해도 모자람이 없지만 이번에 말할 주제는 그의 음행에 관해서다.” 영양죽 한 숟갈을 뜨려던 김성철의 숟가락이 멈췄다. 그는 고개를 돌려 인간제국의 관리를 응시했다. “김성철이라 이름을 지닌 그 추악한 자는 만족을 모르는 호색한으로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그냥 놔두지 않는다고 한다. 믿을 수 있는 소식통에 의하면 세계의 적은 그의 본거지에 각지에서 납치한 미녀 수백 명을 가둬두고 주야를 불문하고 그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끔찍한 소식은 김성철이 만든 악몽의 할렘에서 탈출한 어느 익명의 여인으로부터 간신히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피식 웃었다. ‘서지도 않는데.’ 말도 안 되는 비방이다. 김성철은 쓴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영양죽을 한 스푼 더 입에 넣었다. “?!” 스푼이 입에 들어가자마자 김성철은 영양죽을 뱉었다. ‘이건 호문클루스 고기군. 호문클루스 고기에 오래 된 곡물과 야채를 갈아 넣고 거기에 얼룩양귀비 씨앗의 즙을 첨가했어.’ 맛의 비밀은 얼룩양귀비 씨앗의 즙이다. 약한 환각성분을 내는 마약이다. 특히 미각에 강한 자극을 줘 어떤 맛없는 음식도 먹을 만한 음식으로 만들곤 한다. 반란군 시절, 썩은 음식을 먹으며 버텨야 했던 우울한 시기에 궁여지책으로 병사들에게 지급됐던 물건이다. 당연히 잊을 수 없는 맛이다. ‘아직 가을에 수확한 물건이 창고에 넘칠 텐데 그런 걸 놔두고 이런 걸 급양하다니. 인간제국도 갈 때까지 갔군.’ 인간제국이라는 이름은 본시 범인류를 위한, 일곱 왕에게 선출 받은 정당한 황제의 나라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서 일곱 왕은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왕국의 왕도 포함했고 제대로 의사를 표명하지 않은 왕국의 의견도 제멋대로 넣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인간제국이 사람들의 열광과 지지를 얻었던 이유는 제국의 설립 목적에 모든 인간을 위한다는 점을 명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왕을 섬긴다는 이유로 타국인에게 갖은 악행을 일삼던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과는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차이점이었다. 실제로 인간제국은 건국 초기 어떤 대가도 이익도 바라지 않고 대륙 각지에 산적한 문제를 대신 해결해 제국의 핵심가치를 대륙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 물론 이에는 엄청난 희생이 따랐지만 그렇기에 인간제국은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을 대신하는 대륙의 강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인간제국을 믿고 몸을 의탁한 사람들에게 먹여서는 안 될 쓰레기 같은 죽을 아무렇지도 않게 배급한다는 것은 적어도 김성철이 제국에 몸을 담을 때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성철이 현직에 있었다면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음식을 만든 이와 만들게 지시한 이 전부. ‘그 녀석. 자신의 나라가 이렇게 돌아가는 걸 알기라도 하는 건가?’ 김성철은 황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윌리엄 퀸튼 말버러. 완벽한 철인. 그 이외엔 황제를 달리 표현할 말이 존재치 않을 것이다. 그는 마치 신을 본 따 만든 조상처럼 근엄한 미와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외견에서 느껴지는 인상을 그대로 담은 경건한 음성은 더욱 대단했다. 그가 입을 열면 시끄럽게 떠들던 한량마저도 고개를 돌리고 그쪽을 응시할 정도였다. 김성철과는 소환궁전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다. 인세의 지옥과 같던 소환궁전에서 김성철은 그에게 생명의 빚을 졌다. 여기서 말하는 빚이란 한 번의 돌발적인 위기에서 목숨을 구한 일개 사건이 아니다. 정신이 붕괴되어 정처 없이 방랑하던 김성철을 다잡고 생의 의지를 불어넣은 건 물론이고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알려준 스승이기도 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김성철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의 결정적인 충돌이 있었고 김성철과 황제는 오랜 연을 끊고 결별했다. 아마도 두 번 다시 화해할 순 없을 것이다. 김성철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심장 바깥으로 뛰쳐나올 것 같은 분노의 감정이 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뭘 그리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고 있는 거야?” 베르텔기아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김성철을 향해 퉁명스레 물었다. “옛날 생각.” “아, 옛날 생각? 난 또...” 베르텔기아가 실망한 어조로 말끝을 흐렸다. 김성철은 뭔가 꺼림칙한 걸 느끼고 물었다. “뭐가 문제냐?” 김성철이 묻자 베르텔기아는 베시시 웃으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뭐냐. 두고 온 할렘 생각하는 줄 알았지!” “그딴 게 있을 거 같냐!” 그러고 보니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는 김성철이었다. 인간제국의 수도 바로 옆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정보수집이란 것도 필요한 법이다. 그렇게 황제에 대한 김성철의 분노의 불똥이 열심히 일하는 제국의 관리에게 튀게 된 것이다. 방법은 김성철이 즐겨 쓰는 미행으로부터 시작됐다. 영양죽을 나눠주던 수레를 따라갔다. 수도 인근이라 그런지 경비병은 늙고 허리가 굽은 병사 두 명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피난민이 없는 지역에 들어서자 수레에서 떠났다. 수레는 물푸레나무가 우거진 숲속에 들어섰는데 숲의 입구에 들어서자 영양죽의 기묘한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숲의 입구에 작은 오두막이 있었는데 수레는 그 앞에 섰다. 삐쩍 마른 관리는 수레에서 내리며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여어! 구호식량 준비는 잘 되고 있나?” 오두막 입구엔 푯말이 하나 붙어 있었다. - 호문클루스 아줌마의 집 - 버림받은 호문클루스에게 관심과 사랑을 - 안 쓰는 호문클루스 기부 받습니다 한 덩치 좋은 중년 여성이 거대한 솥 안에 주걱을 넣고 젓고 있었다. 옷차림은 여성인데 근육질의 팔뚝과 떡 벌어진 어깨를 보니 남자로 보였다. “으읔...” 이상한 놈을 알아보는 기발한 재능이 있는 베르텔기아가 묘한 소리를 냈다. 김성철도 그 사내가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아니나 다를까 곧 김성철은 그 사내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오두막 옆에 위치한 수상쩍은 창고 안에 살아 있는 야생 호문클루스들이 가득했다. “여기서 꺼내달라는 거예요!” “제발 부탁이니 당장 꺼내주는 거예요!” 창고 문을 열자마자 호문클루스들이 아우성을 쳤다. 근육질의 사내는 호문클루스를 몇 마리 붙잡고 오두막으로 들어가더니 그대로 펄펄 끓는 가마 안에 집어넣었다. 삐쩍 마른 관리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아무리 쓰레기 같은 생명이라고 해도 저렇게 죽는 걸 보니 보기 좀 그렇구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은화 몇 닢을 근육질의 사내에게 넘겼다. “어머어머.” 그것이 수상쩍은 사내가 한 유일한 말이었다. 돈을 넘긴 관리는 다시 수레에 올라탔다. 김성철의 본격적인 용무도 그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무방비 상태의 관리를 숲속에서 가볍게 포획했다. “뭐.. 뭐냐! 뭐하는 짓이냐! 내가 누군지 알기라도 하는 거냐!” 격렬하게 반항하는 관리를 향해 김성철은 가만히 영혼창고에서 팔 가라즈를 꺼내보였다. 그것을 본 관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김성철은 그를 나무 위에 매달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아까 일주일 낮, 일주일 밤 동안 내 욕을 할 수 있다고 했었지?” “히.. 히익!” “어디 한 번 해 봐. 일주일 동안 들어줄 테니.” 덕분에 기선 제압은 쉽게 할 수 있었다. 김성철은 관리로부터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현재 라그란제는 봉쇄된 상태라고 한다. 황제의 명으로 모든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황제의 허가서를 받은 자만이 라그란제를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물었지만 관리는 알지 못했다. 다만 라그란제 내부에 심상찮은 일이 일어났다는 궁색한 추측만을 이야기할 뿐이었다. “…….” 이제 남은 건 관리의 처분뿐이다. 김성철은 관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잠깐 생각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죽여서 입을 없애는 것이지만 김성철은 왠지 다른 방법을 쓰고 싶었다. 그는 관리를 풀어줬다. “내 소문이 제도에 퍼지면 네가 그렇게 한 걸로 알고 있겠다.” 상투적인 협박과 함께. 베르텔기아도 한몫 거들었다. “호문클루스들과 함께 솥 안에서 목욕하기 싫다면 입조심 하는 게 좋아!” 숲을 나설 무렵 베르텔기아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아? 저렇게 풀어줘도.” 이제는 김성철의 방식에 익숙한 베르텔기아다. 김성철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문이 나도 관계없다. 어차피 입구가 막힌 이상 큰 의미는 없으니 말이다.” “그럼 어떻게 그 도시에 들어갈 거야?” 베르텔기아의 물음에 김성철은 무심한 눈빛으로 허공을 노려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길이 하나 있다. 그것도 특별한 길이.” “특별한 길? 무슨 길인데?” “예전에 가려고 했었지만 끝내 가지 못했던 길이지.” 김성철은 쓸쓸히 웃으며 제도 라그란제의 뒤편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은 악취로 들끓는 하천이었다. 김성철은 성벽과 하천을 연결하는 거대한 틈바구니를 노려보았다. 김성철은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다. 대하수도의 입구. 제도 라그란제의 모든 오물들이 흘러나오는 곳. ======================================= 54. 대하수도 (2) 대하수도에 들어가기 전에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다른 옷을 꺼냈다. 이계인들이 입는 허름한 평상복에 가죽으로 만든 허름한 외투였다. “옷 갈아입는 건 처음 보네.”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불쑥 말했다. “자주 입는 옷에 냄새가 배기면 안 되거든.” “결국 또 그 넝마주이 같은 옷 입겠다는 소리야?” “마음에 드는 옷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지.” 옷을 갈아입은 김성철은 원래 입던 옷을 영혼창고에 고이 모셔두고 대하수도의 입구로 통하는 비탈길을 걸어 내려갔다. 가까이 갈수록 끔찍한 악취로 인해 김성철은 깨끗한 물에 적신 천으로 호흡기를 막아야 했다. 후각이 쉽게 자극에 둔감해지는 기관이라고 하나 이런 악취를 장기간 맡으면 식욕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대하수도의 입구에 가까이가자 놀랍게도 사람이 사는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김성철이 오물이 흐르는 강가에 들어서자 그 기척을 듣고 굴 속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기어 나왔다. 김성철은 잠시 멈춰 그들을 응시했다. ‘피난민인가. 아니, 피난민은 아니군.’ 사람이라기보다는 사람의 형상을 한 껍데기 같은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꽤 오랫동안 이 끔찍한 환경에서 살아온 것으로 보였다. 김성철은 그들을 지나쳐 입구로 걸어갔다. “으... 저 사람들 대체 뭐야?” 베르텔기아가 몸을 부르르 떨며 묻자 김성철은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부터 라그란제의 대하수도엔 살인자와 기형아, 저주를 받은 뒤틀린 자, 도적과 부랑자, 기타 알고 싶지 않은 괴물들로 우글거렸지.” “도시 위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네.‘ 제국이 들어서고 어느 정도 청소된 줄 알았는데 황제의 통치력도 라그란제의 지하엔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군.” 건너편 강가엔 하수도 옆에 사는 자들이 긴 장대로 오물 속을 뒤적이고 있었다. 곧 그쪽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는데 도시에서 떠내려 온 시체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베르텔기아는 이곳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하수도로 통하는 커다란 틈새 안에 들어서자 짙은 어둠이 김성철을 반겼다. 김성철은 소환광장에서 노획한 라이터로 횃불에 불을 붙이고 망설임없이 악취나는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 걸음 걷자 머리 위와 측면에서 가볍고 부산하면서도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소음이 들려왔다. 벽면에 횃불을 비추자 다리가 아주 많거나 아예 없는, 혹은 더듬이가 대단히 긴 끔찍한 벌레들로 가득 차 있었다. “꺄아아아아!” 결국 베르텔기아의 입에서 비명이 나왔다. 김성철은 마구 몸을 흔들어대는 베르텔기아를 손으로 움켜잡고 진정시키며 빠르게 그 끔찍한 지역을 벗어났다. 쭉 앞으로 가자 멀리서 희미하게 횃불이 켜진 구역이 들어왔다. 화강암 벽돌로 만든 하수도와 이끼 긴 벽면이 횃불 아래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하수도의 끝부분이다. 그쪽으로 가자 베르텔기아가 기겁하는 벌레는 거의 없었다. 어느 정도 패닉에서 벗어난 베르텔기아가 여전히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파블론지 파브르인지 하는 인간도 저런 거 좋아해?” “아마 저런 건 파브로도 거를 거다.” 대하수도의 입구는 굵은 쇠창살로 막혀 있었다.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쪽문이 하나 있긴 했는데 세월의 흐름에 녹슬고 뒤틀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걸로 보였다. 김성철은 냅다 그 쪽문을 발로 찼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쪽문이 저만치 멀리 날아가 나뒹굴었고 징소리 같은 소음이 오물이 흐르는 물살 위로 멀리 울려 퍼졌다. “너무 호쾌한 거 아니야?” “나름 힘 조절을 했는데 생각보다 문이 약했던 모양이야.” 아마도 이 주변에 사람이 있다면 모두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성철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라그란제로 숨어 들어가는 이유는 못 들어가서가 아니라 무의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니까. 실제로 소음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상상 이상으로 방대하고 복잡한 악취 나는 미로 속에서 김성철은 그만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대하수도에 들어오는 걸 처음부터 못 마땅하게 생각했던 베르텔기아가 짜증을 부렸다. “길도 모르면서 여기로 오자고 한 거야?” “앞으로 가다보면 아는 길이 나올 줄 알았는데 워낙에 지은 지 오래된 도시라 그런 지 그게 잘 안되는군.” 김성철은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했다. 더욱 큰 문제는 되돌아가는 길도 잃어버렸다는 것이고 김성철이 좋아하는 벽을 부셔 길을 만드는 방법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무턱대고 벽을 부셔대다간 도시 한 구석에 무너져 내릴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제 김성철에게 유일한 탈출법은 천정에 구멍을 뚫고 빠져 나오는 것이다. 다행히 그 작업은 예전보다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비행마법인 플라이를 익혔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강행돌파라도 할 걸 그랬나.’ 그렇게 생각하며 플라이를 시전하려하던 참이었다. 어두운 하수도 복도 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조심스럽고 작은 발걸음. 도적의 발소리다. 그 발소리는 이쪽을 향해 똑바로 오고 있었다. 멀리서 일렁이는 횃불을 보고 찾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김성철은 그 자리에 멈춰서서 낯선 인물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횃불을 든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이는 이십대 중반, 나이에 비해 귀엽게 생겼지만 뺨에 큼지막한 칼자국이 나 있어 복합적인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도적풍의 행색을 한 그의 허리춤엔 두 자루의 단검이 달려 있었다. “뭐야?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했더니 멀쩡한 사람이잖아.” 그는 김성철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뭐하는 놈이냐?” 김성철이 싫어하는 건 마법사, 암살자 등등 매우 많은데 도적도 그중 하나였다.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숨어 기회나 엿보는 비열한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김성철의 물음에 젊은 도적은 김성철에 대한 파악이 전부 끝난 듯 제법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올려 싸울 뜻이 없음을 표시했다. “뭐하는 놈이긴. 냄새 나는 하수도를 돌아다니는 버러지 인생이지. 그러는 넌 여기서 뭘 하고 있냐?” “…….” 김성철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인즉슨 개똥도 약에 쓸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생각을 정리한 김성철은 도적을 노려보며 솔직하게 말했다. “길을 잃어버렸다.” 그 말을 들은 젊은 도적은 폭소를 터뜨렸다. “거참 웃기는 놈이네. 생긴 건 빡세게 생겼는데 말이야.” 다른 건 몰라도 도적의 눈치는 빠른 편으로 보였다. 무표정한 김성철이 분노를 느끼기 시작하자 즉시 태도를 바꾸어 화제를 전환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지만 곤경에 처한 걸 사람을 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인간제국의 시민으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 모처럼 인간애를 발휘해 도와주지.” 그 도적은 뒤로 돌아서서 앞으로 걸어갔다. 김성철은 도적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은 속는 셈치고 도적의 뒤를 따랐다. 가끔 김성철이 즐기는 소소한 도박이다. 오랜만의 도박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파토가 난 걸로 보였다. 도적이 김성철을 데리고 간 것은 악인이 우글거리는 도적의 소굴이었던 것이다. 적대적인 눈빛이 김성철의 얼굴을 연이어 날카로운 창끝으로 후벼 파는 듯 했다. “긴장하지 마. 여기 있는 친구들은 비록 전과자에 살인범도 섞여 있지만 알고 보면 전부 좋은 친구들이거든.” 똥개도 제 집 앞에선 50점은 먹고 들어간다고 젊은 도적도 자기 패거리가 있는 곳에 오자 제법 기고만장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성철 앞에 두 명의 사내가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한 놈은 덩치가 크고 다른 하나는 덩치가 작았는데 덩치가 작은 녀석은 체구의 열세를 이마에 살인범을 나타내는 문신으로 보충하고 있었다. 문신을 새긴 사내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진 거 다 내놔.” 좋은 친구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정직한 친구들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두 흉악한 도적 등 뒤에 숨어 히죽 웃는 젊은 도적을 노려보았다. 젊은 도적은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하며 익살스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 김성철은 품속에서 은화 세 닢을 꺼내 사내들에게 내밀었다. “이게 전부냐?” 도적들은 만족 못했다. 김성철은 은화 한 닢을 더 꺼내 도적에게 내밀었다. “이게 전부냐?” 도적들이 다시 물었다. 김성철은 이번엔 은화 2닢을 더 내놓았다. “뭐하는 놈이야. 내놓을 거면 한 번에 내놓을 것이지.” 이에 김성철은 마지막으로 은화 한 닢을 더 꺼내 도적들에게 내밀었다. 도적들은 거칠게 은화를 받아 챙긴 후 서로를 마주보며 히죽 웃었다. 드디어 만족한 것이다. 그걸 본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욕심이 작은 친구들이군.’ 오래 살 관상이다. 그들은 젊은 도적에게 은화 한 닢을 던지고는 자리를 떠났다. 젊은 도적의 입가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아니, 형님들! 제 몫이 조금 작은 거 같은데 뭔가 계산에 착오가 있는 거 아닌가요?” 그는 거친 도적들의 뒤를 따라붙었다. 그 대가는 매서운 주먹질이었다. 한 방에 코가 삐뚤어지고 코피가 나올 정도로 묵직한 일격을 맞은 젊은 도적은 뒤로 나자빠진 채 분한 표정으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 어두운 통로 쪽을 향해 걸어갔다. 김성철은 그 젊은 도적의 뒤를 좇았다. 이미 다른 도적들이 보는 앞에서 탈탈 털린지라 아무도 김성철을 신경 쓰지 않았다. 젊은 도적은 오수가 흐르는 통로에 놓인 술통 위에 멍하니 앉아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이.” 김성철이 젊은 도적을 불렀다. 젊은 도적은 김성철 쪽을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김성철이 다시 젊은 도적을 불렀다. “어이.” “왜?” “약속이 틀리잖아.” “속는 놈이 바보지.” 젊은 도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김성철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품속에서 은화 한 닢을 꺼냈다. 그걸 본 젊은 도적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는 손을 뻗어 덥썩 김성철의 은화를 가로채려했다. 제법 빠른 손놀림이었지만 김성철의 눈엔 애들 장난으로 보였다. 그는 은화를 낚아채려는 도적의 손을 가볍게 피하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바깥으로 나가는 법을 알려주면 이 은화를 주지.” “아니 이 사람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속고만 살았어! 은화 주면 안내해준다고.” “속는 놈이 바보라며?” 김성철의 말에 도적은 정곡을 찔렸는지 인상을 구기며 술통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따라와. 어디로 가고 싶어? 대하수도 바깥? 아니면 라그란제 안?” “당연히 라그란제 안이지.” “라그란제 쪽? 거긴 상당히 위험한데. 굳이 그쪽으로 가려면 은화 하나로는 부족해.” “그럼 두 닢이면 충분한가?” “세 닢. 세 닢이면 라그란제 입구까지 안내해주지.” 젊은 도적은 제 딴엔 괜찮은 협상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김성철의 눈엔 이놈이고 저놈이고 한없이 저렴해 보일 뿐이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젊은 도적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그러자 도적은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댔다. “빠른 손 바빈이다.” 김성철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라그란제로 향한 여정이 재개됐다. 김성철은 바빈에게 현재 위치를 물었다. “여기는 라그란제 아래인가?” 바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확히는 아니야. 여긴 구시가지 아래거든.” “구시가지라.” “루테기네아 왕국 시절 있었던 오래된 거리지. 라그란제에 초행길인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구시가지엔 아무도 살지 않아.” “그래?” 김성철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8년 전 그가 수도를 떠나기 전까진 구시가지엔 제법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다수 가난하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옛 왕국의 오래된 귀족 일부도 그 땅에 터 잡아 살고 있었던 곳이었다. “황제가 정화구역으로 선포했거든. 각종 이단에 사이비가 그곳에서 창궐하니까 아예 사람이 살지 못하게 모두 내쫓아 버린 거지.” “그럼 그곳에 살던 사람은 다 어디로 간 거지?” 김성철의 의문은 오래 지나지 않아 해결됐다. 햇빛 하나 들지 않는 껌껌하고 악취 나는 공터 안에 사람들의 마을이 있었다. 대다수 늙고 병든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곳에는 절망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무력감이 흐르고 있었다. ‘이래가지고는 옛날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군.’ 10년도 더 된 과거의 일이 김성철의 눈앞을 그리듯 스치고 지나갔다. “자, 여기서 앞으로 쭉 가면 수도로 가는 통로가 나올 거야.” 약간의 행군이 추가로 이어진 후 바빈은 어두운 통로를 불안한 눈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김성철은 약속했던 은화를 전부 그에게 내밀었다. 바빈은 돈을 챙기고는 씨익 웃었다. “아까 속인 건 미안! 형님들이 시켜서 한 짓이었어.” “신경 쓸 것 없다.” “시원시원한 사람이군. 상으로 한 가지 사실을 더 알려주지.” 바빈은 두려움이 깃든 푸른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통로 안쪽을 지그시 응시했다. “여기까지 와서 할 말은 아닌 거 알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 이상 앞으로 가지 않는 게 좋아.” “이유라도 있나?” “괴물이 살고 있어. 저 너머엔.” “괴물?” “그게 정확히 뭔지는 나도 몰라. 황제가 풀었다는 소문도 있는데 중요한 건 그 괴물을 만나고 살아남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거야.” 바빈은 그 괴물을 이야기 하는 것 자체가 두려운 듯 시종일관 몸을 떨며 이야기했다. 물론 김성철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이야기다. “죽어도 난 몰라. 난 경고했어.” 그는 젊은 도적의 경고를 듣고서도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곧 어둠 속에서 경계를 구분 짓는 쇠창살이 나타났다. 입구에 있던 것과 확연히 비교될 정도로 튼튼하고 유지보수가 잘 되어 있었다. 김성철은 앞을 가로막은 철문을 응시했다. 철문 앞엔 피를 연상케 하는 붉은 물감으로 칠한 푯말이 서 있었다. [ 제국 하수도 관리인 외 출입금지 ] 철문 너머에서 음산하고 기괴한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놀랍게도 일전에 들은 소리다. 김성철은 아퀴로아의 공선에서 보았던 기괴한 형상의 병사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괴물의 정체라는 건 구세병인가?’ 확실치는 않지만 확인해볼 가치는 있다. 김성철은 철문을 열어젖히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54. 대하수도 (3) “우로로롱,,,” “우로로롱....” 음습한 악취와 함께 멀리서 들려오는 기괴한 울음소리는 제 아무리 강심장을 지닌 사람이라고 공포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김성철에겐 야밤에 짖는 옆집 개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시끄럽군.’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악취에 섞여 풍기는 시체 썩는 냄새였다. 처음엔 운 없는 시체 한 구가 무덤도 없이 하수도에서 썩어간다고 생각했지만 앞으로 진행할수록 부패한 시체의 악취는 농도를 더해갔다. 한두 구가 아니다. 김성철은 한 여름날 전투가 끝난 전장에서 풍기던 악취를 연상했다. 김성철의 예측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김성철은 하수로 안에 처박혀 처참한 몰골로 부패하고 있는 시체들을 발견했다. 대략 다섯 구정도. 떠도는 부랑자이거니 했는데 복장을 보아하니 제법 지체 높은 사람들로 보였다. 김성철은 오폐수 너머 드러난 썩어가는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보석반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으.. 그냥 빨리 여기서 떠나면 안 돼? 저런 건 절대 안 보고 싶어서 말이야.” 끔찍한 장면엔 이골이 난 베르텔기아였지만 썩어가는 시체는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다. “잠깐만.” 김성철은 구석에 널린 더러운 장대를 잡아 시체를 뒤적거렸다. 찰랑하고 한 시체에서 금으로 만든 목걸이가 흔들거렸다. ‘돈을 노리고 죽인 게 아니군.’ 김성철은 시체를 버려두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무더기의 시체가 이번엔 수로가 아닌 통로 쪽에 쌓여 있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꽤나 지체 높아 보이는 사람들이었지만 이번 시체들은 귀중품이 모두 약탈당한 상태였다. 그래도 아까보단 상태가 양호했기에 김성철은 시간을 들여 시체들의 상태를 감정했다. 명백한 타살이다. 모두 검이나 둔기 따위에 의해 살해당했다. 김성철은 한 시체의 상의에 장식된 문장을 보고 그의 출신을 알아보는데 성공했다. ‘대륙 동부 군소국들의 귀족들이군.’ 강력한 국가가 자리 잡은 대륙 서부와 중앙지방과 달리 대륙 동부엔 유구한 세월 동안 번성하던 부유한 소국과 도시국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활발한 교역과 수준 높은 문화로 대륙 전체에서도 살기 좋은 곳으로 정평이 난 곳이지만 거신의 출현은 이계의 낙원을 폐허로 바꿔 놓았다. 은자의 탑에서 제도 라그란제까지 끝도 없이 자라잡고 있던 피난민들은 전부 동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김성철의 뇌리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하지만 그는 그 생각을 흩어버렸다. 구체적으로 결론내리기에는 근거가 빈약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로를 지나면서 계속해서 동부 귀족들의 시체들이 연이어 발견되자 김성철은 자신의 생각이 들어맞는 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의혹을 느꼈다. ‘설마. 동부의 귀족들을 대량으로 처형한 건가?’ 김성철은 라그란제 외곽에서, 제도 라그란제 전역에 봉쇄조치가 내려졌다는 말을 떠올렸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이유가 있다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이 시체들을 보니 그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불길한 예감이 드는군.’ 황제는 심장보다는 머리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다. 루테기네아처럼 수단과 방법을 일체 가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필요한 경우엔 충분히 비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다. 동부의 귀족들은 대량으로 처형한 것은 틀림없이 모종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리라. 지금까지 황제가 밟아온 길을 돌이켜볼 때 그것은 그다지 기분 좋은 이유는 절대 아닐 것이다. 김성철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빨라졌다. 그와 상응하며 멀리서 들려오던 구세병의 울음소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우로로로....” 시체더미 한 구석에서 구세병의 모습이 보였다. 숫자는 셋. 푸르스름한 젤리 같은 신체를 지닌 그 괴물들은 시체더미 앞에 아이처럼 쪼그리고 앉아 시체를 파먹고 있었다. 구세병들은 김성철의 기척을 느낀 듯 커다란 몸을 움찔거리며 김성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으.. 귀도 밝네. 나 쟤들 정말 싫어.” “…….” 김성철의 손에 오랜만에 대도 크럼부이가 나타났다. 팔 가라즈를 쓰지 않은 이유는 장소가 장소인지라 오물이 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팔 가라즈는 자아를 가진 크럼부이와 달리 단순한 하나의 사물에 불과했지만 김성철은 드워프들에게서 잠시 빌린 그 성스러운 물건을 하수도에서 쓰고 싶진 않았다. “여어. 친구. 이 퇴물을 왜 다시 부르셨나?” 영혼창고에서 나오자마자 크럼부이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난 이 놈도 싫어!” 베르텔기아가 크럼부이를 보자 한마디 했다. “가진 건 날카로운 날밖에 없는 주제에 너무 말이 많다구!” 크럼부이도 한 성깔 하는 녀석인지라 지지 않고 맞받아친다. “뭐야? 전의 그 말하는 책이냐? 여전히 징징거리는 꼬마 애처럼 구는군!” 안 그래도 인상이 나쁜 놈이 쓴 소리까지 하니 참을 수 없다. 베르텔기아는 버럭 화를 냈다. “누구보고 꼬마 애라는 거야? 너 몇 살이야? 어? 천 살은 넘어? 어!” “천 살이야 가볍게 넘지!” 아닌 때 일어난 물건들 사이의 내분을 보고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경로당 싸움도 아니고.’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와 크럼부이를 각각 움켜잡아 진정시킨 후 눈앞의 적을 노려보았다. “싸움은 나중에 해라. 지금은 저것들이나 처리하자고.” “싫다면 어쩔텐가?” 크럼부이의 날이 무뎌졌다. 그걸 본 김성철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설마 저것들을 벨 자신이 없는 건 아니겠지?” 김성철은 크럼부이를 들어 구세병을 가리켰다. 크럼부이에게서 묘한 빛이 번득였다. “저건 또 뭐야? 사람도 아니고 젤리도 아니고. 모양새 자체는 루테기네아의 고기 골렘처럼 생겼는데 기분 나쁜 건 똑같군그래.” “벨 수 있겠나? 저것들을?” “한 번 해보지.” 크럼부이의 칼날이 다시 예리하게 돌아왔다. “그나저나 여긴 기억에 있는 곳이군. 어디였더라. 아. 거기였군. 공주와 사랑의 도피를 하던... 읔!” 크럼부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김성철의 손이 손잡이를 박살낼 것처럼 강하게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농담이야! 농담! 아무튼 저것들이나 빨리 베자고!”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시체를 뜯는 구세병을 향해 다가갔다. 구세병들은 김성철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도 계속해서 시체를 뜯어먹고 있었다. 그동안 자기들보다 약한 자를 상대해서 그런 것일까? 김성철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실제로 구세병들은 그 자체로 놓고 보면 충분히 강한 존재였다. 초인이라 불리는 기사급의 신체적 능력에 여간한 물리 및 마법공격을 저감시키는 회복력 뛰어난 육체를 지니고 있으므로. 게다가 3미터에 이르는 키와 긴 리치에서 나오는 변칙적인 일격은 능력치 이상의 효율성을 지니고 있었다. 아마도 구세병 하나가 그 키우기 어렵다는 기사 한 명보다 높은 전투력을 지니고 있으리라. 그런 것들이 세 마리나 뭉쳐 다니고 있으니 여간한 위협 따위엔 반응을 보이지 않을 법도 하다. 하지만 이번엔 운이 나빴다. 그 괴물들은 김성철이 코앞에 다가와서야 비로소 몸을 일으키고 지퍼처럼 달린 눈알을 굴리며 김성철을 노려보았다. 그 괴물들은 말은 하지 못했지만 비웃음 비슷한 소리를 낼 수 있었다. 바람 빠진 아코디언에서 날 법한 기괴한 소리였다. 크럼부이가 그 괴물들을 노리고 허공 위에 일직선을 그렸다. 스걱. 겉보기엔 평범한 휘두르기로 보였지만 구세병은 김성철의 일격을 피해날 수 없었다. 한 마리가 거대한 칼날에 잘려 일도양단 당했다. 구세병들은 그제야 상대방이 만만치 않은 적수라는 알게 되었지만 크럼부이의 움직임이 한 발 빨랐다. 구세병들은 칼날에 토막 나 시체 옆에서 나뒹굴었다. 무참하게 썰린 머리통들이 김성철을 노려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인다. 김성철의 군홧발이 구세병들의 골통을 호두처럼 으깨버리자 하수도 안엔 정적이 찾아왔다. “…….” 김성철은 처치한 구세병의 시신에서 검은 재앙의 기운이 연기처럼 하늘 위로 올라가며 사라지는 걸 두 눈에 담았다. ‘부유군도. 언젠가는 한 번 들릴 필요가 있겠군.’ 그 시점은 아마도 칠영웅을 쓰러뜨린 다음이 될 것이다. 김성철은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끝도 없는 시체의 물결이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그렇게 앞으로 가던 중, 오랜만에 보는 햇빛이 머리 위에서 비추고 있었다. 라그란제의 시가에 내리쬐는 햇빛이다. 희미하게 웅성이는 소리와 마차의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 틈새 사이를 오가며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기척들. 김성철은 종착지가 머지않았음을 느꼈다. 하지만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평탄치 않다. “우로로로...” “우로로로....” 구세병의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김성철은 숨을 죽이고 구세병의 소리를 들어 그 숫자를 가늠했다. ‘얼추 수십 마리는 되어 보이는군.’ 김성철이 처치한 것은 그저 파수병에 불과한 걸로 보였다. 구세병은 라그란제의 지하수로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아마도 요소요소, 길목마다 여러 마리로 이루어진 구세병 무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김성철은 한 가지 의아함을 느꼈다. ‘이 괴물들이 왜 제도의 하수도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 부유군도와 인간제국은 동맹 관계에 놓이긴 했지만 엄연히 구분되는 세력일 터인데.’ 김성철이 제국에 몸을 담을 때만 해도 제국과 부유군도 사이는 좋지만은 않았다. 제국대원수 김성철이 대륙을 동분서주하며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낸 세계의회. 그 주도권을 놓고 황제와 아퀴로아는 막후에서 대립하고 있었다. 세력 기반은 누구보다 강하지만 다른 나라에게 집요한 견제를 받는 황제와 기반은 약하지만 따라서 중립적일 수 있다는 기치를 내걸며 타국의 지지를 등에 업은 아퀴로아 사이의 주도권 다툼은 권력층에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물론 재앙 혹은 대륙의 평화를 저해하는 행위에 대한 대처 등의 중대사엔 감정을 제쳐두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모양새긴 했고 부유군도의 유능한 마법사를 황제가 궁정에 받아들인 것도 사실이지만 적어도 수도의 지하를 정체모를 괴물들에게 내줄 정도로 살가운 사이는 절대 아니었다. 혹 아퀴로아가 다른 마음을 먹기라도 한다면 황제 부재시 제도 전체를 장악할 수도 있는 괴물들을 받아들이는 건 황제가 미치지 않은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괴물들이 지금 제도의 대하수도 안에 서식하고 있다. 둘 사이의 관계는 김성철이 상상한 이상으로 끈끈한 사이로 발전된 게 틀림없다. 아무튼 하수도를 뒤덮다시피 한 구세병단의 출현으로 인해 김성철의 발걸음이 일순 멈췄다. 기척을 죽이고 한 무리씩 죽이고 나아가는 게 최적의 선택지로 보였지만 구세병은 평범한 인간보다 오감이 발달한 상태로 보인다. 기척을 죽이고 한 무리를 때려죽이는 건 간단한 일이지만 행여나 그 과정에서 다른 동료들을 부르기라도 한다면 난감한 상황에 처한다. 수십 마리의 구세병을 싸워 이기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 싸움을 조용히 할 자신은 또 없었던 것이다. 필경 전투의 파장이 머리 위, 라그란제의 도심까지 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껏 동네 도적들에게 삥까지 뜯겨가며 이곳에 온 보람이 하나도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 그렇게 김성철이 고민할 때였다. 크럼부이가 불쑥 그 특유의 걸걸하고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 그리 고민해? 앞으로 쭉쭉 보자고. 이 괴물들의 피 맛, 제법 독특한 풍미가 있으니까 말이야.” “조용히 가려고 한다. 크럼부이.”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며 하수도 주변을 돌아보았다. 눈에 익은 풍경이지만 확실히 알 수 없는 곳이다. ‘분명 여긴 온 기억이 있는데... 시간의 흐름 때문인가. 흐릿하기만 하군.’ 김성철이 다시 침묵에 잠겨들자 크럼부이가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그 길로 가면 되잖아?” “그 길이라니?” 그의 물음에 크럼부이는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양질의 피를 잔뜩 먹여줬던 그 길 있잖아.”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동공이 일순 수축됐다.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무딘 심장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그 길을 기억하나?” 김성철이 묻자 크럼부이는 자신의 칼날을 번득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쭉 앞으로.” “이 칼 고장 난 거 같은데.” 베르텔기아가 딴지를 놓았지만 김성철은 여기서는 크럼부이의 말을 따랐다. “왼쪽으로.” 크럼부이는 마치 이곳의 풍경을 모두 숙지라도 한 양 지체없이 김성철에게 길을 제시했다. 중간 중간 구세병에게 아슬아슬하게 들킬 뻔한 적도 없지만 큰 무리없이 김성철은 위험을 통과했고 곧 김성철은 막다른 벽 앞에 이르렀다. “여기잖아. 기억 안 나?” 크럼부이가 말했다. 베르텔기아는 계속해서 크럼부이에게 시비를 걸었다. “뭐야. 막다른 길이잖아! 나이도 어린 게 벌써부터 기억력이 그렇게 낮으면 어떻게 해!” 두 물건이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막다른 벽을 응시했다. 세월의 흐름을 머금은 다른 부분과 달리 새롭게 회벽칠을 한 부분이 보였다. 김성철은 그 틈을 손바닥을 대고 적당한 힘으로 밀었다. 그러자 회벽질한 벽돌이 무너지며 새로운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녹색빛이 도는 다른 하수도의 벽과 달리 불그스름한 빛깔을 머금은 새로운 통로였다. 그 통로를 본 순간 김성철은 둔기로 후두부를 얻어맞은 충격을 느꼈다. “…….” 무아지경 속에서 김성철은 침을 꿀꺽 삼켰다. 주머니 안에 있던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심장의 고동이 평소와는 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람...’ 지금 이 순간, 김성철은 다른 이와 같은 곳을 보고 있었지만 그의 눈앞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10년도 더 된 먼 옛날. 투기장의 핏물을 흘려보내던 붉은 통로에서 검투 노예 김성철은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공주 라이즈 하이메르를 데리고 탈주극을 감행했다. 김성철은 피를 머금은 석벽 사이를 걸으며 과거의 아련한 추억들이 생생한 형태로 재구성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슬픔과 회한 속에서 어느덧 붉은 통로는 끝을 고했다. 판자를 덧대어 만든 엉성한 나무벽이 앞을 막고 있었다. 김성철은 뜯어내고 그 너머로 걸어 나갔다. 죽음과 열광, 그리고 피로 얼룩졌던 투기장의 익숙한 풍경이 운명처럼 김성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 55. 제도 라그란제 (1) 라그란제의 투기장은 루테기네아의 잔악성을 상징하는 곳이다. 그곳에선 매일 같이 피의 축제가 벌어졌다. 김성철은 수만 명의 관중 앞에서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의 사람, 이종족, 짐승, 마물들이 피를 흘리며 투기장의 흙바닥 위에 쓰러지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하지만 인간제국이 들어서면서 투기장은 자연스레 폐쇄, 이제는 제국 식물원으로 전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인간과 동물의 피를 잔뜩 머금었던 흙바닥 위로 이국적인 식물들이 무럭무럭 자라 있었다. 김성철은 주변을 살폈다. 석양이 지고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적절한 시간대다. 먼저 옷부터 갈아입었다. 늘 입고 다니던 허름한 코트와 다 떨어진 청바지다. 하수도의 악취가 묻은 옷은 식물원 구석에 거름 무더기 위에 집어 던졌다. 옷을 갈아입은 김성철은 느긋하게 주변의 동정을 살폈다. 가까운 곳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멀리 떨어진 건물 쪽에서 일렁이는 불빛이 보였고 희미한 기침 소리도 들리긴 했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니다. 김성철은 입구 주변에서 해가 완전히 지기를 기다렸다. 엄폐는 어렵지 않았다. 사람의 키보다 높이 자란 수풀이 훌륭하게 몸을 가려주었다. “이 훌륭하고 유서 깊은 건물을 농장으로 쓰다니.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만행이군. 그래도 이 풀들은 잘 자라겠군? 수백 년 동안 거름을 듬뿍 준 땅이니까. 안 그래?” 크럼부이는 투기장의 풍경이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김성철도 크럼부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체 없이 영혼 창고에 집어넣자 베르텔기아가 깔깔 웃어댔다. 곧 완전히 해가 졌다. 김성철의 시간이 온 것이다. 그는 두 가지 방법을 놓고 고민했다. 귀신처럼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갈 것인지 아니면 경비병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빠져나갈 것인지. 김성철은 먼저 첫 번째 방법을 생각하고 투기장 건물 쪽으로 다가가 영혼 창고 속의 디텍트 라이프 스크롤을 찢었다. 마법을 통해 본 결과 경비 수준이 만만치가 않다. 아무도 지키지 않는 식물원 안쪽 구역과 달리 식물원을 둘러싼 원형의 투기장 건물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곳곳에 침입자를 감지하는 경계결계는 물론이고 중요한 길목마다 경비병과 주시자의 눈이 교차되어 배치되어 있다. 경비 수준으로 놓고 보면 거의 황궁 수준이다. 아퀴로아의 공선을 제압할 때처럼 하나씩 은밀하게 죽이거나 때려눕히면 쉽게 통과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김성철은 혹 자신의 옛 부하가 섞여 있을지도 모르는 병사들을 상대로 폭력적인 방법을 쓰고 싶진 않았다. 플라이를 써서 하늘로 달아나는 방법도 있지만 이 정도 경비 수준이면 당연히 방비를 해놓았을 것이다. ‘강행돌파는 쉽지 않겠군. 그럼 두 번째 방법을 써야겠어.’ 두 번째 방법을 하려면 연기를 해야 한다. 그런데 김성철은 연기나 미술 같은 예술 쪽엔 재능이 전무하다. 그럼에도 그는 별로 긴장하지 않는 눈치였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모든 군대를 관할하던 김성철은 제국 병사들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병사들이 뭘 생각하는 지 뭘 하려고 하는지는 눈빛과 행동만 보고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시시콜콜한 믿음과 일과까지 꿰고 있었다. 그는 여기서 어떻게 해야 빠져나올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수풀 속에서 나와 원형의 투기장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판자 위에 인부들이 입는 외투와 모종삽, 원예가위 같은 도구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김성철은 외투 중에 그나마 깨끗한 걸 찾아 몸에 한 번 입어보았다. 딱 맞다. 외투를 걸친 김성철은 완벽을 기하기 위해 겉옷에 거름을 묻혔다. 이걸로 복장은 완벽하다. 다음으로 할 걸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교대시간까지 1시간 정도가 남았군. 그동안 식물이나 구경해볼까?’ 김성철은 어둠에 싸인 식물원을 유유히 배회했다. 몇 걸음 채 옮기지도 않았는데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붉은 술에 노란 꽃잎을 지닌 화려한 꽃이었다. 라그란제에서 여우혓바닥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여러해살이 꽃으로 샤프란과 비슷한 맛을 내는 귀중한 식재다. 김성철은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고는 영혼창고에서 자루를 꺼내 하나도 남김없이 잡아 뜯어 자루 안에 집어 넣었다. ‘이런 횡재가 있나.’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반면 베르텔기아는 그런 김성철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많이 해본 솜씬데?” 베르텔기아는 삐딱하게 말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도 영혼 창고에 넣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대신 주변을 돌며 더 가져갈 게 없나 살펴보았다. “호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탐스럽게 익은 복숭아가 가득 열린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예사 복숭아가 아니다. 겨울이 다가오는데도 과실이 열린 것도 신기했지만 꽉 찬 과육에 표면에 은은한 황금빛이 도는 것이 먼 동쪽에서 간신히 가져왔다는 신선도(神禪桃)임이 틀림없다. 사람들이 못 들어가게 붉은 줄로 경계선을 만들어 놓은 게 진귀한 식물이 가득 찬 제국 식물원에서도 특별 취급을 받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황제 놈이 복숭아를 좋아했었지.’ 김성철은 즉시 진실의 눈을 가동했다. 언제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정령계의 촉진 마법과 찬바람으로부터 보호하는 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깨끗한 자루를 꺼냈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신품이다. 그걸 본 베르텔기아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전부터 느꼈는데 말이야. 당신 자루나 밧줄 같은 건 왜 이렇게 많이 들고 다니는 거지? 마치 이럴 때를 대비해 미리 준비한 것 같잖아!” 뼈가 담긴 말이었지만 이미 복숭아에 정신이 팔린 김성철의 귀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밧줄과 자루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김성철은 신선도 나무로 다가갔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손놀림으로 과실을 따 자루 안에 집어넣었다. 벌레가 파먹어 흉하게 자국이 남은 한 개를 제외한 모든 복숭아가 털렸다. 김성철은 하나 남은 복숭아를 노려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황제에게 양보하지.” “보면 볼수록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 꽤 큰 자루가 두둑해졌다. 과일 같은 식감이 중요하고 물기가 가득 한 물건은 영혼 창고에 넣으면 상할 우려가 있으므로 김성철은 자루를 어깨에 짊어졌다. 한 몫 단단히 챙긴 김성철이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복숭아를 짊어진 채 더 챙길 게 없나 주변을 돌아다녔다. 곧 그는 갖가지 향신료의 재료가 되는 허브가 심어진 밭을 발견됐다.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자루 안에 집어넣었다. 보다 못한 베르텔기아가 한 마디 했다. “우리 대체 여기 뭐 하러 여기 온 걸까? 설마 이러려고 여기 온 거야?” “겸사겸사다.” 김성철은 자루에서 신선도 하나를 꺼내 덥석 베어 물었다. 눈이 번쩍 떠질 정도로 훌륭한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멋지군.’ 향긋한 복숭아를 먹으며 별빛으로 가득 찬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붉은 통로를 지나가며 우울했던 마음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김성철은 달빛을 길잡이 삼아 식물원 곳곳을 돌며 챙길 수 있는 건 모두 털어갔다. 어차피 김성철이 안 먹으면 황제의 입으로 들어갈 녀석들이니까 거리낄 것도 없었다. ‘이건 시작일 뿐이다.’ 게다가 김성철의 약탈엔 나름의 이유도 있었다. 서리를 하고 있자니 문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교대를 한 것이다.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 김성철은 잠시 벗어뒀던 인부의 외투를 다시 걸치고 인부용 통로로 걸어갔다. 겉모습이 많이 변했지만 김성철의 기억엔 뚜렷하게 남아 있는 통로다. “여기가 투기장으로 쓰일 때 이 통로는 천국으로 향하는 길이라 불렸지. 투기장에서 죽은 시체는 모두 이곳으로 빠져나가거든. 탐탐 같은 큰 녀석을 제외하곤 말이야.” 통로를 지나며 김성철은 흥미로운 눈으로 통로 곳곳을 살펴보았다. 기묘한 일이었다.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던 검투노예 시절, 언젠가 시체가 되어 이 통로를 통해 투기장 바깥으로 나갈 것이라고 동료 노예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방랑왕의 선처로 석방되어 다른 길을 통해 투기장을 나가게 되었고 천국으로 가는 길은 영영 인연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것이 정작 이렇게 살아서 애증어린 이 길을 통과하게 될 줄이야. 길고 어두운 길을 쭉 따라가자 곧 쇠창살로 이루어진 출구가 나타났다. 병사 두 명이 철문을 지키고 있었다. 겉보기엔 허술하지만 내막을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 병사들을 조망할 수 있는 지점에 투명화된 주시자의 눈이 깔려 있다. 병사들의 숫자가 적다고 제압하려 들다간 식물원 전역에 경보가 울리게 될 것이다. 김성철은 태연하게 병사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들은 자루를 짊어 진 김성철이 나타나자 눈살을 찌푸리며 한마디 씩 했다. “뭐야? 인부냐?” “이 시간에 뭐하는 거야? 일몰 후 작업금지라는 거 못 들었냐?”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건을 벗어봐라.” 김성철은 시키는 대로 했다. 경비병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못 보던 얼굴인데. 안에 든 건 뭐지?” 병사들의 물음에 김성철은 입을 두드리며 말을 할 수 없다는 시늉을 했다. 별 거 아닌 행동처럼 보였지만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다. 바깥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구 루테기네아 왕실에선 비밀유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왕실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잡부들의 혀를 모두 잘라버렸다. 루테기네아 왕국이 멸망하고 라그란제를 접수한 인간제국은 루테기네아에서 쓰던 일꾼들을 모두 승계했다. 말할 수 없는 신세가 된 그들이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경비병은 김성철을 노려보며 한 마디 했다. “뭐야? 루테기네아 벙어리잖아.”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부자만이 아는 정보는 상대방의 경계를 풀어놓는데 훌륭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위기가 지나간 건 아니다. 이 사기극은 병사가 입 한 번 벌려보라는 말만 해도 간단하게 논파 당한다. 그는 병사가 딴소리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자루에서 신선도를 꺼내 제도의 하늘 위에 떠오른 황제의 거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살짝만 벌려 괴이한 소리를 낸 것이다. “아! 아!” 병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 폐하에게 신선도를 진상하러 가는 길이라고?”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선도 하나를 더 꺼내 병사들에게 내밀었다. “아!” “…뭐야?” 병사들의 눈동자에 탐욕의 빛이 떠올랐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선도를 더욱 가까이 내밀었다. “우리한테 주는 거라고?”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손가락을 세워 입을 가리며 쉿 하는 소리를 냈다. 병사들의 얼굴에 함지박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못 보던 얼굴인데 뭔가 아는 친구군.” 그들은 흔쾌히 김성철을 통과시켰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다. 그렇게 생각하며 석벽 사이를 걷자니 누군가 후다닥 뛰어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거기 루테기네아 벙어리!” 모르는 목소리다. 김성철은 자신의 계획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되새겨보며 뒤를 돌아보았다. 마법사다. 상당히 젊은 나이로 보였는데 그는 주변을 돌아보더니 김성철에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나도 하나만 줘!” 주시자의 눈으로 통로 입구를 지켜보는 마법사로 보였다. 김성철은 그에게 신선도 2개를 내주었다. “아!” 그게 마지막 난관이었다. 김성철은 유유히 삼엄한 경계가 펼쳐진 투기장을 빠져나왔다. 아무 문제도 없었다. 한 가지 작은 문제가 있다면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을 흉내 낸다는 것. “아! 아!” 그녀는 뭐가 그리 웃긴지 키득거리며 연신 김성철의 흉내를 냈다. ‘어린애답게 유치한 걸 좋아하는군.’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제 자신 앞에 펼쳐진 제도 라그란제의 정경을 무심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사람은 물론이고 개새끼 한 마리 다니지 않는 조용한 거리. 터무니없이 깨끗하고 정갈한 거리는 보기엔 좋았지만 인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걸 본 김성철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여긴 2구역이었지.’ 현재 사람이 살지 않는 구시가지를 제외하면 인간제국의 수도 라그란제는 총 8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단순히 행정편의상 지역을 나누기 위한 분리가 아니다. 구역 그 자체에 각각의 의미와 힘이 담겨 있다. 제도 라그란제에선 이런 말이 전해오고 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다면 그가 어디 사는지부터 알라는. 김성철은 어깨에 복숭아를 짊어지고 미리 생각해둔 곳으로 향했다. 이름하여 8구역. 라그란제의 밑바닥이라 불리는 빈민들의 거리로 말이다. ======================================= 55. 제도 라그란제 (2)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수도 라그란제의 전체적인 구조를 보면 평지에서 꼭대기까지 나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모양새를 지니고 있다. 인간제국의 황제 윌리엄 퀸튼 말버러는 완만한 나선형의 구조를 이루는 라그란제를 총 8개의 구역으로 분리해 각 구역마다 그곳에 걸 맞는 사람들이 거주하게 했다. 나선의 정점에 위치한 정상 구역은 1구역이라 불린다. 황제의 궁성인 허공궁궐 바로 아래 위치한 이 구역은 모든 구역을 통틀어 가장 으뜸이 되는 구역으로 당연히 반란군의 주요 인사와 반란군에 크게 기여한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한때 김성철도 1구역의 주민이었다. 그는 허공 궁궐이 한 눈에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저택에서 수십 명에 달하는 하인을 거느리고 살았었다. 1구역보다 조금 아래쪽에 위치한 2구역에는 1구역에 사는 이보다 조금 못한 이들이 살고 있다. 루테기네아 왕국의 왕족과 반란군 출신의 신흥귀족들이 이에 속한다. 비록 2구역이라고 하나 1구역에지지 않을 정도의 화려한 저택이 즐비하게 있으며 과거 루테기네아를 상징하던 투기장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명소이기도 하다. 그 아래엔 부유한 시민과 귀족이 사는 3구역이 자리 잡고 있고 그 밑엔 그보다 못한 사람들이 사는 4구역이 있다. 이런 식으로 구역의 숫자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거기 사는 주민의 신분은 반비례한다. 라그란제에서 인간답게 사는 사람들이 모인 구역의 마지노선은 6구역까지다. 그럼에도 그 아래의 구역에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7구역은 아예 산업구로 못 박아 사람이 살 수 없는 구역으로 못박아버렸지만 수많은 직공들이 닭장 같은 집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곳의 삶은 연옥과 종종 비교되곤 하다. 하지만 그 끔찍한 7구역도 최하 등급의 구역인 8구역에 비하면 천국과 같은 곳이다. 라그란제의 시민들은 8구역을 가리켜 인간 하수도로 불린다. 다른 구역에서 살아갈 수 없는 부적격자들이 떠 내리고 떠 내려와 마지막으로 머무는 종착점이라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황제가 자신의 자랑스런 도시에 8구역과 같은 곳을 용인한 이유는 간단했다. 쓰레기는 쓰레기끼리 사는 게 어울린다는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8구역엔 치안도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제국의 치안국에서 형식적인 조사를 하긴 하지만 처벌 받는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8구역 출신의 범죄자가 다른 구역에서 발견될 경우엔 이야기가 다르다. 그들은 단순히 다른 구역에 들어섰다는 이유만으로 지난 8구역에서 벌어진 모든 범죄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극형에 처해진다. 그러므로 8구역에 한 번 들어온 이들은 그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인간 하수도에서 서서히 썩어 죽어간다. 김성철은 바로 그 인간 하수도에 와 있었다. 그의 허름한 복장은 인간 하수도에 살아가는 자들과 비교해서도 절대 꿀리지 않는 복장이다. 오히려 추레함으로 따지면 김성철이 두어 수는 앞설 정도다. 그런 김성철이 2구역 같은 높은 등급을 돌아다닌다면 곳곳에 잠복한 제국치안국의 순경들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김성철은 8구역에 오기 전까지 10번 이상의 순찰조를 피해 다녀야 했다. 그중 2구역에서만 5개 조를 만났다. 라그란제의 치안이 구역의 등급에 비례한다는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무사히 8구역에 도착한 김성철은 복숭아 자루를 짊어진 채 허름한 숙소를 잡았다. 김성철은 첫날을 수면으로 보냈다. 밖에서 들려오는 싸움 소리와 앙칼진 비명소리에 잠을 잠깐 설치긴 했지만 그럭저럭 양질의 수면을 취할 수 있었다. 하루가 지난 뒤 김성철은 복숭아 자루를 짊어진 채 본격적으로 탐색에 나섰다. 그런데 몇 발 가기도 전에 김성철은 제도 라그란제를 뒤덮은 뜨거운 화제와 맞닥뜨릴 수 있었다. “제국 식물원이 괴한에게 털렸데!” “수수께끼의 괴도가 황제가 애지중지하는 복숭아를 전부 털어갔다지 뭐야?” “복숭아는 물론이고 귀중한 꽃과 허브를 싸그리 긁어갔다는 이야기야. 황제가 어찌나 화가 났는지 치안감의 이마에 재떨이를 집어던졌다고 하던데?” 다름 아닌 김성철의 소문이다. ‘황제는 담배를 안 피는데.’ 지엽적인 오류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대로는 위험하다. “어디서 복숭아 냄새가 나지 않아?” “킁킁! 그러고 보니 어디서 복숭아 냄새가 나네.” 행인들이 김성철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고개를 숙이고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다람쥐도 아니고 대체 다 먹지도 못할 거 대체 왜 들고 다니냐고?” 베르텔기아가 기다렸다는 듯 포문을 열었다. “…….” 김성철은 보통 할 말이 없으면 묵비권을 행사한다. 그는 숙소로 돌아가 복숭아를 고이 숨겨두었다. 하지만 8구역엔 도둑이 즐비하다. 여관 주인이 투숙객의 짐을 훔치는 일도 꽤 흔하게 벌어지는 곳이 8구역의 정이라고 한다. 김성철은 최근에 익힌 주문 술식을 시험해볼 기회라 여겼다. 방문, 창문, 침대 주변에 이르기까지 좁은 구간에 15개의 주문 술식이 빽빽하게 설치됐다. 김성철은 여관을 나서며 주인에게 경고했다. “내 방엔 손대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다시 거리로 나선 김성철은 보다 가벼운 기분으로 살풍경한 8구역의 거리를 돌아보았다. 선입견 때문인 진 몰라도 걸어 다니는 행인 전부가 사기꾼, 강도로 보였다. 길을 가다 시체인지 주정뱅이인지 모를 몸뚱이가 엎어져 있는 걸 보는 것도 이곳에선 흔한 일이었다. 치우는 사람도 달리 없어서 거리의 불결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인데 그런 8구역에서도 말끔한 거리가 있긴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8구역 사람들은 깨끗한 거리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잘 정리된 구역은 8구역을 주름 잡는 조직의 근거지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목숨이 열 개라도 보장 못 한다. ‘정말 개 같은 동네군.’ 열악한 곳이지만 장점도 있다. 이 거리에선 김성철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세계의 적이 바깥에서 아무리 악명을 떨친다고 해도 언제 누구의 손에 죽을지 모르는 8구역의 사람들에겐 그저 먼 곳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덕분에 김성철은 실로 오랜만에 자유를 만끽하며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8구역의 행정관청으로 가 관청 앞을 지키는 제국의 병사들 앞에서 태연하게 게시판을 열람했다. 그곳엔 이제는 친숙한 김성철의 현상수배전단과 함께 라그란제 봉쇄에 관한 이유가 게시되어 있었다. [ 종말교단 잔멸 ] 세계의 적을 숭배한다는 종말교단의 교세가 라그란제 내에서 나날이 커지는 바, 이를 완전히 섬멸하기 위해 성문을 걸어 잠그고 정화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걸 본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종말교단의 교세가 그렇게 컸나. 성문을 스스로 걸어잠그는 건 단 하루라고 하더라도 세입에 영향이 있을 터인데.’ 무턱대고 제국에서 건 게시물의 말을 믿을 수만은 없다. 김성철은 정보상을 찾았다. 뒷골목에 서식하는 음산한 정보상은 과연 제국의 공표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물론 공짜는 아니지만. “은화 세 장. 그 이하는 꺼져.” 은화 3장을 지불한 김성철은 정보상의 입을 통해 충격적인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머저리들은 라그란제 봉쇄가 종말교단 토벌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지만 실제로 소탕하고 있는 건 전혀 다른 친구들이야.” 나이에 비해 늙어 보이는 외눈의 정보상은 의미심장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동부가 거신에게 짓밟힌 이후에 그곳의 높으신 분들이 황제에게 도움을 구하기 위해 줄줄이 제도로 피난을 왔지. 황제는 그들에게 1구역과 2구역의 훌륭한 저택을 제공하며 그들의 불만을 무마해왔어. 하지만 그랬던 그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거지. 그게 뭘 뜻하는지 알겠어?” “알겠으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하던 말이나 계속해라.” “뭐? 이 햇병아리 새끼가!” 정보상이 버럭하자 김성철은 벽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가 등지고 서 있던 벽면에 주먹 모양이 구멍이 뚫렸다. “계속해.” 정보상은 침을 꿀꺽 삼키고 얌전한 양이 되어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그러니까 실제로 사냥하고 있는 건 종말교단이 아니라 동부의 귀족들이라는 겁니다. 제 사촌의 친구의 동생과 함께 골라를 마시던 어떤 사내가 봤다고 하더군요. 정체모를 사내들이 야심한 밤에 동부 귀족들의 시신이 가득 실린 수레 옆에서 시신들을 하수도에 처넣는 광경을 말이죠.” 정보상이 아는 건 거기까지였다. 비록 정보상은 출처가 모호한 지인의 말을 근거로 삼았지만 김성철은 이미 대하수도를 오던 중 동부의 귀족들이 무참하게 죽어 있는 광경을 보았다. ‘역시 황제의 짓이었나.’ 진한 실망감과 함께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에서 증폭된다. 대륙십삼걸 시절 맡을 수 있었던 역겨운 악취가 코끝에 어른거렸다. ‘설마 그놈들과 손을 잡으려는 건 아니겠지?’ 이 세계의 기득권들은 인간의 적인 악마왕과도 손을 잡았다. 재앙이라고 하나 같은 인간 출신인 칠영웅은 악마왕에 비하면 오히려 훨씬 나은 교섭 상대다. 물론 칠영웅과 교섭을 하려면 그들이 원하는 걸 손에 쥐어 줘야한다는 선결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칠영웅 정도나 되는 자들이 원하는 게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건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기록에 의하면 칠영웅은 첫 번째 재앙인 악마왕을 처치한 이후에 그 시대의 기득권들에게 그들의 영지를 요구했다고 한다. 즉, 칠영웅 각각이 왕이 될 수 있는 영지를 말이다. 하지만 당시의 권력자들을 이를 거부했다. 이미 대단한 명예와 명성을 누리는 칠영웅에게 권력자들의 힘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토지마저 줘버리면 그들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칠영웅이 앙심을 품고 전횡을 부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생각하면 당시와는 사정이 다르다. 지금은 광활하고 비옥한 공백지가 남아 있다. 거신의 휩쓸고 간 대륙 동부와 북부. 대륙을 구성하는 절반 정도의 세계가 주인 없는 상태로 남아 있다. 거기다 칠영웅의 숫자도 일곱 명에서 네 명으로 줄었다. 황제로선 능히 꺼내 볼 카드인 것이다. 이에 반발할 동부의 귀족들만 제거하면 말이다. ‘만약 그런 결정을 내린다면 나는 네 놈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김성철의 얼굴이 무서우리만치 경직됐다. 이에 본의 아니게 가장 큰 피해를 받은 건 외눈의 정보상이었다. 맨주먹으로 화강암 벽을 아무렇지도 않게 뚫어대는 괴력의 사내가 바로 앞에서 인상을 쓰고 있자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그는 김성철의 눈치를 필사적으로 살피며 주섬주섬 말했다. “기.. 기분이 좋지 않으신 거 같으니 기쁜 소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3일 뒤에 제국에서 4구역 성전 광장에서 도시의 전 시민을 상대로 중대한 공표가 있을 거라고 1구역에서 6구역 사이의 시민들에게 통지를 했다고 합니다.” “뭘 공표한다는 거지?” 생각에 잠겨 있던 김성철이 눈동자를 굴리며 짤막하게 물었다. 외눈의 정보상은 굽신굽신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어떤 공표가 나올 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데 가장 가능성 있는 건 황제가 동부 변경에서 칠영웅을 상대로 승전보를 올렸다는 희소식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변경에 나타난 거신들이 스스로 물러났다는 미확인 정보가 있습죠. 헤헤...” “…….” “전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정보상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김성철은 그를 무심한 눈으로 응시하다가 은화 3장을 더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여관으로 돌아온 김성철은 여관주인이 문앞에서 죽어 있는 걸 발견했다. 방에 침입하려다가 주문술식을 건드려 글레어 세례를 받고 즉사한 것이다. 창문에도 이름 모를 시체가 한 구 몸에 구멍이 뚫린 채 죽어 있었다. 김성철은 복숭아 자루를 들고 여관을 떠났다. 3일 뒤. 인간제국의 수도엔 세상을 경천동지할 발표가 흘러 나왔다. 높은 관을 쓴 황제의 대리인은 운집한 군중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황제 폐하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인간제국 및 그에 찬동하는 세계의회의 국가들과 칠영웅과의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즉, 거신의 위협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군중들은 열광하며 황제를 연호했다. 그 뜨거운 열기는 문외한이 보기에도 피가 끓어오르는 광경이었다. 열기 속에서 황제의 대리인은 전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대신은 황제는 칠영웅에 대해 칸토니아 일대와 트로윈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기로 했다.” 열광하던 군중들은 복합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떤 이는 계속해서 열광의 함성을 내지르는 반면 어떤 이는 고함을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방금 황제의 대리인이 한 말은 칠영웅에게 대륙 동부와 북부를 송두리째 내어준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대륙의 절반을 그 땅에 살아가는 이들의 동의 없이 칠영웅에게 내주었다. 그 욕설과 함성이 교차하는 현장에 김성철이 있었다. “그렇게 된 건가?” 모든 것이 일목요연해졌다. 차가운 분노 속에서 김성철은 생각했다. 향후 그 결정이 대륙 전역에 몰고 올 풍파를. 거신에게 집과 나라를 잃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게 되면 대륙십삼걸로 대표되는 거짓된 평화는 그 뿌리부터 흔들리게 될 것이다. 재앙의 서에 기록된 세 번째 재앙은 두 번째 재앙이 끝나기도 전에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중대한 변화도 있었다. 그것은 요란한 연설도 포고문도 천재지변도 아니었다. 어느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한 개인의 내적인 심경의 변화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변화가 미치게 될 파장은 기존에 있었던 어느 사건보다 결정적일 것이다. “…….” 그날 김성철은 실낱같이 남아 있던 이 땅의 기득권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버렸다. 썩어가는 복숭아 몇 개를 남겨 놓은 채 그는 홀연히 광장에서 사라졌다. ======================================= 55. 제도 라그란제 (3) 칠영웅에게 세상의 절반을 넘겼다는 경천동지할 소식이 발표된 지 한 달이 흘렀다. 김성철은 라그란제에 머물러 있었다. 몇 가지 실용적인 이유가 그를 계속해서 8구역에 머물게 했다. 먼저 라그란제엔 세계 중의 모든 정보가 흘러들어 정보를 수집하기 용이했고 8구역에 있는 한 숨어서 지내기도 용이했다. 둘 다 김성철에겐 중요한 문제다. 그에겐 영혼석을 개방할 시간과 칠영웅의 정확한 위치 정보가 필요했다. 마계최전선에서 악마들의 남하를 막으려고 전장에 나섰던 목적은 거신의 출현에 의해 상당 부분 퇴색되긴 했지만 폐허가 된 땅에 사람들이 남아 있는 이상 어떻게든 라그란제로 정보는 흘러들어올 것이다. 따라서 서두를 필요는 없다. 김성철은 모든 칠영웅들의 정보를 손에 넣은 후 움직일 생각이었다. 가시옹, 드라고만, 베스티아레. 그리고 칠영웅의 리더 데스포트. 김성철은 이들 모두를 한 번에 끝낼 생각이었다. 일말의 지체도 없이. 그렇게 해야만 다가올 세 번째 재앙이 가지고 올 혼돈의 진도가 줄어들 것이다. 따라서 때가 오기 전까진 웅크리며 힘을 기른다. 김성철은 지금 꿈의 세계에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평원의 한복판. 그는 풀밭 위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멀리서 부산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여자아이의 힘찬 기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잡았다! 요놈!” 베르텔기아가 풀숲 위에 살짝 드러난 카벙클의 커다란 귀를 잡고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뀨우!” 하얀 카벙클은 잡히긴 했지만 기분이 좋은 듯 꼬리를 살랑거리며 울었다. 베르텔기아는 카벙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카벙클의 이마에 박힌 보석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응시했다. “고것 참 재료로 쓰기 좋은 녀석이네.” 못된 마음을 품자 하얀 카벙클은 꼬리를 거칠게 흔들어 베르텔기아의 얼굴을 후려쳤다. “야! 그만해! 농담이라고. 농담!” 베르텔기아는 하얀 카벙클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기어코 카벙클을 품안에 안고 김성철 쪽을 향해 걸어왔다. 김성철 쪽에 다가오자마자 베르텔기아는 카벙클을 내려놓았다. 하얀 카벙클은 김성철의 발치 쪽으로 다가와 몸을 말고 눈을 감았다. 새근새근 볼록한 배가 움직이는 걸로 보아 잠이 든 것 같았다. 베르텔기아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며 김성철에게 말했다. “그만 하자는데? 이 정도면 됐다고.” 꿈의 세계에서 원래 모습을 되찾는 베르텔기아는 높은 빈도로 거울을 꺼내 자신의 모습을 응시했다. “어머 이 고운 얼굴이 카벙클에게 맞아 부은 것 좀 봐.” 칠영웅 베스티아레를 꼭 빼닮은 외모는 자칭 코디아 마을의 여왕벌이라고 칭할 만큼 예쁘장한 얼굴이다. 물론 베르텔기아의 모친은 베스티아레가 아니다. 얼굴이 닮은 다른 사람이다. 김성철은 풀밭에 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 “슬슬 현실로 돌아가야 되지 않을까?” 베르텔기아가 주변을 돌아보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김성철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있는 곳은 아마도 황궁을 제외하고 라그란제에서 가장 안전한 곳일 테니까.” 김성철이 자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지금 8구역을 지배하는 3명의 깡패두목 중 하나인 앵글로색슨보이의 집에 머물러 있다. 그것도 사육사 자격으로 말이다. 흔히 줄여서 앵글로라 불리는 앵글로색슨보이는 김성철과 같은 소환자 출신인데 어째서인지 이름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와 달리 일본인이었다. 뒷골목의 깡패두목들이 그렇듯 대단히 잔인하고 흉포한 자로 부족한 인덕을 공포로 채우려는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키우는 마수 탐탐도 공포의 수단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부하나 혹은 사로 잡은 적 파벌의 수하들을 탐탐의 먹이 및 노리개로 제공한다. 하지만 8구역이라고 해서 매일 같이 항쟁이 벌어지거나 부하들의 반란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라서 평상시에 탐탐에게 먹이를 줄 사육사가 필요하다. 김성철의 일은 그 탐탐에게 과일과 고기 따위를 급식하는 것이다. 운 없는 전임 사육사는 먹이를 주다 그만 탐탐에게 붙잡혀 처참하게 죽었다고 한다. 지금도 탐탐의 우리 구석엔 전임 사육사의 백골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김성철에게 탐탐의 위협이란 건 미끄러운 바닥만도 못한 것이다. 철컹. 사육사용 철문을 열고 급식구로 향하는 순간 어른 머리만한 돌멩이가 김성철을 향해 떨어졌다. 탐탐이 설치해 둔 함정이다. 마수라고는 하나 본질은 유인원에 가까운 이 괴물이 이 방법으로 몇 명의 사육사를 죽였는지 모른다. 그 마수는 그렇게 바위로 사육사를 죽지 않을 정도로 기절시켜 놓은 다음 작대기를 써서 쇠창살로 둘러싸인 사육사용 통로 사이를 긁어내 사육사를 끄집어 낸 후 갖고 노는 것이다. 물론 김성철에게 그런 수법은 통하지 않는다.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각에서 떨어지는 돌멩이를 피하고 끌고 온 수레에 담긴 잡다한 과일과 토막 낸 고기, 삶은 곡물 따위를 콩고라는 이름이 각인된 커다란 탐탐의 밥그릇에 퍼 담았다. “우끼끼!” 탐탐은 자신의 함정이 걸려들지 않을 걸 보고 대단히 화가 난 듯 우리 앞을 거칠게 서성이며 소리를 질러댔다. 대단히 역겨운 광경이긴 하지만 현재 김성철의 고용주인 앵글로색슨보이는 그런 탐탐을 대단히 귀여워했다. 탐탐에게 먹이를 주고 주방으로 돌아오자 한 여성이 휘파람을 불며 김성철을 반겼다. “이번 사육사는 꽤 오래 버티네. 이러다 한 달 채우는 거 아냐?” 젊다고 할 수 없지만 늙었다고 하기엔 모호한 나이. 누렇게 뜬 얼굴에 퇴폐적인 시선을 지닌 여성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라르고. 지금으로선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과거엔 앵글로의 정부였다고 한다. 라르고는 김성철을 곁눈질로 힐끗 쳐다보고는 붉은 빛이 도는 결정을 입안에 털어 넣고 우드득 씹었다. 김성철은 그 붉은 결정이 뭔지 알고 있었다. 검투사의 혼이라 불리는 마약이다. 쾌감보다는 공포와 두려움을 장기간 동안 잊게 하는 효과가 있어 투기장에서 이를 대량으로 구입해 검투사에게 나눠주곤 했다. 실제로 그 약을 먹은 검투사는 그렇지 않은 검투사보다 잘 싸웠다. 하지만 김성철은 그 약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의존증이 있기 때문이다. 라르고는 이미 중독 상태로 보였다. 그녀는 길다란 담배 파이프를 잡은 손을 벌벌 떨며 김성철에게 말했다. “잘됐네. 계속 열심히 버텨. 오래 살아야 다시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걸 볼 수 있을 테니. 그러니 지금 미리 내게 잘 보여 둬. 혹시 알아? 내가 너에게 한 자리 줄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지금은 주방에서 밥이나 짓는 신세지만 언젠간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갈 거라고.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김성철이 알기로 지금 앵글로는 라르고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정부로 두고 있다. 물론 외면의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의 전부는 아니라고 하지만 늘 불평불만에 과거만 바라보고 사는 라르고에게 내면의 아름다움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김성철은 라르고를 내버려둔 채 식당을 나서 저택 바깥으로 향했다. 하인용의 통로엔 갑주를 걸친 건장한 사내가 지키고 서 있었다. 더러운 밑바닥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고아함이 느껴지는 용모. 한국 출신의 소환자로 사람들은 그를 김치라고 불렀다. 김성철은 한 눈에 김치의 범상치 않음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최소 초인급의 전사다. 이런 곳에서 문지가나 할 실력자는 아닌데. 아무래도 사정이 있는 모양이군.’ 과거 이야기와 푸념만 늘어놓던 라르고와 달리 김치는 김성철과 친해지려는 모습을 보였다. 문을 드나들 때마다 그는 김성철에게 살갑게 말을 걸었다. “장 보러 가나?” 김성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검은색 잎사귀 모양의 브로치를 김성철에게 내밀었다. “이걸 빼먹고 다니면 안 되지. 바깥에 나갈 땐 꼭 차고 다녀. 그렇지 않으면 삼류 양아치에게 당할 수도 있으니까.” 김성철은 솥뚜껑 같은 손바닥 위에 올려 진 검은 장식물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옷깃에 달았다. “고맙다.” 검은 리본은 앵글로색슨보이 패거리를 상징하는 징표로 그 검은 잎사귀를 단 자를 공격하는 건 앵글로색슨보이 패거리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한다. 즉, 얼치기들은 함부로 손을 대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문인 셈이다. 실제로 잎사귀의 효과는 굉장했다. 주점 같은 곳에 그걸 달고 가면 제 아무리 떠들썩한 주점이라도 일순 조용해진다. 하지만 김성철에겐 필요 없는 물건이다. 특히 이목을 끌 수 있는 물건은 김성철이 가장 삼가야 할 물건. 김치의 마음씀씀이는 고맙지만 김성철은 저택에서 떨어지자마자 브로치를 떼어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김성철이 향한 곳은 이제는 친숙한 외눈 정보상이 머무는 뒷골목이었다. 촐싹거리고 깝죽거리는 게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정보력 하나만은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 “어이쿠. 또 오셨습니까?” 김성철은 은화를 정보상에게 내밀며 늘 묻던 정보를 요구했다. “방금 입수한 따끈따끈한 정보입니다.” 정보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새롭게 동쪽과 북쪽에서 얻은 정보를 김성철에게 전달했다. 김성철의 예상대로 칠영웅의 거취가 점점 드러나고 있었다. 대륙의 절반을 손에 얻은 칠영웅은 주요 도시에 거신을 배치하고 그곳을 그들의 영지로 삼았다. 현재까지 위치가 확실하게 알려진 영웅은 달타니어스가 유일하다. 그는 한때 대륙십삼걸 마르틴 브레가스의 영지였던 트로윈 일대에 자리를 잡고 그 흩어진 백성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약속하며 끌어들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달타니어스는 이미 김성철의 손에 죽었다. 아마도 지금 달타니어스 행세를 하는 건 가짜일 것이다. ‘이건 허탕이군.’ 고무적인 소식도 있었다. 메아리술사 베스티아레에 관한 소식이다. 그녀는 거신에 의해 멸망한 동부의 소국 익시온에 홀연히 나타나 이 땅에 마법사의 나라를 세우겠다고 천명, 재앙의 추종자를 위시한 수많은 마법사를 불러 모으고 있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베스티아레는 단 3일 만에 폐허가 된 시가지를 원래대로 복구하는 기적을 보였다고 한다. 그 기적 같은 능력과 본신의 몽환적인 아름다움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추종자를 양산하며 세를 더하고 있다는 풍문. ‘익시온이라.’ 힘은 더럽게 약한 주제에 콧대만큼은 황제에게도 지지 않았던 작은 체구의 왕의 얼굴이 김성철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이 입가에 베어 나왔다. “그나저나 익시온의 왕은 어떻게 됐지?” “행방불명입니다. 라그란제로 왔다는 소문도 있긴 한데 뭐, 자신의 궁전에서 죽으나 라그란제의 하수도에서 죽거나 그게 그거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무심한 듯 말했지만 조금은 입 안이 쓰다. 익시온의 왕과는 진저리 날 정도로 싸웠지만 그만큼 잘 아는 사이였다. 익시온의 왕은 김성철을 사위로 삼으려고까지 했으니. 물론 상대방의 나이가 너무 어려 김성철 쪽에서 거절하긴 했지만 나쁜 추억은 없었다. “공주는 어떻게 됐나?” “공주도 행방불명입니다. 아마도 익시온 왕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군.” 공주가 죽었다는 소식은 왕이 죽었다는 소식만큼 김성철의 가슴을 두들기진 못했다. 왕의 안 좋은 점만 물려받은 데다 제 힘에 취해 천방지축처럼 날뛰는 이기주의자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남은 곳은 3곳인가.’ 가시옹, 드라고만, 데스포트. 나머지 3명의 영웅도 동부와 북부 어딘가에 그들의 영지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대단히 기쁜 마음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작은 권력을 휘두르고 있겠지만 김성철 또한 바라는 바였다. ‘어디 한 번 블럭 놀이 잘해 보라고. 네 놈들의 성이 완성되는 순간 네놈들과 함께 전부 부셔 줄 테니까.’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것도 있었다. 악마왕이 남긴 말이다. 악마왕은 김성철에게 이렇게 말했다. 칠영웅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인간 자체의 절멸이라고. 인간의 절멸을 바라는 자들이 영지 따위에 집착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김성철이 칠영웅이라면 남은 거신을 총동원해 일전을 불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행동이 뒤에 있을 좀 더 큰 그림을 위한 준비라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김성철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끼며 정보상 앞을 떠났다. ======================================= 56. 철혈기사단의 파편 (1) 비록 세상의 절반이 재앙에게 넘어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집과 나라를 잃은 채 방황하고 있지만 이 세상의 기득권들은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한다. 모든 것은 평온하고 아무 문제없다고. 하지만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그들의 업보는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터지게 될 것이었다. “이딴 놈이 대륙십삼걸이라고?” 비참하게 죽어나자빠진 시체를 보며 한 청년이 이죽거리고 있었다. 젊다기보다는 앳되다고 해야 될 모습.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발밑에 죽어 있는 자는 평범한 자가 아니었다. 대륙구걸 성 달파인. 세상을 좌지우지한다는 대륙십삼걸 중 한 명인 그는 자신의 패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흙을 움켜쥔 채 죽어 있었다. 앳된 청년은 그런 달파인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군중들 앞에 잘린 목을 들어 보였다. 군중들은 믿기지 않는 광경에 모두들 두려워했다. “성전사 달파인이 무명의 검사에게 패하다니.” “아니, 그건 일방적인 승부였어. 달파인이 질만 했지. 하지만 저 강함. 설마 저 자가 소문 속의 세계의 적인가?” “그런가? 저 자가 세계의 적인가?” 수군거리는 군중들은 이내 너나 할 것 없이 금기시된 인물을 입에 올렸다. 그 말을 들은 젊은 청년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바닥에 침을 뱉고는 중얼거렸다. “또 그 놈의 세계의 적 타령. 지긋지긋하네. 하여간 늙은 게 벼슬이라고 조금 먼저 설쳤다고 가장 유명한 악인이 되다니. 너무 불공평한 거 아냐?” 그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차양을 쓴 여자 마법사 한 명과 긴 창을 든 전사가 어둠에 싸인 분수대 위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기대했던 대꾸가 없자 청년은 실소를 머금고는 이내 군중들을 돌아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비겁하고 약해빠진 대륙십삼걸의 시대는 갔다! 이제부터는 보다 강하고 현명한 그리고 무엇보다 젊은 우리 검은 명부가 썩어빠진 쓰레기들을 대신해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확립할 것이다!” 오랫동안 유지되던 굳건한 체제의 균열은 세계의회의 힘이 미치지 않는 대륙 동부에서 일어났다. 대륙십삼걸 중 한 명인 성전사 달파인이 수많은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무명의 검사에게 일 대 일의 승부에서 패해 죽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사내는 무명의 검사가 아니다. 단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달파인을 죽인 자는 안겔모 룩스라는 하프엘프로 과거 대륙십삼걸에 의해 위험인물로 지정된 인물이었다. 그 사내가 위험인물로 지정된 이유는 터무니없었다. 여간한 대륙십삼걸보다 월등히 강한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정치적인 이유로 대륙십삼걸에서 배제되었고 거기에 대한 불만을 세간에 표출했다고 검은 명부라 불리는 특별 위험인물 명단에 오른 것이다. 검은 명부에 오른 건 안겔모 룩스뿐만은 아니었다. 노력과 실력만 있으면 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었던 순진한 전사도, 선의로 새롭고 강력한 마법을 선보였는데 그것이 너무 강해 구설수에 오른 마법사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검은 명부라 불리는 블랙리스트에 올라갔다. 검은 명부에 오르는 조건은 간단했다. 대륙십삼걸의 평균보다 강할 것. 그리고 현 체제에 불만을 지니고 있을 것. 이 두 가지 요건만 충족하면 누구든 제약 없이 검은 명부에 오를 수 있으며 진정한 탄압이 무엇인지 경험할 수 있다. 실제로 검은 명부에 오른 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부당한 탄압을 받아왔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 10년 넘게 재앙을 방치하며 시간을 끄는 사이, 그들을 죽일 치명적인 독버섯은 음지 속에서 조용히 힘을 키워 왔고 세상의 절반이 무너진 지금 오랜 구속을 풀고 기지개를 펴려 하고 있었다. “안겔모. 다음 목표는 뭐야?” 커다란 차양을 쓰고 안경을 낀 젊은 여자 마법사가 하품을 하며 안겔모에게 다가왔다. “글쎄. 뭐가 좋을까?” 안겔모 룩스는 히죽 웃으며 성 달파인의 목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축구공처럼 그 잘린 머리를 걷어찼다. 몸통을 잃은 머리는 허공 위에 높이 솟아올랐다가 떨어지며 식지 않은 피를 하얀 석조포도 위에 흩뿌렸다. “그러고 보니 최근 라그란제에서 가짜 황제가 한 건 저질렀다는데. 너도 들었지? 프리마.” “응. 들었어. 자신을 믿고 몸을 의탁한 동부의 귀족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며?” 프리마라 불린 수수한 인상의 여성은 목 없는 달파인의 시체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손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마법의 기운이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옛 대륙십삼걸의 목 없는 시체가 스스로 일어났다. 그 시체는 엉성한 걸음걸이로 걷어차인 자신의 머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 잘린 머리를 목에 붙였다. 군중들은 그 모습을 보고 몸서리를 치거나 기도를 했지만 안겔모는 그 장면이 재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 나온 김에 한 번 날뛰어보는 건 어때?” “라그란제에서? 가능할까? 아무리 최근 제국의 위세가 죽었다고 해도 그들의 함대는 건재한데?” “그러니까 그냥 한 번 날뛰어보자고! 자세한 계획은 틀니영감에게 맡기고. 설마 겨우 한물 간 대륙십삼걸 하나 죽인 걸로 만족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만.” 그렇게 프리마가 말하자마자 죽은 달파인의 시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다가 잘린 목을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다시 그걸 주워 목에 붙인다. 그걸 본 안겔모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망해버릴 세상인데 두려워할 게 뭐가 있어? 즐기다 가는 거지. 거기다 이제는 세계의 적 소리 듣는 것도 지겨워. 놈의 이름 따윈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한 번 흔들어보자고.” 칠영웅, 대륙십삼걸, 그리고 김성철. 시대를 움직이는 거인들이 숨을 고르고 있는 동안 누구도 생각지도 않은 위협이 재앙이 만들어낸 폐허에서 탄생하고 있었다. * 8구역의 별명은 인간 하수도. 이름 그대로 별의 별 인간들이 세상에서 낙오해 이 나락으로 떨어져 내려온다. 마법사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중엔 한때 명문 마법학교에서 촉망받았다는 마법사도 섞여 있었다. 물론 그 말의 진위여부는 각자가 잘 가려서 판단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경쟁에서 패배하고 자기학대를 반복한 끝에 8구역에 떨어졌지. 지금은 마법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지만 머릿속에 깃든 마법의 지식은 진짜라네. 하지만 하나는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야.” 마법사 대신 마술사가 되어 눈속임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전직 마법사의 몰골은 겉보기엔 멀쩡했다. 키가 대단히 크고 낙천적인 관상의 늙은이였다. 그는 8구역에서 가로등이라 불렸다. 김성철이 그를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마법서를 구하기 위함이다. 3번째의 영혼석을 개방함으로써 다양한 마법의 필요성이 커졌다. 김성철이 마법서를 구한다고 말하자 가로등은 눈을 가늘게 뜨고 김성철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소환자 같은데. 마법을 배우려면 마법사 클래스를 반드시 습득해야 되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마법사 클래스다.” 김성철은 짤막하게 말했다. “아, 그랬었군.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가끔 마법사 클래스도 아닌 소환자가 내게 마법을 배우러 오겠다고 땡깡을 부리기 때문이지. 아주 피곤한 양반들이야. 세상엔 안 되는 것도 있는데 그걸 몰라. 어린놈이 그러면 말을 안 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것들이 더하단 말이야!” “장사 합시다.” 김성철이 진중하게 한마디했다. 가로등은 힐끗 눈을 치켜 떠 김성철을 흘겨 봤으나 이내 스스로 참는 듯 신음소리를 내며 한숨을 내리쉬었다. 그리고 이내 품속에서 마법서 몇 권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김성철은 책상 위의 마법사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화염학파의 공격마법, 빙결학파의 공격 보조 마법 등등 인기 많은 학파의 마법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김성철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김성철은 마법서들을 전부 훑어본 후 말했다. “난 천공학판데?” 그 말을 들은 가로등은 머리를 긁적이며 씨익 웃었다. “아, 마법을 배우셨나? 이거 실례했군. 행색을 보아하니 그저 마법사 클래스만 간신히 얻은 거 같아서 말이야.” 가로등은 가방 안에서 다른 책을 꺼냈다. 이번엔 꽤 쓸 만한 게 있었다. 김성철은 두 종의 마법서를 골랐다. 페어리 라이트와 중급 주문술식 마법서였다. 페어리 라이트는 범용마법으로 시전자를 따라다니며 빛을 발하는 구체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굳이 횃불을 켜지 않아도 어둠 속을 탐험할 때 유용한 녀석이다. 한편 중급 주문술식은 현재도 유용하게 쓰고 있는 주문술식을 더욱 강화시켜 줄 것이다. 김성철이 두 권의 책을 구입하자 가로등이 김성철을 멀뚱멀뚱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룬은 좀 있나? 중급 주문술식을 제대로 쓰려면 룬이 어느 정도 갖춰줘야 하는데.” “룬은 마법서에 전부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닌가? 입문서엔 4개의 룬이 포함된 걸로 기억하는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 초급이나 중급이나 고급이나 전부 같은 룬만 들어 있어. 죄다 주문 함정용이지. 하지만 주문 함정으론 돈을 벌기 어렵지.” “호오.” 사기꾼이라 생각했는데 제법 아는 게 있는 모양이다. “주문술식을 어떤 용도로 쓸 진 모르겠지만 돈이 되는 용도로 쓰려면 룬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에 가서 인기 있는 룬을 구입하는 게 좋을 거야. 특히 경계 결계 같은 건 수요가 많으니 익혀만 두면 밥 빌어먹고 사는데 무리는 없을 거야. 최소한 이 빌어먹을 하수도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삶은 살 수 있지.” 가로등은 더 이상 마법을 쓸 수 없는 자신의 입장을 돌이켜보기라도 한 듯 씁쓸하게 웃으며 둥글게 만 대마초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룬은 어디서 사야 하지?” 김성철이 물었다. “카타콤에 에어푸르트라는 놈이 있을 거야.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자칭 에어푸르트 출신이라고 하는데 아주 질이 안 좋은 놈이지. 내가 보기엔 마법학교는커녕 글이나 제대로 배웠을지 의문인 놈인데 아무튼 8구역에서 가장 큰 마법상점은 놈이 운영하고 있지. 물론 아무하고나 장사하진 않지만.” 좋은 정보를 얻었다. 그런데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다. 상점의 위치다. 카타콤은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천 년도 된 해골들이 빽빽이 들어 찬 지하묘실인데 이 영역은 8구역을 어둠 속에서 지배하는 삼 두의 뱀 중 하나인 록산느의 영역이다. 록산느는 8구역의 지하경제를 좌지우지한다고 알려진 큰 손으로 대단히 신중하고 조심스런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자신의 영역에 아무나 들이지 않으며 허가되지 않은 사람과도 거래 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아무리 큰 이익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귀찮게 됐군.’ 김성철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가로등이 펼쳐 놓았던 책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요즘 록산느 쪽에서 사람을 뽑는다고 하더군. 일용직이긴 한데 굳이 룬을 사고 싶다면 거기 지원해보는 건 어때?” 괜찮은 정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자리를 떠났다. 게시판의 공고를 확인해보니 과연 카타콤에서 일할 인부를 모집하다는 공고가 앵글로색슨보이가 사육사를 구한다는 공고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그런데 어째 공고가 붙은 자리가 좋지 않다. 김성철이 오기 전까지 일주일에 한 명 꼴로 죽어나가던 게 사육사 일자리 아니던가? 실제로 정보상을 통해 실상을 확인해보니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형씨가 아무리 강해도 그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외눈의 정보상은 딱 잘라 말했다. “록산느 패거리는 원래 대하수도를 통해 밀수품을 실어 날랐는데 어느 순간 그게 불가능하게 되었습죠. 어느 날 갑자기 하수도에 정체불명의 괴물들이 나타났거든요. 슬라임도 인간도 아닌 기괴한 변종들이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시체를 뜯어먹으며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던 구세병 패거리를 떠올렸다. 정보상의 말은 이어졌다. “록산느는 그 괴물들 때문에 밀수 루트가 막혀 엄청난 피해를 입었죠. 외부에서 강력한 전사도 모셔온 모양이지만 속수무책이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대로 있자니 말라 죽을 판이라 결국 궁여지책으로 대하수도 안에 새로운 통로를 만들기 시작한 거죠.” “건설 중에 그 괴물들이 들이닥치면 그냥 죽는 거군.” 김성철의 말에 정보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초인급의 기사를 산 채로 찢어죽일 정도로 강한 놈들이 떼 지어 몰려온다고 상상해보십쇼. 각이 나옵니까?” 김성철은 나는 나오는데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밀려온 걸 억지로 밀어 넣고는 헛기침을 했다. “어흠!” 아무튼 사정은 알았다. ‘일단은 앵글로 밑에서 영혼석이나 개방하다 떼가 되면 록산느 쪽에 한 번 들려야겠군.’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앵글로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늘 그렇듯 김치라 불리는 문지기가 김성철을 반겨줬다. “여어. 뭐 장보러 간다더니 빈손으로 왔네? 검은 잎사귀는 어떻게 한 거야?” 김성철은 깜빡하고 있던 검은 잎사귀를 김치의 손에 쥐어주면서 함께 과자가 든 봉투로 선물했다. “오, 이건 고맙군.” 김치가 활짝 웃었다. 언제부터인가 김성철은 문을 드나들 때마다 김치에게 과자를 선물했다. 계기는 우연히 이루어졌다. 시장에서 산 주전부리를 우물거리며 저택으로 들어오고 있자니 김치가 너무나도 애처로운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성철은 충동 구매한 맛도 없는 걸 억지로 먹고 있던 차라 먹던 걸 전부 김치에게 양보했다. 물론 김치는 대단히 기뻐했고 자연스레 김성철에게 호감을 보였다. “오늘은 버터링이네. 이런 비싼 과자를 다. 사육사 급료가 많긴 많은 가봐?” “뭐, 그럭저럭 먹고 살 수준은 되지.” 사실 한 달 급료는 은화 20닢이다. 버터링의 가격은 은화 1개 하고도 반. 받는 급료로 고려하면 제법 버거운 선물이다. “집사람이 참 좋아하겠어.” 김치는 버터링의 향기를 맡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걸 본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신혼인가.’ 정작 본인은 장가간 적도 없지만 지레짐작으로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나저나 우리 집사람이 당신 얼굴 한 번 보고 싶다고 하는데.” “날?” “하루도 안 거르고 군것질꺼리를 선물하는 사람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며 말이야.” 아무래도 김치는 김성철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려는 모양이다. 실로 오랜만의 일이다. 몇 년 만의 일인가.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아 간다는 게. 친구는 별로 없고 적만 더럽게 많은 김성철에겐 좀처럼 오지 않는 기회.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김성철은 흔쾌히 김치의 제안을 승낙했다. ======================================= 56. 철혈기사단의 파편 (2) 김치의 집은 8구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허름한 다세대 주택이었다. 다 쓰러져가는 현관과 그을림으로 가득 찬 주방, 문도 없이 커튼으로 칸막이를 쳐 놓은 살림방을 목격했을 때 김성철은 마치 가난이라는 개념이 형상화되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김성철은 시커먼 주방 바닥에 놓인 용도불명의 검은 쇳덩어리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상상 이상이군.’ 비록 거지같은 꼴을 하고 다니고 있지만 김성철은 의외로 고급스런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먹는 것도 제일 좋은 것만 먹고 눈에 보이진 않지만 속옷과 양말도 보통 최상급의 실크로 만든 걸 대량으로 구입해 영혼창고에 넣어 다니고 있다. 비록 지금 그가 지금 머무르고 있는 골방이 변변찮은 곳이라고 하지만 김치의 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적어도 김성철의 방은 화려한 앵글로색슨보이의 저택의 일부분이니 말이다. 골방이라고 해도 기본적인 마감재의 질이 다르다. 아무튼 누추한 집으로 들어가자 인기척을 느낀 여성의 기침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한 젊은 여성이 현관과 주방을 막아놓은 커튼을 열어젖히고 모습을 드러냈다. “오빠. 왔어?” 꽤나 예쁘장한 얼굴.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김성철의 눈에 희미한 놀라움이 떠올랐다. ‘저 여자는...’ 더욱 놀란 건 여자 쪽이었다. “다.. 당신은 소환광장의 그...” 김치의 아내는 바로 배성혜였다. 소환광장에서 김성철을 업신여기던 내정자 말이다. 김성철은 아직도 기억한다. 예쁜 얼굴 하나로 내정자 사이에서 여왕벌처럼 군림하다 철딱서니 없고 이기적인 행동으로 결국 고립을 자초, 업신여기던 김성철에게 도움을 구하던 광경을 말이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다. 내정자라 하면 다들 이계에 강력한 인맥이 있다는 뜻인데 그런 내정자가 인간 하수도에서 비참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건 말이다. 김성철은 이윽고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 철혈기사단 쪽에 연줄이 있다고 했었지.’ 마계 최전선을 지키던 철혈기사단은 대륙육걸 마르틴 브레가스와 함께 공멸했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살아서 인간 하수도에서 살고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인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베일에 싸여 있던 김치의 정체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철혈기사단 출신의 기사였군. 악마가 되지 않은 걸로 보아 조성택의 결정에 반발한 소수의 기사일 가능성이 높아. 허나 명예를 잃은 기사단의 기사가 다른 곳에서 실명으로 활동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겠지.’ 철혈기사단은 악마와 손을 잡았다.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분명 마르틴 브레가스의 비열한 술책이었지만 늘 그렇듯 사람들은 결과만을 본다. 김성철이 잠자코 있자 배성혜는 어색함을 뒤로 하고 식사를 준비했다. “자, 어서 들어가자고. 누추한 곳이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김성철은 김치와 함께 두 젊은 부부가 기거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안은 그나마 주방과 현관보단 나았지만 가난의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방안에 앉아 어색하게 앉아 있자니 곧 배성혜가 술상을 내왔다. 정체모를 풀을 올린 부침개와 간단한 무침, 그리고 술은 밀로 빚은 막걸리가 나왔다. 음식은 더럽게 맛이 없었다. [ 이 음식의 점수는.... 3점! ] [ 이런 걸 음식이라고 먹이는가? ] 오랜만에 김성철은 요리인 클래스의 평가자의 의견에 동의했다. 반면 술은 먹을 만 했다. 김성철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술만 음미했다. 김치가 그런 김성철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 술 괜찮지 않아? 큰마음 먹고 산 거야.” “직접 담근 건가?” 김성철의 물음에 김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국 출신 사람들이 장사하는 가게가 있어. 거기서 산거지.”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철혈기사단 출신들이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모양이군.’ 현재 철혈기사단이 지배하던 영지엔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다. 기사단은 대부분 마르틴 브레가스와 일전에서 죽었다고 하지만 그들의 가족과 영지민의 행방은 알려진 바가 없다. 그 많은 사람들이 전부 다 죽었을 리는 없고 일부는 어디론가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인간 하수도로 몇 명이 흘러든 모양이었다. ‘한때 인간제국마저 우습게보던 철혈기사단이 이렇게 쇠락할 줄이야.’ 사람들은 입 모아 말한다. 철혈기사단장 조성택이 홀로 재앙을 해결하고자 악마들과 일전을 벌이지 않았다면 철혈기사단은 여전히 북방의 강자라 군림했을 것이라고. 조성택은 대륙십삼걸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가 대륙십삼걸보다 못하다는 건 큰 오산이다. 조성택은 스스로 거절한 것이다. 인간제국 주도의 질서에 편입되는 걸 말이다. 하지만 그 수는 결국 자충수가 되었다. 철저한 소외 끝에 기사단은 쇠락했고 남겨진 자들은 궁핍한 삶을 이어나간다. 나름 독자적으로 재앙에 저항하려한 세력의 비참한 말로는 세계의회와 대륙십삼걸로 대표되는 질서에 힘만 실어주는 꼴이 됐다. 말없이 술잔만 기울이고 있자니 배성혜가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커튼을 걷으면서 김성철을 힐끗 쳐다보고는 김치 옆에 다소곳이 앉더니 그의 귀에 무언가 속삭였다. 김치가 활짝 웃으며 배성혜를 돌아봤다. “또 그게 먹고 싶다고? 좋아. 내가 사가지고 오지.” 술이 약한 모양인지 벌써부터 얼큰하게 취한 김치는 싱글벙글 웃으며 일어섰다. 그는 김성철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방을 나섰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비호처럼 빠른 몸놀림이었다. 졸지에 방안엔 배성혜와 김성철 단 둘이 남았다. “솔직히 조금 당황스럽네…요.” 배성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편하게 말해도 관계없다.” 김성철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배성혜가 눈동자를 굴려 곁눈질로 김성철을 응시했다. “소환광장에서 봤을 땐 제법 한 가락 할 거 같더니 결국 당신도 이곳으로 왔네? 탐탐 사육사라며?” 그녀는 피식 웃으며 술상에 놓인 육포를 집어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탐탐... 박아람... 알라모...” 그녀는 이제는 추억이 된 공포스런 이름들을 감회어린 어조로 되뇌었다. “그것만 넘기면 꽃길이 열릴 줄 알았지. 황금도시에 들어갈 때만 해도 구질구질한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 같았는데.” “어쩌다가 이런 곳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거지?” 대충은 짐작하고 있지만 김성철은 모르는 척하고 물었다. 배성혜는 얕은 탄식을 하고는 김치가 먹던 사발에 막걸리를 붓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기사단이 멸망했어. 브레가스인지 뭔지 하는 새끼 때문에. 단장님을 시작으로 기사들은 악마와 계약했고 철썩 같이 믿던 큰아버지도 난리통에 죽어버리고 뭐.. 이렇게 된 거지.” “그래도 최악은 면했군.” 김성철은 바깥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는 김치를 생각하고 있었다. 배성혜도 김성철의 뜻을 헤아린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좋은 사람이야.” 말 한 마디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이 우울한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 김성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무겁게 이어졌다. 배성혜도 곧 그 무거운 분위기를 느꼈는지 화제를 전환했다. “김우정이라고 기억해?” “김우정? 누구더라?” “팩맨 룰에서 함께 우리와 싸웠던 사람 말이야.” “아.” “그 사람 제도에서 꽤 유명해졌어. 인형극을 기가 막히게 잘하거든. 인형술사도 아닌 인간이 줄 몇 개 가지고 인형극을 하는 게 꽤나 먹힌 모양이야.” “그렇군.” “주로 6구역과 7구역 사이를 돌며 공연을 하니까 기회가 되면 한 번 구경이나 해 봐.” “기회가 닿으면.” 같은 경험을 했지만 기억의 경도가 다르다. 배성혜에게 소환광장에서 경험했던 모든 것은 또렷하게 기억에 새겨진 반면 김성철에겐 그저 흐리멍텅한 덩어리로 망각과 경계선에 박혀 있다. 그래서 그런지 반응도 시큰둥할 수밖에 없다. ‘김치 녀석. 빨리 안 오나.’ 김성철이 지루함을 느끼고 있을 때 배성혜는 뭔가 떠오른 듯 짧은 탄성을 터뜨리고는 입을 열었다. “아 참. 나 그 여자 봤어.” “누구 말인가?” “아무개 말이야. 아무개. 그 여자 엄청 출세했더라. 그 평범한 얼굴로 누굴 어떻게 물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젊은 장군과 함께 화려한 공선에서 내리는 걸 본 적이 있어.” “…….” 김성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걸 본 배성혜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둘이 친한 거 아녔어?” 배성혜의 물음에 김성철은 술잔을 쭉 들이켜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와 친한 건 죽음과 고독뿐이다.” 그러자 갑자기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가 갑자기 격렬하게 몸을 흔들었다. 갑작스런 베르텔기아의 진동에 김성철은 놀라면서도 왜 베르텔기아가 그런 행동을 취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녀석이 진짜.’ 김성철이 생각하는 그대로다.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그 말을 듣고 온 몸에 닭살이 돋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김성철의 얼굴이 살짝 상기됐다. 배성혜는 그런 김성철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당신은 어째 하나도 안 변했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지.” 김성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는 거야? 아직 남편도 오기 전인데.” 배성혜가 살짝 당황하며 같이 일어섰다. 김성철은 손바닥을 내밀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이 할 짓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만난 것도 인연이겠다 모처럼 솜씨 좀 발휘해보려고.” 사실은 안에 있기 거북해서였지만.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며 코트 자락을 드러냈다. 그런데 코트 자락이 열리지 않는다. 베르텔기아가 어느새 주머니에서 튀어나와 코트 자락이 휘날리지 못하게 책장으로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녀석이 왜 심술이지?’ 타이밍을 놓친 김성철은 그대로 커튼을 통과해 허름한 주방으로 넘어갔다. 주방에서 김성철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거냐? 베르텔기아.” “그냥.”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며 삐죽거리듯이 말했다. ‘이 녀석, 설마 사춘기인가?’ 김성철은 생각하며 영혼 창고에서 자루를 꺼냈다. 황제의 식물원에서 훔친 양질의 향신료가 가득 담겨 있었다. 김성철은 그중 몇 개를 추리고 주방 안에 널린 식재료를 봤다. 밀가루 조금, 쌀 조금, 말린 빵과 정체모를 말린 생선. 신선한 야채는 흙 묻은 부추 한 바구니가 전부였다. 재료는 절망적이지만 궁색하나마 살림살이는 전부 갖춘 게 그나마 다행이다. 김성철은 쌀과 여우혓바닥 가루를 함께 물에 넣어 불려놓고 집밖으로 나갔다. 마침 김치가 뭔가를 잔뜩 사들고 집 앞으로 오고 있었다. 손에 들린 걸 보니 과자점에 들린 모양이었다. “어이! 사육사 친구! 어디 가?” 김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전에 말하지 않았나? 라르고 보다 내가 훨씬 더 요리를 잘한다고. 모처럼 솜씨를 발휘해보려고.” “그래? 그런데 손님한테 요리를 시키는 건...” “그건 내게 맡겨도 상관없고 그 과자는 뜬금없이 뭐지?” “아, 집사람이 요즘 밥맛이 없어서 말이야. 밥을 통 안 먹으려 들거든. 그래서 이걸 사온 거지. 지금 당장 해줄 수 있는 게 그거 말고 없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는 김치의 얼굴은 어딘가 어두워보였다. 김성철은 그런 김치를 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내 요리가 완성되기 전까지 그거 안 먹는 게 좋을 거다. 후회하게 될 테니까.” 궁색했던 집안에 호화로운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그 냄새가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지나가는 행인들이 집앞에 서서 코를 킁킁 거릴 정도였다. 김성철은 젊은 부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뜨겁게 달군 무쇠쟁반을 두꺼운 장갑을 낀 손으로 들어 방안으로 가지고 왔다. 배성혜와 김치는 쟁반을 열기도 전에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이국적이면서도 매혹적인 향기에 압도되어 숨을 죽이고 뚜껑을 여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김성철이 무심한 손놀림으로 뚜껑을 열었다. 닭, 돼지, 새우 등 육해공을 아우르는 조리된 고기 아래 황금빛 밥알이 추수기의 평야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건 빠에야?” 배성혜가 한 눈에 요리의 정체를 알아봤다. 김성철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배성혜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숟가락을 들어 김성철의 요리를 덜어 입안으로 가지고 갔다. 김치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좁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맛있어!” 배성혜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반응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거 사프란도 넣은 거야?” 다시 맛을 음미한 배성혜가 질문을 던져왔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프란 친척을 넣었지.” “대체 그런 귀한 식재는 어디서 구했지?” “그건 상상에 맡기지.” 아무리 사석이라고는 하나 황제의 식물원을 탈탈 털어간 범인이 자신이라는 말은 결코 할 수 없다. 김성철은 숟가락만 들고 침만 삼키고 있는 김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불쑥 입을 열었다. “안 먹고 뭐해?” “아내가 다 먹은 다음에 먹으려고.” “모자라면 다시 만들어 줄 테니까 사양 말고 먹어 둬.” 김성철은 큰 수저로 자신의 그릇에 자신의 요리를 담고 한 입 음미해보았다. [ 이 요리의 점수는... 81점! ] [ 대단히 훌륭하다! ]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식사가 끝난 후, 김성철과 김치는 집밖에 나와 지는 석양을 보고 있었다. 김치가 연초를 입에 물며 말했다. “대접을 하려고 했는데 또 대접을 받아버렸네.”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알 수 없는 친구군. 사실 내가 당신을 부른 건 작별인사를 하기 위함이었어.” 김치가 석양을 응시하며 쓸쓸히 말했다. “작별인사?” * 안개여정을 통한 카벙클의 꿈 속. 카카벙이라 이름을 지닌 4번째 카벙클은 대뜸 털실무더기 하나를 김성철 일행 앞에 펼쳐 놓고 그걸 자기가 보는 앞에서 뜨라는 식의 요구를 해왔다. 김성철은 바느질은 할 줄 알지만 뜨개질은 할 줄 몰랐다. 당연히 익숙한 방법을 사용했다. “베르텔기아. 밥값 할 시간이다.” 자연스레 이번 카벙클의 임무도 베르텔기아가 도맡아 하게 되었다. 다행히 김성철과 달리 베르텔기아는 처음엔 잠깐 헤매긴 했지만 이내 뜨개질에 적응하고 안락의자에편히 앉아 카벙클 앞에서 노련하게 뜨개질을 시작했다. 베르텔기아를 부려먹는 동안 김성철은 조금은 이국적인 실내 풍경을 응시하며 흔들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잠시 쉬고 있자니 아까 김치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김성철의 입에서 한줄기 한숨이 흘러나왔다. 김치와 배성혜는 최악의 환경에 내몰려 있었다. 이대로 두면 비참한 최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김성철과는 관계없는 인물이지만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뜨개질을 하던 베르텔기아가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불쑥 입을 열었다. “그냥 잠자코 보고만 있어도 되겠어? 아주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잠깐이나마 인연이 있던 사람으로 보이는데.” 베르텔기아가 대바늘을 내려놓고 불쑥 물었다. 그러자 뜨개질을 구경하던 카벙클이 베르텔기아의 신발에 앙증맞은 앞발을 툭 올려놓았다. 쉬지 말라는 이야기다. 베르텔기아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카벙클을 노려보다가 다시 뜨개질을 하면서 김성철 쪽을 힐끗 응시했다. 늘 그렇듯 겉으론 무표정했지만 제법 고뇌하는 모양새였다. 그걸 본 베르텔기아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당신도 밥값 한 번 해 보는 건 어때?” “밥값이라.” 김성철은 늘 쓰던 말을 음미라도 하듯 턱 끝을 쓰다듬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 56. 철혈기사단의 파편 (3) 길을 걸으면서 김성철은 김치의 집 앞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서 생각했다. 식사를 마친 김치는 머리를 긁적이며 오래 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일을 토로했다. “록산느 밑에서 일하기로 했거든.” “록산느? 밀수업자 록산느를 말하는 건가?” 김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앵글로 밑에서 일하는 게 편하긴 한데 급료가 짜서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자네처럼 사육사를 할 걸 그랬나봐. 솔직히 탐탐 정도는 가볍게 제압할 수 있는데.” “록산느 밑에서 무슨 일을 하려고?” 김성철은 예전에 본 록산느의 구인공고를 떠올렸다. 아마도 라그란제에서 가장 위험한 일자리일 것이다. 차라리 검투사가 나을 정도다. 검투경기는 그나마 도박이 되는 배당이 나오게끔 승률을 조정하지만 지하의 구세병 상대로는 그런 확률 따윈 0으로 수렴하니 말이다. 김성철의 불길한 예감은 여지없이 이번에도 들어맞았다. “록산느가 요즘 하수도에 새로운 루트를 만들고 있는데 인부들을 경호하는 역을 맡기로 했어. 이미 록산느 앞에서 시범도 보였지. 돈을 제법 높게 부르더라고. 아직 받진 못했지만. 언제 받으면 한 턱 쏘지.” “그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김성철은 딱 잘라 말했다. 결과가 너무 뻔하다. “너무나도 위험해.” 그런데 그 말이 김치의 마음을 조금은 상하게 한 것 같았다. 김치는 정색했다. 늘 서글서글하게 웃음 짓던 그가 처음 보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지금에야 앵글로 같은 깡패 두목 아래서 문지기노릇이나 하고 있지만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한 사람이야. 지금은 사정이 있어 여기에 머무르고 있지만!” 그의 결연한 표정 안엔 언젠가는 여기를 벗어나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젊고 실력도 있지만 경험은 없는 친구군.’ 그가 죽든 살든 김성철과는 하등 관련 없다. 이미 한 번 경고는 했다. 따르고 말고는 김치의 몫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유를 물었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려는 이유가 뭐지?” 그 질문에 김치는 김성철이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을 내놓았다. “아내가 임신했어.” “…….” 김성철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아마도 가족 단위로 맞이할 수 있는 최악의 재앙이리라. 익히 알려진 대로 재앙의 전조인 절멸의 저주가 세상을 뒤덮으면 아이는 물론이고 모든 지성을 지닌 존재들은 불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드물게 임신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천형이라고 해야 할 정도의 저주다. 절멸의 저주를 받은 아이가 뱃속에서 자라며 산모에게 그 저주를 전이시키는 것이다. 김성철은 절멸의 저주를 받아 죽어가는 아이와 함께 산모를 옆에서 본 적이 있었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그가 제국대원수의 직을 버리고 세상의 적으로 행동하게 한 직접적인 동기는 되지 못했지만 그가 재앙에 지니고 있던 시각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정도로 커다란 충격을 안겨다 줬었다. 김성철이 침묵에 잠기자 김치는 김성철의 어깨를 툭 치며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별 거 아니야. 아직 임신초기고. 약만 제 때 쓰면 아내를 살릴 수 있어. 문제는 그 약이 지랄 맞게 비싸다는 점이지만.” “약이 있다고?” 김성철은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재앙에 관련된 질병엔 약이 있을 수 없다. 적어도 김성철이 라그란제에 살고 있을 동안은 말이다.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물론 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김치는 언젠가 돈이 마련됐을 때 김성철에게 특별한 장소를 소개해주겠다고 자신하며 말했다. 아무튼 중요한 건 게 아니다. 김성철은 예언자는 아니었지만 김치와 배성혜의 최후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그런 이유로 김성철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이후에도 편치 않은 기색을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베르텔기아의 밥 값하라는 말은 김성철을 밀수꾼 록산느에게 이끌었다. 록산느의 아지트인 카타콤의 입구엔 공고를 보고 몰려든 여러 명의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다들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하수도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 사람들도 대충 소문으로 접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인부에 자원한 건 돈 때문이다. “네놈들도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소문으로 듣고 왔을 거야.” 록산느는 강단 있고 시원시원한 중년의 여성이었다. 덩치는 크지 않았지만 몸에 배인 기질과 성질은 여간한 남자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록산느를 본 김성철은 록산느가 앵글로섹슨보이보다 보스에 적합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호걸이군.’ 게다가 밀수꾼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작은 거래보단 큰 거래를 주로 해온 모양인지 돈 계산도 철저했고 치졸한 속임수도 없었다. 가장 마음에 든 점은 록산느가 금방 탄로날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문은 사실이다. 어제도 2명이 죽어 나갔고. 죽고 싶지 않은 놈은 지금 당장 돌아서서 문밖으로 나가. 그리고 다른 일을 찾아.” 물론 김성철은 다섯 명의 인부들과 함께 자리에 남았다. 작업반장이라는 자가 나타나 인부들을 카타콤 안으로 안내했다. 김성철은 말로만 듣던 카타콤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글자 그대로 무수히 쌓인 백골들이 칸마다 들어차고 벽을 이룬 공간이었다. ‘나하크 족의 지하왕국보다 규모는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밀도는 훨씬 높군. 어쩌면 거기보다 훨씬 많은 해골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김성철은 기괴한 분위기를 지닌 카타콤을 지나 대하수도로 들어섰다. 멀리서 구세병의 기괴한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우로로로....” “우로로로...” 그 소리를 들은 인부 몇 명이 줄행랑을 쳤다. 작업반장은 그들을 잡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인부들을 돌아보며 지금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돌아가라고 말했다. “물론 지금 돌아가면 땡전 한 푼 줄 순 없지만 말이야. 그래도 목숨보다 소중한 건 없지.” 한편 대하수도의 입구까지 따라온 록산느는 모두를 보며 타이르듯이 말했다. “조금만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달아나. 죽지 말란 소리야. 우리 무역로에 시체가 있으면 부정 타니까.” 록산느가 떠나고 작업이 시작됐다. 작업은 록산느 패가 무역로로 설정한 대하수도 구간에 정체불명의 괴물이 들어올 수 없게 울타리를 쳐 안전구역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작업을 시작한 지 꽤 됐는지 제법 긴 안전통로가 대하수도 안에 만들어져 있었다. 안전통로 끝엔 외바퀴 수레 몇 대와 다량의 자재가 놓여 있었고 큰 칼을 찬 두 명의 용병이 인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 그럼 시작이다. 뭔가 재수가 없을 거 같으면 호루라기를 불 테니 뭘 하든 관계없이 안전통로 안으로 기어들어와. 시체라도 남겼다간 그 괴물들이 하루 종일 죽치는 불상사가 일어날 테니 말이야.” 작업반장의 지시에 따라 작업이 시작됐다. 김성철은 강철 자재를 옮기는 일을 맡았다. 괴물들은 멀리서 울어댈 뿐 다행히 이곳을 공격하지 않았다. 인부들이 작업을 하는 동안 호위를 맡은 두 명의 사내는 작업현장 외곽에 동상처럼 서서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저게 김치가 맡을 일인 모양이군.’ 김성철은 쉬는 시간 동안 그 용병들에게 접근했다. 그는 미리 준비한 고급술과 연초를 호위에게 선물로 건넸다.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다는 바른생활 사나이에겐 돈까지 쥐어준 끝에 김성철은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괴물들은 주로 상위 구역의 지하에 집중적으로 서식하고 있어. 여기 8구역에 나타나는 건 무리에서 떨어진 것들이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 괴물들이 하는 짓이 야생 호문클루스와 비슷하다고 하더군. 약한 놈을 구박해서 쫓아내는 게 말이야.” “그 괴물들이 누구의 지휘를 받아 움직이냐고? 글쎄. 그런 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초창기에 록산느 두목이 각지에서 용병들을 끌어와 괴물들과 한판 본격적으로 붙은 적이 있는데 그런 느낌은 별로 못 받았어. 하지만 모르지. 상위 구역에 있는 괴물들은 어떨지.” 추상적이긴 하지만 김성철에겐 귀중한 정보다. 김성철이 라그란제로 올 때 그는 상위구역을 통과해왔다. 외벽에 싸인 구시가지는 2구역과 바로 맞닿아 있으니 말이다. 김성철이 본 건 아무래도 용병들이 말하는 상위 구역을 지키는 구세병인 것 같았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이곳의 지하는 2구역의 지하만큼은 위험하지 않다는 이야기. 록산느가 대량의 용병을 불러 구세병과 싸웠을 때 이야기도 자세히 들어보면 고작 3마리 상대로 그런 치열한 싸움을 벌였단다. 간신히 1마리를 죽였는데 이쪽 용병만 10명이 넘게 죽었다고. 그렇다면 일은 의외로 쉽게 해결될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작업 중에 은근슬쩍 자리를 비우고 직접 하수도를 탐험했다. 과연 요소마다 구세병이 들어섰던 2구역과는 사뭇 다른 한산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김성철은 멀리서 울어대는 구세병 쪽을 향해 걸어갔다. 2마리가 있었다. 여기저기 뜯겨 나가고 찢겨나간. “으.. 나 저거 정말 싫어.” 안 그래도 흉악한 몰골이 더욱 끔찍해보였다. “밥값 하라며?” 김성철의 손에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던 구세병들은 김성철을 발견하고 긴 몸체를 일으켜 세웠다. 잠시 후, 김성철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납작해진 두 마리의 시체를 뒤로 하고 주변을 살폈다. ‘더 이상의 구세병은 없나.’ 멀리 기척이 있긴 하지만 구세병의 것은 아닌 걸로 보였다. 오히려 그 기척은 사람의 그것에 가까웠다. 김성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구세병이기에 그 기척에 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굳이 관심을 두지 않아도 그것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으니 말이다. 하수도 안을 한 바퀴 돈 김성철은 작업현장에 이르렀다. 작업반장이 김성철을 보자마자 불호령을 내렸다. “아니,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죽은 줄 알았잖아!” “미안하게 됐수다. 똥이 마려워서.” “똥누다 뒤질 일 있어? 당장 일이나 해!” 김성철은 묵묵히 작업을 재개했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이미 달성한 상태다. 김성철은 작업반장에게 더는 일을 못하겠다고 말했다. “배가 너무 아파서 일을 못하겠군.” “오늘 일당은 없다.” “불만 없소.” 김성철이 작업반장과 실랑이를 하는 동안 아까부터 김성철이 느끼고 있던 기척이 이쪽을 향해 모습을 드러냈다. 일남일녀. 검을 찬 금발의 젊은 남자 한 명과 커다란 차양과 안경을 쓴 여자마법사였다. 김성철은 그들에게서 묘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둘 다 나이는 이십대 중반. 그 이상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젊은 풍모. ‘뭐지 이것들은?’ 평범한 사람은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 젊은 남자의 손에 들린 게 범상치 않았다. 그의 손아귀 안엔 지퍼처럼 생긴 눈동자를 지닌 푸르스름한 구세병의 머리가 쥐어져 있었다. “정말 지랄 맞은 곳이네. 라그란제는. 이런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괴물이 지하에 서식하다니. 안 그래? 피비.” “그만 투덜거려. 이곳에 오자고 한 건 안겔로 너잖아?” 하수도 안에서 걸어 나온 두 남녀는 유유한 발걸음으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용병들은 감히 그들을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갑작스레 나타난 불청객이 구세병도 아니었을 뿐더러 안겔로라 불린 젊은 남자가 들고 있는 구세병의 머리을 보고 놀란 탓이다. ‘뭐지? 용병 수십 명을 투입해 간신히 잡은 괴물을 단 둘이서 잡았다고?’ 안겔로는 용병들 앞에 다가와 구세병의 머리를 툭 내려놓더니 명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이. 라그란제로 가려면 이쪽으로 가며 돼?” 용병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청년은 씨익 웃고는 안전통로를 향해 걸어갔다. 커다란 차양을 쓴 여자 마법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목례를 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불청객들이 통로로 들어가자 작업반장이 용병들에가 뛰어가 귓속말로 중얼거렸다. “뭐하는 거야. 저것들을 안 막고!” 작업반장의 지시를 받은 용병들이 그제야 불청객들을 따라 잡았다. 행여나 이들이 카타콤에 들어가 무슨 짓을 펼칠지도 모르니 말이다. 김성철은 구석에서 그 모습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상당한 강자군. 풍기는 분위기나 기도로 보아.’ 정확한 실력은 직접 겨뤄봐야 알 수 있겠지만 최소한 대륙십삼걸의 말석 정도는 가볍게 차지할 정도의 실력자로 보였다. ‘하긴 대륙십삼걸이란 게 만들어진지도 벌써 10년이 흘렀군. 너무 오랫동안 정상에 있었어. 새로운 강자들이 출현할 때도 됐지.’ 어차피 일도 중간에 때려 치웠겠다 김성철은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내 한 무리의 험상궂은 무리들이 2인조를 막아섰다. 그 중앙에는 긴 담뱃대를 입에 문 록산느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록산느가 그들에게 무슨 용무로 왔냐고 물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위력을 동반한 록산느 패거리에 공포심을 느꼈겠지만 안겔로는 히죽 웃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그냥 놀러. 라그란제는 처음이거든.” 록산느는 비록 밀수꾼에 불과하지만 사람을 보는 안목은 있었다. ‘위험한 냄새가 나는군.’ 그녀는 이 불청객이 카타콤을 통과하게 내버려두었다. 수수께끼의 2인조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들은 얌전히 해골로 가득 찬 카타콤을 걸어갔다. 불청객들은 카타콤 안에서 별 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다만 해골로 가득 찬 석실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짧게 한마디 나눴을 뿐이다. “어이. 피비. 여긴 네가 좋아하는 장난감이 한 가득이네?” 청년의 물음에 안경을 낀 여자 마법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두 수수께끼의 불청객은 카타콤을 지나 라그란제의 거리 저편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김성철은 그들이 사라지는 걸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신경 쓰여?” 베르텔기아가 입을 열었다. “조금은.” 하지만 김성철은 이내 2인조에 대한 관심을 지워버렸다. ‘저 정도 강함이면 언젠가 소문이 나겠지. 나처럼 힘을 숨기지 않는 이상.’ 그보다 이곳에 온 목적은 달성했다. 하수도에 어슬렁거리던 구세병은 청소했고 김치는 안전할 것이다. 당분간은 말이다. 김성철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텅 빈 거리를 향해 걸어갔다. 아무도 없는 거리를 홀로 걷는 그의 뒷모습을 무심한 달이 쓸쓸히 비추고 있었다. ======================================= 57. 신의 글자 (1)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계절은 겨울의 문턱을 성큼 넘어서 한 겨울에 접어들었다. 아직 완연한 겨울을 상징하는 눈은 내리진 않았지만 실내에서도 입김이 날 정도로 차가운 공기는 아무리 둔감한 자라도 지금이 어떤 계절인지 충분히 알려주고도 남았다. 마당에선 눈 꼴 사나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저택의 주인 앵글로색슨보이가 배신자를 기둥에 묶어놓고 제재를 가하고 있었다. 그는 부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몸소 채찍을 들어 배신자에게 태형을 가했다. 살이 찢겨지고 피가 사방에 튀었다. 기둥에 묶인 사내의 눈동자가 뒤집히며 새우처럼 허리를 꺾어대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앵글로색슨보이는 피 묻은 채찍을 다른 부하에게 넘기며 부하들에게 경고했다. “라그란제의 황제는 윌리엄 퀸튼 말버러지만 8구역의 황제는 이 앵글로색슨보이다. 잊지말고 명심하도록. 다음에 형틀에 묶이는 건 누가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 찬물 끼얹은 분위기 속에서 앵글로색슨보이는 구석에 서 있는 사내에게 손짓했다. “야! 저 거 끌어내 원숭이 먹이로 던져 줘.” 깡패두목이 쳐다보고 있는 건 김성철이었다. 세계의 적으로 알려진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내는 군소리 없이 일개 깡패두목의 명을 묵묵히 따랐다. 그는 형틀에서 시체를 끌어내 외바퀴 수레에 실었다. “그나저나 이번 새끼는 참 오래가네.” 별명 짓기를 좋아하는 앵글로색슨보이지만 탐탐 사육사에겐 별명을 지어주지 않는다. 기대수명이 일주일도 안 되는 놈들에게 별명을 붙이는 건 감수성의 낭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에너자이저가 좋을까?” 앵글로색슨보이가 김성철의 별명을 고민하고 있을 때 김성철은 시체를 싣고 가 탐탐 우리 안에 가볍게 집어던졌다. 툭. 시체가 떨어지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탐탐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 사육사의 두개골을 갖고 놀던 그 거대한 원숭이는 김성철을 발견하자 쇠창살로 다가와 우리를 두 주먹으로 내려치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우끼끼! 우끼끼!” 사육사를 죽이는 취미가 있는 이 흉악한 마수에게 김성철은 눈에 가시였다. 필사적으로 하등한 대가리를 굴려 몇 번이고 김성철을 죽이려고 시도했지만 김성철은 너무나도 쉽게 그 의도를 피해내니 말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김성철의 무신경함이 탐탐의 신경을 긁었다. “크르르르...” 탐탐은 자신을 철저히 무시하며 지나쳐가는 김성철을 향해 누런 앞니를 드러냈다. 마수 탐탐이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위협표시. 하지만 김성철의 눈에 탐탐 따위 하찮은 미물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슬슬 안전통로도 완성될 기미가 보이는군.’ 지난 한 달 동안 김성철은 8구역의 하수도를 몰래 돌며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구세병을 처리했다. 탐탐의 우리 옆에 대하수도로 통하는 진입구가 있는 것은 큰 호재였다. 김성철은 탐탐 우리 옆을 지나다니며 대하수도의 지형을 숙지했고 이내 거미줄처럼 엮인 8구역의 지하를 손바닥 들여 보듯 하는 경지까지 이르게 되었다. 지형을 눈에 익히자 작업은 당연히 순조롭게 진행됐다. 김성철의 숨은 활약 덕에 록산느가 대하수도 안에 건설하려고 시도하던 안전통로의 증축은 거의 이루어졌고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마지막 구간만 완성되면 더 이상 김치가 위험에 처할 일은 없을 것이다. 철컹 철컹. 탐탐의 우리가 거칠게 흔들리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탐탐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던 김성철은 쇠와 쇠가 마찰하며 내지르는 비명소리를 듣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탐탐이 우리를 좌우로 흔들어대며 자신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놈은 김성철과 시선이 마주치자 기다리기라도 한 듯 포효를 내질렀다. “구아아아아아!” 저택 전체가 울릴 정도로 커다란 소리였다. 물론 김성철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이내 고개를 돌리고 갈 길을 계속 갔다. 탐탐의 우리를 지나면 저택의 주방이 나온다. 저택의 요리를 책임지는 라르고는 김성철이 주방에 나타나자 걱정스런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왜 저래? 그 원숭이. 설마 발정기라도 온 거야?” “내가 싫은 모양인데.” 김성철은 주방 중앙에 담아놓은 항아리에서 물을 바가지로 떠 마셨다. 라르고는 팔짱을 낀 채 김성철을 곁눈질로 관찰하다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또 한 달을 살아남았네. 축하 해.” “딱히 축하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까칠한 건 여전하네. 내가 말했지? 출세하고 싶으면 지금 나한테 미리 잘 보여 두라고.” 또 그놈의 제 자리 찾아가기 이야기를 전개하려는 모양이다. 김성철은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라르고도 만만치 않았다. 종종걸음으로 앞길을 막아서고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 뭐 좀 변한 거 같지 않아?” 김성철은 대꾸해줄 생각도 마음도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지금까지 라르고를 자세히 관찰한 적도 전무. 요리라도 잘한다면 모를까 여자에 대하 아무런 관심이 없는 김성철이 라르고의 변화라는 걸 잡아낸다는 것은 지금 당장 모든 재앙을 해결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둔감한 김성철의 눈에도 무언가 익숙한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삐쩍 마른 라르고의 배가 어느 정도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김성철의 동공이 약간 흔들렸다. “설마...?” “응. 그 설마가 맞아. 임신했어.” 라르고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은 초췌했던 배성혜의 얼굴과 오버랩됐다. 같은 사안이지만 받아들이는 태도는 하늘과 땅 차이다. 김성철은 순간 속으로 생각했다. ‘드디어 미쳐버린 건가?’ 안 그래도 약물에 의지해 과거의 영광과 열등감을 이겨내며 간신히 버텨오던 여자다. 언제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결과를 들고 오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라르고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김성철의 반응을 즐기며 자랑스레 말했다. “다이스케의 자식이야.” “다이스케?” “앵글로색슨보이의 본명이지. 다섯 달 쯤에 술에 떡이 될 정도로 취해 내 방으로 찾아와 날 안은 적이 있거든. 정말로 오랜만에 격렬한 밤이었지.” “그건 물어본 기억이 없는데?” “내가 말했지? 그 사람의 마음을 내가 되돌리겠다고.” 라르고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 안에서 붉은 결정을 꺼내 흡입하려 했다. 습관적으로 복용하던 마약 검투사의 혼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스스로 복용을 멈췄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이건 아이한테 안 좋은 건데.” 그녀는 붉은 결정은 다시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김성철은 여전히 과거의 아름다움이 남은 손이 금단현상으로 덜덜 떨리는 것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며 말했다. “당신,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고 있나?” “응. 행운이 내게 다가온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이 시대에 아이의 잉태가 뭘 의미하는지 정녕 모르고 하는 소린가?” “어머. 당신이 이렇게 정색하고 말하는 건 처음보네. 이렇게 화도 내니 좀 더 좋은 남자로 보이는데.” 라르고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김성철은 더 이상 말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완전히 미쳐버렸군.’ “당신 지금 나보고 미쳤다고 생각하는 거지?” 라르고가 덜 위험한 파이프를 입에 물며 말했다. 김성철이 응시하자 그녀는 파이프에 불을 붙이며 미소를 지었다. “나 그렇게 바보 아니야. 글도 모르고 산수도 못하지만.” “그게 바보지!” 베르텔기아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응? 무슨 소리지? 방금?” 갑작스런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라르고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김성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검투사의 혼을 끊어서 그런가? 이젠 헛소리가 들리네. 아무튼, 내가 이렇게 자신하는 건 다 이유가 있어.” “…….” “나 뱃속의 아이를 낳을 거야.” “미쳤군.” “미치지 않았어. 당연히 절멸의 저주를 피해서 아이를 낳을 거야.” “절멸의 저주를 피한다고? 왕과 제후도 피하지 못했던 그 천형을 당신이 무슨 수로 피한다는 거지?” 김성철이 물었다. 물론 라르고의 말은 터럭만큼도 믿지 않았지만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대체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하는지 말이다. “흠 이건 말하면 곤란한데. 비밀 지켜줄 수 있어?” 그녀의 물음에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라르고는 잠시 운을 띄우더니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종말교단이야. 종말교단의 치료사가 답을 알고 있어.” * 종말교단. 세계의 적 김성철을 구세주로 내세운다는 정체불명의 사교집단이다. 김성철이 라그란제에 온 이유 중 하나다.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자신의 이름을 팔아대는 무리들을 말이다. 하지만 막상 라그란제에 왔지만 김성철은 종말교단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최근 탄압이 워낙 거세졌고 따라서 종말교단에 속한 이들은 모두 지하로 숨어버렸기 때문이다. 정보원조차 라그란제엔 더 이상의 종말교도는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여전히 라그란제에 종말교단의 무리는 실존한다. 왕년의 뒷골목의 여왕 라르고는 종말교단이 있는 곳을 알고 있었다. “특별히 부탁해서 데려가주는 거야.” 허름한 평상복을 입던 주방 때와 달리 라르고는 지나가는 행인의 시선을 충분히 잡아 끌만한 수많은 장식이 달린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면사포 사이로 희미하게 드러난 얼굴은 짙은 화장으로 덮여 있었다. “…….” 저택에서와 달리 바깥에서 라르고는 여전히 현역이었다. 예전처럼 사치스런 마차를 타고 다니는 대신 자신의 발로 걸어 더러운 거리를 거닐긴 하지만 저 검은 드레스의 여인이 악명 높은 앵글로색슨보이의 애첩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김성철은 사람들에게 시종처럼 취급받고 있었다. 실제로도 라르고는 그렇게 보이도록 주문했고.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와 줘. 절대 어깨를 나란히 하지도 말고 앞서가지도 말고.” 이것이 종말교단의 비밀회당에 데려다주는 조건 중 하나였다. ‘참 운명이란 얄궂군.’ 라르고와 함께 행동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식견 없고 거만한데다가 자기밖에 모르는 허영심덩어리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게다가 요리도 더럽게 못했고 마약 중독자다. 최근은 마약을 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여파로 반쯤 미쳐 있었다. 아마도 김성철을 비밀스런 종말교단의 회당에 데려가는 것도 사리분별을 잃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바로 여기야.” 라르고는 허름한 점쟁이의 집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원뿔 모양의 모자를 쓴 노파가 둘을 반겼다. “오셨나? 부인. 그런데 이 젊은 신사분은...?” 노파가 눈을 번득이며 김성철을 노려봤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냉랭한 눈빛.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김성철의 지금 행색은 대단히 수상했다. 언제나 얼굴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그지만 오늘은 두건을 깊이 눌러 쓰고 붕대로 눈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둘둘 감고 나타났다. 누가 봐도 대단히 수상한 모양새다. 노파의 의심이 고개를 들고 일어날 무렵 라르고가 부채를 펄럭이며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에 하인을 데리고 왔어. 이젠 제법 배도 불러서 혼자 거동하기 불편하니까.” “하인인가?” “얼굴을 좀 다쳤어. 그래도 저 모양이지. 신원은 내가 보증할게. 앵글로색슨보이의 아내로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라르고는 고급스런 지갑에서 은화 두어닢을 꺼내 노파에게 내밀었다. 동전을 받은 노파는 마지못한 눈치였지만 라르고의 말을 믿어주기로 했다. “다음부터는 얼굴이 제대로 드러난 하인을 데리고 다녔으면 좋겠어.” 놀랍게도 그걸로 상황은 종결됐다. 일련의 상황을 지켜 본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바깥으로 어지간히 허세를 부리고 다닌 모양이군.’ 아무튼 그덕에 김성철은 베일에 싸인 종말교단의 비밀 회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회당으로 통하는 입구는 점쟁이의 수정구가 놓인 탁자 아래 감춰져 있었다. 비밀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자 널찍한 홀이 나타났다. 별 다른 우상도 장식물도 없이 그저 타오르는 불만이 중앙에 자리 잡은 단출한 공간이었다. 그 안에는 로브를 걸친 사내가 바닥 위에 깐 방석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라르고가 다가오자 고개를 들어 따뜻한 목소리로 맞이했다. “오셨군요. 라르고 부인.” “오랜만이에요. 선생님.” 김성철은 한 걸음 뒤에서 그들의 대화를 지켜봤다. 평범한 대화였다. 선생님이라 불리는 마법사도 썩 대단해보이지 않았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마법사다. 혹시나 싶어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지는 않을까 시간을 들여 분장한 게 아까워질 정도였다. 긴 이야기 끝에 종말교단의 치료사는 라르고에게 약을 건넸다. 어둠을 머금은 것처럼 시커먼 환단이었다. 한 눈에도 위험해 보이는 약이다. 회당을 나선 후 김성철은 라르고에게 부탁해 그 약을 직접 만져 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환단을 만진 순간 김성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복대 안에 들어 있는 물건에게서 느낀 것과 동일한 감각을 느꼈다. 즉, 재앙의 파편이다. 아주 희미하긴 하지만 그 비슷한 파장이 은은하게 환단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해가 진후 김성철은 점쟁이의 가게로 다시 향했다. 김성철은 뒷골목에서 인적이 끊기는 시간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다. 하염없는 기다림의 시간 동안 김성철은 생각했다. ‘아퀴로아가 만들어 낸 수정과는 다르지만 틀림없다. 그 감각. 분명히 재앙의 파편과 동일한 것이다.’ 김성철은 복대를 열었다. 그 안엔 악마왕을 처치하고 얻은 보상인 재앙의 파편이 들어가 있었다. 영혼창고에조차 넣을 수 없는 그 물건은 언제나처럼 김성철로 하여금 섬뜩하게 만드는 불길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김성철은 복대 안에 담긴 재앙의 파편을 다시 만져보면서 자신의 감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종말교단. 대체 그것들은 뭐지?’ 그다지 질이 좋지 않은 단체라는 건 예전의 만남에서 익히 느낀 바다. 그때는 자신의 이름을 이용하는 기회주의자 정도로 치부했지만 그들이 아퀴로아처럼 재앙의 파편과 비슷한 힘을 이용하는 걸 안 이상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다. 김성철은 인적이 끊기자마자 지체 없이 점쟁이의 가게 안으로 침입했다. 그런데 가게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점쟁이는 물론이고 비밀 계단을 가리던 탁자도 수정구도 없었다. 계단을 아래 숨겨져 있던 회당을 밝히던 불은 이미 꺼진지 오래였다. 종말교단의 무리들은 꽤 오래 전 이곳을 떠난 것으로 보였다. ‘보통 내기들이 아니군.’ 김성철은 황제의 수도에서 공공연하게 반기를 드는 이 종말교단이라는 사조직이 어떻게 아직까지 근절되지 않고 살아남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모처럼 왔는데 허탕이라니. 당신 답지 않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베르텔기아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김성철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열쇠는 그 라르고라는 여자가 쥐고 있는 게 분명하다.” 두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 57. 신의 글자 (2) 가장 쉽고 간편한 방법은 폭력에 의한 방법이다. 지금껏 김성철은 그 방법을 즐겨 썼다. 매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몇 가지 이유가 폭력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라르고의 정신상태다. 김성철은 두 달 동안 그녀와 같은 장소에서 일하면서 그녀의 정신상태가 마약과 우울증 등으로 붕괴직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매에는 장사가 없다지만 광인에겐 매도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녀는 무고한 사람이다. 아주 급박한 상황이 아니면 모를까 일반인을 붙잡아 문초하는 건 김성철의 취향이 아니다. 따라서 김성철은 온건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라르고와 친해져서 종말교단과 접선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김성철에게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김성철은 붙임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 고심하던 차에 베르텔기아가 한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김치라는 사람도 종말교단을 알고 있지 않을까? 치료 운운하는 걸로 보아 뭔가 아는 거 같은데.” 안 그래도 김치를 통해서 록산느 패가 운영한다는 마법 상점에 들릴 계획이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의 제안을 택하고 카타콤으로 향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실패였다. 김치가 믿고 있는 것은 종말교단을 통한 치료가 아니라 라그란제에 유서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질서신을 모시는 뮤라 교단을 통한 치료였다. 김성철을 파문한 라그란제의 2대 교단 중 하나인 그 뮤라 교단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치료라 쓰고 낙태로 읽어야 되는 물건이다. 그 치료엔 산모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극약이 사용된다. 다만 교단의 숙련된 치유사들이 산모를 간호하는 것이 다른 사이비 시술과의 차이점이다. “조금만 더 모으면 가능할거야. 걱정한 만큼 일이 위험하지 않더라고. 하지만 오래는 못하겠지. 록산느 패는 소규모로 패를 운영하니까.” 오랜만에 만난 김치는 밝은 얼굴로 김성철의 의문에 답했다. “그렇군.” 김성철은 실망했으나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다. 김치는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그리고 전의 건 말인데 에어푸르트 선생한테 설명 드렸어. 당신 이야기를 하니 물건을 팔아 주겠데.” 원래 온 목적이 조금 퇴색하긴 했지만 다른 목적은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성철은 김치와 함께 카타콤에 다시 들어갔다. 문지기 몇 명이 앞을 지키고 있었지만 김치를 보자 군말 없이 앞을 비켜줬다. 에어푸르트의 마법상점은 카타콤의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느 방과 다를 바 없이 해골로 들어찬 공간에 책장을 두고 마법서적과 도구를 빽빽이 채워놓은 곳이었다. 그 중심에 에어푸르트라고 불리는 주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에어푸르트는 수세미 같은 수염을 지닌 중동풍의 풍모를 지닌 거구의 사내였다. “혹시 에어푸르트 출신?” 김성철은 그를 보자마자 불쑥 물었다. “아니.” 에어푸르트는 솔직히 말했다. “에어푸르트에 가고 싶었는데 못가서 한이 되서 에어푸르트라는 별명을 쓰고 있지.” “아.” “에어푸르트가 망했으니 뭐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 되긴 했지만. 원하는 게 뭔지 말해보라고.” 김성철은 일단 룬을 찾았다. 길바닥에서 키 큰 마법서 상인의 말대로 에어푸르트는 여러 가지 도움이 되는 룬을 지니고 있었다. 김성철은 방어의 룬과 마법방어의 룬을 구입했고 여기에 더해 감지의 룬과 범위 확장의 룬도 함께 구입했다. ‘이걸로 나도 방어술식과 경계결계를 구축할 수 있겠군.’ 상급 주문술식의 마법서는 구하지 못했기에 사자토스나 마라키아 급의 강력한 방어술식은 만들어내지 못하겠지만 상황에 따라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보다 요긴한 건 감지의 룬과 범위 확장의 룬이다. 감지의 룬은 결계 내의 모든 침입자를 탐지하는 역할을 하는 다재다능한 결계로 주문술식의 크기를 늘리는 범위 확장의 룬과 함께 경계결계를 구축하는 핵심이 된다. 김성철은 지금껏 경계결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지만 아무개 같은 까다로운 존재가 나타난 이상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 되었다. 물론 가격은 싸지 않았다. 에어푸르트는 상당한 금액을 불렀다. 특히 경계결계를 구성하는 룬의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쌌다. 가지고 온 금액에 약간 못 미치는 금액이다. 김성철은 어쩔 수 없이 영혼창고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그걸로 계산했다. 그런데 그걸 본 에어푸르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영혼 창고를 써? 겉모습은 가난뱅인데 돈은 제법 있는 모양이군. 일종의 기만전술인가?’ 김성철이 돈이 많다는 걸 안 에어푸르트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그는 룬 이외에도 다른 품목을 권했다. 각종 학파의 강력한 마법서가 차례차례 그의 영혼창고에서 나왔다. 그걸 본 김성철은 영혼창고에서 금화 두어 닢을 더 꺼냈다. 에어푸르트의 눈동자에 불이 붙었다. ‘역시 알부자였군. 저걸 전부 쓰게 만들어주지!’ 그러나 딱히 김성철의 눈에 띄는 건 없었다. 다들 인기 있는 화염학파나 빙결학파의 마법서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마법서를 전부 훑어본 김성철이 불쑥 말했다. “장거리 텔레포트 마법을 찾는데?” 당장 필요한 마법을 생각하니 역시 먼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것이 가장 나아 보였다. 앞으로 칠영웅을 사냥할 때 요긴하게 쓰일 테니. “장거리 텔레포트라? 그건 몹시 구하기 어려워. 돈이 되다 보니까 기록을 남기는 놈들도 1회용 마법서에만 기록해서 전수자를 줄이는 편이니까.” “그건 어느 학파의 마법이지?” “감화학파. 비전투, 비지문학파 주제에 몸값이 대단히 높은 것들이지.” “그렇군.” 김성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리 원하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게 없나?” 에어푸르트는 몸이 달았다. “딱히.” “그럼 이건 어때?” 에어푸르트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영혼 창고에서 대단히 낡아 보이는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대단히 귀한 물건이지.” “이게 뭐지?” “에인션트 레터라고 불리는 걸로 신의 글자를 기록한 최초의 문서 중 하나야. 안에 든진 아무도 모르지만 특별한 걸 찾는다면 어디 한 번 살펴보는 게 어때?” 그 말은 김성철의 발걸음을 되돌리기에 충분했다. 김성철은 다시 의자에 앉아 탁자 위의 고문서를 응시했다. 일단 겉모습만 놓고 보면 유구한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김성철은 알고 있다. 사기꾼들이 어제 만든 책을 하룻밤 만에 천 년의 세월을 머금은 고서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기술을 쓴다는 걸. 김성철은 시험해보는 기분으로 두루마리를 살폈다. ‘흠.’ 오래된 건 맞지만 어딘가 미묘하다. 두루마리를 고정한 봉인을 풀려고 하자 맞은편에 앉은 에어푸르트가 수세미 같은 수염을 매만지며 씨익 웃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아무나 볼 수 없어. 왜냐? 엄청난 직관력을 요하거든. 신은 자신의 글자가 아무에게나 해독되기를 원하지 않으셔서 말이야.” “그래? 직관력이 얼마나 되어야 볼 수 있는데?” “최소한 직관력 500은 넘어야 그 안에 있는 서문이나마 읽을 수 있다더군. 하지만 제대로 해독하기 위해선 900이상의 수치가 필요하다는 풍문이야.” “900?” 김성철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엄청난 수치도 수치지만 어떤 바보가 직관력을 900까지 키우려 한단 말인가? 여간한 마법학파의 최종마법서는 직관력 400 언저리에서 전부 독해가능하다. 김성철 최강의 마법인 스타라이트를 담은 원시의 빛조차 단지 직관력 500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가? 그 이상의 마법서가 있다면 모를까 현존하는 마법서 중에 직관력 600 이상을 요구하는 마법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득한 고대엔 있었을 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누가 더 이상 올리는 게 무의미한 직관력 수치를 끌어올린단 말인가? 김성철의 직관력이 600을 넘긴 했지만 김성철은 이제는 그것이 불필요할 정도로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알고 있어. 불가능하다는 수치라는 걸.” 에어푸르트가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하지만 장담하는데 사기는 절대 아니야. 정 궁금하면 그 책을 펼쳐 봐. 단! 너무 빠지지는 마. 신의 글자를 잘못 읽었다간 정신이 파괴될 수도 있으니까!” 김성철은 반신반의하며 책을 펼쳤다. 그런데 그 책을 펼치는 순간 김성철은 보았다. 낡은 책장 안에 담긴 무한한 문자가 사방으로 퍼지며 밤하늘의 별처럼 자신을 둘러싸는 것을. ‘이.. 이것은...?!’ 탁자 건너편에 앉아 있던 에어푸르트의 목소리가 희미한 형태로 들려왔다. “뭐야? 형씨. 뭔가 보이는 거야? 설마. 직관력 500이 넘는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의 목소리는 희미한 웃음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김성철은 어느 순간 다른 세계에 있었다. 문자로 이루어진 바다 속에 말이다. ‘대체 이건.. 뭐지?’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문득 김성철 앞에 알 수 없는 문자가 나타났다. 고대어도 현재의 글자도 아닌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문자. 김성철은 어째서인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은 문자가 마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듯 의미를 가지고 자신의 머릿속에 전달되는 감각을 느꼈다. 그 안에서 김성철은 보았다. 한 음절로 이루어진 무한한 의미의 문자를. 감당할 수 없는 속삭임이 우레처럼 사방에서 울리는 가운데 몇 개의 희미한 의미가 김성철의 의식 속에 희미하게 떠올랐다. [ …전면적인 붕괴는 필연적이다. ] [ …수확은 단지 종언의 그날을 늦출 뿐 ] [ …신들이 죽은 세상에서 ] 더 이상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김성철은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중대한 무언가가 부러질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고 문자에서 눈을 돌렸다. “…….” 별처럼 퍼진 무한한 문자는 사라졌다. 김성철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납골당 안이다. 건너편에 앉은 에어푸르트가 미심쩍은 얼굴로 김성철을 응시하고 있었고 품안의 베르텔기아는 격렬하게 몸을 흔들며 김성철을 깨우고 있었다. 김성철은 부드럽게 베르텔기아를 잡으며 심호흡을 했다. “점잖은 친군줄 알았는데 연기가 제법이군. 설마 직관력이 500 넘는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에어푸르트 내에서도 몇 안 된다는?” 에어푸르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김성철을 미심쩍으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김성철은 등줄기로 한 줄기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어색하게 둘러댔다. “…들켰군.” “그런다고 해서 가격을 깎아주진 않으니까 헛수고는 하지 마. 게다가 그 책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니까.” “직관력 900이 넘는 사람이 있다고?” 아마도 없을 것이다. 온 세상을 통틀어서 단 한 명도. 영원히 산다는 드래곤 일족이라면 모르겠지만.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에어푸르트의 얼굴을 살폈다. “직관력과 관계없이 신의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 “그건 금시초문인데.” 제국대원수로 가장 은밀한 지식까지 접근한 게 김성철이다. 그가 모른다는 건 여간해선 있을 수 없다. “못 믿겠다는 얼굴이군. 뭐 나도 보지 못했으니까 내 말이 맞다고 우기기 좀 그렇지만 실제로 있어. 루테기네아에서 독해자 혹은 읽는 자라고 불리는 선택 받은 존재가 말이야. 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진짜로 있다니까!” “…….” 김성철의 시선에 에어푸르트는 당혹감을 느끼고 한참이나 눈동자를 굴리더니 이내 뭔가 떠오른 듯 눈을 번쩍 뜨고 말했다. “옳지. 그 여자가 있군! 망국의 공주 라이즈 하이메르 말이야!”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김성철은 온 몸이 감전된 듯한 전율을 느꼈다. ‘라이즈 하이메르...?!’ 전율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에어푸르트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여자가 읽는 자라는 소문이 있어. 알려나 모르겠지만 그녀는 루테기네아 왕실의 핏줄이 아니야. 크롬갈드 왕이 직접 지목해서 양녀로 삼은 거지.” “…….” 헛소리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겠지만 에어푸르트의 말은 사실이다. 라이즈 하이메르는 왕실의 핏줄도 귀족의 핏줄도 아니다. 오히려 농가의 딸이라는 소문도 있고 상인의 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떠돌이 치유사의 딸이지만. 에어푸르트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크롬갈드가 그 여자를 양녀로 맞아 공주로 삼은 건 그녀의 미모도 영지도 아닌 타고난 특수한 능력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지.” “그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지?” 주변의 공기가 변했다. 태평하게 이야기를 꺼내놓던 에어푸르트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마치 바늘처럼 자신의 전신을 찌르는 기이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뭐.. 뭐야?!’ 그는 뒤늦게 느꼈다. 그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은 다름 아닌 알 수 없는 후줄근한 사내에게서 나온다는 걸. 제대로 대답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에어푸르트는 그런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갈프.. 갈프한테 들었어! 반란군이 라그란제를 접수하고 전범 재판을 열 때 모가지가 댕강 잘린 그 노인네 말이야.” “갈프...? 흑마법장 르페브르 갈프 말인가?” 김성철의 물음에 에어푸르트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행동으로 보아 단순히 둘러대기 위한 건 아닌 걸로 보였다. 김성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살기가 사라졌다. “그렇군. 다른 이야기는 없나?” 김성철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방금 결례에 대한 보답으로 손바닥에 쥐고 있던 금화 두 닢은 물론이고 영혼 창고에서 또 다른 금화를 꺼내 에어푸르트에게 내밀었다. 에어푸르트는 잠깐 놀라긴 했지만 금화 3닢이란 거금이 한 번에 들어오자 없던 용기를 내어 자신이 아닌 사실을 전부 털어놓았다. “신의 문자는 하나가 아니야. 루테기네아 비밀서고에 각지에서 모은 서류가 제법 있었나 봐. 하지만 루테기네아가 멸망하면서 그 문서는 뿔뿔이 흩어졌지. 이건 그중 하나이고. 아무튼 무위의 암군 크롬갈드는 이 고문서에 광적으로 심취한 모양이야. 그래서 뭐, 국정을 놓았다던가. 그런 이야기도 있더군.” 전혀 듣지 못한 이야기다. 하지만 아주 거짓말이라고 치부할 순 없다. 김성철은 기억하고 있다. 라이즈 하이메르의 말을. 그녀와 함께 했던 기억을. 일방적으로 그녀가 보내오던 편지들을. 영혼수확자, 천둥방패, 진실의 눈. 홀로 세계 전체에 대적할 수 있는 수단들. 그리고 마지막 편지에 담긴 신에게 이르는 길. 이미 일어난 일이지만 결코 이해할 수 없던 파편과 같은 진실 사이에 희미한 연결고리가 만들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김성철은 발견한 것이다. 그가 알지 못했던 어떤 사실들을. 하지만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신의 도구인 그에겐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운명이라 불리는 불변의 여정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 그 운명을 가장 잘 아는 이는 지금 8구역의 상공에서 누추한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필이면 영년의 밤 언저리에 사고가 터진다니.그것도 전부 태워죽여도 시원찮을 쓰레기들이 모여사는 8구역에 말이야. 이건 재수가 없어도 더럽게 없잖아!” 제도 방위함대를 지휘하는 젊은 제독 아르큐부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인의 등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여인이 말했다. “큰 사건은 아닐 거야. 작은 소요에 불과할 거야.” 아르큐부수의 입가에 진한 냉소가 떠올랐다. “알다시피 곧 다가올 영년의 밤은 라그란제 최대의 축일이야. 황제폐하께서 직접 주재하는 행사도 그때 개최되지.” “…그건 알아.” “그런 축복받은 날을 또 네 헛된 보고 때문에 망친다면 그때는 나도 더 이상은 간과하지 않을 게다. 회귀자.” 아르큐부스의 서릿발 같은 말에 황제의 빈객 이수진은 조금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마도....” ======================================= 58. 라르고 (1) “…….” 김성철이 입을 닫고 있는 동안 에어푸르트는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아무튼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야. 거래는 여기까지 하자구. 당신 연기를 너무 잘해서 상당히 피곤하네!” “넌 왜 이 두루마리를 가지고 있는 거지?” 김성철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러자 에어푸르트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갈프가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 간수를 했었거든. 그때는 젊고 착할 때라 그 노인에게 잘 대해줬지. 사실은 콩고물 하나 떨어지지 않나 해서 그런 거지만.” 아무래도 문답은 이 정도로 끝내야 할 거 같았다. 또 다른 손님이 마법상점의 입구에 팔짱을 낀 채 이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별 일 없지? 핫산?” 카타콤의 여주인 록산느다. 담뱃대를 입에 문 그녀는 에어푸르트를 응시하며 퉁명스레 물었다. 아무래도 거래가 길어짐에 따라 무슨 일이 있지는 않나 걱정 되서 와본 모양이었다. 에어푸르트는 금화 3닢을 보이며 활짝 웃었다. 록산느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당신.” 록산느가 지나가는 김성철을 불러 세웠다. “전에 인부로 왔을 때부터 느꼈지만 평범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네.” “당신 눈에 그렇게 보인다면 그런 것이겠지.” 김성철은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록산느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세계의 적, 김성철 맞지?” 느닷없는 기습. 하지만 김성철은 어떤 심경의 변화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는 찰나간의 시간 동안 생각했다. 한 번 떠보는 것이리라.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상상에 맡기지.” 록산느는 붉은 빛이 도는 눈동자로 김성철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눈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에어푸르트가 금화를 만지작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마담. 그 친구 연기파예요.” 록산느가 피식 웃으며 담뱃대를 쭉 빨아들이며 먼저 시선을 돌려 싱거운 눈싸움을 끝냈다. 그러자 에어푸르트가 다시 말했다. “농담이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우리 마담은 말이야 범상치 않은 검은머리 소환자가 나타나면 일단 찌르고 보는 주의니 말이야.” “…….” 김성철은 록산느의 행동엔 별 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그는 신의 글자가 담긴 두루마리를 흔들어 보이며 에어푸르트에게 물었다. “이 비슷한 걸 구할 수 있나?” “금화만 두둑하다면야 어디 한 번 구해보지.”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록산느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할 말이 남은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친구네. 굳이 재고가 없더라도 한 번 놀러 와.” “내가? 왜?” “사연이 있어 보이는 친구는 좋아하니까. 뭐, 8구역에 살면서 우리 록산느 상회와 친분을 쌓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거든. 우리는 의외로 다재다능하니까.” 말은그래도 김성철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나쁜 건 없는 일이다. 8구역을 좌지우지하는 패거리 하나와 친분을 쌓는다는 건. 정보는 물론이고 다방면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걸어갔다. “조만간 찾아가지.” * 머나먼 북쪽에선 악마왕이 죽었다. 그보다 가까운 북쪽과 동쪽에선 거신이 출현해 대륙의 절반을 짓밟았다. 남쪽에선 강 위의 도시 하나가 초토화됐고 세계의 적은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난 한 해였다. 연대기 작가들에게 고초를 안겨다 주었던 혼돈의 해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평상시라면 모두들 곧 다가올 라그란제 최대의 축제 영년의 밤을 준비하며 떠들썩해야 할 시기지만 시기가 시기다 보니 올해의 연말은 어느 때보다 뒤숭숭했다. 시외엔 몰려든 피난민으로 몸살을 알았고 시내엔 이단과 사이비가 역병처럼 창궐했다. 라그란제 시내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괴소문도 이에 일조했다. 바로 참수귀라 불리는 살인마에 관한 소문이다. 연령도 성별도 출신도 모든 것이 불명인 그 살인마는 밤이 찾아오면 제국의 각 구역을 돌며 무차별적인 살인행각을 벌였는데 그에게 죽임 당한 이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목이 몸통에서 분리되었다고 한다. 그 살인마의 범행은 4구역에서 6구역 사이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집중됐지만 익명의 소식통에 의하면 라그란제에서 가장 지체 높은 사람들이 사는 1구역에서도 참수귀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살인극이 일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괴소문에도 불구하고 한 해의 마무리를 짓는 영년의 밤의 행사준비는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최근 연이은 실책으로 신망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라그란제의 위정자들은 혼란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이번 영년의 밤 축제를 어느 때보다 성대하고 성공적으로 치루기를 원한 것이다. 황제의 명으로 대륙각지에서 모여든 극단이 각 구역에서 흥겨운 공연을 펼치며 열기를 끌어올렸고 제국 소유의 창고에 쌓여 있던 다량의 생필품이 라그란제의 시민들에게 뿌려졌다. 각 구역의 장들은 저마다 그들의 구역에서 나름의 행사를 기획했고 황제의 처소인 허공 궁궐에서는 전대미문의 볼거리를 제국의 시민들에게 보여주겠노라 공언했다. 잠시 냉각됐던 라그란제의 거리엔 연말연시 특유의 흥청거림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어디에도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꽃이 되고 싶은 나의 아이에게 엄마는 무엇이든 전부 내준다네.” 라르고는 하루 종일 듣기 싫은 목소리로 출처모를 노래를 불러댔다. 태교를 위해 좋은 노래라고 하는데 김성철은 그녀의 노래를 듣느니 호문클루스의 노래를 듣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돌아가시겠군.’ 라르고와 친해진다는 계획 따윈 조금도 진전되지 않았다. 그동안 몇 번 시도하긴 했지만 라르고는 김성철에게 자신의 정보를 가르쳐 줄 마음이 추호도 없어보였다. 오히려 그것을 구실 삼아 김성철을 어떻게든 이용해먹으려는 투박한 추악함까지 드러내보였다. “양파 전부 다듬었어?” 자장가를 흥얼거리며 주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외투를 벽걸이에 걸며 김성철을 응시했다. 그녀가 주문한 양파 한 무더기는 이미 김성철의 손에 깔끔하게 손질된 상태. 라르고는 바구니에 담긴 양파를 하나 들어 유심히 쳐다보더니 한마디 했다. “남자치고는 깔끔하게 했네. 하지만 마무리가 어설퍼. 좀 더 배워야겠어.” “…….” 언어도단이다. 요리인은커녕 평범한 주부만도 못한 솜씨를 지닌 그녀가 고급요리인의 김성철의 손질을 보고 훈계를 늘어놓는 것은. 라르고는 김성철이 손질한 양파를 도마 위에 올리고 엉성한 칼질로 썰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엄마는 사랑하는 아이에게 모든 걸 내준다네. 피와 살은 물론 뼈와 영혼까지도. 그렇게 생명의 횃불이 줄 지어선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옮겨가듯~.” 노래를 흥얼거리던 라르고는 갑자기 김성철을 돌아보더니 불쑥 말했다. “미안한데 사육사. 양파 좀 대신 다져줄래? 뱃속의 아기가 자꾸 발로 차는 거 같네. 장군감이 될 모양인지 예사 힘이 아니야.” “…….” 김성철은 말없이 라르고 대신 도마로 가 양파를 다지기 시작했다. 라르고는 주방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김성철을 가늘게 뜬 실눈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종말교단은 왜 만나고 싶어 하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나?” 김성철의 목소리엔 은근한 짜증이 담겨 있었다. 몇 번짼지 모른다. 라르고는 항상 자신이 할 일을 김성철에게 미루고는 선심이나 쓰듯 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던졌다. 김성철은 그때마다 종말교단에 가입하고 싶다는 대답을 했지만 변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어차피 그 질문이란 게 김성철을 조금이라도 더 부려먹기 위한 라르고의 좁은 머리에서 나온 당근이니 말이다. “아. 그래?” 라르고는 손톱을 다듬으며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김성철은 이 여자가 당분간은 절대로 종말교단에 관한 정보를 털어놓지 않으리라는 걸 확신했다. ‘역시, 말로 해서 될 여자가 아니군.’ 일주일. 김성철은 딱 일주일만 더 참기로 마음먹었다. “으! 그 여자. 진짜 밉상이야! 진짜 그 노래도 듣기 싫고!” 인내심이 먼저 바닥이 난 쪽은 베르텔기아였다. 라르고의 멍청한 악의는 그 악의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당사자보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감정을 긁어놓는 무언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김성철은 그럼에도 일주일이란 유예기간을 단축하지 않았다. 약간의 변화가 있다면 질문이 많아진 정도. 다음날도 김성철은 라르고의 주문으로 재료를 대신 손질하면서 옆에 앉아 손톱 소제를 하고 있는 라르고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아이를 낳으면 앵글로색슨보이가 정말 당신을 돌아봐 줄 거라고 믿나?” “당연한 거 아냐! 강한 남자일수록 자기 유전자에 집착하는 법이야. 그 이를 꼭 빼닮은 아이를 낳기라도 하면 그 어리고 싸가지 없는 그 년? 당장 여기서 내치고 말 걸?”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당신처럼 남의 밑에서 잡일이나 하는 작은 남자가 그 이의 생각을 알 리가 없지. 양파 껍질이나 제대로 벗겨 놔. 종말 교단과 만나고 싶다면 말이야.” 라르고는 마치 훈계조로 말하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김성철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앞으로 라르고에게 남은 날을 헤아렸다. ‘6일 남았나.’ 또 하루가 지났다. 라르고는 주방에 오지 않았다. 주방에 출근할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그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정오가 되어서야 김성철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라르고는 온 얼굴에 시퍼렇게 멍이 들고 눈이 퉁퉁 부은 채 주방으로 들어왔다. “뭘 봐? 니 일이나 해. 눈알 함부로 굴리지 말고.” 라르고는 의자에 주저앉더니 한참동안 서럽게 울어댔다. 김성철은 안면이 있는 조직원에게 라르고에게 있었던 일을 들을 수 있었다. 라르고가 복도를 걷던 중 두목의 새로운 애첩을 만나 대판 싸운 모양이다. 원래는 동선이 달라 저택 내에서 마주 칠 일이 없는 모양인데 의도치 않게 마주친 것이다. 짧은 언쟁이 오간 후 두 여자가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는 촌극이 벌어졌는데 그걸 본 앵글로색슨보이가 라르고를 그야말로 개 패듯이 팼다고. 아무리 얄밉고 심성 더러운 여자라고 하나 상황이 그렇게 되자 김성철은 일말의 동정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라르고가 떨리는 손으로 마약을 꺼내 흡입하려는 걸 말로 막았다. “그거 아이 몸에 좋지 않은 거 아닌가?” “…….” 라르고는 정신이 번뜩 들었는지 마약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는 이를 악물었다. 한동안 주방 안엔 서러운 흐느낌이 이어졌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라르고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진심이 깃든 말은. “오늘은 뭘 다듬어 드릴까?” 김성철은 팔짱을 낀 채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재료를 다듬을 필요 따윈 없어. 그보다 나랑 같이 내 침실에 가지 않을래?” 퍼렇게 멍이 든 눈으로 김성철을 응시하며 라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랜만에 남자한테 위로 받고 싶은데.” 전성기의 라르고가 추파를 던졌어도 씨알도 안 먹혔을 것이다. 하물며 몸과 마음이 전부 병든 지금 시점에 와서 던진 추파는 김성철로 하여금 피곤함을 느끼게 할뿐이었다.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종말 교단이고 나발이고 없을 텐데?” “종말 교단으로 협박해도 할 수 없는 일이야.” 김성철은 딱 잘라 말했다. 라르고는 쓸쓸히 자조하며 말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정말로 끔찍한 일이네.” “…….” “라그란제의 그늘에 핀 장미라 불리던 내가 당신 같이 못 생긴 동양인한테도 거절당하는 걸 보니 말이야.” “그거 미안하게 됐군. 변명하는 건 아니지만 이쪽도 사정이 있어.” “무슨 사정? 사랑하는 마누라라도 있어?” “그런 게 있다면 이런 짓도 안 했지. 솔직히 말하자면 서지도 않거든.” 그 말을 들은 라르고는 어린아이처럼 웃어댔다. 방금 전까지 서럽게 울어대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고자? 고자였어?” “…….” 김성철은 마음속으로 라르고에게 주어진 유예기간을 5일에서 3일로 줄였다. “이제야 알겠네. 그렇게 내 심부름까지 하면서 종말교단을 찾는 이유를.” 한참 동안이나 깔깔 웃던 라르고는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알려줄게. 종말 교단과 접촉하는 법. 사실은 조금만 더 부려먹고 알려주려고 했는데 당신 사정을 알고 나니까 양심의 가책이 조금 느껴지네.” 전혀 생각하지 않은 곳에서 라르고가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녀는 날계란으로 시퍼렇게 멍이 든 눈자위를 문지르며 자신이 아는 정보를 털어놓았다. “어차피 빨리 말해줘 봐야 만날 방법은 없어. 워낙에 탄압을 심하게 받는지라 정기적인 집회 따윈 꿈도 못 꾸고 장소조차 함부로 잡을 수 없거든.” 종말 교단과 만나는 방법은 의외의 곳에 있었다. 8구역의 구역행정청 앞의 게시판에 말이다. 종말 교단은 그 모두가 지켜보는 게시판에 대담하게도 그들의 자취를 남긴다고 한다. 무작위의 게시물의 귀퉁이에 그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비밀스런 표식을 남긴다는 것이다. “아직은 그 표식이 나타나지 않았어. 아마도 경계가 느슨해지면 다시 나타나겠지. 나도 매일 체크하고 있는데 언제 다시 나타나면 당신에게 알려줄게.” 김성철은 반신반의했지만 놀랍게도 라르고는 약속을 지켰다. 이틀 뒤, 그녀는 김성철을 종말교단의 간부에게 안내했다. 엄밀히 말하면 정식적인 회합은 아니었다. 사전에 교단의 집회에 참가할 사람을 미리 알아보는 과정이었다. 교단에 속한 사람이라기보다는 도적에 가까운 종말교단의 간부는 김성철이 종말교단에 접근하려는 이유를 집요하게 추궁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엄격함에 김성철은 말문이 막히는 위기를 겪었지만 라르고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사전 점검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이 사람, 고.. 아니 발기부전이래요. 갖은 약도 축복도 받아봤지만 결국 방법을 못 찾아 교단의 힘을 빌리고 싶다고.” “…사실인가?” 종말교단의 간부는 안쓰러운 눈으로 김성철을 응시했다. “…….” “올해의 마지막 날, 영년의 밤 행사가 펼쳐지고 있을 때 집회가 있을 거야. 장소는 아직 미정이지만 암호문으로 게시할 것이니 제대로 찾아오도록.” 라그란제에 온 지 2달째. 드디어 종말 교단에 대한 단서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 58. 라르고 (2) 한 해의 마지막까지 앞으로 일주일. 인간제국 건국 이래 최대의 축제가 될 것이라고 예상되는 영년의 밤 행사를 앞두고 제도는 열광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 8구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평소엔 인간 하수도라 불리며 제국의 무관심 속에 철저히 방치됐던 이곳에서도 황제의 은전이 내려지고 있었다. 8구역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치안감 웨이 롱은 8구역의 중심인 행정청 앞에 큰 무대를 설치하고 광대들을 풀어 사람들에게 먹을 걸 나눠주는 행사를 개최했다. 8년 동안 야생에서 살아온 김성철에게 이런 성대한 행사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 그는 정체를 숨기고 각 구역을 전전하며 곳곳에서 벌어지는 행사를 모조리 구경하고 다녔다. 그중 4구역에서 본 행사예고가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 라그란제 황제배 요리대회 ] [ 15년 만에 펼쳐지는 맛의 향연 ] [ 과연 세계 최고의 요리사는 누가 될 것인가? ] “…….” 그 광고를 본 이래 김성철의 마음엔 풍파가 일었다. “대체 사람이 왜 요리만 나오면 그렇게 유치해지는 거야? 응?” 베르텔기아가 옆에서 붙잡지 않았다면 그는 참가자 목록에 이름을 올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요리대회 행사가 벌어지는 올해의 마지막 날엔 종말교단 집회가 예정되어 있다. 대회 특성상 하루 종일 펼쳐질 요리대회에 참가를 하면 종말교단 집회에 참석할 수 없다. 모두의 관심이 축제에 쏠렸을 때 은밀한 모임을 가지는 건 대단히 현명한 선택이지만 김성철은 이 부분에 관해 강한 불만을 지녔다. ‘음... 종말교단. 점점 마음에 안 드는군.’ 종말교단과 별개로 위기도 있었다. 김성철의 얼굴을 아는 이들이 제도에 있었던 것이다. 7구역에서 펼쳐지고 있는 노래경연대회를 구경하던 중 김성철은 판추리아에서 만났던 클라리스와 쿠르트 아삼 일가를 발견했다. 공장에 취직을 했는지 여직공의 복장을 한 클라리스는 쏟아지는 수많은 음담패설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무대에 올라 노래를 마무리 지었다. 노래 실력만큼은 있는지라 그녀의 노래가 끝났을 때 냉소적인 관중들 사이에서 약간의 박수소리가 흘러 나왔다. 노래를 마치고 관중들께 목례하던 클라리스의 시선이 김성철 쪽에 고정됐다. 김성철은 그녀가 눈을 껌뻑이는 동안 자취를 감췄지만 클라리스는 한참 동안이나 김성철이 있는 곳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응시하며 김성철을 찾았다. “저 노래 잘하는 언니도 이곳으로 왔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걸.” 김성철은 역시 8구역에서만 돌아다녀야겠다고 생각하며 저택으로 돌아왔다. 저택의 입구에서 김성철은 앵글로색슨보이와 그의 애첩이 마차를 타고 정문을 나서는 걸 볼 수 있었다. 차창 안쪽으로 대단히 즐거워 보이는 앵글로색슨보이의 얼굴이 들여다보였고 대로 너머로 사라지는 마차 안에선 간드러지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주방으로 돌아온 김성철은 연초를 피고 있는 라르고를 볼 수 있었다. 연초 또한 아이의 몸에 좋은 건 결코 아니지만 불가피한 선택이다. 연초마저 하지 않으면 금단증세에 찌든 그녀의 심신이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을 위해 준비했어.” 라르고는 수북이 쌓인 양파 무더기를 가리키며 몽롱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 김성철은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말없이 양파를 손질했다. 종말교단과 접선할 기회를 얻은 현재 더 이상 그녀의 청을 들어줄 필요는 없지만 김성철은 라르고의 요구를 계속해서 들어줬다. 애당초 요리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라르고에겐 어떤 희망적인 미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아이를 낳기도 전에 그녀는 죽을 것이다. 종말교단에서 준 약이 저주의 전이를 막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이 내렸다는 절멸의 저주는 그깟 환약 몇 개를 먹는다고 쉬이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전에 한 번 물어본 적이 있는데 말이야.” 양파의 껍질을 까면서 김성철이 입을 열었다. “뭘?” 연초에 취한 라르고는 안락의자에 목을 편안히 기댄 채 힐끗 고개를 돌려 김성철의 등을 눈에 담았다. “그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과연 앵글로가 마음을 고쳐먹을까?” “당연하지.”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대답. 김성철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빠진 것만 빼면 말이다. “아까 오는 길에 앵글로와 크리스티나라고 했나? 그 젊은 여자랑 도심에 나가는 걸 봤어. 사이가 좋아 보이더군.”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아이를 낳으면 모든 게 변할 거야. 그 개자식과 나 사이엔 그 어린년이 감히 끼어들 수도 없는 오랜 인연이 있거든.” 그렇게 말하는 라르고의 얼굴엔 좀처럼 보기 힘든 자부심이 떠올랐다. “그래. 우리 사이엔 한편의 드라마라고 해도 될 정도의 아찔한 로맨스가 있었지.” “호오.” 김성철은 칼질을 멈추고 라르고를 돌아봤다. 라르고는 득의만면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래, 이거부터 말해줘야겠네. 사실 나도 소환자야.” “그래? 그건 금시초문이군.”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일도 업다. 왜냐하면 라르고는 소환자 치고는 지나치게 약했기 때문이다. 내정자인 배성혜도 소환자 축에선 약한 편에 속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평범한 시민들 사이에서 능히 두각을 드러낼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녀 또한 인세의 지옥이라 해도 무방한 소환광장을 수료한 졸업생이므로. “얼굴을 보니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라르고에게 재주가 있다면 대체로 무표정인 김성철의 심중을 읽어내는 일이었다. 그것 하나만은 기가 막히게 잘했다. 김성철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자니 라르고는 히죽 웃더니 갑자기 팔소매를 걷어 올렸다. “사실 난 노예 출신이야. 적광장이었나. 그곳에 소환되자마자 어떤 목소리를 듣고 노예의 길을 택한 거지.” 그녀의 팔위엔 노예를 상징하는 낙인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노예 치곤 정신이 멀쩡하군?” 김성철은 소환광장의 노예들이 어떤 형태로 유통되는지 잘 알고 있고 실제로 그 장면을 본 적도 있었다. “취향이 특별한 고객도 있거든. 날 사들인 인간은 쇠락한 루테기네아의 귀족이었는데 당신처럼 고자였어.” “…….” “고자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 썩을 놈의 취향이 특이한 거지. 그 인간은 여자의 몸을 탐하는 것보다 망가뜨리는 걸 선호했어. 그래서 맨정신인 노예를 원했지. 망가뜨리는 보람이 있으니까.” 그녀는 뒤로 돌아 상의를 슬며시 끌어올렸다. 문신으로 뒤덮인 살결 이면엔 고문이 훑고 간 끔찍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슬며시 들췄던 상의을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고자는 차례차례 노예들을 고문하고 개처럼 도살했지. 다음은 내 차례였는데 운 좋게도 그 개자식이 날 구출한 거야. 앵글로색슨보이 말이야. 자기 말로는 한 눈에 반했다고.” “개자식도 가끔 좋은 일을 하는군?” “그렇지? 아무튼 우리 사이엔 그런 로맨스가 있었어. 다만 그 결실이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지만 그 결실만 맺힌다면 모든 건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라르고는 확신을 품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사랑했다면.” 김성철이 불쑥 말했다. 베르텔기아도 깜짝 놀랬다. 김성철이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담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그런 결실이 없어도 되지 않나?” “무슨 뜻이지?” 라르고가 불쾌감을 드러내며 말했다. “말 그대로야. 그러니까 내 말은 작은 부분에서 감동을 주라는 것이지. 어차피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당신이 변하지 않으면 결국 원래대로 돌아오게 될 거야.” 김성철은 그 말을 해놓고 조금은 후회했다. 그답지 않았던 것이다. 라르고 같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운명 따윈 그냥 흐르게 놔두면 될 일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김성철은 자기도 모르게 의중의 말을 꺼내고 있었다. “그럼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거지?” 게다가 설상가상. 라르고가 김성철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김성철은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후회했지만 뒤늦은 후회였다. 그는 라르고의 뜨거운 눈길을 받으며 주섬주섬 말을 이어나갔다. “앵글로도 말이야. 그러니까 나이 먹을 만큼 먹었잖아? 젊은 여자도 좋다지만 그 나이 대 남자에겐 정말 필요한 건 인생의 동반자 아니겠어?” “서지도 않는 주제에 말은 그럴싸하네. 그래. 그럼 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까?” “…….” 말문이 막혔다. 사실 더 이상 꾸며낼 말도 없었기 때문이다. 김성철은 잠시 머리를 굴리다 이내 편한 선택지를 발견하고 담담한 어조로 몰했다. “일단은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는 게 어떨까? 집요리라는 건 언제나 남자에게 특별한 마력을 지니고 있지.” “집요리?” 라르고의 눈이 반짝였다. 김성철은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을 깨달았지만 기호지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게 나으리라.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라르고에게 말했다. “앵글로 그놈 일본 놈이라고 했지? 내가 괜찮은 레시피를 알려주지.” 김성철의 손에 들린 식칼이 시원스레 손끝에서 회전했다. * 탐탐에게 먹이를 주고 주방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라르고가 입구까지 달려와 김성철을 가로막았다. 좀처럼 보기 드문 환희에 가득 찬 얼굴. “당신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라르고는 벅찬 목소리로 김성철에게 말했다. 그걸 본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성공인 모양이군.’ 그는 라르고에게 일본인이 좋아할만한 요리를 몇 개 전수했다. 화려한 요리가 아닌 일반 가정식을. 라르고의 말에 의하면 앵글로색슨보이는 소고기와 감자를 넣고 졸인 요리를 먹고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당연히 라르고의 평가가 올라가는 건 당연지사. 함께 식사를 하던 그 젊은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진 건 덤이라고 한다. “처음이었어. 주방으로 쫓겨 온 이래 사람이 내게 그런 표정을 지어보인 건.” “그건 좋은 일이군.” 김성철은 내색하진 않았지만 기분은 상당히 좋았다. 그의 요리가 누군가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확인하는 건 가슴 뿌듯한 일이기에. 김성철은 그 후로도 앵글로색슨보이가 좋아할만한 요리를 라르고에게 전수했고 그녀의 평가는 점점 올라갔다. 어느 순간부터 김성철은 연초와 마약의 유혹을 이를 악물고 참아내는 라르고의 필사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솔직히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김성철은 즐거운 마음으로 영년의 밤을 기다렸다. 시간을 유수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김성철은 라르고와 함께 장을 보러갔다. 원래는 장은 김성철이 보지만 라르고가 좋은 물건을 고르는 법을 알려달라고 떼를 써서 어쩔 수 없이 동행한 것이었다. 라르고는 더 이상 화려한 의복을 입지도 김성철을 하인취급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둘이 함께 바깥으로 나선 데엔 다른 목적도 있었다. “장소가 정해졌네. 녹청골목 안에 버려진 폐가야.” 라르고는 8구역의 행정청 앞의 게시판에 은밀하게 표기된 종말교단의 표식을 보고 집회의 장소를 김성철에게 알려주었다. 앞으로 남은 날은 이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게 볼일을 보고 오는 와중에 김성철은 공교롭게도 김치 부부와 마주쳤다. “이게 누구야! 야! 김치! 오랜만이야!” 라르고는 팔을 흔들며 김치에게 달려가 친한 척을 했다. 짧은 시간 동안 놀라울 정도로 변한 라르고의 모습에 김치는 적응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라르고를 응시했다. 김성철이 따로 김치에게 귀띔을 하자 그제야 김치는 라르고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반갑게 환대했다. 라르고는 배성혜에게도 친한 척을 햇다. “듣던 대로 상당한 미인이네요. 뭐 젊을 때 나보다 못하지만. 그런데 어디에 갔다 오는 길이죠? 둘이 좋은 옷을 입은 것이 다른 구역에 갔다온 걸로 보이는데.” 이에 배성혜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뱃속의 아이 때문에요.” “아이?” 라르고가 관심을 보인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배성혜는 눈웃음을 지으며 천진난만한 어조로 말했다. “뱃속의 아이한텐 미안하지만.. 우리 부부가 살기 위해 뮤라 교단에 상담을 받으러 가는 중이었어요.” 김치는 그런 배성혜의 어깨를 꼬옥 껴안으며 넉넉한 미소를 지어보였고 배성혜도 수줍은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그 모습을 본 라르고의 표정이 어색하게 변했다. 라르고의 심경 따위 알 리 없는 김치는 김성철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내일 입원이야! 돈도 이미 전부 모아서 일시금으로 완납하고 했어! 8구역 출신이라고 우릴 벌레처럼 보든 직원 자식 얼굴 변하는 걸 당신도 봐야 했는데 말이야!” 반면 김성철은 모처럼 좋았던 라르고의 표정이 안 좋게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서둘러 작별을 구했다. “바쁜 일이 있어서 말이야. 먼저 가야겠군.” 김성철은 라르고를 데리고 앵글로색슨보이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예상한대로 라르고의 정신은 대단히 불안정해보였다.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꿋꿋하게 끊었던 연초를 다시 입에 가져가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연초를 빨아들이며 그녀는 말했다. “당신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네.” 김성철이 무심한 눈으로 응시하자 라르고는 쓸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진정한 사랑엔 결실 따윈 없어도 된다는 걸.” 그녀는 뭔가 다짐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성철은 이에 대해 불길한 예감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녀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생명을 희생해야 하니까. 그것이 타의에 의한 깨달음이라고 할지라도 바른 길로 나아가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녀를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이틀 뒤. 한 해의 마지막을 마중 보냄과 동시에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라그란제 최대의 축일이 다가왔다. 모든 이가 성대한 축제를 꿈꾸며 잠들어 있는 밤. 록산느 패가 지배하는 카타콤에 두 개의 불길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우리, 여기서 그만두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다고 해서 멸망한 나라가 부활하는 것도 아닌데.” 안경을 쓴 여자 마법사가 검을 든 남자를 돌아보며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을 든 남자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그냥은 지켜볼 수만은 없잖아? 우리를 재앙에게 팔아먹은 제국 놈들이 신나게 웃고 떠느는 걸?” “그건 뭐 나도 동감이지만.” “그럼 가자고. 피비 칸버스! 황제의 얼굴에 똥칠을 하러.” 참수귀. 언제부터인가 제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살인마는 망설임 없이 카타콤의 입구를 굳게 걸어 잠근 쇠사슬을 검으로 끊어냈다. ======================================= 58. 라르고 (3) 축제 당일. 제도 라그란제엔 아침부터 떠들썩한 행사들이 여기저기서 개최됐다. 김성철은 4구역에 있었다. 그는 군중들 틈에 서서 황제 배 요리대회를 지켜보고 있었다. 100명이 넘는 참가자가 풍성한 재료가 마련된 수십 개의 조리대에서 채점관이 낸 문제를 수행하고 있었다. 예선으로 치러지는 조식 요리대회의 주제는 ‘활기’였다. 수많은 요리사들이 저마다 해석한 활기를 요리라는 형태로 풀어내고 있었다. 김성철은 매의 눈으로 참가자의 요리 하나하나를 살폈다. 참신하지만 기본기가 부족한 요리사, 기본기는 철저하지만 고리타분한 요리사, 실력은 발군이나 주제를 잘못 해석한 요리사 등등 각양각색의 군상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보다 잘하는 놈은 보이지 않는군.’ 짧은 관찰 후 김성철은 결론을 내렸다. 그가 판단 근거로 삼은 건 브로치였다. 참가자들 중 적은 수가 요리인을 상징하는 브로치를 지니고 있었는데 대부분 무쇠 혹은 황동색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 김성철의 것처럼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나는 브로치를 단 요리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쩌면 일부 요리인이 실력을 숨기기 위해 브로치를 숨길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그런 걸 일일이 고려할 수 없는 노릇이다. 슬슬 예선이 끝나갔다. 채점관의 채점이 끝난 요리는 결과가 발표된 후 관중들에게 나눠주게 되어 있어 벌써부터 관중들 간에 눈치 싸움이 치열하게 펼쳐졌다. 김성철도 밀치고 엎치는 관중들 틈바구니에 서서 눈 여겨 보던 참가자의 대기열에 섰다. 운 좋게 마지막 남은 요리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감자를 잘게 썰어 우유와 향신료 그리고 치즈를 넣고 오븐에 구운 감자 그라탕의 일종이었다. [ 이 요리의 점수는... 38점! ] 그저 그런 점수. 활기라는 주제를 달콤한 산미가 도는 침전물로 표현한 게 특징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전체적인 맛은 오히려 저하됐다. 주제에 맞춰 억지로 끼워 맞춘 요리가 전형적으로 답습하는 좋지 않은 결과였다. ‘뭐 이 정도 수준인가?’ 투덜거리면서도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운 김성철은 코트 자락을 습관적으로 펄럭여보지만 브로치는 나타나지 않았다. 브로치는 베르텔기아가 책장 속에 넣어 품고 있었다. 손가락도 없는 주제에 어떻게 그걸 빼낼 수 있었는지는 김성철조차 고개를 갸우뚱 거릴 만큼 기이한 일이었지만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 괜히 이런 곳에서 주목이라도 받는 행동이라고 했다간 하루일정이 깡그리 망가지게 될 게 뻔하므로. “자, 이쯤 되면 만족하지 않았어?” 여느 때보다 경계심을 드러내며 베르텔기아가 말했다. “사실 아침 요리에 모든 걸 담기엔 부족함이 많지.” 아침, 점심, 저녁을 주제로 3번에 걸쳐 진행되는 요리대회에서 첫 예선인 아침 요리는 대중 몸 풀기에 불과하다. 모두들 대회의 백미가 모든 식사의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디너 요리가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저녁 경엔 종말교단 집회가 예정되어 있어 참석은 불가능하다. 김성철은 그럭저럭 아쉬운 대로 점심 예선까지라도 지켜볼 작정이었다. 오늘은 일반시민은 물론이고 8구역의 깡패들에게도 휴일이니 말이다. 게다가 김성철의 시선을 잡아 끄는 요리사도 몇 명 보였다. 다른 참가자와 비교해도 단연 압도적일 정도로 대기열이 긴 참가자가 몇 명 있었다. 김성철은 은근슬쩍 대기열에 서서 앞 사람에게 저 요리사가 누구냐고 물었다. “레스토랑 엘프의 식탁. 수석 주방장 파파르파입니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라그란제 최고의 요리사지요.” “파파르파...?!” 김성철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느긋하게 차례를 기다렸고 곧 문제의 요리사를 볼 수 있었다. 세련된 이목구비에 높은 요리사의 모자를 쓴 엘프 요리사였다. 그의 밑엔 10명이 넘는 조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몰려드는 군중들에게 나눠줄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저 놈이 파파르파인가?’ 브로치는 달고 있지 않아 겉보기로 실력을 가늠하긴 어렵다. 역시 직접 맛을 봐야 실력을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오랜 기다림 끝에 김성철의 차례가 되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샌드위치였다. 하지만 그 맛은 평범치 않았다. 맛을 보는 순간 김성철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이 맛은..?!’ [ 이 요리의 점수는... 75점! ] 김성철은 달라진 눈빛으로 거만하게 서 있는 파파르파를 노려봤다. ‘이 자식. 설마 고급 요리인인가...?!’ 김성철은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요정빵에 황금염소의 젖으로 만든 치즈, 그리고 어린 베히모스 멧돼지의 살을 염장해 만든 소시지를 얇게 썰어 곁들였군.” 그 말을 들은 파파르파는 김성철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냉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호오? 겉보기엔 꿀꿀이 죽이나 먹을 것 같은 분이 저의 요리의 레시피를 알아내다니. 흥미롭군요.” “솔직히 꽤 하는군.” 그것은 김성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다. 그런데 파파르파는 그런 김성철의 칭찬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파파르파가 그랬다. “꽤...? 꽤 한다고...?” 그는 차가운 눈으로 김성철을 노려보며 얼음장처럼 차디찬 음성으로 매섭게 물었다. “보아하니 요리사로 보이는데 이번 대회 참가는 하셨는지?”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김성철이 고개를 가로젓자 파파르파는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거 현명한 선택이네. 실력은 없고 딴지는 걸고 싶은 사람이라면 당신처럼 행동해야지. 계속 그렇게 해. 당신이 무명에 머물러 있는 동안 꽤 요리를 하는 내 가게는 더욱 번창할 테니까!” 파파르파는 주걱을 휘둘러 부하 요리사에게 김성철을 쫓아낼 걸 지시했다. ‘이 자식이...’ 김성철의 얼굴이 꿈틀거리는 그 순간 베르텔기아가 격렬하게 진동을 일으켜 김성철을 말렸다. 김성철은 멀리서 들려오는 파파르파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치욕스럽게 자리를 떠났다. “그러게 내가 뭘 했어? 오래 있지 말자고 했잖아?”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베르텔기아가 기다렸다는 듯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놔.” 김성철은 손바닥을 내밀며 짧게 말했다.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주머니 안에서 나와 책장 안에 숨겨 놓았던 황금 브로치를 그의 손바닥에 떨궜다. “이게 최선인 거 알지?”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을 응시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속으로 분하긴 했지만 맞는 말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브로치를 코트 안쪽 깊숙한 곳에 옷자락을 몇 겹이나 겹쳐 굳게 매달았다. 남은 시간 동안 김성철은 바쁘게 제도를 두루 돌아다니며 축제를 구경했다. 그 속에서 김성철은 아직 사람들이 아직 절망에 물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미 재앙으로 얼룩진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웃을 힘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저녁 경이 되었다. 김성철은 방안에서 준비를 갖추고 저택을 나설 채비를 했다. 그런데 방을 나서려고 하니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누군가 했더니 라르고다. 집안에선 언제나 평범한 작업복을 입고 있던 라르고였지만 지금 이 순간엔 한창 때의 처녀처럼 화려하게 꾸미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남아 있지만 한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미모의 흔적 또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라르고를 보는 순간 김성철이 주목한 건 그녀의 미모가 아니라 그녀의 전신에 흐르고 있는 불안정한 기류였다. 무언가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녀는 왼손을 발작적으로 떨며 말했다. “저기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한데.” 라르고가 망설이며 말했다. “나랑 같이 영년의 밤 행사에 참석해주면 안 될까? 혼자 가긴... 조금 그래서....” 잔뜩 메인 목소리. 김성철은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라르고에게 어떤 일이 있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겐 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 “미안하지만 오늘 나는 종말교단의 집회에 나가야 해서.” “아... 그랬었지.” 라르고의 눈동자에 역력한 실망의 빛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녀는 쓸쓸히 웃으며 문가를 떠났다. “미안. 주제 넘는 부탁을 해서.” “빨리 끝나면.” 김성철이 말했다. “바로 돌아오지. 그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다면 말이야.”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실망으로 얼룩진 라르고의 메마른 얼굴에 웃음기를 주기엔 충분했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조금은 활기를 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늦지는 마. 다른 녀석하고 갈 수도 있으니까!” “…….”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종말교단의 집회 장소로 가는 와중에 베르텔기아가 입을 열었다. “전부터 느꼈는데 당신, 의외로 좋은 사람이네?” “그렇게 생각하나?” “불쌍하다고는 하지만 못 된 아줌마한테까지 잘해주는 걸 보면 말이야. 나라면 거절했을 텐데. 지금까지 당한 게 있잖아? 들리는 소문도 썩 좋지 않고.” “축제를 즐기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일행이 있어서 나쁠 건 없지.” 그 말에 베르텔기아가 몸을 강하게 흔들며 되물었다. “내가 있잖아?” “으음...” 김성철은 희미한 신음소리를 냈다. 베르텔기아는 즉시 버럭하며 말했다. “그거... 대체 무슨 뜻이지?!” “아무것도 아니다.” 베르텔기아의 구박을 받으며 김성철은 어느덧 종말교단의 집회 장소에 도착했다. 라르고가 알려준 방법대로 문을 빠르게 두 번 두드리고 약간의 간격을 두고 한 차례 두드리자 걸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윽고 문이 열렸다. “아, 당신이 교단에 참가하고자 하는 새로운 교도인가?” 나이 지긋한 노파가 김성철을 반겼다. 김성철은 그 노파에게서 별 다른 힘을 느끼지 못했다. 노파는 김성철은 지하에 있는 회당으로 안내했다. 그 안엔 종말교단의 교도로 보이는 십여 명의 사람이 교단의 간부로 보이는 중년 사내의 말을 듣고 있었다. 김성철은 교도 사이에서 중년 사내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그는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종말의 때는 머지않았습니다. 수많은 증거들이 종말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가리키고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종말의 진행은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꽤 길게 이어진 연설 속에서 김성철은 그 이야기에 맥락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누구나 종말에 관한 주제로 한 번 읊어보라고 하면 할 수 있는 모호한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구절도 있었다. “재앙의 서는 거짓된 물건입니다. 그것은 날조되고 조작된 거짓된 재앙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습니다. 태초에 기록된 신의 말씀에서 재앙의 서에 대한 언급이 일언반구도 없다는 점에서 그 위서의 거짓됨을 짐작할 수가 있죠.” 이전에 은자의 탑에서 김성철은 종말교도들이 재앙의 서를 불태우러 온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이 주장은 그 행동의 원인으로 보였다. 하지만 목회자는 구체적인 설명을 결코 하지 않았다. 주장만 있을 뿐 근거는 다른 이야기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거 없다더니.’ 연설이 끝난 후 개개인의 교도에 대한 목회자의 대담시간이 주어졌다. 김성철은 마지막 차례에 배정됐다. 목회자 앞에 서자 그는 부하가 가지고온 서류를 보며 미소 지으며 말했다. “으음.. 발기부전에 시달리는 모양이군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종말 교단의 지니고 있는 지식만 있다면 당신은 원래의 건강함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전에 약간의 성의를 보여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목회자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돈을 달라는 것이다. 김성철은 주머니를 뒤적거려 가지고 있는 주화 중 가장 가치가 낮은 동전 몇 개를 꺼내 목회자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목회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성의가 부족하군요.” “지금 버는 중이라서. “성의가 부족하면 높은 등급의 모임에 참가하실 수 없습니다.” “높은 등급의 모임에 참여하면 뭐 좋은 거 있습니까?” 김성철의 물음에 목회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말교단의 체계에 대해 설명했다. 교단의 구조는 철저한 피라미드 구조가 교단의 신뢰를 얻으면 얻을수록 피라미드의 정점으로 갈 수 있는 구조라고 한다. 헌금이나 착실하게 교단집회에 참석하는 등, 교단의 신뢰를 살만한 행동을 하면 높은 등급의 모임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 당신이 참여한 지회는 모든 모임 중 가장 낮은 단계의 모임이라 보시면 됩니다.” 결론은 간단했다. 지금 단계에서 얻을 수 있는 모임은 한정적이라는 것. ‘이것도 시간을 필요로 하는 모양이군.’ 대량의 헌금은 의심을 살 수 있으므로 김성철은 내일을 기약하고 자리를 떠났다. 집회 장소를 나왔을 때 이미 해는 기울어진 뒤였다. 김성철은 라르고와의 약속을 떠올리고 서둘러 저택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김성철은 8구역에서 펼쳐지고 있는 행사를 볼 수 있었다. 궁색하나마 색을 넣은 화등을 건 수레가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지나가는 게 군중들 너머로 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환호성이 급작스럽게 커졌다. “가면의 성녀님이다!” “진짜야.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인데?” 김성철은 무시하고 갈까하다가 예상외로 뜨거운 반응에 잠시 군중들 사이로 파고 들었다. 거기서 김성철은 생각지도 않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사라사 제로. 종말교단의 중책으로 보이는 언데드 소녀가 수레 위에서 범상치 않은 사람들의 경호를 받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저 녀석이 왜 여기에 있지? 어마어마한 대담함이군. 제국병들이 두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을 텐데.’ 이유야 어찌됐든 그녀의 출현은 빈궁한 삶을 사는 8구역의 사람들에게 기적 같은 일로 받아들여졌다. 이곳 사람에게 그녀는 가면의 성녀라 추앙받고 있었다. 열광의 도가니 속에서 김성철은 라그란제 깊숙이 뿌리내린 종말교단의 진정한 교세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제국이 위협적으로 받아들일만 했다. 하지만 열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라사의 출현을 알아차린 제국의 병사들이 이곳을 향해 출동한 것이다. 사라사는 사람들에게 다음을 기약하며 어둠 속으로 모습을 숨겼다. 김성철에겐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그녀만 따라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종말교단에 대한 의문은 대부분 풀릴 것이다. 구질구질한 하급 지회에서 신뢰를 쌓는 짓을 하지 않아도 말이다. 하지만 사라사를 뒤쫓으려 할 때 하늘 위에서 울려퍼진 폭음 소리 하나가 김성철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라그란제의 하늘 위에 떠오른 허공궁궐 쪽에서 폭음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화려한 색채를 지닌 폭죽이 허공궁궐 위에서 터져 나왔다. 영년의 밤 최대 볼거리인 불꽃 축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라르고의 기대하던 얼굴이 문득 김성철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 59. 축제의 밤 (1) 8년 아니 9년째 멈춤 없이 달려왔다. 몇 가지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면 김성철은 오로지 자신의 목적에 따라 움직였고 그것을 잘 수행해냈다. 그런 김성철에게 이번 선택은 당혹스런 것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라르고 같은 평범한 자의 운명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깡패두목의 애첩인 라르고의 중요도는 종말교단의 비밀을 움켜 쥔 사라사의 중요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성철은 쉬이 판단내릴 수 없었다. 고뇌하는 이 순간에도 사라사는 멀어지고 있고 폭죽은 연이어 터지고 있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 멀리서 울려 퍼지는 외로운 고함 소리를 들으며 김성철은 발길을 돌렸다. 라르고를 선택한 것이다. 결정을 내리는 순간에 김성철은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자신이 설계하고 추구하던 세계 한 축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 또한 강하게 받았다. 그것은 그답지 않은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의문과 회의가 연이어 뇌리 속에서 떠올랐다. ‘나라는 놈도 많이 물러진 것인가.’ 묘한 패배감을 안고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김성철을 반긴 건 새 문지기였다. “잘 왔어! 에너자이저. 안 그래도 빨리 돌아오길 학수고대 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김치와 달리 말 수가 극단적으로 적은 새로운 문지기가 김성철에게 말을 먼저 거는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다. “무슨 일이지?” 김성철의 물음에 새 문지기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딘가 찝찝한 인상이 남은 음성으로 말했다. “일이 좀 있었어. 아주 개 같은 일이 말이야! 영년의 밤에 이게 무슨 개지랄인지 모르겠지만 늙은 여자가 발작을 일으켰지. 일단 안으로 들어가 봐.” 문지기는 서둘러 김성철에게 안뜰 쪽으로 가라고 손짓했다. 김성철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멋없는 정원을 따라 안뜰로 향했다. 그곳엔 몇 명의 조직원이 쪼그려 앉아 청소를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들의 문질러대는 천엔 붉은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더욱 증폭되는 걸 느끼며 김성철은 안뜰에 들어섰다. 저택의 정문 앞엔 앵글로색슨보이가 그답지 않게 넋이 빠진 얼굴로 계단에 아무렇게나 걸터 앉아 연초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김성철을 보더니 한숨과 함께 연기를 내뿜고는 중저음의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야 왔군. 어이. 에너자이저. 당장 안으로 들어가. 그리고 처리해.”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조직원 한 명이 김성철을 안내했다. “이쪽으로.” 복도를 따라 걸으며 김성철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이에 조직원은 침통한 어조로 대답했다. “두목의 애첩이 죽었어. 얄궂게 됐지.” “…누가 죽인 거지?” 이미 답은 예상하고 있었다. “전 애첩인 그 늙은 여자가.” “…….” “시비를 먼저 건 건 크리스티나 쪽이야. 모처럼 라르고가 꽃단장을 한 걸 보고 생각 없이 입을 놀린 거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죽이는 건 아니었어.” 김성철과 조직원은 주방에 들어섰다. 김성철의 눈앞에 지난 두 달 간의 풍경에 그린 듯 스치고 지나갔다. 별 볼 일 없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익숙하기도 했던 일상이었다. “자, 그럼 부탁하지.” 이제 주방엔 김성철 홀로 남았다. 김성철은 주방 구석에 검게 아가리를 벌린 사육장 입구를 노려보았다. 주방 한 구석엔 김성철이 대신 손질하던 양파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김성철은 통로를 향해 걸어갔다. 이윽고 사육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성철을 본 탐탐은 우리를 맹렬히 흔들어 내며 기괴한 소리를 내질렀다. “끄.. 끄르르르!” 김성철은 탐탐 따위엔 터럭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대신 우리 앞에 꽁꽁 묶인 채 주저앉은 라르고를 응시했다. “왔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두들겨 맞아 있었지만 라르고는 놀랍게도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손바닥 안에 답이 있었다. 붉은 결정, 검투사의 혼을 복용한 것이다. 그녀는 김성철이 다가오자 스스로 비틀거리며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문만 열어 줘. 어차피 내가 자초한 일이니. 당신한테 더러운 기억을 안겨다 줄 순 없지. 그나저나 미안하게 됐어. 같이 축제를 구경하기로 해놓고는 이렇게 민폐를 끼치다니. 역시 난 최악의 여자야.” 라르고는 쓸쓸히 웃으며 우리에 가까이 다가갔다. 거대한 탐탐이 눈앞에서 바퀴 같은 눈알을 번득이며 이를 드러내도 그녀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뭐하는 거야? 사육사. 문을 열어줘. 빨리 끝내야 영년의 밤 행사를 볼 수 있는 거 아니었어? 허공궁궐에서 터뜨린다는 불꽃축제 말이야.” 김성철이 움직이지 않자 그녀는 스스로 사육사 통로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탐탐이 침을 흘리며 우리를 마구 흔들어댔다. 그 광경을 본 김성철은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되는 걸 느꼈다. 분노는 아니다. 연민도 아니다. 둘을 섞어놓은 것 같은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었다. 라르고는 사육사용 통로에 서서 갑자기 노래를 불렀다. 언제부터인가 주방에서 흥얼거리던 자장가였다. 그토록 듣기 싫은 노래였지만 지금 이 순간엔 어떤 노래보다 처량한 운율로 공간을 뒤흔들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사육사용 통로에 들어서자마자 그 위에 탐탐이 설치했던 바위가 그녀의 머리 위를 향해 떨어져 내린 것이다. 탐탐이 사육사를 죽이기 위해 자주 써먹던 방법 중 하나다.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김성철도 순간적으로 반응할 수 없었다. 뒤늦게 글레어를 시전해 바위가 라르고를 찌부러트리기 전에 박살내긴 했지만 파편 일부분이 라르고의 머리와 어깨 위에 떨어졌다. 라르고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어졌다. “어이.” 김성철은 라르고에게 달려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치명타다. 즉사는 면했지만 등뼈와 목뼈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우끼끼!” 탐탐이 이를 드러내며 기쁜 소리를 냈다. 김성철이 고개를 돌려 탐탐을 노려봤다. 아마도 그가 처음으로 마수에게 보인 관심이었을 것이다. 그 의미가 뭔지 알 수 없는 탐탐은 낡은 창대를 작대기 삼아 라르고를 향해 쑤셨다. 라르고를 작대기로 긁어 우리 안으로 가져가기 위해서다. “우끼!” 창대가 창살 틈으로 밀고 들어온 순간이었다. 김성철의 손이 창대를 덥썩 잡았다. “우끼끼!” 탐탐이 기뻐하며 창대를 잡아당겼다.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 눈에 가시 같은 사육사를 잡을 기회를. 하지만 창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바위 위에 박아 넣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고 창대는 위태롭게 휘청거리다가 우지끈 하고 부러졌다. 뒤로 나자빠진 건 탐탐이었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고는 발로 찼다. 탐탐의 완력으로 꿈쩍도 하지 않던 쇠창살이 단 일격에 박살이 나 나뒹굴어졌다. 그걸 본 탐탐은 깨달았다. 자신을 둘러 싼 우리가 사육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었음을. 하지만 너무나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김성철은 맨 몸으로 자신에게 뚜벅뚜벅 걸어왔다. 탐탐은 포효와 함께 가슴을 두드리면서 김성철은 위협해보지만 그런 게 통할 리가 만무하다. 김성철은 탐탐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탐탐은 참지 못하고 육중한 두 주먹을 자신의 허리에도 못 미치는 작은 인간을 향해 내리쳤다. 탐탐의 주먹은 그러나 인간의 작은 손에 간단히 막혔다. 다음 순간 탐탐이 허공 위로 번쩍 들렸다. “우끼..?” 퍽! 김성철은 그대로 탐탐을 지면에 내다꽂았다.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뒤이어 탐탐의 비명이 사육장 안을 가득 매웠다. 김성철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제 두려움에 떠는 탐탐에게 다가가 주먹을 휘둘렀다. 힘조절을 한 덕에 일격에 죽진 않았다. 대신 김성철은 탐탐의 모든 걸 차례로 부셔놓았다. 양팔과 다리, 무릎과 어깨 그리고 내장. 마지막에 부셔버린 것은 턱이었다. 탐탐은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지렁이처럼 바닥에 엎어져 꿈틀거렸다. 김성철은 바퀴만한 탐탐의 눈앞에 섰다. 김성철이 노려보자 탐탐은 눈을 질끈 감으며 거대한 육체를 부르르 떨었다. 김성철은 죽어가는 탐탐을 뒤로 하고 라르고를 향해 걸어갔다. 영혼 창고에서 갖가지 포션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 같이 억만금의 가치를 지닌 귀중한 것이다. 정성이 닿아서일까. 라르고가 정신을 차리고 흐릿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나 아직 살아 있는 거야?” “알 거 없다.” 김성철은 라르고를 들쳐 업고 앞으로 걸어갔다. 복도를 따라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을 주방을 지나 저택의 입구로 걸어갔다. 수많은 조직원들이 김성철을 발견하고 앞을 막았다. “뭐하는 거냐? 사육사.” “아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던데 대체 무슨 소리였지?” 조직원들의 물음에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자신을 상징하는 무기를 조용히 꺼냈다. “미안한데, 지금 기분이 안 좋아서 말이야.” 팔 가라즈를 본 조직원들은 잊고 있던 전설적인 인물을 떠올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김성철은 방해받지 않고 저택을 빠져나왔다. 안뜰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앵글로색슨보이. 조직의 두목이다. 그는 김성철을 보고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너.. 넌 대체..?” “비켜라.” 한때 그의 밑에서 잡일이나 하던 김성철은 이제는 진중한 목소리로 그에게 명을 내리고 있다. 앵글로색슨보이는 흉포한 행동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사실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섰다. 김성철은 앵글로색슨보이 앞에서 멈췄다. “이 여자는 너의 아이를 가졌다. 그리고 그 아이를 필사적으로 낳으려고 했지.” “…….” 앵글로색슨보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 김성철을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지나다니던 문을 통과해 앞으로 걸어갔다. 문지기는 김성철을 두려운 눈으로 보며 길을 열어줬다. 문을 통과하자 폭음이 들려왔다. 김성철은 눈가에 빛이 어른거리는 걸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제도의 하늘 위엔 빛으로 만든 형형색색의 꽃이 만발해 있었다. “어이 저길 봐. 멋지지 않나?” 기대했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라르고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일단은 몸을 쉬게 해야겠군.’ 김성철은 대로변으로 걸어갔다. 익숙한 길을 따라 눈여겨보던 숙소를 찾았다. 여인숙 몇 개가 눈에 띄었다. 김성철은 라르고를 들쳐 업고 여인숙 하나를 찾아가 방을 빌리고 라르고를 뉘였다. 라르고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상처는 어느 정도 치료했지만 마약의 몽롱한 기운과 충격으로 인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자 바깥에서 느닷없는 비명이 들려왔다. “사.. 사람 살려! 괴물이다! 괴물이 나타났다!” 다급하게 뛰는 소리도 함께 울려 퍼졌다. 뒤이어 터진 축제의 폭음이 그 소리를 묻어버렸지만 먼 곳에서 또 다른 비명이 터져 나왔다. 김성철은 창문을 열고 아래를 살폈다. 라그란제의 병사들이다. 수도를 지켜야 할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부리나케 달아나고 있었다. “지원을 요청해라! 우리만으로 막을 수가 없다!” 일방적인 패주. 라그란제에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김성철은 고른 숨을 쉬고 있는 라르고를 응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쉬고 있어.” 그리고 창문을 통해 아래로 뛰어내렸다. 김성철이 사라진 후 홀로 남은 라르고는 눈을 떴다. 그녀는 손을 들어 장갑을 벗고 자신의 손의 상태를 확인했다. 붉은 반점이 끔찍하게 퍼져 있었다. 그녀는 뱃속에서 움직이는 아이의 고동을 느끼며 두 눈을 감았다. 콧노래로 흥얼거리는 자장가의 곡조가 초라한 여인숙의 방에서 울려 퍼졌다. * 대로변에 선 김성철은 익숙한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바람결에 실린 죽음의 냄새가 코끝에 스쳤고 거리 저편에서 뿌연 안개가 해무처럼 거리를 뒤덮어 오는 것 또한 볼 수 있었다. ‘이것은...’ 김성철은 기시감을 느끼며 잊고 있단 한 단어를 떠올렸다. ‘사령술사인가?’ 재앙의 추종자들이 위세를 떨치던 때였다. 만만한 마법사들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죽음을 다루는 자. 사령술사였다. 그들의 전투력은 평이한 수준이지만 그들의 무서움은 본신의 전투력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 숨어 죽은 시체를 불러 일으켜 그들의 적과 적의 도시에 군사적인 위협을 가한다. 제국대원수 김성철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일인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있다면 네크로맨서. 사령술사가 유일할 것이라고. 김성철은 거리를 뒤덮어오는 안개 속에서 꿈틀거리는 망자들의 유해를 지켜보며 과거 자신이 한 말을 입속으로 되뇌었다. ======================================= 59. 축제의 밤 (2) 녹슨 검과 방패, 몽둥이와 창을 든 해골의 군세가 거리를 뒤덮어나가고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숫자만 수백 마리. 김성철은 재앙의 추종자 섬멸전의 한 광경을 떠올렸다. ‘평범한 사령술사는 아니군.’ 김성철은 라르고가 머물고 있는 여인숙의 입구를 마차를 끌어다 막아버린 후 언데드의 군세를 향해 걸어갔다. 오랜만에 마편 카산드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약한 적 다수를 상대로 편리한 그 도구는 무자비하게 해골의 군세를 집어삼켰다. 수백 마리의 해골 군세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김성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허공궁궐에선 화려한 불꽃이 터지며 보는 이의 눈을 현혹하고 있었다. 쉬지 않고 울려 퍼지는 폭음의 잔향 속에서 김성철은 희미한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김성철은 영혼석에게 명했다. ‘플라이.’ 김성철의 몸이 하늘 위로 가파르게 치솟아 올랐다. 8구역 상공에 자리 잡은 방위함대의 공선들이 곳곳에 있었지만 김성철은 개의치 않았다. 하늘 위에서 그는 볼 수 있었다. 끝도 없이 이어진 죽음의 군단의 행렬을. 수천 아니 수만 마리에 달하는 해골들이 8구역 대로를 뒤덮고 7구역으로 통하는 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대체 이 많은 수의 시체는 어디서 구한 것이지?’ 한 군데 짐작이 가는 곳이 있다. 김성철은 즉시 하늘을 비행해 록산느 패거리의 본거지로 향했다. 김성철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카타콤의 입구에서 무수한 해골의 군단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팔 가라즈가 모습을 드러냈다. 김성철은 앞을 가로 막는 해골들을 모조리 박살내며 길을 뚫었다. 발 하나 디딜 틈 없이 밀집 된 상태로 뭉친 그것들은 군세라기보다는 벽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벽도 김성철을 버텨낼 수 없다. 그는 해골의 벽을 허물어내고 카타콤 깊숙한 곳에 진입했다. 이윽고 그는 낯익은 인물의 죽음을 볼 수 있었다. 록산느의 시체다. 그녀는 이루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형태로 난자당해 죽어 있었다. 그녀의 잘린 목은 옆에 나란히 죽은 에어푸르트의 몸통에 붙어 있었다. 놀라운 것은 아직 그녀가 죽지 않았다는 것. 에어푸르트의 시신 위에 꿰맨 그녀의 목이 바람 새는 기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끄.. 끄으... 주... 죽여 줘...” 처참하게 죽이고 시체를 잔인하게 능욕한 것도 모자라 언데드로 만들어 죽은 이후에도 고통을 안겨다 줬다. 김성철은 그 독랄한 방법에 치를 떨었다. 사령술사 중에 갖은 미친 놈이 많다지만 이렇게까지 잔인한 방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놈들은 본 적이 없었다. ‘어떤 놈들이 이런 짓을.’ 김성철은 록산느에게 예를 표하고 그녀의 머리를 박살냈다. 목을 잃은 채 버둥거리는 에어푸르트의 시신에게도 안식을 주었다. 에어푸르트의 목은 머지않은 곳에 발견됐다. 검게 빛나는 보옥 옆에서 눈을 부릅뜬 채 창살 위에 꿰여 있었다. 김성철은 보옥으로 다가갔다. 그는 곧 그 보옥의 정체를 알아냈다. 원혼의 구슬. 강력한 사령술사가 죽음의 정수를 담는 그릇으로 쓰는 것으로 사령술사는 그 구슬을 이용해 대규모의 시체를 일으키는데 사용한다. 김성철이 처치했던 사령술사들은 모두 이 원혼의 구슬을 이용해 공동묘지 등에서 거대한 시체의 대군을 만들어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구슬의 마력에 이끌린 망자들이 구천에서 돌아와 세상의 질서를 거스르고 있었다. 김성철은 구슬을 깨뜨리고 깨어나려는 해골들을 산산조각 냈다. ‘어떤 놈이 이런 짓을 하는 것이지?’ 누가 됐든 김성철은 마음속으로 정했다.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그 전에 적을 찾아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체를 되살려내는 네크로맨서를 말이다. *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 일로를 걷는 비상사태에 아르큐부스는 현기증을 느꼈다. 8구역에서 지명 수배된 사라사 제로의 위치가 확인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아르큐부스는 또 다른 승진과 총애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가면의 성녀라 불리는 종말교단의 중책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황제의 우환인 종말교단의 교세를 크게 줄일 수 있기에. 하지만 호재는 예상치 못한 괴인의 출현으로 악몽으로 뒤 바뀌었다. 사라사 제로를 잡기 위해 급히 파견한 정예의 비룡기사들 앞에 자신을 안겔로 룩스라고 칭하는 괴한이 나타났고 그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버린 것이다. 그 솜씨를 본 생존자는 말했다. 그 괴인의 정체는 제도를 공포로 몰아넣은 참수귀라고. 철썩 같이 믿는 정예를 순식간에 잃어버린 아르큐부스는 즉시 증원을 내려 보냈지만 그의 증원군 앞에 나타난 건 수천 마리에 달하는 해골의 군세였다. 곳곳에 설치된 맨홀 뚜껑을 열고 지하에서 기어 나오는 해골의 군세를 본 군중들은 마치 그 광경이 세계의 종말에서 봄직한 광경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황제가 준비한 깜짝 쇼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골들이 무방비의 사람들을 덮치자 주변을 아수라장으로 화했다. 허공 궁귈에선 여전히 폭죽이 터지고 있지만 8구역은 생지옥으로 화했다. 문제는 이 사태가 그걸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 해골 군세의 주공은 8구역이 아니라 지하였다. 제국 하수도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수를 셀 수도 없을 정도의 해골들이 하수도를 따라 다른 구역으로 침입 중이라고 한다. 속속 긴급하게 날아드는 급보에 의하면 이미 해골 군세는 7구역을 지나쳐 6구역까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아르큐부스는 제국 하수도 관리인에게 반드시 7구역 선에서 막아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자신의 은밀한 병력은 4구역에 집중시키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빌어먹을! 그 음침한 개자식이!” 제국 하수도 관리인은 그의 밑이 아니다. 아퀴로아의 심복으로 알려진 그 수수께끼의 사내는 제도 방위 사령관인 아르큐부스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아르큐부스의 분노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지면을 내려다보다가 이윽고 옆에 나란히 선 젊은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욕설을 섞어 소리쳤다. “작은 소요라며? 응? 작은 소요라며!” 비판의 화살은 고스란히 아무개에게 돌아갔다. 그녀로선 할 말이 없었다. 경고를 하긴 했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언제나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던 그녀의 눈동자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짙은 동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럴 리가. 분명 최후로 향하는 기록에는 이런 사태는 일부 반란분자의 소규모 소요로 끝났다고 나타나 있는데.’ 이수진이 과거로 회귀하면서 가지고 온 영혼각인은 소실 뿐만이 아니다. 미래에서 왔다는 장점을 십분 발휘하기 위한 미래의 기록도 함께 들고 왔다. 그것이 바로 영혼각인 최후로 향하는 기록. 등급은 희귀 등급에 불과하지만 그 안엔 아무개가 회귀한 시점부터 재앙의 도래에 이르기까지 기록된 모든 역사가 담겨 있다. 굵직한 사실만을 기록한 무미건조한 연대기에서부터 시장 한 구석에서 좌판을 깔고 장사를 하던 평범한 상인의 부기장까지. 이수진이 권력자 사이에서 눈에 띌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미래의 예측뿐만 아니라 물가의 변동, 유명인의 죽음 등의 지엽적인 문제까지 두루 미리 내다보는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영역에 관해서는 예측이 틀리는 일도 종종 있었지만 그녀가 가지고 온 기록 전체를 부정할 수준은 아니었고 시간을 주무르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역사라는 것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합창과 같은 것이기에 일부의 불협화음이 있다 하더라도 정해진 가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법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이수진에게도 당혹스런 일이었다. 이번 사태에 관해 최후로 향하는 기록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 악마왕이 죽고 거신이 나타나 대륙의 절반을 짓밟은 해의 마지막 날 라그란제엔 성대한 축제가 벌어진다. 동부에서 온 자객들이 축제에 찬물을 끼얹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축제는 계속된다. ] 그다지 중요한 사건이 아니므로 이를 언급한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제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은 그녀가 가지고 온 기록 전체를 부정하고도 남을 정도의 규모로 커져가고 있다. ‘이대로는 이 인간의 신뢰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권력자들의 불신을 초래하게 돼.’ 승승장구하던 그녀가 맞닥뜨린 최초의 위기. “어떻게 책임 질 거냐고?” 아르큐부스가 어린애처럼 징징거렸다. 아무개는 백골로 뒤덮어가는 거리를 노려봤다. 이 거리 어딘가에 시체를 일으켜 세우는 원흉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 원흉을 지금이라도 죽일 수 있다면 축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개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아르큐부수를 노려보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사령술사의 목을 치고 올 테니까.”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는 공선 아래로 몸을 날렸다. 환영과 같은 잔상들이 머리 위에서 빛을 발하는 폭죽의 빛을 받아 점멸했다 사라지더니 이윽고 모든 것은 어둠 속에 묻혀 버렸다. * 8구역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종루 위에 일남일녀가 서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최대의 축제가 벌어지던 라그란제에 찬물을 끼얹은 장본인. 동부의 재앙으로부터 비롯된 이들은 아래에 벌어지는 참극 따위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아깝네. 그 빌어먹을 언데드 계집의 목을 쳤어야 했는데. 방해꾼들만 가로막지 않았어도.” 안겔로 룩스는 피묻은 검을 헝겊으로 닦으며 분한 듯이 말했다. 그의 옆엔 안경을 낀 젊은 여자 마법사가 난간 밖에 다리를 내놓고 앉아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는 은은한 마법의 기운이 아래를 향해 뻗어 내려가고 있었다. 종탑 아래 공터에 엎어져 있던 시체들은 그 마법의 기운이 닿자 새로운 그러자 부정한 생명력을 얻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 그래도 저것들은 쓸 만하겠지? 나름 초인급의 전사들이니 말이야.” 안겔로 룩스가 그것들을 보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 모두 목이 달아난 그 시체들은 사라사 제로를 지키던 호위병들이었다. 실력이 출중하지 않았다면 사라사 제로의 목숨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리라. “아직도 만족 못했어?” 시체를 일으킨 장본인인 여자 마법사는 별 감정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가 일으킨 시체들에 의해 대량학살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그녀는 어떤 동요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태연하기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검은 명부는 재능은 많지만 위험하기 짝이 없는 어린 천재 사령술사에 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자유도시 파비언 출신인 어린 사령술사 피비 캔버스는 겉으로 보면 평범한 여자아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는 그녀의 천부적인 사령술사에 관한 재능에 감탄을 토할 것이다. 하지만 경계하라. 겉보기에 평범한 이 여자의 마음속에 인간의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 사령술사는 필연적으로 그 자질에 있어서 타인의 죽음과 시체에 대해 무감각해질 것을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피비 캔버스는 최고 수준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한 가지 감각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바로 타인의 마음에 공감하는 능력. 김성철이 있던 세상에서 피비 캔버스 같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 있다. 사이코패스. 그녀는 종탑 아래 내려와 목 없는 시체들을 지휘하며 검은 명부에 기록된 또 다른 광인 안겔로 룩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언제까지 해야 만족할 거야?” 그녀의 물음에 안겔로 룩스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이 빌어먹을 축제가 끝날 때까지.” 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제도 위를 굽어보는 허공 궁궐에선 계속해서 화려한 폭죽이 터지며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같은 시각 김성철은 무수한 해골의 군세를 박살내며 사령술사를 찾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 어디에 있는 거지?’ 수많은 사령술사를 상대해봤지만 이번 녀석은 특별하다.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보통 이런 미친 짓을 대담하게 벌이는 놈이라면 어떻게든 관심을 유도하고자 은근슬쩍 흔적을 남기길 마련인데 이번 사령술사는 그런 기색이 일절 없었다. 원혼의 구슬에 의해 일으켜 세워진 해골의 군세는 오직 망자가 산 자에 대해 가지는 원념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원혼 이외엔 어떤 감정도 없기에 전투력은 형편없고 그 움직임 또한 인형과 별 다를 바 없을뿐더러 지속시간도 30분 남짓에 불과할 정도로 짧지만 가공할 숫자로 부족함 점을 메꾸고 있었다. 게다가 더욱 치명적인 것은 해골의 군세를 일부러 사람이 많이 사는 주거구로 돌리고 있다는 걸. 그렇기에 짧은 지속 시간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냥 내버려두면 필연적으로 피해가 발생하게 되니까. 김성철은 해골들을 박살내며 사령술사가 있음직한 장소를 두루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김성철은 앞에서 누군가가 싸우고 있는 장면을 발견했다. 단순하지만 정갈한 의복을 걸친 여전사다. 두르고 있는 망토엔 제국의 고위직을 상징하는 표식이 걸려 있었는데 그녀는 아직 피를 흘리는 신선한 시체와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시체의 움직임이 범상치 않다. 다른 해골과 달리 사령술사가 신경을 써서 일으켜세운 것이 분명하리라. ‘이 주변에 사령술사가 있는 건가?’ 평소라면 마주치지 않을 상대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김성철은 그녀를 돕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크럼부이를 꺼내 좀비들을 일도양단했다. 김성철의 개입으로 현장은 순식간에 정리됐다. 여전사는 싸움이 끝나자 두건을 벗고 김성철에게 예를 표했다. “뒤늦게나마 아르큐부스의 마음이 변한 모양이네. 아무튼 고마워. 사령술사는 이 앞에 있어.” 그녀는 김성철은 아르큐부스가 보낸 지원군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여전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 세계의 적..?!” 그 여전사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아무개였다. 그녀는 온 몸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놀라기는 김성철도 피차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감정을 추스리고 당면한 문제에 관해 생각했다. “사령술사의 위치를 아는 모양이군.” 지근거리다. 아무개는 도망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날 도와라.” 김성철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 59. 축제의 밤 (3) 귀찮은 여자다. 알려진 인간 중에서 김성철에게 사소하나마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아마도 유일한 존재일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여기서 이수진을 죽여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김성철은 이수진을 죽일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수많은 적들이 김성철에게 말했다. 김성철 또한 힘에 삼켜져 재앙 그 자체가 될 것이라는 말을. 그리고 보았다. 자신과 같은 이름을 지닌 검은 거인을. 그 검은 해골 밑에 깔려 있던 무수한 백골을. ‘난 타락하지 않는다.’ 일종의 오기일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을 가리켜 세상을 멸망시킬 재앙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여자에게 그녀가 본 미래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사령술사는 어디에 있지?” 김성철이 경직된 아무개에게 다시 물었다. 아무개는 여전히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눈치였다. ‘왜.. 왜.. 이 남자가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최후로 향하는 기록에서 이 남자는 라그란제에 나타난 일이 없는데...’ 더욱 아무개를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김성철의 질문 그 자체였다. 이미 절반 정도 마비된 그녀의 두뇌는 성급한 결론을 떠올렸다. ‘설마.. 이 사람. 도시를 파멸로 몰아넣으려는 사령술사와 한 패?!’ 김성철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아무개를 향해 크럼부이를 들이댔다. “무고한 희생자가 늘어나는 걸 원하는 건가?” 김성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크럼부이도 입을 열었다. “이 여자, 늑대를 만난 양처럼 떠는군!” 아무개의 어깨가 움찔 거렸다. 부릅뜬 눈에 또 다른 충격이 지나갔다. ‘설마 이 사람. 도시를 파괴하려는 게 아니라...’ 그제야 아무개는 김성철의 의도가 뭔지 알아차렸다. 세계의 적이라 불리는 사내는 자신과 거의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여기에 나타났다는 걸. 하지만 아무개로서는 그건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녀가 아는 세계의 적은 세상을 멸망시키고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절대 악이다. 절대 악이 왜 사람을 구한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떨림이 멈췄다. 정신이 맑아졌다. 아무개는 김성철을 향해 허리를 펴며 당당히 말했다. “무슨 꿍꿍이지? 죽이려면 죽여. 개수작 부리지 말고!” “착각하는군. 회귀자.” 김성철이 말했다. “너 따윈 내 안중에도 없다.” “…….” 김성철이 내뿜는 서늘한 기백에 눌린 나머지 이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멀리서 거대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방향으로 미루어보아 6구역 쪽이다. 그 묵직한 파공음과 거기 섞인 희미한 아우성은 이수진으로 하여금 잊고 있던 사실 몇 가지를 환기시켜주었다. ‘사태가 점점 커지고 있어!’ 여기서 김성철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모를까 살아 있다고 가정했을 때 지금 그녀는 여기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는 몸이다. 한시 바삐 사령술사를 죽이고 이 동란을 끝내야 한다. 축제의 불꽃이 멈추기 전까지 말이다. 만약 축제가 멈춘다면 그녀는 지금까지 쌓은 모든 걸 잃어버린다. 지금까지의 명성은 물론이고 성장의 기반까지. 어쩌면 이 시대의 기득권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걸 버리고 과거로 회귀한 목적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한 번 보았던 끔찍한 미래를 반복해서 보는 것 외엔 말이다. 그것만큼은 사양이다. 아무개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결심을 굳혔다. “날 따라와.” 마지못한 음성이었지만 행동은 민첩했다. 김성철은 기척을 거의 느낄 수 없는 아무개를 눈으로 좇으며 어두운 밤거리를 빠르게 질주했다. 물론 김성철은 이 다급한 순간에도 신기술을 활용하는 걸 잊지 않았다. ‘2번 영혼석, 페어리 라이트.’ 전에 구입한 발광마법을 시전하자 김성철 주위를 환하게 비추는 구체가 나타나 그를 따라다녔다. 새로운 마법의 성능에 김성철은 만족했다. ‘나쁘지 않군. 이거. 요긴하겠어.’ 아무개는 갑작스레 나타난 불빛에 뒤를 힐끗 쳐다 보았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빠르게 앞을 해쳐나갔다. “인간제국에서 사령술사를 찾는 건 너뿐인가?” 김성철이 빠르게 앞으로 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아마도.” 아무개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지금 현재 인간제국에서 제도를 어지럽히는 사령술사를 찾아다니는 것은 아무개 한 명 뿐이다. 상공엔 아르큐부스가 지휘하는 수도 방위 함대가 자리 잡고 있지만 아르큐부스는 그저 발만 동동 구를 뿐 함대를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축제가 멈출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실책으로 인해.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축제를 멈추는 한이 있더라도 행동에 나섰겠지만 상부의 눈치와 체면이라는 이상한 논리에 지배되는 세계에 순응한 아르큐부스로선 당장에 시민에게 가해질 피해보단 황제의 권위가 달린 축제의 중단여부가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아마도 그는 최소한 축제가 끝난 뒤에야 함대를 움직일 것이다. 아르큐부스 뿐만이 아니다. 그것이 지금 세상을 움직이는 자들의 평균적인 사고방식이다. “저기서 사악한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져.” 전장에서 암살자의 주된 임무 중 하나는 귀찮은 마법사의 암살이다. 암살교단에서 추적술을 전수받은 아무개는 빠르고 정확하게 사령술사의 위치를 발견해냈다. 사령술사는 8구역이 내려다보이는 종탑 위에서 시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종탑 주변엔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는 언데드들이 주변을 배회하며 사령술사를 지키고 있었고 사령술사 옆엔 날렵한 검사 한 명이 옆을 지키고 있었다. ‘역시 저것들이었군.’ 김성철은 한 눈에 사령술사 패거리의 정체를 파악했다. 카타콤에서 마주친 적이 있던 수수께끼의 2인조. 그들이 결국 사단을 일으키고 만 것이다. “저 하프엘프. 날 들고 다닐 때의 너보다 강해 보이는데?” 크럼부이가 안겔로 룩스를 보고 말했다. 수천 년을 살아온 마검 답게 크럼부이는 검사의 자질을 한 눈에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김성철도 그 점에 동의했다. “확실히 상당한 강자군.” 하지만 더 이상 김성철의 상대는 아니다. 그 점을 잘 아는 아무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움직인들 달라지는 건 아무도 없으니까. 바램이 있다면 이 사내가 당면한 위협을 처리해주는 것. 물론 여기엔 도저히 가슴에 담아 둘 수만은 없는 의문이 내포되어 있다. 그녀는 김성철이 나서지 전에 질문을 던졌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그녀가 있던 미래에서 김성철이란 재앙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그를 신의 도구라 불렀다. 신을 대신해 세상을 멸하는 도구로 말이다. 일곱 재앙의 무기를 휘두르는 김성철은 그에 대적하는 모든 인간들을 멸하고 알려진 모든 왕국을 짓밟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추적하며 사냥했다. 흔히 신은 불길과 역병으로 세상을 벌한다고 알려졌지만 신의 도구는 대륙 각지를 돌며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이를 직접 심판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에게선 도망칠 순 있지만 숨을 순 없다. 하지만 도망 또한 영원히 칠 수 없으리라. 신의 도구가 지나간 땅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죽음의 땅으로 화해버리니까. 그런 생생한 기억을 간직한 아무개로선 김성철이 사람들을 도우려고 하는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개가 다시 물었다. “세계의 적인 당신이... 세상을 멸할 당신이 왜 사람들을 돕는 거지?” 아무개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엔 감출 수 없는 흥분이 숨겨져 있었다. 이에 김성철은 아무개를 응시하며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릴 때 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다. 아무도 우리를 돕지 않았지. 졸지에 고아가 된 나는 난 생각했다. 난 저런 쓰레기들처럼은 되지 않겠다고.” “설마 얄팍한 정의감 때문에 이런 짓을 한다고 말하는 거야?” 아무개의 목소리에 깃든 차분함은 흥분의 열기에 녹아 사라지고 없었다.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피식 웃었다. “정의?” “왜 웃는 거지?” “그런 건 상상조차 해본 적도 없다” “그러면 자기만족?” 아무개의 물음에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밥맛이 떨어지거든.” “밥맛...?” 아무개가 터무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묻자 김성철은 고개를 들어 앞으로 보았다. 종탑 위에 있던 사령술사 패거리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짧은 대화를 듣고 위치를 알아차린 것이다. “손님이 온 거 같은데?” 안겔로 룩스가 목을 우두둑 꺾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떠날 때가 왔다는 신호가 아닐까?” 피비 캔버스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시체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올리자 종탑 아래 서성이던 시체들이 고개를 들어 김성철 쪽을 노려봤다. 사라사 제로를 지키던 종말교단의 전사들은 이제 목이 뒤바뀐 기괴한 몰골의 언데드가 되어 사령술사에게 부림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아무개는 방금 전까지 살아 있던 시체들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위험해!’ 그녀 혼자선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옆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사내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 김성철은 크럼부이를 든 채 앞으로 나섰다. “언데드의 식은 피는 썩 좋아하지 않는데.” 크럼부이가 툴툴거렸다. “호오? 저 녀석.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거대한 대검을 든 김성철이 슬며시 다가오는 걸 보고 안겔로 룩스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인부. 카타콤으로 들어올 때.” 피비 캔버스는 정확하게 김성철과 언제 만났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운 하난 좋은 놈이군. 우리가 카타콤 패거리를 쓸어버렸을 때 자리에 없는 걸로 보면. 하지만 제 발로 죽을 자리로 찾아오다니 머리가 좋은 놈은 아닌 모양이야.” “그럼 벌을 줘야지.” 피비 캔버스가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그녀가 조종하는 열두 구의 시체가 일제히 무기를 빼어들고 김성철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어딘가 엉성하지만 빈틈없는 솜씨. 생전의 전투력을 고스란히 기억한 듯한 몸놀림이었다. 평범한 전사도 아니고 초인급의 전사 열두 명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면 어떤 전사도 가볍게 상대할 순 없을 것이다. 열두 구의 시체가 제대로 붙지 않은 잘린 목과 목의 단면에서 기괴한 휘파람 소리를 내며 김성철에게 달려들었다. “죽이지는 마.” 공격 직전에 안겔로 룩스가 말했다. “시간도 죽일 겸 장난 좀 치자고.” 그 소름끼치는 말에 피비 캔버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짧게 대답했다. “응.” 하지만 그들의 방심은 5초도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열두 구에 달하는 언데드 전사들이 단 한 순간에 무참하게 썰리고 만 것이다. 하수도에서 잡일이나 하던 인부의 검에 말이다. 그 장면을 본 안겔로 룩스는 검을 뽑으며 중얼거렸다. “피비. 저 자식 강해.” “설마 황제 본인?” “황제는 아닐 거야. 황제는 저렇게 없어보이게 생기지 않았으니까.” 김성철의 충격적인 등장은 동부에서 온 2인조를 긴장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러나 이 또한 이미 예상한 바다. 안겔로 룩스는 피비 캔버스의 앞을 막아서며 짤막하게 말했다. “그걸 쓰자.” “응.” 피비 캔버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영혼 창고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평범한 상자는 아니었다. 김성철은 진실의 눈으로 그 상자 자체가 갖은 보존 마법과 냉각마법, 그리고 좀처럼 보기 힘든 물속성 마법까지 걸려 있는 걸 꿰뚫어 보았다. ‘뭐지 저 상자는?’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상자 안엔 눈을 감은 사내의 잘린 목이 들어 있었다. 아무개는 뒷걸음질 쳤다. 아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상자 안에 담겨 있는 건 이 세계의 질서를 상징하는 대륙십삼걸 중 한 명. 대륙구걸 성전사 달파인의 얼굴이었다. 시체임에도 불구하고 영혼창고 안에 들어가 있던 그 사내의 얼굴은 생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더욱 섬뜩한 느낌을 줬다. 그리고 피비 캔버스가 손을 들어 올리자 그 잘린 목이 눈을 번쩍 뜨며 입을 크게 벌렸다. 그 잘린 목은 알아들을 수 없는 바람소리를 내었다. 안겔로 룩스는 그 목을 종탑 아래 방치된 목이 없는 시체에 꿰매며 중얼거렸다. “너도 곧 이 놈처럼 만들어주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좀 더 우리는 장난을 칠 테니까. 아직 축제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몸통이 바뀐 성전사 달파인의 시체가 몸을 일으켰다. 같은 대륙십삼걸에 속했던 김성철 또한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달파인.’ 식견이 짧고 앞만 보는 사고방식의 소유자라 교단과 교단을 조종하는 황제의 앞잡이라는 악평이 있지만 신에 대한 신실한 믿음과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자세는 진짜였다. 한때 고결했던 그 성전사는 이제 기괴한 살덩어리가 되어 김성철 앞을 가로막았다. ======================================= 60. 분기점 (1) 김성철이 기억하기로 성전사 달파인은 진실한 신앙심, 불굴의 정신, 어떤 고통도 감내하는 대담함 등 성전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두루 갖춘 이상적인 성전사였다. 그는 세계를 양분하는 뮤라 교단과 호라산 교단, 소위 양대 교단으로부터 동시에 축성(祝聖)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가진 축복에 따라 능력이 결정되는 성전사의 특성상 그는 가히 역대 최강의 성전사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그런데 막상 그가 세상에 나오자 드러나지 않았던 치명적인 단점이 드러났다. 바로 전투에 대한 감각이 떨어진다는 것. 달파인이 다른 성전사에 비해 전투 센스가 떨어진다는 의견은 예전부터 있어왔지만 그가 가진 정신적인 굳건함은 다른 성전사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부족한 부분은 능력치로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됐다. 하지만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강자들의 싸움에서 그의 부족한 재능은 번번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특히 자신보다 주요 능력치 총합이 300이나 떨어진다는 소환자 샤말 라지푸트와 결투에서 그는 세계의 강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결국 그는 대륙오걸에도 들지 못하고 대륙구걸이라는 기대에 못 미친 자리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김성철은 확신한다. 달파인이 좀 더 전투에 능했다면 그의 자리를 지금보다 훨씬 높은 곳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공교롭게도 달파인의 강함은 생전이 아닌 사후에 발휘됐다. 김성철은 성스런 광휘로 뒤덮인 성전사 달파인을 무심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 광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응보의 방패. 이 세상의 힘이 아닌 질서신에 속한 권능을 빌린 인과역전의 덫이다. 이 광휘는 모든 형태의 직접공격을 적에게 되돌려주는 효과가 있다. 물론 응보의 방패 자체에 피해를 흡수하는 힘이 없기에 김성철이 일격을 가하면 달파인도 사라지겠지만 김성철처럼 압도적인 공격력을 지닌 사람에겐 더할 나위 없이 껄끄러운 덫이다. 상성이 좋지 않다. 생전의 달파인이었다면 스스로 응보의 방패를 풀고 좋아하는 필살기를 사용해 성급하게 승부를 냈겠지만 사령술사에게 조종당하는 지금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달파인을 노려봤다. “오... 오라...” 양대 교단으로부터 동시에 축성을 받은 인물답게 그가 지닌 신성력은 목숨을 잃어도 그의 몸에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걸로 보였다. 문제는 그의 신성력을 담은 머리 자체가 피비 캔버스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이지만. 피비 캔버스는 달파인을 방패로 활용해 김성철이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시원하게 날리는 식의 해결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괜히 시간을 줬나.’ 다소의 시간은 걸릴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정해져 있다. 김성철이 그들을 찾아낸 순간부터 말이다. 오히려 가끔 머리를 쓰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너무 편한 싸움에 익숙해지는 것은 장래를 고려해볼 때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니까.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이 가진 수를 생각했다. 너무나 많은 카드가 그의 손에 있었다. 김성철은 순식간에 그 카드를 머릿속에서 조합해 행동을 시작했다. 먼저 그는 뒤로 물러섰다. 피비 캔버스의 방패인 달파인은 김성철의 뒤를 쫓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렀다. 우뚝 선 달파인 옆으로 김성철에게 토막 났던 시체들이 스스로 잘린 조각들을 이어붙이며 다시 일어나 시체의 방벽을 재구성했다. 종탑 위에 두 다리를 난간 밖으로 내민 채 앉은 피비 캔버스의 지루한 얼굴은 전체적으로 무표정이었지만 유인에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김성철이 바라는 바다. 그는 동부의 악인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주문을 영창했다. 그의 주위로 복잡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안겔로 룩스는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지만 피비 캔버스는 한 눈에 김성철의 의도를 파악했다. “메테오야. 피해.”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도의 밤하늘을 수 놓은 불꽃 사이로 천공의 마법진이 펼쳐졌고 그 마법진을 통해 가공할 힘을 머금은 운석이 낙하했다. 피비 캔버스는 레비테이션을, 안겔로 룩스는 민첩한 몸놀림으로 종탑 아래로 뛰어내렸고 그들이 떠나기 무섭게 운석이 낙하했다. 종탑은 산산조각이 나 박살났고 종루에 매달린 종은 지면에 처박히며 여운이 긴 잔향을 남겼다. “저 자식 마법전사였나?” 안겔로가 중얼거리는 그 순간이었다. 또 다른 마법진이 순차적으로 그들의 머리 위에 떠올랐다. [ 메아리 X3 ] 김성철의 클래스 메아리술사의 능력이 발현된 것이다. 시간차를 두고 3개의 메테오가 안겔로 일행의 머리 위에 잇따라 떨어졌다. 잔해가 사방에 튀고 주변은 완전히 초토화됐다. 사방에 자욱한 먼지가 깔린 가운데 피비 캔버스와 안겔로 룩스는 먼지 너머에 우뚝 선 사내는 달라진 눈빛으로 응시했다. 둘은 눈빛을 교환했다. ‘강적이다.’ 피비 캔버스의 방패 달파인이 다른 시체들과 함께 느릿하게 전진했고 안겔로 룩스도 시체의 행렬에 합세했다. 더 이상의 주문영창을 막기 위함이다. 전투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 김성철과 동부의 2인조가 전투를 벌이던 그 순간에도 죽음의 군세에 의한 라그란제 공격은 계속됐다. 8구역에서 비롯된 해골의 군세는 측면의 7구역을 무시하고 6구역의 입구로 그대로 들이닥쳤다. 소수의 경비병들은 있는 힘을 다해 그것들을 막아보려 했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육중한 문이 잇따른 공격에 휘청거리고 결국 무너지기 시작했다. 공병들이 자재를 가지고 와 보수하려 했지만 중과부적. 게다가 그들은 볼 수 있었다. 해골 병사 사이를 날아다니는 검은 나방을. 원혼의 구슬을 6개의 다리로 움켜 쥔 거대한 나방은 해골의 군세에 의해 죽임 당하거나 예전에 죽은 자들을 끊임없이 일으켜 세우며 군세의 숫자를 늘렸다.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죽음의 군세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는 이유다. “저 벌레를 죽여! 저 빌어먹을 벌레를 죽이라고!” 병사들의 지휘관이 메마른 목소리로 소리쳤다. 마법 화살, 석궁의 화살, 불덩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화력이 나방에게 집중됐다. 운 좋게 눈 먼 화살 하나가 나방에 적중했다. 나방은 그대로 거꾸러져 하수도로 통한 틈바구니 안으로 떨어졌다.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은 최악의 결과를 이끌어 냈다. 대하수도 아래에서 썩어가던 또 다른 시체들이 원혼의 구슬이 내뿜는 죽음의 기운에 눈을 뜨고 일어선 것이다. 이들은 하찮은 평민의 백골이 아니다. 오랜 역사와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던 동부의 귀족들이다. 한때는 화려했던, 그러나 이제는 시체의 진물과 구더기의 분비물로 더럽혀진 넝마를 걸친 시체들이 차례라 일어섰다. 하수도를 지키던 구세병이 있었다면 다른 곳으로 옮겨 붙은 죽음의 불길을 빠르게 꺼뜨릴 수 있었겠지만 구세병들은 제국 하수도 관리인의 지휘 하에 중요구역, 4구역의 입구에 모여 철통같은 방비를 하고 있었다. 즉, 6구역의 지하는 버려진 상태다. 동부의 귀족들이 산 자의 숨결을 찾아 지하에서 지상으로 기어 올라왔다. 해골의 군세를 막아선 성문의 앞뒤로.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6구역의 방어선이 무너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병사들은 달아났고 이제 죽음의 군세를 6구역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소리는 정적이 흐르는 병실 안에 앉은 젊은 부부에게도 고스란히 들려왔다. “무슨 소리?” 침대에 누운 배성혜는 초췌한 얼굴에 불안한 빛을 띠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잠깐 둘러보고 올게.” 전장에 섰던 그는 직감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교단의 성직자들이 복도를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장애물로 입구를 막아라!” 또 다른 성직자들은 육중한 중갑과 둔기로 무장하며 그들의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김치는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나이 지긋한 성직자가 탄식하며 대답했다. “이 경건한 영년의 밤에, 신이시여 저들의 우행을 용서하시길! 사악한 네크로맨서가 시체의 대군을 일으켜 이곳을 공격하고 있소. 늦지 않았으니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 5구역으로 피난을 가시오.” 김치의 얼굴이 어두운 그림자가 떠올랐다. 지금 배성혜는 움직일 수 없다. 몸에 좋지 않은 약을 복용했기에 절대안정이 필요하다. 이곳을 떠나라는 말은 김치에게 아내를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그럴 수 없어요.” 김치는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 있다간 다른 환자들과 함께 죽게 될 거요. 물론 우리가 버티는 데까진 버텨보겠지만...” 성직자가 탄식을 섞어 말했다. 김치라고 불린 덩치는 크지만 어수룩해 보이는 가난한 청년은 잠시 주저하는 듯 하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결연한 눈빛으로 성직자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저도 싸우겠습니다.” “당신이...?” 성직자가 놀란 눈으로 김치를 응시했다. 김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공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오랜 기간 영혼창고 안에 봉인되어 있던 철혈기사단의 무구였다. 철혈 기사단을 상징하는 철혈이라는 한글로 된 문구가 새겨진 그 무구를 본 성직자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 그것은..?” “옛 철혈기사단의 고위기사 이강희. 이미 한 번 버린 이름을 다시 걸고 당신들과 함께 싸우겠습니다.” 철혈기사단의 갑주를 다시 걸친 이강희는 두 눈을 번뜩이며 뮤라 교단의 성직자들과 함께 나란히 병원 앞에 서서 다가오는 죽음의 군세를 응시했다. 동부의 귀족을 앞세운 군세들은 병원을 발견하고 괴성을 지르며 노도처럼 병원을 향해 몰려왔다. “와라! 이 개자식들아! 어떻게 낚아 챈 여우같은 마누란데 니들한테 내줄 거 같냐!” 이강희는 철검과 방패를 들고 옛 동부의 귀족들을 향해 달려갔다. 이렇게 산 자와 죽은 자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와중에도 축제는 계속되고 있었다. 아르큐부스는 이제는 해탈한 눈으로 허공궁궐에서 터지는 폭죽을 응시하고 있었다. 허공으로부터 비룡기사 한 기가 날아와 갑판 위에 안착했다. “제독님. 드미트리 총신의 전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은 아르큐부스에게 내려진 한 줄기 단비와 같았다. 그는 체통도 잊고 비룡기사에게 다가가 다급히 물었다. “그래. 어떤 조치가 내려왔나?” 그의 물음에 비룡기사는 조금은 자신 없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황제 폐하의 다른 지시사항이 있기 전까진 현재 상황은 제독의 판단에 맡기라는 명입니다.” 그 말을 들은 아르큐부스의 얼굴은 구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하지만 입 밖으로 무책임한 상관의 욕을 내뱉는 누는 범하지 않았다. ‘늙은 너구리 새끼. 황제에게 보고하지도 않았어! 늘 그렇듯 끝까지 자기 책임은 하나도 지지 않으려고 하잖아!’ 그런데 그의 상관은 사소한 단서 하나를 남겼다. 즉, 아르큐부스의 판단에 맡기라는 것. 책임을 넘길 거리가 하나 주어진 것이다. 아르큐부스는 불타는 8구역을 응시했다. 8구역에서 나타난 해골들은 8구역을 무시하고 상위 구역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진군로에 놓인 일부 지역에서 8구역의 시민들이 작은 저항거점을 형성해 고립된 섬처럼 저항하고 있었는데 해골병사의 능력치 자체가 형편없는지라 시간을 끌면 충분히 구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8구역 자체는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8구역에서 거의 무한에 가까운 해골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아르큐부스는 턱을 괸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권한으로 가능한 한계와 그로 인해 벌어질 파장을. * 달파인의 목을 매단 시체가 엉성한 걸음걸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김성철은 차분하게 뒤로 물러서며 퇴로를 찾았다. 시체들이 김성철을 에워쌌다. 안겔로 룩스는 시체들의 대군 뒤에서 김성철의 움직임을 날카로운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어이. 넌 뭐냐?” 안겔로 룩스가 물었다. “보아하니 제국의 개도 아닌 거 같은데 왜 제국을 돕는 거지?” “…….” 김성철은 대답하지 않고 뒷걸음질 쳤다. 성전사 달파인의 시체는 그에 상응하듯 한 걸음 앞으로 걸어와 간격을 유지했다. 그는 안겔로 너머 자리 잡은 피비 캔버스를 노려봤다. 그의 시선을 본 안겔로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설마 양동작전을 쓰려는 건가? 그런 짓은 하지도 말아. 피비한테 그런 뻔한 수는 안 통하니까.” 그의 말대로 피비 캔버스 주위엔 물 샘 틈조차 없는 방어결계가 깔려 있었다. 아마도 이 정도 실력의 마법사라면 사령술 이외에 호신용 마법을 익히고 있을 것이다. 아무개 따윈 간단하게 제압할 정도의 마법을 말이다. 그런데 김성철이 노리는 건 양동도 암습도 아니었다. 그가 의도한 것은 따로 있었다. 이윽고 김성철의 눈에 들어왔다. 흙먼지로 뒤덮인 연약한 배수구 위에 달파인이 올라서는 걸. 뒷걸음질 치던 김성철의 몸에 순간 신적인 힘이 흘렀다. 감당할 수 없는 그 힘의 흐름은 안겔로 룩스에게도 미약하게나마 느껴졌다. ‘뭐지? 이 불길한 기운은?’ 그가 반응하기도 전에 김성철은 신적인 힘이 실린 발로 지면을 강하게 굴렀다. 순간 지축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지면에 무너져 내렸다. 안겔로는 재빨리 도약해 무너지는 바닥에서 탈출했지만 피비의 조종을 받는 달파인의 시체는 그렇지 못했다. 무너지는 발판과 함께 지면 아래로 떨어져 하수도 아래 떨어졌다. 달파인의 시체는 그럼에도 안정적으로 하수도의 제방에 착지했지만 그의 뒤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김성철이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달파인의 목을 향해 크럼부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단순한 휘두름은 아니다. 크럼부이는 달파인의 살점은 일체 건드리지 않고 잘린 목과 육체를 꿰맨 철사만을 고스란히 잘라냈다. “오.. 오라 찌르기!”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달파인의 시체가 자신의 검에 성스런 검기를 실어 공격을 취해보려 하지만 그 격한 움직임은 연결점을 잃은 목과 몸통을 분리시킬 뿐이었다. 김성철의 공격과 무관하게 말이다. 툭. 성스런 오라를 머금은 검이 허공을 찔렀다. 그와 동시에 달파인의 목이 지면에 떨어졌고 분리된 몸통에 서린 응보의 방패의 광휘가 사라졌다. 방패가 부서진 것이다. 김성철은 검을 재차 휘둘러 몸통을 글자 그대로 분쇄시켜버린 뒤 지면 위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자, 그럼.” 김성철에겐 좋지 않은 버릇이 하나 있다. 알량한 힘을 믿고 천방지축으로 설치는 무리들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는 것. 사자토스를 상대로 할 때도 그러했다. 그 알량한 힘의 한계를 처절하게 느끼게 한 뒤 악행에 상응하는 죽음을 선사한다. 시간을 끈 것도 그 때문이다. “솜씨 좀 구경해볼까?” 그는 타인을 절망시키는 법을 알고 있으며 가끔 그것을 즐긴다. 딸랑. 크럼부이가 사라지고 대신 그의 오른손엔 재앙의 무기 움 브루크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의 왼손엔 못보던 무기가 나타났다. 검이라기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육편에 가까운 기괴한 형태의 검이었다. 그것을 본 아무개의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저.. 저것은...! 또 다른 재앙의 무기 아고니...!’ 양손에 각기 다른 재앙의 무기를 쥔 김성철은 이제 사신처럼 동부의 2인조를 향해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 60. 분기점 (2) 아무개는 기억한다. 재앙의 무기 아고니가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아고니는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생명의 원천이다. 어느 명검보다 날카로운 아고니의 칼날은 상대방을 베어냄과 동시에 치유한다. 모순이다. 무기이면서 치유의 도구를 겸하는 것은. 하지만 거기에 아고니의 진정한 힘이 숨겨져 있다. 아고니는 이기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오로지 고통만을 주기 위한 형벌의 도구다. 아무개는 기억한다. 세계의 적 김성철이 재앙의 무기 아고니를 이용해 어떻게 자신의 적을 망가뜨려놓았는지.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죽음을 갈구하던 자들의 절규를 그녀는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 지금 끔찍한 지옥도가 다른 시대에서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피비. 도와 줘.” 안겔로 룩스가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이 세상의 물건이라 생각되지 않는 기괴한 무기들이 그에게 강렬한 위험신호를 보냈다. 피비 캔버스가 신형이 지면을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며 안겔로 룩스에게 합류했다. 그녀는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주문을 영창 했다. 소규모 소환 마법이다. 마법진이 펼쳐지고 거기에서 붉은 피부를 지닌 시체가 마법진 위에 나타났다. 그것은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컸다. 악마, 그것도 강력한 대악마의 시체다. “저... 저건?” 베르텔기아가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비취로 만든 가면을 씌워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김성철은 그 시체의 전체적인 형태와 분위기가 마계최전선에서 죽은 일리야 브레가스와 닮은 것을 발견하고 물었다. “어디서 주웠지? 이건?” “마계 최전선.” “그렇군.” “이런 것도 있어.” 피비 캔버스는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영혼창고에서 또 다른 상자 두 개를 꺼냈다. 그 상자 안엔 김성철이 잘 아는 얼굴 두 개가 있었다. 대륙육걸 마르틴 브레가스와 철혈기사단장 조성택의 잘린 목이었다. 조성택 쪽은 부패와 손상이 심해 눈알 하나를 유리 안구로 대체했고 철판으로 깨진 두개골 일부를 덧대 놓고 있었다. 그들의 싸늘한 얼굴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늘 위에서 터지는 폭죽의 색깔에 따라 붉고 푸른색으로 변색하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들과 재회한 김성철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었다. 이들의 시체를 이런 식으로 재활용을 하는 인간이 나타나리라고는. ‘대륙을 좌지우지하던 이들이 지금은 이름도 없는 미치광이들의 장난감이 되었구나.’ 그걸 본 안겔로 룩스가 냉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이 늙은 너구리들의 얼굴을 아는 거 보니 확실해졌네. 너도 저기 있는 것들과 한 패지?” 그의 손가락은 지금도 폭죽을 터뜨리고 있는 허공궁궐을 가리켰다. 그의 싸늘한 눈동자엔 이 시대의 기득권에 대한 감출 수 없는 경멸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이에 대한 김성철의 답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나타났다. 재앙의 무기를 내려놓고 그는 자신을 상징하는 무기 하늘의 파편을 벼려 만든 팔 가라즈를 꺼내 들었다. 안겔로 룩스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무표정 일색이던 피비 캔버스도 팔 가라즈의 출현엔 관심을 보였다. “세계의 적이라고? 생각보다 젊잖아?” “아마도 저 망치는 진짜일 거야.” “그래? 운도 좋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거물을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이야!” 안겔로 룩스는 해맑게 웃었다. 그의 옆구리를 피비 캔버스가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안겔로가 돌아보자 피비는 지팡이를 꼬옥 쥐며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겔로. 나 저 사람 갖고 싶어.” 피비 캔버스의 눈동자에 기이한 광채가 감돌았다. 집착과 소유욕, 욕망이 뒤섞인 섬뜩한 동공이 김성철을 그 혼탁한 중앙에 담았다. “호오. 오랜만이네. 네 입에서 그 소리를 듣는 건.” 어릴 적부터 세계의회의 삼엄한 감시를 받아오던 피비 캔버스는 좀처럼 자신의 힘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안겔로 룩스는 알고 있다. 그녀가 전력을 다했을 때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 피비 캔버스는 체스라는 게임을 배운 이래 단 한 번도 체스 게임에서 패배한 적이 없다. 상대방의 수를 읽는 능력, 배치에 대한 천부적인 이해도,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상황이든 순간적으로 연산할 수 있는 비범한 두뇌가 그녀를 무패의 기사로 만들었다. 그 재능은 단순히 게임에서 그치지 않고 전투의 영역까지 확장됐다. 피비 캔버스에게 전투는 체스와 대동소이했다.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상아를 깎아 만든 장기 말 대신 시체로 만든 장기 말이 쓰이고 왕의 자리에 자신이 대신 들어찼다는 정도. 그녀의 장기 말은 그녀의 손짓에 따라 부정한 생명을 부여받아 다시 일어났다. 대악마 일리야 브레가스가 성벽처럼 앞을 지키는 가운데 변경백 마르틴 브레가스, 철혈기사단 단장 조성택이 새로운 육체를 얻어 전열에 섰고 그녀의 여왕이 될 안겔로 룩스는 그녀의 지시에 언제든 따를 채비를 하고 있었다. 모든 준비가 착실히 갖춰지는 가운데 피비 캔버스는 한 가지 의문을 느꼈다. “그런데 저 사람, 왜 아무것도 안 하는 거지?” 눈앞에서 전열을 강화하는데 김성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잠을 자고 있는 자신의 적을 흔들어 깨워 상대방이 싸울 준비를 갖출 때까지 기다려줬다는 어떤 동화 속의 기사가 불현듯 피비 캔버스의 뇌리에 떠올랐다. “점점 더 갖고 싶어지는데?” 피비 캔버스는 김성철의 시신을 해부하고 쪼개고 붙이는 상상을 하며 묘한 흥분 상태에 빠져들었다. 시체로 만든 장기 말들이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당신이 십만이나 되는 악마군을 홀로 물리쳤다는 말을 들었어.” 피비 캔버스는 더 이상 웅얼거리지 않았다. 대신 광기어린 눈동자에 걸 맞는 들뜬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시체는 다를 거야. 당신이 아무리 베고 박살내고 계속해서 일어설 것이고 당신의 몸을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지도록 할 거야. 그리고 당신이 결국 지치면 나는 당신의 몸을 해부할 거야. 당신의 숨이 붙어 있는 채로.” 말하는 내내 피비 캔버스는 끔찍한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떨어댔다. 그야말로 인간의 탈을 쓴 악귀 그 자체의 형상. 그러나 김성철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럴싸한 계획이군.” 일단 김성철은 영혼석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페어리 라이트.’ 환한 빛을 발하는 3개의 구체가 김성철 뒤에 떠올랐다. 물론 아무 의미도 없는 행동이다. 의미 있는 행동은 그 다음에 이루어졌다. 3개의 구체를 뒤에 달고 다니며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달고 앞으로 쇄도했다. 일리야 브레가스의 시체가 김성철의 앞을 철벽처럼 가로 막았다. 아마도 그것이 달파인처럼 김성철을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착각은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박살났다. 퍽! 팔 가라즈는 대악마의 시체를 글자 그대로 박살내버렸다. 식은 피와 육편이 사방으로 튀는 가운데 피비 캔버스는 그 비상한 두뇌로 자신의 계획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걸 느꼈다. 그녀가 반응할 사이도 없이 팔 가라즈는 연거푸 그녀의 장기 말을 박살냈다. 김성철은 과거의 영웅들을 그만의 방식으로 장사지냈다. 그의 망치가 지나간 자리엔 형체조차 남지 않은 육편과 핏자국만 남아 있었을 뿐이다. 재생은 물론이고 부활도 불가능하다. 순식간에 모든 장기 말을 잃은 피비 캔버스 눈앞에 자신의 미래가 그려졌다. ‘이것이 세계의 적...?!’ 쓰디 쓴 패배와 죽음이. 하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보다 죽음보다 가혹한 운명이었다. 꿈틀거리는 아고니의 칼날이 그녀의 눈앞에서 안겔로 룩스의 심장을 꿰뚫었다. “끄아아아악!” 검에 심장이 찔린 채 안겔로 룩스는 그대로 하늘로 들어 올려졌다. 피비 캔버스는 동료 안겔로의 죽음을 예상했다. 그런데 이윽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심장이 꿰뚫린 채 허공 위에 들쳐 진 안겔로 룩스가 계속해서 손발을 휘저으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것이다. ‘왜... 안 죽지...?’ 피비 캔버스의 머릿속에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사령술은 아니다. 마법의 흔적 따윈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의 눈은 다음 대상으로 옮겨갔다. 안겔로 룩스를 관통한 꿈틀거리며 약동하는 기괴한 마검을 말이다. ‘저건 대체 뭘까?’ 생각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김성철이 아고니를 아래로 향해 휘둘렀다. 안겔로 룩스는 그대로 튕겨져 나가 단단한 석조 포도 위에 부딪쳤다. “끄아아아!” 대로변에 개구리처럼 납작하게 뻗은 안겔로는 죽지 않고 몸부림쳤다. 그때 피비 캔버스는 볼 수 있었다. 아고니에 의해 관통당한 안겔로의 상처가 스스로 아물어 가는 것을. 김성철은 이제 피비 캔버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꽤나 악취미를 갖고 있더군.” 피비 캔버스는 공감능력이 떨어진다. 공포라는 감정 또한 그녀에겐 먼 세상의 일이었다. 다만 공포를 느끼지 않더라도 그녀는 지금 전투에서 패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당신 강하네. 패배를 인정할게.” 그녀는 지팡이를 떨어뜨리며 손을 들어올렸다. 김성철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피비 캔버스는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그의 무심한 얼굴을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두렵진 않았지만 그런 짓을 당하는 건 사양이다. 그녀는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지금 당장 시체들을 멈출게. 당신이 원하는 게 그거 아니었어?” “…….” “내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당신을 위해 싸워 줄게. 내 사령술의 지식은 제국을 싫어하는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녀는 계속해서 거래를 제시했다. 그러나 그녀는 김성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었다. “설마 연약한 여자인 날 해칠 셈이야?” “…….” 푹. 마검 아고니가 피비 캔버스의 몸통을 꿰뚫었다. “꺄아아아아아악!” 처참한 비명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폭음 소리를 덮어버렸다. 어둠 속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무개는 눈을 감은 채 귀를 양손으로 틀어막고 주저앉듯 쪼그리고 앉았다. 시작된 것이다. 재앙 그 자체의 의해 집행되는 태형식이. 김성철은 피비 캔버스를 아고니와 함께 벽에 박아버린 후 바닥에 떨어진 각목을 집고 그녀 앞에 섰다. “타인의 생명이 그렇게 우습나?” “우리 행동에도 명분은 있...” 퍽! 피비 캔버스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각목이 그녀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절반이나 박살났고 반대편 안구가 눈 밖으로 튀어 나왔다. 즉사해도 무방할 치명상이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엔 재앙의 무기 아고니가 꽂혀 있다. 그 재앙의 무기 아고니가 심장에 꽂혀 있는 한 그 사람은 죽지 않는다. 재앙의 무기는 저승으로 떠나려는 피비 캔버스의 혼을 붙들어 놓고 박살난 얼굴을 원래대로 회복시켰다. 피비 캔버스의 의식이 돌아왔다. 끔찍한 고통과 충격의 기억과 함께. “그.. 그만..” 단 한 번의 일격으로 피비 캔버스는 알게 되었다. 진정한 공포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그러나 너무나도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하늘 높이 들린 몽둥이가 벼락처럼 내려와 그녀의 의식을 꺼뜨렸다. “그만... 제발... 제발...” 다시 의식을 차린 피비 캔버스는 애원했다. “피.. 피비!” 지면에 쓰러진 안겔로 룩스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가 뭔가 하려고 하기도 전에 녹슨 단창이 그의 몸에 박혔다. 또 다른 재앙의 무기가 그의 몸을 파고든 것이다. “끄억!” 안겔로 룩스는 온 몸의 힘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정신을 파괴시킬 것 같은 종소리를 들었다. “서두르지 마라. 네 차례는 다음이니까.” 틀어막은 귓구멍 사이로 처참한 비명소리가 연이어 새어 들어왔다. 이수진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이런 걸 들으면 안 돼. 이런 걸 보면 이 괴물과 싸울 의지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몸을 일으켜 어둠 속으로 몸을 옮겼다. 처참한 비명이 뒤에서 또 한 차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이수진은 귀를 막은 채 다시 주저앉았다. 저항할 수 없었다. 비명이 울려 퍼질 때마다 그녀는 떠올렸다. 숨죽인 채 그저 동료들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던 지난날의 악몽을. 그녀는 기도했다. ‘누가 제발. 저걸 멈춰 줘! 신이든 악마든 누구라도 좋아. 제발 저 저주받을 태형식을 멈춰 줘.’ 하지만 그녀는 그 태형식이 멈춰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김성철은 신의 도구이며 따라서 멈출 수 없기 때문에. 그런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둔탁한 파공음과 비명만이 울려퍼지는 공터에서 짤막한 여자아이의 외침이 들려온 것이다. “그만 둬! 이런 짓은!”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주머니 안에서 소리쳤다. ======================================= 60. 분기점 (3) “그 무기. 안 쓰면 안 돼? 사람이 변하는 거 같아서 무섭다고.” 몸서리쳐질 정도의 잔인한 광경보다 참기 어려운 것은 김성철의 변화였다. 재앙의 무기를 들면 그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누구보다 김성철의 심장에 가까이 있는 베르텔기아는 알 수 있었다. 재앙의 무기를 쓸 때 김성철의 심장의 고동이 평소와 다르게 변한다는 것을.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베르텔기아.” 김성철이 달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담담했지만 베르텔기아는 그 안에 방해 받은 자의 분노가 은은히 서려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베르텔기아는 생각했다. ‘설마 즐기고 있었던 거야?’ 이내 강하게 부정하긴 했지만 마음 한 구석이 꺼림칙해지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베르텔기아는 더욱 강하게 저 괴이한 무기의 사용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저 여자, 이미 열 번이나 고쳐 죽었잖아! 저 세상 문턱을 들락날락하며 이미 충분히 후회했을 거야. 자신의 악행을.” “아직 이 여자는 죗값을 전부 치루지 않았다.” 김성철이 부러진 몽둥이 대신 새로운 몽둥이를 고쳐 잡으며 대답했다. 그는 재생되고 있는 피비 캔버스를 노려보며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반나절이 남았다.” 그 말을 들은 피비 캔버스는 눈을 까뒤집고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퍽! 김성철의 몽둥이가 피비 캔버스의 머리통을 다시 으깨버렸다. 피와 뇌수가 사방에 튀었고 몽둥이의 표면에도 고스란히 묻었다. 김성철은 쓰러진 채 신음하는 안겔로 룩스를 향해 재앙의 종을 흔들며 덧붙였다. “남은 반나절은 저 녀석의 것이고.” 지근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은 안겔로 룩스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떼굴떼굴 굴렀다. 단말마에 가까운 처절한 비명 소리 속에서 베르텔기아는 보았다. 지켜보는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히는 것을. ‘위험해. 지금 바로 멈춰야 해.’ 베르텔기아는 김성철 주머니 속에서 있는 힘을 다해 몸을 흔들었다. 김성철이 아래를 응시했다. “베르텔기아. 창고로 들어가고 싶은 것이냐?” “창고로 들어가도 관계없어. 하지만 그 여자는 어떻게 할 거야?” “그 여자?” 김성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치였다. “라르고 말이야.” “…….” 김성철의 눈빛에 약간의 변화가 나타났다. 베르텔기아는 멈추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김치 부부도 걱정되지 않아?” “아.. 그 사람들.” 느리게 뛰던 김성철의 고동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베르텔기아는 희망을 느끼고 계속해서 말했다. “저 사람들에게 죄를 묻는 게 더 중요하다면 알아서 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장 저 여자에게 주술을 풀라고 말해서 지금 사태를 끝내자고. 후회하기 전에 말이야!” “후회라....” 김성철의 말끝이 흐려졌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라르고, 김치, 배성혜는 물론이고 이곳에 온 이유 자체를. 어느 순간부터 김성철은 자신에게 분노라는 감정을 느끼게 한 2인조를 처벌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에 함몰되어 있었다.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에게 도전했기 때문이다. 감히 인간 따위가.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렀을 때 김성철은 전율했다. ‘내가 이런 놈이었다고..?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가 꿈결처럼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 지켜보겠다. 신의 힘을 얻은 네가 인간 틈바구니 속에서 언제까지 인간처럼 행세할 수 있을 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재앙의 무기가 나타나 있었다. 의식적으로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재앙의 무기가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툭. 피와 뇌수로 얼룩진 각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베르텔기아는 불안한 마음으로 김성철의 다음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김성철은 고개를 들어 여전히 폭죽이 터지고 있는 허공 궁궐을 멍하니 응시했다. 허공 궁궐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꽃 축제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허공궁궐의 성벽을 따라 마치 불꽃으로 만든 폭포가 맹렬히 흘러내며 장관을 연출했고 휘파람 같은 고성이 홀연히 울려 퍼지더니 하늘 위에 거대한 빛의 꽃을 피어냈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잠시나마 이 세상의 일을 잊게 할 정도로 말이다. 김성철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베르텔기아는 잠시 긴장했다. 김성철이 또 다시 재앙의 무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걱정하면서.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이번에 그의 입가에 서린 미소는 만족보다는 씁쓸함을 보다 진하게 담고 있었다. 이윽고 김성철이 말했다. “오랜만에.... 했군.” “응? 뭘?” 베르텔기아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밥값 했다고.” 김성철은 피비 캔버스의 심장과 벽을 동시에 관통하고 있던 아고니를 뽑아 허공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안겔로 룩스의 몸에 꽂힌 움 브루크 또한 회수해 마찬가지로 허공 안에 갈무리했다. 재앙의 무기는 사라졌다. 김성철은 쓰러진 이인조를 무심한 눈으로 보다가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 자들은 죽어야 한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연히 죽여야지! 살려두면 또 다른 곳에서 못된 짓을 할 테니까!” 오히려 베르텔기아가 몸을 흔들며 기세 좋게 말했다. 김성철이 고개를 숙여 주머니 안을 응시했다. “베르텔기아.” “뭐. 기분이 풀리지 않으면 저 남자도 열 번 고쳐 죽여도 관계없어. 이번 한 번만 딱 눈감아줄 테니까.”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피식 웃고는 두 악인에게 다가갔다. 사형집행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 개의 목이 신적인 힘을 품은 손아귀 안에서 힘없이 부러졌다. 안겔로 룩스가 죽었을 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피비 캔버스가 죽었을 땐 의미 있는 변화가나 나타났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사령술사의 기운이 소멸된 것이다. 도시를 배회하는 죽은 시체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활동을 멈출 것이고 도시는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라르고와 김치 부부. 무사할까?” 라르고 쪽은 이미 충분히 손을 써두었다. 진짜 어지간한 악운이 터지지 않는 한 라르고의 신변엔 별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보다 걱정이 되는 쪽은 김치 부부다. 김성철은 죽음의 군세가 배성혜가 입원한 6구역 근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디부터 갈 거야?” “일단은 뮤라 교단의 병원이 있는 쪽으로 가야겠지. 김치와 배성혜는 아마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발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진실의 눈이 무수한 마법의 기운을 포착했다. 하늘 위다. 김성철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절정에 이른 불꽃들이 수놓은 하늘 아래 8구역 상공에 전개한 방위함대의 공선들 쪽에서 무수한 마법진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런.” 김성철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고 곧 그 예감은 현실로 나타났다. 수천 수백 개의 화염구가 하늘 위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허공 궁궐과 상위 구역에서 축제를 지켜보던 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호오. 저것도 축제의 일부입니까?” “제국의 자랑인 함대까지 동원한 볼거리라니. 새롭습니다.” 기득권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구경거리인 그 불덩이들은 아래 구역에 살아가는 하층민들에겐 재액 그 자체다. 무자비한 마법폭격에 노출된 8구역은 불길과 폭발에 휩싸였다. 쾅! 쾅! 곳곳에서 어마어마한 폭음이 울리는 가운데 김성철은 뾰족한 여성의 비명을 들었다. 아무개의 목소리다. 김성철은 바로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화염구를 팔 가라즈를 휘둘러 그 풍압으로 날려버린 후 아무개를 향해 달려갔다. 작열하는 불꽃을 뒤로한 채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성철을 본 아무개는 괴성을 지르며 뒤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아아아아악!” 그녀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김성철을 응시하며 가녀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정신 차려라. 이수진. 나다.” 김성철은 가볍게 아무개의 뺨을 때렸다. 강하게 때리면 죽을 수도 있기에 힘 조절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아무튼 그 일격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무개는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여전히 얼굴엔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내가 그렇게 무섭나? 소환궁전에선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던 녀석이.’ 김성철은 문득 어릴 때 본 적 있던 원효대사의 해골 물 일화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알고 싶었다. 아무리 여기가 구제불능의 쓰레기가 모인 인간하수도라 불리는 지역이라고 하나 엄연한 자신들의 국민들에게 불벼락을 퍼 붙는 인간제국의 생각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방금 정신을 차린 아무개는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김성철은 손가락을 하늘 위로 올려 마법폭격을 쏟아 붙는 인간제국의 공선들을 가리켰다. 그걸 본 아무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 뭐야? 왜... 왜 공격을 하는 거지?” 그때 무자비한 2차 공격이 김성철과 이수진 주변에 떨어지며 불꽃과 폭발을 일으켰다. 박살난 건물 속에서 온 몸에 불이 붙은 사람들이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고 처참한 곡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왜 인간제국이 자신의 백성을 공격하는 거지?” 아무개가 큰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 모습을 본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 아무것도 모르는군.’ 그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라르고가 걱정됐다. 입구를 막아 놓아 해골 군세로부터는 안전할지언정 이 어마어마한 마법 폭격으로부터 살아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혼란에 빠진 이수진을 향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어리석군.” 이수진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김성철은 계속해서 말했다. “이 시대의 권력자와 함께 하면서도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단 말인가?” “뭐.. 뭐라고?” 아무개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 눈으로 보고 직접 판단해라.” 김성철은 그 말을 남기고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덩그러니 남겨진 이수진은 창백한 얼굴로 불바다가 된 제도의 거리를 텅 빈 눈동자로 돌아봤다. 멍하니 생각을 하던 그녀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중얼거렸다. ‘그 여자아이 목소리. 대체 뭐였을까? 분명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불타 버린 여관에서 김성철은 라르고를 찾아냈다. 이미 절멸의 저주가 온 몸에 퍼진 상태에서 그녀는 무너진 서까래에 깔려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미 의식은 남아 있지 않은 상태. 곧 죽음이 그녀를 덮칠 것이다. “…….” 김성철은 간신히 다스렸던 어두운 분노의 불길이 다시 타오르는 걸 느꼈다.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심장의 고동이 불길한 박자로 변하는 걸 느끼고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걸 쓰자. 우리.” “뭘?” “안개 여정 말이야.” “안개 여정?” “전설에 따르면 어떤 왕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된 사람과 작별을 고하기 위해 그걸 사용했대.” “…….”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개여정을 손에 쥔 채 베르텔기아와 함께 라르고의 마지막 꿈속으로 들어갔다. 사치와 향락으로 가득 찬 화려한 방안이었다. 가면을 쓴 수많은 사람들이 한 곳을 보고 있었다.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라르고였다. 푹신한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뉘인 그녀의 품안엔 귀여운 아기가 잠들어 있었다. “어머. 왔어? 너무 늦은 거 아냐? 기다렸는데.” 라르고는 김성철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옆의 귀여운 아가씨는 누구야? 강아지처럼 쪼그만한 걸 보니 여자 친구는 아닐 테고.. 딸? 그런데 하나도 안 닮았네. “딸 아니거든. 조언자거든!” 베르텔기아가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남겨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방안의 조명이 껌뻑거리며 강한 흔들림이 일었다. 방안에 모인 가면을 쓴 남자들은 어둠 속으로 하나 둘 사라졌다. 그녀의 세상이 꺼져가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것을 깨닫고 탄식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귀여운 아기군. 당신을 꼭 빼닮았어.” 그 말을 들은 라르고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 발린 칭찬은.” 방 안이 다시 한 번 흔들렸다. 화려한 조명의 불이 하나 둘 꺼져갔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가 봐.” 라르고는 자신의 품속에서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며 손짓했다. “그럼 가지.” 김성철은 손을 흔들고 뒷편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둠 속에서 라르고는 김성철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조용히 말했다. “고마웠어.” “…….” 김성철이 멈춰 섰다. “정말로, 정말로 고마웠어. 죽어서도 잊지 않을게. 물론 우리 아기한테도 입이 닳도록 이야기 할 거야. 당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흔들림이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는 완전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라르고의 세상이 끝난 것이다. 김성철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현실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8구역은 완전한 불길에 뒤덮여 있었다. 여관 또한 불길에 휩싸여 완전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김성철은 라르고의 시체가 불길에 뒤덮이는 걸 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할 거야?” 베르텔기아가 물었다. 그 물음에 김성철은 지팡이를 꺼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코트 안의 영혼석 하나가 플라이의 마법진을 표시하고 있었다. 하늘로 날아오른 김성철의 주위로 환한 마법진이 펼쳐졌다. 이윽고 그의 지팡이 끝에서 천공의 빛줄기가 뿜어져 나와 폭격을 하고 있는 공선 한 척을 그대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말했다. “황제를 만나러 간다.” 경천동지할 사건이 일어났지만 베르텔기아는 놀라지 않았다. 느껴지는 심장의 고동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 61. 황제 (1) 치열한 전투 와중에서 이강희는 하늘에서 번쩍하는 빛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걸 보았다. 폭죽과는 다르다. 마법으로 만들어낸 섬광이다. “크으으으...” 동부 귀족의 살아 있는 시체가 이강희를 향해 검을 휘둘러왔다. 이강희는 방패를 들어 검격을 막아냈다. 이미 언데드가 되었다고 하지만 만만치 않은 일격. 생전의 이 귀족은 아마도 이강희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오래 지속된 전투로 인해 이강희는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 팔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다. 그가 쓰러지는 순간 언데드들은 그의 시체를 지나 병원 안으로 밀어 닥칠 테니까. 그리고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의 아내의 생명을 빼앗을테니까. “개새끼들아!” 이강희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최후의 남은 힘을 쥐어 짜내 언데드를 밀어냈다. 갑작스런 기세에 언데드는 그대로 쓰러졌고 그 위로 이강희의 검이 쏜살처럼 꽂혔다. 동부의 귀족은 몸을 부르르떨다 이내 정지했다. “허억 허억...” 더 이상 싸울 힘이 남아 있지 않다. 아직 눈앞엔 수백 마리는 족히 됨직한 동부의 귀족들이 버티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강희는 머릿속으로 기도를 올리며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하늘 위에서 또 다른 빛이 번쩍였다. 전과 마찬가지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섬광. 이강희의 눈이 휘둥그레 퍼졌다. 라그란제의 상공에 전개한 공선 한 척이 불길에 휩싸여 아래로 낙하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지? 이 빌어먹을 상황은? 설마 적은 하늘까지 노리고 있는 건가?’ 문득 그의 눈에 허공을 날아다니는 어떤 존재가 어른거렸다. 인간이다.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걸로 보아 마법사로 짐작되지만 어둠이 그를 가려 자세한 모습을 판별할 수 없었다. ‘뭐지? 저 사람은?’ 그때 허공 궁궐 위에서 또 하나의 불꽃이 번쩍 터지며 세상을 밝혔다. 그 화려한 빛은 하늘을 가르는 의문의 사내 또한 어둠 속에서 들추어냈다. 이강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저.. 저건 사육사?!” 그 사육사는 하늘을 유영하다 갑자기 멈춰서 거대한 마법진에 휩싸이더니 막강한 빛을 내뿜어내 방위함대의 공선 한 척을 박살냈다. 그와 동시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를 포위한 죽음의 군세들이 하나 둘 비틀거리더니 이내 모두 쓰러진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는 것이지?” 이강희는 피묻은 검을 떨어뜨리며 하늘 위를 응시했다. 사육사로 불리던 사내, 김성철은 허공 궁궐을 향해 똑바로 날아가고 있었다. * 아르큐부스 크세네폰. 혜성처럼 라그란제의 정계에 등장해 젊은 나이에 수도방위함대 8함대의 수장이자 수도방위사령관이란 중책을 꿰 찬 화제의 인물이다. 그의 가장 큰 치적은 세계의 적에 동조한 판추리아의 정화다. 그의 명령 하에 이미 거신에 의해 유린당한 강상도시 판추리아는 지도에서 지워졌다. 판추리아의 생존자들은 입을 모아 그의 만행을 규탄했지만 약자들의 말에 귀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유포하는 자는 모두 종말교단의 패거리로 몰려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큐부스에 대한 악평은 끊임없이 세상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두 가지 흠이 제기됐다. 하나는 무능력이다. 언제나 화려한 복장을 입고 번쩍이는 명도로 무장한 그는 대단한 검술 실력을 지니고 있고 초월자에 근접한 강함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도 있지만 실제로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장에서 예기치 못한 조우에 우연히 아르큐뷰스와 검을 섞었다는 옛 용병의 말에 의하면 아르큐부스의 수준은 초월자는커녕 초인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라고 한다. 물론 그 용병의 뒷소식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게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아르큐부스를 구설수에 오르게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미심쩍은 그의 출신이다. 그는 루테기네아 왕국의 귀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루테기네아 왕국의 귀족들도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황제에 투항해 황제를 도와 제국을 건국한 공헌 귀족과 구 루테기네아의 왕을 대신해 전횡을 일삼고 다니던 몰락 귀족으로 말이다. 몰락 귀족들은 워낙에 저지른 죄가 많은 지라 어는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했다. 대표적인 몰락 귀족 가문이자 투기장의 소유자이기도 했던 간다르바 가문 같은 경우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처형되거나 유폐 당했다. 그런데 아르큐부스가 그 몰락 귀족, 그것도 가장 악랄한 간다르바 계보에 속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그가 지니고 있는 소품 중 간다르바 가문의 상징이 새겨진 물건이 있다는 이야기가 왕궁의 시녀들을 중심으로 돌았다. 아무튼 이런 소문에도 불구하고 아르큐부스는 그동안 승승장구해왔다. 황제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그는 고속승진을 거듭했고 제국의 총신인 드미트리 메디오프에게도 어느 정도 대들 수 있는 배경 또한 지니고 있었다. 8구역에 대한 괴멸적인 공격은 자신의 힘과 배경에 대한 자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대를 위한 희생은 불가피. 8구역은 어차피 제도의 오수들이 모이는 인간 하수도다. 잠깐 들쑤셔 놓아도 금방 쓰레기들로 들어차게 되겠지.” 그는 만류하는 부하들의 충언을 모두 무시하고 8구역 폭격을 명했다. 하지만 그것이 최악의 실책이 되리라고는 명령을 내리는 시점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좌현에 괴 마법사 출현! 스타라이트를 시전하려 합니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나타난 마법사 하나가 평온을 깨뜨렸다. 느닷없이 나타난 그는 공선 사이를 신출귀몰하게 비행하며 막강한 수도방어함대의 공선을 한 척 한 척 격침시켜 나갔다. “대체. 저 놈은 뭐지?” 경악 속에서 아르큐부스느는 범인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기억했다. 이윽고 하나의 이름이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설마, 칠영웅 사자토스?!’ 홀로 제도를 흔들어놓을 수 있는 마법사는 칠영웅 중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칠영웅에서 마법사 클래스는 두 명. 그중 남자에다 강력한 마법능력을 지닌 칠영웅은 사자토스 한 명밖에 없다. 플라이를 시전하면서 강력한 마법을 뻥뻥 터뜨리는 걸로 보아 사자토스가 확실하다. 하지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저것이 말로만 듣던 다중영창인가? 하지만 그 사자토스가 왜 우리를 공격하는 거지? 우리와 그들은 호혜적인 거래를 했을 텐데?!’ 이유야 어찌됐든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는 즉시 비룡기사들에게 출격을 명했다. “당장 저 놈을 잡아 내 앞에 끌고 와라!”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자토스를 포획할 수 있다면 지금 제도에 벌어진 모든 실책을 덮는 건 물론이고 자신을 의심하는 모든 이의 코를 납작하게 할 수 있는 공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아르큐부스가 자신하는 이유는 그의 배안에 숨겨져 있었다. 그의 공선 깊숙한 곳엔 무시무시한 힘을 지닌 비밀스런 존재가 잠들어 있었다. 그를 뒤에서 밀어주는 이들이 그에게 선물한 최강의 병기. 어지간히 급한 상황이 아니면 절대 쓰지 말 것을 명받았지만 지금이 바로 그 급박한 상황이 아니고 뭐겠는가? 멀리서 비룡기사들이 사자토스로 추정되는 마법사를 둘러싸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에서 비룡만큼 빠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알에서 깬 후 단 한 명의 주인만을 모시는 그 영물은 키우는데 들이는 비용과 노력만큼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비룡의 탑승자들은 그들의 벗에 지지 않을 정도의 강함을 갖추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 하나 같이 초인급의 엄선된 정예 비룡기사는 공선함대에 가려진 제국의 또 다른 주축이다. 그런 비룡기사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아르큐부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칠영웅의 힘이 저 정도란 말인가?’ 비룡기사들을 도륙낸 수수께끼의 사내의 다음 행선지는 바로 모든 공선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아르큐부스의 기함이었다. 쿵. 갑판 위에 후줄근한 차림의 사내가 내려 앉았다. 아르큐부스는 그제야 그 사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뭐야? 칠영웅이 아니야?’ 겉으로 보이는 행색은 영락없는 소환자. 그런데 황제와 암살교단의 교주를 제외하고 저토록 강한 소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 하나의 희박한 가능성을 제외하면 말이다. 아르큐부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세계의 적?’ 그의 불길한 예상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김성철은 아르큐부스를 노려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명령했나?” 작지만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 아르큐부스는 온 몸이 얼어붙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또한 하나의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등뒤로 손을 내밀어 뒤에서 지켜보는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곧 공선의 내부에서 철컹하는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무슨 권한이 있어서 명령을 했겠어?” 아르큐부스가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피래미라는 거군.” 김성철은 아르큐부스에게 다가갔다. 아르큐부스의 눈앞에 노래지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시의적절하게 갑판 중앙부가 활짝 열렸고 그 안에 잠복해 있던 검은 괴인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구세병. 아르큐부스의 뒤를 봐주는 세력들이 그에게 선사한 최강의 병사들이다. 그가 사자토스를 홀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원천이 바로 이 불길한 재앙의 기운을 머금은 병사들이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칠영웅급인 세계의 적 또한 이 무적의 구세병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가라! 가서 저 세계의 적을 포획해라! 내 직접 이 반도는 황제 폐하 앞에 끌고 가리라!” 그의 망상은 10초도 되지 않아 산산조각났다. 팔 가라즈 앞에 모든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자랑하는 구세병은 모조리 피곤죽이 되어 사라졌고 애지중지하는 기함의 갑판은 대파되어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혼란 속에서 김성철은 아르큐부스에게 다가와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사.. 살려주시오.” 아르큐부스의 구걸에 대한 답은 경쾌한 한 방이었다. 김성철의 주먹이 아르큐부스의 얼굴에 그대로 강타했다. 딱 죽지 않을 정도의 세기로. “피래미에게 너무 시간을 할애했군.” 김성철은 바닥에 누워 부들부들 경련으 일으키는 아르큐부스를 놔두고 플라이를 시전, 허공 궁궐을 향해 날아갔다. 다른 공선에서 출동한 비룡기사들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후, 허공 궁궐의 정원에 사뿐히 내려 앉았다. 그리고 보았다. 그 자리에 모인 이 땅의 권력자들을. 하나 같이 얼굴에 기름이 흐르고 사치스런 옷을 입었으며 교만한 낯빛을 지닌 자들이었다. 김성철은 그 옷을 입은 돼지들 중심에 선 사내를 응시했다. 온통 황금으로 장식된 갑주를 걸친 건장한 사내. 세상은 그를 가리켜 황제라 부른다. “너는 김성철이군.” 모습이 상당히 바뀌었지만 황제는 한 눈에 김성철을 알아봤다. “마치 처음 이계로 올 때의 모습을 하고 있군.” 황제가 팔을 내저으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물러서라. 그리고 끼어들지마라. 나는 이 자와 대화를 하겠다.” 황제가 명하자 연회장의 귀족들은 술렁이며 물러났다. 거대한 연회장엔 이제 김성철과 황제 단 두 명의 사내만이 남은 것처럼 보였다. 김성철이 말했다. “오랜만이군. 윌리엄 퀸튼 말버러.” 복잡다단한 감정이 담김 음성이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날 황제라 부르지 않는군?” “황제라 불릴 자격이 없으니까.” 김성철이 대답했다. 황제는 천천히 옆으로 걸었다. 그가 걸을 때마다 입고 있는 황금갑주들이 부딪치며 미미한 쇳소리를 냈다. 그가 측면에 이르렀을 때 김성철이 말했다. “왜 자신의 백성들을 공격했지?” 황제는 의아한 표정으로 김성철을 응시했다. 곧 한 시종이 그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무언가 속삭였고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련의 행동에서 김성철은 황제가 이 사태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는 자다. 김성철이 다시 말했다. “너의 함대가 너의 백성들을 죽였다. 세상에 자신의 백성을 죽이는 임금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임금도 우두머리도 아니다. 비열한 학살자에 불과하다.” “변명 하진 않겠다. 전부 다 나의 불찰이다. 하지만 그 또한 라그란제를 위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도시는 지금쯤 시체들로 뒤끓고 있었을 터이니.” “사령술사라면 내가 죽였다. 피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더군.” 그 말을 들은 황제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피비 캔버스를 말하는 건가?’ 그의 입가에 이윽고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의 제국대원수는 옷을 벗어도 여전히 제국을 위해 일하는군.” “농담 따먹기 하러 온 게 아닌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김성철이 불쾌감을 드러났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손에 그를 상징하는 신물,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 61. 황제 (2) 연회장 구석에서 이를 지켜보던 드워프 왕국의 귀빈들이 그걸 보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 저...!!” 황제는 김성철이 내뿜는 적의에도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결 더 편안한 표정을 짓더니 영혼 창고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한 자루 단검이었다. 김성철이 에어푸르트의 마법상점 주인에게 황제에게 보여주라 명하고 넘겼던 바로 그 단검. 겉보기엔 평범한 무기지만 그 안엔 겉으로 보이는 이상의 사연이 담겨 있다. “그때 널 말리지 않았다면 너는 이 칼에 목숨을 잃었겠지.” “네 은혜는 이미 지난 노고로 충분히 갚았다.” 김성철이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던가?” 마치 사자의 포효와 같은 으르렁거리는 어조였다. 황제는 무심한 표정으로 김성철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라이즈 하이메르는 자신의 선택으로 네가 아닌 다른 남자를 남편으로 택했다. 날 원망할 계제가 아니다.” “그 뒤에 너의 강요가 있다는 걸 내가 어찌 모른다고 생각하지?” “그런가? 그렇다면 나의 실책이군. 사과하지.” 황제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했다면 왜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지?” “…뭐라고?” 김성철이 묻자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풍문으로 들은 것만 수십 번이 넘게 문전박대를 했다고 들었다. 모두가 말하더군. 제국대원수는 의외로 속이 좁은 남자라고.” “…….” “게다가 그녀의 가문이 몰락하고 궁핍 속에서 죽어가는 걸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하지 않았던가?” “그 입 닥쳐라.” 김성철의 목소리가 변했다. 김성철의 모독적인 발언을 들은 장내의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저.. 저 놈이 감히.. 황제 폐하에게 무슨 망발을..!” “세계의 적이 되더니 아주 근본까지 잃어버린 모양이야.” 그의 품안의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감정이 격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어두운 분노는 아니다. 보다 뜨겁고 약동하는 살아 있는 분노였다. ‘이 사람. 이렇게 흥분하는 건 요리 할 때 말고는 처음이야.’ 김성철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 다시 말했다. “그리고 너의 선택으로 인해 그녀의 딸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 “핏줄도 이어지지 않은 남의 자식 아닌가?” 황제가 말했다. 김성철의 이가 맞물렸다. 인내의 한계에 달한 것이다. 그는 팔 가라즈로 정원을 내려쳤다. 쿵. 거대한 허공 궁궐의 한 차례 흔들렸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만물이 요동치는 가운데 김성철이 말했다. “내 자식이라 생각했다.” 이에 대해 황제는 쓸쓸히 웃더니 자신의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라벤다 향이 물씬 풍기는 장식 없는 비단 손수건이었다. 그것을 본 김성철은 흠칫했고 황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오랜 벗이여. 내 자식도 죽었다네.” “…….” 그 말은 사실이다. 김성철은 기억하고 있다. 자식을 잃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에게 술잔을 권하던 인간적인 황제의 마지막 모습을.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빛바랜 추억에 연연하지 않는다. “더 이상 친구라고 부르지 마라.” 김성철은 힘주어 말했다. “그렇게 된 거군.” 황제는 무심한 얼굴로 한 차례 탄식을 쏟아내고는 영혼창고에서 그의 무기를 꺼냈다. 태양처럼 빛나는 갑주와 달리 달의 차가움을 머금은 양손 검. 전설급 양손 무기 루크리티. 황제를 상징하는 권능이자 그의 무용을 증명하는 불패의 검이다. 그리고 크럼부이와 같은 대장장이에게 만들어 졌다는 형제검. “오랜만이군. 대원수. 내 동생은 어디 있지?” 루크리티가 말했다. 김성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팔 가라즈를 들어 올렸다. “너와 싸우는 게 몇 년 만이지? 15년만인가?” 황제가 물었고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됐겠지.” “그 땐 나의 승리였는데.” “지금은 다를 거다.” 황제의 몸에 기이한 광휘가 떠올랐다. 그가 받은 축복과 영혼각인이 전투가 시작되자 발동을 개시한 것이다. 그걸 본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태양의 장막인가?’ 전설급 영혼각인 태양의 장막. 우연한 기회에 손에 넣은 그것은 황제를 상징하는 표상 그 자체가 되었다. 그것은 황제에게 강력한 방어력과 마법저항력은 물론이고 그에 닿는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무시무시한 방어효과를 지니고 있다. 과거에 김성철은 태양의 장막을 결코 뚫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김성철이 움직였다. 황제의 모습이 급격히 커지는 걸 느끼며 팔 가라즈를 가볍게 휘둘렀다. 팔 가라즈가 황제에게 적중하기도 전에 황제의 모습이 사라졌다. ‘역시 빠르군.’ 황제는 힘보다는 민첩함과 기술에 의지하는 전사다. 그의 민첩성은 먼 옛날에도 초월자의 경지에 달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움직임은 김성철에 의해 낱낱이 보이고 있었다. 그림자조차 따라잡지 못하고 태앙의 장막만을 허무하게 만지작거렸던 그는 측면으로 회피기동하는 황제를 따라잡아 그를 추적했다. 황제의 눈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느끼고 있는 것이다. 김성철의 장족의 발전을. 황제는 기선을 제압당하지 않기 위해 루크리티를 휘둘렀다. 달빛을 머금은 서늘한 칼날이 김성철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김성철은 단지 팔 가라즈를 수직으로 들어 올림으로서 루크리티의 검격을 막아냈다. 챙캉. 날카로운 공격. 하지만 거기에 실린 힘은 약하기만 하다. 김성철은 거기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불현듯 느꼈다. ‘이렇게 약했었나. 황제의 검이.’ 김성철은 살짝 힘을 줘 검을 튕겨냈다. 약간의 힘을 줬을 뿐이지만 황제는 순간 균형을 잃고 부리나케 측면으로 도주했다. 상당한 거리를 둔 황제가 손바닥을 김성철에게 향하더니 주문을 영창 했다. “파이어 볼.” 날렵한 전사임과 동시에 대마법사급의 마력을 지닌 그는 화염학파의 대가이기도 하다. 맹렬한 기운을 뿜은 불덩이가 김성철을 향해 날아왔다. 김성철은 날아오는 불덩이를 가만히 보다가 일전에 익힌 주문술식을 구사했다. 사용한 룬은 모두 4개. 마법방어 - 조건 - 강화 - 제약으로 이어지는 4개의 룬을 순차적으로 배치했다. 룬 그 자체만으로 마법방어의 효과를 지닌 마법방어의 룬을 몸통으로 삼아 조건의 룬에 마법 피격시라는 조건을 건 후 강화의 룬으로 술식의 구성은 한 층 강화, 거기다 제약의 룬엔 받는 물리 공격 증대라는 효과를 거는 대신 술식 자체의 효과를 더욱 강화시킨 마법 방어 술식이다. 펑! 화염구는 마법방어 술식에 그대로 적중해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보는 이들이 모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일 정도로 커다란 폭발이었지만 정작 김성철의 옷 한 자락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강화의 룬에다 제약의 룬으로 더욱 강화된 그의 마법 방어 술식을 뚫어내지 못한 것이다. ‘쓸 만하군.’ 김성철은 술식을 거두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되자 수세에 몰린 건 황제였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강해졌단 말인가? 전사로서의 능력은 물론이고 언제 이런 마법의 능력까지?!’ 황제는 직감했다. 한때 김성철 위에 있던 그는 더 이상 그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몇 차례의 공방이 오갔을 때 그의 생각은 더욱 짙어졌고 이윽고 그는 몸통에 일격을 허용했다. “크억!” 그의 몸을 둘러싼 태양의 장막이 박살이 나며 황제는 분수대에 처박혔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군중들이 술렁였고 어느새 허공궁궐을 둘러 싼 수백 척의 공선 함대에선 김성철을 향해 가용가능한 모든 화력을 정조준했다. “…….” 김성철은 우두커니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황제가 박살난 분수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관은 벗겨지고 창백하게 질린 입가엔 은은한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할 말이 있다.” 황제가 말했다. 사이가 틀어졌지만 눈빛만 알고도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을 정도의 지기였다. 김성철은 황제가 할 말이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라는 걸 직감하고 팔 가라즈를 영혼 창고에 넣었다. “강해졌군. 대원수.” 황제의 검이 말했다. 황제는 검을 내려놓고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그의 궁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김성철은 말없이 그를 따라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궁궐 안에 두 남자가 대치하고 섰다. 황제는 덩그러니 놓인 옥좌에 쓰러지듯 앉았다. “할 말이란 것이 뭐지?” 김성철이 말했다. 황제는 쿨럭 거리며 피를 토해냈다. 한참 동안이나 피를 토해낸 그는 김성철을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겠지만....” “…….” “루테기네아의 치세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무슨 소리지?” 김성철이 다그치듯 물었다. 이에 황제는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날 전투에서 우리는 패배할 운명이었다.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확정적인 패배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나는 보았어. 무위의 암군이라 불리는 자의 진정한 힘을.” “방랑왕이...?” “너에겐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겠지. 너처럼 자신만의 진실을 갈구하며 꿋꿋이 걸어 나가는 사내에겐.” 황제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언젠가 그가 너에게도 말을 걸어올 것이다. 하지만 명심해라. 그 또한 너처럼 재앙에 맞서 싸우는 투사라는 사실을.” 힘겹게 몸을 일으킨 황제가 다시 옥좌로 쓰러졌다. 황제는 눈을 감았다. 죽진 않았지만 당분간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문득 김성철은 어느새 자신 주위에 수많은 주시자의 눈들이 위치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 이 단순한 문답으로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김성철은 황제를 남긴 채 옥좌 앞을 떠났다. “잘 있게.” 문을 열자 중무장한 수천 명의 군대가 정원 아래 진을 치고 김성철의 안을 가로 막고 있었다. 그 선두엔 총신 드리트리 메디오프가 기겁한 얼굴로 김성철을 보고 있었다. “제.. 제국 대원수. 황제를.. 황제폐하를 어떻게 한 거냐?” “걱정하지 마라. 황제는 건재하니.” 김성철은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어느 누구도 감히 그를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김성철은 유유히 걸어 허공 궁궐의 끝에 이르렀고 아래로 낙하했다. 그가 사라지기 전까지 정적에 휩싸였던 정원은 생기를 되찾고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무관! 황제 폐하를 치유하라!”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김성철은 문득 뒤를 돌아봤다. 더 이상의 불꽃은 터지지 않았다. 라그란제의 축제는 끝났다. * 추락한 공선 아래 한 사내가 신음하고 있었다. “끄으으으....” 아르큐부스. 그는 추락하는 공선에서 간신히 살아 남았다. 하지만 그는 모든 부하를 잃었고 중상을 입은 몸이다. 공교롭게도 그가 추락한 것은 그가 가장 멸시하던 8구역이었다. “누가.. 누가 도와다오.. 누가!” 그는 그토록 경멸하던 8구역의 시민들을 애타는 목소리로 찾았다. “누가.. 날 도와다오! 금화.. 금화를 주겠다. 아니 4구역의 주택을 선물하겠다! 합당한 일자리도 함께! 나는 아르큐부스 크네세폰. 내가 말하면 이 제도에선 무엇이든 이루어진다!” 하지만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그 앞에 나타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자신의 명령으로 구역의 사람들을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이미 먼 곳으로 떠난 뒤다. 그는 업보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득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개다. “…….”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르큐부스를 향해 걸어갔다. 아무개를 발견한 아르큐부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구세주라도 발견한 기분이었다. “이게 누구야. 아.. 아무개! 아무개 아니야? 우리의 선지자! 예언자! 그리고 아름다운 제국의 밤장미!” 그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입 발린 칭찬을 한 뒤 아무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런데 어째 아무개의 태도가 이상하다. 아르큐부스는 그녀의 분위기기 기이할 정도로 차갑다는 걸 발견했다. 마치 달빛을 받은 칼날처럼 말이다. “내 예지에 대한 보고는 어디까지 했지?” 아무개가 차디 찬 음성으로 말했다. “어떤 보고 말이지?” 그의 물음에 아무개는 폐허가 된 주변을 가리켰다. 아르큐부스는 그제야 아무개의 의도가 뭔지 알 수 있었다. ‘이 빌어먹을 여우같은 년. 살아서 꿈틀거리려고 내 입을 막으려드는군.’ 그는 격통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한테도 보고 하지 않았어. 네 예지를 아는 건 오직 나뿐이라는 거지. 그래. 따라서 이번 사태의 책임은 전적으로 내게 있어. 응당 내가 모든 책임을 지는 게 맞는 일이고.” “…그래?” 아무개가 냉소를 흩뿌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엔 날카로운 비수가 들려 있었다. 아르큐부스는 다급하게 말했다. “날 여기서 죽이겠다고? 이 아르큐부스 크세네폰. 아니 아르큐부스 간다르바를 왕도 라그란제의 한 복판에서 죽이겠다고?” “간다르바? 소문이 진짜였던 모양이네. 당신이 루테기네아 폐족의 후손이라는 말이.” “폐족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나라는 여전히 루테기네아의 지배하에 있다. 네가 받들어 모시는 황제조차도 진정한 왕의 가신에 불과하다.” 아르큐부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의 얼굴엔 감출 수 없는 자부심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개는 비수를 높이 들었다. 그러자 아르큐부스가 소리 높여 말했다. “몇 명의 눈이 널 지켜볼 것 같나? 날 죽여서 입을 막는다고 해도 이 모습을 지켜보는 자들이 너의 악행을 널리 퍼뜨릴 것이다.” “눈? 어디?” 아무개가 피식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폐허 밖에 남지 않은 곳엔 어떤 생명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불에 탄 채 스러진 시체 몇 구만이 휑하니 놓여 있을 뿐. 아르큐부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스스로의 업보가 스스로의 운명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비수가 아르큐부스의 목을 주저 없이 찔렀다. “끄.. 끄으으으윽......” 아르큐부스 간다르바는 그렇게 그가 가장 혐오하던 사람들을 애타게 찾으며 죽임을 당했다. 아르큐부스는 처치한 아무개는 자리에서 일어나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김성철.” 복잡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가 희미하게 그녀의 입술 틈으로 새어 나왔다. 그녀는 처음으로 의심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이 어쩌면 알려진 것과 다른 것이 아닐까 하는. 이수진은 터벅터벅 걸어 폐허가 된 거리 너머로 사라졌다. 동쪽엔 어느새 미명이 서려 있었다. 새로운 해가 다가 오고 있었다. ======================================= 62. 숲의 마녀 (1) 루테기네안 가도. 라그란제와 동부를 잇는 오래된 길에 한 사내가 느릿한 걸음걸이로 동쪽을 걷고 있었고 하늘을 나는 책 한 권이 그의 주위를 배회하며 날고 있었다. 그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김성철. 그는 또 다시 정처 없는 여행길에 올랐다. 원했던 정보는 거의 얻지 못했다. 그가 알고 있는 정보는 단 하나. 베스티아레의 새로운 영지 익시온에 관한 것에 불과하다. 나머지 3명의 영웅의 위치는 파악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김성철의 기분은 홀가분했다. 비록 죽긴 했지만 라르고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김치 부부의 건재함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황제와의 재회는 김성철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8구역에 대한 발포 명령을 내린 것은 황제가 아니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느닷없는 김성철의 분노에 직면했다. 그럼에도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못난 부하의 잘못을 전부 자신의 과오로 돌렸다. 그 점에서 황제는 예전과 달라진 점이 아무것도 없다. 어쩌면 그 동일성이 김성철의 마음을 누그러뜨린 지도 모른다. 그 이후에 나눈 대화는 지엽적인 부분으로 해묵은 감정을 재확인하는데 그쳤다. 힘의 명백한 차이를 확인한 결투는 오히려 김성철에게 씁쓸함을 안겨다주었다. 그 결과로 인해 김성철은 볼 수 있었다. 황제 또한 철저한 고독 속에 버려져 있었음을. 그것도 돌과 모래로 이루어진 사막이 아닌 믿을 수 없는 인간들로 이루어진 사막 속에서. ‘윌리엄. 넌 대체 무엇을 위해 그 자리에 있는 것이지?’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내막이 숨겨져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쩌면 김성철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명확하게 정해졌으니까. “이곳엔 눈이 내리지 않나 봐? 한 겨울일 텐데.” 베르텔기아가 책장을 펄럭거리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가도 주변엔 눈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나뭇잎 하나 없는 앙상한 가지들이 계절에 걸 맞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을 뿐이다. “라그란제 일대에 눈이 오지 않은 건 오래된 일이다.” “그래?” “여긴 따뜻한 지역이니까. 100년 전쯤에 한파가 몰아쳐 내린 적 있다고 하더군. 그 대가로 수천 명의 노예들이 동사하긴 했지만.” “흐음. 그나저나 그 황제 놈이 한 말 사실일까?” “황제 노옴?” 김성철이 베르텔기아를 약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응시했다. 베르텔기아가 말했다. “그 인간 말로 미루어보면 자기는 그냥 그 뭐라고 하나. 바지..? 바지 대장?” “바지 사장?” “대장이나 사장이나.” “대장과 사장은 엄연히 다르지.” “내 기록에 그런 은어는 기록하지 않아. 아무튼! 자기는 바지 사장 같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잖아. 실세는 방랑왕인지 뭔지 하는 인간이고.” “음...” 언젠가 전장에서 만난 미나모토란 남자도 같은 취지의 말을 했었다. 루테기네아는 최후의 전투에서 반란군을 능히 제압할 힘을 지니고 있었다고. 그때는 넘겨들었다. 반란군의 전력이 루테기네아 군에 비하면 열세라는 건 반란군에 속한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이니까. 하지만 황제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미나모토의 것과는 무게가 달랐다. 그는 절대적인 열세를 말했다. 백 번을 싸워 백 번을 질 정도의. “그 부분에 관해서는 길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김성철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앞만 보고 달려가도 부족함이 있는 현재 과거를 돌아보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자신의 할 일을 되뇌었다. ‘일단 베스티아레를 처치하고 나머지 칠영웅을 제압한다. 그 다음, 다가올 재앙에 맞선다.’ 그렇게 목표를 정하고 있자니 베르텔기아가 옆에서 다시 입을 삐쭉거렸다. “음 그나저나 라이즈 하이메르란 사람은 누구야?” 민감한 질문에 맞닥뜨린 김성철은 일순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며 딱딱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그... 그건 네가 알 거 없다.” “여자 맞지?” 베르텔기아가 김성철 얼굴 가까이 다가오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김성철은 다시 한 번 딱 잘라 말했다. “알 거 없다니까.” “흐으으으으음.....”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얼굴 측면에 닿을 듯 말듯한 거리에서 이상한 소리를 계속해서 냈다. “차인 거 같던데.” “창고에 들어가고 싶나?” 참다못한 김성철이 한마디 하자 베르텔기아는 혼비백산 뒤로 달아나며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농담이야. 농담. 그나저나 당신 놀리는 재미가 있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부터 골려먹을 걸 그랬어.” 베르텔기아가 점점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존재가 되고 있다. 김성철은 여간한 강적보다 베르텔기아가 까다롭다는 사실을 슬슬 인정하고 있었다. ‘이 녀석. 정말로 창고에 넣어 버릴까? 하지만 창고에 넣으면 삐져서 말도 안 들을 건데.’ 게다가 아마도 영혼석도 파업을 일으킬 것이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카벙클들의 정신감응으로 알 수 있었다. 카벙클은 베르텔기아가 옆에 있다는 전제 하에서 김성철의 말을 들으므로. 귀찮다고 베르텔기아에게 밥값을 시킨 것이 화근이었다. 물론 영혼석을 쓰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김성철은 영혼석을 포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영혼석의 편리함과 멋짐에 이미 눈을 떴기 때문에. “페어리 라이트.” 땅거미가 졌을 때 여러 개의 페어리 라이트를 등 뒤에 달고 다니는 건 김성철의 새로운 취미였다. 하지만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이 좋아하는 것들을 대부분 기겁을 한다. “으.. 정신 사나워.” “창고에 들어가면 정신 안 사나울 게다.” “창고는 싫다고! 안 그래도 들어가기 싫은데 그 미친 네크로맨서의 상자까지 넣고 다니니 더 들어가기 싫다고!” 베르텔기아의 말대로 김성철은 피비 캔버스가 들고 다니던 사람의 목을 넣을 수 있는 상자를 획득해 영혼창고에 넣어놓았다. 영혼창고 속에서도 사람의 목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히 보전할 수 있는 기능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는 상자를 깨끗이 씻어 그것을 일종의 도시락통으로 재활용하리라 생각했다. 물론 이 생각에도 베르텔기아는 기겁했다. “그나저나 오늘도 노숙이야? 노숙은 이제 정말로 싫은데. 따뜻한 불빛과 이불이 있는 사람의 향기가 나는 곳이 그리워.” 베르텔기아가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페어리 라이트 사이를 유영하며 툴툴 거렸다. 김성철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라그란제를 떠난 지 벌써 일주일 째.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루테기네안 가도를 걸으며 민가는 구경도 못했다. 도시를 몇 개 지나치긴 했지만 이미 거신의 발호로 인해 모두 박살난 상태. 선량한 사람은 모두 떠나고 도적들만 우글거리는 폐허에 김성철이 들어갈 이유는 없었다. 침낭에서 자는 건 고통스럽지 않았지만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는 것은 김성철에게 크나큰 고통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건 그 파파르파라는 엘프 놈의 요리가 마지막이었군.’ 피난민이 몰려오면서 먹을 만한 작물을 모두 털어간지라 허허벌판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요리를 할 여건이 아닌 것이다. 아무래도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어디보자.’ 김성철은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인근 지역을 생각했다. 플라이는 이런 시점에서 내려다보면 자기가 어디쯤 있는지 알기 훨씬 수 있는 훌륭한 마법이었다. 높은 상공에서 지면을 확인하기 수월해지니 말이다. 땅거미가 지고 있어 전체적으로 흐릿하긴 했지만 아직 서쪽에 미명이 서려 있는지라 김성철은 인근의 지형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동쪽으로 길게 뻗은 루테기네안 가도 측면에 울창한 숲이 자리 잡은 게 보였다. 그 숲을 본 김성철은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추억을 떠올렸다. ‘으음.. 하필이면 저 숲이 가까이 있군.’ 김성철과는 악연이 있는 숲이다. “앗. 저 숲. 저기라면 당신이 좋아하는 그 ‘식재’라는 게 가득 있지 않을까?‘ 뒤늦게 책장을 펄럭여 김성철 옆으로 다가온 베르텔기아가 숲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덥썩 붙잡아 아래로 강하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런 숲은 가면 안 된다.” “왜?” “저기엔 그다지 좋지 못한 사람이 살거든.” “누가? 황제 놈보다 나쁜 놈이야?” “황제 놈 황제 놈 하지마라.” “그럼 누가 사는데? 호문클루스 아줌마?” “그 숲이 뭐라고 불리는지 아나?” 그와 동시에 김성철을 베르텔기아와 함께 바닥에 사뿐히 착지했다. 베르텔기아가 물었다. “뭐라고 부르는데?” 그녀의 물음에 김성철은 어딘가 껄끄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령 들린 숲.” 그곳엔 무시무시한 마녀가 살고 있다. 그것도 김성철과 인연이 있는 마녀가. 그 마녀는 김성철에게 하나의 저주를 걸었고 그 저주는 김성철의 상태창 한 구석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 저주 ] 유령 들린 숲의 마녀 아델화이트의 평범한 저주(힘 -5, 발기부전의 저주) 김성철은 오랜만에 떠오른 상태창에 걸린 해묵은 저주를 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시각, 숲의 모처. 고깔처럼 뾰족 솟은 차양을 쓴 여자가 기괴한 웃음을 흘리며 수정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수정구 안엔 하늘 위에 높이 솟아 아래를 관측하는 김성철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얼굴을 확인한 여자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서렸다. “어머. 이게 누구야?” 마녀의 눈이 반짝였다. * “아델화이트? 흐음. 마녀다운 이름은 아니네.” 식욕은 두려움보다 강하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와 함께 유령 들린 숲의 끝자락에 들어섰다. 잠깐만 식재를 채취하고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김성철은 숲의 마녀가 결코 만만치 않은 존재라는 걸 알고 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그 악명 높은 루테기네아 왕국조차 포기한 미친 여자다.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지.” 숲의 마녀 아델화이트는 그다지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대륙십삼걸의 말석을 차지한 상인왕 호르네코 총독의 이름을 알아도 아델화이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아델화이트에 대해 조사한 사람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왜냐하면 그 이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에서도 똑똑히 기재되고 있으니까. 물론 2천 년 전에 기록된 아델화이트와 현재의 아델화이트가 동일인이라 믿는 이는 아무도 없다. 마녀들이 하나의 이름을 전승하여 이어나가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니 말이다. 그렇다고 하나 현 아델화이트가 만만하다는 건 결코 아니다. 숲 전체를 지배하는 그녀는 불가사의한 마법과 그리고 무엇보다 무시무시한 저주의 능력으로 자신의 적들로 하여금 감히 적대할 생각을 품지조차 못하게 만들었다. 유령 들린 숲을 개간하려던 루테기네아의 영주가 저주를 받아 역병 들린 고자가 되어 처참하게 죽었다는 것은 지금도 남아 있는 생생한 기록이다. “아무튼 여기서부턴 입조심 하는 게 좋다. 그 여자의 귀는 대단히 밝으니까.” 하지만 등 뒤에 정신 사나운 페어리 라이트 3개를 달고 다니는 남자가 그런 말을 하면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베르텔기아는 건성건성 대답했다. “네에.” 어둠에 싸인 숲속 안엔 과연 김성철이 찾는 식재가 널려 있었다. 김성철은 개울이 흐르는 시내에서 가재와 송사리를 발견했고 낙엽 속에서 자라고 있는 버섯 또한 발견했다. 김성철은 좀 더 주변을 돌아 왕 산 닭을 발견했다. 크기가 크고 맛이 뛰어나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엔 씨가 말랐지만 소환궁전 주위나 유령 들린 숲 같은 위험한 곳엔 당당하게 숲의 골목대장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꼬꼬!” 김성철은 날개를 펴며 몸을 부풀려 위협하는 왕 산 닭을 가볍게 포획하고 달걀 몇 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따뜻한 달걀을 하나 까서 입에 털어 넣으니 고소한 게 맛이 아주 그만이다. “으웩. 그걸 날 걸로 먹어?” 베르텔기아는 이번에도 기겁을 했다. 반면 김성철은 유령 들린 숲에 잘 왔다고 생각하며 숲을 떠날 채비를 했다. 여기엔 식재를 구하러 온 거지 요리를 하러 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숲의 마녀는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니 눈에 띄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서둘러 숲을 빠져 나가던 김성철은 그러나 숲의 마녀의 눈에 포착되고 말았다. 원인을 제공하는 것은 그가 좋아하는 페어리 라이트였다. 정신 사납게 회전하는 3개의 불빛은 좋은 표적이었다. “어딜 그렇게 도둑고양이처럼 조용히 지나가시나요?” 김성철 앞에 빗자루를 탄 마녀가 쏜살같이 지나가 높은 나뭇가지 위에 사뿐히 올라서서 김성철을 굽어보았다. “오랜만에 왔으면 우리 집에 한 번 들려야죠.” 숲의 마녀 아델화이트가 나타났다. 아델화이트 뒤에 작은 그림자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진짜 대원수님인 거예요!” “오랜만인 거예요!” 호문클루스와 비슷한 크기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 진짜 요정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62. 숲의 마녀 (2) 오랜만의 목욕이다. 라그란제에선 제대로 목욕을 하지 못했다. 그곳에도 공중목욕탕이 있긴 했지만 시설이 너무 좋지 않았고 그다지 질이 좋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김성철은 기억한다. 그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8구역 사람들의 시선들을. 그들로선 아무 의미도 없는 행동이었을지도 모르겟지만 김성철에겐 그런 시선이 뼈아팠다. 그는 고개 숙인 남자이기 때문이다. “…….” 김성철은 욕조 안에 둥둥 뜬 황금오리를 멍하니 보다가 탕 안에서 일어났다. 숲의 마녀가 준비한 유치찬란한 반짝이가 달린 나이트가운을 차려입고 홀로 가자 맛있는 향기가 풍겨 왔다. “어머. 여전히 위풍당당하고 늠름한 모습이네요.” 숲의 마녀 아델화이트는 요정들과 함께 식탁 위에 앉아 있었다. 각각 하얀 색과 자주색의 옷을 입은 요정들은 김성철에게 손짓하며 미소로 반겼는데 그 요정들 사이엔 못 보던 금테를 두른 베르텔기아가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을 보자 거만하게 말했다. “어서 와. 이렇게 좋고 훌륭한 곳을 놔두고 왜 그냥 가려고 한 거야? 혹시 이 선량하고 훌륭한 분들에게 죄 지은 거라도 있어?” “…….” 김성철은 말없이 식탁에 착석했다. 식탁 위엔 마녀가 차린 진수성찬으로 가득했다. 김성철은 그중 아까 잡은 산 왕 닭으로 만든 훈제 다리를 잡고 입안에 넣었다. [ 이 요리의 점수는... 91점! ] [ 이 정도는 되어야 미식의 제왕인 나를 만날 자격이 있다 할 것이다! ] 90점에 달하는 점수. 김성철이 단 한 번도 달성하지 못한 경지다. 아델화이트는 깔깔 웃으며 자신의 상의에 붙은 브로치를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그녀의 브로치는 무려 다이아몬드 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 김성철의 표정은 맛과 별개로 썩어 들어갔다. ‘역시 이런 곳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아델화이트는 겉보기엔 나이를 알 수 없는 여자였다. 어떻게 보면 십대 후반의 소녀처럼 보이기도 했고 또 어떻게 보면 40대의 원숙미가 넘치는 귀부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때그때 용모가 바뀐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그녀에겐 두 마리의 작은 동료가 있었다. 호문클루스가 아닌 진짜 요정들이다. 정령계에서만 산다는 이 귀한 요정들의 이름은 각각 카프와 르로 유쾌하고 밝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자신들을 카피한 호문클루스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라그란제 옆동네에 호문클루스 아줌마라는 사람이 있는데. 어휴 말도 마. 그 이상한 놈이 어떤 짓을 하냐면 야생 호문클루스를 잡아와서 그걸 푹 고아 스프를 만드는 게 아니겠어?” 베르텔기아는 두 요정들 사이에서 모처럼 으스대며 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우와. 정말 무서운 거예요!” “호문클루스 아줌마는 어떻게 생긴 거예요?!” 베르텔기아가 종이 위에 자신의 장기 중 하나인 그림을 그릴 동안 김성철은 묵묵히 배를 채우고 있었다. 건너편에 앉은 아델화이트의 시선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인 법이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난 후 아델화이트가 입을 열었다. “거긴 어때요? 안서도 살만해요?” “…그럭저럭.” 아델화이트와 알게 된 지는 20년도 더 되었다. 아직 초보자 티를 벗지 못했던 시절, 그는 재수 없게 유령 들린 숲에 들어섰고 악명 높은 마녀와 만난 것이다. 다행히 소문의 마녀는 소문처럼 악랄하지 않았다. 그녀는 김성철을 환대했고 그 이후로는 간간히 왕래를 이어가며 지내왔다. 발기부전의 저주를 걸어달라고 부탁한 것도 김성철 본인이었다. “응? 그러고 보니 마녀님은 어떻게 안 거야? 우리 세계의 적이 그.. 그... 그거라는 거?” 호문클루스 아줌마의 초상화를 그리던 베르텔기아가 불쑥 물었다. 곤란한 상황이다. 김성철은 주제를 바꾸기 위해 포크를 일부러 떨어뜨렸다. “어이쿠!” 그러나 그의 노력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 이 그거? 좋아하는 여자한테 차이고 정신이 나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그만 꽃뱀에 물리...” “꽃뱀?” “어험!” 김성철이 강하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아델화이트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피식 웃더니 베르텔기아에게 윙크했다. “뭐, 그런 사정이 있었단다. 책 아가씨.” “어머, 마녀님은 내가 아가씨라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네?” “당연하지. 예전에도 너와 닮은...” “응?” “아. 실수. 사실은 마법의 힘으로 살짝 널 들여다 봤지.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아델화이트는 베시시 웃으며 다시 시선을 김성철에게 돌렸다. “원한다면 풀어줄게. 그 저주.” “…….” 김성철은 그답지 않게 고민하는 눈치였다. 베르텔기아는 가만히 있다가 이윽고 다시 그림을 그려나갔다. 곧 그녀의 화폭 안엔 흉악한 호문클루스 아줌마란 사내가 나타났다. 그걸 본 요정들은 깜짝 놀라며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정말 무섭게 생긴 거예요!” “꿈에 나올까봐 무서운 거예요~!”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시간을 흘러갔다. 곧 김성철은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으음. 당장은 필요 없을 것 같군.” 솔직히 쓸 데도 없다. 김성철은 그렇게 느끼며 가만히 생각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현재의 나는 그야말로 스님 아닌가? 누군지 몰라도 날 죽인 놈은 내 몸 안에서 사리 두어 개 정도는 발견할 수 있겠지.’ 한편 그의 대답을 들은 아델화이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왜?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직도 못 만난 거야?” “만날 수도 없지.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모르진 않을 텐데?” “세계의 적이라고 불리는 건 알고 있어.” 아델화이트가 손을 들어 손가락을 한 차례 튕겼다. 그러자 요정들이 요정용 의자에서 일어나 마룻바닥에 사뿐히 착지했다. 요정들은 베르텔기아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마녀님께서 대원수님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나 봐요.” “우리는 우리끼리 우리의 방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거예요.” 베르텔기아는 계속 있고 싶은 눈치였지만 마녀와 김성철 사이에 흐르고 있는 미묘한 분위기를 느끼고 이내 요정들의 뒤를 따랐다. 베르텔기아 일행이 총총 사라지자 아델화이트는 미려한 손짓으로 허공을 내저었다. 식탁 위에 있던 진수성찬들이 갑자기 사라지며 대신 따뜻한 차와 다과가 나타났다. 뜨거운 물이 담긴 주전자를 마치 스스로 생명을 가진 듯 저절로 움직여 아델화이트와 김성철의 찻잔에 향긋한 차를 따랐다. 아델화이트는 차를 한 모금 음미할 때 김성철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또 그때 그 제안을 다시 하려고 하는가?” 아델화이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벌써 13번째 퇴짜를 맞았지만 다시 한 번 제안할게.”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별빛 같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이 숲은 고대신과 질서신의 축복을 골고루 받은 곳. 바깥의 재앙도 숲의 주민을 해할 수 없어. 그러니 바깥의 재앙일랑 잊고 나랑 같이 사는 건 어때?” 평범한 사람 아니 난세의 영웅이라 불리는 사내에게조차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리라. 아름답고 현명하며 헌신적인 마녀와 함께 단 둘만의 정원에서 일생을 함께 하는 것은. 하지만 김성철은 아델화이트란 여자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델화이트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그녀는 불사조처럼 죽음과 환생을 반복하며 유구한 세월을 살아 왔다. 따라서 그녀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담을 수 없다. 영겁의 세월을 살아온 그녀에겐 모든 것이 식상하며 반복적인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사랑도 예외는 아니다. 찰나의 관심을 사랑으로 포장한다면 그럭저럭 그림이 그려질지도 모르겠지만 모든 것을 김성철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그의 대답은 변하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사양하겠어.” 아델화이트는 그의 대답을 예상이라도 한 듯 별 다른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과 하나를 집어먹고는 얕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이번엔 솔직히 기대했는데. 10년 넘게 여자 구경도 못하면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길 줄 알았지!” “할 말이 없군.” 김성철은 껄끄러움을 느꼈다. 사실 아델화이트는 보기와 다르게 대단히 속이 좁다. 측정 불가능한 연륜이 있다 보니 겉으로는 일체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사사로운 원한을 결코 잊지 않으며 반드시 되갚는다. 그것이 그가 숲의 마녀를 보지 않으려던 이유였다. 만나게 되면 같은 질문과 답변을 반복하게 되고 쓸데없는 원망을 또 얻게 되니 말이다. 그리고 혹처럼 따라오는 귀찮은 재앙은 덤. 김성철은 몇 번이고 아델화이트에게 골탕을 먹은 적이 있다. 며칠 동안 미각을 느끼지 못했던 저주는 지금까지 그가 받은 저주 중 가장 무서운 저주였다. 오죽하면 각종 저주를 주렁주렁 훈장처럼 달고다니는 그가 기겁해서 풀어달라고 찾아올 정도였으니. 그런데 오늘의 전개는 평소와 달랐다. 아델화이트는 진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야? 그 여자애를 살리기 위해 계속해서 재앙을 해결할 거야?” 김성철은 찻잔을 흔들며 그녀를 응시했다. 다행히 별 다른 뒤끝은 없어보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 그 여자, 복도 많지. 내가 찍은 두 남자의 마음을 모두 가지고 가다니.” “…….” “아니.. 가만 생각해보니 사실은 그게 아닌 거 아니야?” 아델화이트가 뭔가 떠올린 듯 눈을 반짝였다. 김성철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물었다. “뭘 생각하는 거지?” 그러자 아델화이트는 김성철의 눈치를 살피며 너스레를 떨어댔다. “당신 설마... 어린 여자 취향?” “헛소리.” 김성철은 강하게 부정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델화이트는 실실 웃으며 계속 말했다. “아니, 걔도 그렇고 이번에 데리고 온 애도 그렇고. 항상 데리고 다니는 게 어린 여자애들이잖아.” “이번에 데리고 온 것은 책이지.” “그건 맞네. 책은 책이지. 뭐....”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알겠는데 이상한 소리는 그만둬줬음 좋겠군.”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고는 차를 후루룩 들이켰다. 잠깐 동안 테이블엔 침묵이 흘렀다.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김성철은 어둠에 싸인 겨울 숲을 무심한 눈으로 보며 찻잔을 기울였다. “아무튼 그 책하고 조금 친한 거 같더라? 적은 많고 친구는 거의 없는 당신답지 않게.” 아델화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은 녀석이야. 쓸모도 많고.” 김성철은 솔직히 베르텔기아에겐 고마워하는 마음을 은연중에 지니고 있었다. 이제 와서는 상상도 하기 어렵다. 그 녀석이 없는 여정이. 그 전까지 어떻게 홀로 8년이라는 시간을 버텼는지 자신이 대견할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배성혜 덕분에 그 녀석을 얻었었지.’ 배성혜 본인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김성철은 은연 중에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라그란제에서 김치 부부를 위해 발품 벗고 나선 것도 어쩌면 그런 고마움이 근저에 깔려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회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아델화이트가 자신의 차양을 만지작거리며 불쑥 입을 열었다. “나, 전에 그거랑 똑같은 책을 본 적이 있어.” 김성철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베르텔기아와 같은 책을?” “응. 걔하고 똑같은 리빙북을 말이야.”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김성철은 후두부를 둔기 얻어맞은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가로저어다. “그럴 리가. 그건 불가능하다.” “겉모습만 같다면 모르겠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그 책엔 대단히 복잡한 술식이 걸려 있잖아? 시간과 공간, 물질 모든 것을 잇는 천재적인 발상이. 세상이 온통 검은 잿더미에 덮여 있을 때부터 살아온 나조차 처음 보는 발상이었어. 그러니 당연히 기억하지.” “잘못 봤겠지. 저건 책의 모습을 한 사람이야.” 김성철은 차를 음미하며 단언했다. 아델화이트는 그런 김성철의 태도를 눈 여겨 보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스스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책일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 책을 가진 사람이 누구라는 거지?” 김성철의 목소리엔 감정이 섞여 있었다. 좀처럼 보기 드문 모습이다. “5년 전 쯤에 본 걸로 기억해. 풋내기 모험자였어. 당신과 같은 소환자였지. 뭐, 전도유망한 소환자를 초대하는 건 내 오랜 취미라는 거 당신도 알잖아?” “…….” “안타깝게도 3년 전 쯤에 유적을 탐사하다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당신처럼 강하지 않았거든.” “그 책은?” “불에 타 없어졌어. 조금은 후회했지. 그럴 줄 알았다면 그 책을 훔치던지 구입하던지 해서 개인적으로 뜯어볼 걸 그랬는데.” “…그다지 신빙성은 없는 이야기군.” “그냥 하는 이야기지. 아무튼, 여기 온 김에 점이나 보고 가는 건 어때?” 아델화이트는 김성철이 불편해하는 걸 보고 주제를 바꿨다. “점이라...” 아델화이트는 스스로를 평범한 마녀라고 말하고 있지만 왕과 제후들은 알고 있다. 유령 들린 숲의 마녀 아델화이트의 진가는 저주도 마력도 아닌 미래를 보는 눈에 있다고. 알려진 대로 그녀는 미래를 본다. 어떤 사람과 함께한 물건을 통해. 비록 그것이 대단히 추상적이고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다고 해도 기억에 남은 장면 하나하나를 조합해서 만들어내는 예측은 대단히 정확하다. 그녀는 루테기네아 왕국의 멸망을 예언했고 나아가 김성철의 세계의회 이탈도 예언했다. 김성철은 보통 예언을 믿지 않지만 아델화이트의 능력은 어느 정도 신뢰하고 있다. 예언에 구속되진 않더라도 앞으로의 향방에 어느 정도 참고할 수는 있으리라. “얼마나 걸릴까?” “일주일 정도? 길면 한 달 정도 걸릴 수도 있어.” “그건 너무나 긴데.” “정령계로 통하는 문을 열어줄게. 간만에 그 아이에게 인사나 해둬. 앞으로 당신이 할 일이라는 거, 얼마나 위험한지 자신이 잘 알잖아?” “…….”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영혼창고에서 팔 가라즈를 꺼냈다. “이걸 맡기지.” ======================================= 63. 정령계 (1) 정령계. 세상 틈바구니 어딘가 존재한다는 전설의 땅. 그곳은 세상에 자취를 감춘 요정들의 마지막 안식처다. “우와. 여기가 정령계야? 말로는 들었지만.. 진짜 장난 아닌데?” 베르텔기아는 넋을 잃고 압도적인 정령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그곳은 이상적으로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못난 게 없었고 각자 최선의 아름다움을 뽐내면서도 다른 것들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유연한 또한 지니고 있었다. 갖가지 들꽃이 핀 신녹색의 초원 너머엔 청녹색의 나무들이 아담한 숲을 이루고 그 너머엔 머리에 하얀 눈을 쓴 깎아지른 산이 솟아 봉우리 사이사이 흘러다니는 구름을 이고 있었다. 하지만 정령계의 멋짐은 단순한 풍경의 아름다움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몇 가지 물리법칙이 무시된 그 환상의 세계엔 하늘을 가로지르는 시내가 있다. 총천연색의 초원과 숲과 산 너머를 완만한 아치형으로 가로지르는 허공의 강안엔 만발한 꽃보다 다채로운 색채의 기상천외한 물고기들이 물속을 노닐며 보는 이의 눈을 현혹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터무니없을 정도로 맑고 푸른 하늘은 이 모든 풍경을 영원한 것으로 만든다. ‘8년만인가. 아니 9년만이지.’ 김성철은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색채로 어우러진 정령계의 풍광을 무심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곳이다. 하지만 김성철은 잊지 않는다. 그곳이 인간의 영역이 결코 아니며 따라서 오래 머물 곳 또한 아니라는 사실을. 벌써부터 김성철의 기척을 느끼고 정령계의 적대적인 정령들이 먼 곳에서 몸을 숨기고 나타나 김성철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프리트, 운디네, 진 등등 한때는 일부 지역 사람들에게 토속신으로 추앙받았지만 지금은 철저히 잊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정령들은 대부분의 힘을 잃고 이곳 정령계에서 쓸쓸한 만년을 보내고 있다. 인간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다. “이쪽으로 오는 거예요. 대원수님.” “오랜만의 정령계는 어떤 거예요?” 아마도 카프와 르, 두 명의 요정이 김성철 옆에 없었다면 벌써 공격을 해왔을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숨어서 자신을 응시하는 정령들을 보며 생각했다. ‘그땐 애먹었지만 지금은 어떨까. 아마도 모두를 합친다고 해도 내 상대는 아니겠지.’ 그렇다고 하나 실체도 없는 정령들과 싸워봐야 아무 득도 없다는 건 누구보다 김성철 본인이 잘 안다. “어서 안내해라. 요정들.” 김성철은 서둘러 요정들의 뒤를 따랐다. 김성철 일행은 설산 사이로 난 녹색의 평탄한 계곡을 쭉 걸어갔다. 요정들은 하늘에 걸린 강의 발원점에서 출발해 그 끝으로 가고 있었다. 과연 목적지에 가까이가면 갈수록 버섯으로 지은 앙증맞은 요정의 집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베르텔기아는 대단히 신이 난 눈치였다. “우와. 너희들은 버섯 속에서 살아?” “게으른 요정들은 버섯을 파 집을 만드는 거예요. 하지만 부지런한 요정들은 인간 같은 집을 짓기도 짓는 거예요.” 과연 버섯 집 몇 채를 지나자 제법 그럴 듯 하게 만든 목조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요정의 크기에 맞춰 지은 거라 김성철이 들어갈 수는 없었다. 단순한 면적으로 치면 요정보다 조금 더 큰 베르텔기아는 몸을 축소해 요정들의 집을 방문했다. “뭐.. 뭐인 거예요! 꺄악! 이상한 책 괴물이 침입한 거예요!” 엄밀히 말하자면 무단침입이었지만. 베르텔기아는 뻔뻔한 아이답게 죄를 짓고도 딴소리를 해댔다. “요정들은 검소하게 사는 모양이네. 기념품으로 들고 갈 게 하나도 없어.” “…….” 그러는 동안에도 하늘에 걸린 강의 끝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지평선 너머에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나무의 꼭지를 발견했다. 지평선 끝에 걸쳤음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인 크기가 그것이 지닌 거대함을 충분히 연상케 한다. 베르텔기아는 책장을 격하게 파닥거렸다. “우와. 저게 뭐야? 설마.. 저거... 말로만 듣던 전설의 세계수?!” 에크하르트의 딸답게 그녀는 한 눈에 나무의 이름을 맞췄다. “그렇다. 저것이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세계수 안델리카다.” 한때 대륙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는 세계수는 모두 시들고 죽어 이제는 더 이상 대륙에서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 세계수는 요정들의 땅에 남아 있었다. 언젠가 김성철이 알투지우스에게 건넨 세계수의 수액은 바로 이곳에서 구한 것이다. 어느덧 세계수는 억만 개의 줄기로 이루어진 붉고 거대한 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서 또 다른 장관이 펼쳐졌다. “우와.” 홍학을 닮은 수만 마리의 새가 떼지어 세계수 너머로 날아가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깃털 하나가 바람을 타고 김성철에게 날아왔다. 김성철은 조건반사적으로 깃털을 잡고 그곳을 응시했다. “운이 좋은 거예요. 정령계에 돌아오자마자 천년 기러기의 깃털을 얻은 건!” “천년 기러기의 깃털은 여간하면 빠지지 않아 정말 구하기 어려운 거예요! 우리 요정들도 백 년에 한 번 얻을까말까한 귀중한 물건인 거예요!” 요정들이 호들갑을 떨며 김성철의 손 안의 깃털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러자 시큰둥하던 베르텔기아가 반응을 보였다. “흠, 그 깃털. 내 표지에 장식하면 아주 그럴 듯 하겠는데?” 요정들의 손길에 금테를 두른 이후 베르텔기아는 아무래도 여자아이로서의 치장 욕구에 눈을 뜬 것 같았다. 하지만 김성철은 쉽게 깃털을 넘길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요정들에게 귀한 건 자기에게도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성철은 자신의 영혼창고 깊숙이 잠들고 있는 요리사의 모자에 이 깃털을 달리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정말 마음에 드는데. 그거?” 그러나 베르텔기아의 탐욕은 끝이 없다. 그녀는 김성철 눈앞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처럼 불쑥 나타나 시야를 막더니 김성철의 손에 들린 천년 기러기의 깃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뭐하는 짓이냐. 베르텔기아.” “정말 마음에 들어. 그거. 내 가죽에 붙여놓으면 나의 세련됨이 두 배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이야.” “쓸데없이 크기만 한 네가 멋을 부린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책의 가치는 정장에 쓴 가죽이나 종이의 질이 아닌 종이에 쓰인 글의 내용에 따라 결정되는 거다.” “난 최고의 책이니까 내용은 뭐 굳이 말할 필요가 없지. 당신도 알잖아? 그러니 조금 더 권위를 실어주자는 거지.” 베르텔기아는 좀처럼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물론 김성철도 깃털을 남길 마음 따윈 하나도 없었다. 그는 정령들이 숨어서 지켜보는 가운데 깃털 하나 가지고 얄궂은 책과 드잡이질을 하는 건 자신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 생각하고 여기서는 일단 절충안으 내놓았다. “이건 내가 가지고 나중에 세계수 아래를 훑어보자고. 액면으로 본 것만 3만 마리가 넘어 보였는데 잘 찾아보면 깃털 두어 개 정도는 있겠지.” “흐으으으으으음......”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제안이 대단히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김성철의 어깨 위에 올라 타 계속해서 이상한 소리를 냈다. 참다못한 김성철이 한마디 했다.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흐으으으으음...” 베르텔기아는 여전히 못 마땅한 눈치다. ‘이 녀석이 정말. 어린애 아니랄까봐 내가 방금 얼마나 중한 말을 했는지 이해 못하는 모양이군.’ 김성철은 짐짓 모른 척하고 발걸음을 부지런히 넘겼다. 조금이라도 빨리 세계수에 가야 베르텔기아의 입을 닫게 하리라는 계산이 서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르텔기아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래 담보, 담보가 필요해.” “담보?” 김성철은 이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느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정령들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방심하고 있자니 베르텔기아가 기습적으로 김성철의 코트 자락 안으로 파고 들었다. “아니, 이놈이!” 김성철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베르텔기아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 챘기 때문이다. 베르텔기아는 책장과 그리고 숨겨놓은 책실을 혓바닥처럼 놀려 김성철이 애지중지하는 브로치를 풀고 있었다. 전에 한 번 당한 수법인지라 이번에는 순순히 당하지 않았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급히 떼어놓았다. 브로치는 건재했다. 베르텔기아는 아쉬운 듯 책실을 날름거리며 책장을 오므렸다 펴며 입맛을 다시는 걸 행동으로 표현했다. “쩝.” “…….” 뒤에서 정령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김성철이 방금 꼬락서니가 대단히 웃기게 보였던 모양이다. “부수는 자도 한 물 갔군. 전에 왔을 땐 손가락만 얹어도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칼날 그 자체와 같은 분위기를 풍겼는데.” “그게 인간의 약함이라는 거지. 애초에 유한한 생명을 살게 운명 지어진 만큼 금방 시드는 거지. 이 땅에 피고 지는 꽃처럼.” 뒤에서 정령들의 조롱이 들려왔다. 베르텔기아는 그제야 그들의 뒤에 미행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았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짙은 청록색의 숲속 안에 기이한 형체가 어른거리는 것만 보일 뿐. “저건 뭐야?” 베르텔기아가 호기심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정령들이다. 한물 간 족속들이지.” “아.. 저게 그 정령? 정령은 내가 살 때에도 없었는데.” “재앙이 다가오면 세상의 생명력은 고갈 되어 정령들이 터 잡아 살 수 있는 곳이 없어져버리거든.” 김성철도 정령들에게 들은 이야기다. 정령이 어떤 식으로 사는지는 김성철도 자세히 모른다. 아무튼 깃털 분쟁은 김성철이 양보하는 걸로 끝이 냈다. 어른답지 못한 일이라고 김성철이 한 발 물러선 것이다. 신이 난 베르텔기아의 콧노래를 들으며 김성철 일행은 세계수 아래에 이르렀다. 바로 앞에서 본 세계수는 그야말로 하늘에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높고 거대했다. 하늘에 걸린 강은 세계수 아래에 화사한 색채를 품은 물고기를 품은 물은 세계수 아래에 떨궈 놓았다. 세계수 근 처는 마치 커다란 연못처럼 수량이 풍부했고 수많은 생명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끼 낀 고목 아래에서 요정 하나가 나타났다. 다른 요정보다 조금 더 크고 하얀 수염이 달린 게 두드러진 차이점이었다. “오. 부수는 자여 오랜만이군.” 그 노인의 정체는 이곳 정령계들의 모든 요정들을 이끄는 장로였다. 달리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억겁과 같은 세월을 정령계에서 살아오며 이미 그 이름은 잃은 탓이다. 요정 자체가 자신의 이름에 연연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장로는 오랜만에 나타난 김성철을 환대했다. “9년 만인가? 놀랍군. 딸을 보러 온 건가?” 장로의 말에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고 있는가 말이지.” “그 아이라면 잘 지내고 있어. 세계수의 기운을 받으며 영원한 꿈속을 거닐고 있지.” “기대되는군.” 그 말을 들은 베르텔기아도 기대에 부풀었다. ‘아, 드디어 말로만 듣던 그 뻐꾸기 새끼를 보게 되는 구나! 어떻게 생겼을까?!’ 장로는 느릿한 발걸음으로 김성철 일행을 세계수 안쪽으로 안내했다. * 덩그러니 놓인 팔 가라즈 옆 주위엔 이 세상 어느 마법사도 감히 흉내내지 못하는 고대의 마법진이 펼쳐져 있었다. 숲의 마녀 아델화이트. 그녀는 어떤 이의 물건을 통해 그 사람의 성격과 과거는 물론 미래까지 점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팔 가라즈는 김성철이 세계의 적이 된 이래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신물. 김성철이란 인물의 미래를 들여다보기에 그것보다 좋은 도구는 없다. 그런데 아델화이트는 팔 가라즈라는 거울 속에서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광경을 보았다. 그녀의 예지라는 것은 단편적인 미래의 장면을 보고 그 장면을 나름의 논리와 유추로 끼어 맞추는 것인데 지금 그녀 앞에 펼쳐진 장면들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도 하나로 뭉칠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것들이었다. ‘대체, 뭐지?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녀가 미래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 자신이 미래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는 신에 의해 보호 받는 숲속에서 불멸의 삶을 누린다. 어느 누구도 그녀를 해할 수 없고 그녀의 평온을 깨뜨릴 수 없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겐 공포스런 미래도 남의 일처럼 찬찬히 시간을 들여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그녀 앞에 나타난 화상들은 불멸의 삶을 지닌 그녀에게도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무개가 보았던 것과 같은 광경을 보았다. 무수히 널린 백골 위에 우뚝 선 검은 거인의 모습을. 하늘은 불타고 있고 땅은 허물어져 간다. 그리고 거인은 아직 푸르름이 남은 대지를 향해 걸어갔다. 시종처럼 따르는 일곱 재앙의 무기를 거느린 채. ‘이건 정례적인 재앙 따위 수준이 아니야... 이건... 재앙 너머의 진정한 재액(災厄). 신이 죽은 이후에 이 땅에 운명 지어진 저주야...!’ 공포로 물들어가는 아델화이트의 눈동자에 다른 장면이 나타났다. 그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베르텔기아라는 이름을 지닌. 같은 시각, 김성철은 정령계에 놔두고 온 자신을 움직이게 만든 소중한 사람 앞에 서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저.. 저게 뭐야?’ 김성철이 지키려고 했던 여자아이는 세계수의 뿌리 옆에 잠들어 있었다. 흙과 먼지에 덮인 채 마치 고목의 일부분처럼. 그녀의 몸 여기저기엔 누에에 핀 꽃을 연상케 하는 기이한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김성철은 그 아이에게 다가 무릎을 굽히고 부드럽게 딱딱한 뺨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말 몇 마디를 건넸다. 하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는 베르텔기아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저 아이... 이미 죽었잖아.’ 하지만 차마 말로 할 순 없었다. 현실을 가르쳐 주기엔 김성철은 너무나도 애틋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 63. 정령계 (2) 하루 밤 만에 멸망한 나라의 수는 꽤나 많다. 창조는 파괴보다 어려운 법이니. 하지만 하루 밤 만에 건설된 나라의 전례는 일찍이 없었다. 익시온. 왕립 마법학교를 건립해 양질의 마법사를 다수 배출한 것 이외엔 그다지 이름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흔한 동부의 군소국 중 하나에 불과했다. 거신에 의해 왕국과 도시가 짓밟히고 왕마저 죽었을 때 왕국의 운명은 종언을 고했다고 모두가 생각했지만 그 나라는 불가사의한 힘에 다시 일어섰다. 베스티아레라는 재앙의 여인과 도시를 파괴한 거신의 권능에 의해. “새로운 익시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래된 건 아무것도 없고 오직 새로운 것만이 있는 도시에서 당신은 다른 이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도전하세요. 그리고 쟁취하세요. 아직 이 도시가 무인지경의 상태에 있을 때.” 도시로 들어서는 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베스티아레의 화사한 모습과 그윽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재앙에 대한 반감이 덜한 마법사들이 우선적으로 하루 만에 만들어졌다는 상아색의 도시에 들어섰다. 그중 기존부터 재앙의 추종자에 속했던 마법사들은 자진해서 도시의 주인인 베스티아레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고 보다 많은 동료들을 사방에서 끌어 왔다. 심지어 거신에 의해 멸망당하지 않은 제국의 마법사까지도 익시온이란 신천지에 합류할 지경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융성해지는 도시를 보면서 베스티아레는 오랜만에 나타난 손님을 대접하고 있었다. 데스포트. 칠영웅의 리더. 그는 말없이 활기에 찬 신흥 마법도시를 지켜보고 있었다. 베스티아레를 닮은 조그만 여자아이들이 차를 내왔다. 데스포트는 차를 받아들고 뒤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백영의 시체를 발견했다.” “이기지 못했군요. 예상은 했지만.” 베스티아레는 그다지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치욕스럽게 죽었더군.” “어떻게 죽었는데요?” “도둑처럼 교수형을 당해 죽었다.” “그건 안타깝네요. 백영처럼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 그렇게 죽다니.” “아무튼 이번 일로 확신을 하나 얻었다.” 데스포트는 품속에서 작은 팬던트를 하나 꺼냈다. 팬던트 안엔 늙은 남자와 어린 사내아이의 초상이 담겨 있었다. 둘 다 데스포트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 그는 팬던트의 뚜껑을 손을 움켜쥐어 닫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부수는 자와 적대할 필요는 없다는 걸.” “왜 그렇게 생각하죠?” 베스티아레가 언제나처럼 몽롱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어의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이에 데스포트는 탁자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손가락을 한 차례 퉁겨 파문이 일어나는 걸 지켜보다 느릿하게 말했다. “그는 나와 비슷하다.” “대단히 위험하다는 뜻인가요?” “그건 아니야.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는 바로 나다. 이건 절대불변의 자연법칙과 같은 것이지.” “그렇다면 어디가 비슷하다는 건가요?” 데스포트는 대답하는 대신 파문이 가라앉은 찻잔을 다시 손가락으로 퉁겨 또 다른 파문을 만들어냈다. 녹색의 찻물 위에 불순물 같은 껍질이 파문 속에서 떠올랐다. “바꿔 드릴까요? 데스포트님.” 베스티아레를 닮은 조그만한 여자아이가 그걸 보고 귀여운 목소리로 물었다. 데스포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껍질을 직접 손가락을 넣어 꺼냈다. 베스티아레는 그런 데스포트를 끈기 있게 지켜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대답을 못 들었는데....”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 데스포트가 말했다. “따라서 자신의 행동에 흔한 정당성도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굳이 자위하지도 하지도 않지. 그는 그저 그가 정한 길을 걸어가는 궤도 위의 광차와 같은 존재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찻잔의 물을 들이켰다. 베스티아레가 손수 주전자를 들어 그의 차에 찻물을 보충하며 덧붙였다. “자기가 정한 길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요.” “그게 그 남자와 내가 다른 점이겠지.” 데스포트는 창밖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 비친 하늘의 색채는 푸른 하늘색을 띄고 있었다. “사자토스가 죽은 시점부터 정면승부는 어려워졌다.” “좀 더 강하게 말릴 걸 그랬어요.”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 칠영웅 전원이 있다고 해도 그 괴인을 이길 방법은 딱히 보이지 않으니까.”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하자는 건가요?” 베스티아레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데스포트는 하늘을 계속해서 응시하며 대답했다. “날 믿고 따라온 동료들에겐 미안하지만 그때 하지 못했던 그 일을 해야 할 때가 온 거 같다.” 그의 눈동자에 결연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베스티아레는 그런 데스포트를 지켜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에크하르트가 그냥 지켜보고 있지는 않을 텐데요?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이에 데스포트는 일소했다. “신조차 유구한 세월 속에서 침식되어 스스로를 잃었다. 하물며 조악한 신의 피조물인 그 꼬마 따위야. 아마도 지금쯤이면 자기가 누구인지 무엇이었는지 조차 기억 할 수 없을 것이다.” 베스티아레는 승복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굳이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찻잔을 모두 비운 데스포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앞으로 걸어갔다. 바람과 함께 차디 찬 목소리가 실려 왔다. “그 꼬마는 네게 일임하마. 그리고 그 괴인의 발을 최대한 묶어다오.” 베스티아레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한줄기 광풍이 실내에 불어 닥친 후 데스포트의 자취는 사라졌다. 홀로 남은 베스티아레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창밖으로 걸어가 푸른 하늘을 그윽이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최대한 시간을 벌어드리죠. 데스포트. 오직 당신을 위해서.” 베스티아레는 현재 자신이 가진 것과 곧 다가올 적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적의 발걸음을 어떻게 해야 가장 효과적으로 지연시킬 수 있는 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몇 개의 생각이 순차적으로 그녀의 뇌리에 떠올라 사라졌다. 이미 적에 대한 분석은 끝났다. 그가 왜 재앙과 맞서려 하는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녀의 충복이 된 재앙의 추종자들의 입을 통해 충분히 들었다. 베스티아레는 자신이 있었다. 세계의 적이라 불리는 자를 멈추게 할 방법을 말이다. “맞아요. 부수는 자는 당신과는 달라요. 데스포트. 당신과 달리 그는 너무나 인간적이죠.” 자신이 만들어 낸 도시를 보며 베스티아레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수많은 마법사들과 인부들이 거신이 그늘을 드리운 도시 중앙에 거대한 돔형의 축조물을 세우고 있었다. 한 기의 거신이 동부의 해안선을 향해 나아갔다. 거신 위엔 칠영웅의 리더 데스포트가 우뚝 서 있었다. 동부의 해안선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거신을 이끌고 해안선을 따라걷다가 이윽고 얕은 지점을 따라 거신을 바다로 밀어 넣었다. 거신은 망망대해를 해치고 나아가며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 끝을 향해 나아갔다. 삼일 낮, 삼일 밤을 꼬박 바다를 해쳐 나갈 즈음이었다. 데스포트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하늘을 향해 뾰족 솟은 봉우리다. 망망대해 한 곳에 솟은 무인도. 하지만 그 바위섬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조차 자라지 않았다. 생명으로 가득 찬 바다 속에서도 홀로 동 떨어진 것 같은 것 같은 인상을 줬다. 데스포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거신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하게 했다. 그러자 푸른 바다 속이 한 차례 일렁거린다 싶더니 이내 수천 마리에 달하는 비늘을 지닌 괴인들이 나타났다. 어인들이다. 다른 시대에 재앙 중 하나로 지정되어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다 주었던 고대의 종족들이 무리를 지어 데스포트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인들이 웅성이는 가운데 물속에서 거대한 물보라가 솟구쳤다. 물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거인에 필적할 정도로 거대한 존재가. 곧 그 거대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살로 만든 천을 뒤집어 쓴 것 같은 해파리 형태의 괴물체였다. 도저히 이 세상의 존재라고 믿기지 않는 그 썩어가는 거대 괴물은 데스포트를 향해 붉은 빛이 나는 촉수를 들어 가리켰다. “입장이 바뀌었군. 데스포트. 재앙을 치던 자가 재앙 그 자체가 되어 나타나다니. 우리에게 훔친 움 브루크는 잘 간수하고 계신가?” 괴물은 수천 개의 입이 동시에 내지르는 듯한 고함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평범한 자라면 넋이 나가고 미쳐버릴 수도 있을 정도로 기괴한 울림을 담은 음성이었다. 데스포트는 괴물 앞에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길을 열어라. 고대신의 종복.” “왜 우리를 먼저 공격하지? 네가 진정으로 토벌하고 싶은 건 널 배신한 인간들이 아닌가?” 거대한 괴물이 물었다. 이에 데스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다.” “이 바다에 인간은 살지 않는다.” 고대의 괴물이 말했다. 이에 데스포트는 손가락을 들어 아까부터 자신이 응시하던 뾰족한 봉우리를 가리켰다. 그걸 본 고대의 괴물이 흠칫 놀라 거대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전 시대의 영웅이여.” 이에 데스포트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공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늘의 색을 바꾸겠다.” 그 말을 고대의 괴물이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윽고 수천수만 개의 촉수로 바다를 후려치며 광분했다. “그런 행동은 그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내가 원하는 바다.” 데스포트는 자신의 검을 뽑았다. 찬란한 영광의 빛이 담긴 영웅의 검을. 칠영웅 데스포트. 그는 재앙에 맞서기 위해 세상에서 키워낸 용사 중 가장 완벽한 용사였다. 인간적인 됨됨이는 물론이고 전사로서의 강함, 비상한 머리와 사자토스 같은 망나니까지 다스릴 수 있는 포용력까지.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에게 충실하다는 것. 그는 자신과의 약속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 대적할 수 없는 상대방을 만나 뜻이 좌절된 단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면. 그런데 누구에게도 단점은 있다. 가장 모범적인 용사라 불린 사내에게도 . 악마왕을 토벌하기 위해 마계로 향하는 여정에서 용사들끼리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벌인 카드 게임에서 그 작은 편린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때는 아무도 그의 문제점을 직시하지 못했다. 어떤 이는 게임의 룰이 불리하면 손을 떼거나 잃은 돈을 돌려달라고 떼를 쓰며 더러는 불리한 룰을 기획한 자를 비난하기도 한다. 데스포트는 평범한 자와는 다른 대응을 보인다. 그는 자신에게만큼이나 타인에게도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게도 엄격하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이길 수 없는 불합리한 게임에 직면했을 때 판 자체를 엎어버린다. 설령 그것이 이 세상 전체라고 할지라도. * 아름다운 정령계에서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냈다. 김성철은 몸과 마음이 재충전 되는 걸 느꼈고 또한 자신을 이끄던 내면의 불길이 다시 한 번 충만해지는 것 또한 느꼈다. 예정에 없었던 외유였지만 김성철은 만족했다. 그는 10일 정도를 정령계에서 보냈다. 그동안 영혼석 하나를 더 해방한 것은 덤. 김성철은 슬슬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마음먹었다. 현실로 돌아가는 문 앞에서 요정의 장로가 김성철에게 푸른빛이 감도는 물건을 내밀었다. 그것은 갓 돋은 세계수의 잎. 그것은 죽은 사람도 살릴 정도의 효능이 있는 진귀한 물건이다. 김성철 자신이 지금 쓸 일은 없지만 언젠가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이계엔 드러난 강자보다 숨은 강자들이 훨씬 많으므로. 김성철은 요정들과 작별하고 다시 아델화이트의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다시 만난 아델화이트는 눈에 보일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밥이라도 굶었나?” 김성철은 아델화이트에게 무슨 일이 있겠거니 생각했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너무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녀가 자극을 얻고자 변덕을 부리는 건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므로. 아델화이트는 김성철에게 팔 가라즈를 돌려주었다. “당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그 아이를 구하는 거죠?” 망치를 돌려주며 아델화이트가 조심스레 물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아델화이트는 김성철에게 평어와 경어를 섞어 쓴다. 말투가 그때그때 변하는 건 흔한 일이다. 보통 아델화이트는 김성철에게 평어를 쓰지만 가끔 경어를 쓸 때도 있다. 오랜 기간 떨어졌다 재회했을 때 그녀는 보통 경어를 쓴다. 워낙에 많은 모험자를 만난지라 김성철과 다른 기억 속의 모험자를 달리 대하는 게 아델화이트로선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그녀는 스스럼없이 평어로 이야기 하곤 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가끔 경어를 쓰곤 한다. 어딘가 불편한 일이 있을 때 말이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말투의 변화를 보고 김성철은 또 아델화이트가 뭔가 변덕을 부리는 건 아닌가하고 속으로 짚었다. “그렇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이다. “만약에 말이지.” 아델화이트가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와 달리 평어다. 김성철은 역시나 아델화이트가 변덕을 부리는구나 생각하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델화이트는 계속해서 말했다. “만약에 당신이 그 아이를 구한 다음에도 재앙이 계속 진행되면 그땐 어떻게 할 거야?” “내게 피해가 오면 당연히 맞서 싸워야지.” “당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으면? 당신은 물론이고 당신이 지키려는 사람들 모두가 재앙으로부터 안전하다면? 그때에도 남겨진 사람을 위해 싸울 거야?” 아델화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성철을 응시했다. 김성철의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야? 뭔가 심오한 이야기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그거였나?” “나에겐 중요한 이야기야.” “전에도 물어봤었잖아? 기억이 안 나나?” 수많은 기억이 난립해있지만 아델화이트는 그때의 광경을 똑똑히 기억한다. 또한 그때의 대답 또한 확연히 기억하고 있다. 아델화이트의 심각한 태도와 달리 김성철의 얼굴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말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난 영웅이 아니야.” 9년 전과 똑같은 대답. 아델화이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변하지 않았어.’ 김성철은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나와 내 사람의 구원을 위해 싸운다. 그뿐이다.” 아델화이트가 기대했던 답이다. 김성철의 눈동자를 통해 들여다 본 그의 마음엔 어떠한 변화도 감지되지 않았다. 김성철은 그녀가 알던 김성철 그대로다. 하지만 팔 가라즈를 통해 본 미래의 광경이 계속해서 거슬렸다. ‘대체 그 광경은 뭐였을까? 단순한 착오? 착각?’ 어쩌면 인간으로서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아델화이트의 머릿속에 깃들었다. ‘다음 시대엔 나도 제자를 둬야겠어.’ 시간은 흘러 떠날 때가 되었다. 아델화이트는 자신의 솜씨를 발휘한 며칠 분의 도시락을 김성철에게 선물했다. 김성철은 내키진 않았지만 지루한 여행길에선 괜찮은 도락이 되리라 여기고 피비 캔버스가 들고 다니던 상자에 넣었다. 그걸 본 베르텔기아가 기겁을 하며 책장을 파닥거렸다. “으읔.. 사람 모가지 집어놓는 곳에 먹는 걸 넣어 다니지 말라고!” “괜찮아. 깨끗이 씻었으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아델화이트는 티격태격하는 베르텔기아와 김성철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문득 팔 가라즈를 통해 본 하나의 장면을 떠올랐다. 한 권의 책. ‘대체 그건 뭐였을까? 저 책이 부수는 자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뜻일까?’ 미래를 내다본다는 아델화이트지만 이번 일만큼은 그녀로서도 예지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다. 태고의 마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김성철 일행은 다음 행선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신 익시온. 순백의 마녀가 하루 만에 만들었다는 마법사들의 낙원. ======================================= 64. 단 한 명을 상대하기 위한 군세 (1) 끝없이 펼쳐진 동부로 향하는 길. 김성철은 자신의 자랑인 요리인의 브로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마녀의 숲을 떠나기 전에 아델화이트가 한 말이 불현듯 떠올라서다. 아델화이트의 말에 의하면 요리인의 브로치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요리인 클래스 자체에 대한 정보가 희박할 뿐더러 거의 독학으로 요리를 익힌 김성철은 자연스레 요리인 클래스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는데 적어도 지금은 김성철보다 뛰어난 요리인인 아델화이트가 문득 조언을 해준 것이다. “90점 이상의 요리를 만들어내면 이 브로치가 다이아몬드 빛을 내는 건 당신도 알고 있겠지. 하지만 또 하나의 특전이 있어.” 김성철은 아델화이트에게 그 특전이 뭐냐고 물었지만 원하는 대답은 얻지 못했다. 다만 분발해서 90점을 넘어보라는 상투적인 격려와 함께 의미심장한 한 마디가 흘러 나왔다. “당신이 이 세상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을 때, 머리도 식힐 겸 요리에 매진해 봐. 당신이라면 금방 넘길 수 있을 거야. 그 놈의 당신 고향 식 레시피 억지로 넣으려는 시도만 배제한다면 말이야. 평가자의 입맛은 대단히 편향적이거든.” 요리인 점수 90점을 밥 먹듯이 넘는 아델화이트의 말이니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90점이라....’ 90점짜리 요리를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김성철이 잘 알고 있다. 아델화이트의 요리가 90점을 넘는 이유는 우선 재료가 좋아서이다. 그녀는 풀 하나, 고기 한 점 허투루 쓰지 않는다. 최상의 조건에서 사육되고 생육된 채소와 고기를 오랜 세월 동안 체득한 갖가지 비술에 의해 조합하고 다듬고 조화를 맞춰낸다. 그런 훌륭한 재료를 바탕으로 아델화이트는 자신의 진정한 강점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바로 경험이다. 까마득한 과거에서부터 존재했던 그녀의 경험의 총량은 감히 김성철이 견줄만한 대상이 아니다. 김성철이 100번의 요리를 했다고 가정하면 아델화이트는 10,000번 아니 100,000번에 달하는 요리를 했을 지도 모른다. 그만큼 아델화이트는 유구한 세월을 살아오며 자신의 레시피를 가다듬고 또 가다듬었다. 잠깐의 여흥으로 요리를 시작한 어떻게 보면 취미 요리인인 김성철이 그녀에 못 미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좋아하는 영역에서 목표가 생긴 부분에 대해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한 번 정도는 90점을 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도전이겠군.’ 사실 그에겐 예전부터 생각해 둔 비장의 레시피가 있었다. 다만, 재료와 장소, 시간적인 문제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고 무엇보다 본인이 점수를 위한 요리보다 자신을 위한 한국적인 요리를 주로 해먹는지라 고득점에 도전할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명확한 목표가 제시된 이상 김성철은 언젠가는 자신이 넘어서지 못한 영역을 한 번 넘어서리라 다짐했다.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달고 그 건방진 라그란제의 엘프 놈 앞에 나타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시기는 칠영웅을 처리한 뒤로 잡았다. 재앙의 전개가 악마왕을 처치했을 때와 비슷하게 돌아가면 충분한 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게다가 재앙의 성격상 급작스럽게 상황이 전개되는 그림도 좀처럼 그려지지 않고. “흐음. 아무것도 없네. 아무것도 없어.” 김성철이 그렇게 요리 계획에 대해 깊은 생각에 빠진 동안 베르텔기아는 김성철 주위를 돌며 아름답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 동부의 땅을 둘러보고 있었다. 황량한 북부와 달리 동부는 살기 좋은 땅이라 민가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었고 군데군데 알록달록한 지붕이 모인 작은 마을도 점점이 박혀 있었다. 겉만 보면 당장이라도 선량한 시민이 튀어나와 인사를 하거나 하다못해 불쾌한 눈초리로 이방인을 노려보기라도 할 터인데 실제로 김성철 앞에 나타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성철은 처음엔 거신 때문에 전부 피난 갔겠거니 생각했지만 4일 동안 같은 현상이 이어지자 뭔가 좋지 않은 가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기이한 일이군. 아무리 큰 재난이 있어도 자신의 땅에 집착하는 이들은 있기 마련인데.’ 김성철은 여러 번 보았다. 적대하는 두 군대가 격돌할 것이라고 예상되는 지점에 사는 주민들 일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집을 떠나지 않는 광경을. 어떤 이들은 삶의 터전을 잃는 것이 생명을 잃는 것보다 두려워했다. 특히 나이가 든 노인들 사이에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들은 고향을 잃느니 기꺼이 고향에서 죽기를 택했었다. 동부에도 그런 사람이 몇몇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파괴된 동부로 오자 김성철을 기다리는 건 텅 빈 집 뿐, 사람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주인 잃은 가축들이 방랑하며 죽어가는 것 외엔 말이다. 김성철은 시험 삼아 버려진 집 몇 군데를 들렀다. 아무도 살지 않았다. 작은 마을에 한 번 들러 집 전체를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도 결과는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성철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시체가 발견됐다. 그것도 한 두 구가 아닌 수십 구의 시체가 무더기처럼 쌓여 장작처럼 불에 타 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조직적인 학살이다. 그것도 최근에 벌어진. 김성철은 시체의 상태를 보고 그 시점을 대략 일주 전으로 잡았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약탈의 흔적은 없었다. 다만 가옥의 파손은 심했다. 어떤 것은 전소되고 또 어떤 것은 반파되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단순한 도적의 짓은 아닌 것 같다.’ 고스란히 금품이 보관된 어떤 사람의 금고를 들여다보며 김성철은 동부에 벌어지고 있는 재앙이 아직 그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기이하군. 칠영웅은 그들의 영지에 사는 주민들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린다는 말을 들었는데.’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우물 물을 길어 한 그릇 떠다 마셨다. 그런데 우물물이 입에 닿은 순간 김성철은 즉시 그릇을 집어 던지며 물을 거칠게 뱉었다. “무슨 일이야?!” 베르텔기아가 깜짝 놀라며 묻자 김성철은 우물을 들여다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 우물에 독을 탔군.” 김성철은 이름 모를 시체가 둥둥 떠 있는 우물의 깊은 바닥을 보며 반란군 시절에 겪었던 참혹했던 전쟁의 기억을 떠올렸다. 청야 작전이다. 그것은 루테기네아 왕국과 반란군 양자가 모두 즐겨 쓰던 잔혹한 전술로 예상되는 적의 진군로의 모든 먹을 것, 마실 것, 쉴 곳, 그리고 사람까지 상대방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 거리 그 자체를 우군으로 삼아 적에게 위협을 가하는 걸 골자로 한다. 제국의 영역을 떠난 이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됐지만 김성철은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녀의 숲을 떠난 이후에 나타난 모습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칠영웅의 짓인가? 하지만 칠영웅은 제국과 화평은 하지 않았던가? 그저 명목상의 것이라고 해도 지금 당장 이런 짓을 펼칠 이유는 하나도 없을 터인데.’ 하나의 가능성이 머릿속에서 제시됐다. ‘설마, 나 하나를 막기 위해 이런 짓까지 하는 건가?’ 현실성은 거의 없으며 들어본 일 또한 없다. 단 한 명을 막기 위한 청야전술이라니. 오직 광인의 머릿속에서만 나올 상상이다. 불길한 전조는 머지않아 나타났다. 화톳불 옆에서 불을 쬐며 아델화이트의 도시락을 먹으며 쉬고 있을 때였다. 김성철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관찰하는 불청객의 존재를 감지했다. 그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식사를 하고 따뜻한 차까지 마셔 입가심을 한 후에야 불청객을 찾아 나섰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이 허허벌판에서 김성철에게 포착당한 이상 그에게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소실의 능력을 지닌 이수진 정도가 아니면 김성철의 추적을 뿌리칠 수 없다.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한 김성철의 눈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이건, 소형 골렘?’ 소환궁전 바깥에 위치한 메마른 우물. 그 안엔 연금술사 퀘스트를 얻을 수 있는 에크하르트의 자취가 숨겨져 있다. 지금 김성철 앞에 나타난 골렘은 그 우물에서 본 것과 거의 동일한 형태였다. 숫자는 모두 3기. 골렘들은 김성철이 자신을 발견했음을 인지하고 몸을 돌려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머리 부분에 박힌 보석에서 섬뜩한 붉은 빛이 번득였다. “앗. 저건 아빠의 골렘이잖아?” 베르텔기아도 골렘의 정체를 파악하고 소리쳤다. “위험하다.” 김성철은 파닥거리는 베르텔기아를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소형 골렘의 눈에서 붉은빛이 번득였고 곧 핏빛의 섬광이 김성철을 향해 날아들었다. 김성철은 찰나의 순간 궤적을 읽고 간단하게 섬광을 피하며 팔 가라즈를 꺼내 들었다. 두 기의 골렘들이 연이어 섬광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글레어와 비슷하지만 명백히 다른 원리와 힘으로 발동되는 공격. ‘마도 병기를 탑재했군.’ 마도 병기. 마법의 힘으로 구동되는 일련의 무기를 총칭하는 개념. 한 때는 광범위하게 쓰였으나 현재는 높은 단가 대비 낮은 효율성 등의 문제로 거의 쓰이지 않는 구세대의 무기다. 치이익- 김성철을 빗맞춘 광선 한 줄기가 지면을 긁고 지나갔다. 땅의 일부분이 살짝 타올랐지만 드러나는 위력은 글레어에 비하면 절반도 못 미치는 수준. ‘너무 약한데?’ 김성철은 어지러이 쏟아지는 광선들을 피해내며 순차적으로 골렘을 팔 가라즈로 후려쳤다. 퍽! 퍽! 퍽! 경쾌한 3번의 연타. 붉은 광선을 뿜어내던 3기의 골렘은 박살나서 지면 위에 너부러졌다. 전투가 끝나자 베르텔기아가 주머니에서 나와 골렘들을 살폈다. “흐음. 왜 아빠의 골렘들이 여기에 있는 걸까?” 김성철은 혹시 숨어 있는 또 다른 적이 있지는 않나 오감을 곤두 세워 주위를 확인했고 별도로 카타콤에서 익힌 경계결계를 펼쳐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동안 베르텔기아는 골렘에 대한 분석을 순조롭게 끝낼 수 있었다. “베르텔기아. 그 골렘은 네 아버지가 만든 게 맞나?” 김성철이 물었다. “설계는 분명 우리 아빠의 솜씨야. 골렘의 핵도 구동계도. 하지만 부착된 마도 병기는 아빠의 솜씨는 아닌 걸로 보여. 너무 조잡하거든.” “그런가?” 이 세상에 에크하르트의 골렘을 다루는 이들은 칠영웅 이외엔 없다. 김성철은 대밀림에서 사자토스가 에크하르트의 골렘을 다루는 것을 목격한 바가 있다. 다른 칠영웅이 그러지 말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있어. 아니... 큰 문제라고 해야 하나?” 베르텔기아가 골렘들을 살피며 어딘가 불안한 구석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문제지?” 김성철의 물음에 베르텔기아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것들, 최근에 만들어졌어.” “최근? 최근이라면 언제를 말하는 거지?” 아델화이트나 베르텔기아 같은 오래 된 존재들의 시간관념은 평범한 자와 다르기에 주의를 요한다. 특히 아델화이트의 경우, 그녀가 말하는 최근은 지난 천 년간을 뜻한다. 오래 살기로는 다른 이들에게 별로 꿀릴 게 없는 베르텔기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김성철은 조용히 베르텔기아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두 달 정도?” 베르텔기아는 뜻밖의 말을 내놓았다. “두 달이라고?” “응. 최근 두 달 사이에 만들어진 거 같아.” “에크하르트의 기술이 유출된 건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설령 기술이 유출됐다고 하더라도 만드는 방법을 알아도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야.” 베르텔기아는 단정적으로 운을 떼고는 이윽고 덧붙여서 말했다. “당신 요리의 레시피를 안다고 해서 다른 어중이떠중이 요리사들이 당신 요리 흉내 낼 수 있겠어?” “그건 그렇지.” 김성철이 좋아하는 요리에 빗대어 설명하니 한 번에 머리에 들어온다. “뭔가 이상해.” 베르텔기아가 생각에 잠긴 사이 김성철은 파괴된 골렘의 잔해를 확인했다. 골렘의 눈 주위에 다채로운 마법문양이 새겨진 조잡한 기계장치가 널려 있었다. 김성철을 공격한 마도 병기다. 그 마도 병기는 동력원 구실을 하는 골렘의 내핵과 연결되어 있었다. 빛의 형태로 나타난 결과 투사체의 속도는 회피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지만 그 위력은 시원찮았다. 물론 마을에 고립된 소수의 주민들 상대로는 어느 정도 힘을 쓸 수 있겠지만 제대로 훈련받고 장비를 갖춘 병사들 상대로는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아마도 갑주나 방패 근처를 지지는 게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속단은 금물. 이 골렘의 뒤에 칠영웅이 있는 이상, 간단하게 넘길 문제는 아니다. 김성철이 그렇게 마음을 굳힌 찰나, 먼 곳에서 3개의 각기 다른 불꽃이 하늘 높이 솟아 그 빛을 사방에 흩뿌렸다. 청, 홍, 적. ‘신호탄인가?’ 그때 김성철인 지축이 미약하게 흔들리는 걸 감지했다. 그는 자세를 숙이고 지면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었다. 쿵. 쿵. 은은하지만 거대한 울림을 담은 진동이 지면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김성철은 비슷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거신인가?’ 그의 예측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지평선 너머에서 태산의 형상을 지닌 거인의 형상이 희끄무레한 달빛을 받으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런데 한 기가 아니다. 다가오는 거신 뒤에 똑같은 거신 한 기가 더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두 기의 거신. 그러나 그것뿐만이 아니다. 거신 아래엔 방금 김성철이 박살냈던 것과 같은 종류의 골렘들이 개미떼처럼 깔려 있었고 사이사이 대밀림에서 보았던 중형 골렘이 붉은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골렘으로 이루어진 대군이 김성철을 향해 육박해오고 있었다. ======================================= 64. 단 한 명을 상대하기 위한 군세 (2) 베르텔기아가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뭐야. 저거? 저렇게 많은 걸 아빠가 만들었다고? 불가능해! 그런 건.” 한편 그 골렘을 호령하는 두 기의 거신 중 한 기 위엔 두건으로 하관을 가린 구부정한 사내가 웅크리고 있었다. “크크크... 예상대로 라그란제를 떠나 곧장 이곳으로 오는군. 너무나 뻔해. 하긴 그토록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면 누구나 단순하게 행동하겠지.” 그 사내 옆엔 12개의 검을 찬 사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솔직히 이곳에 억지로 끌려오긴 했지만 난 저런 괴물과 싸울 생각은 추호도 없어.” 그 두 사내의 정체는 칠영웅. 영혼을 먹는 자 가시옹과 검의 극에 이른 자 드라고만이다. 그들은 인간제국과 동부를 잇는 루테기네안 가도에 자리 잡고 김성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아무 대책없이 김성철을 기다린 건 아니다. 그들은 나름의 대비를 하고 김성철과 다가 올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칠영웅 또한 한 때 재앙에 맞선 자이며 세상을 구원한 영웅 중의 영웅. 그들은 또 다른 영웅에 의해 차례차례 격파당하는 수동적인 재앙으로 남아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들의 동료가 무차하게 죽임 당했을 때 칠영웅은 김성철이란 강적의 존재를 인식했고 그에 맞설 방법을 강구해왔다. 지금 김성철 앞에 나타난 골렘으로 이루어진 군대 또한 그 준비 중 하나다. “크크.. 걱정하지마라. 드라고만. 에크하르트의 인형은 네 상상 이상으로 쓸모가 많으니까.” 가시옹은 과거엔 칠영웅 중에서 최약체로 알려졌지만 적어도 지금 시대에선 칠영웅 중 가장 유명한 존재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이렇게 부른다. 황제를 무릎 꿇린 자. 3기의 거신을 이끌고 황제 앞에 나타난 가시옹은 황제 앞에서 세상의 반을 요구했고 그것을 얻어냈다. 그리고 지금 가시옹은 황제의 벗이었던 사내마저 무릎을 꿇리려고 하고 있다. 골렘으로 이루어진 무기체의 군대로. 그것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유형의 군대다. 단순히 군대의 구성을 골렘만으로 채운 결과가 아니다. 가시옹은 골렘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병대를 이렇게 명명했다. 단 1명을 상대하기 위해 군세. 바로 김성철 한 명을 말이다. “저 괴물에게 과연 이 잡동사니들이 통할까?” 드라고만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 작전에 반대했다. 그가 관심을 두고 있는 건 고대왕국 뿐이었다. 고대왕국이 자리 잡은 대륙의 서부 해안선 일대는 과거 그의 조상의 영지. 그런데 지금 그 땅을 다스리는 건 자신의 가계가 아닌 그 밑에서 종노릇이나 하던 천한 것들이다. 얼토당토 않는 잡것들이 고대라는 단어까지 붙여가며 근본도 없는 나라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 보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났다. 안 그래도 눈에 가시 같은 것들인데 나름의 힘까지 갖추고 있어 거신을 동반한 공격도 수포로 돌아갔다. 드라고만은 자신의 영지를 가꾸며 절치부심 힘을 기르며 고대왕국을 멸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는데 하필 그때 데스포트의 호출이 떨어진 것이다. 지극히 개인주의자인 드라고만은 다른 동료들을 복날에 개잡듯 때려잡는 김성철과 싸울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리더인 데스포트의 명은 절대적이었기에 거역할 순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평불만만 늘어나는 건 당연지사. 그런데 얄궂게도 가시옹은 속된 말로 제 정신이 아닌 사내다. “크크크... 이 대 일인군대의 기본은 에크하르트의 인형들이지만 이 영혼을 먹는 자 가시옹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들어가 있어. 이 가시옹의 눈으로 보건데 이 군세가 저 괴인에게 이길 확률은 팔 할이 넘는다.” 다가올 전투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한 그에게 드라고만의 불평 따윈 들리지도 않았다. 드라고만은 한숨을 내쉬며 가시옹에게 빈정거리듯 말했다. “…이런 장난감을 만든다고 네 영지를 못 만든 건가?” “크크크... 나의 솔선수범에 경의라도 표할 작정인가?” “농담 따먹기 할 때가 아닌 거 같은데?” 드라고만의 표정이 굳었다. 부수는 자가 골렘 군세의 전위와 접촉했다. 금명간에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드라고만은 즉시 몸을 일으켜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다리에 쌓인 피로를 풀었다. 언제든 무슨 일이 생기면 도망갈 수 있도록 말이다. 어차피 여기서 달아난들 그 앞에 놓인 건 자신의 영지가 아니라 베스티아레의 영지다. 도망가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반면 가시옹은 자신만만이었다. 그는 자신의 군대가 김성철과 맞닥뜨리는 걸 기대어린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곧 전투가 시작됐다. 김성철은 마편 카산드라를 꺼냈다. 지옥의 불꽃을 머금은 긴 채찍이 허공을 가르자 무수한 골렘들이 박살이 나 흩어졌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부수는 자는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땐 저 채찍을 선호하더군.” 가시옹이 싸움을 지켜보며 말했다. 드라고만은 불안한 눈빛으로 전투를 지켜보다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아무래도 난 여기서 실례해야겠어. 느낌이 영 안 좋아서 말이야.” 그러자 가시옹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도망가는 건 자유지만 담낭이 있다면 어디 한 번 똑똑히 지켜보라고.” 그의 시선은 전장 한 가운데를 향하고 있었다. 가시옹이 워낙에 진지한 모습을 보이자 심드렁하던 드라고만도 표정을 바꾸고 전장 쪽을 응시했다. 여전히 김성철의 압도적인 무위가 펼쳐지고 있는 상황. 그런데 이윽고 드라고만의 눈에 이채로운 광경이 떠올랐다. 김성철의 공세가 주춤거린 것이다. 그 원인은 골렘들의 집단 공격이었다. 파멸의 시선이란 이름을 지닌, 그러나 이름값을 못하는 조악한 마도병기로 무장한 골렘들은 처음엔 김성철의 기세에 금방 와해될 것처럼 보였지만 이윽고 진용을 갖추고 반격을 시작했다. 마도병기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무수한 붉은 빛이 김성철을 향해 집중됐다. 빛의 속도에 가깝고, 따라서 정확히 맞춘다는 전제 하에 대단히 회피하기 어려운 그 마도병기 공격이 중첩되서 다가오자 천하의 김성철로서도 공격을 멈추고 몸을 피하게 만들었다. ‘까다롭군.’ 실제로 김성철은 곤란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가시옹이 광소를 터뜨리며 자신의 동료에게 말했다. “어때? 드라고만. 내가 만든 단 한 명을 상대하기 위한 군세의 위력이.” 드라고만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골렘들이 김성철을 연거푸 몰아세우는 걸 보고서야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설마 저 골렘들. 전부 글레어와 비슷한 마법을 쓰게 만든 거냐?” “글레어는 아니야. 그 열화판인 마도병기지. 하지만 효과는 크게 다르지 않아.” 가시옹은 상황이 자신이 상정한 것과 비슷하게 전개되는 걸 보고 몸이 달아올랐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키득거리며 계속해서 들뜬 어조로 말했다. “키키키... 아무리 부수는 자가 강해도 그 또한 본질은 인간. 버틸 수 있는 피해의 총량엔 한계가 있지. 따라서 나는 고안해냈지. 세상에 어떤 군대도 이길 수 있지만 한 개인에 있어서만큼은 무적인 군대를 말이야!” 절대적인 강자 앞에서 숫자는 의미가 없다. 이는 김성철과 카네스가 마족의 군세를 상대로 홀로 전장을 지배했을 때 여실히 드러난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 숫자가 의미를 가지게 만든다면? 가시옹이 개변한 에크하르트의 골렘은 모든 걸 도외시하고 명중률과 효율적인 화력집중이 용이한 마도병기로 무장했다. 그 개개의 위력은 평범한 병사 한 명을 상대하는 것조차 벅차지만 숫자가 모인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가시옹의 발상은 거기에서 비롯됐다. 하나의 돋보기로는 겨우 개미 하나를 태워버리는데 그치겠지만 수 천 수 만 개의 돋보기를 집중시킬수만 있다면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놈은 갑주를 입지 않지. 방패를 들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의 날렵한 몸놀림을 믿고 실제로 잘도 싸우지만 이번에는 어떨까?” 가시옹은 신이 나서 계속 떠들어대고 있었다. 처음엔 도망갈 궁리만 하던 드라고만도 김성철이 점차 궁지에 몰리는 걸 보고 마음을 서서히 고쳐먹었지만 곧 치명적인 단점을 발견했다. “어이. 가시옹. 네 군대니 군단이니 다 좋은데 말이야. 부수는 자 입장에선 저러다 도망가면 그만 아니야?”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 있는 거지.” 가시옹은 거기까지 헤아리고 있었다. “대장에게 부탁해 너까지 여기 불러낸 건 부수는 자가 결코 여기서 물러서지 않게 하기 위함이야.”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지?” “놈은 퍽이나 우리를 죽이고 싶어 하거든. 크크크.... 한마디로 재앙을 해결하고 싶어 안달이 났지. 하지만 놈의 그 조급함이 스스로를 수렁으로 빠뜨리는 결과를 낳게 될 거야.” 가시옹은 거신의 머리 위에 편하게 옆으로 모로 누우며 아래서 펼쳐지는 전투를 진득하게 감상했다. 김성철은 마도병기로 무장한 소형 골렘에 둘러싸여 있었다. 골렘들의 공격은 지극히 단순했다. 김성철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글레어와 비슷한 붉은 빛을 내뿜는다. 썩 대단할 것도 없고 약해빠진 공격이지만 빛의 형태로 사출되는 공격인 만큼 조준단계에서 피하지 않으면 반드시 적중한다. 김성철이 지닌 강력한 마법저항력은 그 정도 공격은 가볍게 흩어버릴 수 있지만 수십 발의 광선이 한꺼번에 들어온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작다고는 하나 몸에 피해가 가게 되고 무엇보다 그가 애지중지하는 코트에 상처가 생길 것이다. ‘어떤 놈이 이런 발상을 한 진 모르겠지만 어이가 없군.’ 김성철을 향해 지금까지 쏘아진 광선의 개수는 대충 눈으로 잡아도 1만 번이 족히 넘는다. 그러나 김성철이 허용한 적중타는 0회. 그는 단 한 번도 골렘의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수세적인 기동을 펼쳤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앞으로는 그마저도 어려워질 것 같다. “으으.. 너무 많은데? 이거 정말 위험한 거 아니야?!” 베르텔기아가 더 이상 들어갈 곳도 없는 주머니 안속으로 파고들며 오랜만에 죽는 소리를 냈다. 베르텔기아가 괜히 죽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골렘을 박살내며 전열 깊숙이 들어가자 어느새 김성철은 골렘들에게 반 포위된 형국이 되었다. 어둠 속에 도열한 골렘이 붉은 눈빛이 사방에서 번득이는 광경은 실로 섬뜩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플라이.’ 김성철은 1번 영혼석에게 플라이를 시전할 걸 요구했다. 영혼석 위에 마법진이 떠오르며 김성철의 몸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걸 본 가시옹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비행 마법이란 카드도 있었나. 하지만 그 또한 예상한 바지.” 그는 거신을 통해 골렘들에게 다른 명을 내렸다. 수천 마리에 달하는 골렘들이 명령을 수신하고 붉은 눈을 껌뻑거렸다. 골렘들의 공격 패턴이 바뀌었다. 김성철이 사정거리 내에 들어오면 그를 향해 조준하고 광선을 발사하는 방법에서 일정 거리 안에 김성철이 들어오면 김성철 주변의 무작위를 쏘는 방법으로. 한두 마리가 그런 공격을 시도하면 난사라고 부르지만 수천 마리가 그 공격을 시도할 경우엔 탄막이라고 부른다. 김성철은 즉각 마력을 플라이에 강하게 흘려 빠른 속도로 고도를 올려 탄막을 피해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불안정한 기류가 흐르는 발밑 하늘에서 그를 노리고 번쩍이는 물체가 날아들었다. 얼음으로 만든 창. 3위계 빙결학파 공격마법인 크리스탈 랜스와 비슷한 유형의 공격으로 보였다. 김성철은 허공 위에서 몸을 움직여 날아오는 창을 피해냈지만 김성철을 지나친 창이 스스로 터지며 날카로운 파편을 사방에 흩뿌렸다. 그 중 하나가 김성철의 코트 자락 밑단을 찢고 지나갔다. 김성철은 짜증을 느꼈다. ‘참 지저분하게 싸우는군.’ 그는 분노한 눈길로 아래를 응시했다. 소형 골렘 사이에 드문드문 자리 잡은 중형 골렘이 얼음의 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소형 골렘과 마찬가지로 마도병기를 통한 공격. 중형 골렘은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전제하고 대공용으로 준비된 것들로 보였다. 김성철은 발밑에서 수백 개에 달하는 번뜩임이 자신을 노리는 걸 느끼고 급히 몸을 틀어 구역에서 이탈했다. 수백 개의 얼음 창이 김성철이 있던 영역을 거꾸로 내리는 비처럼 쏘아 오르며 그 파편을 사방에 흩뿌렸다. 아래서 본 그 모습은 마치 눈이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키키킥! 멋지지 않아? 드라고만.” 가시옹은 득의만면한 미소를 지으며 드라고만을 돌아봤다. “…음.” 드라고만은 칭찬에 인색한 남자다. 그것이 자기보다 약하고 못난 가시옹이라면 더더욱. “잠깐. 저 녀석도 방식을 바꾼 거 같은데?” 그는 칭찬을 하는 대신 하늘 위에 잇따라 떠오른 마법진을 가리켰다. 메테오의 마법진이다. 메아리의 효과를 받은 수 개의 운석들이 얼음창을 내뿜는 골렘의 전열을 잇따라 강타하며 수백 마리의 골렘을 한꺼번에 일소했다. 김성철도 방법을 바꾼 것이다. 상대가 다수로 하나를 상대하는 방법을 쓰자 하나로 다수를 상대하는 대량파괴 마법이라는 전통적인 카드로 꺼내든 것이다. 하지만 드라고만은 그 행동이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속으로는 내심 가시옹을 부러워하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었다. ‘아... 거신으로 내 도시를 만드는 대신 나도 이 인간처럼 골렘이나 만들어낼 걸 그랬어.’ 그가 발을 디디고 있는 거신의 하복부에선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골렘이 찬란한 광휘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져 전열에 합류하고 있었다. 이것이 최초의 창조술사 에크하르트에 의해 만들어진 대 재앙용 결전병기 베르텔기아의 숨겨진 능력. 창조. 베스티아레가 하루아침에 화려한 상아색의 도시를 만들어 낸 비밀이 바로 여기 담겨 있었다. “크크크...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군세를 이길 수 없어.” 가시옹은 증식하는 자신의 군세를 보며 승리에 대한 기대가 점점 부풀어가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김성철이 신적인 힘을 얻은 이래 전력을 다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 김성철이 외투를 벗었다. ======================================= 64. 단 한 명을 상대하기 위한 군세 (3) 외투를 벗은 김성철은 영혼창고에서 다른 무언가를 꺼냈다. 은색 늑대의 가죽을 덧대어 만든 가죽 갑옷이다. 가죽으로 만든 것에 비해 높은 방어력과 내화성을 지녔고 무엇보다 자체 회복의 축복을 지녀 함부로 굴리기 딱 좋아 반란군 시절부터 애용한 물건이다. 김성철은 그 갑주를 걸치고 베르텔기아를 안쪽에 집어넣었다. “이게 그 낡은 코트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거 같은데?” “이 실버 팽은 확실히 좋은 물건이지. 하지만 너무 오래 입었어.” 10년을 넘게 입고 다녔다. 그만 입을 때가 됐다고 생각해 영혼창고 구석에 밀어 넣었는데 다시 이것을 꺼내게 된 것이다. 김성철은 약간의 분노를 느꼈다. ‘이런 장난 같은 술책으로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가만 두지 않으리라.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신물인 팔 가라즈를 꺼냈다. 의외의 선택이었다. 팔 가라즈는 마편 카산드라에 비해 다수의 적을 상대로 불리한 무기로 보이니까.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쿵! 신적인 힘이 실린 팔 가라즈가 지면을 천둥처럼 후려쳤다. 순간 모든 기류가 타격점 한 가운데 빨려드는가 싶더니 이윽고 엄청난 기류가 파편을 싣고 충격파와 함께 사납게 분출됐다. 김성철 주변에 있던 골렘의 군세는 갑작스런 진동에 크게 요동쳤고 일부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고 뒤이어 밀어닥친 충격파는 가까이 있는 모든 것들을 글자 그대로 분쇄시켜 버렸다. 진동은 멀리 떨어져 있는 가시옹과 드라고만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됐다. “지진을 일으킨다고...? 마법도 정령의 힘도 빌리지 않고 순수한 자신의 힘만으로?! 저게 인간에게 허용된 것인가?” 보다 충격을 받은 건 드라고만이었다. 검사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그는 인간이 오를 수 있는 한계에 근접했다고 평가받은 인물. 하지만 지금 김성철이 보여준 힘은 그가 상정한 인간의 벽을 가볍게 허물고 있었다. ‘진짜 괴물이군!’ 쿵! 쿵! 쿵! 팔 가라즈는 더 이상 하찮은 골렘을 공격하지 않고 지면을 계속해서 두들겼다. 김성철은 지진을 일으키며 거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상식을 초월한 공격에 골렘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자랑하는 탄막을 펼치기도 전에 전열이 발밑으로부터의 진동이 붕괴되고 뭐에 맞았는지도 모른 채 잔해로 변해갔다. 단 한 명을 상대하기 위한 군세는 역으로 한 명의 사내에게 먹히고 있었다. 득의만면하던 가시옹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키키! 역시 부수는 자. 만만치 않군.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그는 바쁘게 손을 놀리며 자신의 군세의 위치를 재조정하며 김성철을 요격할 채비를 했다. 대공용으로 준비한 중형 골렘들이 마도병기를 하늘대신 지상에 겨누었다. 장거리에서 쏘아지는 얼음으로 만든 창의 저격. 김성철은 그 반짝이는 치명적인 도구가 자신을 향해 날아옴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대신 지면 대신 허공을 향해 강하게 한 차례 휘둘렀을 뿐. 펑! 한 박자 늦게 터져 나온 폭발음과 함께 무시무시한 풍압이 팔 가라즈로부터 발생해 날아오는 얼음창들을 허공에서 박살내버렸다. 박살난 창에서 떨어진 파편들은 애꿎은 소형 골렘에게 떨어져 무수한 손실을 발생시킬 뿐이었다. 가시옹은 계속해서 같은 공격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모두 같았다. 그 와중에 김성철이 일으키는 무시무시한 폭음은 점점 가까워져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작전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야. 다음엔 3기의 거신을 동원해서 다른 패턴의 공격으로...” 정신병자처럼 중얼거려 마음의 위안을 얻어 보려 하지만 가시옹은 알고 있었다. 이미 이 싸움의 승패는 결정됐다는 사실을. 그의 작전은 약하지만 축차적인 소모를 강요하는 골렘 다수를 동원하여 김성철의 힘을 뺀 뒤, 거신과 함께 통렬한 일격을 먹인다는 발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김성철이 무인지경처럼 골렘들을 쳐부수며 다가오기 시작하자 그의 작전은 시작 단계에서부터 틀어졌다. 김성철은 그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강했고 상식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그의 군세를 무참하게 부셔놓았다. 이대로 결전을 벌여봐야 승산은 전무. 가시옹은 칠영웅 최약체지만 머리회전은 누구보다 빠르고 그리고 과감한 결정을 장기로 한다. ‘거신을 포기하는 건 뼈아프지만 이미 마테리얼을 대부분 소모한 개체. 이용가치가 크게 감소된 것들이다.’ 가시옹은 싸움을 포기하고 철수할 채비를 했다. 그가 손짓하자 거신 아래에 전개된 특이한 형태의 골렘들이 어둠 속으로 철수했다.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특별히 준비한 가시옹의 역작들이다. 자신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정예골렘을 모두 보낸 후 가시옹은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드라고만을 발견하고 퉁명스레 말했다. “아직도 거기 있나? 도망간다고 하더니.” “…나중에 가지. 발의 빠르기라면 자신 있으니까.” 드라고만은 뭔가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시옹은 그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부수는 자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쿵! 진동이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가시옹은 서둘러 거신을 떠나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거신 아래로 뛰어내리려고 할 때였다. 드라고만이 가시옹을 앞을 막고 손을 내밀었다. “열쇠는 내게 맡겨라.” 가시옹은 드라고만의 의외의 행동에 놀라움을 느끼고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뭘 하려고?” “거신을 살릴 수 있으면 살려보려고.” 드라고만은 싱겁게 말했다. 가시옹은 그런 드라고만의 행동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뭔가 꾸미고 있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는 드라고만을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 거신들은 내 것이잖아?” “달타니어스와 백영의 거신이겠지.” 드라고만이 냉담하게 말하며 살기어린 시선을 가시옹에게 보냈다. 가시옹도 미간을 찌푸리며 나름 기 싸움을 해보려하지만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가시옹은 드라고만보다 약하다. 게다가 드라고만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질이 좋지 않은 남자다. ‘이 녀석.’ 까마득한 과거, 칠영웅이 결성된 지 오래지 않아 가시옹은 드라고만에게 한 차례 죽을 뻔한 위기를 겪은 적이 있었다. 마음에 안 든다. 그런 사소한 이유로 동료를 벨 수 있는 게 드라고만이란 남자다. 가시옹은 과거, 자신을 베려고 하던 드라고만의 그 불쾌한 눈빛이 다시금 자신 앞에 드러난 걸 보고 거신의 열쇠를 드라고만에게 건넸다. “나중에 빈손으로 오면 무슨 말을 할 지 기대가 되는군.” 물론 자존심이 있기에 빈정거리는 건 빼놓지 않았지만. 드라고만은 거칠게 가시옹의 손에서 거신의 열쇠를 뺏었다. “대장에게 전부 일러바칠 테니 각오하는 게 좋을 게다.” 열쇠를 뺏긴 가시옹은 그대로 거신 아래로 뛰어내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쿵! 쿵! 김성철이 일으키는 진동은 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드라고만은 팔짱을 낀 채 김성철이 가까워지길 기다렸다. 이윽고 김성철이 두 기의 거신 아래에 나타났다. 거신엔 가시옹이 준비한 특별한 함정이 준비되어 있었다. 김성철이 다가오자 거신에 달린 수천 개에 달하는 마도병기가 파멸적인 광선을 일제히 내뿜었다. 김성철은 어렵지 않게 그 공격을 피하며 바위로 만들어낸 파편을 거신에게 흩뿌렸다. 거신에 부착된 마도병기는 차례차례 박살나 한 개도 남지 않게 되었다. 김성철은 무력화된 거신 앞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짝. 짝. 짝. 박수소리가 거신 위에서 울려 퍼졌다. 김성철은 고개를 들어 거신 위에 선 한 사내를 발견했다. “칠영웅인가?” 김성철이 물었다. 거신 위의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고만이다.” “날 보고도 도망가지 않는 점은 칭찬해주지.”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 하지만 여기서 확실히 하지 않으면 또 다른 곳에서 만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이야.” 드라고만은 듬성듬성 난 턱수염을 매만지며 냉소적인 어조로 말했다. “페어리 라이트.” 김성철은 마법의 불빛 하나를 만들어내 드라고만을 향해 날려보냈다. 마법의 불빛 아래 드라고만의 얼굴이 비춰보였다. 키가 크고 삐쩍 마른 체구에 수척한 얼굴에 허무한 눈빛을 지닌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사내였다. 김성철은 그가 10자루가 넘는 검을 등 뒤에 지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칼 장사라도 하는 모양이지?” “이제부터 그러려고.” 드라고만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김성철을 노려봤다. “내려 와라.” 김성철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드라고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려갈 생각은 없어.” “그럼 내가 올라간다.” 김성철이 올라오려는 시늉을 하자 드라고만이 다급하게 말했다. “성격 한 번 급한 양반이군. 난 당신 같은 괴물과 싸울 생각이 조금도 없어. 난 그저 이야기를 하려고 할 뿐이야.” “재앙과 할 이야기는 없다.” 김성철이 고개를 숙이며 영혼석 하나에 플라이를 시전하게 했다. 그의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드라고만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난 재앙이 아니야.” 김성철이 고개를 들어 드라고만을 응시했다. 그의 발끝은 허공에 머무른 채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 나는 네가 해치우려는 그 재앙이 아니야.” “헛소리를 듣는 취미는 없다.” 김성철의 몸이 하늘을 향해 떠올랐다. 그가 올라오는 와중에도 드라고만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재앙의 하수인. 알기 쉽게 말하자면 떨거지에 불과하지.” 그 말이 끝날 무렵 김성철은 드라고만과 같은 높이에 이르러 있었다. 똑같은 눈높이. 김성철의 눈빛을 본 드라고만은 알 수 있었다. 김성철이 타협을 모르는 사내라는 것을. 하지만 아주 협상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었다. ‘젊은 시절의 데스포트와 비슷한 눈빛을 지니고 있군. 어떠한 풍파에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올곧은 눈빛. 좋은 눈빛이다.’ 드라고만은 그렇게 생각하며 김성철에 무언가를 던졌다. 반짝이는 두 개의 물체가 허공 위에 포물선을 그리며 김성철의 손바닥 아래에 떨어졌다. 두 개의 열쇠다. “이건 뭐지?” “거신의 열쇠다. 이 녀석을 이용하면 이 거신들을 멈출 수 있지.” “…이런다고 내가 널 살려둘 것 같나?” 김성철이 열쇠를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드라고만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날 죽여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 부수는 자.” “…….” 김성철이 팔 가라즈를 들어 올렸다. 드라고만은 감당하기 어려운 살기가 자신을 옥죄어 오는 걸 느끼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사자토스, 달타니어스, 그리고 백영을 죽이면서도 느끼지 못했나?”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건 김성철로서도 오랜 의문이었다. 명백히 재앙에 속한 자들을 죽였음에도 어떤 효과도 보상도 주어지지 않았다. 드라고만은 그 답을 알고 있는 눈치다. “우리 칠영웅 중에서 재앙의 챔피언으로 지정된 건 오직 단 한 명. 데스포트 뿐이다. 그가 우리 모두를 대표해서 재앙의 챔피언이 된 거다.” “…….” 김성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담담한 눈빛을 다음 이야기를 강구하고 있었다. 드라고만은 몇 천 년만의 긴장과 전율의 물결이 몸을 흘러내리는 걸 느끼며 계속해서 말했다. “다시 말해 두 번째 재앙을 해결하려면 그를 죽여라. 그러면 모든 게 해결되고 재앙은 다음 단계로 넘어갈 것이야. 그러니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자고.” “이런 말을 하는 의도가 뭐지?” 김성철이 입을 열며 거신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팔 가라즈를 여전히 손에 쥔 채였다. 드라고만은 김성철이 다가온 만큼 뒷걸음질 쳤다. “개죽음 당하기 싫거든. 난 그저 이 세상에서 내 몫만큼의 행운과 행복을 누리고 싶을 뿐이야. 몇 천 년만의 잠에서 깨어났는데 짧은 호사도 못 누리고 너 같이 말도 안 되는 놈에게 죽는다면 정말로 억울하지 않겠어?” 드라고만의 행동과 표정을 본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칠영웅이란 칭호를 지닌 자가 이렇게까지 시정잡배처럼 행동하는 것은 솔직히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지. 손을 잡자는 말까진 하지 않겠어. 다만 날 모른 척 해줬으면 좋겠군. 대신에 너에게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지.” 드라고만이 계속해서 말하려는 찰나 김성철의 모습이 순간 사라졌다. 팔 가라즈가 드라고만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드라고만은 미간을 찌푸리며 검을 뽑으며 김성철의 일격을 막아냈다. 챙캉! 검과 망치가 부딪치며 무시무시한 불꽃을 일으켰다. “크윽...!” 드라고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진짜 기똥차게 강한 새끼네. 달타니어스 따위와 비교도 되지 않아!’ 하지만 드라고만은 칠영웅에서도 상위권의 무력을 지닌 자. 달타니어스처럼 힘에만 의지하는 무식한 전사가 아니라 기교와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승무패의 검사다. 그는 김성철의 검을 막아냄과 동시에 자신이 지닌 12자루의 검을 일제히 전개하며 거칠게 김성철에게 반격했다. 저마다의 사연과 이름을 지닌 검들이 싸늘한 빛을 흩뿌리며 전방위에서 김성철의 약점을 노리고 전개됐다. 김성철은 공격이 예사롭지 않음을 눈치 채고 뒤로 물러서 검들이 노리는 각을 무마시켰다. 단순한 기동이었지만 그 빠르기와 시의적절한 판단은 드라고만의 의도를 한 번에 분쇄시켰다. 물론 드라고만은 처음부터 김성철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싸울 맘도 없었다. 싸움이 약간의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그는 자신의 검을 회수하고 김성철에게 달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너에게서 도망칠 수 있다. 잘 생각해라.” 김성철은 그것이 허튼 소리가 아니라는 건 짧은 싸움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김성철은 걸치고 있는 가죽 갑옷 일부가 살짝 베인 것을 알고 있었다. 재생 능력이 있는 갑주는 스스로 그 작은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지만. ‘옷을 갈아입길 잘했군.’ 물론 움 브루크나 재앙의 무기를 동원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김성철은 베르텔기아가 기겁하는 재앙의 무기를 쓰느니 한 번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말해라. 칠영웅.” 담담한 음성이 거신의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 ======================================= 65. 여덟 번째 영웅 (1) 살아남은 골렘들이 북진을 시작했다. 어두운 지평선 너머로 들려오는 묵직한 발 구령이 타악기의 연주처럼 귓가로 찾아와 감겨들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둘 사이를 흘러갔고 곧 드라고만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데스포트는 익시온 너머 북동쪽에 자리 잡은 하부르스라는 해안 도시에 거점을 마련했다. 혹 그를 그 도시에서 찾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거신의 흔적 정도는 찾을 수 있겠지.” 드라고만은 가장 중요한 정보를 먼저 제시했다. 김성철에겐 어떤 말재간도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간보기, 떠보기, 말재간 따위가 통할 상대로 아니라는 것은 한 번의 대면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실제로 드라고만의 판단은 적절했다. 원하던 답을 얻은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거두었고 동북쪽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하부르스라.” 느긋하게 걸어가면 이주일 정도를 잡아야겠지만 서두르면 이틀 정도의 거리. 거기서 데스포트를 만날 수 있다면 지긋지긋한 두 번째 재앙도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드라고만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칠영웅의 리더를 처치하는 건 두 번째 재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국면이니. ‘일단은 이 자의 말을 믿어볼까.’ 드라고만이 거짓을 고한다고 해도 큰 틀에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두 번째 재앙의 해결이 조금 늦어지는 게 김성철에게 올 유일한 불이익이다. 드라고만은 김성철의 눈치를 살피다가 기회를 봐서 다시 입을 열었다. “추가로 말하자면 베스티아레는 익시온에 있어. 데스포트가 유일하게 신뢰하는 여자니까 보다 확실한 걸 원한다면 그 여자를 먼저 찾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는 또 가시옹의 근거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가시옹은 북부에 있어. 도시 이름은 잘 모르겠는데 맑은 호수 옆에 자리 잡은 그림 같은 도시로 기억해.” “예레반트군.” “잘 아네.” 모든 동료의 위치를 발설한 드라고만은 후련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칠영웅의 소재. 네가 찾던 거 아니야?” “그건 그 정도로 충분하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군.” 김성철이 전부터 궁금하게 여기던 것이 하나 있었다. 칠영웅과 에크하르트의 관계다. 김성철은 자신이 디디고 서 있는 거신의 거대한 머리 부분을 가리키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 거신은 어떻게 손에 넣은 거지?” “아, 이거 말이야?” 드라고만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이 질문의 대답 여하에 따라 자신의 생사가 결정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에크하르트의 비전을 지닌 김성철은 칠영웅이 아는 이상으로 거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반면 칠영웅은 김성철이 에크하르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아니 에크하르트라는 이름을 알고나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이제 바통은 드라고만에게 넘어갔다. 김성철의 눈동자는 드라고만의 메마른 입술을 응시했다. 침묵 속에서 드라고만이 입을 열었다. “에크하르트라는 연금술사의 작품이야.” “…….” 김성철은 어떤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드라고만에게 합격이라는 점수를 주고 있었다. 드라고만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 녀석은 우리를 따라다니던 시종 같은 놈이었지. 하지만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 뭐, 대단한 연금술사가 되었지. 자기 말로는 창조술사라고 우기는데 좌우지간, 이 거신은 그 녀석의 작품이야. 전 시대의 재앙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었지. 정식 명칭은 베르텔기아 1호. 옆의 거신은 2호야. 참고로 베르텔기아는 역병에 걸린 딸의 이름이지.” 그 말을 들은 베르텔기아는 김성철 주머니 안에서 가볍게 몸을 떨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친을 아는 이에게 부친의 이야기를 듣는 건 다 아는 이야기라도 다르게 들리기 마련이지.’ 드라고만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뭐, 그렇게 된 거야. 더 궁금한 게 있나?” “에크하르트는 어떻게 됐지?” 김성철이 물었다. 그 물음에 드라고만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에크하르트를 아나?” “이 정도 거신을 만들 정도의 연금술사라면 당연히 흥미가 갈 수밖에.” 모른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드라고만의 얼굴엔 감출 수 없는 경멸감과 불쾌감이 떠올라 있었다. “미안한데 난 그 놈을 좋아하지 않아. 그래서 별로 관심이 없지. 정 그 놈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 놈이 쫓아다니던 베스티아레나 아니면 데스포트에게 물어 봐. 사실 놈에 대해 제일 잘 아는 건 사자토스지만 네가 죽여 버렸으니 자업자득이지.” 시종일관 저자세로 나오던 드라고만이 돌변했다. 그만큼 에크하르트를 싫어한다는 걸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튼튼한 막대기라고 해도 견딜 수 있는 강도 이상의 힘이 들어오면 부러지는 법이다. 에크하르트는 드라고만이 감당하기 어려운 무언가로 보였다. ‘이 정도가 드라고만에게 얻을 수 있는 정보의 한계인 모양이군. 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대단히 요긴한 정보임이 틀림없어. 하지만....’ 움 브루크를 쓰고 싶은 마음이 어느새 마음 깊은 곳에서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 강렬한 충동을 속으로 억누르며 비스듬히 돌아서서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듣고 싶은 건 모두 들었다.” 이야기를 길게 하면 할수록 충동은 강해질 것이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가 그것을 쓰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드라고만을 보내는 걸로 마음을 굳혔다. 드라고만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앞으로 다시 만날 일이 없기를.” “동감이다.” “아, 참.” 떠나려고 하던 드라고만이 뭔가를 떠올린 듯 김성철에게 뒤돌아섰다. “그 열쇠 사용법 아나?”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의외로 A/S가 좋은 놈이군.’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른다.” “그건 열쇠의 열쇠다. 일종의 비상 열쇠 같은 녀석이지. 파란 색 끈을 달아놓은 것이 1호기 그러니까 이 녀석용. 그리고 초록색 끈을 달아 놓은 녀석이 2호기용이다.” “이것들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지?” 김성철은 과거 사자토스의 거신 안에 들어갈 때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땐 열쇠의 열쇠라는 건 있지도 않았다. “자세한 건 열쇠를 들고 이 안으로 들어가면 알 수 있겠지. 아마도 그걸 들고 가면 거신의 열쇠가 질문을 해올 것이다. 베르텔기아란 이름만 기억하면 오우거도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니 잘 대답하리라 믿는다.” 드라고만은 그렇게 말한 후 거신 아래로 뛰어내렸다. 공언한 것처럼 대단히 민첩하고 빠른 움직이었다. 어쩌면 일부러 자신의 스피드를 김성철에게 무리해서 과시하는지도 모른다. 물 찬 제비처럼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는 드라고만은 곧 김성철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저 자식. 재수 없어!” 드라고만이 사라지자말자 베르텔기아가 주머니에서 나오며 화를 냈다. “자기 하나 살겠다고 동료나 팔아먹는 비겁자 자식이!” “참아라. 베르텔기아.” “아오! 짜증나! 재앙의 무기는 뒀다가 뭐해? 저런 놈한테 써야지.” “…….” 아무래도 잘못 짚은 모양이다. 베르텔기아를 위해 재앙의 무기의 사용을 꾹 참았는데 정작 베르텔기아는 그 사용을 원하고 있으니. ‘이놈도 꼴에 본판은 여자라고 날 헷갈리게 하는군.’ 씁쓸한 추억들이 방울방울 떠오르는 걸 고개를 저어 흩어버린 후 김성철은 서둘러 거신의 머리 안으로 들어갔다. 조종실의 내부는 판추리아에서 보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흠. 저번 녀석이 3호라고 했지?” 베르텔기아가 마치 조종석 안을 제집처럼 다니며 입을 열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조종석 중앙으로 들어섰다. ‘역시. 저게 있군.’ 조종석 중앙에 위치한 제단엔 베르텔기아가 꼭 닮은 책 한 권이 신비로운 광휘 속에 싸인 채 직립해 있었다. 이것이 거신을 움직이는 열쇠. 김성철은 전처럼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경고의 메시지가 즉시 그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 권한 없는 자는 지식의 열쇠를 뽑을 수 없다. ] [ 권한 있는 자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 ] [ 칠영웅, 그리고 에크하르트 ] 김성철은 드라고만에게 받은 열쇠를 꺼냈다. 초록색 줄이 달린 녀석이다. “파란 거라고 했잖아!” 베르텔기아가 즉시 시어머니처럼 잔소리를 해댔다. 김성철은 열쇠를 파란 색 줄이 달린 걸로 바꿔 제단의 책을 향해 가지고 갔다. 그러자 놀랍게도 전과 다른 메시지가 김성철의 눈앞을 덮어 나갔다. [ 마스터키 확인 ] [ 정당한 마스터키의 주인임을 확인하기 위해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 [ 이 기체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 마치 책 자체가 말을 걸어오는 듯한 분위기였다. 김성철은 제단 위의 책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베르텔기아.” “응? 왜 불러.” [ 정확한 대답입니다. ] [ 지금부터 대 재앙 결전병기 베르텔기아 1호는 당신의 명을 따릅니다. ] “왜 부르냐고?” “아무것도 아니다.” 거신의 기동이 멈췄다. 김성철은 흔들리는 진동 속에서 거신이 활동을 완전히 중지했음을 발견했다. “응?” 감이 늦은 베르텔기아는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다. “드라구만인지 드라구라인지 하는 재수 없는 놈이 준 열쇠 먹힌 거야?” “그런 모양이다.” 거신은 작동을 멈추고 이제 김성철의 명에 복종한다. 꽤나 싱거운 결말이다. 예전엔 여기서 연금술도 하고 이 것 저 것 용을 썼던 것 같은데. 김성철은 제단에 꽂힌 책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크기, 재질, 정장된 가죽. 아무리 봐도 베르텔기아와 꼭 빼닮았다.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저 시대의 책은 전부 저렇게 만들어서 그런 건가.’ 3호기 안에도 베르텔기아와 닮은 녀석이 꽂혀 있었지만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하고 넘어갔지만 같은 녀석을 두 번째 보니 없던 의문도 자연스레 생겨난 것이다. “뭘 그리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어? 2호기도 장악하러 가자고!”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에게 다가와 어깨 위에 올라타며 분노가 식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당장 2호기로 갈 필요는 없다. 거신이 가봐야 얼마나 가겠으며 주변엔 때려 부술 게 골렘 이외엔 남아 있지 않으므로 놔둬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중요한 건 뭔가 찝찝한 여운이 남아 있다는 것. 김성철은 예전의 기억을 상기하며 제단 위의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 지식의 열쇠를 뽑으면 거신의 모든 활동이 정지되며 복구할 수 없습니다. ] [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 “음...” 김성철은 잠시 책을 뽑는 걸 보류했다. 전과 질문이 다르기 때문이다. 김성철이 원하는 건 에크하르트의 시험 퀘스트. 분명 이 거신 안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에크하르트가 남긴 유산이 말이다. 창조술사 클래스를 얻기 위해서도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중요한 인물이 되어가는 에크하르트에 대해 알기 위해서도 그 퀘스트의 수행은 필수적이다. ‘일단 이 놈도 생김새는 베르텔기아와 비슷하다. 어쩌면 말이 통할지도 모르겠군.’ 김성철은 한 번 던져보는 심정으로 제단에 꽂힌 책을 응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나는 연금술사다.” 제단 안에선 별 다른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김성철의 입가에 실소가 맺히려고 할 때였다.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나 그의 시야를 덮어 나갔다. [ 그대는 연금술사인가? ] 원하던 질문이 마침내 나왔다. 그리고 또 다른 질문이 나타났다. [ 원하는 게 무엇인가? ] “창조술사.” 김성철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 시험을 치기 원하는가? ] 그 대목에서 김성철은 느꼈다. ‘이 녀석. 말이 통하는 건가.’ 김성철은 결계 안에 말없이 자리 잡은 베르텔기아를 꼭 닮은 책을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전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발광석으로 만든 등불이 나타나 조종실 전체를 환하게 밝혔고 숨겨진 탁자들이 나타나 김성철 앞에 형태를 갖추었다. [ 증명해라. ] 그리고 여러 가지 종류의 시약과 재료가 모습을 드러냈다. [ 에크하르트 최후의 문제 1번 ] [ 여기 있는 연금재료로 만들 수 있는 연금아이템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만들어내서 앞쪽의 제단 위에 올려놓아라. 그리하면 그대는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 첨언. 어떤 도구를 쓰건 무방하다. ] 모든 것이 원하던대로 이루어졌다. 김성철은 언제나처럼 베르텔기아를 돌아보며 늘 하던 말을 되풀이했다. “베르텔기아.” 베르텔기아는 한숨을 내쉬고는 힘없는 어조로 말했다. “알았어. 밥값하면 될 거 아냐. 밥 한 끼 얻어먹은 적은 없지만!” 베르텔기아는 스스로 책장을 펼쳐 에크하르트가 제시한 문제의 해답에 근접한 레시피를 찾았다. 김성철은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답을 기다렸다. ======================================= 66. 여덟 번째 영웅 (2) 연금술을 할 때 김성철은 별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머리를 비우고 하나의 기계가 된 것처럼 정해진 작업을 한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지금 흐릿한 기억 속의 먼 과거. 모두가 납땜질이라면 질겁을 했지만 김성철은 아무 말 없이 만능기판과 전선, 실납을 앞에 두고 자리에 선 채 몇 시간이고 묵묵히 기판을 완성하곤 했다. 특별히 납땜질이 재밌다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뭔가를 몰입해서 하는 게 좋았다. 그렇게라도 해야 자신을 둘러 싼 엄혹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으니까.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올 때마다 그는 못 보던 남자가 거실을 차지하고 있는 걸 본다. 누나가 데리고 온 남자다. 아마도 술집에서 눈이 맞아 집까지 끌고 온 모양이다.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라 김성철은 무시하고 자신의 방으로 간다. “야!” 그러나 그중 몇 명은 김성철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김성철이 교복을 입은 걸 보고 꼴에 연장자 대접을 받으려고 시비를 걸어대곤 했다. 그런 일이 발생하면 대부분 김성철에게 죽도록 맞았다. 김성철은 가끔 말리는 누나까지 두들겨 팼다. “신난다!” 베르텔기아의 환호성이 김성철의 회상을 가로 막았다. “…뭐가 그리 신이 난다는 거냐?” 김성철은 조합을 잠시 멈추고 베르텔기아를 응시했다. 베르텔기아는 탁자 위에 황금빛 가루를 뿌려놓고 거기다 몸을 비벼대고 있었다. “베르텔기아 도금하는 중!” 황금 가루는 이번 과제에 에크하르트가 함정으로 내세운 재료 중 하나. 쓸 일이 없어 내버려 둔 걸 베르텔기아가 내용물을 엎어놓고 장난치는데 쓰는 모양이었다. 김성철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베르텔기아를 보고 피식 웃고는 계속해서 조합을 계속해갔다. 조합을 하자 자연스레 회상은 계속됐다. 부모님이 사고로 죽은 이래 별다른 유산은 없었지만 제법 큰 보험금이 김성철과 누나에게 지급됐다. 문제는 누나 쪽이었다. 원래부터 가출을 수시로 하는 문제아였지만 부모님을 잃고 더욱 막 나갔다. 정신 못 차리고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탕진하는 건 물론이고 술, 담배, 이상한 제비 같은 놈까지 집안에 끌어들이니 분노가 쌓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도 유일한 혈육인지라 일회용 남자친구를 때릴 때보단 힘 조절을 했다. 평소에 쌓인 감정도 감정이지만 제발 좀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가 보다 강했으니. 하지만 진심을 담아 두들겨 팬 적이 있었다. “신난다!” 또 베르텔기아가 중요한 대목에서 회상을 방해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반대쪽을 도금하고 있었다. “…….” 연금 작업이 다시금 중단됐다. 김성철은 지금까지 만든 것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세공 도구를 이용한 달걀만한 암소의 상이 보기 좋게 나열되어 있었다. 전부 직접 김성철이 에크하르트가 준비한 거품나무의 외피를 가공해 만들어 낸 것이다. ‘앞으로 2개만 더 만들면 되겠군.’ 이번에 만들 아이템은 전사의 돌이란 이름을 지닌 녀석이란다. 이전에 만든 마법사의 돌과는 동일한 카테고리의 아이템. 아마도 다른 거신들 안엔 저마다의 돌이 김성철의 연성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김성철은 세공도구로 나무를 다듬으며 베르텔기아에게 말했다. “어이. 베르텔기아. 넌 외동이라고 했지?” “응. 형제도 자매도 없어.” 도금 놀이가 그새 질렸는지 베르텔기아는 몸에 붙은 금가루를 몸을 털어 떼어내고 있었다. “당신은 형제자매 있어?” “…그런 건 없다.” 이미 버린 지 오래. 소환궁전을 통해 이 세상에 오기 전부터 김성철은 혼자였다. “흐음.”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을 향해 다가오더니 그가 만들고 있는 암소 조각상에 몸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세공도 제법 하네? 그림을 워낙 못 그려서 세공도 못할 줄 알았더니.” “즐겨하진 않지만 요리에도 데코레이션이라는 게 있지. 얼음을 깎아 용을 만든다거나 과일을 깎아 꽃을 만든다거나. 이것 또한 엄연한 요리인의 자질 중 하나다.” “그런데 그림은 왜 그리 못 그려?” “베스티아레를 그리기 싫었을 뿐이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2개의 암소상이 모두 완성됐다. 테이블 위에 10개의 앙증맞은 암소상이 나란히 놓였다. 김성철은 암소상들을 에크하르트의 휴대용 연금가마 안에 집어 넣은 후 이전에 만든 다른 자료들과 함께 섞어 주걱을 젓기 시작했다. 베르텔기아는 노예 감독관처럼 김성철 옆에 버티고 서서 그의 행동을 감시했다. “요령 피우지 말고 바닥까지 잘 긁히게 싹싹 저으라구!” “…….” 김성철은 묵묵히 베르텔기아가 시키는 대로 했다. 체내에서 대량의 마나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김성철이 지닌 최강의 마법 스타라이트를 연달아 3번 정도 쓸 정도의 소모량. 김성철이 마법을 제대로 익히지 않았다면 꽤나 오랜 시간을 들여서 주걱을 저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량의 마나가 빠져나간다는 건 그만큼 훌륭한 연금 아이템이 탄생한다는 증거. 곧 김성철의 노고는 결실을 맺는다. [ 연성 성공! ] 솥 안에 집어 넣었던 모든 재료가 사라지고 하나의 결과로 남았다. 김성철은 활기 찬 붉은 색의 광택을 지닌 원형의 돌을 손에 넣었다. < 전사의 돌 > 레벨 : 7 등급 : S 속성 : - 분류 : 유물 효과 : 다른 다섯 개의 돌을 모아라. 그러면 진리의 길이 그대 앞에 열릴 것이다. 마법사의 돌과 거의 동일하다. 색채와 표면을 장식한 해독불가능한 문자의 패턴이 조금 다르지만 대동소이하다. 범상치 않은 신비로움을 간직한 물건이다. 김성철은 지금 세상에서 그 이외엔 누구도 만들 수 없는 연금아이템을 가지고 제단으로 다가갔다. 빛나는 문자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났다. [ 훌륭하다. 그대는 전사의 돌을 완성했다. ] [ 내 딸과 함께 왔다면 축복을, 그렇지 않다면 경탄과 더불어 저주를 내리겠다. ] “나는 네 딸과 같이 왔다.” 앞에 에크하르트가 있을 리 없지만 김성철은 그에게 말하듯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 순간 김성철은 자신의 눈을 살짝 의심했다. 제단 위에 놓인 책이 움직인 것이다. 찰나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짧은 시간, 제단 위의 책은 마치 사람이 고개를 가로젓듯 몸을 흔들었다. ‘뭐지? 설마. 이 책.’ 김성철은 아델화이트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베르텔기아와 같은 책을 지닌 모험가를 불현듯 떠올렸다. “어이. 너. 살아 있는 건가?” 김성철은 책을 향해 물었다. 책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또 다른 문자를 김성철 앞에 표시했을 뿐이다. [ 베르텔기아 1호기의 진정한 목적인 계승자의 영접을 달성했으므로 본 지식의 열쇠는 곧 기능을 정지합니다. ] [ 거신을 떠나기 전에 에크하르트님의 전언을 확인하여주십시오. ] 제단 안에 펼쳐진 결계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광휘 속에서 세로로 서 있던 책은 힘을 잃고 이내 사라진 결계 너머로 떨어져 지면에 덩그러니 떨어졌다. 김성철은 무릎을 굽혀 그 책을 집어 올렸다. ‘대체 이건 뭐지?’ 김성철은 책장을 펴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책 안엔 이해할 수 없는 무수한 글자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 글자들은 마치 김성철의 시선에서 달아나기라도 하듯 책장 깊은 곳을 향해 달아났고 이윽고 책안엔 백지만이 남았다. 김성철은 다른 장을 펼쳤지만 결과는 같았다. 책 안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뭐하는 거야?” 베르텔기아가 불쑥 물었다. “아니. 별 거 아냐. 그보다 에크하르트의 메시지나 확인하러 가자고.” 발광석들이 조종실 한 구석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숨겨져 있던 상자. 아마도 칠영웅들은 결코 찾지 못했을 물건이리라. 김성철은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과연 그 안엔 에크하르트가 남긴 기록이 있었다. 활자로 찍은 것 마냥 균일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필체. ‘난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글씨는 못 쓰겠지.’ 김성철은 종이에 적힌 글귀를 읽어나갔다. [ 에크하르트의 기록 그 첫 번째 ] [ 창조술사가 된지 1년 째. 드디어 칠영웅이 날 인정해줬다. 특히 사자토스 형이 기뻐해서 황송한 기분이었다. 내 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 궁극의 연금병기는 대륙의 모든 범인류에게 희망을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 1년만 빨리 이것을 만들었어도 나도 소환궁전으로 돌아가 다른 칠영웅처럼 나만의 자취를 남길 수 있었을 텐데! ] 그걸 본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에크하르트란 사내의 초심인가?’ 풋풋하고 소박하다. 현실에서 답을 찾고 미래를 꿈꾸는 열의에 찬 청년 학자의 초상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이것이 이 기록의 끝이 아니라는 건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김성철은 정려하게 쓴 문장 아래 갈겨쓰다시피 한 새로운 문장을 읽어나갔다. [ 재앙을 막기 위한 도구가 재앙 아니 그보다 더 큰 재액을 불러올 수 있는 도구가 되리라고는 그땐 상상하지 못했다. 어리석었다. 너무나도 어리석었다. 칠영웅이 무슨 짓을 하려고 한 지 알고 싶다면.... ] [ ... ] [ ... ] [ ... ] [ ... ] [ 유감! 다른 다섯 기의 베르텔기아를 찾으면 알 수 있다! ] [ 그리고 전사의 돌은 내 딸에게 먹이도록. 먹는 게 아닌 거 같다고?! 과연 그럴까? 어디 한 번 도전해보시라! ] “음. 이 양반. 패턴이 한결같군.” 김성철은 갈겨 쓴 문장을 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조금 부끄러워.” 베르텔기아가 몸을 가볍게 흔들며 대답했다. “아무튼 이번엔 편식은 안 할거지?” 김성철은 마법사의 돌을 먹기를 한사코 꺼리던 베르텔기아를 응시하며 물었다. “이번엔 제대로 먹을 거야. 그게 얼마나 맛있다고. 하지만 하나만 먹으면 부족하니까 옆 동네 거신의 돌도 만들어보자구!” 자기가 연성하는 게 아니라고 막 나간다. 김성철은 약간의 불만을 가졌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여겼다. 오늘 하루는 충분히 몸을 많이 움직인 것 같지만 가끔은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날도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는 베르텔기아 2호기라 명명된 또 다른 거신으로 옮겨탔고 1호기에서 한 것과 동일한 작업을 했다. 연성은 다음 날 해가 뜨기 전까지 지속됐다. 오랜 시간을 들인 끝에 김성철은 두 번째 거신에 암살자의 돌을 연성했다. 남은 마나는 거의 바닥을 보일 지경. 김성철은 오랜만에 진한 피로를 느끼며 잠시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에크하르트의 기록 열람은 뒤에 이어졌다. [ 에크하르트의 기록 그 두 번째 ] [ 팔영웅의 칭호는 안타깝게도 받지 못했다. 영웅이 하나 더 늘어나는 건 제후들로선 달갑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스포트님이 나를 위해 우리만의 서훈식을 열어주었다. 베스티아레님이 날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지만 이제 와서 뭘! 내겐 천만금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딸과 아내가 있는데! ] 그걸 본 김성철은 알 수 있었다. 에크하르트가 남긴 기록은 거신의 순서에 따라 시간 순대로 배치되어 있다는 걸. 시간에 따라 변하는 에크하르트의 심리변화를 보는 건 흥미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기록 말미에 갈겨 쓴 듯한 문구는 거의 동일한 시기에 쓰인 것으로 보였다. 이번에도 비슷한 내용의 칠영웅에 대한 비판이 적혀 있었다. 김성철은 갈겨 쓴 내용을 읽어 나갔다. [ 달타니어스의 멍청함엔 신물이 난다. 가시옹의 끝도 없는 투덜거림은 나를 미치게 만든다. 드라고만은 내게 패배한 이후로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이렇듯 칠영웅의 민낯은 상상 이상으로 추악했다. 나의 오랜 우상이었던 베스티아레마저도... 하지만 나머지 칠영웅 모두의 광기를 합쳐도 데스포트 하나의 광기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진짜로 미친 사람이다... ] “베르텔기아. 데스포트는 어떤 사람이지?” 모든 기록을 읽은 뒤 김성철이 말했다. “좋은 사람... 으로 기억해.” 베르텔기아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군.” 김성철은 자신이 만들어 낸 전사의 돌과 암살자의 돌을 모두 베르텔기아로 하여금 흡수하게 했다. 베르텔기아의 몸이 광휘로 휩싸였다. 김성철은 그 광휘 속에서 전에 본 것과 같은 형상을 볼 수 있었다. 빛 한 가운데 자리잡은 태아처럼 웅크린 여자아이. 찰나의 번득임과 함께 사라졌지만 그 모습은 안개여정에서 볼 수 있는 베르텔기아의 모습과 동일하다. 흡수가 끝난 후 김성철의 눈앞에 퀘스트를 완료했다는 문자가 떠올랐다. 능력치도 소폭 올랐다. 이제 이곳에 남은 볼일은 끝이 났다. 김성철은 거신에서 내려와 지면에 섰다. 문득 김성철은 거신 아래에서 만들어지다 만 골렘을 발견했다. 도구도 장비대도 없지만 분명 거신 아래에 방치된 것은 만들다 만 골렘이었다. 김성철은 의문을 느끼고 주변을 살폈다. 곧 그는 거신 아래에 하복부 부근에 아주 미세한 기이한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걸 발견했다. ‘이런 것도 있었나.’ 김성철은 플라이를 사용해서 허공에 떠올라 그 장치를 살폈다. 마도병기와는 격이 다른 고도의 기술로 만들어 낸 용도불명의 장치가 하복부의 두터운 장갑 아래 숨겨져 있었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이용, 장치를 분리해 살펴보았다. “이건 뭐지?” 김성철이 물었으나 베르텔기아는 모른다는 눈치였다. 김성철은 계속해서 장치 내부를 살폈다. 이윽고 무언가를 담아두는 금속제 상자를 발견했다. 몇 겹으로 봉인한 것이 장치에 있어 귀중한 것을 담은 게 틀림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상자를 열어젖혔을 때 김성철은 또 다른 충격에 직면했다.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은 재앙의 파편이었다. 김성철의 복대 안에 숨겨진 것과 같은. ======================================= 66. 여덟 번째 영웅 (3) 김성철은 그 검은 파편을 만져보았다.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순도가 김성철의 것에 비해 명백히 약하다. 김성철이 지닌 재앙의 파편이 보는 것만으로 꺼림칙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면 거신에서 발견된 파편은 형태만 남은 빈껍데기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대체, 이건 뭐란 말인가?’ 영혼창고에서 수령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재앙의 파편이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정체에 대해서 김성철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아무래도 이 재앙의 파편이란 건 일종의 동력원으로 보이는군.’ 현재까지 확인된 것으로 3개의 세력이 재앙의 파편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는 아퀴로아의 구세병. 다른 하나는 종말교단의 환단.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크하르트의 거신. 이중 에크하르트는 재앙의 파편의 존재를 알고 있으리라는 개연성이 추측된다. 칠영웅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하나 그가 칠영웅과 함께 맞서 싸우며 재앙을 해결한 전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나머지 두 집단이 어떻게 재앙의 파편을 손에 넣었고 그것을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다. ‘재앙의 파편은 재앙 해결에 대한 보상이다.’ 현 시대의 재앙에 대해서 맞서는 이는 오직 김성철 하나뿐이다. 또한 재앙의 파편 또한 김성철의 손에 들어왔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한 가지 가설을 도출하게 된다. 아퀴로아와 종말교단은 전 시대, 아니 어쩌면 전전 시대의 재앙과 모종의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물론 이 생각에 맹점이 아주 없지는 않다. 재앙이 이 세상에 내려왔을 때 그 세대가 재앙을 해결하지 못하면 그 종족은 절멸한다. 설령 운 좋은 일부가 재앙 그 자체에서 피한다고 해도 후세를 낳지 못하게 되는 절멸의 저주가 그 종족의 완전한 죽음을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이 인간들의 지배적인 종교집단인 뮤라 교단과 호라산 교단의 경전에서 거듭 강조하는 내용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김성철의 가설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 시대의 재앙을 막지 못한 시점에서 아퀴로아 혹은 종말교단의 먼 조상 또한 사멸해버리는 게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남겨줄 유산도 지식도 같이 소멸해버린 채 말이다. ‘당면한 적은 칠영웅이지만, 어쩌면 그것보다 더욱 지독한 무언가가 인간 사이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것이 무엇이 될 지 김성철은 알지 못한다. 어쩌면 아델화이트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 여자는 여러 가지 의미로 지금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니. 하지만 늘 그렇듯 김성철은 막아서는 모든 적을 분쇄할 것이다. 하늘의 파편을 벼려 만든 팔 가라즈를 지니고. ‘뭐가 나타나든 전부 박살낼 뿐이다.’ 김성철은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으며 몸을 돌렸다. “거신이 아빠의 골렘을 만들다니. 뭐, 결국은 아빠가 만든 거였네. 저 수많은 골렘 군대도.” 베르텔기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마음을 졸였던 모양이다. 생판 모르는 이가 아빠의 전매특허인 골렘을 만든다는 사실이 말이다. 김성철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다. ‘그렇게도 볼 수 있겠군.’ 쉽게 망각하지만 모든 사람에겐 저마다의 시선이라는 것이 있다. 김성철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해왔지만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베르텔기아가 물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의 물음에 머리를 심란하게 만드는 생각을 훌훌 털어버리고 특유의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하부르스. 데스포트의 숨통을 한 번에 끊는다.” 김성철은 전속력으로 하부르스를 향해 달려갔다. 전력을 다한 건 아니지만 마법과 다리의 힘을 번갈아 쉬지 않고 달려 한 달음에 방대한 동부를 답파, 그 끝에 위치한 항구도시 앞에 이르렀다. 하지만 하부르스에 도착했을 때 김성철은 한 가지 속담을 머릿속에 떠올려야 했다. 닭 쫓던 개가 지붕만 쳐다본다는. ‘이런 개 같은 일이 있나.’ 확실히 데스포트는 이곳에 있었다. 그의 거신이 자리 잡은 흔적은 깨끗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흔적은 바다로 이어져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거신의 흔적을 추적하던 김성철은 얄궂은 상황에 직면했다. 칠영웅의 리더 데스포트는 거신을 끌고 망망대해로 도망친 것이다. ‘아니 이런 개 같은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상상조차 못한 일이다. 악의 근원이 도망쳐 버린 것이다! 추적도 탐색도 불가능한 대해 너머로 말이다. 악마왕 해서니우스 맥스가 아무리 졸렬한 놈이라고 해도 적어도 자신의 악마궁을 떠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진짜 미친놈이네.” 김성철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한 마디 내뱉었다. 하지만 김성철은 알고 있다. 재앙 그 자체가 된 존재가 자신의 책무를 방기한 채 도망친다면 결코 좋지 않은 결과가 따르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마도 신의 직접적인 제재를 받을 것이다. 김성철은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그의 가슴 속에도 박힌 맹약의 십자가가 그 점을 말없이 웅변하고 있었다. “으음. 칠영웅의 대장이란 놈이 죽기 싫어서 도망가다니. 진짜 꼴 볼견이네.” 베르텔기아가 악취로 들끓는 해변을 바라보며 툴툴거렸다. 해안가엔 반쯤 불어터진 어인의 시체가 한 가득 밀려와 썩어가고 있었다. 부패 상태로 미루어보아 먼 바다 쪽에서부터 떠내려 온 것으로 보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대해 너머는 전인미답의 영역이다. 어떤 지도도 바다 너머의 세상에 대해서 기술하지 않는다. 힘만 있다면 뭐든 얻을 수 있는 이계에서 굳이 먼 바다로 나갈 필요도 없을 뿐더러 바다엔 미지의 위험이 가득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 김성철이 아무리 신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신의 권능의 또 다른 형태인 바다 전체에 맞설 순 없다. 지금으로서는 물러서는 것 외엔 다른 도리는 없어 보였다. ‘거신이든 공선이든. 일단은 돌아가서 추적할 수단을 강구해보는 게 좋겠군.’ 그날 밤은 하부르스에서 묵었다. 사람은 살지 않지만 사람이 남겨 놓은 조리시설이 있고 해산물이 풍부한 하부르스는 요리하기 좋은 곳이었다. 지글지글. 한 쪽에서 입을 벌린 조개들이 석쇠 위에서 구워지는 가운데 김성철은 갓 잡아 채를 썬 신선한 생선의 회를 철혈주와 함께 들이켰다. 라그란제에 살고 있던 철혈기사단의 생존자로부터 구한 철혈주는 본토의 그것보다는 맛이 덜했지만 충분히 김성철이 기대하는 풍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럴 경우에 대비해 구입한 아이스볼트 스크롤로 만들어낸 얼음 더미 안에 철혈주를 쌓아놓고 오랜만의 만찬을 유감없이 즐겼다. “세상에. 당신의 괴식은 갈수록 도가 지나치네. 생선을 날 것으로 먹다니! 리자드맨도 안하는 짓을!” 평가가 박한 건 베르텔기아 뿐만은 아니었다. 김성철 내면의 평가자도 좋지 않은 점수를 매겼다. [ 이 요리의 점수는... 9점! ] [ 생식은 네 발로 걷는 짐승이나 하는 것이다. ] 예전엔 초딩 입맛이라고 무시하던 평가자지만 이제는 조금은 흥미가 생겼다. 장소, 위치를 불문하고 매번 다른 평가를 내리는 존재가 무엇인지. ‘어딘가 사는 별난 아신 정도로 여겼는데.’ 아신(亞神)이라 불리는 존재는 필멸자와 신 중간에 있는 모든 존재를 총칭하는 말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세계에서 필멸자에게 허용된 힘을 넘어선 자는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한다. 이 세상이란 그릇이 더 이상 그의 형체를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신이 된 자는 다른 세상으로 간다. 신계, 천상, 무의 공간 등 다채로운 이름으로 불리는 불가해의 영역으로 말이다. 아신이 된 자는 즉각 자신이 몸담던 세상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더 이상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고 한다. 필멸자의 육체를 잃고 아신의 경지에 이르는 순간 그는 전과 다른 어떤 존재로 거듭나고 따라서 과거의 작은 일 따윈 전부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 어떤 아신들은 아주 예외적인 영역에서 은밀하게 활약한다는 소문이 있다. 김성철은 브로치에 담긴 요리인 클래스의 익명의 평가자도 필경 그런 존재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델화이트의 말에 다르면 이 녀석과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모양이군.’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쟁반 위에서 꿈틀거리는 지렁이 같은 물체를 응시했다. 개불이다. 김성철이 살던 곳에선 귀한 식재였지만 여기선 아무도 먹지 않는 혐오식품이다. 김성철은 개불을 집어 도마 위에 놓고 토막 쳤다. “읔. 그런 걸 먹는 거야?” “이게 얼마나 맛있다고.” 김성철은 아무것도 곁들이지 않고 개불을 입에 넣고 꼭꼭 씹으며 점수가 뜨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개불에 관한 점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평가자가 도망을 친 모양이다. ‘해산물의 멋짐을 모르다니. 정말로 불쌍하군.’ 개불 하나를 먹어치운 김성철은 다음엔 석쇠 위에 익어가고 있는 조개들로 눈을 옮겼다. 냄새만 맡아도 군침이 돈다. 그의 식사는 자비 없이 이어졌다. 칠영웅과의 전투, 연금술, 그리고 데스토프 추적까지 많은 힘을 소모한지라 그의 식사량은 평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산더미만한 음식과 술이 소비됐다. 본인 스스로도 과식을 했다고 느낄 정도. 하지만 과자가 들어갈 배는 따로 있는 법이다. 그는 한때 달파인의 목을 넣어두었던 상자를 열어 아델화이트가 싸준 쿠키를 따뜻한 차와 함께 음미하며 입가심을 했다. “참. 잘 먹는다. 진짜.” 베르텔기아의 투정에 김성철은 희미하게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잘 먹어야지.” 슬슬 밤이 깊어 온다. 김성철은 버려진 저택에 숙소를 잡고 잠을 청했다. 약간은 낡았지만 푹신한 침구 속에서 김성철은 그럭저럭 만족할만한 수면을 취할 수 있었다. 잘 먹고 잘 자는 것만큼 훌륭한 휴식도 없다. 김성철은 몸이 충실해지는 걸 느끼며 버려진 항구도시를 나섰다. 도시의 입구엔 뜻밖의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베스티아레. 아니 베스티아레를 닮은 조그만 여자아이다. 김성철은 그것이 베스티아레가 부리는 호문클루스와 유사한 사역마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베스티아레님께서 당신을 찾으세요.” 꼬마 베스티아레가 똑 부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에게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네요.” 짧은 용건을 말한 후 꼬마 베스티아레는 차원진 너머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엔 익시온으로 향하는 지도 하나가 놓여 있었다. “흐음. 대단히 수상한 제안인데?” 주머니 안에 숨어 있던 베르텔기아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여기 우리가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온 걸까?” “하부르스는 놈들에게도 중요거점이니 눈을 몇 개 심어뒀겠지. 게다가 아무도 없는 도시에서 밤새 불을 피웠으니 모르는 게 이상할 일일지도 모르지.” 김성철은 잠시 생각을 했다. 드라고만의 말에 의하면 베스티아레는 더 이상 만날 가치가 없는 적이다. 그녀를 죽인다고 해봐야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기에. 하지만 데스포트를 놓친 이상, 한 번 정도 그녀를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드라고만이 말하지 않았던가. 데스포트라는 남자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메아리술사 베스티아레라고. 거신을 가지러 가든 공선을 가지러 가든 그녀의 근거지가 중간 지점에 있다는 점도 마음을 굳힌 이유 중 하나였다. 김성철은 거신 보다는 공선 쪽이 비록 가지러 가는데 시간은 걸리겠지만 탐색에 보다 적합한 대상이라 생각했다. 높은 고도에 머무른 공선 위에선 보다 멀리 볼 수 있고 게다가 거신 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니 말이다. 게다가 그에겐 공선 중에서 1급의 성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아퀴로아의 기함 프로크루스테스 급의 공선이 있다. 은자의 탑 주변에서 두 번째 아퀴로아 및 그 승무원을 처치하고 얻은 그 공선은 주변 삼림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공선을 가지러 가는 김에 베스티아레의 본거지에 들렀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단 1시간 이상은 그녀에게 할애하지 않겠다.’ 갈 길을 정한 김성철은 다시 여행을 시작했다. 단 하루 만에 만들어졌다는 마법사의 도시 익시온으로 말이다. * 동부의 대해 너머엔 이름 없는 섬이 있다. 현 시대에 그 섬의 존재를 아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 시대의 사람, 그것도 가장 은밀하게 전해 내려오는 신의 글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데스포트는 신의 글을 읽을 능력이 없다. 하지만 아주 일부분의 내용은 독해할 수 있을 정도의 직관력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의 미약함과 한계를 느끼고 실의에 빠져 있던 시절, 우연히 입수한 신의 글은 마치 그에겐 계시와도 같았다. [ ...재앙과 무관하게.... 세상을.... 절멸로 몰아넣은.... 동해의 외로운 고도.... 어인족을... 풀어... 외인의 접근을... 차단했다.... ] 이 내용을 바탕으로 데스포트는 과거의 기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곧 그는 원하던 정보를 얻게 되었다. 아주 까마득한 과거, 동쪽의 화산이 어마어마한 분화를 일으켰고 죽음을 연상케 하는 황색의 낙진 아래 대지의 모든 것들은 죽음과 투쟁하며 신음해야 했다고. 무엇보다 그것이 재앙의 서에 기록된 재앙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이 데스포트의 흥미를 돋우었다. 쿠구구궁! 지면이 거칠게 흔들렸고 겨운 유황과 알 수 없는 악취가 코끝에 진하게 감돌았다. 데스포트는 고개를 돌렸다. 이름 없는 화산 옆 에크하르트의 거신이 거대한 손으로 화산의 지반을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그 틈새 사이로 시커먼 연기와 황색의 유독성 물질이 아무것도 살지 않는 섬의 하늘 위에 불길한 형태로 퍼져 나갔다. 데스포트는 팔짱을 끼고 그 작업을 주시했다. 유쾌한 곡조를 콧노래로 흥얼거리면서.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데스포트는 자신 옆에 익숙한 불쾌한 기운이 어느새 자리 잡았음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한 권의 책이 있었다. 거신의 조종석에 있는 것과 동일한 형태. 데스포트의 입가에 비릿한 냉소가 떠올랐다. “예정에 없는 재앙을 내가 만들어내려고 하니 초조해지셨나?” “…….” 허공에 뜬 책은 아무 말도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데스포트는 그 책을 노려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정 내가 마음에 안 들면 여기서 죽여라. 너에겐 간단한 일 아닌가?” “…….” 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점점 감당할 수 없는 압박감을 데스포트에게 안겨다주었다. 점잖던 데스포트의 얼굴이 차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난 도살장의 소가 아니야! 가만히 앉아 차례대로 죽음을 기다릴 정도로 멍청한 축생이 아니라고!” “…….” 책은 이번에도 침묵으로 답했다. 하지만 전과 달리 중대한 변화가 주변에서 일어났다. 화산을 자극하던 거신이 움직임을 멈춘 것이다. 데스포트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다고 내가 포기할 거 같나?” “…….” 침묵은 길게 이어졌다. 이윽고 책은 어떤 징조도 없이 사라졌다.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한줄기 한 숨이 데스포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부질없는 짓이다. 꼬맹이. 파멸은 피할 수 없다.” 그는 우두커니 멈춰 선 거신을 노려보았다. 진한 분노의 불길이 눈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불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아닌 네가 신이 된 순간부터!” ======================================= 67. 익시온 (1) 익시온으로 향하는 여정 중에 김성철은 운 좋게 마차 한 대와 주변에서 노니는 길들여진 말 두 필을 발견했다. 모처럼 탈 것을 얻은 김성철은 유유자적하게 대로를 따라 앞으로 나아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민가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동부를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외부인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멀찍이서 김성철이 다가오는 걸 본 것만으로 집안에 꽁꽁 숨어 숨을 죽였다. 김성철은 일부러 빠른 걸음으로 마을을 지나쳤다. “익시온은 어떤 곳이야?” 베르텔기아의 물음에 김성철은 묵혀 뒀던 옛 기억을 끄집어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작은 나라다. 마법학교도 있었지.” “에어푸르트 보다 좋은 곳이야?” “글쎄. 그건 잘 모르겠지만 동부에선 나름 명문이라고 취급 받은 곳으로 기억 해.” 부유한 대륙 동부는 다른 곳에 비해 인구도 많고 교육수준도 높았다. 큰 나라는 없고 강한 군대는 없지만 모든 것의 근간이 되는 인재는 서부나 중앙에 비해 훨씬 풍부했다. 김성철이 피비 캔버스나 안겔로 룩스 같은 동부 출신의 숨은 강자들의 출현에 놀라지 않은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따라서 황제는 동부의 부국들이 힘을 합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만약 동부 전체를 아우르는 대국이 만들어진다면 제국이 장악한 헤게모니에 심대한 위협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루테기네아 왕국은 정기적으로 동부를 침략해 무수한 볼모와 노예를 끌고 가는 것으로 잠재적인 라이벌을 짓밟았지만 황제는 교묘한 외교적 술책과 세작을 통해 동부를 컨트롤했다. 익시온은 과거 김성철이 동부를 회유하기 위해 자리 잡은 거점 중 하나였다. “…익시온의 왕은 볼품없는 외모에 체구도 작았지만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지. 그는 끝까지 세계의회의 설립을 반대했다.” “왕이 누군지 별로 궁금하진 않은데.” “기억나는 게 왕 밖에 없어서 말이야. 거리는 적당히 아름답긴 했지만 별 특색 없는 나라였다.” 그렇게 말하던 김성철의 뇌리에 뭔가 스치고 지나갔다. “아. 그리고 그것도 있었지.” “뭐?” “양파 스프를 기가 막히게 잘 만드는 가게가 있었다. 대륙 전역을 통틀어도 거기만큼 맛있는 가게는 없을 게다.” “또, 또 먹는 이야기.” “…….” 베르텔기아는 먹는다는 주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본인이 먹을 수 없게 된 몸이 된 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애당초 먹는다는 행위에 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럼 넌 대체 뭘 좋아하지?” 김성철이 베르텔기아의 기호식품에 관해 묻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나?” “그렇다.” 김성철의 물음에 베르텔기아는 마부석 옆 자리 좌석에 엎어지더니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뭔가 떠올려내고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메뚜기.” “메뚜기?” “응. 다리를 떼어내고 불에 구우면 얼마나 맛있다구!”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언제는 개불 먹는다고 난리를 치더니.’ 김성철은 메뚜기를 먹지 않는다. 벌레를 아주 안 먹는 건 아니지만 특별한 별미가 아닌 대용품이라면 결코 입에 대지 않는다. “솔직히 내가 살던 때엔 별 달리 먹을 만한 게 없었어. 날씨가 계속 안 좋아 흉년이 지속되고 근근이 먹을 정도의 풀이나 곡식 같은 걸 먹고 살았거든.” 베르텔기아가 모처럼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그래도 칠영웅은 맛있는 거 먹는 거 같더라. 전에 데스포트를 좋은 사람이라 말한 것도 우리 집에 올 때마다 먹을 걸 선물했거든.” “근본은 나쁘지 않은 놈이군.” 여행은 계속됐다. 익시온은 곧 목전에 이르렀다. 멀리 지평선 끝에 거신의 형체가 어른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저기가 하루 밤 만에 만들어졌다는 도시인가? 과거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군.’ 도시에 근접할수록 김성철은 익시온이 단순한 급조도시가 아니라는 생각을 강하게 품었다. 도시를 둘러 싼 높고 정려한 성벽, 그 위로 솟은 무수한 첨탑들. 도저히 하루 만에 만들어진 도시라고 볼 수 없었다. 성벽 아래 이르자 김성철은 방어시설이라기보다 하나의 예술작품에 가까운 성벽의 화려하고 균형잡힌 구조와 장식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도시 전체에 드리워진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갖가지 경계결계과 알 수 없는 용도의 결계들이 도시 전역을 빽빽하게 뒤덮고 있었다. 땅은 물론 땅밑에서도 하늘 위에서도 간단하게 침입할 수 없는 모양새. 그걸 본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이 도시의 무서운 점은 하루 만에 만들었다는 도시의 건물이 아니라 도시를 둘러 싼 술식일지도 모르겠군.’ 그 아래 마법검사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성벽 아래 김성철이 이르자 즉각 뿔피리를 불었다. “당신이 부수는 자입니까?” 위병 하나가 다가와 김성철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자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엔 무수한 인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위병들이 공손하게 김성철을 안으로 안내했다. 김성철이 결계를 뚫고 성벽 안으로 들어가자 군중들이 일제히 김성철을 향해 절을 올리며 소리쳤다. “부수는 자님의 예방이다!” “모두 부수는 자를 경배하라!” 조용한 상아빛의 도시에 갑작스레 축제의 장이 펼쳐졌다. 종루의 종들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꽃잎들이 사방에서 흩뿌려졌고 흥겨운 음악이 여기저기서 들려 왔다. 익시온의 군중들은 진심으로 김성철의 방문을 환영하는 눈치였다. “뭐야. 이거 뭔가 무서운데?” 베르텔기아가 몸을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세계의 적이 된 이래 김성철은 이런 환영을 받은 적이 전무하다. “…….” 하지만 그보다 수상쩍은 것은 도시 전체에 흐르는 기이한 기류였다. 뭐라고 콕 찝어 말할 수 없지만 도시의 공기가 바깥과는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마치 다른 세계의 질서가 통용되는 듯한 감각. 김성철이 이런 부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과거에 비슷한 경험을 느꼈기 때문이다. ‘신으로 향하는 길에서 느꼈던 이질감과 비슷한 느낌이 나는군. 그것과는 명백히 다르지만...’ 하지만 뭐가 나타나듯 김성철을 해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김성철은 주위를 둘러봤다. 도시 곳곳에 어떤 존재의 조각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네 개의 팔을 지닌 강인한 남성의 상. 인간이라기보다는 악마, 혹은 신과 같은 경건함을 지닌 존재였다. ‘대체 저건 뭐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형상이다.’ 조각가가 제멋대로 만들어낸 창조물이라고 하기엔 같은 조각상이 지나치게 많았다. 김성철은 동행한 병사에게 물었다. “저건 뭔가?” 김성철의 물음에 병사는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도시의 수호신 시드미아님입니다.” “시드미아?” 듣지 못한 이름이다. “저는 외지인이라 잘 모르지만 익시온에선 오래 전부터 수호신으로 모셔왔다고 하더군요.” 금시초문이다. 아무리 이교신앙이 탄압의 대상이라고 해도 꽤 오랫동안 익시온에 체재한 김성철이다. 시드미아는커녕 저런 조각상은 단 한 차례도 본 적이 없다. ‘기이하군. 하루 만에 만들어 진 도시가 이교의 중심지가 되다니.’ 김성철은 저마다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경탄어린 눈으로 응시하는 군중들을 돌아보며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상아빛의 도시 중앙에 자리 잡은 거신 아래 베스티아레의 궁전이 있었다. 베스티아레는 궁전의 입구에서 자신을 닮은 작은 시종들을 거느리고 김성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어요. 부수는 자.” 베스티아레는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무슨 꿍꿍이지?” 수많은 인파를 동원한 성대한 환영에도 불구하고 김성철의 말투는 싸늘하기만 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엔 베스티아레의 흉계가 숨겨져 있으리라 본 것이다. “무슨 꿍꿍이라니요? 저는 그저 진심을 담아 당신에게 합당한 대우를 했을 뿐이예요.” 베스티아레는 빤히 김성철을 응시하며 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김성철을 안으로 안내했다. 김성철은 말없이 그녀를 따라 거신 아래 위치한 베스티아레의 궁전으로 들어갔다. 순백의 톤으로 꾸며진 응접실에 들어서자 작은 베스티아레들이 차와 다과를 내왔다.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는 꼬마 베스티아레를 보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뭐야? 저것들. 호문클루스도 요정도 아니고...” “사악한 마법사들의 술책은 굳이 파헤칠 필요가 없단다. 베르텔기아.” 김성철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들어 향을 음미했다. 최상품이다. 독극물의 악취도 없다. 김성철은 대범하게 차를 음미했다. 향만큼이나 훌륭한 풍미다. 다만 과자는 그의 입맛엔 조금 자격 미달이었다. “어떠셨나요? 제가 직접 탄 차와 손수 만든 과자의 맛은?” 차를 즐기고 있자니 베스티아레가 홀로 응접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성철은 그녀를 노려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차는 상품이지만 과자는 중등품이군.” “어머, 박하신 평가.” 김성철은 여전히 적대감이 묻은 눈빛으로 베스티아레가 그 앞에 앉는 걸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녀가 자리를 잡자 김성철이 딱 잘라 말했다. “용건이 뭐지?” 김성철의 물음에 베스티아레는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 몫의 차를 음미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김성철은 확실히 베스티아레의 아름다움은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도 보기 어렵다는 걸 솔직히 속으로 인정했다. ‘하이엘프 중에서도 손꼽히는 미인 취급을 받았겠군.’ 그러나 여자의 외모에 마음이 흔들릴 나이도 지났다. 흔들릴 몸 또한 더더욱 아니고. 베스티아레는 김성철의 싸늘한 눈빛을 받으며 차를 음미한 후 그를 그윽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과 우리는 싸울 필요가 없어요.” “화평이라도 맺고 싶다는 뜻인가?” 드라고만과 비슷한 소리를 한다는 말을 하려다 꾹 눌러 참았다. 드라고만을 배려하는 게 아니다. 다만 김성철은 자신이 드라고만에게 얻은 정보를 베스티아레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당신이 왜 대륙십삼걸이란 자리를 박차고 방랑에 나섰는지 알게 되었어요.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더군요.” 베스티아레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김성철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눈에 비친 김성철에겐 한 점의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단지 무뚝뚝한 어조로 되물을 뿐이었다. 베스티아레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루테기네아 공주의 딸을 양녀로 받아 행복한 시간을 보내셨더군요. 그녀가 절멸의 저주를 받아 죽을 위기에 처하기 전까지 말이죠.” “…….” “절멸의 저주.” 베스티아레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저주는 흔히 신이 내린, 해결할 수 없는 저주라는 말이 지금 세상에서 떠돌고 있더군요.”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절멸의 저주는 지금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해결 불가능한 저주가 아니에요.” “절멸의 저주를 풀 수 있다고 말하는 건가?” 김성철의 가시 돋친 질문에 베스티아레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불쾌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오래 전, 소환궁전에 남겨진 사자토스의 자취에서 사자토스가 장난질을 쳤던 걸 기억한다. 그때 김성철은 상당히 분노했었고 사자토스를 일순위로 죽이겠다고 다짐했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보여드릴 게 있어요. 당신은 귀보다는 눈을 신뢰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긴 말 대신 하나의 장면을 보여주는 게 효과적이겠지요.” 베스티아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성철은 수많은 의혹과 질문이 안에서 꿈틀거리는 걸 꾹 눌러 참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랐다. 베스티아레는 궁전 뒤편으로 걸어갔다. 궁전의 뒤뜰에 들어서자 무릎을 꿇은 거신의 형상이 눈앞을 가렸다. 김성철은 거신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설마 거신 안에 보여줄 게 있다는 건가?” “아니오. 그 아래예요.” 베스티아레는 거신 아래쪽을 가리켰다. 그 안엔 귀족의 저택 크기만 한 돔형의 건물이 거신의 그늘 아래 가려져 있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건물. 별 다른 특징도 주문의 술식도 보이지 않는다. “안으로 드시죠.” 베스티아레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만약 이게 함정이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김성철은 망설이지 않고 대리석 문을 열어젖히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에 들어선 김성철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소리를 들었다. 아이의 웃음소리. 몇 년만에 듣는 생명의 소리인가. 김성철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빨라졌고 곧 그는 볼 수 있었다. 젊은 산모의 품에 안긴 갓 태어난 아기들을. 절멸의 저주로 인해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생명들이 좁은 돔 안에서 다시 그 싱그러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건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몸속 깊은 곳이 떨리는 걸 느끼며 김성철이 물었다. ======================================= 67. 익시온 (2) “당신이 보는 그대로예요.” 베스티아레가 대답했다. “이 낙원에서 절멸의 저주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답니다.” 김성철은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며 산모들과 그녀들의 품에 담긴 아기들을 의심 섞인 눈으로 응시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론 완전한 아이들로 보인다. 만들어 내거나 꾸며낸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김성철은 베스티아레가 속임수에 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뼛속 깊이 주지하고 있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부정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베스티아레는 그런 김성철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제가 만들어 낸 작은 기적이 좀처럼 믿기 어렵다는 건 저도 충분히 이해하는 바예요. 그런 당신을 위해 이곳, 신록의 온실에 당신을 위한 방을 마련했어요. 시간을 두고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는 건 어떤가요?” 정 의심이 가거든 진득하게 붙어서 관찰하라는 이야기다. 시간을 끌기에 이보다 좋은 카드는 없으리라. 김성철은 베스티아레의 술수를 한 눈에 꿰 뚫어보았지만 마냥 거절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그가 험난한 모험길에 나선 건 자신의 양녀에 걸린 절멸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바로 눈앞에 가시적인 해결책이 있는데 위험으로 가득 차고 험난할 뿐더러 둘러가는 길을 택할 사람은 많지 않다. “잠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김성철은 베스티아레에게 시간을 요청했다. 베스티아레로선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닮을 시종들에게 김성철의 시중을 들게 하고 자리를 떠났다. “느긋하게 생각하셔도 좋아요. 어떻게 제가 절멸의 저주를 풀었는지 상담하러 오셔도 관계없고요. 전 언제나 저의 궁전에 있겠습니다.” 베스티아레가 떠난 후 김성철은 꼬마 베스티아레의 안내를 받아 신록의 온실이라 불리는 돔형 건물에 위치한 내빈실을 배정받았다. 우아한 가구와 오브제로 가득 찬 기품 있는 침실이었다. “우와. 처음이야! 이런 곳에서 잠을 자는 건!” 베르텔기아는 신이 나서 침대 위로 몸을 던져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최상급의 거위 털 이불이 몸에 착 감겨오는 걸 느끼며 베르텔기아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으흐... 끝내주는 기분이네.” “…….” 베르텔기아와 달리 김성철의 기분은 마냥 편치 않았다. 뜻하지도 않은 광경이 진중한 그의 마음을 강하게 뒤흔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본 건 헛것이 아니다. 환영은 내 축복과 영혼각인에 의해 부셔지기 마련이다.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해도 여간 정교한 것이 아닌 이상 내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그 방안에 있던 것은 진짜 새로운 아이일수도 있다.’ 후손에게 다음 세대를 물려주고자 하는 건 모든 개체의 주어진 사명이다. 따라서 수많은 왕과 제후들이 절멸의 저주를 풀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당대의 석학, 기적을 일으키는 성자, 은둔한 마법사 등등 수많은 위인들이 절멸의 저주를 풀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절멸의 저주를 끝끝내 풀어내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지엄하다는 황제의 자식마저 죽어나가는 판국에 누가 후세를 도모할 수 있단 말인가? 절멸의 저주는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사람들은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현재의 삶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 절멸의 저주를 풀어냈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베스티아레는 전 시대의 가장 뛰어난 마법사 중 한 명이다. 그녀는 현재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과거의 지식을 지니고 있으며 신의 영역이라 불리는 재앙에도 발을 들여놓은 인물이다. 어쩌면 그녀라면 절멸의 저주를 해결할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말이다. “뭘 그리 고민하고 있어?” 침대에 누워 한창 노닥거리던 베르텔기아가 죽을 상을 짓고 있는 김성철을 불쑥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실감이 안 나서 말이야.” 이미 눈으로 보았지만 김성철의 마음 한 구석엔 베스티아레의 능력에 대한 의심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절멸의 저주를 풀어내기 위해 가장 고심하던 사람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베스티아레가 쇼라도 꾸민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그 여자의 목적이 시간 끌기라는 건 명백하니.” 아이가 커가는 걸 보라는 건 대놓고 긴 시간을 여기다 갖다 바치라는 소리다. “아무래도 직접 물어보는 편이 낫겠군.” 김성철은 그 길로 방을 나서 다시 베스티아레를 찾아갔다. 베스티아레는 아름다운 익시온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테라스 안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김성철이 왜 자신을 방문했는지 알고 있었다. “어떻게 절멸의 저주를 풀어낸 것인지 물어보시러 오신 거겠죠?” “짧게 대답해라.” 김성철은 날이 선 어조로 말했다. 그만큼 이번 주제는 그의 심경을 직접적으로 건드렸기 때문이다. 베스티아레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도시를 응시했다. 약간의 침묵이 이어진 후 그녀가 말했다. “이 도시는 아신에 의해 보호받고 있어요.” “아신...?” “네. 지금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먼 옛날의 아신을.” “그건...” 김성철은 이단이라는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재앙이자 과거의 영웅인 베스티아레에게 현재의 법도를 들이대는 건 옳지 않은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성철은 베스티아레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아신을 불러내는 짓을 하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아신과 접촉하는 일은 거의 모든 교단과 종파에서 엄중히 금하는 일이다. 아신은 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도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극도로 위험하다. 신적인 힘이 있지만 그 정신은 여전히 필멸자의 티를 벗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앙을 전후하여 쏟아져 나온 수많은 회귀자들은 이런 아신들의 작품이다. 죽음 직전의 실패자에게 다가가 회귀를 통해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유혹한 뒤, 그들이 또 한 번의 실패를 반복하며 고통 받는 걸 즐기는 건 몇몇 아신들의 오래된 고약한 취미다. 그런 아신과 접촉했다는 건 여간한 각오가 없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운이 좋다면 아신의 작은 축복을 얻을 수 있겠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베스티아레가 아무리 칠영웅이라 불리는 존재라고 해도 아신의 입장에선 조금 다른 필멸자에 불과할 뿐이다. 김성철은 베스티아레를 가만히 응시했다. 교활하면서 노회한 전 시대의 영웅은 안개 같은 미소로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있다. 관찰만으로 그녀의 마음을 읽는 것은 불가능. 침묵 속에서 김성철은 평정심을 되찾고 찬찬히 현재 상황을 돌이켜보았다. 곧 김성철은 베스티아레의 주장에 숨겨전 허점을 찾을 수 있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군.” 김성철은 담담한 어조로 그 점을 지적했다. “아신의 힘이 강대하다고는 하나 결국 아신은 아신. 신을 넘어설 순 없다. 그런데 절멸의 저주는 신이 직접 내린 저주. 아신의 힘으로 신의 권능을 부족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사이비 철학자들이 주로 쓰는 논쟁의 기술이 있다. 현학적인 단어의 남용이다. 지식이 일천한 자는 단어의 무거움에 눌려 사이비가 지껄이는 헛소리의 틈을 미처 보지 못한다. 베스티아레가 꺼낸 아신이라는 단어는 그와 비슷한 기능을 한다. 단어 자체가 지닌 파괴력을 이용해 상대방의 생각을 뒤흔들어놓는다는 점에서. 하지만 김성철은 어중이떠중이들과 다르다. 단어에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그 단어가 지니고 있는 한계를 포착하고 이 점을 문제 삼았다. 베스티아레는 그런 김성철의 날카로움이 예외라는 듯 살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싸움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상당한 통찰력을 지니셨네요. 당신의 말이 맞아요. 아신의 권능은 신의 권능에 미칠 수 없죠.” “그렇다면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베스티아레는 문득 테라스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하늘은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은 파란 색을 띄고 있었다. 베스티아레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말을 꾸며내기 위한 침묵이라기보다는 할 말을 가다듬기 위한 침묵으로 보였다. 곧 베스티아레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김성철을 응시했다. 무언가 결심한 빛이 아주 잠깐이지만 그녀의 푸른 눈동자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흔히...” 베스티아레가 김성철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절멸의 저주는 신이 내리는 것이라 알려져 있죠. 하지만 내막을 알고 보면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내리는 저주도 아니랍니다.” “절멸의 저주가 신이 내리는 게 아니라고?” “정확히 말하면 신의 대행자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신의 대행자나 신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이긴 하지만 적어도 여기선 그 구분은 의미를 갖게 되지요. 특히 당신의 의문에 대해서.” “그런 정보는 대체 어디서 얻은 거지?” 김성철이 베스티아레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이에 베스티아레는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오래 살다보면 자연스레 아는 것도 있답니다.” 대답해 줄 마음은 없어 보인다.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일단 김성철은 베스티아레와 작별을 고하고 다시 신록의 온실로 돌아갔다. 김성철은 넓은 홀 안에서 노니는 아이들을 보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확실히 여기선 절멸의 저주가 통용되지 않는 걸로 보인다. 하지만 베스티아레의 말이다. 그 여자는 믿을 수 없다.” 김성철이 팔걸이의자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지금 바깥의 아기들이 꾸며낸 것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지?”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밖으로 빠져나오며 말했다. “그래. 그 여자의 마법적인 지식은 보통이 아닌 것으로 보이니까.” 김성철은 베스티아레가 만들어 낸 자신을 꼭 빼닮은 꼬마 베스티아레들을 떠올렸다. 분명 베스티아레가 만들어 낸 것이지만 어색한 점이나 이상한 점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만들어 낼 지식이 있다면 김성철의 이목을 속일 수 있는 가짜 아기를 만들어내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그렇다고 아기가 진짜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 아기를 다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베스티아레의 목적은 명확하다. 여기서 시간을 끄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여자는 그 대가로 나를 묶어놓을 수밖에 없는 카드를 내놓았다. 그 카드가 진실이라면 충분히 속아 넘어갈 용의는 있다. 하지만 만약 그 카드가 거짓이라면...’ 김성철이 가장 염려하는 점은 일방적인 손해다. 그것은 김성철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적어도 그는 절멸의 저주를 풀어낼 수 있다는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뭘 그리 고민하고 있어?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 고심에 잠겨 있는 김성철을 바라보며 베르텔기아가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불쑥 말했다. 뭔가 방법이 있는 모양이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밥 값할 방법이 생각난 거냐?” “밥값은 무슨. 밥도 안 먹는데.” “전사의 돌하고 암살자의 돌 먹여주지 않았나?” “으음.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그보다 나에게 좋은 방법이 있어!” 베르텔기아가 이불 속에서 몸을 흔들었다. “나랑 아이 만들기 하자!” “뭐.. 뭐라고?” 김성철의 몸이 순간 경직됐다. 그의 동공은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뭘 그리 놀라고 그래? 사람 민망하게.” “제 정신이냐 베르텔기아?” “절멸의 저주를 푸는 게 진짠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다며? 그럼 당연히 아이를 만들어 확인하는 게 최선책이지!” 베르텔기아가 이불 한 쪽을 들어 올리며 김성철에게 오라고 손짓하듯 책장을 흔들었다. “뭘 하고 있어? 어서 이리로 들어오도록 해!” 김성철은 즉각 반발했다.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베르텔기아. 갑자기 머리가 이상해지기라도 한 거냐?”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거야? 그거 꺼내라고 그거.”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더 이상 서지 않는 자신의 물건을 떠올렸다. ‘이 녀석이 드디어 미쳐버린 건가?’ 김성철이 버럭 화를 내려고 할 때였다. 베르텔기아의 맑은 목소리가 혼란 상태에 있던 김성철의 정신을 일깨웠다. “달걀 아니, 알 말이야. 알!” “알...?!” 그 말을 듣고서야 김성철은 정신이 번쩍 깨는 걸 느꼈다. “그래. 이 바보야. 그 검은 날개 지닌 새대가리 알을 여기다 넣고 품어보자고!” 김성철은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하며 영혼 창고 안에서 커다란 알 하나를 꺼냈다. 겉보기엔 단순히 커다란 알 정도로 보였지만 그 안에 든 것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날개와 부리를 지닌 조인 나하크 족. 그 위대한 종족의 왕인 멸세의 왕 마라키아가 다시 한 번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 67. 익시온 (3) 베르텔기아는 책이고 따라서 체온이 없다. 온기를 가진 건 김성철뿐이다. 그래서 김성철이 알을 품게 되었다. 세계의 적이라 불리는 사내가 할 일은 결코 아니었다. 김성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체면 따질 때가 아니다. 그는 옛 위인의 고사를 생각하며 밀려오는 자괴감을 뿌리쳤다. ‘위인 에디슨도 어릴 때 달걀을 품었다고 들었다.’ 적어도 한 가지 측면에서 김성철이 에디슨보다 나은 점이 있다. 유년기의 에디슨이 무정란을 품은 반면 김성철은 적어도 알맹이가 든 녀석을 품고 있으니까. 그러나 꼬박 반나절을 품어도 마라키아는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으음. 이 알. 죽은 거 아냐? 영혼 창고 안에서.” “죽진 않았다.” 알 안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주 미약하긴 했지만. 오래지 않아 마라키아는 부화할 것이다.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반나절을 꼬박 마라키아의 부화를 위해 투자하고 있자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꼬마 베스티아레가 눈을 껌뻑껌뻑 거리며 김성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김성철이 묻자 꼬마 베스티아레는 혀 짧은 소리로 대답했다. “손님이 왔어요.” “손님? 네 주인 말이냐?” 꼬마 베스티아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주.” “공주?” 꼬마 베스티아레는 불충분한 답을 남긴 채 자리를 떠났다. 곧 문제의 손님이 김성철의 방 앞에 찾아왔다. 작고 아담한 체구를 지녔지만 자신감이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빨간 머리 아가씨였다. 그녀를 본 김성철의 심경에 약간의 변화가 일었다. 아는 사람이다. 그것도 인연이 있는. 김성철은 흐릿한 기억 속에서 지금은 멸망한 왕국의 소녀를 떠올렸다. ‘마커레이드 공주.’ 지금은 멸망한 구 익시온의 공주. 나면서부터 강력한 마력과 두 개의 마법지문이라는 축복을 받아 사람들로부터 익시온의 별이라 칭송받았다. 하지만 그 과한 능력이 화근이었을까. 김성철이 기억하는 마커레이드 공주는 천방지축에 제멋대로인 통제 불능의 사고뭉치였다. 그것과 별개로 김성철과 마커레이드 사이엔 얄궂은 인연이 있다. 익시온의 왕은 마커레이드를 김성철에게 시집보내려고 시도했었다. 김성철이 거절해서 흐지부지 끝나버렸지만. “흐음. 당신이 제국 대원수?” 마커레이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머리색과 같은 붉은 눈동자로 김성철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얼굴이 많이 변했네. 체구도 작아지고.” 그녀는 마치 제 집처럼 김성철의 방 안으로 밀고 들어와 푹신한 팔걸이의자에 앉더니 다리를 꼬고 김성철을 돌아보았다. “진짜 김성철 맞아?” 그녀는 김성철을 노려보며 다시 물었다. 아무래도 현재의 모습이 눈에 익지 않았던 모양이다. 김성철은 뜻밖의 손님에 난감함을 느꼈다. ‘죽은 거 아니었나. 이 여자.’ 상성이 좋지 않다. 차분하고 담담한 성격의 김성철과 달리 마커레이드는 어릴 때부터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었다. 익시온 체류 시절 김성철은 틈만 나면 가출을 해대는 마커레이드를 찾느라 여러 번 진땀을 뺐었다. “저기, 김성철 씨 맞으세요?” 마커레이드가 상념에 잠긴 김성철 앞에 다가와 손을 흔들며 말을 걸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렇다.” “그렇다가 뭐야? 거의 10년 만에 만난 혼약자에게.” 그 순간 갑자기 침대 쪽에서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베르텔기아의 것이다. 혼약자라는 말을 듣고 그만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버리고 만 것이다. “응?” 침대에서 여자아이의 소리가 들리자 마커레이드는 마치 먹이 감의 냄새를 맡은 맹수처럼 눈을 번쩍였다. “방금 무슨 소리가 난 거 같은데. 못 들었어?” 그녀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김성철을 응시했다. “이곳엔 무엇을 하러 왔지?” 김성철은 이상해지는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주제를 전환하려 시도했지만 한 번 불붙은 마커레이드를 말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의 몸에 마법진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녀는 침대 위에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는 모습으로 재등장했다. “분명 여기서 소리가 난 것 같은데.” 김성철이 멈출 새도 없이 그녀는 이불을 들췄다. 이불 안엔 책 한 권과 커다란 알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마커레이드의 눈동자에 실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뭐야. 여자라도 하나 숨겨 놓은 줄 알았더니.” “넌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나.” 김성철이 말했다. 여전히 방약무인하고 제멋대로다. 자신의 나라가 멸망하고 부왕이 죽었으면 어느 정도 철이 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커레이드는 12년 전 혼담이 오갈 때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내가 왜 변해야 돼?” 마커레이드는 오히려 정색하며 반문했다. 김성철은 잠자코 그녀의 행동을 지켜봤다. 마커레이드는 침대 옆에 앉아 베개 옆에 누운 베르텔기아와 마라키아의 알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응? 이건 뭐지?” 마커레이드가 마라키아의 알을 보고 호기심을 보였다. ‘위험하다.’ 마커레이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물건을 파괴한다. 과거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입장이지만 개버릇 남 못 주는 법이다. 김성철은 전력을 다해 침대로 이동해 알을 쓰다듬으려는 마커레이드를 가로 막았다. “만지지 마라.” 마커레이드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게 뭔데?” “알 거 없다. 그보다 여기 온 용건에 대해 물은 기억이 있는데.” 김성철은 일부러 싸늘하게 말했다. 김성철의 냉담한 반응을 본 마커레이드의 눈동자에 실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대략 10년만의 만남이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이다. 김성철은 마커레이드를 좋지 않게 평가했지만 김성철에 대한 마커레이드의 평가는 상당히 높았다. 혼담이 오간 건 단순히 익시온 왕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김성철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지금은 마라키아와 베르텔기아의 안전이 우선이다. “물러나라.” 그는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눈싸움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마커레이드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섰다. “변한 건 당신이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응접실의 의자로 걸어갔다. “그깟 달걀 하나 손 못 대게 할 줄이야.” 그녀가 자리에 앉은 뒤 본격적인 넋두리가 시작됐다. “알아. 당신이 날 좋아하지 않는 거. 나 같은 왈가닥보단 그 루테기네아 여우가 더 당신 취향에 맞다는 것도 알고 있어.” “여기 온 목적에 대해 물었다.” 3번째 질문이다. 김성철의 진중하고도 무거운 한마디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마커레이드는 김성철을 흘겨봤지만 감히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 순수한 분노가 깃들어 있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알았어. 본론으로 넘어갈게.” 그녀는 품속에서 두 개의 황금 구슬을 꺼내 손 안에서 굴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름이 아니라 당신과 동맹을 맺으려고 해.” “동맹? 누구와 동맹을 맺자는 거지?” “어디긴 어디야. 익시온이지.” 마커레이드 손안의 구슬은 계속해서 굴러갔다. 김성철은 실소했다. “베스티아레의 하수인이 되었나? 당치도 않군. 자기 부왕을 죽이고 나라를 파괴한 자와 손을 잡다니.” 김성철이 알고 있는 마커레이드는 품행이 단정친 못했지만 적어도 정의가 뭔지는 추상적이나마 알고 있었다. 마커레이드 손 안의 구슬이 운동을 멈췄다. 그녀는 김성철을 노려보며 똑 부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난 칠영웅의 부하 따위가 아니야.” 김성철이 무심한 눈으로 마커레이드를 추궁하듯 응시했다. “물론 이 도시가 베스티아레의 지배하에 있는 건 맞아. 내가 베스티아레에게 몸을 의탁하는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베스티아레는 우리를 지배하려 들지 않아. 오히려 그녀는 우리에게 기회를 줬지.” “기회?” “지금까지 동부인들의 삶이란 무기력했지. 오랜 역사와 잘 교육 받은 양질의 시민, 풍족함, 아름다운 환경, 모든 걸 갖췄지만 정작 서쪽의 루테기네아와 다른 근본도 없는 나라들의 위세에 눌려 눈치나 보는 삶을 살아왔지.” 마커레이드는 막힘없이 자신의 생각을 구술하며 손안의 황금 구슬을 한 차례 굴렸다. “거신은 분명 우리 나태한 동부인들에게 내려쳐진 하늘의 벼락이었어.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동부인들에게 기회가 되었지.” 이 대목에서 김성철은 예언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설마하니 거신이 동부의 통합이라는 해묵은 난제를 해결했다고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마커레이드는 우쭐거리며 말했다. “지금 우리에겐 명분이 있어. 우리 동부인들이 하나로 합칠 명분이. 인간제국도 세계의회도 우리를 막지 못해.” “칠영웅이 가만 두지 않을 텐데?” “천만의 말씀. 오히려 베스티아레님은 우리의 통합을 지원하고 계셔. 대륙십삼걸에 맞설 동부칠웅의 결성도 베스티아레님의 은밀한 지원 덕에 가능했던 거지.” “동부칠웅?”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이름이다. “이름 그대로 동부의 일곱 영웅을 일컫는 말이지. 동부칠웅은 몰라도 얼마 전에 라그란제에서 일어난 대사건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있겠지? 당신이 막판에 초를 쳐서 조금 의미가 퇴색된 감이 있지만.” “언데드가 라그란제를 습격한 사건 말인가?” 마커레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 뜬 목소리로 말했다. “황혼의 네크로맨서 피비 캔버스와 참수귀 안겔로 룩스. 우리 동부칠웅의 멤버들이지.” 그녀는 아직 그 이인조의 운명이 어떻게 된 지 잘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따라서 김성철이 그들을 직접 심판한 것은 알 턱이 없다. 김성철은 짐짓 모른 체를 하며 말했다. “그들이 그런 짓을 한 건 동부칠웅의 결정이 있어서인가?” 마커레이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독단적인 행동이야.” “그들은 어디에 있지?” “글쎄. 어딘가에 있겠지. 종잡을 수 없는 아이들이니까.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중요한 건 동부의 미래지.” 마커레이드는 구슬을 품안에 집어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고 해. 모두가 행복하고 자기 직분에 충실하며 어떤 협잡도 부정도 없는 나라를 말이지. 새로운 익시온은 그 첫걸음이 될 거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당신의 힘이 필요해.” “…….” 김성철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마커레이드도 딱히 세치 혀로 김성철을 설득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여기 새로운 익시온엔 당신이 보는 대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있어. 하지만 이 도시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뿐만이 아니야. 이 도시는 그 자체로 완벽한 곳. 시간이 나면 직접 도시 곳곳을 돌아 봐. 그럼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 새로운 나라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 마커레이드는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그야말로 돌풍 같은 출현과 퇴장. 문이 닫히자 베르텔기아는 혀를 내둘렀다. “저 여자 대체 뭐야? 자기 할 말만 냅다 지껄이고 가네. 정말 이상한 여자야.” “이상한 여자 맞다.” “혼약자라고 하던데. 사실이야?” “자기 멋대로 찍은 거지. 난 저 여자를 좋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하긴. 저런 타입은 당신하고 어울리지 않겠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 알이나 품자고!” “…….” 김성철은 내키진 않지만 다시 침대로 돌아가 알을 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김성철은 밀려드는 회의감을 억누르며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계속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하루가 지난 시점에 소식이 왔다. 알 안에서 보다 강한 생명의 기운이 넘치기 시작한 것이다. 베르텔기아는 책 모서리로 알 껍질을 두드리며 마라키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마라키아는 부리로 안의 껍질을 쪼아 자신의 건재를 과시했다. “으음. 그나저나 이 녀석 말 안 들으면 어떻게 하지?” 이제야 걱정이 드는 모양이다. 지금에야 마라키아는 움직이지 못하는 알 신세라 베르텔기아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이 녀석이 깨어나면 피할 수 없는 서열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 예정된 수순이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좀 말해줘. 이 녀석 깨어나면. 베르텔기아님에게 절대 대들어서는 안 된다고.”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베르텔기아. 마라키아는 비록 잔혹한 조인이긴 하나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걱정과 기대 속에서 부화의 날은 다가왔다. 콕콕. 알 안쪽에서 껍질을 쪼는 소리의 빈도 수가 늘었다. 베르텔기아는 바깥에서 알을 두드리며 마라키아의 부화를 도왔다. “으음.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인데 우리 이런 짓 해도 될까?” 부화가 가까워지면서 베르텔기아의 쓸데없는 걱정이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죽으면 어떻게 하지?” “…….” 김성철은 껍질을 두드리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정말 못된 사람이네.” “의견을 낸 건 너다.” “하란다고 하는 당신이 더 나쁘다고!” 티격태격 하는 사이에 마라키아의 알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 베르텔기아와 김성철은 숨을 죽이고 부화의 순간을 지켜보았다. 콰직. 껍질 일부분이 부서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날카로운 노란 부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라키아의 부리다. 베르텔기아는 급히 김성철 주머니 안으로 숨어 들어갔고 김성철은 말없이 마라키아가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부서지기 시작한 알 일부분이 완전히 무너지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검은 깃털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크크... 멸세의 왕 마라키아님의 행차시다...!” 껍질을 깬 마라키아가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전과 달리 터무니없이 작고 귀여운 모습으로. ======================================= 68. 완벽의 도시 (1) 마라키아는 곧 자신이 처한 현실을 알게 되었다. “응? 너는...?! 으아아아아!!” 김성철과 눈이 마주치자 마라키아는 기겁하며 다시 알 속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이미 깨진 껍질은 더 이상 그를 완벽하게 가려주지 않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껍질로 머리를 덮으며 마라키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멀쩡하군.”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보고 짤막하게 말했다. 그 옆에 있는 책의 형상을 한 베르텔기아도 지극히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응. 멀쩡해 보여.” 시간이 흐르자 마라키아도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껍질을 천천히 들어올리며 쓸데없이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어디인가? 일단은 모르는 천정이 보이는데. 신정력 몇 년이지?” “그런 연호는 들은 적도 없다. 마라키아.” 김성철이 무덤덤한 어조로 대답했다. “여기는 동부의 도시다. 그리고 네 놈을 만난지는 겨우 1년이 흘렀을 뿐이고.” “1년..? 그것밖에 안 되었다고?” 마라키아는 급히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과 깃털을 응시했다. 검은 깃털 외엔 별 다른 죽음의 반점은 보이지 않았다. 마라키아는 고개를 급히 쳐들며 부리를 열었다. “이 몸. 멀쩡하군. 절멸의 저주를 상징하는 저주받을 반점도 지독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설마 재앙을 해결한 건가?”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겨우 첫 번째 재앙을 해결했을 뿐이다. 아직 재앙은 현재진행중이다.” “으음. 그런가.” 마라키아는 쉬이 수긍하는 눈치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지만 김성철은 이 사안을 가볍게 받아들이는 마라키아의 태도를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재앙이 진행 중인데도 절멸의 저주에 걸리지 않은 걸 자연스럽게 생각하는군. 역시 조인들은 절멸의 저주로부터 몸을 피할 방법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베스티아레처럼.’ 마라키아는 알에서 나와 기지개를 폈다. 검은 날개를 푸드덕 거리는 꼬락서니가 꽤나 귀엽다. “별 놀랍지 않은 모양이지? 지금 상황이?” 김성철이 마라키아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놀라지 않았나? 네가 날 조기에 깨운 건 충분히 놀랄만한 일인데.” “그것 말고, 네가 절멸의 저주에 걸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야.” “아마도 안전지대 안인 모양이지. 이 몸이 절멸의 저주에 걸리지 않는 걸 보면 말이야.” “안전지대?” “절멸의 저주가 미치지 않는 땅 말이야. 여기도 일종의 안전지대라 보이는데. 어떤 원리로 이런 영역을 구축한 지는 찬찬히 돌아봐야겠지만 말이야.” 마라키아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김성철이 알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지금 상태가 영원히 가리라는 보장은 없어. 난 이제 겨우 알에서 깨어났을 뿐이다. 자세한 내막은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게 좋겠지.” 마라키아는 그렇게 말하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감당할 수 없는 수마가 날 꿈의 세계로 잡아끄는군. 어린 육체는 많은 것을 요구하는 법이거든. 잠자리를 원한다.” 김성철은 이불과 베개를 적당히 섞어 마라키아가 잘 수 있을만한 간이 요람을 만들었다. 마라키아는 하품을 하고 요람 안에 들어가 눈을 감았다. “으음. 일단은 문제없는 거 같네.” 마라키아가 깨어 있는 동안에 김성철의 주머니 안에서 한마디도 못했던 베르텔기아가 불쑥 주머니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마라키아의 말이 맞다. 아무래도 지금 단계에선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게 옳다.” 마라키아라는 좋은 표본을 확보한 이상 남은 건 시간이 모두 해결해 줄 일이다. 그리고 절멸의 저주를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 최종적으로 확인된다면 김성철은 오랜 숙원을 이루게 될 것이다. 정령계에 잠든 양녀의 모습이 그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만 기다려라. 꼬맹이.’ * 이튿날,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주머니에 넣고 신록의 온실을 나섰다. 방 안에 홀로 놔둔 마라키아가 걱정되긴 했지만 마라키아를 위해서 신선한 날고기와 견과류를 잔뜩 준비해줬다. 마라키아는 고기가 맛이 없다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지만 얌전하게 방 안에 있겠다고 약속했다. “흐음. 그 녀석. 새 주제에 편식을 하다니 보면 볼수록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야. 새 주제에 벌레나 먹을 것이지.” 베르텔기아는 마라키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모든 새가 벌레를 먹는 건 아니다.”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며 두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라그란제의 8구역과 달리 익시온에서 김성철은 유명인사이기 때문이다. 그가 거리 탐방을 나선 건 이전에 만난 마커레이드의 영향이 컸다. 그녀는 새롭게 만들어진 익시온을 가리켜 완벽한 도시라고 자평했다. 김성철은 그 말이 맞는지 확인해볼 참이었다. ‘그럼 어디 한 번 감상해볼까. 마법사의 도시가 얼마나 완벽한 곳인지.’ 일단 거리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질서정연하게 배치된 상아빛의 건물들은 하나의 커다란 도로를 중심으로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고 길바닥에 쓰레기 하나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깔끔했다. 곧 김성철은 청결의 비밀을 알 수 있었다. 호문클루스로 보이는 가면을 쓴 소인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거리를 비로 쓸고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다른 호문클루스들과 달리 제대로 교육 받은 걸로 보이는 그 소인들은 무엇보다 조용했다. 시끄럽게 빽빽 고함을 질러대는 평범한 호문클루스들과 딴판이다. 거기까진 나쁘진 않지만 김성철은 익시온의 많은 영역에서 호문클루스가 활약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청소는 물론 조경, 유지보수, 대중교통 전반적인 공공서비스 영역에서 호문클루스들이 이용되고 있었다. ‘역시 마법사의 도시라는 건가. 호문클루스가 더럽게 많군.’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지만 모두가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호문클루스에게 떠맡겨서 그런지 도시 시민들의 얼굴엔 구김살 하나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들은 시드미아라 불리는 아신의 동상이 세워진 광장에 모여 새들에게 모이를 주거나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싱그러운 겨울아침을 만끽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광장 주변을 돌며 사람들이 대체로 여기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는 아침 허기를 달래기 위해 광장 옆에 자리 잡은 노천카페에 방문했다. 젊은 부부가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메뉴판엔 크레페와 커피 이외에 다른 건 없었다. 물론 이런 곳에선 메뉴를 직접 손님이 맞춰줘야 한다. 김성철은 생크림과 딸기를 얹은 크레페 하나와 얼음을 곁들인 커피를 주문했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커피 맛도 괜찮았다. 김성철은 커피를 마시며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별 다를 것 없는 일상 이야기. 장래에 대한 걱정도 재앙에 대한 두려움도 여기서는 다른 세상의 일 같았다. ‘마치 내가 있던 세계와 닮아 있군. 이 도시는.’ 김성철은 컵을 반납하며 젊은 부부에게 자연스레 말을 걸었다. “여긴 살기 좋은 곳 같군요.” “당연하죠. 예전의 익시온이 어떤 곳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의 익시온만한 곳은 대륙 전체를 찾아봐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카페 주인은 자부심을 섞어 자신의 도시에 대해 말했다. 만들어 진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도시의 주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자부심이다. 김성철은 도시 풍경을 돌아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음... 이 일설에 의하면 이 도시는 처음부터 모든 것이 마련된 곳이니 개척민의 애환이나 노고 따윈 다른 세상의 이야기겠지. 이 자들은 개척민이라기보다는 입주민에 가까우니.’ 김성철은 좀 더 다른 곳을 돌아보기로 하고 도시를 계속해서 떠돌아다녔다. 대략 반나절 정도 거리를 헤맨 끝에 김성철은 중대한 사실 하나를 알 수 있었다. 거리에 거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일부러 못사는 동네를 찾아 뒷골목을 뒤지고 다녔는데도 걸인의 그림자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작은 마을이라면 모를까 수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도시에 걸인 하나 찾아볼 수 없다는 건 적어도 이계에선 대단히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기이하군. 이 도시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베르텔기아의 눈에도 새로운 익시온은 충분히 이상하게 비칠 지경이었다. 마커레이드가 공언한 것처럼 익시온은 완벽한 도시에 가까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어떤 도시든 그늘 하나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익시온은 시간축이 정오에 고정된 것 마냥 흔한 그늘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이들이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고 불만을 지니는 이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인간 틈바구니에서 오랫동안 고생을 한 김성철은 그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 잘 알고 있다. ‘뭔가 이상하군. 현실 같지만 현실 같지가 않아. 마치 마계의 마탑의 주민들을 보는 기분이군.’ 김성철은 의문만을 가득 안은 채 신록의 온실로 복귀했다. 마라키아는 산더미처럼 쌓인 고기와 견과류를 모두 먹어치운 상태였다. “배가 고프군.”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마라키아는 처음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커진 것 같았다. “더럽게 많이 먹네. 밥값 해야 할 놈은 내가 아니라 이 놈 같은데.” 베르텔기아가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김성철도 마라키아의 대식가 기질엔 다소 놀란 눈치였다. ‘진짜 더럽게 많이 처먹네.’ 그렇다고 다시 알 속에 집어넣을 순 없는 노릇. 김성철은 시중을 드는 하녀에게 보다 많은 고기와 견과류를 요청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었는지 마커레이드가 다시금 김성철의 방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지?” “당신이 바깥에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야.” 말하는 태도로 보아 추가 고기 요청 건으로 온 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잠시 도시 구경 좀 했지.” 어차피 숨길 필요도 없는 이야기라 김성철은 솔직하게 말했다. “감상은 어땠어?” 마커레이드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김성철을 응시했다. “나쁘지 않더군.” “나쁘지 않다라... 그다지 좋은 평가는 아니네? 뭐 시간도 많으니 느긋하게 돌아 봐. 익시온의 멋짐은 머무른 시간이 길수록 확실하게 눈에 들어올 테니 말이야.” 마커레이드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김성철은 문을 닫고 생각에 잠겼다. ‘마커레이드도 그렇게 아까 그 카페의 젊은 부부도 그렇고. 이곳 사람들은 이 도시에 대한 과하리 만치 커다란 자부심을 지니고 있군.’ 다른 건 몰라도 살기 좋은 건 확실했다. 도시의 선진성도 다른 곳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고도로 계획된, 엄격하게 운영되는 도시다. 마라키아가 낮잠을 자는 동안 김성철은 다시 신록의 온실을 나섰다. 이번에 그가 찾은 곳은 주점이었다. 어디에나 주점은 있고 주점엔 질 낮은 인간들이 있기 마련이니. 그런데 하루 종일 발품을 팔아도 도시에 김성철이 찾는 주점은 보이지 않았다. 기이한 일이었다. 보통 이계의 주점은 여인숙도 구하므로 조그만한 마을에도 하나 정도는 있기 마련인데 이 커다란 도시엔 단 하나의 주점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걸인도 주점도 없는 도시.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기괴한 곳이다. 김성철은 아예 신록의 온실로 돌아와 하녀에게 물었다. 이 주변에 술 한 잔 걸칠만한 곳이 있는지 여부를. 의외로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됐다. 하녀는 가까운 곳에 위치한 술을 마실 수 있는 장소를 알려주었다. 주점이 아니라 문화극장이라는 다소 특이한 형태였지만 늦은 밤에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 장소라는 건 확실했다. “호두가 조금 맛이 없는데. 부리로 쪼는 촉감이 퍼석해. 파삭하지 않고.” “뭐래.” 김성철과 베르텔기아는 마라키아의 불평을 철저히 무시하고 문화극장으로 향했다. 과연 문화극장이란 곳은 다른 도시의 주점에 해당되는 곳이었다. 물론 모두가 자랑하는 익시온답게 칙칙하고 어두운 분위기 대신 화사하고 화려한 분위기가 주를 이루었다. 무엇보다 서빙을 에크하르트의 소형 골렘이 맡고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아니, 아빠의 골렘을 이런 용도로 쓰다니...” 베르텔기아가 투덜거리는 동안 김성철은 술을 음미하고 있었다. 좋지도 나쁘지 않은 맛. 적어도 중등품 이상의 술로 보인다. 무엇보다 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것은 극장형의 구조. 주객들이 술을 마시는 테이블 너머로 무대가 있었고 그 위에서 연극이 공연되고 있었다. 김성철이 문화극장에 발을 들이던 시점엔 배우들이 저마다 우렁찬 발성으로 어떤 연극을 공연하고 있었다. 어인들의 왕과 맞서 싸우는 칠영웅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으로 보였는데 베스티아레의 도시 아니랄까봐 베스티아레 역을 맡은 배우가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다했다. “더 이상 세상을 어지럽히지 말고 심해로 돌아가세요! 이 사악한 혼종!” 김성철은 칠영웅의 일대기에 대해선 그다지 아는 바가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 측면에선 고증이 제법 맞다고 생각했다. 미역을 휘감은 어인의 왕을 맡은 배우가 지닌 무기는 김성철의 움 브루크와 같은 걸로 보였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야기 할 분위기는 아니군.’ 주점에 온 목적은 정보 수집 중 하나인데 이 문화극장이란 곳에선 시끄럽게 배우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어 좀처럼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눌만한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다. 다행히 그 빌어먹을 연극도 슬슬 끝날 기미였다. 박수 소리가 우레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열연을 펼친 배우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관객들에게 인사를 했다. 김성철은 빨리 저들이 퇴장하길 바랐지만 연극이란 게 그렇듯 커튼이 닫혔다 열렸다 몇 번을 반복하며 계속해서 박수를 강요하는 법이다. ‘더럽게 질질 끄네.’ 김성철의 인내가 바닥이 날 무렵 다행히 배우들이 퇴장했다. “뭐 이런 거 가지고 열을 받고 그래? 나름 문화생활 했다며?” 분노한 김성철과 달리 베르텔기아는 이곳의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아무튼 배우들이 퇴장하고 비로소 문화극장엔 주점 특유의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적당히 주변을 물색해 얼굴에 불만이 많아 보이는 놈을 찾아 술이나 몇 잔 사주고 이야기나 들어볼 참이었다. 곧 김성철의 눈에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저 놈이 좋겠군.’ 그렇게 생각하고 그 사내에게 다가 갈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불만 많은 사내가 눈을 번쩍 떴다. “와.. 왔다!” 장내가 술렁였다. 김성철은 무언가 낌새가 수상한 걸 느끼고 무대 쪽을 돌아보았다. 무대 위엔 한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 중앙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여자의 얼굴을 본 김성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클라리스?’ 가는 곳마다 초토화가 되는 운 없는 여자가 익시온에 나타났다. ======================================= 68. 완벽의 도시 (2) 클라리스의 인기는 제법 높았다. 판추리아에서 귀족들 상대로 노래 부르던 때와 달리 지금은 열렬한 팬도 있고 관중들의 호응도 제법 받았다. 공연이 끝난 후 김성철은 무대 뒤편으로 들어갔다. 극장 직원이 김성철의 앞길을 막았지만 김성철은 자신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했다. 대기실 안엔 수많은 배우들과 가수들이 모여 분장을 하거나 대본을 외우거나 악기를 조율하는 등의 일을 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곧장 클라리스에게 찾아가 말을 거는 대신 돈으로 직원을 매수했다. “나는 오늘 저 여자의 공연을 보고 열렬한 팬이 되었고 후원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정식 후원자가 되기 전에 조용한 곳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가능하겠나?” 금화 한 닢은 거의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든다. 직원은 싱글벙글 웃으며 기꺼이 김성철의 명을 수행했다. “저기 비상문으로 나가셔서 그늘 진 곳에 기다리고 계십시오. 곧 당신의 카나리아를 대령해 오겠습니다.” 극장 뒤편에서 김성철은 클라리스가 나오길 기다렸다. 곧 클라리스가 비상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공연이 전부 끝났는지 화사한 무대복 대신 활동하기 편한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쪽이 김성철의 눈엔 익숙한 모습이다. 그녀는 김성철을 발견하고 곧장 다가와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부르셨다고 하셨죠? 저는 신인가수 클라리스입니다.” 클라리스의 목소리엔 내심 기대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경계의 빛도 내비치고 있었다. 무대 뒤편의 후원자들이라는 족속들은 순수한 의도로 여배우에게 접근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더 많으니까. 이런 경우의 은밀한 제의는 타고난 미모를 지닌 클라리스에겐 흔한 이벤트다. 밤의 그늘 속에 숨은 김성철을 본 클라리스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또 남자네. 뭔가 구질구질한 분위기가 나는 걸 보니 또 그 놈의 첩살이 타령인거 같은데.’ 혹 그런 제의라면 단칼에 거절할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단단히 먹고 클라리스는 익명의 후원자의 말을 기다렸다. 익명의 후원자는 클라리스를 말없이 응시하다 갑자기 얼굴을 가린 두건을 벗었다. 클라리스는 순간 긴장했다.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다음 일어난 일은 예상의 범주를 넘어도 한참 넘은 일이었다. “날 기억하나?” 김성철이다. “으응?” 클라리스의 얼굴이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김성철은 클라리스가 비명을 지르기 전에 입을 틀어막아 위협을 예방했다. “소리 지르지 마라. 나쁜 의도로 부른 건 절대 아니니 말이야.” 클라리스는 강한 여성답게 한참이나 반항을 지속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이 강해도 그 상대는 세계의 적. 결국 클라리스는 탈진 상태에 빠져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을 정도가 되어서야 발악을 멈췄다. “정말 지독한 여자군. 간단한 질문 몇 가지만 한다고 하는데 이렇게까지 앙탈을 부리다니.” “으.. 으... 저리 가. 이.. 악마...” 클라리스는 소리 지를 기운조차 없었다. 하지만 전통의 만병통치약인 금화 한 닢을 꺼내자 그녀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 “그... 그런 걸로 날 회유하려 드는 거야? 웃기지도.. 않네.” 이에 김성철은 금화가 잔뜩 든 자루를 꺼내 보였다. 클라리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몇 가지 질문에 답하면 이걸 조건 없이 넘겨주지.” “저.. 정말?” 클라리스가 벌떡 일어섰다. 그걸 본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동안 고생이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그때 비상구 쪽의 문이 슬며시 열렸다. 김성철은 극장의 직원이 문틈 사이로 이쪽을 주시하는 걸 한 눈에 알아챘다. ‘그새 소문이 그 여자 귀에 들어갔나. 빨리 끝내야겠군.’ 김성철은 바로 클라리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지금은 어디서 지내는 지. 등등의 극히 사소한 질문이었다. 첫 번째 질문에 클라리스는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기억을 가다듬으며 느릿하게 말했다. “영년의 밤 사태 때 내가 일하던 공장이 추락한 공선에 깔려 박살이 났어. 일자리는 그걸로 날아가 버린 거지. 하지만 노래말고는 별 기술이 없는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하루하루 떨어지는 돈을 보며 간신히 연명하던 중 할아버지가 익시온에 관한 소식을 가지고 왔지.” 클라리스의 조부, 쿠르트 아삼은 라그란제 뒷골목 사이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신천지에 관한 소식을 들고 왔다고 한다. 지상낙원 익시온.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현실의 이상향. 라그란제가 쑥대밭이 되고 하층민의 삶이 더욱 어려워진 시점에 익시온에서 온 행복전도사라는 수수께끼의 인물들이 어렵게 사는 시민들 사이를 떠돌며 지상낙원을 선전, 그곳으로 향하는 표를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클라리스 일행은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을 털어 익시온으로 향하는 표를 구입했다. 놀랍게도 익시온으로 통하는 문은 라그란제 깊숙한 곳에 있었다고 한다. “차원문을 만들어 놓은 모양이군.” 김성철의 말에 클라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놀랄만한 일이었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지. 제도 한 가운데에 제국의 적이라는 칠영웅의 영지에 통하는 차원문이 있다니. 뭐, 덕분에 편하게 왔지만.” 클라리스의 말에 의하면 그녀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익시온으로 넘어오고 있을 거라고 한다. 실제로 라그란제 하층민의 삶의 기반은 영년의 밤 사태 때 완전히 붕괴되었고 피난민 구제에도 급급한 제국 정부는 이 사태를 해결할 역량이 전무했으므로. “아 그리고 나는 도시 바깥에 살아.” 끝으로 클라리스는 자신이 사는 방향을 가리켰다. “성벽 바깥에 자리 잡은 정착촌이야. 마법사들은 바로 시민으로 승격되는 모양인데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해야 도시 안에서 살 수 있어.” 클라리스는 김성철에게 받은 금화 주머니를 흔들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이게 있으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겠네!” 비상구 쪽에 선 직원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이야기가 길어지는 걸 원하지 않는 모양이다. 김성철은 클라리스와 작별했다. “…두 번 다시 당신하고는 안 만났으면 좋겠네.” 클라리스는 김성철을 노려보며 농담 반, 진담 반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동감이다.” 김성철은 무뚝뚝하게 말한 후 자리를 떠났다. 멀리서 클라리스가 직원과 실랑이를 하는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귓가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런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 쓸 여유는 없다. 클라리스의 이야기는 김성철에게 많은 의문을 던져주었다. ‘베스티아레. 무슨 의도로 라그란제의 시민들을 이곳에 불러 모으는 거지?’ 좋은 의도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스티아레가 지금은 선량한 도시관리인의 역할을 맡고 있다 하더라도 그녀의 근본은 재앙 그 자체. 무슨 꿍꿍이가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다. 김성철은 추후에 클라리스가 산다는 정착촌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하며 거처인 신록의 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록의 온실 앞에선 마커레이드가 김성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클라리스라는 계집과 개인적으로 만났다며?” 마커레이드의 표정과 몸짓이 예사롭지 않다. 김성철은 표독스런 독사와 같은 눈빛을 내뿜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잊고 있던 그녀의 문제점 하나를 되새겼다. ‘이 여자. 질투심이 보통이 아니었지.’ 정확히 말하면 독점욕이 강했다. 마치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어린아이처럼 마커레이드는 모든 걸 자신의 손아귀 안에 넣고 싶어했다. 김성철이 질려버린 이유 중 하나다. 아무튼 지금 벌어진 오해를 풀지 않으면 클라리스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 전혀 뜻밖의 사태지만 마커레이드라면 해코지를 하고도 충분히 남을 인간이다. 김성철은 흥분 상태에 빠진 마커레이드를 향해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판추리아에서부터 아는 인연이다. 그녀의 조부인 쿠르트 아삼과는 함께 대밀림을 탐험을 하기도 했었지. 반가운 마음에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 것뿐이니 오해는 없었으면 하는군.” “쿠르트 아삼?” “정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던가.” “물어볼 거야. 당신이 원하지 않아도.” 마커레이드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사라지자 품속의 베르텔기아가 몸을 떨며 말했다. “뭐야. 저 여자? 진짜... 너무 없어 보인다.” “저래 뵈도 한 땐 이 땅의 공주였다.” “공주면 뭐해. 여자가 줏대도 없고 저렇게 없어 보이는 짓을 자초하다니. 자존심도 없나 봐. 나 같았으면 신경도 안 썼을 건데.” 전직 여왕벌의 말이다. 김성철은 쓴 웃음을 지으며 거처로 돌아갔다. 거처 안엔 뜻밖의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바깥으로 내보내다오.” 고기는 물론 맛없다는 견과류마저 다 먹어치운 마라키아가 툭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당당하게 말을 걸어오는 게 아닌가. “바깥으로 내보내 달라니. 무슨 뜻이지?” 김성철이 묻자 마라키아는 눈을 반짝이며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신선한 인간의 피를 마시고 싶군.” “알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나?” “농담이야. 조인도 가끔 농담을 하지. 어때? 나하크 족의 고차원적인 농담은. 포복절도할 정도로 웃기지 않나?” “…….” 방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모든 걸 잘한다는 마라키아였지만 그에게도 결점은 있었다. 그는 공기를 읽지 못했다. “안 웃겨? 재미없나?” “뭐래. 정말.” 참다 못한 베르텔기아가 품속에서 중얼거렸다. “응? 뭐야. 이 리빙 북은. 리빙 북 따위가 감히 멸세의 왕에게 망발을 일삼다니. 아무리 네가...” 덥썩. 김성철이 마라키아를 목덜미를 움켜 잡고 들어올렸다. 손아귀 안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마라키아는 부리를 꾹 닫았다.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잡아 올린 상태에서 베르텔기아를 꺼냈다. 그리고 말했다. “이 녀석은 베르텔기아다. 현재 내가 거느린 것 중엔 가장 서열이 높지.” “서.. 서열...?!” 마라키아의 동공이 순간 수축됐다.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명심해. 베르텔기아가 서열 1위고 그 다음이 너라는 걸.” “그.. 그런 말도...!” 마라키아는 즉각 반발하려했지만 그를 잡은 김성철의 몸에 신적인 힘이 흐르고 지나가는 걸 느끼고 부리를 닫았다. “알겠나? 마라키아. 네가 예전에 사회에서 아무리 잘나갔건 좋은 대학을 나왔건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아. 여기는 군대... 아니 내 영역이다.” 무심코 김성철은 과거 군 시절 후임들에게 상투적으로 하던 말을 한 걸 깨닫고 습관의 무서움을 느꼈다. ‘20년도 전에 하던 말을 이런데서 할 줄이야.’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군 시절엔 그는 군기반장 김병장이라 불렸다. 아무튼 예전의 가락이 아주 녹슨 건 아닌지라 김성철은 마라키아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과 서열을 주지시키는데 성공했다. “내.. 내가.. 멸세의 왕인 내가 이런 책보다 못하다니...!” “책이라니! 무례하구나! 베르텔기아님이라고 부르지 못할까?” 그 전까진 마라키아의 위세에 눌려 말도 못하던 베르텔기아였지만 김성철이 서열을 세우자 그야말로 여포처럼 돌변했다. 마라키아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놈이 떡 버티고 있는데 거스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무튼 혼란스러웠던 서열 확립이 끝난 후 마라키아는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으며 아까 했던 이야기를 다시 재개했다. “으음... 몇 가지 불미스런 일이 있었지만 다시 제안을 하려 한다. 나를 바깥으로 내보내다오.”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마라키아가 단순히 장난으로 그 말을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며 물었다. “생각이라도 있나?” 김성철의 물음에 마라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 마라키아는 검은 깃털을 지닌 가장 뛰어난 나하크. 그동안 단순히 신나게 먹고 마시면서 시간을 허비한 게 아니다. 그동안 내 몸에 걸린 저주에 대해 생각했지. 왜 절멸의 저주가 풀렸는지. 이곳에선 통용되진 않는지 그런 의문들에 나름의 의문을 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오랜 사색의 시간을 보냈다.” “서열 3위 주제에 혓바닥이 길다!” 베르텔기아가 버럭 소리 질렀지만 김성철도 마라키아도 호응하지 않았다. 무안해진 베르텔기아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침묵이 찾아오자 김성철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곳의 비밀을 알아낸 것인가?” “확실치는 않아. 하지만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래서 명령하는 거다. 나를 이 답답한 집밖으로 내보내달라고.” “…….” 말투가 고깝긴 하지만 마라키아는 원래 다른 시대에서 최강의 마법사로 군림하던 존재. 그 지식의 방대함과 깊이는 이 시대의 모든 마법사를 합한 것보다 뛰어날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기대를 품고 마라키아를 안고 방밖으로 나섰다. 하녀들의 시선이 불룩 튀어나온 김성철의 복부에 꽂혔다. 로브 안에 숨겨 놓은 마라키아다.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마커레이드는 물론이고 베스티아레에게도 알려줄 용의가 없었다. 김성철은 그녀들을 향해 퉁명스레 말했다. “발기한 거 처음 보나?” 하녀들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복도를 무사히 빠져나온 김성철은 문 앞에 섰다. “괜찮겠나?” 마라키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날개를 살짝 폈다. “내 천재적인 감각을 믿고 천천히 움직여보자고. ” 김성철은 시키는 대로 마라키아를 조심스레 집밖으로 옮겼다. 깃털 하나가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순간이었다. 검은 깃털이 하얗게 변색됐다. “깃털을 쳐 내!” 마라키아가 다급하게 말했다. ======================================= 68. 완벽의 도시 (3) 김성철의 손날이 깃털을 쳐냈다. 지면에 떨어진 검은 깃털은 하얗게 변색되더니 이너 검은 반점으로 뒤덮여 말라비틀어졌다. “큰일 날 뻔 했군.” 마라키아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뭘 좀 알아냈나?” 김성철이 바닥의 깃털을 응시하며 물었다. 마라키아의 작은 날개가 살짝 파닥거렸다. “조금은 알아낸 거 같아.” 마라키아는 자신의 깃털 하나를 손을 떼어내 문밖을 향해 던졌다. 놀랍게도 그의 몸에서 박리된 깃털엔 어떤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보다시피 절멸의 저주는 나라는 개체 그 자체에 걸린 것이야.” 마라키아가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이 안에선 그 저주가 통하지 않지. 부수는 자. 저주에 대해선 좀 아나?” 마라키아가 김성철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김성철은 턱 끝을 매만지며 팔짱을 꼈다. “그다지 잘 알진 못해. 몸에 덕지덕지 달고 있긴 하지만.” “확실히 너에겐 별 잡스런 저주가 걸려 있더군.” “저주를 모으는 게 취미거든.” “별난 취미군. 좌우지간, 저주라는 건 주문술식과 유사한 요식성을 띄고 있지.” “주문술식과 유사하다라? 생각해보니 그런 점도 없잖아 있군.” 저주라는 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저주를 거는 자와 저주를 받는 대상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며 그리고 그 대상은 반드시 특정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인생의 막장에 내몰린 자들이 으레 하는 “하늘을 저주한다!”는 상용적인 문구는 어떤 효력도 지니지 못한다. 하늘 입장에서도 기가 찰 것이다. 지깟 놈이 뭔데 날 저주하냐고. 반면 토지의 일정 영역에 대한 저주는 가능하다. 강력한 존재에 한해서 가능한 솜씨이긴 하지만. 절멸의 저주는 신이 내린 저주이므로 그 저주의 범위가 대륙 전체에 미친다. 그 대상은 대륙 전역에 사는 지성체 중 스무 살에 이르지 못한 모든 자. 저주의 효과는 반드시 죽음에 이르는 병. 하지만 이곳 신록의 온실엔 그 저주가 미치지 않는다. 마라키아는 그 원인을 이렇게 분석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이 영역이 신의 저주로부터 미치지 않는 영역이라는 것. 다시 말해 신의 눈으로부터 가려진 영역이라는 가능성이다. 과거 지하 속에 들어간 우리의 왕국이 그러한 곳이었지.” “그 전에 말한 안전지대라는 말인가?” 김성철의 물음에 마라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여기서 지내면서 두 번째 가능성에 눈을 떴고 그것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했다.” “뭐지? 그 두 번째 가능성이란?” 이에 마라키아는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밤하늘을 응시하며 특유의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이곳에선 신의 권능조차 무효화 되는 걸로 보인다.” “…….” 김성철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마라키아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여기선 상태창이 열리지 않아.” 김성철은 즉시 자신의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열리지 않는다. 분명 몸에 흐르는 신적인 힘은 그대로인데 그것을 표시하는 수단이 나타나지 않았다. 꿈의 결계 속이나, 고유 영역에선 종종 일어나는 일이지만 엄연히 현실에 속한 이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적어도 이계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이하군.” 김성철이 말했다. “그때 나는 이 두 번째 가능성을 응시했지. 그리고 그것을 시험해보려한다.” 마라키아는 작은 날개를 활짝 펼쳤다. “다시 한 번 나를 바깥으로 내밀어다오.” “위험할텐데?” 김성철이 묻자 마라키아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앙증맞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나는 나하크의 왕. 두려움을 모르는 존재지.” “…….”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들어 올렸다. 그걸 본 베르텔기아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뭘... 하려는 거야?” “이 녀석의 두 번째 가능성이 맞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다.”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며 마라키아를 다시 바깥을 향해 내밀었다. 그의 날개가 다시금 신록의 온실 바깥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 그런데 날개가 바깥 끝에 닿자 마라키아가 김성철의 팔목을 붙잡고 다급히 말했다. “잠깐, 천천히. 아주 살짝만.” “알았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잘라내라.” “두려움 모른다는 놈이 말 한 번 많군.” “절멸의 저주 한 번 걸려 봐. 나처럼 되나 안 되나.” 김성철은 쫑알쫑알 말대꾸를 하는 마라키아를 바깥으로 불쑥 내밀었다. 날개 일부분이 온실 바깥으로 나왔다. “끄으윽!” 그와 동시에 보호받는 영역 바깥으로 나온 깃털들이 하얗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마라키아가 외쳤다.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다시 온실 안쪽으로 끌어당김과 동시에 영혼창고에서 날카로운 단도를 꺼내 들었다. “크으으..!” 김성철은 마라키아의 날개에 얼룩처럼 나타난 하얗게 변색된 부분을 노려보았다. 혹 그것이 퍼지거나 악화가 될 겨우 바로 잘라내기 위해서. 마라키아는 끔찍한 고통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나하크의 왕답게 정자세로 서서 그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끔찍한 인고의 시간. 잠시 후, 기적 같은 일이 나타났다. 원래라면 하얗게 변색된 영역에 검은 반점이 생기며 괴사하는 게 정상이지만 지금 여기선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하얗게 변색된 영역이 원래의 검은 색으로 천천히 회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크크크... 역시 나의 대담함과 하해와 같은 지식의 승리군.” 마라키아는 자신의 건재를 확인하며 낮게 웃었다. 하지만 갓 태어난 작은 몸. 곧 한계가 왔다. 마라키아는 그대로 힘을 잃고 쓰러졌다. “영차!” 베르텔기아가 쓰러질려는 마라키아를 뒤에서 떠받쳤다. 덩치가 큰 베르텔기아는 작은 마라키아를 혼자 떠받치고도 남을 정도의 묵직함이 있었다. “크으... 책도 쓸모가 있군.” 마라키아가 부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서열 2위에게 무슨 망발이냐.” 베르텔기아는 버럭하면서도 마라키아가 자신을 지렛대로 삼아 다시 일아나게 내버려두었다. 김성철은 정신을 차린 마라키아를 다시 품속에 숨기고 방으로 돌아갔다. 하녀들의 시선이 김성철의 하복부를 향해 꽂혔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팔걸이의자에 앉혔다. “네 말이 맞는 모양이군.” “그렇다. 역시 이곳엔 신의 저주조차 무효화시키는 힘이 있다.”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베스티아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베스티아레. 허투루 말한 건 아닌 모양이군.’ 김성철은 마라키아에게 전 익시온의 공주가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곳 새로운 익시온은 아신 시드미아를 섬기고 있고 아신 시드미아는 그 답례로 이 도시에 신의 저주조차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를. 마라키아는 때로는 김성철의 말에 질문 혹은 반박을 하며 그 나름대로 베스티아레의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그가 가장 의심한 부분은 절멸의 저주를 거는 주체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 베스티아레란 여자의 말에 따르면 절멸의 저주의 주체는 신이 아니라 그보다 격이 한층 낮은 신의 대행자라고 하는데 이를 입증할만한 증거나 근거가 있나? 나는 들은 적이 없다.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하지만 그렇기에 일개 아신의 힘으로도 네 몸의 저주를 무효화시킬 수 있었겠지.” 김성철의 말에 마라키아는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러고 보니 절멸의 저주가 신이 내렸다는 증거 또한 없지. 그저 세대와 세대 사이에 전해져 온 이야기 중 하나일 뿐.” 그는 무언가 떠올린 듯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었다. “이 땅에 아신이 강림했나?”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아신의 권능이 이 땅에 발현되고 있는 건 사실. 내 예측이 맞다면....” 마라키아는 하얗게 변했다 원래의 색을 되찾은 왼쪽 날개의 귀퉁이를 오므려 손으로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이 땅 어딘가에 대규모의 인신공양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알지?” 김성철의 물음에 마라키아는 접었던 날개를 펼치며 쓸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조인 또한 같은 짓을 시도했거든.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말이야.”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지하의 조인 왕국 벽속에 파묻혀 있던 무수한 동굴엘프들의 시체를 떠올렸다. 마라키아는 계속해서 말햇다. “다른 세상으로 건너간 아신들이 이쪽 세상에 아무 조건 없이 영향력을 행사할 순 없지. 대가가 있어야 돼.” “그것은...?” “알고 있는 눈친데 뭐, 말해주지. 인간의 영혼이다.” “인간의 영혼이라.” 완벽의 도시라 불리는 익시온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김성철은 얼마 전에 클라리스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지상낙원 익시온은 라그란제에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고 그들을 정착촌이란 시설에 밀어 넣는다는 이야기를. ‘그러고 보니 도시의 규모에 비해 사람의 숫자는 지나치게 적었지.’ 익시온의 믿기 어려운 번영은 단순히 베스티아레와 거신의 힘만으론 설명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 누군가의 희생이 따른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짚이는 곳이라도 있나?” 마라키아가 의자에 몸을 편안히 뉘이며 묻는다. “한 군데 떠오르는 곳이 있군.”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대 위에서 밝은 얼굴로 노래를 부르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심증을 굳혔다. ‘그 여자가 있는 곳이니 필경 뭔가 벌어지고 있겠지.’ 다음 행선지는 정해졌다. “일단 그 부분에 대한 확인을 부탁하지. 나는 내 나름대로 절멸의 저주란 것에 맞서볼 테니.” 마라키아의 눈동자엔 의지가 충만했다. 신의 저주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에서 한 가지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 아니 일족 전체를 주박하고 있는 절멸의 저주를 풀어낼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말이다. * “들어오시는 건 자유지만 나가는 건 아닙니다.” 경비병이 도시 바깥을 나가려는 김성철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커레이드님의 허가장을 가지고 오셔야 합니다.” 경비병들은 김성철의 악명을 알고 있음에도 완고한 태도를 보였다. 마커레이드의 명이 절대적이거나 김성철이 생각보다 무서워 보이지 않는다거나 등의 이유가 있겠지만 김성철은 여기서 문제를 일으킬 하등의 마음도 없었다. 그는 곧장 물러서서 마커레이드를 찾아갔다. 마커레이드는 베스티아레의 궁전 옆에 위치한 도시회관 청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신이 여긴 어쩐 일이야?” 마커레이드는 눈웃음을 지으며 김성철의 중요한 부분을 힐끗 쳐다봤다. “…도시 바깥에 나가려고 한다.” “그 이유는?” 마커레이드가 서릿발처럼 질문을 해왔다. “마녀의 숲에 잊고 온 물건이 있어서 말이야.” “마녀의 숲...?” 기세등등한 마커레이드지만 마녀의 숲이란 이름이 나오자 태연할 수 없었다. 동부의 사람들은 그들과 이웃한 아델화이트란 마녀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고 그 마녀가 사람들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 또한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아.. 그 여자. 당신 그 마녀하고도 친했었다지 아마?” “친하다고는 할 수 없지. 아무튼 이틀 안에 다녀오지. 도시를 떠나는 건 아니다. 떠날 이유도 없고.” “잠깐의 외유라면 자유롭게 해도 좋아. 당신은 익시온의 죄수가 아니라 손님이니까.” 마커레이드의 허가장을 얻은 김성철은 다시 정문으로 향했다. 경비병은 마커레이드의 서명을 확인하고 기꺼이 문을 열어주었다. 거기에서 김성철은 마커레이드가 이 도시의 실권자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베스티아레는 그저 군림할 뿐이고 도시의 실권을 쥔 건 역시 저 여자인가.’ 김성철은 일단 지평선 끝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감시자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말이다. 땅거미가 지고 밤의 어둠이 드리워지자 김성철은 180도 방향을 선회했다. 멀리 달빛에 비친 완벽의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김성철은 은밀하게 도시를 따라 측면으로 돌아갔다. 원형의 도시 사각에 가려진 작은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익시온보단 못하지만 나름 정사각형을 이루는 성벽에 의해 둘러싸인 소도시. 김성철은 한 눈에 그곳이 정착촌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주변을 경계하며 정착촌을 향해 신중하게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를 나아갔을까. 또 다른 정착촌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김성철은 곧 커다란 놀라움에 직면하게 된다. 익시온의 성벽 뒤, 서쪽에 면한 광활한 평야 위엔 수십 개의 정착촌이 나란히 서 있었다. “응? 저 상자 같은 도시가 뭐 저렇게 많아?” 베르텔기아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불쑥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마라키아의 말 대로 이 도시에서 뭔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군.” 각각의 정착촌은 완벽히 성벽에 의해 구분된다. 그리고 정착촌을 둘러싼 성벽 너머엔 어떠한 생명의 기운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살인골렘들이 침입자를 기다리고 있을 뿐. 저벅. 김성철의 기척을 듣자 수십 기에 달하는 골렘들이 일제히 붉은 눈빛을 번득였다. 그와 동시에 무수한 마법진이 하늘 위에서 번쩍이며 나타나며 작은 베스티아레를 쏟아냈다. ======================================= 69. 죽음의 농장 (1) “이거 위험한데?”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본 베르텔기아가 꾸물거리며 말했다. 김성철은 말없이 어둠 속으로 조용히 모습을 숨겼다. 소실의 능력을 지닌 아무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김성철의 은신술은 최고 수준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정착촌 사이로 전개된 수백 마리에 달하는 베스티아레의 종들은 김성철의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꼬마 베스티아레 몇 마리가 끈질기게 주변을 배회하며 침입자를 찾아보려 했지만 무의미한 시도로 그칠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출현은 김성철의 심증을 더욱 굳게 하는 역할을 했다. ‘역시 정착촌에 뭔가 있군.’ 숨기려는 비밀이 크면 클수록 지키는 세력도 큰 법이다. 정착촌에 대한 경비는 정작 익시온 자체보다 훨씬 삼엄하다. 김성철은 정착촌으로 침입해보고 싶은 열망을 느꼈다. 하지만 지상으로는 침입할 방법이 없다. 잠을 자지 않는 골렘들과 무수히 쳐진 경계결계 사이로 유유히 뚫고 갈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김성철은 이런 경우에도 나름의 노하우를 지니고 있다. 그는 땅을 밟은 발에 힘을 주고 꾹 눌러보았다. ‘무르군.’ 김성철이 이계로 오기 전 그는 노가다라 불리는 건설현장의 잡부를 하며 살았다. 게다가 그는 군 생활 시절 까탈스런 행보관 아래서 말년까지 진지공사를 해야 하는 비운의 군 생활을 보냈다. 삽은 손에 익은 밥벌이의 수단이자 무기다. 게다가 지금 그의 손에 들린 건 드워프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흑철로 만든 삽. 결코 무뎌지지도 부러지지도 않는 최상급의 삽이다. “…….” 김성철은 그 훌륭한 도구로 그야말로 신들린 속도로 땅굴을 파나갔다. “우와.....” 여간해선 놀라지 않는 베르텔기아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지점에서부터 땅굴을 파들어 가는 것은 오랜 전쟁의 수단. 김성철은 반란군 시절, 몇 개의 성과 도시를 땅굴로 함락시킨 적이 있다. 물론 땅을 파고 들어간다는 게 수고스러운 일이라 싸우기도 전에 땀을 비오듯 흘리며 뼈와 힘줄이 지치지만 언제나 피보다는 땀을 흘리는 게 낫다는 게 김성철의 지론인지라 그는 그런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때도 그랬는데 신적인 힘을 손에 넣은 지금 그의 삽을 멈출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푹!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움직이는 삽은 한 번에 대량의 흙을 뒤로 퍼냈다. 그런 삽질이 멈추지 않으니 그의 전진 속도는 그냥 걷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파낸 흙을 따로 뒤로 옮기지 않아 삽질하는 족족 후방이 막혀버린다는 점인데 여기에 대해서도 김성철은 나름의 대비책을 두고 있었다. ‘아쿠아 브레스.’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게 하는 마법 스크롤은 공기가 희박한 땅속에서도 유용하다. 곧 그는 골렘들이 지키는 땅 아래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신중하게 삽을 놀리며 지면 위의 동정을 살피는데 주력했다. 골렘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골렘들은 잠을 자지도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지만 인간에 비해 유연성과 상상력이 부족하다. 상정 범위 바깥의 상황엔 속수무책이다. 꼬마 베스티아레도 상공의 적을 감시할 뿐, 지면 아래의 일은 신경 쓰지 못하는 듯 했다. 설령 그들이 지면 아래를 파헤친다고 해도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김성철의 땅굴은 이어지지 않으니까. 지면 위의 경계병들이 자신을 찾지 못한다는 걸 확신한 김성철은 다시금 신속하게 정착촌 하나를 목표로 땅굴을 파고 들어갔다. 곧 그는 정착촌 하나의 아래에 이를 수 있었다. 그는 신중하게 삽을 놀려 지면으로 통하는 마지막 흙을 퍼냈다. “…….” 정착촌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생명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김성철은 조심스럽게 정착촌 내부를 살폈다. 정착촌 안에 위치한 가옥은 대략 150여채. 바둑판처럼 배열된 임시가옥과 우물, 빨래대, 식수터 등이 있었다. 빨래대엔 바람에 날려 떨어진 옷가지 몇 개와 더불어 누군가의 옷이 걸려 있었고 식수터엔 누군가가 쓰던 컵이 떨어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산 흔적이 뚜렷했다. 하지만 정착촌 전체를 돌아봐도 살아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역병이 돈 마을처럼 모든 사람들은 정착촌에서 사라져 있었다. ‘기이하군.’ 김성철은 조심스럽게 성벽으로 다가가 인근 정착촌의 위치를 확인했다. 몇 개는 불이 켜졌고 몇몇 개는 여기처럼 어둠과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김성철은 불빛의 자취가 남은 정착촌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삽을 들고. 다음 정착촌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많은. 늦은 밤이었지만 거리를 활기에 차 있었고 두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김성철은 땅굴을 늘 들고 다니는 마대자루로 덮고 거리로 나아갔다. 그곳은 영락없는 사람이 사는 마을이었다. 김성철은 고단하지만 기대와 희망에 찬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정사각형의 정착촌 중앙엔 익시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신 시드미아의 동상이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늦게까지 문을 연 간이주점에서 김성철은 주객들 사이에서 몇몇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마커레이드님이 곧 우리에게도 시민권을 발부해준다고 하더군.” “하긴 우리 제7촌은 생산량이 가장 높으니까.” “제44촌 녀석들이 우리를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으니까 방심하기엔 일러. 좀 더 열심히 일을 해서 할당량을 달성해야지!” 김성철은 곧 이들이 동부의 피난민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고단한 피난민 캠프 생활 중, 한 의문의 안내인의 광고를 보고 이곳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머물던 캠프의 위치는 제국이 아닌 그 아래 남쪽의 상인연합의 자치령 영토. ‘라그란제에서만 사람을 끌어모으는 게 아니군.’ 정착촌 한 곳에 수용가능한 사람의 숫자는 최대한 우겨넣으면 2천명, 평범하게 수용하면 천 명에 이를 것 같았다. 그런 정착촌이 50여개가 넘게 있다. 수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하지만 이 주변엔 그 많은 인구를 지탱할 농지도, 가축도, 물자도 없다. 대륙 최강국이라 불리는 인간제국조차 피난민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판국에 하루 만에 만들어진 도시가 그들을 전부 부양한다? 이건 애당초 성립자체가 되지 않는 이야기다. ‘역시 아주 지독한 악취가 나는군.’ 그는 다음 정착촌으로 향하는 대신 이곳에 머물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정착촌 주민들의 일상을 보면 단서가 보일 것 같았다. 해가 뜨자 굳게 닫힌 정착촌의 문이 열리고 호문클루스가 조종하는 커다란 물소가 끄는 마차가 나타나 배급을 시작했다. 배급은 후하게 그리고 넉넉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익시온에선 일자리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일을 할 모범적인 정착민들은 어서 이 마차에 타고 기다리는 거예요!” 일용직을 모집하는 마차 주변에 성인 남성 몇 명이 군불 옆에서 몸을 녹이며 마차가 출발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김성철은 마치 제 집 안방에 온 것처럼 그 자리에 합류했다. 연초를 피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 불을 빌려주거나 시덥지 않은 잡담을 나누거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곧 출발할 시간이 되자 익시온의 감독관이라는 허여멀건한 관리가 나타났다. 화려한 복장은 물론이고 여러 명의 작업반장을 대동한 걸로 보아 꽤나 지체 높은 사람으로 보였다. “오늘은 교통안내 1명, 포도가설 10명, 하역작업 8명, 폐정착촌 정리정돈 4명을 모집한다.” 김성철은 일단 상황을 관망했다. 사람이 많이 몰리는 쪽이 소위 말하는 꿀보직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교통안내직에 구름처럼 몰렸다. 그 다음으로 선호되는 게 포도가설. 하역작업은 모두가 기피했지만 포도가설에서 떨어진 자들이 마지못해 지원했다. 그런데 폐정착촌 정리정돈 작업엔 아무도 지원하려 드는 이가 없었다. 김성철은 연초를 함께 피면서 안면을 익혀놓은 사내에게 물었다. “처음이라 그런데 왜 폐정착촌 일은 아무도 안 하는 거요?” 그 물음에 그 사내는 바닥에 침을 한 차례 뱉고는 거친 어조로 말했다. “지랄 같거든. 역병에 걸린 새끼들이 왜 이런 곳까지 와서 병을 퍼뜨리는 지 원. 자기 땅에서 얌전히 뒤질 것이지.” 나중에 보충해서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폐정착촌이란 역병이 돌아 정착촌 전체가 전멸한 곳을 이르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의 설명에 의하면 정착촌을 이렇게 엄격하게 성벽을 지어 구분해놓은 것도 동부에서 돌고 있다는 끔찍한 역병에 의해 전멸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한다. ‘이유는 그럴 듯 하군.’ 하지만 김성철은 절멸의 저주 이외에 대륙 중에 무시무시한 역병이 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김성철은 폐정착촌 정리정돈 작업에 기꺼이 지원했다. 김성철과 함께 늙은이 2명과 소년티를 갓 벗은 청년 하나가 배정됐다. 폐정착촌으로 가는 마차 위에서 김성철은 성벽 사이사이를 감시하는 골렘들을 볼 수 있었다. “저건, 우리를 지켜주는 경비골렘이오. 멋 모르고 우리를 습격하던 도적놈들이 저 신기한 작은 골렘들에게 학살당하는 걸 당신도 봤어야 했어!” 노인들은 경비골렘을 입이 마르게 칭찬했다. 거신에 의해 삶의 터전이 파괴되면서 도적이 들끓게 되었고 그로 인해 별 못 볼꼴을 다 보게 된 노인에겐 치안과 안전만큼 소중한 가치도 없었다. 또 김성철은 마커레이드의 평가가 정착민 사이에선 대단히 높은 것도 알 수 있었다. “마커레이드님은 뭔가를 아는 분이야. 제국처럼 생판 남에다 지역도 다른 사람들을 한 곳에 몰아넣는 우를 범하는 대신, 출신지별로 정착촌을 만들어 구분해서 배정해놓는 기특한 생각을 하시다니 말이야.” “그분 또한 거신에 의해 나라가 파괴된 어찌 보면 피난민 출신이니까 피난민 마음을 아는 거지.” “익시온의 선왕이 그렇게 명군이라는데 그 핏줄이 어디 가겠어? 그대로 물려받은 거지.” 노인들이 마커레이드 칭송을 하는 동안 김성철은 풀이 죽은 채 한마디 말도 없는 청년을 응시했다. 그는 어딘가 겁에 질린 눈치였다. 폐정착촌 정리정돈이라는 일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 다른 사내에게 들었기 때문이리라. “…….” 곧 마차는 폐정착촌에 도착했다. 폐정착촌으로 지정되기 전엔 제34촌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과일촌은 없나.’ 김성철은 엉뚱한 생각을 하며 아무도 살지 않는 정착촌에 입성했다. 생명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 여기 마스크를 써. 역병의 기운은 베스티아레님의 축복에 의해 모두 소멸됐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말이야.” 감독관이 인부들에게 마스크를 지급했다. 마스크를 쓰고 마차에서 내린 김성철은 곧 볼 수 있었다. 거리 도처에 널린 무수한 시체들을. ‘이건...’ 시체들의 상태를 확인한 김성철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으.. 끔찍하군. 동부에 거신에 이어 역병까지 퍼지다니!” “어서 시체들을 한 곳에 모으자고!” 노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단순한 역병에 의한 죽음이 아니다. 사람들은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져 죽어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게 쥐어짜낸 듯이. 크지 않은 정착촌 전체를 돈 끝에 김성철은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이 정착촌은 단순히 피난민을 수용하고자 하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정착촌 전체가 인신공양을 위한 시설이다.’ 반나절 동안 시체를 치우며 김성철은 자신의 생각을 굳혔다. 정사각형의 성벽 안에 둘러싸인 정착촌은 그 자체로 아신을 위한 제단. 그 안에 있는 자들은 통째로 아신을 위한 제물로 바쳐진다. 어떠한 예외도 없다. 시체들을 한 곳에 모아 불태우는 걸로 그날의 작업은 마무리됐다. “전부 처리됐나?”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감독관이 다시 폐정착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시체들이 순조롭게 처리된 걸 확인하고는 경비병을 대동하고 마을 광장으로 향했다. 김성철은 연초를 피는 척하고 그 사내의 동향을 살폈다. 감독관은 마을 광장에 우뚝 선 아신 시드미아의 동상으로 향했다. 다른 정착촌에서 본 것과 동일한 동상이다. 감독관은 주변을 돌아보더니 아신의 동상 아래를 조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동상 아래의 기둥 일부분이 열리더니 검은 무언가를 그의 손바닥 위에 뱉어냈다. 감독관은 그것을 붉은 비단이 고이 싸 품속에 숨겼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지만 김성철은 감독관이 챙긴 그 검은 물체를 똑똑히 보았다. ‘저것은...?’ 김성철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시드미아의 동상에서 배출된 것은 재앙의 파편이다. 김성철이 가진 것에 비하면 손톱만큼도 안 되는 작은 크기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분명 재앙의 파편이다. ======================================= 69. 죽음의 농장 (2) 김성철이 마커레이드를 찾아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인신공양까지는 눈감고 넘어가려고 했지만 재앙의 파편을 다루는 것까지는 묵과할 수 없었다. 그는 다짜고짜 마커레이드의 집무실로 가서 복대 안에 숨겨 놓았던 재앙의 파편을 꺼내 책상 앞에 올려놓았다. “이게 뭐지?” 그는 단순명쾌하게 물었다. 김성철의 거친 태도에 마커레이드는 의외라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이건 무슨 조화일까?” “묻는 말에 대답해라.” 김성철은 장난칠 기분이 추호도 없었다. 한때 김성철과 아는 사이였던 마커레이드다. 김성철이 지금 화를 내고 있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기세를 꺾지 않았다. “대답하기 싫다면?” 이에 대해 김성철을 책상을 내려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책상 다리가 부러져 한쪽이 주저앉을 정도의 충격이었지만 마커레이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경비병이 집무실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녀는 손을 저어 경비병을 내보내는 여유까지 보였다. “어머, 사람 잡겠네.”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김성철의 뜻은 확고했다. 하지만 마커레이드의 고집 또한 보통이 아니다. “그냥 죽이지 그래?” 마커레이드는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 안엔 깊숙이 감춰놓았던 광인의 피가 들끓고 있었다. ‘이런.’ 붉은 눈동자 속에 이는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걸 보며 김성철은 낭패감을 느꼈다. ‘모친의 피가 발작을 일으킨 건가.’ 마커레이드의 모계혈통은 이름 높은 광전사의 가계. 평소엔 멀쩡하지만 감정이 격화되거나 분노를 주체할 수 없을 경우 핏줄에 각인된 광기가 눈을 뜬다. 어처구니없게도 김성철의 돌발행동이 그 광기의 봉인을 풀어버린 것이다. “죽여 버리라고!” 마커레이드가 격하게 몸을 떨며 소리 질렀다. “당장!” 그걸 본 김성철은 알 수 있었다. ‘이 여자. 10년 전보다 훨씬 더 병증이 심해졌군.’ 책상을 내려친 건 잘못한 일이지만 과거엔 이 정도로 가벼운 일에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다. 김성철이 본 그녀의 유일한 발작은 탑에 갇힌 모친이 죽었을 때뿐이었다. 마커레이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김성철에게 손가락질 하며 덤벼들었으나 애당초 그녀는 김성철의 상대가 아니다. 몇 번의 공격이 실패로 끝나자 분을 참지 못한 그녀는 마침내 단검을 꺼내 자해를 시도했다. 김성철은 어쩔 수 없이 마커레이드의 손에서 단검을 뺏었다. 그때 그는 볼 수 있었다. 마커레이드의 손목에 남겨진 무수한 자해의 흉터를. “…….” 김성철도 모르진 않았다. 왕국이 파괴되고 부왕이 죽는 와중에 마커레이드가 받았을 충격을. 다시 만난 마커레이드의 겉은 멀쩡하고 당당하기까지 했지만 그 안은 완전히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던 것이다. 김성철은 처음 여기 온 의도와 달리 난리를 피우는 그녀를 진정시켜야 했다. ‘돌아버리겠군.’ 김성철은 입에 거품을 물고 자신의 손목을 그으려는 미친 여자를 끌어안고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어이. 거기 누구 없나? 누가 의사 좀 불러와!” 그러나 바깥에선 아무 반응도 없었다.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 하녀로 추정되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조심스레 돌아올 뿐이었다. “가만 놔두시면 괜찮아 지실 겁니다.” 말투로 미루어보아 이런 일이 한두 번 있었던 일은 아닌 모양이다. 김성철은 어쩔 수 없이 미쳐 날뛰는 마커레이드의 목을 졸라 그녀를 기절시켜야 했다. “끄.. 끄으윽...!” 그러는 동안에 그녀의 코와 입에서 흘러나온 침과 콧물은 전부 김성철이 애지중지하는 코트 자락에 묻었다. ‘이런 개 같은 일이 있나.’ 김성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마커레이드의 집무실에서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대로 돌아간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이대로 돌아 가봐야 좋은 일은 하나도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마커레이드의 발작이 끝난 뒤 한참 뒤에야 하녀들이 집무실에 들어와 집무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부서진 책상을 보더니 김성철을 응시하며 어떻게 된 일이라는 식으로 눈을 깜빡였다.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마커레이드를 가리켰다.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주머니 안에서 부들거린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마커레이드가 소파 위에서 눈을 떴다. “으.. 으음...” 그녀는 흘러내린 붉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응?” 그녀는 주변을 돌아봐 낯익은 집무실이라는 걸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곧 김성철을 발견했다. 마커레이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발작 전에 있었던 일이 다시 한 번 흐릿한 의식 속에 또렷하게 새겨진 것이다. 그녀는 벌떡 일어서서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걱정이 되서 있었던 것뿐이다.” “걱정?” 그 말을 들은 마커레이드의 입가에 의외라는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이 내 걱정도 해? 그거 참, 눈물 나게 고맙네.” “…….” 마커레이드는 김성철과 자신의 부서진 집무실을 번갈아 쳐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오랜 기다림 끝에 그녀는 뭔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김성철을 응시했다. “말해줄게. 한 가지 약속을 하면.” 한바탕 풀어낸 탓일까. 지금 그녀는 어딘가 힘이 빠진 기운이었다. 얼굴엔 극도의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 김성철은 그녀를 담담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뭘 말해준다는 거지?” “당신이 가져온 물건의 정체.” 마커레이드는 눈을 반짝이며 김성철의 손에 들린 재앙의 파편을 응시했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여자군.’ 김성철은 감정의 변화가 느리다. 마커레이드처럼 휙휙 감정의 기복이 바뀌는 여자와는 처음부터 상성이 최악이었을지도 모른다. 같은 시간 축 위에서 살아가지만 그 살아가는 형태는 전혀 다른 모습이므로.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순 없다. 김성철이 입을 열었다. “뭘 약속하면 되나?” “나랑 결혼하는 거.” 예상했던,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다.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어려운 일이라는 거 잘 알고 있을 텐데.” 마커레이드도 김성철의 거절을 예상한 듯 짓궂게 미소지으며 되물어왔다. “과거엔 나이가 어리다고 거절했는데 지금은 무슨 명분으로 거절하는 거지?” 얄궂은 질문. 하지만 김성철은 이에 대한 모범답안을 알고 있다. 그는 마커레이드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서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나?” “응? 그게 무슨 소리지?” 마커레이드의 붉은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당신은 분명 엄청난 물건의...” “헛소문이다. 안에 잡동사니를 넣어뒀을 뿐이야.” 그 말을 들은 마커레이드는 실소를 터뜨렸다. 김성철은 항상 활성화 상태인 기만자의 장막을 비활성화 시키고는 마커레이드에게 말했다. “원한다면 들여다봐도 좋다. 나의 저주를.” 김성철이 신적인 힘을 손에 넣은 이래 자신의 능력치를 공개하는 건 좀처럼 없는 일이다. 마커레이드는 그 기회를 잡았고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소형 마법진이 나타났고 그녀는 김성철의 상태창을 들여다보았다. 순간 마커레이드의 몸이 경직됐다.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압도적인 능력치에 그만 몸이 얼어붙어버린 것이다. “다.. 당신. 대체 어떤 대가를 치루고 이런 힘을 손에 넣은 거지...?”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 대원수 시절의 김성철의 능력치를. 김성철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신 앞에 섰다.” 마커레이드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도 어지간히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당신은 더 미쳤네. 잘도 그런 미친 짓을.” 충격의 여운 속에 떨던 마커레이드의 눈동자에 뭔가 떠올랐다. 그녀는 즉각 자세를 바로하고 싸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라이즈 하이메르. 그 여자가 그 계단을 알려주고 당신을 부추긴 거지?” 라이즈 하이메르란 이름에 마커레이드는 감출 수 없는 혐오감과 증오를 불어넣어 말했다. 김성철은 담담한 어조로 되물었다. “계단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군?” “알다마다. 우리 왕국엔 대륙에서 손꼽히는 마법학교가 있었으니. 그 존재에 대해선 잘 알지. 하지만 전설에 따르면 그 계단, 아니 그 용광로에 들어가서 돌아온 자는 단 한 명밖에 없어. 수만, 아니 수백 만 명의 도전자 중에서 말이야.” 김성철의 얼굴엔 어떤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지만 마커레이드의 그 한마디는 김성철의 심경에 파문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그럴 리가. 라이즈의 말로는 성공률은 절반 정도라고 했는데...’ 표정엔 비록 변화가 없으니 충격은 행동의 일부에서 드러난다. “…….” 마커레이드는 침묵에 잠긴 김성철을 찡그린 눈으로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 여자는 그걸 알고도 당신을 보낸 거야. 자신의 복수를 위한 도구로.” “그 여자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나는 힘을 얻었다. 더 이상 그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 김성철은 은근한 불쾌감을 내비쳤다. 마커레이드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숲의 마녀에게 저주를 받았다는 건 확인했어. 보여주고 싶은 건 그거였겠지.” “그래서 결론은?” “나도 남자구실 못하는 남자랑은 살고 싶지 않아.” 마커레이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현명하군.”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김성철의 심기는 편치 않았다. 마커레이드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다른 부탁을 할 거야.” “합리적인 것이라면 받아들이지.” 마커레이드는 활짝 웃으며 들뜬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 일이 끝나고 나랑 같이 여행을 가는 건 어때? 아무도 없는 동부의 해안선부터 시작해 남쪽의 대밀림, 그 너머의 사막도 괜찮겠네. 아무튼 그렇게 시작해 대륙을 한 바퀴 도는 거야.” “그럴 시간은 없는데.” 시국이 시국이다. 한가하게 여행이나 할 때가 아니다. 그러자 마커레이드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작아진 목소리로 조르듯 말했다. “그럼 하루 일정으로 동부의 해안선만이라도.” “…그 정도라면 받아들이지.” 그러자 마커레이드는 뭐가 그리 기쁜지 폴짝 뛰어오르며 화사하게 미소지었다. 김성철은 그걸 보고 생각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조울증이라는 건가.’ “당신은 몸만 준비해. 여행 준비는 내가 모두 해올 테니. 옷가지부터 해서 음식준비까지 전부 내가 할 게. 당신은 요리를 못하니까 설거지나 하면 되겠네.” “요리는 내가 한다.” 김성철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에겐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지만 마커레이드에게 요리를 누가 하는 건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김성철이 다리를 부셔놓은 책상 앞에 앉아 턱을 괴고는 달라진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약속대로 당신이 가지고 온 그 검은 물질이 뭔지 알려줄게.” “…….” 김성철은 빈 소파를 찾아 착석하고는 마커레이드를 응시했다. “그 물질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 가장 일반적으로 불리는 명칭은 재앙의 파편이겠지.” “다른 이름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김성철의 물음에 마커레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신의 흙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려.” “신의 흙?” “그 검은 물질은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힘의 정수를 담고 있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고. 그래서 붙은 별칭 중 하나가 신의 흙. 하지만 먼 옛날엔 ‘모든 것’이라고 불렸던 모양이야.” “모든 것이라...” 김성철은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인 재앙의 파편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짙은 녹색 빛을 띤 차가운 느낌을 주는 넓적한 돌조각. 그 촉감은 꺼끌꺼끌하고 얼음처럼 찼다. 진실의 눈으로도 그 실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 조각엔 분명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었지만 마커레이드의 말처럼 엄청난 힘이 숨겨져 있다고는 보이지 않았다. “먼 과거, 에크하르트란 연금술사가 있었지.” 마커레이드가 입을 열었다. 에크하르트의 이름을 아는 김성철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녀를 향했다. “그는 모든 것을 연성해낸 최초의 연금술사였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용해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최초의 연금술사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는 운이 좋지 않았어. 동시대에 칠영웅이란 걸물이 존재했거든.” 마커레이드는 자리에서 일어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문 너머엔 이전에 김성철이 본 적이 있는 거대한 거신이 도시의 중심에 우뚝 자리 잡고 있었다. “한 가지 재밌는 걸 보여줄게.” ======================================= 69. 죽음의 농장 (3) 마커레이드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제법 높은 높이였지만 마법의 힘이 그녀를 새처럼 날게 했다. 김성철은 그냥 무대포로 뛰어내렸다. 쿵. 마법의 힘이 있지만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마커레이드는 곧장 거신 쪽으로 날아갔다. “이쪽으로.” 김성철은 그녀를 따라 거신 아래에 이르렀다. 거신의 하부엔 고기와 과일, 채소, 건초 등의 물자가 정결하게 닦인 은으로 만든 판자 위에 정려하게 담겨 있었다. 그 주위로 마커레이드의 시종들이 나란히 서있었다. “그것을 가지고 와라.” 마커레이드는 주위를 둘러보며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마법사 하나가 마커레이드에게 다가와 검은 결정을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정착촌의 시드미아의 동상에서 감독관이 채취했던 바로 그 재앙의 파편이다. 결정을 받은 마커레이드는 거신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녀가 손을 퉁기자 거신의 하복부가 열리며 복잡한 기계장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저것은.. 드라고만의 거신에 있던 것과 동일한 녀석이군.’ 마커레이드는 과거 김성철이 뜯어냈던 철관을 열고 검은 결정을 집어넣고 봉했다. 그리고 거신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태고의 지식을 간직하고 있는 말없는 신의 시종 베르텔기아 4호에게 명하노니, 제물을 통해 우리의 작은 염원을 이루어주기를.” 마커레이드의 말이 끝나자 거신은 마치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기이한 울림을 냈다. 그리고 곧 기적이 시작됐다. 하복부에 설치된 기계장치에서 김성철조차 해독할 수 없는 무수한 마법진이 겹치면서 나타나더니 번개 같기도 하고 섬광 같기도 한 무언가를 그 아래 방사했다. 빛 무리 속에서 김성철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거신 아래 수북이 쌓인 갖가지 물자가 스스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하나의 소시지가 열 개가 되고 백 개가 되었다. 은으로 만든 판자 또한 증식을 거듭해 하나의 판자가 층층이 쌓아올린 건물처럼 변했다. “세상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며 베르텔기아는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 순간 김성철의 눈엔 보다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외계가 아닌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였다. 그의 눈앞에 거신이 내뿜는 빛보다 더욱 반짝이는 문자가 운명처럼 그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 이 문자는 돌을 연성한 자만이 볼 수 있다. ] [ 그대가 보고 있는 것은 창조술사의 권능 ] “…….” 김성철은 숨을 죽이고 다음에 나올 문자를 기다렸다. 곧 하나의 단어가 그 앞에 또렷하게 자리 잡았다. [ 복사 ] “너무 감동적이었나?” 빛은 사라지고 물자의 증식은 끝났다. 마커레이드는 살짝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거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김성철을 향해 다가왔다. “당신이 그런 표정 짓는 건 정말 오랜만인 거 같은데. 내가 왕궁에 불을 질렀을 때 이후로 말이야.” “…솔직히 놀라운 광경이군.” 김성철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말했다. 아직 방금 본 문자의 충격의 여운이 몸에 미약하게 남아 있었다. ‘저것이 창조술사의 권능이라고. 그렇다면 이해가 가는군. 가시옹의 그 무수한 골렘의 대군이 만들어진 경위가.’ 거신은 물건을 복제할 수 있는 장치를 달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에크하르트 본인이 만들어 낸 것이겠지만 칠영웅들은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이 있는 걸로 보였다. 김성철은 마커레이드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 검은 파편을 이용하는 법은 베스티아레가 알려준 건가?” “응. 베스티아레님이 알려줬지. 그녀가 만들어 낸 이 도시를 우리로 하여금 운영할 수 있게끔.”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더 이상 물을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이라 불리는 재앙의 파편은 정착촌에 불러 모은 사람들을 제물로 바쳐 만들어 낸다. 그 검은 결정은 새로운 익시온은 더욱 풍요로운 번영을 안겨다 준다. 그 번영을 본 자들이 헛된 희망은 품고 익시온을 찾아 정착촌에 모여든다. 익시온은 정착촌에 모인 순진한 사람들을 집어 삼킨다. 김성철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이건 그야말로 죽음의 농장이군.’ 도저히 인간이 할 수 없는 상상. 하지만 인간을 증오하는 칠영웅이라면 능히 가능한 발상이다. ‘베스티아레.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뒤틀린 하나의 사회라는 진정으로 끔찍한 괴물을 만들어냈군.’ 그는 마커레이드를 응시하며 담담하지만 은은한 분노가 담긴 음성으로 물었다. “이런 것을 하기 위해 정착촌의 사람들을 제물로 바쳤나?”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마커레이드는 김성철의 추궁에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어 주위의 사람을 물렸다. 둘 만 남은 거신의 그늘 아래서 마커레이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일부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어.” “그렇다고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닭장 같은데 가둬놓고 몰살시키는 것은...” “우린 그저 되갚아줄 뿐이야. 당신네 대륙십삼걸과 세계의회가 한 결정에 대해.” 마커레이드의 붉은 눈동자엔 감출 수 없는 분노가 숨겨져 있었다. “당신이 만든 조직이잖아? 대륙십삼걸도, 세계의회도.” 마커레이드가 빈정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 김성철은 침묵했다. 비록 대륙십삼걸을 탈퇴하고 세계의 적이 되었지만 대륙십삼걸의 결성과 세계의회의 성립에 김성철이 중심역할을 한 건 사실이다. “당신이 동부의 입장을 대변할 사람을 단 한 사람만이라도 그곳에 넣어줬다면 우리 왕국이 망할 일은 없었겠지. 소환자 출신인 황제 따위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일은 더더욱 없었겠지.” 선의로 한 일이 때로는 악업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김성철이 재앙에 맞서기 위해 국가와 종족을 초월해 만든 조직은 너무나 큰 힘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조직은 이기적인 소수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고 악용되었다. 김성철은 깊이 이해하고 있다. 단지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만으로 자신의 죄과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익시온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사의 근저에 그의 책임이 단 하나라도 없다고 말할 순 없는 것이다. ‘이 무슨 인과란 말인가...?!’ “어차피 당신을 욕하고 조롱하던 자들이야. 설마 이제 와서 구세주 놀이라도 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마커레이드가 날카로운 눈으로 김성철을 추궁하듯 노려봤다. “무슨 뜻이지?” “종말교단. 당신이 만들어낸 거 아니야?” 그 말을 하고 마커레이드는 싸늘하게 웃었다. 김성철은 마치 속이 후벼 파지는 것 같은 불쾌감을 느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종말교단과 나는 하등 관계가 없는 조직이다. 그들은 내 이름을 무단으로 차용한 사이비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잘 됐네. 당신이 종말교단에서 말하는 구원자가 아니니까 이번 일은 그냥 눈감고 넘어가도 되는 거겠네?” “마커레이드.” “당신이 가지고 있는 파편, 아니 그 절반만 있어도 당신이 간절히 원하는 기적을 보여줄 수도 있어.” 마커레이드는 교활하게도 주제를 바꿨다. “지금 절멸의 저주를 푸는 기적을 보여줄게.” 김성철이 묵과할 수 없는 주제로 말이다. * 신록의 온실 앞에 여러 명의 사람이 모였다. 저마다의 특색 있는 복장을 입은 이들은 이름 높은 마법사들로 새로운 익시온을 움직이는 중역들이다. 그들 중엔 재앙의 추종자라 불리던 마법사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그래서인지 김성철이 신록의 온실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작은 목소리로 그를 비난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마법사 도살자가 잘도 여기에 얼굴을 들이미는군.” “자기를 키워 준 황제한테까지 이빨을 들이댄 인간이다. 상종할 존재가 아닌데 어찌하여 마커레이드님은...” 김성철은 단지 무심한 눈빛을 그들에게 던지는 것만으로 재앙의 추종자 출신 마법사의 입을 닫게 했다. 단순히 세계의 적을 넘어서 재앙과 맞서며 무수한 곳에서 족적을 남긴 김성철의 존재감은 그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다. 강요된 적막 속에서 곧 의식의 집행자가 나타났다. 구 익시온 왕국의 공주, 마커레이드가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신록의 온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성철은 약속한 대로 자신이 지닌 재앙의 파편 절반을 마커레이드에게 내밀었다. 그가 지닌 재앙의 파편을 본 재앙의 추종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저렇게 큰 신의 흙이라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군!” “저 정도 크기의 모든 것을 만들어내려면 대체 몇 명을 희생시킨 것이지? 십만 명? 아니.. 백만 명 단위인가?” “세계의 적이라면 능히 가능한 일이지. 저 자가 마법사를 광적으로 사냥한 건 저걸 만들기 위해서인지도 몰라. 알다시피 마법사의 목숨은 보다 큰 결정을 안겨다 주니까.” 재앙의 추종자들은 재앙 해결의 보상이 뭔지 모른다. 무지와 편견에서 비롯된 억측이 나도는 가운데 마커레이드는 신록의 온실 앞에 설치된 시드미아의 동상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네 개의 팔을 지니고 그 중 두 개의 팔을 합장한 자세로 우뚝 선 시드미아의 음험한 동상이 불길한 그림자를 아래에 드리우고 있었다. 마커레이드는 제단 앞에 재앙의 파편을 바치고 알아듣지 못할 주문을 외웠다. 김성철은 그 언어가 지금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고대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저것 또한 베스티아레에게 배운 술법일 것이다.’ 불경한 언어가 제단 아래서 울려 퍼지기 시작한 지 한 시간 째. 아신 시드미아는 아직 어떤 은총도 내려주지 않았다. 모두가 지루함을 느끼고 정신이 산만해지기 시작할 때였다. 한 사내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저.. 저걸 봐!” 하늘의 형태가 변하고 있었다. 도시 앞을 흐르던 구름들이 한 곳에 빨려 들어가듯이 뭉쳤다가 비와 번개로 화하며 소멸했고 잠깐 동안의 비가 그치자 4개의 무지개가 하늘 위에 걸렸다. 사람들은 넋을 잃고 생전 처음 보는 기이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김성철은 그 안에서 잘 아는, 그러나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맹약의 십자가가 박힌 심장에 에이는 고통이 새겨졌다. 김성철은 눈을 살짝 찡그리며 하늘 아래서 찬란한 섬광이 내려와 신록의 온실을 내리쬐는 걸 보았다. 엄청난 광휘 속에서 하얀 색의 돔형의 건물은 일순간 김성철의 시야 속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빛은 사라지고 신록의 온실은 원래의 총천연색의 모습을 드러냈다. 마커레이드는 지친 얼굴로 지팡이를 떨구며 김성철을 돌아보았다. “우리의 신께서 부름에 응답하셨어.” 제단 위에 올린 재앙의 파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자, 이제 기적을 보여라.” 마커레이드는 주변 사람들에게 명했다. 신록의 온실의 문이 열렸고 그 너머에 도열한 아이를 안은 여인들이 보였다. 그녀들은 주저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정한 병사가 나갈 것을 종용하자 어쩔 수 없이 한 아낙에 온실 바깥으로 나왔다. 김성철이 말리려고 말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온실 바깥에 나온 아기엔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검은 반점도, 끔찍한 고통도 그 아이에겐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보였다. 김성철은 그 순간만큼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어떤 말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꾸물거리는 아이의 천진난만한 손짓을 보며 단지 놀라움에 젖은 채 그저 멍하니 아이를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 밤이 되자 김성철은 낮에 보았던 기적을 자기 나름대로 확인하기 위한 작업을 펼쳤다. “분명하다. 아신의 힘이 내 몸에 걸린 저주를 풀었다.” 아신이 만들어 낸 빛 속에 있던 마라키아는 시드미아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두 번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음성이었다.” “신의 목소리란 대저 그렇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품에 안고 바깥으로 나섰다. 온실에 머물던 아낙들이 모두 바깥으로 퇴소한 상태라 신록의 온실 안엔 거의 사람이 없었다. 단지 김성철의 시중을 들기 위한 하녀 소수가 남았을 뿐이다. 그녀들은 지금은 출타 중이었다. 덕분에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편하게 안고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다. 문 앞에서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응시하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괜찮겠나?” “당연하지.” 마라키아는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발로 나가겠다.” 마라키아는 검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아장아장 바깥으로 걸어갔다. 문틈에서 그는 약간 주저하긴 했지만 왕답게 어깨를 펴고 바깥으로 나갔다. 깃털이 하얀 색으로 탈색되는 지점이 넘어섰을 때였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마라키아는 건재했다. ‘절멸의 저주가 정말로 풀렸다.’ “와! 풀렸어! 진짜 풀렸어!” 베르텔기아가 환호성을 울렸고 마라키아는 부리 위를 손가락으로 슥 문지르며 건방진 표정을 지어보였다. “훗. 내게 걸리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단란한 열광 속에서 김성철은 자신에게 아직 절반의 파편이 남은 걸 상기했다. 정령계에 잠들어 있을 그가 구해야 할 아이의 얼굴이 눈앞을 꿈결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좋아. 일단 이걸로 그 녀석을 구한다. 나머지는 그 다음에 생각한다.’ 오랫동안 죽어 있던 김성철의 가슴에 진정한 생명의 불길이 다시 타오르던 때였다. 먼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기괴한 우레 소리가 들렸고 땅이 거칠게 흔들렸다. ‘지진인가..?’ 강한 지진은 아니다. 약간의 진동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의 진도. 하지만 진정한 놀라움을 지금부터였다. 마라키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어떤 인과관계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존재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응? 리빙 북? 리빙 북이 두 개였나?” 김성철 또한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허공에 나타난 베르텔기아와 똑같은 형태의 책이 떠올라 있는 것을. “당신이 지금 바로 해야 하는 일이 있어요.” 책이 말했다. 베르텔기아와 똑같은 목소리로. 김성철의 눈이 충격으로 흔들리는 가운데 그 앞에 빛나는 문자가 눈앞에 떠올랐다. [ 신의 과제 - 위업(신) ] [ 버려진 섬으로 가서 데스포트를 죽여라 ] 보상 : 파이널엘릭서 1개 비고 : 이 퀘스트를 수행하지 못할 경우엔 세상 그 자체가 파멸한다. ======================================= 70. 베스티아레 (1) 은자의 탑. 재앙의 서의 보관고. 탑에 속한 노예 한 명이 콧노래를 부르며 비로 바닥을 쓸고 있었다. 재앙의 서 아래 놓인 복잡한 기계 장치들에 묻은 먼지를 세심한 손놀림으로 털어내고는 잠시 바닥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다. 그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력의 흐름으로 감지할 수 있는 유형의 기운에 손을 갖다 대었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하나의 문자가 떠올랐다. [ 개미 위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은자의 탑의 은둔자라면 누구나 애용한다는 지식 네트워크. 그 목적은 지식의 보존이지만 잡다한 정보가 많은 관계로 지긋이 정보창을 검색하다보면 시간 보내기 딱 좋다. 소환자 출신인 노예는 이계로 소환되기 전의 과거를 떠올리며 개미위키의 정보를 열람했다. 최근 단연 논란이 되는 항목은 제도 라그란제에서 일어난 속칭 영년의 밤 사건이었다. 수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와 제국 함대 하나가 글자 그대로 산화한 것은 물론 제국의 황제까지 중상을 입은 그 사건은 대륙 전체를 경천동지하고도 남을 정도의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다. 노예는 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는 새로운 정보를 찾아 나섰다. 새로운 항목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영년의 밤 사건에서 전사한 아르큐부스 제독의 뒤를 이어 제도의 수호자로 임명된 새로운 인물이 항목에 떠올랐다. “아무개?” 제국의 주요인사는 다른 지역에서도 초미의 관심사다. 따라서 듣지 못한 인물이 요직에 오르면 자연스레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는 아무개 항목으로 들어갔다.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보니 소환자에 여자라는 것 외엔 어떤 정보도 없다. “대체 무슨 빽으로 저 위치에 오른 거지?” 한창 무형의 정보를 가슴 졸이면서 읽어나가던 그 사내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바로 뒤에 놓인 재앙의 서가 활짝 펼쳐진 채 그 글귀에서 빛을 내뿜고 있다는 사실을. 그늘 진 앞이 활짝 밝아진 뒤에야 노예는 심상치 않은 기류의 변화를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노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으.. 으.. 저.. 저건?!” 모든 재앙을 미리 기록한다는 재앙의 서. 신이 직접 써 내리는 글귀를 이루는 한 자 한 자가 경이롭고도 두려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은자의 탑의 주인 포르피리우스는 잠옷조차 갈아입지 않은 채 재앙의 서의 보관고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그곳에서 그는 광휘에 싸인 재앙의 서를 볼 수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무슨 짓을 한 거냐?” 그는 노예에게 엄중하게 추궁했다. 노예는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저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위키를 잠시 들여다본 것 빼고는요!” “아니, 여기선 개미위키를 쓰지 말라고 했잖아!” 포르피리우스는 버럭 화를 냈지만 지금은 노예 따위에 신경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 그는 눈을 찡그리고 빛속에 잠긴 재앙의 서를 응시했다. “응.. 이건..?!” 포르피리우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빛속에 잠긴 재앙의 서 글귀. 그 세 번째 재앙을 암시하는 영역에 흔들리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글자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설마 재앙이 변하는 건가...?’ 마치 불안정한 화학물질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글귀 속에서 포르피리우스는 몇 개의 단어가 반복해서 나타나는 걸 발견했고 그것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입으로 되뇌었다. “수확자... 3개의 깃발.... 재앙의 군세....” 아직 재앙의 서의 세 번째 재앙은 확정되지 않았다. * “이건 뭐야?” 자신과 똑같은 책을 향해 다가가며 베르텔기아가 말했다. 수수께끼의 책은 책장을 덮은 채 허공 위에 모로 서 있을 뿐 대답이 없다. “대체 저건 뭐지? 동굴 엘프 같은 리빙 북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자부심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마라키아조차 눈앞에 벌어진 상황엔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김성철도 충격을 느끼긴 매한가지였지만 이중에서 유일하게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겐 예전에 아델화이트에게 들은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델화이트는 이전에 베르텔기아와 똑같은 책을 지닌 모험자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김성철은 그 말을 귀담아 듣진 않았지만 가슴 한 켠에 묻어두고 있었다. 김성철은 새롭게 나타난 책을 향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정체를 밝혀라. 리빙 북.” 정물처럼 허공에 자리 잡고 있던 책은 김성철이 묻자 비로소 움직임을 보였다. 이윽고 책이 말했다. “저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이지요.” 베르텔기아와 똑같은 목소리였지만 분위기는 딴 판이다. 베르텔기아가 시끄럽고 산만한 여자아이 느낌이라면 이쪽은 잘 훈육되고 교육 받은 아가씨의 느낌이다. “제가 버려진 섬으로 가는 길을 열어드리겠어요. 당신은 포탈을 타고 데스포트를 처치하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의 힘이라면 그 변질자의 목숨을 거두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요.” 새로운 책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책장을 펼치며 마법진을 온 몸에 머금었다. 그때 김성철의 냉담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진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 책이 주문영창을 멈췄다. 그 책은 다시 정자세로 똑바로 서서 원래대로 움직임 없는 정물로 돌아갔다. 김성철은 그 책을 노려보며 은은한 위엄이 서린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명령대로 움직이는 인형이나 도구 같은 게 아니다. 나를 움직이려면 먼저 내 동의부터 구하는 게 좋을 거다.” 그의 말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어떤 감언이설도 협박도 그 앞에선 통하지 않을 것이다. 책은 그런 김성철을 빤히 쳐다봤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 책이 먼저 입장을 굽혔다. “…어쩔 수 없군요.”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수수께끼의 책은 다시 청아한 느낌이 나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체랄 것도 없지만 일단 저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짝퉁이겠지. 이 베르텔기아님의 짝퉁.” 김성철 바로 옆에서 살기등천하게 서 있는 베르텔기아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짝퉁...?”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던 책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렸다. 하지만 흔들림은 거기서 그쳤다. 책은 다시 평정을 되찾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 정체는...” “짝퉁!” 베르텔기아가 다시 끼어들었다. “아니... 저 불량품 좀 어떻게 해봐요!” 책이 김성철에게 도움을 청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의 격앙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때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베르텔기아. 지금은 이 짝퉁의 말을 들어보자.” “아니.. 당신까지 그러면 어쩌자는 거죠?” 책이 마침내 평정을 잃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김성철과 베르텔기아는 서로를 잠시 마주보았다. 베르텔기아는 곧 고개를 끄덕이듯 몸체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베르텔기아의 허락을 얻은 김성철은 책에게 기회를 주었다. 처음 등장했을 때의 신비로움이 상당히 퇴색된 수수께끼의 책은 여전히 당혹감이 남아 있는 음성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당신들이 신이라 부르는 존재의 명을 받고 당신 앞에 나타났습니다.” “신? 어떤 신이지? 질서신인가? 아니면 혼돈신인가? 그것도 아니면 중립신인가?” 김성철은 평소와 달리 날카로운 반문을 연이어 던졌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팔짱끼고 고개를 끄덕이며 들은 계제가 아니라고 봤기 때문이다. 김성철의 질문에 책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이 언급하는 신은 아닙니다. 신과 유사한 존재죠. 하지만 신을 대신해 이 세상 전체를 관리한다는 점에서 당신 같은 필멸자 입장에선 신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겁니다.” “신의 대행자라는 것인가.” 책은 몸을 가볍게 흔들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은 재앙에 맞서는 자. 지금처럼 차례로 재앙을 해결하다보면 언젠가 그 분 앞에 서게 될 날이 올 겁니다. 의문은 그때 해소하여주시길 바랍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요.“ 책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법진을 펼쳐내며 김성철 앞에 하나의 화상을 김성철 앞에 표시했다. 공간 위에 거울처럼 떠오른 상 안엔 누런 연기로 뒤덮인 절해고도의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 “하늘의 색이 왜 저렇지?” 김성철이 하늘의 색을 보며 물었다. 책이 대답했다. “먼 옛날 사악한 아신이 만들어낸 죽음의 장기(瘴氣)가 저 화산 안에 갇혀 봉인되어 있습니다. 데스포트는 그 화산을 자극해 죽음의 장기로 이 세상을 뒤덮으려 하고 있습니다.” “데스포트가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그가 원하는 건 모든 생명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땅이 한 차례 미약하게 흔들렸다. 틀림없는 지진이다. 비록 이곳 익시온에선 미약한 떨림이지만 먼 곳에 떨어진 이름 없는 섬에선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을 것이다. 땅은 물론이고 구름마저 침범해 들어가는 무시무시한 황색 먼지구름을 본 김성철은 사안의 심각성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의문이 일었다. 데스포트의 목적이. 이름 모를 책은 그가 원하는 것이 모든 것의 절멸이라고 하지만 거기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재앙으로 운명 지어진 몸. 하지만 그는 그 자체가 재앙이면서도 예정된 재앙보다 더욱 참담한 재앙을 불러일으키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행자라는 자의 시종이 이 앞에 나타난 것이겠지.’ 그 다음으로 궁금한 것은 베르텔기아를 닮은 책의 정체. 김성철은 책을 노려보며 또렷히 말했다. “네 주인은 에크하르트냐?” 책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무감정한 대답이 돌아왔다. “신의 대행자는 눈에 보이는 유한한 세계의 섭리를 벗어난 자. 필멸자들이 말하는 이름 같은 구분 짓는 명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름 없는 존재라는 건가.” “아무튼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데스포트는 세상을 파괴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상황을 방치한다면 대행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극단적인 선택이라니?” 김성철의 물음에 책은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재앙의 내용이 바뀌게 될 겁니다.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재앙에서 해결할 수 없는 재앙으로.”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재앙이라고?” 그 질문에 책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것은 묵묵히 버려진 섬에서 벌어나는 참상을 환영으로 보여줄 뿐이었다. 화산에서 폭발이 터지며 죽음과도 같은 짙은 황색의 연기가 대량으로 솟아나왔다. 그걸 보며 책이 말했다. “데스포트가 하려는 짓은 어떤 재앙보다 심대한 결과를 불러올 것입니다. 하늘의 색이 바뀌면 어느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풀 한포기까지.” 그 말을 들은 마라키아가 김성철을 향해 말했다. “동쪽의 먼 바다에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조차 자라지 못하는 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리빙 북의 말은 거짓말이 아닌 걸로 보인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포탈 너머를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데스포트를 처치하기 위함이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다시 상기했다. ‘다만 절멸의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아냈기에 잠시 머물렀을 뿐.’ 단순하게 접근하자 가야 할 길이 보인다. 김성철은 책에게 물었다. “파이널 엘릭서는 절멸의 저주를 치유할 수 있나?” “그렇습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돌아보았다. “…라고 이 짝퉁이 말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짝퉁이라니...” 수수께끼의 책이 중얼거리며 몸을 부들거렸다. “흐음...” 베르텔기아는 아무래도 짝퉁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결정을 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의견을 구한 김성철의 태도는 그녀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에 충분했다. “괜찮지 않아? 이 짝퉁의 말을 듣는 것도.” 베르텔기아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책을 응시하며 말했다.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그에겐 절멸의 저주를 풀어 낼 두 개의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재앙의 파편을 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꺼림칙한 물건이다. 어쩌면 정착촌에서 또 다른 희생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데스포트 하나를 처치하면 얻을 수 있다. ‘꿩도 먹고 알도 먹는 게 좋겠지. 도랑치고 가재 잡는 각은 안 보이지만.’ 방향은 정해졌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꼭 닮은 책을 향해 말했다. “길을 열어라.” 명이 떨어지자 수수께끼의 책 위로 수많은 마법진이 떠올랐다. 장거리 차원 이동의 마법. 김성철이 보지 못한 기이한 술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수많은 마법진이 교차하며 사라진 후 김성철 일행 앞에 포탈이 나타났다. 버려진 절해고도로 바로 통하는 문.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주머니에 놓고 마라키아를 응시했다. “따라가겠나?” “당연하지. 왕이 된 몸으로 견문을 넓히는 것은 크나큰 기쁨이다.” 마라키아의 동행이 결정됐다. ‘이 놈은 도움이 되는 놈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포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김성철은 누군가의 기척을 느꼈다. 대단히 빠른 속도로 접근 중이다. 김성철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잠깐, 당신. 어디로 가는 거야?” 그의 뒤엔 붉은 머리칼과 눈동자를 지닌 마커레이드가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과 일렁거리는 차원문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 70. 베스티아레 (2) “익시온을 떠나겠다.” 김성철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기다릴 여유도 숨길 이유도 없다. 마커레이드는 전혀 뜻밖의 상황에 후두부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김성철이 그냥 이렇게 떠나는 건 지켜 봐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김성철이 포탈로 향해 발걸음을 다시 옮기려고 하자 날카로운 소리로 이를 제지했다. “기다려!” 그녀의 눈동자에 광증의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김성철은 난감함을 느꼈다. 마커레이드는 이어서 말했다. “갑자기 왜 떠나려고 하는 거지? 그것도 절멸의 저주를 푸는 기적을 본 날에 말이야.” 마커레이드는 곧 김성철 발치에 작지만 당당하게 서 있는 마라키아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건 뭐지? 설마 조인...?” “나는 멸세의 왕 마라키아다.” 마라키아는 검은 날개를 활짝 펴며 쓸데없이 거만한 음성으로 말했다. 베르텔기아가 다급히 날아가 마라키아의 입을 닥치게 했지만 이미 마라키아의 행동은 마커레이드의 혼란에 부채질을 했을 뿐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 조인은 또 뭐고 저 리빙 북들은 또 뭔지.” 상황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김성철은 마커레이드를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먼 동쪽에서 화산이 분화하려고 한다. 그 화산이 분화되면 대륙의 모든 생명은 사멸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막기 위해 이 포탈을 타고 그곳으로 가려 한다.” 마커레이드가 받아들이기엔 지나친 생략과 정보의 부족이 있었다. 그녀는 눈만 껌뻑이며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이어 내뱉듯이 말했다. “당신이 지금 이대로 익시온을 떠나버리면 내 입장이 말이 아니게 된다고!” 절박함이 묻어나오는 어조였다. 김성철은 멈춰 서서 마커레이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베스티아레 때문인가?” 김성철이 묻자 마커레이드는 불안한 눈빛으로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이대로 훌쩍 떠나면 그 여자가 날 가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그 말인즉슨 베스티아레가 널 처형 혹은 위해를 가한다는 뜻인가?” “그 여자... 아니 베스티아레님은 그런 사람은 아니야. 하지만 행여나 그 분의 미움을 받게 되면 거신을 통한 기적을 더 이상 할 수 없을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새로운 익시온도 나도 모든 게 끝이야.” 마커레이드는 모든 걸 털어놓은 양 축 늘어진 채로 힘없이 어둠 속에 우뚝 선 거신을 바라보았다. “…….” 김성철은 베스티아레와 마커레이드 간의 관계를 알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된 거군.’ 마커레이드의 지지기반은 정치적 정통성이 아닌 거신의 힘을 빌린 무한한 물자에서 나왔다. 신 익시온에 옛 익시온의 주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니 거신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일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성철이 보기엔 그것 또한 잘못된 일이다. “이 참에 그 여자와 손을 떼는 게 어떤가? 어차피 네가 말하는 익시온의 번영도 결국 누군가의 생명을 희생해서 얻는 것 아닌가?” “그건 전에도 말했다시피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라그란제의 인간 몇 명이 죽든...” “정착촌엔 너와 같은 동부의 피난민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김성철은 마커레이드의 말을 자르고는 추궁하는 듯한 엄중한 눈빛으로 마커레이드를 노려봤다. 마커레이드는 일순 말문이 막혔지만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은 눈치였다. 그녀는 인상을 쓰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들은 익시온 출신이 아니야. 그리고 동부도 동부 나름이지. 남동쪽 해안가, 특히 인스반트 같은 음험한 촌락에서 온 것들은 동부의 사람이라 볼 수 없어.” “같은 동부의 사람끼리도 차별을 하는 건가?” “제국은 같은 도시 사람끼리도 차별하잖아?” 마커레이드의 억지와 같은 반문에 김성철은 짜증보다는 피곤함을 느꼈다. 김성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커레이드는 계속해서 말했다. “동부의 부흥을 위해서도 익시온은 계속해서 현재의 번영을 유지해야 돼. 새로운 익시온을 기점으로 동부칠웅의 결집이 공고화되면 서쪽으로 떠난 유민들이 다시 동부로 돌아올 거야. 그때가 되면 우리는 우리를 져버린 이 세상의 기득권과 겨룰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거지.” “수많은 사람들을 장작처럼 써서 말이지?” 김성철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몇 명이 죽건 말건 그건 내 알바가 아니야. 지금 우리에겐 동부의 재건만큼 중요한 가치는 없어. 익시온은 그 새로운 동부의 심장이 될 도시이고. 그 날이 오기 전까지 나는 베스티아레와 관계를 공고히 유지하지 않으면 안 돼.” “…….” 더 이상 이야기는 필요 없다고 김성철은 생각했다. 입장의 차이가 너무나도 다르다. 마커레이드는 일종의 신념은 물론 사명감까지 가지고 있는 걸로 보인다. 아무리 잘못된 신념이라고 해도 김성철은 그러한 깃발이 마음속에 선 이상 쉬이 꺾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한 때 그의 가슴 속에서 비슷한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으니까. “더는 할 이야기가 없군. 동부의 재건은 내 알바가 아니다.” 김성철은 포탈을 향해 나아갔다. “그냥 망치로 입 닫게 하면 되지. 이 친구도 가만 보면 답답하다니까.” 마라키아는 김성철의 뒤를 아장아장 걸어 따랐고 그를 감시하듯 베르텔기아가 마라키아의 꽁무니 뒤에 바로 붙어 그를 따랐다. 홀로 남겨진 마커레이드는 어찌해야 할 바를 알지 못했다. 눈동자는 끊임없이 흔들렸고 이가 덜덜 떨렸다. 분노인지 실망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커레이드는 마침내 소리쳤다. “저기!” 김성철은 멈추지 않았다. 마커레이드는 주먹을 꾹 쥐며 다시 한 번 외쳤다. “같이 여행가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발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고개는 돌리지는 않았다. 고독해 보이는 어깨너머로 그의 음성이 바람에 실려 마커레이드의 귓가에 들려왔다. “일이 끝나면 이곳에 돌아오겠다.” “…정말?” 마커레이드의 붉은 눈동자에 한 방울 눈물이 맺혔다. 김성철은 등을 보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곧 돌아오지. 그리고 저 거신에 관한 것도 어쩌면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굳이 정착촌의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은 물론 베스티아레의 도음을 받지 않더라도 말이지. .”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고는 뒤따라오는 베르텔기아를 응시하며 가볍게 물었다. “밥값 할 자신 있나? 베르텔기아.” “당연하지! 서열 2위의 실력을 우습게보지 말라고.” “그 불안정한 서열 2위,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리빙 북.” 마커레이드는 놀란 눈으로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조합들을 응시했다. 세계의 적에 건방진 조인, 말하는 책까지. 철저하게 초현실적인 조합이었지만 마커레이드는 왠지 모르게 이들이 뭔가 이루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었다. 왜냐하면 그 중심엔 김성철이 있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남자다. 과거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제국대원수 직을 버리고 세계의 적이 되기를 기꺼이 감수한 남자다. 마커레이드는 손으로 흘러내리는 한 방울 눈물을 훔치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여러 가지로 실망스러운 작태네요.” 마법진이 포탈 바로 앞에 나타나며 낯익은 하지만 결코 들려서는 안 될 음성이 울려 퍼졌다. 베스티아레의 음성이다. 이윽고 마법진 속에서 창백한 낯빛의 아름다운 여인이 그림처럼 나타났다. “마커레이드. 당신이 절 처음 만났을 때 한 말을 기억하나요?” 베스티아레는 마커레이드를 응시하며 그윽하면서도 꿈꾸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마커레이드의 얼굴은 일순 얼어붙었다. 그녀는 마치 천적을 만난 소동물 마냥 몸을 떨며 그저 눈만 깜빡이며 자신의 고용주를 바라볼 뿐이었다. 베스티아레는 계속해서 말했다. “뭐든 하겠다고 했었죠? 왕가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베스티아레.” 더는 지켜볼 수 없다. 김성철이 마커레이드를 향해 걸어가는 베스티아레의 앞을 가로 막았다. “경고한다. 지금 당장 내 앞을 떠나라.” 베스티아레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김성철을 몽환적인 눈빛으로 응시했다. 평범한 남자라면 가슴 속까지 흔들릴 청아하면서도 그악한 눈빛이었지만 김성철은 보통 남자와는 다르다.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계속해서 말했다. “네가 지금까지 널 죽이지 않는 건 죽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흐음. 그래요? 드라고만이 말했나요?” 예리하다. 그녀는 이미 김성철과 드라고만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고 있었다. 아니 예측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타당하리라.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게 약한 드라고만이라면 당신에게 비밀을 술술 털어놓고도 남았겠죠. 하지만 그런 천박한 사내가 뭘 어떻게 하든 그건 저와 데스포트님의 계획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아요.” 베스티아레는 그렇게 말하고는 처량한 웃음을 흘렸다. “지금 당장 익시온에서 떠나라. 그러면 적어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게다.” 김성철의 손에 명성 높은 그의 신물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칠영웅의 피가 묻은 그 전설적인 망치를 본 베스티아레는 그다지 두려워하지도 경계하지도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 군요.” “너에겐 승산이 없다.” “저의 힘만으론 그렇겠죠.” 베스티아레의 눈동자에 소름끼치는 살의가 번득였다. “남아 있는 네 친구들을 모두 불러와도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사자토스가 있었다면 글쎄요. 해볼 만 했을지도. 하지만 굳이 그런 사람이 없어도 당신은 여기서 나갈 수 없어요.” 베스티아레의 말은 확정적이다. 김성철은 그것이 객기나 만용이 아니라는 걸 피부로 느꼈다. 그가 아는 메아리술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의 근저에 뭐가 있는지는 김성철조차 알 수 없었다. 김성철은 사방에 자리 잡은 시드미아의 동상을 보며 불길한 예감에 사로 잡혔다. ‘빠르게 처리해야겠군.’ 김성철은 베스티아레가 뭔가 하기 전에 처단하리라 마음먹고 팔 가라즈를 들고 베스티아레에게 돌진했다. 팔 가라즈가 그녀를 으깨버리기 전에 베스티아레는 김성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보고 피한 건 아니다. 김성철이 공격을 할 마음을 품기도 전부터 은밀하게 속으로 차원이동 주문을 영창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김성철의 시야에서 사라진 베스티아레는 신록의 온실 위에 다시 나타나 있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어요. 당신은 여기서 살아나갈 수 없어요.” 베스티아레가 다시 말했다. 김성철은 눈으로 거리를 쟀다. 베스티아레가 반응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어깨에 걸치며 베스티아레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지금 세상에 김성철을 이길 수 있는 자는 필멸자 중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길 수 있는 세력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홀로 인간제국을 멸할 수 있으며 다른 동맹국 또한 능히 초토화시킬 힘을 몸에 지니고 있다. “제가 왜 이 도시를 만든 줄 아나요?” 베스티아레가 온실 아래 우두커니 서 있는 마커레이드를 응시했다. 몽환적인 푸른 눈동자 아래 숨겨진 독사의 무자비한 살기가 희미하게 비쳤다. “익시온의 재건? 동부의 부흥? 그런 하찮은 것은 저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이야기예요.” 얼음보다 차가운 베스티아레의 목소리를 들은 마커레이드는 고개를 쳐들고 베스티아레를 떨리는 눈동자로 응시했다. 베스티아레는 마커레이드를 향해 잔혹한 미소를 지어보인 후 김성철에게 시선을 옮겼다. “당신은 보았을 거예요. 정착촌에서 이 여자가 인간의 영혼을 수확하며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광경을. 제가 알려줬어요. 저 우둔한 여자에게.” “…….” “하지만 한 가지 알려주지 않은 게 있어요.” 베스티아레의 입가에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법사의 영혼이 보다 가치가 있다는 것.” 그 순간 하나의 단창이 허공을 갈랐다. 푹. 움 브루크가 베스티아레의 복부에 박혔다. 베스티아레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몸을 휘청였다. “말 많은 것들은 빨리 죽지.” 김성철은 기다리고 있었다. 베스티아레가 떠벌이며 방심하는 찰나의 순간을. 베스티아레는 충격은 받은 듯 처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후... 훌륭하군요. 하지만... 하아... 바뀌는 건... 없어요!” 베스티아레가 심호흡을 몰아 내쉬며 손을 들어올렸다. 마법진이 피어오르며 수많은 꼬마 베스티아레들이 나타나 하나의 거대한 스크롤을 그녀 앞에 대령했다. 김성철은 재앙의 종을 흔들었다. “아.. 아아악!” 베스티아레는 끔찍한 고통에 거의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몸을 새우처럼 구부렸지만 그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베스티아레가 얼굴을 찡그리며 찢어지는 소리로 외쳤다. “약조한대로... 이 제단을... 당신에게 바치겠나이다. 제물들을 거두어... 이 땅에 강림하소서.” 베스티아레가 스크롤을 찢으며 쓰러졌다. 움 브루크의 종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의식이 끊겨버린 것이다. 하지만 찢어진 스크롤의 파편이 도시의 땅 위에 닿자 도시 전체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느닷없이 찾아온 정적 속에서 김성철은 베스티아레의 마지막 중얼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아신.. 시드미아여...!” ======================================= 71. 아신 강림 (1) 하루 만에 만들어졌다는 도시 익시온 전역에 무지갯빛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기이한 광채가 전역에 안개처럼 머물렀다. 익시온의 시민들은 처음엔 놀라움 속에서 이 또한 도시의 수장인 마커레이드의 기적인 건 아닌가 하며 기대감과 함께 이를 찬탄했지만 소수의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 빛 속에서 위험을 감지했다. “할아범! 어서 여기서 나가자고!” 불과 하루 전, 익시온의 시민으로 도시에 입주한 클라리스는 일말의 미련 없이 모든 걸 내던지고 도시 바깥으로 질주했다. 그녀의 조부인 쿠르트 아삼은 손녀의 돌발 행동에 따라가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아니, 어딜 가자는 게냐? 이 야밤에.” “안 좋은 느낌이 든단 말이야! 죽기 싫으면 빨리 나와. 쓸데 없는 거 버리고.” 클라리스와 쿠르트 아삼은 최소한의 짐만을 챙기고 집을 나서 도시 밖으로 나갔다. 경비병이 둘의 앞길을 가로막았지만 시민증을 제시하자 순순히 길을 비켜주었다. “정착촌 쪽으론 절대 가지 마시오. 죽을 수도 있으니까.” 클라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도시를 빠져나갔다. 성문 옆의 작은 출입문이 닫힌 후 병사들은 보았다. 도시에 서린 광채 속에서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형체를 갖추고 튀어나오는 것을. “어이. 토드. 저게 뭐야?” “글쎄. 나도 처음 보는 건데.” 두 병사는 무방비하게 의문의 하얀 형체를 향해 다가갔다. 하얀 형체는 마치 올챙이 같이 머리와 꼬리만 있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하늘 위를 자유롭고 유영하고 있었다. 병사 하나가 창대를 쥐고 그 의문의 물체에게 다가간 순간 그는 보았다. 그 괴물은 오직 입이라는 기관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 입이 활짝 벌려지며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것을. “끄아아아아악!!!!!” 최초의 단말마의 비명이 도시의 밤하늘 위에 울려 퍼진 직후, 도시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인 비명과 노호성이 뒤를 따랐다. “…….” 김성철은 사방에 나타난 하얀 괴물을 무심한 눈으로 응시했다. 이 세상의 물리법칙 따윈 구애받지 않는다는 듯 자유롭게 허공을 떠도는 어린아이 크기의 괴물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적막 속에서 하늘을 떠돌며 끝없이 증식한다. “저.. 저게 뭐야?”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주머니에 급히 들어가며 물었다. “처음 보는 것들이다.” “저건.. 수확자로 보인다.” 마라키아가 은근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확자?” 김성철이 묻자 마라키아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고서에서 본 적이 있다. 아신의 강림 전, 그 전조로 나타나는 영혼을 먹어치우는 수확자라는 혼령들을.” “수확자라....” 그 하얀 구형의 괴물들은 이미 지천에 널려 있다. 그것들은 빛 속에서 끊임없이 튀어나오며 어느새 익시온의 하늘 절반 이상을 뒤덮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김성철 일행을 발견하고 급강하하며 입을 활짝 벌리며 흉측한 이빨을 드러냈다. 퍽! 팔 가라즈가 수확자의 머리통에 적중했다. 수확자는 지면에 처박히며 꿈틀거리다 연기처럼 소멸했다. 김성철은 바닥이 쓰러진 베스티아레 쪽을 응시했다. 수환자 수십 마리가 베스티아레를 먹어치우려고 주변을 멤돌고 있었고 베스티아레의 분신과 같은 꼬마 베스티아레들이 마법을 쓰며 자신의 주인을 지키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저 여자.’ 아신의 강림은 이제 베스티아레의 손을 떠났다. 그녀의 의지와 관계없이 강림은 착착 진행되고 있다. “아직 아신의 강림은 이루어지지 않은 걸로 보인다.” 마라키아가 말했다. 그는 손바닥에 마법진을 떠올리고 주시자의 눈을 만들어 냈다. 평범한 마법사가 소환하는 마법생물보다 훨씬 크고 짙은 검은 빛을 띤 녀석이었다. 그 주시자의 눈은 수천수만 마리의 수확자가 배회하고 있는 하늘 위로 솟아올라 마라키아가 원하는 정보를 전달해주었다. “역시.” 마라키아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이 도시 전체가 아신 강림을 위한 제단이다.” “뭐라고...?” 말없이 구석에 서 있던 마커레이드가 두 눈을 크게 치켜뜨며 되물었다. 마라키아는 그녀를 노려보며 한심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말귀를 못 알아듣나? 인간? 이 도시 자체가 제단이라고. 도시에 사는 것들은 전부 제물들이라고. 물론 너도 포함해서 말이다.” “아..!” 마커레이드는 그 말을 듣고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베스티아레의 말을 들었을 때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가혹한 현실 앞에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눈동자 깊숙한 곳에 어른거리던 광기의 불마저 사그라들 정도의 충격이었다. 그 모습을 본 김성철은 베스티아레의 지독한 술수에 치를 떨었다. ‘먹이사슬이라는 건가.’ 정착촌 위에 익시온. 그리고 익시온 위에 베스티아레. 익시온이 생존하기 위해 정착촌에 하던 몹쓸 짓은 결국 베스티아레가 익시온에 하려던 짓과 동일했다. 인간의 목숨을 삼아 무언가 대가를 받아낸다는 점에서. ‘마법사들의 도시랍시고 사람들을 끌어모은 건 전부 아신의 강림을 위한 것이었군. 가급적이면 아신이 나타나기 전에 강림을 막아야 한다.’ 김성철은 마라키아에게 아신의 강림을 멈출 방법에 대해 물었다. 마라키아는 자신없는 어조로 말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 도시 전체가 아신 강림을 위한 제단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도시의 중요한 표지들을 박살내면 아신의 강림을 저지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가?” “수확자들이 이미 나타난 지금 시점에선 늦은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김성철은 바닥에 주저앉은 마커레이드에게 다가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일어서라. 공주.” 여전히 공황상태에 빠져 있던 마커레이드는 김성철의 음성을 듣고 흐리멍텅한 눈으로 김성철을 응시했다. 김성철은 다시 말했다. “너의 도시 아닌가? 네가 아니면 누가 이 도시를 지킨단 말인가?” 그 말을 들은 마커레이드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김성철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시간이 없다. 마라키아와 함께 녀석이 지적하는 표적들을 함께 파괴해라.” “마라키아?” 마커레이드가 묻자 김성철은 검은 깃털을 지닌 작은 조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조그만 녀석 말이다.” 김성철은 즉시 마라키아에게 다가가 자신의 뜻을 전했다. “나는 다른 곳을 파괴하겠다. 너는 저 여자와 함께 내부의 건조물을 부셔라.” “대체 무엇을 생각하느냐?” 마라키아는 김성철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김성철은 도시를 둘러 싼 상아빛의 성벽을 무심한 눈동자에 담으며 말했다. “좀 큰 걸 부수려고.” 마라키아는 코웃음을 치고는 날개를 파닥거리며 마커레이드에게 다가갔다. “날 들어올려라. 인간. 비행 마법 정도는 쓸 수 있겠지?” “으.. 응...” 마커레이드는 마라키아가 시키는 대로 자그만한 몸체를 들어올렸다. 마라키아의 깃털의 촉감은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부드럽고 기분이 좋았다. ‘부드럽고... 보송보송해...’ “뭘 꾸물거리느냐? 인간! 어서 빨리 움직이지 않고!” 마라키아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마커레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도심의 중심으로 날아갔다. 그러자 허공 위의 수많은 수확자들이 움직임을 감지하고 그녀를 향해 덮쳐왔다. 마커레이드의 눈동자에 당혹과 공포가 떠오르는 순간 그녀가 안고 있는 마라키아의 앞에 복잡다단한 수많은 마법진이 떠올랐다. “죽어라. 벌레들.” 마법진에서 무수한 불덩이가 쏟아져 나왔다. 콰콰쾅!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마력. 접근하는 수확자들을 모두 허공에서 불타고 박살이 나 연기처럼 흩어졌다. “멍하니 있지 마라! 인간. 저 동상부터 파괴한다!” 김성철과 있을 때와 달리 원래의 폭군처럼 변한 마라키아는 마커레이드에게 호령하며 자신의 몫을 충분히 다했다. 짧은 시간 안에 도시 도처에 널린 아신 시드마이의 동상이 파괴되어 흩어졌다. 같은 시간, 김성철은 도시외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살려줘요! 제발!” “안 돼!!!!! 아아아아악!” 도시 도처에서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도시를 뒤덮은 수확자들은 도시의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고 그들의 영혼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김성철은 거리 곳곳에 널린 사람들의 시체를 볼 수 있었다. 정착촌에서 시체를 치울 때 본 것과 동일한 형태의 죽음. “…….” 김성철은 도처에서 들려오는 절규와 애원을 뒤로 하고 멀리 우뚝 선 성벽을 향해 달려갔다. 성벽 아래엔 눈으로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수확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 보통의 수확자보다 수십 배는 큰 거대한 수확자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김성철의 왼손에 마편 카산드라가 나타났다. 휘리릭! 마편 카산드라는 하늘을 나는 뱀처럼 날아 진로 상의 수확자를 허공에서 짓이겨 놓았다. 졸개들이 죽자 대형 수확자가 김성철을 향해 덤벼들었다. 오른손에 들린 팔 가라즈가 가만 놔둘 리 없다. 퍽! 아무리 덩치가 크다 한 들 김성철의 일격을 당해낼 존재는 드물다. 김성철은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무자비하고 빠르게 박살내며 성벽 아래에 이르렀다. 상아빛 성벽 아래서 김성철은 하루 만에 세워졌다는 높은 성벽을 응시했다. 겉보기엔 아름답고 완벽해보이기까지 한 미려한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엄연히 제단을 이루는 부속. 김성철은 제단의 테두리를 이루는 이 성벽을 부수는 것이 현재진행 중인 강림을 막는 열쇠로 보았다. 팔 가라즈를 잡은 손에 신적인 힘이 흘렀다. 김성철은 성벽 가까이 다가가 팔 가라즈에 모든 힘을 쏟아 한 차례 후려쳤다. 쿵! 땅이 울부짖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충격이 성벽을 두들겼다. 충격파가 휘몰아치며 광풍을 일으켜 김성철의 코트 자락은 물론 그 뒤의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갔다. 일순 모든 것이 정지한 것 같은 짧은 순간이 지난 후 그 징표가 성벽에 나타났다. 쩍. 일격을 가한 자리를 중심으로 역으로 내리치는 번개 같은 갈라짐이 성벽 위에 새겨졌다. “하아...” 심호흡이 김성철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그는 다시 한 번 성벽을 후려쳤다. 또 한 번 지면이 흔들렸고 성벽의 균열은 끝에서 끝에 이르르며 수많은 가지를 상아빛의 성벽 위에 만들어냈다. 그리고 잠시 후. 둔중한 굉음이 허공 위에서 울려퍼지며 잔해가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익시온의 성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먼 곳에서 그 광경을 발견한 마커레이드와 마라키아는 혀를 내둘렀다. “역시, 저 인간은 못 말릴 놈이군.” 김성철은 성벽 주위를 돌며 무자비한 일격으로 계속해서 성벽을 두들겨 나갔다. 익시온의 둘러 싼 장대한 성벽은 김성철의 신적인 힘에 쿠키처럼 무너져내렸다. 그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도시 전체에 서린 기이한 광채의 일부가 무너진 성벽 아래로 삐져나오더니 산란되어 사라졌고 무수한 수확자들이 그 속에서 소멸했다. 아신 강림의 기운이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김성철 또한 그 점을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진행된 강림은 멈출 수 없다. 수많은 시민들의 영혼을 포식한 수확자들이 갑자기 도시의 중앙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무언가 일어나려는 걸 인지하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스타라이트를 시전해 중앙에 모여드는 수확자들을 태워버렸다. 마라키아 또한 작은 체구에서 나온 것이로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화력을 퍼부었고 마커레이드도 한때 촉망 받던 마법사 다운 실력으로 수확자들을 중도에서 끊어냈다. 하지만 수확자들의 무한한 숫자는 그야말로 중과부적. 김성철 일행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까마득한 수확자들이 중앙에 모여 무언가 만들어내고 있었다. 검은 기운이 어른거리는 기괴한 풍광 속에서 김성철을 볼 수 있었다. 안개 너머에 자리 잡은 네 개의 팔을 지닌 아신의 형상을. ‘저것이.. 아신인가?!’ 마편 카산드라가 안개 속의 아신을 향해 뱀처럼 날아갔다. 네 개의 팔 중 하나가 채찍을 잡았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채찍을 잡은 아신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수준? 아니 그 이상인가.’ 김성철은 채찍을 잡은 손에 신적인 힘을 흘리며 힘껏 마편 카산드라를 잡아당겼다. 의도치 않은 결과가 일어났다. 뚝. 수많은 전투에서 활약을 펼쳤던 유용한 도구 마편 카산드라가 중간에서 끊어져버리고 만 것이다. 단순한 하나의 무기에 상실로 치부할 수 있는 사건이지만 이 일로 김성철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검은 안개 속의 아신은 지금까지 자신이 상대한 어떠한 적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 71. 아신 강림 (2) “모두 물러나라.” 김성철이 말했다. 이번만큼은 베르텔기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베르텔기아. 너도.” “하지만...” “이번만큼은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영혼 창고에 넣는 것도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창고의 주인이 죽으면 영혼 창고 안에 든 것은 영영 찾을 수 없으니까. 아마도 영원히 차갑고 어둡고 건조한 미지의 차원에서 잠들어야 할 것이다. 베르텔기아는 마지못해 마커레이드 쪽을 향했다. 졸지에 책과 새, 두 개의 짐을 떠안게 된 마커레이드는 김성철의 등을 응시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 어떻게 할 거야?” 그녀의 물음에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들어 올리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저 아신으로부터는 달아날 수 없다.” 김성철의 머리 위엔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이는 붉은 빛의 표식이 환영의 형태로 떠올라 있었다. 아신의 노림을 받은 것이다. “달아날 수 없다면 맞서 싸우는 수밖에.” 팔 가라즈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커레이드는 김성철의 뜻이 확고함을 깨닫고 베르텔기아와 마라키아를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최대한 멀리 떨어져라. 저런 괴수들의 싸움은 단순히 지켜보는 것만으로 엄청난 위험을 동반하니 말이다.” 마라키아가 부드러운 솜털이 달린 날개를 파닥거리며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지면 안 돼!” 베르텔기아는 멀어지는 김성철을 보며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상아빛 도시의 중심부엔 김성철과 아신 시드마이만이 남았다. 김성철은 여전히 검은 안개에 싸인 아신 시드미아의 크기를 눈대중으로 가늠했다. ‘신장만 대략 10미터 정도인가.’ 크기도 크기지만 가장 위협적으로 보이는 건 네 개의 팔. 그 중 두 개의 팔은 합장한 자세로 있지만 그 안에 어떤 꿍꿍이가 숨겨져 있을지는 전투가 시작되어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쿵. 적막 속에서 둔중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신 시드마이가 움직였다. 검은 안개에 싸인 채로. 따라서 김성철은 아신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합장하지 않은 두 개의 팔에 서로 다른 무기가 나타났다. 청룡언월도를 연상하게 하는 긴 자루를 지닌 창칼과 뱀처럼 휘어지며 어지러이 움직이는 긴 세검. 합장할 팔 뒤에 자리 잡은 언월도를 쥔 팔이 움직였다. 압도적인 신장과 리치에 나오는 빠르게 무자비한 일격. 거대한 언월도가 움직이는 순간 누구나가 파멸을 연상할 정도로 파멸적인 일격이었지만 김성철은 숨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팔 가라즈를 들어 아신의 일격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아신의 일격을 받아내는 순간 천둥 같은 굉음과 함께 작은 충격파가 무기와 무기가 부딪친 지점에서 터져 나왔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격돌. 아신의 힘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대지를 디디고 선 김성철 주변의 포석이 움푹 패면서 상아빛의 포석이 튕겨져 나올 정도였다. 기기기기-. 언월도와 맞닿은 팔 가라즈에서 기이한 소리가 울렸다. 일찍이 이 정도의 일격을 김성철에게 가한 존재는 없었다. 하늘을 벼려 만든 파편으로 만들었다는 팔 가라즈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 일격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역시 아신이라는 것인가?’ 하지만 받아 낼만하다. 김성철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방금 그 일격이 아신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하더라도 엄연히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가한 살의를 품은 일격이다. 그런 공격을 튕겨냈다는 것은 김성철이 아신에게 맞설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다. 김성철이 아신의 공격을 피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정보가 전무한 상대방을 가장 빠르게 이해하는 방법은 무기를 섞는 것이기에. ‘이 싸움, 해볼 만하다.’ 김성철은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언월도를 신적인 힘으로 튕겨냈다. 김성철의 신장보다 거대한 칼날을 지닌 언월도가 마침내 튕겨져 나왔다. 검은 안개 속의 아신은 깜짝 놀란 듯 공격을 멈추고 김성철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번엔 다른 무기가 움직였다. 아신의 움직임에 따라 버들가지처럼 혹은 채찍처럼 움직이던 세검이 김성철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언월도의 일격이 강맹하고 묵직한 일격을 노렸다면 이쪽은 눈으로 보고도 따라 잡을 수 없을 정도의 현란함과 속도로 승부를 보는 견제공격이다. 파박! 파박! 파박! 연검의 칼날은 순식간에 김성철 주변의 사물을 연이어 박살내며 김성철의 신경을 분산시켰고 이어 검끝을 뱀처럼 휘게 해 김성철의 후방 측면에서 목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최초에 박살낸 건물의 잔해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의 신속한 일격이었다. 칼날이 목에 닿기 직전 김성철은 아신의 의도를 깨닫고 앞으로 빠르게 굴렀다. “…….” 김성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반칙이다. 저렇게 크고 거대한 존재가 저토록 빠르고 예측하기 어려운 기교까지 지닌 공격을 가해온다는 건 말이다. 세검의 칼날은 마치 생명을 지닌 것처럼 앞으로 빠르게 몸을 날린 김성철을 쫓아오며 바닥에 무수한 상흔을 남겼다. 김성철은 연이어 몸을 날리며 뒤 따라오는 검의 추격으로부터 피해냈다. 반격은 고사하고 그저 제 한 몸 건사하기 위해 급급한 낭패감이 혼란스런 몸짓과 정신없이 펄럭이는 코트 자락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베르텔기아는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지면 안 된다고.. 아직 내 몸도 찾지 못했는데..” 반면 마라키아는 다른 시각에서 그 국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공격을 모조리 피해내고 있군. 겉으로 보기엔 꼴사납지만 저 정도의 남자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공격을 피하는 건 아니겠지.’ 마라키아의 생각대로 김성철은 단순히 아신의 공격을 피하는데 모든 신경을 집중한 건 아니었다. 검을 피할수록 검의 속도, 움직임 등이 눈과 머리에 조금씩 구체적이고 예측 가능한 정보가 축적되고 있었다. 지금은 마법을 익히긴 했지만 김성철은 그 전까진 오로지 자신의 힘과 기술을 믿고 싸우는 순수한 전사다. 그런 전사들은 한정되고 예측하기 쉬운 움직임을 가졌기에 검과 마법을 익힌 다채로운 기술을 지닌 적에게 필연적으로 농락당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전사들이 승리를 거두는 방법은 단 하나다. 상대방과 자신을 동일한 입장에 놓는 것. 다시 말해 적의 공격에 익숙해지고 이쪽에서도 예측할 수 있게 할 것. 매 순간에 생사가 갈리는 전투에서 상대방을 재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지 않으면 패배하고 죽게 된다. 김성철은 그런 싸움을 수도 없이 경험해왔다. 재앙의 추종자의 우두머리를 자처하던 대마법사 발자크와 검성 카라카드라를 죽일 때도 그러했다. 갖은 농락을 당하며 온 몸에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중한 상처를 입어가면서도 적의 모든 패를 기어코 읽어내고 결투에서 승리했다. 그들이 남긴 저주가 상태창에 남아 있는 것은 김성철이 스스로에게 내린 훈장이기도 했다. 파박! 파박! 파바박! 그는 처음에 간신히 쫓아가는 게 고작이었던 세검의 움직임을 이제는 뚜렷하게 볼 수 있었고 그 검이 몇 가지의 정해진 패턴에 의해 움직이는 것 또한 유추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김성철이 몸을 옆으로 가볍게 비틀며 뒤로 물러섰다. 파박! 세검이 김성철이 있던 자리를 때리고 지나간다. 지면을 강타하며 박살낸 포석의 파편이 코트 자락에 구멍을 내고 지나갔지만 김성철은 개의치 않았다. ‘슬슬 보이는군.’ 김성철이 세검의 움직임에 익숙해졌다는 것은 그를 상대하는 아신 시드미아도 알고 있었다. 아신은 곧 현란하게 움직이던 세검을 거두었다. 김성철이 반격을 준비하던 시점에 말이다. 아신이 태세를 바꿨다. 김성철은 섣불리 공격하는 대신 아신의 움직임을 좀 더 지켜보기로 마음먹고 뒤로 물러서 거리를 벌렸다.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지금까지 미동도 않던 합장한 두 손이었다. ‘뭐라도 봉인한 것인가.’ 움직이는 건 합장한 손의 비밀을 안 이후에도 늦지 않다. 아신을 상대하는 건 처음이니 말이다. 아신 시드미아의 두 손이 이제는 함께 움직였다. 육중하지만 강력한 한 방이 있는 언월도와 현란한 세검이 동시에 움직이며 김성철을 압박해왔다. 두 무기의 공격은 치밀하게 계산된 경로를 따라 김성철에게 숨 쉴 틈 조차 주지 않고 밀어붙였다. 김성철은 때로는 언월도를 팔 가라즈로 받아내며 때로는 앞구르기로 세검의 공세를 피해내며 아신 시드미아의 협격으로부터 효율적으로 자신을 방어했다. 두 가지 무기를 이용한 시드미아의 공격은 새로운 구석도 있지만 결국 눈에 익은 두 무기의 변주에 불과할 뿐, 그 움직임은 이미 김성철의 상정범위 내에 있었고 김성철은 그 정보를 근거로 효율적으로 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김성철의 마음속엔 자신감이 커져갔다. 해볼 만하다는 선에서 이길 수 있다는 선까지. 하지만 아직 합장한 두 손은 그 힘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디 한 번 움직여볼까.’ 세검이 주변의 가옥과 구조물을 박살내며 주위를 분산시키는 가운데 사각에서 언월도가 비스듬하게 김성철을 노리고 내려처졌다. 김성철은 발밑을 뱀처럼 휘감아 오는 세검의 날카로운 칼날을 얕은 도약으로 피하며 온 몸에 신적인 힘을 흘리며 날아오는 언월도를 풀 스윙으로 맞받아쳤다. 쿵! 예상치 못한 일격에 언월도는 저만치 날아갔고 언월도를 잡은 아신의 팔은 저만치 뒤로 젖혀졌다. 하지만 언월도를 떨구지는 않았다. 아신 다운 힘. 하지만 김성철의 공격은 그것이 끝이 아니다. 두 개의 무기를 번갈아 이용하며 공세 일변도로 김성철을 밀어붙이던 아신의 움직임은 김성철의 반공으로 빈틈이 생겼고 김성철은 그 틈을 노리지 않고 비장의 무기인 마법을 이용했다. 김성철은 이제 4개에 달하는 자신의 영혼석에 각각의 주문을 할당했다. 1번 플라이 2번 메테오 3번 메테오 4번 메테오 메테오 일변도의 주문 공격. 하지만 그 발동시간과 타격지점은 각기 다르다. 검은 안개에 싸인 아신 시드미아가 자세를 바로 잡으며 언월도를 고쳐 잡는 순간 김성철을 플라이를 이용하여 전속력으로 아신의 상체를 향해 날아올랐다. 아신의 세검이 허공 위에서 춤을 추며 무수한 죽음의 꽃을 피워냈다. 하지만 그 세검의 속도는 이미 김성철의 눈에 익을 대로 익었다. 팔 가라즈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챙캉! 챙캉! 팔 가라즈는 뱀처럼 조여 오는 세검의 일격을 단두대처럼 모조리 튕겨냈고 그 순간에도 김성철은 검은 안개 속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검은 안개 바로 앞에서 아신의 또 다른 팔이 움직였다. 언월도를 쥔 팔이 숨을 고르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김성철을 끝장내기 위해 휘둘러진 것이다. 김성철은 언월도 아니 아신의 언월도를 쥔 왼쪽 팔의 어깨가 살짝 움찔하는 것만을 보고 경로를 바꾸어 위로 급상승했다. 붕- 언월도의 칼날은 폭군의 고함 같은 바람소리를 남기며 김성철의 발밑을 지나갔다. 언월도가 헛되이 허공을 가르며 지나가자마자 세검이 복수라도 하듯 날아올랐지만 김성철은 플라이를 해제하고 지면에 안착 재빠르게 아신의 주위를 돌며 측면으로 기동했다. 아신이 거대한 몸체를 김성철을 향해 돌리던 순간이었다. 하늘 위에서 3개의 마법진이 순차적으로 떠올랐다. 천공학파의 주력 공격 마법 메테어의 영창이 끝난 것이다. 영창을 마친 영혼석의 카벙클들은 그 의지로 김성철에게 공격 시점을 물어왔다. 사자토스의 영혼석의 최대 강점은 생각을 공유하기에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는 것이다. 김성철은 찰나의 순간 공격 지점을 설정하고 아신의 측면을 향한 발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김성철을 따라 선회하던 아신은 처음 바라보던 방향과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의 머리 위에 빛나는 마법진은 보지 못했다. 그것이 김성철의 노림수. 김성철이 측면 기동을 멈추고 팔 가라즈를 들고 전투 자세를 취했을 때 아신 시드미아 또한 두 개의 무기를 고쳐 잡으며 공격 준비를 했다. 최초의 메테오는 그 순간 아신 시드미아의 등뒤를 향해 떨어졌다. 세검을 휘두르려던 아신 시드미아는 뒤늦게 메테오가 자신의 뒤를 노리고 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돌리며 세검을 휘둘렀다. 아신은 아신. 붉은 열기에 휩싸인 운석은 세검의 뱀 같은 칼날에 칭칭 감겨 허공 위에서 그대로 부서졌다. 하지만 김성철에겐 다구의 마법사 사자토스의 비전이 있다. 각기 다른 각도에서 날아오는 메테오가 순차적으로 아신 시드미아를 향해 떨어졌고 이에 발맞추어 김성철 또한 느릿한 하지만 터질 것 같은 중량감을 지닌 전진을 개시했다. 찰나에 벌어진 3방향 공격. 아신은 세검으로 김성철을 견제했고 언월도로 측면에서 날아오는 메테오를 쳐냈지만 그 반대편에서 날아오는 메테오는 쳐내지 못했다. 쿠쿠쿠쿵! 단 한 방으로 중대규모의 기사단을 전멸시킬 수 있다고 전해지는 강렬한 메테오 한 방이 아신에게 적중했다. “그아아앗-.” 아신은 처음으로 이 세상에 불경한 소리를 내질렀다. 합장했던 손이 처음으로 움직이며 맞붙어 있던 틈새를 드러냈다. 김성철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그 손바닥 안엔 그야말로 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순백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 ‘이건 위험하다.’ 다음 순간 합장한 손에서 하얀 섬광이 번쩍이며 무언가가 김성철을 뎦쳤다. ======================================= 71. 아신 강림 (3) 소리도 징조도 없이 무언가가 김성철을 향해 날아왔다. 김성철은 순간적으로 다리에 신적인 힘을 흘려 측면으로 도약했다. 다음 순간 거대한 폭발이 일며 김성철이 자리 잡고 있었던 주인 모를 저택이 폭발했다. 어마어마한 파괴력. 주력 파괴마법인 익스플로전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폭발이었다. 그것도 즉발적이고 어떠한 사전 동작도 예비 동작도 없는. ‘이게 아신 시드미아의 주력인가.’ 지금까지의 공격은 몸 풀기에 불과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양 아신 시드미아는 이제 두 개의 무기에 더해 합장한 두 손을 기꺼이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합장한 두 손이 살짝 벌어지며 그 안의 틈새를 내보였다. 김성철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다시 한 번 한 측면으로 도약했다. 콰콰쾅! 어마어마한 폭발이 주변의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며 무수한 흙먼지를 피어올렸다. 흙먼지 너머에서 김성철은 먼 곳에서 번쩍하는 빛을 보았다. 아신의 또 다른 공격이다. 좌우는 상아빛의 건물로 막혀버린 상태. 김성철은 다시 한 번 도약했다. 건물을 몸으로 꿰 뚫으며. 묵직한 충격이 몸에 전해졌지만 그가 있던 자리에서 일어난 폭발에 비할 정도는 아니다. 옷자락이 찢어지고 얼굴에 흙먼지가 가득 했다. 신적인 힘을 손에 넣은 이래 처음 맛보는 낭패다. 김성철에게 일격을 얻어맞은 아신 시드미아는 그 분노를 풀기라도 하듯 빠르게 움직이며 김성철을 밀어붙였다. 쿵! 언월도가 무너진 건물 잔해를 박살내고 세검이 폭풍처럼 움직여 아래의 잔해를 털어내며 김성철을 찾는다. 김성철은 어두운 모퉁이 건물 아래서 아신이 자신이 찾는 소리를 들으며 흐트러진 마음을 진정시켰다. 저 합장한 손이 문제다. 김성철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 내구엔 한계가 있다. 그의 육체엔 신적인 힘이 머물러있다지만 그 신적인 힘을 머무른 육체는 무적이 아니다.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살과 뼈로 이루어진 필멸자의 몸. 물론 오랜 고련과 성장으로 보통 사람에 비하면 금강불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강인함을 지녔지만 규격을 넘어도 한참 넘어서는 아신의 주력기를 버틴다는 보장은 없다. ‘아신은 아신이라는 건가.’ 하지만 김성철은 이미 아신에게 한 방 먹인 적이 있다. 메테오를 맞고 괴로워하는 모습에서 김성철은 아신의 내구도 또한 자신처럼 무적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저 즉발성의 파멸적인 위력과 정확도를 지닌 합장한 손의 공격을 어떻게 막아내냐다. 김성철은 일단 가장 직관적인 방법을 떠올렸다. 거리를 벌리는 것이다. 신적인 힘이 그의 양발에 깃들었다. 김성철은 시야에 들어온 모든 구조물을 머릿속에 담고 질주를 시작했다. 김성철이 시야에 나타난 순간 아신 시드미아는 합장한 손을 벌렸다. 하얀 빛이 번득임과 동시에 김성철의 측면에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지만 김성철은 간발의 차로 폭발을 피해 시가지 너머로 질주했다. 쿵! 쿵! 쿵! 아신의 파괴력에 가려졌지만 김성철의 질주 또한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전력을 다한 발이 지면을 내딛을 때마다 어김없이 그 자리엔 움푹 팬 상흔이 남았다. 단 한 번의 도약에 그는 한줄기 번개처럼 텅 빈 거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창졸간에 김성철과 아신의 거리는 5킬로미터 이상이 벌어졌다. 거대했던 아신마저 개미 한 마리 정도로 보이는 거리. 김성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신 시드미아를 주시했다. 합장한 손이 펼쳐졌다. 김성철은 온 몸에 소름이 듣는 걸 느끼며 측면으로 피했다. 하지만 그것은 함정이었다. ‘아뿔싸.’ 김성철이 습관적으로 왼쪽으로 피하는 걸 간파한 아신이 김성철이 있던 지점이 아닌 처음부터 왼쪽을 노리고 타격을 가한 것이다. 김성철은 직진하려는 방향의 공기가 순간 배수구의 물처럼 빨려 들어가는 걸 보며 영혼창고에서 무언가를 다급히 꺼냈다. 콰콰쾅! 어마어마한 폭발이 김성철을 직격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르텔기아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아.. 안 돼!” 그녀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아신은 무자비했다. 김성철이 폭발의 원점에 위치한 것을 확인한 그 무자비한 아신은 연거푸 합장한 손을 벌리며 그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커다란 건물이 있었던 자리엔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오직 흙먼지로 가득 찬 공허한 벌판 위에서 관전자들은 흙먼지가 가라앉기만을 두려움, 걱정을 안고 지켜보았다. 곧 마라키아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살아 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나의 손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지면 아래를 뚫고 나왔다. 김성철의 주먹이다. 곧 그는 지면을 뚫고 나오며 다시 한 번 대지 위에 두 다리로 섰다. 그의 왼팔엔 기이한 형태의 방패가 들려 있었다. 베르텔기아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저건.. 뭐지?” 방패의 보호를 받는 김성철의 몸에 겉으론 심각한 부상은 전무했다. 옷가지가 찢기고 여기저기 작은 상처가 나긴 했지만. 하지만 김성철만이 아는 부상도 있다. 양 귀에서 흐르는 피. 연속폭발로부턴 간신히 피해냈지만 고막이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 것이다. “…….” 김성철은 영혼창고에서 엘릭서를 꺼내 마셨다. 이명만이 울리던 양 귀가 원래의 감각을 찾았다. 김성철은 다시 한 번 찾아온 적막을 음미하며 눈앞에 떠오른 문자를 담담한 눈으로 응시했다. [ 고르고트에게 진 빚 : 목숨 한 개하고도 반 ] [ 이율 : 일당 10% ] 그 문자는 다름 아닌 김성철이 들고 있는 방패로부터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 방패의 정체는 김성철이 지닌 일곱 재앙의 무기 중 하나인 고르고트. 지옥의 고리대금업자의 방패라고도 불리는 불경한 물건이다. 그것은 어떠한 공격도 막아내는 절대적인 방어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 대가로 착용자의 생명력을 요구한다. 그것도 이자까지 붙여서. 변제라고 불리는 생명력 징수 의식을 제 때 치루지 않거나 고르고트에게 빚진 생명력이 도저히 갚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방패는 착용자의 영혼을 심연으로 끌고 간다. 그것을 잘 아는 김성철은 이 방패를 절대 쓰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패를 쓰지 않았다면 김성철은 이미 죽어 시체도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김성철은 방금의 공격으로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신의 합장한 손으로부터 나오는 공격의 정체를 말이다. ‘투사체가 있다.’ 눈으로 볼 수도 쫓을 수도 없는 속도지만 아신 시드미아가 시전 하는 죽음의 폭발은 합장한 손에서 쏘아올린 투사체를 통해 일어난다. 김성철은 지근거리에서 받았던 폭격과 장거리에서 받은 폭격 사이의 미묘한 시간차를 감지해냈고 결정적으로 지하 속에 숨어 있는 사이 연속적인 폭격을 받을 때 심증을 굳힐 수 있었다. 이제 아신의 모든 수가 드러났다. 김성철의 뇌세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몇 년 만의 치열한 싸움인가. 김성철은 이 싸움을 어느 순간부터 즐기고 있었다. 수많은 선택지가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아신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듯 또 하나의 폭발을 김성철에게 날려 보냈다. 김성철은 측면으로 기동해 폭발을 막아내며 영혼 창고에서 마나회복의 정수를 꺼내 들이켰다. 텅, 텅, 텅. 마력이 높아지다 보니 채워야 할 마나도 많아 순식간에 여러 통의 정수가 버려졌다. ‘쓰레기 무단투척은 취미가 아니지만.’ 김성철은 마나가 회복되는 걸 느끼며 아신 시드미아를 향해 지그재그로 돌진했다. 한 손엔 팔 가라즈, 다른 한 손엔 고르고트를 들고서. 그의 경로상에 무수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것도 모자라 아신은 다른 패턴을 보였다. 살짝만 벌리던 합장한 손을 활짝 벌린 것이다. “…?!” 김성철은 방패로 몸을 막으며 전력을 다해 뒤로 후퇴했다. 눈앞이 번쩍이며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대폭발이 김성철 지근거리에서 터져 나왔다. 지축이 거칠게 흔들리고 주위의 모든 공기가 순간 타 없어질 정도의 폭발이었다. 무자비한 기류에 실린 파편이 회오리처럼 타고 올라가 사방에 비산하며 아무것도 남지 않은 대지 위에 비처럼 떨어졌다. 다행히 김성철은 폭발의 반경 바깥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어 목숨을 모면했다. ‘대단하군.’ 놀라움은 곧 전율로 바뀌었고 전율은 다시 흥분으로 바뀌었다. 김성철은 파편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거리를 향해 질주했다. 검은 안개에 싸인 네 개의 팔을 지닌 거신이 모습이 곧 가시거리 내에 들어왔다. 김성철이 다가오는 걸 보가 세검과 언월도를 든 팔이 태세를 갖추었다. 김성철은 아신의 눈앞에서 주문을 시전했다. 자신의 최강 마법인 스타라이트를. 김성철의 전신에 마법진이 꽃처럼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는 영혼석과 의견을 교환했다. 하나의 과감한 의견이 김성철로부터 제시됐고 나머지 영혼석들은 난감하다는 의견을 표시했다. 다만 하나의 영혼석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창졸간에 이루어진 의사소통이 끝난 후 김성철은 그 영혼석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1번 글레어 2번 메테오 3번 메테오 4번 스타라이트 공격 일변도의 주문 구성. 열쇠를 쥔 것은 스타라이트를 영창 하는 녀석도 메테오를 영창 하는 녀석도 아닌 글레어를 영창 하는 녀석이다. ‘믿는다. 카벙.’ 선공은 아신 시드마이가 먼저 가했다. 다가오는 김성철을 향해 합장한 손의 안쪽을 살짝 내비친다. 이제는 익숙한 패턴. 김성철은 손 안에서 빛에 가까운 속도로 날아오는 투사체의 흐름을 감지하며 측면으로 날아올라 폭발을 피하며 아신을 향해 쇄도했다. 세검이 뱀처럼 휘어오며 김성철을 덮쳤고 언월도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로 세검을 쳐내며 아신을 향해 무리할 정도로 단도직입적인 돌격을 가했다. 언월도가 가만 지켜볼 리 없다. 아신은 언월도를 휘둘러 김성철을 쳐내려고 했다. 김성철은 그마저도 팔 가라즈로 튕겨냈다. 쿵! 또 한 번의 힘과 힘의 격돌. 한 치의 물러섬이 없는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그 뒤로 아신의 세검과 합장한 손이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김성철의 마법 또한 영창 준비를 완료해갔다. 공격이 임박한 그 순간 김성철은 신적인 힘을 몸에 흘려 언월도를 쳐내고 측면으로 다시 빠르게 아신의 주위를 돌았다. 같은 공격 방법에 당하지 않는다는 양 아신은 무기를 바꿨다. 세검과 언월도가 사라지가 두 개의 거대한 방패가 나타나 아신의 양 측면을 보호했다. 예상치 못한 전개. 하지만 김성철은 미리 정해두었던 작전을 강행했다. 그는 아신의 주위를 회전하며 주문의 영창의 완료를 인지하고는 지팡이를 꺼내 아신을 가리켰다. ‘스타라이트.’ 아신의 폭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강력한 빛의 기둥이 아신을 향해 쏘아졌다. 스타라이트의 시전을 확인한 아신은 즉시 합장한 손을 떼며 양 손에 기이한 수인을 맺었다. 합장한 손 안에 머물던 기이한 흰색 광채가 번득임과 동시에 스타라이트의 빛이 아신에 맞부딪쳤다. 육안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의 과도한 빛의 향연 속에서 김성철을 믿기 어려운 광경을 보았다. 수인을 맺은 아신의 양손을 중심으로 형성된 무형의 막이 스타라이트의 빛을 모두 산란시키고 있는게 아닌가. ‘공방일체의 무기라는 건가.’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자신을 닮은 무수한 시종들의 시체아래 깔린 그 여인의 정체는 베스티아레. 간신히 목숨을 건진 그녀는 고통 속에서 김성철과 아신 시드미아의 전투를 몽롱한 눈으로 응시했다. 죽어가는 그녀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김성철이 자신의 비전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메아리. 김성철은 아신의 주위를 돌며 메아리로 보이는 추가적인 스타라이트를 연이어 사용하며 다방면에서 타격을 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공격은 모두 아신이 펼쳐 낸 무형의 방어막에 모두 차단당해 무위로 끝났다. 베스티아레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신 시드미아는... 저쪽 세상의 아신 중에서도 비상히 강력한 존재... 아무리 당신이 아신에 근접한 힘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필멸자라는 한계를 지닌 당신이 그 존재를 이기는 건 불가능해요.” 그녀의 말 대로 김성철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정식 영창 및 메아리로 만들어 낸 4발의 스타라이트가 아무 타격도 주지 못한 채 막혔고 영혼석을 통해 시전한 메테오마저도 방패에 막혔다. 방세를 취한 아신 시드미아의 방어는 그야말로 철벽. 김성철은 낭패감을 느끼며 아신의 반격을 기다렸다. ======================================= 72. 칠영웅 (1) 반격은 곧 시작됐다. 수인을 맺으며 방어막을 펼친 아신의 손이 다시 합장한 자세를 취하며 파멸적인 파괴를 김성철이 있는 영역에 일으켰다. 김성철은 어렵지 않게 그 공격을 피했지만 어느새 세검으로 무기를 바꾼 아신이 김성철에게 추가타를 가해왔다. 쉬익! 김성철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세검이 하나가 아니다. 아신은 어느새 두 개의 세검으로 바꿔들고 있었다. 시야 속에 보였던 하나의 궤적은 팔 가라즈로 쳐냈지만 사각에서 날아온 또 하나의 궤적은 고르고트르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챙캉! 고르고트는 훌륭하게 아신의 일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김성철이 고르고트에게 받아야 할 채무 또한 늘어났다. [ 고르고트에게 진 빚 : 목숨 두 개 ] [ 이율 : 일당 10% ] 예상치 못한 상황 속에서 아신 시드미아는 김성철을 끝내기 위해 합장한 손을 펼쳤다. 콰쾅! 이번 폭발은 김성철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옷이 넝마가 되고 팔 가라즈를 잡은 팔의 어깨가 빠졌다. 온 몸에 열상과 찰과상을 입은 건 덤. 김성철은 빠진 어깨를 끼우며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자세를 추스르며 아신을 노려봤다. 아신은 빈틈이 없었다. 두 개의 세검으로 김성철을 농락하며 움직임을 시험해보려 한다. 김성철은 최후의 힘을 짜내 아신의 공세를 막아냈다. 집요하고도 치열한 공격 속에서 고르고트에게 갚아야 할 부채는 끝도 없이 늘어났다. [ 고르고트에게 진 빚 : 목숨 세 개 반 ] [ 이율 : 일당 10% ] 이 이상은 위험하다. 작전 변경의 필요성이 요구된다. 김성철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아신 시드미아는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합장한 손을 살짝 벌렸다. 김성철의 눈이 부릅떠졌다. ‘지금이다!’ 가느다란, 아니 이 거대한 싸움이라는 규모에 반추해보면 거의 없다 해도 무방할 가냘픈 섬광이 김성철로부터 쏘아져 나왔다. 그 섬광의 정체는 글레어. 어떤 영창도 사전 준비도 없이 나타난 그 섬광은 아신의 합장한 중심을 향하고 있었다. 스타라이트마저 막아내는 그 합장한 두 손을 상대로 어떤 의미가 있을 지 의문이지만 그 섬광이 노리는 건 아신의 두 손이 아니었다. 노리는 건 합장한 두 손에서 쏟아져 나오는 투사체. 눈으로 따라잡기도 어려울 정도의 그 투사체가 발사되는 순간을 포착해 아신의 손을 떠나는 순간에 요격을 시도한 것이다. 치익- 글레어의 얇은 섬광의 반경안에 무언가 타들어갔다. “그으...?” 아신 시드미아는 순간 뭔가 잘못됐음을 즉감했다. 바로 다음 순간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다. 바로 아신의 합장한 손 바로 앞에서. “그아아아아앗!” 아신의 절규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육편으로 화한 두 개의 손이 팔목으로부터 절단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아신 최대의 무기가 막혔다. 김성철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팔 가라즈를 들고 아신 시드미아를 향해 쇄도했다. 두 개의 세검이 김성철을 향해 날아왔지만 패턴을 익힌 그에겐 문제되지 않았다. 그가 열세에 몰리는 것은 의도된 연기. 감당 가능한 선에서 피해를 컨트롤하며 단 한 틈의 순간을 기다린 것이다. 4번 영혼석이 품고 있는 스타라이트 한 방을 포함해서 말이다. 김성철은 아신 시드미아의 바로 앞에서 스타라이트를 쏘아올리며 하늘 위로 도약했다. 1번 플라이 2번 페어리라이트 3번 페어리라이트 4번 페어리라이트 승리를 자축하는 페어리라이트 3기를 거느린 채 그는 교차하여 스타라이르를 막아내는 2개의 세검 위로 벼락처럼 떨어지며 팔 가라즈를 내려쳤다. 쿠쿵! 신의 일격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경이로운 일격. 하늘의 파편을 벼려 만들었다는 팔 가라즈는 두 개의 세검의 방어를 뚫어내고 검은 안개에 싸인 아신의 거대한 두상의 정수리를 그대로 직격했다. 퍽! 익숙한 타격음. ‘그리운 소리군.’ 그것이 의미하는 건 인간에게나 아신에게나 같다. 아신의 손에서 두 개의 세검이 떨어졌고 아신의 형상은 동상처럼 쓰러졌다. 검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며 무지갯빛의 광채가 아신을 감쌌다. 김성철은 적수의 생명의 기운이 옅어지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이겼다.’ 흔한 공략 성공의 문자도 보상도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필멸자가 하도록 계획된 일이 아니기에. 김성철은 필멸자가 할 수 없는, 해서도 안 되는 금기를 스스로 깨부순 것이다. 광휘 속에서 불경한 그리고 거역할 수 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왜 여기 있느냐?” 아신 시드미아의 음성이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소멸하는 아신을 응시했다. 아신이 다시 말했다. “왜 네가 여기 있느냐? 더 이상 필멸자로 있어서는 안 되는 힘을 지닌 네가 어찌 인간의 형상으로 현현한 상태로 있느냔 말이다?” 알아들을 수 없다. 김성철은 아신 시드미아가 말하는 의도를 알지 못했다. “…….” 이윽고 아신 시드미아 쪽에서 자조적인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런가?” 자문자답. “그렇게 된 것인가? 크크크크....”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김성철이 아신에게 물었다. 아신은 거역할 수 없는 불경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대답했다. “드디어 가짜 신들의 놀음이 끝날 때가 왔군.” 아신 시드미아는 완전히 소멸해가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검은 머리만이 남겨두고 있었을 때 아신 시드미어는 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있어라.... 신의 도구여....” 김성철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신 시드미아는 소멸했다. 최후의 한 마디를 남기고. “가짜가 아닌 진정한 신의....” 아신은 사라졌다. 김성철은 문득 가슴 깊숙이 몰려드는 공허감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하루 만에 만들어졌다는 도시 익시온은 하루 만에 멸망했다. 자신이 만들어내고 소멸시킨 잔해 위에서 베스티아레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 최후의 주문을 시전했다. 마법진이 그녀를 감쌌고 그녀는 마법진 너머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의 목숨은 길지 않을 것이다. 움 브루크의 종소리를 견디기에 그녀는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 있으니. 상아빛의 도시 익시온의 최후는 그녀의 현재와 다를 바가 없었다. * “어.. 어떻게 한 거야?” 김성철이 오자 가장 기뻐한 건 베르텔기아였다. 그녀는 김성철 주위를 인공위성처럼 돌며 그의 상태를 살폈다. 입고 있던 코트가 걸레짝이 되고 옷 여기저기가 찢어진 것 외엔 경상.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왼팔에 매인 작은 방패를 발견하고 이를 유심히 바라봤다. “이건...?” “재앙의 무기다. 어쩔 수 없이 사용했지만 당분간 이 녀석을 들고 다녀야 한다.” 재앙의 무기 고르고트는 채무를 갚기 전까진 내려놓을 수 없다. 귀찮지만 매일매일 회복에 주력해 생명력으로 변제하는 것만이 고르고트를 내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조.. 조금 하는군.” 가장 충격을 받은 건 마라키아였다. ‘이.. 이놈이 강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아신마저 박살 낼 정도로 강하다니...’ 그는 내심 반역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몸이 자라 힘을 회복하면 김성철을 처치하고 다시 한 번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서는 장면을 상상하며 말이다. 하지만 김성철이 보여준 압도적인 무위는 그런 작은 음모를 좌절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내 왕국만이라도 보전하자....’ 생존자 중에는 마커레이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익시온의 공주이자 새로운 익시온의 관리자이기도 했던 그녀는 수확자의 습격으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를 분리하고 구조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뒤늦게 김성철의 귀환을 전해들은 그녀는 김성철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고 예를 표했다. “정말 고마워.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그녀의 눈동자에 더 이상 광기의 그늘은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광기를 넘어선 장면을 보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마커레이드 뒤편에 도열한 생존자들을 응시했다. 수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익시온에 이제 남은 사람은 천명 남짓. 서로의 몸을 기댄 채 망연자실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시민들에겐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동부의 부흥이니 결집이니 하던 목표가 단 한 번의 참사로 인해 박살이 난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난 건 아니다. 마커레이드는 생존자 너머, 무너진 성벽 쪽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들을 바라보았다. 정착촌의 주민들이다. 성밖에 있었기에 비로소 아신 강림의 제물이 되는 길을 피한 사람들이 소동이 끝나자 선망하던 도시의 무너진 성벽을 지나 이쪽을 기웃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 김성철이 물었다. 마커레이드는 살아남은 자들을 바라보며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말했다. “다시 일으켜 세워야지. 새로운 익시온을.” “…….” 김성철의 눈동자에 실망이 스쳐가려는 순간 마커레이드가 이를 정정하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더 이상 거신의 힘은 사용하지 않을 거야.”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제물된다는 것의 심정을 알아버린 이상.. 더 이상 그 여자의 방식은 쓸 수 없어. 쓰기도 어렵겠지만.” “현명한 선택이군. 하지만 그건 어려운 길일 것이다.” “알지. 어려운 길이라는 걸. 그럼에도 남아 있는 사람과.. 우리들의 힘만으로 다시 한 번 익시온을.. 그리고 동부를 일으켜 세워 보이겠어. 분명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그런 이유로 여행은 취소할게.” 그녀는 김성철을 향해 활기차게 웃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다가갔다.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는 마커레이드의 뒷모습을 보며 김성철은 성장이라는 단어를 무심코 떠올렸다. ‘이런 녀석도 철이 들긴 드는군.’ 그리고 아직 그에겐 남은 일이 있다. 김성철은 손을 펴 하나의 종을 소환해 흔들었다. 종소리가 멀게 느껴진다. ‘먼 곳으로 떠났군.’ 하지만 추적할 필요는 없다. 그녀의 생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길어봐야 반나절? 베스티아레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심연으로 끌려들어갈 것이다. 업보에 걸 맞는 최후. 자업자득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 앞에 갑작스레 나타난 한 권의 책을 응시했다. “이 짝퉁. 제 몸 건사는 잘하네.” 그가 빈정거리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짝퉁이라 불린 책은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살짝 몸을 부들거리더니 이윽고 낭랑한 어조로 대답했다. “고생하신 건 알겠지만 저희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데스포트는 저 아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참사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책은 말이 끝나기 전에 포탈을 열었다. 강압적이라고 할까 무대포라고 할까. 김성철은 문득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책의 입장을 헤아려보았다. ‘이 녀석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책은 도구다. 말을 하고 감정표현을 보인다고 하나 원래 주어진 명령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존재. 김성철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책의 운명에 연민을 느끼며 책에게 말했다. “묻고 싶은 건 많지만 지금은 너의 뜻에 따르겠다.” 김성철은 묵묵히 포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베르텔기아가 깜짝 놀라며 그의 뒤를 따라 붙는다. “하루 아니, 한 달은 쉬고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엄청난 싸움을 했는데...”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게 나에게도 이롭다.” 김성철이 서두르는 이유는 단순히 책에 연민을 느껴서만이 아니다. 고르고트에게 진 부채 때문이다. 목숨 값만 3개 이상을 빚진 지금, 그는 당분간은 고르고트의 채무자가 되어 그 빚을 변제하는데 모든 노력을 쏟아야 한다. 그것은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데스포트는 지금 당장 처치해야 한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주머니에 넣고 포탈로 발걸음을 옮겼다.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응시했다. “절멸의 저주가 완전히 풀린 모양이군.” 도시 자체가 파괴되었음에도 저주는 부활하지 않았다. 마라키아는 건재하다. 김성철은 고개를 돌렸다. 그 의미는 앞으로는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마라키아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달리 갈 곳도 없을 뿐더러 마음속으로 김성철과 행동을 함께 하기로 정했기 때문이다. ‘이 괴물 인간과 함께라면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을 마음 껏 볼 수 있겠군. 어쩌면 떨어질 콩고물도 있을 터이고!’ 먼 곳에서 마커레이드가 지켜보는 가운데 김성철 일행은 포탈 너머로 사라졌다. 데스포트가 기다리는 먼 동쪽 바다의 외로운 섬으로. ======================================= 72. 칠영웅 (2) 주변은 죽음을 머금은 황색 연기로 가득하다. 풀 한 포기조차 돋지 않는 이 땅 위에서 바라본 하늘의 색은 그가 추구하던 색깔에 가까워져 있었다. 칠영웅의 수장, 데스포트. 그는 이름조차 없는 섬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으로 분화구를 파괴할 때 그 반작용으로 인해 치명상을 입고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상태에서 죽음의 공기를 잔뜩 들이켰다. 이미 폐는 오염됐고 독기는 느릿하게 전신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살아 있어봐야 오래 버티진 못하리라. 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대가를 받는 게 자신 하나로 그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나아가 이 잘못된 세상 전체를 끝장내 버릴 수도 있다는 걸 알기에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유쾌하게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앞에 마법진이 나타나며 낯익은 형체가 어른거렸다. 바닥에 큰 대 자로 누워있던 데스포트는 고개를 돌려 오랜 동료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베스티아레.” 베스티아레는 사자토스만큼이나 갖은 축복을 받고 태어난 여자다. 거기에 더해 그녀에겐 경국지색의 미모와 고귀한 혈통이라는 축복까지 더해졌다. 데스포트가 처음 여행길을 나섰을 때 베스티아레의 명성은 이미 전 대륙에 퍼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본 순간 데스포트는 알 수 있었다. 메아리술사 베스티아레에겐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결핍되었다는 사실을. 그녀에겐 감정이 없었다. 감정이 없기에 화도 내지 않았고 동요도 불안도 없었다. 어떤 의미로 그녀는 살아 있는 인형에 가까웠다. 하지만 데스포트와 동료들과 만난 이후 베스티아레는 변하게 된다. “이곳엔 좋은 냄새가 나네요.” 베스티아레가 비틀거리며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파리한 안색. 입가엔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데스포트는 희게 웃었다. “처참한 몰골이군. 베스티아레.” 베스티아레는 비틀거리며 걸어와 데스포트 옆 바위 옆에 주저앉고는 등을 기댔다. 데스포트는 그녀를 응시하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일은 잘 해결됐나?” 그 물음에 베스티아레는 쓸쓸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우리 상상을 넘어선 존재였어요. 당신이 본 것처럼.” “그렇군.” 데스포트는 아무래도 좋다는 반응이었다. 그의 폐부 깊숙한 곳에 켜켜이 쌓이고 있는 죽음의 낙진이 고통과 함께 안도감을 가져다주고 주고 있었다. “데스포트.” 베스티아레가 가쁘게 숨을 몰아 내쉬며 말했다. 데스포트는 직감적으로 베스티아레 최후의 순간이 온 것을 느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베스티아레의 차디 찬 손을 잡았다. 베스티아레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눈을 감았다. “문득 떠올렸어요. 우리 칠영웅이 가장 좋았던 시절을.” 그 말을 들은 데스포트는 기침을 하며 미소지었다. “우리의 호시절이라. 브룬가스트 황제 놈의 콧대를 꺾어놓을 때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악마왕을 처치했을 때?” 데스포트는 침침한 기억을 더듬으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베스티아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전요.” “그 전?” 데스포트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눈치다. 맞잡은 베스티아레의 손이 질책하듯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소환궁전 때 기억나지 않아요?” “소환궁전이라...” “네. 우리 칠영웅이 악마왕과 결전을 치루기 전 그곳에 우리들의 자취를 남겼잖아요.” “아, 그때 말인가?” 데스포트의 눈동자에 한줄기 감회가 서렸다. 아직 때 묻지 않았던 시기였다. 모르는 것이 많았기에 순수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절멸의 저주로 인해 더 이상의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세계에서 칠영웅은 유일한 희망인 소환궁전에 일곱 개의 자취를 남겼다. 혹 그들이 실패하더라도 뒤에 나타날 소환자가 그들의 비전을 이어받아 이 땅에 드리운 재앙을 해결할 수 있게끔 말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요.” 베스티아레가 쓸쓸히 말했다. 데스포트는 눈을 질끈 감으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들이 아직 영웅이라 불릴 자격이 있었던 시절로...” 그녀의 체온은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데스포트는 죽어가는 그녀의 어깨로 감싸 안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곧 돌아가게 될 거야. 아니 돌아가야겠지. 먼저 간 녀석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미 죽은 동료들의 얼굴이 차례로 데스포트의 눈앞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달타니어스, 사자토스, 백영. 그들과는 하루 종일이라도 떠들 수 있는 수많은 사연과 사건이 있다. 하지만 그것도 끝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베스티아레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다. 데스포트를 유일하게 이해했던 그녀의 몸은 이미 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없었다. 움 브루크의 저주가 그녀를 심연으로 끌고 가 버린 것이다. 홀로 남은 데스포트는 마치 술에 취한 기분으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땅이 흔들리고 황색 세상 너머 짙은 재앙의 낙진이 뿜어져 나오는 광경이 어렴풋이 보였다. 데스포트는 문득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뭐냐. 전부 보고 있었던 거냐?” 책 한 권이 허공 위에 머물러 있었다. 베르텔기아와 똑같은 생김새의 책. 데스포트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질문을 던졌다. “어떤가? 네가 좋아했던 여자의 최후에 대한 감상은?” “…….” 책은 아무 말도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데스포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상징인 두 개의 검을 뽑고는 머지않은 곳에 열린 포탈을 노려보았다. “저기 봐. 베스티아레. 우리를 위한 조문객이 왔어.” 같은 시각, 김성철은 포탈 너머로 넘어왔다. 포탈을 넘어가자마자 눈앞을 가득 채우는 짙은 황색의 풍경과 몸에 해로운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삐기이이이이!” 마라키아가 코를 막으며 죽는 소리를 냈다. 베르텔기아는 날개를 파닥거리는 마라키아를 떠받치며 다급하게 말했다. “어쩌지? 이 녀석에게 이곳의 공기는 너무 해로운 거 같은데.” “…….” 김성철은 말없이 마라키아를 불쑥 집어들고는 포탈 너머로 집어 던졌다. 다소 거친 방법이지만 이게 최선이다. 유황보다 지독한 유해물질로 가득 찬 이 곳의 공기는 갓 태어난 마라키아의 몸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말이다. “이쪽으로.” 이름 없는 책이 길을 안내했다. 김성철과 베르텔기아는 천천히 죽음의 낙진으로 뒤덮인 섬 위를 걸어갔다. 쿠구구궁. 천둥 소리를 방불케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지면이 흔들렸고 황색의 죽음의 낙진을 토해냈다. 김성철은 플라이를 시전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몇 개의 구름을 뚫고 비행한계 고도까지 솟아오른 김성철은 발 밑 아래 펼쳐진 참상을 고스란히 지켜볼 수 있었다. 죽음의 낙진은 섬 전체는 물론이고 인근 모든 지역을 뒤덮고 바람을 타고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심각하군.’ 이곳에 오길 잘했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아래로 하강했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김성철은 갈 길을 서둘렀다. 책은 말없이 빠르게 움직여 김성철을 안내했다. 몇 개의 능선과 바위가 빠르게 지나간 후 김성철은 곧 이 사태를 일으킨 주범과 대면할 수 있었다. “데스포트.” 뿌연 황색 안개 너머로 쌍검을 든 사내가 당당하게 서 있었다. 김성철의 손에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베르텔기아. 안으로.” “응!” 이번 전투는 아신과의 전투와는 성격이 다르다. 베르텔기아는 크기를 줄여 김성철의 안 주머니 안으로 쏙 들어갔다. 준비를 끝낸 김성철은 천천히 걸어 칠영웅의 우두머리를 향해 걸어갔다. 데스포트는 동상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김성철이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김성철이 가시거리 내에 닿자 데스포트가 입을 열었다. “부수는 자. 김성철.” 김성철은 말없이 데스포트를 노려보았다. 훤칠한 키에 수려하다기보다는 올 곧은 풍모. 별빛처럼 빛나는 눈동자와 전신에 흐르는 자신만만한 기운은 쉬이 지나치기 어려운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품고 있었다. ‘이 자가 칠영웅의 우두머리인가.’ 겉으로는 베르텔기아의 말대로 멀쩡해 보인다. 오히려 이유 없는 친근감마저 느껴졌다. ‘적어도 매력은 나보다 수백 배는 높은 게 확실하군.’ 하지만 그는 죽여야 할 적이다. 김성철은 짧게 말했다. “데스포트. 모든 걸 끝낼 시간이다.” 데스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운명을 받아들이겠다는 양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한 가지 질문이 있다.” 데스포트가 말했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고쳐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짧게.” 김성철로서도 몸의 상태를 확인할 시간은 필요하다. 아무리 그가 신적인 힘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방금 아신 시드미아와 혈전을 벌인 몸이기에. 김성철이 몸의 상태를 점검하는 동안 데스포트는 낮은 웃음소리가 함께 입을 열었다. “너는 신 앞에 선 모양이군.” 김성철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는 팔 다리를 굽히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이 신인지 아닌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오히려 더 신뢰가 가는 답안이군. 그렇다면 하나 더 묻지. 너는 그 계단을 끝까지 올랐나?” 김성철은 옆구리를 만지작거렸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느끼지 못한 사이에 늑골 하나가 부러졌다가 붙은 걸로 보였다. 김성철은 늑골 주위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마치 그 계단을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김성철의 말에 데스포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또한 그 계단에 오른 적이 있거든.” “호오?” 김성철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데스포트는 힘없이 웃으며 덧붙였다. “중간에 포기했지. 다른 이들처럼.” “현명한 선택이군.” “아니, 최악의 선택이었지.” 데스포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나는 그 계단을 올라갔어야 했어. 설령 죽음이 날 가로막는다고 하더라도.” 회한에 가득 찬 데스포트의 목소리를 들으며 김성철은 문득 눈앞에 하나의 정경을 떠올렸다. 구름을 뚫고 우뚝 선 두 개의 설산. 그 사이에 눈으로 보이지 않는 계단이 있다. 하늘로 향하는 그 계단엔 여러 이름이 있지만 가장 정당한 명칭은 신으로 향하는 계단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 계단을 전부 오르는 자는 신 앞에 설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신 앞에 선 자는 신으로부터 사명과 함께 무한한 힘을 손에 넣는다. 철저하게 잊히고 숨겨졌던 그 계단의 위치를 알려준 것은 다름 아닌 애증의 여인 라이즈 하이메르. 그녀는 김성철에게 자신이 해독해낸 신의 글의 지식 모든 것을 전수했다. 신의 계단 또한 그 중 하나. 김성철은 죽음을 무릅쓰고 계단을 올랐고 마침내 신, 아니 신이라고 생각되는 존재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나저나 대담한 담낭이군. 그 계단이 봉인된 이유를 알고도 완주할 수 있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불가능하지. 수백 만 명이 도전해 단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그 참극을 의식하고 있다면 말이야.” 데스포트가 쌍검을 서로 교차해 칼날을 맞부딪치게 하며 경탄한 어조로 말했다. “그 이야기라니?” 김성철이 물었다. 알지 못한 이야기다. “신으로 향하는 계단이 왜 폐쇄 된지 알지 못하나?” 이 이야기에 관해서는 마커레이드에게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때는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같은 계단 앞에 선 사람의 이야기라면 사정이 다르다. 김성철은 그 계단과 관련한 라이즈 하이메르의 편지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 성공률은 절반, 그보다 조금 낮을 수도 있어. 하지만 당신이라면 오를 수 있을 거야.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이잖아? 투기장의 검은 늑대라면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그 내용과 별개로 계단을 완주할 성공률이 낮다는 건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아주 먼 옛날. 신이 죽은 이후 세상이 혼란에 접어들었을 때 강성한 종족의 왕이 세상의 패권을 차지하고자 자신의 모든 군대와 백성을 그 계단 앞에 불러 세웠다.” 데스포트가 말했다. 김성철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내장 쪽을 점검하고 있었다. 겉으로 느껴지는 이상이 없다고 확인될 즈음 데스포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숫자만 수백 만. 왕은 생각했지. 이 중에 단 한 명만이라도 신 앞에 선 자가 나타난다면 남은 백성의 숫자가 아무리 적더라도 그의 종족은 세계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고.” “…….” 김성철은 왠지 그 답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데스포트는 김성철이 예견한 답을 그대로 말했다. “단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최후로 그 잊힌 종족의 왕이 비탄에 잠긴 채 계단을 오른 뒤로 그 종족은 절멸했다. 그 이후로 그 계단에 오르려는 자는 아무도 없게 되었지.” “…….” 확률이 낮은 건 알고 있었다. 충분히 감수하고 있었다. 강력한 힘을 아무 위험부담도 없이 손에 넣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데스포트의 말이 진짜라면 라이즈 하이메르는 김성철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한 것이 된다. 김성철은 계단을 오를 때의 형언할 수 없던 번뇌와 고통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라이즈 하이메르. 너는 대체...’ 마음이 흔들린다. 정확히는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김성철이 충격에 잠긴 사이 데스포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멍청한 놈이라도 수백만 아니 수천만 분의 일이라는 확률에 목숨을 거는 놈은 드물거든.” “그 멍청한 놈이 나였군.” 김성철이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너 말고도 한 녀석이 더 있다.” ======================================= 72. 칠영웅 (3) “에크하르트를 말하는 건가?” 김성철이 묻자 데스포트는 미소를 머금었다. 정답인 모양이다. “그 놈은 어떤 연금술사의 사환이었지. 어디에나 있는 한심한 녀석이었어.” 데스포트의 눈은 먼 과거, 처음 에크하르트를 만났을 때의 시점으로 돌아가 있었다. 데스포트는 기억한다. 악마왕을 처치하기 위해 마계로 떠났던 300여명의 용사들. 나부끼는 각국의 휘황찬란한 깃발들, 모든 남자의 입에 오르내리는 베스티아레, 건방진 천재 사자토스, 느닷없는 습격과 파멸에 직면한 토벌대 그리고 앳되고 어리숙한 소년의 얼굴. “그 녀석은 주제넘게도 베스티아레를 연모했지. 물론 베스티아레가 그런 하잘 것 없는 남자에 눈길을 줄 리가 무방, 결국 놈은 우리 뒤꽁무니만을 졸졸 따라다니는 그래, 한 마리 애완견 같은 놈이었지.” “…….” 준비는 끝났다. 몸에 특별한 이상은 없고 신적인 힘은 유효하다. 언제든 김성철은 데스포트를 끝장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공격하지 않았다. 듣고 싶었다. 동 시대를 살았던 사내의 입을 통해 에크하르트라는 사내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었다. “오랜 기간 그 녀석은 우리에게 잡다한 연금 아이템을 판매했지. 솔직히 쓸 만한 것도 있었어. 하지만 그 녀석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키우는 개에 지나지 않았지. 그 놈이 베스티아레와 꼭 닮은 여자를 어디서 구해와 아이까지 낳았을 땐 정말로 기가 막혔지. 베스티아레가 뭐라고 한 줄 아나? 역겹다고 말했지. 그 기품 있는 베스티아레가 말이야.” 데스포트는 크게 웃었다. 하지만 김성철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사내의 웃음은 거짓이고 억지로 지어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데스포트는 계속해서 말했다. “두 번째 재앙인 심해로부터의 재앙은 대처하기 곤란했어. 어인들은 강력했고 동시다발적으로 세계 전역을 덮쳤어. 우리들은 힘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지. 그래서 결국 그 계단으로 갔던 거야. 고대의 위대한 종족은 절멸로 몰아넣은 신의 용광로라 불리는 곳에.” “에크하르트도 그곳에 같이 간 모양이군.” 김성철이 입을 열었다. 데스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칠영웅은 함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섰다. 가장 먼저 포기한 건 사자토스였지. 차례로 다른 녀석들도 포기했어. 마지막까지 남은 건 나와 베스티아레였지. 그때 에크하르트가 갑자기 나타나더군. 이유는 간단했어. 베스티아레가 걱정 되서 온 거야.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 “지독한 집착이라고 할까. 처자식까지 있는 인간이. 당시 베스티아레는 녀석을 질색하고 있었고 놈의 도움을 매몰차게 거절했지. 그런데 그 냉혹한 거절이 놈의 의지에 불을 붙인 모양이야.” 데스포트의 눈동자에 회한이 서렸다. 당시의 광경이 그린 것처럼 생생한 형태로 눈앞에 펼쳐졌다. 당시 데스포트는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보이지 않는 하늘로 향하는 계단은 하나의 층계를 오를 때마다 극한의 고통과 인내, 회의심을 유발한다. 더 이상 갔다가는 소멸한다. 고대의 종족처럼. 데스포트는 발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뒤따라오던 사내는 멈추지 않았다. “…그건 치졸한 광기였지. 별 볼일 없는 놈이 인정받고자 하는.” “하지만 대가를 얻은 모양이군.” “그런 모양이야. 덕분에 놈은 이 세계의 신이 되었다.” 데스포트는 오랜 이야기를 꺼내고 검을 들었다. 이야기의 끝맺음이다. “쇠락한 영웅의 넋두리를 들어준 답례로 한 가지만 더 알려주지.” “말해라.” 그 시점에서 김성철은 느낄 수 있었다. 데스포트에겐 더 이상 살아갈 의지도 힘도 없다는 걸. 따라서 그는 거짓을 말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세간엔 우리가 재앙을 해결한 최초의 인간들이라 알려져 있더군.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군.” “당연하지. 재앙이 한 번 덮칠 때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초기화되니까. 전 시대의 사실 따윈 재앙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이 얼마든 꾸며내고 날조할 수 있는 것이지.” 데스포트는 씨익 웃었다. “재앙이란 것은 의식이다.” 김성철의 눈에 놀라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데스포트는 계속해서 말했다. “신이 죽은 세계에 새로운 신을 선발하기 위한 의식이지. 진짜 신과 달리 만들어진 신은 영원한 시간을 버틸 수 없거든.” “…….” “그리고 재앙 속에서 신이 되지 못한 자에겐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지.” 데스포트는 검 한 자루를 바닥에 푹 꽂고는 자신을 가리켰다. “재앙이 되는 건가?” “정확히 말하면 재앙의 하수인이 되는 거지. 물론 평범한 생존자로 유유적적하게 새로운 신이 만들어 낸 신세계에서 살아남는 길도 있지만....” 데스포트는 코웃음을 치며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을 보며 김성철은 생각했다. ‘이 남자.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재앙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군.’ 신이 되지 못할 바에 세상을 부셔버린다. 그것이 데스포트라는 남자의 사고방식이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김성철은 이와 비슷한 이미지를 떠올렸다. 부루마불이란 보드게임에서 서울에 걸렸다고 판을 뒤집는 이기적인 아이를. ‘이거 완전 개새끼 아니야?’ 칠영웅의 실체가 추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리더라는 작자가 이렇게 유치한 인간일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깽판을 치는 거군. 낮춰보던 에크하르트란 녀석이 신이 되니까.” 김성철이 데스포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데스포트는 씨익 웃었다. “마음대로 지껄여라. 이미 이 세상은 끝장났으니까.” 데스포트는 검을 교차하며 발로 땅을 디뎠다. 슬슬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충분히 이야기는 나눴다. 김성철도 데스포트를 끝장내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기이하군.” 무심코 김성철 입에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신이 된 자가 자기 딸 하나 구해내지 못하다니.” 김성철은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의 무게를 느끼며 말했다. “신이라서 구하지 않은 것이다.” 데스포트가 쌍칼을 교차하며 말했다. “신은 인간과 달리 모든 것을 보듬고 관장해야 하거든. 신이 되는 순간, 에크하르트란 인격은 거의 소멸된다고 봐야지.” “그건 참 바람직하지 않은 소리군.” 김성철이 움직였다. 데스포트는 김성철의 움직임을 읽어내는덴 성공했으나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이미 치명상을 입은 데다가 지독한 농도의 낙진을 들어마신 그에겐 저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푹. 한 자루 검이 데스포트의 몸에 꽂혔다. 데스포트의 입가에 떠오른 건 미소였다. ‘드디어 끝이군.’ 그는 곧 찾아올 완전한 어둠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분명 심장을 찔러 죽어 마땅한데 오히려 그의 정신은 점점 또렷해졌고 온 몸에 느껴지는 감각조차 더욱 예민해졌다. ‘뭐.. 뭐지?’ 그는 뒤늦게 자신의 심장을 찌른 검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이 놈, 언제 검을 든 거지?’ 그의 심장엔 검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생물체 같은 검붉은 형태의 기괴한 장검이 박혀 있었다. 그 무기의 정체는 재앙의 무기 아고니.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아닌 살리는 검. 그 저주 받아 마땅할 무기가 데스포트의 심장에 박힌 것이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데스포트가 다급하게 외쳤다. 김성철은 이미 등을 보이고 먼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잘 봐둬라.” 김성철이 향하는 곳은 분화구였다. 그는 데스포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뚫어놓은 구멍을 노려보고 있었다. ‘꽤나 크군.’ 분화구 옆엔 작동을 멈춘 거신 한 기가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에게 말했다. “베르텔기아. 저걸 움직일 수 있겠나?” “으음.. 열쇠가 없으면 어렵긴 하겠지만 뭐, 전처럼 하면 되겠지.” “좋아. 밥값 할 수 있다 이거지.” 그때 바로 옆에서 베르텔기아와 똑같은 음성이 울려퍼졌다. “데스포트를 죽이지 않고 무엇을 하려는 거죠?” 책이 말했다. 김성철은 책을 곁눈질로 보며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구멍을 막으려고. 놈이 보는 앞에서.” 책은 한 번에 김성철의 말을 이해했다. “그렇다면 제가 힘을 빌려드리죠.” 김성철 앞에 번쩍이며 무언가가 나타났다. 거신의 열쇠다. 묻고 싶은 건 많지만 김성철은 열쇠를 집어 들고 묵묵히 거신의 조종부로 향했다. 거신의 조종부는 다른 거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김성철은 거신을 관장하는 또 다른 책 앞에 서서 열쇠를 내밀었다. 쿠구구구궁. 거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깨어난 거신은 주변에 무너진 잔해를 들어올려 죽음의 낙진이 솟아오르고 있는 구멍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아고니에 의해 죽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게 된 데스포트는 허탈한 표정으로 거신이 자신이 만들어 낸 틈새를 매우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이런.. 빌어먹을....” 외마디 고함이 그의 입에서 나왔지만 공허한 메아리로 그칠 뿐이었다. 거신은 느릿하지만 멈춤 없이 구멍을 매웠고 이윽고 마지막 틈새가 커다란 바위에 의해 가로막혔다. 죽음의 낙진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비록 이미 흘러 나온 낙진이 세상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지만 데스포트가 원한 모든 것의 절멸을 불러오지는 못할 것이다. 데스포트의 계획을 눈앞에서 깨부순 김성철은 다시 데스포트 앞에 섰다.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앞에서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재앙의 무기로 인해 또 변해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서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걱정 마라. 베르텔기아. 빨리 끝낼 테니까.” 김성철은 그렇게 말한 다음 데스포트에게 다가가 그의 심장에 꽂힌 아고니를 뽑았다. “크억!” 데스포트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고니의 힘으로 죽지 않았지만 아고니에게 생명력을 공급받은 대가로 그는 끔찍한 무력감과 기묘한 고통을 동시에 느끼며 신음해야 했다. 저벅. 김성철의 발이 그의 얼굴 앞에 나타났다. 이어 담담한 목소리가 엄중한 선고처럼 들려왔다. “이 세상은 너 따위가 멸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데스포트는 힘겹게 고개를 치켜들며 김성철을 노려봤다. “이... 이 벌레 같은 게...!” “적어도 나는 너처럼 찌질하지 않다.” 팔 가라즈가 높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퍽. 칠영웅의 리더 데스포트의 최후는 보잘 것 없었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데스포트의 시신을 응시하며 다가올 징조를 기다렸다. 이윽고 빛나는 문자가 김성철의 시야를 덮어나갔다. [ 당신은 두 번째 재앙을 해결했다. ] [ 당신은 세계를 움직이는 진실에 접근할 권리를 얻었다. ] [ 신들이 당신을 주목한다. ] 보상 : 1. 읽는 자(초급) 2. 재앙의 파편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읽는 자?’ 읽는 자는 신의 글을 읽을 수 있는 권리. 김성철의 운명의 여인 라이즈 하이메르가 지녔던 능력이다. ‘하지만 초급이라...’ 그 한계와 범위는 나중에 확인해도 늦지 않았다. 김성철은 발밑에 떨어진 또 다른 재앙의 파편을 회수했다. 악마왕을 처치했을 때보다 크고 보다 어두운 기운을 머금고 있다. 김성철은 재앙의 파편을 복대 안에 넣고 다음에 나타난 현상을 기다렸다. 곧 기다렸던 결과가 나타났다. 데스포트의 시체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단순한 연기가 아니다. 끝없는 악의와 바닥을 알 수 없는 허무로 채워진 부정한 기운. 김성철은 그 불경한 광경을 눈 하나 꿈쩍이지 않고 담담한 시선으로 재앙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김성철 앞에 검은 문자가 나타났다. [ 재앙의 증인 ] [ 당신은 재앙의 정수를 보았다. ] [ 신의 권능을 본 당신은 세계의 비밀에 한 발 가까이 다가갔다. ] [ 증인의 보상은 직관력에 상응하여 주어진다. ] 보상 : 마력 +120, 직관력 +120, 마법저항 +120 능력치가 상승했다. 김성철은 담담하게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확인했다. 정당한 보상이다. 재앙에 맞선 자가 응당 얻어야 할. 그리고 김성철을 기다리는 또 하나의 보상이 있다. 김성철은 머지않은 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책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약속을 지켜라. 짝퉁.”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책은 김성철 앞에 작은 병 하나를 소환해 그에게 내밀었다. 다이아몬드를 방불케 하는 복잡다단한 문양과 세공이 들어간 병 안엔 진홍빛의 영롱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김성철은 그것을 손으로 들어 올려 그 이름을 확인했다. [ 파이널 엘릭서 ] 김성철은 천신만고 끝에 손에 넣은 그 물건을 손으로 꼭 쥐었다. ‘라이즈 하이메르. 너와의 약속은 이루어질 것이다.’ 10년도 전에 한 하나의 약속이 한 사내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그리고 그 약속의 성취는 목전에 있다. 사내의 눈동자엔 감출 수 없는 감회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 73. 세계수 아래서 (1) 마음 같아서는 한 달음에 정령계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김성철은 일부러 느긋한 여정을 택했다.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할까. 선물이 가장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순간은 역시 선물의 포장을 뜯기 전이니까.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낙진의 독성이 상상 이상으로 높았고 재앙의 무기인 고르고트는 그에게 정기적인 생명력의 공급을 요구했다. 회복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정기적인 생명력 공급을 해야 하는 김성철 입장으로선 무리할 수 없었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김성철은 아델화이트의 숲을 향한 느릿한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 당신의 생명력의 삼분의 일을 변제하겠습니다. ] 수락을 하자마자 온 몸에서 그야말로 진이 쭉 빠져 나간다. 그 생명력의 감소는 육안으로도 보일 지경이었다. “으.. 그 방패. 끔찍하네.” 베르텔기아가 갑작스레 볼이 움푹 들어가며 짙은 음영이 여기저기 진 김성철의 핼쑥한 얼굴을 보며 혀를 찼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이 방패를 쓰지 않으려고 생각했다.” 김성철은 모닥불 위에 철망을 얹어 만든 간이화로 위에서 끓고 있는 냄비를 응시했다. 대량의 생명력이 빠져나간 탓인가. 뱃속이 그야말로 요동을 친다. 김성철은 돌로 다져 놓은 뚜껑 사이로 은은히 흘러나오는 향긋한 음식 냄새를 맡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주 단점만은 있지 않아. 이 녀석, 식욕 증진에 아주 그만인데?’ 그는 침이 넘쳐흐르는 걸 꿀꺽 삼키며 냄비 뚜껑을 열었다. 냄비 안엔 하얀 쌀밥이 지어지고 있었다. ‘슬슬 뜸을 들여야겠군.’ 김성철은 쌀밥이 든 냄비를 아래에 내려놓은 뒤 준비 했던 메인 메뉴를 준비했다. 오늘의 메뉴는 삼겹살. 동부 해안에서 주인을 잃고 자유롭게 노닐던 돼지 한 마리를 잡아 빠르게 해체해 얻은 물건이다. 성질 같아서는 다른 부위로 순대도 만들고 베이컨도 만들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고 빠르게 식사를 해결해야 하기에 대충 삼겹살만 추려내는 걸로 오늘의 저녁을 해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물론 삼겹살에 곁들인 갖가지 채소와 무침은 진즉에 만들어 낸 상태. 식사에 곁들일 철혈주까지 완비된 상태다. ‘역시 탁한 공기를 마신 다음엔 삼겹살로 목구멍을 씻어 줘야지.’ 김성철은 모닥불 철판 위에 미리 준비한 납작한 돌판을 얹어 데운 후 신선하다 못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삼겹살을 올렸다. 치이이익- 익숙한 소리와 함께 고기가 익어가는 고소한 향기가 코를 찌른다.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조그만 검은 새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고기가 익어가는 불판을 보고는 퉁명스레 말했다. “인간들은 고기의 참맛을 모르는군. 저 훌륭한 고기를 굳이 태워서 먹다니 말이야.” 마라키아는 나하크라 불리는 조인족. 인간처럼 두 다리로 서고 손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고 하나 결국은 부리를 지닌 종족. 입맛이 인간과 같을 수가 없다. 마라키아에게 훌륭한 음식은 썩기 직전의 피가 뚝뚝 흐르는 짐승의 시체와 부리를 자극하는 맛이 있는 견과류다. 따라서 그는 김성철이 만드는 요리의 의미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베르텔기아도 김성철의 맛이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생판 신인이 김성철에게 시비를 거는 건 서열 2위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하극상이었다. 베르텔기아는 등 뒤에 김성철을 세우고 마라키아를 힐난했다. “똥 가득 찬 내장이나 먹는 주제에!” “내장을 먹는 건 강력한 육식동물의 권리지.” “우웩.” 서열 2위와 3위가 티격태격 하는 동안 김성철은 오랜 인내의 시간을 견뎌내고 한 점의 고기가 완전히 구워졌음을 확인했다. 젓가락으로 겉면이 바싹 구워진 삼겹살 한 점을 집자 안에 있던 기름이 후두둑 쏟아져 내린다. 김성철은 그 고기를 집어 입안으로 가지고 갔다. “음.” 기대했던 바로 그 맛이다. 하지만 간단한 조리법은 미각을 관장하는 존재에겐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 이 요리의 점수는.... 23점! ] [ 원시적인 요리군. ] 늘 그렇듯 김성철은 요리인 클래스를 관장하는 존재의 점수에 대해 별 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다. 물론 지금은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 바뀐 건 사실이다. ‘3번 째 재앙이 가시화되기 전에 90점 이상의 요리를 만들어 내서 자칭 미식가라는 이 클래스의 관장자를 한 번 만나봐야겠어.’ 물론 그 90점 짜리 요리는 다시 눈을 뜬 인상 깊은 꼬맹이를 향해 헌정될 것이다. 아마도 대단히 놀랄 것이다. 요리라고는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천하진미라는 표현조차 진부해질 위대한 요리를 대접하면 말이다. 김성철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베르텔기아와 마라키아의 다툼을 들으며 즐거운 식사를 시작했다. 고기가 전부 사라지고 술병의 술이 전부 비워질 무렵이었다. “저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마라키아와 설전을 끝낸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냐?”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보며 죽음의 섬에 있던 책에 관해 생각했다. 베르텔기아와 똑같은 생김새와 목소리. 단순히 짝퉁이라 치부하긴 했지만 그 녀석의 존재가 그리 쉽게 가치 절하할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김성철은 익히 잘 알고 있다. 단지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베르텔기아가 상처 입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김성철은 십중팔구 베르텔기아가 함께 묻어뒀던 그 무거운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리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베르텔기아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뜻밖의 주제였다. “그 세계수 뿌리 안에 있던 아이. 누구 딸이야?”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지?” “궁금해서.” 김성철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정했던 것보다는 가벼운 주제이려나? 그런 생각이 취기에 얼큰해진 의식 속을 맴돌았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김성철은 가벼운 자포자기와 함께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라이즈 하이메르라는 여자의 딸이다. 루테기네아의 공주였지. 입양 된.” 베르텔기아는 책장을 도리도리 흔들었다. “엄마는 알아. 나도 귀동냥은 할 줄 아니까. 중요한 건 아빠가 누구냐는 거지.”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의 얼굴이 눈에 띄게 경직됐다. 베르텔기아는 한 눈에 자신이 역린을 건드렸다는 걸 발견했다. “말하기 싫으면 관계없고. 그 여자애 깨어나면 물어보면 되니까.” “…….” 베르텔기아의 말이 맞다. 늦든 빠르던 결국 드러날 일이다. 김성철은 술병을 들어 술잔에 기울였다. 이미 술병 안엔 한 방울의 술도 남지 않았다. 김성철은 아쉬운 듯 술병을 내려놓고 대신 마라키아가 먹는 것과 같은 고급 땅콩을 씹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놈이 그 꼬마의 아버지였다.” “으응?” 베르텔기아는 깜짝 놀라면서도 몸뚱이를 바위 위에 비스듬히 기울였다. 어디 더 이야기해보라는 뜻이다. 김성철은 간략한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마도 처음으로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김성철은 과거의 일을 그다지 입에 담는 사람이 아니기에. 타닥타닥 타오르는 화톳불 옆에서 김성철이 스쳐지나온 세월이 빠르게 흘러갔다. 이야기 속의 김성철은 어느새 18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중요한 전투에서 우리는 패배했어. 동부의 어떤 왕이 우리를 도와주기로 했는데 뒤통수를 치고 역으로 우리를 밀고해 팔아넘긴 거지. 많은 동료들이 죽었고 나는 포로로 잡혀 루테기네아 투기장의 검투 노예로 끌려갔다.” “흠흠. 다 좋은데 갑자기 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새는 느낌인데? 그거랑 그 꼬마 아빠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상관이 있어. 왜냐하면 그 녀석의 부친은 나와 같은 검투사였거든.” “흠흠....” 몸을 끄덕거리는 베르텔기아를 보며 김성철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까마득한 과거의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 루테기네아 신민의 즐거움을 위해 봉사하는 검투사를 크게 구분하면 두 가지 부류가 있었다. 하나는 강제적으로 검투사가 된 이른 바 검투노예. 김성철 같은 전쟁 포로가 이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자발적으로 투기장에 들어선 자유 검투사들이다. 이들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기장에 들어선다. 돈, 명예, 더러는 피에 대한 갈망, 자신의 자격에의 증명 등의 갖가지 이유로 그들은 기꺼이 죽음을 감수하고 피로 얼룩진 투기장의 흙 위에 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자유 검투사 쪽의 전투력이 검투노예보다 훨씬 높다는 점이었다. 자유 검투사 중에 루테기네아 투기장 사상 최고의 인기를 누린 검투사가 있었다. 화려한 투사 크릭프리드. 루테기네아 유력가의 자제라는 검투사에 어울리지 않는 고귀한 신분, 금발 벽안의 수려한 외모와 재치 있는 입담, 무엇보다 투기장 최강자라 불리기에 손색없는 무시무시한 전투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여러 모로 김성철과 대척점에 선 자였다. “…난 별로 인기가 없었지. 인기를 얻을 마음도 없었지만. 아무튼 말 수 적고 인물도 볼품없고 게다가 미친개처럼 싸우고 번번이 역배당을 불러오는 놈을 누가 좋아하겠나? 반면 크릭프리드는...” 김성철은 기억한다. 수많은 검투사 중에서 마치 빛처럼 군림하던 사내를. 그는 모두에게 인기가 있었다. 잔혹한 투기장의 도박꾼은 물론이고 경비병, 어린 아이, 젊은 처녀, 심지어 같은 검투사까지. 크릭프리드를 싫어하는 건 단 한 명 뿐이었다. “질투?” 베르텔기아가 날카롭게 찔러보았다.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유치한 이유가 아니야. 그 녀석은 루테기네아가 만들어 낸 가짜 영웅이야.” “가짜 영웅?” “인간들이란 영웅들에 열광하는 법이거든. 루테기네아 귀족 출신에 모범적이고 전투력까지 강한 그 녀석을 간판으로 내세워 감추는 거지. 투기장에서 일어나는 갖은 만행을 말이야. 물론 놈에게 악의는 없었다. 놈도 어떻게 보면 희생양이지.” “그 사람과 싸운 적이 있어?” 베르텔기아의 물음에 김성철은 무거운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투 전 날, 루테기네아 마법사가 와서 내 몸에 이상한 약을 주입하더군.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극약이었다.” “그래도 당신이 이긴 모양이네?” 이에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승부였다. 지금은 방랑왕이라 불리는 크롬갈드 왕이 우리의 싸움을 보고 무승부라는 판정을 내리게 된 것이지.” “흐음...” 김성철은 그때의 광경을 눈에 그린 듯 흐릿한 눈으로 공터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처절한 싸움이었다. 굉장한 석양이 지는 날이었지.” “흐으으음....”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에게 천천히 접근하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뭐냐?” 김성철이 묻자 베르텔기아는 원 위치로 돌아갔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런데 그 이야기만 듣고는 이해가 잘 안 가는데. 당신이 그 사람을 왜 그렇게 싫어한 지 말이야.”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퉁명스레 말했다. “사람 싫어하는데 이유가 있냐? 마음에 안 드는 놈은 마음에 안 드는 거지.” “그 말이 정답이다.” 옆에서 마라키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홀로 가부좌를 틀고 뭔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옆으로는 김성철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결투라는 제도가 있는 거지.” 마라키아는 계속해서 말했다. 베르텔기아는 마라키아 쪽을 힐끗 쳐다봤다 다시 김성철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 라이즈라는 여자와는 무슨 관계야? 듣자 하니 차인 거 같던데.” “차이다니..” “차인 거 아니야?” “…내가 찬 거다.” 김성철은 몸을 일으켰다. 그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기분은 강렬하게 어필하며 말이다. 베르텔기아는 조금 더 김성철을 괴롭혀주고 싶었지만 일단은 이 정도 선에서 그치기로 마음먹고 바위 가에 가만히 몸을 뉘였다. 베르텔기아가 조용히 있자 불가엔 정적이 찾아왔다. 김성철은 아무도 없는 초원 한 가운데 누워 밤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들을 지켜보았다.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라키아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 낙진. 그야말로 지독했다. 네가 그 낙진의 구멍을 틀어막았다고는 하나 바람을 타고 온 낙진의 일부가 이 땅에 덮치면 세계의 멸망까지는 아니더라도 꽤나 심각한 피해를 야기할 것이다.” “그런가?” 마라키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불가로 돌아갔다. 겉모습은 귀엽고 하는 짓도 귀여운 구석이 있지만 대체로 맞는 말만 하는 녀석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이야기는 김성철에게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는 오랜만에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과거를 마음껏 되새기고 있었다. 대부분이 오해와 권태, 고통으로 얼룩진 과거지만 그 사이사이 보석처럼 묻힌 잠깐의 행복이 그에게 살아갈 힘과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그때의 희망을 되살릴 기회가 지금 눈앞에 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김성철은 바로 이 부분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생각만큼 기쁘지 않았던 것이다. 파이널 엘릭서를 손에 넣은 그 순간에조차. 무덤덤한 게 본인의 성격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 그가 느끼는 메마름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도 많이 지친 모양이군.’ 육체가 피로하면 마음도 피폐해진 법이다. 어쩌면 고르고트의 효과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그날 밤, 김성철은 꿈을 꾸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편안하고 개운한 잠이었다. ======================================= 73. 세계수 아래서 (2) “역시 거기서 창조술사의 시련을 받고 올걸 그랬어.” 동과 서로 끝없이 이어진 루테기네안 가도 위에서 베르텔기아가 말했다. 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느릿하게 걷는 김성철을 노려보며 칭얼거렸다. “이렇게 느긋하게 갈 지 알았다면 말이지!” 익시온과 이름 모를 섬을 거치며 김성철 일행은 두 기의 거신을 확보했다. 베스티아레와 데스포트의 것이다. 그 둘 안에 내재된 창조술사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다면 이제 남은 건 2기에 불과. 창조술사 퀘스트 완료가 성큼 앞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김성철에겐 그만의 우선순위가 있다. 정령계에 잠든 꼬맹이를 구하는 건 김성철이 여행을 시작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 따라서 최우선 순위를 차지한다. 베르텔기아도 그런 사정을 알고 있기에 당시엔 그냥 넘어간 것이었지만 최근 김성철의 행보를 보고 있자니 울화통이 터진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바짓가랑이를 끌고 가서라도 시련을 수행했어야 했어!” 흥분한 베르텔기아와 달리 김성철은 그야말로 태평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베르텔기아.” 그는 하늘 위를 흐르는 한줄기 구름을 응시하며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익시온의 거신에 발이 달려있다고는 하나 어디 도망갈 녀석도 아니고 그리고 그 섬의 거신은 아마도 지금 이 순간에도 육지를 향해 바다를 건너고 있을 테니 말이다.” 김성철이 아무 대책 없이 이름 없는 섬의 거신을 버려두고 온 건 아니다. 거신에 대한 명령권한이 있는 그는 데스포트의 거신에게 익시온으로 향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당면한 일을 끝내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을 때 한꺼번에 거신과 관련된 창조술사 퀘스트를 수행하리라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음. 저기 사람들이 보이는데?” 잠자코 있던 마라키아가 눈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김성철의 눈엔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마라키아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먹이를 찾는 나하크 족의 시력은 인간에 비할 바가 아니므로. 곧 김성철은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다. 서쪽으로 피난 갔던 동부의 사람들이다. “서쪽의 칠영웅들이 구축됐다는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인간제국에 남아봐야 희망이 없는 건 똑같기에 이렇게 고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익시온이 붕괴되고 칠영웅의 재앙이 해결된 지 이제 일주일째. 소문은 빠르게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김성철은 고향으로 향하는 동부인들의 행운을 빌어주었다. 루테기네안 가도를 따라 고향으로 향하는 피난민은 서쪽으로 가면 갈수록 급증했다. 그러던 중 김성철은 무려 수천 명 규모의 행렬과 마주쳤다. 수십 대의 수레는 물론이고 자체 호위 병력까지 갖춘 대단위 행렬이었다. 그들은 일단의 소형 골렘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김성철은 한 눈에 그것들이 가시옹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골렘 군단의 잔당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아마도 대규모의 행렬이 오가는 소리에 반응해 공격을 해온 모양이었다. 행렬의 호위 병력들은 용감하게 골렘들과 싸웠지만 조금 힘에 부치는 눈치였다. 김성철이 나서려고 하자 마라키아가 날개를 저으며 김성철 앞을 가로 막았다. “오랜만에 내 실력을 발휘할 때가 왔군.” 그동안 잘 먹어서 그런지 조금 성장한 마라키아가 날개짓을 했다. 아직 덜 자란 날개라서 그런지 파닥파닥 거려도 하늘 위에 뜨지 않는다. “레비테이션.” 마라키아는 결국 마법을 써서 자신을 허공 위에 떠올린 뒤 골렘들을 향해 나아갔다. “내버려 둬도 될까?” 베르텔기아의 걱정 섞인 말에 김성철은 무덤덤한 어조로 대답했다. “저 녀석. 저래 뵈도 꽤 강한 녀석이다. 저 정도 골렘 정도는 가벼운 사냥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김성철은 여전히 자신의 왼팔에 단단히 매인 재앙의 방패 고르고트를 응시했다. 무슨 기준으로 목숨 값을 산정하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김성철은 고르고트에게 목숨 값 반개를 빚지고 있었다. 오늘 내일 중으로 갚을 수 있을 정도의 수치지만 힘을 아낄 수 있다면 무리를 하지 않는 게 좋다. 김성철은 가만히 자리에 앉은 채 마라키아가 밥값을 하는 걸 구경했다. 마라키아는 순식간에 중형 골렘들을 모두 마법의 힘으로 잡아내 판세를 뒤집었다. 전투가 끝난 뒤 피난민들은 혜성처럼 나타난 기이한 외모의 구세주를 찬양하며 열렬히 환영했다. “어허. 가까이 다가오지마라. 천박한 유인원들아!” 마라키아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경배와 찬양은 받아들이면서도 인간들의 손이 자신의 깃털에 닿는 건 극구 꺼렸다. “으.. 진짜 싫어진다.” 그 광경을 본 베르텔기아가 질린 어조로 말했다. 아무튼 마라키아의 활약으로 김성철 일행은 자연스레 피난민 행렬에서 귀빈 대접을 받게 되었다. 피난민 행렬을 이끄는 건 나이 지긋한 동부의 소귀족이었는데 김성철은 식사 자리에서 그에게 흥미로운 정보 몇 가지를 들을 수 있었다. “듣자하니 두 번째 재앙이 마침내 해결이 됐다고 하더구만. 그래서 그런지 인간제국에서 우리를 몰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 쫓겨나는 건 뭐 실향민의 숙명이니 아무래도 좋은데 제국 관리들 사이에서 기묘한 소문이 돌고 있더구만. 재앙의 서가 고장 났다는.” “재앙의 서가 고장이 났다고요?” “고장이라는 표현이 타당한 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재앙의 서가 먹통이 됐다고 하더군. 세 번째 재앙을 게시하는 문구에 기이한 빛이 번득이며 끊임없이 글자가 바뀌고 있다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분명 세 번째 재앙은 전쟁의 재앙인데....’ 재앙의 내용이 뒤바뀐다는 건 꽤나 골치가 아픈 일이다. 미리 예측하고 준비해 대항하는 것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맞서는 건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으므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재앙이 아니다. 피난민 행렬과 작별한 김성철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드디어 느긋한 여정에서 벗어나 속도전에 돌입한 것이다. 피난민 행렬을 만난 지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김성철은 목적지인 아델화이트의 숲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 마라키아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이.. 이 숲은...?! 설마 저주 들린 마녀의 숲인가?!” 아까 전까지만 해도 피난민 사이에서 왕처럼 거만하게 굴던 모습은 오간데 없고 벌벌 떠는 한 마리 병약한 병아리의 모습만이 남았다. “틀림없다. 머나먼 남쪽... 사계절이 공존하는 귀기어린 숲에 사는 사악한 리자드맨 마녀의 전설을...! 이 숲은 위험하다!” 마라키아는 그렇게 말하며 숲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강경하게 버텼다. 그 모습을 본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아델화이트라면 저 병아리 종족이 설칠 때도 살아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건 그렇다 치고 리자드맨 마녀라....’ 리자드맨이 된 아델화이트의 모습을 상상하자 피식 실소가 터져 나온다. 김성철은 완강하게 버티는 마라키아를 결국 힘으로 끌고 갔다. “삐기기기이이!” 다행히 유령 들린 숲엔 마라키아가 두려워하는 마녀는 없었다. 마중 나온 요정들의 말에 의하면 아델화이트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 현재 부재중인 상태란다. “아델화이트가 여행을? 별 일이군.” 어디로 여행갔냐고 묻자 요정들은 모른다는 눈치. 어차피 정령계로 떠날 생각이었는지라 그녀의 부재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마녀의 오두막에서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한 후 김성철은 요정들에게 부탁해 정령계로 향하는 포탈을 열게 했다. “흠흠. 진작 이렇게 속도 좀 내지 그랬어?” 포탈을 넘어서자 베르텔기아가 심기 불편한 어조로 툴툴 거렸다. 한편 마라키아는 처음 보는 정령계의 장관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니...!” 마라키아는 먼저 포탈 밖으로 달려 나가 아름답기 그지없는 정령계를 향해 뛰쳐나갔다. 방금 전까지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던 모습은 역시나 오간 데가 없다. 그걸 본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새대가리는 새대가리인가.’ 산만하기 짝이 없다. 베르텔기아는 마라키아가 엉뚱한 곳으로 가지 않게 뒤를 따랐다. 김성철은 아름다운 정령계의 풍광을 보며 느긋하게 걸었다. ‘드디어 이 순간이 왔군.’ 어째서일까. 익시온에서부터 이어져온 무덤덤함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정령계에 오면 적어도 다소의 흥분은 느낄 것이라 생각했는데 변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김성철은 간간히 섬뜩한 충동을 느꼈다. 주머니 안의 파이널 엘릭서를 그냥 바닥에 넣고 으깨버린다거나 찾지 못하게 멀리 던져버린다거나 하는. 오히려 그런 것들이 보다 자극이 될 것이라는 기괴한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지쳐 보이는군.” 다시 만난 요정의 장로가 김성철의 안색을 보며 한 말이다. “잘 먹고 푹 자고 왔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성철은 이유모를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그냥 단순히 지금 상황을 끝내고 편안한 침대에 누워 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손꼽아 기다리던 순간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정작 찾아온 것이 권태라니. “힘 좀 내. 뭘 그리 어벙한 얼굴을 하고 있어?”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안색을 살피며 책 모서리로 김성철의 등을 쿡 찔렀다. “…그럼 슬슬 시작하지.”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품속에서 이름 모를 존재에게 받은 전설의 약을 장로에게 내밀었다. 장로의 눈이 놀라움으로 휘둥그레 커졌다. “이.. 이것은... 전설의 파이널엘릭서 아닌가? 대체 어디서 이런 걸 손에 넣은 거요?” “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소. 그보다 빨리 그 녀석에게 가봅시다.” 김성철과 장로는 정령계의 하늘 뚫고 우뚝 선 세계수를 향해 걸어갔다. 마라키아의 경탄에 찬 탄성이 뒤에서 쉴 새 없이 들려왔다. 김성철과 베르텔기아는 시끄러운 새를 무시하고 발걸음을 빨리 했다. 곧 일행은 세계수의 뿌리 아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에 느꼈는데 말이야. 으음..” 베르텔기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뭐냐?” 김성철이 묻자 베르텔기아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흉중의 말을 끄집어 냈다. “그 여자애 말이야. 으음.. 진짜 살아 있는 거 맞아?” “당연하지.” “으음.. 겉보기엔 뭐라고 해야 하나. 그 죽은 누에에 피는 꽃 같은 것도 있고 그러니까.. 살아 있다기보다는...” 베르텔기아가 어물쩡어물쩡 말하자 김성철은 희미하게 웃으며 베르텔기아의 책모서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죽었다고 생각했나?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죽은 게 아니야.” 김성철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장로 쪽을 응시했다. 김성철의 시선을 받은 장로가 곧 수염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 인간 여자아이는 세계수와 연결된 상태다. 생명의 원천인 세계수와 연결된 이상 그 아이는 불로불사. 세계수와 운명을 함께 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지.” “아.. 그런가? 그럼 몸에 핀 그 하얀 곰팡이 같은 건 뭘까나?” “은혜의 이끼는 세계수와 하나가 됐다는 증거야. 세계수로부터 생명의 힘을 받은 흔적이지.” “아... 그렇구나.” 베르텔기아는 이제야 이해했다는 눈치였다. 김성철 일행은 동굴과 같은 뿌리 속을 걸어 곧 빛나는 버섯 아래 잠자듯이 누운 소녀가 있는 방실로 들어섰다. 이름 모를 반딧불들이 소녀 주변에 모여 있다 김성철 일행이 나타나자 흩어졌다. “준비는 되셨나? 부수는 자.” 장로가 소녀 앞에 멈춰 섰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옆에 서서 뿌리 위에 잠든 소녀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군.’ 소녀의 얼굴을 본 순간에야 뭔가 가슴에 쿵하고 와닿았다. 여전히 미약하긴 하지만 김성철은 정령계에 발을 디딘지 처음으로 일종의 보상감을 느끼고 파이널 앨릭서를 품속에서 꺼냈다. “그럼, 세계수와의 공생을 해제하겠네.” 장로는 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영혼창고에서 꺼내며 무언가 주문을 외웠다. 김성철은 마법진이 소녀 전신에 나타나는 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시오.” 의식이 시작됐다. 장로의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이 방안에 울려 퍼지며 소녀의 몸에 서린 마법진은 점점 크기와 복잡성을 더해갔고 어느 한 순간 번쩍 하는 빛이 나며 모든 마법진이 소멸했다. “지금이오!” 장로가 무겁게 외치는 그 순간, 소녀의 몸에 낀 하얀 이끼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 이끼가 사라진 부분에 죽음의 검은 반점이 피어 올랐다. 절멸의 저주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희생양을 덮쳐온 것이다. 김성철은 지긋지긋한 신의 저주에 분노를 느끼며 파이널앨릭서의 뚜껑을 열고 소녀를 받치고 입을 살짝 벌렸다. ‘이걸로 약속은 지켰다. 라이즈 하이메르.’ 영롱한 진홍빛의 액체가 병을 타고 소녀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한 줌밖에 안 되는 액체가 몸에 들어간지 십여 초. 소녀의 전신에 기이한 광채가 서리기 시작했다. 장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오오... 틀림없군. 이 광채! 이 영험한 기운! 이건 진품이다. 진짜 파이널앨릭서다!” 모든 병을 치유한다는 기적의 약. 그 효과는 확실했다. 광채가 가라앉으면서 신의 저주를 상징하는 검은 반점이 급속도로 지워지기 시작했다. 죽음의 반점은 사라지면서 검은 그림자 같기도 하고 연기 같은 것을 피워 올렸다. 이제는 익숙한 재앙과 관련된 현상이다. 이윽고 소녀의 몸에 핀 반점은 모두 사라졌다. 김성철은 여전히 두통처럼 자리 잡은 무신경함을 은은히 느끼면서도 끈기 있게 소녀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소녀는 처음으로 얕은 숨을 토해냈다. 하얀 이끼의 기운이 서린 오래된 숨결이었다. 그걸 본 김성철은 주먹을 살짝 쥐고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던 이름을 불렀다. “일어나라. 크라이아 라이즈 크릭프리드.” 베르텔기아는 그 광경을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소녀의 아미가 살짝 찡그러졌다. “우.. 우와! 진짜 살아났잖아?” 팔부능선을 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한참이 지나도 소녀는 숨만 내쉴 뿐 눈을 뜨지 않았다. 장로가 소녀의 몸을 살피고 가볍게 흔들었다. “기이하군. 분명 심장은 뛰고 있는데.” 그때였다. 소녀의 입술이 살짝 열리며 앳된 목소리를 토해냈다. “아.. 아빠.” 베르텔기아는 벅찬 감정을 느끼며 김성철에게 향했다. “깨어났어!” 그런데 김성철의 표정은 묘했다. 베르텔기아는 적어도 김성철에게서 터럭만큼의 기쁨도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에게서 당혹감과 그에 감춰진 미약한 실망감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뭐.. 뭐야? 이 당혹스러운 얼굴은?’ 베르텔기아는 꿈에도 몰랐겠지만 저 소녀, 크라이아 라이즈 크릭프리드는 단 한 번도 김성철을 아빠라는 명칭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 그곳은 태고의 어둠과 빛이 혼재하는 공간이었다. 인간의 미약한 이지로는 이해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절대적인 공간. 인의 영역을 초월한 자만이 형체를 유지할 수 있다는 그곳은 흔히 신의 세상, 혹은 이면세계 등의 명칭으로 불리곤 하지만 그 곳에 존재하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영역의 명칭 따윈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재앙의 주구가 진정한 재앙을 일으킬 줄이야. 오래 살다 보니 별 일도 다 일어나는군.” 어둠 속에서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가 산 위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그에 준하는, 하지만 음험함에서 훨씬 농도가 짙은 불경한 목소리가 태고의 빛 속에서 울려 퍼졌다. “어리석은 자들의 낙진이 우리들의 농장에 닿으면 수확에 차질이 일어날 것이다.” 그 기괴한 존재 앞엔 세계 그 자체를 구현한 구체가 떠올라 있었다. 구체의 한 사분면엔 황색의 죽음의 기운이 바다를 뒤덮고 대륙 쪽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수확을 서둘러야 한다!” 목소리들이 재촉하듯 말했다. “수확을 서둘러야 한다!” “어서 수확을 해야 한다! 늦기 전에.” 수천수만의 군중이 동시에 외쳐대는 것 같은 음성. 그 속에서 홀연히 하나의 목소리가 모든 걸 갈라버리는 검처럼 군중의 함성을 가르고 불멸의 공간 위에 또렷이 울려 퍼졌다. “시드미아가 필멸자에게 당했다는 소식이 있다.” 그 말은 즉각적인 반발에 직면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필멸자 따위가 어찌 신을 이길 수 있는가?” 하지만 군중의 함성을 가른 음성은 꺾이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필멸자가 아신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길처럼 들끓었던 소요가 가라앉았다. 침묵 속에서 그 칼날 같은 목소리를 다시 말했다. “허나... 진정한 신의 도구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겠지.” 신의 도구. 그 한 마디의 울림은 불멸자들의 공간을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영원과 같은 정적이 태고의 빛과 어둠이 머무르는 공간을 가득 매웠다. ======================================= 74. 무뎌지는 것 (1) 절멸의 저주는 풀렸다. 하지만 아이는 아빠라는 김성철이 원하지 않았던 한 마디를 남긴 채 깨어나지 못했다. “…….” 의외의 사태에도 이를 바라보는 김성철의 눈빛은 담담하기만 했다. 장로는 크라이아 크릭프리드의 몸을 계속해서 살폈다. “심장은 확실히 뛰고 있어. 호흡도 정상이고. 영혼에도 하자가 없다.” 장로가 크라이아의 상태를 살피는 동안 김성철은 뒷짐을 지고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수많은 요정들이 들락날락거리며 장로를 보조했다. 심지어 요정들과 친한 물의 정령까지 나타나 크라이아의 진찰하기까지 했다. “피는 오염되지 않았는데. 완벽하게 깨끗한 피야.” 그렇게 상당한 시간과 토론이 있은 후에야 장로는 대충의 사정을 파악하고 김성철을 불렀다. 장로눈 예상치 못한 사태를 이렇게 분석했다. “어떤 생명이 모든 생명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세계수와 연결된다는 건 어떤 의미로 새가 알로 돌아가는 것과 같소. 세계수와 연결된 자는 영원히 깨지 않는 행복한 꿈이라는 껍질 안에 들어가게 된다오. 자애로운 세계수의 축복 중 하나지.” 예전에 들은 이야기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로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장로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 인간 아이의 육신은 완벽하게 치료됐고 영혼 또한 육신 안에 머물러있지만 아이의 의식은 아직 세계수의 축복이 만든 꿈속의 세계에 갇혀 있소. 그 영원한 꿈은 보통 세계수와 연결이 끊길 때 깨게 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꿈에서 깨지 못하는 사람도 있소.” 말을 맺으며 장로는 김성철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깨어날 의지가 없다는 소리?” 김성철이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장로는 침음성을 흘리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김성철은 그 대목에서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 “…….” 그는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베르텔기아가 그를 뒤쫓아 왔다. “응? 그냥 가는 거야? 기껏 살려놓았는데 눈 뜨는 거 보지도 않고?” “조금 피곤하군. 한 숨 붙이겠다.” 김성철은 성큼 걸음으로 세계수의 뿌리 밑을 빠져나왔다. 홀로 남은 베르텔기아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김성철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지켜보았다. ‘뭔가 이상해. 재앙의 무기 때문일까?’ 라그란제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그때 당시 김성철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사악한 열락에 젖어 있었다. 반면 현재의 김성철을 지배하고 있는 건 발도 닿지 않는 깊은 권태감이다. ‘그래. 그냥 지친 거겠지. 자진해서 빚쟁이가 됐으니까. 아빠도 그랬잖아. 빚지고 사는 것만큼 힘든 인생도 없다고.’ 베르텔기아가 그렇게 혼자 열심히 궁리를 하고 있자니 뒤에서 마라키아가 아장아장 걸어오더니 검은 날개로 베르텔기아를 툭하고 쳤다. “어이. 리빙 북.” 마라키아가 베르텔기아에게 말을 거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베르텔기아는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아차...!’ 베르텔기아가 비록 서열 2위라고 하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모범적인 호가호위. 김성철이 옆에 없으면 베르텔기아는 서열 2위는커녕 마라키아의 장난감조차 되지 못한다. “저 인간 여자는 누구냐?” 다행히 마라키아에게 적의는 없어보였다. 베르텔기아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서열 2위로서의 자부심과 오기가 빠르게 되살아나는 걸 느끼며 평소처럼 뾰족한 말투로 자신이 알고 있는 김성철과 크라이아의 관계를 이야기해줬다. “음...” 마라키아는 이야기를 들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베르텔기아의 간략한 이야기는 세계수의 뿌리 아래로 통하는 동굴 바깥으로 나왔을 때 대충 끝을 맺었다. “정말 어리석은 인간이군.” 이야기를 전부 들은 마라키아는 한심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나는 고귀한 몸으로 백성들의 저속한 언어엔 조예가 그다지 깊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날개와 부리를 지닌 종족이 가장 빈번하게 그리고 악독한 뜻으로 쓰는 욕설을 알고 있지.” “엥?” 베르텔기아는 깜짝 놀라 책장을 흔들며 마라키아를 응시했다. 뜬금없이 욕설론을 전개한 의중이 갈피가 잡히지 않아서다. 베르텔기아의 반응 따윈 아무래도 좋은 마라키아는 하늘 위에 걸린 허공의 강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뻐꾸기에게 탁아당한 놈이라는 욕이다.” “뻐꾸기에게 탁아당한 놈...?” 베르텔기아에게 눈이 있었으면 몇 차례나 껌뻑거렸을 것이다. “그게 우리 나하크 족이 할 수 있는 가장 악독한 욕이지. 내가 볼 때 김성철은 그 문제의 뻐꾸기에게 탁아당한 놈으로 보인다....!” “흐으으음....” 그제야 베르텔기아는 마라키아가 뭘 말하려는지 알거 같았다. “그러니까 뻐꾸기가 라이즈라는 여자라는 소리지?” “그래. 알은 저 잠자는 인간 여자고.” “아.. 그거 말은 되긴 되네.”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군.” 마라키아의 눈동자가 매섭게 번득였다. 베르텔기아는 마라키아의 부리부리한 눈동자에 쓸데없는 자존심이 불타오르는 걸 발견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 뭘 하려는 거야?” “내가 저 인간 여자를 깨워보지.” “무슨 수로...?” “인간은 고통에 반응하지.” 마라키아는 아직 덜 여물었지만 날카로움이 남은 부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부리로 쪼갰다는 소리다. 베르텔기아는 그 길로 김성철에게 다가가 잠자는 김성철을 깨워 마라키아의 만행을 일러바쳤다. 다행히 마라키아가 크라이아를 쪼기 전에 김성철이 적시에 도착해서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삐기이이이이....” 마라키아를 제압한 김성철 앞에 베르텔기아가 다가 불쑥 말했다. “내친 김에 당신이 저 애를 깨워보는 건 어때?” “무슨 방법으로?” 아직 채 피로가 가시지 않은 김성철은 하품을 하고는 기지개를 폈다. 베르텔기아는 그런 김성철을 빤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안개여정이 있잖아.” “안개여정이라...” 확실히 타인의 꿈의 세계로 진입할 능력이 있는 안개여정이라면 잠에서 깨어나지 않으려는 여자아이를 깨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왠지 꺼려진다. 가까운 사람의 꿈을 들여다보는 건 단순히 모르는 무언가를 아는 것 이상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굳이 알 필요가 없었던 일면을 아는 두려움, 혹은 기대. 그런 것들은 김성철과 친하지 않은 속성이다. “멍하니 잠만 자는 거 보다 그냥 빨리 끝내는 게 나을 거 같은데. 할 일이 많잖아. 거신부터 시작해서... 거신으로 끝나는....” “…….” 딱히 움직일 마음은 없지만 베르텔기아의 잔소리를 듣고 있다 보니 귀찮아서라도 안개여정을 써야 겠다는 마음이 문득 들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와 함께 다시 크라이아가 잠들어 있는 세계수의 지하로 향했다. 크라이아는 어느새 요정들이 마련해놓은 요와 이불을 덮고 세상모르게 편안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깨우기 미안해질 정도의 행복감이 얼굴에 서려 있었다. 김성철은 그 얼굴을 보고 조금 망설였지만 뒤에서 지켜보는 베르텔기아의 시선을 느끼고 안개여정을 꺼내들었다. “나도 같이 갈게!” “…….” 딱히 동행하고 싶진 않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 손으론 베르텔기아를 품고 다른 한 손으론 안개여정을 쥔 채 크라이아의 포갠 양 손을 한 번에 덮을 정도로 큰 손을 살포시 덮었다. 꿈으로의 여행. 알 수 없는 삼라만상들이 휙휙 지나가고 이윽고 햇살로 가득 찬 화려한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와.”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베르텔기아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맺혔다. “여긴 어디야? 진짜 예쁘네. 저기 저 꽃 좀 봐. 관목으로 만든 미로도 있어!” 천진난만하게 기뻐하는 베르텔기아와 달리 김성철은 아름다운 정원을 눈에 담는 순간 머리 지끈한 두통을 느꼈다. ‘이제는 불에 타 다시는 안 봐도 될 거라고 생각했던 장소가 생생하게 다시 눈앞에 재현됐군.’ 그곳은 크릭프리드의 장원이다.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남의 처가 된 라이즈 하이메르가 몇 번이고 마법인화로 현상한 사진을 보내서 눈에 익은 장소다. 라이즈 하이메르는 마음을 알 수 없는 여자였다. 마음을 준 것 같으면서도 다시 돌아보면 다른 곳을 보고 있다. 반란군이 루테기네아 왕국을 패망시킨 후 왕족들의 처우는 중요한 협상 테이블의 주제였다. 김성철과 연분이 있던 라이즈 하이메르의 처우 또한 그 중 하나였다. 패했다고 하나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지닌 구 루테기네아 호족들은 비록 왕실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하나 크롬갈드 왕으로부터 직접 지명 받아 수양딸이 된 라이즈를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소환자의 배필로 보내는 걸 탐탁치않게 여겼다. 반란군의 중역들도 과정은 다르지만 루테기네아 호족들과 결론을 함께하고 있었다. 선두와 최후미를 가리지 않고 가장 위험한 곳에서 치열하게 싸운 황제의 오른팔이 왕실의 피조차 섞이지 않은 근본 없는 여자와 짝이 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여겼다. 좋지 않은 소문들이 라그란제의 거리에 파다하게 퍼지는 가운데 황제가 될 남자, 윌리엄은 김성철과 독대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주례를 서겠다.” 그때 김성철은 정확히 뭐라고 대답한 지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도 라이즈 하이메르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말한 걸로 기억한다. 진심이 100% 반영된 의견은 아니었다. 심적으로 흔들리고 있기에 누군가에게 의지하려는 치기가 분명 섞여 있었다. 그 어물쩡한 선택의 결과가 바로 눈앞에 펼쳐진 장원이다. 라이즈 하이메르는 김성철이 가장 싫어하는 사내를 자신의 배우자로 선택했다. 김성철의 막연한 기대는 보기 좋게 거절당했고 그는 선택받지 못한 자의 쓰라림을 느껴야 했다. “얼굴이 왜 그래? 맛없는 음식을 먹었을 때 짓는 표정을 짓고 있고.” “…더럽게 맛없는 풍경이군.” 김성철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성큼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꿈의 세계가 그나마 좋은 건 시드미아 전에서 넝마가 된 코트가 완벽하게 부활한 형태로 재현되었다는 정도? 김성철은 마음을 짓누르는 풍경을 휙휙 지나가며 라이즈 하이메르의 딸을 찾았다. 곧 김성철은 찾던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다가가지 못했다. 아이의 곁엔 라이즈 하이메르가 있었다. “…….” 아무리 꿈속에서 존재라고 해도 지금 김성철 앞에서 살아 움직이고 숨쉬고 말하며 미소 짓는 라이즈 하이메르는 그가 알던 여인과 모든 부분에서 일치했다. 김성철은 순간 가슴 안쪽에 강한 쓰라림을 느끼고 눈을 찡그렸다. “응? 갑자기 왜 멈춰?” 뒤따라오던 베르텔기아가 딱딱하게 굳은 김성철을 발견하고는 이윽고 저 멀리 아이와 함께 놀아주고 있는 라이즈 하이메르를 발견했다. ‘아.. 저 여자가... 그....’ 생각한 것만큼 미인은 아니다. 예쁜 걸로 치면 클라리스나 마커레이드가 라이즈 하이메르보다 훨씬 위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하지만 곧 베르텔기아는 느낄 수 있었다. 라이즈 하이메르가 안에 품고 있는 내면의 빛을. 활달하고 장난기 많은 그녀는 재치 있게 크라이아의 칭얼거림을 넘기며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놀아주고 있었다. 아이를 돌 본 경험이 많은 베르텔기아는 아무리 자신의 자식이라고 해도 저렇게까지 즐겁게 놀아주는 건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밝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한 사내가 정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건장한 체격에 조각을 깎아 만든 것 같은 수려한 외모, 그리고 턱없이 순수한 눈빛을 지닌 사내였다. 그 사내가 나타나자 크라이아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환한 표정을 지으며 그 사내에게 달려갔다. “아빠!” 베르텔기아는 그 대목에서 김성철의 옆모습을 힐끗 쳐다보았다. 잠시 노곤했던 김성철의 얼굴엔 황량한 쓸쓸함이 그늘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뭘 그리 풀이 죽어 있어? 아신을 보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은 남자가 말이야!”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등을 턱하고 치며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나저나 저 아이를 이 꽃밭 같은 세계에서 빠져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가정파괴범이라도 되야 하는 거 아니야?” 베르텔기아는 허리까지 자란 금발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가정파괴범이라....” 김성철은 멍하니 베르텔기아가 한 말을 읊조리고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화들짝 놀라며 김성철의 등을 손으로 떠밀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일단은 저 저택 안에나 한 번 들어가 보자고. 혹시 알아? 뭔가 단서가 있을 지!”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에게 등이 떠밀려 자신의 의사에 반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 74. 무뎌지는 것 (2) 저택의 내부는 적당히 화려하면서도 과하지 않은 장식물들이 곳곳에 자리 잡아 기품 있고 균형 잡힌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예술에 조예가 거의 없는 김성철의 눈에도 상당히 훌륭한 인테리어다. 현관 복도를 걸어 로비에 이르렀을 때 김성철의 눈을 사로잡은 물건이 하나 있었다. 현관 쪽에서 마주보이는 로비의 벽면에 보란 듯이 장식 된 목검이다. 겉보기엔 물푸레나무를 깎아 만든 그다지 정성을 들이지 않은 투박한 목검에 불과하지만 김성철에게 그 검은 뜻깊은 물건이다. 목검의 검신엔 엉성하게 새긴 고대어가 적혀 있다. 그 뜻은 드문 용기. 한 번 입장하면 내가 죽거나 혹은 적을 죽여야 나올 수 있는 루테기네아 투기장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제3의 길. 즉, 사면의 증표다. 김성철과 반나절 동안 벌였던 끔찍한 전투의 포상으로 말이다. 물론 김성철도 같은 목검을 받았다. 다만 세계의 적으로 몰려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치는 와중에 잃어버렸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소문에 의하면 크릭프리드의 장원에 있던 목검도 크릭프리드 가의 몰락 후 경매장을 전전하는 동안 불에 타 없어졌다고 한다. 김성철은 두 개의 마주보는 계단 중앙에 자리 잡은 사면의 목검 앞에 서서 한참동안 그것을 지켜보았다. “으음... 당신이 쓰기엔 너무 약한 무기가 아닐까?”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베르텔기아가 퉁명스레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지.” 김성철은 목검에서 눈을 떼고 계단을 올랐다. 거울처럼 반짝이는 난간을 잡고 계단을 전부 오르자 붉은 양탄자가 깔린 복도 주위로 늘어선 수많은 방문이 보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김성철이 잠시 머뭇거리자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일단 그 꼬마가 쓰는 방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의 의견을 좇아 크라이아가 쓸 법한 방으로 이동했다. 수많은 방문을 하나하나 열어보는 와중에 베르텔기아가 입을 열었다. “그 크라이아란 꼬마. 어떤 아이야?” “그건 왜 묻지?” 김성철이 아무 것도 없는 빈 방문의 문을 닫으며 되물었다. “그냥 궁금해서.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당신이 죽자고 살리려는 애가 누군지 궁금한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는 법이지.” 김성철은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난 고양이가 아닌 걸.” 베르텔기아는 양 손을 머리 옆에 갖다 대며 동물의 귀인양 손바닥을 활짝 펼쳐 보였다. “카벙클인걸.” “…….” 김성철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생각지도 않은 지점에서 느닷없이 닥쳐온 베르텔기아의 애교에 허를 찔린 것이다. 잠시 후에 경직에서 풀린 김성철이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카벙클은 딱 질색이다. 하늘 다람쥐가 백 배 낫지.” “쉿! 카벙클들이 그 말 들으려면 어쩌려고 그래? 당신이 좋아하는 페어리라이트 쇼도 못하게 되는 수가 있다고.” 베르텔기아의 쉬지 않는 맹공에 김성철은 이 대목에선 입을 닫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원래 말 많은 녀석이지만 꿈의 세계에선 더욱 말이 많아지는 것 같아.’ 김성철은 서둘러 복도를 걸었다. 그러나 베르텔기아는 그런 태도를 용납할 정도로 관대하지 않다. “크라이아가 어떤 아이인지 아직 못 들은 거 같은데? 카벙?” “…….”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면 계속해서 따라붙으며 괴롭힐 기세다. 김성철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조용하고 말 수 적은 아이였다.” “아. 그래?” 베르텔기아는 그제야 카벙클의 귀랍시고 머리 옆에 댄 손을 풀며 허리를 세웠다. “그게 전부?” “말도 잘 들었지. 너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내가 뭘? 밥 안 줘도 밥값 자주 하는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 말로는 이길 수 없다. 김성철은 입을 꾹 다물고 다음 방문을 열었다. 놀이방으로 보이는 화사한 방이었다. 잡다한 장난감과 인형, 그리고 작은 애완견 한 마리가 동물침대에서 눈을 붙이고 있었다. 김성철은 방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어질러진 장난감을 무심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베르텔기아는 김성철 앞으로 걸어가더니 쪼그리고 앉아 바닥에 널린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흐음. 부잣집 아이는 다르네. 장난감 다양한 거 좀 봐. 우리는 닭발가지고 놀았는데.” “닭발?” 김성철이 의아해하며 묻자 베르텔기아는 손에 뭔가 쥐고 잡아당기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닭 잡고 남은 발 있잖아. 삐져나온 인대 잡고 이렇게 잡아당겨서 놀잖아. 안 해 봤어?” “…….” 김성철도 충분히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그런 걸 가지고 논 기억은 없다. 아니, 그런 게 있다는 이야기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응? 없어?”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당혹스런 얼굴을 보고 얼굴을 불쑥 내밀며 다시 물었다. “…진짜 없어?” “없다.” “그럼 뭐하고 놀았어?” “알아서 뭐하게.” 김성철은 다음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방문 앞에 서자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성철의 몸이 살짝 굳으며 그는 베르텔기아를 돌아보며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방문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크라이아 가족의 것이기 때문이다. 조심스러워 질 수 밖에 없다. 뒤이어 김성철이 멈칫한 이유를 알아 챈 베르텔기아가 문고리를 잡았다. 김성철이 만류하자 베르텔기아는 희희낙낙하며 말했다. “뭐 어때. 문 열어도 신경도 안 쓸 거야. 여긴 꿈의 세곈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베르텔기아는 방문을 열어젖혔고 문 너머에 가려져 있던 풍경이 김성철 눈앞에 펼쳐졌다. 그곳은 크라이아의 방이었다. 공주님 풍의 실크로 만든 모기장이 달린 작지만 화사한 침대 옆에 크라이아 일가족이 모여 행복한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이건 뭐라고 읽게? 응? 안 들리는데? 좀 더 큰 소리르 말해줄래?” 작은 책상 앞에 앉은 크라이아 옆에 크릭프리드와 라이즈가 붙어 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다. 크라이아는 끙끙대며 책상 앞에 놓인 책을 읽다가 이내 뒤로 발라당 넘어지며 큰 대자로 뻗었다. “못하겠어!” 라이즈는 그런 크라이아를 보며 혀를 끌끌 차며 묵묵히 서 있는 크릭프리드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장난기 묻은 어조로 말했다. “우리 딸. 당신 닮아서 머리가 나쁜 모양이네. 날 닮았으면 이런 쉬운 책은 하루 만에 독파했을 건데!” “어린 애가 너무 똑똑하면 귀엽지 않잖아?” 크릭프리드는 털털하게 웃으며 바닥에 벌러덩 누운 크라이아를 안고 높이 들어 올려주었다. “…….” 더할나위 없이 행복한 일가족의 모습이었지만 김성철에겐 무겁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그는 뒷걸음질 쳤고 곧 뒤돌아섰다. 베르텔기아는 그런 김성철의 미약한 표정의 변화를 커다란 푸른 눈으로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김성철이 방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크릭프리드의 품에 안겨 활기차게 웃던 크라이아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김성철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베르텔기아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김성철의 옆모습을 본 크라이아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걷히는 걸. 문득 저택의 풍경이 변했다. 방을 나선 김성철은 갑작스레 저택 안에 안개라기보다는 뭔가를 태운 연기 같은 것들이 가득 찬 걸 발견했다. “…….”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꿈의 세계가 요동치는 모양이야.” 베르텔기아가 변화하는 풍경을 보며 말했다. “오늘은 이 정도만 하고 나갈까?” 김성철의 말에 베르텔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성철의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둘은 가던 길을 돌아가 저택의 입구로 향했다. “그 꼬마 말이야.” 베르텔기아가 불쑥 입을 열었다. “꽤나 활달한 거 같던데? 가족한테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성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먼 거 같더라.” “그러고 보니 그런 점도 없잖아 있군.” 김성철은 또 다시 피로가 몰려오는 걸 느꼈다. ‘빨리 여기서 나가서 잠이나 한 숨 자야겠어.’ 그런데 복도를 걷던 중이었다. 김성철과 베르텔기아는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크라이아의 울음소리다. 그것은 1층으로 내려가는 층계 바로 옆에 위치한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처음 지나쳤을 때 닫혀있었던 문은 어느새 활짝 열려 있었다. 커튼 틈 사이로 희미한 석양이 점차 어둠으로 변화하는 방안에서 두 모녀가 쓸쓸한 적막 속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크라이아의 꿈속에서 발견하는 처음으로 어두운 일면.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저기 좀 봐!” 김성철은 몰려드는 피로감 때문에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베르텔기아의 눈에 비친 방안의 풍경은 기회로 보였다. 제3자인 베르텔기아의 눈으로 봤을 때도 크라이아 일가족의 모습은 행복을 그대로 형상화하여 옮긴 것처럼 보일 정도로 완전무결했다. 꿈의 세계야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다고 하지만 지금 같은 모습이 재현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지금이 기회야.’ 베르텔기아는 이번에는 아예 김성철 앞을 양 팔을 벌려 가로막았다. “저길 좀 보라고. 잠은 나중에 자고!” 베르텔기아에게도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김성철이 크라이아 가족의 행복한 일상을 보고 괴로워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해 김성철이 지금 지쳐 있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왕 매를 맞을 거, 한 번에 맞고 전부 끝내는 게 현명한지도 모른다. “여기 한 번만 돌아보고 나가자. 응?” 김성철은 앞을 가로막은 베르텔기아를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이윽고 얕은 한숨을 토해내고 방으로 향했다. 과연 방안엔 지금까지와 이질적인 어두운 분위기가 팽배하게 퍼져 있었다. “어쩌면 여기가 그 꼬마를 현실로 돌아오게 할 출입구인지도 몰라!” 베르텔기아가 달아오른 목소리로 김성철을 격려했다. 묵직한 피로감 속에서 김성철은 천천히 방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서럽게 흐느끼는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아빠... 아빠는 어디 있는 거야?” 김성철은 크릭프리드의 최후를 알고 있다. 본의는 아니라고 하나 루테기네아를 상징하는 아이콘 중 하나였던 그는 대내외적으로 치열한 공격을 받았고 갖은 모략에 휩싸였다. 수많은 송사가 벌떼처럼 일어나 막대한 재산을 하나 둘 잃어가던 중 그는 소리 소문 없이 실종됐다. 사람들은 그가 자결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드래곤처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자결하는 루테기네나 옛 귀족들의 옛 전통을 좇아서. “지금이 기회야. 한 번 말을 걸어보는 게 어때?” 베르텔기아가 멍하니 서 있는 김성철의 팔을 흔들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때 크라이아를 꼬옥 껴안은 여자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아빠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갔단다.” “약속...?” “오래된 약속이란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렴. 아빠는 신의 곁에 있으니.” 라이즈 하이메르의 목소리다. 김성철의 발걸음이 멈췄다. 뒤이어 밤안개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사랑하는 크라이아야. 너도 할 일이 있단다. 착한 우리 딸이라면 엄마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지?” “부탁...?” 크라이아가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라이즈 하이메르의 입이 살짝 열렸다. 김성철은 순간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피로감이 날아가는 걸 느끼며 정신을 집중했다. 다음 순간 풍경이 변했다. 김성철 일행은 어두운 방안 대신 하얀 대리석 타일이 깔린 정원에 있었다. “응? 여긴 어디지? 갑자기 무슨 일이야?” 베르텔기아가 주변을 돌아보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딱 좋은 순간에!” 그런데 김성철의 반응은 베르텔기아와 정반대였다. 그의 눈동자엔 놀라움이 가득 차 있었다. ‘이곳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10년을 넘게 산 보금자리를. 비록 연기에 가까운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지만 김성철은 어렵지 않게 그곳이 자신이 살던 라그란제 1구역에 위치한 자신의 저택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저기! 그 꼬마야!” 베르텔기아가 손가락으로 안개 너머를 가리켰다. 과연 저 너머에 크라이아가 홀로 대리석 타일 위를 따라 걷고 있었다. “따라가자!”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손을 잡고 앞으로 잡아끌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에 이끌려 크라이아의 뒤를 쫓았다. 과연 안개 너머에 김성철의 옛 저택이 우뚝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분명 김성철의 저택이었건만 그 분위기는 크릭프리드의 저택과 분위기가 상반됐다. 전자가 빛으로 충만한 화원 같은 느낌이었다면 후자는 음산하고 귀기어린 처형장과 같은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김성철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아우성이 울려퍼지는 걸 느끼면서 점점 등을 보이고 있는 작은 소녀를 향해 다가갔다. 손이 닿을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 저택의 문이 열렸다. 김성철은 열린 문 안에서 건장한 체구의 사내를 보았다. ‘저.. 저건?’ 짙은 푸른색의 원단으로 만든 절제되면서도 우아한 정장. 등 뒤에 찬 늠름한 크럼부이. 틀림없다. 저건 김성철의 옛 모습이다. 제국대원수라 불렸던 그리웠던 시절의. 김성철은 은근한 고양감이 마음 속 깊은 곳을 울리는 걸 느끼며 시선을 위로 들어올렸다. 궁금했던 것이다. 크라이아의 눈에 비친 자신의 옛 모습이 말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얼굴까지 시선을 올렸을 때 그는 원하지 않았던 장면에 직면했다. 제국대원수의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엔 돌로 만든 무서운 석상의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웃지도 떠들지도 않고 따라서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석상의 얼굴을 본 순간 김성철의 움직임이 멈췄다. 베르텔기아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이 나오는 걸 양손으로 틀어막으며 속으로 충격을 달래야 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크라이아가 깨어나지 않는 이유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곳에 있었다. 진실은 이러하다. 크라이아는 김성철을 좋아하지 않았다. 눈물이 샘솟듯이 나와 눈가를 적시는 걸 느끼며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을 잡아끌었다. “뭐하는 거야? 가자. 어서.” 김성철은 잠깐 경직됐을 뿐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만용이나 약점을 감추려고 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어떤 느낌도 들지 않았다. 분명 슬퍼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 죽을 고생을 하며 살리려 했던 아이가 가장 싫어했던 사람이 자신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것만이 이유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김성철은 그 정도로 속이 좁은 남자가 아니다. 김성철은 중요한 무언가가 퇴색되어가고 있음을 인지했다. ‘졸리는군.’ 잠시 잦아들었던 졸음이 다시 찾아왔다. * 은자의 탑. 재앙의 서 앞엔 각국에서 파견된 수많은 사신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단 하나. 재앙의 서에 나타나고 있는 심상치 않은 징조와 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전쟁의 재앙을 암시한 세 번째 재앙이 기재된 부분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확정적인 문구로 바뀐 이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언제나처럼 떠들썩한 군중 사이에서 손가락 하나가 솟아올라 재앙의 서를 가리켰다. “저기 봐! 글씨가 변했어!” 누군지 모를 사내의 외침이 울려 퍼진 직후 자리에 모인 모든 사신들의 이목이 재앙의 서에 집중됐다. 불에 타 사라진 두 번째 재앙의 문구 아래 변화하던 세 번째 재앙의 문구가 하나씩 고정되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전혀 달라진 세 번째 재앙의 새로운 형태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 동쪽 바다에서 날아온 황색의 죽음이 오래된 기둥에 닿기 전에 대륙 위엔 오직 하나의 왕관만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산 자들은 보게 될 것이다. 진정한 신의 분노가 이 땅에 강림하는 것을. ] ======================================= 75. 움직이는 왕들 (1) 바깥엔 혹한의 추위를 머금은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누추하지만 사람으로 붐비는 주점. 일렁거리는 불빛 사이 사람들의 그림자가 쉴 새 없이 지나가고 화롯불 옆에선 음유시인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옛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온 세상 백성들의 염원과 바람을 가슴에 새기고 험지로 전진 하네 지금은 이름조차 전하지 않는 일곱 명의 영웅. 그들의 최후의 싸움을 본 자는 누구인가! 그 노래의 운율과 곡조는 아름답고 가사 또한 유구한 과거의 고사로부터 내려오는 깊은 의미가 있었지만 한 가지 부분이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칠영웅이 무슨 영웅이야? 재앙이 되서 나타난 것도 영웅인가?” 한 취객의 성난 일갈에 음유시인은 잠시 노래를 멈추고 양해를 구해야 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가 사과할 문제는 아니다. 문제의 노래는 작자미상의 작가에 의해 수천 년도 전에 만들어진 노래이므로. 아마도 동부 출신으로 보이는 취객들의 소요는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구석에서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난 건 그 즈음이었다. 육중한 흉갑 위에 검은 표범의 털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걸친 사내였다. 비록 얼굴은 두건이 만들어 낸 음영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주점 안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건장한 체구와 육중한 장비에 한 번 놀랐고 그리고 그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형의 위압감에 또 한 번 놀랐다. 수수께끼의 사내는 취객들에 둘러싸인 음유시인에게 다가갔다. 흉포한 늑대처럼 날뛰던 취객들은 그 사내를 보자 순한 양이 되어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비켜줬다. 숨 막힐 것 같은 적막 속에서 사내가 말했다. “가사를 이렇게 바꿔보는 건 어떻겠나? 일곱 명의 영웅 대신 한 명의 영원한 왕으로.”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몸 구석구석을 떨리게 하는 위엄 넘치는 음성에 음유시인은 기립한 채 고개만 그저 끄덕였다. 수수께끼의 사내는 음유시인의 어깨를 두드리고 그에게 하나의 금화를 내민 다음 주점을 떠났다. “손님! 바깥엔 엄청난 눈보라가 휘몰아칩니다. 하룻밤 묵어가시는 건 어떤가요?” 뒤늦게 주점 주인이 다가왔지만 그 사내는 대꾸 없이 주점의 문을 열고 사라졌다. 잠시 정적이 찾아왔던 주점 안은 사내가 사라지자 다시금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음유시인에게 몰려와 그의 행운을 부러워하며 음유시인의 손바닥 위에 놓인 금화를 시기심 혹은 부러운 눈으로 응시했다. 웅성임 속에서 한 노인의 고성이 갑작스레 터져 나왔다. “아니, 이건 루테기네아 금화 아닌가?” 그 한마디에 음유시인에게 별 관심이 없던 사람까지도 홀 안으로 몰려들었다. 한 상인이 음유시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금화를 감정했다. “틀림없다. 이 완벽한 순도. 불순물이라고는 하나도 섞이지 않은 이 완벽함. 이 금화는 오직 루테기네아 왕만이 발행할 권한이 있는 진짜 루테기네아 금화요. 상인연합회가 찍어 낸 쓰레기 금화완 궤를 달리하지.” 느닷없이 금화를 받은 것도 행운인데 그 금화가 여간한 금화보다 훨씬 가치가 높다는 말에 음유시인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서둘러 비파를 치며 아까 욕을 먹었던 문제의 노래를 불렀다. 뜻밖의 행운을 안겨 다 준 이름 모를 나그네의 귀에 들리기를 소망하며. 휘이이이~ 주점의 바깥엔 주인의 말 대로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의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하지만 수수께끼의 사내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하게 하얀 눈발이 몰아치는 시커먼 어둠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의 앞엔 해독할 수 없는 문자를 새긴 가면을 쓴 호리호리한 여성이 길을 막고 서 있었다. 그녀는 수수께끼의 사내를 보자 고개를 숙여 예를 표시한 후 공손하게 무릎을 꿇었다. “폐하.” 주점 안의 사람들 중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혹 그런 안목이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수수께끼의 나그네 앞에 무릎을 꿇은 여자는 세계 전역에 명성을 떨치는 대륙이걸 아퀴로아와 동일한 신상착의를 지니고 있기에. 세상에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퀴로아가 무릎을 꿇는 존재는 한 명뿐이다. 구 루테기네아의 폐왕. 대륙삼걸 크롬갈드. “급한 용무가 생긴건가? 그대가 언질도 없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을 보면.” 수수께끼의 나그네는 아퀴로아를 내려 보며 주점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냉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퀴로아는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두 번째 재앙이 해결됐습니다.” 그 말을 들은 두건 안에 소름끼치는 빛이 번득였다. “또 그 자가 해결한 건가? 이계에서 온 그 소환자가.” 아퀴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흐름을 보면 그 사내가 해결한 것이 틀림없겠지요. 하지만 확정적인 건 아닙니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수수께끼의 사내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아퀴로아는 끈기 있게 사내의 말을 기다렸다. 곧 사내의 차디 찬 음성이 울려 퍼졌다. “다음 재앙은? 정해진 수순대로 전쟁의 재앙인가?” “혹 그러했다면 제가 폐하께 폐를 끼치면서까지 예고 없이 나타나지 않았겠지요.” 아퀴로아는 품속에서 양피지 하나를 꺼내 수수께끼의 나그네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사내는 단순히 손을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 양피지를 움직이게 만들어 자신의 눈앞에 대령했다. 그 양피지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 동쪽 바다에서 날아온 황색의 죽음이 오래된 기둥에 닿기 전에 대륙 위엔 오직 하나의 왕관만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산 자들은 보게 될 것이다. 진정한 신의 분노가 이 땅에 강림하는 것을. ] “한 명의 왕을 남기는 재앙이라.” 두건 안에서 재차 기이한 빛이 번득였다. “기이하군.” 사내는 양피지를 내려놓았다. 양피지는 다시 아퀴로아의 손으로 돌아갔다. “그 수많은 재앙의 형태 중에서 해결 가능한 최후의 재앙이 먼저 찾아오다니.” “아마도 그들도 서두르는 것이겠지요.” “서두른다고?” “먼 동쪽 바다에서 모든 것을 죽이는 황색의 낙진이 대륙을 향해 다가온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아퀴로아가 주문을 외워 나그네 앞에 하나의 상을 만들어 냈다. 그 상 안엔 모든 것이 황색으로 변한 세상이 담겨져 있었다. “악신의 재. 태고의 봉인이 풀렸군.” 나그네는 먼 하늘을 보며 읊조리듯 말했다. 한때 왕이었던 사내가 있었다. 스스로 왕관을 버리고 방랑길에 나선 그 사내를 가리켜 세상에서는 방랑왕이라고 칭했다. 왕관도 영지도 따라서 백성도 없는 그는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방랑왕 크롬갈드는 두건을 벗었다. 옆에 부복한 아퀴로아가 그에게 잿빛이 감도는 철로 만든 투구를 내밀었다. 안쪽이 훤히 뚫렸지만 결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는 투구. 방랑왕은 자신을 상징하는 잿빛 투구를 쓰고 뒤돌아섰다. 눈발 사이로 뿌옇게 보이는 여관 안에서는 음유시인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은 이름조차 전하지 않는, 한 명의 영원한 왕. 슬프고 애절하면서도 경건한 음색의 노랫말이 반복해서 들려오는 가운데 방랑왕은 다시 뒤돌아서서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왕관을 찾을 때가 왔다.” 그 한마디를 남기고 왕관 없는 왕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짙은 한 밤의 어둠이 그의 모습을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 인간제국의 수도 라그란제. 그 최정상에 위치한 허공궁궐. 제국의 황제는 황금으로 만든 권좌에 앉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중신들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한 명의 왕이라.” 그의 시선은 좌우로 늘어선 수많은 대신들을 굽어보다 이윽고 화려한 정장을 입은 젊고 호리호리한 체구를 지닌 젊은 여성에서 멈췄다. 그가 손짓하자 옆에서 시종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도 방위사령관 아무개. 황제 폐하 스무 걸음 앞에 설 것을 명한다.” 아르큐부스의 뒤를 이어 제도 방위사령관이 된 아무개는 굳은 얼굴로 황제 앞에 섰다. 황제가 손을 두 번 젓자 궁정마법사들이 일제히 주문을 영창하며 황제와 아무개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막과 무음 결계를 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떤 소리도 새어나가지 않는 공간 안에서 황제가 아무개를 노려보며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도 방위사령관.” 아무개가 평범한 회귀자가 아니라는 것은 지난날의 수많은 경험들이 증명하고 있다. 라그란제에서 일어난 대참사가 아무개의 능력에 회의를 품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었지만 그 사건은 아무개의 상관인 아르큐부스가 아무개에게 미래를 전해 듣고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실책으로 넘어갔다. 지엄한 인간제국의 황제가 세계의 적에게 패해 부상까지 입은 경천동지할 사건은 아무개의 입지를 위협하기는커녕 제국 내의 그녀의 입지를 더욱 강하게 세우는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지금 황제가 아무개를 대하는 태도가 아무개의 바뀐 입장을 온 천하에 드러내고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나?” 황제가 물었다. 아무개는 즉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하루에 수백 명이 넘는 사람을 접견하는 황제다. 그는 아무개가 대답을 꺼려하는 걸 파악하고 다시 물었다. “문제라도 있는가?” “폐하.” 아무개가 대답했다. “정직하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무개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황제를 똑바로 올려다 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 이 세상엔 제가 모르는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의지?” 황제의 말에 아무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겪었던 미래와 진행되는 현재가 조금씩 괴리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무개는 슬며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말은 자폭에 가까운 말이었기 때문이다. 미래를 못 읽는 회귀자 만큼 쓸모없는 존재도 없으니. 황제는 잠시 침묵한 채 허공을 바라보았다. 곧 위엄 넘치는 음성이 권좌 위에서 울려 퍼졌다. “그래서, 미래를 알 수 없다는 말인가?” 아무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완전히 틀어진 건 아닙니다. 단지 두 번째 재앙이 조기에 해결되었을 뿐.” “그렇다면 말하라. 앞으로 벌어질 미래를.” 황제의 목소리엔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그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한 사람이다. 이렇게 특별히 시간을 낸 것도 황제로선 특단의 결단이다. 따라서 이런 말장난 같은 소리를 들은 시간은 하나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무개를 쏘아본 순간 아무개의 목소리가 비수처럼 그의 귓가에 박혔다. “폐하께서는... 왕관을 잃으십니다.” “…….” 황제의 얼굴엔 한 점의 변화도 없었다. 아무개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런 곳에서 덜미를 잡히다니.’ 물론 그녀는 황제의 궁궐에서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영역 중에서 가장 엄중한 경계망을 지닌 암살교단의 궁전마저 제 집처럼 드나든 게 그녀다. 아무개가 빠른 이별을 속으로 준비하고 있을 때 황제의 서릿발 같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누구에게?” 그 질문을 들은 아무개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 그녀가 아는 미래를 이야기했다. “방랑왕 크롬갈드입니다.” 미래에 벌어진 일이지만 황제는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병사 하나, 한 점 떼기 땅, 백성 한 명 없는 그가 무슨 수로 대륙을 좌지우지하는 인간제국의 황제에게 맞서겠는가? 루테기네아의 구 귀족들이 나름 강력한 파벌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황제에겐 절대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공중 함대와 친우 샤말 라지푸트의 조력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아무 말도 없었다. 아무개는 불호령 혹은 조소를 기대하며 다음에 나올 말을 기다리며 슬며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황제의 입가에 떠오른 건 조소도, 불쾌감도 아닌 환한, 꾸밈없는 미소였다. “그런가? 겨우 그런 거 때문에 말을 돌린 것인가?”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는 표정. 오히려 그의 눈동자엔 위엄이라는 이름의 어두운 장막이 걷히고 희망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네가 본 미래가 틀어지고 있다고 했었지?” 황제가 묻자 아무개는 고개를 숙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 진폭이 큰가?” “모든 걸 뒤엎을 정도로 결정적이진 않지만 상당한 폭으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황제의 입에서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황제의 진짜 웃음소리를 들었기 때문일까. 그녀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권좌 위에 앉은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황제는 턱 끝을 쓰다듬으며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회심의 눈빛을 번득이며. “크롬갈드. 너의 치세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세 번째 재앙이 세상에 공표된 지 일주일이 흘렀다. 아직 겨울 속에 묻힌 대륙은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그 이면엔 용광로와 같은 불길이 서서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인간제국 뿐만이 아니다. 드워프 왕국, 고대 왕국 같은 아직 힘이 있는 왕들은 당면한 문제에 대해 나름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고 그보다 못한 군소왕국, 상인연합 같은 독립세력들은 어느 쪽에 붙을 것인가 치밀하게 주판알을 굴리고 있었다. 세상에 멸망 직전의 위기에 놓였는데도 사람들이 단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살아서 왕관을 벗은 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법이다. 여기 왕관 없는 두 명의 왕이 있다. 한 명은 아무것도 없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갖추고 숨어서 때를 기다려왔다. 반면 또 다른 왕에겐 아무것도 없다. “…….” 김성철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쾌청하고 맑은 하늘이었다. 그는 손을 올려 가슴 부분을 쓰다듬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실제로 그렇게 해도 무방하다는 마음가짐이었지만 주어진 운명은 그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다. 심장에 박힌 맹약의 십자가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소용돌이치는 또 다른 전장으로. ======================================= 75. 움직이는 왕들 (2) 크라이아는 세계수의 잎으로 만든 침대 위에 바른 자세로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고 장난기 넘치는 요정들이 그녀 주위를 떠돌며 놀고 있었다. “보코! 니코! 장난은 그만치고 인간 아이에게 세계수의 수액을 먹이는 거예요!” “그건 카미트가 할 인 거예요!” “슈퍼는 같이 놀지 말고 카미트를 찾으러 가는 거예요!” 새처럼 지저귀는 요정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김성철은 팔짱을 낀 채 옆에서 들려오는 장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늘 그렇듯 시간은 대부분의 상처를 치유하오.” 절멸의 저주가 풀린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크라이아는 눈을 뜨지 않았지만 장로는 그다지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세계수와 연결됐다면 모를까 인간의 미약한 육체엔 영원한 꿈을 담을 수 없으며 따라서 금명간에 저 소녀는 눈을 뜨게 될 것이오.” “얼마나 걸리는지?” 요정들의 시간감각에 한 번 데인 적이 있는 김성철이다. 그는 팔짱을 풀고 장로를 응시했다. “당신의 기준으론 몇 달, 혹은 1년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많이 기다릴 순 없소.” 김성철은 심장에 은은하게 느껴지는 이물감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이다. 심장에 박힌 맹약의 십자가가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말이다. 아마도 재촉하고 있는 것이리라. 김성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라고. “오늘 떠나겠소.” 김성철의 뜻은 정해졌다. 그의 성격을 잘 아는 요정들의 장로는 수염을 쓰다듬을 뿐 흔한 만류 하나 하지 않았다. “아이는 우리가 잘 돌보고 있겠소.” “…나하곤 이제 무관계한 이야기요.” 김성철의 눈앞에 구빈원의 더러운 침상에서 죽어가는 여인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약속은 지켰다.’ 그를 무겁게 짓누르던 짐 하나가 사라졌다. 비록 그 결말이 찜찜하다 하더라도 아이를 살리겠다는 약속은 성취했다. 장로는 묵묵히 떠나는 김성철의 뒷모습을 보며 아마도 그는 두 번 다시 이곳에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비슷한 것을 느꼈다. 세계수의 뿌리 아래에서 나온 김성철은 마라키아와 베르텔기아를 찾았다. 마라키아는 하늘 위에 걸린 강 위에 판자대기를 올려놓고 물살을 즐기는 위험천만한 놀이를 하고 있었고 베르텔기아는 그 아래에서 떨어지라고 저주를 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둘을 불렀다. “떠날 시간이다.” 마라키아와 베르텔기아는 곧 합류했다. “뭐야? 벌써 가는 건가? 아직 그 인간 아이는 깨어나지도 않았잖아?” 마라키아는 이 아름다운 정령계를 떠나는 게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요정들에게 순식간에 인기남으로 등극해 왕처럼 군림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던 마라키아에겐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원한다면 여기에 남아도 무방하다.”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묶어둘 마음이 없었다. 혹 그가 여기 남는다고 해도 허락할 작정이었다. “으음...” 마라키아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현왕은 한 곳에 안주하지 않지.” 마라키아는 김성철을 따르기로 마음속에서 굳힌 모양이었다. ‘솔직히 내가 이 유인원보다 훨씬 뛰어나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인간에겐 배울만한 점이 있다. 재앙이 끝난 후에 다시 만들어진 나하크 왕국의 부흥을 위해서라도 일단은 이 놈 밑에서 조금은 보고 배워야겠지.’ 마라키아의 눈이 순간 섬뜩하게 번득였지만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저기, 아기 세계수야!” 베르텔기아와 김성철의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정령계 곳곳에 세계수의 묘목이 심어져 있었다. 묘목이라고 하나 벌써 아름드리 나무에 가까울 정도의 크기. 그런 것들이 정령계 여기저기 퍼져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세계수가 이렇게 많다니.’ 이전엔 보지 못했던 풍경이다. 김성철은 묘목 하나에 다가가 그 아래서 열심히 퇴비와 비료를 나르고 있는 요정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건 뭐지?” “새로운 세계수인 거예요.” “새로운 세계수?” “정령왕께서 씨앗을 내려주신 거예요!” 요정들은 꺄르르 웃으며 김성철 주위를 맴돌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정령왕이라.”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다. 정령계를 다스리는 정령들의 왕. 하지만 그 실체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만날 길도 없다. 요정들의 말에 의하면 정령왕은 정령계가 아닌 불멸자들의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말이다. 그런 정령왕이 갑작스레 정령계에 나타나 요정들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내려줬다는 것은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긴 하지만 김성철의 발목을 잡을 정도로 중요한 주제는 아니다. “으음. 저 많은 세계수를 보니 책에서 본 옛 이야기가 떠오르는군.” 마라키아가 세계수들을 보며 불쑥 입을 열었다. “세계수는 재앙의 진행도를 나타나는 척도라는 이야기를 말이야.” “그건 무슨 이야기지?” 김성철이 물었다. “확실한 이야기는 아니야. 고대 문헌에서 본 일종의 근거 없는 가설 같은 이야기지. 아무튼 그 의견에 따르면 재앙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면 대륙 곳곳에 새로운 세계수가 나타나 재앙이 휩쓸고 간 대륙에 새로운 생명의 바람을 몰고 온다고 해.” “…….” 김성철은 주변 곳곳에 심어진 세계수의 묘목의 수를 세어 보았다. 눈대중으로 대충 서른 세 그루의 묘목이 있었다. 마라키아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세계수들이 하나 둘, 죽고 최후의 세계수가 죽으면 그때 새로운 재앙이 내려진다는... 뭐 그런 이야기지.”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군.” “당연하지. 우리들의 지식은 태곳적 시절까지 뻗어 있으니까!” 마라키아가 기고만장하게 언성을 높이자 옆에서 지켜보던 베르텔기아가 불쑥 나타났다. “그렇게 잘난 종족이 왜 망했대?” “삐이....!” 베르텔기아의 한마디는 마라키아의 입을 닫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야말로 서열 2위에 적합한 위엄. 김성철은 요정 카프와 르의 안내를 받으며 아델화이트의 오두막으로 통하는 차원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차원문 앞에서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일단은 은자의 탑으로 갈 생각이다.” 딱히 정한 건 없다. 해야 할 일은 여러 가지가 있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거신과 관련된 창조술사 퀘스트, 90점 이상의 요리 만들기가 있다. 물론 김성철이 보다 흥미를 지니는 건 후자였다. ‘요리에나 한 번 도전해볼까.’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무언가에 심취해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만 어느 순간부터 찾아온 만성적인 피로와 권태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래의 간략한 계획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김성철은 차원문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차원문을 지나자 김성철 앞에 낯익은 오두막 안의 풍경이 펼쳐졌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델화이트가 돌아온 모양이다. 자존심이 조금 상하긴 하지만 김성철은 아델화이트에게 요리에 관한 자문을 구해보리라 생각하며 거실을 향해 걸어갔다. 거실엔 뜻밖의 사람이 있었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 거실의 탁자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두터운 갑주 위에 짐승의 털가죽으로 만든 망투 같기도 하고 외투 같기도 한 것을 걸친 건장한 체구의 사내였다. 김성철은 그 사내의 창백한 초록색 눈동자와 헝클어진 회색 머리, 지쳐 보이는 수려한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방랑왕 아닌가?’ 루테기네아의 옛 왕. 크롬갈드. 그 사내가 아델화이트의 오두막에 있었다. “우와! 국왕 폐하인 거예요!” “정말 오랜만인 거예요!” 요정 르와 카프가 쪼르르 달려가며 방랑왕을 반겼다. 놀라기는 방랑왕도 마찬가지였다. 한 눈에 방랑왕을 알아본 김성철과 달리 방랑왕은 김성철을 한 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방랑왕은 퇴색된 기억 속에서 한 얼굴을 끄집어내고 그 이름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아, 그 사람이었군. 제국 대원수. 아니 요즘엔 세계의 적이라 불리던가.” 방랑왕의 입가에 투명한 미소가 걸렸다. 특별한 악의는 없었지만 김성철은 방랑왕이 자신과 거리를 두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방랑왕은 그 점을 뚜렷하게 밝혔다. “내 비록 대륙삼걸이라는 칭호를 지니고 있긴 하나 그대와 싸울 생각은 추호도 없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양 빈 손을 들어올렸다. 김성철도 방랑왕에겐 특별한 악의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는 비록 대륙십삼걸에 속해 있다고 하나 이 세계를 움직이는 기득권의 중심엔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다. 대륙삼걸이라는 건 그저 허울뿐인 칭호만 있을 뿐 세계의회에서 어떤 발언권도 영향력도 지니지 못했다는 사실은 옛 루테기네아 왕의 현주소라는 건 세계의회의 설립자 중 한 명인 김성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게다가 김성철은 아마도 방랑왕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목숨 하나를 빚지고 있다. 굉장한 석양이 지던 그날, 황제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면 김성철은 투기장 위에서 크릭프리드의 검에 찔린 채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나도 딱히 당신과 싸울 생각은 없다. 싸울 장소도 아니고.” 김성철은 아델화이트의 집을 돌아보았다. 세계의 강자라 불리는 두 사내가 전투를 벌일 경우 아마도 아델화이트의 오두막은 형체도 남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김성철 또한 비어 있는 양손을 올리며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행동으로 나타냈다. 잠시 흘렀던 긴장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누그러졌다. “그대가 아델화이트와 아는 사이라는 건 몰랐군.” 방랑왕이 말했다. 김성철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무뚝뚝한 음성이 울려 퍼지자 방랑왕은 희미한 웃음을 흘리며 옆으로 걸었다. “아델화이트와 나는 오랫동안 아는 사이지. 그대가 아는 것 이상으로.” “그런가?”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루테기네아의 영토에 접한 이 숲이 무사할 수 있었겠는가?” 방랑왕이 발걸음을 멈추고 김성철을 응시했다. 근거 있는 이야기다. 마녀의 저주가 무서워 그 악명 높은 루테기네아 귀족들이 숲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민담보다 말이다. 김성철은 방랑왕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건 거의 15년 만에 처음이다. 제국 대원수 직에 있으면서 김성철이 방랑왕을 본 건 흔치 않다. 몇 번의 전장에서 함께 싸운 적이 있지만 방랑왕은 그 독특한 과거 이력 때문인지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고 다른 이들도 그의 뜻을 존중해 굳이 그를 대화의 장에 끌어내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게다가 대륙삼걸에 방랑왕을 포섭한 건 김성철이 아니라 황제였고 방랑왕은 세계의회에도 출석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하나도 늙지 않았군.’ 방랑왕의 얼굴을 보며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똑같다. 언제나 투구에 가려져 있던 방랑왕의 얼굴은 15년 전, 루테기네아 투기장에서 라이즈 하이메르와 함께 도망쳤다가 그 앞에 끌려 나왔을 때, 그 벌로 투기장의 챔피언인 크릭프리드와 목숨을 건 사투에서 사면을 받아 나무로 만든 검을 직접 수여 받았을 때 눈동자 안에 새긴 얼굴과 하나도 다름이 없다. “아무래도 오늘 중에 아델화이트는 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군.” 방랑왕은 탁자 위에 놓인 투구를 들어올렸다.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그 투구는 왕관대신 방랑왕을 상징하는 신물이 되었다. “서로 불편하긴 피차 마찬가지니 먼저 자리를 뜨지.” 방랑왕은 투구를 눌러쓰며 등을 돌렸다. “국왕 폐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차나 한 잔 하고 가시는 거예요!” 요정들이 떠나려는 방랑왕의 외투를 붙잡았다. “당신이 떠날 필요는 없소. 어차피 난 여기를 나설 작정이었으니까.” 김성철이 방랑왕을 지나쳐 걸어갔다. 김성철이 방랑왕을 지나치는 순간이었다. 방랑왕이 김성철의 옆모습을 보며 불쑥 질문을 던졌다. “두 번째 재앙을 해결한 것도 그대인가?” 김성철은 방랑왕을 지나쳐 오두막의 문 앞에 이른 뒤에야 그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렇다.” 방랑왕의 투구 안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김성철은 방랑왕을 남겨둔 채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방랑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혼각인 천둥방패, 진실의 눈은 그대가 취했나?”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반쯤 열린 문을 다시 닫았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김성철에게 전설급 영혼각인인 영혼수확자, 천둥방패, 진실의 눈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라이즈 하이메르와 김성철 둘밖에 없다. 라이즈 하이메르가 신의 글을 해독해 김성철에게 그 위치를 알려준 것이니까. 그런데 방랑왕은 그 영혼각인의 존재를 알고 있다. 김성철은 방랑왕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것들은 내가 취했다.” “역시 그렇게 된 거군.” 방랑왕은 투구를 쓴 채 의자에 걸터앉으며 흐릿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라이즈 하이메르. 그 계집이 또 내게 거짓말을 했군.” 그의 음성엔 희미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김성철이 불쑥 말했다. “이미 죽은 여자다. 굳이 탓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김성철은 똑똑히 기억한다. 구빈원의 더러운 침상에서 죽어가던 라이즈 하이메르의 최후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 자리에서 라이즈 하이메르는 신에게 이르는 길에 대한 정보를 건넸다. 김성철을 지금 이 자리에 이끈 약속과 함께. 임종을 지켜보진 못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성철은 구빈원의 관리에게 라이즈 하이메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크라이아가 자신의 저택에 찾아온 건 그 뒤였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방랑왕이 말했다. 김성철의 시선이 그의 투구에 닿자 방랑왕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라이즈 하이메르. 그 계집은 살아 있다.” ======================================= 75. 움직이는 왕들 (3) “그 여자가 살아 있다고...?” 김성철의 외견엔 확연히 눈에 보일 정도의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었다. 격양하는 김성철과 대조적으로 방랑왕은 마치 하찮은 일상을 이야기 하듯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답했다. “살아 있다. 거지꼴이 되서 내게 다시 찾아오더군. 천한 핏줄답게 긍지도 명예도 없이.” “…그 말은 사실인가?” 어느 정도 가라앉긴 하지만 여전히 떨림이 남은 목소리로 김성철이 물었다. 그 물음엔 단순한 질문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었다. 즉, 거짓을 말한다면 김성철과 척을 질 수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존재와 말이다. 자칫 답변하기 어려운 무거움이 담긴 질문이었지만 방랑왕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어조로 답했다. “원한다면 만나게 해줄 수도 있다.” 방랑왕의 얼굴은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투구에 가려 볼 수 없었지만 김성철은 방랑왕이 아무 대책 없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라고 판단 내렸다. 방랑왕이 바보가 아닌 이상 김성철과 척을 질 이유가 없다는 배경은 차치하고서 말이다. “하지만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네가 알던 그 계집의 얼굴은 시간의 흐름이 휩쓸려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지 오래니.” “…….” “다시 묻겠다. 원한다면 말하라. 언제든 준비해서 그대 앞에 그 계집을 대령하지.” 그 제안에 김성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어딘가 지친 얼굴로 힘없이 문을 열어 오두막 바깥으로 사라졌다. 그건 마치 도망가는 모양새였다. 방랑왕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김성철이 떠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앗. 제국대원수님께서 가신 거예요?” “인사도 없이 가시다니 서운한 거예요.” 주방에서 차를 타던 요정들이 나타나 김성철을 찾았지만 그는 이미 먼 곳으로 떠난 뒤였다. * “뻐꾸기가 살아 있었군.” 김성철이 저기압인 이유로 숲길을 걷는 내내 한 마디도 못했던 마라키아는 김성철이 야영지를 차리고 식재를 조달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자 기다렸다는 듯 부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가만 생각해보니 그 라이즌가 하는 인간은 뻐꾸기라기보다는 니나니벌에 가까워. 어이 리빙북. 니나니벌이 뭔 줄 아나?” “으응.. 잘 모르겠는데...?” “다른 곤충을 납치해 거기다 알을 까고 새끼에게 먹이는 잔혹한 곤충이지. 설마 그 많은 페이지 중에 니나니벌에 관한 토막상식 조차 없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시정잡배가 보는 잡지와 다를 바가 없는데!” 물론 그 상대방은 베르텔기아였다. ‘이 자식. 말이 왜캐 많아. 진짜 조상 중에 촉새가 있는 것 아니야? 불만이 있으면 면전에서 하던가.’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은 걸 후회하며 마라키아의 이야기를 전부 받아줘야 했다. 하지만 마라키아의 주장 일부분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나하크 족은 타 종족에겐 악독하지만 동족에겐 자비롭지. 물론 하얀 깃털을 지닌 나하카와 푸른 깃털을 나하크 간엔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런데 그 인간에겐 동족에게 지켜야 할 의리도 뭐고 없던 거야. 아까 그 이상한 투구를 쓴 인간의 말마따나 명예도 긍지도 없는 거지.” “어휴. 그러게. 그 사람은 왜 맨날 그렇게 바보처럼 당하고 살까? 우리 아빠도 한 바보 하는데 그 인간은 아빠보다 더 심한 거 같아.” 베르텔기아가 맞장구를 쳐주자 마라키아는 신이 나서 견과류를 부리로 쪼며 중얼거렸다. “얼마 전에 인간들에게 배운 이런 상황에서 쓸 수 있는 적합한 단어가 있지.” “그게.. 뭔데..?” “호.구.” 그때 큼지막한 손이 마라키아의 뒷덜미를 잡았다. “삐기이이이!” 잠깐의 응징 후 김성철은 자리에 앉았다. 베르텔기아가 조심스레 모닥불에 비친 그의 표정을 살폈을 때 그의 얼굴은 평소와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괜찮아?” 베르텔기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을 게 뭐가 있나?” 김성철은 숲에서 잡아온 원숭이의 껍질을 벗겨냈다. 껍질은 시원스레 벗겨졌다. 껍질을 벗긴 원숭이 고기는 통째로 나무 작대기에 꿰인 채 온 몸에 허브 샤워를 받았다. 특히 칼집을 낸 옆구리 부분에 다량의 허브가 들어갔다. 김성철은 모닥불 주변에 타고 있던 장작들을 불씨만 남기는 수준에서 모두 걷어내고 숲에서 베어낸 티크 나무와 유사한 경목을 잘게 잘라낸 땔감을 넣고 원숭이 고기에 연기를 입히기 시작했다. 맛 좋은 훈제를 만들기 위해선 고기만큼이나 연기를 낼 나무의 재질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불러와 고기를 걸어둔 꼬챙이를 빙글빙글 돌려 골고루 연기가 베게 하는 작업을 시켰다. 마라키아는 왕이 이런 짓을 할 수 없다고 버텼지만 10초도 가지 못해 고집을 꺾어야 했다. 훈제 고기가 준비되는 동안 냄비 하나를 준비해 우유와 스톡을 넣어 맛을 낸 스프에 숲에 만든 버섯과 원숭이 눈알을 넣어 스프를 만들었다. 김성철의 요리를 질색하는 마라키아도 눈알 스프 요리만은 높게 평가했다. “인간의 요리치고는 운치 있군.” “한 번 들어 볼텐가?” 김성철이 마라키아에게 묻자 마라키아는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미안하지만 인간의 요리는 먹지 않아. 푹 썩기 직전의 고기의 감칠맛도 모르는 것들과 어찌 맛을 논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혼자 들지.” 김성철은 부글부글 끓어오른 스프를 스푼으로 떠 음미했다. 나쁘지 않은 맛. 하지만 원숭이 눈알을 넣은 건 패착이었다. “퉤!” [ 이 요리의 점수는 45점 ] [ 평이 ] 그래도 기본기가 있고 클래스의 관장자가 좋아할 법한 요리인지라 점수는 제법 높게 나왔다. 사냥감을 찾다가 결국 제대로 된 걸 찾지 못해 온천에서 목욕하는 걸 억지로 잡아온 원숭이 요리는 67점을 받았다. 나름 높은 점수. 맛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김성철이 원하는 90점에 이르려면 멀어도 한참 멀었다. ‘아무래도 그걸 한 번 만들어 봐야겠군.’ 제국대원수 시절, 김성철은 세계 곳곳을 돌며 각종 진귀한 요리들을 대접받았다. 거의 매일매일 벌어지는 진수성찬의 향연 속에서도 유독 두드러지는 음식이 몇 종 있었다. 김성철은 그 요리들을 자신의 해석에 맞게 변주하여 한 번 도전해볼 생각이었다. ‘겨울잠쥐, 명금(鳴禽), 새끼를 밴 토끼. 뭐 대충 생각나는 건 이 정도인가?’ 그렇게 행복한 고민을 하는 김성철의 얼굴엔 어떤 근심도 걱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실제로도 그는 평온했다. 비록 방금 충격적인 사실을 듣긴 했지만 마치 전류가 지나가듯 최초의 통증이 지나간 이후엔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 베르텔기아는 그런 김성철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걸 알고도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거지? 그 여자 때문에 삶의 방향 자체가 달라져버렸는데.’ 단순히 정신력이 강하거나 의지력이 높다는 문제가 아니다. 베르텔기아의 눈에 비친 김성철은 어딘가 이상해져 있었다. 뒤틀렸다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지만 평소 그녀가 알던 김성철의 모습과는 괴리가 있었다. “저기. 정말 괜찮은 거야?” 식사가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에게 다시 한 번 그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그 이야기 말인가?” 김성철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베르텔기아가 살짝 몸을 흔들자 김성철은 뼈만 붙은 원숭이의 팔을 휙 집어던졌다. “딱히 신경 쓰진 않는다.” “정말?” “내가 알던 그 여자는 이미 내 마음속에서 죽었다. 어딘가에서 숨이 붙어있다 한 들 그건 나와 하등 관계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 그래?” “약속을 지킨 시점에서 나와 그 여자와의 관계는 청산됐고 그걸로 모든 건 끝난 것이지.” 놀라울 정도로 담담한 어조로 김성철은 과거의 인연을 베어내고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그런 김성철이 대단하다고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두려움을 느꼈다. 한 번 날카로운 칼날을 가슴 속에 벼린 이상, 언제든 그것을 꺼내 쓸 수도 있으므로. ‘설마... 아니겠지.’ 베르텔기아는 속으로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며 김성철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나 주머니 안에 들어가도 돼?” 그녀의 물음에 김성철은 뭔 새삼스럽게라는 식의 표정을 지으며 넝마가 된 코트 자락을 열어젖혀 주었다. 안도감 속에서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달라진 건 없다. 언제나 듣던 그대로의 박동이다. 베르텔기아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왜 그러나?” 김성철이 갑작스런 진동을 느끼고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운동부족인 거 같아서.” “책도 운동을 하나?” 김성철은 피식 웃으며 남은 식사를 마저 했다. 이튿날, 여행은 계속됐다. 김성철은 곧장 진로를 은자의 탑으로 잡고 인적이 드문 숲과 산맥을 빠르게 답파해 한 달음에 목적지로 향했다. 김성철의 속도는 전력을 다한 건 아니지만 상당히 빠른 속도로 쉬지 않고 장시간을 행군하는 것이기에 중간에 마라키아가 퍼지는 사건이 있었다. 결국 김성철은 코트 뒤에 조그만 주머니를 바느질로 매달아 그 안에 담고 가야 했다. ‘주머니 마다 불청객이 가득 하군.’ 또 하나의 문제도 있었다. 군화의 밑창이 닳고 있었다. 오랫동안 군말 없이 제 역할을 다한 군화는 겉보기엔 평범한 군화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드워프 장인이 흑룡의 비늘을 써서 만든 둘도 없는 명품이다. 그동안 오랜 세월 격전 속에서도 제 역할을 다해온 녀석인데 아신 시드미아와의 결전에서 김성철이 전력을 다하는 통해 결국 그 수명에 한계가 온 것이다. 코트의 수선 정도는 김성철도 할 수 있고 재료가 되는 용의 비늘 또한 영혼 창고 안에 잠들어 있지만 김성철은 장화를 고칠 수 없다. 그런 고급 재료 아이템은 상위직으로 전직한 장인들만이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으음.. 내키진 않지만 드워프 왕국에 한 번 들려야겠군.’ 그곳은 아마도 세계 전역을 통틀어 김성철에게 가장 껄끄러운 장소일 것이다. 모든 드워프들이 김성철의 생 살을 씹으려는 게 작금의 상황이므로. 원인은 드워프들이 신성시 하는 팔 가라즈지만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돌려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약간은 돌려줄 마음이 있었지만 아신 시드미아와의 일전을 치루면서 팔 가라즈 없이는 그런 존재와 싸울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아무튼 장래의 계획에 대한 생각을 하며 하염없이 앞으로 달려가고 있자니 우거진 침엽수림 사이로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와 그 주변에 펼쳐진 하얗게 모자를 침엽수림 그리고 그 침엽수림을 병풍처럼 감싼 설산. 김성철은 호수에 중심에 있는 탑을 눈동자에 담으며 비로소 속도를 늦췄다. 여기서부터는 평범하게 갈 필요가 있다. 은자의 탑의 주인인 포르피리우스와 안면을 트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상황 속에서 굳이 문제를 일으킬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김성철은 우거진 숲을 해치고 은자의 탑으로 난 길을 향해 걸어갔다. 곧 김성철은 과거에 있던 피난민 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스반트 사람들이 머물던 피난민 촌은 텅 비어 있었다. 남은 흔적으로 미루어보아 최소한 보름 전에 떠난 것으로 보인다. 김성철이 정령계에서 크라이아가 눈을 뜨기를 기다리던 시점에 말이다. ‘서둘러도 끝났군. 한 겨울인데도 굳이 이동을 한 거보면 역시 대접이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피난민 촌 주변을 걷고 있자니 마라키아가 몸을 움츠린 채 주변을 둘러보며 부리를 열었다. “대체 여긴 왜 온 거지?” “…….” 김성철은 은근한 짜증을 느꼈다. 이미 몇 번 말한 것 같은데 알아듣지 못하는 꼴을 보면 누구나 짜증을 느낄 것이다. 마라키아는 워낙 자기중심적인 존재라 원래 남의 말을 듣는 경우가 거의 없다. 김성철은 자신이 말하는 대신 서열 2위를 움직였다. 김성철 옆에선 마라키아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거물이 되는 베르텔기아는 핀잔을 섞어가며 마라키아에게 이곳에 온 목적에 대해 이야기했다. 건방지기 짝이 없지만 머리 하나는 좋은 마라키아는 바로 이해했다. 그런데 한 가지 점이 마라키아의 신경을 거슬렀다. “음? 재앙의 서라고? 뭔가 이상한데?” “뭐가 또 불만이야? 또 뭐?” 베르텔기아가 따지듯이 묻자 마라키아는 부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커다란 불만은 아니야. 그냥 명칭이 바뀐 거 같아서 말이야. 우리 시대엔 다른 이름으로 불렸거든.” “다른 이름이라고?” 잠자코 있던 김성철이 마라키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마라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우리 시대에 재앙을 예고하는 물건은 묵시록의 석판이라 불렸다.” ======================================= 76. 균열 (1) “이름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거 아냐? 나 땐 계시의 양피지 같은 이름으로도 불렸던 거 같은데?” 마라키아의 말을 들은 베르텔기아가 즉시 반문을 했다. “신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의 형상이 바뀌는 경우는 종종 있지.” 마라키아는 베르텔기아의 말을 일부분 수용하면서도 곧 자신의 부리처럼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하지만 내 시대에 은자의 탑 같은 건 없었다. 내 비록 절멸의 저주 때문에 직접 보진 못했지만 전언에 따르면 묵시록의 석판이 보관된 장소는 당시 리자드맨 왕국 영역 안에 자리 잡은 죽은 생명의 나무라고 알고 있다.” “그게 은자의 탑을 말하는 거 아냐? 재앙의 서가 이름을 바꾼다면 그 것을 보관하는 탑의 이름도 뭐 바뀔 수 있는 거잖아?” 베르텔기아의 반론에 마라키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언제나처럼 쓸데없이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죽은 생명의 나무는 대륙의 중심에 위치해 있어. 대륙의 중심엔 눈이 오지 않지. 쌓이지도 않고. 여긴 대륙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크게 치우친 곳이야. 그러니 이렇게 춥고 눈까지 쌓이는 것이지.” 마라키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추운 듯 앙증맞은 날개를 오므렸다. 조인족이 사는 곳이 썩 따뜻한 곳은 아니지만 마라키아의 신체나이는 생후 몇 개월 수준이다. 영하의 추위에 맞서기엔 미숙한 몸. 김성철은 여벌의 주머니 안에서 오들오들 떠는 마라키아의 움직임을 느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옷을 한 벌 내어주지.” “나는 보석과 황금으로 치장된 옷이 아니면 입지 않는다.” 마라키아는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김성철이 영혼 창고에서 빛바랜 깔깔이를 꺼내 내밀자 염치불구하고 뒤집어썼다. 베르텔기아가 이를 눈뜨고 볼 리 없다. 그녀가 마라키아 앞에 저승사자처럼 떡 버티고 있자 마라키아는 눈을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진정한 왕은 바람을 옷으로 삼고 밤하늘을 이불삼아 덮는 법이라네. 하물며 이런 천쪼가리 정도야 허용범위 내이지.” 곧 김성철 일행은 낯익은 무너진 오두막 옆에 도착했다. 마을을 위해 죽어간 탕그리트라는 최후의 루테기네아 기사가 거처하던 오두막은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아 폐허처럼 변했다. 그 오두막을 본 베르텔기아가 중얼거렸다. “남작, 잘 있을까.” 베르텔기아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김성철은 문득 베르텔기아가 남작이라 불리는 그리폰과 친하게 놀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발걸음을 멈췄다. “잠깐, 남작이 있나 확인해볼까?”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지금 시각이 지나치게 이르다는 것. 갓 해가 뜬 지금 시간은 아직 보통 사람들이 일과를 영위하기에 조금은 이른 시간이다. ‘대략 새벽 5시에서 6시 사이겠군.’ 약간은 시간을 때울 필요가 있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베르텔기아와 마라키아를 거느리고 오두막 뒤 옛 루테기네아 기사의 저택으로 향했다. “와아! 남작이다!” 그리폰은 탕그리트의 무덤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곳에 언제나처럼 늠름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고삐는 풀렸고 이제는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여전히 옛 주인이자 전우의 묘역을 홀로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김성철은 한결 같은 그리폰의 모습을 보고 마음 깊은 곳에서 묘한 울림이 울리는 걸 느꼈다. 긍정적인 울림이다. 그동안 간절히 원했지만 결코 느낄 수 없었던. ‘짐승이 사람보다 낫다더니.’ 김성철은 끌리듯 남작에게 다가가 굵직하고 힘 있게 뻗은 목주위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삐기이이이....” 마라키아는 그리폰이 조금은 두려운 모양인지 몸을 떨었다. “왜 그래? 마라키아? 설마 그리폰을 보고 겁을 집어 먹은 거야?” “뭍짐승도 아니고 날짐승도 아니고 이건 대체 뭐냐?” 마라키아는 그리폰을 본 적이 없었다. 베르텔기아가 기막히게 마라키아가 두려워하는 기색을 읽어내고 짓궂게 몸을 들이밀며 말했다. 캥거루처럼 주머니 안에 들어간 마라키아는 강하게 부정했다. “우.. 웃기지마라. 만물의 왕인 내가 한낱 미물을 보고 두려워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호오? 자칭의 만물의 왕의 몸이 조금 떨리는 거 같은데. 이건 순전히 기분 탓?” 그 모습을 본 김성철은 어릴 때 빛바랜 책에서 감명깊게 본 고대 중국의 한 인물을 떠올렸다. 위로는 금관을 쓰고 아래로는 적토마에 올라타 방천화극을 휘두르며 무수한 병사들을 짚단처럼 베어 넘기던 장수를 말이다. ‘사람 중엔 여포, 말 중엔 적토마라는 말이 있었지. 하지만 이 녀석은 책이니... 책 중엔 베르텔기아라는 말을 덧붙여야 하나.’ 김성철이 속으로 흥미로운 상상을 하는 중에도 마라키아와 베르텔기아는 계속해서 티격태격 하고 있었다. 견디다 못한 마라키아가 손가락을 들어 남작을 가리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것은... 해로운 짐승이다.” “해로운 건 너 아니야?” 베르텔기아는 우쭐거리며 남작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남작은 베르텔기아가 다가가자 마라키아의 것보다 수십 배는 큰 부리로 쿡 쥐어박듯 쪼았다. “으갸악!” “내가 뭐라고 했나? 해로운 짐승이라고 하지 않았나?” 마라키아가 꼴좋다는 듯 손가락질 하면 껄껄 웃었다. 베르텔기아의 접근은 거부했던 남작은 그러나 김성철이 다가오자 순순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김성철은 남작이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야위었다는 걸 발견했다. 수북한 깃털 아래 양상한 몸이 가린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날개가 불편하니 그동안 사냥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겠군.’ 김성철은 부러졌다 잘못 붙은 그리폰의 날개를 응시했다. ‘음...’ 손도 많이 가고 귀찮을 뿐더러 시간도 오래 잡아먹지만 어느 정도 처치를 하면 날개를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남작 옆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낸 뒤 은자의 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각국의 사신들이 타고 온 공선의 정박지엔 여전히 수많은 국적의 공선들과 승무원들이 붐비고 있었다. 그들은 막 막사에서 나와 아침밥을 짓거나 차를 마시는 등 다가올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 은자의 탑으로 가려면 그들을 지나쳐야 한다. 내키진 않지만 김성철은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라며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정박지로 향했다. 딱히 김성철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다들 자기 일만 할뿐 낯선 이가 지나가도 눈길을 주는 이는 한두 명이 고작이고 곧 시선을 돌렸다. 정박지를 지나가며 김성철은 승무원들의 분위기가 과거와 확연히 달라졌다는 걸 인상을 받았다. 따로 놀고 있다. 예전엔 볼 수 없었던 목책이 각 정박지의 숙소마다 쳐져 있다. 기사나 승무원들도 철저히 그 테두리 안에서 자기들끼리 교류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경계와 견제의 흐름이 정박지 곳곳에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김성철로서는 기이한 경험이었다. 비록 나라는 다르다고 하나 세계의회라는 큰 틀에 하나로 묶인 공동체의 일원인데 눈으로 보일 정도로 갈라진 모습을 보인다는 건 말이다. ‘일이 생긴 건가?’ 김성철의 합리적인 의심은 정박지의 끝과 토포로 마을 사이에 공터에서 확실한 것으로 굳어졌다. 기사의 시체 하나가 나무에 못 박힌 채 방치되어 있었다. “읔..” 베르텔기아가 거북한 소리를 낼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살인자 혹은 복수의 살인자들은 기사를 그냥 죽인 것도 모자라 시체를 훼손했다. 갈린 배에서 나온 내장이 길게 바닥이 늘어져 있었다. “츄릅.” 김성철은 입맛을 다시는 마라키아를 가볍게 쥐어박고는 시체의 상태를 살폈다. 차가운 공기 탓에 싸늘하게 식었지만 아직 죽은 지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았다. 아마도 간밤 사이에 살해당한 게 틀림없다. 김성철은 기사의 갑주에 달린 문양을 보고 그 기사가 다름 아닌 인간제국의 기사라는 걸 한 눈에 발견했는데 놀라움은 거기서 일어났다. 죽임 당한 기사가 인간제국의 기사라는 걸 뻔히 아는 타국의 기사들이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당했군.” “벌써 이번 달에만 3명 째인가?” 그들은 멀찍이서 시체를 지켜보며 수근 거리기만 하고 시체를 수습하거나 이 일을 제국에 알리려는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다만 멀리 있는 기사가 김성철을 향해 손을 모아 입을 대고 큰소리로 경고를 했을 뿐이다. “어이. 촌뜨기. 그 시체에 함부로 손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나중에 제국 어르신들한테 책잡힐 수도 있으니 말이야!” 타국의 기사들은 뭐가 그리 웃긴지 자기들끼리 쳐다보며 낄낄 웃어댔다. 사건이라기보다 단순한 해프닝에 가까운 일화였지만 김성철은 여기에서 어떤 예감을 느꼈다. [ 정과 인심의 고장, 토포로 ] “…….” 김성철은 익숙한 현판을 지나 토포로 마을로 들어섰다. 빵 굽는 향긋한 냄새가 기분 좋게 코를 간질이긴 했지만 김성철이 이 마을에 지니고 있는 인상은 최악에 가까웠다. 배은망덕, 후안무치. 그것이 김성철이 이 마을에 대해 지닌 감상의 전부다. 몇 명의 주민이 김성철을 알아보고 대경실색하여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세.. 세계의 적이다!” “그 자가 또 왔어!” 마을의 종탑이 시끄럽게 울린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몇 명의 자경단이 허겁지겁 뛰어나와 김성철 앞을 막아섰다. “후후. 배도 출출한데 여기선 내가 나서도 될까?” 마라키아가 깔깔이를 벗으며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깔깔이 안에 감춰져 있던 마라키아를 본 주민들은 더욱 크게 놀랐다. “저.. 저 새는 뭐야?” “까마귄가? 작지만 대단히 불길해 보인다!” 세계의 적 하나만도 벅찬데 이상한 괴물까지 달고 왔으니 말이다. 김성철은 자신을 막아 선 자경단을 노려보고 딱 한 마디를 했다. “꺼져라.” 은근한 불쾌감이 섞인 그 일갈의 위력은 즉각적이었다. 안 그래도 오합지졸인 자경단은 왕겨처럼 흩어졌다. 뒷걸음질 치다가 뒤로 엉덩방아까지 찧은 녀석도 있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자경단이 믿는 구석은 있는 모양인지 주점에서 술에 쩔은 기사 두 명이 마을 주민의 손에 이끌려 현장에 다가오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 기사들은 김성철의 얼굴을 한 눈에 알아보고 다른 주민과 마찬가지로 신속하게 달아났다. ‘내 얼굴이 많이 팔린 모양이군.’ 예전엔 거의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황궁 침입당시 얼굴이 크게 팔린 모양이었다. 아마도 세계 구석구석에 지금의 김성철과 거의 흡사한 초상화가 걸려 있으리라. 아무튼 이제 김성철의 앞을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김성철은 식객들을 몸에 달고 거울처럼 맑은 호수에 고고하게 선 은자의 탑을 향해 걸어갔다. “흐음. 여기가 은자의 탑인가? 분위기만 놓고 보면 제법 운치가 있는데?” 마라키아가 은자의 탑을 보며 말했다. “네가 아는 죽은 생명의 나무와는 다른가?” 김성철이 물었다. 마라키아는 큰 눈을 껌뻑거리며 대답했다. “같을 수가 없지. 죽었다고 해도 세계수는 세계수. 죽은 생명의 나무는 그 높이가 하늘에 닿았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저 탑은... 소박하군.”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재앙의 서 역할을 하는 물건의 위치도 시대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건가.’ 재앙이 아닌 재앙을 둘러 싼 사물들에 관한 의문. 그것은 지금까지 특별히 생각한 적이 없던 주제다. 중요한 건 언제나 신이 내리는 재앙 그 자체였고 다른 것들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재앙을 해결해나가고 다른 시대를 살아간 자들과의 만남, 기기묘묘한 신의 글, 특히 데스포트가 전해 준 이야기는 김성철의 시야를 단순히 재앙 그 자체뿐만 아니라 주변부까지 넓히고 있었다. 지금까지 김성철은 라이즈 하이메르의 딸 크라이아를 구한다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아 움직였지만 그것이 어떻게든 해결 된 이상 김성철의 운신의 폭은 당연히 넓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 은자의 탑은 분명히 신... 적어도 신적인 힘으로 만들어진 게 틀림없다.’ 은자의 탑으로 향하는 징검다리를 하나하나 건너며 김성철은 점점 커져가는 은자의 탑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곧 잿빛 로브를 걸친 은자 한 명아 나타나 김성철에게 다가왔다. 그는 한 눈에 김성철을 알아보고 쪼르르 탑 안으로 들어갔다. 탑의 주인인 포르피리우스는 김성철에게 언제든 이곳에 찾아오라고 했지만 여전히 다른 은자들에게 세계의 적은 공포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잠시 닫힌 탑의 문이 다시 열리고 낯익은 인물이 나타났다. 하늘거리는 두건 너머로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과 파충류의 눈동자가 들여다보였다. 반인반용의 은자. 카네스. 그녀가 김성철을 맞이하러 나온 것이다. ======================================= 76. 균열 (2) 카네스를 본 마라키아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호오? 드래곤인가?” 마라키아는 한 눈에 카네스의 인간의 몸에 숨겨진 거대한 마력과 존재감을 알아보았다. 마라키아의 눈동자에 감출 수 없는 자부심의 빛이 반짝였다. 그의 짧은 치세 중에 이른 최고의 업적이 불현듯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드래곤이라면 홀로 처치한 적이 있지. 칠일 밤 칠일 낮에 이르는 장엄한 전투였다.... 이름 난 엘프족 서사시 작가를 끌고 와 내 덕을 기리는 시를 짓게 했지... 그것은 1연이 12행으로 이루어진 엄격한 규칙 속에서도 정려한 아름다운을 간직한 완벽한 시였다...” 아무도 묻지도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 슬픈 광경이었다. “오랜만이야! 세계의 적.” 카네스는 활짝 웃으며 활기차게 손을 흔들며 김성철이 맞이했다. 상대방이 그렇게까지 나오는데 답례 한 마디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성철은 어렵사리 입을 열어 열렬한 환영에 대해 답했다. “…오랜만이군.” “응? 못 보던 친구가 늘었네?” 카네스는 곧 김성철의 코트 뒷자락에 달라붙은 마라키아를 발견했다. “우와. 이거 나하크 아니야? 요즘도 살아 있는 나하크가 있었어?!” 카네스는 마라키아를 발견하자마자 순무를 뽑듯 주머니에서 쏙 뽑아냈다. “삐기이이이!” 마라키아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저항하려 하지만 이미 마라키아는 카네스의 품에 안긴 뒤였다. “부드럽고 보송보송해. 뭐 이리 귀여운 게 다 있어?” “무.. 무엄하다! 이거 놓지 못할까! 파충류.” 마라키아가 강하게 저항하지만 이미 몸을 제압당한 상태, 한참 동안 카네스의 손에 마라키아는 농락당해야 했다. 형벌의 시간이 끝난 후, 김성철은 축 늘어진 마라키아를 주머니에 담고 용건을 말했다. “재앙의 서를 확인하러 왔다.” “재앙의 서라면 안쪽에 있어. 내가 안내할게.”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카네스는 콧노래를 부르며 앞으로 걸어갔다. 곧 은자의 탑의 문이 열렸다. 김성철 일행은 경쾌하게 걷는 카네스의 뒤를 따라 재앙의 서가 보관된 장소로 걸어갔다. 재앙의 서가 위치한 홀 안엔 각국에서 파견된 수많은 사신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로 재앙과 고대의 역사에 조예가 깊은 학자, 마법사로 이루어진 그 사신들은 이른 아침부터 카네스가 홀안에 들어서자 하나 둘 졸린 눈을 뜨고 그쪽을 응시했다. 정적 속에서 갑작스레 상기된 목소리고 울려 퍼졌다. “저.. 저거. 세계의 적 아니야?” 그 짧은 울림은 곧 즉각적인 화학반응을 일으켜냈다. “맙소사. 수배 전단에서 본 것과.... 똑같은 얼굴이야.” “저.. 자가 여기엔 왜 온 것이지?” “설마 우리들을..?” 김성철은 조용했던 공간이 순식간에 전장에 가까운 분위기로 변하는 광경을 묵묵히 목도했다. 최근 들어서 그다지 느낄 기회가 없었지만 그는 이 세상에서 세계의 적이라 불린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김성철은 자신을 바라보는 겁에 질린 눈동자들을 보면서 새삼스레 자신의 위치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 곧 김성철이 자주 보던 광경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반복됐다. “모두 전투 준비를 하시오! 우리가 죽더라도 반드시 재앙의 서를 지켜내야 하오!” 인간제국 측에서 파견된 마법사와 학자들이 검과 지팡이를 들었다.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감돌자 잠자코 있던 카네스가 비로소 앞으로 나섰다. “잠깐...” 그녀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들불처럼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식었다. 그것은 누가 강요한 것도 부추긴 것도 아닌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마치 불에 들어간 지푸라기가 강하게 타들어갔다가 갑자기 사그러지는 것처럼 말이다. “…….” 장내에 모인 수많은 사신 중 어느 누구도 앞으로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뒤돌아 섰고 자리를 떠났다. 당황한 건 인간제국의 사신들이었다. “뭣을 하는 거요? 종말교단의 지도자가 재앙의 서를 파괴하러 왔는데? 막지 않을 거요?” 그들은 물러서는 동맹국의 사신들의 등을 보며 재촉하듯 소리쳤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빈정거림밖에 없었다. “세계의 왕을 모시는 그쪽이 해결하구려.” 인간제국 사신의 얼굴에 굵은 핏줄이 불거지며 격하게 일그러졌다. 카네스의 음성이 울려 퍼진 건 그 다음 수순이었다. “이 자는 나의 손님이다.” 아무리 인간제국의 사신이라 하더라도 감히 규격 외의 강자라 불리는 반인반용의 말엔 토를 담을 수 없다. 재앙의 탑 바깥에서야 외교적인 방법으로 압박을 가할 수 있겠지만 은자의 탑 안에서 카네스의 말과 그 존재감은 절대적이다. 인간제국의 사신은 굴욕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제국의 사신들의 퇴장을 지켜보았다. ‘뭔가 있군.’ 아침에 본 광경은 허투루 본 것이 아니다.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 세계의회라고 불리는 현 세계의 질서에 중대한 변화가 일고 있다. ‘내가 익시온과 정령계에 있었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딱히 짚이는 구석은 없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다. 세계의회는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봐야 결국 그 본질은 이익을 좇아 세계의 기득권 세력이 결집한 이익단체. 따라서 그 붕괴의 시발점은 더 이상 각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을 때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지만. 그러나 곧, 김성철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재앙의 서를 공개할게.” 카네스의 지시에 따라 탑의 노예들이 제단 아래의 레버를 당기자 재앙의 서를 가리고 있던 강철 덮개가 톱니바퀴와 사슬에 의해 가동되는 복잡한 기계장치가 움직이며 몇 겹으로 둘러싼 강철 단계를 예술적인 형태로 차례대로 열어젖혔다. 마침내 재앙의 서가 모습을 드러내자 김성철은 즉시 재앙의 서에 나타는 문구를 눈으로 읽어내렸다. ‘두 번째 재앙은 첫 번째 재앙처럼 불에 탄 것처럼 지워졌군. 문제는 세 번째 재앙이다.’ 세 번째 재앙이 인류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의 왕. 난제다. 지금까지 나타난 어떤 재앙보다. 하나의 왕을 남겨둔다는 말은 다른 모든 왕을 폐하라는 말을 그 안에 담고 있다.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누가 왕관을 포기하려 하겠는가. 왕관을 잃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왕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유구한 역사가 말하고 있다. 그 악명 높은 루테기네아 왕국의 방랑왕 크롬갈드가 사면을 받은 것도 어려운 결단을 했기 때문이다. “당신답지 않게 망설이는 표정이네?” 카네스가 곁눈질로 김성철의 옆모습을 지켜보며 히죽 웃으며 말했다. “…까다롭군.” 김성철은 말끝을 흐리며 재앙의 서에게서 눈을 뗐다. “온 김에 포르피리우스와 만나고 가. 아니면 조금 여기서 쉬어가도 좋고.” 카네스는 김성철에게 쉬고 갈 것을 제안했다. 마다할 이유는 없다. 김성철이 고개를 끄덕여 승낙하자 카네스는 노예 몇 명을 움직여 김성철을 응접실로 안내하게 했다. “그럼 나중에.” 카네스가 사라진 후 김성철은 노예의 뒤를 따라 응접실로 걸어갔다. 생각이 많아졌다. ‘세계의 일통, 혹은 통합. 재앙의 서가 이번에 시험하려 드는 것은 어쩌면 이 세상의 권력자들일지도 모르겠군.’ 당장 두 가지 방법이 떠오른다. 하나는 힘에 의한 방법. 과거의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힘과 기율로 다른 모든 나라를 침략해 그 나라를 멸해 한 명의 왕만이 남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방법은 필연적으로 피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도 대단히 많은 피를. 두 번째 방법은 과거에 이미 김성철이 세계의회라는 이름으로 그 전 단계를 마련한 바가 있다. 정복이 아닌 통합의 길. 모든 이들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당면한 대문제에 관해 합심하여 움직이는 어떻게 보면 가장 이상적인 방법. 하지만 김성철은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안다. 왕, 대신, 학자. 개개인만 놓고 보면 어느 누구보다 훌륭하고 사려 깊고 지혜로운 자들이 권력이라는 것에 엮이면 얼마나 이기적이고 추하며 어리석은 존재로 전락하는지. 권력을 한 번 잡은 자는 결코 그것을 내려놓으려 들지 않는다. ‘결국은... 피를 보는 수밖에 없단 말인가.’ 감히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앞으로 흘리게 될 피가 얼마나 될런지. 그로 인해 뒤집어 쓸 저주와 증오가 얼마나 거대할 것인지.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은 오랜만이다. 휴식이 필요하다는 걸 느낄 무렵 적절하게 문이 열렸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은자의 탑의 노예가 고개를 살짝 들며 김성철은 소박하지만 있을 건 다 있는 기능적인 응접실로 김성철 일행을 안내했다. 김성철은 그의 얼굴이 왠지 낯이 익다는 걸 발견했다. ‘저 놈은 그때 개미위치? 아니 개미위쳐 던가? 아무튼 개미 뭐시기를 쓰던 그 놈이군.’ 김성철은 방안의 편안한 의자에 앉아 모처럼의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취하는 중 다른 노예들이 음료와 다과를 내왔다. 김성철은 차를 마시며 어떻게 다가올 재앙을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골치만 아파진다. ‘어떻게 해야 하나.’ 동부에선 거신에게 파괴당한 동부의 주민들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고 세상의 중심을 잡아야 할 인간제국은 그 역할을 하지 못한지 오래다. 심지어 하나의 왕을 만들어내라는 재앙의 요구에 제국에 합세하던 나라들도 하나 둘 떠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세계의회에 분열의 조짐이 일어난 것이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김성철은 알고 있다. 먼 동쪽 바다에서 죽음의 낙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아직 그것은 먼 바다의 상공 위에 머물고 있겠지만 금명간에 계절풍을 타고 대륙을 뒤덮을 것이다. 그 죽음의 낙진은 데스포트가 원한 것처럼 이 세상을 풀 한포기 돋지 못하는 죽음의 땅으로 만들 수준은 아니지만 짧게는 하루 해, 길게는 여러 해에 걸쳐 이 땅의 작물과 짐승들에게 치명적인 수준을 입힐 수준은 된다. 그렇게 되면 이 땅엔 기근이 덮칠 것이다. 기근은 죽음을 낳고 죽음을 역병을 낳아 또 다른 죽음을 증식시킨다. 그 시체들을 장작삼아 전쟁의 불길이 타오를 것이고 정해진 시간까지 하나의 왕을 만들어내라는 재앙의 요구와 맞물려 전쟁의 불길은 모든 대륙을 불태워버릴 정도로 크게 치솟을 것이다. ‘오래된 기둥은 서쪽 바다, 고대왕국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절벽을 말하는 것이리라. 다시 말해 대륙 전체가 낙진이 뒤덮였을 때를 말하는 것이겠지.’ 재앙이 인류에게 유예해준 시간은 길다고 할 수 없다. 길어봐야 1년. 짧게는 수개월. 그 안에 모든 걸 결정내야 한다. 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피를 보는 단순한 방법 이외엔 말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순탄치 않을 것이다. 김성철이 그렇게 당면한 재앙을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골머리를 썩히고 있는 동안 마라키아는 그다지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없는 베르텔기아와 노닥거리고 있었다. “그 드래곤 말이야. 정말로 질이 나쁜 드래곤인 같단 말이야. 반인반용? 잡종이라는 소리 아닌가?” “쉿! 카네스가 들으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런 말도 있잖아. 낮말은 카네스가 듣고 밤말도 카네스가 듣는다고.” “10년. 아니 5년만 더 있으면 내가 잡.. 아니 그 혼혈보다는 조금은 강해질 것이다. 그나저나 그것보다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게 있는데 말이야.” 마라키아는 은자의 탑 전역에 흐르는 마법적인 기운을 자신의 마술적인 재능으로 감지했다. 은자의 탑을 관통하는 하나의 무형의 기운. 마라키아는 그것에 작은 손을 갖다 댔다. 이윽고 마라키아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호오. 개미위키? 일종의 무형 도서관인가.” 마라키아는 대단히 놀라워하며 은자의 탑의 자랑인 개미위키에 접속했다. 그것은 일찍이 보지 못했고 접하지 못한 하나의 센세이션과도 같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라키아는 미소마저 머금으며 생각지도 못한 발상의 집합에 찬사를 보냈다. “인간 주제에 이런 걸 만들다니.... 이건 정말 놀랍군. 누구나 편집하고 만들 수 있는 정보의 집합이라니. 물론 무자격자의 편집 가능성이라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이 참신한 발상은 충분히 이 멸세의 왕의 칭찬을 들을 자격이 있다.” 그런데 베르텔기아는 마라키아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아까도 뭔 시가 어쩌구 저쩌구 혼자 쫑알거리더니.” 이에 마라키아는 조소하며 말했다. “가련한 리빙북. 손이 없으니 이 지식의 보고를 쓰지도 보지도 못하겠구나.” 마라키아의 손가락 위에 마법진이 떠올랐다. 지금 세상의 마법사들과는 다른 형태의 마법진. 마법진이 사라지자 마라키아와 베르텔기아 앞에 하나의 영상이 나타났다. 그 영상 위엔 다름 아닌 개미위키의 문자가 나타나 있었다. “우와. 이거 뭐야?” 베르텔기아가 깜짝 놀라며 묻자 마라키아는 씨익 웃으며 날카로운 발톱이 돋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잘 보라고.” 마라키아는 능숙하게 자판을 쳐 영상 위에 김성철이라는 문자를 쳤다. [ 김성철 ] “후후후... 입력...!” 그러자 영상 위에 김성철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우와... 우와!” 잔뜩 고심하던 김성철은 뒤늦게 자신의 식객들의 작태를 발견했다. “아니 뭐하는 거냐?” 마라키아와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과거사를 떡하니 허공 위에 펼쳐놓고 그걸 열람하고 있었다. “라이즈 하이메르도 한 번 쳐 봐.” “라이즈 하이메르라고? 아, 그 뻐꾸기 말인가? 어렵지 않지. 대신 오늘부터 내가 서열 2위가 되는 거다.” 마라키아는 희희낙락하며 개미위키에 라이즈 하이메르라는 이름을 입력했다. “입력..!” 그러나 다음 순간 김성철의 불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꺼라.” “삐이...?” “개미위키 꺼라고.” 다음 순간 마라키아는 볼 수 있었다. 진짜 김성철이 화났을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삐기이이이이....” ======================================= 76. 균열 (3) 탑의 주인 성은자 포르피리우스와의 대화는 큰 무리 없는 선에서 이루어졌다. 김성철은 자신이 데스포트를 처치했고 두 번째 재앙을 끝냈다는 선에서 간략하게 자신의 업적에 대해 설명했다. 설명이 끝난 후 포르피리우스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변경된 세 번째 재앙은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쉽지 않을 것 같구려.” “동감이오.” 최악의 경우엔 단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왕을 직접 손으로 처단해야 할지도 모른다. “뭐, 그것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문제가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소.” 포르피리우스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가로저으며 진저리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김성철은 잠자코 차를 마시며 포르피리우스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포르피리우스가 탄식과 함께 입을 열었다. “종말교단이라는 사교집단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소?” 그렇게 묻는 포르피리우스의 얼굴에 어딘가 미심쩍은 빛이 들여다보였다. 무언가 염려하고 걱정스러워하는 눈치다. “종말교단?” 잠시 잊고 있었지만 친숙한 이름이다. 김성철을 구세주로 내세우며 제도 라그란제를 비롯한 대륙 전역에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사이비 종교 집단. 옛 부하 슈넬메르커나 인연이 있는 사라사 제로 같은 지인들이 그 집단에 속해 있기도 하지만 김성철은 그들이 재앙의 파편을 다루는 힘이 있다는 부분에 주목하고 있었다. “종말교단이라면 알고 있소. 하지만 오해하지 마시오. 그것들은 내 동의도 없이 내 이름을 빌리고 있는 후안무치한 무리들이니까.” 김성철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 말을 듣자 포르피리우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편하게 몸을 기울였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였군. 당신이 그런 사악하고 끔찍한 집단에 들어갈 리가 없지.” “무슨 문제라도 있소?” 김성철은 종말교단을 이야기하는 포르피리우스의 반응이 마음에 걸렸다. 아니나 다를까 포르피리우스는 활짝 열린 창밖에 펼쳐진 아름다운 호수의 정경을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종말교단. 최근까진 제국에 퍼지고 있는 신흥종교 정도로 알고 있었소. 그 자들이 이곳 은자의 탑 일대에 진출하기 전까진 말이오.” “그 자들이...?” 김성철은 입단속을 해야 했다. 그는 과거에 종말교단의 공선이 이곳 주변에 온 사실을 알고 있다. 거기서 만난 사라사 제로는 은자의 탑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들의 충격적인 목적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다. 은자의 탑에 있는 재앙의 서는 가짜이고 그것을 불살라야 한다고. 김성철이 나서 그들을 돌려보내긴 했지만 공선 하나 돌려보낸다고 해서 종말교단 전체의 의지가 꺾일 리는 없다. “그 자들이 여기에 왜 온 거요?” 김성철이 물었다. 포르피리우스는 전지의 눈이 자리 잡은 두 눈을 번쩍이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그들이 말하더구려. 재앙의 서는 잘못된 것이고 따라서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야 마땅하다고.” “…….” 김성철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같은 목적으로 왔군.’ 하지만 단순히 종말교단의 생각에 무작정 반감을 가질 수만도 없는 것이 김성철의 현 생각이었다. 마라키아가 말하지 않았던가. 재앙의 서는 먼 과거엔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고. 김성철은 이 기회에 재앙의 서가 무엇인지 한 번 쯤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재앙의 서는 어떤 의미로 성역이라고 할 수 있지. 종말교단이 나서기 전까지 어느 누구도 재앙의 서 자체에 의문을 품지 않았고 그것은 당연한 것처럼 이 땅에 존재해왔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포르피리우스의 경계심을 드러나게 하지 않는 선에서 완곡한 질문을 던졌다. “딱히 종말교단의 생각에 찬동하는 건 아니지만 개인적인 관심으로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 괜찮겠소?” 김성철의 물음에 포르피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김성철은 즉시 민감한 주제를 끄집어냈다. “재앙의 서는 언제부터 이 땅에 존재했소?” 이에 대해 포르피리우스는 한 치의 흔들림 없는 태도로 대답했다. “이 세상이 존재하기 전부터.” 널리 알려진 지극히 일반적인 대답이다. 포르피리우스는 그 질문에 답하면서 여기엔 어떤 이의도 반론도 없다는 걸 표정과 목소리의 톤으로 함축해서 은연중에 드러냈다. 하지만 그 답변은 마라키아로부터 들은 지식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김성철은 다음 질문을 던졌다. “재앙의 서가 다른 이름으로 불린 적은?” 포르피리우스가 평소와 다름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시하자 김성철은 부연설명을 했다. “고대의 기록을 읽던 중 그런 주장을 본 적이 있어서 말이오.” “재앙의 서는 재앙의 서요. 그 이름은 인간이 아닌 신이 지은 것. 어찌 신의 창조물인 인간들이 임의로 그 정해진 이름을 바꿀 수 있단 말이오?” 포르피리우스의 태도는 단호했고 타협의 여지가 없다. 재앙의 서에 대한 그의 믿음과 신념은 과연 재앙의 서를 지키는 은자의 탑 수장 다운 것이었다. 따라서 더 이상의 질문을 하는 건 포르피리우스를 자극한 것밖엔 되지 않는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질문을 그만두고 차를 음미하며 창가를 응시했다.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아름답고 고즈넉한 풍경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신의 눈으로도 만족할만한 풍경이리라.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포르피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당신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세 번째 재앙이 공표된 이후에 지금 세계의회엔 균열의 조짐이 일고 있소. 여기 은자의 탑 일대도 예외는 아니오. 각국의 사신들 사이에 물리적인 충돌은 일어나지 않지만 이미 그들은 각각 다른 마음을 품고 갈라선지 오래지. 문제는 종말교단이오.” “종말교단이?” “종말교단에서 보낸 살인자들이 최근 사신들을 해치우고 있다오. 문제는 그들은 오로지 인간제국 측의 사람들만을 골라 살해하고 있다는 것.”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의 눈앞에 은자의 탑에 들어서기 전 나무 위에 못 박힌 채 죽어 있던 제국의 기사의 시체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종말교단의 짓이었나.’ 김성철은 솔직하게 자신이 이곳에 오면서 본 풍경에 대해 포르피리우스에게 말했다. 포르피리우스는 턱 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오늘 또 한 명 해치운 모양이군.” 대수롭지 않은 태도였다. 이미 너무 많이 벌어진 일이고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김성철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럼에도 타국의 기사들은 움직이지 않았소.” “무너지고 있소. 루테기네아 패망 이후 십 수 년 동안 유지된 세계의회라는 유일 체제가.”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세계의회로 대변되는 기득권의 질서는 분명 김성철이 질시하던 것이지만 그 세계의회를 만든 장본인은 김성철이다. 애증의 산물이 소멸을 눈앞에 두고 있다. “종말교단은 표면적으론 재앙의 서를 불태우겠다는 명목을 내세우고 있지만 진정으로 그들이 원하는 건 다른 것일지도 모르오.” 포르피리우스가 이어서 말했다. 그는 넓은 시각에서 현재 벌어진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에겐 다른 목적이 있는지도 모르오.” 하지만 그는 종말교단이 어떤 조직인지 모르고 있다. 김성철도 마찬가지다. 그가 아는 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다. 김성철이 심각한 표정을 짓자 포르피리우스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탑은 걱정할 필요가 없소. 일단 우리가 탑의 문을 걸어 잠그면 어느 누구도 침입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에겐 카네스가 있으니까.”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김성철로선 종말교단을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김성철의 이름을 마음대로 걸고 활동하는 무리들이니. “…….” 김성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여기서 신세를 지겠소.” * 탑을 나선 김성철은 먼저 자칭 정과 인심의 고장 토포로를 돌며 시간을 보냈다. 주점, 광장, 교회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주변의 정보를 수집했다. 종말교단에 관한 이야기가 과연 모든 이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오늘 아침에 발견된 제국 기사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에 비해 종말교단의 정보는 턱없이 부족했다. 종말교단이 이곳 은자의 탑 주변 어딘가에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농민의 반문에서 이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종말교단이 있는 곳을 안다면 인간제국이 가만두지 않았겠지!”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마을에서 정보를 얻는 것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히려 정보라면 인간제국 측이 더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민감한 시국에 그들을 표적으로 삼아 공격하는 불온한 무리들을 그냥 내버려두는 건 당장 전력의 손실을 넘어서 제국 전체의 위신과 직결된 문제이므로. 제국대원수로서 제국 군인들의 사고방식을 잘 이해하고 있는 김성철은 아마도 지금쯤 파견 공선의 지휘관이 노이로제에 걸려 미치기 일보직전에 상황까지 몰렸으리라 예측했다. ‘아마도 악마와도 손을 잡으려 들 정도로 몰려있겠지.’ 김성철이 인간제국의 공선을 다음 행선지를 잡은 건 그 대담성도 대담성이지만 누구보다 제국군인의 생리를 잘 알기에 가능한 판단이었다. 제국의 공선은 정박지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과거에 왔을 때 기라성 같은 강국들의 군함의 중심에 서 있었던 때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아마도 잇따른 습격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다른 나라와의 알력도 구석으로 내쳐진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타국 사람들에게 세계의 적은 김성철이 아니라 인간제국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유는 간단하다. 최강국인 인간제국이 하나의 왕에 가장 근접한 국가이므로. 따라서 견제를 받는 것이다. ‘인간제국은 공공의 적이 되어가고 있군.’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철통처럼 방비되는 제국 군함 아래의 정박지로 걸어갔다. 비록 경계는 삼엄했지만 김성철에겐 플라이라는 새로운 수단이 있다. 굳이 기구를 올라타는 대신 그는 플라이를 사용해 제군 군함 위에 간단히 승선했다. 물론 공선 주변에 처진 여러 개의 경계 결계를 침범하며 요란스레 등장하게 되는 건 피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안 그래도 잔뜩 날이 서 있던 제국의 군인들이 중무장을 하고 갑판 위로 일제히 집결해 침입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성철은 수십 명의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니콘 형상의 선수상(船首像)에 등을 돌린 채 지휘관이 나오길 기다렸다. 곧 병사들 사이로 공선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나타났다. “정체를 밝혀라. 침입자.” 김성철이 몸을 돌리자 지휘관은 물론 병사들 사이에 일제히 경악이 떠올랐다. “세.. 세계의 적?” “은자의 탑에 있다는 말이 진짜였나?” 이미 김성철의 힘을 잘 아는 병사들은 순간 전의를 상실했으나 그러나 제국의 정예답게 눈앞에서 퇴주하는 볼썽사나운 짓까진 하지 않았다. 애당초 하늘에 떠오른 공선의 갑판에서 도망갈 곳도 없지만 말이다. 찬바람 불어오는 갑판 위에서 김성철은 자신을 상징하는 팔 가라즈를 영혼 창고에서 꺼내 자신이 소문의 제국의 적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모두에게 주지시킨 후 지휘관을 노려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한 가지 말해두지. 나는 너희들을 해하러 온 것이 아니다.” “…….” 지휘관의 나이는 삼십대 중반, 젊음이라기보다는 노련한 힘참을 뿜어내는 강인한 인상의 사내였다. 김성철은 한 눈에 그가 아르큐부스 같은 낙하산 따위가 아니라 전장에서 오래 구른 정통파 사관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운이 좋군.’ 운이 좋지 않더라도 나름의 방법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김성철은 여전히 혼란에 빠져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지휘관을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에 내 이름을 파는 요사한 무리가 있다고 들었다.” “종말교단.” 지휘관이 말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그들에 대한 정보를 내게 넘겨라. 위치, 인물, 정보. 모든 것들을.” “…그런 건 없다.” 지휘관은 단호하게 말했다.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전 제국대원수 앞에서 거짓을 말할 셈인가?” “…….” 지휘관은 침묵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엔 의혹이 깃들어 있었다. 당신은 더 이상 제국대원수가 아니라는. 김성철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내가 자리를 떠난 후 제국사관의 자질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라도 한 건가?” 그 말을 들은 지휘관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김성철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부하를 몇 명이나 잃고도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자가 공선의 함장을 맡다니. 제국군도 끝장이군.” 이에 반발하듯 지휘관이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이어 감정을 억누른 지휘관의 음성이 갑판 위에 울려 퍼졌다. “정보는 있소.” “호오?” “하지만 당신에게 줄 수는 없소. 당신은 우리의 적이고 우리는 당신을 토벌할 의무가 있으니까.” 물론 자신이 말한 그 토벌이라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건 지휘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김성철은 지휘관을 노려보며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지휘관을 비롯한 모든 장병들이 김성철의 전진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선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휘관. 이름이 뭔가?” 김성철의 물음에 지휘관은 김성철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당당한 음성으로 답했다. “브레브. 제국 대령이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달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대령. 다시 묻지. 내게 종말교단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게.” “그것은....” 대령이 뭐라고 말하려고 하자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혹 누가 이에 대해 문책을 하려들거든 직접 황제에게 전해라.” 황제라는 말이 나오자 모든 이들의 눈에 경악과 존경의 빛이 떠올랐다. 김성철은 충격에 사로잡힌 병사들을 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 김성철이 황제에게 양해를 구한다고.” ======================================= 77. 옛 부하 (1) 김성철이 황제의 이름을 팔았다고는 하나 제국대령 브레브의 입장으로서도 그렇게 편하게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랜 줄다리기 끝에 제국대령 브레브는 마지못한 태도로 김성철에게 한 명의 병사를 내주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신참 비룡기사였다. 갓 상경한 것 같은 영락없는 시골처녀. 그녀는 소문 속의 세계의 적을 보고 몸을 바들바들 떨며 자기 소개를 했다. “제국의 비룡 견습기사. 스튜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김성철이 그 이름을 음미하듯 되물었다. “스튜?” “머.. 먹는 스튜 맞습니다! 하지만 제 이름입니다!” 먹는 걸로 이름을 삼는 건 제국 빈민층에서 종종 보이는 풍습이다. 최소한 이름으로 삼은 음식만은 실컷 먹으라는 배려와 그리고 아이가 너무 많다보니 아무렇게나 짓는 편이성이 결합된 결과다. ‘기이하군. 귀족자제도 아닌 자가 비룡기사라니.’ 김성철이 의문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보통 비룡기사는 돈 좀 있고 힘 좀 있는 집안의 자제들이나 지원하는 병종이다. 하늘의 왕자라 알려진 비룡이 워낙 귀하고 비룡의 알을 구하는 건 더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이 스튜라는 여자 견습기사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비룡기사가 된 이유도 어처구니가 없다. 밭을 갈다가 우연히 주운 커다란 알을 혼자 먹을 요량으로 방안에 넣고 보관하다 우연찮게 그 알을 부화시켰고 그 알에서 새끼 비룡을 보게 된 것이다. 새끼 비룡은 처음 만나는 상대방을 부모로 인식하는 습성이 있다. 졸지에 비룡의 부모가 된 시골처녀는 이 일을 황급히 이장에게 알렸고 이장은 그녀를 군대 쪽 사람에게 보냈다. 비룡은 대단히 희귀하고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자원이기에 제국 징집 부서에선 어쩔 수 없이 이 시골처녀를 기사로 등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쟁쟁한 부모로부터 체계적인 지원과 갖은 퀘스트를 수행하며 힘을 키운 준비된 귀족의 자제와 달리 스튜는 그저 비룡만 탈 줄 아는 시골처녀로 처음부터 기초훈련을 받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고 각지를 전전하다 이곳 은자의 탑까지 떠밀려 온 것이다. ‘어쩐지 비룡기사를 붙여 준다고 했더니만.’ 스튜를 상대한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김성철은 이 여자가 못 쓸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까. 그들은 거기 있어요!” “거기가 어디냐고?” “거기가... 거긴데... 웅.. 하늘에서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는데!” 스튜의 말을 따라 플라이를 써서 하늘을 함께 비행했지만 상공엔 오늘따라 바람이 유난히 강하고 스튜도 제대로 길을 찾지 못해 쓸데없는 마력만 소비해야 했다. 비룡의 속도가 워낙 빨라 플라이를 시전한 상태에서 마력을 최대한으로 투입해서 그런지 피로는 더욱 심해지기만 했다. “저쪽이에요! 저쪽으로 가세요!” 그런 와중에 들려오는 스튜의 지시는 김성철의 짜증을 부채질할 뿐이었다. “저쪽이 어디냐고?” “저기요! 저기! 나무 옆에.” “나무가 한 두 개냐? 먼저 내려가서 대기하고 있어. 바로 따라 내려갈 테니.” “그.. 그건 어려워요! 혼자 갔다가 죽을 수도 있는 걸요.” 심지어 겁까지 많다. 그거야 지금까지 죽임 당한 기사들을 보면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미 김성철의 인내는 한계를 넘어선 뒤였다. “…….” 결국 김성철은 참지 못하고 비장의 한 수를 꺼내들었다. 그는 바로 마을로 돌아와 탕그리트의 저택으로 향했다. 남작은 탕그리트의 묘지 옆에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 “조금 아프겠지만 참거라.” 김성철은 남작의 듬직한 목을 쓰다듬은 후 잘못 뼈가 붙어 뒤틀려 있는 왼쪽 날개에 손을 가져다 되었다. “뭐하려는 거야?” 베르텔기아가 묻자 김성철의 손이 남작의 날개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우두둑. 인간의 대퇴부 뼈보다 두꺼운 뼈가 부셔졌다. 따라서 그 소리도 생생하고 크게 들렸다. 뼈가 부러진 고통에 남작의 거대한 몸이 한 차례 들썩이긴 했지만 남작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알고 있는 것이다. 김성철이 자신의 날개를 부러뜨린 건 자신을 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치유가 목적이라는 걸. ‘역시 영특한 녀석이군.’ 김성철은 부러진 그리폰의 날개를 제대로 끼워 맞춘 후 간단한 부목과 붕대 묶어 단단히 고정시켰다. 보통의 치료는 여기서 회복 포션을 더하는 정도로 끝내겠지만 지금 김성철은 일분일초가 급한 상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자연적으로 뼈가 붙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특단의 방법이 필요하다. 그는 영혼창고에서 귀중한 엘릭서를 꺼냈다. 인간에게 쓰는 것조차 쉽지 않은 그 귀중한 치유제. 그것이 남작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그 귀한 걸!” 스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김성철은 깜짝 놀라는 스튜를 무심한 눈으로 힐끗 보고는 또 다른 엘릭서를 꺼내 남작에게 먹였다. ‘덩치가 크다보니 상처가 제대로 낫지 않는군.’ 김성철은 남작의 부러진 날개가 다시 제대로 붙기까지 계속해서 엘릭서를 투약했다. 하지만 3개 이상의 투약은 효과가 없다. 포션 중첩이라는 패널티를 받기 때문이다. 다행히 엘릭서 3개의 투약만으로 남작은 건강을 되찾았다. “구우우우우!” 남작은 자신의 날개가 회복된 걸 느끼고 상체를 올리며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남작은 말을 하지 못하지만 그 커다란 매의 눈동자엔 기쁨이 서려 있었다. 김성철은 남작의 몸을 쓰다듬으며 남작을 격려했다. “잘 참았다. 남작. 지금부터 넌 다시 날 수 있는 몸이 되었다.” 베르텔기아도 남작에게 다가가 책 모서리로 하얀 갈기털을 쓰다듬었다. “잘했어. 귀염둥이!” 하지만 김성철 일행 중엔 남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으음.. 설마 이걸 타고가자는 건 아니겠지?” 마라키아는 여전히 그리폰에 대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런 마라키아를 뒷주머니에 강제로 집어넣고 남작 위에 올라탔다. 남작은 순순히 김성철이 자신의 등에 타는 걸 허락했다. 그리고 비행이 시작됐다. 상공엔 난기류가 흐르고 있었지만 바람과 친한 날개가 달린 종족은 마치 파도를 타듯 편안하게 그 기류에 올라탔다. 플라이를 시전하며 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안락하고 편안한 기분. 김성철은 발밑에 펼쳐진 대지를 보다 편하고 느긋하게 볼 수 있었다. 멀찍이 앞서 간 스튜의 비룡이 뒤돌아왔다. “저 쪽이에요. 저 쪽.” 그녀는 용기병의 창을 들어 눈 덮인 숲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저 쪽이 어디냐고?” “앞으로 쭉요.” 남작을 탄다고 해서 스튜가 명석해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플라이를 시전하며 날던 때보다 보다 편하고 여유 있는 자세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사실이다. 한참이나 실랑이를 한 끝에 김성철은 문제의 종말교단이 있다는 지점으로 홀로 내려갔다. 하늘 위엔 스튜의 비룡이 8자를 그리며 비행하고 있었다. 그곳이 맞다는 소리다. “와... 어떻게 저렇게 멍청할 수 있지?” 젊은 여자에겐 대부분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베르텔기아도 스튜의 멍청함에 대해선 질린 모양이다. 마라키아는 한술 더 떴다. “노예로도 쓰기 곤란한 인간이군. 가축들마저 멍청해질 것 같으니.” 김성철도 할 말은 많았지만 그는 어른인지라 그 말을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당면한 문제에 시선을 돌렸다. 김성철의 주머니 안쪽에 넣어둔 돌에서 희미한 빛이 발하며 스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기가 종말교단의 근거지 중 하나로 추정되는 곳이에요. 조금만 더 가면 동굴이 하나 있을 거예요. ] 통신석이다. 감화학파 마법사의 마력이 깃든 한 쌍의 짝을 이루는 돌로 각 돌을 지닌 자 사이에 일정시간 동안 원거리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물건이다. 통신 거리에 한계가 있어 짧은 거리 내에서 사용해야 하고 게다가 통신 시간도 돌에 충전된 마력이 사라지기 전이라는 제약이 있어 길게 쓸 순 없지만 한정된 상황에선 제법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물건이다. 실제로 이 돌의 가격과 희소성은 대단이 높아 부유한 인간제국 조차 공선 당 하나 씩을 둘 정도의 희귀한 아이템이다. 그런 걸 내줬다는 건 제국대령 브레브가 겉으로 보이는 이상으로 김성철에 큰 것을 걸고 있다는 이야기기도 했다. ‘이대로 부하를 잃은 채 돌아 가봐야 기다리는 건 가볍게는 문책성 인사, 무겁게는 군사재판일지도 모르니.’ 물론 집안 배경이 우월하다면 아무 문제없겠지만 김성철의 눈에 비친 브레브 대령은 훌륭한 집안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보였다. 김성철은 상공에 있는 스튜의 안내를 따라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남작은 김성철과 스튜 사이의 낮은 지대를 날며 김성철의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덕분에 김성철은 곧 심상치 않은 동굴의 입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동굴 주변에서 김성철은 익숙한 싸늘한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김성철은 기척을 죽이고 조용히 동굴 쪽으로 접근했다. 그때 통신석이 번쩍 빛이 났다. [ 동굴이 보이나요? 보여요! 거기 나쁜 종말교단의 소굴이에요! 대규모 토벌대가 가면 숨고 소수가 가면 나타나죠! ] 스튜의 경박한 목소리가 고요한 숲속에 울려퍼졌다. 동굴 주변에서 느껴지던 살기가 일제히 사라졌다. ‘이런 개 같은 일이 있나.’ 김성철은 통신석을 으스러뜨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문제의 동굴 쪽으로 다가갔다. 사라졌던 기척이 다시 주변에서 포착됐다. “적이다.” 썩어도 준치라고 마라키아도 동일한 기척을 느끼고 짧게 말했다. “여긴 내게 맡겨라.” 김성철은 하얀 숲속을 돌아보며 소리 높여 말했다. “모습을 드러내라.” 쥐 죽은 듯한 적막이 겨울의 삼림에 펼쳐졌다. 김성철은 상대방이 잘 훈련되고 교육 받은 정예의 암살자라는 것을 간파했다. ‘귀찮은 것들이군.’ 김성철은 오감을 극대화시켜 숨은 암살자들의 기척을 찾아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부스럭. 미세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저쪽이군.’ 김성철이 암살자를 잡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 저기요! 저기요~? ] 통신석이 또 발광하며 스튜의 멍청한 목소리를 송출했다. 김성철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지는 동안 간신히 포착했던 암살자의 기척이 사라졌다. 김성철은 보기 드문 분노를 느끼고 품속에서 스크롤 하나를 꺼냈다. 불길한 보랏빛을 머금은 스크롤. 베스티아레에게 받은 하르마게돈 스크롤이다. “당장 기어 나와라.. 동굴 전체를 날려버리기 전에.” 하지만 저쪽엔 아무 반응도 없다. 김성철은 강한 분노를 느끼며 스크롤을 찢으려고 했다. 그때 복실복실한 솜털로 뒤덮인 앙증맞은 손이 그의 손을 가로막았다. “…그건 위험한 물건이다.” 마라키아다. 마라키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보랏빛 스크롤을 노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법사로서의 실력은 마라키아가 훨씬 위라는 걸 알기에 김성철은 스크롤을 찢으려던 것을 멈추고 그것을 마라키아에게 내밀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문제라도 있나?” “이건, 함정이군.” “함정?” “찢는 순간 하르마게돈이 주변에 시전 되게 만든 물건이야. 다시 말해 찢는 순간 펑! 이라는 거지. 누가 준 건지 모르겠지만 그야말로 순수한 악의로 똘똘 뭉쳐 있는 물건이군.”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쓴웃음을 지으며 스크롤을 다시 영혼창고에 집어넣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군.” “내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 날 당장 서열 2위로....” 마라키아가 그렇게 희망사항을 말하려고 할 때 동굴 안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김성철의 시선은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한 사내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군복을 연상케 하는 디자인의 순백의 제복을 입은 사내로 훤칠한 키에 금발백안의 준수한 용모, 너그러운 미소를 지닌 자였다. 그 사내를 본 순간 김성철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니 저 녀석은?’ 절망적인 싸움을 되풀이 하던 반란군 시절. 정예 루테기네아 왕국군을 상대로 불패의 전적을 쌓아나가던 부대가 있었다. 빈사의 사자 여단. 김성철은 그 전설적인 부대의 지휘관이었다. 성공적인 부대가 그러하듯 김성철에게도 훌륭한 부하들이 있었는데 지금 동굴 앞에 나타난 사내도 그중 하나였다. 김성철은 놀라움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프리츠 슈넬메르커.” 김성철의 옛 부관. 그는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는 태평한 얼굴로 김성철을 바라보며 정중하게 경례했다. “오랜만입니다. 여단장님.” [ 저기 뭐하고 있죠? 혹시 살아 있어요? 살아 있는 거 맞죠? ] 통신석이 또 한 번 터무니없는 타이밍에 발광하며 이제는 꼴도 보기 싫은 목소리를 송출했지만 그것만으로 김성철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워버릴 순 없었다. “오랜만이군. 프리츠.” ======================================= 77. 옛 부하 (2) 슈넬메르커가 손을 들어 올리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자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김성철이 예상한 대로 잘 훈련된 암살자들. 그들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슈넬메르커의 손짓에 따라 나타났다가 다시 숲속으로 사라졌다. 아는 얼굴은 없다. 김성철은 자신의 부하들의 이름을 전부 외우지 못했지만 함께 생사고락을 한 얼굴들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암살자들은 슈넬메르커가 독자적으로 고용하거나 훈련시킨 존재로 보인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의외의 곳에서 만난 옛 부하의 뒤를 따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들어가기 전에 시끄러운 통신석에 한 마디 하는 건 잊지 않았다. “돌아가라. 스튜. 개인적으로 할 일이 있다.” 물론 스튜가 한 번에 말귀를 알아듣는다면 여기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 네..? 무슨 할 일요? 뭔가요? 그게? ] 김성철은 마라키아에게 통신석을 내밀며 처리하게 시켰다. 통신석을 받아든 마라키아는 작심한 듯 날개를 파닥거리며 통신석을 향해 외쳤다. “입 닥쳐라! 인간! 간을 쪼아 먹기 전에!” [ 히.. 히이이이!! ]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남작과 함께 바깥에 남겨두었다. 마라키아를 남겨둔 건 남작을 지키기 위해서다. 아무리 작아졌다고 하나 지금 세상에 마라키아를 이길 존재는 몇 되지 않으니까. “넌 남작과 함께 바깥에 남아 주변을 경계해라.” “호오? 이 멸세의 왕을 풀어줘도 괜찮은 건가? 나도 모르게 날뛰어 버릴지도 모르는데?” 김성철은 움 브루크를 꺼내 보임으로써 마라키아를 침묵시켰다. “삐이이....” 슈넬메르커를 따라 들어간 동굴 안엔 횃불의 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는 종유석들이 여기저기 자라나 있었다. 줄지어선 종유석 기둥을 따라가자 수많은 갈래길이 나왔다. 그걸 본 김성철은 왜 제국의 기사들이 이 동굴의 위치를 알고서도 종말교단을 일망타진 못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동굴은 그 자체로 자연이 만들어 낸 미로다. 그 깊이 어느 정도 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슈넬메르커는 아무 표지판도 없는 몇 개의 갈림길을 망설임 없이 선택해 앞으로 걸어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몇 번이고 헷갈릴 정도로 특색 없는 길임에도 그는 일말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걸 본 김성철은 프리츠 슈넬메르커가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라는 걸 상기했다. 어지러운 갈림길을 거듭해서 간 지 10여분. 김성철은 마침내 은자의 탑 일대에 자리 잡은 종말교단의 본거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넓찍한 공동 안엔 여러 개의 천막이 있었고 불빛 주위로 교단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숫자가 제법 많다. 김성철은 눈대중으로 동굴 안에 모인 종말교단의 숫자가 200명은 족히 되는 것을 발견했다. “이쪽입니다.” 슈넬메르커는 천막 가운데서도 특별히 화려하고 큰 곳으로 들어갔다. 천막 앞을 지키고 있던 전사들이 슈넬메르커를 보고 목례를 하고 앞을 비켜주었다. 하지만 그 전사들은 김성철에겐 별 다른 존경의 표시를 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으시죠. 여단장님.” 슈넬메르커는 김성철을 계속해서 여단장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그는 김성철이 장군의 직위에 오른 뒤에도 군에 남아 있었지만 그 전에 다른 부대의 지휘관으로 전출되어 바뀐 호칭을 부를 기회가 없었고 얼마 뒤에 군을 떠나 더더욱 그럴 기회가 없었다. 김성철은 천막 중앙에 장식된 부러진 검이 그려진 문장을 응시했다. “이건 뭔가?” 못 보던 문장이다. 이에 슈넬메르커는 웃으며 대답했다. “제 가문의 문장입니다.” “아. 슈넬메르커 백작의 문장인가? 못 알아봐서 미안하군.”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 마음대로 만든 문장에다 라그란제에 입조한 일도 거의 없는 지방 귀족의 문장이니 기억 못하시는 게 당연하죠.” 간단한 인사치레가 끝난 후 천막 안엔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당연한 귀결이다. 김성철도 슈넬메르커도 각자의 사정이 있으니까. 김성철은 천막 안의 물건들을 하나씩 응시했다. 장식용 검, 두터운 책이 진열된 간이 책장, 바닥에 깔린 하얀 곰의 모피 등이 있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천막 중앙에 자리 잡은 탁자와 그 위에 올린 이 세계 전체를 표시한 커다란 지도였다. 슈넬메르커는 지도 주변에 서서 이지로 반짝이는 눈동자로 지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말하기 전에 몇 번이고 심사숙고 하는 것은 슈넬메르커의 좋으면서도 나쁜 버릇이다. 시간이 넉넉할 때는 그보다 좋을 수 없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꾸물거리는 건 상관 입장으로 속이 터지는 일이니 말이다. 다행히 지금은 허락된 시간이 많다. 슈넬메르커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고 길게 이어진 침묵을 깼다. 그는 천막 중앙에 자리 잡은 커다란 지도 위에 놓인 장기 말을 손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입을 열었다. “여단장님께서 이곳에 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김성철은 자신의 옛 부하를 무심한 눈으로 응시했다. “이전에도 은자의 탑을 찾아오셨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첫 번째 재앙을 해결한 이후에 말이죠. 그때 사라사 아가씨와 알투지우스 옹을 만나셨던 걸로 아는데.” “그렇다.” 김성철은 은자의 탑 인근에서 의외의 재회를 떠올리며 그들을 찾았다. “사라사와 알투지우스 교수는 어디에 있나?” “그들은 라그란제에 있습니다. 라그란제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지요.” “중요한 일?” “포교라던가. 뭐 그런 것이죠. 하지만 그들이 비번이라고 해도 제가 올 작정이었습니다. 직접 만나뵙고 싶었거든요.” 툭. 슈넬메르커가 지도의 일부분에 장기 말을 내려놓았다. 김성철은 그제야 슈넬메르커의 손에 들린 장기 말이 사자의 형상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슈넬메르커는 사자를 은자의 탑이라 표시된 부분에 올려놓았다. “굳이 날 만나러 왔다는 건가?” 김성철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슈넬메르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유를 말해라.” 김성철은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슈넬메르커 쪽을 바라보았다. 슈넬메르커는 지도가 탁자 주변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저희 종말교단이 뭔지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처음엔 질문으로 시작됐다. “날 숭배하는 집단이라고 하더군.” 김성철이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프리츠. 자네가 이 집단의 구성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담담한 어조로 말했지만 뼈가 있는 한 마디. 프리츠 슈넬메르커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여단장님께서도 우리에 대해 나름의 조사를 하신 모양이군요.” “내 이름을 파는 무리들인데 어떤 것들인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김성철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대답했다. 또 다른 침묵이 흘렀다. 슈넬메르커는 엷은 미소를 지은 채 지도를 응시하며 또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종말교단의 구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건 맞습니다. 특히 재정적인 부분에 큰 기여를 했지요. 물론 이러한 모든 행위는 여단장님을 위한 충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말하게. 짧게.” 김성철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김성철이 말을 길게 하는 걸 좋아하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프리츠 슈넬메르커는 심호흡을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의 옛 대장. 윌리엄 퀸튼 말버러는 황제의 자격이 없는 인물입니다.” 충격적인 한마디. 김성철은 속으로 강한 호기심을 느꼈지만 내비치지 않고 담담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그 이유는?” “그는 루테기네아 왕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인물입니다.” 불현듯 어두운 얼굴로 김성철에게 읊조리던 황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황제는 김성철에게 이렇게 말했다. “루테기네아의 치세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하지만 김성철은 그 말은 묻어두고 슈넬메르커를 무심한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증거는?” “없습니다.” 슈넬메르커는 당당하게 말했다. 김성철의 입가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좀처럼 보이지 않는 감정표현이다. 그의 품속에 있는 베르텔기아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김성철은 미소를 머금은 채 슈넬메르커에게 말했다. “자네는 예전과 변한 게 하나도 없군.”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잠깐의 웃음이 지나간 후 슈넬메르커는 다시 입을 열었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작은 물증은 얼마든지 들 수 있지요.” “말해보게.” “지금은 출입금지 된 라그란제의 구 시가지에 루테기네아의 범죄자들이 모여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작년 마지막 날에 전사한 수도방위 사령관 아르큐부스 제독은 악명 높은 간다르바 가문의 적자라는 소문도 있지요.” “간다르바 가문? 그 쓰레기 새끼들이 아직도?” 김성철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간다르바 가문이 얼마나 잔인한 인간들인지는 김성철이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투기장에서 김성철은 간다르바 가문이 연출한 일방적으로 불리한 검투극에서 수많은 괴물들과 검투사들에 의해 몇 번이고 죽임을 당할 뻔했다. 투기장에서 마지막으로 치룬 크릭프리드와의 일전도 간다르바 가문의 연출이었다. 하마터면 김성철은 비열한 반란군의 심장을 루테기네아의 영웅이 취한다는 뻔한 연출의 희생양이 될 뻔했다. “게다가 수도의 지하엔 정체불명의 괴인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마법에 정통한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것들은 루테기네아가 과거 정복 전쟁에서 사용했다는 저주 받을 시체골렘과 닮아 있다고 하더군요.” “음...” 김성철은 턱 끝을 매만지며 낮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제도 라그란제의 지하에 도사리고 있는 막강한 구세병은 김성철이 직접 눈으로 확인한 존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슈넬메르커의 주장을 확실히 뒷받침하지 못한다. 김성철은 이 부분을 지적했다. “인상 깊은 이야기군. 하지만 여전히 근거는 빈약해.” 이에 슈넬메르커는 오히려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지도 위의 장기 말을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왕관 형태의 장기 말이었다. 섬세한 손가락에 의해 들어 올린 장기 말은 이내 대륙의 남서쪽, 인간제국의 수도인 라그란제 위에 놓였다. “황제가 은밀히 추진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뭔지 아십니까?” “안다면 여기 오지도 않았겠지.” “알다시피 황제는 모든 범인류와 각자의 행복, 정의와 질서, 법의 지배, 정당한 종교의 보호자를 자처합니다.” “그랬었나?” 김성철이 아는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중요한 문제는 아니기에 김성철은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정당한 종교의 보호자 역할이죠. 아시다시피 라그란제엔 대륙에서 가장 신도가 많은 두 개의 교단의 본부가 있습니다. 호라산 교단과 뮤라 교단이죠.” “그리운 이름이군.” 언급한 두 교단은 김성철과도 관련이 깊다. 그들은 사이좋게 김성철을 파문했고 그 사실은 상태창의 저주 항목에 똑똑히 새겨졌다. “하지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그 두 교단의 지지를 업고도 뒤로는 이단의 상징과 제기들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이단이라...” 제국의 인간들은 다섯 주신 중 질서신을 모신다. 하지만 다른 주신들을 섬긴다고 해서 이단이 되는 건 아니다. 그들 또한 이 세계를 관장하는 신이며 숭배를 받아 마땅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단은 신이 아닌 존재를 믿는 것을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들이 아신이라 불리는 존재다. 익시온에서 김성철은 아신 숭배의 폐해를 누구보다 밀접하게 몸으로 느낀 바가 있다. “황제가 이단에 손을 뻗었다고 말하는 건가?” 김성철이 달라진 음성으로 물었다. 슈넬메르커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미 허공궁궐 안엔 아신을 위한 불경한 예배당이 마련되어 있고 지금 현재에도 황제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황제의 검들이 대륙 각지를 돌아다니며 사악한 아신의 기념물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건 심각한 일이군.” 지엄한 다섯 신은 인간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어떤 간절한 기도라도 잘 응하지 않지만 아신이라는 신도 인간도 아닌 존재들은 원하는 대가만 지불하면 즉각적인 만족을 준다. 부, 사랑의 성취, 불로장생, 역병, 천재지변, 혹은 증오하는 적수의 죽음 등등. “황제가 막강한 공중 함대를 지니고 있음에도 이단의 힘까지 빌리려고 한다는 것은 그만큼 열세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도처에 남아 있는 루테기네아의 망령에 대해서 말입니다.” “…….” 딱히 여기에 대해 김성철이 할 말은 없다. 가능성이 있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섣불리 판단 내릴 문제는 아니다. 김성철은 문득 피로감이 몰려오는 걸 느끼며 어깨를 주무르며 슈넬메르커에게 말했다. “그래서 결론이 뭔가?” 슈넬메르커는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리한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 사내는 얼굴에 화색을 띄며 김성철에게 흉중에 오랫동안 감춰왔던 말을 꺼냈다. “간단합니다. 황제는 처음부터 자격이 없었고 지금은 남아 있던 마지막 존엄성까지 내팽겨 쳤습니다. 반면 여단장님은 시대의 영웅답게 홀로 묵묵히 재앙과 맞서 싸우셨고 벌써 두 개의 재앙을 해결하셨습니다. 자, 여기서 생각해봅시다. 배신자 황제와 세상의 구원자. 누가 더 진정한 왕에 적합하겠습니까?” “…….” 그 순간 김성철은 위험한 예감을 느꼈다. 슈넬메르커의 푸른 눈동자에 미약한 광기의 빛이 감도는 걸 몽롱한 와중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옛 부하는 들뜬 어조로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존경하는 여단장님. 부디 우리들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이 멸망해가는 세상 속에서 한줄기 빛이 되어 우리들을 이끌 진정한 왕으로 말입니다.” ======================================= 77. 옛 부하 (3) 왕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김성철은 단 한 번도 스스로가 왕이 되고자 하는 생각을 한 적 없었다. ‘내가 왕이 된들, 무위의 암군 크롬갈드 2세 밖에 더 되겠는가?’ 모든 이들 위에 선 자는 그에 걸 맞는 책임과 의무를 지닌다. 그 임무를 져버리는 자들은 암군 혹은 폭군이 되며 그에 상응하는 피해를 아래의 사람들에게 전가한다. 김성철이 딱 질색하는 것들이다. 김성철은 일언지하에 옛 부하의 제안을 거절했다. “프리츠. 나는 왕이 될 생각이 없네.” 슈넬메르커는 이를 예상한 듯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이미 우리에겐 여단장님을 믿는 수만 명의 신도들이 있고 새롭게 도읍을 만들 부도 쌓아놓고 있습니다. 여단장님께서 허락만 한다면 우리는 언제든 여단장님을 위한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김성철은 피로를 느꼈다. 지금 상황이 불편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느껴졌다. 그는 이어지는 슈넬메르커의 이야기를 마지못해 들었다. “세 번째 재앙은 하나의 왕을 만들라는 명령을 모든 인류에게 내렸습니다. 모든 인류 위에 군림하는 하나의 왕. 제가 볼 때 이에 적합한 인물은 단 한 명뿐입니다. 바로 여단장님이지요. 재앙에 맞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황제나 고대왕국의 왕 따위가 어찌 우리 모두를 대표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왕이 된다면 나는 뭘 해야 하나?” 김성철의 무심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슈넬메르커는 환희에 찬 미소를 머금으며 서둘러 말했다. “우리들의 왕이 되어 주시는 겁니까?” “내가 뭘 해주길 바라나?” 김성철이 다시 물었다. 프리츠 슈넬메르커는 김성철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사내였다. 그의 눈에 비친 김성철의 눈빛은 거울처럼 맑았다. 그는 왕이라는 선물을 내밀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대단하군. 세계의 적으로 십여 년을 들개처럼 살아오며 누구보다 권력에 갈증을 느꼈을 사람이.’ 오랜 부관으로서 슈넬메르커는 김성철에게 시덥잖은 말장난이나 미사여구 따위가 통용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좀스런 수는 오히려 김성철의 분노와 의혹을 키울 뿐이다. 슈넬메르커는 대답을 무언으로 촉구하는 그의 옛 상관을 향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해주실 일이 하나 있습니다. 여기서 말이죠.” “여기서?”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슈넬메르커는 계속해서 말했다. “재앙의 서를 파괴하여 주십시오.” 아마도 이것이 슈넬메르커가 진정으로 원한 것이리라. 김성철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가 왕이 되고 안 되고는 부차적인 문제다. “왜 재앙의 서를 파괴해야 하지?” 김성철은 흩어졌던 생각의 파편들이 하나 둘 모여 가며 형체를 갖추는 걸 느끼며 질문을 던졌다. 침묵 속에서 슈넬메르커는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재앙의 서가 이 땅에 재앙을 불러오는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재앙이 재앙의 서로부터 나온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슈넬메르커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낡은 양피지 하나를 꺼냈다. 김성철은 그 양피지의 정체를 한 눈에 파악했다. 종류는 다르지만 이미 본 적이 있는 물건이다. ‘저것은...?’ 슈넬메르커는 둘둘 말린 양피지를 탁자 위에 올려 놓고 김성철을 응시하며 말했다. “이것은 신의 글이라고 불리는 태고의 문헌입니다. 루테기네아 왕국이 멸망했을 때 입수했던 것이었죠.” “그것이 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김성철이 신의 글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는 신의 글을 덥석 잡으며 슈넬메르커에게 고개를 돌렸다. “프리츠. 자네는 이 글을 읽을 수 있나?” “없습니다. 다만 우리 쪽에 읽는 자의 능력을 지닌 사람이 있어 독해를 도왔죠.” “호오.” 김성철의 눈앞에 이제는 애증이 묻은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양피지를 들어올렸다. “여단장님. 아무리 여단장님이라고 해도 그걸 직접 보시는 건 위험합니다.” 슈넬메르커가 김성철이 뭘 하려는지 알고 즉시 만류했다. 하지만 김성철은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겐 두 번째 재앙을 해결하면서 얻은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읽는 자(초급) 김성철 또한 이제 신의 글을 읽을 자격이 있다. 비록 초급에 머물러 있다고는 하지만 자격이 있는 건 사실이다. 김성철은 흔들림 없이 신의 글을 펼쳤다. 과거 카타콤에서 보았던 무수한 별과 같은 글귀가 김성철 주위에 펼쳐졌다. 과거에 김성철은 그 무한한 문자의 바다에서 의식이 혼미해지는 걸 느꼈지만 지금의 김성철은 또렷한 정신 속에서 문자의 바다에서 떠오르는 글귀를 부담 없이 응시할 수 있었다. [ 아신 힐데가름의 기록 ] 문자 속에서 마치 여신처럼 아름답고 실제로 그러한 분위기를 지닌 여인이 물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처럼 김성철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 여신은 거대했다. 실로 거대했다. 세상의 절반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여인 앞에 선 김성철은 공허감과 더불어 왜소함,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공포를 느꼈다. 그 여인이 김성철을 향해 뭐라고 말했다. 천둥소리 이외엔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혼돈 속에서 곧 김성철은 어느 순간 자신이 여인의 말을 이해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 …신이 죽은 이후 세상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처음엔 신의 시종인 아신들이 신의 역할을 대신해 세상의 붕괴를 막았다. 하지만 신의 역할은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무한한 권능과 의무의 바다 속에서 신의 역할을 맡은 아신들은 차례로 녹아 없어졌다. 초기의 거룩한 아신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성스런 책무라고 생각했으나 자격 없는 아신들은 전혀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다. ] 그 이후부턴 다시 천둥과 같은 굉음이 들려왔다. 김성철이 다시 여인의 말을 이해한 것은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을 때였다. [ …타락한 아신들은 신이 이 땅에 남겨 놓은 아신에 이르는 길을 차례로 지웠다. 그것들은 먼 바다에 혹은 지하 깊은 곳, 아니면 구름 위 등 평범한 인간이 결코 닿을 수 없는 영역에 숨겨 놓았다. 가장 위험한 길 하나를 제외하고. 그렇게 자신들의 추악한 기득권을 공고히 한 아신들은 만들어내서는 안 될 물건을 만들어 내었다. ]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김성철 앞에 수많은 사물들이 차례로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검, 창, 석판, 두루마리, 허공에 떠오른 불빛, 달 위에 새겨진 문자 등 다양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형태를 하고 있든 그 목적은 한결 같았다. 재앙의 전파. 그것들은 이 땅에 재앙을 뿌리는 물건이다. 그 자체로 말이다. 거대한 여인의 눈이 감겼다. 그녀가 눈을 감자 김성철 앞에 펼쳐진 무한한 문자의 세계도 어둠으로 침식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을 때 느닷없는 불협화음과 같은 문자가 눈앞에 펼쳐졌다. [ 이 기록은 전부 악신으로 타락한 힐데가름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 [ 미혹되지 말지어다. 통합을 저해하고 오로지 이 세상의 멸망을 바라는 무리들의 말에. ] [ 진실을 원한다면 언제든 우리에게 오라. 진리를 아는 축복이 허락된 자여. ] 찰나의 순간 김성철은 그 문구의 저자가 신의 글의 저자와 다르다는 걸 인식했다. 그리고 김성철의 의식 한 가운데 신의 글이란 양피지 구석에 붙은 봉인이 또렷하게 각인됐다. ‘이것은...?’ 정신을 차렸을 때, 김성철은 현실의 세계로 돌아와 있었다. ‘이것이 읽는 자의 능력인가...?’ 간단하게 표현하면 한 편의 영화를 본 기분이었다. 문제는 영화가 재미없어도 중간에 도망 나올 수 없다는 것이지만. ‘그래도 쇼킹 아시아보단 재밌군.’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놀란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슈넬메르커를 발견했다. “괜찮으십니까? 여단장님?” “괜찮네.” 김성철은 슈넬메르커의 신의 글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군.” “모두들 그런 말을 하지요.” 슈넬메르커는 어느새 자신의 서재에 앉아 뭔가를 작성하고 있었다. 아마도 김성철이 신의 글 안에 빠져든 긴 시간 동안 나름의 업무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각거리는 펜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김성철은 신의 글이란 양피지를 노려보았다. 있다. 무한한 세계의 끝자락에서 본 봉인이. 김성철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봉인을 떼어냈다. 하지만 잘 떨어지지 않는다. 김성철은 다른 곳을 바라보며 몸에 신적인 힘을 흘렸다. 쭈욱. ‘아뿔싸!’ 힘을 너무 준 탓일까. 양피지 일부분이 봉인과 함께 떨어져 나왔다. 김성철의 얼굴에 경악이 떠오르던 그 순간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찢긴 신의 글이 어떠한 인과관계도 없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김성철의 손엔 찢긴 양피지는 흔적도 없이 오로지 떼어 낸 봉인만이 남아 있었다. “그건 왜 또 찢으려 하십니까?” 슈넬메르커가 문서작업을 하며 사무적인 어투로 물었다. “손이 미끄러졌군.” 김성철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했다. 상관의 특권이라고 할까. 악폐습이라고 할까. 슈넬메르커는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아무리 여단장님께서 힘이 강하셔도 그 신의 글은 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름 그대로 신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거든요. 아무리 구기고 찢고 불에 태운다고 하나 그것은 원형을 잃지 않습니다.” 하지만 봉인은 떨어졌다. 슈넬메르커가 재잘거릴 동안 김성철은 그 봉인을 슬그머니 자신의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그걸 본 베르텔기아가 몸을 격하게 흔들었지만 김성철은 태연함을 잃지 않았다. “역시 신의 글이라는 건가. 비범하군.” 김성철이 말했다. “모두들 같은 말을 하지요.” 슈넬메르커는 작업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탁자 위에 올린 신의 글을 자신의 품안에 소중히 간직하며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 정도면 설득을 마무리 지을 수 있겠군.’ 팔부능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김성철의 날카로운 질문이 비수처럼 날아왔다. “자네는 그 글을 어떻게 읽은 건가?” 김성철은 알고 있다. 알려진 신의 글의 해독자는 단 한 명밖에 없다는 걸. “생각하시는 그대로입니다.” 슈넬메르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것을 기회라고 여겼다. “라이즈 하이메르 공주, 그 분이 신의 글의 해독을 도왔습니다.” 김성철의 표정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지긋지긋하군.’ 김성철은 넌더리를 느끼며 옛 부하를 무심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하나의 이름이 나온 것만으로 모든 흥미는 사라졌다. 김성철은 지금까지와 다른 냉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라이즈 하이메르가 종말교단의 창설에 관여했다는 이야기인가?” 김성철이 매섭게 물었다. ‘응? 말투가 왜 이래?’ 슈넬메르커는 뭔가 일이 틀어지는 걸 느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이상하군. 여단장은 라이즈 하이메르에게 여전히 마음이 있는 게 아니었나?’ 황망한 와중에 김성철이 달라진 목소리로 연거푸 질문을 던져왔다. “그 여자는 종말교단의 무엇인가?” “지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그녀는 이미 고인이 된 몸이니까요. 다만...” “다만?” “신의 글을 해독해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해주신 분이지요. 저는 일종의 선지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정의로운 마음을 지닌 당신이 기꺼이 세상을 위해 한 몸 희생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죠.” 슈넬메르커는 김성철이 여전히 라이즈 하이메르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김성철의 행보도 그러했고. 자신의 딸도 아닌 옛 연인의 딸을 구하기 위해 모든 걸 버리고 세상을 등 진 인물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그의 생각은 중간에서 그르쳤다. 그는 김성철이 정령계에서 무엇을 본 지 방랑왕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 지 못했다. “…그 여자의 말은 믿을 수 없다.” 김성철이 말했다. 그 한 마디는 앞으로 벌어질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툭. 검은 재앙의 파편이 탁자 위에 올라갔다. 그걸 본 슈넬메르커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아니 여단장이 어떻게 그것을...?’ 그는 모른다. 재앙 해결의 보상으로 재앙의 파편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이것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김성철은 추궁하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슈넬메르커는 상황이 자신이 의도한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걸 느꼈지만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요량은 없는지라 궁색하나마 답변하는 선택지를 취했다. “그것은 신의 흙, 혹은 재앙의 파편으로 불리는 물질 아닙니까? 신이 기적을 일으키는데 쓴다는...” “그게 전부인가?” “네?” “그게 전부라고 물었다.” “네, 그게 전부입니다.” 처음으로 슈넬메르커는 거짓말을 했다.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지 안다면 결코 우리와 손을 잡으려들지 않겠지. 하지만 신의 흙은 우리의 대업에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다.’ 진실은 어느 정도 대업이 이룬 다음에 전해도 늦지 않다. 대의를 위한 작은 희생으로 포장하는 선 정도면 충분히 옛 상관의 마음을 다독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최악의 패착이었다. 김성철은 코웃음을 치고 재앙의 파편을 다시 복대 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말교단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프리츠 너냐?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인물이냐?” “그건 어찌하여 물으십니까?” 김성철은 벗어놓은 외투를 걸치며 뒤돌아섰다. “내 이름을 파는 짓을 멈추게 하려고.” 김성철은 슈넬메르커를 향해 몸을 돌렸다. 무심하지만 단호한 표정을 본 슈넬메르커는 직감했다. 김성철을 포섭하려는 자신의 계획은 실패했다는. ‘이런 빌어먹을.’ 뜻하지 않은 실패다. 김성철이 당장은 수락하지 않더라도 우호적인 관계는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실패로 끝이 났다. “그리고 애꿎은 제국 기사들을 살해하는 것은 관뒀으면 좋겠군.” 그것뿐만이 아니다. 김성철은 외투를 걸친 채 의자에 앉았다. “그럼 지금부터는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듣겠다. 질문에 대답할 준비는 되었나?” 김성철은 종말교단에 대한 모든 것들을 물어볼 작정이다. 그것은 슈넬메르커에게 허락된 일이 아니다. “죄송합니다만 여단장님. 오늘은 이쯤에서 실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슈넬메르커는 천막의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어딜 가나? 프리츠. 이야기는 지금부터인데.” 김성철은 옛 부하를 순순히 돌려보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참에 모든 것을 알아낼 작정이었다. 종말교단의 시작과 끝. 그 진정한 목적을. “미안합니다만, 다음에 뵙겠습니다. 여단장님. 이 이야기에 관해서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요.” “나중은 무슨. 언제 또 만난다고.” 김성철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어둠 속의 프리츠 슈넬메르커는 구석에 불타는 화로를 뒤엎었다. 화르륵하고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는 와중 슈넬메르커의 신형이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김성철은 이전에 비슷한 술법을 본 적이 있었다. 알려지지 않은 마법. ‘이건 아퀴로아의 것과 유사한 것이군.’ 김성철은 즉시 자리에 일어나 오감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영창 없는 마법엔 한계가 있다. 아마도 멀리는 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즉시 불타는 천막을 나서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그 앞에 검은 로브를 두른 건장한 사내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묘한 붉은 빛이 감도는 석궁으로 무장한 사내들이었다. 심상치 않은 무기를 들고 살기를 뿜어내는 걸로 보아 한 번 해볼 요량인 것 같았다. 김성철의 입가에 그답지 않은 냉소가 걸렸다. “어이, 난 너희들의 구세주라고?” 이에 대한 사내들의 답은 간명했다. “엿이나 처먹어!” 붉은 보석을 단 화살이 일제히 김성철을 향해 발사됐다. ‘이런, 쇼킹 아시아 같은 새끼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꺼내 날아오는 화살을 모두 쳐냈다. 그런데 화살이 팔 가라즈에 맞고 부서지는 그 순간, 김성철은 주변의 공기의 부자연스런 수축을 감지했다. “호오...?” 콰콰쾅! 어마어마한 폭발이 김성철의 지근거리에서 일어났다. 공동 전체가 무너질 정도의 거대한 폭발이었다. “폭발물에 전부 불을 붙여라. 그가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어느새 바깥에 당도한 슈넬메르커는 도도한 걸음걸이로 빠르게 걸으며 숲속에 숨겨진 공선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부하가 다가와 외투를 입혀주며 물었다. “이걸로 그 자를 매장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하겠지.” 슈넬메르커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하지만 시간은 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병력을 풀어라. 목표는 은자의 탑.” 슈넬메르커는 저 멀리 우뚝 선 아름다운 탑을 시선에 답았다. “거짓된 신의 책을 불태울 때가 왔다.” ======================================= 78. 불타는 호수 (1) “이 멍청한 인간!” “히에에... 살려 주세요!” 마라키아는 원래 한 성깔 하는 존재다. 지금에야 김성철에 눌려 힘을 못 쓰는 아기 새가 됐지만 원래 갖고 있던 더러운 성질이 없어질 리 만무하다. 마라키아는 김성철이 동굴에 들어가자마자 스튜를 아래로 끌고 내려와 나무 위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부리로 쪼는 가혹행위를 하고 있었다. “멍청한 유인원에겐 매가 약이지!” “히에에!!!” 마라키아의 작지만 날카로운 부리가 스튜의 등줄기를 콕콕 찔렀다. 살짝 따끔거릴 정도지만 스튜는 한 번 부리에 찔릴 때마다 죽는 소리를 내며 몸부림을 쳤다. 그녀의 애마이자 벗인 비룡이 이를 보고 몸부림쳐보지만 어느새 마라키아의 동료가 된 남작이 비룡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르르르르...” 물론 아직 마라키아와 남작은 서먹한 사이. 하지만 멍청한 스튜에 대한 짜증은 매한가지 느끼고 있었던지라 남작이 마라키아의 가혹행위에 협력한 것이다. “끄뢰에에에에!!!” 비룡이 광분하며 스튜를 구하려 해보지만 하늘이라면 모를까 지상에서 비룡은 그리폰의 상대가 될 수 없다. 남작은 사자의 앞발과 묵직하고 거대한 몸에서 나오는 힘을 이용해 간단하게 달려드는 비룡을 막아섰다. “크크크... 운 좋은 줄 알아라. 그 무식하게 힘만 쌘 인간만 아니었다면 네 녀석의 내장은 전부 내 뱃속에 들어갔을 거니까!” “히이이이이이!!!” 마음에도 없는 협박을 하는 도중 마라키아는 문득 도처에 깔린 음침한 인기척을 감지했다. “삐이이...?” 숲속 도처에 인간의 기척이 가득하다. 그런데 그가 지키고 있는 입구에서 나온 인간의 숫자는 전무하다. ‘다른 출구로 나간 건가?’ 다음 순간 지면이 흔들리며 동굴 안쪽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진은 아니다. 인위적인 폭발에 의한 흔들림이다. 마라키아는 안쪽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이.” 마라키아는 마법의 줄로 거꾸로 매달아 놓은 스튜를 풀어주었다. “사.. 살려주세요!” 스튜는 그대로 넙죽 엎드리며 목숨을 구걸했다. “닥쳐라. 인간! 내가 언제 죽인다고 했냐.” 마라키아는 작은 날개로 스튜의 머리를 한 대 가볍게 때리고는 명령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당장 위로 올라가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해라.” 스튜는 도망치듯 비룡에 올라 타 하늘 위로 올라갔다. 비룡의 포효가 아스라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마라키아는 주변을 불안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미약하지만 소름끼치도록 기분 나쁜 사악한 마기가 주변에서 풍기고 있었다. 마라키아는 작은 날개를 움츠리며 몸을 떨었다. “안 좋은 예감이 드는군.” * 은자의 탑 인근 공선 정박지엔 인간제국을 포함한 다양한 나라에서 파견된 공선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모여 있다. 각 공선의 책임자는 공선을 통제하는 함장이지만 가장 높은 직급을 지닌 자는 은자의 탑에 드나드는 사신들이다. 그들은 비록 한직이라고 하나 각자의 주군을 대리해 의사를 표시할 권한이 있고 타국의 공적인 의시표시를 수령할 권한 또한 지니고 있었다. 그 사신들 앞에 정체불명의 사내들이 나타난 것은 먼 곳에서 진동이 감지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고대왕국의 공선의 갑판 위에도 동일한 수수께끼의 인물이 나타났다. 검은 로브를 걸친 그들은 검은 연기와 함께 갑판 위에 나타났다. “실례를 무릅쓰고 느닷없이 나타난 부분에 대해 먼저 사과를 드립니다.” 고대왕국을 대표하는 소드마스터들이 일제히 검을 빼들었지만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정중함으로 포장한 강압적인 요구를 해왔다. “우리들은 종말교단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귀국의 이익을 위해 이곳에 왔으니 권한을 지닌 분과 만나게 해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겠습니다.” 종말교단은 한낱 사교집단에 불과했지만 지난 며칠 간 인간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승무원에게 나쁘지 않은 인상을 심어줬다. 세 번째 재앙이 공표된 이후 공공의 적이 된 인간제국의 얼굴에 먹물을 끼얹은 게 바로 종말교단들이니 말이다. 그들은 일련의 잔혹한 암살극을 통해 자신들의 주적이 누구인지 뚜렷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실력 또한 증명했다. 그러한 일련의 사실은 공선의 함장으로 하여금 괜히 건드려서 피를 볼 바에 한 번 정도 사신을 데려와 이야기를 듣게 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했다. 곧 사신이 주섬주섬 옷을 입고 갑판에 나왔을 때 종말교단의 무리들은 단도직입적으로 그들의 용건을 말했다. “우리 종말교단에겐 인간제국에 맞설 비밀의 무기가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한 번 감상해보시지요.” 슈넬메르커는 그렇게 말한 후 고대왕국의 사신의 얼굴을 살폈다. 반신반의. 굳이 평가한다면 불신하는 눈치다. 하지만 그의 평가는 곧 바뀌게 될 것이다. ‘여단장이 그렇게 나온 것은 예상외지만 큰 틀에서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 아니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슈넬메르커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저었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부하가 소리를 내는 화살을 활에 재고 하늘 높이 쏘아 울렸다. 매가 우는 듯한 긴 소리가 은자의 탑 상공 위에 울려 퍼졌다. 은자의 탑 주변에서 일을 하던 은자들과 토포로 마을의 주민 몇 명이 흔치 않은 소리를 듣고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 위엔 어떤 조짐도 없었다. 불길한 조짐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일어났다. 검은 로브를 걸친 수백 명의 종말교단의 교도들이 물밀듯이 토포로 마을을 향해 밀어닥친 것이다. 마을 앞엔 각국에서 파견된 공선이 모인 정박지가 있었지만 타국의 기사들은 종말교도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들의 공선 위엔 이미 종말교도에서 파견된 인물들이 탑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 하나, 인간제국을 제외하고 말이다. “종말교단이 나타났다고?” 제국대령 브레브는 지면 아래 일렁이는 검은 종말교단의 물결을 보며 심대한 충격을 받았다. ‘저렇게 많은 이단이 숨어 있었다니.’ 종말교단들은 그 많은 경비병 중에 오직 인간제국의 경비병만을 살해하고 정박지를 지나쳐 토포로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브레브 대령은 즉시 부관에게 명해 깃발 신호로 동맹국에게 이 사실을 전하도록 시켰다. 하지만 동맹국의 함선의 갑판 위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고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노련한 뱃사람인 브레브 대령은 한 눈에 동맹국들의 함선들이 전투에 결코 뛰어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런 개자식들. 세계의회의 서약과 의무는 이미 시궁창에 처 넣어버린 건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르긴 하지만 한가롭게 분노를 곱씹어도 될 정도로 한가한 상황은 아니다. 브레브는 즉시 부하들에게 명했다. “마법 포격을 준비해라! 하늘 위에서 저 사악한 이단을 친다!” 그때였다. 머리 위에서 파수병의 날카로운 외침이 울려 퍼졌다. “좌현에 무국적기함 출현!” 브레브는 즉시 옆을 돌아보았다. 눈 덮인 설산의 그늘 아래 세 척의 공선이 상승하고 있었다. 그중 마지막에 떠오른 공선에 걸린 깃발은 브레브도 잘 아는 깃발이었다. 부러진 검. 종말교단의 후원자인 슈넬메르커 백작의 문장이다. “총원! 전투 준비! 종말교단의 함선이 먼저 마법 폭격을 가했다. 입을 크게 벌린 대포에서 쏘아져 나온 마법탄환이 인간제국의 공선 지근거리에서 폭발함과 동시에 모든 것을 짓이기는 뇌전을 사방에 흩뿌렸다. 인간제국의 공선의 좌현이 반파되며 사람과 잔해를 아래로 쏟아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가?” 습격소식은 뒤늦게 은자의 탑에 전해졌다. “대체 파견 기사들은 뭘 하는 거지?” 은자들은 상공 위에서 일어난 공선 간의 전투를 보며 중얼거렸다. 땡! 땡! 땡! 마을의 종이 시끄럽게 울렸다. 종말교단의 군세들은 순식간에 무인지경에 가까운 마을 중앙을 돌파 그대로 은자의 탑으로 향하는 징검다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탑으로 피신하라!” 은자들은 앞 다투어 탑 안으로 달려갔고 이윽고 탑의 문이 굳게 닫혔다. “여.. 열어주십시오! 은자님들!” 바깥에서 농땡이를 치다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노예 하나가 문을 두드려보지만 탑의 문은 결코 열리지 않았다. 탑의 상층부에서 은자들은 좁은 창문을 통해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검은 로브를 걸친 무리들이 하나 둘 징검다리를 건너왔다. 다리를 건너는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하나 같이 호랑이처럼 날랜 정예의 전사이며 마법사들이다. 뒤늦게 상황을 보고 받은 포르피리우스는 탑의 최상층 전망대에 올라 종말교단의 무리들이 탑을 향해 접근하는 걸 지켜보았다. “으음. 어찌 이런 일이.” 종말교단에 맞서 싸우는 세력은 인간제국이 유일하다. 다른 나라의 공선들은 눈앞에 벌어진 은자의 탑의 위기를 보고도 꿈쩍하지 않고 있다. 불과 1년 전만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세계의회의 균열은 현실이 되었다. 인간제국의 공선은 홀로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오래가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포르피리우스는 그다지 지금 상황을 염려하지 않았다. 은자의 탑엔 최강의 은자라 불리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반인반용 카네스.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며 귀찮음을 표정으로 드러내며 포르피리우스 앞으로 걸어왔다. “뭐야? 종말교단? 그것들이 겁도 없이 여길 왔다고?” 지금 세상에서 그녀를 이길 만한 강자는 그다지 많지 않다. 대륙십삼걸을 통틀어도 이길 자는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규격 외의 강자라는 것은 그러한 것이니. 카네스는 탑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종말교단을 벌레보는 듯한 시선으로 노려봤다. “어떻게 할까?” 그녀는 기지개를 펴며 포르피리우스에게 물었다. 포르피리우스는 언제나처럼 신중한 입장이었다. “어디 한 번 그들의 이야기나 들어보자고.” 그렇게 말하는 포르피리우스의 눈동자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김성철이 지닌 영혼각인인 진실의 눈에 견줄 수 있는 전지의 눈이 이백여 명에 달하는 종말교단의 무리 하나하나의 능력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눈에 띄는 강자는 없군.’ 중간 중간 초인급의 강자들이 심심찮게 보이지만 카네스를 위협할만한 이는 단 하나도 없다. 하지만 지금 탑 앞에 모인 종말교단이 종말교단의 전력이라고 할 수는 없기에 포르피리우스는 계속해서 신중하게 상황을 관망하기로 마음먹었다. 곧 종말교단 쪽에서 한 젊은 여자가 탑을 향해 걸어왔다. 문 앞에 서 있던 노예는 겁에 질려 탑의 뒤쪽으로 후다닥 달아났다. “성은자 포르피리우스.” 그녀는 탑 최상층에 서 있는 포르피리우스를 올려다보며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포르피리우스는 냉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여기 온 용건이 뭔가?” 그의 물음에 수수께끼의 여인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그릇 된 신의 책을 불태우러 왔다.” 포르피리우스는 코웃음을 쳤다. “헛소리.” 은자의 탑의 목적은 재앙의 서의 보관과 보존. 은자의 탑 이전에 재앙의 서가 있다. 그 재앙의 서를 불태우겠다는 종말교단의 요구는 은자의 탑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쓸어 버릴까?” 카네스가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꼴사나운 주장을 하고 있으니 참고 보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포르피리우스는 여전히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지만 적어도 여기 모인 종말교단 중 카네스를 상대할만한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참에 카네스의 힘을 보여 은자의 탑의 위엄을 신흥 사이비 교단에게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겼다. “가라. 카네스. 가서 용의 힘을 보여줘라.” 포르피리우스의 명에 카네스는 활짝 웃으며 탑 아래로 몸을 날렸다. 탑의 최상층에선 가냘픈 여성의 몸은 그러나 지면에 닿을 땐 거대한 용의 형상으로 변해 있었다. “누구부터 먹어줄까?” 본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드래곤은 탑을 둘러 싼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을 노려보며 천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압도적인 카네스의 위용을 본 종말교단은 그럼에도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카네스의 심기가 점차 불편해지고 있을 때 선두에 있던 여성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짙은 검은 색으로 이루어진 결정. 재앙의 파편이다. 그녀는 재앙의 파편을 높이 들어 올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그와 동시에 그녀 뒤에 도열한 수십 명의 종말교단은 일제히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으며 기이한 주문을 이구동성으로 외웠다. 은자의 탑 주변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부정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짓을!” 카네스는 은자의 탑을 부정한 목소리로 더럽히는 이들을 향해 입을 크게 벌렸다. 이윽고 가공할만한 화염의 브레스가 분출되어 주문을 외는 종말교단을 덮쳤다. 강렬한 브레스는 종말교단은 물론 그 뒤의 토포로 마을 소유의 가옥 일부마저 초토화시키며 고요한 호숫가에 강렬한 파문을 일으켰다. 멀리 떨어진 공선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슈넬메르커는 당황해하는 고대왕국의 사신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 봐두십시오. 고대왕국분들. 우리들의 무대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브레스의 불길이 모든 것을 불태우고 지나간 자리에 머물고 있던 검은 연기가 서서히 걷혔다. 카네스는 발톱을 오므리며 자신의 숨결이 초토화시킨 자리를 큰 눈으로 응시했다. 잿더미 이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장면을 예상하며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바램은 곧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파멸적인 브레스가 훑고 지나 간 자리엔 검은 로브를 걸친 여인이 우뚝 서 있었다. 털 한 오라기 상하지 않은 건재한 모습으로. ‘이것은 뭐지?’ 경악으로 물든 카네스는 이윽고 더욱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했다. 그녀의 브레스는 선두의 여성은 물론이고 뒤에 도열해 앉은 채 주문을 외우던 다른 무리들조차 처리하지 못한 것이다. 가장 놀란 건 포르피리우스였다. ‘아니, 고만고만한 능력치를 지닌 자들이 어찌하여...?’ 갑자기 여성의 신형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카네스의 붉은 불길이 아니었다. 눈처럼 하얀 기괴한 불길이었다. 그 원인 모를 불길은 이름 모를 종말교단 교도의 몸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불길에 휩싸인 채 여성은 환희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게 강림하소서! 깨달은 자 토드하우여!” 점증하는 영창의 합창 속에서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쿵! 김성철은 깊숙한 종유동굴 안에 갇혀 있었다. “왜 당신 아는 사람은 하나 같이 정신병자밖에 없어!” 베르텔기아의 타박을 들으며 말이다. ======================================= 78. 불타는 호수 (2) “세상이 그들을 미치게 한 거지.” 김성철은 무너진 바위를 팔 가라즈로 가볍게 두드려 보았다. 빈틈이 없을 정도로 꽉 막혔다. 그러나 통과 못할 것도 아니다. 김성철은 품속에서 천을 꺼내 코와 입을 막고는 팔 가라즈를 휘두를 준비를 했다. “좀 시끄러울 거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자비한 착굴이 시작됐다. 그렇게 해야만 베르텔기아의 잔소리를 조금이라도 덜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 저기, 새... 새님! ] 딱히 다른 호칭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스튜로서는 새로운 상전에게 보고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 보고를 게을리 했다간 다시 거꾸로 매달려 날카로운 부리에 등짝을 쪼일 수 있으니 말이다. “뭐가 보이나? 인간?” 다행히 건너편의 작은 새는 호칭엔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스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보고를 계속했다. [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요. 제가 탑승했던 글로리호가 다른 공선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네요! ] 자신이 소속된 공선이 공격당한다는 충격적인 목격을 보고도 스튜는 비교적 차분하게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글로리호에서도 스튜는 천덕꾸러기로 갖은 구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확 떨어져버려라! 아.. 그건 너무 심한가. 그냥 적당히 날 괴롭히던 사람 몇 명만 죽어버렸으면.’ 그녀는 속으로 못된 염원을 품으며 통신석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 작은 폭군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스튜의 눈에 무언가 거대한 것이 포착됐다. “응...?” 스튜의 동공이 갑작스레 수축됐고 이윽고 커다란 괴성이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 와아아아왓! ]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나? 인간? 또 등짝을 쪼이고 싶냐?” 마라키아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 그.. 그게 아니라. 새님! 드래곤이에요! 드래곤이 나타났어요! ] “드래곤?” 마라키아는 아까 전부터 심상치 않았던 마법의 기류를 느끼고 있었다. 분명 드래곤이 내뿜는 마력의 기운은 폭풍과 같이 강렬한 구석을 품고 있지만 마라키아가 전부터 느끼던 것과는 성질이 다르다. 마라키아는 끈적거리고 불길한 부정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굳이 가까운 예를 든다면, 방금 생각해낸 것이지만, 익시온에서 느꼈던 그 기운. 아신이 나타나기 직전에 감돌던 기분 나쁜 고요와 닮아 있었다. ‘역시 느낌이 좋지 않군.’ 마라키아는 내키진 않았지만 남작 위에 올라타고 부리로 남작의 뒷목을 콕 쪼았다. 작은 부리가 뒷목에 닿자 남작의 거대한 몸통이 움찔거리더니 목이 뒤로 돌아가며 성난 눈빛을 내뿜었다. “어이. 축생. 잠깐만 태워줘. 같이 날개와 부리를 지닌 친구에게 태워달라고 하기엔 염치가 없는 건 알지만 지금 내 날개는 충분히 성장하지 않았고 저기선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것 같으니 말이야.” 남작은 말은 하지 못했지만 여간한 말은 전부 알아듣는 눈치였다. 그래서인지 목을 쪼인 원한을 잊고 힘찬 날갯질을 시작했다. 마라키아는 앙증맞은 손으로 커다란 고삐를 잡고 남작이 날아오르길 기다렸다. 곧 남작의 몸이 상공 위로 떠오르며 마라키아는 눈덮인 나무들에 가려져 있던 먼 곳의 풍경을 눈동자에 담을 수 있었다. 단연 눈에 띄는 건 탑 전체와 맞먹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크기를 자랑하는 드래곤 카네스의 모습이었다. ‘그 무례한 여자. 강력한 드래곤의 혈통이었군. 반인반용이라고 하나 저 정도의 크기를 지니고 있다니.’ 마라키아는 고삐를 당겨 좀 더 옆으로 비행할 걸 주문하며 드래곤 주변에 펼쳐진 것들을 보았다. 조인인 나하크 족의 시력은 인간의 몇 십배. 아주 멀리 떨어진 물체도 정확하게 파악하는 힘이 있다. 마라키아는 그 나하크의 눈으로 드래곤 주변에 포진한 검은 로브를 걸친 자들을 발견했다. 마라키아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저것인가? 내가 느꼈던 부정한 기운의 정체가.’ 마라키아는 카네스 바로 정면에 우뚝 선 채 하얀 불길에 타는 종말교도를 발견했다. 그 종말교도의 뒤에서 가부좌를 든 채 불길한 영창을 합창하는 무리들에게서 부정한 검은 기운이 방출되어 하얀 불길에 타오르는 여자에게 향하고 있었다. 마라키아는 그것이 한 눈에 그것의 정체를 파악했다. ‘설마, 저 여자. 아신을 자신의 몸에 강림시키려고 하는 것인가?’ 직접 보진 못했지만 부왕으로부터 몇 번이고 들은 적이 있었다. 나하크 족의 침략을 받은 원시부족들이 최후의 방법으로 아신을 불러내어 나하크 족에게 맞섰다는 이야기를. 일단 아신이 나타나면 나하크 족은 공격을 멈추고 즉시 해당 공역에서 후퇴하는 것을 방침으로 삼았다. 어차피 맞서봐야 이길 수도 없을 뿐더러 아신을 불러낸 대가가 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신은 본질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 그러한 것들을 이 세상에 무한정 붙들어놓을 방법은 없다. 그래서 나하크 족들은 아신이 일단 나타나면 자리에서 이탈해 시간이 가길 기다렸다. 짧게는 수 분, 길게는 몇 시간. 베스티아레처럼 무수한 인명을 희생시켜 아신을 직접 소환하는 방법을 쓴다면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아신을 이 땅에 머물게 할 수 있겠지만 나하크 족이 상대했던 원시부족들은 그럴만한 인적 자원도 지식도 부족하다. 그들은 대단히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방법으로 아신을 이 땅에 강림시켰다. 바로 아신화라 불리는 직접 술자의 몸에 아신의 영이 깃들게 하는 방법이다. 마라키아는 한 눈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아신화를 하기 위한 의식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육신이 아닌 혼령을 불태우는 하얀 불길이 무엇보다 그 확실한 증거다. ‘아신화라... 지금 세상에도 저런 졸렬한 술책이 남아 있었다니.’ 아신 소환의 촉매가 된 술자는 촛불처럼 타 없어진다. 하얀 불길은 술자의 모든 것을 태우는 불길이다. “깨달은 자 토드하우여...! 내 몸에 깃드소서!” 부정한 기운에 싸인 종말교단의 여인의 몸이 하늘 위로 떠올랐다. 카네스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다시 한 번 브레스를 내뿜어보지만 그녀의 강력한 브레스는 종말교도의 몸을 둘러 싼 부정한 기운에 다시 한 번 막혔다. 은자의 탑 최상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네스! 위험해! 뒤로 물러나라!” 포르피리우스다. 그는 부정한 기운에 싸인 여성의 능력치가 무서우리만치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것을 전지의 눈을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군. 이 능력치는... 필멸자의 것이 아니다..!’ 그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로 드러났다. 부정한 기운에 싸인 채 하얀 불길에 타오르고 있는 여성의 위에 검은 형체가 나타났다. 보는 이로 하여금 미지의 공포와 허무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불길한 형상이었다. 카네스는 자신과 맞먹을 정도로 커다란 검은 형상을 보고서야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깨달았다. ‘저건 아신...?’ 아주 옛날, 친지에게 들은 옛 이야기가 불현듯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태고의 원시인간 부족들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 아신을 불러내는 방법을 사용했다는. 인간이 올바른 신앙을 갖기 시작하면서 절멸되고 뿌리가 끊긴 줄 알았던 그 금지된 술법은 놀랍게도 아직까지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다. 검은 형체가 무언가를 꺼냈다. 길게 이어진 두루마리. 마법의 스크롤이다. 그 검은 형체는 거대한 스크롤을 펼친 채 알아들을 수 없는 음성으로 무언가 소리쳤다. 그의 주위로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며 주변 일대를 휩쓸기 시작했다. 카네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저건 메가 사이클론. 7위계의 마법을 짧은 영창만으로 그것도 두 개나 사용하다니.’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해도 저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면 성치 못한다. 하나만이라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간격을 둔 두 개의 소용돌이 안에 끼기라도 한다면 글자 그대로 회오리 사이에서 갈가리 찢길 것이다. ‘저걸 맞으면... 죽어...!’ 회오리는 주변의 모든 걸 끌어당기며 파멸의 축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그 위력은 실로 거대했다. “으아아아아아!!!” 은자의 탑 바깥에 방치되어 있던 노예는 탑의 반대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메가 사이클론에 빨려 들어가 부유물처럼 회오리 안에서 춤추다가 이내 사라졌다. 카네스는 몸을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묵직한 네 개의 다리로 지면을 움켜쥐다시피 한 상태에서 엉금엉금 후퇴했다. 날개로 나는 것이 훨씬 빠르지만 지금 상태에서 비행을 하는 것은 자살행위다. 다행히 몸체의 육중함이 회오리바람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막아주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후퇴하는 와중에도 두 개의 회오리바람은 카네스를 향해 천천히 그리고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며 전진하고 있었지만 카네스에게 영향을 미치기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아신의 힘을 머금은 검은 형상은 또 하나의 시련을 반인반용에게 내렸다. “다가! 다가!” 정신병자의 노호성 같은 구호가 허공에 울려 퍼지는 순간 은자의 탑 상공에 짙은 먹구름이 먹물처럼 피어나 순식간에 일대를 짙은 뇌운으로 뒤덮었다. 밤낮이 한 순간에 바뀌었다고 착각할 정도의 짙은 구름들이었다. 은자의 탑에서 전투 장면을 지켜보던 은자들은 저 무시무시한 검은 형상의 끝 모를 마법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나기!” 검은 형상이 거대한 팔을 내저으며 소리를 내지르는 순간 일은 벌어졌다. 당장이라도 지면 아래로 떨어질 듯한 구름들 사이에 불길한 울림이 울리더니 천지사방에 소나기와 같은 번개를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로 번개의 폭풍이었다. 마른벼락은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휩쓸고 불태웠다. 카네스는 즉시 주문방어 술식을 펼쳐 자신을 보호했지만 끝도 없이 떨어지는 번개의 폭풍에 순식간에 한계 수용 역량을 초과 술식이 파괴되는 걸 지켜보아야 했고 벼락 한 방이 거대한 육체를 관통하는 걸 허용해야 했다. “크으으윽...!” 찌릿찌릿한 감각이 온 몸에 퍼지는 걸 느끼며 카네스는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몸이 너무 커서 주문방어 술식으로 막기에 곤란해.’ 거대한 드래곤의 몸을 포기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변환해 벼락을 피하는 대신 회오리바람에 위협에 직면하느냐, 아니면 드래곤인 상태로 계속해서 번개를 맞으면서 회오리바람으로부터 벗어나느냐. 어느 하나 희망적인 건 없었다. 그녀는 멀리 재앙처럼 머물고 있는 검은 형상을 노려봤다. 검은 형상의 중심에 선 종말교단의 인간은 여전히 하얀 불에 불타고 있었다. ‘말도 안 돼.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저런 걸 몸에 받아들이고 멀쩡할 수 있는 거지?’ 의문을 품는 그 순간 카네스의 눈에 검은 형상 뒤에 도열해 가부좌를 틀고 앉은 무리들을 발견했다. 뭔가 변했다. 카네스는 곧 그 이유를 찾아냈다. 숫자가 줄어든 것이다. 처음엔 대략 오십여 명이었던 무리가 지금은 사십여 명 수준으로 줄었다. 또 다른 번개가 카네스를 덮치는 순간에 카네스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가부좌를 틀고 가슴 쪽에 검은 결정을 들고 주문을 외우던 무리 하나가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지며 하얗게 불타는 검은 형상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장면을. ‘인신공양의 힘으로 유지하는 거야?’ 뒤늦음 깨달음이다. 번개는 계속해서 주문방어 술식을 두들기고 있었고 회오리바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천천히 모든 걸 빨아들이며 이쪽으로 오고 있다. 카네스는 아신이 왜 이 세상에 허용되지 않는 존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힘은 신적이다. 평범한 필멸자로는 대적할 방법이 전무할 정도로. 그렇기에 신은 불멸자들을 이 세상에 있게 하지 못하게 하고 불멸자만의 세상을 만들어 그들을 그곳에 거주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그 깨달음과 무관하게 카네스에겐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아 있는 시간은 1분 남짓. 선택을 하지 못하면 그녀는 번개와 회오리 둘 중 하나에 의해 죽게 된다. 파지직! 지금도 벼락 하나가 주문방어 술식에 부딪치며 산란됐다. 번개가 보다 위협적이다. 카네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용의 상태를 해제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들어갔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간 직후 카네스는 자신을 잡아당기는 우악스런 힘을 느꼈다. 회오리바람의 강한 인력이 왜소한 카네스를 강압적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카네스는 마법의 힘으로 그걸 극복할 생각이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당황하는 그녀의 눈에 회오리바람 속에 이미 미리 빨려 들어가 낙엽처럼 떠돌고 있는 잿빛 로브의 노예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저렇게 되는 거야...?’ 절망이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퍼지던 그 순간 하늘 위에서 무언가가 내려와 지면을 강타했다. 그것은 검은 번개였다. 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던 검은 형상이 즉시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번개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무리들의 머리 위에 정확하게 꽂혀다. 다섯 명의 신도가 개구리처럼 사지를 뻗은 채 죽어 있었다. 느닷없는 기습에 일격을 허용하고 만 것이다. 공선 위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슈넬메르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지? 벌써 나온 건가? 아니 그보다 방금 그 마법의 정체는 뭐지? 본 적이 없는 마법이다...!’ 당연한 일이다. 방금 그 검은 번개를 불러내는 마법은 인간이 아닌 다른 강력한 종족이 만들어 낸 것이므로. “훗... 저질러버렸군.” 먼 하늘 위에 떠오른 그리폰 한 마리. 그 위에 앉은 마라키아는 자신의 몸보다 다섯 배는 긴 지팡이를 든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례한 용을 벌하지 않고 오히려 포용으로 감싸앉은 관대함. 이것이 왕의 그릇이 아니고 뭐겠는가?” 다음 순간, 검은 형상이 마라키아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삐이이...?” 마라키아의 부리가 굳게 닫혔다. 그때 그의 푹신한 솜털 속에 감춰 있던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 저기, 새님. 새님! ] 영 좋지 못한 순간에 통신석이 울렸다. 다음 순간 무수한 번개의 폭풍이 마라키아와 남작을 덮쳤다. ======================================= 78. 불타는 호수 (3) “삐기이이이!!!” 마라키아는 남작의 고삐를 움켜잡으며 다급히 전신을 보호하는 주문방어 술식을 전개했다. 파지직! 파직! 카네스 때와 달리 이번 벼락들은 집중적으로 마라키아와 남작을 노리고 있었다. 화가 난 것이다. “으. 좀 더 빨리 날지 못해? 날개를 가진 종족의 수치 같으니라고!” 마라키아는 끝도 없이 투덜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주문방어 술식을 펼쳐 날아오는 모든 벼락을 효율적으로 끊어냈다. 방어 술식이 한계에 가까워질 때를 차분하게 기다려 다음 술식을 기계적으로 펼치는 묘기는 말은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 극히 어려운 것이다. 마리카아는 비록 지금은 새님이 되었지만 한때의 멸세의 왕답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치의 틀림없이 수행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하는 게 벼락 한 대라도 맞았단 카네스와 달리 전기통닭 신세가 되기 때문이다. “최대한 빨리 이 공역에서 벗어나라! 구름의 끝에 이르면 저 괴물도 우리를 더는 어쩌진 못할 게다!” 남작은 그 말을 알아듣고 전력을 다해 구름의 끝자락으로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다행히 거리가 떨어지자 날아오는 벼락의 빈도수도 떨어졌고 한층 여유가 생겼다. [ 저기, 새님. 새님? 응? 안 들리는 걸까. 모른 척 하는 걸까? 이 스튜가 그렇게 새님에게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은데! ] 덕분에 통신석을 통해 쉴 새 없이 지껄이는 스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이. 인간. 나중에 등짝을 보겠다.” 약자에게 한없이 강한 마라키아는 목소리를 깔며 위협적인 한 마디를 통신석에 흘려보냈다. [ 히이이이이! ] 마라키아가 통신석의 마력을 방전시켜 통신석을 끄려고 할 때였다. 스튜의 다급한 목소리로 비명의 여운이 아직 남은 중에서 울려 퍼졌다. [ 그 분이 나왔어요! ] “뭐라고?” [ 음.. 정확히 말하면 나오고 있는 중이에요. 지금 막 바위를 부수고 있거든요. 진동이 여기까지 느껴지네요! ] “당장, 그 인간에게 바깥으로 나오라고 해! 지금 엄청난 일이 벌어졌으니까!” 마라키아는 그렇게 불호령을 치며 남작을 재촉해 전투 영역 바깥으로 이탈했다. 곧 뇌운의 끝자락이 마라키아의 눈에 포착됐다. ‘살아난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갑자기 남작의 신체가 크게 요동쳤다. 평소 같으면 남작에게 같은 투정을 쏟아냈을 마라키아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도 느낀 것이다. 남작을 흔들리게 한 원인을. 공기가 흔들리고 있다. ‘설마?!’ 뭔가 올라오고 있었다. 먼지, 나뭇잎, 눈과 흙, 모든 것들이. “축생! 옆으로 피해!” 마라키아가 고함치는 순간 남작의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삐이이이!!!” 마라키아는 온 몸의 피가 한 곳에 쏠리는 걸 느끼며 고삐를 꽉 잡고 아래를 응시했다. 또 다른 용오름이 지근거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짓이겨놓는 가공할만한 소용돌이가 마라키아와 남작 바로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정도 거리에서 이런 마법을 시전한다고?’ 마라키아 또한 불세출의 마법사긴 하나 저 스크롤을 든 아신의 능력은 마라키아의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 한가롭게 아신의 능력을 분석할 시간은 없다. “날개가 빠지도록 날아!” 마라키아는 고삐를 잡은 채 몸을 숙이며 남작을 독려했다. 남작 또한 저 소용돌이 안에 들어가면 죽음뿐이라는 걸 알기에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하지만 남작의 날개는 치유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남작의 날갯짓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강제로 뼈를 맞춘 부분에 강렬한 통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힘을 내! 축생!” 마라키아 또한 작은 날개를 파닥거려 일조하여 했지만 그러나 남작과 마라키아는 점점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마라키아는 그제야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이런 빌어먹을. 생색 좀 낸다고 하는 게!’ 물론 자신도 있었고 나름의 수확도 있었다. 꽤나 장거리에서 공격을 가했고 연료 역할을 하는 종말교단의 무리들이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허용한다는 사실 또한 발견했으니. 하지만 아신의 힘은 상상 이상. 상정 범위 바깥에서 일으킨 소용돌이는 지금 이 순간도 마라키아를 죽음의 문턱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라! 축생! 나무를 잡고 버텨보자!” 하지만 남작은 아래로 내려갈 수 없었다. 강하를 하려면 날갯짓을 멈춰야 하는데 날갯짓을 멈추는 순간 남작과 마라키아는 소용돌이 안에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므로. “삐기이이이이!!!” 마라키아는 숨이 막히는 걸 느끼며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느꼈다. ‘이런 빌어먹을! 이 멸세의 왕이.. 이렇게 죽을 수 있을쏘냐!!!!’ 그 순간, 마라키아 눈앞에 뭔가 스치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뭐지?’ 마라키아가 뒤돌아보는 순간이었다. 쿵!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 지면을 강타했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일격. 산과 들이 그 충격에 떨었고 먼 곳에는 설산에 쌓인 눈들이 흘러내리며 눈사태를 일으켰다. 마라키아의 눈동자에 환희가 떠올랐다. 그가 알기로 이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 사내인가?!’ “…….” 김성철이 나타났다. 주변을 초토화시키던 소용돌이를 단 일격으로 지워버린 채 소용돌이가 밀어 올렸던 눈과 흙, 무수한 사물들이 비처럼 내려오는 와중에 홀연히 서 있었다. [ 새님! 제가 그 분을 데려 왔어요! ] 마라키아의 통신석이 발광하며 스튜의 천진난만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스튜와 그녀를 태운 비룡은 어느새 마라키아의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김성철이 시의적절하게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던 건 비룡의 기동력 덕분이었다는 걸 시위라도 하듯이 말이다. “이미 알고 있다! 등짝.” 마라키아는 짐짓 화난 목소리로 통신석을 향해 말한 다음, 놀란 눈으로 소용돌이를 지워버린 남자를 응시했다. 그 남자는 고개를 들어 마라키아와 남작을 응시했다. “다친 덴 없나?” 김성철이 물었다. “삐기!” 마라키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날개를 파닥거려 보였다. 이윽고 남작이 지면에 내려앉자 김성철은 마라키아에게 현 상황에 대해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그의 눈은 마라키아의 것만큼 밝지가 않다. 마라키아는 자신이 보았던 사건의 핵심만을 찍어 전달했다. “저 여자보단 네가 낫군.” 김성철은 순식간에 상황을 이해했다. “종말교단이 아신을 불러냈다는 건가. 카네스는 어떤가?” “그건 잠깐 확인해봐야겠어.” 마라키아는 그렇게 말하고 마법을 시전해 하늘로 날아올라 먼 곳의 은자의 탑 일대를 살폈다. 다행히 카네스는 마라키아가 기습을 가할 때 무사히 도망친 모양이었다. “그 드래곤. 도망치는 재주만은 남다르군.” 지인이 무사하다는 말에 김성철은 안도감을 느끼며 팔 가라즈를 들어올렸다. 마라키아가 그걸 보며 물었다. “싸우러 갈 셈인가?”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나?” 이에 마라키아는 김성철의 어깨에 앙증맞은 손을 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싸울 필요는 없어. 아신화의 지속시간은 대단히 짧다. 익시온에서 직접 강림한 것과는 궤가 달라.” “아신화?” 김성철의 물음에 마라키아는 허공에 거울상을 만들어 그 안에 가까이서 지켜 본 종말교단의 모습을 담았다. 아신의 힘을 빌린 종말교단 교도가 하얀 불길에 타오르고 있는 장면이 곧 그 중심에 나타났다. “익시온에선 무수한 사람들을 재물로 바쳐 아신을 직접 이 땅에 강림시켰지만 저 자들이 하고 있는 짓은 단지 자신을 제물로 바쳐 아신의 힘을 빌리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직접 일종의 영매가 된 것이지. 그것이 아신화다.” “영매라..?” “저 하얀 불길이 전부 타오르면 아신은 물론이고 저 인간도 소멸한다. 그리고 저 불꽃은 오래가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굳이 싸울 필요는 없다는 뜻.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선택지다. 김성철은 마라키아의 말을 이해하고 팔 가라즈를 거두었다. “호오? 제법인데?” 강적과 싸우는 건 베르텔기아로서도 질색이었는지라 보기 드문 칭찬의 말을 건넸다. 마라키아는 코웃음을 치며 거만한 어조로 말했다. “미개한 인간들은 원래 악신과 닿아 있는 존재였지. 악신 미신은 야만종들 사이에서 두루 보이는 특징이거든.” 아무튼 급하게 온 것에 비해 할 일이 없어진 건 사실이다. 김성철은 마라키아의 의견을 좇아 일단은 숲속에 숨어 마라키아가 제공하는 거울상의 영상을 보며 상황을 관망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가 서두를 건 없었다. 카네스는 이미 달아난 뒤고 종말교단 앞엔 은자의 탑만 덩그러니 놓였으니. 그런데 은자의 탑은 신의 힘으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적어도 김성철은 그렇게 알고 있고 본인의 눈으로도 은자의 탑이 범상치 않은 힘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신의 힘으로 만든 탑이 아신의 힘 따위에 무너질 리가 없지.’ 신적인 힘을 지닌 김성철조차 은자의 탑에 진입할 때 즐겨 쓰던 파괴 대신 잠입을 선택했다. 은자의 탑은 안전할 것이다. 아신 따위에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안에 있는 사람은 벌벌 떨겠지만!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느긋하게 거울상을 지켜보았다. 마라키아의 말대로 하얀 불길은 인간의 생명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였다. 불길에 휩싸인 인영은 당장이라도 스러질 것처럼 위태로워보였다. 다만 종말교단에서는 짧은 지속시간을 늘릴 방법을 고안한 것 같았다. 아신화 한 여성 뒤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무리들이 차례로 하얀 불길 안으로 빨려들듯 사라졌다. ‘일종의 건전지라는 건가?’ 그건 그렇다 쳐도 실로 섬뜩한 장면이다. 인간을 건전지로 삼는다는 발상도 충분히 섬뜩하지만 김성철이 보다 혐오감을 느낀 것은 기꺼이 죽음을 감내하는 건전지 역할을 하는 교도들이었다. ‘대체 뭘 위해서 저렇게까지 하는 거지?’ 세간에 종말교도는 세계의 적 김성철을 숭배한다고 알려졌지만 적어도 저 검은 로브를 입은 종말교도들은 김성철에 대해 일말의 존경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보다 다른, 숭배할만한 대상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김성철 뒤에 숨겨진 진정한 그들의 우상을 말이다. 그 광신도의 힘으로 유지되는 아신은 쉴 새 없이 은자의 탑을 공격하고 있었다. 두 개의 메가 사이클론이 은자의 탑 일대를 초토화시키며 탑을 두들겼다. 하지만 김성철이 예측한 것처럼 탑은 그 막강한 마법에도 불구하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흐음. 마치 코코넛을 처음 보는 원숭이 같네.” 베르텔기아가 그 광경을 보고 짤막하게 논평했다. “그것도 시한부지.” 마라키아가 덧붙였다. “…….” 김성철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거울상을 지켜보았다. ‘시간이 우리 편이라는 건가.’ 시간은 든든한 아군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건 물론 적에게 무리를 강요할 수도 있으니까. 반란군 시절 치렀던 수많은 전투 중엔 몇 번의 공성전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짧게는 한두 달, 길게는 수개월에 이르는 공성전에 현재 상황을 비교할 건 아니다. 단 몇 시간 안에 끝난다. 이는 착실하게 줄어들고 있는 가부좌를 튼 무리의 남은 숫자가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마라키아가 검은 번개로 거의 삼분의 일에 달하는 무리를 쓸어버린 덕이 아신화의 지속시간은 더욱 짧아졌다. 1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가부좌를 튼 무리의 숫자는 열 명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그 동안에도 종말교단은 은자의 탑을 향한 무의미한 공격을 지속하고 있었다. “우르! 카샤!” 지금 검은 형상은 자신의 무기로 보이는 세 개의 창날을 지닌 삼지창을 꺼내 은자의 탑을 찌르고 있었다. 쿵! 쿵! 창날이 탑을 찌를 때마다 지면이 요동칠 정도의 강렬한 일격이었지만 그러나 은자의 탑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흠집조차 남지 않았다. “근성 하나만은 인정해줘야겠네.” 베르텔기아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성철도 같은 생각은 품었지만 한편으로는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슈넬메르커. 그 녀석이 겨우 이 정도 남자였나?’ 김성철이 알고 있는 그의 부관은 치밀하고 빈틈 없는 작전을 세우는 자였다. 특히 그는 하나의 가능성에 매달리는 계획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단 하나의 변인으로 좌우되는 계획은 작전이 아니며 노름꾼이 하는 도박과 다를 바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놈은 확률이 99%라고 해도 다음 수를 준비하는 남자다.’ 김성철의 포섭이 기정사실화 된 것이라고 해도 그는 분명 이를 대신할 방법을 마련했을 것이다. 미로와 같은 종유동굴 안에서 김성철과 만난 것도 그 일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슈넬메르커 답지 않다. 지금 공격은 효율적이지 않고 그들의 자원만을 무의미하게 소모하고 있을 뿐이다. 실패한 작전이다. 김성철이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우르! 이노!” 아신의 현상이 두 손으로 창을 잡고 힘껏 은자의 탑을 후려쳤다. 텅!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다를 바 없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뻔한 예상과 함께 말이다. 그런데 다음 순간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쩍. 은자의 탑 일부분에 균열이 일어났다. “카샤! 우르! 젠카!” 아신의 형상이 그것을 보고 포효했다.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 찬 환호였다. 김성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신의 힘으로 만든 은자의 탑이... 일개 아신에게 부서진다고...?’ 있을 수 없는,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 78. 불타는 호수 (4) “베르텔기아. 잠시 여기 기다리고 있어라.” 아신 정도의 강력한 적을 상대로 베르텔기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이 점을 잘 아는 베르텔기아는 순순히 주머니에서 나와 남작 옆에 머물렀다. 김성철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응!”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을 배웅하듯 몸을 양옆으로 흔들어보였다. “…….” 신적인 힘으로 땅을 박찼다. 단 한 번의 도약에 수십 그루의 나무와 그만큼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은자의 탑으로 향하는 와중 김성철은 추락한 인간제국의 공선을 발견했다. 그것은 하얀 숲 사이에 수직으로 처박혀 있었는데 다행히 생각보다 사망자는 많지 않은 듯 공선 주위에 인간제국의 승무원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상황을 수습하려 하고 있었다. ‘번개에 맞은 모양이군.’ 까맣게 잊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 이미 추락했는지 하늘 위에 보이지 않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지원군은 아직인가?” 브레브 대령은 비록 이마에 피로 물든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지만 건재해보였다. 그는 호되게 감화학파 마법사를 야단치고 있었다. “지원요청은 했지만 아직 수신확인은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계속 시도하고 있지만 알 수 없는 장막에 막혀 장거리 교신 자체가 불능입니다.” 한 장면만 보고도 김성철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지 알 것 같았다. ‘지원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철저하게 고립된 상태군.’ 배를 잃은 공선 승무원들은 보통 쉬운 사냥감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오늘만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더욱 발걸음에 힘을 실었다. 곧 정박지가 나타났다. 김성철은 인간제국의 공선 이외에 다른 나라의 공선들이 멀쩡하게 하늘 위에 머물러 있는 걸 발견했다. 그들의 기술력이 인간제국보다 떨어졌으면 떨어졌지 뛰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멀쩡하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김성철은 나중에 그 이유를 알아보리라 마음먹으며 다음 목적지인 토포로 마을로 달려갔다. 정과 인심의 고장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모든 걸 끌어당기는 메가 사이클론과 무시무시한 번개폭풍 이중고를 동시에 겪었으니 마을이 무사할 리가 없다. 동화 풍으로 꾸민 아기자기한 집들은 전부 무너지거나 부셔졌고 마을 사람들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순식간에 마을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탕그리트가 살아서 이 광경을 보면 그저 쓴 웃음만 흘릴 것이다. 목숨마저 바쳐 지키려고 했던 마을이 단 한 순간에 멸망하였으니. 김성철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마을을 지나 은자의 탑으로 향하는 징검다리 앞에 다다랐다. “그 자다!” 어둠 속에서 검은 로브를 걸친 자들이 짤막하게 소리를 냈다. 김성철은 그들이 동굴 바깥에 숨어 있던 잠복자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는 용서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퍽!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기동 후 내려치는 경쾌한 일격. 힘껏 휘두를 필요도 없다. 살짝 뒤통수를 두들기는 것만으로 종말교단의 파수병은 뒤통수가 함몰된 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종말교단의 파수병은 곳곳에 숨어 있었다. 김성철은 검은 로브에 가린 대가리가 보일 때마다 이동해 망치로 가볍게 두들겼다. ‘뿅망치로 두더지 잡기를 하는 기분이군.’ 순식간에 열 명이 넘는 파수병을 처리했다. 하지만 이미 종말교단에선 김성철의 등장을 알아챈 뒤였다. “이나기! 젠카!” 은자의 탑을 두들기던 거대한 검은 형상이 기괴한 단어를 외치며 김성철을 향해 몸을 돌렸다. 김성철은 순간 온 몸의 모공이 쪼그라들 정도의 강렬한 긴장감을 느꼈지만 위축되진 않았다. 아신이라면 이미 한 번 상대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김성철은 검은 형상 아래 하얀 불길 속에 타들어가는 인영을 볼 수 있었다. ‘저것이 아신화한 인간의 본체인가.’ 피부에 와 닿는 기류가 불쾌하다. 겉보기엔 어떤 변화도 없는 것 같지만 김성철은 죽음의 낙진으로 가득 찬 먼 동쪽의 섬보다 지금 이곳의 기류가 보다 위험하다고 감지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어떤 해로운 공기도 마법적인 작용도 없는데 말이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교차하는 가운데 김성철은 지금 느끼는 것과 떠올렸다. ‘마치 이건 뭔가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를 비롯한 주변의 모든 것들이.’ 그때 가부좌를 틀고 앉은 무리 중 하나가 검은 기운으로 화하며 하얀 불꽃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수수께끼의 사내가 사라지는 그 순간 김성철은 땅은 물론 공기마저 전율시키는 지진과 같은 충격을 느꼈다. “…….” 느낌이 좋지 않다. ‘아무래도 아신을 유지시키는 건 교도의 생명 뿐만은 아닌 모양이군.’ 김성철은 빠르게 이 상황을 처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며 주변 풍경을 날카로운 눈으로 주시했다. 정면엔 아신화한 검은 형상이 있고 그 왼쪽 측면엔 아신을 유지시키는 가부좌를 튼 무리가 있다. 한편 가부좌를 튼 무리의 숫자는 이제 7명 남짓. 지금까지의 관찰로 길면 3분, 짧으면 1분 안에 한 명이 줄어든다는 걸 가정해보면 아신이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봐야 20분 남짓. 가부좌를 튼 무리를 처치한다면 더 빨리 끝낼 수 있겠지만 김성철이 나타나자 가부좌를 튼 무리 주변에 무형의 방어결계가 펼쳐졌다. 한편 아신의 우측 측면엔 50~60명 정도의 또 다른 종말교단 무리들이 모여 있었다. ‘이것들을 먼저 처리할까.’ 적수가 없었던 시절에는 별 생각 없이 단순히 적진을 헤집어 놓는 것만으로 충분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매사에 생각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다. 그건 김성철이 좋아하는 것이다. 그의 참모 슈넬메르커나 오랜 동료인 황제가 큰 틀에서 계획을 짜는데 능했다면 김성철은 일단 판이 벌어진 후 순발력을 요하는 난전에서 진정한 실력을 발휘했다. 김성철의 왼손에 크럼부이가 나타났다. “여어! 친구! 오랜만이군! 오늘은 또 어떤 더러운 일을 시키려고!” 언제나처럼 말이 많은 크럼부이는 오늘도 나오자마자 신나게 떠들어댔다. ‘손쉬운 먹이감을 먼저 도륙한다.’ 잠재적인 위협과 당면한 위협 중 당면한 위협에 먼저 맞서는 게 당연한 순서지만 당면한 위협을 즉각적으로 해결할 수단이 없을 땐 변수를 줄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저 아신은 시한부 인생이니. ‘시간은 나의 편이다.’ 일단 판단을 내리면 주저하지 않는다. 김성철은 비호처럼 우측의 종말교단에게 쇄도해 크럼부이를 휘둘렀다. 스걱! 무지막지한 칼날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마치 양떼 한 가운데 들어간 늑대처럼 김성철은 효율적이고 잔인하게 종말교단을 도륙했다. 스걱! 순식간에 십 수 명에 달하는 교도가 두 동강 혹은 여러 토막이 나 죽었다. 살아남은 종말교도들은 일제히 안개의 형상으로 변했다. 암살자들의 기술로 시간을 번 것이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호오?’ “이노! 우르!” 아신이 즉각 반응했다. 하지만 그 또한 김성철의 계산 안에 있었다. 아신처럼 크고 강력한 존재의 공격은 적과 아군이 뒤엉켜 싸우는 난전에서 언제나 오폭의 위협이 있다. “젠카!” 아신의 창이 김성철을 향해 날아왔다. ‘역시, 마법은 쓰지 못하는군.’ 김성철은 어렵지 않게 창날을 피해내며 옆에 있던 안개화 한 종말교도를 향해 힘차게 팔을 휘저었다. 그러자 소맷자락이 마치 대포와 같은 굉음을 내며 무지막지한 풍압을 발생, 안개화 된 종말교도를 그대로 아신의 창날 아래 밀어 넣었다. “끄아아아악!!!” 아무리 안개로 변했다고 하나 절대적인 힘 앞에 좀스런 장난은 의미 없다. 지면을 헤집는 창날 아래 깔린 종말교도는 안개화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글자 그대로 거꾸로 동강나 명을 달리했다. 이제 남은 숫자는 삼십여 명. 김성철이 뛰어든 지 3분만의 일이다. 하지만 이 또한 김성철의 계산의 범위. 아무리 이들이 안개화라는 잔재주를 들고 나왔어도 마음만 먹으면 1분 안에 이들을 전부 쓸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잠재적인 위협을 처리함과 동시에 그들을 방패로 써서 아신의 움직임에 제한을 두고 최대의 우군인 시간마저 활용하기 위해서다. 중요한 건 순식간에 모두 죽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적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김성철의 계획대로 아신은 장기인 마법을 봉인 당했고 예비대라 할 수 있는 종말교단은 김성철의 손아귀 안에서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다. 이대로 시간이 가면 은자의 탑의 전투는 싱겁게 끝이 날 것이다. 하지만 적에겐 슈넬메르커란 머리 좋은 우두머리가 있다. “역시, 여단장님. 미증유의 힘을 얻고 머리가 굳은 줄 알았더니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군.” 고대왕관의 갑판 위에 선 그는 김성철에 대한 찬사를 보낸 다음 별 위기감 없는 음성으로 부하들에게 명했다. “베크에게 전해라. 몇 명의 형제가 죽건 관계없으니 여단장을 막으라고. 그리고 바넷사에겐 즉시 생존자를 이끌고 은자의 탑으로 진입하라고 명해라. 목표는 아신이 뚫어놓은 틈새.” 슈넬메르커의 명은 즉각적으로 아래의 종말교단에게 전해졌다. 종말교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형상의 아신의 손에 창 대신 스크롤이 나타났다. 아신이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외치는 순간 허공 위엔 수백 개에 달하는 은색의 창이 나타났다. “…….” 김성철은 적의 계획에 변화가 생긴 걸 눈치 채고 종말교단이 뭉쳐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김성철의 뒤를 좇아 수백 개의 창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푹! 푹! 하나하나의 위력이 일류의 기사가 전력으로 찌르는 것에 필적한다. 성인 남성의 신장 길이에 달하는 창은 단단한 지반의 절반 이상을 가볍게 찌르고 들어가는 것도 모자라 자체적으로 폭발을 일으켰다. 저런 게 몸에 박히면 팔 다리 하나 잘려나가는 것으론 끝나지 않을 것이다. “끄어어억!” 따라서 안개로 변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은색 창 하나가 안개로 변한 종말교도의 중앙에 꽂히자 변신이 풀리며 그대로 폭사했다. 피 한 방울이 김성철의 볼에 튀었다. 김성철은 피를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판단을 내렸다. ‘위에서 명령이 내려온 모양이군.’ 더 이상 종말교단 무리에 섞여드는 건 옳지 않다. 게다가 현재진행형으로 아신의 창은 종말교단의 잔당을 처리하고 있었다. 삼십 명 남짓이던 종말교도의 숫자는 순식간에 열 명 이하로 줄었다. 김성철은 은색의 창을 피해내며 아신 너머에 자리 잡은 가부좌를 튼 무리를 응시했다. 남은 인간 건전지의 숫자는 다섯. 얼마 남지 않았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은자의 탑 쪽으로 도약했다. 그것이 이곳에 남은 유일한 엄폐물이기 때문이다. 쉬익- 은색 창 하나가 김성철을 노리고 날아들었지만 팔 가라즈가 창을 허공에서 쳐 떨어뜨렸다. 짧은 교전 속에서 김성철은 이번 아신이 이전에 상대했던 시드미아보다 급이 떨어지는 아신이라는 걸 느꼈다. 그렇다면 싸움은 더욱 쉬워진다. 그가 은자의 탑 뒤로 돌아가자 창날은 목표를 잃고 무의미한 은자의 탑 벽면을 두들길 뿐이었다. 김성철은 사각에 서서 아신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무언가 움직였다. 아신이 아니다. 열 명도 채 남지 않은 종말교단의 교도들이다. 그들은 안개화를 풀고 김성철이 몸을 숨기고 있는 은자의 탑 반대편 쪽으로 전력으로 질주했다. ‘뭘 하려는 거지?’ 김성철의 뇌리에 즉각적으로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가 사각에서 나오는 순간, 이미 종말교단의 교도들은 김성철이 예측한 행동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은자의 탑 직전까지 종말교도들이 다시금 안개로 변해 탑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신이 만들어 놓은 좁은 틈새로 말이다. “어이! 던지지 마!” 크럼부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크럼부이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안개화 한 종말교도 둘을 절반으로 갈라놓았다. 안개의 형상은 김성철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절반으로 갈라졌고 두 구의 동강난 시체로 변해 바닥에 너부러졌다. “젠카! 이노!” 이를 본 아신이 스크롤을 손으로 훑으며 불경한 주문을 외웠다. 김성철은 주변의 공기가 변하는 걸 느끼며 즉시 주머니 안에서 헝겊을 꺼내 입을 막았다. 짙은 자줏빛 안개가 피어오르며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을 녹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김성철이 뒤로 물러서는 그 순간 살아남은 종말교도들이 탑의 틈새로 들어갔다. “거짓된 신의 부역자를 전부 죽이고 책을 불태워라!” 탑에 침입한 종말교도의 숫자는 다섯. 거기에 더해 뒤로는 죽음의 독무가 밀려들어오고 있다. 은자들은 절망 속에서 예상치 못한 죽음이 다가오는 걸 지켜봐야 했다. “이런...” 카네스가 있다면 모를까, 그녀가 패주한 이상 무력한 은자들만으로 이 위기를 이겨낼 수 없다. 성은자 포르피리우스는 그럼에도 죽음을 불사하고 지팡이를 든 채 다가오는 적과 독무에 맞섰다. “와봐랏!” 실로 한 집단의 우두머리에 걸 맞는 용기. 같은 시각 김성철은 바깥에서 이 모습을 그저 지켜봐야만 했다. ‘이런 개 같은 술수를 지니고 있을 줄이야.’ 억지로 독무 속을 뚫고 갈 수는 있다. 하지만 안개로 변하는 기술이 없는 김성철로선 독무를 뚫고 나아간다고 해도 은자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이상 탑 안에 들어갈 수 없다. 탑의 견고함이 오히려 김성철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김성철이 필사적으로 뇌세포를 가동하는 그 순간 기대하지 않았던 기적이 나타났다. 그것은 보랏빛 독무로 덮인 은자의 탑 상공 위에서 일어났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홀연히 허공에 마법진이 나타난 걸 필두로 수십 개의 마법진이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했고 그 사이에서 위풍당당한 공선의 선수(船首)가 물결을 거스르는 물고기처럼 강하게 밀고 나온 것이다. 김성철의 눈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저건.. 인간제국의 공선..?’ 갑작스레 은자의 탑 상공을 뒤덮은 인간제국의 함대, 그 기함의 갑판 위엔 황금빛 갑주를 걸친 사내가 우뚝 서 있었다. “전 함대에 명한다. 목표는 아신 측면의 종말교단. 놈들에게 제국의 분노를 보여줘라.” 인간제국의 황제. 윌리엄 퀸튼 말버러. 그가 오랜만에 황제다운 음성으로 명령을 발했다. “…….” 그 뒤엔 굳은 표정의 아무개가 다른 기사들과 함께 황제를 옹위하고 있었다. 탑의 내부에서도 기적이 일어났다. 포르피리우스는 놀란 눈으로 자신들 앞에 나타난 한 권의 책을 응시했다. 허공 위에 우뚝 자리 잡은 고색창연한 커다란 책은 차분한 소녀의 목소리로 말했다. “베르텔기아 53호. 아버님의 명을 받들어 탑의 방위를 시작합니다.” ======================================= 79. 조촐한 연회 (1) 베르텔기아의 이름을 댄 책이 책장을 펼쳤다. 활짝 펼친 책장 안은 마치 태양처럼 눈부신 빛으로 가득했다. 종말교단의 암살자들은 심상치 않은 위기를 감지하고 물러서려 했지만 이미 그들의 뒤엔 죽음의 독무가 밀고 들어오고 있다. 그들에겐 전진 이외의 선택지는 없다. 선두에 선 여성이 곡도를 뽑고 눈부신 빛을 향해 걸어가자 나머지 암살자들도 그 뒤를 따랐다. “목표 확인.” 빛을 내뿜는 책이 말했다. 암살자들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한 달음에 책을 넘어 무방비의 은자들을 덮칠 셈이다. 곡도를 든 여인이 책을 지나치려는 찰나였다. 눈부신 빛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며 암살자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 종말교도들은 그들 앞에 무형의 막이 펼쳐진 걸 느끼고 발걸음을 멈췄다. 곡도를 든 여인이 곡도의 끝으로 그들을 막은 무형의 막을 두드려 보았다. 톡. 무언가 걸리는 게 있다. 유리처럼 투명하지만 유리와는 다른 질감을 지닌 무언가가. 이윽고 그들은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이 유리보다 더 투명한 무형의 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그 벽은 종말교도의 앞을 원천봉쇄하고 있다는 것 까지도. 곡도를 찬 여인이 부하들에게 벽을 부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아무리 두들겨도 모든 마법과 마법 스크롤을 동원해도 그 벽은 좀처럼 뚫리지 않았다. 그들이 벽 앞에서 지체하는 동안 독무는 성큼 암살자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암살자들의 마음이 급해졌다. 위기감은 종종 평상시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게 한다. 쩍! 한 사내의 혼신을 건 일격이 작은 기적을 일으켰다. 투명한 벽에 마침내 금이 간 것이다. 암살자들의 공격은 자연스레 그 균열에 집중됐다. 얼음의 창, 화염구, 무수한 검격, 원시적인 몸통 박치기까지.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마침내 투명한 벽은 무너졌다. 종말교도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그 순간, 베르텔기아라는 이름을 댄 책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마치 투망을 던지듯 빠른 속도로 튀어나온 그것은 기뻐하는 종말교도 앞에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곡도가 앞을 더듬었다. 톡. 또 다른 벽이 나타났다. 종말교단의 암살자들의 눈동자에 일제히 죽음의 공포가 떠올랐다. 처참한 절규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보랏빛 독무가 그들의 몸을 삼켰고 이윽고 그들을 은자의 탑에서 지워버렸다. 승리의 환호가 은자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은자의 탑 만세!” “재앙의 서는 결코 불타지 않는다!” 그 소리는 아신이 낸 균열을 통해 김성철의 귀에 고스란히 전달됐다. ‘벌써 처리한 건가? 은자들도 제법이군. 전에 봤을 때 전투능력은 변변치 않았는데.’ 그렇다면 서둘러 탑안으로 들어갈 이유는 없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무수한 인간 제국의 공선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최소한 3개 함대. 거기서 뿜어져 나온 화력은 실로 막강했다. 비록 아신을 멸할 정도에 이르진 않겠지만 아신 옆에서 주문을 외던 자들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드는 데는 충분하다. 건전지 역할을 하던 가부좌를 튼 무리들이 있던 달의 표면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구멍이 보기 흉한 형태로 뚫려 있었다. 남은 건 하얀 불길에 타오르는 최후의 종말교단의 신도 한 명과 그 주위로 그림자처럼 펼쳐진 검은 형상의 아신. “우르! 이나기!” 아신은 알아들을 수 없는 불경한 주문을 외치며 최후의 발악을 하려 했지만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끝이 났다. 그를 이 세상에 붙들어놓던 인간은 외부의 동력이 끊기자마자 하얀 불길에 삼켜졌고 처참한 비명과 절규 속에서 그 존재가 이 세상에서 지워졌다. 툭. 주인을 잃은 로브 자락이 지면이 떨어지는 순간 아신의 형상은 기괴한 절규와 함께 흩어지듯 사라졌다. 사람들은 검은 형상이 흩어지면 수천수만 마리의 섬뜩한 까마귀 떼가 사방으로 퍼지며 사라지는 광경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초자연적인 장면이었다. 아신이 없어지자 주변을 뒤덮은 보랏빛 독무는 힘을 잃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 흩어지는 독무 틈에서 김성철은 하늘을 뒤덮은 인간제국의 공선들을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어이. 날 안 줍고 뭐하는 거야! 콜록! 콜록!” 독무 한 가운데 있던 크럼부이가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김성철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팔 가라즈를 쥔 채 인간제국 공선 함대를 주시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신이 사라지고 종말교단을 몰아냈다고 하나 그것은 별개의 문제. 세계의 적이라 불리는 김성철과 세계의 질서를 대표하는 인간제국은 만인이 아닌 공표된 적대관계다. 마음을 놓는다는 여유 따윈 여기선 허락되지 않는다. 김성철은 선공을 가할 생각은 없지만 인간제국이 싸움을 걸어온다면 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의 심신은 이미 충분히 지쳐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을 용납할 정도로 너그롭지 않은 상태이므로. “…….” 얼마 지나지 않아 공선 한 척에서 빛이 반짝거렸다. 거울을 이용한 발광 신호. 인간제국의 제국대원수였던 김성철이 그 신호를 모를 리가 없다. 그 신호는 김성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아래의 전 제국대원수에게 일시적인 휴전을 청한다. ] 마다할 이유는 없다. 김성철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이고 뒤돌아섰다. 제국은 김성철 쪽을 향해 전투대형을 펼쳤던 함대의 기수를 일제히 종말교단의 공선이 있는 남쪽으로 도는 것으로 김성철의 행동에 답했다. “아무래도 관전은 여기까지인 모양이군요.” 고대왕국 공선의 갑판에 서 있던 슈넬메르커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들의 장래의 고객들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중간에 방해꾼이 나타나긴 했지만 오늘 여러분들은 저희들의 보잘 것 없는 전쟁병기가 최강의 은자를 쫓아내고 저 막강한 세계의 적과 막상막하로 싸우는 걸 보셨을 겁니다.” 슈넬메르커는 그렇게 말하며 고대왕국의 사신과 함장을 응시했다. 무표정을 유지하며 말을 아끼고 있지만 슈넬메르커의 눈엔 전부 다 보였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퍽이나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그저 일개 사이비교단이라고 생각했던 조직에 저토록 강력한 전쟁병기가 있다는 것에 대해. 슈넬메르커는 눈웃음을 지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저희 종말교단에서는 저러한 전쟁병기가 여럿 있으며 기꺼이 이것을 소환자가 만든 근본 없는 제국에 핍박받는 전통 있는 군왕들에게 팔 용의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고대왕국의 요인의 눈동자에 탐욕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북녘 하늘을 뒤덮은 저 막강한 인간제국의 함대와 맞서 싸우는 건 물론 압도할 수 있는 힘을 한 번에 손에 넣는다는 건 얼마나 매력적인 제안인가? 슈넬메르커는 이쪽을 향해 기수를 돌린 제국함대를 보고 고대왕국의 관계자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아무래도 슬슬 저희들은 퇴장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머지않은 시간에 저희 쪽 사람이 그쪽에 의사를 타진할 것입니다. 긍정적인 결과가 있길 기원하며 저희들은 실례하겠습니다.” 검은 연기와 함께 나타난 종말교단의 무리들은 마찬가지로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고대왕국의 공선뿐만 아니라 다른 군소왕국의 공선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종말교단의 무리들은 제국에 맞설 힘을 모두에게 보여줬고 그것을 거래의 대상으로 제시했다. 비록 여러 왕국들은 이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이들을 충분히 어떤 결과가 있을 지 예상하고 있었다. 제국의 추격함대가 종말교단의 공선을 추격하는 막간극이 은자의 탑의 상공 위에서 펼쳐지는 가운데 또 다른 배우들은 재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전 제국대원수를 뵙고자 합니다.” 늠름한 비룡을 타고 온 비룡기사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정중하게 전한 소식을 들으며 김성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라고 하라.” 여기서 황제를 만날 이유는 없다. 설령 작은 이유가 있다고 해도 인간제국의 만인이 보는 앞에서 황제와 접촉하는 것은 앞으로의 행보에 악영향을 미칠 뿐이다. 시대는 지금 하나의 왕을 원한다. 하나의 왕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김성철이 비록 적이 되었다고 하나 옛 동료였던 황제를 만나는 건 아무리 그럴 수밖에 없던 사정이 있다고 해도 제3자의 눈엔 좋게 보일 리가 없다. 김성철 본인도 석연찮은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가 굳이 황제의 만남에 응한 건 언제부터인가 그를 지배한 피로와 권태감 그리고 그 위를 기포처럼 덮어나가는 공허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 늦은 오후를 기해 은자의 탑 일대에 나타났던 제국 함대의 대부분은 철수했다. 남은 것은 황제의 기함과 그 호위함 수척. 타국의 공선들은 그 전에 이미 은자의 탑을 떠났다. 여러모로 켕기는 게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제국의 황제에게 간단한 예만을 표하고 앞다투어 공역에서 떠났다. “그르르르르!!” 은자의 탑 옆에는 거대한 드래곤 한 마리가 옆으로 누워 골골대고 있었다. 그 드래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카네스. 치명상은 입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를 입어 옴짝 달싹도 하지 못하는 몸이 되었고 여러 명의 은자들이 그녀 옆에 들러붙어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마라키아는 멀리서 그 모습을 보며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정말 뻔뻔한 드래곤이군. 뭐 잘했다고 드래곤 형태로 치료를 받아? 사람 형태에서 받아도 될 걸 괜히 더 손만 가게 하는군!” 마라키아는 기고만장한 상태였다. 실제로 공도 세웠고 자랑할 만한 활약도 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다. 서열 변동은 없었고 흔한 축사도 없었다. 단지 김성철의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를 들은 게 전부다. 마라키아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생각했지만 자신에 비해 한 게 아무것도 없는 스튜가 먼 곳에서 인간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축하를 받는 모습을 보자 배알이 꼴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니, 저 멍청한 인간 여자가 어찌 나보다 더한 찬사를 듣는단 말인가?’ 마라키아는 언젠가 스튜에게 이 책임을 단단히 물을 것을 다짐하며 홀로 하늘을 바라보며 우뚝 서 있는 김성철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김성철은 아까부터 한 마디 말도 없었다. 원래 말 수가 적은 남자였지만 최근 들어 그 작은 말 수도 더 줄어든 느낌이다. 그런 김성철을 향해 화려한 옷을 입은 인간제국의 관리들이 다가와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먼 하늘을 응시하고 있던 김성철의 눈동자가 그들을 향했다. 인간제국의 관리들은 그의 시선을 받자 황급히 눈을 깔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황실 관리답게 쓸데없는 수식어와 관용구로 범벅이 된 언사를 늘어놓았는데 앞뒤를 자르고 핵심만 요약하면 한 마디로 정리 가능했다. 옷을 갈이 입히러 왔다는 것이다. 김성철이 황제를 배알하니 그에 걸 맞는 옷을 입히겠다고. 이에 대해 김성철은 특유의 담담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황제가 보냈나?” 황실 관리들은 그렇지 않다는 말을 아주 길고 지루한 언어로 완곡하게 표현했다. 아마도 의전을 담당하는 고지식한 고위 관리가 자기 일을 한답시고 이들을 보낸 모양이었다.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일 텐데. 김성철은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가라.” 관리들은 김성철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공포에 질려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허겁지겁 달아났다. 짧은 해프닝이었지만 김성철은 그것을 보고 제국대원수 시절에 늘 가슴에 담아두던 답답함을 상기해냈다. ‘궁정은 정말로 지랄 같은 곳이었지.’ 예로부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과 구분 짓기 위해 갖가지 격식과 예법을 만들어 냈다. 라그란제의 궁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갖가지 격식과 예법을 만들어 내 사람을 구분했다. 그것은 입은 옷, 패용한 장신구 같은 눈으로 보이는 것에서부터 말투의 억양이나 단어의 선택, 식기를 잡는 자세 같은 몸으로 익힌 것까지 그 종류는 수도 없이 많고 복잡하기 이를 때 없었다. 야인이 된 지금에야 아무래도 좋은 일이 되어버렸지만 제국대원수 시절엔 제법 그런 허례허식 때문에 꽤나 고통을 받았었다. 하지만 황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황제는 일개 관리는 제국대원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중한 격식과 예법에 묶여 있어야 했으니.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김성철의 입가에 얕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황제 녀석. 잘도 그런 걸 버텨냈군.’ 윌리엄 퀸튼 말버러는 겉보기엔 점잖은 사람이지만 안으로 파고 들어가 보면 실로 독특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전투에서 이길 때까지 수염을 기른다거나, 한 겨울에도 반팔 상의를 고집 한다던가, 여름엔 양말을 신지 않는다는 등의 갖가지 기행이 있었다. 그런 자유분방한 사내가 수십 년 동안 가장 엄중한 예법에 구속받는 황제 노릇을 한 건 어떻게 보면 인간승리인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을 맞이하러 온 관리들을 따라 황제의 천막으로 향했다. 정박지 아래 구축된 황제의 막사 앞엔 제국에서도 최정예라 불리는 근위기사단의 정예들이 도열해 있었다. 김성철은 그들에게서 두려움, 경계, 특히 적개심 등의 감정을 볼 수 있었다. 근위기사단이 김성철에게 적개심을 느끼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라그란제에서 김성철은 근위기사단이 보는 앞에서 황제에게 상처를 입힌 적이 있으니. 설령 그것이 일 대 일의 결투에 의한 결과라고 해도 그를 막지 못한 책임은 고스란히 근위기사단의 명예의 실추로 기록된다. “폐하에게 다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결코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안면만 있는 근위기사단장이 김성철을 황제의 천막으로 들여보내며 경고하듯 속삭였다. 김성철은 대꾸하지 않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은 넓고 별 다른 장식이 없었다. 몇 안 되는 음식을 차린 탁자 너머엔 황금갑주 대신 검박한 평상복을 걸친 옛 전우가 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김성철은 조건반사적으로 식탁 위의 음식을 응시했다. 대충 소금에 절여 구운 고기, 정성이 보이지 않는 샐러드, 거무튀튀한 빵 따위가 놓여 있었다. 황제의 식탁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검소한 식단. 흔들림이 심해 제대로 된 조리를 하기 어려운 공선의 일반병에게 지급되는 간단한 요리다. 김성철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술잔을 기울이던 황제가 김성철을 응시했다. “생각보다 빠른 재회군.”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황제의 얼굴과 분위기가 변했다. 위엄 속에 감춰 진 뭔가 짓눌려 있고 끌려 다니던 우울한 모습 대신 과거 반란군 시절의 엄격하면서도 자유분방하던 기상이 황제의 얼굴과 행동에 은연중에 나타나 있었다. 한편 김성철이 황제의 변화를 한 눈에 감지하는 것처럼 황제 또한 김성철의 변화를 한 눈에 눈치 챘다. 황제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중저음의 음성으로 말했다. “지쳐 보이는군. 김성철.” ======================================= 79. 조촐한 연회 (2) 김성철은 말없이 식탁 앞에 앉았다. 황제가 술병을 들어 빈 술잔에 술을 직접 따랐다. 아마도 황실의 의전담당이 이 모습을 본다면 기겁을 할 것이다. 지엄한 황제가 제국의 적에게 술을 따르다니. 김성철은 황제가 따른 술을 들이켰다. 술맛은 음식과 달리 제법 괜찮았다. “지쳐 보일 법도 하지. 아신급과 싸웠으니.” 김성철은 그다지 맛있어 보이지 않는 고기 덩어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는데.” 황제는 고기 한 점을 자신의 접시로 가져가 망설임 없이 썰어 입안으로 가져갔다. “음. 맛있군. 이거 한 번 들어보게.” 황제가 고기를 권했다. 김성철은 마지못해 대충 태운 고기 덩어리를 잘라 입안에 넣었다. [ 이 요리의 점수는... 18점! ] [ 카악~~~~~~ ] 김성철은 눈앞에 떠오른 문자를 고개를 저어 흩어버리고 몇 번 씹지도 않고 목구멍 안으로 넘긴 뒤 자작을 해 술로 꺼림칙한 뒷말을 씻어냈다. “내 말은...” 황제가 술잔을 들며 말했다. “눈이 죽어 있어. 마치 그때를 연상케 할 정도로.” “그때?” 김성철이 묻자 황제는 술잔을 기울이며 답했다. “라이즈 하이메르에게 선택받지 못하고 술과 계집질로 전전할 때 말이야.” 어딘가 멍해 보이던 김성철의 표정에 변화가 일었다. 듣기 싶지 않은 이름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내 기억에 의하면 고초를 겪은 걸로 아는데. 분명 자네의 아이를 가졌다는 여자가 나타나서 신생 제도에 한바탕 풍파를 일으키지 않았던가?” “그.. 그건...!” 김성철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천막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보이는 인간적인 반응이었다.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심장박동이 바뀌는 걸 감지하고 격하게 몸을 흔들어댔다. 안절부절 하는 김성철과 강렬한 호기심을 보이는 베르텔기아와 달리 황제는 관조적인 태도로 말을 이었다. “뭐, 막상 그 여자가 출산한 아기가 늠름한 흑인혼혈아라서 일단락되긴 했지만. 큰 일 날 뻔했지. 자네와 조금이라도 닮았다면 어쩔 뻔 했나?” “…그 여자와 잔 기억은 없어. 술 먹고 깨어보니 그 여자가 옆에 있었을 뿐. 전형적인 꽃뱀이었지.” “꽃뱀이라.” 황제의 입가에 인간적인 미소가 깃들었다. 지엄한 황제가 생각하기에도 웃긴 단어였고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뭐, 내가 과거사를 굳이 꺼낸 이유는 자네의 얼굴이 그때와 닮아 있어서.” “그런가?” 김성철은 술잔을 연거푸 들이키며 대답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도무지 세계의 적이라 할 수 없는 맥 빠진 얼굴을 하고 있어.” “내가 그렇게 보인다고?” 김성철이 반문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 위의 종을 흔들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바깥에 있던 기사가 천막에 들어오자 황제는 그에게 그것을 가져오라 시켰다. 이윽고 요리사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 하나를 장만해왔다. 그걸 본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건...” 수육이다. 김성철이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하기 전에 계란후라이와 더불어 유일하게 만들 수 있었던 요리. 모두들 그냥 물에 고기를 삶은 원시적인 요리라고 싫어했지만 윌리엄만은 김성철의 요리가 영국적인 청교도스러운 기풍이 있다며 좋아했다. 황제는 푹 삶은 돼지고기를 칼로 썰어 그 중 일부를 김성철에게 내밀었다. 김성철은 무심코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잡내 제거 따윈 하나도 하지 않고 그저 맹탕 물에 삶아낸 형편없는 요리다. 곁들일 김치도 없는 건 덤. 20년도 전에 김성철이 실력발휘를 하겠다며 파티원에게 대접했던 바로 그 요리 말이다. 김성철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더럽게 맛없군.” “난 먹을 만한데.” “그렇다면 할 말이 없지만.”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황제가 음식에 집중을 했기 때문이다. 수육 한 점을 술 한 모금과 위장에 흘려보낸 황제는 다시 김성철을 응시하며 원래의 주제로 돌아갔다. “아무튼 내가 받은 인상은 그래. 지금 자네에게서 작년 연말에 보았던, 그 전에 세계의회를 박차고 나갔던 기상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아.” “…….” “무슨 일이 있었나?” 황제의 눈이 반짝였다. 순간 김성철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갑작스레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거대한 감정의 응어리가 마음의 근저에서 꿈틀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미 감정 따윈 고독과 인내의 세월 동안 무딘 칼날처럼 변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가슴 속에 이토록 많고 풍부한 것들이 남아 있었다니. 김성철은 충격의 여운 속에서 그 감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서서히 자각해가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뭐지. 이 기분은...? 설마 이 내가... 이 김성철이 누군가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건가?’ 첫 번째 재앙이 마침내 해결된 경사스런 해의 마지막 날. 김성철은 식탁 너머의 황제와 절교를 선언했다. 그럴 만한 그릇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는 그때의 단호한 결심과는 명백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제야 김성철은 느낄 수 있었다. 정령계에서 자신이 받은 상처의 깊이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단순히 피로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진짜 몸이 피곤해서가 아니었다. 마음이 차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스스로 그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무뎌진 건 받아들이는 마음 뿐이다. 상처가 남긴, 짓누르는 무게는 변하지 않았다. 황제는 정자세로 앉은 채 갈등하고 있는 김성철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 김성철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머지않은 곳에서 드래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카네스가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것이리라. “참 아이러니한 일이군.” 침묵을 깬 건 황제였다. “나는 자네를 보고 의지를 다 잡았는데 정작 다시 만난 자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죽은 눈을 하고 있다니.”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김성철의 눈동자가 황제를 향했다. “우리 근위기사단을 비롯한 내 측근들은 작년 영년의 밤 사건 때문에 자네의 생살을 씹으려 들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때의 사건에 대해 자네에게 깊은 감사를 느끼고 있어.” “감사?” “감명을 받았다고 해야 하나. 뜻을 정하고 그것을 흔들림 없이 관철하는 자네의 얼굴을 보고 나 자신을 돌아보았지. 실로 부끄러웠어.” 황제의 눈동자에 흐트러짐이 일었다. 술이 그다지 강한 편이 아닌 황제의 주량을 넘어선 술이 들어갔기 때문이리라. 그는 술병을 들어 술잔에 술을 따랐다. 술잔이 넘치도록 술을 들이 붓는 걸 김성철이 술병을 잡아 만류했다. “적당히 마셔.” “고맙네.” 황제는 희미하게 웃으며 술잔에 입술만 간단이 축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내가 미덥지 못한 모습을 보인 건 사실이야. 황제라고는 하나 사실상.... 뭐 그런 거지.” “방랑왕과 관계가 있는 건가?” 김성철이 고쳐 앉으며 물었다. 황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노 코멘트. 오늘 하루만큼은 그놈의 일, 과업, 대의 같은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자네에 관한 것이니까.” 그 대목에서 김성철은 황제가 상당히 취했다는 걸 인지했다. 그동안 쉬지 않고 술을 들이켰으니.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중요한 건 바로 자네지.” 황제의 손가락이 김성철을 가리켰다. “눈이 죽었어. 단 몇 개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랐다. ‘이래서 귀찮다니까. 옛.... 친구라는 건....’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또 당했다. 꽃뱀에게.” 그 순간 황제의 천막을 지키던 기사들은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 인간제국의 황제의 꾸밈없는 소탈한 웃음소리를. 놀란 중신들과 시종들이 무슨 일이 생겼나 하나 둘 천막으로 하나 둘 천막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담담한 어조로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굳이 숨길 이유도 숨겨야 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때로는 미소를 머금은 채 때로는 미간을 찌푸린 채 김성철의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자네는 자네의 퀘스트를 해결했군.”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다.” 김성철은 자신의 심장에 박혀 있는 맹약의 십자가의 이물감을 새삼스레 다시 느꼈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군. 하루하루 죽지 않기 위해 싸워야 하는 투기장의 투사로.’ 맹약에 십자가에 맹세한 것은 재앙의 해결. 김성철이 움직이는 이유는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죽지 않기 위해. 맹약의 십자가가 자신을 불태워버리지 않기 위해 마지못해 남은 재앙에 맞서고 있다. 문제는 살아가려는 의지의 농도다. 악귀가 되어서라도 바득바득 살아나가고자 했던 과거와 달리 그의 삶의 의미는 먼지에 쌓인 화폭처럼 흐리멍덩하기만 하다. 그것이 그의 마음과 몸과 그리고 눈동자에 드러났고 오랜 지기인 황제는 그것을 알아본 것이다. “…자네라면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 믿네.” 황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성철로서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뭐야? 벌써 끝난 건가?” “술이 과한 거 같아서 말이야.” “할 이야기가 있을 텐데?” 김성철은 필경 황제가 세 번째 재앙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리라고 생각했다. 하나의 왕.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조력을 구할 것이라고. 하지만 황제는 끝내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할 이야기? 아, 한 가지가 있군.” 대신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조촐한 연회를 마무리 지었다. “…나도 나만의 퀘스트를 하려고 하네.” 자신만만한 미소를 남긴 채 윌리엄 퀸튼 말버러는 천막을 나섰다. 연회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 연회가 끝나고 황제는 곧장 자신의 공선으로 돌아갔다. 아직 늦은 저녁이었다. ‘술버릇은 변함이 없군.’ 예전에도 그랬다. 황제는 언제나 빨리 먹고 마시고 할 말만 빠르게 하고 술자리를 떠났다.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고 억지로 할 말을 끄집어내는 건 황제의 사전엔 없는 일이다. ‘조금 모자란데.’ 김성철은 홀로 술이나 한 잔 하리라 마음먹으며 제국의 진영을 떠났다. 제국의 병사들은 모두들 김성철을 경계하고 있었으나 그에게 감히 시비를 걸거나 막으려는 자는 없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김성철은 가볍게 황제의 진영을 통과했다. 그런데 진영에서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성철은 뒤쪽에서 느닷없는 기척을 느끼고 뒤돌아섰다. 아무개다. 허름한 암살자의 복장을 한 과거와 달리 그녀는 화려한 제국 장성의 정장을 입고 있었다. 언제나 올곧은 눈빛을 한 그녀의 눈동자엔 이제는 익숙한 싸늘한 적대감이 서려 있었다. “너냐? 황제와 제국 함대를 이곳으로 인도한 것이.” 김성철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아무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기는 다르지만 두 번째 재앙이 해결된 직후에 당신이 은자의 탑을 찾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니까.” “…그럼 종말교단의 출현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군.” 아무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무리들이지. 앞으로 그들은 대륙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킬 거야.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금단주술의 힘을 빌려서 말이야.” 취기가 약간 서려 있던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런 걸 내게 알려줘도 되나? 나는 너의 철천지원수이자 네가 있던 세상을 파괴한 재앙 그 자체인데.” 적대감은 여전하지만 김성철은 아무개, 아니 이수진의 분위기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방향은 바뀌지 않았지만 큰 변화가 느껴졌다. 무조건적인 증오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신 차갑게 정제된 분노의 칼날을 은연중에 드러내며 아무개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다지 믿고 싶지 않지만 내가 보았던 미래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어. 아니 엄밀히 말하면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일어났지. 이대로 가다간 나도 이제 내가 지닌 과거에 대한 정보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을지도 몰라. 그리고.” 아무개는 눈을 한 차례 질끈 감고 심호흡을 했다. 다시 눈을 뜬 이수진은 김성철을 노려보며 차디 찬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온 주 목적은 세상의 멸망을 막는 것이야. 당신을 죽이는 게 어렵다면 다가올 역사를 바꿔보는 것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거든.” “그건 고무적인 일이군.” 김성철이 피식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아마도 취기 탓이리라. 아무개의 얼굴에 즉시 냉담한 불쾌감이 떠올랐다. 그녀를 혀를 한 차례 차고는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전히 나는 당신이 가장 커다란 위협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실제로 당신에겐 그럴만한 힘도 있고.” “아신의 힘을 빌리는 무리보다 내가 더 위험하다는 건가?” 김성철의 날선 물음에 아무개는 즉답하지 못했다. 김성철은 아무개의 얼굴을 응시했다. 뭔가 망설이고 있다.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군.’ “그건 결과가 말해줄 이야기야. 아무튼 본론을 이야기할게.” 아무개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김성철은 팔짱을 끼고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아무개의 입술이 열렸다. “조만간 당신은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할 거야.” “선택..?” “곧 알게 될 일이야.” “점쟁이처럼 말하는군.” “…나는 그 선택을 지켜보겠어.” 아무개는 그 말은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관망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뾰족한 여성의 비명이 머지 않은 곳에서 들렸고 뒤이어 낯익은 비명 또한 함께 울려 퍼졌다. “삐기이이이!” 마라키아의 것이다. 김성철은 즉시 마라키아의 소리가 난 곳으로 몸을 날렸다. 마라키아와 누군가가 어두운 길가에서 부딪친 듯 뒤엉킨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김성철은 그쪽으로 다가가려고 하다 어둠 속에 쓰러진 사람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나무 옆에 몸을 숨겼다. ‘아무개?’ 아마도 은신 중에 마라키아와 부딪친 모양이다. 마라키아는 체구가 작고 깃털까지 검은 색이라 이런 어둠 속에선 잘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마라키아였다. 마라키아는 넘어진 아무개를 노려보며 역정을 냈다. “어디다 눈을 팔고 다니는 거야? 인간 따위가!” “으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무개가 흙먼지를 털어내고 자신을 향해 화를 내는 작은 조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무개의 몸이 일순 굳는다 싶더니 이윽고 그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마.. 마라키아님?” 생각지도 않은 일이 일어났다. ======================================= 79. 조촐한 연회 (3) “응? 뭐냐? 인간? 어째서 내 이름을 아는 거지?” 역정을 내던 마라키아가 눈을 껌뻑이며 아무개를 올려다보았다. 아무개는 그런 마라키아를 복잡한 감회가 서린 눈으로 응시하다 이내 자신이 실언을 한 것을 깨달았다. “그.. 그게...”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가 제대로 얼버무릴 리가 없다. 마라키아는 마법의 힘으로 아무개의 눈높이 까지 날아오르고는 얼굴을 아무개 가까이 들이대었다. “흐음... 모르는 얼굴인데. 인간들은 하나같이 똑같이 생겨 개체를 구분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넌 처음 보는 얼굴이다.” “아하하.. 그게....” 아무개는 마라키아의 시선을 피하며 멋쩍게 웃었다. ‘아무개에게도 저런 일면이 있었군.’ 김성철은 기척을 죽이며 상황을 계속해서 관망했다. “아, 참!” 아무개가 무언가 떠올린 모양이었다. “뭐냐? 인간!” 마라키아가 불쾌한 어조로 묻자 아무개는 주변을 한 차례 돌아보고는 밝은 어조로 말했다.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검은 깃털을 가진 하늘과 땅의 왕의 전설을.” “호오?” 심술을 부리던 마라키아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그가 조인왕국 바깥으로 나온 지 처음으로 자신을 아는 인간을 만났기 때문이다. “인간 주제에 그래도 어느 정도 지식은 있는 놈이구나. 지금까지 만난 인간 중 가장 낫군!” “전설로만 전해지던 마라키아님을 직접 보게 되어 정말로 영광이에요.” 아무개는 그렇게 말하며 마라키아의 구석구석을 응시했다. 부리 하나만은 날카롭지만 전체적으론 병아리 같은 인상. 솜털로 덮인 작은 몸은 귀여움 이외에 다른 인상을 주기 어려웠다. ‘마라키아님. 이런 시절도 있었구나.’ 그녀의 뇌리에 하나의 인물이 스치고 지나갔다. 검은 날개로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재앙의 하수인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하며 살아남은 인간들을 지켜주던 하늘의 왕을. 하지만 그 최후는 재앙에 맞선 다른 이와 마찬가지로 순탄치 못했다. 아무개는 기억한다. 역병을 불러일으키는 재앙의 무기에 당해 온 몸이 천천히 썩으며 죽어가던 검은 날개의 왕의 모습을. ‘마라키아님...’ 아무개의 눈에 이슬과 같은 물방울이 맺혔다. “응?” 마라키아가 아무개의 심상치 않은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순간이었다. 숲 속 저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만 마라키아님. 저는 이만 실례할게요.” “응? 어딜 가는 거냐? 인간. 나는 네가 떠나는 걸 허락하지 않았는데?” 마라키아가 엄포를 놓긴 했지만 아무개가 도망치고자 마음을 먹으면 김성철조차 그녀를 잡을 수 없다. 아무개는 마라키아의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삐이..?” 마라키아가 깜짝 놀란 건 당연지사. “이게 어디 간 거야?” 마라키아가 허둥지둥 아무개를 찾을 때 숲 속에서 무언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길 잃은 사슴 한 마리였다. 마라키아는 작은 깃털을 하나 뽑아 마법의 힘으로 사슴에게 날려보냈다. 깃털을 맞은 사슴은 폭 고꾸라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빌어먹을 인간. 대체 어디로 간 거지?” 마라키아가 마법의 힘으로 주변을 살피려고 할 때였다. 숨어 있던 김성철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라키아. 힘 뺄 거 없어.” “으응? 갑자기 넌 또 왜 나타난 거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아무튼 그 녀석을 찾으려 드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야. 그 여자에겐 아주 특별한 영혼각인이 있거든. 누구도 찾아낼 수 없고 감지할 수 없는 특별한 영혼각인이 말이야.” 김성철은 그렇게 말한 후 마라키아가 쓰러뜨린 사슴 쪽을 향해 걸어가 사슴을 들쳐 엎고는 마라키아 앞을 지나쳤다.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고 밥이나 먹자고.” 마라키아는 김성철의 말이 못마땅한 듯 미련을 보였지만 이미 아무개는 멀리 달아난 뒤였다. 김성철은 차가운 밤하늘에 떠오른 달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아무개가 마라키아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건 역시 아무개가 미래에서 마라키아를 보았기 때문인가.’ 조금은 흥미로운 이야기다. 변화는 그렇게 느닷없고 어찌 보면 지극히 사소한 일에서 정정 시작되곤 한다. ‘응?’ 문득 김성철은 오랫동안 잊고 지내오던 마음의 친구를 발견했다. 여유라는 녀석이다. 오로지 재앙의 해결이라는 목적에 사로잡혀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을 땐 다른 일에 눈을 돌린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잠깐 다른 일을 한 적이 있긴 하나 그것 또한 재앙 해결의 일환으로 한 것일 뿐 그 자체로 어떤 목적이 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거기서 김성철은 처음으로 대담한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잠깐 다른 일을 해볼까?’ 다른 일을 한다고 해서 재앙의 해결을 포기하는 건 아니다. 사람은 한 번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고 일도 할 수 있는 동물이다. 다만 목표 하나가 추가된다는 것일 뿐. 겨우 그런 걸로 심장에 박힌 맹약의 십자가가 자신을 불태울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니 자신을 불태워도 이제는 관계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황제의 말마따나 김성철은 이미 자신의 퀘스트를 달성했으므로. 남은 건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김성철의 침묵이 지나치게 길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뭘 할지 생각을 해봤다. 어차피 이번 재앙은 간단하게 해결될 거라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자 베르텔기아는 몸을 격하게 흔들며 뾰로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할 게 뭐가 있어! 당연히 그동안 내팽겨 쳐 둔 창조술사 퀘스트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렇게 말하는 김성철은 사실 다른 걸 생각하고 있었다. 봉인이다. 슈넬메르커가 건넨 신의 글을 담은 두루마리에서 떼어 낸 기이한 봉인. 불가해한 글씨가 적힌 작고 세로로 된 작은 양피지 둘을 어긋나게 포갠 뒤 그 양피지가 합쳐지는 부분에 붉은 빛이 도는 금속성 물체를 녹인 것을 부어 발톱 모양의 인장을 찍어 만든 물건이다. 그 봉인은 그 자체로 특별한 힘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신이 적어 내렸다는 신의 글에 간섭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아무래도 신의 글의 저자는 아신들로 보인다. 하지만 이 세상에 남겨진 아신의 정보는 많지 않지.’ 아신 신앙은 가장 전형적인 이단으로 세상에 터 잡은 모든 종단에서 배척하는 것들이다. 아신에 관한 책은 이미 김성철이 이 세상에 오기 전부터 불타 없어졌고 아신에 관한 전승이 있는 곳엔 이단심문관들이 어김없이 창칼을 든 무리들을 데리고 찾아 와 잘못된 믿음을 지워버렸다. ‘일단은 봉인에 관해 조사를 해보도록 할까.’ 하고 많은 수많은 일중에 굳이 봉인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멀리가지 않고 이곳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성철은 품속에 있는 기이한 봉인을 꺼내 손안에 쥐었다. 그 봉인을 쥐는 순간, 계시와 같은 생각이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럼 다음 목적지는 정해졌네! 성질 더러운 빨간 머리가 사는 익시온으로!” 김성철의 생각을 꿈에도 알 리 없는 베르텔기아의 활기 찬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김성철은 옆에서 조잘거리는 베르텔기아를 머리를 쓰다듬듯 손을 얹으며 호숫가에 외로이 서 있는 탑을 응시했다. 은자의 탑. 수수께끼의 봉인은 김성철에게 은자의 탑으로 갈 것을 주문하고 있었다. * 이튿날. 김성철은 은자의 탑으로 다시 향했다. 은자의 탑 입구 앞에 자리 잡고 있던 토포로 마을은 폐허가 즐비한 흉물스런 땅으로 변해 있었다. 김성철은 생존자로 보이는 마을 사람들이 퀭한 눈을 하고 망연자실한 얼굴로 앉아 있는 걸 지나치며 탑으로 향하는 징검다리를 건넜다. “쌤통이긴 한데 불쌍하기도 하네.” 마라키아와 함께 남작 위에 올라탄 베르텔기아가 주변을 돌아보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편 은자의 탑 주변에 초토화되긴 마찬가지. 탑 주변에 있던 축사와 창고, 그리고 김성철이 컨닝극을 펼쳤던 작은 목조건물도 아신이 일으킨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여기저기 무너진 잔해와 이름 모를 동물의 시체, 돌무더기가 널려 있었다. 은자들은 이른 아침부터 노예들과 함께 은자의 탑 일대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김성철은 그들의 얼굴에서도 깊은 절망과 충격을 느낄 수 있었다. 단 하루 사이에 은자의 탑은 동맹국에게 버림받았고 그들의 이웃을 잃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신성불가침의 탑이 부정한 기운에 의해 침범 당하는 걸 목도해야 했다. 은자의 탑은 더 이상 안전한 장소가 아니다. 김성철은 잔해를 치우는 은자들 사이에서 재앙의 서가 옮겨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난 안 들어갈래.” 탑 앞에서 베르텔기아가 불쑥 말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베르텔기아가 김성철과 임의로 떨어지려 하는 건. “기분 나쁜 기운이 저 탑 안에서 나오고 있어. 그래서 안 들어갈래.” 가기 싫다는 건 억지로 끌고 가는 건 김성철의 취미가 아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와 일행을 문 앞에 두고 홀로 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긴 또 무슨 일로 왔는가?” 김성철이 탑에 들어서자 탑의 주인인 포르피리우스가 김성철 앞을 막아섰다. 김성철은 간단하게 용건을 이야기했다. “재앙의 서를 보고 싶소.” “재앙의 서라. 그건 이미 한 번 보지 않았소? 오늘 아침에 내가 직접 그것을 확인했는데 내용에 달라진 건 없었소.” 포르피리우스는 전과 달리 김성철을 경계하는 눈치였다. 무리도 아니다. 무너져서는 안 될 탑에 금이 갔다. 그 이야기는 마찬가지로 신의 힘으로 만든 재앙의 서에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포르피리우스 정도 되는 사람 앞에서 서투른 거짓말은 길보다 흉을 불러올 경우가 많다. 김성철은 포르피리우스의 눈앞에 자리 잡은 두려움을 파악하고 품속에서 신의 책에서 떼어낸 수수께끼의 봉인을 꺼내들었다. “사실은 이것 때문에 왔소.” “그것은...?” 김성철은 포르피리우스에게 봉인을 넘겼다. 포르피리우스가 봉인을 이리저리 살피는 동안 김성철은 솔직하게 봉인을 얻게 된 경위에 대해 이야기했다. 포르피리우스는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봉인을 김성철에게 돌려주었다. “신의 글이라. 그런 것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내 눈으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소. 하지만 그 봉인은 예사롭지 않은 물건인 게 확실하구려. 어떤 힘이 느껴지오. 우리가 알 수 없는... 알아서는 안 되는 그런 힘 말이오.” 포르피리우스는 그다지 김성철을 재앙의 서에 접근하는 걸 원치 않았지만 말릴 명분이 없었다. 김성철이 은자들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운 건 모두가 지켜본 바이므로. 게다가 재앙의 서는 순순히 자신이 당하게 놔둘 지 않을 것이다. 느닷없이 나타난 정체불명의 책. 포르피리우스는 그 책이 어떻게 불가해한 힘을 이용해 암살자들을 처치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비록 탑은 부서졌지만, 재앙의 서의 힘은 유효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옆으로 비켜서 김성철에게 길을 터주었다. 포르피리우스의 묵인 하에 김성철은 재앙의 서가 있는 중심부로 걸어갔다. 재앙의 서가 보관된 중심부 앞엔 노예 한 명이 물걸레로 바닥을 부지런히 닦고 있었다. 김성철은 노예를 지나쳐 중심부로 진입했다. 그곳에 보관된 재앙의 서는 원래 있던 그 자리에 가만히 떠 있었다. 김성철은 봉인을 꺼내 손바닥에 올렸다. “…….” 봉인은 김성철에게 재앙의 서로 가라는 계시를 추상적인 생각의 형태로 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재앙의 서 앞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재앙의 서도 봉인도 잠잠하기만 하다. 김성철이 의문을 느끼고 뒤돌아서는 순간이었다. 김성철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니, 이건.’ 겉으로만 보면 어떤 것도 달라지지 않은 풍경이다. 단 하나, 노예의 움직임만 빼면 말이다. 투덜거리며 걸레질을 하던 노예는 마치 얼어붙은 듯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김성철은 처음엔 빙결 마법 혹은 즉사의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뒤이어 나타난 노예의 느릿한 미세한 움직임은 그의 생각을 완전히 고쳐놓으며 인정하기 어려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시간축이 변한 건가?’ 시간은 인간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다. 기껏해야 짧은 미래를 내다보는 정도라면 모를까 시간의 조정은 그 어떤 현인도 해결하지 못한 불가침의 영역이다. 그런데 재앙의 서가 마련된 중심부 안의 시간은 명백하게 외부와 다른 축을 가지고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충격 속에서 김성철은 하나의 책이 느닷없이 자신 앞에 나타난 것 감지했다. 베르텔기아와 똑같이 생긴 형태의 책. 또 다른 짝퉁이 나타났다. 김성철은 책을 똑똑히 응시하며 물었다. “뭐냐?” 김성철이 묻자 책은 앞을 비켜주었다. 책이 가리고 있던 영역엔 하나의 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금도 철도 아닌 색채가 있는 빛으로 만든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문이었다. 김성철은 그 문을 보고 누군가가 허공 위에 대충 그림을 그려놓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쪽으로.” 책이 김성철은 문으로 안내했다. 베르텔기아와 동일한 목소리로. 문이 열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칠흑 같은 어둠이 문 너머에 있었다. 김성철은 무저갱과 같은 어둠을 보고 미지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 크라이아를 구하기 전이라면 그는 결코 문 너머를 통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호기심 하나만으로 목숨을 걸기에 그의 어깨 위에 실린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기에. 하지만 그 짐을 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그는 자유롭고 구속받지 않는다. ‘죽기 밖에 더하겠나.’ 하지만 그가 쉽게 죽겠는가? 김성철은 자신의 힘을 잘 알고 신뢰하고 있다. 다만 지금까진 필요에 의해 숨겼을 뿐. 김성철은 망설임 없이 어둠의 심연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넘어선 순간 소리도 빛도 없는 완전한 어둠이 그를 가두었다. “…….” 다음 순간, 어둠 속에서 손바닥에 올린 봉인이 빛을 발했다. 그 빛은 점차로 커져 김성철을 덮었고 이윽고 짙은 어둠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폭증했다. 마치 폭발과도 같은 빛의 팽창 이 후, 김성철은 눈이 멀 정도의 눈부심을 경험하며 눈을 감았다. 눈꺼풀 위를 비추는 빛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김성철은 다시 눈을 떴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는 전혀 다른 세상에 와 있었다. 대지도 태양도 없고 따라서 하늘도 바다도 없는 무한한 세계를. 그는 그 무한한 세계 위를 부유하는 원색으로 치장된 기이한 궁전의 중심에 서 있었다. 곧 그의 머리 위에서 머릿속을 울릴 정도의 거대한 그러나 시끄럽지 않은 범상치 않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 필멸자? 필멸자가 온 건가? ] 다음 순간 김성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평선이라 불러야 할 가시거리의 끝에서 한 마리 뱀이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실로 거대한 뱀이었다. 세상을 삼켜버릴 정도로. 그 거대한 뱀은 김성철이 선 허공 위의 궁전을 칭칭 휘감으며 거대한 두상을 김성철 앞에 들이대었다. 이윽고 뱀이 물었다. [ 불멸자의 세계엔 어찌하여 온 것인가? ] ======================================= 80. 초월세계 (1) 그 한마디엔 강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 상대방을 죽일 수 있다는. 뱀은 계속해서 말했다. [ 게다가 네 피의 냄새는 날 섬기는 무리의 것들과 다르구나. ] “…….” 마치 환각과도 같은 광경 속에서 김성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지금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 작은 흥분마저 느끼며 손바닥 위에 있는 물건을 뱀에게 펼쳐 보였다. 뱀의 거대한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 호오. 초대장이군. 이 얼마만의 초대장인가? 대략 5년만인가? ] 뱀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 불멸자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이방인. ] “불멸자의 세계? 여기가?” 김성철은 가늠할 수 없는 주위의 풍경을 돌아다보며 물었다. 뱀은 몸통을 움직여 허공 위의 성을 한 차례 더 칭칭 감은 후 김성철 쪽을 이번엔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구도에서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 정확히 말하면 입구지. 너는 단지 초대장을 가지고 온 이방인에 지나지 않으니까. ] ‘초대장?’ 김성철은 자신의 손바닥 위의 봉인을 응시했다. ‘이걸 말하는 건가?’ 김성철은 봉인을 쥐며 거대한 뱀을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뱀의 눈동자 위엔 김성철이 알고 있는 하늘이 담겨 있었다. 연한 푸른색의 배경 위를 도도히 흐르는 무수한 구름들. 구름의 색깔은 시시각각 색이 바뀌어 더욱 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위험하군.’ 김성철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감지하고 뱀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돌렸다. 여간한 정신공격에 면역인 김성철이 위기를 느낄 정도로 뱀의 눈동자엔 마술적인 매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어 뱀이 입을 열었다. [ 아무튼 네가 초대장을 가지고 여기에 왔다는 이유는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겠지. 하나는 우리 불멸자가 남긴 기록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읽는 능력으로 악신이 남기고 우리가 주석을 붙인 기록을 읽었다는 것. 내 말이 맞나? ] 뱀의 질문에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질문을 던졌다. “그러는 넌 뭐냐? 정체를 밝혀라.” 김성철의 목소리와 태도엔 어떤 비굴함도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뱀은 그런 김성철을 계속 올려보다 쑤욱 머리를 올려 김성철 위에 머리를 위치시키고는 혓바닥을 한 차례 날름 내밀었다. 뱀의 혓바닥에서는 민트향과 유사한 대단히 상쾌한 향기가 뿜어져 나와 사방을 청량감으로 가득 차게 했다. 그런데 김성철은 민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민트로 만든 과자, 차, 아이스크림 등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읔, 역겨운 뱀이군.’ 김성철이 코를 틀어막고 있는 동안 뱀은 이제는 부드럽게 느껴지는 음성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 나는 우로보로스. 지식의 뱀으로 불리지. 이곳 초월 세계의 불멸군주 중 하나다. 너희들이 말하는 불멸자이자 아신이지. ] “호오?” [ 나는 악신들이 퍼뜨린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접한 필멸자들에게 진실을 전달하여 돌려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 뱀은 거기까지 말한 후 갑자기 김성철 쪽으로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순식간에 김성철이 발을 붙이고 있는 원형의 홀 안이 뱀의 대가리로 가득 찼다. 김성철은 그 거대함으로 인해 위협을 느꼈지만 뱀으로선 그저 편하게 머리를 괴려고 한 모양이었다. 한결 편안한 자세를 취한 뱀은 민트향이 나는 한숨을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 그렇다고 해도 최근 수 년 간은, 초대장을 들고 온 자가 없었지. 악신이 뿌린 기록은 나와 내 벗들의 노력으로 대부분 회수됐거든. ] “회수?” [ 그래. 네가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양피지 말이야. ] “이것 말인가?” 김성철은 주머니 깊숙한 곳에 보관된 두루마리를 꺼내 보였다. 거대한 뱀의 입이 꿈틀거렸다. [ 그래. 그 불경한 양피지. 그걸 내게 넘겨라. 그것은 악신이 남긴 저주 받을 기록이다. 선량하고 무지한 필멸자들을 호도해 세상에 혼란을 불러일으키려는 사악한 안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 ] 뱀이 다시금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김성철은 취할 것 같이 짙은 농도로 풍기는 민트향애 코를 틀어막고 뒤로 물러섰다. 뱀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 응? 혹시 내 숨결에 거부감을 느끼나? ] “미안하지만 민트 냄새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야.” [ 기이하군. 혹시 오크신가? ] “갑자기 오크가 왜 나오지?” [ 청결의 대명사인 민트향을 싫어하는 건 오크 밖에 없거든. 아니 가만 보자. 나하크도 싫어하는군. 하지만 나가와 리자드맨은 민트향이라면 사죽을 못 쓰지. ] “나는 오크가 아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텐데?” 김성철이 고개를 돌리며 삐딱하게 자세를 고치고는 손에 쥐고 있는 두루마리로 어깨를 툭툭 쳤다. [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샜군. 하지만 필멸자여. 이해해주게.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건 대략 5년 만이라서 말이야. ] “…5년 전에도 누군가 이곳에 찾아왔었나?” [ 그렇다. 나를 섬기는 일족의 후예들이 악신의 기록을 가지고 이곳에 종종 들렀었지. 하지만 그 빌어먹을 인간 놈. 그 조그만 녀석이 내 하수인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삼아 이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 그 조그만 녀석에겐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지만 좌우지간, 나의 사명은 악신이 남긴 기록을 회수하여 파기하는 것이다. ] “악신이란 건 뭐지?” 김성철이 물었다. 이제는 민트향에도 어느 정도 코가 적응해 제법 코로 숨을 쉴만했다. 그런데 뱀이 잠자코 있다. 김성철이 의아함을 느끼고 있자니 뱀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 악신을 모른다고? 설마 악신도 모르고 이곳에 왔단 말인가? ] “모를 수도 있지. 게다가 이 두루마리는 내가 최초로 읽은 신의 글이다. 거기엔 악신에 대한 설명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 호오. 그렇게 된 건가? 뭐, 악신들이 준동했을 때로부터 시간이 한참 흘렀으니. 이해가 안 가는 일도 아니군. 악신이란 것은 말 그대로 사악한 아신을 말한다. ] “사악한 아신?” 김성철이 보기엔 어폐가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본 아신들은 모두 사악했고 실제로 아신에 대한 짧은 기록은 아신을 극도로 위험한 존재로 기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뱀은 그런 김성철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신적인 음성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아마도 만 년도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이곳 초월세계의 거주민인 아신 일부가 신의 뜻을 거역하고 너희들 필멸자의 세계로 내려가려고 한 적이 있었다. 모두들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지. 네가 알 지 모르겠지만 우리 불멸자는 필멸자의 세계에 머무를 수 없거든. 하지만 악신들은 방법을 찾아냈지.“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의 뇌리에 몇 가지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특히 익시온에서 일어났던 무시무시한 광경이. [ 필멸자의 영혼과 생명을 약탈해 악신들은 필멸자의 세상에 일시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지. 그렇게 필멸자의 세계로 건너간 악신들의 원하는 건 단지 하나였어. ] “…….” 김성철은 입을 다문 채 우로보로스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우로보로스가 말했다. [ 필멸자의 세계를 파괴하는 것. 그리하여 이 세상 전체를 멸하려는 것. ] “…?!” [ …그리고 세계 전체를 없던 것으로 하여 영원한 무로 돌리는 것. 그것이 악신들의 목적이었다. 그들은 실제로 너희들이 땅 곳곳에 세상을 멸망시킬 재앙을 심어 놓았다. 최근에 분화한 비탄의 산 또한 그 중 하나다. ] ‘비탄의 산?’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지만 김성철이 그것을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까마득히 먼 동쪽 바다에 위치한 이름 없는 섬. 칠영웅의 리더 데스포트가 생명을 깎아가며 터뜨린 화산 말이다. ‘그 화산을 만들어 낸 것이 악신이었다고?’ [ 아직 악신의 재는 바다에 머물러 있지만 곧 너희들의 땅에 닿게 되겠지. ] “악신들은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김성철이 물었다. 이에 거대한 뱀은 하늘을 담은 눈을 감았다 뜨며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 모든 생명엔 시작과 끝이 있다. 우리 불멸자들도 원래는 시작과 끝이라는 운명을 지닌 필멸자 중 하나였지. 어떤 녀석들은 끝이 없는 무한한 시간에 잘 순응했지만 어떤 녀석들은 그렇지 않았어. 끝을 갈구하게 된 것이지. 그것도 아주 사악한 형태로 말이야. 아무튼 설명이 길었지만 네가 가지고 있는 그 부정한 양피지는 악신이 너희들 필멸자를 속여 타락시키기 위해 만든 물건이다. ] “이게 말인가?” 김성철은 손 안에 있는 신의 글을 응시했다. [ 읽는 자의 능력이 있는 넌 보았을 것이다. 누구냐? 그 불경한 기록의 저자는? ] “힐데가름이라는 이름을 댄 것으로 기억한다.” 힐데가름이라는 이름을 듣자 뱀은 갑자기 머리를 들었다. 갑자기 치켜든 머리가 천정에 부딪치자 허공의 성 전체가 흔들렸다. 지진과 같은 진동 속에서 김성철은 뱀의 성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힐데가름! 도로메아의 창녀. 그 썩어빠질 계집이 그런 불경한 기록을 남기다니! 염치도 없군! ] “무슨 문제라도 있나?” 평범한 사람이라면 겁에 질려 그저 벌벌 떨기만 할 정도로 압도적인 광경이었지만 김성철은 조금도 않고 당당하게 물었다. [ 힐데가름은 악신 중에서도 악질이다. 너와 같은 인간들을 무수히 죽여 그 시체로 산을 쌓고 피로 바다로 만들어 들이킨 악종이지. 그런 끔찍한 계집의 기록은 당장 불태워 없애야 마땅하다. 필멸자. 당장 그 양피지를 내게 넘겨라. ] 뱀은 김성철을 종용했다. 그런데 김성철은 그런 우로보로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어도 그냥은 넘기지 않겠다. 상대방이 아신이라고 해도. “내가 이걸 넘기면 너는 내게 뭘 줄 수 있지?” 김성철이 물었다. 하늘을 담은 우로보로스의 눈동자가 검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 힘을 주겠다. ] “힘?” 김성철의 묻자 그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나타나 시야를 덮기 시작했다. < 지식의 뱀의 은혜 > [ 이중 하나를 선택하시오 ] 1. 명부마도의 서 - 아크리치 전직 아이템 2. 살쾡이 그림자 - 영혼각인 3. 바람정령의 정수 - 민첩성 강화 아이템 4. 화염정령의 정수 - 힘 강화 아이템 5. 플레임베어러 - 도검 [ …이것들의 등급은 모두 전설급이다. 하나 같이 필멸자들에겐 요긴한 물건이지. ] 김성철은 우로보로스가 제시한 대가를 하나하나 살폈다. 일단 여기서 명부마도의 서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아크리치라는 리치 위의 한 단계 위의 존재는 지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희소성이 있는 존재지만김성철은 굳이 리치로 변하지 않아도 충분히 강하다. 게다가 리치화는 필연적으로 생명을 포기하는 것. 김성철의 심장이 멈추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는 누구보다 김성철 본인이 잘 알고 있다. ‘이건 불필요하군. 비슷한 이유로 영혼각인 살쾡이 그림자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아.’ 한편 전설급 영혼각인 살쾡이 그림자는 물리공격판 메아리술사라고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또 하나의 그림자를 만들어내어 사용자의 공격에 추가적인 공격 효과를 부여하는 일종의 영구 공격력 강화의 효과를 지닌 영혼각인인데 김성철은 이미 초월적인 힘에서 나오는 막강한 공격력을 가지고 있다. 아신 시드미아마저 단 일격에 보내지 않았던가? 게다가 살쾡이 그림자의 추가공격력은 본체의 공격력과 별개로 작용한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림자 자체에 내재적인 한계가 있어 김성철의 압도적인 힘을 그대로 복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건 내게는 그다지 필요 없는 물건이다.’ 플레임베어러란 전설급 도검도 팔 가라즈에 비하면 격이 떨어지는 물건이다. 김성철은 문득 자신이 새삼스레 대단하다는 걸 발견했다. ‘대단하구나. 나 자신.’ 어쩌면 가장 김성철이 힘을 숨기고 있던 대상은 바로 그 자신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소거법으로 아신의 선물을 차례로 정리한 끝에 이제 남은 선물은 두 개가 남았다. 화염정령의 정수와 바람정령의 정수다. 김성철은 지식의 뱀을 올려다보며 불쑥 물었다. “이 정수들 말이야. 능력 상한치 패널티 같은 게 붙어 있나?” [ 그런 것은 없다. 정령이 몇 남지 않은 지금 세상에서 정령의 정수는 대단히 구하기 어렵고 희귀한 물건이다. 게다가 그 효과도 보통이 아니지. 무려 50이라는 수치를 한 번에 올려주니까. ] “50?” 김성철의 눈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한 번에 50이라는 능력치를 올려주는 것은 일회성 위업 중에서도 찾기 어려울 정도다. 그것도 상한치 패널티가 없는 상태에서 올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에 가깝다. [ …우리 불멸자에겐 더 이상 의미가 없는 물건이지만 필멸자에겐 대단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무려 50이라는 수치를 한 번에 올려주니까. ] 눈 앞의 아신이 미덥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오랜만에 몸이 달아오를 정도의 조건이다. 한 번 정도 속아줘도 될 정도로 말이다. 김성철은 가지고 있는 신의 글을 거대한 뱀에게 내밀었다. “바람정령의 정수가 좋겠군.” ======================================= 80. 초월세계 (2) [ 현명한 인간이군. ] 신의 글은 김성철의 손을 떠나 우로보로스를 향해 날아갔다. 우로보로스는 민트향 나는 입을 벌려 신의 글을 삼켰다. [ 약속한 보상을 내려주지. ] 신의 글을 삼킨 우로보로스는 김성철 앞에 녹색 빛이 도는 빛나는 구체를 날려보냈다. 김성철은 양손을 모아 어린아이 머리 크기 만한 구체를 받아들였다. 청량하고 시원한 기운이 구체로부터 느껴지고 있었다. ‘이게 정령의 정수인가. 처음 느껴보는 순수한 기운이다.’ 김성철은 문득 정령계에서 만날 수 있는 때 묻지 않고 청량하며 그리고 생명력으로 충만한 기운을 녹색 구체로부터 느낄 수 있었다. [ 그럼, 나는 이만 돌아가겠다. 필멸자. 또 다른 신의 글을 발견하면 우리의 대행자를 통해 언제든 다시 여기에 오도록. ] 김성철은 우로보로스가 서두르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거대한 뱀은 할 말이 끝나자마자 칭칭 휘감았던 몸을 풀고 서쪽 공간을 향해 날아갔고 김성철이 갖고 있던 봉인은 모래처럼 흩날려 사라졌다.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홀로 남은 김성철 앞에 문이 나타났다. 김성철은 직감적으로 그 문이 현실로 통하는 문이라는 걸 느끼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일단은 돌아갈까. 저 거대한 뱀의 말에 의하면 신의 글이라는 게 있으면 다시 여기로 올 수 있는 것 같으니.’ 우로보로스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김성철에겐 또 다른 신의 글이 있다. 라그란제의 카타콤에서 얻은 물건이다. 과거엔 그것을 거의 해독해내지 못했지만 읽는 자의 능력을 익힌 지금이라면 그 두루마리에 쓰인 글귀를 어느 정도 해독할 수 있으리라. ‘이왕 이렇게 된 거 시간을 들여 그것을 한 번 보던가 해야겠군.’ 신의 글을 읽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읽는 자의 능력을 익혔음에도 신의 글을 보고 있으면 상당한 체력과 심력이 소모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김성철은 시간을 들여 그것을 보기로 다짐하며 문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어둠이 그를 감쌌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봉인이 없다는 점. 김성철은 동요하지 않고 느긋하게 인도하는 빛이 비추길 기다렸다. 곧 그가 기다린 빛이 나타났다. 어둠 곳곳에 반딧불과 같은 구형의 빛이 절대 암흑 속의 공간을 밝혔다. 김성철은 그 작은 빛 안에 사람의 형체가 머물러 있는 걸 알아차렸다. 각기 다른 얼굴, 복색, 그리고 자세.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들 석상처럼 멈춘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오직 단 한 명, 마지막에 스쳐 지나간 사내만이 눈을 뜬 채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30대 후반 정도는 되었을까. 수척한 얼굴과 빼빼마른 체구를 지닌 볼품없는 남자로 낡은 책상 앞에 앉은 채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김성철은 왠지 모르게 그 얼굴이 낯이 익다고 느낀 채 빛에 휩싸였다.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김성철은 은자의 탑, 재앙의 서 보관고에 있었다. 베르텔기아와 똑같이 생긴 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책은 김성철이 잘 아는 목소리로 그러나 전혀 다른 톤으로 말을 건넸다. “위대한 지식의 뱀께서 당신을 인지하셨습니다. 앞으로 당신은 언제든 저를 통해 초월세계로 가실 수 있습니다. 단, 소각해야 할 신의 글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 하에 말이죠.”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걸어오는 책을 응시하다 불쑥 물었다. “넌 뭐냐?” 베르텔기아와 함께 있었을 때라면 결코 묻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베르텔기아에게 커다란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하지만 혼자인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김성철은 사뭇 살벌한 시선으로 책을 노려보며 다시 물었다. “넌 뭐냐고 물었다.” 이윽고 책이 미약하게 몸을 떨며 움직임을 보였다. “저는 베르텔기아 55호입니다.” “베르텔기아 55호...? 그게 뭐지?” “글쎄요. 그건 마치 당신에게 당신이 대체 뭐냐고 묻는 것과 동일한 성격의 질문이네요.” “무어라?” “당신이 당신의 부모님에게 생명과 이름을 받았듯이 저도 저의 아버님에게 생명과 이름을 받았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탑의 경비와 증표를 지닌 사람을 초월세계로 안내하는 것이고요.” 55호라 자신을 밝힌 책은 묻지도 않은 부분까지 차분한 어조로 물 흐르듯 이야기했다. “…….” 김성철이 잠시 할 말을 생각하며 침묵에 잠긴 동안 책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조금은 놀랐네요. 신룡의 일족 이외의 인물이 증표를 가지고 올 줄이야.” “신룡의 일족?” “지식의 뱀을 섬기는 무리들이죠. 얼마 전까지 최후의 생존자가 종종 드나들곤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끊겨서 일족이 멸망한 줄 알았어요.” 그 말을 듣던 김성철은 눈을 반짝이며 작심한 듯 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거, 젊은 여잔가?” 지식의 뱀 우로보로스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김성철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한 명의 인물을 떠올리고 있었다. 라이즈 하이메르. 지금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인물이 어쩌면 초월세계의 탑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는 지식의 뱀을 섬기는 일족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불현듯 솟아나왔다. 왜냐하면 그녀는 현재까지 알려진 김성철을 제외하고 유일한 ‘읽는 자’니까. “라이즈 하이메르라고 하는.” 이에 책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저는 이름을 묻지 않아요. 제가 판단하는 건 증표를 지니고 있는지 여부, 지식의 뱀께서 허락하신지 여부, 그리고 탑의 적인지 아닌지 여부.” “그런가? 그럼 그 여자는 어떻게 생겼지? 젊은 여잔가? 아니 더 이상 젊지 않을 수도 있겠군. 그래도 아주 늙진 않았을 것이다.” 김성철은 어딘가 필사적이었다. 아주 뜨거운 건 아니었지만 평소의 담담함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열의가 그의 태도와 목소리에 서려 있었다. 55호는 그런 김성철을 가만히 응시하다 이내 얕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당신이 찾는 사람은 아주 늙고 쭈글쭈글한 노파랍니다.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인물과는 거리가 멀어요.” “…그런가?” 책은 그렇게 말한 후 몸을 가볍게 흔들며 김성철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조금은 풀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재밌는 인간이었죠. 저는 제법 그녀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신룡의 일족 중에 찾으시는 사람이 있나보군요?” “글쎄. 딱히 찾진 않아. 약간 궁금해서 말이야.” “그럼 잘됐네요.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신룡의 일족은 루테기네아라고 불리는 나라에게 멸족 당했으니까요.” “그런가?” 그렇게 묻는 순간 김성철은 문득 자신을 둘러싼 외계에 약간의 변화를 감지했다. 그는 열린 입구를 봤다. 거의 정지 상태에 가까울 정도로 느려진 노예의 움직임이 생기를 되찾고 있었다. “시간이 다 된 것 같군.” 김성철이 책을 보며 말했다. 책은 고개를 끄덕이듯 몸을 흔들었다. “자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네요. 저를 만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사람이 한정되다 보니 말할 기회가 거의 없었거든요. 지난 5년 동안 유일하게 한 대화가 탑의 침입자를 향한 것이었어요. 하지만 그건 대화라고 할 수 없죠.” “…그렇군.” 김성철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의 뇌리 속에선 수많은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그의 뇌리를 지배하는 것은 이 책이 살아 있는 소녀처럼 느껴진다는 것. ‘이 녀석. 비탄의 섬에 있던 것과는 다른 녀석인가? 전혀 분위기가 다르군. 이래서는 완전 그 녀석과 똑같은...’ 그 대목에서 김성철은 덜컥 겁을 느꼈다.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라도?” 책이 김성철에게 불쑥 물었다. 원상복구 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김성철은 눈을 한 차례 껌뻑이며 땅바닥을 응시했다 이내 작심한 눈빛으로 책을 응시했다. “…너와 비슷한 녀석을 본 적이 있다.” * 탑의 바깥엔 알록달록한 신관의 복색을 한 자들이 대거 나타나 있었다. 질서신을 섬기는 뮤라교단의 성직자들이다. 그들은 아신이 나타난 자리에 모여 여러 가지 기구를 이용해 인근 지대를 살피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치는 와중에서 분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악한 이단 놈들. 신성한 신의 탑에 상처를 입힌 것도 모자라서 대지의 기운마저 착취해버리다니.” “바야흐로 말세라는 것이겠지요. 이럴수록 우리들은 질서신의 말씀에 엄숙하게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성직자들의 대화를 들으며 김성철은 탕그리트의 옛 저택으로 돌아갔다. 탕그리트의 저택 옆엔 마라키아와 남작, 베르텔기아가 사이좋게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응? 이제 나온 거야? 한참 동안 안 나와서 우리끼리 먼저 돌아왔어.”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을 보고 반갑게 말을 걸었다. “그렇군.” 김성철은 모닥불 옆에 모포를 깔고 털썩 앉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에게 다가와 물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가 다가오자 멍하니 그녀를 응시하다 이내 손을 뻗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베르텔기아가 기겁을 하며 몸을 뒤로 물리며 뾰족하게 소리쳤다. “갑자기 징그럽게 왜 이러는 거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김성철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갑자기 왜 이러냐고? 혹시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 아니야?!” 이윽고 그는 잔뜩 경계하는 베르텔기아를 응시하며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 일 없었다. 시덥잖은 아신을 만난 것 외에는.” “아신?” “멀게만 느껴졌던 존재들은 의외로 가까이 있더군.” 김성철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영혼창고에서 바람정령의 정수를 꺼냈다. 남작 옆에서 꾸벅꾸벅 졸던 마라키아가 눈을 번쩍 뜨고 녹색 빛이 도는 구체를 크게 뜬 눈으로 응시했다. “삐이...?” 부리가 살짝 열렸다. “저것은 설마?” 마라키아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김성철 쪽으로 다가왔다.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곁눈질로 바라봤다. 이윽고 김성철 옆으로 다가온 마라키아는 바로 앞에서 녹색 구체를 보며 놀라움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정령의 정수?” “이걸 아나?” 김성철이 물었다. “책으로만 보았다. 까마득한 과거. 세상의 절반이 정령으로 뒤덮여 있을 때, 종종 볼 수 있었다는 물건이지. 전설에 따르면 이 정령의 정수는 사용하는 이에게 영구적인 힘의 상승을 준다고 들었다.” 그렇게 말하는 마라키아의 부리에서 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베르텔기아가 그걸 보고 가만 내버려 둘 리 없다. 그녀는 즉시 마라키아를 가로막고 책 모서리고 마라키아의 겨드랑이를 푹 찔렀다. “삐이잇! 뭐하는 짓이냐?!” 마라키아가 깜짝 놀라며 역정을 내자 베르텔기아는 크기를 축소해 김성철의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며 약올리듯 말했다. “도둑고양이가 생선을 훔치기 전에 미리 예방을 해봤어.” “뭐? 도둑고양이? 이.. 한심한 리빙북 따위가!” 마라키아가 역정을 내보지만 그 앞에 있는 건 다름 아닌 김성철이다. “…….” 김성철은 단지 담담한 눈빛으로 마라키아를 노려보는 것만으로 전 멸세의 왕을 침묵시켰다. “삐기이이이.....” 마라키아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남작 옆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냥 돌아가면 마라키아가 아니다. “반역심이 20 올랐습니다!” 뭔가 신경 쓰이는 말을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래.” 물론 김성철과 베르텔기아는 그 말을 일언반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김성철은 신비로운 빛을 발하는 녹색구체를 손바닥 위에 올리고 얼굴에 가까이 댔다. 청량한 바람의 기운이 얼굴을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 ‘확실히 이건 범상치 않은 물건이군. 이렇게 순수하고 정당한 힘이 서린 물건은 보기 어렵다.’ “민첩성이 부족해서 제대로 싸울 수가 없군!” 마라키아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민첩성이 조금만 더 높았어도... 좀 더 활약할 수 있을 텐데....” 정말 눈에 보이는 일차원적인 수작이다. 하지만 김성철은 적어도 능력치 상승에 있어서만큼은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 김성철은 마라키아의 말을 철저히 무시하며 오랜만에 상태창을 떠올렸다. [능력치] 힘 999+ 민첩 866 체력 815 마력 732 직관력 738 마법저항 632 의지 543 매력 28 운 28 “음....” 여전히 매력과 운은 절망적이지만 다른 능력치가 소폭 상승된 게 눈에 띄었다. ‘아신과의 싸움 덕분인가. 의지력이 30 가까이 올랐군.’ 더 이상 올리는 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민첩성과 체력 부분도 조금이나마 상승했다. ‘하지만 이것이 있다면...?’ 김성철은 손 안에 담긴 바람정령의 정수를 응시했다. 어차피 속는 셈 치고 가져온 물건이다. 김성철은 정수를 사용하기 전에 헛된 기대부터 접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는 지금 충분히 강하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눈에 띄는 장족의 발전을 한다면 분명 기분이 좋을 것이다. 김성철은 성장의 프로임과 동시에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난 방랑 세월 동안 인생의 유일한 낙은 요리와 성장 두 가지가 전부였으니. 김성철은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바람의 정수를 움켜 쥐었다. 곧 하나의 메시지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 바람의 정수를 사용하시겠습니까? ] 당연히 예스다. “아~ 민첩성~ 민첩성만 높으면~” 마라키아의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김성철은 마라키아의 간절한 염원을 무자비하게 깨부셨다. 바람정령의 정수가 깨어지며 푸른 기운이 김성철을 향해 속속들이 흡수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마라키아는 부리를 쩍 벌린 채 망연자실한 얼굴로 지켜보다 이윽고 고개를 푹 숙였다. [ 당신은 바람정령의 정수를 흡수했다. ] [ 신의 숨결이 당신을 축복한다. ] 김성철은 더할나위 없는 청량한 기운을 느끼며 즉시 상태창을 다시 열었다. [능력치] 힘 999+ 민첩 916 체력 815 마력 732 직관력 738 마법저항 632 의지 543 매력 28 운 28 “…앗싸!” 김성철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벌떡 일어섰다. ======================================= 80. 초월세계 (3) 베르텔기아는 화들짝 놀랬다. 저 무뚝뚝한 사내가 저렇게까지 기쁜 표정을 지으며 흥분하는 건 지금까지 통틀어 처음 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끝내주는군.” 능력치의 상승폭이라면 단연 직관력과 마력 쪽이 압도적이지만 김성철은 원래 전사다. 그것도 천상 전사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그에게 마법 같은 건 편리하긴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성에 차지 않는 물건이다. 그런 김성철에게 가장 유의미한 능력 항목은 힘, 민첩, 체력. 이른바 전사의 덕목. 하지만 그 3가지 항목은 이미 극에 달해 더 이상 발전가능성이 사라진 채 정체되어 있었고 김성철 본인도 더 이상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 답답한 상황 속에서 김성철은 예정에도 없던 거대한 전진을 한 것이다. 김성철은 자신의 몸이 보다 빨라지고 유연해진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직관력이 몇 오르고, 마력이 몇 오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이 정도라면 드라고만 녀석 따윈 놓치지 않겠군.’ 그 흥분 상태는 심장 박동을 통해 베르텔기아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으음.. 정말 기분 좋은 모양이네?” “당연하지.” 김성철은 서둘러 영혼창고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카타콤에서 얻은 신의 글이다. ‘빨리 이것도 정령의 정수와 바꿔와야겠어.’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다. ‘마치 어릴 때 빈 병 모아 새 콜라로 바꿔먹는 기분이군. 이렇게 훌륭한 성장 방법을 이제야 알다니!’ 흥분 상태에 빠진 김성철의 눈엔 바야흐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베르텔기아는 그런 김성철을 보고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완전히 기력을 되찾은 것까진 좋은데 뭔가 위험한데...?’ 베르텔기아는 결국 주머니에서 튀어나와 김성철의 시야를 가로막는 것으로 그의 폭주를 멈춰 세웠다. “뭐냐. 베르텔기아. 갑자기.” “거기 당신 너무 흥분한 거 같아서!” “흥분이라니.”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덥썩 잡아 옆에 내려놓으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확실히 조금은 흥분을 한 것 같군.’ 냉정을 잃은 건 오랜만이다. 기분 좋은 흔들림이다. 하지만 베르텔기아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가슴이 착잡해진다. 은자의 탑에 살고 있는 55호. 그 책이 남긴 말이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그 책이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보장은 없다.’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어 머릿속에 떠오른 좋지 않은 기억을 흩어버리고는 신의 글을 들었다. ‘일단 이걸 그 놈에게 주기 전에 한 번 정도 내용을 확인해보는 게 좋겠군.’ 이전엔 읽을 수 없었던 신의 글. 김성철은 다시 한 번 그 태고의 문서를 열어젖혔다. 전과 마찬가지로 두루마리를 펼치는 순간 무수한 문자로 이루어진 밤하늘이 펼쳐지며 압도적인 광경이 김성철을 압박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것들은 김성철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수 없다. 김성철은 비록 모든 문장을 전부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 정리된 형태로 완독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 해독할 수 있는 문자는 아래와 같았다. [ 모든 걸 창조하시고 생명을 부여하시던 신께서. 눈을 감았고..... 이 세상의 전면적인 붕괴는 필연적이다. ] [ 신께서 아무 말씀도 남기지 않았기에.... 격렬한 토론이 있었다.... 남겨진 신의 사도들은 둘로 갈라졌다. ] [ 그중 하나는 세상의 유지를 원했다.... 수확을 통해.... 그러나 수확은 단지 종언의 그날을 늦출 뿐 ] [ 어떤 몸부림도 파멸을 막지 못한다.... 세계는 결국 신의 뜻에 따라 무로 돌아갈 것이다.... 거짓 신들이 죽은 세상에서 ] 신의 글은 거기서 끝이 났다. 이번 양피지엔 지식의 뱀 일파가 붙인 봉인은 없었다. 시야를 덮은 무수한 문자가 사라진 후 김성철은 두루마리를 말며 생각에 잠겼다. ‘이건 일종의 전단과 같은 것이군. 힐데가름이란 아신의 기록과 달리 저자도 나타나지 않았고 전체적인 구성 또한 단출하다.’ 하지만 그 안에 적힌 문구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힐데가름의 기록보다 김성철에게 많은 것을 전달해주고 있었다. 김성철은 턱 끝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저자는 알 수 없지만 이 기록 또한 아신이 남긴 것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신은 이미 죽었다고 했다.’ 하지만 김성철은 신을 만났다. 먼 서쪽에 있는 높은 산. 신으로 향하는 계단의 끝에서. 김성철은 그 너머에서 본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신이었다.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 그렇게 인지하는 것. 의심의 싹 조차 자라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한 신이다. 신의 옆엔 신의 말씀을 전하는 존재가 있었다. 그 또한 감히 마주 볼 수 없을 정도로 숙연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풍기는 어떤 의미로 절대적인 존재였지만 진정한 신에 비하면 격이 떨어졌고 신이 아니라고 의심할 수 있을 정도의 존재였다. 당시 김성철은 그것이 아신이라 생각했고 그 생각은 진짜 아신을 만난 현재 더욱 확실하게 굳어졌다. 김성철은 그 존재와 몇 마디 말을 나누었다. 대화의 내용은 상온에 뿌려놓은 에탄올마냥 증발되어 사라지고 없었다. 몇 가지 기억나는 것은 신과의 맹약.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재앙의 해결뿐이오.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소.” 대충 이런 취지의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것은 맹약의 십자가의 형태로 그의 심장에 박혀 있다. 신의 말씀을 전하는 존재는 빈정거리며 혹은 비웃으며 김성철의 말을 신에게 전달했고 또 신의 말씀을 김성철에게 전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김성철의 뇌리 속에 희미하게 떠올랐다. “지켜보겠다. 신의 힘을 얻은 네가 언제까지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지.” 그것이 신에 이르는 계단 너머에서 기억해낼 수 있는 마지막 대화. 세계의 적으로서 진정한 김성철의 출발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그 전까지는 대륙십삼걸 중 한 명조차 싸워서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으니 말이다. 김성철은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무언가 이상하다. 이 세상은 내가 아는 것과는 그리고 내가 사실로 믿고 있는 것과는 어딘가 다른 것 같다.’ 첫 번째 재앙을 해결할 때만 해도 김성철은 이 세상에 대해 어떤 의심도 없었다. 오히려 단순히 지켜보는 것만으로 힘을 얻는 재앙의 증인이 되고서 그는 재앙이 신의 권능에 의해 이루어지는 작용이라는 것을 더욱 신뢰했다. 하지만 최근 그가 연달아 겪은 일련의 사건. 아신의 강림, 데스포트의 발언, 지금 이 시각에도 대륙을 향해 다가오는 죽음의 낙진, 신의 글, 초월세계, 지식의 뱀, 수많은 사건들이 김성철의 의혹을 증폭시켰고 그가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세계관을 뒤흔들어놓고 있었다. ‘신이 내린 재앙보다 일개 사이비 종교집단이 불러일으키는 아신이 더 위험하다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일단 한 번 의심이 시작되자 또 다른 의심이 봇물이 터지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이어 튀어 나왔다. 너무나 많은 모순과 부조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답답한 것은 그 수많은 파편을 하나로 묶을 연결 고리가 일체 없다는 것이다. “…….” 김성철의 얼굴에 짙은 근심이 떠올랐고 부릅뜬 그의 눈동자는 이따금 경련을 일으켰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거야?” 남작과 놀고 있던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변화를 발견하고 옆으로 다가왔다. 김성철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을 느끼며 다가온 베르텔기아를 보고 툭 손을 올렸다. “잡생각.” 그 말을 들은 베르텔기아는 몸을 흔들어 김성철의 손을 떨쳐낸 후 뾰로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뭔 잡생각이 그렇게 많아? 그렇게 인상 쓰고 있을 거면 그냥 좋아하는 술이나 먹고 푹 자던가.”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잔뜩 찌푸렸던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이 의문들은 나 혼자서 해결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김성철은 코트 안쪽에서 반짝이는 황금빛 브로치를 쓰다듬으며 다음에 할 일에 대해 생각했다. 아델화이트 왈,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기꺼이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조금 특이한 불멸자. 요리 클래스의 관장자를 말이다. 김성철은 그 초딩 입맛의 까탈스런 녀석과 한 번 만날 생각을 품었다. ‘일단 이 신의 글을 뱀에게 반납하고 90점 이상의 요리를 만들어낸다.’ 목표는 단순 명쾌한 게 좋다. 김성철은 눈앞이 개는 걸 느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잠깐 여기서 놀고 있어라. 베르텔기아.” * 뮤라 교단의 이단심문관들은 타협을 모른다. 강철의 심장을 가진 자라는 이명을 지닌 수석 이단심문관 타이곤 보스보로트 또한 불굴의 의지와 이단에 대한 무자비로 대륙 전역에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뮤라 교단의 최고 의결기구인 교단회의에서 은으로 만든 망치를 수여받았다. 말레우스라 불리는 그 망치는 뮤라 교단으로부터 모든 군사 권한은 물론 수사 권한까지 위임 받았다는 일종의 전권 임명장이었다. 지난 수십 년간 교단의 가장 깊숙한 곳에 보관된 그 망치가 타이곤에게 수여된 것은 그만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은자의 탑 일대를 파멸로 몰아넣은 종말교단의 흔적을 살피고 있었다. “…금주영창의 흔적이군.” 초로에 이른 사내의 눈가에 형형한 빛이 서렸다. “보시는 대로입니다. 종말교단은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되는 마법을 자유자재로 쓰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헤집어진 땅 위엔 천칭 여러 개와 해시계를 닮은 기구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타이곤은 각 기구 사이에 나타난 불길한 수치를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내뱉듯이 말했다. “이 땅은 이미 글렀다. 아마도 두 번 다시 생명이 이 땅에 깃들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검게 그을린 흙을 장갑을 낀 손으로 움켜쥐고는 불어오는 바람결에 그 흙을 날려 보냈다. 대부분의 흙은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지만 일부는 반짝이는 유리와 같은 반사광을 발하며 하늘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수석 이단심문관의 움푹 들어간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놈들은 대지에 머문 신들의 축복을 뽑아내는 비술마저 익힌 모양이군. 실로 무섭구나. 그런 것들과 같은 시대를 보내야 하다니.” 한숨을 내쉬며 탄식을 하던 이단심문관의 귀에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몇 명의 신관들이 폐허가 된 마을 쪽을 보며 웅성이고 있었다. “…세계의 적이다!” “뻔질나게 은자의 탑에 드나드는군.” “무슨 목적이라도 있는 건가?” “쉿! 눈을 마주치지 마. 황제가 그에 대한 모든 적대행위를 금지하라고 명했다. 괜한 시비라도 붙었다간 우리만 손해를 본다고!” 세계의 적이란 울림이 타이곤의 흥미를 유발했다. “세계의 적이라.” 뮤라 교단의 수석 이단심문관으로선 쉬이 용납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세계의회와 세계 중에서 받고 있는 평가도 평가지만 세계의 적은 몇 명이나 되는 이단심문관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엔 지금은 폐교한 에어푸르트 마법학교에서 자신이 후견을 맡던 이단심문관 하나를 망치로 때려죽였다. 그것이 타이곤의 위신을 깎아먹은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타이곤은 멀리서 은자의 탑을 향해 다가오는 허름한 코트를 걸친 사내를 보고 자신을 보필하고 있는 젊은 이단심문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황제는 어찌하여 저 자와의 모든 적대행위를 중지하라는 명을 내렸을까?” “글쎄요.” 타이곤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테제바 테미아는 경험이 부족하고 신심도 떨어진다는 평을 받고 있지만 대단히 명석하고 정보 습득에도 기민함을 발휘하는 인물이었다. “사실상 세계의회가 해체된 지금, 굳이 저런 강적을 상대로 힘을 빼고 싶지 않은 것이겠죠. 아시다시피 세계의 적은 황제와 적이 되었다고 해도 과거의 연이 있고 제국 자체를 부정하는 인물도 아니니까요.” “그렇다고는 하나 교단의 파문자이자 무고한 우리 형제들을 한 줌 육편으로 만든 자가 우리 앞을 저렇게 편안하게 가로지르는 걸 보는 것은 달갑지 않군.” 타이곤 보스보로트는 불쾌한 시선으로 그들을 지나치는 김성철을 노려보았다. 김성철은 뮤라 교단의 이단심문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대로 은자의 탑으로 직행했다. 김성철이 은자의 탑으로 들어간 직후 타이곤은 입가에 난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군. 저 사내의 자신감의 이면엔. 아마도 황제의 약조가 있었다는 것인가?” “글쎄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만 그가 황제와 단 둘이 식사를 한 것은 사실입니다. 믿을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황제가 식사 중에 소리를 내어 웃기도 하셨다는군요.” 그 말을 들은 타이곤은 수염을 살짝 잡아당기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허공 위의 제국 공선들을 노려보며 읊조리듯 말했다. “어쩌면 이것이 라그란제 일대에 벌어지고 있다는 대규모 이단행위와 접점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 말을 들은 테제바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황제와 관련된 소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테제바의 음성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타이곤은 자신의 부관과 달리 일말의 떨림도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어느 누구도 이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수석 이단심문관 타이곤 보스보로트. 그의 몸은 현재 멀리 떨어진 은자의 탑에 있지만 그의 시선은 북쪽에 자리 잡은 세계의 중심 라그란제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설령 그것이 제국의 황제라고 해도.” ======================================= 81. 궁극의 요리 (1) 두 번째 방문은 보다 손쉽게 이루어졌다. “당신 또 왔어요?” 자칭 55호는 김성철이 재앙의 서 보관고에 들어가기도 전에 먼저 불쑥 나타나 김성철에게 반갑게 말을 건넸다. “설마 날 만나러 온 건 아니겠지요?” “설마.”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 담긴 신의 글을 꺼내 보여주었다. “응? 하나 더 갖고 있었어요? 아까 지식의 뱀께 반납하기 전에 함께 반납하지 그랬어요?” “이 나이가 되면, 거기다 술까지 좋아하면 머리가 깜빡깜빡하지.” “흐음... 그런 건가요? 덤벙거리는 게 꼭 아버님 같네요.” 55호는 툴툴 거리면서도 김성철 앞에 초월세계로 통하는 문을 만들어주었다. 물론 주변의 시간축의 흐름은 달라진 상태. “굳이 이럴 필요는 없는데.” 김성철은 시간축의 변동을 느끼고 말했다. “이렇게 해야 불필요한 소문이 나지 않아요! 호기심의 싹조차 주지 않는 게 비밀유지의 기본이거든요.” “그렇군.”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서 김성철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55호를 돌아보며 질문을 던졌다. “아까 네가 한 말. 사실이냐?” “무슨 말? 아.. 그 물건에 관한 이야기?” 김성철의 얼굴이 짙은 어둠이 드리워졌다. 그는 55호를 노려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55호는 몸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전부 사실이에요. 내가 왜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시시콜콜한 주제인데.” “…시시콜콜한 주제라.” 김성철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문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다시금 그를 에워싸고 전혀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주었다. 또 다시 찾아온 무한의 세계. 김성철은 허공 위에 뜬 사방이 훤히 뚫린 거대한 궁전의 홀 안에 서서 낯익은 존재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참을 기다려도 그가 기다리는 존재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그 뱀 녀석 어디서 뭘 하는 거지?’ 김성철이 짜증을 느낄 즈음 먼 곳에서 거대한 뱀의 형체가 어른거렸다. 지식의 뱀, 우로보로스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 정말 귀찮게 하는 인간이군. 딱 재밌어 지려는 찰나에 신을 귀찮게 하다니! ] 우로보로스는 불쾌감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심지어 위협까지 하려는 듯 커다란 머리로 김성철을 내려 찧을 것처럼 붕붕 휘둘러대기까지 했다. 물론 김성철이 겨우 그 정도 위협에 위축될 남자는 아니다. 그는 미동도 않고 거대 뱀의 행동을 차분히 지켜보았다. 먼저 흥이 깨진 건 당연히 우로보로스였다. 뱀이 말했다. [ 설마 내가 널 죽일 수 없다고 자신하는 건가? 그런 건가? ] “마음대로 해라.” 김성철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자신이 온 용건, 새로운 신의 글을 뱀 앞으로 툭 던졌다. 하늘을 담은 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 사실 나는 널 죽일 수 없게 되어 있어. 그것뿐이겠나? 터럭 하나 건드려서도 안 되게 되어 있지. ] 우로보로스는 전과 마찬가지로 염동력으로 신의 글을 들어 올려 거대한 입안에 삼켰다. 민트향 나는 혓바닥이 입술 밖을 부지런히 낼름 거리기 시작했다. 뱀이 혀로 먹이감과 천적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처럼 거대한 뱀은 혀를 통해 신의 글을 독해하는 걸로 보였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김성철은 문득 지식의 뱀의 거대한 동체가 경직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뱀의 얼굴엔 놀랍게도 경악이라는 감정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변화가 나타나 있었다. 비늘이 해일처럼 일어서기 시작했다. 대가리부터 시작해 끝도 없이 뻗은 몸통을 지나 보이지도 않는 곳에 있는 꼬리까지. 그것은 꽤나 장관이었다. ‘문제라도 있는 건가?’ 김성철은 가만히 뱀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뱀이 말했다. [ 메다스 사본. 이 저주 받을 글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니. ] “메다스 사본?” [ 악신들이 세상을 호도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찍어낸 불경한 전단이다. 전량을 회수해서 폐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남은 게 있었던 모양이군. ] “…….” 김성철이 침묵하자 우로보로스는 거대한 눈을 치켜뜨며 김성철에게 물었다. [ 이... 이걸 읽은 건가? 필멸자! ]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일단은 읽는 자의 능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내용 따위엔 별 관심도 없어. 내가 여기 온 건 네게서 아이템을 얻으러 온 것뿐이니까.” [ 그렇군. 너처럼 정신이 제대로 박히고 선량한 영혼을 가진 필멸자에겐 너에겐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겠지. ] 뱀의 행동을 쭉 본 김성철은 문득 생각했다. ‘확실히 저 거대한 형체와 몸에 흐르는 거대한 힘을 보면 경이감이 드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덩치를 가지고 하는 짓은 시정잡배와 별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은데.’ 지금 한 장면만 보고 내린 판단이 아니다. 거대한 뱀의 형체라는 겉모습을 도외시하고 오직 말과 행동, 그리고 간간히 느껴지는 보이지 않는 기풍 같은 걸 고려하면 이 뱀은 적어도 김성철 기준엔 낙제점이었다. 잰 체하고 으스댈 줄 알지만 깊이가 없고 가볍기가 깃털과 같다. 무엇보다 김성철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느낄 수 있었다. 불멸자인 저 지식의 뱀이 필멸자인 김성철을 얼마나 우습게보고 있는지를. ‘저런 것도 아신이 될 수 있는 모양이군. 아니 아신이 된 이후에 성격이 바뀐 건가?’ 바꿔 말하면 덩치와 힘은 아신이나 정신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방금만 해도 그렇다. 김성철이 가지고 온 메다스 사본이란 게 치명적인 내용을 품고 있다는 걸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드러냈고 그걸 또 김성철 본인에게 내용을 보았냐고 묻는 얼치기 같은 행동까지 되풀이했다. 김성철이 지식의 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동안 지식의 뱀은 가만히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저 뱀은 인간과는 다른 존재.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 무엇을 하고 있을지는 인간으로선 알 수 없다. 곧 지식의 뱀이 하늘을 담은 눈을 껌뻑였다. [ 이런! 빌어먹을 재밌는 부분을 놓쳐버렸군. 전부 네놈 때문이야.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김성철이 묻자 지식의 뱀은 김성철 앞에 거대한 성채 크기의 거울상을 만들어냈다. 그 거울상 안엔 또 하나의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김성철은 살짝 놀란 눈으로 거울상 속에 펼쳐진 세상을 응시했다. 그곳엔 갑주를 입은 두 군세가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이미 승부의 추를 기울어져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섬멸하는 양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무심한 눈으로 거울상을 보던 김성철은 양 군대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나라의 것이며 그들의 전투 기술 또한 일반인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걸 알아채고 지식의 뱀을 노려보며 질문을 던졌다. “여긴 어디지?” [ 호오? 눈치 챈 건가? 제법 눈썰미는 있군. ] 지식의 뱀은 득의만면한 미소를 지으며 김성철이 발을 디디고 있는 거대한 홀의 모소리에 머리를 걸터 놓았다. [ 여긴 나의 영지다. 흔히 렐름이라고 불리지. ] “렐름?” [ 이 초월세계 속에서 무한한 생명을 허락받은 존재가 우리 아신. 하지만 생각해보라. 무한한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느낄 무료함을. ] “그건 꽤나 지루하겠군.” [ 그렇다. 그건 우리 아신들도 마찬가지다. 뭐, 별종들은 묵상이니 명상이니 하며 일 년이고 백년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묵상이란 걸 하며 무생물처럼 살지만 나 같은 살아 있는 정신을 지닌 아신에겐 그건 어려운 일이거든. ] “그렇겠군.” 김성철은 은연중에 지식의 뱀을 비꼬고 있었다. 이미 그의 눈에 지식의 뱀의 수준은 과거 그가 몸을 담았던 라그란제의 깡패 두목 밑에서 일하던 건달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 그래서 우리 아신들은 비록 신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나름의 세계를 창조하고 그것을 운영하고 지켜보고 있어. 그걸 렐름이라고 하지. ] 지식의 뱀은 하늘을 담은 눈을 거울상에 돌렸다. [ 보다시피 나의 렐름엔 지금 한 명의 공주를 얻기 위한 두 기사의 장렬한 싸움이 펼쳐지고 있지. 내가 인위적으로 조작한 건 없는데도 어떤 문학과 시보다 슬프고 애절하며 영웅적인 싸움이 펼쳐진 거야. 뭐, 네 놈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결투장면은 보지 못했지만! ] 지식의 뱀은 김이 샌 듯 민트향을 내뿜으며 김성철의 시야 한 구석을 완전히 매워버리던 거울상을 소멸시켰다. “아신들은 모두 렐름이란 걸 가지고 있나?” 김성철이 지식의 뱀을 향해 물었다. [ 전부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아신들은 그들의 렐름을 가지고 있지. 렐름은 그야말로 아신의 축복이지. 한 세계의 신이 되는 것도 모자라 그 안에서 한 명의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거든. 상상을 해보라고! 한 세계의 신이 정체를 숨긴 채 하나의 개인으로서 그의 세계를 주유하는 걸. 그야말로 서사시의 주인공이 힘을 숨기고 다니는 격 아닌가? ] 렐름의 이야기를 할 때 지식의 뱀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꽤나 몰입한 모양이군.’ 김성철은 렐름이란 것에 대해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그는 즉시 자신의 요구사항을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전에 다시금 지식의 뱀의 터무니없이 큰 목소리가 그의 말을 가로 막았다. [ 렐름이 없는 건 주로 악신들이야. 악신들은 렐름을 두지 않지. 신도 아닌 존재가 신 행세를 하는 게 불경하답시고 거부하고 있거든. 하지만 내가 볼 땐 그 반대야. 놈들은 심술을 부리고 있는 거야. 다른 아신들이 가지고 있는 렐름이 부러워서 말이야. ] “으음. 무슨 말인지 알겠으니 어서 아이템이나 받았으면 좋겠군.” 민트향을 참는 것도 고역이다. [ 성질 급한 필멸자군. 뭐, 나라고 해서 네놈을 상대하는 게 즐거운 건 아니므로 내어주지. 보상을. ] 뱀의 말이 끝나자 김성철 앞에 빛나는 문자가 나타났다. 선물의 목록이다. < 지식의 뱀의 선물 > [ 이중 하나를 선택하시오 ] 1. 명부마도의 서 - 아크리치 전직 아이템 2. 살쾡이 그림자 - 영혼각인 3. 4. 화염정령의 정수 - 힘 강화 아이템 5. 플레임베어러 - 도검 목록을 살피던 김성철이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물었다. “응? 3번이 없는데. 어떻게 된 거지?” [ 아까 네가 취하지 않았나. 그래서 없는 거지. ]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게으른 아신이군. 저래가지고 어떻게 아신이 된 거지?’ 아무튼 지금 상황에서 선택할만한 건 4번 화염정령의 정수 밖에 없다. 힘은 더 이상 올릴 필요가 없지만 한 번 쯤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미 신적인 그의 힘이 더 이상 오를 수 있는지 없는지 말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4번을 선택했다. [ 약조한대로 보상을 내려주지. ] 우로보로스는 김성철에게 화염으로 불타는 원구를 건넸다. 김성철은 그 원구에서 바람정령의 정수와 같은 신비로운 힘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럼 나는 이만 실례하겠다. 어서 빨리 나의 렐름에서 벌어지는 서사시를 지켜봐야 되거든. ] “잠깐.” 김성철이 떠나려는 뱀을 불러세웠다. [ 무슨 일이냐? ] “선물은 이제 남은 게 전분가? 또 다른 신의 글을 가지고 와도 남아 있는 것 중에 선택해야 된다는 뜻인가?” [ 당연하지. 왜? 필멸자. 남은 아이템이 마음에 들지 않기라도 하는 것인가? ] “정직하게 말해서 별로 마음에 안 드는군. 새로운 아이템을 추가하지 않는 이상 다시 여기 올 이유는 없을 것 같다.” [ 으음... 까다로운 필멸자군. ] 뱀의 눈이 검은 색으로 잠시 물들었다. 김성철로선 물러설 이유가 없다. 뱀은 잠시 고민하는 듯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거대한 대가리를 끄덕였다. [ 좋다. 필멸자. 내 창고지기에게 말해 다른 선물을 준비하도록 하지. 하지만 내 노력이 보상받았으면 좋겠군. ] “무슨 뜻이지?” 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대가리를 돌려 먼 시공의 저편을 응시했다. 순간 김성철의 심장이 한 차례 요동쳤다. 김성철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뭐지 이 느낌은...?’ 김성철은 문득 누군가의 명을 받은 것처럼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고개를 들어 동쪽을 바라보았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경악이 떠올랐다. 세상을 먹어치운다는 뱀, 우로보로스. 그것 따윈 한낱 실지렁이처럼 느껴지게 할 정도로 거대한, 감히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광휘에 싸인 무언가가 무한의 시공 저편에서 걷고 있었다. [ 운이 좋군. 필멸자. 이 짧은 우연의 시간동안 저 위대한 존재를 멀리서라도 지켜볼 영광을 얻게 되다니. ] “저건 뭐지?” 김성철이 묻자 우로보로스는 경탄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 이 세상을 유지하는 다섯 주신 중 한 분이다. ] “다섯.. 주신 중 하나라고?” 김성철은 경악이 담긴 눈동자로 무한한 세계 저편을 유유히 거닐고 있던 거대한 존재를 응시했다. 보는 것만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숨이 막힐 것 같은 경이로움이 그 거대한 존재의 전신에 서려 있었다. 감정의 기복이 없는 김성철의 심신에 동요를 일으킬 정도로 말이다. 말없는 충격 속에서 우로보로스가 말했다. [ 질서신의 행차시다. ] “질서신...?” 이 세계에서는 다섯 명의 신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질서신, 중립신, 고대신, 혼돈신,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신. 이중 질서신은 중립신과 더불어 대부분의 인간들이 숭배하는 인류의 보호자다. 그 명성과 영예와 걸맞게 멀리 보이는 질서신의 위용은 김성철로 하여금 한낱 먼지 같은 존재로 생각하게 될 정도의 인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김성철의 뇌리 한 가운데는 경탄과 정반대의 의혹이 떠오르고 있었다. ‘어.. 엄청나군. 하지만...’ 일찍이 김성철은 신에 이르는 계단 너머의 존재와 만난 적이 있다. 어떤 수식어도 없이 단순히 신이라 불리며 실제로도 신 그 자체로 느껴지는 무한한 존재를. ‘저건, 신이 아니다.’ 잠시 흐트러졌던 김성철의 눈동자에 결연한 빛이 서서히 감돌기 시작했다. ‘저것은 내가 계단의 끝에서 만났던 신이 아니다. 또 다른 무언가다.’ 머리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의혹의 싹은 아이러니하게도 신이라 불리는 어떤 존재의 만남을 통해 급속히 뿌리를 내렸다. 현실로 돌아오는 어둠 속에서 김성철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의 우선순위를 재정렬했다. 다시 은자의 탑으로 돌아온 김성철은 즉각 탕그리트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는 폐허가 된 저택의 한 방실로 들어가 먼지와 눈에 쌓인 기구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야? 갑자기?” 호기심 많은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에게 다가오며 질문을 던졌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간만에 솜씨 발휘 좀 해보려고.” 90점 이상의 요리. 그것을 만들 때가 왔다. ======================================= 81. 궁극의 요리 (2) “음....” 조리대를 정리할 때만해도 의욕이 넘쳤었다. 하지만 막상 정리를 끝내고 조리대 앞에 서자 김성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무슨 요리를 만들 것인가. 가장 원초적이고 핵심적인 문제가 그를 가로막은 것이다. ‘구상한 요리는 있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재료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 또 오래 걸린다.’ 김성철이 생각한 재료 중 하나는 겨울잠쥐의 새끼다. 아직 눈도 뜨지 않은 것들을 암실에 가둬두고 향긋한 씨앗만 먹여 살을 찌운 후 달콤한 술에 빠뜨리는 게 대강의 준비과정인데 살을 찌우는 것만 일주일은 족히 걸린다. 굳이 겨울잠쥐가 아니더라도 지금 김성철 수중엔 상급으로 분류할 수 있는 식재가 하나도 없다. 일급의 고기는 물론이고 신선한 채소도. 눈으로 덮인 산야에서 발굽 달린 동물 정도는 사냥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얻기 어렵다. 요리인으로서 김성철은 재료의 중요함이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알고 있다. 요리에 따라서는 재료의 중요성이 구 할이 넘는 요리도 충분히 존재한다. “음.....” 김성철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현실이 의욕을 따라가지 못할 때의 곤란함을 그는 잘 알고 있다. “뭘 그리 고민하고 있어? 그 좋아하는 피라미 잡아다 이상한 흙 같은 거 풀어서 끓여먹던지.” 김성철의 고민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베르텔기아가 입을 열었다. “된장이라고 하는 거란다. 그리고 그 놈은 매운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흐음. 그럼 재료가 없어서 고민하고 있는 거였어?” 베르텔기아의 물음에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선한 육류, 작물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는데. 여기서 구할 방법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군.” 그러자 베르텔기아가 몸을 가볍게 흔들며 불쑥 말했다. “그럼 손을 벌리는 건 어때?” “손을 벌린다고?” 김성철이 살짝 놀라며 물었다. “조금 정돈 빌릴 수 있잖아. 당신이 뭐 세계의 적이니 뭐니 욕먹고 다녀도 적어도 여기서 당신이 구한 사람들이 몇 명인데. 식재 정도 빌리는 게 뭐가 어떻다고 그래?” 베르텔기아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듯 하다. 김성철은 충분히 식재 정도를 빌릴 자격이 있다.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다른 곳으로 가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오히려 식재만 있다면 느긋하게 요리에 전념할 수 있는 은자의 탑 일대가 가장 좋은 걸작요리의 도전장소가 될 것이다. 그런 이유로 김성철은 은자의 탑으로 가 요리 재료를 구했다. 은자의 탑의 사정도 빈궁하긴 마찬가지라 김성철이 얻을 수 있는 건 약간의 감자와 순무가 전부였다. 바람에 말린 생선도 권했지만 김성철은 받지 않았다. 초딩 입맛을 지닌 클래스 관장자가 기겁하는 물건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김성철이 찾아간 곳은 인간제국의 공선이 모여 있는 정박지였다. 그런데 인간제국의 관계자들은 김성철을 모두 두려워한다. 그가 나타나자 인간제국의 진영이 일순 얼어붙을 정도였으니. 다행히 김성철의 눈에 아는 얼굴이 눈에 띄었다. “어이. 너.” 스튜다. “누... 누구세요?” 스튜는 필사적으로 김성철을 피해 숨으려고 했지만 그녀의 능력으로 김성철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스튜를 포획한 김성철은 그녀의 상관인 브레브 대령을 만날 기회를 얻게 되었고 추가적인 식재를 구할 수 있었다. 스튜와 달리 김성철의 은혜를 잘 아는 브레브 대령은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김성철이 원하는 식재를 구해다주었다. 염장한 돼지고기와 살아 있는 닭, 계란, 당근과 빵 따위가 수중에 들어왔다. 그것은 제법 두둑한 수확이었다. “고맙네.” 김성철이 브레브 대령에게 감사를 표했다. “목숨 값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답례죠.” 브레브 대령은 털털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보기 드문 염치를 아는 인물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탕그리트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막상 다시 조리대에 서고 보니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모은 식재들로 충분히 괜찮은 요리는 만들 수 있겠지만 그가 정녕 원하는 90점 이상의 궁극의 요리를 만들기엔 모자람이 있다. ‘답은 향신료인가.’ 다행히 김성철의 영혼창고 안엔 진귀한 향신료가 가득 담긴 상자가 있다. 향신료는 평범한 재료도 최상의 요리로 탈바꿈하게 만드는 요리계의 마술. 김성철은 일단 가진 것만으로 한 번 도전해보고자 마음먹고 요리를 시작했다. 처음 도전한 것은 닭으로 만든 요리였다. 요리인 클래스의 관장자는 대체로 굽고 튀긴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김성철은 구운 요리 중에서 재료의 맛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화덕을 이용한 요리에 도전해볼 생각이었다. 조리 방법은 간단하지만 중요한 것은 향신료의 배합이다. 김성철은 황제의 식물원에서 훔친 향신료들을 하얀 식탁보 위에 올려놓고 세심한 계측과 조합을 통해 그가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소스를 준비했다. 3종의 소스가 준비됐다. 굳이 소스 종류를 3가지로 만든 것은 요리인 클래스의 관장자의 취향을 알아내기 위함이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라... 는 말이 있었지.’ 김성철은 어릴 적 주워들은 말을 연상하며 각 소스의 맛을 음미했다. 하나는 매우면서도 감칠맛이 도는 것, 다른 하나는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것, 나머지 하나는 담백하면서도 은은한 향이 뒷 끝에 감도는 것. “좋아.” 김성철은 각 소스를 바른 닭을 화덕에 넣고 굽기 시작했다. “삐이이...?” 모닥불 옆에서 부리를 다듬던 마라키아가 배가 고픈지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곧 마라키아의 눈에 닭의 내장이 포착됐다. “음. 이거 안 먹는 건가?” 김성철은 도마 옆 통안에 담긴 내장 중 닭근위를 따로 빼낸 뒤 나머지를 마라키아에게 내밀었다. “먹어라.” “잠깐. 그건 뭐지?” 마라키아가 김성철의 손에 들린 근위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이건 닭똥집이라는 거지. 일종의 모래주머니다. 네 몸엔 안 달려 있나?” “고귀한 나하크의 몸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마라키아는 버럭 화를 내면서도 닭근위에 둔 시선만은 좀처럼 떼지 않았다. “그거, 맛있어 보이는데?” “이건 안 된다.” 김성철이 딱 잘라 말했다. “이유가 뭐지? 인간은 내장을 먹지 않잖아?” “이건 나중에 내 술안주로 할 작정이다.” “술안주라면 지금 저기서 굽고 있지 않나?” 마라키아가 닭이 익어가는 화덕을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리켰다. “으음...” 듣고 보니 그렇다. 어차피 90점을 넘지 못할 때 저 닭요리들은 고스란히 김성철의 배에 들어가게 될 운명이므로. “옛다.” 김성철은 선심 쓴다는 투로 닭근위를 마라키아에게 던졌다. 마라키아는 크게 기뻐하며 닭근위를 허공 위에서 부리로 낚아채더니 오물오물 씹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번이나 씹었을까. 마라키아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퉤!” 마라키아가 닭 근위를 뱉어냈다. “뭐야. 이거 맛없잖아! 뭐가 이리 질겨.” 그걸 본 김성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놈 봐라...?’ 마라키아는 그 사실을 모르는지 천진난만한 얼굴로 내장이 담긴 통을 두 손으로 안고 부리로 찍어먹기 시작했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흉흉한 살기가 떠올랐다. “참아!” 아마도 베르텔기아가 만류하지 않았다면 마라키아는 소스를 바른 닭과 함께 화덕 안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닭이 익는 동안 김성철은 초월세계에서 받아온 비장의 물건을 꺼냈다. 화염정령의 정수다. ‘더 이상의 힘은 무의미하다. 그리고 설령 힘이 오른다고 해도 지금의 상태창으로는 볼 수 있는 방법 또한 없다.’ 상태창에 표시되는 능력치의 상한은 999. 아직까지 그 수치 너머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999를 넘긴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엔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세상에 그 정도의 성취를 지닌 자는 김성철이 유일하다. 그럼에도 더 이상 힘을 올릴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는 한 번 시험해볼 필요가 있다. 김성철은 화염정령의 정수를 손바닥에 올린 채 그것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런데 내장을 먹고 있던 마라키아가 귀신 같이 낌새를 눈치채고 김성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삐이...?” 마라키아의 부리가 살짝 벌어졌다. 그와 동시에 마라키아는 날개까지 파닥거리며 김성철 앞으로 달려왔다. “그.. 그건! 화염정령의 정수?!” 마라키아가 불쑥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김성철은 몸을 옆으로 돌려 마라키아를 떨쳐냈지만 마라키아는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화염정령의 정수에 대한 집착을 보였다. “책.. 책에서 본 적이 있어. 마력을 올려준다는 전설적인 화염정령의 정수를...! 최후의 정령왕이 죽은 후 화염정령의 정수를 본 자는 아무도 없다고 들었는데.. 그게 지금 여기 나타날 줄이야! 역시 널 따라다니길 잘했군! 부수는 자!” 마라키아는 전과 마찬가지로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김성철은 이번에도 마라키아를 철저히 무시했다. “마력을 좀 더 높일 수 있다면... 종말교단? 그것들과 싸울 때 좀 더 인상 깊은 활약을 할 수 있을 텐데...” 마라키아는 계속해서 옆에서 칭얼거렸다. “화염정령의 정수로 올리는 건 마력이 아니라 힘이다.” 김성철이 퉁명스레 말했다. 마라키아의 작은 몸이 일순 굳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힘! 힘 좋지. 마법도 좋지만 최근엔 힘 부족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거든. 힘, 힘만 있다면 보다 도움 되는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김성철은 그런 마라키아를 힐끗 쳐다보고는 화염정령의 정수를 꽉 움켜쥐었다. “아.. 안 돼!” 마라키아가 눈을 부릅뜨며 손을 뻗어봤지만 이미 화염정수는 김성철의 손아귀에 으스러지며 원형을 잃은 뒤였다. 화염정령의 정수가 붕괴되며 그것을 이루는 입자들이 김성철 주위를 회전하기 시작했다. 거기까진 바람정령의 정수를 흡수할 때와 같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붕괴된 화염정령의 정수가 다시금 하나로 뭉치며 김성철의 손바닥 위에 원형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곧 김성철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떠올랐다. [ 당신은 한계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 [ 더 이상 화염정령의 정수를 흡수할 수 없습니다. ] 김성철은 무덤덤하게 눈앞에 떠오르는 문자를 응시하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역시나군. 정령의 정수로도 올릴 수 있는 상한치란 게 있었던 모양이야.’ 한편 마라키아는 신이 났다. “그래.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는 법이지! 뭐든 적당한 게 좋은 거야!” 마라키아의 눈동자는 탐욕의 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베르텔기아가 기겁을 할 정도였다. “으.. 진짜 기분 나빠.” 김성철도 기분 나쁘긴 매한가지였다. 무엇보다 김성철이 좋아하는 닭근위를 먹지도 않을 걸 가져가서 뱉어버린 녀석이니 말이다. “안 쓰는 화염정령의 정수 삽니다~.” 마라키아는 계속해서 눈치 없이 촐싹대고 있었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다시금 살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이번엔 화덕에서 나는 타는 냄새가 그를 살렸다. ‘어느 정도 익은 모양이군.’ 김성철은 화염정령의 정수를 영혼창고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덕으로 향했다. 마라키아가 김성철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왕이란 게 자존심도 없어? 너 주기 싫다 잖아!” 베르텔기아가 핀잔을 줬지만 마라키아의 귀엔 들리지도 않는 눈치였다. 마라키아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김성철은 화덕 안의 닭을 음미했다. [ 이 요리의 점수는... 71점 ] [ 이 요리의 점수는... 68점 ] [ 이 요리의 점수는... 75점 ] 닭에 바른 소스에 따라 다른 점수가 나타났다.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건 매운 맛을 가미한 소스였고 반대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은 달콤한 맛이 감도는 녀석이었다. ‘달콤한 걸 좋아하는 모양이군.’ 확실히 설탕은 모든 조미료의 기본이 되는 녀석이다. ‘다음 요리엔 설탕을 팍팍 쳐야겠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뒤로 도는 순간 뭔가 발에 걸렸다. “삐기이이이!” 마라키아다. 계속 뒤에서 얼쩡거리다가 걷어차인 모양이다. 별 거 아닌 해프닝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김성철처럼 신적인 힘이 감도는 사람이 무심코 본래 힘을 내기라도 했다가는 마라키아도 화덕 안에 들어갈지도 모르니 말이다. “…옛다.” 김성철은 선심쓰듯 영혼창고에서 화염정령의 정수를 꺼내 마라키아에게 툭 던졌다. “삐이이...?”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던 마라키아가 동작을 멈추고 자신 앞에 굴러다니는 화염정령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오.. 오...!! 이것이... 그 전설의...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정령의 정수란 말인가?!” 마라키아가 신이 나서 떠들고 있을 동안 김성철은 하얀 숲으로 걸어가 다음 요리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늘 위에 무언가 거대한 게 나타나 해를 가렸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쿵. 거대한 드래곤이 김성철의 머리를 가로질러 탕그리트의 저택 앞에 내려앉았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카네스다. 착륙 즉시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한 그녀는 여기저기 붕대를 감은 전형적인 환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식욕만큼은 평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킁킁. 엄청 좋은 냄새가 나는데?!” 배를 두드리는 카네스를 보며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궁극의 요리를 만들기 위해 준비했던 요리는 모두 카네스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카네스가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우는 동안 김성철은 다음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음식을 먹어치운 카네스가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며 김성철에게 다가왔다. “뭘 그리 열심히 요리를 만드는 거야? 설마 고생한 날 위해 준비하는 거야?” 이에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의 코트 안에 반짝이는 앙증맞은 드래곤 형상의 황금브로치를 가리켰다. “아니, 이걸 만든 녀석을 만족시킬 요리를 만들고 있어.” “아~. 그 분을 만족시킬 요리?” 카네스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뭔가 아는 눈치다. 김성철은 그런 느낌을 받으며 카네스에게 물었다. “뭔가 짚이는 구석이라도 있나?” “당연히 알 수밖에.” 카네스가 말했다. “그 분은 우리 일족이거든.” “뭐라고...?” “최초의 드래곤이자 모든 드래곤의 아버지. 그 분이 요리인 클래스의 관장자야.” ======================================= 81. 궁극의 요리 (3) 요리클래스의 관장자가 드래곤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다. 드래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 드래곤이 드래곤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나타나는 건 오직 그 드래곤이 살의의 파동에 미쳐버렸을 때뿐이다. 은자 카네스 같은 극히 일부의 예외가 있다고 하지만 카네스는 보통 그들의 생태에 관해 이야기 해주지 않는다. 그러던 것이 우연찮은 기회에 턱없이 엄청난 정보를 손에 넣어버렸다. “드래곤이라고...?” 김성철이 카네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흔히 인간들 사이에서 에인션트 드래곤이라고 부르는 존재야. 모든 드래곤들의 대부라고 할까나.”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이도 처먹을대로 처먹은 놈이 입맛이 왜 그 따위지?’ “무슨 생각하는 거야?” 카네스가 게슴츠레 눈을 뜨며 김성철을 흘겨봤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보다 카네스.” 김성철이 달라진 목소리로 카네스를 불렀다. “무슨 일이야?” 카네스가 묻자 김성철은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드래곤.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알고 있나?” “최초의 용께서 좋아하는 음식?” 카네스가 눈을 껌뻑이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손가락을 흔들며 생각을 하던 그녀는 이내 뭔가 떠올리고는 김성철을 응시했다. “그분은 모든 음식을 다 잘 잡수지만, 전설에 따르면 달콤한 걸 좋아한다고 들었어.” “달콤한 거라...” 김성철의 뇌리에 역시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도 혀가 마비될 정도로 달콤한 거. 그런 거에 사죽을 못 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역시 그렇게 된거군.” 김성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카네스가 묻자 김성철은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한 후 돌아서서 팔짱을 끼고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아델화이트보다 요리를 못하는 게 아니다. 그 여자가 잘 만들긴 하지만 솔직히 나와의 실력차를 살펴보면 종이 한 장 차이. 아니 얼큰하고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기법은 내가 한 수 위지. 그런데 그 여자는 되고 난 안 되는 이유는 결국 요리의 방향성이었군.‘ 김성철은 과자 같은 걸 잘 만들지 않는다. 굳이 만들려면 만들 수 있지만 그는 디저트로 과일 하나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입안에 들어가면 사르르 녹는 크림, 혀를 마비시킬 정도의 가루설탕 같은 것은 김성철의 요리 사전엔 없는 재료다. 김성철은 영혼창고에서 비장의 향신료 상자를 꺼냈다. 향신료 중에 설탕이 있긴 하지만 카네스가 언급한 혀를 마비시킬 정도의 단맛과는 거리가 멀다. “베르텔기아.” 김성철은 손을 들어 자신의 파트너를 불렀다. “응? 무슨 일이야?” 마라키아가 화염 정령의 정수를 들고 난리법석을 피우는 걸 옆에서 구경하던 베르텔기아가 김성철 쪽으로 날아왔다. 김성철은 그녀를 노려보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네 레시피 중에 설탕 같으 녀석이 있었지?” “설탕?” “그래. 설탕 중에서도 아주아주 달콤한 녀석 말이야.” 예전에 얼핏 만들어 본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라키아를 만나기 전, 마계최전선에서 주방장을 하며 소일거리를 하고 있었던 때로 기억한다. 그때 만든 재료는 모두 병사들의 식사에 이용됐다. 자신은 직접 맛 본적은 없지만 병사는 물론 장교 출신마저 찾아와 어디서 이런 설탕을 구했냐고 물었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설탕? 달콤한 거라.. 응. 그런 거라면 있어.” “그거 좋군.” 김성철은 즉시 베르텔기아가 그 레시피를 펼칠 것을 명했다. “정말 오랜만이네. 당신에게 나의 무한한 연금지식을 보여주는 것도.” 베르텔기아는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책장을 펼쳤다. 곧 그녀의 페이즈 한 부분에 김성철이 원하는 레시피가 나타났다. < 별가루 설탕 > 레벨 : 3 등급 : C 속성 : 목(木) 분류 : 식품 효과 : 일반 설탕보다 훨씬 달콤한 설탕 “바로 이거군.” 레벨도 낮고 등급도 낮다. 전사의 돌 같은 고레벨의 아이템을 만들어낸 김성철에겐 땅 짚고 헤엄치기 정도의 수준. 문제는 재료다. 별가루 설탕을 만들기 위해서는 설탕 이외에 다른 재료가 필요하다. 설탕이야 현재 가지고 있는 걸 쓰면 된다지만 다른 재료인 월영석이라든지 코발트초 뿌리 같은 재료들은 수중에 없다. 구하려고 해도 어디서 구하는지 알 수 없을 뿐더러 설령 이 주변에 그런 재료가 난다고 해도 천지가 하얀 눈에 뒤덮인 상황 속에서 그것을 찾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으음...” 만들 요리는 이미 생각해놓았다. 빵이나 과자 같은 디저트 류는 아니다. 어느 정도 조예가 있다고 하나 최고 수준엔 미치지 못한다. 김성철은 어디까지나 그가 좋아하는 주요리로 승부를 볼 작정이었다. 그렇게 해서 생각해낸 것이 간단한 중국식 볶음요리. 간단하다고 해서 전부 다 맛이 없는 건 아니다. 인간제국에서 얻은 고기의 질은 충분히 괜찮았고 김성철이 직접 담군 간장은 요리에 깊은 맛을 더해줄 것이다. 무엇보다 김성철이 믿는 것은 불을 다루는 자신의 실력. 별가루 설탕은 그것에 화룡정점을 찍을 핵심 재료가 될 것이다. ‘어디서 재료를 구하지. 이거 난감하군.’ 토포로 마을이 멸망한 이상, 재료를 구할 장소는 딱히 없다. 은자의 탑도 사정이 변변찮고 김성철이 아는 바로는 인간제국의 함대에 연금술사는 태우지 않는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결국 은자의 탑 바깥, 먼 곳으로 가서 재료를 얻어야 된다는 이야기밖에 안 되는데 그것은 김성철이 바라는 그림이 아니다. 그는 여기서 90점 이상의 요리를 만들어 에인션트 드래곤을 만날 작정이었다. 가슴 속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의혹을 식히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걸 써보는 건 어떨까?” 김성철이 고민에 잠겨 있을 때 베르텔기아가 불쑥 입을 열었다. 김성철은 좋은 예감을 받았다. 베르텔기아는 종종 쓸데없는 간섭을 하긴 하지만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는 의견을 내놓을 때가 많았다. 지금도 그렇다. 그녀는 조금은 엉뚱한 것 같으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안을 제시했다. “그 검은 덩어리 말이야.” “재앙의 파편 말인가?” 생각지도 않은 물건이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다. 김성철은 재앙의 파편이 고도의 에너지의 응집체이며 연금술을 통해 다른 물질로 변환되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창조술사의 권능. 변환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김성철은 아직 창조술사의 경지엔 이르지 못한 일반 연금술사. 그의 기량으로 그 신비한 물질을 쓸 수 있을지는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한 번 정도 시도해보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김성철은 바로 에크하르트의 휴대용 연금가마를 꺼냈다. “뭘 하는 거야?” 카네스가 연금가마를 보고 다가왔다. “만들 게 있어서.” 김성철은 연금가마에 불을 지피고 새로운 주재료가 될 검은 파편, 신의 흙이라 불리는 신비의 물질을 아주 조금만 떼어 내 안에 집어넣었다. 떼구르르. 검은 파편의 일부가 달구어지고 있는 연금 가마 바닥을 굴렀다. 거기까진 어떤 변화도 없었다. ‘레시피에 따르면 설탕을 넣고 서서히 가열하면서 다른 재료를 넣으라고 했었지. 하지만 이 재앙의 파편은 그럴 필요가 없겠지.’ 김성철은 어떤 재료도 첨가하지 않은 채 긴 주걱을 들고 연금가마를 젓기 시작했다. 문외한이 보기엔 무의미한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는 행위지만 연금술사의 연금가마 안은 일반적인 물리법칙이 통용되지 않은 마술적인 공간으로 변모한다. 그 점을 잘 아는 김성철은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것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끈덕지고 정성스럽게 주걱을 휘저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김성철의 눈앞에 하나의 문자가 떠올랐다. [ 신의 흙이 당신의 의지에 반응한다. ] [ 무엇을 만들겠는가? 창조의 길을 걷는 자여? ]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는 즉시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을 떠올렸다. 별가루 설탕이다. 별가루 설탕을 연상하는 순간 김성철은 자신의 몸 안에 서린 마나가 가마 안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가는 감각을 느꼈다. ‘이것은...?’ 무아지경 속에서 김성철은 가마의 안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파편은 연금 가마 안에서 원형을 잃고 무지갯빛을 내뿜는 환한 발광물질로 변해가며 가마 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손톱만한 검은 파편이 유려한 색채를 띤 걸쭉한 액체 변하며 커다란 가마 안을 채워가는 광경이란. ‘이것이 재앙의 파편의 힘인가?’ 다음 순간 가마 안에서 눈부신 섬광이 튀어나왔다. 탕그리트의 저택 일대를 뒤덮을 정도의 거대한 빛이. “삐이....?” 정수를 얻고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기뻐하던 마라키아가 고개를 돌릴 정도의 빛은 점차 사그라지며 곧 사라졌다. 하지만 기적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었다. 김성철은 볼 수 있었다. 에크하르트의 연금 가마 안에서 달빛을 머금은 가루가 화수분처럼 솟아나오는 광경을. [ 연성 성공! ] 별가루 설탕은 가마를 가득 채우고 그 주변에 작은 둔덕을 만들 정도로 생성됐다. “우와! 우와!” 누구보다 기뻐한 것은 베르텔기아였다. “그냥 해본 소리였는데 진짜로 해냈잖아!” 베르텔기아는 김성철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기쁨을 표출했다. 연금술사로서의 김성철의 발전은 베르텔기아의 기쁨이기에. 김성철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이 만들어 낸 별가루 설탕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았다. “음.” 혀가 저릿할 정도의 달콤함. 김성철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이지만 아마도 클래스의 관장자는 환장할 정도로 좋아할지도 모른다. 가장 중요한 재료가 만들어진 그 순간부터 요리는 시작됐다. 기름진 고기에 직화를 가해 표면만을 바싹하게 구운 후 그것을 잘게 잘라 가열한 팬 안에 넣어 볶으면서 갖가지 향신료를 섞어준다. 고기가 어느 정도 익고 팬 안에 구릿빛이 감돌기 시작할 때 비장의 재료. 별가루 설탕을 아낌없이 뿌려준다. 김성철의 입맛엔 과하다고 할 정도로. ‘내 입맛엔 솔직히 별로군.’ 중간중간 간을 볼 때마다 김성철은 자신의 입맛과는 상당히 어긋나 있다는 걸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김성철이 음식을 대접하려고 하는 건 자신이 아니니까. 김성철은 붉게 달군 팬을 흔들며 생각했다. ‘궁극의 요리라는 것은 결국 허구의 산물 아닐까?’ 김성철이 원래 준비했던 것은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식당에서 맛보았던 최상급의 요리들이다. 그 요리들은 물론 저마다 특징을 가지고 한 분야의 정점에 설 정도의 가치를 지닌 요리였다. 하지만 그것들이 궁극의 요리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입맛이라는 건 맛보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것이므로. 모든 사람의 입맛을 만족시키는 요리는 없다. 그런 것은 신에게나 허용된 기적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접시 위에 자신이 만들어낸 비장의 요리를 담으며 비장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김성철식. 월광 홍소육.”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의 코트자락을 휘저으며 안에 감춰진 황금빛 브로치를 드러냈다. “으...” 베르텔기아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지만 끝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반면 카네스는 크게 기뻐하며 접시 주변을 기웃거렸다. “맛 봐도 돼?” “한 점 정도라면.” 이윽고 카네스의 시식이 시작됐다. 그런데 어째 카네스의 표정이 묘하다. “으음. 이거.. 맛있긴 한데...” “한데..?” “너무 단맛이 강한 거 같은데.” “그런가?” 김성철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자신이 만든 요리를 젓가락으로 집어 손수 입안에 가져갔다. “…크윽!!” 바삭한 식감을 시작으로 감미로운 간장과 향신료의 맛이 깊게 베어든 부드러운 고기맛까지는 완벽 그 자체였지만 그 뒤를 추격하듯 밀어닥친 별가루 설탕의 무자비한 단맛이 나머지 미각을 지워버렸다. ‘이건 아니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나타났다. [ 이... 이 요리의 점수는.... ] 뭔가 일어나려고 하고 있다. 김성철은 오랜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과 뜻하지 않은 미각 동거를 한 클래스의 관장자가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다음 순간 김성철 앞에 충격적인 점수가 나타났다. [ 103,234점!!! ] ‘에라이.’ 하마터면 소리 내어 욕을 할 뻔했다. 다행히 그럴 기회는 나타나지 않았다. 김성철 앞에 수많은 마법진이 꽃처럼 피어올랐다. 마법진이 사라진 자리엔 포탈이 열려 있었다. 요리인 클래스의 관장자. 최초의 드래곤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문이 마침내 김성철 앞에 열린 것이다. ======================================= 82. 재앙의 진실 (1) [ 요리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오라. ] 포탈 너머의 세계는 하늘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었다. 구름과 푸른 하늘에 뒤섞여 하늘을 떠도는 수많은 부유섬과 바위가 김성철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곳은 설마 부유군도인가?’ 부유군도. 오직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환상의 장소. 김성철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틀림없이 전설 속의 부유군도의 풍경과 일치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약간의 놀라움을 느낀 채 앞으로 걸어갔다. 포탈은 녹색 이끼로 뒤덮인 부유섬의 가장자리에 있었다. 김성철은 부유섬의 끝자락에서 발밑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부스럭. 자갈 하나가 떨어져 내리는 발밑엔 검푸른 빛의 거친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이 김성철의 옷자락을 쉴 새 없이 펄럭이게 만들었다. 김성철은 바람으로부터 눈 부위를 손바닥으로 가리며 자신을 부른 존재, 고대의 드래곤을 찾았다. “뒤를 보라.”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러우면서도 중후하며 어딘가 익살스런 기운이 묻은 인상 깊은 음성이었다. “히이.. 엄청 느끼한 목소린데?”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안에서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김성철은 자신의 뒤에 커다란 동굴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거대한 드래곤이라도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큰 굴. 김성철은 접시에 덮인 요리를 들고 동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것 외엔 별 특징 없는 동굴이었다. 금은보화도 동굴을 지키는 하수인도 없었다. 안으로 갈수록 빛은 희미해져 김성철은 페어리라이트를 시전 해 어둠을 몰아내야 했다. 이윽고 김성철은 어둠의 저편에 자리 잡은 거대한 존재를 볼 수 있었다. 드래곤이다. 더하고 뺄 것도 없는 순수한 드래곤이 어둠 너머에 거대한 존재감을 과시하며 누워 있엇다. 김성철은 요리를 든 채 드래곤 앞으로 걸어갔다. 드래곤 가까이 가자 황금빛의 비늘이 페어리라이트의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요리를 내려놓아라. 인간.” 드래곤이 말했다. 그러자 김성철 앞에 마법진이 피어오르며 화강암으로 만든 탁자가 소환됐다. 김성철은 시키는 대로 자신의 요리, 김성철식 월광 홍소육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드래곤은 염동력으로 김성철의 접시를 들어 올려 그것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으적. 으걱. 인간 기준으론 제법 양이 되는 음식이지만 드래곤 기준으론 한입 거리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의 드래곤은 그 한입거리도 되지 않는 걸 입안에 넣고 한참이나 씹고 음미했다. “…….” 그것은 생각보다 긴 시간을 요구했다. 김성철이 슬슬 지루함을 느낄 무렵 드래곤이 몸을 일으켰다. “이 중독성 있는 단맛의 정체가 뭔가 했더니 바로 그거였군. 별가루 설탕.” 드래곤이 말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어쩐지 그리운 맛이라고 했더니. 그거였군.” 어둠 너머에 자리 잡은 드래곤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너는 연금술사인가?” “연금술사이기도 하지.” “그런 모양이군. 이 최초의 드래곤인 날 보고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걸 보면 말이야.” 다음 순간 천정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어둠을 걷어냈다. 페어리라이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찬란한 빛 아래에서 김성철은 고대의 용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다채로운 색상의 비늘을 지닌 거룡이었다. 황금빛 비늘은 극히 일부분, 몸 전체가 보석처럼 번쩍이는 아름다운 비늘에 쌓여 있었고 그 아름다운 전신엔 온 몸의 털을 쭈뼛 서게 할 정도의 막강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우와...” 베르텔기아가 놀라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경이롭기까지 한 드래곤의 아름다움에 압도된 것이다. 반면 김성철이 드래곤을 보고 느낀 단편적인 감상은 불안정성이었다. 그는 실로 압도적이지만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불안정한 기류가 드래곤 주위에서 흐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아신과는 다르군. 아신에 근접했지만 아신과는 어딘가 다르다.’ 이윽고 드래곤이 말했다. “내가 바로 최초의 드래곤이자 요리인 클래스의 관장자. 안드로아다.” 그야말로 모든 용들의 아버지라 불릴 만한 절대적인 위용. 평범한 자라면 그 음성을 들은 것만으로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겠지만 김성철은 평범한 사내가 아니다. 그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거룡을 응시하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김성철이다.” “호오...?” 안드로아의 눈이 번득였다. “담낭 하나만은 알아줘야겠군. 그 쌍검을 찬 인간도 한 가닥 했지만 그대에 비하면 그저 평범해 보이는 수준이야.” “쌍검을 찬 인간?” “대략 1000년 전이었나. 아직 천 년까진 되지 않았겠군. 아직 이번 시대가 끝나지 않았으니. 아무튼 그 인간의 이름은 내 기억에 의하면 데스포트였다.” “데스포트...?”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여러 동료를 데리고 왔지. 실제로 요리를 만든 건 엘프 여자였고 내가 감동 받은 별가루 설탕을 만들어 낸 건 삐쩍 마른 연금술사였는데 뭐, 공동 작품이란 명목으로 함께 온 거지. 영광스런 브로치는 연금술사에게 수여됐다.”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드래곤이 말하는 게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데스포트. 그 자는 베스티아레. 에크하르트와 함께 이곳에 왔었군.’ “그 인간은 나름 이 세상에 대해 열심히 조사를 한 모양이야.” “그가 너에게 물은 게 뭐지?” 김성철이 물었다. “세상을 파멸시킬 수 있는 방법.” “…….” “엄밀히 말하자면 방법은 알고 있었어. 그 자가 내게 물은 것은 그 방법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장소였고.” “비탄의 섬 말인가?” “잘 아는군. 인간. 하지만 방금 대화에서 그대는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을 거야. 이 안드로아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말해줄 수 있는 진실의 한계는 네가 알고 있는 사실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을.” 안드로아의 눈이 한 차례 번득였다. 김성철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번에 이해했다. 김성철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왜 웃는 거지? 인간.” 안드로아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인간 김성철이 이 세상의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그 끝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지?” 김성철이 물었다. “얼마든지. 하지만 시간은 많이 주지 않겠다. 그러니 잘 생각해서 물어라. 유한한 인간이 나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지식의 가치는 이루 따질 수 없으니.” 안드로아의 목소리엔 끝없는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실로 최초의 드래곤 다운 자신. 아마도 안드로아의 눈에 김성철은 그저 찰나를 살아가는 덧없는 생명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그 고까울정도로 높은 자부심에 반발해 묘한 반항심이 가슴에 서리는 걸 느끼며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초월세계에서 질서신을 보았다.” 단 한 마디만으로 김성철은 최초의 드래곤을 놀라 게 만들었다. 안드로아의 거대한 신형이 한 차례 움찔거린 것이다. “…?!” 동굴 안이 미약하게 떨리는 걸 느끼며 김성철은 계속해서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것은 진짜 신인가?” “엌!” 안드로아가 몸을 들썩였다. 방금 전까지만 자신만만했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너... 넌 뭐냐? 무슨 잠꼬대를 하는 거냐?” 당황하고 있다. 모든 드래곤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대의 존재가. “말도 안 되는 걸 묻는군! 인간! 설마 날 떠보는 것인가?” 이에 김성철은 드래곤과 달리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어조로 자신이 본 바를 솔직히 말했다. “잠꼬대는 아니야. 왜냐하면 나는 계단을 올랐거든.” “계... 계단...?!” 안드로아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신에 이르는 계단을 말이야.” “그것을 전부 올랐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안드로아의 눈동자에 마법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마법진이 일제히 떠올랐다 사라지며 이윽고 안드로아는 마법의 힘을 통해 김성철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드래곤의 보석 같은 비늘이 곤두섰고 거대한 발톱이 지면을 움켜쥐었다. 충격 그 자체였다.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태고의 용으로도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그런 사내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쓰레기 요리나 만들어먹는 괴식가의 정체가 이런 것이었다니...” 안드로아의 입에서 진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괴식가라니. 말이 심하군.” 김성철이 목을 한 바퀴 돌리며 기지개를 폈다. “괴식가는 바로 너 아닌가? 사카린 같은 것에 환장하는 네 입맛도 보통은 아닌 것 같은데.” “…….” 안드로아는 침묵에 잠겼다. 억겁에 가까운 세월을 지닌 그로서도 김성철 몸에 서린 불가사의한 힘은 그의 인식 밖이었다. 김성철은 느긋하게 동굴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곡소리를 들으며 안드로아가 생각을 정리하길 기다렸다. 안드로아는 베르텔기아가 지루함을 느끼고 몸을 마구 뒤척일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서 입을 열었다. “…결국 이 세계는 정해진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모양이군.” 구석에 앉아 코트 자락을 수선하던 김성철은 바느질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은 계속해서 말했다. “네가 그 계단을 완주할 수 있었던 건 물론 너의 의지가 범인의 것을 한참 뛰어넘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용은 거대한 발톱으로 바위를 한 차례 긁고는 말을 이었다. “때가 가까워졌다는 것이겠지. 이전 시대에 날 찾아온 연금술사도 신의 계단을 거의 완주했다고 말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 과거엔 그보다 훨씬 더 강한 영웅들이..” 그때 김성철의 말이 안드로아의 말을 잘랐다. “그보다 아까 내가 한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은데.” 김성철이 듣고자 하는 답은 하나였다. 그가 계단 너머에서 본 것. 그리고 초월세계에서 본 것. 어느 것이 진정한 신인지. 안드로아의 거대한 신형이 미약하게 떨렸다. 김성철은 불길한 예감을 감지했다. 아니나 다를까 곧 안드로아가 입을 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감히 내가 할 수 없다. 어느 쪽도 감히 내가 언급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답은 불가능. 김성철의 눈에 실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가?” 하지만 그는 안드로아를 책망하지 않았다. 겨우 그것밖에 안 되는 존재인 것이다. 태고의 용이라는 것 또한. 김성철은 그 흔한 빈정거림도 상대방을 자극하는 말도 남기지 않은 채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벌써 떠나는 것인가? 인간...? 아니,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여.” 그렇게 되자 막상 몸이 단 건 안드로아였다. 최초의 용, 모든 드래곤의 대부, 무한한 지식의 증인이라는 수많은 칭호를 지닌 그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한 명의 인간에게 무시당하고 있었다. “그것 이외에 궁금한 것은 없는가? 다른 것이라면 뭐든 이야기해줄 수 있다.” “딱히 없군.” 궁금한 것이 몇 가지 있긴 하지만 딱히 묻고 싶진 않았다. 가장 궁금하던 근원적인 물음이 막혔는데 다른 소소한 것들을 물어봐서 무엇 하겠는가? 안드로아는 그런 김성철의 생각을 읽은 듯 계속해서 뒤에서 권유했다. “네가 알고 싶은 것. 그 답은 네 스스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 답을 들으러 여기 온 건 아니다. 드래곤.” 김성철이 뒤돌아서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인간과 드래곤의 시선이 마주쳤다. 조급해하는 드래곤과 호수처럼 잔잔한 인간의 눈동자. 잠깐 자리 잡은 침묵을 깨고 드래곤이 말했다. “그 계단으로 다시 가라. 그러면 너는 네가 구하는 그 답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확인... 이라...”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너는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나?” 드래곤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건가?” 조금은 질문을 할 생각이 생겼다. 김성철은 다시금 안드로아를 향해 몸을 돌린 후 오랫동안 가슴 속에 담아두던 그리고 인생 자체의 목적이 된 것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재앙은 뭐지?” 김성철이 물었다. 안드로아는 전과 마찬가지로 미약하게 거대한 몸을 떨었지만 이번엔 전처럼 피하지 않았다. 느릿하고 진중한 어조로 드래곤이 말했다. “…재앙은 필요악이다.” “필요악?” 김성철의 물음에 안드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악. 그것이 재앙의 본질이다.” ======================================= 82. 재앙의 진실 (2) 태초의 용이 말했다. “네가 있던 곳과 달리 이곳은 불완전한 반석 위에 올려 진 위태로운 세계다. 소환자.” 안드로아는 이어 말했다. “많은 아신들이 말하지. 신은 죽었다고.” “계단 너머의 존재를 말하는 건가?” 김성철의 물음에 안드로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필멸자. 그것은 네가 직접 확인하여야 할 문제, 중요한 것은 어떤 모종의 원인에 의해 이 세상을 유지시키던 힘이 사라졌다는 것이지.” 안드로아는 거대한 발톱을 펼쳐 위를 가리켰다. “생각해보라. 대지를 내리쬐는 태양이 더 이상 비추지 않는다면, 낮과 밤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현실과 초월세계의 경계가 무너진다면?” 김성철의 상상력은 그다지 풍부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는 곧 안드로아가 원하는 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멸망... 이 세상의 멸망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안드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앙은 그 땅 위에 사는 이들의 파멸만을 부르지만 멸망은 인간과 동식물은 물론 이 세상 전체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한다.” 안드로아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신도 예외는 아니지...!” 김성철의 침착된 눈동자에 시린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재앙이란 것은 결국 아신들의 작품이군.” “다섯 주신들의 작품이지.” 안드로아가 정정했다. “…다섯 주신이란 것도 결국 아신 나부랭이 아닌가?” 김성철이 실소를 머금으며 내뱉듯이 말했다. 안드로아는 이에 반응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세상의 예정된 붕괴를 막기 위해 다섯 주신들은 초월세계의 아신의 힘을 모아 현재의 체제를 만들어냈다.” “그게 재앙이라는 건가?” 김성철은 계속해서 불쾌감이 서린 음성으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안드로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쓸쓸한 음성으로 답했다. “재앙은 그 일부분에 불과해.” “호오?” “이 세상을 지탱하던 힘이 사라진 이후, 이 세계는 더 이상 과거처럼 무한한 생명과 영혼을 떠받들 수 없게 되어버렸어. 세계가 지탱할 수 있는 생명의 숫자가 넘어버리는 순간 이 세계엔 커다란 위험이 닥치게 되거든. 특히 인간과 엘프 같은 고도의 정련된 영혼을 지닌 존재는 그 부담이 특히 크지. 그래서 그것들을 지우기 위한 의식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게 재앙이군. 하지만 그 인간들이 부담이 된다면 애당초 전부다 죽이는 게 편한 방법이 아닌가?” 김성철은 그 질문을 던지며 죽은 데스포트의 얼굴을 떠올렸다. “생명은 한편으론 균형을 해하는 짐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상을 유지하는 힘의 원천이다. 너무 많은 생명은 짐이 되지만 그렇다고 모든 생명이 절멸시켜버리면 이 세계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지. 위태로운 세상은 결국 균형에 기댈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군.” 데스포트는 그 사실을 알고 이 세상을 파괴하려 했다. 김성철은 왠지 모르게 데스포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다른 일부분은 무엇을 말하는 거지?” 팔짱을 끼고 등을 벽에 기댄 채 김성철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전자와 동기는 동일해. 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다를 뿐이지.” “알기 쉽게 설명해줬으면 좋겠는데.” 안드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대한 눈을 번득이며 입을 열었다. “불멸자가 이 세상에 주는 부담은 다른 평범한 인간 수만 명, 많게는 수백만을 합친 것과 동일하다.” “그럴 거 같군.” 김성철은 아신들과 마주쳤을 때 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위압감을 되새기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신들은 더 이상 새로운 동료가 나타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지. 그리하여 그들은 신이 이 세상에 남긴 퀘스트를 후세의 인간이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에 숨기는 일에 착수했다. 그 덕에 이 세상의 형태가 크게 달라졌지.” 안드로아의 전신에 마법진이 피어올랐다. 김성철은 한 눈에 그것이 텔레포트 마법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짧은 영창 뒤에 김성철과 안드로아는 무수한 부유섬이 떠 있는 바깥으로 전송됐다. 안드로아는 거칠게 부는 바람과 하늘에 뜬 수많은 부유섬을 커다란 눈동자에 담으며 읊조리듯 말했다. “과거엔 무수한 부유섬이 있었지. 세계 곳곳에. 지금은 세계의 끝자락에 일부분이 존재할 뿐이지만.” “…신에 이르는 길을 지워 버린 거군.” 김성철은 떠올렸다. 힐데가름이라는 아신이 남긴 기록의 일부분을. 태초의 용 안드로아의 증언은 힐데가름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 뿐 만이겠나? 아신들은 필멸자에게 막강한 보수를 주는 정령의 씨를 말렸다. 나의 오랜 벗인 수많은 정령왕들이 아신들에게 절멸 당했지.” 안드로아는 하늘을 응시하며 탄식했다. 짙은 서러움과 회한이 긴 호흡에 실려 거센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정령의 정수 때문이군.” 김성철은 얼마 전에 손에 넣었던 그 신비로운 힘을 상기하며 중얼거렸다. 안드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말했다. “지금 남아 있는 정령왕은 정령계에 속박된 최후의 세계수 위그드라실 하나뿐이다. 그 이외의 정령들은 왕을 잃고 긍지를 잃어버린 채 정령계의 그늘 속에서 그저 숨만 쉬고 있지.” 김성철은 정령계의 어두운 곳에 서식하는 정령들을 상기했다. 김성철은 그들이 과거에 젖어 사는 음습하고 음험한 무리들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놈들에게도 그러한 사정이 있었군.’ “하지만 아신들에게도 지울 수 없는 길이 하나 있었다. 그것이 바로 네가 오른 그 계단이다. 아신들로선 그저 그 계단을 침범하지 못하고 주변에 높은 산만을 쌓아 올렸을 뿐이지.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지금까지는 말이지. 그 계단을 완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으니까.” 안드로아가 다시 한 번 마법의 영창을 시전했다. 김성철과 안드로아는 전면이 붉은 색으로 뒤덮인 자수정으로 이루어진 동굴 안으로 이동됐다. 김성철은 눈을 부시게 만드는 수정들을 무심한 눈으로 굽어보았다. “와.. 예쁘다.” 잠자코 주머니에 있던 베르텔기아가 흐드러지게 핀 꽃처럼 화사한 빛을 발하는 수정을 보고 몸을 꿈틀거리며 중얼거렸다. 안드로아의 시선이 잠시 베르텔기아를 향했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곧 다시 김성철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계단에 끝에 이르는 자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에크하르트란 연금술사도 그중 하나였지.” “에크하르트라.” 베르텔기아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는 신의 도구가 되지 못했지.” 김성철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신의 도구. 오랜 싸움을 거치는 동안 숱하게 들은 말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했고 설령 안다고 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나마 김성철 손에 멸한 아신 시드마이만이 추상적인 추측이나마 할 수 있는 단서를 남긴 게 전부였다. “신의 도구란 무엇이지?” 김성철이 물었다. 안드로아의 눈동자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별로 물을 게 없다고 하더니 그런 것도 아니었군.” “…….” “이게 마지막 답변이 될 것이다.” 안드로아의 중후한 목소리에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드로아가 살짝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거대한 신체에 가렸던 한 줄기 빛이 동굴 안으로 들어와 붉은 자수정들을 비췄다. 한 줄기 빛을 머금은 자수정들은 저마다 눈부신 화려한 색채를 뿜어냈고 그 수많은 붉은 빛을 받은 안드로아는 그야말로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기품을 뿜어내고 있었다. 붉은 빛 속에서 안드로아가 말했다. “여기선 단 둘이 있고 싶군.” 그는 베르텔기아를 배제하려 하고 있었다. 김성철이 베르텔기아를 보자 베르텔기아는 자진해서 주머니 바깥으로 나갔다. 마법진이 그녀를 삼켜 바깥으로 전송했다. 둘 만 남은 붉은 공간에서 안드로아가 입을 열었다. “악신들에 의하면 그들이 섬기는 진정한 신은 이 세상의 멸망을 원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다섯 주신과 그들을 따르는 아신들은 이 세상의 멸망을 막아냈고 오랜 기간 세상의 안녕을 지켜왔다. 악신들은 이에 맞서 전쟁을 일으켰지만 결국 패배했고 어둠 속에서 세상이 굳건하게 유지되는 걸 지켜봐야 했지.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의 희망이 남았다.” “…….” 김성철의 심장이 한 차례 강하게 요동쳤다. 김성철은 주먹을 쥐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신의 도구.” “…….” “악신들은 이렇게 말하지. 거짓된 세상을 쳐부수고 세상의 멸망을 도래할 진정한 신의 뜻을 집행하는 자.” 순간 김성철의 눈에 운명처럼 한 가지 존재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처음 그가 연상한 것은 아무개였다. 소환궁전에서 그녀는 김성철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세상을 멸망에서 구하러 왔어요.” 이윽고 그녀의 얼굴은 마라키아와 부딪쳤던 장면으로 변화하며 흩어졌고 이윽고 또 다른 장면이 시야를 덮어나갔다. 김성철의 몸이 전율했다. 해골로 이루어진 대지 위에 홀연히 선 검은 거인. 그것이 시야를 뒤덮은 것이다. 자신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지닌 그 괴물은 김성철 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기 직전 김성철은 하마터면 외마디 비명을 지를 뻔할 것을 꾹 눌러 참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근거는 희박하군.” 김성철이 애써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그 말을 믿지 않아. 악신들이 주장하는 이야기니까. 다만.” 안드로아가 운을 띄웠다. “너의 존재가 그들의 말을 입증하려 하는군.” “나의 존재가...?” 김성철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서서히 평정을 잃어가는 김성철에게 안드로아는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실에 미련이 남은 수많은 아신들이 이 세계로 돌아오려 노력했었지. 하지만 어떤 아신도 이에 성공하지 못했다. 불멸자와 필멸자의 분리. 그것은 신이 엄격하게 구분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편법을 써서 강림하는 이도 없잖아 있지만 그건 논외로 하지.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니까.” 안드로아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악신들은 말하지. 그 예외가 있다면 그 자가 바로 신이 직접 선택한 그의 뜻을 집행할 도구라고.” 붉은 광휘에 싸인 안드로아는 발톱을 세워 김성철을 똑똑히 가리켰다. “너는 필멸자로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김성철의 눈이 일그러졌다. 꾹 쥔 주먹이 더욱 강하게 움켜쥐어졌다. 안드로아는 그런 김성철을 향해 다그치듯 말했다. “그 이유는 너도 알지 않나?” “나는 잘...” 김성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는 것을 안드로아의 중후한 음성이 가로막았다. “신적인 힘을 지닌....” “…….” “부수는 자여.” * 까마득한 하늘 위에 자리 잡은 부유섬 위엔 상시 거센 바람이 불고 있다. 김성철은 몸을 휘청이게 할 정도로 강풍이 불어오는 부유섬의 끝자락에 서서 멀리 펼쳐진 검푸른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주머니 안에서 몸을 뒤척거리며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김성철이 좋지 않은 기분이란 것 정도는 그의 심장박동과 얼굴만 보고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김성철은 한줄기 한숨을 내쉬며 지평선 끝을 응시했다. “시덥잖은 이야기다.” “정말?” 베르텔기아가 은근히 추궁하는 투로 물었다. “예전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야. 전혀 새로울 것도 없지.”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코트 자락 안에 새롭게 부착된 징표를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었다. 황금빛 대신 영롱한 다이아몬드 빛 광채를 발하는 브로치. 모든 요리인 중의 요리인. 마스터 쉐프의 상징이다. 요리인 클래스의 관장자인 안드로아의 말에 의하면 마스터 쉐프의 상징을 얻는 조건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황금빛 브로치를 받을 정도의 요리 실력을 갖출 것. 그의 말에 따르면 황금빛 브로치는 기예 면에서 극에 이르는 것만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에 더해 요리인 클래스의 취향을 알고 그에 걸맞는 요리를 만들어내야 궁극의 요리인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 ‘한 대 패주고 올 걸 그랬나.’ 안드로아의 입맛이 기괴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이아몬드 브로치의 가치가 조금도 떨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괴이한 식성을 가진 자의 취향마저 꿰뚫고 그것을 만족할 수 있는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요리사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종족의 미각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 받은 것이니까. 밀웜 스페샬을 먹는 리자드맨이라든지 썩은 고기를 즐겨먹는 마라키아라든지. 종을 초월해 모든 이에게 훌륭한 요리라는 지고의 행복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최고의 요리사에게 한정된 권능일 것이다. 다이아몬드 브로치는 그 증표. “보다 많은 종족의 입맛을 만족시킬수록 그 브로치는 더욱 빛이 날 것이다..!” 안드로아의 말을 떠올리며 김성철은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욕이라면 들을 만큼 들었다. 저주 또한 받을 만큼 받았고. 모두가 나에게 잘못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성철은 잘못되지 않았다. 그는 모두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 나갔고 그리고 당초의 목표를 끝끝내 이루어냈다. ‘나는 신의 도구 따위가 아니다.’ 멀리 푸른 바다의 끝에서 기묘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태양빛은 아니다. 극광(極光). 세계의 끝에서 아주 희귀하게 볼 수 있다는 경이로운 광채다. “우와... 예쁘다...!” 베르텔기아가 빼꼼 주머니에서 몸을 내밀며 둘 앞에 펼쳐진 경이로운 장관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김성철은 수 만가지 색채를 지닌 빛무리를 눈에 담으며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했다. ‘일단은 남은 재앙을 해결한다.’ 그리고 볼 것이다. 재앙 너머에 있는 존재들을. 그들이 누군지 무엇을 원하는지는 아무래도 좋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김성철은 자신의 뜻을 찾을 것이다. 전신에 흐르는 신적인 힘과 애병인 팔 가라즈와 함께. 지쳤던 몸에 새로운 힘이 차올랐다. ======================================= 82. 재앙의 진실 (3) 세 번째 재앙이 요구하는 것은 하나의 왕관. 그것은 특정 세력에 의한 세계의 일통을 의미한다. 지금 대륙의 패권을 쥔 것은 인간제국이다. 어떤 나라도 공중함대로 대표되는 인간제국의 무력에 맞설 수 없다. 북부와 동부가 거신에 의해 황폐화된 지금 그나마 인간제국의 군사력에 어느 정도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대륙 서남쪽의 고대왕국, 중부에서 서부로 이어지는 대산맥의 주인인 드워프 왕국, 그리고 북서쪽 깊은 숲의 주인인 엘프 왕국 정도다. 그런데 인간제국에 감히 대항할 수 없는 소국, 전통적인 속국의 왕관을 합치면 왕관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은자의 탑 정박지엔 12개 왕국에서 보낸 공선이 주둔하고 있었다. 속국, 혹은 동맹국 형태로 존재하던 군소왕국의 공선들이다. 왕을 칭하지 않는, 국가집단의 공선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14척으로 불어난다. 물론 모든 왕관의 숫자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정박지에 공선을 보내지 않은 나라의 숫자도 고려해야 한다. 왕 대신 그보다 격이 떨어지는 공(公)을 칭하는 군주들이 지배하는 공국들이다. 물론 이들은 왕관이 없기에 재앙이 원하는 고려의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언제든 왕을 칭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해선 안 될 것이다. 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신흥 국가들이다. 지금은 해결된 두 번째 재앙 칠영웅. 그들의 잔당인 드라고만과 가시옹은 북부와 북서부에 유민들을 모아 그들의 나라를 만들었다고 한다. 정확한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들은 모든 걸 만들어내는 거신의 힘을 빌려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고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유민을 그들의 왕국에 끌어 들이고 있다고 한다. 비슷한 예로 파괴된 동부에서 새롭게 일어나는 세력도 무시할 수 없다. 익시온의 공주였던 마커레이드가 이끄는 신 동부연맹은 동부칠웅이라 불리는 막강한 은거 기인들을 휘하에 거느리고 한때 부유하고 풍요롭던 동부의 시민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며 그 세를 불리고 있다고 한다. 서쪽에 있는 배신자들과 어떤 타협도 거부할 것을 천명하고 있는 그들은 유일하게 인간제국에 적대관계를 표방한 세력이다. 이러한 수많은 나라들이 서로 난립하고 적대하는 가운데 어둠 속에선 종말교단이라는 불길한 집단이 준동하고 있다. 김성철은 종말교단이 이미 그 자체로 인간제국과 맞설 수 있는 무력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들이 불러내는 아신은 비록 그 힘만 일시적으로 빌린 것이라고 해도 인간제국의 함대 하나 둘 정도는 가볍게 삼켜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으니. 게다가 현재 종말교단을 움직이는 것으로 추정되는 슈넬메르커는 대단히 교활한 인물이다. 순발력과 임기응변은 떨어지지만 그 대신 기발한 상상력과 치밀함으로 큰 그림은 물론 세부적인 국면까지 빈틈없는 계획을 짜내는 그가 강력한 종말교단을 움직인다면 인간제국에 있어 가장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이다. ‘놈이 굳이 날 기다려 아신을 불러낸 목적은 아마도 모두에게 보이기 위해서였겠지. 인간제국의 위세에 겁을 집어먹는 군소국과 적대국가를 그들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거기서 김성철이 슈넬메르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이미 지금쯤 종말교단은 인간제국의 수도인 라그란제에 진주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가 신의 힘을 지닌 김성철과 아신들을 막겠는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김성철은 인간제국 쪽의 정보망을 통해 정박지에 머물던 타국의 공선 위에 종말교단의 관계자가 나타났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들이 각 나라의 사신들에게 무슨 거래를 제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성철은 그것이 아마도 대단히 골치 아픈 일을 불러오리라 직감했다. “음...” 머리를 쓰는 건 김성철의 전공이 아니다. 그는 괴발개발 그린 지도를 올려놓은 탁자에서 물러나 의자에 앉으며 두 눈을 감았다. 탁자 옆에서 놀던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이 올려놓은 조약돌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전부야?” 조약돌은 현존하는 왕관의 숫자. 김성철은 지도 위에 18개의 조약돌을 올려놓았다.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숫자. 그 숫자가 김성철로 하여금 세 번째 재앙을 직접 해결하게 만드는 걸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베르텔기아는 여기에 더해 하나의 조약돌은 개판으로 그린 지도 남쪽에 툭하고 얹어놓았다. 휴식을 취하던 김성철이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뭐하는 짓이냐? 베르텔기아?” “뭐하는 짓이긴. 빼먹은 걸 보완하는 중이야.” 베르텔기아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책장을 턱 펼치더니 백지를 보였다. 이윽고 백지 위엔 혀를 날름거리는 리자드맨의 초상화가 떠올랐다. “밀웜 먹는 얘네들도 왕국 있다며?” “…그 친구들은 포함할 필요가 없다. 경외(境外)의 종족들이니까.” 경외란 인간들이 주로 사는 대륙 이외의 장소를 말한다. 마계가 가장 대표적인 경외의 영역이고 판추리아 이남의 대밀림과 황무지도 경외의 영역에 속한다. 많은 학자와 석학들은 경외에 사는 종족은 대륙에서 인정받는 인간의 범주에 포함하지 않는다고 한다. 김성철도 동일한 생각이었다. 경외의 종족까지 하나의 왕관이란 퀘스트에 포함시키면 인간의 손이 닿을 수조차 없는 바다 속에 사는 어인까지 복속시키라는 말이니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재앙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물론, 재앙이 요구하면 이들과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지금은 배제하는 게 옳다.”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며 베르텔기아가 올려놓은 조약돌을 지도 바깥으로 밀었다. “그나저나 18개의 왕관이라. 참 많네. 그치?” 베르텔기아는 마치 자신이 참모라도 된 것 마냥 뚫어지게 지도를 응시하며 깊은 고심에 잠겼다. 오랜만에 머리를 쓴 탓에 휴식을 필요로 하는 김성철은 의자에 앉은 채 생각을 정리했다.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군소왕국의 왕관은 단 수 개월 안에 정리될 것이다.’ 제국 입장으로 군소왕국 하나를 정리 하는 데는 한 개 함대면 충분하고 그마저도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제국을 위시한 강대국이 군소국을 처리하면 남는 왕관은 대략 10여개 안팎. 김성철이 나서야 할 때는 아마도 그 즈음이 될 것이다. 문제는 방법. 직접 왕이 되어 다른 왕들을 복속시키느냐. 아니면 다른 왕을 내세워 그로 하여금 모든 왕관을 받아 내느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처음 세 번째 재앙을 접했던 때로부터 조금의 진전이 없다. 세상의 끝에서 세 번째 재앙을 해결하기로 다짐했지만 그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심 중. 꽤나 장고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의자에 몸을 편안히 뉘였다. 천막 사이로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며 운동에 매진하고 있는 작고 검은 새가 보였다. “…백만 스물 하나! 백만 스물 둘!” 마라키아다. ‘저 녀석도 왕이었지?’ 김성철은 코웃음을 치며 눈을 감았다. * 하이포지 왕국은 제국 남서부에 접한 작은 소국이다. 이들은 형식적으로는 독자의 왕을 지닌 독립국이지만 실제로는 제국의 대장간이라 불리며 오랜 기간 제국의 속국으로서 존속을 보장받았다. 그것은 제국에게나 하이포지 왕국에게나 호혜적인 거래였다. 비교적 군사력이 약한 왕국으로서는 제국의 보호를 받아 타국의 침략을 방지할 수 있었고 제국으로서는 공선의 주요 부품인 마도증폭장치 등의 고도의 설비를 싼값에 제공받을 수 있었으니. 하지만 오랜 거래도 이제는 끝이 날 때가 되었다. 거대한 대장간의 형상을 지니고 커다란 수차가 딸린 하이포지 왕국의 궁성, 대 대장간의 낭하에 검은 로브를 걸친 음험한 자들이 들어섰다. 그들은 드워프 용병들의 삼엄한 경비를 받으며 강철과 대리석으로 장식된 낭하를 따라 알현실에 이르렀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반백의 수염, 우유부단한 관상을 지닌 하이포지 왕국의 왕은 초조한 낯빛으로 낯선 손님들이 왕전에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검은 로브의 인물들이 왕전에 나타나자 왕은 벌떡 일어서 몸소 그들을 맞이했다. “그대들이 그.. 교단의 사람들인가?” 아무리 상황이 촉박해도 일국의 왕이 보일 행동은 아니었지만 아무도 왕의 행동에 제동을 거는 이는 없었다. 그만큼 왕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상황에 내몰려 있고 그리고 왕의 손님은 충분히 그런 대접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선두에 선 자가 두건을 벗었다. 은발에 가까운 금발의 소녀. 얼굴의 반면엔 영롱하게 빛나는 은가면을 썼지만 드러난 다른 얼굴엔 수려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었다. 하이포지 왕국의 왕은 소문으로 그 인물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오오. 그대가 교단의 성녀. 사라사 제로인가?” “그러합니다. 폐하.” 사라사 제로는 사뿐히 왕에게 인사했다. 알현실의 좌우에 선 중신들은 소문으로 듣던 교단의 성녀가 생각보다 앳된 소녀라는 걸 알고 적잖이 실망하는 눈치였다. 기껏해야 십대 중후반. 왕국의 운명을 맡기기엔 지나치게 경험과 연륜이 부족해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라사 제로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몸안에 내재된 기운을 내뿜는 순간, 모든 이는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저 평범해보이는 소녀의 몸안에 담긴 죽음의 기운을. 궁정의 수석마법사가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리.. 리치인가? 그것도 평범한 리치가 아니라...” “아크리치랍니다” 은가면 쪽에 뚫린 눈구멍에서 검은 연기와 같은 불길한 기운을 피어 올리며 사라사 제로가 대답했다. “아크.. 리치...!” 대마법사급에 이른 마법사가 체통도 잊고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왕은 그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자신을 내방한 손님이 어느 정도의 인물이라는 것 정도는 눈치로 알 수 있었다. “그.. 그렇군. 아무튼 약조한 것에 대한 것은 받을 수 있는 것인가? 교단의 성녀여.” 왕의 말에 사라사 제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왕과 단둘이 이야기하기를 원했다. 교단을 반기지 않는 일파가 완강하게 그 제안을 탐탁치않게 여겼지만 이미 왕의 뜻은 정해졌다. 왕은 은가면을 쓰는 고혹적인 소녀의 미모와 신비로운 분위기에 반쯤 매료된 채 유사시에 자신을 지켜줄 경비병마저 내보내고 소문 속의 교단의 성녀와 독대했다. “저희들이 가지고 온 선물은 무상으로 드리겠습니다.” 사라사 제로는 그윽한 미소를 머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이포지의 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인간제국의 막강한 공중함대에 맞설 수 있는 비장의 무기를 무상에 넘기겠다니. 당연히 의심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 왕의 의심을 알기라도 한 듯 사라사 제로는 이어 말했다. “허나 폐하께선 많은 희생을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많은 희생...?” 사라사 제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왕의 곁으로 다가와 무언가를 속삭였다. 사라사의 속삭임을 듣는 왕의 눈은 다채로운 변화를 보였다. 만족하며 눈을 살짝 감는 듯 싶더니 경악으로 일그러지며 부릅떴고 이윽고는 숙연한 빛을 머금은 채 허공을 응시했다. 사라사의 말이 끝났을 때 왕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절반의 만족이었다. “그런가? 그것이 교단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인가?” 왕은 탄식을 섞어 말했다. 사라사는 그런 왕을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승리엔 대가가 따르는 법이랍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할 수만 있다면 그 승리는 결코 씁쓸한 것만은 아니겠지요.” “…그렇다고 하나 백성의 절반을 희생하라니.” “폐하께서 쓰시지 않으면 제국이 그들, 아니 그들보다 훨씬 많은 백성을 끌어다 쓰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왕의 눈이 흔들렸고 그와 동시에 가면 너머의 눈에서 묘한 빛이 번득였다. “저희 교단의 제안이 내키지 않으신다면 이대로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지만 사라사 제로는 알고 있었다. 왕관과 백성을 지킬 힘이 없는 왕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지. “하겠소.” 하이포지의 왕 하라드 3세가 힘주어 말했다. 사라사 제로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왕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종말교단과 하이포지 왕국이 밀약이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륙에 불고 있는 바람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흐음. 그대들의 의도는 불순하나 한 번 정도 받아들일 가치는 있겠군.” 유서 깊은 고대왕국을 비롯하여 수많은 왕관을 지닌 자들이 은자의 탑을 헤집어 놓은 검은 로브를 걸친 자들과 거래를 하고 있었다. 툭. 슈넬메르커는 정교하게 그려진 지도 위에 자신의 승리를 의미하는 장기 말을 올려놓았다. “고대왕국에 이어 하이포지 왕국이라. 고대왕국은 그렇다 치고서라도 제국의 턱밑 아래 위치한 하이포지 왕국마저 우리의 손을 잡다니 의외의 성과군.” “성녀님의 매력 덕분이지요. 그분은 불가능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의 소유자니까요.” 부관의 말에 슈넬메르커는 씨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우리 여단장님과는 다르게 말이지.” 비슷한 시기, 검은 로브를 걸친 수수께끼의 인물들이 대륙 각지에 자리 잡은 왕국을 방문했다. 종말교단이라 불리는 신비의 세력이 각지의 왕에게 약속한 것은 독립과 왕국의 존속이라는 양보할 수 없는 가치. 세 번째 재앙 이후 경색국면에 빠졌던 대륙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각. 동부의 해안. 천리길을 걸어 고향으로 돌아온 자들은 그들 앞에 닥친 또 다른 재앙에 직면했다. “저.. 저건 또 뭐냐?” 동부 해안가의 사람들은 볼 수 있었다. 세 번째 재앙이 예고한 황색의 죽음이 세상의 절반을 뒤덮으며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멸망의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83. 붉은 공선 실피드 (1) “바로 그것이다...!” 장고에 들어간 지 일주일만의 일이었다. 김성철의 머리에 날벼락과 같은 기발한 생각이 내려쳤고 그는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우지끈. 하지만 그의 의도치 않은 힘은 많은 것을 파괴한다. 며칠간 그의 체중을 굳건하게 받쳐주었던 자단목 의자가 박살이나 주저앉았다. 신적인 힘의 단점이라면 단점이랄까. “천만 스물 하나... 천만 스물 둘...!” 화염정령의 정수를 입수한 이래 근력운동에 매진하고 있는 마라키아는 김성철의 외침을 듣고도 미동도 하지 않았고 축생인 남작 또한 한 차례 고개를 들어 김성철 쪽을 바라볼 뿐 하품을 하며 이내 고개를 돌렸다. 외로운 남자에게 유일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역시 베르텔기아 뿐이었다. “무슨 일이야?”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던 베르텔기아가 그림그리기를 멈추고 김성철에게 책장을 파닥거리며 날아왔다. 김성철은 자신이 개판으로 그리고 베르텔기아에 의해 그럭저럭 봐줄만한 것으로 수정된 지도를 응시하며 담담한 어조를 말했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원점?” 김성철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의 단어를 읊조렸다. “세계의회.” 세계의회. 그것은 본시 예고된 세 번째 재앙의 빠른 해결을 도모하기 위해 당시 김성철의 주도 하에 설립됐고 지난 수년 간 대륙의 굳건한 질서로 기능했다. 하지만 세 번째 재앙이 예상치 못한 형태로 개변된 이후 세계의회는 그 흔한 선포도 협상도 없이 흐지부지 되었다. 인간제국 대 나머지 국가라는 구도가 현상된 지금 어느 누구도 세계의회가 다시 개최되리라고 믿지 않았다. “흐음. 그거 완전 갈가리 찢긴 거 아냐?” 베르텔기아도 동일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계의회의 효력은 유효하다. 적어도 법적으론 말이다. 김성철은 법률에 무지했지만 세계의회의 설립자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해도 되지 않는 법률조문을 각국의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가며 수정하고 또 수정하는데 엄청난 시간을 허비했고 끝나지 않는 불면의 밤을 지새워야 했다. 그 결과 김성철의 머릿속엔 오랜 세월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한 자의 오자도 없는 법문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원칙적으로 세계의회의 해산은 참가국의 삼분의 이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김성철은 또렷한 기억을 되살리며 말했다. “흐음. 그래?” “다른 사유에 의한 해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당초 세계의회란 것은 해산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한 기구였거든.” 인간제국을 위시한 쟁쟁한 강국들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뭉쳤다. 실제로 세 번째 재앙이 일어나기 전에 인간제국과 주요 강국들은 쏠쏠한 재미를 봤다. “그런데 법적으로 존재한다고 해봤자... 모두들 사실상 탈퇴한 상태인데 어떤 의미가 있는 거지?” 베르텔기아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집 해야지. 각 회원국들을.” “흐음. 과연 부른다고 올까?” 베르텔기아의 질문에 김성철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힘으로 불러야지.” 힘쓰는 것. 김성철이 가장 잘하는 것이다. 그는 각국을 돌아가며 왕관을 강제로 뺏는 대신 일단 모든 왕들을 한곳에 모아 적어도 한 차례 이상 각자의 의견을 수렴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지금은 서로 왕관을 못 주겠다고 가시를 세우고 있지만 모든 왕들은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왕관은 결국 하나만이 남아야 한다는 걸. 누가 그 마지막 왕관의 주인이 될 것인가가 사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데 인간제국을 제외한 소국들은 지레 소환자 출신인 인간제국의 황제가 당연히 최후의 왕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적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그렇게 꽉 막힌 인물이 아니다. 김성철은 한때 져버렸던 황제의 가능성을 의도치 않은 재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녀석이 고집을 부린다면 어쩔 수 없이 힘을 써야겠지.’ 어려운 난제다. 김성철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판세를 보고 생각을 정할 생각이었다. 세계의회의 재소집은 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가 될 것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군.’ 세계의회. 한때 기득권의 상징. 그러나 지금은 유명무실한 껍질만 남은 잔해. ‘껍질만 남았더라도 쓸 수가 있다면 이용해야지. 복 껍질만 해도 얼마나 맛있는데.’ 김성철은 입 안에 침이 고이는 걸 느끼며 탁자 앞에 서서 지도를 응시했다. 그가 표시해 둔 수많은 조약돌이 눈동자에 들어왔다. 김성철은 펜을 들어 지도 위에 선을 그었다. “응? 뭐하는 짓이야?” 고생스럽게 지도를 수정한 베르텔기아가 화들짝 놀라며 묻는다. “최단동선을 그리고 있다. 모든 왕들을 만나기 위한.” “흐음. 그런 건 연필로 해줬으면 좋겠는데.” 김성철은 뒤늦게 연필로 고쳐 잡고 다시 선을 긋기 시작했다. 최단 동선으로 잡았다고 하나 먼 여정이다. 김성철은 걷는 건 좋아하지만 뛰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달리기라면 군대에서 실컷 했기 때문이다. 마라톤을 좋아하는 대대장을 만난 자라면 모두 김성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김성철 혼자 가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가겠지만 지금은 동료가 늘었다. 특히 마라키아 같은 인간을 먹이로 보는 녀석을 풀어놓았다간 어떤 짓을 할 지 모른다. 마라키아의 흉악한 인성에 대해선 매일 같이 베르텔기아가 일러바쳤기 때문이다. “뭐라고? 이 엄청난 거리를 보름 만에 답파하겠다고? 그건 지배의 날개를 지닌 나하크 족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일이다.” 여행계획을 말하자 마라키아는 손사래를 쳤다. 방금 전까지 짱돌을 들며 천만 스물 하나를 외치던 패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확실히 탈 것이 필요하겠군.’ 김성철은 그리폰인 남작을 응시했다.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그리폰은 원래 전투용으로 조련된 마수다. 강인한 체력과 내구력을 바탕으로 적진의 전열에 파고들어 진형을 붕괴시키는 것이 그리폰의 임무. 비행능력에 있어선 단거리나 장거리나 모두 비룡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음, 뭔가 좋은 게 없나.’ 가장 대중적이고 효율적인 교통수단이라면 역시 수레다. 그러나 도로가 잘 닦인 지역이라면 그만한 게 없지만 지금 같은 난리 통에 각국을 잇는 도로망이 잘 관리될 리가 없다. 도로 상태가 열악하면 바퀴는 가치를 잃는다. “공선을 타면 되잖아.” 베르텔기아가 불쑥 입을 열었다. “공선?” 김성철의 물음에 베르텔기아는 긍정하듯 몸을 흔들었다. “갑자기 왠 공선?” 확실히 공선은 대륙을 대표하는 최고의 교통수단이긴 하지만 그만큼 구하기가 쉽지 않고 비용도 다른 것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싸다. 무엇보다 공선은 개인 자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워낙 비싼 몸값은 물론이고 전략자원으로 취급되는지라 돈이 있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김성철은 미처 공선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 걸 베르텔기아가 끄집어 낸 것이다. “공선은 너무 멀리갔다. 베르텔기아. 그것은 구한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김성철이 말했다. 그러자 베르텔기아는 퉁명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전에 여기 왔을 때 아퀴로안가 뭔가 하는 여자한테 뺏은 공선이 한 척 있잖아.”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읜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아, 그거 말인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퀴로아의 기함 프로크루스테스를. 과거 은자의 탑 방문 시 김성철은 아퀴로아 일당을 처리하고 남은 공선을 은자의 탑 주변을 둘러싼 방대한 삼림지대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다. 사정상 은밀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엔 다시는 그것을 쓸 일이 없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세계의회가 거의 유명무실해지고 대립의 축이 김성철에서 국가 간의 분쟁으로 바뀐 지금 공선은 훌륭한 이동수단이 될 수 있다. 공선은 지형에 구애받지 않고 빠른 속도로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고 그리고 특수한 장비를 갖춘 경우 공선 그 자체로 차원이동을 해 이동할 수도 있다. 조만간 대륙 전체를 주유할 김성철에겐 이보다 훌륭한 선택지는 없다. “…문제는 승무원이겠군.” 일단 김성철 혼자만으로 공선의 운항은 가능하다. 하지만 문제는 유지보수와 장기적인 운영. 공선은 반드시 일정 수 이상의 승무원을 필요로 한다. 김성철에게 가장 어려운 난제다. “일단, 한 번 살펴나 보자구. 오랫동안 그 골짜기에 처박아놓았잖아?” 베르텔기아의 의견을 들은 김성철은 즉시 베르텔기아, 마라키아를 각각 다른 주머니에 넣고 남작에 탑승, 아퀴로아의 공선을 숨겨두었던 깊은 골짜기로 날아갔다. 그런데 눈 때문인지 지형이 변해 알아보기 어렵다. 김성철은 일단 지면에 착지한 후, 팔 가라즈를 꺼내들었다. “뭘 하려는 거야?” 베르텔기아가 묻자 김성철은 망치를 잡은 팔에 신적인 힘을 흘려보내며 지면을 강타했다. 쿠쿵! 땅이 들썩이며 침엽수에 소복히 쌓인 눈들이 부스스 아래로 떨어져 내렸고 산정을 덮은 눈도 김성철이 일으킨 진동을 반응, 조금씩 흘러내리더니 이윽고 어마어마한 산사태를 일으키며 아래로 쓸려 내려갔다. 다시 남작을 타고 하늘 위로 오른 김성철은 전보다 확연히 윤곽이 또렷해진 산자락을 보고 위치를 가늠했다. 아퀴로아의 기함, 프로크루스테스 호는 하얀 눈 한 복판에 있었다. 김성철은 뒷주머니에 들어 있는 마라키아를 두 손으로 잡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마라키아. 눈을 치워라.” “뭐... 뭐라고?!” 마라키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항변해보지만 김성철이 마라키아를 여기 데리고 온 유일한 이유는 제설작업이었다. 마라키아는 무의미한 반항을 몇 차례 반복한 끝에 투덜거리며 마법의 힘으로 인근 일대의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마라키아가 일으킨 강렬한 화염폭풍이 춤추듯 교차하며 일대의 눈을 녹이는 동안 김성철은 남작 옆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주전자로 물을 끓였다. “흐음. 저 녀석, 그래도 대단하네.” 베르텔기아가 눈을 치우는 마라키아를 보며 중얼거렸다. “당신한테 힘을 넘겨주고도 저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다니.” “그만큼 선택받은 존재라는 이야기겠지.” 김성철은 찻잔에 뜨거운 물을 따르고 홍차잎을 넊어 되는대로 섞었다. 급조품이긴 하지만 먹을만한 차가 만들어졌다. 김성철은 차를 홀짝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저 녀석도 원래의 세계에선 아신이 되었을지도 모르겠군.’ 아신으로 향하는 길이 막힌 세계. 힘을 키우는 방법은 극도로 제한됐고 그 마저도 상한선이 정해져 있다. 혼의 망해 따위 같은 비효율적인 방법은 아마도 절박한 필요에 의해서 나온 궁여지책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안드로아는 아신들이 불멸자에 이르는 길을 그저 차단만 했을 뿐, 그 자체를 없애지 못했다는 취지로 이야기했었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이 세계에 신이 직접 만들어 놓은 퀘스트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이야기. 물론 그 장소는 오직 아신만이 알겠지만 다른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바로 신의 글이다. ‘라이즈 하이메르는 신의 글을 통해 강력한 영혼각인이 숨겨진 위치를 발견했다. 하지만 신의 글 특성상, 악신들은 신이 직접 만든 퀘스트가 있는 장소를 남겨두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김성철의 추측이다. 하지만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이야기다. 물론 그 장소를 안다하더라도 아신들은 그 곳에 쉽게 다다르지 못하게 장난을 쳐놨을 것이지만 어디쯤에 있는지만 알 수 있다면 못 찾을 이유도 없다. 지금 세상에 김성철에게 불가능한 일은 많지 않으니까. 김성철이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마라키아는 눈 더미 안에 파묻힌 공선을 발견했다. “어이! 부수는 자. 네가 원하는 걸 찾아냈다.” “잘했다. 마라키아.” “화염정령의 정수 다섯 개만 더 넘겨준다면 직접 꺼내 줄 수도 있을지도 모르는데.” “…….” 김성철은 마라키아의 은근한 부탁을 철저히 무시하고 영혼창고에서 애용하는 삽을 꺼내들었다. ‘오랜만에 힘 좀 써볼까.’ 김성철의 삽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오랜 기간 눈 속에 숨겨져 있던 아퀴로아의 기함 프로크루스테스가 그 순백의 아름다운 자태를 다시 한 번 세상에 드러냈다. 김성철은 함교의 문을 열어젖히고 조종간으로 나아가 공선의 기능을 확인했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공선 프로크루스테스는 완벽하게 기동했다. ======================================= 83. 붉은 공선 실피드 (2) 일단 공선을 꺼내놓긴 했지만 할 일이 태산이다. 프루크루스테스는 지금 김성철의 손에 있긴 하지만 엄연한 남의 배. 이대로 타고 다니는 건 그다지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색깔이라도 바꿔야겠군.” 김성철은 아름다운 곡선을 자랑하는 공선 주위를 한 바퀴 돌며 가장 먼저 할 일을 정했다. 물론 거대한 공선의 도색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일손이야 김성철이 신적인 힘을 써서 도맡는다고 해도 도색을 하기 위해서는 도료가 필요하다. 하지만 김성철은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는 연금술사이기 때문이다. “베르텔기아.”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연금숤사의 힘을 발휘하겠는가. 전투시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지만 실생활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요긴하기 둘도 없는 베르텔기아는 우쭐거리며 물었다. “어떤 색을 원해?” 베르텔기아가 지닌 레시피 중에는 거의 모든 색을 재현할 수 있는 도료가 담겨 있었고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색으로 보이는 도료 또한 지니고 있었다. 김성철은 잠시 고민을 하다 답을 내놓았다. “검은 색이 좋겠군.” 가장 무난하면서도 시크한 칼라. “그거 너무 칙칙하지 않아?” 베르텔기아는 머지 않은 곳에 명상을 취하고 있는 마라키아 쪽을 향해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저 녀석 깃털 색깔과도 겹치고 말이야.” “음, 그렇고 보니 그렇군.” 김성철은 좀처럼 자신의 취향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는 사람이지만 간단하게 생각을 바꿨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마라키아도 김성철 일행이 자신을 화제에 올리는 걸 알고 날개를 파닥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너희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깃털이 가렵군.” “공선의 색깔을 정하는 중이야.” 베르텔기아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마라키아는 뭔가 의심이 가는 듯 김성철과 베르텔기아를 돌아봤지만 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관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낼 순 없었다. 다만 자기도 일단은 김성철 일행 중 한명이라는 자각은 있는지 팔짱을 낀 채 부리 끝을 쓰다듬으며 심사숙고하는 자세를 취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검은 색이 좋겠군.” “검은 색은 탈락이다.” 김성철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응? 검은 색은 가장 고귀한 색인데. 태초에 어둠이 있었으니. 라는 말도 모르나? 검은 색을 싫어하는 것은 밤을 두려워하는 나약한 유인원들의 본능에서 비롯된 가련한 습성이지.” “저리 가서 운동이나 해라.” 김성철은 말 한마디로 귀찮은 새를 쫓아 보냈다. 마라키아는 부리를 활짝 벌리며 떨떠름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자, 그럼 무슨 색이 좋을까?” 방해꾼이 사라지자 베르텔기아가 입을 열었다. “음... 딱히 떠오르는 색은 없지만 회색이 좋겠군.” “회색? 왜 또 그런 칙칙한 색을 좋아하는 거야? 아무리 모든 대륙인에게 미움받는다고 하지만 그럴수록 밝은 마음가짐으로 헤쳐나가야 하지 않겠어?” “으음. 모두는 아니지. 날 좋아하는 사람도 꽤 되지 않나?” “싫어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걸.” “…….” 베르텔기아의 잇따른 바른 말에 김성철은 잠시 할 말을 잊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레드. 붉은 색이 좋겠군.” “붉은 색? 그건 좀...” “붉은 색은 정열의 색깔이지.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붉은 색으로 도색하면 이 공선이 좀 빨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야.” “그거 오크들이나 믿을 법한 미신이네.” 아무래도 계속 딴지를 거는 것 보니 베르텔기아에게도 생각이 있는 모양이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응시하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너에게도 생각해 둔 색깔이 있나?” 김성철이 묻자 베르텔기아는 몸을 크게 끄덕거리고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핑크!” “…레드로 한다.” “으응?! 그런 게 어딨어!” 색깔은 정해졌다. 재료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재앙의 파편이 있는 이상 김성철은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도료를 만들어낼 수 있으므로. 김성철은 투덜거리는 베르텔기아를 다독여 붉은 염료를 연성한 뒤, 마리키아와 함께 선체를 도색하기 시작했다. 둘 다 인간계로 치면 극에 달한 존재들이라 작업 속도를 대단히 빠르게 이루어졌다. “하하! 바람 정령의 정수만 있다면 작업속도가 3배는 빨라졌을 것인데.” 작업 도중 김성철은 부리마개라는 걸 만들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 것 이외에는 무난한 작업이었다. 반나절만에 하얀 색의 프루크루스테스가 타오르는 불꽃 같은 붉은 색의 공선으로 거듭났다. 에크하르트가 개발한 도료는 평범한 도료와 달리 에나멜처럼 빛을 받으면 번쩍이는 광택까지 나서 한결 멋이 있었다. “…음.” 김성철은 자신의 노작을 보며 이례적으로 만족을 표했다. 애당초 프루크루스테스 자체가 미려한 곡선을 지닌 명함선이긴 했지만. 도색이 마를 동안 김성철은 다음 과제로 들어갔다. “다음은 이름을 정하는 것이군.” 그 말을 들은 베르텔기아는 불길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녀는 작업용 탁자 위에 종이를 한 장 올려다놓고 김성철에게 생각중인 이름을 적어볼 것을 주문했다. 김성철은 아래의 이름을 종이에 기재했다. [ 공선명 후보 ] 1. 파브르 2. 시튼 3. 계백 4. 간담 그걸 본 베르텔기아는 당연한 일이지만 기겁을 했다. “또 그놈의 파브르!” “파브르를 왜 그렇게 싫어하는 것이지?” “아무튼 파브르는 절대 안 돼! 시튼도 마찬가지고.” 베르텔기아는 연필을 책장으로 들어 파브르와 시튼 부분을 진한 줄로 쫙쫙 그었다. 김성철은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였으나 베르텔기아의 생각이 워낙 확고한 걸 알기에 여기서는 한 발 물러섰다. “그럼 계백과 간담 중에서 골라야겠군.” 남은 이름은 두 개. 그런데 베르텔기아는 두 이름을 보더니 갑자기 몸을 떨었다. “흐음... 다른 건 몰라도 간담에게선 엄청 위험한 냄새가 나는데...? 대체 왜 넣은 거야?!” “…그러고 보니 아무 생각도 없이 넣었군. 나도 왜 넣었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네 말대로 나도 간담에게서 극도로 위험한 향기를 느낀다.” 김성철은 즉시 연필을 들어 4번째 항목을 제거했다. 간담이란 이름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건 하나. 계백이다. “계백은 뭐야?” 베르텔기아가 최후의 후보를 보며 물었다. 김성철은 어릴 때 망해가는 집구석 책장에 꽂혀 있던 낡은 어린이 위인전집을 연상하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저쪽 세계에 있을 때 우리 조상 중의 위인이다.” “위인? 파브르 같은 학자야?” “학자는 아니고 장군이다. 내가 어릴 때 가장 좋아한 위인이지.” “장군? 어떤 사람인데?”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앞두고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맞서 최후까지 숨이 끊어질 때까지 싸운 분이다. 무엇보다 싸움 직전에 결코 돌아가지 않을 각오로 자신의 손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죽인 일화가 유명하지.” “흐음...” 다른 이름과 달리 이번엔 베르텔기아도 고민하는 눈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곧 결과가 나왔다. 답은 부정. 베르텔기아는 몸을 가볍게 흔들며 조금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용감한 군인인 건 맞지만.. 우리가 탈 배의 이름에 붙일 이름은 아닌 거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하지?” “왜냐면.. 조금 그렇잖아? 아무리 패배할 싸움을 눈앞에 두고 있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죽인다는 게...”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비극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인가.’ 비극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막상 그런 비극이 자신에게 닥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군.” 김성철 또한 비극을 바라지 않는다. 이미 비극이라면 겪을 만큼 겪었다.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길 바라는 게 김성철의 소박한 희망. 김성철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베르텔기아 위에 조심스레 손을 얹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생각하는 이름이 있나?” “왜 물어? 어차피 내가 선택한 이름은 안 쓸 거 아냐?” 핑크 색 제안이 거절당한 걸 상기하며 베르텔기아는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이에 김성철은 쓴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친구를 다독였다. “일단 한 번 들어보고 결정하지.” “흐음.. 뭐 기대는 하지 않을게.” 베르텔기아는 책장을 펼쳐 훨훨 날아오르더니 굴러다니는 연필을 야무지게 집고 김성철이 기재한 4개의 후보 옆에 자신이 생각하는 이름을 끄적였다. [ 실피드 ] “실피드?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군.” “응? 정말? 의외로 견식이 넓은데?” “제국 유해도서로 지정된 어떤 상업소설 중에 본 기억이 난다.” 김성철은 광장에서 산처럼 쌓여 불타오르던 유해도서의 최후를 연상하며 중얼거렸다. ‘아마 죄목이 [재미없음]이었던가...?’ 추억에 잠긴 김성철을 향해 베르텔기아가 불쑥 말했다. “소설에 나오는 이름이 아닌데.” “그래?” “전설 속의 정령왕 중 하나야. 바람의 정령왕!” 베르텔기아가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호오. 정령왕이라.” “그것도 무려 바람을 다스리는 바람정령들의 여왕님!” 베르텔기아는 어째서인지 그 실피드란 바람정령들의 여왕에게 환상이 있는 것 같았다. 김성철은 그런 베르텔기아를 귀엽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새로운 배의 이름은 실피드로 하지.” “정말?” “남자는 두 말하지 않는다.” 그 말을 들은 베르텔기아는 환호성을 지르며 하늘 위를 흥겹게 날아다니더니 이윽고 가만있는 마라키아에게 달려들어 날개를 쪼아대기 시작했다. “삐이이.. 뭐하는 짓이냐! 리빙 북 따위가!” “가만 좀 있어봐! 깃털 하나만 뽑아갈게!” 그렇게 좋아하는 베르텔기아를 본 건 아마도 처음이 아닐까. 따스한 웃음이 깃든 눈으로 베르텔기아를 쳐다보던 김성철의 눈동자에 갑자기 흔들렸다. 서릿발 같은 차가운 음성이 느닷없이 의식 속에 울려 퍼졌다. “일단, 그 아이들도 자매는 맞아요.” 현실의 목소리가 아니다. 과거의 불쾌한 기억이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이런 기억이 튀어나오다니.’ 소소한 행복에 젖은 김성철의 얼굴이 무서우리만치 경직됐다. 불쾌한 기억은 그의 의지에 반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아이가 그랬나요? 자기가 아버님의 딸이라고?”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가 소름끼치는 형태로 김성철의 의식 안에 메아리쳤다. 그 목소리는 김성철이 지금 가장 의지하는 목소리와 본질적으로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개체다. 차디찬 재앙의 서 보관고 앞,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또 한 권의 책. 그 책은 김성철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나름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하나 김성철이 마음먹으면 먼지만 남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 책의 무서움은 지니고 있는 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김성철은 그 책이 남긴 마지막 말을 또렷히 기억하고 있다. “아무튼 지금의 현실이 지속되길 원한다면 창조술사 같은 건 포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당신에게나, 그리고 그 아이에게나.” 김성철은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스려 불쾌한 기억이 더는 자신의 의식에 머무르지 않게 털어내버렸다. 기억은 흩어졌고 목소리 또한 사라졌다. 하지만 그 음성이 남긴 무거운 무게는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을 누르고 있다. “응? 갑자기 왜 그런 꿍한 얼굴을 하고 있어? 새로운 공선의 이름이 정해진 이 역사적인 순간에 말이야!” 기어코 마라키아의 검은 깃털 하나를 뽑아낸 베르텔기아가 나비처럼 날며 김성철에게 말을 걸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언제나처럼 동요 없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다. 베르텔기아.” 그 말대로 아무 일도 없길 바라며 김성철은 뒤돌아섰다. 붉게 번들거리는 새로운 그의 기함, 실피드가 드리운 웅장하면서도 미려한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드리운 우울한 그림자를 가려주었다. *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갔다. 겨울의 끝을 알리는 신호가 은자의 탑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할 즈음 김성철은 모든 준비를 끝내고 새로운 여정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승무원 문제는 의외로 가볍게 해결됐다. 베르텔기아가 제안한 에크하르트의 소형 골렘을 승무원으로 쓴다는 계획은 최상의 계획이었다. 소형 골렘들은 인간과 달리 봉급도 이념도 밥도 필요가 없었다. 다만 소형 골렘을 조종할 인원으로 주머니 안의 영혼석, 즉 카벙클을 써야 한다는 소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어차피 전투 중엔 다시 주머니 안으로 회수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김성철은 여행 도중 틈틈이 연금술의 지식을 이용해 자신의 새로운 공선을 보다 효율적으로 개조하리라 마음 먹으며 출발을 서둘렀다. “마라키아는 대체 어디 있는 거냐?” “그 녀석, 요즘 은자의 탑에 처박혀서 뭔가 꾸미는 거 같던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마라키아가 공선의 갑판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라키아의 입가엔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크크크크.. 이걸로 준비는 끝났다..” 아마도 은자의 탑에서 뭔가 흉측한 음모를 꾸민 모양이었다. 김성철이 불쑥 말했다. “또 개미위키를 보고 온거냐?” “삐이이이... 무슨 소리냐?!” 강하게 부정하는 걸 보아 아무래도 개미위키와 관련된 짓을 하고 온 모양이다.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무시하고 자신의 새로운 기함의 키를 두 손으로 잡았다. “아무튼, 슬슬 출발하지.” 소형 골렘이 정박지와 공선을 고정한 밧줄을 풀었다. 수십 개에 이르는 단단한 밧줄이 일제히 풀리자 공선의 선체가 한 차례 강하게 요동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김성철의 기함, 붉은 색의 실피드는 힘차게 창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해빙기를 맞은 개울과 숲이 김성철 일행의 앞에 드넓게 펼쳐졌다. ======================================= 84. 허수아비 왕 (1) “저기 또 하나가 퍼졌어.” 선내를 움직이던 소형 골렘 하나가 기동을 멈췄다. 자주 있는 일이다. 재앙의 파편은 확실히 대단한 힘을 지닌 물질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재료로 쓰는 것만으로 모든 형태의 연금아이템을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연금술사가 생각하는 형태의 최종물을 완전히 완성된 형태로까지 연성해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지금 선내를 돌아다니며 실피드의 운영을 맡는 소형 골렘은 모두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원래 골렘은 연금술만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 부분을 연성한 후 제작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제작은 대장장이 클래스가 지닌 고유 능력. 통상 노련한 전사들은 서브 클래스로 하급 대장장이 클래스를 넣어 자신의 무기를 관리하는 길을 택하지만 크럼부이, 팔 가라즈 같은 특별한 관리를 요하지 않는 무기를 사용해온 김성철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골렘 제작 같은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는데 신비로운 힘을 지닌 재앙의 파편 덕에 일사천리로 제작과정을 생략하고 골렘 그 자체를 연성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원인인지 소형 골렘들은 자주 작은 문제를 일으켰다.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던지, 갑자기 기동을 멈춘다던지 하는 사소한 문제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빈도수가 워낙 높아 김성철의 쾌적한 여정을 망치는데 일조했다. “음.” 김성철은 기동을 멈춘 소형 골렘의 팔을 한 차례 두드리고는 어깨를 살짝 뽑았다. 부스럭. 쇳가루 같은 것들이 관절 주변에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아무래도 그 이물질들이 고장의 원인인 것 같았다. 전직 메르킷 카벙클, 영혼석 5호기가 조종하는 소형 골렘은 고장 났던 팔을 이리저리 돌려보고는 고개를 끄덕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베르텔기아는 책 모서리로 소형 골렘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아이를 어르듯이 말했다. “그래. 그래. 착하지. 내 새끼.” “…….” 딱히 이 상황에 대해 김성철이 할 말은 없다. 영혼석들이 김성철의 말보다 베르텔기아의 말을 우선순위로 듣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그럴만한 사정도 있으니까. 사자토스로 부터 노획한 영혼석의 개방은 오로지 베르텔기아가 도맡아했다. 김성철이 한 것은 안개여정을 통해 베르텔기아를 꿈이 세계로 데려다 놓은 게 고작이니 말이다. 아무튼 고장 난 골렘의 수리를 끝낸 김성철은 다시 함교로 향했다. 갑판 위엔 남작이 들고양이처럼 엎드려 떡하니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량의 먹이를 필요로 하는 것 이외엔 실피드의 요긴한 자원이다. 남작은 공선의 정박시 기구와 공선을 묶는 삭구의 운반, 소규모 상륙, 정찰 등의 다채로운 역할을 할 수 있다. 김성철은 눈을 감고 있는 남작의 목을 한 차례 쓰다듬은 뒤 함교 안으로 들어갔다. 공선의 뇌라 할 수 있는 함교엔 마라키아와 영혼석 1호기 카벙이 조종하는 소형골렘이 있었다. “크크크....” 마라키아는 함교 구석에서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흑요석 석판 위에 마법의 힘으로 무언가를 새기고 있었다. “…….” 언제부터인가 마라키아에 대해서 일절 신경을 쓰지 않게 된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무시하고 그를 대신해 조종간을 잡고 있는 카벙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잘 되고 있나 카벙?” 소형 골렘은 목소리를 낼 수 없지만 대신 눈 부분을 껌뻑거려 대답을 대신했다. 몇 번의 깜빡임은 아무 문제없음! 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조종석 뒤 함장의 자리에 앉았다. 아퀴로아의 소유였던 공선 프로크루스테스엔 인간제국의 최신 공선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차원적인 기능이 즐비했다. 나름 공선 생활을 오래한 김성철조차 감탄을 금할 수 그 기능은 주로 지휘석에 집중되어 있었다. 김성철이 지휘석에 앉는 순간 그 앞엔 마법의 힘으로 만들어낸 다채로운 메뉴가 나타난다. 이를 통해 김성철은 공선이 세계의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 알 수 있는 건 물론이고 공선의 주요시설의 현황, 전투 지휘, 지금은 비활성화 됐지만 실시간으로 마법사를 통한 장거리 교신과 장거리 텔레포트 등을 실시할 수 있었다. ‘부유군도의 기술력은 대단하군. 그렘린이 출현하지 않을 아슬아슬한 한계까지 기술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실피드에 대해 알면 알수록 김성철은 실피드가 얼마나 대단한 공선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겉모습은 인간제국의 공선과 큰 차이가 없으나 항행속도, 안정성과 정숙성, 기동력, 내구도 모든 면에서 제국의 표준함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성능을 지니고 있었고 무엇보다 세부적인 편의성 면에선 인간제국의 함선이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의 세련됨을 지니고 있었다. 제국대원수 시절 김성철은 아퀴로아의 기함이 그저 돈만 많이 부어 겉모습만 아름답게 꾸민 쾌속함선 정도로 생각했지만 그 배의 주인이 된 지금은 그 생각을 싹 고쳐먹었다. ‘부유군도.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 전설에 따르면 부유군도는 위대했던 고대인의 후예들이 재앙을 피해 숨어 들어간 최후의 피난처라고 한다. 예전 같으면 김성철은 그 말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겠지만 세상의 진실에 근접한 지금은 모든 것이 의심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부유군도의 기술력은 진짜다. 그것만큼은 김성철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안드로아의 말에 의하면 부유군도는 세상의 서쪽 끝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그곳이 어디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김성철은 언젠가 부유군도 세력이 자신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다시 만나면 박살낼 뿐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 앞에 표시된 대륙전도를 응시했다. 현재 김성철의 기함 실피드는 남서쪽으로 쾌속 항진중이다. 목표는 대륙 남서부 끝자락에 자리 잡은 일레보로라 불리는 해안지대다. 루테기네아 치세 초기 바다에서 밀려오는 어인들을 막기 위해 성채를 세운 것들이 왕국으로 발전하여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 곳으로 대륙에 현존하는 18개의 왕관 중 4개의 왕관이 몰려 있다. 왕관의 숫자도 숫자지만 거리상으로도 은자의 탑에서 가장 가까운지라 자연스레 이곳을 첫 목적지로 잡았다. 하지만 김성철은 알고 있다. 일레보로의 지배자는 왕관을 쓴 4명의 왕이 아니라 왕관 없는 한 명의 상인이라는 것을. 대륙십삼걸 중 십삼걸. 상인연합길드의 총수 호르네코. 대륙에서 가장 융성한 무역도시인 아에게의 총독이자 모든 상인들의 정점에 서 있는 그는 일레보로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김성철의 적이다. 김성철의 저주 목록엔 아래와 같은 저주가 있다. 상인연합길드 블랙리스트 등재(세력: 상인연합길드 및 모든 하위 세력과 거래 불가능) 저주 자체에 특별한 힘은 없다. 교단의 파문과 유사한 어디까지나 선언적인 의미의 저주. 물론 상업을 영위하는 상인에겐 죽음보다 더 무서운 저주일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의 규율 따윈 훌훌 벗어던진 김성철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저주다. 그래서 호르네코는 김성철의 목에 막대한 현상금을 걸고 오랜 시간 그를 추적해왔고 암살교단의 암살자를 보내기도 했다. 그 이유는 김성철이 세계의 적이라는 것도 있겠지만 김성철이 무한금고라 불리는 상인연합의 금고를 탈탈 털어갔기 때문이다. 금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상인연합의 상인들에게 그것을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였다. 물론 김성철에게도 나름의 변명거리는 있었다. 상인연합은 세계의회가 출범한 이래 루테기네아 왕국이 독점하던 무역루트를 취해 그야말로 돈방석을 쌓았다. 아마도 순수한 금전적 이득으로 따지자면 세계의회에서 가장 많은 부를 쌓았을 것이다. 그렇게 세계의회 덕에 무럭무럭 성장한 주제에 정작 재앙의 해결엔 앞장서서 반대하는 건 물론이고 뒤로도 갖은 공작을 펼쳐 김성철 같은 재앙 해결파를 고립시켜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 상인연합이란 조직의 실체다. 평소 그들을 좋지 않게 보던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얻은 직후 상인연합의 무한금고에 침입해 그야말로 싹쓸이를 한 것이다. ‘상인연합과의 만남은 가급적 피한다. 빠르게 4개 소국의 왕을 만나 세계의회의 소집을 통지하고 이 공역을 떠나자.’ 붉은 공선 실피드는 눈 덮인 산맥을 넘어 일레보로 공역에 이르렀다. “우와. 정말 빠르고 편안하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공선을 구해 타고 다닐걸 그랬어!” 베르텔기아가 창밖을 보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로 공선을 통한 여행은 지금까지 겪었던 어떤 여행보다 안락했다. 김성철은 편안한 가죽을 깐 지휘석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대략 3시간 후엔 첫 번째 왕국의 공역에 들어서겠군.’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베르텔기아가 이쪽으로 날아오는 게 보였다. “저기.” “무슨 일이냐. 베르텔기아.” “우리, 익시온엔 언제 가는 거야?”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의 눈빛에 살짝 어두운 빛이 스쳤지만 그는 크게 내색하지 않고 평소의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엔 나중에 갈 생각이다.” “흐음. 지금쯤이면 그 거신 익시온에 도착하지 않았을까?” “그건 알 수 없지. 바다는 넓고 거신은 느리니까. 이왕 가서 허탕을 치는 것보다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게 좋지 않겠나?” “그것도 그렇지만!” 다행히 베르텔기아는 별 의심하지 않고 김성철의 말을 받아들이는 눈치였지만 아쉬운 속내를 감추진 않았다. “그래도 이번 기회에 연금술 실컷 했으니까 그걸로 된 걸까. 그래도 솔직히 말하면 당신이 바로 익시온에 갈 줄 알았는데!” 베르텔기아는 투덜거리며 함교 구석에 마련한 책꽂이 형태의 베르텔기아 전용 침대 안에 쏙 박혔다. 마라키아의 솜털을 뽑아 그 안에 집어 넣어 안락함을 더한 그 책꽂이는 김성철의 주머니를 대신해 베르텔기아의 새로운 안식처가 되어 있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가 책꽂이에 꽂히는 걸 보며 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군. 베르텔기아.’ 진로를 익시온 쪽으로 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껄끄러웠다. 55호가 남긴 말이 저주처럼 그를 망설이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55호의 말이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김성철은 당장 그녀의 말을 시험하는 것보다 당면한 문제, 세 번째 재앙의 해결을 처리하는 것이 여러모로 낫다고 판단했다. “어이. 부수는 자. 불청객이 나타났다.” 갑판을 떠돌며 운동에 매진하던 마라키아가 함교 안으로 들어왔다. 견시(見視)를 맡은 소형골렘도 함교와 연결된 소리파이프를 두들겨 무언가 상공 위에 나타났음을 알려왔다. 좌현 쪽이다. 김성철은 지휘석에서 일어나 함교 밖으로 나갔다. 과연 서쪽에 까만 점들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저건 뭐지?” 김성철이 시력이 좋은 마라키아에게 물었다. 이에 마라키아는 잘 안 보인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으음... 대기 상태가 좋지 않아 잘 안 보이는군. 화염정령의 정수가 있다면 좀 더 잘 보일 거 같은데.” 이에 김성철이 눈동자에 살기를 담아 노려보자 마라키아는 즉시 눈동자를 옆으로 돌리며 태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비룡이다. 전부 4기. 전부 인간들이 타고 있군.” “…….” 김성철은 입을 다문채 고개를 끄덕였다. ‘일레보로의 기사들이군.’ 공선을 타고 다닌다는 건 언제나 발견당할 수 있다는 위험을 내포한다. 그렇기에 각 국의 공선엔 그들의 소속을 멀리서도 식별할 수 있게 하는 깃발을 건다. 하지만 김성철의 공선엔 깃발이 걸려 있지 않다. 소속이 없기도 하거니와 김성철 본인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상인연합 측의 기사들이라면 조금은 귀찮아 지겠는걸.’ 김성철은 손수 거울을 들어 비룡기사 쪽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전투의사는 없고 승선을 허가한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이윽고 비룡기사들 측에서도 동일한 거울을 이용한 답변이 들어왔다. 지금 당장 승선하겠으니 함장 및 요인들을 갑판에 대기시키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지금 실피드에 순수한 의미의 인간이라고는 김성철 하나 밖에 없다. 김성철은 궁색하게나마 소형 골렘 두 기를 좌우에 거느리고 비룡기사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비룡기사의 소속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까지 거리가 좁혀졌다. 김성철은 기사들의 방패에 든 문양을 보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꼬챙이에 꽂힌 생선, 바다를 가르는 벼락, 암초에 부딪치는 파도 등 다양한 문양이 있었지만 김성철이 가장 염려하는 문양은 없었기 때문이다. 금괴 3개를 삼각형 형태로 겹쳐놓은 문양. 상인연합길드를 상징하는 삼금괴기는 적어도 여기선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낯선 불청객들은 전부 일레보로 지방에 자리 잡은 4명의 왕의 기사라는 이야기. 곧 비룡기사들이 실피드 주위를 선회하다 하나 둘 갑판 위에 안착했다. “규루루루루.” 낮잠을 자던 남작이 비룡의 기척을 느끼고 독수리 형상의 머리를 쳐들었다. 쿵. 기사들이 차례대로 비룡에서 내렸다. 갑판에 선 기사들은 실피드를 돌아보며 김성철에게 다가왔다. “당신이 이 배의 함장인가?” 기사가 물었다. 제법 고압적이고 신경질적인 목소리.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렇다라니?” 기사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그는 투구를 벗으며 김성철에게 다가왔다. “깃발도 안 걸고 건방지게 일레보로의 하늘을 나는 주제에 뭐라고? 그렇다.. 라고? 아주 간이 부었군. 그래.” 투구 안엔 고집스럽게 퉁퉁 부운 중년 사내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그는 아예 김성철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소리를 질렀다. “공선만 멋드러지면 모든 죄가 사해지는 줄 아나? 여긴 일레보로의 하늘이다! 국적기도 걸지 않고 우리의 하늘을 가로지르다니 간도 크군!” 김성철은 한 눈에 이 사내가 기사노릇을 하기엔 지나치게 살이 올라 있음을 발견했다. 게다가 방금 전까지 술을 퍼마셨는지 입을 벌릴 때마다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아무리 소국이라고 하나 이렇게 자기관리도 안하는 자가 기사 노릇을 하고 있다니.’ 김성철이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동안 그 기사는 계속 김성철 앞에 서서 훈계하듯 고성을 질러댔다. 그런데 이윽고 한 기사가 김성철의 얼굴을 보고 흠칫거렸다. ‘응? 저 얼굴은...?!’ 그는 즉시 화를 내는 중년기사에게 다가가 그를 제지했다. “저기 남작님. 이러시면 곤란할 거 같습니다.” “뭐? 뭐가 곤란하다는 거야? 이 뻔뻔한 해적은 당장 공선 밖으로 던져버려도 시원찮은데!” 중년 기사는 좀처럼 화를 거두지 않을 기색이다. 그러나 그의 분노를 잠재우는 데는 단 한마디의 말이면 충분했다. “저 사람. 세계의 적 같은데요?” 부하기사가 그의 귓가에 대고 한마디를 속삭였다. 노발대발하던 중년기사의 안색이 싹 변했다. “응...?” 그는 다시 눈을 비비고 방금 전까지 몰아세우던 사내의 얼굴을 제대로 응시했다. 알콜에 취해 몽롱한 정신머리 와중에 하나의 얼굴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인간제국에서 뿌렸던 수배전단, 상단부에 기재된 제목은 다름아닌 세계의 적이었다. “히.. 히이...!” “긴말은 하지 않겠다. 나를 너희들의 왕에게 날 안내해라.” 김성철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섰다. 기사가 머뭇거리자 김성철은 담담한 어조로 덧붙였다. “직접 찾아가서 전부 박살내버리기 전에 말이야.” ======================================= 84. 허수아비 왕 (2) 식탁 위에 놓인 것은 딱딱한 빵과 물 한 잔. 이 세상의 부의 절반을 쥐락펴락한다는 사내의 식사치고는 지나치게 검박한 식사였다. 상인연합길드의 수장이자 아에게의 총독이라는 직함을 지닌 사내는 딱딱한 검은 빵을 입안에 넣고 한참이나 우물거린 후에 한 잔 물과 함께 식도로 흘려보냈다. 소의 되새김질을 연상케 하는 식사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런 호르네코의 길고 검소한 식사는 상인연합길드에 속한 자라면 모두가 아는 공지의 사실이었다. 하지만 호르네코가 처음부터 이런 식사를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다른 부유한 상인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의복을 입고 각종 산해진미를 즐기고 몇 십 년 된 비싼 술을 사 모았다. 그런 그가 오랜 생활습관을 싹 바꾸게 된 것은 한 건의 절도사건에 기인한다. 그것은 절도라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사건이었다. 무한금고의 대약탈. 한때 제국대원수라 불리던 영예로운 자는 도적으로 돌변, 호르네코 자신과 상인연합의 힘의 원천이던 무한금고의 금은보화를 싸그리 털어갔다. 돈 자체가 권력과 직결되는 상인연합의 상승세는 맥없이 꺾였고 모든 비난의 화살은 자연스레 총독 호르네코에게 돌아갔다. 각종 향락을 유감없이 즐기던 호르네코가 돌연 검박한 수도승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주변의 비난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물론 대륙십삼걸이란 칭호와 세계의회의 전폭적인 지지가 그가 커다란 실책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지만 영리한 호르네코는 남들의 눈에 보이는 작은 행실 하나가 여론을 바꾸는 힘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생각은 정확했다. 무한금고 약탈로부터 9년이 흐른 지금, 위태로운 그의 자리를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는 오랜 시간 이어온 모범적이고 검소한 생활로 쌓은 작은 명성이었다. 그마저도 없었다면 진즉에 총독 자리에서 쫓겨나 작은 점포나 경영하는 일개 상인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를 지지해주는 세계의회가 세 번째 재앙의 공표로 유명무실해진 시점에 말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호르네코의 든든한 뒷배경이 사라지자 쟁쟁한 연합의 대상인들이 그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 젊은 청년 상인들은 호르네코의 행실과 인품에 반해 그를 지지하고 있지만 연배가 높은 중견 상인들은 9년 전의 사건을 결코 잊지 않았다. 사방에서 호르네코를 질타하는 압력이 일어났고 지금 호르네코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가장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자, 그럼 이야기를 계속해볼까?” 식사를 마친 호르네코는 줄곧 커튼 옆에 서 있던 검은 로브를 걸친 사내를 향해 눈길을 주었다. 성성한 백발, 카랑카랑한 얼굴. 호르네코는 그 사내가 한때 유명한 마법학교의 교수였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었다. 그 사내는 형형한 눈빛을 머금은 눈동자를 호르네코로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교단은 상술한 모든 것을 무상으로 제공할 생각입니다.” “그건 훌륭하군. 하지만 늙고 지친 장사치에게 투자하는 것 치곤 너무 과한 것 아닌가?” 호르네코의 가시 돋친 질문에 검은 로브의 사내는 하나의 양피지 두루마리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물론 조건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 어려운 건 아닙니다. 이 두루마리를 그저 총독께서 받아들이시기만 하면 됩니다.” 겉보기엔 오래된 두루마리. 투박하고 별 다른 장식도 없다. 하지만 호르네코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것이 그 아신의 힘을 부른다는 소환술식인가?’ 과연 두루마리 자체에서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고 거대한 기운이 은은히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오랜 기간 수많은 재보를 거래하며 감정해온 호르네코는 한 눈에 그 두루마리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이것은 신의 글과 유사하군. 종류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눈에 익은 형태와 기운을 내뿜고 있어.” 검은 로브를 걸친 사내는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르네코는 기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양피지를 향해 손을 벋었다. “한때 이런 신의 글이 상인연합 최고의 상품이라고 한다면 믿겠나? 무위의 암군 크롬갈드, 현재의 방랑왕은 이 기분 나쁜 문서를 기를 쓰고 모았지.” 호박을 박아 넣은 반지를 낀 손이 양피지에 닿았다. 그러나 호르네코의 손은 양피지 언저리에 머물 분 그것을 집지 않았다. 호르네코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과 비슷한 것을 공짜로 받다니. 기이하군.” 호르네코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내 경험에 의하면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인데 말이야.” 호르네코는 비상한 두뇌와 타고난 조심성을 통해 일찍부터 두각을 드러냈지만 그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은 직감이었다. 순간순간 번갯불처럼 뇌리에 번쩍하는 직감. 호르네코는 마치 하늘의 계시와 같은 직감을 통해 여러 번의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위험을 피해나갔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의 직감이 그에게 속삭인 것이다. 이 거래는 안전하지 않다는. 양피지에 머물던 손이 갑자기 주먹을 쥐었고 이윽고 양피지에서 멀어졌다. 검은 로브를 걸친 사내의 고개가 호르네코를 향해 돌아갔다. “그쪽이 원하는 진정한 조건이 뭔지 알고 싶은데?” 호르네코의 작지만 예리한 음성이 검박한 방안에 울려 퍼졌다. 검은 로브를 걸친 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호르네코는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이었다. “여기서 내가 몰락한다고 해도 나는 걱정하지 않아. 적어도 노후까지 유유자적하게 살 수 있는 기반을 이 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닦아 놓았거든. 그런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득실도 따질 수 없는 거래에 응할 거라고 생각하나?” 호르네코는 양피지를 놔두고 뒤돌아섰다. 일말의 흥미도 없다는 매몰찬 기류가 그의 전신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마침내 검은 로브의 사내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다시금 방안에 울려퍼졌다. 호르네코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수수께끼의 사내를 응시했다. “혼돈입니다.” 더하고 뺄 것도 없는 투박한 음성. 호르네코의 흐릿한 푸른 눈동자 깊숙한 곳에 이채가 떠올랐다. “혼돈?” “그 두루마리는 우리가 총독님께 제공한 것과는 종류가 다릅니다. 보다 특별하고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지요. 이 세상을 경천동지하게 할 정도로 말이죠.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혼돈의 모습입니다.” “내가 이런 걸 쓸 거라고 생각하는가?” 호르네코의 물음에 검은 로브의 사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호르네코의 판단에 전적으로 넘기겠다는 묵언의 표시였다. 호르네코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그거 마음에 드는군.” 요컨대 그 두루마리는 최후의 수단이 될 것이다. 호르네코가 궁지에 처할 때 뽑아들. 그로 인해 무슨 결과가 벌어질지 호르네코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종말교단의 관계자는 짧게나마 대략적인 파장을 이야기했다. 혼돈. 여러 가지 의미로 끝자락에 다다른 사내에겐 터무니없이 기분 좋은 울림이다. ‘종말교단은 어쩌면 혼돈신의 종복일지도 모르겠군.’ 호르네코는 다시 뒤돌아서서 이번엔 망설임 없이 양피지 두루마리를 집었다. 불경한 기운이 손끝을 타고 전신에 전해졌다.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나며 한 차례 부르르 떨렸지만 전율이 가신 후 호르네코에게 남은 건 한줄기 미소였다. ‘오호라. 종말교단 놈들. 이런 걸 내게 넘기다니.’ 호르네코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을 느꼈다. 두루마리 아니 그 안에 숨겨진 어떤 거대한 존재가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호르네코는 끝없는 무저갱에 빠져드는 것 같은 추락감을 느끼며 양피지를 들어올려 자신의 안주머니로 가지고 갔다. 그런데 양피지가 그의 주머니에 들어가기 직전의 누군가 다급하게 바깥에서 문을 두드렸다. 호르네코는 양피지를 내려놓고 책상으로 다가가 종을 흔들었다. 문이 열리며 상인의 복색을 한 자가 호르네코에게 고개를 숙이며 냉정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세계의 적이 님파스에 출현했다고 합니다.” “세계의 적이?” 호르네코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는 두루마리를 잡으려던 손을 거두었다. 종말교단의 사내가 흠칫 놀라며 이쪽을 응시하자 호르네코는 거둔 손을 쥐락펴락하며 달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이 거래는 보류하도록 하지.” 호르네코의 뇌리에 또 다른 직감이 번득였다. 직감이 가리키는 방향은 대박의 기운. 상인으로서 가장 뿌리치기 어려운 기회다. * 실피드에 올라탄 비룡기사들은 님파스란 나라에서 왔다고 한다. 그 이름은 세계를 주유했던 김성철에게도 생소한 이름이었다. 세계의회를 구성할 당시 김성철은 굳이 일레보로를 들릴 필요가 없었다. 일레보로 지방의 네 왕을 대리하는 대리인이 직접 라그란제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현재 상인연합의 수장을 맡고 있는 호르네코가 그 대리인이다. 그는 그 이후에도 그는 대륙십삼걸로서 일레보로의 소영주들을 대신해 의회에 참석했다. 툭. 김성철을 태운 남작이 낡은 요새의 중앙 정원 안에 착륙했다. 하늘 위에서 님파스 전체를 조감하던 김성철은 이 나라가 자신이 상상한 이상으로 약소국이고 국력이 형편없이 낮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일국의 수도라는 것이 제국의 2급 도시 수준만도 못하군.’ 애당초 왕을 칭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라고 해도 무방하지만 그들은 현명하게도 반란군이 어려운 시절부터 반란군을 후하게 대접한 전력이 있다. 줄을 잘 선 것이다. 그것도 하나의 능력이라면 능력,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이쪽입니다.” 이제는 고분고분해진 비룡기사들이 김성철을 그들의 왕이 머무는 궁성으로 안내했다. 왕성이라고 하나 김성철 눈엔 조금 더 화려하고 몸집이 큰 주택 정도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님파스의 왕은 정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홀의 중앙에 평상복을 걸친 채 앉아 있었다. 그다지 낯이 익지 않은 얼굴이다. 그것보다 대단히 젊은 얼굴이었다. 이제 겨우 약관을 넘겼을까. 절멸의 저주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소위 종말세대이리라. “님파스의 궁정에 온 것을 환영하오. 전 제국대원수.” 젊은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성철을 맞이했다. 김성철은 왕의 표정에서 기이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왕은 마치 존경하던 학자 혹은 열렬하게 사모하는 배우라도 만난 듯 찬탄어린 얼굴로 김성철을 응시하고 있었다. 싸늘한 시선 혹은 두려움에 찬 시선만을 받던 김성철에겐 생소한 경험. 김성철은 왕과 대조적으로 그의 중신들의 눈동자에 경계의 빛이 서린 걸 발견하고 팔 가라즈를 꺼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 김성철은 당신들에게 어떤 원한도 악의도 없음을 이 망치를 걸고 맹세하오.” 그렇게 말하며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번쩍 들어올렸다. 이름 높은 신물을 본 왕실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특히 왕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우... 우와아아아!” 젊은 왕은 체통도 잊고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쩍 벌리고 팔 가라즈를 응시했다. “저.. 저게 말로만 듣던 그 하늘의 파편을 벼려 만든 망치..?!” 어째 왕의 반응이 이상하다. 정신병자만 보면 자동으로 몸을 떠는 베르텔기아가 몸을 강하게 떨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나는데?”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왕의 반응을 지켜봤다. 중신들이 젊은 왕에 달라붙어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폐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체통을 지키십시오.” 중신들의 지적에도 젊은 왕은 정신을 못 차리는 듯 했다. 오히려 그는 중신들을 뿌리치며 김성철에게 다가왔다. “정말로 영광입니다. 말로만 듣던 실물을 뵙게 되다니.” “…….” 김성철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지나치게 초롱초롱한 젊은 왕이 다가오자 자기도 모르게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그 망치 한 번만 만져 봐도 될까요?!” ‘이 새끼 뭐냐?’ 김성철은 필사적으로 표정관리를 하며 마지못해 그의 신물인 팔 가라즈를 살짝 왕에게 내밀었다. “우.. 우와. 엄청 차가워 보이는데 전혀 차갑지 않아. 진짜 신기하네!” 젊은 왕은 신주단지 만지듯 팔 가라즈를 어루만지며 행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한편 그 동안 김성철은 점점 장내의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걸 느꼈다. 왕의 급작스런 행동에 모든 이들이 실망 혹은 당혹감을 느끼는 기색이 역력했다. 점점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찰나, 도도한 구두발 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폐하!” 싸늘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중신의 만류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젊은 왕이 여성의 목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라며 뒤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왕보다 더 화려한 복장을 한 젊은 여인이 눈썹을 곤두세우고 서 있었다. “흐음. 저 여자가 이 애벌레만한 나라의 왕비군.” 김성철의 뒷주머니에 쏘옥 들어 있는 마라키아가 다 안다는 양 거만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 84. 허수아비 왕 (3) 님파스의 왕비가 등장한 이후 장내의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김성철 일행은 귀빈용 응접실로 안내됐다. 시종은 김성철에게 왕과 왕비 사이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당부를 하고 응접실을 나섰다. 제법 넓은 응접실에 김성철 일행만 남자 마라키아는 코트 뒤에 달아놓은 배낭형태의 뒷주머니에서 기어 나와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뚜벅뚜벅 걸어 소파에 작은 몸을 앉혔다. 김성철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고까움을 억눌러 참으며 마라키아에게 물었다. “방금 그 여자가 이 나라의 왕비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넓은 견문을 쌓은 김성철의 안목이 불과 몇 달 전에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보다 못하다는 사실이 말이다. 김성철은 그다지 드러내진 않지만 자신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걸 마라키아가 정면으로 건드린 것이다. “네가 그 카벙클 골렘을 만드는 동안 나는 은자의 탑을 드나들며 많은 정보를 얻어냈지.” 김성철은 직접 보지 못했지만 나중에 베르텔기아가 고자질한 정보를 듣고 마라키아가 뻔질나게 은자의 탑을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라키아는 카네스의 주선으로 탑의 주인인 포르피리우스를 만나 의기투합하여 제법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포르피리우스 입장으론 재앙의 서에 기재됐다 사라진 속칭 ‘취소된 재앙’ 멸세의 왕이 귀여운 병아리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게 신기하기도 했거니와 그의 귀여운 모습의 이면에 감추어진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전설 속의 종족의 진실을 알게 되자 극진하게 대접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성철 일행에서 하찮은 취급을 당하다가 은자의 탑에서 왕 취급을 받자 마라키아의 자존감은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되살아났다. “알다시피 나는 검은 깃털을 가지고 태어난 멸세의 왕. 두뇌의 비상함은 하등한 인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인간이 평생에 걸쳐 간신히 습득할 지식 따위 이 마라키아님에게 걸리면 하룻밤 사이에 격파되지.” 그 말을 듣던 김성철의 눈자위가 살짝 실룩였다. “그래서 네 녀석의 직관력은 몇이나?” 빈정 상한 김성철이 물었다. 여간해선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직관력? 그건 왜 묻지?” 마라키아가 머뭇거리자 김성철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600은 넘냐?” “그.. 그건...” “500은 넘냐?” 이에 마라키아는 피식 웃으며 대수롭지 않은 듯 넘겼다. “예전엔 간단히 넘었지. 네놈에게 넘겨주느라 반토막이 나서 그렇지.” “지금은 못 넘는단 소리군.” “지.. 직관력이 지식의 전부는 아니야!” 마라키아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김성철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돌렸다. 마라키아의 눈자위가 부들부들 떨렸다. 힘의 차이를 확인시켜 준 김성철은 시종이 내온 차를 후루룩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잠시 이야기가 옆으로 새고 말았군.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듣고 싶은데.” “훗. 결국 내게 의지할 거면서!” 잠시 위축됐던 마라키아는 마치 불사조처럼 바로 기세를 회복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님파스 왕국에 관한 정보를 날개를 이야기했다. “그 여자, 님파스의 왕비의 이름은 옥산나라고 하는군. 다른 가문에서 시집 온 신분인데 지금은 사실상 님파스 왕국을 휘어잡은 실권자인 모양이야.” “왕비가 실권자라.” 왠지 그럴 것 같았다. 김성철은 젊은 왕이 왕비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 왕비의 명이 왕의 권위에 우선하는 것을 방금 전의 사건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흠흠. 왕비가 유력한 가문의 영애라는 모양이야.” 마라키아가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김성철은 마라키아의 시선 처리에 위화감을 느꼈지만 특별히 지적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떤 가문이지? 설마.. 호르네코는 아니겠지?” 불현듯 김성철의 뇌리에 잊고 있던 생각이 떠올랐다. 상인왕 호르네코에겐 딸이 대단히 많고 그 딸들을 좋은 가문에 시집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정작 좋은 혼처를 구한 딸은 몇 없다는 사실을. 그 일화는 약간의 틈만 있어도 흠 잡고 비꼬길 좋아하는 궁정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김성철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 호르네코야.” 마라키아가 멍하니 허공을 보며 말했다. “아에게의 총독 호르네코의 넷째 딸이라는군.” “그런가?” 김성철이 마라키아 쪽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물었다. 마라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원래는 고대왕국의 왕자와 혼담이 있었던 모양인데 왕비의 성격 때문에 혼사가 틀어졌다고 하더군. 고대왕국의 검왕의 평가에 의하면 부친을 닮아 똑똑하고 똑 부러진 성격까진 좋은데 기가 너무 강하고 뼛속부터 거만한 게 왕비가 되면 왕을 잡아먹을 상이라 거부했다는 모양이야. 실제로 검왕의 평가는 이곳 님파스에서 사실로 드러났고.” “별 걸 다 아는군.” 김성철은 마라키아의 지식에 솔직히 감탄하고 있었다. 짧은 시간 안에 궁색한 왕국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의 비화까지 꿰고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묘기니. 평소 같으면 주점을 찾아가 지역의 정보꾼을 수소문해 푼 돈 몇 푼 쥐어줘야 간신히 얻을 수 있는 정보다. 그런데 아까부터 느끼고 있었는데 어째 마라키아의 시선 처리가 이상하다. 보통 마라키아는 그래도 일국의 왕답게 대화를 할 때 시선을 허투루 두는 법이 없었고 의식적으로 위엄 있게 보이려고 시도했는데 지금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한 점을 느낀 김성철이 불쑥 물었다. “뭐 보고 이야기 하는 거냐?” “삐잇...?!” 마라키아가 화들짝 놀랐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다. 김성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라키아에게 성큼 다가갔다. 마라키아는 날개를 파닥거리며 뒤로 물러나며 김성철의 접근을 거부했다. “보긴 뭘 봐. 내 방대한 기억 속을 뒤지고 있는데.” “흐음...” 김성철은 격렬히 반응하는 마라키아의 반응을 보고 뭔가 있다고 느꼈지만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그렇게 잠자코 있자니 베르텔기아가 불쑥 말했다. “혹시 개미위키라도 보고 있는 거 아니야?” “삐기깃?!” 마라키아가 다시금 화들짝 놀랐다. 비명 소리로 보아 전보다 훨씬 놀란 모양새다. “무... 무슨 망언을 하는 거냐. 싸구려 리빙북!” 김성철은 역시 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국왕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왕비의 등장으로 잠시 미루어졌던 회견이 다시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김성철은 마라키아의 지식의 출처에 강한 의문을 느꼈지만 경중을 따질 줄 아는 사람답게 현재는 불문에 붙이고는 대신 한 가지 질문을 추가로 던졌다. “여기 국왕은 어떤 놈인가? 내가 보기엔 조금 모자란 놈으로 보이는데.” 김성철의 물음에 마라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코트 뒤의 배낭 같은 뒷주머니 안으로 쏘옥 들어갔다. “님파스의 국왕 디히터 3세는 어릴 때부터 형제 중에서 제일 모자란 인간으로 소문이 났더군. 정신병이 있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야.” “정신병이라.” 그 말을 들은 베르텔기아도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나도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면서 마라키아 쪽을 향해 몸체를 돌렸다. 마라키아는 베르텔기아의 도발을 철저히 무시하며 부리를 열었다. “아무튼 형제들이 알 수 없는 사고로 모두 죽은 뒤 자연스레 왕위계승자가 되긴 했는데 새 왕비를 들인 이후부턴 완전히 허수아비로 전락했다고 하더군.” “…허수아비라.” 왕관만 있는 왕들. 소국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심한 경우엔 일개 깡패에 의해 좌지우지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튼 그 허수아비 왕이 김성철에 대해 보이는 열렬한 관심은 진짜다. 김성철은 그 열광적인 모습이 어디서 본 것과 유사한지 무심코 떠올렸다. 투기장 시절, 김성철을 지지하던 소수의 팬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떠오른 것이다. 대부분 술주정뱅이에 도박에 미친 인간쓰레기들이었지만 투기장의 전투가 시작되면 누구보다 김성철의 이름을 크게 연호했고 밤이 되면 야광봉을 신명나게 휘두르던 그들은 일당백의 응원단이었다. 독불장군인 김성철 본인도 조금은 그들에게서 힘을 얻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지랄 같은 곳에 왔군. 하지만 굳이 대응할 필요는 없다.’ 어느 정도의 트러블은 이미 예상한 바고 김성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핵심은 간단하다. 그는 통지를 하러 왔지 설득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김성철은 왕과의 만남에서 이를 명확하게 할 생각이었다. * 시종은 왕의 거소로 김성철을 안내했다. 그다지 넓지 않은 궁궐이라 걷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다른 방문과 동일한 형태의 문 앞에서 시종이 멈춰 섰다. “이쪽으로 들어가시지요.” 김성철은 별 생각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든 그가 할 일은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안에 들어선 순간 김성철은 어떤 의미로 압도당했다. ‘뭐.. 뭐냐? 이것들은...?!’ 방 입구부터 김성철을 놀라게 하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중키에 마른 체구, 찢어진 청바지와 다 떨어진 셔츠 위에 낡은 코트를 걸친 검은 머리 사나이가 팔 가라즈와 똑같이 생긴 망치를 든 등신대 조각상이 우뚝 서 있었다. “…….” 그 조각상이 다름 아닌 김성철의 조각상이라는 건 굳이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아 오셨어요? 어서 들어오시지요.” 방 안쪽에서 젊은 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성철은 자신의 조각상을 스쳐지나가면서 더욱 충격적인 방안의 풍경이 자신을 압도하는 걸 느꼈다. “…?!” 사방천지가 김성철과 관련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김성철의 수배전단을 시기별로 모아 하나의 액자에 장식한 것이 있는가 하면 크고 작은 김성철의 석상, 김성철의 제국대원수 시절 군복, 아마도 사비를 들여 그렸을 김성철의 다채로운 그림들이 방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으음. 이건 조금 부러운데?” 마라키아는 감동을 받은 눈치였다. 주머니 밖으로 부리를 빼내고 시기심 어린 눈으로 구석구석을 돌아본다. 반면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이 가볍게 몸을 떠는 걸 느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당신 모습을 본 뜬 베개는 없네.” “그딴 게 있으면 이 왕국은 오늘 멸망이다..!” 김성철은 버럭 화를 내며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 중앙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자신을 지켜보는 님파스의 왕 디히터가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이게 다 뭐지?” 김성철이 감정을 억누르며 다그쳤다. “아, 이거 말입니까? 이건 제가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세계의 적, 아니 제국대원수님에 관련된 예술품들입니다!” 디히터는 자신의 컬렉션에 크나큰 자부심을 가진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김성철의 표정이 싸늘한 걸 깨닫고 급격히 움츠러들며 고개를 숙인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별 다른 악의는 없었습니다.” “으음...” 김성철도 디히터에게 별 악의가 없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잡동사니로 가득 찬 방 중앙에 자리 잡은 의자를 찾아 앉고는 잠시 서먹해진 대화의 불씨를 이어나갔다. “내가 여기 찾아온 것은 제국대원수도 세계의 적도 아닌 세계의회의 설립자 자격으로 찾아온 것이오.” “세계의회의 설립자?” 님파스의 왕 디히터가 물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세계의회의 개최를 통지하러 왔소.” 김성철의 말을 듣던 디히터는 별 관심없는 얼굴이었다. 없는 건 관심만이 아니다. 그는 김성철의 발언이 갖는 의미를 조금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가 뭘 하면 되나요?” 김성철은 답답함을 느꼈지만 세계의회의 설립자의 자격으로 온 이상 끝까지 예를 갖추어 공손하게 말했다. “봄이 찾아오는 산양의 달. 첫 번째 만월이 뜨기 전까지 대륙 동부의 익시온으로 참석해주시오. 왕관을 지닌 한 명의 왕으로서.” “아, 익시온요? 그곳으로 가면 되는 건가요?” 왕이 얼빠진 얼굴로 묻는 순간이었다. 왕의 거소의 문이 노크도 없이 열렸다. 문을 열어젖힌 것은 다름아닌 소국의 왕비 옥산나. 그녀는 경계와 불신, 혐오와 짜증이 뒤섞인 복잡한 얼굴을 한 채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이 여자만 온 건 아닌 모양이군.’ 김성철은 옥산나 뒤에 선 낯익은 인영의 존재를 눈치챘다. 아니나 다를까, 옥산나 뒤에서 한 사내가 느릿한 걸음으로 걸어나왔다. 수수한 검정 일색의 비단옷을 걸치고 용의 뼈로 만든 닳은 지팡이를 든 사내가 흐릿한 푸른 눈으로 김성철을 응시하며 왕의 거소로 들어왔다. 김성철은 그 얼굴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호르네코.’ 이제는 유명무실해진 대륙십삼걸 중 말석, 상인왕 호르네코가 김성철 앞에 나타났다. ======================================= 85. 뜻밖의 거래 (1) “얼굴이 많이 변했군요. 많은 사람들이 못 알아본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닙니다.” 호르네코는 김성철 앞에 지팡이를 짚고 서며 목례를 했다. “오랜만이군요. 전 제국대원수.” 공손하지만 비굴하지 않은 대상인 특유의 기품이 느껴지는 인사였다. 그와 대조적으로 김성철은 지그시 바라보기만 할 뿐 호르네코의 인사에 어떤 답례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시 돋친 말을 한 마디 내뱉었을 뿐이다. “에어푸르트에선 많은 신세를 졌소.” 마법학교 에어푸르트에서 김성철은 상인연합이 보낸 암살교단의 암살자의 습격을 받았다. 물론 그들은 분노한 김성철에 의해 대부분 처단되긴 했지만 중요한 것은 상인연합이 김성철을 공격했다는 사실이다. 호르네코는 김성철이 은근한 분노를 내비침에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이쪽이야말로 무한금고 사건 땐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덕분에 우리 상인연합은 뿌리까지 흔들릴 뻔했죠.” 공격성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느릿한 말이었지만 사건의 원인은 따지고 보면 김성철에게 있다는 걸 강조하는 묵직한 일격이었다. 김성철은 호르네코와 말장난을 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당신과 할 이야기가 없고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오. 내가 여기 온 것은 단지 왕관을 지닌 왕에게 향후 있을 일정을 통지하러 온 것뿐이니.”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고는 영혼창고에서 자신을 상징하는 팔 가라즈를 꺼냈다. 호르네코는 잠자코 있었지만 그의 뒤에 도열한 문 너머로 보이는 그의 측근들은 일제히 검을 빼들며 경계의 빛을 드러냈다.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 방안을 팽팽하게 채우기 시작할 무렵 의외의 사태가 일어났다. 왕비가 등장한 이래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님파스의 왕이 팔 가라즈를 보고 눈이 뒤집힌 것이다. “오오. 팔 가라즈의 멋짐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네요! 이것이 그 소문의 악마왕 해서니우스 맥스의 머리통을 박살냈다니.” 뜻밖의 독백에 팽팽하던 긴장은 맥없이 깨졌고 호르네코 옆에 서 있던 왕비는 경멸스런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디히터 왕의 뜻밖의 개입은 자연스럽게 상황을 변화시켰다. 먼저 그 흐름을 탄 건 호르네코였다. “제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과거의 일을 묻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다시 영혼창고에 넣으며 호르네코를 바라보았다. 호르네코는 이어서 말했다. “오히려 저는 한 명의 상인으로서 당신과 하나의 거래를 하려고 합니다.” “거래?” 김성철의 물음에 호르네코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에게 득이 되는 거래를 생각 중에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호르네코는 품속에서 하나의 문서를 꺼내 김성철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상인연합길드의 블랙리스트. 호르네코는 그 최상단에 등재된 김성철의 이름을 지우려고 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상인연합길드 총수의 자격으로. “우리에겐 당신과 같은 무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상인연합은 당신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뜻밖의 제안. 예상 밖의 상황이 전개됐다. 김성철의 진가는 혼란 속에서 빛을 발한다. ‘반드시 응해야 하는 계약은 아니다.’ 그러나 딱딱하게 굴 것만은 아니다. 세계의회가 무너진 지금 세상엔 과거의 적과 아군이란 구분은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이용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모두 이용한다. 재앙이 허락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니까.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호르네코를 향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잠깐,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 운명의 형태는 실로 다양하다. 둘도 없는 친우가 작은 이익을 두고 다투다가 철천지원수가 되는가 하면은 서로 목숨을 노리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던 원수들이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손을 잡기도 한다. 구 에어푸르트 마법학교의 천공학파 교수. 알투지우스 제로. 그는 과거의 형형한 빛이 남은 퇴색된 눈동자로 뜻밖의 인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운명이란 참으로 얄궂군.” 어찌 그 얼굴을 잊겠는가. 삶의 유일한 이유였던 손녀의 얼굴의 절반을 흉측한 시체의 몰골로 바꿔놓은 사내의 얼굴을 말이다. “…동감이오.” 달빛을 등 뒤에 받은 채 선 사내는 두건을 벗으며 쓸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팔 하나가 있어야 할 자리에 헐렁한 소매만을 펄럭거리고 있는 그 사내의 이름은 카즈 알메이라. 한때 암살교단의 4대 암살가문 중 하나로 손꼽혔던 알메이라 가문의 장남이다. 그러나 이제는 가족도 명예도 팔 하나와 살아갈 의지마저 잃은 채 부표처럼 떠돌아다니는 비참한 인생으로 전락했고 삶의 끝자락까지 떠밀려 왔다. “하필이면 내게 가장 큰 원한을 지닌 당신이 내 주인이 될 줄이야.” 카즈 알메이라는 조소하며 하나 남은 팔로 코담배를 꺼내 코로 가져가 깊숙이 짙은 향을 빨아들였다. 알투지우스가 무서운 표정을 지은 채 노려보는 동안 담배 하나를 모두 빨아들인 카즈 알메이라는 코담배를 바닥에 버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것도 나의 길흉화복. 복수조차 꿈도 못했던 비참함 속에서 죽느니 차라리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품은 채 영광스러웠던 과거의 나를 아는 인물에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카즈 알메이라의 외팔이 앞섶을 풀어헤쳤다.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오.” 그의 입가에서 진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알투지우스는 카즈의 숨결에서 담배의 역한 냄새뿐만 아니라 썩어가는 내장의 악취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싸구려 마약을 복용한 건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몸을 상했군.’ 카즈 알메이라의 형편없이 삭아버린 얼굴에서 더 이상 과거 암살자 시절의 잔혹함과 예리함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미 여러 가지 의미에서 끝났다는 징표가 분노가 걷히기 시작한 알투지우스 제로의 눈에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갈등했다. 그만큼 알투지우스가 카즈 알메이라에게 가지고 있던 증오가 깊었던 것이다. 목숨보다 중히 여기던 손녀의 얼굴을 절반이나 앗아 가버린 놈이니. 그 때문에 사라사 제로는 영원토록 얼굴의 절반을 기괴한 은가면으로 가려야 하는 불운한 운명 속에서 살게 되었다. 빠드득. 알투지우스의 이가 갈렸다. 늦겨울의 한기를 머금은 바람이 땅거미가 지는 서쪽에서 불어왔다. 땅거미가 지고 곧 어둠이 둘을 덮었고 하늘 위엔 태양빛에 가려졌던 성좌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결단의 시간이 찾아왔다. 알투지우스는 체념한 채 고개를 돌리고 있는 카즈를 노려보았다. 알투지우스의 지팡이가 카즈를 향했다. 이윽고 지팡이와 알투지우스 전신에 기하학적인 마법진들이 하나 둘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천공학파 최강의 마법, 원시의 빛이 영창되기 시작한 것이다. 카즈 알메이라는 두 눈을 감았다. 그는 이미 죽을 마음을 굳힌 것으로 보였다. 알투지우스가 마지막 영창을 끝내고 처형의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이었다. 문득 하나의 얼굴이 알투지우스 제로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알투지우스의 눈동자가 경련을 일으켰다. 종말교단의 교주대행. 프리츠 슈넬메르커. 갑자기 떠오른 사내의 얼굴이 알투지우스의 처형을 중지시킨 것이다. 슈넬메르커는 에어푸르트를 따난 이래 갈 곳을 잃고 광야를 헤매던 알투지우스와 사라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은인이었다. 그는 분명 알투지우스보다 나이는 적었지만 알투지우스가 학교라는 울타리에 갇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다가올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과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재산, 지위, 명예 같은 외적인 것은 물론이고 오랜 원한 같은 사사로운 감정까지 말이죠.”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알투지우스는 어쩌면 지금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슈넬메르커가 자신에게 내린 시련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었다. ‘그 자라면 그럴 수도 있다. 내 각오를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카즈 알메이라라는 미끼를 내게 던진 지도 모른다.’ 지팡이와 전신을 뒤덮은 마법진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급격히 회전하던 마나의 흐름이 다시 체내에 흡수되는 걸 느끼며 종말교단의 검은 로브를 걸친 과거의 노교수는 뒷짐을 진 채 카즈 알메이라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의 선택은 불살. “죽이지 않는 거요?” 카즈 알메이라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너는 교단에서 보낸 귀중한 자원자다. 어찌 내 사사로운 원한으로 널 죽일 수 있겠는가?” 짐짓 침착하게 말하고 있지만 다혈질인 천성은 숨길 수 없는지 그의 목소리는 부자연스럽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 폐인생활로 사리판단이 흐릿해진 카즈 알메이라는 그 미묘한 떨림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를 받아들여 주겠다는 겁니까?” 카즈 알메이라의 눈동자엔 감출 수 없는 환희의 감정이 들끓고 있었다. 착잡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알투지우스는 가슴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속삭이는 증오의 목소리를 뿌리치기 위해 다른 생각을 의식적으로 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카즈 알메이라에 관한 것이었다. 알투지우스는 카즈 알메이라가 김성철에게 패배해 한 팔을 잃고 쫓겨난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카즈 알메이라는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알투지우스가 물었다. “너는 암살교단의 고위 가문의 후계자다. 그런 네가 어찌하여 교단에 가입해 성전에 자원하게 되었는가?” 그 물음은 카즈 알메이라의 흐릿한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타오르던 분노와 증오의 불길을 일깨웠다. “당신과 당신의 가족이 나를 증오하듯, 나 또한 증오하고 원망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는 너무나도 강했죠. 복수라는 단어조차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알투지우스 제로는 그것이 누군지 알고 있다. 기이한 사내라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알 수 없는 사내였다. 알투지우스는 조그만 소리도 크게 들리는 천공학파의 회당 안에서 이해할 수 없는 책을 붙잡고 몇 시간이나 씨름하던 사내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세계의 적, 김성철.’ 암살자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당신은 모를 겁니다. 복수조차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원수를 상대로 느끼는 절망감을.” “…….” 알투지우스는 카즈 알메이라의 눈동자에 불타오르던 증오의 불길이 점점 광기로 뒤바뀌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달라진 목소리로 카즈 알메이라가 말했다. “하지만 종말교단엔 방법이 있다 들었습니다. 내 가족을 처참하게 죽이고 가문을 멸망시킨 그 저주받을 놈에게 복수를 꿈꿀 수 있는 방법이 말입니다.” 알투지우스는 이제 알 수 있었다. 카즈 알메이라가 김성철에 대해 지닌 복수심은 자신이 카즈 알메이라에 대해 지니고 있던 것과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투지우스의 복수심이 참고 안 참고를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의 문제였다면 카즈 알메이라의 복수는 그 자체로 삶의 남은 유일한 이유이자 목적이었다. ‘쓸 만한 소재가 되겠군.’ 알투지우스는 카즈 알메이라를 죽이지 않았던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카즈 알메이라를 향해 하나의 문서를 건넸다. “이것이 너의 염원을 이루어 줄 것이다.” 카즈 알메이라는 두 손으로 공손히 부정한 기운을 머금은 문서를 받아들었다. 카즈의 입가에 감출 수 없는 광기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것.. 이것만 있으면.. 복수를 할 수 있겠군요.” “너에게 허락된 시간은 단 1분이다. 단 1분 안에 끝장내지 않으면 너의 목숨만 헛되이 사그러들 것이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일레보로 교구장 어른. 암살이란 찰나의 예술이니까요.” 완전히 생기를 되찾은 카즈 알메이라의 눈동자와 얼굴에 과거의 예리한 암살자의 기풍이 돌아오고 있었다. 이윽고 시리도록 차가운 안광을 발하며 카즈 알메이라가 물었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상대방은 당신들의 우상인데.” 카즈의 물음에 알투지우스 제로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아무 감정도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대체할 우상은 있다.” 그 말을 남긴 채 알투지우스 제로를 뒤돌아서서 뒤편에 그림자처럼 머물던 종말교도와 함께 어둠 속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알투지우스의 흐릿한 목소리가 파도처럼 다가왔다 희미하게 부서졌다. “조만간 사람을 보내겠다. 그때까지 부디 경거망동 하지 말도록.” 광야에 홀로 남은 카즈 알메이라는 부정한 두루마리를 든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을 밝히는 별중에 유난히 붉은 빛이 도는 별이 있었다. 살인자의 별. 암살자들의 수호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에 가장 빛난다. * 만물박사가 된 마라키아는 당연히 상인연합의 내부사정도 상세히 꿰고 있었다. “최근 호르네코는 자리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하더군. 너에게 손을 뻗는 이유도 결국은 위협에 처한 자신의 입지를 지키기 위함이야.” 김성철은 신나게 거만한 목소리로 떠들어대는 마라키아의 뒤로 불쑥 돌아가 보송보송한 검은 솜털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김성철에 눈에 무언가 포착됐다. 마라키아의 전신을 은은히 흐르는 지식의 끈을. 김성철이 거기에 손을 갖다대자 모든 의혹은 일시에 해소됐다. [ 개미위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역시 그걸 썼군.” 김성철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나왔다. 마라키아는 뒤늦게 자신의 방심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마라키아는 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뒤돌아섰다. “고.. 고의는 아니었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나름대로 복제품을 만들었을 뿐이다.” 마라키아는 기억하고 있다. 김성철이 개미위키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지금도 응당 응분의 처분이 따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마라키아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던 김성철은 뒤로 물러서며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쁘지 않군.” “저.. 정말이냐?!” 마라키아의 물음에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개미위키 켜도 된다.” ======================================= 85. 뜻밖의 거래 (2) [ 저주 - 상인연합길드의 블랙리스트 등재가 해제되었습니다. ] [ 당신은 지금부터 상인연합길드 세력과 자유로운 거래를 할 수 있습니다. ] 저주 하나가 풀렸다. 그것은 그 자체로 마력을 지닌 상인연합길드의 장부에 사선을 긋는 것만으로 효력을 발했다. 물론 이런 저주 하나가 없어진다고 해서 능력치에 별 다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행운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매력이 오르는 것도 아니다. 저주 해제는 김성철이 다시 상인연합과 거래를 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빠른 결단으로 넓은 아량을 보여주신 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밀실에서 호르네코는 단 서기 1명만을 대동하고 김성철과 협상에 나섰다. 대단한 배짱이었다. 사실 호위 몇 명을 두나 두지 않으나 김성철이란 맹수 앞에선 아무 의미 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것과 행하지 않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대원수님께서는 단순명쾌한 걸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에 맞춰 간단히 이쪽의 요구사항을 말씀드리죠.” 호르네코가 먼저 조건을 말했다. 김성철은 차분하게 호르네코의 말을 기다렸다. 조금이라도 말장난을 하거나 그런 기색을 보일 경우엔 이 협상은 무효라는 생각을 품으며 말이다. 이윽고 호르네코가 입을 열었다. “제 요구사항은 간단합니다. 보름 동안 님파스 궁정에 머물러 주십시오.” “…….” 김성철의 얼굴엔 별다른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김성철은 호르네코의 제안에 살짝 놀랐다. ‘무슨 꿍꿍이지?’ 전혀 생각지도 않은 조건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호르네코는 김성철의 눈치를 살피며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걸 의식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시선을 오직 책상 바닥에 두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 후 호르네코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이런 제안을 드러내는 이유는 현재 상인연합 내에서 제 입지가 대단히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세계의회가 건재했을 땐 이런 일이 없었지만 그것이 유명무실해진 지금 저는 안팎에서 거센 비난과 정치적 공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전 총독 자리를 내놓을 것도 생각하고 있었죠. 당신이 오기 전 까지는.” “나를 외부의 적으로 삼겠다는 소리요?” 김성철이 불쑥 입을 열었다. 책상 바닥을 보던 호르네코가 고개를 들어 김성철을 응시하며 희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의 위기는 내부를 결속시키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지요. 이미 그 명성이 세계 전역을 떨쳐 올리고 있고 과거에 무한금고를 한 차례 약탈한 전력이 있는 당신이 상인연합의 중심지 주변에 도사리는 것만으로 제가 할 수 있는 게 많아집니다.” 김성철은 호르네코의 사정 따윈 묻지 않았다. 자신과 호르네코가 만나고 있다는 걸 다른 대상인들이 알고 있지 않냐는 따위의. 그렇게 허술한 일처리를 할 거면 현재의 호르네코는 없었을 것이다. ‘딱히 내게 불리한 조건은 아니다. 보름 정도의 시간이 거슬리긴 하지만 그것 또한 호르네코가 내게 뭘 제시하냐에 따라 달리 볼 수 있는 것이겠지.’ 이제는 대가를 들을 시간이다. 김성철은 바닥을 응시하는 호르네코에게 물었다. “내가 이곳에 머물러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오?” “상인연합의 전폭적인 지원입니다. 송구한 말씀이오나 제 딸인 옥산나를 통해 당신이 일레보로에 무엇을 요구하러 왔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호르네코는 거기까지 말한 후 다시 고개를 들어 김성철을 응시했다. “세계의회를 재소집하려고 하신다고요?” 여러 가지 중의적인 의미가 담긴 질문이었다. 특별히 나서서 해명할 이유는 없지만 김성철은 이 기회에 자신의 뜻을 알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진의를 밝혔다. “세 번째 재앙을 해결하기 위한 회합이오. 다른 뜻은 일체 없소. 그리고 내가 하나의 왕이 될 생각 또한 추호도 없고.” “누가 왕이 되든 그것은 우리 상인들에게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면 안정된 질서지요. 우리 아에게의 상인들이 마음 놓고 무역을 하기 위한.” 그럴 듯한 말이다. 하지만 김성철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호르네코의 달변을 허락해봐야 자신에게 득이 될 건 하나도 없는 걸 알기 때문이다. 김성철이 침묵하자 호르네코는 다시 책상 바닥을 겸허한 표정으로 응시하며 서기에게 손짓했다. 서기는 호르네코에게 하나의 문서를 내밀었고 호르네코는 그것을 검토한 후 다시 김성철에게 내밀었다. “이런 걸 준비했습니다.” 김성철은 호르네코가 내민 종이를 보았다. 그것은 상인연합 총독의 명령으로 발한 명령서였다. [ 아래의 문서를 지정된 국가에 상인연합의 총독 자격으로 전할 것 ] [ 왕관을 지닌 왕에게 전함. 세계의회의 설립자가 올해 첫 의회를 개최하오니 산양의 달, 첫 번째 만월이 뜨기 전까지 대륙 동부의 익시온의 회의장으로 참석해주길 바람. ] “문서 문구는 일단 제 임의대로 써봤습니다. 추정하거나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서기에게 알려주세요.” 김성철은 문구를 살폈다. 딱히 더하거나 뺄 부분은 없었지만 몇 가지를 추가해 넣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뒤이어 호르네코가 말했다. “여기에 더해 저는 상인연합의 통신망을 당신에게 제공할 생각입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상인연합의 통신망은 대단히 유용하지요. 그리고 내키신다면 저희 상인연합 소속의 국적기를 그쪽에 제공할 용의도 있습니다. 깃발 없이 타국의 공역을 항해하는 건 여러 가지 작은 문제를 일으키니까요.” 나쁘지 않은 조건들이다. “이 정도면 괜찮겠습니까?” 김성철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었다. 호르네코가 제시한 게 상인연합이 김성철에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의 전형적인 예시였으니까. “이 정도면 적당한 것 같긴 한데.” 김성철이 그렇게 말하자 호르네코가 또 하나의 소품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지금까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김성철이 처음으로 관심을 보였다. 호르네코가 꺼낸 것은 맹약의 십자가였던 것이다. “우리 사이엔 오랜 원한의 골이 있지요. 세상이 변했다고 마냥 무시하기엔 지나치게 깊은 골이 말입니다. 그런 이유로 이런 걸 준비했습니다.” “내 심장엔 빈자리가 없소.” 김성철이 말했다. 호르네코는 고개를 들어 김성철을 응시하며 히죽 미소 지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호르네코가 돌연 십자가를 움켜쥐었다. 김성철은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과연 이 녀석이 그런 짓을 할까. 어쩌면 속임수를 쓰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김성철에게 눈속임은 통하지 않는다. “중립신에게 전하노니, 상술한 계약조건을 에오도어 호르네코의 심장을 걸고 지킬 것을 맹세하며 그것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 제 심장을 중립신에게 기꺼이 바치겠나이다.” 호르네코는 김성철이 지켜보는 가운데 맹약의 십자가를 높이 들고 그것을 그대로 자신의 심장을 향해 꽂아 넣었다. 맹약의 십자가는 모든 것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검은 빛을 내뿜으면서 마치 그것이 원래 호르네코의 일부분이었던 것 마냥 옷과 살갗을 뚫고 그의 심장 안에 들어가 꽂혔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눈속임은 아니군. 확실히 맹세했다. 중립신의 이름을 걸고.’ 생각지도 못한 쇼였다. 같은 십자가를 심장에 지닌 김성철은 계약 불이행의 대가가 즉각적인 죽음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을 호르네코가 김성철의 눈앞에서 시연한 것이다. 김성철을 대신할 서한의 통지, 정보망의 제공, 그리고 별 필요는 없지만 국적기까지. 호르네코가 살아 있는 한 김성철이 만족할만한 조건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아무튼 호르네코의 목숨을 건 맹약은 협상의 분위기를 자신 쪽으로 끌고 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 입니다.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십자가를 지닌 호르네코는 이제는 더 이상 책상바닥을 보지 않았다. 김성철은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흐릿한 눈동자의 시선이 생각보다 껄끄럽다는 걸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약조대로 보름간 님파스 쪽에 머물겠소.” “훌륭하군요. 다만 판세에 따라 약간의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약간의 도움?” “무력지원은 아니니 오해마시길. 저희가 추가로 원하는 건 약간의 제스츄어 정도에서 그칠 겁니다.” 어차피 무력지원을 요구해도 김성철을 계약 이외의 일에 따를 생각은 없었다. “협박 정도라면 도와줄 수 있소.” “훌륭하군요.” 호르네코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 앞의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둘의 대화를 기재하던 서기가 정리에 동참했다. 회담이 파하려고 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의아함을 느꼈다. ‘기이하군. 분명 무한금고의 금은보화의 반납을 요구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전체는 아니더라도 절반 정도의 반납 정도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르네코는 그 이야기를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분명 본인으로서도 욕심나는 이야기고 충분히 꺼낼만한 이야기임에도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정리를 마친 호르네코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무인주화들은 잘 간수하고 계신가요?” “그럭저럭.” 조금 뜨끔하긴 했지만 김성철은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마음 놓고 쓰셔도 됩니다. 무인주화에 관한 모든 제재와 명령은 제 권한으로 취소될 예정이니까요.” 환한 미소를 남긴 채 호르네코는 방을 떠났다. 뜻밖의 계약은 뜻밖의 형태로 체결됐다. * 보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처음에는 실피드를 개조하거나 소형 골렘들을 유지보수하며 보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김성철은 기회를 포착했다. 상인연합길드의 블랙리스트에서 해제되었다는 것. 그것은 그동안 김성철이 꿈도 못 꾸었던 다양한 거래의 가능성을 활짝 열린 것을 의미한다. 김성철과 호르네코의 협상이 타결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아 한 상인이 김성철을 찾아왔다. 김성철이 마라키아, 베르텔기아 등 그의 도당을 이끌고 님파스의 보잘 것 없는 정원을 산책하던 때였다. “어이. 저길 좀 봐. 저거 너의 조각상 아니냐?” 마라키아가 정원 뒤편, 땔감이 수북이 쌓인 창고 옆을 가리켰다. 과연 그곳엔 김성철의 것으로 추정되는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땔감용으로 쓰기 위에 여기저기 팬 자국도 있지만 김성철은 조각상 표면에 서투른 검사가 휘두른 칼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땔감 창고 옆엔 중년의 시종 하나가 장작을 옮기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를 불러 조각상을 가리켰다. “폐하께선 정기적으로 대원수님의 조각을 교체하십니다. 아마도 이건 예전에 쓰던 조각상인 것 같군요.” “그렇군.” 이유가 납득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기분이 나쁘다. 누군가의 조각상을 만들어놓고 그걸 함부로 다루는 건 전통적인 저주의 방식 중 하나이니. 물론 이런 소국에서 아무리 저주를 해봐야 김성철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김성철은 너그럽게 마음을 품고 산책을 계속했다. 반대편 쪽에 한 여성이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님파스의 궁정인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상인의 차림새. 짧은 머리를 양갈래로 묶어 발랄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 여성은 젊다기보다는 앳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상인연합의 상인인가.’ 김성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님파스 궁정은 이미 호르네코 일파의 상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니 상인 하나 둘 정도 궁정 내에 있는 게 이상할 것도 없다. 그렇게 그녀를 지나치려는 찰나였다. “안녕하세요. 제국대원수님.” 젊은 여성이 김성철에게 말을 걸었다. 김성철은 살짝 고개를 돌려 그 여성을 응시했다. 흐릿한 푸른 눈동자가 어디서 본 것과 닮았다. “저는 상인연합의 상인, 데르하라고 해요.” “자기소개를 부탁한 적은 없는데.” 김성철은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여간한 사람이라면 그 위압감에 눌려 입도 뻥긋 못했겠지만 간이 큰 것인지 아니면 둔감한 것인지 데르하는 오히려 빵긋 웃으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기엔 풋내기로 보이지만 무려! 중계 거래를 전문으로 하고 있답니다. 지옥에서 온 중간상인이 있다면 바로 저 데르하를 말하는 것이지요.” 김성철은 순간적으로 이 젊은 여자가 엄청난 멍청이거나 아니면 대단히 둔감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판단했다. “구하시고 싶은 물건 있다면 뭐든 말씀해주세요. 가문의 힘을 이용해 구할 수 있는 건 뭐든 구해드릴 테니까요!” 김성철이 계속해서 위험신호를 보내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고 자기 할 말을 계속하는 걸 본 마라키아가 김성철의 등을 날개로 툭 치며 말했다. “내가 나설까? 신선한 생간이 그립군.”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김성철은 데르하를 보며 담담하면서도 간결한 어조로 말했다. “신의 글을 구해와라. 기한은 하루를 주겠다.” “신의 글? 그게 뭐죠?” “기한 안에 구하지 못한다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진짜 신의 글을 구하겠다는기대를 품고 한 말은 아니다. 김성철로서는 산책을 방해하는 귀찮은 잡상인을 쫓아내기 위해 한 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가 지났을 때 김성철은 시종으로부터 한 손님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마라키아를 만족시킬 썩은 요리를 만들던 김성철은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얼굴에 표시하며 귀찮은 손님을 맞이했다. “나는 여자라고 봐주지 않는다.” 그렇게 김성철이 으름장을 놓을 떼 데르하는 김성철 앞에 무언가 한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툭. 보따리 안엔 세월을 가늠할 수 없는 고문서 수십 개가 잔뜩 널려 있었다. 그중 하나를 집어 든 김성철은 자신의 감각을 의심했다. 데르하가 가지고 온 것은 전부 다 아신이 작성한 신의 글이었기 때문이다. “대충 비슷한 걸 추려서 가지고 왔는데 어떠신가요?” 데르하는 눈을 껌뻑이며 놀라움에 빠진 김성철을 응시하며 그 답을 기다렸다. ‘이건 전부 다 신의 글이다.’ 정신없이 신의 글들을 감정하던 김성철은 데르하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혹시.. 마음에 안 드시나요?” 그녀의 물음에 김성철은 이계로 오기 전에 본 전설적인 TV광고를 연상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따봉.” ======================================= 85. 뜻밖의 거래 (3) 김성철은 즉시 무인금화가 가득 담긴 상자 하나를 영혼창고에서 꺼내 데르하에게 내밀었다. “어머. 통 한 번 크시네요!” 데르하는 김성철이 내놓은 상자를 자신의 영혼창고에 집어넣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간단하게 계약 성립이다. 김성철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김성철은 데르하가 상자 여러 개를 요구하면 기꺼이 내줄 생각이었다. 이제 그에게 금전 따위는 별 의미가 없는 반면 신의 글은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내포한 귀중한 물건이니 말이다. 그녀가 떠난 후 김성철은 즉각 자신의 숙소에 틀어박혔다. ‘보름이 아니라 한 달로 할 걸 그랬나.’ 신의 글을 읽는 건 김성철로서도 상당한 인내력과 에너지를 요구한다. 많이 읽어봐야 하루에 두 권 정도가 한계. 데르하가 김성철에게 판매한 신의 글의 숫자는 무려 34개에 달한다. 하루에 2개를 읽는다고 쳐도 2주가 꼬박 걸리는 숫자다. 김성철은 일단 할 일이 정해지면 지체하는 법이 없다. 그는 마라키아와 베르텔기아에게 자유행동을 명한 뒤 자신을 푹신한 등받이 의자에 앉아 내키는 대로 신의 글 하나를 꺼내 봉인을 풀었다. 막강한 힘이 서린 문서의 봉인이 풀리면서 김성철 앞에 별천지가 펼쳐졌다. 김성철은 예상외의 행운에 더해 강렬한 기대감이 몸을 휘감고 들어가며 온 몸에 전율이 이는 걸 느꼈다. ‘이번 여정은 정말 운수가 좋군.’ 행운 수치가 거의 없다시피 고정된 김성철에게 이런 기회는 천 번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호재다. 길에서 우연히 주운 복권이 당첨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까. 김성철은 기분 좋게 어떤 아신이 쓴 글귀가 떠오르길 기다렸다. 곧 그 앞에 오직 읽는 자만이 해석할 수 있는 아신의 글귀가 나타났다. [ 모든 승천자를 대신해 낙원의 주민들에게 인사드립니다. 오랜 기간 수많은 징표를 통해 알려왔던 낙원의 감사제가 곧 개최됩니다. ] 거기까지 읽은 김성철의 고개가 옆으로 갸우뚱 기울어졌다. “응?” 그는 계속해서 신의 글을 읽어 나갔다. [ 이번 감사제에선 낙원의 주민을 위한 많은 선물과 은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낙원의 주민은 널리 이 사실을 전파하여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이 신을 위한 제전에 참가할 수 있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 신의 글은 거기서 끝이 났다. 김성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지만 놀랍게도 그 신의 글의 끝은 거기가 한계였다. ‘이럴 리가.’ 김성철은 가지고 있던 두루마리를 재차 읽었지만 내용은 같았다. 김성철은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집어던지고 다음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여느 신의 글과 마찬가지로 두루마리를 쥐자 그 두루마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아신의 막강한 힘이 느껴졌다. ‘이번엔 제대로 된 놈이겠지.’ 김성철은 심호흡을 하며 다음 문서를 읽어 나갔다. [ 모든 승천자를 대신해 낙원의 주민들에게 인사드립니다. 오랜 기간 수많은 징표.... ] 김성철은 거기까지 읽고 그 문서를 집어던졌다. 더 읽을 필요도 없었다. 똑같은 저자, 똑같은 내용이다. 저자가 누군지 신의 글이 명시하지 않아 알 길은 없었지만 김성철은 오감 전체를 통해 그 의미를 전달하는 신의 글 특유의 분위기에서 전에 본 문서와 동일한 느낌을 받았다. ‘설마 이것들 찌라시 같은 건가.’ 김성철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다음 문서를 꺼내 읽었다. 경험치가 쌓였다고 해야 되나, 이제는 두루마리를 펼치기만 해도 저자의 분위기, 성격, 스타일 등 다양한 정보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귀중한 경험에 의하면 이번 문서는 다른 저자에 의한 것이다. ‘이번엔 제대로 된 것이길.’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신의 글의 문구가 시야를 덮어나가는 것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곧 아신의 글귀가 떠올랐다. [ 감사제를 준비하기 시작한 작년 겨울부터 현재까지, 단 일각도 잠을 잔 적이 없다. 이제 본격적인 정식 개막을 이틀 앞 둔 오늘. 회고해보면 수많은 비난이 있었다. 일일히 대응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스산한 바람소리가 신전 밖을 때린다. 그야말로 전투 전의 정적.. ] 거기까지 읽었을 때 김성철은 운명과도 같은 불길함 예감에 다시 한 번 사로잡혔다. ‘이거.. 느낌이 영 안 좋은데...’ 김성철은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감각을 느끼며 나머지 문구를 읽어 나갔다. [ 니들이 허접한지, 우리가 허접한지는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나.’ 김성철은 그대로 신의 글을 읽는 걸 멈추고 내팽겨 쳤다. “아까부터 왜 그래?” 옆에서 불쑥 베르텔기아가 말을 걸어왔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의 기척을 눈치 채지 못했다. 아무래도 신의 글을 읽는 데 정신이 팔린 동안 열린 창문을 통해 방안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님파스 왕이 저녁 식사 같이 하자고 하던데?” “님파스 왕이?” “응. 잔뜩 기대하는 눈치더라.”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닌데.” 김성철은 다음 신의 글을 상자에서 꺼냈다.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이 바닥에 쓰레기 버리듯 내팽겨 친 신의 글들을 힐끗 보고는 다시 김성철을 응시했다. “응? 비싼 돈 주고 산 걸 왜 아무렇게나 버리고 그래.” “내용이 마음에 안 들어서 말이야.” “아깐 뭐 따.. 따본? 아무튼 그런 파브르적인 말까지 하면서 좋아했잖아.” “따봉이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베르텔기아. 하나만 더 읽어보마.”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의 양해를 구하고 서둘러 다음 신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가 서두르는 이유는 조바심이 났기 때문이다. 그가 금화 궤짝 하나를 지불하고 산 수십 권의 신의 글 전체가 쓰레기일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말이다. 곧 김성철 앞에 새로운 신의 글 내용이 펼쳐졌다. 분위기가 앞서의 문서와는 다르다. 다른 저자에 의한 것이다. [ 10년만의 감사제는 완벽하게 말아먹었다. ] 단 한 문장만 보고도 김성철은 뒷내용을 연상할 수 있었다. “에라이!” 김성철은 참지 못하고 다시 신의 글을 집어 던졌다. 그걸 본 베르텔기아가 퉁명스레 말했다. “따봉이라며?” “…따봉 취소.” 김성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동자엔 야수와 같은 흉포함이 흐르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여자 아직 이 주변에 있겠지?” 김성철은 당장이라도 데르하를 잡아 족칠 기세였다. 그러나 바깥으로 나가려는 김성철을 베르텔기아가 몸으로 가로 막았다. “안 돼! 님파스 왕이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고 했잖아.”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하지만 일은 김성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코트 자락을 물어지고 필사적으로 그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실랑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이 저녁이거든? 창밖을 보라고! 저 어둑어둑한 하늘이 보이지 않아?” 그녀의 말대로 바깥은 이미 저녁을 넘어 밤이 오고 있었다. 하늘이 베르텔기아를 돕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김성철은 일단 내일을 기약하고 오늘은 왕의 만찬에 참석하기로 했다. 아에게 항과 님파스는 엎어지면 코 닿을 때고 지금 아에게로 간다고 해도 그 복잡한 항구도시에서 데르하를 찾는다는 보장은 없으니 말이다. 시종이 곧 문을 두드리며 시간이 되었다고 전해왔다. “마라키아는 어디에 있는 거지?” 김성철의 물음에 베르텔기아는 한숨을 쉬며 답했다. “벌써 참석했을 걸.” “그래?” “그 녀석, 이상하게 가는 곳마다 인기가 있단 말이야. 은자의 탑도 그렇고.” “그런가?” “응. 매력이 높아서 그런 걸까?” “그럴 리가.” 대체로 환영을 받지 못하는 남자 김성철은 새가 자신보다 매력이 높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식적으로 무시하고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이어 도착한 만찬회장은 제법 구색을 갖춰놓은 요리들이 갖춰져 있었고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까지 섭외되어 있었다. 만찬회장의 참석자는 호사스런 규모에 비해 소수였다. 님파스 쪽에선 왕과 왕비, 기사단장과 궁정대신 4명이 참석했고 김성철 쪽에선 남작을 제외한 그의 무리 전원이 참가했다. 디히터 왕은 김성철은 물론이고 그의 동료들의 자리까지 정성을 다해 세심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마라키아를 위해서는 과일을 올린 모이를 준비했고 베르텔기아를 위해서는 잉크를 준비했다. 물론 잉크를 먹지 않는 베르텔기아는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아무튼 오늘은 여러분들을 위한 자리입니다. 님파스의 왕으로서 정성껏 준비했으니 사양 말고 마음껏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디히터 왕은 만면에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만찬의 시작을 알렸다. 데르하 건으로 그다지 심기가 좋지 않은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식사를 시작했다. 요리의 수준은 40~50점대. 제법 실력 있는 주방장의 요리임은 분명하지만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지닌 김성철에 비하면 한참이나 모자란 솜씨다. 김성철은 멀리서 만찬 장면을 지켜보는 주방장을 향해 의식적으로 코트 자락을 펄럭여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드러내면서 요리에 입을 대다가 자체적으로 요리가 평이하고 개성이 없다는 평을 내린 이후엔 거의 입을 대지 않았다. 요리가 맛있다고 할 수도 없거니와 테이블 너머에서 고스란히 보이는 왕과 왕비의 관계에 보다 눈길이 갔기 때문이다. ‘처참하군.’ 왕비가 이 나라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일국의 왕이 남들이, 그것도 자신이 모셔온 귀빈 앞에서 왕비에게 완벽하게 무시당하는 건 김성철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다. “이것도 한 번 들어봐요.” 왕이 왕비에게 직접 음식을 덜어 접시에 담아 건네기를 수차례. 왕비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왕의 호의를 거듭 무시했다. 지켜보는 쪽이 오히려 무안할 정도의 냉랭한 기류가 흐르는 건 덤. 김성철은 젊은 왕의 얼굴에 흐르는 어색한 미소에서 그가 얼마나 깊은 모멸감을 느끼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저 여자, 아주 독하군.’ 저러기도 쉽지 않다. 아무리 남편이 싫다고 해도 그래도 부부라는 자각이 있는 이상 남들 보는 앞에서 남편에게 저토록 무안을 주는 건 어지간히 독한 마음이 없고서야 불가능하다. 평범한 부부라고 해도 충분히 구설수에 오를만한 일인데 디히터와 옥산나는 일국을 대표하는 왕과 왕비의 관계다. 사적인 자리라고 해도 지탄을 받을 것인데 공적인 자리에서마저 저런 식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 행동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으. 저것 좀 봐. 저 여자 진짜 장난 아니네.” 베르텔기아도 왕비의 무자비한 모습을 보고 김성철에게 다가와 속삭일 정도였다. 왕과 왕비의 관계가 이토록 파탄이 나 있다 보니 다른 님파스 왕국의 참석자의 얼굴이 밝을 리가 없다. “오렌지를 먹은지 얼마나 오랜지!” 만찬 초반에 썰렁한 농담을 하며 분위기를 띄워보려고 했던 기사단장은 언제부터인가 벙어리가 되었고 궁정대신 또한 와인잔을 든 채 굳은 얼굴로 입술만 축이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즐거운 자는 오직 한 명 마라키아 밖에 없었다. “으하하하하하!” 과일을 뿌린 모이를 호쾌하게 들이키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 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더니 나중에는 식탁 위에 올라갔다. “밥상 위에 올라가면 못 써!” 베르텔기아가 경고를 해보지만 이미 흥이 오른 마라키아의 귀에 베르텔기아의 잔소리가 들어올 리가 없다. 그는 식탁을 가로질러 건너편에 있는 왕비에게 걸어가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왕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뭐... 뭐야...’ 안 그래도 표정이 썩어있던 왕비다. 이상한 새까지 자신 앞에 나타와 빤히 쳐다보니 인내심이 버틸 리가 없다. 안색이 보기에 위험해 보일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하찮은 인간의 감정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마음조차 없는 마라키아는 왕비를 뚫어지게 보더니 이어 불쑥 말했다. “이야. 인간 중에도 흑요석의 멋짐을 아는 자가 있다니.” 마라키아가 왕비에게 다가간 것 이유는 단 하나였다. 똑같이 흑요석으로 만든 목걸이를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비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르는 것도 모르고 마라키아는 유쾌하게 날개를 파닥거리며 소리 높여 외쳤다. “이럴 때 나하크의 언어로 하는 말이 있지. 요- 소토!” 왕비의 인내가 한계에 달했다. 마라키아는 유쾌하게 다시 외쳤다. “같이 하자고. 요-소토!” 마라키아의 유쾌함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 왕비는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짜증 나.” 툭. 그녀는 걸고 있던 목걸이를 끊어내며 식탁 위에 집어던지다시피 내던지고는 종종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디히터가 바로 뒤따라가 그녀를 달래보려 하지만 왕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왕의 손길을 뿌리치는 또 다른 꼴사나운 모습만을 연출할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무안해진 건 마라키아였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김성철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니, 저 하등한 인간 왜 저러나? 설마 내가 야만적인 인간 풍습에 대한 금기라도 건드린 건가?” 이에 김성철은 식기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잘했다. 마라키아.” 왕의 중신들이 듣고 있는 자리지만 김성철은 거리낌 없이 말했다. “밥맛 떨어지게 하는 여자를 제 발로 쫓아버리다니 제법이군.” 중신들의 낯빛이 변하게 할 정도의 수위의 발언. 김성철은 개의치 않았다. 먼저 실례를 범한 건 그 쪽이므로. 곧 복도 너머에서 왕비의 앙칼진 고함이 울려 퍼졌다. “하기 싫다고 몇 번을 말했어! 내가 하기 싫다고 하면 하지를 말아야지! 왜 당신 생각대로만 하냐고!” 김성철은 그 고함을 들으며 말없이 와인이 담긴 술잔을 기울였다. 이윽고 초췌한 얼굴로 디히터 왕이 돌아왔다.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김성철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이미 파탄 난 분위기를 추슬러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왕비가 오늘 기분이 안 좋은가 보네요. 원래는 저런 사람이 아닌데.” 김성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부간의 일이고 저쪽은 소국이라고 해도 일국의 왕이다. 불쾌하다고 해도 그냥 넘어가주는 것이 예의다. 오랫동안 외교관 비슷한 생활을 하며 몸으로 체득한 관례라고는 할까나.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김성철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 왕국, 문제가 있다. 님파스 왕국의 고질적인 문제를 발견한 다음 날, 김성철은 겁도 없이 제 발로 찾아온 데르하의 방문을 받았다. 이번에도 신의 글이라 쓰고 찌라시라 읽는 쓰레기 한 뭉텅이를 가지고 온 건 덤. “왜.. 왜 이러세요!” “마라키아. 쪼아라!” 마라키아를 동원한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김성철은 사기극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저.. 저는 선량한 중개인일 뿐이에요! 신의 글을 판 건 장물할아범에요!” “장물할아범?” “따지려면 그 사람에게 따지세요. 저는 그저 당신이 신의 글이 필요하다고 해서 가지고 온 것뿐이니까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마냥 데르하의 잘못으로 치부할 수도 없는 사정이 있다. 설명이 불충분한 건 김성철의 잘못이니. “장물할아범이라.”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다. 김성철은 그 문제의 인물을 한 번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에게 항으로 가야 하나. 9년 만이군.' 범인은 반드시 현장을 다시 찾는다는 추리소설의 격언을 되새기며 김성철은 여장을 꾸렸다. ======================================= 86. 뒷골목의 상인왕 (1) 상인연합의 본거지 아에게 항에 가기 앞서 김성철은 몇 가지 준비를 했다. 가장 큰 변화는 스타일의 변화다. 뼛속부터 단벌신사의 유전자를 지닌 그는 오랜만에 즐겨 입는 낡은 청바지와 셔츠, 허름한 코트라는 복장 대신 상인들이 즐겨 입는 치렁치렁한 단추 없는 상의와 통이 큰 바지,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신고 챙이 불룩하면서도 넓은 모자를 눌러 썼다. 그것만으로 모자란 지 김성철은 얼굴을 손아귀로 감싸 쥐고 무언가를 시도했다. 우드득. 우득. 뼈마디가 꺾이고 뒤틀리는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성철은 전혀 다른 용모의 사내가 되어 있었다. “뭐.. 뭐야? 어떻게 한 거야?!” 누구보다 깜짝 놀란 건 베르텔기아였다. 하지만 뒤이은 김성철의 변하지 않은 음성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나다. 베르텔기아. 놀라지 마라.” “어떻게 한 거야? 그거?” “예전에 취미 삼아 배운 잡기지.” “잡기? 대체 그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베르텔기아의 물음에 김성철은 과거의 인연을 떠올리며 얕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내 옛 동료 중에 최고의 암살자가 있었다.” “최고의 암살자? 백영? “비열하게 뒤치기나 하는 놈이 최고의 암살자를 자처하면 곤란하지. 그 친구, 샤말 라지푸트는 진정한 의미의 암살자였다.” 김성철은 보통 암살자를 경멸하지만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 대륙삼걸 샤말 라지푸트. 암살교단의 교주인 그는 전장 한 복판에서 몇 차례의 전설적인 암살을 성공시켜 반란군의 승리에 일조했다. 뿐만 아니라 소환광장 동기인 그는 김성철에게 여러 모로 영향을 준 인물이기도 했다. “이 변안술은 그에게 배운 것이다.” “흐음. 옛날엔 친구가 꽤 있었던 모양이네?” “뭐, 그런 셈이지.” “그런데 이런 좋은 기술을 알면서도 왜 지금까지 쓰지 않았던 거야?” 베르텔기아의 물음에 김성철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표정을지으며 대답했다. “불편해서.” 김성철에게 그보다 타당한 이유는 없을 것이다. 물론 한 번 쓴 적이 있긴 하다. 소환궁전에서,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철혈기사단의 고위기사 앞에 정체를 밝힐 때 김성철은 변안술을 썼었다. 그리고 느꼈다. 더럽게 불편하다는 걸.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불편을 감수해야 할 때다. 김성철은 호르네코와 계약관계에 있는 상태니. 물론 계약내용을 꼼꼼히 따져보면 김성철이 아에게 항에 가는 건 계약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가 지고 있는 의무는 님파스와 그 인근일대의 체류니. 마차로 2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 아에게 항은 충분히 인근일대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허투루 그런 내용을 기재한 것은 아닐 것이다. 호르네코 정도의 사내가 그런 모호한 조항을 넣는 건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일 것이다.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때 김성철을 아에게 항 앞까지 부른다던지 할 때를 대비해서 말이다. 아무튼 이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김성철은 굳이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 결과가 바뀐 얼굴이다. “자, 그럼 출발.. 응...? 누구세요?” 김성철의 방으로 들어온 데르하가 깜짝 놀라며 김성철을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바라본다. 그만큼 완벽한 변신이다. 김성철은 자신의 변신에 만족해하며 베르텔기아와 함께 데르하의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엔 김성철이 수령을 거부한 짜투리 신의 글 더미와 향료 같은 물건과 함께 한 사내가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수수한 옷차림에 얼굴을 두건으로 가린 상인이다. 김성철이 데르하에게 묻자 데르하는 대수롭지 않게 자신의 조수라고 대답했다. ‘저런 여자에게도 조수가 있는 모양이군.’ 김성철은 저 상인이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나저나 그 병아리 녀석. 잘 하고 있을까?” 베르텔기아가 불쑥 주머니 안에서 입을 열었다. “마라키아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영 안심이 안 되서 말이야.” “놈은 그렇게 만만한 새가 아니다.” 마라키아가 김성철 앞에서 바보짓을 종종 하는 건 맞지만 그건 김성철이 있기에 바보짓이 되는 것에 불과하다. 김성철 같은 막강한 존재가 없다면 마라키아의 기괴한 행실은 왕의 기행 정도로 포장될 것이다. 실제로 조금 멍청한 구석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자기 말마따나 머리가 좋은 건 사실이다. 혼자 놔둬도 큰 문제는 되지 않으리라. 알에서 처음 태어났을 때보다 몸집이 조금 커지기도 했으니. 아무튼 데르하의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그리고 출발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마차는 국경에 이르렀다. 간담한 검문이 실시된 후 마차는 국경을 넘어 상인연합의 자치령 안으로 들어갔다. “흐음. 여기도 농사는 짓는구나. 상인들의 도시라고 해서 농사 같은 건 일절 안 짓는 줄 알았는데.” 베르텔기아가 창밖으로 펼쳐진 드넓은 경작지를 보며 말했다. 아직 아무것도 심지 않아 흙빛 그대로의 경작지였지만 베르텔기아는 그 땅 위에서 힘차게 땅을 일구는 농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채소를 심기 위한 밭일 겁니다. 곡물이야 먼 곳에서 가지고 온다손 쳐도 신선한 야채는 가져오기 어려우니까요.” 잠자코 있던 구석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낯익은 목소리다. 베르텔기아는 깜작 놀라며 그를 돌아다보며 물었다. “님파스 왕...?” 그 말을 들은 사내는 베시시 웃으며 두건을 벗고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다. 베르텔기아가 눈치 챈 것처럼 그 사내의 정체는 님파스의 왕 디히터였다. 김성철은 놀라지 않았다. 처음 그를 봤을 때부터 머릿속에 떠오른 선택지 중 하나였다. 다만 귀찮아서 그리고 지금의 모습이 불편해서 그냥 놔뒀을 뿐이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꼭 한 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세계의 적.. 아니 제국대원수님과 함께 모험할 수 있다는 걸요!” 김성철은 들뜬 목소리로 두 주먹을 부르 쥔 디히터를 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여기 온 거지? 데르하와 아는 사인가?” 그 물음엔 마부석에 있던 데르하가 천으로 만든 작은 커튼을 직접 걷으며 대답했다. “님파스의 국왕폐하는 저의 형부랍니다.” “그렇군.” 흐릿한 푸른 눈동자가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호르네코의 핏줄이었던 모양이다. 김성철은 그 말을 듣고 변안술로 뒤틀렸던 얼굴에 손을 대고 원래대로 되돌렸다. 호르네코의 딸이 인솔잔데 굳이 변장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는 마부석을 보며 말했다. “총독도 이 사실을 알고 있나?” “아니오. 모르실 거예요. 설령 안다고 해도 신경 쓸 여력이 없겠죠. 지금 한창 바쁘실 때거든요.”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엔 님파스의 왕 디히터에게 시선을 옮겼다. “국왕이 왕국을 비워도 문제는 없나?” 그 물음에 디히터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문제는.. 없을 겁니다. 왕국이라고 부르기에 과분한 소국이라 할 일도 없고 게다가 궁에는 왕비가 있어서요.” 왕비라는 말이 나오자 김성철은 마부석 쪽을 힐끗 보더니 영혼창고에서 스크롤 하나를 꺼냈다. 무음결계다. 결계를 펼친 김성철은 왕에게 말했다. “그 왕비하고는 어떻게 결혼하게 된 거지?” 왕비 이야기가 나오자 디히터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면서 마부석 쪽을 두려운 눈으로 응시했다. “무음결계를 쳤다. 그러니 앞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 그런가요?” “어제 만찬 때 왕비가 보인 행동은 문제가 많더군. 내 비록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라고 하나 불쾌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 부분은 정말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해하진 마세요. 저는 왕비를 사랑하고 있고 왕비 또한 저를 좋아하고 있으니까요.” 그 말이 나오자마자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주머니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던데요. 왕님.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혐오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뜬금없는 출현에 이은 묵직한 직설. 디히터의 표정이 통제를 잃고 복잡한 감정을 그대로 내비쳤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가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지금 같은 기회가 아니면 어디서 듣겠는가. 한 술 더 떠 김성철도 베르텔기아의 말에 동조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며 김성철은 지그시 디히터를 관찰했다. 디히터의 얼굴엔 한마디 말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갖은 고뇌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간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한 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러간 후 디히터는 허공을 응시하며 슬픔이 묻은 음성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왕비는 절 좋아하지 않아요. 성에 차지도 않았겠죠. 강대국인 고대왕국의 왕자와 교제하다가 저 같은 소국의 이웃나라 왕자가 결혼하게 됐으니.”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마라키아의 정보대로군.’ 디히터는 계속해서 말했다. “같은 왕자라고 해도 고대왕국의 왕자와 저는 살아온 길이 전혀 달랐죠. 그 남자가 혼의 망해를 먹고 무럭무럭 성장하며 왕국의 소드마스터들에게 깊은 가르침을 받아온 반면 저는 왕성이라고 부르기도 초라한 곳에서 아버지가 상인연합 사람들에게 야단맞는 걸 보고 자라야 했으니까요.” 김성철의 눈썹 하나가 치켜 올라갔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뭐,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보니 엄청난 격차가 난 거죠. 한쪽은 대륙십삼걸에 근접한 차기의 영웅이 된 반면 이쪽은 그저 언제 뺏길지도 모르는 왕관만을 지닌 허수아비 왕이 되었으니까요.” “허수아비라는 자각은 있네.” 베르텔기아가 디시 한 번 묵직한 직설을 날렸다. 김성철은 그래도 정치계에 발을 담군 인물이라 다른 부분에 관심을 보였다. “왕관을 뺏긴다고? 누가 왕관을 탐하는 거지?” 김성철의 물음에 디히터는 마부석 쪽을 응시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의 장인이신 호르네코 총독께서 왕관을 쓰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호르네코가?” “네, 원래는 왕이 될 마음이 추호도 없었는데 최근 정세 변화에 따라 지위가 위협을 받자 생각을 고쳐먹었다고 하더군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권력의 상징, 즉 왕관을 원하게 된 거죠.” 어눌하게 말하고 있지만 김성철은 디히터가 의외로 정세판단이 뚜렷하고 나름의 생각을 가진 인물이라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친구. 아주 바보는 아닌 모양이군.’ 디히터는 한숨을 내쉬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뭐, 어쩌겠습니까? 사실을 안다고 해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요. 예전부터 그랬죠. 그래서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제국대원수님의 열렬한 지지자가 된 것은.” 침울하던 디히터의 눈동자에 생기가 다시 돌았다. 그는 이내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김성철을 응시하며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 같은 한심한 놈과 달리 제국대원수님은 홀로 서셨잖아요. 지위, 명예, 친우. 모든 것을 버리고.” “…….” “그리고 증명하셨지 않습니까? 자신이 옳다는 것을.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말입니다.” 낯 간지러운 말이긴 하지만 김성철은 왜 저 아무 연고도 없는 젊은 왕이 자신을 그토록 숭배하는지 알게 되었다. 툭툭. 김성철은 미약한 진동을 느꼈다. 마부석의 데르하가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소리는 나지 않지만 진동으로 이를 감지한 김성철은 무음결계를 풀고 커튼을 직접 걷었다. “무슨 일인가?” “왜 이리 대답이 늦으세요? 거의 다 왔다고요.” “알겠다.” 짧은 대담은 여기서 끝난 모양이다. 김성철은 눈짓으로 디히터에게 이야기의 끝이 왔음을 알렸다. 디히터는 여전히 우울함이 묻은 얼굴로 고개를 힘없이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전 왕비를 정말로 사랑합니다. 첫 눈에 반했죠. 그것만큼은 진실입니다.” 그걸 본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에게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진짜 불쌍하다...” 김성철도 같은 생각이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영혼창고에서 검 하나를 꺼냈다. 반짝반짝 빛나는 인간제국의 군도. 고기 자르는 용도로 쓰긴 했지만 원래는 제국장군 이상에게 지급되는 고급장교용 군도다. 김성철은 그것을 자신의 팬인 디히터에게 내밀었다. “약소하나마 내게서 주는 선물이다.” “이.. 이건 뭡니까?” 디히터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제국대원수에 임명될 때 황제에게 받은 검이다. 이야기에 어울려 줬으니 마땅한 보상을 해야지.” “오오.. 이런 귀중한 물건을.. 이.. 이런 초 진귀한 극 레어 아이템을 제게 주시다니...” 검을 받은 디히터의 눈가엔 한방울 눈물이 맺혔고 두 손은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진짜 감격하는 모양이다. 조금 아깝긴 하지만 그렇게 기뻐해주니 김성철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검을 받은 소국의 왕이 김성철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격렬하게 인사했다. 아무리 소국의 왕이라도 해도 왕은 왕. 김성철은 디히터의 허리를 일으켜 세우며 약간은 당황한 어조로 말했다. “왕이 이러면 못 써.” “흐음...” 베르텔기아는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며 그런 김성철과 디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디히터는 재차 힘찬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어느새 아에게 항의 입구를 통과해 세계최대의 무역항에 들어서고 있었다. 김성철은 창문을 열어젖혔다. 물씬 풍기는 바다 내음과 함께 갈매기 소리가 머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 86. 뒷골목의 상인왕 (2) 재앙이 몰고 온 전운이 대륙 전체에 드리우고 있다지만 적어도 아에게 항에서 그런 이야기는 딴 세상에 있을 법한 이야기로 들렸다. 거리는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 찼고 곳곳에 활기 넘치는 상인들이 목청 높여 대륙 곳곳에서 매입한 이국적인 물건을 팔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게서 재앙에 대한 두려움이나 전쟁에 대한 공포 따위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이곳 사람에겐 그런 것조차 하나의 기회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오로지 돈만이 최고의 가치이고 그 이하의 것들은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에게 사람들의 오랜 습성이니. 아에게의 대부호부터 밑바닥의 놈팽이까지 두루 모인 상인연합길드 증권거래소는 아에게 사람들의 본질을 볼 수 있는 최상의 장소다. “언제 전쟁 나냐?” “너무 보채지 마. 곧 날 테니. 쓸데없는 계집질에 돈 쓰지 말고 현금이나 비축해 둬.” 악명 높은 증권거래소를 지나며 김성철은 길바닥에 앉아 대낮부터 술을 마셔대는 주식꾼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전쟁나면 어디 주식을 사는 게 좋을까?” “전쟁 난 다음 사면 무슨 의미가 있어. 전쟁나기 전에 미리 사둬야 의미가 있지.” 오직 돈이 된다는 이유로 무수한 피를 부를 수 있는 전쟁이 나길 학수고대하는 사람들을 보며 김성철은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군.’ 증권거래소를 지난 마차는 아에게의 뒷골목에 들어섰다. 아에게의 뒷골목엔 상인연합의 묵인 하에 각종 마물, 마수, 각 종족의 노예, 마약 따위 타국에서 법으로 금지된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김성철은 노예상인들이 소환광장에서 데리고 온 노예들을 경매하는 걸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흐음. 보기가 좀 그렇네.” 베르텔기아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소환광장에서 죽느니 노예를 선택한 건 그들 자신이기에. 다른 한편으론 의문이 들었다. ‘소환광장. 그것도 신이 직접 만든 것일까?’ 예전 같으면 의문조차 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의 구조물로 알려진 은자의 탑이 부서지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중립신이 만들었다는 소환광장도 어쩌면 계단 너머의 신과는 무관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정상 다시 갈 일은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 번 확인해보고 싶었다. 자신을 이 세계로 불러 온 소환광장이 대체 어떤 곳인지. 그런 생각을 품으며 김성철을 태운 마차는 아에게 항에서 가장 으슥하고 은밀한 영역에 들어섰다. 건물로 가로막힌 정방형의 공터. 사방에서 칼로 찌르는 듯한 살기가 느껴졌다. 김성철은 마차 근처에 수많은 괴한이 공격할 의사로 포진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감히 세계의 적상대로 이런 짓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곧 마부석에서 데르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외할아버지의 경호원들이니까요.” “외할아버지?” 김성철이 물었다. “네. 장물할아범이라 불리는 분은 바로 제 외할아버지예요.” “그랬었군.” 호르네코와 데르하, 데르하와 장물 할아범. 모두 혈연으로 연결된 사이다. 놀랄 일도 아니다. 상인 세계에선 위로 올라갈수록 핏줄을 중요시여기니까. 하찮은 소상인 때야 피를 나눈 형제끼리도 뒤통수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돈이 모이고 힘이 쌓이면 다른 어떤 집단보다 혈연 단위로 끈끈하게 뭉치는 게 상인 집단의 속성이다. 권력은 나눌 수 없다지만 상인 세계에서의 권력은 돈에서 나오고 돈은 뭉치면 뭉칠수록 힘을 발하기 때문이다. 그런 집단에서 집안싸움은 가문 전체의 몰락으로 귀결되길 마련이다. 하물며 상인연합에서 정점에 오른 호르네코 가문이랴.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부석을 향해 담담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외할아버님의 성함이 어떻게 되나?” 김성철의 물음에 데르하는 언제나처럼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외할아버지 성함은 음, 그건 함부로 말하기 어렵네요. 비밀스러운 분이라. 하지만 과거엔 외눈박이 그리즐리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지셨던 걸로 알고 있었어요.” “외눈박이 그리즐리라.” 김성철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루테기네아 시대에 아에게 항을 다스리던 전 총독의 이름이다. ‘호르네코가 그 자의 사위였군.’ 김성철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데르하는 마차에서 내려 손수 객실의 문을 열며 두런두런 말했다. “허가된 모든 상품을 거래하는 게 아버지라면 허가되지 않은 모든 물품을 거래하는 것이 바로 우리 외할아버지죠.” 김성철은 디히터와 데르하를 지상에 남겨두고 음침한 사내의 안내를 받으며 뒷골목의 상인왕의 아지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곧 김성철은 끝없이 지하로 파고드는 나선형의 계단 끝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인물과 마주칠 수 있었다. 외눈박이 그리즐리. 장물할아범이라는 친숙한 별명으로 불리지만 그 진정한 정체는 뒷골목의 총독. 호르네코가 일개 상인에서 모든 상인의 정점 위에 있는 상인연합 총독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장인의 덕이 절반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2미터에 달하는 큰 키에 시체처럼 피골이 상접한 외눈의 노인. 황금으로 만든 의안이 희미한 횃불의 빛을 받아 으스스하게 번들거리는 것이 노인의 독특한 풍모와 맞물려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잘 왔소. 세계의 적. 우리 손녀에게 모든 이야기는 들었다오. 안으로 들어오시오.” 장물할아범은 외모만큼이나 인상적인 쇳소리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호위 하나 없이 김성철을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작은 탁자 하나와 서로 마주보는 의자 두 개만이 있는 단출한 방이었다. 양옆에 걸린 횃불 두 개는 받침대 역할을 하는 장식에 가려 오로지 중앙의 탁자 부분만 밝혔다. 그 장치의 목적은 간단했다. 김성철은 의자에 앉아도 노인의 얼굴이 빛과 어둠이라는 이중의 커튼에 가려 윤곽조차 볼 수 없다는 걸 발견했다. 그것은 저 노인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묘한 방이군.” 김성철이 말했다. 그의 음성엔 노골적인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행위다. 김성철은 이 의문의 상인에게 예를 갖출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일단 그는 사기극의 피해자니 말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운을 띄우고는 궤짝을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노인을 노려보며 다그치듯 말했다. “일단 이게 무엇인지 설명해줬으면 하는데.” 궤짝이 열리자 엉터리 신의 문서 한 뭉텅이가 드러났다. 어둠 너머에서 무언가 번득였다. 노인의 눈에 끼운 황금 의안이 불빛을 받아 번득인 모양이다. “아, 이거. 전에 데르하가 보채서 가져온 물건이구려. 신의 글을 찾는다고 해서 급하게 부랴부랴 창고를 뒤져서 보냈는데 마음에 안 드셨던 모양이오?” “내가 누군지 안다면 결론부터 말하는 게 좋을 거요.” 김성철은 담담하지만 숨 막힐 정도의 위압감이 서린 음성으로 말했다. 건너편에서 또 한 차례의 번득임이 있었다. 이윽고 쇳소리 섞인 한숨소리와 함께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건 루테기네아 시절 팔려다가 반품당한 물건이오.” “반품 당한 물건?” “아실지 모르겠지만 구 루테기네아 왕국의 무위의 암군은 신의 글을 맹렬히 수집했소. 당시 아에게의 총독이었던 나는 세계 각지에 사람을 보내 신의 글을 모아 왕에게 헌납하는 일을 맡았지. 처음에는 루테기네아 측에선 신의 글이라면 가리지 않고 사들였는데 어느 날을 기점으로 자칭 감정가가 나타나더구려.” “감정가라.”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탁자 너머에서 희미한 불이 떠올랐다. 성냥의 불빛이다. 이윽고 매캐한 연기가 저편에서 풍겨왔다. “읽는 자였지.” 외눈박이 그리즐리가 말했다. “…….” 김성철은 그것이 누구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연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을 저리고 불쾌하게 만드는 얼굴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루테기네아 공주 라이즈 하이메르.” 김성철의 얼굴에 희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노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 건방진 어린 것이 신의 글을 감정을 맡은 뒤로 루테기네아로부터 벌어들이던 수입이 반 토막이 났소. 한번은 그 여자가 루테기네아 병정을 동원해 내 눈알 하나를 뽑으며 이렇게 말하더군. 한 번만 더 이런 쓰레기를 넘긴다면 하나 남은 눈알도 뽑아 그 안에 전표를 쑤셔 박겠다고.” 그리즐리의 목소리엔 라이즈 하이메르에 대한 깊은 증오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 김성철은 별 다른 의견을 표시하지 않았다. 빚을 청산한 이상 이미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당신에게 넘긴 것은 그 루테기네아 공주, 아니 공주도 아니지. 방랑왕의 양녀가 폭언을 하며 반품한 물건이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구려.” 건너편에서 또 한 번의 번득임이 일었다. “당신도 신의 글을 읽는 능력이 있소?”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이 방 안에서 고개를 끄덕거린다고 의사가 전달될 리 없다. 약간의 어색한 침묵이 있은 후 김성철은 말로 보완했다. “그렇소.” “역시 재앙을 해결하는 자는 남다르구려. 물려받은 핏줄만으로 신의 글을 해독하는 무리와 달리.” “무리라.” 김성철은 일전에 초월세계에서 만났던 지식의 뱀 우로보로스가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세상 어딘가에 지식의 뱀을 섬기는, 읽는 자의 능력을 지닌 무리가 있다고 했다. 라이즈 하이메르도 그 무리 중 하나일 것으로 짐작했지만 그 부분에 관한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찰나에 그리즐리가 무리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뭔가 아는 게 있다는 소리다. 김성철은 때를 놓치지 않는다. “그들에 대해 아는 게 있소?” 주저 없는 물음이 어두운 방안에 울려 퍼졌다. 건너편의 노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은 태고의 산 고지대에 살던 소수부족이오. 스스로를 지식의 뱀을 섬기는 백사의 부족이라고 불렀던 모양이오.” “백사의 부족이라....”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다. 당연히 개미위키에도 이런 건 없다. ‘시시콜콜한 건 많은데 정작 필요하고 중요한 건 하나도 없지. 거기엔.’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뒤이은 노인의 말을 경청했다. “인근 주민의 이야기에 따르면 소수부족이라고 하나 아신의 가호를 받아 주변의 다른 종족들은 물론 드래곤마저도 침범하지 못하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들었소. 그랬던 것이 하루아침에 멸망당하고 말았지.” “크롬갈드의 짓이군.” “루테기네아의 마법 병단이 태고의 산 고지대에 진을 치고 일주일 낮, 일주일 밤 또한 포격을 퍼부었다고 하더구려. 울창했던 일대의 숲의 절반 이상이 불에 탈 정도로. 아무튼 우리의 감정인은 그 부족의 생존자였던 모양이오.” “그걸 어떻게 아는 거요?” 김성철이 물었다. 아무리 어둠의 대상인이라고 하나 김성철도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상자 다섯 개.” 건너편에서 노인의 달라진, 호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래를 할 셈이다. “정보료 치고는 너무 높지 않나?” 김성철이 불쾌감을 섞어 말했다. 언젠가는 상인의 습성을 드러낼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야기를 끊고 거래를 제의한다. 노회한 상인만이 아는 엇박자라고는 할까나. ‘역시 만만치 않군. 이 노인 장사하는 솜씨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만 해도 상자 3개 값어치의 정보요. 게다가 어차피 그쪽이 가진 재산도 결국 불로소득으로 얻은 거 아니오?” 노인은 김성철의 반발에 느릿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김성철이 지닌 금은보화가 원래는 무한금고에서 나온 것을 꼬집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대단한 담낭이다. 천하의 김성철에게 배짱을 부리는 것은.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꺼냈다. 그러자 노인이 달라지지 않은 목소리로 빈정거리듯 말했다. “어차피 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소.” “…….” “오히려 이런 게 신선한 자극이 되는군. 매일매일 같은 일상 속에서 죽음만 기다리던 노인에겐 말이지.”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변태 끼가 다분하군.’ 황금 의안을 끼고 다닐 때부터 그런 싹이 보였다. 시간을 들이고 신경을 써서 고통을 가한다면 입을 열겠지만 오히려 돈을 내주는 게 편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베르텔기아가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도 않으니 말이다. 한편 그런 김성철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읽기라도 한 듯 노인은 탁자 아래에서 가방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가방 안엔 낡아빠진 신의 글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는 김에 이것도 같이 넘겨드리지요.” 김성철에겐 별 가치 없는 물건이다. 무심한 눈으로 보고 있자니 검버섯이 군데군데 핀 손이 탁자 위로 출현했다. 그 손은 궤짝 너머의 가방 안을 뒤적거리더니 빨간 색 실을 매단 신의 글 두루마리를 찾아내 보이는 곳에 놔두었다. “우리 측 감정인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빨간 것으로 표시한 게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하더구려. 판로가 없어지고 감정인도 죽어서 악성재고가 되어버렸지만!” 상인다운 싹싹한 말투가 이어 들려왔다. 김성철은 속는 셈 치고 붉은 실이 달린 신의 글을 펼쳐 어렴풋이 확인했다. 익숙한 압도되는 기운과 함께 하나의 문구가 시야를 뒤덮었다. [ 아신 시구레아의 기록 ] [ 이 기록은 신의 의지를 져버린 배신자들의 만행을 후세의 필멸자에게 남기기 위해 남긴다... ] 김성철은 검은 장막이 시야를 뒤덮는 부분에서 읽기를 멈췄다. ‘이건 진짜군.’ 김성철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 86. 뒷골목의 상인왕 (3) “어떻소?” 건너편에서 그리즐리가 은근한 어조로 물어왔다. 김성철은 과연 이 노인도 천상 상인이었다는 간단한 사실을 상기하고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장사치들이란.’ 김성철은 그대로 무한금고에서 무인금화가 가득 담긴 궤짝 다섯 개를 차례로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궤짝 3개째를 올리자 탁자의 빈약한 다리가 견디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김성철은 나머지 두 궤짝을 발밑에 두고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만족하오?” “흐음. 그 정도면 우리 사위를 위한 용병과 암살자를 충분히 고용할 정도는 되겠구려.” “호오?” “우리 사위의 생각이지. 그 녀석은 당신이 돈은 많지만 오랫동안 쓰지 못해 돈을 쓸 기회가 있다면 유감없이 그것을 뿌리리라고 예측했소. 그게 신의 글이 될지는 나도 그 녀석도 예측하지 못했지만. 덕분에 잘 된 일이지. 세계의 적 덕분에 악성재고도 처리했으니.” 건너편에서 의자가 뒤로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선 모양이다. “따라오시오. 악성재고와 묶음으로 판매한 정보를 보여 줄테니.” 노인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방을 나서 어두침침한 복도를 느릿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걸음 자체는 느렸지만 노인의 다리가 워낙 긴 탓에 상대적인 속도는 빨랐다. 이윽고 노인은 강철과 목재로 만든 문 앞에 섰다. 김성철은 방문 너머에서 불쾌한 기운을 느꼈다. 살이 썩으며 나는 불쾌한 악취가 코끝에 은은하게 서렸다. 노인은 손수건을 꺼내 코와 입을 막고는 김성철에게 고갯짓을 했다. “좀 끔찍할 거요. 뭐 대원수의 강철심장을 놀라게 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노인이 문을 열어젖혔다. “읔.” 베르텔기아가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다. 문 너머엔 붉은 고깃덩어리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김성철은 곧 그 고기 덩어리가 인간의, 썩어가는 육신이라는 걸 발견했다. “아델화이트..! 아델화이트..!” 천형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끔찍한 질병에 걸린 그 사내는 벌레처럼 몸을 꿈틀거리며 김성철이 잘 아는 인물의 이름을 알아듣기 어려운 발음으로 연달아 부르고 있었다. 끔찍한 모습만큼이나 처절한 분노를 담아. “이 자는 뭐요?” “우리의 전 감정인이었소.” 어둠의 상인왕 그리즐리는 김성철을 돌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라이즈 하이메르가 죽은 현재, 세상에 남은 최후의 백사의 부족이오.” 그리즐리는 부하를 불러 고깃덩어리와 같은 사내를 향해 무언가를 주사하게 시켰다. 김성철은 그것이 마약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어쩌다 저렇게 된 거요?” 그리즐리의 부하들이 천형에 걸린 사내를 깨끗한 천으로 싸매는 걸 보며 김성철이 물었다. 그리즐리는 황금 의안을 번쩍이며 입가에 담배를 물었다. 친숙한 필터가 달린 담배. 소환광장에서 구한 물건이 틀림없다. 그리즐리는 불을 붙인 담배를 한모금 빨고는 연기와 함께 입을 열었다. “저 자의 말에 의하면 루테기네아, 아니 지금은 인간제국 영역의 동쪽 유령 들린 숲에 사는 마녀 아델화이트의 짓이라고 하더구려.” “아델화이트...?” 김성철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영원한 삶을 누리며 보통 인간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규격 외의 존재인 그녀가 이런 악독한 짓을 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델화이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모르오. 이 자가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지.” 그리즐리는 혀를 차며 이제는 미이라처럼 변한 사내를 지그시 노려봤다. 갓 덮어씌운 하얀 천이 순식간에 누런 진물로 물들어갔다. “나병도 저 병에 비하면 감기 수준일 거요. 처음에 여기 올 땐 저 정도로 심하지 않았는데....” “끔찍한 저주군.” 전장을 전전하며 갖은 지옥도를 보아온 김성철에게도 이 사내가 걸린 역병은 손에 꼽을 정도로 지독했다. ‘이런 저주를 아델화이트가 내렸다고? 그럴 리가. 그녀는 태곳적부터 유령 들린 숲에서 불간섭을 주의로 하여 영겁의 세월을 살아 왔다. 아마도 이 자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이리라.’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하얀 천으로 뒤덮인 사내의 의식이 돌아왔다. 마약의 기운이 고통을 경감하고 어느 정도 이성을 되돌려 놓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성철은 그 사내의 눈빛이 여전히 혼탁함에 젖어있다는 걸 발견했다. 이미 그의 몸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마약이 축적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 물....!” 썩어가는 사내가 물을 요구했다. 그리즐리의 부하가 가죽부대를 꺼내 물을 미이라 사내에게 건넸다. 미이라 사내의 손이 느닷없이 그리즐리의 부하의 팔목을 붙잡았다. “으.. 으아아아!!!” 팔목을 잡힌 사내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그는 팔을 휘둘러 미이라 사내의 손을 뿌리치고 소매를 거두었다. 붉은 고름과 반점이 먹물이 번지듯 그 사내의 팔에 번지고 있었다. “으아아! 아... 안 돼!!” 끔찍한 비명이 방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리즐리의 또 다른 부하가 날카로운 검을 꺼내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썩어가는 사내의 팔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툭. 붉게 썩어들기 시작한 팔이 바닥에 떨어지더니 이윽고 핏물로 향했다. 핏물이 고인 자리엔 하얀 색의 기생충 같은 벌레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 김성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일찍이 이토록 끔찍한 질병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이런 역병이 존재하다니. 역병의 끔찍함도 끔찍함이지만 저 전염성은 그야말로 소름끼치는군.’ 그리즐리의 부하들은 팔을 잃은 채 혼절한 사내를 끌고 나갔다. 미아라 사내는 외부의 사정 따윈 아무래도 좋은 지 가죽부대 안에 담긴 물을 정신없이 들이켰다. 김성철은 그가 들이킨 물의 일부가 볼에 뚫린 구멍에서 역겨운 고름과 함께 줄줄 새어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읔....” 베르텔기아가 죽는 소리를 낼 정도로 역겨운 광경이었다. “다행히 공기 중으로 전염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그보다 슬슬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나 같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라면 모를까 앞길이 창창한 당신이 오래 있을 곳은 아니니.”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미이라 사내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당신의 백사의 일족인가?” 미이라 사내는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김성철의 목소리에 반응, 고개를 끄덕이며 붕대를 감은, 마디가 몇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 볼에 난 구멍을 비비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 그의 발음은 불분명했고 그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사내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김성철을 향해 덮쳐왔다. 역병을 퍼뜨리기 위함이다. 김성철은 옷소매를 강하게 휘두르는 것만으로 그 사내를 벽에 처박히게 만들었다. “끄.. 끄으으....” 바닥에 처박힌 사내가 신음소리를 내며 부들거렸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라이즈 하이메르를 아는가?” 그 말을 들은 사내가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더니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라이즈 하이메르..? 알지. 알고말고. 빨간 지붕집의 막내딸이었지.” 김성철은 그의 얼굴과 몸짓을 냉정하게 관찰했다. 이미 온전한 정신이 얼마 남지 않아 그의 외표만으로 거짓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건 무리였다. 김성철은 붉은 실이 달린 신의 글을 사내 앞에 꺼내보였다. 바닥에 처박힌 사내의 흐릿한 눈이 반짝였다. 그는 버둥거리며 그리즐리를 향해 탁한 음성으로 말했다. “흐... 내가 감정한 것이군. 어이 거기 그리즐리 총독. 요즘은 왜 내게 일감을 주지 않아? 내 이 꼴이 되도 능력은 유효해. 그러니 일을 맡기고 전처럼 장님 여자라도 방에 넣어달라고.” 김성철은 그를 노려보며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신 시구레아의 기록.” 짧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 한마디는 바닥에 버둥거리는 사내를 경천동지하기에 충분했다. “그.. 그걸 어떻게...?!” 사내의 눈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설마 네놈도 우리 일족..? 그럴 리가 그 용모는 소환자의 풍모인데..” 처음으로 사내가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김성철이다.” “기.. 김성철?! 세계의 적이라고...?!” “재앙을 해결하고 읽는 자의 능력을 손에 넣었다. 따라서 너의 하찮은 능력 따위는 아무 필요도 없다.” “그.. 그럴 리가...” 미이라 사내의 마지막 자존심이 무너지고 있었다. 세상에 남은 마지막 읽는 자라는 가치가 아는 자만이 아는 형태로 무자비하게 파괴되고 만 것이다. “크롬갈드는 왜 너희부족의 마을을 파괴한 것이지?” 김성철이 물었다. 미이라 사내는 더 이상 저항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 마약에 취한 몽롱한 기분으로 그는 입에서 나오는대로 이야기했다. “그 이유는 우리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장로들이 말하더군. 크롬갈드는 악신의 의지를 잇는 자라고.” “…….” “그는 마을에서 가장 어린 라이즈 하이메르를 제외한 모든 마을 사람들을 죽였다.” “왜 라이즈 하이메르를 살린 것이지? 그 여자에게 특별한 힘이라도 있나?” “그런 건 없다. 부족 중에서 극히 평범한 아이였지. 하지만 그 녀석은 마을에서 가장 어렸고 그리고 가장 유순했다. 그래서 크롬갈드가 살려둔 것이지. 자신만의 도구로 두기 위해... 콜록!” 미이라 사내가 헛기침을 했다. 기침 안에 든 피섞인 침엔 하얀 벌레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무튼 세계의 적. 네가 여기 왔으니 나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미이라 사내가 달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김성철은 흐릿한 그의 눈동자에 차가운 분노가 응축되는 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단 하나. 콜록! 아델화이트. 그 저주 받을 여자의 악행이다. 크헉!” 말이 많은 탓인지 아니면 마약의 기운 때문인지 사내는 격하게 기침을 해댔다. 처음엔 침만 나오더니 이윽고는 피까지 토해냈다. 김성철은 끔찍한 썩는 냄새를 느끼며 물었다. “아델화이트가 너에게 저주를 걸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생각하는 게 아니다. 세계의 적. 정 원한다면 네 눈으로 직접 봐라. 내 상태창을 볼 수 있는 능력 정도는 구비하고 있겠지?” 김성철은 반신반의하며 영혼창고에서 스크롤을 꺼냈다. 상대방의 상태창을 보는 하급 마법 스크롤. 그다지 강하지 않은 시절엔 요긴한 아이템이었지만 신의 힘을 얻은 이후로는 거의 쓰지 않던 것이다. 김성철은 스크롤을 찢었다. 마법진이 그의 눈동자 위에 떠오르며 미이라 사내의 상태창을 그의 시야 앞에 표시하기 시작했다. 김성철이 주목한 건 한 부분이었다. ‘아니, 이것은..?!’ 김성철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 저주 ] 아델화이트의 황혼역병(전이형, 죽음에 이르는) 저주엔 반드시 시전자가 표시된다. 미이라 사내의 저주 란엔 아델화이트란 이름이 똑똑히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아델화이트가 이런 저주를 내렸다고 단정할 수 없다. 동명이인의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으니까. 고뇌하는 김성철의 의식 너머로 처참하게 일그러진 사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델화이트.. 그 빌어먹을 마녀는 크롬갈드와 한 패다. 그 사실을 잊지 말고 널리 알릴 지어다. 악신과 붙어먹은 그 연놈이 얼마나 악독한 것들인지...!” 미이라 사내는 웃음과 기침을 반복하여 이윽고 두 눈을 감았다. 죽지는 않았다. 다만 혼절한 모양이다. “이쯤하면 만족하오?” 그리즐리가 질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혔다. 복도 안에 서린 어둠이 김성철의 얼굴을 뒤덮었지만 의혹으로 번득이는 그의 눈빛만큼은 가리지 못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군.’ “괜찮아?” 베르텔기아가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김성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전부터 품어오던 하지만 결코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던 한 가지 의문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 세계는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잠시 잊었던 권태감이 다시금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심장의 박동이 미묘하게 변화했다. * 아에게 항에 한 척의 쾌속 공선이 도착했다. 제국 국적기를 단 아름다운 공선을 본 부두의 일꾼들은 공선의 승객이 틀림없이 지체 높은 제국의 어르신 정도로 예상했다. 그런데 막상 공선에서 내린 것은 아직 젊은, 앳됨이 남은 젊은 여자였다. 검은 머리에 수수한 생김새. 한 눈에도 소환자라는 걸 드러내는 용모를 지닌 그녀는 소속과 신분을 묻는 관리의 물음에 짤막한 물음으로 대답했다. “아무개.” 그녀는 제국에서 꾸민 서류를 관리에게 건넸다. 관리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제국의 수도방위사령관이라고...?! 이 젊은 소환자가?!’ 놀라워하는 관리들을 뒤로 한 채 아무개는 발밑 아래 펼쳐진 아에게 항의 경관을 올곧은 두 눈동자에 담았다. ‘김성철. 어째서 일레보로로 온 것이지? 예정엔 없던 일인데.’ 그녀는 자신의 의문을 품기 위해 이 땅에 왔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기구를 타고 지면으로 뛰어내린 그녀를 수많은 행인들이 오가는 거리로 걸어갔다. 벽면에 큼지막하게 걸린 벽보가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 대인기 가수 클라리스 아삼의 디너 공연! ] [ 놓치지 마시라!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지닌 미녀가수의 열연을! ] 아무개는 코웃음을 치고는 인파 속으로 사라져 들어갔다. ======================================= 87. 복수자의 칼날 (1) 밤이 되면 아에게 항은 전쟁터로 변한다. 무장한 깡패와 도적, 지팡이 없는 마법사와 방패 없는 기사. 소환자와 원주민. 일일이 구분하기도 어려운 각양각색의 무리들이 한 줌의 금에 고용되어 무의미한 다툼의 희생양으로 죽어간다. 아무개는 계단의 난간 옆에 서서 문을 걸어 잠근 시장 한 복판에서 벌어지는 꼴사나운 혈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상인 간의 싸움에 쇠붙이는 금한다는 아에게의 불문율에 의거, 양 세력 모두 검과 창 대신 나무 몽둥이로 무장한 걸 빼면 그것은 완벽한 전쟁에 가까웠다. 아무개는 두 세력이 괴성을 지르며 몽둥이로 투닥 거리는 걸 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이건 기록에 나와 있어.’ 아무개는 오직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영혼각인 - 최후로 향하는 기록을 열람하여 현재 아에게 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이 기록된 역사와 일치하는 걸 발견했다. ‘총독 호르네코와 그를 위협하는 대상인 도날드 맥갈리의 권력 다툼. 비열한 거리의 추잡한 싸움은 배금주의자들의 수도를 몰락시키는데 일조했다…라.’ 아무개는 이 싸움의 승자가 누군지 알고 있다. ‘역사대로라면 호르네코는 모든 구역을 잃고 실각해 총독 자리를 뺏긴 채 작은 집에 유폐당해 매일매일 독이 든 식사를 하게 될 운명에 처해져.’ 하지만 지금 아무개의 눈에 펼쳐지고 있는 전투에선 호르네코 일파가 단연 우세했다. 도날드 맥갈리 일파가 정예를 앞세워 호르네코 일파를 시장 광장 구석으로 모는 찰나에 광장과 연결된 모든 길에서 속속 호르네코 일파의 증원군이 도착했다. 사방에서 몽둥이찜질이 시작되자 전황은 급속도로 호르네코 일파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건 내가 아는 역사와는 다른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아무개는 뒤쪽에서 기분 나쁜 기척을 느끼고 뒤돌아섰다. “어이. 거기. 아가씨.” 몽둥이를 든 깡패 여러 명이 아무개를 향해 실실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 으슥한 밤에 왜 젊은 여자 혼자 돌아다니나?” “매춘부 아냐?” “매춘부라고 하기엔 옷이 꽤 좋아 보이는데.” 질이 좋지 않은 무리들이다. 여기저기서 힘에 담지 못할 험담이 나오는 걸 보며 아무개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아무개의 눈동자에 한 줄기 살기가 감돌았다. 한 사내가 히죽 웃으며 그녀를 조롱했다. “앙칼진 계집...” 그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아무개의 신형이 순간 사라졌다. 다음 순간, 한 줄기 바람이 일며 모든 것을 베어버렸다. 아무개를 둘러 싼 십여 명의 사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시체로 나뒹굴었다. “…….” 아무개는 싸늘한 눈빛으로 시체를 확인하고는 영혼창고에서 붉은 액체가 든 유리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고 붉은 액체를 뿌리자 시체는 하얀 연기를 피어 올리며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건 붉은 핏자국 뿐. 모든 시체를 처리할 즈음 광장의 전투도 끝나가고 있었다. “호르네코 총독 만세!” “총독에게 영광 있으라!” 광장을 제압한 무리들의 환호성이 밤하늘 위로 높이 울려 퍼졌다. 아무개는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기근의 기사가 승리한 건가. 결과적으론 그렇게 되겠지만 이 흐름은 너무나도 빨라.’ 그렇게 생각하며 뒤로 도는 찰나 아무개는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자신조차 감지하지 못했던 음습한 기운을 풍기는 사내가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암살자..? 상당한 실력자야.’ 아무개가 숨을 죽이고 조용히 살기를 발산하는 찰나 어둠 속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살기를 내뿜던 아무개의 눈이 활짝 떠졌다. “당신은...?” 넝마와 같은 옷을 걸치고 생김새도 형편없게 삭아 있었지만 아무개는 한 눈에 의문의 사내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카즈 알메이라.” 암살교단에서 짝 지어준 동료. 그는 아무개의 선임 역할을 하며 한동안 그녀와 함께 활동했었다. 세계의 끝자락에서 세계의 적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말이다. “실력이 제법 늘었군. 아무개. 제국에서는 처우가 좋은 모양이지?” 한때 고대신의 교도들이 붙여준 촉수가 너울거리던 잘린 팔엔 빈소매만 남아 나풀거리고 있었다. “당신. 갑자기 왜 말도 없이 사라진 거지? 암살교단에서 당신을 추적한다는 소문이 돌던데.” “딱히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카즈가 희게 웃었다. “중요한 건 내게 힘이 있다는 거지.” “힘..?” 짧은 대화 속에서 아무개는 카즈 알메이라가 과거에 자신이 알던 사내와 전혀 다른 인간이 된 것을 간파했다. 스산한 잔혹함이 베여 있던 눈동자를 가득 채운 뒤틀린 광기가 이를 증명한다. “나에겐 이제 세계의 적을 죽일 힘이 있다.” 카즈가 말했다. 아무개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지그시 응시했다. 빈말을 하는 것 같지 않다. 광기 속엔 계산된 확신의 빛이 번득이고 있었다. “내가 굳이 널 찾아온 이유는 하나야. 호르네코에게 손대지 마라. 회귀자. 아직 그 자는 죽을 때가 아니니.” “…난 세계의 적을 관찰하러 왔을 뿐이야. 호르네코에겐 어떤 볼 일도 없어.” “그렇다면 잘 됐군. 눈을 뜨고 잘 관찰하는 게 좋을 거야.” 카즈가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세계의 적이 이 카즈 알메이라의 칼날에 죽는 모습을...”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는 허무한 웃음소리 외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 홀로 남은 아무개는 한동안 카즈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다 그 자신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두 암살자가 사라진 자리엔 주인 잃은 핏물만이 남아 수채구멍으로 흘러내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 일주일이란 시간이 평온함 속에서 훌쩍 흘러갔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김성철은 쓸 만한 신의 글을 손에 넣은 건 물론, 그리즐리가 각지에 파견한 신의 글 전문 취급상인의 명단까지 입수 했으니. 그리즐리의 말에 의하면 루테기네아 왕국이 멸망한 이후 판로가 없어진 관계로 그 신의 글들은 여전히 그들의 창고 안에 있을 거라고 귀띔했다. 한편 호르네코의 약속도 충실히 이행되고 있었다. 김성철을 대신해 상인연합의 깃발을 단 공선들이 세계 각지로 출발, 김성철이 주최하는 세계의회의 새로운 개시를 통지하러 떠났다. 김성철이 직접 기재하라고 지시한, 불참석한 국가에겐 어떤 불이익도 달게 감수하라는 협박문이 든 서한을 들고서 말이다. 이제는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 김성철은 창가에 서서 꽃망울이 핀 나뭇가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평상시와 별 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지만 그의 전신엔 범접하기 어려운 우울의 장막이 두텁게 펼쳐져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구석에서 김성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저기압이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정작 김성철만 지지부진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섣불리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나서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 문제는 김성철과 아델화이트가 직접 이야기를 해서 해결할 문제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김성철의 침울함은 도가 지나쳤다. 사방에서 흉흉한 소식이 잇따라 터지는 지금 시점엔 더더욱. “제국이 결국 검을 빼들었군. 제국이 8개 함대를 동원해 황제에게 반기를 든 속국들에게 일제히 선전포고를 실시했다는 소식이다.” 어느새 님파스 왕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손님이 된 마라키아가 방안으로 들어오며 방금 입수한 소식을 모두에게 전했다. “정말?” 베르텔기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사실 그다지 놀라진 않았지만. “아마도 호르네코가 대신 전한 세계의회 일정이 변수가 됐을지도 모르지. 제국 입장으로선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속국들이 회의장에 참석하는 걸 원치 않을 테니 말이야.” 창밖을 응시하던 김성철은 마라키아 쪽을 살짝 돌아볼 뿐 별 말을 남기진 않았다. “…….” 그는 예전처럼 무심한 눈으로 변해가는 자연을 보며 스스로를 고독 속에 빠뜨렸다. “저 인간. 왜 저러나? 아에게 항에 갔다 온 뒤로는 넋이 빠진 얼굴이군.” 기껏 급보를 가지고 온 마라키아가 김샌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베르텔기아도 그런 김성철의 행동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가만 놔두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는 양상마저 보였다. ‘음. 결국 한 마디 해야 하나. 정말 싫다. 싫어.’ 베르텔기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동안 선택의 기로에 섰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베르텔기아는 방침을 굳혔다. ‘어떻게 되든 저 이상한 취향을 지닌 사람의 정신을 원대대로 돌아오게 만들어야겠어. 이대로 놔두다간 진짜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으니.’ 생각을 굳힌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을 향해 날아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우수에 찬 김성철의 눈동자는 말할 기분이 아니라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텔기아는 특유의 긍정적인 사고를 발휘하여 김성철 바로 뒤까지 책장을 파닥거려 날아갔다. “에.. 엣햄!” 새침한 기침소리가 김성철 뒤에서 울려 퍼졌다. 무심한 눈으로 나뭇가지를 보던 김성철의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갔다. “…….” 하지만 그게 전부. 평소 같으면 베르텔기아의 이름을 불러줬겠지만 지금 그는 다시 앞을 응시하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사색에 들어갔다. 그냥 놔둬서는 안 된다. 솔직히 베르텔기아는 그 사건이 이렇게까지 김성철이 침울해야 하냐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즈 하이메르, 크라이아 사건 때 궁상을 떨었던 건 이해가 가지만 그저 지인에 불과한 아델화이트 가지고 저렇게 궁상을 떠는 건 납득하기 어려웠다. ‘사람이 실수 할 수도 있지. 자기도 못된 짓 잔뜩 해놓고는!’ 베르텔기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김성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에게 강한 야속함을 느꼈지만 지지 않게 계속해서 말했다. “뭘 그리 울상을 짓고 있어? 정신 좀 차리라고.” “베르텔기아.” 김성철이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베르텔기아는 드디어 김성철의 저기압이 풀리나 기대를 했지만 곧 그 기대는 무참히 짓밟혔다. “혼자 있고 싶구나.” 그 말을 들은 베르텔기아는 실망보다는 오기가 치솟는 걸 느꼈다. “아니, 그게 그렇게 당신에게 중요한 문제야?” 결국 베르텔기아가 참지 못하고 뾰족하게 말했다. 김성철의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가 베르텔기아를 동공 안에 담았다. 곧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베르텔기아.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아델화이트 문제라면 잊은 지 오래다.” “그럼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일주일 째 아무 말도 없이. 창가에 서서 나무나 보고 있고. 당신이 그러면 나도 그렇게 저기 저 새도 그렇고 마음이 불편하잖아.” “내 눈치 같은 거 볼 필요 없다. 자유롭게 행동해라. 정 내가 신경 쓰인다면 내 직접 님파스 왕에게 가서 방을 하나 더 내달라고 요청하겠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베르텔기아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물고 늘어졌지만 지금 김성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기어코 마라키아를 보내 베르텔기아와 마라키아를 다른 곳으로 떼어놓았다. “정말 이러기야? 좋아... 그럼 마음대로 해보라고!” 베르텔기아가 단단히 삐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지금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 아델화이트에 관한 건은 그가 말한 것처럼 말끔히 잊은 지 오래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전혀 다른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물음을 야기시켰다. 그것은 김성철 자신에 관한 문제다. 그가 잊고 있던 혹은 간과하던 중대한 무언가에 관한. 그는 지난 일주일 간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곰곰이 살펴보았다. 수많은 배신이 있었고 그 곱절이나 많은 실망이 있었다. 시작과 끝에 관해서도 생각했다. 시작은 명확했고 동기도 확실하다. 끝은 여전히 미지에 싸여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날 것이다. 문제는 그 중간의 잃어버린 무언가다. 김성철은 그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기 위해 일주일 간 식음을 전폐한 채 깊은 고뇌 속에 스스로를 밀어 넣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무의미한 일이었다. 무엇인지 자신도 모르는, 아주 희미한 단서조차 없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귀중한 시간을 투자하는 건 말이다. 하지만 그 무언가는 있다. 철썩 같이 믿던 아델화이트에 관한 불미스런 이야기는 김성철의 의식 깊은 곳에 묻혀 있던 그 무언가의 단편을 드러내게 했다. 김성철은 그것이 무엇인지 해명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렸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집착을 보인다는 점에서 김성철은 일종의 사명감을 느꼈다. 그렇게 길고 무의미한 추적 끝에 김성철은 자신의 상태창에서 그 무언가를 알아낼 단서를 찾아냈다. 그것은 그의 상태창 중 각각 축복과 능력치 창에 있었다. 김성철의 축복 첫 열엔 아래와 같은 축복이 존재하고 있다. [ 축복 ] 맹약(알 수 없음) 마찬가지로 상태창에서 그가 주목하는 부분은 아래와 같다. [ 능력치 ] 매력 28 운 28 보통 맹약이란 것은 축복과 저주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호르네코의 상태창을 봐도 그의 맹약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맹약의 증거는 심장에 박혀 있으니. 그런데 김성철의 맹약은 축복 란에 당당히 기재되어 있다. 김성철은 그것이 신에 이르는 계단 앞에 서서 재앙의 해결을 천명하고 그 대가로 받은 저주 받은 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 외엔 달리 생각할 거리가 없으니. 하지만 김성철은 그 맹약 안에 자신도 모르는 숨겨진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사로 잡혔다. 그 증거로 김성철은 어느 순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있던 능력치, 이상할 정도의 낮은 매력과 낮은 운에 주목했다. ‘어쩌면 나는 신 앞에서 나눈 이야기의 전부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김성철은 차분히 신의 계단의 끝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김성철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을 느꼈다. “이럴 수가...” 기억은 있다. 언제 어디서라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기억이.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통일된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파편처럼 여러 개로 나뉘어 의식 곳곳에 박혀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다. 그 파편들이 너무나도 날카롭고 예리했기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아냈다. 그의 기억이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다음 순간 김성철은 마치 마술처럼, 의식 속에서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네가 계단을 끝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결코 네가 뛰어나서가 아니다.”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그 이상의 말은 너무나 희미해져 알아들을 수 없었다. 충격과 전율 속에서 김성철은 확신했다. 그 희미한 목소리야말로 자신이 잃어버렸던 기억의 연결고리라는 사실을. ‘대체 나는... 그곳에서 무엇을 이야기했던 것인가...?’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바깥에서 울려 퍼진 날카로운 노호성이 김성철의 시선을 끌었다. 강한 피로감을 느끼며 김성철은 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님파스 왕과 왕비. 결코 모범적이라 할 수 없는 부부가 왕궁 앞의 정원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이게.. 이게 다 뭐야! 이게 다 뭐냐고!” 왕이 왕비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금박으로 정장된 수려한 필체가 적힌 편지를 들고서. “어... 어떻게 당신이 내게 그럴 수가 있냐고!” ======================================= 87. 복수자의 칼날 (2) 왕이 그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 봤다. 그것도 꼼짝달싹도 못하던 왕비한테 저렇게 화를 내다니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까. 김성철은 다시 집중을 하며 잃어버린 기억의 편린을 찾으려고 시도했지만 좀처럼 되지 않았다. 머리를 너무 많이 썼고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아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일단은 뭔가 먹어둬야겠군.’ 김성철은 방안에 있는 과일바구니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 한입 깨어 물고 다시 창가로 가 부부싸움을 구경했다. ‘음.. 재밌겠군.’ 단순히 기분전환용이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까짓 편지 좀 주고받은 게 뭐가 대수라고?!” 싸움의 양상이 변해 있었다. 잠자코 디히터의 고함을 듣던 옥산나가 태도를 바꾸어 오히려 디히터를 공박하고 있었다. 으적. 김성철은 사과를 한 입 더 베어 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흐음. 무슨 일이지?’ 궁성 앞 정원 앞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안절부절 못하던 중신들이 기사들에게 일러 구경꾼들을 쫓아내게 했다.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옥산나의 목소리가 다시 한 차례 울려 퍼졌다. “그보다 국왕폐하는 왜 남의 편지를 가로채나요? 님파스 국왕이면 왕비의 서신을 검열할 수 있는 권리라도 있는 건가요?” 버럭 화를 내던 때와 달리 차분한 어조로 존댓말까지 쓰고 있다. ‘이 싸움, 저 여자가 이겼군.’ 보통 이런 싸움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자가 패배한다. 일종의 멘탈 게임이다. 김성철은 남은 사과를 먹어치우며 간단한 관전평을 내렸다. 여유를 찾은 왕비와 달리 디히터는 편지를 쥔 채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었다. 그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 듯 왕비를 원망어린 눈으로 노려보다 편지를 흔들며 쥐어짜내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소? 당신의 옛 연인에게 사랑한다는 문구를 이렇게 당당하게 쓴 편지를 걸리고도.. 어떻게 이렇게 당당할 수 있냔 말이오? 내가 정녕 남편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거요?” 왕은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그는 편지를 쥔 손과 고개를 떨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애처로운 광경이지만 다른 한 편으론 코믹했다. 왕비는 그를 노려보다 시녀들을 거느리고 자리를 떠났다. “원한다면 언제든 교단 교구장에게 이혼서류를 신청하세요. 나는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물론 내 책임도 있으니 지참금은 깔끔하게 포기할게요.” 비수보다 날카로운 싸늘한 한마디는 봄바람마저 얼리는 듯 했다. 홀로 남은 왕은 한동안 자리에 머물다 중신들의 부축을 받으며 쓸쓸히 자리를 떠났다. 힘없는 나라의 왕의 운명이 그와 같았다. 김성철은 같은 남자로서 그리고 그의 아이돌로서 저 불쌍한 왕을 그냥 놔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방을 나섰다. 복도 앞엔 마라키아와 베르텔기아가 앞을 가로질러가고 있었다. “응? 당신. 왜 나와? 생각할 거 있다며?” 우연히 마주친 베르텔기아가 심통이 난 어조로 말했다. 김성철은 쑥스러움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이렇게 빨리 그만 둘 거면 우리는 왜 쫓아낸 거야? 혹시 우리가 싫어진 건 아니야?” 베르텔기아는 계속해서 공격적으로 말했다. “그건 아니다. 알잖아? 나...” “친구 없는 거?” 아까 베르텔기아를 쫓아내면서 내심 그녀가 삐질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베르텔기아가 받은 상처가 컸던 모양이다. “…….” 김성철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막무가내로 자기 생각에 빠져든 건 그의 선택이니까. 베르텔기아는 묵비권을 행사하는 김성철을 말없이 쳐다보더니 이내 몸을 핑그르르 돌리며 주문을 외는 주술사처럼 중얼거렸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뭐! 당신은 창조술사가 되어야 할 몸이니! 안내자인 내가 뭐! 눈감아 줘야지. 이가 떨리고 오한이 들고 종이결이 갈라져도!” “눈 감아 주는 거냐?” 김성철이 반색하며 물었다. “아니.” 베르텔기아가 몸을 흔들었다. “일단은 저 불쌍한 왕을 달래주기 위해서 당신과 일시적으로 손잡는 거뿐이야!” 베르텔기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크기를 줄여 김성철의 주머니 안으로 막무가내로 파고들었다. 움직임이 평소보다 거칠고 신경질적으로 변하긴 했지만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의 넓은 아량이 고맙기만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라키아가 부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부수는 자에게도 약점이 있군.” “시끄럽다.” 김성철은 마라키아에겐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살기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자 마라키아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삐이이....” “어서 가자고. 저 임금님. 자살할지도 모르니까.”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가 몸을 흔들며 보챘다. “그런 일은 없겠지.” 김성철은 문제의 소지가 있는 마라키아를 남겨두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왕의 처소로 향했다. 왕은 김성철의 기념품은 잔뜩 모아놓은 자신의 컬렉션 룸에 틀어박혀 있었다. 문 앞을 지키던 기사가 김성철을 알아보고 비켜줬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김성철에게 왕의 위로를 부탁하는 모양새였다. 김성철은 조용히 문을 열고 왕의 처소로 들어갔다. 왕은 김성철의 조각상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김성철은 그가 선물한 제국대원수의 검이 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힌 걸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냥 넘어갔다. 지금 왕의 모습은 일국의 왕이라기보다는 사춘기의 소년 같은 모양새로 보일 정도로 의기소침해져 있으니까. 김성철은 말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왕은 힐끗 김성철을 보고는 다시 앞을 응시했다. “죄송합니다. 일국의 국왕으로서 못 보여드릴 꼴을 보여준 것 같네요.” 김성철은 방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왕의 옆에 왕과 같이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눈높이가 낮아지자 방안에 장식된 김성철의 기념품이 보다 두드러져 보였다. 마치 김성철을 위한 김성철의 세상에 들어온 기분이라고 할까나.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하지.” 김성철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건 어불성설이다. 김성철은 총각이고 디히터 왕은 유부남이다. 총각이 유부남에게 부부생활의 어려움을 이야기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김성철은 한마디 만에 말문이 막히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런...’ 김성철이 당황하며 다음 말을 찾고 있는 사이 다행히 왕이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은 처음 듣는군요. 아무튼, 고맙습니다. 저 같은 녀석을 위로해주러 직접 와주시다니.” “어려울 것도 없지. 그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위기를 탈출한 김성철은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의 물음에 왕은 한 손으로 눈자위를 문지르며 답답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왕비가 그 사람과 계속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어요.” “그 사람?” “옥산나의 전 약혼자인 고대왕국의 왕자요.” “그건 부부의무의 위반이군.” “편지를 주고받는 것 까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본 편지 안엔... 아에게 항에서 만나자는 내용이 적혀 있더군요. 그 날의 뜨거운 밤을 다시 기대한다면서....” 어... 흠...” 할 말이 없다. 그것은 대놓고 외도를 하겠다는 이야기 아닌가. 베르텔기아도 크게 놀랐는지 강하게 몸을 진동시켰다. “그런 편지를 들키고도 저렇게 군거예요?” 베르텔기아가 직접 왕에게 물었다. 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편지는 보란 듯이 제 서재 안으로 배달됐어요.” “뭐라고요...?”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위로 몸을 불쑥 밀어 올리며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물었다. 김성철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놀라워하는 가운데 왕은 쓸쓸히 말을 이었다. “이제는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녀가 지금까지 저에게 야박하게 군 건 제 스스로 정나미가 떨어지게 만들어 이혼을 유도하게끔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이제는 아예 대놓고 유도하고 있지만 말이죠.”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잘 아는군.’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그 말을 낼 수 없었다. ‘무언가 위로해줄 말이 필요한데...’ 하지만 좀처럼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의 두뇌는 일주일 간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느라 혹사당할 대로 혹사 당한데다가 무엇보다 김성철은 이런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기엔 감정표현이 부족한 남자였다. ‘으음... 그냥 사실대로 말할까?’ 김성철이 이도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왕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김성철도 반사적으로 같이 일어섰는데 왕은 한 발 빨리 김성철 앞으로 걸어오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부탁드립니다.” 생각지도 않은 일이 일어났다. 디히터 왕이 김성철 앞에 난데없이 무릎을 꿇고 무언가를 애원하려 하고 있었다. 놀라움 속에서 김성철은 디히터의 입술이 열리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 “…힘?” “제가 대원수님을 존경하는 건 그동안 보여주신 영웅적인 행보도 물론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저를 감동하게 만든 것은 다른 이들과 달리 맨손으로 모든 것을 일궈냈다는 점입니다.” 필경 오랫동안 생각한 말이리라. 왕자는 막힘없이 술술 미리 준비한 것처럼 말했다. 김성철은 순간적으로 왕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예측할 수 있었다. ‘디히터 왕... 설마....?’ 한줄기 실망이 김성철의 눈동자에 스치고 갔고 이윽고 자괴감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왕은 무릎을 꿇은 채 간절한 어조로 이어 말했다. “전 비록 왕실의 혈통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소환자 출신인 당신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부탁할 곳 하나 없고 믿을 사람 하나 없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도... 저도... 강해지고 싶습니다. 제국대원수이나 외람되지만 세계의 적인 당신처럼요...!” 김성철의 예상이 맞아 들어갔다. 찬물을 끼얹은 듯한 기분. 김성철은 착잡한 심정으로 왕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당신처럼 강해지고 싶습니다. 부디 저에게 길을 알려주십시오.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 당신처럼 강해지는 법을...!!” 디히터 왕이 김성철을 존경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디히터 왕이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고 경외하면서 바라보는 대상은 김성철 본인이 아니라 김성철이라는 소환자가 홀로 세계에 맞설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 과정 그 자체다. 그것이 아귀가 맞다. 소국의 왕자로 태어나 상전과 같은 사돈과 자신을 남자로조차 보지 않는 왕비의 무시 속에서 김성철이란 어찌 보면 왜곡된 우상을 가지게 된 경위가. ‘이 녀석. 결국은 힘을 원한 것이었나.’ 김성철은 다음 질문도 예상했다. 그는 김성철에게 그것을 요구할 것이다. 신의 계단에 오르는 법을. 그의 예상은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대원수께선... 그 계단을 오르신 겁니까?” 왕이 물었다.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디히터 왕의 얼굴이 확연히 밝아졌다. 그는 환희에 가까운 미소를 지으며 김성철에게 엎드렸다. 그리고 김성철이 예상했던 것을 구했다. “부디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못난 남편이자 힘없는 나라의 왕인 저에게.... 그 계단을 완주할 수 있는 비법을....!” 순간 베르텔기아는 느꼈다. 김성철의 심장 박동이 다시 한 번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다행히 그 변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김성철은 익숙한 피로를 느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디히터 왕.” “네..! 대원수님!” “계단을 오를 쉬운 방법이란 없어.” 그러자 왕이 두 주먹을 부르쥐며 절규하듯 말했다. “남편이란 자가 아내를 안기는커녕 한 방조차 쓰지 못하는 비참한 기분을 아십니까?” “…….” “죽어도 좋습니다. 부디 저에게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그에 따른 결과는 오직 제가 떠안겠습니다.” 왕은 절박했다. 하지만 왕의 절박함과 간절함이 진해질수록 김성철이 느끼는 피로도도 올라갔다. “그 계단은 모든 걸 시험하지. 첫 층계를 내딛는 순간,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인생이 눈앞에 하나의 평행선과 같은 형태로 펼쳐져.” 김성철이 말했다. 먼 곳을 바라보며. 머리를 조아리던 왕은 고개를 치켜들고 김성철을 응시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지. 계단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시험해. 살아온 인생역정 뿐만 아니라 마음의 경도까지.” 다음 순간 김성철의 뇌리에 희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네가 계단을 끝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결코 네가 뛰어나서가 아니다. ] 그 목소리가 사라진 직후, 다음에는 최초의 용의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용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했다. 김성철과 에크하르트가 계단을 올랐던 것은 둘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단순히 때가 되었고 그리하여 계단이 그들을 허용한 것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계단이 관대해졌다고 한들, 자기 집안 문제 하나 처리 못하는 못난이를 완주하게 놔둘 리가 없다. 김성철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듣기 좋은 말을 해서 왕을 부추기든가. 아니면 진실을 말해 왕을 실망시키든가. 김성철이 선택한 건 당연하게도 후자였다. “계단을 오를 방법은 없다. 디히터 왕. 당신은 3번째의 층계를 오르기도 전에 신의 용광로 안에서 녹아 없어질 것이오. 따라서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이야기 할 게 없고 해줄 수 있는 말도 없소.” 냉담한 말을 하는 내내 김성철은 볼 수 있었다. 기대에 찬 젊은 왕의 얼굴이 시시각각 일그러지고 절망으로 뒤틀리는 걸. 김성철은 무릎 꿇은 왕을 놔둔 채 방을 나섰다. “내가 보기엔 이혼만이 답인 것 같소.”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김성철은 무거운 마음을 안은 채 왕의 거소를 나섰다. 그는 보지 못했다. 홀로 남은 왕의 얼굴에, 눈동자에, 전신에 광기의 그림자가 덮어나가는 걸. 김성철이 방을 나선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이... 이혼?!” 왕이 달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혼을 하라고...? 나보고....?” 왕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위험할 정도로 흔들리는 눈동자로 방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김성철의 조각상을 노려봤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해? 쓰레기 같은 소환자 새끼가.... 감히... 내가... 내가 그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첫 눈에 반했다고! 그 개같이 도도한 여년을!” 그는 구석에 아무렇게나 박아둔 제국대원수의 검을 꺼냈다. 스르릉. 칼집에서 제국대원수의 검이 뽑혔다. “치사한 새끼! 비열한 새끼! 그까짓것 알려 줄 수 있잖아!” 왕은 김성철의 조상을 향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김성철의 조상 여기저기가 칼에 베여 패였고 이윽고 팔이 잘려나가면서 들고 있던 베르텔기아도 함께 떨어져나갔다. “헉...! 헉...!” 한참 동안 검을 휘두르던 왕은 땀을 흘린 채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다. “니깐 놈이... 니깐 놈이 뭘 알아! 뭘 아냐고!!!” 참고 참았던 고함이 마침내 터져 나왔다. 바깥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왕은 지친, 그러나 광증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기사를 힐끗 노려보더니 이윽고 김이 식은 듯 맥 빠진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말했다. “가서 이 쓰레기를 당장 내 눈앞에서 치워버려.” 왕의 일갈에 기사는 즉시 시종을 불러 토막 난 김성철의 조상을 치우게 했다. 시종 두 명의 손에 옮긴 조상은 궁전의 뒤편, 땔감을 쌓아두는 창고 앞으로 운반됐다. 장작을 패던 잡부가 실려 온 조상을 보며 혀를 찼다. “또 세계의 적 조각상인가? 일주일 단위로 박살낼 거면 대체 왜 만드는지. 나라에 돈도 많은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는 투덜거리며 창고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 안엔 드러나지 않았던 셀 수도 없는 인간 형태의 조각상이 소름끼치는 형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얼굴의 형태는 제각각이지만 그 조각상들은 하나의 인물을 나타내고 있었다. 홀로 세계에 맞설 힘을 손에 넣은 자. 즉, 김성철을. ======================================= 87. 복수자의 칼날 (3) 짝. 경쾌한 타격 음이 방안에 울려 퍼졌다. 짤막한 비명과 함께 님파스의 왕비 옥산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따귀를 맞은 뺨이 순식간에 벌겋게 부풀어 올랐고 치켜 뜬 눈은 경악으로 일그러져 떨리고 있었다. “멍청한 것.” 호르네코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인물이 아니다. 젊은 시절부터 바늘로 찔러서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다는 평가를 들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도 사람이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결정적인 순간,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혈육이 생각지도 못한 못난 짓을 하여 모든 것을 망쳐놓으려고 하고 있다. “만약 님파스 왕이 김성철과 손을 잡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호르네코는 뺨을 감싼 채 주저앉은 님파스의 왕비를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 말인즉슨 절연을 뜻한다. 경악으로 일그러져있던 옥산나의 얼굴에 급속도로 공포감이 차올랐다. 부친과의 절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래도 명석한 두뇌를 어느 정도 이어받은 그녀로서도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누리는 모든 호사와 보호가 사라진다. 보호막이 없어진 자의 최후는 비참하다. 설령 그것이 친딸이라고 해도 호르네코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이다. “언니. 큰일 났네.” 배 다른 누이 데르하가 돈 주머니를 툭툭 만지며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옥산나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자신의 부친을 돌아보며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빠....” “나한테 애원하지마라. 옥산나. 이건 네 문제고 네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호르네코는 차디찬 말을 쏟아낸 후 창밖을 바라봤다. 딸을 처벌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건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아에게 항의 총독 자리를 두고 일어난 항쟁은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매일 밤마다 계속된 분쟁 속에서 호르네코는 자신이 새로운 도전자보다 조금도 뒤쳐지지 않는 저력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했다. 능력이 비슷하다면 구관을 앉히는 것이 상인연합의 오랜 관례. 님파스에 머물고 있는 김성철은 호르네코의 왕국을 재구축하기 위한 화룡정점이 될 예정이었다. 앞으로 일주일 뒤면 그는 떠나게 된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김성철과 호르네코 둘 뿐. 호르네코는 그것을 자신의 치적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한때 상인연합을 괴멸적인 위기로 몰아넣었고 다시 한 번 상인연합에 야욕을 드러내는 세계의 적을 상인답게 세치 혀와 기지, 합리적인 거래로 쫓아낸다는 치적을 말한다. 김성철이 상인연합에 적의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여부는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었다. 비록 힘의 총합에선 상대편에 밀린다고 하나 오랫동안 검박한 식사 따위로 하며 쌓은 명성은 그로 하여금 여론을 쥐고 흔들 수 있는 힘을 안겨다 주었으므로 말이다. 이제 남은 건 일주일 간 자신의 건재함을 다른 대상인들에게 알리는 것뿐인데 그것이 막바지에 이른 국면에서 남도 아닌 자신의 딸이 초를 치고 만 것이다. 예상치 못한 변수의 창출. 호르네코는 그것이 반석 위에 오른 자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특히 님파스 왕과 왕비의 불화를 이유로 김성철이 일레보로의 일에 간섭이라도 한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소지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헐레벌떡 집무실로 뛰어 들어온 수하가 호르네코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전했다. “세계의 적과 님파스 왕이 왕의 거소에서 비밀리에 회동을 했다고 합니다.” “무... 무어라...?!” 호르네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구석에 주저앉은 옥산나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본 뒤 다시 전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떻게 된 건가? 설마 세계의 적과 님파스 왕이 손을 잡은 건 아니겠지? 그가 결코 일레보로의 일에 개입하게 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회동이 끝난 후 왕의 광증이 다시금 발작을 일으켰다고 하더군요.” “그런가? 하지만 그 또한 연기일수도 있다. 님파스 왕은 보기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거든.” 호르네코는 님파스 왕이 나름 자신의 왕관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쳤던 전례를 알고 있다. 지금은 깔끔하게 포기하긴 했지만 그 어린 녀석에게 속을 보였다는 것은 호르네코에겐 잊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미 변수는 발생했다. 그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오직 그가 섬기는 중립신만이 알 것이다. 호르네코로서는 그 변수를 차단하고 싶었다. 인위적인 또 다른 변수를 일으킴으로써. 잊고 있던 만능패가 뇌리에 떠올랐다. 어느 정도 효과는 있는 것 같지만 아직 검증되지 않은, 그래서 껄끄러운 패가 말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아껴야 할 건 아무것도 없다. 호르네코는 그렇게 생각하며 전령을 응시하며 감정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교단의 사람을 불러라.” * 신의 글은 아무에게나 읽도록 허락된 물건이 아니다. 오직 자격을 지닌 강력한 존재에게만 허락된 물건이다. 악신으로 내몰린 불멸자들은 그들의 문서가 앞도 제대로 못 보는 장님들에게 보이는 걸 원치 않았다. 직관력은 이 세상을 이해하는 척도. 진실과 속임수를 구분하는 유일한 기준점이다. 하지만 모든 신의 글이 높은 직관력을 요하는 건 아니다. 적어도 카즈 알메이라가 지닌 문서는 그렇게 되어 있다. “시간이 왔다.” 종말교단의 사자가 주점 안에 처박힌 암살자를 향해 지령을 내렸다. 카즈 알메이라는 히죽 웃으며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보관하던 금단의 문서를 꺼냈다. “들어라. 그것을 써서 네가 생존할 수 있는 시간은 1분에 불과하다.” 사자가 말했다. “1분이면 충분하지.” 카즈 알메이라는 불경한 힘으로 가득 찬 문서의 가치를 단순히 손을 올리는 것만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문서는 검은 파편으로 쓰여 졌다. 신의 흙 혹은 재앙의 파편이라 불리는 기이한 물질이 문서의 글귀 하나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카즈 알메이라는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고 그 문서를 살짝 들여다보았고 공기 중에 드러난 검은 글자가 부서지며 사라지는 마술적인 광경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는 어떤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 힘을 원하는가? 카즈 알메이라. ] 그 다음 벌어진 일은 카즈 알메이라에게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는 그저 초조하게 때로는 느긋하게 복수의 때가 오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이걸 써라.” 사자가 카즈 알메이라에게 단검 하나를 건넸다. 가장 간단하면서도 유구한 암살자들의 무기. 카즈는 그 무기를 감정도 하지 않았다. 단지 칼날이 충분히 날카롭고 손아귀로 느껴지는 감각이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에겐 더 이상 무기의 질은 중요하지 않다. 시장에서 사온 식칼이라고 해도 달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에겐 힘이 있으므로. 자신의 원수를 끝장내고 위해를 가하고 죽일 힘이. 사자는 또 다른 물품을 카즈에게 내밀었다. 위장 신분증과 가족사진이 담긴 팬던트, 편지 혹은 서류 따위. 카즈는 그중 신분증을 들어 내용을 살폈다. [ 상인연합 상인증 : 로이스 샴펜 ] “이건 뭐지?” “네가 남겨야 할 물건이다.” 사자가 말했다. 카즈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로이스 샴펜은 누구편이지? 호르네코의 수하인가? 아니면 그 반대 측의 수하인가?” “그것은 네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교구장께선 네가 최대한의 가능성을 보이길 기대하고 계신다. 카즈 알메이라. 알메이라 가문의 최후의 생존자여.” 사자가 지금까지와 달리 존중하는 모양새로 말했다. 카즈의 자부심을 자극하려는 셈이다. 카즈는 무감각한 눈으로 사자를 응시하다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굳이 내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 시키는 일은 충실히 이행할 것이다. 그리고...” 카즈 알메이라는 탁자 위의 물품을 하나 남은 팔로 하나하나 집어 품안에 집어넣었다. “무엇보다 나는 놈의 심장을 찌를 수 있다는 것에 충분히 만족하니까.” 한 줄기 바람이 카즈와 사자 사이에 일어났다. 바람이 그친 후 카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창밖에 펼쳐진 밤하늘엔 별 하나가 유난히 밝은 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빛나는 별의 정체는 살인자의 별, 암살자들의 수호성이다. * “음, 어제 밤 동안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아침식사를 하는 와중 베르텔기아가 입을 열었다. “너무 심한 거 아닐까? 아무리 그 왕이 당신에 대해서 왜곡된 존경을 품고 있다고 해도 같이 봤잖아. 그 사람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김성철은 달걀을 우물우물 씹으며 베르텔기아의 말을 무표정한 얼굴로 흘려들었다. 이윽고 달걀을 한 모금 물과 함께 삼킨 뒤 김성철이 입을 열었다. “계단을 오르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는 이상, 어떤 달콤한 위로도 그 자의 귀엔 위선과 가증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런가...?” “나도 한 땐 저 왕과 비슷한 생각을 지녔으니까.” “그렇군. 그런데 당신은 왜 우리 방에 와서 천연덕스럽게 식사를 같이 하고 있는 거지?” 베르텔기아가 식탁을 책 모서리를 콩 내려찍고는 김성철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우리 방이잖아! 당신 방은 저쪽이고.” 아직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을 용서하지 않았다. 님파스 왕가에 일어난 일이 예기치않게 일시적인 휴전을 가져오긴 했지만 아직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진정어린 사과도 반성도 받지 못했다. 그녀는 당분간 마라키아와 함께 김성철을 따돌릴 셈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은 제 안방 드나들 듯 방문을 열고 들어온 김성철의 행동에 제동이 걸렸다. 시종들은 그의 식사를 아예 베르텔기아의 방으로 가지고 왔고 김성철은 자연스럽게 베르텔기아 일행과 식사를 함께 한 것이다. 그는 베르텔기아의 지적에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오히려 마라키아의 식사를 바라보며 말을 건네는 여유까지 부렸다. “조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향신료가 뭐지? 꿀 말고.” “나하크 족에겐 내장을 뜯어 먹히는 사냥감의 비명이 최고의 조미료지.” “…음. 조인은 청각과 미각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인가...?” 그들의 사차원적인 대화를 듣던 베르텔기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 어째서인지 갈수록 뻔뻔해지는 느낌이야.’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김성철은 마치 자신이 펼친 그물에 묶여 이도저도 못하는 거미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은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그의 곁을 지키며 관찰해온 베르텔기아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변화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증거니까. 사람이지만 사람 같지 않았던 사내가 말이다. “베르텔기아. 잠시 산책이나 할까?” 뻔뻔해진 김성철이 베르텔기아가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어휴. 진짜. 처음 만날 때도 인간말종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인간말종이 되어가는 거 같은데?”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군. 어쩌면 그게 내 본성인지도 모르겠어.”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덥썩 잡고 자신의 주머니 안으로 억지로 밀어 넣었다. “싫어! 이거 놔!” 베르텔기아가 앙탈을 부려보지만 김성철의 신적인 힘엔 대항할 리 만무하다. 김성철은 반항적인 베르텔기아의 움직임을 느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잠깐만 걷자고. 지난 일주일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자초지종을 말해줄 테니.” “으...” 베르텔기아는 싫어하는 티를 냈지만 내심은 기뻐하고 있었다. 저 무심하기 짝이 없는 남자가 자진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하는 건 좀처럼 없는 일이니. “나도 같이 갈까?” 마라키아가 뒤따라오지만 결과는 한결같다. “넌 남아서 방을 지켜라.” 마라키아를 남겨두고 김성철은 한동안 봄이 찾아온 화원을 말없이 거닐었다. 비록 향기도 화려한 색채도 없었지만 수줍은 신록의 색채로 물들기 시작한 정원은 새로운 계절의 변환기에만 느낄 수 있는 신선한 느낌을 전해주었다. 개화 직전의 꽃망울이 맺힌 화원 앞에서 김성철이 입을 열었다. “크라이아와 라이즈의 일을 처리한 후 솔직히 난 뭘 해야 할 지 모르고 있었다. 사실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 나라는 놈은 언제나 다음이 없는 놈이었으니까. 그런 놈은 빨리 죽지만 운이 좋아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비록 운수치는 나쁘지만 말이야.” 언제나처럼 감정이 별 담기지 않은 담담한 어조였지만 베르텔기아는 평소엔 느낄 수 없던 진솔함을 감지하고 몸을 뒤척이며 물었다. “그래?” “하지만 그 짐을 덜고 난 이후에 보이더군. 내가 그토록 맹목적으로 집착했던 목적이 아니라 나라는 인간 그 자체가 말이야.” “당신이 보기엔 당신은 어떤데?” 베르텔기아가 달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김성철은 말을 하기 앞서 잠시 생각을 했다. 아직 자기 자신도 정의내리지 못한 것 같았다. 자신이라는 존재를 말이다. 한참 동안의 망설임 끝에 김성철이 입을 열었다. “적어도 인간말종은... 아닌 것 같다.” “그걸 말이라고 해?!” 베르텔기아가 버럭 화를 내자 김성철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농담이고 아주 나쁘지만은 않은 놈인 거 같아. 내 입으로 말하길 뭐하지만... 뭐라고 할까...” 그때였다. 김성철은 정원 반대편에 한 사내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눈에 익은 얼굴이다. 허름한 행색의 외팔이. 허리춤엔 단도 한 자루를 차고 있다. ======================================= 87. 복수자의 칼날 (4) 정원의 모퉁이엔 누구도 의식하지 못하는 관전자가 한 명 있었다. 아무개. 다른 시간축에서 온 존재. 그녀는 김성철보다 한 발 늦게 암살자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카즈. 무슨 생각으로 그에게 덤벼든 것이지? 당신에겐 어떤 승산도 없어.’ 그녀는 카즈가 김성철의 진면목을 보고 복수의 의지를 잃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미쳐버리기라도 한 것인가. 아무개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가올 전투를 반신반의한 마음가짐으로 지켜보았다. 그녀가 예상한대로 김성철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인상을 살짝 찌푸렸을 뿐이다. ‘그때 그 암살자인가?’ 마법학교 에어푸르트에서 일어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끔찍했던 동료의 죽음과 보복. 묵묵히 자신의 적을 고문하고 처참하게 찢어발기던 당시의 얼굴이 문득 눈앞에 떠올랐다. 지금과는 전혀 달랐던 얼굴, 마음가짐, 입장. “너를 죽이기 위해 이곳에 왔다.” 암살자, 카즈 알메이라가 말했다. 김성철의 손에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너의 힘으로는 무리다. 사라져라.” 암살자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죽여 버리는 것이 김성철의 방식이다. 허나 이번의 적은 암살자라고 하나 정정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한 차례 기회는 줄 생각이다. 그런데 상대방은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그가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불경한 힘이 느껴지는 두루마리. 김성철은 순간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간파하고 적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김성철이 덮친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김성철의 눈에 약간의 놀라움이 떠올랐다. ‘나보다 빠르군.’ 카즈 알메이라는 어느 순간 정원의 반대편에 있었다. 마법은 아니다. 다른 무언가다. 이미 두루마리에서 검게 타오르는 불길이 카즈 알메이라의 몸에 옮겨 붙고 있었다. 암살자의 전신이 검은 불길에 휩싸이기 전 김성철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카즈 알메이라의 소름끼치는 미소였다. ‘단 한 번이라도 좋다. 한 번이라도 찌르게 해다오.’ 카즈 알메이라의 의식이 급격하게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뇌리엔 죽음 대신 소멸이라는 보다 끔찍한 결말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그는 그 결말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김성철의 손에 비참하게 죽어간 그의 누이,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들이 희미한 와중에서도 차례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빠드득. 검은 불길 속에서 카즈 알메이라는 이를 갈았다. ‘이것이 내가 원한 길이다.’ 그때 그의 의식 속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불경함으로 가득 찬 음성. [ 복수를 향한 너의 의지는 나로 하여금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하는구나. ] [ 힘을 빌려주마. 필멸자. 신을 제외하고 가장 빠른 존재인 내가. ] 그 목소리가 그친 순간 카즈 알메이라의 몸엔 강력한 힘이 깃들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한한 힘이. ‘이것이... 신의 힘인가..? 김성철이 지닌 것과 동일한..?’ 또 한 편 그는 알 수 있었다.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채 10초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단검을 쥔 하나 남은 손에 다른 세상의 존재로부터 물려받은 불경한 힘이 흐르고 지나갔다. 다음 순간 카즈 알메이라의 신형이 사라졌다. 김성철은 그것이 마법도 눈속임도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것은 순전히 압도적인 속도에 힘입은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허락하지 않은. 찰나의 순간 속에서 김성철은 온 몸이 불길에 타들어 소멸해가는 증오와 원념의 덩어리가 자신을 향해 쇄도하고 있다는 걸 포착했다. 빠르긴 하지만 피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최악의 경우 옷깃을 스치는 것이 그만일 것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미 카즈의 검이 자신에 와 닿기도 전에 도약을 시도했다. ‘음...?!’ 김성철을 가슴 서늘한 불길함을 느꼈다. 일이 틀어지고 있다. 상대방을 얕보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단순히 상대방의 속도가 김성철이 상정한 한계를 아득히 넘어섰을 뿐이다. ‘이런 빌어먹을.’ 생각이 거기까지 닿는 순간 검은 불길에 휩싸인 칼날이 그의 심장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절체절명의 위기. 돌연, 김성철의 몸이 측면으로 틀어졌다. 머리로 생각한 움직임이 아니다. 뼈와 살을 내주더라도 심장은 내줄 수 없다는 오랜 전투의 감각이 스스로 행한 움직임이다. 그것으로 치명타는 피할 수 있다. 남은 건 응징뿐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김성철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베르텔기아..!’ 푹! 복수자의 칼날이 김성철의 몸에 꽂혔다. 그것보다 김성철을 놀라게 한 것은 가슴 위에 포개졌던 둔탁한 무언가가 꿰뚫리는 감각이었다. 칼날은 베르텔기아를 뚫고 김성철의 살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 김성철 앞에 운명과 같은 문자가 나타났다. [ 당신은 처음으로 당신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적을 만났다. ] ‘이건 또 뭐냐?’ 김성철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놀랄 틈은 없다. 또 다른 문자가 연이어 시야를 덮어나간다. [ 당신에게 또 다른 권능을 부여한다. ] [ 축복 - 맹약에 새로운 권능 “초월감각”이 추가되었습니다. ] 문자가 사라진 직후 김성철은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즉시 고개를 돌려 암살자를 응시했다. 검은 불길에 싸인 남자의 이름이 김성철 앞에 표시됐다. [ 필멸자 카즈 알메이라 ] 아울러 그의 뒤에 붙어 힘을 주는 아신의 이름마저도. [ 불멸자 최속(最速)의 부루탈러스 ] [ 키레의 어부, 놈팽이, 운 좋은 놈 ] 그것이 찰나의 시간 동안 일어난 일. 그동안 칼날은 맹약의 십자가가 꽂힌 심장 앞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그것이 한계였다. [ 축복 ‘광전사의 핏줄’ 발동 ] 김성철은 쉽게 죽지 않는다. 좀처럼 기회는 없지만 그는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강해진다. 죽음의 위기에 직면할 때 발동되는 광전사의 핏줄은 김성철의 육신을 약간이나마 팽창시켰다. “…….” 그와 동시에 김성철의 우악스런 손이 암살자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파죽지세로 찔러오던 칼날은 아주 약간의 차이로 심장 앞에서 그 진격을 멈췄고 저지당했다. 운이 아니다. 모든 패가 드러난 순간, 김성철은 순간적으로 그 한 장의, 그러나 결코 뚫을 수 없는 차이를 벌린 것이다. “끄.. 끄으으으....” 이미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형체에게선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것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미 반쯤 타 들어간 육체는 검은 불길에 재마저 남기지 않고 소멸되는 와중이었다. 그것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 영원히 없어지게 될 무언가였다. 문득 김성철의 귓가에 낯익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 헤헤... 찔렀다... 찔렀어...! ] 카즈 알메이라의 음성이다. 김성철의 손에 신적인 힘이 흐르고 지나갔다. 으적! 김성철의 손아귀에 들어간 카즈 알메이라의 두상은 깨진 수박처럼 으깨졌다. [ 모두들 보라고! 내가 찔렀다고! 저 괴.. 물을... ] 카즈 알메이라의 음성은 더는 이어지지 않았고 남은 그의 육신은 검은 불길에 휩싸여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완벽한 소멸. [ 영혼각인 ‘영혼 수확자’ 발동 ] [ 처치한 대상의 생명력을 흡수합니다. ] 챙캉. 단검은 바닥에 떨어지고 암살자는 사라졌다. 단도가 헤집어 놓은 가슴의 구멍에선 붉은 피가 샘솟듯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김성철은 자신의 상처엔 터럭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모든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바로 품안에 있던 베르텔기아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를 꺼냈다. 베르텔기아의 몸 안엔 단검에 꿰뚫린 선명한 구멍이 나 있었다. 김성철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크게 떨렸다. “베르텔기아...” 김성철이 양손으로 베르텔기아를 감싸 쥐며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언제나 무표정에 가깝던 그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그림자가 드리워있었다. 그의 발밑엔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가 흥건한 샘을 만들고 있었다. “베르텔기아...!” 시시각각 창백해져 가는 김성철이 다시 한 번 베르텔기아의 이름을 불렀다. 베르텔기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책이라는 무생물이라는 것을 강조라듯 하듯. “…….” 우두커니 선 김성철의 주위가 어둠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환한 봄날의 태양과 그 사이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의 주위는 밤의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먼 곳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다른 시대에서 온 자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저것은...?!’ 아무개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어둠으로 물든 김성철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검은 광휘였다. 카즈 알메이라의 몸을 태우던 것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태초의 어둠을 머금은 검은 빛. 그것은 피를 흘리는 가슴의 상처에서 흘러나와 김성철의 몸을 덮기 시작했다. 아무개는 그것을 보고 경악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멸망의 검은 거인...!” 그녀가 알고 그토록 두려워하던 김성철의 또 다른 모습. 그 검은 거인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부수는 자라는 김성철의 별칭처럼. 아무개가 검을 빼들었다. ‘지..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몸 아니 영혼 단위에 각인된 공포심이 그녀를 묶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눈앞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동료들의 처참한 말로가 그녀를 속박했다. 떨그렁.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무개는 금방 전의를 잃고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양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것 외에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속수무책 속에서 김성철의 변화는 계속됐다. 어둠이 마침내 김성철의 몸을 집어삼키려는 차였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으...” 그것은 아주 작은 움직임에서 비롯됐다. 베르텔기아가 소리를 냈다. 그녀는 곧 몸을 흔들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검게 물들어가던 김성철의 두 눈이 번쩍 깼다. “베르텔기아?” 어둠에 휩싸인 그가 다시 물었다. “왜 불러? 으.. 방금 그거 뭐였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베르텔기아가 대답했다. 원래와 다르지 않은 음성으로. 그 순간 김성철의 몸을 뒤덮기 시작한 검은 기운은 원래 있던 가슴의 상처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둠은 곧 걷혔고 그의 상처에선 다시 붉은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베르텔기아. 괜찮은 거냐?”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김성철이 물었다. “별로 안 괜찮아. 몸에 구멍이 났는데 괜찮을 리가 없잖아.” 김성철의 양손에 안겨져 있던 구멍 뚫린 베르텔기아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며 김성철의 상처로 다가갔다. “뭐.. 뭐야? 안 괜찮은 건 당신인 거 같은데! 가슴에서 피가 나잖아!” 베르텔기아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지만 그것은 다른 이야기. 김성철은 결코 보여주지 않았던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베르텔기아를 껴안았다. “피.. 피가 묻잖아! 상처나 치료하라고!” 김성철은 그제야 영혼창고에서 세계수의 잎을 꺼내 자신의 상처에 발랐다. “무슨 일이냐!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뒤늦게 마리키아가 자신의 추종자가 된 시녀들을 이끌고 달려왔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 세상을 한 번 멸망시킬 뻔 했던 사건은 단 한 명의 목격자만을 남긴 채 종결이 났다. 표면의 세상에 남은 것은 세계의 적이 암살자에 의해 큰 상처를 입었다는 호사가들의 이야기 거리 뿐. 하지만 세계의 한 부분에선 아무개 외에 이 변화를 감지한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쨍그랑. 수정구슬이 깨어졌다. 유령 들린 숲의 마녀. 아델화이트의 얼굴에 이 정도의 공포감이 드러난 일은 일찍이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녀가 느낀 것은 재앙 따위 상례적인 현상이 아니다.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는 죽음의 낙진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녀를 경악으로 몰아넣은 것은 하나의 파동이었다. 표면세계는 물론이고 초월세계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 단 한 번의 울림. 아델화이트는 명상 속에서 그 울림을 들었다. 모든 것의 종결을 알리는 진정한 신의 음성을. 그러나 그녀가 알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그 진정한 의미는 다른 세계의 위대한 존재들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초월세계. 불멸자들이 말한다. [ 죽은 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 [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마침내 일어났군. ] [ 악신들의 잔재가 느껴졌다. ] [ 하지만 그것은 지엽적인 문제겠지. ] [ 그때 그 인간인가? ] [ 그 자가 진정으로 신의 도구였던 모양이군. ] [ 인간도 신도 아닌 자 ] [ 경계에 선 존재만큼 불쾌한 것도 없지. 그것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종말의 첨병이다. ] 목소리를 모으던 불멸자들은 이윽고 하나의 간명한 결론을 내놓았다. [ 그 자는 죽어야 한다. ] [ 이 세상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기 전에. ] ======================================= 88. 탐욕 (1) 동쪽에선 죽음의 낙진이 상륙했고 세계의회는 붕괴, 인간제국은 동맹국에게 배신당한 채 고립됐다. 전부 단 몇 개월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의 충격적인 소식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륙 남서쪽엔 또 다른 경천동지할 일이 일어났다. 세계의 적이 치명상을 입었다. 익명의 암살자의 검에 의해. 그 소식은 순식간에 세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것은 동쪽에서 몰려오고 있다는 죽음의 낙진만큼이나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결코 쓰러질 것 같지 않던 세계의 적이 암살자의 검을 맞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으니. 비록 죽음엔 이르지 않았다고 하나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무적의 불사신으로 여겨지던 세계의 적 또한 피를 흘리는 한 명의 필멸자라는 것을. 그 소식은 일반대중에겐 그저 술 한 잔과 함께 넘길 안주꺼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기득권이라 불리는 권력을 쥔 존재들에겐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세계의 적 김성철. 확실히 그는 대단한 사람이입니다. 하지만 그가 누리는 명성은 그의 실력에 비해 과대평가 된 부분이 없잖아 있지요.” 이 사건으로 누구보다 큰 이득을 얻은 것은 상인연합의 총독 호르네코였다. 하지만 그는 오랫동안 상인연합의 수장 노릇을 했던 이답게 호재에도 별 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는 종말교단의 일레보로 교구장 알투지우스 제로의 설명을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알투지우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 또한 사람이었지만 모두가 그것을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제 우리의 교단의 암살자는 세계의 적의 전설을 한 자루 단검으로 깨어 부셨습니다. 이 부분은 총독께서도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노회한 호르네코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미 전날, 님파스 궁정 전역에 도사린 그의 수하들이 호르네코에게 낭보를 전해왔다. 암살자는 죽었지만 김성철은 치명상을 입었고 그가 흘린 피가 대야를 가득 채울 만큼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그 중엔 암습직후 갑자기 님파스 궁정 앞이 어둠으로 물들었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도 섞여 있었지만 호르네코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흘려듣는 사람이다. 지금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사실은 단 하나다. 무한금고를 턴 대적 불가능한 존재 김성철이 상처를 입었다. 호르네코에겐 모든 길이 열려 있었다. 이참에 종말교단과의 관계를 더욱 굳건하게 해서 교단의 지원 하에 정적을 제거할 수 있고 정보를 조작해 김성철의 손으로 정적을 처리하는 책략을 부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의 정적은 이제 더 이상 호르네코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는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희 교단은 당신들에게 책임과 의무를 다했습니다. 이제는 그쪽에서 우리에게 약조했던 것들을 보여드릴 차례입니다.” 알투지우스의 억지로 순화한 그다지 듣기 좋다고 할 수 없는 음성이 먼 곳을 바라보는 호르네코의 귀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에도 호르네코의 꿈은 계속됐다. ‘세계의 적을 처치할 수만 있다면...!’ 이 얼마나 대담한 발상인가. 하지만 그 가능성은 열렸고 그 방법 또한 호르네코의 손에 있다. ‘상상조차 되지 않는군.’ 그가 감히 바라보지 못했던 그럴 생각조차 품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는 눈에 보일 듯 잡혔다. ‘일레보로의 왕.. 아니 그 이상의 것도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세상의 최후의 왕이 될지도 모르지!’ 비록 그가 철썩 같이 믿는 직감은 이 부분에선 약간의 광휘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호르네코는 자신의 운을 시험해볼 작정이었다. 호르네코는 자신의 동업자를 응시했다. “암살자를 한 명 더 제공해줄 수 있소?” 이에 알투지우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더 이상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약속에 대한 답을 아직 듣지 못했는데?” 알투지우스는 대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아에게 항 전역에 관한 포교권, 일부 중요 건물에 대한 권리, 상인연합회 국적기를 단 공선의 제공 등등 종말교단에 있어선 대단히 중요한 것들이었다. 그것은 지금 당장 내줄 수는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호르네코는 조금 더 종말교단에게서 대가를 뜯어낼 생각이었다. “지금 단계에선 어렵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세계의 적 또한 살아 있소.” 호르네코는 난색을 표했다. 알투지우스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약속이 다른데?” 그는 더 이상 호르네코에 대한 존경을 보이지 않았다. 호르네코는 개의치 않았다. “암살자만 더 있으면 세계의 적을 끝장낼 수 있소. 그것은 당신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텐데.” 알투지우스는 처음 호르네코를 만났을 때 창가 옆 작은 탁자 위에 놓아둔 두루마리를 힐끗 응시했다. 종말교단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은 호르네코에게 종말교단이 최후의 해결책으로 제시한 물건. 알투지우스는 그것을 계약의 대가로 그 자리에 놔뒀지만 영악한 호르네코는 그것에 손끝 하나 대지 않고 그 자리에 놔두었다. 알투지우스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카랑카랑한 음성을 숨기지 않았다. “추가는 없소.” 일말의 타협의 여지조차 없는 단호한 한마디였다. “지금 당장 모든 약속을 이행하긴 곤란하오. 다만, 당신들이 가장 시급해하는 문제, 상인연합의 국적기라면 지금 바로 내어줄 수 있소.” 알투지우스의 얼굴이 약간 누그러졌다. ‘역시 교수출신이라 그런지 다루기 쉬운 놈이군.’ 호르네코는 그렇게 생각하며 알투지우스의 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알투지우스가 입을 열었다. “암살을 위한 도구라면 제공할 수 있소.” “도구...?” 알투지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건 사람이오. 전 암살자는 누구보다 세계의 적을 처치하겠다는 의지가 깊었지. 그렇기에 세계의 적에게 상해를 가할 수 있었던 것이오.” “호오. 그런 내막이...?” “안타깝게도 지금 내 휘하엔 그 정도의 의지를 지닌 자는 없소. 겁쟁이들뿐이지. 겁쟁이는 키우는 개도 죽일 수 없다오.” 그때였다.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커튼 뒤에서 모두가 그 존재를 알고 있었던 여성이 걸어 나왔다. “그런 문제라면 저한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실 수 있나요?” 눈 밖에 난 자식 옥산나였다.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 소란 속에서 하루가 지나갔다. 김성철의 상처는 꽤나 깊었다. 갈비뼈를 깎아내며 심장 앞까지 진출한 칼날은 깊은 상처는 물론이고 대량의 출혈까지 일으켰다. 김성철에겐 상처를 당장 치료한 전설 급의 포션이 다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거처에서 시간을 들여 세계수의 잎을 통해 느리지만 확실한 치료를 선택했다. 다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님파스 왕국 측에서 제의한 치유사의 지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귀중한 포션을 아낀다는 현실적인 이유다. 김성철이 신적인 힘을 얻은 이래 그는 상처는커녕 옷자락 하나까지 다치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신들은 달랐다. 그들의 힘은 강력했고 예측할 수 없었다. 앞으로 이런 싸움이 지속된다면 아마도 크고 작은 부상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포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김성철이 오랜 동안 잊고 있던 모험자들의 격언이다. 물론 김성철이 단순히 포션을 아끼기 위해 느린 치료를 선택한 건 아니다. 그의 진정한 목적은 따로 있었다. 김성철은 오랫동안 세계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 인간들이 얼마나 교활하고 비열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다. 김성철의 부상. 그것은 단순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움직이는 것은 그 다음이다. ‘반드시 밝혀낸다.’ 종말교단이 이 사건에 개입한 것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종말교단 하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또 다른 세력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김성철은 그 배후를 밝히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을 위한 연극이다. 김성철은 자신의 침대 옆 마라키아의 솜털로 만든 책장 안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는 베르텔기아를 보며 차가운 복수심을 불태웠다. “으.. 으음...” 베르텔기아가 정신을 차리며 책꽂이에서 느릿하게 기어 나왔다. “베르텔기아. 몸은 좀 괜찮나?” 김성철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으응. 조금. 그런데 이상하게 피곤하네. 몸에 구멍이 뚫려서 그런가.” 베르텔기아는 평소와 달라지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리하지 말고 폭 쉬어둬라.” 안타깝게도 책의 몸을 지닌 그녀는 김성철과 달리 자연치유는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김성철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대신 그녀의 몸엔 마라키아가 붙여 놓은 가죽으로 만든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티격태격 서열 다툼을 하면서도 정이 든 모양이었다. ‘나쁜 녀석은 아니다.’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멍청하게 굴고 있고 실제로도 종족 차이로 인한 종종 멍청한 짓을 저지르곤 하지만 김성철의 눈엔 보였다. 마라키아가 얼마나 똑똑한 녀석인지. 그는 단 한 번도 북쪽의 동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그런 기미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의도한 것이라면 소름끼칠 정도의 치밀함이오, 자제심이다. 김성철은 그런 똑똑한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김성철은 똑똑한 사람이 반드시 악한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 또한 경험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그저 지켜볼 때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수도 없이 있으니.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상태창을 떠올렸다. 시야 대부분을 뒤덮은 상태창 속에서 김성철은 그간 들여다 볼 일이 없던 축복 란을 응시했다. 실로 오랜만의 변경사항이 있었다. [ 축복 ] 맹약(초월감각, 알 수 없음) 신에게 이르는 계단 끝에서 얻은 맹약에 변화가 일어났다. 초월감각은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나타난 맹약의 권능 중 하나. 그것의 정체는 아쉽게도 불명이다. 김성철은 그것이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영혼각인과는 다른 궤도 위에 존재하는 능력 정도라고 파악했다. 김성철은 암습을 받았을 때 그의 눈에 표시 된 적의 진정한 이름 그리고 죽어가는 적의 목소리 따위가 초월감각의 권능 정도로 해석했다. 그다지 도움 되는 능력이라곤 할 수 없다. 하지만 덕분에 김성철은 하나의 확실한 물증을 잡았다. 암살자의 완벽한 신원이다. 카즈 알메이라. 암살교단의 강력한 가문 중 하나인 알메이라 가문의 장남. 김성철은 암살자의 정체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알고도 내색하지 않았고 어떤 반응도 의사도 표명하지 않았다. 침묵은 여러 각도로 해석될 수 있는 의사표시다. 힘없는 자의 침묵은 그저 결과를 미룰 뿐이지만 진정 힘 있는 자의 침묵은 그것과 다르다. 상대방을 초조하게 만들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움직이게 한다. 김성철은 느긋하게 그 변화를 지켜볼 작정이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도날드 맥갈리라는 생소한 이름의 상인이었다. 개미위키의 데이터를 빼내 온 마라키아가 여기서 또 작은 활약을 했다. “호르네코, 그리즐리의 뒤를 잇는 상인연합의 3인자라고 하더군. 3인자라고 하나 대상인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어 실제로는 차기 상인연합의 총독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점쳐지는 인물이다.” 그 대상인은 아마도 암살교단의 최상급 암살자로 추정되는 강자를 보내면서까지 김성철에게 접촉을 시도했다. 암살자 대신 전령의 임무를 띄고 온 사내는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한 후 하나의 문서를 내밀었다. 김성철은 그 문서를 무심한 눈으로 읽었다. 이번 암살은 결단코 자신과 연관이 없으며 아무 관련도 없다는 내용의, 지레 겁을 먹은 자들이 흔히 보이곤 하는 전형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 편지보다 암살자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지나가는 말로 한 가지 질문을 암살자에게 던졌다. “과거에 암살교단 출신의 암살자가 내 목숨을 노린 적이 있다. 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나로서는 의심할 수밖에 없군. 이번 사건의 뒤에 암살교단이 배후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 김성철은 은근한 협박을 가했다. 암살자의 의뢰인이 아닌 암살자의 조직 자체에 말이다. 기대했던 반응이 나타났다. 암살자는 솔직하게 그리고 자신의 권한 내에서 카즈 알메이라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더 이상 우리 교단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솔직하게 카즈 알메이라가 마계 최전선에서 돌연 이탈해 잠적했고 그 뒤로는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간명하게 이야기했다. “그렇군.” 김성철은 별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샤말 라지푸트에게 안부나 전해주게.” 암살자는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초들이 암살자의 기척을 눈치 챈 모양이다. 김성철과는 관계없는 이야기다. 다음 날, 김성철은 마라키아의 입을 통해 궁정 앞에 거꾸로 매달려 죽은 암살자의 시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남은 건 5일인가.’ 초인적인 체력 수치 덕에 이미 상처는 거의 아물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일부러 상처를 긁어 피를 만들어내 피로 흥건한 붕대를 만들어냈다. “뭐하는 거야? 대체?” 베르텔기아가 그걸 보며 퉁명스레 물었다. “낚싯대다.” 김성철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읊조리듯 말했다. “나의 피로 만든.” 똑똑. 포션과 붕대를 가지고 온 하녀가 방으로 들어왔다. 김성철은 포션은 쳐다보지 않고 붕대만 취했고 피 묻은 붕대를 하녀에게 돌려주었다. “딱히 의미가 있다고 보이지 않는데.” 그걸 본 베르텔기아는 당연하게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낚시는 기다림의 미학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똑똑. 또 한 번 방문에 노크소리가 들렸다. 김성철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엔 대물일게다.” 낚시는 김성철의 취미 중 하나다. 물론 직접 바다에 뛰어 들어가 잡거나 어릴 때 본 개울가 밧데리 지지기를 응용한 팔 가라즈 내려치기 따위의 불법 어로행위를 하는 경우가 더 많긴 하지만 김성철은 낚시가 그의 취미 중 하나라고 굳건히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김성철은 대물이 걸릴 때의 손맛이 손끝을 찌르르 울리는 걸 느끼며 열리는 방문을 응시했다. “응..?” 김성철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실례하겠소. 뮤라 교단의 이단심문관 타이곤 보스보로트요.” 대물이 아니다. 잡어다. ======================================= 88. 탐욕 (2) “마라키아. 문을 닫아라.” 김성철이 다소 맥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다.” 김성철이 명하자 문가에 있던 마라키아가 문을 닫았다. “자.. 잠깐!” 예상치 못한 문전박대에 타이곤은 크게 당황했으나 수석 이단심문관답게 빠르게 냉정을 되찾고 닫히려는 문을 몸으로 힘껏 밀며 버텼다. “잠깐만 이야기 좀 합시다!” 타이곤이 문을 밀며 다급하게 말했다. “이 놈이!” 마라키아도 지지 않았다. 그는 김성철에게 받은 화염정령의 정수의 성과를 유감없이 보여줄 작정이었다. 타이곤 보스보로트는 문 반대편에서 자신을 밀어붙이고 있는 게 솜털이 난 작은 새라는 걸 발견했다. ‘이 펭귄. 왜 이리 힘이 쌔?’ 한동안 타이곤과 마라키아의 힘싸움이 지속됐다. 그것은 실로 꼴사나운 광경이었다. 보다 못한 김성철이 말했다. “그만하고 열어줘라. 한 마디만 들어보지.” 잠시 후 상기된 얼굴의 타이곤 보스보로트가 방 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오? 날 파문한 교단의 이단심문관이 병문안까지 다 오고.” 김성철이 퉁명스레 말했다. 그는 인간제국의 양대교단인 뮤라 교단과 호라산 교단 모두에게 파문당한 상태지만 그 전에도 양대교단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들은 지나치게 딱딱하고 고지식했고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하면 사사건건 반대했다. 김성철은 교단 자체를 부정하진 않지만 교단의 고위 인사들은 예외 없이 싫어했다. 수석 이단심문관 정도면 교단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일 것이다. 타이곤 보스보로트는 문 너머에 있던 마라키아를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김성철의 병상 건너편에 있는 의자 하나를 돌려 거기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고위 신관의 행동치고는 제법 투박한 감이 있다. “뜬금없이 방문한 점에 대해 우선 사과하는 바이오.” 타이곤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한 번 마라키아를 응시했다. 적잖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문 반대편에서 자신을 못오게 막던 존재에 대해서 말이다. 마라키아는 이미 타이곤에 흥미를 잃었는지 침대 맡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몸이 좋지 않으니 짧게 끝냈으면 좋겠구려.” 김성철이 입을 열었다. 타이곤은 김성철의 가슴을 감은 붕대가 피로 물들어 있는 걸 힐끗 보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과연, 소문은 진짜였군.’ 그때 김성철의 싸늘한 눈빛이 타이곤의 눈을 직시했다. 타이곤은 순간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무언의 경고였다. 빨리 핵심만 말하고 여기를 떠나라는. 교단 성직자 특유의 장황설이 입에 밴 타이곤이지만 그는 상례를 깨고 일단 자신이 가지고 온 비장의 물건부터 영혼창고에서 꺼냈다. 그의 감싼 손바닥에서 나온 것은 은은한 초록빛을 발하며 허공 위에 떠오른 작은 돌이었다. 부유석이다. 공기보다 가볍진 않지만 그 자체에 이 마법적인 힘이 담겨 있어 하늘 위로 떠올리는 성질을 지닌 귀중한 돌. 공선의 주재료이며 라그란제 상공의 허공궁궐은 그 하부 전체가 부유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부유석 자체는 각국에서 전략물자로 지정될 만큼 중요한 자원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희귀한 물건은 아니다. 김성철로서는 단순히 부유석을 보여준 것만으로 타이곤의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건 뭐요?” 김성철이 물었다. 타이곤은 손바닥 위에 떠오른 부유석을 다시 감싸 쥐며 펜을 꺼내 종이에 뭔가 쓴 후 김성철에게 내밀었다. [ 듣는 사람이 있으면 곤란합니다. 약속을 잡아 다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 꽤나 보안에 신경을 쓰는 모양이다. 김성철이 말했다. “괜찮소. 여긴 아무것도 없으니.” 실제로 이 방 안엔 보안이 보장됐다. 흔히 쓰는 투명화 된 주시자의 눈도 없고 은밀한 마법술식도 없다. 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중을 드는 시종이 대기하고 있긴 하지만 그의 임무는 시중을 드는 게 전부다. 방안의 대화를 엿듣는다던지 하는 비밀스런 임무 같은 건 부여받지도 않았고 그럴 능력도 없다. 님파스 왕실, 아니 그 뒤에 선 호르네코의 지시일 것이다. 세계의 적 김성철을 상대로 얄팍한 수작을 부리는 건 소탐대실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성철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감각과 전설급 영혼각인 진실의 눈을 통해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여기서 이야기하시오.” 김성철이 힘주어 말했다. 세계의 적이라 불리는 세상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거물이 그렇게 말했다. 타이곤은 껄끄럽긴 하지만 그의 말을 따르는 게 옳다 생각하며 우락부락한 생김새답지 않게 소심한 소녀처럼 일어서 김성철 앞으로 걸어왔다. “이것은 은자의 탑 주변에서 채취한 것이오.” “은자의 탑?” 김성철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곳엔 부유석이 나지 않는다. 부유석이 채굴할 수 있는 곳은 대륙 내에선 제국 소유의 1급 탄광이 유일하다. “그곳에 공선 간의 전투가 있었소. 아마도 추락한 함선의 부산물이겠지.” 김성철이 말했다. 이에 타이곤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 마라키아를 맡아 흐트러졌던 그의 눈동자엔 수석 이단심문관에 걸 맞는 강한 신념이 다시 드러나 있었다. “이 부유석은 은자의 탑 주변에서 나온 거요.” “그 사실을 알면 제국이 곧 은자의 탑을 접수하겠군.” “농담이 아니오.” 타이곤은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작은 지구의를 꺼냈다. 고위 성직자들의 흔히 쓰는 성물이다. ‘뭘 하려는 거지?’ 무슨 짓을 하려는 지 알 수 없다. 타이곤은 한 손엔 부유석 다른 한 손엔 지구의를 들고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중간중간 낯익은 구절이 있는 걸로 보아 뮤라 교단에서 전해 내려오는 기도문을 빠르게 암송한 것으로 보였다. 김성철이 싫어라 하는 것들이다. “마라키아. 이 잡상인을 쫓아내라!” 김성철은 용서 없었다. 마라키아가 눈을 번득이며 이 귀찮은 인간 앞으로 날개를 파닥거리며 쇄도했다. “잠깐만 기다려보시오!” 마라키아가 타이곤의 옷자락을 앙증맞은 손으로 덥썩 잡는 순간이었다. 부유석을 쥔 그의 오른손에서 환한 빛이 손가락 틈 사이로 새어나왔다. 김성철은 별 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마라키아는 이제 타이곤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이걸 보시오!” 위기의 순간, 타이곤이 소녀처럼 소심하게 외쳤다. 그는 쥐고 있던 오른손을 폈다.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하늘 위에 상시 머무르려는 성질을 지닌 부유석이 그 힘을 잃고 평범한 돌처럼 손바닥 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김성철의 영혼각인 진실의 눈이 가동됐다. 어떤 속임수의 흔적도 없다. “마라키아. 잡상인은 아닌 모양이다.” 김성철이 말하자 마라키아는 쳇! 이라고 말하며 뒤돌아섰다. 공포의 펭귄이 물러서자 타이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는 성질을 잃어버린 부유석을 김성철에게 내밀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흔들어 거절했다. 만져볼 필요도 없었다. 대신 그는 타이곤 보스보로트를 향해 사뭇 진지해진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된 거요?” “거두절미하고 핵심만 이야기하지요. 당신도 잘 아는 두 교단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책무가 있소.” “호오.” 놀라는 척을 하긴 하지만 듣기 싫다는 감정을 적나라하게 내비친 김성철이었다. 타이곤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최대한 간결하게 서론을 끝낼 방법을 궁리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호라산 교단의 숨겨진 책무는 생명의 정화. 신이 이 세상에 허락하지 않은 부정의 생명을 멸하는 게 그들의 임무요. 최근에 와서는 거의 사라...” “뮤라 교단은?” 말이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김성철이 한 발 앞서 타이곤의 말을 막아섰다. “뮤라 교단의 책무는 땅의 정화요.” 타이곤은 자신의 오른손에 있는 힘을 잃은 부유석을 응시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태초에 이 땅은 부유석으로 가득한 세계였소. 두 발로 걷는 존재에겐 가혹한 땅이었소. 질서신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 권능을 하사, 부유석들을 가라앉히고 지금의 세상을 만들었소.” “…….” 여기 대해서 김성철은 토를 달지 않았다. 그의 말은 태초의 용이 남긴 말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이곤은 김성철의 침묵이 말을 재촉하라는 것으로 오인하고 서둘러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신심이 옅어지고 타락함에 따라 신의 권능도 힘을 잃고 부유석이 제 성질을 내는 경우가 있소. 그것이 지진의 숨겨진 원인. 100년 전쯤에 고대왕국에서 일어난 대지진도 그 때문에 일어난 거요. 아무튼! 세계 곳곳엔 힘을 잃고 봉인된 부유석, 아니 부유 섬이라 하는 게 옳겠군. 그런 것들이 곳곳에 박혀 있소.” “그래서 뮤라 교단의 책무는?” “신이 봉인한 부유석을 재봉인 하는 것. 그것이 우리 교단에서 행하는 정화의 의식이오.” 그렇게 말하며 타이곤은 손바닥 위의 돌을 아래로 흘렸다. 툭. 한때 부유석이었던 돌은 평범한 돌처럼 바닥에 떨어져 떼구르르 굴렀다. “제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함이오.” 수석 이단심문관의 눈빛이 번득였다. 김성철은 그의 형형한 눈빛을 대수롭지 않게 받으며 고개를 까딱이며 물었다. “말하시오.” 이에 타이곤은 기다렸다는 듯 흉중의 말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당신은 종말교단의 적이오?” 말은 길어질 필요가 없다는 게 김성철의 지론이다. 처음으로 타이곤은 김성철의 개입에 관계없이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김성철이 좋아하는 소통의 방식이다.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이 아니오.” “…….” 타이곤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어 김성철이 말했다. “그렇다고 친구도 아니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확실한 것은...?” “그들이 날 노리고 있다는 것.” 김성철은 희미하게 웃으며 피로 얼룩진 가슴 부분의 상흔을 가리켰다. 타이곤의 입가에 처음으로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뭔가 있다. 김성철은 처음엔 다소 별 볼일 없이, 약간은 코믹하게 시작된 타이곤과의 만남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어떤 변수가 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내게 뭘 바라고 온 거요?” 김성철이 병상에서 살짝 허리를 일으키며 물었다. 이에 타이곤은 마라키아를 힐끗 쳐다보고는 의미심장한 어조로 대답했다. “적의 적은 친구라고 하지요. 물론 파문자인 당신이 우리 교단의 친구가 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하겠지만, 그만큼 사안이 중하오.” “…세계의 적인 나보다?” 김성철이 물었다. 타이곤은 반백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한 후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재앙의 추종자들을 기억하실 거라고 믿소. 한때 당신이 제국대원수 시절에 파리처럼 때려잡던 그 무리들을.”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 “그 재앙의 추종자 세력은 지금 종말교단이 대부분 흡수했소. 처음엔 믿기 어려운 일이었소. 알다시피 당신은 재앙의 추종자들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대마법사 발자크를 살해한 철천지원수이고 종말교단은 그런 당신을 구세주로 모시는 종교단체니까.” 실로 그러하다. 김성철과 재앙의 추종자는 물과 기름과 같은 관계. 그 증거는 김성철의 저주란 한 부분에 나타나 있다. 대마법사 발자크의 저주. 발자크는 재앙의 추종자의 대부. 그는 재앙의 추종자이면서도 세계 각국의 수뇌부와 연을 가지고 있어 제국대원수인 김성철로서도 공개적으로 처리하기 곤란한 인물이었다. 김성철은 철혈의 의지로 기어코 그를 처치했다. 머리가 죽자 재앙의 추종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들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켜나가야 했다. “거기서 나는 의문을 느꼈소.” 타이곤이 말했다. “종말교단이 당신을 이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 김성철은 별 말하지 않았지만 속으론 신선함을 느끼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바퀴벌레 처럼 다시 살아나는 재주밖에 없는 이단심문관 중에서도 머리가 돌아가는 인물이 있다는 것은. 침묵 속에서 타이곤은 다시 입을 열었다. “종말교단이 진정으로 섬기는 건 악신이오.” “악신..?”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질서신과 중립신의 주도로 신의 세계에서 쫓겨난 사악한 무리들을 일컫는 말이오. 지금은 질서신에게 패배하 초월세계 끝자락, 연옥에 갇혀 있는 존재들이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요?” 김성철이 물었다. 이에 타이곤은 바닥에 떨어진 부유석이었던 돌을 다시 집어 들며 대답했다. “이 돌이 부정할 수 없는 증거요.” 신이 다진 땅. 그것을 해하는 존재는 오직 하나뿐이다. 악신이라 불리는 존재. 그것들을 섬기는 무리는 이 땅의 정화를 사명으로 하는 뮤라 교단의 진정한 적이라 할 것이다. 타이곤이 말했다. “뮤라 교단의 입장에서 보자면 종말교단.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세계의 적이오.” 그의 눈동자엔 타협의 의지도 의문도 없었다. 김성철은 그런 타이곤이란 인물에 흥미를 느꼈다. 서로 적대하는 적이면서도 협력을 할 수 있는 관계. 차라리 그런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항시 서로 의심하고 경계하는 관계가 우정과 사랑이라는 듣기 좋은 허울 뒤에서 배신의 칼을 꽂는 것보다 훨씬 나으므로. 달라진 분위기 속에서 타이곤이 입을 열었다. “그런 이유로 일단은 그쪽과 협력을 하려고 하오. 우리 쪽에서 줄 수 있는 정보를...” 그때였다. 김성철은 이제는 익숙한 부정한 기운을 벽 너머에서 느꼈다. 벽 너머다. 김성철은 즉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모두 피해!” 그는 베르텔기아를 감싸 앉으며 몸을 날렸다. 다음 순간, 벽이 뚫리며 무언가가 쏜살처럼 날아들었다. “크억!” 타이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것은 검이다. 김성철이 님파스의 왕 디히터에게 선물한 제국대원수의 검이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쓰러진 타이곤을 응시했다. 눈을 하얗게 까뒤집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즉사다. 김성철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벽면 너머를 응시했다. 먼 곳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몇 겹이나 되는 벽을 한 번에 꿰뚫은 구멍 너머에 검은 불길로 일렁거리는 사내가. 김성철은 그를 한 눈에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의 새로운 능력 초월감각이 반응했다. [ 디히터. 님파스의 왕 ] “…….” 김성철의 손에 그를 상징하는 신물,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 88. 탐욕 (3) 초월감각은 디히터 이면에 숨겨진 또 다른 이름을 드러냈다. [ 불멸자, 처형인 픽튼 ] [ 트로이메아의 운수 좋은 병졸 ] 김성철은 차분히 수많은 구멍 너머의 디히터를 응시했다. 검은 불길 속에서 붉은 빛이 번득였다. 디히터의 눈동자다. “나는 여기서 너를 죽인다.” 디히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신의 의지가 아니다. 디히터 자신의 것이다. 초월감각이 그 사실을 느끼게 했다. “베르텔기아. 창고 안으로 들어가라.” 김성철이 말했다. “싫어. 거긴 춥고 외롭다고. 지금처럼 구멍이 난 상태로 들어갔다가는...” 베르텔기아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김성철이 베르텔기아를 붙잡고 자신의 안주머니 안에 집어넣은 것이다. “다시는 널 다치게 하지 않겠다.” 김성철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 반짝이는 빛이 번득였다. 그것은 흔한 분노나 복수심의 빛이 아니다. 그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 열정의 빛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보금자리와 같은 김성철의 주머니 안에서 몸을 흔들었다. “응. 이번엔 잘 지켜. 못 지키더라도 같이 죽던가!” “당연하지. 하지만 이런 놈에게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밑의 마라키아에게 말했다. “마라키아. 실피드를 부탁한다.” 평소 사고뭉치인 마라키아도 지금만큼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다. 그는 고개와 작은 날개를 함께 움직이며 답했다. “알겠다.” 마라키아가 출발하려고 할 때였다. 무언가가 마라키아의 발을 덥석 잡았다. “응?” 마라키아가 깜짝 놀라 아래를 내려 봤다. 그것은 손이었다. 그것도 죽은 타이곤 보스보로트의 손이다. “뭐.. 뭐야? 이놈?!” 마라키아가 발에 힘을 주는 순간 타이곤의 시체가 황금빛 광휘에 휩싸였다. 김성철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단심문관들이 필수적으로 지닌 영혼각인. 부활의 힘이 발동되고 있었던 것이다. “뭐.. 뭐냐! 방금은! 펭귄 네 짓이냐!” 타이곤이 엄한 마라키아를 붙잡고 늘어졌다. “이거 놔라! 바퀴벌레 같은 인간아!” 김성철은 실랑이를 벌이는 두 흉물 앞을 가로 막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마라키아. 이 남자와 함께 실피드로 향해라.” “으음... 어쩔 수 없군. 어이. 인간. 가자고 어서.” 마라키아의 몸에 마법진이 떠오르더니 그의 신형이 하늘 위로 살짝 떠오르더니 이내 미끄러지듯 창밖으로 날아갔다. “당신도 가시오. 어서.” 김성철은 앞을 바라본 채 말했다. 타이곤은 김성철이 바라보는 방향이 부정한 기운으로 뭉친 디히터 왕의 존재를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곧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이제 남은 것은 김성철과 디히터. 디히터는 뭐가 그리 좋은 지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 “이제 둘만 남았군. 세계의 적. 그거 아나? 나는 일부러 기다려 준 거야. 네 무리들이 방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야.” 그는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 무슨 일이 닥칠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현재라는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힘이 넘친다. 이 힘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아. 왜 몰랐을까? 힘을 얻는 이렇게 쉽고도 간편한 방법이 있었는데.” 검은 불길 너머로 또 다시 붉은 빛이 번득였다. “계단 따위 오르지 않아도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디히터의 불길은 조금씩 사위여 들고 있었다. 김성철의 날카로운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디히터가 손을 들어 올리자 부정한 파동이 지진처럼 궁성을 뒤흔드는가 싶더니 검은 불길이 다시 타올랐다. 검은 불길은 원래의 기세를 회복했다. 무언가 있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든 채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를 가로막는 모든 것이 박살났다. 벽, 기둥, 동상, 커튼 뭐든 할 것 없이. 왕은 조촐한 궁전에서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는 알현실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알현실에 들어선 김성철은 님파스 궁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 제물이다. 피로 쓴 마법진이 홀 전체를 채우고 있었고 마법진 주위로는 긴 꼬챙이에 꿰인 무고한 자들이 이미 죽거나 죽어가고 있었다. 김성철은 제물 중에 자신에게 식사와 붕대를 가져다주던 시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름은 몰랐지만 김성철이 아는 사람이다. 입장의 차가 있어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 마음씨가 곱다는 것 정도는 행동으로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어떻게 저런 짓을...” 베르텔기아는 왕실 안에 벌어진 참극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끔찍한 장면이라면 수도 없이 봤지만 알고 지내던 이가 죽은 것은 또 다른 형태의 끔찍함이니 말이다. 광기로 가득 찬 알현실 안에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은 왕비 옥산나 뿐이었다. 김성철은 옥산나와 디히터를 번갈아보고는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주실까?” 김성철은 옥산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왕과 왕비의 관계를 잘 아는 그는 왕비가 이 사건에 깊이 개입했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옥산나는 입을 다문 채 김성철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엔 짙은 공포감에 묻어 있었다. 그 원인은 그녀의 남편인 디히터다. 힘을 얻기 전엔 아내의 외도를 알고도 칭얼거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무력한 사내가 힘을 얻은 이후는 여느 폭군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끔찍한 폭군이 되어 있었다. “왕비는 대답하지 않을 거야.” 왕이 김성철과 왕비 사이에 끼어들어왔다. “왕비는 이제 나의 완전한 아내로서 그 의무를 다하기로 맹세했거든.” 검은 불길에 가려 표정을 알아볼 수 없지만 김성철은 디히터가 웃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터무니없이 교만하고 오만하다. “정숙한 여인은 외간 남자와 함부로 이야기를 해서는 아니 되지.” 초월감각이 아니었다면 김성철이 알던 디히터와 동일인이라는 것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사람이 변해 있었다. ‘디히터.’ 김성철은 떠올렸다. 처음 자신을 보고 어린애처럼 좋아하던 사내의 얼굴을. 대원수의 검을 받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순수해선 청년의 얼굴을, 그리고 아무도 없는 작은 방에서 비참한 현실을 이야기 하던 애절한 왕의 얼굴을. 하지만 김성철이 알던 왕의 모습은 전부 검은 불길과 함께 사라졌다. 주체 할 수 없는 힘이 그의 모든 것들을 왜곡시키고 망가뜨렸다. “…….” 결론을 내릴 때가 왔다. 김성철에게나, 디히터에게나. 왕이 오른손을 뻗었다. 타오르는 손에 한 자루 도끼가 나타났다. 그것은 도끼라고 보다는 둔기에 가까운 무딘 칼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딘 칼날은 흥건한 핏물로 점철되어 있었다. 김성철은 그 도끼가 자신이 지닌 재앙의 무기에 준할 정도로 불경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오늘 나는 너를 죽이고 새로운 역사가 된다.” 디히터가 들뜬 어조로 말했다. “김성철.” 검은 불길 너머 붉은 눈빛이 또 한 차례 번득였다. 전신에서 아신 특유의 압도적인 기운이 폭발하듯 팽창했다. 바람이 떨었고 알현실 곳곳에 매단 태피스트리가 출렁였다. 알현실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든 옥산나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방황했다. 디히터는 자신의 몸에 흐르는 막강한 힘에 취해 히죽 웃었다. 그때였다. 싸늘한 음성이 반대쪽에서 터져 나왔다. “겨우 그런 힘을 얻었다고 기고만장해진 건가?” 김성철이다. 그는 디히터가 내뿜는 불경한 기운에도 약간의 변화조차 보이지 않았다. 늘 그렇듯 그는 평소와 같았다. 가슴팍에 칭칭 휘감은 붕대에 진한 핏물이 베어든 걸 제외하면 말이다. 왕은 조소했다. “그렇다면 어쩔 건가? 계단 좀 올랐다고 기고만장해진 소환자 양반?” “…넌 좀 맞아야겠다.” 대화는 끝났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든 채 깍지를 끼고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뼈마디가 부딪치며 투둑 거리는 소리가 피로 물든 알현실에 울려 퍼졌다. 마지막으로 그는 베르텔기아를 살짝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게다.” 베르텔기아는 이에 응답하듯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준비를 끝마친 김성철은 디히터 쪽을 응시했다. 왕은 최초 공격 이후 선공을 가할 마음이 없는 듯 했다. 초월감각이 김성철에게 말해줬다. 현재 저 검은 불길에 타오르는 존재를 지배하는 것은 아신이 아닌 디히터 그 자체라고.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는 없다. 김성철은 마치 소풍이라도 가듯 가볍게 도약해 디히터를 덮쳤다. 디히터는 뭐가 그리 좋은지 미치광이 같은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무딘 도끼를 휘둘러 날아오는 팔 가라즈를 받아쳤다. 챙캉! 망치와 망치가 부딪쳤다. 디히터의 몸에 붙은 검은 불꽃이 고양이의 털처럼 곤두서며 바짝 타올랐다. “이 감각! 이것이 세계의 적의 일격이냐?!” 디히터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김성철의 면전에서 죽이겠다고 말은 했지만 김성철 팬보이 시절의 감성을 떨치지 못한 것이다. 김성철은 망치로 느껴지는 디히터의 힘을 가늠했다. 약하다. 충분히 압도할만하다. 그는 허공에 떠 있는 자신의 한 발에 신적인 힘을 흘리며 마치 지면에 내리꽂듯 내딛으며 착지했다. 쿵! 그의 발이 닿자 궁성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충격파가 일어났다. 디히터의 입에서 쾌재가 터져 나왔다. “아하!” 하지만 그것은 도입부에 불과하다. 김성철은 지면을 내딛은 발을 힘의 중심축으로 팔에 보다 강하고 예상치 못한 힘을 디히터를 향해 가했다. 밀고 밀리던 팔 가라즈가 마치 생명을 얻은 듯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그 힘의 변화는 누구보다 직접 망치를 맞댄 디히터 본인에게 확연히 와 닿았다. 그는 감당할 수 없는 힘의 제2파가 밀려오는 걸 느꼈지만 대항할 수단이 없었다. 디히터의 두 발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은 반대쪽 벽면을 향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날아갔다. 날아가는 도중에 디히터는 왼손을 뻗었다. 갈고리처럼 움켜쥔 그의 손가락이 난간의 철제 장식물을 긁고 지나가며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끔찍한 소리를 냈다. 손톱과 장식물 사이에 불꽃을 튀기며 날아간 그는 왕궁의 벽면에 거꾸로 처박혔다. 공교롭게도 김성철이 미처 기억하지 못한 왕실의 문장이 걸려 있던 자리였다. “끄으윽...” 디히터를 중심으로 알현실의 뒷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은 아니다. 검은 불길에 휩싸인 디히터의 눈이 붉은 빛을 발했다. 김성철의 초월감각이 반응했다. 디히터는 자신의 힘에 더해 아신의 힘을 쓰려 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발밑에 부정한 기운이 응축됨을 느꼈다. 가볍게 뒤로 물러서자 지면을 뚫고 붉은 기둥 4개가 김성철이 있던 지점을 향해 솟아올랐다. 피로 물든 것 같지만 실은 녹슨 끝이 날카로운 쇠기둥. 그것은 왕실의 사람을 꿰뚫은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것이 저 픽튼이라는 아신의 능력인가.’ 마법이 아닌 다른 무언가. 그것은 몬스터의 고유능력에 가까운 느낌을 줬다. 슉! 슉! 또 다른 쇠기둥이 연거푸 김성철의 발밑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김성철이 측면으로 움직이자 그 궤적을 따라 수십 개의 기둥이 그를 추적하며 솟아올랐다. 순식간에 알현실의 절반에 쇠기둥으로 이루어진 벽이 생성됐다. 김성철은 쇠기둥으로 가려진 영역 너머로 보이는 디히터의 불길이 다시 사위여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연료가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성철이 그렇게 판단을 내리는 순간 옥산나의 짤막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이거 놔!” 다음 순간 디히터가 움직였다. 김성철 쪽이 아닌 마을 쪽이다. ‘제물을 보충하러 가는 건가.’ 김성철은 앞을 가로막는 쇠기둥을 팔 가라즈를 휘둘러 모조리 부셔버리고 디히터를 추적했다. 디히터는 한 팔로 옥산나를 껴안은 채 유성처럼 마을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작은 왕국이다. 왕궁 정원을 통과하면 바로 번화가다. 마을 광장엔 님파스의 시민들이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들 앞에 검은 불길로 일렁거리는 괴인이 나타났다. “너희들의 왕이 왔노라.” 왕이 말했다. 검은 불길에 뒤덮인 왕은 그의 백성들을 굽어봤다. 그러나 어떤 백성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님파스의 시민들이 알아본 것은 왕비가 전부였다. “저걸 봐! 저거 왕비 아니야?” “진짜네. 진짜 왕비잖아.” 백성들에게마저 외면당한 왕. 디히터의 눈에 붉은 불빛이 번쩍였다. ======================================= 88. 탐욕 (4) 다음 순간 수십 개의 쇠기둥이 마을 광장을 뚫고 솟아올랐다. 찰나의 순간에 수백 명의 시민들이 말뚝에 꿰뚫린 채 절명했다. 그들의 피에서 흘러나온 생명의 기운은 말뚝을 타고 흘러가 지면에 안착, 지면이 머금고 있는 또 다른 마력과 융합하여 검은 불길이 보다 오래 지속될 수 있는 힘을 내주었다. 김성철이 등장한 건 그 다음이었다. ‘한 발 늦었군.’ 디히터는 옥산나를 피로 물들어 가는 마을 분수대 옆에 내려놓고 히죽 웃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 사랑. 곧 돌아올 테니.” 김성철의 무심한 눈은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 그는 팔 가라즈를 든 채 재차 디히터를 향해 도약했다. “이런. 힘도 보충했는데 잠시 이야기나 하고 싸우려고 했더니.” 디히터가 빈정거리며 손을 휘둘렀다. 김성철이 전진하는 경로 상에 부정한 기운이 응축된다 싶더니 마치 대지의 이빨 같은 무수한 핏빛 기둥이 김성철을 노리고 솟아올랐다. 빽빽한 기둥이 시야를 가려버리던 그 순간 김성철은 가슴에 묶인 피로 물든 붕대를 풀어 헤쳤다. 그 붕대는 새롭게 솟아 오른 기둥에 부착된 채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호오.” 기둥 너머에서 디히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1번 영혼석. 플라이.’ 1번 영혼석에 마법진의 문양이 감돌았다. 김성철은 아래에서 찔러오는 기둥을 피해 하늘로 날아가 측면으로 고속으로 기동했다. 드러난 상처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디히터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김성철을 추적했다. “도망갈 셈인가?” 그의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추적할 수단도 없는 듯 보였다. 김성철은 아신 픽튼을 국지적인 방어에 적합한 별 볼일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지했다. ‘시드미아에 비할 바가 아니군.’ 하지만 픽튼보다 더욱 한심한 것은 그 파일럿이다. 이제 김성철과 디히터는 마을 외곽에 이르렀다. 하늘을 날던 김성철은 고도를 더욱 높였다.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디히터는 고개를 쳐들며 김성철을 조롱했다. “뭐하나? 세계의 적? 자랑하던 무적의 힘도 내 능력 앞에선 무용지물인가?” 그때 김성철의 몸에 마법진이 떠올랐다. 주문 영창을 시전 한 것이다. 디히터는 김성철을 향해 손가락질 하며 그를 조롱했다. “부끄럽지도 않나? 김성철. 남자라면 당장 아래로 내려와 나와 자웅을 겨뤄라!” 백병전에서 밀려 쇠기둥을 동원한 사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디히터는 당당하게 말했다. 김성철은 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팔 가라즈를 영혼창고에 집어넣고 대신 두 개의 물건을 꺼내 오른손과 왼손에 쥐었다. 한 손엔 라이즈 하이메르의 지팡이 다른 한 손엔 마나 포션. “내 전기를 제대로 읽지 않은 모양이군.” 김성철이 여유를 담아 말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지팡이가 대상을 가리켰다. 목표는 정북쪽. 디히터가 아니다. 마을광장에 남겨두고 온 옥산나다. 그 의미를 깨달은 디히터는 노호성을 질렀다. “그만 둬!” 그러나 다음 순간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모든 걸 묻어버렸다. 디히터가 손을 내젓자 옥산나와 김성철 사이에 쇠기둥으로 만든 방벽이 전개됐다. 원시의 빛은 수십 개의 기둥을 뚫고 지나간 뒤에야 사그러들었다. 디히터의 입가에 잠깐의 환희가 비치는가 싶었지만 그것도 잠시 뿐. 그가 막아낸 일격은 효시에 불과했다. 김성철은 자신의 몸에서 대량의 마나가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눈앞에 떠오른 문자를 응시했다. [ 메아리 X5 ] 하나의 빛이 그치는가 싶더니 연거푸 또 다른 빛이 연이어 옥산나를 덮쳤다. 다섯 개의 빛줄기. 디히터는 모든 힘을 동원해 그 빛의 기둥이 자신의 아내에게 닿지 않도록 막아냈지만 힘에 부쳤다. 결국 디히터는 네 번째의 스타라이트가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왔을 때 쇠기둥 대신 직접 자신이 옥산나와 김성철 사이에 서서 마법방벽을 전개, 빛의 기둥을 상쇄시켰다. 다섯 번째 스타라이트도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펼친 방벽을 뚫지 못했다. 디히터 주변은 폐허가 되었다. 그와 김성철 사이의 구간엔 박살나고 녹아버린 쇠기둥과 민가, 나무, 흙 따위가 구분 없이 섞여 혼란 그 자체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 결과 디히터를 지탱하던 검은 불길은 형편없이 사위여 들었다. 디히터는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몰렸다는 것을 간파하고 고개를 돌려 새로운 제물을 찾았다. “어딜 보나?” 그때 허공 위에서 김성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푸른창공 위에 서서 느긋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 보며 무언가를 들이키고 있었다. 대용량의 마나 포션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 하겠다는 거냐?” 디히터는 급한 대로 쇠기둥을 마구잡이로 전개해 마을에 온전한 민가를 마구잡이로 공격했다. 눈먼 쇠기둥에 몇 명의 시민이 희생되어 꺼져가는 그의 불길을 어느 정도 되살렸다. 그와 동시에 디히터는 품속에서 스크롤 하나를 꺼냈다. 하늘에 머문 김성철을 지면으로 끌어내린 대공 마법이 기재된 아신 픽튼의 하사품. [ 그걸로 저 인간을 끝장내라. ] 대공 수단이 생긴 디히터의 선택은 단순해졌다. 한 차례 공격을 더 막아내고 반격을 한다. ‘놈도 마력이 바닥났을 거다. 마나 포션 조금 들이킨다고 해서 아까 같은 엄청난 공격을 연이어 퍼부을 순 없겠지.’ 붉은 눈빛이 번득였다. 그러나 김성철은 그런 디히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가볍게 옷자락을 펄럭여 그 안의 내용물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눈부신 빛을 발하는 다이아몬드 브로치 아래 8개의 영혼석이 일제히 빛나고 있었다. 다중영창. 그 현황은 아래와 같다. 1번 영혼석 플라이 2번 영혼석 스타라이트 3번 영혼석 스타라이트 4번 영혼석 스타라이트 5번 영혼석 스타라이트 6번 영혼석 스타라이트 7번 영혼석 스타라이트 8번 영혼석 스타라이트 그 의미를 모르는 디히터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다음 순간 라이즈 하이메르의 지팡이 끝에서 원시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하나도 둘도 아닌 일곱 개의 빛의 기둥이. ‘순차공격이 아니라 이번엔 일제공격이라고?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그는 김성철의 장기가 힘에 기반한 육박전으로 알고 있었다. 실제로 김성철은 무수한 적을 팔 가라즈로 후려쳐 죽였다. 이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것이 가장 간편하고 익숙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다른 방법이 필요한 경우에 김성철은 그동안 비밀리에 키워온 새로운 무기, 즉 마법을 아끼지 않는다. 일곱 개의 빛기둥이 연출하는 죽음의 합창 속에서 디히터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빛 속에 삼켜졌다. 눈을 부시게 하는 원시의 빛이 사라진 자리엔 재조차 남기지 않은 올곧은 파괴의 흔적과 그리고 그 경로상에 그저 서 있을 뿐인 검은 덩어리만이 남았다. “오... 옥산나....” 님파스의 왕 디히터의 몸이 소멸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몸은 재처럼 조금씩 떨어지며 그가 파괴한 왕궁과 마을을 향해 날아갔다. 분수대 뒤에 숨어 있던 옥산나는 입을 틀어막은 채 자신의 명목상의 남편의 최후를 울먹이며 지켜보았다. “…….” 김성철은 지팡이를 내려놓은 채 천천히 지면으로 내려왔다. 망자의 마지막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 사랑했다.... ] 디히터의 음성. [ 15년 전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 왕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 김성철은 입을 다문 채 지면으로 내려와 분수대를 향해 걸어갔다. 스타라이트가 만든 일직선의 길을 걸으면서 그는 생각했다. ‘결국은 사랑 때문이었나.’ 미처 살피지 못했다. 디히터를 움직이는 것은 오직 왕비를 향한 마음뿐이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두려움에 떠는 왕비 옥산나 앞에 섰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옥산나를 노려보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겠지?” 옥산나는 입을 열지 못했다. 아니 입을 열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독한 여자다. 그 끔찍한 광경과 목숨의 위기, 그리고 남편의 죽음을 보았음에도 옥산나는 평정을 잃지 않았고 오히려 두려움을 가장한 채 김성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틈만 나면 자신을 변호할 말을 쏟아낼 준비를 마치고서 말이다. 김성철은 순간 살심을 느꼈다. 그러나 곧 그만뒀다. 흩어지듯 사라진 디히터의 마지막 목소리가 걸린 탓이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를 죽인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 지.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거두며 한숨을 내쉬며 하늘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는 붉은 공선 실피드의 건재를 눈으로 확인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놈이 내게 말하더군.” 몸을 떨던 옥산나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김성철을 응시했다. “15년 전 널 처음 만난 이후부터 사랑했다고.” “네...?” 옥산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그때 전 남편을 알지도 못했는데...”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김성철은 망자의 말을 전했다. 더 이상의 이야기는 불필요하다. 어차피 이야기를 더 해봐야 저 여자에게 들을 수 있는 것은 역겨운 자기변호가 전부일 테니.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옥산나를 노려보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넌 목숨을 바쳐가며 너를 지키려고 했던 남편을 배신했고 죽이려고 했다. 네가 다른 곳에서 어떤 삶을 살 건 이 사실은 변치 않을 것이다.” 옥산나의 동공이 수축됐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보인 감정의 전부. 옥산나에게 디히터는 겨우 그것 밖에 안 되는 존재였다. 김성철은 마을 입구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머지않은 곳에서 말의 힘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기사 한 명을 태운 마필이 이쪽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한 출현. 김성철의 손끝이 찌르르 울렸다. 뒤늦은 낚시꾼의 감각이다. 붉은 공선 실피드는 어느새 김성철 위로 와 그들의 건재를 알렸다. 김성철은 좌현에 일렬로 선 마라키아와 타이곤, 그리고 이름 모를 뮤라교단의 신관들이 손을 흔드는 걸 무심한 눈으로 보며 세계수의 잎을 꺼냈다. 김성철은 그들을 찌푸린 눈으로 응시하며 상처를 지혈시키면서 기사가 자신 앞에 오기를 기다렸다. 곧 기사가 김성철과 옥산나 앞에 이르렀다. 그는 곧장 왕비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무사하셨습니까? 왕비 저하!” 안면은 있는 얼굴이다. 근위기사 중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오열을 터뜨리는 왕비에게 현재 사항을 전해 들으며 왕비를 위로했다. 그걸 본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녀석. 데르하와 아는 사이였지.’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 것인지 알 것 같다. “대원수님도 무사하셨군요. 정말로 다행스런 일입니다!” 그는 김성철에게 다가왔다. 김성철의 무심한 시선이 그의 얼굴에 꽂혔다. 무언의 압박이 그를 짓누르자 기사는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기어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김성철에게 내밀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왕궁을 비운 것은 폐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디히터 왕의 명령?” 김성철이 묻자 기사는 김성철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안에 뭐가 담겨 있지?” 김성철이 묻자 기사는 어눌하면서도 막힘없는 말솜씨로 설명을 시작했다. “대원수께서 암살자에 공격을 당한 이후 폐하께서는 장인이신 호르네코 총독과 협력해 그 범인을 추적해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결과가 나왔는데... 유감스럽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군요.” 김성철은 편지를 뜯었다. 그 안엔 암살자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 로이스 샴펜 ] 나이 : 23세 소속 : 상인연합상인 ... 그 서류엔 암살자에 대한 아주 상세한 정보가 장문의 글과 여러 개의 증빙으로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로이스 샴펜이라는 남자의 출생부터 성장과정, 가족사항, 그리고 암살교단에 협력한 배경과 그 동기 등등. 제 아무리 엄격한 재판관이라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만한 내용이었다. 진실을 모르고 봤다면 말이다. 그러나 김성철은 암살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초월감각. 그 신과의 맹약이 하사한 권능 앞에서는 어떤 치밀한 문서도 조작도 통용되지 않는다. 김성철은 서류를 가볍게 훑고는 기사를 노려보며 담담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이 서류는 누가 만든 거지?” 이에 이름 모를 기사는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호르네코 총...” 퍽! 팔 가라즈가 기사를 그대로 으깨버렸다. 뒤쪽에서 옥산나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 무슨 짓이에요! 대체!” 김성철은 피 묻은 망치를 든 채 옥산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돌렸다. “네가 널 살려둔 건 네 남편 때문이다.” “…….” 옥산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표독스런 얼굴로 김성철의 뒤를 노려보았다. 이어 김성철의 다음 말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곧 넌 네 남편을 저주할 것이다.” 김성철은 피 묻은 망치를 든 채 앞으로 걸어갔다. “네 가문은 오늘 멸망할 예정이니까.” 그토록 긴 시간을 들여 드리웠던 낚싯대는 드디어 기다리던 대물을 낚았다. 그 대물의 정체는 대륙십삼걸 호르네코. 그는 오늘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다른 이도 아닌 베르텔기아의 몸에 상처를 낸 대가를 말이다. ======================================= 89. 호르네코 (1)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불안과 초조, 공포로 물들어 가는 회의장 안에서 호르네코는 단 한 마디로 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생각에 몰두했다. 그의 계획은 빈틈이 없었다. 설령 하나가 실패한다고 해도 다른 하나가 실패를 벌충할 수 있게 상당한 노력을 들여 안전장치를 만들어 두었다. 그러나 그의 원대한 계획은 현실이란 벽에 부딪쳐 박살이 났고 이제는 원금은커녕 평생을 걸쳐 쌓아올린 지위와 부, 아니 생명마저 날아갈 판이다. “세계의 적이 님파스에서 출발했습니다.” 심복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말했다. “그가 찾는 것은?” 호르네코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총독님입니다.” 호르네코의 눈이 감겼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했다. 올 것이 왔고 대가를 치를 때가 왔다. 회의장에서 한 사내가 벌떡 일어섰다. 대단히 키가 큰 한 쪽 눈에 황금 의안을 박아 넣은 기괴한 용모의 사내였다. “과욕을 부렸군. 호르네코. 자네답지 않게.” 그의 장인인 그리즐리다. 그는 별 다른 정보가 없는 상황 속에서도 현상을 꿰뚫어봤다. “그러게 말입니다.” 호르네코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의 좌우에 배석한 대상인들이 각자 옆 동료를 돌아보며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곧 조용하던 회의장 안은 아에게 항의 노점시장처럼 왁자지껄하게 변했다. 그 혼란 속에서 또 다른 사내가 일어났다. 호르네코와 장기간 아에게 항의 총독 자리를 두고 항쟁을 벌여온 인물이다. 이제는 돈도 인망도 모두 잃고 대상인의 자리마저 걱정해야 할 정도로 추락한 인물이지만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선 당당하게 호르네코를 향해 비판을 가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종말교단과 붙어먹더니 사위의 나라를 거덜내고 이제는 우리의 고향까지 박살낼 참이군.” 그는 침을 튀기며 언성을 높였다. 그는 대낮부터 술에 취했는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강한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이 도시는 끝났어! 호르네코. 당신 때문에!” 그러자 호르네코 파의 대상인이 즉각 반발했다. “뭘 안 다고 그러는 거요? 세계의 적이 이곳에 온 목적도 모르면서. 단편적인 첩보만 믿고 입을 함부로 노리지 마시오. 그리고 세계의 적이 설령 화가 나서 이곳에 온다고 해도 그가 도시를 파괴한다는 보장이 있소?” “클라리스가 말하더군.” “클라리스? 설마 그 여자가수를 말하는 거요?” “그래, 그 여자가 말하더군! 세계의 적이 온 곳은 남김없이 폐허로 변한다고. 판추리아, 라그란제, 익시온. 다음은 아에게 항이군!” “헛소리도 적당히 하시오!” 호르네코는 가라앉은 눈으로 회의장 안에 벌어지는 어이없는 설전을 지켜봤고 또 자신을 힐끗힐끗 보는 불신의 시선 또한 감지했다. 하지만 이제 이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인 것인가. 호르네코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뺐다. 그리즐리의 황금 의안이 번득였다. 그것은 루테기네아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아에게 총독의 인장. 호르네코가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벗었다는 것은 단 하나의 사실을 의미한다. “급작스럽지만... 본인은...” 호르네코가 빼낸 반지를 책상 앞에 내려놓았다. 술렁이던 회의장 안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호르네코는 광택 없는 금속 인장을 책상 앞으로 내밀며 침통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일신상의 이유로 영구 자유도시 아에게 항의 총독직에서 사퇴하겠습니다.” 충격이 몰고 온 침묵 속에서 호르네코는 인장을 놔둔 채 회의장을 나섰다. 쿵. 닫힌 문 너머로는 일시적인 정적이 흘렀지만 이내 왁자지껄한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수많은 대상인 중 그를 따라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평소 같으면 회의장에 있던 무리 반 이상이 그를 따라 나와 비위를 맞췄을 것인데 권력을 내려놓은 지금 그의 은퇴 따위 신경 쓰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오직 이익만이 지배하는 비정한 세계. 아에게 항의 일반적인 풍경이다. ‘나만큼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임 총독 그리즐리의 쓸쓸한 퇴장 장면이 지금 자신 앞에 펼쳐진 상황과 묘하게 오버 랩됐다. 호위도 아첨꾼 하나 없이 호르네코는 곧 비워줘야 할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집무실 안엔 한 사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종말교단의 알투지우스 제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권력을 잃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의 쓸쓸한 퇴장을 마중하러 나온 이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동료 상인이 아니라 안 지 얼마 안 되는 꽉 막힌 거래 상대방이라는 것은. “세계의 적이 당신의 사위를 죽이고 이곳으로 오고 있소.” 알투지우스가 특유의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알고 있소.” 호르네코는 인장이 남긴 패인 자국이 남은 빈 손가락을 흔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오. 차후의 거래는 내가 아닌, 곧 선출될 새로운 총독에게 가서 하시오.” 호르네코는 그렇게 말하며 서랍을 열어 깊숙한 곳까지 팔을 뻗어 무언가를 꺼냈다. 푸른 액체가 담긴 작은 병이었다. 고대신의 물방울이라 불리는 극독이다. 한 방울만 마셔도 죽음에 이르는 건 물론 시체마저 녹아 없어져 언데드로 부림당할 일마저 없어진다. 죽음은 물론 죽음 이후의 평판에도 신경 쓰는 이에게 어울리는 적절한 마무리 방식이다. 호르네코는 그것을 써서 자진할 작정이었다. 세계의 적 앞에서 말이다. 그것이 지금 그가 세계의 적에게 가할 수 있는 유일한 타격이라고 믿으며 말이다. “가시오. 새 총독에게.” 호르네코가 병을 챙기며 말했다. 그러나 알투지우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일 초 일 초가 길게 느껴지는 무거운 침묵이 지나간 후 알투지우스 제로가 입을 열었다. “내가 거래를 하러 온 것은 상인연합의 총독이 아니라 개인 드로비스 호르네코 당신이오.” 알투지우스는 그렇게 말하며 창가 옆 탁자에 방치된 두루마리를 힐끗 응시했다. “…오직 당신만이 저 문서의 힘을 극한으로 이끌어낼 수 있지.” “결국 그게 목적이었군.” 호르네코가 고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왠지 그럴 거 같더니.” 그래서 호르네코는 그 두루마리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고 청소부에게도 얼씬도 하지 말라고 명했었다. 그 결과 창가의 빛을 받고 있는 두루마리와 탁자 주변엔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왜 나요?” 호르네코가 물었다. “왜 내가 저 두루마리를 써야 한다는 거요?” 호르네코는 저 종말교단의 두루마리가 뭔지 대강은 알고 있었다. 시전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대신 가공할 힘을 안겨다주는 자기파멸의 도구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사정은 모른다. 왜 알투지우스가 자신으로 하여금 그토록 그 두루마리를 쓰게 하려는지. “우리의 지도자가 안배한 일이요.” 알투지우스가 말했다. “종말교단의 지도자..? 프리츠 슈넬메르커 말인가?” 그 물음에 알투지우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유능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지만 우리의 지도자는 아니오. 우리의 진정한 지도자는 따로 있소.” “호오...?” 천상 상인인 모양이다.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방금 들은 정보를 비싸게 팔 수 있겠다고 은근히 생각한 걸 보면 말이다. “당신도 잘 아는 사람이오.” 알투지우스가 이어 말했다. “누굴까나?” 호르네코는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금방 포기했다. 아무 단서도 없이 한 사람을 찾는 것은 백사장에서 모래 찾기와 별 반 다를 가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불현듯 하나의 얼굴이 호르네코의 뇌리를 운명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그 자가...?” 호르네코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분이 당신을 직접 지목했소.” “…….” “당신을 직접 만나보고 판단을 내리셨다고 하더군.” “어떤 판단을?” 호르네코가 물었다. 이에 알투지우스는 형형한 눈빛을 번득이며 의미심장한 어조로 조심스레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상인 클래스의 관장자 이작 라께뗌의 화신에 어울리는 남자라고.” 알투지우스는 뒤돌아섰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그의 부하들이 집무실에 나타났다. 그의 부하들은 알투지우스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떠날 시간이 왔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오. 드로비스 호르네코.” 알투지우스는 그 말을 남긴 채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홀로 남은 호르네코 앞엔 이제 두 개의 선택지만이 남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과는 같다. 어느 것을 선택해도 죽음은 피할 수 없다. 푸른 병은 보잘 것 없는 개인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반면 불경한 두루마리는 공멸을 의미한다. 어느 쪽도 호르네코에겐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그는 선택을 해야 했다. 평생을 선택 속에서 살아온 그는 그러나 문득 어린아이 같은 치기가 메마른 마음의 틈바구니 속에서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호르네코의 인장 없는 손이 푸른 병을 잡았다. 뚜껑을 따고 단숨에 푸른 액체를 들이켠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빛이 모로 새어 들어오는 탁자로 다가가 두루마리 위에 손을 올렸다. 이미 식도도 혀도 위장도 타들어가 말을 할 수 없었지만 고통과 절망, 광기와 집념이 뒤섞인 눈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자, 거래를 시작해볼까? 아신. ] 동기는 치기였지만 그 행동을 결행하게 한 것은 확신이었다. 호르네코 보다 두루마리 너머의 존재가 더욱 상대방을 원한다는 확신. ‘비싸게 팔 수 있겠어. 이 늙은 몸뚱이도.’ 녹아들어가기 시작한 사내의 몸에 검은 불길이 붙었다. 툭.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심장에 박혔던 맹약의 십자가다. * “…….” 아에게 항의 입구. 한 사내가 그리폰을 타고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입구에 착륙했다. 망루에서 성문 아래를 주시하던 경비병들은 그 사내의 정체를 한 눈에 파악하고 수군거렸다. “세계의 적이다...” “그가 왔다...!” 상인연합의 끈질긴 생명력은 다량의 신뢰할 수 있는 정보와 그 정보의 신속한 전달에서 나온다. 이미 김성철이 호르네코를 처치하러 온 것은 상인연합 상인 전체에게 알려져 있었다. 김성철이 디히터를 처치한 지 이제 겨우 1시간 남짓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나저나, 이렇게 늑장피워도 되는 거야? 그 나쁜 놈이 도망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놈은 도망가지 못한다.” 김성철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어째서?” 베르텔기아가 묻자 김성철은 베르텔기아가 들어 있는 심장 쪽을 가리켰다. “그의 심장엔 맹약의 십자가가 박혀 있거든. 놈은 나와 체결한 계약이 성사될 때까진 여기서 떠나지 못한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에 그는 불에 타 없어질 테니까.” “흐음....” “게다가 맹약의 십자가가 없더라도 놈은 여기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 김성철은 아에게 항 중앙에 자리 잡은 거대한 정사각형의 건물을 눈에 담았다. 무한금고. 상인연합의 모두 부가 축적된 상인연합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건물. 그 안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살 수 있는 황금이 있다 전한다. 그 말은 사실이다. 김성철은 직접 그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성문이 열렸다. 깃털을 꽂은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용병대장이 김성철을 향해 소리쳤다. “호르네코는 더 이상 우리의 총독이 아니오. 따라서 아에게 항은 당신에게 문을 열어줄 것이오.” 김성철은 활짝 열린 아에게 항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김성철이 성문을 향해 들어가는 순간에 쪽문을 통해 후다닥 뛰쳐나오는 이가 있었다. 화사한 드레스를 입었지만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여성과 앙상한 체구의 사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고 있었다. “응? 뭐지?” 마치 엇갈리는 순간을 노린 모양새. 베르텔기아가 몸을 흔들며 호기심을 보였다. 김성철도 뭐하는 인간들인지 조금은 궁금하긴 했지만 초월감각이 발동하지 않는 걸로 보아 평범한 인간일 뿐일 더러 지엽적인 문제다. 김성철은 여느 때와 다를 게 없는 항구 도시의 대로를 걸으며 총독의 집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집무실의 입구는 성문과 마찬가지로 김성철에게 활짝 개방되어 있었다. 호화로운 옷을 입은 대상인 몇 명이 입구 앞에서 김성철 앞을 마중 나와 굽신 거리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들에게서 호르네코는 이미 총독에서 사퇴했고 상인연합 임시총회에서 파문당했다는 등의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집무실로 이어진 복도에서 김성철은 복도에 젊은 상인들 몇 명이 웅성이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전부 다 가식이었어?” “자리에서 쫓겨나니 본색을 드러내는군.” “죽기 전에 좋은 거 먹을 수도 있지. 왜들 그래?” 그들은 집무실의 문을 바라보며 험담을 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젊은 상인들을 지나쳐 총독의 집무실 앞에 섰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향긋한 음식의 냄새가 풍겨왔다. “…….” 김성철은 살짝 열린 문에 손을 대고 문을 열어젖혔다. 순간 김성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것은 음식의 향연이었다. 총독의 집무실 안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가짓수의 요리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고 한쪽에선 주방장이 열린 창문으로 연기를 내보내며 조리를 하고 있었다. 탁자의 의자가 휘청거릴 정도로 많은 음식이 쌓인 탁자 너머엔 김성철이 잘 아는 사내가 등을 보인 채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호르네코.’ 김성철은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에게의 총독은 세계제일의 부자지만 검소하기 짝이 없어 검은 빵과 물 한 모금만 먹는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군.” 게걸스럽게 음식을 삼키던 사내가 식사를 멈췄다. 그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로 사치스런 포도주 병을 집어 들더니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키며 몸을 돌렸다. “…….” 김성철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히이...” 베르텔기아가 몸을 떨었다. 그의 적은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몰골로 변해 있었다. 초로의 늙음이 남은 눈매와 콧대 이마 아래엔 갓 돋은 새살마냥 핑크빛의 불길한 살덩이가 젤리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이어붙인 모양새. 김성철은 그 모습에서 미친 마법사들이 종종 만들어낸다는 키메라의 형상을 떠올렸다. “미안하게 됐군. 하지만 양해해주게.” 옛 총독이 말했다. “십 년 동안 쓰레기 같은 검은 빵만 먹고 살았는데 이 정도 호사는 누려줘야지.” 그는 다시 식탁으로 몸을 돌리면서 바닥 아래 떨어진 서류를 가리켰다. “각국으로 보냈던 연락선단이 보내온 보고서요. 당신이 주최하는 세계의회가 어떤 모양새가 될지 저기에 다 적혀 있으니 한 번 읽어보시구려.” 김성철은 바닥의 서류를 집었다. 과연 그 서류엔 상인연합의 선단이 김성철의 문서를 전한 사실과 그 결과가 적혀 있었다. 그중 하나의 결과가 김성철의 마음을 흔들었다. [ 인간제국 - 불참 ] ‘윌리엄.’ 김성철이 서류를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도 괴물도 아닌 존재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정직한 상인,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오. 신의와 성실을 다해서.” 검은 옷 아래 감춰진 거대한 배가 물결처럼 출렁였다. 김성철은 아신의 불경한 기운이 뒤덮는 걸 느끼며 팔 가라즈를 꺼냈다. ‘또 이렇게 되는 건가.’ 호르네코의 몸에 검은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김성철의 초월감각이 그에 반응해 그 존재의 정체를 김성철 앞에 드러냈다. [ 불멸자 이작 라께뗌 ] [ 최초의 상인, 탐욕에 삼켜진 자 ] 불멸자의 이름이 먼저 떠올랐다. 김성철이 의아함을 느끼는 순간 또 하나의 문자가 그의 앞에 떠올랐다. [ 호르네코, 일레보로의 왕 ] ======================================= 89. 호르네코 (2) 지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이다. ‘뭐지 이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흔들림 속에서 김성철의 초월감각이 반응했다. 그것은 아주 작은 미세한 입자였다. 아무리 시력이 좋은 자라도 육안으로 불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그 입자엔 은은한,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밝은 힘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러한 한 것들이 부지불식간에 김성철과 호르네코 주변에 가득 있었다. 쿠궁! 쩍! 김성철과 호르네코 사이의 벽면에 금이 갔다.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건물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심상치 않군.’ 상대방은 아신, 그것도 대단히 강력한 것으로 추정되는 존재다. 섣부른 공격보다는 관찰이 나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몸에 익은 편한 선택은 아니다. 초월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호르네코는 어떠한 형태로 증식하고 있으며 그 주변엔 소름끼치는 함정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라는.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일단 무너지는 천정을 뚫고 건물에서 탈출했다. 고색창연하면서도 균형 잡힌 외관과 기능성으로 오랜 시간 아에게 항의 명물로 자리 잡았던 총독 건물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아에게의 사람들은 갑작스런 지진에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하고 있었다. 이 일대엔 지진이 일어난 적이 없는 지형이었기 때문이다. 바깥으로 나온 김성철은 아까 호르네코의 방에서 보았던 미세한 입자들이 어디서 나오고 있는지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것들은 대지에서 나왔다. 마치 순무를 뽑듯 대지에서 뽑혀 나왔고 무너진 건물 안에 있을 호르네코를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대체 이건 무슨 조화냐?’ 지금까지의 아신은 이 세상에 강림할 때 어떠한 형태든지 인간 제물을 필요로 했다. 아신을 직접 강림시킬 때는 무작위의 무수한 인명을 제물로 바쳤고 아신화의 경우엔 종말교단의 광신도의 생명을 쓰기도 했고 무고한 인물을 직접 살상해 얻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저 건물 안에 도사린 가공할만한 존재는 지금까지의 상식을 모두 뒤엎기라도 하는 양 독자적인 방식으로 구동하고 있었다. ‘1번 플라이.’ 김성철은 하늘로 날아오르며 그 모습을 상공에서 관찰하며 메테오의 주문을 영창 했다. 마력 소모는 절반이지만 파괴력 그 자체는 스타라이트에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고 무엇보다 걸리적거리는 잔해를 처리하는데 메테오 세례만한 것도 없었다. 이윽고 영창이 끝나자 하늘 위에서 마법진이 열리며 하늘에서 끌어 온 운석이 총독 건물을 향해 떨어졌다. [ 메아리 X7 ] 뒤이어 메아리 효과로 7개의 운석이 추가로 총독부 건물의 잔해를 강타했다. 쿵! 쿠궁! 연이은 운석 강타에 유서 깊은 건물은 잔해조차 남지 않고 먼지로 변해가고 있었다. 김성철은 잔해 사이로 드러난 검은 불길을 발견했다. 그것은 김성철의 우려대로 점점 증식하여 거대한 형체를 갖추고 있었다. “저건 뭐야..? 지네?!”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너머로 빼꼼 몸을 내밀며 경악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대로 검은 불길 안에 휩싸인 존재는 마치 지네와 같은 다족류의 형상으로 변해 있었다. 건물 잔해를 뚫고 검은 불길에 휩싸인 거대한 지네가 모습을 드러냈다. “으아아아!” “살려줘!” 김성철은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귓가에 스치는 걸 느끼며 초월세계에서 보았던 거대한 뱀의 형상과 익시온에 강림한 신상과도 같은 시드미아의 형상을 떠올렸다. ‘설마 호르네코. 실체화를 하려는 것인가? 제물도 없이?’ 그 검은 지네는 이제 일말의 이성이라곤 남아 있지도 않은 듯 본능에 따라 몸을 꿈틀거렸고 이윽고 수천 개의 다리를 놀려 어디론가 향했다. 그 거대한, 몸집을 끝없이 불려나가는 지네는 아에게 항의 시장 광장과 아케이드 천막, 낡은 집들의 지붕을 타고 빠른 속도로 북상했다. 김성철은 상공에서 그 괴물을 지켜보았다. 괴물이 가는 곳마다 대지 안에 깃든 성스런 어떤 힘이 입자 형태로 빠져 괴물의 검은 불길 안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그걸 본 김성철이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한때 호르네코였던 어떤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이 땅, 아에게 항 전체에 깃든 힘으로부터 생명력을 얻는다는 것을. 그것은 막을 수 없다. 김성철의 힘으로도 도시의 대지 전체를 박살낼 방법은 전무하니. 오직 신 그 자체만이 가능한 영역이리라. “아무래도 우리, 도망치는 게 좋지 않을까?” 지금까지 수많은 적을 함께 보아왔지만 이번 적은 베르텔기아의 눈에도 극도로 위험해보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지난 날, 카즈의 검에 관통된 상처가 아려오는 지 몸을 떨며 주머니 안쪽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 베르텔기아의 말이 실로 옳다. 마라키아는 말했다. 나하크 족이 아신화를 사용하는 인간 원시 부족을 상대할 때 가장 즐겨쓰던 방법은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라고. 아신은 신에 의해 이 세상에 허락되지 않은 존재고 따라서 어떠한 수를 써도 이 세상에 오래 남을 길은 없다고. 그의 말대로라면 무너지는 아에게 항을 뒤로 한 채 님파스와 아에게 항의 경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실피드 쪽으로 귀환하는 것이 옳다. 이미 호르네코가 약조한 세계의회 통지는 각국에 확실히 전해졌고 이제는 익시온에서 세계의 수뇌들이 모일 날만 기다리면 충분하므로. 그런데 몇 가지 미묘한 감정이 김성철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하나는 껄끄러운 형태의 의문이었다. ‘대체 뭘 위해서?’ 김성철은 슈넬메르커처럼 용의주도한 타입도 황제처럼 큰 그림을 짜는 타입도 아니다. 그는 순간의 기지와 번득이는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타개하는 일선형의 지휘관이었다. 하지만 그 기지와 임기응변도 결국은 큰 줄기를 이해한 뒤에야 가능한 것들이다. 김성철은 주어진 전략적인 목표를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대강의 줄기는 이해한 후에 그것에 부합하기 위한 최적의 행동을 펼친다. 그 전장에서의 경험이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모순이 있다고. 이미 아신으로 변해가고 있는 호르네코, 아니 호르네코였던 존재는 아에게 항의 중앙 무한 금고를 역겨운 다리와 몸통으로 뱀처럼 칭칭 휘감고 있었다. 그에겐 어떤 전투 의사도 김성철을 해하려는 움직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본능만 남은 벌레처럼 무한금고가 먹이라도 된 것마냥 집착하고 있었을 뿐이다. 가는 곳마다 대지의 힘을 빨아먹으며 지진을 일으키면서 말이다. “뭘 그렇게 멍하니 생각하는 거야?” 베르텔기아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김성철을 일깨웠다. 그는 베르텔기아의 강한 진동을 느끼며 머릿속을 파고드는 의혹을 떨쳐버리고 가볍게 생각을 전환했다. ‘어쩌면 이것은 호르네코에게 두루마리를 건넨 자들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인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계획을 짜본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김성철이 선뜻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건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호르네코였던 존재가 일으킨 지진으로 인해 아에게 항은 처참하게 파괴되고 뒤틀리고 있었다. 당장 눈앞에서만 수천, 아니 수만 명의 인명이 목숨을 잃을 위기에 놓여 있다. “모두 이쪽으로!” “이쪽으로 달아나시오!” 내진 설계 따위 일체 고려하지 않고 빽빽하고 무질서하게 자리 잡은 건물들은 약간의 진동에도 진흙으로 만든 집처럼 무너져 내렸다. “살려주세요!” “누가 살려주세요!” 사방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구슬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순간, 김성철 발밑에 있던 거대한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악명 높은, 인간 쓰레기와 꾼들로 가득 찬 상인연합 증권거래소 건물이다. 거대한 정방형의 건물 안에 모여 타인의 운명을 걸고 돈놀이나 하던 자들은 잔해 안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누가.. 누가 구해주시오!” 힘 좀 꽤나 쓰는 자들이 마법과 힘으로 개인적인 탈출을 하는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비어있던 중앙 구역에 갇혔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천정과 그 천정에서 흘러내리는 먼지와 부스러기를 사형수의 심정으로 지켜보면서 말이다. “…….” 그 광경을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는 영웅도 뭐도 아닌데. 죽어도 하등 관계없는 인간쓰레기들을 구하려 하다니. 김성철은 증권거래소 앞을 가로지르는 마차 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전쟁이 나길 원하는 자들의 한심한 대화를 똑똑히 기억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김성철을 묶어두고 있었다. 판추리아에서도 그랬다. 그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도시를 가로지르는 쇠사슬을 잡아당겼고 제도 라그란제에서도 수십 만의 시체를 일으켜 세운 동부의 2인조를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찾아다녔다. 지금 김성철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불쾌하군.’ 김성철의 눈동자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처음엔 그저 자기들의 잇속만 챙기는 이 세상의 기득권에 대한 반발심리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판추리아에선 그런 심리가 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단순한 반발이 아닌 근본적인 무언가가 그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가슴 속에 나타난 변화를 느끼고 조심스레 물었다. “잠깐만. 베르텔기아.” 김성철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밑으로 하강해 지붕이 두 동강이 난 증권거래소 천정에 안착했다. 팔 가라즈가 김성철의 손에 나타났다. “모두 물러서라!” 천둥 같은 일갈. “모두, 지붕에서 물러나라!” 김성철은 재차 말했다. 팔 가라즈가 머리 위로 번쩍 들렸고 이윽고 신적인 힘이 그의 몸을 감쌌다. 쿵! 말 그대로 강력한 일격이 지붕을 강타했다. 사람들을 가둬놓고 있던 잔해는 신적인 힘에 의해 마치 비로 쓸려나가듯 날아갔고 그 안에 갇혀 죽음만을 기다리던 이들은 다시 한 번 하늘 위에 빛나는 태양을 볼 수 있었다. 등 뒤로 그 태양빛을 받아 마치 거룩한 무언가로 보이는 한 사내와 함께. “저.. 저것은.. 세계의 적?!” “세계의 적이 우리를 구한 건가?!” 탐욕에 의해 지배되던 상인과 모리배의 흐린 눈동자에도 광명은 찾아왔다. 답례 같은 걸 받을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김성철은 마치 자신을 구원자처럼 응시하는 사람들을 버려둔 채 다음 건물로 향했다. 하층민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였다. 안 그래도 다닥다닥 호수별로 뭉쳐놓은 곳이었는데 임대인들이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불법으로 방을 건축하며 호실을 더욱 늘려놓은 닭장 같은 공간이었다. 지진으로 인해 그 7층에 이르는 인간닭장이 허리부터 휘어지고 있었다. 기사 수준의 능력치를 지닌 사람이라면 그대로 뛰어내리면 그만이지만 하층민들은 평범한 인간 그대로의 능력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무너지는 건물 안에서 아우성치고 허둥댔다. 김성철이 무너지는 건물을 몸으로 받쳤다. “지금 당장, 건물에서 나가라!” 건물의 흔들림이 멈추자 멈춰 있던 사람들은 앞 다투어 앞으로 뛰쳐나갔다. 나이 지긋한 노인이 입구의 계단 앞에서 넘어졌다. 몇몇 남자들이 그 노인을 밟고 지나갔다. 김성철이 고함을 지르려는 찰나 젊은 남성들이 쓰러진 노인을 일으켜세웠다. 김성철의 분노는 가라앉았고 그의 비호 하에 수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김성철은 대부분의 사람이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후 건물에서 손을 뗐다. 인간 닭장은 찰흙으로 만든 집처럼 무너지며 대량의 먼지를 발생시켰다. 다시 플라이를 시전한 김성철은 하늘 높은 곳에서 이 모든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원흉을 노려보았다. 호르네코라는 이름을 지녔던 거대한 지네가 무한금고를 긴 몸과 수많은 다리로 칭칭 휘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김성철은 호르네코의 몸에 붙은 불길이 많이 사그러든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것이 쇠락의 징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다른 무언가가 번뜩이고 있었다. 광택이다. 무지잿빛으로 번들거리는 기묘할 정도로 아름다운 광택이 불길이 사그라진 자리에 실체를 갖춰가고 있었다. 초월감각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대지의 힘이 호르네코를 향해 모여드는 것을 알려줬다. ‘대체 뭘 하려는 거냐.’ 김성철이 의문을 느낀 순간, 또 한 차례의 지진이 아에게 항을 뒤흔들었다. 도처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며 여기저기 화재의 불길이 일어났다. 있는 자들은 재빨리 그들의 공선에 올라타 도시를 탈출하려고 했다. 부자를 태운 공선이 닻줄을 끊고 상승하려는 찰나였다. 그들의 발밑에서 터무니없이 거대한 무언가가 올라오며 부자들의 공선을 박살내며 지나갔다. 김성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수많은 공선들을 집어 삼킨 것은 부유석, 아니 부유섬이라 불러야 할 만큼 거대한 질량의 덩어리였다. 파괴된 공선에선 대량의 금화가 파편과 함께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음 순간 아에게 항에 있던 모두의 눈에 동일한 내용의 문자가 떠올랐다. [ 그 누구도 도망갈 수 없다. ] [ 황금을 내놓아라. ] 그 문자가 떠오른 직후 모든 이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무한금고 위에 도사리고 있는 거대한, 무지갯빛의 지네를 응시했다. 그 지네는 무한금고의 외벽을 뚫고 무언가를 부지런히 가로로 된 입으로 집어삼키고 있었다.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부의 상징. 황금이다. 황금을 삼키는 지네가 갑자기 몸을 틀더니 김성철 쪽을 응시했다. 또 하나의 문자가 눈 앞에 떠올랐다. [ 너, 황금이 많구나. 냄새가 난다. ] 오직 김성철의 눈에만 보이는 문자였다. ‘안타깝지만 여기서 물러나야겠군.’ 그렇게 생각하고 뒤로 날아가려는 참이었다. 김성철 주위의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 김성철의 눈동자에 경악이 떠올랐다. 있을 수,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영혼창고가 스스로 열리고 있었다. ======================================= 89. 호르네코 (3) ‘영혼창고를 스스로 열어젖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능력이다. 영혼창고는 소유의 한계를 물리적으로 증폭시키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 중 하나. 영혼각인의 형태로 존재하는 영혼창고는 영혼제련사라 불리는 희귀 클래스를 지닌 장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일반적인 도구로 취급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영혼창고에 넣은 것은 다시 빼낼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이며 불가침의, 소유의 확장이라는 신의 뜻에 가장 근접한 도구다. 그런데 그 가치를 정면에서 반박하는 일이 일어났다. 김성철의 영혼창고가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열리기 시작하며 무언가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상인연합의 무인금화가 가득 담긴 궤짝이다. ‘이런 개 같은 놈을 봤나.’ 금화 궤짝 하나 둘 정도는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영혼창고 안엔 그가 중하게 여기는, 인생 그 자체를 나타내는 물건들이 깊은 곳에 감춰져 있다. 지금 저 황금빛 지네는 그것을 끄집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초월감각이 말해주고 있다. 저 지네는 이 아에게 항에서 자신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황금을 지닌 사내, 즉 김성철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9년 전 무한금고를 털 때의 응보가 이런 식으로 돌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 황금을 내놔라! ]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지는 듯한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성철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적이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 알아차렸다. 저 지네 안에 호르네코는 더 이상 없다. 멈출 줄 모르는 탐욕이 그를 집어삼킨 것이다. 그와 하나가 된 아신과 마찬가지로. 아신 이작 라께뗌은 대지의 힘을 빨아들이고 호르네코는 황금을 빨아들인다. 서로의 탐욕마저 빨아들이는 두 존재는 하나로 합쳐져 아에게 항은 물론이고 김성철마저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성철에겐 비장의 무기가 있다. “호르네코!” 김성철이 호르네코를 향해 소리쳤다. 지네는 고개를 쳐든 채 경직된 모습을 보이고 있엇다. 김성철은 영혼창고 입구 안에 가득 들어찬 황금 더미를 밀어내며 하나의 문서를 끄집어냈다. 그것은 다름아닌 김성철과 호르네코 간의 계약서. 김성철이 2주를 머무르는 걸 대가로 호르네코가 이행하여야 할 사항들이 기재되어 있는 문서. 얼핏 보면 평범한 계약서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 문서엔 중립신을 공증인으로 세웠다. 맹약의 십자가라는 도구를 이용해 말이다. 김성철은 호르네코가 이행하여야 할 의무 중 하나를 눈에 담고 황금지네를 응시했다. “상인연합 국적기의 인도를 원한다! 지금 당장 이 계약서에 적힌 의무를 이행하라!” 호르네코의 심장엔 맹약의 십자가가 박혀 있다. 아무리 지금 호르네코과 아신 그 자체가 되었다고 해도 아신은 아신, 아신은 상급 존재인 중립신의 권능을 이길 순 없다. 따라서 맹약의 십자가가 박혀 있는 이상, 그 맹약을 저버릴 경우엔 치명타를 가할 수 있을 것이다. 호르네코에게 이성이 남아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이계의 계약엔 배려라는 것이 없으니까. “1분의 시간을 주겠다! 당장 내 질문에 응답하라!” 계약서의 문구에 밝은 빛이 서리기 시작한다. 계약의 법쇄로 묶인 중립신의 신성력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1분이 채 지나가기도 전 거대한 지네가 꿈틀거리더니 입으로 황색의 끔찍한 냄새가 나는 점액을 토했다. 김성철은 재빨리 현재 자리에서 이탈해 쏟아지는 액체를 피했다. 치이이이익- 노란 액체가 떨어진 자리의 모든 것이 부식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건물을 녹이고 지면까지 바닥을 드러내게 하고 있었다. ‘왕수? 아니 그 비슷한 액체군.’ 극산성의 액체라는 건 분명하다. 금을 녹여 먹는 괴물의 내장에서 나올 법한 물건이다. 아무튼 이유야 어찌됐든 방금 공격으로 김성철이 원하던 조건은 성취됐다. 호르네코는 방금 공격으로 스스로 계약을 파기했다. 거래 상대방에 대한 신의성실 의무는 모든 상거래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의무. 호르네코는 그것을 져버린 것이다. 이제는 맹약의 십자가가 그를 불태우는 것을 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김성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설마, 중립신의 권능이 아신에겐 미치지 않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할 찰나 머지않은 곳에서 작은 불길이 솟아올랐다. 아에게 항 전역을 불태우는 불꽃과는 다른 신성함이 느껴지는 불꽃. 맹약의 십자가의 불꽃이다. 그런데 그것은 호르네코라는 지네가 아닌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잔해 속에서 피어올랐다. 김성철은 그 신성한 찰나의 불길이 총독의 관저 일부분에서 나는 것을 발견했다. ‘설마 맹약의 십자가를 빼낸 건가? 그럴 리가. 그것은 불가능....’ 불가능이란 단어를 생각하려는 찰나였다. 김성철은 불가능하지 않다고 단정 지었다. 소위 다섯 주신이라 불리는 것들은 김성철이 생각하는 진정한 신이 아니니까. 따라서 완전이란 개념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쿠웩!” 생각할 시간은 없다. 호르네코는 재차 모든 걸 녹이는 극산성의 용액을 토해냈다. 이번엔 김성철 쪽이 아닌 하늘을 향해 토해냈다. 하늘 높이 솟아 오른 그 점액은 중력에 이끌려 상승을 멈추더니 이내 수천, 수만, 수억 개의 방울방울로 갈라지며 아에게 항 전역에 떨어졌다. 글자 그대로의 죽음의 비. 그것이 파멸에 이른 항구에 쏟아졌다. ‘이런 빌어먹을.’ 스케일이 다르다. 지금까지 만난 적들과. 김성철은 즉시 지면으로 낙하해 비를 막을 물건을 찾았다. 뭐든 좋았다. 건물의 잔해건 공선이건 저 극산성의 용액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운 좋게 머지않은 곳에서 속박에서 풀려 난 부유섬 하나가 상승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전 마력을 쏟아 부어 혜성처럼 날아가 부유섬의 바닥 아래 몸을 붙였다. 상승하는 부유섬에 매달린 김성철과 쏟아지는 죽음의 비가 교차했다. 부유섬 바닥에서 김성철은 볼 수 있었다. 죽음의 비가 아에게 항에 종언을 선고하는 것을. 간신히 살아 있던 자들은 죽음의 비를 맞고 그대로 녹아버리거나 죽음의 비가 피어올리는 유독가스를 마시고 절명했다. 그 비는 어떤 의미로 아에게 항에 진정한 평등을 선사했다. 빈자에게나 부자에게나 동일한 죽음을 선사했으니. [ 황금을 내놔라! ] 거대한 지네가 김성철을 향해 소리쳤다. 김성철은 이미 부유섬에 올라탄 채 아에게 항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땅을 기는 지네가 김성철을 쫓아낼 길은 없어 보였다. 그는 그대로 부유섬의 부력에 이끌려 이곳에서 후퇴할 생각이었다. 초월감각이 때마침 영혼창고를 잡아끄는 호르네코의 힘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뭔가 잊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하지만 껄끄러운 적 상대로 아무 의미 없는 싸움을 하는 것은 김성철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의 몸은 하나고 그가 죽여야 할 놈은 셀 수도 없으니. 그렇게 생각할 찰나였다. 호르네코가 거대한 몸을 움츠렸다가 쭉 펴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푸슉!” 그것은 일직선으로 방사되는 죽음의 용액의 물줄기였다. 그것은 김성철을 향해 똑바로 날아가 그가 몸을 숨긴 부유섬을 직격했다. 김성철은 즉시 녹아내리는 부유섬에서 이탈해 허공에서 자리를 잡았다. 불길한 기운이 발밑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김성철을 보았다. 거대한 지네가 수천 개의 다리마다 마법진의 형상을 머금은 채 하늘을 오르고 있는 광경을. ‘님파스 왕에 붙었던 피라미와는 다르군.’ 지네가 하늘을 걷자 대지에 응축된 입자가 폭발적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반작용으로 아에게의 땅이 중력의 속박에서 벗어나 차례로 하늘로 떠올랐다. 상공 위에 머무른 김성철은 부유섬들이 빠져나간 죽음의 항구에 바닷물이 뒤덮는 걸 볼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알려졌던 유서 깊은 도시의 비참한 결말이었다. 이제 김성철에게 주어진 길은 하나다. 적과 맞서 싸우는 것. “베르텔기아. 꼭 붙어 있어라.” 김성철의 눈동자에 차가운 안광이 번득였다. 그의 주위로 마법진의 형상이 나타났다. 주력 마법, 스타라이트의 마법진이다. 그와 동시에 그의 일곱 영혼석 또한 동일한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스타라이트 13단 콤보...!” 김성철은 디히터 왕을 상대했을 때 사용했던 기술을 다시 한 번 구사하려 하고 있었다. “뭐야? 그 이상한 이름은?” 베르텔기아가 즉각 김성철의 끔찍한 작명센스에 반발했지만 김성철은 못 들은 체 하고 남은 영창을 마무리했다. 김성철은 한 손엔 팔 가라즈, 다른 한 손엔 라이즈 하이메르의 지팡이를 들고 자신을 향해 육박해오는 거대한 지네를 노려봤다. 이윽고 지핑아의 끝에서 원시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6번의 연격과 7번의 동시 타격으로 이루어진 모든 마력을 퍼붓는 기술. 김성철은 일전의 싸움에서 마나가 최대치인 상태에서 추가적인 마나포션의 섭취 없이도 마력치가 버텨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추가는 없다. 이미 포션 중첩 효과가 나타나고 있으니.’ 도합 13개의 원시의 빛을 내뿜으면서도 김성철은 이 일격만으로 호르네코를 처치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호르네코는 디히터보다 훨씬 강하고 그리고 형체마저 달라진 상태니. 13개의 빛이 사라진 후 김성철은 후방으로 날아가며 광휘 속에 파묻힌 호르네코를 응시했다. 곧 빛이 걷히고 호르네코의 형상이 천천히 드러났다. 김성철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호르네코는 건재했다. 아니,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김성철은 그 괴물의 번들거리는 무지갯빛 껍질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마법내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 황금을 내놔라! ] 황금 이외엔 어떤 생각도 할 수 없게 된 탐욕의 괴물을 기괴한 포효를 내지르며 하늘을 기어 올라왔다. 김성철은 다가오는 호르네코를 응시하며 초보 모험가 시절 길드의뢰소에서 들었던 초보 모험자의 상식을 되새겼다. 지금은 아마도 고인이 되었을 중년의 길드마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몬스터는 저마다의 약점을 지닌다. 충(蟲)형 몬스터에겐 둔기가 효과적이지.” 팔 가라즈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답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접근해서 내려치냐다. 점액 공격 한 두 번 정도는 강력한 체력,혹은 재앙의 무기를 동원해 견뎌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김성철은 소중한 단벌 옷이 녹아내리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리고 살이 타들어가는 끔찍한 경험도 하고 싶지 않았다. “찍!” 호르네코가 극산성의 액체를 분비했다. 김성철은 최대 속도로 고도를 상승시켜 점액공격을 회피했다. 하지만 그 방법도 오래가진 못한다. 비행마법 플라이로 날 수 있는 고도엔 한계가 있으니. 공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걸로 보아 슬슬 한계고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베르텔기아도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기압 때문인지 품속에서 말없이 몸을 떨었다. [ 황금을 내놔라! ] 호르네코의 음성이 다시 한 번 들려왔다.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군.’ 호르네코의 가로로 된 입이 벌어졌다. 다시 한 번 점액을 뿌릴 생각이다. 비어 있는 김성철의 왼손이 허공을 더듬었다. 영혼창고다. 손으로 닿는 다른 세계의 안쪽엔 찰랑거리는 감촉의 금화가 잔뜩 쓸려와 있었다. 호르네코가 일으킨 인력에 이끌린 것들이다. ‘조금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김성철은 영혼창고 안에 손을 넣은 채 공간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그 안에 있던 금은보화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금화들이 떨어져내렸다. 황금의 비처럼. [ 황금! ] 몬스터가 평범한 인간보다 월등히 강한 신체와 특수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사냥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지닌 지성이란 게 보잘 것 없기 때문이다. 호르네코도 마찬가지다. 탐욕에 삼켜진 그는 인간, 인간에서 발전한 아신이라기보다는 하등 몬스터에 가까운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호르네코를 무심한 눈으로 내려 보았다. ======================================= 89. 호르네코 (4) 그 괴물은 김성철의 영혼창고에서 쏟아져 내리는 무한금고의 금화를 따라 아래로 하강하며 정신없이 금은보화를 받아 먹어치우고 있었다. 실로 기묘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운명의 장난이었다. 9년 전 김성철이 강탈했던 무한금고의 금화가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한 형태로 반환되는 광경은. 김성철은 마지막 금화 하나마저 영혼창고를 벗어나는 걸 느끼며 황금을 먹어치우는 지네를 향해 수직으로 하강했다. 팔 가라즈를 든 손이 올라갔다. 김성철은 호르네코의 무지갯빛으로 번들거리는 대가리를 노려보며 팔 가라즈를 쥔 오른팔에 신적인 힘을 흘렸다. [ 모든 황금은 내 것이다! ] 호르네코의 목소리가 의식 속에 울려퍼지는 순간 팔 가라즈가 힘껏 내려처졌다. 퍽! 경쾌하지만 가공할만한 일격이 황금 지네의 두상을 강타했다. 그 어떤 강한 아신이라고 해도 김성철의 신적인 일격을 버텨내는 존재는 없다. 하지만 호르네코는 달랐다. 그 탐욕의 화신은 거대한 전신을 부르르 떨 뿐 김성철의 일격을 버텨냈다. 그러나 한 대를 버텨냈다고 해서 두 대를 버틸 수 있는 건 아니다.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무 기둥만한 무지갯빛 더듬이를 왼손으로 움켜잡고 몸을 고정시켰다. 뒤어 무자비한 강타가 이어졌다. 퍽! 퍽! 퍽! [ 아.. 안 돼!!! ] 매에는 장사가 없고 가끔 매는 인간으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게 만들기도 한다. 김성철의 의식 속에 괴물로 변한이래 처음으로 사람 말 같은 호로네코의 음성이 울려퍼졌다. [ 그만.. 그만 둬! ] 그러나 그 절규는 김성철의 가학심을 부추길 뿐이다. 더듬이를 잡은 채 김성철은 쉬지 않고 망치를 휘둘렀다. 퍽! 퍽! 퍽! 퍽! 퍽! 무지잿빛 갑각이 박살나고 머리통이 으깨졌다. 김성철은 흔들림 없이 타격을 계속했다. 상대방의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 그.. 그만... ] 초월감각이 김성철에게 말해줬다. 아에게 항에 강림한 아신의 숨통이 끊어졌다는 것을. 망치질을 멈추자 거대한 지네는 마법의 힘을 잃고 지면으로 떨어져내렸다. 김성철은 더듬이에서 손을 떼고 허공에 머무른 채 황금을 먹어치우는 지네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부유섬을 뒤로 한 채 이제는 바다로 변한 아에게 항으로 낙하하는 것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허공 속에서 지네의 몸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찢어진 거대의 내장에서 흘러나온 것은 용해된 황금이었다. 무한금고의 황금은 물론이고 김성철의 황금까지 먹어치운 그 탐욕의 화신은 바다가 된 아에게 항에 황금빛의 물을 흩뿌리며 공중에서 산화했다. 바람결에 실려 망자의 말이 김성철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 나는... 일레보로의 왕이다..... ] [ 누구보다 많은 부를 지닌.... ] 흩어지는 시신 속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떨어졌다. 김성철은 그것을 낚아챘다. 그것은 고색창연한 느낌을 주는 열쇠였다. 하지만 그 열쇠는 엄청난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트로이메아 금고지기의 열쇠 > 등급 : 신화급 분류 : 아이템 효과 : 타인의 영혼창고를 열 수 있다. 비고 : 신의 창고관리인의 열쇠. 그 열쇠는 가장 신의롭고 정직한 자만이 가질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아이템이 손에 들어왔다. ‘이런 것이 존재하다니...’ 김성철이 새롭게 얻은 전리품에 감탄하는 동안 황금의 물은 아에게였던 바다 위에 떨어지며 온 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그것은 실로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씁쓸한 광경이었다. “너무 아름다워.. 하지만 너무 아름다워서.. 더욱 슬퍼 보여.” 베르텔기아가 그 장관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 김성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하강을 시작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지축이 흔들렸다. 지진이다. ‘그럴 리가. 호르네코는 이미 죽었는데.’ 김성철은 하강을 멈추고 아에게 항에 새롭게 일어나는 진동에 모든 주의를 기울였다. 이윽고 진동의 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무언가가 황금으로 물든 아에게의 바닷물을 뚫고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부유섬? 아니 다른 것이다.’ 김성철은 허공에서 압도적으로 거대한 성채 같기도 탑 같기도 한 거대한 구조물이 황금 바다 아래서 솟으며 형체를 갖추는 걸 지켜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동은 멈췄다. 김성철은 한때 아에게 항을 구성하던 부유섬들 아래로 하나의 거대한 구조물이 우둑 선 것을 발견하고 마치 끌린 듯 그 앞에 하강해 내려섰다. “뭐.. 뭐야? 이건? 터무니없이 신성한 느낌이 들어.” 베르텔기아가 몸을 떨며 말했다. 김성철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터무니없는 거대함 속에서 김성철은 굉장하다는 감정과 무한함이라는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그것은 일찍이 다른 신의 구조물, 소환광장이나 은자의 탑에서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김성철은 이 압도적인 구조물 아래서 처음 호르네코와 직면했을 때 어렴풋이 느낀 의아함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설마.. 이것이....” 김성철이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는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왜 그래? 갑자기?” 베르텔기아의 물음에 김성철은 부드럽게 베르텔기아를 쓰다듬으며 담담하지만은 않은 살짝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이것이 종말교단이 원한 진정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확증은 없다. 근거는 빈약하다. 하지만 김성철의 감각과 경험, 직감이 아무 근거도 없는 그의 생각을 굳건히 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성철이 그 거대한 신의 구조물 앞에 서자 그가 지니고 있던 일말의 의혹 따윈 단숨에 날아가버렸다. 김성철이 다가오자 구조물은 스스로 문을 열었다. 김성철은 계단 너머에서 보았던 죽은 신에게서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감각을 느끼며 눈앞에 떠오르는 문자를 응시했다. [ 신의 시련 ] [ 던전 - 아에게히오스 ] 지금은 소실되고 사라진 까마득한 과거. 아신, 혹은 불멸자라는 존재들이 기를 쓰고 말살하려 했던 불멸자의 이르는 길. 그것이 억겁의 세월을 지나 처음으로 세상에 다시 드러난 순간이었다. 김성철은 그 던전 안에 감히 한 걸음을 내딛으며 생각했다. ‘종말교단. 너희들이 원하는 게 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 눈으로 확인해주겠다. 이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어떤 보상이 기다리고 있고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베르텔기아를 다치게 한 또 다른 공범. 종말교단. 그들에 대한 복수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져갈 것이고 선점할 수 있는 건 모두 선점해주겠다.’ 김성철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 제국 남부 변경. 구 동맹국 하이포지 왕국과의 국경. 상공 위엔 수십 척에 이르는 공선이 집결해 있었다. 11함대 사령관이자 철두철미한 군인인 보라딘은 정적이 흐르는 국경 너머를 응시했다. 쉬운 임무라고 생각했다. 처음 명령을 하달 받았을 때 임무의 성공 여부보다 점령지의 피해의 최소화와 신속한 접수를 먼저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군인의 감이라고 해야 할까. 전설적인 황제의 직속부대인 황금사자대의 창립멤버이자 수많은 전장을 전전한 그의 눈에 비친 국경 너머의 땅엔 다가가지 어려운 꺼림칙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었다. “제독님. 결단을.” 부관이 재촉하듯 말했다. 그럴 법도 한 게 이것은 쉬운 임무이면서 또 한 편으론 시급을 요하는 임무이기 때문이다. 이미 다른 동맹국을 향해 제국의 내놓으라하는 쟁쟁한 전투함대가 공략을 실시하고 있다. 그 배경엔 현실화되기 시작한 제국의 위기가 있었다. 동쪽엔 재앙에 예고된 죽음의 낙진이 이미 동부의 해안가에 이르렀고 거신에 이어 낙진이라는 또 다른 재해에 직면한 동부인들은 제국 동부 변경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서쪽과 서북쪽에선 강력한 고대왕국과 엘프왕국이 국경에 병력을 증강시키고 있다. 정찰병들의 보고에 의하면 서쪽 변경엔 이미 고대왕국의 소드마스터가 개인 혹은 무리 단위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종말교단은 제국의 심장부인 라그란제에서 또 다른 폭동을 일으키려 획책하고 있고 내우외환의 위기에 처한 제국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 세계의 적은 막무가내로 세계의회의 개최를 제멋대로 통지했다. 황제는 다가올 국면에 대항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잠재적이고 쉬운 적들을 미리 처리하길 원했다. 그렇게 해서 보라딘은 쉬운 적 중 하나인 하이포지왕국에 국경에 이르게 된 것인데 상술했다시피 그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시간이 없다. 그는 직감 대신 운에 당장의 일을 맡기기로 생각하며 함대를 전진시켰다. 그런데 함대가 전진한 지 몇 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전방에 정체불명의 괴인 출현!” 고깔을 쓴 마법사들이 비전 마법을 써서 그 모습을 비추려고 했지만 보라딘은 한 발 먼저 망원경을 꺼내 전방을 주시했다. “저.. 저것은...?!” 그것은 한 명의 개인이었다. 그러나 그 개인은 홀로 제국의 함대에 맞설 것 처럼 당당하게 다리를 벌리고 서서 함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보라딘의 불길한 예감이 더욱 짙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 수수께끼의 사내는 이윽고 검은 불길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형상은 보라딘이 어전회의에서 황제에게 들었던 제국을 위협할 존재와 상당부분 일치했다. ‘그럴 리가. 저것은 종말교단의 기술인데.. 그걸 어떻게 하이포지 왕국 따위가...?!’ 생각 따위 할 시간은 없다. 그는 즉시 뒤를 돌아오며 소리쳤다. “전 함대! 후퇴! 전속 후퇴!” 하지만 그 외침이 모두에게 전달되기도 전에 상공 위에 무수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메테오의 술식이다. 일견 평범한 마법. 하지만 상공에 떠오르는 메테오의 술식은 무한으로 증식했다. 보라딘은 메테오의 마법진이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불어나는 끔찍한 광경을 목도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빌어먹을.” 운석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 파멸적인 빗줄기 아래서 수많은 공선이 파괴되고 추락했다. 제국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온전한 함선들은 총력을 다해 반격, 조막만한 하이포지 왕국의 수도를 초토화시키는 것으로 보복을 가했다. 무시무시한 화력전이 끝난 후, 벌판에 남은 것은 그저 타고 남은 재와 불길뿐이었다. 몇 남지 않은 하이포지 왕국과 제국함대의 생존자들은 허망함 속에서 무언가가 왕국의 수도 아래에서 부상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인간이 만들었다고 보기엔 너무나 거대한 구조물. 훗날 던전이라 불리게 될 불멸자에 이르는 길이다. 아에게 항이 멸망하던 시점, 세계의 형태는 변하기 시작했다. 변화는 또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다. 마족이 사라져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마계의 땅. 그 얼음과 불이 공존하는 황무지에 어느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크기의 게이트가 열렸다. 그 게이트 너머에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느릿한 걸음걸이로 나오고 있었다. 야만인, 혹은 야만족이라 불러야 할 의장과 생김새. 그들은 두려움과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그들 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숫자는 수천 명, 아니 곧 수만 명으로 불어났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새로운 생명의 존재였다. “응애~!” 아기의 울음소리와 아이의 웃음소리. 지금 세계엔 사라진 것들이 그 생경한 무리 속엔 당연한 것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게이트 안쪽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울려퍼졌다. [ 모두 들을 지어다! ] 전율을 일으킬 정도로 경건하고 신성한 힘이 담긴 음성이었다. 그 음성이 들려온 순간, 수만 명에 달하는 미지의 부족이 일제히 게이트 앞에 부복했다. [ 지금 너희들 앞에 펼쳐진 것은 신세계다. 선택받은 새로운 인류인 너희들이 정복하고 차지해야 할. ] [ 두 가지 의무를 너희들에게 부과하겠다. ] 잠깐의 침묵이 이어진 후, 게이트 너머의 존재는 계속해서 말했다. [ 하나는 수확이다! ] [ 마주치는 모든 구시대의 인간을 말살해라. 그들을 죽이고 말살해 그들의 심장과 영혼을 우리에게 공물로 바칠지어다. ] 야만부족들은 바닥에 엎드린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마치 신을 처음 만난 인간처럼. [ 그리고 또 하나. 한 사내를 죽여라.] [ 그의 위치가 파악되면 다른 모든 것을 멈추고 그를 사냥해라. ] 재앙의 서에 기재되지 않은 진정한 재앙이 마족의 땅에 강림했다. [ 그의 이름은 김성철이다. ] 야만인들의 눈이 번득였다. 호전적인 북소리와 함성이 마족이 사라진 땅을 뒤덮었다. 종말의 시침이 성큼 앞으로 움직였다. ======================================= 90. 신의 던전 (1) 신성루테기네아 왕국의 학정에 맞서 일어서기 전, 김성철은 평범한 모험자였다. 그는 마음 맞는 동료와 함께 길드 의뢰소의 의뢰를 해결하거나 던전 따위를 탐험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이중 던전 공략은 모험자의 주된 밥벌이 수단. 김성철은 바닥에서 잔뼈 굵은 중견 모험자 아래서 철두철미하게 던전을 공략하는 모험자의 자세를 뼛속 깊이 익혔다. 그때 익힌 교훈 중 하나는 계획성 있는 공략이다. 던전에 들어가는 목적, 체류할 시간은 계획의 핵심적인 뼈대를 이룬다. 그런 것도 없이 던전에 들어갔다가 눈앞의 이득에 눈이 멀어 유명을 달리한 모험자가 부지기수다. 물론 평범한 던전이라면 김성철은 아무 걱정도 하지 않겠지만 이번 던전은 이름하여 신의 시련이라는 또 다른 이명이 붙은 던전이다. 지금까지 공략한 것들과는 급이 다르다. 한편 김성철에게 주어진 시간은 20일 남짓. ‘산양의 달, 첫 번째 보름이 뜨기 전까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20일.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짧다면 한없이 짧은 시간이다. 특히 눈앞에 우뚝 선 아에게히오스 정도의 거대한 던전이라면 제대로 탐험하는데 최소 한 달 정도는 소요할 것이다. 문제는 아에게에서 익시온까지 가는 시간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선을 타고 전속력으로 운항해도 일주일은 족히 걸리며 김성철이 전력으로 쉬지 않고 질주를 한다고 해도 3일 정도는 잡아야 한다. 한편 김성철은 오래달리기 같은 끔찍한 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다행히 이 부분에 관해선 얼떨결에 실피드 호의 손님이 된 타이곤이 해결을 보장했다. “그쪽 배엔 차원학파 마법을 익힌 신관들을 태웠습니다.” 디히터의 습격 이후 아에게의 멸망까지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어 알 방법이 없었지만 타이곤은 김성철을 미리 만나기 전에 많은 준비를 해둔 모양이었다. 그는 김성철이 세계의회 건으로 전세계를 돌아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김성철의 공선을 은밀히 조사, 실피드 호에 장거리 텔레포트를 시전한 마법사가 없다는 걸 알고 미리 장거리 텔레포트가 가능한 신관을 자신의 관할 아래로 배속시켰다. 향후에 김성철과 일시적인 동맹을 제의하기 위한 일종의 협상카드로 말이다. “먼저 도착해 그 좌표를 이쪽에 알려줄 수 있는 선도자가 있다면 하루 만에 장거리 전송이 가능하오.” 타이곤은 잔뜩 생색을 내며 말했다. 딱히 타이곤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의 시의적절한 인력제공은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김성철은 타이곤의 말대로 짧은 시간 동안 그와 그의 신관들은 실피드 호의 승객으로 받아들였다. 타이곤은 거기에 더해 또 하나의 요구를 했다. 자신을 이 기묘할 정도로 거대한 던전 공략에 참가시켜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아에게 항에 벌어진 신성모독적인 상황에 끔찍한 공포와 혼란을 느끼면서도 눈으로 아에게 항에 묻혀 있던,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불경한’ 구조물에 대한 조사를 이단심문관 자격으로 하고 싶다고 말했다. “죽을 지도 모르는데?” 김성철이 짧게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그런 경고는 이단심문관 부류에겐 통하지 않는다.“ “난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오.” 아무튼 쓸데없는데 옥신각신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김성철은 타이곤을 일행으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던전 공략을 준비했다. 김성철의 계획은 아래와 같았다. 목표 - 던전 아에게히오스의 완전공략 기한 - 15일 빡빡한 계획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김성철은 자신이 가진 모든 기술과 경험, 지혜를 동원할 것이다. “그럼 부탁한다.” “부탁할게. 카벙벙.” 김성철은 일단 영혼석 하나를 소형골렘에 넣어 공선 실피드를 먼 바다에 대기시키도록 명했다. 던전에 있는 동안 종말교단의 무리가 습격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소형골렘은 눈을 번쩍거리며 실피드를 서쪽 바다로 이동시켰다. 실피드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 마침내 신의 시련 던전 아에게히오스에 대한 본격적인 공략이 시작됐다. 파티원은 김성철과 베르텔기아. 한 명과 한 권. 짐짝으로 타이곤 보스보로트가 있고 마스코트로는 마라키아가 있다. 마라키아의 기분은 당연한 일이지만 최고조였다. “흥분되는군! 신의 시련 던전! 아아~ 부리 끝이 간지러워.” 반면 이단심문관 타이곤 보스보로트의 얼굴엔 불쾌한 빛이 가득했다. “신의 시련이라니 당치도 않군. 이런 불경한 구조물. 그 흉한 민낯을 톡톡히 드러내주지!” 김성철은 이 두 흉물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적어도 들어갈 기회 정도는 주는 게 낫지 않겠냐는 베르텔기아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들을 이끌고 활짝 열린 던전의 어두운 공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어둠이 김성철 일행을 감쌌다. 김성철은 문득 초월세계로 향하는 포탈에서 느꼈던 것과 지금 느끼는 감각이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어딘가 다르다. 이전 같으면 동일한 것으로 여겼겠지만 김성철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는 초월감각이 양자의 미묘한 차이를 그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곧 어둠이 걷혔다. “오오! 이건 또 무슨 악신의 장난이냐!” 김성철은 마라키아보다 타이곤이 보다 골칫덩어리라는 걸 깨달았다. 적어도 마라키아는 어느 정도 눈치를 볼 정도로 영악한 점이 있는데 반해 이 꽉 막힌 초로의 사내에겐 유연한 사고가 결핍되어 있는 걸로 보였다.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세상 인간들의 절반 이상이 믿는다는 거대 종교권력 뮤라교단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력한 권력자인데. 지금은 죽은 호르네코조차 세간의 인식으로 따지면 타이곤 아래라고 보는 게 옳을 정도니. 하지만 그딴 건 김성철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정말 버리고 가고 싶군.’ 김성철의 머릿속에 그답지 않은 사악한 흉계가 뭉개뭉개 피어오를 무렵, 김성철의 초월감각이 꿈틀거렸다. 무언가 앞에 나타나려 하고 있었다. 김성철이 잡념을 떨쳐버리고 조용히 앞을 응시하자 곧 일행 앞에 거대한 인간 형상의 존재가 허공 속에서 걸어나왔다. 그것은 그거대로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어떤 마법의 흔적도 조짐도 없이 허공 속에서 나타나는 묘기는 수많은 경험이 있는 김성철로서도 처음 보는 일이니. “누..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가장 격렬히 반응한 건 타이곤이었다. 참다못한 마라키아가 몸통박치기로 타이곤의 허리를 들이박았다. “크헉!” 급작스런 일격에 타이곤이 고꾸라진 동안 김성철은 자신 앞에 나타난 거대한 존재를 올려보았다. 그것은 황소의 머리를 지닌 인간 형상의 괴물이었다. 비슷한 형태의 몬스터로 미노타우르스가 존재하지만 지금 김성철 앞에 나타난 것은 그러한 몬스터보다 비교 따위 할 수 없을 정도로 경건하고 신적인 힘으로 충만한 존재였다. 무엇보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광휘에 찬 눈동자가 신성함과 신비함을 도드라지게 강조하고 있었다. “이 얼마만의 도전자인가?” 감탄을 섞어 황소머리의 거한이 입을 열었다. 위협적인 생김새와 달리 학자풍의 부드럽고 점잖은 음성이었다. “일 만 년만의 도전자군.”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그 존재를 응시하다 곧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요?” 그 물음에 황소머리의 거한은 정중한 몸짓을 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나의 이름은 아에게히오스. 이 던전 그 자체다.” 황소의 눈이 한 차례 번득였다. 그 순간 김성철의 초월감각이 반응했고 김성철은 볼 수 있었다. 이 거대한 구조물 전체와 저 황소머리의 거한이 셀 수 도 없을 정도로 무수한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김성철은 그걸 통해 눈앞의 거한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이 던전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녀석 또한 던전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군.’ 한편 마라키아의 급습으로 잠시 정신을 잃었던 타이곤이 다시 발광을 시작했다. “만 년..? 만 년이라고? 웃기지도 않은 소리! 아에게 항은 만 년 전에도 이 땅에 자리 잡고...” 타이곤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아에게히오스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짧은 말로 뭐라고 중얼거리자 타이곤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이 신성한 복도 안에 울려 퍼지지 않았던 것이다. “시끄러운 인간이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너에게선 신의 시련을 받을 일말의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는구나. 자격은 어느 정도 있는 것 같다만 그런 마음가짐을 지닌 자를 이곳에 들일 수 없다.” 아에게히오스가 가볍게 손을 저었다. 다음 순간, 타이곤 보스보로트의 발밑에 검은 구멍이 생기더니 그는 아래로 빨려들듯이 사라졌다. “어떻게 한 거지?” 김성철이 아에게히오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리 밉상이라도 해도 죽으면 곤란한 녀석이다. “신의 시련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던전 밖으로 쫓아냈을 뿐이다. 걱정하지 마라.”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아에게히오스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며 한마디 했다. “따봉.” “따봉? 그건 무슨 표현이지? 설마 너도 이 신의 시련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은 갖고 있다는 것이냐?” 아에게히오스가 엄격한 어조로 물었다. 김성철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만에. 최상급의 감탄사다.” “최상급의 감탄사라.” 아에게히오스는 손톱이 길게 자란 손가락을 턱끝에 얹고 잠시 그 의미를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아무튼 인사치레는 여기까지 하고 본격적인 시련을 시작하겠다.” 아에게히오스는 자신의 고개를 한참 숙여야 볼 수 있는 마라키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너도 시련에 참가할 건가? 어린 조인.” “당연하지.” 마라키아는 주먹과 날개를 동시에 올려 보이며 자신감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전생을 한 모양이군. 좋다. 너도 시련에 참가하는 걸 허락하지.” 다음으로 아에게히오스는 다시 김성철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번에 그의 빛나는 눈이 향하는 방향은 김성철이 아닌 그의 가슴팍 안 주머니에 쏙 들어가 있는 베르텔기아였다. “너도 시련에 참가하겠는가? 리빙북.” “응...? 나?” 베르텔기아가 몸을 빼꼼 내밀었다.. “그렇다. 너 말이다. 책의 형태를 한 인간이여.” 아에게히오스가 재촉하듯 물었다. 예상치 못한 물음에 베르텔기아는 일시적인 충격에 빠진 듯 머뭇거리다가 이내 몸을 흔들었다. “난 도전자가 아닌데. 이 사람 일행이야.” “그래?” 아에게히오스는 뭔가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걸 알아본 김성철이 나섰다. “이 친구는 내 동료다. 시련과는 관계없어. 시련을 받는 건 나다.” “그렇다고는 하나...” 아에게히오스는 베르텔기아를 유심히 노려보며 말끝을 흐렸다. 광휘에 찬 눈동자가 한 차례 강하게 번득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아에게히오스는 납득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 만 년 사이에 나의 통찰력으로도 헤아리지 못하는 것들이 생겨났군. 좌우지간, 방금 한 말은 취소한다. 이 리빙북의 동행을 허가하지.” 이유야 어찌됐든 간에 허가가 나온 모양이다. 김성철 앞에 두 개의 기둥이 나타났다. 기둥 사이엔 마법적인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응? 이건 뭐지?” 마라키아 앞에도 비슷한, 그의 작은 몸에 맞춘 기둥이 나타났다. 아에게히오스가 말했다. “시련으로 통하는 문이다. 준비가 되었다면 시험에 들 준비를 하라.”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기둥 사이로 나타났다. 기둥을 통과하기 직전 아에기히오스의 명료한 음성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신은 관대하다. 그러나 명심하라. 과욕은 죽음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을.” 기둥 사이를 통과하자마자 김성철 앞엔 아무것도 없는 순백색의 끝없는 공간이 펼쳐졌다. 가히 눈으로 끝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넓이. 잠시 상황을 관망하던 김성철 앞에 하나의 자그만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오랜만의 인간인 거예요!” 어디서 들어본 듯한 말투. 김성철의 미간에 주름이 팼다. ‘설마 호문클루슨가?’ 하지만 호문클루스의 듣기 싫은 목소리와 달리 이쪽은 귀엽고 상냥하며 듣기 좋은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김성철 앞에 나타난 것은 흉측한 호문클루스와는 전혀 다른 귀여운 형상의 요정이었다. “저는 당신의 시련을 도울 시련 도우미인거예요.” 하는 짓도 행동도 호문클루스와는 딴판이다. 김성철은 그 사랑스런 요정을 보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글쎄 인거예요! 아에게히오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만 년은 넘은 거 같은데 긴 잠을 자서 정확한 수치는 저도 잘 모르는 거예요.” 요정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 후 이내 활짝 웃으며 김성철 앞에 걸어와 섰다. “아무튼 급작스럽지만 첫 번째 시련을 시작할 거예요. 앞을 봐주시는 거예요.” 요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성철의 눈앞에 일련의 문자가 나타났다. [ 신의 시련 ] [ 아에게히오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김성철은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이곳의 분위기가 소환광장과는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는 하늘과 땅 차이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이쪽이 정품 같군.’ 그렇게 생각하는 김성철의 눈앞에 또 다른 문자가 연이어 떠올랐다. [ 입문 시련을 시작합니다. ] [ 입문 시련은 본격적인 시련에 앞서 당신의 힘과 기술, 용기와 지혜를 시험하는 곳입니다. ] [ 시련에 도전하기 앞서 당신의 객관적인 현상을 주지한 후 아래의 난이도를 선택하여 주세요. ] 1. 상냥한 2. 평범한 3. 어려운 4. 극히 어려운 5. 극한의 다섯 개의 난이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성철은 자칭 시련 도우미인 요정을 내려다보며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극한의 시련을 선택하면 어떤 보상이 따르지?” 이에 요정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최상의 보상이에요! 하지만 참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극한의 시련을 극히 어렵고 일단 시련이 시작되면 멈출 수 없으니까... 예요!” “그런가?” 그렇다면 답은 정해졌다. 김성철은 주저없이 극한의 시련을 선택했다. “정말 그걸로 하시는 거예요?” 요정의 놀란 물음에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 건투를 비는 거예요!” 요정이 시무룩하며 사라졌다. 요정이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성철은 사방을 덮쳐오는 스산한 살기와 적의를 느낄 수 있었다. 곧 허공 속에서 그의 적이 나타났다. 쿵. 해골. 하지만 평범한 해골은 아니다. 드래곤의 해골로 만든 언데드. 본 드래곤. 여간한 마수 따위완 비교를 불허하는 막강한 드래곤의 시체, 그것도 무려 다섯 구가 김성철 주위를 에워쌌다. 과연 신의 시련에 어울리는 어려운 시련. 평범한 자라면 입문단계조차 넘기지 못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김성철은 남들과 다르다. “그럼 시작해볼까.” 팔 가라즈가 김성철의 손에 나타났다. ======================================= 90. 신의 던전 (2) 퍽! 퍽! 퍽! 살아 있는 드래곤도 김성철의 적수가 될 수 없다. 하물며 이미 죽은 드래곤의 시체를 일으켜 세운 인형 따위야. 김성철에겐 요리 하나를 만드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계란간장밥만도 못한 것들.’ 퍽! 퍽! 김성철은 본 드래곤들이 미처 공격을 하기도 전에 비호처럼 달려들어 모든 드래곤들을 순차적으로 박살냈다. 요정이 탄식하며 사라진 지 10초도 채 걸리지 않은 때였다. “어... 어라?” 요정이 다시 나타났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게 묘하게 귀여웠지만 김성철은 무덤덤하게 요정을 바라보며 팔 가라즈를 영혼창고에 집어넣었다. “어렵지 않군. 이게 겨우 극한의 어려움이란 말인가?” 요정은 김성철의 말 따윈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본 드래곤의 잔해 사이를 이리 뛰며 저리 뛰며 살피다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번쩍 뜬 눈으로 김성철을 바라보았다. “대... 대단하네요!” 요정 특유의 기괴한 말투를 잃어버릴 정도로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요정은 심통이 난 듯 양볼을 부풀리고는 두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소리쳤다. “하지만 겨우 극한의 입문시험을 해결했다고 해서 너무 기고만장해지는 건 곤란한 거예요. 이곳은 신의 던전이니까! 우... 우습게보지 말라는 거예요!” “알았다. 알았어. 그보다 보상은 뭐지?” “조금 기다리는 거예요.” 요정의 말 대로 잠시 시간이 지나자 바닥에 널린 본 드래곤의 시체들이 가루처럼 변해 흩어지면서 김성철 앞에 빛나는 문자가 나타났다. [ 당신은 ‘극한의’ 입문 시련을 통과했다. ] [ 극한의 입문시련을 통과한 그대에겐 아래와 같은 보상을 내린다. ] 1. 던전 토큰 - 30개 2. 엘릭서(최상급) 김성철 앞에 황금빛의 하지만 재질은 플라스틸처럼 가볍고 비금속성의 기이한 동전들과 엘릭서가 든 포션 하나가 떨어졌다. 던전 토큰을 본 김성철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라. 이거 어디서 본 듯 한데.’ 재질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신비로운 것이지만 분명 어디서 본 것과 대단히 낯이 익다. 어디서 본건지 노쇠한 뇌세포를 가동해 회상하고 있자니 베르텔기아가 불쑥 몸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뭐야. 이거? 소환 궁전에서 쓰는 물건이잖아? 그.. 뭐라고 하더라. 궁전 토큰! 완전 그거하고 똑같잖아.” 김성철도 동일한 생각이었다. 요정이 나타날 때부터 소환 궁전과 어딘가 닮았다고 느꼈는데 시련 해결 보수로 토큰을 주는 거 보니 이건 완전 빼다 박았다. ‘거의 똑같다. 소환 궁전과.’ 소환 궁전은 이 세계의 다섯 주신 중 하나인 중립신의 영지. 주신의 힘에 의해 이 세계와 김성철이 있는 다른 세계의 길을 열어 다른 차원의 인간들을 소환하는 성스러운 장소로 알려져 있다. 물론 세간에선 성스러운 이미지보다 소환 궁전 자체내에서 펼쳐지는 끔찍한 시련과 그 시련을 구경하는 기득권들의 도락장, 심하게는 싱싱한 무연고의 노예들을 얻는 장소로 알려져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김성철은 이 신의 던전과 소환 궁전 사이에 놀라울 정도의 유사성에 주목하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역시 소환 궁전은 신의 던전을 베낀 짝퉁이라는 건가.’ 얼굴 마담인 호문클루스와 요정의 차이만 봐도 확연히 드러난다. 열화 카피판과 정품의 넘을 수 없는 차이. 김성철은 청소년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미니 모터카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일본산 정품 블랙모터와 거기서 ‘블랙’만 따온 골드블랙모터의 넘을 수 없는 성능의 차를 뼈저리게 실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소환 궁전과 신의 던전 사이에 놓인 차는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베끼려면 잘 좀 베낄 것이지. 호문클루스가 뭐야. 호문클루스가.’ 김성철은 호문클루스를 대단히 싫어한다. 좀 더 나이가 젊고 불필요한 충동에 쉬이 빠져드는 열정이 있었다면 시간을 들여 이 세상에 호문클루스라는 존재를 지워버렸을지도 모른다. 김성철이 속으로 진지한 고민을 하는 동안 베르텔기아는 무료함을 느끼고 주머니에서 나왔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던전 토큰을 유심하게 보더니 퉁명스레 말했다. “이거 궁전 토큰 짝퉁 아니야?” “네? 무슨 말인 거예요?” 컴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베르텔기아를 쳐다봤다. “짝퉁?” “응. 짝퉁.” “짝퉁이 뭐인 거예요?” 아에게히오스라면 모를까 요정은 만만해보였다. 베르텔기아는 요정을 보며 스스럼없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음... 가짜? 싸구려 모조품...?” 그 말이 나온 직후였다. “아닌 거예요!” 요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귀여운 얼굴이 발갛게 상기될 정도로. “짝퉁이 아닌 거예요!” 보는 상대방이 무안할 정도로 화를 내고 있다. 불을 지핀 당사자인 베르텔기아는 요정을 가만히 바라보다 슬그머니 김성철의 안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나, 말실수 한 거야?” “당연하지.” 그녀의 물음에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템을 회수했다. 던전 토큰 30개, 그리고 엘릭서. ‘토큰은 그렇다 치고 엘릭서는 별 필요 없는 물건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익숙한 손놀림으로 토큰과 엘릭서를 영혼창고에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엘릭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요정이 김성철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은근히 감정에 기복이 있는 놈이군.’ 그래도 호문클루스보다는 낫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요정은 씨익 웃고는 뒷짐을 지고 김성철 주변을 돌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는 소모형 아이템은 오직 제가 제공한 것만 사용 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래?” “못 믿겠으면 한 번 시험해보시는 거예요!” 요정은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잔뜩 기대한 얼굴로 김성철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테스트 해보라는 걸로 보였다. 그러나 김성철은 현실적인 인물이다. “그런 걸로 하지.” “응? 시험하지 않는 거예요?!” “네가 못 쓰다고 하면 못 쓰는 거지.” 김성철의 무덤덤한 반응에 요정은 허탈한 얼굴로 입을 벌린 채 김성철을 응시하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 재미없는 도전자인 거예요. 나이는 젊은데 하는 짓은 할아버지 도전자 같은 거예요.” “…실제로 나이를 좀 먹긴 했지.” 나름 도발이라고 해봤지만 김성철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으음.. 알겠는 거예요. 아무튼 당신은 입문 시련을 통과했으니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제가 당신을 신에 이르는 길에 안내를 하도록 하겠는 거예요!” “알겠다.” “제 이름은 컴뮈인 거예요!” “컴미?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름인데.” 김성철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무었다. “아니 컴.뮈! 미가 아니라 뮈! 인거예요!” “음. 그렇군. 아무튼 컴.무.이. 다음엔 뭘 하면 되지?” 김성철이 대충 어떤 사람인지 파악한 컴뮈는 조금은 사무적인 어투로 김성철이 신의 던전에서 받을 수 있는 시련과 그 보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먼저 던전 토큰은 이 신의 던전 안에 통용되는 유일무이한 화폐다. 모든 보상은 던전 토큰으로 이루어지고 시련의 도전자는 시련과 시련 사이 방문할 수 있는 토큰 교환소에서 바깥세상에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귀중한 아이템을 손에 넣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한편 던전 토큰은 아이템을 교환하는 데만 쓰는 건 아니었다. 아에게히오스엔 평범한 시련 이외에 던전 토큰을 사용해 입장할 수 있는 9개의 특수한 시련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름 하여 궁극 시련. 각 궁극 시련엔 인간의 극한을 시험할 정도의 강력한 존재가 도사리고 있으며 이들을 쓰러뜨릴 경우엔 평범한 시련으로는 얻을 수 없는 엄청난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한편, 아에게히오스에 존재하는 9개의 궁극 시련을 모두 달성한 자에겐 아주 특별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9개의 궁극 시련을 전부 공략한 자는 아무도 없어 그 특별한 보상이 무엇인지 아는 이는 아에게히오스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고 한다. “…궁극 시련이라.” 소환 궁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형태의 시련. 김성철은 팔짱을 낀 채 턱 끝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것은 베끼기 어려웠던 모양이군.’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이 던전을 완전 공략할 방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니까. “컴뮈.” 김성철이 요정을 불렀다. “무슨 일인 거예요?” “궁극 시련에 도전하기 위해선 몇 개의 토큰이 필요하지?” “시련마다 다른 거예요. 첫 번째 궁극 시련에 필요한 토큰은 30개인 거예요.” “그래?”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극한의 시련은 나 같은 강자들이 시간 허비를 하지 않게끔 위한 속성 코스인 모양이군.’ 그렇다면 좋다. 김성철은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걸 느끼며 가지고 있는 던전 토큰 30개를 컴뮈에게 내밀었다. “지금 바로 궁극 시련에 도전하겠다.” “벌써?! 인거예요...?” 컴뮈의 물음에 김성철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의 공략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솔직히 이런 곳에서 쓸데없는 잡담을 하는 시간마저 아깝게 느껴질 정도다. “으음. 그렇게 빨리 죽기를 원하신다면 소원대로 해드리는 거예요. 응?” 토큰을 받고 돌아서던 컴뮈가 갑자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걸까. 컴뮈는 뒤돌아서서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 소곤거렸다. 아마도 통신 마법이나 비슷한 기능을 이용해 먼 곳의 동료와 교신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컴뮈는 교신을 끝내고 다시 뒤돌아섰다. 컴뮈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무슨 일이지?” 김성철이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고 묻자 컴뮈는 머리를 긁적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그쪽 동료 분에게 문제가 생긴 거 같은... 거예욧!” “뭐라고?” “지금... 보여드리겠는... 거예요!” 컴뮈가 한발짝 물러섰다. 그러자 컴뮈 앞에 마법진이 떠오르더니 펭귄과 닮은 무언가가 마법진 위에 떠올랐다. “삐이이이....” 그것은 마라키아였다. 어디에 두들겨 맞았는지 초죽음이 된 상태로 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이건 또 뭐냐?” 김성철은 불쾌감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이건 당신의 동료인 거예요. 안타깝게도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당신처럼 극한의 도전을 했다가 죽음 직전의 위기에 놓인 거예요.” “그래서?” 김성철이 퉁명스레 물었다. 그걸 본 마라키아가 앙증맞은 손을 뻗으며 죽는 소리를 냈다. “삐이이이이....” 김성철의 등줄기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흐르고 지나갔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개 같은 전개가 나오는 건 아니겠지?’ “흐-음....” 베르텔기아도 김성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상을 느꼈는지 김성철 옆에서 심기가 불편한 콧소래를 내고 있었다. 컴뮈는 마라키아의 동료들의 예상치 못한 싸늘한 분위기에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조곤조곤하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궁전 토큰 서른 개면 죽음 직전의 당신의 동료를 구할 수 있는 거예요.” 컴뮈가 다시 김성철에게 토큰 30개를 내밀었다. 김성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에라이.’ 그때 갑자기 마라키아가 갑자기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키더니 김성철과 베르텔기아 쪽을 그윽한 눈으로 응시했다. “저기.. 오래 전부터 생각했는데 말이야. 부끄러워서 말을 못했다고는 할까나....” “…….” 김성철은 고개를 돌렸고 베르텔기아도 다른 쪽으로 몸체를 돌렸다. 마라키아는 그런 동료를 바라보며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친구지?” “아니.” 베르텔기아는 알 수 있다. 지금만큼은 김성철이 처음 자신과 만났을 때와 똑같은 차가운 금속 같은 남자로 돌아왔음을. “삐기이이이이이~!” 처참한 절규가 무한한 백색 공간에 울려 퍼졌다. “으음.. 곤란하게 된 거예요.” 절규가 어느 정도 잦아든 후 컴뮈가 마라키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힘없이 가로저었다. “삐이이이... 웃기지마! 저놈들은 전부 내 동료라고! 내가 지금까지 해준 게 얼만데!” “본인들이 아니라고 하잖아요!” 컴미가 정색하며 말했다. 가끔 그녀는 요정 특유의 말투를 생략하는 버릇이 있었다. 화가 날 때 말이다. “질 낮은 농담이다. 이 친구들. 조금 짓궂거든. 아니, 아주 장난꾸러기들이지. 하하! 나원참!” 마라키아는 필사적으로 현실에서 도망치려하고 있었다. 컴뮈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다시 김성철에게 다가왔다. “지금 저 조인을 죽게 내버려두면 나중에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거예요.” “무슨 문제가 생기지?” 김성철의 물음에 컴뮈는 얼굴에 짙은 그늘을 만들어내며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복수귀가 되서 당신들 앞에 나타날 거예요.” “그거 좋네.” 베르텔기아가 퉁명스레 말했다. 마라키아보고 들으라고 한 소리다. “바라던 바다.” 김성철도 베르텔기아의 뜻을 짐작하고 동조하는 체를 했다. ‘주제도 모르고 극한의 시련에 도전한 죄값은 치르게 해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살려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김성철과 베르텔기아가 싸늘하게 나오자 컴뮈는 당혹하는 기색을 보였다. 무언가 또 다른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으음... 곤란하게 된 거예요. 원래대로라면 저 조인은 주제를 모르고 설친 대가로 던전에서 죽어야 마땅한데 던전 마스터께서 경사스런 던전 부활의 첫 도전자들이 죽는 걸 원치 않으시는 거예요!” “던전 마스터? 그건 또 뭐지? 아에게히오스와는 다른 건가?” “그런 거예요. 아에게히오스님은 던전 그 자체이신 반면, 던전 마스터님은 이 던전의 주인이신 거예요.” “던전 마스터가 아에게히오스의 주인이라는 건가?” “으음.. 그런 것과는 개념이 조금 다른 거예요. 설명 드리기 곤란한 거예요. 아무튼, 이 정도 하고 저 조인을 살려주시는 건 어떤가요?” 컴뮈가 다시 정색하며 말했다. “대신, 숨겨진 시련에 대한 정보를 알려드리는 거예요.” “숨겨진 시련이라...” “지금까지 아무도 발견 못한 엄청난 보상이 숨겨진 시련인 거예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던전 식구들은 마라키아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운 하난 좋은 놈이군.’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베르텔기아를 응시했다. 베르텔기아는 썩 내키지 않는 눈치지만 몸을 으쓱 흔들며 시원하게 말했다. “뭐, 살려주자.” “어쩔 수 없군.” 김성철은 아깝게 얻은 던전 코인 30개를 컴뮈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토큰을 받아든 컴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마라키아를 돌아보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라고 말하는 거예요!” 건너편에서 환희에 찬 마라키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우린 친구야! 친구라고!” “…….” “…….” 김성철과 베르텔기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90. 신의 던전 (3) 김성철의 불길한 예감은 대체로 들어맞는 편이다. 마라키아를 위해 통 큰 기부를 한 김성철 앞엔 새로운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던전의 피로’라고 불리는 던전의 제약 시스템. 이에 따르면 시련의 도전자가 하루에 도전할 수 있는 일반 시련은 다섯 개로 제한된다. 궁극 시련은 여기엔 포함되지 않지만 궁극 시련에 도전해서 시련을 이겨낼 경우엔 그것으로 그날의 일정은 끝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상적인 하루 코스는 일반시련 5개를 클리어하고 궁극 시련에 도전하는 것이다. 아무튼 하루에 일반 시련 5개밖에 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김성철처럼 갈 길 바쁜 사람에겐 꽤나 커다란 제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일반 시련으로 얻을 수 있는 던전 토큰의 숫자도 시원치 않았다. 입문 시련과 달리 일반 시련은 쉬운 난이도의 시련을 클리어 해야 다음 난이도의 시련으로 넘어가는 단계형 구조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1-1 ] 마라키아를 구제하고 일반 시험에 돌입한 김성철 앞에 떠오른 문자와 그 앞에 나타난 고블린 한 마리는 모든 것을 설명해줬다. [ 전설적인 고블린 워록 ] “키키키키!” 쓸데 없이 장황한 칭호를 지닌 고블린 한 마리가 마법으로 장난을 치며 김성철을 도발한다. 하지만 그래봐야 고블린은 고블린이다. 퍽! “엌!!!!!” 단 일격에 첫 시련을 해치운 김성철 앞에 보상이 주어졌다. 떨그랑. 던전 큰 한 닢. 흔한 보상 문자조차 없다. 대신 그 앞에 나타난 것은 다음 단계로 진행하겠냐는 물음 뿐. [ 다음 단계로 진행하겠습니까? (Y/N) ] [ 앞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던전의 피로도 하나가 필요합니다. ] [ 현재 남은 던전의 피로도 (4) ] “음....” 김성철의 얼굴이 좋을 리가 없다. 미리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결국 마라키아를 살리긴 살렸겠지만 그 민폐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김성철은 알고 있다. 어느 영역에 가나 처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소환 궁전만 해도 그렇다. 내정자든 뭐든 처음부터 미리 정보를 선점하고 한 발 앞서 나간 녀석들은 보통 처음의 우위를 마지막까지 끌고 나가고 좋은 과실을 독식한다. ‘아무래도 던전 코인 30개는 적어도 지금 단계에선 대단히 커다란 수치이리라.’ 김성철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 1-2 ] [ 전설적인 고블린 워록 ] 고블린 두 마리. 쩡그렁. 던전 토큰도 두 개. 다음 단계도 예상 범위 내에서 전개됐다. 여기에서 김성철은 즉각 컴뮈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숨겨진 시련에 도전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컴뮈는 의도적으로 김성철의 시선을 회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숨겨진 시련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닌 거예요. 어중이떠중이들이 우연히 발견할 수 있다면 숨겨진 시련의 취지가 무색하지 않지 않냐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인 거예요.” “그래서 언제 도전할 수 있는데?” “여덟 번째 궁극 시련을 해결한 뒤에야 도전할 수 있는 거예요.” “여덞 번째 궁극 시련이라.” 까마득하다. 도전할 수 있을지나 의문이다. 그에게 남겨진 날이 며칠 남지 않은 걸 감안해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멈출 순 없다. 김성철은 잠시 중단했던 고블린 학살을 계속했다. 그렇게 해서 아에게히오스의 진입 첫날, 김성철은 총 15개의 던전 토큰을 손에 넣었다. 더 하려고 해도 던전의 피로도라는 장벽이 그를 막아섰다. ‘피로하긴 뭐가 피로하다는 거야.’ 김성철이 피로도 부분에 대해 요정 컴뮈에 대해 따져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컴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정색하며 말했다. “던전의 피로는 제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존재하던, 그러니까 신님께서 직접 만드신 규칙인 거예요. 제가 어떻게 임의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닌 거예요.” 던전의 피로를 모두 소모한 도전자는 광장이라 불리는 특별한 공간으로 이송된다. 광장은 색깔에 따라 청홍백적, 모두 4개가 존재했고 선택에 따라 한 광장을 선택해 던전 공략 중의 근거지로 쓸 수 있었다. 물론 던전 바깥으로 나가는 선택도 가능한데 이 경우, 가지고 있는 던컨 토큰과 아이템을 모두 잃게 된다고 한다. ‘소환 궁전의 광장 시스템은 여기서 따온 모양이군. 기능은 완전히 판이하지만.’ 김성철은 그중 백광장을 선택했다. 백광장은 중앙의 햐얀 대리석을 깐 광장을 중심으로 요정들이 운영하는 가게와 숙박업소, 식당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아에게히오스에서의 화폐는 던전 토큰. 식당과 숙소마다 싸구려, 평균, 고급, 최고급 등이 있는 모양이다. 물련 제일 싸구려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는데도, 싸구려 식당에서 밥 한 끼를 먹는데도 던전 토큰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던전 토큰 하나가 아쉬운 김성철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호사다. 한편 요정들의 가게에선 아에게히오스의 말 대로 전설적인 검, 무구, 회복 아이템 등등 바깥세상에선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진귀한 아이템을 팔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정령의 정수다. 정수는 전투계와 비전투계에 따라 다른 가격이 매겨졌는데 그 가격은 아래와 같았다. < 요정 샤이록의 토큰 교환 상점 > 각종 정령의 정수(전투계) - 1,500개 각종 정령의 정수(비전투계) - 1,350개 “더럽게 비싸군.” 지금 가진 토큰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런데 상점가 기준으로 정령의 정수는 그다지 비싼 축에도 들지 못했다. 김성철의 시선을 단연 압도한 것은 두 번째 내화(內火)라는 이름의 아이템이었다. < 요정 샤이록의 토큰 교환 상점 > 두 번째 내화 - 22,250 무려 2만 개 이상의 코인에 달하는 가격. “이건 뭐 이리 비싸냐? 바가지냐?” 김성철이 요정 샤이록에게 퉁명스레 물었다. “바.. 바가지라니요?! 당치도 않은 거예요! 비쌀 만하니까 비싼 거예요!” 요정 샤이록은 김성철이 토큰 15개 밖에 없는 거지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무려 일 만 년만의 손님인지라 친절하게 아이템에 대해 설명했다. “무려 두 번째 마법지문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아이템인 거예요!”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두 번째 마법지문...?’ 생각지도 않은 기회다. 분명 두 번째 마법지문은 오직 천운을 가지고 태어난 자에게만 허락되는 축복. 그것을 인위적으로 얻게 하는 것은 들은 적이 없다. 하지만 이곳은 신의 던전. 모든 일이 가능한 공간이다. 게다가 김성철이 두 번째 마법지문을 가진다는 것은 천공학파 이외의 주력학파의 계열의 주문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막상 두 번째 마법지문을 지닌다고 해도 마법을 가르쳐 줄 이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지금에야 김성철에 대한 제재가 풀렸다고 하나 알투지우스 같은 높은 경지의 마법사를 다시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막강한 마법사들은 재앙의 추종자 소속이고 지금은 종말교단에 들어가 버렸으니. “마법서 같은 건 안 파나?” 김성철이 상점 목록을 훑어보고 물었다. 요정 샤이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점 옆 궁전 처럼 생긴 건물을 가리켰다. “마법은 저기 소원의 궁전에 있는 지니들에게서 배우는 거예요.” “지니?” “정령의 일종인 거예요. 성격들이 괴팍하긴 하지만 실력만은 진짜인 거예요!” “5위계 이상의 마법도 배울 수 있나?” “5위계? 당연한 소리 하지도 말라는 거예요! 저 소원의 궁전에선 7위계의 고등마법도 배울 수 있는 거예요!” 요정 샤이록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 보니 확실히 저 요상한 궁전 쪽에서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금은 들어갈 수는 없다. 샤이록의 말에 의하면 소원의 궁전은 최소한 네 번째 궁극 시련을 클리어한 사람에게 개방되는 것 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생각지도 못한 기회 앞에서 김성철은 오랜만에 크게 피가 끓어오르는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두 번째 마법지문이라.’ 화염도 좋고 냉기도 좋다. 화염은 집단을 상대로 냉기는 개체를 상대로 할 때 좋다. 물론 화염은 요리에, 냉기도 요리에 좋다. ‘아이스크림이나 만들어 먹을까.’ 김성철은 간만에 행복한 상상을 하며 베르텔기아에게 말했다. “베르텔기아. 받아 적어라.” “응? 뭘?” “두 번째 내화, 토큰 이 만 이천 이백 오십 개.” “으.. 응....”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샤이록이 킥킥 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살 토큰은 있는 거예요? 그쪽이 가진 15개로는 턱도 없이 모자랄 것 같은 거예요.” “누구나 꿈은 꿀 수 있다.” 김성철은 그 말을 남기고 상점을 나섰다. 그의 눈동자가 매섭게 돌아갔다. “누굴 찾는 거야?”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을 보고 불쑥 묻자 김성철은 담담하지만 분노가 응어리진 음성으로 말했다. “마라키아.” 마라키아도 지금쯤이면 난이로들 낮춰 입문시련을 통과했을 것이고 그 보상으로 몇 개의 토큰을 받았을 것이다. 김성철은 그 토큰을 갈취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마라키아는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궁금해진 김성철이 광장을 수소문 해 안내 요정에게 컴뮈를 불러 달라 부탁했다. 다시 김성철 앞에 나타난 컴뮈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달했다. “응? 그 조인? 그 조인은 지금 적광장에 있는 거예요.” “무어라...?” “그쪽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고 백광장에 있다는 말을 듣자말자 적광장을 선택했다고 하는 거예요!” “…광장끼리는 이동 가능 한가?” “가능은 한 거예요. 단, 하루가 지나야 가능한 거예요.” “이런 빌어먹을.” 다음날. 광장에서 적당히 노숙을 하고 가지고 온 간이식량으로 배를 채운 후 김성철은 일반 시련에 도전했다. [ 1-6 ] 이번엔 적수가 변했다. 한 마리 오크다. “취익~.” [ 전설적인 오크 블러드워리어 ] 하지만 오크든 고블린이든 결과는 같다. 퍽. 쩔그렁. 이번엔 6개의 던전 토큰. 그리고 이제는 지긋지긋한 던전의 피로도 문자. 김성철은 내친 김에 일반 시련을 내리 달렸다. 바로 궁극 시련에 도전할 수도 있지만 궁극 시련을 도전해 해결할 경우 그날의 일정은 끝이 난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푼돈이라도 벌 수 있을 때 버는 것이 좋다는 게 김성철의 생각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전부 획득한 토큰의 숫자는 모두 45개. 어제 얻은 것과 합치면 도합 60개다. 이제는 궁극 시련에 도전할 때다. 김성철은 즉각 컴뮈에게 궁극 시련을 열어달라고 부탁한다. 컴뮈는 궁극 시련으로 향하는 차원문을 열며 김성철에게 신신당부했다. “궁극 시련은 일반 시련과는 격을 달리하는 강자가 나오니 절대 방심하지 마시고 상대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과연 차원문 너머엔 그럴 듯한 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 마장(魔將) 오크 그록 & 고블린 발그림 ] 일반 시련에 나타난 오크와 발그림과 생김새는 같았지만 이쪽은 허상 같은 게 아니라 실체가 있다. 김성철은 초월감각을 통해 맞은편의 적이 꽤나 강력한 전사와 마법사의 조합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필멸자 수준에서의 이야기다. 퍽! 퍽! 김성철은 이미 필멸자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존재. “가... 강하구나.” “인정한다..! 키킥!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 될 것을...!” 첫 번째 궁극 시련의 보스들은 간단하게 김성철에게 패배를 인정했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눈앞에 보상이 떠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 당신은 첫 번째 궁극 시련을 이겨냈다. ] [ 보다 높은 시련의 문이 열렸다. ] [ 궁극 시련을 이겨 낸 그대에게 다음과 같은 보상을 내린다. ] 1. 던전 토큰 - 1,000개 2. 엘릭서(최상급) 3. 드래곤 호텔 ‘그랜드 키레’ 일주일 숙박권 떨그랑. 지금까지 본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커다란 토큰이 떨어졌다. ‘이것이 천 원짜리 토큰인가.’ 궁극 시련의 보상은 그야말로 격이 다르다. 다른 건 몰라도 희망이 생겼다. 너무 비싸서 쳐다도 보지 못했던 신의 던전의 귀중한 재보를 얻을 수 있는 희망이. 아마도 다른 궁극 시련을 차근차근 해결하다보면 언젠가는 손에 들어올지 모른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컴뮈에게 다음 행선지를 말했다. “적광장으로.” 마라키아에게 밀린 빚을 받으러 갈 시간이다. 그러나 그날 김성철은 결국 마라키아를 만나지 못했다. “그 펭귄 닮은 조인? 청광장으로 간 거예요.” 컴뮈의 천진난만한 목소리를 들으며 김성철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내일을 기약했다. 아무튼 김성철이 모처럼 얻은 숙박권을 이용하여 드래곤 호텔이라는 곳을 수소문하며 찾아갈 무렵이었다. “…….” 김성철은 골목 어둠 속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어떤 존재의 기척을 느꼈다. “누구냐?” 김성철이 고개를 돌리며 묻자 어둠 속에 있던 무언가는 후다닥 뛰어 골목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김성철은 그것의 기척을 추적하려 했지만 곧 종적이 끊겼다. 귀신처럼 신묘한 솜씨였다. 김성철은 대로로 돌아오며 방금 목격한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요정은 확실히 아니다. 요정이라기에는 너무 컸고 인간이라기엔 어딘가 뒤틀려 보이는 존재였다. “그건 뭐였지?” 김성철이 컴뮈를 보며 방금 사라진 존재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컴뮈는 자기도 신기하다는 듯 눈을 껌뻑이며 대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는 거예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아마 다른 요정이나 지니일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지니는 호기심이 대단히 강한 거예요. 호기심이 지니를 죽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말이예요!” “지니라...” 아직 직접 본 적이 없는 존재. ‘아무래도 좋은가?’ 김성철은 방금 출몰한 괴이한 존재에게서 그다지 위협적이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요정의 말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남은 시간과 그 동안에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 김성철은 이 신의 던전에 처음 발을 들일 때 다짐한 것처럼 이곳에서 얻어갈 수 있는 것은 모두 얻어갈 작정이었다. ‘최소한 두 번째 마법지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손에 넣으리라.’ 낮과 밤의 경계가 없는 신의 던전에서 또 다른 하루가 지나갔다. ======================================= 91. 만 년 동안 아무것도 안 한 남자 (1) 시간은 흘러 5일차. 4번 째 궁극 시련의 보스가 김성철의 손에 쓰러졌다. 코끼리 두상을 한 거인은 바닥에 거체를 주저앉히며 김성철에게 비장한 음성으로 말했다. “패배를 인정한다.” 툭. 보상으로 던전 토큰 4천 개와 엘릭서, 드래곤 호텔 숙박권 한 달 권이 주어졌다. 김성철은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보상을 받아들고 던전 도우미 컴뮈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마라키아만 없었더라도 지금쯤 5번 째 궁극 시련을 클리어하고 지니들이 산다는 소원의 궁전에 입장할 자격을 얻었을 텐데.’ 비록 지금 던전 토큰 30개는 푼돈에 지나지 않는 단위지만 김성철에겐 돈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 시간이다. 현재 그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10일 남짓. 최대한 길게 잡아도 12일까지를 허용한계로 잡고 있지만 김성철은 10일 이상은 넘길 생각이 없었다. 그만큼 다가올 세계의회의 개최는 그에게 있어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라키아 놈. 잡히기만 해봐라.’ 지난 5일간 마라키아는 잘 도망 다녔다. 하지만 더 이상은 어려울 것이다. 김성철은 컴뮈에게 절대 자신의 행선지를 밝히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고 더 이상 마라키아는 김성철이 있는 장소를 알고 미리 도망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데 마라키아는 매일매일 신의 던전에서 수행하는 시련 이외에도 25% 확률로 김성철을 만날 수 있는 러시안 룰렛도 해야 한다. “백광장으로.”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쫓아 광장을 바꾸는 대신, 하나의 광장에 터 잡고 진득하게 기다리는 것으로 방침을 바꿨다. ‘언젠가는 걸려들겠지.’ 아무리 마라키아가 운이 좋다고 해도 결국 한 번 정도는 백광장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때 김성철은 던전 토큰 30개 및 그 이자, 그리고 괘씸죄까지 곁들여 가혹한 처분을 내릴 작정이었다. “베르텔기아. 새로운 책꽂이가 필요하지 않나?” “으음. 뭐, 만들어준다면 고맙게 받고. 그래도 여기 쿠션은 참 좋은 거 같네.” 베르텔기아는 소파에 놓인 푹신 쿠션 위에 몸을 뉘이고 있었다. 살짝 떨어지려고 하는 반창고 너머로 보이는 베르텔기아의 몸에 난 구멍이 김성철의 마음을 살짝 짓눌렀다. “그 구멍. 어떻게 해야 치료할 수 있는 거지?” 김성철이 베르텔기아를 향해 물었다. “으음..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비록 내 안엔 수많은 레시피가 있지만 정작 이 몸을 만드는 레시피는 안 나와 있거든.” “숨겨져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럴 가능성도 있기는 해. 하지만 그걸 알려면 역시, 당신이 한시바삐 창조술사 퀘스트를 완료해야겠지!” 베르텔기아는 언제나처럼 똑 부러진 아이였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익시온에 두 기가 있을 테니 의회가 끝나는 대로 거신을 돌아볼 생각이다.” “나머지 두 기는?” “그것도 찾아봐야겠지.” 그렇게 말하는 김성철의 눈동자에 한 줄기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해도 되는 걸까.’ 은자의 탑에서 만났던 한 권의 책의 모습이 김성철의 의식 속에 희미하게 떠올랐다. 스스로를 또 다른 베르텔기아라고 말했던 그것은 그 자체로는 김성철에 어떤 위협도 가할 수 없었지만 그것이 남긴 말은 소화되지 않는 가시처럼 김성철의 마음 속을 떠돌아다니며 이따금 그를 찔렀다. “…저기. 베르텔기아.” 김성철이 반대쪽 의자에 몸을 눕히고 있는 베르텔기아를 응시했다. “왜?” 베르텔기아가 살짝 몸통을 들며 물었다. “혹시, 그 상처. 많이 불편하나?” “아주 불편한 건 아니야. 하지만 신경 쓰이지. 책장을 펼칠 때마다 찢겨서 말려올라간 부분이 걸리적거리고 게다가 그 안으로 찬바람도 들어오니까!” “그런가.” “그런데 잘나가다 그건 왜 물어?” “별 이유는 없다.” “흐음.” 베르텔기아는 못마땅한 듯 콧소리를 내며 김성철을 노려보다 이내 쿠션 위에 몸을 뉘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피로라도 느끼는 모양이다. 조용해진 방안에서 김성철은 수중의 던전 아이템을 침대 위에 늘여놓았다. 현재 그가 보유한 것은 던전 토큰 10,942개와 엘릭서 4개, 그리고 지금 묵고 있는 드래곤호텔 숙박권 여러 장. 여기서 던전 토큰의 숫자는 큰 의미가 없다. 지난 4일간 김성철은 이 던전에서 의미 있는 토큰 벌이는 궁극 시련이 유일하고 일반 시련은 아무리 해봐야 푼돈 밖에 못 버는 걸 발견했다. 하지만 궁극 시련으로 벌어들인 토큰은 고스란히 다음 궁극 시련에 도전하는 접수비로 쓰인다. 즉, 김성철이 지닌 던전 토큰 10,542개 중 10,000개가 고스란히 궁극 시련 도전 비용으로 빠져나갈 예정인 것이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실제로 그가 가용할 수 있는 던전 토큰의 숫자는 1,000개도 되지 않는 542개에 불과한 것. 전부 일반 시련에서 벌어들인 것이다. 여기서 김성철은 이 신의 던전이 의도하는 것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이 던전에서 의미 있는 것은 궁극 시련뿐이다. 일반 시련에 아무리 매진해봐야 얻을 수 있는 소득은 미약하고 그마저도 던전의 피로도라는 제약 때문에 하루에 얻을 수 있는 총량은 한정적이다. 김성철은 그것을 이렇게 해석했다. ‘실력에 자신 있는 자만 들어오라는 소리겠지.’ 즉, 이 던전의 목적은 육성이 아니다. 자격의 검증이다. 이 던전에 들어온 자는 자신이 몇 번째의 궁극 시련을 통과할 수 있는 지 시험받고 거기에 따른 보상을 챙겨 나오거나 혹은 죽게 되리라. 물론 보상도 거의 없는 일반 시련만을 반복적으로 수행하여 육성을 노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김성철이 보기에 너무나도 비효율적이고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 5-1 ] [ 전설적인 메두사 샤프슈터 ] 멀리 활을 들고 뱀으로 이루어진 머리칼을 지닌 반인반사의 괴물이 김성철을 향해 시위를 겨누고 있다. 김성철은 간단하게 날아오는 화살을 피한 뒤 스타라이트로 원거리에서 괴물을 날려버렸다. 떨그렁. 괴물이 소멸하자 던전 토큰이 김성철 앞에 떨어진다. 그 액수는 겨우 토큰 30개. 대충 하루에 벌어들일 수 있는 액수가 짐작이 된다. ‘기껏해야 300개 정도를 버는 건가.’ 던전 토큰을 주머니에 넣으며 김성철은 이 던전의 목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굳혔다. ‘그렇다면, 내 앞에 놓인 궁극 시련을 최대한 빠르게 깰 뿐이다.’ 오히려 시간이 부족한 김성철에겐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파죽지세로 일반 시련을 모두 클리어 하고 던전 토큰 10,000개를 사용해 다섯 번째 궁극 시련에 도전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보아왔지만 이렇게 빠르게 궁극 시련을 거듭 해결 하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인 거예요!” 컴뮈가 경탄하며 김성철 앞에 다섯 번째 궁극 시련의 보스로 향하는 차원문을 열었다. 문 앞엔 지금까지 상대했던 메두사와 동일하지만 좀 더 크고 힘이 느껴지는 상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김성철에겐 큰 의미가 없는 적수다. “…….” 김성철의 손에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시련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이 났다. [ 당신은 다섯 번째 궁극 시련을 이겨냈다. ] [ 보다 높은 시련의 문이 열렸다. ] [ 소원의 궁전의 지니들이 당신을 인정했다. ] [ 당신은 지금부터 소원의 궁전에 들어갈 수 있다. ] [ 궁극 시련을 이겨 낸 그대에게 다음과 같은 보상을 내린다. ] 1. 던전 토큰 - 15,000개 2. 엘릭서(최상급) 3. 드래곤 호텔 ‘그랜드 키레’ 일주일 숙박권 던전 토큰은 일정 단위가 모이면 스스로 합쳐져 새로운 고액권으로 변형한다. 김성철은 다이아몬드 빛으로 빛나는 1만 개짜리 던전 토큰의 묵직함을 손바닥으로 느끼며 주머니 안에 집어 넣었다. ‘15,000개라.’ 가깝다. 이 추세로 쭉 나아가면 일곱 번 째 궁극 시련을 해결할 즈음엔 두 번째 내화를 구입은 물론, 마법과 소소한 정령의 정수를 살 수 있을 정도의 토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김성철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9개의 궁극 시련 완전 공략이다. 지금 당장 계산하는 건 무의미하지만 아마도 대단히 넉넉할 것이다. 한계를 돌파한 김성철이 보다 강하게 성장하고도 남을 정도로 말이다. ‘이래서 아신들이 기를 쓰고 신의 던전을 봉인한 것이군. 이곳에서의 성장은 실력만 있다면 너무나도 간단하다.’ 물론 그 실력이 가장 큰 변수이긴 하지만 말이다. 모든 볼 일을 끝낸 김성철은 다시 백광장으로 돌아왔다. 다음 행선지는 이미 정해졌다. 마법을 가르쳐 준다는 지니들이 살고 있는 소원의 궁전이다. 김성철은 이제 낯익은 광장의 거리를 걸어 광장 한 구석에 동그랗고 알록달록한 지붕을 지닌 독특한 소원의 궁전 앞에 섰다. 그런데 문득 김성철은 구석진 곳에서 날아오는 시선을 느꼈다. ‘이 느낌. 익숙한데.’ 이전에 적광장에서 비슷한 시선을 느낀 적이 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어차피 이곳에선 시간이 남아돈다. 김성철은 소원의 궁전에 들어가는 척을 하며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비호처럼 몸을 날렸다. 무언가 다급히 후다닥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김성철은 호흡을 멈추고 방향을 전환, 수수께끼의 대상을 추적했다. 곧 막다른 골목이 나왔다. 어떤 생명의 기운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김성철은 알 수 있었다. 이곳 어딘가에 그 수수께끼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김성철의 손에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지금 썩 모습을 드러내라. 그렇지 않으면...” 김성철이 팔 가라즈를 높이 들어올렸다. 그의 몸에 신적인 힘이 흐르고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잠깐!” 다급한 목소리가 허공에서 튀어 나왔다. 곧 김성철은 풍경의 일부가 일그러지며 한 사내가 튀어나오는 마술적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투명화? 아니,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허공에서 나타난 것은 다 떨어진 넝마를 걸치고 해골처럼 삐쩍 마른 사내였다. 키가 상당히 커 긴 팔과 다리를 지녔는데 몸이 삐쩍 마르다보니 징그러운 벌레 같은 느낌을 강하게 줬다. “누구냐?” 김성철이 그 사내를 보며 담담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그 물음에 그 사내는 무릎을 꿇으며 때리지 말라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 나는 도전자야. 너와 같은...” 사내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도전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신의 던전은 아신들의 공작으로 지하에 파묻힌 뒤, 무려 일 만 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최초의 입장자는 김성철이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를 제쳐두고 도전자라니.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불투명하다. 일단 김성철은 그 사내에게 팔 가라즈를 겨누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종말교단이냐?” “그.. 그게 뭐야?” 사내는 퀭한 눈에 의문을 떠올리며 김성철을 올려다봤다. 김성철은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능력은 없지만 어느 정도 사람의 진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썰미 정도는 지니고 있었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진 않다. 그리고 저 행색.’ 입고 있는 옷감을 보아하니 거지꼴이 따로 없다. 마치 오래된 무덤에서 꺼낸 골동품 같은 느낌. 김성철은 그 사내에게서 미미하지만 끔찍할 정도로 응축된 악취를 감지할 수 있었다. “대체 넌 뭐냐?” 김성철은 그에게 망치를 들이대며 물었다.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마.. 말했잖아. 너와 같은 도전자라고!”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내려놓고 대신 크럼부이를 꺼냈다. “오랜만이군! 친구!” 김성철은 크럼부이의 인사에 간단한 목례로 답한 후 크럼부이의 칼날을 악취 나는 사내의 목에 가져다댔다. “혹시 나에게 불만이라도 있나?” 크럼부이가 자조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퀭한 눈빛의 사내의 눈동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의 목에 갖다 댄 칼날을 응시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다는 거지?” 김성철이 재차 물었다. 그러자 퀭한 눈빛의 사내는 칼날을 피해 뒤로 기며 다급한 어조로 대답했다. “몰라...” 김성철이 그를 좇아 다가가자 그 사내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탄식에 가까운 고함을 쏟아냈다. “정확한 건 잘 모른다고! 갑자기 이 빌어먹을 던전이 기능을 정지할 때부터 있었어!”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김성철은 크럼부이를 내려놓으며 담담한 어조로 의문의 사내에게 물었다. “그 말 사실인가?” “내가 왜 거짓말을 말하겠어!” 사내가 답답하다는 듯 무언가를 영혼창고에서 꺼내 김성철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하나의 문서였다. 김성철은 그 문서를 집어 눈으로 읽어나갔다. ‘음? 이 문자는...?!’ 고대어다. 김성철은 어설픈 독해 실력으로 그 문서를 읽어 나갔다. [ 딜로... 부론.... 트로이메아.... 도적... 길드.... 입문자.... 좋아한다.... 가지로 만든.... 무침.... ] 뒷내용은 알아볼 수 없지만 일종의 신분증이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김성철은 그 사내를 노려보며 다시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지?” 가장 본질적인 의문. 이에 그 사내는 두려운 눈동자로 사방을 주시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잘.” 어처구니없는 대답. 하지만 김성철은 그를 책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깊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이 일 만 년 전부터 던전에 있었던 사내에 대해서 말이다. ======================================= 91. 만 년 동안 아무것도 안 한 남자 (2) 김성철은 일단 그 의문의 사내에게 드래곤 호텔 숙박권 하나를 건네 거기서 몸을 씻게 했다. 말끔하게 씻고 나온 사내는 그럭저럭 봐줄만 했다. 김성철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그를 요정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요정들의 음식 솜씨는 요리 드래곤 기준 50~70 점에 이르는 상당히 높은 수준을 자랑했다. 의문의 사내는 크게 기뻐하며 게걸스럽게 음식을 들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배가 불러야 머리도 도는 법이지.’ 김성철은 인내를 가지고 무려 던전 토큰 10개 치 분량의 식사를 그 자리에서 먹어치운 사내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곧 김성철이 기대하는 순간이 왔다. “나는 딜로 브론이다. 신성도시 트로이메아 도적 길드의 입문자 클래스의 길드원이지.” 처음엔 정신이 불안정해 보였던 그는 안정을 되찾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성철은 곧 딜론 브론의 눈동자에 경계의 빛이 서리는 것을 발견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김성철을 노려보며 물었다. “넌 어디 소속이지?” 딜로 브론이 질문을 던졌다. “난 어디 소속도 아니다.” 김성철이 대답했다. 이에 딜로 브론은 조소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왜 말이 안 된다는 거지?” 이번엔 김성철이 질문을 던졌다. “이 신의 던전, 아에게히오스는 신성도시 트로이메아의 소유다. 따라서 트로이메아 제사장의 허락이 없으면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트로이메아?” 몇 번은 들어본 이름이다. 초월감각을 얻은 이래 아신의 소개문 앞에 붙어 나오던 수식 중 하나. 새롭게 얻은 영혼창고를 여는 열쇠의 이름도 트로이메아 금고관리인의 열쇠였다. 어느 한 곳의 지명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오늘 그 문제의 트로이메아를 아는 사람이 마침내 나타난 모양이다. “트로이메아도 모른단 말인가?” 딜로 브론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솔직히 잘은 모른다. 하지만 이런 걸 가지고 있지.” 김성철은 호르네코에게서 얻은 트로이메아 금고관리인의 열쇠를 영혼창고에서 꺼내 내밀었다. “응? 그.. 그건..?! 이작 라께뗌님의 열쇠..?!” “뭐야. 아는 건가. 그 지네를.” “지네라니 당치도 않군! 그분은 신성도시 트로이메아의 곳간을 책임지는 가장 지혜롭고 욕심 없는 고결한 어른이시다.” “…….” 김성철은 가만히 눈을 치켜 뜨고 흥분하고 있는 딜로 브론을 보며 생각했다. ‘이 남자의 시계는... 일 만 년 전에 멈춰버린 모양이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 전에 오해부터 풀어야 했다. 딜로 브론이 갑자기 영혼창고에서 두 자루 단검을 꺼내며 김성철을 겨누었다. “네놈. 서.. 설마... 키레의 전사냐? 이작 라께뗌 님을 어떻게 한 것이냐!” “키레는 또 뭐냐. 카레도 아니고.”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보란 듯이 꺼낸 것이지만 그럼에도 딜로 브론은 팔 가라즈를 알아보지 못했다. ‘팔 가라즈는 만 년 전의 무기는 아니었던 모양이군.’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팔 가라즈를 딜로 브론에게 겨누었다. “헛소리!” 딜로 브론은 강하게 반발했지만 그의 눈동자는 이미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본인도 내심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도도히 흘러간 장구한 세월의 경과를. “정 원한다면 상대해주지.” 김성철이 담담한 어조로 말하며 팔 가라즈를 들어올렸다. 그의 전신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압도적인 투기가 뿜어져 나온 것은 덤. 딜로 브론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툭. 결국 먼저 무기를 내려놓은 쪽은 딜로 브론이었다. “…네 말을 믿어서가 아니다.” 딜로 브론이 여전히 앙금이 남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네 놈과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현명한 선택이군.” 김성철도 팔 가라즈를 영혼창고에 집어넣었다. 다시 식탁을 사이에 두고 두 사내가 마주 앉았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는 둘 다 알고 있었다. 딜로 브론은 요정이 내온 차를 한 모금 음미하고는 자포자기한 표정과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트로이메아 도적 길드 출신으로 제사장의 명을 받아 트로이메아 출신 시민들이 승천을 하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승천?” “불멸자가 되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말해.” 그렇게 말하면서 딜로 브론은 인상을 찌푸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다음은 내 차례였는데.” 그 모습을 본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이 던전 내에서.’ 딜로 브론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내가 맡은 역할은 배달부야. 제단 전사들이 상위 레벨 시련에서 획득한 던전 토큰을 다른 약한 녀석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어.” “그런 게 가능한가? 아니, 질문을 바꾸지. 그런 걸 이 던전이 용납을 하나?” “당연히 용납하지 않지. 그래서 나 같은 배달부가 대접을 받는 것이고.” 딜로 브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이더니 이내 김성철의 시선 속에서 사라졌다. 감쪽같은 투명화. 김성철은 기척조차 느낄 수 없는 걸 발견했다. ‘이 능력. 어디선가 본 듯 하군.’ 아무개의 얼굴이 불현듯 김성철의 뇌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까보단 훨씬 낫군?” 김성철이 허공을 보며 말했다. 딜로 브론은 다시 김성철 앞에 나타나며 이가 몇 남지 않은 입안을 씨익 웃으며 드러냈다. “아깐 정말 죽기 일보 직전이었거든. 배도 고프고 정신도 없고. 평소 같으면 결코 걸리지 않을 텐데.” “그나저나 어쩌다 이 모양이 된 거지?” 자신만만하던 딜로 브론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뭔가 이상했어. 그 날은.” “…….” “제단 전사들이 먼저 바깥으로 나왔고 승천을 했어. 그들은 곧 교대로 올 새로운 제단 전사가 온다고 말했지.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다음 교대가 오지 않는 거야. 그러다가 갑자기 던전 전체가 짙은 어둠에 잠겼어.” 김성철의 눈이 미약하게 번득였다. ‘이 친구가 남은 상태에서 아신들이 이 던전을 봉인한 모양이군.’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 던전 자체가 기능을 정지하는 건. 요정들은 모두 잠이 들었고 지니의 궁전도 불이 꺼졌지. 세상 전체가 죽음 같은 침묵에 잠겨 들었어. 그것은... 저.. 정말 개 같은 경험이었지....” 딜로 브론은 당시 그때의 일이 눈앞에 떠오르기라도 한 듯 공포에 질린 얼굴로 몸을 움츠리고 엄지를 입안에 가져다 대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어떻게 살았나?” 김성철이 물었다. 딜로 브론은 두려움이 남은 눈빛으로 김성철을 응시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아. 던전이 어둠에 잠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도 잠이 들었거든. 아니 잠이 든 것 같아. 가끔 잠에서 깨곤 했지. 그러나 끔찍한 어둠과 정적이 여전히 주변에 깔린 것을 보고 다시 눈을 감아 억지로 잠을 청했어. 몇 백 번, 아니 몇 만 번이고...”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만 년 동안 잠만 잤다는 소리군.’ 그럼에도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신의 던전 자체가 지닌 신비로운 힘 때문인지도 모른다. 신의 던전은 한낱 이물질에 지나지 않는 저 딜로 브론이라는 사내조차 포용한 것이다. “자, 그럼 그쪽의 사정을 이야기해 주실까?” 시간이 경과하고 두려움을 어느 정도 떨쳐 낸 딜로 브론이 김성철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소속과 목적 정도만 이야기해줘도 괜찮아. 어차피 네가 키레 쪽 사람이라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이에 김성철은 간략하지만 어떤 말보다 무거운 진실이라는 것을 그 사내에게 선사했다. “네기 있던 시대로부터 만 년이란 시간이 지난 걸 알고 있나?” “만 년...?!” 딜로 브론의 동공이 지진이 온 것 마냥 격하게 흔들렸다. “네가 말하는 트로이메아도 키레도 지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것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세상 사람들의 뇌리 속에 지워졌지.” “헛소리!” 딜로 브론이 눈을 시퍼렇게 치켜뜨며 격하게 소리 질렀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다는 것은 딜로 브론 본인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껏해야 몇 년, 길어봐야 몇 십 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정확히 말하자면 만 년하고도 좀 더 지났지.” 김성철은 박수를 쳤다. 요정 몇 명이 빼꼼 문가에 서서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인 거예요?” 김성철은 요정들에게 말했다. “이 던전이 몇 년 동안 땅 밑에 묻혀 있었지?” “그만.” 딜로 브론이 말했다. “그만 둬.” 김성철은 딜로 브론이 어떤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딜로 브론도 알고 있었다. 엄청난 시간이 어둠 속에서 지나갔음을.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을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살아온 모든 행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니까. 기억해주는 이도 없고 기억하는 것조차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한 사람의 죽음을 의미한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레스토랑의 요정에게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몇 년이 지났지?” “만 년하고도 수십 년이 지난 거예요.” 그 한마디는 딜로 브론이라는 남자를 폭발시켰다. “헛소리!” 딜로 브론이 광분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야!” 식탁이 분노한 두 주먹에 박살이 나 부러졌고 그 위에 놓인 빈 접시들이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깨졌다. 베르텔기아가 가볍게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왜 저래.” 김성철은 차분하게 딜로 브론의 분노를 지켜보았다. 만 년 동안 잠만 잤던 사내의 분노의 불길은 좀처럼 사그라질 것 같지 않았다. 늘 그렇듯 시간의 흐름만이 답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조금은 아이러니했다. 저 딜로 브론이란 사내가 그토록 끔찍하게 여겼던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작금의 상황을 해결한 유일한 치료제라는 사실이 말이다. * 이튿날, 김성철 앞에 딜로 브론이 다시 찾아왔다. 그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김성철에게 어제의 무례를 사과했다. “어제는 미안하게 됐어. 나도 모르게 너무 흥분을 해버렸네.” 김성철은 개의치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큰 문제는 없다. 그보다 마음은 후련해졌나?” 그 물음에 만 년 전의 남자 딜로 브론은 자신 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말을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다.” “직접 아에게히오스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별로 그 소머리를 만나고 싶지 않아.” 아직 완전히 현실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대신 그는 몇 남지 않은 이를 씨익 드러내며 김성철에게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네 놈과 함께 이 던전에서 나갈 것이다.” “나랑 함께?” “세상이 조금 변한 건 인정하기 싫지만 뭐, 사실인 거 같으니까 말이야. 이대로 나가봐야 아는 놈 하나도 없고 어차피 바깥에 나갈 거라면 조금은 연줄이 있는 쪽이 좋지 않을까?” “…….” 김성철은 그다지 붙임성 있는 사람이 아니다. 김성철이 베르텔기아와 함께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자 딜로 브론은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넉살 좋게 말했다. “아, 맨 몸으로 부탁하려는 건 결코 아니야. 대신 정보를 주지.” “정보?” “각 궁극 시련 보스의 종류와 약점, 던전 안에 숨겨진 보상 등등을 말이야.” “호오.” “식대와 숙박권만 제공해주면 충분해. 어때? 괜찮은 거래 아니야?”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단서를 덧붙였다. “식사의 질은 네가 제공하는 정보의 질에 따라 결정 될 테니 그렇게 알도록.” 그렇게 해서 김성철의 새로운 던전 공략이 시작됐다. 딜로 브론은 김성철이 발견하지 못했던, 아니 발견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숨겨진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조건에 관한 정보를 알려줬다. 그것은 바로 일반 시련에 나타나는 모든 몬스터의 공격을 모두 지켜 보는 것. [ 6-1 ] [ 전설적인 나가 블레이드마스터 ] 메두사와 먼 친척뻘인 반인반사의 검을 든 여성형 몬스터가 나타났다. 평소 같으면 일격에 처리했겠지만 김성철은 끈기 있게 몬스터의 공격을 지켜봤다. “쉬잇!” 뱀 특유의 소리를 내면서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히는 전진공격, 4개의 팔을 모두 이용한 강력한 연격. 4자루의 도검을 한 점에 찔러오는 결정타 등등. 공격 자체는 만만치 않았다. 오히려 변화무쌍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공세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던 독특하고도 치명적인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대륙십삽걸 중 대부분이 이 일반 시련의 몬스터를 이겨내지 못할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김성철은 그들과 격이 다른 존재, 묵묵히 몬스터의 연이은 파상공세를 막아내며 하나의 문자가 눈앞에 떠오르길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장장 10분에 이은 방어와 회피가 반복되는 와중이었다. 곧 김성철이 원하던 문자가 나타났다. [ 적의 움직임이 눈에 익기 시작했다. ]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문자. 이유는 간단했다. 시작하자마자 상대방의 머리를 망치로 부셔버렸으니. 하지만 지금은 다를 것이다. “쉬쉬식!”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휘둘러 뱀 소리를 내는 적수를 휘두르는 검과 함께 박살냈다. 늘 그렇듯 단 한 번의 일격. 쩔그렁. 던전 토큰이 김성철 앞에 떨어졌다. 던전 토큰 50개. 하지만 그 다음이 있으리라. 김성철은 딜로 브론이 공언한 보상 문자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 당신은 강력한 적수의 모든 수를 간파했다. ] [ 당신은 의지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 [ 의지력 +5 ] 김성철은 즉시 상태창 - 능력창을 떠올렸다. 빛나는 문자가 그의 눈앞을 덮어나갔고 이윽고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능력치] 힘 999+ 민첩 916 체력 815 마력 732 직관력 738 마법저항 742 의지 548 매력 28 운 28 능력치가 상승했다. 아주 소폭이긴 하지만. ======================================= 91. 만 년 동안 아무것도 안 한 남자 (3) 능력치가 오르는 건 좋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일반 시련을 잇 따라 클리어 할 때부터 김성철은 약간의 불만족을 느꼈고 궁극 시련의 보스를 쓰러뜨릴 즈음엔 회의마저 느끼기 시작했다. [능력치] 힘 999+ 민첩 916 체력 815 마력 732 직관력 738 마법저항 742 의지 578 매력 28 운 28 김성철은 여섯 번째 궁극 시련을 해치우고 다시 자신의 상태창을 떠올렸다. ‘역시 의지만 오르는 건가.’ 궁극 시련, 일반 시력을 합쳐 도합 35라는 수치가 올랐다. 일반 시련 각 스테이지마다 의지력 5, 궁극 시련에서는 의지력 10이라는 숨겨진 보상 수치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김성철의 현재 상태를 보면 의지력이 올라가는 게 나쁜 일만은 아니다. 힘, 매력과 운은 올릴 수 없고 마법적인 부분은 충분하다. 그것을 제외하면 한 가지 유독 도드라지게 낮아 보이는 수치가 하나 있는 게 그게 바로 의지력이다. 의지는 각종 정신공격에 대한 내성, 침착함, 특별한 기술이나 마법, 특히 흑마법을 사용할 때 성공률, 그리고 마나의 회복 수치 등에 관여한다. 기능만 놓고 보면 여러 가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 성능은 고만고만하고 그다지 눈에 띄지도 않는 능력치다. 세간에서도 특별히 키울 필요가 없는 능력이라고들 한다. 다만 너무 낮게는 유지하지 말라는 경고는 반드시 한다. 최악의 경우, 정신공격을 장기로 하는 악마나 마법사의 장난감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 적정 수치만 키우고 그 이후엔 쳐다보지 않는 것이 육성의 일반 원칙이다. 한편 김성철의 의지 수치는 상태창 내에서는 서열이 낮지만 세계 평균에서 놓고 보면 수위권에 오를 정도로 높다. 게다가 김성철이 의지력을 별로 올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게 그에겐 굳이 의지를 높이지 않아도 이를 보완할만한 천둥방패라는 강력한 영혼각인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천둥방패는 마법피해 반감이라는 사기적인 성능 이외에도 전설급 이하 모든 전설공격에 면역이라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라이즈 하이메르가 알려준 삼신기 중 하나. 김성철이 홀로 세상에 맞설 수 있게 할 수 있는 한 축이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김성철은 의지 수치가 낮다고 해도 우선적으로 올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의지력은 그다지 필요가 없는데. 민첩이나 힘, 하다못해 마법적인 수치라도 올랐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군.’ 김성철은 일단 토큰 21,000개와 또 다른 엘릭서를 가지고 백광장으로 귀환했다. ‘음, 마라키아 놈 오늘은 안 걸리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김성철은 곧장 드래곤 호텔로 돌아가 딜로 브론을 찾아갔다. “당연한 거 아닌가?” 의지력만 오른다는 김성철의 항의 섞인 물음에 딜로 브론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 아에게히오스는 아홉 미덕 중 하나인 인내와 절제, 즉 의지를 키우는 신의 던전이야.” 뜻하지 않은 정보. 김성철은 던전 토큰 1개짜리 주전부리를 내밀며 이야기를 유도했다. 딜로 브론의 말에 의하면 이 세계엔 9개의 신의 던전과 81개의 첨탑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첨탑은 신의 던전의 하위 던전으로 충분히 강해졌지만 신의 던전에 본격적으로 도전하기 어려운 수준의 사람들이 도전하는 곳이라고 한다. 딜로 브론은 김성철 정도의 급이 첨탑에 가봐야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중요한 것은 신의 던전이다. 이 세상에 단 9개만 존재하는 신의 던전은 상태창의 표시되는 9종의 능력치를 하나씩 전담한다고 한다. 즉, 힘을 시험하는 신의 던전에서는 힘만을 보상으로 주며 매력을 시험하는 신의 던전에서는 매력만을 보상으로 준다는 것이다. “능력치 창을 한번 떠올려 보라고.” 딜로 부론이 말했다. 김성철은 시키는 대로 했다. [능력치] 힘 999+ 민첩 916 체력 815 마력 732 직관력 738 마법저항 742 의지 578 매력 28 운 28 총 9종의 능력치로 구성된 능력치 창이 눈앞을 덮었다. 딜로 브론의 눈엔 그것이 보이지 않겠지만 딜로 브론은 마치 김성철의 상태창이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가정하며 이야기했다. “그 능력치 창엔 공공연한 비밀이 숨겨져 있지.” “공공연한 비밀?” “그래. 그 상태창 각 능력치의 배열. 그것은 각 능력치를 상징하는 신의 던전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려주고 있어. 여기 아에게히오스의 위치를 생각해보라고.” “으음. 그러고 보니.” 확실히 아에게히오스는 대륙의 남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능력치 창의 대응되는 방향과 일치한다. “그거 참 신기하군.” 김성철이 그답지 않게 탄성을 터뜨렸다. 좀처럼 보기 힘든 반응이다. 아무튼 놀라움과는 별개로 이 아에게히오스가 의지력을 집중적으로 키우는 신의 던전이라는 사실을 이 기회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성철은 숨겨진 보상을 무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의 가장 전통적인 취미는 올라가는 능력치 창을 보는 것. 설령 그것이 별 도움 안 되는 의지력이라고 해도 그는 꾸준히 올릴 생각이었다. ‘안올리는 것보다 낫겠지.’ 그런 이유로 다음 날에도 수련은 이어졌고 마침내 김성철은 마지막 궁극시련의 전 단계까지 진출했다. [ 8-1 ] 스테이지를 표시하는 문자를 보며 김성철은 하품을 하며 상태창을 응시했다. [능력치] 힘 999+ 민첩 916 체력 815 마력 732 직관력 738 마법저항 742 의지 613 매력 28 운 28 일반 시련에서 얻을 수 있는 의지력 수치는 어떤 스테이지를 불문하고 5로 고정되고 보상은 중복되지 않는다. 한편 각 일반시련의 스테이지는 5개다. 즉, 1-1에서 9-5까지 모든 일반 시련에 숨겨진 보상을 얻었다고 가정했을 때 올릴 수 있는 의지력 수치는 225. 궁극 시련에서 볼 수 있는 보스가 주는 숨겨진 보상도 의지력 10에서 고정되므로 모든 일반 시련과 궁극 시련을 합쳐 얻을 수 있는 의지력은 315에 달한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숫자. 신의 던전에 걸 맞는 보상이다. 그런데 김성철은 지난 다섯 번의 보스들을 모두 일격에 쓰러뜨렸고 재도전 기회는 없다. 50이라는 수치가 증발한 셈이다. ‘의지력 상승폭의 최대치는 265인가.’ 컴뮈의 말에 의하면 한 번 클리어 한 일반 시련은 언제든지 재도전 할 수 있다고 한다. 잊고 온 의지력 수치는 재도전해서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론 다른 생각도 들었다. 일반 시련에서 얻을 수 있는 던전 토큰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그의 수중에 있는 던전 토큰은 1,832개. 7-5 단계 일반 시련 기준으로 다섯 번을 반복할 경우 하루에 300개라는 던전 토큰을 벌 수 있다. 단계가 높아질수록 보상도 커지는 던전의 특성상 9단계 일반시련에서는 그 보상이 더 높아질 걸 감안하면 단순히 하루 종일 일반 시련을 클리어만 해도 제법 쏠쏠한 토큰 벌이가 가능하다는 소리고 그것은 정령의 정수 구입으로 이어져 그가 원하는 다른 능력치의 성장으로 치환할 수 있다. ‘앞으로 남은 날은 6일. 의지력을 올릴 것인지 아니면 보다 많은 토큰을 얻을 것인지는 내 선택에 달린 것이군.’ 아무튼 생각할 시간은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그의 눈앞에 적의 등장을 알리는 문자가 나타났다. [ 전설적인 마스터 서큐버스 던전아이돌 ] ‘던전.. 아이돌...?!’ 김성철의 눈동자가 일순 흐릿해졌다. 어둠 속에서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를 지닌 뇌쇄적인 여인의 모습을 한 요괴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나타나 요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바깥세상의 서큐버스와는 전혀 다른 인간형 타입. 그렇기에 김성철의 고뇌는 더욱 짙어진다. “어머, 귀여운 얼굴이네. 완전 내 타입이야~.” 그걸 본 김성철의 등줄기에 한 방울 식은땀이 흐르고 지나갔다. “에라이.. 시벌...” 왜 안 나오냐 했다. ‘신 놈... 상상력 한 번 빈약하네....’ 그답지 않게 신성모독적인 언사를 속으로 되뇌이며 김성철은 자신의 앞에서 되지도 않는 추파를 던지는 마스터 서큐버스를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며 가슴 앞에 손을 얹었다. “무.. 무슨 짓이야?” 베르텔기아가 묻자 김성철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베르텔기아. 미성년자 관람불가다.” 그렇게 말하며 김성철은 적수를 노려보았다. “자 그럼 광란의 파티를 시작해볼까?” 마스터 서큐버스가 양 손을 위로 번쩍 들어 올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성에게 막강한 정신지배를 노리는 마스터 서큐버스의 특수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김성철의 눈앞에 문자의 형태로 표시되기까지 했다. [ 마스터 서큐버스가 당신에게 유혹의 댄스를 시전 했다! ] 그 춤은 실로 황홀할 정도의 치명적인 유혹을 담고 있었지만 그러나 애초부터 그것은 어떤 사내에겐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 고개 숙인 남자는 소가 닭을 보듯 무심한 시선으로 적수를 지켜보았다. 곧 결과가 나타났다. [ 하지만 당신은 마스터 서큐버스의 유혹을 훌륭히 이겨내는데 성공했다(물리적 오류). ] 그 문자를 본 김성철의 몸이 흠칫했다. 이윽고 또 다른 문자가 나타났다. [ 적의 움직임이 눈에 익기 시작했다. ] “이런! 고자 같으니라고!” 유혹에 실패한 서큐버스가 대노하며 칼날로 만든 채찍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김성철이 바라던 바다. 퍽. 쩔그렁. 몇 안 되는 던전 토큰과 쥐꼬리 만 한 의지 수치. 들인 고역에 비하면 너무나도 한미한 보상이다. 하지만 김성철은 멈추지 않는다. ‘서지 않는 게 가끔은 도움이 되는군.’ 김성철은 어렵지 않게 마의 8번 째 시련을 모두 해결했다. 남은 것은 최후의 시련인 9단계 시련. 하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것이 있다. “삐이이이....” 결국 잡았다. 마라키아를. “…….” 김성철 마라키아를 덥썩 포획했다. 보송보송하고 부드러운 솜털의 촉감이 느껴졌다. “왜 나를 피해 다녔지?” “피.. 피해 다니다니. 당치도 않은 소리다! 그냥 묘하게 운이 안 맞을 뿐이야!”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마라키아는 김성철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있었다. “…코인 30개를 돌려받겠다.” 김성철이 의지의 던전의 도전자 다운 인내심을 발하며 말했다. 하지만 마라키아 또한 인내의 던전의 또 다른 도전자다. “한 푼도 없다.” “뭐라고?” 김성철의 눈동자에 한줄기 살기가 흐르고 지나갔다. “다 썼어. 진짜야. 한 푼도 없다고!” 마라키아는 날개와 팔을 동시에 흔들며 자신의 솜털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몸으로 강조했다. “만약 하나라도 있으면?” 김성철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전부 가져라! 나는 결백하니까!” 마라키아는 몸을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전형적인 배째라 식. 하지만 김성철에겐 마라키아가 모르는 비밀스런 아이템이 있다. 김성철이 영혼 창고에서 고색창연한 열쇠 하나를 꺼냈다. 바로 트로이메아 금고지기의 열쇠. 그 신화급 아이템은 타인의 영혼창고를 열어젖히는 힘이 있다. 김성철이 열쇠를 들자 김성철은 볼 수 있었다. 마라키아 옆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금고 문의 존재를. 김성철이 열쇠를 들고 그 문에 갖다 대자 놀랍게도 마라키아의 영혼 창고가 저절로 열리며 그 안에 있는 소지품 중 열쇠의 소유자가 가장 원하는 물건이 스스로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쩔그렁. 쩔그렁. 쩔그렁. 김성철에게 붙잡힌 마라키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삐... 삐기이이이이이이이이!!!” 마라키아의 입에서 이렇게 큰 비명이 나온 적은 전에 없었다. 그의 금고에선 던전 토큰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그 숫자는 모두 해서 천오백 오십 개. 두 번째 궁극시련의 보스까진 어떻게 처치한 모양이다. 김성철 그중 천 개짜리 커다란 던전 토큰을 손에 쥐며 마라키아를 향해 씨익 웃었다. “하나라도 나오면 전부 가지라고 했겠다...?” “삐이이이이... ” 마라키아는 완전히 수세에 몰렸다. “바... 바저...” 마라키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김성철이 되물었다. “하.. 한 번만 봐줘....” 마라키아가 몸이 떨리고 있었다. ======================================= 92. 던전의 주인 (1) “한.. 한 번만 봐줘. 인간. 나하크의 왕의 자존심을 접고 부탁한다...” 마라키아가 평소와 다른 어른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도 평소에는 절대 입밖에 내지 않던 왕의 자존심이란 단어까지 써가며. 그것은 김성철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다. 김성철의 눈앞에 알로 돌아가기 전의 늠름했던 마라키아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진심을 말하는 건가.’ 마라키아는 계속해서 말했다. “반드시.. 반드시 사야할 게 있다.... 부탁한다...” 그걸 본 베르텔기아가 강하게 몸을 흔들었다. “한 번만 봐주자.” 베르텔기아도 뭔가 느낀 모양이다. 마라키아에게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뭘 사려고 하는데?” 그녀는 김성철이 나서기도 전에 먼저 주머니에서 나와 마라키아 앞에 나타나 명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라키아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리.. 리빙북!” “빨리 말해. 이 사람. 성질 급하니까.” 이에 마라키아는 큰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파.. 파이널 엘릭서.” “파이널 엘릭서?” 베르텔기아의 물음에 마라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 상점에 절멸의 저주를 풀 파이널 엘릭서를 팔고 있다. 그것을 내 동족 중 한 녀석에게 먹일 생각이다.” 중간에 일이 꼬이긴 했지만 마라키아의 의도는 참작할 만한 것이었다. 그는 김성철과 함께 여행을 하면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북쪽에 있는 자신의 동포에 깊은 근심을 지니고 있었던 모양이다. 동굴 엘프에게 당부를 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는다. 자신을 대신해 믿고 동족들을 맡길 대리인이 필요하다. 그런 찰나에 발견 한 것이다. 파이널 엘릭서를. ‘솔직하지 못한 녀석이군.’ “…….” 자초지종을 들은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풀어주고 던전 토큰도 돌려줬다. 물론 30개도 받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마라키아에게 물었다. “토큰 2천 개는 모을 수 있나?” 던전 상점엔 이상할 정도로 회복 아이템의 가격이 높이 책정되어 있는데 그중 최상위의 회복 아이템인 파이널 엘릭서의 가격은 무려 던전 토큰 3,000개. 전투계 정령의 정수 두 개를 살 수 있는 가격이다. 그런데 지금 마라키아가 지닌 토큰은 천 개 남짓. 김성철이 2만 개의 토큰을 만지작거릴 동안 마라키아가 천 개 남짓에 머물렀다는 것은 김성철처럼 궁극 시련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걸 의미한다. “…몸만 조금 더 컸다면.” 마라키아는 분한 듯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잠도 노숙하면서 자야 했다.. 토큰 하나를 아끼기 위해서....” 그러고 보니 마라키아의 몸이 조금은 야위어진 느낌이 들었다. 윤기를 자랑하던 털도 거칠어진 느낌이고. 김성철과 함께 다니며 갖은 호사를 누리던 때와는 차이가 있다. 그동안 마라키아도 고생을 한 것이다. 단순히 김성철을 피해 다니며 마음 고생한 것뿐 아니라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끼니마저 굶는 육체적인 고통까지. “성장기의 나는 잘 먹어 줘야 하는데....” 마라키아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음.” 김성철의 입에서 마침내 한숨이 흘러나왔다. 긍정적인 의미인지 부정적인 의미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이 무슨 생각을 한 지 알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김성철이 기구한 마라키아를 보며 영혼창고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에게 던졌다. 툭. 2천 개에 달하는 던전 토큰. 아홉 번째 궁극 시련에 참가비를 제외하면 3천 개 남짓이던 그의 전 재산 중 삼분의 이에 달하는 금액이다. “가져라.” “삐.. 삐이...?” 마라키아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김성철을 올려다봤다. “이... 인간...!”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뒤돌아서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당장 현물로 바꿔라. 마음 바뀌기 전에.” 그 말을 들은 마라키아는 앙증맞은 손으로 천 원짜리 토큰 두 개를 손에 쥐고 부리나케 상점으로 달려 나갔다. “당신, 진짜 괜찮은 거야?” 베르텔기아가 의외라는 목소리로 말했다. “…….”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 저 참새 녀석을 챙겨주는 일면도 있네?” “딱히 챙겨주는 건 아니야. 녀석에겐 빚 진 것도 있으니.” 김성철은 기억한다. 그날, 조인왕국의 묘실에서 마라키아의 현명한 결단이 없었다면 첫 번째 재앙의 해결은 늦춰졌으리라는 것을.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베르텔기아는 알고 있었다. “흐음. 당신도 알고 보면 의외로 좋은 남자 아니야?”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어깨 위에 올라타며 은근히 장난기 묻은 음성으로 말했다. “무.. 무슨 소리 하는 거냐.” 김성철은 어깨를 흔들어 베르텔기아를 떨어뜨리고는 호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베르텔기아는 그런 김성철의 괜히 서두르는 듯한 뒷모습을 보며 킥킥 소리 내어 웃으며 생각했다. ‘솔직하지 못하기는.’ 한편 마라키아의 출현은 다른 이에겐 재앙으로 다가왔다. “나.. 나하크!” 딜로 부론이 대로변에 나타난 검은 깃털의 마라키아를 보고 대경실색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하크다! 나하크가 나타났다!” 하지만 그를 돕는 이도 그를 추적하는 이도 아무도 없었다. 공포에 질린 건 딜로 부론 한 명 뿐. 이유는 모르겠지만 조인에 대해서 안 좋은 추억이 있었던 모양이다. “뭐야.” 김성철과 베르텔기아는 혼비백산하는 딜로 부론을 말없이 쳐다보며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숙소에 들어서기 전 김성철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응시했다. “…….” “무슨 일이야?” 먼저 들어간 베르텔기아가 묻자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베르텔기아를 따라 숙소로 들어갔다. “잘못 본 모양이군.”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시 한 번 주변을 날카로운 눈으로 돌아본 뒤 숙소 안으로 사라졌다. “후우...” 아슬아슬한 탄식이 허공에서 터져 나왔다. “하마터면 들킬 뻔 했군.” 광장 골목의 모퉁이. 허공 속에서 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딜로 부론과 정 다른 유쾌하고 밝은 목소리. 그런데 그 사내의 옆엔 놀랍게도 거대한 체구의 황소머리를 한 신성한 존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신 같은 존재가 왜 굳이 일개 도전자에게 관심을 두는 겁니까?” 던전 그 자체 아에게히오스가 허공을 향해 물었다. 이에 허공 속의 존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김성철이 사라진 드래곤호텔 쪽의 입구를 응시했다. 멀리서 딜로 부론의 괴성이 한 차례 더 울려 퍼진 건 덤. 그 소리를 들은 허공 속의 존재가 중얼거렸다. “음. 저 트로이메아의 배달부 놈, 그냥 내쳐버릴 걸 그랬나.” “지금 내쳐버릴까요?” 아에게히오스가 말했다. 이에 허공 속의 존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진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는 없어. 그보다 저 사내. 특이하군.” “특이?” “상당히 특이해. 나로선 믿기지 않는군. 저런 사내가 그런 짓을 저지른다는 것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저보다 적합한 인물도 달리 없을지도 모르겠지.” 허공 속에 마법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포탈이다. 그 사내는 모습을 감춘 채 포탈 안으로 걸어갔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만?” 아에게히오스가 그를 불러 세웠다. 이에 허공 속의 사내는 유쾌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약속했던 숨겨진 시련을 그 사내에게 개방해.” “괜찮겠습니까? 그 사내는 숨겨진 보상을 전부 개방하지 못했는데.” 아에게히오스가 다시 물었다. “괜찮아. 어차피 숨겨진 시련 따위 해결할 녀석은 나타나지 않을 거니까.” “적절한 답변이 아니라고 판단됩니다만.” 아에게히오스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에 허공 속의 사내는 아에게히오스 옆에 또 다른 포탈을 만들어내며 특유의 유쾌한 어조로 한 마디 했다. “어차피 저 사내가 이 세상을 파괴할거거든.” 그 말을 들은 아에게히오스의 거대한 신형이 일순 경직됐다. 허공 속의 사내는 아에게히오스를 뒤로 하고 포탈에 발길을 들였다. “비록 그것이 껍질만 남은 세상이라고 할지라도.” 그 말을 남기고 그는 포탈 너머로 사라졌다. 마법적인 반응은 사라졌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평화로운 백광장엔 딜로 부론의 처참한 비명만이 이따금 울려 퍼질 뿐이었다. “…당신은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군요.” 아에게히오스는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한참동안 그 자리에 머물다가 뒤돌아서며 중얼거렸다. “던전 마스터.” * 마계 최전선은 인간 군주 간에 벌어진 내전과 거신의 침공으로 대부분 괴멸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적어도 하나의 전선은 전력은 온존한 채 살아남아 있었다. 마계 최전선 서부, 삼림 지대를 방비하는 바란아란 동맹이 담당구역이 바로 그곳이다. 대부분 엘프족으로 구성된 순찰대는 마족들의 까닭모를 전멸에도 불구하고 항시 북쪽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난 수백 년간, 마족들이 얼마나 교활한 존재인지 뼈저리게 체험했기 때문이다. 한 무리의 엘프 정찰대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얼음과 불의 땅을 주시하며 숲의 외곽을 돌고 있었다. 간간히 멀리서 터져 나오는 간헐천의 소리가 스산하게 밤하늘 위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풍경. 하지만 엘프들은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곧 한 엘프가 손가락으로 마계의 입구를 통해 길게 뻗은 회랑지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뭔가 있다.” 그것은 놀랍게도 한 무리의 인간이었다. 그 인간들은 점점 불어나 마침내 몇 천 명에 달하는 대무리로 변했다. 그 인간들은 털가죽과 몽둥이, 조잡한 갑주 따위를 걸치고 있었는데 무기 수준과 행색은 영락없는 야만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엘프들은 크게 놀라워하면서도 경계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변장할 악마일 수도 있다.” “어쩌면 오래 전, 악마의 땅으로 건너 간 타락한 인간들일지도 모르지.” 엘프들의 경계심은 그 인간 무리가 가까워지면서 점점 놀라움으로 변해갔다. 그곳엔 아이의 울음소리가 있었다. 지난 수십 년 간 감히 듣지 못했던 소리. 엘프 정찰대는 그 인간 무리 중에 어린아이가 있고 아이가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악마가 다시 출현한 것보다 더욱 심대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절멸의 저주가 풀린 건가?”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절멸의 저주는 현재 진행 중이다.” 엘프들이 수군거리고 있을 때였다. 인간 무리에 선두에 선 사내가 엘프들이 있는 쪽을 똑바로 응시했다. “들킨 건가?” “그럴 리가. 인간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간조차 탐지할 수 없는 거리다.” 엘프들은 그저 우연히 저 인간 사내가 이쪽을 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 사내가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엘프들은 다시 한 번 그들이 자랑하는 매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뭐지?” 엘프 궁수 중 하나가 등줄기에 스산한 감각을 느끼고 중얼거렸다. 그 순간, 그는 등줄기에 벼락이 치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그대로 번쩍 들려졌다. “크헉!” 입에서 제멋대로 붉은 피가 솟아나왔다. 엘프 궁수는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들어올리고 있는 존재를 돌아보았다. ‘저.. 저 것은...?’ 아까 보았던, 이쪽을 응시하던 인간이다. ‘어느 틈에..?!’ 그것이 그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야만족 사내의 손이 엘프의 목과 머리를 그대로 분리시켜 버렸다. 후두둑. 핏줄기가 떨어지는 가운데 살아남은 엘프들은 공포에 질린 채 그들 사이에 나타난 야만인을 응시했다. “검을 들어라!” 챙캉. 엘프들이 일제히 단검을 빼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폭풍과 같은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뒤 남은 것은 처참하게 일그러진 엘프들의 시신뿐이었다. 야만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혹은 살의에 찬 눈빛으로 죽은 자들의 시신 너머 자리 잡은 드넓은 숲을 노려보았다. 마치 방금 살육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처럼 야만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엘프의 시신을 밟고 울창한 숲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철혈기사단, 폭풍전선과 함께 마계 최전선을 지켰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북부 변경을 수호하던 바란아란 동맹의 최후의 자세한 내막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하지만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의 입을 통해 대강의 진실은 세상에 알려졌다. “북쪽에서 무시무시한 이민족이 나타났다. 이 세상 언어가 통하지 않는 그 야만인들은 그들은 지나치는 경로 상의 모든 것을 파괴하며 남하하고 있다. 이 세상에 허용되지 않은 새로운 생명과 신적인 힘을 지니고.” 하지만 세계의회가 무너진 지금, 그 야만인들에 맞설 단일 된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유일한 희망은 단 하나. 머지않아 폐허 익시온에서 개최될 세계의회. 설립자 자격으로 세계의회를 개최한 사내는 지금, 대륙 남서쪽 끝 신의 던전에 있다. [ 숨겨진 시련 ] 김성철은 아무것도 없는 무심한 광야를 노려보며 다가올 적수를 기다렸다. 곧 그 앞에 무언가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수많은 불빛이 별빛처럼 반짝거렸다. 김성철은 심호흡을 하며 적수를 노려봤다. ‘이제 남은 건 숨겨진 시련과 마지막 시련뿐이군.’ 아에게히오스에서의 시련은 이제 막바지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 92. 던전의 주인 (2) 김성철 앞에 하나의 활과 화살이 나타났다. 벚나무 가지로 만든 평범한 활과 화살이다. [ 무기를 들어라. ] 광야 너머에서 고함치는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김성철은 거부감 없이 활과 화살을 들었다. 자주 경험했던 일이다. 특정한 상황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따른 대처방법에 따라 달성 여부를 정하는 퀘스트들을. 하지만 유행이 지난 것들이다. 그런 작위적인 퀘스트들은 모범 정답이 공유되는 순간, 최초의 취지를 상실하고 보상만을 주는 통과의례로 변모한다. 하지만 사전 정보가 없는 상황 속에서 그런 퀘스트들은 본래의 목적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쉽지 않겠군.’ 특히 김성철처럼 규격 외의 힘을 지닌 자에겐 가장 까다로운 유형. 김성철은 아에게히오스에 온 이래 처음으로 긴장하며 다가올 메시지를 기다렸다. 곧, 김성철 뒤에 환한 빛이 나타났다. 그것들은 던전 토큰이 가득 담긴 주머니로 놀랍게도 불룩한 주머니가 얼굴인 것처럼 눈코입이 달려 있었고 스스로 웃음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당신 좋아하는 게 한가득이네.” 베르텔기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돈주머니의 숫자는 모두 9개. 그것들은 김성철의 뒤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줄지어 섰다. ‘뭘 하려는 거지.’ 김성철은 활을 쥔 채 광야 너머 어둠 속에 빛나는 별빛과 같은 미명들을 노려보았다. [ 조건은 다음과 같다. ] 고함치는 목소리가 광야 너머에서 들려왔다. [ 반대편에 한명의 궁수가 있고 너의 뒤에는 각각 만 개에서 십만 개에 이르는 던전 토큰이 든 아홉 개의 보상 주머니가 있다. ] “시…십만 개?!” 베르텔기아가 주머니에서 빠져나와 보상 주머니들을 응시했다. 과연 큼지막한 만개 짜리, 천 개짜리로 가득 찬 녀석이 바로 김성철의 왼쪽 후방에 자리 잡고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약간의 침묵이 이어진 후 다시 고함치는 목소리는 말했다. [ 궁수는 너의 보상 주머니를 차례로 쏘아 떨어뜨릴 것이고 마지막으로 널 향해 최후의 화살을 발사하고 사라질 것이다. ] [ 너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 [ 너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화살로 궁수를 쏘아라. 궁수를 맞추면 시련은 해결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시련은 실패로 끝난다. ] [ 한편 시련을 해결한 순간, 네 뒤에 살아남은 보상 주머니 안의 던전 토큰은 모두 네 것이 된다. ]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탐욕의 빛이 번득였다. 그의 뒤에 자리 잡은 던전 토큰의 숫자는 어림잡아 삼십 만 개. 말도 안 되는 숫자다. 모든 보상 주머니를 살릴 수 있다는 전제하에 그 도전자는 단 한 번에 모든 능력치를 999로 찍는 정령의 정수를 얻는 것도 모자라 던전 상점에 있는 모든 거액 아이템, 두 번째 내화 같은 것들을 마음껏 사들일 수 있다. 한 번의 성공으로 범인이 불멸자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하물며 이미 불멸자에 반열에 오른 김성철이랴. 다른 것은 필요 없다. 십만 개가 든 보상 주머니만 살리는 것만으로 김성철은 크나큰 발전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숨겨진 시련인가. 마라키아 녀석. 엄청난 걸 물어왔군.’ 김성철은 은혜 갚은 까치, 까마귀, 두루미, 제비 따위의 옛 설화를 떠올리며 가지고 있는 활을 굳건히 움켜쥐었다. [ 네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너의 머리와 몸, 주어진 활과 화살뿐이며 그 외에 다른 것은 일체 금지되었다는 것을 명심하라. ] [ 그러면 아에게히오스의 숨겨진 시련을 시작하겠다. ] 쉬익.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살 하나가 건너편에서 날아들었다. 김성철은 순간적으로 광야 너머 번득이고 있는 수천 개의 별빛과 같은 빛들을 응시하며 궁수의 위치를 가늠했지만, 너무나 멀었다. ‘시작하자마자 공격을 해오다니. 나쁘지 않군.’ 이미 날아온 화살은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김성철을 지나 환한 빛 속에서 웃고 있는 보상 주머니의 얼굴에 그대로 적중했다. “으하하하하! 만 개! 만 개가 날아간다~!” 화살을 맞은 보상 주머니는 처음으로 말을 하며 바닥에 떨어졌고 안에 든 수많은 던전 토큰을 바닥에 쏟았다. 쩔그렁. 수천 개에 이르는 던전 토큰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러다니다가 흐릿해지는 빛 속에서 보상 주머니와 함께 소멸했다. 던전 토큰 만 개가 그대로 증발한 것이다. “으…. 아까워라.” 베르텔기아가 중얼거리며 김성철에게 힘을 북돋아 주려는 듯 몸을 부르르 흔들었다. “이번엔 잘하라고.” “…당연하지.” 이미 김성철은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하나가 날아갔을 뿐이다. 게다가 활은 김성철이 자주 다루는 무기는 아니지만 모든 무기에 통달한 그에겐 수족처럼 다룰 수 있는 무기이기도 했다. 적의 위치만 특정되면 하나의 살로 꿰뚫어버리고도 남는다. 김성철은 시위를 반쯤 잡아당긴 채 오감을 집중해 광야 너머를 노려보았다. ‘궁수는 하나가 아닌 건가.’ 많은 것들이 어둠 너머에 도사리고 있다. 그중 하나가 움직였다. “?!” 김성철의 눈이 마치 매의 눈처럼 날카로운 안광을 발하며 움직이는 대상을 좇았다. 곧 김성철은 그 움직이는 괴물체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날 노리는 거야? 고자 아저씨?” 자칭 던전 아이돌 마스터 서큐버스다. 그것 외에도 이 검은 광야엔 김성철이 지금까지 쓰러뜨린 궁극 시련의 잡다한 보스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일종의 찬조출연인 셈이지만 그들의 등장은 김성철의 신경을 어느 정도 흩트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쉬익. 궁수의 화살이 찬조출연 몬스터 사이에서 날아들었다. 김성철은 순간적으로 궁수의 위치를 특정했지만 시위를 당기지 못했다. ‘빌어먹을.’ 쏠 수 있는 화살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김성철을 망설이게 했다. 체념한 김성철을 지나 또 하나의 화살이 보상 주머니를 꿰뚫었다. “으하하하! 오만! 오만 개가 날아간다~!” 쩔그렁렁. 이번엔 제법 손실이 크다. 뼈아픈 실책. 쉬익. 김성철의 눈에 노기가 떠올랐다. 또 다른 화살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대처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화살이 날아든 방향은 앞이 아니라 뒤였기 때문이다. 김성철이 시위를 당기며 뒤를 노리는 순간 김성철은 스러져가는 보상 주머니 너머 펼쳐진 어둠 속의 사라지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당기면 맞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빗나갈 수도 있다. 궁수로서의 감각이 김성철에게 속삭였다. ‘불확실성에 맡길 순 없다.’ 김성철은 당겼던 시위를 풀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으효효효! 이만 개! 토큰 이만 개가 날아간다~!” 순식간에 보상 주머니 3개가 사라졌다. 상실감과 함께 조바심이 김성철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더는 잃으면 곤란하다. 다음엔 반드시 한 번에 처리해야 한다.’ 김성철은 작전을 바꿨다. 상대방을 보고 대응하는 대신 미리 화살을 팽팽하게 당긴 채 궁수의 기척이 느껴지는 순간 즉각 대응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김성철의 동체시력과 힘, 궁수로서의 감각은 적이 어느 곳에 나타나도 즉각적인 응징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다만 거슬리는 것은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몬스터들. 김성철은 그 방해물들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저것들이 이 숨겨진 시련의 진정한 의도가 아닐까.’ 특정한 역할을 주고 그것을 수행하게 하는 퀘스트엔 퀘스트를 만든 자의 의도가 반드시 들어 있다. 이전에 해결한 궁극 요리의 과제도 그러했다. 명백한 의도가 있었고 그 의도를 알아내고 그에 맞게 행동한 자에게 성공이라는 달콤한 과실을 보상으로 내렸다. 지금 김성철이 경험하고 있는 시련 또한 그와 비슷한 목적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김성철은 문득 이 아에게히오스라는 신의 던전이 의지를 상징하는 던전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김성철의 눈에 번갯불과 같은 빛이 튀었다. ‘그렇군. 이 숨겨진 시련은... 다른 시련의 연장선에 있다.’ 다시 말해, 이 숨겨진 시련의 목적은 도전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태산준령의 꼭대기 위에 솟아오른 나무 한 그루. 이 시련의 제작자가 도전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와 같은 굳건한 의지일 것이다. 김성철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대량의 던전 토큰에 흔들렸던 마음이 가라앉고 다른 무언가, 그가 할 수 있었지만 할 수 없었던 강한 의지의 발현이 내면 속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와라. 궁수.’ “…….” 더 이상 눈앞의 방해꾼들은 김성철을 방해할 수 없다. 그들이 소리치고 움직이고 김성철을 자극하려 해도 굳건한 김성철의 의지는 그들을 없는 것처럼 배제했고 김성철은 오직 자신의 적수만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 조용한 변화는 그의 심장에 가장 가까이 위치한 베르텔기아도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길을 찾았구나.’ 한 시름 놓았다. 게다가 아직 남은 던전 토큰은 많고 십만 개가 든 보상 주머니도 건재하다. 핑-. 어듬 속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전엔 들을 수 없었던 시위를 놓는 소리. 그런데 김성철의 안색은 편치 못했다. ‘이럴 수가.’ 너무나 멀다. 소리의 발원점이. 우려는 곧 현실로 드러났다. 쉬익-. 초장거리에서 발사한 화살이 큰 포물선을 그리고 마치 위에서 아래로 내려꽂히는 모양새로 보상 주머니 하나를 꿰뚫었다. “으하하하하! 만 개, 만 개가 날아간다~!” 던전 토큰 만 개의 손실은 뼈아프다. 하지만 그것보다 김성철에게 아프게 다가온 것은 반격 불가능이라는 현실이었다. 아무리 김성철이 신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화살이 지닐 수 있는 파괴력의 한계는 활, 자세히는 활의 시위가 지닌 탄력에 의해 정해진다. 따라서 김성철이 아무리 기민하게 대처를 한다고 해도 결국 같은 비거리로 화살을 맞히려면 어둠 속의 궁수처럼 거의 활을 하늘에 향한 상태로 당겨야 하고 같은 궤적으로 화살을 날려 보내야 한다. 그렇게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궁수가 노리는 것은 고정된 표적이고 김성철이 노리는 것은 움직이는 표적이다. 노리는 것의 근본적인 차이가 대처 불가능이라는 엄혹한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쉬익- 또 하나의 화살이 날아왔고 또 하나의 보상 주머니가 사라졌다. 궁수는 마치 김성철을 절망의 화신으로 만들 셈인양 연거푸 화살을 발사해 김성철의 몫을 소멸시키고 있었다. 김성철의 가라앉은 마음이 이번엔 분노라는 소용돌이를 만나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개 같은 놈이...’ 김성철의 눈동자에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진정해. 아직 하나가 남았어. 십만 개가 든 녀석이.”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기분을 헤아려 미리 뒤를 돌아보고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십만 개가 남았다는 것은 김성철에게 안도를 주었다. ‘십만 개. 십만 개만 거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어둠 속의 궁수는 숨 고르기를 하는 듯 한동안 아무 움직임도 없다. 잠깐 찾아온 평화 속에서 김성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뒤에 남은 십만 개짜리 보상 주머니를 지켜야 한다고 굳게 다짐했다. 아니, 다짐했었다. 분노아 냉정,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 드나들던 김성철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잠깐. 내가 뭔가 엄청난 착각을 하는 게 아닐까.’ 쉬익. 또 하나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으하하하! 오만 개! 오만 개가 날아간다~!” 마지막 두 개 남은 보상 주머니 하나가 소멸했다. 이전 같으면 뼈 아픈 상실감을 느꼈을 테지만 지금의 김성철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군.’ 오히려 김성철의 입가에 떠오른 것은 희미한 미소였다. 팽팽히 당겨졌던 시위가 느슨해졌다. 김성철은 활을 내려놓고 어둠 너머를 응시했다. “뭐.. 뭐하는 거야? 설마 저걸 포기할 셈이야? 십만 개짜리라구!”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자포자기한 듯한 태도를 보고 질책했다. 김성철은 여전히 무반응이다. “…….” 그는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곧 어둠 속에서 하나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이 아니다. 보잘것없는, 초보 모험자도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고블린 궁수 한 마리다. 세계의 적이라 불리는 김성철을 그토록 화나게 한 것은 한낱 고블린에 불과했던 것이다. “저.. 저놈! 저런 건 내 책 모서리로 찍어도 해치울 수 있는데!” 베르텔기아는 당장에라도 날아가 건방지게 웃고 있는 보잘것없는 궁수를 처치하겠다는 등 격분했지만 김성철의 마음은 오히려 평안해졌다. ‘그런 거였군.’ 고블린이 김성철의 목전에서 시위를 당겼다. 김성철은 움직이지 않았다. 핑~. 고블린이 시위를 당겼고 직선으로 날아간 화살은 정통으로 십만 개의 던전 토큰이 든 보상 주머니를 꿰뚫었다. 수천 개의 토큰이 바닥에 떨어지며 영롱한 소리를 냈다. 고블린은 김성철을 향해 한 줄기 썩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음 순간, 김성철이 시위를 잡아당기고 활을 들어 올렸다. 고블린의 얼굴에 경악과 공포가 떠올랐다. 고블린은 허겁지겁 시위에 화살을 재고 김성철을 향해 시위를 당겼다. “저.. 저 놈!” 베르텔기아가 적개심을 보였다. 일촉즉발의 순간. 김성철은 돌연 뒤로 돌아섰다. 고블린에게 등을 보인 것이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김성철의 담담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뒤돌아선 그의 눈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뒤편의 어둠을 직시하고 있었다. 잔잔한 바다처럼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 안엔 아무것도 떠올라 있지 않았지만 김성철은 느낄 수 있었다. 태산준령의 꼭대기에 선 한 그루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은 의지를 지닌 자만이 볼 수 있는 것을. 즉, 해치워야 할 궁수를 말이다. “단지, 이 시련을 해결하기 위해서일 뿐.” 김성철이 시위를 놓았다. 핑-. 마침내 그가 지닌 한 발의 화살이 시위를 떠났고 그 화살은 미지의 적수에 적중했다. [ 훌륭하군. ] 광야 너머에서 고함치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성철은 한숨을 내쉬며 활을 내려놓았다. 광야의 저편에 자리 잡은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 92. 던전의 주인 (3) 다시금 김성철 앞에 익숙한 백색의 풍경이 펼쳐졌다. “으.. 아까워라.” 베릍레기아가 입맛을 다시며 부산을 떨었지만 김성철은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아쉬워 할 것 없다. 대량의 토큰은 그 자체로 미끼였다.’ 지켜야 할 보상 주머니. 그 자체가 함정이었다. 진정한 목적을 흐리게 만들어 목적마저 망각하게 하고 종국엔 모든 것을 망치게 하는 대단히 치밀한 함정이었다. 실로 의지를 시험하는 신의 시련에 걸맞은 과제. 혹 김성철이 하나의 보상 주머니라도 살리려고 했다면 그는 결코 진정한 궁수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김성철의 무심한 눈동자 앞에 하나의 문자가 떠오른다. [ 10 ] ‘바로 건너뛰기를 하는 건가.’ 아직 아홉 번째 시련은 시작하지도 않았다. 열 번째 시련이 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며 그리고 그것을 시작하라는 말을 한 적도 없었다. 이것은 김성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백색 공간 너머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검정 일색. 검은 도포에 나무로 만든 가면을 쓴 평균보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을 지닌 사내였다. 다만, 가면에 뚫린 눈구멍에서는 녹색의 신성한 광채가 어른거리고 있었는데 가면의 이마 부분엔 김성철이 쏜 화살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 그 사내는 가면의 이마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면서 김성철의 머리에 직접 말을 걸어왔다. [ 그러나, 의지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 [ 강한 의지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있어서야 진정한 광휘를 드러낸다. ] [ 그렇지 않은 의지는 작게는 공허한 메아리로, 크게는 자신은 물론 주변의 모든 것을 불 사를 재앙의 겁화로 변하게 되리라. ] [ 자신이 없으면 돌아가라. 의지에 상응하는 보상은 충분히 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보상을 얻고 싶다면... ]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 앞으로 나와라. 나아갈 자신이 있다면. ] 검정 일색의 사내는 말하고 있었다. 숨겨진 시련을 극복한 부분은 칭찬해주겠지만 진정한 대가를 얻기 위해서는 또 다른 증명을 하라고. 즉, 힘의 증명을 말이다. 그것은 의미한다. 이 난관은 결코 만만치 않지만 또한 그 앞에 주어질 보상은 비할 바 없이 귀중하고 크다는 것을. 아마도 그것이야말로 던전의 설계자가 가장 중히 여기는 보물. 즉, 던전의 완전공략에 가장 가까운 길이리라. 초월감각이 김성철의 생각에 반응이라도 한 듯 하나의 정보를 김성철 앞에 전달했다. [ 이름 없는 자 ] [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신의 대리인 ] [ 최초의 아홉 불멸자이자 진정한 신의 사도 ]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자가 이 던전의 주인이군.’ 확신에 가까운 감정이 김성철을 지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만난 인간 중에 그토록 강한 자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다. “베르텔기아. 잠시 관전을 부탁할 수 있을까?” 김성철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베르텔기아는 그가 말하기 무섭게 주머니에서 빠져나와 원래의 크기를 되찾으며 책장을 펄럭였다. “흐음. 저 앞의 상대가 그렇게 강해?” 베르텔기아의 물음에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 수 없다.” “흐음.” “하지만 느낌이 오는군. 오랜만에 싸워볼 만한 상대가 나타난 것 같은.” “난 그게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힘내! 지지 말고!” 베르텔기아는 훌훌 날아 멀찌감치 먼 곳으로 이동했다. 김성철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벚꽃 나무로 만든 활은 사라지고 대신 팔 가라즈가 김성철의 손에 나타났다. “바라던 바다.” 김성철이 전투태세를 갖추자 검은 도포의 사내 또한 자세를 갖추었다. 무투가의 자세다. 그것도 상당히 숙련된. 사내의 내민 발이 가볍게 바닥을 굴렀다. 다음 순간, 사내의 신형이 쏜살처럼 튕겨 나와 김성철 앞에 쇄도했다.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응축한 주먹을 김성철을 향해 내리찍으면서. ‘빠르다.’ 김성철은 공격을 회피하는 대신, 한 번 자신의 힘으로 맞받아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들어 올려 벼락처럼 내리치는 그 사내의 공격을 막았다. 쿵! 어마어마한 힘이 팔 가라즈를 통해 김성철의 신적인 힘이 흐르는 몸 안에 고스란히 전달됐다. ‘그리고 강하다.’ 아신이 아닌 상대방의 힘에 경탄하는 것은 얼마 만인가. 한쪽 팔로 사내의 공격을 막던 김성철의 왼팔이 팔 가라즈를 받쳤다. 살짝 밀리던 팔 가라즈의 떨림이 멈췄고 김성철은 힘을 더해 허공에 머무른 검정 일색의 사내를 신적인 힘으로 몰아냈다. 검정 일색의 사내가 하늘 높이 떠올랐다. 김성철은 역방향으로 날아가는 사내를 추적하며 착지의 순간을 노렸다. 붕붕붕- 김성철 손의 팔 가라즈가 위압적인 소리를 내며 회전하기 시작한다. 그만큼 오늘 김성철이 달아올랐다는 이야기다. ‘인간 중에도 나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자가 존재하다니.’ 사내의 움직임은 실로 탁월했다. 그 사내는 발밑에서 김성철이 무시무시한 풍압을 일으키며 추적하는 것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허공에 체류 중인 짧은 순간을 즐기기라도 하듯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지면에 가까워질 무렵에야 공중에서 몸을 회전하며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한 자루 검이었다. 위태로울 정도로 긴 검신을 지닌 그 검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움직이는가 싶더니 창졸간에 감당하기 어려운 기운을 머금고 육박해오는 김성철을 향해 날아들었다. 회심의 역습, 물러가라는 무언의 시위다. “…….” 그러나 김성철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저돌적으로 사내의 반격을 되받아쳤다. 챙캉! 푸른 불꽃이 검과 망치 사이에서 튀었다. 최초의 합에서 김성철의 망치가 살짝 밀리는 기색을 보였으나 오래가지 않았다. 김성철은 기어코 검격을 받아내고 쌍방의 싸움을 다시금 힘의 대치상태로 몰아넣었다. “…제법이군.” 가면 속에서 연륜이 느껴지는, 유쾌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물러선 건 가면의 사내였다. 그는 한 번의 도약으로 저만치 도약하고는 도포를 휘날리며 자세를 잡았다. 위태로울 정도로 긴 검은 뒷짐을 진 그의 손에 역으로 쥐어져 그의 신장 너머에 한 포기 난초처럼 솟아 있었다. “나는 평생에 걸쳐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가면의 사내가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 혹자가 말하길, 나에겐 호랑이의 기세와 여우의 교활함이 고루 갖춰져 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 “…….” “나도 왜 내가 이 의지의 시험장의 주인으로 선택받았는지는 알지 못한다. 평생에 걸쳐 살업을 쌓은 나와 의지라는 인내의 미덕은 물과 기름과 같은 불가분의 관계이니.” 사내의 위태로울 정도로 긴 검이 미려한 곡선을 그리며 사내의 전면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군.” 다음 순간 가면의 사내에게 폭발적인 투기가 솟아나 왔다. 마치 광풍과도 같은 무시무시한 투기에 천하의 김성철조차 위험성을 느낄 지경이었다. 위험하다. 초월감각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김성철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저 앞에 선 사내는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상대, 심지어 아신을 전부 아우른다고 해도 가장 강한 대적자라는 것을. ‘아무래도 이 던전에선 아무리 능력치가 높아도 소위 말하는 승천을 하지 않는 모양이군.’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저 압도적인 기세는. 신을 모사한 불경한 아신에게도 이 정도의 위압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팔 가라즈를 쥔 김성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디 한 번 해보자고.’ 두려움과 기대, 즐거움과 베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함이 어우러진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김성철의 메마른 뇌를 기분 좋게 적셨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살아 있다는 자각이 되살아났다. 그 평범한 인식은 김성철의 심장은 물론 몸의 구석구석, 말단까지 가벼운 흥분으로 세웠다. 몸이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가벼운 한숨이 김성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윽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주변의 모든 것이 얼어붙을 것 같은 극한의 대치상태에서 김성철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별것도 아닌 가벼운 걸음걸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먼저 균형을 깼다는 것은 장내에 심상치 않은 파장을 몰고왔다. 무시무시한 투기를 뿜어내던 사내의 몸이 흠칫하더니 이윽고 그는 검을 고쳐잡고 김성철을 향해 마주 걸어가기 시작했다. 폭풍이 사내의 주변에 일기 시작했다. 위태로울 정도로 긴 검이 일으킨 검의 폭풍이다. 폭풍 속에서 사내의 모습을 여러 개로 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폭풍 속의 사내는 사라졌다가 두 개로 변하기도 했고 한순간엔 수천 개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 사내의 모습은 천변만화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변화무쌍한 모습이었지만 하나로서의 사내의 존재가 김성철에게 전달해주는 의미는 실로 간단했다. 피하라는 것. 막을 수 없다는 것. “…….” 하지만 그럼에도 김성철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폭풍을 일으키는 사내를 응시하며 제 발로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것이 위험하고 피할 수 없고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감내하고. ‘드디어 만난 모양이군.’ 합을 맞추기도 전에 가면의 사내는 직감했다. 김성철이란 사내가 자신의 폭풍을 보고도 의연하게 전진하는 그 순간에. ‘내 불패의 신화를 깨뜨릴 적수를.’ 천둥 같은 강맹한 일격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그물망 같은 연격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많은 이들이 그 파훼법을 연구했고 마침내 답을 찾아냈다. 최초의 강맹한 일격을 버텨낼 수만 있다면 불패의 검객의 지옥과 같은 연격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어느 누구도 그의 일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 어떤 대담한 자도 불패의 검객이 일으킨 폭풍 앞에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무한한 추격 속에서 종국엔 패배하고 말았다. 챙캉! 지금 그 앞에 우뚝 선 세상을 파멸시킬 남자를 제외한다면. 수천 번의 폭풍과 같은 검격이 그 사내를 위협했지만, 그자는 강철 같은 의지로 오롯이 자신의 적만을 응시했고 마침내 적을 제압했다. “내가 이겼소.” 온몸이 검격에 베이고 찔려 피투성이가 된 그 사내는 묵직한 한 자루의 망치를 폭풍의 눈에 들이대고 있었다. 약간의 상실감과 허무함, 그리고 운명이라는 거대한 굴레를 느끼며 던전의 주인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의 패배다.” 폭풍은 그쳤다. 폭풍의 눈 속에 있던 사내는 눈에 띄게 작아져 있었다. 김성철은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걸 느꼈다. 하늘 위에서 달콤한 향기가 감도는 미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 미풍은 김성철의 전신에 난 크고 작은 상처를 마술처럼 치료했다. 전투의 훈장과 같은 흉터와 고통이 가시는 것에 절반의 아쉬움을 느끼며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거두었다. 곧 그의 눈앞에 기대했던 문자가 나타났다. [ 당신은 신의 던전 아에게히오스의 던전 마스터를 쓰러뜨렸고 던전의 모든 시련을 넘어섰다. ] [ 신의 시련 던전 아에게히오스는 당신에게 경의를 표한다. ] [ 모든 시련을 이겨 낸 그대에게 다음과 같은 보상을 내린다. ] 1. 던전 토큰 - 1,342개 2. 엘릭서(최상급) 3. 영혼각인 강철의 혼 4. 의지 +135 엄청나다고 하기엔 어딘가 어중간한 보상. 일단 김성철은 새로운 영혼각인 강철의 혼을 집어 들었다. 영혼에 장착되기 전의 영혼각인은 실체를 지니는데 강철의 혼은 이름대로 강철로 만든 작은 수레바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즉시 강철에 혼에 대한 감정을 실시했다. <강철의 혼 > 등급 : 신화급 분류 : 영혼각인 효과 : 모든 등급의 정신공격에 면역, 즉사 방지, 역천 비고 : 아에게히오스의 시련을 모두 돌파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불가능의 상징, 신과 가장 가까운 자만이 이 강철의 증표를 지닐 수 있으리라 “어떤가? 그것이 아에게히오스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이다.” 건너 편의 던전 마스터가 말했다. 확실히 대단한 물건이다. 신화급의 영혼각인은 김성철로서도 처음 손에 넣는 물건. ‘천둥방패와 중복이 되긴 하지만 상위호환 성격도 있고 즉사방지라는 좋은 기능도 붙어있군. 게다가 마지막에 붙은 효과. 이건 조금 의문이 들지만 일단은 장착하기로 할까.’ 김성철은 강철의 혼을 손바닥에 올린 채 그것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부름을 받은 강철의 수레바퀴고 손바닥 위에서 핑그르르 회전하더니 하늘 위에 떠올랐고 이윽고 김성철의 머릿속으로 그대로 파고들었다. 어떠한 상처도 남기지 않고. [ 당신은 영혼각인 ‘강철의 혼’을 획득했다. ] ======================================= 93. 고대의 마법 (1) 이로서 김성철의 영혼각인은 모두 여섯 개. 6개의 슬롯 중 마지막 빈자리가 마침내 주인을 맞이했다. 김성철은 상태창 - 영혼각인 창을 눈앞에 떠올려 그것을 확인했다. [영혼각인 - 6 슬롯 ] 1. 영혼 수확자(전설, 체력 흡수 15%, 죽인 상대방으로부터 체력 회복) 2. 천둥방패(전설, 모든 종류의 마법에 50% 피해 반감, 전설급 이하 정신공격에 면역) 3. 진실의 눈(전설, 에픽 이하 모든 환영마법 무효화, 에픽 이하 모든 아이템, 마물, 스킬 감정) 4. 영혼 창고(에픽, 1,500종의 아이템 보관) 5. 기만자의 장막(희귀-상급, 상태창 위장) 6. 강철의 혼(신화, 모든 등급의 정신공격에 면역, 즉사 방지, 역천) ‘음, 기만자의 장막은 더이상 필요가 없겠군. 적당한 영혼각인을 얻으면 교환해야겠어.’ 오랫동안 유용하게 쓴 녀석이지만 더는 힘을 숨길 필요가 없는 지금 상황에 적절한 영혼각인은 아니다. 아무튼, 대어는 확인했다. 김성철은 곧장 다음 문제에 주목했다. 바로 기대에 못 미치는 던전 토큰의 숫자다. 김성철은 여전히 저 너머에 우두커니 서 있는 던전의 주인을 향해 약간의 불만을 섞어 말했다. “토큰 숫자가 조금 작은 거 같은데.” 이에 가면을 쓴 사내는 머리를 긁적이며 특유의 유쾌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게 지금 우리가 내줄 수 있는 한계야. 9단계 시련을 생략한 것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야. 하지만 너무 섭섭해하지 말라고. 의지 보상치는 던전 마스터의 권한으로 확실히 챙겨줬으니까!” 사정은 이러했다. “신의 흙이 다 떨어졌거든.” 능력치 보상이야 신의 던전 자체가 지닌 권능에 의해 줄 수 있지만 던전 상점의 아이템은 신의 흙이라는 소재를 변환하여 제공한다고 한다. “신의 흙은 신의 권능에 의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가 땅밑에 묻히기 전과는 크게 달라졌고 더 이상의 외부로부터의 공급은 없게 되었다.” 던전의 주인은 차분하게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공급이 없으니 배분도 없는 것이다. “신이라면 지금도 존재하는데.” 김성철이 말했다. “다섯 주신이라는 것들 말인가?” 던전의 주인이 냉소를 섞어 말했다. “그것들은 신인가?” 김성철이 물었다. 이에 던전의 주인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회의적인 어조로 말했다. “뭐, 나야 모르지. 그것들이 진짜 신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것은 그 다섯 주신이라는 것들은 이 신의 던전에 어떤 것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야.” 모호한 대답. 아마도 던전의 주인은 이 문제에 대해선 결코 확답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 김성철도 더 이상 묻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대신 그는 다시 본론으로 넘어갔다. “신의 흙이라면 내게도 있는데.” 그는 복대를 열어 검은색의 돌을 던전의 주인에게 내밀었다. 그걸 본 던전의 주인은 잠시 관심을 두고 파편을 보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파편을 되돌려주었다. “이런 불경한 모조품 따위는 쓸 수 없어.” 단칼에 거절당했다. “그건 그렇고 어느 놈이 만든 진 몰라도 참 고약한 물건이군. 그렇게 끔찍한 발상을 한 것만으로도 모자라 그것을 실행에 옮기다니…. 일찍이 피의 악마라 불리던 나조차도 이 정도 만행은 생각지도 못했다.” 던전의 주인은 검은 파편에 대한 혐오감을 감추지 않았다. “아마도 그 모조품을 만든 놈은 세상에 둘도 없는 미친놈일 것이다.” “…….”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던전의 주인이 그렇다는데. “그럼 그 숨겨진 시련에 있던 토큰들은 전부 가짜였소?” 그래도 아쉬운 게 있어 김성철답지 않게 구질구질한 질문을 했다. “당연하지!” 던전의 주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지만 자네가 관심 가지는 물건 정도는 살 수 있을 거야.” “음?” “나 덕분에 굳었잖아. 궁극 시련 도전비.” 지금 김성철의 수중엔 3만여 개에 달하는 던전 토큰이 있다. 최종 시련의 달성으로 얻은 토큰을 합산하면 그 정확한 숫자는 모두 31,081개. “으음....” 만족할만한 숫자는 아니다. 하지만 다른 한 가지 측면에선 긍정적인 점도 없잖아 있다. ‘원하지 않은 형태긴 하지만 그야말로 던전을 탈탈 털었군.’ 다른 의미로 완전공략이라고 할까나. 아무튼, 지금부터는 고대하던 쇼핑 타임이다. 김성철은 백광장에 돌아와 보무도 당당하게 던전 상점으로 갔다. 눈치는 없지만 콩고물 떨어지는 소리엔 기막히게 반응하는 마라키아가 어선을 떠도는 갈매기처럼 김성철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또 나 빼놓고 뭘 꾸미길래 그러시나!” ‘귀찮군.’ “으~. 저리 가!” 베르텔기아가 구박했지만 마라키아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김성철은 요정 샤이록의 던전 상점 앞에 가지고 있는 던전 토큰을 전부 턱하고 내려놓았다. “으.. 아니?!” 마라키아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마라키아는 날개를 파닥거리며 상점 가판대에 올라 산더미처럼 쌓인 던전 토큰을 부리를 살짝 벌린 채 초롱초롱한 눈으로 응시했다. “방해된다.”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옆으로 밀어붙였다. “삐이이이...” 마라키아는 안간힘을 다해 악착같이 버티려고 했다. 김성철은 더 이상 힘을 줬다가는 마라키아의 목을 부러질 거 같아 일단 그를 내버려 두고는 상점 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걸로 거래하려고 하는데.” “호오.” 상점 주인 샤이록의 눈에도 이채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보는 큰 손인 거예요!” 일단 김성철은 노렸던 아이템부터 샀다. “두 번째 내화를 원한다.” 바로 두 번째 내화다. “토큰 22,250개 되겠습니다.. 예요!” 샤이록이 22,250개에 달하는 토큰을 한 번의 손놀림으로 정확하게 계량해 상점 안으로 가지고 갔다. 남은 것은 8,831개. 마라키아가 부리가 토큰에 닿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걸 본 베르텔기아가 한소리했다. “아니, 뭐하는 거야! 아까부터. 도둑고양이도 아니고.” “갈매기겠지.”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의 비유를 자기식대로 정정하며 상점 안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기다리는 거예요. 고가의 아이템은 변환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거예요.” 상점 안엔 위를 향해 난 동그란 구멍이 있었는데 그 안에서 빛의 입자와 같은 것들이 뿜어져 나와 어떤 형체를 구성하고 있었다. ‘음, 이것이 신의 흙을 이용한 제조인가.’ 김성철은 그것이 어딘가 연금술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의 흙을 이용하는 것도 같지만, 재료가 달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신성하고도 경건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었다. 곧 상점 안에서 김성철의 원하는 아이템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이름 대로 활활 타오르는 불꽃 그 자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여기 두 번째 내화인 거예요!” “호오.” 손바닥에 올려도 뜨겁지 않다. “우와아아....” 마라키아가 부리를 쩍 벌리고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 “…….” 김성철은 마라키아의 시선을 철저히 외면하며 두 번쨰 내화를 움켜쥐었다. [ 당신은 두 번째 내화를 사용했다. ] [ 당신의 몸 안에 새로운 마법의 길이 열렸다. ] 눈앞에 나타난 문자를 보며 김성철은 자신의 몸 안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감지했다. 하지만 확연히 느껴지는 변화는 없었다. “호오. 그걸 샀군?”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성철은 조금 놀라긴 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뒤돌아섰다. 무명인. 던전의 주인이다. 가면을 쓴 그는 뒷짐을 진 채 김성철의 뒤에서 그가 하는 걸 빤히 보고 있었다. “뭐하는 거요?” 김성철이 퉁명스레 물었다. “사람 구경.” 그렇게 말하며 던전의 주인은 골목 구석 쪽을 응시했다. 그곳엔 공포에 질려 이곳을 엿보고 있는 잊힌 사내, 딜로 브론이 있었다. “저 인간 아까부터 왜 저래.” 베르텔기아가 퉁명스레 말하자 던전의 주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 던전이 배신자들에게 봉인 당하기 전에 나하크 족들이 발흥했거든. 그들의 터전이던 부유섬을 배신자들이 강제로 가라앉히다 보니 일어난 참사지. 누구나 자기 집을 뺏기면 발악하는 법 아닌가?” “…….” “좌우지간, 그걸 샀다면 어여 소원의 궁전으로 가보라고. 쓸모없는 지니 녀석들도 가끔을 일을 하게 만들어줘야지.” 하는 짓은 얄밉지만 말은 맞는 말이다. 김성철은 마라키아에 이어 귀찮은 방해꾼이 하나 더 늘었다고 생각하며 남은 던전 토큰을 마라키아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주머니에 넣은 후 곧장 소원의 궁전으로 향했다. “잠시 뒤에 다시 오지.” “언제든지 다시 오는 거예요!” 소원의 궁전은 상점 바로 옆에 있었다. 김성철이 궁전 앞에 서자 굳게 닫힌 궁전의 문이 열렸다. 김성철은 열린 문 너머로 보석과 자수정으로 장식된 분수와 과할 정도로 화려한 황금과 백금으로 장식된 내부 장식을 볼 수 있었다. ‘여기가 소원의 궁전이군.’ 소원의 궁전에 들어갈 자격은 진즉에 얻었지만 김성철은 궁전에 들어가지 않았다. 강철의 혼을 손에 넣을 정도의 강한 의지를 입증받은 사내지만 쇼핑에서 있어서만큼은 스스로도 약점이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충동구매를 일삼곤 했다. ‘지름신이 가장 무서운 법이지.’ 그는 알고 있었다. 목돈 없이 푼 돈만 가지고 소원의 궁전에 갔다 별 필요 없는 마법, 특히 페어리 라이트 같은 것에 혹해 아득바득 긁어모은 던전 토큰을 날려 먹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두 번째 내화도 얻었겠다, 조금은 불충분해도 토큰도 어느 정도 있다.’ 김성철은 자신의 의지에 강한 자부심을 느끼며 보석으로 가득 찬 궁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삐이이이!!” 뭔가 했더니 마라키아다. 모든 시련을 통과한 김성철과 달리 겨우 두 번째 궁극 시련을 간신히 클리어 한 마라키아는 소원의 궁전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다. “나도.. 나도 들어가게 해줘! 나도 마법의 지식 얻고 싶다고!” 마라키아는 애절하게 손을 뻗으며 애원했지만 그것은 김성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김성철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절규하는 마라키아를 버리고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쿵. 그가 들어가자 활짝 열린 문은 굳게 닫히고 마라키아의 울부짖음도 깨끗이 사라졌다. “그럼 슬슬, 마법 쇼핑을 시작해볼까?” 베르텔기아가 마치 자기 일인양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김성철은 희미한 웃음을 머금으며 처음 보는 종족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저것들이 지니인가?’ 지니라는 종족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푸른색 피부와 눈동자가 없는 빛나는 눈을 지니고 있었고 만주족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일부를 남기고 길게 기르는 독특한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에게선 강한 마법적인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소원의 궁전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도전자.” 지니가 말했다. 부드럽고 온화하며 지성이 느껴지는 음색이었다. 김성철은 목례를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서는 어떻게 하는 거지?” “원하시는 마법을 말해주시면 거기에 해당되는 지니는 불러드리겠어요. 하지만 그 전에 당신은 두 번쨰 마법지문을 가지고 있군요.” 그제야 김성철은 지니의 눈동자 안에 마법진의 잔영이 서려 있음을 발견했다. 상대방의 능력을 꿰뚫어 보는 영혼각인 전지의 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지니가 김성철의 상태창 일부분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일단, 마법창이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군요. 마법을 자주 사용하지 않으시나 봐요?” “자주 쓰긴 하는데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실제로 김성철의 마법창은 상당히 지저분한 상태다. 어차피 쓰는 마법도 몇 개 없으니 아무래도 좋은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두 번째 마법 지문을 가지셨으니 거기에 맞게 상태창을 조정해드리겠습니다.” 거절할 이유는 없다. “상태창을 띄워주세요.” 김성철이 시키는 대로 하자 지니는 김성철 가까이 다가오더니 김성철의 상태창 일부분을 손으로 건드렸다. 놀랍게도 김성철의 눈앞에만 보인다고 여겨졌던 상태창의 일부가 지니의 손놀림에 반응했다. “호오.” 처음 보는 신기한 경험에 김성철은 놀라움을 표시했다. “지니들은 특별한 존재들이지. 바깥세상엔 찾아볼 수 없어. 오직 신이 허락한 곳에서만 볼 수 있지!” 어느새 김성철 뒤에 나타난 던전의 주인이 껄껄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 양반. 알고 보니 오지랖 한 번 더럽게 넓구만.’ 김성철은 목구멍 끝까지 나온 말을 꾹 눌러 참으며 지니의 작업이 끝나길 기다렸다. “자, 정리되었습니다.” 지니가 말했다. 김성철은 자신의 상태창 중에, 새롭게 변화된 마법 창을 볼 수 있었다. [ 마법 ] 1. 빛의 마법(주력) 글레어 - 3위계 메테오 - 5위계 스타라이트 - 7위계 2. 공백(주력) 3. 범용 페어리라이트 - 1위계 플라이 - 2위계 주문술식 - 중급 “주문 술식의 룬을 보려면 따로 창을 열어주시면 될 거예요.” 지니가 덧붙였다. 아무튼 지저분하던 마법창이 정리가 됐다. 한결 보기가 좋다. “이런 것도 있었군.” 김성철이 감탄을 섞어 말했다. 그는 천공학파의 마법이 빛의 마법이라는 다른 타이틀로 치환된 것에 주목했다. ‘하긴, 학파라는 것은 인간들이 만든 개념이니. 적어도 만 년 전의 존재인 지니들에겐 다른 용어로 불리는 게 당연한지도 모르지.’ 아무튼, 상태창은 정리됐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마법을 익힐 시간이다. 김성철이 상태창을 닫고 지니를 응시하자 지니는 김성철의 마음을 헤아린 듯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쳤다. 손뼉 소리가 보석과 황금으로 치장된 궁전의 높은 천정을 울리자 한 줄기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왔다. 김성철은 그 신비로운 바람에 실려 수많은 램프가 궁전 아래에 놓인 것을 보았다. “이건 뭐야?” 황금 같기도 하고 백금 같기도 한 금속제에 알록달록한 보석으로 치장된 램프들. 중앙의 지니가 다시 손뼉을 치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늦잠 꾸러기들. 오랜만에 손님이 왔으니 그만 자고 모두 일어나세요!” 그 말이 울려 퍼지자 김성철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늘어선 램프 안에서 회색의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나오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그 안에 도사리고 있던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합해 여덟 명의 지니들.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개성 하나만은 뚜렷한 태고의 존재들이 동공 없는 눈동자로 김성철을 응시했다. ======================================= 93. 고대의 마법 (2) “어떤 마법을 원하나?” 지니들이 일제히 말했다. 제각기 불, 물, 바람, 빛, 어둠 등등 각각의 특기를 나타내는 마법적인 환상을 내비치며 자신을 어필하고 있었다. ‘이건 대단하군.’ 김성철은 몸속의 피가 끓어오르는 걸 느끼며 중앙의 지니에게 말했다. “마법 하나 배우려면 토큰이 얼마나 필요하지?” “가장 싼 게 5천 토큰 정도 해요. 지니들의 강습료는 비싸거든요.” “5... 5천 토큰?!” 김성철은 자신의 예산을 떠올렸다. 현재 그의 수중에 있는 토큰은 9천 개 미만. 최하급의 마법 하나를 달랑 배우는 게 전부다. 김성철은 아까부터 동네 아저씨처럼 뒷짐 지고 옆에 서 있던 던전의 주인을 응시했다. “으음, 딱히 마법 배우는데 신의 흙이 필요한 것 같지 않은데, 할인을 받거나 아니면 못 받은 것들을 받고 싶은데.” 김성철로서는 정당한 주장이다. 신의 흙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토큰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보상 하나를 깜빡했네.” 이에 던전의 주인은 껄껄 웃으며 김성철에게 뭔가 내밀었다. “생략한 아홉 번째 시련의 보상이네.” 엘릭서다. 궁극 시련을 클리어할 때마다 주던 쓸모 없던 녀석들. 그걸 본 김성철이 퉁명스레 물었다. “이걸 어디에 쓰란 말이오?” 이에 던전의 주인은 손가락을 흔들며 특유의 유쾌한 어조로 대답했다. “어허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 궁극 시련의 보상으로 주는 아에게히오스 특제 엘릭서는 아주 귀한 물건이라고. 도전자들이 최상급 엘릭서를 두고 목숨을 걸고 싸울 정도로 말이야. 눈썰미 있는 도전자라면 알아챘겠지만, 이 아에게히오스 특제 최상급 엘릭서는 상점에서도 팔지 않지! 신기하지 않나? 파이널엘릭서도 파는데 말이야!” “이.. 이게?” 그러고 보니 요정 상점에 각종 엘릭서는 팔긴 하지만 궁극 시련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과 동종의 물건은 없었던 것 같았다. 처음 엘릭서(최상급)을 손에 넣었을 때 컴뮈가 보인 열띤 반응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 평범한 엘릭서에 비밀이 있었던 건가.’ 김성철이 그렇게 생각하자 던전의 주인은 김성철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못 믿는 눈치군. 어이. 마스터 지니. 뭐라고 말 좀 해 봐.” 던전의 주인이 중앙의 지니를 향해 묻자 지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던전 마스터의 말씀 대로입니다. 저희 소환의 궁전은 엘릭서도 받는답니다.” “얼마 정도의 가치로?” 김성철의 물음에 마스터 지니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토큰 1만 개의 가치로요.” “으잉..?!” 베르텔기아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김성철도 놀라기는 매한가지. “이 엘릭서 하나가 1만 토큰의 가치를 지닌다고?” 김성철이 엘릭서를 들며 물었다. “당연하지!” 그러자 던전의 주인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김성철과 마스터 지니 사이에 끼어들었다. “원래 이 던전엔 자네 같은 괴물이 오는 곳이 아니야. 대부분 하나하나의 시련을 받을 때마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 그건 그렇다. 던전의 주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회복 아이템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곳에서 이 엘릭서를 궁극 시련의 보상으로 괜히 지정한 게 아니지. 쓸 수 있는 귀중한 아이템을 최대한 아끼는 것, 그 또한 의지력의 시험의 일환이니.”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바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덧붙였다. “참고로 바깥의 새대가리는 그 귀한 엘릭서를 이미 써버렸어. 자네와는 다르게 말이야.” “그렇군.” 이유야 어찌 됐든, 엘릭서(최상급)이 이 소원의 궁전에서는 어마어마한 교환가치를 지니는 화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성철의 수중에 있는 엘릭서(최상급)의 숫자는 모두 9개. 뚜껑에 손조차 대지 않은 신품들이다. 김성철은 마스터 지니 앞에 엘릭서들을 늘어놓은 뒤 빙 둘러선 각양각색의 지니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최상급의 마법을 배우려면 몇 개의 엘릭서가 필요하지?” “다섯 개면 충분할 겁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직관력이 있어야 익힐 수 있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겠지만요.” 지니가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의 직관력이라면 대부분의 마법을 익힐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부터는 쇼핑 시간이다. 김성철은 겉으로는 침착하게 행동했지만 오랜만에 동심의 기분을 느끼며 얼음수정을 만들어서 놀고 있는 지니를 향해 빠른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얼음 마법을 배우고 싶은데.” 김성철의 본심이 숨김없이 튀어나왔다. “얼음 마법?” 한기를 내뿜는 지니가 눈을 번득이며 물었다. 김성철은 진중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아이스크림은 물론, 냉면, 동치미도 마음껏 만들어 먹을 수 있겠군.’ 진중한 얼굴표정과 달리 입안엔 침이 고이고 있었다. “흐-음...” 베르텔기아는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의 마음을 어렴풋이 읽은 것이다. 전투보다는 전투 외적으로 마법을 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받은 것이다. “혹시 요리에 쓰려고 얼음 마법을 택한 건 아니지?” 지니와 흥정을 하는 김성철을 향해 베르텔기아가 퉁명스레 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베르텔기아.” 김성철이 정색하며 물었지만 이미 베르텔기아는 그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던전의 주인마저 뒷짐 지고 어슬렁 걸어왔다. “빙결 마법? 뭐, 좋긴 한데 자네 같이 강하고 빠른 자에게는 그다지 상성이 좋다고 할 순 없는데.” “…….” 김성철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은 뜨끔했다. 던전의 주인 말이 얼추 맞기 때문이다. 빙결 마법의 강력함은 그 자체의 파괴력보다는 강렬한 냉기를 통해 상대방을 얼려서 움직임을 느리게 하는 데 있다. 김성철처럼 날래고 빠른 사람에겐 굳이 필요 없는 기능이다. 굳이 얼릴 필요도 없이 냅다 달려가서 두드리면 그만이니까. “어허. 이 사람이 정말. 던전의 주인이라는 사람이 자기 궁전에나 있을 것이지 뭐하러 이리 돌아다닌 답니까!” 빙결 마법을 가르치는 지니가 던전의 주인에게 쓴 소리를 한다. 던전의 주인은 껄껄 웃으며 뒷짐 진 채 어슬렁 물러났다. “…….” 방해꾼이 사라지긴 했지만, 김성철의 빙결마법에 대한 열정은 이미 차게 식은 뒤였다. “자, 어떤 빙결 마법을 원하는가? 인간!” 냉기를 내뿜는 지니가 기운찬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의 옆을 떠났다. “이런 빌어먹을!” 다음으로 김성철이 향한 곳은 불길을 뿜는 지니였다. ‘모닥불도 좋지만 피우기도 귀찮고 가끔은 강한 화력으로 한 번에 구워내는 요리도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그가 화염 마법을 가르치는 지니에 이르기도 전에 던전의 주인이 다시 한번 어슬렁거린다. “화염? 흐음 화~염?” ‘이런 빌어먹을.’ 마음을 읽힌 기분이다. 김성철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화염 마법이 좋지 않은 건 아니지만 한 방의 파괴력이 있는 그에겐 화염 마법의 폭발적인 위력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차원 마법이나 배워볼까.’ 김성철은 구석에 단거리 텔레포트를 반복하며 정신 사납게 자신을 어필하고 있는 지니를 응시했다. “블링크는 파훼법이 많아. 제약도 많고. 게다가 결국 보조 마법이지. 보조오~ 마법 말이야. 흐음....” 옆에서 또 던전의 주인이 궁시렁거린다. 무시할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 맞는 말이라는 게 김성철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였다. “그럼 추천하는 거라도 있소?” 참다못한 김성철이 던전의 주인에게 직접 물었다. 이에 던전의 주인은 껄껄 웃으며 손가락으로 구석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무언가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회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회오리를 일으키는 건가.’ 김성철은 던전의 주인을 응시했다. “바람의 마법은 이 세상에 그다지 많이 쓰이지 않는 모양이군.” “바람의 마법이라.” 바람의 마법. 그것을 가르치는 마법 학교는 세계를 통틀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랜 옛날에 이미 실전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재앙의 추종자들과 싸우면서 수많은 마법사를 상대한 김성철은 그 많은 마법사 중에 바람에 관한 마법을 사용하는 이는 본 적이 없었다. 바람 마법을 사용하는 자는 아신 토드하우를 제외하고 전성기의 마라키아, 그리고 부유 군도의 아퀴로아가 전부였다. “바람의 마법은 다른 말로 대기의 마법이라고 하지. 바람은 물론이고 번개마저 다스리는 다재다능한 마법이야.” 던전의 주인은 바람의 마법이 취향인 모양이었다. 김성철은 그의 취향에 놀아날 생각이 없었다. “다른 마법부터 살펴보겠소.” 김성철은 왼쪽에서부터 차례대로 각 지니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마법과 그 효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화염, 빙결 같은 대표적인 마법을 필두로 해서 수많은 속성의 마법의 향연이 시작됐다. 그중 단연 김성철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화염 마법 속성의 최고 위계 마법이자 최강 마법인 하르마게돈이었다. 위계는 무려 8위계. 김성철이 지닌 스타라이트보다 한 단계가 높다. ‘그러고 보니 내 영혼창고 안엔 아직 하르마게돈 스크롤이 남아 있군.’ 베스티아레의 선물. 하지만 김성철은 그것을 쓰지 않았다.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라키아도 그것이 함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성철이 첫 번째 재앙 해서니우스 맥스를 처치할만한 마법력이 부족했다면 그는 주저 없이 그 스크롤을 사용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섬뜩한 일이다. 하르마게돈의 파괴와 지옥과 같은 열기 속에서 김성철 본인은 치명상을 입는 건 둘째치고, 그의 오랜 파트너 베르텔기아가 불에 타 없어졌을 것이니. ‘운이 좋았군.’ 김성철은 소환광장과 에어푸르트 마법 학교에서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새삼스레 느끼며 다음 지니로 향했다. 다음 지니의 특기는 공교롭게도 김성철이 주력으로 하고 있는 천공학파의 마법, 즉 빛의 마법이었다. “스타라이트를 익힌 인간이 아직도 남아 있다니. 그것은 아무나 익힐 수 있는 게 아닌데.” 빛의 지니가 칭찬을 섞어 말했다. 김성철은 빛의 지니에게 상위의 공격마법이 없냐고 물었다. 안타깝게도 빛의 마법 중에 스타라이트 상위의 마법은 없었다. 다만 빛의 지니 개인적으로 스타라이트를 개량해 만든 개량 마법이 있다고 했다. “스타라이트와 같아. 하지만 뒤에 브레이커라는 수식어가 붙지. 개량형이거든. 위력은 기존의 스타라이트의 약 1.5배! 수치상으론 얼마 안 되어 보이는 것 같지만, 알다시피 스타라이트가 좀 쌔야 말이지.” “음... 그거 뭔가 위험한 느낌인데.” 베르텔기아가 그 이름을 듣고 중얼거렸다. 김성철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름이 긴 마법은 여자아이들이나 좋아하지. 나에겐 어울리지 않아.” 김성철은 스타라이트 개량형을 과감히 포기했다. “다른 마법은 없나?” 김성철의 질문에 빛의 지니는 빛의 마법 지문을 지닌 자가 쓸 수 있는 여러 가지 빛의 마법 리스트를 김성철에게 보여줬다. < 빛의 마법 > ??? - 9위계 글로리 - 8위계 스타라이트 - 7위계 프리즘 - 6위계 메테오 - 5위계 ... 김성철은 5위계 아래의 마법은 보지 않는다. 못 보던 것과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 “이름이 없는 마법은 뭐지?” 김성철은 먼저 9위계 마법에 관해 물었다. “그것은 나조차도 알려줄 수 없는 마법이야. 하지만 배울 생각도 하지 않는 게 좋아. 그것은 우리가 아닌 저쪽 세계의 존재 중에서도 신에게 선택받은 존재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니까.” “그래?” “하지만 네가 찾는 공격마법은 아니야.” “그런가. 그럼 글로리는 뭐지? 이것도 공격마법이 아닌가?” 김성철의 물음에 빛의 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군중 마법이야.” “군중 마법?” “한 명 혹은 소수가 아닌 그 마법의 효과가 너와 같은 깃발에 선 모든 이에게 고루 미치는 마법이지. 글로리 같은 경우엔 네가 일으킨 빛을 본 모든 이에게 약간의 능력치 상승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지니고 있어.” “나하고 어울리는 건 아니군.” 가격도 무려 엘릭서 4개. 가지고 있는 엘릭서 중 절반에 달하는 가격이다. 남은 프리즘이란 6위계 마법도 김성철에게 썩 필요한 마법은 아니었다. 공격과 회복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마법이라고 하는데 그 위력 자체가 스타라이트는 물론 메테오만도 못한 미미한 위력이라 김성철에겐 그다지 도움되는 마법이 아니었다. “음....” 빛의 지니를 끝으로 소원의 궁전에 있는 모든 마법에 대한 감상이 끝이 났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김성철은 던전 주인의 추천이 옳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것저것 고르고 따지다 보니 남는 것은 고대의 실전된 마법이라 불리는 바람의 마법밖에 남지 않았다. 김성철이 찾는 마법은 스타라이트를 능가할 정도의 파괴력 혹은 다수의 적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냐 여부였는데 스타라이트보다 강한 마법은 하르마게돈을 필두로 여러 개 있긴 하지만 스타라이트처럼 적을 확실히 맞출 수 있는 마법은 전무했다. 다들 조건이 너무 많이 붙었고 빠른 적을 상대로는 맞추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과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하르마게돈 같은 경우엔 정해진 사용법이 있을 정도였다. 빙결 계통의 마법으로 적을 얼려 둔화시킨 후, 거기에 하르마게돈의 덮으라는 식의. 김성철의 마법 지문이 3개가 아닌 이상 그런 호사는 불가능하다. 반면 바람의 마법은 김성철이 원하는 즉발성과 파괴력, 광역 파괴 등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바람의 지니가 가지고 있는 바람 마법의 목록은 아래와 같았다. < 바람의 마법 > 메가 사이클론 - 8위계 썬더 브레이크 - 7위계 체인 라이트닝 - 6위계 윈드 쉴드 - 5위계 ... ======================================= 93. 고대의 마법 (3) 메가 사이클론은 은자의 탑에 나타났던 아신이 주력기로 쓰던 녀석이다. 파괴력도 파괴력이지만 전장에 일종의 벽과 같은 장애물을 설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활용도도 높았다. 썬더 브레이크 또한 은자의 탑의 아신이 사용한 마법. 아퀴로아도 이 마법을 김성철에게 쓰려고 했었다. 영창은 길지만 일단 영창이 끝나면 회피가 불가능한 대량의 성난 번개를 뿌려 주변 일대를 초토화하는 마법이다. 스타라이트 보다 단일기의 위력은 약하지만 다수의 적이나 회피력이 강한 적을 상대로 균일한 위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바람의 마법의 진가는 상위 마법인 7위계 이상의 마법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아래의 마법에 있다. 체인 라이트닝. 뒤틀릴 정도로 응축된 번개를 적에게 쏘면 그 번개가 적 사이를 날뛰면서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공격마법이다. 6위계라는 상대적으로 낮은 위계의 마법이지만 그 마법은 김성철이 원하는 장점을 고루 지니고 있었다. 즉발성과, 파괴력, 광역 파괴 삼박자를 말이다. 글레어 정도의 짧은 영창만으로 그 몇십 배의 위력에 달하는 공격을 쓸 수 있다. 유일한 문제는 소모 마나량이 많고 단일 상대로는 효율이 떨어진다는 점인데 그것은 높은 마력과 이제는 의지력까지 획득한 김성철에겐 큰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마지막 5위계 마법인 윈드 쉴드는 다른 속성의 방어마법과 별 차이는 없지만 어째서인지 다른 속성의 마법보다 위계가 하나 높은 대신 물리속성 공격에 대해 특별히 높은 방어력을 지니는 장점이 있었다. ‘음.’ 카즈 알메이라의 칼날에 뼈아픈 경험을 한 김성철은 반드시 윈드 쉴드를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메가 사이클론은 엘릭서 6개, 썬더 브레이크와 체인 라이트닝는 5개, 윈드 쉴드는 3개야.” 바람의 지니가 신이 나서 가격을 말했다. 그런데 조금 비싸다. “왜 썬더 브레이크와 체인 라이트닝이 가격이 같은 거지?” 김성철이 즉각 항의했다. 바람의 지니는 길게 늘어뜨린 변발의 끝자락을 빙빙 돌리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잖아. 체인 라이트닝의 인기가 높이니까. 게다가 무조건 고위계의 마법이 좋거나 비싸다는 편견은 버려. 위계가 높다고 해서 전부 좋은 건 아니니까 말이야.” “이 친구 말이 맞아. 솔직히 이 세계의 마법은 뭐라고 해야 하나. 균형이 잘 맞지 않거든.” 던전의 주인도 한 몫 거들었다. 거기에 더해 그는 한 가지 장면을 김성철에게 보여줬다. “아에게히오스. 그걸 보여주라고. 저 친구에게.” 던전의 주인이 말하자 황소 머리를 지닌 거한이 허공 속에서 걸어나 와 김성철 앞에 하나의 상을 보여줬다. 그것은 아에게히오스의 외부, 무너진 해안 절벽 지대를 축으로 잠복하고 있는 종말교단의 무리들이었다. “자네가 이 던전에 들어올 때부터 저 친구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 처음엔 몇 명 정도였는데 이제는 제법 대단위야. 저쪽 세계의 힘을 끌어올 수 있는 도구도 있는 모양이고.” 던전의 주인이 말했다. ‘아에게히오스를 덫으로 삼아 날 칠 셈인가.’ 종말교단에겐 일거양득의 기회가 될 것이다. 김성철의 처치와 아에기히오스의 점거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손에 넣을 수 있으니 말이다. “체인 라이트닝은 저런 잡것들을 잡아내는데 최적의 마법이지.” 바람의 마법 예찬론자인 던전의 주인이 부추기듯 말했다. 김성철은 체인 라이트닝보다는 썬더 브레이크 쪽에 마음이 쏠렸지만 시전 시간이 거의 없는 체인 라이트닝 쪽이 범용성이 높다는 걸 알고 그것을 택했다. ‘어쩔 수 없지. 솔직히 저런 것들 상대로는 체인 라이트닝이 최적인 것 같으니.’ 그렇게 해서 김성철이 선택한 마법은 바람의 마법. 체인 라이트닝과 윈드 쉴드가 김성철의 마법창에 추가됐다. 거기에 더해 던전의 주인은 김성철에게 특별한 선물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남은 엘릭서를 내게 넘기면 빛의 지니에게 글로리를 알려주도록 설득해보겠네. 던전 마스터의 권한으로 말이야!” 선심 쓴다는 듯이 말했지만 김성철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글로리?” 김성철은 메가 사이클론이나 썬더 브레이크 같은 화끈한 공격마법을 원했다. 던전의 주인은 어림도 없다는 태도였다. “잘 팔리는 건 줄 수 없어. 마음에 안 든다면 다른 싸구려 마법을 사던가.” “으음....”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김성철은 남은 엘릭서 두 개를 써서 빛의 마법 8위계 군중마법인 글로리를 구입했다. 이로서 소원의 궁전에서 볼 일은 전부 끝났다. 김성철은 두 번째 마법의 지문에 새로운 힘이 채워지는 걸 느끼고 궁전을 나와 다시 상점 앞에 섰다. 남은 토큰으로 아이템을 살 시간이다. 김성철은 일단 남은 토큰 4,500개를 써서 정령의 정수 3개를 샀다. 민첩성 하나, 체력 두 개에 각각 투자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힘은 물론 민첩과 체력도 999에 근접한다. 완전무결한 전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런데 정수 사고 나니 마라키아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 “나.. 나하크의 왕으로서 부탁한다.” 마라키아가 갑자기 또 무게를 잡으며 말했다. “또 뭐냐?” 베르텔기아가 퉁명스레 묻자 마라키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이윽고 김성철을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파이널엘릭서 못 샀어.” “뭐라고?” 김성철이 묻자 마라키아는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며 주섬주섬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사실 파이널 엘릭서를 사려고 했는데 말이야. 갑자기 손이 미끄러져서 정수를 사버렸거든.” “정수는 어디 있지?” 김성철의 냉랭한 물음에 마라키아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기가 꿀꺽했다는 소리다. “으... 진짜 왕재수야.” 베르텔기아가 경악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미 양심을 져버린 마라키아에게 더 이상 부끄러움은 문제 거리가 아니었다. 마라키아는 김성철에게 고개를 숙이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애원했다. “부.. 부탁이니 제발 남은 토큰으로 파이널 엘릭서를 사주면 안 될까? 이 은혜는... 나하크의 왕으로서 반드시... 반드시 갚겠다!” “…어떻게 갚겠다는 거지?” 김성철이 퉁명스레 물었다. “뭐.. 뭐야? 저 자식에게 그걸 또 사주게?” 베르텔기아가 화들짝 놀라며 김성철을 만류하려 들었다. 김성철도 내키진 않긴 했지만 그도 한때 무언가를 지키려고 했던 사람, 마라키아의 마음을 조금쯤은 이해할 수 있었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선 결국 자신의 힘이 강해야 한다는 걸. “모.. 목숨을 다해 갚겠다!” 아마도 마라키아도 필사적으로 고민했을 것이다. 파이널 엘릭서를 사느냐 아니면 좀 더 길게 보고 자신의 강함을 선택하느냐. 뭐, 기본적으로 재수가 없는 녀석이긴 하지만 김성철은 상점 주인 샤이록을 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이널 엘릭서 하나.” “예이~ 지금 바로 준비하는 거예요!” 베르텔기아의 비명과 함께 토큰 3천 개가 사라졌다. “이 은혜... 내세에 가서도 잊지 않겠다!” 마라키아는 김성철이 사준 파이널 엘릭서를 신주단지로 모시며 김성철에게 절대충성을 맹세했다. “…….” 이제 남은 건 자투리 토큰 몇 개. 김성철에게 별 필요 없는 물건이다. 김성철은 남은 토큰 800여개와 호텔 숙박권을 구석에 숨어 있는 만 년 동안 아무것도 안 한 사나이를 불러 그의 손에 넘겨 주었다. “이.. 이걸 내게 왜 주는 거지?” 딜로 부론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차피 여기서 못 나갈 거 아닌가?” 김성철은 알고 있었다. 만 년 동안 던전에 갇혀 있던 사내가 바깥에 나간다고 해도 어떤 좋은 일도 없을 거라는 사실을. 그럴 바에 차라리 이 던전에서 남은 토큰으로 먹고 자고 하며 시간이나 죽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밀려드는 재앙 속에서 죽어가느니 말이다. “고.. 고맙다! 이 은혜... 반드시.. 반드시 갚겠어!” 졸지에 한 명과 한 마리의 은인이 된 김성철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던전의 주인과 아에게히오스를 응시했다. “슬슬 나가볼까 하는데.” “성질 하나 급하군. 며칠 정도 더 있어도 될 거 같은데.” 던전의 주인은 김성철이 떠나는 게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할 일이 있어서. 오래 머무를 수가 없군.” 김성철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던전의 주인에게 말했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서린 굳은 결의를 본 던전의 주인은 가면을 매만지며 쓸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군.” 던전의 주인이 말했다. “아에게히오스. 이 자에게 길을 열어주게.” 황소머리를 지닌 거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성철 앞에 두 개의 기둥을 소환시켰다. 기둥 안에는 마법의 힘이 흐르고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바깥으로 통하는 게이트. “언제 다시 한번 놀러 오는 거예요!” 김성철은 어느새 나타난 요정 컴뮈와 던전의 주인, 아에게히오스와 딜로 부론의 배웅을 받으며 묵묵히 던전의 출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나 그렇듯이 망설임 없이. 김성철은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이제 슬슬 재밌게 되겠군.” 던전의 주인이 가면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뭐가 재밌다는 겁니까?” 아에게히오스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며 질문을 구했다. 던전의 주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꼴 보기 싫은 놈들이 하는 일에 재 뿌리는 것만큼 재밌는 일도 없는 법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군요.” “그런 게 있어. 뭐, 다르게 말하면 나도 이번 기회에 한몫 끼게 됐거든.” 그렇게 말하며 던전의 주인은 뒤로 돌아서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감히 신을 참칭 한 것들의 장난질에 말이야.” 던전의 주인은 김성철 내면에 스며든 강철의 수레바퀴. 강철의 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반전의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지.’ 가면 너머로 희미한 빛이 번득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단 하나의 존재, 끝없이 이어진 계단 너머에서 잠자고 있는 어떤 존재를 제외하면 말이야. * 김성철이 던전 아에게히오스를 완전공략하는데 걸린 시간은 일주일. 모든 준비는 끝났다. 게이트를 빠져나온 김성철은 눈부신, 대체할 수 없는 강렬한 빛이 갈고리처럼 눈알을 파고드는 걸 느끼며 김성철은 바다의 향기를 느꼈다. 폐허가 된 황금의 바다, 아에게 항이 김성철을 다시 맞이한 것이다. 던전의 입구에서 김성철은 멀찌감치 해안 절벽 위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검은 로브를 걸친 일단의 무리들을 발견했다. 종말교단. 신의 던전을 불러내기 위해 아에게 항을 파괴하고 무수한 인명을 희생시킨 원흉. 그리고 무엇보다 김성철을 공격한 자들. 김성철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세계의 적이다!” “아신을 불러내라! 당장!” 김성철이 등장한 것을 본 종말교단은 허겁지겁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허를 찔렸다고는 하나 대단히 기민하고 숙달된 움직임. 김성철은 한눈에 이 종말교단이 그의 세부적인 정보와 역량을 파악하고 함정을 팠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던전 주인의 말대로군.’ “2번 영혼석 플라이.” 김성철은 그대로 하늘 위에 날아올랐다. 하늘로 날아오른 김성철의 주위에 짧은, 그리고 이 시대엔 생소한 형태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멀리서 그 장면을 보던 종말교단의 무리들은 김성철의 몸에 떠오른 마법진을 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천공학파의 마법을 쓰려고 하는군. 하지만 영창엔 시간이 걸린다. 주문술식으로 방벽을 쳐 주술자를 보호하라.” 과거의 김성철이었다면 그의 명령은 적절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고 있다. 김성철이 던전 아에게히오스에서 또 다른 성장을 이루어냈다는 사실을. 김성철의 몸에 나타난 마법진은 빠르게 전개되어 사라졌고 그의 손끝에 이글거리는 뇌전의 형태로 치환됐다. 파지지직- 김성철은 극도로 화가나 울음소리를 내는 번개들의 분노를 고스란히 손끝으로 느끼며 그의 적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리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체인 라이트닝.” 손가락 끝에서 분노한 전류가 용솟음치며 김성철의 적에게 쏟아졌다. “뭐.. 뭐냐!” 날아오는 번개를 보며 종말교단의 무리들은 제각기 개인적으로 주문방어 술식을 펼치려고 했으나 체인 라이트닝의 뇌전은 한발 빨리 그들의 검은 로브에 닿았다. 파지지직! “끄아아아아악!” 최초의 희생자가 온 몸에 연기를 피어오르며 경련을 일으키다 이내 축 늘어졌다. 하지만 그가 죽어가는 와중에도 체인 라이트닝의 뇌전은 거칠게 먹이감 사이를 해치며 마구잡이로 희생자를 늘려나갔다. 스스로 품은 뇌전의 힘이 전부 사라지기 전까지 말이다. “뭐.. 뭐냐? 방금 그 마법은?” “스크롤일 게다! 모두 겁먹지 말고 어서 집단 방어 술식을 펼쳐라! 술식이 완성되고 아신들이 나타나면 우리의 승리다.” 종말교단의 우두머리는 뒤편에서 엄중한 보호를 받으며 부정한 기운을 머금은 횃불이 될 남녀 3명을 힐끗 쳐다보았다. 세 명의 아신. 그것은 아에게히오스에 들어간 교단의 적을 처치하기 위해 종말교단 남부 교구의 전력을 쏟아부어 만든 비장의 무기다. 아무리 김성철이 강하다고 하나 그는 결국 필멸자. 아신 하나로 대등하게 싸울 수 있고 두 기를 쓴다면 그를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종말교단의 지휘를 맡는 슈넬메르커는 그보다 하나 많은 3기를 추천했다. 이왕 전력을 투입할 거면 과할 정도로 투입하는 것이 변수를 차단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변수는 아에게히오스 안에서 만들어졌다. 김성철은 코트 자락을 살짝 열며 그것을 공고히 했다. 다이아몬드 빛으로 빛나는 궁극 요리인의 브로치 아래 한 개를 제외한 6개의 영혼석에 떠오른 고대의 마법진. 사자토스의 다중영창. 그리고 실전된 바람의 마법. 종말교단의 무리들이 넋을 잃고 허공 위에 떠오른 김성철을 응시하는 것을 보며 김성철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쏴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6개의 영혼석이 일제히 가공할만한 뇌전을 여러 갈래로 그의 적에게 흩뿌린다. 사람을 잡아먹는 뇌전들은 최초의 희생자를 집어삼킨 후 굶주린 맹수처럼 종말교단 사이를 이리저리 날뛰며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으아아악!” 순식간에 3명을 집어삼킨 뇌전이 종말교단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덮쳤다. 아신화에 자원한 횃불들이다. 귀중한 횃불들은 그 염원을 이루지도 못한 채 번개에 타 검은 숯덩이로 변해 바닥에 너부러졌다. 그것 뿐만 아니었다. 종말교단의 지휘자는 볼 수 있었다. 삽시간에 아에게에 포진한 종말교단의 귀중한 자원이 생전 처음 보는 살아 움직이는 번개에 의해 분쇄 되는 것을. ‘말도 안 돼. 교단 전력의 삼 분의 일 이상을 투입 했는데... 이렇게 간단하게…. 무너지다니...!’ 그의 생각은 뒤이어 덮친 번개에 의해 깔끔하게 불태워지며 흩어졌다. “끄아아아악!” 우두머리의 최후의 단말마를 끝으로 아에게 항 인근엔 정적이 찾아왔다. 김성철을 노리던 종말교단은 예외없이 모두 전멸.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었다. “…….” 김성철은 하늘 위에서 여기저기 피어오르는 연기들을 보고 있었다. 새로운 마법의 힘. 상상 이상이다. 김성철도 이렇게까지 쉽게 까다로운 종말교단 무리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해냈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그리고 그것은 온전한 그의 힘이고 그의 내부에 머물러 있다. 새롭게 보강된 한결 강화된 의지의 힘이 빠르게 소모된 마나를 채우는 것을 느끼며 김성철은 조용히 말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김성철은 아에게 항의 입구에 내려앉았다. 세계의 적이 다시 이 세상에 돌아왔다. 더욱 강해져서. ======================================= 94. 황색경계 앞에서 (1) 죽음의 낙진은 멀리서 보면 저녁노을처럼 보인다. 아침 해가 뜰 때면 죽음의 낙진은 다채로운 색상으로 변하는데 태양이 황색의 벽을 뚫고 나오기 직전엔 낙진 전체가 핏빛으로 변한다. 그것은 마치 세상의 절반이 핏빛 빨강으로 물든 것 같은 끔찍한 광경이었다. “…….” 한 사내가 외로운 봉우리 정상에 서서 소문을 통해 전해오는 핏빛으로 얼룩진 세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것이 예고되지 않은 재앙인가? 예고되지 않은 재앙은 예고된 재앙보다 더욱 섬뜩하고 두렵기만 하군.” 평범한 모험자의 복색. 하지만 그의 뒤엔 수십 척에 이르는 인간제국의 전투 공선들이 질서정연한 대열을 이루고 진용을 갖추고 있었다. 그 사내의 정체는 인간제국의 황제. 윌리엄 퀸튼 말버러. 그는 온통 핏빛으로 물든 대지 아래 우뚝 선 위태로운 첨탑을 응시했다. 익시온. 하루 만에 만들어졌고 하루 만에 멸망했다고 전하는 마법사들의 도시. 건물 대부분이 원인 모를 환난에 휩쓸려 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남은 건물이 몇 채 있었고 10일 뒤면 그 건물 중 한 곳에서 세상의 운명을 결정지을 세계 수뇌부들의 회의가 열리게 된다. 주최자는 세계의 적으로 이름 높은 김성철이라는 이름의 옛 친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수많은 장군과 제독들이 그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익시온을 파괴하시겠습니까?” “…….” 황제는 결단을 주저하는 법이 없다. 그는 매사 심사숙고해 방침을 정하고 일단 방법이 정해지면 신속한 결단을 내린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천하의 황제도 그 결단을 망설이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나라는 녀석이.’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목표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뭐든지 배제하며 살아왔다. 지금도 그렇다. 익시온은 파괴되어야 한다. 그자, 방랑왕이라는 불리는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괴물이 회담장에서 마각을 드러내기 전에 말이다. 방랑왕이 수십 년 전에 뿌려놓았던 혼돈의 씨앗은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있다가 세상의 혼란과 더불어 본색을 드러내고 황제를 위협하고 있다. ‘일단, 회담이 시작되면 방랑왕은 공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자리를 요구할 것이다.’ 군대와 신흥귀족은 황제의 편이지만 제국의회와 지방 영주들은 은연중에 소환자 출신 황제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그러던 차에 제국을 떠받치던 제국함대의 절반이 속국에 나타난 아신과 함께 증발함에 따라 황제의 지위는 크게 위태로워졌다. 그의 무능과 실책을 규탄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시작했고 일각에선 황제를 강제로 제위에서 끌어내리자는 과격한 의견이 지지를 얻고 있었다. 황제는 알고 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은 방랑왕의 뜻대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황제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함대를 대신할, 제국을 영원의 나라로 만들기 위한 새로운 힘을 만들 시간 말이다. 그것을 벌기 위해서라도 회담일정은 늦춰져야 하고 여기 익시온에 제국의 잔존함대를 집결시켰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황제는 망설이고 있었다. “…….” 어째서일까. 황제는 생각했다. 무엇이 자신을 그토록 망설이게 하는지를. 옛 친우 김성철의 얼굴이 불현듯 눈앞에 스치고 지나갔다. ‘그 녀석 때문인가.’ 하지만 그 생각은 곧 수정됐다. 황제를 망설이게 한 것은 김성철이 아니라 그 김성철 앞에서 호기롭고 대담하게 의견을 피력하던 과거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군.” 황제가 읊조리듯 말했다.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 눈동자 깊숙한 곳에선 세계의 적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던 과거의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시의 나라면 이런 치졸한 짓은 하지 않았겠지.”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던 황제는 이내 고개를 들고 망토를 휘날리며 뒤돌아섰다. 황제가 얼굴을 보이자 그 뒤에 늘어선 수천 명의 군사가 일제히 고개를 숙여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전 함대에 명한다.” 황제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는 라그란제로 귀환한다. 이상.” 수십 척에 이르는 공선들이 일제히 기수를 틀어 핏빛으로 물든 동쪽 하늘을 등지고 서쪽을 향해 날아갔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량한 대지의 그늘진 곳에 숨어 제국의 함대를 지켜보던 익시온의 생존자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제국함대의 철수를 지켜보았다. “제국 놈들이 물러간다.” “마커레이드님께 이 사실을 알려라. 제국은 철수했고 익시온은 안전하다고.” 토굴 속에서 수많은 움직임이 일어났다. 수백 명의 저항군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오직 한 명만이 멍하니 서서 철수하는 제국함대의 잔영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아무개. 님파스에서 도망치듯 달아난 그녀는 대륙의 반대쪽 끝에서 하나의 계기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역사가 틀어졌어. 다시 한번.” 이제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녀가 알던 역사의 흐름은 이미 뒤틀려졌고 많은 부분에서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 수많은 변화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 아무개는 자신의 손끝에 놓인 한 자루의 단검을 응시하고 있었다. 스르릉. 칼집에서 검을 꺼내자 밤의 어둠을 그대로 머금은 것 같은 광택 없는 검은 칼날이 드러났다. “역시 그는 위험해.” 김성철은 검은 거인이다. 언제든 세상을 파멸시킬 가능성을 내포한. 그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검은 거인이다. “더 이상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겠어.” 어둠을 머금은 칼날을 다시 검집에 넣으며 아무개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군중들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 종말교단을 처리한 김성철은 실피드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먼바다에 있되, 시야에는 보이는 곳에 있으라는 것이 김성철이 카벙벙에게 내린 명령인데 실피드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이다. 종말교단이 눈을 퍼렇게 뜨고 있는 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김성철은 난감함을 느꼈다. 타이곤 보스보로트가 약속한 장거리 텔레포트를 쓸 수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귀중한 영혼석 하나의 부재가 크게 느껴진 것이다. 물론 공들여 개수한 실피드를 잃는 것도 바라지 않는 일이기도 했고. 김성철은 일단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정찰은 내게 맡기라고! 부수는 자!” 갑작스레 열렬한 김성철의 충성분자가 된 마라키아가 한 발 앞세 날개를 파닥거리며 앞으로 날아갔다. “왜 저래. 저 녀석.” 베르텔기아가 마라키아의 꽁무니를 보며 중얼거렸다. “양심은 있는 모양이지.” “하지만 얼마나 갈까?” “…….” 베르텔기아의 물음에 김성철은 대답하지 못했다. 차 한 잔을 마실 시간이 지난 후, 마라키아가 김성철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살아 있는 인간을 하나 발견했다! 부수는 자!”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와 함께 마라키아를 따라 숲속으로 이동했다. 과연 숲속에 이르자 썩은 살점의 냄새와 함께 누군가의 신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으.. 으...!” 종말교단이 버리고 간 형틀에 한 사내가 묶여 있었다. 다름 아닌 이단심문관 타이곤 보스보로트다. 종말교단은 그를 붙잡아 혹독한 고문을 가한 뒤, 형틀에 매달아 내버려 두었다. “…….” 김성철 일행은 파리와 구더기로 뒤덮인 끔찍한 몰골의 타이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살아 있소?” 김성철이 타이곤을 향해 물었다. “당연히 살아 있지!” 타이곤이 역정을 내며 말했다. 아직 팔팔한 모양이다. 김성철은 마라키아에게 타이곤을 풀어줄 것을 명했다. “좋아! 그런 건 이 개과천선한 마라키아님에게 맡기라고!” 갑작스레 과잉 충성을 보이기 시작한 마라키아가 기세 좋게 날아가 정교한 마법으로 타이곤을 묶고 있던 노끈을 풀었다. 그런데 너무 서두른 탓이었을까. 묶여 있던 타이곤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정면에 있던 커다란 바위에 그대로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엌!!!!” 평소의 타이곤이었다면 이 정도 충격엔 죽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 그는 고문과 방치로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 뭔가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타이곤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랍쇼?” 마라키아가 부리를 벌리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타이곤 보스보로트가 죽었다. 향년 57세. 파란만장한 인생이었다. 그런데 타이곤에겐 남들에게 없는 특기가 하나 있었다. 죽은 그의 몸이 황금빛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곧 그는 좀비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오! 거룩하신 질서신이시여! 인간의 보호자 질서신에게 영광 있으라!” 다른 이단심문관처럼 타이곤에겐 부활이라는 특기가 있었다. 아무튼, 부활의 효과로 인해 흉한 고문의 상처는 말끔히 사라졌고 피와 얼룩으로 더러워졌던 얼굴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굳이 마라키아가 실수로 죽이지 않았더라도 미련 없이 자살을 선택했을 정도로 완벽한 회복이었다. 타이곤은 김성철 일행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몸에 달라붙은 구더기들을 훌훌 털어내고는 바닥에 떨어진 옷을 걸치며 김성철 일행을 응시했다. “왜 이렇게 늦은 거요?” “…….” 김성철 일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베르텔기아가 김성철 위에서 책장을 파닥거리며 중얼거렸다. “진짜 싫다….” “아니, 뭐가 싫다는 거지? 리빙 북.” 타이곤 보스보로트가 눈동자에서 형형한 빛을 발하며 묻자 김성철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요?” 아에게히오스에 의해 던전에서 쫓겨난 타이곤은 곧 주변에 나타난 종말교단의 무리들을 발견했다고 한다. 던전에 재차 입장하려고 해도 거부당한 그는 할 수 없이 종말교단을 다음 목표로 정하고 이단심문관의 의무, 즉 이단의 정화를 하려고 했지만 종말교단 무리가 상상외로 강하게 나오자 부하들을 실피드에 피신시킨 후 자신이 직접 미끼가 되어 종말교단의 주의를 끌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김성철 일행 앞에서 떠벌이고 있는 타이곤 보스보로트다. “정말 끈질긴 인간이군.” 마라키아가 감탄을 섞어 말했다. “실제로 다섯 번 정도 죽었지.” 타이곤이 자부심을 섞어 답했다. “하지만 진실한 신의 사도인 나는 아홉 번 죽어야 진짜 죽거든.” “고양이냐!” 베르텔기아가 타이곤을 보며 딴지를 걸었다. 타이곤은 베르텔기아를 향해 눈을 부라렸지만, 뒤에 버티고 있는 김성철이 존재감을 드러내자 곧 눈을 깔았다. 그래도 할 말은 끝까지 했다. “그래도 난 당신이 그놈들을 해치울 거라고 믿고 있었어.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았지. 종말교단과 당신은 결코 같은 편이 아니라는 것을.” 김성철은 타이곤에게 실피드의 위치를 물었다. 실피드는 여전히 먼 서쪽 바다에 있단다. 타이곤은 형틀에서 멀지 않은 바위 아래를 손으로 파내더니 통신석 하나를 가지고 왔다. “종말 교도에게 붙잡히기 전에 숨겨놓은 물건이지.” 그는 통신석을 통해 먼바다에 있는 실피드를 통해 연락했다. 거리가 너무 떨어진 탓인지 교신은 잘되지 않았지만 해가 중천에 이르렀을 무렵엔 만족할 만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다. [ 지금, 즉시 그곳으로 향하겠습니다. ] 타이곤의 부하 신관이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김성철은 그런 타이곤을 보며 아주 썩어빠진 신관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부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상관은 지금 시대엔 찾아보기 어려운 법이지.’ 타이곤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타이곤에 대한 김성철의 평가가 한 단계 올라갔다. 실피드는 지나칠 정도로 먼 곳까지 진출한 모양이었다. 타이곤의 부하의 말에 의하면 오는데 반나절이 걸린다는 모양. 텔레포트를 써서 즉시 이곳에 오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은 보류하기로 했다. 지금 여기서 힘을 전부 써버리면 나중에 익시온에 갈 수 없으니 말이다. 실피드를 기다리는 동안 김성철은 오랜만에 수제 요리를 준비 중이었다. 바닷가긴 하지만 해산물 요리를 선택하지 않았다. 아직 이 바다엔 죽은 아에게 사람들의 원혼이 머물러 있으니. 김성철은 종말교단의 음모에 의해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아에게 시민에 대한 묵념을 한 후 인근 버려진 축사에서 도망쳐 나온 돼지를 이용한 요리를 만들었다. 재료는 넉넉하게 준비했다. 커다란 돼지를 잡아 피와 내장을 빼내고 털을 다듬었다. 그뿐만 아니라 실피드에 타고 있을 타이곤의 부하의 몫도 있으니 말이다. 남는 게 시간인지라 김성철은 평소 하지 않는 시간이 걸리는 요리를 선택했다. 그는 주변에 널린 벽돌을 쌓아 이글루 형태의 화로를 만들고 그 안에 숯과 땔감을 가득 넣어 불을 지폈다. 화로 전체가 벌겋게 변할 정도로 달아오를 동안 김성철은 손질한 고기에 주변에서 구한 향신료와 포도주를 넣어 간을 했다. 간이 끝나자 김성철은 네모난 철판 위에 간을 한 고기를 올려놓고 화로 안을 달구던 모든 땔감을 꺼내고 그 빈자리에 고기를 넣고 적당한 철판으로 입구를 막았다. “그래서 고기가 익나?” 옆에서 구경하던 타이곤이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김성철의 요리에 토를 달았다. “익소.” 김성철은 짤막하게 대답한 후, 고기와 곁들여 먹을 음식을 찾았다. 버려진 농가에서 밀가루 한 포대가 발견됐다. 김성철은 그것을 적당히 반죽해 반죽 상태로 준비해 별도로 준비한 화로에 납작하게 구워냈다. 해 질 무렵, 노을 진 하늘에서 검은 점이 나타났다. 실피드다. 가만히 앉아 휴식을 취하던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보내 실피드를 이쪽에 인도하게 했다. “마라키아님에게 맡겨두라고!” 이윽고 무사하게 실피드가 상공에 나타나고 타이곤의 부하들이 지면에 안착하자 김성철은 화로를 막고 있던 철판을 치웠다. “안 익었을 거 같은데.” 타이곤이 김성철의 요리에 회의적인 시각을 내비쳤으나 이내 그의 입은 굳게 다물어졌다. 화로 안엔 이보다 잘 익을 수 없을 만큼 노릇한 고기들이 바다와 같은 육즙을 쏟아내며 탐스러운 자태를 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시오.” 김성철은 자기 몫의 고기와 밀가루 요리를 챙긴 후 자리를 떠났다. 아무리 김성철이 우군이라고 해도 그는 세계의 적, 타이곤을 제외한 평범한 자에겐 껄끄러운 존재라는 걸 알기에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 대신 그는 자리 좋은 곳에 홀로 앉아 자신이 만든 요리를 맛보았다. [ 이 요리의 점수는 72점. ] [ 그럭저럭의 요리군. 특급 요리인엔 어울리지 않는 요리다. ] 여전히 다이아몬드 브로치의 평가는 계속됐다. 김성철은 불만족스러운 점수를 보며 영혼창고에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별가루 설탕이다. 별가루 설탕을 고기에 떡칠을 한 후 다시 맛을 보았다. 눈앞에 또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 이 요리의 점수는 100,322점! ] [ 완벽한 요리다! ] “설탕 한 포대를 입안에 넣어주고 오는 건데.” 김성철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땅거미가 지는 서쪽 하늘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검게 변해가는 하늘 속에서 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며 반짝이기 시작했다. 늘 보아오던 평소 그대로의 밤하늘. 김성철은 고기 한 점을 입안에 다시 넣고 우물거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내일은 다른 하늘을 보게 되겠지.’ 김성철은 황색의 하늘을 생각했다. 죽음의 낙진으로 가득 찬 죽음의 하늘을 말이다. ======================================= 94. 황색경계 앞에서 (2)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준비는 시작됐다. 차원 마법을 익힌 타이곤의 부하들이 공선 실피드의 상갑판 중앙에 자리 잡은 장거리 텔레포트용 마법진에 늘어섰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직 익시온으로 향한 선발대가 익시온은커녕 동부의 입구에도 이르지 못했단다. 그들이 좌표를 불러 줘야 제대로 된 장거리 텔레포트가 가능한지라 그들의 도착이란 조건은 대단히 중요했다. 김성철은 난감함을 느꼈다. ‘너무 빨리 던전에서 나온 것도 문제가 되는군.’ 하지만 그런 걸 감안해도 일주일이란 시간 동안 전령이 동부 입구에도 채 이르지 못했다는 건 너무 느린 감이 있다. 이에 차원 학파 마법사를 이끄는 신관은 김성철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제국 국경이 폐쇄됐다고 합니다.” “제국 국경이 폐쇄됐다고?” “네. 제국이 속국과의 전쟁에서 참패한 직후 제도로 통하는 모든 길이 폐쇄되었다고 하더군요.” 제국은 예로부터 대륙 중심에서 남과 북, 동과 서를 잇는 교통의 요지. 거미줄처럼 촘촘한 도로와 안전한 치안은 대륙 전역에 활력을 가져오는 원동력이었다. 그런 제국의 국경이 폐쇄되었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문제다. 김성철이 제국에 몸담은 시절만 하더라도 상상도 못 할 일이 일어난 것이다. ‘제국이 함대의 절반을 잃었다는 소문은 진짜였나.’ 어제 저녁 식사를 하던 중, 타이곤의 부하들이 웅성거리는 대화를 본의 아니게 몇 개 들었다. 그중엔 제국이 속국을 공격하다가 대패했다는 믿기 어려운 소식도 섞여 있었다. 제국함대의 막강함과 속국의 나약함을 잘 아는 김성철에게 그 이야기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제국이 국경 폐쇄라는 전대미문의 조치를 취한 것은 그만큼 엄청난 위기가 제국에 찾아왔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김성철은 한시바삐 이 폐허에서 벗어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에 가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김성철은 타이곤에게 말했다. “일단 현 위치에서 장거리 텔레포트를 실시해주시오.” 시간은 넉넉하고 실피드는 빠르다. 선발대가 익시온엔 이르지 못했다고 해도 대륙 중앙의 절반을 넘어섰으니 거기서부터 동진하면 될 것이다. 김성철의 부탁에 따라 신관들은 현 위치에서 장거리 텔레포트를 시전하기로 했다. 장거리 텔레포트의 시전은 마치 합창단의 합창을 보는 것 같았다. 10명에 달하는 신관이 마법진을 따라 둥그렇게 둘러서고 그 중심에 선 신관의 장이 작은 마법 지팡이를 휘두르며 신관들을 지휘했다. 작은 지팡이의 움직임에 따라 신관들이 각기 다른 음색의 소리를 순차적으로 내며 각자의 마법진을 꽃피운다. 소리는 또 다른 음계의 소리에 덮여 화음을 이르고 화음은 만발하는 마법진의 꽃 사이에서 변화하며 하나의 멜로디를 만들어낸다. “우와.....” 베르텔기아는 장거리 텔레포트의 의식을 보는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김성철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신관들의 멜로디가 만들어 낸 마법진이 실피드 전체를 덮어나가는 것을 응시했다. 곧 공선 전체가 마법진에 잠겨 들자 풍경이 변화했다. 아에게히오스가 내려다보이던 바닷가 대신 짙은 초록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은 아공간이 나타났고 그 아공간은 곧 굳은 물감이 저절로 떨어지듯 뭉텅이로 벗겨지며 마법으로 연결된 반대편의 도착지의 풍경을 드러냈다. 그리고 짙은 녹색의 아공간이 모두 사라지자 실피드를 뒤덮었던 마법진이 힘을 잃고 흐려지기 시작했다. 실피드 주위엔 바닷가 대신 메마른 산과 들녘이 펼쳐진 대륙 중앙의 전형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김성철은 한 바퀴 주위를 돌아보고는 그곳이 제국 국경 남동쪽 인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실피드의 함교의 제독석에서 확인한 위치도 김성철의 추측과 일치했다. ‘이 정도 거리에 실피드의 속력이라면 3일 안에 익시온엔 도착할 수 있겠군.’ 선발대는 동부 국경을 넘진 못했지만 가까운 곳까진 진출해 있었다. 김성철은 선발대 두 명이 실피드에 승선하는 것을 지켜본 후 카벙벙에게 전속력으로 동쪽을 향해 전진할 것을 명했다. 빠른 작업을 위해 김성철은 영혼석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소형 골렘에 탑승시켜 저마다 할당된 작업을 하게 했다.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영특한 카벙클들은 신이 나서 김성철의 명에 따랐고 자기들끼리 몸을 부딪치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여기서 본의 아니게 성격 나쁜 카벙클 몇 마리가 드러났는데 그들은 타이곤에게 텃세를 부리고 있었다. 비록 말은 하지 못하지만 눈동자를 점멸하며 몸으로 위압감을 보이며 이단 심문관을 위협한 것이다. 카벙클들의 텃세에 익숙한 다른 신관들은 타이곤에게 절대 소형 골렘과 눈을 마주치면 안 된다는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놈들. 한량이구만.” 김성철이 한마디 했지만 골렘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 들은 척했다. 그걸 본 베르텔기아가 대신 나섰다. “키버엉! 카벙카! 그러면 못 써! 우리 배의 귀중한 손님이잖아.” 그녀가 책장을 팔랑거리며 골렘 사이를 떠돌며 주의를 시키자 영혼석들은 베르텔기아의 말에 즉각 복종했다. “규잉.” 영혼석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무튼, 작은 해프닝이 있었지만 실피드는 동쪽을 향해 쾌속으로 전진했다. 반나절 정도를 갔을 때 실피드는 대륙 동부의 초입에 이르렀다. 거기서 김성철은 뜻하지 않은 광경을 목격했다. 처참하게 박살 난 제국 공선의 잔해들이었다. 김성철은 잠시 실피드를 정선시키고 남작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 주변 일대를 살폈다. ‘여기는 제국의 속국 중 하나인 위트로아 공국의 영역인데. 위트로아 공국마저 반기를 든 건가.’ 김성철은 경로를 수정해 실피드를 남진시켰고 적당한 지점에서 다시 남작을 타고 위트로아 공국의 수도를 정탐했다. 김성철은 곧 놀라운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기억하는 작지만 아름다운 성과 수도원, 동화 같은 마을과 포도밭이 어우러진 풍경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흉물스런 부유섬들이 공국 수도의 상공 위에 무질서하게 떠올라 있었고 그 아래, 거대한 구조물이 우뚝 서 있었다. “신의 던전?!” 잠시 뒤 김성철은 그것이 신의 던전 급은 아니고 그 아래 급인 81개의 하위 던전인 첨탑, 오벨리스크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의 눈에 떠오른 경악이 지워진 건 아니었다. 김성철은 오벨리스크 아래 모인 수많은 군중을 볼 수 있었다. 종말교단의 무리들은 아니다. 잡다한 모험자와 귀족, 패잔병 따위의 하나로 특정할 수 없는 다채로운 족속들이 던전의 입구 앞에 진을 치고 폐허 위에 작은 촌을 이루고 있었다. 김성철은 남작을 타고 그곳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급조된 마을을 둘러보았다. 화롯가에 모인 한 패의 모험자들이 뜨거운 차와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오르테가 패가 13층까지 공략에 성공했다더군.” “썩어도 준치라고 루테기네아 출신 귀족들은 뭔가 다르군그래.” “우리도 서둘러서 10층을 뚫어야 할 텐데 말이야.” 사람들은 온통 오벨리스크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던전 주변 폐허에서 곳곳에서 전부 썩지도 않은 시체의 악취가 풍겼고 심지어 잔해 사이로 삐져나온 시신의 팔다리까지 보였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과 능력치 상승이 옛 공국 시민들의 운명이나 장례보다는 훨씬 중요한 일로 보였다. 김성철은 영혼 없는 신관 몇 명이 당나귀가 끄는 수레를 타고 성수를 아무렇게나 폐허 쪽에 살포하는 광경을 보며 옛 공국의 폐허를 떠났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군.” 실피드로 돌아오니 타이곤 일행이 마법으로 투영한 위트로아 공국의 현재 상태를 보며 탄식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토록 많은 이단이 숨어 있을 줄이야. 대체 종말교단은 몇 년 전부터 이런 엄청난 짓을 준비한 것이지?” 타이곤의 말은 보통 귀담아 들을만한 게 별로 없지만 방금 한 말만큼은 김성철도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종말교단. 단 몇 년 사이에 급조된 세력은 결코 아니다. 수십 년, 아니 어쩌면 수백, 수천 년에 걸쳐 만들어진 세력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는 짧은 시간 그들이 보여준 무시무시한 힘과 저력을 설명할 길이 없다. 종말교단의 태동은 인간제국의 성립 아니 어쩌면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건국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른다. ‘종말교단. 대체 그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지금으로써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김성철이 그들을 주목하기 시작했으니까. 전처럼 허술하게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김성철은 자신에게 다짐하듯 속으로 중얼거리며 동쪽의 하늘을 응시했다. 먼 구름 너머 희미하게 황색의 경계가 어른거렸다. * 2일을 쉬지 않고 비행한 끝에 실피드는 익시온 경내에 도착했다. “흠흠. 저기 우리 귀여운 거신들이 있네.” 베르텔기아는 어둠 속에 희끄무레하게 자리 잡은 두 기의 거신에 주목했다. “저기, 우리. 내일 거신에 들리면 안 될까? 오랜만에 창조술사 퀘스트를 해결하자고! 혹시 알아? 퀘스트를 해결하다 보면 내 몸에 난 구멍이 메워질지?” 간만의 거신을 본 베르텔기아는 대단히 고조되어 있었다. 김성철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베르텔기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나면.” 하지만 김성철이 진짜로 주목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는 거신 너머, 짙은 어둠 속에 가려진 동쪽 하늘 끝에 장벽처럼 자리 잡은 죽음의 낙진을 보고 있었다. 세상의 한 편을 가득 채운 황색의 장기를 보던 김성철은 불현듯 칠영웅 데스포트의 집념을 떠올렸다. ‘데스포트.’ 졸렬한 남자였지만 그가 벌인 짓은 상상 이상의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왜 에크하르트가 김성철 본인에게 직접 베르텔기아를 닮은 책을 급파해 개인적인 의뢰를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저 낙진이라면 정말로 이 세상을 멸망으로 몰아넣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지면을 응시했다. 익시온의 폐허엔 불빛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도 없는 것일까. “페어리라이트.” 김성철은 페어리라이트를 소환해 적당한 속도로 자신을 돌게 해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발광신호를 보냈다. 그 뜻은 아래와 같았다. [ 나는 김성철이다. 마커레이드를 만나길 원한다. ] 지면 아래에선 한 동안 어떤 신호도 없었다. 김성철이 직접 남작을 타고 내려가려고 할 즈음에야 비로소 아래에서 희미한 빛이 나타났다.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보기 어려울 정도로 낮은 조도. 김성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익시온 측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접수했다. [ 당신이 제국대원수라면 혼자 내려와라. 당신을 상징하는 신물을 들고. ] 어려울 건 없다. 김성철은 남작의 등에 올라타 빛이 머문 곳으로 하강했다. 남작이 날개를 크게 펄럭이며 지면에 착륙하자 어둠 속에서 무언가 꾸물거리며 기어 나왔다. 하얀 옷을 입고 전신을 가린 암살자와 같은 복색을 한 사람들이었다. 김성철은 자신을 경계하는 사람들을 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바로 김성철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김성철이 자신의 신물을 영혼 창고에서 꺼내 높이 들어올렸다. 가장 어두운 밤에서도 하늘의 파편을 벼려 만든 망치는 은은한 빛을 발한다. 김성철의 위용과 팔 가라즈를 본 익시온 사람들은 비로소 경계를 풀고 하나둘 김성철 주변에 모여들었다. 곧 김성철은 익시온과 동부의 유민들을 이끄는 지도자인 마커레이드와 재회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강력한 마법사답게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와 김성철 앞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오랜만이야. 전 대원수 각하.” 안 본 사이에 고생했는지 다소 수척해진 그녀는 그러나 생기발랄한 미소를 지으며 김성철을 맞이했다. “아니, 이제는 세계의회의 의장이라고 해야 하나.” “경계가 삼엄하더군.” 김성철은 당돌한 공주의 눈빛을 받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며칠 전에 제국이 공격을 하려고 했어.” “제국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며칠 전에 제국군이 절반만 남은 함대 전체를 이끌고 이곳 상공에 이르렀어. 다행히 그냥 물러가긴 했지만 직감이란 게 있잖아. 혹 그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올지 몰라서 경계수위를 최고 단계로 높였어. 게다가 당신이 타고온 공선.” 마커레이드는 하늘 위에 어슴푸레 떠오른 김성철의 기함 실피드를 올려다보았다. “옛 의장의 공선과 실루엣이 비슷하거든. 그래서 부하들이 착각한 모양이야. 알다시피 옛 의장 아퀴로아는 지금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나 전통적인 친제 인사라 우리로선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지.” “그런 사정이 있었군.” 실제로 실피드는 김성철이 두 번째 아퀴로아를 처치하고 나포한 선박이다. 착각한 게 아니라 제대로 본 거다. “아무튼, 상인연합의 사자가 전달한 내용은 충분히 읽었어. 벌써 당신을 기다리는 손님도 한 분 도착했고.” “그게 사실인가?” 상상 이상의 낭보다. 호르네코가 알려준 통지 결과에 의하면 불참 의사를 밝힌 나라는 두 개 뿐이다. 인간제국과 드워프 왕국. 나머지 나라는 보류 혹은 고려라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김성철은 최악의 경우엔 단 한 명의 참석자도 없이 의회를 개최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럴 찰나에 자발적인 참석자라니. “응. 목이 빠지라고 당신만을 기다리고 있어.” 김성철은 마커레이드의 말에 반색하며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느 나라지?” 김성철의 물음에 마커레이드는 눈웃음을 지으며 귀띔했다. “피라미는 아니야.” 곧 김성철은 그 피라미가 아닌 나라의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수려한 외모에 뾰족한 귀를 지닌 종족. 엘프족이다. ‘누구지?’ 엘프족의 왕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복장과 얼굴에선 유서 깊은 왕국의 왕족들이 그러하듯 격조 높은 기품이 흐르고 있었다. 김성철이 장내에 들어서자 엘프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성철을 맞이했다. “당신의 제국 대원수입니까?” 김성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예를 표한 후 공손한 어조로 자신의 소개를 했다. “저는 엘프 왕국의 왕세자이자 왕의 전권대리인인 해서데인이라고 합니다.” “반갑소. 나는...” 김성철이 관례에 따라 자신의 소개를 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엘프 왕자가 김성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비분강개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부탁드립니다! 회담 의제에 반드시 넣어야 할 안건이 있습니다!” ======================================= 94. 황색경계 앞에서 (3) “야만인들이라.” 마계에 인간이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다. 그것은 누구보다 마계에 살다시피 한 김성철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인간이었던 것은 있지만 순수한 인간은 없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게 되어버렸다. 야만인들이 바란아란 부족연맹을 단 3일 만에 멸망시켰다는 소식은 김성철이 지닌 상식이란 것을 한 번에 무너뜨릴 정도의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게 정녕 사실이오?” 김성철은 다시 한번 물었다. 그가 좀처럼 하지 않는 행동이다. ‘마계를 지키는 3개의 벽에 관해 이런 이야기가 있지. 가장 날카로운 것은 철혈기사단이오, 가장 단단한 것은 폭풍전선이오, 그리고 가장 끈질긴 것은 바란아란 부족연맹이라는.’ 강약의 문제를 떠나 사람들은 마계최전선에서 가장 오래 버틸 수 있는 세력이 바란아란 부족 동맹이라는 사실에 의견을 함께했다. 험준한 지형과 울창한 숲, 그리고 숲에서 진정한 힘을 발휘하는 치밀한 엘프들이 지키는 영역. 그 창백한 숲에서 몇 만의 악마들이 길을 잃고 헤매다 죽어갔던가. 김성철의 질문에 엘프 왕자는 침통함을 감추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부족 연맹의 수도인 하이데바란을 점령했고 제 숙부인 연맹부족장 어른마저 참살해 그 목을 소금에 절여 그들의 더러운 깃발 위에 꽂아 놓았다고 합니다.” “…….” 김성철은 고개를 숙여 고인의 운명에 대해 묵념했다. 바란아란 부족 연맹장은 김성철이 개인적으로 아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적대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최소 3회 이상, 그들의 숲에서 어슬렁거리며 식재를 구하는 김성철을 포착하고도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김성철의 식탁은 단출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소?” 김성철이 물었다. 해서데인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그들의 주력은 여전히 하이데바란에 있습니다. 숲을 전부 불태우고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들은 그걸로 만족하지 않을 겁니다.” “추가적인 움직임이 있는 모양이군.” 김성철이 중얼거리자 엘프 왕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소수의 정찰대가 이미 우리 국경에 나타났습니다. 아직 본격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았지만 병사들이 말하더군요. 그 괴물들은 한 명 한 명이 대륙십삼걸 같다고. 아니, 전부 초월자 수준이라고.” “개개인이 초월자 수준?” 귀를 의심할 수 없는 발언이다. 초월자. 필멸자가 이를 수 있는 가장 강한 경지로 힘, 민첩, 체력 혹은 마력이나 직관력 등 주력 스탯이 평균 600을 넘기는 자를 초월자라고 부른다. 김성철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 세상에 알려진 초월자는 극소수였다. 인간제국의 황제, 세계의회의 의장, 암살교단의 교주 단 3명에 불과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지 알 수 없지만 10명도 채 넘지 않으리라는 것이 김성철의 생각이다. 그런데 정찰병 하나하나가 초월자에 이른 존재다? 이것은 나가도 너무 나아갔다. 하지만 아주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끈질긴 바란아란 부족연맹을 3일만에 멸망시킨 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아무튼 지금 야만인들은 우리 엘프 연합왕국의 국경은 물론 드워프 왕국, 지금은 칠영웅의 잔당이 지배하는 트로윈 일대까지 기웃거리고 있다고 합니다.” 엘프 왕자는 거기까지 말한 후 김성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간절함이 음성은 물론 전신에서 풍겨 나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우리에게 그 야만인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 야만인들이 밀고 내려오면 우리들은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스러질 것입니다. 해서, 청컨대, 부디 이번 세계의회의 안건에 야만인에 대한 우선적인 대처를 넣어주셨으면 합니다.” 엘프 왕자는 그렇게 말한 후 자신의 부친에게 받은 전권위임 임명장을 꺼내 김성철에게 보여주었다. “종족만 보존할 수 있다면 왕관 따윈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 아버님의 전언입니다.” “…….” 위기 속에서 기회는 생긴다. 4대 강국 중 하나인 엘프 연합왕국이 스스로 왕관을 양보한 하려고 한다. 김성철 자신도 협박과 언쟁, 심지어 피마저 볼 각오로 얻으려 했던 것이 저절로 들어온 것이다. 다만 김성철은 눈앞의 왕관만을 보고 기뻐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현재 남은 4대 강국 중 하나인 엘프 연합왕국을 저토록 다급하게 만드는 야만인은 어떤 의미로 동쪽에서 다가오는 황색의 죽음보다 위험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가장 훌륭한 협상 도구가 될 수 있다. 김성철이 물었다. “그 야만인 개개인이 초월자 수준의 강함을 지니고 있다는 건 사실이오?” 해서데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성철은 다시 물었다. “지금 당신 왕국의 국경으로 갈만한 가장 빠른 수단은 무엇이오?” 각 종족들은 저마다 선호하는 이동방식이 있다. 신속성을 중시하는 인간은 공선을 선호하는 반면 그들의 영지를 잘 떠나지 않는 드워프는 단단한 기동요새를 선호한다. 엘프 같은 경우엔 유니콘이나 페가서스 같은 그들의 말만을 듣는 자연의 친구들을 타는 것을 선호하지만 장거리일 경우 엘프들은 반드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고정된 텔레포트 진을 만들곤 한다. 김성철은 제도 라그란제에 엘프 왕국의 고위 인사들이 사용하는 마법진의 존재를 알고 있다. 칠영웅 베스티아레도 엘프 출신이라 그런지 라그란제에 바로 통하는 마법진을 만들어 뒀었다. 김성철은 그 점을 노리고 해서데인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왕도로 통하는 마법진이 있습니다.” “그쪽으로 날 안내해주시오.” “무슨 일을 하실 작정입니까?” 엘프 왕자의 물음에 김성철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곧 여기 모일 군왕들에게 견본을 보일 생각이오.” “견본?” “북쪽에서 왔다는 야만인 말이오.” 그 길로 김성철은 해서데인과 함께 엘프들이 사용하는 마법진으로 향했다. 엘프의 이동 마법진은 대륙의 각 요지에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주로 마법진이 설치된 곳은 엘프들이 선호하는 숲속이었는데 일정한 법칙이 있었다. 각 마법진엔 등급이 매겨져 있는데 상위등급에서 하위등급으로 향하는 마법진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지만 하위등급에서 상위등급 마법진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정된 곳을 통해 이동해야 한다는 법칙이다. 마법진은 분명 편하긴 하지만 역으로 대량의 적을 쉽게 불러들일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보안책이었다. 그 법칙은 엘프 왕국의 왕세자로서도 거스를 수 없었다. 덕분에 김성철은 12개에 달하는 마법진을 차례대로 이동한 끝에 엘프 연합왕국의 수도 글렌피데에 당도할 수 있었다. 이동 자체는 번거롭지 않았지만 절차상의 문제로 익시온에서 글렌피데에 이르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물론 이 정도는 허용범위 안이다. 신의 던전을 조기에 공략함에 따라 얻은 부수적인 이득이라고 할까. 김성철은 엘프 왕을 뵙고 가라는 왕자의 부탁을 정중히 거절하고 대신 국경으로 통하는 마법진을 통해 엘프 연합왕국의 최전선으로 향했다. 숲과 나무, 자연방해물로 둘러싸인 엘프 왕국의 최전선엔 비장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거의 동원할 수 있는 전병력을 국경에 배치했군.’ 엘프들이 자랑하는 궁수 군단을 필두로 마법사, 유니콘, 페가서스 기사까지 볼 수 있었고 여간해선 꺼내지 않는다는 살아 움직이는 나무요정까지 오랜 잠에서 깨어나 전선의 후방을 받치고 있었다. 사정을 모르고 봤다면 누가 봐도 엘프 왕국이 타국을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의 전력의 집중이었다. 그만큼 국경 너머의 야만인들이 무시무시한 상대라는 것이다. 김성철은 수많은 엘프들의 시선을 받으며 국경수비대장의 막사로 안내됐다. 수비대장은 김성철이 필요한 정보를 전달했다. “언덕 너머에 야만인 정찰대가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 앞에서 보란 듯이 포로들을 처형하고 성스런 유니콘을 함부로 잡아 그 고기로 연회를 열고 있습니다.” 그 숫자는 단 30명. 겨우 30밖에 안 되는 정찰대 앞에 수만 명에 달하는 엘프군단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가겠다.” 김성철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엘프들은 놀란 눈으로 세계의 적이라 불리는 사내가 막사를 나서는 걸 지켜보았다. “안녕. 귀염둥이.” 막사 옆에 있던 순백의 유니콘 한 마리가 김성철을 커다란 눈망울로 바라보았다. 베르텔기아는 유니콘 주변을 한 바퀴 돌고는 김성철의 안주머니로 들어갔다. 베르텔기아를 회수한 김성철은 엘프 전선 군단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책을 통과했다. 엘프들의 동맹인 살아 움직이는 덩굴이 김성철을 휘감으려하다가 엘프들의 호각소리를 듣고 물러섰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요.” 김성철은 엘프들을 돌아보며 짤막하게 말한 후, 시야에서 사라졌다. 김성철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질주하며 숲속을 돌파했다. 곧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연기를 확인하고 진로를 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야만인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우렁차고 윽박지르는 듯한 처음 듣는 귀에 익지 않은 언어였다. ‘다른 언어를 쓰는 종족이라. 이 세계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일인데.’ 김성철은 멀리서 들려오는 야만인의 언어에 크 혹은 쉬로 시작되거나 끝나는 날카로운 소리가 유난히 많이 섞여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곧 김성철은 야만인의 캠프에 당도했다. 야만인들은 수만 명에 달하는 적들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리낌 없이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야만인들의 잔혹함에 들어선 해서데인에게 수차례 들은 바지만 실제 김성철 눈앞에 펼쳐진 야만인들의 잔혹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야만인들은 각자 나무로 만든 넓적한 판자 위에 방석을 깔고 앉아 있었는데 그 아래엔 살아 있는 엘프들이 열 명 단위로 깔려 있었다. 야만인들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껄껄 웃으면서 일부로 엉덩이에 힘을 줘 그 아래에 깔린 엘프들을 깔아뭉갰다. 고통에 겨운 엘프들이 몸을 꿈틀거리면 판상이 출렁이는데 그들은 마치 파도를 타는 듯 그 꿈틀거림을 즐기다가 엘프들의 움직임이 둔해지면 다시 한 번 판상을 깔아뭉개는 것이었다. 야만인들의 놀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몇 번의 들썩임 끝에 엘프들은 모두 질식해 죽임 당했다. 야만인이 노예 엘프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귀가 전부 뜯겨져 나간 노예 엘프들은 서둘러 움직여 판자를 들어 시체를 채우고 새로운 살아 있는 엘프를 채워 넣었다. 그렇게 죽인 엘프들은 캠프 구석에 작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본보기로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게 죽인 시체도 경고의 표시로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저건 너무 하잖아.” 베르텔기아가 몸을 떨며 말했다. “…….” 악마들만큼 잔인한 놈이다. 아니 어떤 면에선 악마보다 더 흉악한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악마가 행하는 살육은 인간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저 야만인들은 그저 재미와 놀이로 사람을 해치고 있으니 말이다. 야만인 하나가 소리 높여 웃는 걸 들으며 김성철은 캠프 앞에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우르카쉬?!” 먼 거리였지만 야만인 삼십 명이 모두 김성철의 존재를 발견했다. 김성철은 말없이 야만인을 향해 걸어갔다. 야만인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야만인들이 술잔을 들며 껄껄 웃었다. 재밌는 놀이감을 발견한 모양새였다. 벌떡 일어선 야만인은 판자 위에서 쿵쿵 뛰어 아래에 있던 엘프들을 깔아 죽인 후 목과 주먹을 꺾으며 김성철을 향해 걸어왔다. 마침내 김성철과 야만인이 바로 앞에서 대치했다. 야만인은 거대하면서도 균형 잡힌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2미터 30센치 정돈가. 대단히 크군.’ 어떤 의미에서 야만인들은 다른 종족이었다. 김성철의 앞에 우뚝 선 야만인이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김성철에게 뭐라고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들이댔다. 몸짓으로 보아 김성철의 사지를 그대로 뜯어낼 셈이다. 실제로 그 야만인은 구석에 버려진 힘으로 찢긴 엘프들의 시체를 가리켰다. 김성철은 시체를 보고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야만인을 향해 말했다. “선착순 3마리. 지금 바로 앞으로 나와라.” 야만인들은 김성철의 말을 듣고 껄껄 웃기만 했다. 그들이 엉덩이를 들썩이자 엘프들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뒤를 덮었다. 그리고 전면의 야만인이 김성철을 향해 주먹을 들어올렸다. “우르카쉬!” 공격할 셈이다. 야만인의 솥뚜껑만한 손이 김성철을 덥썩 잡았다. 하지만 그의 손은 김성철을 잡기 전에 김성철의 손이 야만인의 손, 정확히는 손가락 두 개를 움켜쥐었다. 야만인이 인상을 쓰며 김성철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가 손을 움직였을 때 떨어져 나간 것은 김성철의 손만은 아니었다. 툭. 손가락 두 개가 떨어져나갔다. 김성철의 움켜쥔 손과 함께. 야만인은 피가 콸콸 흘러나오는 손가락이 뜯겨진 구멍을 휘둥그레 커진 눈으로 보더니 이내 처참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것은 전주에 불과했다. “…안 나오면 내가 직접 추린다.” 김성철은 야만인의 큼지막한 손가락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허공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왔다. 그를 상징하는 신물 팔 가라즈다. 학살은 오래가지 않았다. 김성철은 순식간에 잔악한 야만인들을 도살했다. 개개인의 신체능력이 초월자 수준에 가까운 건 사실이지만 소문보다 강하진 않았고 김성철은 이미 한참 전에 초월자의 수준을 넘어선 존재다. 야만인들은 뒤늦게 저 작은 사내가 연회장의 장난감이 아닌 사신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 김성철 앞엔 27구에 달하는 야만인의 시신과 반신불수로 만든 살아 있는 3마리의 야만인이 놓여 있었다. 김성철은 살아남은 야만인들을 향해 다가갔다. 야만인들의 눈동자에 일제히 공포가 떠올랐다. 김성철이 그 중 하나의 팔을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우두둑. 우둑! “그아아아아앗!” 야만인의 관절과 뼈가 이상한 방향으로 꺾이고 돌아갔다. 곧 김성철 앞에 살로 이루어진 기괴한 덩어리가 탄생했다. 살아 있는 야만인으로 만든 공이다. 이들의 막강한 힘을 견딜 포승이 몇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와 그들이 보인 잔악성에 대한 김성철 나름의 처벌이다. “놈들을 끌고 와라.” 엘프군의 진중으로 돌아온 김성철은 엘프 장군을 향해 담담한 어조로 명령했다. 엘프군은 놀랍고 두려워하면서도 김성철의 명을 이행했다. 곧 엘프군이 끄는 수레에 김성철이 으스러뜨린 3명의 야만인이 실려 왔다. 끔찍한 부상을 입었다고 하나 야만인들의 기세는 살아 있었다. 그들은 엘프를 씹어 먹을 것처럼 노려보며 고함을 질러댔다. 김성철의 눈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야만인들의 눈동자에 공포가 떠올랐고 그들의 고함은 잦아들었다. 야만인을 입 다물게 만든 김성철은 뒷짐을 지며 하늘 위에 떠오른 달을 응시했다. 차오르기 시작한 달은 만월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세계의 존망을 건 세계의회의 개최는 목전. 준비는 충분하다. 김성철은 사로잡은 포로와 함께 황색경계로 돌아갔다. ======================================= 95. 세계의회 (1) 김성철은 여간해서 꿈을 꾸지 않는다. 간혹 꾸는 것이 있다면 악몽뿐이다. 그런 그가 과거를 보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회상뿐이다. 김성철은 정치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십 년도 넘게 소용돌이치는 정치판의 한 가운데에서 살아 왔다. 그때의 경험은 당시로서는 고통 그 자체였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모진 경험이었을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오랜만에 세계 정치의 한 가운데에 우뚝 서 있던 제국대원수로서의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그때의 경험과 감각을 되살리고 있었다. ‘순탄치는 않을 것이다.’ 가장 어려운 난관이 되리라는 것은 세 번째 재앙의 내용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김성철은 장시간 책상에 앉아 회의장에서 일어날 가능한 모든 상황에 대해 상정하고 이에 대한 대처법을 궁리했다. 늘 그렇듯 회의 준비란 쉬운 일이 아니다. 김성철은 문득 자신의 곁에 있었던 한 소녀를 생각했다. 크라이아 크릭프리드. 세계의회 설립 일로 녹초가 되어 집으로 들어온 그를 언제나 밝은 미소로 반기던 소녀는 사막처럼 황량한 김성철의 마음에 유일한 안식이었다. 김성철은 그 아이를 통해 죽은 라이즈 하이메르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진지하게 마주 할 수 있었고 그녀에게 속죄하기 위해 떳떳해지기 위해 그리고 한 아이와 여러 아이의 미래를 위해 세상과 맞서 싸우는 길을 택했다. 물론 그가 믿고 있던 것은 신기루와 같은 허상에 불과했지만. 지금 그의 곁엔 크라이아도 없고 그의 가슴 속엔 더 이상 라이즈 하이메르에 대한 죄책감도 없다. 지금 김성철은 움직이는 것은 희미한 목표의식, 낮은 의무감, 약간의 호기심, 그리고 가슴 속에 박힌 맹약의 십자가가 전부다. 세상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게 김성철의 솔직한 생각이다. 그는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을 구하긴 했지만 그가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마음은 변치 않았다. 너무 많이 당했고 데였기 때문이다. 진흙 속에서도 꽃은 피어난다지만 흉터와 화상으로 일그러진 곳에서 아름다움은 생겨나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김성철에게도 동료가 생겼다. 김성철은 마라키아의 솜털로 만든 책장 안에서 미동도 없이 잠든 한 권의 책을 바라보았다. 베르텔기아. 가끔 김성철은 그녀가 없었으면 하는 상상을 해보곤 한다. 차가운 머리로 생각해보면 겉으로는 크게 달라진 건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한 평생 목적을 설정하고 이행하는 삶을 살아왔으므로. 하지만 김성철은 알고 있다. 김성철 자신이 이 세상에 가진 애착이 거의 없다는 것을. 마지막 남은 애착이 사라질 경우 김성철은 자신이 무슨 행동을 취하게 될 지 상상할 수 없다. 아마도 그가 지금까지 숱하게 보아왔던, 선을 넘은 사람들처럼 행동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 김성철에게 베르텔기아는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다. 김성철은 마라키아의 반창고를 붙여놓은 베르텔기아의 상처를 응시하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번 일이 끝나면 거신에 함께 가자. 거기 가서 치료법을 알아보자고.” 깊게 잠이 든 탓일까. 베르텔기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리던 찰나였다. 불현듯 은자의 탑에서 만났던 또 다른 책과 그 책이 남긴 말이 김성철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김성철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 마침내 약속했던 산양의 달, 만월이 뜨는 운명의 날이 왔다.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김성철의 복장이다. 언제나 거지같은 옷을 입고 다니던 그는 오늘 만큼은 정제되고 세련된 위엄이 느껴지는 제복을 입고 있었다. 제국대원수의 옷. 정확히는 제국대원수의 옷을 참고해 만든 것으로 동부연합의 군주인 마커레이드가 특별히 김성철을 위해 준비한 옷이었다.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 “…….” 김성철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옷이 불편했기도 했거니와 주변 동료들의 시선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성철은 어른이다. 복장이란 것에 구애받는 성격은 아니지만 복장을 갖춰야 할 때는 알고 있다. 무엇보다 세계의회는 김성철 본인이 개최한 것, 개최자부터 평소대로 엉망인 복장을 하고 나타나는 것은 자신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니까 다름없는 일이다. “뭐야. 당신도 이렇게 입으니까 뭔가 있어 보이긴 하네.” 베르텔기아가 새 옷을 입은 김성철 주위를 돌며 품평하듯 말했다. 마라키아는 아직까지 신의 던전에서 내린 포상금의 약빨이 유지되는 모양인지 말을 아끼고 있었다. 그러나 김성철이 보지 않을 때 깃털로 덮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베르텔기아에게 뭔가 수군거리고 베르텔기아가 폭소를 터뜨리는 걸로 보아 악담 혹은 좋지 않은 농담을 퍼붓는 게 유력해보였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인 타이곤 보스보로트는 자리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부하 신관과 함께 아신 시드미아가 출현하고 초토화시킨 이단의 흔적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참석자는 거의 없을지도 몰라.” 마커레이드가 피처럼 벌겋게 물든 동쪽 하늘을 응시하며 말했다. “확실치는 않지만 수많은 군소국이 오벨리스크의 출현과 함께 멸망했거든.” 마커레이드는 인근 위트로아 공국 같은 소국의 멸망의 원인이 오벨리스크의 출현에 의한 지각변동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뒤에 자리 잡은 종말교단의 내막에 대해선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누가 오든 해가 정오에 떠오를 때, 세계의회는 시작된다.” 김성철은 세계의회의 개최장소로 예정된 극장으로 한 발 먼저 들어갔다. 배우들이 칠영웅의 영웅담을 공연하고 클라리스가 노래를 부르던 곳엔 커다란 테이블과 스무 개의 좌석이 놓여 있었다. 상석은 없었지만 중앙엔 의장 역할을 맡게 될 김성철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김성철은 테이블 중앙에 앉아 시간이 가길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열린 창문에서 미풍이 불어와 그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먼 곳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이윽고 동부연합 소속의 전령이 나타나 김성철에게 고개를 숙이고 보고했다. “킨데 왕국의 재상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킨데 왕국?” 생소한 나라다. 김성철은 곧 그 나라가 제국 북서쪽, 고대왕국 사이의 완충지대에 있는 소국 중 하나라는 걸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국조차 왕을 보내지 않는군.’ 그래도 아무도 보내지 않은 것보단 낫다. 정오가 다가올수록 참석자는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킨데 왕국을 필두로 중요하지 않은 5개 소국의 사절이 도착했고 이윽고 엘프 연합왕국의 왕자인 해서데인이 도착했다. 해서데인의 도착은 회의장에 큰 반향을 이끌어냈다. 처음으로 참석한 대국의 사절이기 때문이다. 이미 김성철과 접점이 있는 해서데인은 김성철을 향해 우호적인 눈빛을 보낸 뒤 자신의 자리에 착석했다. 그의 뒤엔 늠름한 엘프 궁수들이 뒤를 지키고 있었다. 한편 해는 점점 떠올라 정오에 가까운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우물 옆에 선 동부연합의 병사들이 서서 태양이 우물 중심에 이르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뿐인가.’ 예상은 했지만 세계의회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빈약한 참가국들. 김성철이 허전한 테이블을 보며 마음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또 다른 미풍이 창가에서 불어왔다. “고대왕국이요!” 멀리서 누군가의 환희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고대왕국이라.’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인간제국과 더불어 인간 족의 양대강국 중 하나. 엘프 왕국의 뒤를 이어 또 다른 강국이 참석한 것이다. 김성철이 별 기대하지 않았던 소득이다. 곧 회의장에 여러 자루의 검을 찬 화려한 검사풍의 복장을 한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드마스터의 나라다운 늠름한 기백. 그중 선두에 선 사내의 얼굴을 본 김성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간한 사절 앞에선 목례로 답하던 그가 자리에서 직접 일어난 이유는 간단했다. 고대왕국의 국왕이 직접 회의장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국과 소국을 아울러 처음으로 자리에 도착한 왕관 있는 왕이었다. “오랜만이군. 제국대원수.” 대륙사걸. 검왕 아르카나이트. 검왕이라는 이명과 달리 호리호리한 체격에 지적인 인상을 지닌 고대왕국의 왕은 거만한 눈빛으로 김성철을 노려보며 싸늘한 인사를 건넸다. 그의 옆엔 김성철이 잘 아는 얼굴도 섞여 있었다. ‘저 녀석은?’ 강가스 아론. 마계최전선에서 김성철의 상전노릇을 하던 교활한 사내. 그는 왕을 수행하는 사절 중 한 명으로 자리에 참석했다. 강가스 아론은 김성철과 눈이 마주치자 비굴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목례를 해 아는 체를 했다. “그건 그렇고 헐빈하기 짝이 없는 곳이군. 세계의회의 명성도 바닥에 떨어졌어.” 아르카나이트는 불쾌감 어린 말을 내뱉으며 회담장 구석에 앉았다. 소드마스터들이 엄정무비한 기율을 과시하며 그의 뒤를 지켰다. “제국은 어떻게 된 거지? 참석을 하긴 하는가?” 아르카나이트가 섬세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기울이며 질문을 던져왔다. “제국은 불참이오.” 김성철이 답했다. “호오.” 고대왕국은 놀라는 척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곧장 반대편에 앉은 빨간 머리칼을 드리운 젊은 여성을 응시했다. 마커레이드다. 그녀는 동부연합의 대표로 이 자리에 앉았다. 그녀도 원하고 김성철도 원한 일이다. “이 여성분은 못 보던 얼굴인데.” 고대왕국의 왕이 특유의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마커레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소개를 했다. “나는 한때 익시온의 공주였습니다. 마커레이드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죠.” “익시온.” 고대왕국의 왕은 피식 웃었다. 고대왕국 따위와 비견도 할 수 없는 소국이라고 깔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커레이드는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소개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동부연합의 지도자입니다.” “동부연합?” 아르카나이트의 물음에 마커레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절제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구 세계의회의 결정에 의해 버림받았던 동부의 모든 나라와 백성들을 위한 국가연합이지요.” 이에 아르카나이트는 야릇한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장내에 싸늘한 기류가 흐르고 지나갔다. 베르텔기아가 김성철 옆에 다가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왕관 쓴 아저씨. 되게 재수 없네.” “거만하긴 하지만 용기도 있고 사려분별도 있는 인물이다.” 확실히 재수는 없는 인물이다. 인간제국보다 힘도 약하면서 제국을 업신여기고 황제를 소환자 출신이라고 깔봤다. 하지만 그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판단할 인물이 아니다. 천성이라 할 수 있는 거만함 뒤엔 일국의 왕 다운 치밀한 계산과 담낭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일국의 왕이 이곳에 직접 왔겠는가. 홀로 십만 악마와 상대하는 무시무시한 세계의 적이 도사리고 있는 곳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고대왕국의 그릇을 드러내는 일이다. 누란지위에 처한 엘프 왕국의 왕마저 직접 오길 꺼리는 걸 감안하면 고대왕국의 왕이 범상치 않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무튼 시간은 다시 흘러갔고 태양은 어느새 우물의 중앙에 자리 잡았다. 우물을 관찰하던 병사가 소리 높여 정오가 됐음을 알렸고 그 외침을 들은 나팔수가 나팔을 높이 들어 우렁찬 나팔소리를 하늘 위로 올려 보냈다. 부우우우우--- 정오가 왔다. 드디어 세계의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와중에 또 한 명의 참석자들이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 “늦어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대륙의 제왕들이여.” 카랑카랑한 노파의 외침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일제히 기분 나쁜 노파의 목소리를 들으며 입구를 응시했다. 여러 가지 색채를 지닌 화려한 로브를 입고 독해할 수 없는 문자가 새겨진 가면을 쓴 여성이 경비병 사이에 우뚝 서 있었다. 김성철을 제외한 오직 한 명, 고대왕국의 왕만이 불청객을 알아보았다. “이게 누군가. 아퀴로아 의장 아닌가.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더니 살아 있었군.” 그의 냉소적인 태도는 새로운 참가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됐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군.’ 염려했던 일이 일어났다. 세 번째 아퀴로아가 나타났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다. 아퀴로아 뒤에 커다란 키와 체구를 지닌 갑주를 걸친 사내가 나타났다. 왕의 것이라기보다는 방랑기사의 것에 가까운 낡고 먼지로 뒤덮인 갑주,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투구. 그 사내는 아퀴로아 만큼이나 소국과 신생국의 인물에겐 낯선 인물이었지만 아퀴로아와 달리 사람들은 그 전설적인 인물을 알아보았다. “방랑왕....!” “저 자가 방랑왕인가...?!” 아퀴로아의 등장으로 술렁이기 시작한 회의장은 방랑왕이라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인물의 출현으로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들었다. 아직 채 정오를 알리는 긴 나팔 소리가 그치기도 전이었다. 그때 한 사내가 일어섰다. 김성철이다. 그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걸어 나와 아퀴로아와 방랑왕의 앞을 향했다. 그리고 그들을 노려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초대받지 않았소.” 김성철은 아퀴로아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철저한 무시. 김성철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퀴로아 따위가 아니라 오로지 방랑왕 뿐이었다. “…….” 방랑왕의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투구의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번득였다. 김성철과 방랑왕. 한때 대륙삼걸과 대륙십걸로 불리며 세계의회를 대표했던 두 사내가 마주보고 섰다. ======================================= 95. 세계의회 (2) “자격이 없는 건 당신 아닌가? 아퀴로아가 뒤에서 악에 바친 소리를 질렀다. “세계의회의 적법한 의장은 바로 나요. 세계의 적.” 그녀는 김성철이 예상한 그대로의 레퍼토리를 들고 나왔다. 장기간 김성철의 골머리를 책상머리 앞에서 썩게 한 문제다. 알맹이가 바뀌었다고 하나 원래 부유군도의 아퀴로아는 늙은 여우처럼 교활한 인간이다. 조금이라도 빌미를 주면 교묘한 언변으로 상황을 휘어잡고 분위기를 자신의 쪽으로 끌고 온다. 처음에 김성철은 아퀴로아를 논리와 정당성으로 상대하려고 계획했지만 애당초 그는 언변이 좋지도 않고 지식이 특출나게 뛰어난 것도 아니다. 수많은 생각과 방안을 궁리했지만 김성철이 결과적으로 선택한 것은 가장 그 다운 방식이었다. “…….” 김성철의 손에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눈동자에 아퀴로아의 발치를 응시하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한 번만 더 그 더러운 주둥아리를 놀리면 즉결 처형하겠다. 외부인.” 이것이 김성철의 답이다. 상대의 존재를 전면 부정하는 것. 김성철은 실제로 그것을 실행할 뜻까지 지니고 있었다. “썩 꺼져라.” 살기를 담은 세계의 존재의 잠잠한 일갈에 장내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어... 어디다가 감히...!” 아퀴로아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김성철에게 삿대질을 하려했다. 팔 가라즈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 김성철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 장면을 본 모든 이가 직감했다. 김성철의 망치가 아퀴로아를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모두고 숨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오직 한 사내만이 평정심을 가지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방랑왕. 아니, 전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왕관 없는 왕 크롬갈드. “아퀴로아는 나의 수행원이다.” 그가 말했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면 아퀴로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김성철 손에 죽임 당했을지도 모른다. 살짝 옆으로 돌아갔던 김성철의 고개가 다시 방랑왕에게 돌아갔다. “당신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고 말했을 텐데?” 김성철의 살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방향을 바꿨을 뿐이다. 방랑왕은 세계의 적이라 불리는 사내가 내뿜는 투기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김성철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퀴로아에게 여유롭게 손짓했다. “그것을 보여줘라.” 방랑왕의 명령하자 아퀴로아는 마치 주종관계를 맺은 신하처럼 고개를 굽신거리고 품속에서 일단의 두루마리 서류를 꺼냈다. 아퀴로아는 모두가, 특히 김성철의 눈에 잘 띄게 두루마리를 펼쳤다. “가지가지 하는군.” 시종일관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아르카나이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런 개소리를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 거지?”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것도 노골적으로. 왜냐하면 아퀴로아의 두루마리엔 고대왕국의 왕으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사실이 적혀 있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엘프 연합왕국의 왕자도 다른 국가의 사절도 일제히 일어나 아퀴로아가 펼친 두루마리의 내용에 대해 거칠게 항의했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격동으로 몰아넣었는가. 답은 하나다. [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 ] 오랫동안 금기시되던 사악한 나라의 이름이 권력자들의 회합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두루마리엔 전 대륙의 공분을 사던 악의 왕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인간제국의 지방 영주와 귀족들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 충성 목록의 의미는 장내에서 누구보다 김성철이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디모크, 세판, 무가리에 이어 호트까지. 제국의 지방 행정구 대부분이 황제를 배신했다는 건가. 루테기네아 출신이 원래의 왕에게 돌아간 건 그렇다 치고서라도 반란군, 그것도 소환자 출신 영주까지 크롬갈드의 편을 들고 나서다니….’ 김성철이 생각에 잠긴 사이 두루마리를 펼치고 있는 아퀴로아가 주름으로 얼룩진 손을 꼼지락거리며 기세 좋게 말했다. “인간제국의 가짜 황제. 윌리엄 퀸튼 말버러는 이미 잇따른 실정과 실책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잃은 지 오래. 아주 오래 전부터 그가 자랑하는 공중함대와 비밀경찰의 가혹함으로 간신히 제국을 유지해 온 자격 없는 황제요. 하지만 그마저도 이번 정벌에서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지.” 아퀴로아는 마법의 힘으로 두루마리를 허공에 고정시킨 채 듣기 싫은 웃음소리와 함께 이죽거렸다. “그는 황제를 칭하고 있지만 실제 그가 지배하는 것은 라그란제. 일개 도시에 지나지 않소. 제국의 나머지 다른 주요 지방은 여기 보시는 것처럼 이미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정당한 왕. 크롬갈드 폐하에게 마음을 돌렸지.” 물론 아퀴로아와 방랑왕이 거짓을 고할 수도 있다. 제국이 불참한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김성철은 어쩌면 그들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억한다. 허공궁궐에서 다시 만난 황제가 했던 말을. 천막 안에서 가졌던 조촐한 연회에서 황제가 보였던 결연한 태도를. “…루테기네아의 치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황제의 쓸쓸한 목소리가 김성철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역시 그렇게 된 것인가.’ 많은 추억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요도를 휘두르던 소환자 출신 배신자가 남긴 말, 황제의 석연찮은 태도, 아퀴로아의 득세, 그리고 방랑왕의 사면. 흩어져 있던 퍼즐이 모여 하나로 맞춰진다. 김성철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황제가 지고 있던 진정한 짐의 무게를. 황제의 진의를. ‘녀석은 승산 없는 싸움에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타협을 한 것이었군.’ 하지만 황제는 이렇게도 말했다. 방랑왕은 또한 재앙에 맞서는 투사 중 하나라고. “내가 이 자리에 온 목적은 옛 왕국의 부흥을 선언하는 것도 나의 건재를 확인받으려는 것도 아니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단 하나. 세 번째 재앙의 해결이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 방랑왕이 말했다. “왕관을 지닌 한 명의 왕으로서 책임을 방기한 인간제국의 황제, 윌리엄 퀸튼 말버러를 대신해서.” 김성철은 순간 혼란을 느꼈다. 무엇이 맞는 것일까. “…….”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 온 것이다. 그러나 지금 김성철이 나설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지금 부글부글 끓고 있는 건 김성철이 아니니까. “이 자리에 오길 잘했군. 신하들이 전부 만류했지만 감이 좋지 않았거든.” 고대왕국의 왕 아르카나이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방랑왕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런 곳에 와서 그런 망발을 지껄여대다니.” 스르릉. 고대왕국의 왕이 검을 뽑았다. 그가 검을 뽑자 뒤에 서 있던 그의 부하들이 일제히 검을 빼들었다. 뒤에서 번쩍이는 예리한 검광을 등 뒤에 하고 고대왕국의 왕이 말했다. “시간이 흐른다면 모두 잊힐 것이라 생각했나? 루테기네아의 이름도, 그 악행도?” 고대왕국의 왕이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고대왕국은 루테기네아 치세 시절 항구적인 전쟁을 벌인 주적이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었고 무고한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 황음무도한 루테기네아 귀족들의 노리개가 되었다. 엘프 연합왕국의 왕자 해서데인은 아르카나이트처럼 과감하게 나서지 않았지만 그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고대왕국의 왕과 의견을 같이 했다. “우리 엘프 연합부족 왕국 또한, 고대왕국의 국왕폐하와 뜻을 함께 하는 바입니다.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이란 이름은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제 모든 이의 시선이 김성철을 향했다. 그들은 요구하고 있었다. 저 사악한 무리를 당장 이 자리에서 쫓아내라고. 회의장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발언권은 사실상 없는 군소국의 사절들도 비슷한 시선을 김성철에게 보냈다. 다시 공은 김성철에게 넘어갔다. “나가시오. 피를 보기 전에.” 김성철이 말했다. 모두의 지지를 업고.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은 인정할 수 없소.” “그런가?” 조소를 섞어 크롬갈드가 말했다. “하지만 이 자리는 하나의 왕을 선발하는 자리라고 알고 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찾아온 것이오?” 그 말을 들은 망치를 잡은 김성철의 손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제국을 대신해 이 자리에 왔소. 오직 눈앞의 재앙을 해결하기 위해서.” 김성철이 움직이기 앞서 방랑왕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아퀴로아가 또 하나의 두루마리를 꺼내 허공에 펼쳤다. 그것은 인간제국의 지도였다. “무슨 짓을 꾸미는 것이지?” 회담장이 다시 한 번 술렁거렸다.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은 과거의 과오를 알고 있고 깊이 뉘우치고 있소.” 방랑왕이 술렁거리는 군중들을 굽어보며 손짓했다. 아퀴로아가 기침 섞인 웃음소리를 내며 주문을 외자 지도에 변화가 생겼다. 제국의 각 지역에 각기 다른 색이 마술처럼 번지더니 그 안에 각 국가들의 이름이 떠올랐다. 김성철과 제후들은 그 직관적인 방랑왕의 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 번에 알아차렸다.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은 표시된 대로 그 영토를 포기하고 각 국의 여러분에게 양도할 것이오.” 그것은 실로 충격적인 쇼였다. 아퀴로아의 영토분할 지도는 대륙중앙의 방대한 인간제국의 국토 대부분을 여기 모인 엘프왕국, 고대왕국, 군소왕국은 물론 동부연합, 심지어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은 드워프 왕국에게 양도하는 안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나 같이 비옥하고 수많은 자원이 넘치는 금싸라기와 같은 땅이었다. 아퀴로아의 지도에서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에게 남겨진 몫은 수도 라그란제와 그 옆의 자그마한 곡창지대가 전부. 이 안이 확정되면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은 국가라기보다는 아에게와 같은 도시국가와 같은 규모로 전락한다. 국가의 힘이 국토와 인구에서 나오는 걸 감안해볼 때 크롬갈드의 선택은 모든 이의 충격을 넘어 경악을 선사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하고 있지만 내 관심사는 오직 재앙의 해결이오.” “왜 그리 재앙의 해결에 집착하는 것이오? 그것도 이제 와서.” 검을 쥔 아르카나이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는 ‘이제 와서’라는 말을 특히 강조하면서 김성철 쪽을 힐끗 응시했다. 그렇게 재앙의 해결을 원했다면 9년 전 악마왕 해서니우스맥스의 궁전 앞에서 왜 김성철을 돕지 않았냐는 빈축이 담긴 몸짓이었다. 이에 방랑왕은 아르카나이트 쪽을 바라보며 오히려 반문했다. “집착할 수밖에 없지 않소?” 아르카나이트의 미간에 주름이 패자 방랑왕은 손을 들어 동쪽을 가리켰다. “동쪽에선 황색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고.” 그의 손은 다시 서쪽을 가리켰다. “서쪽에선 종말교단이 전쟁을 부추기고 있으며.” 다음엔 남쪽. “남쪽에선 정체불명의 구조물이 부유섬과 함께 솟아오르며.” 그리고 마지막엔 북쪽을 가리키며 어느 때보다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북쪽에선 대적할 수 없는 야만인들이 바란아란 동맹을 멸하고 남진을 준비하고 있소.” 방랑왕의 정세판단은 정확하다. 그것은 아르카나이트 본인도 알고 있는 문제였다. 방랑왕이 다시 말했다. “이런 시국에서 어찌 재앙의 해결에 목매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오? 지금 모인 그대들 또한 작금의 상황의 심각성을 알기에 이 자리에 모인 게 아니오?” “…….” “다른 이도 아닌 당신들이 세계의 적으로 명명한 사내가 주최한 회의에 말이오.” 그 한마디는 자신을 변호함과 동시에 아르카나이트를 공격하고 있었다. 방랑왕의 완벽에 가까운 대처에 아르카나이트 왕은 표정을 구기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크롬갈드가 저렇게 똑똑한 놈이었나?’ 상상하지도 못했다. 수백 년간 대륙굴지의 강국으로 군림했던 루테기네아 왕국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무위의 암군에게 저런 식견과 언변이 있다는 것은. 어릴 때 똑똑하다는 이야기가 있긴 했지만 아주 바보가 아니고서야 어릴 때 안 똑똑한 놈이 어디 있는가? 십중팔구 뒤에 아퀴로아가 방랑왕을 뒤에서 조종했으리라 보고 김성철이 아퀴로아를 닥치게 한 동안 방랑왕 개인을 강하게 밀어붙이면 틀림없이 넘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역으로 한 방 먹게 된 셈이다. 체면을 구긴 아르카나이트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버린 가운데 방랑왕은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재앙의 해결을 위하고자 하는 건 새삼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지난 루테기네아 왕국이 저지른 과오를 조금이라도 속죄하기 위한 마음도 있소. 그것을 위해서라면 내 왕국이 없어지건 말건 아무렇지도 않소.” 그때 누군가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부연합의 지도자 마커레이드다. 그녀는 길게 기른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후 방랑왕을 노려보며 낭랑하고 당찬 어조로 물었다.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만, 혹시 그렇게 말해놓고 당신이 한 명의 왕이 되려는 건 아니겠지요?” 그 말을 들은 방랑왕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아퀴로아가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무엄하다! 일개 변방의 공주 따위가. 어디 감히 지엄한 루테기네아 왕에게...!” 하지만 아퀴로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 순간 뒤에서 나타난 마라키아가 아퀴로아의 등을 부리로 쪼아버렸기 때문이다. “끄억!!!” 김성철은 그런 마라키아를 곁눈질로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주 쓸모없는 놈은 아니군.’ 아무튼, 마커레이드의 질문은 거칠긴 하나 그렇기에 핵심이 담긴 질문이었다. 한 명의 왕. 왕관을 지닌 자에겐 가장 달콤한 속삭임. 그렇기에 가장 민감할 수밖에 없는 질문. 마커레이드를 괄시하던 아르카나이트가 휘파람을 불며 방랑왕을 노려봤다. 방랑왕은 이제 어떤 식으로든 대답해야 했다. 어물쩡한 회피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긍정과 부정. 방랑왕에겐 두 개의 길만이 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윽고 방랑왕이 입을 열었다. “나는 한 명의 왕이 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소.” ======================================= 95. 세계의회 (3) 그는 어렵지 않게 말했다. 분위기가 급변했다. 달콤한 약속에 대의명분이 더해졌다. 그것은 왕관 없는 왕에게 전례 없는 진정성을 안겨다 주었다. 회의장이 술렁였다. 김성철은 회의의 주도권이 순식간에 자신에게서 방랑왕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 김성철도 알고 있다. 사람을 움직이는데 가장 훌륭한 수단은 보상이라는 것을. 김성철 자신만 해도 보상을 위해 몇 백, 몇 천 번의 퀘스트라는 것을 수행하지 않았던가. 다만 그 보상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줄만한 게 있어야 할 것을 전제로 한다. 왕도, 더 이상 재산가도 아닌 김성철이 왕과 제후에게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준비했다. 보상이라는 당근 대신, 야만인이라는 채찍을. 당근이 없다면 공포심으로도 움직여야 하니까. 하지만 방랑왕은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보상을 가지고 왔다. 모두가 제국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소유물에서 말이다. “내 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는 전 제국대원수, 아니 새로운 세계의회의 의장의 명에 따라 여기를 나서겠소.” 방랑왕의 투구가 김성철을 향했다. 김성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망치는 여전히 그의 손에 있었다. 무기를 거두지 않는다는 것은 환영하지 않는다는 의미. “떠나시오.” 김성철이 말했다. “그것이 그대의 뜻이라면.” 방랑왕은 망설임 없이 뒤돌아서서 회의장을 나섰다. “폐하! 이렇게 쉽게 포기하시다니요!” 아퀴로아가 경박하게 소리치며 방랑왕의 뒤를 따랐다. “잠깐.” 고대왕국의 왕이 입을 열었다. “굳이 내보낼 필요까진 없는 것 같은데.” 아르카나이트는 그렇게 말하며 건너편의 엘프 왕자를 응시했다.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엘프 왕자는 잠시 머뭇거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 중신의 속삼임을 전해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엘프왕자는 동부연합의 마커레이드를 응시했다. 그녀는 김성철의 눈치를 살피긴 했지만 그녀 또한 뒤에 자리 잡은 동부연합의 실력자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방랑왕이 제시한 제국의 방대한 동쪽 영토. 그것은 당장 진격하는 죽음의 낙진에 노출된 동부연합에겐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마커레이드는 해서데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동감합니다.” 김성철은 거기에서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권력에 대한 환멸감이 스물스물 마음 깊은 속에서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어찌 이들은 이렇게 단순한가.’ 세계의회는 겉으로는 많은 부분이 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국익을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지닌 탐욕과 이기심이 세계의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어쩌면 황제가 여기 참석하지 않은 것은 저 방랑왕이 여기에 나올 걸 알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네요.” 김성철이 권태감을 느끼는 사이 참석자들은 저마다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하지만 이미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방랑왕을 다시 들이는 게 어떻소?” 여론을 등에 업은 아르카나이트가 특유의 거만한 어조로 물었다. 모두가 아르카나이트에 동조하고 있었다. 김성철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방랑왕을 들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금수처럼 눈앞만을 보는 기득권들의 행태가 눈에 거슬렸다. 왕관, 영토, 권력. 세상의 멸망이 다가오는 판국에 그게 다 무어란 말인가. 순간, 망치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들을 전부 죽인다면 어떻게 될까.’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최악의 해결책이다. 여기서 왕을 죽이는 순간 김성철에게 남은 길은 학살 밖에 없다. 왕을 죽이고 후계자를 또 죽이고 그 후계자를 또 죽이고 그렇게 아무도 남지 않을 때까지 죽이는 방법 말이다. 그런데 김성철은 알고 있다. 자신에게 거역하는 이를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죽일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그것도 아주 쉽고 빠르게. [ 전부 죽여라. 덧없는 생명들을. ]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김성철은 인식했다. 일곱 재앙의 무기의 존재와 자신의 몸에 내재된 무한한 가능성을. 하지만 그 힘을 인식한 순간 검은 거인의 모습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멸하는 검은 거인. 그 괴물은 여전히 해골로 뒤덮인 대지 위에서 김성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괜찮아?”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이상을 깨닫고 조심스레 물어왔다. “괜찮다.” 김성철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방금 그 목소리는?’ 김성철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몸이 편찮으신 거 같은데. 괜찮으세요?” 해서데인이 김성철을 바라보며 말을 걸어왔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김성철의 낯빛이 좋지 않게 보인 모양이다. “괜찮소.”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집어넣고 자신의 자리에 앉아 이마를 매만졌다. 짧은 침묵 속에서 김성철은 자신에게 모든 이들의 시선이 쏠리는 걸 느꼈다. 그들은 김성철에게 대답을 원하고 있었다. 방랑왕을 안으로 들이라는. 김성철은 방랑왕을 회의장에 들이라고 지시했다. 자신이 인간을 혐오하고 있다는 해묵은 생각을 재확인하면서. 이윽고 방랑왕이 다시 회담장에 나타났다. “당신의 영주들이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여 순순히 그들의 영지를 포기하겠소?” 아르카나이트 왕이 방랑왕에게 달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그 질문을 건넨 후, 뽑았던 검을 집어넣었다. 스르릉. 그의 뒤에 번쩍이던 검광들이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고대왕국이 방랑왕을 인정한 것이다. 회의장에 모인 인사 중 김성철과 방랑왕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배분을 지닌 고대왕국의 왕이 그런 행동을 취했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방랑왕은 결단을 내린 고대왕국의 왕에게 목례를 한 후 작지만 또렷한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나에게 충성맹세를 한 영주들은 모두 재앙의 위험성을 알고 있소. 몇몇 소환자 출신을 제외하면 모두 자신의 영지를 기꺼이 포기할 것이요. 혹, 그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세계의회 차원에서 토벌하시오. 그리고 그 선봉엔 부덕한 군주인 내가 설 것이오.” 방랑왕이 고개를 돌렸다. 회의장 한 편에서 누군가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엘프 족의 왕자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방랑왕에게 물었다. “당신의 제안은 충분히 보았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의구심이 드는군요. 기왕 모든 땅을 포기할 거면 라그란제도 포기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습니까?” 어리숙하게 말했지만 어떤 비수보다 날카로운 한 마디다. 그 말을 들은 아르카나이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새 엘프 왕은 자비심 없는 전왕보다 한 술 더 뜨는 성격이군그래.’ 방랑왕이 그 의미를 모를 리가 없다. 그는 느릿하게 손을 올려 자신의 상징인 투구를 벗었다.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투구 안에 감춰져 있던 지친, 나이에 비해 젊은 수려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엘프 왕자를 향해 말했다. “라그란제도 포기할 예정이오.” 그런 다음 크롬갈드는 김성철을 응시했다. “재앙이 원하는 한 명의 왕을 만들 수 있다면.” 김성철은 차분히 크롬갈드의 눈을 응시했다. 때로는 천 마디 말보다 하나의 표정이 설득력을 지니는 법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방랑왕의 얼굴엔 진심이 엿보였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할 작정이었다. 왕국은 물론 왕관마저도. “그리고 나는 그 한 명의 왕에 가장 적합한 인물을 추천하려 합니다.” 크롬갈드는 김성철을 응시하며 지금까지와 다른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이고 방랑왕을 응시했다. 방랑왕의 손이 천천히 들렸다. 그리고 그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당신이오.” 김성철이다. “?!” 김성철이 당혹감이 서린 눈동자로 크롬갈드를 응시했다. 크롬갈드는 김성철을 향해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좌중을 응시하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세계의회의 의장은 홀로 우리들을 대신해 재앙에 맞섰소. 그는 홀로 대륙십삼걸이 처치하지 못했던 해서니우스맥스를 처치했고 구 세계의회의 방관 속에 대륙의 동부가 거신에게 철저히 유린당하는 동안 그는 또 다시 홀로 칠영웅에 맞서 그 수장, 데스포트를 처치하고 두 번째 재앙마저 해결했소.” 크롬갈드는 낭랑한 목소리로 김성철의 공적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던 김성철의 공적을 말이다. “묻겠소. 인류를 위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재앙이라는 짐을 홀로 해결한 이 사람 이외에 어느 누가 재앙이 원하는 한 명의 왕에 적합한지?” 회의장에 들어오기 전의 크롬갈드가 이런 말을 했다면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을 것이다. 맞는 말이라고 해도 그는 자격이 없으니까. 하지만 스스로 자격을 얻어 낸 지금, 그의 말엔 힘이 실려 있었다. 그 권위는 다름 아닌 군왕들 자신이 부여했다. 아르카나이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계에 잔뼈가 굵은 그로서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기상천외한 의심까지 하고 있었다. ‘설마 크롬갈드 놈. 김성철과 한 패였나?’ 노회한 고대왕국의 왕마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회의장의 분위기는 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김성철을 한 명의 왕으로 만들라는 거역하기 어려운 큰 흐름. 누구보다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그 흐름의 중심에 선 김성철이다. ‘크롬갈드.’ 김성철은 솔직히 인정했다. 지금 저 사내가 무엇을 꾸미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김성철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소재를 가지고 왔고 또 그것을 조합해 김성철이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것이 즉흥적인 변덕에 의한 것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김성철의 오랜 정치 감각은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상황이 오래 전부터 계획된 치밀한 계획의 일환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이 정도 남자였나.’ 기억 한 구석에 남아 있던 투기장의 퀭한 눈빛의 의욕 없는 사내의 모습은 깨진 거울처럼 산산 조각났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과거의 모습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세계의회의 의장, 김성철 공이 세 번째 재앙이 요구하는 한 명의 왕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크롬갈드는 계속해서 흐름을 끌고 가고 있다. 그 흐름은 김성철에게 좋지 않다. 김성철은 한 명의 왕이 될 생각이 추호도 없다. 단순한 평판의 문제뿐만 아니다. 김성철은 은연중에 직감하고 있었다. 한 명의 왕이라는 자리가 치명적인 함정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해라. 김성철.’ 이 흐름은 멈춰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김성철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 말을 하건, 이미 준비를 갖춘 크롬갈드 쪽에서 받아칠 그림이 그려졌던 것이다. 무엇보다 검은 거인의 환상이 김성철의 심력과 활기를 소진시켰다. 전율을 동반하는 그 환상에 시달린 김성철은 새로운 생각을 할 여유도 기력도 없었다. ‘생각을 해라. 김성철.’ 그때였다. 그의 주머니 안에서 무언가가 쏙 빠져나왔다. 그것은 주머니를 나오며 크기를 불리더니 이윽고 꽤 커다란 책의 모습으로 변했다. 베르텔기아다. “지금 정할 필요 있나요?” 베르텔기아가 당돌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작스런 리빙 북의 출현에 좌중의 시선은 일제히 한 권의 책을 향했다. “아니, 급하게 정할 필요 있냐고요? 지금 급한 건 그게 아닌데.” “넌 뭐냐?” 아퀴로아가 베르텔기아를 향해 삿대질하며 말했다. 그녀의 물음에 베르텔기아는 김성철 주위를 빙글빙글 돌더니 퉁명스레 말했다. “불청객은 닥치시지.” 한마디 말로 아퀴로아의 입을 닫아버린 베르텔기아는 이어 구석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조력자를 불렀다. “마라키아. 그걸 가지고 와.” “개과천선한 마라키아! 의무를 다하겠다!” 푸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깃털을 지닌 말하는 펭귄이 나타났다. 그걸 본 모든 이들이 깜짝 놀라 마라키아를 응시했다. ‘뭐.. 뭐냐? 저건.’ 시종일관 냉소적이던 아르카나이트가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엄청 귀엽잖아!’ 누구보다 놀란 건 아퀴로아였다. “나... 나하크?!” 그녀의 목소리엔 공포가 담겨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라키아를 본 아퀴로아는 몸서리를 치며 뒷걸음질 쳤다. 갑작스레 등장해 장내에 충격을 안긴 한 권의 책과 한 명의 조인은 그들의 등장은 맛보기에 불과하다는 듯 세계의회 전체를 뒤흔들 비장의 소재를 회의장에 데리고 왔다. 그것은 검은 천에 싸인 커다란 새장이었다. “마라키아.” 베르텔기아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자 마라키아는 지체 없이 새장을 포장한 검은 천을 벗겨냈다. 새장 안에는 온 몸이 몇 중의 강철로 꽁꽁 묶인 거대한 사내가 들어 있었다. 북방에서 밀려오는 야만인이다. “으... 으...!” 온 몸의 뼈가 부러져 너덜거리고 있음에도 두 눈에 포악한 빛을 띤 그 괴인은 좌중을 둘러보며 으르렁거렸다. “헤이! 거기 엘프 왕자!” 베르텔기아가 해서데인을 향해 소리쳤다. 해서데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자 베르텔기아는 책장을 거칠게 펄럭이며 소리를 높였다. “지금 중요한 게 뭐다?” “그.. 그건...” 해서데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노련한 중신들이 그에게 조언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훨훨 날아가 해서데인과 중신 사이를 가로막고는 다시 물었다. “지금 중요한 게 뭐다?” 그녀의 잇단 다그침에 해서데인은 엉겁결에 야만인을 보았다. 야만인은 그를 노려보며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답은 알고 있었다. “야... 야만인입니다.” 완전히 억지다. 김성철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같은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흐름이 바뀌었다. ======================================= 95. 세계의회 (4) ‘야만인이란 소재를 이렇게 이용하다니. 멋지군. 베르텔기아.’ 김성철은 속으로 베르텔기아의 대응에 감탄했다. 야만인은 어디까지나 각 나라에 위기심을 심어주어 그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도구였다. 하지만 방랑왕이 선수를 쳐 제국의 영토로 각 나라의 이해관계를 하나로 묶은 시점에서 야만인은 쓸모없는 도구로 전락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것을 베르텔기아가 끄집어 내 방랑왕이 주도하는 흐름을 막는 도구로 사용했다. 김성철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쓰임새다. 효과는 확실했다. 이미 야만인을 본 해서데인을 제외한 다른 참석자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야만인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김성철은 한 시름 긴장을 풀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김성철은 새장 옆에 있는 베르텔기아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세계의회의 의장이 다시금 부활한 것이다. 그는 먼저 방랑왕을 응시하며 말했다. “나를 칭찬한 부분에 대해서는 감사를 표하는 바이오. 하지만, 보다시피 지금은 아직 모든 왕이 모이지도 않은 상태. 아직 참석하지 않은 나라의 입장을 고려하면 섣부른 선택은 의도하지 않은 반목을 부를 수 있소.” 방랑왕은 입을 닫은 채 묵묵히 김성철의 말을 경청했다. ‘생떼를 부릴 법도 한데 한 마디 말도 없군.’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다른 무엇보다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소.” 김성철은 해서데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그쪽의 국경은 어떠한가?” “대단히 위험한 상태입니다. 혹 그들이 우리에게 공격을 가한다면 우리 왕국은 한 달도 채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일단, 한 명의 왕을 추대하기에 앞서 우리의 동맹국인 엘프 연합왕국에 대한 구원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하오.” 흐름을 탔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방랑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 명의 왕은 추후, 정하기로 합시다.” “…….” 방랑왕은 피로가 서린 눈동자로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참석하지도 않은 나라를 위해 배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윽고 방랑왕이 입을 열었다. “내 장담하건데 인간제국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오.” 그는 여전히 김성철을 한 명의 왕으로 세우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김성철은 아까의 김성철이 아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김성철이 말했다. 방랑왕은 김성철의 눈동자에 활력이 되살아나는 것을 보았다. 김성철이 활기가 감도는 눈을 빛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말한 자리는 내가 잠시 맡아두는 것으로. 그리고 모든 왕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투표를 통해 뽑읍시다. 재앙이 요구하는 한 명의 왕에 가장 적합한 왕을.” 제3의 선택지. 방랑왕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일었다. 김성철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것만이 지금 이 자리에 직접 참석해주신 각 당사자들을 납득시킴과 동시에 추후에 우리와 뜻을 함께할 새로운 동지의 동의를 구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라는 게 내 생각이오.” 김성철은 그렇게 말한 후 좌중을 둘러보았다. 다른 나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눈앞에서 김성철이 한 명의 왕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장래에 투표로 언제든 원하는 자를 새로운 왕으로 세울 수 있으니 말이다. “명안이군.” 아르카나이트가 호쾌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왕국의 사절들도 김성철의 의견에 찬동했다. 흐름은 김성철에게 넘어갔다. 김성철은 말을 마무리하며 베르텔기아와 마라키아 쪽을 힐끗 쳐다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모두들.’ 김성철은 그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상황을 끌고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바턴은 다시 방랑왕에게 넘어갔다. 방랑왕은 겉으로는 별 다른 감정변화를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의도하려고 했던 김성철을 한 명의 왕으로 내세운다는 계획은 무산되고 있었다. 처음엔 성대한 보상으로 각 국의 환심을 샀고 그것을 동력삼아 장내의 흐름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수를 둬 장내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지만 그것도 이제는 옛말. 베르텔기아의 적절한 끊기와 회복한 김성철의 반격에 그의 입지는 애매해졌다. ‘아무래도 김성철과 방랑왕은 한 패는 아니었던 모양이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약 크롬갈드가 아까 한 약속을 번복한다면, 그걸로 놈의 정치생명은 끝이다.’ 남의 집 불구경만큼 재밌는 것도 없다. 아르카나이트는 섬세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침묵에 잠긴 방랑왕을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 방랑왕은 한참동안이나 우두커니 서서 하얀 바닥을 가만히 응시했다. 딱히 할 말도 뾰족한 수도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그는 나지막한 탄식과 함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의견에 따르겠소.” 방랑왕이 승복했다. 무리하게 한 번의 기세로 일을 매조지하려고 했던 것의 그의 패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능한 건 결코 아니다.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김성철을 한 명의 왕으로 세우기 직전까지 몰고 갔으니까. 김성철은 뒷짐을 진 채 등을 보이고 있는 방랑왕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알 수 없는 사내다. 목적도 불분명하고 동기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한 가지 사실은 확인됐다. 방랑왕은 재앙의 파편을 사용하는 아퀴로아의 주군이라는 것을. ‘무언가 있다. 저 사내에겐.’ 하지만 마냥 배척할 수만은 없다. 방랑왕은 적어도 지금 이 국면에선 어떤 왕보다 큰 도움을 주고 있으니까. 아르카나이트 같은 야심 찬 군주가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는 것은 오로지 방랑왕의 공이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이용한다.’ 이제는 회의의 내용을 모두에게 확인받을 때다. 김성철은 종이를 한 장 준비해 참석한 모든 나라에게 김성철에게 각자의 왕관을 맡긴다는 서약에 서명하게 했다. “바로 다음 안건을 부탁드립니다.” 엘프 왕의 전권대사로 온 해서데인은 김성철과 눈을 마주치며 가장 먼저 협정서에 서명했다. 이어 다른 소국들도 서명에 나섰다. 다만 한 소국의 사절이 자신에게 전권이 없다며 할 수 없다고 버텼지만 아르카나이트가 으름장을 놓자 마지못해 서명을 했다. “그나저나 인간제국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 나중에 우리와 뜻을 함께 하더라도 제국의 영토를 모두 뺏기게 될 텐데.” 아르카나이트는 그답게 가시 돋친 말을 하며 협정서에 서명했다. “…….” 말은 거북하지만 아르카나이트의 말은 사실이다. 이 협정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받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제국이다. 실질적인 지배를 잃었다고 하나 방랑왕이 약속한 영토는 법적으론 제국의 영토니 말이다. 황제와 방랑왕. 서로 라그란제의 주인이라 주장하는 두 사내는 필연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 언젠가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시간이 올 것이다. 지금으로선 방랑왕 쪽이 보다 가능성이 높지만. 입을 굳게 다문 김성철의 눈동자에 실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윌리엄. 어째서 나오지 않은 것이냐. 다른 이는 몰라도 너만큼은 이 자리에 나올 것이라 믿었는데.’ 하지만 불참은 불참이다. 불참한 자에겐 불이익이 따를 수밖에 없다. 방랑왕이 말한 대로 재앙과 파멸의 전조는 사방에서 덮쳐오고 있다. 시간이 얼마 없다. 김성철은 얕은 한숨을 내쉬고 다음 서명자 앞에 섰다. 방랑왕. 왕관 없는 왕은 물끄러미 시종이 내민 서류를 응시했다. “나는 왕관이 없는데 그래도 되겠나?” 이제 와서 새삼스런 질문이다. 김성철은 그런 방랑왕의 태도가 비열하다고 생각하며 퉁명스레 말했다. “왕관이 없더라도 당신은 일단 왕의 자격으로 왔잖소?” “그렇군.” 방랑왕은 뜻 모를 미소를 머금은 채 펜을 들었고 서류에 자신의 직함과 이름을 기재했다. [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국왕 ] [ 크롬갈드 어비스 가바인 ] 여섯 개의 나라와 국왕 혹은 왕을 대리하는 서명이 협정서에 기재됐다. 아직 반에도 채 이르지 않은 상황. 정확한 현황을 알려면 멸망한 나라의 근황이 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김성철이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허공에 마법진이 떠올랐다.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전개. 다음 순간, 마법진 안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금과 보옥으로 장식된 화려한 옷을 입고 두 자루의 검은 등 뒤에 찬 그는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을 놀란 눈으로 응시하는 좌중들을 둘러보았다. 그 사내의 얼굴을 본 김성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드라고만?’ 칠영웅의 잔당 중 하나. ‘이 자가 왜 여기 나타난 것이지?’ 김성철의 의문은 드라고만에 이어 나타난 또 다른 존재에 의해 더욱 증폭됐다. 그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응? 또 리빙 북이야? 저것과 똑같이 생겼잖아!” 아퀴로아가 새롭게 나타난 허공의 책을 손가락질 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나타나 신성한 회의장을 어지럽히다니! 더는 못 봐준다!” 아퀴로아가 일갈하며 채찍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저런. 멍청하기도 하지.” 드라고만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새롭게 나타난 책에서 번쩍하는 광채가 번득였다. 다음 순간 아퀴로아의 꼴사나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빛과 함께 무형의 힘이 나타나 채찍을 강타한 것이다. 아퀴로아는 손아귀를 움켜쥔 채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냈다. 대륙이걸의 체통 따윈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김성철은 천천히 걸어 새롭게 회의장에 나타난 불청객들을 응시했다. “무엇을 하러 왔는가? 설명해라. 불청객.” 김성철의 손에 다시금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김성철은 드라고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드라고만은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질 쳤다. “오고 싶어서 여기 온 게 아니야. 오해하지 말라구. 날 여기 끌고 온 건 이 녀석이니까.” 드라고만은 자신 앞에 우뚝 떠오른 책을 바라보았다. 김성철의 시선이 책을 향했다. “저... 저건...?” 멀리서 그 광경을 보던 베르텔기아가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편 김성철의 시선은 책을 향하고 있었다. 베르텔기아와 똑같은 형태를 지닌 책. 아퀴로아를 응징한 책은 천천히 몸을 돌려 김성철을 향했다. “다시 뵙네요. 부수는 자.” 낯에 익은 목소리와 분위기. ‘이 녀석. 설마 익시온에서 만났던 바로 그 녀석인가.’ 책은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재앙의 서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자입니다. 여간해서는 인간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오늘은 특별히 재앙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분들을 위해 도움을 드리러 이곳에 왔답니다.” 다음 순간, 자리에 모인 모든 이의 눈앞에 빛으로 이루어진 문자가 나타났다. 김성철은 빛나는 문자 너머로 보이는 책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문자가 자신의 시야를 덮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문자는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었다. [ 한 명의 왕을 만들기까지 앞으로 5개의 왕관이 필요합니다. ] [ 남은 5개의 왕관은...... ] 1. 인간제국. 2. 드라고만의 나라 3. 오시리아 공국 4. 드워프들의 왕국 5. 가시옹의 나라 그것을 본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갑작스레 나타난 책은 혼탁하던 임무에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눈앞에 떠오른 문자를 보며 놀라움에 잠겨 있었다. 오직 단 한 명, 아르카나이트 왕만이 흥미없다는 듯 문자를 지워버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에게 중요한 건 왕관 따위가 아니었다. 그에 필요한 건 한 치의 땅. 왕관이야 재앙이 해결된 다음에 다시 만들면 그만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저게 그 무지막지하다는 야만인인가?’ 아르카나이트는 새장 안에 갇힌 야만인에게 다가갔다. 실로 크고 강한, 인간처럼 생겼으나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괴물이었다. 그는 부하에게 검을 하나 건네받은 뒤 그것을 뽑고 새장 안에 갇힌 야만인을 앞에 섰다. 그는 새장 안에 검을 찔러 넣어 포박된 야만인을 살짝 찌르는 시늉을 했다. 야만인은 으르렁거릴 뿐 움직이지 않았다. 아르카나이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검 끝을 야만인의 눈에 갖다 대었다. 이유는 야만인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일국의 왕에게 눈알을 부리라다니.’ 아르카나이트는 홧김에 검을 야만인에게 찔러 넣었다. 그 순간, 책이 말했다. “아, 한 가지 수정 사항이 발생했네요.” 사람들의 눈앞에 떠오른 다섯 개의 왕관 중 하나가 모래처럼 흩어져 지워졌다. 가시옹의 나라였다. “방금, 멸망했어요.” 책은 새장으로 몸을 돌렸다.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당혹감과 공포에 찬 아르카나이트의 얼굴을. 검을 쥔 왕의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쥔 검의 끝은 야만인의 입안에 있었다. 으적. 으적. 야만인은 살기어린 눈빛으로 아르카나이트를 노려보며 그가 찔러 넣은 검을 이로 씹어 삼키고 있었다. 아르카나이트는 안간힘을 다해 검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의 힘은 야만인에 미치지 못했다. 대륙사걸이라 불리는 왕국 최강의 소드마스터가 일개 야만인에게 힘에서 밀리고 있었다. 실로 꼴사납고도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잠시 망각했던 야만인의 위협이 다시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충격이 일으킨 침묵 속에서 책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기 신인류에게 말이죠.” 같은 시간, 대륙의 북쪽. 트로윈이라 불리던 북방의 요지엔 성난 함성과 뿔피리 소리가 서늘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북방의 야만인. 그들이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남하했다. 지나가는 경로 상의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 96. 북방전역 (1) 황색의 경계 앞에서 재개된 세계의회가 끝난 후 대륙의 관심은 북쪽으로 옮겨갔다. 한 명 한 명이 대륙십삼걸에 준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야만인. 그들은 마계에서 발흥해 마계최전선을 넘어 이제 대륙 북부의 절반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마계최전선의 마지막 방어선을 붕괴시켰고 칠영웅 가시옹이 자리 한 트로윈 일대까지 장악했다. 엄청난 희생과 파괴 끝에 사람들은 조금씩 야만인의 윤곽을 알 수 있었다. 야만인들은 하나가 아니다. 그들은 무수한 혈족 단위로 나뉜 잡다한 집단의 연합체이며 크게 두 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핏발 선 눈의 부족이다. 바란아란 연맹을 일주일 만에 멸망시킨 그들은 엘프 연합왕국의 국경선 앞에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을 핏발 선 눈의 부족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쓰는 깃발에 충혈 된 노란 안구를 섬뜩한 모양으로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내장의 부족이다. 트로윈 일대를 장악한 그 야만인들은 트로윈의 새로운 주인인 가시옹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손으로 머리와 사지를 잡고 글자 그대로 찢어버렸다고 한다. 그 부족은 그 사방에 널린 내장으로 그들의 불경한 상징물에 휘감에 장식한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내장의 부족이다. 어느 한 쪽이든 지금 인간에겐 위험하긴 매한가지지만 김성철이 주도하는 세계의회는 먼저 엘프 연합왕국 앞에 포진한 핏발 선 눈의 부족을 먼저 막기로 합의했다. 트로윈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는 세계의회에 참석하지도 않은 오시리아 공국이고 그 너머엔 인간제국이 있다. 세계의회에 참석하지 않은 나라는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처리해야 한다는 오랜 불문율에 따라 그들은 장래에 다가올 야만인에 대해 스스로 대처하는 법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 세계의회에 의해 잠재적인 한 명의 왕으로 인정 받은 김성철은 지금 엘프 연합왕국의 북쪽 국경선에 있었다. 전선은 일견 평화로운 듯 보였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각지의 정찰병과 마법사들이 야만인의 세력이 점점 증강되고 있다는 비보를 속속 전했다. 현재 국경 너머에 자리 잡은 야만인의 숫자는 무려 1만 여명. 하지만 야만인만이 아니다. 야만인들은 북쪽에서 사로잡은 악마와 엘프, 드워프, 인간들을 노예로 만들어 그들의 노예 병사로 삼았고 그 숫자만 무려 2만에 이르고 지금 이 순간에도 착착 증원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맞서는 엘프군의 전력은 4만 여명. 강력한 유니콘과 나무 정령을 합치면 실제 전력은 그 곱절이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막강한 전력이다. 하지만 대적 불가능한 야만인이 직접 전투에 참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바란아란 부족연맹 출신의 생존자의 말에 의하면 야만인은 전술도 없고 기율도 없으나 일단 난전 상황이 만들어지면 산봉우리를 내려치는 벼락처럼 모든 것을 순수한 힘으로 박살낸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서 놈들은 초월자 급은 아니야.” 세계의회의 한 축이자 고대왕국의 국왕인 아르카나이트 또한 전장에 함께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힘에 필적하는 야만인에게 낭패를 당해 체면을 구겼으나 이후 정식으로 벌어진 결투에서 야만인을 어렵지 않게 처치해 약간의 체면을 회복했다. 물론 야만인은 맨손이고 자신은 검을 들었다는 점에서 불공정한 승부긴 했지만 아르카나이트의 말처럼 야만인은 개개인의 능력치는 아득히 높으나 전투의 기술적인 측면에선 부족함이 있었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그저 힘만 쌘 어린아이라고 할까나. 실제로 야만인이 쓰는 무기라고 해봐야 원시적인 몽둥이와 노획한 것으로 보이는 도끼가 전부고 일체의 투척무기는커녕 마법도 모른다는 것이 야만인을 경험해본 자들의 공통된 증언이었다. 그 말이 맞는다면 아주 승산이 없는 싸움은 아니니라. 어느 정도 대등한 전력을 지닌 다수와 다수가 맞붙는 싸움에서 결국 승리하는 것은 기율이 강한 쪽이니. 야만인의 힘을 기술과 전술로 상쇄시키고 전열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들을 물리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김성철이 전선을 시찰하며 내린 나름의 결론이었다. 그것을 위해 세계의회 소속의 각국에서 막강한 전사를 보내왔다. 하는 짓은 밉상이지만 명예로운 기사이자 소드마스터의 자긍심을 지닌 아르카나이트가 자신이 거느린 최정예 소드마스터를 끌고 전선에 참여 했고 동부연합의 마커레이드 또한 대마법사 급의 마법사를 이끌고 합류했다. 칠영웅 드라고만의 참전은 김성철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일단 나도 뭐, 왕으로 취급 받는 모양이니까.” 그는 과거 만났을 때에 비해 살집이 많이 붙어 있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와 함께 뚫어질 정도로 뻔뻔하게 나타난 드라고만을 노려봤다. ‘얼마나 좋은 것만 처먹고 다녔으면.’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드라고만은 자신의 궁전 안에 술을 부어 만든 연못 위에 과자로 만든 배를 타고 각지에서 추리고 추린 999명의 미인을 거느리고 어마어마한 호사를 누렸다고 한다. “너는 없어도 된다. 협정서에 서명한 것만으로 충분하니 이 자리를 떠나라.” 병사 한 명 없이 달랑 홀몸으로 참전한 드라고만을 향해 김성철이 말했다. 두 번째 재앙이 해결됐다고 하나 드라고만은 원래 칠영웅 중 한 명, 믿을 수 없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제 한 몸 살기 위해 동료를 팔아먹고 칠영웅의 비밀과 약점을 폭로한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번 배신자는 영원한 배신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해 드라고만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김성철을 설득했다. “나도 좋아서 이 자리에 있는 건 아니라고. 지도를 보면 알잖아.” 드라고만은 대륙 서부의 고대왕국과 북서부의 엘프왕국 중앙의 완충지대에 자리 잡았다. 다른 칠영웅이 북부와 동부에 머무른 것에 비하면 제법 특이한 행동이었는데 나름 이유는 있었다. 드라고만이 현역이던 시절, 현재의 고대왕국은 그의 봉토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거신과 함께 나타났을 땐 거신을 이끌고 고대왕국과 작은 접전을 여러 차례 벌였다고 한다. 물론 고대왕국의 국력은 거신 하나에 멸망할 정도는 아니라서 결국 단념하고 향락에 젖긴 했지만 말이다. “엘프들이 무너지면 다음은 바로 나야. 뭐, 내가 망한 다음엔 저 종놈의 자식들도 망하겠지만.” 드라고만은 멀리 서 있는 아르카나이트 쪽을 힐끗 보며 중얼거렸다. 그와 아르카나이트는 알려진 것 이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차피 막을 거면 남의 힘을 빌려서 막는 게 좋지 않겠어? 그러니 내 역할만 정해줘. 적어도 1인분은 할 테니.” 그 말을 듣고 김성철은 고민에 잠겼다. 못 믿을 인간이긴 하지만 동기는 분명했고 실력 하나만은 분명하니. 그는 아마도 여기 있는 사람 중 다섯 손가락에 손꼽힐 정도로 강한 존재다. 살집이 좀 붙긴 했지만 검을 들면 적어도 주변의 병사 정도는 충분히 지킬 수 있으리라. 김성철은 장고 끝에 칠영웅 드라고만을 아르카나이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했다. 한편 방랑왕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세계의회가 끝난 직후, 필요할 때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원했던 건 하나도 못 이루고 손해만 잔뜩 봤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드라고만의 참가를 마지막으로 진용은 갖춰졌다. 김성철은 야만인들이 언제 어떻게 공격해오더라도 굳건히 대처할 수 있는 방어선을 구축했고 야만인이 공격하기를 기다렸다. ‘일단 놈들의 기세를 한 차례 꺾어놓을 필요는 있다.’ 모든 준비는 순조롭다. 김성철이 원하는 건 전투였다. 그런데 전투를 준비하는 내내 유령처럼 달라붙어 김성철의 근심을 불러일으키는 문제가 있었다. 과연 야만인은 모두가 말하는 것처럼 단순한가? 적어도 김성철이 포로로 잡아 온 야만인은 야만인에 걸맞은 지능과 행동양식을 보여주고 있었다. 구 할의 본능과 일 할의 지성. 야만인이 지닌 조막만한 지성이란 것도 결국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김성철이 관측하고 정찰 쪽에서 보고하는 야만인들은 원시적인 트롤 혹은 오크 부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성철로선 그들의 정보가 맞길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훌쩍 지났다. 봄기운이 완연히 엘프의 숲을 신록으로 물들이기 시작할 무렵, 뿔피리 소리가 숲속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김성철의 천막 앞에 페가수스를 탄 엘프 족 기사가 나타나 차분하게 야만인의 진격을 보고 했다. 기다렸던 야만인의 공격이 마침내 시작된 것이다. 김성철은 이 사실은 전군에게 알리고 엘프의 군주에게도 보고하게 했다. 모든 엘프들의 군주이자 대륙팔걸의 지위를 지닌 엘프왕 시그너스는 신병을 핑계로 전투 불참을 표명했고 전 엘프군의 지휘권을 세계의회의 의장인 김성철과 해서데인에게 양도한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명성 높은 궁수인 시그너스의 불참은 아깝긴 하지만 전투의 향방을 결정짓는 건 아니다. 김성철은 엘프 군주의 비겁함을 비난하는 대신 자신에게 주어진 엘프 연합왕국의 성스런 벚나무 가지로 만든 활을 말없이 받아들었다. 그것은 봄의 낙엽이라 불리는 엘프들의 신물. 엘프 군 군권의 상징이다. 모든 엘프들과 엘프의 동맹이 봄의 낙엽을 든 김성철에게 경의를 표했다. “으으.. 드디어 시작이네!” 주머니 안에 쏙 들어간 베르텔기아가 흥분된다는 듯 몸을 떨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조금씩 몸이 자라기 시작한 마라키아가 손깎지를 끼며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 한 달 간 마라키아는 전체적으로 성장했는데 특히 목이 조금 길어져 전과 같은 귀여움 대신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그런 마라키아를 가리켜 ‘중닭’이라는 불명예스런 이름으로 불렀다. 실제로 마라키아에게 관심이 있던 아르카나이트가 마라키아의 모습이 변하자 못 본 체 하는 걸로 보아 마라키아의 귀여움이 많이 퇴색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라키아 본인은 자신의 성장에 만족하고 있었다. 몸에 힘도 붙고 전체적인 능력도 강해지고 있으니까. ‘크크크... 이 성장세라면 완전히 컸을 때 전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해지겠는데? 어쩌면 나도 승천이란 걸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마라키아의 흉악한 마음을 거울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김성철은 그러나 별 터치는 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사악한 놈이긴 해도 인간 기득권처럼 밑바닥까지 썩은 놈도 아닌 걸 이제는 알고 있기에. 게다가 마라키아는 이번 전투가 끝나고 야만인을 몰아내면 자신의 왕국에 한 차례 방문할 계획까지 짜고 있었다. 그도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야만인이 자신의 왕국에 침입해 동굴엘프는 물론 동족을 모조리 죽여 버리지는 않나 하는. 첩보에 의하면 야만인은 조인왕국을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조인왕국의 입구가 야만인의 점령지역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불안요소다. 마라키아는 여러 가지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울 것이다. ‘못 미덥긴 하지만 여기 있는 내 전력 중에 이 정도 전투력을 지닌 녀석은 없지.’ 굳이 대등한 적수를 골라본다면 드라고만 정도가 될 것이다. 김성철은 마라키아에게 후방의 보조부대의 호위를 맡겼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야만인 별동대가 난입이라도 하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와 함께 방어선 최전선에 자리 잡았다. 야만인의 노예 병사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야만인이 직접 총공세를 가해오면 직접 최전선에서 맞서 싸울 작정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야만인을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는 건 김성철이 유일하니 말이다. 새로운 무기가 된 체인 라이트닝은 김성철의 가장 유용한 무기가 될 것이다. ‘그 영감. 솔직히 나이는 헛먹지 않은 거 같단 말이야.’ 마지못해 익힌 체인 라이트닝이지만 지금은 가장 주력마법으로 격상했다. 아마도 전투가 시작되면 가장 많이 남발하는 마법이 될 것이다. 부우우우우-- 아까보다 가까운 곳에서 야만인의 뿔피리 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김성철은 고개를 좌우로 돌려 병사들의 얼굴을 살폈다. 두려움을 품고 있긴 하지만 자신의 조국과 고향을 지킨다는 의무감과 명예심이 엘프 병사들의 눈빛에 결연히 머물고 있었다. 바란아란 동맹에서 야만인들이 저지른 끔찍한 만행도 엘프 병사들의 전의를 다지는데 한몫했을 것이다. ‘사기는 나쁘지 않군.’ 엘프 군단 앞엔 엘프들이 자랑하는 살아 있는 목책이 벽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무 정령만큼 성숙하지 못한 살아 있는 나무들이 스스로 만든 그 벽은 판추리아에서 김성철이 상대했던 나무엄마와 비슷한 존재로 동맹인 엘프의 명에 따라 움직이거나 방벽을 구축하고 살아 있는 덩굴을 꺼내 다가오는 적을 휘감거나 혹은 독성 열매를 지뢰처럼 깔아 엘프의 적에게 타격을 가한다. 야만인이라고 해도 쉽게 넘지 못하는 방벽이다. 그 방벽 뒤엔 약간의 공백을 두고 유니콘이 배치되어 있다. 유니콘은 숲 깊은 곳에 은거하는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생명체. 여간한 괴수급도 유니콘 앞에선 뼈도 못 추릴 정도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과 소통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은 지력 또한 지니고 있다. 한 가지 문제는 처녀 이외엔 등 위에 태우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건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유니콘 또한 그들의 동족이 야만인의 안주꺼리로 전락한 걸 알고 깊이 분노하고 있으므로. 그 뒤엔 억겁의 세월을 살아왔다는 거대한 나무 정령과 엘프 궁수들을 이차적으로 보호하며 엘프군 전열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세계의회의 부름에 참전한 강력한 전사들이 배치되어 만일에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싸움에 앞서 김성철은 하늘을 바라봤고 손을 들어 바람의 방향을 느꼈다. 날씨는 쾌청, 풍향은 남서풍. 하늘마저 김성철과 엘프 군을 돕고 있다. ‘이 전투, 질수가 없겠군.’ 봄의 낙엽을 등뒤엔 맨 김성철의 손에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 96. 북방전역 (2) 예상대로 야만인들은 노예 병사들을 앞세웠다. 그 숫자는 3만여 명. 하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병사가 아니라 민간인이었다. 특히 정복지에서 징발한 엘프들의 숫자가 단연 많았는데 야만인들은 노인, 여성, 불구의 몸이 된 사람까지 전장에 내몰았다. 아이들이 있었다면 아이들도 전장에 세웠을 것이다. 야만인이 앞세운 노예 병사의 몰골은 처참했다. 엘프는 귀를 찢어버렸고 드워프는 수염을 살점 째로 뽑아냈으며 인간의 경우엔 코를 잘라버렸다. 육체와 정신 모든 면에서 학대당한 그들의 눈은 어떤 의미로 이미 죽어 있었다. 노예 병사의 뒤엔 천 명에 이르는 야만인들이 간격을 두고 서 있었는데 그들의 손엔 길이가 10미터는 족히 됨직한 가시가 박힌 채찍이 들려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야만인들은 채찍을 휘둘러 노예 병사들을 전장으로 내몰았다. 철썩! 채찍 하나가 노예를 훑고 지나갔다. “끄아아아악!” 무시무시한 힘이 실린 채찍을 맞은 노예 하나가 감전된 쥐처럼 몸을 떨다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야만인들을 그걸 보고 소리 높여 웃으며 각자의 채찍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채찍질 한 번에 한 명의 노예가 죽어나갔다. 3만 명에 이르는 노예들의 뒤엔 천 명 이상의 야만인들이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천 명 이상의 노예가 죽었고 그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야만인들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들은 남은 노예들을 모두 죽여 버릴 기세로 채찍을 휘둘렀다. 공포에 질린 노예들로선 선택지가 없었다. 그들은 늑대를 만난 양떼처럼 동족이 지키는 수비진을 향해 빈약한 무장으로 돌진했다. 김성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상한대로다. 엘프들은 유난히 동족애가 강하다. 그들은 처참한 몰골로 변한 동족들에게 시위를 당기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야만인에 휘둘려 죽음에 내몰리는 자들에 대해 김성철 또한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전장이다. 잠깐의 방심과 안일함이 승패를 가른다. 이대로 주저하면 야만인이 원하는대로다. 그리고 야만인이 원하는 대로 전투가 전개된다면 앞날은 뻔하다. 이쪽은 전투에서 패배할 것이고 전투에서 살아남은 아군의 생존자는 물론 엘프 왕국에 남겨진 민간인도 지금 저 앞에 내몰리는 노예병과 같은 결말을 맞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제국대원수님?” 다급해진 엘프 부관이 김성철의 전 직함을 습관적으로 부르며 의견을 구했다. “…….” 지휘관은 강철의 심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인간제국의 황제가 김성철에게 한 말이다. 군대를 지휘하며 수많은 전투를 호령한 김성철은 그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야만인도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군.’ 지금이야 말로 지휘관이 나서야 할 때다. 늘 그렇듯 그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자신의 뜻을 표현하는 것을 선호했다. 김성철은 직접 엘프 군주에게 하사받은 신성한 활을 들어 손수 시위를 당겼다. 봄의 낙엽. 전투용이라기보다는 의전용에 가까운 활이었지만 까마득한 과거 세계수가 엘프들에게 선물했다는 이 전설급 활의 성능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그 활의 시위는 제법 김성철의 신적인 힘을 잘 받아들이고 있었다. ‘호오. 이 정도 성능의 활도 있었나. 재앙의 무기 중 하나와 비견될만하군.’ 김성철은 위태로울 정도로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에 만족감을 느끼며 시위를 놓았다. 핑-. 김성철의 화살은 화살이라기보다는 탄환에 가까운 궤적을 그리며 적진을 향해 날아갔다. 맹렬한 기세로 날아간 화살이 달려오는 노예 병사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런데 하나가 아니다. 푹! 푹! 푹! 화살은 선두의 병사의 심장을 꿰뚫은 채 그대로 관통해 십 수 명이나 되는 병사를 한 번에 거꾸러뜨린 뒤에야 멈췄다. 그야말로 가공할만한 일격. 화살이라기보다는 포탄에 가까운 위력이다. 신적인 힘이 화살에 실릴 수 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김성철은 활을 내려놓으며 주위를 둘러보며 우렁차게 일갈했다. “주저하지 마라!” 김성철이 그렇게 외치며 손을 내밀었다. 엘프 장교가 김성철에게 다음 화살을 내밀었다. 김성철은 화살을 시위에 재며 다시 외쳤다. “너희들이 저들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자비는....” 김성철은 말끝을 흐리며 시위를 놓았다. 또 하나의 화살이 전장을 가르며 십 수 명의 노예들을 꿰뚫었다. 처참한 단말마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김성철이 재차 일갈했다. “오직 죽음뿐이다!” 신적인 무위 때문일까. 아니면 천둥 같은 호통 때문일까. 어느 쪽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김성철이 발사한 두 발의 화살은 잠시 머뭇거렸던 엘프 진영을 뒤흔들어놓았다. 멍하니 있던 부대지휘관들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휘하의 부대원에게 명했다. “제국대원수의 명을 따라라!” 절도 있는 명령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고 이윽고 수천 개에 이르는 화살의 비가 살아있는 목책을 넘어 노예 병사들에게 흩뿌려졌다. 애초에 노예 병사들은 병사도 전투원도 아니다. 소수의 전사 출신을 제외한 그들은 화살 비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하사관도 장교도 없이 채찍질에 내몰린 그들이 할 줄 아는 것은 선 채로 죽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끄아아아아악!” 화살 세례에 고슴도치처럼 변한 노예 병사 중 하나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갑자기 온 몸이 하얀 색으로 변하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폭발했다. 쿠구궁! 그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폭발이었다. 주변의 노예는 물론 지축까지 뒤흔들 정도로. 김성철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악마들도 쓰지 않는 수다. 살아 있는 인간을 사악한 술식을 이용해 폭탄으로 만들었다. 노예들을 동족이랍시고 진중에 들였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서늘해진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김성철은 야만인들이 마법을 모른다는 첩보가 사실과 다르다는 확신을 굳혔다. ‘놈들에게도 술사는 있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 김성철은 차분하게 전황을 응시했다. 엘프 병사들은 이제 거리낌 없이 화살을 퍼부었다. 한 차례의 일제사격이 이루어질 때마다 수백 명에 이르는 노예들이 화살 세례 속에서 죽었고 그 중 한 두 명이 하얗게 발광하며 폭발,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시체 몇 구와 커다란 구멍을 남겼다. “끔찍하군.” 전장을 응시하던 아르카나이트가 기가 질린 표정을 지은 채 김성철에게 다가왔다. 수많은 전투를 경험하고 끔찍한 장면 또한 수도 없이 지켜 본 역전의 용사로서도 지금 펼쳐지고 있는 양상은 처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확실해. 저 야만인들은 우리들을...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아.” 아르카나이트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김성철이었지만 그 말만큼은 현상을 제대로 짚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볼 수 있었다. 겁에 질린 채 죽어가고 발광하며 폭발하는 노예들 뒤에 서서 낄낄 거리고 웃는 야만인들의 모습을. 그들은 폭죽놀이를 지켜보는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군.” 김성철이 곁에 선 엘프 장교에게 손을 내밀었다. “화살을.” 엘프 장교가 김성철에게 매의 꽁지깃이 달린 화살 한 대를 내밀었다. 김성철은 엘프 족 고유의 문자가 아로새겨진 화살을 시위에 재우고 적을 노려봤다. 노리는 건 눈앞의 노예 병사들이 아니다. 그 너머, 안전한 곳에서 포진하고 이 장면을 감상하고 있는 잔혹한 야만인이다. 김성철과 야만인 사이의 거리는 1,500미터 이상. 궁술의 달인이라고 해도 맞추기 쉽지 않으며 설령 맞춘다고 해도 의미 있는 타격을 가하기 어려운 거리다. 김성철은 심호흡을 하고 엘프 군주의 신물을 한계까지 팽팽하게 당겼다. 김성철의 호흡이 멈추며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목표는 야만인. 피로 흥건한 채찍을 휘두르며 깔깔 웃어대는 그 흉악한 아가리 속이다. 김성철의 몸에 신적인 몸이 흐르고 지나갔다. 시위를 잡은 그의 손이 팽팽하게 당겨진 활대를 한계 너머까지 구부렸다. 지켜보는 엘프 사관들의 얼굴에 경악과 감탄이 일제히 떠올랐다. 지지지직-. 활이 울고 있었다. 자신의 진정한 힘을 이용할 줄 아는 이를 위해서 결과 결을 부딪치며 신묘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 엄청나군.’ ‘저 활을 저렇게까지 다루는 사람이 있다니.’ 침묵 속에서 김성철은 시위를 놓았다. 핑- 봄의 낙엽이 쏘아올린 것은 화살이 아니라 한줄기 섬광이었다. 빛과 같은 일직선이 김성철과 그가 노리는 사냥감 사이에 놓였다. 약간의 구부러짐도 없는 궤도가 확정되는 순간 화살의 운명은 정해졌다. 빛줄기는 웃고 있는 야만인의 입안으로 빨려들듯 들어갔다. “크허허허허.... 엌!!!!!” 야만인 하나가 입에서 피를 뿜으며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함께 웃고 즐기던 야만인은 뒤늦게 동료의 죽음을 확인했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먼 곳, 살아있는 목책 뒤에 활을 들고 있는 한 사내를 볼 수 있었다. 김성철. 그는 똑바로 야만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두 번 다시는 이빨을 보이지 못하겠지.” 김성철이 야만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야만인들은 김성철이 풍기는 기도에 일순 주춤했으나 이내 짐승 같은 포효를 일제히 내지르며 기세를 올렸다. 야만인들은 일제히 외쳤다. “샤만 카! 샤만 카!” 누구도 의미를 알 수 없는 기괴한 이름이었다. 야만인들을 사람의 가죽을 이어 붙인 북을 미친 듯이 두들기며 어떤 불길한 전조를 예고했다. 이윽고 채찍을 든 야만인의 진중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나무로 만든 길쭉한 가면을 쓰고 사람의 눈알과 자른 수급을 장식품 마냥 여기저기 나무 지팡이를 든 늙은 여자였다. ‘주술사인가.’ 풍기는 분위기로 보아 그렇게 보였다. 야만인들은 야만인 주술사가 나타나자 한껏 기세를 높여 소리쳤다. “샤만 카! 샤만 카!” 김성철은 그 주술사에게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다음 순간, 주술사가 눈알과 수급으로 장식된 지팡이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지팡이 주변에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마법진이 나타나는 것을. 김성철의 지식으로도 처음 보는 마법진이었다. 다음 순간 살아 있는 목책 앞 곳곳에 폭발이 일어났다. 인간 폭탄으로 만든 노예들이 한꺼번에 터져버린 것이다. 수많은 시체가 사방에 널리고 이제 야만인의 전장엔 소수의 생존자와 널려 있는 시체밖에 남지 않았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늙은 주술사가 나타나서 한 짓이라고는 그들의 고기방패가 될 노예들을 모두 폭살시킨 것 외엔 없다. 하지만 이윽고 야만인은 진의를 드러냈다. “키히히히히!” 샤만 카라 불리는 주술사가 음산한 웃음소리를 내며 또 다른 주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지체 없이 화살을 노파를 향해 쏘아 보냈다. 하지만 야만인들은 전처럼 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름드리나무를 통째로 뽑아 김성철과 노파 사이에 벽을 만든 것도 모자라 스스로 방패가 되어 주술사를 보호했다. “엌!!!” 그럼에도 야만인 하나가 화살에 꿰뚫려 절명했지만 그동안 주술사는 자신의 사악한 술법을 완성시켰다. 주술사가 미친 듯이 웃으며 지팡이를 흔들자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검은 구름이 사방을 뒤덮었다. 엘프들은 두려워하며 하늘의 조짐을 지켜보았다. 김성철도 좋지 않은 익숙한 예감을 느꼈다. ‘이 느낌.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다음 순간, 검은 번개가 대지를 강타했다. 그것은 단순한 번개가 아니었다. 불경함으로 이루어진 저주의 힘이며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힘이다. “저... 저길 봐!” 한 궁수가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전장 한 곳을 가리켰다. 일어나고 있었다. 전장에 누워 식어가던 시체들이. “크으으으....” 콰광! 검은 번개는 계속해서 내리쳤다. 검은 번개가 닿는 곳마다 적게는 수십 구, 많게는 수백 구의 시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고위급 네크로맨서들이 전장에서 구사하는 대규모 강령술이다. 하지만 평범한 강령술이 아니다. 김성철과 엘프 군은 되살아난 시체들의 입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돋아나오며 부분적으로 몸이 안개처럼 흐려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스켈레톤이나 좀비가 아닌 그 상위급의 언데드 몬스터, 흡혈귀로 되살린 것이다. “말도 안 되는군. 내 전장에서 수많은 강령술사를 보아 왔지만 저런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네크로맨서를 전장에 기용한 마지막 나라였던 루테기네아 왕국과 싸웠던 이들은 알고 있다.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불가능한, 아니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라는 것을. 하지만 지금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상식의 파괴보다 훨씬 심각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사안의 중대성이다. 3만 마리의 좀비라면 모르겠지만 3만 마리의 흡혈귀라면 무게가 다르다. 안개화를 통해 물리공격을 흘리고 박쥐로 변신해 적진에 빠르게 쇄도할 수 있는 흡혈귀는 느릿한 표적에 지나지 않는 좀비하고는 궤가 다른 존재다. 그것을 본 김성철은 직감했다.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건가?’ 흡혈귀로 부활한 노예병들의 어깨엔 예외 없이 불경한 눈알 모양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검은 번개의 불경한 마력은 허공 위에서 흩어지며 낙인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그것으로 확실해졌다. 야만인이 노예 병사를 통해 노린 것은 단순한 사기 꺾기도 소모전도 아니었다. 그것은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인 부수적인 효과다. 그들이 노린 것은 처음부터 신선한 대량의 시체였다. 강력한 상위급 언데드를 마음껏 불러내기 위한. 김성철은 잠시 바닥에 내려놓았던 팔 가라즈를 들었다. “모두, 방어에 주력하라.” 전장의 네크로맨서를 상대하는 전통적이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하나다. 술자를 처치하는 것. 라그란제에서 벌였던 숨바꼭질보다야 훨씬 직관적이지만 김성철은 이번 일이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전례 없는 방비를 갖추고 암살자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 파지지직. 김성철의 손가락 끝에 미약한 스파크가 튀었다. 한 손엔 팔 가라즈 다른 한 손엔 전류의 힘을 품은 채 김성철이 앞으로 나섰다. “베르텔기아. 조금 위험할 거다.” 김성철의 마음은 평소와 달리 무거웠다. 하지만 그런 김성철을 향해 베르텔기아는 퉁명스레 말했다. “요즘 들어 엄살이 심한 거 같은데. 빨리 끝내고 거신에나 방문하자구! 매일 간다간다 해놓고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건데?” 베르텔기아에게선 어떤 두려움도 느낄 수 없었다. 정겹기까지 한 베르텔기아의 면박을 들은 김성철은 잠시나마 무거운 마음을 지녔던 자신을 반성하며 고개를 들었다. “엘프들이 워낙에 죽는 소리를 내서 말이야.”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빨리 끝내지.” 세계의 적이라 불린 사내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앞으로 묵묵히 걸어갔다. 내려치는 검은 번개 속에서 부활하는 3만 마리의 흡혈귀들이 일어서는 전장으로. ======================================= 96. 북방전역 (3) 박쥐 떼들이 무리를 지어날며 김성철 주위의 하늘을 까맣게 물들였다. 그 정체는 갓 소생한 흡혈귀. 무리에 합류하는 흡혈귀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며 어느 덧 수천 마리에 이르렀다. “…….” 김성철은 묵묵히 검은 박쥐 떼 너머에 자리 잡은 강령술사의 위치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박쥐떼가 김성철 뒤에 내려앉으며 정체를 드러냈다. 창백한 핏기 없는 얼굴에 붉은 눈동자, 그리고 섬뜩하게 자란 송곳니. 흡혈귀들이다. 생전에 야만인에 의해 훼손되었던 그들의 몰골은 죽음이라는 검은 물감을 뒤집어쓰고 한층 더 처참해졌다. “으. 진짜 싫다.” 베르텔기아가 망자의 흉한 몰골을 보고 가볍게 몸을 떨었다. “키이이이이이!” 흡혈귀 한 무리가 김성철에게 달려들었다. 이에 대한 김성철의 답은 한 번의 휘두름. 퍽! 신적인 힘이 깃든 망치가 전장을 휘젓자 달려들던 흡혈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구도를 아득히 상회하는 일격에 그대로 재로 변하며 글자 그대로 성불해버린 것이다. 또 한 무리의 흡혈귀가 김성철의 뒤를 노리고 공격해왔다. 퍽! 망치질 한 번에 십수 마리의 흡혈귀가 재가 되어 흩어진다. “우르카쉬. 아밀카!”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강령술사는 김성철이 지금까지 상대하던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걸 감지했다. 흡혈귀들의 움직임이 변화했다. 하늘을 뒤덮던 박쥐 떼가 김성철 사방해 내려앉아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했다. 그 숫자는 눈대중으로만 5천 마리. 나머지 박쥐 떼는 주위를 맴돌며 상황을 보고 있다.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아르카나이트가 김성철을 향해 외쳤다. “지원이 필요한가?” 이에 대해 김성철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필요 없소.” 그와 동시에 먼 곳에서 강령술사의 사악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할쉬!” 그 추악한 외침을 신호로 흡혈귀들이 김성철을 사방에서 덮쳐왔다. “키이이이이!” 죽음의 기운으로 일렁거리는 망자들은 마치 해일처럼 김성철을 삼키려 들었다. 수천 개의 손이 지네의 발처럼 일사불란하면서도 징그럽게 움직였고 송곳니가 어두운 하늘 아래서 스산한 빛을 발했다. 만연한 죽음의 향기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상대하는 존재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 그는 자신의 적에겐 무감정한 도살자고 지칠 줄 모르는 학살자다. 스르릉. 그의 왼손에 한 자루의 대검이 나타났다. “오랜만의 출현이군! 이번에도 냄새나고 더러운 걸 벨 참인가?” 자아를 지닌 검 크럼부이다. “비교적 신선한 녀석이야.”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며 달려드는 흡혈귀들을 도살하기 시작했다. 한 손엔 팔 가라즈, 다른 한 손엔 크럼부이. 두 개의 신병이기가 풍차처럼 움직이자 흡혈귀의 대군은 잿빛의 재만을 남긴 채 증발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신적인 무위. 무쌍의 기풍이다. 순식간에 수백 마리의 흡혈귀가 도살당했고 나머지 흡혈귀도 마치 빨려들어가듯 김성철이란 분쇄기에 도살당했다. 주변을 맴돌던 박쥐 떼들이 속속 주변에 내려 않아 병력을 충원해보지만 김성철이 갈아버리는 속도가 충원되는 속도보다 빨랐다. 결국 흡혈귀 군단은 공세를 중단하고 일제히 박쥐로 변해 김성철로부터 벗어났다. 무인지경. 이제 대지 위엔 김성철과 야만인 강령술사 사이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여전히 하늘을 검게 물들이고 있는 박쥐 떼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이지만 그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것들은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김성철은 두 개의 무기를 양 손에 든 채 그의 기품처럼 담담한 걸음걸이로 앞으로 뚜벅뚜벅 전진했다. 그 고독한 행군은 살아있는 목책 뒤에서 지켜보던 엘프 군과 다른 국가의 군주들의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저것이 제국대원수의 진정한 힘인가?” 이미 인간의 수준이 아니었다. 마계 최전선에서 홀로 악마군 십만 대군 사이를 종횡무진 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실화였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그때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숫자만 채운 하급 악마가 대부분인 악마군 사이에서 날뛰는 것과 고위 언데드 흡혈귀만으로 이루어진 죽음의 군대 사이에서 싸우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니까. 공포를 넘어선 경이감은 인간 측만 아니라 야만인에게도 똑똑히 전해지고 있었다. “우.. 우르카쉬. 다카!” “젠카!” 야만인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은 상대할만한 적 수준이 아닌 그들의 학살자라는 사실을. 강령술사가 소리를 높이며 눈알로 장식된 지팡이를 흔들었다. 허공 위에 맴돌던 박쥐 떼가 김성철 앞에 내려앉아 원래 모습으로 변하며 다시 한 번 흡혈귀의 벽을 쌓았다. “쉬이카!!!” 흡혈귀들이 일제히 안개로 변했다. 검은 기운이 흐르던 전장은 순식간에 흡혈귀가 변한 안개로 자욱하게 뒤덮여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 그럼에도 김성철은 그저 묵묵히 앞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안개 속에서 흡혈귀의 날카로운 손톱이 그의 뒤를 노렸다. 발밑에선 어느새 지면 아래 숨은 흡혈귀들이 흙속에서 손을 뻗쳐 김성철의 발을 노린다. 무의미한 저항이다. 김성철의 전신에 신적인 힘이 흐르고 지나갔다. 김성철의 왼발이 허공에 떠올랐다 지면을 거칠게 밟았다. 쿵! 지축이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발밑에서 손을 뻗치던 흡혈귀들은 충격파 속에서 그대로 내장이 파열되며 재로 변했다. 팔 가라즈가 허공을 갈랐다. 붕- 팔 가라즈 자체에 실린 힘은 물론 그것이 몰고온 풍압이 마치 폭음처럼 터지며 주변의 모든 것을 휩쓸어버렸다. “키이이이이이!” 안개 속의 흡혈귀들은 그 풍압 아래 산산조각 나며 재로 변했다. 형태는 변했지만 또 다시 일방적인 학살이 전개됐다. 하지만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김성철과 강령술사 사이의 거리다. 야만인 전사들이 창과 도끼를 들고 강령술사를 막아섰다. “이노! 이노!” “우르카쉬! 다카!” 저마도 소리 높여 기세를 올려보지만 김성철의 눈엔 똑똑히 보였다. 야만인의 눈에 서린 공포감을. 김성철은 그 대목에서 확정적인 승리를 생각할 수 있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김성철이 갑자기 활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왔다. “다음에 보자고.” 왼손에 들린 크럼부이가 사라지며 검은 나무지팡이가 그의 손에 나타났다. 야만인들은 밀집 진형을 갖추고 쇄도하는 김성철을 향해 방진을 펼쳤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제법 진형도 갖출 줄 아는 족속이었군.’ 하지만 모르는 게 나을 뻔 했다. 검은 지팡이 끝에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미약한 스파크가 튀었다. “체인 라이트닝.” 검은 지팡이에서 고대의 마법이 작렬했다. 이글거리는 전류는 밀집한 야만인 사이를 마음껏 휘저었다. 어깨와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밀집한 야만인들은 무자비한 뇌전의 힘앞에 온 몸에 검게 타버린 채 차례차례 쓰러졌다. 하지만 김성철의 마법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 메아리 X6 ] 하나의 뇌전이 끝나자 바로 다음 뇌전이 야만인을 덮쳤다. 시전시간이 극도로 짧은 체인라이트닝인지라 그 메아리는 마치 속사포처럼 연이어 강타하는 것으로 보였다. 무지막지한 뇌전의 폭풍 속에서 야만인의 방진은 재가 되어 타버렸다. 저벅. 온 몸이 뒤틀린 채 연기를 피어올리고 있는 야만인의 부릅뜬 눈 바로 앞에 김성철의 군홧발이 대지를 밟았다. “…….” 남은 것은 가면을 쓴 야만인 강령술사. 좌우에서 야만인들이 고함을 치며 그들의 주술사를 구원하러 오고 있지만 그들은 멀고 김성철은 가깝다. 그리고 김성철은 야만인보다 빠르다. 팔 가라즈가 겹겹이 쌓은 나무를 일격에 박살냈다. 비산하는 파편 속에서 김성철은 등을 보이고 달아나는 주술사의 뒷모습을 포착하고 그대로 뒤를 쫓았다. “젠카이쉬!” 주술사가 등을 돌리며 지팡이를 흔들었다. 불경한 힘이 깃든 검은 번개가 김성철을 덮쳤다. 그런데 그 검은 번개의 파괴력은 별 볼 일 없는 것이었다. 번개에 깃든 파괴력은 김성철의 영혼각인 천둥방패에 의해 반 토막 났고 김성철 본인이 지닌 마법저항력에 부딪쳐 힘없이 스러져 상쇄됐다. 검은 번개의 진정한 힘은 다른 곳에 있었다. 검은 번개를 맞은 직후 김성철의 시야에 시체와 살점, 피와 음울함으로 뒤덮인 환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정신공격이다. 그것도 대단히 높은 수준의. 천둥방패를 지닌 김성철에게 이 정도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 자체가 전설급에 준하는 정신공격의 일종이라는 이야기. 하지만 김성철에겐 어떤 정신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 환상은 이내 신기루처럼 흩어졌고 흩어지는 환상 너머로 김성철은 자신을 향해 지팡이를 양손으로 치켜 든 주술사를 응시했다. 김성철의 손이 내려쳐지는 지팡이를 한 손으로 잡았다. 묵직한 일격. 하지만 김성철이 지닌 힘에 비하면 야만인의 힘은 필멸자스러운 것이었다. 김성철의 아귀힘이 눈알과 피, 기타 인간의 부산물로 장식된 지팡이를 그대로 뭉개버렸다. 지팡이를 부순 왼손은 앞으로 나아가 주술사의 목을 움켜 잡았다. “끄... 끄으으읔.....! 이... 이노!” 주술사의 발이 들렸다. 주술사는 허공에서 팔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툭. 급기야 주술사의 가면이 벗겨졌다. 가면 아래 숨겨진 것은 의외로 아름다운 젊은 여성의 얼굴이었다. “젠카.... 이노....?” 김성철은 그 주술사를 노려보며 짤막하게 말했다. “닥쳐!” 투둑! 김성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술사의 목뼈는 그대로 끊어졌고 주술사는 절명했다. 김성철은 축 늘어진 주술사의 시체를 지면에 내다버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야만인을 돌아보았다. “다음은 누구냐.” 김성철의 기세를 본 야만인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주춤거렸다. “아직 안 끝난 거 같은데?” 그때 베르텔기아가 불쑥 말했다. 다음 순간, 김성철은 뒤편에서 찬란한 황금빛이 비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 느낌은. 설마.’ 김성철은 의문을 품은 채 뒤돌아섰다. 죽은 주술사의 온 몸에 찬란하고 영광스런 황금의 빛이 머물고 있었다. 김성철의 미간에 미약한 주름이 새겨졌다. “…….” 주술사는 부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영혼각인 부활. 부활의 각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지금 저 주술사가 쓰고 있는 부활 각인의 유형은 질서신을 섬기는 신성한 사제의 것과 불가사의할 정도로 흡사했다. ‘틀림없다. 그 이단심문관과 같은 유형의 영혼각인이다.’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저 흉악하고 인간의 마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야만인이 가장 경건한 질서신의 계열에 속하는 영혼각인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김성철은 의문을 품은 채 주술사가 되살아나길 기다렸다. 팔 가라즈를 움켜 쥔 채 말이다. 황금의 빛이 걷히며 주술사가 완벽하게 회복된 상태로 전장에 돌아왔다. 하지만 부활의 각인은 막상막하의 싸움이라면 모를까, 이런 식의 일방적인 격차가 나는 싸움에선 고통을 배가시킬 뿐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주술사가 죽음에서 돌아온 직후 김성철을 향해 다급하게 말했다. “하... 한 명의 왕?” 야만인이 말했다. 이 세께의 언어로. “한 명의 왕?”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깐의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하지만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주술사는 갑자기 떠올려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두 눈동자에 공포의 빛을 떠올리며 뱀처럼 날카로운 소리를 내뱉었다. “브... 브린스 아르놀트!” 주술사가 두 손에 독기를 피어 올리며 김성철을 공격해왔다. 팔 가라즈가 주술사를 내려쳤다. 주술사는 그대로 지면에 으깨졌다. 주술사의 부활은 한 번으로 끝났다. 하늘을 뒤덮던 박쥐의 무리들이 하나 둘 지면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전장을 뒤덮은 안개가 재로 화하여 걷히기 시작했다. 전투는 끝났다. 김성철을 향해 달려오던 야만인들은 어리둥절하다 이윽고 그들의 운명을 깨달았다. ‘이제는 모두에게 자신감을 심어줄 때군.’ 김성철이 팔 가라즈를 높이 들어올렸다. 그의 전신에서 환한 빛이 났다. 주술사를 되살리던 황금의 빛보다는 옅었지만 그 빛은 마치 대지를 비추는 태양 빛처럼 전장 전체를 두루비치며 검은 구름이 드리운 어둠을 거두어냈다. 그리고 그 빛은 김성철과 뜻을 함께 하는 자들의 심장에 용기라는 두 글자를 아로새겼다. 8위계 빛의 마법. 글로리. 다시는 비춰질 일이 없었던 신성한 빛이 세상을 비춘 것이다. “모두, 진격하라! 남은 잔적을 토벌해라!” 김성철이 팔 가라즈를 휘두르며 일갈했다. 살아 있는 목책 뒤에 숨죽이며 전장을 지켜보던 병사들을 무한한 용기와 자신감을 느끼며 진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갔다. 비록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이지만 그들에겐 더 이상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우두머리는 물론 용기마저 잃어버린 야만인들은 그토록 우습게보던 현 시대의 인류에 대해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야만인들이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자신의 뒤를 노도처럼 채우는 동맹군의 최전선에서 망치를 든 채 앞으로 전진했다. 또 한 번의 승리를 확신하며.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는 3명의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고대왕국의 국왕 아르카나이트다. ‘이것이 세계의 적의 진정한 힘인가.’ 김성철이 악마 십만 대군 사이를 제 집 드나들듯 들었다는 정보는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아르카나이트는 반신반의했었다. 김성철의 그릇의 크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만난 김성철의 크기는 그가 감히 측량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올라와 있었다. 순간 아르카나이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저렇게 강한 힘을 지녔는데 어째서...’ 언제나 오만한 빛을 띠고 있던 아르카나이트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어째서 세계의회 따위를 개최하는 귀찮은 짓을 한 거지? 저런 힘을 지니고 있다면 홀로 모두를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고도 남을 건데.’ 섬뜩한 가정. 하지만 가능한 이야기다. 또 한 명의 관전자는 엘프 쪽 진영의 깊숙이 자리 잡은 경계탑의 그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륙이걸이자 세계의회의 의장이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 추한 노파. 아퀴로아는 경계탑의 그늘 속에서 동상처럼 서서 김성철의 전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 단 한 마디 말도 미동도 없이. 마지막 관전자는 깊은 숲 안쪽, 야만인의 진중에 자리 잡고 있었다. 피로 물들인 가면을 쓰고 거대한 순록 위에 탄 거구의 야만인이었다. “브린스 아르놀트.” 그 야만인 뒤엔 수천 명의 야만인이 질서정연하게 서서 그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록을 탄 야만인은 김성철을 한동안 지켜보다 부하들과 함께 전장을 이탈했다. 그의 귓속엔 다른 세상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 과연, 신의 도구라 할 만하군. ] [ 하지만 생각보다 강하진 않아. 솔직히 실소가 나올 정도의 힘이었다. 전에 느낀 것과는 너무나 다르다. ] [ 결국은 필멸자의 그릇이라는 한계에 묶여 있다는 건가? ] [ 신수(神獸)를 불러내면 어떻게 될까? ] [ 신수까지 불러낼 필요는 없다. 굳이 배신자에게 우리의 비장의 패를 보일 필요는 없겠지. ] [ 하지만 방심은 금물. 저 도구는 가능성을 한 번 보였다. 따라서 결코 오래 살려둬서는 안 될 것이다. ] 음산한 웃음소리가 초월세계의 한복판에서 울려 퍼졌다. 아신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사내. 김성철은 달려드는 야만인 하나를 쓰러뜨린 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꺼림칙한 예감이 느껴졌다. ======================================= 97. 49호 (1) 부유군도는 원래 대륙 서부의 먼 바다, 세계의 끝이라 불리는 까마득한 영역에 존재하는 일군의 부유 암석들의 군락을 일컫는다. 그 부유군도에 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가장 대담한 탐험가들이 기회를 찾아 부유군도 일대를 답사했지만 그들이 내린 결론은 불가해. 너무나도 방대하고 넓어 그 끝을 짐작할 수 없을 뿐더러 강한 기류와 바다 속에 존재하는 무시무시한 마물들은 인간의 침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그런데 대륙 곳곳엔 부유군도를 두고 신비로운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부유군도 깊숙한 곳, 태초의 용의 포효가 들려오며 사라진 조인들이 날갯짓하는 곳에 재앙이 미치지 않는 숨겨진 낙원이 있다고. 부유군도라는 말은 점차 서쪽 바다의 쓸모없는 부유암초지대가 아닌 그 안에 숨겨진 낙원을 가리키는 말로 변천됐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에 지치고 실망한 사람들이 지어낸 동화나 민담 속에 나오는 상상의 소재에 불과했다. 아퀴로아라는 인물이 혜성같이 세계역사의 한 복판에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다. “…….” 순백의 공선. 프루크루스테스. 그 함교엔 한때 이름 높았던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한 여성이 우두커니 서서 함교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창밖엔 가슴을 저리게 할 정도로 즐비한 거대한 부유암초들이 시야를 뒤덮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상황. 그럼에도 조타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능숙하게 키를 조정, 거대한 부유 암초 사이를 부드럽게 빠져 나갔다. 보는 사람의 심장이 멎을 정도의 위태로운 장면만 여러 번째. 마지막 암초를 통과하자 공선 프루크루스테스 앞엔 이 세상의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녹색의 작은 낙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강과 호수가 있고 곧게 뻗어 푸른 잎사귀를 드리운 나무들이 있는 곳.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인간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동물들이 뛰노는 곳. 그것은 그야말로 수많은 동화와 민담 속에서 묘사하는 환상의 이상향, 부유군도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순백의 공선은 은혜로운 자연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엄숙한 궁전 위에 정박했다. 로프와 그물 사다리와 같은 삭구가 차례대로 지면을 향해 던져지는 가운데 아퀴로아는 마법을 시전 해 가볍게 부유군도의 석조포도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아래에 모여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아퀴로아를 지나쳐 다른 승무원들을 향해 뛰어가 그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 안엔 이 세상의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존재도 있었다. “아빠!” 아이였다. 수많은 소년소녀들이 아퀴로아를 지나 그들의 부모를 향해 총총 뛰어갔다. 그 안에서 아퀴로아는 철저히 혼자였다. 그녀는 쓸쓸히 군중 사이를 지나 광장의 저편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얼마나 걸었을까. 사방에서 타종 소리가 울리며 귀청을 때렸다. “나하크다!” “나하크의 습격이다!” 광장 곳곳에 자리 잡은 경계탑의 병사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댔다. 광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전락했지만 군중들은 곧 평정을 되찾고 경비병의 지시에 따라 광장 곳곳에 마련된 대피호로 질서정연하게 대피를 실시했다. “저쪽이다!” 경계탑의 병사가 손가락으로 북쪽 하늘을 가리켰다. 흰색, 파란색, 갖가지 색깔을 지닌 깃털을 지닌 조인이 무리지어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구세병을 전개해라!” 광장 곳곳에 마법진이 나타나며 푸르스름한 살갗을 지닌 기괴한 생명체. 구세병이 모습을 드러내며 하늘을 응시했다. 조인들은 매처럼 빠르게 구세병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가공할만한 마법 폭격을 지면에 가했다. 쿵! 쿠궁! 광장 곳곳에 폭발이 일어나는 가운데 철저히 혼자로 남겨진 자, 아퀴로아는 무너진 돌담 뒤에 쪼그려 앉아 몸을 숨기고 있었다. 쿵! 쿵! 폭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렸고 거친 노호성이 들려왔다. 언제나의 일상. 모든 이들이 선망하던 낙원은 동화나 민담 속의 그것처럼 낭만적인 곳이 아니었다. 그곳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불합리한 세상을 피해 온 고대의 종족이. 낙원에 당도한 인간들은 날개 달린 또 다른 인간과 항구적인 전쟁을 벌여야 했다. 쿵! 마법폭격이 지근거리에서 터졌다. 아퀴로아가 몸을 숨기고 있던 돌담이 무너지며 그녀를 덮쳤고 거친 먼지가 주변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콜록! 콜록!” 아퀴로아는 격렬하게 기침하며 잔해 사이를 파헤치며 빠져 나왔다. 양질의 재질의 만든 옷과 가면 전체가 하얀 석회질의 가루로 뒤덮여 있었다. 아퀴로아는 결국 독해불가능한 문자가 적힌 가면을 벗어제꼈다. 가면이 벗겨지며 인간의 살가죽과 같은 것이 딸려 나왔다. 그것은 인간의 피부로 만든 가면, 주름진 노파의 얼굴모양을 가지고 있었다. 가면 뒤에 숨겨져 있던 젊은 맨얼굴은 광장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응시하고 있었다. “후우우우.....” 한줄기 한숨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후회와 탄식, 혹은 기쁨과 그리움,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 담긴 젊은 여성의 한숨소리였다. “김성철.” * 북방전역이라 명명된 엘프 국경선에서 벌어진 전투는 김성철이 이끄는 엘프 - 세계의회 동맹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엘프 연합왕국 북부 국경선을 위협하던 야만인은 수많은 사망자를 남긴 채 패주했고 노련한 엘프 병사들은 그들을 끝까지 추적해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완벽한 승리였다. 피해자가 전무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주눅 들었던 병사들의 사기를 살리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당장은 물론 미래까지 아우르는 승리였다. 엘프 국경선을 위협하던 야만인의 세력은 일소됐고 전선은 안정됐다. 어려운 일을 해낸 김성철은 엘프 군주의 연회 제의도 마다하고 익시온으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썩 김성철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그는 엘프 족의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걸 아쉬워하고 있었다. 떠들썩한 연회는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엘프들의 음식, 특히 엘프 왕궁에서 빚는 담금주는 기가 막힐 정도로 맛있는 명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성철은 연회에 참석할 수 없다. 그의 뒤엔 엄격한 감시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흐-음....” 김성철에겐 어떤 호랑이 감독관보다 무서운 존재는 다름 아닌 베르텔기아다. 그녀는 김성철의 바로 뒤를 따르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강한 압박을 넣고 있었다. 어서 빨리 창조술사 퀘스트를 수행하라는 창조술사 안내인의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 딱히 김성철도 할 말은 없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한 달 전에 이미 익시온에 있는 2기의 거신의 시험을 통과했어야 했다. 다만 엘프 쪽 사정이 워낙에 다급해서 어쩔 수 없이 생략했다. 김성철은 이 대목에서 자신의 무심함이 어느 정도인지 무심코 느낄 수 있었다. ‘사람 마음이란 참 간사하군.’ 베르텔기아의 몸에 난 구멍을 볼 때마다 마치 자기 가슴에 구멍이 난 것 마냥 아픔을 느꼈는데 막상 베르텔기아 본인은 평소와 별 다른 거 없이 뽈뽈 거리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걸 보다보니 이왕 늦은 거 하루나 이틀 정도는 더 늦어도 되지 않냐는 마음이 고개를 들고 일어선 것이다. 김성철은 9년 전에 맛보았던 엘프 궁정의 미주의 맛을 회상하며 입맛을 다셨다. “쩝.” “응? 무슨 소리지? 방금 그건?” 감독관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작은 심리변화마저 포착해 그를 몰아세운다. “…아무것도 아니다.” “설마 또 그 술 생각을 한 건 아니겠지?” 김성철의 마음을 제대로 짚었다. 김성철은 순간 새로운 영혼각인 강철의 혼의 효용성을 의심했다. ‘정신공격 안 통하는 거 아니었나.’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럴 리가.” “어차피 당신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했던 엘프주는 그 중닭이 가지고 올 예정이잖아.” 베르텔기아의 말마따나 김성철 패거리 비공식 서열 3위 마라키아는 현재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김성철을 대신해 엘프 군주의 연회에 참석했다. 그 진정한 목적은 엘프주 얻어오기 였지만 다른 주요한 목적도 있었다. 마라키아는 어디에 가나 인기를 몰고 다니는 인기조였다. 귀여움은 떨어지긴 했지만 어느새 익힌 유머와 위트, 신비로움으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력이 바닥인 김성철로선 꿈도 꾸지 못하는 재주. 게다가 머리가 좋은 편이라 김성철을 대신해 그의 메시지를 엘프 궁정에 전하며 그들의 동향을 읽는 임무도 가볍게 수행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얼굴 마담인 격이다. 하지만 마라키아는 언제나 그렇듯 미심쩍인 구석이 있다. 잘나가다 꼭 중요한 걸 하나씩 빼먹는 습관. 어쩌면 고의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마라키아가 어쩌면 고대하던 엘프주를 들고 오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음....” 물론 이 문제는 닥쳐봐야 알 수 있는 문제고 더 이상 생각을 겨를도 없다. 김성철과 베르텔기아는 엘프들이 자랑하는 텔레포트 네트워크 앞에 당도했기 때문이다. 엘프들은 그들의 거미줄 같은 텔레포트 연결망을 여행의 문으로 부르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 여행의 문 앞에서 화려한 갑주를 걸친 엘프 병사들이 그를 맞이했다. “오오, 바탄 평원의 영웅이다!” “야만족 네크로맨서를 망치질 한 번에 박살낸 제국 대원수가 이곳에 오셨군!” 예전과는 대접이 전혀 다르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해서데인과 함께 엘프 족의 땅을 처음 밟을 때만 해도 두려움과 경계심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던 병사들이 이제는 찬탄 어린 눈으로 그를 응시했고 일각에선 낯이 뜨거운 정도의 찬양마저 하고 있었다. “…….”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김성철 뒤를 바짝 따르며 김성철을 익시온으로 몰던 베르텔기아도 부담스런 시선을 느끼고 살짝 아래로 하강해 김성철 등 뒤에 숨을 정도였다. “세계대원수!” 한 엘프가 장난인지 혹은 진담인지 모를 칭호로 김성철을 불렀다. 김성철은 생소한 칭호를 듣고 피식 웃었다. “왜 웃어? 맞는 말인 거 같은데.” “그러게 말이야.” 말은 맞는 말이다. 김성철은 더 이상 제국의 군인이 아니니까.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이러다 우주대원수가 되는 거 아닌가.’ 여행의 문 앞엔 미리 연락을 받고 온 해서데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을 위한 여행 수속은 모두 마친 상태입니다. 언제든 자유롭게 우리 엘프 족의 문을 여행하여주십시오.” 해서데인은 김성철에게 진심어린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젊은 왕자를 한동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리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 전부 끝난 건 아니다. 승리를 자축하는 것도 좋지만 병사들이 너무 풀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군.” 극적인 승리를 한 차례 거뒀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야만인의 위협이 가지 않은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첩보와 정찰에 의하면 만 명에 달하는 야만인이 북방 국경선 응집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김성철과 동맹군이 해치운 숫자는 2천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정찰병이 보고한 숫자는 아이와 여성 등 비전투원의 숫자를 포함한 것이고 한 명 한 명이 대륙십삼걸에 준하는 능력을 지닌 야만인을 무려 2천 명이나 처리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전과긴 하지만 말이다. 대부분의 야만인은 왕겨처럼 흩어졌다고 하지만 일부 확인되지 않은 정찰병의 증언에 의하면 한 무리의 야만인들이 대오를 유지한 채 질서정연하게 숲의 그늘을 따라 퇴각했다고 전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야만인들은 완전히 패배한 게 아니고 언젠가 다시 세력을 규합하는 대로 공세를 재기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북방의 야만인의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혹자는 만 명을 주장하나 일각에서는 야만인의 숫자가 십만이 넘는다는 설도 제기하고 있으니. 하지만 늘 그렇듯 모든 것은 닥쳐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야만인이 다시 한 번 공세를 가해온다면 그때는 다시 박살낼 뿐.’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익시온으로 통하는 마법진에 올라서서 전송을 요청했다. “드디어! 드디어 창조술사 퀘스트를 하게 됐네!” 목적을 달성한 베르텔기아가 뛸 듯이 기뻐하며 김성철의 주머니 안으로 파고들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감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김성철은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통하는 철창이 열리는 걸 보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법진 위에 올라서자 베르텔기아가 몸을 뒤척이며 말했다. “그나저나 당신. 연금가마 안 쓴지 몇 달은 지난 거 같은데. 별가루 설탕 만들고 한 번도 안 했었지?” “그렇고 보니 그렇군.” “흐-음. 그래가지고 창조술사 퀘스트 할 수나 있겠어? 감이 완전히 죽었을 텐데.” “해봐야 아는 거지.” 마법진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전송이 시작된 것이다. 김성철은 눈을 감고 주위가 마법진의 빛으로 가득 차는 것을 느끼며 전송이 완료되길 기다렸다. 빛이 사라지고 풍경이 바뀌었다. 매캐한 유황 섞인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법진을 지키던 엘프들이 김성철의 전송을 알아차리고 다가와 철창을 열어주었다.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제국대원수.” 김성철은 약간의 나른함을 느끼며 여행의 문을 나섰다. 동쪽에 벽처럼 자리 잡은 황색의 장벽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낙진을 본 김성철은 낙진의 크기가 전과는 또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지난 한달 간 야만인과 대치하는 사이 죽음의 낙진은 야금야금 대륙을 덮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낙진에서 갈라져 나온 한 무리의 황색 안개가 익시온의 끝자락을 살짝 덮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도시는 낙진 아래 잠겨버릴 것이다. 짧으면 한달? 길어봐야 두 달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김성철은 잠시 들떴던 마음이 착잡하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야만인을 몰아낸 것은 괄목할만한 성과다. 하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재앙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이 세계는 조금씩 그리고 확실하게 멸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죽음의 낙진은 그런 절망적인 현실을 거대한 존재감을 통해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서두르긴 잘했군.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김성철은 죽음의 낙진 아래 우뚝 선 두 기의 거신을 응시했다. ======================================= 97. 49호 (2) 거신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익시온 시내를 가로질러야 한다. 익시온 시내는 폐허가 됐지만 생존자들은 마커레이드의 지휘 아래 폐허 아래 참호와 땅굴을 파고 제2의 터전을 마련했다. 김성철은 발을 함부로 디딜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민들이 밀집해있던 참호 지대를 떠올리며 그곳으로 접근했다. 한 달이 지난 지금, 참호 안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한참을 참호를 따라 걸은 뒤에야 김성철은 한 노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빛바랜 마법사의 로브를 걸치고 삐걱거리는 안락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시력은 이미 잃었는지 김성철이 다가오자 김성철을 비껴난 엉뚱한 지점을 응시했다. 김성철이 그에게 왜 이곳을 떠나지 않느냐고 묻자 그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미 한 번 고향을 버리고 떠난 몸이오. 그래서 확실히 알게 됐지. 늙은이에게 고향을 버린다는 것은 살아온 세월을 함께 버린다는 것을.”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태도였다. 그는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눈을 지그시 감고 몸을 편안히 의자에 뉘였다. 호문클루스 몇 마리가 눈치를 보며 노인의 발치 아래를 돌아다녔다. 입고 있는 옷을 보니 과거 익시온의 시내에서 청소를 하거나 교통정리를 하던 무리였다. 김성철은 노인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곧 김성철은 한 무리의 병사를 만날 수 있었다. 마커레이드의 병사였다. 그들은 익시온에 남은 서류와 쓸 만한 자원을 수색하기 위해 남겨졌다고 하면서 마커레이드는 이미 동부연합의 정예와 유민을 이끌고 낙진에서 안전한 땅을 찾아 서쪽으로 떠났다고 한다. “저희들도 곧 이곳을 떠날 예정입니다.” 김성철은 그들과도 작별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곧 참호의 끝자락에 이르렀다. 엄지손가락만 하던 거신은 어느덧 고개를 들고 올려봐야 할 정도로 커져있었다. “왠지 쓸쓸 하네.” 베르텔기아가 말했다. “처음 여기 왔을 땐, 제법 괜찮은 도시였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렇군.” 김성철은 문득 이 도시에 기거하던 아름다운 베스티아레에 대해 생각했다. 하루 만에 만든 도시를 하루 만에 부셔버렸을 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영원히 풀리지 않을 의문이리라. 김성철은 잠시 들었던 의미 없는 생각을 흩어버리고 이제 자신 앞에 자리 잡은 거신을 올려다보았다. “슬슬 시작해볼까.” 그때였다. “어?” 베르텔기아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김성철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 권의 책이 김성철 일행 앞에 어느 순간 출현했다. “짝퉁? 또 너냐?” 베르텔기아가 험악하게 물었다. 김성철의 눈엔 다 똑같이 보이지만 베르텔기아의 눈엔 분간이 되는 것 같았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의 말을 듣고 자신 앞에 나타난 책의 정체를 짐작했다. ‘익시온의 멸망 전에 내 앞에 나타났고 그리고 세계의회 회의장에서 나타났다 바로 사라진 그 녀석이군.’ 그리고 또 하나. 김성철의 눈에 우울한 빛이 떠올랐다. 은자의 탑에서 만났던 또 다른 책이 남긴 말이 뇌리를 스치고 그의 심장을 후벼 판 것이다. [ 아마도 그 아이는 49호라고 생각해요. ] 그것은 결코 발설해서는 안 되는 비밀이다. 적어도 베르텔기아 본인 앞에선. 아무튼 지금 그 문제의 책이 다시 김성철 앞에 나타났다. 어떤 용무가 있는 모양이다. 김성철은 그 책을 노려보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용건이지?” 이에 책은 마치 인사를 하듯 위 아래로 동체를 움직인 후 베르텔기아와 같은, 그러나 보다 예의바르고 아가씨다운 톤으로 말했다. “다시 뵙네요. 부수는 자. 회의장에서 따로 인사를 드리지 못한 점은 사과드릴게요.” 짤막하게 인사를 한 그 책은 김성철 앞에 새침하게 다가오더니 이윽고 김성철의 주머니 안에 있는 베르텔기아와 같은 높이로 이동했다. “오늘 제가 당신 앞에 나타난 건 당신에게 볼 일이 있는 게 아니라 거기 있는 짝투웅.. 아니, 가짜에게 볼 일이 있어서 왔어요.” “뭐? 가짜?!” 베르텔기아가 버럭 하며 주머니 밖으로 뛰쳐나왔다. 원래의 커다란 모습으로 돌아온 베르텔기아는 몸을 가볍게 부들거리며 똑같은 모습의 책 앞에 대치했다. “짝퉁은 너잖아!” “…….” 베르텔기아가 강하게 나오자 문제의 책은 딴청을 피우는 듯 몸을 살짝 기울여 베르텔기아를 외면했다. “베르텔기아 진정 좀 하고 일단은 이 녀석의 말을 들어보자.” 김성철이 둘 사이를 중재했다. 굳이 베르텔기아의 편을 들지 않은 것은 수수께끼의 책이 악의로 여기에 나타난 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짝퉁의 말을 들을 필요가 뭐가 있어!” 베르텔기아가 그녀답지 않게 흥분하며 몸을 좌우로 떨었다. 그 반동일까, 마라키아가 붙여둔 반창고가 살짝 떨어져 나풀거렸다. 떨어진 반창고가 있던 자리엔 암살자가 남긴 구멍이 유감없이 드러났다. 책은 그 베르텔기아의 상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몸으로 창조술사 퀘스트는 수행할 수 없어.” 책이 말했다. 단정적인 어조였다. “짝퉁이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건데?” 베르텔기아가 역정을 냈다. “견디지 못할 거야. 완전성을 잃은 네 몸으로는.” “뭐라고?” “정 시험해보고 싶으면 직접 도전해봐. 말리지는 않을 테니까.” 책은 그렇게 말한 후 뒤로 물러나며 김성철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선택은 당신에게 달렸어요. 창조술사 퀘스트를 수행할지 안 할지는.” 베르텔기아하고는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 집념이 태도와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베르텔기아도 그 책을 상대하기 싫긴 매한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김성철의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며 분이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짝퉁은 무시하고 그냥 빨리 거신 안으로 들어가자고.” “…….”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책을 지나칠 때 김성철은 고개를 돌려 책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할 말이 남았나?” 책은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아니오.”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거지?” “문제가 생기면 대처하기 위해서요. 알다시피 당신은 극도로 위험...” 그때 베르텔기아가 책의 말을 끊으며 불쑥 입을 열었다. “그냥. 무시 해. 친구 없어서 심심한 모양이지.” “뭐.. 뭐라고?!” 묘하게 책은 베르텔기아의 빈정거림엔 민감하게 반응했다. 김성철은 더 이상 둘을 붙여놔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하며 훌쩍 첫 번째 거신으로 뛰어올라 조종석으로 향했다. 조종석 안은 여느 거신의 구조와 동일했다. 조종실로 통하는 돌로 된 문을 열어젖히자 오래된 먼지가 쌓인 조종석이 둘 앞에 펼쳐졌다. “아, 호사다마라더니. 진짜 그 말이 맞네. 기분 좋은 시점에 갑자기 나타나 초를 치질 않나.” “무시해라.” “무시를 하려고 해도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걸. 이 녀석이고 저 녀석이고 죄다 나랑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잖아.” 베르텔기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머니 밖으로 뛰쳐나가며 조종실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또 다른 책 앞으로 날아가며 덧붙였다. “이 녀석까지 말이야!”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응시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버지가 만든 것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그건 그래. 하지만, 당신은 그 기분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꺼야. 정교한 짝퉁들이 진품의 위치를 위협하는 그 꺼림칙함을!” “동대문이 떠오르는군.” 무심코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뉴스를 보면 왕왕 나오던 본토 명품 기술자마저도 감탄한다는 실력을 지닌 짝퉁기술자에 관한 이야기를 말이다. “동대문?”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저쪽 세계 이야기다.” “흐음....” “게다가 비슷한 경험도 했고.” “어떤 경험?” “종말교단이 내 이름을 팔아먹었던 경험.” “아, 그러고 보니 그것과 조금 비슷하긴 하네. 아주 같진 않지만!” 베르텔기아는 조종석 내부를 한 바퀴 호쾌하게 돈 후 김성철 어깨 쪽에 내려앉으며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시작하자고! 위대한 창조술사의 퀘스트를!” “너답지 않게 기운이 넘치는데.” “가끔 나도 힘 좀 써야지!” 김성철은 피식 웃으며 거신에 숨겨진 창조술사 퀘스트를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창조술사의 퀘스트는 시험을 요구한다. 숨겨진 선반이 나오며 억겁의 세월 동안 잠들어 있던 수많은 연금술 재료들이 선반 위에 놓인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응시했다. 여기서는 창조술사로 향하는 안내자 베르텔기아만이 정확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르텔기아의 몸에 은은한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흠흠. 이 연금재료들의 최종 레시피는....” 그때였다. 빛을 머금은 채 허공에 떠올라 있던 베르텔기아가 갑자기 크게 휘청거리더니 추락했다. 다행히 떨어지던 도중 균형을 잡고 하늘 위에 떠오르긴 했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장면이다. ‘베르텔기아!’ 김성철은 놀란 눈으로 베르텔기아를 응시하며 물었다. “괜찮나? 베르텔기아.” “응. 괜찮아. 그나저나 갑자기 왜 이러지.” 베르텔기아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반창고가 떨어져 드러나 보이는 구멍이 전에 없이 커보였다. 베르텔기아는 싱겁게 웃고는 원래 자리로 떠올라 그녀 안에 숨겨진 레시피를 다시 찾기 시작했고 곧 거신이 원하는 진정한 레시피를 찾아내 김성철 앞에 펼쳤다. “짜잔! 이번에 만들 것은 무려 궁수의 돌이네!” 다행히 베르텔기아는 제대로 기능했다. 게다가 레시피를 공개한 것도 모자라 선반 위에 놓인 수많은 재료 중에 필요한 녀석 앞에 머무르며 무엇이 필요한지 손수 안내하기까지 했다. “보다시피 난 아무 문제없다고! 어서 빨리 만들기나 하라고! 내가 얼마나 이 순간만을 기다렸는데.” 여기까지만 보면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거슬렸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했다. 베르텔기아의 몸 전체를 관통하는 칼로 찌른 상처는 숨겨진 페이지에도 똑같이 새겨져 있었다. “…….”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무심한 얼굴을 보더니 그에게 불쑥 몸을 들이밀며 말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 거야? 연습이 필요해?” “아니, 딱히 그런 건 필요하지 않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가 펼치고 있는 레시피를 보며 재료를 다듬기 시작했다. 연금술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손이 많이 가고 정교한 손기술과 경험에 의한 계량 등을 요구하긴 하지만 요리로 단련된 김성철에겐 그다지 어려울 게 없는 평상의 행위. 그를 거리끼게 만드는 것은 연금술 자체가 아니라 바깥에서 만났던 책이다. 그 책은 베르텔기아가 창조술사 퀘스트를 수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렇다. 베르텔기아는 아까 받은 충격 탓인지 제대로 허공에 머무르지 못하고 자꾸만 휘청거리고 있었다. “왜 가만히 있어? 어서 연금술사는 연성이나 하라고. 내 걱정일랑 하지 말고!”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시선을 느끼고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김성철을 알 수 있었다. 지금 베르텔기아가 무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베르텔기아.’ 의문이 들었다. 계속 이 작업을 수행해도 되냐는. 왜냐하면 이 연성이 끝난 후 베르텔기아가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책에 담긴 지식의 전수. 그것은 숨겨진 레시피를 찾는 것보다 훨씬 더 베르텔기아에게 무리를 줄 것 같았다.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김성철의 호흡이 일순 멈췄고 그의 눈동자엔 비할 바 없는 공포심이 떠올랐다. 그때였다. “설마, 아까 그 짝퉁 말 듣고 주저하는 거 아니겠지?” 베르텔기아가 질책하듯 물었다. 제대로 짚었다. 하지만 김성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난 괜찮으니까 계속해.” “하지만 베르텔기아.”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지적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베르텔기아의 태도가 이상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얼굴이 없기에 표정도 없는 책. 그 책을 본 것만으로 슬픔을 느끼는 것은. “…그만두기만 해봐.” 베르텔기아가 살짝 몸을 떨며 말했다. “다시는 당신하고 말 안 할 테니까.”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느낄 수 있었다. 창조술사 퀘스트에 대한 베르텔기아의 집념, 아니 각오라는 것을. “그렇게까지 자기 몸을 되찾고 싶은 게냐?” 김성철이 달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은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고는 이내 몸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응.” 대답을 확인한 김성철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다시 뜬 그의 눈동자엔 언제나처럼 무심한 흔들리지 않는 의지가 머물러 있었다. 김성철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주저하던 손길이 아닌 대담한 연금술사의 손길이 재료들을 훑고 선별하고 가공했다. 수많은 기구들이 숙련된 연금술사의 지휘아래 저마다의 역할을 다했고 선반 위의 재료들은 점점 하나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베르텔기아는 한 명의 연금술사가 된 김성철의 뒤에서 흐뭇한 기분으로 그의 등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나의 장면이 그녀의 마음속을 따뜻하게 채워나갔다. 한때 에크하르트라 불렸던 남자가 가족을 위해 묵묵히 주걱을 젓는 모습을. 전혀 다른 뒷모습이지만 또 다른 사내도 주걱을 젓고 있었다.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 주걱이 휘젓는 가마 속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베르텔기아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슬며시 김성철의 뒤를 다가갔다. 가마 안엔 빛나는 주홍빛의 돌이 떠오르고 있었다. 궁수의 돌. 창조술사 퀘스트를 위한 핵심 아이템이 또 한 차례 연성된 것이다. 베르텔기아는 몸 깊숙한 곳에서 자기 의지와는 상반된 무한한 힘을 느끼며 그것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아버지의 퀘스트를 수행한 사내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상과 새로운 안내를 하기 위해. “응..?” 갑자기 베르텔기아의 시야가 지진이 난 것처럼 한 차례 흔들렸다. “어라...?” 베르텔기아가 갑자기 허공 위에서 한 차례 크게 휘청거렸다. ‘어라...? 내가 왜 이러지....?’ 그제야 베르텔기아는 눈치 챌 수 있었다. 몸 안에 서린 따뜻한 힘이 암살자가 낸 흉한 구멍을 통해 빠져나가는 것을. 멀리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 깨진 그릇은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 ] 일말의 정도 담기지 않은 엄격한 음성이었다. 베르텔기아는 어째서인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 것만 같았다. ‘깨... 깨진 그릇?’ 흐릿한 시야 속에 한 명의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머리색을 지닌 여인의 손을 잡은 채 빛이 모로 새어 들어오는 문가에 서 있었다. 그 소녀는 싸늘한 시선으로 뒤를 한 차례 돌아보고는 손을 잡은 여인과 함께 문을 나섰다. 그것이 베르텔기아가 본 마지막 장면. 그 장면을 본 것을 끝으로 베르텔기아의 시야는 완연한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베르텔기아!” 김성철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추락하는 베르텔기아를 받았다. “베르텔기아!” 베르텔기아는 미동도 없었다. 마치 자신이 평범한 책인 것처럼. 김성철의 몸이 한 차례 떨렸다. 그를 지탱하던 내면이 무언가가 끊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당황하지 마세요.” 김성철 앞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베르텔기아와 꼭 닮은 한 권의 책이다. “너.. 너는..?” 김성철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책은 김성철과 베르텔기아를 똑바로 보며 마치 기계처럼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예측범위 내입니다. 잠시만 그대로 계셔주세요.” 스스로를 49호라 밝힌 책에게서 환한 그리고 따뜻한 빛이 물결처럼 흘러나와 김성철의 손바닥 위에 누운 베르텔기아를 향해 뻗어갔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빛의 물결을 받은 베르텔기아의 몸에 난 구멍들이 스스로 메꿔지기 시작한 것이다. 놀라움 속에서 김성철은 들을 수 있었다. 베르텔기아를 꼭 닮은 책의 또렷한 음성을. “베르텔기아 49호. 동 153호에 대한 긴급수복을 실시합니다.” ======================================= 97. 49호 (3) 그것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였다. 종말교단과의 힘겨운 전투를 벌이고 황제와의 조촐한 연회를 끝낸 뒤였다. 김성철은 은자의 탑 안에서 한 권의 책을 만났다. 자신을 베르텔기아 55호라고 소개하던 책이었다. 김성철은 그때의 대화를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먼저 말을 건 것은 김성철이었다. “베르텔기아 55호...? 그게 뭐지?” 그 시점에서 김성철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것을 묻고 있다는 것을. 김성철 정도의 경험이 쌓인 사람이라면 세상엔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사실이 종종 존재한다는 말에 공감할 것이다. 그는 피 끓는 젊은이도 아니고 참견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참견꾼도 아니다. 하지만 사람은 종종 실수를 한다. 뒤이어 몇 가지 질문이 이어졌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무거운 진실이 재앙의 서를 지키던 책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김성철은 크게 충격을 받았고 그 사실을 가슴 깊은 곳에 봉인하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늘 함께하는 베르텔기아 본인에게조차.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때 맞닥뜨린 무거운 진실은 다시 한 번 김성철 앞에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네, 제가 베르텔기아 49호예요.” 베르텔기아를 치료한 책이 기계처럼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김성철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김성철의 눈앞에 한줄기 바람이 불며 은자의 탑, 재앙의 서 보관고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회상 속에서 김성철은 책 앞에 서 있었다. 스스로를 55호라고 칭하던. 그때 김성철은 그 책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와 비슷한 녀석을 본 적이 있는데.” “응? 누구 말이죠? 바깥에 있는 아이요?” “아니, 익시온이라는 나라에 있을 때 한 녀석이 내 앞에 나타나 퀘스트를 의뢰하더군. 너와 비슷한 녀석이었지만 사뭇 분위기가 달랐어.” “그래? 혹시 그 아이. 무뚝뚝했나요? 마치 기계처럼?” 김성철은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55호는 김성철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도 그 아이는 49호라고 생각해요. 아버님을 옆에서 모시는 건 이쪽이지만 아버님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건 49호가 유일하거든요.” 회상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그때 입에 오르내리던 49호가 지금 김성철 바로 앞에서 말을 걸고 있다. “저기. 저기요?” 김성철은 고개를 들어 49호를 응시했다. “무슨 일이냐?” 김성철이 묻자 49호는 잠시 머뭇거리며 김성철의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제가 49호라는 건 어떻게 아셨나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인데.” “아까 네 입으로 말했잖아.” “제가 언제요? 저는 그렇게 입이 가벼운 책이 아니랍니다.” 49호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김성철에게 따졌다. 하지만 아무리 행동거지가 얌전하고 말투가 점잖다고 해도 잘못한 건 잘못한 거다. 김성철이 49호를 무심한 눈으로 노려보며 퉁명스레 말했다. “아니, 아까 긴급수복이니 뭐니 하면서 49호라고 말했잖아.” “…아. 아앗?!” 49호는 충격을 받은 듯 허공에서 글자 그대로 정지했다. “쿵-.” 이상한 소리를 내는 건 덤. 그동안 김성철은 천위에 뉘인 베르텔기아를 근심이 드리운 눈동자로 응시했다. 겉보기에 상처는 완치됐다. 마라키아가 붙여놓은 너덜거리는 반창고가 상처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줄 뿐, 구멍이 있었던 자리는 어떤 작은 흠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말끔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 베르텔기아는 정신을 잃은 이래 깨어나지 못했다. “이 녀석은 무사한 거냐?” 김성철이 베르텔기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네, 당분간은.” 49호도 어느 정도 충격에서 회복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발언이 있다. 김성철의 고개가 49호를 향해 돌아갔다. “당분간은?” 49호는 점차 냉정을 찾으며 특유의 기계적인 어투로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곳에 남은 창조술사 퀘스트를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은 회복한 상태예요.” “그런가?” 다행이다. 김성철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갑작스레 나타난 49호에게 무한한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49호는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았다. 49호는 뒤이어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퀘스트를 계속하는 것은 추천하진 않아요.” 김성철은 의아함을 느꼈다. “왜지?” “아버님이 더 이상 원하시지 않거든요. 누군가 그 퀘스트를 완료하는 걸 말이죠.” 49호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말이 가지는 힘은 목소리의 크기에 좌우되지 않는다. 말의 힘은 어디까지나 그 말이 내포한 의미에 의해 좌우된다. 지금도 그렇다. 신경을 기울이지 않으면 놓쳐버릴 정도로 작은 말 한마디에 김성철이 알고 있고 당연하다고 믿고 있던 사실이 흔들렸다. “…에크하르트가 창조술사 퀘스트를 원하지 않는다고?” 그것은 소환궁전에서 처음 에크하르트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그가 남긴 당부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거기서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지닌 지식과 힘을 전부 줄 테니 그 대신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딸, 베르텔기아를 되살려달라고. 그 안내인인 베르텔기아도 몇 번이고 그 말을 강조했다. 빨리 김성철을 창조술사로 만들고 인간의 육체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때의 다짐과 희망이 송두리째 부정되고 있다. 베르텔기아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같은 이름을 지닌 또 다른 책에게. 49호는 계속해서 말했다. “네. 사정이 달라졌어요. 10년 전의 당신과 현재의 당신이 같지 않은 것처럼, 소환궁전에서 창조술사 퀘스트를 만들던 아버님과 현재의 아버님과는 전혀 다른 존재지요.” “전혀 다르다고?” “네. 모든 의미에서.” 거신의 조종실에 다시금 침묵이 찾아왔다. 침묵을 깬 것은 49호였다. “게다가 현실적인 이유에서 퀘스트의 속행을 추천하지 않아요. 저의 치료는 완벽한 것이 아니고 임시방편에 그치는 것이거든요.” “임시방편이라고?” 49호는 고개를 끄덕이듯 몸을 흔들고는 말을 이었다. “아마도 153호는 이 거신, 그리고 다음 거신, 그러니까 이곳 익시온에 남은 퀘스트에선 버틸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북쪽에 남은 두 거신, 그리고 최후의 거신 안에 숨겨진 힘을 해방하기엔 역부족이에요.” “역부족이라는 말의 의미는?” “단순한 기절로는 끝나지 않을 거예요. 어쩌면 몸 전체가 타버릴 수도 있고 아니면 갈가리 찢겨져 재만 남을 수도 있어요.” 49호의 감정 없는 목소리를 듣던 김성철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 “그렇게 되면 아마도 대단히 위험한 일이 벌어지겠죠. 님파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말을 들은 순간, 김성철의 눈앞에 검은 거인의 모습이 번갯불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내면에 숨겨진 검은 거인의 힘은 단순히 회상하는 것만으로 김성철의 심장을 저리게 만든다. 김성철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전부 보고 있었던 건가?” 김성철이 지친 음색으로 물었다. “긍정. 아버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신 답니다. 신을 대신해 이 세상을 관장하는 위대한 존재로서.” 그때 김성철의 코끝에 매캐한 유황냄새가 스치고 지나갔다. 열린 입구에서 불어 들어온 한 줄기 바람에 죽음의 낙진이 품은 냄새의 일부가 실려 들어 온 것이다. 그 자극적인 냄새는 김성철로 하여금 한 사내의 얼굴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칠영웅 데스포트. 죽음의 낙진을 일으킨 원흉이자 비열한 소인배. 그 데스포트의 말대로 에크하르트는 신과 비슷한 존재가 된 모양이다. “…모든 걸 본다고?” “엄밀히 말하자면 모든 걸 보시는 건 아니에요. 그랬다간 몇 남지 않은 아버지의 수명이 더욱 줄어들겠죠. 그래도 대부분의 것을 보세요. 하지만 당신처럼 강력하고 위험한 존재 같은 경우엔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신답니다. 저 같은 특별한 도구를 이용해서요.” 49호는 책장을 한 차례 오므렸다 펴고는 전신에 푸르스름한 빛을 일으켜 존재감을 어필했다. 성격은 판이하지만 하는 짓은 베르텔기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49호를 노려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있다는 건 눈치 채지 못했는데.” 김성철의 시야를 벗어나는 건 많지 않다. 자체의 오감도 필멸자 중에서 으뜸갈 정도로 뛰어날 뿐더러 전설급 영혼각인 진실의 눈은 그의 앞에 나타나는 어떠한 마술적인 장난과 협잡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런 김성철의 이목을 속인 것은 한 명 뿐이다. 아무개라는 가명을 쓰고 다니는 회귀자 말이다. 김성철의 물음에 49호는 의식적으로 쓰던 기계적인 말투마저 잊은 채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럴 수밖에요. 이래 뵈도 저에겐 완벽한 은신을 가능하게 만드는 신화급 영혼각인이 하나 있거든요.” “신화급 영혼각인?” “뭐, 그런 시시콜콜한 건 중요한 일이 아니니 그냥 넘어가죠. 어차피 당분간 저는 당신 옆을 관찰해야 되는 임무를 맡았으니 능력껏 찾아보세요.” 기계인척 하지만 자기 자랑할 때만은 감정을 드러내는 이상한 녀석이다. “아, 물론 우리들은 당신의 적이 아니랍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저 건방진 아이에게 모욕을 당하면서까지 당신을 막고 저 아이를 치료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겠죠.” 김성철은 입술을 다문 채 묵묵히 49호의 말을 들었다. 맞는 말이다. 적은 아니다. 그러나 적이 아닌 존재, 즉 아군이라는 말엔 동의할 수 없다. 평정심을 되찾은 김성철의 냉철한 두뇌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김성철이 49호를 향해 말했다. “너희들에게 나쁜 의도가 없는 것은 알겠다.” “그건 다행이네요.” “지금까지는 말이야.” 김성철의 눈이 번득였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자신이 납득하기 전까진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마냥 끌려 다니지도 않는다. 방안의 기류가 변했다. 49호는 그 변화를 느끼며 정자세로 김성철의 질문을 기다렸다. “너의 주인의 진정한 목적이 뭐지?” 김성철이 말했다. 거역하기 어려운 힘이 담긴 음성이었다. 49호는 어째서인지 김성철이 긴 대답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기이한 경험이었다. ‘이 사람... 단순히 말 이상의 내용을 의지만으로 전하고 있어.’ 그것은 필멸자에게 허락된 권능이 아니다. 49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내면의 흔들림과 달리 안정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태의 안정.” “사태의 안정?” “지금, 이 세상엔 아버님 혼자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어요. 그것이 무엇인지 굳이 대부분의 사실을 아는 당신에게 부연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요?” 49호의 물음에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위기는 당신이 생각 하는 이상으로 커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너무나도 오랜 시간 동안 이 세상은 정체됐거든요. 위기가 올 때가 된 거죠. 수천 년 동안 억누르던 것들이 하나 둘 눈을 뜨고 그들이 바라는 혼돈을 세상에 불러올 준비를 하고 있어요.” “던전을 말하는 건가?” “그것도 포함되죠. 그런데 또 다른 변수가 생겼어요.” 49호는 김성철을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이라는 가장 위험한 존재가 나타난 거죠.” “…….” 예전이라면 부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검은 거인의 존재를. “신들은 당신을 없애버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버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버님은 당신이 재앙을 해결하기를 원하세요.” “…에크하르트가?” 그때 김성철은 아래에서 미약한 진동을 느꼈다. “으.. 으...” 베르텔기아였다. 쓰러진 이래 처음으로 움직임을 보였다.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49호도 깨어나려는 베르텔기아를 보고 슬슬 떠날 채비를 했다. “정신을 차릴 때가 온 거 같네요. 저 아이는 절 별로 안 좋아하니 전 몸을 숨기도록 할게요.” “잠깐. 아직 이야기가 안 끝났잖아?” “저 아이가 절 봐서 좋을 건 하나도 없어요. 어쩌면 상처가 악화될 수도 있을지도 모르죠.” “…그건 곤란하군.”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아버님에게 물어보세요. 어차피 세 번째 재앙을 해결하면 당신은 아버님을 만날 수 있으니까.” “그런가?” 데스포트도 비슷한 소리를 했다. 재앙을 차례로 해결하면 결국 재앙을 내린 존재에 근접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어렵진 않을 거예요. 어차피 제가 볼 때 의미 있는 왕관은 둘인데 곧 하나는 당신에게 붙을 것 같으니.” “제국인가?” 김성철의 물음에 49호는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부정이다. “마지막 왕관은 쉽게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아마도 최대의 걸림돌이 될 수 있겠죠. 왜냐하면 그 왕관을 쓴 자는 아버님이 최대의 위협으로 본 상대니까요. 당신이 전면에 부상하기 전엔 말이죠.” “…….” 그때 다시 베르텔기아가 몸을 뒤쳑였다. “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베르텔기아가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비할 바 없는 기쁨을 느끼면서도 마지막까지 49호를 응시했다. “아무쪼록 조심하세요. 당신이 처한 상황은 그렇게 녹록치 않으니까. 제가 옆에서 도울 수 있는 건 돕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 더 많이 벌어질 예정이거든요.” 49호는 김성철을 향해 목례를 하듯 몸을 끄덕였다. 점차 49호의 몸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김성철은 49호의 능력이 예전에 본 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건 아무개의... 능력?’ 사라지는 49호에게서 희미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불쌍한 연어.” 49호는 베르텔기아를 보고 있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숙여 베르텔기아를 바라보았다. “으... 죽다 살아났네!” 생기를 되찾은 베르텔기아는 몸을 일으키며 언제나처럼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김성철의 주머니로 쏙 들어갔다. “조금 춥네.” 베르텔기아는 부활했다. 하지만 김성철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절반의 기쁨 속에서 김성철은 아까부터 조종석 중앙에 우뚝 자리 잡은 또 다른 베르텔기아를 바라보았다. ‘넌 대체 무엇을 만든 것이냐.’ 그 질문에 답을 해줄 사람은 여기에 없다. 그 답을 알기 위해서 김성철은 직접 그를 만나야 할 것이다. 신을 대신하고 있다는 에크하르트란 이름을 지닌 어리석은 연금술사를 말이다. 재앙을 해결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 98. 위기의 왕국 (1) 창백한 달이 험준한 바위산 일대를 비추고 있었다. 그 바위산 곳곳에 자리 잡은 견고한 요새 안엔 풍성한 수염을 기른 드워프들이 두려운 눈으로 산 아래를 주시하고 있었다. 쥐죽은 듯한 고요 속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어스름한 화강암 바위 위로 기어 올라왔다. “야만인이다!” 다급한 초병의 외침은 이내 우렁찬 나팔 소리로 변해 전장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 드워프들이 자랑하는 수많은 공성 화기가 일사불란하게 정렬되며 사선을 정하는 동안 산 아래에선 불길한 검은 그림자들이 무서울 속도로 증식하고 있었다. 드워프들은 그 검은 그림자의 악명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북쪽의 야만인. 기록되지 않은 진정한 재앙. 엘프 연합왕국의 국경선에서 크게 패하기 전까지 무적의 군대라 불렸던 그 야만인들은 교활하게도 경로를 바꾸어 드워프 왕국의 경내를 침입하고 있었다. 애당초 승산 없는 싸움이다. 전장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정에서 왕관을 쓴 드워프들의 왕은 자신의 백성과 전사의 보루가 차례차례 압도적인 야만인의 공세에 함락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자랑하는 공성 화기도 소문난 드워프의 강인함과 끈기도 압도적인 힘 앞엔 짚으로 만든 집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전투가 끝나진 않을 것이다. 드워프 왕국의 국왕이자 대륙십일걸, 다인크래프트는 야만인에게 함락되기 시작한 보루 한 가운데에서 검은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목격했다. “이노! 이쉬!” 검은 불길은 이내 거대한 검은 형상으로 화하며 보루를 장악한 야만인 사이에 우뚝 섰다. “도르온! 트로이메아 도르온!”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야만인은 그러나, 검은 형상이 나타나자 적잖이 당황했다. 검은 불길은 다른 보루에서도 속속 피어올라 저마다 다른 형태의 검은 형상을 만들어냈다. “무르크! 이노!” 불경한 외침이 전장을 뒤흔들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종말교단. 그들이 불러낸 아신들이 기울어가던 전장에 출현한 것이다 아신 하나가 합장을 하자 전장엔 모든 것을 박살내는 천둥벼락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쿠쿵! 하나의 벼락이 야만인 무리를 향해 떨어졌다. 무적처럼 보이던 야만인은 그러나 불멸자인 아신 앞에서는 한낱 필멸자에 지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산정을 향해 진격하던 야만인들은 주춤거렸고 이내 산 아래에서 섬뜩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우우우우-- 후퇴신호다. 야만인들은 그 소리를 듣고 가지고 있던 노획한 검과 장비를 내다버리고 산 아래로 퇴각했다. 일방적인 드워프 왕국의 패배로 보이던 전투는 싱거운 승리로 변했다. “어떻습니까? 위대한 드워프들의 왕이시여.” 어둠 속에서 앳되지만 거역하기 어려운 매력을 지닌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가면을 쓴 인간 소녀였다. 그녀의 뒤엔 그녀와 비슷한 얼굴을 지닌 수려한 용모의 중년 남자가 굳은 얼굴로 그녀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저것이 종말교단의 정신적 지주라 불리는 가면의 성녀인가.’ 왕을 지키던 전사 하나가 날카로운 눈으로 종말교단의 무리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희 종말교단은 보신 바와 같이 인간제국은 물론 어떤 외부의 위협도 막을 수 있는 방패를 제공해드릴 수 있습니다.” 가면의 성녀. 사라사 제로는 성벽으로 천천히 걸어가 전장을 드러난 한쪽 눈에 담았다. 곳곳에서 잔불이 피어오르는 전장에서 야만인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 빈자리엔 3기의 아신이 우뚝 서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을 뿐이다. 드워프 왕 다인크래프트의 얼굴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처뿐인 승리였기 때문이다. 수많은 전사가 야만인의 습격에 죽었고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들이 아신을 불러내기 위한 도구로 소모됐다. 그에 반해 야만인의 피해는 극히 적었다. 그들은 교활하게도 아신이 나타나자마자 일제히 퇴각했고 피해를 최소화했다. 알고 있는 것이다. 아신화의 약점을. 사라사 제로도 드워프 왕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방패는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영원하지 않습니다. 야만인은 교활하게도 방패의 약점이 뭔지 잘 알고 있지요. 그들은 공격과 퇴각을 반복하며 방패를 꺼내게 만들 것이고 그때마다 폐하는 가장 충성스런 신하들을 잃게 될 것입니다.” 사라사 제로가 손짓했다. 그러자 그녀 뒤에 서 있던 그녀를 닮은 중년인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사라사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경함을 불러일으키는 검은 무쇠 빛의 두루마리였다. 사라사 제로는 그 두루마리를 드워프의 왕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이 두루마리는 일시방편이 아닌 영원한 수호의 힘을 보장할 것입니다.” 다인크래프트는 그러나 그 두루마리를 지켜보기만 할 뿐 선뜻 손을 내밀지 않았다. 사라사 제로가 달콤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철혈의 의지와 바위 같은 강함을 지닌 폐하만이 이 야만인의 위협으로부터 왕국을 지킬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구의 도움도 빌리지 않고요.” 달콤한 유혹. 그러나 다인 크래프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또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저 두루마리가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 이전에 한 번 손을 댄 것만으로 다인크래프트는 느낄 수 있었다. 두루마리 안에 깃든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존재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을. 하지만 언젠가는 이 두루마리에 손을 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야만인들이 계속해서 침공해오고 아신을 불러낼 자신의 충성스런 신하들이 모두 없어졌을 땐 말이다. 그런데 드워프 왕에겐 다른 길이 하나 있다. 종말교단 말고 손을 잡을 다른 세력이. 김성철. 그리고 그가 주재하는 세계의회.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어쩌면 직면한 위협에서 왕국을 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라사 제로는 그런 드워프 왕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면, 왕국의 성물을 허락 없이 가져간 사람과 손을 잡으시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지.” 긴 침묵 끝에 드워프 왕은 입을 열었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드워프 원한록 첫 열에 이름을 올린 도적놈과 손을 잡는 것은. 설령 왕국이 멸망할지언정 다인크래프트는 그 사내, 김성철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당장 두루마리에 손을 대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이 드워프의 고집이다. 하지만 이 장면을 지켜보던 한 드워프 전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건 아니야.” 그의 이름은 아카드. 한때 형벌부대에서 복무한 특이한 이력을 지닌 그 사내는 개인적으로 김성철을 알고 있었다. 그는 드워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악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아카드는 기억하고 있다. 모두가 외면하던 악에 홀로 맞서던 사내를. 그는 요새를 떠나기 전에 친한 동료 하나하나를 찾아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꼭 살아서 보자구.” “죽지 마라.” “반드시 살아남아라.” 그리고 같은 요새에서 복무하는 아들들에게 인사하는 것도 있지 않았다. “여기 있어. 금방 올게. 얌전히 있어야해. 알았지? “가족들 말 잘 듣고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네.” 장장 반나절에 이르는 작별을 끝낸 후 아카드는 홀로 요새를 떠나 남쪽으로 향했다. 야만인을 한 번 물리친 적이 있는 엘프들의 땅으로. “…이것이 나의 마지막 임무다!” 어째서인지 불길한 말만을 골라하며 그 사내는 도끼 한 자루를 짊어진 채 우거진 숲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 [ 연성 성공! ] 궁수의 돌에 이어 기사의 돌이 만들어졌다. “좋았어! 다음은 내 차례네!” 베르텔기아는 페이지를 열어 자신의 몸안에 깃든 힘을 김성철에게 전한다. 소폭의 능력치가 상승했다. 아울러 거신의 제작자, 에크하르트가 남긴 기록 또한 김성철 앞에 나타났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수천 년 전의 한 사내가 남긴 기록을 읽어 나갔다. [ 칠영웅의 배신이 기정 사실화됐다. 베스티아레 누님 아니.. 그 여자는 아직 순수함을 간직한 다른 영웅들마저 꼬드기고 있다. 사자토스 형은 그들의 속셈을 알고 있지만 확고한 의지도 이상도 없는 그는 동료들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데스포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나는 안다. 선동과 사주를 일삼는 베스티아레의 뒤엔 그 사내가 있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인류, 아니 이 세상을 증오한다. ] “…….”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기록. 김성철의 경험은 오래된 기록을 넘어섰다. 김성철은 기록에서 눈을 떼며 몸을 일으켰다. 베르텔기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몸은 좀 어떠냐?” 김성철이 물었다. “완전히 나았어!” 베르텔기아는 대단히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토록 고대하던 창조술사 퀘스트도 수행하고 그동안 휑했던 구멍도 말끔하게 치료했으니 말이다. “역시, 창조술사 퀘스트를 수행하니까 몸도 회복되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거신에 들릴걸 그랬어.” 베르텔기아는 아무것도 모른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신을 치료한 것이 무엇인지. 그렇기에 천진난만하게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다. “어서 빨리, 다른 거신들도 찾아내서 나머지 퀘스트도 수행해야지. 이제 남은 건 두 기 밖에 없으니까!” 잠자코 베르텔기아의 말을 듣던 김성철의 눈동자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베르텔기아. 더 이상의 퀘스트는 불가능하다.’ 언젠가는 따끔하게 말해줘야 할 것이다. 그녀가 처한 현실을. 하지만 쉽지 않으리라. 아마도 큰 상처를 남길 것이다. 김성철에게나, 베르텔기아에게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나중에, 상황이 정리가 되면 그때 말하자.’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종석 중앙에 우두커니 떠올라 있는 한 권의 책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네가 6호냐?” 그 물음에 책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김성철의 눈엔 미묘하게 베르텔기아와 꼭 닮은 책이 몸을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쿵-. 거신을 나선 김성철은 조종실의 문을 굳게 닫았다.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새벽에 미명의 기운이 희미하게 서려 있었지만 동쪽 하늘을 장악한 두꺼운 낙진은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 동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김성철을 스치고 지나갔다. 완연한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돌아가자.” 실피드는 지금 엘프 왕국의 영내에 머물러 있다. 다음 행선지와 목적은 실피드에 귀환한 직후부터 생각하면 될 것이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한 잔의 술이었다. 그는 아무도 남지 않은 거리를 천천히 걸어 되돌아갔다. 익시온의 참호 속에서 김성철은 홀로 남은 노인과 재회했다. 노인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꿈을 꾸는 모양이었다.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갈 정도로 좋은 꿈을. 노인이 꾸는 꿈이 행복했던 과거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내세에 대한 막연한 기대인 것인지 김성철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잠깐 동안 생각할 거리는 남겨줬다. 김성철은 노인의 꿈에 대한 생각을 하며 엘프들이 기다리는 마법진 쪽으로 복귀했다. 엘프들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김성철이 다가가자 엘프들은 마법진을 개방했다. 다른 공간으로 가는 빛 속에서 김성철은 동쪽을 응시했다. 어느덧 밝아진 동쪽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마치 하늘이 인간을 버린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처럼 보이는 섬뜩한 광경이었다. 몇 개의 마법진을 통과한 끝에 김성철은 엘프들의 땅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익시온과 달리 엘프 영내는 흥겨운 잔치 분위기였다. 익시온의 세기말적인 분위기가 너무 강하게 뇌리에 남아서일까. 김성철은 그 분위기가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김성철은 엘프 병사들의 힘찬 경례를 받으며 궁성으로 향했다. 뒤늦게나마 엘프 왕에게 인사를 하러가기 위함이다. 겸사겸사 마라키아와도 합류하고. 그런데 궁정에 도착한 직후, 김성철은 궁전 안에 긴박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바쁘게 뛰어나가는 기사들과 궁수들, 입을 가린 채 속닥이는 대신들을 보며 김성철은 엘프 왕의 알현실에 도착했다. 알현실 안엔 엘프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땅딸막하고 수염으로 가득 찬 사내가 등에 도끼를 진 채 당당하게 뒷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드워프? 피난민인가?’ 평범한 피난민은 아니리라. 그렇다면 까탈스런 엘프왕의 궁전에 발을 들일 일도 없으니. 김성철은 호기심을 품은 채 드워프를 향해 다가갔다. 시종들이 김성철을 알아보고 그의 예방을 소리 높여 알렸다. “대원수님의 입장이십니다.” 그 말은 드워프의 귀에도 들어갔다. 드워프는 다가오는 김성철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게 누군가.” 드워프가 말했다. 김성철은 한 눈에 드워프의 얼굴을 알아봤다. ‘저 친구는. 틀림없다. 마계최전선에서 함께 복무했던 그 사내군.’ 김성철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드워프는 김성철의 이름은 물론 그의 죄수번호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34호 아닌가? 역시 34호가 세계의 적이었군!” “누구야?” 김성철의 뒤를 따르던 베르텔기아가 넉살 좋게 김성철에게 아는 척을 하는 드워프를 보며 퉁명스레 물었다. “아는 사람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며 한때의 전우, 아카드에게 다가갔다. 약간의 반가움과 묘한 기대감을 느끼며. ‘자기 땅에 틀어박히길 좋아하는 드워프가 제 발로 찾아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지. 하지만 드워프는 적어도 까치보다는 반가운 손님이다.’ 김성철의 예감은 적중했다. 격의 없이 아는 체를 하던 아카드는 낯빛을 바로하고 예의를 갖춰 김성철에게 말했다. “왕국이 위험하오.” ======================================= 98. 위기의 왕국 (2)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카드가 드워프 왕국을 대표해서 온 게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김성철을 찾아왔다고 말했을 때 김성철은 내면에서 고조되던 열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식는 걸 느꼈다. ‘나라가 그 지경이 됐는데도 원한록에서 내 이름을 지울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드워프들의 고집은 정평이 나 있다. 김성철은 자신의 영혼 창고 안에 있는 팔 가라즈를 생각했다. ‘겨우 망치하나 때문에 왕국 전체를 멸망으로 몰아넣을 셈인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다른 각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겨우 망치하나가 아닌 왕국을 대표하는 신물이라고 해석한다면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생명도 아닌 물건 하나 때문에 나라는 물론 종족 전체의 절멸을 기꺼이 바라는 드워프들의 기질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드워프 왕국에 대한 출병은 지금 상태로는 불가능합니다.” 해서데인은 드워프 왕국을 돕는 일에 대해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즉각 반대의견을 표했다. 북방전역에서 승리를 거둔 후 사실상 엘프 연합왕국의 왕위를 계승한 그의 입장은 왕국 전체의 입장을 대변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들이 우리에게 직접 원조를 요청한다면 모를까, 그 고집불통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국경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도리어 곳곳에 매복한 드워프 군대에게 공격을 받을 겁니다.” 김성철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 또한 드워프들과 일을 해 본 적이 있었고 루테기네아 전쟁에서는 같은 진영에서 함께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그 경험에 비추어보면 해서데인의 말은 어림짐작이 아니라 예정된 사실이다. 보다 과격한 의견을 내놓는 이도 있었다. “죽게 내버려두면 되지 않나?” 마라키아다. 갑자기 자리에 나타난 마라키아는 거만하게 말하며 김성철 옆 빈 자리에 앉았다. ‘이 녀석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마라키아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다. 그럼에도 경비병이 마라키아를 통과시켜 준 것은 그만큼 마라키아가 엘프 왕국에서 만만치 않은 대접을 받고 있다는 반증. ‘가지고 오라는 술은 제대로 준비했으려나.’ 할 말은 많지만 꾹 눌러 참고 김성철은 마라키아에게 물었다. “무슨 뜻이지? 그건.” 이에 마라키아는 탁자 위에 올려놓은 호두 하나를 염동력으로 집어 자신 앞에 갖다놓은 뒤 부리로 파삭 쪼고는 호두 알을 질겅질겅 삼키면서 불분명한 발음으로 이야기했다. “전에 보니까 칠영웅 가시옹인가 뭔가 하는 놈. 수집해야 할 왕관 목록에 있었는데 중간에 죽어서 사라졌잖아? 드워프란 하등종족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분위기를 보니 말 안 듣고 손 많이 가는 무리 같더라고.” 마라키아는 호두 하나를 더 꺼내 부리로 쪼며 말했다. “어차피 힘들여서 놈들의 마음을 돌리나, 가만히 앉아서 야만인의 손에 멸망하게 만드나 결과는 같은 거 아닌가?” “…….” 하는 짓은 밉상이고 말 자체도 거만하기 이를 때 없지만 다 맞는 말이다. 오히려 마라키아는 김성철이 생각 하지 못한 신선한 해결책까지 내어놓았다. ‘야만인을 이용한 소거법이라.’ “거기다 듣자하니 그쪽엔 종말교단도 대규모로 설치고 있는 모양인데 오히려 더 잘 된 일 아닌가?” 마라키아는 계속해서 말했다. 김성철은 마라키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미리 알아챘다. ‘종말교단이 아무 이유 없이 힘을 빌려줄 리 만무하다. 놈들이 드워프 왕국을 돕는 목적은 역시 다른 데에 있겠지. 결국 놈들이 노리는 건 그것인가?’ 김성철읜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던전. 아마도 종말교단의 진정한 목적은 던전의 해방이리라. 이름 없는 던전의 주인 말에 의하면 9개의 능력치 중, 힘과 관련된 던전이 드워프 왕국 안에 숨겨져 있을 확률이 크다. “그러니 우리는 가만히 기다리다 이익만 얻자고. 야만인과 종말교단이 서로 싸우게 만드는 걸 구경하면서 던전이 나타나면 전처럼 바람처럼 가로채면 되는 거지. 왕관도 하나 줄이고 능력치도 얻고 얼마나 좋아?” 마라키아의 머리가 비상한 건 익히 알고 있는 바지만 실제로 각국의 유력 인사 앞에서 스스럼없이 말하는 건 보기 드문 일이었다. 마라키아는 보통 한 발 뒤에 물러서 귀여운 모습으로 가장한 채 상황을 관망하는 걸 즐기는 녀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마라키아도 조금씩 변해가는 모양이다. 짐승도 은혜를 안다고 마라키아도 약간이나마 은혜를 알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흐-음.” 물론 베르텔기아는 마라키아가 주목 받는 걸 달갑지 않게 여겼지만. 그건 김성철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마라키아가 간과한 게 하나 있다. 회의장 한 구석을 차지한 아카드의 존재다. “…….” 아카드의 얼굴 표정이 심히 좋지 않다.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는데 기껏 듣는 소리가 저래서야 성인군자라 하더라도 표정이 좋을 리가 없다. 하지만 아카드의 사정 따윈 마라키아에겐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어때? 내 완벽한 계획이. 모두 동의하지 않나?” 마라키아는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 아카드의 얼굴이 위험할 정도로 붉게 상기되었다. “뉘신지 모르겠지만 말씀이 좀 지나친 거 같은데.” 결국 아카드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마라키아의 눈에 살기가 서렸다. “나는 너에게 발언권을 준 적이 없다. 하등종족.” 마라키아는 마치 전성기, 멸세의 왕 시절처럼 말했다. 아카드는 분노를 느꼈으나 마라키아의 범상치 않은 생김새와 묘한 기운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분위기가 점점 묘하게 흘러갔다. ‘이건 좀 아니지.’ 아무래도 마라키아의 입을 닫게 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해도 정도라는 게 있다는 걸 모르는 녀석은 제동을 걸어줘야 한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모두의 이목이 김성철에게 쏠렸다.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응시했다. “술은 챙겼냐?” 김성철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가볍게 던진 한 마디였다. 그런데 어째 반응이 묘하다. 신나게 떠들던 마라키아의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간 것이다. 딴청을 피우고 있다. 김성철의 눈썹이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이 녀석. 설마?’ 익시온으로 떠나기 전에 김성철은 마라키아에게 신신당부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엘프 담금주는 꼭 챙기라고. 그런데 마라키아는 김성철의 부탁을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어이.” 분노가 서서히 끓어오르는 걸 느끼며 김성철이 마라키아를 불렀다. 기세등등하던 마라키아는 계속 시선을 피하며 못들은 체 했다. 곧 눈동자를 돌리던 마라키아의 눈에 변명거리가 포착됐다. 베르텔기아다. “오! 리빙 북. 상처가 말끔하게 회복됐군! 훨씬 보기가 좋은데.” 마라키아는 은근슬쩍 베르텔기아에게 관심을 보이는 척 하며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런 잔꾀는 김성철에게 통하지 않는다. “말 돌리지 마라.” 김성철은 달아나려는 마라키아의 뒷덜미를 덥석 움켜잡고 들어올렸다. “술은 어디 있지? 내가 몇 번이고 부탁했던 엘프주 말이야.” 뒷덜미를 잡힌 마라키아는 그제야 눈동자를 굴리며 날개를 파닥거리며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혀를 삐죽 내밀며 천진난만한 음성으로 말했다. “깜빡했당.” 김성철은 마라키아에게도 혀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하지만 그것 중요한 게 아니다. “이 놈이.” 김성철의 눈동자에 불길이 일었다. “삐이이이이.....” “당장 가서 남은 엘프주나 구해와라.” 김성철은 살기를 담아 말한 후 마라키아를 내려놓았다. 마라키아는 혼비백산하며 달아나다가 문가에서 다시 용기를 되찾았는지 되를 노려보며 소심하게 항의했다. “가.. 가면 되잖아! 그깟 술 한 병!” 쿵! 문이 닫혔다. 분위기가 약간 이상해지긴 했지만 방해꾼은 사라졌다. 김성철은 아카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녀석이 한 말에 대해서 사과하지.” “…….” 아카드는 여전히 상기된 얼굴이었지만 김성철에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저 녀석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어.” 김성철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아카드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김성철은 순간 아카드가 자신에게 덧없는 희망을 걸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김성철이 아무 조건도 없이 드워프들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하지만 그것은 오지 않을 구세주를 기다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김성철은 입장차를 확인하면서 다시 말했다. “우리를 움직이려면 그쪽 왕이 우리에게 최소한의 입장 표명을 해야 해.” 그의 결론은 해서데인과 동일했다. 왕의 정식적인 요청이 있기 전까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 그것이 김성철의 의견.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게 가능했다면 애당초 아카드는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카드에겐 비장의 수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는 김성철을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며 간곡하게 말했다. “한 가지 묘안이 있소.” “묘안?” “신성한 망치, 팔 가라즈를 우리 왕국에 돌려주는 것이오.” “팔 가라즈를?” 곤란한 이야기다. 팔 가라즈는 지금 김성철에겐 없어서는 안 될 주요한 무기다. 그의 신적인 힘을 받아낼 수 있는 유일한 무기를 잃는다면 김성철의 힘은 반감될 것이고 아신 같은 강적 상대로 고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팔 가라즈를 돌려준다면 우리 왕을 내가 한 번 설득해보겠소.” “설득해본다?” 팔 가라즈를 주는 것만으로 온전한 해결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즉, 팔 가라즈만 반납한 채 갈등이 지속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최악의 시나리오다. 혹 드워프 왕이 팔 가라즈의 장식장에 팔 가라즈를 넣고 봉인이라도 해버리면 천하의 김성철이라도 팔 가라즈를 되찾을 수 없다. 장식장의 봉인 또한 팔 가라즈와 같은 하늘의 파편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그건 불가능하다.” 김성철이 말했다. 아카드의 몸이 한 차례 휘청였다. “정녕 안 된단 말이오? 겨우 망치 하나지 않소?” 아카드가 간절하게 물었다. 그의 흔들리는 눈을 보며 김성철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카드의 고개가 아래로 떨구어졌다. 고개 숙인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분노와 실망이 그의 탄식에 그대로 섞여 나왔다. 무거운 침묵이 회의실에 깔렸다. 해서데인을 비롯한 엘프 관계자의 얼굴에 짜증이 느껴졌다. 왕의 사자도 아닌 일개 드워프의 넋두리를 듣는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기도 하고 시간낭비라고 생각한 것이다. 엘프 귀족 하나가 경비병에게 드워프를 모시고 나가라고 눈빛을 교환할 때였다. “…나도 한때 세계의 적인 당신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했었다” 아카드가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경비병이 아카드 뒤로 다가가며 김성철을 응시했다. 허락을 구하고 있다.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비병이 물러난 직후 아카드는 고개를 숙인 채 회한이 깃든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마계최전선에서 홀로 악마군을 막아서던 당신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솔직히 존경했었다. 남자로서 그리고 전사로서. 하지만 지금 당신을 보니 내 감도 무뎌진 것 같군. 어쩌면 강가스 아론이나 마르틴 브레가스 같은 인간쓰레기들만 봐서 비교적 당신이 신선해보였는지도 모르지.” 노골적인 공격이었지만 김성철의 표정엔 한 점의 변화도 없었다. 드워프 전사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의 부리부리한 눈은 무표정한 김성철의 얼굴을 정면으로 직시했다. “내가 동족의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요.” 아카드의 짧고 굵은 손가락이 김성철을 가리켰다. “당신만은 다른 권력자와 다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하지만 겨우 망치하나에 연연하는 당신을 보니 과거의 멍청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기 짝이 없군.” 김성철의 얼굴엔 어떤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방금 그 한마디는 아팠다. 그것도 퍽이나. ‘내가 그들과 같다고…?’ 1년 전에 그런 말을 들었다면 일소에 부쳤을 것이다. 그는 권력자도 아니었고 게다가 다른 권력자와 구분되는 대의명분이 있었으니. 무엇보다 김성철 스스로가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기득권과 달리 고통 받는 무력한 자들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재앙의 현장에서 수많은 사람을 구했던가. 김성철은 충분히 자신은 기득권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는 권력자다. 그는 남아 있는 강대국을 두 개나 포함한 세계의회의 의장이자 잠재적인 한 명의 왕이다. 또 김성철은 과거의 그가 그토록 혐오하던 기득권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철저히 실리만을 앞세우는 마라키아의 계획에 아무런 거부감 없이 찬동하고 있다는 것. 과거의 그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망치하나에 연연한다는 말이 김성철의 폐부를 예리하게 후벼 팠다. 그것은 회의 초반에 김성철이 드워프 왕국에 품었던 불만이었다. 김성철은 그 옹졸한 드워프 왕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드워프 입장에서 보면 김성철도 똑같은 소심한 소인배다. 게다가 그 팔 가라즈는 드워프 왕의 호의를 배신하고 훔쳐간 물건이 아니던가. 김성철의 마음이 착잡하게 식었다. ‘내가 변한 건가. 아니면 자리가 나를 만든 건가.’ 한 명의 개인과 세계를 이끄는 자의 책임이 같은 수는 없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것이다. 김성철은 방문을 열려는 아카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잠깐만 기다려주시게.” 김성철이 아카드를 불러 세웠다. ======================================= 98. 위기의 왕국 (3) 실피드의 갑판. 김성철은 난간에 기댄 채 술을 음미하고 있었다. 난간 아래엔 크고 작은 산들이 줄기를 이루고 동과 서로 길게 뻗어 있었다. 실피드의 선미엔 엘프 연합왕국의 특사임을 알리는 하얀 바탕에 초록 나뭇잎이 그려진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지금 실피드는 드워프 왕국으로 향하고 있다. 아무것도 결정된 건 없었다. 발단은 단순한 변덕 때문이었다. “당신답지 않네.”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가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한 잔 술을 들이키며 김성철이 먼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때는 1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루테기네아에 맞선 반란군이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김성철은 한 드워프를 알게 됐다. 무려 드워프 왕자님이었다. 그는 대단히 강한 전사였고 숙련된 정예병을 수행원으로 끌고 와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던 반란군에겐 천군만마와 같은 전력이었다. 그런데 호사마다라, 그 드워프 왕자의 인성엔 문제가 많았다.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모두가 그를 싫어하게 됐다. 김성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너무나 이기적이었고 거기에 더해 고집불통이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했고 동맹군의 사정 따윈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식료품이 모자라 반란군이 기아 상태에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드워프 왕자는 곡식 한 톨, 고기 한 점 나눠주지 않았다. 대신 감자 몇 포대에 반란군의 우두머리 자리를 내놓으라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다. 모두가 그를 싫어했다. 김성철도 그를 싫어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드워프 왕자는 김성철을 마음에 들어 했다. 행동거지가 드워프처럼 묵직하고 단단해서란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 자에겐 못할 짓을 많이 했지.” 김성철은 기억한다. 전리품이 가득 담긴 드워프 왕자의 수레를 수레 째로 횡령하던 과거의 자신을. 드워프 왕자는 당시 길길이 날뛰었지만 김성철을 탓하지는 않았다. 김성철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뒤로도 김성철은 드워프 왕자의 물자를 몇 번이고 빼돌리거나 훔쳤고 한 번은 드워프 왕자를 포함한 부대 전체를 미끼로 내세워 전멸에 몰아넣을 뻔한 적도 있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김성철이 직접 전투에 참전해 왕의 목숨을 구해주긴 했지만. “…그렇게 당하고도 그는 날 믿더군.” 김성철의 흐릿한 회상 속에 천막 안의 풍경이 그려졌다.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수많은 드워프 전사들이 그들의 왕자에게 김성철에 대한 처벌을 강하게 요구했다. 실로 살기 등천한 광경이었다. 강심장을 넘어서 무심장으로 불리던 샤말 라지푸트도 그날만큼은 얼굴에 초조함을 드러낼 정도였다. 이제 갓 태동하기 시작했던 반란군이 끝장날 위기 앞에서 그 왕자는 오히려 자신의 부하들을 꾸짖으며 김성철을 감쌌다. 김성철은 자신을 바라보는 드워프 왕자의 눈을 보며 그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감싸는지 알게 되었다. 그 왕자도 김성철이 잘못한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김성철을 감싸는 것은 그의 고집 때문이다. 별 근거 없이 김성철을 좋은 놈으로 판단했지만 일단 한 번 먹은 마음이다. 그 뜻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이기심으로 뭉친 드워프 왕자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고집을 부렸다. 그리고 그 고집이 그로 하여금 김성철을 비호하게 했다. 덕분에 상황은 가라앉았고 위기는 해소됐다. “설마 그 드워프 왕자…. 지금의 드워프 왕은 아니겠지?” 김성철의 이야기를 듣던 베르텔기아가 희미하게 몸을 떨며 물었다. 김성철은 술잔을 들이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워프 왕이 맞다.” 그 남자, 다인크래프트는 그런 인물이었다. 고집 그 자체가 인격화 되어 현현한 것 같은 존재. 하지만 그 고집불통도 끝내 고집을 꺾는 순간이 있었다. 김성철의 귓가에 드워프 왕의 한스런 외침이 환청처럼 메아리쳤다. “내가 바보라서 너를 믿은 줄 아느냐? 전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부 눈 감아 주었다!” 드워프 왕국에 관한 기억 중 그 기억은 어떤 것보다 생생하게 와 닿는다. 드워프 왕국의 왕실. 드워프 군주의 옥좌 위에 늘 걸려 있던 팔 가라즈가 김성철의 손에 넘어갔을 때였다. “그러나 팔 가라즈를 들고 간다면 나는 더 이상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김성철!!!!” 김성철은 기억한다. 꼿꼿한 수염을 곤두세운 채 자신을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던 옛 전우의 얼굴을. 드워프에게 팔 가라즈란 그런 물건이었다. 단 한 번도 고집을 꺾지 않은 사내의 고집을 가볍게 꺾어버릴 정도의 가치가 팔 가라즈에게 있다. 그때만큼은 김성철도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에 회의를 느껴야 했다. 그러나 당시에 김성철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에겐 팔 가라즈가 필요했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든 채 왕성을 빠져나갔다. 다음날 김성철의 저주란에 드워프 원한록 기재라는 새로운 저주가 나타났다. 모든 드워프가 김성철을 불구대천의 적으로 인식한 순간이었다. “…괜히 드워프들이 당신 이야기만 나오면 욕설을 퍼붓는 게 아니구나.” “…….” 김성철의 이야기를 들은 베르텔기아가 몸을 가볍게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부수는 자도 꽤나 군왕다운 행동을 하던 때가 있었군.” 어느새 나타난 마라키아는 베르텔기아와 달리 감탄한 눈치였다. 김성철은 눈을 감은 채 술잔을 기울였다. “…세계의회 구성원 중 유일하게 내가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인물이 드워프 왕이다. 물론, 팔 가라즈가 다인크래프트의 손에 있어봐야 장식품 이상의 용도로는 쓰이지 못했겠지만.” 굳이 그런 개인적인 사정이 없더라도 김성철은 드워프의 영지로 향했을 것이다. 그는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몇 명이 죽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권력자들과. “조금만 더 가면 왕도의 입구가 나타날 거요.” 아카드가 갑판으로 나와 김성철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김성철을 드워프 왕국 내로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김성철이 직접 드워프 왕국의 형세를 보고 판단하겠다는 말을 하자 적극 협력하기로 한 것이다. 드워프 왕국 내에서 김성철은 아카드의 이름 없는 수행원으로 행동할 것이다. “신원보증은 이쪽에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보다 이단의 무리가 드워프 왕국까지 손길을 뻗쳤다니.... 용서할 수 없군.” 어느 순간 실피드 호의 승무원이 된 타이곤도 이번 여행에 동참했다. 전투에서 별 쓸모는 없지만 뮤라 교단의 수석 이단심문관이라는 높은 직위는 이런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리라. 각자의 사정을 안은 채 실피드는 거대한 바위 산 아래 형성된 도시에 도착했다. 드워프 왕국의 수도. 다인타이트. 겉보기엔 볼 품 없는 도시다. “흐음. 여기가 드워프들의 수도라고? 썩 대단하진 않은 거 같은데.” 베르텔기아가 다인타이트의 전경을 보며 감상을 말했다. 확실히 육안으로는 별 볼 일 없는 도시다. 건물도 몇 채 없고 군데군데 빈자리가 도드라져 보인다. 하지만 다인타이트의 진가는 산의 바깥이 아닌 산의 안쪽에 들어와야 알 수 있다. 검게 입을 벌린 거대한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베르텔기아는 방금한 말을 취소했다. 긴 동굴 안쪽엔 또 다른 세계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드워프들이 수천 년에 걸쳐 파헤친 거대한 공동. 두터운 암반 아래 거대한 도시가 인공의 빛을 받아 장엄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와. 이게 드워프의 도시라고? 진짜 멋지다. 조인왕국보다 훨씬 큰 거 같은데?” 베르텔기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흥! 뭐가 우리 왕국보다 크단 말인가. 내가 볼 땐 조잡한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데.” 마라키아가 자존심을 세워보였지만 규모로만 치면 드워프 쪽이 훨씬 큰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피드는 수많은 공선과 기동요새들이 밀집한 벼랑 위의 항구에 정박했다. 기구로 오르내리는 다른 도시와 달리 드워프의 항구엔 기계적인 원리로 작동하는 접안시설이 공선의 양현에 직접 이동해 오르내리게끔 했다. 접안을 마치자 일단의 드워프 병사들이 몰려왔다. “최근 검문검색 절차가 강화됐소. 미리 준비한대로 둘러대시오.” 아카드의 말대로 드워프들의 검색 절차는 까다로웠다. 그들은 인물 한 명 한 명에 대한 신원조회를 하는 한 편, 인간 마법사까지 동원해 개개인에 대한 능력치 조회까지 실시했다. 덕분에 김성철은 오랜만에 얼굴을 변형시키는 건 물론, 기만자의 장막을 가동했다. “흐음.” 삐쩍 마른 여자 마법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김성철의 능력치를 살폈다. 마법진이 눈동자 안에 떠오른 그녀의 눈에 문자가 떠올랐다. [변강쇠의 능력치] 힘 300 민첩 18 체력 38 마력 10 직관력 5 마법저항 18 의지 28 매력 18 운 18 기만자의 장막이 오랜만에 활약했다. “변... 강쇠 씨?” 여자 마법사가 넙적하게 변형된 김성철의 얼굴을 응시하며 물었다. “네.” “힘만 이상할 정도로 강하시네요.” “다른 건 몰라도 힘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김성철이 평소와 다른 걸걸한 음성으로 답했다. 여자 마법사는 김성철의 정력적인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음 타자로 넘어갔다. 다음 대기자는 여자 마법사를 화들짝 놀라게 할 정도의 거물이었다. “타이곤 보스보로트님! 이런 곳에서 뵙게 되어 정말로 영광입니다.” 그녀가 놀라는 사이 김성철은 아카드와 함께 빠르게 선착장을 빠져 나갔다. 그럭저럭 무사하게 다인타이트에 돌입했다. 아카드와 타이곤 덕분이다. 다음엔 문제의 드워프 왕실에 갈 차례다. 김성철은 직접 드워프 왕실의 상태와 왕국이 처한 현황, 그리고 종말교단의 무리들을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결정은 그 다음에 내려도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변강쇠가 뭐야?” 베르텔기아가 퉁명스럽게 질문을 던져왔다. “그냥 갖다 붙인 이름이다.” “흐-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 묘한 느낌이 들어서. 뭐랄까. 힘만 강하게 설정한 것도 그렇고....”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래서 눈치 빠른 애들은...’ 그때 앞서가던 아카드가 일행을 재촉했다. “뭐들 하는 건가. 빨리들 움직이자고.” 김성철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아카드의 뒤를 급히 따랐다. 다행히 베르텔기아도 더 이상 김성철의 가명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드워프의 항구엔 이것저것 볼 게 많았기 때문이다. 마라키아는 실피드에 남았다. 대륙에서 유일무이하게 활동하는 조인이라 눈에 띄기도 쉽고 그 이름도 빠르게 퍼져나가 이런 유형의 잠입임무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실피드엔 마라키아를 포함해 타이곤의 부하 신관과 영혼석 하나가 조종하는 소형 골렘이 남아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나저나, 당신 어제 말할 땐 목숨을 걸고 여기 왔다고 하더니 왕성에 들어가도 괜찮은 건가?” 김성철이 짧은 다리로 빠르게 걷는 아카드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당신을 공적으로 국왕 폐하 앞에 데리고 왔으면 모가지가 날라 갔겠지. 왕명을 어긴 것이니. 하지만 지금 상태로 난 그저 휴가를 쓴 드워프 하나에 지나지 않아.” 형벌 부대에서 석방된 뒤 아카드는 드워프 왕국 내에서 승승장구한 모양이다. 특히 거신이 대륙 북방을 휩쓸고 다닐 때 거신의 진격을 막아 내 고속승진, 근위 전사로 임명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왕성 내에 잠입하는 것은 다인타이트 항의 검문을 통과하는 것보다 쉬웠다. 그런데 다인타이트의 왕궁의 규모는 실로 엄청났다. 왕궁 전체가 라그란제처럼 엄격한 구역으로 나뉘어 있어 하위 구역에 들어가는 건 쉽지만 상위 구역으로 가는 것은 간단치 않다. 특히 왕족이 기거하는 금강석 구역엔 얼굴을 서로 아는 왕족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아주 좌절할 것만도 아닌 게 일주일에 네 번, 왕성에선 왕의 알현실을 개방한다. 그 날은 모든 드워프와 신분이 확실한 타 종족이 차별 없이 알현실 앞에 들어가 왕의 집무를 관전할 수 있다. 오늘은 그 알현실을 개방하는 날 중 하나. 아카드의 아들 중 하나가 알현실의 방문객의 리스트를 관리하고 있었다. “아니, 아버지. 꼭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말씀하시고 훌쩍 떠나시더니 벌써 돌아오신 겝니까?” 아카드와 똑같이 생긴 아들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니, 죽긴 누가 죽어! 당장 이 사람이나 명부에 올리라고!” 아카드의 호통을 들은 아카드의 아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김성철을 보며 신상명세에 관해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김성... 아니... 변강쇠입니다.” 큰일 날 뻔 했다.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안에서 몸을 흔든 덕분에 정정할 수 있었다. “변... 강쇠 씨? 으음.” “무슨 문제라도?” “소환자신가요?” “그렇습니다.” “뭔가 파워풀 한 이름이네요.” “…힘에는 조금 자신이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회랑을 가로질러 알현실을 향해 걸어갔다. 도끼를 든 험악한 경비병이 도처에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김성철은 고개를 들어 그 무리를 응시했다. ‘응? 저것들은.’ 검은 로브를 걸친 무리. 종말교단이다. 그 중엔 김성철이 아는 얼굴도 있었다. 반쪽 얼굴을 은가면으로 가린 아름다운 소녀. ‘사라사.’ 가면의 성녀라 불리는 그녀는 검은 로브를 걸친 무리와 함께 알현실로 들어갔다.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베르텔기아가 조심스럽게 김성철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니, 별 거 아니다.” 그렇게 말하려는 찰나였다. 또 다른 무리가 김성철 앞을 지나갔다. 이번에도 아는 얼굴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무리다. 독해불가능한 문자가 적힌 천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여러 가지 색채를 지닌 로브를 걸친 자가 비슷한 복색을 한 사내를 거느리고 알현실로 향했다. ‘아퀴로아.’ 종말교단이 드워프 궁정 안에 있다는 건 상정범위 내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있어서는 안 될 무리가 드워프 궁정 내에 있었다. 세계의회에 가입한 국가의 외교는 세계의회에 속한 국가 사이에서는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의회에 가입하지 않은 국가, 즉 외국으로 분류되는 국가를 상대한 외교에서는 세계의회의 의결을 거쳐 공동의 명의로 하게 되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의회의 존재 자체가 유명무실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랑왕의 수하인 아퀴로아는 세계의회의 의장인 김성철에게 어떤 통지도 하지 않고 외국으로 분류된 드워프 왕국에 모습을 드러냈다.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이다. 김성철이 봐서는 안 될, 알아서도 안 될 무언가가 말이다. 방랑왕과 아퀴로아. 그들은 의문부호가 붙는 집단이다 특히 아퀴로아하고는 몇 번이고 악연이 있다. 서류에 기입을 마친 김성철은 뒤돌아서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곳에 오길 잘한 것 같군.” 아카드는 가치 있는 손님이었다. ======================================= 99. 가면 뒤의 얼굴 (1) 공개된 장소에서 왕이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정을 수행하는 것은 드워프 족의 오랜 전통이다. 그 전통 덕에 드워프 족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김성철은 어렵지 않게 드워프 왕국의 심장부에 진입할 수 있었다. 드워프 왕의 거대한 알현실 안엔 이미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왕의 국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나라의 궁전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광경. 타종족들은 이런 드워프 알현실의 분위기가 시장 바닥 같다고 비하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열린 궁정이 드워프 왕국의 숨은 힘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다. 드워프 왕의 왕좌는 하늘의 파편으로 만든 그러나 지금은 텅 비어 있는 팔 가라즈 거치대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비취로 만든 옥좌 위엔 사자갈기 같은 수염을 기른 강인한 드워프 왕 다인크래프트가 다리를 벌리고 앉아 턱을 괸 채 앉아 있다. 왕 앞엔 과연 종말교단의 무리들과 아퀴로아의 무리가 간격을 둔 채 서로 대치하는 모양새로 서 있었다. 분위기가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사방에서 웅성이는 드워프들의 목소리가 이들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었다. “조용히 하시오.” 알현실 곳곳에 자리 잡은 경비병들이 창끝으로 바닥을 쿵쿵 소리 내면서 사람들에게 사담을 금할 것을 명령하고 있었다. 한편 드워프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알현실에서 김성철은 눈에 잘 띄는 존재였다. “거기, 인간 족. 두건을 벗어라.” 드워프 경비병이 김성철에게 명령했다. 김성철은 시키는 대로 했다. 원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넓적하고 정력적인 얼굴이 나타났다. 몇 명의 드워프가 김성철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는 무시했다. 경비병 몇 명이 김성철 쪽을 향해 수군거리는 게 보였다. 인간 족이라 그런지 경계를 많이 받는 모양이었다. 곧 인간 마법사 하나가 나타나 김성철의 양해를 구하고 그의 능력치를 조사했다. “변강쇠 씨라고요? 힘이 대단히 강하시네요.” “힘 빼면 시체입니다.” 잡다한 이야기를 하면서 김성철은 알현실 중앙을 면밀하게 살폈다. 아퀴로아 측과 종말교단 측은 각각 왕의 왼쪽 정면과 오른쪽 정면에 서서 각자 무언가를 상의하고 있었다. 곧 할 이야기가 끝났는지 아퀴로아가 왕 앞에 나섰다. “폐하. 아까도 말씀드린 바지만 저희 부유군도는 폐하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퀴로아가 노파의 목소리로 말했다. 왕은 아퀴로아를 심드렁한 눈빛으로 응시하며 턱수염을 매만질 뿐이었다. 아퀴로아는 계속해서 말했다. “대륙십삼걸 중 일인인 폐하께서는 자비롭고 용맹하며 지혜로우신 군주 중의 군주입니다. 그런 분이 어찌 저런 사악한 이교도의 도움을 받는 단 말입니까? 게다가 저 자들의 사악한 술수는 결국, 폐하의 충직한 신하들의 생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폐하를 지킬 전사와 옆에서 보필할 심복을 모두 잃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달리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이오?” 드워프 왕은 앉은 채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냉랭한 기류가 왕과 왕을 둘러싼 중신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퀴로아 일행은 드워프 왕국 입장에서 불청객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아퀴로아는 그러나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유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럴 때를 대비해 저희 쪽에서 준비한 비장의 수단이 있습니다.” 아퀴로아가 뒤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알현실 입구 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이 나타났다. 거인들이다. 키가 3미터에 이르는 기이한 인간처럼 생긴 무언가가 보라색과 붉은 색으로 치장된 전신을 가리는 로브를 걸치고 부유군도의 장교의 안내를 받아 모든 드워프가 지켜보는 가운데 왕 앞에 섰다. 숫자는 전부 셋. 알현실에 모인 수백 명에 이르는 드워프의 시선이 일제히 그 길쭉한 거인에게 집중됐다. “오우거인가?” “오우거치고는 몸이 너무 호리호리한데.” 의견이 분분하지만 진실에 근접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직 단 한 명 김성철을 제외하고 말이다. ‘저것은 구세병인가.’ 검은 파편의 힘으로 움직이는 정체불명의 괴병사. 그 괴병사의 전투력은 초인급인 기사에 준하며 기사보다 훨씬 강인한 육체와 재생력을 지니고 있었다. 드워프 왕은 턱 끝을 흔들어 부하에게 명해 아퀴로아로 하여금 이야기를 계속하게 지시했다. “설명 드리죠.” 아퀴로아가 다시 한 번 손짓했다. 부유군도의 무리들이 길쭉한 거인을 덮은 천을 벗겨냈다. 그러자 푸르스름한, 젤리 혹은 슬라임과 같은 피부를 지닌 기괴한 거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세병. 김성철의 예상이 그대로 적중했다. 드워프들은 처음 보는 기괴한 괴병사의 정체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드워프 왕도 마찬가지. 그런데 다른 드워프보다 유독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이가 있었다. 왕 뒤에 두 손을 모으고 선, 백발의 수염을 기른 늙은 드워프였다. ‘드워프 원로인가?’ 드워프 원로는 모든 드워프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현명한 자만이 임명될 수 있는 명예직, 왕조차 그들의 의견을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을 지닌다. 그 원로 중 하나가 손을 떨며 말했다. “저건, 루테기네아 왕국의 시체 골렘 아닌가?” “시체 골렘? 그것이 뭡니까?” 왕이 물었다. “루테기네아 왕국의 발흥기 때 전진에 내세운 사악한 병기입니다. 학살한 타국의 병사와 백성의 시체로 만든 끔찍한 골렘이지요. 형태는 다르지만 저괴물은 루테기네아의 시체 골렘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드워프 원로는 아퀴로아를 의심이 깃든 눈빛으로 노려보며 직접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물었다. “대륙이걸 아퀴로아 공. 당신이 끌고 온 괴물의 정체는 뭡니까?” “구세병입니다.” “구세병?” “다가올 재앙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인간제국과 함께 비밀리에 개발한 초인병사입니다.” 아퀴로아는 우뚝 선 구세병 옆에 다가가더니 갑자기 단도를 꺼내 구세병의 몸을 그었다. “우오오오오!” 갑작스런 행동에 드워프들이 소리를 내며 격앙스런 반응을 보였다. 정작 검격을 받은 구세병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단검으로 갈라진 젤리질의 피부에선 한 방울 피도 흘러나오지 않았고 이내 스스로 붙으며 치유됐다. “보다시피, 구세병은 시체 같은 걸 이용해서 만든 게 아닙니다. 고도의 마법과 연금술을 이용해 만들어 낸 첨단의 전투기계지요.” “호오?” 드워프 왕이 처음으로 관심을 보였다. 심금을 울린 것은 기계라는 단어였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이 병사는 육성한 게 아니라 만들어냈다는 소리요?” 왕이 물었다. 아퀴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함이 촉촉이 밴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대량생산 체제는 이미 갖췄고 저희들은 그 물량 전체를 드워프 왕국에 무상으로 전해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무상이라고?” 왕이 관심을 보였다. “물론 조건이 있습니다.” 아퀴로아가 대답했다. “저의 주군이신 방랑왕께서는 폐하와 동맹을 체결하길 원하십니다.” “동맹?” 다인크래프트의 눈에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동맹이라니. 소문에 의하면 방랑왕 측은 그 도둑놈이 주재하는 새로운 세계의회의 일원으로 참가하지 않았소?” 도둑놈이라는 말이 나오자 드워프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도둑놈의 새끼!” “김성철 개새끼!” “찢어죽일 놈의 새끼!” 김성철에 대한 드워프들의 분노가 그와 같았다.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안에서 부르르 떨었다. “변강쇠 씨? 인기 좋은데?” “…….” 김성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대화는 계속 진행됐다.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퀴로아가 대답하고 왕이 재차 물었다. 중요한 대목이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에게 가만있으라고 손을 살짝 올리면서 아퀴로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폐하와 세계의 적 사이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은 이쪽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과거의 원한에 사로잡혀 있을 건가요? 저는 여기 세계의회의 새로운 의장과 폐하 간의 해묵은 갈등을 조정하고 조율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뭔가 꾸미는 게 아니었나?’ 지금까지 말만 놓고 보면 아퀴로아의 동기는 세계의회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속단은 이르다. 김성철은 계속해서 상황을 관망했다. “뭐라고?” 드워프 왕의 날카로운 외침이 연회실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의 수염과 머리털은 마치 번갯불을 맞은 것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웅성거리길 좋아하던 수백 명의 드워프 관중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이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다인크래프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왕좌 뒤의 텅 빈 거치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금 나더러 그 도둑놈의 새끼가 장악한 그 쓰레기 같은 놀이극에 참가하란 말이오?” 그의 짧지만 강인한 손끝은 분노로 떨고 있었다. “대륙이걸 아퀴로아.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그건 그냥 듣고 넘어가지 못할 문제군그래.” “폐하. 냉정해지셔야 합니다. 지금은 대단히 위험한 시기. 사사로운 원한에 휩쓸려 일을 그르칠 때가 아닙니다.” “그 도둑놈이 훔쳐간 팔 가라즈는 드워프 왕국 그 자체요.” 드워프 왕이 일갈했다. 팔 가라즈란 이름이 나오자 모든 드워프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왕좌 위의 텅 빈 거치대를 응시했다. 하늘의 파편을 벼려 만들었다는 둘도 없는 신병이기. 팔 가라즈. 아카드 같은 급진적인 드워프들은 그 망치가 단순한 장식품 이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전통 속에 살아온 대부분의 드워프는 팔 가라즈가 그들의 종족 자체의 상징이라고 믿고 있었다. 천하의 고집불통인 다인크래프트의 고집마저 꺾을 정도의 가치를 지닌 무기다. “팔 가라즈를 돌려받기 전까진 당신들과 어떤 이야기를 하지 않겠소.” 왕이 미심쩍한 눈빛으로 아퀴로아를 노려봤다. “하지만 과연 당신이 팔 가라즈를 이곳에 가지고 올 수 있을까요?” 어디 가지고 올 수 있으면 가져와보라는 태도다. “그건 시도해봐야겠죠. 하지만 폐하. 위기는 북쪽의 야만인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보다 근본적이고 심각한 위기가 남쪽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무어라?” 분노하던 드워프 왕의 수염이 가라앉았다. 그는 고집불통이긴 하나 분노에 휩쓸릴 정도로 어리석은 자는 아니다. 그는 보다 근본적인 남쪽의 위기라는 말에 관심을 보였고 즉시 주변의 원로들과 중신을 불러 모아 은밀한 회의를 시작했다. 정보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한편 놀라기는 김성철도 마찬가지였다. ‘남쪽의 위기? 특별히 생각나는 건 없다. 위기는 서쪽과 북쪽에서 몰려온다. 보다 당면하고 심각한 것은 북쪽의 야만인이다. 하지만 북쪽의 야만인보다 더 심각한 위협이 있다니. 김성철은 차가운 눈으로 아퀴로아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화려한 복장으로 몸을 감싸긴 했지만 볼품없는 체구의 여인은 늘 허리를 구부리고 있던 평소와 달리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약간은 거만한 태도로 손가락을 구부려 굽은 손가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전혀 무관계한 사람의 얼굴이 김성철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퀴로아의 행동거지가 어딘가 모르게 아는 이와 닮았던 것이다. 그에게 사랑과 상처를 동시에 주었던 짓궂은 여인과 말이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단순한 착각이다. 눈을 감았다 뜨고 아퀴로아를 다시 바라봤을 때 그녀는 언제나처럼 허리를 굽힌 채 쇳소리 섞인 기침을 하고 있었다. 방금 전의 생각이 착각이었다. 중신들과 의견을 교환한 드워프 왕이 다시 아퀴로아를 향해 물었다. “남쪽의 위기라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지금 야만인보다 중한 문제가 있기라도 한 거요?” 지금까지 보지 못한 신중한 물음이었다. 대답을 잘해야 할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가운데 아퀴로아가 입을 열었다. “인간제국의 국경이 폐쇄된 건 주지하고 계시지요?” “그렇소. 제국의 제후들이 그쪽의 방랑왕 쪽으로 돌아선 결과로 알고 있소.” “라그란제의 상황에 대해서도 알고 계십니까?” “라그란제? 그건 왜 묻는 거요?” 드워프 왕도 거기까지는 모르는 눈치다. “라그란제에서 황제는 지금 말도 안 되는 일을 꾸미고 있습니다. 최후의 발악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르려 하고 있죠.” 아퀴로아가 지팡이를 덜어 반대 측에 서 있는 사라사 제로 쪽을 가리켰다. “저기 계신 종말교단 여러분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짓을 말이죠.” 아퀴로아를 방관하던 종말교단의 무리들이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지목당한 당사자 사라사 제로의 얼굴엔 불쾌한 낯빛이 떠올랐다. 그의 뒤에 서 있는 사내가 그녀의 뒤에 서서 뭐라고 속삭였다. 김성철은 순간적으로 드러난 그 사내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데커드? 사라사 제로의 부친? 그도 종말교단 패거리에 가입한 건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가면의 성녀, 사라사 제로가 오랜 침묵을 깨고 드디어 정면으로 나섰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잘 들었어요. 방랑왕의 사신님.” ======================================= 99. 가면 뒤의 얼굴 (2)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처음부터 아퀴로아에게 묵직한 일격을 날렸다. 드워프의 왕조차 존대를 하는 아퀴로아를 일개 사신으로 강등시키고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네요.” 사라사가 아퀴로아의 뒤편에 우두커니 서 있는 구세병을 눈에 담았다. “저 인형이 뭔가 대단한 것처럼 소개했는데 제가 볼 땐 그냥 평범한 잡동사니 그 이상으론 보이지 않거든요.” “망발을 삼가라. 이교도 계집.” 아퀴로아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주의를 줬다. 사라사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녀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것을 데려 오세요.” 그녀가 명하자 알현실의 입구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쇠사슬로 무언가를 끌고 나타났다. 몇 겹이나 되는 드워프제 사슬로 묶인 것은 공포의 야만인이었다. 야만인은 짐승 같은 포효를 지르며 수십 명에 이르는 종말교도에 의해 끌려오고 있었다. 야만인은 곧 구세병 앞까지 끌려왔다. “폐하.” 사라사가 말했다. “저 방랑왕의 사신께서 자랑한 저 인형이 얼마나 쓸모 있는지 검증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드워프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겉보기엔 그럴 듯 하지만 구세병의 힘은 미지수다. 왕의 윤허를 얻은 사라사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짤막하게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구세병과 야만인 사이에 검은 불길로 한 차례 솟아오르더니 무형의 장막이 나타났다. 종말교단이 술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종종 치는 방벽이다. “그럼 어디 한 번 보기로 하죠.” 사라사가 손가락을 한 차례 튕겼다. 그러자 야만인을 붙잡고 있던 수십 명의 사내들이 차례로 쇠사슬을 놓았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아퀴로아가 당혹감이 섞인 목소리로 사라사를 노려보며 소리 질렀다. 사라사는 그저 짓궂게 웃을 뿐이었다. “이 년이!!!” 아퀴로아가 고함을 질렀지만 그녀의 고함은 곧 이어진 야만인의 포효에 묻혔다. 성난 야만인은 그대로 구세병에게 달려들었다. 구세병은 유연한 신체를 칼날처럼 변형시켜 야만인에게 맞서려 했지만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구세병은 야만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흉포한 야만인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구세병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고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삼 대 일의 승부였지만 그것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별 볼 일 없네요.” 그렇게 말하며 사라사 제로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주문을 외웠다. 장막 안의 공기가 급속도로 냉각됐다. 구세병을 쓰러뜨린 야만인이 몸을 벌벌 떠는가 싶더니 갑자기 그의 심장 근처에서 폭발 같은 게 일어났다. 냉기의 폭발이다. 고슴도치처럼 장방형으로 퍼진 얼음의 창날이 야만인의 가슴을 꿰뚫고 있었다. 막강한 야만인은 경악한 표정을 지은 채 아름드리나무처럼 쓰러졌다. 그 장면을 본 모든 이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김성철도 마찬가지였다. ‘저 마법은 본 적이 없는 마법이다.’ 마법진 부터 생소하다. 그가 아는 모든 얼음의 마법을 총동원해도 방금 사라사가 펼친 마법과 일치하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설마, 저건 신의 던전에서 얻은 건가.’ 에어푸르트 마법학교에서 수학할 당시 사라사는 제법 강한 마법사였지만 야만인을 일격에 처리할 수준가진 이르지 못했다. 한편 신의 던전은 모두 아홉 개가 있다. 김성철은 사라사가 그가 알지 못하는 던전에서 수련을 마친 건 아닌가 하고 짐작했다. 한편 아퀴로아의 입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자신 있게 내세운 구세병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만천하에 까발려진 것도 모자라 상대방의 기를 살리는 용도로 전락했다. 드워프 왕은 더 이상 아퀴로아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아퀴로아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었고 아퀴로아의 말을 듣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고집은 한 번 정해지면 어지간한 것엔 꺾이지 않는다. 왕이 손을 내젓자 드워프 병사들이 아퀴로아 일행을 둘러쌌다. “이야기는 잘 들었소.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건 그쪽의 사정이나 지원이 아니라 당면한 야만인이겠지.” 다인크래프트는 사라사가 처치한 야만인의 시체를 바라보고는 손을 다시 한 차례 내저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아퀴로아를 둘러싼 드워프 병사들이 그들을 알현실 바깥으로 내몰려고 하고 있었다. “후회할 거요.” 아퀴로아가 말했다. 드워프 왕은 코웃음을 치며 떠나가는 아퀴로아에게 말했다. “다음에 여기 오려면 맨손으로 오지 말고 팔 가라즈를 지참하고 오시오. 그러면 한 번 그쪽 이야기는 들어주리다.” 왕이 빈정거렸다. 알현실에 있던 수백 명의 드워프들이 일제히 껄껄대며 아퀴로아 일행을 비웃었다. 알맹이는 다르다고 하나 한때 대륙이걸이었던 아퀴로아의 마지막 체면마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아퀴로아의 몰락을 지켜보았다. 시선은 이제 홀로 남은 사라사 제로에게 집결됐다. 사라사 제로는 자신을 지지해 준 왕에게 목례를 해 감사를 표한 후 낭랑한, 재기가 넘치는 특유의 목소리로 말했다. “현명하신 왕의 판단에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드워프 왕국의 위기는 현재진행중입니다.” 사라사 제로가 손짓하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데커드가 소매 속에서 하나의 두루마리를 꺼냈다. 불경한 기운으로 점철된 무쇳빛의 두루마리였다. 김성철은 한 눈에 그 두루마리가 심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 저것은 위험한 물건이다. ] 그의 내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목소리는 김성철의 뜻과 완벽히 일치했다. “슬슬 나가시는 게 어떻겠소?” 김성철은 여기까지 안내한 아카드가 김성철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해꾼도 사라졌으니 자신의 뜻에 따라 직접 드워프 왕과의 교섭을 하라는 속내였다. “준비가 되면 내가 앞장서리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게.” 김성철은 데커드의 손에 들린 두루마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신의 글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왜곡된 악의가 느껴진다.’ 김성철이 느끼는 감정은 심장을 통해 베르텔기아에게 전해졌다. “뭔가 있는 거야?” “그렇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사라사는 왕의 앞을 우아한 걸음걸이로 거닐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이 두루마리엔 까마득한 고대의 힘이 담겨 있습니다. 한 번 나타나면 세상을 격동시키고 모든 것을 뒤집을 정도의 힘이요. 하오나, 모든 신화적인 물건이 그렇듯 이 두루마리의 힘은 아무나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오직 드워프 중의 드워프이자 바위 그 자체인 폐하만이 이 두루마리의 힘을 제대로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험이 따르겠지.” 왕이 말했다. 이에 사라사 제로는 엷은 미소를 띤 채 왕의 말을 받았다. “국경을 넘어오는 야만인보다 위험하진 않을 겁니다.” “…….” 진실보다 무거운 건 없는 법이다. 왕의 얼굴이 굳었다. “첩보에 따르면 야만인들이 국경 근처에서 대대적인 병력 보강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조만간에 다시 한 차례 폐하의 요새를 습격할 것입니다. 저희들은 기꺼이 폐하를 도와 수비에 임하겠지만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희생은 불가피합니다.” 다인크래프트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신화를 위한 제물. 그것은 아무나 쓸 수가 없다. 격심한 고통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자기를 잃지 않고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기꺼이 자기 한 몸을 불사를 수 있는 자만이 제물이 될 자격이 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미 수많은 왕의 심복들이 검은 불길을 태우기 위한 땔감으로 전락해 사라졌다. “제가 볼 때 이대로라면 드워프 왕국이 버틸 수 있는 한도는 한 달 남짓입니다.” 사라사가 말했다. 그녀는 국왕 뒤의 원로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처음 그녀가 궁정에 나타났을 때 왕의 뒤엔 스무 명의 원로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현재 남은 원로의 숫자는 여섯 명에 불과하다. 절반 이상이 왕국을 지키기 위한 불꽃으로 산화한 것이다. “저희들도 언제까지 이곳에 남아 있을 순 없습니다. 방어선이 뚫리면 저희들도 이곳을 떠나야 하니까요. 하지만 저희 종말교단은 드워프 왕국이 허무하게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데커드가 다시 한 번 앞으로 나와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만일에 대비한 최후의 수단으로 말입니다.” 노골적인 강권. 김성철의 눈엔 그렇게 비쳤다. 드워프 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김성철과 입장이 다르다. 그에겐 지켜야 할 왕국과 백성이 있다. 설령 그 수단이 검증되지 않고 불분명하더라도 왕국을 구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다. 비록 왕의 내면에선 강한 회의가 일었지만 사라사가 말했듯 그에겐 시간이 없었다. 왕이 힘없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여봐라.” 왕의 병사들이 부복했다. “저 두루마리를 받아들여라.” 여간해서 생각을 바꾸지 않는 그가 뜻을 바꾼데엔 아퀴로아의 등장도 큰 몫을 했을 것이다. 그녀는 왕국을 살리기 위한 또 다른 길에 대한 비전제시는커녕 실망감만 심어줬으니까. 그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선 아퀴로아가 아니라 그 사내가 왔어야 했다. 세계의 적이라 불렸던 바위처럼 단단했던 검은 머리의 사내가. 드워프 왕은 이제는 희미한 망치를 들고 떠나가던 사내의 뒷모습을 눈에 그리며 부하들이 두루마리를 향해 걸어가는 것을 지친 눈으로 응시했다. “멈춰라.” 그때였다. 한 사내가 군중을 뚫고 왕좌로 향하는 붉은 주단으로 만든 카페트 위에 올라섰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누구냐?” 경비병들이 창과 도끼를 들고 김성철 앞을 막아섰다. 아무도 그의 얼굴을 아는 이가 없었다. 아카드가 뒤늦게 김성철을 뒤쫓아 오며 그의 이름을 말하려고 할 때였다. 김성철의 왼손의 그의 얼굴을 감싸듯이 만졌다. 우드득. 두득. 근골이 뒤틀리는 소리가 알현실 위에 메아리쳤다. 다른 한 손은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드워프 왕의 눈에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허공 속에서 그토록 그리던 하나의 무기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팔 가라즈. 드워프의 자랑이자 상징이 다시 한 번 드워프 궁정 내에 나타났다. 그것도 주인 잃은 거치대 앞에서. 김성철의 얼굴을 감싼 왼손이 천천히 얼굴에서 물러났다. 왼손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순간 사람들은 알아 볼 수 있었다. 팔 가라즈를 든 사내의 정체를. 김성철. 9년 전에 바로 이 알현실에서 팔 가라즈를 훔쳐 달아갔던 사내가 다시 돌아왔다. “그 두루마리는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물건이오.” 김성철이 원래의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드워프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수염과 머리털을 꼿꼿이 세운 채로. 충격은 다른 곳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났다. 여유롭게 상황을 주시하던 사라사 제로의 드러난 반쪽 얼굴이 놀라움과 경악, 그리고 그리움으로 물들었다. “김성철.” 사라사가 말했다. 애틋한 여운이 남은 음성으로. “감히 무슨 낯짝으로 이곳에 나타났는가?” 드워프 왕이 사자처럼 포효했다. 김성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눈빛으로 왕을 응시하며 고개를 숙였다. “할 말을 하러 왔을 뿐이오.” 적으로 가득 찬 공간 속에서도 김성철은 의연하기만 했다. 마치 태산준령에 우뚝 선 봉우리처럼. 김성철은 재차 드워프 앞에 내민 두루마리를 보며 말했다. “그 두루마리는 불경한 물건이오. 어쩌면 이 왕국을 멸망에 몰아넣을 수 있을 정도로.” “네 말은 듣고 싶지 않다.” 드워프 왕이 소리쳤다. 이미 그의 분노는 임계치를 넘어가고 있었다. “당장 우리의 물건을 원래의 자리에 돌려놓아라. 세계의 적!” 왕이 바라는 건 이제 두루마리도 왕국의 구원도 아닌 하나의 망치였다. 타협의 여지는 없다. 드워프들의 왕. 다인크래프트는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꺾이지 않는 고집의 소유자였다. 김성철의 눈에 일순 실망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팔 가라즈를 되돌려 놓기 전엔 답이 없는 건가.’ 침묵 속에서 알현실 입구로부터 드워프 병사들이 속속 증원되고 있었다. 한 명의 드워프가 아니다. 왕국 전체가 김성철을 잡으려 하고 있다. 조여드는 포위망 속에서 김성철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라사를 지그시 응시했다. “왜 그렇게 사는 거냐?” 사라사의 표정이 일순 변했다. 싸늘한 빛이 드러난 하나의 눈에 떠올랐다. “질문의 의도가 뭐지?” 그녀의 물음에 김성철은 두루마리를 응시하고는 그녀를 마치 꿰뚫어버릴 듯한 시선으로 노려봤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묻는다고 생각하나?” 그의 차가운 일갈을 받은 사라사의 신형이 한 차례 휘청거렸다.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그때였다. 바깥에서 다급한 고성이 들려왔다. 드워프 병사의 것이다. 지금 알현실엔 어떤 외침이나 호소도 일체 통용되지 않을 정도의 냉랭한 장막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 외침의 의미가 또렷하게 들려오는 순간 장내의 분위기는 다시 한 번 급변했다. “야만인이다! 야만인이 나타났다!” ======================================= 99. 가면 뒤의 얼굴 (3) “어디냐. 어디로부터 들어오는 거냐?” 아카드가 경비병을 향해 소리쳤다. “그건 알 수 없소! 하지만 야만인은 지금 왕성 바로 직전까지 진출했소!” 머지않은 곳에서 광기에 가득 찬 짐승의 포효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알현실의 드워프들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공포가 떠올랐다. “야만인이다!” “놈들이 진짜 나타난 건가?” 곳곳에서 야만인의 출현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억겁의 세월에 걸쳐 만들어졌다는 암반 아래의 도시. 다인타이트는 건설 이후 최악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 치명적인 사태로 인해 상황은 급변했다. “폐하. 수도에 침입한 야만인들은 저희가 막겠습니다.” 사라사가 다인크래프트에게 말했다. 김성철의 출현으로 잠시 당황했던 그녀지만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은 듯 아름다운 얼굴엔 장막과 같은 여유와 기품이 다시 흐르고 있었다. ‘저 녀석이.’ 김성철은 두루마리를 든 데커드 쪽을 노려봤다. 데커드는 김성철과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는 여유마저 부렸다. “오랜만이군. 34호.” 김성철의 뒤에 있던 아카드는 푹 눌러 쓴 두건 아래 희미하게 드러난 데커드의 얼굴을 알아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데커드. 자네도 이 자들과 한 패였나?” 아카드의 물음에 데커드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김성철은 데커드의 위치를 마음속으로 가늠한 후 이 사태의 열쇠를 쥔 사내. 다인크래프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다인크래프트는 왕좌에 일어선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런데 다인크래프트의 얼굴, 특히 그의 시선을 본 순간 김성철은 다인크래프트라는 사내가 지닌 지독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다인크래프트의 시선은 오직 팔 가라즈에 머물러 있었다. 자신은 물론 왕국 전체를 멸할 수 있을 정도의 위기 상황 속에서 그의 관심사는 오직 팔 가라즈 뿐이었다. “망치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아라.” 알현실 밖에선 지금 이 순간에도 야만인의 포효와 드워프의 비명, 도시 전체를 떨쳐 울리는 종소리와 뿔피리 소리가 쉬지 않고 번갈아가며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드워프 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팔 가라즈를 돌려다오. 세계의 적.” “…….” 다인크래프트란 사내의 왜곡된 고집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고집을 부리는 그 사내의 모습을 본 김성철은 답답함을 느꼈다. “다인크래프트. 지금 그게 중요하오?” 김성철이 물었다. “야만인이 궁성 앞까지 진출했다!” 알현실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을 또 다른 충격적인 소식이 들어왔지만 다인크래프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팔 가라즈를 돌려주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지. 여봐라! 모든 병사를 알현실로 불러 모아라! 저 저주받아 마땅한 인간 도둑놈에게서 성스러운 망치를 뺏어라!” 왕이 명했다. 터무니없는 명령이다. 원로 하나가 다가와 왕에게 진언했다. “폐하. 지금은 팔 가라즈보다 수도에 침략한 야만인에 주력할 때입니다.” 원로뿐만 아니었다. 알현실에 모인 모든 드워프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의 생각은 달랐다. 왕의 근엄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우리 종족의 생명이 육체라면 팔 가라즈는 영혼과 같은 것. 영혼과 육체.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기꺼이 영혼을 택하겠소.” 왕은 만류하는 중신과 원로에게 그렇게 말한 후 다시 김성철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장, 팔 가라즈를 반납해라. 다른 말은 듣지 않겠다.” 협상의 여지도 타협의 여지도 없다. 저 드워프 왕은 자신의 말을 지킬 사람이다. 자신이 만들어 낸 왜곡된 고집이 몸 전체를 갉아먹는다고 할지라도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죽어갈 사람이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자기 하나의 생명만 걸렸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드워프의 왕의 어깨엔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의 생명이 걸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순히 자신의 뜻을, 고집을 관철시키기 위해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순수한 이기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답답함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변했고 분노는 다시 허무한 권태감으로 변해갔다. 그 와중에 김성철은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다. [ 어차피 스러질 덧없는 존재. 네가 전부 여기서 거두어가는 건 어떤가? ] 거역하기 어려울 정도로 달콤한 목소리였다. 더욱 섬뜩한 것은 김성철 본인이 그 생각에 스스럼없이 동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방금 혼란 속에서 비슷한 음성을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간 김성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설마 방금 그것은 내 생각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속삭임인가.’ 순간 김성철의 주위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의 주변엔 짙은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김성철은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검은 거인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는 것을. ‘위험하다.’ 그때였다. 심장 쪽에 강렬한 움직임이 일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베르텔기아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으로 몸을 흔들어 김성철을 일깨웠다. 어둠 속에서 김성철은 유일한 외부의 감각을 등대 삼아 어둠 바깥으로 탈출 할 수 있었다. “헉!” 어둠이 걷히고 총천연색의 색깔이, 왕좌 앞에 선 다인크래프트의 얼굴이 다시금 눈에 들어왔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속에서 말했다. “아니, 아무 문제도 없다.” 큰일 날 뻔했다. 현실만 놓고 보면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김성철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 안엔 언제 어디서라도 자신을 빠뜨려놓은 무시무시한 구멍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진짜 아무 문제 없는 거 맞아?” 김성철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베르텔기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베르텔기아. 어떻게 알 지? 내게 문제가 있다는 걸?” “심장이.. 뭐랄까. 조금 이상해서.” “그럴 리가. 내 심장은 멀쩡하다.” 김성철은 호흡을 멈추고 내면에서 힘차게 약동하는 심장의 고동을 느꼈다. 그의 몸엔 어떠한 이상도 없다. 그래도 베르텔기아 덕분에 정신은 차렸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의 존재에 다시 한 번 고마움을 느끼고는 수염을 곤두세운 채 자신을 노려보는 드워프 왕을 향해 팔 가라즈를 번쩍 들어올렸다. “이 망치를 돌려주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건가?” “어떻게 하기는. 그 망치는 네가 훔쳐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돌려받을 뿐. 너와 무슨 할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하나? 도둑.” 지독할 정도의 답답함을 드워프 왕은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김성철은 느낄 수 있었다. 왕을 바라보는 드워프들의 시선이 전과 같지 않음을. 그때 비명소리가 문가에서 울려 퍼졌다. 드워프 병사의 것이다. 피가 튀었고 누군가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알현실 안에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곧 문 너머로 한 사내가 나타났다. 2미터는 훌쩍 넘는 거대하고 육중한 체구. 더럽고 투박한 갑주와 피로 흥건한 도끼. 북쪽의 야만인이 알현실까지 나타났다. “야... 야만인이다!” 야만인의 힘을 아는 드워프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다인크래프트. 지금 네 앞에 누가 있는지를 봐라.” 김성철이 망치를 쥔 채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작지만 응축된 분노가 담긴, 지진 전의 고요와 같은 묵직함을 담은 음성이었다. 모든 드워프들의 눈이 김성철을 향했다. 그러나 드워프의 왕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네가 훔쳐간 물건뿐이다.” 왕은 그렇게 말하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저 외적으로부터 팔 가라즈를 되찾지 않고!” 왕의 못난 행태는 다시 한 번 김성철로 하여금 권태감을 느끼게 했다. 어둠은 권태감과 함께 밀려든다. 밀려드는 어둠 속에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김성철은 하나의 끈을 느꼈다. 고통과 고난으로 점철된 끔찍한 과거와 현재의 자신을 잇는 외로운 끈 하나가. 그것은 위태롭게 현재의 자신을 묶어두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끈은 단단해지고 질겨졌다. 스쳐 지나갔던 몇 개의 인연이 위태로운 끈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김성철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 명예롭게 죽어간 사람들, 김성철이 시험했던 자들, 그리고 라그란제의 라르고란 여자와 조촐한 식탁 앞에 포부를 이야기하던 황제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맹약의 십자가가 박힌 심장 위를 덮듯 주머니 안에 포개져 있는 베르텔기아 말이다. “…….” 버텨냈다. 권태감은 인연이 만들어 낸 감정의 불꽃에 녹아 사라졌고 주위를 덮어오는 어둠 또한 사라졌다. 단순명쾌한, 유쾌하기까지 한 상쾌함을 느끼며 김성철은 드워프 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엔 더 이상 분노도 짜증도 책망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옜다!” 김성철은 아무 미련 없이 자신의 신물을 드워프 왕을 향해 던졌다. 팔 가라즈가 그의 손을 떠나는 순간 묘한 감각이 느껴졌지만 크게 의식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손을 떠난 팔 가라즈는 다인크래프트의 머리 위에 쓴 왕관을 지나 그 너머에 자리 잡은 팔 가라즈의 거치대에 정확히 날아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철컥. 철컥. 하늘의 파편으로 만든 부정형의 거치대가 오랜만의 주인을 반기며 신성한 망치를 봉인했다. 다음 순간 김성철의 손엔 대도 크럼부이가 나타났다. 크럼부이는 신이나 떠들었다. “진정한 주인공은 적절한 순간에 등장하는 법이지! 싸구려 망치의 뒤를 이을 최강의 도검 크럼부이님, 드디어 등장!” 김성철은 크럼부이를 든 채 점찍어 둔 데커드에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다가가 그를 가볍게 밀쳐냈다. “크억!” 불의의 일격을 당한 데커드는 뒤로 나자빠지며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떨어뜨렸다. 김성철은 즉시 그 두루마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닿으려는 찰나, 내면에서 경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위험하다. 그것은 의지를 빨아먹는 독이다. 네가 만져서는 아니된다. ] 김성철은 손을 떼고 대신 크럼부이를 휘둘러 두루마리를 일도양단했다. 바닥과 함께 반으로 갈라진 두루마리는 그러나 곧 원형으로 복귀했다. 그 또한 파괴할 수 없다는 신의 글의 일종인 것이다. 김성철은 크럼부이를 사라사 제로와 종말교단에게 향했다. 그러자 왕이 즉각 반발했다. “내 손님에게 손을 대는 건 허락하지 않겠다.” 왕의 부하들이 사라사와 종말교단을 감싸듯이 호위했다. “그런가.” 할 만큼은 했다. 남은 것은 저 어리석은 왕에게 맡길 차례다. 이미 한 번 그의 고집에 따라 움직여줬으니. 이제는 김성철 본인이 마음껏 휘저을 때다. 김성철은 검을 든 채 주위를 둘러보며 힘이 깃든,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너희들의 원한록 첫 열에 있고 종족의 원수라는 건 알고 있다. 과거의 일에 대해선 사과한다. 물론 쉽게 사과 받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김성철은 다시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며 마지막으로 드워프의 왕을 응시했다. 왕은 더 이상 김성철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원하는 바를 채운 드워프 왕은 전보다 훨씬 작은 남자가 되어 있었다. 김성철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내 나름대로의 속죄를 하겠다.” 크럼부이에 푸르스름한 빛이 서렸다. 김성철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알현실 앞에 나타난 야만인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김성철에게 도끼를 휘둘렀다. 김성철은 숨지도 피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야만인의 도끼를 받아냈다. 챙캉! 힘과 힘의 대결. 그러나 어찌 감히 야만인 따위가 김성철의 신적인 힘에 비견될 수 있겠는가. 김성철의 몸에 신적인 힘이 흐르고 지나간 순간 안간힘을 쓰며 도끼날을 김성철에게 밀어 넣던 야만인은 갈대가 꺾이듯 김성철의 압도적인 힘에 꺾여 무참하게 대리석 바닥 아래 뭉개졌다. 쿵! 김성철의 군홧발이 야만인의 머리통을 밟고 그대로 터뜨려버렸다. 피와 뇌수가 사방에 퍼졌고 뒤이어 드워프들의 함성이 뒤를 이었다. 함성 속에서 아카드는 도끼를 들고 김성철의 뒤를 바짝 따랐다. “뭣들 하는 건가? 형제들. 제국대원수 아니 세계대원수와 함께 고향을, 우리의 영토를 지키지 않을 건가? 생에 한 번 올까말까 한 영예로운 기회라구!” 어느새 김성철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가 된 사내가 사람들에게 윽박지르듯 말했다. 망치를 얻어맞은 듯 충격에 사로잡힌 드워프들은 저마다 무기를 빼들고 하나 둘 김성철과 아카드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김성철이 사라진 알현실 너머 복도에선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와 노호성이 울려 퍼졌다. 알현실에 있던 드워프들은 곧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왕의 뒤를 보필해야 할 원로마저도 연로한 몸을 이끌고 전사들의 뒤를 따랐다. 남은 것은 왕과 왕을 지키는 근위병, 그리고 종말교단 뿐. 왕좌 위에 비어 있던 거치대는 채워졌지만 알현실은 비워졌다. 홀로 남다시피 한 다인크래프트는 텅 빈 알현실을 멍하니 바라보며 쓰러지듯 옥좌 위에 앉았다. ======================================= 99. 가면 뒤의 얼굴 (4) “크르르르르!” 야만인 셋이 김성철에게 달려들었다. 김성철은 야만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크럼부이를 휘둘렀다. 스걱! 검광이 한 차례 번득이자 야만인 셋은 피분수를 뿜으며 바닥에 너부러졌다. 입에 거품을 물며 죽어가는 야만인을 뒤로 한 채 김성철은 전방에 자리 잡은 보루를 올려다보았다. 다인타이트의 중심에 선 요충지다. 그곳엔 느닷없는 야만인의 기습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는 드워프 병사들이 있었다. 야만인을 해치우는 걸 병사들이 보루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김성철은 계단을 따라 보루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꼭대기엔 노포와 화포를 쏘아대는 드워프 병사와 그들을 지휘하는 장교가 있었다. “전황은 어떻게 되가고 있나?” 김성철이 드워프 장교에게 물었다. 드워프 장교는 김성철의 얼굴을 보고 적잖이 놀랐으나 김성철 뒤를 지키고 있는 원로와 장군의 얼굴을 보고 대강의 상황을 파악하고는 김성철에게 보고했다. “현재 수도에 침입한 야만인의 숫자는 약 500명 정도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적군.” 다인타이트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보루 위에 올라서자 김성철의 의혹은 확신으로 굳었다. ‘조직적인 공격이 아니다. 우리 쪽도 놀라긴 했지만 야만인 또한 놀라기는 매한가지로 보였다.’ 수도에 침입한 야만인들은 야수처럼 개별로 수도 전체를 휘저을 뿐, 어떤 일관된 계획도 없이 아무렇게나 눈에 보이는 대로 살육과 약탈을 벌이고 있었다. 북방 전역에서 야만인에게도 조직적인 행동이 가능하다는 걸 확인한 김성철에게 그런 야만인의 움직임은 의문을 품기에 충분했다. “500명이라.” 적다면 적은 숫자. 하지만 그 500명만으로 다인타이트는 이미 도시의 기능이 마비될 정도의 충격을 입었다. 그것이 야만인의 힘이다. 김성철은 망루 아래 곳곳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와 치솟는 불길을 보며 다시 장교에게 물었다. “야만인의 침입경로는?” 가장 궁금한 건 그것이었다. 드워프는 다른 종족보다 수비적인 종족이고 요새를 쌓고 소수로 다수의 적을 막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한다. 특히 드워프의 왕도인 다인타이트는 사슬처럼 설치된 수많은 요새에 의한 보호를 받는다. 아무리 야만인이라도 간단하게 침입하기 어렵다. 다른 모든 요새 망을 섬멸하기 전까진 말이다. “누군가 게이트를 열었습니다.” 장교가 말했다. “게이트?” “그렇습니다. 누군가 야만인의 영토와 다인타이트 사이를 연결하는 게이트를 건설했고 거기를 통해 야만인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 게이트의 위치가 어디인가?” 이에 경비병은 왕성 아래에 자리 잡은 고급 주택가 중 하나를 가리켰다. “저 건물입니다.” 눈에 익은 건물이다. 곧 김성철은 그 건물이 과거 자신이 머물던 인간제국 대사관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인간제국의 대사관입니다. 제국과의 수교가 끊어지고 대사가 떠나 빈 건물이 되었는데 누군가 그 건물 안에 게이트를 설치한 것이지요.” 인간제국의 대사관에 예고 없이 열린 게이트. 김성철은 문득 그 게이트가 드워프 왕국은 물론 야만인에게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변수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었다. ‘드워프 왕국도 야만인도 아닌 제3의 세력이 열었을 가능성도 있다.’ 드워프 왕국을 혼란으로 몰아넣길 원하는 무리가 지금 당장 알현실에도 있지 않은가. “우물쭈물할 시간은 없겠군.”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아래 내려다보이는 인간제국의 대사관을 응시했다. ‘지금 도시를 파괴하고 있는 야만인은 척후병에 불과하다. 곧 본대가 이곳에 들이닥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곳, 드워프 왕국은 멸망한다. 왕국이 멸망하는 건 아무래도 좋지만 김성철을 따라 기꺼이 싸우길 원하는 전사들을 허투루 죽게 할 수 없다. 김성철은 아카드와 원로, 그리고 고위 장교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내가 게이트를 닫겠소. 도시 안을 휘젓는 야만인의 토벌은 그쪽에 일임하겠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 드워프들의 얼굴엔 자신감이 없었다. 야만인 1인의 전투력은 대륙십삼걸 급이니. 그런 야만인이 수백 명이다. 하지만 절망적이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여긴 우리가 힘을 합쳐 막겠소. 그러니 꼭... 돌아와 주시오.” 아카드가 비장하게 말했다. “당신은 좀 조용히 해! 뭔가 재수가 없어지려고 하고 있잖아!” 베르텔기아가 기겁을 하며 아카드에게 핀잔했다. 김성철은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럼 다녀오리다.” 그대로 김성철은 보루의 꼭대기에서 까마득한 계단처럼 이어진 건물들의 첨탑을 향해 뛰어내렸다. 강한 맞바람이 김성철의 머리칼과 코트 자락을 펄럭이게 했다. “오랜만이군! 이렇게 함께 싸우는 것도!” 크럼부이가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전에도 꺼낸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김성철은 공중에서 몸을 한 차례 회전하며 석조 포도 위에 착지했다. 쿵. 지면 전체가 울릴 것 같은 충격. 촘촘히 박아넣은 석조 타일이 피아노의 건반처럼 튀어올랐다 내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이노! 라이카쉬!” 골목길에서 야만인의 말이 들려왔다. 곧 후다닥 하는 발소리와 함께 야만인 일곱 명이 김성철 앞에 나타났고 뒤이어 야만인 다섯이 뒤편에도 출몰했다. 완벽하게 포위된 형세. 그 숫자는 공교롭게도 모두 열 둘, 대륙십삼걸 중 한 명을 제외한 숫자다. 어떻게 보면 김성철과 그를 제외한 대륙십삼걸 전체와 싸우는 모양새. 그 모습은 보루 위에 서 있던 수많은 드워프들의 눈에 고스란히 포착됐다. “대원수가 야만인 열두 놈에게 둘러 싸였다!” “대륙십삼걸 전체와 싸우는 형국이군.” 모두가 김성철에게 위기가 찾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상황은 싱거울 정도로 빠르게 종결됐다. 파지직. 김성철의 손끝에 전류가 일어나더니 이윽고 맹수와 같은 기세를 지닌 전격이 야만인을 향해 내려쳐진 것이다. 전류는 야만인 사이를 휘감으로 무자비하게 그들을 지지고 불태웠다. 체인 라이트닝. 고대의 바람 마법이 포위망의 한 축을 글자 그대로 박살을 낸 것이다. 김성철은 뒤편의 야만인을 무시하고 그대로 앞으로 뛰어나갔다. “저것들은 그냥 놔둬도 되는 거야?”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가 물었다. “놈들은 대사관을 지키는 무리로 보인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이미 게이트 너머에서 어떤 조직적인 지령이 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겠지.” 김성철의 판단은 정확했다. 대사관 쪽엔 이미 수십 명의 야만인들이 운집해 그들의 교두보가 될 게이트 인근을 철지히 지키고 있었다. 도시 안을 휘젓는 다른 야만인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움직임. 김성철은 한 번에 이쪽을 돌파하고 싶었다. 그러나 야만인의 경계는 대단히 삼엄했다. 강행돌파를 하려면 할 수 있겠지만 촘촘한 야만인의 방어진은 시간을 요할 것으로 보인다. 김성철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때마침 하늘 위엔 붉은 색의 공선 실피드가 다인타이트 상공에 떠올라 있었다. 김성철은 플라이로 하늘로 날아올라 실피드로 직진, 함교 앞까지 날아갔다. “마라키아!” 함교엔 소형 골렘과 신관들 그리고 마라키아가 있었다. “부수는 자! 어떻게 된 일인가? 야만인이 도시를 침공하고 있는데.” “네가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광역 마법을 저 건물에 꽂아 넣어라.” 김성철은 정확하게 인간제국의 대사관을 가리켰다. “호오. 내 실력을 시험해보겠다는 건가?” 마라키아의 눈이 번득였다. “잔말 말고 지금 당장.” 말을 마치자마자 김성철은 아래로 낙하했다. 마라키아는 갑판 위에 올라가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검은 깃털을 지닌 최강의 나하크 주위로 인간의 마법이 아닌 조인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영창을 마친 직후 마라키아는 영혼창고에서 지팡이를 꺼내며 마치 아래를 내려치듯 휘두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새의 울음을 외쳤다. 다음 순간, 지팡이 쪽에서 무언가 번쩍거렸다. 이윽고 바람보다 빠른 무언가가 탄환처럼 김성철을 지나 날아가더니 대사관 인근에 적중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켰다. ‘아신 시드미아와 쓴 것과 유사한 마법이군.’ 그 위력은 시드미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김성철만을 바라보던 야만인을 혼비백산하기에 충분했다. 쿠쿵! 마라키아는 갑판 위에서 가공할 마법 포격을 연달아 가했다. 건물이 무너지고 흙먼지가 질척하게 피어오르는 와중에 야만인의 시선은 온통 실피드에게 쏠렸다. 그 혼란을 틈 타 김성철은 흙먼지로 자욱한 인간제국의 대사관의 안들에 안착했다. 시계(視界) 제로의 전장. 하지만 김성철은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야만인의 몸에서 나는 체취와 시끄러운 소리가 눈이 보이지 않아도 그들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김성철은 크럼부이를 휘둘렀다. 그의 휘두름엔 거리낌이 없었다. 이 지역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가 적이니. 야만인들은 눈을 뒤덮은 먼지와 폭음 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크럼부이에 베여 그 피를 칼날에 빨아 먹히며 죽임을 당했다. 순식간에 방벽을 친 수십 명의 야만인이 도륙 당했다. 10초도 되지 않아 야만인의 교두보는 증발됐다. 아무 소모값 없이 단순한 포격지원만으로 얻어 낸 성과다. 김성철은 시체를 뒤로하고 대사관 안쪽으로 들어갔다. 곧 김성철은 문제의 게이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법의 힘을 머금은 바위로 쌓아올린 아치형의 게이트는 대사관 정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로비 정면에 건설되어 있었다. 아치형을 이루는 테두리 안쪽엔 물결처럼 일렁거리는 차원의 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게이트를 파괴하면 되겠군.’ 팔 가라즈가 있었다면 시원하게 일격에 박살낼 수 있었겠지만 크럼부이가 그렇게 좋지 않은 무기는 아니다. 크럼부이로도 게이트를 부술 수 있다. 김성철은 달려드는 야만인 둘을 가볍게 베어 넘기고 게이트 앞으로 섰다. “뭘 망설여?” 김성철이 게이트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자 베르텔기아가 불쑥 물었다. “잠깐만 있어 봐. 이 게이트를 만든 녀석들을 알아보는 중이야.” 종말교단이라고 지레 짐작할 수도 있었다. 그게 가장 간단한 해결책이다. 개연성도 있고. 그러나 김성철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게이트를 만든 재료, 제조 방식, 주변에 널린 기자재를 둘러보며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 게이트를 만들었는지 알아내려 하고 있었다. “호오?” 예전의 김성철에게선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과거의 그가 눈앞의 상황만을 보는 그저 임기응변이 뛰어난 돌격형의 무장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의식적으로 전장의 모든 면을 통찰하려 하고 있었다. 게이트의 조사. 그것은 변화의 결과다. ‘역시, 이 게이트만으로는 알아낼 수 없겠군.’ 그러나 적은 교묘했다. 어떤 눈에 띄는 단서도 실마리도 남기지 않았다. 이래가지고는 전투가 끝나고 몇 달을 조사하고 분석해도 범인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출구가 있다는 것은 입구가 있다는 뜻이다. ‘네놈들의 뜻대로는 움직여주지 않겠다.’ 적이 상정한 가능성은 두 가지였을 것이다. 게이트가 열린 채 왕국이 멸망하거나 아니면 간신히 야만인을 막아낸 드워프 세력이 허겁지겁 게이트를 파괴하거나. 어떤 경우에도 이 경우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게이트가 열린 채 그 너머로 날아가 반대편의 출구를 조사하는 경우의 수 말이다.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성철에게 불가능은 없다. 그는 크럼부이를 꽉 진 채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베르텔기아. 오늘은 내가 밥값 좀 해야겠군.” 말이 끝나는 순간 김성철은 그대로 게이트 너머로 몸을 던졌다. 빨려들어갈 것 같은 푸른 풍경이 지나간 후, 곧 김성철은 게이트의 반대편에 이르렀다. 음침한 침엽수로 가득 한 숲 속. 불 타 버린 건물과 가지마다 목 매 달린 시체가 풍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곳은 바란아란 연맹의 땅인가?’ 문제는 어디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게이트 너머에 액면 상으로 수천 명에 달하는 야만인이 집결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명약관화하다. 드워프 왕국의 대대적인 침공이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수천 명의 군세가 대오를 갖추고 게이트를 넘어왔을 것이다. “세상에. 뭐 저렇게 많아.” 베르텔기아가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 김성철은 말없이 야만인의 군세를 응시했다. 그의 추측이 옳았다. 다인타이트에 열린 게이트는 야만인이 연 게 아니다. 제 3자의 소행이다. 김성철은 수천 명의 야만인의 시선을 받으며 하늘로 떠올랐다. 급상승한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반대편 게이트는 파괴된 공선에 실려 있었다. 누군가 게이트가 실린 공선을 그대로 야만인의 점령지에 처박아 게이트를 연 것이다. 그리고 그 공선의 함종은 김성철이 아주 잘 아는 것이었다. 부유군도의 프로크루스테스급 전함. 김성철이 탑승한 실피드의 동형함이다. ‘종말교단의 짓이 아니라 부유군도 짓이었군.’ 김성철의 눈앞에 회의장을 나서며 후회하게 될 거라는 말을 내뱉으며 떠나던 아퀴로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 범인은 파악했다. 쉭! 쉭! 야만인이 쏘아 댄 화살이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머금은 채 김성철을 향해 날아왔다. 하나라도 꽂힐 경우엔 김성철도 부상을 면키 어려운 정도의 힘이 실린 화살들. “브린스 아르놀트! 젠카!” 야만인이 소리치며 마구잡이로 화살을 퍼부었다. 야만인과 상대할 시간은 없다. 김성철은 야만인의 화살을 피해 아래로 급강하, 야만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게이트를 건넜고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크럼부이로 아치형의 게이트를 후려쳤다. “뜨아아아아! 난 망치가 아니라고!” 크럼부이의 비명소리와 함께 게이트는 무너졌다. 더 이상의 추가적인 위협은 없을 것이다. 김성철은 대사관을 나서 공동 천장을 응시했다. 한 척의 공선이 다인타이트를 떠나고 있었다. 순백의 공선. 부유군도의 프로크루스테스 급이다. 김성철은 즉시 플라이를 시전, 프로크루스테스로 날아가 그 갑판 위에 내려앉았다. 부유군도의 병사와 승무원들이 공포에 질려 물러섰다. 김성철은 크럼부이의 칼끝으로 함교를 가리켰다. “어딜 급하게 떠나시나. 아퀴로아.” 어느 누구도 김성철에게 대적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침묵 속에서 곧 함교로부터 한 여성이 걸어나왔다. 독해할 수 없는 문자가 쓰인 천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 아퀴로아. 김성철은 이전에도 같은 이름을 쓰는 두 여자를 죽인 적이 있다. 어쩌면 3번째가 될 지도 모르는 아퀴로아가 김성철 앞에 섰다. 김성철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아퀴로아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몸짓이 아퀴로아라기보다는 전혀 다른 인물과 닮아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부유군도의 장교 하나가 아퀴로아의 뒤를 바짝 쫓으며 그녀를 만류하고 있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난 죽고 싶지 않아.” 아퀴로아가 팔을 내저으며 말했다. 김성철이 알던 아퀴로아의 목소리가 아니다. 전혀 다른, 그가 아는 사람의 것이다. 김성철의 눈이 일순 경련을 일으켰다. ‘이 목소리는...?!’ 초조와 불안 약간의 기대감 속에서 아퀴로아는 가면을 벗었다. 김성철의 눈빛이 일순 흐려졌다. 라이즈 하이메르. 김성철을 이 자리로 이끈 여인이 다시 한 번 김성철의 운명 앞에 나타났다. “오랜만이야.” 라이즈 하이메르가 기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인사했다. ======================================= 100. 하늘의 파편으로 벼린 망치 (1) 김성철과 라이즈 하이메르와의 관계는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반란군의 수괴 중 하나였던 김성철은 중과부적의 전투에서 패배, 아군을 엄호하며 최후미에서 싸우다가 루테기네아 병사에게 생포 당해 악명 높은 루테기네아 투기장에 끌려온다. 잔혹한 루테기네아 인들은 전상으로 신음하는 김성철에게 어떤 치료도 하지 않은 채 그를 지옥 같은 투기장의 전투로 몰아넣었다. 때는 더운 여름. 김성철은 온 몸에 들끓는 구더기를 품은 채 이름도 고향도 모르는 낯선 상대방을 몇 번이고 죽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대로 아물 여유조차 주지 않았던 전투의 상처가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형틀에 묶여 죽음을 준비하던 때, 그 앞에 기적과도 같은 인물이 출현한다. 루테기네아 왕국의 공주, 라이즈 하이메르. 그녀는 김성철을 검투장 투기사에게 구입했고 죽어가던 김성철의 상처를 모두 치료했다. 말없고 거친 한 마리 외로운 늑대 같은 사내와 장난치길 좋아하고 세상천지 명랑한 공주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로부터 수많은 일이 있었지만 김성철은 아직도 기억한다. 라그란제의 모두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원하고 있었고 실제로 죽음으로 몰아넣던 와중에 그를 유일하게 인간으로 대접하던 한 소녀의 호의를.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 한 구석이 설렌다. 하지만 추억은 추억일 뿐이다. 김성철은 그 이후로도 조금씩 성장했다.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가 겪은 아픔이, 겪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강철처럼 제련했고 결과적으로 아픈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으로 거듭났다. “…….” 김성철은 어떠한 흔들림도 없이 수십 년의 세월을 거쳐 다시 나타난 애증의 여인을 응시했다. 언제나처럼 담담하고 무심한 표정. 그의 심경은 평온했다. 그것은 누구보다 그의 심장 가까이 있는 베르텔기아가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이 그... 라이즈 하이메르? 그런데, 이 사람. 조금도 놀라지 않았어!’ 김성철이 살아 움직이는 인간보다는 딱딱한 사물 과 비슷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를 오랫동안 알아오고 밀접한 관계였던 라이즈 하이메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금도 그렇다. 라이즈 하이메르는 김성철에게서 인간이 아닌 어떤 정물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로 하여금 호기심을 가지게 만들었던 늑대와 같은 투쟁심 안에 숨겨진 의연한 자태. 그런데 과거와는 느낌이 다르다. 뭐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라이즈 하이메르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오랜만이군.” 김성철이 말했다. 언제나처럼 담담한 음성으로. 하지만 라이즈 하이메르는 김성철이 다른, 절박한 음성도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조금은 그런 반응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사내에겐 어떠한 빈틈도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을 한 명의 사람으로 대하고 있었다. ‘설마.’ 불길한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약속대로 네 딸의 몸에 걸린 저주는 모두 풀어냈다.” 김성철은 계속해서 말했다. “이것으로 너와 나 사이의 은원은 모두 청산됐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라이즈 하이메르는 깨달았다. 과거의 김성철과 현재의 김성철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를. 둘은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그 내용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의 차이가 있다. 과거의 김성철의 정물과 같은 무감정, 과묵함이 의식적으로 만들어 낸 껍질과 같은 것이었다면 현재의 김성철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산과 같다. 그가 지닌 영혼의 무게는 역설적으로 그가 지니고 있는 것 중에 가장 무거운 존재였던 팔 가라즈를 던져버렸을 때 폭증했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의회의 의장 자격으로 묻겠다.” 크럼부이의 날카로운 칼끝이 라이즈 하이메르를 가리켰다. “게이트를 연 것은 너희들이냐?” 라이즈 하이메르의 신형이 한 차례 휘청였다. 눈치가 빠른 그녀는 파악했다. 김성철의 마음 안에 자신이 들어갈 자리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10여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데 이 사람은 언제 이렇게 변한 거지?’ 의문에 답할 시간은 없다. 라이즈 하이메르는 자신의 눈앞에서 번득이는 칼날에 자비가 없으리라는 엄혹한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김성철에게 고개를 숙였다. “게이트를 연 것은 우리들이야.” 그녀는 안다. 김성철이 거짓말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그런가?” 김성철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크럼부이가 살짝 움직였다. 그걸 본 라이즈 하이메르가 다급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그때였다. “이 배은망덕한 배신자년이!” 라이즈 하이메르에 뒤에 있던 장교가 검을 뽑아 뒤에서 라이즈를 공격하려 했다. 김성철의 손끝에서 한 줄기 섬광이 뿜어져나왔다. 글레어. 실로 오랜만에 시전한 작은 섬광은 부유군도의 장교의 목을 그대로 꿰뚫고 지나갔고 뒤이어 여러 개의 섬광이 순차적으로 나와 장교의 급소를 두루 관통했다. “크억!” 방해꾼은 사라졌다. 김성철은 라이즈 하이메르 뒤에 포진한 부유군도의 무리들을 노려보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한 번만 더 끼어들면 그때는 너희들 전부를 죽여버리겠다.” 협박이 아니다. 경고다. 언제든 실현될 수 있는. 잔뜩 날이 서 있던 부유군도의 승무원들은 김성철의 압도적인 기세에 주눅이 드는 걸 느끼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감히 눈조차 마주칠 수 없는 기백. 그것이 세계의 적이다. 그 위압감은 이제 라이즈 하이메르에게도 동일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 사람. 나를 죽일 수도 있어.’ 신세한탄할 시간은 없다. “누구냐?” 김성철이 물었다. 그 또한 답은 알고 있었다. “방랑왕이야.” 예상대로의 답변이 라이즈의 입에서 나왔다. 영특한 그녀는 거기서 말을 멈추지 않았다. “드워프 왕국이 협조하지 않으면 빨리 없애버리는 것이 나았기 때문이야. 왜냐하면, 지금 인간제국에선 네 친구인 황제가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거든.” “황제가?” 아까 궁정 안에서도 들은 이야기다. 라이즈 하이메르는 김성철이 흥미를 느끼는 걸 알아차리고 주위를 둘러본 후, 조금은 그녀다운 여유를 섞어 입을 열었다. “황제는 명목상으로 인간제국의 황제지만 그의 제위는 방랑왕에게 위임받은 것에 지나지 않아. 약속했던 시간이 오면 황제는 방랑왕에게 왕관을 돌려줘야 할 처지에 놓였지. 그런데 황제는 때가 왔음에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 “…….” “물론, 방랑왕은 여기에 대한 수를 이미 써뒀어. 실제로 제국의 모든 제후가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루테기네아의 옛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황제는 궁지에 몰렸지. 그런데 황제도 제국을 통치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게 아니야.” 라이즈 하이메르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데스포트와 여러모로 닮은 사람이지.” “데스포트…?”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김성철은 동쪽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황색의 낙진을 떠올렸다. “흠잡을 때 없는 능력과 성품을 가지고 오랜 기간 높은 명성과 지위를 누렸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영원히 2인자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점에서.” “황제는 무엇을 꾸미고 있는 거지?” 조촐한 식탁 앞에서 황제는 김성철에게 말했다. 자신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싸워보겠다고.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선 말해주지 않았다. 김성철은 라이즈 하이메르의 답을 기다렸다. 라이즈 하이메르는 김성철과 눈을 마주치며 희미한 음성으로 흘리듯이 말했다. “세상의 멸망.” “황제는, 윌리엄은 그런 남자가 아니다.” 김성철이 힘주어 말했다. “나는 내가 아는 걸 전부 말했어. 확인하고 말고는 당신의 몫이지.” 라이즈 하이메르는 홀가분한 목소리로 말한 후 춤을 추듯 뒤돌아서서 자신을 증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부유군도의 장교들을 향해 짓궂은 표정을 지어보인 후 다시 돌아 김성철을 바라봤다. “자, 이제 당신의 답은?” 여전히 크럼부이의 칼끝은 라이즈 하이메르를 겨눈 채였다. 크럼부이의 칼끝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동정이나 혹은 과거에 대한 추억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라이즈 하이메르는 충분한 정보를 제공했다. 자신을 감시하는 부유군도의 무리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까지. 검을 거둔 김성철은 뒤돌아서며 말했다. “네 딸은 정령계에 있다. 요정들이 함께 하고 있겠지만 그 아이에게 필요한 건 역시 육친의 손길이겠지.” 김성철이 라이즈 하이메르를 해치지 않은 또 다른 이유. 베르텔기아는 그런 김성철에게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멋져진 거지?’ 그는 이 자리에 없는 이제는 자신과 관계없는 아이의 미래까지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리라. 라이즈는 놀란 얼굴로 김성철의 넓은 등을 응시했다.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머리칼과 코트 자락을 끊임없이 펄럭이게 하고 있었다. 이어 김성철이 다시 말했다. “유령들린 숲의 아델화이트의 오두막에 가면 그녀가 너를 정령계로 인도해줄 것이다.” 그 말을 남긴 채 김성철은 좌현으로 걸어갔고 모두가 바라보는 가운데 좌현 위에 올라섰다. “혹 방도가 없다면 그땐 날 찾아와라. 그 동안 인연을 생각해 한 번은 도울 것이니.” 김성철의 몸에 희미한 마법진이 번득이는가 싶더니 그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불길이 피어오르는 드워프 왕국의 전장으로 하강했다. 크럼부이의 칼날이 번쩍이며 포효하는 야만인의 함성을 묻어버렸다. 라이즈는 난간에 서서 한참이나 김성철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김성철.”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잘못을 했다고 해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성격이 한몫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고 있었다. “이번 일은 크롬갈드 폐하에게 낱낱이 보고될 것이오. 백사의 일족.” 그녀 뒤에 서 있던 장교들이 그녀의 어깨를 흔들며 위협했지만 라이즈의 귀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역시, 저 사람을 선택할 걸 그랬나.’ 그녀의 의식은 지금 십 수 년 전의 과거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 다인타이트를 휘젓는 야만인을 소탕하고 있던 중에 전령 하나가 김성철을 급히 찾아왔다. “대원수님. 왕궁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왕궁에? 왕궁이라면 정예병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지 않나.” 특히 알현실엔 드워프 중에서도 가려 뽑은 최강의 전사들이 왕을 호위하고 있다. 김성철은 굳이 왕성을 지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진짜 도움이 필요한 것은 안전한 곳에 처박힌 왕이 아니라 무방비로 노출된 평범한 사람들이므로. 그런데 전령의 다음 말이 김성철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게 야만인에 의한 게 아닙니다. 종말교단입니다. 그들과 폐하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종말교단이?” 종말교단의 일이라면 알현실을 떠날 때 왕에게 일임했다. 그런데 종말교단과 왕이 다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왕이 상상 외로 잘 처신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고집쟁이가 종말교단과 불화를 일으키고 있다라.’ 그렇다면 구제의 여지는 있다. 다인크래프트가 구제불능의 인간이라는 것과 별개로 불가피한 희생을 줄일 수 있다. 김성철은 야만인의 피를 뒤집어 쓴 아카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왕성에 가겠다. 힘들겠지만 나머지를 부탁하지.” “먼저 가시오! 바로 처리하고 뒤 따를테니!” 아카드는 언제나처럼 무언가 불길한 말을 하고는 드워프 병사들을 이끌고 앞으로 뛰쳐 나갔다. 빵과 소시지를 한 웅큼 든 야만인이 골목에서 나타났다. 김성철 없이 상대하는 첫 야만인. 아카드는 도끼를 꽉 쥐며 말했다. “쫄지마! 상대는 한 명이야!” 김성철은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주저없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투닥거리는 소리와 함성이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여전히, 저 드워프 아저씨. 불길한 소리만 골라하네.” 베르텔기아가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제일 빨리 죽을 것 같은 양반이 묘하게 안 죽는단 말이지.” 김성철은 바람처럼 가파른 계단을 올라 왕성으로 쇄도했다. 왕성 앞엔 야만인 몇 명의 시체와 현장을 수습하는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김성철을 보자 모두 일제히 힘차게 경례를 올렸다. 기이한 일이었다. 지금 현재도 드워프 원한록 첫 줄에 오른 김성철은 김성철이 오랜만에 변장을 하고 기만자의 장막까지 써야 할 정도로 드워프들의 철천지원수였는데 지금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경례까지 받고 있다니. “…….” 나쁜 기분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김성철은 몸에 알 수 없는 힘이 내려앉는 걸 느끼며 알현실로 달려갔다. 다시 알현실에 들어간 김성철은 전령의 말대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 발견했다. 왕의 병사들 몇 명이 쓰러져 있었고 종말교단의 무리 소수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거치대에 걸린 팔 가라즈 아래 드워프 왕과 종말교단이 반으로 갈려 대치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의문은 왕을 노려보는 사라사 제로의 말에 의해 어느 정도 해소됐다. “우리 종말교단은 폐하의 영토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아낌없는 노력을 다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간단하게 내치겠다는 말씀을 할 수 있는 건가요?”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사라사의 화난 모습이다. 육체는 이미 죽었다지만 김성철은 사라사에게서 산 자의 생기 같은 걸 느낄 수 있었다. 뒤이어 드워프 왕 다인크래프트가 말했다. “우리의 신물인 팔 가라즈를 되찾은 이상, 너희들의 도움은 필요없다. 우리 드워프 왕국은 어느 누구의 도움도 간섭도 받지 않고 우리의 영토와 백성을 지켜 나갈 것이다. 나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다인크래프트는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오랜만의 좋은 고집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알현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100. 하늘의 파편으로 벼린 망치 (2) 김성철이 알현실에 등장하는 순간 분위기는 바뀌었다. 대치하던 양 세력은 필멸자 중에 가장 강한 사내를 바라보며 물러섰다. 한편 김성철의 시선은 오로지 종말교단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라사 제로. 그리고 데커드 제로.” 오늘 김성철은 종말교단과 어떤 형태로든 결말을 볼 생각이었다. 때마침 여기엔 종말교단 내부에서도 가면의 성녀라 불리는 사라사 제로가 있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오늘 그녀는 전부 말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데커드가 말하던지. 사사로운 감정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김성철은 기억한다. 아에게 항의 수십만 시민이 종말교단이 일으킨 재앙에 휘말려 죽어갔다는 사실을. 같은 일을 반복하게 하진 않겠다. 김성철은 결심을 굳혔고 이제 그의 발은 종말교단의 중추를 향해 가고 있었다. “너희들이 아는 모든 것을 내게 이야기해라.” 크럼부이의 칼날이 번득였다. 데커드 부녀의 얼굴에 당혹감이 일제히 떠올랐다. 특히 충격을 받은 것은 사라사였다. 그녀는 처음 보는 김성철의 무시무시한 얼굴과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백에 그저 몸을 떨뿐 감히 맞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반면 실전경험이 풍부한 데커드는 평정을 유지했다. “사라사를 지켜라.” 검은 로브를 걸친 종말교도들이 데커드 부녀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그들이 앞을 막아서자마자 김성철의 손가락에서 흉포한 전류가 뿜어져 나와 종말교도 사이를 이리저리 떠돌며 무자비하게 지져버렸다. 털썩. 그 장면을 본 드워프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가장 크게 놀란 건 다인크래프트였다. ‘아니, 저 놈이 언제 저런 마법을 익힌 거지?’ 그가 기억하는 김성철은 단순무식하고 저돌적인, 비록 인간이지만 가장 드워프 다운 전사였다. 왕국의 최정예인 근위병조차 쩔쩔매던 종말교도들이 순식간에 처리되자 이제 남은 것은 사라사와 데커드 그리고 2명의 종말교도였다. 남은 두 명은 전투원이 아니라 시종. 실제 김성철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이제 데커드와 사라사 밖에 남지 않았다. 김성철은 크럼부이의 칼등을 어깨에 올린 채 데커드 부녀를 응시하며 특유의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을 이야기하고 종말교단에서 탈퇴한다면, 이번 한 번은 너희들을 이곳에서 나가게 해주겠다.” 그것은 김성철이 베풀 수 있는 최대의 자비. 사라사와 데커드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찰나의 순간에 부녀 사이엔 수많은 감정이 오갔다. 이윽고 사라사가 나섰다. “왜 우리를 이렇게까지 몰아세우는 거지?” 사라사가 앙칼진 음성으로 말했다.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반쪽 얼굴에 드러난 눈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걸 말이라고 묻나.” 김성철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는 너희들이 아에게에서 무슨 짓을 한 지 알고 있다.” 그 한마디는 사라사가 지닌 모든 카드를 박살내기에 충분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사라사는 찰나의 시간 동안 준비해둔 모든 변명이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남은 것은 김성철과 그들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이야기뿐이다. “당신!” 애절함과 분노, 뭐라 특정할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가 담긴 음성이 알현실에 울려 퍼졌다. “…….” “당신 때문에 우리는 모든 걸 잃었어. 당신이 에어푸르트에 오지 않았더라도 에어푸르트는 멸망하지 않았을 거고 우리 가족은 우리의 집과 터전에서 평온하게 살았을 거야!”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군.” 김성철은 순순히 인정하는 모양새였다.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안에서 몸을 부르르 떨어 주의를 줬다. 그런데 김성철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옆을 응시하던 김성철이 다시 사라사를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1년도 전에 거신의 발아래 밟혀서 사라졌겠지.” “…….” 사라사의 말문이 두 번째로 막혔다. 김성철은 더 이상 반론을 듣지 않겠다는 듯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진중하게 덧붙였다. “이제부터는 내가 묻겠다.” 어깨 위에 걸쳐 놓았던 크럼부이가 아래로 내려갔다. “어이. 거기. 예쁜 리치 아가씨. 이 친구 요즘 날이 서 있거든. 허튼 수작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크럼부이가 신이 나서 입을 열었다. 이제 사라사와 데커드는 완전한 궁지에 몰렸다. 그들의 운명은 이제 김성철의 손아귀 안에 있다. 김성철은 원하는 답을 듣기 전까지 이들을 놓아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사라사.” 데커드가 사라사를 바라보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부녀 사이에 재차 눈빛이 오갔다. 사라사의 커다란 눈동자에 놀라움이 떠올랐고 놀라움이 사라진 자리에 슬픔이 물감처럼 번졌다. “5초를 주겠다.” 김성철의 말이 선고처럼 엄숙히 울려 퍼졌다. 데커드가 앞으로 나섰다. “우리에게 무엇을 알기 원하는가? 34호.” 그의 얼굴엔 놀랍게도 여유가 묻어 있었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데커드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종말교단의 진정한 목적.” 그 말을 들은 데커드의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더니 이윽고 그는 배를 부여잡고 크게 웃어댔다. 김성철이 이를 가만 내버려둘 리 없다. 김성철이 크럼부이를 휘둘렀다. 무시무시한 검풍이 일어나 데커드의 머리칼과 로브자락을 세차게 뒤흔들었다. 데커드의 웃음은 사라졌다. “마지막 경고다. 시간을 끌 요량이면 다음은 네 딸에게 묻겠다.” 김성철이 덧붙였다. 데커드는 그런 김성철의 경고가 무섭지도 않은 지 계속해서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보다 이내 헛웃음과 함께 내뱉듯이 말했다. “세상의 구원이라고 하면, 믿을 텐가?” 의외의 대답이다. “충분한 근거와 이치에 맞는 주장을 한다면 못 믿을 이유도 없지.”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고는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그런데 그렇게 희망적인 목적을 지닌 것치고는 재앙의 추종자들이 너무 많이 몰린 것 같더군. 그 헛똑똑이들이 설교 한 번 듣는다고 해서 왜곡된 신념을 바꿀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데?” “재앙의 추종자. 그들이 추구하는 건 오로지 진리야. 우리의 교주께서는 우리에게 한줄기 빛과 같은 진리를 내려주셨지.” “이를테면?” 김성철이 피곤함을 느끼며 물었다. 데커드는 씨익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사라사. 보여줘라.” 김성철의 눈동자가 데커드에서 사라사에게 넘어갔다. “허튼 짓은 하지 말라고. 지금, 이 친구 손에 힘이 꽉 들어갔으니까!” 크럼부이가 익살스럽게 데커드 부녀에게 경고했다. 사라사 제로의 손이 부드럽게 올라갔다. 손의 종착지는 얼굴의 절반을 덮는 가면이었다. 김성철은 속으로 의아함을 느꼈다. ‘가면? 어쩔 셈이지?’ 가면 안엔 아마도 사라사가 가장 보여주기 싫어하는 흉측하게 변해버린 모습이 있을 것이다. 떠오르는 경우의 수는 하나. 사라사의 추한 몰골을 공개해 김성철의 동정표를 얻어내려는 심산. 하지만 김성철에게 그런 수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김성철은 가만히 사라사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예상한대로 사라사의 손은 가면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으....” 이상한 장면엔 기가 막힐 정도로 냄새를 잘 맡는 베르텔기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윽고 가면이 얼굴에서 떨어졌다. 오랫동안 베일에 싸인 가면의 성녀의 완전한 얼굴이 세상에 공개되려는 찰나였다. 잠시 후, 김성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가면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은 추한 언데드의 몰골이 아닌 완전한 사라사의 얼굴의 절반이었다. 사라사 제로의 얼굴은 완전한 원형을 되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환상 따위는 아니다. 필멸자의 환술은 김성철에게 통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환술 이외에 김성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미 죽은 몸인 사라사는 마법을 통해 그 부패를 늦추거나 저지할 수 있을지언정, 이미 죽은 조직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이미 죽은 자에게 소생이란 축복은 모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모순은 불가능을 내포한다. 그런데 지금, 그 불가능이 현실로 일어났다. “이제 이해가 가나? 왜 우리 일가가 기꺼이 종말교단의 말씀을 받드는지?” 데커드가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종말교단의 지식은 창조라는 신의 속성마저 침범한다.” 김성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창조는 오로지 신의 권능이다. 그 이외에 모든 것은 창조라는 토대 위에서 벌어진 변형에 불과하다. 물건을 만드는 것, 새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 우연이 겹쳐 일어난 복잡한 화학반응도 창조의 테두리 내에서 일어나는 개변이다. 그런데 지금 데커드는 창조라는 말을 언급했다. 실체를 알기 전의 에크하르트 같은 인물이 창조를 언급했다면 일소에 부쳤을 것이다. 실제로 김성철은 처음 창조술사라는 말을 접했을 때 일소에 부쳤다. 창조라는 단어가 과장된 수식어쯤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불가능을 가능한 것으로 실증해보이고 있는 데커드의 창조라는 말은 무게가 다르다. “너희들의 우두머리가 누구냐?” 김성철이 눈이 번득였다. 그 대목에서 김성철은 종말교단의 우두머리가 슈넬메르커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머리 좋은 책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세계의 비밀에 관여할 정도의 깜냥은 없다. 이제는 그 정체를 밝힐 때다. 김성철이 한 걸음 데커드를 향해 다가갔다. “사라사!” 그때였다. 데커드가 소리 높여 외쳤다. 그와 동시에 사라사도 다인크래프트를 노려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다인크래프트! 배은망덕의 대가를 받아라!” 사라사의 전신에 마법진이 떠올렸다. 주문영창을 시전한 것이다. ‘이 사람들이.’ 김성철은 지체 없이 다인크래프트를 보호하기 위해 사라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몸을 날리는 그 찰나의 순간 김성철은 사라사가 만들어 낸 마법진의 패턴을 읽어냈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어마법인가?’ 다음 순간 어마어마한 냉기가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더니 이윽고 전신은 물론 주변을 모두 덮는 얼음 덩어리로 감싸버렸다. 김성철의 추측이 옳았다. 사라사가 시전한 것은 방어마법 아이스월의 변형. 다인크래프트의 이름을 외친 것은 김성철을 끌어들이기 위한 술책이었다. 하지만 김성철은 직접 사라사의 책략을 간파했고 시선을 데커드에게 돌렸다. 데커드는 그 틈을 타 검은 무쇠 빛의 스크롤을 들고 있었다. 김성철은 의아함을 느꼈다. ‘저걸로 뭐할 셈이지?’ 사라사 일행은 그 불경한 두루마리를 드워프 왕의 손에 필사적으로 넘기려고 하고 있었다. 호르네코가 그러했듯 그 두루마리는 특정인의 손에 들어가야 진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데커드는 그 두루마리를 손에 든 채 양손으로 찢으려고 하고 있었다. 데커드가 마른 목소리로 소리쳤다. “사라사! 나는 먼저 이상향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마.” 두루마리가 찢어졌다. 그러자 그 안에 담긴 불경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데커드의 전신을 감쌌다. “끄으으윽!” 데커드의 준수한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얼음 속에서 사라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부친의 최후를 눈으로 배웅하고 있었다. “…….” 김성철은 즉시 경로를 바꿔 얼음덩어리에 스스로를 가둔 사라사를 향해 방향을 전환했다. 크럼부이가 두터운 얼음을 강타했다. 얼음이 박살나며 파편이 사방이 튀었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검은 베는 물건이지 깨뜨리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일 뿐더러 크럼부이는 김성철의 신적인 힘을 완벽하게 받아낼 수 있는 물건도 아니다. ‘당했군.’ 만만치 않은 부녀다. 그 사이에 이미 데커드의 몸을 덮은 불경한 기운은 그의 형체를 지워놓고 있었다. 김성철은 가슴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감당하기 어려운 살기가 사라사 주변을 뒤덮어 나갔기 때문이다. “오오...!” “저건 대체 뭐냐?” 안개처럼 데커드의 몸을 감싼 불경한 기류 속에서 하나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거대한 갑충(甲蟲)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초월감각이 반응했다. [ 불멸자 양케 라이만 ] [ 병기창의 장, 자신이 만들어 낸 감옥에 갇힌 자 ]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 시작되는 건가.’ 거대한 갑충은 다리 하나로 사라사를 감싼 얼음 바위를 꿰어 들어 올린 후 키틴질의 아래 껍질을 열고 열개를 드러냈다. 부우우웅- 알현실 전체가 풍랑에 휩싸일 정도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김성철은 갑충의 또 다른 문자가 눈앞에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어떤 소녀의 아버지. ]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데커드란 사내는 딸을 든 채 알현실의 벽을 부수며 바깥으로 날아갔다. 지축이 한 차례 더 흔들렸지만 김성철은 초월감각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데커드가 일으킨 진동은 호르네코가 일으킨 것에 미치지 못하리라는 것을. ======================================= 100. 하늘의 파편으로 벼린 망치 (3) 검은 갑충은 탄환처럼 날아가 도시 하부의 주택가에 그대로 처박혔다. 수많은 가옥이 파괴되고 무너졌고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가 검은 갑충을 가려버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다인크래프트가 김성철을 향해 소리 높여 물었다. “종말교단의 목적.” 김성철이 대답했다. “다행으로 여기시오. 만약 당신이 그 두루마리를 받아들였다가는 이 도시 전체는 그 순간 멸망했을지도 모르니.” 김성철은 그렇게 말한 후 왕좌 위에 걸린 그의 진정한 무기, 팔 가라즈를 약간의 아쉬움이 남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럴 때야 말로 팔 가라즈가 필요한데.’ 하지만 이미 돌려준 물건이다. 다인크래프트는 김성철이 팔 가라즈를 보는 걸 눈치 채고 즉시 부하들에게 팔 가라즈에 천을 씌우라고 명했다. 김성철은 미련두지 않았다. 그는 바로 검은 갑충이 만들고 지나간 거대한 구멍을 통해 알현실에서 빠져나가 갑충이 낙하한 지점을 향해 달려갔다. 유서 깊은 드워프의 고도 다인타이트는 전방과 후방의 구분이 없는 전쟁 상태에 놓여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시무시한 야만인들이 개별로 혹은 작은 무리를 지어 움직이며 무차별적인 파괴와 약탈을 일삼고 있었고 이에 맞서 수백 명 단위의 드워프들이 주요 길목에 방어진을 치고 맞서고 있었다. 이런 극한의 혼란 상황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갑충의 출현은 다인타이트의 혼란을 더욱 부추겼다. 주택가에 처박힌 검은 갑충은 다시 한 차례 껍질 안에 숨겨진 날개를 펼치더니 포탄처럼 날아 포물선을 그리며 아래 지대에 낙하했다. 쿠궁! 그곳은 드워프의 공장이 밀집된 지역이었다. 쇳내음이 물씬 풍겨 나오고 시뻘건 쇳물이 끓는 용광로들이 있는 곳. 검은 갑충은 박살난 공장에서 몸을 일으켜 공장 지대 옆에 자리 잡은 거대한 기둥 쪽으로 움직였다. 기둥이라기보다는 탑에 가까운 거대한 구조물의 이름은 다인타이트의 기둥. 이름 그대로 공동 안에 만들어진 도시인 다인타이트를 떠받치는 도시의 핵심 구조물로 동서남북, 중앙 총 다섯 개가 있다. 검은 갑충은 도시의 생명줄과 같은 다인타이트의 기둥에 접근하더니 마치 흰개미처럼 기둥을 잘근잘근 씹어 먹기 시작했다. “양케! 양케!” 기둥 아래에서 무기와 갑주를 약탈하던 야만인 무리들이 검은 갑충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달아났다. 그들은 검은 갑충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김성철은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으며 갑충 아래 낙하했다. 쿠궁! 멀리서 마법 포격음이 들려왔다. 공동의 천장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 실피드 쪽에서 야만인 무리를 향해 포격을 가하는 모양이었다. 김성철은 검은 갑충에게 다가가며 주변을 살폈다. 사라사 제로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달아난 건가.’ 어쩌면 도시 아래 몸을 숨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그녀를 놓쳐버린 이상, 다시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은 보다 직관적이고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한때 데커드 제로였던 검은 갑충 말이다. “크르르르르...” 검은 갑충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기둥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김성철이 갑충 바로 아래에 이르렀을 땐 이미 기둥의 절반 이상이 먹힌 상태였다. ‘난감하군.’ 가까이서 본 검은 갑충은 실로 견고해보였다. 광택이 흐르는 키틴질의 검은 갑각은 어떤 예리함 검으로도 베어내지 못할 것 같았고 어떤 강력한 마법도 간단하게 튕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이. 크럼부이. 저걸 벨 수 있겠나?” 김성철이 이제는 주무기가 된 검에게 물었다. “솔직히 어렵겠어.” 크럼부이는 솔직한 검이다. 김성철은 일단 시험 삼아 스타라이트를 시전했다. 오랜 영창이 끝나고 하나의 거대한 빛줄기가 검은 지팡이 끝에서 폭발적인 기세로 뿜어져 나와 검은 갑충을 강타했다. 그러나 스타라이트의 빛줄기는 검은 갑충의 표면을 맞고 오히려 옆으로 휘어 애꿎은 천정 표면에 흠집만 낼 뿐이었다. ‘마법 반사라. 아주 골치 아프게 됐군.’ 다중영창과 메아리를 시전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이다. 직접 공격하는 것. 김성철의 몸에 신적인 힘이 흐르고 지나갔다. 그는 그대로 도약해 벼락처럼 검은 갑충을 향해 크럼부이를 휘둘렀다. 팅! 영 좋지 않은 소리와 타격감. 크럼부이의 칼날은 검은 갑충의 표면에 흠집조차 내지 못하고 매끄러운 갑각의 결을 따라 미끄러졌다. “이 녀석, 엄청 단단해. 전신이 아다만타이트급의 금속으로 이루어진 모양이야. 나로선 베어낼 수 없다.” 크럼부이가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 난감할 따름이다. 그 동안에 갑충은 어느새 기둥 하나를 전부 먹어치우고 있었다. 쿠궁! 다인타이트의 천정과 지면을 잇는 기둥 하나가 중간에서 끊어지는 순간 다인타이트 전체가 흔들렸다. 김성철의 초월감각이 반응했다. 단순히 기둥 하나가 무너졌다고 해서 나타나는 반응이 아니다. 다인타이트의 기둥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보다 중요한 무언가를 떠받치고 있었다. 바로 다인타이트 지하에 촘촘히 박힌 부유석들이다. 기둥이 무너진 자리에 균열이 일어나며 억눌려 있던 부유석들이 분출하듯 솟아나오며 다인타이트의 천정을 소나기처럼 강타했다. 그것은 멀리서 보면 거꾸로 내리는 비와 같았다. 하지만 그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그것은 죽음의 예고와 같았다. 천정에 부딪치며 박살난 부유석에 섞여 있던 바위의 파편들이 다시 아래로 소나기처럼 쏟아져내렸기 때문이다. 기둥이 있던 반경 수백 평방미터는 바위로 이루어진 소나기에 그대로 노출됐다. 수많은 드워프들이 떨어져내리는 바위에 깔려 죽었고 무수한 집이 파괴됐다. 아신이 일으키는 재앙에 야만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크억!” 야만인 하나가 집채만 한 바위에 깔렸다. 그러나 대륙십삼걸 급의 신체능력을 지닌 야만인답게 바위를 밀어내고 일어서려고 했으나 또 다른 바위가 이번에는 머리 위에 그대로 떨어졌다. 야만인은 구슬픈 비명을 내지르며 천천히 죽어갔다. 차라리 즉사를 하는 게 나았으리라. 기둥 하나를 파괴하며 다인타이트의 구역 하나를 아비규환으로 몰아넣은 검은 갑충은 다시 날개를 펴고 유유히 다음 기둥을 향해 날아갔다. 김성철은 저 아신이 원하는 바가 뭔지 알아차렸다. ‘저 괴물.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도시를 파괴할 수 없으니 인공적으로 도시를 파괴시켜 던전을 노출시킬 셈이다.’ 의도는 알지만 저 괴물에겐 검도 마법도 통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김성철은 검은 갑충을 앞질러 둥그스름한 원형의 몸체가 부착된 작은 대가리를 발견하고 지체 없이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김성철이 검을 휘두르는 찰나, 검은 갑충은 마치 공처럼 몸을 말아 전신을 감쌌다. 크럼부이의 칼날은 이번에도 작은 상처조차 내지 못했다. 검을 막아낸 갑충은 몸을 크게 흔들어 김성철을 떼어낸 후 닫힌 껍질을 열어 4장의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껍질 너머에 하얀 빛의, 연한 살갗이 보였다. 네 장의 날개가 폭발적으로 교차하며 움직이며 바람을 일으키는 순간 김성철의 손끝에서 체인 라이트닝의 전격이 날개를 노려 갑충의 연한 부분을 노렸다. 전격은 검은 갑충이 하늘 위로 도약한 후에 적중했다. “그으으으으!” 포환처럼 날아간 갑충이 기이한 울음소리를 냈다. 효과가 있다. 하지만 그 정도 마법 하나에 갑충을 처치할 수 있을 거라곤 김성철도 생각지 않았다. 그는 재차 갑충을 쫓아 낙하지점으로 날아갔다. 겁은 갑충은 박살난 건물의 잔해 위에 공처럼 몸을 만 채 정지해 있었다. “…….” 전후좌우 어느 방향으로 공격해도 타격을 가할 수 없는 상태. 김성철은 난감함을 느끼며 갑충이 방어태세를 풀 길 기다렸다. 그런데 잠시 후, 갑충이 움직였다. 몸을 둥글게 만 채 다음 기둥으로 향해 굴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저 녀석이.’ 가옥들을 거대한 몸으로 박살내면서 굴러간 검은 갑충은 다음 다인타이트의 기둥에 이르렀고 둥글게 만 몸을 폈다. 날개가 있던 껍질 쪽에 달콤한 냄새가 섞인 탄 내음이 바람결에 실려 왔다. 체인 라이트닝이 어느 정도 먹힌 것이다. 김성철은 순간적으로 판단했다. 줄 것은 주되, 찾아올 기회는 예리하게 포착해 한 번에 끝내는 작전을 머릿속에 그렸다. 갑충이 기둥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갑충 옆에서 기다리며 다가올 한 번의 기회를 기다렸다. 또 다른 기둥 하나가 무자비한 포식에 의해 파괴됐다. 억눌러 있던 부유석이 하늘 위로 떠오르며 지축을 흔들었고 수많은 파편이 비처럼 쏟아졌다.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떨어지는 파편을 크럼부이로 쳐내며 갑충의 빈틈이 드러나길 기다렸다. 이윽고 갑충이 날개를 펼치기 위해 딱딱한 껍질을 좌우로 펼쳤다. 그 순간, 김성철의 눈썹이 크게 일그러졌다. 껍질로 보호받던 검은 갑충의 연약한 내부가 외피와 마찬가지로 검은 빛을 띄고 있었다. 날개 또한 아까와는 다른 기이한 광채를 띄고 있었다. 짧은 순간 동안 검은 갑충은 체내의 구성을 바꿔버린 것이다. 김성철의 모든 공격에 대처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김성철은 크럼부이를 든 채 하늘 위로 날아올랐고 비호처럼 강습하며 크럼부이를 외피 안쪽의 살결로 혼신의 힘을 다해 꽂았다. 푹. 아까와 달리 박히는 느낌이 났다. 하지만 얕다. ‘이런.’ 다음 순간 갑충의 날개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움직이며 맹렬한 바람을 일으켰다. 김성철은 눈을 뜰 수 없는 바람을 맞으면서 검 한 자루에 매달린 채 갑충과 함께 어디론가 날아갔다. 마치 청룡열차를 타는 듯한 쏠리는 감각, 무중력을 떠도는 감각이 순차적으로 지나간 후 거대한 충격이 아래에서 일어났다. 먼지와 파편으로 시계가 어두워진 상황 속에서 김성철은 갑충의 날개와 외피가 닫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대로 있으면 저 안에 갇히게 된다. 김성철은 크럼부이를 꽂은 채 갑충의 등 위에서 몸을 날렸다. “어이! 어디 가는 거야!” 크럼부이가 구슬프게 외쳐보지만 김성철에게도 생각이 있었다. 크럼부이가 약간이나마 내피를 뚫고 고정된 상태를 유지하며 외피 안에서 원형을 유지할 수 있다면 못처럼 내려쳐 좀 더 깊숙이 갑충 안에 파고들게 하여 타격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성철의 기대는 힘없이 외피에 밀려 떨어지는 청아한 소리와 함께 무너졌다. ‘방법이 없나.’ 자욱한 먼지 속에서 김성철은 이 방법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이 하나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그러나 그것은 멀리 떨어진 알현실에 있고 그 주인은 김성철이 그것을 쓰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였다. “전사에게 망치를.” 자욱한 먼지 너머로 굵직한 중저음의 합창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드워프들의 목소리다.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그곳은 놀랍게도 다인타이트의 중앙. 드워프 왕국의 왕궁이었다. 검은 갑충은 김성철을 매단 채 왕성까지 날아온 것이다. 바로, 궁성 바로 위에 우뚝 서 있는 다인타이트의 기둥을 먹어치우기 위해. “전사에게 망치를.” 왕을 호위하여야 할 왕성의 전사들이 김성철과 검은 갑충을 에워 싼 채 합창하고 있었다. 그들 또한 보고 있었다. 그들의 고향과 터전을 파괴하는 정체불명의 검은 갑충과 이에 맞서는 유일한 전사인 김성철의 분전을. 어떤 무기와 마법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아신. 그 괴물을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알현실의 왕좌 위에 고고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 하늘의 파편으로 벼렸다는 망치뿐이리라. 기둥 이외에 어떤 무엇에도 관심 없는 검은 갑충은 여섯 개의 다리를 부지런히 놀려 알현실 너머 기둥으로 향해 기어갔다. “전사에게 망치를.” 전사들이 합창했다. 그 중심에 선 전사들의 왕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외부인에게 드워프의 신물을 넘기는 것.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드워프의 왕이 가장 신성한 책무 중 하나는 종족의 염원을 담은 신성한 망치를 지켜내는 것이다. “…….” 그는 전사들의 외침을 외면했다. 김성철이 왕 앞에 서서 왕을 응시했다. 어울리지 않는 간절함을 담아. 하지만 왕은 김성철의 시선을 외면했다. “전사에게 망치를.” 전사들이 다시 한 번 합창했지만 왕은 움직이지 않았다. 김성철은 왕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김성철은 단지 한줄기 아쉬운 한숨을 내쉬며 왕을 지나쳤다. 무표정한 김성철과 초조한 다인크래프트가 교차하는 그 순간, 왕좌 위에서 청아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팔 가라즈 쪽이다. 왕의 명령으로 두터운 천에 쌓인 팔 가라즈 쪽에서 계속해서 청아한 금속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하자 놀랍게도 팔 가라즈를 씌운 천이 떨어져내렸다. 그때 비로소 사람들은 볼 수 있었다. 천정에 매달려 있던 팔 가라즈가 떨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그것은 아신이 일어낸 진동에 의한 것이 아니다. 팔 가라즈를 봉인한 하늘의 파편들은 한 치의 틈도 없이 팔 가라즈를 속박해 약간이라도 움직일 여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팔 가라즈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것은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도 감히 예상하지도 못하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됨을 알리고 있었다. “저.. 저걸 보라!” “팔 가라즈가 스스로 움직이고 있어!” 드워프 전사들은 격앙에 사로잡혀 불가능한 광경이 일어나는 것을 목도했다. 팔 가라즈를 구속한 하늘의 파편이 스스로 녹기 시작했다. 그 기적 같은 장면에 모든 드워프는 물론 김성철마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기적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스스로 녹은 파편은 팔 가라즈의 일부가 되어 또 하나의, 새로운 망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늘의 파편을 벼린 것은 드워프가 자랑하는 제련기술도, 모든 걸 녹이는 용광로의 열도 아닌 순수한 전사들의 염원이었던 것이다. 쿵. 새롭게 태어난 팔 가라즈가 지면 아래로 떨어졌다. 그것을 본 드워프 왕은 더 이상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기적은 또 다른 기적을 불러일으킨다. 다인크래프트의 마음속에 굳건하게 서 있던, 스스로 만들어 낸 벽이 허물어졌다. 드워프 왕이 훌쩍 커진 망치를 두 손으로 들었다. 실로 육중하고 크며 그리고 아름다운 망치였다. 다인크래프트는 그 망치를 든 채 김성철 앞으로 걸어갔다. 김성철은 가만히 선 채 왕이 다가오는 걸 응시했다. 김성철 앞에 선 왕이 두 손으로 망치를 내밀며 힘주어 말했다. “전사에게 망치를.” 손에서 손으로 하늘의 파편을 벼린 망치가 넘어갔다. 짧은 이별 끝에 다시 만난 망치의 촉감은 더없이 청량했고 그리고 따뜻했다. 망치를 든 전사는 정련된 차가운 눈빛으로 전방의 적을 노려봤다. 어느 때보다 신적인 힘이 그의 내면에서 맹렬하게 용솟음쳤다. ======================================= 101. 최후의 왕관을 향하여 (1) 사라사 제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광야를 정처 없이 헤매던 그날, 치욕스런 부패와 영원한 죽음의 갈림길에서 마주쳤단 사내와의 첫 만남을. 그는 사라사를 치료 혹은 보존하면서 전형적인 광신도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결국 우리는 농장 안에서 사육 되는 돼지나 소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지.” 그의 발언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성모독적이었고 나아가 현재의 세상 전체를 부정하고 있었다. 독실한 신자는커녕 무신론자에 가까웠던 알투지우스조차 그 사내의 무모한 의견에 경악했을 정도였다. 알투지우스는 그 사내를 미친 사람이라고 불렀다. 몸을 숨길 도피처가 확정되면 즉시 그를 떠나리라고 사라사에게 여러 번에 걸쳐 강조했다. 그러나, 진실이라는 굳건한 반석 위에 쌓아올린 일관된 의견은 현실과 동 떨어진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과 강조를 통해 듣는 이로 하여금 검증의 유혹을 느끼게 했다.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되는 지식은 굳게 봉인된 신을 모시는 교단의 서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의 말씀은 곳곳에 존재한다. 동에서 떠올라 서편으로 지는 태양, 바람결에 휘날리는 황금빛 이삭, 짐승의 몸에 새겨진 무늬, 모두가 당연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보편적인 생각에서조차. 그 의문의 사내. 종말교단의 교주. 그는 이 세계의 모든 비밀과 진실을 알고 있었다. 사라사와 알투지우스에게 뒤틀린 세계의 진실을 보여주었다. “…….” 무너진 기둥 옆에 기적적으로 보존된 첨탑 위에서 사라사 제로는 멀리 내다보이는 왕궁의 앞뜰에서 대치중인 거대한 검은 갑충과 그에 맞서는 망치를 든 사내를 응시했다. 그것은 싸움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처형이었다. 드워프의 함성 속에서 망치를 든 자는 검은 갑충을 향해 달려들었고 한 번의 휘두름으로 갑충의 몸을 감싼 갑각을 분쇄했다. “먼저 가 있어. 아빠. 곧 우리들도 따라갈 테니까.” 사라사는 우수에 젖은 눈동자로 아버지였던 존재의 최후를 커다란 눈에 담았다. “안타깝게 됐군요. 그는 좋은 벗이었는데.” 사라사 제로의 뒤에 어느 순간 검은 로브를 걸친 사내가 나타났다. 종말교단의 부교주 슈넬메르커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게다가 영원히 못 만날 것도 아닌데요.” 라고 말하며 사라사는 자신의 상징인 얼굴의 반쪽을 가리는 은가면을 착용했다. “더욱이, 아빠의 희생은 분명 보답 받았다고 생각해요.” 사라사는 무너진 궁성 너머로 삐쭉 튀어나온 도시와 이질적인 색채와 느낌을 주는 구조물을 응시했다. 그것은 다인타이트의 지하에 묻혀 있던 신의 던전의 일부. 비록 전체는 드러내지 못했지만 그녀의 부친 데커드는 영원토록 땅 밑에 묻혀 있을 신의 던전을 거의 지면 밖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이걸로 이 세계는 그것이 가지고 있던 원래의 이름에 보다 근접한 존재가 되겠지요.” “이 세계가 지닌 원래의 이름이라. 강해졌군요. 당신은.” 슈넬메르커가 사라사에게 경탄을 담아 말했다. 사라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뒷일은 우리에게 맡기시고 슬슬 자리를 떠납시다. 지금 이곳은 오래 머물기 좋은 자리가 아니니까요.” 슈넬메르커의 제의에 사라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섰다. 그런데 한 줄기 미련이 남았던 것일까. 사라사는 드러난 한쪽 눈에 슬픔을 담아 스러져가는 검은 갑충의 잔해와 그 너머에 우뚝 선 망치를 든 사내를 응시하며 뒤돌아섰다. “…바보.” 그것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으리라. “…이것이 내가 알던 팔 가라즈던가.” 김성철은 경탄을 담아 자신의 망치에게 읊조리듯 말했다. 새롭게 변한 팔 가라즈의 힘은 진짜였다. 두 번의 타격도 필요 없었다. 평소보다 증폭된 힘이 담은 보강된 팔 가라즈는 단 일격에 검은 갑충의 갑각을 깨부수고 그것의 대가리를 박살냈다. 비산하는 뇌수의 갑각의 파편 속에서 김성철은 흘러가는 하나의 음성을 초월감각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 그 아이에게 다시 생명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난 만족하리. ] 그것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사내의 마지막 유언이었으리라. 머리를 잃은 갑충의 나머지 몸체가 재처럼 휘날리며 소멸되기 시작했다. 갑충의 잔해 속에서 하나의 물체가 떨어졌다. 그것은 검은 갑각과 동일한 재질로 만들어진 장갑형의 무구, 건틀렛이었다. 김성철은 그 무구를 들어올렸다. < 승천자의 손 > 등급 : 신화급 분류 : 방어구 - 장갑(한 손) 효과 : 물리공격의 완전 방어, 정형의 역장 전개 비고 : 신의 병기창 제조장의 무구. 그 불가침의 외피로는 적의 칼과 창을 막아내며 손바닥 안에 박힌 축복의 수정으로 대부분의 마법을 막아내는 정형의 역장을 펼칠 수 있다. 어떤 아이템의 비고란은 그 아이템의 제작자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남긴다. 아마도 이 승천자의 손을 제작한 장인은 대단히 무뚝뚝하고 실용주의적인 성격이리라. 이토록 아름답고 강력한 무구를 만들어내면서도 그 흔한 자화자찬과 신비주의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고 대강의 기능만 서술한 걸 보면 말이다. 김성철은 승천자의 손을 왼손에 꼈다. 검은 무쇠 빛의 건틀렛은 김성철의 왼손에 닿자 스스로 복잡다단한 철갑을 열어 저절로 왼손에 장착됐다. ‘이건, 쓸 만 하겠군.’ 착용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편하면서도 적당한 중량감이 안도감을 심어줬다. 김성철은 시험 삼아 왼손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건틀렛의 손바닥 중심에 박힌 검은 수정으로부터 무형의 에너지가 분출되어 전면에 막강한 대마법 역장을 만들어냈다. 건틀렛의 방어력과 역장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추후 시험해봐야겠지만 이미 김성철은 새로운 전리품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신화급의 방어구는 아마 이것이 처음이 아닐까?’ 한편 뒤편에서는 천지가 떠나갈 정도의 고함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승리의 함성이다. 다인크래프트를 위시한 드워프들이 한 손에 망치, 한 손엔 건틀렛을 낀 전사의 승리를 기뻐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어이. 나도 좀 주워 달라고. 창고에 넣어도 군소리 안 할 테니까!” 구석에 처박힌 크럼부이가 씁쓸하게 웃으며 김성철에게 소리쳤다. * 부유군도와 종말교단. 두 세력이 드워프의 고도, 다인타이트에 할퀴고 간 상처는 결코 적지 않았다. 하지만 굳건한 드워프들은 타고난 인내와 고집을 바탕으로 의연하게 재앙에 대처, 최소한의 피해로 재앙을 막아냈고 도시를 위기 속에서 구해냈다. 최후의 야만인이 쓰러진 후, 드워프 왕국의 왕은 도시에 전역에 내린 계엄령을 풀고 희생자와 전사자에 대한 국가적인 추도식을 거행했다. 짧은 추도식이 끝난 다음에 이어진 것은 연회였다. 다인크래프트는 국운이 기울 정도의 위난에 맞서 드워프 왕국에 값진 승리를 가져다 준 팔 가라즈의 진정한 주인을 위한 감사제 및 드워프 왕국의 새로운 세계의회의 가입을 축하하는 거대한 축제를 열었다. 드워프 왕의 축하연엔 엘프 왕국의 왕자와 군소국가의 왕, 고대왕국의 왕이 참석해 그 위상을 한껏 드높여 주었다. 드워프 역사에 길이 남을 축제의 주인공이 된 김성철을 위해선 특별한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우리는 드워프보다 더 드워프 다운 뚝심과 고집을 지닌 한 명의 전사에 대한 오해를 풀려고 합니다.” 표정이 한결 밝아진 다인크래프트가 우렁차면서도 넉살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취기가 적당히 올라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한 손엔 자기 머리통만한 술잔을 든 다인크래프트의 유쾌한 모습은 김성철이 젊은 시절 보았던 드워프 왕자와 많이 닮아 있었다. 술과 무용담을 좋아하는 유쾌한 전사. 그것은 고집쟁이 왕 다인크래프트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 다인크래프트 앞엔 두 명의 드워프가 거대한 책을 낑낑거리며 들고 와 그 앞에 대령하고 있었다. 베르텔기아 열 개를 합친 것보다 더 큰 그 거대한 책은 널리 알려진 악명 높은 드워프의 원한록이다. “이 원한록엔 십만 하고도 이만 삼천 구백 사십 이 명에 대한 원한이 적혀 있지.” 다인크래프트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으음. 딱히 자랑할 일은 아닌 거 같은데.” 김성철의 뒤에 딱 붙어 있던 베르텔기아가 몸을 파초처럼 흔들며 중얼거렸다. 김성철도 동감이었지만 과묵한 사내답게 별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자, 그럼 오늘 제국대원수, 아니 한 명의 왕 대리를 위해 모드들 잔을 듭시다.” 오늘의 주인공은 김성철이다. 옷도 마커레이드가 준비한 때깔 나는 제복으로 갈아 입었다. 다인크래프트가 귀빈들 앞에 나서며 커다란 잔을 들어올렸다. 자리에 모인 수많은 귀빈들이 저마다 잔을 치켜 올렸다. 익숙하지 않은 환대에 김성철은 난감함을 느꼈지만 의연하게 대처했다. “다가오는 모든 재앙의 해결을 위하여.” 김성철이 선창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지축이 흔들거렸다. 김성철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말교단의 잔당인가.’ 기우였다. 진동의 정체는 거신이었다. 왕관을 맡긴 자 중 하나인 드라고만이 직접 거신을 이끌고 다인타이트까지 온 것이다. 모두를 깜짝 놀래키며 연회장에 나타난 드라고만은 머리를 긁적이며 해명했다. “혹시나 이 녀석이 야만인 상대에 도움이 될 거 같아서 데리고 와봤지.”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는 수더분했다. 드라고만이 참석하고 연회는 이어졌다. 김성철은 다시 술잔을 들어 올리며 건배 제의를 했다. “재앙의 해결을 위하여.” 김성철이 선창하자 군왕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저마다의 술잔이 기울여졌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드워프 왕은 이제 이번 연회의 화룡정점을 찍을 두 개의 문서를 준비했다. 하나는 원한록, 다른 하나는 세계의회에 대한 가입신청서. 하나의 문서에선 기재된 내용이 지워졌고 다른 문서엔 새로운 내용이 기재됐다. 김성철은 저주란의 한 구석을 차지하던 해묵은 저주 하나가 사라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걸로 된 건가.’ 행사가 끝나자 흥겨운 축제가 이어졌다. 어렵고 위험한 시기였지만 이날만큼은 모든 이들이 다가오는 재앙과 야만인의 위협, 동쪽의 낙진 같은 시름을 잊고 축제에 빠져 들었다. 김성철은 화려한 연회의 요리를 맛보며 묵묵히 술잔을 기울였다. 김성철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요리였다. ‘이 요리, 드워프의 요리와는 거리가 먼데.’ 드워프의 요리는 투박하고 기름진 것이 많다. 고기 본연의 맛을 살리는 재주는 있지만 기교는 부족하다. 그런데 연회장의 요리는 드워프라기보다는 엘프식의 채소 요리가 많았고 과할 정도의 기교가 들어가 있었다. 어디서 분명 맛 본 적이 있는 요리. 김성철은 시종을 불러 누가 이 요리를 만들었냐고 수소문했다. 이에 드워프 시종은 대단히 유명한 요리사가 먼 곳에서 날아와 요리를 만들었다고 귀띔했다. “저쪽입니다. 라그란제 최고의 요리사라고 하더군요.” “뭐라고?” 술기운 탓인지 김성철은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좀처럼 보이지 않는 감정표현이다. ‘설마 그 녀석은 아니겠지.’ 라그란제 최고의 요리사라는 말이 김성철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일전에 김성철이 라그란제에 잠입했을 때 그는 요리대회를 참관하러 간 적이 있다. 이를테면 이름 난 검의 대가가 하급전사들이 투닥거리는 싸움판을 구경하러 간 셈이다. 그런데 거기서 김성철은 자신과 같은 황금빛 브로치를 지닌 거만한 요리사를 본 적이 있었다. ‘그 놈 이름이 뭐였더라. 파파... 파파르파였나.’ 전형적인 부자와 귀족만을 상대하는 거만한 요리사였다. 언젠가 그 녀석을 손봐주리라 생각했지만 일정상 그러지 못했다. 김성철은 묘한 두근거림을 안고 문제의 요리사 있다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사람들 사이에 한 엘프족 요리사가 간사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 둘려쌓여 갖은 칭찬을 듣고 있었다. 김성철의 눈빛이 번득였다. 틀림없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요리사는 과거 라그란제에서 만났던 바로 그 파파르파라는 녀석이다. 왜 라그란제 최고의 요리사가 이역만리 떨어진 드워프 왕국의 연회장의 음식을 준비하는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놈의 옷에 부착된 황금빛 브로치다. “하하하. 별 것도 아닙니다. 제 요리 철학은 신선한 재료와 정성. 그리고 화려함이지요.” 팔짱을 낀 채 흐뭇한 얼굴로 연회객들을 상대하는 파파르파의 얼굴에 서린 것은 요리사로서의 자부심. ‘이 녀석이.’ 김성철의 가슴에 묘한 불길이 타올랐다. 김성철은 제복 코트 안에 단 다이아 브로치의 촉감을 코트 옷감 너머로 느끼며 엘프 요리사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몇 발자국 채 걷기도 전에 갑자기 발에 뭔가 채는 게 있었다. “삐기이이이이!” 마라키아다. 마라키아는 김성철이 새로운 건틀렛을 손에 넣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주변을 비둘기처럼 맴돌고 있었다. 계속 무시했는데 아직도 따라다니고 있는 모양이었다.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무시하고 파파르파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이 요리를 만들었는가?” 김성철이 파파르파에게 물었다. 파파르파는 한 눈에 김성철의 얼굴을 알아보고 “오오. 영광이군요. 맞습니다. 제가 이 요리를 만든 주방장입니다.” 파파르파 요리사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요리사 복 위에 단 황금빛 브로치를 정성스레 닦아 반짝이게 했다. 김성철은 피식 웃으며 파파르파에게 말했다. “날 기억하나?” 파파르파는 김성철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오래 전의 일이었고 당시 김성철은 허름한 옷에 추레한 몰골을 한 별 볼 일 없어보이는 남자로 행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성철이 씨익 웃으며 코트 자락 안에 감춰진 다이아빛 브로치를 꺼내려고 하려고 할 때였다. “헤이! 당신!” 베르텔기아가 뒤에서 날아와 김성철의 어깨를 툭하고 쳤다. 베르텔기아 옆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인물이 묘한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구 칠영웅. 드라고만이다. 베르텔기아와 드라고만. 전혀 접점이 없는 인물들이 갖이 찾아오자 김성철은 브로치를 공개하려던 걸 멈추고 의아한 표정으로 그 둘을 번갈아 보았다. 곧 베르텔기아가 입을 열었다. “드라고만님이 거신을 개방해준데!” “뭐라고?” 김성철이 당혹감이 서린 음성으로 묻자 베르텔기아는 세상천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밥값 할 시간이라구! 창조술사 후보!” ======================================= 101. 최후의 왕관을 향하여 (2) 결론부터 말하자면 밥값은 할 수 없다. 베르텔기아를 창조술사 퀘스트에 다시 투입시켜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49호의 말대로 베르텔기아는 진짜로 없어질 수도 있다. 문제는 베르텔기아에게 모든 상황을 말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는 것이다. 김성철이 가슴 속에 깊이 감추고 있는 진실은 베르텔기아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무거우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선 천하의 김성철도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으음. 베르텔기아.”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장처럼 변해가는 걸 느끼며 김성철이 궁색하게 입을 열었다. “응?” 베르텔기아는 여전히 기분이 좋은 상태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넘겨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별 다른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는다. ‘야만인 놈들은 뭐하냐. 이럴 때 안 쳐들어오고.’ 정말로 야만인이라도 오던가, 아니면 아신이라도 나타나길 바랄 정도로 절망적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김성철로서도 도무 답이 없는 상황. 그때 뒤에서 간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용무가 있으신 거 같은데 자리를 떠나도 될런지요?” 요리사 파파르파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김성철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자.. 잠깐!” 김성철이 떠나려는 파파르파를 불러 세웠다. “음? 무슨 일입니까. 대원수님.” 파파르파는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김성철을 응시했다. 여전히 거만한 얼굴. 원래라면 코를 납작하게 눌러줘야 할 재수 없는 녀석이다. 하지만 지금 김성철은 이 재수없는 놈을 동앗줄을 써야 할 정도로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다. ‘뒷일은 아무래도 좋다. 일단은 이 상황만 타개하자.’ 무리수라는 건 잘 안다. 하지만 가끔 남자는 무리를 강요당하는 때가 있다. 김성철에겐 지금이 그런 순간이리라. 침묵 속에서 김성철이 손가락이 파파르파를 향했다. “승부다…!” 비장한 한 마디. 그것은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응? 하라는 대답은 안하고 무슨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거야?!.” 베르텔기아가 김성철 주위를 파닥거리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김성철은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하며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베르텔기아. 지금 나는 저 친구와 더불어 누가 최고의 요리사인지 실력을 겨뤄봐야 하거든.” “엥?” 놀라기는 베르텔기아도 파파르파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말씀입니까?” 뒤에서 이 모습은 구경하던 드라고만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김성철은 실로 오랜만에 영혼이 깎여나갈 정도의 쪽팔림을 느꼈지만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상황. 멈출 순 없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재수 없는 엘프 요리사에게 묵직한 한마디를 날렸다. “네가 요리를 그렇게 잘해?” “…네?” “라그란제 황제배 요리대회에서 마주친 적이 있을 텐데.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군.” “…….” “식당으로 따라와. 누가 진정한 요리의 달인인지 승부를 내보자.” 김성철은 성큼 걸음으로 걸어 식당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파파르파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내 평정을 회복하고 기억 속에 묻혀 있던 한 인물의 얼굴을 떠올려냈다. ‘아, 대원수가 그때 그 사람이었군. 감히 내 요리의 재료를 품평하며 따지던.’ 파파르파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김성철이 싸움으로 승부를 걸어왔다면 당연히 사양했겠지만 요리로 승부를 걸어왔다면 물러설 순 없다. ‘취미로 요리를 한 모양이군. 제법 얄팍한 지식도 있었던 것 같고. 아마츄어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근거 없는 자신감에 빠진 모양이야. 하지만, 프로의 세계는 그렇게 간단치 않지.’ 그는 자신의 옷깃에서 번쩍이는 황금빛 드래곤 브로치를 응시했다. 고급 요리인의 상징. 이것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최고 수준의 요리사만이 획득할 수 있는 미식의 경지를 상징하는 징표다. 그가 드워프 왕실 주방장들 앞에 황금빛 브로치를 드러내 보였을 때 그 고집 센 드워프 주방장들이 어떻게 눈을 깔고 고개를 숙였던가? ‘내 명성을 드높일 기회다.’ 파파르파는 자신의 자랑인 황금빛 브로치를 정성스레 닦은 후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김성철의 뒤를 따랐다. “으. 대체 뭐하는 거야?” 홀로 남은 베르텔기아는 사고와 같은 상황에 한동안 멍하니 자리를 지켰다. “뭐, 걱정하지는 마. 책 아가씨.” 베르텔기아 옆에 있던 드라고만이 말했다. “거신이 내 통제 하에 있는 이상, 언제든 그쪽에게 개방해줄 테니. 어차피 신의 흙도 전부 사용해서 내겐 별 쓸모가 없거든.” 드라고만도 거신이 야만인과의 전투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다만, 생색내기 용으로 가져왔을 뿐이다. 저마다의 군대를 거느린 다른 왕과 달리 드라고만은 혼자 뿐이니 말이다. “으음. 알겠어요. 아무튼, 지금은 저 바보들을 상대하러 가야겠네요!” 베르텔기아는 드라고만에게 꾸벅 인사한 후 김성철의 뒤를 향해 책장을 파닥거리며 날아갔다. 드라고만은 그런 베르텔기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담배를 입에 물며 중얼거렸다. “…저 책도 개체마다 성격 차이가 큰 모양이군.” 드라고만은 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책 말고 어디 좀 좋은 여자 없나.” 연회장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드라고만의 눈에 한 여성이 눈에 띄었다. “어차피 망할 세상. 실컷 즐기다 가야지.” 드라고만은 씨익 웃으며 그 여자에게 다가갔다. 한편 식당에선 치열한 요리대결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심사위원은 불사신 아카드와 그의 아들 둘. 그들은 이곳 드워프 왕국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드워프 자격으로 심사위원에 선정됐다. 파파르파는 이에 즉각 이의를 제기했다. “보아하니 지인이신 거 같은데, 그럼 제 쪽에서 불리하지 않겠습니까?” 이의를 제기하면서도 아무래도 좋다는 거만함이 그의 얼굴과 태도에서 물씬 풍기고 있었다. 어떤 심사위원을 쓰건 아주 장난을 치지 않는 이상 자신이 이기리라는 확신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감 하나만은 발군인 놈이군.’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누구의 요리인지 밝히지 않는다면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블라인드 테스트인 셈이다. 파파르파도 여기엔 동의했고 나아가 대결을 펼칠 요리의 주제에 대해 말했다. “오늘은 뜻깊은 날을 축하하는 자리, 연회에 어울리는 요리를 주제로 각자의 요리를 만들어봤으면 합니다만.” 김성철이 거절할 리가 없었다. 나아가 파파르파는 또 다른 제의를 했다. “재료는 자유롭게 쓰는 게 어떨까요? 드워프의 투박한 주방에 있는 평범한 재료로선 제 요리를 십분 발휘할 수가 없거든요.” 그것은 김성철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다. 김성철은 지난 몇 달 간 오로지 전투를 반복하며 살아왔다. 요리는 계속해서 틈날 때마다 했지만 진귀하고 훌륭한 식재료를 채취한 것은 까마득한 과거다. 현재 그의 영혼창고 안에 보관된 향신료 상자의 재료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반면 파파르파는 라그란제에 거대한 레스토랑을 지닌 1류의 요리사. 황제배 요리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한 실력자로 실력과 재력, 인맥을 고루 갖추고 있다. 그의 수중엔 김성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훌륭한 식재료가 가득할 것이다. 요리의 맛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소가 재료 그 자체라는 걸 감안해볼 때 파파르파의 제안은 김성철에겐 대단히 불리한 것이었다. “흐음.” 침묵이 길어질 즈음 불청객이 주방에 나타났다. 김성철을 쫓아 온 베르텔기아다. “뭐하고 있냐 했더니 여기서 이런 짓이나 하고 있었네.” 김성철은 감히 베르텔기아를 쳐다볼 수 없었다. 베르텔기아는 그런 김성철의 주위를 돌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그의 주머니 안으로 쏙 들어갔다. “뭐, 당신도 당신 사정이 있으니까. 아량 깊은 내가 이해해줘야지.”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베르텔기아.” “뭐, 당신에게 그놈의 요리보다 중요한 건 별로 없는 거 같으니까. 나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해봐. 난 낮잠이나 잘 테니까.” 한편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파파르파는 팔짱을 낀 채 김성철을 응시하며 간사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대원수님. 방금 한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는데요.” “아, 재료 말인가?” “네. 제가 보아하니 이 주방에 비치된 재료만으로 승부를 겨뤄봐야 기껏해야 50점 수준의 요리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요리인 클래스라면 제가 말하는 점수가 뭔지 알고 계시겠지요?” 파파르파는 아직 김성철이 다이아 브로치를 지니고 있다는 걸 모른다. 김성철은 군말 할 것 없이 브로치를 그냥 드러낼까 생각하다가 무심코 과거의 일을 떠올려냈다. 그것은 요리인 클래스 관장자. 태초의 용이라 불리는 안드로아의 목소리였다. “…각 종족은 저마다의 입맛을 지니고 있어. 궁극요리인의 상징 다이아몬드 브로치는 다른 종족의 입맛을 만족시킬 때마다 보다 화사한 빛으로 빛나게 될 걸세.” 그 한마디는 김성철에게 실로 복음과도 같았다. 김성철은 자신만만한 파파르파를 응시했다. “그렇게 하지.” 오랜 망설임 끝에 나온 대답치고는 지나치게 간결하고 단호했다. “정말 입니까?” 파파르파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눈동자엔 벌써부터 승리에 대한 확신이 별빛처럼 떠올랐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제 재료는 아무리 고명하신 대원수님이 요구해도 드릴 수 없다는 걸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약속하지.” 그렇게 두 요리사의 자존심을 건 대결은 시작됐다. 승부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조리광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파파르파의 완벽한 우위였다. 그는 각지에서 공수한 수많은 향신료와 호화로운 재료를 현란한 손놀림으로 다듬고 손질하고 조각했는데 그 모습은 요리라기보다는 화려한 검무에 가까웠다. 반면 김성철의 움직임은 정중동. 그는 큼지막한 돼지 족발을 투박하게 손질해 무심한 눈으로 솥 안에 넣고 간간히 고기를 꼬챙이로 찔러 익은 정도를 확인하는 등의, 파파르파에 비하면 수수한 요리를 하고 있었다. “당신 질 거 같은데.” 낮잠을 잔다고 하던 베르텔기아가 이래가지고는 안 될 거 같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경고를 했다. 김성철은 천하태평이었다. “아파성!” 옆에서 파파르파가 기괴한 기합소리를 내지르며 기관총을 연상케 하는 소리를 내며 도마를 두드려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진득하게 감자를 삶고 고기를 건져 오븐에 넣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작업을 할 뿐이었다. 그가 쓴 재료는 전부 드워프 궁정의 주방에 있던 것 뿐. 다른 재료를 일체 쓰지 않았다. 두 요리사의 요리가 윤곽을 드러냈을 때, 적어도 베르텔기아의 눈엔 승패가 결정 난 것으로 보였다. 파파르파의 요리는 형형색색의 채소와 육류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조리해 드래곤 현상으로 만들어낸 눈과 입을 모두 만족시키는 일품 요리였다. ‘음, 저 엘프. 요리를 만들라고 했더니 아주 작품을 만들었네. 반면 우리 창조술사 후보는....’ 감자를 곁들인 족발 구이. 그게 전부다. 파파르파가 곁눈질로 김성철의 요리를 보며 피식 웃으며 자신의 조수들에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의 조수들 사이에서 환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두 요리가 한꺼번에 심사위원 앞에 대령됐다. 반응은 베르텔기아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아카드 부자는 파파르파의 요리를 보고는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김성철의 요리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당연히 그들의 포크도 먼저 파파르파의 요리를 먼저 향했다. “오오. 뭐지. 이 맛은?” 드워프들은 마치 충격을 받은 모양새였다. 정신없이 포크가 움직였다. “아버지. 너무 빨리 먹는 거 아닙니까? 체하겠어요.” “괜찮아! 내 몸은 내가 알아!” 순식간에 파파르파의 요리가 전부 없어졌다. 안 그래도 고급 음식점 요리 답게 적은 양이라 게눈 감추듯 사라져버렸다. “이래서 드워프들은 교양이 없다니까.” 파파르파는 피식 웃으며 김성철에게 자신의 요리를 권했다. “이런 말씀드리기 뭐하지만 승부는 난 것 같군요. 제 요리를 한 번 맛봐주시겠습니까?” 파파르파가 알록달록한 드래곤이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김성철은 말없이 파파르파의 요리를 맛보았다. 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제법, 훌륭한 요리군.’ [ 이 요리의 점수는... 82점! ] [ 강자의 솜씨다. ] 요리인 클래스의 관장자도 고득점을 할 정도. 반면 김성철의 요리의 점수는 그에 한참 못 미쳤다. [ 이 요리의 점수는 52점. ] [ 기본기는 있으나 투박하군. ] 파파르파는 재료만으로 예상되는 점수를 맞춘 것이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명백한 김성철의 패배. 그런데 게임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뭔가 부족한데.” 아카드가 입맛을 다시며 쳐다도 보지 않던 김성철의 요리를 응시했다. 평범한 요리. 그는 반신반의하며 포크를 김성철의 요리에 대고 입으로 가져갔다. “음?” 아카드의 표정이 묘하다. 그는 다시 한 번 포크를 가져가 김성철의 족발 요리를 입 안으로 가져갔다. “양이 부족한 거 같은데 한 접시 더 가져다 드릴까요?” 파파르파가 드워프들의 요구사항을 파악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아니, 괜찮소.” 아카드는 그렇게 말한 후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맥주! 맥주를 가져와라!” 맥주가 도착하자 아카드는 단숨에 거대한 맥주잔의 맥주를 전부 비운 후 본격적으로 김성철의 요리를 시식했다. 아버지의 모습을 본 김성철의 요리를 맛보더니 같은 반응을 보였다. “맥주 여기도 한 잔!” 그 모습은 그야말로 폭풍 흡입. 파파르파의 요리를 맛있게 먹긴 했지만 이 정도의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누가봐도 드워프들은 김성철의 요리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파파르파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혹감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맛, 향, 기술, 모든 면에서 내가 우월할 텐데!” 아카드 부자의 포크는 쉬지 않았다. “오. 이게 대원수가 만든 요리였구만!” 그때 김성철이 파파르파에게 다가가며 오랫동안 기다렸던 거룩한 행위를 실시했다. 펄럭. 코트 자락이 펄럭였다. 그러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다이아몬드 브로치가 황홀한 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우.. 우와앗!” 파파르파는 그 빛을 감당하지 못한 듯 손으로 눈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는 똑똑히 보았다. 김성철이 지닌 브로치의 색깔을. ‘이.. 이것은 설마...?! 전설의... 궁극 요리인?!’ 그의 동공은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김성철은 몸을 떠는 파파르파를 향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진정 맛있는 요리는 힘과 재료로 윽박지르는 게 아니야. 누군가의 취향을 맞춰주는 것이지.” 그렇다. 김성철이 쓴 재료는 오직 드워프의 주방에서 얻은 것. 그는 드워프들의 요리 방식을 참고했고 그들의 요리와 취향의 전통을 수용하되 최고수준의 실력과 배려로 진일보 발전시킨 것이다. “대원수의 승리요!”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우던 아카드가 맥주잔을 높이 들며 말했다. 궁극 요리인을 상징하는 김성철의 다이아몬드 브로치가 보다 강한 빛을 내뿜었다. [ 당신은 다른 종족 - 드워프의 입맛을 만족시켰다. ] [ 당신의 요리 혼에 광채가 더해졌다. ] ======================================= 101. 최후의 왕관을 향하여 (3) “흐-음….” 연회는 점점 활기를 더해갔지만 이에 반비례하여 베르텔기아의 기분은 점점 나빠지기만 했다. 눈에 보였던 것이다. 김성철이 의식적으로 자신을 피하는 걸. “뭘 그리 고민 하냐. 리빙 북.” 마라키아가 견과류를 들고 베르텔기아에게 접근했다. “아니, 저 인간 하는 짓이 얄미워서.” 베르텔기아는 멀리서 사람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는 김성철을 책모서리로 가리켰다. “지금 당장 거신으로가서 창조술사 퀘스트를 수행해도 모자란 판국에 저렇게 시간이나 죽이고 있다니.” “창조술사? 그건 뭐지?” 물욕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마라키아가 눈을 번쩍 뜨고 흥미를 보였다. “연금술사의 최종형태야.” 베르텔기아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 그래?” 마라키아의 관심이 팍 식었다. “뭐야? 그 반응은?” “무슨 반응. 난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리빙 북.” “아? 그러셔.” “게다가 연금술사라. 제왕이 가질 클래스는 아니지. 우리 조인왕국에서 연금술사는 하위 카스트의 나하크에게 부여되는 클래스였다.” 마라키아는 마치 영광스런 과거가 눈에 선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건방지게 말했다. 이에 대해 베르텔기아는 짧고 묵직한 일격으로 보복했다. “그러니 나라가 망하지.” “삐기이잇?!” “기술을 천대하는 나라는 망하는 거야. 원래.” “삐이이이... 이 리빙북 녀석이...!” 마라키아의 부리가 부르르 떨렸다. “아우, 너하고 놀 시간 없어. 그보다 파이널엘릭서 얻어놓고 네 잘난 왕국엔 언제 돌아갈 거야? 동굴엘프들이 입 싹 닫고 네 동족 괴롭히고 있을 수도 있는데.” “으음. 언젠가는 가야겠지.” 잠시 흥분하던 마라키아도 동족의 일을 생각하면 애잔하기만 한지 풀이 죽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지금 내 왕국의 입구는 야만인의 점령지역 안에 있다. 섣불리 왕국에 드나들었다 야만인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왕국의 멸망을 앞당길 뿐이지.” “흐음. 그럴 수도 있겠네.” 베르텔기아는 몸을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라키아는 견과류를 부리로 쪼아 먹고는 베르텔기아를 응시했다. “고민이라도 있나?” “그냥. 뭐. 약속을 강제하는 좋은 방법이 없나 싶어서.”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을 보고 있었다. “약속을 강제하는 방법?” “응. 약속을 지독하게 안 지키는 사람이 있거든.” “이를 테면 돈 안 갚는 채무자 같은 녀석이라 그거군.” “응. 바로 그거! 옳은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담보를 제공받는 건 어때?” 마라키아가 또 하나의 견과류를 부리로 쪼며 말했다. “담보?” “상대방이 귀중하게 여기는 것을 담보로 쥐고 있으면 그 사람은 싫더라도 약속을 지켜야만 하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가장 전형적인 약속 강제 수단이지.” “흐음. 담보라.” 베르텔기아는 처음엔 시큰둥하게 받아들였지만 이내 그녀의 머릿속에 번갯불과 같은 묘안이 번쩍하고 떠올랐다. ‘바로 그거야!’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코트 안, 가끔 드러나며 기괴한 광채를 발하는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응시했다. ‘저걸 담보로 받아내면 되겠어!’ 베르텔기아는 알고 있다. 김성철이 자신의 요리인 브로치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그는 고된 여행 속에서도 하루에 두 차례 이상 브로치를 정성스럽게 부드러운 천으로 닦고 향유를 뿌려 광을 낸다. 그에게 브로치는 이미 단순한 물건 이상의 무언가다. 그 브로치를 받아낼 수만 있다면 베르텔기아는 자신의 목적을 간단하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텔기아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김성철을 향해 접근했다. “헤이. 당신!” “음? 베르텔기아. 무슨 일이냐?” 김성철이 짐짓 놀라는 눈치를 하며 물었다. ‘으, 오는 거 다 보고 있었으면서. 연기 한 번 지지리도 못하네!’ 그렇게 속으로 부들대고 있자니 김성철이 말했다. “다음 행선지가 결정됐어. 베르텔기아. 우린 라그란제로 간다.” “라그란제? 제국의 수도? 거긴 왜 또 가는 거야?” 베르텔기아의 물음에 김성철은 테이블 옆에 앉은 파파르파를 가리켰다. “저 친구 말을 들어보니 라그란제의 상황이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는 거 같아. 그렇지 않은가? 고급 요리인?” 김성철은 특히 고급 요리인이라는 말에 강한 악센트를 주었다. 이미 기가 한 차례 꺾인 파파르파는 체념 혹은 유순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말도 마십시오. 지금 라그란제는 이단의 집합소가 되었습니다. 거리마다 흉악한 아신의 조형물이 들어섰고 허공궁궐에선 매일매일 기괴한 의식을 치르고 있습니다. 호라산 교단과 뮤라 교단이 본부를 버리고 떠난 이후엔 많은 귀족과 상류층들이 도시를 버리고 떠났죠. 덕분에 4구역 이상의 상위 구역엔 빈집이 천지입니다.” 파파르파도 점점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라그란제에서 탈출한 상류층 중 하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언제부터인가 라그란제 상공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검은 뇌운이 나타나 불길하게 소용돌이치고 있다고 한다. “뭐 그렇게 된 거지. 그 여자와 사라사도 라그란제에서 엄청난 일이 일어난다고 했으니.” 김성철이 파파르파의 말을 받아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흐-음.” 말은 다 맞는 말이다. 베르텔기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라이즈 하이메르, 사라사 제로. 김성철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 외엔 아무 접점이 없는 두 여성은 이구동성으로 라그란제에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난다고 경고했다. 아마도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그 실체는 직접 봐야 알겠지만 재앙이 빈발하는 현재로서도 비견하기 어려울 정도의 대재앙으로 이어진 공산이 크리라. 하지만 베르텔기아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창조술사 안내인으로서 자신의 사명이다. ‘하루면 충분하잖아. 이제 거신 두 개의 시험만 더 통과하면 끝인데. 라그란제로 떠나면 언제 다시 여기에 올지도 모르고.’ 베르텔기아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엇박자로 퉁명스런 어조로 김성철에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 거신엔 언제 갈 거야?” “그... 그건...” 김성철이 베르텔기아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때 그의 모습은 딴청을 피우는 마라키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때가 되면.” 김성철이 궁색하게 대답했다. “때가 되면?” 베르텔기아가 김성철 앞에 몸을 들이밀었다. “흐-음. 뭔가 숨기는 거 있는 거 아냐?” “그럴 리가. 내가 너에게 숨길 게 뭐가 있냐.” “그럼 거신에 가면 될 거 아냐. 지금 당신의 연금술 실력으론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을 건데.” “그게 베르텔기아. 세상일엔 순서라는 게 있는 거다. 거신은 세상이 안정된 이후에도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잖아?” “오늘은 왜 안 되는데?” 베르텔기아가 정색하며 말했다. 김성철은 때가 왔음을 느꼈다. 베르텔기아는 좀처럼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베르텔기아의 말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진실을 말하기 전까진. 그러나, 그 진실은 봉인해야 한다. 모든 것이 안정되기 전까지는. “…….” 김성철의 얼굴이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베르텔기아는 한 눈에 김성철이 심상치 않은 갈등을 겪고 있다는 걸 간파했다. ‘왜 저러는 걸까. 설마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어서?’ 베르텔기아는 눈치가 빠르기도 하지만 배려심도 강한 아이다. 그녀는 더 이상 김성철을 몰아세우는 건 좋지 않은 일이라고 판단했다. “알았어. 다음에 가면 될 거 아냐.” 베르텔기아가 한 발 물러섰다. 김성철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그림자가 싹 지워졌다. “정말이냐? 베르텔기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베르텔기아가 이렇게 쉽게 물러날 줄은. “하지만 조건이 있어.” “조건?” 김성철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전에 한 약속 하나 기억하고 있지?” “약속?” “내 소원 하나 들어주기.” “…….” 김성철의 안색이 다시 변했다. 완전히 깜빡하고 있었다. “일단, 그건 상기하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고 내 조건은 따로 있어.”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품에 파고들더니 그의 코트 자락을 펼쳤다. 그러자 안에 숨겨져 있던 다이아몬드 브로치가 드러나며 사방에 눈부신 빛을 뿌렸다. “우와왓!” 아두도 그 빛에 반응하지 않았지만 오직 단 한 명, 파파르파만이 브로치의 반응해 눈을 가렸다.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자긍심 그 자체인 브로치를 책 모서리로 살살 긁으며 다시 말했다. “담보를 하나 받고 싶어. 당신이 약속을 어길 때 대비해서.” “다... 담보?” “응. 담보.”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의 단호한 태도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고개를 숙여 자신의 브로치를 응시했다. “설마 그 담보라는 게 나의 보물 브로치는 아니겠지?” “그 설마가 맞아. 브로치를 담보로 제공해줘.” “…?!” 김성철의 눈이 동공지진을 일으켰다. “왜 그래? 나도 통 크게 양보했는데 당신도 남자다움을 보이는 게 좋지 않겠어? 팔 가라즈도 훌훌 던지던 남자가 왜 그 브로치엔 쪼잔한 모습을 보이는데?” “베... 베르텔기아. 이... 이 브로치는 말이다. 팔 가라즈 하고는 뭔가 다르다고 할까.” 김성철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드라고만이 술잔을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부수는 자에게도 천적은 있군.” 지금 김성철에겐 야만인과 아신에 맞서던 모습은 눈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베르텔기아가 다시 한 발 물러섰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몸을 한 차례 핑그르르 돌리고는 다소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브로치를 못 넘기겠으면 다른 거라도 제시해봐.” 이에 김성철은 영혼창고에서 크럼부이를 꺼냈다. “이건 어때?” “싫어!” 나오자마자 반품당한 크럼부이는 뭔가 말할 새도 없이 다시 영혼창고에 처박혔다. 김성철이 다음에 꺼낸 것은 베르텔기아가 좋아할만한 물건, 꿈을 여행하는 반지인 안개여정이었다. “이건 어때?” “흐-음.” 크럼부이 때와 달리 이번엔 베르텔기아도 다소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타인의 꿈을 여행하는 건 베르텔기아가 좋아하는 취미니까. 그런데 베르텔기아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이것도 좋긴 한데 역시 그게 좋겠어.” “그거?” “트로이메아 금고관리인의 열쇠.” “그 열쇠 말이냐?” 호르네코를 처치하고 얻은 신화급 아이템. 그것은 타인의 영혼창고를 열 수 있는 상식을 파괴하는 능력을 지닌 신적인 물건이다. “당신이 약속을 어기면 창고 전부 털어가게. 그래도 그게 브로치보다는 낫지 않아?” “으음.” 김성철은 약간 갈등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는 도둑도 아니고 마라키아처럼 물욕의 노예도 아니다. 그에겐 팔 가라즈 하나면 충분하다. “좋다. 그렇게 하지.” 김성철은 다소 낡고 투박해 보이는 열쇠를 창고에서 꺼내 베르텔기아에 건넸다. 베르텔기아는 책장을 벌려 마치 그것을 삼킨 후 책장을 닫았다. “좋아. 담보 수령 완료!” 이것으로 급한 불은 껐다. 당분간 베르텔기아는 그녀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는 창조술사 퀘스트의 수행을 종용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모로 최상의 해결책. 김성철은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직면한 과제, 모든 재앙의 해결에 임할 수 있었다. 바람은 남쪽에서 불어왔다. 연회가 끝난 다음 날, 뜻밖의 손님들이 김성철을 찾아왔다. 호라산 교단과 뮤라 교단에서 보낸 사신들. 타이곤 보스보로트의 안내를 받아 김성철 앞에 선 그들은 세상을 뒤흔들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인간제국의 황제 윌리엄 퀸튼 말버러를 양대교단에서 파문함과 동시에 이미 파문당했던 전 제국대원수이자 현 세계의회의 의장인 김성철에 대한 파문을 취소한다.” 그들의 선언은 현재 세계의 정세를 축약적으로 드러내는 일면이라 할 수 있었다. 드워프 왕국마저 끌어들여 구 세계의회를 완전히 대체한 새로운 세계의회의 지도자 김성철. 반면 모든 동맹은 물론 영광마저 잃고 좁은 도시에 고립된 인간제국의 황제 윌리엄. 한때 인간제국에 쏠렸던 힘의 무게중심은 이제 김성철에게 있다. 양대 교단의 자발적인 귀순은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누구인지 단적으로 드러내는 부수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축복 속에서 김성철은 해묵은 저주를 털어내고 새로운 세계의회의 최정예를 거느리고 북쪽의 야만인에 대한 기습공격을 실시했다. 결과는 대성공, 느슨한 야만인들은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김성철의 압도적인 무력을 앞세운 기습 앞에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눈알로 장식된 야만인의 군기는 꺾였고 야만인의 우두머리는 김성철의 망치에 머리가 으깨져 죽었다. 한 번의 기습으로 김성철은 드워프 왕국은 물론 엘프 연합왕국을 위협하는 세력을 일소했다. 그런데 승리의 여운도 잠시 뿐, 해방된 포로 중 하나가 좋지 않은 소식을 전했다. “주력 부대는 오래 전에 진영을 떠나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야만인이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낸 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야만인은 여전히 공포스러운 존재지만 수많은 정찰대와 첩보원들의 필사적인 희생으로 야만인에 대한 정보는 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축적됐다. 현재 이 땅을 침입한 야만인의 부족은 크게 2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첩보원들은 그 부족들의 이름을 알아내는데 성공했다. 눈알을 상징으로 쓰는 부족의 이름은 케르쉬 내장을 상징으로 쓰는 부족의 이름은 아만다쉬 그 두 부족은 각각 엘프 - 드워프 왕국 방면과 대륙 북방 방면에 자리 잡고 개별적인 공세를 펼쳐왔다. 그런데 새롭게 입수된 정보에 따르면 야만인의 움직임에 변화가 일었다. 갈라 진 두 개의 부족이 하나로 합친 것이다. 한때 정체됐던 그들은 거대한 하나의 세력을 이루어 다시 한 번 파죽지세의 진격을 시작했다. 그 목표는 대륙의 중심. 인간제국. 최후의 왕관이 남은 땅이다. ======================================= 102. 믿음 (1) 제도 라그란제. 구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수도였던 거대한 도시에 언제부터인가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검은 뇌운이 자리 잡았다. 끊임없이 비를 쏟아내면서도 계속해서 증식되는 그 구름이 생긴 이래 도시는 항구적인 어둠과 습기에 잠식됐고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떠났다. 특히 다른 곳에 정착할 여력이 있는 상류층과 재산가들이 탈출 행렬의 대다수를 이루었다. 그러나 수많은 상류층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인구는 줄지 않았다. 오히려 늘었다. 혼란스런 시기, 안전한 성벽 안에 있기를 원하는 자는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동쪽과 북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안전을 찾아 라그란제에 모여 들었다. 라그란제의 사정을 잘 모르는 피난민들은 영원의 도시라 불리던 옛 루테기네아의 고도에서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조형물을 발견한다. 끊임없이 내리는 빗속에서 번들거리는 검은 수정으로 만든 흉측하고 섬뜩한 조각상들. 피난민들은 그것들의 정체를 알 길이 없었지만 제도의 뒷골목에서 암약하는 수상한 무리들은 그 조각상을 가리키며 은밀하게 속삭인다. 그것은 오래 전에 신들에게 패배한 악신들의 우상이라고. “…….” 황제 윌리엄 퀸튼 말버러는 제도의 하늘 위에 떠오른 허공 궁궐의 테라스에서 빗속에 잠긴 우중충한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때 화사한 꽃으로 가득 찼던 정원엔 죽은 풀과 말라비틀어진 나무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한 장교가 그 황폐한 정원에 흙탕물을 튀기며 걸어가 황제 앞에 부복했다. “야만인들이 남하를 시작했습니다. 경로를 분석해 볼 때 야만인들이 노리는 곳은 바로 이곳, 라그란제입니다.” 황제는 뒷짐을 진 채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크롬갈드의 동향은?” “방랑왕의 동향은 알 수 없습니다. 그의 위치는 김성철이 주재하는 세계의회에 출석한 이후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가?”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저어 장교를 물러가게 했다. 테라스엔 한 동안 빗소리만 울려 퍼졌다. 홀로 빗속에 선 황제는 먼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그들이 오는군.” 한 명 한 명이 대륙십삼걸에 필적하는 신체 능력을 지녔다는 막강한 야만인들. 그런 괴물들이 무려 십만 이상의 무리를 이루고 바로 이곳, 라그란제로 오고 있다. 어떤 강심장을 지닌 왕이라고 해도 평정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오히려 그들의 대대적인 진격이 반갑기만 했다. 야만인의 이상행동이 오히려 확신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황제는 도시의 외곽,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섬처럼 분리된 구역을 눈에 담았다. 라그란제 구시가지. 서류상으론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이고 실제로 개새끼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은 죽은 거리지만 그 도심의 지하엔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황제는 구시가지에 우뚝 솟은 첨탑을 응시했다. 겉보기엔 낡고 오래된 볼품없는 첨탑. 그러나 그 끝에 흐르고 있는 것은 무한하고 방대한 순수한 마력의 흐름이었다. 첨탑 아래 거대한 마법진 아래선 마법사들이 탑에서 방사되는 마력을 조종해 도시를 뒤덮은 거대한 뇌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황제의 시선은 첨탑을 넘어 마침내 라그란제 전역을 뒤덮은 뇌운을 향했다. “결국 놈은 여기에 모습을 드러내겠지.” 도시를 집어삼킬 듯이 비를 퍼붓는 뇌운을 바라보며 황제는 입을 열었다. 확신에 가득 찬 눈빛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했다. “하지만 네 생각대로는 되지 않을 게다.” * 고대왕국과 엘프 연합왕국의 함대가 인간제국의 동쪽 변경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 척에 이르는 함대가 머물고 있는 하늘 아래, 지면에서는 드워프의 기동요새들이 장거리 텔레포트를 마치고 속속 거대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움직이는 하늘의 성과 땅의 성이 한 자리에 모인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 중심에 있는 붉은 공선 실피드엔 이 모든 군세를 통솔하는 부수는 자 김성철이 함교의 지휘석에 앉아 모든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동쪽에서 대규모 군세의 접근을 확인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갑작스레 실피드의 승무원이 된 신관이 경쾌한 목소리로 김성철에게 보고했다. 김성철은 지휘관 석에 부착된 수정구를 통해 다가오는 군세의 정체를 식별할 수 있었다. 붉은 머리칼을 휘날린 아름다운 여성이 군세의 선두에 있었다. 동부연합의 지도자 마커레이드다. “이걸로 전부 모였군.” 하루가 다르게 몸이 자라는 마라키아가 훌쩍 길어진 목을 빳빳이 들고는 거드럭거리며 말했다. 그의 말 대로다. 지금 라그란제 동쪽엔 현재 세계에 남아 있는 가용 가능한 모든 전력이 집결했다. 고집 강하고 거만하며 자기 잇속밖에 모르는 권력자들이 기꺼이 그들의 군대를 빌려준 목적은 보다 큰 재앙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재앙의 서가 내려준 세 번째 재앙. 한 명의 왕. 마지막 왕관은 인간제국의 황제가 쓰고 있는 구 루테기네아 왕국으로부터 내려오는 황금관이다. 김성철이 세계 전력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군세를 끌고 온 목적은 그 왕관을 얻기 위함이다. 황제는 김성철이 보낸 사절을 모두 돌려보냈고 어떤 대화의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한편 그런 와중에서 야만인들은 라그란제를 향해 남하하고 있다. 이대로 놔두면 황제도 그리고 라그란제에 모인 백만 명의 목숨도 모두 사라진다. 어느 것도 김성철이 원하는 결말은 아니다. 드워프 왕국을 위시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지금 당장 라그란제 외곽에 전개된 방랑왕의 군세와 합쳐 라그란제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한 명의 왕을 만든 다음 거대한 야만인에 맞서자는 의견이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다. 그 결과, 라그란제 동부의 평원에 수만 명에 이르는 군세가 모여들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규모는 점점 불어나고 있다. 세계의회의 의장으로서 김성철은 그 대세적인 의견에 반박할 수 없었다. 이미 그의 뜻대로 몇 번이고 대화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가로막혔고 결과적으로 시간만 허비하게 된 셈이었다. 야만인은 파죽지세로 남진하여 라그란제와 북부 사이에 있는 수많은 도시를 함락시키고 불태웠다. 정찰병들의 보고에 의하면 야만인들은 도시를 점령할 때마다 어김없이 피의 축제를 벌였고 절멸에 가까운 학살극을 지칠 때까지 벌였다고 한다. 확인되지 않은 첩보지만 정찰병 중 일부가 야만인들이 피의 의식을 거행할 때 거역하기 어려운 음성과 웃음소리가 메아리치는 걸 들었다고 한다. 어느 쪽이건 섬뜩한 소식임은 틀림없다. 전군이 야영지를 준비하는 동안 김성철과 세계의회의 수뇌부들은 실피드에 모여 작전회의를 시작했다. “사정 봐줄 거 없잖소? 당장, 지금 전군을 이끌고 라그란제를 기습해 도시를 함락시키고 황제를 끌어냅시다.” 김성철의 가장 큰 적에서 이제는 가장 강력한 지지자로 변모한 다인크래프트가 말문을 열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황제는 그저 자기 왕관을 놓으려 들지 않는 어린아이 같군.” 아르카나이트는 특유의 빈정거리는 어투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마커레이드는 더욱 과격한 의견을 내놓았다. “황제는 처형당해야 마땅해요. 동부의 파괴가 전부 그의 잘못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와 아퀴로아가 주축이 된 구 세계의회가 동부를 외면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녀는 이미 황제의 처우까지 정하려고 하고 있었다. 제각각의 관점과 의견이 있었지만 지향하는 바는 명확했다. 라그란제에 대한 즉각적인 공세. 야만인의 선봉은 이미 라그란제로부터 일주일 거리인 황금 도시까지 접근해 황금 도시를 점령했다는 풍문이다. 더 이상의 시간은 없다. 야만인이 본격적인 침공을 가하기 전에 적어도 인류 사이의 내분은 끝을 내야 한다. 그러나 김성철은 여전히 공격을 망설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황제에 대한 믿음을 거두지 않았으므로. “…….” 아마도 은자의 탑에서 황제를 만나지 않았다면 김성철은 지체 없이 라그란제에 대한 공격명령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 만남은 중요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오랜 앙금이 따뜻한 물속에서 싱겁게 해소되는 그 감각. 김성철이 느낀 그 감각은 진짜다. ‘윌리엄. 대체 뭘 생각하는 거냐.’ 그가 아는 황제는 한때 김성철이 진심으로 믿고 목숨을 내맡겨도 될 정도의 남자였다. 비록 세월의 흐름 속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변하긴 했지만 마지막으로 만났던 황제의 모습은 김성철이 좋아하고 서로 의지하던 윌리엄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그런 그가 종말교단에서조차 경고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것엔 필경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망설임이 김성철로 하여금 결단을 늦추고 있었다. “빨리 어떤 형태로든 끝을 내야 하오.” 다인크래프트가 재차 김성철을 종용했다. 다른 군주들도 말은 하지 않지만 눈빛으로 태도로 다인크래프트의 뒤를 받치고 있었다. “으음….” 베르텔기아는 주변의 공기가 좋지 않은 걸 느끼며 김성철의 기분을 살폈다. 김성철의 심장의 고동은 정상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엔 라그란제의 상공에 낀 것과 비슷한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의무와 믿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오늘 하루는 휴식을 취합시다. 병사들도 지쳐 있고 아직 방랑왕의 군대와도 합류하지 못했으니.” 결국 김성철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홀로 남은 선실 안에서 김성철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독한 술이 담긴 술잔을 기울였다. 베르텔기아는 트로이메아 금고 관리인의 열쇠를 책장으로 가지고 놀며 김성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했지만 베르텔기아는 알 수 있었다. 김성철의 방황은 여전히 현재진행 중이고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걸. 술은 그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다. 김성철의 방황을 끝내는 답은 오직 하나. 선택이다.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 베르텔기아가 취기가 오른 눈빛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김성철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한 번은 더 사절을 보낼 생각이다.” 아마도 그것이 김성철이 취할 수 있는 황제에 대핸 마지막 배려이리라. 그 이상은 군주들이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기껏 힘들게 쌓아올린 통합이 한 번에 무너질 수가 있다. 하지만 김성철은 알고 있다. 이미 수차례에 걸쳐 보낸 사절이다. 이제 와서 사절을 보낸다고 해도 황제가 받아들일 리는 만무하다. 그렇기 때문에 김성철은 더욱 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보답 받지 못하는 믿음에 대한 실망을 위로하기 위해. 술병이 기울며 호박 빛 액체를 술잔에 담았다. 김성철은 술잔을 흔들리는 눈으로 노려보다 단숨에 들이켰다. 위장이 찌르르 울리며 취기가 오르는 걸 느끼며 김성철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던 베르텔기아가 열쇠를 책장 안에 집어넣고는 불쑥 말했다. “당신이 직접 가는 건 어때?”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전에도 한 번 숨어들어간 적이 있잖아. 다시 직접 가서 만나보는 건 어때?” “하지만 베르텔기아. 그때와 나와 지금의 나는 입장이 다르다. 당시 내가 세계의 적이었다면 지금은 세계의회를 책임지는...” “다르긴 뭐가 달라.”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당신은 당신이잖아.” 베르텔기아는 책장을 팔락거리며 날아올라 김성철의 심장 부분을 책 모서리로 툭 쳤다. “당신 정도면 1시간도 안 걸려 다녀올 수 있잖아? 안 그래?” “…….” 김성철의 눈동자를 흐리고 있는 취기가 아침햇살 아래 안개가 개듯 사라지고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그런 김성철을 쳐다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당신을 누가 막겠어?”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눈을 감고는 실소를 터뜨렸다. 오랫동안 굳어 있던 그의 입가에 비로소 미소가 떠올랐다. “말은 맞는 말이군.” 김성철은 실소를 머금은 채 어두운 창밖을 응시했다. 이따금 천둥이 치는 서쪽 하늘 위엔 거대한 구름이 머문 성벽의 도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김성철은 마지막으로 술잔에 술을 따르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시름을 달래고자 마신 술이 아니다. 결의를 굳히기 위한 한 잔이다. “윌리엄.” * 라그란제 제2구역. 구역에 따라 삶의 질과 지위과 결정되는 라그란제에서 2구역에 살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최고 수준의 신분과 부를 지니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증표다. 물론 과거의 이야기다. 황제가 고립되고 라그란제에 아신의 조형물이 들어선 이래 가진 자들과 특권층이 도시를 모두 떠난 후, 4구역 이상의 상위 구역의 곳곳엔 덩그러니 빈 집만이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민과 피난민으로 득실거리는 라그란제에서 상위구역에 산다는 것은 여전히 그 사람이 특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와아! 이 침대 좀 봐! 할아범! 진짜 푹신푹신하네.” 클라리스는 거위의 솜털로 만든 이불이 깔린 고급 침대에 다이빙 하듯 뛰어 들어 푹신한 느낌은 온몸으로 만끽했다. 한때 라그란제에서 잠시 살기도 했던 클라리스에게 2구역의 저택에서 산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던 호사였다. 당시 7구역의 공장지대에서 여공으로 일했던 그녀는 새벽 별 빛을 받아 반짝이는 상위 구역의 저택들을 선망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클라리스는 자신이 원하던 저택의 주인으로 입주했다. 문가엔 수많은 하녀와 하인들이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돈이 최고야.” 그런데 그의 조부는 썩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끊임없이 내리는 비와 궂은 날씨 때문일까. 쿠르트 아삼은 창가에 우두커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왜 그래? 할아범. 이 좋은 날에.” 클라리스가 퉁명스레 묻자 쿠르트 아삼은 오한을 느끼는지 몸을 감싸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분이 썩 좋지 않구나.” ======================================= 102. 믿음 (2) [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돌아오겠다. ] 짧은 메모를 끄적거린 후 김성철은 입김을 불어 촛불을 끈 후 어둠 속에서 일어났다. 소리 없이 갑판 위에 올라 선 그는 지면에 빛나고 있는 불빛들을 눈에 담으며 지면으로 하강, 빛이 없는 지점을 선택해 착지했다. 드워프들의 웃음소리가 머지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김성철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영원의 도시 라그란제를 향해 조용히 전진했다. 제도 가까이 이르자 몇 달 째 그치지 않는다는 빗줄기가 그를 반겼다. 김성철은 영혼창고에서 어인의 껍질로 만든 우비와 장화를 신어 비로부터 자신과 베르텔기아를 보호했다. 제국의 경계망은 만만치 않았다. 대륙최강이라 불렸던 제국함대의 공선들이 제도 주위를 순시하며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성벽 인근에도 적지 않은 숫자의 순찰병들이 쏟아지는 빗속도 마다않고 눈을 부라리며 라그란제 일대를 철통처럼 틀어막고 있었다. 그러나 김성철은 이미 길을 알고 있다. 대하수도의 입구. 라그란제의 모든 오수가 섞여 나오는 곳. 김성철은 그곳을 통해 라그란제에 잠입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하수도의 입구에 이르자 김성철은 풍경이 바뀐 걸 발견했다. 오수와 쓰레기로 범벅이 된 작은 강이 있던 자리엔 커다란 강과 폭포가 맹렬한 기세로 으르렁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원인은 하나다. 라그란제에 상공에 머무른 검은 비구름. 하루 종일 퍼붓는 빗줄기가 모인 어마어마한 수량 때문에 풍경 자체가 변한 것이다. 한때 마을이 있던 곳은 물속에 잠겼고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대신 김성철은 인간이 아닌 역겨운 존재들이 기슭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우로로롱.” “우로로롱.” 구슬프면서도 공허한 울음소리. 부유군도에서 만들어낸 인공 병사 구세병들이다. 그 괴물들이 세찬 강물이 흐르는 강변에서 서성이며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것들은 원래 라그란제의 지하에 있던 것들이다. ‘설마, 대하수도로부터 떠내려 온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제도의 도시전설급으로 치부되는 괴물들이 세상 밖에서 나와 있을 이유가 없으리라. 그만큼 대하수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거셌다. “난감하네. 아무리 당신이라도 저런 물살은 거스를 수 없겠지?” “어렵겠지만 막상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가까이서 대하수도의 입구를 보니 들어갈 마음이 싹 사라졌다. 절반은 쓰레기, 절반은 오물인 물속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김성철은 강행돌파를 생각했다. ‘그냥 단 번에 성벽을 넘어갈까.’ 그라면 할 수 있다. 하지만 처음 생각한 것과 모양새는 달라진다. 필연적으로 인명의 희생을 부를 수 있으며 자칫하면 황제가 찾을 수 없는 곳에 숨어버릴 수도 있다. 김성철은 우두커니 선 채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저기, 불청객이 와.” 베르텔기아가 몸을 흔들어 위험을 알렸다. 구세병들이 김성철을 발견하고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붙은 그들의 눈동자의 떠오른 기척은 명백한 적의. 김성철은 귀찮음을 무릅쓰고 팔 가라즈를 꺼냈다. 퍽! 퍽! 자비심 없는 망치가 구세병을 피떡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대하수도 바깥으로 떠밀려온 구세병은 하나 둘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구세병 두 마리를 해치운 김성철은 어둠 속에서 좀비처럼 일어나는 무수한 괴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로로롱...” 세차게 내붓는 빗줄기 속에서 구세병 하나가 진흙을 털어내고 눈을 번득인다. 김성철은 묘한 기분에 사로 잡혔다. “이 거, 원치 않는 시간 낭비를 하게 생겼군.” 하지만 구세병이 몇 마리가 있건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김성철의 손끝에 파지직 하며 미약한 전류가 지나갔다. “덤벼라.” 김성철은 모여드는 구세병을 노려보며 작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구세병과 김성철이 전투를 시작하기 직전, 구세병의 뒤쪽에서 음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멈춰라. 나의 아이들아.” 인간 같지 않지만 인간의 음성이다. 구세병들은 그 목소리를 듣고 움찔거렸고 이윽고 구세병들의 무리가 둘로 갈라지며 그 사이서 하나의 검은 인영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곧 김성철 수수께끼의 인물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언데드인가.’ 낡은 장의사의 두건 아래 드러난 것은 말라붙은 해골이었다. 텅 빈 안구 너머로는 차가운 느낌을 주는 노란 빛이 번득이고 있었다. 전형적인 리치의 형상. 김성철은 낯선 존재에게 만만치 않은 마력의 기운을 느끼며 싸늘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리치가 먼저 행동했다. 그는 김성철을 향해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 예를 표한 다음 정중한, 그러나 언데드 특유의 음산함이 묻은 음성으로 말했다. “실례지만, 그쪽은 혹시 부수는 자 김성철입니까?” “…그건 왜 묻지?” “세상에 강자는 많다지만 은빛 망치를 들고 종횡무진 제 아이들을 학살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을 통틀어 그 분이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리치의 퀭한 눈구멍이 또 한 차례 번득였다. 김성철은 생리적인 꺼림칙함을 느끼며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넌 누구냐?” “저는 제국 하수도 관리인입니다.” 의외의 대답. 시종일관 경계를 하던 김성철의 눈동자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하수도 관리인이라.’ 김성철은 이전에 대하수도를 통해 라그란제에 잠입할 당시 제도 한 쪽으로 통하던 철문 앞에 서 있던 섬뜩한 붉은 물감으로 칠한 푯말을 떠올렸다. [ 제국 하수도 관리인 외 출입금지 ] 그때 철문 너머에서는 음산하고 기괴한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제국 하수도 관리인이라.’ 직책만 놓고 보면 한직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백 마리에 이르는 구세병을 거느리는 리치를 어떻게 평범한 자로 볼 수 있단 말인가. “일단, 오해를 풀기 위해 말씀드리자면 저는 황제가 아니라 세간에서 말하는 방랑왕을 모시는 자입니다.” 제국 하수도 관리인이 말했다. 김성철은 그를 노려보며 짤막하게 말했다. “이름을 밝혀라. 리치.” 김성철의 명령을 들은 리치의 눈이 반발하듯 번득였다. 그러나 그의 텅 빈 아가리 안에서 나온 것은 공손한 목소리였다. “아쿤 간다르바. 크롬갈드 왕의 오랜 가신입니다.” 간다르바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간다르바라. 구 루테기네아 귀족의 성씨 아닌가.’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쿤 간다르바에게 물었다. “방랑왕의 가신이 어찌 제국의 지하를 관리하고 있는 것이지?” “거기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황제 본인도 동의한 바였죠. 라그란제의 지하엔 평범한 군대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 꿈틀거리고 있으니까요.” “…….” “그보다 대원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더럽고 악취 나는 곳에 홀로 오셨는지요? 제가 알기로 대원수께서는 세계의회의 연합군대를 이끌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지하에 처박혀 있던 것 치고는 정보가 빠르군.” 김성철이 리치를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크롬갈드 왕을 모시는 제후들과는 정기적으로 정보를 교환하고 있습니다.” 아쿤 간다르바는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대하수도의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아하니, 제도에 들어갈 방법을 찾고 계신 거 같은데 쉽지는 않을 겁니다.” “무슨 뜻이지?” 김성철의 물음에 리치는 물이 콸콸 쏟아져나오는 대하수도의 입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국은 지금 하수도를 정화하고 있습니다. 저 물 안엔 대단히 해로운 독극물이 포함되어 있죠.” 아쿤 간다르바는 손가락을 움직여 강처럼 흐르는 물줄기와 그를 둘러 싼 대안을 두루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보십시오. 저 물 안에 살아 있는 생명이 하나라도 있는지. 심지어 물 밖에 거주하던 자도 모두 자리를 떠났습니다.” “네가 몰아낸 게 아닌가?” 김성철이 날카롭게 묻자 아쿤 간다르바는 음산한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제 아이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탈출했을 땐 이미 죽어가는 사람 몇 명 이외엔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김성철은 하수도와 그 아래를 응시했다. 물에서 미약하게 화약약품을 연상하게 하는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김성철은 주변에 굴러다니는 대야를 주워 물을 가득 펀 후, 인근에 돋은 잡초에 뿌려보았다. 놀랍게도 하수도의 물을 뒤집어 쓴 잡초는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져 죽고 말았다. “아마도 황제가 저 구름을 불러낸 목적은 저와 저의 아이들을 손실 없이 몰아내기 위함이었겠지요.” 아쿤 간다르바는 라그란제 전역을 뒤덮은 짙은 적란운을 응시했다. 신이 쌓은 탑 마냥 두텁게 하늘 위에 쌓인 적란운은 쉬지 않고 장대비를 라그란제 전역에 뿌리고 있었다. “혹시 제도로 들어가는 길을 찾고 계십니까?” 아쿤 간다르바가 눈을 번쩍이며 물었다. 믿을 수 없는 존재다. 꺼림칙하다. 방랑왕은 김성철의 동맹이긴 하나 상당 부분이 베일에 싸인 인물. 다른 동맹들도 방랑왕에 대해선 한 꺼풀 거리를 두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지금 현재로는 다른 방법은 없다. 대하수도의 입구가 사실상 막힌 상태에서 김성철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강행돌파 뿐인데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김성철 본인이 잘 알고 있다. “여기 말고 다른 길을 아는 모양이군.” 김성철이 말했다. 아쿤 간다르바는 즉시 앙상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제국 하수도 관리인. 제도의 지상은 황제가 지배하지만 그 지면은 저의 관리 하에 있지요. 원하신다면 제가 직접 대원수님을 제도로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원수님은 저의 주군의 맹방. 주군의 맹방을 돕는 것은 주군을 돕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요.” “안내해라. 리치.” 김성철이 담담한 음성으로 말하자 리치의 눈이 또 한 차례 섬뜩한 노란 빛으로 번득였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리치는 넘칠 듯이 물이 흐르는 강을 따라 걸어갔다. 대하수도의 반대방향. 아쿤 간다르바는 강변을 따라 10분 즈음 걷다가 완만한 경사를 따라 철제 펜스가 둘러처진 지역까지 김성철을 안내했다.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안개 속에서 김성철은 흐릿한 묘비를 볼 수 있었다. ‘공동묘지군.’ 김성철은 빗물이 가득 고인 커다란 구덩이 아래서 천으로 싼 시체 몇 구가 물 안에서 썩어가는 걸 볼 수 있었다. “이쪽입니다.” 아쿤 간다르바는 오래된 묘비를 앙상한 손으로 더듬었다. 마법적인 기운이 묘비에 닿자 묘비 아래의 석관이 열리기 시작했다. 석관 안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아쿤 간다르바가 페어리 라이트 마법을 시전했다. 녹색 빛의 원구가 아쿤 간다르바 주위를 돌며 어둠을 밝혔다. 그것을 본 김성철은 즉시 자신의 영혼석에 명령을 내렸다. 3개에 달하는 페어리 라이트가 김성철 주위를 회전하며 돌기 시작했다. 아쿤 간다르바의 눈이 한 차례 번득였다.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계시군요.” 숨겨진 통로를 걸으면서 이 통로가 대단히 오래 전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수백 년 전에 만든 길이다.’ 사람이 드나든 흔적은 거의 없었다. 아마도 통로를 만든 이후 오랜 시간 동안 버려졌음이 분명하다. 제도의 명목상 주인인 황제조차 이 통로의 존재를 모르고 있으리라.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길고 긴 어둠의 길을 걸었다. “이 길은 깁니다.” 아쿤 간다르바가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좀 더 빨리 갈 순 없나?” “안타깝지만 언데드인 저의 몸은 상태가 썩 좋지 않습니다. 이 늙은이를 두고 먼저 가셔도 무방하지만 이 어둠과 미로와 같은 길속에서 행여나 길을 잃지는 않나 염려되는군요.” “…….” “하지만 인내엔 보상이 따릅니다. 제가 안내하는 길은 1구역, 허공궁궐의 바로 아래까지 이어져 있지요.” 1구역까지 제국 측에 들키지 않고 갈 수만 있다면 일사천리다. 몇 명의 경비병이 있건 경계결계가 있건 관계없다. 1구역에서 허공궁궐은 글자 그대로 한 달음에 돌파할 수 있을 정도로 짧은 거리니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김성철은 자신의 몸 주변을 도는 3개의 페어리 라이트의 잔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시 지루한 행군이 이어졌다. 어둠 속에선 벌레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박쥐의 울음소리,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만이 이따금 울려 퍼졌다. ‘지루하군.’ 풍경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어둠과 이끼 낀 오래된 벽밖에 없는 좁은 통로를 걷는 것은 정신건강에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 “무료하군요.” 아쿤 간다르바가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리치도 지겨움을 느끼나.’ 김성철의 생각은 뒤이어 떠오른 사라사 제로의 모습에 의해 사라졌다. 리치라고 해서 인간의 본질이 사라진 건 아니다. 다만 형태가 바뀌었을 뿐이다. “괜찮다면 이 늙은이가 옛날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아쿤 간다르바가 다시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관계없다. 하지만 재미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아주 재미가 없진 않을 겁니다.” 아쿤 간다르바는 눈을 번득이며 낮게 웃었다. 웃음이 잦아들자 간다르바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시대, 영원히 사는 마녀가 있었습니다.” ======================================= 102. 믿음 (3) ‘아델하이트의 이야기인가.’ 영원히 사는 마녀라는 말을 듣는 순간 김성철은 자신에게 저주를 걸었던 유령들린 숲의 마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쿤 간다르바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마녀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했죠. 한 번은 리자드맨의 모습이기도 했고 다른 한 번은 조인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바다 속에 사는 어인의 모습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렇듯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살아가는 시대의 지배적인 종족의 형상과 일치했죠.” 이 대목에서 김성철은 앞서가는 아쿤 간다르바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느릿하게 걷는 이 리치는 무슨 의도로 이런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일까. 의문 속에서 이야기는 이어졌다. “하지만 그녀가 모방했던 종족들은 한때는 융성했으나 결국 멸망 혹은 그에 준하는 쇠퇴의 길을 걸었습니다. 재앙이라는 하늘이 내린 시련 때문이었죠. 재앙 속에서 수많은 종족들이 절멸했지만 영원히 사는 마녀만큼은 오래된 숲속에 남아 유유자적한 삶을 보냈습니다. 그녀는 시대의 방관자였죠.” 그때 김성철과 아쿤 간다르바 앞에 3개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갈림길에는 이끼 긴 골렘 한 기가 경계를 서고 있었다. 아쿤 간다르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몇 마디 하자 골렘은 자리를 비켜 석상처럼 굳었다. 아쿤 간다르바는 3개의 갈림길 중 오른쪽 길을 택했다. 갈림길에 들어서자 아쿤 간다르바는 잠시 끊었던 이야기를 재개했다. “그렇게 영원한 삶을 누리던 그녀는 어느 날 한 길을 잃고 숲을 헤매던 한 청년을 만나게 됩니다. 평범한 청년이냐고요? 그렇다면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겠지요. 그 청년은 놀랄 정도로 아름답고 영리하며 그리고 보석처럼 빛나는 고고한 정신의 소유자였습니다. 그 마녀는 영원을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청년은 그런 마녀를 충격에 몰아넣기에 충분할 정도로 완벽한 인간이었죠.” “…….” 딱히 떠오르는 인물은 없다. 그가 알기로 칠영웅이 존재하기 전에 재앙을 해결한 필멸자는 없었다. 그렇다면 칠영웅이 인간 중 가장 뛰어난 자가 되어야 하는데 칠영웅은 김성철이 직접 본 바 대로 명성만큼의 인물들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인가?” 김성철이 물었다. 아쿤 간다르바는 음산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에 흥미가 있으신 모양이군요. 질문까지 해주시다니.” “…….” “좌우지간, 그 마녀는 수천 년의 삶에도 불구하고 그 청년에게 흥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 청년 또한 신비로운 매력을 지닌 마녀에 끌리게 되죠. 관심과 흥미가 사랑으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두 연인에겐 예정된 작별이라는 험난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재앙 말인가?” 김성철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물방울 하나가 머지않은 곳에서 떨어지며 청명한 소리를 냈다. “그렇습니다. 그 시대의 필멸자들은 신들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했지요. 따라서 그들을 기다리는 운명은 절멸뿐이었습니다. 그 청년에게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되죠. 마녀는 생전 처음으로 가슴이 찢어질 정도의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기이한 일이었지요. 자신의 동족 수천 만 명을 죽일 땐 아무렇지도 않았던 심장이 겨우 한 사람의 죽음을 앞에 두고 그토록 시린 고통을 안겨다주다니 말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김성철은 리치의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고약한 청중이다. 그는 만화방에서 재밌는 만화를 발견하면 결말부터 찾는 기괴한 습성이 있었다. 베르텔기아가 몸을 부르르 떨며 김성철에게 주의를 줬다. “아, 왜 그러는 거야 정말! 한창 재밌어지려고 하는데 결론부터 들어서 뭐하려고?” “아니. 그게...” 김성철은 변명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쿤 간다르바는 음산한 웃음을 흘리고는 분위기가 잦아들길 기다려 다시 입을 열었다. “마녀는 비록 경계 외에 속한 존재라고 하나, 그렇다고 해서 신의 의지를 거스를 순 없었습니다. 그 청년은 반드시 죽어야 했죠. 하지만 마녀는 그 청년을 잃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녀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아쿤 간다르바의 눈이 번득였다. 그와 동시에 김성철 일행 앞엔 공터가 나타났다. 아무것도 없는 암실. 하지만 아쿤 간다르바가 앙상한 손가락을 튕기자 공터 중앙에서 불이 피어올랐고 그 불은 바닥 가장자리에 난 작은 회랑을 따라 불의 강을 만들어내더니 이윽고 방 전체를 밝히는 등불을 차례차례 점화했다. 그곳은 말 그대로 어둠 속의 빛이었다. 김성철은 빛으로 가득 찬 공간 아래서 한 젊은 남녀의 동상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죽어가는 미청년을 두 손으로 감싸 안은 아름다운 여인의 조상이었다. ‘저건, 내가 모르는 얼굴이군. 적어도 아델화이트의 얼굴은 아니다.’ 남자의 얼굴도 매한가지. 아쿤 간다르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자신의 비밀을 넘기기로 결심했습니다.” “자신의 비밀?”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네. 불사의 비밀. 그녀가 생명을 지닌 채 영생을 누리는 가장 은밀한 이유.” “그것은...?” “혼의 전이(轉移)입니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영혼전이라고? 그런 게 가능한가. 회귀자라면 몇 번이고 보아왔지만 그런 것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생각에 잠긴 김성철의 귓가에 리치의 음산한 목소리가 파고 들었다. “타인의 혼을 파괴시키고 그 텅 빈 육신에 영혼을 옮길 수 있는 비술을 지닌 그 마녀는 제자를 들이는 방법으로 몇 번이고 육체를 바꿔가며 살아왔습니다. 신들의 묵인 하에.” 거기까지 이야기를 듣던 김성철의 눈에 잠시 잊고 있던 중앙의 조각상이 들어왔다. 죽어가는 청년을 본 순간 김성철의 뇌리에 불길한 가정이 떠올랐다. ‘설마. 저 조각상의 주인은?!’ 김성철의 몸에 전율이 흐르는 그 순간 아쿤 간다르바는 득의만면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장래에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나라를 건설하게 될 영웅을 말이죠.” “그 남자가 크롬갈드는 아니겠지?” 김성철이 떨림의 여운이 남은 목소리로 물었다.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왕은 여러 명이 있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왕은 오직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각기 다른 이름과 육신을 지닌 껍질일 뿐.” 즉, 저 제국 하수도 관리인은 너무나도 담담하게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에 서린 경천동지할 비밀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창시자부터 최후의 왕까지, 오직 한 명의 왕만을 둔 나라. 그것이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실체.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차치하고 그 이야기는 단순히 듣는 것만으로 수천 가지는 족히 넘는 의문과 가정을 낳는다. 김성철 또한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한히 증식하는 의문을 느끼며 조상 아래 서 있는 앙상한 리치를 응시했다. “이 이야기의 의도가 뭐지?” 김성철은 영리하게도 의문의 늪에 잠기기보다는 이런 이야기를 꺼낸 상대방의 저의를 알아냄으로 혼란을 해결하고자 했다. “진실을 말해드리기 위함입니다. 크롬갈드 왕의 진정한 목적과 이 왜곡된 세상의 진실을.” “왜곡된 세상?” 김성철의 물음에 제국 하수도 관리인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오히려 반문했다.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당신 정도의 영웅이라면. 지금 이 세상에서 신이라 불리는 것들이 사실은 신의 이름을 빌린 참칭꾼에 다름이 아니라는 사실을.” “…….” 김성철은 그 대목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아쿤 간다르바가 한 말은 김성철이 오래 전부터 추상적으로 해오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신을 칭하는 존재들은 그들에게 권능을 내려준 신을 배신하고 등 뒤에 비수를 꽂아 넣은 배신자들입니다. 그들은 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신을 참칭하고 신이 만든 이 세상을 그들 입맛대로 바꿔놓았지요. 그것이 바로 재앙이라는 의식으로 유지되는 현재의 세상입니다.” 아쿤 간다르바는 거기까지 말한 후 몸을 돌려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빛으로 가득 찬 세상을 등뒤로 한 채 김성철은 저 아쿤 간다르바가 저런 지식을 어디서 얻었는지 생각했다. 해답은 바로 나왔다. ‘아델화이트가 말해주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좀처럼 공유하지 않는 존재니까. 아마도 크롬갈드는 신의 글을 통해 이 지식을 얻게 되었겠지. 특히 한 여자를 통해…!’ 김성철의 눈에 자신을 향해 짓궂게 미소 짓던 한 소녀의 얼굴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라이즈 하이메르. 백사의 부족 혹은 신룡의 일족이라 불리는 읽는 자의 능력을 지닌 특이체질의 소유자. 크롬갈드는 그녀를 통해 이 세상의 진실에 대해 접근하고자 노력했을 것이고 나름의 생각을 정립한 것으로 보인다. 저 제국 하수도 관리인은 크롬갈드의 생각을 전해 듣고 다시 읊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크롬갈드 왕은 헤아릴 수 없는 긴 세월 동안 이 왜곡된 체제를 끝내고자 했습니다. 정중동. 겉보기엔 인간들의 욕망만으로 움직이던 이 세상은 하나의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건국 또한 그 원대한 작업의 일환이었죠. 그리고, 그 멸망 또한 그의 안배였습니다.” “루테기네아 왕국의 멸망이 그의 계획이었다고?” 김성철은 굴욕과 더불어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이미 어느 정도 납득하고 있었다. 방랑왕의 진정한 전력과 반란군의 힘의 차이는 명백했다. “황제는 크롬갈드 왕으로부터 이 모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알게 되었지요. 세상의 비원을 한 몸에 지고 분연히 떨쳐 일어난 영웅인 자신이 이미 준비된 배역을 연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자괴감 속에서 그리고 자기혐오 속에서 크롬갈드 왕의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때 앞쪽에서 희미한 빛이 비췄다. 그와 동시에 김성철은 앞쪽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머금은 바람을 느꼈다. 출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크롬갈드는 어찌하여 자신의 왕국을 버린 것이지?” 김성철이 물었다. 이에 아쿤 간다르바는 다가오는 미명을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가짜 신들이 크롬갈드 왕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책의 형상을 한 괴물체들이 수시로 라그란제 주변에 나타나며 크롬갈드 왕을 감시하기 시작했죠.”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의 뇌리에 베르텔기아와 꼭 닮은 그러나 다른 인격을 지닌 책들의 모습이 차례로 떠올랐다. “어쩔 수 없이 크롬갈드 왕은 자신의 뜻을 이을 인간 중에서 가장 나은 자를 찾게 되었고 결국 지금의 황제를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왕도 간과한 게 하나 있습니다. 황제, 아니 윌리엄 퀸튼 말버러의 치졸함이었습니다.” 그때 또 다른 갈림길이 나타났다. 두 개의 갈림. 아쿤 간다르바는 오른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서 우측으로 가면 크롬갈드 왕의 노고를 볼 수 있습니다.” “어디로 통하는 길이지?” “구 시가지로 통하는 길입니다.” “구 시가지라.” 루테기네아 왕국이 멸망하고 방랑왕에게 문서상 남은 마지막 영지. 그곳은 인간제국의 최전싱기에도 굳게 봉인되어 누구의 출입도 허용하지 않았다. 제국대원수라 불리며 명실상부한 제국의 2인자인 김성철에게조차. “구 시가지의 지하엔 크롬갈드 왕이 수천 년 동안 가짜 신들의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한 은밀한 작업이 준비되고 있었지요? 한 번 보시겠습니까?” “…안내해라.” 아쿤 간다르바는 음산한 목소리로 주문영창을 하더니 김성철과 그 사이에 무음결계를 쳤다. “따라오시지요.” 길은 어둡고 길었다. 상당한 시간이 소모되리라. 그럼에도 김성철은 조금도 그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아니 아까워하는 감각조차 느낄 새도 없었다 ‘황제는 이 야이기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는 이런 사실을 하나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지?’ 세상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면 김성철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황제를 도울 준비가 있었다. 설령 라이즈 하이메르와의 약속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황제의 명을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불통. 황제에 대한 믿음이 어둠 속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 103. 선택의 기로에 서서 (1) 이윽고 김성철과 늙은 리치 앞에 문이 없는 인구가 나타났다. 입구 너머로는 불그스름한 공간과 벽면이 들여다보였다. 아쿤 간다르바는 김성철의 양해를 구하고 투명 결계를 펼쳤다. 이중의 보호 속에서 김성철은 기척을 죽이고 앞으로 걸어갔다. 입구 너머엔 낡은 난간이 있는 작은 테라스 같은 공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구조물이었지만 김성철이 지닌 영혼각인 진실의 눈은 테라스 전체에 고도의 환영마법이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도 바깥에서 이곳의 존재를 감지할 수 없게끔 만든 장치이리라. 그럼에도 아쿤 간다르바가 투명 결계를 연거푸 펼쳤다는 것은 그의 신중한 성격을 짐작하게 한다. 김성철은 테라스로 나아가 앞과 위를 살폈다. 앞은 벽돌로 이루어진 벽면이고 위는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볼거리는 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이것은...?” 아래를 보는 순간 김성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발밑 아래엔 어둠을 훤히 밝히는 방대한 규모의 설비 장치들이 불을 뿜어내며 가동 중에 있었다. 공장이라기보다는 병기창에 가까운 모습. 그런데 단연 눈에 띄는 존재가 있었다. 인간의 심장을 닮은 그러나 금속과 수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심장이 공간의 중심에 우뚝 자리 잡으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벽면 여기저기서 이어진 파이프와 호스가 거대한 심장에 이어져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었다. “저건 뭐지?” 김성철이 물었다. “저것은 고대신의 심장입니다.” “고대신의 심장?” 고대신은 이 세계의 다섯 주신 중 하나. 인류가 숭배하는 질서신과 중립신과 같은 반열에 놓인 존재다.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고대신의 심장은 아닐 것이다. 신의 이름을 붙일 정도의 힘이 있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겠지.’ 그러나 그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저것은 문언 그대로의 고대신의 심장입니다.” 아쿤 간다르바가 자부심이 깃든 음성으로 말했다. “고대신의 심장이 왜 저런 곳에 있지?” “글쎄요. 고대신의 심장이 왜 여기 있는지 관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 아쿤 간다르바는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여운을 둔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선후관계의 문제이죠. 라그란제라는 도시는 고대신의 심장 위에 의도적으로 건설됐으니까요.” 제도 라그란제의 충격적인 진실이 아무렇지도 않게 늙은 리치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연이은 충격에 김성철은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가는 혼란마저 느꼈다. ‘대체, 나는 뭘 알고 있었던 것인가.’ 누구보다 재앙의 첨단에서 활동하며 현대의 인간들은 알지 못하는 이른바 ‘진실’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가 만나고 보았던 존재들은 전설 혹은 신화 속에서 볼 법한 존재였다. 그는 이 세계의 지배적인 주신인 질서신의 모습도 직접 보지 않았던가. 그러나 김성철의 자신은 라그란제의 지하에서 산산조각나고 있었다. “…이것도 크롬갈드의 안배인가?” 김성철은 감정을 추스르며 가까스로 담담한 어조를 유지했다. “그렇습니다. 그는 고대신의 심장이야말로 이 세계의 왜곡된 질서를 무너뜨릴 유일한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고대신의 심장엔 그 정도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김성철은 난간 아래의 거대한 심장을 응시했다. 뛰지 않는 심장. 거대하다는 것 외엔 별 다른 힘을 느낄 순 없었다. 가까이 간다면 뭔가 다른 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김성철의 초월감각은 그 심장에 대해 반응하지 않았다. “너의 주군은 저 고대신의 심장으로 뭘 할 생각이었지?” 김성철의 물음에 리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까지는 미천한 종복인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저 고대신의 심장이 황제의 손에 넘어갔고 황제가 저 고대신의 심장으로 무언가를 꾸미려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고대신의 심장 부근엔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었다. 제국의 장교와 기사가 빈틈없이 들어찬 가운데 마법사들이 분주하게 심장 주위를 오가며 모종의 작업을 하고 있었다. “…….” 김성철은 한동안 테라스에 선 채 그들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아래에서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다. “시험가동 실시!” “시험가동을 실시한다!” “모두 충격에 대비하라.” 작업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심장 주변을 지키던 기사들도 멀찌감치 철수했다. 무언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긴장과 초조 속에서 아래를 계속 지켜보았다. 심장과 연결된 파이프와 호스관을 통해 검은 형태의 에너지가 공급됐다. “가동 시작!” 다음 순간, 거대한 심장이 한 차례 뛰었다. 두근. 김성철의 눈앞이 순간, 검게 변하며 흐려졌다. 기묘한 경험이었다. 다른 무언가의 심장이 뛴 것 같은데 자신의 심장이 그것에 공명하고 있었다. ‘이건, 대체.’ 충격 속에서 초월감각이 그에게 하나의 환영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엎드린 채 죽어가는 어떤 거대한 형상과 그 뒤에 유령처럼 서 있는 두 개의 형상이었다. 그중 하나가 말했다. [ 어리석은 알레옥고스. 달콤한 꾐에 빠져 모든 것을 그르치는구나. 한 가지 알려주지. 네 친구는 너와 널 따르는 자를 버리고 죽은 신의 곁으로 도망쳤다. ] 머릿속에서 백만 개의 종이 일제히 울리는 것 같은 거룩하고 형언하기 어려운 음성이었다. 죽어가는 거대한 형상은 서서히 스러지기 시작했다. 최후의 순간 그것은 마지막 힘을 다해 초월세계의 벽면에 구멍을 내고 최후의 잔해를 인간계에 던져 넣었다. 혜성처럼 불타며 하늘을 가로지르던 최후의 잔해는 아무도 살지 않는 원시림에 떨어졌다. 그 후 억겁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잔해가 파고 들어간 자리엔 바람이 몰고 온 흙이 덮었고 그 위에 나무가 뿌리내리고 과실을 맺었다. 수도 없는 과일이 열렸다 떨어지길 수천 차례. 한 사내가 아무도 살지 않는 원시림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죽은 과일과 낙엽이 켜켜이 쌓인 흙을 파내고 파내 마침내 흙속에 파묻혀 있던 하늘을 가로질렀던 잔해를 다시 세상에 드러냈다. 김성철이 알지 못하는 그 사내는 잔해를 내려 보며 미소 지었다. 그것은 소름끼칠 정도 잔혹한 환희에 젖은 미소였다. 초월감각이 보여준 환영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이것이... 이 고대신의 심장에 얽힌 이야기인가?’ 정신을 차리자 김성철 앞엔 흉측한 몰골의 리치가 흉측한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앗, 깜짝이야. 씨벌.” 김성철이 뒤로 물러서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아쿤 간다르바는 머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한동안 아무 말씀도 없으셔서.” “…출구로 안내해라.” 아무튼 약간의 놀람 덕에 김성철은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사색이나 추측이 이다. 확인이다. 지금 당장 황제를 만나 물어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가슴 속에 또아리를 틀며 증식하는 의문의 무게에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쿤 간다르바의 발걸음은 느릿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언데드의 그 느린 속도는 김성철의 답답함을 배가시켰다. “어이. 리치. 1구역으로 통하는 길은 아까 그 빛이 비치던 그 길로 가면 되나?” 김성철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아쿤 간다르바는 눈을 번쩍이며 고개를 숙였다. “안내에 감사한다. 지금부터는 혼자 가겠다.” 김성철이 마침내 아쿤 간다르바를 추월해 그 앞으로 나아갔다. 가볍게 시작한 발걸음은 곧 그를 한줄기 광풍처럼 폭발적인 스피드로 이끌며 그를 출구로 인도했다. 어둠이 걷히고 답답한 벽면에 가로막힌 풍경이 걷히며 환한 바깥 =세상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질척한 비가 내리는 잿빛의 풍경. 곳곳에 예전엔 볼 수 없었던 기괴한 형상의 부정한 조각상들이 들어차 있었다. 만연한 이단의 기운이 곳곳에서 풍겨온다. 초월감각이 김성철에게 메스껍다는 감정을 느끼게 했다. 구토 할 것 같은 역겨움 속에서 김성철은 머리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부유섬을 올려다보았다. 허공궁궐. 황제는 그곳에 있을 것이다. 김성철은 묵묵히 궁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누구도 김성철의 등장을 눈치 채지 못했다. 오직 단, 한 명 그의 끈질긴 추적자를 제외하고. “…….” 현실과 초월세계의 틈새. 그곳엔 한 여성이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수진. 혹은 아무개. 그녀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그녀는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던 과거의 역사 그 자체를. * 예정 된 절망의 미래. 은밀 행동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던 그녀는 제국 길드의 의뢰를 받아 세계의 적이 점령한 황금 도시에 밀정으로 파견됐다. 아무개는 당시의 세계의 적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는 근육질로 뒤덮인 거구였고 얼굴엔 결코 걷히지 않는 그림자가 덮여 있었다. 당시 세계의 적은 완전한 검은 거인으로 변하지 않았고 인격도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후에 일삼게 되는 무분별한 파괴 대신 살육의 유희를 즐길 수 있었다. 그녀가 황금 도시에 도착했을 때 도시에 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단지 몇 구의 의지를 잃은 언데드만이 남아 도시를 배회하며 살아남은 인간의 살점을 갈구하고 있었다. 세계의 적이 지닌 일곱 재앙의 무기 중 하나인 저주 받을 사후의 역병, 시쿨레아의 작품이다. 이수진은 자신의 냄새를 맡고 코를 킁킁 거리는 언데드를 피해 도시 사람들의 흔적을 좇았다. 수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발길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긴 행렬이 남긴 발자국이 몇 구의 썩어가는 시체와 함께 남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종착지는 소환 광장이었다. 소환 광장에 도착한 그녀는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된다. 세계의 적은 권좌에 앉아 과거 자신이 당했던 죽음의 시련을 이계의 주민들과 소환 광장의 관리인들에게 되갚아 주고 있었다. 청홍백적, 네 개의 광장은 이미 산처럼 쌓인 주검과 넘쳐흐르는 피로 뒤덮여 있었다. 광장뿐만 아니었다. 소환 광장을 감싸고 있는 성벽엔 그의 명에 반항하는 자들을 산채로 꼬챙이에 꿰어 또 다른 재앙의 무기 아고니로 묶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붙들어 놓고 있었다. 마계에서 서식하는 괴조가 소환 광장의 하늘을 떠돌다가 성벽에 내려 앉아 살아 꿈틀거리는 자들을 산 채로 뜯어먹었다. 그곳은 영원한 고통과 절망이 되풀이 되는 실재하는 지옥이었다. 세계의 적, 김성철은 권좌에 앉아 살점이 붙은 두개골로 만든 술잔에 술을 따라 마시며 비명으로 가득 찬 광장을 향해 천둥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를 원망하지 마라. 이 모든 것은 너희들이 저지른 죄악의 결과다.” 또 김성철은 말했다. “나는 그저 신을 대신해 너희들을 벌하는 도구에 불과할 뿐.” 아무개는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빠져 나왔다. 이후에 소환 광장에서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는 그러려니 했다. 이미 그 자, 세계의 적은 도저히 손 쓸 수 없는 악 그 자체에 물들어 있었으니까. 그 이후 세상의 멸망의 단초 된 라그란제의 대재앙이 일어났을 때도 그녀는 그것이 김성철의 또 다른 작품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건, 김성철의 짓이다.” 검은 거인과 맞서던 주축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모든 멸망의 원인은 김성철이라고. 김성철의 손에 모든 것을 잃은 그녀는 점점 그것을 확고한 진실로 받아들였고 이윽고 생각했다. 김성철을 처치하는 것만으로 세상은 구원 받을 것이라고. 하지만 차례차례 드러나는 숨겨진 진실 앞에서 아무개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것은 결단을 내리는 것. 갈팡질팡 하는 선택의 기로 속에서 그녀를 구원하고 그리고 세상을 구원할 단 하나의 길을 찾아내는 것. 쉬운 일은 아니다. 이 세상엔 너무나 많은 거짓과 속임수가 횡행하고 있으니까. 지금, 그녀의 세상을 파괴한 존재는 허공궁궐의 정원에 내려앉았다. 정원엔 그를 기다리던 손님이 하나 있었다. 얼굴만을 대충 기억하는 황제파 장군이었다. “의외군요. 우리가 기다린 건 당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을텐데.” 그 장군과 김성철은 아는 사이로 보였다. 김성철이 말했다. “길을 비켜라. 도르온. 나는 황제를 만나러 왔을 뿐이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름 모를 장군이 당당하게 서서 김성철의 앞을 막았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날 방해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 김성철이 경고했다. 장군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엷은 미소마저 띄는 여유를 보였다. “그건 내가 할 말이오. 전 제국대원수.” 장군이 검을 뽑았다. 다음 순간, 김성철과 아무개는 들을 수 있었다 두근. 거대한 심장의 울림을. 눈앞이 검어지는 감각 속에서 초현실적인 일이 일어났다. 김성철의 앞을 막아서던 장군의 형상이 변했다. 4개의 가면을 쓴, 정사각형의 판금만으로 이어진 갑주를 걸친 기괴한 존재로. 그 형상은 제도 도처에 널려 있는 불경한 조각상과 꼭 닮아 있었다. 초월감각을 지닌 김성철의 눈엔 보다 확실히 보였다. [ 불멸자 커큠버스 ] [ 트로이메아의 끔찍한 요리사이자 강간범 ] [ 그리고 추방된, 이른바 악신 ] 악신이 나타났다. 하지만 보다 문제되는 건 그것이 아니었다. 초월감각은 말해주고 있었다. 이 악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환경의 변화로 인한 것이라는 것을. 두근. 두근. 지하에 있는 고대신의 심장은 계속해서 뛰었다. 그 고동은 있어서는 안 되고 용서받아서도 안 되는 불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상상치 못할 신성모독. 현실과 초월세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유가 어떻게 됐든 김성철은 멈추지 않는다. 그는 아무개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재앙의 무기가 아닌 자신의 진정한 벗인 은빛 망치를 꺼냈다. “…와라.” 김성철의 몸에 신적인 힘이 흐르고 지나갔다. ======================================= 103. 선택의 기로에 서서 (2) 4개의 두상을 지닌 거인은 톱니모양의 칼날을 지닌 거도를 김성철을 향해 내려쳤다. 쿠궁! 지면이 갈라질 정도의 강맹한 일격. 김성철은 뒤로 물러서며 자신의 새로운 방어구 승천자의 손을 꺼냈다. 영혼 창고에서 나온 검은 갑각으로 이루어진 무구는 스스로 움직이며 김성철의 왼손을 감쌌다. 왼손에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며 김성철은 망치를 든 채 옆으로 돌며 적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적의 방어력은 대단히 강해 보였다. 특히 전신을 감싼 판금 갑옷엔 고도의 대마법 코팅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걸 본 김성철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오직 검으로 승부를 보겠다? 도르온과 어울리는 불멸자군.’ 인간제국의 장군 도르온은 김성철과 접점이 그다지 없는 인물이다. 그는 반란군 출신이 아니었고 인간제국이 성립된 이후에 황제 밑에 들어온 이른바, 새로운 피였다. 그러나 그는 김성철이 이름을 알리기 전 부터 유명세를 떨쳤단 검사이자 철두철미한 군인이었다. 그는 제국대원수인 김성철과 더불어 불안정했던 제국 초기, 제국을 흔들 수 있었던 각지의 수많은 반란과 다툼을 해결했다. 일각에서는 그저 황제와의 인맥 덕에 제국 대원수에 오른 김성철보다 낫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고대왕국 출신의 소드마스터라는 특별한 이력의 소유자로 검에 대한 상당한 실력과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검술 실력만으로 따지면 김성철도 그에겐 한 수 접어야 할 정도. 하지만 김성철이 그의 검술보다 높게 평가하는 것은 고결하고 기사도적인 인품이었다. 그는 황제가 재앙의 해결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대놓고 반기를 든 김성철 정도는 아니지만 한직을 자청함으로써 나름의 저항을 펼쳤다. ‘기이한 일이군. 저 정도 사내가 악신이 되는 길을 택하다니.’ 그가 아는 도르온은 님버스 왕국의 철부지 왕자처럼 힘에 도취되는 남자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악신으로 화한 도르온이 재차 거대한 검을 휘둘러 김성철을 공격해왔다. 3미터에 이르는 검이 바람처럼 김성철을 향해 휘몰아쳤다. 챙캉! 찰나의 순간, 팔 가라즈와 톱니바퀴의 대검이 수 차례 격돌하며 불꽃을 튀겼다. 한 차례 합을 교환한 두 전사는 거리를 두고 물러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 조심해라. 저 강간범은 악신 중에선 손꼽히는 칼잡이니까. ] 내면에서 알 수 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우우웅- 과연 악신의 힘은 진짜다. 악신의 검격이 남긴 여운이 팔 가라즈에 남아 청명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김성철의 신적인 힘이 흐르는 팔에도 가벼운 피로가 느껴졌다.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던 싸움은 다시 붙으며 다음 격돌을 예고했다.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악신이 갑자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물러나시지요. 제국 대원수. 초대받은 건 당신이 아닙니다.” 도르온이 인간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과연 고고한 정신의 소유자다. 악신의 힘을 빌려쓰면서도 악신에 혼탁한 인격에 삼켜지지 않았다. 존경할만한 적이다. 그러나 또한 해치워야 할 적이다. “내가 언제 초대받고 온 적이 있나?” 속으로 악신의 검로를 그리면서 김성철이 말했다. ‘이런 곳에서 시간을 끌릴 순 없다. 최대한 빠르게 놈을 처리한다.’ 만만치 않은 적을 빠르게 허물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힘을 쓰는 것만으로 모자라다. 필연적으로 적의 의도치 않은 협력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적이 바보가 아닌 이상, 생각을 할 것이고 그 나름대로의 경험과 판단을 통해 최적의 선택지로 공격해올 것이기 때문이다. 막상막하의 힘을 지닌 전사들의 대결의 수 싸움은 대부분 상대방이 예상치 못하는 숨겨진 한 수에 의해 결판난다. 김성철은 새롭게 얻은 방어구 승천자의 손의 방어력을 믿어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수단에 대한 전적인 신뢰는 패배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김성철은 악신의 검로를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이번엔 먼저 팔 가라즈를 휘두르며 뛰어 들어갔다. 망치와 검이 허공에서 또 한 차례 격돌했다.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악신과 김성철이 발을 디딘 석조포도가 박살나고 튀어오를 정도의 격전이었다. 숨 막히는 교전 속에서 김성철은 악신의 검로가 일정한 방향성을 띄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피차일반이다. 악신 또한 김성철의 휘두름에 점점 익숙해지며 한 합 사이의 빈틈을 잘게 쪼개 교묘하게 빈틈을 노려왔다. 쉬익- 거대한 톱니바퀴의 칼날이 김성철의 머리카락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간발의 차였다. 하마터면 김성철이 준비한 수를 펼치기도 전에 머리통이 두 개로 쪼개질 뻔 했다. 그럼에도 김성철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수많은 전투 속에서 생과 사를 오간 몸. 악신의 날카로운 일격은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을지언정 그의 근본까지 흔들진 못했다. 다음은 김성철의 차례다. 그는 악신의 예상치 못한 반격에 대비하며 온 몸에 신적인 힘을 흘리며 재차 비호처럼 악신에게 달려들었다. 딱. 딱. 딱. 악신이 두른 정사각형의 판금으로 만든 갑주가 서로 부딪치며 방아깨비의 울음소리 같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악신의 검이 달려드는 김성철을 요격하기 위해 저면에서 찔러 들어왔다. 리치의 차이를 이용한, 이미 여러 번 목도했던 반격. 김성철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짓쳐들어오는 톱니 날의 대검을 팔 가라즈로 걷어내며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악신의 쓴 네 개의 가면, 8개의 눈이 일제히 번득이며 팔 가라즈에 밀리고 있는 검에 전력을 퍼부어 김성철을 밀어냈다. 허공에 떠오른 김성철은 악신의 막강한 힘에 맞서는 대신 부드럽게 망치를 흘리며 악신의 검을 흘렸다. 그 반작용으로 김성철은 허공에서 팽이처럼 회전하며 바닥에 착지했다. 파바박! 착지의 충격으로 또 다른 포도가 박살나며 그 파편이 사방으로 튀며 비로 질척한 허공궁궐의 정원의 말라붙은 나무와 꽃가지를 짓이기며 지나갔다. “후우.” 김성철은 심호흡을 했다. 습기로 가득 찬 주변의 공기가 하얗게 변색되며 그의 콧구멍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입김으로 화하여 입으로 내뱉어졌다. 장대비가 그의 몸을 여전히 적시고 있었지만 전투의 열기로 뜨거워진 그의 몸에선 증기와 같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딱. 딱. 딱. 아신의 판금갑옷은 여전히 덜렁거리며 풀벌레의 울음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냈다. 지금까지는 예상되었던 흐름. 몇 번이고 반복한 동일한 싸움의 양상이다. 하지만 악신은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김성철은 최소 한 번 이상의 반격이 올 것으로 예측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신의 판금갑옷 안에 숨겨져 있던 거신의 발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신의 발이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걷어찼다. 흝탕물과, 진흙, 파편 조각들이 김성철을 향해 쏟아졌다. 검객들 사이에 흙을 걷어차 상대방의 빈틈을 노리는 것은 흔히 있는 숨김 수 중 하나. 하지만 아신의 발길질은 산사태가 퍼붓는 것 같은 막대한 양의 토사를 김성철에게 날려 보냈다. 김성철의 시야는 날아드는 토사로 순식간에 막혔다. 시야가 완전히 막히기 직전, 김성철은 시야의 우측 상단 방향에 번득이는 빛을 응시했다. 이중의 공격. 토사를 걷어찬 발을 내딛음과 동시에 김성철을 토사와 함께 베어버릴 심산이다. 악신이 승부수를 던져 왔다. 승부수엔 승부수로 맞선다. 김성철은 진흙탕 시절부터 정립한 자신의 철학을 되새기며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카드를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나열했다. 있다. 시계가 막히는 건 물론 심대한 충격을 안겨다 줄 진흙 세례로부터 몸을 지키는 건 물론 숨겨 온 한 수를 실행하게 할 마법의 카드가. 김성철의 몸에 마법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충직한 영혼석들도 일제히 영창을 시작했다. 1번 영혼석 윈드 쉴드 2번 영혼석 윈드 쉴드 3번 영혼석 윈드 쉴드 4번 영혼석 윈드 쉴드 5번 영혼석 윈드 쉴드 6번 영혼석 윈드 쉴드 7번 영혼석 윈드 쉴드 8번 영혼석 체인 라이트닝 방어마법의 미덕은 순간적인 영창. 영창과 동시에 바람으로 이루어진 탄환이 약실에 들어가 발사를 기다렸다. 아신급의 힘이 담긴 흙더미가 김성철을 덮쳐온다. “꺄아~!” 베르텔기아가 몸을 떨며 주머니 안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위로 던지면서 영혼창고에서 크럼부이를 꺼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시동어를 외치며 영혼석에 장전된 모든 마법을 일제히 방출했다. “윈드 쉴드.” 도합 9개의 바람으로 만든 방벽이 김성철의 전면에 전개됐다. 펑! 펑! 펑! 펑! 바람이라기보다는 폭발에 가까운 격류. 그 막강한 방벽은 날아오는 흙더미를 밀어내며 막힌 시야의 전면에 구멍을 뚫었다. 우측 상단에서 비스듬히 날아오는 악신의 칼날이 뚜렷하게 보였다.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 김성철은 시야를 넓게 두고 번쩍이는 검 너머, 흙더미를 차올리고 아직 바닥에 닿지 못한 거대한 발을 바라보며 막 꺼낸 크럼부이를 던졌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악신의 칼날은 전진해 어느 새 김성철의 상반신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척. 타이밍 좋게 하늘로 잠시 띄웠던 팔 가라즈가 김성철의 손에 들어왔다. “후우.” 그의 몸에 신적인 힘이 지르고 갔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증기가 가일층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격돌이 이어졌다. 챙캉! 전력을 다한 검과 망치가 맞부딪쳤다. “…….” 엄청난 힘이요 기세다. 나무뿌리처럼 지면에 단단히 박힌 그의 발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크럼부이라면 이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을 것이다. ‘강하군.’ 김성철의 몸에 흐르던 신적인 힘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다행인 것은 악신의 힘도 떨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직전 던졌던 크럼부이는 판금 갑옷이 덮어버리기 전에 아신의 거대한 발의 일부를 뚫고 박혔다. 악신 커큠버스는 움찔하긴 했지만 상처는 얇고 그리고 그의 상처는 지면에 닿을 정도로 연장된 판금갑옷의 스커트에 완전히 차폐됐다. 잠시 중단됐던 악신의 기세가 올랐다. 악신은 놀고 있는 왼손을 대검에 덧대 김성철을 그대로 짓눌렀다. 장대비가 물렁하게 만든 지면을 디딘 김성철의 발이 순식간에 무릎까지 잠겼다. 악신은 이대로 김성철을 눌러버릴 셈이다. 김성철의 힘이 신적이긴 하나, 그를 지지하는 땅은 그렇지 않은 걸 노린 임기응변. 딱, 딱, 딱. 악신의 판금갑옷이 단속적인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악신은 전력을 다해 김성철을 눌려버리려고 했다. 지면 속에 처박아 시계를 가린 상태에서 피하기 어려운 공격을 가할 심산이다. 절체절명의 위기. 그러나 그 순간에도 그의 영혼석 하나는 다른 주문보다 영창 시간이 좀 더 긴 주문을 완전히 영창해내고 있었다. 체인 라이트닝의 영창이 완료됐다, 고 영혼석 안의 카벙클의 영혼이 감정으로 전달했다. ‘잘했어. 카벙카카.’ 증기열차처럼 막대한 수증기를 피어 올리던 김성철의 눈이 번득였다. 승천자의 손을 낀 왼손이 톱니 칼날을 부여잡았다. 악신은 반응하지 않고 더욱 힘을 가했다. 자신의 우위를 믿고 잔꾀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겠다는 자세. 하지만 상대방은 김성철이다. 김성철의 시선은 크럼부이가 꽂힌 아신의 발, 스커트로 가려진 사각을 응시하고 있었다. 칼날을 부여잡은 승천자의 손이 그 지점을 정확히 가리켰다. “체인 라이트닝.” 뇌전이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와 아신의 스커트 부근을 노린다. 악신은 그저 웃었을 뿐이다. 그의 판금 스커트엔 대부분의 마법을 막아낼 대마법코팅이 씌워져 있었으니까. 그런데 김성철이 바라보고 있는 지점은 스커트가 아니었다. 스커트가 걸쳐진 무른 진형.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오고 있는 빗물이 고인 웅덩이였다. 파지지직! 체인 라이트닝의 뇌전이 물웅덩이에 닿았다. 전류는 물을 타고 스커트 사이의 틈새를 파고 들어가 악신의 발, 크럼부이가 꽂힌 지점까지 그대로 파고 들어갔다. “끄아아아악!” 악신의 비명이 아니다. 크럼부이의 비명이 스커트 안쪽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악신 또한 충격을 받았다. 가해오는 힘이 약해졌다. 잠시 외도를 했던 승천자의 손이 톱니바퀴를 움켜잡았다. 김성철의 몸에 재차 신적인 힘이 흐르고 지나갔다. 칼날과 맞대고 있던 팔 가라즈가 떨어져나갔다. 체인 라이트닝의 충격으로 잠시 발생한 힘의 공백. 그것을 이용해 오로지 승천자의 손만으로 악신의 칼날을 지탱한 것이다. “이도 젠카!” 악신이 처음으로 소리를 냈다. 당황한 것이다. 김성철은 악신이 미처 태세를 회복하기 전에 칼날을 잡은 채 진흙 속에서 튀어나와 그대로 악신 커큠버스를 향해 쇄도했다. 악신은 다급히 검에 검기를 흘려냈다. 톱니바퀴를 이루는 날 하나하나에 막강한 검기가 깃들며 절삭력을 높였다. 치지지지직-. 신화급 무구인 승천자의 손에 상처가 생기기 시작됐다. 이대로는 잘려나갈 것이다. 하지만 멈출 순 없다. 김성철은 손가락 끝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서 전진을 계속했다. 싹둑. 손가락이 승천자의 손의 일부분과 함께 떨어져나갔다. 온 몸의 털이 삐죽 설 정도의 고통이 엄습했다. 그러나 그 순간, 김성철은 악신의 바로 앞까지 진출해 있었다. 그가 망치를 들고 두들길 수 있는 거리까지 말이다. 팔 가라즈가 높이 올라갔다 악신을 향해 내려처졌다. 퍽! 천둥 같은 일격. “크억!” 악신의 거대한 체구가 휘청거렸다. 김성철은 악신의 칼날을 떠받치던 피를 철철 흘리는 왼손을 놓으며 재차 악신을 타격했다. 폭풍과 같은 연타 속에서 악신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판금을 잇던 줄이 끊어지고 얼굴을 가리던 가면이 찌그러지며 푸른 피를 사방에 흩뿌렸다. 악신이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공격. 공격. 공격. 김성철은 멈추지 않았다. 몸에선 증기를, 잘린 손가락에선 붉은 피를 끊임없이 내뿜으며 김성철은 맹공을 가했다. “끄.. 끄으으으....” 악신이 마침내 무너졌다.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는 사체를 남긴 채 악신은 스러지기 시작했다. “대원수.... 당신과 싸우게 되어... 영광이오....” 최후의 유언을 남긴 채 도르온은 소멸했다. 초월감각이 전투의 끝을 알렸다. [ 황제를 믿어주시오. 그는 흔들리고 있소.... ] 빗 내음 섞인 바람에 실려 어느 제국 장군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에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김성철은 장갑 째 잘린 손가락을 주워 원래 자리에 맞추고는 엘릭서를 꺼내 상처를 치유했다. 다행히 손가락은 제대로 붙었고 승천자의 손의 잘린 파편도 스스로 붙어 원형을 회복했다. 김성철은 잘렸다 붙인 손가락을 오므렸다 펴며 점검했다. 아직 이물감과 그리고 섬뜩한 통증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다. 황궁의 테라스에 한 사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윌리엄 퀸튼 말버러. 황금갑주를 두른 인간제국의 황제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는 김성철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제야 도 다른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곳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투구를 쓰고 짐승의 가죽으로 치장한 갑주를 걸친 사내가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방랑왕. 아니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유일한 왕 크롬갈드가 황제와 김성철의 측면에서 삼각형의 꼭지점 중 하나를 형성하고 있었다. 최후의 왕관을 지닌 왕과 왕관 없는 두 명의 왕. 그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고대신의 심장의 불규칙한 고동 속에서. ======================================= 103. 선택의 기로에 서서 (3) 쿠구궁. 검은 뇌운에서 내려친 벼락이 허공 궁궐의 상부에 있는 피뢰침을 강타했다다. 그 점멸하는 불빛은 무대에 오른 3명의 남자를 껌뻑이게 했다. 무거운 침묵은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한동안 이어졌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침묵을 깬 것은 황제였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이 내 정원을 어지럽히는군.” 그의 음성은 특유의 위엄을 머금고 있었으나 어딘가 지쳐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황제의 말에 방랑왕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황제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불쾌감이 섞인 오만한 어조로 말했다. “라그란제는 내가 계획하고 건설한 나의 도시다. 따라서 이 정원 또한 나의 것. 윌리엄 퀸튼 말버러. 너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이에 대해 황제는 비릿한 냉소를 머금었을 뿐이다. 방랑왕과 황제. 두 남자 사이에서 뿜어져 나온 무형의 기운의 격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불꽃을 튀겼다. 김성철은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두 왕 사이의 대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자신이 무엇을 할 지 선택하지 못한 채. 그때였다. [ 칼자루를 쥔 것은 너다. 선택의 시간이 왔다. ] 김성철의 내면에서 거역할 수 없는 음성이 울려 퍼졌다. 순간 김성철은 아찔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감각이 멀어졌다. 소리도 시야도 촉감도. ‘뭐지, 이 감각은.’ 무감각 속에서 오직 심장을 죄여오는 저릿함만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이상 징후는 누구보다 그의 심장 가까운 곳에 있는 베르텔기아가 느꼈다. “괜찮아?” 그녀의 걱정스런 물음에 김성철은 잠시 멀어졌던 감각이 회복되는 걸 느끼며 고개를 털 듯 좌우로 흔들며 읊조렸다. “…문제없다.” 여전히 이물감이 느껴지는 손을 오므렸다 펴며 김성철은 황제와 방랑왕 두 사내를 시야에 담았다. 내리는 빗줄기가 거세졌다. 먼저 움직인 것은 황제였다. “크롬갈드. 이 지긋지긋한 악연에 종지부를 찍을 시간이다.” 의식적인지 아니면 맹렬한 분노에 불타서인지 모르겠지만 황제는 오로지 방랑왕만을 노려보고 있었고 김성철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마치 그가 이 자리에 없는 양. 그런 황제의 행동은 김성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흔들리기 시작한 믿음의 진폭은 더욱 커져가는 와중 김성철은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투구가 자신을 향하는 것을 보았다. 방랑왕이 김성철에게 말했다. “보이는가? 부수는 자. 사사로운 굴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오로지 나에 대한 증오만으로 살아가는 한심한 자의 모습이?” 그것은 원치 않은 방관자였던 김성철을 비 내리는 무대로 끌어내는 한마디였다. 오로지 방랑왕만을 노려보던 황제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김성철을 무심한 눈동자에 담았다. 먼 거리 탓에 김성철은 황제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읽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금 황제는 자신을 꺼리고 있다는 것을. 황제의 관심사는 방랑왕이 말했듯 오로지 크롬갈드 뿐이었다. 김성철에게 잠시 시선을 던진 황제는 다시 고개를 기울여 방랑왕을 노려보았다. “부끄럽지도 않나? 크롬갈드. 둘 사이의 문제에 관계없는 제3자를 끌어들이려고 하다니.” 이에 크롬갈드는 코웃음을 쳤을 뿐이다. 그는 김성철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다면 부수는 자에게 직접 말하라. 이 자리에서 빠져달라고.” 두근. 고대신의 심장 박동 소리가 모든 이의 귀에 들려왔다. 황제의 얼굴에 희미한 노기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김성철이 응사흐는 도중 다시 김성철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리를 비켜주지 않겠나? 나의 벗이여. 이것은 나와 크롬갈드 사이의 문제다.” 거기서 황제의 말은 끝났다. 어떤 설명도 이유도 없었다. 완곡한 어조를 제외하고 보면 단순한 명령과 다를 바가 없다. 흔들리기 시작한 믿음이 더욱 크게 흔들렸다. ‘왜, 말해주지 않는 거냐?’ 김성철이 힘들게 조직한 동맹군을 뒤에 둘고 홀로 이 자리에 온 것은 황제의 이야기를 듣기 위함이다. 하지만 지금 황제는 김성철에게 아무 것도 말하려 하지 않는다. 김성철의 간절한 눈빛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김성철의 청을 외면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루테기네아 왕국이 항복한 그 날부터 황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거기까진 좋다. 다가오는 재앙을 눈앞에 두고 매일매일 격돌하며 불화의 씨앗을 키워가던 제국대원수의 막바지 시절. 황제는 김성철에게 말해줄 수 있었다. 작금의 상황과 재앙을 미루는 이유를. 그러나 결국 그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고 김성철은 세계의 적이 되어 지독한 고독 속에서 살아야 했다. 진짜 웃긴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김성철이 동분서주하며 악마왕과 칠영웅을 차례로 격파하고 있을 때, 이 세계의 권력자들은 그들만의 비밀을 간직한 채 뒤로 말도 안 되는 협잡이나 꾸미고 있었으니. 두근. 고대신의 심장 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귀에 거슬린다. ‘나는 대체 뭘 한 것인가.’ 김성철의 코와 입에서 진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얀 입김이 하늘로 올라가며 흩어져 사라졌다. 잠깐의 무거운 침묵이 이어진 후, 김성철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나는 여기에 있겠다.” 김성철의 손에 악신의 푸른 피로 점철이 된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빗줄기가 팔 가라즈에 묻은 푸른 피를 진창에 씻겨 흘려보냈다. 쿠구궁! 뇌운은 또 하나의 번개를 토해내며 무대 위의 3인의 모습을 번쩍이게 했다. 대립의 무게중심은 황제와 방랑왕의 구도에서 황제와 김성철로 넘어갔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 힘없는 박수 소리가 팽팽한 긴장을 뚫고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짝 짝 짝. 방랑왕이다. 그는 과장적인 몸짓으로 세 차례 박수를 쳤다. 대치하던 김성철과 황제의 시선이 다시 방랑왕에게 향했다. “이런 곳에서 구시대의 인간끼리 싸워서 무엇을 하겠나? 새로운 시대의 인간들이 지척에서 우리를 멸하려드는 판국에 말이야.” 방랑왕의 목소리는 달라져 있었다. 지치고 노곤하며 희미했던 무위의 암군의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사라지고 대신 힘 있고 청량하며 뚜렷한, 달변가의 기질마저 엿보이는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투구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 가지 제안을 하지. 황제.” 방랑왕이 말했다. “…너의 제국을 돌려주겠다.” 황제의 얼굴에 희미한 변화가 일었다. 방랑왕은 계속해서 말했다. “형식상의 반환이 아니다. 나를 따르는 제후들은 부유군도로 보내겠다. 빈 땅에 누구를 새로운 제후로 임명하건 그것은 너의 문제다.” “…….” 황제는 침묵한 채 그저 방랑왕의 말을 듣기만 했다. 방랑왕은 그런 황제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 또한 부유군도로 떠나 그곳에서 남은 생을 마감하겠다.” “그 대가는?” 황제가 날이 선 음성으로 날카롭게 반문했다. 방랑왕은 잠시 뜸을 들인 후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두 가지를 포기하면 된다.” “그 두 가지라고 함은?” “하나는 네 머리 위의 제관.” 황제는 코웃음을 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방랑왕은 이어 말했다. “다른 하나는 이 도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크롬갈드.” 황제는 조소했다. “지금 내가 고대신의 심장을 움직이고 있는 게 보이지 않나? 이런 것을 시커먼 야욕을 가슴에 품은 네놈에게 다시 넘기라고?” 황제의 목소리엔 가벼운 분노가 묻어 있었다. 황제가 흥분하고 있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습. “내게 넘기라는 소리가 아니다.” 방랑왕이 소리 높여 말했다. 그러면서 방랑왕은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김성철을 가리켰다. “고대신의 심장이 잠든 이 라그란제라는 도시는 새로운 세계의회의 의장이자 한 명의 왕이 될 사람에게 어울리는 왕도라 할 만하겠지.” 방랑왕은 말하고 있었다. 김성철을 재앙을 요구하는 한 명의 왕으로, 그 영토로 라그란제를 줄 것을. 어느 당파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롯이 재앙의 해결을 위해 걸어 간 영웅적인 사내에게 위험한 도시의 감시와 관리는 맡기는 것은 대의명분이 있었고 어떤 의미로 보편적인 생각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고대신의 심장은 위험한 물건이다. 나에게나 너에게나. 오직 부수는 자만이 그것을 통제하고 관리할 자격이 있다 할 것이다.” 방랑왕은 낭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주장을 매조지 했다. 이제 바턴은 황제와 김성철에게 넘어갔다. 김성철은 한 명의 왕이 될 생각은 없었지만 저 위험한 고대신의 심장의 관리는 자신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제의 얼굴에 불안과 초조가 나타났다. 궁지에 몰리고 있음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 자는 용서할 수 없는 자다.” 황제가 갑자기 떨리는 목소리로 김성철에게 말했다. 공허한 메아리. 김성철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계속해서 말했다. “저 자가 종말교단의 교주라는 걸 알고 있나?” “방랑왕이?” “그렇다. 저 자가 세상의 멸망을 갈구하는 종말교단의 교주다!” 이에 방랑왕은 실소를 터뜨리며 불쑥 말했다. “추하군. 소환자. 근거는 마련하고 하는 소리인가?” “근거 따윈 필요 없다. 진실이 말하고 있으니까.” 그때 또 다른 천둥번개가 천지를 떨쳐 올렸다. 아래의 도심에서 상승기류가 묘한 소리를 내며 빗줄기를 말아 올리며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믿고 싶다면 믿는 건 자유다. 하지만 황제여. 조금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방랑왕이 조소했다. “알려진 사실부터 말하자면 종말교단은 바로 이곳 라그란제에서 발흥했고 제국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세를 확장했다.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던질 수밖에 없군. 도시 전체를 구역으로 나누어 철권통치를 하는 건 물론, 이단을 감시하는 호라산 교단과 뮤라 교단의 총본부가 있는 이 도시에서 어떻게 근거 없는 사이비 종교가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일까?” 방랑왕은 여유롭기까지 한 태도로 황제를 도리어 밀어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한 치의 미동도 없는 석상 같은 자세로 위엄 있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럴듯한 궤변을 하는데 크롬갈드여. 이 도시의 지하는 내 것이 아니잖아?” “지하엔 그저 소수의 구세병과 나의 종복 하나가 있을 뿐이다. 원숭이만도 못한 지능을 지닌 구세병들이 뭘 할 수 있을까? 그것들이 포교라도 할 수 있다면 모를까 현실은 신자와 먹이도 구분 못하는 것들이지. 놈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고대신의 심장을 보호하는 거니까.” 논쟁이 길어질 기미를 보인다. 김성철은 슬슬 답답함과 지루함을 느꼈다. 열세에 몰린 것은 확실히 황제였다. 그의 말을 근거 없었고 빈약했고 발버둥치는 인상을 줬다. 방랑왕은 그를 계속해서 공격했다. “논점을 흐리지 마라. 황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차대한 목표는 재앙의 해결 그 자체니까. 대답해라. 황제. 지금 너의 왕관을 기꺼이 반납할 것인지? 그리고 이 도시를 한 명의 왕에게 넘길 것인지?” 방랑왕은 황제를 점차 벼랑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김성철의 눈에도 보였다. 황제는 왕관을 포기할 생각도, 도시를 넘길 생각도 없다는 것을. 입을 꾹 다문 채 억지스런 고집을 피우는 황제의 모습에서 김성철은 전형적인 권력자들, 다인크래프트, 아르카나이트 같은 군왕과 심지어 마르틴 브레가스 같은 이기주의자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었다. ‘황제. 너는 어찌하여.’ 그때 멀리서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소름끼치는 형태로 벌판을 휩쓸고 지나가는 음산한 울림. 야만인의 뿔피리다. 김성철은 즉시 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야만인들이다. 3일 거리에 있다는 야만인의 군세가 하루 만에 그 먼 거리를 주파하고 제도 인근까지 진격해오고 있었다. 야만인의 군세를 본 방랑왕은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고대신의 심장의 고동을 듣고 몰려온 것이군. 놈들이 섬기는 가짜 신이 명령했겠지. 당장 이 도시를 멸하고 심장을 파괴하라고.” 이제 남은 시간은 없다. 지루한 이야기의 끝을 낼 시간이 왔다. 척. 김성철이 마침내 전면에 나섰다. ======================================= 103. 선택의 기로에 서서 (4) 그가 첫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그의 내면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자, 선택해라. 어느 쪽을 선택하건 희망은 없겠지만 그러나 지금 너는 선택을 해야 하는 도구다. ] 거역할 수 없는 음성. 분명 기이한 일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자기도 모르게 어느 순간 그러려니 하고 납득해버리는 목소리. 언제부터 이 음성을 인지한 것일까. 김성철은 순간 자신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세계의 적이 되었을 때? 신의 계단에 섰을 때? 악마왕과 칠영웅을 처치했을 때? 아니면 초월감각을 얻었을 때? 어느 쪽도 아니다. 무수한 과거의 잔영이 스쳐지나가는 와중에 김성철은 자신의 손바닥 위를 회전하던 강철의 수레바퀴를 떠올렸다. ‘강철의 혼? 아니면 높아진 의지력 때문인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그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됐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움직이는 가증스런 목소리를. 하지만 놀랍게도 그 모처럼 품은 의심도 곧 에탄올이 기화하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지금 생각해봐야 시간만 낭비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이끄는 어떤 의지가 있다는 것. 그리고 김성철은 그 의지에 대해 강한 반발심을 느낀다는 것. 김성철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 발 떨어져 상황을 정리했다. 죽어간 전사의 마지막 당부가 문득 뇌리 속에 떠올랐다. “…….” 세 명의 왕이 세상의 운명을 걸고 논하고 있는 자리 뒤편엔 초대받지 않은 또 다른 손님이 가슴을 졸인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개. 그녀는 이제는 믿기 어려운 과거의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라그란제의 대재앙. 그 뒤엔 황제와 세계의 적의 결탁이 있었다고 이 기록은 말하고 있어.’ 멸망을 바라는 자 황제. 멸망을 부르는 자 김성철. 둘의 결탁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아니나 다를까, 김성철은 황제를 향해 걸어갔다. 김성철은 곧 황제의 바로 앞에 섰다. 십 수 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하던 전우이자 친우가 비로소 서로를 마주볼 수 있게 됐다. 김성철의 올곧은 시선은 흔들리는 황제의 시선을 뚫어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친우라고 하나 황제는 김성철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그가 인정한 유일한 군주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된 것으로 보였다. 김성철보다 키도 크고 번쩍이는 갑주를 걸치고 제관까지 쓴 황제가 지금은 김성철보다 작은 존재처럼 보였다. 적어도 아무개는 그렇게 생각했다. 둘 사이엔 별 다른 말은 오가지 않았다. 어떠한 마법적인 교류도 없었다. 촌각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짧은 시간이 지나갔다. “그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군.” 김성철의 입가에 떠오른 건 소탈한 미소였다. “그때?” 황제가 멈칫하며 물었다. 이에 김성철은 뒤돌아서며 가벼워진 음성으로 답했다. “상상에 맡기지.” 김성철은 황제를 뒤로 하고 걸어가 황제와 방랑왕. 대립하는 양 축의 중간지점에 섰다. 그리고 말했다. “결정을 내리겠다.” 세상의 운명을 가르는 순간이 도래했다. 아무개는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윽고 김성철이 말했다. “결정을 하지 않는 것이 나의 결정이다.” 아무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결정을 하지 않겠다니. 이 무슨 언어도단인가. 이윽고 김성철이 말했다. “대신 세계의회의 의장, 아니 한 명의 왕으로써 명한다. 인간제국의 황제. 그리고 루테기네아 왕국의 왕. 둘은 당장의 반목을 끝내고 나의 군기 밑으로 들어와라.” 김성철은 힘 있는 손짓으로 북쪽을 가리켰다. 메마른 평야를 짓쳐들어오는 야만인들을. “결정은 저것들을 박살낸 이후에 내리겠다. 그리고 반론은 허용하지 않겠다. 하지만 원한다면 기꺼이 해라.” 김성철의 손에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날 적으로 돌리고 싶다면 말이지.” 김성철의 선택은 선택하지 않는 것. 우유부단이 아니다. 세계의 운명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결정이다. 어찌 그런 중대한 결정을 단편적인 정보와 감정의 흐름만으로 정할 수 있단 말인가. 잡음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은 납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해결해야 할 난관에 지나지 않는다. 일에는 순서가 있다. 지금은 당면한 위기에 힘을 합쳐 맞서야 할 때다. 어느 편을 드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그것이 김성철의 속내. [ 주제넘게 설치는군. 도구 따위가. ] 내면의 목소리가 저주를 담아 지껄이는 것을 들으며 김성철은 앞으로 걸어갔다. 자신을 기다리는 전장으로. 황제가 뒤로 물러나 궁궐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전투 준비를 하라. 지금부터 우리 인간제국의 전군은 세계의회의 의장을 도와 북쪽의 야만인을 상대할 것이다.” 황제가 김성철의 군기 밑으로 들어왔다. 남겨진 것은 방랑왕. “…….” 그의 얼굴은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투구로 인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개는 들을 수 있었다. 투구 안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한숨 소리를. 방랑왕의 뒤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넝마주이를 걸친 추악한 리치가 나타났다. “폐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에 방랑왕은 원래의 지치고 노곤한 음성으로 말했다. “구세병을 거느리고 저 자의 군기 아래로 들어가라. 나도 부유군도의 함대를 이끌고 합류하겠다.” “알겠습니다. 폐하.” 아쿤 간다르바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방랑왕 또한 김성철의 뒷모습을 한동안 응시하다 사라졌다. 먹구름에 뒤덮인 우울한 도시에서 오랜만에 우렁찬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름 안에 숨어 있던 제국의 함대가 오랜만에 그 위용을 드러냈다. 아무개는 허공궁궐 끝자락에 선 사내의 등을 응시했다. 그가 만들어 낸 것이다. 결코 융합될 수 없었던 인간들을 하나로 말이다. 비록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고 외부요인에 의한 것이긴 하나 그것을 이룩해낸 김성철은 실로 한 명의 왕에 걸맞은 존재라 할 것이다. 그 사내의 상의 주머니 안에선 미약한 움직임이 일었다. 베르텔기아다. “저기, 그때라는 건 언제를 말하는 거야?” 그녀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김성철은 플라이를 시전, 허공 궁궐의 아래로 낙하했다. “아? 그거? 언제였더라.” 허공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김성철은 머리를 긁적였다. 곧 그의 뇌리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과거의 풍경이 눈앞을 스치고 지났다. “그때였군. 모두가 쫄쫄 굶고 있던 반란군 시절, 놈이 허기를 참지 못하고 몰래 고구마 하나를 횡령했다 딱 걸렸을 때 그런 표정을 지었지.” “뭐어? 뭔가 대단하다 싶었더니 겨우 그런 거 였어?” 베르텔기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김성철이 뭔가 생각난 듯 눈을 번쩍뜨고 다시 말했다. “또 한 번 있다.” “언제? 허기를 참지 못하고 감자를 훔쳤을 때?” “아니.”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도시 앞에서 최후의 싸움을 준비하기 전, 황제 아니 윌리엄은 그런 얼굴을 했었지.” “흐음?” “놈은 거짓말을 잘 못하는 성격이거든.” “그래?” “나처럼 말이지.” “그건 아니다.” 기분 좋은 바람이 젖은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끼며 김성철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라그란제를 오랫동안 덮은 구름이 사라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라그란제를 적시던 비가 그쳤다. * 본진으로 돌아온 김성철은 즉시 전 병력을 소집해 라그란제로 나아가게 했다. 왕과 제후들의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동안 홀로 동 떨어져 문을 굳게 걸어 잠그던 인간제국이 반야만인 전선에 합류하다니. 한때 대륙을 지배하던 하늘의 패자, 제국 함대는 숱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막강한 전력을 갖춘 채 전선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뿐만 아니라 베일에 싸여 있던 방랑왕의 숨겨진 전력 또한 세계의회의 군기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기괴한 구세병의 모습은 수많은 사람들의 놀라움과 충격을 빚어냈다. 환상 속의 부유군도에서 온 원정 함대의 위용도 구세병 못지않았다. 제국 함대에 비해 숫자는 모자랄 지언정 알려지지 않은 신비로운 기술로 건조된 특유의 공선은 도도한 백조 같은 자태를 과시하며 동맹군의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갈가리 찢겼던 인류의 군세가 마침내 하나로 합치는 순간이었다. 아직 한 명의 왕은 탄생하지 않았지만 구시대의 인류들의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비록 일각에서는 인간제국에 관해서 여전히 회의적인 시각에서 비판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지만 황제는 자신이 최전선을 맡겠다고 자원함으로써 주위의 불신을 걷어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선 김성철은 인간들의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한 명의 왕을 만들어 낸다.’ 김성철은 단순히 전투 준비만을 한 건 아니었다. 그는 마커레이드를 통해 종말교단의 교주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드워프 왕국 뿐만 아니라 엘프 왕국, 고대 왕국 등 제국을 제외한 주요 국가에 종말교단의 사자가 방문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부왕을 대신에 엘프군의 총사령관으로 참석한 왕자는 솔직하게 그들이 종말교단과 거래를 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하지만 종말교단의 조건은 필연적으로 왕국에서 가장 뛰어나고 고결한 인재를 소모시키는 것이기에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고대왕국의 아르카나이트도 몇 번을 부정하다 결국 엘프 왕자와 비슷한 답변을 내놓았다. “이 나이가 되면 보이는 법이지. 도움을 빌미로 속이려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말이야.” 김성철은 종말교단에 사라사 제로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천공학파의 마법을 전수한 알투지우스 제로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완고한 자마저 종말교단에 붙었단 말인가. 대체 종말교단. 그들은 누구인가.’ 황제와 방랑왕은 서로가 종말교단의 교주라고 비난하고 있다. 진실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진실을 확인할 희망은 있었다. “슈넬메르커. 종말교단의 부교주는 고대왕국에서 멀지않은 변경에 숨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아르카나이트가 한 건 했다. 노회하고 의심 많은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종말교단을 처음부터 철저히 경계하면서도 속내를 비치지 않고 협력하는 모양새를 보이며 여러 가지 구체적인 정보를 얻어낸 모양이었다. 종말교단의 부교주 슈넬메르커. 그를 포획할 수 있다면 종말교단의 교주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황제와 방랑왕. 둘 중 누구를 선택할 지는 그 다음에 정하면 충분하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가올 전투를 준비했다. 야만인의 군세는 끝도 없이 몰려 왔다. 정찰병들은 끊임없이 야만인의 증원에 대한 보고를 올렸고 그때 마다 현황판에 적힌 야만인의 추정 수치는 가파르게 올라갔다. 야만인의 뿔피리가 라그란제의 성벽 위에 울려 퍼진지 3일 만에 야만인의 숫자는 삼만 명으로 불어났다. 이에 맞서는 인류 연합군의 숫자는 십만여 명. 막강한 야만인을 막기에 숫자는 다소 빈약하지만 숫자를 벌충할 전쟁 공선과 기동요새, 구세병 등의 전쟁 병기들이 힘의 균형을 가져다 올 것이다. 그리고 인간 측에겐 망치를 든 한 명의 전사가 있다. 선두에 포진한 인간제국의 공선 아래 김성철은 자신을 상징하는 팔 가라즈를 들고 우뚝 섰다. ‘이 싸움은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싸움이다.’ 무자비한 살육자인 야만인은 물과 기름과 같던 황제와 방랑왕을 같은 군기에 서게 할 정도로 심대한 위협이다. 김성철이 세계의 적이라면 야만인은 인류의 적이다. 그 야만인들은 지금 모든 전력을 긁어모아 인간제국의 심장부 라그란제를 치려하고 있다. 여기서 패배하면 모든 것은 의미가 없어진다. 인류를 패배시킨 야만인들은 거침없이 전세계로 뻗어나가 살아남은 자들에게 신의 철퇴를 가할 것이다.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적의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존재의 위치가 확인됐다. 지금까지 경험에 의하면 야만인들은 우두머리가 쓰러지면 급속도로 약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야만인의 전력 대부분이 모인 이곳에서 그 우두머리를 쓰러뜨릴 수 있다면 라그란제를 지키는 것은 물론 야만인 대부분을 섬멸할 기회가 올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인류는 구원 받으리라. “…….” 김성철은 전투 직전에 신에게 기도를 올리거나 행운을 비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오늘만큼은 기도하는 듯한 자세로 팔 가라즈를 쥔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김성철은 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나는 도구가 아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전장의 북소리를 들으며 김성철은 눈을 떴다. 전사의 몸에 신적인 힘이 흐르고 지나갔다. ======================================= 104. 신을 참칭하는 자 (1) [ 너는 그저 도구일 뿐이다. ] 허공궁궐에서 내려온 이후 부쩍 목소리가 들려오는 빈도가 늘었다. 김성철은 신경 쓰지 않았다. 별 볼 일 없는 환청 정도로 치부했다. 어차피 그 목소리는 기억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희미하게 변하며 곧 사라져버리니까. 대신 김성철은 전투 준비를 끝낸 야만인의 움직임에 주력했다. 야만인의 전열은 전체적으로 조악했다. 그들은 나름대로 인류를 흉내 내어 좌익, 중군, 우익의 형태를 갖추긴 했으나 김성철 같은 노련한 장수의 눈엔 그저 구색을 갖춘 것에 불과해 보였다. 적의 배치와 움직임을 보고 김성철은 생각했다. ‘적의 지휘관은 대규모 회전의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저런 강력한 군세를 지니고 있다면 작전이나 전략 같은 게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야만인 하나하나는 정예병 수십 명을 홀로 상대하고도 남을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 어중간한 상대는 오로지 힘만으로 찍어 눌렀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그들은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의 알량한 용력과 용기만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도 있다는 것을. 그때 전령 한 명이 김성철에게 다가와 다급히 보고했다. “방랑왕의 부대가 배치를 바꾸고 있습니다.” 김성철은 뒤를 돌아 우익을 맡은 방랑왕의 군세를 바라보았다. 구세병과 공선, 그리고 마법사로 이루어진 육전대로 이루어진 군단. 방랑왕의 군세는 당초 예상됐던 지점에서 한 발 벗어나 우측으로 이동했다. 덕분에 중군과 우익 사이엔 꽤나 큰 틈이 생겼다. “그냥 내버려둬도 괜찮겠습니까?” 참모 하나가 걱정스러워하며 김성철에게 아뢰었다. 김성철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방랑왕의 움직임에 높은 평가를 내렸다. ‘야만인의 무질서한 움직임을 보고 적장의 수준을 파악한 모양이군. 전열이 저래서야 조직적인 돌파나 포위는 불가능. 오히려 간극을 벌려 우군의 함대 포격 지점의 범위를 넓히려고 하는 안배겠지.’ 방랑왕의 군사적 재능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었다. 하지만 루테기네아 왕국 초기 대륙을 제패했던 역사의 중심에 저 크롬갈드가 서 있다고 가정하면 그의 군략은 범상한 것이 아닐 것이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야만인들은 김성철에게 사신을 보냈다. 학대당하고 고문당해 더 이상 인간의 몰골이라 할 수 없는 처참한 모습으로 전락한 사내였다. 입술이 뜯겨져 나가고 이가 모두 뽑힌 그는 역겨운 숨소리를 내며 알아듣기 어려운 발음으로 야만인의 요구사항을 말했다. “도시를 넘기고 군대를 해산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에게 진정한 고통이 뭔지 알려줄 것이다.” 인간제국의 장교들이 그 사신의 끔찍한 몰골을 보고 이쪽에 귀순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그 사신은 그렇게 학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야만인의 진영에 돌아가려고 했다. 그는 멀찌감치 서서 그를 바라보는 김성철을 힐끗 쳐다보며 새는 발음으로 말했다. “저 야만인들은 신의 선택을 받은 종족이다. 너희들은 저들을 거스를 수 없다. 따라서 너희들 편에 붙어봐야 비참한 죽음을 당할 것이고 그럴 바에 차라리 야만인의 개로 살아가겠다.” 사신은 기어코 야만인의 진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야만인들은 그들에게 돌아온 사신을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산 채로 갈기갈기 찢어 튀어 나온 내장의 형태를 점을 치는 용도로 사용했다. 야만인의 진중에서 열광적인 함성이 일어났다. 내장으로 친 점괘가 꽤나 좋았던 모양이다. 섬뜩한 뿔피리가 야만인의 진중에서 울려 퍼졌다. 공격 신호다. 야만인의 제1파가 움직였다. 처음엔 슬금슬금 걷던 그들은 이윽고 구보를 시작했고 그 다음엔 마치 성난 짐승처럼 질주했다. 수천 개에 달하는 야만인의 발길질은 모래폭풍을 연상할 정도의 거대한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이에 맞서 최전열에 배치된 인간제국의 공선들이 가공할 마법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고 고막이 터져나갈 정도의 폭발이 지면을 뒤덮었다. 기세 좋게 달려오던 수많은 야만인들은 무시하던 인간들의 공격에 나동그라지고 불타 죽었다. 왜 제국의 함대가 한 때 대륙 최강의 무력집단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지면에 선 김성철은 제국의 함대의 적절한 포격과 화력집중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 황제 녀석의 감은 죽지 않았군.’ 제국 함대의 효율적이고 치명적인 폭격은 야만인의 제1파를 빈사상태로 만들었고 그들이 수비 방벽에 이르기도 전에 돈좌시켜 버렸다. 목책과 토사로 굳게 쌓아올린 보루에 도착한 야만인은 소수였고 그 마저도 반쯤 넋이 빠진 상태로 수비병의 반격을 받아 차례차례 사냥됐다. 상대적으로 압박을 덜 받는다고 하나, 방랑왕이 맡은 우익도 가볍게 야만인의 첫 공격을 분쇄했다. 야만인들은 방랑왕의 생각대로 중군과 우익 사이의 간극을 활용하지 못하고 그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가 부유군도 함대의 일제포격 속에서 산화했다. 서전이라 하나 압도적인 승리다. ‘흐름이 좋군. 이대로만 흘러간다면 굳이 내가 나설 필요도 없겠지.’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먼 하늘 위에서 맴돌고 있는 비룡기사들을 응시했다. 공중 정찰병이다. 그들은 지면의 마법사와 실시간으로 교신하며 야만인의 우두머리의 위치를 찾아내고 있다. 우두머리의 위치가 특정되면 김성철은 웅크리고 있는 전군을 이끌고 반공에 나서 단번에 우두머리를 제압할 것이다. 한편 제1파가 일으킨 먼지구름 속에서 두 번째의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제2파가 온다. ‘다음엔 어떻게 나올 건가. 야만인들.’ 김성철은 매서운 눈초리로 먼지구름 속을 노려보았다. 쉬익-. 무언가가 가파른 속도로 먼지구름 밖으로 튀어 나왔다. 김성철은 순간적으로 그것이 글자 그대로의 야만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알 수 없는 동력이 살아 있는 야만인을 포환처럼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려 보낸 것이다. 가공할 가속도로 먼지구름을 뚫고 상승한 야만인들은 제국 함대를 내려다 볼 정도로 상승했다가 이윽고 공중에서 자세를 잡고 함대의 갑판을 향해 하강했다. “으아아아아아!” 몇 명의 야만인이 갑판에 착지 못하고 까마득한 아래로 곤두박질 쳤지만 상당수의 야만인 전사들이 제국 공선의 갑판을 박살내며 착륙했다. 인간제국의 승무원들의 눈에 공포심이 떠올랐다. “배나구! 이노!” 야만인들은 히죽 웃으며 자신들의 동료를 무참하게 살해했던 공선의 승무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싸클첸쥐!” 이윽고 제국 공선 하나가 불에 탄 채 추락했다. 먼지 구름 속에선 속속 야만인이 포환처럼 튀어 오르며 하늘로 솟아 다른 제국의 공선을 노렸다. 김성철은 공중정찰대에게 대체 야만인이 무슨 수단으로 마법도 없이 저렇게 튀어 오르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곧 대답이 나왔다. “투석기입니다. 야만인들이 원시적인 투석기를 이용해 그들 자신을 쏘아올리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야만인은 절대적인 기술의 열세에 놓인 상태에서 그들이 지닌 자산, 압도 적인 능력치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견 코믹해보여도 야만인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몇 척의 공선이 야만인의 강습으로 인해 포기되거나 폭발을 일으키며 지면으로 추락했다. 곧 제국함대로부터 전갈이 날아왔다. [ 야만인의 공중강습으로 인해 함대의 위치를 보다 안전한 위치로 변경예정. 지원 포격의 약화가 예상됨. 귀군의 건투를 기원. ] 전갈을 받아든 김성철은 순간적으로 그것이 황제 본인이 직접 써서 보낸 것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그 와중에 김성철에서 멀지않은 곳에 공중에서 방향을 잘못 잡은 야만인 하나가 곤두박질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야만인은 즉사했지만 전체적인 공세는 성공적이다. 전진 배치된 막강한 공중포대인 제국 함대에 타격을 입혔고 그들의 위치를 방어적인 위치로 배치하게끔 강요했다. 제1파가 일으킨 먼지구름이 걷히면서 김성철은 야만인의 다음 움직임을 지켜볼수 있었다. 병사들 사이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는 분명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마수들이 야만인의 진중에 나타나 있었다. 이계엔 수많은 마수들이 있지만 야만인들이 거느린 것은 김성철의 풍부한 경험과 넓은 견식으로도 생소한 것들이었다. 의문 속에서 그의 초월감각이 반응했다. [ 신수(神獸). ] 김성철의 동공이 가볍게 흔들렸다. ‘신수라고?’ “끄뢰에에에에에!” 야만인의 제3파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괴수들의 포효와 함께 시작됐다. 공중정찰대로부터 다급한 전갈이 속속 이어졌다. “야만인들이 이상한 의식으로 괴수들을 불러내고 있습니다.” “후방으로부터 전언! 새로운 야만인의 지원군 다수 출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그 숫자가... 말도 안 됩니다!” “야만인의 중군에서 야만인들이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는 중. 의도는 불명.” 야만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후 새롭게 증원되는 야만인의 추가 병력의 규모를 전해들은 김성철은 적장이 무능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생각을 취소했다. 전술 면에선 분명 모자람이 있으나 큰 그림을 그리는 능력은 인간에게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이상이다. ‘숫자를 속인 거군.’ 후방에서만 3만 명으로 추산되는 새로운 병력이 오고 있다. 지금 벌판을 차지한 야만인의 전 병력에 가까운 숫자다. 그 많은 숫자가 땅에서 솟은 건 아닐 것이다. 필경 하늘을 장악한 구 인류의 정찰대의 눈을 피해 숨어 있다고 적절한 기회를 맞아 숨겨진 전력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의 숫자를 오판한 구인류로 하여금 결전을 유도하기 위해. 김성철이 야만인을 일거에 섬멸하겠다고 생각한 것처럼 야만인의 수장 또한 걸리적거리는 구인류의 저항을 단 번에 뿌리 뽑으려고 하고 있다. 김성철은 하늘로 날아올라 까마득한 지평선 너머에서 달려오고 있는 적의 지원군을 노려보았다. ‘저 속도라면 대략 2시간 후면 본대와 합류하겠군.’ 그전에 끝내야 한다. 두 개의 격류가 하나로 합쳐져 모든 것을 쓸어버리기 전에. 김성철은 신수를 앞세우고 진군하는 제3파를 노려보며 정찰대를 채근했다. “적의 수장의 위치 정보는 아직인가?” 제국함대의 포성이 울려 퍼지며 전선에 몇 개의 불기둥과 폭발을 일으켰다. 제국 함대의 포격의 위력은 여전히 강력했지만 고도를 높이고 후퇴 배치해 그정밀도는 예전만 못했다. 신수 몇 마리와 야만인이 쓰러지긴 했지만 건재한 전력을 온전한 채 이쪽을 향해 육박하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 김성철에게 천금과 같은 희소식이 들려왔다. “적의 우두머리의 위치가 특정되었습니다. 우두머리를 발견한 비룡기사가 곧 발광신호를 보낼 것입니다.” 비룡기사 하나가 하늘 위에서 녹색 빛이 나는 돌을 손에 들고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 있었다. 김성철이 아는 얼굴이다. “응? 저 여자. 그 여자 아니야? 그 먹는 거 가지고 이름을 지은... 조금 모자라는 언니.” 베르텔기아도 그 얼굴이 낯익은지 몸을 흔들며 말했다. “스튜였나. 아마도 스튜였던 것 같다. 여자 이름이 스테이크면 뭔가 이상하니 말이다.” “스튜나 스테이크나!” 은자의 탑에서 만났던 그 맹한 여자 비룡기사도 이 전투에 참전한 모양이다. 약간의 인연이 있는 제국 공선의 함장도 이 전투에 참전했으리라. 아는 자와 함께 싸운다는 것은 언제나 힘을 배가 시킨다. 김성철은 회색의 제국 공선의 한 가운데에 유독 도드라진 존재감을 과시하는 붉은 공선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기함 실피드다. “마라키아에게 명해라. 내가 전진할 테니 길을 뚫으라고.” 김성철의 명은 실피드에 함교에 머무르고 있는 마라키아에게 즉각적으로 전해졌다. “크크크. 드디어 하등한 인간들에게 내 진정한 실력을 보여줄 시간이군.” 마라키아는 갑판에 서서 조인족에게 전해 내려오는 은밀하고도 강력한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김성철은 몰려오는 수천 명의 야만인과 수십 마리의 신수에 맞서 앞으로 걸어갔다. 어떤 후속 병력도 없이 오직 단기로. “끄뢰에에에에!” 타조처럼 긴 다리에 거대한 두상과 부리를 지닌 기괴한 형태의 신수들이 김성철을 발견하고 날지 못하는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김성철을 향해 질주했다. 하지만 그 괴물들이 김성철에 미처 닿기도 전에 붉은 공선에서 날아온 충격파가 신수를 덮쳐 그대로 으깨버렸다. “후후후. 별 거 아니군. 저 날지 못하는 새는. 역시 날개 달린 것 중에 가장 우월한 것은 우리 나하크다!” 오랜만에 검은 깃털을 지닌 날개를 활짝 펼친 마라키아가 거만하게 웃으며 연기가 피어오르는 지팡이를 핑그르르 돌렸다. 언제부터인가 실피드의 승무원이 되어버린 이단심문관 타이곤 보스보로트는 시원한 일격에 쾌재를 부르며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바로 그거야! 펭귄! 저주 받아 마땅할 재앙의 자식들. 보기 좋게 당했군!” 김성철은 마라키아의 지원 마법 포격을 받으며 밀고 들어오는 제3파의 전열을 돌파하며 야만인의 방어선에 도달했다. 쉭쉭-. 한 발 한 발에 치명적인 힘이 담긴 화살 세례가 그를 열렬히 맞이했다. 팔 가라즈가 풍차처럼 회전하기 시작하며 화살을 쳐냈다. 왼손에 낀 승천자의 손으로는 그의 심장과 심장에 가장 가까이 머무른 베르텔기아를 보호했다. “으으. 왠지 느낌이 안 좋은데?” 베르텔기아가 몸을 가볍게 떨며 말했다. 이제는 적응될 만하기도 한 데 상대가 상대이다보니 베르텔기아도 불안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전부 다 잘 될 테니.” 김성철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때 그의 내면에서 알 수 없는 음성이 울려 퍼졌다. [ 그래. 앞으로 가라. 전부 다 잘 될 것이니. ] [ 예정된 운명이 널 기다린다. ] [ 너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해라. 스스로 인간이길 저버린 도구여. ] 의문의 목소리는 명백히 김성철을 조롱하고 있었다. ======================================= 104. 신을 참칭하는 자 (2) “갑자기 왜 그래?”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이상을 발견하고 묻는다. “심장 소리가 갑자기 이상해졌어.” “아무 일도 아니다.” 잠시 혼미했던 정신을 추스르며 김성철은 부리를 들이대는 신수를 향해 팔 가라즈를 휘둘렀다. 퍽! 단 일격에 신수의 부리가 골통과 함께 박살이 나며 야만인의 대오를 향해 날아가 야만인들을 깔아뭉갰다. “저기예요! 저기!” 하늘 위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룡기사 스튜가 8자 형태로 날며 발광석으로 적의 수장의 위치를 간절히 알리고 있었다. 곧 그녀의 마음은 김성철에게 전해졌다. 김성철은 볼 수 있었다. 숲처럼 늘어선 야만인의 창 너머로 하늘거리는 화려한 알지 못하는 새의 깃털로 치장한 내장이 칭칭 휘감깃 불경한 깃발을. 아마도 저 쪽에 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있으리라. 일점 돌파다. 김성철은 달려드는 신수와 야만인을 피해 측면으로 이동하며 스튜가 표시하는 야만인의 우두머리와의 위치를 눈으로 가늠했다. 그동안 그의 코트 안쪽에는 다중영창이 시전 되고 있었다. 여덟 개의 영혼석이 일제히 스타라이트를 영창하기 시작했다. 영혼석들은 오랜만에 원시의 빛을 영창한다는 뜻을 감정으로 전해왔다. “끄뢰에에에!” 재빠른 신수 한 마리가 김성철의 뒤를 따라 잡으며 성인 남성 크기의 부리로 김성철을 쪼아왔다. 그와 동시에 시간차를 두고 또 다른 신수가 김성철의 앞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마치 미리 합을 짠 것처럼 정교한 협격. 하지만 신수는 신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만큼 강하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내면의 목소리가 송곳처럼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 그건 최하급의 신수다. 전투용이 아니라 사냥용이지. ] “…….” 김성철은 뒤에서 공격해오는 신수의 부리를 팔 가라즈로 후려치는 한편 간발의 차로 승천자의 손으로 반대편에서 쪼아오는 날카로운 부리를 받아냈다. 신수 한 마리가 피를 내뿜으며 쓰러지는 찰나의 순간 김성철은 양 발의 신적인 힘을 흘리며 태산처럼 대지를 디디고 선 채 그대로 붙잡은 신수의 부리를 대가리 째 지면에 처박았다. 신수가 대가리를 꿈틀거리려는 순간 김성철의 군홧발이 신수의 대가리를 짓밟으며 박살냈다. “브린스 아르놀트!” “브린스 아르놀트! 젠카!” 신수의 협격을 가볍게 박살 낸 김성철의 무용을 보고 야만인들은 알아들을 수없는 말을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또 다른 신수가 자신을 좇는 걸 곁눈질로 보며 시종일관 놓치지 않았던 야만인의 우두머리의 지점을 눈에 담았다. ‘아직인가.’ 조금만 더라고 영혼석들이 감정으로 전했다. 스타라이트의 영창은 제법 긴 편이다. 짧게 짧게 끊어 쓰던 체인라이트닝이 그리워지는 순간.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일점돌파를 가능케 하는 스타라이트 뿐이다. 김성철은 계속해서 측면으로 돌아 야만인과 신수를 끌고 다니며 시간을 벌었다. 곧 영혼석들이 스타라이트의 준비가 다 됐다고 알려왔다. 그는 구름처럼 몰려 자신을 따라다니는 야만인의 무리와 그 너머에 자리 잡은 야만인의 수장의 위치를 가늠, 최대한 많은 야만인을 사선에 넣기 위해 역방향으로 이동했다. ‘지금이다.’ 김성철의 눈이 번득였다. 김성철이 코트 자락을 펄럭이자 다이아몬드 빛으로 빛나는 궁극 요리인의 브로치 아래 꽃처럼 활짝 만개한 마법진을 떠올린 여덟 개의 영혼석이 드러났다.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라이즈 하이메르의 검은 지팡이를 꺼내며 사로에 놓은 무수한 적들을 노려보며 원시의 빛을 방출했다. 야만인들의 눈엔 김성철이 어떤 영창도 하지 않고 강력한 마법을 쓰는 것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무수한 야만인들이 예상하지 못한 고화력의 마법에 노출되어 빛 속에 삼켜졌다. 김성철은 두 발에 신적인 힘을 실으며 스타라이트가 만들어 낸 일직선의 길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또 다른 야만인들이 그의 앞에 나타나 앞길을 막았다. ‘아직 7발 남았다.’ 거칠 것이 없다. 또 다른 빛의 기둥이 야만인의 급조한 방벽에 구멍을 냈다. 신수 몇 마리가 김성철의 뒤를 바짝 추격하며 공격을 가해보려 하지만 때마침 마라키아의 마법 포격 지원이 신수들을 지면에 처박히게 했다. “끄뢰에에에에!” 분노한 신수의 포효가 울려 퍼지는 그 시점 또 하나의 빛이 기둥이 작렬하며 야만인의 전열에 구멍을 뚫었다. 상공에 머문 공선에서 내려다 본 그 모습은 그야말로 경이 그 자체였다. 단 한 명이 뜨거운 칼로 버터를 가르듯 전선을 분단하고 있었다. “저런 녀석을 적으로 돌리지 않은 내 판단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녀석은 없겠지.” 인간제국의 황제는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이 섞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 루테기네아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시종일관 전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김성철을 지켜봤다. 크롬갈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지금 김성철의 활약을 얼마나 주의 깊게 보는지 알 수 있으리라. 크롬갈드 옆에 선 무수한 부하 중 한 명 중엔 라이즈 하이메르 또한 섞여 있었다. 더 이상 아퀴로아의 이름을 댈 필요가 없는 그녀는 가면을 벗은 채 맨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자신의 지팡이를 들고 싸우는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그녀의 심장에 피어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한편 하늘을 맴도는 스튜 같은 평범한 자에게 김성철의 거침없는 진격은 재앙이라는 먹구름 속에 비치는 한 줄기 희망이었다. 절멸의 저주로부터 시작된 재앙에 점점 짓눌려 어느새 재앙 그 자체의 질식할 것 같은 공기에 익숙해졌던 그 답답함을 한 전사가 행동으로 시원하게 타파하고 있는 것이다. 김성철. 그는 인류의 빛이오, 희망이다. “앞으로 두 발!” 베르텔기아가 남은 스타라이트의 잔량을 밝은 목소리로 알려줬다. “두 발까진 필요 없지.” 김성철은 남은 두 개의 영혼석을 통해 일제히 스타라이트를 발사하며 마지막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적의 우두머리가 있는 지점까지 진출했다. 그곳엔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포로의 시체와 피로 그려진 역겨운 마법진. 그것은 마치 악마들의 의식을 방불케 했다. ‘이것이 공중정찰병이 보고한 그 마법진인가.’ 김성철은 마법진 중앙에 선 깃털로 장식된 투구를 걸치고 거대한 순록 위에 올라 탄 근육질의 전사를 보았다. 범상치 않은 기운이 그 전사에게 느껴진다. 아마도 저 자가 우두머리이리라. 단 번에 끝내리라.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쥔 손에 힘을 더하고 야만인의 족장을 향해 돌진했다. 그런데 김성철을 보자마자 야만인의 족장은 기이한 주문을 외웠다. 그와 동시에 야만인의 진영 중앙에 자리 잡은 거대한 피의 마법진에서 극도로 불경한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위험함을 느끼고 뒤로 물러섰다. 아련한 노래 소리가 귀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야만인의 노래 소리다. 야만인 여성이 아이들을 이끌고 나타나더니 처량한 곡조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들의 아이들의 몸에 단검을 꽂았다. 김성철의 미간이 깊은 주름이 팼다. ‘뭐, 저런 짓을?!’ 자신의 아이를 해치워 피를 흩뿌린 여성들은 다음엔 자신의 목에 칼을 찔러 넣어 그 피가 부정한 기운을 뿜어내는 마법진 안에 흐르게 했다. 갑작스런 인신공양은 찰나의 순간에 수백 명의 야만인과 그들의 아이를 집어삼켰다. 혼란과 충격 속에서 내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저것이 이른바, 신을 참칭하는 작자의 방식이지. ] 마법진 사이에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미에 의해 죽임당한 아기의 울음소리와 누군가의 헛고함이 섞인 이중창은 전장의 모든 이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중심에선 김성철은 보았다. 마법진 중앙에서 표범의 두상을 한 근육질의 아신이 소환되는 것을. 종말교단의 아신화가 아니다. 시드미아 때처럼 아신 그 자체를 불러내는 것이다. 초월감각이 반응했다. [ 불멸자 최속(最速)의 부루탈러스 ] [ 키레의 어부, 놈팽이, 운 좋은 놈 ] 김성철의 가슴 부분이 아려온다. 틀림없다. 그때 그 놈이다. 암살자 카즈 알메이라의 몸을 빌려 자신과 베르텔기아를 꿰뚫었던 바로 그 아신이 현실에 강림한 것이다. “음? 이게 누구야? 얼치기 인간들의 부름에 응했을 때 만난 그 얼치기 아닌가.” 표범의 머리를 지닌 불멸자가 히죽 웃으며 조롱조로 말했다. “네 놈이 신의 도구였다니. 그럴 줄 알았다면 그때 죽여 버릴걸 그랬어.” 불멸자 부루탈러스는 맹수의 이빨을 드러내며 한 자루의 창을 꺼냈다. 아무런 장식도 세공도 들어가지 않은 곧게 뻗은 금속의 창. 아신은 그 창끝을 김성철에게 겨누었다. “시드미아도 참 재수도 없지. 이런 하찮은 인간에게 죽다니. 하지만 신의 도구여! 넌 네 자신이 죽음을 깨닫기도 전에 넌 죽어 있을 것이다.” 불멸자는 싸우기도 전에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김성철은 볼 수 있었다. 표범의 두상 너머에서 번쩍이는 잔혹한 눈동자에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교만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김성철은 가벼운 분노를 느끼며 거대한 아신을 향해 망치를 들어올렸다. 그는 생각했다. 카즈 알메이라의 단검이 자신을 찔러오던 속도를. 그때는 반응하기도 전에 찔러 들어왔었다. 그리고 그 칼날은 베르텔기아를 관통하고 자신의 심장 지근거리까지 후벼 파냈다. 그때의 감각을 복기하며 김성철은 아신을 노려보았다. 생각할 것도 없다. 놈은 같은 방법으로 공격해올 것이다. 자신의 기량과 정확도 그리고 속도를 믿고. 노리는 것은 심장과 베르텔기아. ‘두 번은 당하지 않겠다.’ 김성철은 자신의 심장을 감싸듯이 지키고 있는 베르텔기아의 무게를 느끼며 아신에게 모든 신경을 기울였다. 아신이 히죽 웃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전과 같다. 아신의 속도는 반응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아신이 노리는 곳을 안다면, 대처할 수 있다면 어렵지 않게 대응할 수 있다. 승천자의 손이 그의 심장 앞에 마치 무언가를 받아내는 자세를 취했다. 푹. 눈으로 반응하기 전에 승천자의 손을 낀 왼손에 충격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왼손엔 신적인 힘이 흐르면서 손을 스쳐지나가는 광속의 창을 움켜잡았다. 기기기긱- 승천자의 손과 창대 사이에서 마찰이 일며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김성철의 힘은 속도만을 숭상하는 아신보다 한 차원 높다. 부루탈러스의 창날은 김성철의 심장은 물론 베르텔기아에 닿지 못했다. 그 직전에서 승천자의 손에 붙잡혀 버둥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부루탈러스의 눈에 서려 있던 교만함이 비로소 사라졌다.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표범의 눈 안에 감출 수 없는 분노가 빈 자리를 차지했다. 표범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표범의 입안엔 송곳니가 있다!” 부루탈러스가 창대를 잡은 채 앞으로 전진해 김성철을 물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김성철은 몸을 옆으로 틀면서 창대를 잡은 승천자의 손을 안쪽으로 힘껏 끌어당겼다. 으르렁거리던 불멸자는 창대에 이끌려 김성철에게 당겨져 왔다. 균형이 일순 무너진 상황 속에서도 불멸자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김성철을 깨물려고 했다. 그러나 이빨이 김성철의 목에 닿기 전에 둔탁한 은빛의 망치가 불멸자의 두상을 후려쳤다. 퍽! “끄억!” 드러낸 날카로운 이빨이 무자비한 망치에 일격에 맞아 마치 고드름이 박살나듯 산산조각 났다. 김성철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불멸자의 텅 빈 입안을 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젠 더 이상 없군.” 이빨을 잃은 채 쓰러진 불멸자를 향해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높이 들어올렸다. “그.. 그만! 그만 둬!” 불멸자는 꼴사납게도 김성철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태세전환만큼은 최속이라 능히 칭할 수 있으리라.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망치를 내려쳐 사사로운 복수에 종지부를 맺었다. 처참하게 으깨지고 박살난 불멸자의 시신을 한 발로 밟고 김성철은 그 너머에서 두려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야만인의 우두머리를 노려보았다. “이제는 네 차례다.” 그때였다. [ 아니, 내 차례지. ]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김성철은 떠올렸다. 자신의 심장에 박힌 맹약의 십자가의 형상을. 다음 순간, 누구도 예상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전장에서 떨어진 고대신의 심장이 한 차례 박동했다. “뭐냐? 이것은?” “누가 심장을 작동시켰나?” “아무도 시키지 않았어. 마력 파이프도 봉인된 상태인데?” 라그란제의 지하, 구시가지에 숨겨진 고대신의 심장을 관리하는 제국의 마법사와 기술자들은 경악한 채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약동하는 심장의 박동을 보았다. 심장의 고동은 점점 빨라져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그것처럼 뛰기 시작하며 성밖에 야만인이 피로 그린 거대한 마법진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을 한 차례 의심했다. 모든 이들이 같은 꿈을 꾸다 깨어난 것과 같은 기이한 체험을 했다. 그것은 경계선의 붕괴를 의미한다. 현실과 초월세계의 경계가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김성철은 볼 수 있었다. 고대신의 심장이 고동 속에서 마법진 너머,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가 이 세계에 현현하려고 하는 것을. 찬란하고 영광스런 빛이 전장을 뒤덮었다. 그 빛을 본 모든 이들은 싸움을 멈추고 그저 멍한 눈으로 광휘에 휩싸인 어떤 존재를 보았다. 김성철의 초월감각이 반응했다. [ 질서신 ] 김성철은 심장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저릿함을 느끼며 무릎 꿇었다. 격통 속에서 김성철은 보았다. 질서신이라는 문구가 모래처럼 흩어지며 또 다른 이름이 나타나는 것을. [ 아니, 신살자(神殺者) 엔케아두사 ] 희미한 의식 속에서 잔혹한 비웃음이 들려왔다. ======================================= 104. 신을 참칭하는 자 (3)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신이 다른 세계에서 건너와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누구보다 인간의 가능성을 믿었던 그는 자신이 만들게 될 새로운 세상에서 모든 이들이 각자의 노력과 재능에 따라 그 꿈을 펼치며 자유롭게 살 수 있기를 바랐다. 어떠한 계급도 차별도 구분도 없는 그 세계엔 원래 주어진 이름이 있었다. 신을 참칭한 자들이 그 이름을 지워버리기 전 까지는. [ 제 꾀에 걸려들었군. 알레옥고스. 내가 너의 파편을 아무 대책 없이 하계에 떨어지는 걸 방관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 또한 나의 설계에 불과하다. ] 질서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말했다. 그의 말은 그 자체로 복음이었다. 말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았다. 목소리에 깃든 성스러운, 거룩함, 그리고 경이로움은 모든 필멸자로 하여금 저 하늘의 천정에 닿은 거대한 형상이 신의 형상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질서신의 신자들이 먼저 무릎을 꿇었다. 질서신을 모시는 사제, 타이곤 보스보로트와 그의 신관들은 앞 다투어 갑판으로 달려 나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형상을 향해 무릎을 꿇고 그의 현현을 축복했다. 다음은 평범한 병사들이 질서신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이유는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성스러운 거대함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분위기에 휩쓸려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드라고만 같은 골수 반골은 신의 형상을 보고도 끝까지 꼿꼿이 서 있었지만 다른 왕들은 기꺼이 신의 출현에 저마다의 경의를 표했다. 다음은 라그란제의 시민들이었다. 돈 없는 시민은 성벽 위에서, 상위 구역에 살고 있는 부자들은 지대가 높은 자신의 집에서 멀리감치 떨어진 전장 한 가운데 나타난 거대한 성스러운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메마른 구름이 자욱하게 덮여 나가는 가운데 신의 형상이 있는 곳에만 모로 세운 듯한 빛줄기가 비치고 있었고 찬란한 빛 너머로 순진무구한 새떼가 무리지어 동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신이다. 질서신께서 나타났다!”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질서신께서 마침내 이 세상에 왕림하신 것이다!” 호라산 교단의 사제들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그 들뜬 목소리를 들은 대중들은 열광했다. 기록되지 않은 최악의 재앙인 야만인이 도시 앞까지 육박해 최후의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그들이 믿는 신이 몸소 나타났다. 이것이 구원의 징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오직 단 한 명, 클라리스 아삼만은 신의 형상을 보고 몸을 가볍게 떨었다. “아.. 아니야. 저건.” 그녀는 신자가 아니다. 오히려 신과 운명을 저주하는 무신론자다. 따라서 보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몇 번이고 경험한 대재앙이 그녀로 하여금 어떤 감을 준지도 모른다. “저건... 우리를 구하러 온 게 아니야...!” 그녀는 부리나케 달려 나가 자신의 저택으로 뛰어갔다. “할아범! 모든 돈과 보석을 챙겨! 당장 여기를 떠야 해!” “아니, 클라리스. 또 왜 그러냐? 이 집에 들어오려고 쓴 돈이 얼만데!” 쿠르트 아삼은 손녀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눈치였다. “난 더 이상 도망 다니기 싫구나.” 쿠르트 아삼은 안락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할아범!” 클라리스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쿠르트 아삼은 돌아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후에 그의 입에 떠오른 것은 자족적인 미소였다. “어차피 죽는다면, 이런 곳에서 죽겠다. 언제 다시 한 번 이런 집에서 살아보겠냐?” 쿠르트 아삼은 클라리스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파란 사파이어를 가공해 만든 반짝이는 큐브였다. 큐브는 손에서 손으로 넘어갔다. “이게 그 소문의 부유군도행 표야.” “할아범….” “어렵게 구한 거야.” 쿠르트 아삼의 주름진 손이 클라리스의 매끈한 손을 감쌌다. 그런데 표는 한 장뿐이다. 클라리스가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할아범 껀 없어?” “부유군도에선 나 같은 노인은 받지 않는다더군. 젊고 아름다운 사람만 갈 수 있는 모양이야.” 쿠르트 아삼은 그렇게 말한 후 손녀를 향해 넉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클라리스의 신형이 가볍게 떨리는 그 순간이었다. 바깥에서 절규에 가까운 한탄이 터져 나왔다. 성벽 위의 사람들이 경악에 가득 찬 눈으로 질서신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보고 놀란 것들은 야만인의 행동이다. 야만인들이 질서신 앞에 일제히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하고 있었다. 그것은 의미한다. 질서신은 인류만의 수호신이 아니라는 것을. 인간들의 부름엔 답하지 않았던 질서신은 그러나, 야만인들의 숭배엔 움직임을 보였다. 손이라기보다는 성채라고 불러 마땅할 거대한 것이 흔들거리며 야만인의 숭배에 보답했다. 그 짧은 장면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희망이라는 녀석을 산산이 조각냈다. [ 한 명의 왕. 그 쉬운 시련조차 극복 못하는 것들이 감히 누구를 의지하려 드느냐? 이 짐승 같은 것들도 그들의 운명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사익과 당파를 버리고 하나로 뭉치는데. 부끄러운 줄 알아라. ] 신이 말했다. 그 음성은 전장은 물론 라그란제의 성벽 너머까지 또렷하게 들려왔다. 질서신은 아래를 보았다. 까마득한 아래 개미처럼 작은 야만인들이 모두 엎드리고 있는 와중, 홀로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쳐든 한 사내가 있었다. [ 네가 신의 도구구나. 과연 평범한 물건은 아닌 모양이구나. 아무리 부루탈러스가 하찮은 건달모리배 출신이라 하나 불멸자는 불멸자. 그 녀석을 힘도 들이지 않고 살해할 줄이야. ] 이제 질서신의 목소리는 오직 김성철에게만 들려오고 있었다. 목소리 자체에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서려있다. 김성철은 그 음성이 어딘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틀림없다. 이 목소리는....’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내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보아라. 저 신을 참칭한 괴물을. 저 놈이 신을 배반하고 모두에게 공평히 주어진 이 세상을 사유화 한, 진정한 세계의 적이다. ] 같지만 않지만 동일한 느낌이라는 것을 김성철은 알 수 있었다. 그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질서신과 동급의 존재의 것이었던 것이다. 순간 김성철의 의식 속에 조각조각 파편만 남은 신의 계단 앞에서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대체, 난 그때 무슨 짓을 한 것이지?’ 떠올 릴 수 없다. 도구라는 단어만이 머릿속을 맴돈다. 무심코 김성철의 뇌리 속에 메마른 음성이 울려 퍼졌다. [ 뭐든 되겠소. 도구든 무엇이든. 뿌리 깊은 무력감을 종식시킬 수만 있다면. ] 기억 속에 없었던 그 목소리는 바로 자신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기억할 수 있다. 계단 너머 자리 잡고 있던 진정한 신의 모습. 그 옆에 서 있던 신을 모시는 자. 그리고 그들 앞에 무릎 꿇은 지친 남자. 김성철의 눈동자가 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절망이 물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나…나는 대체…?” 그 순간, 김성철은 현실로 붙들어 맨 것은 베르텔기아였다. “뭐하는 거야! 정신 차려!” 베르텔기아는 필사적으로 몸을 흔드는 것도 모자라 책 모서리로 그를 쿡쿡 찌르면서까지 그의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했다. “정신 차리라고! 적 앞에서 뭘 하는 거야!” 모두가 무릎 꿇고 있는 질서신 앞에서도 베르텔기아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베르텔기아의 필사적인 노력 덕분에 김성철은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잠시 헛된 망상을 펼친 모양이군.” 그러나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질서신은 여전히 김성철 앞에 서 있었다. [ 신전 전사인 시드미아에 이어 부루탈러스까지 쓰러뜨린 네 솜씨는 잘 보았다. 실로 신의 도구에 어울리는 무용. 그러나 죽은 신의 빈약한 도구로는 나의 질서를 깨뜨릴 수 없다. ] 질서신이 말하고 있었다. 거신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 거대한 존재의 그늘 아래서 무수한 검들이 나타났다. 하나 같이 거울처럼 맑고 빛나는 검신을 지닌 아름다운 검들은 하늘 위에 잠시 머물러 있더니 이윽고 김성철을 향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 신의 도구인 너를 죽이고 허황된 멸망만을 꿈꾸는 무리들의 마지막 희망을 꺾겠다. 그것이 이 세계의 신인 내가 몸소 강림한 이유. ] 김성철은 생각했다. 이것은 전투가 아니라 심판이다. 신을 칭하는 자에 의한. 김성철은 무수히 쏟아져내려오는 검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베르텔기아.” 언제나처럼 담담한 목소리. 그러나 베르텔기아는 알 수 있었다. 김성철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김성철은 왼손에 두르고 있던 승천자의 손을 벗어 베르텔기아를 감쌌다. 승천자의 손은 베르텔기아의 몸에 맞게 변형되어 그녀 전체를 감쌌다. “시.. 싫어.” 베르텔기아가 격렬하게 반항하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두 손으로 안고 지그시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살아남아라. 너는.” “시.. 싫어! 싫다고!” 김성철은 팔에 신적인 힘을 흘리고 베르텔기아를 인간진영을 향해 집어 던졌다. “싫어-!!!!” 베르텔기아의 애처로운 절규가 희미해지며 사라진다. 그리고 그 빈자리엔 질서신이 만들어 낸 무수한 검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한 손엔 팔 가라즈 다른 한 손엔 크럼부이를 든 채 질서신의 공격에 맞섰다. “이런, 보아하니 여기가 오늘 우리가 죽을 자리인 모양이군?” 크럼부이가 끔찍한 상황을 지켜보며 말했다. 김성철은 씨익 웃으며 크럼부이를 꽉 잡았다. “혼자 가기엔 외로울 거 같아서 말이야.” “끝까지 민폐 끼치는 주인이군. 뭐, 이렇게 된 김에 어디 한 번 겨뤄보자고. 저 빌어먹을 신놈의 검과 함께 말이야!” 심판의 빗속에서 김성철은 치열하게 날뛰었다. 무수히 떨어지는 검은 쳐내고 기어코 질서신의 발치까지 다가가 광휘에 덮인 성스러운 몸을 해하려고 했다. 모든 산 자들은 숨을 죽이고 신이라 불리는 존재에 맞서 치열하게 저항하는 한 사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느 누구도 감히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야만인도 그리고 김성철의 동맹도. 신의 심판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나 무수한 검의 비와 빛의 장막 속에서 김성철은 점점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푹. 푹. 수많은 검들이 그의 몸을 긋고 지나가며 크고 작은 상처를 냈고 힘을 빼앗는 흐릿한 비는 기력은 물론 전의마저 빨아들이고 있었다. “스타라이트!” 김성철은 전력을 다해 자신의 빛을 뿜어냈지만 그러나 보다 밝은 질서신의 몸에 서린 빛의 장막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희망이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 참회할지어다! 질서 그 자체인 나에게 거스른 신성모독의 죗값을 치러라! ] 무수히 쏟아지던 검들이 흐름을 바꾸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기만 하던 검들이 움직임을 바꾸더니 사방팔방에서 김성철을 향해 날아들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공세 속에서 김성철은 치열하게 맞섰으나 그것이 끝이었다. 푹. 검이 그의 복부를 꿰뚫었다. 그 순간 김성철은 들을 수 있었다.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잔혹한 웃음소리를. “크억!” 그의 입에서 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십수 개의 검이 잇따라 김성철의 몸을 꿰뚫었다. 영혼각인이 발동해 일시적으로 몸이 크게 부풀어 올랐지만 그것은 검이 꽂힐 자리만 더 만드는 결과에 불과했다. “끄으으으....” 눈앞이 검어지기 시작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 끝이다. 신의 도구. ] 흐릿한 의식 속에서 김성철은 빛 속에서 검을 든 희끄무레한 인영을 보았다. ‘저것이 질서신의 본체인가...?’ 미리 알았다면 어떻게 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이 김성철이 한 마지막 생각이었다. 마지막까지도 그는 전투만을 생각하는 전사였다. 질서신이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고 할 때였다. 질서신의 희끄무레한 신형이 움찔거렸다. 그는 검을 든 채 그대로 정지했다. [ 이럴 수가. ] 질서신은 비로소 발견했다. 피로 뒤덮이고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김성철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뻗어 나오고 있다는 것을. 모든 것을 집어 삼키고 파괴하는 검은 빛은 질서신의 몸에서 나오고 있는 거룩한 빛마저 삼켜버리고 있었다. 질서신의 거대한 신형이 부르르 떨었다. [ 이것은 죽은 신의 힘? 설마 이것이 신의 도구의 정체였던 것인가?! ] 검은 기운은 아직 김성철의 상처 주변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질서신의 희끄무레한 형체가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다소 민망할 정도로. 그러자 김성철을 꿰뚫은 십 수 개의 검이 일제히 뽑혔다. 김성철이 신형이 꿈틀거리며 검이 뽑힌 자리에서 대량의 피를 쏟아냈다. 치유의 빛이 김성철을 감쌌다. 죽음에 이르렀던 김성철의 상처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완벽하게 치유되고 있었다. 돋아나는 새살 속에서 김성철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검은 기운은 차차 봉인되어 사라졌다. 그제야 질서신은 안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 혼돈신 쿤키도! 이 사악한 뱀과 같은 놈. 감히 이 세계의 신인 나로 하여금 저 멸망의 상자를 열게 하려고 하다니! 조금만 더 경솔하게 움직였다면 나는 내 손으로 이 세계를 파멸로 밀어 넣을 뻔 했구나. ] 한편 고대신의 심장의 고동이 점점 잦아들어가고 있었다. 흐려졌던 현실과 초월 세계의 경계가 돌아오고 있었다. 질서신은 쓰러진 김성철을 노려보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 나의 주구들아. 이 위험한 도구를 포획해라! 어떤 상처도 위해도 가해서는 아니 된다! 그대로 잡아두고 있어라. 나는 이 도구를 처리할 방법을 알아낸 후에 너희들에게 다시 명령을 내리겠다. ] 질서신은 뒤돌아서서 허공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전장을 비추던 거룩한 빛은 사라졌고 거대한 신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신이 사라진 전장엔 그들이 믿는 신에게 버림받은 자들과 선택받은 자들이 남았다. ======================================= 105. 빈 집의 불청객 (1) 먼저 움직인 것은 신에게 선택 받은 자들이었다. “브린스 아르놀트! 싸클! 싸클 첸쥐!” “이노! 배나구!” “돔! 돔!” 야만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기괴한 언어로 소리치며 쓰러진 김성철을 향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버림받은 인간들은 착잡한 분위기 속에서 상황을 관망했다. “대원수가 위험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황제의 부관이 마법의 거울상에 비친 김성철의 위기를 보고 황제에게 물었다. 황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김성철. 그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구하고 싶다. 구할 방법 또한 있다. 황제는 부관에게 물었다. “심장을 가동할 수 있겠는가?” 약간의 기다림 끝에 황제는 고대신의 심장이 가동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럼에도 김성철은, 그의 유일한 벗은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고대신의 심장이 없다면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할 것이다. 필경 함대의 대부분과 그를 따르는 소중한 병사들을 수도 없이 잃을 것이다. 과연 이 수많은 병사와 한 명의 벗을 바꿀 만 한 가치가 있는가? “대원수를 구해야 합니다.” 주저하는 황제를 향해 한 사내가 걸어와 정중하고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배의 함장이다. ‘브레브 대령이라고 했던가.’ 은자의 탑에서 김성철과 함께 싸운 인연을 갖춘 사내라 들었다. 그래서 배를 잃은 그를 자신의 기함의 함장으로 임명했었다. “저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처음엔 브레브 대령 개인의 의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황제는 알게 되었다. 제국의 모든 공선들이, 지면의 육전대들이 발광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의도한 것도 아닌 오직 순수한 동기로 이루어진 그 자발적인 합창의 뜻은 아래와 같았다. [ 제국대원수에 대한 구원을 요청 ] [ 어떠한 피해를 입더라도 무방 ] 이중엔 김성철의 밑에서 싸운 병사도 있을 것이고 아닌 병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에게 버림받은 지금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나마 이 절망적인 미래에서 희망을 걸만한 상대는 홀로 신에 맞서던 자. 김성철 뿐이라는 것을. “…….” 황제의 마음이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제가 결단을 하고 명을 막 내리려는 찰나였다. 짤막한 보고가 옆에서 울려 퍼졌다. “방랑왕의 군대가 퇴각을 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방랑왕이라는 말을 듣자 황제는 번갯불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춰라.” 곧 마법사 하나가 거울상으로 방랑왕의 군대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보고가 옳았다. 방랑왕은 본격적으로 후퇴하고 있지 않지만 휘하의 부대로 하여금 언제든 진지를 버리고 퇴각할 수 있도록 거치된 모든 물자와 장비를 그들의 공선으로 옮기고 있었다. 황제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김성철을 구하면 병력을 잃는 건 물론 그 틈을 타 방랑왕이 라그란제에 들이닥칠 수도 있다. 방랑왕의 구세병을 몰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무엇보다 라그란제엔 뺏겨서는 안 되는 물건이 있다. 고대신의 심장. 황제는 자신의 심장이 뛰는 가슴 부분을 어루만졌다. 그의 약동하는 심장엔 맹약의 십자가가 꽂혀 있었다. 그 맹약의 십자가가 제약하는 것은 단 하나의 비밀. 방랑왕의 꿈. 그것이 방랑왕이 황제에게 자신의 나라를 일시적으로 내맡기면서 내건 조건. 그때 당시만 해도 황제는 그 말도 안 되고 허무맹랑한 꿈이 실현될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고대신의 심장은 방랑왕의 말도 안 되는 허황된 꿈을 현실로 바꿀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황제 앞에 펼쳐진 수많은 거울상 중엔 여전히 야만인 한 가운데 쓰러져 움직이지 않는 친우의 모습이 드러나 있었다. 황제는 잠시 고민했고 이윽고 답을 정했다. 황제는 거울상 속에 비친 쓰러진 김성철을 슬픈 눈으로 응시하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다. 나의 벗이여.’ 회한에 찬 탄식이 황제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이윽고 그는 명했다. “전군, 후퇴.” 죽음조차 불사하고 전진을 기대하던 병사들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기함의 함장인 브레브 대령은 얕은 한숨을 내쉬고 감정이 배제된 목소리로 뱃머리를 돌릴 것을 명했다. 전선에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인간제국의 함대와 육전대가 퇴각하기 시작했다. 고대신의 심장의 박동이 잦아들어든 그들의 도시 라그란제로. 이미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던 방랑왕의 군세도 후퇴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연합군의 절반 이상의 전력이 빠져나갔다. 남은 군대로는 김성철의 구출은커녕 현상유지도 되지 않는다. “아니, 우리를 구했던 유일한 희망이 야만인의 손에 떨어지게 생겼는데 어찌 지켜보고만 있을 수 있단 말이오?” 다인크래프트 같은 의리파들은 잔존 군대만으로도 김성철은 구출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현실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배은망덕한 원숭이들! 너희들은 정말로 멸망해도 싸구나! 뭣들 하는 거냐! 부대를 움직이지 않고!” 검은 깃털을 지닌 조인 마라키아가 실피드를 이끌고 선봉에 서겠다는 뜻을 전해왔지만 마라키아와 실피드 한 척만으로 타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야만인들이 반공을 가해오자 잔존 부대는 크나큰 위협을 맞이했다. 공격은 선두에 선 실피드에 집중됐다. “어쩔 수 없소.” 사람이라기보다는 시체에 가깝게 변한 신의 사제 타이곤이 마라키아에게 후퇴를 권했다. 마라키아는 어쩔 수 없이 뱃버리를 돌려야 했다. 이제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야만인들은 전열을 글자 그대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왕들은 새삼스레 느끼게 되었다. 야만인이 원래는 대적할 수 없는 적이라는 사실을. 벗어날 수조차 없다. 야만인의 추격대가 후미에 달라붙고 있었다. 이대로는 전멸, 최소한 절반 이상의 전력을 잃을 것이다. 그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패주하는 전열 앞에 검은 로브를 입은 무리들이 검은 연기와 함께 나타나 후위를 자처한 것이다. 종말교단이다. “이곳은 우리 종말교단이 막겠습니다.” 종말교단의 부교주라 알려진 사내, 슈넬메르커는 수백 명에 달하는 종말교도를 이끌고 바람처럼 나타나 몰려오는 야만인을 향해 그들의 무기를 꺼냈다. 무질서한 전선 곳곳에 검은 불길이 타오르며 아신화에 의해 소환된 아신의 형체들이 거대한 위용을 드러냈다. “아니, 어찌하여 너희들이 우리를 지켜 주는가?” 다인크래프트가 복잡한 심경이 담긴 목소리로 슈넬메르커를 향해 소리쳤다. 이에 슈넬메르커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야만인은 인류의 적입니다. 인류의 적 앞에선 종족, 종파, 사익 따위의 구분은 무의미합니다. 어찌 세상의 멸망 앞에서 사사로운 이익을 따질 수 있겠습니까? 이곳은 우리에게 맡기고 어서 군대를 보존하여 물러나십시오.” 이미 기세를 탄 야만인들은 아신화로도 쉬이 막을 수 없었다. 3기의 아신이 차례로 야만인의 광풍에 쓰러졌고 야만인은 그 간극으로 물밀 듯이 쳐들어오고 있었다. 종말교단의 활약 덕에 인류의 잔존부대는 간신히 전장에서 이탈할 수 있었다. 한 명의 왕의 가장 유력한 후보 김성철을 뒤로 한 채 말이다. 이제 홀로 남은 김성철은 야만인들에게 포위당했다. 의식을 잃었지만 야만인들은 좀처럼 김성철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두려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홀로 망치를 휘두르고 야만인의 진형을 갈라놓은 무지막지한 전사의 무용에 대한 기억이 말이다. “후라이! 후라이!” 용기 있는 야만인들이 쓰러진 김성철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갔다. 한 녀석이 나무 작대기를 들고 김성철을 찔러 본다. 아무 반응이 없다. 대담해진 그 야만인이 김성철에게 다가가려는 찰나였다. “그만 해! 이 개자식들아!!!” 갑자기 하늘 위에서 뭔가 파닥거리며 날아왔다. 검은 갑각 같은 걸 둘러 쓴 한 권의 책. 베르텔기아다. 베르텔기아는 쓰러진 김성철 위에서 필사적으로 파닥거리며 다가오는 야만인들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저리 꺼져! 죽기 싫으면!” 갑작스런 베르텔기아의 출현에 야만인들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저 무시무시한 전사와 접점이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야만인들이 한동안 허둥거리며 당황하고 있자 얼굴에 피칠갑을 한 야만인 하나가 다른 야만인을 제치고 나타나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디에! 이타!” 그 일갈에 다른 야만인들은 정신을 차린 듯 다시 눈을 뜨고 베르텔기아를 쳐다봤다. 별 볼 일 없는 리빙북이다. 겉에 두르고 있는 검은 갑각 같은 게 걸리긴 했지만 입김만 불면 쓰러질 것 같은 작은 녀석이다. 어른들을 지켜보던 야만인 사내아이가 돌멩이를 집어 베르텔기아를 향해 집어던졌다. 아이의 힘이라고 하나 야만인의 힘이다. 퍽! “아얏!” 으르렁거리며 야만인을 막아서던 베르텔기아는 등 뒤에 큰 충격을 느끼며 허공에서 휘청거렸다. 다행히 방어구 역할을 든든히 해주는 승천자의 손덕분에 아무 피해를 입지 않았 다. 그러나 아이의 돌팔매질에 흔들림을 보인 대가는 컸다. 이번엔 어른들이 돌멩이를 들었다. “젠카!” 무시무시한 힘이 담긴 돌멩이가 베르텔기아를 강타했다. “아악!” 아이의 돌팔매질과는 차원이 다른 충격. 그 일격은 베르텔기아를 돌멩이와 함께 바닥에 처박히게 할 정도로 강력했다. 신화급 무구 승천자의 손이 없었다면 베르텔기아는 아마 갈기갈기 찢겨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텔기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흙먼지를 털고 다시 솟아올라 김성철 앞을 막아섰다. “소... 손대지 마! 가까이 오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베르텔기아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그녀의 힘은 마음에 보답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돌멩이 하나가 더 베르텔기아에게 날아왔다. 베르텔기아는 다시 한 번 지면에 처박혔고 그녀를 향해 여러 개의 돌멩이가 비처럼 쏟아졌다. “아악! 악!” 아무리 승천자의 손을 입었다고 하나 모든 충격을 막을 수 없다. 비처럼 쏟아지는 돌팔매질 속에서 베르텔기아는 천천히 의식이 흐려지는 걸 느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강타가 지속되는 가운데 베르텔기아는 쓰러진 채눈을 뜨지 못하는 김성철을 필사적으로 응시했다. ‘저..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돌팔매질이 그쳤다. 베르텔기아는 흐릿한 의식 속에서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몸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야만인이다. 도끼를 든. 번쩍이는 도끼의 날은 베르텔기아를 향하고 있었다. “이노!” 베르텔기아는 죽음에 관해 생각했다. 어두운 집, 뒤를 돌아보며 집을 나서는 금발의 소녀의 얼굴이 그린 듯 그녀의 의식 속에 떠올랐다. 대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렇게… 이렇게 끝나는 거야?’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을 때 베르텔기아는 보았다. 허공 위에 마법진과 함께 떠오른 한 권의 책을. ‘저.. 저 녀석은?’ 틀림없다.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지닌 또 하나의 리빙북. 49호다. 49호는 베르텔기아를 향해 날아오는 도끼날을 그대로 몸으로 받았다. 야만인이 전력을 다해 휘두른 도끼날이 몸에 닿는 순간 무형의 힘을 지닌 마법진이 나타나 도끼의 힘을 무효화시켰다. “물러서라. 렐름의 불나방들아.” 49호가 말했다. 그녀는 베르텔기아처럼 말로만 하지 않았다. 책 주위에 검은 구체들이 잇따라 떠오르더니 달려드는 야만인에게 차례로 날아가 야만인을 날려버렸다. “…이쪽으로.” 49호가 말했다. 베르텔기아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49호를 향해 날아갔다. “저 인간은?” 그녀는 자신의 몸보다 김성철을 더 걱정했다. 49호는 가볍게 몸을 흔들며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가만히 있어. 짝퉁. 같이 데려가 줄 테니까. 안전한 곳으로.” 그 말이 끝난 직후 49호와 베르텔기아 그리고 김성철을 중심으로 구형의 마법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49호에 멍하니 있던 야만인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49호가 펼친 방어술식은 야만인의 공격에 끄떡도 하지 않았다. 견고한 방어 속에서 49호는 자신의 결계 안에 있는 존재들을 미리 내정한 안전지대로 이송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텔레포트의 마법의 영창을 끝낸 후 49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신, 베르텔기아 그리고 쓰러진 김성철. 3개의 개체가 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49호는 하나의 개체가 더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쓰러진 김성철 앞에서 주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기척을 감추었고 49호의 인지 범위를 벗어났다. ‘뭐였지? 설마 나와 같은 능력자가 있는 거야?’ 꺼림칙하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은 없다. 방어결계는 야만인의 맹렬한 공격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49호를 둘러싼 구형 안이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빛이 사라졌을 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야만인들은 망연자실한 눈으로 아무것도 없는 공터로 걸어 들어가 의미모를 고함을 질렀다. 인류의 명운을 건 라그란제의 회전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그날 신에게 버림받은 인류의 군대의 손실은 경미했지만 그들은 힘들게 이룩한 유대와 그리고 누구보다 중요한 한 명의 영웅을 잃었다. 역사가는 이 날을 인류의 패배로 기록하게 될 것이지만 아무도 그런 사실 따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이미 사람들은 알고 있었으니까. 그들에게 허락된 역사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 105. 빈 집의 불청객 (2) 쿵. 쿵. 멀리서 둔탁한 파공음이 들려온다. 이른 새벽부터 야만인들이 투석기로 도시를 두들기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 소리는 도시 지하에서 울려 퍼지는 또 다른 고동, 고대신의 심장의 소리가 들리자 잦아들었다. 인간제국의 수도. 라그란제 전역엔 고대신의 심장의 힘을 이용한 방어결계가 펼쳐졌다. 그 결계너머로는 어떤 무엇도 투과할 수 없었다. 오직 인가를 받은 공선만이 어둠과 결계가 사라지는 찰나의 시간을 틈타 도시 바깥으로 탈출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항구엔 수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한때 내놓으라하던 명문가의 귀족과 부호들이 새벽부터 비를 맞으며 도시를 떠나려는 공선에 타려고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운 좋게 공선에 탑승한 사람들은 부러운 눈으로, 시기심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나도, 나도 데려가 줘! 제발!” 상승하는 공선에 한 사내가 난간에 매달리며 애처롭게 소리 질렀다. 승무원이 바닥에 침을 뱉고 도끼를 들더니 도끼 자루로 그 자의 손을 찧었다. “끄아아악!” 안간힘을 다하던 밀항자는 그대로 지면 아래에 곤두박질쳤다. “…….” 클라리스는 갑판에 서서 떨어지는 사내와 그리고 멀어져가는 제도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저택에 홀로 남은 노인은 만족한 얼굴로 제도를 떠나는 공선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잘 살아야 한다. 클라리스. 이 칠칠치 못한 할애비의 몫까지.” 세계의 적으로 불렸던 이후엔 인류의 수호자로 숭앙받던 전사가 질서신에게 쓰러진 지 한 달이 흘렀다. 전황은 절망적이었다. 연합군은 도시를 버리고 멀찌감치 뒤로 물러났고 덩그러니 남은 라그란제는 육만 명에 이르는 야만인의 군대에 포위됐다. 고대신의 심장의 힘이 없었다면 이미 도시는 야만인에게 함락되어 유린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라그란제에도 한계는 오고 있었다. 수십만에 이르는 시민과 피난민을 부양할 식량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고 도시를 지킬 병사들은 갈수록 전투에서 소모되어 줄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한편 동쪽에선 소문으로만 듣던 죽음의 낙진이 출현했다. 아직 드러난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라그란제의 시민들은 아침 해가 떠오를 때 동쪽 지평선 전체가 핏빛으로 물든 섬뜩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멸망으로 치닫는 순간, 다른 한 곳에서는 세상의 멸망 따위와 아무 관계없다는 양 평범한 하루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곳은 라그란제 상위 구역에 버려진 빈 집 중 하나였다. 주인이 전쟁 전에 이미 떠나 아무도 살지 않게 된 그 집엔 유령이 산다는 소문이 자자해 아무도 얼씬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 집엔 엄연한 주인이 있다. 한 권의 책이다. 그 책은 소수의 소형 골렘을 거느리고 집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한편 그 집 안엔 또 다른 책 하나가 더 있었다. 베르텔기아다. “잠시 바깥의 상황을 살피고 있을 테니까. 가만히 있어. 아무 짓도 하지 말고.” 49호는 베르텔기아를 향해 냉랭하게 말했다. 베르텔기아는 몸을 기울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아들었으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냐?” 49호가 냉랭하게 소리 지르자 그제야 베르텔기아는 몸을 떨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으언누으우이.” “언…. 뭐? 똑바로 말 안 해!” 49호가 날선 목소리로 날카롭게 되물었다. 베르텔기아는 몸을 축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어... 언니!” 언니라고 말하는 게 분한 듯 말의 말미에 베르텔기아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럼. 집 잘보고 있어. 이번 정탐은 꽤 오래 걸릴 테니까. 짝퉁.” 49호는 그 말을 남긴 채 사라졌다. 아마도 일주일간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어디로 간지는 49호만이 알겠지만. 베르텔기아는 한동안 49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누구보고 짝퉁이라는 거야! 자기가 짝퉁인 주제에. 그깟 싸움 잘한다고 위세 부리기는!” 문 바깥 복도 쪽에서는 이따금 소형 골렘들이 오가며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텔기아는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침대에 한 사내가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그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김성철. 질서신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지 한 달 째, 그는 아직 눈을 뜨지 못했다. “끙!” 베르텔기아는 안간힘을 다해 주전자를 기울였다. 주전자에 담긴 물이 아래 받쳐 놓은 면봉의 끌을 적신다. 베르텔기아는 면봉을 책장으로 섬세하게 들어 올린 후 침대에 누운 김성철을 향해 나아갔다. “…….” 베르텔기아는 물에 젖힌 면봉의 끝을 섬세하게 김성철이 입술 주변으로 가져가 그의 입안에 물을 흘려보냈다. 물방울 하나가 입술 끝에서 흘러나와 볼을 타고 베개를 적셨다. 그 모습은 본 베르텔기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왜 일어나지 못하는 거야? 숨도 쉬고, 몸도 따뜻하고 아무 상처도 없는데! 빨리 일어나서 나보고 짝퉁이라 놀리는 그 짝퉁을 혼내주란 말이야!” 베르텔기아는 책장으로 김성철을 뺨을 가볍게 쳤다. 눈을 감은 그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흔들고 책모서리도 찔러봐도 미동조차 없다. “좀 일어나라고!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야!” 베르텔기아는 체념한 체 크기를 줄여 늘 머무르던 안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을 굳이 택한 이유는 따뜻하기도 하거니와 그가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언제나와 같은 힘찬 박동 소리가 그녀에게 전해온다. 그런데, 심장의 박동이 평소와 다르다. “으.. 으....” 김성철이 미간을 찌푸린 채 희미한 신음소리를 냈다. 악몽이라도 꾸는 것일까. 최근 악몽을 꾸는 일이 잦다. 베르텔기아는 그때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한없이 무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악몽은 평소보다 배는 끔찍한 것 같았다. 박동 소리가 변해간다. 베르텔기아가 알고 있는 박동으로. “이건. 곤란해. 49호 언니! 어디 있어요! 있으면 모습을 드러내세요!” 베르텔기아가 주머니 밖으로 뛰쳐나가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49호를 찾았다. 그러나 그녀의 부름엔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진짜 위험하다고! 빨리 나타나서 어떻게 좀 해 봐! 49호 언니! 아니 짝퉁!!!!”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49호는 나타나지 않았다. ‘큰일 났어. 이대로는!’ 같은 시각 김성철. 그는 운명의 기로에 서 있었다. * 고독은 건조한 사막과 같다. 오랜 고독은 사람의 마음을 메마르게 한다. 그 사막 속에선 오직 강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김성철은 강하지 못했다. 그는 그가 생각한 것만큼 대단하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친우라 여겼던 자들이 손가락질 하고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마저 그의 이름을 알고 저주하고 있다. 얼음과 불로 이루어진 땅, 마계의 대단에 자리 잡은 황량한 땅에서 김성철은 점점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라이즈 하이메르가 남겨다 준 편지를 통해 막강한 영혼각인을 얻고 위업을 달성할 때 약간의 보람과 성취감을 느끼긴 했지만 말라붙어 갈라지기 시작한 그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약은 될 수 없었다. 한 해가 흐르고 또 한 해가 흘렀다. 변치 않는 황량한 풍경 속에서 김성철은 자신이 언제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했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한동안은 혼잣말이 늘었다. 특히 요리를 할 때 그는 말이 많아졌다. 그러나 대답 없는 중얼거림이 늘어날수록 그는 강해져가는 충동을 느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다는 충동을 말이다. 김성철이 입버릇처럼 말했다. 자신은 영웅이 아니라고. 입 발린 겸손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결국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몸서리처질 정도로 고통스러운 경험 끝에 체득할 수 있었다. 불운한 삶과 겉으로 보이는 외관, 스스로가 쌓은 장벽으로 인해 고독과 어울리는 남자로 보이게 했을 뿐. 그는 누구보다 애타게 사람을 갈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풀 길 없는 외로움은 그를 결국 그곳으로 데리고 갔다. 깎아지른 서쪽의 산악지대. 깊숙한 곳에 감춰진 신에 이르는 계단으로. 계단을 걸어가면서 김성철은 많은 것들을 보았다. 처음은 환청이라 생각했고 나중에는 유령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계단의 중간쯤에서 옛 투기장의 동료이자 사랑하는 여인을 가로 채 갔던 크릭프리드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 거렸을 때 김성철은 이곳이 죽은 자의 영혼이 머무는 곳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느꼈다. “어이. 친구. 자네도 죽으러 온 건가?” 김성철은 죽은 자가 말을 걸어오는 것조차 반가웠다. 김성철은 그에게 뭐라고 말하긴 했지만 크릭프리드는 듣지 못하는 듯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김성철은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오르면서 김성철은 수많은 사람이 환영의 형태로 자신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 안엔 다른 세계에서 이미 작고한 그의 부모님의 얼굴도 있었다. 미칠 정도로 그리운 얼굴이지만 이제는 흐릿하여 윤곽조차 떠오르지 못하는 얼굴들. 김성철은 그것들을 넘어 마침내 계단의 끝에 이르렀다. 계단의 끝에서 김성철은 무한히 펼쳐진 우주와 무수한 별들의 바다를 보았다. 빨려 들 것 같은 그 무한함 속에서 김성철은 순간 생각했다. 이 하잘 것 없는 목숨 따위는 죽어 없어져도 관계없을 것 같았다. 그때 듣기 좋고 부드러운 그러나 사악함과 흉심이 느껴지는 음성이 옆에서 울려 퍼졌다. [ 너의 마음은 실로 황폐하구나. 아무것도 남지 않은 불쌍한 인간이여. 너는 무엇을 찾기 위해 이곳에 왔느냐? ] 그때 김성철은 무한한 우주 옆에 선 압도적인 형체를 보았다. 김성철은 전율했다. 그러나 그 형체 옆에 자연스럽게 의식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또 다른 무언가를 보았을 때 김성철은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신이라고. 그 이후에 몇 개의 대화가 김성철과 신 옆에 선 자 사이에 있었다. 크게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부터 일어났다. [ 기구한 필멸자. 그대는 분수에 맞지도 않는 운명을 택해 그 무게에 짓눌려 고통 받고 있구나. 내 눈엔 전부 보인다. 모든 이에게 버림받고 배신당해 구제할 길 없는 외로움 속에서 쓸쓸히 죽어갈 너의 미래가. ] 신 옆에 선 자는 조롱을 섞어 말하며 김성철의 눈에 그가 처하게 될 처참한 미래를 환상의 형태로 보여주었다. 김성철은 머리를 감싼 채 울부짖으며 무릎 꿇었다. 서러운 오열이 신의 공간에 한동안 울려 퍼졌다. [ 너의 운명은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아마도 힘을 가진다 하더라도 결국 운명의 무게에 눌려 스스로를 해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김성철이여.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 신 옆에 선 자가 말했다. 김성철이 핏발 선 눈을 부릅뜨며 간절하게 외쳤다. “무엇입니까? 그 방법이란 것은.” 이에 신 옆에 선 자는 미소 - 적어도 김성철의 눈엔 그렇게 비쳤다 -를 머금으며 답했다. [ 도구는 생각을 할 필요도 없고 스스로 판단할 필요도 없지. 그것은 오직 목적 달성을 위해 존재하는 물건이다. 네가 입고 있는 옷, 쓰는 칼처럼. 물론 신에게도 도구는 있다. ] 신 옆에 선 자는 그의 옆에 자리 잡은 깊은 잠에 빠진 거룩한 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신의 목적과 너의 목적이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아주 약간이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가? 다른 세계에서 온 불행한 자여. 한 번 걸어볼만 하지 않는가? ] 거절할 이유는 없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김성철은 자신의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 운과 매력. 도구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수치지. 대신 너에겐 홀로 필멸자의 세상을 평정할 힘을 주겠다. 공평하지 않은가? ] 김성철은 느꼈다. 자신의 몸에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막강한 힘이 흐르는 것을. 마치, 신적인 힘이. 하지만 그 힘은 곧 사라졌다. 신 옆에 선 자가 말했다. [ 세상에 공짜라는 건 없다. 네가 느꼈던 무적의 힘을 얻고 싶다면 한 가지 조건을 받아들여라. ] 그는 김성철에게 맹약의 십자가를 내밀었다. [ 그래, 너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거다.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던 간에 전부 감수하고 그것을 네 심장에 꽂아 넣는 거다. ] 김성철은 홀린 듯 맹약의 십자가를 건네받았다. 몇 가지 문장이 눈앞에 떠올랐지만 그는 보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어떤 주저함도 없이 자신의 심장에 박아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맹약의 십자가가 그의 심장을 꿰뚫기 직전 갑자기 그의 몸이 멈췄다. “?!” 김성철의 눈앞에 무언가 어른거렸다. 그것은 허공 위에 떠올라 회전하고 있는 강철의 수레바퀴였다. 아무 인과관계 없이 나타난 의문의 상징. 그런데 그 수레바퀴를 보는 순간 김성철은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는 환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 의식 먼 곳에서 비열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강철의 혼이라. 귀찮은 걸 손에 넣었군. 하지만 강철의 혼만으로 너의 주어진 운명을 거스를 순 업다. 네 심장에 새겨진 낙인이 증명하듯 너는 결국 도구이길 스스로 선택했으니까. 고장 난 도구는 고치면 그만이야. ] 다음 순간 김성철의 의식은 흐려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메마른 황야에 홀로 서 있었다. 같은 꿈이 반복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버티기 어렵다. 그의 의지력은 거듭되는 악몽 속에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통 속에서 김성철은 서서히 내면의 검은 거인이 눈을 뜨는 걸 느꼈다. ‘누구라도 좋다. 나를 도와다오. 어떤 대가든 치를 터이니 이 지옥에서 나를 꺼내다오...!’ 아무도 오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는 언제나 혼자였고 모두에게 버림받았다. 그러나 가끔 그도 기대를 품는다. 그것이 헛된 것인지 아닌지는 시간이 해결하겠지만. * “…여기네?” 아무개는 신중한 추적자다. 그녀는 2구역에 버려진 저택 앞에 서 있었다. “세계의 적 김성철. 드디어 찾았다.” ======================================= 105. 빈 집의 불청객 (3) 김성철이 쓰러지고 49호라는 책이 나타났을 때 아무개는 아무도 모르게 김성철의 몸에 은밀한 표식을 남겨놓고 뒤로 물러났다. 놀랍게도 49호가 김성철을 데리고 간 곳은 애먼 곳이 아닌 가장 가까이 있던 도시 라그란제였다. 이후 야만인에게 포위당한 도시에서 아무개는 자신의 표식을 찾아 라그란제의 모든 구역과 거리를 샅샅이 뒤졌고 오랜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상위 구역에 버려진 빈집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표식이 있음에도 찾기 어려웠다. 처음 보는 고도의 경계결계과 기만결계로 숨겨진 은밀한 장소였다. 대체 누가 이런 곳을 만들어낸 것일까. 황제? 아니면 방랑왕? 아무개는 갖은 상상을 하며 집 안에 침입했다. 막상 집 안의 경계는 그다지 삼엄하지 않았다. 그녀는 복도를 지키는 소형 골렘과 경계 결계를 가볍게 돌파한 이후에 표식의 흔적을 찾아 닫힌 방문 앞에 섰다. 문틈으로 누군가의 신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틀림없다. 김성철의 것이다. 현실도 초월세계도 아닌 경계선에 숨은 아무개는 그대로 문을 투과해 문제의 방안으로 들어갔다. 있다. 침대에 누워 숨을 헐떡이는 세계의 적이. 지키는 건 책 한 권. 아무개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 책을 살핀다. 책은 두 권이 있다. 야만인조차 가볍게 쓸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책과 김성철이 늘 데리고 다니던 전투능력 없는 책. 이 책은 전투능력이 없는 책으로 보인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신중하게 확인을 마친 아무개는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며 품안으로 조용히 손을 가져갔다. 단검손잡이의 꺼슬꺼슬한 촉감을 손바닥으로 느끼면서 그녀는 김성철에게 다가갔다. 세계의 적이라 불리며 두려움이 대상이 되었던 사내는 지금 만큼은 눈을 감은 깨어나지 않는 환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걸로 이 세상은 구원 받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아무개의 뇌리에 자신이 직접 지켜봐 온 권력자의 추악한 모습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오로지 그들의 안위와 기득권만을 챙기는 모습을 연상하면서 아무개는 자신의 생각을 일부 수정했다. ‘아니, 적어도 예정된 멸망만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 이번에야 말로 후회하지 않겠다. 설령 지옥 같은 세상이라고 해도 멸망해 없어지는 것보다 낫다. 단검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깊게 눌러 쓴 두건 속에서 섬뜩한 안광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어이! 거기 당신!” 김성철의 가슴 위에 올라 그를 흔들어대던 책이 갑자기 아무개를 발견하고 뒤로 돌아섰다. 아무개는 화들짝 놀랬다. ‘설마, 함정?!’ 언제든 몸을 숨길 준비를 하며 아무개는 책의 행동을 관찰했다. 그 낡고 커다란 책은 다짜고짜 아무개를 향해 날아오더니 외투 안에서 단검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왼손을 책장으로 단단히 잡고 잡아당겼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마침 잘 왔어! 나를 도와줘. 지금 당장!” 베르텔기아는 아무개가 누군지 무슨 의도로 왔는지 알지 못한다. 오직 김성철을 살리겠다는 일념 하에 그녀는 아무개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녀가 죽여야 할 증오해 마땅할 존재에게. “자.. 잠깐!” 갑작스런 베르텔기아의 행동에 아무개는 크게 당황하면서도 김성철에게 이끌려갔다. 김성철 바로 앞에서 아무개는 힘을 주고 베르텔기아를 끌어당겼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아무개가 무음결계 스크롤을 꺼내 찢고는 날카롭게 말했다. “설명할 시간은 없어! 지금 이 사람을 가만 놔두면 큰일이 날 거야.” 베르텔기아는 연신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큰일?” 아무개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가슴 위에 납작 엎드려 그의 고동을 듣고는 어두운 목소리로 답했다. “이대로 놔두면, 이 사람 검은 거인으로 변해버릴 거라고!” “거... 검은 거인?!” 아무개의 신형이 한 차례 휘청거렸다. 그 반동으로 쓰고 있던 두건이 벗겨졌다. 그때 비로소 베르텔기아는 아무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저 사람은? 그때....?’ 적어도 좋은 의도로 나타난 사람은 아니다. 그녀는 김성철의 오랜 적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다른 길은 없다. “으... 으....” 김성철은 고통에 사로잡힌 채 신음하고 있다. 이대로 그를 방치하면 모든 것은 끝이 난다. 베르텔기아는 다짜고짜 자신의 책장을 열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고색창연한 느낌을 주는 오래된 열쇠였다. “시간이 없어! 빨리 이 열쇠를 들어!” 베르텔기아가 아무개에게 명했다. 멍하니 서 있던 아무개는 자기도 모르게 베르텔기아가 시키는 대로 했다. 열쇠에서 범상치 않은 느낌이 전해졌다. 얼핏 본 감정 결과는 더욱 놀라웠다. ‘뭐. 뭐야? 신화급 아이템이라고? 이게?’ 아이템의 설명을 전부 읽기도 전에 베르텔기아가 아무개를 재차 책장으로 물어 잡아끌며 말했다. “빨리 그걸로 저 바보의 영혼창고를 열어!” 베르텔기아가 재차 명했다. 아무개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낯익다고 여기며 자기도 모르게 베르텔기아의 말을 따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걸로 어떻게 열어? 아니 그 전에 영혼창고를 어떻게 열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아무개는 항의 하듯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열 수 있다고! 그냥 허공에 대고 열어젖혀봐.” 아무개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베르텔기아를 바라보다 속는 셈치고 김성철을 향해 열쇠를 가져다댔다. ‘무슨 꿍꿍이인진 모르겠지만 한 번은 원하는 대로 해주자.’ 그렇게 생각하며 열쇠를 김성철 앞에 가져다대는 순간이었다. 덜컥. 무언가 열쇠의 끝에 닿았다. 아무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뭐지? 방금 이건?’ 아무개는 경이로움을 느끼며 열쇠를 돌렸다. 문을 여는 느낌이 손에 전해왔다. 그리고. 툭. 김성철의 옆,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빈 병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별 거 없는 술병이었지만 아무개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열린 것이다. 타인의 영혼 창고가. “빨리 영혼 창고 안에 손을 넣고 그걸 찾아.” “그거?” “안개여정!” “안개여정?” “반지야. 타인의 꿈속에 들어갈 수 있는 반지!” “그걸 꺼내서 어떻게 하려고?” 아무개는 자신이 리빙 북에 지나치게 휘둘리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며 약간 날선 목소리로 되물었다. “저 멍청이를 깨워야지! 검은 거인으로 변하기 전에!” “…….” 아무개는 입을 다물고 침대에 누운 김성철을 차디찬 시선으로 노려봤다. ‘지금이라면 죽일 수 있어. 단 칼에 목을 그어서. 아니면 두 손으로 단검을 쥐고 심장에 말뚝을 박듯이 찔러 죽일 수도 있어. 하지만 뭐지?’ 이제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전투 능력이 없는 리빙북이 아무리 저항해봐야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다. 김성철의 운명은 그녀의 손에 달린 것이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인가? 그녀는 떠올렸다. 있을 수 있는 또 다른 미래, 김성철이란 존재가 행했던 수많은 악행을. 일곱 재앙의 무기를 휘두르고 대륙 곳곳을 누비며 마주치는 모든 이들을 개인으로서 한 명 한 명 살해하던 그는 아무개의 동료들을 죽였고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 연인마저 죽여 버렸다. ‘…내 사랑.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녀의 연인은 무명의 검사였다. 하늘이 무너지고 대륙의 절반이 아무도 살 수 없는 해골의 땅으로 변해가는 와중에 만났던 그는 오로지 자기의 안위와 생존을 지상최대의 과제로 생각하는 극도로 이기적인 인물이었다. 모두가 그를 싫어했고 아무개도 그를 싫어했다. 하지만 아주 경미한 계기로 아무개와 그 사내는 친해졌고 점점 서로에 대해 이해하게 됐고 아무개는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마지막 순간, 그 이기적인 사내는 생존자의 피난처를 급습한 김성철에 맞서 모두를 아니 아무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검은 거인은 자기에게 대든 자는 그냥 죽이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무명의 검사는 김성철의 손에 의해 삼일 낮 삼일 밤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받으며 죽었다. 안전한 곳에 숨어 있던 아무개는 기억한다. 자신의 연인이 내뱉던 처절한 비명 소리를. 아무개가 그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을 때 그녀가 사랑하던 사람은 이미 인간이라는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훼손된 뒤였다. 빠드득. 아무개의 이가 갈렸다. 잠시 식었던 분노의 불길이 맹렬하게 솟아올랐다. 아무개는 품속에 숨기고 있던 단검을 꺼냈다. 번쩍이는 칼날이 서슬 퍼런 살기를 사방에 흩뿌렸다. “뭐하는 거야? 당신! 갑자기 그런 위험한 걸 꺼내고 사과라도 깎을 작정이야?!” 베르텔기아가 김성철 앞을 막아섰다. “비켜.” 아무개는 비정한 암살자가 되어 있었다. ‘이 자식만 죽으면 돼. 이 자식만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야. 그 다음 세상? 개나 주라지.’ 그녀는 한 팔로 베르텔기아를 밀어내며 김성철에게 다가갔다. 김성철은 잠시 고통이 가라앉았는지 세상 편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이 자가 어떤 사람인 건 중요하지 않아. 이 자는 존재 자체로 너무나도 위험하고 따라서 죽어야만 해.” 이수진이 단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녀가 택한 처형 방식은 가장 확실한, 심장을 꿰뚫는 것이다. ‘한 번에 끝내겠어.’ 그런데 베르텔기아가 악착 같이 그녀를 방해했다. 베르텔기아는 아예 김성철의 가슴 위에 드러누우며 소리쳤다. “그래, 할 테면 해 봐! 죽이려면 같이 죽이라고!” “비켜.” 아무개가 베르텔기아를 덥석 잡아 집어 던졌다. 그러나 베르텔기아는 허공에서 균형을 잡고 다시 아무개를 막아섰다. “나도 같이 죽이라고? 응? 왜? 그건 못하겠어?” 아무개는 그런 베르텔기아가 더욱 거슬렸다. ‘왜지? 겨우 리빙 북일 뿐인데.’ 그냥 저 책을 베고 김성철을 죽이면 된다. 간단한 일이다. 그런데 베르텔기아의 목소리는 아무개를 계속 주저하게 만들었다. 다음 순간 아무개는 베르텔기아의 목소리가 자신이 잘 아는 목소리와 꼭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육성을 들은 건 단 한 차례에 불과하지만 아무개는 흐릿하게나마 그녀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가서 그 멍청이의 엉덩이를 걷어 차주고 와.” 회귀의 우물에 스스로 뛰어들 때 뒤에서 자신을 격려했던 존재. 환한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눈부실 정도의 미모를 지닌 그녀를 사람들은 신녀님이라 불렀다. 멸망해가는 세상 속에서 혜성같이 등장해 압도적인 지식과 마법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을 인도하던 그녀는 아무개를 이 세상으로 돌려보낸 장본인이다. 베르텔기아는 그녀와 같은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럴 리는 없어! 이 책이 신녀님이라고?’ 모처럼 다잡았던 결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음의 흔들림은 행동으로 나타났다. 단검의 끝이 떨리고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찰나의 빈틈을 발견하고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승천자의 손을 뒤집어 썼다. 이미 그녀를 한 번 허락한 승천자의 손은 완벽하게 그녀를 감쌌다. “흥! 이제 다시 덤벼보시지! 49호가 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 볼 테니까! 오히려 잘 됐네. 엄한 곳을 찌르면 이 바보가 깨어날지도 모르니.” 이제 완벽한 방어력을 갖춘 베르텔기아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면 아무개는 여전히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때 무언가가 허공에서 떨어졌다. 툭. 영혼 창고가 여전히 열려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개의 시선이 조건반사적으로 그곳을 향했다. 그녀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건 반찬통?’ 멸망과는 조금도 관계없는 소박한 물건이 영혼창고에서 흘러나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생활감이 주는 충격이라고 할까나 아무개는 이끌리듯 김성철에게 다가가 활짝 열린 영혼창고를 향해 손을 넣었다. 툭. 상자 하나가 나왔다. 아무개는 그 상자를 열고 눈을 찡그렸다. 그 안에 든 것은 무기도 마법도구도 아닌 향신료 통이었다. “뭐하는 거야! 이 강도! 도둑!” 베르텔기아가 옆에서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개는 아랑곳하지 않고 영혼창고 안의 물건을 끄집어냈다. 투둑. 툭. 계속해서 창고 안의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빛바랜 의복, 봉제 곰인형, 낡은 편지. 아무개는 그중 낡은 편지를 집어 펼쳤다. [ 아저씨. 생일선물 감사드려요.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크라이아 ] 귀여운 필체로 적힌 글씨였다. ‘뭐지? 이건?’ 아무개, 아니 이수진이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물건이 쏟아졌다. 필경 그녀는 김성철의 영혼창고 안에 무시무시한 살육의 도구와 무기로 가득 차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창고 안에 있던 것은 그녀의 예상과는 아득히 상반된 일상의 물건이었다. 그렇다. 김성철 또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아무개의 손이 신경질 적으로 창고 안의 물건을 꺼냈다. 툭. 이번엔 금속성의 물체가 떨어졌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군. 사악한 도구가.’ 아무개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깔았다. 기대는 곧 실망으로 변했다. 그녀의 발밑에 뒹굴고 있는 것은 쓸데없이 귀여운 황금 오리였다. “뭘 찾는 거야?”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을 지킨 상태로 입을 열었다. “이게 아니야.” 아무개는 중얼거렸다. “이게 아니라고!” 그때였다. 잠시 평온하게 있던 김성철이 갑자기 외마디 신음을 지르며 몸을 떨었다. “큰일이야. 진짜 큰일이야!”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당신이 이 사람에게 무슨 악감정을 가졌건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아!” 베르텔기아는 아무개를 향해 날아가 그녀의 손에 있던 열쇠를 낚아채고는 창고 안에서 바로 반지 하나를 꺼내 아무개 앞에 대령했다. “당장 이걸 써서 저 인간의 꿈속에 들어가야 해!” “내가 왜?” 아무개가 묻자 베르텔기아는 슬며시 물러나 그녀에 가려져 있던 김성철을 보여주었다. 아무개의 동공이 수축됐다. ‘저건?’ 검은 기운이 김성철의 주위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무개는 베르텔기아를 밀치고 단검을 김성철을 향해 꽂아 넣었다. 의미 없는 짓이다. 검은 기운은 아무개의 칼날을 간단하게 튕겨냈다. “방법이 없어! 어서 그 반지를 쥐고 그 사람의 몸에 손을 대!” 베르텔기아가 아무개의 품에 안기며 소리쳤다. 김성철의 몸에 서린 어둠은 더욱 짙어졌다. 이대로는 이 세상은 멸망한다. 아무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에라 모르겠다!’ 안개여정과 베르텔기아를 품은 채 아무개는 검은 기운에 둘러싸인 그녀의 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주변에 서린 어둠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외마디 비명은 어둠 속에 묻혔다. 잠시 후, 아무개는 자신이 다른 공간에 서 있는 걸 발견했다. 공허. 그것외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황량한 풍경이 가녀린 여인 앞에 펼쳐져 있었다. ======================================= 106. 도구 그리고 인간 (1) 하루에서 가장 어두운 순간은 미명이 비추기 전이다. 이 세계는 그러한 어둠에 잠식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개는 알게 되었다. 어둠 보다 더 무서운 숨 막힐 정도의 적막이 이 삭막한 대지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영원한 어둠과 적막 속에서 아무개는 일부러 소리 내어 말했다. “대체 여기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조차 이 공허에 휩쓸려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은 공포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뭐긴 뭐야. 그 사람의 꿈이지.” 뒤에서 낯익은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개는 반가워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놀랄 정도로 귀여운 여자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얼굴은? 설마 신녀님? 아니, 신녀님이라기엔 어린데.’ 아무개가 놀란 얼굴로 보라보자 베르텔기아는 히죽 웃으며 양 엄지로 자신을 척 가리키며 우쭐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껴안고 있던 책이야. 이게 내 본 모습이지. 뭐. 내가 너무 예뻐서 깜짝 놀란 건 이해해. 여왕벌의 칭호는 아무나 가지는 게 아니니까.” 아무개는 그제야 이 소녀가 자신을 이 세계로 안내한 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야. 이 녀석.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나 부리고.’ 우두커니 서 있는 아무개를 향해 베르텔기아는 손을 뻗어 아무개의 손을 잡고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멍하니 있을 시간은 없어. 빨리 이 인간을 여기서 끌어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은 끝장이야.” 귀엽고 앳된 겉모습의 소유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침착함과 냉정함이다. 갖은 지옥을 해쳐 나왔던 아무개조차 이 절대적인 공허 앞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모르는데 말이다. 베르텔기아는 아무개의 손을 잡은 채 앞으로 끌고 갔다. “어디로 가는 거야?” 아무개는 자진해서 베르텔기아에게 이끌려가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로든!” 베르텔기아도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낫잖아?” 베르텔기아는 무작정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찾아야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보다 발버둥이라도 쳐야 한다는 필사적인 일념으로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베르텔기아는 어두운 공간 저편에서 희끄무레 비치는 폐허를 발견했다. “저기! 뭔가 있어!” 둘은 발걸음이 빨라졌다. 마침내 둘이 당도한 곳은 어느 주택 앞이었다. 그 주택은 베르텔기아보다는 아무개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2층 양옥주택?’ 그 집은 이계가 아닌 현실 세계, 아무개의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오래된 주택가의 집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흐음. 이상한 집이네. 이런 형태의 집은 본 적이 없는데. 단단해 보이는 것 빼고는 보기도 좋지 않고 뭔가 이상해.” 베르텔기아가 문 앞에 서서 감상을 말했다. “이건, 저쪽 세계의 집이야. 그것도 조금 오래 된.” 아무개가 대문 옆에 걸린 문패를 눈여겨보며 말했다. 한자를 못 읽는 그녀는 김이라는 성씨만을 알아볼 수 있었다. ‘김 아무개의 집이라. 어쩌면 이 집은 김성철의 옛집인지도 모르겠어.’ 아무개는 굳게 닫힌 대문으로 걸어가 문을 밀어보았다. 철컥. 문은 굳게 닫혀있다. 난감하다. 꿈속의 세계에서 그녀의 힘은 평범한 여성과 다를 바가 없었다. 따라서 벽을 투과하거나 담을 뛰어 넘어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다. 잠시 곤란을 겪던 아무개의 눈에 반가운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초인종이다. 그녀는 초롱초롱 눈을 뜨고 자신을 지켜보는 베르텔기아의 시선을 받으며 초인종에 손을 눌렀다. 삐약~ 삐약~ 삐약~ 아주 촌스러운 전자음이 울려 퍼졌다. “우왓!” 베르텔기아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뭐야? 이건!” “초인종이라는 거야.” “초인종? 뭐로 작동한 거지? 마법? 연금술?” “우리 쪽 세계의 기술이야.”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대문 쪽에서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린 것이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이 집 안에 누군가 있다는 소리다. ‘김성철은 이 안에 있는 게 틀림없어.’ 아무개와 베르텔기아는 열린 문안으로 들어갔다. 벽면에 가로막힌 콘크리트가 대부분인 아주 좁은 정원이 나타났다. 정원엔 빨간 대야와 칼로 중간 부분을 자른 호스를 이어붙인 수도꼭지, 낡고 녹이 슨 벤치 프레스 따위의 잡동사니가 무질서하게 널려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그중에 낯익은 물건을 발견했다. 싸구려 합성수지로 만든 목욕 오리다. “오크족이 만들었을까? 참 못 만들었네.” 아무개는 정원에 서서 집 전체를 둘러보았다. ‘90년대? 어쩌면 80년대에서나 볼 법한 집이야.’ 정원을 지나친 아무개와 베르텔기아는 현관으로 통하는 정문 앞에 섰다. 정문은 다행히 열려 있었다. 문을 열자 오래된 냄새와 함께 빛바랜 집안의 풍경이 드러났다. 좁은 복도엔 작은 인영이 있었다. 인간의 그림자다. 베르텔기아는 그것을 본 순간 그 모습이 자신이 애타게 찾는 김성철이라는 걸 한 눈에 알아보았다. 그녀는 그 검은 그림자를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 형씨! 거기서 뭐하는 거야! 회춘도 적당히 하셔야지!” 베르텔기아의 말을 들은 검은 그림자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을 본 아무개와 베르텔기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소년의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얼굴 없는 형체는 불청객을 힐끗 쳐다보고는 좁은 복도를 걸어 방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할까?” 아무개가 살짝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쫓아가는 수밖에 없잖아!” 베르텔기아는 이를 질끈 깨물고 앞장섰다. 방문 앞에 먼저 도착한 베르텔기아는 멀찌감치 서 있는 아무개를 노려보았다. “뭐하는 거야? 당신은 안 오고?” “내가 갈 필요는 없잖아?” “아니, 당신도 와야 돼!” 베르텔기아의 단호한 태도에 아무개는 한숨을 내쉬며 베르텔기아와 함께 문 앞에 섰다. ‘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베르텔기아가 문고리를 잡고 힘껏 열어 젖혔다. 끼익-. 평범한 가정집 안방이었다. 다만 그 안의 집기류는 아무개의 시대의 것보다 훨씬 옛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브라운관?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물건이네.’ 곧 아무개는 TV 앞에 멍하니 쪼그려 앉아 방송을 보고 있는 얼굴 없는 소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체 무엇을 보는 걸까. 아무개는 의문을 느끼며 TV 속의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날로그 TV의 브라운 관 안에선 뉴스 영상이 송출되고 있었다. 부부를 동반한 승용차가 빗길에 미끄러져 전신주를 들이받고 모두 사망했다는 내용의 비극적인 내용이었다. 그런데 TV에선 그 뉴스만이 반복해서 나왔다. 다른 내용은 일체 없었다. 타인의 죽음을 무덤덤하게 반복해서 말하는 아나운서의 음성과 그 뉴스를 미동도 없이 지켜보는 얼굴 없는 소년의 모습은 아무개로 하여금 섬뜩한 공포를 느끼게 했다. ‘뭐 이런 곳이 다 있어.’ 아무개는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었다. 더 있다가는 자신 또한 악몽에 빠져버릴 것 같았다. “저기. 리빙 북.” 아무개가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쉿!” 베르텔기아가 손가락으로 입을 막으며 아무개를 한 팔로 제지했다. 뉴스를 보던 얼굴 없는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소년은 베르텔기아와 아무개를 지나쳐 복도로 향했다. 베르텔기아는 아무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소년을 따라나섰다. 문을 나서자 풍경이 바뀌었다. 장례식장의 풍경이었다. 향불이 타고 있는 영전 앞은 고요한 슬픔에 젖어있는 반면 그 너머에 있는 빈소엔 떠들썩한 말소리와 더러는 흥청망청한 웃음소리마저 들려오고 있었다. 완전히 상반된 분위기. 얼굴 없는 소년은 고요한 영전 앞에 홀로 앉아 빈소에서 술을 마시고 떠들고 있는 얼굴 없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그 얼굴 없는 괴인들은 곧 이야기를 멈추고 일제히 홀로 앉아 있는 소년을 향해 걸어왔다. 불길한 느낌을 주는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소년의 발등까지 덮어왔다.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자들을 피해 달아났다. 베르텔기아는 아무개의 한 팔을 잡아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서 빨리!” 뒤에서는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괴인들이 느릿하게 걸으며 소년의 뒤를 쫓았다. 아무개는 달리는 와중 뒤에서 들려오는 괴인들의 소름끼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성철아. 삼촌 집으로 가자. 삼촌이 잘 돌봐줄게.” “무슨 소리. 고모 집으로 가야지. 성철이 내가 만든 돈가스 좋아하지 않니?” 순수한 악의와 탐욕으로 들끓는 목소리. 아무개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뭐야. 이 사람.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거야?’ 장례식장 바깥으로 나서자 또 한 차례 풍경이 바뀌었다. 오래된 학교였다. 교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깎은 소년들이 성큼 자란 얼굴 없는 소년을 둘러싸고 있었다. “애비애미도 없는 새끼!” “우리 반엔 얼씬도 하지마라!” 소년들이 얼굴 없는 소년에게 폭언을 가하고 있었다. 도를 지나친 폭언. 베르텔기아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얼굴 없는 소년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폭언을 듣던 소년의 가슴에 하얀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절망과 증오로 피어올린 불길. 심장에서 피어오른 그 불길한 흰색의 불꽃은 이내 빠르게 번져나가 소년의 전신을 불태웠다. 불길에 휩싸인 소년이 손을 내젓자 폭언을 하던 다른 소년들의 모습이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베르텔기아와 아무개 앞에 펼쳐진 학교의 풍경도 사라졌다. 풍경은 바뀌어 공작기계가 가득한 공장으로 변했다. 비린 쇳 내음이 코끝에 확 확 풍겼다. 거기서 얼굴 없는 소년은 여전히 하얀 불길에 싸인 채 묵묵히 프레스 기계를 조작하며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에게 다가왔다. “진짜 돈 될 만한 일이 있는데 어때? 조금만 빌려주지 않겠어? 우린 친구잖아? 일이 년 안 사이도 아닌데. 친구 하나 살린다고 생각하며 제발 좀 도와주라. 응?” 비굴한 목소리로 애걸복걸하던 그 사내는 갑자기 하얀 불길에 휩싸이더니 재로 변해 사라졌다. 그 불길은 얼굴 없는 청년에게 흡수되며 그 청년의 불길을 배가시켰다. 비슷한 인간들이 나타났다 불길로 사라지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인정과 의리에 기대며 얼굴 없는 청년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고 있었다. 반복되는 장면을 보며 베르텔기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보여주고 있는 거구나.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그녀의 짐작대로 그 얼굴 없는 청년의 정체는 김성철이었다. 증오를 땔감 삼아 스스로를 불태우며 버텨오던 사내 앞에 놓인 것은 예정된 비극이었다. 양초의 운명은 심지의 길이에 의해 결정된다. 아무리 초가 많이 남아 있더라도 촛불을 붙잡고 버틸 심지가 다해 버리면 그 불길은 결국 꺼져버린다. 얼굴 없는 청년의 불길은 빠르게 꺼졌다. 결국 그는 흥청망청한 유흥가에서 모든 걸 잃은 채 군중 속에서 고독하게 죽는다. 그것이 김성철이 이계로 오기 전의 인생이다. “…처참하네.” 아무개의 짧은 감상이었다. 소환 광장에서 수많은 애환을 지닌 사람을 보아왔지만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고독 속에 내몰려 비참하게 죽은 이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배신당하고 버림받고 그런 끔찍한 경험을 몇 번이나 했구나.’ 베르텔기아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김성철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인간이라기보다는 골렘 같은 기계장치에 가깝다고 느낀를. 다시 베르텔기아와 아무개 앞에 좁은 복도가 나타났다. 복도는 전과 달리 끝없이 뻗어 있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복도를 따라 걸었다. 수많은 문들이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그중 시험 삼아 하나를 열어 보았다. 문 너머엔 투기장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온 몸에 상처를 입고 숨을 헐떡이는 김성철 앞에 건재하면 다수의 적이 히죽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고 그 너머엔 수만 명에 이르는 관중들이 함성을 지르며 오직 그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황급히 문을 닫았다. 자신의 기억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당시 김성철이 느꼈을 공포감과 절망 그리고 철저한 고독을. “…….” 그러나 문을 닫고 난 직후 베르텔기아의 눈동자엔 오히려 결연한 빛이 감돌았다. 베르텔기아는 성큼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갔고 아무개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뒤를 따랐다. 좁은 복도에 난 수많은 문들. 그 안엔 김성철이 간직한 몇 안 되는 기억들이 보관된 장소였다. 좋은 추억은 많지 않았다. 그마저도 마지막엔 배신이라는 결과를 맞이한다. 가장 최근에 만들어 진 듯 깨끗한 문 안에서 베르텔기아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라이즈 하이메르와 크라이아 일가족의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 보는 얼굴 없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베르텔기아의 기척을 느끼고 돌아선 얼굴 없는 남자는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 난 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온 것일까? ] 그 사내는 짙은 허무감 속에서 하얀 불길에 쌓여 재가 되어 사라졌다. 처참하고도 비참한 기억. 하지만 그럴수록 베르텔기아의 마음은 더욱 강해졌다. ‘용케 버텼구나. 이런 끔찍한 기억 속에서.’ 베르텔기아는 작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반드시 불운한 사내를 구해내겠다는 의지가 가슴 속을 뜨겁게 달구었다. 곧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복도의 끝이 보였다. 그런데 복도의 끝자락에서 베르텔기아는 복도에 있던 다른 문과 철저히 구분되는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많은 자물쇠와 사슬로 꽁꽁 묶인 문이었다. 대체 무엇을 감추고 있는 것일까. 긴 복도 속에서 닫혀 있는 문은 처음이다. 베르텔기아는 강한 호기심을 느꼈지만 복도 너머에서 들려온 음성이 그녀의 주의를 그쪽으로 돌렸다. 복도 너머에서 거역하기 어려운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자, 대답해라. 김성철. 너의 뜻은 어떠한가?” 다음 순간, 또 하나의 목소리가 복도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나는 신의 도구가 되겠다.” 베르텔기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계단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 그것은 김성철의 목소리였다. ======================================= 106. 도구 그리고 인간 (2) 베르텔기아는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뛰어갔다. 복도의 끝에 이르자 눈 부신 빛이 베르텔기아의 눈동자를 찔러 들어왔다. 베르텔기아는 눈을 찡그린 채 손으로 눈으로 눈을 가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계단이었다. 무한함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우주가 배경처럼 펼쳐진 일직선으로 뻗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이었다. 그 끝에 김성철이 앞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베르텔기아의 눈엔 그것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 있는 것 같은데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김성철이 바라보는 대상 옆에 빈대처럼 붙어 알랑거리고 있는 희끄무레한 형체가 전부였다. “좋다. 김성철. 너는 도구가 되기를 스스로 선택했다. 하지만 그 전에 답해줘야 할 것이 있다.” 베르텔기아는 아까 들었던 거역하기 어려운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저 형체라는 것을 발견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그녀의 눈에 비친 김성철은 허공을 바라보며 희끄무레한 형체와 대화를 이어나가는 거로 보였다. 뒤늦게 아무개가 헐레벌떡 현장에 도착해 베르텔기아 옆에 섰다. “대체 여긴 어디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아무개의 말에 베르텔기아는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 쉿 하는 소리를 내며 김성철의 행동을 굳은 얼굴로 지켜보았다. “도구로서 너는 무엇을 달성하길 원하느냐?” 희끄무레한 형체의 얼굴은 결코 볼 수 없었지만, 베르텔기아는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웃고 있다. 더러운 열락과 기대에 젖어 뒤틀린 증오를 웃음이라는 형태로 발산하고 있다. ‘저 놈은… 나쁜 놈이야!’ 베르텔기아의 몸이 떨렸다. 정신병자만 보면 몸을 떠는 습관은 인간의 형태로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재앙의 해결.” 아무 감정도 뜻도 담기지 않은 음성으로 김성철이 말했다. ‘저건, 평소의 저 인간이 아니야.’ 누구보다 김성철에 대해 잘 아는 베르텔기아는 한 눈에 김성철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굴복당한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함부로 고개를 숙이지 않던 사내가 저 희끄무레한 정체불명의 괴인에게 말이다. 정상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희끄무레한 형체에게서 느껴지는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이윽고 그 형체가 말했다. “그것만은 아닐 텐데? 김성철. 네가 원하는 거 또 하나 있지 않나? 너를 그렇게 만든 이 잘못된 세상을 그냥 놔두겠다고?” “…….” 김성철은 즉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일까. 그때 아무개가 손가락 끝으로 김성철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저건 뭐지?” 아무개의 손끝을 보고 베르텔기아는 비로소 김성철의 머리 위에서 돌아가고 있는 강철의 수레바퀴를 보았다. ‘저건, 뭐지?’ 그녀는 강철의 혼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넘어지려는 남자를 지지하고 있는 마지막 버팀목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베르텔기아가 소매를 걷고 앞으로 나섰다. “어이! 거기! 당신!”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김성철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김성철은 입을 살짝 벌린 채 잠꼬대를 하듯 무언가를 웅얼거리고 있었다. 베르텔기아의 음성에 반응한 것은 희끄무레한 형체뿐이었다. “호오? 이 꿈의 세계에 불청객이 들어왔군. 기이한 일이군. 안개여정은 드래곤 일족의 손에 있을 터인데.” 희끄무레한 형체가 베르텔기아와 아무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음 순간, 베르텔기아는 온몸이 세포 단위로 터져나갈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시선만으로 이 정도의 감정의 격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존재는 처음은 아니었다. 베르텔기아는 순간 생각했다. 언제 이런 느낌을 받았는지. 그것은 오래되지 않은 비교적 신선한 경험이다. 그 덕에 베르텔기아는 자기도 모르게 하나의 단어를 입 밖에 낼 수 있었다. “당신은.... 질서신?” 이에 희끄무레한 형체는 숨을 옥죄던 시선을 풀고 실소를 터뜨렸다. “어이가 없군. 하등생물의 통찰력이란. 질서와 가장 거리가 먼 속성을 부여받은 이 내가 그런 위선자이자 배신자와 비견되다니 말이다. 하지만, 네 눈이 아주 잘못되진 않았다는 건 인정하지. 적어도 너는 신성(神性)을 알아봤으니까.” 잔혹하고 높낮이가 제각각인 거만한 음성을 들으며 베르텔기아는 이 희끄무레한 형체에게서 혼탁한 흙탕물 혹은 아무렇게나 그려진 물감의 배열을 떠올렸다. ‘뭐지 이놈은? 질서신은 아니야. 하지만 같은 급으로 보여. 그렇다면 뭐지? 중립신? 아니 그것과는 거리가 멀어. 고대신의 분위기도 아니야. 그렇다는 이야기는...?’ 생각이 거기까지 닿는 순간 베르텔기아는 꺼림칙한 시선이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훑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감각을 느꼈다.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이 저 괴이한 존재에게 들여다보임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어 희끄무레한 형체가 말했다. “잘 유추했군. 리빙 북. 내가 바로 이 없어져야 할 세상의 다섯 주신 중 하나, 혼돈신이다.” 그 한마디는 장내에 폭풍을 몰고 왔다. 베르텔기아의 몸이 한 차례 흔들렸고 아무개는 아예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보다 큰 충격을 받은 건 아무개였다. “뭐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그녀는 이미 제정신을 잃고 있었다. 혼돈신에게 처음 받았던 압박과 그 이름을 들은 충격이 합해져 그녀를 주저앉게 한 것이다. 아무개는 결코 강한 사람이 아니다. 혼돈신이라 칭한 존재는 아무개를 보고 피식 웃으며 빈정거렸다. “도구만도 못한 벌레군.” 다음으로 혼돈신은 베르텔기아를 바라보았다. “하긴 대부분의 인간은 늘 도구 이하의 존재야. 웃기지 않나?” 그걸로 혼돈신의 용무는 끝이 난 거로 보였다. 그는 멍하니 석상처럼 서 있는 김성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머리 위에서 회전하고 있는 강철의 수레바퀴는 점점 그 힘을 잃고 회전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수레의 살을 셀 수 있을 정도로 느려진 그 순간 혼돈신은 김성철에게 부드럽게 속삭였다. “자, 어서 말하라고. 그날 너는 내게 무엇을 말했는지? 네가 원한 건 그 시답잖은 재앙의 해결이 아니잖아. 그건 핑계고. 어서 말해. 너의 진정한 욕망을.” 혼돈신의 눈이 번득였다. “모든 것의 파멸을.” 그는 강요하고 있었다. 김성철으로 하여금 그 말을 하게끔. 머뭇거리던 김성철이 인형처럼 멍한 눈으로 앞을 응시하며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야!” 베르텔기아가 다시 한 번 김성철을 불렀다. 김성철은 반응하지 않았다. 혼돈신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네가 뭐라고 하던 이 도구는 널 돌아보지 않을 거다. 내 오랜 교정으로 인해 이 도구에겐 이제 생각이란 건 존재하지 않게 되었거든?” 실로 김성철의 몸과 정신은 이미 혼돈신의 것이 되어 있는 걸로 보였다. 베르텔기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김성철의 정신을 차리기 위한 한마디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때 기적 같은 반짝임이 김성철의 코트 안쪽에서 번쩍였다. 궁극 요리인의 브로치다. 베르텔기아는 처음으로 그 브로치에 감사하며 작은 몸에서 모든 힘을 쥐어짜내 소리 질렀다. “야! 삼류 요리사!” 그 울림은 다른 울림처럼 공허하게 계단 너머로 울려 퍼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잠시 후, 김성철의 행동에 작은 변화가 일었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삼류… 요리사…?!” 김성철이 반응을 보였다. 희망을 발견한 베르텔기아는 더욱 거세게 소리 질렀다. “그래 이 삼류 요리사야! 당신이 만든 음식은 진짜 맛없어!” “뭐라고?!” 김성철이 재차 반응했다. 베르텔기아는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당신이 만든 끔찍한 음식을 먹을 바에 리자드맨이 먹는 밀웜 스페샬이나 처먹겠어!” “이 무슨 망발이냐? 감히 내 요리를 모독하다니!” 김성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답지 않은 시원함 감정 표현. 흐릿했던 그의 동공에 총천연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베르텔기아는 눈가에 눈물이 핑 도는 걸 느꼈다. ‘드디어 정신 차렸구나! 이 바보!’ 김성철은 비로소 긴 잠에서 깨어난 기분을 느꼈다. 너무나도 오래되고 지긋지긋한 벗어날 수 없는 꿈에서 말이다. 김성철의 기도가 마침내 통했다. 하지만 베르텔기아의 난입은 되풀이되는 악몽을 종식시키는데 그쳤다. 김성철이 안고 있는 마음의 짐, 그 무게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고 그는 여전히 꿈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다. ‘베르텔기아.’ 김성철의 눈동자에 흐릿한 슬픔과 두려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김성철은 한숨을 내쉬며 베르텔기아에게 말했다. “베르텔기아. 미안하지만 창조술사의 길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어.” 김성철의 마음은 다시금 어둠 속에 젖어 들었다. “내 운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날 버리고 떠나라.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아델화이트를 찾아가라. 정령계 속에서 너는 편안히 살 수 있을 것이다.” 김성철의 얼굴에 서린 것은 체념이라는 이름의 어둠이었다. 누군가 강요해서 만든 어둠이 아니다. 스스로 만들어 낸 어둠이다. 베르텔기아는 모처럼 정신을 차린 김성철이 왜 저런 행동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알게 될 순간이 왔다. 혼돈신이 메마른 웃음소리를 내며 김성철과 베르텔기아 일행 앞에 커다란 거울상을 펼쳐 그 안에 어떤 장소를 보여주었다. 두근. 경이로운 심장의 박동 소리가 거울상을 통해 들려왔다. 베르텔기아는 거울상의 중심에서 낯익은 물건을 볼 수 있었다. 약동하는 고대신의 심장. 그렇다 그곳은 제도의 지하에서도 가장 은밀한 구역이다. 고대신의 심장 옆엔 황금 갑주를 걸친 황제가 근심 어린 얼굴로 옆을 지키고 서 있었다. “어이. 김성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네 친구가 엄청난 일을 저지르려고 가슴을 졸이고 있다고!” 곧 거울상 속의 황제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을 폭주시킨다면 다수의 악신을 불러올 수 있다. 그걸로 제도를 지키고 내 제국을 지탱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크롬갈드 놈의 계획을 막을 수 있다.” 거울상에 비친 황제에게선 더 이상 만인의 위에서 군림하던 군주의 기상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엄지손톱을 깨물며 혼잣말을 하는 그는 지치고 초조하고 절박한 작은 남자로 변해 있었다. 김성철의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베르텔기아는 그제야 저 혼돈신이 무엇을 빌미로 김성철을 잡아두었는지 알 것 같았다. 혼돈신은 너저분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황제의 거울상 바로 옆에 또 하나의 거울상을 만들어냈다. 그 거울상 안엔 다인크래프트, 아르카나이트 등의 군주들이 한자리에 모인 군막 안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군막 안에 한 사내가 들어왔다. 김성철의 눈썹이 또 한 차례 꿈틀거렸다. ‘슈넬메르커? 저 녀석이 어떻게 연합군의 군막에?!’ 김성철은 종말교단이 패퇴하는 연합군의 후위를 지킨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아무튼, 그 종말교단의 부교주는 모든 군주가 보는 앞에서 사근사근하고 조리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황제가 배신하고 대원수가 쓰러진 지금, 우리에게 남은 희망은 한 명의 왕을 만드는 것 외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슈넬메르커는 그렇게 말하고는 구석에 입을 꾹 다문 채 앉아 있는 크롬갈드를 힐끗 응시했다. 혼돈신의 웃음소리가 높이 울려 퍼졌다. “보아라. 김성철. 저 추잡한 인간들의 모습을. 지금 네가 이 꿈에서 깨어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을까?” “…….” “설령 그들이 변한다고 해도 질서신과 그 멍청한 동생인 중립신이 널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질서신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김성철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였다. 그의 몸에 흐르는 신적인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김성철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짙어졌고 그에 반비례하여 혼돈신의 눈에 서린 광기 어린 빛을 밝기를 더했다. 뒤이어 혼돈신의 흥분으로 고조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사실을 받아들이고 도구가 되는 거다. 진정한 신의 도구가. 그렇게 해야만 너는 네 몸 안에 숨겨진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몸 안에 숨겨진 힘…!” 김성철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그 신을 참칭 하는 자마저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 말이다.” 은은한 검은 기운이 그의 몸을 덮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 위에서 회전하던 수레바퀴가 정지했다. 베르텔기아는 멈춰버린 수레바퀴 아래 흐릿한 검은 기운에 잠식되기 시작한 김성철의 심장 부근에 꽂힌 불길한 맹약의 십자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김성철이 베르텔기아의 시선을 의식하고 뒤돌아보았다. “가라. 베르텔기아. 나는 더 이상 너의 주인이 아니다. 도구가 어떻게 도구를 거느릴 수 있겠느냐?” 눈을 감은 채 김성철이 말했다. 힘없는 목소리. 베르텔기아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의 김성철에겐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혼돈신이 조소하며 베르텔기아에게 말했다. “한 가지 알려주지. 도구. 너에겐 너도 모르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그 결함이 너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저 인간을 체념으로 몰아넣은 것이지.” 그때 김성철의 목소리가 혼돈신의 말을 가로막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김성철의 목소리엔 날이 서 있었다. 혼돈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한편 혼돈신의 한 마디가 던진 파장은 결코 적지 않았다. “나의… 결함?” 그 순간 베르텔기아는 인식했다. 자신이 알지 못하던 그러나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던 불길한 가능성을. 문득 베르텔기아의 뇌리에 한 가지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계단에 이르기 전 복도에 나열된 수많은 문 중 유일하게 굳게 닫히고 자물쇠가 걸린 문이었다. ‘설마. 그게?’ 김성철의 반응이 모든 걸 말해준다. 확신이 섰다. 베르텔기아의 푸른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어둠으로 젖어 들어가는 김성철을 바라보며 뒤로 돌아섰고 급히 뛰어갔다. 주저앉은 채 반쯤 정신을 잃었던 아무개는 그제야 황급히 놀라 베르텔기아의 뒤를 쫓았다. 빛이 걷히고 우울한 어둠에 싸인 좁은 복도가 둘 앞에 펼쳐졌다. 베르텔기아는 그 복도의 맨 앞에 있는 닫힌 문 앞으로 달려갔다. 몇 중의 사슬과 자물쇠로 잠긴 문. 베르텔기아는 문을 묶어놓고 있는 사슬을 작은 손으로 잡았다. 김성철이 기어코 감추려고 했던 비밀의 문이 열리려 하고 있었다. ======================================= 106. 도구 그리고 인간 (3) 철컥. 단단해 보이는 사슬은 그러나 그녀의 손이 닿는 것만으로 모래로 만든 밧줄처럼 스러졌다.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여전히 겁에 질린 아무개가 출구를 찾았다. “아직은 안 돼.” 베르텔기아는 아무개의 손을 잡고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당신이 나가면 나도 여기서 함께 나가야 돼.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영원히 기회를 잃게 되는 거야.” 언제부터였을까. 좁은 복도 전체에 검은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직은 미약한 불길. 그러나 그 불길은 곧 복도 전체를 뒤덮고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이다. “시간이 없어.” 베르텔기아는 아무개에게서 시선을 떼며 문고리를 잡았다. 문고리를 잡는 순간 베르텔기아는 느낄 수 있었다. 문고리에 응어리져 있던 감정을. ‘이것은 슬픔...? 아니 두려움이야!’ 두려움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상실에서 나온다. 따라서 잃을 게 없는 자는 두려운 게 없다. 더이상 잃을 게 없는 김성철이란 사내에게 두려움이란 감정을 가져다준 것은 이 문 너머에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굳은 얼굴로 문고리를 돌렸다. 문 너머엔 석벽으로 둘러싸인 원형의 공간이 나타났다. 그 중심에 선 재앙의 서가 무심하게 베르텔기아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재앙의 서를 본 순간 베르텔기아는 기이한 감각을 받았다. ‘뭐지? 이건.’ 전에는 느낄 수 없던 감각. 그것은 아마도 이 공간이 단순히 김성철의 기억에 의해 재현된 것뿐만 아니라 그의 감정 또한 녹아들어가 있을지도 모른다. “여긴 은자의 탑 재앙의 서 보관고 아니야?” 아무개가 뒤늦게 풍경을 알아보고 소리내어 말했다. 곧 베르텔기아와 아무개는 재앙의 서 반대편에서 김성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전히 얼굴이 없는 그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살짝 앞으로 걸어가 김성철이 누구를 보고 있는지 살폈다. 책이다. 베르텔기아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49호? 아니, 49호와는 느낌이 달라.’ 뒤이어 베르텔기아의 것과 똑 닮았으면서도 전혀 느낌이 다른 차가운 목소리가 원형의 홀 안에 울려 퍼졌다. “저는 베르텔기아 55호입니다.” 처음 보는 타입. 베르텔기아는 기억해냈다. 당시 자신은 그 자리에 없었음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탑 안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느낌을 말이다. 얼굴 없는 김성철과 베르텔기아 55호는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라이즈 하이메르와 신룡의 일족 같은 이야기가 중심 주제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과거로 통하는 문에 자물쇠를 걸 이유는 없다. 베르텔기아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무거운 목소리가 저편에서 울려 퍼졌다. “…너와 비슷한 녀석을 본 적이 있다.” 김성철의 목소리. 아무개는 베르텔기아의 옆모습을 힐끗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이 아이….’ 베르텔기아는 두 손으로 치맛단을 꾹 쥐고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김성철과 그리고 자신과 같은 이름을 지닌 책을 노려보고 있었다. “응? 누구 말이죠?” 55호가 특유의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섞이지 않은 음성으로 물었다. 김성철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익시온이라는 나라에 있을 때 한 녀석이 내 앞에 나타나 퀘스트를 의뢰하더군. 데스포트를 처리하라고. 너와 비슷한 녀석이었지만 사뭇 분위기가 달랐어.” “그래? 혹시 그 아이. 무뚝뚝했나요? 마치 기계처럼?” 김성철은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 아이는 49호라고 생각해요. 아버님을 옆에서 모시는 건 이쪽이지만 아버님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건 49호가 주로 담당하거든요. 그런데 전 그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왜지?” 그 물음에 55호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물들었거든요. 인간 세상에 너무 오래 있었던 거죠.”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베르텔기아는 그녀의 말속에서 은밀한 경멸감을 느낄 수 있었다. “소환궁전에 있는 것도 너의 자매인가?” 김성철이 물었다. 베르텔기아는 그 물음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내려 앉는 걸 느꼈다. 김성철의 물음은 베르텔기아 자신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었기 때문이다. 베르텔기아의 커다란 눈이 더욱 커졌다. 아무개는 말없이 그런 베르텔기아의 옆모습은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뒤이어 55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환궁전? 아 튜토리얼 코스에 있던 애들을 말하는 건가요? 아까 바깥에 있던 그것을 말하는 거죠?”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55호의 말에 악의는 없었지만, 베르텔기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그 아이들도 자매는 맞아요.” “일단... 이라니?” “같은 자매라고는 해도 그 아이들은 아무 능력도 없는 양산형이거든요.” “양산형이라고…?” 김성철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놀랄 것이다. 그가 이 정도의 감정의 진폭을 보이는 것은 거의 볼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지금 김성철은 그 정도 흔들림을 보일 정도의 경악을 보였다. “베르텔기아라는 건 아버님 친딸의 이름이 맞아요. 하지만 그 여자는 자신의 모친과 함께 아버님을 버리고 떠났죠.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이 우리 베르텔기아 타입. 세상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한 거룩한 아버님의 도구죠.” “…….” 베르텔기아가 자기도 모르게 양손으로 벌어진 입을 가렸다. 틀어막은 양손 사이로 숨넘어갈 것 같은 경악의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무개는 두 눈을 감았다. ‘편의로 만들어진 도구. 이게 이 아이의 정체였구나.’ 충격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55호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베르텔기아 타입은 여러 종류가 있어요. 1호에서 7호까지는 거신 운용형. 8호에서 30호까지는 인공영혼 시제 운용형. 31호부터 54호는 전투 임무형. 그리고 55호부터는 통합 자율사고형. 베르텔기아의 궁극 진화형이죠.” 그렇게 말하는 55호의 목소리엔 감출 수 없는 자부심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신이 최고의 모델이라는 자부심. 베르텔기아는 온몸에 오한이 스미는 걸 느꼈다. 뒤이어 김성철이 말했다. “베르텔기아. 바깥의 베르텔기아는 어떤 모델이지?” 김성철은 바라고 있었다. 베르텔기아가 에크하르트에 의해 만들어진 양산형이라고 해도 최고의 모델이기를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엄혹했다. “아. 그 아이요? 그 아이는 저와 같은 모델이 아니랍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저보다 만들어진 시기는 앞서지만, 완성 자체는 저희보다 느려요.” “베. 베르텔기아는 몇 호지?” “양산형은 100호부터 넘버링이 시작돼요. 아마도 백몇 호겠죠. 정확한 건 직접 봐야 알겠지만,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어요. 알 필요도 없고.” “그…. 그런가?” 김성철의 말에 55호는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무자비하게 말했다. “튜토리얼 코스에 있는 어중이떠중이 신참 소환자 상대로 지급되는 ‘물건’ 같은 건데 좋은 걸 줄 리가 없잖아요? 어차피 주인이 죽으면 같이 없어질 애들인데.” “…….” 진실은 엄혹했다. 베르텔기아에게나 김성철에게나. 그리고 한 번 열린 진실은 쉬지 않고 휘몰아친다. “걔들도 베르텔기아란 이름을 쓰긴 하지만 우리 같은 정식 넘버링이 있는 자매들은 걔들을 자매로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그 아이로 하여금 이곳에 못 오게 정신 파장을 보낸 것도 그 때문이고요.” “그런가…? 베르텔기아는 에크하르트의 딸이 아닌 건가?”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 아이가 그랬나요? 자기가 아버님의 딸이라고?” “…….” “어이가 없네요. 뭐, 그렇게 믿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아무튼, 그 아이는 물건일 뿐이에요. 렐름에 처박힌 아버님을 버린 여자를 세상에 다시 끄집어내기 내기 위한 도구. 뭐, 대충 그런 것. 자세한 건 당신이 직접 확인해 보는 게 좋겠네요.” “알겠다.” “당신은 그 아이에게 정을 지닌 것 같네요. 아무튼, 지금의 현실이 지속하길 원한다면 창조술사 같은 건 포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당신에게나, 그리고 그 아이에게나.” “그건 무슨 의미지…?” 공간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이 방의 기억이 끝에 이른 것을 충격 속에서 감지했다.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한 공간 너머에서 55호의 마지막 음성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의무를 다한 기계는 작동을 멈춰요.” 그것이 김성철이 감추려고 했던 기억. 그의 두려움이다. 어둠이 방안을 완전히 뒤덮었을 때 베르텔기아와 아무개는 검은 불길이 타오르는 좁은 복도로 돌아와 있었다. 불길이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세졌다. “…….” 베르텔기아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충격이 클 수밖에 없으리라. 아무 사정도 모르는 아무개조차 알 수 있을 정도로 베르텔기아의 진실은 가혹하기만 했다. ‘사람처럼 행동하고 움직이는 이 아이가 그저 1회성 도구였다니.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누구라도 충격을 받을 수밖에.’ 그보다 지금은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다. 불길은 침묵에 잠긴 와중에도 점점 복도 전체를 태워버릴 것처럼 커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이 세상이 무너진다. “저기. 베르텔기아.” 아무개가 처음으로 베르텔기아의 이름을 불렀다. 베르텔기아는 그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언제나 밝게 빛나던 푸른 눈동자엔 보석 같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 눈물은 이윽고 홍조를 띤 뺨을 흘러내리며 검은 불길이 타오르는 바닥에 떨어졌다. 그때였다. 아주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아무개는 절망 속에서 작은 기적의 꽃이 피어오르는 걸 보았다. “…난 도구가 아니야.” 베르텔기아가 말했다. 두 주먹을 굳게 쥐고 이를 악물면서. “난 도구 따위가 아니라고!” “…….” 헛된 발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개는 볼 수 있었다. 베르텔기아의 작은 체구에서 복도 전체를 태우는 검은 불길보다 더 강한 의지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것을. “도구라는 건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사람의 손에 휘둘리는 거야. 나는 내 생각이 있고 내 뜻대로 움직이고 있어.” 베르텔기아는 아무개를 바라보았다. “어떤 운명이 닥치던지 그건 중요하지 않아. 적어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기 전까지 나는 도구 따위가 아니야.” “…베르텔기아.” 아무개는 가슴 속에 무언가 움직이는 감각을 받았다. 베르텔기아는 갑자기 춤을 추듯 양팔을 벌리고 한 바퀴 회전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봐, 이 꿈의 세계에서 이렇게 예쁜 얼굴과 뛰는 심장이 있는데. 내가 도구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그렇지 않니? 얘들아?” 베르텔기아가 뒤를 돌아보자 여덟 마리의 귀여운 소동물이 나타났다. 카벙클들이다. 김성철의 몸에 맞닿은 영혼석의 카벙클이 진정한 주인의 부름에 응해 베르텔기아 앞에 나타난 것이다. “뀨잉?” 베르텔기아는 무릎을 굽히고 손을 뻗었다. 주먹만한 카벙클들이 베르텔기아의 손을 타고 팔을 따라 줄줄이 올라가 가녀린 어깨와 머리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베르텔기아의 몸이 너무 작았기에 한 마리는 올라타지 못했다. 베르텔기아는 그 한 마리를 양손으로 안고 아무개에게 건넸다. “카벙벙. 미안하지만 이 언니에게 안기렴.” “뀨우...” 카벙클은 내숭 따위 부리지 않는다. 아무개는 묘한 분노를 느끼면서도 베르텔기아가 내미는 카벙클을 받아들였다. 카벙클을 받아드는 순간 아무개는 갑자기 머릿속에 따뜻한 무언가가 흘러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절망과 고통으로 가득 찬 이계 속에서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그리운 감각. 그것은 베르텔기아와 김성철의 마음이다. 그들의 따스한 마음이 마음과 마음을 전하는 힘이 있는 카벙클을 통해 아무개에 전해진 것이다. ‘따뜻해. 이것이 세계의 적과 베르텔기아의 마음?’ 베르텔기아를 바라보는 아무개의 시선이 변했다. 처음엔 의문, 경계에서 연민의 빛을 띠었던 눈동자에 따스한 애정과 이해의 빛이 반짝이기 시작한 것이다. “가요. 언니.” 베르텔기아가 이전과 달리 살갑게 말했다. 아무개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소녀의 목소리에 담긴 힘이 아까 계단 바깥에서 들었던 혼돈신의 목소리보다 더 거역하기 어려운 힘이 담겨 있음을. 아무개의 얼굴에 비로소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실로 오랜만에, 그것도 파멸의 검은 불길로 타오르는 공간에서. ======================================= 106. 도구 그리고 인간 (4) 아주 먼 옛날 다른 세계에서 신도를 잃고 버림받은 신이 그곳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신도들의 타락을 방관한 나머지 자신의 신도들이 사멸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신은 이곳만큼은 다른 세상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그는 사람들의 가능성을 믿었다. 모든 사람이 성공의 가능성을 믿고 노력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마음껏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세상. 그것이 그가 바란 세상이었다. 그는 인간의 체제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체제 그 자체가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는 데에서 인간의 타락이 온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다수의 잘못을 타파할 한 명의 초인이 등장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9개의 주요 능력치를 골자로 하는 세계의 기틀은 그렇게 탄생 됐다. 그의 세심한 배려와 관심 속에서 인간들은 저마다 자신의 재능과 장기를 살리며 새로운 세계의 꿈과 같은 나날을 마음껏 만끽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은 자신의 힘이 다해감을 깨닫고 자신을 대신해 이 세계를 다스릴 존재를 찾았다. 불멸자, 후에 아신이라 불리게 되는 존재들이 등장했다. 신을 받드는 아홉 명의 현인들은 기꺼이 신의 던전에서 인간 위의 인간, 즉 아신을 만들어내기 위한 시험관이 되었다. 처음에 아신은 인간 중에 가장 뛰어난 자만이 선발될 수 있었고 그 수명 또한 무한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친 신을 대신해 세상을 관장하며 무한한 신의 권능 속에서 스스로를 희생하며 봉사했다. 하지만 모든 것엔 끝이 있다. 트로이메아와 키레. 두 개의 도시가 있었다. 인류의 가장 큰 거점인 두 도시는 서로 경쟁하고 때로는 상생하며 인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의 흐름 끝에 두 도시를 둔 본질은 왜곡되어 그들의 상생은 증오로 변했고 경쟁은 전쟁으로 변했다. 그들의 타락을 지켜보던 신은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인간으로부터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대신 그는 자신을 대신해 인간 세상을 지배할 대리인을 내세우려 했다. 신의 던전의 아홉 현인들은 그 자리를 사양했다. 신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막중한 책임을 지는 자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대신 해서 인간 중에서 네 명의 후보가 선정됐다. 그들은 키레의 엔키아두사, 디르고와 트로이메아의 알레옥고스, 쿤키도. 두 개의 경쟁도시에서 선발된 최고의 인물들이다. 키레의 최고사제였던 엔키아두사는 질서신이 되었다. 그의 동생인 디르고는 중립신이 되었다. 한편 트로이메아의 최고령자이자 현인으로 칭송받던 알레옥고스는 고대신이 되었고 젊고 자유분방한 천재 쿤키도는 혼돈신의 이름을 받았다. 그들은 처음엔 신을 대신해 혼란스런 세상을 잘 다스리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트로이메아와 키레의 경쟁은 그들이 불멸자가 되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야심가인 엔키아두사가 먼저 일을 벌였다. 그는 신이 눈을 돌린 틈을 타 신의 던전에 자신의 심복을 심어두고 자격미달의 인간들로하여금 막대한 능력치를 얻게 하여 불멸자로 승천시키는 꼼수를 부렸다. 불멸자의 수는 곧 그 세력의 힘과 같았다. 뒤늦게 트로이메아의 주신들도 질서신이 했던 것과 비슷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나마 인간 중에서 뛰어난 인간들만이 불멸자가 될 수 있었지만, 나중에 와서는 그야말로 개나 소나 불멸자가 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어제의 강간범, 도둑, 사기꾼이 다음날 아신으로 승천하는 꼬락서니를 보는 일은 이제는 새로운 것도 없는 일로 전락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신은 분노했다. 그는 네 명의 주신을 견제할 세력이 필요하다 보고 다섯 번째 주신을 만들려고 했다.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네 명의 주신을 관장할 관리자를.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질서신은 중립신과 짜고 자신을 신으로 만들어 준 이 세계의 신에게 위해를 가했다. 자신의 창조물에 불의의 일격을 당한 신은 눈을 감았고 이 세상은 죽어가기 시작했다. 신이라 불리지만 신의 권능은 없었던 질서신은 그러나 이 세상을 유지할 방법을 찾아냈다. 재앙. 후대의 인간들을 연료로 삼아 현재의 자신들의 행복과 영원을 유지하는 극악무도한 시스템. 그것이 이 세상의 진실이다. “…….”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혼돈신의 입을 통해 들은 이 세계의 진실은 상상 이상으로 더럽고 지저분했다. 김성철은 떠올렸다. 소환궁전에 소환되기 직전, 저쪽 세계에서 보냈던 최후의 시간을. 그때 그는 영하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유흥가의 뒷골목에 쓰러져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한 사내가 다가왔다. 그가 김성철에게 말했다. “낙원을 원하는가?” 어떤 설명도 없는 단도직입적인 물음. 김성철의 답은 자명했다. 하지만 그 낙원의 실체가 설계된 지옥이었다니. 김성철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 증오의 불길이 타올랐다. “…이런 세상을 구할 가치가 있을까?” 잊은 줄 알았던 불쾌한 기억이 하나둘 의식을 덮어나간다. 세상을 구하고자 모든 것을 버리고 분연히 떨쳐 오른 이에게 이 세상은 어떤 대접을 했던가? 한 잔의 물조차 내민 적이 있었던가? 결단코 없다. 모두가 김성철을 조롱했고 두려워했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은 어떤가? 김성철이 쓰러졌을 때 한 명이라도 그를 구하기 위해 나선 이가 있었던가? 없다. 그는 철저히 버림받았다. 가장 믿었던 친우에게조차. 이 세상의 인간들에겐 가망이 없다. 검은 불길이 그의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강철의 수레바퀴는 더 이상 회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분노는 자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혼돈신은 단지 김성철의 분노를 부추겼을 뿐이다. 베르텔기아와 아무개가 다시금 계단의 풍경에 나타난 것은 그즈음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그들은 검은 불길에 휩싸인 김성철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변하고 있었다. 세상을 파멸할 검은 거인으로, 다행히 검은 불길은 아직 그의 좌반신만을 덮고 있었다. 혼돈신의 웃음소리가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이미 늦었다. 리빙 북. 이미 나의 도구는 세상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찼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이 세상의 파멸. 도구로서의 그의 목적이 위대한 신의 목적과 같은 방향을 띠었다.” 계단 너머 검은 불길에 뒤덮인 김성철이 서 있었다. “…….” 지금 김성철의 눈에선 비할 바 없는 허무와 증오의 감정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혼돈신은 베르텔기아를 다시 지그시 바라보았다. 베르텔기아는 한 마리 뱀이 몸 안 구석구석을 훑는 듯한 역겨운 감각을 다시 한번 느끼고 주먹을 꼭 쥐었다. 뒤이어 혼돈신이 조롱조로 말했다. “확인한 모양이군. 이 사내가 꼭꼭 감추려고 하던 진실을. 어리석기도 하지. 작별인사라도 하러 온 건가? 리빙 북?” 그 목소리를 들은 김성철이 베르텔기아를 돌아보았다. “베르텔기아.” 김성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를 빠져나가라. 이수진과 함께.” 그의 목소리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동화되고 있었다. 내면에 숨겨진 검은 거인에게. 모든 가능성이 부정되고 있는 절망의 세계에 어울리는 음울한 울림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의 잔향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맑고 깨끗하며 낭랑한 음성이 뒤이어 울려 퍼졌다. “전부 봤어. 당신이 내게 감추던 것을.” 베르텔기아가 말했다. 김성철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약간의 움직임이 있다. 베르텔기아는 그 약간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고 다시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55호라고 했었지?” 그 한 마디는 효과가 있었다. 인간의 모습을 유지한 우반신엔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지만 검은 불길로 휩싸인 좌반신의 눈은 멀리서도 변화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휘둥그레 커졌다. 베르텔기아는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도구라며? 그것도 별 볼 일 없는 양산형이라며?” “…베르텔기아.” 검은 거인으로 변하지 않은 나머지 반신의 입에서 회한 어린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치명적인 진실을 감추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던가. 베르텔기아의 미움을 받는 걸 참작하고서라도 지켜야 할 비밀이었다. 그런데 베르텔기아가 그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자신이 에크하르트의 딸이긴커녕 에크하르트를 모시는 수많은 책 중에서도 물건 취급을 받는 열등한 존재라는 것을. ‘그것만은 알려주고 싶지 않았는데.’ 김성철을 태우는 불길이 더욱 짙어졌다.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익숙한 권태감 속에서 김성철은 검은 불길이 나머지 우반신마저 집어삼키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무력감을 느낀 채 의식이 희미해지도록 놓아두었다. 그때였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다는 거지?” 베르텔기아가 불쑥 말했다. 김성철의 신형이 가볍게 떨렸다. ‘뭐가 중요하냐고?’ 김성철이 그 의미를 생각하려고 머리를 굴리려고 할 때 베르텔기아의 낭랑한 음성이 비수처럼 흐릿한 그의 의식을 꿰뚫고 들어왔다. “나는 나야. 베르텔기아. 누가 뭐라고 하던 나는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머리도 좋고 손재주도 뛰어나고 연금술도 척척박사인 코디아 마을의 여왕벌 베르텔기아라고!” 과할 정도의 자기애. 그러나 그것은 메말라가던 김성철의 감정에 청량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김성철의 나머지 반신을 덮어나가던 불길이 주춤했다. 베르텔기아는 그 작은 성공을 눈에 담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의 사명이 재앙의 해결인 것처럼 내게도 주어진 사명이 있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창조술사의 길로 이끌 거야!” 베르텔기아는 부르짖고 있었다. 김성철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작은 소녀의 말에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몸에 붙은 검은 불길이 흔들리고 있었다. 혼돈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위험을 느낀 것이다. 신이라 불리는 자가 일개 리빙 북에게 말이다. “이런. 싸구려 도구 따위가!” 그가 베르텔기아를 향해 손을 뻗으려고 하는 찰나였다. 김성철이 검은 불길로 타오르는 손을 뻗었다. 그러자 검은 불길이 스스로 생명을 가진 듯 뻗어 나오며 혼돈신의 앞에 불의 장벽을 만들어냈다. 그 안에서 혼돈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방해꾼이 배제된 가운데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을 굳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은 짧은 수명이 다하면 죽는 존재잖아? 하지만 난 평범한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았어. 나이로 치면 내가 당신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보다 오래 살았지. 인간에게 수명이란 한계가 있듯이 내게도 수명과 비슷한 게 있어. 바로 사명이지.” “사명.” 김성철은 그 단어를 음미하듯 말했다. 몸을 덮은 검은 불길이 거칠게 흔들렸다. 베르텔기아가 무릎을 굳히고 팔을 아래로 뻗었다. 그녀의 몸에 올라탄 카벙클들이 줄줄이 내려와 그녀의 발치 아래에 섰다. 베르텔기아는 두 손을 양손으로 교차해 손바닥으로 가슴을 품으며 말했다. “사명이든 운명이든 꿈이든 뭐라고 부르던 관계없어. 나는 내가 정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완수하기 전까지 도구가 아니야. 설령 그 끝에 인간의 죽음과 같은 최후가 기다리고 있더라도 난 받아들일 거야. 천수를 누린 인간들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베르텔기아는 굳혔단 팔을 뻗었다. 마치 모든 것을 포용하는 대지의 어머니처럼. “베르텔기아.” 김성철이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도구 따위가 아니라 사람이야. 자타공인의 도구인 내가 도구가 아닌 것처럼.” 검은 불길이 일순 멈췄다. 그때 불의 장벽에 가로막힌 혼돈신의 간사한 목소리가 옆에서 울려 퍼졌다. “너의 숨겨진 힘을 얻지 못하면 여기서 나간다고 해도 너는 다시 질서신에 의해 죽임당할 것이다.” 숨겨진 힘이란 말에 김성철은 주춤했다. 이에 베르텔기아는 미소를 지은 채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에겐 숨겨진 힘이 있잖아. 이런 사악하고 무서운 게 아니라 당신의 내면 안에 숨겨진 힘이.” “숨겨진 힘?” 김성철이 달라진 그의 본연의 목소리로 말했다. 베르텔기아는 환하게 눈웃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모르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김성철의 의식을 뒤덮던 흐릿한 안개가 걷혔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동심 어린 의문이었다. 자신의 몸에 숨겨진 힘이 무엇인가에 대한. 그렇게 김성철은 끝나지 않을 꿈에서 깨어났다. 머리 위의 강철의 수레바퀴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혼돈신의 음모는 무위로 돌아갔고 흐름은 김성철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혼돈신은 여유만만이었다. “이미 네 몸엔 죽은 신의 어두운 속성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네가 아무리 궁상을 떨고 발악을 해도 이미 시작된 죽은 신의 분노는 아무도 막을 수 없다.” 혼돈신은 웃음을 흘린 채 공간 너머로 사라졌다. 그의 말 대로였다. 김성철의 반신을 덮은 검은 불길은 잠시 주춤하는 듯 했으나 다시 기세를 타고 김성철의 나머지 반신마저 삼키려고 하고 있었다. “틀렸어. 이대로는 검은 거인이 나타나게 돼!” 아무개가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빌어먹을.’ 이제야 답을 찾았는데 얄궂게도 그가 일으킨 불길은 꺼지기는커녕 더욱 맹렬하게 타오르며 그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었다. 검은 불길은 그의 명에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모른다. 그 불길을 회수하는 방법을. ‘제발, 이대로 끝이 나지 않게 해다오.’ 흐릿해지는 시선 너머로 베르텔기아와 아무개의 모습이 보인다. 이대로는 아무개가 보았다는 검은 거인으로 변하고 만다. 그렇게 될 바엔 차라리 목숨을 끊는 게 나아보일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직 불길에 덮이지 않은 오른손을 심장에 올렸다. 그의 손에 신적인 힘이 흐르고 지나갔다. 맹약의 십자가를 뽑는 순간 그는 또 다른 계약의 불에 타 죽을 것이다. 김성철은 마지막으로 베르텔기아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죽음을 각오한 미소. 베르텔기아가 뭐라고 말하지만 들려오지 않았다. “잘 있어라.” 김성철의 오른손이 그의 가슴을 후벼팔려는 찰나였다. 둥. 소리가 났다. 김성철과 베르텔기아 아니 그 안에 있던 모든 존재는 계단 너머 무한한 우주를 향해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난 방향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들은 예상했다. 무언가 일어나려고 한다는 것을. [ 흥미롭군. ] 목소리다. 설명이고 감상 따윈 무용했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것이 진정한 신의 목소리라는 것이 전해졌으니까. [ 도구가 되기를 선택한 인간. ] [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 도구. ] 경이 그 자체라고밖에 설명할 수밖에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안 김성철의 몸을 뒤덮던 검은 불길은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그냥 사라진 것이 아니다. 마치 흡수되듯 그의 심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김성철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좁은 복도와 음울한 세상을 태우던 불길이 꺼졌다. [ 너희들의 앞날을 지켜보겠다. ] 신이 말했다. ======================================= 107. 남자의 약속 (1) 금빛 바다 위에 우뚝 선 신의 던전. 사람들이 모두 쓸려나간 도시의 폐허 주변엔 던전의 정보를 듣고 모인 발이 빠른 모험가들의 캠프가 대신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 낯선 얼굴이 나타났다. 평범한 모험자의 복색. 다소 지쳐 보이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미남자였다. 신의 던전 주변에 모여 있던 일단의 모험자들이 던전 바깥으로 나오는 그를 보고 수군거렸다. 여성 측에서 괜찮은 남자라는 평이 나왔지만, 남성 측에선 음울해 보이는 그 사내가 던전의 시련을 몇 개 넘기지도 못하리는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 왜냐하면, 그가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았으니까. 던전 주위에 있는 사람 중 어느 누구도 그 사내의 얼굴은 물론 이름조차 알지 못했지만, 한때 그 사내의 얼굴과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의 최후의 왕. 크롬갈드 루테기네아. 그는 아에게에 있다. “…상태창. 능력치.” 그는 한적한 숲속으로 들어가 바위 위에 몸을 기댄 채 상태창을 떠올렸다. [능력치] 힘 700 민첩 700 체력 701 마력 699 직관력 699 마법저항 703 의지 698 매력 692 운 695 비범한 능력치. 그런데 그의 능력치는 의도적으로 끼워 맞춘 듯 700이라는 단위에 근접해 있었다. 그 이유는 상태창 아래에 새로 떠오른 문자에 있었다. [ 조금만 더 정진하면 승천 가능! ] 그 문자를 본 크롬갈드를 코웃음을 쳤다. 웃음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 부스럭. 수풀 쪽에서 발소리가 나타났다. 크롬갈드의 눈이 희미한 살기가 번득였으나 곧 가라앉았다. 아는 얼굴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숲속에서 그림처럼 아름다운, 그러나 전혀 인간답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여성이 나타났다. 날이 서 있던 크롬갈드의 눈빛은 그러나, 그 여성의 얼굴을 보자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소리 내어 그 여성의 이름을 불렀다. “아델화이트.” 그렇다. 갑작스레 크롬갈드 앞에 나타난 여성의 정체는 유령 들린 숲의 마녀이자 영겁을 살아가는 존재 아델화이트다. 아델화이트는 멀리 내려다보이는 황금빛 바다 위에 우뚝 선 신의 던전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차라리 지금 승천을 하는 건 어떤가요? 당신 정도라면 저 던전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바로 승천이 가능할 텐데.” “이 정도 능력치로 승천해봐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당신도 알고 있잖아?” 크롬갈드는 쓸쓸히 웃으며 반문했다. 일견 지쳐 보이는 그의 눈동자 속엔 새벽하늘 마지막까지 빛나는 외로운 별빛과 같은 빛이 번득이고 있었다. 그 타협 없는, 올곧은 눈빛을 본 순간 아델화이트는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시대에 있었던 만남을 떠올렸다. ‘크롬갈드.’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는 어둠 속에 희망의 빛을 던져 준 사내. 그가 없었다면 아델화이트는 아직도 무의미한 영원 속에서 나무나 돌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살아갔을 것이다. “할 이야기가 있어요.” 아델화이트가 말했다. 크롬갈드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실로 오랜만이군. 당신 쪽에서 먼저 내게 용건이 있어서 찾아오는 건 말이야. 아마 백사의 일족 사건 이래로였던가?” 즐거워 보이는 크롬갈드와 달리 아델화이트는 얼음처럼 차가운 분위기 속에 머물러 있었다. 약간의 침묵이 지난 후 그녀가 말했다. “당신을 돕기로 정했어요.” “호오? 무슨 바람이 분 거지?” “엔키아두사. 명색이 질서신을 칭하는 자가 태고의 질서를 깨고 직접 세상에 개입한 것을 보고 확실히 마음을 잡을 수 있었죠.” 아델화이트의 청명한 눈동자 속에 감출 수 없는 증오와 혐오의 빛이 번득였다. “…타인을 학살자로 만들어 영원한 죄책감의 그물 속에서 살아가게 해놓고 자신은 신을 칭하며 무소불위의 전횡을 일삼는 것을 더는 지켜볼 수만은 없어요.” 아델화이트는 눈을 감은 채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긴 속눈썹은 분노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크롬갈드는 영겁의 마녀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그녀를 안았다. “아델화이트.” 아델화이트는 말없이 그에게 몸을 기댔다. 두 남녀는 한동안 같은 자세로 있었다. 서로를 안은 두 연인의 의식 속엔 영겁이라고 해도 무방할 긴 시간의 흐름과 인연의 추억이 강물처럼 흐르고 지나갔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모험가들이 그들을 보고 손가락질하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저기 좀 보라고.” “응? 아 저기? 경치 좋은데? 껄껄껄!” 무심코 내뱉은 말들은 아델화이트와 크롬갈드의 회상을 가로막았다. 크롬갈드의 눈동자에 살기가 번득였다. “벌레만도 못한 것들이.” 앞으로 나가려는 그를 아델화이트의 손이 가로막았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크롬갈드를 바라보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좋지 않은 꿈을 꿨어요.” “좋지 않은 꿈?” “어떤 책에 관한 꿈이에요. 며칠 동안 같은 꿈을 꾸었죠.” 아델화이트는 가볍게 몸을 떨며 몇 달에 걸쳐 자신을 짓누른 책의 형상을 떠올렸다. “…가야겠어요.” “어떻게 할 거지?” 크롬갈드의 아쉬움섞인 말에 아델화이트는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황금빛으로 물든 아름다운 바다와 그 너머에 우뚝 선 신의 던전을 눈에 담았다. “당신과 이 세상을 함께 구하겠어요.” “…아델화이트.” 크롬갈드의 신형이 석상처럼 굳었다. 아델화이트는 천천히 걸어 그를 떠났다. “당신은 이 세상을 바꿔주세요. 이 세상이 원래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도록.” 그녀가 손을 들어 올렸다. 손끝에서는 보랏빛의 꽃가루와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그 꽃가루는 바람을 타고 움직여 신의 던전 앞, 모험가들의 캠프에 닿았다. 캠프에선 모험자들이 둥글게 모여 이야기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 중심엔 아까 크롬갈드와 아델화이트의 회상을 방해하던 사내가 있었다. “그 얼굴 허연 멀대 말이야. 아주 살판이 났더구만. 수십 만의 사람이 죽은 이 저주받은 땅에 여자까지 끌고 와서 연애 행각을 벌이지 뭐야.” 그나 조롱을 섞어 떠드는 동안 은은한 라벤다 빛의 꽃가루는 어느새 캠프 전역을 둘러싸고 있었다. 한 여성이 그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고 코를 킁킁 거렸다. “뭐지? 이건?” 그때였다. 여성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끄.. 끅!”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양손으로 몸을 부여잡은 채 격렬히 경련했다. 모험가들 중앙에서 신나게 떠들던 사내가 여성의 변화를 감지했다. “어이. 갑자기 왜 그래?” 다음 순간, 그도 느꼈다.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뒤를 이었다. “끄르르르...!” 순식간에 그를 둘러싼 세계가 무너졌다. 화롯불 옆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던 모든 동료가 같은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장면이 보였다. 그는 마지막 정신을 쥐어 짜내 그 원인을 알고자 했다. 보랏빛의 꽃가루. 그것은 먼 곳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그는 보랏빛의 자취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고 기어코 발견했다. 얼음장처럼 냉담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며 죽음의 꽃가루를 날리는 여인의 얼굴을. 죽어가는 사내의 뇌리에 전설적인 마녀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떠올랐다. ‘설마 저게 신조차 두려워한다던 죽음의 마녀…. 아델화이트인가?’ 그의 생각은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안구에서 터져 나온 핏물이 시야를 막았고 생각하는 것마저 멈추게 했기 때문이다. “…….” 이제는 죽음만이 횡행하는 캠프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아델화이트는 조용히 뒤돌아섰다.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보랏빛 꽃가루를 흩어버리는 동안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눈을 뜬 김성철은 낯선 천장을 바라보았고 이윽고 어질러진 생소한 방안의 풍경을 보았다. “으…. 머리 아파….” 그의 옆엔 이수진이 머리를 감싼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고 그녀의 옆구리엔 베르텔기아가 꿈틀거리며 아무개의 겨드랑이에서 빠져나오려고 용을 쓰고 있었다. “끙!” 김성철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지끈거리듯이 아팠지만, 그는 방금 있었던 일을 정리하고자 했다. 김성철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랬었군.’ 구체적으로는 기억에 남는 게 없다. 단지 기억에 남는 중대한 사실은 단 하나. 그가 신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 “…….” 흐릿한 김성철의 눈동자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우두둑. 두둑. 그는 오랫동안 굳어 있던 목과 어깨를 풀며 침대 아래에 두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발에 밟히는 게 있다. 뽀각. 뭔가 부러졌다. “응?!” 김성철의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왜냐하면, 그의 군홧발이 무언가를 밟아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의 애장품 중 하나인 황금 오리의 목을 말이다. “이럴 수가…?!” 그는 양손으로 애지중지 목과 몸통이 분리된 황금 오리를 받쳐 들었다. “누가 이런 짓을?” 그는 즉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로 옆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아무개와 그리고 베르텔기아가 있었다. 김성철은 아무개의 손에 트로이메아 금고지기의 열쇠가 들린 걸 발견했다. ‘아니, 이 여자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건 황금 오리뿐만 아니다. 크라이아에게 선물로 줬던 곰 인형, 반찬통, 금괴보다 소중한 향신료 박스가 아무렇게나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김성철은 아무개의 멱살을 잡고 싶은 것을 간신히 눌러참으며 대신 그녀의 머리를 슬쩍 손가락으로 밀었다. “꺄악!” 아무개는 베르텔기아를 안은 채 뒤로 넘어갔다. 뒤통수가 그대로 마룻바닥을 강타하긴 했지만 이계의 전사들의 몸은 튼튼하다. “으갹!” 베르텔기아도 은근 튼튼하다. 원래 튼튼한 녀석인데 승천자의 손까지 걸쳤으니 끄떡도 없을 것이다. 김성철은 뒤로 자빠진 아무개를 향해 저승사자와 같은 엄중한 분위기로 우뚝 섰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설명해라.” 김성철이 담담하지만, 분노를 숨기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개는 뒤통수를 매만지며 몸을 일으키고는 뒤늦게 자신을 노려보는 김성철을 발견했다. 아무리 김성철의 마음을 이해했다고 하나 평생에 걸쳐 공포심을 가진 상대다. 주눅이 든 아무개의 입이 꽁꽁 얼렸다. 김성철의 눈썹이 일그러지는 순간, 아무개와 함께 자빠져 있던 책 한 권이 불사조처럼 날아올랐다. “잠깐! 오해하지 마시라!” 베르텔기아다. 그녀는 몸에 두르고 있던 승천자의 손을 벗으며 김성철을 향해 날아갔다. “이 언니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끝장났어! 기억 안 나?” “…….” 김성철은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찌푸리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대부분을 기억해냈다. 특히, 검은 거인으로 변하기 전 베르텔기아가 그를 검은 불길에서 구원한 부분을 떠올리고는 김성철은 자기도 모르게 베르텔기아의 이름을 되뇌었다. “베르텔기아.”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 김성철의 입가에 꾸밈없는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흐음. 이제야 이 베르텔기아님의 가치를 알아본 모양이네.” 베르텔기아는 의기양양하게 말하고는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손수 책장으로 집어 김성철에게 건넸다. “꾸물 될 시간이 없는 거 알고 있잖아?” “그렇지.” 김성철은 서둘러 아무개가 꺼내놓은 자신의 짐을 영혼 창고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황금 오리가 부서진 건 못내 아쉬운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동안 바라보다 주머니 안에 넣었다. ‘나중에 수리해야겠군.’ 아무튼 정리는 끝났고 아무개도 정신을 차렸다. 김성철과 아무개는 서로를 달라진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당신을 믿기로 했어.” 아무개는 그렇게 말하며 베르텔기아를 힐끗 쳐다보며 가볍게 윙크했다. “어머나.” 베르텔기아는 마음에도 없는 호들갑을 떨었다. “믿어준다니 고마울 따름이군.” 김성철은 아무개를 향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태도와 목소리는 소환 궁전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지만, 이제는 아무개도 알 수 있었다. 그때의 도구처럼 살아가던 김성철과 현재의 김성철은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을. “당분간은 당신 주변에 머물고 있을 테니까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나 불러줘.” 아무개는 김성철에게 호각 하나를 내밀었다. 산호로 만든 아름다운 빛깔의 그러나 약간은 조잡한 호각이었다. 김성철이 호각을 건네받자 아무개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은신과 암살엔 제법 자신이 있거든.” “은신 하나만은 인정해주지.” 김성철은 씨익 웃으며 호각을 목에 걸었다. 결코 풀릴 것 같지 않던 감정의 벽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허물어졌다. 이제 김성철에겐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는 느끼고 있었다. 그가 눈을 깨기도 전부터 먼 곳에서 울려오던 고대신의 심장의 고동을. “…윌리엄.” 황제를 만나러 가야 할 때다. 아니, 한 대 때려주러 가야 할 때다. “황제는 지금 고립무원의 상황에 부닥쳐있어. 연합국의 군주들도 모두 등을 돌렸고 충성심 높았던 막료까지도 하나둘 이탈하고 있지. 빨리 가지 않으면 당신의 꿈에서 본 것처럼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상상조차 가지 않아.” 아무개가 간략하게 황제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김성철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영혼 창고를 열어 결의를 다질 때 으레 꺼내고 하던 자신의 신물을 찾았다. 그런데 없다. 그의 신물 팔 가라즈가. “응? 내 망치가 어디 갔지?” 몸에 신적인 힘을 흘리려다가 말고 김성철이 물었다. “그거, 잃어버렸어.” 베르텔기아가 옆에서 몸을 흔들며 퉁명스레 말했다. “뭐라고…?!” 김성철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 107. 남자의 약속 (2) “팔 가라즈라면 연합군의 진중에 있어.” 아무개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김성철이 깜짝 놀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무개는 계속해서 말했다. “팔 가라즈라면 마라이카님이 되찾아 연합군의 본진에서 보관하고 있어.” “마라키아가?” 사정은 이러했다. 김성철이 쓰러지고 팔 가라즈가 그의 손을 떠났을 때 팔 가라즈는 드워프의 알현실에 걸려 있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하늘의 파편으로 거치된 사용 불가능한 무기의 모습으로 말이다. 야만인들은 쓸 수 없는 팔 가라즈를 내버려 두고 대신 비범하게 생기고 말까지 하는 크럼부이를 그들의 왕에게 바쳤다고 한다. 팔 가라즈는 대신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다. 야만인들은 변소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팔 가라즈를 집어넣었다. 팔 가라즈는 야만인의 악취나는 똥오줌에 잠긴 채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마라키아는 그 사실을 알고 타이곤과 함께 실피드를 이끌고 은밀하게 야만인의 진중에 접근해 팔 가라즈를 빼내온 것이다. ‘야만인 놈들.’ 김성철의 이가 빠드득 갈렸다.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분노는 곧 가라앉았다. 어차피 야만인은 곧 그의 손에 멸망할 테니까. 그보다 다른 부분에 흥미가 생겨났다. “마라키아 녀석을 알고 있나?” 예전에 아무개와 만났을 때 그녀는 마라키아를 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인상 같은 걸 듣고 싶었다. 다른 미래의 마라키아는 어떤 모습인지 말이다. “당연하지.” 아무개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뜻밖에 인상이 좋았던 모양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어떤 녀석이었지?” “정말 멋진 분이었어. 종족을 초월하고 모든 이들이 그의 아름다움과 강력함에 매료됐지. 뭐라고 할가. 전장의 아이돌? 그런 느낌이었어.” “뮈이-야? 그 중닭이 전장의…. 아이돌이라고?!” 옆에서 듣고 있던 화들짝 놀라 베르텔기아가 그녀답지 않게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하며 끼어들었다. “단순한 내 느낌일 뿐이야.” 아무개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감상을 마무리지었다. 아무튼 팔 가라즈가 무사하다는 걸 알았다. 김성철은 지금만큼은 마라키아에게 약간은 감사하고 있었다. “…놈도 아주 가끔 밥값을 하는군.” 게다가 희소식이 하나 더 있다. 야만인을 피해 후퇴한 연합군이 라그란제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라그란제 일대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팔 가라즈는 가까운 곳에 있다. 아무개는 자신의 짐을 챙겼다. 슬슬 여기를 떠날 모양이다. “하지만 그쪽 상황도 썩 좋진 않아.” “어떤 점에서 좋지 않다는 거지?” “종말교단이 후퇴 작전에 큰 공헌을 했고 그 종말교단이 방랑왕을 지지하고 있어.” “종말교단이 방랑왕을?” “자세한 내막은 파고들어 봐야겠지만 일단은 황제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좋을 거야.” 아무개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영혼각인 - 소실을 사용해 모습을 감추었다. “필요한 일이 생기면 호각을 불러. 난 당신 가까운 곳에 있을 테니까.” 아무개의 기척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자 김성철은 비로소 시간의 경과를 느낄 수 있었다. 그로서는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자신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당신이 잠든 지 한 달이 지났거든.”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주머니 안을 파고들며 말했다. 그런데 뭔가 걸리적거렸다. 황금 오리다. 베르텔기아는 뻐꾸기처럼 몸을 움직여 황금 오리 파편을 밀어냈다. “으! 걸리적거려!” 김성철은 그 황금 오리 파편을 다른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이라.” 꽤 오랜 시간이다. 특히 지금처럼 위급한 국면에서 한 달이란 시간은 다른 어느 때보다 그 무게가 무거울 것이다. 해야 할 일이 많다. 김성철은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짐의 무게를 새삼스레 깨달으며 문으로 걸어갔다. 곧 문고리에 그의 투박한 손이 올라갔고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가자. 베르텔기아. 밥값 하러.” 그가 문을 열어젖혔을 때 복도엔 아무것도 없었다. “어라? 골렘들 다 어디갔지?” 베르텔기아가 빼꼼 주머니에서 몸을 내밀며 중얼거렸다. “골렘?” 골렘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김성철은 아무것도 없는 복도를 지나 집을 나섰고 아무도 남지 않는 집안은 죽음과 같은 정적에 휩싸였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한 권의 책. 책의 형상을 한 인공생명체 베르텔기아 49호다. 닫힌 문 너머로 베르텔기아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누이 말하는 거 같은데 나는 밥 안 먹거든? 49호는 닫힌 문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가볍게 몸을 흔들며 뒤돌아섰다. “…부러워.” * 라그란제엔 다시금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장대비 같은 빗줄기가 다시금 제도의 땅을 적시고 있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성벽 바깥엔 온통 야만인의 진영이다. 야만인의 원시적인 막사와 진지가 지평선 끝에서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야만인의 본진 한가운데엔 오직 하늘 위에서만 그 완벽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질서신을 불러내는 불경한 마법진. 김성철은 그 마법진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뇌리에 담았다. 김성철은 시선을 당겨 좀 더 안쪽을 바라보았다. 라그란제를 둘러싼 성벽을 지키는 건 병사뿐만이 아니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무기를 들고 적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자라면 누구든 성벽 위에 올라 그들의 도시를 지키고 있었다. 김성철은 먼저 무수한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용돌이치며 상승하는 두터운 적란운 아래 위태롭게 떠 있는 허공궁궐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저 궁궐 안에 황제는 없을 것이다. 부우우우우- 성벽 바깥에서 야만인의 소름 끼치는 전쟁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성벽을 따라 설치된 수백 문에 달하는 투석기들이 일제히 포탄을 성벽을 향해 쏘아 올렸다. 김성철은 포탄의 형상이 인간과 유사하다는 걸 발견했다. ‘전처럼 야만인을 쏘아 보내는 건가.’ 김성철은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하늘 위에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하는 투사체는 약간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산 사람이 아니라 시체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썩고 문드러지고 역병으로 가득 찬 시체. 야만인은 참혹한 고문 끝에 살해한 포로와 노예의 시체를 제도를 향해 쏘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두근. 발밑에서 고대신의 심장의 박동이 느껴졌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막강한 힘을 지닌 고대신의 심장은 도시 전체를 두르는 방어막을 가동했다. 구더기가 들끓는 시체는 그 무형의 방벽에 부딪쳐 마치 유리창에 부딪혀 쓰러지듯이 진액과 고름을 방벽을 따라 흘려보내며 성벽 아래에 판 해자 아래로 떨어졌다. 이미 해자는 썩어가는 시체로 메워져 시체의 산을 이룬지 오래였다. 두근. 두근. 야만인의 시체 포격은 한동안 계속됐고 그에 상응하며 고대신의 심장 또한 계속해서 뛰었다. “…황제는 어디에 있지?” 김성철은 허공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는 지하에 있어. 나조차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삼엄한 경비가 펼쳐진 곳에.” 허공 너머에서 아무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대신의 심장 옆이라.” 그렇다면 절호의 통로가 있다. 한때 황제를 갖고 놀았던 방랑왕이 만들어 놓은 통로가 말이다. 김성철은 기억을 더듬어 오래된 분수를 찾아갔다. 더 이상 가동되지 않는 빛 바랜 분수 아래엔 지하로 통하는 통로가 있다. 통로는 굳게 막혀 있었다. 그러나 김성철에겐 신적인 힘이 있다. 그는 오른손에 승천자의 손을 끼고 돌벽을 신적인 힘으로 눌렀다. 우지끈! 그의 힘을 견디지 못한 두터운 석벽이 무너져내렸고 그 너머로 아래로 통하는 까마득한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라그란제의 건설 시점부터 있었던 크롬갈드와 그의 도당만이 알고 있는 비밀 통로. 김성철은 주위를 둘러본 후 주저없이 계단으로 몸을 옮겼다. “이런 곳이 있었어?” 허공에서 아무개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에 날 미행할 때 보지 않았나?” 김성철이 반문했다. “당신이 리치를 만나 수상쩍은 통로로 향하는 부분까지만 보고 바로 허공궁궐 앞쪽으로 이동했어.” “왜지?” “비좁고 탈출하기 어려운 곳엔 절대 가지 않는 주의거든. 함정일수도 있으니. 어차피 당신의 목적지가 허공궁궐이라는 걸 알기에 미리 허공궁궐 앞으로 가서 대기했어.” “현명하군.” 그런 이야기를 하며 두 사람과 한 권의 책은 계단을 내려가 통로에 다다랐다. 그런데 지하 통로안에 무언가 있다. 구세병들이다. 어둠 속에 침잠되어 있던 구세병들은 김성철의 기척을 느끼자 아무렇게나 붙은 눈에서 푸른 빛을 발하며 시체처럼 몸을 일으켰다. 김성철에게 무기는 없다. 재앙의 무기라면 있지만 이제는 그것을 더는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김성철은 격투에도 능하다. 그리고 그에겐 마법도 있고 무엇보다 신적인 힘이 있다. “마침 기분도 좋지 않았는데 잘 됐군. 공짜 샌드백까지 준비해두다니. 무위의 암군에게도 어느 정도 덕성은 있었던 모양이야.” 어두운 복도 너머에 수많은 푸른 빛이 번득거린다. 통로 전체엔 구세병이 가득 차 있었다. 김성철의 발에 신적인 힘이 흐르고 지나갔다. 콰직. 딛고 있던 계단이 박살 남과 동시에 그의 몸이 포탄처럼 튕겨 나갔다. 퍼퍼퍼퍼퍽! 포환으로 화한 그는 그대로 수십 마리의 구세병을 뚫고 지나갔다.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짓이겨진 구세병의 시체가 미처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승천자의 손을 낀 오른팔이 풍차처럼 회전하며 닥치는 대로 앞을 가로막는 구세병을 박살 냈다. 뒤이어 왼손에 한 자루 삽이 나타났다. 팡! 금강석으로 코팅된 삽 대가리가 구세병의 머리통을 강타했다. “역시 뭔가를 때릴 땐 후려치는 맛이 있어야지.” 무인지경. 주먹과 삽을 휘두르는 그 앞에 통로 안엔 아무것도 없는 거과 마찬가지였다. 무수한 구세병의 시체를 뒤로 남긴 김성철의 앞에 희끄무레한 형체가 나타났다. 제국 하수도 관리인 아쿤 간다르바다. “어떻게 된 일이냐?” 그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듯했다. 김성철의 진격이 너무나 빨랐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순식간에 너무나 많은 구세병의 손실이 발견되자 현장을 확인하러 온 것뿐이었다. 뒤늦게 짓쳐들어오는 김성철을 발견한 아쿤 간다르바는 황급히 무언가를 조작해 통로를 막으려 했다. 두터운 강철로 이루어진 벽이 김성철과 아쿤 간다르바 사이를 가로막았다. 쿵. 김성철은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강철의 벽을 올려다보았다. ‘팔 가라즈가 그립군.’ 물론 팔 가라즈가 없다고 해서 이 문을 통과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승천자의 손을 낀 오른손이 화강암질의 바닥을 파고 들어가 강철의 벽 끝을 붙잡았다. 그의 몸에 신적인 힘이 흐르고 지나가는 순간, 육중한 강철의 벽은 번쩍 들렸다. 불가해한 힘의 결과. 김성철은 열린 공간 너머로 당황하는 아쿤 간다르바를 노려보며 그대로 뛰어들어갔다. “제…. 제국 대원수님!” 아쿤 간다르바는 뒤늦게 김성철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김성철의 주먹이 그의 말보다 빠르게 머리통을 날려 보낸 뒤였다. “끄윽!” 라그란제의 시작과 함께 한 제국 하수도 관리인의 최후는 허망했다. ‘부활과 영생이 눈앞에 있었는데…?!’ 목을 잃은 몸통은 깡마른 손을 허공을 움켜쥐며 차디찬 바닥 위에 쓰러졌다. “…….” 아쿤 간다르바가 죽자 구세병은 그제야 김성철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방해꾼으로 가득 찬 통로가 깨끗이 비워졌다. 김성철은 아무것도 없는 통로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고대신의 심장의 박동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곧 심장이 있는 공간으로 통하는 테라스가 나타났다. 김성철은 테라스의 난간에 서서 아래를 내려 보았다. 인간제국의 황제 윌리엄 퀸튼 말버러는 약동하는 거대한 심장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지치고 초조한 표정. 그 옆엔 아무도 없었다. 단지 소수의 시종만이 먼발치에서 황제의 눈치를 보며 서성거릴 뿐이었다. 그 많던 충신과 부하들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녀석을 구했어야 했다.’ 황제는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제국을 버려서라도 그를 구해냈어야 했다.’ 김성철을 포기함으로써 그는 병력과 심장을 보전할 수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야만인으로 둘러싸인 제도 속에서 그의 영혼과 그의 병력과 시민은 점점 줄어가기 시작했다. 제국의 약화는 그의 약화로 이어졌다. 지금 황제는 최후의 도박을 시도하려는 중이었다. 자신의 나라와 백성을 담보 삼아서. ======================================= 107. 남자의 약속 (3) 고뇌에 잠긴 황제의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아무개가 말했다. “당신이 쓰러진 이후로 황제는 점점 이상하게 변했고 결국 그의 가장 큰 지지세력은 군인들마저 그를 버리고 떠났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게 진짜였던 모양이네.” 조금은 슬픈 목소리였다. 그녀 또한 한때 황제의 밑에 있었고 황제가 황제답던 시기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었다. 그러나 지금의 황제에겐 과거의 영광스런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약동하는 고대신의 심장 옆엔 그저 힘없고 나약한 중년의 사내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을 따름이었다. “폐하.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멀찌감치 참모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신으로 화할 기사와 장군들이 전투 배치를 마치고 폐하의 명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잔존 함대 출격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황제는 여전히 쪼그리고 앉은 채 반대편에 자리 잡은 일단의 마법사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심장의 폭주 준비는 끝났는가?” 그의 물음에 헬쑥한 얼굴의 마법사는 침을 꿀꺽 삼키고 두서없이 말했다. “이론상의 준비는 완료됐습니다. 하지만 심장을 통제할 마법사들이 그 증상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고대신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 말인가?” 황제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마법사가 두려운 눈으로 황제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황제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고대신은 이미 죽은 지 오래다. 환청 따위에 제국의 마법사들이 굴복해서 쓰겠는가? 모두 제 자리를 지키고 명을 기다려라!” 황제는 짐짓 위엄 섞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김성철은 알 수 있었다. 모든 이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황제조차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이대로 그를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시간을 잘 맞춰온 모양이군.” 김성철은 행운과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김성철은 허공을 향해 담담한 어조로 말한 후 그대로 난간을 뛰어넘어 아래로 낙하했다. 높은 천정을 따라 거미줄처럼 펼쳐진 경계 결계가 차례차례 발동하는 게 느껴졌다. “침입자 감지!” “위로부터 침입니다!” 결계를 펼친 마법사들의 날카로운 외침이 울려 퍼졌다. 심장 주변에 대기하던 호위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빼 들고 황제 주변으로 달려갔다. 긴박감 속에서 공간에 있던 모든 이들이 위를 올려보았다. 그리고 모든 이들은 볼 수 있었다. 그들 위의 머리 위에서 마치 신의 사자처럼 강림하던 낡은 코트를 걸친 사내의 강림을. 쿵. 그 사내, 김성철은 쪼그려 앉은 자신의 황제 앞에 착륙했다. 호위무사들은 다급히 김성철에게 검을 들고 다가갔으나 이내 김성철의 얼굴을 알아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충격으로 빚어낸 침묵 속에서 먼 곳을 응시하던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기엔 그가 간절히 원하던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꼴사납군. 윌리엄.” 김성철이 말했다. * 26년 전. 소환 궁전. 그곳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많은 소환자가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이계의 차가운 바닥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미쳐버리는 사람도 부지기수.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내일이 보장되는 곳에서 살아가던 이에게 그곳은 한 폭의 지옥도였다. 하지만 아주 소수의 사람은 소환 궁전의 가혹한 환경에 빠르게 적응했다. 특히 저쪽 세계에서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었던 불운한 자들은 쉬이 이계에서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 제2의 운명을 개척하려고 했다. 김성철 또한 그런 인물 중 하나였다. 소환 궁전의 광장 위에서 김성철은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 사람 구실을 하고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는 전투 중에는 언제나 선두에서 싸웠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사람들을 구하려고 애를 썼다. 딱히 바라는 건 없었다. 그는 그저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을 뿐이고 단지 감사의 한마디를 듣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도 친한 사람이 생겼다. 처음 소환 궁전에 끌려와 모두가 의기소침한 상황 속에서도 홀로 목소리를 높여 힘을 합치자고 외치던 젊은 여성이었다. 김성철은 운명처럼 그녀에 이끌려 그녀의 팀이 되었고 생전 처음으로 사랑 비슷한 감정이 싹트는 걸 느꼈다. 그 날의 사건이 있기 전까지 말이다. 팩맨 룰. 거대한 괴수를 상대로 일정 이상의 소환자가 죽거나 혹은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소환자가 괴수를 쓰러뜨리는 경우 승리로 인정되는 규칙. 12개의 말발굽을 지닌 흉포한 괴수의 말발굽 아래 김성철이 의지하던 여성은 짓밟혀 죽었다. 김성철은 그 전투에서 살아남았지만 다른 의미로 그는 사자에 가까웠다. 그런 김성철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이 바로 윌리엄 퀸튼 말버러. 훗날 황제가 될 사내였다. “꼴사납군.” 곡기조차 끊고 죽음만을 기다리던 김성철을 향해 젊은 윌리엄이 말했었다. 김성철은 퀭한 눈빛으로 힘없이 윌리엄을 올려다보았다. 수십 년의 세월의 흐름이 지나 같은 구도의 광경이 그러나, 전혀 다른 구도로 되풀이됐다. 일어서서 말을 건네는 자리엔 윌리엄이 아닌 김성철이 있었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퀭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자리엔 윌리엄이 있었다. 김성철은 오래된 기억을 더듬으며 윌리엄이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 윌리엄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국엔 이런 속담이 있지.” 그는 퀭한 눈빛의 김성철이 올려다보기를 기다려 힘 있는 확고한 목소리라 말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음악이 없어도 춤을 춘다.” 김성철은 그 빛바랜 추억 속의 장면을 의도적으로 재현했다. “한국엔 이런 속담이 있지.” 황제 아니, 윌리엄의 눈이 가볍게 떠올렸다. 데자뷔 적인 신선한 충격 속에서 그 또한 떠올린 것이다. 평생을 함께하게 될 친우의 첫 만남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그 순간 김성철은 뭔가 잘못됨을 느꼈다. 그 감각은 베르텔기아의 격렬한 진동 때문에 확실한 거로 굳어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잔뜩 분위기를 잡아놓고!’ 김성철은 헛기침하고 인용할 속담을 정정하려 했다. 그러나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학교 다닐 때 책 좀 읽을 걸 그랬나.’ 김성철이 머뭇거리는 동안 윌리엄의 미소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속담 따윈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김성철이 전하려는 마음이다. 김성철은 퀭했던 윌리엄의 눈에 생기의 빛이 돌아오는 걸 보며 손을 뻗었다. 사내와 사내의 굳건한 손이 마주 잡았다. 김성철은 적절한 힘으로 황제를 일으켜 세웠다. “살아 있었군.” 비로소 황제가 입을 열었다. 미안함과 기쁨이 혼재된 결과적으로는 벅찬 음성이었다. 김성철은 쑥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번지는 걸 느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눈을 뜨고 보니 살아 있더군.” 황제는 코끝이 찡해지는 걸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어떤 예감에 사로잡혔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대역사가 곧 일어날 것이라는. 이윽고 모든 이들의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황제가 무릎을 꿇었다. 자신을 따르던, 심지어는 세계의 적으로까지 불린 사내에게. “미안하다.” 황제는 솔직하게 말했다. 위엄이고 체면이고 모든 것을 벗어던진 그의 진정한 목소리는 약간은 가늘고 유약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너를 구해주지 못해서.” 김성철은 황제에게 손을 뻗는 대신 그의 팔을 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네가 사과할 건 없다. 너는 제국의 시민과 군대를 이끄는 황제로서 적절한 판단을 했을 뿐이다.” 김성철이 황제를 응시하며 말했다. 김성철의 눈빛을 가까이서 본 황제는 알 수 있었다. 소환 궁전의 광장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사내는 오래전에 자신을 추월했고 이제는 감히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이르렀다는 것을. 단순히 힘의 강약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한 가지 약속을 해다오.” 김성철이 고개를 돌려 황제 너머에 약동하고 있는 고대신의 심장을 노려보았다. 고대신의 심장을 본 순간 김성철은 환청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걸 느꼈다. [ 먹이…. 탐스러운…. 함께…. 할지어다…. ] [ 세상의 파멸…. 그것이 신의 의지…. ] 그러나 그 목소리는 곧 방파제에 부딪혀 흩어지는 파도처럼 사라졌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잔류사념인가. 끈질기군.’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방금 들린 목소리를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격의 차이다. 혼돈신이 만든 꿈의 미로를 해쳐나온 김성철은 더는 고대신 따위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김성철은 고대신의 잔해를 노려본 채 계속해서 말했다. “이 불경한 물건에 의지하는 걸 관둬라.” “…하지만!” 황제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고대신의 심장이 없다면 라그란제는 하루 만에 야만인에게 멸망 당할 것이다. “대신 한 가지 약속을 하지.” 김성철은 고대신의 심장에서 눈을 돌려 위를 바라보았다. 벽돌과 바위로 이루어진 천장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지만 김성철의 시선은 그 너머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일주일 안에 원군을 끌고 라그란제로 오겠다.” “원군?” 황제의 물음에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수롭지 않은 움직임이었지만 황제는 그에게서 깊은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곧 황제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황제는 알고 있다. 지금 라그란제 동쪽으로 후퇴한 연합군의 진중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종된 김성철을 대신해 방랑왕이 한 명의 왕의 후보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김성철의 약속이다. 그는 허투루 약속하지 않는다. “일주일이다. 일주일 안에 동쪽의 연합군을 규합해 라그란제를 찾아오겠다.” 김성철은 그 말을 남기고 뒤돌아섰다. 낡은 코트를 걸친 남자의 등 너머로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동쪽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죽음의 낙진만은 아닐 것이다.” 김성철은 앞으로 걸어갔다. 숨 죽이고 그를 지켜보던 호위무사들은 황제가 명하지도 않았는데도 지레 자리를 비켜 길을 열어 주었다. 앞으로 걸어가는 김성철을 지켜보던 황제가 김성철을 뒤에서 불렀다. “김성철.” 김성철이 멈췄다. 황제의 손이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 사실을 말해야 한다.’ 루테기네아 왕국 최후의 날의 전야. 크롬갈드에게서 들었던 그의 허무맹랑한 계획. 황제는 그것을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말하면 그는 맹약의 십자가에 의해 불 타 없어질 것이다. 황제는 기로에 섰다. 수많은 생각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가운데 김성철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황제의 말을 기다렸다. 황제의 눈이 질끈 감겼다. 그는 온 몸의 힘이 풀리는 걸 느꼈으나 억지로 무너지는 자세를 지탱했다. 뒤이어 맥 풀린 목소리가 황제의 입밖에 흘러나왔다. “…조심히 다녀오게.”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플라이를 시전, 자신을 토해낸 천장에 가까운 보이지 않는 테라스를 향해 날아갔다. ‘결국, 말하지 못했다.’ 김성철이 사라진 직후 황제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호위무사들이 비틀거리는 황제를 급히 부축했다. 수치심과 자괴감이 그의 얼굴을 하얗게 만들어놓고 있었다. 무엇이 무서웠던 것일까. 죽음? 그것은 아니다.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황제는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곧 그는 씁쓸한 진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왕관의 상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그가 그토록 경멸하던 권력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가 된 것이다. 자신에 대한 경멸과 혐오에 젖어들며 황제 윌리엄 퀸튼 말버러는 어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신인 나를 도구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나? 하잘 것 없는 인간 따위가? ] 심연에서 기어오르는 듯한 끈적하고 음습한 울림. 마법사들에게 들린다는 고대신의 환청이 황제의 뇌리에 직접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 108. 전사의 귀환 (1) 드르르르. 음습한 공동묘지의 묘비석이 열렸다. 그 안에서 두 사람과 한 권의 책이 나타났다. 그 정체는 김성철과 아무개 그리고 베르텔기아. 쏴아아아. 가까운 곳에서 물소리가 들려온다. 거대도시 라그란제의 모든 물을 받아 토해내는 대하수도에서 흘러나온 물이 만들어낸 하천이다. 아무개가 흐르는 물을 보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세계의회의 연합군은 한 달 전의 전투에 대패해 동쪽의 요새까지 후퇴해 그곳에 진을 치고 있어.” 툭. 바닥에 뭔가 떨어졌다. 정성스레 포갠 하얀 천이다. 그 천위엔 잘 지워지지 않는 물감으로 그려진 마법진이 있었다. “휴대용 텔레포트 마법진이군.”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해 이동하는 것을 엘프족의 특징. 하지만 이런 식으로 휴대용의 마법진을 두고 이동하는 것은 엘프의 방식이 아니다. 김성철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한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암살교단의 방식이군.” “당신의 또 다른 동료 샤말 라지푸트에게 직접 배운 방법이야.” 아무개는 흰 천을 잘 펼쳐지게 네 모서리를 돌로 고정하고 마력의 원천이 될 마석 덩어리를 마법진 주변에 흩뿌렸다. “그는 지금 뭘 하고 있지?” 김성철이 아무개의 행동을 지켜보며 말했다. “알 수 없어. 당신도 알겠지만, 그 사람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하긴 그 녀석은 그런 면이 있지.” 대륙십삼걸 중 한 명 샤말 라지푸트. 그는 재앙으로 촉발된 긴 동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긴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그 사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의 종결을 받아들이진 않을 것이다. 샤말 라지푸트는 김성철이 아는 모든 사람을 통틀어 가장 신중하고 인내심이 강한 자다. 언젠가 그가 생각하는 움직여야 할 때가 오면 그와 암살교단은 다시금 세상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다시 아무개에게 말을 걸었다. “이 마법진은 어디로 연결되는 거지?” “성궁(星宮) 요새의 뒤편. 성벽만 뛰어넘으면 세계의회가 개최되는 성안으로 침입할 수 있어.” “너무 눈에 띄는 곳이 아닐까?” 아무개는 휴대용 마법진을 골고루 펴고는 몸을 일으켜 새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텔레포트 마법진의 반대편엔 적절한 엄폐물이 있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베르텔기아 쪽을 힐끗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애들이 보기에 썩 좋은 곳은 아니네.” “어떤 점에서?” 김성철이 묻자 아무개는 김성철에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체소각장 앞이거든.” “…그런 거라면 문제없다.” “아니면 저녁까지 여기서 기다렸다가 한 번에 이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 어차피 세계의회는 저녁에 개최되고 아까 말했다시피 세계의회가 열리는 장소까진 성벽 하나만 넘으면 그만이니까. 당신이 돌아오기를 원하지 않는 무리도 상당수 있는 거 같으니 적절한 시간대에 당신이 모습을 드러내면 그걸로 충분하겠지.” “날 반기지 않는 무리라.” 종말교단.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지만, 세계의회의 구성원은커녕 잠재적인 토벌대상이었던 존재가 세계의회에 뻔뻔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모자라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아직 김성철은 종말교단이 황제의 편인지 방랑왕의 편인지 확답을 내리지 못했다. 지금까지 행보로 보면 방랑왕의 세력에 가깝다고 봐야 하지만 늘 그렇듯 모든 일은 일면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방랑왕에 대한 지지 자체가 기만책이 아니라는 보장도 없으니 말이다. ‘어떻게 할까.’ 매일매일 야만인의 공성에 시달리는 황제의 처지를 생각하면 한시라도 바삐 세계의회 연합군의 진중에 도착해 건재를 알리는 게 옳다. 그렇게 해야만 최대한 빨리 황제가 원하는 지원군을 보낼 수 있으므로.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은 기회다. 명목상으로는 인류의 적 야만인에 대항하기 위해 하나로 뭉친 세계의회 중에서도 진정한 적과 아군을 가려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세계의회의 수장 자리에서 옥석을 가려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김성철이 주도권을 쥔 상황에서 흉악한 본심을 지닌 무리는 그늘 속에 숨어 결코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니까. 하지만 김성철이 실종 혹은 사망했다고 알려진 지금 내부의 적은 마음껏 정체를 드러내고 활개를 치고 있을 것이다. 한 달의 공백. 그것은 분명 뼈 아픈 손실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기회를 살리기 위한 소재가 될 수 있으리라. 시간이란 것은 대부분의 것들을 느슨하게 만드는 법이니까. 생각을 정리한 김성철은 아무개를 바라보며 불쑥 말했다. “혹시 쓸 만한 변장 도구 같은 거라도 있나?” 화르륵. 천의 끝에 약한 불이 붙었다. 마법진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핸 암살자들의 전형적인 방법. 마법진이 번쩍였다. 아무개가 마법진을 타고 먼저 반대편 출구로 이동한 것이다. 다음은 김성철 차례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다르다. 후줄근하긴 했지만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그의 풍모는 그러나 지금은 그야말로 한 명의 비루한 걸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당하던 등은 새우처럼 굽었고 무표정 속에 위엄을 감추던 얼굴은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흉한 사마귀와 물집으로 뒤덮여 있었다. 김성철은 영혼각인 기만자의 장막을 조정하며 전신과 얼굴을 가리는 검은 로브를 걸침으로써 자신의 변신에 마무리를 지었다. “빨리. 움직여. 마법진이 타 버리겠어!” 베르텔기아의 충고를 따라 김성철은 서둘러 간이 마법진에 몸을 실었다. 혼란스러운 차원의 틈이 바람처럼 스쳐지나가고 곧 어두컴컴한 막사 안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아무개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천막의 입구 앞에 눈을 가늘게 뜨고 바깥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세계의회 개최는 보통 해 질 무렵에 시작돼. 그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던 그녀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지금 김성철의 모습은 그녀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법인데?” 아무개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정체와 힘을 숨기는 건 그다지 낯선 일이 아니거든.” 김성철은 쇳소리가 섞인, 몰골만큼이나 추한 목소리로 말하며 주저 없이 천막 밖으로 나갔다. 매캐한 잿빛 연기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무수한 시체가 불에 타고 있는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 잠행 시작이다. * 한 달 만에 찾은 연합군의 진중에서 종말교단의 무리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김성철의 것과 색은 같지만, 형태도 다르고 때깔도 한결 고급스러운 검은 로브를 걸친 종말교단 패거리는 연합군 막사 곳곳에 박혀 있었다. 김성철은 허리를 굽힌 채 발을 절며 군인과 피난민이 혼재된 거리를 거닐었다. “제법 잘하는데?”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연기를 보며 칭찬을 섞어 말했다. “그게 말이지.” 김성철은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을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던 중이었다. 극장가를 지나던 중 극장 앞에 긴 행렬을 이룬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제법 유명한 영화가 개봉하겠거니 생각하는 도중 버스에 동승한 사내가 창문을 열더니 행렬을 향해 소리쳤다. “범인은 절름발이다!” 당시 김성철은 그가 미친 사람이겠거니 생각했지만, 나중에 그는 그 사내의 순수한 악의를 알게 된다. 아무튼, 그가 절름발이를 연기한 것은 그대의 추억에 근거한 바가 크다. 조금은 하고 싶었다. 반전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알려준 절름발이 역을 말이다. 김성철의 진정성 연기 덕에 그는 특별한 주목을 받지 않고 혼란한 요새 도시 안을 마음껏 누빌 수 있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가 옷만 갈아입고 얼굴만 가리고 다녔더라도 그를 알아볼 사람은 몇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이곳 성궁 요새 안은 지금 혼란으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민심은 흉흉했고 병사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었다. 패배의 기운이 진지 내에 깊숙이 깔려있었다. 참담한 진영을 거닐던 김성철의 귓가에 아무개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속삭여 들어왔다. “마라키아님을 발견했어.” “빠르군. 그 녀석은 어디에 있지?” “공선 정박지에 있어.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쭉 걸어가서 기구들이 서 있는 곳으로 가면 돼.” “고맙군.” 아무개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사라졌다. 확실히 그녀는 도움이 되는 존재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동쪽으로 걸어갔다. 거리를 걷는 도중에 김성철은 술에 취한 드워프들의 술주정을 들을 수 있었다. “빌어먹을 크롬갈드놈. 이대로라면 그놈이 한 명의 왕이 될 기세야.” “그럴 리가. 아직 우리의 왕과 엘프의 왕자가 반대하고 있는데. 쉽지는 않을 거야.” “아니, 그렇게 생각할 것만은 아니야. 엘프 놈들이 재고하고 있다더군. 입장을 바꾸기로 말이야.” “은혜도 모르는 족속 같으니라고! 고대왕국은 그렇다 치고서라도 대원수 덕에 종족을 지킨 엘프 놈들이 그러면 안 되지!” 단편적인 이야기지만 김성철은 현재 세계의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았다. 소문대로 그의 부재를 틈타 크롬갈드가 득세하고 있다. “…….” 김성철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잠시 후, 그는 기구들이 떠오른 공선의 정박지에 도착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김성철은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곧 김성철은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검은 깃털의 마라키아, 전과는 또 다르게 부쩍 성장한 마라키아가 군중의 중심에 당당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라키아 옆엔 김성철의 심장을 뛰게 하는 그리운 친구가 있었다. 팔 가라즈. 그의 손을 떠났던 무기는 무기의 역할을 저버리고 하늘의 파편으로 둘러싸인 장식물로 변해 있었다. 야만인의 오물 구덩이에 잠겨 있었다는 그 신물은 다행히 정성스레 씻겼는지 잡티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깔끔했다. 마라키아 앞엔 부유군도 출신으로 보이는 귀족들이 서서 마라키아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마라키아 공. 팔 가라즈를 내어주시지요.” “팔 가라즈는 한때는 드워프 왕국의 물건이었으나 이제는 우리 세계의회의 상징. 당신이 보관할 물건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마라키아는 부리로 겨드랑이를 느긋하게 긁고는 부유군도의 귀족들을 향해 퉁명스레 말했다. “잘 모르는 모양인데 그 유인원과 나 사이엔 계약관계가 있어.” “계약?!” 귀족들이 어리둥절하며 서로를 마주보았다. 김성철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아니 저 새대가리놈이 나더러 유인원이라고? 아니 그건 나중에 따지고 계약이라니. 무슨 개소리지?’ 김성철과 마라키아 사이에 맺은 계약은 전혀 없다. 한편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라키아는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만약 그 유인원이 뒤지면 그 물건은 전부 이 마라키아님이 상속한다는 계약 말이야.” “상속 계약?!” 마라키아가 아직 덜 자란 날개를 펼쳤다. 그래도 제법 봐 줄만은 했는지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그 덜떨어진 쓰레기 요리나 만드는 유인원을 따라다녔다고 생각하나?” 빠드득. 김성철이 이가 갈렸다. 베르텔기아가 필사적으로 몸을 흔들며 김성철을 진정시켰다. “참아. 착하지.” 김성철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를 마라키아는 계속해서 거만하게 말했다. “그 유인원이 죽은 이상, 그 유인원의 것은 전부 내것이다. 저기 보이는 실피드, 그 안에 있는 집기, 그리고 여기 있는 팔 가라즈까지 전부 나의 소유물이란 이야기지.” 마라키아가 펼친 날개를 접으며 씨익 웃었다. “전부 내.꺼.라.고.” 귀족들이 마라키아의 기세에 일제히 놀라 뒤로 물러섰다. 김성철도 아주 약간이지만 뒤로 물러날 정도였다. ‘이놈이?!’ 그의 경우엔 뻔뻔함에 놀라 물러선 것이다. 마라키아는 히죽 웃으며 날개와 손을 동시에 흔들며 귀족들에게 물러가라는 시늉을 했다. “알아먹었으면 귀찮게 하지 말고 사라져라. 이 나하크의 왕이 옛날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행운으로 여기면서 말이야.” 부유군도의 귀족들은 분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 검은 괴조가 크기는 작긴 해도 대륙십삼걸 따위는 갖고 놀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니까. “두고 봅시다! 마라키아 공!” 부유군도의 무리는 상투적인 말을 내뱉으며 자리를 떠났다. 군중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김성철은 슬슬 모습을 드러내려 했다. 팔 가라즈를 보자 당장 손에 쥐구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낀 것이다. 그러나 뒤에서 차가운 손길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무개의 손이다. 김성철은 발걸음을 멈추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 은근히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는 여자군.’ 뒤이어 아무개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마라키아님이 망치를 내주지 않는 데에는 내막이 있어.” “내막?” “드워프 왕이 조건으로 내걸었거든. 팔 가라즈를 정당하게 돌려받기 전까진 어느 누구도 지지하지 않겠다고.” “드워프 왕이?” 아무개는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고집을 부리고 있군.” 좋은 고집이다. 그렇다면 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김성철은 당장 마라키아를 쥐어박고 팔 가라즈를 회수하려던 계획을 접고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 108. 전사의 귀환 (2) 축사를 개조해 만든 간이 선술집의 구석에서 김성철와 아무개는 비밀스러운 회합을 가졌다. 아무개는 차분하게 자신이 얻은 정보를 김성철에게 전달했다. 주된 주제는 김성철이 실종된 직후 권력자들의 움직임이었다. 김성철이 사라진 이후 세계의회는 구심점을 잃고 방황했다. 따라서 후임자의 지정이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고대왕국의 아르카나이트 왕이 차기 한 명의 왕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아르카나이트는 모처럼 주어진 기회를 스스로 차버렸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 명의 왕이라는 자리가 허울밖에 없는 자리라는 것을. 그 대안으로 급부상한 게 크롬갈드였다. 그의 활약은 연합군의 패배 이후에 도드라졌다. 차원의 문을 차례차례 뚫고 등장하는 그의 보급선단은 십 만에 가까운 연합군과 그 세 배는 넘는 피난민의 식량과 물자를 사실상 혼자 도맡다시피 제공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구세병은 주야를 불문하고 철통 같은 경계를 펼쳐 야만인의 기습을 막아냈다. 그의 지원이 없었다면 연합군은 진즉에 흩어져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종말교단이 그를 지지했다. 빵과 칼, 그 모두를 손에 쥔 크롬갈드의 지위는 점차 확고한 것이 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인간제국의 황제는 철저히 배제됐다. 세계의회의 모든 이들은 그를 배신자로 간주했고 심지어 라그란제에서 쫓겨난 사제들은 그가 한시바삐 죽어 없어지기를 기도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세계의회에서 벌어진 상황. “일단, 한 명을 제외한 모든 군주는 암묵적으로 크롬갈드를 지지하기로 합의를 본 상태야.” “마커레이드도 크롬갈드를 지지하나?” 입안에 쓴맛이 퍼지는 걸 느끼며 김성철이 물었다. 아무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어. 삼십 만에 이르는 유민들의 입을 책임져주는 사람이 크롬갈드거든. 그가 지원을 끊어버리면 그녀를 따르는 백성들은 모두 굶어 죽어.” “그렇군.” 유일한 우방이라 할 수 있는 마커레이드까지 크롬갈드에게 넘어갔다. 이제 크롬갈드에게 남은 장벽은 단 하나. 드워프 왕 다인크래프트. 그만 찬성하면 크롬갈드는 세계의회의 새로운 의장이자 김성철의 후계자로 한 명의 왕의 후보로 격상할 것이다. 수십 년 전, 대륙의 모든 이들이 패망시키려고 했던 루테기네아의 망령이 정당한 절차에 의해 부활하려 하는 것이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김성철은 씁쓸한 흑맥주가 든 잔을 기울이고는 아무개에게 불쑥 말했다. “이런 정보는 다 어디서 구했지?” 아무리 아무개가 신출귀몰하다고 하나 단시간에 이 정도 정보를 얻었다는 건 정보원이 있다는 뜻이다. 아무개도 맥주잔을 기울이고는 가볍게 대답했다. “암살교단 쪽에 아는 친구들이 있어.” “암살교단? 카즈 알메이라 같은 녀석 말인가?” 김성철의 눈동자에 경멸의 빛이 서렸다. “암살교단이라고 해서 악인만 있는 건 아니야. 알메이라 가문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가가 있는가 하면 야생동물처럼 반드시 필요한 살업만을 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어.” 아무개가 지닌 비장의 무기는 암살교단과의 인맥. 실제로 그녀는 소환 궁전에서 나온 직후, 다른 소환자처럼 황금도시로 향하는 대신 바로 암살교단의 궁전으로 숨어 들어가 교주 샤말 라지푸트 앞에 나타남으로써 스스로의 길을 개척했다. 거기서 그녀는 샤말 라지푸트가 관심을 가질만한 정보를 알려줬고 그에게 큰 이익을 안겨다 줬다. 그녀는 소환자임에도 중용되었고 샤말 라지푸트의 추천으로 제국의 요직을 얻기도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공생관계야. 나는 그들에게 내가 지닌 정보를 주고 그들은 내게 필요한 정보를 주지.” “이번에도 그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준 모양이군.” 김성철의 눈이 묘한 빛을 발했다. 아무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대단히 중요한 정보지.” 이에 김성철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나의 생존 말인가?” 아무개는 고개를 재차 끄덕였다. “그 정도 가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암살교단과 내가 친한 사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자세한 세계의회의 내부사정을 쉽게 얻진 못했겠지.” 아무개는 그렇게 말하고는 김성철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하지만 곧 다른 왕들도 이 소식을 알게 될 거야.” 그녀는 촉구하고 있었다. 김성철이 최대한 빠르게 정체를 밝히고 세계의회를 다시 휘어잡을 것을. 다시 말해 변장 놀이 따위 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그것이 아무개의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김성철의 생존이 알려진다면 크롬갈드 혹은 크롬갈드를 한 명의 왕으로 옹립하려는 세력은 빠르게 움직이거나 최악의 경우 다시 지하 속으로 숨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김성철은 아무개의 뜻을 대부분 파악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뜻을 고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 이대로 모습을 드러내면 후방의 적을 잡을 기회는 영영 놓치게 된다.’ 등 뒤의 적만큼 껄끄러운 것도 없다. 김성철은 이 기회에 확실히 하고 싶었다. 크롬갈드라는 자가 어떤 사내인지. 그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혹 크롬갈드가 미끼라면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을 진정한 적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세계의회에 잠입할 방법은 없나?” 김성철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기만자의 장막과 완벽한 변장, 이 두 가지면 어렵지 않게 적의 이목을 속일 수 있으리라. 그러나 아무개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유군도 패거리가 세계의회의 의전을 도맡다시피 하면서 경계가 매우 삼엄해졌어. 추천인이 없으면 잡부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가?” 김성철은 쉽게 포기하는 자가 아니다. 그는 아무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계의회의 본부 역할을 하는 성궁 요새의 본성을 돌며 빈틈을 살폈다. 과연 아무개의 말이 옳았다. ‘이런 개 같은 일이 있나.’ 세계의회의 경비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삼엄했다. 개구멍 앞에도 경비병 둘과 구세병 하나로 이루어진 경비조가 배치되어 있을 지경이었다. 곳곳에 깔린 경계결계와 주시자의 눈은 덤. 오히려 주시자의 눈을 통해 어슬렁거리는 김성철을 발견한 부유군도 병사들이 김성철 앞에 나타나기까지 했다. “넌 뭐냐? 뭔데 이 앞을 어슬렁거리냐?” 화려한 옷을 걸친 병사가 김성철을 호되게 질책했다. 김성철은 고개를 숙인 채 적당히 얼버무렸다. “배가 너무 고파서요. 일자리는 없는지 찾아보던 중이었습니다.” 병사들은 김성철의 흉측하고 지저분한 몰골과 어수룩한 말투를 보고 깔깔 웃었지만, 김성철은 영혼각인 진실의 눈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저편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능력치를 살펴보고 있다는 것을. “가도 좋다.” 병사들은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이후에 김성철을 돌려보냈다. “음. 그 언니 말대로 몰래 들어가는 건 불가능한 거 같은데?” 잠자코 있던 베르텔기아가 퉁명스레 말했다. 김성철도 그 시점엔 거의 잠입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문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 관리의 목소리가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를 살렸다. “세계의회의 한 장면을 묘사할 화가를 모집하는 중이다.” 관리 앞엔 일자리를 구하러 온 군중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관리가 다시 말했다. “인물 묘사에 자신 있는 화가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지원해라. 화가로 선발되는 이에겐 상당한 보수가 따를 것이고 왕과 제후들이 흡족할 만한 그림을 그려내는 이는 부유군도로 갈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환상의 이상향 부유군도라는 말이 나오자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 올렸다. 곧 수백 개에 달하는 손이 번쩍 들렸다. “나! 나를 뽑아주시오! 그림이라면 자신 있소!” “여기 제국 화가 출신이 있소! 실력이라면 누구에게도 떨어지지 않소!”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고 싶은 욕구가 그들로 하여금 손을 들게 했다. 이에 관리는 히죽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테스트를 볼 것이다. 만약 그 테스트에서 형편없는 솜씨를 보인 녀석은 야만인을 가둬 놓은 토굴 속에 집어넣겠다.” 그 한마디는 장내의 뜨거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 많던 천재 화가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모두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실력 있는 화가는 물론 엉터리 화가까지. 행여나 테스트에 탈락한다면 무시무시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주저하는 가운데 한 사내가 손을 들었다. 추레한 행색에 흉한 얼굴. 다리까지 저는 그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김성철. “아니, 당신 그림 더럽게 못 그리잖아!”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주머니 안에서 몸을 꿈틀거렸다. “야만인 따위가 날 어떻게 하겠나.” 김성철은 자신만만이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이에 김성철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으며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를 내려다보았다. “베르텔기아. 밥값 할 시간이다.” * 삼십여 명 정도의 용기 있는 화가들이 테스트에 자원했다. 그들은 먼지가 켜켜이 쌓인 오래된 방안으로 안내됐고 거기서 아무 그림이나 자유롭게 그리도록 명받았다. 도구는 낡은 종이와 목탄 하나. 지우개로 쓸 식빵이 제공됐다. 김성철은 조용히 자신의 라이벌들을 살펴보았다. 크게 3개의 패로 갈려져 있었다. 첫 번째 패는 고급 화가들로 구성됐다. 그들은 대부분 화려하고 정갈한 복장을 갖춰 입었고 도구도 부유군도의 관리가 내어준 싸구려 목탄이 아닌 자신만의 화구를 지참했는데 표정으로 보나, 행동거지로 보나,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두 번째 패는 부유군도의 관리와 결탁한 무리다. 김성철은 복도 뒤편에서 부유군도의 관리와 은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참가자를 볼 수 있었고 그들과 관리 사이에 금전이 오가는 걸 볼 수 있었다. 김성철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오래전, 소환 궁전에서 보았던 내정자들을 떠올렸다. ‘소수는 뇌물로 선발이 되겠군. 하긴, 이런 지옥에서 부유군도로 갈 수 있다는 건 크나큰 행운이니. 전 재산을 주고서라도 갈만하겠지.’ 그리고 나머지는 김성철과 같은 후줄근한 패다. 부유군도 관리들은 그들을 시험장 맨 뒤에 의도적으로 배치했다. 악취가 풍길뿐더러 가망성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뒤 심사위원으로 보이는 제법 지체높은 양반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 얼굴은 김성철이 아는 얼굴이다. ‘저놈은?’ 고대왕국의 강가스 아론이다. 한때 김성철의 상관이기도 했던 그 속물이 운명의 장난으로 다시 한번 김성철을 평가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물론 그는 김성철이 이 자리에 있다는 걸 꿈에도 몰랐다. 그는 흉측한 몰골의 김성철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시간은 1시간. 주제는 자유주제. 선발인원이 적지는 않을 테니까 적당히 그림다운 그림을 그리는 게 좋을 거다.” 강가스 아론은 피곤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어느 정도 정성을 들여 그려라. 낙서장 따위를 그려 제출하는 놈은 공언했다시피 굶주린 야만인이 득실거리는 토굴 속에 집어 던지겠다.” 강가스 아론은 하품을 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럼 1시간 뒤에 다시 오겠다.” 그런데 그가 나가려고 할 때 한 화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어떤 느낌으로 그려야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습니까?” 행색을 보아하니 전문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인물로 보였다. 행동거지와 옷차림에 여유가 있었다. 강가스 아론의 얼굴에 노골적인 분노가 떠올랐다. 그 얼굴을 본 화가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강가스 아론은 그 화가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살기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갈통이 있다면 생각을 해 봐. 왜 너희 같은 밥벌레 새끼들을 뽑는지.” 그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나자 화가들 사이에 술렁임이 일었다. “뭘 그려야 하는 거지?” “주제도 던져주지 않고 무턱대고 아무거나 그리라니.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화가들이 혼란에 빠진 이유는 간단했다. 뭘 그려야 높은 점수를 받는지 알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구도의 참신함이 배점의 중요한 기준이라고 주장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자세한 군중의 묘사가 열쇠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1시간이라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하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림이 기계처럼 나오는 건 줄 아나? 창작의 고뇌와 예민한 감수성이 있어야 비로소 한 폭의 그림이 나오는 것인데!” 화가들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김성철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 뒤돌아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를 쏙 끄집어냈다. “베르텔기아. 하는 거다. 밥값을.” “아니, 뭘 하라는 거야!” 베르텔기아가 작은 목소리로 짜증을 부렸다. 김성철은 그녀에게 목탄 대신 영혼창고 안에 처박혀 있던 연필 한 자루를 건네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베스티아레를 그려라.” “베스티아레?! 갑자기 그건 왜?” “잔말 말고 베스티아레를 그려. 그거면 통과할 수 있다.” 확신을 담아 김성철이 말했다. 자신감엔 이유가 있었다. 김성철은 오랫동안 기득권의 중심부에 머물렀다. 그동안 그는 원치 않게 상층부의 취향과 심리 상태를 직간접적으로 익힐 수 있었다. 그런 그의 경험에 의하면 이 바닥에서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중요한 건 무조건 실물보다 멋지고 예쁘게 그리라는 것이다. 원판이 옥떨메건 옥동자건 그건 아무래도 좋다. 화폭 속에서 권력자는 무조건 아름다워야 한다. “으음.” 베르텔기아는 마지못해 책장으로 연필을 잡고 프린터가 인쇄를 하듯 빠르게 베스티아레의 초상화를 그렸다. 미의 여신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베스티아레의 얼굴이 오래된 종이 위에 그려졌다. “시키는 대로 하긴 했는데, 그런데 이 여자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지?” “베스티아레의 얼굴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특히 세계의회의 권력자 중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지.”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베르텔기아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하자 김성철은 베르텔기아가 쥐고 있던 연필을 뺏더니 베스티아레의 초상화 눈 옆에 점 하나를 찍었다. “…이걸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에 베르텔기아는 몸을 부르르 떨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그리고 심사시간. 심사를 맡은 강가스 아론은 참가자들이 정성스레 그린 그림을 심드렁한 눈빛으로 넘기며 짧게 합격 여부를 판단했다. “이건 합격, 이건 탈락, 이건 야만인 토굴행.” 예상했던 대로 실력자 일부와 내정자가 합격했고 목숨을 판돈으로 건 자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왜! 왜 내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한 사내가 야만인 토굴로 끌려가는 가운데 김성철 차례가 왔다. 강가스 아론은 김성철의 그림을 보지도 않았다. 그는 흉측한 김성철의 몰골을 힐끗 보고는 척수에서 나오는 말을 내뱉었다. “야만인 토….” 그때였다. 아주 약간의 변덕이 일어 강가스 아론의 눈이 김성철 아니, 베르텔기아가 그린 화폭을 눈에 담았다. 강가스 아론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아아닛! 뭐 이런 아름다운 그림이 다 있나!” 결과는 자명했다. “합격!” 김성철은 세계의회의 화공으로 고용됐다. 합격자의 수는 스무 명. 합격자들에게 곧 그리게 될 그림의 주제가 전달됐다. “너희들은 역사적인 한 명의 왕이 탄생하는 순간을 그리게 될 것이다.” 그 한 명의 왕. 그 이름은. “방랑왕 크롬갈드.” 김성철의 눈이 번득였다. ======================================= 108. 전사의 귀환 (3) 화공들에겐 눈에 잘 띄는 알록달록한 색상으로 이루어진 옷 한 벌이 제공됐다. 화공의 인솔을 맡은 관리는 화공들을 세계의회의 회의가 열리는 대회의실로 안내했다. “작품 구상을 위해 이곳을 너희들에게 개방하겠다. 미리 회의실의 풍경을 눈에 익혀 놓아라. 아마도 한 명의 왕을 위한 대관식은 그곳에서 열릴 예정이니까.” 화공들은 관리가 떠나기 무섭게 분주하게 좋은 구도를 찾기 위해 치열한 자리다툼을 벌였다. 벌써 종이 위에 대강의 회의실 풍경을 그리는 화가도 있었다. 이전의 테스트가 선발전이었다면 이제부터가 화가들의 진정한 싸움인 셈이다. 물론 김성철은 그 싸움의 향방에 아무 관심이 없다. 그는 눈치를 봐 회의실에서 나서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는 그 나름대로의 싸움을 시작했다. 김성철은 세계의회의 곳곳을 지키는 병사들의 상당수가 황제에게 등을 돌린 지방 제후와 부유군도의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드워프와 엘프, 고대왕국의 병사도 있긴 했지만, 그 수는 적었고 주로 그들이 모시는 왕과 귀족의 경비를 맡는 데 불과했다. 한편 종말교단 무리는 복도에선 보이지 않았지만, 병사들이 엄중히 관리하는 구역에 숙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김성철은 그 안까지 들어갈 수 없었다. 회의실로 돌아가는 길에 김성철은 복도에서 아는 얼굴 하나를 볼 수 있었다. 드미트리 메디오프. 제국의 총신이자 황제의 심복으로 알려진 사내가 세계의회의 복도를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걷고 있었다. 그것도 수십 명에 이르는 시종을 뒤에 달고 말이다. 그의 거만함은 먼 옛날 황금도시에서 보았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이한 일이다. 이미 힘을 잃은 황제 측의 인사가 세계의회에서 이토록 당당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저녁이 되자 인솔을 맡은 관리가 나타나 화공들을 요새 밖으로 데리고 나와 자재 창고로 보이는 허름한 건물 앞으로 안내했다. “안타깝게도 성안에서 너희들을 재울 공간은 충분치 않다. 그 대신, 간소하게나마 숙소를 마련했으니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길 바란다. 물론, 다른 숙소나 잘 자리가 있는 자라면 그곳에서 숙박해도 무방하다. 단, 내일 아침까진 반드시 이 숙소 앞에 대기해야 하는 걸 잊지 마라.” 대부분의 화가들은 숙소를 한 번 둘러보고는 미련 없이 그들의 숙소로 돌아갔다. 화공을 위한 숙소는 가축만 없다뿐이지 짚더미만 깔아놓은 마구간이었다. 김성철은 미련 없이 숙소 안으로 들어가 여장을 풀었다. 김성철 이외에 2명 정도의 화가가 숙소의 신세를 졌다. 김성철은 화공의 옷을 벗고 사람들이 모이는 주점으로 가 정보를 수집했다. 그는 거기서 황제 측의 인사 상당수가 야만인의 오랜 공성과 황제의 알 수 없는 이단 행위, 스스로 자처한 고립에 질려서 차례차례 그의 곁을 떠났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특히 황제의 오른팔을 자처했던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잔존함대 중 절반이 넘는 무려 3개 함대의 사령관을 설득해 야음을 틈타 크롬갈드 측에 붙었다고 한다. 김성철은 공선 정박지 구석에 방수포를 덮어놓은 제국함대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모든 제후가 등을 돌리는 와중에도 황제를 지지한 군대가 이반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김성철은 인적이 드문 공터에서 산호로 만든 호각을 불었다. 입으로 불어도 소리는 나지 않는 호각. 그러나 그 소리는 단 한 명에겐 정확하게 전달된다. 곧 김성철의 뒤에서 아무개가 나타났다. “잘도 성안에 잠입했네.” 아무개가 솔직하게 감탄을 섞어 말했다. 지켜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김성철이 화공으로 선발되는 장면을 말이다. 김성철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드미트리 메디오프와 함대가 황제를 배신했더군. 하지만 웃긴 일이야. 군대는 드미트리 메디오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 1함대의 지휘관을 맡긴 했지만,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전통적인 군인이라기보다는 문관에 가까운 인물이다. 이에 아무개는 특유의 맑은 목소리라 대답했다. “황제가 당신을 구출하지 않고 퇴각을 명했을 때 적잖은 제국 병사들이 황제에게 등을 돌렸어.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그저 그들의 불만을 이용한 것뿐이고.” “드디트리 메디오프는 지금 방랑왕의 편인가?” 아무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만 아니야.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이미 방랑왕에 포섭되어 그들의 주군으로 하여금 방랑왕을 지지하게 하고 있어. 엘프 왕자의 뒤에 있는 에르포러스란 늙은이도 그중 하나지.” “종말교단은 왜 방랑왕을 지지하는 거지?” “…그건 알 수 없어.” 김성철은 기억하고 있다. 드워프의 궁정 내에서 벌어졌던 부유군도의 라이즈 하이메르와 종말교단의 사라사 제로 간의 대립을. 그 싸움만 놓고 보면 두 세력은 결코 같은 편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싸움 또한 방랑왕의 연출일 수도 있다. 게다가 황제는 이들이 같은 주인, 즉 크롬갈드를 모시는 같은 패거리라고 말했다. 아직은 그 말의 진위를 확인할 길이 없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다. “쉿!” 그때였다. 아무개는 매서운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그녀는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하늘 위에서 마법사를 태운 그리폰 한 마리가 날아가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리폰에 올라탄 마법사가 청음과 관련된 마법을 전개한 것을 진실의 눈을 통해 볼 수 있었다. 먼 곳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괜히 세계의회를 험담하는 말을 했다간 즉각 포승을 든 병사들에게 호된 꼴을 당할 것이다. 수상쩍은 마법사를 태운 그리폰이 지나가자 아무개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보여줄 게 있어.” 그녀는 고양이 같은 몸놀림으로 어둠 속을 소리 없이 걸었다. 김성철은 묻지 않고 그녀를 따라갔다. 곧 그녀는 성궁 요새와 떨어진 석조 건물로 이동했다. 요새를 보조하는 별채다. 병사 여러 명이 지키고 있긴 했지만, 본채만큼 경계가 삼엄하지 않았다.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두 명은 가볍게 경계를 뚫고 건물의 입구에 이를 수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김성철은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여긴 어디지?” 김성철이 물었다. “보면 알아.” 아무개는 손을 부지런히 놀려 눈앞에 쳐진 경계결계를 해제하고 있었다. 김성철이 할 수 없는 도적 클래스의 고유기술이다. 경계결계를 해제한 아무개가 어둠 속으로 앞장섰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끝없이 뻗어 있었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면서 김성철은 더욱 진한 죽음의 냄새와 함께 고통에 찬 신음을 들을 수 있었다. ‘고문실인가.’ 익숙한 풍경.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못 볼 꼴을 볼 수 있으니 눈을 감아둬라.” “으…. 응!” 예상했던 대로 그 건물의 정체는 그 자체가 거대한 고문실이오, 처형장이었다. 지하 감방 곳곳에 처참하게 고문당해 죽어가는 자들이 가득 차 있었고 복도 곳곳엔 거적때기에 쌓인 시쳇더미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수천 명이 이곳에 갇혀 있어. 하루에 죽어 나가는 사람의 숫자만 2백여 명. 하지만 이 고문실의 존재에 대해 아는 자는 별로 없어.” 아무개가 어둠 속에서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누구의 짓이지?” 김성철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와 음성엔 가벼운 분노가 묻어 있었다. “세계의회의 이름으로 벌인 일이야.” 아무개가 답했다. 김성철의 얼굴에 불쾌감이 떠올랐다. “나는 이런 일을 지시한 적이 없는데.” “당신이 떠난 이후 크롬갈드 패가 실권을 잡은 건 기억하지? 이건 그 결과야.” 그녀의 말대로였다. 고문관과 경비병, 그들을 보조하는 마법사. 모두 구 인간제국, 아니 루테기네아 출신의 제후들이 부리는 것들이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김성철은 그들의 만행을 보며 진한 분노를 느꼈다. “명목상 이들의 죄는 적과의 내통이야. 하지만 실체를 알고 보면 이들의 죄는 하나밖에 없어.” “…….” “방랑왕을 비난한 죄.” 김성철의 얼굴이 무겁게 굳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야.” 아무개는 고문실을 지나 별채의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아직 보여줄 게 남은 것 같았다. “이 시설의 진정한 목적은 단순히 비방자를 처벌하기 위함이 아니야.” 어둠 속에서 푸른 눈빛이 번득이고 있었다. 구세병이다. 구세병이 교차로에서 보초를 서고 있다. “내가 주의를 끌게. 저 괴물이 자리를 비우면 직진해. 곧 따라올 테니.” 아무개는 소실의 능력을 이용해 먼저 안쪽으로 돌파해 일부로 소리를 내 구세병의 주의를 끌었다. 구세병이 아무개를 잡으러 간 동안 김성철은 빠르게 그 지점을 돌파했다. 아무개는 순식간에 김성철과 합류했다. “이쪽이야.” 복도의 끝엔 반쯤 열린 철문이 있었다. 철문 너머엔 끔찍할 정도로 짙은 농도의 시체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끼이이익- 김성철은 말없이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엔 처참하게 훼손된 시체로 가득했다. 피비린내로 가득한 방에서 김성철은 볼 수 있었다. 시체로 기워 만든 골렘의 형상을. 그것들은 검은 파편이 담긴 푸른색의 액체 담긴 욕조 안에 담겨 있었다. “…….” 김성철은 한눈에 그 시설의 목적을 파악했다. 구세병의 제조시설이다. 시체를 기워 만든 시체골렘을 검은 파편을 이용한 특별한 마도구를 통해 구세병으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처참한 현장을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보며 아무개가 말했다. “크롬갈드는 자신의 비방자를 자신의 가장 충직한 병사로 개조하고 있어.” “…그야말로 루테기네아적인 방법이군.” 실로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신성 루테기네아 왕국이라 불리던 순수한 악의 제국에 가지던 분노를 말이다. 오랜 시간의 경과로 인해 잠시 망각했지만, 그것들은 원래 이런 족속이었다.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김성철과 아무개는 끔찍한 현장을 뒤로한 채 요새에서 빠져나왔다. 달빛이 비치는 밤하늘 아래에서 아무개가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역사에서 방랑왕은 훌륭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어. 그는 최후까지 재앙에 맞서 싸운 투사로 알려졌어.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지. 하지만 내가 알던 역사는 실제의 역사와 다른 것 같아.”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김성철을 힐끗 응시하고는 피식 웃었다. “뭐, 당신부터가 역사를 거스르는 선택을 한 장본인이지만 말이야.” “선택이라….” 김성철은 예전에 아무개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창백한 달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게 전에 당신이 말한 내가 하게 될 선택을 말한 건가?” 아무개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당신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는 선택을 하게 되었지만.” 아무개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문득 김성철은 아무개에게 당시 그 자신이 누구를 선택했는지 묻고 싶은 기분을 느꼈지만,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회귀자가 본 미래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건 그 자신이다. “…하지만 곧 선택을 하게 되겠지.” 김성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머지않았다. 선택의 때는 왔다. ‘미안하지만, 하루만 견뎌주시오.’ 김성철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고통과 죽음으로 가득 찬 건물 앞을 떠났다. * 다음 날 아침. 화공들이 급히 소집됐다. 용건은 간단했다. “지금부터 곧 너희들은 한 폭의 그림을 그리게 될 것이다. 모두 제각기 최고의 실력을 다해 이상적인 한 명의 왕을 그리도록 해라! 전에도 말했다시피, 가장 훌륭한 그림을 그려내는 자에겐 가족을 데리고 부유군도로 갈 수 있는 특전을 제공하겠다.” 십 수명에 이르는 화공들은 성궁 요새의 회의실로 이동됐다. 그중 하나인 김성철은 다리를 절며 회의실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아르카나이트, 엘프 왕자, 다인크래프트, 드미트리 메디오프 같은 제후들이 저마다의 시종을 거느리고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무려 제국의 망명정부의 장이라는 직함을 내걸고 있었다. 그리고 회의실 구석엔 검은 로브를 걸친 무리가 음험한 분위기를 풍기며 서 있었다. 종말교단의 무리다. 김성철은 그들 중에 아주 잘 아는 얼굴이 섞여 있다는 걸 발견했다. ‘슈넬메르커.’ 종말교단의 부교주. 그토록 찾아 헤매던 녀석이 드디어 김성철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장엄한 나팔 소리와 함께 세계의회의 회의가 시작됐다. 회의의 주재자는 아르카나이트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하기 싫다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이번 세계의회의 의제인 재앙의 해결을 위한 한 명의 왕의 지정을 시작하겠소.” 그는 마치 책을 읽듯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대해 친 크롬갈드 측 패거리의 행동이 확연이 드러났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아르카나이트의 시건방진 태도에 대해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특히 인간제국을 대표한다는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손을 들어 직접 아르카나이트를 은근히 돌려 질타하기까지 했다. “몸이 편찮아 보이시는 거 같은데, 정 힘드시면 쉬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대신해드릴 수도 있으니.” 아르카나이트는 마치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드미트리 메디오프를 노려봤다. 하지만 세계의회의 칼자루를 쥔 건 그가 아니다. 그는 분노를 적당한 선에서 멈추고 자리를 옮겼다. “주인 노릇도 대신 하는 분인데 뭔들 대신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당신이 하시구려. 나는 뒤에서 몸이나 구경이나 하고 있을 테니.” 그 가시 돋친 발언에 부유군도 패거리와 구 인간제국 패거리들이 격하게 반발했지만 정작 욕을 얻어먹은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오히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아르카나이트가 내어준 상석으로 걸어가 앉았다. 이제 세계의회의 주재는 왕도 제후도 아닌 주군을 배신한 자가 맡게 되었다. 김성철은 회의실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투구를 쓴 사내를 응시했다. 그는 우두커니 말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딱히 그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열렬한 지지자들이 그의 입장을 대변해줄 것이기에. 하지만 모든 이가 크롬갈드를 지지하는 건 아니다. 상석에서 말석으로 자리를 옮긴 아르카나이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다인크래프트를 힐끗 바라보고는 드미트리 메디오프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세계의회의 전통적인 표결방식은 만장일치라는 건 알고 있소?”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인크래프트는 이에 흥! 하는 소리를 내며 팔짱을 단단히 끼었다.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는 옹고집이 얼굴은 물론 전신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팔 가라즈를 돌려받기 전에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을 것이오!” 다인크래프트가 오래된 고목을 연상케 하는 고집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 108. 전사의 귀환 (4) 좌중에서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특히 친 크롬갈드 패거리에 속한 자들이 싸늘한 눈초리를 다인크래프트에게 보냈다. 반면 마커레이드와 해서데인, 아르카나이트 같은 기존의 멤버들은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드워프 왕의 태도에 동조하는 눈치를 보였다. “전하.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엘프왕자 해서데인 뒤에 선 늙은 엘프가 엘프 왕자의 얼굴을 보고 황급히 놀라 귀띔을 했다. 해서데인은 눈을 꾹 감고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마커레이드 같은 경우엔 따로 담당하는 관리가 붙은 모양이었다. 회의실 구석에 선 사내가 오로지 마커레이드를 주시하며 그녀의 무언의 압박을 넣고 있었다. 왕도 제후도 아닌 그저 일개 관리에 불과한 자가 왕관에 준하는 자격을 지닌 자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아르카나이트는 배분으로나 국력으로나 딱히 꿀릴 게 없지만 노회한 정치가답게 적당한 선에서 삐딱선을 타고 있었지만, 대세를 거스르기엔 그 힘이 명백히 부족했기 때문이다. 나머지 군소국가는 말할 것도 없다. 이미 회의장의 분위기는 크롬갈드가 한 명의 왕이 되는 걸 기정 사실화하고 있었다. 드워프 왕만 지지하면 말이다. 김성철은 지금 당장 정체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현장을 지켜봤다. 아퀴로아와 비슷한 가면을 쓴 부유군도의 마법사들이 회의장에 줄을 지어 등장했다. 모두가 수근거리는 가운데 그들은 회의장 테이블 앞 공터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아르카나이트가 불쾌감을 섞어 묻자 드미트리 메디오프가 히죽 웃으며 답했다. “드워프 왕의 소원을 풀어주기 위한 쇼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김성철은 드미트리 메디오프가 과거 아퀴로아가 하던 짓을 대신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아퀴로아, 아니 라이즈 하이메르는 보이지 않았다. 아퀴로아와 비슷한 가면을 쓴 사람은 여러 명 있었지만 모두 얼굴과 몸을 가리는 가면과 옷을 입고 있어 식별하기 곤란했다. 마법사들은 신속하게 마법진을 그리고 뒤로 물러섰다. 그들 중 한 명이 제국의 옛 총신을 응시했다.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크롬갈드를 바라보았다. 크롬갈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드미트리 메디오프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들의 일제 영창이 시작됐다. 마법진이 밝은 빛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마법진의 중앙에 무언가 나타났다. 검은 깃털을 지닌 새 형상의 인간. 그리고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구속구 안에 담긴 망치. 마라키아와 팔 가라즈다. 부유군도의 마법사들이 그를 통째로 소환한 것이다. 마라키아의 주변엔 주문술식으로 펼친 방벽이 펼쳐져 있었다. 김성철은 마라키아가 여기 오기 전에 공격을 받았음을 간파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라키아는 바뀐 현장을 보고 냉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아신까지 불러내서 날 공격하더니 이런 꿍꿍이가 있었군.” 부유군도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마라키아를 둘러싸며 방벽을 펼쳤다. 그 뒤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종말교단의 광신도들이 서서 언제라도 아신화를 할 준비를 갖춰 놓고 있었다. 마라키아는 지금 새장 안의 새였다. “뭣들 하는 거야? 지금 이 장면을 그리라고! 화공들. 이 장면은 좋은 그림이 될 것이다.” 화공들은 감독하던 관리가 뒤에서 재촉했다. 김성철은 고개를 숙이고 스케치를 그리는 척했다. 그러나 그의 도화지에 그려진 것은 눈과 부리가 달린 강낭콩이었다. 관리가 김성철의 그림을 보고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이딴 그림을 그렸다간 야만인 토굴행이니 정신 차리는 게 좋을 게다.” 드미트리 메디오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거기. 조인. 긴말은 하지 않겠다. 순순히 팔 가라즈를 정당한 주인인 다인크래프트에게 돌려주고 물러나라.” 마라키아의 날개가 퍼드득 날개짓을 했다. 마라키아는 인간보다 넓게 돌아가는 목을 돌려 날개 겨드랑이를 부리로 긁으며 말했다. “나는 나보다 약한 녀석의 명령 따윈 듣지 않는다.” 드미트리의 미소가 깨어졌다. 그때 한 여성이 앞으로 나섰다. 얼굴을 천으로 만든 가면으로 가리고 몸을 치렁치렁한 로브로 가렸지만, 김성철은 한 눈에 그 여성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라이즈 하이메르.’ 그녀도 여기에 있었다. 그녀는 왕과 제후 앞에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 마라키아에게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검은 깃털을 지닌 나하크의 왕이시여.” 라이즈 하이메르가 말했다. 마라키아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호오. 나하크의 이름을 알다니. 유인원 중엔 그나마 쓸모 있는 녀석이 있구나.” 라이즈 하이메르의 등장과 마라키아의 반응은 회의실의 공기를 바꿔놓았다. 좌중들이 라이즈 하이메르를 보며 수근거렸다. “나하크? 그게 뭐지?” “처음 듣는 이름인데.” 그들의 정보로는 알 턱이 없다. 하지만 라이즈 하이메르는 많은 걸 알고 있다. 그녀는 마라키아를 노려보며 계속해서 명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쪽의 조건을 한 번 들어보시는 건 어떤가요? 나하크의 왕께서 손해 보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뭐지? 그 조건이란 건?” 마라키아는 여전히 냉소적인 태도로 물었다. 이에 라이즈 하이메를 약간의 뜸을 들여 기대감을 고취시킨 후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망치를 넘겨주시면, 동족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동족?” 마라키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는 먼 북쪽, 야만인의 지배영역에 있는 바위산 아래의 조인왕국을 떠올렸다. 그러나 라이즈 하이메르가 제시한 건 다른 것이었다. “대륙의 바깥, 멀리 떨어진 부유군도. 그곳엔 나하크의 후예들이 살고 있습니다.” “헛소리.” 마라키아는 바로 부정했다. 그러자 라이즈 하이메르는 그의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뒤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곧 부유군도의 무리들이 검은 천에 덮인 커다란 새장을 회의장 안으로 끌고 왔다. 마라키아의 눈이 차차 커지기 시작했다. 새장은 방벽을 펼친 마라키아 바로 앞에 놓였다. 회의장의 공기가 일순 얼어붙었다. 침묵 속에서 라이즈 하이메르는 새장을 덮은 천을 손으로 잡고 들췄다. “삐잇?!” 마라키아의 입에서 가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새장 안에 있던 것은 하얀 깃털을 지닌 조인이었다. 그 조인은 검은 깃털을 지닌 마리키아를 보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양손으로 쇠창살을 잡았다. 커다란 날개가 의지와 관계없이 펄럭이며 바람을 일으켰다. “검은 깃털? 전설의 나하크 왕?!” 조인이 말했다. 마라키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상상도 못했다. 이성을 지닌 자신의 동족이 세계 어딘가에 남아 있을 줄이야. 김성철은 마라키아의 눈에 한줄기 눈물방울이 맺히는 걸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그가 처음 보인 눈물이리라. 김성철은 마라키아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놈은 늘 혼자였지. 어떻게 보면 대단한 녀석이다. 홀로 종족 전체를 짊어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걸 보면.’ 마라키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회가 깃든 눈으로 자신의 동족을 바라보았다. 그의 방벽이 차차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해후는 오래가지 않았다. 라이즈 하이메르는 부하들에게 시켜 새장 안에 다시 검은 천을 씌웠고 새장을 다시 바깥으로 들고 나갔다. 허물어지기 시작한 방벽이 다시 복구됐다. “자, 나하크의 왕이시여. 눈으로 보신 바와 같이 당신의 동족은 건재합니다. 그들은 부유군도에 남아 있지요.” “부유군도라.” 마라키아가 음미하듯 말했다. “폐하께서 팔 가라즈를 넘겨주신다면 우리는 폐하를 부유군도로 안내, 폐하의 백성이 있는 곳으로 안전히 보내드리겠습니다.” 전부 죽었다고 생각했던 동족과 다시 만난다는 것. 실로 거부하기 어려운 제안이다. 김성철조차 마라키아가 그 제안을 받아들여도 그를 탓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 마라키아는 부리를 닫은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치열한 고민을 하고있는 게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다. “마라키아….” 베르텔기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잠시 후, 마라키아를 둘러싼 방벽이 없어졌다. 스스로 방벽을 해제한 것이다. 마라키아는 팔 가라즈 옆으로 걸어가 자신을 둘러싼 인간들을 노려보았다. “너희들의 뜻은 잘 알겠다.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모두의 이목을 한 몸에 받으며 마라키아는 다시 말했다. “팔 가라즈를 돌려주지.” 드미트리 메디오프를 위시한 친 크롬갈드 패거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김성철은 구석에 선 슈넬메르커가 특유의 자기확신에 찬 미소를 지으며 부하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는 걸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아는 법이다. 그것이 조인이라고 해도 말이다. 마라키아가 다시 말했다. “단, 팔 가라즈가 인정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드미트리 메디오프의 입가에 서렸던 미소가 싹 걷혔다. 마라키아는 말하고 있었다. 거치대와 분리된 팔 가라즈를 다시 하나의 망치로 합쳐 무기로 들 수 있는 자에게 그 망치를 돌려줄 것을.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가능하게 한 사람은 지금까지 김성철이 유일하다. “자, 유인원들. 뭐하는가? 어서 이쪽으로 와 자격을 증명해라. 단 한 명이라도 자격을 증명하는 자가 나타난다면 나는 미련 없이 이 망치를 넘겨주겠다.” 마라키아는 먼저 드워프 왕을 노려봤다. “자, 거기 땅딸막한 수염 원숭이. 너는 이게 네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어디 한 번 자격을 보여라.” 명백한 도발. 그러나 다인크래프트는 조금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오히려 씨익 웃으며 자진해서 마라키아 옆으로 다가갔다. 그의 투박한 손이 거치대에 구속된 팔 가라즈에 닿았다. 팔 가라즈는 반응하지 않았다. “어이쿠! 난 자격이 없는 모양이군!”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더니 좌중을 노려보며 아까와 다른 매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여기 계신 영웅 중 아무나 저 검은 새에게 내 망치를 가져와 주시오. 누구든 좋소. 팔 가라즈를 가져오는 자에겐 드워프 왕국의 은인으로 모실 터이니.” 이것으로 명백해졌다. 마라키아와 드워프 왕이 한 통 속이라는 것을. 크롬갈드 패거리는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소드마스터로 이름 높은 아르카나이트 왕이 한 번 팔 가라즈의 시험에 드는 건 어떻소?” 다인크래프트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아르카나이트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팔 가라즈를 잡았고 아무 소득 없이 물러났다. “이런, 나도 자격이 없는 모양이군.” 아르카나이트는 이제 크롬갈드 왕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한 명의 왕을 계승하는 자가 시험에 도전해보면 어떻겠소?” 그는 도발하고 있었다. 크롬갈드 왕은 물론 그 패거리 전체를. 드미트리 메디오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끓어올랐다. “명색이 세계의 적을 잇는 자라면, 그 정도 자격 정도는 증명해야되지 않겠소?” 아르카나이트의 말엔 노회한 왕의 기백이 담겨 있었다. 이에 놀란 크롬갈드가 움찔거렸다. 그 순간 김성철은 저 보이지 않는 투구를 쓴 자가 크롬갈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품었다. 그러자 뜻밖의 인물들이 등장했다. 잠자코 있던 슈넬메르커와 종말교단 패거리였다. 그들은 크롬갈드에게 다가와 뭔가 속삭였다. 그 장면을 본 김성철은 심증을 굳혔다. ‘보통 관계는 아니다.’ 이윽고 종말교단 광신도 하나가 검은 불길로 휩싸였다. 아신화를 시전한 것이다. 검은 불길로 싸인 자의 몸에서 검은 그림자가 뻗어 나오더니 앉아 있는 크롬갈드의 몸에 겹쳤다. 크롬갈드는 검은 그림자에 싸인 채 번쩍 일어섰다. 그의 몸엔 압도적인 힘이 넘치고 있었다. ‘아신화를 쓴 광신도를 통해 힘을 전달받는 모양이군.’ 검은 그림자를 몸에 드리운 크롬갈드는 천천히 걸어 팔 가라즈 앞에 섰다. 장내의 모든 이가 역사적인 장면에 주목했다. 크롬갈드는 말없이 검게 물든 손으로 팔 가라즈를 어루만졌다. 그러나, 팔 가라즈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자격 없는 왕인 모양이군.” 마라키아가 빈정거렸다. 상황이 일변했다. “당장, 저 새를 죽이고 팔 가라즈를 회수해라.” 드미트리 메디오프가 삿대질을 하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명했다. 그의 명에 종말교단 패거리가 일제히 전면으로 나섰다. 그들의 몸에 검은 불길이 붙기 시작했다. 3기에 달하는 아신을 불러낼 셈이다. 1기도 벅찬 마라키아에겐 사형선고와도 같은 일. 그러나 마라키아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위협하는 종말교단 무리를 무시하고 그 너머의 관중들을 향해 소리 높여 말했다. “전사의 자격을 증명할 또 다른 이는 없나? 누구든 좋다. 진정한 전사의 심장을 지닌 이라면.” 아무도 이에 대답하지 않았다. 첫째로 자격이 없었고 둘째로 서슬퍼런 종말교단와 부유군도 세력 앞에 대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변이 싸늘한 침묵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종말교단 패거리는 마라키아를 더욱 압박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던 그때. 한 사내가 벌떡 일어섰다. “나에게도 기회를 주시오!” 그는 얼굴이 추한, 다리를 저는 화공으로 알려졌다. 그의 발밑에는 새랍시고 눈알과 부리가 달린 강낭콩을 개판으로 그려놓은 낙서가 나뒹굴고 있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다리를 절며 팔 가라즈 앞으로 걸어갔다. 드미트리 메디오프가 그를 막아서려 했지만 슈넬메르커가 제지했다. “구경이나 해봅시다. 저 진정한 전사가 어떻게 하는지.” 그는 빈정거리며 경멸에 찬 눈으로 왕과 제후들을 노려봤다. ‘죽어 없어져야 할 쓰레기 같은 것들.’ 그가 절름발이를 가만 내버려 둔 것은 세계의회를 욕보이기 위해서다. 그의 비호 아래 절름발이는 팔 가라즈 앞에 섰다. 목탄으로 검게 변한 손이 팔 가라즈에 닿았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드미트리 메디오프와 슈넬메르커의 입가에 비릿한 냉소가 떠오르려는 찰나였다. 철컥. 기적이 일어났다. 철컥. 철컥. 철컥. 팔 가라즈를 감싸던 파편이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대단히 복잡하고 조화로운 일련의 움직임으로 뭉치기 시작한 파편은 곧 그를 감싼 망치와 합쳐져 하나의 완전한 망치로 거듭났다. “…….” 소란스럽던 회장에 고요가 찾아왔다. 그 적막 속에서 망치를 든 자는 두건과 그리고 얼굴을 가리던 가면을 벗어던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믿는 신에게 심판받았다고 생각한 전사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삐기이이이...” 마라키아가 글썽거리는 눈으로 그 사내를 응시했다. 김성철은 그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좌중들, 특히 크롬갈드 패를 노려보며 담담하지만 위엄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여기서 나가지 못한다.” 전사가 돌아왔다. ======================================= 109. 반격 (1) 누가 감히 그의 귀환을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장내의 모든 이들이 한 사내의 등장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 채 침묵했다. 그 경악어린 고요 속에서 가장 기민하게 움직인 것은 종말교단 패였다. 아신화를 준비하던 광신도들이 불경한 두루마리를 꺼내며 금지된 힘을 얻으려 했다. 하지만 김성철은 화공이라는 전체를 볼 수 있는 자리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모든 걸 관찰했다. 그가 손가락을 뻗었다. “체인 라이트닝.” 분노한 전류는 종말교단의 광신도가 아신을 불러오기도 전에 그들을 고압의 전류로 구워버렸다. 남은 아신화를 시전한 광신도는 하나. 김성철은 직접 그에게 달려들어 팔 가라즈를 휘둘렀다. 직접 강림한 아신조차 이겨내지 못하는 힘이다. 어찌 감히 아신의 힘을 그저 빌려온 자가 막을 수 있겠는가. “켁!” 검은 불길에 휩싸인 사내는 팔 가라즈의 일격에 못처럼 지면을 뚫고 들어가 즉사했다. 느닷없는 귀환으로부터 10초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그야말로 창졸지간. 세계의회의 소집자는 순식간에 회의실을 자신의 것으로 휘어잡았다. “부수는 자!” 마라키아가 김성철의 다리로 다가와 날개와 팔로 그의 다리를 안았다. 꽤나 힘들었던 모양이다. 김성철은 그러나, 다리를 흔들어 마라키아를 떼어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종말교단을 감시해라.” “아…. 알겠다!” 마라키아 뿐만 아니었다. 김성철은 속으로 지지하던 군왕들도 자신의 부하들을 풀어 부유군도과 모반한 인간제국, 종말교단을 감시하게 했다. 다만 엘프 왕자 해서데인만큼은 뒤편에 선 늙은 엘프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는데 김성철은 단지 해서데인에게 눈빛을 보내는 것만으로 왕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해서데인은 김성철의 기대에 부응했다. “물러서세요. 스승님. 저는 당신의 주군이지 부하가 아닙니다. 여기서부터는 제 판단 하에 움직이겠습니다.” 왕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늙은 엘프는 고개를 숙인 채 뒤로 물러났다. 자신의 스승을 물리친 해서데인은 휘하의 엘프 궁수들을 움직여 크롬갈드 패를 견제하게 했다. 이렇게 되자 방금 전만 해도 세계의회를 주름잡다시피 한 크롬갈드 패는 궁지에 몰렸다. 그리고 또 하나. 김성철의 손 위에 단창이 나타났다. 재앙의 무기 움 브루크. 김성철은 주저 없이 그것을 슈넬메르커에게 던졌다. “크억!” 창날은 슈넬메르커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이것으로 김성철이 공을 들여 정체를 숨긴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했다. ‘무턱대고 세계의회에 나타났다면 이 교활한 너구리를 잡기는 불가능에 가까웠겠지.’ 이미 포로로 잡은 이상 슈넬메르커는 자신이 아는 사실을 술술 말해줄 것이다. 슈넬메르커는 의지나 신념보다는 개인의 이익과 흥미본위에 따라 움직이는 녀석이니 말이다. 이제 남은 것은 크롬갈드다. 크롬갈드의 문제를 처리하기 앞서 김성철은 회의실 탁자로 걸어가 드미트리 메디오프 앞에 섰다. 드미트리 메디오프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이마에선 땀이 비오듯 흐르기 시작했다. “꺼져라.” 김성철은 담담한 어조로 한마디를 던졌다.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상석을 김성철에게 양보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군중 속으로 섞여들어 간 그는 귀뿌리까지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상기되어 있었다. “아무도 나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김성철이 회의실을 나서려는 드미트리 메디오프를 향해 말했다. 드미트리 메디오프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는 치욕 속에서 고개를 숙인 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엉거주춤하게 회의실 구석에 서서 원하지 않은 관중이 되어야 했다. 방해꾼을 처리한 김성철은 건너편에 앉은,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투구를 쓴 자를 바라보았다. “투구를 벗어라.” 김성철이 말했다. 크롬갈드는 멈칫 거렸다. 김성철은 테이블 아래에서 은은히 전해오는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떨고 있었다. 대륙삼걸 방랑왕이라는 사내가. ‘역시, 저건 가짜인가.’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이번은 살기를 섞어 크롬갈드의 투구를 쓴 자에게 말했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지금 여기서 김성철의 말을 거역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벗으면 안 됩니다!” 부유군도의 고위 장교가 크롬갈드에게 명하듯 속삭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한줄기 빛줄기가 김성철의 손끝에서 뻗어 나와 그의 미간을 꿰뚫었다. 글레어. 김성철이 최초로 익힌 공격 마법. 적들이 강해져 이제는 전투용으로 거의 쓰지 않는 마법이지만 이런 상황에선 최적의 효용성을 자랑한다. 피 분수를 구멍에서 토해내며 부유군도의 장교가 테이블에 엎어지면서 천천히 미끄러져 바닥에 누웠다. “히이이익!” 크롬갈드, 아니 크롬갈드를 연기하던 사내가 안이 보이지 않는 투구를 황급히 벗었다. 투구 안엔 김성철이 예상한 대로 크롬갈드가 아닌 전혀 다른 모습의 사내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그 얼굴을 본 장내 군왕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저런.” “어떻게 이럴 수가. 신성한 세계의회에 대타를 내보낼 생각을 하다니.” “너는 대체 누구냐? 내가 아는 크롬갈드 왕은 이런 낯짝이 아닌 거로 기억하는데.” 정체가 탄로 난 가짜 크롬갈드는 왕들의 매서운 시선을 받으며 바들바들 떨며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고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김성철은 부유군도 패거리를 노려보며 일갈했다. “너희들의 왕은 어디 있는가?” 아무도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김성철이 다시 말했다. “너희들의 왕은 어디 있냐고 물었다.” 팔 가라즈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에도 부유군도 패거리는 무서웠다. 그들은 묵비권 행사의 대가가 뭔지 알면서도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김성철은 그 지독한 충성심이 종말교단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걸 다시 발견했다. “좋다.” 김성철이 부유군도 패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두 눈에선 짙은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 한 여성이 가면을 벗으며 나섰다. “그는 아에게에 있어.” 라이즈 하이메르다.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의 얼굴에 일제히 경악이 떠올랐다. “루테기네아의 공주? 그 여자가 아직도 살아 있었다고?” “믿을 수 없군. 분명 죽었다고 들었는데.” 라이즈 하이메르의 얼굴을 아는 자는 그녀와 김성철 간의 관계도 알고 있었지만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지금 이 분위기 속에서 김성철의 심기를 거스른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니까. 그런데 김성철은 라이즈 하이메르를 보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아에게? 그는 왜 아에게에 있는 거지?” 김성철은 마치 처음보는 타인을 대하듯 행동했다. “그곳에 신의 던전이 있기 때문이지.” 라이즈 하이메르도 그런 김성철의 태도가 어색하지는 않은지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맞은편에 서 있는 슈넬메르커를 가리켰다. “종말교단 또한 크롬갈드의 부하거든. 그들은….”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라이즈 하이메르의 뒤에 서 있던 부유군도 관리들이 검을 빼들어 그녀의 목을 치려고 했다. “배신자년!”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아르카나이트와 다인크래프트, 그리고 해서데인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무산됐다. 왕들의 검과 도끼, 그리고 화살이 방해꾼의 칼날을 막아내고 그들을 도륙한 것이다. 라이즈 하이메르는 대담하게도 뒤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 따윈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종말교단은 크롬갈드가 뿌려놓은 사조직이야. 그들의 목적은 신의 던전을 개방하여 그들의 교주인 크롬갈드가 힘을 얻게 해 불멸자로 만드는 것. 그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이자, 진정한 사명이야.” 라이즈 하이메르는 작정한 듯 가슴 깊이 숨겨둔 비밀을 토해내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크롬갈드에 대한 깊은 분노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가족과 일족을 잃고 반평생을 노예로 살아야 했던 가혹한 운명을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성철은 대하수도의 지하수로를 함께 빠져나가던 시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는 크롬갈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를 것이다. “…이 여자를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가라.” 김성철은 자신의 권한으로 라이즈 하이메르를 부유군도 아니 크롬갈드의 손아귀에서 떼어냈다. 부유군도 패거리는 라이즈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그녀를 저주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김성철은 쉬지 않고 다음 일에 착수했다. 이것은 라이즈 하이메르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 바로, 군대의 장악이다. 다인크래프트나 아르카나이트의 군대는 기꺼이 김성철의 군령에 따르겠지만 현재의 연합군 내엔 김성철의 명을 순순히 따르지 않을 군대가 다수 섞여 있었다. 부유군도와 루테기네아 귀족 제후의 군대, 그리고 황제를 져버린 함대다. 이 배신자들의 군대의 수뇌부는 지금 김성철에 의해 구금되어 있다. 김성철은 이 소중한 전력을 버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상대는 십 만에 이르는 야만인이다. 인간 세력으로선 한 명의 병사가 아까운 실정이다. 단 한 명이라도, 억지로라도 전열에 세워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야만인의 군세를 부수고 라그란제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김성철이 화공으로 위장하면서 꾸민 두 번째 목적. 요인 구속은 어떻게 보면 군대를 장악하기 위한 전제였을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면담을 시작하겠다.” 세계의회의 의장석에 앉은 김성철은 먼저 드미트리 메디오프를 향해 손짓했다. 옛 제국의 총신이 김성철 앞에 앉았다. 김성철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제국의 함대는 이제 누구의 명을 따를 것인가?” 김성철의 물음에 드미트리 메디오프는 초췌한 얼굴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살아서 김성철에게 협력하던가, 아니면 죽어서 그의 군대를 뺏기는 걸 보던가. 김성철에 대해 잘 아는 옛 황제의 오른팔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어렵사리 대답했다. “…대원수님입니다.” 제국의 배신자 함대를 손에 넣은 김성철은 다음 사람을 건너편에 앉았다. 구 루테기네아 귀족 출신의 제국 제후였다. 김성철은 그에게 앞선 배신자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네 군대는 이제 누구의 명령을 따를 것인가?”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 죽은 줄 알았던 김성철은 한 번에 자신의 자리를 되찾은 것도 모자라 적대적인 군세까지 자신의 지배력 아래 두었다. 손실이나 내분은 거의 없었다. 부유군도 소속의 공선 몇 척이 달아나긴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고 김성철은 위협과 회유를 통해 부유군도의 군대의 지휘권마저 넘겨 받는데 성공했다. 이제 연합군의 군대를 장악하여 세계의회의 입지를 바로세운 김성철에 대해 세계의회의 왕들이 연회를 제의했다. 그러나 김성철은 그 제의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에겐 달리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김성철은 먼저 병사들을 풀어 크롬갈드 세력이 만들어놓은 고문실 및 구세병 제조시설을 점령, 억울하게 갇힌 사람을 석방하고 고문관과 범죄행위에 협력한 자들에게 죗값에 맞는 처벌을 내리도록 지시했다. 다음으로 김성철은 지하감옥으로 찾았다. 어두컴컴한 감방 안엔 그의 옛 부관 슈넬메르커가 갇혀 있었다. “잘 지냈나?” 김성철이 담담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움브루크의 창날에 꿰뚫린 슈넬메르커는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닦아내며 간신히 말했다. “…제가 졌습니다.” 그는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질서신의 힘과 진정한 신의 도구인 김성철의 가능성은 제아무리 현명한 인간이라도 가늠할 수 없기에. 그는 이미 김성철이 완전히 죽어 없어졌다고 가정했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 장기로 삼던 몇 중의 안전장치도 마라키아와 적대적인 왕을 위한 것이었지 김성철의 출현에 대비한 건 하나도 없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떨어뜨린 옛 부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종말교단의 교주는 황제와 라이즈 하이메르가 말한 것처럼 크롬갈드 본인이었다. 그리고 종말교단과 부유군도, 그리고 구 루테기네아 귀족은 철저히 분리되어 최상위권자가 아닌 이상 각 조직이 한 명의 군주를 두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게 설계되어 있었다고 한다. “실로 무서운 안배지요. 그런 조직력은 오직 크롬갈드 왕만이 지니고 있을 겁니다.” 감탄을 섞어 슈넬메르커가 말했다. 김성철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저 크롬갈드라는 작자는 수천 년 이상을 살아오며 대륙의 역사 그 자체를 써 내려온 인물이기에. 그가 원하고자 한다면 더한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한편 슈넬메르커는 종말교단의 진정한 목적에 대해 라이즈 하이메르가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을 말했다. 종말교단의 진정한 목적은 던전의 개방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종말교단은 아에게 뿐만 아니라 낙진으로 뒤덮인 동부에 두 개의 신의 던전이 추가로 개방됐다고 한다. 그리고 드워프 왕국 내에 출현한 신의 던전의 경우엔 종말교단 패거리가 드워프 불량배를 사주해 입구로 향하는 굴을 파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무려 4개의 신의 던전이 개방된 셈이다. “크롬갈드는 각 던전에서 그 던전이 지닌 궁극의 힘을 손에 넣으려고 할 겁니다.” 슈넬메르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109. 반격 (2) 거기까지는 김성철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라이즈 하이메르의 말도 그렇고 슈넬메르커의 말도 그렇고 그들의 말엔 공통적인 맹점이 있다. “크롬갈드 정도의 힘을 지닌 자라면 모든 던전을 개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하나? 아니면 두 개의 던전을 도는 것만으로 그는 승천할 것이다.” 이계에서 일정 이상의 능력치를 지닌 자는 더 이상 아래 세계에 머물지 못하고 초월세계로 전이된다. 그것을 승천이라 한다. 김성철은 예전에 황제에게서 크롬갈드의 능력치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에 의하면 크롬갈드의 능력치는 마치 짜 맞춘 것처럼 모든 항목이 700에 근접했다고 한다. 승천의 조건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신의 던전을 통한다면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닐 것이다. 혼돈신의 이야기에 의하면 하나의 던전에서 여러 명의 승천자, 즉 아신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아 하나의 능력치가 일정 수준에 달하는 것만으로 불멸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항목에 매진해 극에 달하는 것만으로 인간을 넘어선 존재, 즉 아신이 되는 게 이 세계를 창조한 진정한 신의 의도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 사람이 뭘 생각하는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가 저에게 알려준 건 전부가 아니니까요.” 슈넬메르커는 고통이 심한지 숨을 가쁘게 몰아 내쉬었다. 김성철은 그런 자신의 옛 부관을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무엇을 위해서 크롬갈드 밑에서 일한 것이지?” 이에 슈넬메르커는 고통스러운 와중에서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힘겹게 대답했다. “기억하십니까? 이 세계로 오기 전에 우리를 인도한 자가 한 말을?” 모든 소환자는 소환되기 전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내에 의해 인도된다. 그때 그 인도자는 이계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낙원.” 하지만 그 낙원이라는 두 글자는 소환 궁전 안에서 깨끗이 지워진다. “크롬갈드는 우리에게 진정한 낙원을 약속했습니다. 그가 창조하는 렐름이라는 이상세계로 말이죠.” 렐름. 아신이 초월세계 내에 만들어낸다는 작은 세상. 그 안에서만큼은 아신은 전지전능한 진정한 신으로 거듭난다. ‘그렇게 된 거군.’ 조금은 이해했다. 낙원을 바라는 종말교단의 마음이. 제시된 낙원이 구체성을 띠어 갈수록 믿음의 크기도 증대하는 법이니 말이다. “너에게 기회를 주겠다.” 김성철이 슈넬메르커를 향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를 도와 종말교단을 거느리고 야만인과 싸워다오. 그리하면 너에게 자유를 주겠다.” “그것이 정말입니까?” 고통으로 점철된 슈넬메르커의 눈동자에 한 줄기 희망이 떠올랐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길 것이다. 그래도 좋다면 나의 군기 밑으로 들어와라.” 움 브루크가 꽂힌 슈넬메르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아신화라는 강력한 무기를 지닌 종말교단이 김성철의 군기 아래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김성철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지하감옥을 나서며 소리가 나지 않는 산호 피리를 불었다. 어둠 속에서 아무개가 나타났다. 김성철은 그녀를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가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 마계에서 야만인 무리가 출현한 지 수개월이 흘렀다. 처음에는 도저히 막을 수 없다고 알려진 무적의 야만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실체와 허실이 드러나고 있었다. 인간으로서 됨됨이는 둘째 치고 군략가로서 비교할만한 사람이 찾기 어려운 종말교단의 부교주 슈넬메르커는 치밀한 관찰력과 정보력으로 야만인이라는 미지의 세력의 약점을 포착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야만인이 지닌 압도적인 개인 능력은 스스로의 성취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즉, 야만인의 힘은 누군가에 의해 부여받은 것이다. 슈넬메르커는 야만인의 우두머리가 단순히 무리의 수장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그들이 모시는 신에게 힘을 부여받아 아래 부족민에게 힘을 배급하는 일종의 송신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야만인은 그들의 우두머리를 잃으면 한없이 약해지고 뿔뿔이 흩어진다. 그것은 북방전역을 비롯한 수많은 전장에서 김성철이 눈으로 확인한 바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사기의 저하의 문제가 아닌 직접적인 힘의 약화로 이어진다는 사실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야만인은 부족단위로 영적으로 연결된 존재입니다. 각각의 야만인은 하위 부족장과 연결되어 있고 하위 부족은 상위 부족과 연결되어 있죠. 그리고 최상위의 부족은 그들이 모시는, 그리고 우리가 모셨던 질서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보입니다.” 슈넬메르커는 그 증거로 우두머리를 잃은 야만인 포로, 그렇지 않은 포로를 데리고 와 강약을 비교하게 했다. 우두머리를 잃은 야만인은 무기력했고 그 힘도 별 볼 일 없었다. 그것은 평범한 기사 한 명으로도 가볍게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해졌다. 거의 20년 만에 슈넬메르커와 손을 잡게 된 김성철은 솔직히 자신의 옛 부관의 능력을 인정했다. ‘적으로 돌리기엔 아까운 놈이다.’ 슈넬메르커는 자신이 판단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대담한 작전을 제시했다. 김성철은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어떤 작전을 입안할 것인지 감으로 알고 있었다. 김성철의 감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요컨대, 뱀의 머리를 자르는 작전입니다.” 슈넬메르커가 자신 있게 제안한 반공 작전의 요체는 한 번의 치명적인 기습으로 적의 수뇌부를 섬멸하는 것이다. 현재 야만인의 진영은 라그란제를 둥글게 포위하고 있는 모양새로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취약하다. 게다가 한 달 넘게 이어진 지루한 공성전으로 야만인의 기강은 크게 흐트러졌다. 그들의 일과는 오전 내내 포로를 학대하다가 마음이 동하면 투석기로 라그란제를 두들기고 밤이면 약탈한 술과 가축으로 연회를 벌여 곯아떨어지는 게 전부라고 한다. 가능성 있는 작전이다. 문제는 야만인의 본진에 있는 거대한 마법진이다. 슈넬메르커를 비롯한 세계의회의 수뇌부는 그 거대한 마법진이 질서신을 불러내는 힘을 지닌 것을 알고 있다. 그 마법진은 라그란제 안에 있는 고대신의 심장을 멋대로 기동시켜 마법진 자체의 힘과 고대신의 심장 박동의 공명을 이용해 이 세상에 허락되지 않은 힘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기습도 기습이지만 야만인이 그 마법진을 가동하기 전에 마법진을 박살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질서신 앞에 패퇴한 지난 전투의 판박이가 될 것이다. 이제 김성철을 위시한 인류 연합군에게 두 가지 목표가 주어졌다. 하나는 적의 거대 마법진을 박살내는 것. 다른 하나는 적의 수장을 처치하는 것. 이 두 가지를 야만인이 대응하기 전에 번개처럼 해치워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니다. 슈넬메르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라그란제를 미끼로 던져주자는 것. 맹수는 사냥감을 사냥한 직후 가장 경계가 느슨해진다. 야만인이 라그란제를 함락하고 수많은 포로와 노획물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가 야만인이 가장 취약한 시기일 것이라는 게 슈넬메르커의 생각이다. 그의 안에 따르면 공세는 라그란제의 함락 시점까지 늦춰진다. 슈넬메르커는 라그란제가 길어봐야 석 달을 버티는 게 고작이라고 판단했다. 고대신의 심장이 도시를 지켜준다고 하나, 도시민을 떠받칠 병사와 물자는 이미 바닥나고 있으니 말이다. 대부분의 왕과 제후가 그 의견에 동참했다. 특히 부유군도의 항장과 루테기네아의 귀족 출신 제후는 크게 환영했다. 그들은 김성철보다 황제의 몰락을 바라는 무리들이므로. 김성철도 슈넬메르커의 견해가 가장 이상적인 안이라고 생각했다. 연합군 자체의 시점내에서 본다면 말이다. 그러나 김성철은 황제와 약속을 했다. 늦어도 일주일 안엔 원군을 끌고 와주기로. 김성철은 허투루 약속하는 사내가 아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일을 그르치는 것은 인류의 운명을 등에 짊어진 자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가 패배하는 순간, 황제는 물론이고 인류 전체가 질서신의 생각대로 이 세상에서 청소될 테니 말이다. 생각을 해야 한다. “…….” 낙진 섞인 바람이 불어오는 망루 위, 김성철은 달빛을 받아 핏빛으로 변한 동녘의 낙진을 응시하며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약속을 지키느냐. 아니면 약속을 버리고 최적의 시기를 잡느냐. 쉽사리 정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한다는 것은 모든 것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인류의 운명과 개인적인 우정. 어느 쪽이 중한지는 굳이 살펴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도 포기하기 어렵다는 감정이 김성철을 고뇌로 몰아넣고 있었다. 또르륵.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 단숨에 들이킨다. 좋아하는 달콤씁쓰름한 엘프주지만 그의 무거운 기분을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짙은 한숨이 연신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가벼운 걸음걸이. 이쪽을 향해 똑바로 오고 있다. 김성철은 뒤를 돌아보았다. “작별 인사 하러 왔어.” 불청객의 정체는 라이즈 하이메르였다. 김성철은 그녀를 정령계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아델화이트에 보내는 편지와 딸려 보낼 호위병까지 준비해 라이즈 하이메르에게 제공했다. 마라키아와 베르텔기아는 라이즈가 김성철에게 한 일을 생각해 좀 더 고생을 시킨 뒤에 보내주자는 입장이었지만 과거의 일 따위 훌훌 털어버린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냥 버리다시피 정령계에 두고 온 크라이아에게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실망이 크다고 하나, 어린아이 상대로 어른답지 못한 일이었다. 라이즈 하이메르 모녀의 재회라면 마음 한구석의 짐을 가볍게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출발한다고 하지 않았나?” 김성철이 다시 성벽 바깥으로 고개를 돌리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라이즈 하이메르는 천천히 걸어 망루의 흉벽에 팔을 올리고는 김성철과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깜깜한 밤하늘, 그러나 별은 보이지 않고 동녘에 서린 낙진만이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핏빛처럼 물들어 있다. 그 핏빛의 경계를 바라보며 라이즈 하이메르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갈 땐 가더라도 인사는 하고 가야지. 당신하고는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해야 할 사과도 산더미처럼 많고.” “…….” 딱히 그녀와 할 이야기는 없다. 김성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차가운 시간이 흘러갔다. 라이즈 하이메르의 입가에 희미한, 힘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시간의 경과만큼이나 변해버린 관계가 피부로 느껴진 탓이었다. 침묵 속에서 김성철의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가서 크라이아를 잘 돌봐줘라.”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김성철에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사과조차 들을 필요도 없다. 이미 그녀는 흘러간 과거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존재가 아니니까. 그것이 진실이다. 그녀는 흉벽에 올리고 있던 팔을 떼고는 뒤로 돌아섰다. 처음과 달리 조금은 무거워진 발소리가 들려왔다. 김성철은 술잔을 기울이며 먼 하늘을 생각 없이 바라보았다. 가까운 곳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저기, 소문을 들었어.” 라이즈 하이메르가 말했다. 김성철은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녀는 위축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반란군 대장을 돕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며?” 이에 김성철은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가 라이즈의 말에 처음으로 보이는 반응이었다. 용기를 얻은 라이즈 하이메르는 양손을 모아 입에 모으고는 심호흡을 한 뒤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되든 안 되든 저질러버려! 그게 당신의 방식이잖아?” 그 목소리를 들은 김성철은 어째서인지 정신이 번쩍 뜨이는 느낌을 받았다. 라이즈 하이메르는 김성철의 희미한 옆모습을 보며 뒤로 돌아섰다. 그녀는 활짝 열린 망루의 입구 쪽으로 사라졌다. “…….” 홀로 남은 김성철은 술잔을 가볍게 저으며 생각에 잠겼다. ‘나의 방식이라.’ 라이즈 하이메르의 말이다. 새겨들을 필요는 없다. 지금은 희석되었다고 하나 여전히 그의 가슴 한가운데엔 그녀를 원망하는 마음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는 게 순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말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군지 뭐가 중요하냐는. 아무리 평범한 사람에게도 새겨들을 말은 있다. 하물며 그를 잘 아는 사람이다. 그녀가 보기에도 지금 김성철은 김성철답지 않았던 모양이다. “…….” 차분히 머리를 식히고 자신을 돌이켜보니 너무 생각이 많았다. 짊어진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일까. 벌써 사흘이라는 시간은 고민하는 데 소모했다. 황제와 약속한 날은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그냥 고민을 거듭하다 황제와의 약속을 무심코 혹은 고의적으로 넘기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비겁한 필부의 방식이다. 그것은 그답지 않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중요한 국면에서 그는 언제나 뭔가를 저질렀다. 대륙을 아우르던 루테기네아 왕국을 상대로 반란군을 결성했을 때, 라이즈 하이메르를 데리고 투기장에서 탈출을 시도했을 때, 그리고 비겁한 세계의회를 스스로 박차고 나갔을 때 김성철은 뒷일 따윈 생각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좋았냐 좋지 않았냐에 대해선 정확한 평가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김성철은 당시의 선택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았다. “저 여자, 솔직히 마음에 안 들지만 방금 한 말은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주머니 안의 베르텔기아가 조용히 말했다. “지금, 당신은 당신답지 않아.” “그런가?” 김성철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서서 흉벽에 등을 기댔다. 먼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코트 자락과 머리칼을 기분 좋게 흔들고 지나갔다. “나다운 방식이라.” 당장은 때려 부수는 것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다. 하지만 뭔가를 급히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은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곧 오랫동안 침체하여 있던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과거에 비슷한 전투가 있었다. 루테기네아 약탈부대가 김성철이 지키는 작은 마을을 포위했고 황제가 소규모의 부대를 거느리고 김성철과 마을을 구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전투의 규모나 대치한 양군의 전력은 비교할 계제가 아니지만, 전체적인 상황은 지금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 김성철과 윌리엄은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하는 방법으로 루테기네아의 군세를 격멸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 그 방법을 쓴다면? 물론 모든 걸 그르칠 수도 있고 적지 않은 희생을 불러올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 그것이 라이즈 하이메르가 상기시킨 김성철다운 마음가짐이다. “…한 번 저질러볼까.”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가끔 욕심을 부린다. 황제와의 약속, 인류의 구원. 양립하기 어려운 주제. 하지만 그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손에 넣기로 생각했다. 누군가의 조언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의지로 말이다. 김성철은 단숨에 남은 술을 들이켜고는 서둘러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는 즉시 가장 날랜 전령을 보내 아래와 같은 명령을 하달했다. [ 이틀 뒤, 해가 지면 심장을 멈춰라. 빛과 함께 찾아오겠다. ] 전령을 태운 비룡이 밤하늘 위를 날아오르는 걸 보며 김성철은 전군을 소집했다. 인류 최후의 군세가 그의 명에 복종해 드넓은 벌판 위에 정렬했다. ======================================= 109. 반격 (3) 아침 해가 동쪽의 낙진을 피처럼 달구기 시작할 무렵, 대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두에 선 것은 종말교단과 부유군도의 무리들이다. 크롬갈드의 부하라는 원죄가 있는 그들은 필연적으로 최전선에 서서 그들의 진정성을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그들의 군세 뒤엔 드워프 왕과 아르카나이트의 군대가 창끝을 그들의 등에 들이대고 엄중히 감시하고 있었다. 부유군도와 종말교단과 달리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떨어지는 구 루테기네아 영주의 군세는 갈기갈기 찢어놓아 각 동맹군의 군세 사이사이에 분할 배치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부유군도의 함대도 같은 식으로 연합함대에 각 함별로 쪼개져 각 함대에 흡수 배치됐다. 그리고 크롬갈드 패의 수장격이라 할 수 있는 슈넬메르커는 김성철의 기함 실피드에 동승시켰다. 움 브루크가 여전히 몸에 꽂힌 그는 연합군 내에서 최강 전력을 종말교단 패거리를 움직이게 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이로써 크롬갈드 패의 군세에 대한 장악은 완벽히 이루어졌다. 최전선에 선 그들의 주력이 혹 배신을 시도한다면 후방에 배치된 독전군에 가로막힐 것이고 그들은 야만인과 독전군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되어 완전히 소멸할 것이다. 분할 배치된 무리도 사정은 마찬가지. 그들은 심지어 조직적인 반란조차 꿈꿀 수 없을 것이다. 완벽하게 군대를 장악한 김성철은 다음으로 야만인의 마법진을 파괴할 방법에 대해서 생각했다. 야만인의 마법진이 파괴하기 어려운 것은 순전히 그 방대한 크기에 있다. 하나의 도시를 넣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마법진을 한 번에 파괴하는 것은 오로지 다수의 함대에 의하면 마법폭격 이외엔 방법이 없는데 야만인도 바보가 아닌 이상 대규모 함대의 접근을 그냥 내버려 둘 리 없다. 최근 야만인은 신수라는 기괴한 동물을 데리고 와 여러 용도로 쓰고 있다고 하며 그중에는 날개를 지닌 것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야만인의 머리 위엔 4개의 날개가 달린 눈 없는 괴조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구천을 떠도는 영혼처럼 하늘 위를 배회하고 있다고 한다. 함대를 이용한 폭격은 불가능이다. 폭격을 대체할 다른 무기가 필요하다.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무식하고 무자비한 무기가 말이다. 영혼창고를 무심코 뒤지는 중에 하르마게돈 스크롤을 꺼냈다. 칠영웅 베스티아레가 김성철에게 남긴 함정 도구. 그런데 그 무기는 찢는 순간 시전자 마저 폭발에 휘말리게 하는 고약한 설계를 지니고 있다. “이 녀석은 조금 그래.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데 말이야. 도시를 박살 낼 정도의 무기. 그런 건 없을까?” 그때 김성철 뒤를 배회하고 있던 베르텔기아가 퉁명스레 말했다. “도시를 박살 내는 무기?” 뭔가 아는 눈치다. 김성철은 반색하며 말했다. “연금술로 그런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나?” 베르텔기아는 그런 김성철이 못마땅한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럴 때만 연금술을 찾는다니까!” “…….”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김성철은 그다지 좋은 연금술사는 아니니까. 엄밀히 말하면 부업으로 하고 있다는 게 옳으리라. 잠시 뜸을 들인 베르텔기아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실, 그런 건 없어.” “음.” 김성철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하지만, 도시를 박살 내는 말을 들으니 떠오르는 도구가 있는걸?” “뭐라고? 그런 도구가 있다고?” 금시초문이다. 팔 가라즈조차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가 있다는 건 말이다. 애타게 답을 갈구하는 김성철을 향해 베르텔기아는 가볍게 몸을 흔들며 답했다. “노래 잘 부르는 언니 살던 곳에 있잖아.” “판추리아에?” 강 위의 도시 판추리아엔 아무것도 없다. 건달, 사기꾼, 강도 이외엔 말이다. 그런데 문득 한 가지 장면이 김성철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슬이다. 강의 양안에 걸쳐져 도시를 하나로 묶던 거대한 사슬. 김성철은 기억한다. 그 사슬이 거신에 의해 말려 올려지며 도시 전체를 박살 내던 장면이. 그 정도 질량과 크기를 지닌 물체라면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김성철에겐 힘이 있지 않은가? 그런 사슬조차 움직일 수 있는 신적인 힘이 말이다. 문제는 그것을 적재적소에 가져오는 것인데 인류의 남은 전력을 거느린 그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리라. 슈넬메르커가 이 임무에 자원했다. “우리 종말교단의 고도의 전송 마법을 이용한다면 어렵지 않게 그걸을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몸에 꽂힌 단창을 슬그머니 손으로 가리켰다. 김성철은 군말 없이 재앙의 무기 움 브루크를 그의 몸에서 뽑았다. 재앙의 무기는 쓰는 것만으로 그의 마음을 오염시키고 있었으니까. “내 명예를 걸고 당신의 명을 따르리다. 이번 전투에서만큼은.‘ 슈넬메르커는 자신의 명예를 걸고 복종을 맹세했다. 김성철은 슈넬메르커의 귀순을 승낙했다. 그는 슈넬메르커에게 공선을 내어주고 독자적으로 아신을 지휘하게 했다. 모든 지휘관들이 그런 김성철의 결정에 반발했지만 김성철은 개의치 않았다. 슈넬메르커는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고 나아가 김성철의 작전을 보완할 새로운 계획을 입안했다. “…두 명의 조인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김성철 밑에 있다는 걸 과시라도 하듯 종말교단의 가장 은밀한 공간이동 기술을 아낌없이 공개했다. 아무튼, 우려 속에서 최후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다. 이제 남은 부분은 황제의 대응에 달렸다. 손뼉이란 것은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니 말이다. * 고대신의 심장의 기동을 정지하라는 김성철의 전갈은 황제 측을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심장이 가동을 멈추는 순간, 도시를 감싸는 방벽은 사라지고 그 너머로 야만인들이 물밀 듯이 밀고 들어올 것이다. 그 이야기는 도시의 괴멸을 뜻한다. 황제 옆에 남은 소수의 중신은 절대 있어서 안 되는 이야기라고 진언했다. “야만인의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혹, 이런 방법을 통해 승리한다고 해도, 우리가 죽어버리면 그 승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랜 불신과 불화가 그들의 마음을 닫아놓고 있었다. 황제도 한때는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기억한다. 김성철의 달라진 모습을. 못 보던 사이에 그는 이제는 자신이 그의 등을 바라봐야 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이제 황제는 알 수 있었다. 김성철의 지나치게 짧고 무례하기까지 한 전갈은 오히려 자신을 믿기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오랜 친우 사이에 구구절절한 설명이 뭐가 필요하겠는가. 황제는 오래전 형태는 다르지만,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한 전투를 떠올렸다.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하는 필사즉생의 마음가짐으로 쟁취했던 승리. 김성철이 생각했던 것과 같은 전투였다. ‘녀석은 그 전투를 이곳에서 재현하려 드는군.’ 멀리 떨어져 있지만 지기의 뜻은 통하기 마련이다. 김성철의 뜻을 이해한 황제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즉시 엄정한 목소리로 일련의 명령을 내렸다. “고대신의 심장은 일시적으로 가동을 중지한다. 심장을 멈추기 전에 모든 시민과 방어군을 4구역 이내로 대피시켜라. 우리는 거기에서 적을 막을 것이다. 동쪽에서 빛이 비치기 전까지.” 그때 옆에서 한 중신이 황제에게 질문을 던졌다. “8구역의 무리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것들도 4구역 안으로 피신시킬까요?” 8구역. 인간 하수도라 불리는 제도의 쓰레기장. 황제는 이들을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고 죽어 없어질 쓰레기로 대우했다. 그러나, 종말이 눈앞에 닥친 지금 인간 사이의 구분이 무슨 생각이 있단 말인가. 황제는 자신의 오랜 편견을 스스로 깨뜨리며 근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 또한 나의 백성이다. 한 명도 남김없이 4구역 안으로 피난시켜라. 이것은 명령이다.” 고대신의 심장의 가동을 멈추기 전에 앞서 하위구역에 대한 소개명령이 일어났다. 1구역에 사는 시민이나 8구역에 사는 시민이나 차별 없이. “어떻게 된 일일까요?” 8구역의 주민 배성혜는 전례 없는 황제의 명령에 의아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그의 남편에게 말했다. 김치라 불리는 그의 남편은 투구를 고쳐 쓰고 검을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계의 적이 다시 한번 황제 앞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어.” “김성철 씨가?” 배성혜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아마 그 남자가 황제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겠지.” 자리에서 일어선 김치는 배성혜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과 손이 마주 잡았다.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 김치가 불경스런 악신의 조상들이 가득 들어선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실로 끔찍하고 혐오스런 풍경이었다. 하지만 풍경이 무슨 소용이랴. 김치는 배성혜의 손을 가볍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옆에 있어 줘서 항상 고마워.” “여보….”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간에 지금 나는 낙원에 있어. 바로 당신이 내 옆에 있으니까.” 부부는 잠시 포옹을 한 뒤, 상위 구역으로 향하는 행렬을 따라 걸어갔다. 멀리서 소름 끼치는 야만인의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지만 마주 잡은 손은 절대 놓지 않았다. * 고대신의 심장이 고동이 마침내 멈췄다. 제도 라그란제의 모든 시민들은 성벽 뒤에서 마음을 졸이며 곧 닥칠 거센 풍랑에 대비했다. 야만인들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다수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그들은 통일적인 명령에 움직이기보다는 각 부족 부족장의 판단에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잦았다. 대부분의 야만인이 게으르고 나태했지만,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교활한 부족장 하나가 높은 성벽 너머에서 들려오던 불경한 고동 소리가 그쳤음을 인지했다. 신중하게도 그는 직접 부족원을 내보내는 대신, 포로의 썩어가는 시체를 투석기에 담아 쏘아 올리게 지시했다. 야만인들이 투정을 부리며 투석기에 시체를 장전하고 성벽 너머로 쏘아 올렸다. 원래 같았다면 시체는 방벽에 부딪쳐 이미 시체의 산을 이룬 해자 쪽에 떨어졌을 테지만 그 시체는 아무 방해도 없이 성벽 바깥으로 넘어갔다. “젠카!” 야만인 부족장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는 즉시 모든 부족원을 규합하여 성벽을 넘게 지시했다. 수백 명의 야만인이 구름처럼 성벽으로 몰려갔다. 늦잠에 취해있던 다른 부족은 귀를 파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곧 놀라운 장면이 펼쳐졌다. 선발대가 아무 방해도 없이 성벽을 사다리로 넘어선 것이다. 그토록 두들겨다 함락되지 않던 라그란제의 성벽 위에 처음으로 야만인의 흙발이 닿았다. 성벽을 넘어선 야만인들은 신이 나서 아래로 강승,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약탈하기 시작했다. 술, 음식, 신기한 장난감 모든 게 있었다. 단, 가지고 놀 포로만 없었다. 그래도 야만인은 개의치 않았다. 오랜 공성으로 지칠 대로 지친 그들에게 근래 이 정도의 성취감과 자극을 주는 일은 없었으니까. 선두의 야만인이 손쉽게 성벽을 넘어 라그란제 시내를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걸 본 다른 야만인들은 뒤늦게 함성을 지르며 약탈 대열에 합류했다. 성문이 활짝 열리고 야만인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그란제 시내의 절반 이상의 구역이 야만인으로 뒤덮였다. 도시 상층부에 자리 잡은 라그란제의 시민과 피난민들은 두려운 눈으로 야만인들이 도시를 장악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황제는 허공궁궐 위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야만인은 다행스럽게도 바로 4구역에 대해 공세를 개시하지 않았다. 야만인들은 미리 도시 곳곳에 뿌려 둔 귀중한 식량과 술, 그리고 반짝이는 물건을 약탈하는데 정신이 팔려 공세를 계속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그 혼란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황제는 동쪽을 지켜보았다. 황색의 낙진이 지평선 끝에 자리 잡은 대지 너머엔 아직 희망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밤이 깊었다. 슬슬 음식과 술, 장난감에 질린 야만인들은 다른 놀이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흉포한 눈동자가 도시 위에서 반짝이는 불빛들을 노려봤다. 살육을 원하는 웅성거림이 야만인 사이에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만인들은 자발적으로 그들의 부족장의 명에 복종하며 최후의 공세를 할 준비를 했다. 수많은 사다리가 준비됐고 인간으로부터 약탈한 갑주를 개조한 철갑을 두른 야만인 전사들이 선두에 섰다. 4구역으로 통하는 성벽 앞에 선 야만인 부족들은 일제히 기괴한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젠카! 젠카!” 뱃심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지는 음산한 함성은 남은 도시에 자리 잡은 시민들의 귀는 물론 심장까지 떨게 했다. 황제는 굳은 얼굴로 야만인들의 군세를 내려보고 있었다. 끝없는 숫자. 게다가 한 명 한 명이 대륙십삼걸에 필적할 정도로 강한 이들이다. 고대신의 심장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결코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친우와의 약속을 맺었다. ‘이번에는 다시는 너를 배신하지 않겠다.’ 황제의 마음은 결연했다. 그는 모든 것을 내주더라도 약속을 지키리라 마음먹었다. 곧 야만인의 공세가 시작됐다. 무수한 사다리가 성벽 위에 걸쳐지기 시작했다. 미리 대기하던 병사들이 사력을 다해 사다리를 걷어냈다. 그러자 야만인 중 특히 민첩한 녀석들이 어떤 보조기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성벽을 향해 메뚜기처럼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중 일부는 성벽 위에 안착했다. 수십 개의 창칼이 야만인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야만인은 온몸에 창칼이 박히면서도 기어코 십 수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손아귀로 찢어발기면서 야만인이 우글거리는 성벽 아래로 집어 던졌다. 전투가 시작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방어선 곳곳에서 비상신호가 울려 퍼졌다. “좌측 구역에서 지원군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비대로 투입할 제국기사들의 숫자가 절반 이하로 줄었습니다. 이대로는 곧 4구역이 함락됩니다. 폐하!” 4구역은 나선형을 이루는 제도의 상층부 중 방어의 핵심이다. 이곳이 무너지면 나머지 3구역의 운명은 불 보듯 뻔하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이곳을 지켜야 한다. 황제는 동쪽을 응시했다. 아직 어떤 빛도 비치지 않았다. 순간 황제는 고대신의 심장을 다시 가동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꼈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나라와 왕관을 지킬 수 있다. 그리고 그토록 질시하던 크롬갈드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놈만큼은 반드시 꺾어야 한다.’ 질투심, 패배감 그리고 복수심.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져본 적이 없던 황제에게 크롬갈드란 존재는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벽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부정당한 자신의 가치와 과거를 돌려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지난 십여 년간 황제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황제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명령만 내리면 제도를 지킬 수 있다. 감당하기 어려운 유혹. 하지만 결정을 내리기 직전, 그는 또 다른 생각이 머릿속에서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것은 김성철에 대한 생각이었다.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감내한 사내. 그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그라면 이렇게 쉽게 포기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자신이 몸의 부서져도 모든 희망을 잃어도 불사조처럼 살아내 자신의 사명을 다 한다.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동녘에서 비추는 빛이 아니다. 황제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비치는 그가 만들어 낸 내면의 빛이다. 그 빛 아래 황제를 떠받들던 질투심과 시기심으로 이루어진 기둥은 소금기둥처럼 무너져내렸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하들에게 명했다. “…허공궁궐을 떨어뜨려라.” ======================================= 109. 반격 (4) 허공궁궐은 황권의 상징 그 자체. 그것을 떨어뜨리라는 것은 황제임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중신들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황제의 용안을 응시했다. 황제의 얼굴을 본 순간 그들은 알 수 있었다. 초조하던 황제의 얼굴에 비로소 평안이 찾아왔다는 것을. 황제를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는 쓰고 있던 황제의 제관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엔 전성기를 연상케 하는 야심만만하고 재기에 찬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자, 어서.” 허공궁궐을 묶던 사슬이 차례차례 끊어졌다. 속박에서 풀려난 허공궁궐은 4구역까지 천천히 이동했다. 맹공을 가하던 야만인들이 일제히 그들의 머리 위에 떠오른 부유섬을 올려다보았다. “이노?” 그때 허공궁궐 아래에 연쇄적인 폭발이 일어났다. 궁궐을 떠받치던 부유석이 마법과 폭약에 의해 박살이 난 것이다. 라그란제의 주요 행사인 영년의 밤에 벌어지는 폭죽놀이를 방불케 하는 연쇄적인 폭발 속에서 허공궁궐은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인간제국의 황권을 상징하던 허공궁궐은 지면으로 추락해 황권을 따르지 않는 무수한 야만인을 깔아뭉갰다. “이걸로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왕관도 궁궐도 잃은 사내가 평상복으로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만인들은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황제는 알 수 있었다. 그 너머엔 수만 명에 이르는 예비대가 약탈과 살육에의 기대에 흠뻑 젖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나를 따라 검을 들어라. 동쪽에서 빛이 비칠 때까지 우리는 싸우고 또 싸울 것이다.” 황제가 진두에서 지휘하기 시작했다. 황제의 등장에 의기소침했던 구 인류의 사기는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인 것처럼 되살아났다. “버티고 버텨라!” “빛이 비칠 때까지!” 처절한 사투가 시작됐다. 화살과 마법이 비처럼 쏟아지고 상공에 자리 잡은 제국의 잔존함대는 모든 잔존 화력을 야만인으로 가득 찬 시가지에 내려 뿜었다. 야만인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날개가 달린 신수들이 공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신수의 공격에 제국함대는 치열하게 맞서 싸웠지만 한 척, 한 척 격침되기 시작했다. 성벽 위의 싸움도 소모전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화살 비를 뚫고 야만인 하나가 성벽에 오를 때마다 십수 명의 병사가 죽어 나갔다. 황제의 진두지휘와 제병사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라그란제의 운명은 점점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치열한 사투 중 황제는 자신 옆에서 숨을 헐떡이며 싸우는 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낯익은, 그러나 이제는 보기 어려운 갑주. 철혈기사단의 갑주다. “그대는 누군가?” 황제가 실로 오랜만에 보는 철혈기사단의 단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름을 밝힐 것도 없습니다. 저는 그저 자신의 낙원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8구역의 주민에 불과합니다.” 담담한 어조로 김치가 말했다. “8구역이라.” 황제는 음미하듯 자신이 직접 격리를 지시했던 구역의 이름을 되뇌었다. “혹시라도 우리가 이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황제가 말했다. 함께 싸우던 모든 이들이 왕관 없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황제가 말했다. “모든 구역과 차별을 철폐하겠다.” 편견은 허공궁궐과 함께 사라졌다. 남은 것은 다가올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황제는 검을 뽑고 성벽 위에 올라선 야만인을 향해 달려갔다. 황제의 혼신을 다한 일격. 야만인 하나가 피 분수를 뿜으며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일진일퇴의 공방 속에서 밤은 더욱 깊었다. 약속했던 일주일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동쪽에선 어떤 징조도 없었다. 황제는 그러나 김성철을 원망하지 않았다. ‘최선은 다했다. 이것이 끝이라면 달게 받으리라.’ 그때였다. 하늘 위에서 무언가 어른거렸다. 황제의 날카로운 눈은 그 찰나의 반짝임을 놓치지 않았다. ‘저것은 차원문?’ 황제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치열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는 라그란제의 교외, 야만인의 본진 아래 수척의 공선이 대담한 장거리 텔레포트를 시전한 것이다. 그 척후병엔 두 명의 조인이 있었다. “좋아. 자라스. 이곳에 종말교단 놈들에게 빌린 차원 관문을 설치하면 딱 좋겠어!” 검은 깃털을 지닌 마라키아가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명을 따르는 이는 하얀 깃털을 지닌 조인이다. “예! 폐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두 명의 조인은 각각의 영혼창고에서 검은 파편이 박힌 푸른 돌을 꺼내 하늘 위에 놓았다. 그 돌은 스스로 공중 위에 머물렀다. 푸른 돌들이 거대한 원형을 그리며 순차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원형이 완성되자 마라키아는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멸세의 왕에게 이런 건 식은 죽 먹기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각각의 푸른 돌 위에서 하얀 섬광이 나타났다. 마법진이다. 마라키아와 그의 부하 1호는 종말교단에게 넘겨 받은 차원관문을 야만인의 본진 위에 열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한 차원문이 아니다. 대규모의 함대가 드나들 수 있는 차원관문이다. 곧 하늘 위에 희끄무레한 거대 마법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면 아래에 있던 야만인들은 뒤늦게 그들의 머리 위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젠카! 이쉬! 라이!” 야만인의 두령이 다급히 명령을 내리며 제도 상공에서 제국 함대와 싸우던 신수들을 귀환시켰다. 그러나 신수의 귀환보다 마법진의 완성이 빨랐다. 마라키아는 인류 최후의 마법사들이 그에게 건낸 희망의 차원관문을 기어코 완성 시켰다. 환하게 밝힌 차원관문 너머로 붉은 공선의 선수가 힘차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붉은 공선의 갑판. 그곳엔 운명의 망치를 쥔 김성철이 있었다. 그는 실피드와 그리고 그와 연결된 십 수 척의 공선에 걸쳐 운반되고 있는 거대한 쇠사슬의 끝을 잡고 있었다. “페어리 라이트.” 김성철의 몸에서 3개의 녹색 발원체가 나타나 지면을 비췄다. 보인다. 하늘 위에서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야만인의 마법진이. 거대하기만 하고 아름다운 구석도 하나도 없는 게 실로 그들의 주인과 닮아 있었다. 김성철의 몸에 신적인 힘이 흐르고 지나갔다. 두 팔이 판추리아를 떠받치던 쇠사슬이 번쩍 들어 올렸다. 김성철은 그대로 지면으로 강하했다.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쇠사슬이 연줄처럼 풀리며 아래로 뻗어 나갔다. 멀리서 김성철의 강하를 눈치 챈 야만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브린스 아르놀트!” “젠카!” 야만인 주술사들이 다급하게 마법진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준비된 제물이 속속 마법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식이 시작되기도 전에 거대한 쇠사슬이 마법진과 그 위에 모여 있던 주술사 무리들을 내려쳤다. 쿠궁! 마법진의 한가운데에 김성철이 낙하했다. 김성철의 온 몸에 재차 신적인 힘이 흐르고 지나갔다. 김성철은 순간, 자신의 눈앞에 검은 불길이 어른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놀라움은 찰나에 불과했다. 불길의 환영이 사라지기도 전에 그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내 몸에 흐르는 신적인 힘의 정체였나.’ 그의 힘은 내면에 봉한 검은 불길에서 비롯된다. 그는 지금까지 이 세상을 파괴하기 위해 점지된 힘으로 세상을 지켜왔던 것이다. 힘 그 자체에 선과 악은 없다. 중요한 건 방향이다. 찰나의 깨달음 속에서 김성철은 쇠사슬을 붙잡으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법진을 가로지르며 일자로 내려친 쇠사슬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쇠사슬 곳곳엔 쟁기를 연상케 하는 창칼이 틈틈이 박혀 있었다. 김성철의 회전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도시를 묶던 쇠사슬은 그 육중한 무게와 사이에 끼어놓은 쟁기 역할을 하는 창칼을 통해 지면을 헤집어놓기 시작했다. 야만인들은 속수무책으로 그들의 마법진이 단 한 명의 사내에 의해 박살 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폭풍과 같은 회전이 끝났을 때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법진은 완전히 파괴됐다. 남은 건 당장 농사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잘 갈린 공지. 김성철은 가공할 원심력이 실린 쇠사슬을 그대로 자신의 적을 향해 집어 던졌다. 질량 그 자체가 파멸적인 무기로 화한 쇠사슬은 수천 명이나 되는 야만인의 부족 하나를 그대로 집어삼켰다. 지축이 흔들리며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김성철의 몸에 마법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성철의 몸에서 환하고 따뜻한 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은 그저 눈 부시고 오만하기만 하던 질서신의 빛과는 달랐다. 라그란제의 시민들은 김성철의 몸에서 약속된 빛이 비로소 나올 것이라는 예감을 받았다. 김성철은 온몸에 빛의 힘이 충만한 것을 느끼고 예정된 시동어를 내뱉었다. “글로리.” 김성철로부터 시작된 빛이 동쪽 하늘을 밝히기 시작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북쪽에 치우친 동쪽이긴 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 작은 오류를 지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환한 빛무리는 새벽의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진군하던 인류 최후의 군세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둥. 둥. 둥. 진군의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 돌격하라!” “야만인을 때려죽여라!” 아신화를 가동한 종말교단을 필두로 성난 인간의 구원군이 야만인을 전열을 향해 일제히 돌격했다. 야만인의 뿔피리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라그란제에 머물던 야만인들이 속속 빠져나가며 인류 최후의 군세에 맞서기 위해 진용을 갖추려고 했다. 수많은 신호가 교차 되는 가운데 김성철은 매의 눈으로 그 신호가 집중되는 지점을 발견했다. 전사의 눈이 번득였다. 화려한 관을 쓴 근육질의 야만인이 앉은 가마가 마침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저놈이 우두머리군.’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질서신이 나타났을 때도 저 녀석이 있었다.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은은한 소리를 내는 팔 가라즈를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가한 자들에게 정당한 복수를 선사하라고. “그렇게 해야지.” 김성철은 자신의 신물을 쥔 채 적의 본진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하늘 위에서 마라키아와 또 다른 조인이 교차하며 날며 김성철에게 적의 방향을 알려줬다. 베르텔기아도 나름 김성철 몸 안에서 진군의 북소리와 함께 장단을 맞춰 몸을 흔들며 김성철을 응원했다. 김성철은 몰려드는 수많은 야만인을 글자 그대로 분쇄하며 적의 우두머리 앞에 이르렀다. “브린스 아르놀트…!” 그의 손엔 낯익은 검이 들려 있었다. “엿이나 처먹어 개자식아!” 그것은 바로 크럼부이였다. 야만인의 우두머리는 이를 갈며 김성철을 노려봤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퍽! 단 한 번의 일격에 야만인의 우두머리는 피떡이 되어 사라졌고 크럼부이는 해방됐다. 김성철은 적장이 쓰고 있던 화려한 관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서 빛나고 있는 글로이의 빛을 더욱 환하게 하며 소리 높여 외쳤다. “적장을 해치웠다!” “적장을 해치웠다!” 야만인 밑에서 원치 않던 재롱을 부리던 크럼부이도 목청껏 승리의 함성을 복창했다. 수개월 간 인류를 위협하던 야만인의 패배가 기정 사실화되는 순간이었다. 인류 최후의 군세는 가열차게 공세를 가했고 라그란제에 웅크리던 황제의 군세 또한 성문을 열고 협공을 가했다. 빛 속에서 인류는 승리를 위한 일보를 힘차게 내딛고 있었다. 한편, 부유군도 세력의 기함에선 한 사내가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또 한 번의 승리를 일구어냈군.” 슈넬메르커다. 움 브루크가 몸에서 뽑힌 뒤에도 충실하게 명을 수행하고 최전선에서 종말교단을 통해 혁혁한 전과를 세운 그는 그러나, 지금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대원수. 예전에는 의심이 많은 사내였는데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너무 유해졌군. 자신을 파멸시키다시피 한 라이즈 하이메르를 그냥 놓아주질 않나, 게다가 독일연방군 장교 출신인 이 프리츠 슈넬메르커를 억제하던 구속구를 풀어주질 않나.” 프리츠 슈넬메르커의 입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 아신을 총동원해 그의 뒤통수를 후려치면 이 승리는 완벽해질 것이다.’ 지금 그에겐 김성철마저 처치할 수 있는 다수의 아신이 있다. 그들로 하여금 한번에 공세를 가한다면 제 아무리 김성철이라도 살아남기 어려우리라. 그리고 김성철이 없는 세계의회는 아무것도 아니다. 최후의 승리는 크롬갈드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는 승리에 대한 확신을 품으며 좌우에게 명했다. “모든 교도에게 명해라. 지금 즉시 공격을 멈추고 목표를 그 사내에게 집중….” 슈넬메르커의 말은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명령이 완성되기 직전 그의 목에 차디찬 칼날이 밀고 들어왔다. 놀라움 속에서 죽음의 공포 속에서 슈넬메르커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해한 차가운 눈빛을 지닌 여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저…. 저 여자는 황제 밑에 있던 회귀자?!’ 그것이 그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슈넬메르커는 입에서 피거품을 내뿜으며 그대로 쓰러져 절명했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아무개는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종말교단과 부유군도 패거리를 노려보며 슈넬메르커의 로브에 피 묻은 검을 닦으며 냉랭히 말했다. “또, 죽고 싶은 사람?” 슈넬메르커의 반란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우두머리를 잃은 건 야만인이 아니었다. 종말교단의 잔존세력과 배신자들의 군대는 최전선에서 소모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완벽한 승리. 황제는 감회어린 눈빛으로 광휘에 싸인 자신의 옛 동료를 지켜보고 있었다. “김성철. 넌 정말 멋진 놈이다.” 황제는 그렇게 말한 후 중신들을 불러 위엄 서린 목소리로 명했다. “당장 왕관을 준비해라. 지금 바로 한 명의 왕에게 인간제국의 왕관을 바칠 수 있게끔.” 드넓은 벌판 위에서 야만인은 왕겨처럼 흩어지고 있다. 기록되지 않은 재앙은 끝났다. 그렇게 생각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황제 내면에 음습하고 끈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크롬갈드가 왜 날 손에 넣고도 쓰지 않았는지 아나? ] 정신에 직접적으로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이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목소리는 계속해서 말했다. [ 놈은 너보다 뛰어났기 때문이야. 모든 면에서 말이지. ] 다음 순간, 제도 라그란제 지하에서 불길한 고동이 울려 퍼졌다. 두근. 고대신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단 한 차례에 불과했지만, 그 울림의 형태는 지금까지 제도에 울려 퍼진 수만 번의 고동보다 흉험하고 기괴했다. ======================================= 110. 관리자 (1) 라그란제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는 구 인류의 대승리로 끝났다. 무적의 위용을 자랑하던 야만인들은 신적인 힘을 지닌 김성철의 철권 아래 격멸 당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분노한 인류의 추격에 학살당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일단의 야만인은 북쪽으로 달아났지만, 그들은 결코 이전과 같은 힘을 지닐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승자의 시간이다. 수많은 사람이 전사했고 그보다 많은 사람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축제를 거행했다. 그것은 일종의 선언이었다. 신에게 버림받은 인류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리는. 축제는 과거 루테기네아 투기장이라 불리는 거대한 원형의 건물에서 거행됐다. 투기장으로선 기묘한 운명의 변화였다. 오직 살육만을 갈구하던 거대한 처형장이 이제는 모든 인류의 화합과 안녕을 기원하는 화합의 장이 된 것은 말이다. 검투사들이 사투를 벌이던 경기장엔 평화와 승리를 축하하는 행사장이 마련됐고 그곳을 둘러싼 수만 석에 이르는 관중석엔 수많은 시민과 병사들이 운집했다. 모두가 곧 거행될 기념비적인 행사를 가슴 졸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곧 팡파레가 사방에서 울리며 왕과 제후들이 경기장에 나타났다. 군중들은 열띤 환호성을 보내 그들의 노고와 희생에 경의를 표했다. 아르카나이트, 다인크래프트, 해서데인, 그리고 마커레이드. 세계의회의 주요 구성원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제국의 황제가 등장했을 때 경기장엔 미온적인 침묵이 잠시 감돌았다. 아직, 그는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세계의회의 의장이자 한 명의 왕의 잠재적인 후보인 김성철이 등장했을 땐 경기장이 떠나갈 정도의 함성이 라그란제 시내 전역을 뒤흔들었다. “나, 저 사람하고 아는 사이야! 같은 소환 궁전 출신이라고!” 한 소환자가 정갈한 의복을 갖춰 입은 김성철을 가리키며 애절하게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투기장의 흙 땅. 갈아엎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풀 내음과 흙내음이 진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그 위에 올라선 김성철은 감회가 새로웠다. 과거 그가 같은 자리에 섰을 때 그에게 들려오던 것은 오로지 비난과 야유, 그리고 순수한 악의였다. “반란군을 죽여라!” “저 검은 머리를 죽여라!” 지금도 그때의 함성이 생생하게 떠올 정도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모든 이들이 김성철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하고 있다. 우뢰와 같은 함성 속에 담긴 순수한 열망은 김성철의 차가운 심장마저 뜨겁게 할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와우. 살다가 이런 꼴도 다 보네.” 오늘은 주머니 바깥에서 커다란 덩치를 과시하고 있는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어깨를 책장으로 탁 치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함성은 한동안 이어졌다. 김성철은 투기장 중앙에 놓은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세계의회의 주요 구성원과 그리고 그의 친우 윌리엄 퀸튼 말버러가 서 있었다. 황제는 김성철과 눈이 마주치자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환영하네. 우리의 영웅.” 황제는 김성철은 진심으로 반겼다. 그보다 김성철에게 쏟아지는 환호가 더욱 거셌지만, 그것은 이제 그에게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몸이 아픈가?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하얗게 분칠을 하긴 했지만, 김성철은 한 눈에도 황제의 얼굴에 편찮다는 걸 발견했다. 눈빛만 보고도 서로의 마음을 아는 사이다.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건 얼굴만 보고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황제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전쟁 중에 마음고생이 너무 많아서 그런 모양이야. 아무튼 이 자리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자네일세.” 그는 기꺼이 김성철에게 상석을 내주었다. 왕과 제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들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며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변화가 느껴졌다. 그 거만하던 아르카나이트는 김성철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고 다인크래프트는 씨익 이를 드러내며 친근함을 표시했다. 해서데인은 겉보기에 큰 변화가 없었지만, 그는 소심하던 평소와 달리 대단히 대담한 발언을 하고야 말했다. “한 명의 왕을 위하여!” 좌중들은 깜짝 놀랐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한 명의 왕을 위하여.” 마커레이드가 윙크를 하며 해서데인의 말을 받았다. 처음엔 작은 울림으로 시작된 그 한마디는 이내 모두에게 전염해 모두에게 같은 말을 하게 만들었다. “한 명의 왕을 위하여!” 모두가 바라고 있었다. 김성철이 재앙을 해결할 한 명의 왕이 되기를. 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함성이 어느 정도 잦아든 이후에야 김성철은 반가운 얼굴들이 식장에 참석했음을 발견했다. 한 명은 옛 친우 샤말 라지푸트였다. 왕도 제후도 아니지만, 구 세계의회의 그림자 역할을 하며 뒤에서 질서를 수호해 온 그가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중립을 지키던 암살교단이 새로운 세계의회를 인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축하하네. 한 명의 왕.” 샤말 라지푸트는 굳은 얼굴로 김성철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실로 오랜만에 악수를 교환했다. 여전히 따뜻하고 거북이 등껍질처럼 꺼끌꺼끌한 손이었다. “나중에 긴히 할 이야기가 있네. 시간을 내줬으면 하는군.” 김성철은 흔쾌히 옛 친우의 말을 승낙했다. 다음 귀빈은 동화 속의 마녀, 아델화이트였다. 아마도 처음이리라. 대륙의 긴 역사를 통틀어 영겁을 살아가는 마녀가 공식행사에 참석하는 건 말이다. 그녀는 단순히 어딘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그것이 역사가 될 정도의 상징성을 지닌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크롬갈드와 연관이 있는 인물이다. 마냥 반갑게 맞이할 수 없는 게 김성철의 속내다. 하지만 그녀는 전투가 끝난 후 많은 역할을 했다. 먼저 제도에 떠도는 역병의 기운은 마법의 힘으로 가라앉혔고 오염된 물을 정화해 만성적인 물 부족을 해결했다. 김성철은 뒤늦게 아델화이트의 활약을 전해 들었다. 할 말은 많지만, 여론이 그녀에게 우호적인 반응을 보여 딱히 그만두게 할 구실을 찾지 못했다. 아델화이트도 그런 김성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친근한 태도로 먼저 그에게 다가가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라이즈 하이메르란 여자는 정령계로 안전하게 보냈어요.” “고맙군.” “그럴 수밖에요. 당신이 보낸 편지 내용이 워낙 살벌해서 말이죠.” 아델화이트는 환하게 웃으며 김성철이 직접 쓴 친필편지를 꺼내 흔들어 보이면서 김성철의 흉내를 내며 말했다. “그 여자는 더 이상 나와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이지만 내가 안전을 보증했다. 불미스런 소식이 없기를 기대한다.” 그걸 본 베르텔기아가 깔깔 웃었다. “똑같네!” 베르텔기아의 배신에 김성철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뭐라고 토를 달 수 없을 정도로 오늘의 아델화이트는 밝은 분위기였다. 그녀는 김성철 곁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딱히 나쁜 의도로 온 건 아니니까, 눈감아주길 바래요. 크롬갈드하고 인연은 아주 옛날에 끝냈으니까요.” “…어쩔 수 없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녀는 필요한 존재다. 아델화이트는 정령계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니까. 게다가 영겁을 살았다고 하나, 결국은 필멸자인 그녀가 뭘 할 수 있겠는가. “어이. 부수는 자. 빨리 해치우고 끝내자고.” 회의장 구석에 자리를 배정 받은 마라키아가 그의 부하 1호를 대동하고 아장아장 걸어와 김성철을 채근했다. 마라키아가 얄밉긴 하지만 딱히 심각하게 받아들일 정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오늘은 어떤 의미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날이니까. 김성철은 아델화이트를 받아들였다. “자, 거기 귀여운 책 아가씨. 우리가 너무 많이 이 분의 시간을 뺏었네. 아저씨들은 아저씨들끼리 놀게 하고 우리들은 우리끼리 여자의 이야기를 해볼까?” 아델화이트는 베르텔기아와 함께 회의장 구석으로 걸어갔다. 적절한 처신이었다. 아델화이트 뒤엔 어서 빨리 식전을 거행하라는 눈빛들이 독촉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 중심에 황제가 있었다. “자, 서두르게. 친구. 빨리 끝내자고.” 몸이 좋지 않아서일까. 안색이 좋지 않은 황제는 빠르게 절차를 진행하려했다. 그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김성철은 일단 아델화이트를 뒤로 하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모든 왕과 제후들의 시선이 김성철에게 향했다. 황제는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높은 관을 쓴 드워프 족 아카드가 금박과 비단술로 치장된 두루마리 하나를 황제에게 정중하게 두 손으로 건넸다. 그 두루마리는 한 명의 왕을 인정한다는 모든 왕들의 서명이 담긴 것이었다. 수만 명이 지켜보는 장내의 분위기가 일순 숙연해졌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소리내지 않았다. 그만큼, 지금 이 순간은 인류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역사가 시작되려 한다. 그 중심에 선 황제는 김성철 앞으로 걸어가 두루마리를 펼쳤다. 세계의회에 참석하는 모든 왕과 제후의 서명이 담겨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루테기네아의 왕의 서명조차 말이다. 황제는 황금으로 만든 펜을 들어 서명란의 말미에 자신의 서명을 했다. [ 인간제국의 황제 윌리엄 퀸튼 말버러 ] 간략하지만 힘있는 필체. 김성철은 그 두루마리를 건네받고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펜을 들었다. 마지막 퍼즐을 완성할 때다. 김성철은 서류의 마지막에 문구 하나를 추가했다. [ 이 모든 왕들의 지지를 얻은 한 명의 왕. 김성철. ] 마지막 퍼즐의 한조각이 완성됐다. 왕과 제후들이 박수를 쳤고 뒤이어 숨죽이고 있던 군중들의 우레와 같은 함성이 투기장을 뒤덮었다. 환희와 열광 속에서 한 명의 왕이 된 김성철은 곧 나타날 징후를 기다렸다. 곧 허공 위에 마법진이 나타나더니 한 권의 책이 출현했다. “읔.” 아델화이트와 여자끼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던 베르텔기아가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몸을 움츠렸다. 49호다. 49호는 김성철이 쓰러진 한 달간 베르텔기아를 구박했다. 딱히 해코지한 건 없지만 마음의 앙금은 남아 있다. 한편, 49호가 나타나자 투기장 안의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침묵 속에서 49호는 김성철 앞으로 날아갔고 곧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서명란에 하나를 추가해주셔야 해요.” 49호가 말했다. “무슨 서명을 말이지?” 김성철이 물었다. 모든 왕과 제후가 모였을 텐데. 하나가 빈다니. 의아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49호가 마라키아 쪽을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한 명의 왕이 추가됐어요. 왕이라고 하기엔 부족함이 많지만 나하크 족은 인간이 발흥하기도 전에 대륙의 절반을 지배하던 고귀한 종족. 단 한 명의 백성이 있더라도 여기 모인 왕과 동일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죠.” 그 말을 들은 마라키아의 부리가 활짝 벌어졌다. 인간으로 치면 입이 귀까지 찢어지는 광경이었으리라. “크크크. 역시 뭘 아는군. 고급 책은 말이야.” “고급 책이라니!” 아델화이트 옆에 있던 베르텔기아가 버럭 화를 냈다. 마라키아는 휘파람을 부르며 딴청을 비우며 자신의 부하 1호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장아장 회의 테이블 중앙으로 걸어가 펜을 들었다. 그가 서명할 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서명란 상단 여백에 기어코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 나하크의 태양이며 조인왕국의 전무후무한 검은 깃털의 아름다운... ] 거기까지 끄적거렸을 때였다. 49호가 퉁명스레 말했다. “짧게 적어주세요.” 그녀는 마법의 힘으로 마라키아의 글귀를 지워버렸다. 남은 건 조인왕국의 왕 뿐. “자세히보니 고급이 아니네.” 마라키아는 심기가 불편한 듯 부리를 거리며 서명을 마쳤다. [ 조인왕국의 왕 마라키아 ] 이걸로 서명은 끝났다. 49호는 모든 왕들의 서명이 적힌 두루마리를 떠올려 자신에게 가지고 갔다. 두루마리는 활짝 펼친 49호의 책장 안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책의 형상을 한 전령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49호가 말했다. “한 명의 왕을 인정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49호 뒤에서 거대한 마법진의 형상이 나타났다. 텔레포트 마법진이다.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거대한 드래곤이었다. 김성철은 한 눈에 그 드래곤의 정체를 알아봤다. ‘카네스?’ 반인반용 카네스가 나타났다. 입에 거대한 궤짝을 물고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경기장의 절반을 차지한 거대한 용은 궤짝을 김성철 아래에 내려놓았다. 궤짝은 스스로 열렸다. 그 안에 있던 것은 재앙의 서였다. 재앙의 서에 기재된 세 번째 재앙의 문구가 불에 탄 것처럼 불타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해결된 것이다. 최후의 재앙을. [ 이쪽으로 오시오. ]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젊음이 남은 그러나 지친 음성이었다. 김성철은 끌리듯 재앙의 서에 다가갔다. 차원문이 열렸다. 재앙의 서는 그 안으로 김성철이 들어오기를 원하고 있었다. 문득 김성철은 재앙의 서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설마, 이 녀석은.’ 김성철은 차원문 안으로 들어갔다. 차원문 너머엔 허름한 옷을 걸친 왜소한 체격의 사내가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김성철은 알 수 있었다. 저 왜소한 사내가 재앙을 해결한 자. 연금술사 에크하르트라는 사실을 말이다. ======================================= 110. 관리자 (2) “나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소.” 얼룩진 유리와 같은 흐릿한 공간, 그 중심에 선 에크하르트가 말했다. “마치 바닥 위에서 마지막 불꽃을 피우는 불꽃과 같지.” 에크하르트가 뒤돌아섰다. 김성철은 그의 얼굴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너무나도 평범한 얼굴이었다. 거리를 걷다 보면 으레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사내의 얼굴, 그것이 에크하르트의 얼굴이었다. “누구나 신이 되고 싶어 하지. 하지만 신의 책무가 무엇인지, 신이 감내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아무도 하지 않으려 들것이오.” 에크하르트의 앞엔 낡은 책상이 있었다. 해지고 닳고 손때가 묻은 오래된 나무 책상 위에는 해독하기 어려운 갖가지 도형과 문자, 공식을 휘갈긴 종이가 널려 있었다. 에크하르트는 책상 주위를 걷기 시작했다. 느릿한 발걸음. 하지만 김성철은 자신이 끼어들 틈을 발견하지 못했다. 에크하르트의 말은 아직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지루할 정도의 느린 박자가 지나간 후 에크하르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소위 신이 되겠다고 설쳐대는 자들이 말하는 신은 진정한 의미의 신이 아니라 신의 이름을 빌린 폭군과 다를 게 없으니까.” 에크하르트가 흐릿한 눈으로 허공 위에 한 사내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쌍검을 지닌 당당한 풍채와 영웅의 풍모를 지닌 사내. 칠영웅의 우두머리 데스포트다. 에크하르트가 데스포트의 형상을 보며 말했다. “이 자는 신이 되고 싶어 했지. 하지만 그는 신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었어.” 데스포트의 뒤에 여섯 개의 검은 실루엣이 나타났다. 김성철은 그것들이 데스포트와 뜻을 함께한 나머지 칠영웅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일곱 명의 영웅 앞에 에크하르트가 우뚝 섰다. 그는 한동안 감회가 서린 눈으로 과거의 영웅들을 응시하다 이내 뒤를 돌아 김성철을 바라보았다. 순간 풍경이 변했다. 잔잔하던 우윳빛의 배경이 소용돌이치는 듯한 푸른색의 격렬한 흐름으로 바뀌었다. 무언가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선 에크하르트가 힘주어 말했다. “이 세계의 진정한 신은 이미 죽었소.” 단정적인 확언. 아마도 대단히 충격적인 발언이었을 것이다. 김성철이 이전에 세계의 진실을 듣지 않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김성철은 진실을 알고 있다. 충격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오히려 그는 한결 여유를 가지고 에크하르트를 관찰할 수 있었다. ‘묘하군.’ 지금의 에크하르트에겐 무언가 괴리감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김성철은 눈앞의 사내에게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뭐랄까, 마치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김성철의 싸늘한 시선을 받으며 에크하르트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가 만든 이 세상은 여전히 살아 있소. 하지만 신이 없는 세상은 결국 시들어가고 사멸할 운명이지. 이에 질서신, 솔직히 말하면 신도 아니지. 그 작자가 무너져가는 세상을 지탱할 방법을 생각해냈소. 바로, 신을 대신해 이 불완전한 세상을 대신해서 관리할 관리자를 내세운 거지.” “…그건 이미 다 아는 이야기요.” 김성철이 말했다. 하지만 에크하르트는 김성철의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불멸자들이 관리자 역할을 자처했소. 진정한 신이 설계하고 고대했던 진정한 불멸자들이었지.” 에크하르트는 김성철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야기만을 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눈앞의 사내는 더 이상 생각도 사고도 할 수 없는 어떤 존재가 남긴 기억의 파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에크하르트는 김성철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짐짓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계속 세상의 진실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김성철이 다 아는 것의 변주에 지나지 않았다. 지루한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데스포트는 그 관리자가 신이라고 생각했어. 절반은 맞는 말이지. 관리자가 하는 일이 신이 하던 일이니까. 하지만 필멸자든 불멸자든, 신이 아닌 존재는 신을 대신할 수 없소. 처음에는 신의 힘을 얻고 기뻐할 수 있겠지만 곧,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지.” 데스포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엔 한 폭의 풍경화 같은 아름다운 대자연의 풍경이 드러났다. 에크하르트는 그 풍경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상상해보시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소리가 한꺼번에 귀에 들려오는 것을. 어떤 것은 사랑을 노래하고 어떤 것은 생명의 노래를 부르기도 하지. 하지만 죽어가는 것들의 비명, 절규 혹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소리, 그런 것들이 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들려온다고 생각해보시오.” 에크하르트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인간의 정신은 무한한지 않기에 무한한 것을 감당할 수 없소. 그렇기에 신이 아닌 자는 서서히 신의 자리에서 사멸되어가고 결국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어버리지.” 에크하르트의 눈에 허무한 빛이 떠올랐다. 심드렁하게 에크하르트의 이야기를 듣던 김성철은 지금만큼은 집중해서 그의 말을 들었다. 에크하르트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치 나처럼 말이오. 그것이 관리자의 숙명. 무한함 속에서 헤매다가 결국 사라지고 마는 소모품. 그것이 우리의 운명.” 김성철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에크하르트는 사라졌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다. ‘베르텔기아를 살릴 방법은 영영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인가?’ 살아 있다면 묻고 싶었다. 다른 무엇보다. 하지만 진실은 엄혹하다. 침묵 속에서 에크하르트가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이 보고 있는 건 나라는 존재가 남긴 뭐랄까. 자동 목각인형 같은 걸로 생각하면 되오.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건 뭐 내가 너무 뛰어난 연금술사에 섬세한 실력을 지니고 있어서 그런 것이고. 뭐, 이 모양이 됐지만 간단한 의사소통은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수다.” 갑자기 풍경이 변했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던 풍경이 화사한, 총천연색의 무대로 바뀌었다. 그리고 허공 속에서 책들이 나타났다. 베르텔기아와 똑같은 형상의 베르텔기아 타입. 그것들은 에크하르트의 주위를 마치 춤을 추듯 원을 그리며 파닥거리며 요란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중심에 선 에크하르트의 얼굴에 익살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뭐지?’ 뭔가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에크하르트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한 명의 왕인 당신에게 이 신을 대신하게 된 관리자, 통칭 재앙의 서인 에크하르트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할 기회를 드리지.” 에크하르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성철의 눈에 빛나는 문자가 나타났다. [ 1. 당신은 누구인가? ] [ 2. 당신은 어떻게 해서 관리자가 되었는가? ] [ 3. 당신은 관리자가 되어 무슨 일을 했는가? ] [ 4. 관리자로서 당신의 목표는 무엇인가? ] [ 5. 에크하르트의 은밀한♥ 취미 ]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분위기가 어딘가 닮았다. 소환 궁전에서부터 에크하르트가 남긴 퀘스트를 수료하면서 시종일관 느낀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가 지금 또 다른 형태로 재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런 점이 에크하르트란 사내의 특징일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선택지를 둘러보았다. 5개의 선택지가 있지만 유독 눈이 가는 게 하나 있다. 김성철은 자기도 모르게 5번을 선택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손가락이 5번을 눌렀다. 그런데, 선택되지 않는다. ‘뭐야.’ 김성철은 다시 한번 5번 선택지, 에크하르트의 은밀한 취미를 눌렀다. 아무 반응이 없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순간 김성철의 눈앞에 경고문이 떠올랐다. [ 이런! 당신은 성질이 급한 친구군요. 에크하르트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그의 은밀한 취미를 알려고 하는 것은 나빠요! ] “…….” 김성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친구…. 이런 사람이었지.’ 또 다른 문자가 나타났다. [ 나머지 4개의 선택지를 정독하고 오시라! 그러면 당신은 에크하르트의 은밀하고 야릇한 취미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김성철의 입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 장난기, 적당한 경박함. 이것이 어쩌면 에크하르트란 사내의 일상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다만 세상이, 이 잘못된 세상이 그를 떠민 것이다. 원하지도 않았던 신의 길로. 김성철은 문득 에크하르트란 사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성격도, 취향도, 성향도 완전히 다르지만 김성철은 자신과 에크하르트 사이에 묘한 동질감이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같은 신의 계단을 오른 사람으로서. 그리고 홀로 세상을 구하기 위해 투신한 사람으로서. 김성철은 담담한 얼굴로 1번 선택지를 골랐다. 풍경이 다시 변했다. 하얀 모자를 쓴 것 같은 만년설을 머리에 인, 깎아지른 산 아래 동화 속의 마을처럼 옹기종기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의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등 뒤에서 가벼운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신선하면서도 매운 신록의 냄새를 김성철의 코끝에 실어다 주었다. 에크하르트의 모습은 사라지고 김성철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나타났다. [ 이곳은 나의 고향 코디아 마을. 모든 일의 시작은 마을 앞에 한 무리의 군대가 찾아오면서 시작된다오. ] 마을 앞에 300명 남짓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전사, 마법사, 궁수, 시종, 음유시인. 실로 다채로운 광경이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머나먼 북쪽 땅의 마계. 그들 첫 번째 재앙인 악마왕을 토벌하기 위해 각지에서 모인 영웅들이었다. 한 소년이 두리번거리다가 야음을 틈타 그 무리에 합류했다. [ 연금술사 밑에서 갖은 구박을 받아가며 혹사당하던 어린 연금술사가 그들을 동경해 몰래 영웅들의 대열에 합류했소. 그게 바로 나 에크하르트요. ] 풍경이 바뀌었다. 300명의 영웅이 차례차례 마계의 마물들과의 싸움 속에서 소모됐고 급기야 단 여덟 명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한 명의 소년과 일곱 명의 영웅. 그러나 일곱 명의 영웅은 소년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 칠영웅의 전설은 그렇게 시작됐지. 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동경했다오. 칠영웅 중에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 ] 일곱 명 중에 한 여성이 부각 됐다. 메아리술사 베스티아레다. 에크하르트가 펼쳐 낸 베스티아레는 실제의 베스티아레보다 훨씬 아름답고 고결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 그중엔 내가 생애를 걸쳐 사모한 여인이 있었다오. 아, 베스티아레. 나의 베스티아레. 하지만 그녀는 결코 날 돌아봐주지 않았지. ] 베스티아레 옆에 데스포트가 나타났다. 둘은 손을 잡고 위풍당당한 성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년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고개를 떨구었고 그 자세 그대로 소년은 성장해 어른이 되었다. 그의 뒤엔 어딘가 베스티아레를 닮은 여인과 그 여인의 손을 잡은 소녀의 그림자가 나타났지만 에크하르트는 이들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한편 에크하르트의 뒤에선 거대한 마물들이 검은 그림자의 형태로 나타나 점점 증식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마물로 뒤덮여갔다. [ 그러는 동안, 재앙은 점점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를 인간에게 내려주었지. 칠영웅의 리더 데스포트는 필멸자의 한계를 느끼고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소. ] 풍경이 또 다시 변화했다. 계단이 나타났다. 하늘로 향해 끝없이 뻗은 계단. 진정한 신으로 향하는 계단이다. 데스포트가 나타났다. 그는 힘차게 계단을 걸어 올랐으나, 그러나 몇 층계를 밟기도 전에 스스로 내려왔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슬픔에 젖었다. 베스티아레가 그의 옆에 다가와 그의 슬픔을 달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크하르트가 갑자기 계단을 올랐다. 사자토스가 그를 강하게 만류했지만, 에크하르트는 듣지 않았다. 다른 칠영웅들이 비웃는 가운데 에크하르트는 신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층계, 한 층계. 계단을 오를 때마다 에크하르트는 엄청난 고통을 몸짓과 행동으로 표현했다. 온 정신이 박탈당한 것 같은 허무감, 자포자기, 치욕스런 과거의 기억을 거듭 난자당하는 괴로움, 혹은 당장 쓰러져 자고 싶은 권태감 같은 것들이 끝없이 그를 괴롭혔다. 그 고통을 잘 알고 있는 김성철은 당시의 고통을 복기하며 에크하르트란 사내가 계단의 끝에 이르는 것을 보았다. 에크하르트는 기어코 계단의 끝에 섰고 신과 그리고 그 옆을 지키고 있는 혼돈신과 마주했다. [ 결국, 나는 힘을 얻게 되었지. 미증유의 힘을. ] 에크하르트의 목소리가 변했다. 그의 목소리는 파멸적이었고 그리고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힘을 얻은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재앙을 한 번에 해결했다. 그는 이제 자신보다 작은 존재가 된 칠영웅을 굽어보았다. 고고하던 데스포트는 고개를 숙였고 그를 비웃던 칠영웅도 더는 그를 비웃지 못했다. 입장이 바뀐 것이다. 하지만 바뀌지 않은 것도 있었다. 바로 베스티아레의 시선이었다. 그녀는 일편단심 데스포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크하르트가 갑자기 정지했다. 문득 김성철은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동상처럼 멈춰버린 에크하르트에게서 명백한 살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끼기긱. 에크하르트의 목이 목각인형처럼 움직여 베스티아레를 갈구하듯 바라보았다. [ 왜 나를 바라봐주지 않는 거야? 이렇게 강한 힘을 얻었는데! 데스포트 같은 건 파리를 잡듯이 잡아버릴 수도 있는 강한 힘이 있는데! ] 그의 절규에도 베스티아레는 데스포트만을 응시했다. 곧 데스포트가 사라지고 베스티아레는 홀로 남았다. 도도하게 선 그녀 앞에 에크하르트가 나타나 뭐라고 말했다. 하지만 베스티아레는 그를 바라봐주지 않았다. 냉랭한 무시. 힘을 얻은 에크하르트가 다시 한번 고개를 떨구었다. 한숨과 탄식 속에서 베스티아레는 동상처럼 굳어버렸다. 에크하르트의 슬픈 독백이 들려왔다. [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 모든 것이 사라지고 암흑이 도래했다.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이 주위에 내려앉았다. 그 중심에 선 에크하르트, 아니 에크하르트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 110. 관리자 (3) 그것은 마치 악몽의 한 장면을 방불케 했다. 멀쩡하던 인간이 갑자기 괴물로 변했다. 목이 거꾸로 돌았고 안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팔과 다리는 기괴한 형태로 꺾이더니 발작하듯 떨렸다. 가장 도드라진 변화를 보인 곳은 그의 고간이었다. 허름한 옷 너머로 무언가가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그것은 음경이라기에 너무나 컸다. 푹. 옷을 찢고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에크하르트의 고간에서 솟아 나온 것. 그것은 에크하르트의 형상을 한 목각인형이었다. 씨익. 목각인형의 얼굴이 김성철을 향해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김성철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바닥에 떨어진 에크하르트 형상의 목각인형은 기괴한 움직임으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그 너머에 그를 배출한 에크하르트의 형상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스러졌다. ‘뭐지? 이건? 이것도 에크하르트가 의도한 것인가?’ 단순히 극적인 장치를 의도한 것치고는 피부로 느껴지는 살기가 너무나도 생생하다.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그 순간 에크하르트, 아니 에크하르트가 만든 목각인형이 포효를 내질렀다. 괴물이 된 에크하르트는 무대의 구석에 조그맣게 존재하던 그의 처와 처의 손을 잡은 딸을 뒤틀린 눈알로 노려봤다. [ 관리자 따위 되고 싶지 않았어! 저 빌어먹을 마누라와 딸년만 아니었어도! 그 짐짝들만 아니었어도!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쥘 수 있었단 말이야! ] 광기에 찬 에크하르트가 손을 뻗었다. 그곳엔 데스포트의 어깨에 몸을 기댄 가련한 베스티아레의 실루엣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베스티아레에 닿지 않았다. 투둑. 한계까지 연장된 에크하르트의 손의 관절이 빠지며 지면 아래로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손 모양의 나무 조각은 검은 불길로 화했다. [ 혼돈신의 말을 들었어야 했어! 변덕 같은 알량한 위선 따위 부리지 말았어야 했어! ] [ 이 개 같은 세상 따위 진즉에 파괴해버렸어야 했는데! ] 미쳐버린 목각인형이 절규했다. 주위는 벗어날 길 없는 어둠으로 물들었고 그 너머에 수십 권의 책이 나타났다. 김성철은 만연하던 불길함이 현실로 드러나는 걸 느끼고 영혼 창고에서 그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팔 가라즈와 승천자의 손이 양손에 각각 나타났고 그와 동시에 초월감각이 반응했다. [ ‘재앙의 서’ 총괄관리유닛 ] [ 에크하르트 1호 ] 에크하르트의 형상을 한 에크하르트의 피조물. 그것이 이 목각인형의 정체. [ 가하하하하핫! ] 목각인형의 턱이 부르르 떨며 딱딱하는 소리를 연이어 냈다. [ 쓰레기 같은 세상! ] 김성철은 순간 바로 자신의 뒤에서 무언가의 기척을 느끼고 팔 가라즈를 들어 올렸다. 챙캉! 칼날이 그의 뒤를 향하고 있었다. 칼날을 겨눈 것은 바로 베르텔기아와 똑같은 형상의 책. 칼날은 그 책장 안에서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책은 뒤로 물러나 목각인형을 떠도는 책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 숫자는 대략 20여 기. 겉모습은 베르텔기아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 분위기는 지금까지 만난 베르텔기아 타입과 사뭇 다르다. 다른 녀석들에게 인격이 있었다면 지금 그의 주위를 떠도는 수많은 책에선 무감정과 살의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야말로 냉혹한 전투기계 그 자체. 김성철은 문득 과거 55호로부터 들었단 말을 떠올렸다. ‘이건 전투형?’ 55호는 말했다. 베르텔기아 타입 31호부터 54호까지는 전투임무형이라고. 지금 김성철 주위에 전개된 숫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목표 고정.” “파괴 실시.” 베르텔기아의 자매는 오직 김성철의 제거만을 바라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싸우지 않을 수밖에 없군.’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눈앞의 적을 노려봤다. “나는! 이 세상의 신이다!” 목각인형이 광소를 터뜨리며 팔을 내저었다. 그의 주위를 떠돌던 베르텔기아 타입이 둘로 갈라졌다. 하나는 멀리 떨어져 주문 영창을 시작했고 다른 하나는 목각인형의 주위를 떠돌며 그를 방호했다. 목각인형은 그렇다 치고서라도 원거리에서 주문영창을 하는 베르텔기아 타입이 영창 하는 주문의 형태가 심상치 않다. 거의 모든 마법진의 형태를 꿰뚫고 있는 김성철은 원거리의 베르텔기아 타입들이 최소 5위계 이상의 고위마법을 영창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파지직. 김성철의 손끝에 전류가 감돌았다. ‘체인 라이트닝으로 한 번에 떨어뜨린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지면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발밑은 어느 순간 늪처럼 변해 그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지면 자체가 변화하고 있었다. 멀리서 목각인형이 두 눈에서 형형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에크하르트의 이름을 지닌 목각인형이 지형을 자신의 의지대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김성철의 발목을 소리소문없이 집어삼킨 땅을 빠르게 경화하며 그를 속박하고 있었다. 마법적인 힘, 하지만 마법이 아니다. 이것은 연금술 아니, 그 상위의 힘이다. 김성철의 뇌리에 창조술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아무런 과정 없이 그저 의지만으로 물질을 변화시키는 건가.’ 그야말로 창조라는 오만방자한 수식어를 붙일만한 힘이다. 감탄만 하고 있을 때는 아니다. 원거리에선 십여 기의 베르텔기아 타입이 파멸적인 마법의 영창을 완료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마법 세례를 맞게 된다. 김성철의 몸에 신적인 힘이 흐르고 지나갔다. 지면을 향해 발을 내딛는 순간, 김성철은 이것이 아니라는 감각을 받고 그의 발이 지면을 차기 전에 힘을 회수했다. 목각인형이 변화시키고 있는 것은 표면만이 아니다. 무저갱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깊은 영역까지 수렁처럼 만들어놓았다. 힘을 가하면 가할수록 깊게 빠져들 것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의 또 다른 힘을 사용했다. ‘1번 영혼석 플라이.’ 코트 안의 영혼석 하나에 마법진이 떠오르며 그를 상승시켰다. 그러나, 수렁은 그를 잡고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 800에 달하는 마력을 총동원해도 요지부동이다. 또 다른 추진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김성철의 눈에 좋지 않은 신호가 포착됐다. 원거리에서 베르텔기아 타입 하나 앞에 눈부신 얼음창이 완성되고 있었다. 빙결 학파, 아니 얼음 마법의 5위계 공격 마법인 크리스탈 랜스다. 이 정도 마법이라면 승천자의 손에 내장된 대마법 필드로 간단하게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베르텔기아 타입은 하나가 아니다. 김성철은 자신의 머리 위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을 발견했다. 머리털이 탈 것처럼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김성철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파이어 레인. 5위계의 화염 마법이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10권에 달하는 베르텔기아 타입은 속속 영창을 완성시키며 김성철의 전후좌우, 사방향은 물론 머리와 발밑까지 각각의 마법으로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한편 김성철은 지금 목각인형이 만들어 낸 수렁에 발이 묶인 상황. ‘선공은 이쪽이 먼저다.’ 이미 영창은 끝내놓았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손끝에 어른거리는 전류를 자신의 적을 향해 뿜어냈다. 체인 라이트닝. 전투형 베르텔기아의 타입의 내구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구도 시험의 시금석은 물론 어느 정도 견제 역할도 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마법의 시전과 동시에 목각인형 주위를 떠돌던 나머지 절반의 베르텔기아 타입이 집단 순간이동을 시전, 자신의 자매 앞을 막아섰다. 챙캉! 챙캉! 그것들은 책장 안에서 일제히 그 안에 숨긴 창칼을 꺼내더니 아래로 향하는 기역 형태의 진을 펼쳤다. 체인 라이트닝이 한 녀석에 닿았다. 파지직! 전류는 그대로 베르텔기아 타입에 적중. 그러나 다음 순간, 김성철의 눈을 의심케 하는 장면이 연출됐다. 베르텔기아 타입에 적중한 전류는 다른 베르텔기아 타입을 따라 차례대로 전전하다 지면 가까이 창칼을 들이댄 녀석을 끝으로 소멸해버린 것이다. 전류는 그대로 지면을 통해 흩어지며 산란됐고 그 일부를 오히려 김성철에게 미치며 짜릿한 전격의 고통을 선사했다. ‘이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전투 방식. 한편 김성철읫 선제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사이 나머지 베르텔기아 타입은 영창을 끝내고 김성철에게 전방위적인 반격을 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먼저, 얼음의 창이 김성철을 향해 날아왔다. 그와 동시에 머리 위에선 불의 비가 떨어졌고 발밑 아래에선 폭발을 예감케 하는 공기의 수축이 일어나고 있었다. 김성철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방어술식을 펼치기도 수렁에서 빠져나오기도 늦었다. 사면초가다. 가공할 마법의 연격이 김성철을 덮치는 찰나 김성철은 이미 몸에 흐르고 있던 신적인 힘을 이용해 지면을 거세게 걷어찼다. 그의 몸이 지면 아래로 움푹 들어갔다. 김성철은 연거푸 발길질했다. 신적인 힘이 실린 두 다리가 힘차게 발길질을 할 때마다 그의 몸은 안으로 쑥쑥 들어갔다. 하얗게 변해버린 알 수 없는 지질 아래에서 김성철은 이마 바로 위에서 무언가 찔러 들어오는 감각과 함께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크리스탈 랜스다. 뒤어어 한기는 사라지가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이번엔 불의 비다. 하지만 그 열기는 김성철에게 따뜻하다는 느낌을 줬을 뿐 어떤 타격도 가하지 못했다. 역이용한 것이다. 목각인형이 김성철을 속박하기 위해 만들어 낸 끝없는 수렁을 방벽으로 삼아서 말이다. 김성철의 임기응변으로 베르텔기아 타입이 시도한 전방위 마법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역설적으로 김성철이 입은 유일한 마법 타격은 베르텔기아 타입이 반사한 체인 라이트닝이 전격 공격이 유일했다. 문제는 이 다음이다. 일단, 이 수렁을 이용했지만 어떻게 빠져나오느냐. 물론 생각해둔 방법이 있긴 했다. 김성철은 자신의 여덟 영혼석에 일제히 명령을 내렸다. 카벙클의 혼이 내재한 영혼석은 즉각 그의 의지에 반응해 주문 영창을 시작했다. 1번 영혼석 윈드 쉴드 2번 영혼석 윈드 쉴드 3번 영혼석 윈드 쉴드 4번 영혼석 윈드 쉴드 5번 영혼석 윈드 쉴드 6번 영혼석 윈드 쉴드 7번 영혼석 윈드 쉴드 8번 영혼석 윈드 쉴드 ‘8연장 윈드 쉴드.’ 가공할 풍압을 발생해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윈드 쉴드. 그것은 김성철이 필요로 하는 폭발적인 추진력을 선사할 것이다. 영창은 시전과 동시에 끝이났다. 김성철은 직접 플라이를 시전하여 영혼석에 명령을 내렸다. 펑! 펑! 펑! 펑! 펑! 그의 손끝에서 마치 로켓을 방불케 하는 일련의 폭발이 일어났다. 그 반작용은 수렁 안에 갇힌 김성철을 강하게 밀어 올렸다. 신적인 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윈드쉴드 하나가 터질 때마다 그의 몸은 수렁을 뚫고 쑥쑥 올라갔다. [ 넌 못 빠져나간다! ] 수렁 바깥의 목각인형이 턱을 딱딱거리며 눈에서 섬뜩한 빛을 발했다. 급속상승하던 김성철의 움직임에 제동이 걸렸다. 수렁이 갑자기 딱딱한 바위처럼 굳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창조의 힘이 또 한 번 지형을 변화시켰다. 윈드쉴드의 추진력도 전신을 구속한 단단한 바위 앞에선 무의미했다. [ 어둠 속에서 질식해 죽어라. ] 지면 위에서 목각인형은 광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김성철 또한 진정한 신 앞에 선 사내라는 사실을 말이다. 광소를 터뜨리던 목각인형이 몸이 휘청거렸다. 지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땅이 갈라지며 검은 형체가 솟아나왔다. 수많은 파편이 휘날리는 가운데 목각인형은 눈에서 빛을 발하는 검은 형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부수는 자, 김성철이다. 목각인형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 막아라! ] 목각인형이 손을 내저었다. 십여 기의 베르텔기아 타입이 줄지어 이동하는 물고기처럼 이동하며 목각인형을 막아섰다. 허공에 떠오른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휘둘렀다. 하늘의 파편을 벼려 만들었다는 망치는 가까운 거리의 거대한 바위 크기의 파편을 후려쳤다. 파편은 잘게 부서지며 마치 산탄총의 총알처럼 목각인형의 전면을 향해 매섭게 날아갔다. 파바박! 신적인 힘이 살린 파편의 대군이 목각인형을 막어선 베르텔기아 타입에 부딪쳤다. 베르텔기아 타입들은 급히 방어술식을 펼쳐 자신과 자신의 주인을 보호하려 했지만, 너무나 급작스럽게 전개된 상황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베르텔기아 타입 하나가 찢어지며 지면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김성철의 초월감각이 반응했다. [ 언니들, 미안. ] 마지막 단말마를 끝으로 떨어진 책은 스스로 불타 없어졌다. 김성철의 눈에 경악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녀석들. 살아 있는 건가?’ ======================================= 110. 관리자 (4) 김성철의 경악과 별도로 그의 공격은 계속됐다. 팔 가라즈가 하늘 위에 떠오른 바위를 재차 강타했다. 또 한 번의 파편 세례가 목각인형과 베르텔기아 타입을 향해 쏟아졌다. 베르텔기아 타입 앞에 방어술식이 펼쳐졌지만, 일부는 버티지 못하고 짓이겨지고 산산이 찢겨 바닥에 처박혔다. 초월감각이 죽어가는 소녀의 목소리를 김성철에게 들려주었다. [ 아파, 너무 아파! ] [ 미안. 지켜주지 못해서. ] 베르텔기아와 똑같은 목소리. 이걸로 확실해졌다. 저 전투형 베르텔기아 타입은 김성철이 아는 베르텔기아와 크게 다를 거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럼에도 김성철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당하기에. 김성철이 당하는 순간, 이 세상은 끝장난다. 세상이 멸망하지 않기를 위해서라도 김성철은 싸워야 한다. 파지직! 체인 라이트닝이 손끝에서 원거리의 베르텔기아를 뿜어져 나갔다. 전과 달리 지켜줄 자매는 없다. 맹수와 같은 뇌전은 무방비의 베르텔기아 타입 사이를 마구 날뛰며 무자비한 피해를 입혔다. 베르텔기아 타입 하나가 검게 탄 채 지면으로 떨어졌다. 다음 순간, 김성철은 동공을 흔들리게 할 정도의 충격적인 장면을 보게 된다. 활짝 열린 책장에서 무언가가 기어 나왔다. 금발의 소녀였다. 그것은 꿈의 세계 속에서 김성철이 본 베르텔기아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타기 시작한 책장의 불에 삼켜져 그대로 녹아 없어졌다. 금발과 하얀 피부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은 김성철의 앞에서 턱을 딱딱거리는 목각인형이었다. [ 뜨…. 뜨거워! 언니! 도와줘! ] 목각인형은 앞을 향해 손을 뻗다가 그대로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 무슨.’ 씁쓸한 죄책감이 그의 마음 위에 서리처럼 내려앉았다.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에크하르트 행세를 하던 목각인형이 뒤로 물러나며 턱을 딱딱거렸다. [ 베스티아레! 베스티아레! 나는 오직 그녀만을 갈구했는데 왜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나! ] 목각인형의 눈에서 소름끼치는 빛이 번뜩였다. 다음 순간, 김성철은 머리 위에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늘이 무너지고 있었다. 아니, 하늘의 일부분이라 해도 무방한 거대한 질량의 덩어리가 이쪽을 향해 낙하하고 있었다. 에크하르트의 목각인형이 하늘을 고체덩어리고 바꿔버린 것이다. 무너지는 하늘을 피해 김성철은 전속력으로 안전지대로 달아났다. 그를 쫓아 다섯 기의 베르텔기아 타입이 따라붙었다. 쉬익! 베르텔기아 타입의 책장 안에서 번득이는 검과 창날이 튀어나와 김성철의 등줄기를 노렸다. 승천자의 손이 칼날을 붙잡았고 그대로 신적인 힘으로 그것을 내동댕이쳤다. 책장은 바닥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 [ 아버님. ] 하나가 죽을 때마다 어김없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성철의 앞에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무너지기 시작한 하늘이 이미 목전에 이른 것이다. 김성철은 마지막 힘을 다해 앞으로 내달렸다. 쿵! 하늘이 내려앉았다. 김성철은 간발의 차로 무너지는 하늘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바짝 쫓던 베르텔기아 타입은 하늘에 깔린 채 그대로 소멸했다. [ 안녕…. 모두들. ] [ 하계로 소풍, 다시 가고 싶어. ] 씁쓸한 울림이 들려온다. 김성철의 눈이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이제 몇 기 남지 않은 베르텔기아 타입을 거느린 목각인형을 바라보았다. 목각인형은 더는 김성철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낸 베스티아레의 실루엣을 향해 뒤틀린 두 손으로 구애하는 자세를 취하며 이해할 수 없는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 나는 천재 연금술사, 에크하르트. 그 잘난 검성 드라고만도 내 앞에서 볼기짝을 두들겨 맞고 목숨을 애걸했다네. ] 이미 목각인형은 미쳐버린지 오래다. 따라서 그 행동을 짐작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든 채 목각인형을 향해 걸어갔다. 살아남은 베르텔기아 타입들이 목각인형을 보호하듯 그 주위를 맴돌았다. 하지만 전과 달리 먼저 공격을 해오지 않았다. 김성철은 분위기가 바뀐 것을 감지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저벅. 김성철은 목각인형에게 팔 가라즈가 닿을 거리까지 접근했다. 베르텔기아 타입들이 마침내 김성철 앞을 막아섰다. 끼릭. 목각인형의 목이 180도 뒤로 돌아갔다. 광기에 물든 안구엔 기름 한 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윽고 목각인형은 몸을 전환시켜 목과 방향을 일치시킨 후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런 실례를 했군요.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아까의 이야기를 계속하지요.” 목각인형은 에크하르트의 목소리로 말했다. 김성철의 눈앞에 빛으로 이루어진 문자가 떠올랐다. [ 1. 당신은 누구인가? ] - 완료 [ 2. 당신은 어떻게 해서 관리자가 되었는가? ] [ 3. 당신은 관리자가 되어 무슨 일을 했는가? ] [ 4. 관리자로서 당신의 목표는 무엇인가? ] [ 5. 에크하르트의 은밀한? 취미 ] “…….” 이번에 김성철은 아무 선택지도 취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팔 가라즈를 높이 들어올려 내려쳤다. 콰직! 무시무시한 일격은 그대로 목각인형의 머리를 내려쳐 그것을 몸통과 분리시켰다. 목각인형의 머리통은 그대로 반파되어 지면 아래를 공처럼 튀기다가 이윽고 김성철의 발치를 향해 또르르 굴러왔다. 회전하던 머리통은 정확히 김성철을 응시하는 방향에서 회전을 멈추었다. 반파된 머리통에서 안구 하나는 사라졌고 나머지 하나는 용수철을 매단 채 눈알 구멍에서 튀어나와 대롱거리고 있었다. 그 튀어나온 눈알이 김성철을 향했다. 그리고 텅빈 공간에 기괴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렇게 된 이상, 한 명의 왕인…. 당신에게 이 신을 대신하게…. 된 관리자, 통칭 재앙의 서인 에크하르트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할 기, 기회를 드리지.” 목각인형은 아까 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군화발로 머리통을 짓밟았다. 간신히 기능하던 머리통은 형체조차 남지 않았다. “…….” 베르텔기아 타입들은 주인을 잃자 뿔뿔이 흩어져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상황은 끝났다. 에크하르트를 칭하던 인형은 파괴됐고 이제 이 낯선 공간엔 김성철 하나만이 남았다. 짙은 허무감이 엄습했다.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술 한 병을 꺼내 뚜껑을 따고 그대로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위장을 태울 것 같은 강한 액체가 흘러 들어가는 걸 느끼며 김성철은 병을 내려 놓았다. 그 앞에 또 하나의 책이 나타났다. 베르텔기아와 똑같이 생긴 녀석이다. 김성철이 그 책을 노려보자 그 책이 먼저 말했다. “오해마세요. 전 55호입니다.” “55호?” 은자의 탑에 있던 녀석이다. 목숨보다 소중한 베르텔기아를 소모품으로 취급하던 그 녀석이 다시 김성철 앞에 나타난 것이다. “아버님에게 향하는 길을 열어드리죠.” 55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원문을 열었다. 김성철은 주저 없이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함정이든 아니든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그는 뭐든 박살 내고 싶은 기분이었으므로. 차원문 너머엔 좁고 어두운 작업실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책상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에크하르트의 모습을 한 목각인형 앞에 있던 것과 같은 형태와 질감을 지니고 있었다. “아버님은 저기에 있어요.” 55호가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무언가 있다. 김성철은 낡은 작업장 안에 희끄무레한 형체가 머물러 있는 걸 발견했다. 그것은 사람도 아니고 목각인형도 아니었다. 그것은 도화지 위에 그리다 만 선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미안하게 됐군. 내 인형이 미쳐 버린 모양이야.” 이제는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그 형상과 걸맞는 흩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김성철은 한눈에 이 자가 한때 에크하르트라 불렸던 사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사내. 소멸하기 직전이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는 말 한마디를 하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거로 보였다. 그 짧은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안 그래도 희미해진 그의 형체는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으니 말이다. “시간은 없어. 빠르게 일을 끝내야 돼. 당신은 한 명의 왕으로 모든 재앙을 해결했어.” 에크하르트가 말했다. 서두르고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그런데 다음 순간, 에크하르트의 형체가 갑자기 사라졌다. ‘뭐지?’ 김성철이 살짝 놀라는 순간, 옆에 있던 55호가 나서 그의 창조자를 대신해서 이야기를 이어받았다. “잠시, 형태를 잃으신 거 같아요. 요즘엔 흔한 일이죠. 곧 돌아올 테니 당황하지 마시길.” “…아까 그 목각인형은 뭐였지?” 김성철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그것은 아버님이 한 명의 왕이 올 때를 대비해 만들어놓은 아버님의 분신이에요. 하지만, 그것을 만들 때 이미 아버님은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기에 아버님의 어두운 마음이 스며들었고 종내에 그것은 아버님조차 어떻게 할 수 없는 괴물이 되었죠.” “…….” “아무튼, 그것은 잠시 잠들었고 또한 당신은 당면한 재앙을 해결했으니 아버님을 대신해 제가 그 보상에 대해 말씀드리겠어요.” 55호는 책장을 펼쳤다. 아무것도 없는 비어 있는 종이 위에 곧 빛으로 쓴 문자가 나타났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그것을 읽어 나갔다. [ 재앙의 해결자를 위한 보상. ] [ 당신은 이제 관리자가 되어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신이 이제 신과 같은 반열에 올랐음을 의미한다. ] 그걸 본 김성철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게 재앙을 해결한 자의 보상인가?” 어이가 없는 걸 넘어 황당하기까지 하다. 그토록 죽을 고생을 한 대가가 겨우 이런 것이라니. 혹자에겐 비할 바 없는 지고의 보상이겠지만 김성철의 눈에 비친 그것은 또 다른 희생에 불과했다. 불쾌한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고 이윽고 55호의 페이지에 또 다른 보상이 나타났다. [ 이 세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구 인류는 교체돼야 한다. ] [ 단, 당신은 재앙을 해결한 자. 당신은 구 시대의 인류 중 9,999명을 추려 그들을 보호할 수 있다. 그것이 재앙의 해결자인 당신만이 지닐 수 있는 특별한 권능. ] 더 이상 김성철의 입에선 실소도 헛웃음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대신 차가운 분노가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선심 쓰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다음 순간, 김성철의 내면에서 잊고 있던 교활한 음성이 들려왔다. [ 엔키아두스와 디르고의 작품이지. 놈들은 그런 족속들이야. ] 혼돈신의 목소리다. 그러는 동안 잠시 사라졌던 에크하르트의 형체가 오래된 책상 위에 다시 나타났다. 55호는 자신의 창조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버님은 따님과 아내분, 그리고 칠영웅을 각기 다른 렐름에 모셨어요.” “에크하르트의 가족은 어떻게 됐지?” 김성철이 물었다. 55호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오랫동안 베르텔기아와 함께한 김성철은 행동만으로 55호의 심리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이윽고 55호는 판단을 내렸다. “당신은 재앙의 해결자, 제 나름대로 보상을 해야겠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내분은 죽었고 따님은 살아남았어요.” “그 딸은 어디에 있나?” “렐름에 있어요. 아버님의 고향인 코디아 마을과 똑같은 형태의 렐름에 잠들어 있죠.” “…베르텔기아는 그 딸과 다른 존재인가?” 55호가 대답을 하려는 찰나였다. 책상에 앉은 에크하르트가 말이 둘의 대화를 가로막았다. “당신은 세상을 파괴할 힘을 지니고 있소. 내가 내 딸을 당신에게 보내 또 다른 딸과 당신을 지키게 한 것은 세상의 파멸을 막기 위해서였지.” 김성철의 시선은 에크하르트에게 옮아갔다. 분명 딸이라고 말했다. 김성철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지금 저 에크하르트는 대단히 불안전한 존재다. 이미 소실된 인격의 잔해를 간신히 붙잡아 김성철 앞에 버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가 사라지면 언제 다시 나타날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이리라. 김성철의 침묵 속에서 에크하르트는 계속해서 말했다. “질서신과 중립신은 어리석게도 당신은 영원히 가둬둘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미봉책에 그칠 뿐, 다가올 파멸을 막는 법은 하나뿐이오.” 희끄무레한 형체가 연장되며 한 사내의 얼굴이 구체적인 형태를 갖춰갔다. 그것은 늙고 지친 어떤 사내의 얼굴이었다. 목각인형이 지녔던 얼굴보다 수십 년은 늙은 모양새. 그것이 에크하르트의 민낯이었다. 늙은 에크하르트가 말했다. “당신이 나의 뒤를 이어 관리자가 되는 것이지.” “…….” “내키지 않는 건 잘 알지만 잘 생각해보시오. 당신 안에 있는 힘은 실체는 신의 속성이오.” “…신의 속성?” 이에 에크하르트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진정한 의미의 신성(神性)이지.” 에크하르트는 계속해서 말했다. “신은 창조와 파괴의 힘을 지니고 있소. 그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끊임없이 번갈아가며 하나의 세상을 창조하고 파괴하기를 반복하지. 당신 안에 있는 신의 속성은 그 동전의 양면 중 하나인 파괴의 속성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김성철의 시야가 일순 수축하며 한 점으로 쏠렸다. 수많은 풍경이 쏜살처럼 지나간 끝엔 해골로 뒤덮인 대지 위에 우두커니 선 검은 거인이 있었다. 찰나의 환각은 검은 거인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끝이 났다. “…파괴의 속성이라.” 실로 그러하다. 설명이나 부연설명은 필요 없다. 김성철은 선험적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단지 의식하지 못했을 뿐. 신의 계단을 오른 자, 에크하르트의 말은 이어졌다. “필연적으로 무한과 맞서 싸워야 하는 관리자는 오로지 신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 파괴의 속성이라고 하나 그 또한 신의 속성. 그 무한한 힘을 지닌 당신은 관리자로서 가장 적합한 존재요.” 에크하르트의 눈동자에서 또렷한 빛이 떠올랐다. “부수는 자.” ======================================= 111. 붕락 (1) “내가 관리자로서 가장 적합한 존재라고?” 에크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한이라는 구속 속에서 당신의 내면의 검은 거인은 결코 깨어나지 않을 것이오. 오히려 신만이 감당할 수 있는 무한함에 맞서 상승효과를 불러일으키겠지.” “상승효과라.” 에크하르트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당신은 일개 관리자를 넘어 완벽한 신의 대체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오.” 김성철은 회의적이었다. 너무나도 일방적이고 자기편의적이다. 하지만 깊게 생각할 시간은 없다. 에크하르트의 형체가 위태로울 정도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한편 멀리서 무언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이 진동은.’ 심상치 않은 힘과 광기가 느껴진다. 에크하르트의 옆을 지키고 있던 55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크하르트 1호가 다시 깨어났어요. 빨리 대답하셔야 해요.” “그 인형이 또 깨어났다고?” 55호는 긍정하듯 몸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건 죽지 않아요. 당신이 신에게서 파괴의 권능을 받았듯이 아버님또한 창조의 권능을 받았으니까요. 그 괴물은 아버님의 창조의 권능을 훔친 존재예요.” “그건 아니란다.” 희미해진 에크하르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계단을 전부 오르지 않았다. 마지막 층계 앞에서 나는 혼돈신을 의심했고 그의 제안을 일부만 수락했지. 그 결과 나는 불완전한 창조의 힘만을 얻을 수 있었지.” 에크하르트는 다시 김성철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처음 봤을 때처럼 도화지 위에 그리다 만 선과 같은 형태로 돌아와 있었다.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상황. “당신만이 이 세상을 구할 수 있소.” “구하는 게 아니겠지.” 김성철이 에크하르트의 말을 정정했다. 그의 눈동자엔 타협이 불가능한 결연한 빛이 서려 있었다. “그저 유지하는 거겠지. 질서신과 나머지 떨거지들이 만들어놓은 이 누더기 같은 세상을.” 진실을 적시당한 탓일까. 에크하르트의 신형이 파초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김성철은 계속해서 말했다. “9,999명의 사람을 추리라고? 그럼 나머지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지?” 김성철이 다그치듯 물었다. “그들은 다음 세상을 위한 밑거름으로 희생될 것이오.” “그들의 빈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은?” “렐름에 있는 새로운 인류들이오.” 에크하르트는 숨김없이 말하며 김성철 앞에 거울상 하나를 만들어내어 다른 곳의 장소를 보여주었다. 그곳은 정령계였다. 하늘의 천정에 맞닿은 세계수 아래 수많은 세계수의 묘목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에크하르트가 그것을 보며 말했다. “구시대의 인류가 청소되고 새로운 세대가 오면 세계수의 묘목이 세상 곳곳에 심어질 것이오. 데스포트가 일으킨 낙진은 세계수에 흡수되어 힘을 잃게 될 것이고 그 아래서 새로운 인류는 또 한 번의 번영을 구가하게 되겠지.” 에크하르트는 너무나도 담담하게 소름 끼치는 일련의 계획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성철은 방금까지 라그란제의 투기장에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진심을 부르며 열광적으로 환호하던 수만 명에 이르는 군중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 중에서 단 9,999명을 추리라니. 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9,999명이 많다면 많은 숫자지만 막상 실제로 이 문제를 다른 왕들과 논의하면 그렇게 많은 숫자도 아닐 것이다. 세계의회의 구성원에게 먼저 그 자리가 돌아갈 것이고 그들의 가족과 가신을 데려가려 할 것이기에. 그렇게 되면 결국 살아남는 것은 기득권이라 불리는 지배층 뿐이다. 그것은 김성철이 그토록 혐호하던 구 세계의회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어떤 면에선 더욱 잔인하고 이기적인 행동이다. 김성철은 그런 조건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구 시대의 인류를 전부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소?” 김성철이 물었다. 하겠다는 게 아니다. 단지 그들의 저의를 듣기 위한 질문이었다. 에크하르트가 말했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아마도 불가능할 거요.” “이유가 뭐요?” “그 이상의 인원을 수용하려면 다른 아신들이 자신의 렐름을 당신에게 양도해야 하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자신의 렐름을 내어주지 않겠지. 왜냐하면, 그들의 렐름은 신놀음을 할 수 있는 즐거움과 존재 가치의 원천. 렐름을 가지지 못한 아신은 보통 악신으로 전락하오. 아무것도 없는 초월세계에서 영겁을 살아가는 건 고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일이니.” “…….” 김성철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그의 눈동자에 형형한 빛이 번득였다. 에크하르트가 김성철의 속내를 읽고 말했다. “내 잠시, 다른 질서신과 중립신에게 직접 말을 해보리다.” 그는 눈을 감은 채 한동안 침묵했다. 그는 김성철이 모른 방법으로 초월세계와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지닌 것 같았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에크하르트가 눈을 떴다. 희미한 그는 김성철을 바라보며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9,999명. 거기서 단 한 명도 내어줄 수 없다고 하더구려.” 김성철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두 주먹이 꽉 쥐어졌다. ‘결국, 하나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건가. 그저 아래 인간의 희생을 강요하고 또 강요해 그들만의 즐거움을 누리겠다는 건가.’ 이 세상의 구조는 한줄로 요약된다. 질서신과 그 도당만을 위한 세상.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발로 걷어차고 손바닥으로 때리고 심지어 죽여도 대체할 노예들은 계속해서 사육되고 있으니까. 그런데 다르게 보면 그 구조는 아래에서도 똑같이 재현된다. 구 세계의회의 기득권과 질서신 패거리와 다른 게 무엇인가? 또 형벌부대의 장인 강가스 아론이 아래 부하들을 대하는 방식과 소환 궁전에서 내정자와 비내정자 간의 심각한 불균형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단순히 규모의 차이다. 신적인 힘을 가진 자는 신적인 규모로 전횡을 휘두르고 그 아래 존재는 자신이 가진 힘만큼 적당히 횡포를 부린다. 질서신으로부터 이어진 뒤틀린 고착 구조는 계층별로 순차적으로 이어져 이계의 밑바닥까지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은 이해가 갔다. 혼돈신의 심정이. 그만큼 이 세계는 근본부터 틀어져 있었다. “자, 결단의 시간이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소.” 아까부터 들려오던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더욱 커졌다. “설령 당신이 이 제안을 거절한다고 해도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진 않을 것이오. 당장 질서신과 중립신이 당신을 무한의 뇌옥에 빠트릴 궁리를 하고 있고, 당장 바깥에만 해도 좋지 않은 징후가 기다리고 있으니.” “좋지 않은 징후?” 김성철이 물었다. 에크하르트는 힘없이 웃으며 답했다. “당신이 서 있는 그 땅은 이미 멸망하기를 바라는 자의 악의로 뭉친 씨앗으로 가득 찼소. 몇몇 씨앗은 이미 대지에 뿌리는 내리고 악의가 만개할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지.” 에크하르트는 김성철 앞에 또 하나의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 중심에 선 것은 김성철의 친우, 황제였다. “지금, 당신이 관리자가 되면 이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거요.” 에크하르트는 다음으로 베르텔기아를 비췄다. 그녀는 아델화이트와 함께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또한 이 녀석도 살릴 수 있게 되겠지.” 그제야 김성철은 에크하르트가 자신에게 거래를 제의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에크하르트는 김성철이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의 목숨을 담보로 잘못된 세상을 위해 희생하라고 말하고 있다. “…….” 뿌리치기 어려운 제안이다. 이미 아무것도 남지 않은 텅 비어버린 사내에게 몇 남지 않은 인연은 목숨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법이니.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과거였다면 덜컥 에크하르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는 수많은 사건과 인연을 거치면서 변화했다. 현재의 그는 소환 궁전에서 동료 소환자가 무차별한 폭력에 죽어가던 것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때의 김성철과 같지 않다. 또한 마계에서 브레가스 남매가 비참한 운명으로 빠져드는 것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던 김성철과도 같지 않다. 그는 더 이상 목적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문득 베르텔기아의 목소리가 그의 의식 깊숙한 곳에서 들려왔다. [ 당신에겐 숨겨진 힘이 있잖아요! 당신도 모르는. ] 이제는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그 숨겨진 힘의 정체가. 스스로 부정하고 가능성을 닫아놓았던 내면의 힘의 성질을 말이다. 김성철이 감은 눈을 떴다. 그는 똑바로 뜬 눈으로 희미한 관리자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절하겠소.” “세상이 멸망할 거요.” 에크하르트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 멸망에 맞서 싸울 것이오.” 그 말을 들은 에크하르트는 두 눈을 감았다. 희미한 그의 형체는 더욱 흐려져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완전히 사라지기 전 에크하르트는 뒤돌아서며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아직, 당신이 처한 위기를 모르오. 내 딸을 붙여 주리다.” 55호가 김성철의 뒤를 따랐다. “당장 오늘, 당신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 것이오.” 에크하르트는 그 말을 남기고 완전히 소멸했다. 무한 속에서 간신히 갈피를 잡아 유지하던 인격이 소멸되는 순간이다. 아마도 그와 다시 이야기를 하려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쿵! 쿵! 멀리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이쪽으로 오시죠.” 55호가 말했다. 그녀는 김성철 앞에 바깥으로 나가는 차원문을 열었다. 차원문을 열며 그녀는 김성철을 지나가는 목소리로 가볍게 빈정거렸다. “곧, 당신은 지옥을 보게 될 거예요.” “지옥?” 김성철이 차원문 앞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55호는 가볍게 몸을 흔들며 대답했다. “네, 당신이 만들어 낸 지옥을요.” “말은 똑바로 해야지.” 김성철이 55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희들이 만든 지옥이겠지. 난 단지 너희들이 만든 지옥 위를 걷는 행인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롭게 생각하세요.” 김성철은 차원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55호는 그의 뒤를 따랐다. 차원문을 통과하자 거대한 함성이 그를 뒤덮었다. 다시 돌아온 것이다. 라그란제의 투기장으로. 수많은 군중과 왕들이 그를 반겼다. “어떻게 됐나?”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놀랍게도 그토록 무뚝뚝하던 샤말 라지푸트였다. “9,999명의 생존자는 이미 정했나?” 김성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친구.’ 알 것 같았다. 샤말 라지푸트의 속내를. 샤말 라지푸트는 계속해서 말했다. “79명. 79명만 넣어주게. 염치없는 부탁인 걸 알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이쪽도 자네를 위해 몇 가지 기여를 했어. 무엇보다 철저히 중립을 지켰지. 야만인 전선에선 전폭적인 지원을 하기도 했고.” 그는 모든 걸 알고 있는듯했다. 재앙해결의 결과와 그 보상에 대해서. 김성철이 아무 말 하지 않자 샤말 라지푸트는 눈동자를 굴리며 다시 말했다. “내키지 않으면 22명. 아니 21명으로 하지. 21명 정도는 괜찮지 않나?” 무뚝뚝한 겉모습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다. 김성철, 샤말 라지푸트, 윌리엄 퀸튼 말버러. 소환 궁전 동기인 3명의 소환자 중 가장 많이 변한 것은 바로 이 암살교단의 교주라는 것을. 어느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을 것 같던 냉연한 달과 같던 사내는 이계의 상층부에서 천천히 부패했고 변해갔다. 김성철은 샤말 라지푸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를 지나쳐 테이블에 앉은 또 다른 친구를 향해 걸어갔다. 황제. 그는 축제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홀로 방치되어 고독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황제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숨을 헐떡이며 바닥을 바라보던 황제가 김성철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전부 해결됐나?” 황제가 숨 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김성철은 황제를 내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부터 해결해야지.”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며 황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함께 말이야.” 그런데 다음 순간, 황제의 눈동자가 심상치 않을 정도로 크게 흔들렸다. 심상치 않은 징조다. 황제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을 알콜중독자의 그것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괜찮나? 윌리엄?” 김성철이 황제를 향해 걱정스레 물었다. “괘… 괜찮아. 이 정도는 이겨낼 수…!” 황제가 갑자기 몸을 새우처럼 구부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주변에서 짙은 녹색을 방불케 하는 우울한 그림자가 퍼져나갔다. 그럼에도 황제는 기어코 손을 뻗어 김성철의 손을 마주 잡으려했다. 그러나 황제의 손은 김성철의 손에 이르기 직전 푹 꺾였고 떨구어졌다. 김성철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라그란제 지하 깊숙한 곳에 숨겨진 고대신의 심장이. “이제 시작되려는 모양이네요.” 김성철의 뒤에 자리 잡은 55호가 싸늘하게 말했다. 김성철은 그제야 황제에게 자신이 생각한 이상으로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 내가, 신에게 허여받은 것은 무한한 생명. ] 황제의 머릿속에서 불경한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황제의 성대를 통해 김성철 앞에 더욱 불길한 형태로 재현됐다. 다음 순간, 김성철은 볼 수 있었다. 황제의 얼굴이 짙은 녹색으로 변하며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것을. ‘이것은?!’ 틀림없다. 그것은 고대신의 종복, 혼의 망해다. 황제가 혼의 망해로 변해가고 있었다. 다음 순간 심장소리는 더욱 크게 변하며 경기장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군중들과 왕은 갑작스런 황제의 변화에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모든 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혼의 망해로 변한 황제가 웃었다. 고대의 심연에서 기어나오는 듯한 끈적거리고 음습한 소름끼치는 웃음소리였다. 그 중심에 선 김성철의 초월감각이 반응했다. 절망적인 결과가 김성철의 눈앞에 나타났다. [ 필멸자 윌리엄 퀸튼 말버러 ] [ 그리고 그것을 집어삼킨 고대신, 죽지 않는 자 알레옥고스 ]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심장 소리 속에서 황제의 몸은 더욱 커지며 경기장 전체를 뒤덮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다. 김성철의 뒤, 우두커니 하늘 위에 떠 있는 재앙의 서에서도 불길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닫혀 있던 책이 활짝 펼쳐졌고 그 사이로 나무로 만든 목각인형의 거대한 손이 나타났다. 그 손은 땅을 움켜잡고 그 너머의 몸통을 책으로부터 끌어냈다. 딱. 딱. 딱. 익숙한 소리와 함께 뒤틀린 인형의 끔찍한 두상이 나타났다. [ 베스티아레. 베스티아레의 냄새가 난다! ] 에크하르트의 창조물. 과거, 필멸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던 투기장의 맨땅에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나타났다. 부정한 존재들을 축복하기라도 하는양 라그란제 곳곳에 녹색의 촉수가 솟아 나왔고 짙은 녹색의 용액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 111. 붕락 (2) 곳곳에서 솟은 눈먼 촉수들이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다. “으악!” “아아아악!”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촉수의 채찍질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재앙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목표 고정. 적에 대한 공격을 시작합니다.” “에크하르트 1호의 명령에 따라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말살합니다.” 소녀의 목소리를 지닌 책들이 주위를 돌며 마법과 책장 안에 숨긴 칼날로 눈에 보이는 모든 이들을 살육하기 시작했다. 축제의 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김성철의 초월감각이 말해주었다.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죽어간다는 사실을. “모두 대피하시오!” 앞엔 고대신, 뒤엔 관리자.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서도 김성철은 먼저 다른 이들의 안위를 걱정했다. 특히 그는 멀리 아델화이트와 함께 있는 베르텔기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가갈 수 없다. 김성철이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수많은 촉수가 그의 발밑에서 솟아올라 앞길을 막았다. “끄아아악!” 가장 먼저 도망가려던 드미트리 메디오프가 마치 장창에 꿰뚫린 것처럼 촉수들에 관통당해 그대로 절명했다. 후두둑. 피와 오줌이 뒤섞여 바닥을 적셨다. [ 어디로 가느냐? 신의 도구. ] 황제를 집어삼킨 비열한 존재가 소리 높여 웃으며 우뚝 일어섰다. 점점 증식되기 시작한 그것은 거대한 흘러내리는 거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혼의 망해를 그대로 확대한 모양. 하지만 그 괴물에겐 다른 것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쿠구궁! 지축이 흔들렸고 각종 복도와 시설로 가득 찬 연약한 투기장의 지반 일부가 무너졌다. “해서데인!” 땅이 무너지며 엘프 왕자가 아래로 떨어졌다. 마커레이드가 다급히 손을 뻗어보지만 해서데인은 채 그의 손을 잡지 못한 채 무저갱과 같은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으아아아아아-!” “해서데인!” 다음 순간, 피와 육편이 튀어 오르며 거대한 무언가가 구멍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두근. 고대신의 심장이다. 녹색의 거인은 팔을 뻗어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김성철은 고대신이 자신의 심장을 박아넣으려고 하는 걸 간파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막아야 한다. 김성철은 출렁거리는 촉수 너머 자리 잡은 베르텔기아와 아델화이트를 바라보았다. 아델화이트가 베르텔기아를 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성철은 안도했다. 아델화이트가 있다면 베르텔기아는 안심이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심장을 움켜쥔 고대신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김성철이 채 고대신에 닿기도 전에 그의 뒤에서 바람이 일며 무언가가 그의 팔을 휘감았다. 실이다. [ 베스티아레. 베스티아레. 어디로 가느냐. ] 김성철의 뒤엔 얼굴이 거꾸로 박힌 거대한 목각인형이 턱을 딱딱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의 뒤로 수많은 베르텔기아 타입이 무리 지어 날고 있었다. 김성철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증식하고 있다. 베르텔기아 타입이. 저 거대 목각인형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거대한 검은 수정으로부터 마치 기계처럼 찍어낸 것처럼 하나씩 하나씩 사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창조술사의 권능, 복사의 힘이다. 새롭게 만들어진 베르텔기아 타입은 무리를 지어 날다가 아래의 인간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폐하!” 아르카나이트와 그의 부하, 강가스 아론이 베르텔기아 타입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미 그의 부하들은 베르텔기아 타입의 칼날에 무참하게 죽은 지 오래. 고대왕국의 검사 둘만이 남아 열 권이 넘는 베르텔기아 타입에서 포위당해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가스 아론. 왜 도망가지 않지?” 아르카나이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폐하?” 강가스 아론이 베르텔기아 타입의 칼날을 막아내며 말했다. “내가 너에 대해 모른다고 생각했나?” 아르카나이트는 강가스 아론이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었다. 다만, 적당한 후임이 없기에 그를 그 자리에 박아넣은 것뿐. 완벽한 인간은 없다는 믿음을 지닌 그다운 인선이다. 강가스 아론은 그러나, 자신의 주군에게만은 진실 된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정중하게 아뢰었다. “제가 그다지 질이 좋은 인간은 아니지만, 왕실과 폐하에 대한 충의는 진짜입니다.” 그때 아르카나이트 뒤에 베르텔기아 타입 하나가 나타나 칼날로 그의 뒤를 노렸다. 강가스 아론은 몸을 던져 자신의 주군을 지켰다. 유언은 없었다. 칼날은 그의 심장을 그대로 관통했고 강가스 아론은 행동으로 그의 의지를 주군에게 전했다. 홀로 남은 왕은 고소를 머금으며 조여드는 책들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고 했어. 아버님이라면 마지막까지 의심하고 또 의심했겠지.” 책들이 그를 둘러쌌다. 그의 최후는 볼 수 없었다. 에크하르트 1호가 김성철을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김성철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에크하르트 1호에게 끌려다니다가 팔 가라즈를 뻗어 지면을 후려쳤다. 퍽! 팔 가라즈는 닻처럼 지면에 깊숙이 박히면서 투기장의 맨땅에 일 자의 긴 상흔 남기며 김성철에게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는 찰나의 틈을 주었다. 김성철의 두 다리가 익숙한 투기장의 땅에 닿았다. 김성철의 두 다리에 신적인 힘이 실렸다. 끌려가던 움직임이 멈췄다. 김성철은 자신의 팔을 묶은 실을 오히려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거대한 목각인형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 에크하르트의 은밀한 비밀! ] 목각인형을 횡설수설을 하며 김성철에게 끌려갔다. 김성철의 억센 팔에 신적인 힘이 흐르고 지나갔고 김성철은 그대로 자신의 팔을 묶은 실을 두 손으로 잡고 전력을 다해 끌었다. 쿵! 목각인형이 투기장의 바닥에 처박혔다. 어마어마한 충격과 함께 아직, 풋풋한 풀 내음이 남은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김성철은 파리 떼처럼 날아드는 베르텔기아 타입을 향해 글레어로 견제하며 실을 잡아 끊고 뒤를 돌아보았다. 김성철의 눈에 실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시간이 너무 끌렸다. 녹색 거인은 이미 심장을 자신의 가슴에 박아넣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원래의 자리를 찾자 흘러내리는 얼굴에 소름 끼치는 눈빛이 번득였다. [ 엔키아두스와 디르고는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그 멍청한 키레의 사제들보다 뛰어났다. ] 알레옥고스가 말했다. [ 내가 놈들에게 당해 그 시체가 백 갈래로 갈라진 채 하계에 떨어진 것은 이 순간을 위해서였지. ] 알레옥고스가 손을 털었다. 그러자 그의 몸에 흘러내리던 녹색의 점액질이 비처럼 떨어지며 아래를 덮쳤다. “아악!” 바위만 한 물방울은 마커레이드에게 직격으로 떨어졌다. 일격에 정신을 잃은 그녀를 향해 녹색의 점액질이 천천히 그녀를 삼키기 시작했다. ‘마커레이드.’ 아직 어린 시절, 빨간 머리의 말괄량이 공주가 순진무구하게 장난을 치던 모습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구할 수 없었다. 김성철은 감당하기 어려운 분노가 내면에서 불타오르는 걸 느끼며 자신 앞에 우뚝 선 알레옥고스를 올려다보았다. [ 과연 신의 도구. 훌륭한 눈빛이군. 내가 인정한 사내, 쿤키두가 고른 재목다워. ] 고대신은 김성철 뒤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는 거대한 목각인형을 노려보았다. [ 그에 반하면 저 연금술사는 너무나도 나약하고 못난 인간이지. ] 에크하르트 1호가 다시 일어섰다. 거꾸로 뒤집혔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가며 턱을 딱딱 부딪쳤다. [ 에크하르트는 자신의 아내를 스스로 목 졸라 죽였다! 그 딸도 죽이려고 했지만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렐름에 가둬 놓았다! 그것이 이 에크하르트의 은밀한 비밀! 가하하하하핫! ] 이미 목각인형은 폭주한 상태다. 상식도 이성도 저 괴물에겐 통용되지 않는다. 목각인형 뒤엔 드워프의 왕이 도끼를 휘두르며 베르텔기아 타입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목각인형의 목이 180도 뒤로 돌아가 분전을 펼치는 다인크래프트를 눈에 담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내질렀다. 하늘을 떠돌며 무수한 사람을 학살하던 베르텔기아 타입이 일제히 드워프 왕을 향해 공격을 가했다. 드워프 왕은 온몸이 칼에 꿰뚫린 채 절명했다. 마지막 순간, 그는 김성철 쪽을 향해 손을 뻗으며 뭐라고 말하려고 했다. “내… 왕국… 팔 가라즈를….”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김성철에 닿지 않았다. 또 하나의 왕이 죽었다. ‘다인크래프트.’ 김성철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슬퍼할 겨를은 없다. 진정한 살육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 고대신과 에크하르트의 피조물은 쉬지 않고 투기장의 군중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기묘한 일이었다. 살육을 보기 위해 만든 좌석이 살육의 장이 되는 것은. 눈 한 번 깜빡하는 사이에도 셀 수 없는 사람이 죽어갔다. 도처에 비명이 일었고 단말마의 비명이 발작적으로 울려 퍼졌다. 투기장은 그 자체로 거대한 도살장이 되었다. 김성철은 가슴 한구석이 미어지는 것을 느끼며 학살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가만히 아버님의 뒤를 이었으면 됐을 것을. 전부 당신이 선택한 결과예요.” 김성철의 뒤에서 55호가 빈정거렸다. 그때 뒤에서 거대한 드래곤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카네스의 것이다. 김성철은 자신을 묶은 실이 이제는 카네스를 묶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카네스!” 김성철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카네스는 발버둥을 치며 목각인형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녀가 발버둥을 칠수록 그녀를 묶은 실은 뒤엉키고 뒤엉켜 그녀를 더욱 깊은 속박으로 몰아넣었다. 김성철이 팔 가라즈를 들고 목각인형을 향해 뛰어갔다. 그러나 그 앞에 녹색 액체가 간헐천처럼 분출되며 수십 개의 촉수가 나와 그의 앞을 막았다. [ 어딜 가나? 신의 도구. ] 알레옥고스, 일찍이 고대신이라 불리던 자가 앞을 막았다. 알레옥고스는 눈을 번득이며 김성철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흘러내리는 녹색 액체로 이루어진 거인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대량의 액체를 아래에 흩뿌렸고 그 액체는 스스로 꿈틀거리며 인간의 형체로 바뀌며 좀비처럼 정처 없이 걸었다. 순식간에 알레옥고스 아래 수십 마리의 혼의 망해가 나타났다. 그 괴인들 앞에서 알레옥고스가 소리 높여 웃었다. [ 신인 내가 아직 너에게 떠나라고 명하지 않았거늘. ] 같은 순간, 카네스는 목각인형에게 사로잡힌 채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우드득. 뒤에서 목각인형이 드래곤의 목을 꺾는소리가 들려왔다. 구슬픈 비명이 뒤에서 울려 퍼졌다. 카네스도 죽었다. ‘카네스.’ 김성철의 심장이 꿈틀거렸다. 그의 눈동자에 감출 수 없는 분노가 번득였다. 김성철은 꿈의 세계에서 자신의 몸을 감싸던 검은 불길의 기운이 임박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의식적으로 그 힘을 거부했다. 자칫 잘못하면 혼돈신의 뜻대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라도 맞서 싸워야 한다. 다행히 베르텔기아는 아델화이트의 보호를 받아 안전하게 탈출한 것으로 보였다. 둘의 모습은 혼란 속에서 어느 순간 사라진 상태였으니. 최후의 보루만은 어떻게든 살아 남았다. 김성철은 마음을 추스르고 앞을 가로막은 녹색의 거인을 노려봤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상대방의 능력을 미리 알 수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움직이다가는 질서신에게 당한 패배를 재현할 뿐이다. 김성철이 숨을 고르며 다음 수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쿵. 지축이 흔들렸다. 에크하르트 1호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 베스티아레! 베스티아레의 냄새가 난다! ] 그 거대한 목각인형는 마치 냄새를 맡듯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좁은 경기장 내를 돌아다니다 이윽고 김성철과 알레옥고스 앞에 이른 것이다. [ 너희들에게서 베스티아레의 냄새가 난다고! ] 에크하르트 1호는 코를 킁킁거리며 김성철과 고대신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가 채 접근하기도 전에 이미 경기장에 여기저기 창궐한 촉수들이 일제히 목각인형을 공격했다. 하지만 촉수가 채 닿기도 전, 베르텔기아 타입들이 칼날과 마법으로 촉수를 베어냈다. 촉수와 책의 싸움이 치열하게 이어지는 가운데 에크하르트 1호는 김성철 직전에 이르렀다. 거대한 목각인형이 드리운 그림자가 김성철과 그가 서 있는 땅을 검게 드리웠다. [ 베스티아레! 베스티아레의 냄새가 난다고! ] 에크하르트 1호는 김성철과 고대신 앞에서 포효했다. 그 괴물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상황은 한 줄기 희망도 없던 김성철에겐 호재다. ‘왜 저 녀석이 베스티아레 냄새가 난다고 하는 거지?’ 그때 촉수 두 개가 김성철 뒤에서 뻗어 나오며 그를 공격했다. 팔 가라즈를 휘두를 것도 없이 승천자의 손을 낀 왼손으로 촉수들을 후려쳐 잠재우며 그는 베스티아레의 최후에 대해 생각했다. 베스티아레는 재앙의 무기 중 하나인 움 브루크가 꽂힌 채 죽었다. 움 브루크는 원래 고대신의 종복이 들던 무기. 종언의 종소리를 들은 자는 감당할 수 없는 심연으로 끌려들어간다고 한다. 바로, 고대신이 만들어놓은 심연으로. ‘그 때문인가.’ 김성철의 눈이 번득였다. 승천자의 손을 낀 왼손에 움 브루크가 나타났다. [ 킁킁! 베스티아레! 베스티아레의 냄새다! ] 김성철은 움 브루크를 고대신을 향해 집어 던졌다. 움 브루크의 창날은 흘러내리는 점액질 아래로 파고 들어가 사라졌다. [ 내가 만든 무기를 내게 사용하다니. 어리석구나. 움 브루크의 힘은 내게 통용되지 않는다! ] 알레옥고스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거대한 목각인형이 녹색 거인에게 달려든 것이다. 에크하르트 1호는 알레옥고스의 양팔을 붙잡고 미친 듯이 흔들어댔다. [ 베스티아레! 베스티아레를 내놓아라! ] 목각인형이 녹색 거인을 흔들때마다 무수한 초록 점액이 떨어져 혼의 망해를 만들어냈다. 곧 에크하르트 1호의 뒤에서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촉수가 나타났다. 그에 반발해 수많은 베르텔기아 타입이 나타나 촉수에 맞섰다. 책과 촉수, 거인과 거인의 싸움이 시작됐다. 천금 같은 기회. 김성철은 투기장을 떠나 관중석으로 뛰어들어갔다. 이미 아수라장이 된 관중석엔 여전히 많은 생존자가 촉수와 책에 맞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왕과 제후들은 지켜내지 못했지만. 이들만은 반드시 살려내리라. 필사의 의지가 김성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빛을 발했다. “모두 비키시오!” 김성철의 몸에 마법진의 문양이 나타났다. 이윽고 한 줄기 빛이 촉수와 책으로 가득 찬 관중석을 꿰뚫었다. 관중석 한가운데에 거대한 구멍이 났다. “이곳으로 탈출하시오!” 김성철이 쏘아 올린 원시의 빛은 투기장이 내려다보이는 상위구역 주민의 눈에도 확실히 보였다. 흔들의자에 앉은 쿠르트 아삼은 아래서 번쩍인 일직선의 빛을 보며 식은 찻잔을 기울였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그의 뒤엔 무언가가 꾸물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형상을 지닌 괴인. 혼의 망해다. 쿠르트 아삼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 111. 붕락 (3) 두 거인의 힘겨루기는 일진일퇴의 향상으로 흘러갔다. 달라붙는 에크하르트, 이를 뿌리치는 알레옥고스. 거의 대등한 힘과 하수인을 지닌 불멸자들간의 싸움은 낮과 밤의 대립처럼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덕분에 김성철은 투기장에 구멍을 뚫고 많은 사람을 피신시킬 수 있었다. 시의적절하게 구원의 손길도 날아왔다. “부수는 자! 지원군을 끌고 왔다!” 마라키아가 도시 외곽에 머물던 함대와 군대를 끌고 왔다. 기민한 대처. 아마도 황제가 변하자마자 행동을 취했으리라. 김성철은 지금만큼은 마라키아의 능력과 판단력에 감사하고 있었다. “마라키아! 최대한 많은 사람을 실어 이 구역을 즉시 떠나라!” “알겠다!” 마라키아가 검은 날개를 퍼득거리며 말했다. 그때만큼은 김성철의 눈에 비친 마라키아는 처음 만났던 멸세의 왕 다운 아름답고 늠름한 면모를 풍기고 있었다. 마라키아는 함대를 이끌고 사람들을 실어나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을 두고 악의 무리가 가만히 좌시할 리 만무하다. 하늘에선 한 무리의 베르텔기아 타입이 함대를 공격했고 땅에서는 촉수와 혼의 망해가 산 자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이 끔찍한 환란 속에서 더 이상 계파나 종파, 국가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곳곳에서 아신화를 시전한 종말교도들이 자신의 몸을 불살라 혼의 망해에 맞섰고 부유군도의 함대와 제국의 함대가 일심동체로 움직이며 베르텔기아 타입을 요격했다. 김성철은 영혼석 가득 체인 라이트닝을 영창하며 날뛰는 번개를 베르텔기아 타입 무리를 향해 뿌렸다. 수천 갈래로 갈라지는 번개가 책들을 불태우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재로 변한 책의 잔해가 우수수 떨어지는 지면에선 촉수와 아신화를 사용한 종말교단의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살아남은 병사들의 복장은 제각기 달랐지만, 그들은 어깨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물밀 듯이 몰려오는 혼의 망해를 막아섰다. 인간들의 필사의 분전으로 많은 사람이 공선과 기동요새에 오를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지?” 마라키아가 숨을 헐떡이며 김성철에게 말을 걸어왔다. 딱히 생각나는 곳은 없다. 이미 모든 왕은 죽어버렸으니까. 그때 마라키아 옆에서 함께 날던 조인이 말했다. “부유군도로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부유군도?” “우리를 반기지 않는 무리들이 있겠지만 여기보단 안전할 겁니다. 그곳은 신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 심지어 절멸의 저주조차 미치지 않는 낙원이니까요.” “낙원이라.” 김성철은 음미하듯 그 단어를 되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든 여기보다 낫겠지.”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마라키아에게 모든 생존자와 군대를 이끌고 부유군도로 갈 것을 명했다. “너는 어떻게 할 셈인가?” 마라키아가 투기장으로 돌아가려는 김성철을 뒤에서 불렀다. 김성철은 투기장 너머 우뚝 서서 힘겨루기를 하는 두 거인을 노려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저것들을 처리하러 간다.” 저 괴물들은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에크하르트는 살인기계인 베르텔기아 타입을 무한하게 찍어내고 있고 알레옥고스는 그 심장의 힘으로 현실세계와 초월세계의 벽을 허물고 있다. 이대로 방치하면 이 세상은 감당하기 어려운 재앙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향해 검 한 자루를 내주었다. 인격을 지닌 검, 크럼부이다. “이 녀석은 좋은 검이다.” “어이, 날 버리는 건가?” 크럼부이가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이미 정해진 길이다. 김성철은 크럼부이의 손잡이를 부드럽게 잡으며 그 검을 마라키아에게 넘겨주었다. “혹,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네가 산 자들을 이끌어라. 날 대신할 한 명의 왕으로. 이건 그 증거로 넘겨주겠다.” “왕의 증표라.” 크럼부이는 쓸쓸히 웃었다. 김성철은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49호. 보고 있나?” 김성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공 너머에서 책 한 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낯선 책이 나타나자 마라키아와 그의 부하가 흠칫 놀랐다. 다른 살인기계와 한 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49호는 한발 앞서 그들을 향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당신에게 이상이 생길 경우, 이 분, 나하크의 왕을 당신의 후계자로 인정하겠습니다.” 김성철은 크럼부이를 마라키아에게 내밀었다. 마라키아가 다루기엔 조금은 큰 검. 마라키아는 두 손으로 김성철의 검을 넘겨받았다. “죽지 마라. 네놈에겐 갚을 빚이 많으니까.” 마라키아가 말했다. 김성철은 피식 웃으며 뒤돌아섰다. “나는 네놈과 네놈의 책이 내게 가한 모욕을 빠짐없이 내 비상한 두뇌에 기억해두고 있다고!” 마라키아의 볼멘소리를 들으며 김성철은 앞으로 달려나갔다. 마라키아는 두 손으로 크럼부이를 받아든 채 거인들을 향해 나아가는 김성철의 뒷모습을 크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이. 새 친구. 울지 말고 빨리 우리 할 일을 하자고!” 크럼부이가 특유의 낙천적인 어조로 말했다. 마라키아는 크럼부이를 두 손으로 쥔 채 고개를 끄덕이고 날개를 펼쳤다. “가자, 우리의 할 일을 하러.” 검은 날개를 지닌 멸세의 왕이 그를 기다리는 함대를 향해 돌아갔다. 그는 힘겹게 크럼부이를 들어 올리며 병사에게 명했다. “전군 후퇴! 여기서 물러난다!” 마라키아의 명령 하에 살아남은 인류들은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베르텔기아 타입과 혼의 망해가 계속해서 공세를 가했지만, 인류는 굳건히 버텨냈다. 한편, 투기장에서 벌어지는 알레옥고스와 에크하르트의 싸움은 소강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고대신을 칭하는 자의 힘과 관리자의 도구의 힘이 용호상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연찮은 기회에 균형은 깨졌다. 툭. 그것은 고대신의 몸에서 떨어진 한 방울의 점액으로부터 시작했다. 고대신의 점액은 지면에 떨어져 혼의 망해로 변한다. 억겁에 가까운 시간 동안 고대신이 삼킨 제물들이다. 그런데 그가 지닌 제물 중엔 특별한 제물도 있었다. 그것은 녹아내리는 끔찍한 몰골을 지니고 있음에도 몸의 형태만으로도 아름다움의 면모를 갖춘 존재였다. [ 크르릉! ] 에크하르트 1호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두 눈엔 기분 나쁜 빛이 번득였다. 그 불경한 목각인형은 온 힘을 다해 고대신을 밀치고는 쪼그려 앉아 걷기 시작한 조그만한 혼의 망해에 관심을 보였다. 목각인형의 턱이 딱딱거리더니 입가에 끔찍할 정도로 혐오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 찾았다! 베스티아레. ] 김성철이 폐허가 된 투기장에 도착한 건 그즈음이었다. 김성철은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혐오스런 광경을 보게 되었다. 거대한 목각인형의 고간에서 음경을 방불케 하는 돌과 검은 파편으로 이루어진 기둥이 커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자그마한 혼의 망해를 보고. [ 베스티아레! 오오 나의 사랑! ] 발기한 목각인형은 성욕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번득거리며 원숭이처럼 손을 뻗어 베스티아레였던 존재를 움켜잡았다. [ 잡았다! ] 다음 순간, 에크하르트 1호의 거대한 신형이 위태로울 정도로 비틀거렸다. 거대한 녹슨 칼날이 에크하르트 1호의 몸통의, 거대한 검은 수정을 꿰뚫은 것이다. 알레옥고스의 짓이다. 그는 에크하르트 1호가 빈틈을 보이자 기회를 잡고 뒤에서 그의 거체에 걸맞는 거대한 무기로 단번에 에크하르트 1호를 응징했다. 베스티아레였던 존재를 움켜잡은 채 에크하르트 1호는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제멋대로 움직였고 턱은 빠져나간 채 대롱거렸다. [ 왜? 왜 모두 나의 사랑을 막는 거야? ] 베스티아레를 움켜잡은 손에 힘이 풀렸다. 에크하르트 1호의 눈에 서린 광기의 빛이 사라졌고 흉측하게 발기한 음경을 방불케 하던 구조물도 수그러들었다. [ 내가 이토록 사랑… 했는데…. ] 에크하르트는 검이 박힌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최후의 발작이다. 바닥에 떨어진 한때 베스티아레였던 존재는 몸을 일으켜 자신을 바라보는 에크하르트 1호의 앞을 느릿한 걸음으로 지나갔다.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 “…….” 에크하르트 1호기는 끝났다. 그 덕에 함대를 위협하던 베르텔기아 타입은 일제히 기능을 멈추고 정지했다.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책들을 향해 촉수들이 달려들어 마구잡이로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또 다른 살육이 시작되는 가운데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쥔 채 알레옥고스 앞에 섰다. [ 호오? 돌아왔는가? 신의 도구여. 기특하구나. ] 알레옥고스가 말했다. 김성철은 망치를 어깨에 짊어진 채 고대신을 올려다보았다. “널 죽이겠다.” 김성철은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고대신은 김성철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다는 헛웃음이었다. [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 고대신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관중석 일부가 그의 정강이에 부딪혀 무너져내렸다. [ 내 진면목을 보고도 다시 돌아온 너의 용기에 대한 포상으로 몇 가지 재밌는 사실을 알려주지. ] 고대신이 손을 들어 올렸다. 다음 순간 김성철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떠올랐다. [고대신 알레옥고스의 상태창 - 능력치] 힘 999+ 민첩 999+ 체력 999+ 마력 999+ 직관력 999+ 마법저항 999+ 의지 999+ 매력 - 운 - 이것은 이름 그대로 알레옥고스의 능력치 창이다. 알레옥고스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낮게 깔리는 가운데 알레옥고스는 점액질로 뒤덮인 팔을 가볍게 휘둘렀다. 별 의미없는 손짓으로 보였지만, 김성철의 초월감각은 그에게 말해줬다. 지금 자신과 알레옥고스 사이의 공간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알레옥고스의 능력치 창에 변화가 일어났다. [고대신 알레옥고스의 상태창 - 능력치] [제한항목 표시] 힘 2523 민첩 2232(-1643) 체력 5423 마력 3423 직관력 2934 마법저항 3235 의지 1323 매력 -(주신) 운 -(주신) 중대한 변화가 9개의 능력을 표시한 상태창에 일어났다. 999 이상은 표시할 수 없었던, 그 너머의 수치가 나타났다. [ 자, 필멸자 너의 상태창을 확인해봐라. 지금까지 네가 볼 수 없었던 너의 정확한 힘을 볼 수 있을 테니까. ] 알레옥고스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성철은 시키는 대로 했다. 고대신의 말에 따르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조차 알 수 없었던 신적인 힘이 어느 정도인지. 곧 김성철 앞에 자신의 능력치가 표시됐다. [능력치] [제한항목 표시] 힘 2842(신의 도구) 민첩 966 체력 915 마력 732 직관력 738 마법저항 742 의지 783 매력 28(신의 도구) 운 28(신의 도구) 드디어 나타났다. 가려져 있던 김성철의 정확한 힘 수치가. 김성철은 자신의 구체적인 힘 수치를 보고 뒤통수에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크고 작은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고 알 수 없었던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궁극의 자산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은 김성철의 가라앉은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2,800대라고? 내 힘이?’ 묵직한 충격 속에서 알레옥고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가 지닌 힘은 아신 중에서도 필적할 이가 없을 정도로 강하지만 그뿐이다. 필멸자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는 한, 너는 신인 나를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다. ] 고대신이 김성철을 향해 팔을 재차 휘둘렀다. 무수한 녹색의 점액질이 김성철을 향해 떨어졌다. 닿는 것만으로 생명력과 영혼을 갈취당하는 부정한 점액이다. 김성철은 윈드 쉴드를 가동해 떨어지는 점액의 비에 맞서며 고대신을 향해 뛰어올랐다. 하지만 김성철이 고대신을 향해 접근하려는 찰나, 난데없이 김성철과 고대신 사이 혼의 망해들이 땅밑에서 돌연 솟아나와 앞을 막았다. 팔 가라즈가 가로막는 혼의 망해들을 후려쳤다. 무수한 혼의 망해가 바닥에 다시 처박혔지만 사라진 만큼 새로운 녀석이 잇따라 나타났다. 끝이 없다. 게다가 혼의 망해를 상대하는 사이 고대신은 녹색의 점액질을 뿌리고 있다. [ 넌 날 이길 수 없다. 천천히 절망의 늪 속에서 익사하며 파멸을 준비하라. ] 고대신은 질서신과는 또 달랐다. 질서신의 공격이 저항할 수 없는 준엄한 심판과 같았다면 고대신의 공격은 그의 말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늪과 같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결국 가라앉고 마는 비극의 소용돌이. 거기다 고대신은 그 악명만큼이나 고약한 형태로 김성철을 괴롭히려 하고 있었다. “으으으….” 혼의 망해 중 하나가 갑자기 신음 소리를 냈다. 얼굴과 전신은 이미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녹색의 점액으로 변해 알아 볼 수 없었지만, 김성철은 실루엣과 분위기로 그 존재의 예전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마커레이드?” 그렇다. 조금 전까지 살아서 미래를 이야기하던 동료이자 옛 제자가 지금은 끔찍한 몰골의 괴물이 되어 김성철 앞에 섰다. 김성철을 놀라게 한 것은 마커레이드 뿐만이 아니었다. “끄… 끄으으으….” 또 다른 혼의 망해가 앞으로 나섰다. 땅딸막하지만 탄탄한 체구, 길게 자란 수염과 뿔모양의 투구를 쓴 그 사내는 한때 다인크래프트라 불렸던 존재였다. 뒤이어 아르카나이트, 해서데인 등 세계의회의 주요 구성원이 흘러내리는 괴물의 형태로 나타나 김성철 앞에 나란히 섰다. 단, 한 명 황제를 제외하고. [ 어떤가? 영생을 얻은 옛 동료를 보는 소감은? ] 고대신이 조롱했다. 그의 의도는 명백했다. 그는 김성철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박살 내려고 했다. 실제로 김성철은 전례 없는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신의 힘을 얻은 이래에 이토록 무참하게 정신의 밑바닥까지 유린당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죄책감과 무력감, 절망이 뒤섞여 머릿속을 엉망으로 헤집어놓았다. 그 와중에도 고대신의 하수인들의 공격은 계속됐다. 김성철은 전력을 다해 끝없이 쏟아지는 혼의 망해와 점액의 비에 맞섰다. 아까와 달리 온몸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죽자 한계도 빨리 찾아온 것이다. 치열하게 싸우던 그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쥐고 있던 팔 가라즈도 축 늘어져 그 머리가 땅에 닿았다. 고대신의 계획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고대신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에크하르트 1호를 처치한 거대한 검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가 검을 쥐는 순간 그는 보았다. “…….” 김성철의 내면에서 섬뜩한 무언가가 번득이는 것을. 순간 고대신의 심장의 고동이 멈췄다. [ 음? 이 감각은…? ] 심장을 멈추게 한 것은 파멸의 기운이다. 단 한 번의 울림만으로 초월세계 전역을 뒤흔들던, 김성철에 내재된 신의 속성. 즉, 순수한 파괴의 권능. 신이 아닌 존재 중 파멸의 검은 거인만이 그러한 힘을 지닐 수 있다. 증오와 절망, 그리고 분노. 익숙하다 못해 진저리 날 정도의 감정을 먹어치우며 내면의 검은 거인은 눈을 떴다. 한때 김성철은 그 힘을 두려워했고 필사적으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했고 철저히 외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이토록 강한 힘이 있는데 어찌하여 저런 녀석에게 당해야 하지?’ 지극히 단순한 물음에서 시작된 회의는 자신의 숨겨진 힘을 둘러싼 김성철의 인식을 뒤바꿔놓기 시작했다. ======================================= 111. 붕락 (4) 죽어간 동료들이 추악한 모습으로 변해 그를 지켜보고 있다. 김성철은 변해버린 동료들을 보며 더 이상 자신의 숨겨진 힘을 외면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대신, 경계심을 가지고 정확히 힘의 실체를 보려고 애를 쓰리라 다짐했다. 검은 거인의 힘을 쓰는 건 처음이 아니다. 꿈의 세계 속에서 베르텔기아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줬을 때 그는 어떻게 했던가? 당시의 감각을 되새기며 김성철은 오랫동안 외면했던 내면의 힘을 끌어냈다. 이윽고 그의 오른손에 검은 불꽃 하나가 피어올랐다. 성냥불처럼 미약한 작은 불. 그러나 그 불꽃은 곧 손 전체를 덮을 정도로 커졌고 그가 쥐고 있는 하늘의 파편을 벼려 만든 망치에 옮겨 붙었다. 그걸 본 고대신이 경악하며 소리 질렀다. [ 오호라! 그 힘을 쓰려고 하는 건가! 좋다! 파멸을 시작하자! 이 잘못된 세상에 종언을 고하는 것이다! ] 환희에 찬 목소리. 그러나 그의 환희는 곧 수그러들었다. 왜냐하면, 김성철의 손과 망치에 붙은 검은 거인의 불길은 더 이상 확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인의 불꽃은 김성철의 통제하에 있었다. 아직 낯설고 두려운 신의 힘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의지에 복종해 팔에 머무르는 걸 느끼며 김성철은 고개를 들었다. “…신 놀음은 재밌었나?” 흘러내리는 고대신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 아니, 어떻게 이런! ] 옛 동료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김성철은 일말의 주저없이 팔 가라즈를 휘둘렀다. 그냥 팔 가라즈가 아니다. 신의 속성, 그중 순수한 파괴를 상징하는 검은 거인의 힘이 서린 불꽃으로 타오르는 팔 가라즈다. 그 일격은 옛 동료를 단 한 번에 이 세상에 지워버렸다. 그에 반발하듯 수십 마리에 달하는 혼의 망해가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땅에서 솟아 나오듯 속속 나타났지만, 아까와는 사정이 다르다. 죽이는 속도가 증원되는 속도보다 빠르다. 김성철로선 가볍게 망치를 휘두르는 것만으로 수십 마리의 혼의 망해를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알레옥고스는 처음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그의 거대한 눈에 마법진이 나타났다. 전지의 눈.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영혼각인이 자신의 수하를 몰살하고 있는 필멸자의 능력치를 굽어봤다. 시뻘건 알레옥고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 ‘부수는 자’ 김성철의 능력치] [제한항목 표시] 힘 5352 민첩 966 체력 915 마력 732 직관력 738 마법저항 742 의지 783 매력 28(신의 도구) 운 28(신의 도구) 힘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아니, 그건 끝이 아니다. 검은 불길로 타오르는 김성철의 힘은 상태창을 떠올린 그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오르고 있었다. 알레옥고스는 경악 속에서 김성철의 능력치의 상승을 지켜보았다. 5초가 지났다. [ ‘부수는 자’ 김성철의 능력치] [제한항목 표시] 힘 9523 민첩 966 체력 915 마력 732 직관력 738 마법저항 742 의지 783 매력 28(신의 도구) 운 28(신의 도구) ‘말도 안 돼!’ 알레옥고스가 현실을 부정하며 상태창을 닿는 순간 김성철의 힘 수치는 만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알레옥고스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그는 가용 가능한 모든 전력을 동원해 김성철을 공격했다. 비처럼 쏟아내던 점액을 아예 직접적으로 집채만 한 물방울의 형태로 쏘아 보냈고 촉수와 혼의 망해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하수인을 동원했다. 그러나, 검은 거인의 힘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생명력과 혼을 착취하는 녹색 점액은 검은 불길이 닿자 녹아 없어졌고 혼의 망해 또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없어지기를 반복하기만 했다. 참다못한 알레옥고스는 거대한 검으로 김성철을 내려쳤다. 필사의 일격이었다. 성채의 탑에 필적하는 크기를 지닌 검과 인간의 손에 쥐어질 정도의 망치가 허공에서 격돌했다. 필사의 일격. 그러나 그의 검은 파멸의 불꽃을 머금은 망치에 닿자 모래성처럼 스러졌다. 거대한 검은 그대로 부러지며 검은 불길에 타들어갔다. 그야말로 가공할 파멸의 불길이다. 하지만 알레옥고스를 놀라게 한 것은 검을 태운 불꽃이 아니라 순수한 김성철의 힘이었다. 검과 망치가 부딪히는 순간 알레옥고스는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거대한 충격을 느꼈다. 온몸을 찌르르 울리는 여운, 통증, 격돌하는 순간 느꼈던 당혹감. 죽을 수도 있다는 원시적인 공포가 되살아났다. 얼마 만인가. 죽지 않는 자라는 칭호를 지닌 존재가 죽음의 공포를 떠올린 것은? “…….” 김성철이 한걸음 앞으로 걸어왔다. 알레옥고스는 황급히 부러진 검을 떨구고 투기장의 관중석을 따라 옆으로 돌았다. 실로 꼴사나운 광경이었다. 신을 칭하는 자가 일개 필멸자를 피해 게처럼 걷는 장면은.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김성철이 지닌 것은 진정한 신의 힘. 신을 참칭한 존재가 넘볼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이다. 김성철은 자신을 피해 달아나는 고대신을 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세상의 멸망을 노래하는 자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가?” 이에 고대신은 버럭 화를 내며 소리 질렀다. [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계획은 나의 죽음으로 완결된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죽음은 내가 원한 게 아니다. 신이 필멸자에게 죽다니. 얼마나 꼴사나운 몰골인가? ] 여전히 알레옥고스는 자신이 신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제는 그 썩어빠진 근성을 고쳐줄 때다. “네가 죽인 사람들의 죽음의 형태는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나?” 김성철은 천천히 고대신을 향해 걸어갔다. 단죄의 시간이다. 물론 심판은 김성철이 한다. 궁지에 몰린 고대신이 다급하게 말했다. [ 나를 죽이면 이 세상은 멸망한다. 느껴지는가? 세상의 균형이 무너지는 게.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해. ] 저벅. 김성철이 다가왔다. 고대신은 또다시 다급하게 말했다. [ 쿤키두가 너를 신의 도구로 삼은 것처럼 나 또한 나의 도구로 삼은 녀석이 있지. 아니, 도구라기보다는 공범에 가까운 녀석이지. ] 고대신은 쉬지 않고 말했다. 실제로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말하는 것 외엔 달리 없었다. 김성철은 아무 흥미도 느끼지 못했고 고대신에게 끝장을 가하기 위해 또 한 걸음 움직였다. 수백 마리에 달하는 혼의 망해가 일제히 발밑에서 솟아 김성철을 덮쳤다. 김성철이 팔 가라즈로 지면을 내려치자 찰나의 준동은 끝이 났다. 땅이 검게 물들었고 그 검은 땅 위엔 무수한 해골만이 화석처럼 남아 박혔다. 그 경이로운 무력시위를 본 알레옥고스의 전의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런 놈에게 죽을 수 없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알레옥고스는 주절주절 말했다. [ 크롬갈드. 그 놈은 지금까지 내가 본 놈 중에 가장 미치광이였지. 놈의 광기는 쿤키두의 그것마저 뛰어넘고 있다. 아니, 혼돈신을 칭하는 쿤키두 따위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뒤틀린 게 크롬갈드라는 인간의 본성이지. 놈이 목적을 달성하면 이 세상은 네 주관과 관계없이 파멸할 것이다. ] 저벅. 김성철은 고대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어느덧 게걸음을 치던 고대신의 발밑에 이르렀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다. 관중석에 뒷꿈치가 닿자 알레옥고스의 뇌리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자신이 죽인 인간들이 승리를 자축하던 장면이었다. 거기서 그는 김성철이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기억하고는 입을 열었다. [ 아델화이트! 아델화이트를 알고 있는 눈치더군? ] 고대신이 다시 말했다. 이번 발언은 효과가 있었다. 김성철이 발걸음을 멈췄다. “아델화이트가 뭐 어쨌다는 거지?” 김성철이 불꽃이 일렁거리는 망치를 어깨에 걸친 채 고대신을 올려다보았다. [ 아델화이트는 우리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다! ] “뭐라고?” 김성철이 흥미를 보였다. 라그란제의 지하에서 그녀의 정체를 어렴풋이 듣긴 했지만 여전히 아델화이트는 베일에 싸인 존재. 그런 그녀를 고대신이라 불린 자가 알고 있다는 건 충분히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다. 이어 알레옥고스가 말했다. [ 그녀는 신녀님이라 불렸지. 하지만 그녀는 신녀의 이름에 반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그게 뭔지 궁금하지 않나? ] 알레옥고스는 어느새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눈은 필사적으로 움직이며 위기를 타개할 수단을 찾고 있었다. 알레옥고스의 눈에 무언가 포착됐다. 에크하르트 1호, 죽은 목각인형의 몸통 부분에 박힌 거대한 검은 수정이다. ‘저것은 신의 흙? 아직 내 운이 다한 건 아닌 모양이야.’ 알레옥고스의 흘러내리는 얼굴의 안쪽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조심스럽게 김성철을 내려 보았다. 김성철은 그저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위험하다. 그가 신이 되기 전, 그는 재능 있는 젊은이라 알려져 있었지만, 그가 진정 잘하는 것은 타인의 마음을 읽고 비위를 맞춰주는 일이었다. 그 덕분에 그는 남들보다 위에 올라갈 수 있었다. 비열한 아첨꾼. 혹은 간신배. 그것이 알레옥고스라 불리던 사내의 민낯이다. 그는 김성철이 곧 공격해올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엔키아두스가 신에 반기를 들 때, 나머지 인간들이 가만있기만 했던 건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였지. 하계의 수많은 필멸자들이 엔키아두스와 그 동생인 디르고에게 복수하기 위해 거대한 연합세력을 구축했어. 신녀라 불리는 아델화이트는 그 중심에 선 인물이지.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믿는 자들을 배신했어. ] “아델화이트가 배신을?” 김성철이 물었다. 질서신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슬그머니 옆으로 걷기 시작했다. [ 그 여자는 저주받을 독기로 자신의 추종자를 모조리 죽여 버렸지. 낙원이 생긴 이래 그토록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은 적은 없었어. ] “아델화이트가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 신녀인 그는 낙원이라 불리던 이 세상을 보존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했거든. 설령 그것이 잘못된 방법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야. 그 이후, 그녀는 불멸자도 필멸자도 아닌 은둔자가 되어 영원히 자신의 숲에서 참회하는 삶을 살게 되었지. ] 주절주절 말하면서 알레옥고스는 어느덧 천천히 걸어 에크하르트 1호의 잔해에 이르렀다. ‘됐다!’ 알레옥고스는 두 눈을 번득이며 자신의 말을 마무리 지었다. [ 어떻게 보면 질서신보다 더한 악의 원흉이지. 질서신 엔키아두스가 초월세계를 장악하는 동안, 그 여자는 질서신에 대항하는 그 많은 필멸자를 철저히 학살했으니까. 그 이후 하계엔 가축과 다를 바 없는 머저리만 남게 되었어. ] 다음 순간, 김성철 앞에 수십 마리의 혼의 망해가 출몰했다. 김성철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은 듯 아주 자연스럽게 팔 가라즈를 휘둘러 그것을 흩어 버렸지만, 그의 반격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수백 개의 촉수가 전우좌후에서 나타나 사방에서 그를 노렸다. 물론 그 공격 또한 가볍게 제압됐지만, 그동안 알레옥고스는 천금 같은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몸을 숙여 에크하르트 1호의 몸통 부분에 있는 거대한 검은 결정을 움켜쥐었다. 두근! 두근! 고대신의 심장이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한 번 뛸 때마다 세상이 들썩이는 듯한 그 심장을 향해 고대신은 검은 결정을 마치 단검처럼 박아 넣었다. [ 끄으으으으…. ] 고대신의 붉게 번들거리는 두 눈에 검은 불길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신의 흙은 모든 것을 창조해내는 신의 물질. 염원하는 것만으로 모든 걸 만들어내며 그 한계는 결정의 크기에 비례한다. 에크하르트 1호가 1개 피조물임에도 알레옥고스와 맞절 수 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제 에크하르트 1호의 심장 역할을 하던 결정과 고대신의 심장이 융합됐다. 그 결과 고대신은 전례 없는 무시무시한 힘을 얻게 되었다. [ 느껴진다. 이 힘! ] 비굴하던 목소리에 교만함이 돌아왔다. [ 이 힘이라면, 진정한 신조차 능가할 수 있으리라! ] 김성철은 기뻐하는 고대신을 향해 달려가며 팔 가라즈를 휘둘렀다. 팔 가라즈가 닿기엔 턱없이 먼 거리였지만 망치에 서린 불꽃이 증폭되며 고대신의 몸통을 후려쳤다. 퍽! 즐거움으로 가득 찬 비명을 지르던 고대신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검은 불길을 뿜어내던 고대신의 붉은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 뭐? 뭐냐? ] 아프다. 그것도 죽음을 떠올릴 정도로. 김성철은 재차 망치를 휘둘렀다. 검은 불꽃이 거대한 망치의 모양으로 화하며 이번엔 고대신의 무릎을 강타했다. 퍽! 또 한 번의 일격. 고대신의 거체가 무너지며 꼴사납게 토끼 발로 뛰더가 이윽고 투기장의 관중석에 걸려 그대로 거꾸러졌다. 투기장의 절반이 고대신의 무게에 깔려 붕괴했다. 김성철은 쓰러진 고대신을 향해 달려가 계속해서 망치를 휘둘렀다. 퍽! 퍽! 퍽! 무자비하고 중단없는 일격.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신의 힘 앞에서 알레옥고스는 알게 되었다. 신을 참칭한 자신이 아무리 잔꾀를 부려봐야 신의 속성을 지닌 김성철에겐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 그에게 남은 건 말뿐이다. [ 협상! 협상을 하자! ] 퍽! 팔 가라즈가 고대신의 주둥이를 후려쳤다. 점액이 사방으로 튀었고 주둥이의 형태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틀렸다. 김성철은 화염을 거두고 직접 고대신의 머리 앞으로 걸어갔다. [ 끄으으으으…. ] 다른 건 몰라도 맷집 하나만은 남다른 녀석이다. 고대신이 말했다. [ 강하군. 하지만, 신의 도구여. 나는 죽일 수 없다. 나는 신에게 무한한 생명을 허여받은 존재. 내가 죽고 살고는 오직 나만이 결정할 수 있다. ] “그럼 어디 시험해보자고.” 매타작이 시작됐다. 한때 신이라 불렸던 존재는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 111. 붕락 (5) “…….” 얼마나 두들겼을까. 스무 대는 족히 후려친 것 같다. 그 결과, 고대신의 몸통은 전부 으스러졌고 머리통은 깨져 형체조차 잃었다. 남은 것은 활짝 열린 갈비뼈 너머로 꼴사납게 뛰는 심장이 전부였다. 더 이상 고대신은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생각이란 걸 할 수 없을 정도로 두들겨 맞았기 때문이다. 끝을 내기 위해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들어올렸다. 목표는 약동하며 세상의 경계를 흐리는 심장. 팔 가라즈는 심장을 일격에 짓이겨버렸다.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알레옥고스의 최후의 의지가 초월감각을 통해 전해졌다. [ 끄으으으… 강하군. 부수는 자…. 하지만 결국 이 세상은 멸망하게 되어 있다. 정해진… 순리대로…. ] 고대신의 의지가 완전히 소멸했다. 알레옥고스가 죽었다. 날뛰던 혼의 망해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김성철은 뭔가 일이 틀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두근. 두근. 두근. 고대신 심장의 박동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기이한 일이다. 이미 심장은 없어진 지 오래인데. 아니, 잘못 알고 있었다. 심장은 없어진 게 아니다. 오히려 증식했다. 김성철은 뒤를 돌아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수십 개의 심장이 나타났다. 그 주범은 혼의 망해다. 주인을 잃은 혼의 망해들이 스스로 뭉쳐 투기장 안에 수십 개의 심장을 만들어낸 것이다. 김성철은 그 모습을 보고 바퀴벌레의 군집을 떠올렸다. ‘죽지 않는 자란 이런 걸 말하는 건가.’ 두근. 두근. 두근. 수십 개로 증식한 심장들에게서 나오는 박동 소리는 점점 커져 모든 것을 덮어버릴 기세로 거세게 울리기 시작했다. 불경한 합창 속에서 김성철의 초월감각이 반응했다. ‘이 감각은?’ 무언가가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현실과 초월세계의 경계가 무너진 라그란제의 하늘 위에서. 쩍. 하늘에 틈이 벌어졌다. 틈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것은 공허한 어둠. 그 너머로 붉은 눈빛들이 번득였다. 김성철은 악신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초월세계 너머의 악신들이 고대신이 열어놓은 세계의 틈새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이다. ‘알레옥고스. 끝까지 지저분한 놈이군.’ 김성철은 닥치는 대로 심장을 파괴했다. 순식간에 투기장 안의 심장은 정리됐다. 그러나, 이미 혼의 망해는 라그란제의 전역에 깔려 있었다. 그 혼을 잃어버린 망자들은 심장이 파괴되자 도시 곳곳에 또 다른 심장을 만들어냈다. 하나의 심장이 파괴되면 두 개의 심장이 다른 곳에서 만들어졌다. 김성철은 특단의 조치를 강구했다. ‘라그란제 전체를 파괴하는 수밖에 없나.’ 신의 힘은 이미 그의 내면에 서려 있다. 부술 수 있다면 전부 부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아직 라그란제 시내엔 미처 피난 가지 못한 생존자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희생은 불가피하다. 김성철의 몸에 신의 힘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의 앞에 혼의 망해들이 뭉치며 새로운 심장을 만들어냈다. ‘일단은 저것부터.’ 김성철이 턱을 든 채 신의 힘이 깃든 망치를 들어 올릴 때였다. 새롭게 생성된 고대신의 심장에서 무언가 떠올랐다. 흘러내리는 인간의 형체. 혼의 망해다. 그런데 그 혼의 망해는 지금까지 나타난 혼의 망해와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김성철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혼의 망해의 정체를. 그는 어떤 이름을 불렀다. “윌리엄.” 마녀들은 이름을 부르는 행위엔 마법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본명을 감추고 가명을 쓰곤 한다. 미신 따위 믿지 않는 김성철은 그 오래된 이야기에 어떤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는 기적을 바라고 있었다. 그의 바람이 통한 것일까. 기적이 일어났다. 흘러내리는 점액질 사이에서 흰색의 살결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인간의 얼굴, 황제의 얼굴이었다. 황제의 얼굴을 본 김성철의 신형이 흔들렸다. “살아 있었나?” 놀랍게도 황제는 살아 있었다. 고대신에 먹혀 사라진 줄 알았던 그는 녹색의 점액에 뒤덮여 고대신의 심장에 부착된 채 끈질긴 삶을 이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황제는 지금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다. 이미 그의 몸의 절반은 녹아내리는 점액질로 변해 녹아 없어졌고 황제 그 자신은 심장의 일부가 되었다. 그를 죽인 고대신의 육편이 공교롭게도 그의 생명을 억지로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상태에서 가해지는 영원한 고통. 실로 고대신 다운 악랄하고 잔혹한 방식이다. 하지만 그 잔혹한 성향은 오히려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고대신이 죽자 황제는 자아를 회복했고 초인적인 의지로 고대신의 주박을 풀고 다시 한번 친우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김성철.” 김성철이 한때 흠모하고 목숨마저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천상의 빛과 같은 고결한 의지가 황제의 창백한 얼굴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는 가장 어두운 시기, 김성철 앞에 내려온 한 줄기 희망이었다. “시간이 없다. 이 괴물을 처치하자.” 어둠 속에 내린 빛. 황제가 말했다. 그때 그의 몸이 뒤로 당겨졌다. 심장에 남은 고대신의 잔류의지가 황제를 강하게 흡착했다. “…….” 김성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심장을 박살 내기 위해 망치를 들었지만, 황제가 김성철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심장을 부수면 다른 심장이 깨어날 뿐이다.” 심장을 강타하려던 망치가 허공에서 멈췄다. 황제는 계속해서 말했다. “고대신은 처음부터 죽을 각오로 강림했다. 다만 그는 알지 못했던 것이지. 자신을 처치할 존재가 질서신도 중립신도 아닌 일개 필멸자인 자네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그걸 알지?” 김성철의 물음에 황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심장의 고동이 찢어놓은 하늘의 틈새 안에 악신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탐스러운 하계를 향해 손을 뻗치며 나가고 싶은 열망을 온몸으로 표출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거대한 검이 하늘 위에서 나타나 틈새 안을 찔러넣었다. 칼날이 박힌 틈새 안에선 피를 연상케 하는 검은 액체가 하늘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더 이상, 이 세상의 풍경이 아니었다. 황제는 그 초현실적인 풍경을 눈에 담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고대신이 날 삼켰을 때 난 그의 일부로 전락했다. 하지만 덕분에 놈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 결과 알게 되었지. 놈에 대한 모든 것을.” “그것이 정말인가?” 황제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고대신은 죽었지만, 놈이 남긴 살점은 원시적인 단계의 의지로 묶여 있어. 그 의지의 끈을 끊어버릴 수 있다면 저 심장들은 저주의 합창을 멈출걸세.” “어떻게 그 끈을 끊을 수 있지?” 김성철이 다급히 물었다. 다음 순간, 황제의 눈빛이 탁하게 흐려졌다. 혼의 망해의 점액질이 다시 그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맨손으로 황제의 얼굴을 덮어가는 점액질을 털어냈다. 부정한 기운을 머금은 점액이 손에 닿자 강한 통증과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감각이 느껴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친우의 손길을 느끼며 황제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의 희생으로.” “윌리엄.” 김성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부름에 황제는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처 전하지 못했던 진실을 이야기하겠다.” 점액에 묻힌 황제의 몸통 속 심장에 꽂힌 맹약의 십자가가 불에 달구어진 것처럼 벌겋게 익기 시작했다. “크윽!” 황제는 심장이 타버릴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의지는 어떠한 것보다 정의롭고 고결하다. 황제는 기어코 흉중에 담아두고 있던 진실을 이야기했다. “크롬갈드의 진정한 목적은, 자신의 왕국을 되찾는 것도, 재앙의 해결도, 힘을 얻어 불멸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황제의 몸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윌리엄!” 김성철이 손을 뻗으려 했지만, 황제는 불이 붙은 몸으로 고대신의 심장에 등을 기대며 남은 최후의 말을 내뱉었다. “크롬갈드의 진정한 목적, 그것은 신이 되는 것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다섯 번째 신으로.” 맹약은 깨어졌다. 황제의 몸이 불타기 시작했다. 김성철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윌리엄…!” “이제야 알 거 같아. 고대신이 왜 그자를 다섯 번째 주신으로 만들려 하는지. 왜 그 녀석에게 주신이 되는 법을 알려줬는지.” 황제의 몸에 붙은 중립신의 불길이 고대신의 심장에 옮겨붙었다. 짐승의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죽은 고대신의 육편이 내지르는 소리다. [ 끼아아아아악! ] 다음 순간, 라그란제를 뒤흔들던 고동이 일제히 멈췄다. 심장을 불태우는 끔찍한 고통이 그 자체로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혼의 망해와 망해를 연결하던 지극히 원시적인 의식의 끈을 끊어버린 것이다. 이제 혼의 망해들은 통제를 잃고 허수아비처럼 우두커니 선 채로 멈춰버렸고 힘차게 약동하던 심장들은 일제히 고동을 멈추고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고동이 사라진 곳에 정적이 찾아왔다. 그 정적 속에서 조용히 타오르는 황제의 최후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알레옥고스는 크롬갈드의 본성을 알고 있다. 반드시 막아야 한다. 그자가… 태어나지 않은 신이 되는 것을…” 불길 속에서 황제는 스러졌다. 김성철은 친우의 최후를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마지막 잔해가 재로 변할 때까지. 바람결에 실려 황제의 마지막 음성이 초월감각을 통해 들려왔다. [ 자네와 함께해서 영광이었네. ] 실낱과 같은 불길이 마침내 꺼졌다. 허공 속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다. “…….” 아무개. 그녀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우두커니 서 있는 김성철을 향해 다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가까운 곳에 장거리 텔레포트 진이 있어. 거기를 통한다면 부유군도로 향하고 있을 제국 함정 내로 전이할 수 있을 거야.” 그녀의 시선은 김성철의 팔과 팔 가라즈에 머물고 있는 검은 불꽃을 향하고 있었다. 김성철이 뒤돌아섰다. 그는 아무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아무개는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김성철이란 사내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금 그는 완벽한 한 명의 인간이었다. 도구가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는 아무개를 향해 김성철이 말을 걸어왔다. “베르텔기아는 어떻게 됐지?” “글쎄. 거기까진 알 수 없어. 황제가 당하자마자 아델화이트는 베르텔기아를 데리고 순간이동을 시전했으니까. 어쩌면 공선에 탔을지도 몰라. 일단 함대로 돌아가 확인을 해야겠지. 게다가 지금, 상황은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으니까.” 아무개는 변해버린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거대한 검이 찌르고 들어간 하늘의 틈새 너머로 시커먼 불경한 형체들이 줄지어 뛰어내리고 있었다. 악신들이다. 악신들이 초월세계를 넘어 현실로 넘어오고 있다. 세상의 경계가 무너졌다. 황제의 희생으로 세상의 전면적인 붕괴는 막을 수 있었지만 이미 무너진 경계는 어찌할 수 없었다. 질서신 혹은 중립신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검이 비현실적으로 움직이며 악신을 도륙하는 것을 보며 김성철은 아무개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 금빛 바다가 출렁이는 아에게의 해안선. 바다 중앙에 우뚝 서 있는 신의 던전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한 사내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먼 곳에서 작은 반향이 느껴졌다. 한 떼의 새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무리 지어 숲에서 바다를 향해 날아갔다. 그 사내는 흩어지는 새떼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시작됐군.” 오랜 기다림이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아무렇게나 자란 머리칼을 흔들고 지나갔다. 사내 뒤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두 명의 사람이 나타났다. 알투지우스 제로와 사라사 제로. 알투지우스가 고개를 숙이며 크롬갈드에게 보고했다. “슈넬메르커 경은 죽었습니다만, 하늘은 무너졌습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사내가 몸을 돌렸다. 크롬갈드. 무위의 암군이라 불렸던 사내는 지금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어느 누구도 도전하지 못한 전인미답의 길을 걸으려 하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면 승천자는 땅에 머무르게 되겠지.” 크롬갈드는 상태창을 떠올려 자신의 능력치를 확인했다. 승천 직전의 아슬아슬한 능력치. 세상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는 상태라면 그는 약간의 힘을 얻는 것만으로 강제로 초월세계로 전이된다. 그것이 이 세상의 법칙. 하지만 균형이 무너진 지금, 그런 제약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는 머물 수 있다. 진즉에 불멸자가 되고도 남을 힘을 가지고도. “부수는 자는 어떻게 됐지?” 크롬갈드가 물었다. “거기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라그란제 일대는 붕락하여 아신과 악신이 횡행하는 죽음의 대지가 되었으니까요.” “그런가?” 크롬갈드는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물음을 남긴 채 절벽의 가장자리에 섰다. 크롬갈드의 눈에 금빛 바다와 그 위에 우뚝 선 신의 던전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모든 걸 바로 잡을 시간이다.” 하얀 갈매기 한 마리가 절벽을 스치듯이 날며 활공하고 있었다. 크롬갈드는 하얀 갈매기를 따르듯 절벽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낙원에 이르는 길을 열겠다.” 낙원이라는 말에 알투지우스와 사라사는 희망에 찬 눈빛으로 그들의 주인이 신의 던전에 이르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보지 못했다. 던전 앞에 선 크롬갈드의 얼굴에 서린 광기 어린 미소를. “…누구도 내 위에 군림할 수 없다. 전부 그 자리에서 끌어 내주지. 협잡꾼과 간신배, 사기꾼과 버러지들을.” 던전의 입구가 열렸다. 크롬갈드는 열린 입구를 향해 들어갔다. 입구에 서린 빛이 그를 삼켰다. ======================================= 112. 부유군도 (1) 한때 라그란제라 불리던 도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영원의 도시는 아래로 내려앉아 주위에서 흘러들어오는 물줄기에 의해 수몰되어 있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도시엔 의지를 잃은 혼의 망해만이 이따금 돌아다니며 불길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붕락된 라그란제 너머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하늘에 갈라진 틈바구니에서 뛰쳐나온 악신들이 벌판을 뛰어다니며 빈집을 들추고 아름드리나무를 꺾어서 놀았다.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내는 악신들 너머로 천구의 중심에서 지평선의 끝에 닿는 거대한 검의 형상이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미 그곳은 초월세계의 일부로 포섭되었다. 소수의 생존자는 아신들의 하늘 아래서 미쳐버리거나 코를 킁킁거리는 악신에 의해 죽임당했다. 그 라그란제의 상공에 두 개의 거대하고 성스런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광휘에 싸였고 다른 하나는 강철로 이루어졌다. [ 알레옥고스 놈. 나하크의 나라에서 한 짓을 되풀이했군. ] 광휘에 싸인 존재. 그것은 이 세계 사람들에게 질서신이라 불린다. [ 다행히 붕락이 중간에서 정지해 내가 나설 필요까진 없어지긴 했지만, 이 주변은 이미 끝났다. ] 강철에 싸인 존재. 그는 중립신이라 불린다. 질서신과 중립신. 두 명의 주신이 죽어버린 도시의 하늘 위에 나타난 것이다. [ 디르고. 이곳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 ] 질서신의 물음에 중립신은 거대한 손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강철로 만든 소매 아래 거대한 차원문이 열리며 용의 머리를 지닌 인간들이 나타났다. 드라고노이드. 혹은 용인. 전설도 신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신비의 종족은 중립신에게 경의를 표한 후 무너진 라그란제로 줄지어 몰려갔다. 용인들은 마법으로 흙과 바위를 들어 올려 무너진 라그란제를 향해 쏟아붓기 시작했다. 라그란제가 매몰되고 있었다. [ 이걸로 미봉책은 되겠지만, 완벽하게 이곳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신의 흙이 필요하다. ] 중립신이 말했다. [ 신의 흙이라. 전에 에크하르트가 만든 신의 흙은 전부 소모된 건가? ] [ 알레옥고스가 나하크의 왕국에서 소동을 일으켰을 때, 대부분을 소모했다. 물론, 이 정도 틈새야 가진 것만으로 때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비축분을 만들어야 한다. ] [ 하지만 에크하르트는 이미 형해화되기 직전이다. ] 중립신은 고개를 돌려 거대한 검이 머무르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갈라진 틈새를 향해 하늘에서 수많은 아신이 무리를 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틈새 안에 있던 악신들이 줄줄이 뛰어나와 아신에게 맞서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불멸자끼리의 싸움은 현장에선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포효와 충격이 연이어 이어졌지만 멀리서 지켜보면 그저 하품이 나오는 투닥거림에 지나지 않았다. [ 한 번 정도는 의식을 치를 수 있을 것이다. ] 질서신이 중립신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중립신은 여전히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 하지만, 한 명의 왕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 제물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한 명의 왕이 있어야 에크하르트의 창조술도 의미를 가지게 되겠지. ] [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렐름의 주민을 끌어다 써야겠지. 저마다 포화상태에 가까울 정도의 주민을 거느리고 있으니, 잘만 쓰면 충분히 부족분을 메꾸고도 남을 거야. ] 질서신이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 반발이 심할 거야. ] [ 하지만 어쩔 수 없다. ] 질서신의 몸에서 뿜어나오는 광휘가 더욱 짙어졌다. 새들이 그의 빛에 놀라 먼 하늘을 향해 달아났다. [ 우리는 이 세계의 신이다. ] 질서신이 힘주어 말했다. 중립신은 그 말에 수긍했다. 하지만 신들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그들중 어느 누구도 그 존재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과 같은 반열에 올랐던 고대신을 죽인 존재, 부수는 자 김성철에 대해서 말이다. 입에 올리는 것조차 두렵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절대자의 자리에 있던 자들은 그들을 끌어내릴 수 있다는 존재를 말이다. 김성철의 이름은 충격이 가신 후 여유가 생겼을 때 비로소 다시 거론되게 되리라. * 부유군도로 향하는 함대 전체를 샅샅이 뒤졌지만, 어디에도 베르텔기아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아델화이트로 추정되는 사람이 있다는 수송선에 가서 직접 살펴보았지만, 실망만을 더할 뿐이었다. 김성철은 내키지는 않지만 결국 자신을 따라다니는 불청객의 조력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55호든, 49호든 좋다. 지금 당장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협박이라기엔 명령에 가까운 어조였다. 곧 허공 속에서 책 한 권이 나타났다. 생김새는 베르텔기아와 같지만, 전혀 다른 인격을 지닌 녀석들. “55호냐? 49호냐?” 김성철은 아직 그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55호입니다만.” 55호가 불쾌감을 섞어 말했다. 하지만 전과 달리 그에게 토를 달 순 없었다. 그녀는 보았기 때문이다. 각성한 김성철의 진면모를. “베르텔기아는 어디에 있지?” 김성철이 55호를 노려보며 물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싶어서 그녀를 불러냈다. 55호는 김성철 주위를 느릿하게 돌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라면 아델화이트가 잘 데리고 있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아델화이트가 어디로 간지 알고 있나?” “지금 그건 49호가 추적 중이에요.” “49호가?”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네, 규율위반을 감수하고서요.” “규율위반이라.” “그 아델화이트란 여자는 관리자 사이에서 특별한 존재로 설정되어 있어요. 알아서도 안 되고 알려 해서도 안 되는 존재죠. 하지만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한 지금에 와선 과거의 계율 같은 건 의미가 없겠지요.” 55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김성철 뒤에 자리했다. 김성철은 의아함을 느꼈다. 원래대로라면 허공 속에 자취를 감추고 은밀하게 행동하는 녀석인데 굳이 김성철 주위에 자리 잡은 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김성철이 바라보자 새침하게 말했다. “당신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이기 때문에 옆에 있는 거랍니다. 불편해하지 마세요.” “불편한데?” “보이든 안 보이든 당신을 관찰하는 건 변하지 않아요. 게다가 전 지금 49호와는 계속 교신 중이에요. 혹시라도 그 아이가 소재가 발견되면 언제라도 당신에게 알려줄 수 있도록 대기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들어서 이렇게 행동하는 거랍니다.” “…알겠다.” 내키진 않지만,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다. 왕들이 죽고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한 판국에 다른 연락망을 대체할 길도 없고, 그리고 이 세상의 관리자인 에크하르트가 만든 베르텔기아 타입은 암살교단 따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관찰자들이다. 결국 김성철은 다음 관리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 그녀들의 속내라고 하지만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해야 한다. 무엇보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다. 김성철은 모든 일을 뒤로 미뤄놓고 자신의 선실로 향해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미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크고 작은 후유증이 고통이란 형태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검은 거인의 힘은 상상 이상의 하중과 피로를 김성철에게 안겨다 주었다. 힘을 쓸 때마다 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무저갱으로 빨려들 것 같은 공허감은 지금도 김성철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그것은 위험한 힘이다.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사용하긴 했지만, 자칫 잘못하면 세상을 멸망시켜버릴 수도 있다. 말 그대로 신의 힘. 하지만 그 속성은 파괴다. 파괴만으로 세상을 구할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을 파괴하려는 자를 파괴할 수 있을 것, 그뿐이다. 게다가 김성철은 은연중에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검은 거인이 눈을 뜨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그 녀석은 기다릴 것이다. 김성철의 마음이 어둠으로 물들고 파멸의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을. ‘이 힘은 최후의 최후까지 봉인해야 한다. 주신급의 적이 아닌 이상, 사용하지 않으리라.’ 영혼창고에서 엘릭서를 꺼내 복용하면서 김성철은 두 눈을 감았다. 옆에서 베르텔기아 55호가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많은 일이 있었던 날이지만, 그는 어떤 꿈도 꾸지 않았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연함함대는 푸른 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 김성철은 선실 창밖으로 뻗은 푸른 하늘을 보며 시야 가장자리에 어른거리는 책을 향해 말했다. “베르텔기아. 좋은 아침.” 습관적인 한마디. 곧 그는 실언했음을 깨닫고 55호를 바라봤다. 55호는 마라키아의 솜털로 만든 베르텔기아 전용 책장에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헷갈린 것이다. 곧 김성철이 은근한 불쾌감이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거긴 베르텔기아 자린데?” “아, 그래요?” 55호는 새침한 기침 소리를 내고 책장 밖으로 나갔다. 그걸 본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책들에겐 책장에 들어가려는 본능이 있는 모양이군.’ 김성철은 코트를 걸치고 바깥으로 나섰다. 함교엔 마라키아를 비롯한 주요 장교들이 모여 있었다. “몸은 괜찮나? 부수는 자.” 크럼부이를 등에 짊어진 마라키아가 인사말을 건넸다. “나쁘지 않군.” “그보다 저 책은 뭐지? 서열 2위는 아닌 거 같은데.” 마라키아가 55호를 찡그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도 알아본 모양이다. 모습은 같지만 55호가 베르텔기아가 아니라는 것을. “…….” 55호는 마라키아를 가볍게 무시했다. 마라키아도 55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슬슬 보이는군. 부유군도로 가는 입구가.” 수평선 너머로 벽과 같은 방대한 규모의 부유석 군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은 일찍이 세상의 끝으로 불린 곳으로 김성철도 와본 적이 있는 곳이다. 확실히 직접 세상의 끝을 다시 보니 저 무수한 부유섬과 부유석 사이에서 부유군도라 불리는 환상의 이상향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길잡이가 없다면 백 년, 천 년이 걸려도 방대한 암초 사이를 헤매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리라. 다행히 지금은 부유군도로 가는 길잡이가 몇 명이나 있다. 부유군도 출신의 항해사와 마라키아의 오른팔이 된 조인 부하 등이 대규모의 함대를 가장 안전한 경로로 부유군도로 안내하고 있었다. 곧, 함대는 부유 암초군에 들어섰다. 모든 함대는 속도를 늦추고 일렬로 길게 늘어서 부유 암초와 암초 사이에 난 좁은 길을 천천히 따라 항해했다. 운전과 별로 친숙하지 않은 김성철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역이었다. 거대한 암초가 공선을 덮칠 듯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갈 때마다 그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수 시간 동안의 아슬아슬한 항해가 이어진 후, 김성철의 함대는 부유 암초 한가운데 만들어진 거대한 원형의 부유 게이트를 발견했다. 게이트 너머엔 부유군도 소속으로 보이는 부유섬과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낯선 공선을 보자 경계 태세를 취했으나 곧 부유군도 소속의 함선이 신호를 보내자 경계를 풀고 게이트를 열어주었다. 김성철은 절차를 밟아준 부유군도 출신 장교에게 현재 부유군도 내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부유군도에서 대규모 전력이 빠져나간 걸 안 조인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단다. 마라키아는 그 보고를 듣고 자신의 부하 1호와 함께 조인들을 만나러 가겠다며 실피드를 나섰다. 김성철은 문득 베르텔기아의 빈자리를 느꼈다. 아마도 그녀가 여기 있었다면 필경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냥 저렇게 보내도 괜찮은 걸까?” 언제나 툴툴거리는 주의지만 기본적으로 상냥한 아이기에 필요한 경우엔 걱정을 아끼지 않는 게 베르텔기아다. 다른 베르텔기아 타입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지만 적어도 지금 옆에 붙어 있는 55호나 49호하고는 명백히 구분되는 특징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55호에게 다시 한번 베르텔기아의 위치에 대해서 물었다. “으음, 여기서는 교신이 안 되네요.” 55호가 난감한 어조로 말했다. 김성철은 그 말을 흘려 들었지만 그림처럼 아름다운 부유군도의 대지에 이르렀을 때 그녀의 말이 결코 흘려들을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55호와 함께 모처럼 남작을 타고 부유군도의 땅에 이르렀을 때 김성철은 망각하고 있던 유형의 인간들을 발견하게 된다. 작고 유약하며 그리고 미숙한 존재. 아이들이다. 절멸의 저주가 휩쓸고 지나간 대륙에서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던 아이들이 부유군도에 있었다. 부유군도 사람들은 김성철 일행을 두려워하면서도 경계했다. 일단, 그들은 크롬갈드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롬갈드와의 연락은 닿지 않은 지 오래고 장기간 고립된 상태에서 조인들의 공격을 받아 어떤 형태의 도움이라고 바라고 있는 상태였다. 부유군도의 접수는 잡음 없이 끝났다. 잠깐 주어진 휴식 시간 동안 김성철은 집무실에서 차를 마시며 55호에게 물었다. “아이가 있더군. 어떻게 된 일이지?” 살아 있는 아이는 그가 눈으로 본 것만 수십 명에 달했다. 그 정도로 많은 파이널 엘릭서를 구한다는 것은 무리다. 다른 어떤 힘이 존재하고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질문을 던졌다. 55호는 의외의 답변을 했다. “이곳은 관리자의 힘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에요.” 생각지도 못한 역발상이다. “관리자의 힘이 미치지 않는다고?” “네, 이곳은 질서신과 중립신이 세계를 재편할 때 역외로 분류된 지역이에요. 아버님의 힘은 여기까지 통하지 않아요.” “그런가?” “대륙 하나만을 관리하는 것만으로 벅찬 일이에요. 이런 무의미한 부분까지 관리한다면 아버님의 수명은 더욱 줄어들겠죠.” 김성철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부유석으로 가득 찬 푸른 하늘 너머로 끝이 보이지 않는 대양이 펼쳐져 있었다. 김성철은 그 대양을 눈에 담으며 물었다. “이 너머엔 뭐가 있지?” “세계의 끝이겠죠. 그 너머의 영역은 제 책장 안에 들어있지 않답니다.” 55호도 모르는 일이 있는 모양이다. 김성철은 문득 그 너머로 한 번 가보고 싶은 마음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달리 할 일이 있다. 김성철은 조용히 찻잔을 기울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찻잔을 절반 정도 비울 무렵, 병사 하나가 헐레벌떡 그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드래곤입니다!” “드래곤?” “네, 그것도 엄청 거대한 드래곤이 대원수님을 직접 찾고 있습니다!” 김성철은 드래곤과 친하지 않다. 그나마 알고 지내던 카네스는 에크하르트 1호기에 의해 죽었다. 반신반의하며 건물 바깥으로 나간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갑작스런 손님의 정체는 공정성과는 거리가 먼 요리 클래스의 관장자였기 때문이다. 태초의 용, 안드로아가 김성철을 찾아왔다. ======================================= 112. 부유군도 (2) 안드로아는 김성철이 55호와 함께 나타나자 대뜸 목을 아래로 숙이며 타라는 시늉을 했다. 딱히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지만 김성철은 안드로아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그는 군말 없이 거대한 드래곤의 등 위에 올라탔다. 김성철을 태운 안드로아가 날갯짓을 시작했다. 부유군도와 피난민들이 탄성을 터뜨리는 가운데 안드로아는 암초 공역 너머로 빠르게 날아갔다. 수많은 암초들이 김성철과 안드로아 사이를 지나갔다.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김성철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으음, 텔레포트던가. 그런 건 없을까?” “원하는 대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원의 간극이 김성철과 안드로아 사이를 덮치더니 둘을 망망대해의 하늘 한가운데에 데려다 놓았다. 하늘과 바다가 닿은 듯한 장소. 그곳엔 지긋지긋한 낙진도, 졸렬한 대륙도, 죽음의 향기도 없었다. 오직 구름과 하늘, 태양과 바다만이 존재하는 단순한 세상 속에서 김성철은 청량한 홀가분함을 느꼈다. ‘세상은 이토록 단순한데.’ 풍경에 취한 것도 잠시, 김성철은 자신을 태우고 묵묵히 날갯짓을 하는 안드로아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슬슬 용무를 말해주실까?” “그냥 한 번 이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네.” 안드로아는 그렇게 말한 후 수직으로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향해 가파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몇 개의 구름층을 뚫었을까. 느껴지는 공기에 눈에 띄게 차가워지고 평평해보이던 세상이 조금씩 구형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공기조차 희박한 곳. 안드로아는 진정한 세계의 끝으로 김성철을 데려왔다. 그곳에서 김성철은 작아진 세계를 볼 수 있었다. ‘저것은 대륙인가.’ 지도를 통해 몇 번이나 봤던 대륙의 모습이 발밑에 있었다. 대륙의 절반은 이미 황색의 낙진에 뒤덮여 알아볼 수 없었고 라그란제 일대엔 하늘을 찢어놓은 것 같은 검은 상처가 남겨져 있어 주변을 판단할 수 없었다. 대륙의 북쪽엔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마계가 있다. 마계의 대륙은 북반구의 중심에 닿아 있었다. 대륙의 서쪽엔 방금 전까지 김성철이 머물던 거대한 부유암초의 군집이 대륙을 따라 긴 띠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김성철이 알던 세계. 그러나 세계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넓었다. 대륙을 둘러싼 부유 암초군 너머 구형의 사각에 걸친 희미한 대지가 있었다. 알려지지 않은 대륙이다. 또 그 아래엔 대륙에 준할 정도의 커다란 섬이 구름 속에 감춰져 머물러 있었다. 그것 또한 알려지지 않은 영역이다. 지도 바깥의 세상. 이계에서 세계라 불리는 영역의 너머에 있는 확장된 세계다. “대체, 이건.” 김성철이 입을 열었다. “신이 창조한 세상은 원래는 이토록 넓었다네.” 안드로아가 답하면서 아래로 하강했다. 차가운 기온과 희박한 공기는 살아 있는 생명체로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래로 하강하면서 김성철은 알려지지 않은 땅, 지도 바깥의 세상을 눈에 담았다. 안드로이가 보여준 확장된 세계 안에서 인류가 사투를 벌이고 절멸의 저주가 휩쓸던 대륙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흔히 세계의 끝이라 불리는 부유환초 너머엔 여러 개의 땅이 존재하네. 드래곤들의 땅, 아신의 놀이터, 버려진 대륙, 생명으로 가득 찬 땅. 갖가지 이름을 지니고 각자의 기능을 지닌 땅이 존재하지.” 지도를 보면서 김성철은 헛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느꼈다. “그런 것이었나.” 지금까지 알려진 세계는 대륙과 그 주변부가 전부였다. 사람들은 그 대륙이 이 세계 전부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세계라 불리던 대륙. 그것은 현재의 뒤틀린 세계를 구축한 자들의 힘의 한계선이다. 명색이 신을 참칭 하는 자들이 다스릴 수 있는 영역이 고작 대륙 하나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실로 졸렬하다. 그것 외엔 달리할 이야기가 없다. 안드로아는 김성철은 자신의 보금자리인 부유섬에 데려다놓았다. 요리인 클래스 건으로 들린 적이 있는 안드로아의 부유섬이다. 안드로아가 허리를 높이 세웠다. 김성철은 안드로아의 등에서 사뿐히 착지했다. 김성철의 발이 지면에 닿자 안드로아는 동굴 쪽으로 거대한 몸을 옮기면서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카네스가 죽었더군.”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그의 눈은 이미 동족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손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성철은 그때의 쓰라린 고통을 되새기며 비장한 어조로 답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용족 중에 가장 어린아이였다. 천 년 만에 새롭게 태어난 아이였지. 비록 인간과 피가 섞이긴 했지만, 수천 년 동안 새로운 아이를 가지지 못한 우리 용족의 작은 희망이었지. 하지만 그 희망도 꺾여버린 지금, 우리 용족은 다른 종족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 아니, 그 전에 이미 우리는 벌을 받고 있었던지도 모르지.” “벌?” 안드로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질서신과 중립신이 진정한 신을 배신하고 그들의 질서를 구축할 때, 우리 용족은 그들에게 힘을 빌려주었다. 그 결과 우리는 필멸자도 불멸자도 아닌 특별한 지위에서 오랫동안 번영을 누려왔지.” 안드로아가 앞발을 들어 긴 손톱으로 허공에 무언가를 그렸다. 김성철의 눈앞에 거대한 지도가 나타났다. 그 지도는 김성철이 하늘의 끝자락에서 보았던 섬과 대륙이 그려진 확장된 세계를 담고 있었다. 안드로아는 그 지도에서 알려지지 않은 섬을 가리켰다. “여기가 드래곤의 땅이지. 우리 용족들은 저곳에서 어떤 근심도 걱정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어. 물론 어쩌다 가끔 미쳐버린 녀석이 부유암초를 넘어 인간계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곤 하지.” 안드로아는 또 대륙에 필적할만한 또 다른 대륙을 가리켰다. “저 대륙은 신이 최초에 만든 세계가 있던 곳이지.” “최초로 만든 세계?” “신은 인간에게 큰 실망을 느끼고 이 세계를 만들어냈네. 신은 자신의 권능으로 인간을 대체할만한 존재를 빚었지.” 안드로아는 거울상을 만들어내 김성철에게 버려진 땅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실로 황량한 곳이었다. 식물은 말라붙었고 인간들이 살던 도시는 폐허로 변해 비바람에 천천히 풍화되고 있었다. 강물은 검게 변해 작은 물고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대신 여러 개의 촉수를 지닌 기괴한 형상의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것이 신수라 불리는 존재들이지. 신수들은 신을 배신할 의지도 생각도 없었지만 그래서일까, 신은 곧 그들에게 실증을 느끼고 다시 한번 인간들을 시험해보기로 마음먹었어.” 안드로아는 대양 너머 자리 잡은 또 다른 대륙을 보았다. “그게 지금 세계가 만들어진 경위라는 것이군.” 안드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좋지 않았지. 그대가 익히 아는 대로 신은 다시 한번 배신을 당하게 됐네. 그가 직접 주신이라 이름 붙인 자식과 같은 존재들에게 말이야.” 안드로아는 그 대목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월의 고단함과 진한 후회가 묻은 탄식이었다. 이윽고 안드로아는 고개를 들어 올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각 주신에겐 역할과 권능이 있네.” 아까와 달리 그의 목소리엔 힘과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중요한 이야기다. 김성철은 정신을 집중하고 안드로아의 말을 경청했다. “질서신은 이름 그대로 세계의 질서를 관할하는 역할을 부여받았어. 신에게 반기를 드는 무리를 쳐부술 막강한 무력과 인간들을 감화시키는 신성력이 그의 권능이지.”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안드로아는 말해주고 있었다. 김성철이 상대하게 될 주신들의 정보를 말이다. 안드로아는 계속해서 말했다. “고대신은 이 세계의 탄생과 끝을 기록하게 될 사서의 역할을 부여받았지. 신은 그에게 신수를 다루는 힘과 영원의 사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끔 무한에 가까운 생명력을 주었네.” “무한한 생명력이라.” “그대가 지닌 건 신의 속성. 신이 준 힘을 거둘 수도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겠지.” 뒤이어 안드로아는 다음 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중립신에 관한 이야기였다. “…중립신 디르고는 다른 주신에 비해 가장 떨어지는 인물이었지만 그 덕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네.” “그 이유가 뭐지?” “그는 멍청했지만 자신의 무능함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야심이 적었어. 무엇보다 그에겐 단순한 일을 끈질기게 할 수 있는 성실함이 있었거든. 신은 중립신에게 이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는 중요한 일을 맡았어. 신을 도와 이 불안정한 세상을 유지하는 역할을 말이야.” “호오?” 실제로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중립신은 김성철과 가장 연관이 있는 존재다. 김성철을 이 세상에 불러온 소환 궁전은 중립신의 영역이니까. 그가 어떤 형태로든 관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성철은 중립신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그의 목소리도 들은 바가 없다. 안드로아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중립신은 이 세계의 근간이 되는 공간 축을 통제하는 능력이 있어. 그는 그 힘으로 외계의 존재, 즉 당신 같은 소환자를 불러내거나 혹은 이 세계에 위협적인 존재를 다른 공간으로 추방하는 힘을 지녔어.” “중립신은 그런 일을 했었군. 워낙에 신도가 없어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어.” 중립신은 질서신과 함께 이계의 주민들이 받들어 모시는 주신이지만 실제 중립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안드로아는 김성철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어 보이며 신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중립신은 질서신보다 훨씬 중요한 존재야. 중립신은 이 불안정한 세계를 떠받치는 기둥을 관리하며 세상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이거든. 질서신이 죽는다고 해도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중립신이 죽으면 이 세계는 위기에 처하겠지.” “그렇군.” 이제는 마지막 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차례다. 김성철은 자신의 심장에 꽂힌 십자가의 이물감을 느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혼돈신, 쿤키두는 어떤 녀석이지?” 김성철을 신의 도구로 만든 녀석. 그 녀석 또한 언젠가 손봐줘야 할 존재다. “그의 역할에 대해 알려진 건 없다. 그의 모든 것은 베일에 가려져 있어. 하지만 그가 신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신에게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거로 보인다.” “이를테면?” “주신들에 대한 감시.” “…껄끄러운 역할이군.” “하지만 그는 결정적으로 다른 주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힘을 지녔어. 따라서 그는 질서신과 중립신의 야합을 파악해내지 못했고 그 맹점을 파악한 신은 그를 보완할 다섯 번째 주신을 만들어내려 한 것이지.” 다섯 번째 주신. 태어나지 않은 신. 크롬갈드의 목적이다. 안드로아는 말했다. “아마도 신은 마지막 주신에게 다른 모든 신을 아우를 수 있는 초월적인 권능을 주려고 한 모양이야.” “초월적인 권능이라.” “어쩌면 그것은 또 다른 신의 힘일 수도 있지.” 안드로아는 고개를 들어 동쪽을 바라보았다. 부유석으로 가득 찬 하늘 너머로 희미한 대륙의 해안선이 보인다. 현재진행형으로 붕괴 중인 세계. 안드로아는 한참이나 말없이 그곳을 바라보았다. 오랜 기다림을 깨고 김성철이 입을 열었다. “왜 이런 것을 내게 알려주는 것이지?” 이전에 만났을 때, 안드로아는 제한적인 사실만을 알려줬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김성철을 알 수 있었다. 안드로아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기꺼이 알려주려고 한다는 사실을. 김성철의 물음에 안드로아는 고개를 돌려 김성철을 거대한 눈동자에 담았다. “…그대에겐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자격?” “진정한 신의 힘을 손에 넣은 그대는 어떤 의미에서 다른 어떤 존재보다 신에 가깝지.” “…….” “안타깝게도 지금 이 세계는 멸망과 존속의 기로에 섰다. 이 세계가 멸망할지 존속할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 키를 쥔 존재가 그대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더럽게 무거운 짐을 떠넘기는군.” 김성철은 조소했다. 원하지 않았던 짐이다. 그가 원했던 것은, 그다지 큰 것이 아니다. 베르텔기아와 마라키아와 함께 짧지만 긴 여행을 하면서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일상. 그 안에 가끔 찾아오는 소소한 행복. 김성철이 원하는 건 단지 그뿐이다. 김성철의 손에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안드로아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김성철로선 별다른 의미가 없는 행위였다. 단순한 습관이다. 그는 손끝으로 전해지는 팔 가라즈의 단단함을 느끼며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했다. 산적한 수많은 문제가 있다. 질서신 패거리의 응징, 혼돈신에 대한 복수, 그리고 크롬갈드의 추적 등등. 하지만 지금, 안드로아의 등 위에서 지극히 단순한 세상을 본 이후 모든 것은 명료해졌다. 김성철은 다음 할 일을 마음속으로 정했고 안드로아에게 물었다. “혹시 베르텔기아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봐 줄 수 있나?” 김성철은 빈 안주머니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덧붙였다. “안주머니가 허전하면 일을 할 수 없거든.” 안드로아는 두 눈에 마법진을 띄우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난 후 안드로아가 입을 열었다. “늘 함께하던 책 말인가?”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라면 지금, 정령계에 있다.” ======================================= 112. 부유군도 (3) 정령계로 가기 위해서는 아델화이트의 영지를 거쳐야 한다. 아델화이트의 영지로 가려면 거리도 거리지만 붕괴된 라그란제 일대를 거쳐야 한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여정이다. 안드로아의 말에 의하면 중립신은 장거리 텔레포트를 시전, 차원문과 차원문의 사이를 오가는 여행자를 자신의 의지로 꺼내올 수 있다고 한다. 물론 김성철은 중립신을 비롯한 아신과 싸울 힘이 있지만 다른 평범한 자들은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전진해야 한다. 베르텔기아가 없는 세상은 이제 상상할 수 없다. 그가 아는 아델화이트는 분명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것만으로 그녀에게 베르텔기아를 맡기는 것은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안드로아의 등을 타고 부유군도로 향하면서 김성철은 함께 할 최소한의 인원을 선발하기로 마음먹었다. 김성철이 다시 부유군도의 본섬에 도착했을 때 그는 부유군도 사람과 연합군 사이에 작은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장교를 불러와서 물어보니 지휘계통의 우열을 둘러싼 문제였다. 즉, 누가 위에 있고 아래에 있는지 그런 시답잖은 문제로 인간들은 또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한 발 떨어져 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거로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 좌시하면 싸움은 커질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복종하고 있다고 하나 부유군도 사람은 여전히 크롬갈드의 충성스러운 백성이니까. ‘까다롭군.’ 사람과 사람의 중재가 가장 귀찮은 법이다. 그 중대성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신경을 필요로 한다. 김성철은 지금 그런 문제에 신경 쓸 여지가 없다. 한시가 급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크롬갈드는 다섯 번째 주신이 되기 위한 모종의 작업을 하고 있을 것이기에. 그렇다고 그가 그냥 훌쩍 부유군도를 떠나버리면 연합군과 부유군도 사람들은 마지막 피난처에서 인간끼리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것인가.’ 해결책을 고민하며 선착장 일대를 거닐던 도중 김성철은 멀리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응? 저 여자는?’ 베르텔기아가 노래를 잘하는 언니라 불렀던 그녀. 클라리스가 있었다. 그녀는 피난민을 싣고 온 선단 아래를 정처 없이 방황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혹시? 이렇게 생긴 할아버지를 보지 못했나요? 이름은 쿠르트 아삼이고 다리를 조금 절어요.” 그녀의 손엔 얼기설기 그린 그래도 특징은 확실히 표현된 조부의 초상이 들려 있었다. “…….” 김성철은 한동안 클라리스를 보다 고개를 돌렸다. 흐트러졌던 마음이 정돈되는 게 느껴졌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명확하게 보인 것이다. 때마침 날카로운 나팔 소리와 천지가 떠나갈 듯한 커다란 종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조인이다!” “나하크 무리가 나타났다!” “엄청난 숫자다!” “함대와 마법사들은 뭘 하고 있는가?” 여기서 외지인과 부유군도 사람의 태도가 극명하게 갈렸다. 이미 라그란제에서 지옥을 보고 온 외지인들은 비교적 무덤덤하게 행동했지만 부유군도 사람들은 그야말로 경기를 일으키며 민감하게 반응했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서 하늘 한 켠을 까맣게 뒤덮을 정도의 조인 무리가 나타났다. 그 숫자는 대략 일만 명. 김성철은 물론 야만인과 맞서 싸운 연합군 출신에겐 그다지 많은 숫자가 아니다. 김성철은 두려워하는 부유군도 사람 앞에 서서 조인 군대를 무심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곧 조인 무리에서 한 무리의 조인이 이쪽으로 날아왔다. 김성철은 그 조인 무리의 중심에 검은 깃털을 지닌 조그만 녀석이 있는 걸 발견했다. 마라키아다. “여어! 부수는 자! 어떤가? 내 군대의 위용이?” 마라키아는 자기 몸보다 큰 크럼부이를 두 손으로 안은 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김성철 앞에 착륙했다. 그의 양옆엔 날카로우면서도 강건한, 당당한 조인병이 묵묵히 그들의 왕을 호위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걸 보고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이야기가 잘 된 모양이군?” “당연하지! 이 검은 깃털이 진정한 왕의 증거인데 이야기가 잘 통하지 않을 리가 없지!” 당당하게 떠벌이는 마라키아 옆엔 다른 조인과 확연히 구분되는 푸른색 깃털을 지닌 아름다운 조인이 있었다. 김성철은 한눈에 그 여성 조인이 부유군도의 조인을 이끌던 우두머리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김성철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마라키아를 왕으로 모신 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푸른 깃털을 지닌 조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뒤이어 그녀는 그들이 왜 대륙을 떠나 여기까지 흘러들어오게 됐는지 간략하게 설명했다. 수천 년도 전, 절멸의 저주가 대륙을 덮치고 당시 나하크의 왕자인 마라키아마저 절멸의 저주에 걸리자 당시의 왕은 마라키아와 백성을 살리기 위해 모든 대책을 강구했다고 한다. 일부는 환상 속의 낙원인 부유군도를 찾아 대륙 각지를 떠돌았고 또 일부는 무모하게도 재앙 그 자체와 맞서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왕이 선택한 것은 오래전부터 그들이 관리하던 고대신의 잔해였다. 왕은 고대신의 속삭임을 듣고 그를 위해 수십만 명의 생명을 제물로 바쳤지만 돌아온 것은 질서신의 응징과 왕국의 몰락이었다. 왕국은 몰락했고 왕 그 자신 또한 고대신에게 삼켜져 혼의 망해가 되었다. 김성철이 조인왕국에서 보았던 혼의 망해는 다름 아닌 마라키아의 부왕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부유군도를 찾아 나선 한 무리의 조인이 부유군도를 찾아냈다. 그러나 그곳엔 선주민이 있었다. 크롬갈드가 데려다 놓은 그의 종복들이다. 종족이 다른 두 세력은 필연적으로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였다. 전체적인 전력은 크롬갈드 측이 훨씬 높았지만 날개가 달린 조인들에겐 날개가 있었다. 그들은 부유 암초와 발견되지 않은 부유섬에 근거지를 만들었고 현재까지 끈질긴 싸움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께서 도와 진정한 왕이 스스로 우리에게 찾아왔으니 우리 나하크 족에겐 오로지 안녕과 번영만이 있겠지요.” 푸른 깃털의 조인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김성철은 이를 정정했다. “멸망해가는 세상 속에서 어찌 안녕과 번영이 있을 수 있겠는가?”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고 마라키아에게 걸어갔다. 마라키아가 김성철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교만하긴 하지만 마라키아의 눈엔 김성철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드러나 있었다. 나면서부터 성스러운 존재였던 그는 알에서 깨어난 직후부터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 모든 것들이 그에게 복종했고 그는 무소불위의 왕이 되어갔다. 마라키아에겐 부왕이 있었지만 부왕 또한 마라키아를 아들이 아닌 특별한, 신적 존재로 취급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마라키아는 교만하고 잔혹한 절대권력을 한 몸에 지닌 냉혹한 왕으로 자라났다. 수천 년 만의 긴 잠에서 깨어났을 때만 해도 그는 기존의 반신 같은 모습을 고수했다. 하지만 그랬던 것이 한 사내의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결정적인 변화의 전기를 맞이했다.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검은 깃털을 가지고 태어난 그를 왕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준 이들은. 김성철과 베르텔기아. 그들은 같은 눈높이에서 마라키아에게 평범한 사람의 삶을 알려주었다. 마라키아는 그들과 함께 하며 적당히 참는 법과 어울리는 법을 배웠고 신적 존재에서 한 명의 인격체로 변화했다. 이제 그에게 사람으로서 생각할 수 있게 가르쳐 준 사내가 그의 곁을 떠나려고 한다. “나는 동쪽으로 떠나겠다.” 현재 부유군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은 그가 해결하기엔 지나치게 복잡하고 까다로우며 많은 시간을 요한다. 분명 살아남은 자들의 운명도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반드시 김성철이 해결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그 적임자로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선택했다. 49호에 서명한 왕 중 자신을 제외한 유일한 왕 마라키아에겐 그럴 자격과 자질이 있고 힘 또한 지니고 있다. “너에게 남겨진 이들의 생명을 맡기마.” 마라키아는 현명한 사내다. 그는 한 번에 김성철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훗, 사람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긴말은 필요 없다. 김성철은 주위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을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부터, 부유군도의 관리와 방위는 나하크의 왕 마라키아에게 맡기겠다.” 그 말을 들은 군중들은 웅성거렸다. 특히, 조인과 항구적인 전쟁을 벌이던 부유군도 주민들이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김성철은 그 부유군도의 주민들을 노려보며 마라키아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마라키아. 저들을 안심시켜라.” 마라키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김성철 앞에 나섰다. 모든 이의 시선이 검은 깃털과 날개 달린 왕에게 향했다. 김성철이라면 부담을 지녔을 시선이지만 마라키아에게 군중들이란 익숙한 상대였다. 마라키아의 힘차고 낭랑한 목소리가 부유섬 위로 깨끗하게 울려 퍼졌다. “그동안 이곳에 우리 나하크와 인간 사이에 오랜 분쟁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위태로운 시기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붕괴하고 있고 우리를 용납하지 않는 사악한 불멸자들은 우리를 죽여 그들의 제단에 놓을 궁리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작금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물 밖의 고기와 크게 다른 존재가 아니다.” 마라키아의 목소리는 조인은 물론 평범한 자의 심금을 울리는 힘이 있었다. 거부감을 가지고 검은 깃털의 왕을 지켜보던 인간들도 점점 마라키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존재감은 어마어마하지만 결국 매력 28의 사내 김성철에게선 느낄 수 없던 부드러움과 호소력이었다. 마라키아는 군중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향하는 걸 느끼며 힘주어 말했다. “나 멸세의 왕 마라키아는 약속한다. 앞으로 우리 조인은 어떤 인간도 정당한 이유 없이 해치지 않으며, 그리고 모든 범인류를 구분 없이 대우하겠다고. 그렇게 우리는 힘을 합쳐 우리를 원치 않는 세상과 맞서 싸워야 한다.” 마라키아는 아직 덜 자란 검은 날개를 활짝 펼쳤다. 광택이 흐르는 검은 날개가 펼쳐진 모습을 본 군중 사이에서 희미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마라키아는 군중들, 조인과 인간을 가리지 않고 두루 내려다보며 자신의 말을 마무리했다. “내가 지금 원하는 소망은 단 하나다. 언젠가 부수는 자 김성철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여기 있는 우리들이 변함없는 모습으로 그를 맞이할 수 있게끔 모두 함께 살아남는 것.” 마라키아의 포부는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살아남는다는 말 속엔 멸망해가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힘이 있었다. 짝짝짝. 김성철은 뒤에서 느닷없는 기척이 나타나는 걸 느꼈다. 이런 일이 가능하면서 손뼉까지 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뿐이다. 김성철은 뒤이어 들려온 아무개의 목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마라키아님. 역시 너무 멋져!” 아무개로 시작된 박수는 조인들에게 전이되고 이윽고 연합군과 피난민 측까지 이어졌다. 부유군도의 사람들은 여전히 반신반의했지만 마라키아가 절반은 두려움, 절반은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부유군도의 어린아이에게 먼저 다가가 아이의 손을 잡고 자신의 날개를 만지게 했을 때, 결국 마음의 벽을 허물고 날개 달린 왕을 받아들였다. 이제 작은 시작에 불과하지만 마라키아라면 잘해낼 것이다. 마라키아는 김성철만큼이나 성장한 친구이니. ‘제법이군. 이 새 녀석.’ 확실히 매력이 있는 친구다. 그동안 구박한 게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그만큼 준 것도 많으니 쌤쌤인 셈이다. 이렇게 김성철은 마라키아에게 뒷일을 맡겨두고 편안한 마음으로 동쪽으로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붉은 공선 실피드는 조인과 피난민, 부유군도의 주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출발했다. 승무원은 전과 마찬가지로 타이곤 보스보로트와 그의 신관들이 맡기로 했다. 환송객의 선두에서 마라키아가 김성철을 향해 소리 질렀다. “반드시 그 빌어먹을 책을 데리고 돌아와라! 부수는 자! 내 너희들에게 당한 울분을 한 번에 되갚아 줄 테니까!” 김성철은 그답지 않게 활짝 웃으며 답했다.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 테니 똑바로 해라. 만약 내가 돌아왔을 때 무고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죽는다면 너의 깃털을 전부 뽑아 줄 테니까.” 웃음 섞인 협박은 때로는 무표정한 얼굴로 하는 협박보다 배는 무서운 법이다. 마라키아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서서 특유의 귀여운 소리를 냈다. “삐이이이이….” 출항을 알리는 경쾌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성철은 웃는 얼굴로 마라키아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뒤돌아서서 실피드 위에 올라탔다. “좋은 바람이군.” 이제는 뱃사람이 다 된 타이곤이 껄껄 웃으며 돛을 펼쳤다. 모든 이의 희망을 싣고서 실피드는 부유군도를 떠났다. 멀리서 드래곤의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안드로아의 것이다. 김성철의 귀에 들린 그 웅장한 포효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항해를 축복하는 기원처럼 들렸다. ======================================= 113. 추적 (1) 유령 들린 숲 입구, 한 척의 공선이 차원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 온통 붉은색의 공선, 실피드다. 운 좋게도 김성철 일행은 라그란제 일대에 도사린 불멸자들을 피해 아델화이트의 본거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김성철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어떻게 보면 악신보다는 무서운 존재였다. 함교 안에서 김성철은 보았다. 황색을 띤 죽음의 낙진이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을. 이곳은 시계 제로, 확정된 죽음의 공간이다. 여기저기서 콜록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낙진이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진건가.’ 예상보다 낙진은 빠르게 움직였다. 이 추세라면 낙진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라그란제 일대를 뒤덮을 것이고 나머지 대륙의 절반을 삼켜버릴 것이다. “조타수! 공선을 최대고도로 상승시켜라. 나머지는 틈새를 막고 정화의 마법으로 낙진의 독기를 중화시켜라!” 타이곤은 부산하게 움직이며 함교 안으로 스며드는 낙진에 대해 조치했다. 김성철은 부지런히 움직이는 전 이단심문관을 가만히 응시하다 그에게 말을 건넸다. “괜찮겠소? 이런 위험한 곳까지 오게 되었는데.” 이에 타이곤은 털털하게 웃으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어차피, 신에게 버림받은 우리 신관들이 할 수 있는 건 이런 일밖에 없소.” 그의 눈동자엔 지금까지의 인생에 대한 진한 회의감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평생을 다해 질서신을 위해 몸 바쳤건만, 질서신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시점에서 질서신을 모시는 뮤라 교단과 호라산 교단은 해체됐다. 어느 누구도 교단의 해체를 선언한 바 없지만, 그들이 모시는 신에게 부정당했는데 더는 무슨 말이 필요한가? 많은 신관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보다 많은 신관이 법복을 벗었다. 법복을 벗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남들처럼 자포자기하기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스스로 찾으려고 했다.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인생은 물론 존재의의 자체가 송두리째 부정당한 그들로선 뭐라도 해야 했다. 그것이 타이곤 보스보로트와 그의 부하들의 마음이었다. 파문자 김성철은 그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타이곤 일행의 노력으로 실피드는 낙진이 미치지 않는 높은 고도까지 큰 피해 없이 이를 수 있었다. 높은 하늘 아래서 본 아래 세상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낙진은 이미 세상 전체를 뒤덮고 있었고 아직 낙진이 덮지 못한 서쪽엔 비현실적인 하늘의 상처와 검이 불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멸망. 그것이 가시화된 풍경이었다. 황색 일색으로 변한 천지를 굽어보던 중 김성철의 초월감각이 반응했다. 초월감각은 김성철에게 동쪽을 보라고 말했다. 김성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동쪽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있다. 거대한 무언가가. 곧 김성철은 그것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악신이다. 수십 마리의 악신이 하늘 위에 떠서 풍선처럼 몸을 부풀려 숨을 들이셨다 내뱉기를 반복했다. 그들이 숨을 뱉을 때마다 낙진은 순풍에 돛단배처럼 서쪽을 향해 쭉쭉 벋어나갔다. ‘이제 현실세계까지 악신들이 설치기 시작했군.’ 마음 같아선 당장 때려죽이고 싶지만 지금은 그런 하찮은 존재에게 시간을 뺏길 여유는 없다. 김성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타이곤에게 다가갔다. “지금 바로 정령계에 다녀오겠소.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지체없이 여기를 떠나시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하지만.” 타이곤은 주저했다. 발밑 아래는 낙진으로 가득 찬 공간. 아무리 김성철이라고 그 독기를 들어마셨다간 오래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 신의 힘이 있다고 하나 그의 육체는 여전히 필멸자의 테두리를 벗지 못했으니까. 타이곤이 머뭇거지라 김성철 뒤에서 아무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에게 간이 텔레포트 마법진이 있어요.” “암살교단의?” “네. 혹 문제가 생기면 이쪽에서 이 사람을 데리고 오겠어요.” 아무개는 그렇게 말하고는 두꺼운 스카프를 꺼내 입을 감쌌다. 타이곤은 그녀에게 스카프를 요구한 후 나름의 축성 의식을 하고 되돌려주었다. “이러면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거요.”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들이 모시는 신에게 버림받았지만 신관의 힘은 그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이. 아무개는 그에게 눈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목례했다. 타이곤은 김성철에게 축성 의식을 한 천을 건넸다.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게 있는 게 나을 텐데?” 타이곤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어디서 구했는지 호피무늬 천을 꺼내더니 그걸 타이곤에게 내밀었다. “이게 좋겠소.” 그는 자신의 스타일 철학이 견고한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의 스타일이 일반인이 추구하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지만. “…….” 타이곤은 호피무늬 스카프에 정화의 기운을 부여하는 축성 의식을 하고 그것을 김성철에게 내밀었다. 김성철은 호피무늬 스카프를 입에 두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오리다.” 김성철이 함교의 문을 열고 나가자 아무개가 그의 뒤를 따랐다. 신관들은 저마다 김성철의 행운을 기원했다. 그들의 신이 아닌, 자신들의 이름으로. 이제 김성철 발밑엔 두터운 황색 낙진이 자리 잡고 있다. 김성철은 심호흡을 한 후 주저 없이 죽음의 낙진을 향해 뛰어내렸다. 아무개도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뒤를 따라 뛰어내렸다. 곧 죽음의 낙진이 김성철과 아무개를 감쌌다. 시계제로, 포효하는 공기의 격류 속에서 김성철은 감으로 낙진 속에 있는 숲의 입구를 찾아 착지했다. 쿵.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군화 너머로 느껴지는 사각거리는 낙엽의 감촉은 틀림없이 유령들린 숲의 그것이다. 김성철은 기억과 초월감각에 의지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길을 걸어갔다. 유령 들린 숲이라고 하나 수많은 생명들이 살아가던 숲속에 이제 살아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들은 말라 비틀어졌고 나무 아래서 살아가던 생물들은 백골이 된 채 썩어가고 있었다. “…….” 김성철은 숲 일대에서 어떤 마법의 기운도 느끼지 못했다. 아델화이트가 숲에 쳐 놓은 자신의 마력을 모두 거두어버린 모양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낙진 속. 어디로 떨어진 지도 모르는 곳에서 표지도 없이 안개 속과 같은 낙진 안에서 오두막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김성철의 영혼석이 일제히 영창을 시작했다. “윈드쉴드.” 김성철이 시동어를 외치자 다발성의 폭음이 일제히 터져 나오며 그 앞의 낙진을 밀어버렸다. 약간이나마 시계가 트였지만 곧 모래처럼 밀려드는 낙진에 의해 흐려지기 시작했다. ‘난감하군.’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다. 숲 속에서는 대부분의 풍경이 비슷해보인다. ‘길을 만들어야 하나. 그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데.’ 스카프를 두른다고 해서 낙진이 몸에 쌓이지 않는 건 아니다. 그 죽음의 독기는 조금씩 몸에 쌓이고 있다. 김성철은 오래 버티겠지만 아무개는 김성철만큼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저기.”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55호다. 입을 꾹 닫고 있다가 갑작스레 입을 연 걸 보면 중요한 용무가 있는 모양이다. “무슨 일이지?” 김성철이 55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49호가 지금 마녀의 오두막에 있다고 하네요. 내가 길을 안내할 테니 따라오세요.” “그건 좋군.” 아마도 마라키아가 옆에 있었다면 55호가 베르텔기아보다 쓸모 있다고 빈정거렸을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이제는 옆에 없는 동료들의 빈자리를 느끼며 55호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55호는 나무, 구덩이, 혹은 급경사 따위 인간의 발로는 걸어가기 힘든 지형으로 김성철을 안내했다. 최단거리로 안내한다는 게 길이 아닌 장애물로 그를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꺼내 죽은 나무와 바위를 깨부숴 길을 만들었고 필요한 순간마다 윈드쉴드를 시전해 시계를 확보했다. 곧 김성철과 아무개는 55호의 안내를 받아 마녀의 오두막 아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죽어버린 숲과 마찬가지로 마녀의 오두막 또한 사멸해가는 폐허가 되었다. 김성철은 시들어버린 나무 위에 위태롭게 자리 잡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자, 이젠 어떻게 하지?” 아무개가 스카프를 끌어내리며 말했다. 그때 빈 방에서 책 한 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49호다. 55호는 49호 앞으로 다가가 말없이 가만히 대치했다. 뭔가 정보를 교환하고 있는 모양이다. 김성철은 두 책이 이야기를 나누게 내버려두면서 집안을 둘러보았다. 오두막 안은 다행히 바깥과 달리 크게 변한 게 없었다. 그래서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김성철은 아델화이트가 쓰던 다기가 테이블 위에 고스란히 놓여 있는 것을 눈에 담았다. ‘얼마 전만 해도 저곳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그 여자가 내어주는 차와 음식을 먹었지.’ 그가 아는 아델화이트는 악인이 아니다. 김성철은 그녀에게 질투심을 느꼈을지언정 악감정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영겁을 살아 온 마녀는 그녀가 몸을 담은 오래된 숲처럼 투명하고 희미한 사람이었으니까. 김성철은 자신이 본 아델화이트가 그녀의 본모습이길 속으로 바랐다. “정령계의 문은 이곳에 있어요.” 55호와 이야기를 끝낸 49호가 김성철에게 다가왔다. 김성철은 49호의 뒤를 따랐다. 49호는 오두막의 다락으로 향했다. 그곳엔 하얀 천으로 뒤집어 놓은 갖가지 가구가 있었고 벽면엔 빛바랜 찬장이 우두커니 자리 잡고 있었다. 49호는 찬장 앞으로 이동했다. “제가 여기를 찾았을 때, 마녀의 흔적이 이 찬장에 남아 있었어요. 제 추측에 따르면 이곳에 정령계로 통하는 연결지점이 있을 거예요.” 원래대로라면 아델화이트의 요정들이 정령계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곤 했다. 하지만 요정이 없는 지금 김성철은 직접 정령계로 통하는 길을 열어야 한다. 다행히 정령계의 문을 열 수 있는 도구는 안드로아에게 받았다. 김성철은 영혼 창고에서 무지갯빛이 감도는 열쇠를 꺼냈다. 죽어가는 태초의 용이 마지막으로 김성철에게 준 선물이다. 김성철은 열쇠를 두고 찬장 앞에 섰다. 곧 초월감각이 반응했다. ‘그렇군.’ 연결점은 찬장만이 아니었다. 마녀의 오두막, 구체적으로는 오두막이 자리 잡은 고목 전체가 정령계로 통하는 연결지점이다. 아델화이트가 넓은 숲에서 굳이 이곳에 자신의 거처를 정한 건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성철은 초월감각으로 정령계의 존재를 의식하고 열쇠를 갖다댔다. 무지갯빛 열쇠에서 오묘한 광채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령계의 문이 열린 것이다. “적게 산 건 아니지만 이런 광경은 처음 보네요.” 49호가 탄성을 터뜨렸다. “진품 베르텔기아는 이 광경을 몇 번이나 봤지.” 김성철의 손에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정령계는 아름답고 싸움과 거리가 먼 곳이지만 이제 그곳엔 마냥 믿을 수만은 없는 아델화이트가 있다. 싸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든 채 정령계로 들어섰다. 바깥은 멸망해가고 있지만 정령계 안은 어떤 변화도 없이 평화와 아름다움 속에 머물러 있었다. 김성철은 하늘에 걸친 강 너머,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세계수의 묘목들을 눈에 담으며 묘목 사이에 우뚝 선 세계수를 향해 걸어갔다. 곧, 그 앞에 한 무리의 요정들이 나타났다. 그중엔 요정들을 이끄는 장로도 있었다. 김성철이 장로에게 말했다. “아델화이트를 찾고 있소.” 이에 장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느릿한 음성으로 답했다. “그녀는 어제 베르텔기아라는 이름의 리빙북과 함께 이곳을 떠났소.” 그 말을 들은 49호가 김성철의 뒤에서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오두막에서 며칠 동안 잠복했지만 어떤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장로는 김성철 일행을 어떤 장소로 안내했다. 빽빽한 삼림 속에 숨겨진 길 너머엔 바깥으로 통하는 또 다른 문이 존재하고 있었다. 정령계를 오갈 수 있는 지점은 마녀의 오두막 한 군데는 아니었던 것이다. 김성철은 장로에게 그 문이 어디로 통하느냐고 물었다. 장로는 그 문이 아에게 쪽으로 통한다고 답했다. “아에게라.” 김성철은 신의 던전을 떠올리며 다시 장로에게 물었다. “아델화이트가 여길 떠난 건 언제요?” 장로는 아델화이트가 어제 정령계를 급히 떠났다고 답했다. 타이밍이 좋지 않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예정된 일일지도 모른다. 유령 들린 숲의 마녀, 아델화이트의 능력 중 하나는 미래 예지고 그녀의 점은 잘 맞기로 유명하니. 김성철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확실하진 않지만 정황상으로 미루어보면 아델화이트가 날 피해서 달아났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혹 그렇다고 해도 정령계와 현실을 오가는 그 여자를 찾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관리자인 수족인 베르텔기아 타입마저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여자다. 김성철이 나선다고 해도 아델화이트를 찾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김성철이 아에게로 통하는 문앞에서 고심에 잠겨 있을 때였다. 한 여성이 소녀의 손을 잡고 김성철 앞에 나타났다. 낯익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욘석아. 인사해야지! 생명의 은인에게!” 라이즈 하이메르다. 그녀의 옆엔 그녀의 딸인 크라이아가 두려운 얼굴로 김성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크라이아는 뭔가 결심한 듯 입술을 꾹 다물더니 김성철에게 다가가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대원수님.” 아무것도 아닌 인사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사자인 김성철은 크라이아가 자신의 의지로 자신에게 먼저 다가서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스쳤다 사라졌다. “아델화이트를 쫓고 있다며?” 라이즈 하이메르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엔 처음 만났을 때의 영리한 눈빛이 번득이고 있었다. 김성철은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며 솔직히 말했다. “…그게 쉽지가 않군.” 과거의 앙금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다. 그것은 흉터와 같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하지만 그런 흉터마저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는 것이 현재의 김성철이다. 라이즈 하이메르는 그런 김성철이 과거와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는 걸 발견했다.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을까. 여성의 육감일까, 라이즈 하이메르는 김성철을 변화시킨 존재를 한 번에 추리해내고 미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그 책, 당신에게 소중한 존재인 모양이지?” 그 물음에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우리보다 더?” 라이즈 하이메르가 은근히 기대하며 말했다. 김성철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닌가? 진짜 양심도 염치도 없군.” 이에 라이즈 하이메르는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그녀는 크라이아를 부여잡고 한참 동안 깔깔 웃었다. 오랫동안 본적 없는 그녀다운 유쾌한 웃음이었다. “하긴, 천하의 몹쓸 년인 내가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네.” “자각은 하는 모양이군.” 베르텔기아와 마라키아가 있었으면 농담 한두 마디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그럼 이 몹쓸 년이 은혜를 갚을 시간이네.” 라이즈 하이메르의 표정이 바뀌었다. 유쾌한 미소는 사라지고 뭔가를 각오한 듯한 결연한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 113. 추적 (2) “그 종이엔 아홉 개의 신의 던전의 좌표를 적어놓았어. 차원학파의 마법사들이 보여주면 알 거야. 그나저나 힘들었어. 굳은 머리 쥐어 짜내면서 간신히 기억해냈거든.” “신의 던전이라.” 김성철은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라이즈 하이메르를 크롬갈드의 속박으로부터 해방했을 때 그녀는 크롬갈드의 목적이 신의 던전을 해방해 불멸자가 되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달랐다. 크롬갈드의 진의는 황제의 죽음과 맞바꿔 알아냈다. 크롬갈드는 불멸자 따위에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크롬갈드가 원하는 것은 비어 있는 다섯 번째 주신의 자리. 라이즈 하이메르는 비록 오랜 기간 크롬갈드 밑에 있었지만 중요한 비밀에 접근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좋은 의도로 김성철에게 신의 던전의 좌표를 알려줬지만 김성철이 보기에 그것은 그다지 의미없는 정보로 보였다. 대신 김성철은 직접 자신이 원하는 것을 라이즈에게 물었다. “혹시 다섯 번째 주신에 대한 정보는 본 적이 없나?” “다섯 번째 주신…?” 아니나 다를까 라이즈 하이메르는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짓는다. “…역시 그자는 너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군.” “거기까지는 알 수 없어. 그는 내게 신의 서를 주고 해독을 시켰을 뿐, 자신의 계획에 대해선 하나도 말해주지 않았거든. 하지만 나는 그가 신의 던전에 있을 거라고 확신해.” 라이즈 하이메르는 단호하게 말했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어떤 근거로?” 라이즈는 잠시 입술을 다물고 뭔가를 생각했다. 한동안 그녀는 두 주먹을 가볍게 쥐고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과거를 더듬어나갔다. 크라이아는 지루함을 느꼈는지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고 옆의 풀밭에 다소곳이 앉았다. “어릴 땐 그저 그 사람이 주는 대로 신의 서를 해석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거기에도 우선순위라는 게 존재하고 있었어.” “우선순위라.” “신의 서는 귀한 물건이거든. 물량은 그렇게 많지 않았어. 한 달 내내 시시껄렁한 전단지 하나를 해석한 적도 있었지. 하지만, 가끔 아에게로부터 대량의 신의 서가 올 때가 있어. 당신이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투기장 단골인 내가 오랫동안 얼굴을 비치지 않은 때가 있을 거야.” “가끔 있었지.” “그때가 내겐 제삿날과 같은 날이었지. 수십 개에 달하는 신의 서를 일일이 해석해야 했어. 하지만, 그 많은 신의 서 중에도 우선순위라는 게 있었어.” “우선순위?” “딱히 문서나 규칙으로 정해둔 건 아니지만, 크롬갈드는 지나가는 말로 내게 말했거든. 신의 던전에 관한 것이 있으면 그것부터 해석해서 그 결과를 자신에게 보고하라고.” “그래서 크롬갈드의 목적이 불멸자가 되는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군.”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상한 느낌이 들어. 내가 알기로 그는 이미 승천이 멀지 않은 필멸자거든. 그 정도 힘을 지니고 있다면 던전 하나를 클리어하는 것만으로 그는 승천하여 불멸자가 될 수 있어.” “…….” 크롬갈드의 정확한 능력치에 대해서 김성철이 아는 바는 없다. 하지만 그는 수천 년 동안 전생을 반복하며 이 세계의 역사를 쥐락펴락한 흑막이다. 라이즈 하이메르가 말한 것처럼 아주 약간의 계기만 있더라도 승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기르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하더라고. 분명 던전 하나만 해결해도 불멸자가 될 수 있었을 건데 그는 왜 악착같이 모든 신의 던전의 정보를 모으고 아신들이 남긴 유물과 아티팩트, 영혼각인의 수집에 열을 올렸는지.” 라이즈 하이메르의 영리한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렀다. 이윽고 그녀는 뭔가를 떠올렸는지 손뼉을 가볍게 치고는 김성철을 흥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쩌면 크롬갈드는 때를 기다린 게 아닐까?” “때?” “승천이 불가능한 세상을.”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한 생각이다. 하지만 그녀의 추측은 잠자코 대화를 듣던 55호에 의해 확실한 것으로 굳어졌다. “이 여자의 말이 맞아요. 지금은 승천이 불가능해요. 고대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균형의 일부가 무너졌거든요.”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의 뇌리에 황제의 최후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황제는 말했다. 고대신과 크롬갈드 사이엔 모종의 협약이 있다고. 고대신도 크롬갈드와 어떤 밀약이 있다는 것을 전투 중에서 암시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김성철의 입에서 얕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확실치는 않다. 하지만 죽음의 낙진 같은 두꺼운 안개 속에서 무언가 빛이 스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크롬갈드가 가려는 다섯 번째 주신으로 향하는 길. 그 중간엔 신의 던전이 있다. 라이즈 하이메르의 추론엔 그 과정에서 비약과 생략이 포함되어 있지만 크롬갈드가 향할 곳이 신의 던전이라는 것은 정확하게 맞춘 것이다. 그걸로 방향은 정해졌다. 김성철은 즉시 마녀의 오두막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차나 한잔하고 가도 될 텐데.” 라이즈와 크라이아는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들은 작게나마 김성철이 그들에게 베푼 은혜를 갚고 싶어 했다. 그 마음만으로 충분하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라이즈 모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에게 평생에 걸쳐 갚으려고 해도 갚기 어려운 은혜를 입었다. 세월을 통해 뻔뻔해지는 법을 어느 정도 익힌 라이즈는 그렇다 치고서라도 크라이아는 김성철이 말도 없이 훌쩍 떠난 이유를 알고 상당히 괴로워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김성철에게 약간의 물이 든 작은 물병을 선물했다. “이걸, 받아주세요.” 김성철은 물병을 받아들며 물었다. “이게 뭐지?” 그 물음엔 라이즈가 대신 대답했다. “세계수의 묘목에 맺히는 이슬을 모은 물병이야. 당신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였는지를 알게 된 후에 크라이아는 매일 새벽 세계수 앞에서 이 이슬을 모았지. 장로가 말하는데 세계수의 수액보다 이쪽이 효과가 좋대.” 귀한 물건이다. 김성철은 기꺼이 크라이아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그 답례로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황금 오리다. “이걸 받아다오.” “이건?” 예쁘기는 하지만 두 동강이 난 황금 오리를 받아들고 크라이아는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김성철은 희미하게 웃으며 크라이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목욕할 때 옆에 띄워놓으면 기분이 좋아져. 지금은 보기 흉하긴 하지만, 언제 다시 이곳에 돌아오면, 이것들을 붙여주지.” 굳이 부서진 황금 오리를 선물한 이유는 내일을 기약하기 위해서다. 불확실한 세상 속에 라이즈 모녀에게 그보다 큰 선물은 없으리라. 김성철은 그렇게 다시 마주한 과거의 인연들과 담담하게 작별을 고했다. 다시 마녀의 오두막으로 돌아오자 55호가 입을 열었다. “아버님의 의식이 점점 돌아오고 있어요. 아마도 가까운 시간 내에 당신과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예요.” “이제 딱히 그 양반과 할 이야기는 없는데.” 추악하기 짝이 없던 에크하르트의 피조물의 모습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단순한 인형이 아니다. 에크하르트의 일부분을 반영한 거울이다. 집착과 열등감이 빚어낸 괴물. 에크하르트는 자신이 만들어 낸 내면의 괴물을 이겨내기는커녕 마주하지조차 못했다. 그의 한계는 명확하다. 그런 자의 의견을 따를 수 없다. 55호는 그런 김성철을 옆에서 지켜보며 약간은 심통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라그란제에서보다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요.” “그렇게 내버려두진 않겠다.”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하며 김성철은 호피 무늬 스카프로 그의 코와 입을 가렸다. 잠자코 있던 아무개도 스카프로 호흡기를 가렸다. 김성철은 아무도 남지 않은 쓸쓸한 빈집을 뒤로하고 황색의 낙진 안으로 들어갔다. * 다시 실피드로 돌아온 김성철은 라이즈 하이메르에게 받은 좌표를 타이곤 일행에게 넘겼다. 차원학파의 마법을 익힌 신관은 라이즈가 불러 준 좌표의 정밀도와 세심함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그야말로 완벽하군요. 차원학파 마법의 전문가가 기록한 게 틀림없습니다. 이렇게까지 안정된 좌표는 인간제국 제국함대의 항해지침에서도 찾아볼 수 없거든요.” 다른 건 몰라도 라이즈 하이메르의 꼼꼼함과 일처리는 김성철도 인정하는 바다. “일단, 아에게로 가주시오.” “아에게라. 그 멸망한 상인연합의 도시 말이군.” 타이곤은 즉시 부하들에게 아에게로 향할 것을 명했다. 수많은 신관들이 영창을 하면서 마법진이 실피드 전역을 감싸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팔 가라즈를 들고 갑판으로 통하는 문 옆에 서서 차원이동이 끝나길 기다렸다. 곧 차원문이 열리며 실피드를 삼켰고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흐름이 지나간 후, 또 다른 세상이 김성철 앞에 펼쳐졌다. 파란 하늘과 그 아래 펼쳐진 금빛 바다. 실피드는 한 번에 아에게 공역에 오는 데 성공했다. 신관들이 웅성거렸다. “대단하군. 완벽한 좌표야.” “하지만 경계를 늦춰선 안 되겠지. 이곳엔 이단의 그림자가 깔린 곳이니.” “…이제와서 무슨 이단 타령이야. 경계나 똑바로 서자고..” 신관들의 두런거리는 말소리를 들으며 김성철은 금빛 바다 위에 우뚝 선 신의 던전을 눈에 담았다. “잠시 다녀오리다.” 김성철은 타이곤에게 말한 뒤 신의 던전을 향해 날아갔다. 두 번째로 선 신의 던전. 아에게히오스. 김성철이 앞에 서자 거대한 던전의 문이 스스로 열렸다. 김성철은 기꺼이 던전의 초대에 응했다. 빛나는 문 너머엔 황소의 머리를 지닌 거대한 사내와 만 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내 그리고 왜소하지만 여전히 두 눈에 형형한 기운을 머금은 노인이 김성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어, 부수는 자.” 이름 없는 노인이 먼저 말을 걸었다. “아니, 이제는 신의 반쪽이라 해야 하나. 그 꽉 막힌 머저리 알레옥고스를 때려죽였으니 말이야.” 그는 모든 걸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김성철은 멋쩍게 웃으며 간단한 인사치레를 한 후 곧 본론으로 넘어왔다. “혹시 이곳에 한 사내가 찾아온 적이 있습니까?” 김성철의 물음에 이름 없는 노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으며 두 눈을 번득였다. “승천하지 못한 자 말인가?” “승천하지 못한 자? 혹시 크롬갈드를 말하는 겁니까?” 김성철의 물음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기막힌 시기에 왔지. 알레옥고스가 자네에게 죽임당하고 초월세계와 현실세계의 경계가 무너진 직후, 그는 이곳에 찾아왔어. 그리고 단 하루 만에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이곳을 유유히 떠났어.” “단 하루 만에?” 말이 되지 않는다. 신의 도구였던 김성철조차 아에게히오스의 모든 시련을 해결하는데 2주일이란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크롬갈드가 뛰어난 존재라고 해도 결국 그 본질은 필멸자. 하급 시련은 모를까 상위의 시련은 그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다. 설령 그에게 필멸자 이상의 힘과 잠재성이 있다고 해도 던전의 시련 해결엔 필연적으로 시간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김성철은 이름 없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언으로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름 없는 노인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누군가 그자를 돕고 있어. 아주 거대한 존재가.” “…….” 김성철은 고대신의 꺼림칙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뒤이어 이름 없는 존재가 말했다. “그 크롬갈드라는 자는 모든 걸 알고 있더군. 신의 던전에 숨겨진 모든 비밀을. 그는 선택받은 자의 길을 알고 있었어.” “선택받은 자의 길?” 김성철의 물음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탄식하며 말했다. “신은 모든 면에서 공정했고, 또 공정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신도 자신이 아끼는 존재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지. 그 결과 가장 공정해야 할 신의 던전에도 떳떳하지 못한 은밀한 길이 만들어졌어. 그것이 선택받은 자의 길이지.” “…….” 침묵 속에서 이름 없는 사내는 계속해서 말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질서신 엔키아두스는 신이 가장 아끼는 존재였거든. 신은 그 이외에 다른 자가 질서신이란 자리에 오르는 걸 원치 않았어. 그의 라이벌 시드미아는 능력은 준수했으나 신이 생각하는 질서와는 거리가 먼 포악한 성격의 소유자였거든. 뒤이어 주신이 된 자들도 비슷한 길을 걸었지. 단 한 명, 혼돈신 쿤키두를 제외하고.” “그나마 혼돈신이 가장 능력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아무튼, 선택받은 자의 길을 아는 존재가 크롬갈드에게 그 길을 알려준 게 분명해. 크롬갈드는 그 쉽고 편한 길을 통해 너무나도 쉽게 이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을 얻어갔지.” “…소환 궁전과 똑같군.” 김성철이 빈정거렸다. 하지만 이름 없는 노인은 김성철의 말에 즉시 반발하듯 말했다. “엔키아두스는 변하기 전엔 대단한 사람이었어. 교정 불가능할 정도로 삐뚤어진 나조차 그가 질서신이 되는 게 맞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에겐 신성이 없었지.” “신성? 창조와 파괴의 힘 말이요?” 김성철의 물음에 이름 없는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성이란 건 그런 것만이 있는 게 아니야. 그것은 신성 중 신의 권능에 불과한 것이고 신성의 근저엔 변하지 않는 영원성이란 게 자리 잡고 있지. 그 영원성을 지닌 신은 필멸자에게 그것이 결핍된 속성이라는 것을 몰랐고 잘못된 방법을 택한 것뿐이야.” 노인은 김성철처럼 거의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지만 김성철은 그 짧은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노인은 여전히 진심으로 신을 섬기는 신의 종복이라는 사실을. ‘변하지 않는… 영원성이라.’ 김성철은 속으로 그 말을 음미했다. 아무튼, 아에게히오스에서 결정적인 정보를 얻는데 성공했다. 하나는 크롬갈드의 현재 목적이 신의 던전을 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크롬갈드는 어떤 던전도 가볍게 공략할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남은 신의 던전은 8개. 한편 세상이 붕괴한 지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이다. 시간은 남아 있다. 다른 던전으로 즉시 향할 수 있는 수단 또한 있다. 서두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김성철은 던전을 떠났다. 이름 없는 존재는 조용히 눈으로 김성철을 배웅했다. ‘지금 그 마음, 변치 않길 바라네. 신의 무게를 등에 진 자여.’ 고대의 존재가 지켜보는 가운데 붉은 공선 실피드는 차원의 문 너머로 사라졌다. ======================================= 113. 추적 (3) 사냥꾼이 사냥을 할 때엔 크게 두 개의 방법이 있다. 하나는 직접 사냥감을 찾아 쫓는 것이다. 사냥감이 남긴 흔적, 특히 배설물을 따라 사냥감의 경로를 추적하여 포착해 시위를 당긴다. 다른 하나는 직접 사냥감을 쫓지 않고 사냥감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사냥감의 습성과 행동을 미리 알고 그것을 이용해 함정을 파고 사냥감이 걸려들게 기다린다. 각각의 사냥법엔 장단점이 있고 노리는 대상도 다르다. 김성철은 크롬갈드라는 사냥감이 대단히 영리하고 높은 기동력을 가진 건 물론 아직 알려지지 않은 비밀을 많이 숨기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쉬운 사냥감이 아니다. 억지로 쫓다가는 놓쳐버릴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김성철은 재빠른 사냥감을 몇 번이고 놓쳐버린 경험이 있기도 하고. 그는 엘프 궁수처럼 기민하기보다는 한 방의 강한 힘에 의존하는 전형적인 전사다. 그런 그가 약삭빠르고 교활한 크롬갈드를 어떻게 잡을지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을 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장고 끝에 김성철은 방법을 정했다. 9개의 던전. 김성철은 그중 아에게를 시작점으로 해 시계방향으로 각 던전을 돌기로 했다. 거기서 김성철이 노리는 것은 아직 크롬갈드가 방문하지 않은 던전이다. 우연한 기회에 크롬갈드와 만난다면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겠지만 김성철은 행운을 기대하기보다는 아직 크롬갈드가 방문하지 않은 던전에서 함정을 파고 그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김성철은 3개의 던전을 돌았다. 마력과 힘, 민첩을 상징하는 던전이었다. 깊이 파묻혀 있던 던전들은 지면 아래 혹은 까마득한 호수 밑이나 부글부글 끓는 용암을 뚫고 나와 압도적이고 경이로운 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크롬갈드는 그 모든 던전을 이미 공략했다. 아주 쉽고 편한, 선택받은 자의 길을 향해. 김성철은 그 3개의 던전 중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드워프 왕국 수도에 출현한 던전을 보면서 종말교단의 잔당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질서신 패거리가 파묻어 놓은 던전을 출현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김성철은 다인크래프트를 종용하던 사라사 제로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를 따르는 두 권의 책에 물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55호가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세계의 균형이 무너져 던전을 구속하던 결속이 약해졌고, 이 세상을 유지하는 아버님의 영향력이 점점 사라지기 때문이에요.” 뒤이어 49호가 덧붙였다. “…균형이 무너진 것만으로도 던전을 해방하려는 무리는 전과 비교할 수도 없이 수월하게 던전을 해방할 수 있지만, 그것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아버님의 약화예요. 굳이 인간들이 던전을 해방하려 하지 않아도 스스로 봉인이 풀려 본 모습이 드러나게 생겼거든요.” “그런가?” “아버님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 거 같은데, 단단한 착각이에요. 아버님은 음지에서 이 위태로운 세상이 안정된 반석 위에서 움직이도록 누구보다 간절히 소망하며 자신을 희생해왔어요.” 그러면서 55호는 다시 한번 은근히 김성철에게 에크하르트를 만나야 한다는 걸 암시했다. 김성철은 그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실피드의 다음 행선지는 대륙 북동쪽의 끝자락이다. 그곳엔 9대 능력치 중 체력을 관장하는 신의 던전이 자리 잡고 있다. 신관들은 쉬지 않고 이어진 강행군에 적잖이 지친 상태였지만, 분발해서 김성철과 실피드를 원하는 지점까지 이동시켰다. 하지만 신관들은 녹초 상태다. 마나 포션과 영양제를 먹고 어떻게든 버텼지만, 하루 정도는 푹 쉬어야 할 것으로 보였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궁극 요리인의 솜씨를 발휘해서 저 친구들의 기운을 북돋아야겠어.’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함교를 나섰다. 눈과 얼음, 바위만 무성한 황량한 땅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영구동토의 땅, 후단. 대륙 북부가 대체로 황량하지만, 대륙 북동쪽 끝은 이상하리만치 생명의 기운이 옅은 땅이었다. 동쪽에 치우친 지형이지만 죽음의 낙진은 여기까지 닿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걸 얼려버리는 매서운 북풍이 불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낙진이 없더라도 눈조차 내리지 않는 이 얼어붙은 사막은 마물조차 살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한 지형이다. 김성철은 남작을 타고 언 땅 위에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 신의 던전은 하나같이 경이로울 정도의 규모를 지니고 있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는데 이곳엔 던전은커녕 작은 오두막 하나 찾아보기 어려웠다. ‘뭐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라이즈 하이메르가 위치를 오기했을 경우. 다른 하나는 보다 희망적이다. 그것은 바로 아직 크롬갈드 패거리가 이쪽에 이르지 않았을 경우다. 그런데 현 상황만 놓고 보면 전자 쪽에 무게가 실린다. 55호와 49호가 말했듯이 에크하르트의 힘이 하루가 다르게 약해지는 지금, 신의 던전의 봉인은 이미 스스로 풀리고 있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흔적, 특히 던전을 억누르던 부유석 같은 것들이 있어야 하는데 이곳 후단의 땅에선 작은 부유석 덩어리 하나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신의 던전은 없는 것 같아.” 아무개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김성철의 생각도 아무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타이곤도 같은 생각이었다. “여긴 아무것도 없는 거 같으니 다른 곳부터 도는 게 좋은 생각인 것 같소.” 김성철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지금 신관들은 한계에 이른 상태다. 당장 그들을 채근하면 하나의 던전 정도는 더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곳으로 간다고 해서 좋은 결과를 얻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또 김성철은 라이즈 하이메르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인간 됨됨이는 둘째치고 그녀의 꼼꼼하고 세심한 솜씨는 슈넬메르커와 같은 화려하고 정려한 구석은 없었지만 언제나 핵심을 향했고 무엇보다 거의 실수하지 않았다. ‘오늘만 벌써 세 군데를 돌았다. 남은 곳은 다섯 곳. 간 곳보다 가야 할 곳이 더 많다.’ 아직은 힘을 아낄 데다. 나중에 있을 전력질주를 위해서도 말이다. 김성철은 라이즈에 대한 믿음과 장래에 대한 대비를 염두에 두고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는 걸로 결정지었다. 다만, 김성철은 실피드를 보이는 곳에 정박시키는 대신, 험준한 바위 산맥 중에 잘 은폐되도록 정박했다. 북풍으로부터 실피드를 고정하기 위한 쇠사슬과 삭구는 김성철이 홀로 도맡아 설치했다. 중간부터 49호가 김성철의 작업을 도왔고 55호는 끝까지 에크하르트 타령만을 하다가 작업의 막바지에 밧줄 하나를 책장으로 물어 김성철에게 배달했다. 김성철은 이 책들이 그렇게 얄밉지만은 않은 존재라는 걸 느꼈다. 특히 49호는 생각보다 괜찮은 아이였다. 실피드의 고정을 마친 김성철은 남작을 타고 해안가로 향했다. 이 땅의 대지엔 살아 있는 생물이 거의 없지만 유빙을 곳곳에 품고 있는 바다는 다르다. 먼 북쪽 마계로부터 내려오는 따뜻한 해류 속엔 풍부한 영양이 스며들어 있고 그것들은 풍부한 어족 자원을 잉태하는 역할을 한다. 김성철은 바위에 어떤 짐승의 가죽을 깔고 앉아 낚싯대를 드리웠다. 출렁. 바늘이 바다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찌가 격렬하게 움직였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힘이 범상치 않다. 만만치 않은 놈이다. 하지만 김성철에겐 마계 최전선에서 갈고 닦은 낚시 실력이 있다. 그는 줄이 끊어지지 않게 낚시감을 놓아주고 당기기를 반복해 힘을 빼고 마침내 녀석이 힘이 다했을 때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생선을 끌어올렸다. 대물이다. 팔뚝만 한 생선이 바늘을 물고 딸려 올라와 출렁거렸다. 알을 잔뜩 밴 대구다. ‘대구탕이 땡기는군.’ 김성철은 입안에 침이 맺히는 걸 느끼며 가볍게 생선의 머리를 후려쳐 기절시킨 후 바구니에 담았다. “이게 낚시라는 건가요?” 김성철을 지켜보던 49호가 그의 뒤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렇다.” 김성철은 바늘에 미끼를 끼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풍덩. 미끼를 끼운 바늘이 가볍게 날아가 검푸른 바다 위로 떨어졌다. 김성철은 편한 자세로 앉아 물고기가 낚싯대를 물기 기다렸다. 49호는 그런 김성철이 신기한지 가만히 그의 뒤를 지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찌가 다시 움직였다. 김성철은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줄을 당기고 놓아주기를 반복해 또 한 마리의 낚시감을 건져 올렸다. 큼지막한 문어다. “고대신의 종복처럼 생겼네요.” 49호가 뒤에서 중얼거렸다. 김성철은 희미하게 웃으며 낚시를 계속했다. 49호는 그런 김성철의 뒤를 지키며 물끄러미 그의 낚시를 지켜보았다. 바구니에 낚시감이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찌가 다시 한번 움직였다. 김성철은 뒤를 돌아 49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 번 해볼래?” “네? 제가요?” 49호가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낚싯대를 49호에게 넘겼다. 49호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책장으로 낚싯대를 물었다. 낚싯대를 잡고 있던 김성철이 손을 놓는 순간 49호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낚시감이 강하게 반항을 시작한 것이다. 끌려다니던 49호는 짧은 탄성을 지르더니 이내 자세를 잡고 낚시감의 저항에 맞서기 시작했다. “쉽지 않네요.” “세상에 쉬운 일은 없지.” 49호는 여러 차례 끌려다니다 제 성질을 못 이기고 확 낚싯대를 잡아당기려고 했다.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낚싯대를 잡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힘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란 얼마든지 있거든.” 김성철은 낚싯대를 잡고 느슨하게 줄을 풀어주었다. 낚시대에 가해지는 힘이 어느 정도 사라지자 김성철은 낚싯대에서 손을 놓으며 말했다. “이제 한 번 당겨 봐. 천천히, 녀석을 자극하지 말고.” “흐음.” 49호는 김성철이 시키는대로 했다. 반항하던 낚시감은 천천히 49호가 이끄는대로 당겨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낚시감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김성철은 격렬히 흔들리며 물 쪽으로 향하는 찌를 보며 말했다. “다시 한번 놓아줘. 녀석이 힘이 빠지게.” 49호는 시키는대로 했다. 한 번 가르쳐줬을 뿐인데 요령이 금세 늘었다. 그걸 본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녀석, 베르텔기아보단 똑똑한 건 확실하군.’ 잠시 후, 49호는 외마디 기합을 외치며 힘껏 낚싯대를 끌어 당겼다. 첨벙. 물보라를 튀기며 튀어 오른 낚시 바늘 끝엔 힘차게 움직이는 대구 한 마리가 낚여 있었다. 월척이다. 지금까지 낚은 어떤 녀석보다. 49호는 자신의 사냥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좀처럼 눈을 뗄 수 없는 모양이다. 마법도, 병기도 아닌 순수한 자신의 요령과 힘으로 잡은 사냥감에서 말이다. 김성철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리를 정리했다. 요리 재료는 충분히 확보했다. 남은 건 마력 및 기력 부족에 시달리는 신관들을 위한 요리를 만들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뿐이다. 김성철이 정리를 어느 정도 마무리를 지을 때였다. 49호가 바구니에 자신이 낚은 대구를 담으며 말을 걸어 왔다. “그 아이랑 지낼 때도 매일 이렇게 보냈나요?” “베르텔기아를 말하는 건가?” “네, 일단 저도 베르텔기아 타입이긴 하지만.” “뭐, 매일 이렇게 한가하게 낚시나 하며 시간을 죽인 건 아니야. 주로 녀석은 내게 잔소리를 해대는 타입이었지. 시어머니도 그런 시어머니가 없을 거야.” “시어머니라.” “뭐, 그래도 녀석이 있기에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겠지.” “그 아이에게 그런 힘이 있나요? 그럴 리가. 그 아이는 능력이 그다지 뛰어난 타입이 아닐 텐데.” 49호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김성철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이 아니야.” “그럼 뭔가요?” 49호가 캐묻듯 물었다. 김성철은 바구니를 들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음. 뭐라고 해야 하나.” 딱히, 꼬집어 말한 단어를 떠오르지 않는다. 베르텔기아는 베르텔기안데 뭘 더 설명하란 말인가. 김성철은 한참이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다가 궁색하게나마 하나의 단어를 찾아냈다. “인연이라고 해야 하나.” “인연?” “뭐 그런 거야. 서로 간의 믿음, 유대, 공감…. 너도 저쪽에 삐쳐 있는 55호한테 느끼는 감정 같은 게 있을 거 아니야?” “55호요? 쟤는 모두가 싫어해요. 아무도 걔를 좋아하지 않아요. 아, 아버님은 빼고요.” 49호의 말은 확고했다. “그래? 어쩐지 그럴 거 같더니. 아무튼, 굳이 저 녀석이 아니더라도 너도 뭐 친구나 그런 건 만들어 봐. 그럼 너도 느낄 수 있겠지. 내가 설명하려는 무언가를 말이야.” “흐음.” 49호는 뭔가 내키지 않는 듯한 태도였지만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김성철은 어째서인지 이 장면이 낯설지 않다는 감각을 느꼈다. 또 김성철은 그리움 비슷한 희미한 감각 또한 느꼈다. 기이한 일이다. 그가 49호를 만난 적은 이전에 따로 없었을 터인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이 순간이 과거의 한 장면이 되풀이되는 듯한 그런 느낌이 자꾸만 드는 것이었다. 남작을 타고 실피드로 향하면서 김성철은 그 묘한 감정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생각했다. 기억의 근저를 헤매던 중 김성철의 생각은 금기시 된 영역까지 닿았다. 의식의 구석에 홀로 서서 자신을 노려보는 존재. 검은 거인. 놀랍게도 아까의 그리운 듯한 감정은 검은 거인에게서 은은히 나오고 있었다. “…….” 그 무렵 남작이 은폐된 실피드에 도착했다. 김성철은 잡념과 같은 생각을 털어버리고 고생한 신관들을 위한 요리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선보이는 솜씨, 그는 자신만이 만족할 수 있는 요리 대신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요리를 만들었다. 주방에 남은 재료와 영혼창고 안의 향신료, 신선한 해산물 섞어 걸쭉한 스튜를 끓여낸 것이다. 그 요리에 대한 평가는 열광적이었다. 신관들이 탄성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가운데 김성철은 한 걸음 뒤에 물러나 벽에 기대서 자신의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은근히 드러냈다. 그런데 뭔가 심심하다. 평소 같았으면 토를 다는 베르텔기아가 있었을 텐데. 김이 빠진 김성철은 갑판에 올라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낙진도 전장의 기운도 없는 청명한 밤하늘. 가슴 한구석이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김성철은 품속에서 술병을 꺼냈다. 한 모금 마시고 피로와 시름을 훌훌 털어버릴 요량이다. 그가 술을 마시려고 할 때 먼 하늘에서 뭔가 번쩍였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공선이다. ======================================= 114. 덫 (1) 어둠 속에 내려앉은 공선 쪽에는 한동안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탐색 중인 모양이군.’ 정중동. 소속 불명의 공선에선 일견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이면으론 치열한 정탐과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곧 수십 개의 이르는 주시자의 눈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인근 지역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그 중 일부는 실피드 쪽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하급 사역마들은 고도의 기만술을 펼치고 있는 실피드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갔다. 주시자의 눈들이 지나간 후 비로소 공선 쪽에서 눈에 띠는 움직임이 보였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구세병과 부유군도 그리고 종말교단의 무리들이다. 이걸로 저 공선이 크롬갈드 패의 것이라는 건 확실해졌다. 그들은 간이 기구를 타고 지면으로 내려가 주변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정탐했다. 그들의 신중한 탐색은 동녘에 여명이 서리기 전까지 계속됐다. ‘대단히 신중하군.’ 그 장면을 본 김성철은 크롬갈드의 움직임이 상상한 것만큼은 빠르지는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김성철에게 크롬갈드가 잡기 어려운 사냥감이지만 크롬갈드 측으로도 김성철은 대적할 수 없는 적수이기 때문이다. 자연히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최고도의 경계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그것은 자연스레 시간의 지체로 이어진다. 아침 해가 떠오르자 부유군도 공선에서 한 무리의 마법사들이 지면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구역을 맡아 갖가지 결계를 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 거야?” 곁에서 크롬갈드 패의 동정을 함께 살피던 아무개가 물었다. “…일단은 기다려보자고.” 아직까지 나타난 건 피라미에 지나지 않는다. 대어는 그들이 안전하다고 믿을 때 비로소 나타날 것이다. 김성철은 차게 식은 자신의 요리를 먹으면서 크롬갈드 패거리의 행동을 주시했다. 크롬갈드 패는 자신의 공선을 중심으로 반경 10킬로미터에 이르는 넓은 영역에 경계망을 구축했고 여기저기에 천리를 감시할 수 있는 주시자의 눈들을 배치했다. 이 척박한 대륙 북동쪽의 끝자락, 혹한을 머금은 바람이 휘몰아치는 곳에서 크롬갈드의 부하들은 조금도 흐트러지는 기색없이 맡은 바 임무를 수행했다. 많은 병사들을 거느려온 김성철은 저 자들이 크롬갈드의 병사 중 가장 충성스러운 정예라고 짐작했다. ‘그 많은 부하 중 추리고 추린 녀석들이겠지.’ 능력면에서 그들은 김성철의 상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에겐 의지가 있다. 그 방향이 잘못된 곳을 향하고 있을지라도 맹렬한 의지는 의외의 변수를 일으킨다. 김성철은 그들을 지금까지 상대한 어떤 적보다 신중하게 상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정오에 이르자, 김성철은 그들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하늘 위에서 거대한 독수리가 나타났다. 멀리서 볼 때 그것은 마계에 서식하는 괴조처럼 보였으나 시간이 흐르자 괴조 따위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크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것은 괴조가 아니라 아신이었다. 초월세계를 떠돌던 아신이 하계의 인간을 발견하고 흥미 삼아 하계로 강하한 것이다. 초월세계와 현실 세계의 균형이 유지될 때만 해도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거대한 독수리는 크롬갈드 패거리가 반나절 걸쳐 정성스럽게 만든 결계진의 중앙에 내려앉아 결계를 모조리 박살 내면서 착지했다. 김성철은 흥미를 가지고 과연 크롬갈드 패거리가 어떻게 저 불멸자를 상대할지 지켜봤다. 종말교단으로 보이는 검은 로브를 걸친 자들이 공선에서 내려와 아신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일제히 주문을 외웠고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불경한 스크롤을 찢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의 목숨을 건 기원은 공허한 메아리에 그쳐버린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초월세계와 현실세계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서 더 이상 아신들은 현실세계의 부름에 응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종말교단 앞에 선 거대한 독수리처럼 자기가 원한다면 언제든 하계에 내려올 수 있으니 말이다. 아신화가 실패하자 크롬갈드 패는 가진 전력을 동원해 아신을 공격했다. 그러나 필멸자와 불멸자 간 승부의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독수리 형상의 아신은 거대한 부리로 종말교단 패거리를 쪼았다. 부리에 쪼인 종말교도는 그 순간 피떡이 되어 사라졌다. 순식간에 현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아신은 공선을 파괴하고 승무원들을 죽이거나 먹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실로 참혹한 광경이었다. 아신은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를 질릴 때까지 가지고 논 이후에 자리를 떠났다. 아신이 떠난 자리엔 극소수의 생존자만이 남았다. 공선은 추락하고 승무원은 대부분 죽임당했다. 공을 들여 만든 결계진도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박살 났다. “저것이 신께서 불멸자와 필멸자 간의 세상을 구분한 이유에요.” 지켜보던 55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성철은 추락한 공선의 잔해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저렇게 격차가 나는 거지? 불멸자도 이전엔 인간이었고 승천에 필요한 능력치를 충족한다고 해도 저 정도까지 강해지지는 않을 것 같은데.” “승천을 하면 그 사람의 필멸자로서의 육체는 소멸되고 불멸자로서 새로운 육체를 받게 돼요.” “그 새로운 육체는 관리자가 정해서 주는 건가?” “그건 아니에요. 새로운 육체는 승천자의 거울. 승천한 필멸자의 개성과 능력치의 배분에 따라 천변만화의 모습으로 나타나요. 하지만, 그 새로운 육체의 힘은 필멸자에 비할 바가 아니죠.” “불멸자가 되면 힘이 보다 강해지는 모양이군.” 김성철은 그 폭을 최소 2배에서 최대 3배로 보았다. 지금까지 상대한 불멸자들을 놓고 보면 그러했다. 그 중엔 다른 불멸자와 격이 다를 정도로 강한 존재도 몇 명 있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크롬갈드 패거리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이후 영구동토에 땅엔 무거운 적막이 내려 앉았다. 김성철로서는 처음부터 관찰을 다시 해야 할 판국이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능력치 창의 배치를 놓고 보면 이곳, 동북쪽에 나타날 신의 던전이 주관하는 것은 체력. 힘, 민첩, 체력은 이계의 인간들의 강약을 결정하는 핵심 능력치들이다. 부하들이 다수 죽었다고 하나 그것만으로 크롬갈드는 이 귀중한 능력치의 상승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김성철의 추측은 또 한 번 들어맞았다. 허공 위에서 마법진이 나타나더니 새로운 공선이 등장한 것이다. 그들은 생존자와 합류하여 이야기를 전해 들은 뒤, 전임자가 하던 지루한 작업을 되풀이했다. 주변을 경계하고, 주시자의 눈을 보내고, 공을 들여 결계를 치는 짓을 또 반복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아주 멍청이는 아닌지라 이전의 경험을 그냥 흘려보내지는 않았다. 또 한 척의 공선이 나타났다. 거기엔 김성철이 잘 아는 인물이 타고 있었다. 알투지우스 제로와 그 손녀 사라사 제로. 그들은 경계결계를 구축하고 있는 부하들을 불러모아 크게 호통을 친 뒤 즉시 다른 작업을 실시할 것을 명했다. 크롬갈드 패의 움직임이 변했다. 경계 결계를 치던 마법사들은 작업을 멈추고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그들은 얼어붙은 사막 위에 마법진을 그렸다. 하늘 위에서만 원형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고 불경한 메시지로 가득 찬 마법진이었다. 그들이 의도하는 건 명백하다. 신의 던전을 불러오려고 하는 곳이다. 이 얼어붙은 땅 위에 말이다. 김성철은 차분히 그들의 의식을 지켜보았다. 김성철이 주안점을 둔 곳은 던전의 위치였다. 던전이 나타난 곳엔 여지없이 부유석이란 증거가 있었다. 김성철은 부유석을 증거로 알지 못하는 던전의 위치를 한 번에 파악했고 던전에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실마리가 없었다. 그래서 위치를 잘못 잡은 줄 알았고 하마터면 아무것도 모른 채 이곳을 떠날 뻔했다. ‘대체 던전이 어디에 있다는 거지?’ 김성철의 의문은 잠시 뒤에 풀렸다. 신의 던전은 구름 위에 있었다. 까마득한 하늘, 보이지 않는 영역에 신의 던전은 숨겨져 있었다. 마법사들이 의식의 주문을 중얼거리며 마법진에 힘을 불어넣자 창공 너머의 던전은 서서히 하강해 가시영역까지 웅대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늘 위에 숨겨 놓다니. 그래서 발견을 못한 것이군.’ 체력을 관장하는 던전은 다른 던전과 달리 거대한 부유섬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질서신과 그의 도당들은 그 던전에 가장 높이 상승하는 여러 개의 부유섬을 붙여 신의 던전을 인간의 눈으로부터 숨겨버린 것이다. 이제 신의 던전은 공선이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하강했다. 크롬갈드 패거리는 사방을 경계하며 잠시 대기했다. 뭔가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곧, 마법진이 생성되며 한 사내가 나타났다.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크롬갈드.’ 드디어 잡았다. 하지만 김성철은 서두르지 않았다. 크롬갈드가 무엇을 할 지 알고 있는 그로서는 언제가 사냥감을 습격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인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검은 로브를 걸친 아마도 핵심 심복으로 보이는 리치 여러 명을 데리고 나타난 크롬갈드는 앞서 신의 던전을 마련한 알투지우스와 사라사와 몇 마디 담소를 나누고는 바로 신의 던전으로 들어갔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루, 혹은 반나절. “언제 움직일 거야?” 아무개가 물었다. 김성철은 느긋했다. “타이곤에게 전해. 저것들의 공선 바로 옆에 이동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두라고.” 맹수들이 가장 위험한 시기는 지켜야 할 대상이 있을 때, 특히 새끼를 양육할 때다. 반대로 맹수들이 가장 취약해지는 시기는 사냥감을 사냥한 직후. 군대도 마찬가지다. 상승무패의 명성을 지닌 강군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수중에 약탈한 전리품이 가득할 땐 오합지졸만도 못한 적이 변모하기 일쑤다. 김성철은 크롬갈드와 그의 도당들이 가장 방심할 시기를 기다렸다. 바로 크롬갈드가 던전의 과제를 해결하고 나오는 직후, 그때가 최적의 시간 대일 것이다. 혹, 어설프게 지금 습격을 했다가 살아 남은 녀석이 던전에 들어가서 크롬갈드에게 그 사실을 전하면 귀찮은 일로 연결 될 수 있으니. 익히 경험한 대로 크롬갈드는 여러 개의 굴을 파놓은 토끼와 같다. 크롬갈드라는 토끼가 굴을 이용하기 전에 그 귀를 낚아채야 한다. 마음을 정한 김성철은 느긋하게 크롬갈드가 던전에서 나오길 기다렸다. 소위 말하는 선택 받은 자가 던전을 공략하는데 얼마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지 알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섞여 있었다. 반나절이 흘렀다. 불멸자는 찾아오지 않았다. 크롬갈드의 부하들은 철저한 사주경계를 서며 만에 있을 위협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었다. 숨죽일 듯한 침묵은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먼바다에서 커다란 고래 한 마리가 꼬리를 들어내며 물보라를 일으켰다. 크롬갈드의 패거리들은 거기엔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김성철의 눈엔 좋은 구경거리였다. 고래가 남긴 파문이 서서히 흩어지던 그 시점, 던전의 입구에 푸르스름한 빛이 서렸다. 그 빛을 본 김성철은 타이곤에게 즉시 명령했다. “지금 텔레포트를 실시하시오.” “준비는 이미 갖춰 놓았소!” 철저히 은폐된 실피드 주위에 마법진이 띠를 그리며 감싸기 시작했다. 영창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법진이 실피드 전역을 덮는 순간, 실피드는 짧은 거리를 이동해 거대한 신의 던전 옆, 크롬갈드 패거리의 공선 바로 옆으로 이동했다. 매의 눈으로 사주를 경계하던 크롬갈드 패거리는 반응하지 못했다. 외적이 바깥에서 올지만 알았지, 그들의 진영 중간에 갑자기 나타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깜짝 등장한 김성철의 손끝에서 체인 라이트닝의 전류가 뿜어져 나왔다. 아신화라는 무기를 잃은 크롬갈드 패거리는 크게 위협이 되는 무리는 아니지만 실피드에 남겨진 다른 승무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한 조처였다.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간 번개는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던 크롬갈드 무리의 병사들을 순식간에 쓸어버렸다. 김성철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즉시 푸른 빛이 서린 던전의 입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막아라!” “이놈!” 부유군도의 복색을 한 검사 두 명이 검을 빼들고 김성철을 막아섰으나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퍽! 퍽! 어느새 나타난 팔 가르자 앞에 두 명의 목숨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김성철은 순식간에 던전의 입구에 이르렀다. 푸르스름한 던전의 입구로부터 한 사내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크롬갈드. 아델화이트와 함께 영겁을 살아온 남자이며 나아가 다섯 번째 주신을 꿈꾸는 자.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어깨에 걸친 채 그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새로운 힘을 얻은 기쁨이 얼굴에 서려 있던 크롬갈드는 천적과 같은 사내의 등장에 입가의 미소를 싹 걷고 굳은 얼굴로 김성철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군. 방랑왕.” 체크메이트. 김성철이 말했다. ======================================= 114. 덫 (2) 덥썩. 김성철의 억센 손이 방랑왕의 멱살을 잡았다. 피할 겨를도 없었고 그럴 틈도 주지 않았다. 김성철이 멱살을 잡은 채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내 오랜 벗이 당신에게 단단히 신세를 졌더군.” 방랑왕의 눈이 휘둥그레 커진 것도 잠시. 퍽! 방랑왕의 몸이 그대로 지면에 처박혔다. 바닥에 처박힌 크롬갈드의 몸뚱이는 검은빛을 띠는 돌로 만든 포도를 박살 낸 것도 모자라 긴 자국을 남기며 저편으로 쓸려갔다. 김성철의 신형이 일순 사라진다 싶더니 김성철은 쓰러진 방랑왕의 뒤에 나타났다. 김성철의 억센 손이 다시 한번 크롬갈드를 잡았다. 이번엔 뒷덜미다. “끄으윽.” 크롬갈드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이 나왔다. 김성철이 그의 목을 부여잡은 채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그만둬라!” “뭐하는 짓이냐!” 돌연 벌어진 참사에 한동안 굳어 있던 크롬갈드의 잔당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김성철을 제지하려 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왕은 김성철의 손아귀 안에 있다. 김성철은 크롬갈드를 잡은 채 그대로 지면에 처박아버렸다. “끄으으으윽!” 크롬갈드의 준수한 얼굴에 땅에 갈리며 진한 핏자국을 바닥에 남겼다. 김성철은 이번엔 크롬갈드의 발목을 잡고 번쩍 들어 올려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쳤다.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붉은 피가 사방에 튀었다. 죽을 정도로 내려친 건 아니다. 그저 약간 손을 봐주는 선에서 힘조절을 했다. 크롬갈드는 신의 던전에서 막강한 힘을 손에 넣었지만 그러나 김성철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했다. 실제로 김성철은 주무기인 팔 가라즈조차 꺼내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완력만으로 크롬갈드를 제압했다. 김성철이 두 번째 패대기를 치기 위해 크롬갈드를 다시 들어 올렸을 때였다. “이 소환자 자식이!” “죽어라!” “저주받아 마땅할 혼종 놈!” 김성철의 뒤에서 종말교단 무리들이 검을 빼 들고 그를 덮쳤다. 하지만 김성철은 이곳의 모든 것을 머릿속에 넣어두고 있었다. 파지직! 김성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뻗었다. 이미 영창하고 있던 체인 라이트닝이 다가오는 무리들을 향해 날아가 그들을 검게 구워버렸다. “끄아아아악!” “으아악!” 처참한 단말마의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김성철은 이번에 라이즈 하이메르의 검은 지팡이를 꺼내 크롬갈드의 공선을 조준했다. 그의 코트 자락 안, 줄줄이 달린 영혼석은 크롬갈드를 두들겨 팰 때부터 어떤 주문을 영창하고 있었다. 이름하여 원시의 빛 스타라이트. 공선에 탑승한 알투지우스와 사라사는 굳은 얼굴로 김성철이 그들에게 겨눈 지팡이 끝을 응시했다. 이윽고 하얀 빛줄기가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4개의 빛줄기는 과거의 인연과 공선을 동시에 노리고 날아갔다. 그 공격엔 김성철의 단호한 메시지가 담겨 있기도 했다. 더 이상 옛 인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빛이 닿기 직전 알투지우스와 사라사는 그들을 정확히 노린 치명적인 공격을 바라보며 사라졌다. 하나의 빛줄기는 허공을 갈랐지만 나머지 3개의 빛줄기는 크롬갈드의 공선을 꿰뚫고 지나갔다. 폭음과 함께 공선은 추락했다. 크롬갈드의 발이 사라진 것이다. 김성철은 엎드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크롬갈드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이미 크롬갈드는 저항할 힘도 의지도 잃은지 오래였다. 누구나 그런 무식하고 압도적인 공격을 받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 오랜 기다림이었다. 김성철은 모처럼 잡은 기회를 허무하게 놓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크롬갈드의 부대는 괴멸됐고 그의 공선은 침몰했다. 크롬갈드 또한 인사불성인 상태로 그의 발밑에 엎드려 있다. 유일한 변수는 알투지우스와 사라사, 그리고 형형색색의 로브를 걸친 일곱 리치가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들이 크롬갈드가 거느린 부하 중에 가장 신뢰하는 충복들일 것이다. 그리고 낙하한 공선에서 예상치 못한 손님이 나타났다. “…김성철.” 옛 친우, 샤말 라지푸트다. 암살교단의 교주라는 이름은 장식만은 아닌지 라그란제의 참사에서 용케 탈출한 모양이다. 문제는 행선지가 옳지 못했다는 점이지만. 공선이 침몰할 때 파편을 관자놀이에 맞았는지 얼굴의 절반은 흐르는 피로 덮여 있었다. “김성철!” 샤말 라지푸트가 연이어 김성철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김성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김성철에게 있어 과거의 인물이었다. 김성철은 샤말 라지푸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늘 휴대하고 다니던 밧줄을 꺼내 크롬갈드의 목을 묶었다. 김성철이 밧줄을 잡아당겼다. 엎어져 있던 크롬갈드의 몸이 번쩍 들리며 가려져 있던 얼굴을 드러냈다. “크르르르르….” 크롬갈드의 얼굴의 절반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치아가 대부분 깨진 입안에선 처참한 신음과 함께 피거품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루테기네아의 건국자이자 영겁의 세월 동안 세계의 역사를 좌지우지했던 사내에겐 어울리지 않는 비참한 몰골이었다. ‘이렇게 했는데도 아델화이트는 나타나지 않는군.’ 딱히 주변에서 지켜보는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신경 쓰이는 것은 살아남은 크롬갈드 부하들의 행동이었다. 리치 중 하나가 뭔가 교신하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김성철은 그렇게 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의 일차적인 목표는 크롬갈드 따위가 아니라 베르텔기아니까. “그럼, 아델화이트가 올 때까지 당신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할까?” 김성철이 밧줄을 잡아당기자 크롬갈드는 개처럼 그에게 끌려왔다. 먼지와 피로 덮인 크롬갈드의 얼굴이 김성철의 군홧발 아래에 닿았다. 크롬갈드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두 손으로 바닥의 흙을 움켜쥐었다. 희미한 중얼거림이 피가 새어 나오는 입에서 흘러나왔다. 김성철은 그 말의 일부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신의 힘만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놈이.”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크롬갈드의 머리카락을 잡고 그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안구 하나는 바닥에 갈릴 때 함께 갈린 모양인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나머지 하나는 부릅뜬 채 김성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을 보는 순간 김성철은 섬찟한 느낌을 받았다. 크롬갈드의 눈동자에 담긴 기운은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흉포한 야수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내. 이런 눈빛을 지니고 있었던가.’ 미처 알지 못했다. 언제나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고 간혹 민얼굴을 드러낼 때도 김성철이 본 것은 허무하고 권태감이 느껴지는 눈동자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김성철은 문득 황제의 유언을 떠올렸다. 맹약의 십자가의 불길에 휩싸였던 황제는 이렇게 말했었다. “알레옥고스는 크롬갈드의 본성을 알고 있다. 반드시 막아야 한다. 그자가… 태어나지 않은 신이 되는 것을…” 방랑왕의 섬뜩한, 마치 야수와 같은 눈빛은 황제가 말한 크롬갈드의 본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김성철의 뇌리에 하나의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대단히 위험하다. 머리로 한 생각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 김성철의 눈에 진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이 자를 살려두면 안 된다.’ 김성철은 크롬갈드를 끝내려다 가까스로 스스로를 제지했다. 하마터면 목적을 망각할 뻔했다. 크롬갈드는 토벌해야 할 대상이지만 지금 최우선 순위는 베르텔기아다. 베르텔기아를 데려간 아델화이트가 나타날 때까지 크롬갈드는 살아 있어야 한다. 김성철은 순간적으로 크롬갈드를 죽일 뻔한 살기를 가라앉히고 대신 그의 목을 움켜잡았다. 크롬갈드의 몸이 번쩍 들렸다. 이제 크롬갈드의 생명은 김성철의 손아귀 안에 있다. 약간만 힘을 줘도 방랑왕의 목뼈는 언제든 으스러질 것이다. 크롬갈드의 목줄을 움켜잡은 채 김성철은 크롬갈드의 부하들을 내려 보았다. 그런데 그들의 태도가 이상하다. 그들은 주군이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도 가만히 자리를 지킬 뿐 움직이지 않았다. 김성철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희들의 왕을 죽이겠다.” 김성철이 시험 삼아 말하며 크롬갈드를 움켜 쥔 손에 약간 힘을 줬다. 크롬갈드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고 의지와 관계없는,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나는 소리가 목구멍 밖으로 새어 나왔다. “꺼... 꺽!” 효과는 확실했다. 알투지우스 일가와 일곱 리치 뒤에 마법진이 열리더니 한 여성이 나타났다. 아델화이트. 목적 달성이다. 그런데 기대한 것과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베르텔기아, 김성철이 애타게 찾는 그 말하는 책은 어디에도 없었다. 크롬갈드의 목을 여전히 조른 채 김성철은 아델화이트를 향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베르텔기아는 어디에 있지?” 아델화이트는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성철은 이에 좀 더 강하게 크롬갈드의 목을 졸랐다. 우두둑. 목뼈가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벌벌 떨던 크롬갈드의 몸이 축 늘어졌다. 김성철 스스로도 위험하다고 생각한 임계치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델화이트는 가만히 자리에 선 채 마치 구경꾼처럼 이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델화이트 뿐만이 아니다. 크롬갈드의 심복인 일곱 리치와 알투지우스 일가도 말없이 그들의 주인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뭐지? 꿍꿍이가 있는 건가.’ 김성철은 상정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머릿속에 그렸다. 답은 곧 나왔다. 지금 그를 여기서 막을 존재는 아무도 없다. 주신마저 쓰러뜨리는 신의 힘을 지닌 그에게 누가 맞서겠는가? 아델화이트의 장기인 저주와 아직 그 위력을 직접 본 적 없는 맹독을 이용한 공격은 조금만 대비하면 쉽게 피할 수 있다. 숨 막힐 것 같은 침묵 속에서 갑자기 크롬갈드의 신형이 격하게 떨렸다. ‘아뿔싸.’ 김성철의 미간에 희미한 주름이 새겨졌다. 죽음의 경련이다. 그에 손에 들린 크롬갈드가 그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죽어버린 것이다.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여전히 아델화이트와 크롬갈드의 부하들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다. 김성철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죽은 크롬갈드의 몸에 황금빛의 신성한 빛이 서리더니 망가졌던 그의 육체가 복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부활의 영혼각인이다. “아니, 저 쓰레기 놈이 내 특기를 따라하고 있잖아!” 실피드의 함교에 있던 타이곤이 그 모습을 보고 버럭 소리쳤다. 신성한 광휘 속에서 크롬갈드가 부활하는 그 짧은 시간 속에서 아델화이트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내기를 해요.” “내기?” 김성철이 크롬갈드 주위를 돌며 물었다. 그의 손에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아델화이트의 얼굴에 짙은 우수가 떠올랐다. 한때의 벗이 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영겁을 살아온 이에게도 씁쓸한 건 매한가지이리라. 서글픈 얼굴로 아델화이트는 말을 이었다. “제가 지목하는 사람과 결투를 하세요. 그를 이긴다면 리빙북, 아니 베르텔기아라는 아이를 당신에게 돌려드리죠.”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실소를 터뜨렸다. “내가 왜 그 제안에 응해야 하지?” 김성철은 부활 중인 크롬갈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질이라면 그에게도 있다는 걸 아델화이트에게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그때 뒤에 가만히 있던 크롬갈드의 부하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그를 본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알투지우스.’ 그의 마법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사내가 손을 까딱였다. 그는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김성철의 결투 상대라는 것을. ‘사제대결을 하자는 건가.’ 알투지우스가 강력한 마법사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전에도 김성철의 상대가 아니었고 신의 힘을 얻은 지금은 더더욱 아니다. 뭘 믿고 나서는 것일까. 복수심? 신념? 아니면 객기? 뭐든 좋다. 김성철은 아델화이트 쪽을 노려봤다. 특별한 움직임도 없고 초조함도 없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좋다. 비장의 수는 김성철도 가지고 있으니까. 각자가 서로의 수를 숨기고 노려보는 동안 크롬갈드의 몸을 덮고 있던 황금빛 광휘가 사라졌다. 김성철은 크롬갈드가 죽음에서 돌아오자마자 억센 손으로 다시 붙잡았다. 크롬갈드의 눈이 부릅떠지는 순간, 김성철이 억센 손이 크롬갈드의 어깨를 으스러뜨렸다. “으아아아악!” 크롬갈드는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김성철은 계속해서 남은 팔과 다리를 적당히 망가뜨렸다. “으아아아악!” 크롬갈드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소처럼 울었다. 꼴사나운 광경이었다. 김성철이었다면 비명은커녕 눈썹에 작은 미동 하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정도 고통은 투기장의 지하, 어두컴컴한 고문실에서 매일 같이 가해지던 참혹한 고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긴, 이 녀석은 지난 수천 년간 막후의 왕으로 군림하며 세상을 좌지우지했을 테니, 이런 고통 따위 맛볼 일은 없었겠지.’ 팔다리가 모두 으스러진 크롬갈드는 바닥을 기며 입술을 씹었다. “용서하지 않겠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크롬갈드의 눈빛에 자리 잡은 야수성은 줄기는커녕 더욱 흉포하고 맹렬해졌다. 그 눈빛을 본 순간, 김성철은 마음을 확실히 정했다. 어떤 결과가 나타나더라도 크롬갈드는 여기서 처치하기로.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뒤에 있을 아무개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결투에 응하겠다, 단, 놈들이 이상한 짓을 하면 크롬갈드를 죽여라.” 김성철의 숨겨진 카드, 그것은 아무개다. 크롬갈드의 다른 부하는 물론이고 아델화이트조차 아무개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크롬갈드의 목과 김성철의 손 사이에 이어진 밧줄이 가볍게 흔들렸다. 알겠다는 신호다. 김성철은 밧줄을 내려놓고 신음을 내뱉으며 꿈틀거리는 크롬갈드를 뒤에 두고 앞으로 걸어갔다. 에어푸르트의 학장이자 김성철에게 빛의 마법을 알려준 알투지우스가 김성철을 향해 걸어왔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살며시 들어 올리고는 힘차게 아래를 향해 휘둘렀다. 봐주지 않겠다는 의미다. 김성철은 알투지우스 너머 차분하게 서 있는 아델화이트를 향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노파심에서 묻겠는데, 약속은 지키겠지?” 이에 아델화이트는 밝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서비스로 당신의 몸에 걸린 저주도 풀어드릴게요.” “…….” “언제까지 고개 숙인 남자로 살 순 없잖아요?” 김성철은 코웃음을 치고 시선을 알투지우스에게 돌렸다. 알투지우스는 처음 만났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적당히 위엄이 서린, 고집스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 있소?” 김성철이 물었다. “약간은.” 알투지우스가 두 눈에서 형형한 빛을 발하며 대답했다. 알투지우스의 로브가 펄럭거리며 그의 전신에 마법진이 꽃처럼 피어올랐다. 김성철은 한 번에 끝낼 작정이었다. 그가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아델화이트의 전신에 창백한 빛이 비쳤다. ======================================= 114. 덫 (3) 그 빛은 일직선으로 사라사를 향해 날아갔다. 김성철은 사라사가 품속에 은과 황동으로 장식된 고색창연한 거울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델화이트에게서 뿜어져 나온 빛은 사라사의 거울에 반사되어 하늘을 향하더니 김성철과 알투지우스 머리 위에서 산란 되며 둘을 감싸는 무형의 막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김성철이 장막 너머의 아델화이트를 바라보며 차가운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아델화이트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신녀라고 아세요?” “신녀?” 김성철은 묻는 채를 하다 위로 도약했다. 하지만 무형의 막은 김성철이 지나가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김성철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이것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유형의 결계다. 단순히 단단하거나 투과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작은 충격 속에서 김성철의 초월감각이 반응했다. 이것은 단순한 결계가 아니다. 세계의 규칙 자체가 임의대로 재조정된 것이다. [ 호오? 무의 영역이라? 그리운 것이 나타났군. ]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혼돈신의 간사한 목소리가 내면에서 울려 퍼졌다. ‘무의 영역?’ 김성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주신이 나타나기 전에, 인간 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신이 만든 해결책으로 일명 신명 재판이라고도 불렸지. 신녀가 잠적한 이후에 다시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오랜만에 흥미진진한 풍경을 보게 됐군. ] 김성철의 눈앞에 그린 듯한 까마득한 고대의 한 장면이 나타났다. 두 명의 사내가 지금 만들어진 구형의 공간 속에서 목숨과 명예를 건 사투를 벌이는 일련의 풍경이 눈앞을 지나갔다. [ 극히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수단이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뒤에 나타날 질서신의 가증스런 법률에 비하면 오히려 공정한 측면도 있군그래. ] 혼돈신의 음험한 웃음소리가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가운데 김성철과 알투지우스 사이에 또 다른 장막이 나타났다.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막은 김성철과 알투지우스를 둘러 싼 반구형의 공간을 이등분했다. 마법진을 떠올리고 있던 알투지우스가 지팡이를 꺼내며 김성철을 향해 힘차게 소리쳤다. “스타라이트!” 궤적 상의 공기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그 다음 순간, 강렬한 빛이 경로상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이다. 김성철은 잠시 생각하는 걸 멈추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강렬한 빛줄기가 투명한 푸른 막 사이를 뚫고 나오며 김성철을 향해 날아왔다. 그러나 그 빛줄기는 푸른 장막만을 투과할 뿐, 김성철과 알투지우스를 둘러싼 외곽 장막은 투과하지 못했다. 주변의 공기가 급격하게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김성철은 알투지우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푸른 장막이 그의 전진을 막았다. 김성철은 외곽의 장막이 지닌 파괴불가능한 힘이 푸른 장막에도 서려 있다는 걸 발견했다. ‘이건 대체?’ 장막 안의 공기를 뜨겁게 데우던 스타라이트의 빛줄기가 잦아들었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든 채 푸른 장막 앞에 서서 알투지우스와 아델화이트를 동시에 눈에 담았다. 장막 밖에서 아델화이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셨나요? 저의 재판정이?” “재판정이라.” 김성철은 우리 안의 고고한 맹수처럼 옆으로 돌면서 아델화이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주신들이 나타나기 전에 저는 모든 인간들을 대신해 신에게 공물을 바치고 인간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일을 했답니다. 물론, 인간 서로 간의 분쟁 해결도 신녀의 역할 중 하나였죠.” 아델화이트가 말하는 와중에도 알투지우스는 끊임없이 주문을 영창하며 여러 개의 마법진을 몸 위에 떠올리고 있었다. 아델화이트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당신과 저분 사이엔 넘을 수 없는 힘의 격차가 존재하죠. 이대로 결투를 벌이는 건 공정하지 않다고 봐요. 그래서 공평하게 오로지 마법만으로 서로의 옳음을 가릴 수 있는 재판정을 만들었답니다.” 이곳에서는 오로지 마법 공격만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김성철의 장기인 힘은 무용지물이다. 그런데 김성철에겐 신의 힘이 있다. ‘그걸 써볼까?’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김성철은 자신이 아델화이트가 쳐놓은 덫에 걸려들었다는 걸 시인했다. 예기치 못한 수단이긴 했지만 걸린 건 걸린 거다. 그러므로 빠져나와야 한다. 내면의 검은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김성철의 우반신에 검은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불꽃은 정확히 김성철의 오른팔에만 머물렀다. 그 검은 불꽃을 본 여유롭던 아델화이트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빨리, 그이를 구출하세요.” 아델화이트가 마각을 드러냈다. 물론 김성철은 이에 대한 대비를 한 상태다. “이수진.” 김성철이 짤막하게 자신의 은밀한 우군의 이름을 불렀다. 일곱 리치들이 단거리 순간이동으로 크롬갈드를 향해 이동하려는 찰나였다. 허공 손에서 번득이는 단검을 쥔 손이 튀어나오더니 그대로 크롬갈드의 목을 그어버렸다. “끄억!” 크롬갈드 수난의 날이었다. 그는 눈을 하얗게 까뒤집고 그대로 절명했다. 동시에 김성철은 내면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거인의 시선을 느끼며 검은 불꽃을 자신의 오른팔과 팔 가라즈에 머물게 했다. 신의 힘이 느껴진다. 김성철은 아델화이트를 노려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실망이군.” 신의 힘이 서린 망치가 결계를 강타했다. 세계의 규칙조차 바꿔버린 공간이 거칠게 흔들거렸다. 주문을 중얼거리며 주문영창을 하던 알투지우스도 휘청거리며 쓰러졌고 그의 전신에 꽃처럼 피어오른 마법진도 모래처럼 흩어졌다. 쨍그랑! 사라사가 양손으로 받쳐 든 거울의 일각에 균열이 일어났다. 규칙마저 부수는 힘. 그것이 신의 힘이다. 사라사의 몸에서 시커먼 핏물이 울컥 뿜어져 나왔다. 죽은 자의 피안엔 알 수 없는 하얀 벌레들이 꾸물거리고 있었다. “신녀님!” 사라사가 아델화이트를 향해 소리쳤다. 아델화이트의 표정은 매섭게 굳었다. 그녀는 김성철이 재차 결계를 후려치기 직전, 사라사의 뒤로 다가오더니 무언가를 품속에서 꺼냈다. 그것은 나무뿌리를 연상케 하는 살아 있는 줄기가 꿈틀거리는 기괴한 형태의 단검이었다. 아델화이트는 그 단검을 사라사 제로의 목에 꽂아 넣었다. “앜!” 사라사의 얼굴 절반을 덮고 있던 가면이 벗겨졌다. 티 없이 맑은 얼굴. 하지만 이내 그 절반의 얼굴은 검게 변색되었고 이윽고 찌그러든 언데드의 모습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사라사!” 지팡이마저 떨구고 알투지우스가 결계의 끝으로 다가가 주먹을 부르쥐며 소리 질렀다. “알투지우스!” 사라사가 알투지우스를 향해 외쳤다. “저자를 막으세요! 그러면 당신도 당신의 손녀도 구원받을 수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알투지우스는 놀랍게도 분을 가라앉히고 김성철을 노려봤다. “이렇게 되어버렸군.” “멈추시오. 저 여자는 결코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오.” 알투지우스는 김성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여전히 완고한 늙은이다. 김성철은 곁눈질로 크롬갈드와 이수진 쪽을 바라봤다. 이수진 주위로 크롬갈드의 심복 일곱 리치가 에워싸고 있었고 죽은 크롬갈드는 이수진의 발밑에 뒹굴고 있었다. ‘이수진이라면 어렵지 않게 빠져나갈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려는 찰나였다. 죽은 크롬갈드의 몸에 연거푸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부활각인. 또 하나의 부활각인이 발동한 것이다. ‘이런.’ 허를 찔렸다고 느낀 순간 아델화이트의 부드러우면서도 냉소적인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파고 들었다. “크롬갈드는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지금 8개의 영혼각인을 전부 부활의 각인으로 채워놓았어요.” “…….” “저의 조언이었죠. 우리가 함께 하는 한 헤쳐나갈 수 없는 위험이란 없으니까요.” 그때였다. 검은 불꽃으로 뒤덮인 팔 가라즈가 결계를 재차 후려쳤다. 지축이 뒤흔들렸고 지면에 잠들어 있던 부유섬이 흙과 자갈을 박차고 하늘로 솟아올랐다. 경천동지할 힘의 일격이다. 그러나, 또 다른 힘의 권능으로 만든 결계는 깨어지지 않았다. 다만, 그 결계를 유지하고 있는 거울 일부분이 깨졌을 뿐이다. “아악!” 사라사가 또다시 핏물을 뱉어내며 휘청였다. 사라사의 얼굴 일부분이 언데드처럼 변했다. 마지막 남은 생명력이 결계를 유지하느라 소모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목에 박힌 나무뿌리로 만든 기괴한 형태의 단검이 그녀에게 힘을 불어넣고 있었다. 단검이 쪼그라들며 사라사에게 힘을 불어넣자 언데드처럼 변했던 사라사의 얼굴이 원형을 되찾기 시작했다. 아델화이트는 또 하나의 단검을 사라사의 몸에 꽂아넣으며 크롬갈드의 부하에게 명했다. “어서, 그를 옮겨요!” 일곱 리치가 부활하고 있는 크롬갈드 주위를 감쌌다. 리치 중 하나가 아무개에게 마법을 퍼부었다. 마법이 아무개에 닿기 직전 아무개는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김성철의 눈이 흔들렸다. 그때, 김성철의 내면에서 혼돈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뭘 꾸물거리나? 신의 도구. 검은 거인의 힘을 전부 받아들여라. 그리하면 이런 하찮은 결계 따윈 한 번에 부술 수 있을 게다. ] “헛소리!” 김성철은 재차 결계를 후려쳤다. 거울의 일각이 또다시 깨졌다. 그러나 겨우 일부분일뿐이다. 거울이 전부 부서져야 결계가 깨진다면 지금 같은 힘으로 열댓번을 더 후려쳐야 한다. 물론 거인의 힘을 완전히 받아들인다면 일격에 결계를 부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허용되지 않는 선택지다. 김성철의 망치가 연거푸 결계를 후려쳤다. 사라사는 입에서 핏물을 내뱉었고 그녀의 얼굴은 점점 다른 리치와 같은 혐오스런 형태로 변해갔다. “그만둬라.” 한 사내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김성철은 자신에게 마법을 가르쳐 준 사내를 보았다. 투지. 맹렬한 투지가 그의 전신에 서려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성철은 그에게서 가장 간명한 해결책을 발견했다. ‘이 자를 쓰러뜨린다면.’ 김성철과 알투지우스. 두 사내를 둘러싼 결계의 목적은 승자와 패자를 가리기 위함이다. 목적을 달성하면 세계의 규칙을 뒤바꾸고 있는 이 결계 또한 사라지리라.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거두고 주문을 암송했다. 알투지우스가 먼저 한 손을 뻗쳐 공격을 가해왔다. 여러 개의 작은 빛줄기가 매섭게 김성철의 눈을 노리고 날아왔다. 대단히 정교하고 정확한 공격. 글레어를 그토록 정확하게 다루는 이는 알투지우스 이외에 달리 없을 것이다. 김성철은 검은 불꽃이 서린 팔 가라즈로 날아오는 글레어를 막아냈다. 알투지우스의 전신에 마법진이 떠올라 있었다. 메테오의 술식이다. 알투지우스는 메테오를 영창하면서도 글레어로 계속해서 김성철을 견제했다. 위력이 약하지만 영창시간이 거의 없고 회피하기 어려운 글레어를 높은 정확도와 숙련도로 구사해 시간을 벌거나 혹은 상대방을 수세에 몰리게 한 후 메테오라는 커다란 마법으로 적에게 결정타를 가하는 것은 알투지우스가 지난 수십 년간 가장 즐겨쓰고 잘하던 전투 스타일이다. 그러나, 김성철은 알투지우스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 육체적인 힘과 마법전인 힘, 그리고 경험적인 측면까지. 김성철은 알투지우스의 글레어 연사를 너무나도 간단하게 피해내는 것도 모자라 그가 스승에게 배운 마법을 수십 배에 달할 정도의 힘으로 반격했다. 김성철 코트 자락 안의 여덟 영혼석이 일제히 반짝였다. 영창조차 필요없는 마법 글레어,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놓고 검은 불꽃으로 타오르는 오른손과 평온한 왼손을 동시에 펴고 내면에 끓어오르고 있는 마법을 일제히 방출했다. “글레어.” 수 개, 아니 수십 개에 달하는 빛줄기가 김성철의 활짝 편 손가락 끝에서 일제히 뿜어져 나왔다. 작은 빛들이 모이고 모여 한 번에 방사되는 그것은 구름에 가려져 있던 태양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비견됐다. 빛의 폭풍 앞에서 알투지우스는 뒤늦게 메테오를 완성시키고 영창함과 동시에 마법 방벽을 쳐보지만 글레어의 빛줄기 여러 개가 그의 노구를 꿰뚫고 지나갔다. “크윽!” 눈앞이 아득하게 흐려졌다. 그가 쓰러지자 둘을 둘러싼 결계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 직후 김성철의 후두부를 노리고 거대한 운석 하나가 떨어졌다. 퍽. 알투지우스의 필사의 일격은 단순히 검은 불꽃이 머금은 주먹으로 후려치는 것만으로 간단히 으스러졌다. 김성철은 쓰러진 알투지우스를 내버려 두고 결계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그런데 아직 결계는 완전히 해체된 게 아니다. 그것은 분명 소멸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 존재가 남아 김성철의 앞을 막아섰다. ‘더럽게 느리군.’ 결코 느린 건 아니다. 초조한 마음이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그 와중에 크롬갈드가 부활을 끝냈다. 그는 김성철을 야수와 같은 눈으로 힐끗 노려보고는 아델화이트와 함께 차원문을 열어젖혔다. “기다려!” 김성철이 소리지르는 순간이었다. 주변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어둠의 힘이 아니다. 그림자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존재에 의한. 익숙한 힘이 주변에서 느껴졌다. ‘이것은?’ 김성철은 다시 팔 가라즈를 집어 들었다. 하늘 위에 두 개의 거대한 형체가 어느샌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진한 분노가 나타났다. 질서신과 중립신. 이 세계를 좌지우지하던 존재들이 그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 역시, 신녀 루테기네아. 적절한 순간에 언제나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는군! ] 질서신의 거대한 손엔 우주를 머금은 듯한 구체의 물질이 들려 있었다. 그 구형의 물질은 긴 띠와 같은 줄이 옆으로 뻗어 중립신의 손에 이르고 있었다. 불길한 물건이다. ======================================= 114. 덫 (4) 아직 결계는 부서지기 직전이다. 질서신은 구형의 물질을 움켜쥐었다. [ 이런 개자식들이! ] 김성철의 내면에서 날카로운 욕설이 울려 퍼졌다. 혼돈신의 것. 처음이다. 혼돈신이 저토록 경악하는 것은. 김성철이 검은 거인을 컨트롤 할 때만 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혼돈신이다. 필경 그의 목적에 심대한 장애를 일으킬 수 있는 일이었는데도 그는 침묵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당황이 생생하게 피부로 전해졌다. 곧 김성철은 혼돈신이 왜 당황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가오는 구체를 보며 초월감각이 반응했다. 초월감각은 말하고 있었다. 그 구체는 그 자체로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라고, 바로 김성철이 온 원래 세상으로 통하는. [ 돌아가라! 소환자여!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 질서신의 비웃음이 구체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이윽고 질서신은 구체를 들어 올렸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치 물을 가득 담은 컵이 흘러넘치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만큼 그의 손에 담긴 차원의 구체는 다루기 힘든 물건이었다. 이윽고 구체는 적당히 투척할 수 있는 지점까지 올라갔다. 질서신에게서 뿜어져 나온 영광스런 빛이 그들이 드리운 어둠을 부자연스럽게 밝혔다. 결계는 아직 걷히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도박을 하는 수밖에 없다. 김성철의 몸에 서린 검은 불꽃이 증식했다. ‘이대로 돌아갈 수 없다.’ 모든 것을 남겨둔 채 떠나는 것은 그에게 죽음보다 더한 천형이다. 검은 거인의 힘이 점점 강해지며 의식을 삼켰다. 넘치는 힘이 느껴진다. 모든 것을 파괴할 신의 힘이 말이다. 그에 반비례하여 모든 것들이 희미해졌다. 김성철이 살아왔던 모든 기억과 그리고 베르텔기아 조차. 마지막 의식이 사라지기 직전, 김성철의 눈에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질서신의 빛 너머에 얼룩처럼 진 검은 점. 검은 불길에 뒤덮인 김성철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검은 점의 정체는 실피드였다. “어림없다! 이단 놈아!” 실피드의 선수엔 뮤라 교단의 수석 이단심문관 타이곤 보스보로트가 우뚝 서 있었다. 그가 이끄는 실피드는 전속력으로 질서신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질서신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손엔 두 명의 주신이 간신히 붙어야 통제할 수 있는 차원의 구체가 들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서신은 주신이다. 주신 답게 그는 살짝 몸을 떠는 것만으로 이 세상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정의의 검을 소환했다. 실피드와 질서신 사이에 수만 개의 검이 나타났다. 심판의 도구다. 타이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김성철마저 이겨내지 못한 검의 폭풍을. [ 감히, 하찮은 벌레 따위가 신에게 대들다니. ] 수만 개에 이르는 검끝이 일제히 실피드를 향했다. [ 기수를 돌려라! ] 질서신이 외쳤다. 타이곤은 분명 공포에 질린 모습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질서신이란 한때 그가 숭배하던 존재에게 압도당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이다. 타이곤은 압도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기수를 돌리지 마라!” 질서신의 것에 비하면 개미의 외침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작은 목소리. 검들이 떨기 시작했다. 심판이 시작되려 한다. 그런데 검이 움직이기 직전이었다. 출렁. 차원의 구체에 미묘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 형님! 조심하십시오! ] 잠자코 있던 또 다른 주신 중립신이 소리쳤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질서신의 손바닥 위에 놓인 차원의 구체가 격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차원의 구체는 곳곳에 위태로울 정도로 부풀어 오른 돌기를 만들어내며 출렁였다. [ 으, 아니! 이런! ] 질서신은 혼비백산 놀라 다급히 자세를 잡고 구체를 안정화시켰다. 실피드를 노리는 검들은 사라졌다. 질서신의 분개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나를 섬기는 자가 어찌 이런 일을 하느냐! ] 천지를 울리는 신적인 음성이었다. 그러나 이에 타이곤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하얀 눈썹과 수염을 곤두세우며 그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호통쳤다. “헌신짝처럼 우릴 버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잘도 떠들어대는군!” 한바탕 시원하게 쏘아붙인 타이곤은 검은 불길에 휩싸인 김성철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멀리 있는 김성철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문득 타이곤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실체적인 빛이 아니다. 김성철의 눈에 보이는 환각 같은 것이었다. 그 빛은 질서신의 몸에 서린 영광스러운 빛을 뚫고 그의 거대한 신형조차 뚫고 더욱 높은 하늘로 향하는 듯했다. 진정한 신념의 빛이 질서신을 뚫고 하늘에 직접 와 닿은 것이다. 타이곤은 점점 다가오는 질서신의 몸통을 바라보았다. 그의 충성스런 신관들이 함교에서 나와 그의 뒤로 걸어 나왔다. 항로는 고정됐고 돌아갈 길은 없다. 타이곤은 자신의 신관들을 돌아보며 그답지 않은 온화한 표정으로 모두에게 말했다. “우리의 믿음은 틀리지 않았소. 설령 거짓된 존재를 믿고 있었다고 해도 그 너머에 있을 진정한 신은 우리들의 기도를 묵묵히 듣고 있었을 것이오.” 타이곤은 눈을 감고 기도했다. 실피드는 그대로 질서신의 몸통에 부딪쳤고 부서졌다. 질서신의 몸은 가볍게 흔들리는 정도에 그쳤지만 그들이 벌어준 약간의 시간은 더할나위 없이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할 수 없다. “…….” 김성철의 몸에 서린 검은 불꽃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장막 밖에 서 있던 사라사가 쓰러졌고 장막이 걷혔다. 질서신의 손에 들린 구체는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중립신이 자신이 펼친 필사의 힘을 거두고 있었다. [ 디르고! 어찌하여 그걸 거두느냐! ] 질서신이 중립신을 다그쳤다. [ 잘못되면 모두가 죽습니다. 형님! ] 디르고는 물러서지 않았다. 중립신의 몸과 연결된 구체는 서서히 사라졌고 이윽고 자취를 감추었다. 최대의 위협이 사라졌다. [ 빌어먹을! 빌어먹을 벌레들이! ] 질서신의 분노에 찬 음성이 울려 퍼졌지만, 그는 곧 입을 다물어야 했다. 바로 아래서 김성철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서신의 운은 아직 다하지 않았다. 온 세상이 일순 껌뻑였다. 마치 수명을 다해가는 형광등이 점멸하듯 세상 전체가 암흑에 물들었다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이 느낌은?’ 초월감각이 반응했다. 이 세상에 중대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김성철 앞에 55호가 나타났다. “큰일 났어요! 아버님이… 아버님이 운명하시기 직전이에요!” “에크하르트가?”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이 세계는 크나큰 위험에 처해요!” 55호는 그녀답지 않게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질서신과 중립신은 그 틈을 타 도주했다. 나타나고 도망가는 재주만은 일품인 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번에도 잘못 짚었다. “…….” 김성철의 몸안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검은 거인을 거의 받아들인 반작용으로 그의 몸 곳곳이 삐걱거렸고 기력이 다했기 때문이다. 주신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다면 어쩌면 김성철을 그들이 원하는 모양새로 봉인할 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털썩. 주신들이 사라지자 김성철은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려울 정도의 무기력과 끔찍한 고통이 그를 덮쳐왔다. 김성철은 힘겹게 고개를 돌려 아델화이트가 있던 자리를 응시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아수라장 속에서 아델화이트와 크롬갈드는 이미 달아난 뒤다. 그리고 그의 발이 되어줄 타이곤과 신관들, 그리고 실피드 또한 사라졌다. 오직 단 한 마리, 남작만이 그를 향해 내려와 늠름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빌어먹을.’ 나름 상대방에 대해 분석했다고 생각했지만 크롬갈드의 비열함과 아델화이트가 지닌 잠재력이 예상의 범주를 넘어섰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신녀에게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은 어떤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김성철은 최선을 다했다. 다만 이번엔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 실책의 대가는 크다. 베르텔기아는 여전히 찾지 못했고 크롬갈드는 무사히 탈출했고 이제는 발마저 묶인 상태다. 진한 한숨을 내뱉는 김성철 뒤에서 숨 가쁜 신음이 들려왔다. 알투지우스의 것이다. 글레어에 치명상을 입은 그는 피를 흘리며 두 팔로 기어가 쓰러진 손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상체를 안고 있었다. 사라사는 이미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빨리 아버님에게 돌아가야 해요!” 55호가 시끄럽게 소리지르는 걸 무시하고 김성철은 사라사와 알투지우스를 향해 다가갔다. 이미 두 조손의 숨은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먼저 숨을 거둔 건 사라사였다. “낙원…. 난 그저 낙원으로 가고 싶었을 뿐인데. 사람이….” 사라사의 고개가 꽃처럼 꺾였다. 언데드의 눈에 서려 있던 형형한 눈빛은 자취를 감췄다. 바람결에 실려 사라사의 마지막 염원이 김성철의 귓가에 전해왔다. [ 다시 사람이 되어서…. 에어푸르트에서…. 그 몹쓸 학생 놈과 함께 우리의 기숙사에서 장난치고 놀고 싶었을 뿐인데…. ] 턱없이 소박한 소망. “…….” 김성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투지우스는 침통한 신음을 내며 손녀의 두 눈을 감긴 후 힘없이 자신 앞에 선 김성철의 군홧발을 힐끗 응시한 후 다시 죽은 손녀로 눈길을 옮겼다. 이윽고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유군도의 낯선 거리를 방황할 때 동네 아이들이 노는 걸 본 적이 있었지.” 이미 알투지우스의 생명은 다했다. 김성철은 죽어가는 노인을 피로한 눈으로 응시했다. 알투지우스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무를 깎아 만든 조잡한 장난감 검과 창으로 놀고 있더군. 그마저도 숫자가 부족해 검과 창을 든 아이는 둘 뿐이었어. 창을 든 아이는 마왕 역할을 했고 검을 든 아이는 그에 맞서는 용사 역할을 했지. 검도 창도 없는 나머지 아이들은 제각각 마왕의 졸개나 용사에게 구원받는 평범한 자 역할을 하더군. 잠시 그늘에 앉아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봤는데, 금세 싸움이 일어나더군. 모두 용사, 그것도 아니면 마왕역을 맡고 싶어 했지, 주변부에 머무르길 원한 자는 아무도 없었거든.” “…그게 당신이 변한 이유요?” 김성철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알투지우스가 김성철을 돌아봤다. 그는 김성철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이미 그의 눈앞은 먹물을 뿌린듯한 진한 어둠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난 변한 적이 한 번도 없어. 난 그저 내 손녀를 인간으로 돌려놓고 싶었을 뿐이야. 막말로 말해서 당신이 나의 손녀를 인간으로 돌려주진 않았을 거 아닌가?” “…….” “당신과 나는 지금은 이렇게 대치하고 싶지만 서로가 처한 입장은 본질적으로 같아.” “궤변이군.” “누차 말하지만 내 목표는 오직 손녀를 구하는 것뿐이야. 세계의 적 시절 당신이 루테기네아 공주의 딸을 구하려 했듯이. 하지만 당신에겐 주인공 행세를 할 수 있는 장난감 검이 있었고 나에겐 아무것도 없었지. 그게 우리 둘 사이의 차이야.” 알투지우스는 그대로 죽었다. 눈도 감지 못한 채. 뒤이어 알투지우스의 본심이 바람을 타고 와 초월감각에 전해졌다. [ 미안하네. 모든 것이. ] “…….” 끝까지 솔직하지 못한 남자였다. 김성철은 죽은 조손을 뒤로 앞으로 걸어갔다. 방향은 정해지지 않았다. 아무개가 뒤에서 나타나 김성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그녀가 묻자마자 55호가 다시 나섰다. “아버님이 있는 곳으로 가요! 아버님이라면 방법을 제시해줄지도 몰라요!” 김성철은 55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내키는 선택지는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어그러진 지금은 아주 작은 희망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김성철이 55호를 향해 말했다. “안내해라. 55호.” * 다시 만난 에크하르트는 전보다 더 희미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무한한 공간 속에서 그는 선조차 이루지 못한 점의 형태로 변했다. 단락적이고 불연속적인 음성이 몇 차례 웅얼거린 끝에 에크하르트는 가까스로 자신의 뜻을 김성철에게 전할 수 있었다. “난 이제 소멸하기 직전이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인간의 음성이 아니었다. 의지의 전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죽으면 이 세상의 붕괴가 시작될 거요. 중립신이 어떻게 버티겠지만 새로운 관리자를 선발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그걸로 끝이오.” 그는 전과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반감보다는 노곤한 피로감을 느꼈다. “나의 뒤를 이어 관리자가 되시오. 모두가 원하는 결말을 맞이하려면 그 수밖에 없소!”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에크하르트를 노려보았다. “모두가 원하는 결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너무나 많은 비극과 부조리가 있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 말이다. 그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된 지 김성철은 알고 있다. 그가 관리자가 된다면 에크하르트의 말대로 세상은 평온을 되찾을 것이다. 그 저주받을 질서신과 중립신의 은총 아래 세상은 안정될 것이다. 필연적으로 다가올 새로운 비극과 부조리와 함께 말이다. “나는 관리자가 되지 않겠다.” 김성철이 말했다. 그의 뜻은 단호했고 번복되지 않았다. 점으로 변한 에크하르트에게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정말 이 세상을 파괴할 신의 도구인 모양이군.” 빈정거리고 있다. 김성철은 부정하지 않았다. “설령 내가 신의 도구라고 할지언정, 이런 비극들이 두 번 다시 반복하게 두진 않겠다.” 김성철의 손에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나는 내 방식대로 할 뿐이다.” 에크하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에크하르트의 임종이 시작되고 있었다. “…당신은 나와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르군.” “…….” “나는 그저 힘을 얻고자 하는 마음만이 있었을 뿐, 그 힘을 얻고 뭘 해야 할지 알지 못했지. 하지만 당신을 보니 조금은 알 것 같군.” 무너지는 공간 속에서 점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에크하르트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당신이 가야 할 곳은 당신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거요.” “그런가?” 문득 김성철의 눈에 희끄무레한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늙고 지친 연금술사의 얼굴. 에크하르트의 맨얼굴이다. 그는 김성철에게 힘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운명에 거역하기 위해선 자신의 운명이 뭔지 알아야 하니까.” 그것이 에크하르트의 끝이다. 그의 공간은 무너졌다. 환각과 같은 풍경이 끝났을 때 김성철은 원래 있던 황량한 북동쪽의 대지 위에 서 있었다. 아무개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어떻게 됐어?” 그녀의 물음에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변변찮은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아무개의 눈에 실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김성철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서쪽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약간은 참고할만한 이야기도 있더군.” 김성철이 손뼉을 쳤다. “거기. 책 친구들.” 허공 속에서 49호가 나타났다. 55호는 나타나지 않았다. 49호도 표정은 알 수 없지만 우울한 기운을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그녀들의 아버님, 에크하르트의 죽음이 전해진 것이다. 김성철은 49호에게 말했다. “신의 계단 앞으로 날 데려다줄 수 있나?” 49호는 김성철은 물끄러미 쳐다보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듯 몸을 흔들어 보였다. “아버님의 명 이외엔 일체 세상 일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베르텔기아 타입의 운용 원칙이지만,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금 그런 건 의미가 없겠네요.” 차원의 문이 열렸다. 차원의 문 앞에서 김성철은 뒤를 돌아보았다. 파괴된 실피드와 덧없이 죽은 자들의 시체, 비극의 흔적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김성철은 그것들을 눈에 담으며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더 이상은 반복하지 않겠다.” 팔 가라즈를 어깨에 짊어진 채 김성철은 차원의 문 앞으로 걸어갔다. 신의 계단. 모든 것이 시작된 그곳을 향해서. ======================================= 115. 신의 계단 (1) 왜 신의 계단으로 향했는지 김성철은 스스로도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막연히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에 이르는 계단은 고대왕국의 국경 밖, 깎아지른 듯한 태산준령 한가운데에 있었다. 남작을 타고 김성철은 신의 계단 일대를 정찰했다. 어떤 삶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에크하르트가 죽은 직후, 세상의 쇠락은 가속도를 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아닌 눈 폭풍이 휘몰아치는가 하면 한밤중에 태양이 떠 지면을 구워버릴 정도의 작렬하는 햇빛을 내던졌고 달구어진 대지 위로 이름 모를 벌레떼가 무리를 지어 서에서 동으로 동에서 서로 날아갔다. 나침반의 바늘이 제멋대로 움직였고 혹서와 혹한을 오가는 날씨 속에서 숲과 나무가 시들어갔다. 마물과 짐승들은 미쳐 서로를 죽이거나 먹었으며 지옥 같은 혼란 속에서 인간들은 남김없이 사라졌다. 모든 것의 사멸을 축복이라도 하는 양 대륙 곳곳의 화산은 불을 뿜어 황색의 낙진에 뒤지지 않는 검은 낙진을 곳곳에 뿌려댔다. 세상의 멸망은 기정사실화되었다. 그럼에도 새로운 관리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질서신이 만든 이 세상이 얼마나 썩어 있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거울이라 할 수 있었다. 수많은 아신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질서신과 중립신 밑에서 신 행세를 하던 아신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관리자라는 자리가 뭘 의미하는지. 그들은 세상이 멸망할지언정 자신을 희생하려는 생각 따윈 추호도 하지 않았다. 질서신의 노호성이 이따금 천둥처럼 울려 천지를 뒤덮었지만 새로운 관리자는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김성철은 신의 계단 앞에서 일주일을 기다렸다. 일주일이 되던 날 남작이 죽었다. 미쳐버린 세상 속에서 어떻게 버티려고 했지만 익숙치 않은 자기장과 날씨, 만연한 낙진 속에서 더 버티지 못하고 숨이 끊어지고 만 것이다. 김성철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위해 옆에 남아준 남작을 정성스레 묻고 작은 돌 하나를 묘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 여기 있어도 되는 걸까?” 아무개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이제 그녀는 김성철 옆에 남은 최후의 인간이다.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멸망하는 세계를 보고 조바심에 사로잡혀 김성철에게 몇 번이나 다른 곳으로 가자고 종용했다. “우리는 여기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김성철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모든 것의 끝이 여기서 시작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김성철의 고집을 잘 아는 아무개는 한숨을 내쉴 뿐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바닥에 주저 앉아 건량을 꺼내 씹으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김성철이 그녀를 보며 물었다. “네가 있던 세상도 이런 식으로 멸망했나?” 건량을 우물우물 씹던 아무개는 입안에 있던 건량을 꼭꼭 씹어삼킨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과는 형태가 달라. 완전히.” 멀리서 울긋불긋하게 타오는 화산들의 불길을 보며 아무개의 눈동자는 과거, 어떤 의미로는 미래라 할 수 있던 어떤 시점의 풍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처럼 급격한 기후 변화도, 불타는 대지도 없었다. 그곳엔 검은 거인이 있었고 그가 남긴 해골로 뒤덮은 검은 대지만이 있었을 뿐이다. 언젠가 먼 산정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아무개는 세상의 절반이 백골이 박힌 검은 대지로 변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오직 당신만이 있었어. 세상은 붕괴하지도 않았었지.” “그런가? 그럼 멸망이 아닌지도 모르겠군.” “그건 아니야. 미래의 당신은 세상을 붕괴시킨다기보다는 글자 그대로 모든 걸 파괴하고 있었거든. 인명, 건물은 물론 세상의 질서마저도.” “세상의 질서라.” “당신이 지나간 공간엔 시간마저 흐르지 않는다고 들었어.” “그곳에서도 질서신과 중립신 같은 주신들이 있었나?” 아마도 좌시하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세상이 부서지는데. 이에 대해 아무개는 고개를 들어 김성철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보지도 못했어. 세상에 나타난 적조차 없었지. 그래서 그때만 해도 주신이란 건 전설 속에나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어.” “…전부 죽은 건가?” “그건 아니라고 믿어. 아마도 살아 있었을 거야.” 멀리서 천둥 같은 질서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짐짓 위엄 있는 체하나 뭉개진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 왜 아무도 없느냐! 왜 아무도 솔선수범을 보이려 하지 않느냐! 정녕 이 세상이 멸망해도 좋단 말인가! ] 질서신의 목소리가 지나간 후 아무개는 바닥의 검은 흙을 꼭 쥐며 피식 웃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들은 아마 숨어 있지 않았을까? 검은 거인으로 변한 당신을 피해서.” “…그럴 수도 있겠군.” 검은 거인의 힘을 쓰면 쓸수록 느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모든 걸 파괴한다. 검은 거인의 힘의 극히 일부만을 쓴 것만으로 김성철은 주신 중 하나인 고대신을 쓰러뜨렸다. 하물며 질서신 패거리야. 검은 거인으로 변한 그에게 있어서는 평범한 인간 그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묘한 일이야.” 아무개가 불타오르는 대지를 눈에 담으며 중얼거렸다. “당신이 검은 거인으로 변하지 않아도 이 세상은 멸망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걸 보면 말이야.” “…….” 아무개의 입에서 힘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김성철을 응시했다. 이윽고 낭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회귀자는 역사를 바꿀 수 없다는 말, 당신도 알고 있지?” 김성철은 고개를 돌려 아무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 본 올곧은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지만 군데군데 혼탁한 회의의 얼룩이 떠올라 있었다. 김성철은 눈을 살짝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 소위 상층부의 인간들에게는.” “회귀하기 전까지 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어. 그저 순진하게 회귀를 할 수만 있다면 역사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 남은 인류가 모든 것을 쥐어짜네 내게 남긴 힘만 있다면 말이야.” “호오.” 흥미가 일었다. 사실 이전부터 흥미는 있었다. 아무개가 처한 과거에 관해서 말이다. 하지만 김성철은 단 한 번도 그것을 물은 적이 없다. 회귀자가 본 미래는 반복되지 않는다. 그것이 김성철이 회귀자에 대해 지닌 오랜 생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멸망이 코앞에 닥쳐오고 하염없는 기다림에 무료해진 지금이라면 약간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성철은 말라붙은 나뭇가지로 바닥에 의미 없는 낙서를 끼적이며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누가 널 이 세상으로 보낸 거지?” 아무개는 고개를 뒤로 꺾었다. 하늘이 보였다. 화산재로 검게 변한 하늘이. 별 하나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하늘을 눈에 담으며 아무개는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신녀님.” “신녀?” 김성철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이에 아무개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가로저어보였다. “그 마녀는 아니야. 난 그 마녀는 본 적도 없어.” “아델화이트는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 있지. 타인의 육체를 강탈해서.”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하지만 내가 본 신녀님은 그 여자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어. 그것 하나만은 내가 보증할 수 있어.” “…어떤 사람이었지?” 오해가 완전히 풀린 건 아니지만 김성철은 일단 그 문제는 가슴 속에 넣어두고 이야기를 진전시켰다. 아무개는 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곳엔 분명 49호가 있다. 아무개는 그 49호에게 눈길을 준 후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나도 잘 몰라. 내가 신녀님을 만난 건 아주 잠시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최근에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어떤 계기로?” “똑 닮은 사람은 봤거든.” “똑 닮은 사람?” 김성철의 물음에 아무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당신의 꿈속에서.” “…….” 설마 하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그의 꿈속에서 얼굴을 가지고 있던 존재는 단 셋밖에 없었다. 김성철과 아무개, 그리고 베르텔기아다. 아무개는 김성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짧은 한마디를 툭 던졌다. “맞아, 베르텔기아와 똑같이 생긴 소녀였어. 물론 꿈속 한정으로.” “그럴 리가.” “하지만 그녀가 베르텔기아와 동일인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어. 신녀님은 베르텔기아보다 미묘하게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겼거든. 희미한 기억이지만 두세 살 정도는 더 많은 느낌이었어.” 그렇게 말하며 아무개는 뒤를 돌아보았다. 49호가 뭔가 말해주기를 바라면서. 49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김성철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 제가 드릴 말씀은 없네요.” 김성철은 왠지 49호가 그 부분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려는 느낌을 받았다. 에크하르트가 소멸하면서 그녀를 옥죄던 계율도 함께 사라졌지만 굳이 말하려 하지 않는다는 건 그녀의 마음이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존중하기에 49호도 존중하기로 생각했다.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내면에서 희미하게 전해지는 애틋함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김성철의 감정이 아니다. 그의 내면 깊숙한 곳, 우두커니 선 검은 거인으로부터 느껴지는 파장이다. 49호를 볼 때마다, 그녀와 말을 할 때마다 검은 거인은 그런 감정을 내비치곤 했다. ‘무언가 있는 것인가. 검은 거인과 49호 사이에는.’ 김성철은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이 무슨 계기로 검은 거인으로 되었는지. 물론 이 세상은 그가 인간으로 남기보다 검은 거인으로 변할 이유가 수천, 아니 수만 배는 많은 세상이다. 하지만 그중에서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을 것이다. 김성철은 지금 자신이 기다리는 인물을 머릿속에 그리며 아무개에게 물었다. “네가 있던 미래에서 크롬갈드는 어떤 역할을 했지?” “그자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몇 되지 않아. 그저 대단히 훌륭한 인물이었고 이 세상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 이외엔.” “그는 어떻게 됐지?” “검은 거인에게 붙잡혀 죽었다는 게 정설이야. 하지만 확실하겠지. 검은 거인은 먹이감을 놓치는 법이 없으니까.” “그런가.” 허무한 최후다. 하지만 그보다 확실한 최후 또한 없을 것이다. 검은 거인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성철은 아무개의 미래에서 크롬갈드의 죽음이 확정적이라 생각했다. 그렇다고서라도 너무나 어이없는 죽음이다. 김성철은 크롬갈드를 상대하면서 그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가호 같은 게 따라다니고 있는 듯한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사자토스와 싸울 때 몇 번이고 겹친 사자토스의 높은 행운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상위의 힘이 크롬갈드에게 서려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가 살아온 인생역정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죽을 운명의 인간에서 아델화이트를 만나 그녀의 마음을 얻어 재앙으로부터 살아날 힘을 얻었고 또 운 좋게 고대신의 육편의 위치를 확보해 고대신의 마음을 얻고 그에게 또 다른 힘과 정보를 얻었다. 김성철과 마주쳤을 때 그는 죽어야만 했다. 그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행운이 그를 따라다녔고 김성철은 결국 그를 눈앞에서 놓쳤다.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주신인 질서신과 중립신이 나타나 훼방을 놓은 건 덤이다. 단순히 운이 좋다고 하기엔 미심쩍은 점이 하나 둘이 아니다. 아무리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명색이 이 세상의 지배자라 불리는 주신들을 동원한 행운을 몇 번이나 맛 볼 수 있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니까. ‘기이하군. 아무개의 미래에선 크롬갈드는 왜 그렇게 쉽게 죽은 것일까?’ 문득 김성철의 내면의 검은 거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장 고동의 여음엔 감당할 수 없는 힘의 미미한 파장이 감돌고 있었다. 순간, 김성철은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 ‘설마 검은 거인의 힘 때문인가.’ 검은 거인의 힘은 모든 걸 파괴한다. 뛰어난 능력, 다중의 힘, 행운, 혹은 예정된 운명까지. 얼마나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김성철 옆에 앉아 있던 아무개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검은 낙진으로 뒤덮인 옷을 털었다. “이유야 어떻게 됐든, 결국 이 세상은 멸망하고 있어.” 뿌연 먼지와 함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귀자는 미래를 바꿀 수 없는 모양이야.” 김성철은 그런 아무개를 올려다보며 몸을 일으켰다. 오랜 전투로 단련된 굳은 손이 그녀의 어깨 위에 놓였다. 김성철이 말했다. “이 세상이 멸망하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 멸망해가는 세상을 바라보며, 멸망의 거인이 내면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며 김성철은 언제나처럼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멸망을 노래하고 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 115. 신의 계단 (2) 오랜 기다림의 성과가 나타났다. 신의 계단 가까운 곳에서 커다란 화산이 터진 날, 신의 계단 가까운 곳에서 차원문이 열리고 목이 빠지라 기다렸던 손님이 나타났다. 크롬갈드의 수하인 일곱 리치다. 김성철은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겐 덕담마저 건네며 이렇게 타일렀다. “네 주인을 데리고 와라.” 일곱 리치 중 다섯이 김성철에게 달려들었다. 예정된 자살이다. 다섯이 죽자 나머지 둘은 내일을 기약하며 사라졌다. 그날, 크롬갈드와 아델화이트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김성철은 초조해하지도 서두르지도 않았다. 그는 신의 계단 앞에 자리를 깔고 예정된 손님이 오길 기다렸다. 다음 날, 또 하나의 화산이 멀지 않은 곳에서 터졌다. 이번엔 제법 강한 놈이었다. 강한 지진이 대륙 전역을 강타했고 저지대의 일부분이 바다에 잠겨버릴 정도로 큰 녀석이었다. 지진은 계속되어 대륙의 삼 분의 일이 바다에 잠겼다. 엄청난 후폭풍이 밤새도록 이어지며 산맥의 나무들을 불태웠다. 지면이 하늘보다 밝았던 그 날 밤은 단 하나의 별도 볼 수 없었다. 다음 날, 또 다른 손님이 나타났다. 김성철은 비로소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아델화이트다. 그녀의 품 안엔 그토록 그리던 베르텔기아가 안겨 있었다. 그런데 베르텔기아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리운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델화이트는 조심스럽게 김성철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걱정마세요. 베르텔기아는 잠시 잠들어 있어요. 저희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면 그녀를 돌려드릴게요.” “거래는 없다.” 김성철이 말했다. “이 아이가 죽을 수도 있어요.” “너희들도 죽을 것이다.” 김성철의 목소리엔 분노도 짜증도 없다. 오히려 평소처럼 무덤덤했다.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영겁을 살아온 아델화이트는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사내에겐 어떤 협잡과 잔재주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김성철은 그들에게 말했다. “베르텔기아를 내게 넘겨라.” 다른 조건은 없다. 흔해 빠진 살려준다는 약속조차 없다. 즉, 이것은 명령이다. 아델화이트는 겉으로는 태연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안고 차원문 너머로 사라졌다. “쫓지 않아도 되겠어?” 아무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김성철은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아쉬운 건 그들이다.”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며 멸망해가는 세상을 눈에 담았다. 또 하루가 지났다. 그날은 김성철 앞에 수십 마리에 달하는 악신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김성철에게 제의했다. 함께 이 세상을 멸망시키자고. 이에 대해 김성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검은 불꽃으로 이글거리는 망치를 들어 모든 악신들을 때려죽였을 뿐이다. 멀리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질서신과 중립신은 공포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로서도 다른 방법은 없었다. 차원의 구체를 던질 천재일우의 기회는 건너갔으니. 그날 밤, 질서신이 아주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지평선 끝에 간신히 보일락 말락 한 거리였다. 졸렬하기 짝이 없는 출현. 김성철은 조소했다. 그 비웃음을 들으며 질서신은 궁색하게 말했다. [ 협상을 하자. 부수는 자. 이 세상은 멸망하고 있다. 관리자가 없으면 이 세상은 멸망한다. ] 이에 대해 김성철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관리자가 그렇게 좋으면 네가 하지 그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질서신은 사라졌다. 그 출현만큼이나 궁색한 모습으로. 다음 날 아침엔 해가 뜨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먼 산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밝았다. 온 세상이 불에 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검은 낙진과 황색 낙진이 뒤섞인 하늘은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색채로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김성철은 술잔을 기울이며 멸망 속에서만 볼 수 있는 하늘의 풍경을 감상했다. 크롬갈드와 아델화이트는 그 멸망의 한 가운데에서 다시 등장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델화이트였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그녀는 간절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이 진심이라는 건 김성철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김성철은 오로지 베르텔기아에게만 눈길을 주었을 따름이다. “오직 크롬갈드만이 이 세상을 구할 수 있어요. 당신도 봤잖아요? 질서신과 중립신이 만든 이 세상이 얼마나 잔혹하고 불합리한 세상인지?” 멀리서 질서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어느새 지평선 끝자락에 모습을 드러내고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델화이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크롬갈드만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어요. 어떤 인간보다 올곧고 강한 의지를 지닌 그만이 이 왜곡된 세상을 부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요. 끝없이 반복된 비극을 끝낼 길은 이것밖에 없어요.” 그녀는 말미에 간절한 울음까지 섞었다. 김성철은 물끄러미 크롬갈드를 바라보았다. 크롬갈드는 여전히 야수와 같은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김성철이 아델화이트에게 말했다. “난 저놈이 가져올 새로운 세상이 그다지 바람직하다고 생각지 않는데.” “그건 그이를 잘못 보고 하시는 말씀이에요. 저도 알아요. 당신이 저와 그이에게 원한이 있다는 걸. 하지만 지금은 사사로운 감정은 배격하고 멀리 보아야 할 때예요. 보세요. 이 멸망해가는 세상을. 시간은 머지않았어요. 당신의 위대한 양보만이 이 세상이 낙원이라는 진정한 이름을 되찾게 될 초석이 될 수 있어요.” 언제나처럼 달콤하고 무의식중에 수긍해버리는 목소리. 과거의 김성철이라면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들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히려 김성철은 구토할 것 같은 역겨움마저 느끼며 아델화이트에게 물었다. “…그의 눈을 제대로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나?” 김성철이 말했다. 아델화이트는 크롬갈드를 돌아보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천연스러운 표정으로 물끄러미 김성철을 바라보았다. “아무 문제가 없는데요. 당신의 편견이 잘못된 환상을 심어 준 게 아닐까요?” “그 반대겠지.” 김성철은 피식 웃었다. “당신은 너무 오래 살았어. 절망이라는 어둠 속에 너무 오래 있었지. 그래서 눈이 멀어버린 거야.” 김성철은 크롬갈드의 눈을 노려보며 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흉포한 야수의 눈을 보면서 말이다. 그것이 빛이라면 빛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야밤에 맹수의 눈은 달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빛을 내는 법이니까. 낙진 구름이 때마침 태양을 가렸다. 천지가 어둠에 잠겼다. 김성철은 불규칙하게 찾아오는 어둠을 보며 문득 아델화이트의 동기가 뭔지 알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협상은 결렬됐다. 아델화이트는 다시 한번 베르텔기아를 인질 삼아 김성철을 위협했다. 김성철은 담담하게 말했다. “공멸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는 흔들리지 않는 거석이다. 아델화이트는 어떤 방법도 통용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돌연 무릎을 꿇었다. 김성철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주시하기만 했을 뿐이다. 신의 계단의 입구를 틀어쥐고 있는 한, 그들이 취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방관 속에서 아델화이트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다섯 주신에 대한 기도가 아닌, 이 세계의 진정한 신, 눈을 감은 죽은 신에 대한 기도였다. 수천 년 동안 울려 퍼지지 않던 찬양이 이 세상에 도래했다. 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델화이트는 계속해서 기도를 올렸다. 그것은 너무나도 처량하고 희망 없는 기도였다. 신은 결국 아델화이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절망처럼 보이던 그때, 아델화이트는 돌연 자신의 목을 검으로 찔렀다. 붉은 피가 땅에 튀었다. 목석처럼 서 있던 크롬갈드는 그때만큼은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다. “루테기네아!” 크롬갈드는 쓰러진 아델화이트의 몸을 껴안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연인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당장 죽지는 않을 테니까.” 크롬갈드는 즉시 그녀를 치료하려 했다. 하지만 아델화이트는 그의 치료를 거부했다. “신께서 자신이 점지한 신녀를 버린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겠죠. 그게 이 세상에 대한 신의 뜻이겠지요.” 그때였다. 아델화이트의 상처가 갑작스레 아물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 창백한 힘이 서렸다. 흐릿하던 아델화이트의 눈동자에 환한 생기가 돌아왔다. “회답하셨어요! 신께서!” 그녀는 벌떡 일어서며 자신의 연인을 힘껏 껴안았다. 그러나 김성철과 크롬갈드의 귀에 신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아델화이트는 계속해서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신께서 저에게 힘을 주셨어요. 모든 것을 결정할 권리를.” 아델화이트의 몸에 서린 창백한 빛이 힘을 더했다. 김성철은 그것이 이전 알투지우스와 싸울 때 아델화이트가 쓴 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김성철이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그는 이미 장막 안에 있었다. 아델화이트의 힘이 아니다. 김성철의 눈앞에 잿빛의 뭉게구름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구름의 중심에서 번갯불이 번쩍이며 구름 안은 물론 구름 아래의 모든 것을 드러나게 했다. 그 번쩍이는 불빛 아래서 김성철은 구름의 중심에 소리도 없이 열기도 없이 냉연하게 타오르는 불을 보았다. 불길의 중심 속엔 4개의 날개와 4개의 음절을 지닌 거룩한 존재가 모든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성철의 눈동자 안에 본능적인 경외의 빛이 떠올랐다. ‘이것은…?’ 경이로움 속에서 김성철은 어떤 음성을 들었다. [ 모든 것을 가지려는 자, 모든 것을 버리려는 자. 둘의 대결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 어쩌면 그것은 과거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먼 미래에서 온 목소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언제 발하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공을 초월하는 신의 음성엔 보편성이 자리 잡고 있으니까. [ 이런! 개 같은! ] 혼돈신의 낭패한 목소리가 김성철의 내면에서 울려 퍼졌다. 신의 음성이 경도되어 있던 김성철은 정신을 차리고 혼돈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지금 죽은 신은 수작을 부리려고 하고 있다! ] “수작?” 김성철이 물었다. 혼돈신은 계속해서 소리쳤다. [ 검은 거인의 힘을 써라! 검은 거인은 신이 지닌 파괴의 속성. 신의 의도마저 부술 수 있다! ] 그 말을 듣는 순간, 김성철은 평소와 다르게 혼돈신의 말에 강하게 끌리는 걸 느꼈다. 언제나 거짓을 말하는 교활한 존재이나 지금만큼은 간절한 진심이 음성에 깃들어 있었고 게다가 김성철은 앞으로 자신에게 좋지 않을 것 같은 숙명의 예감을 느꼈다. [ 빨리 검은 거인의 힘을 써서 신의 의지에 저항해라! 부수는 자! 그렇지 않으면 너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흙 땅 위에 쓰러질 것이다. ] 검은 거인의 힘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것은 언제든 김성철이 원하면 그를 잡아먹고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모든 것을 부숴버릴 것이다. 신의 장막 또한 예외는 아니다. 두려움은 불확실성에서 비롯된다. 김성철은 지금 자신과 크롬갈드 사이를 덮어가는 신의 장막 속에서 형용할 길 없는 아득함을 느꼈다. 김성철의 눈이 부릅떠졌다. “…….” 위험하다. 그것도 극도로 위험하다. 이 불확실함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검은 거인의 힘을 빌리는 것이 타당하다. 검은 거인의 힘을 잘만 통제할 수 있다면 검은 거인에게 잡아먹히지 않고도 장막만을 파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김성철은 다른 생각을 품었다.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앞엔 경이로운 신의 모습이 놓여 있었지만 그의 옆엔 여전히 멸망해가는 세상과 그 아래 서 있는 아델화이트와 베르텔기아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아델화이트의 품 안에 안긴 베르텔기아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김성철의 시선이 닿는 순간, 베르텔기아가 미약하게 몸을 꿈틀거린 것이다. 살아 있다. 확실히 살아 있다. 말라가는 마음에 한줄기 소나기가 내린 기분이다. 김성철은 달라진 마음으로 생각했다. ‘그 녀석이라면 내게 뭐라고 말했을까?’ 베르텔기아는 지금 그의 옆에 없다. 하지만 김성철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 녀석은 한 번 버텨보라고 말했을 것이다. 김성철은 눈을 감고 심장에 손을 올렸다. 의식하지 못했던 그의 박동은 평소보다 헝클어져 있었다. “…후우.” 진한 심호흡이 깊숙한 폐부로부터 흘러나왔다. 한결 마음이 편해진 기분이다. 헝클어진 박동 또한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 뭘 하는 건가? 시간이 없다! 이대로는 너는…. ] 혼돈신이 계속해서 주절거린다. 김성철은 눈을 떴다. 그리고 말했다. “닥쳐라.” 이윽고 신의 장막이 완성됐다. 장막 안에서 김성철이 걸치고 있던 옷이 사라졌다. 낡은 코트, 허름한 군복바지는 물론 자랑하는 브로치마저. 어느 순간 그는 전라의 모습이 되었다. 상대방인 크롬갈드도 마찬가지였다. 그 안에서 김성철은 몸 안의 변화를 느꼈다. 일찍이 천재라 불리던 크롬갈드는 김성철보다 한발 빠르게 현상을 파악했다. 완벽에 가까운 근육질의 몸을 지닌 크롬갈드는 지면의 흙을 맨발로 고르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능력치가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군.” 크롬갈드가 자세를 잡았다. 권투사의 자세다. 크롬갈드가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다른 어떤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걸 깨달은 건 열다섯 살이 되던 해의 봄날이었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크롬갈드는 김성철을 향해 달려들어 매서운 주먹을 날렸다. 이 세계의 시스템에 의해 증폭된 것이 아닌 인간 본연의 순수한 힘으로. 김성철은 두 팔을 들어 올려 크롬갈드의 주먹을 막았다. 퍽! 정확하게 막았다. 그러나 팔뼈가 시큰거린다. 뼈가 사무치게 아프다. “큭….” 김성철은 이를 악물며 뒤로 물러섰다. 크롬갈드의 야수와 같은 눈이 번들거렸다. “넌 아무것도 아니야. 질서신, 중립신, 고대신 같은 쓰레기처럼 이 세계가 부여한 힘이 없으면 그저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일 뿐이지.” 크롬갈드가 다시 달려들며 이번에는 김성철을 발로 걷어찼다. 매서운 킥. 김성철은 가까스로 크롬갈드의 공격을 막았지만 뒤로 거꾸러지고 말았다. 금세 일어나 자세를 잡았지만 둘 간의 우열은 명확했다. 전신에 터질 것 같은 탄탄한 근육을 씰룩거리며 크롬갈드는 김성철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내가 스무 살이 되던 무렵, 나는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지. 대부분의 인간은 짐승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야. 하나같이 어리석고 나약하며 그리고 탐욕스럽기까지 하지.” 크롬갈드의 눈에 머물고 있던 야수의 흉포함은 더없이 진해졌다. “모든 짐승엔 우두머리가 있지. 인간도 마찬가지지만 짐승과 인간이 다른 점은 인간의 경우엔 자격도 없는 것들이 우두머리에 오를 수 있다는 거야.” 야수와 같은 눈동자가 헤아릴 길 없는 증오를 머금으며 스산하게 번득였다. 크롬갈드가 김성철을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가장 뛰어난 자가 우두머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 세상의 진정한 질서이며 신의 뜻이다.” “…….” 김성철은 대꾸 없이 천천히 몸을 두 주먹을 들어 올렸다. 어떤 간섭도 없는 무의 공간. 세상의 운명을 건 두 사내의 싸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115. 신의 계단 (3) 기세등등한 건 크롬갈드다. 상대적으로 김성철은 수세에 놓인 거로 보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아직 김성철은 크롬갈드를 보고 있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서 크롬갈드가 야수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은 크롬갈드의 너머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먼 길을 걸어 결국 이 무의 장막 속에서 크롬갈드라는 사내와 마주 서게 된 이유를 말이다. 대충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본질은 마치 미끄러운 젤리처럼 손에 잡힐 것처럼 하면서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시간은 김성철의 편이 아니다. 생각에 잠긴 김성철의 귓가에 크롬갈드의 오만한 음성이 비수처럼 박혔다. “나는 모든 종류의 체술과 격투술을 배웠고 그것을 극한으로 연마했다. 넌 날 이기지 못한다. 소환자.”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크롬갈드는 신들린 움직임으로 김성철을 향해 쇄도했다. “칫!” 빠르다. 김성철이 그렇게 느끼는 찰나 김성철의 옆머리가 흔들거렸다. 사각에서 날아온 크롬갈드의 주먹이 일으킨 바람이다. 김성철은 즉시 머리를 숙였지만 크롬갈드의 날카로운 주먹이 김성철의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찌릿한 고통과 함께 살갗이 찢어졌다. 김성철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그는 이름난 전사이자 투사다. 김성철의 반격이 시작됐다. 오랫동안 단련된 주먹이 미리 계산된 궤적을 따라 복합된 형태로 크롬갈드를 연거푸 공격했다. “호오?” 크롬갈드는 희게 웃으며 김성철의 공격을 피해냈다. 김성철은 신들린 듯한 움직임으로 자신의 주먹을 피하는 크롬갈드를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자의 체술, 나보다 몇 단계는 위다.’ 퍽! 김성철의 주먹이 크롬갈드의 팔에 가로막혔다. “이건, 하이 엘프 족 최강의 권사에게 직접 사사한 체술이지.” 김성철은 외마디 기합을 지르며 반대 측 발로 크롬갈드의 옆구리를 노리고 걷어찼다. 크롬갈드는 김성철을 농락이라도 하듯 뒤로 공중제비를 돌며 훌쩍 피한 후 팔짱을 끼고 다시 한번 김성철을 조롱했다. “이 몸놀림은 리자드맨 최강의 권투사에게 배운 거야. 내게 꼬리가 달리지 않은 걸 감사해라.” 크롬갈드는 자신의 엉덩이뼈를 어루만지며 득의만면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혹 꼬리가 있었다면 네 목뼈는 꼬리에 휘감겨 부러졌을 테니까.” “…….” 알면 알수록 역겨운 놈이다. 하지만 크롬갈드의 말대로 그는 최강이라는 칭호를 지닌 자에게 두루 격투술을 배웠다. 왕궁과 왕실을 전전하며 기예를 보여주고 보수를 챙기는 권술가. 그들의 무예를 두루 익힌 크롬갈드는 그의 말대로 김성철의 상대가 아니었다. ‘격투술로는 이길 수 없다.’ 김성철이 그렇게 생각하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무의 장막 가장자리에 환한 빛이 번득이더니 빛으로 만들어진 무구들이 나타났다. 검, 도끼, 망치, 창, 활 등 이 세계에서 두루 쓰이는 무기였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무기만 있다면.’ 김성철은 다급히 가장자리로 달려갔다. 검이 잡혔다. 망치를 쥐고 싶었지만 생성된 망치의 수는 검에 비해 부족했고 그마저도 크롬갈드 가까운 곳에 생성됐다. 크롬갈드는 김성철과 마찬가지로 검을 들었다. “호오? 이제는 검으로 싸워보자는 건가?” 크롬갈드는 오만하게 김성철을 굽어보며 손에 쥔 검을 현란한 손놀림으로 돌렸다. 과시하는 움직임이다. 자신이 검에서도 특출난 조예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검돌리기를 멈추고 자세를 잡자 김성철은 또 한번 숨이 막히는 감각을 느꼈다. ‘이 사내, 체술 뿐만 아니라 검술도 나와 호각, 아니 그 이상이다.’ 빈틈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신의 힘만 있다면 가볍게 무너뜨릴 수 있겠지만 오로지 뼈와 힘줄의 힘만으로 싸우는 지금으로서는 크롬갈드를 무너뜨릴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싸워야 한다. 김성철은 검을 꼬나들고 크롬갈드에게 부딪쳐갔다. 검과 검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필사적인 김성철의 공격. 그에 반해 크롬갈드는 여유롭게 김성철의 검을 막아냈다. 공세는 곧 한계점에 부딪혔다. 뼈와 근골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김성철이 공격을 멈추자 크롬갈드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이게 전부냐!” 사자와 같은 일갈을 퍼부은 후, 크롬갈드의 공격이 시작됐다. 김성철은 막는 데 급급했다. 일격 일격이 둔기에 의한 것처럼 묵직했고 거기다 빠름과 현란한 속임수까지 곁들여 있었다. 전형적인 명예로운 결투를 위한 귀족의 검. 분명 훌륭한 검이지만 맨손으로 싸웠을 때만큼 격차는 나지 않았다. 검으로만 놓고 보면 김성철이 우위다. 그의 검은 실전에서 단련되고 단련된 전장의 검이니. 그러나 신체조건의 차이가 승부를 갈랐다. 크롬갈드는 지칠 줄 몰랐고 짐승처럼 용솟음치는 힘으로 끊임없이 김성철을 몰아세웠다. 김성철의 숨이 거칠어졌고 곧 자세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크롬갈드가 돌연 자세를 바꾸며 김성철의 복부를 노리고 킥을 가했다. 기회다. 김성철은 쇄도하는 크롬갈드의 발을 향해 오히려 다가오며 근거리에서 그의 발을 잡으려 했다. 완전한 타점에 이르기 전에 몸을 대 충격을 완화시킴과 동시에 그의 발을 잡고 균형을 무너뜨리기 위함이다. 진흙탕 싸움으로 가야 그나마 승산을 올릴 수 있다는 판단하에 시도한 방법은 그러나, 상상을 초월하는 크롬갈드의 힘에 무산됐다. 퍽! 크롬갈드의 정강이가 복부에 닿는 순간, 김성철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크억!” 아픈 정도가 아니다. 내장 전체가 울리며 조건반사적으로 온몸의 힘이 일시적으로 풀릴 정도의 충격이다. “어리석은 짓을.” 크롬갈드는 김성철을 가볍게 걷어찬 후 그의 몸을 번쩍 들어 바닥 위에 내동댕이쳤다. 김성철의 머리가 지면에 닿기 전, 김성철은 가까스로 몸의 통제를 되찾고 어설프게나마 낙법을 시도했다. “크으으으으….” 다행히 머리부터 땅바닥에 닿는 건 면했다. 그러나 목으로부터 이어지는 등과 어깨 일부에 큰 충격을 받았다. 챙캉. 빛으로 만든 검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크윽.” 김성철은 뒤로 몇 바퀴나 굴러가며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온몸엔 씁쓸한 고통이, 입에선 가쁜 숨이 나오고 있었다. 압도적이다. 크롬갈드의 본신의 힘은. 김성철 또한 만만치 않은 전사라고 하나, 왕실 무예가의 권술을 두루 사사한 기술에 완벽한 육체마저 지닌 크롬갈드라는 사내에 맞서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떤가? 신의 힘이 없는 기분은? 아무것도 아닌 널 대단한 존재로 만들어주던 게 없는 기분이 어떻냐고?” 크롬갈드는 처음엔 조롱조로 말하다가 갑자기 분노를 억제 못 하고 마지막엔 고함을 내질렀다. 급작스런 감정의 변화. 광인의 표본이다. 쓰러진 김성철은 안간힘을 쓰며 일어서려 했다. 팔은 부들부들 떨리고 찌릿한 고통이 비상신호를 보내왔지만, 그의 눈에 서린 투지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위기 속에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싸움이 시작되기 전 치열하게 고민하던 신의 의도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이 신이 원한 결과인가?’ 객관적으로 김성철과 크롬갈드의 차는 명확하다. 단순한 육체의 힘만으로 대치했을 때, 김성철은 크롬갈드에게 이길 수 없다. 이대로라면 김성철은 크롬갈드에게 패배해 쓰러질 것이다. 혼돈신이 말한 것처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크롬갈드의 야욕을 위한 밑거름으로 희생되는 것이다. 차라리 이런 결과였다면 검은 거인의 길을 택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지금 신의 장막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처형에 다름이 아니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 강한 반발심이 김성철의 내면에서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이것이 정녕 신이 원한 결과인가? 의문 속에서 김성철의 내면에 잊고 있던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잠깐?’ 후두부를 둔기로 맞은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언젠가 신이 말하지 않았던가? 김성철과 베르텔기아의 미래를 지켜보겠다고. 즉, 신은 미래를 정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김성철의 시야는 일순 수축되어 하나의 작은 점안으로 수렴되어 갔다. 단 하나의 점에 불과한 그 작은 세상엔 모든 것이 있었다. 점과 점들이 이어져 선이 되고 그 선이 구체적인 하나의 도형을 이루는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김성철의 머릿속에 말 그대로 각인된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존재하는 공간 속에서 김성철은 알게 되었다. 신이 의도한 바를. * 신이 세상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신의 의지와 다르게 세상이 흘러가고 있을 때, 죽은 신이 점지한 것은 크롬갈드다. 크롬갈드는 일찍이 신의 주목을 받았다. 아직 계단에 오르지 않았지만 신은 그에게 운명을 부여했다. 멸망의 시기, 신의 계단 아래에 서게끔. 그리하여 새로운 다섯 번째 주신으로 태어나도록. 단순히 행운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도 거대한 호재가 크롬갈드의 인생에 연이어 일어났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신의 계획에 또 다른 분자가 끼어들었다. 김성철이라는 존재다. 김성철은 원래 신의 계획에 포함되지 않은 존재다. 이른바 불순물이다. 하지만 그 의도하지 않은 존재가 신의 계획에 포함되었을 때 길은 정해졌다. 김성철과 크롬갈드는 이렇게 마주칠 운명이라는 것을. ‘그렇게 된 것이었나.’ 아무 단서도 없는 상황 속에서 신의 계단을 떠올린 것. 그전에 있었던 불미스런 실책. 그것들은 사고가 아니다. 필연으로 이어지는 계단일 따름이다. 모든 것을 손에 거머쥐려는 자 크롬갈드. 그리고 모든 것을 버렸던 자 김성철. 두 사내가 마주 보기 위한. 일찍이 신이 점지했던 자. 나중에 나타난 자. 신은 판단을 유예했다. 따라서 누가 옳은지는 오직 둘만의 대결을 통해서만 가릴 수 있을 것이다. * 수축됐던 세계가 원형을 갖췄다.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크롬갈드는 여전히 세상이 수축되기 전의 모습으로 서 있다. 김성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 싸움은 처형이 아니다.’ 몸 안의 피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투지가 다시금 되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굳었던 그의 뇌세포가 활화산처럼 가동하기 시작했다. 크롬갈드는 아무 말도 없이 굳어버린 김성철을 응시하다 자신의 뒤에 있는 빛의 망치를 꺼내 김성철에게 던졌다. “여어. 부수는 자. 주무기가 아니라서 솜씨가 안 나오는 모양이군.” 크롬갈드는 조롱하고 있었다.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과 김성철 사이의 힘을 격차는. 김성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오로지 이길 방법만을 찾고 있었다. 크롬갈드는 김성철이 아무 말도 하자 재미가 없다는 듯 검을 들고 김성철을 향해 달려왔다. 김성철은 발밑의 망치를 들고 맞섰다.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서로 대등한 기술을 지닌 상황 속에서보다 신체조건이 우월한 크롬갈드 쪽이 이기는 건 당연한 승리였다. 그는 김성철보다 힘이 강했고 체력도 강했으며 팔다리조차 길었고 유연하기까지 했다. “크억!” 힘에 부친 김성철의 망치 위로 칼날이 성난 파도처럼 덮쳐 그의 이마의 일부분을 그었다. 따끔한 상처에 불과하지만 흘러내린 피가 땀과 섞여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고 김성철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크롬갈드는 끝낼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끝을 내는 대신 일어나려는 김성철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끄아아아악!” 온 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강렬한 통증을 느끼며 김성철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갈비뼈 일부가 부러져 그의 폐를 찌른 것이다. 김성철은 부러진 갈비뼈를 부여잡은 채 심호흡을 했다. 끔찍한 격통과 함께 폐가 비수처럼 찌르고 있는 갈비뼈를 몰아내며 원형을 찾았다. 호흡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김성철의 힘은 반감됐다. 무기 또한 잃었다. 정해진 절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망치를 들면 무적이라더니, 그런 것도 아니군. 팔 가라즈가 아니라서 그런가? 하긴, 신의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인간이니 무기 또한 가장 좋은 게 아니면 힘을 못 쓰는 모양이군.” 크롬갈드는 쓰러진 김성철을 계속해서 조롱했다. 김성철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참담한 기분 속에서 절망에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미 그는 전의를 잃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해도 이길 수 없다는 객관적 진실이 그의 투지를 앗아가 버린 것이다. ‘방법이 없는 건가.’ 마지막 발악으로 그는 내면의 검은 거인의 힘을 빌리려 했다. 검은 거인은 반응이 없다. 아니, 없는 것처럼 보였다. 김성철은 순간, 쓰러진 자신 앞에 우뚝 선 검은 거인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김성철 안에 머물고 있었고 또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거인이 김성철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은 불길로 불타는 거대한 손을. 그 손을 잡으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손을 잡는 순간 이 세상은 끝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신이 바란 또 하나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멀리서 크롬갈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검투사!” 멸시를 가득 담은 음성. 검투사라는 말에 김성철은 크롬갈드를 돌아보았다. 크롬갈드는 인상을 구기며 김성철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려 보였다. “오래 살고 싶으면 대꾸를 해야지. 재미없는 검투사의 운명이 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나?” 위로 치켜든 엄지가 아래를 향했다. 투기장에서 지긋지긋하게 보던 수신호다. 김성철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이 앞엔 여전히 검은 거인의 환영이 있다. 김성철은 힘겹게 손을 뻗어 거인의 손을 맞잡으려 했다. 손과 손이 마주 잡으려는 그 순간. 옆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뭐하는 거야! 일어서!” 김성철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일어서라고! 당장!” 그토록 그리던 목소리. 베르텔기아의 음성이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그녀는 아델화이트의 손에 속박된 채 몸을 거칠게 흔들며 김성철을 향해 소리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델화이트는 베르텔기아를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고 베르텔기아가 격렬하게 반응하자 마법의 채찍으로 베르텔기아를 후려쳤다. “아아아악!” 인질의 가치가 있어서일까, 아델화이트는 베르텔기아의 겉표지에 상처를 입히는 정도로 강약을 조절했다. 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김성철의 눈에 이글거리는 불꽃이 피어올랐다. 생의 의지가, 살고자 하는 욕망이 불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의지의 불꽃은 의식의 구석에 묻혀 풍화되고 있던 어두운 기억들을 밝혔다. 투기장에서 펼쳤던 수많은 사투의 광경들이 떠올랐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비린 피 냄새, 등을 타고 흐르는 땀과 몸과 경기장을 달구던 작렬하는 태양의 기억들. 피칠갑을 한 김성철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동안 너무 쉽게 싸웠어.’ 투기장이라는 지옥에서 뒹굴며 갈아오던 승부사의 감각이 눈을 떴다. ======================================= 116. 베르텔기아 (1) 투기장에서 경험했고 지켜보았던 수많은 군상들의 처절한 사투와 최후의 모습들이 차례차례 김성철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루테기네아라는 나라를 위한 무의미한 죽음들. 그러나 지금 김성철의 내면에서 그 죽음들은 의미를 가진다. 하나의 기억이 흐릿하게 그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름 모를 사내의 무의미한 죽음이었다. 투기장에 던져진 그 죄수는 죽음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현재, 김성철에게 시사할만한 가르침을 전해주었다. 저벅. 크롬갈드가 다시 다가온다. 끝을 내기 위해서다. 챙캉! 확실히 하기 위해 크롬갈드는 김성철 주변에 있는 무기를 발로 치워버렸다. 그의 손엔 망치가 들려 있었다. 김성철이 주로 쓰던 그 둔기로 김성철의 머리를 부숴버리려고 하는 것이 크롬갈드의 의도였다. 김성철은 힘을 다해 일어서려 하다 다시 거꾸러졌다. 김성철의 손이 흙을 움켜잡았다. 크롬갈드의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내 흙을 움켜쥔 김성철의 손이 활짝 펼쳐졌다. 안에 담긴 흙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고 크롬갈드의 시선도 다른 곳을 향했다. 김성철은 활짝 벌린 양손으로 몸무게를 지탱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남길 유언은 없나?” 김성철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롬갈드의 얼굴에 싸늘한 살기가 흐르고 지나갔다. “기이하군. 내가 기억하기로 넌 지금보다는 재미있는 검투사로 기억했는데.” 김성철은 힘겹게 두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이미 다리는 풀렸고 팔은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처형의 시간이다. 크롬갈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거리낌 없이 다가와 완벽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을 머금은 망치를 휘둘렀다. 김성철은 그저 그의 주먹을 지켜볼 뿐이었다. “막아봐라! 검투사!” 크롬갈드가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그때였다. 멍하니 날아오는 망치를 지켜보던 김성철의 고개가 돌연 앞으로 쏠렸다. 거기까진 아무래도 좋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찰나의 흐름 속에서 김성철의 입이 열렸다. 처음이었다. 싸움이 시작된 이래 한마디도 하지 않던 사내의 입이 열리는 것은. 크롬갈드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곧 그는 알게 되었다. “퉤에에에!” 김성철의 악바리 같은 고함과 함께 시선을 덮어 나가는 검은 흙더미를 보고. ‘이럴 수가. 입안에 흙을 숨겨둔 건가?’ 손이나 발을 이용해 흙을 뿌리는 건 흔해 빠진 건달의 방식이다. 크롬갈드도 충분히 경계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입으로 토사를 뿜어내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빌어먹을!’ 방심 따윈 추호도 없었다. 김성철은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 천재라 불리던 사내의 맹점은 거기에 있었다. 그는 모른다. 삶의 극한에 이른 인간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책으로 혹은 한정된 상황을 염두에 둔 훈련만으로 배울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반면 김성철은 알고 있다. 투기장이라는 밑바닥의 지옥 속에서 몸부림치며 죽어간 수많은 사람의 최후를. 그들이 시도한 기상천외한 도전과 거듭된 비참한 실패를 말이다. 그것이 이론 속에서 이상만을 배운 자와 현실 속에서 최선을 배운 자의 차이다. “끄아아악!” 달려오던 크롬갈드가 두 눈으로 눈을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망치는 허공을 갈랐다. “크롬갈드!” 지켜보던 아델화이트가 소리 질렀다. “…….” 이제는 김성철의 차례다. 뼈에 찔린 폐에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온몸에 넘치도록 흐르는 아드레날린은 고통을 잠재웠다. 전신에 힘이 감돌았다. 신의 힘이 아니다. 오랫동안 참아오던 분노, 살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 본신의 힘이다. 그 순수한 힘을 머금은 주먹이 크롬갈드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엌!” 크롬갈드가 비명을 지르며 입을 벌렸다. 그는 일격에 쓰러지지 않았다. 김성철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크롬갈드의 뒤로 돌아가 그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누구의 손길도 허락지 않던 왕의 머리카락이다. “계집이냐!” 머리를 잡힌 크롬갈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김성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꿈쩍도 하지 않던 크롬갈드가 딸려왔다. 크롬갈드도 가만있진 않았다. 그는 앞이 보이지 않는 와중에서도 김성철을 향해 억센 팔을 휘둘렀다. 김성철은 가볍게 그것을 피하고 더욱 강하게 크롬갈드를 잡아당겼다. “아아아악!” 비명이 울려 퍼지는 순간 김성철은 그대로 뒤에서 크롬갈드의 다리를 걸어 넘겼다. 크롬갈드는 그대로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넘어지는 와중에도 크롬갈드는 낙법을 시전하려 했으나 이를 예상이라도 한 듯 그의 머리가 땅에 닿기 전에 김성철의 무릎이 크롬갈드가 굽힌 허리를 그대로 찧었다. 허리가 아슬아슬할 정도로 뒤로 꺾였다. 낙법을 시도한다는 게 허리의 긴장을 풀었고 치명상까진 아니지만 심대한 타격을 줄 정도로 허리를 꺾이게 한 것이다. 뚝! 크롬갈드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하반신의 감각이 일순 사라졌다. 그것을 노리고 김성철이 손가락이 날아들었다. 김성철의 손가락이 크롬갈드의 두 눈에 박혔다. 하나는 눈꺼풀이 가렸지만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했다. “끄으으으! 끄윽!” 크롬갈드의 왼눈에 피가 튀었다. 크롬갈드는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김성철의 팔을 움켜잡았다. “죽여… 버린다!” 크롬갈드의 억센 손이 김성철의 팔을 으스러뜨릴 기세로 조여왔다. 김성철은 꿈쩍하지 않고 무릎으로 크롬갈드의 낭심을 찧었다. 남자의 급소가 통타당했다. “아아아악!” 크롬갈드는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사타구니를 감싸고 고통으로 나뒹굴었다. “비겁한 새끼!” 크롬갈드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김성철은 가쁜 숨을 내쉬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크롬갈드를 향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뿌린 씨앗이다.” “뭐라고?” 김성철은 비틀거리며 걸어가 바닥에 떨어진 망치를 잡았다. 그의 주무기가 손에 들어왔다. 크롬갈드의 안색이 변했다. “이건 전부 네가 만든 루테기네아라는 지옥에서 배운 방법이다. 네가 만든 끔찍한 세상에서 죽어간 사람들에게서 말이다.” “웃기지…!” 크롬갈드가 뭐라고 말하려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음 순간 무심한 망치가 크롬갈드의 얼굴을 강타했다. 퍽! 통렬한 일격. 크롬갈드는 두 팔을 교차해 망치를 막았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망치를 견디게 설계되어 있지 않았다. 뼈에 금이 가고 살점이 파열됐다. 무자비한 연타가 이어졌다. 크롬갈드는 어떻게 팔을 들어 막아보려 했지만 이미 균형을 잃은 그로서 저항할 방법은 없었다. 김성철은 들개처럼 그를 물어주고 놓아주지 않았다. 무자비한 구타 속에서 크롬갈드의 팔은 부러졌고 내려갔다. 툭. 망치가 떨어졌다. 망치를 들 힘도 없었다. 김성철은 쓰러진 크롬갈드 위에 올라타고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 주먹으로 직접적으로 그의 얼굴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이가 부러지고 피가 사방에 튀었다. 아델화이트의 절규가 들려왔지만, 김성철은 멈추지 않았다. 흠씬 두들겨 맞은 크롬갈드는 혼절했고 이윽고 축 늘어졌다. 승부는 정해졌다. 김성철의 승리다. 김성철은 가쁜 숨을 내쉬며 비로소 일어났다. 하지만 김성철은 후환을 남기진 않았다. 김성철은 크롬갈드의 무릎을 잡고 그대로 꺾어버렸다. 우드득. 크롬갈드의 무릎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였다. “끄아아아악!” 크롬갈드의 처참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성철은 나머지 관절도 무자비하게 꺾어버렸다. 이걸로 승부는 났다. 김성철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대결을 준비한 신을 책망하는 듯한 시선으로. 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김성철과 크롬갈드를 둘러싼 무의 장막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신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본 가짜 신들은 감히 이곳에 다가올 생각조차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마음을 졸이며 진정한 신이 눈을 감기를 애타게 염원할 뿐이었다. 장막이 걷히면서 없어졌던 의복이 원래의 위치로돌아 왔고 사라졌던 힘이 다시금 느껴지기 시작했다. 김성철의 승리다. 무의 장막 속에서 잃었던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김성철의 손에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그는 이미 혼절한 크롬갈드를 향해 걸어갔다.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 그가 크롬갈드를 끝내려고 할 때였다. 뒤에서 아델화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까지 하세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김성철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델화이트는 나무뿌리로 만든 단검으로 베르텔기아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믿고 의지하는 이 아이의 목숨은 없어요.” 김성철의 눈에 진한 실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당신이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믿었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하지만, 이것은 이 세상을 위해서예요.” 그녀는 지평선을 노려보았다. 지평선 끝에는 질서신과 중립신이 비겁하게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신을 참칭한 자들. 그리고 그에 협력한 제가 만든 이 더럽혀진 세계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놓기 위해서라도 크롬갈드는 새로운 신이 되어야 해요.” “그가 신이 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거지?” “그는 어둠을 밝힐 유일한 빛이예요!” 아델화이트가 눈을 희번득 치켜뜨며 뇌까쳤다. 어둠과 빛이라는 단어, 아델화이트의 추악한 모습. 그것을 본 김성철은 크롬갈드와 싸움을 벌이기 직전 단편적으로 떠올렸던 아델화이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가?”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며 눈썹으로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김성철의 발치에 작은 돌이 떨어졌다. 아무개의 신호다. 김성철은 계속해서 말했다. “네가 원하는 건 새로운 세상이 아니라, 단순한 속죄라는 개인적인 만족이 아니던가?” 그것이 김성철이 내린 결론. 아델화이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의 눈동자엔 감출 수 없는 분노가 흐르고 있었다. 김성철이 정확히 짚은 것이다. 아델화이트의 본심을. “아니야!” 아델화이트가 흥분하여 분노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그 목소리는 더 이상 여성의 것이 아니었다. 분노한 신적인 존재의 아우성이었다. 김성철이 노린 건 그것이었다. 아델화이트의 뒤에서 번쩍이는 단검이 나타났다. 아무개의 검이다. 그런데 아무개의 검이 닿으려는 찰나 보랏빛 독무가 아델화이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아악!” 아무개의 처량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런.’ 아델화이트의 몸에서 나오는 독기가 먼저 반응한 것이다. 김성철이 나서려는 찰나, 베르텔기아가 먼저 몸을 강하게 움직였다. “이거 놔! 마귀할멈아!” 혼신을 건 반항에 아델화이트는 구겨진 얼굴로 베르텔기아를 찌르려 했다. “이 책벌레가!” 그러나 그녀의 칼날은 베르텔기아에 닿지 못했다. 또 다른 칼날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은 것이다. 신녀 아델화이트의 등 뒤엔 베르텔기아와 똑 닮은 책 한 권이 나타나 있었다. 책장 속에서 칼날과 창날을 꺼낸 그 책의 이름은. “…내 동생을 괴롭히지 마!” 49호다. “끄.. 끄윽...” 광기로 물들었던 아델화이트의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대로 쓰러졌고 그녀에게 안겨 있던 베르텔기아는 몸을 흔들며 빠져나와 김성철에게 향했다. “어이! 당신!” 베르텔기아가 책장을 팔랑거리며 김성철을 향해 날아갔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내려놓고 양팔을 벌려 다가오는 베르텔기아를 맞이했다.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의 품에 안겼다. 얼마 만의 재회인가. 김성철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을 가진 기분을. 아무것도 없었던 사내에게 무언가를 가지게 된다는 걸 알려준 존재. 베르텔기아가 돌아왔다. 더할 나위 없는 감사의 마음과 함께. ======================================= 116. 베르텔기아 (2) 하지만 해후의 감격에 젖어있을 시간은 없었다. 김성철은 쓰러진 아무개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몸은 이미 독기에 중독되어 보랏빛으로 변했고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끔찍한 독기군.’ 김성철은 먼저 엘릭서를 꺼내 그녀에게 사용했다. 그러나 먹히지 않는다. 아델화이트의 독은 여간한 치료의 효과는 모두 막아서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으.. 으!” 아무개가 고통스러워하며 신음을 냈다. 그녀는 빠르게 죽어가고 있었다. 김성철의 마음이 급해졌다. “언니. 죽으면 안 돼.” 베르텔기아가 아무개의 옆을 지키며 그녀를 응원했다. “이제 다 끝났는데, 이런 데서 죽으면 억울하잖아? 안 그래?” 김성철은 아델화이트의 독에 혀를 내두르며 가지고 있는 모든 치료제를 꺼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듣지 않았다. 심지어 세계수의 잎조차. ‘파이널 엘릭서만 있었어도.’ 그때였다. 김성철은 무심코 영혼창고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작은 병. 그것은 크라이아가 준 병이었다. 그 병 안엔 매일 새벽, 세계수의 묘목에서 모았다는 이슬이 담겨 있다. 김성철은 반신반의하며 병의 뚜껑을 땄다. 실로 청량한 기운이 병 속에서 흘러나왔다. 김성철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으며 그 세계수의 이슬을 아무개의 입에 흘려 넣었다. 효과가 있다. 변색 된 얼굴색이 원래의 색을 되찾았고 거친 호흡도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아델화이트의 무시무시한 독기는 아무개의 전신에 퍼졌다. ‘주의를 기울여서.’ 김성철은 신중하게 약을 아무개에게 먹이면서 독기를 몰아냈다. 독기는 곧 등허리 쪽에 쏠렸다. 김성철은 신중하게 단검으로 등의 피부를 째 시커먼 독기를 흘려보냈다. 치이익- 지면에 닿은 독기는 하얀 연기를 풍기며 은근한 복숭아 향기를 풍겼다. 그야말로 지독한 독기다. 김성철의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무개의 눈이 가늘게 뜨였고 이윽고 흐릿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세상…. 세상은 구한 거야?” 차도가 있다. 아무개가 흐릿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물었다. 김성철은 아무개의 손을 잡으며 그녀의 용기를 북돋웠다. “아직은. 하지만 머지않았다.” 그때였다. 김성철의 귓가에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땅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거!” 베르텔기아가 뾰족하게 외쳤다. 신의 계단 쪽이다. 크롬갈드가 땅을 기고 있었다. 피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부러진 두 다리를 대신해 두 팔로 바닥을 기며 신의 계단을 향해 필사적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김성철이 손가락을 들었다. 그때 아무개가 격렬한 기침을 시작했다. ‘젠장 할.’ 김성철은 얼마 남지 않은 약병을 다시 한번 아무개에게 신중하게 투약했다. “제가 갈게요.” 49호가 김성철을 지나쳐 크롬갈드에게 향했다. 하늘이 내린 도움이다. 김성철은 계속해서 아무개를 치료하는 데 집중했다. ‘좀 더 힘을 내라. 이수진. 네가 본 세상과 다른 세상을 보여주겠다.’ 49호는 크롬갈드 앞에 이르렀다. 크롬갈드는 49호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이미 이성의 끈을 놓은 채 오로지 본능만을 가지고 계단으로 가려 하고 있었다. 49호의 책장에서 칼날이 튀어나왔다. 그녀가 크롬갈드를 향해 다가서는 순간 49호는 묘한 감각을 느꼈다. 급속회피. 그녀가 있던 자리에 마법의 얼음 창이 책장을 흔들며 지나갔다. 49호는 마법의 발원지를 노려보며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허공 속에서 또 하나의 책이 나타났다. 55호다. 갓 얼음 창을 뿜어낸 마법진의 잔영 속에서 55호가 말했다. “…집념과 희망만 품어서는 이 세상을 구하지 못해.” 55호의 칼날이 자매가 보는 앞에서 서슬 퍼런빛을 내뿜으며 튀어나왔다. “아버님이 소멸한 지금,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태어나지 않은 신의 탄생이야.” 같은 사내가 만들어 낸 두 권의 책. 한때 같은 아버님을 위해 함께 했던 그 책들은 지금은 반대의 입장에 서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냥 손 놓고 지켜볼 수만은 없다. 하지만 아무개를 이대로 버리고 가면 그녀는 죽음을 면하기 어려우리라.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딜레마 속에서 김성철의 마음은 바짝 타들어 갔다. 그 와중에도 크롬갈드는 야수와 같은 신음을 내며 신의 계단을 향해 기어갔고 그를 중심으로 두 권의 책은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내가 돌볼게.” 베르텔기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베르텔기아.” “나는 비록 쟤들처럼 싸움은 잘하지 못하지만, 책장으로 뭔가 집거나 다루는 거만큼은 쟤들보다 잘하거든.”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코트 자락 너머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는 브로치를 위협해 보이는 시늉을 했다. 확실히 베르텔기아는 책장을 움직임만으로 물건을 집는 건 물론 옷깃 사이에 끼어놓은 브로치의 핀도 가볍게 풀 수 있는 녀석이다. 사람의 간호는 처음 해보는 일이겠지만 베르텔기아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김성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베르텔기아에게 크라이아에게 받은 약병을 넘겼다. 세계수의 이슬이 담긴 약병에 베르텔기아의 책장 사이에 들어갔다. “다녀와. 이 언니는 내게 맡기고.” 베르텔기아가 아무개의 입에 부드럽게 이슬 한 방울을 흘리며 말했다. 하늘이 도운 것인가. 아무개의 얼굴에 서려 있던 독기가 눈에 띄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세계수의 이슬에 저항하던 아델화이트의 독기들이 마침내 힘을 잃고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개의 입에서 고통에 겨운 신음이 커지기 시작했다. 좋은 징조다. 생의 의지가 비로소 살아난 것이리라.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에게 모든 걸 맡기고 우뚝 일어섰다. 두 권의 책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칼날과 마법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김성철은 그들 사이로 가볍게 날아가 두 권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이거 놔!” “…….” 55호는 앙탈을 부린 반면, 49호는 얌전하게 김성철의 손아귀 안에 잡혔다. 김성철은 그 둘을 잡아 서로 마주 보게 하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자매끼리 싸워봐야 뭐가 남는가? 누가 이기고 지건 남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상처뿐이다.” 55호는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차마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김성철의 압도적인 힘이 55호를 꽉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읍읍! 읍읍!” 55호의 반항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그녀는 으스러뜨릴 것 같은 김성철의 힘에 정신을 잃었고 축 늘어졌다. 김성철은 55호를 49호에게 맡겼다. “잠시, 맡아둬. 못 설치게.” “맡겨주세요.” 49호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이제 김성철은 크롬갈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계단을 향해 기고 있었다. 아직 계단과 크롬갈드 사이엔 거리가 있다. 김성철은 크롬갈드의 모습을 무심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곧 그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미쳐 버린 건가.’ 무의 장막이 풀렸을 때 김성철은 물론 크롬갈드 또한 힘을 되찾고 이 세계에서 쓸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돌려받았다. 그에게 생각이 있었다면 영혼창고에서 약을 꺼내 상처를 치료하고 한달음에 신의 계단에 달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크롬갈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상처 입은 야수 그 자체가 되어 오로지 본능에 의지해 계단을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김성철의 손에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 크롬갈드의 운명은 김성철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만둬!” 가까운 곳에서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델화이트의 것이다. ‘아직 살아 있었나.’ 김성철은 고개를 돌려 아델화이트를 바라보았다. 치명상을 입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목숨은 붙어 있었다. 곧 김성철은 그 원인을 알게 되었다. 49호가 관통한 심장엔 심장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심장을 대체하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씨앗 같은 모양새였다. 또 고대신의 것과는 또 다른 촉수가 상처에서 징그럽게 솟아 나와 그녀의 몸을 치유하고 있었다. 실로 혐오스런 광경이다. ‘고대의 주술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다행히 아델화이트의 치유 속도는 느릿했다. 아델화이트 자체가 아직 필멸자에 머무른 몸이라 회복의 권능은 고대신에 비할 바가 아니고 49호가 그녀의 몸에 낸 구멍은 지나치게 컸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여자도 살려둬서는 안 된다. 살려두기엔 너무나 위험한 여자다. 하지만 크롬갈드가 우선이다. 생각을 정리한 김성철은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김성철의 손이 크롬갈드의 발목을 잡았다. 당장 팔 가라즈로 후려칠 수도 있지만 크롬갈드에겐 여러 개의 부활각인이 있다. 김성철은 크롬갈드를 아델화이트가 있는 자리에 던져 함께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두 인물을 감시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것이 부정한 연인에게 어울리는 최후이기도 했고, 위험한 두 인물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다는 실제적인 목적도 있었다. 그런데 김성철의 손이 크롬갈드의 발목을 붙잡은 순간, 주변이 검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초월감각이 반응했다. 김성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신의 계단 위에서 이쪽을 향해 하강하는 신적인 존재를 보았다. 아우성치는 수천 개의 비명을 머금은 거대한 채찍이 이쪽을 향해 날아왔다. 김성철의 오른팔과 팔 가라즈 위에 검은 불길이 타올랐다. 검은 불길을 머금은 팔 가라즈로 김성철은 수천 개의 비명을 질러대는 채찍을 막아냈다. [ 아아아악! ] [ 꺄아아아악! ] [ 으어.. 끄으으으! ] 채찍에 촘촘히 박힌 인간 얼굴의 형상들이 처참한 비명을 질러대며 검은 불길을 머금은 팔 가라즈의 결을 따라 스치고 지나갔다. 채찍이 지나간 이후 검은 형상이 지면 위에 내려앉으며 지축을 흔들었다. 쿵.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김성철은 새로운, 그리고 진정한 적수를 노려보았다. “…….” 김성철의 눈에 초월감각이 빚어낸 하얀 문자가 떠올랐다. 그 문자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 혼돈신 쿤키두 ] 모든 것의 흑막이 마침내 나타났다. 김성철은 쿤키두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그 거대한 존재는 염소의 얼굴에 목 아래까지 내려오는 뿔을 달고 있었고 성긴 검은 털이 자란 인간 형상의 몸 곳곳엔 독해 불가능한 기괴한 문자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그 모습에서는 질서신이나 중립신 혹은 고대신처럼 신적인 광휘나 경이로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공포와 불경함만이 존재할 따름이었다. 그것이 혼돈신 쿤키두의 형상. [ 돌고 돌아 결국 다시 마주서게 됐군. 나의 도구여. ] 쿤키두가 말했다. 언제나처럼 비열한 목소리로. 그의 목소리는 공포스런 형상과 김성철의 내면 두 곳에서 동시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김성철은 말없이 검은 불길을 머금은 팔 가라즈를 들어올렸다. 단 일격에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발 빠르게 쿤키두가 거대한 손가락을 펴 흔들어 보였다. [ 이런, 나의 도구야. 뭔가 잊은 건 없나? ] 쿤키두의 말이 끝나는 순간, 김성철의 시야에 또 다른 문자가 떠올랐다. [ 축복 ] 맹약(초월감각, 알 수 없음) 다름 아닌 김성철의 능력창의 일부다. ‘맹약?’ 김성철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이것은 김성철이 처음 신의 계단을 올랐을 때 얻은 축복이다. 김성철은 그 맹약이 뭔지 모른다. 그 맹약으로 인해 신적인 힘을 얻었고 또 시간이 지나서는 그 맹약이 혼돈신과의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까지는 알게 되었지만, 맹약의 진정한 내용은 여전히 안개 속에 머물러 있다. 그 맹약을 혼돈신이 다시 꺼내 들었다. 김성철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염소 모양의 얼굴에 스산한 미소가 떠올랐다. [ 자, 보거라. 나의 도구야. ] 수천 개의 비명을 머금은 채찍이 지면을 강하게 때렸다. 그와 동시에 김성철은 자신의 심장에 박힌 맹약의 십자가를 일목요연하게 떠올렸다. 숨 막힐 것 같은 충격과 함께. “…?!” 봉인된 기억이 해금됐다. 그리고 그는 알게 되었다. 자신이 혼돈신에게 건 맹약이 무엇인지를. ======================================= 116. 베르텔기아 (3) 그곳에서 김성철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오로지 재앙의 해결, 그것뿐이다.” 비록 일개 필멸자, 그것도 어중간한 아무것도 없고, 가지지 못한 사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신과 신적인 존재에게 자신의 요구사항을 말했다. 혼돈신이 기억조작을 통해 조작하려고 했던 투박한 진실이 마침내 베일을 벗었다. 그때 죽은 신을 앞에 두고 혼돈신은 몇 번이고 김성철을 회유하려 했다. 김성철로 하여금 세상을 파멸시키기 위해서. 그러나 김성철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혼돈신이 먼저 손을 들었다. 대신 그는 김성철에게 몇 가지 제안을 한다. [ …드워프보다 고집이 강한 인간이 존재하다니. 뭐, 아무래도 좋다. 신의 도구라면 그 정도 강단은 있어야지. 하지만 몇 가지 작은 사항엔 동의해줘야겠다. 딱히 중요한 건 아니지만, 이쪽도 신과 너를 중개하는 처지에서 뭔가 보장이 필요하거든. ] 혼돈신은 김성철에게 맹약의 십자가를 내밀었다. 조건은 단 세 가지였다. 하나는 기억의 봉인. 신의 계단 너머의 일이 필멸자에게 알려지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 바람직하지 못하므로. 김성철은 그 조건에 동의했다. 다른 하나는 세상의 관리자가 되지 않는 것이다. 김성철은 당시엔 세상의 관리자가 뭔지 알지 못했지만 혼돈신으로부터 재앙을 모두 해결하면 될 수 있는 자리라는 설명을 들었다. 당면한 재앙의 해결이 우선이었던 김성철은 그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그것은 지금 이 상황과 직결되는 문제다. 혼돈신을 해하지 않는다. 이것이 김성철의 심장에 꽂힌 맹약의 십자가의 마지막 조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혼돈신의 최후의 보험이다. 김성철은 그 조건에 순순히 동의했다. 당시 그의 적은 첫 번째 재앙인 해서니우스 맥스와 썩어빠진 세계의회였지, 주신 중 하나와 맞서는 건 물론, 그를 죽인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으므로. 깨달음의 감각 속에서 김성철의 능력치 하나가 변화했다. [ 축복 ] 맹약(초월감각, 제약조건) 오랫동안 베일에 싸인 맹약의 여백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간소했다. 아니,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진실이란 때로는 그런 법이다. 거친 바다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섬에 닿으면 신천지가 펼쳐질 것처럼 보였지만 막상, 파도와 악천후를 뚫고 섬에 이르렀을 때 그 섬이 아무것도 없는 바위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처럼. 조악한 진실이 밝혀진 후, 김성철 앞엔 또 하나의 무거운, 업보와 같은 또 다른 진실에 직면했다. [ 자, 나의 도구야. 어떻게 하겠느냐? 날 죽이고 세상을 멸망시켜보겠느냐? ] 혼돈신이 비명이 머금은 채찍으로 지면을 후려치며 김성철을 조롱했다. 지평선 너머에서 또 다른 주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쿤키두, 이놈. 겁도 없이 다시 신의 계단 아래로 내려오느냐? ] [ 신의 도구가 없다면 너는 죽은 목숨이다. ] 질서신과 중립신이 혼돈신에게 위협을 가했다. 혼돈신은 자신의 옛 경쟁자이자 동료들의 위협을 일소에 부쳤다. 대신 그는 필사적으로 신의 계단을 향해 기어가는 크롬갈드를 폭풍을 머금은 눈으로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 어떻게 해도 외통수군. 그렇지 않은가? 나의 도구야? ] 실로 그의 말대로다. 가만히 있자니 크롬갈드가 신의 계단에 이르러 다섯 번째 주신이 될 것이고 그렇다고 혼돈신을 공격하면 맹약의 십자가는 불타고 김성철은 검은 거인으로 변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김성철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왜 기억의 봉인을 풀었지?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널 죽여 버렸으면 네놈의 소원대로 돌아갔을 터인데.” 이에 혼돈신은 큰 소리로 웃었다. 거대하고 신적이었지만 참으로 경박하고 비열한 웃음소리였다. 혼돈신이 말했다. [ 이 세상이 파멸하는 최고의 장면을 못 본 채 그냥 죽으라고? 그건 안 될 일이지. 세상의 파멸, 그것을 보기 위해 죽은 신 옆에서 수천 년 동안 시체처럼 버텨왔는데. 내 도구에게 죽으면 세상의 파멸을 이루어냈다는 성취감을 얻을지언정, 내가 원하던 광경은 영영 보지 못한 채 소멸하겠지. ] 메마른 웃음소리가 다시 한번 멸망해가는 대지 위에 울려 퍼졌다. 김성철의 얼굴에 진한 불쾌감이 떠올랐다. ‘대체 어디까지 꼬인 놈이지?’ 주신 중에 제대로 된 놈은 하나도 없었다. 주신만이 아니었다. 영겁을 살아온 존재 중에 제대로 됐다고 볼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영원성이 없기에 변질되고 타락해버리는 것이다. 다만, 몇 가지 예외는 있다. 김성철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는 순간 혼돈신이 다시 말했다. [ 게다가. 넌 지켜야 할 것이 있지 않나? ] 비명을 내지르는 채찍이 뱀처럼 땅을 훑으며 움직였다. 김성철의 눈동자에 경악이 떠올랐다. 그는 혼돈신의 행동을 예측했다. 아니나 다를까, 혼돈신의 채찍이 지면을 후려쳤다. 목표는 김성철이 아닌, 베르텔기아와 아무개. “으으….” 필사적으로 아무개를 치료하던 베르텔기아 위에 검은 그림자가 떠올랐다. “응?” 베르텔기아가 불길한 예감을 느낀 순간 비명을 지르는 채찍이 그들을 덮쳐왔다. 수만 개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채찍이 그들을 덮치는 순간, 검은 형체가 베르텔기아와 아무개 앞에 나타나 둘을 막아섰다. 김성철이다. 검은 불길을 머금은 김성철의 팔 가라즈가 비명을 내지르는 혼돈신의 채찍을 막아냈다. [ 크하하하하! 여기 나의 도구야. 내가 생각하는 대로 척척 움직여주는군! ] 채찍은 마치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김성철은 막는 데 급급했다. 어쩔 수 없었다. 혼돈신을 해하면 안 된다는 제약이 걸려 있기에 제대로 된 반격 따윈 꿈도 꾸지 못했다. 귀청을 찢을 것 같은 비명과 태풍과 같은 풍압, 그리고 무시무시한 타격 속에서 김성철은 크롬갈드가 기어이 신의 계단에 이르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끄르르르…. 죽여버린다…. 전부 죽여버리겠어….” 이미 크롬갈드의 이성은 망가졌다. 가장 강한 인간이라 자부하던 그가 그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던 김성철에게 패배했을 때, 그는 인간의 마음을 잃었다. 어떻게 보면 적절한 처신이다. 자신을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던 근거가 무너진 지금 미쳐버리는 것 이외엔 자신을 유지할 방법은 없으니까. 미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말은 크롬갈드를 두고 이르는 것이었다. 크롬갈드라는 인간의 이성은 무너졌지만 그의 또 다른 일면, 흉포한 야수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야수성이 크롬갈드를 계단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혼돈신의 공격은 더욱 거칠어졌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그는 물론 나머지 소중한 동료마저도 잃어버릴 것이다. 보고도 손을 쓸 수 없다. 크롬갈드의 승리는 명확해 보였다. 그렇게 모든 것이 불투명해지는 순간 49호가 크롬갈드 뒤에서 나타났다. “당신을 그곳에 이르게 할 수 없어요.” 49호가 크롬갈드를 끌어내려는 찰나 또 다른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나무뿌리가 지면을 뚫고 솟아 나와 49호의 몸을 묶었다. 아델화이트다. 그녀는 자신의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나무뿌리를 만들어내어 49호의 몸을 묶어버린 것이다. 입에서 검은 피를 내뿜으며 아델화이트는 행복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지면에 처박았다. “…이걸로 됐어.” 그와 동시에 크롬갈드의 손이 신의 계단의 첫 번째 층계에 닿았다. 그의 손이 닿는 순간 하늘로 이어진 계단 전체가 밝게 빛났다. 땅끝에서 하늘의 끝에 이르기까지 일직선의 빛의 직선이 만들어졌다. 신의 계단이 반응했다. 도전자를 받아들인 것이다. 비명을 내지르는 채찍을 쉴 새 없이 휘두르던 혼돈신은 메마른 웃음소리를 흘리며 천공으로 사라졌다. “아무개를 잘 부탁한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놔두고 신의 계단을 향해 달려갔다. 크롬갈드는 여전히 두 팔로 신의 계단을 기어가고 있었다. 따라잡을 수 있다. 지금이라도 끌어내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김성철이 신의 계단에 접근했을 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신의 계단이 그의 출입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신이 그를 거부한 것이다. 크롬갈드는 방해받지 않고 하늘로 뻗은 천공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두 팔로 악착같이 기어서. “보세요. 그이의 모습을.” 여전히 쓰러진 아델화이트가 입에서 보랏빛 피를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당신과 에크하르트 같은 평범한 사람과는 달라요.” “뭐가 다르다는 거지?” 팔 가라즈를 쥔 손을 꾹 쥔 채 김성철이 감정을 억누르며 물었다. “당신과 에크하르트는 모든 걸 버렸기에 비로소 신의 계단을 오를 수 있었지만, 저 이는 당신들과 달리 모든 걸 가지고 오르려 하고 있어요.” “모든 걸 가지고?” 김성철의 물음에 아델화이트는 확신을 담아 긍정했다. “네, 이 세상 모든 것들을 포용할 각오를 가지고 있어요. 그는 그럴만한 그릇을 지닌 사람이에요. 전성기의 엔키아두스도 알레옥고스도 그 이에 비하면 범인처럼 보일 정도죠.” 아델화이트의 눈에 들뜬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이 세계를 바로 잡을 유일한 구원자예요.” 그 말을 들은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무심한 눈에 하늘을 거슬러 올라가는 크롬갈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인간의 마음조차 잃고 한 마리 야수가 되어 필사적으로 계단을 오르는 그는 적어도 김성철의 눈에 세상의 구원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한 마리 야수에 지나지 않았다. 야수가 어떻게 세상을 구원한단 말인가. 시간이 흐르고 크롬갈드의 모습이 사라졌다. 적어도 그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까지는 소멸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신의 계단으로부터 무지갯빛 구름이 피어오르며 어두운 천지를 밝혔다. 영광스러운 광휘가 구름 사이에서 빛을 발하며 신비롭고 경이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지평선 끝에 선 신들이 전율했다. [ 이것은. ] [ 새로운 주신의 탄생인가? ] 천둥과 비슷한 천상의 나팔 소리가 천지를 뒤덮었다. 그 벅찬 울림 속에서 아델화이트는 기쁨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새로운 신을 영접할지어다!” 신녀의 목소리는 먼 곳으로 퍼져 끝없이 메아리쳤다. 기대 속에서 마침내 어떤 신적인 존재가 하늘로부터 하강했다. 주신에 걸맞는 거대한 육체. 경이로움이라는 신에게만 허용된 속성을 지닌 어떤 신성한 무언가였다. 아델화이트는 두 주먹으로 흙을 쥐며 새로운 주신의 탄생을 찬양했다. 김성철은 묵묵히 태어나지 않은 신의 강림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다섯 번째 주신의 완전한 모습이 드러났다. 김성철은 두 눈을 감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새로운 신을 찬양하라!” 아델화이트의 메마른 외침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아까와 달리 그녀의 목소리엔 처음 신의 강림을 찬양할 때 서린 찬탄과 경배의 마음이 적잖이 희석되어 있었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새로운 주신의 형상이 말해주고 있었다. 하늘을 찢어버릴 정도로 날카롭게 손을 거대한 손톱과 불거진 손. 늑대 형상의 아홉 개의 두상. 살의와 파괴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그렇다. 저것은 불길한 악의 덩어리요, 멸망의 짐승이다. 초월감각이 반응했다. [ 마침내 태어난 다섯 번째 주신. ] [ 크롬갈드라 불렸던 수컷. ] 김성철에게 패배했을 때 크롬갈드는 인간의 마음을 잃었고 한 마리 야수가 되었다. 신은 그 야수를 통제불능의 괴물로 만들어 이 세상에 다시 내보냈다. “이것이 당신이 원한 새로운 희망인가?” 김성철은 빈정거리는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아델화이트에게 감정을 섞어 빈정거리고 있었다. “…….” 아델화이트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수천 년간 동안 품어온 염원이다. 쉬이 포기할 수는 없다. 아홉 개의 늑대 머리를 지닌 야수가 김성철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 크어어어어어어! ] 팔 가라즈에 검은 불길이 타올랐다. 거대한 망치 형상의 검은 불꽃이 달려드는 거대한 야수를 후려쳤다. 지축이 뒤흔들렸고 늑대의 광포한 포효가 하늘을 떨게 했다. 한 대 크게 맞은 크롬갈드는 마치 짐승처럼 김성철의 주위를 돌다가 이윽고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바싹 마른 산야가 멸망의 짐승의 거대한 발아래 깔려 뭉개지며 바스러졌다. 크롬갈드가 향한 곳은 기존의 두 명의 주신이 있던 지평선의 끝자락이었다. 크롬갈드는 순식간에 그들에게 이르렀다. [ 오오, 다섯 번째 주신인가. 늠름하군. ] 질서신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는 알고 있었다. 예정된 다섯 번째 주신이 자신들보다 더욱 강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 이렇게 된 이상 우리도 그대를 동료로 받아들여야겠지. 환영하네. 신이 된 것을. ] 중립신이 손을 내밀며 크롬갈드를 반겼다. 크롬갈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홉 개에 이르는 늑대의 두상에 박힌 18개의 눈동자에 묘한 빛이 번득였다. 싸늘한 기운이 장내에 흘렀다. 질서신과 중립신이 그 불길한 기류를 느낀 순간 일은 벌어졌다. 크롬갈드가 중립신을 덮쳤다. 아홉 개의 두상이 무자비하게 주신의 몸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 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 신을 참칭했던 자는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산 채로 몸이 뜯어먹히는 먹이감으로 전락했다. [ 디르고…. 약해. ] 중립신을 뜯어먹은 크롬갈드가 인간의 언어로 말했다. 인간의 마음이 돌아온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흡수한 것이다. 중립신의 피와 살을 먹음으로써. 늑대 머리의 눈동자엔 더욱 흉포하고 혼란스러운 파멸의 기운이 번득였다. 멸망해가는 세상 가운데 우뚝 서서 신을 포식하는 그 존재는 세상을 구원할 다섯 번째 주신이 아니라 멸망의 짐승 그 자체였다. 세상을 떠받치던 또 하나의 기둥인 중립신의 죽음은 세상의 멸망을 더욱 가속했다. 파멸이 시작됐다. 곳곳에 화산이 분출되고 지진이 대륙을 잘게 쪼갰고 성난 파도가 붕락한 대륙을 집어삼켰다. 아델화이트의 입에서 검은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이건, 이건 아니야.” 수천 년의 기대와 염원이 배신당했다. 그녀가 만들어놓은 것은 희망이 아니라 또 다른 멸망의 도구에 다름이 아니었던 것이다. 적나라하며 명명백백한 현실 속에서 아델화이트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실로 처량한 웃음소리였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와 아무개를 안전한 자리로 옮기면서 그녀를 힐끗 응시했다. 아델화이트는 끝났다. 헛된 꿈의 사멸과 함께. ======================================= 117. 부수는 자 (1) 김성철은 자신의 동료들을 신의 계단 바로 아래에 옮겼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 파괴되더라도 그곳만큼은 마지막에 파괴될 것이다. 그의 생각은 현실로 나타났다. 주변의 산들이 붕괴되는 가운데 신의 계단 아래 평평한 분지만큼은 굳건히 남아 흔들리지 않았다. 멀리서 아델화이트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김성철은 지평선 끝을 바라보았다. 중립신을 집어삼킨 크롬갈드는 이제 또 다른 주신인 질서신을 노리고 있었다. [ 이…. 이 놈! 감히 내 동생을! ] 질서신은 나름대로 저항하려 했다. 만 개의 정의의 검을 전개해 크롬갈드에게 맹공을 가했다. 하지만 크롬갈드의 신체에 질서신의 권능은 통하지 않았다. 멸망의 짐승 앞에서 질서신은 그대로 잡아먹힐 운명이었다. 결국 질서신이 위협을 느끼고 꽁무니를 내뺐다. 공교롭게도 그가 도망쳐 온 것은 김성철과 진정한 신이 있는 신의 계단 쪽이었다. 거대한 신형이 시선을 꽉 채워오는 걸 느끼며 김성철은 꼴사나움을 느꼈다. 혼돈신도 같은 감정을 느꼈는지 곧 내면에서 혼돈신의 빈정거림이 들려왔다. [ 정말 추하군. 엔키아두스. 결국 도망쳐 오는 곳이 자신이 배신한 신의 발치 아래라니. ]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질서신을 올려다보았다. [ 크흐흐흑! 살려주시게! ] 질서신은 김성철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비켜.” 김성철은 질서신에게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거대한 몸뚱이에 가려 크롬갈드가 뭘 하는지. 김성철이 손짓하자 질서신은 황급하게 옆으로 비켜섰다. 대지가 요동쳤다. 질서신이 비켜난 자리엔 처참한 살육의 현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크롬갈드는 하늘을 찢고 초월세계의 틈을 만들어내 그 안에 도사리고 있던 아신들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아신들은 저마다 치열하게 반항해보려 하지만 멸망의 짐승 앞에서는 그저 한 입 거리 간식에 지나지 않았다. 우적우적. 거대한 뱀 한 마리가 필사적으로 살육의 현장에서 탈출하려고 했다. 김성철이 아는 녀석이다. ‘저 놈은 우로보로스였던가?’ 지식의 뱀을 칭하던 그 아신은 자신의 몸만 한 거대한 구슬을 품고 이쪽으로 향해 전속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김성철은 그 아신의 품에 담긴 구슬을 보았다. 그 안엔 하나의 작은 세계가 담겨 있었다. 그것이 아신들이 지배하며, 스스로를 신으로 느끼게 한 렐름이다. 크롬갈드의 야수의 손이 우로보로스의 꼬리를 덥썩 잡았다. 우로보로스는 뱀장어처럼 요동치며 크롬갈드의 손길을 벗어나려 했다. [ 놔라! 놓으라고! 이제 막 내 세계에서 재밌는 일이 일어날 예정이란 말이다! ] 크롬갈드는 우로보로스를 잡아당겨 꼬리부터 갉아먹기 시작했다. 우로보로스는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자신의 품에 안긴 작은 세계만은 결코 놓지 않았다. [ 이제 곧, 벙어리 왕자가 정체를 드러내고 유폐 공주를 구출하려고 한 단 말이다! 적어도 그 장면만큼은 보게…. 끄아아아악! ] 우로보로스는 크롬갈드에게 먹혔다. 크롬갈드는 그가 지니고 있던 렐름을 들어 그것을 가만히 응시하다 이내 발톱으로 째고 그 안에 있는 무수한 인간들을 모두 집어삼켰다. 포식을 끝낸 크롬갈드의 눈엔 더욱 흉포한 빛이 감돌았다. [ 놈은 먹어 치운 대상의 힘을 흡수하는 능력이 있다. 이대로 놈을 놔두면 놈은 모든 걸 먹어치우고 마지막엔 이 세상마저 먹어치울 것이다! ] 질서신이 말했다. 김성철은 무심한 눈으로 멸망해가는 세상을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 전에 이 세상이 멸망하겠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 세상의 파멸. 그것은 신의 염원이다. ] 질서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김성철은 고개를 들어 광휘에 싸인 주신을 올려다보았다. [ 그는 자신이 만든 세상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을 멸하러 들었지. 신이 나서 진흙으로 성을 만들고 또 그것이 마음에 안 들어 허물어버리는 어린아이처럼. ] “…….” 질서신은 계속해서 말했다. [ 그것이 우리가 신에 대항해 일어선 이유다. ] 질서신의 말의 일부엔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원인을 제공한 건 그 자신이다. 김성철은 누구의 편을 들 마음도 없었다. 그가 알고 싶은 것은 자신과 자신의 소중한 존재들을 살리는 것뿐이다.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지금 관리자가 되어라! ] 질서신이 소리쳤다. “관리자가 되서 뭐하게?” 김성철은 담담한 어조로 반문했다. [ 에크하르트의 지식이 있는 너라면 신의 흙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아신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아직 렐름엔 신의 흙으로 치환할 소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 김성철은 뻔뻔하게 말하는 질서신을 노려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도 신으로 남고 싶나?” [ 그…. 그 것은…?! ] “오로지 자기밖에 모르는 너 따위가 신으로 남느니 차라리 멸망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김성철의 일갈에 질서신은 침묵했다. 그는 신을 참칭했지만 지금은 어느 필멸자보다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했다. 한편 아신들을 신나게 포식하던 크롬갈드가 이곳으로 아홉 개의 머리를 돌렸다. 천지를 격동시키는 포효가 울려 퍼졌다. 온 몸의 털이 곤두 설 정도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크롬갈드는 다시 이곳으로 올 것이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와 아무개를 지키듯 그 앞에 버티고 서서 검은 불꽃에 휩싸인 팔 가라즈를 높이 들어올렸다. [ 크흐흐흑! ] 질서신은 또 한 번 추태를 부렸다. 그는 크롬갈드가 다가오자 겁에 질려 그 산만한 덩치를 가지고도 김성철 뒤에 숨었다. 김성철은 그런 질서신을 힐끗 쳐다보며 냉담하게 말했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질서신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못했다. 지평선 끝에 머물던 크롬갈드의 형체가 뒤틀렸다. 인간처럼 두 발로 서 있는 그의 몸은 그의 머리에 달리 늑대의 형상처럼 변했다. 성스런 기운이 묻은 옷이 찢기고 그 사이로 검고 붉은 털로 뒤덮인 멸망의 짐승이 나타났다. [ 그오오오오오- ] 소름 끼치는 포효를 내지르며 크롬갈드는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하늘이 찢어지며 한 무리의 악신들이 나타나 크롬갈드를 덮쳤다. 크롬갈드는 미친듯이 날뛰며 악신들을 도륙했다. “이…. 이걸 받아줘.” 어느 정도 독기에서 회복하긴 했지만 여전히 중태에 빠진 아무개가 남을 힘을 쥐어 짜내어 김성철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녀의 손바닥 위엔 하얀색으로 빛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작은 식탁보 모양의 형상이 올려져 있었다. “이것은?” 영혼각인이다. “이걸 받아줘. 이게 지금 내게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보탬이야.” 아무개가 몸을 힘겹게 일으키며 손바닥을 더욱 김성철 가까이에 내밀었다. “언니, 움직이면 안 돼요.” 베르텔기아가 걱정스레 말했다. 하지만 아무개는 요지부동이다. “어서….” 김성철은 말없이 아무개의 영혼각인을 받아들였다. [ 신화급 영혼각인 - 소실 ] 아무개의 가장 큰 힘이자 그녀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무방한 힘이 마침내 김성철의 손에 들어왔다. 그러나 김성철의 영혼각인엔 빈자리가 없다. 그는 오랫동안 신세 지던 기만자의 장막을 제거했다. 영혼에서 제거된 기만자의 장막의 형상은 신화급 영혼각인 소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고 많았다.’ 김성철은 충분히 역할을 다한 영혼각인을 허공 위에 흘렸다. 기만자의 장막은 붉게 타오르는 대지 너머로 날아가 한 무리의 재에 섞여 사라졌다. 김성철은 아무개의 선물을 빈자리에 박아 넣었다. 영혼각인을 장착하는 순간 김성철 눈앞에 경고 문구가 떠올랐다. [ 당신에겐 ‘은밀함’의 속성이 없습니다. ] [ 따라서 당신은 영혼각인 - 소실의 힘을 극히 일부분밖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 [ 그래도 이 영혼각인을 장착하시겠습니까? ] ‘특별한 능력을 필요로 하는 영혼각인인가.’ 김성철이 그렇게 생각할 때 아무개의 숨 가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쿨럭! 제대로 쓸 수 없다는 문구가 나오지?” 김성철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개는 알아보지 못했다. 시력이 이미 죽어버린 모양이다. 김성철은 그녀의 손을 쥐고 그렇다고 답했다. “그럼! 쿨럭! 가볍게 설명해줄게. 그것은 단순히 은폐나 투명화 효과를 주는 영혼각인이 아니야.”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한 대로야. 소실은 그 힘을 사용하는 순간, 당신을 이 세계에서 지워버려.” “역시 그런 것이었나.” 김성철의 뛰어난 오감으로도 그녀의 기척을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별 볼 일 없는 내가 회귀자로 선정된 이유는 단순히 각인 적합성이 있었기 때문이야. 쿨럭! 쿨럭!” 아무개는 입에서 검은 독기가 섞인 핏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그런 그녀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내게 필요한 물건인가?” 그는 묻고 있었다. 아무개는 김성철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합성이 있는 나는 거의 무한에 가깝게 각인의 힘을 쓸 수 있지만…. 쿨럭! 당신이라면 1초 정도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 거야.” “그 정도면 최고의 무기군.” 김성철은 아무개의 손을 잡으며 소실의 힘을 받아들였다. 아무개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김성철이 그녀에게 다가가자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을 막아서며 몸을 흔들어 보였다. “기절한 거야. 아직, 살아 있어.” “그렇군.” 김성철과 베르텔기아 옆에 49호가 나타났다. 아델화이트의 뿌리에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그녀는 정신을 잃은 아무개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의문이네요. 왜 그녀가 우리 자매의 영혼각인을 들고 있는 걸까요.” 이에 대해 김성철은 진한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그녀는 미래에서 왔다. 지금과는 다른 미래에서.” 김성철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들어 동쪽을 바라보았다. 지축이 흔들거렸다. 지진이 아니다. 악신을 먹어치운 크롬갈드가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 바야흐로 최후의 일전이 시작되려 하는 것이다. 아래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틀리지 않았어.” 아델화이트의 목소리다. 온몸이 피투성이로 변한 그녀는 아직 무너지지 않은 작은 산정 위에 우뚝 서 있었다. 그녀는 다가오는 거대한 야수를 보며 양팔을 활짝 벌리며 그를 맞이했다. “파괴와 창조는 언제나 순환하는 것. 누구보다 뛰어난 나의 사랑은 그걸 알고 몸소 야수로 변해 이 세상을 파괴시키고 있는 것에 불과해. 보라고! 크롬갈드가 이 세상을 망친 주범들을 물어뜯고 이곳으로 오는 것을!” 아델화이트를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미쳐버렸다는 사실을. 아무개를 간호하던 베르텔기아가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불쌍한 사람.” 크롬갈드는 바람처럼 달려와 아델화이트를 지나쳐 바로 김성철을 덮쳤다. 김성철은 먼저 앞으로 달려나와 크롬갈드를 마중했다. 검은 불꽃에 뒤덮인 팔 가라즈가 허공을 휘저었다. 팔 가라즈 형상의 검은 불꽃이 달려오는 크롬갈드의 몸통에 적중했다. 퍽. 신의 힘이 담긴 일격. 크롬갈드의 거체가 훅 밀려났다. 하지만 밀려나는 와중에도 아홉 개의 늑대머리는 김성철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쩍 벌린 늑대의 아가리 깊숙한 곳에서 불경한 빛이 번득였다. ‘이런 힘을 숨겨두고 있었단 말인가.’ 순간 김성철은 보았다. 크롬갈드의 아홉 머리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것을. 심상치 않다. 그렇게 느끼는 순간 쩍 벌린 늑대의 아가리에서 순백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브레스다. ‘드래곤 브레스와는 차원이 다르군.’ 그것은 가공할만한 겁화의 불길이오,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녹여버리는 파멸의 불꽃이다. 김성철은 급히 승천자의 손을 들어 불꽃을 중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크롬갈드의 두 번째 머리가 똑같은 불꽃을 뿜어내자 승천자의 손도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승천자의 손이 녹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크롬갈드의 여러 개의 머리가 동시에 각각의 생각을 뇌까렸다. [ 너에게 배운 속임수다! ] [ 불타라. 벌레. ] [ 시정잡배에게도 배울 것은 있지. ] [ 속임수엔 속임수로! ] 김성철의 우반신을 덮은 검은 불길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김성철은 신의 힘이 몸안에 흐르는 걸 느끼며 팔 가라즈를 휘둘렀다. 검은 불꽃이 거대한 망치로 화해 크롬갈드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크롬갈드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뒹굴었다. 그러나, 그 짐승은 공격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름 모를 산정을 박살 내며 쓰러진 그 괴물은 착지와 동시에 균형을 잡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김성철을 향해 아홉 개의 아가리를 일제히 벌렸다. 아홉 개의 브레스. 손톱이 돋은 손으로는 불경한 수인을 맺고 있었다. 대지가 흐물흐물하게 녹아들어가기 시작했다. 김성철의 발이 검은 늪으로 변한 진창에 박혔다. 김성철의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크롬갈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걸 건 아홉 개의 브레스를 일제히 내뿜었다. 서로 다른 각도에서 뿜어져 나온 겁화의 불길이 김성철과 검은 늪을 덮쳤다. 무시무시한 열기는 검은 늪을 부글부글 끓게 하였고 이윽고 대지를 녹여 용암처럼 벌겋게 달구었다. 어떤 생명도 그 초고열의 지옥에선 살아남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 이겼다! ] 크롬갈드가 승리를 확신한 순간이었다. 희끄무레한 형체가 그의 뒤에서 나타났다. 다름 아닌 김성철이다. 크롬갈드는 이내 김성철의 기운을 느끼며 황급히 뒤돌아섰다. 지축이 흔들렸다. [ 어떻게?! ] 물음과 동시에 팔 가라즈 형상의 검은 불꽃이 그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늑대 머리 하나가 박살이 나 뇌수를 사방에 흩뿌렸다. 크롬갈드는 이를 드러내며 김성철을 향해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대가리 하나가 김성철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그것은 의도적인 것이다. 악취나는 입안에서 김성철은 신의 힘으로 팔 가라즈를 강하게 후려쳤다. 턱이 빠지며 길게 아래로 늘어졌다. 김성철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잡고 신의 힘으로 잡아당겼다. 쩍! 길게 아가리가 위아래로 분단됐다. 끔찍한 격통에 크롬갈드는 울부짖으며 뒤로 달아났다. 꼴사나운 패주. 하지만 크롬갈드는 여기에서도 회심의 한 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김성철이 뒤를 쫓는 걸 느끼고 김성철이 몸을 날리는 순간에 남은 머리로 브레스를 뿜어냈다. 하지만 브레스가 김성철의 몸에 닿는 순간 김성철은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뭐지? ] 크롬갈드의 눈에 의구심이 떠오르는 순간 그의 시야의 사각에서 검은 불꽃으로 만들어 낸 거대 팔 가라즈의 형상의 또 하나의 머리를 박살 냈다. 고통스러운 울부짖음 속에서 크롬갈드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김성철에게 전에 없는 또 다른 힘이 생겼음을. 김성철은 크롬갈드를 노려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한때는 잊고 있었지.” 과오로 점철된 과거의 모습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그는 인간을 싫어한다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방관 속에서 살릴 수 있는 수많은 사람이 처참하게 죽어갔다. 부정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광경이지만 김성철은 과거로부터 도망가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김성철의 우반신을 덮은 검은 불길이 순간 하얗게 변했다. 그것을 본 크롬갈드는 근거 모를 공포에 사로잡혀 줄행랑을 쳤다. 김성철은 천천히 그의 뒤를 쫓았다. 사냥의 시작이다. ======================================= 117. 부수는 자 (2) 구구궁! 천둥 번개가 내려쳤다. 하늘 위에선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크롬갈드는 김성철을 피해 달아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새로운 먹이감이 필요하다! 내 힘을 증강 시킬 새로운 먹이감이!’ 곧 그의 눈에 적절한, 어쩌면 최적의 먹이감이 눈에 들어왔다. 신의 계단 아래 유일하게 남은 작은 대지 뒤, 필멸자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질서신이다. 남은 여섯 개의 대가리에서 욕망을 품은 타액이 흘러내렸다. [ 크흐흐흑! 살려주시게! ] 질서신은 크롬갈드가 자신을 노리는 걸 알고 얼른 순간이동을 시전해 김성철 뒤에 나타났다. 그걸 본 김성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도망가는 재주 하나만은 일품인 놈이군.’ 어쩌면 작정하고 죽이려 들었어도 죽이지 못했을지도 모를 녀석이다. 먹이감을 놓친 크롬갈드는 김성철을 피해 달아나며 다른 먹이감을 찾았다. 그때 그의 발밑에서 늙은 여성의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롬갈드! 여기예요! 여기!” 아델화이트다. 그녀는 양팔을 벌린 채 좌우로 흔들어 크롬갈드의 주의를 자신에게 돌리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몰골은 처참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그녀의 얼굴은 젊음을 잃고 추하게 쪼그라들었고 여기저기 크고 상처를 입은 몸에선 보랏빛을 띠는 죽음의 독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날 드세요! 크롬갈드! 나에겐 신에게 받은 고대의 독을 부리는 힘이 있답니다! 저를 먹고 그 힘을 손에 넣으세요! 그리고 저 잘못된 존재들을 멸하고 이 세상을 구해주세요!” [ 드디어 미쳐버렸군. 루테기네아. ] 김성철 뒤에 몸을 숨긴 질서신 엔키아두스가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침묵 속에서 크롬갈드는 아델화이트를 여섯 쌍의 눈으로 담았다. 그는 잠시 주저하는 듯 하다 결국 자신에게 모든 것을 준 여인을 집어삼켰다. 아델화이트는 날카로운 톱니모양의 이빨에 짓이고 갈려 타액과 섞였고 이내 무저갱과 같은 목구멍 안으롣 들어갔다. 크롬갈드의 몸에 변화가 일었다. 그의 몸에 보랏빛의 독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델화이트가 자유자재로 부리던 죽음의 장기다. 크롬갈드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 새로운 힘이 느껴진다…! ] 그때였다. 질서신이 말했다. [ 신의 힘은 자유롭게 양도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네. 어리석은 자여. ] 질서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크롬갈드의 신형이 격하게 뒤틀렸다. 구슬픈 비명이 여섯 개의 머리에서 일제히 터져 나왔고 이윽고 크롬갈드의 거대한 육체가 지면 위에 쓰러졌다. 쓰러진 그의 몸은 보랏빛 액체를 흘리며 녹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일만 년 전, 자신을 따르던 추종자를 몰살시킨 아델화이트의 독은 자신을 사랑하는 이의 목숨마저 앗아 가버린 것이다. [ 루테… 기네아…! ] 사랑하는 여인을 먹어치운 사내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멸망의 짐승은 사라졌다. 하지만, 명백한 하나의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바로 이 세상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크롬갈드가 죽자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의 바람이 사방에서 휘몰아 쳤다. 먼 곳에서 모든 것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려왔고 검게 변한 바닷물이 여기까지 밀려 들어왔다. 묵시록적인 풍경을 굽어보며 김성철은 멸망해가는 세상 속에서 마지막까지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신의 계단 아래로 돌아왔다. 베르텔기아가 그를 반겼다. 하지만 김성철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는 정신을 잃은 아무개를 굽어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미안하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아무개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아니야. 당신은 최선을 다했잖아.” 베르텔기아가 김성철 주위를 돌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뒤에서 신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 약속이라면 지킬 수 있다. ] 질서신이다. [ 이 세상엔 관리자가 필요하네. 지금 바로 관리자를 정한다면 멸망을 막을 수 있을 거야. ] 같은 말이라도 시기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법이다. 처음에 질서신의 제의를 일소에 부친 김성철이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것이 에크하르트의 마음인가.’ 에크하르트는 말했다. 잘못된 선택은 영원한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게다가 김성철에겐 현실적인 장벽도 있다. 바로 심장에 꽂힌 맹약의 십자가의 존재다. 김성철이 질서신을 향해 돌아서며 자신의 심장을 가리켰다. “나는 관리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혼돈신과 맹약을 했거든.” [ 디르고의 힘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어떻게 해보겠다. ] 질서신은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김성철은 꺼름칙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결국 돌고 돌아 이런 결말에 이르게 되다니. 그는 영혼창고에서 독주 한 병을 꺼내 입안에 머금으며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뾰족한 소리가 김성철 옆에서 격하게 튀어나왔다. “시끄러워!” 베르텔기아다. 그녀는 단단히 화난 목소리로 질서신에게 말했다. “왜 당신은 신이라는 작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드는 거지?” 일개 리빙북이 주신이라 불리며 신으로 숭배받던 대상에게 일갈하고 있다. 질서신은 갑작스러운 베르텔기아의 개입에 어쩔 줄 몰라하며 입을 다물었다. 베르텔기아는 계속해서 그를 질책했다. “다른 사람의 희생을 발판삼아 나만 잘되는 게 당신이 말하는 질서야? 그런 거야?” [ 뭐라고? ] 질서신의 거대한 신형이 한 차례 흔들렸다. “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알 마음도 없어.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본 감상은 간단해.” 베르텔기아는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 마…. 말을 삼가라. 리빙북. ] 질서신은 당황하며 거대한 몸을 떨었다. 신적인 진노가 느껴졌지만 베르텔기아는 꿈쩍도 하지 않고 질서신에게 똑똑히 말했다. “기생충!” [ 기…. 기생충? ]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세상의 정점 위에 서서 모든 것을 관장하던 자가 일개 리빙북에게 기생충이라는 말을 듣게 되다니. 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그 말에 반박할 수 없다는 엄혹한 현실이었다. 단 한마디에 질서신은 할 말을 잊고 깊은 번뇌에 잠겨 들었다. 질서신을 잠재운 베르텔기아는 이번엔 김성철을 노려보았다. “당신도 당신이야!” “베르텔기아….”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저 비열한 비겁자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세…. 세상이 멸망해서 말이다.” 김성철은 쓴웃음을 지으며 궁색하게 말했다. 베르텔기아는 책 모서리로 그의 가슴팍을 가볍게 푹 찍고는 그의 앞에 똑바로 서며 말했다. “당신이 없는 세상은 아무 의미도 없어.” “…베르텔기아.” “당신에게나, 우리에게나.” 베르텔기아는 진심이 담긴 한마디를 건네고는 크기를 줄여 자신의 자리, 김성철의 주머니 안으로 파고들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딱딱한 베르텔기아의 촉감. 김성철의 입가에 희미하지만 모든 것을 가진 미소가 떠올랐다. ‘이것인가. 행복이라는 것의 질감이.’ 이제는 더 이상 놓지 않으리. 어떤 미래가 닥쳐온다고 하더라도. 49호는 그런 둘을 멀리서 부러운 듯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곧 49호의 눈에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응?” 질서신이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깨를 늘어뜨린 채 탄식을 하며. [ 이 엔키아두스가 이런 취급을 받다니. ] 그의 몸에 언제나 서린 광휘의 빛이 어둠에 뒤덮인 세계를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 모든 이의 존경을 받았고 신의 총애마저 한 몸에 받았던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추락한 것인가? ] 질서신은 갑자기 거대한 신형을 굽혀 바닷물로 뒤덮인 대지 위에 무릎을 꿇었다. 희미한 빛이 그의 전신에 서렸다. 김성철은 그가 무언가를 하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질서신의 형체가 빛으로 화하며 뭉개지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만성적으로 흔들리던 진동이 멎었고 천둥 번개와 검은 비가 그쳤다. 모든 걸 날려버릴 것처럼 바람은 가라앉았고 검은 먼지구름 너머로 한줄기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본능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설마, 저 녀석.’ 소멸해가는 질서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제야 기억나는군. 나의 사명이. ] 질서신의 목소리다. [ 나의 사명은 이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 세상의 기틀을 단단히 하는 것. 세상을 혼란스러운 적을 제거하는 것. 그 거룩한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나는 신으로부터 주신의 자리를 받을 수 있었다. ] 멸망하는 세계 속, 질서신은 막바지에 비로소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자신의 사명을 되새기고 소임을 다했다. 그는 선택했다. 스스로 이 세계의 관리자가 될 것을. 그의 위대한 선조와 선배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 또한 자신을 희생해 신이 낙점한 존재가 응당 해야 할 거룩한 희생을 마침내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의 희생으로 세상의 멸망의 시계는 잠시나마 멈췄다. 김성철 앞에 붉은 장발을 드리운 훤칠한 미남자가 나타났다. 더할 나위 없는 올곧은 눈동자와 측량할 수 없는 지혜의 품격이 전신에 서린 존재였다. ‘이것이 질서신인가?’ 관리자가 된 엔키아두스는 타락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엔키아두스가 말했다. [ 이걸로 세상의 멸망은 어느 정도 늦췄다. 하지만 나로서는 간신히 멸망의 끈을 잡고 버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김성철은 전과 달리 거부감 없이 질서신이었던 사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신의 흙을 만들어 내야 한다. 신의 흙을 만들어 내어 세상의 균열을 틀어막아야 한다. 할 수 있겠는가? 부수는 자? ] 김성철은 생각했다. 아직 그에게 신의 흙을 만들 수 있는 힘은 없다. 그는 아직 창조술사가 아니니까. “아직 퀘스트를 수행하지 못했다.” 김성철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 옆에 49호가 나타났다. “거신의 위치라면 제가 알고 있어요.” 여기저기 찢어지고 상처 입었지만 그럼에도 49호는 의연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베르텔기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마음 한구석이 저린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베르텔기아는 김성철의 마음을 미리 알고 그를 편안하게 해줬다. “걱정 마라고! 당신을 창조술사로 만드는 건 나의 사명! 남은 두 개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을 테니까!” 원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다. 그는 정신을 잃은 아무개를 힐끗 보고는 엔키아두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시간은 얼마나 남았지?” [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짧으면 하루, 길어봐야 이틀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최대한 빨리 끝내라. 나는 초월세계의 렐름을 회수해 미리 준비하도록 하겠다. ] 49호가 거신에 이르는 차원문을 열었다. 김성철은 아무개를 어깨에 이고 차원문으로 들어갔다. 차원문 너머엔 처참하게 파괴된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참상. 에크하르트가 거신을 거대하게 설계하지 않았다면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김성철은 쇠락한 대지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거신의 머리 위에 안착해 조종석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이야. 언니.” 49호가 조종석 중앙에 자리 잡은 자신과 똑 닮은 책을 향해 인사말을 건넸다. 책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성철과 베르텔기아는 곧장 창조술사의 퀘스트를 시작했다. 재료가 준비되고 시험이 시작됐다. 베르텔기아는 자신의 몸 안에 숨겨진 비밀의 페이지를 찾아내 김성철에게 보여줘 그를 창조술사의 길로 인도했다. 남은 시간은 적었지만 김성철은 서두르지 않고 철두철미하게 재료를 다듬고 정해진 과정을 밟았다. 모든 재료가 연금 가마 안에 섞여 끓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주걱을 저으며 베르텔기아를 응시했다. 아직 괜찮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하나의 돌이 완성됐다.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돌을 완성한 직후 베르텔기아의 몸에서 에크하르트가 준비한 힘이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아흑!” 힘을 방출하던 베르텔기아가 몸을 떨며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베르텔기아!” 김성철이 다급히 베르텔기아의 이름을 불렀다. 베르텔기아는 몸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괜찮아.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베르텔기아의 몸 한 구석이 굳은 진흙처럼 바스러졌다. 김성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암살자가 남겨 놓은 상흔이 다시금 드러난 것이다. 김성철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자 베르텔기아가 먼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버텨낼 수 있어! 버텨낼 수 있다고! 이 정도는 당신이 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베르텔기아의 몸이 광휘에 뒤덮였다. 몸이 찢어질 것 같은 격한 고통 속에서 베르텔기아는 자신의 소임을 완성했다. 하나의 돌이 완성됐다. 이제 남은 거신은 하나. 퀘스트가 끝나자마자 베르텔기아는 날개를 잃은 새처럼 추락했다. 김성철은 그녀를 두 손으로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베르텔기아는 말이 없다. “정신을 잃은 거 같네요.” 49호가 둘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직은 괜찮아요. 아직은.” 중의적인 말이다. 그때 모두에게 엔키아두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시간이 없다. 멸망의 상흔은 생각보다 크다. 어쩌면 내가 상정한 시간보다 오래 버틸 수 없을지도 모른다. ] 그 음성은 잠시 기절했던 베르텔기아를 깨우기에 충분했다. 베르텔기아가 몸을 털며 일어났다. 칼날이 헤집어 놓은 구멍 속에 남아 있던 잔재들이 몸의 움직임에 따라 바깥으로 흘러 나왔다. 김성철은 또렷하게 드러난 베르텔기아의 상처를 볼 수 있었다. “자, 다음 목적지로 가자고. 나는 아직 거뜬하니까!” 베르텔기아는 짐짓 명랑하게 말했지만, 김성철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베르텔기아는 다음 시련을 버텨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가야만 한다. “언니. 뭐해? 어서 다음 목적지로 가는 문을 열라고. 우리 패거리에 들어왔으면 밥값을 해야지! 밥값을!” “나는 밥 안 먹는데.” 49호는 그렇게 말하며 김성철을 바라보았다. 김성철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또 다른 차원문이 열렸다. 최후의 거신으로 통하는 문. 김성철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117. 부수는 자 (3) 이름 모를 거신의 안. 김성철은 낯선 조합식을 따라 연금재료를 조합하고 있었다. 고요한 조종실 안엔 아무개의 거친 숨소리와 김성철이 작업하는 소리 이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거신 바깥에는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광풍이 죽음의 낙진을 머금고 불어닥치고 있다는 것을. 잠시 멈췄던 멸망의 시계는 다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상이 한 번 흔들릴 때마다 엔키아두스의 절규가 모두에게 들려왔다. [ 더는 버틸 수 없다! 시간이 없다! 서둘러라! ] 질서신의 종용에도 김성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더욱 꼼꼼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최후의 시험을 치를 준비를 마쳤다. 김성철은 고개를 들어 베르텔기아를 응시했다. 베르텔기아는 그를 향해 몸을 흔들어 보였다. 적막 속에서 최후의 시험이 시작됐다. 연성은 어렵지 않았다. 주걱을 저은 지 오래되지 않아 김성철은 또 하나의 돌을 만들어냈다. 김성철의 차례는 끝났다. 다음은 베르텔기아의 차례다. 베르텔기아의 몸에 희미한 광채가 서렸다. 그녀는 모든 정신을 집중해 자신의 사명을 다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물리적인 장벽이 그를 가로막았다. 암살자 카즈 알메이라가 남긴 상처가 그녀에게 심대한 고통과 생명의 위기를 안겨다 주었다. “아….” 짧지만 고통에 찬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김성철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할 수만 있다면 대신 베르텔기아의 고통을 넘겨받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방관자다. 이 싸움은 베르텔기아의 싸움이다. 몇 분간의 실랑이 후 베르텔기아의 몸에 서린 광채가 사라졌다. 베르텔기아는 자신의 몸에 걸린 부하를 이기지 못하고 한발 물러섰다. “조금만 휴식을 줘.” 베르텔기아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49호는 그런 베르텔기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적막이 다시금 조종실 안을 메웠다. 초조한 시간이 지나갔다. 엔키아두스는 몇 번이고 서둘러야 한다는 구조신호를 보내왔다. 베르텔기아는 힘겹게 몸을 움직여 다시 최후의 시험에 도전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무리다. 베르텔기아는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힘이 다하는 걸 느끼고 주저앉았다. “정말, 정말 미안해.”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속성을 발견했다. 체념이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밝고 명랑하면서도 심지 굳은 베르텔기아가 포기를 하다니. 김성철은 깊은 고심에 빠져 베르텔기아의 기운을 북돋을 방법을 찾았다. 딱히 떠오르는 말은 없다. 베르텔기아의 문제는 정신적인 것이 아닌, 물리적인 부분이니까. 불가능한 영역을 종용하는 것은 응원이 아니라 가학이다. 김성철의 눈썹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그렇게 얼마나 무거운 시간이 지났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성철은 기척을 느끼고 감은 눈을 떴다. 조종실 한구석에서 낯익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짝퉁이니까 안 되는 거야.” 익숙하지만 악의에 찬 목소리. 김성철은 조종실의 구석을 노려봤다. 그것은 또 다른 베르텔기아였다. 55호라는 번호를 지닌 아이. 그런데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55호는 베르텔기아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상처를 입고 있었다. 멸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의 책장은 반 이상이 박살이 났고 책장의 절반 이상이 찢겨 나간 채 너덜거리고 있었다. “싸구려 양산품 따위가 어떻게 세상을 구할 수 있겠어?” 55호는 작심한 듯 날카로운 말을 베르텔기아에게 쏟아붓고 있었다. 김성철의 눈에 분노의 기운이 번득였다. 55호는 그런 김성철을 보며 쉬지 않고 쫑알거렸다. “죽이세요. 어차피 멸망할 세상인데. 아버님이 죽었을 때부터 이 세상은 망했어. 망했다고!” 55호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베르텔기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베르텔기아에게 이르기도 전에 또 다른 책 한 권이 뒤에서 55호를 강타했다. 49호다. “조용히 해. 밥맛.” 49호의 일격을 얻어맞은 55호는 그대로 엎어져 움직이지 못했다. 49호는 분노한 김성철 앞에 다가가 자신의 동생을 변호했다. “그냥 봐주세요. 아버님을 잃어서 정신이 조금 나간 것뿐이에요. 성격이 모나긴 하지만 아주 나쁜 아이는 아니랍니다.” “…….” 49호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김성철은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오로지 베르텔기아뿐이다. 그런데 베르텔기아의 반응이 이상하다. 작은 흐느낌이 들려왔다. 김성철은 그 소리가 베르텔기아에게서 나오는 걸 알아차렸다. “베르텔기아.” 그는 베르텔기아를 두 손으로 잡았다. 베르텔기아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난 역시 안 되나 봐.” 그녀는 울먹이고 있었다. 김성철은 마음이 미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김성철은 뭐라도 해야 한다는 집념에 사로잡혔다. 뭘 해야 하나. 뭘 할 수 있나. 하지만 그는 곧 무력감에 부딪혔다. 결국 그가 지금 상황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부수는 자니까.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그의 속성이 아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셈인가. “난 역시 짝퉁인가 봐.” 베르텔기아가 자조적인 어조로 중얼거리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큰일이다. 절망이 그녀의 몸을 덮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처참한 진실을 알고서도 동요하지 않던 베르텔기아의 의지가 결국 꺾이고 만 것이다. 강한 것은 부러진다. 이대로는 베르텔기아는 최후의 시험을 수행하기는커녕 그대로 죽어버릴 것이다. 뭔가 해야 한다. 문득 김성철의 눈에 베르텔기아의 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지워버리고 싶은, 가증스런 상처. 그의 힘으로 메꿀 수 없기에 더욱 보기 싫은 그 상처를 지금까지 김성철이 똑바로 보지 않았던 영역이었다. 김성철은 달라진 마음으로 그 상처를 바라보았다. 곧 그의 뇌리에 뭔가 떠올랐다. “딱 맞겠군.” 김성철이 입을 열었다. 베르텔기아가 무언가를 느끼고 가볍게 몸을 떨었다. “뭐가?” 이에 김성철은 자신의 코트를 열어젖혔다. 자랑하는 다이아몬드 브로치가 반짝이며 빛을 발했다. 김성철은 자신의 브로치를 풀었고 그것을 베르텔기아의 상처 안에 넣었다. 암살자의 칼이 낸 상처는 놀랍게도 김성철이 자랑하는 요리사의 브로치와 딱 맞았다.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브로치의 광채가 베르텔기아의 상처가 있는 부분에서 빛났다. 김성철은 그것을 바라보며 베르텔기아를 부드럽게 들어올렸다. “짝퉁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너는 내가 보장한 정품 중의 정품이다.” “정품? 그게 뭐야?” “진품, 아니 유일무이한 베르텔기아라는 거지.” 김성철은 따뜻한 눈으로 자신이 베르텔기아에게 달아준 브로치를 응시했다. “여기, 그 증표가 있잖아.” 베르텔기아의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김성철의 초월감각이 반응했다. 베르텔기아가 잃어버렸던 자신의 색깔, 꺾이지 않는 의지가 돌아오고 있었다. “나, 다시 해볼게.” 베르텔기아가 힘차게 책장을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그녀의 몸에 박힌 김성철의 증표가 찬란하게 빛났다. 다시 시험이 시작됐다. 베르텔기아의 몸이 은은한 광휘로 뒤덮였다. 3번째의 도전. 만만치는 않으리라. 김성철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따스한 눈으로 베르텔기아의 시험을 지켜보았다. 베르텔기아가 돌연 몸을 흔들며 고통에 찬 신음을 뱉어냈다. 하지만 전과 달리 그녀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은은한 광휘는 점점 밝아져 어두운 조종실 내를 환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넘어선 것이다. 그녀 자신의 한계를. 김성철은 자신의 눈앞을 덮어오는 환한 문자열을 보며 마침내 베르텔기아가 해낸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돌이 완성됐다. 8개의 돌은 하늘로 떠올라 원무를 추듯 하늘 위에서 회전했고 이윽고 상서로운 빛 속에서 소멸했다. 벅찬 감동이 감정의 밑바닥에서 들끓는 것을 느끼며 김성철은 최후의 문자를 바라보았다. [ 당신은 8개의 연금술사의 돌을 만들어내어 창조술사의 자격은 증명했다. ] [ 이에 나 에크하르트는 그대에게 창조술사의 길을 열려 한다. ] 김성철의 눈앞에 또 다른 문자가 떠올랐다. [ 창조술사의 문을 열겠습니까? ] 그 너머엔 뭐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김성철은 문자 너머의 베르텔기아를 응시했다. “베르텔기아.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베르텔기아다.” 그 말을 들은 베르텔기아는 몸을 가볍게 움직였다. “응! 당연한 거 아냐!” 하지만 힘을 너무 쓴 탓일까. 그녀는 하늘 위에서 휘청였고 49호가 그녀를 부축했다. 이제 김성철은 자신에게 열린 문을 보았다. 창조술사로 향하는 마지막 문. 김성철은 아무개를 바라보았다. 아직 정신을 차리진 못했지만 큰 고비는 넘겼다. 목숨에 지장은 없을 것이다. “잠시만 기다려다오.” 환한 차원문이 나타났다. 김성철은 아무개를 뒤로 한 채 그 문을 건넜다. 그곳은 멸망해가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동화 같은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작은 마을이었다. “나, 이 마을 본 적이 있어.” 49호의 부축을 받으며 베르텔기아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성철은 주머니를 열며 베르텔기아에게 말했다. “이쪽으로 들어오지그래?” 베르텔기아는 자신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몸을 흔들었다. “아니, 지금은 그냥 이렇게 언니 옆에 있는 게 좋을 거 같아.” “그, 그래?” 김성철은 약간은 서운한 반응을 보이며 앞으로 걸어갔다.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의 중심엔 초록색 지붕을 얹은 아담한 목조주택이 있었다. 베르텔기아는 그 작은 집을 바라보며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야! 저기가 우리 집이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지쳐보였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가 말하는 우리 집으로 걸어갔다. 이름 모를 보랏빛 꽃이 흐드러진 담장을 걸을 때였다. 49호의 부축을 받는 베르텔기아가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이 되면, 내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게 뭔 줄 알아?” 앞장 서서 걷던 김성철은 그 말을 듣고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내 요리를 맛보는 것?” 평상시라면 기겁을 할 것이다. 그러려고 한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베르텔기아는 그녀답지 않게 부드럽게 웃으며 몸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어째서인지 그리운 냄새가 났다. “자, 어서 문을 열어.” 베르텔기아가 말했다. 김성철은 심호흡을 하고 닫힌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여정의 끝이 다가왔다. 하지만 그 전에 할 이야기가 있다. “베르텔기아.”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있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사의 말. 그녀가 없었다면 그는 이 자리에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혼돈신의 꼭두각시라는 걸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 세상을 스스로 파괴했을 것이다. 저 어리석은 크롬갈드처럼. 김성철은 마음을 정리하고 베르텔기아에게 감사의 말을 건네려고 했다. 그런데 베르텔기아의 반응이 이상하다. 베르텔기아가 움직이지 않는다. 49호는 아무 말 없는 베르텔기아를 정중하게 김성철 앞에 대령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를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김성철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그럴 리 없다.’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베르텔기아를 잡고 그녀의 몸을 흔들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베르텔기아. 베르텔기아!” 베르텔기아는 아무 반응이 없다.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몸을 흔들어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장난은 심장에 좋지 않아. 베르텔기아. 나는 보기보다 늙고 지친 사람이라고. 내 건강을 생각한다면 베르텔기아. 제발.” 김성철의 간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김성철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49호가 쓸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강을 거슬러 간 연어는 죽게 되어 있어.” 베르텔기아를 양손으로 받아든 채 김성철은 일어섰다. 그의 눈은 아직도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초록 지붕을 얹은 작은 집의 문 앞에 섰고 문고리를 잡았다. ‘직접 확인해보겠다.’ 김성철의 손이 문을 열어젖혔다. 문을 여는 순간, 김성철의 눈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관리자의 세계에서 보았던 에크하르트의 작업실이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은 그 작업실에 에크하르트 대신 금발의 소녀가 앉아 있다는 것을. 김성철의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심장이 거칠게 흔들렸다. 베르텔기아다. 하지만 그가 아는 베르텔기아는 아니다. 집안의 소녀는 꿈속의 베르텔기아와 동일인처럼 보였지만 눈으로 보이는 나이는 두 살에서 세 살 정도 많아 보였다. 김성철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베르텔기아?” 집안의 소녀가 김성철을 올려다보았다. 연분홍빛 미소가 살짝 열렸다. “…네, 제가 베르텔기아예요.” 김성철은 침을 꿀꺽 삼키고 베르텔기아라고 자신을 소개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과도할 정도로 자신을 직시하는 김성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담담한 하지만 치명적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런데 누구시죠?” 툭. 김성철의 손에 안겨 있던 베르텔기아가 떨어졌다. 무거운 진실 앞에서 김성철의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내면에 자리 잡은 검은 거인이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파멸의 충동이 망가져 버린 마음의 상처를 통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가려는 여행의 종착점이었나.’ 그의 몸이 검은 불길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혼돈신의 웃음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 김성철은 아무래도 좋았다. 모든 걸 부숴 버리고 싶었다. 그는 원래 부수는 자니까. 그러나 그가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이었다. 바람결에 실려 그리운, 다시는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뭐하는 거야. 바보. ] 베르텔기아의 목소리다. ======================================= 117. 부수는 자 (4) 초월감각이 그녀의 마지막 의지를 김성철에게 전해주었다. 베르텔기아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 내가 없다고 해서, 세상을 때려 부수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길 바래. 나이는 내가 당신보다 훨씬 연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당신도 어느 정도 나이 드신 어른이잖아? 안 그래? ] “…베르텔기아.” 김성철의 눈에 투명한 이슬이 맺혔다. 전사의 눈물이다. 다시는 흘리지 않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눈물이 그의 눈에서 흘러나와 볼을 타고 내려왔다. 초월감각이 흐려지며 베르텔기아의 마지막 전언을 그에게 실어 다 주었다. [ 당신을 믿을게. ] 그 말이 끝난 순간, 바닥에 누운 베르텔기아가 환한 빛으로 빛나며 재로 화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의 본심을 깨달았다. ‘…기다리고 있었군.’ 마지막까지 베르텔기아는 베르텔기아였다. 그녀는 죽음을 가장하고 다가올 어두운 미래에 대비했고 최악의 순간에 김성철을 지켜냈다. 물론 그녀의 뜻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김성철이 부응해야 이룰 수 있는 손뼉과도 같은 것이다. 김성철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절망으로 얼룩졌던 그의 얼굴은 그다운 담담하고도 무심한 표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내면에서 눈을 뜬 검은 거인은 뒤로 물러섰다. 극복했다. 멸망의 위기를. 김성철은 사라지는 베르텔기아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마지막 재가 사라질 때까지. 그다운 담담한 이별의 방식이다. 두 권의 책이 김성철과 베르텔기아의 작별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알 것 같아.” 49호가 말했다. “그 아이가 우리보다 훨씬 나은 아이라는 것을.” “…….” 55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부정하지 않았다. 진정 어린 마음은 모든 것을 뚫어낸다. 그동안 모든 사정을 베르텔기아 타입에게 전해 들은 또 다른 베르텔기아가 김성철 옆으로 다가왔다. 에크하르트의 딸이 김성철에게 말했다. “당신과 저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김성철은 여전히 베르텔기아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크하르트의 딸이 다시 말했다. “당신은 지금부터 창조술사입니다.” “…그런가?” 김성철이 힘없이 물었다. “네, 신의 권능 중 일부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창조술사지요. 아버님은 비록 좋은 분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세상으로부터 눈을 돌리진 않았어요. 언젠가 세상에 위기가 닥쳐왔을 때 자신을 대신해 세계를 수복한 인물을 기다려왔던 것이죠.” 베르텔이가는 그렇게 말하며 쓸쓸하게 웃었다. “아버님은 어떠셨나요?” 그녀는 에크하르트의 최후를 묻고 있었다. 김성철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그다지 좋다고 할 순 없었다.” “…역시 그렇군요. 그게 뭐, 아버님의 모습이죠.” 베르텔기아는 창가로 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동화처럼 아름답던 마을의 하늘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생각한 것보다 세상의 파멸은 심각한 국면에 들어선 거 같네요.” 김성철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까부터 그렇게 독촉하던 엔키아두스의 목소리가 언제부터 전혀 들려오지 않고 있으니까. 어쩌면 그는 멸망하는 세계를 감당하지 못하고 조기에 소멸해 버렸는지 모른다. 또 다른 베르텔기아가 말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아버님은 저를 신녀로 만들려고 했답니다.” “신녀로?” 김성철의 눈이 무섭게 번득였다. “물론 아버님의 일방적인 욕심이었어요. 그게 나름의 속죄라고 생각한지도 모르죠. 왜곡된 사랑의 대체재로 선택된 어머니와 그 결실인 저에게 사죄하는 의미로 말이죠.” “…….” “아무튼 아버님은 관리자가 되고 정신을 잃기 전까지 주신들을 관찰해 그들의 권능 일부를 베껴 저에게 물려주었답니다.” 또 다른 베르텔기아가 김성철 옆에 차원의 문을 만들었다. 김성철은 그 문에서 평범한 차원문과 다른 위화감이 느껴지는 감각을 느꼈다. “과거로 통하는 문이에요.” “과거로?” “어차피 이 세상은 제 견해에 의하면 끝난 거 같네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과거로 돌아가 이 모든 것들을 바로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요.” 베르텔기아는 회귀의 문 옆에 또 다른 차원문을 열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다른 방법도 있어요. 이건 당신이 있던 세계로 돌아가는 문이죠.” 두 개의 문이 김성철 앞에 열렸다. 어느 것도 현재 직면한 위기에서 그를 꺼내 줄 구원의 문이다. 하지만 어느 것도 진정한 구원은 아니리라. 김성철은 또 다른 베르텔기아를 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또 다른 문은 없나?” “네?” 베르텔기아가 당황하며 물었다. “바깥 세계로 통하는 문 말이다.” “어쩌시게요. 지금은 당신이 나서도 해결할 수 없어요. 세상의 균열은 신의 흙으로 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요.” “…….” 김성철은 단호한 눈으로 베르텔기아를 응시했다. 그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본 베르텔기아는 그의 뜻을 깨닫고 세 번째 차원문을 열어주었다. 김성철은 에크하르트의 딸과 두 권의 책을 뒤로 남긴 채 마지막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 너머엔 거신의 조종실이 있었다. 조종석의 뒤편에 아무개가 누워 있었다. 김성철의 코끝에 끔찍한 죽음의 기운이 밀고 들어왔다. ‘이것은.’ 그는 조종석의 앞으로 가 거신의 눈 쪽으로 다가갔다. 거신의 눈 너머엔 멸망으로 치닫는 세상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엔키아두스. 질서신.” 김성철은 관리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김성철은 아무개에게 다가갔다. 차원문을 갈 때까지만 해도 회생의 기운을 보이던 아무개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김성철은 조종실의 문으로 걸어갔다. 조정실의 문을 열자 아무개의 단정하게 묶은 머리카락이 풀어지며 거칠게 휘날렸다. 김성철은 아무개에게 목례를 하고 조종실을 나섰다. 세상이 소멸하고 있었다. 일점을 향해 빨려들듯이 무한히 쪼그라들고 있었다. 대륙과 바다가 그 일점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멸망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그때 김성철의 귓전에 질서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뭐하다 이제 왔나! 기다리고 있었다고! ] 질서신은 살아 있다. [ 당장 틈을 메꿔야 해! 렐름이라면 하늘 위에 준비해놓았다. 어서 마법을 써서 날아오르라고! ] 엔키아두스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김성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 앞에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염소의 두상을 지닌 거인. 혼돈신 쿤키두다. “어디로 가나? 나의 도구야.” 그는 모든 걸 알고 김성철을 막으려 하고 있었다. 또 한 번 말이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김성철은 혼돈신을 보고도 털끝만큼의 증오도 느끼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베르텔기아를 떠나보내고 모든 감정을 소모한 탓인가. 그렇지 않다. 김성철은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또 다시 그는 한 발 앞으로 나아간 것이다. 아픔을 딛고. 혼돈신이 비명을 지르는 채찍을 휘둘렀다. [ 넌 가지 못한다! 여기서 함께 멸망의 축제를 구경하자꾸나! ] 김성철은 물끄러미 자신의 적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들여다 본 그의 적은 하잘것없었다. 그 또한 아무것도 아닌 자격 없는 신에 불과했다. 비명을 지르는 채찍이 김성철을 향해 날아왔다. 검은 불꽃으로 뒤덮인 김성철의 손이 채찍을 움켜 잡았다. [ 호오? 그렇게 나오시겠다? 하지만 다음은 어떻게 할 거지? ] 혼돈신이 조롱했다. 김성철의 손에 팔 가라즈가 나타났다. 그는 팔 가라즈를 쥔 채 혼돈신의 머리를 향해 뛰어 올랐다. 혼돈신의 눈에 경악이 스치고 지나갔다. [ 설마? 같이 죽자는 건가? ] 김성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마음속에서 그는 하나의 광경을 연상할 수 있었다. 호르네코의 죽음이다. 그가 괴물로 변했을 때 중립신의 가호가 깃든 맹약의 십자가는 그의 몸과 분리되어 있었다. 중립신의 힘은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명확해진다. 김성철은 팔 가라즈를 높이 들어올리고 혼돈신 쿤기두를 향해 내려쳤다. [ 너도 죽을 것이다! ] 저주섞인 일갈은 신의 힘이 깃든 망치의 일격에 모래처럼 부셔졌다. 머리통이 산산조각 나는 가운데 쿤키두는 볼 수 있었다. 자신을 후려친 김성철의 몸이 검은 불꽃으로 뒤덮이는 것을. 그를 후려친 것은 김성철이 아니다. 완전한 형태의 검은 거인이다. 김성철의 심장에 꽂힌 맹약의 십자가가 피워올린 가련한 불길은 신의 속성을 머금은 완전한 검은 거인의 내면에서 성냥불처럼 피어올랐다 꺼져버렸다. [ 이럴 수가…. ] 하지만 쿤키두에겐 아직 자위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 검은 거인은 곧 자신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그는 보았다. 검은 거인의 색채가 변해가는 것을. 혼탁한 검은 색이 순결한 하얀색으로 변해갔다. [ 말도 안 돼! 일개 필멸자가 파괴의 속성을 제어하다니! ] 하얀 거인은 쿤키두를 돌아보았다. “즐거운가?” 하얀 거인에서 나온 목소리는 틀림없는 김성철의 것이었다. 그것은 김성철이 하얀 거인을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건! 악몽이다! 악몽이라고! 이런 개 같은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이건 내가 계획했던 게 아니야! 내가 꿈꾸던 게 아니라고! ] 절망과 패배감 사이에서 혼돈신 쿤키두는 죽었다. 하얀 거인이 추악한 주신의 머리통을 짓밟고 으깨버렸다. 멸망해가는 대지엔 오직 하얀 거인 하나만이 남았다. 하얀 거인, 김성철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엔키아두스. 살아 있나?” 그러나 하늘로부터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세상은 일점을 통해 소멸하고 있었다. 곧, 여기저기 눈에 띄는 이상징후가 나타났다. 김성철의 머리 위에 상태창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발작적으로 나타난 상태창은 급기야는 그의 칭호만을 불완전하게 남긴 채 정지해버렸다. [ ‘부수는 자’ ] 김성철은 모든 걸 집어삼키는 일점 너머로 신의 던전이 떠밀려 들어가 소멸당하는 걸 지켜보았다. 이 세상을 지탱하던 시스템이 붕괴됐다. 땅은 하늘이 되었고 하늘은 땅이 되었다. 위아래의 구분은 없어지고 시간과 거리조차 무의미한 것으로 되었다. 김성철은 빨려 들어가는 세계 속에서 여러 개의 징표를 보았다. 가장 먼저 검은 깃털 하나가 김성철을 스치고 지나갔다. “…….” 뒤이어 부서진 황금 오리의 파편이 그의 앞을 지나갔고 찢긴 책장이 차례차례 홀로 남은 그의 앞을 순례하듯 지나갔다. 멸망해가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김성철은 진한 회의를 느꼈다.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것은 검은 거인이다. 시간조차 모호한 파멸하는 세계 속에서 미래의 검은 거인이 시공을 거슬러 그 앞에 나타난 것이다. 김성철은 한눈에 그 검은 거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검은 거인의 머리 위엔 이 세상의 시스템이 만든 문자가 떠올라 있었으니까. [ ‘부수는 자’ ] 김성철은 또 다른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검은 거인 또한 김성철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둘은 본질적으로 같다. 하지만 나타난 모습은 정반대다. 하나는 세상을 파멸시키려 했고 다른 하나는 세상을 구하려 했다. 어느 쪽이 옳고그른지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든 멸망이라는 결과는 같았으니까. 검은 거인이 김성철을 향해 다가왔다. 순수한 적의가 김성철의 의식을 강하게 찔러 들어왔다. 김성철의 몸에 하얀 불꽃이 일어났다. 하얀 거인이 검은 거인 앞에 우뚝 섰다. 두 명의 거인이 마주 보았다. 검은 거인은 하얀 거인의 시선을 보려 하지 않았다. 그런 검은 거인을 향해 하얀 거인은 실로 뜻밖의 행동을 취했다. 손을 내민 것이다. 또 다른 시간 축 상에 있던 자신을 향해 검은 거인을 향해 하얀 거인이 말했다. “힘들었지?” 검은 거인의 신형이 거칠게 흔들렸고 분노한 듯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렀다. 몸 안에 품고 있던 일곱 재앙의 무기가 일제히 떠올라 위협적으로 회전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얀 거인은 그에게 다가갔다. 재앙의 무기가 그의 몸을 베고 검은 거인이 주먹이 그를 강타해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자신 앞에 다시 선 하얀 거인은 검은 거인을 끌어 안았다. 또 다른 자신을 포용한 것이다. 검은 거인의 얼굴 부분의 검은 불꽃이 사라졌다. 그 안에 있는 것은 김성철의 얼굴이었다. 눈물에 젖어 울고 있는 그의 얼굴이었다. 하얀 거인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는 끝났다.” 그의 말대로 이루어졌다. 검은 거인은 천천히 소멸되어 하얀 거인을 향해 흡수되기 시작했다. 베르텔기아를 잃었을 때만큼의 심대한 슬픔과 분노가 김성철의 심장을 거칠게 뒤흔들었다. 김성철은 눈을 감고 또 다른 자신이 받았을 모든 감정을 받아들였다. 검은 거인은 사라졌다. 진한 허무감이 김성철을 엄습했다. 여전히 세상은 멸망하고 있었지만, 김성철은 아무래도 좋다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때 머리 위에서 거룩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 실로 대단하군. ] 김성철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위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김성철은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진정한 신이다. [ 내가 기대하던 역할, 그 이상은 너희들이 해냈다. ] 김성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히 대답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 지쳐있었기에. 신은 그런 김성철은 내려다보며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며 사라졌다. [ 너는 새로운 세계의 신이 될 자격을 얻었다. 무엇을 선택하건 자유다. ] 신은 덧붙였다. [ 신도를 잃은 신인 나보다는 네가 더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 ] 이제 세상엔 오직 김성철 하나만이 남았다. 김성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주 먼곳에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믿기지 않는 권능, 신의 눈이다. 김성철은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한 여성이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엔 김성철처럼 망가진 세계의 시스템이 표시하는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 ‘멸망의 전조’ 클라리스 ] 그 이름을 보고 김성철은 피식 웃었다. 클라리스는 그 소리를 듣고 뒤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은 이미 멀어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그녀의 생에 대한 의지는 그녀로 하여금 마지막 말을 하게끔 허락해주었다. 클라리스가 말했다. “신님?” 김성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님이 맞죠? 제가 이렇게 애타게 불렀으니까. 뭐 당신이 누구든 아무래도 좋아요. 제발 구해주세요. 우리들을.” 그 말을 남긴 직후 클라리스는 쓰러졌다. 세상에 만연한 기운이 그녀의 마지막 기력을 앗아간 것이다. 멸망의 일점이 그녀의 몸과 영혼을 빨아들였다. 이제 세상엔 오로지 김성철만이 남았다. 김성철은 뭘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란 말인가. 김성철은 눈을 감았다. 그것이 그의 선택이다. 멸망해가는 세상과 함께 사멸하는 것. 가장 쉬운 선택지다. 그런데 그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래? 재미없게.” 김성철의 눈이 번쩍 떠졌다. 베르텔기아의 목소리다. 김성철은 뒤를 돌아보았다. 또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 안엔 베르텔기아를 비롯해 마라키아, 황제, 라이즈 하이메르(논란의 여지가 있는) 등 그가 좋아하는 모든 사람이 서서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세계였다. 전대의 신이 그를 향해 준비한. 김성철에게 내린 가혹한 시련에 대한 보상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죽어 있던 김성철의 심장이 활기차게 약동했다. 베르텔기아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의 진정한 힘을 떠올려.” “나의 진정한 힘?” “당신 설마, 당신의 재능이 무식하게 때려 부수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겠지?” 베르텔기아가 짓궂게 말했다. 하지만 딱히 김성철의 머리에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가 잘하는 건 언제나 무언가를 부수는 것이었지 다른 재능이 있다고는 달리 생각한 적이 없으므로. 베르텔기아는 그런 김성철을 바라보며 책장을 펄럭이며 말했다. “왜 숨기려고 들어? 당신의 진정한 힘을.” “나의 진정한 힘…?” 베르텔기아가 몸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당신의 진정한 힘은 누구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평범한 마음씨에서 나오잖아.” “아.” 김성철은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게 뭔지. 김성철은 베르텔기아와 아마도 그 너머에 있을 전대의 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진짜 힘을 보여줄 때가 온 거 같군.” 김성철의 입가에 환한, 꾸밈없는 웃음이 떠올랐다. 그 순간 그의 머리에 떠오른 이름이 바뀌었다. [ ‘부수는 자’ ] 에서 [ ‘만드는 자’ ] 로. ======================================= 에필로그 일점으로 빨려들던 세상이 검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김성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그럼 뭘 만들어볼까? 일단 이 세상을 원래 모습대로 뚝딱 고치는 게 우선이겠지?” 그 물음에 답한 것은 베르텔기아의 목소리였다. “흐음. 그래. 그것도 좋겠네. 하지만 난 내 전용 섬이 있었으면 좋겠어.” “전용 섬? 뭐, 베르텔기아를 위해서라면 전용 대륙도 만들어줄 수 있는데.” “신이 됐다고 너무 우쭐대는 거 아냐?” “가끔 나도 거드름을 피우지.” “재수없어. 정말. 아무튼, 사람들은 어떻게 할 거야?” “일단, 뭐 전부 다 살려내야겠지.” “하지만 나쁜 연놈들을 살려내는 건 반대.” “베르텔기아. 의외로 속이 좁군.” “라이즈 하이메르 그 뇬을 살려내는 것도 반대.”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신이라는 작자가?” “뭐 그 이야기는 그쯤 하자고. 게다가 아직 난 신이 되겠다고 정한 게 아니야.” “신이 되는 거 아니었어?” “가만 생각해봤는데 이 세계엔 신이 없는 게 어울릴 거 같아.” “그래?” “뭐, 그런 게 있으면 또 다른 악당들이 나타날 뿐이지. 난 뭐 가급적이면 모두가 자유롭게 이곳의 삶을 만끽하길 원해. 그게 이곳의 진정한 이름. 낙원에 걸맞는 곳이 아닐까?” “흐음. 마음에 안 드는데.” “마음에 안 들면 어쩌게?” 즐거운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다. 어두운 세상의 저편에 한 줄기 빛이 비칠 때까지. * “이상한 마을에 대한 소문이 있더군.” 그 마을에 대한 소문이 라그란제에 퍼진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소환궁전에서 막 나온 초보 여행자 아무개는 그 이상한 마을에 대한 소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실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세상에 어떤 곳에 똑같이 생긴 금발의 인형처럼 예쁜 소녀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단 말인가. 유전공학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는 아무개지만 그런 일은 결단코 있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곳이 낙원이 아닌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라그란제에서 고대왕국으로 향하는 짐마차에 올라탔다. 고대왕국엔 초심자를 위한 오벨리스크가 있다는 정보가 있었다. 그곳이라면 그녀가 잘하는 장기를 마음껏 발휘해 적절한 보상을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일단 그녀에게 시급한 건 박한 능력치니까. “으으. 내게도 뭐 신화급 영혼각인 같은 건 뚝딱 안 떨어질까?” 마차 뒤에 앉은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그녀 앞엔 부녀로 보이는 건장한 사내와 작은 소녀가 앉아 있었다. 남자의 행색은 전형적인 소환자의 그것이었다. 추레한 군복 바지에 다 떨어진 낡은 코트. 안에는 쌍팔년도에 입을 법한 남방을 입고 있다. 그렇게 허술하게 차려입은 주제에 어디서 났는지 옷깃에 다이아몬드로 만든 드래곤 형상의 브로치를 달고 있는 게 어딘가 언밸런스했다. ‘이상한 사람이네.’ 이상하기로는 그 옆에 앉은 소녀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어디서 구했는지 온통 검은 깃털로 장식된 불길한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그래도 무슨 새의 깃털로 만들었는지 때깔은 좋아 그렇게까지 음산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게 유일한 장점이긴 하지만. ‘멀리해야 겠어.’ 아무개는 그 부녀를 보며 몸을 움츠렸다. 마부석에서 늙수구레한 마부의 외침이 들려왔다. “어이! 크롬갈드! 아델화이트! 좀 더 빨리 못 움직여? 오늘 저녁 밥 굶고 싶어?” 어딘가 낯익은 이름. 분명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지만 아무개는 어째서인지 그 이름을 알 것 같았다. 곧 아무개는 그 이름의 주인을 알고 실소를 터뜨렸다. 크롬갈드와 아델화이트는 마차를 끄는 삐쩍 마른 두 필에게 붙여준 이름이었다. 불길한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 짐승으로 태어나지.” 귀여운 감이 있지만 어딘가 섬뜩한 목소리였다. 아무개는 더욱 더 이들과 거리를 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차의 바퀴가 진창에 빠져 바큇살이 나가버린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마부가 혀를 차며 도로에 처박힌 마차를 바라보며 탄식했다. “이거, 마법사나 힘 쌘 전사님이 있지 않은 이상, 당장 빼내기 어려울 거 같은데. 일단은 도움을 요청해야겠어.” 마부는 그렇게 말하고 아무개와 일행을 놔두고 크롬갈드라 불리는 말을 타고 먼 곳으로 훌쩍 떠났다. 아무개는 막막한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산야. 고대왕국의 입구 부근엔 정체불명의 몬스터가 나타난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녀의 힘이 강했다면 남은 길을 도보로 주파할 수 있겠지만 지금 그녀는 초보 모험자. 홀로 가다간 봉변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어떻게 하지. 진짜. 나 정말 운이 없나 봐.” 안절부절 못하는 아무개를 향해 수수께끼의 부녀가 나타났다. 아무개는 처음으로 그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부녀라고 하기엔 전혀 닮지 않은 생김새. ‘뭐지? 이 인간들? 점점 수상해지는데.’ 검은 깃털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아무개를 향해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언니. 아무래도 우리 오늘 노숙해야 할 거 같은데 어때요? 우리와 함께 가는 건?” “너희들과 함께? 어디로…?” “좋은 곳이에요.” 검은 드레스의 소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무개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상황이 아닌가. 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자 수상한 2인조는 그녀를 버리고 숲속으로 걸어갔다. “어디로 가는 거야?” 아무개가 다급하게 멀었다. 검은 드레스의 소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주변에 작은 마을이 있어요.” “작은 마을? 이런 곳에?” “여기선 안 보이지만, 숲길을 걸으면 나와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소녀가 종용하듯 물었다. 아무개는 내키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뒤돌아섰다. 거절의 뜻이다. 수상한 2인조는 그녀를 놔두고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그들을 떠나 보낸 지 얼마나 되었을까. 갑자기 주변에서 불길한 맹수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이 소리는?!’ 처음 듣는 괴물의 소리다. 어쩌면 고대왕국 국경에 서식한다는 무시무시한 쿤키두란 마수일지도 모른다. 공격력은 제로에 가깝지만 몸빵은 무한에 가까워서 모험자들에게 매일 두들겨 맞으며 경험치를 헌납한다는 전설의 마수. 하지만 지금의 아무개에겐 그런 녀석마저 버거운 상대임이 틀림없다. 아무개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어쩔 수 없이 앞서가는 2인조의 꽁무니에 붙었다. “어머? 마음이 변하신 거예요? 언니?” 검은 드레스의 소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무개는 그 소녀로부터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뭐야. 이 꼬마. 머리 위에 올라탄 느낌인데?’ 기분 나쁜 건 저 소녀지만 더욱 불길한 건 그녀 옆에 서서 아무말도 하지 않는 무표정한 사내였다. ‘분명 어디서 본 거 같은데.’ 하지만 일단 그들 또한 인간. 말도 안 통하는 마수보다 그들을 따라가는 게 나은 선택지일지도 모른다. 아무개는 자신의 소지품 중에 구명 아이템 등을 미리 생각해두고 수수께끼의 2인조의 뒤를 따랐다. 울창한 숲속엔 놀랍게도 잘 닦인 길이 있었다. 바깥에서 보이진 않지만 가까이 가야 보이는 신비로운 길이었다. 길은 숲속 깊은 곳까지 길게 이어졌다. 아무개는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몇 가지 아름다운 꽃과 귀여운 짐승들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처음 보는 녀석도 있었다. ‘응? 저건 카벙클?’ 틀림없다. 카벙클 중에서도 특히 영물로 취급받는 메르킷 카벙클과 크게 닮아 있었다. 아무개는 기회가 되면 그걸 포획하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며 2인조의 뒤를 따랐다. 곧 숲길이 끝나고 아름다운 마을의 풍광이 나타났다. 아무개는 적잖이 놀랐다. 전혀 다른 세계로 온 느낌이었다. ‘뭐지? 여긴?’ 숲에 들어오기 전에도 험준한 산이 보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하얀 모자를 쓴 것 같은 깎아지른 산은 보이지 않았다. 마을은 하얀 모자를 쓴 설산 아래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에서 아무개는 충격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을의 주민의 생김새가 똑같다. 모두 환한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소녀 일색. ‘뭐지 여긴?’ 그제야 아무개는 주점에서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던 소문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 세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전설적인 마을을. 수수께끼의 2인조가 나타나자 마을 곳곳에 있던 수십 명에 달하는 똑같이 생긴 소녀들이 그들을 반겼다. “안녕. 베르텔기아.” “안녕! 막내!” 수많은 소녀들의 환대를 지켜보면서 아무개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다른 소녀와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뭐야. 이건 어떻게 되는 거야?’ 당황한 그녀에게 한 소녀가 다가왔다. 다른 소녀와 똑같이 생김새. 그런데 어째서인지 다른 아이보다는 조금은 성숙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놀라셨어요?” 의문의 소녀가 말했다. 그녀의 친절한 말에 아무개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끼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놀란 것까지는 아니고.” 그녀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대체 여긴 뭐하는 마을이지?” 그녀의 물음에 소녀는 화사한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여긴 코디아 마을이에요.” “코디아 마을?” “네. 저는 코디아 마을의 이장인 49호…. 아니, 마리에 베르텔기아고요.” “마리에 베르텔기아?” “직접 지은 이름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들은 모두 같은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서.” 그때 검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마리에라는 소녀를 향해 손짓해 불렀다. 49호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잠깐 실례 해야 할 거 같네요. 편하게 기다리고 계세요. 곧 연회가 시작되니까요.” “연회?” “네, 다른 손님들도 도착할 예정이거든요.” 마리에가 말하기 무섭게 하늘 위에서 검은 날개가 펄럭이며 무언가 내려 앉았다. 늠름하고 잘생기며 아름답기 그지없는 날개를 지닌 이종족이다. 아무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나하크?’ 전설적인 대륙북부의 신비의 조인.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다. 그 검은 깃털을 지닌 조인은 아무개를 힐끗 보고는 이름모를 사내를 향해 걸어갔다. 검은 깃털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그 조인을 올려다보며 버럭 화를 냈다. “아니, 왜 그렇게 늦은 거야! 진짜! 약속 개념하고는!” 소녀의 질책에 검은 깃털을 지닌 조인은 체면 따윈 던져버리고 소녀와 똑같은 모양새로 버럭 화내며 대응했다. 검은 깃털의 조인이 시종일관 한마디 말도 없던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바쁘다고! 왕이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하나? 안 그래? 김성철?” 아무개는 처음으로 그 사내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김성철?” 어디서 들은 적이 없는 이름. 어딘가 그리운 이름이다. 김성철이라 불린 사내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늘 너머로 여러 척의 공선이 차원 문을 통과해 나타났다. 거기엔 수많은 진귀한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각국의 왕과 제후는 물론, 반인반용의 드래곤과 인간제국의 황제마저 그 손님의 대열에 섞여 있었다. 아무개는 놀라움 속에서 자신이 꿈을 꾸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느꼈다. “아니, 들어보세요. 나머지 아이들은 전부 베르텔기아라는 이름 위에 다른 이름을 써서 구분하는데 55호 혼자 이름을 이상하게 바꿨다고요!” 김성철이라 불리는 사내 옆에 마리에라고 자신을 소개한 소녀가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김성철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뭐라고 바꿨는데?” “베르둥요.” “베르둥? 대체 그게 뭐냐?” “몰라요! 아무튼 간에 고집 하나만은 더럽게 질기다니까요. 그러니까 친구가 없죠.” 김성철이라 불린 사내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개는 가슴을 졸였다. 수수께끼의 사내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개 앞에서 김성철이 말했다. “여어. 아무개. 아니, 이수진.” 아무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어떻게 내 본명을?” 놀라워하는 아무개의 손을 작은 손이 잡아끌었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소녀였다. “어서 와요. 언니. 어서 와서 우리 이야기를 들어요.” “우리 이야기?” 아무개의 물음에 베르텔기아는 환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네, 새로운 낙원이 만들어지기 전까지의 운명을 극복한 위대한 리빙 북 베르텔기아님의 위대한 여정을 말이죠.” “베르텔기아.” 김성철이 주의를 주듯 말했다. 베르텔기아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바꿨다. “정정할게요. 우리의 이야기예요.” “우리의 이야기…?” “네, 우리 모두의 여정이죠.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들려줄 테니까 졸지 말고 잘 들으세요!” 성대하기 차린 음식 주위로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베르텔기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미 과거가 된 전설과 같은 모험담은 흥겨운 음악 속에서 시작됐다. 음악은 오래오래 이어졌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축제가 파한 후 김성철과 베르텔기아는 다시 여행길에 나섰다. “슬슬 모험을 해야겠어. 가만히 있자니 삭신이 쑤셔서 말이야.” 김성철이 말했다. “모험? 당신이? 당신처럼 강한 사람이 모험을 하면 아무 재미도 없을걸.” 베르텔기아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이에 김성철은 담담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 반대지. 처음부터 강한 게 재밌지 않나?” “어디서 그 재미를 찾는데?” 베르텔기아의 물음에 김성철의 입가에 쑥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 뭐냐. 힘을 숨기는 주인공은 언제나 인기 있는 소재 아닌가?” “뭐야? 또 그 닭살 돋는 짓거리를 하려고?” 베르텔기아의 물음에 김성철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요리여행보단 낫잖아?” 베르텔기아는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것보다 낫겠네.” 드래곤 한 마리가 길게 울며 하늘 위를 지나갔다. 김성철은 모든 가능성이 열린 새로운 세상을 두 눈에 담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