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으앗, 차거... 우.. 추워랏!" 한창 겨울인 바깥 기온 보다야 따뜻할 물의 온도이겠지만, 수영장 안의 따뜻한 공기와 아까 풀에 들어오기 전에 샤워했던 따스한 물 보다야 무지 차가운 건 당연한 일. 덕분에 먼저 팔과 다리에 물을 끼얹은 후에 첨벙 뛰어 들었건만, 손등이 새파래지고 몸이 오들오들 떨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가만 있지 말고 어서 움직여. 가만히 있으면 더 춥다는 거 몰라?" 나보다 한발 앞서 들어온 엄마는 준비 운동 겸 물의 온도에 익숙해지기 위해 풀 가장자리를 걸어가며 한마디 던졌다. "거야 알고는 있지만... 추우니까 움직이기 싫은 걸... 우, 춰..." 양 팔을 부둥켜 앉으며 엄마의 뒤를 쫓으려고 움직이려는 찰나, 내 뒤에 누가 첨벙 거리며 뛰어 들어와 나에게 차가운 물이 끼얹어지게 했다. "오옷, 시원타~!" "읏 차거워~!! 해민이 너 죽을랫?" 그 일생에 도움이 안 될 녀석은 바로 내 남동생 녀석이었다. 그놈은 이 차가운 물이 아무렇지도 않은 지 들어오자마자 가볍게 앞으로 헤엄쳐 나가며 나에게 히죽 웃었다. "거기 가만히 서 있으니까 그렇지. 언제까지 그러고 서 있을 거야?" "춥단 말야." 나는 입으로 꽁시렁 거리면서도 엄마의 뒤를 따라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원래는 풀장에 들어오기 전에 가볍게 준비 운동을 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누가 이런데서 구경거리 되라고 준비 운동을 하겠는가? 그러니 대신 물 안에서 수영하기 전의 준비 운동을 하는 것이지. 풀장 안을 한바퀴 삥 돈 나는 본격적으로 수영을 하기 위해 폼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남자 샤워실로 통하는 입구에서 등치 좋은 젊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 나오는 것이었다. "자, 빨리 빨리 들어와!" 맨 먼저 들어온 남자가 그 안쪽에 있을 남자들을 향해 손짓을 하며 소리치자 줄줄이 나오는 남자들의 행동이 부산해졌다. 그들은 풀장 가에 우르르 몰려와 이열 횡대로 줄을 맞춰 착착 섰다. "엣, 오늘이었나?" 그 모습에 나는 살짝 눈쌀을 찌푸리며 조금 서둘러서 물 속으로 들어갔다. 이 줄에서 한바퀴 돌고 다른 줄로 넘어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 한떼의 덩치 좋은 남정네들은 이 근처에 있는 모 대학의 체육학과 학생들이라고 했다. 분명히 수영에 관련된 과는 아닌, 다른 종목의 운동선수들이었는데 일주일에 한번씩은 이 곳으로 수영하러 오곤 했다. 그 대학교에는 수영장이 없었고, 이 수영장은 시립 수영장이라 딴 수영장 보다 천원은 쌌고, 또한 풀장이 넓어서 자주 애용되는 듯 했다. 덕분에 그들 뿐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많이 몰려 어떤때 시간을 잘못 잡으면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에 제대로 수영을 하지 못하지만, 우리 식구가 이 수영장을 포기 못하는 이유는 수영장 물을 소독할때 다른 곳 처럼 왁스를 쓰기 보다는 소금을 사용했기에 왁스 냄새가 안 났고, 잘못해서 물을 꿀꺽 해도 좀 짭짜름할 뿐, 화학 약품을 삼킨 듯한 느낌이 안 나 저으기 안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은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이 좀 많은 편이었는데 저 떡대 같은 남정네들이 와서 풀장의 한 줄은 양보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저들은 수영이 전공이 아니라고 하면서 수영을 엄청 잘 했다. 손과 발을 한번 휘저을때마다 물살이 요동을 쳤고 속도는 얼마나 빠른지 그 기세가 살벌해서 저 사람들이 수영하면 나도 모르게 움찔 물러날 정도다. 또 자신들이 줄줄이 비엔나라도 되는 양 줄을 맞춰서 헤엄쳐 다니는데 보기에는 장관일지 몰라도 나 같은 일반인은 그들 바로 옆 줄에서 헤엄치는 것도 겁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저들은 준비 운동을 하고 있는 중이니까 - 남사스럽게 삼각형의 남자 수영복을 입고 헛둘, 헛둘 구령까지 맞추면서 준비 체조를 하고 있었다. - 한바퀴 돌고 옆의 바글바글한 대열에 끼어도 될 것 같아 나는 남들이 다 비켜준 텅빈 줄 안을 헤엄치고 있었던 것이다. 갈 때는 자유형, 올 때는 평형... 나는 개인적으로 평형을 좋아한다. 물론 폼이 개구리 비슷해서 멋이 없고,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 또한 무척 느리지만, 물 속에서 잠수를 한 채 팔과 다리를 쭉 폈을때의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남들이 날 추월해 헤엄쳐 가느라 가끔 물도 먹을때가 있지만,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팔, 다리를 쭉 폈을때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자 숨이 찰 때까지 가만히 있는 바람에 더 속도를 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뒤에 따라오는 사람도 없어 맘 놓고 두 팔과 다리를 쫘악 핀 채 파란 물 속을 들여다보며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퍼억~ 난데 없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나는 머리가 물 속에 더욱 깊숙히 쳐박혀져, 허부적 거리며 짠 소금물을 몇 모금 들이마신 후이야 겨우 겨우 몸을 추스려 바로 세울 수 있었다. 그런 내 앞에는 시커먼 물안경과 수영 모자를 쓴 등치 좋은 남정네가 떡 버티고 서 있는 거였다. "죄송합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 한마디를 한 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다시 힘차게 팔을 저으며 헤엄쳐 가버렸다. "뭐, 뭐야?" 그러고보니 나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느라 - 수영장에서는 왼쪽에 붙어서 오고 가고 한다- 내가 있어야 할 위치를 벗어나 그 옆으로 떠내려간 바람에 마주 오고 있던 그 남자의 힘찬 팔 놀림에 뒤통수를 떡 하니 얻어맞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숙녀의 머리통을 후려 갈겼으면 '다치지는 않으셨어요?' 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열받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녀석의 뒤통수가 따끔따끔 하도록 노려봐주고 있는데 옆 라인에 있던 엄마가 깔깔 웃으며 날 불렀다. "호호호, 그러길래 미리 미리 이쪽으로 오지, 왜 거기에 있다가 뒤통수를 맞니?" "엄마는, 딸내미가 맞았는데 웃음이 나와요?" "호호호, 애는... 뭘 그런거 가지고... 어물대다 다시 맞지 말고 빨리 이쪽으로 와!" "쳇, 쳇..." 내가 물속으로 들어가 물 위에 띄어 놓은 라인 밑으로 지나 엄마 옆으로 다가가자 엄마 옆에 서서 잠시 쉬고 있던 아주머니가 말을 건넸다. "어머, 딸이에요?" 엄마는 평소에도 수영장에 꾸준히 다니셨기에 안면을 익힌 아주머니가 꽤 많았던 것이다. 흔히 들을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엄마는 그 질문에 약간 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얘가 첫째예요." "어머, 그래요?" 엄마의 대답을 들은 아주머니는 얼굴에 놀라움을 띄운 채 나와 엄마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하지만 이 아주머니는 예의 바르게 더 이상 뭐라 하지 않고 질문을 딴 데로 돌렸다. "그래, 얘 혼자 인가요?" "아니요, 아들이 하나 더 있어요." "어머.. 좋겠네. 난 딸만 둘이라서 아들 있는 집이 부럽더라." "아유, 뭘요. 요즘은 아들보다 딸이 더 좋다잖아요." 그렇게 시작된 수다에 엄마와 그 아주머니는 폭 빠져서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어버린 채 계속 풀장 구석에 서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미 엄마의 얼굴에서는 쓴 웃음이 사라진 뒤였다. 나는 그 모습에 피식 웃고는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 헤엄쳐가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었다. 하지만, 아까의 가벼웠던 마음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대신 무거운 마음이 자리를 잡고 앉아 수영을 즐긴다기 보다는 무의식적으로 팔과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 아줌마가 어리둥절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는 엄마를 전혀 닮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반응을 어려서부터 계속 보아 왔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익숙해지지 못한 채 그런 반응들을 보면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이 아려왔다. 나는 엄마의 친 딸이 아니라 양녀였다. 하지만, 울 부모님은 친 아들인 해민이와 조금의 차별도 없이 날 친딸처럼 대해 주시는 훌륭하신 분들이었기에, 내 어린 시절은 조금의 어두운 부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단 한가지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나의 외모에 있었다. 나는 어느 누가 보기에도 척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외모를 가졌다. 바로 혼혈아라는 것을.... 동양인과 같은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카락을 가졌지만, 동양인 답지 않은 큼직하고 반듯하게 생긴 이목구비는 내가 동양인이 아니라는 것을 뚜렷하게 증명해주고 있었다. 나는 내 친 부모가 누구인지 몰랐다. 물론 우리 부모님도 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른다. 내가 우리 부모님과 만나게 된 것은 내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행운이었다. 울 아빠는 군인이신데, 18년 전에 강릉에서 군복무 하셨다고 했다. 그 덕분에 내 동생도 그 곳에서 태어났는데, 엄마가 무슨 변덕이신지 해민이를 낳고 몸을 추스릴 수가 있게 되자 바다가 보고 싶다고 졸라서 -그때가 가을이었다. - 아빠와 같이 해민이를 데리고 사람들 인적이 드믄 해변으로 갔는데 그 곳에서 나를 발견하셨다고 했다. 아직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보는 아이가 알몸으로 밀려오는 찬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있었다고 했다. 가을이라 날씨도 점점 추워지는 때였고, 더더구나 동해 바닷물의 그 차가운 파도가 계속 몸을 씻어주고 있던 찰나라 아기는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울지도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더랜다. 조금만 늦게 발견했더라면 얼어 죽었을 거라나? 그렇게 날 구해주신 인연으로 그 분들은 날 직접 양녀로 삼고 지금까지 길러 주셨던 것이다. 물론 이건 나에게 직접 해주신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몰래 엿들은 거지. 그래서 내 이름은 해인, 바다에서 만난 인연이라는 뜻이다. 거기에 해민이의 누나로 입적해 주셨으니, 정말 두 분은 훌륭하신 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나는 마음 한 구석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던 친 부모에 대한 궁금증을 버렸다. 막 태어난 아이를 그런 추운 바닷가에 -아마 죽으라고 내버린 것이겠지만...- 나둔 그런 인간들은 그리워 할 가치 조차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친부모 원망도 많이 했다. 어느쪽이 서양인이고 어느쪽이 동양인인지는 모르겠으나, 왜 하필 날 혼혈아로 낳아준 건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그냥 날 동양인으로 낳아줬더라면, 지금의 부모님을 닮지는 않았더라도 첫 눈에 남들에게 양녀라는 것을 들키지 않을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게다가 해민이하고도 이란성 쌍둥이라고 - 비록 거짓이지만... - 당당히 말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그렇게 다시 한번 얼굴도 모르는 친부모를 속으로 원망하고 원망하고 또 원망하면서 헤엄치던 와중, 풀 중간쯤 와서 잠수를 하는 내 눈에 작은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잉? 아니 바다도 강도 아닌 풀장에 왠 소용돌이?' 그러나 너무 작은 소용돌이라 많은 사람들이 수영하느라 생긴 건가보다 하고 그냥 그 위를 지나치려 하는데 갑자기 이 소용돌이가 커지면서 날 휘감더니만 물 속으로 끌어 당기는 것이었다. '허걱, 허거거걱~~!!' 풀장 가운데는 깊이가 2m 가 조금 넘었기에 이렇게 있다가 물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갑자기 엄습하여 나는 마구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풀 속에서 생긴 소용돌이의 힘은 내 생각보다 강하여 그런 나를 계속 끌어당겼고, 결국 숨이 차고 힘이 빠져 더 이상 허우적 댈 여력까지 잃어버린 나는 소용돌이에 끌려 들어갔고, 곧 이어 정신까지 가물가물해졌다. 이대로 있다가는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나는 의문이 떠올랐다. '왜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는 거지? 내가 빠진 걸 모르는 건가? 엄마, 나 죽어어어~~' 사람들은 한 소녀가 풀장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는 것도 모르는 양 여전히 그 위를 헤엄쳐 지나가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처럼.... 그때, 수영장에 왔으면서 수영은 안 하고 한 아주머니와 신나게 떠들던 엄마 옆으로 해민이가 헤엄쳐 오면서 말을 걸었다. "엄마, 수영은 안 하고 놀기만 하세요?" 덕분에 엄마와 그 아주머니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고 그 둘의 시선은 그 해민이에게로 쏠렸다. 딸만 둘 있다던 아주머니는 해민이를 보더니 감탄을 터트렸다. "아유, 훤칠하게도 생겼네. 그래, 얘가 둘째인가요?" 그러자 놀랍게도 엄마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아뇨, 얘 하나인데요? 우리 집에는 아들만 하나예요." 옆에 있던 해민이도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오히려 당황한 건 아주머니였다. "예? 아니, 아까 딸 하나 아들 하나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엄마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아니예요. 저는 딸 없어요." "어머나... 내가 딴 사람이랑 착각한 모양이네... 아유, 미안해요. 내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제 1화 해인, 황당한 곳에 떨어지다. (1)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상투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멀리 나가버렸던 정신이 서서히 제자리로 복구됨을 느끼자 제일 먼저 내 머리에 든 의문이었다. 하지만 정신 상태는 복구가 원활히 진행되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지만, 내 육체는 아직 복구가 절반도 안 된 모양이었다. 몸을 움직이려고 해도 도저히 힘이 안 들어가 손하나 까딱 할 여력여 없었다. 아니, 너무 힘이 없어서 내 팔, 다리가 온전히 몸에 붙어 있는지 느껴지지도 않았다. 눈만이라도 떠서 여기가 천국인지 현실 세계인지 알아보려고 했지만, 이놈의 눈꺼풀이 학교에서 꾸벅꾸벅 졸때보다 수십배는 더 무겁게 느껴지는 거였다. '젠장... 죽겠구만...' 그나마 완전 복구가 안된 정신 상태때문에 비몽사몽간인데도 눈이 안 떠지자 되게 답답해서 그 와중에도 눈을 뜨려고 낑낑 거렸다. 그러자 이런 내 노력을 신께서 어여삐 여기셨는지 나는 드뎌 가늘게나마 눈을 뜰 수 있었다. 실과 같은 가는 틈을 통해 빛이 보이자 조금이나마 답답함이 가시는 것 같았지만, 눈에 눈물이 맺혔는지, 눈껍이 잔뜩 달렸는지 시야가 뿌연게 약간 흐리게 보이는 거였다. 눈을 몇번 깜빡인 것 같았지만, 눈을 크게 뜨지 못한 탓인지 시야는 여전히 뿌연게 마치 TV 의 몽환적인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바로 내 옆에 서 있는 인영이 희마하게 비쳐졌다. '엄마? 아니.. 해민인가?' 입을 열어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입은 도저히 안 떨어져서 포기하고 눈만 몇번 더 깜빡 거리자 다행이 시야가 조금 더 밝아져 그 인영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인영은 긴 머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머리카락이 온통 파란빛깔이었다. 자세히는 보이지 않아 그가 무슨 펑퍼짐하고 희끄무레한 옷을 입고 있고 파랗고 긴 머리를 가졌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 알아봤지만, 그것 만으로도 나는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허걱... 흰 옷에... 파란 머리? 호, 혹시... 천사인가? 허걱... 그럼 난 죽은겨?' 그런데 그때 그 인영이 나를 향해 손을 뻗어왔는데, 그러자 이상하게도 나는 시야가 다시 뿌옇게 흐려지며 내가 원치 않았는데도 스르르 눈이 다시 감겨지는 것이었다. '허걱.... 저 천사는 죽음의 천사인가보다. 내 영혼을 지금 가지고 가려고 하나봐...' 다시 한번 가슴이 덜컹 거렸지만, 그 와중에도 이상하게 나에게 잠이 엄습했고 나는 겨우 복구해 놓은 정신을 다시 잃어버렸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나는 날 데리러 온 것이 악마가 아닌 천사인 것 같다는 것에 -아직 진짜 천사인지 아닌지 모르니까 - 와중에 안도하고 있었다. '엄마, 나 먼저 천국에 가~ 나중에 천국에서 보자고~!!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니까...' 그렇게 혼자 쑈를 하고 잠이 든 나는 한참이 지난 후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번에는 마치 푹 잘 자고 일어난 듯 정신도 완전 복구가 되어 말짱했고 눈도 금방 확 뜨여진거 보니 육체도 거의 복구가 된 모양이었다. 눈을 깜빡여 시야를 가리고 있던 눈물을 지우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마치 옛날 초가집의 천장 마냥, 통나무로 지붕과 벽을 지탱해주고 그 틈을 흙으로 꼼꼼히 메꾼 천장이었다. "뭐, 뭐야..." 그 모습에 황당해져서 입을 여는데 목이 오랫동안 안쓴 것 처럼 꺼칠하게 매말라 있어서 거칠고 낮은, 내 목소리가 아닌 것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목과 입술을 침으로 조금 젹셔준 후 나는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여기가 어디지?" 목이 말라 근처에 있는 누군가에게 - 아마도 엄마나 해민이일테지만... - 도움을 청하고 싶어 찾으려 했는데, 그런 내 눈에는 다른 사람은 안 보이고 왠지 엄청 구식으로 보이는 집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내 옆에 작은 원형 탁자에 두개의 의자가 놓여 있고, 그 너머 벽에는 옷장과 화장대가 벽에 붙어 있었으며 그 옆으로 어딘가로 - 아마도 거실이겠지만 - 통하는 나무 문이 달려 있었다. "뭐야? 여긴 어디야?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지?" 병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 집 내 방도 아닌 전혀 상상도 못한 엉뚱한 곳에 내가 와 있자 나는 너무 황당해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가 않아 일어나기는 커녕 팔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고개나 좌우로 돌리는 것이 겨우였다. "엄마아~, 해민아아~ 아무도 없어요?" 목이 잔뜩 가라앉아 있어서 그렇게 크게 부르지는 못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목소리로 크게 불렀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이런 내 부름에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고, 대신 이 방안의 허공을 잔뜩 차지하고 있는 왠 날파리같은 것들만 왱왱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 정말... 왠 날파리들이야? 여기 시골인가?" 평소 벌래를, 특히 여름 밤에 잘때 밤 잠을 방해하는 날파리나 모기등을 엄청 싫어하는 나는 팍 인상을 찡그리며 허공에 있을 그 시끄러운 날파리들에게 시선을 돌리다가 그대로 벙 쪄버렸다. "뭐, 뭐야.. 이것들은?" 그것들은 날파리가 아니었다. 날파리보다 훨씬 컸다. 그리고 엄청 많았다. "내, 내가 지금 헛것을 보나? 나 몸이 많이 허약해졌나봐..." 내 눈앞에서 허공을 날아다니는 것은 모두 내 손 크기 만한 요정같은 것들이었다. 그들은 반투명해서 마치 유령 같이도 보였지만, 유령처럼 희뿌연 색이 아니라 확실하게 색을 띄우고 있었다. 대부분 녹색을 띈 요정(?)이 많았고 그들 중 드문 드문 파란색을 띈 요정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손에 손을 잡고 웃으며 허공을 날아다니기도 하고 모여서 머리를 맡대고 소근대다가 잠시 후 까르르 웃으며 헤어지기도 하고, 하여튼, 자기들 멋대로 놀고 있었다. 날파리가 왱왱 거리는 듯한 소리는 바로 저 애들이 웃으며 소근거리는 소리여던 것이다. 내가 너무 황당해서 그 애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까 마침 어떤 녹색 요정과 파란 요정이 손을 잡고 내가 있는 쪽으로 날아 오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나를 보자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 동방예의지국에서 자란 내가 상대방이 호의적인 얼굴로 건네는 인사를 어찌 그냥 씹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어, 그, 그래... 안녕...?" 그러자 그 인사를 건넨 두 요정이 날아가려다 말고 멈칫 하더니만 내 얼굴 위로 날아와서는 놀랍다는 얼굴로 날 내려다 보았다. [뭐야, 우리의 인사를 받았어!!] [와, 인간이 우리와 인사했어!!] 마치 내가 인사할 줄 몰랐다는 태도였다. "뭐냐, 너희들... 그럴거면 뭐하러 나에게 인사를 한 거야?" 내가 황당해져서 그 두 꼬맹이들에게 말을 건네자 그들이 더욱 놀란듯 서로의 얼굴을 보며 떠들어댔다. [인간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인간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어!!] [우리가 보이나봐!!] [하지만 인간은 우리를 못 봐.] [그렇긴 하지만 저 인간은 지금 우리를 보고 있잖아!!] [정말 신기한 인간이네!!] 그들이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어대자 주위의 허공에 떠 있던 다른 꼬마 요정들이 그 소리를 듣고 우르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봐봐, 이 인간이 우리를 본대!] [정말? 정말이야?] [헤이, 인간, 우리가 보여?] 어떤 초록색 요정이 앞으로 나서더니만 내 눈앞에서 자신의 갸냘픈 팔을 휘둘러 보였다. "뭐야, 지금 뭐하는 거야? 똑똑히 잘 보이니까 장님 취급 하지 마!!" 그러자 주위에 있던 그 요정들이 저마다 꺄르르 웃어대며 떠들어댔다. [와아~ 정말 우리가 보이나봐!] [우리에게 말을 했어!!] [신기해, 신기해!] 자세히 보니 그냥 색깔만 다른 줄 알았던 파란 요정과 초록 요정은 생김새가 조금씩 달랐다. 둘 다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같지만, 초록 요정은 등 뒤에 마치 팅커벨 같은 두쌍의 날개가 달려 있었고, 무릎까지 오는, 주름이 많고 앏아서 계속 나폴거리는 초록 원피스에 초록 머리도 항상 바람에 나부끼듯이 한쪽으로 뻗쳐 팔락대고 있었다. 그에 비해 파란 요정은 그리스나 로마 신화에 나오는 발까지 내려오는 드레스를 입고 있어 발이 보이지 않았고, 그 드레스는 발 부분에서 합쳐져 마치 유령처럼 길고 뽀족하고 구불구불한 꼬리를 가지고 있었었다. 게다가 머리도 마치 물에 젖은 것 처럼 꼬불 거리는 머리가 착 밑으로 늘어져 있었고, 초록 요정 같은 날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요정들은 내 주위를 둘러싼 채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꺄르르 웃으며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뭐, 뭐냐... 너희들은...." 그러자 맨 처음 나에게 인사를 건넨 파란 요정과 초록 요정이 같이 대답해 주었다. [우린 정령이야. 나는 물의 정령] [나는 바람의 정령이야!] '정령? 정려어엉~~? 이게 무슨 귀신과 정령이 만나 쎄쎄쎄 하는 소리다냐?' 제 1화 해인, 황당한 곳에 떨어지다. (2) [우린 정령이야. 나는 물의 정령] [나는 바람의 정령이야!] '정령? 정려어엉~~? 이게 무슨 귀신과 정령이 만나 쎄쎄쎄 하는 소리다냐?' 그러나 나는 속의 생각과는 달리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아, 그... 그래... 정령이었어?" '쟤네들이 너무 오랜 시간 유령으로 있다 보니 자신을 정령이라고 착각하고 있나 봐. 그런데, 예전에도 판타지라는 게 있었나? 정령이라는 걸 어떻게 알고 있지? 쯧쯧쯧... 어쨌든 불쌍한 애들이야. 보아하니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은 거 같은데...' 비록 그들이 초록색에 파란색을 띄고 있고 모습도 소복을 입고 피를 철철 흘리는 모습이 아닌 깨끗한 복장을 하고 있어서 요정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솔직히 21C에 요정이 어디 있겠는가? 그나마 나는 유령이나 귀신의 존재는 믿지만, 요정은 깨끗한 자연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것들, 그러니 불쌍한 자연들이 오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 시대에 요정은 커녕 정령은 있었다 해도 다 전멸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저 애들을 척 봤을때 유령이라고 단정 지었고, 저들을 보게 된 것도 수영장에서 물살에 휘말리다 어딘가에 머리를 크게 부딧혀서 영적인 능력이 생긴 거라 여기고 있었다. '아... 이왕 이런 능력이 생긴 거 앞으로의 진로를 유령 사냥꾼 쪽으로 확 바꿔버릴까? 그런걸 액소시스트라고 하던가? 그건, 그렇고 여긴 참 이상한 곳이군. 왠 어린애 유령들이 저렇게 많아? 이 근처에 공동 묘지라도 있는 건가? 근데 어른 유령은 안 보이고 왜 애들 유령만 있는 거지?' 솔직히 어린 애들 유령이라서 그런지 별로 안 무섭게 느껴져 지금 담담하게 있지만, 만약 어른 유령이 나타난다면 내가 지금처럼 이렇게 담담하게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렇잖아도 지금 이렇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아, 빨랑 엄마나 해민이를 불러야지... 근데 엄마는 왜 날 이런 이상한데다 데려다 놓은 거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진 채 나는 내 앞에서 저희들끼리 떠드는 그 어린 유령들을 향해 물었다. "저기, 이 곳에 나 말고 다른 인간 못 봤니? 내 또래의 남자 인간이라던가, 아니면 아줌마 인간이라던가..." 그러자 그 유령들은 친절하게 서로 자신이 대답해주려는 듯 재잘거렸다. [못봤어, 못봤어.] [여기에 인간은 당신 뿐이야.] [우리는 오랜만에 인간을 처음 본 거야.] [맞아, 맞아] ..... "아... 그러냐?" 하도 많은 애들이 한꺼번에 떠들어서 머리가 띵할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알아낼 수 있었다. '이 곳에 나 뿐이라고? 설마.. 엄마가 날 혼자 여기에 내버려두고 갈 리가 없는데...' 저 유령 애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 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예전에 유령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에서 유령들이 사람을 속여서 자신들처럼 유령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읽은 것 같아서 난 저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나가서 찾아봐야 겠어.' 그렇게 마음 먹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몸이 여전히 말을 안 들어서 상체를 겨우 조금만 들어 올리다가 힘들어서 포기하고 다시 뒤로 털썩 드러누었다. 그러자 이런 내 모습이 웃긴지 그 유령들이 또 꺄르륵 대며 마구 웃어댔다. "헥헥, 이것들아.. 그렇게 웃기냐? 에고.. 힘들다..." 그렇지 않아도 목이 약간 말라 있는데다 힘까지 써서 그런지 목이 몹시 말라왔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봐도, 내 머리맡은 커녕 방 안 어디에도 나를 위한 물주전자는 보이지 않았다. "우쒸.. 엄마는 아픈 딸내미를 두고 어디로 갔담? 아.. 목마른데..." 침을 내어 목으로 삼켜 보았지만, 너무 양이 작았기에 오히려 갈증만 더 부추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이런 내 행동을 보고 있던 유령들 중 파란 하나가 나에게 물어왔다. [목이 마르다고? 그럼 내가 물 줄까?] "네가?" 유령이 준다기에 쪼끔 찝찝했지만, 지금 이렇게 목이 타는 상황에서 찬밥, 더운 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허락했다. '설마.. 별 일이야 있겠어? 먹고 안 죽으면 돼.' "그래, 줄 수 있으면 물좀 줄래?" 내 부탁에 그 파란 유령이 생긋 웃더니 자신의 근처에 있던 유령들을 불러 모았다. [자, 이 인간이 물 먹고 싶대. 우리가 물을 주자.] 그러자 그 옆에 있던 파란 유령들이 재잘대며 앞으로 나서서 저희들끼리 뭉쳤다. [물을 주자, 물을 주자.] [저 인간에게 물을 주자.] 그 파란 유령들은 자그마한 팔을 양 옆으로 펼쳐 옆에 있던 파란 유령들의 손을 잡고 둥글게 원을 만들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들이 만든 원 가운데에 아주 조그마한 물방울들이 하나, 둘 생겨나더니만 그 작은 물방울들이 뭉쳐 조금 더 큰 물방울들을 만들고, 그 조금 더 큰 물방울들이 합쳐저 좀 큰 물방울을 만들고... 그리하여 결국에는 내 주먹만한 커다란 물방울 하나를 만들어 내는 거였다. [이 정도면 충분 하지?] [충분 할까?] [충분 할 거야.] [모자르면 어쩌지?] [그럼 또 주면 돼지.] [아, 그렇구나...] 그렇게 저희들끼리 재잘 재잘 의논을 하더니만 의논을 끝냈는지 일제히 나를 돌아 보며 말했다. [자, 입을 벌려.] [그래, 입을 벌려!] [우리가 물을 넣어 줄께!] 하지만, 물방울이 너무 커서 입에 들어가기 보다는 내 얼굴에 그대로 작렬할 것만 같아서 나는 불안했다. "저, 저기.. 미안한데, 한 두 세조각으로 나눠주면 안 될까? 한번에 먹기에는 너무 많은데..." 그러자 그 유령들은 자신들 사이에 만들어진 물방울을 보더니 다시 날 보고는 꺄르르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래, 괜찮아.] [우리가 알아서 할께.] [입을 벌려] [입을 벌려] 믿어도 될지 심히 불안했지만... 나는 그냥 물벼락 맞아주자는 셈으로 입을 작게 벌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들 사이에 있는 내 주먹만한 물방울이 쭈욱 늘어나더니만 내 손가락 만큼 가는 물줄기가 되어 조르륵 하며 내 입속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얼결에 꿀꺽 삼키자 꽤 시원한 생수였다. [맛있지? 맛있지?] 내가 먹는 모습에 마치 합창을 하듯, 그러면서 나에게 뭔가를 바라는 듯한 빛나는 눈동자로 말하는 그들을 향해 나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무 맛있어. 고마워.." 그러자 그 파란 유령들이 꺄르르 웃으며 흩어졌다. 그러면서 재잘대는 것은 잊지 않았다. [맛있대, 맛있대] [우리더러 고맙다고 했어!] [인간이 우리보고 고맙대!!] 그런 천진난만한 유령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몸을 침대 - 푹신하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 에 깊숙히 누이며 눈을 감았다. 아직 몸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그런지, 아주 잠깐 그 유령들하고 이야기를 나눈 것 뿐인데도 다시 졸음이 쏟아졌던 것이다. '요즘 유령들은 별 희안한 재주를 다 가지고 있구나... 별일이야... 음, 다음에 눈을 뜨면 옆에 아무라도 좋으니 인간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소박한 기원을 하면서 말이다. 제 1화 해인, 황당한 곳에 떨어지다. (3) '요즘 유령들은 별 희안한 재주를 다 가지고 있구나... 별일이야... 음, 다음에 눈을 뜨면 옆에 아무라도 좋으니 인간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소박한 기원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내가 눈을 뜨자 내 눈에 보이는 천장은 흰 바탕에 보라빛 작은 꽃이 그려진 벽지가 발라져 있는게 아니라 여전히 통나무와 흙으로 만들어진 채 당당히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허공에는 눈 감기 전에 본 그 어린 유령들이 동동 떠다니다가 내가 눈을 반짝 뜨자 꺄르르 웃으며 떠들어댔다. [야, 깨어났다. 깨어났어!!] [어디, 어디?] [저봐, 눈을 떴어!!] [이봐, 우리가 아직도 보여?] '여전히 시끄럽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래, 보인다. 아주 자알~ 보인다."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보니, 여전히 내 옆에는 아무도 (그러니까 인간이) 없었다. "아, 정말.. 엄만 나만 이런데 냅두고 어디 간 거지?" 한 초록색 유령이 내 이마 위를 휙 지나가자 바람이 생겨서 (유령이 그럴 수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작은 머리칼이 내 이마를 덮으며 눈가를 간지럽혔다. 나는 커트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멋을 좀 내느라 앞머리는 길게 해서 양 옆으로 늘어뜨렸기에 그 앞머리가 이마 위로 올라오자 눈가를 간지럽히는 건 둘째치고 눈을 찌르는 거였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위를 쓸어 올려는데, 어깨에 약한 통증이 느껴져서 눈쌀을 찌푸리다가 아까는 손가락 끝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는데, 지금은 근육통이 느껴지지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놀랐다. "어? 이제 몸이 좀 나아졌나보네? 역시 한잠 더 자서 그런가?" 목도 아까보다 훨씬 나아져서 팍 잠겨서 쉰 목소리가 아닌 거의 내 본래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자 그런것이 신기했는지 유령들이 또 떠들어댔다. 하지만, 시끄럽기도 하고 일일이 대꾸해주자면 끝이 없을 것 같아 싸악 무시하면서 나는 윗 몸을 일으켜 보았다. 윗 상체를 버텨 일으키는 팔이 부들 부들 떨리고 온 몸의 근육이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대긴 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던 터라 나는 꾹 참고 일어나 앉았다. 역시 내가 누워 있던 곳은 침대였다. 일반 매트처럼 스프링이 너어져 탄력 있는게 아닌, 그냥 솜만 잔뜩 넣어 폭신한 느낌만 나게 하는 형식이었지만, 솜을 넣은지 얼마 안 되었는지 되게 폭신 거렸다. "헐.. 요즘 이런 침대도 다 있고..." 하기사, 내가 있는 방 안도 무지 옛날 형태로 꾸며져 있었는데 침대만 신식이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라고 납득한 나는 일어서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한동안 누워 있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서 그런지 머리가 띵 하고 팔, 다리가 부들 부들 떨려 제대로 서기도 힘들어 이대로 다시 누울까 했지만, 이 곳이 어딘지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기에 약간 무리를 해서 발을 내디뎠다. 내가 제대로 걷지 못하고 아주 느리게 휘청대며 앞으로 나아가자 정령들이 걱정스러운지 자신들이 도와준다느니, 다시 침대로 돌아가라느니 떠들어댔지만, 손을 휘휘 저어 그들의 제의를 거절하고 내가 있는 방을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나무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다. 그 곳은 거실인듯, 바닥에는 양탄자가 깔리고, 한쪽에는 벽난로가 있었고, 가운데에는 소파와 소파용 탁자, 발 받침대, 흔들 의자 등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쪽에는 문이 달리지 않고 대신 천이 절반쯤 내려와 안을 가리는 입구가 있었는데, 아마도 부엌으로 통하는 곳인 듯 했다. 그리고 그곳 맡은 편에는, 내가 나온 것과 같은 문이 달려 있고, 소파 넘어의 내 정면에는 현관문인 듯한, 조금 더 크고 튼튼한 문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집안이 되게 조용하고 썰렁한 것이 마치 사람이 오래 비워놓은 집 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거실에도 내가 있던 방에서 본 그 유령들이 떠돌고 있었지만.... 게다가 현관 문 양 옆에 있는 창은 나무 덮개로 덮여 있어 햇빛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난 불현듯 무엇인가가 떠올라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내 침대 옆에도 커다란 창이 있었는데, 그 창도 똑같이 덮개가 덮여 있었던 것이다. 아까는 그 모습을 그냥 지나쳤지만, 사람이 사는 집에 햇빛도 안 들어오게 모든 창문을 꼭꼭 막아놓은 모습은, 아무도 살지 않는 텅 빈 썰렁한 분위기와 함께 내 마음 속에 불안감을 심어주고 있었다. "이상하네..." 그런 불안감을 해소시키려고 일부러 소리내어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가기 위해 현관문쪽으로 향하던 나는 다시 한번 멈칫 거렸다. 문은 물론 창문까지 꼭꼭 닫힌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일까, 하는 거였다. 하지만, 곧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허공을 떠도는 유령들이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희미한 빛이긴 해도 하나, 둘도 아니고 수십명은 될 것 같은 그 반투명한 유령들이 모여 있으니 주위를 충분히 구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어두운 곳에 있어서 그렇게 빛을 내는 것 같지만, 어쨌든 이 상황에서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참내... 사람이 있는데 엄마는 불도 안 켜놓고 어딜 간 거야?" 나는 다시한번 투덜거리며 허공에서 동동 떠다니고 있는 유령들을 헤치며 우선 밖으로 나가보자는 심정으로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불도 다 끄고 어디론가 가버린 엄마가 혹시나 현관문까지 잠가놓지는 않았을까 걱정하긴 했지만, 다행히 잠그지는 않았는지 옛날 식으로 된 둥그런 문고리를 잡고 힘껏 미니 쉽게 열렸다. 그러나 나는 현관문이 열렸어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니, 나갈 수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했다. 너무 놀라서 입이 저절로 벌어지고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현관 문 앞에는 자그마한 터가 있었고, 그 너머에 낮은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그리고 울타리에 달린 문과 현관문 사이의 길에는 자갈이 깔린 작은 길이 있었다. 하지만, 길 좌우에 있는 잔디와 한쪽에 마련된 밭의 채소, 그리고 울타리에 달린 문 양 옆에 심겨진 커다란 나무는 시들다 못해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울타리 너머에는.... 다양한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니고 해초가 물결에 하늘 하늘 흔들리고 있는 바다속이 존재하고 있었다. 울타리를 기준으로 이 집 전체를 무슨 막 같은 것이 둘러 싸 비록 바닷물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이 집이 바다 속에 있는 것만은 틀림 없었다. 그리고 현관문 밖의 공기가 존재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그 초록 유령들이 몇몇의 파란 유령들과 같이 떠다니고 있었고, 바다 속에는 그보다 훨씬, 훠어어어어얼씬 더 많은 파란 유령들이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굳어있던 나는 시야가 다시 한번 검어지는 것을 느끼며 뒤로 넘어가버렸다. 쿠당탕~~!! 다시 한번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뒤통수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내가 기절했을때 부딧힌 모양이었다. "우쒸.. 너무 아프다..." 입으로는 그렇게 투덜대고 손으로는 아픈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으니 여전히 허공에는 그 유령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 내가 깨어날 때는 활기차게 재잘대며 돌아다니던 녀석들이 지금은 무슨 일인지 잔뜩 굳어져서는 입을 꼬옥 다문채,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가만히 허공에 떠 있는 것이었다. '어? 쟤들이 뭘 잘못 먹었나? 왜저래?' 하지만 이런 내 궁증을 풀기도 전에 나는 나를 향하는 듯한 차가운 어투의 말을 들어야 했다. "멍청하기는..." 유령들이 말할 때의 잔 울림이 없는, 완전한 인간의 목소리였기에 난 너무 반가운 생각에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나 이렇게 내 반가운 마음과는 달리 그 곳에 있는 인간은 무척이나 차가운 눈길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노려보고 있는게 더 정확한 표현일라나? 그러나 처음 보는 그 사람이 그러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입이 다시 떠억 벌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마치 고대 그리스나 로마 사람들이 입었음 직한, 하얗고 얇은 천을 주름을 잡아 뒤집어 쓰고 있는 듯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얼마나 긴지 땅에 질질 끌리다 못해 옷자락이 땅에 약간 쌓여 (?) 있었다. 게다가 그는 내가 처음 본, 거의 하늘색에 가깝지만 그와는 약간 다른, 그러니까 투명한 파란색의 숱많은 생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의 피부는 아기 피부보다도 더 깨끗하고 하얀데 얼굴은 무지 잘생겼다. 비록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의 늘씬한 몸에 잘 어울리는, 중성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조각같은 외모였지만, 그의 온 몸에서 풍겨나오는 분위기는 그의 약해보이는 외모를 카바해 절대로 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하기야,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라도 순정 만화에 나오는 부드러운 꽃미남 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너무 잘생긴 남자였다. 내가 어떻게 그가 남자인 줄 알은 거냐 하면, 우선 목소리가 남자의 목소리였고, 비록 가슴은 천의 많은 주름 때문에 가려져서 알 수 없지만, 가장 확실한 증거인 아담즈 애플이 당당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성격은 얼굴만큼이나 멋지지 못한 지 내가 말을 잃고 그만 멀거니 쳐다보고 있자 그 날아갈 것 같은 눈썹을 못 마땅하다는 듯 찡그리더니 다시 한번 틱틱 대며 말하는 거였다. "뭘 보냐? 그런 멍청한 표정으로..." 이 순간 나는 마음 속 깊숙이 내 인생의 표어 하나를 수정해 다이아몬드에 새겨서 간직했다. '못생긴거는 봐줄 수 있어도 성격 드러운 건 봐줄 수 없다!!' 제 2화 믿을 수 없는 이야기 (1) 정말 성격 드러운 남자였다. 그러나 이 황당 무개한 곳에서 만난 인간이라 나 또한 그 처럼 틱틱대서 그와의 사이가 틀어지는 건 원치 않았기에 속으로 꾸욱 참은채 나는 입을 열었다. "저기요.. 초면에 실례지만 뭐좀 여쭤봐도 될까요?" 그러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 들어있는 어투로 대꾸했다. "흥, 실례인 건 아니 다행이구나. 뭐가 궁금한거냐?" 뭐, 이런 남자가 다 있는 건지... 초면에 질문하는 건 실례인 줄 알면서 초면에 반말하는 건 실례라는 걸 모르는 건가? 하지만, 지금은 내가 아쉽지 저 인간이 아쉬울 건 하나도 없었다. 아까까지 없다가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저 인간은 이 곳을 나가고 들어오고 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그 무례한 놈에게 공손히 입을 열었다. "저기요... 여기가 도대체 어디죠?" 그러자 이 남자는 나를 무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성의없이 대꾸했다. "너 눈은 뒀다 스프 만들어 먹냐? 네가 봤으면 여기가 어딘지 알 거 아냐? 정령들 말로는 밖에 나가도 봤다며? 아, 하긴... 하찮은 인간으로 살아온 주제에 언제 바다 속에 들어와 봤겠어? 어딘지 모르는 건 당연할 지도.... 잘 들어라. 이 곳은 바다속이다. 인간들 말로는... 그래, 케르겔렌 해 바닥이군." '나도 이 곳이 바다 속이라는 건 안다. 그런데 케르겔렌 해라니... 도대체 지구 어디에 박혀있는 나라의 바다인 거야?' 나는 속으로 그렇게 툴툴 댔지만, 겉으로는 더 없이 공손하게 다시 물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제가 왜 인간은 올 수 없는 바다 속에 들어온 거죠? 게다가 바다 속에 이런 집이 있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군요. 이건 어찌된 건가요?" 그 남자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심히 못마땅하다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내비치고 있었지만, 그래도 순순히 대답은 다 해주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왔느냐고? 그건 내가 데려다 놓은 거다. 그리고 이 집이 왜 바다 속에 들어와 있냐고? 내가 가져다 놓았으니까 여기 있는 거지. 바닷물이 이 곳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결계를 친 것도 내가 한 거고." 그의 말의 의미를 깨달은 나는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저를 여기에 데려다 놓았다고요? 이 집도? 도대체 당신은 누구신데 그런 일을 하신 거죠?" "빨리도 물어보는 구나. 보통 처음 본 자가 있으면 그가 누구인지 제일 먼저 물어보는 거 아니냐?" 아마 자기가 누구인지 안 물어봐서 심사가 비틀린 모양이었다. 이 남자도 보기에는 안 그러게 생겼는데,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우러를 줄 아는, 왕자병 기질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런데 왜 내가 사과까지 해야 하는 건지... "흥, 그렇다고 사과 할 일은 아니지." '뭐냐... 이 인간....' 나는 이마에 혈관 마크가 뾰록이 솟아 오르는게 느껴져 얼른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그냥 냅뒀다가는 그걸 본 저 남자가 그걸 꼬투리로 뭔 소리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이마를 집는 걸 의아한 눈초리로 보더니 곧 관심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작게 코웃음 치며 시선을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정령왕이다. 정확히 말하면 물의 정령왕이지." 그의 말에 나는 입이 떠억 벌어졌다. 그는 엄청 놀라는 내 모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더니만 입을 열었다.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네가 감히 정령왕을 만날 줄 꿈에라도 상상 했겠느냐? 다 이해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속에서 마구 떠오르는 오만가지 생각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정령왕? 정령왕이라고? 허걱... 그럼... 이, 이사람이... 어른 유령이구나.. 허걱... 드디어 만났어.. 어쩜 좋아? 꼬맹이들 유령을 볼 때부터 어른 유령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벌써 만나다니.. 그러고보니 '왕'이라고 했지? 이 유령 마을의 대빵인가봐... 근데.. 날 데려 왔다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왈칵 눈물이 솟는 것을 느꼈다. '흐으윽... 그럼 그렇지... 나에게 갑자기 영적인 능력이 생길 리가 없어... 전에 희미하게 봤던 그 천사가 죽음의 천사가 틀림 없었던 거야.... 내 눈에 유령들이 보일 때 미리 짐작을 했어야 했는데...' 내가 놀란 표정을 짓다 말고 갑자기 울자 그 남자가 무지 당황한 얼굴로 날 바라 보았다. "야, 너 왜 우냐?" 나는 눈에서 흘러 내리는 눈물은 닦을 생각도 안 한채 그를 애절한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 "흑흑... 저는 죽은 거로군요... 훌쩍... 저도 유령이 된 거지요? 그래서 제 눈에 유령이 보이는 거고... 흑흑... 여기는.. 저승이었군요? 훌쩍, 저승은 음산할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바다 속의 옛날 집이라는게 이상하지만.. 흑흑... 근데, 심판은 언제 받나요? 유령의 왕이시라니... 혹시 제가 천당 갈지 지옥 갈지 아시나요? 훌쩍, 심판 받을 때는 천사가 절 데리러 오나요? 흑흑... 나 죽었다고 엄마가 많이 울텐데... 훌쩍, 너무 울어서 실신 안 했으면 좋겠는데... 흑흑... 내 친구에게 꿔준 2만원도 못 받았구... 이럴 줄 알았으면 꼬불쳐 둔 돈으로 옷이라도 살걸... 훌쩍... 무지 사고 싶었던게 있었는데... 흑흑... 아, 만화책 빌려온 것도 갔다 줘야 하고..." 죽었다 생각하니, 왜 이렇게 아쉬운 일들만 마구 마구 떠오르는 것인지... 부디 지영이가 나에게 꿔간 돈 입 싹 딱지 말고 해민이에게라도 전해줬으면 좋겠지만, 그 지지배 심보가 꿀꺽 하고도 오리발 내밀고도 충분히 남을 정도라 걱정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돈 없다고 해민이 생일에 그냥 넘어 갔는데 그거라도 받고 마음 풀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심난한 나에게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무슨 변고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숨도 못 쉴 정도의 압력이 생기더니만 어떠한 힘에 의하여 침대에 앉아 있던 내가 날려가 침대 뒤에 있던 벽에 강하게 부딧혀던 것이다. 쿵~!! 얼마나 세게 부딧혔는지 잠시 동안은 너무 아파서 말 조차 안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이런 내 상태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지 분노에 찬 목소리로 거의 고함을 질러대듯이 말했다. "유령이라니!! 감히 나 물의 정령왕 엘라임을 감히 하찮은 유령으로 생각한단 말이냐? 이건 나에 대한 모욕이야!!" 그가 말하는 동안 아까의 그 숨도 쉬지 못할 압력이 여전히 지속되었고 벽에 심히 부딧히고 거기에 더해 벽에서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와 바닥에 부딧히는 바람에 어깨와 등짝, 옆구리가 아파서 나는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콜록, 콜록~!!" 반사적으로 나오는 기침 때문에 온 몸의 근육이 쑤셔왔지만, 기침을 멈출 수가 없었다. 대신 이러한 나의 모습에 그 남자가 잠시 정신을 차렸는지, 숨도 못 쉴만큼 압박을 가하던 기운이 씻은듯이 사라졌다. 그리고는 놀랍게도 허공에 길다란 물줄기가 만들어지더니만, 그게 내 몸을 마치 뱀 처럼 한번 휘감은 다음 번쩍 들어서 다시 침대 위에 내려 놓는 거였다. 그리고는 아까 그 이상한 압력처럼 공중에 분해되듯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허..." 아픈 와중에도 그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데 그 남자가 차가운 말로 경고했다. "앞으로 한번만 더 날 그딴 유령으로 생각하면 그땐 아무리 너라도 죽여버릴 테다." 그러나 난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벌써 죽었는데 뭘..." 이미 죽어다는 걸 안 이상 좀 아프기야 하겠지만, 두려울 건 없었다. 뭐, 어쩌면 영혼을 아예 소멸 시킬지도 모르겠지만, 그런거는 한번도 보지도 못한 거라 두려움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아까의 공손 모드를 버리고 이리 당당히 대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 남자의 눈이 분노로 치켜 올라갔다. "죽어? 누가 죽었단 말이냐!!" "누구긴 누구예요. 당신과 나, 이 곳에 있는 이 꼬맹이 유령들 모두... 여기 유령 마을 이잖아요. 음, 저승이라고 해야 하나?" 그 남자는 내 말에 기가 찬지 허공을 향해 부르짓더니 날 매섭게 노려 보았다. 그런데 그 기세가 너무 살벌하고 무서워 나는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다 못해 온 몸이 덜덜 떨리는 지경이었다. 허공의 꼬맹이 유령들도 무서움을 느끼는 건지 싸그리 내 방에서 사라져 버렸다. "정말 죽고 싶은 게냐?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그런 하찮은 허깨비가 아니라 정.령.이란 말이다. 정.령!!" 그 살벌한 기세에 입까지 얼어 붙은것 같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겠기에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아... 그러니까.. 정령이나 유령이나..." 하지만 그의 매섭다 못해 전율이 좌르르 흐르는 눈길을 받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는 그 상태로 날 한동안 노려 보더니만 뭔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에 힘을 풀고 나에게 물었다. "너, 정령이 뭔지 모르는 거냐?" 그 말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믿기 힘들다는 빛이 떠올랐다. "정말 몰라?" 그에 나는 발악적으로 입을 열어 말했다.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요. 정령이 뭔지 아는 사람이 있나!! 그냥 전설이나 판타지 소설에나 나오는 유령이나 요정 같은 거 아니예요? 그런게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그러자 그가 내 말투를 똑같이 흉내내며 말했다. "너야말로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라. 정령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정령을 모르는 네가 이상한 거야!! 비록 정령이 보통 사람의 눈에 안 보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정령의 존재를 알고 있어!!" 제 2화 믿을 수 없는 이야기 (2) "너야말로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라. 정령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정령을 모르는 네가 이상한 거야!! 비록 정령이 보통 사람의 눈에 안 보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정령의 존재를 알고 있어!!" 그의 말에 나는 너무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무슨 황당한 소리를...." 하지만, 그의 시선이 되게 당당한 것이, 날 이기기 위해(?)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뭐야, 그럼 저 남자가 말한게 사실이란 거야? 아, 하지만... 도대체 누가 정령의 존재를 믿는 다는 거지? 솔직히 유령의 존재도 안 믿고 신의 존재도 안 믿는 사람이 태반 아냐?' 내가 이렇게 속으로 혼란스러워 할 때 날 지그시 보던 남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어 날 현실 세계로 돌아오게 했다. "그렇군... 네가 있던 곳에서는 정령의 존재를 알지 못하나 보지?" "예? 예..." "그랬었군... 하긴... 세계가 다르니 그럴 수도... 하지만, 이 곳 사람들은 모두 정령의 존재를 알고 있고, 정령술사도 있어서 정령들과 계약을 맺어 정령의 힘을 사용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다."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사람 말은 꼭 내가 딴 세상에 떨어졌다는 소리 같잖아? 하긴 뭐... 이 곳이 저승 비스므리한 유령 세계 같으니까 맞는 말일 수도.... 근데, 이건 뭔가 핀트가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저 성격 더럽고 무서운 남자에게 물어보지도 못하고 혼자서 이해 하려고 낑낑대고 있는데, 이 모습을 본 자칭 정령왕이라는 남자가 비웃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해 못해 낑낑대는 모습 하고는.... 네가 멍청하다는 것을 알리지 못해 야단이로군. 도대체 너 같은 것을 위해 왜 그녀가..." 말을 하다가 점점 흥분한 그의 눈빛이 다시 매서워져 내가 찔끔하는 순간, 그가 뭔가 말을 하려다 멈추고 내 시선을 피했다. 비록 고개는 돌렸지만, 그의 주먹이 꽈악 쥐어저 부르르 떨리는 걸 보니 몹시 격양된 감정을 진정 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린 그는 아까의 그 냉정한 모습을 되찾았지만, 날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허공을 보는 듯 초점이 흐려 있었고,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이해 할 수가 없어... 그래, 정말 이해 할수 없는 노릇이지.. 네까짓게 뭐라고..." 그의 띄엄 띄엄 나오는 말에 의해 더더욱 상황이 엉킨 실타래 처럼 이해가 안 갔지만, 그가 온 몸으로 절대로 끼어 들지 말라는 오로라를 팍팍 뿜어내고 있는 터라 나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자기 생각에 빠져 있던 그는 크게 한숨을 한번 쉬더니 날 바라보았다. "잘 들어라. 난 귀찮은 것은 질색이지만, 네 멍청함에 경의를 표하며 단 한번만 설명해 주마. 너는 원래 이 세계에서 태어난 자였다. 하지만, 내가 다른 세계로 보내 버렸지. 그러다 지금 다시 데려 온 것이다. 네가 있던 세계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계에는 정령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정령이란... 젠장 내가 왜 이런 것 까지 설명해야 하는 거지?" 잘 설명하던 그 남자는 점점 귀찮아졌는지 인상을 팍 찌그러트리며 투덜댔다. 하지만, 그런 그를 보면서 나는 황당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하.하... 이 곳에서 태어 났다뇨.... 비록 고아이기는 하지만 저는 한국에서 태어 났는데요... 여기가 어딘 지는 모르겠지만, 인간 같지도 않은 사람들이 설마 애를 낳고 해외에다 버렸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그러나 나는 말을 채 끝내지도 못했다. 그 남자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나게 무서운 눈길로 날 노려봤기에 입을 벙긋하기는 커녕 온 몸이 저절로 떨렸고, 솔직히 이야기 해 실례까지 찔끔 할 것만 같았다. 그는 그런 표정으로 나에게 한 걸음 뚜벅 다가서더니 날 어찌하지는 못하겠는지 괜히 애꿏은 벽을 주먹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기세는 엄청났는데 다행이도 벽이 튼튼했는지, 벽은 금 하나, 우그러짐 하나 없이 꿏꿏이 버텨 내었다. 평소라면 그 모습에 웃음이라도 터트렸겠지만, 분위기가 너무 무서웠기에 난 웃지도 못한 채 그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는 벽에 주먹을 가져다 댄 그 상태로 나를 향해 또박 또박한 말투로 말했다. "경고 하겠다. 한번만 더 네 친모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면 아무리 너라도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 내 친엄마라는 사람을 아주 잘 아는 듯한 말투이기에 나는 그에게 질문하기가 무척 두려웠지만, 떨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입을 열었다. "제... 친엄마를 아세요?" 그는 무지 말해주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대답해준다는 기색을 역력하게 나타내며 말했다. "..... 그래." 다행히 대답은 해주는 모습에 나는 조금은 안도하며 용기를 더욱 짜냈다. "지금... 어디 있는지... 아세요?" 친 부모에 대한 미련은 예전에 버렸다. 지금 내가 이렇게 입을 여는 건, 단지 호기심일 뿐이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몇번이고 되내며 그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솔직히, 속으로는 이런 내가 우습기도 했다. 처음 보는데다가, 자신을 있는지도 모를 정령 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고 이러고 있는 건지... "그녀는... 죽었다." "...그렇군요...." 그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오기 전까지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 스르르 풀리면서 허탈한 기분과 함께 한편에서는 안도감이 자리 잡았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내 친모라는 사람과 가까운 사이었던 모양이었다. "제 친모라는 분과... 가까우셨나보죠?" 그는 날 힐끔 보더니 귀찮다는 투로 대꾸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럼... 혹시... 그렇다면...." 나는 다시 두근 두근 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입을 열었다. 아니, 여는게 아니라 입이 제 맘대로 멋대로 열리는 기분이었다. '바보, 바보.. 입 다물어!! 그걸 저 사람에게 물어서 어쩌겠다는 거야? 그냥 입 다물라니까!!' "혹시... 제 친모가... 절... 왜 버렸는지 아세요?" 듣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너무나 알고 싶은 마음이 속에서 서로 뒤엉키는 걸 느끼며 난 그 남자의 입을 주시했다. 아마 금방 대답을 해준 듯 한데, 그가 말해주는 게 마치 몇 년이라도 되는 것인 양 너무나 길게 느껴져서 내가 기다리다 못해 지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묘하게 웃음 짓는 것이 왠지 맘에 안 드는 대답이 나올 것 같았다. "훗.... 널 왜 버렸냐고? 하, 정말 재미있는 질문이군. 널 왜 버렸냐라..." 저 남자를 만나면서 지금까지 받은 비웃음 중에 가장 기분 나쁘게 느껴지는 비웃음을 나에게 보내며 그는 한동안 킥킥 거리더니 내 질문에 대답해줬다. "널 버릴 수나 있었을까? 네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죽었는데? 너 같은 것 하나 낳겠다고 그렇게 갖은 애를 써놓고서, 정작 그렇게 널 원하던 자신은 네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하고 죽어버렸지. 우습지 않나? 정말 너무나 웃긴 이야기야, 안 그래?" 그러면서 미친 듯이 허공에다 대고 웃음을 터트리는데, 그게 정말 재미있어서 그런게 아니라는 것 쯤은 아무리 눈치 없는 나라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온 몸에서 뿜어지는 슬픈 감정이 나에게도 전염 되었는지 코 끝이 찡해져 왔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남자는 돌연 웃음을 딱 그치더니 날 보고 정색한 채 입을 열었다. "널 버린건 나였다. 너 같은 게 그녀 대신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걸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지. 그래서 널 다른 세상으로 보내버린 거다. 그러니, 원망하려면 날 원망해라." 이런걸 바로 청천벽력이라고 하는 걸 거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너무 놀라서 한 동안 말을 할수도 없었다. 그 동안 얼굴도 모르는 채 친 부모를 수없이 원망하고 원망하고 또 원망 했었는데, 그렇게 나에게 원망을 듣던 친모는 날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고, 생전 모르는 자가 날 버렸다니.... "나, 날... 버린게 당신이라고? 도, 도대체.. 당신이 무슨 권리로!!" 나는 침대 위에서 몸을 반쯤이나 일으키며 그에게 소리쳤다. 그가 버려준 덕분에 양부모를 만나 행복하게 살았으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에게 고맙다고 절을 해야 할 판이었지만, 이 순간만은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한 채 오로지 가슴 저 밑바닥에서 부터 솟아 오르는 분노를 담아 소리를 질렀다. 그 남자는 그런 나를 같잖다는 듯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와 헤어지게 만들었으니까. 더 살 수도 있었는데 너 때문에 그녀가 내 곁을 일찍 떠나 갔으니까! 난 너 같은 건 원하지도 않았어! 단지 그녀가 내 곁에 좀 더 오래 있어주길 바랬지." "무, 무슨 인간이... 그렇다고 해도 애를 버리다니요? 아무리 당신 애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러면 친부에게라도 데려다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 분노에 찬 외침에 그 남자가 어이 없다는 듯 웃었다. "킥... 킥킥킥... 친부? 친부라고? 정말 웃기는 군. 그래, 인간들이 말하는 뜻 그대로의 친부에게 가고 싶은 거라면... 멀리 갈 필요 있나? 바로 네 앞에 있지 않느냐?" "예에?" 순간적으로 그의 말을 이해 못한 내가 어리벙벙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더 진한 비웃음의 미소를 띄우며 벽에 대지 않고 밑으로 그냥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들어 엄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르키며 당당히 말했다. "내가 바로 인간식으로 말하면 네 친부다." 제 2화 믿을 수 없는 이야기 (3) "내가 바로 인간식으로 말하면 네 친부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 큰 벼락을 맞아 버렸다. 덕분에 나는 한동안 말은 커녕 입을 뻥긋 할 수도 없을 것 같았지만, 억지로라도 입술을 벌리고 혀를 놀렸다. "하...하.하.하... 지금 농담 해요?" 힘겹게 단어를 나열하는 내 입술은 직접 내가 보지는 못했지만 추위에 떨 듯 파르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절대로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이를 앙 다물고 두 팔로 상체를 감싸 앉았다. 그렇지 않으면 사시나무 떨듯 떨려오는 이 몸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부디 거짓말이라고 말해주길 바라며 그 남자를 바라보는데, 이 악마 같은 - 이순간에는 내 눈에 그렇게 보였다. - 남자는 날 바라보며 피식 웃고 있는 거였다. 마치 내가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 덕에 나는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정리되자 온 몸의 떨림도 곧 멈췄다. 나는 아직도 날 내려다보고 있는 그 남자를 매섭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웃기지 마요. 절대 믿을 수 없어. 당신이 내 친부라고? 그렇다면 증거를 대 보시지! 당신이 내 친부라는 증거를 대보란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 그가 증거를 못 댈테니 당연히 당황하며 자신의 말을 취소할 거라 여겼다. 허나, 이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조금의 동요도 내비치지 않은 채 이렇게 말했다. "증거? 훗, 일부러 내가 보여줄 것도 없지.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될 테니까..." "내... 모습을?" 이 방에는 거울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이 곳에서 눈을 뜬 뒤로 내 모습을 본 적이 한번도 없었기에 그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런 내 맘을 알아차렸음인지, 그가 자신이 직접 문을 열어 방 밖으로 나가며 나에게 손짓했다. "거울을 찾는 거면 따라 와라." 나는 떨리는 마음을 붙잡은 채 비칠 비칠 일어나서 그의 뒤를 따랐다. 거실에는 이 방안에서 몰려 나간 파랗고 녹색인 유령, 아니 저 남자와 이 애들의 말에 의하면 정령인 애들이 - 나는 은연중에 저들이 정말 정령이라고 믿게 된 모양이었다. 하기야, 내가 안 믿으면 어쩔 것인가? 걍, 밑을 수 밖에...- 모여 있다가 그 남자를 보더니 움찔 거리며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남자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우리가 나온 문 바로 옆에 있던 작은 문을 열고는 나에게 손짓 했다. "들어가 봐라." 아까 내가 거실에 나올 때는 바로 옆에 있어서 못 본 듯한 곳이었는데 그의 손짓에 따라 그 곳을 들여다 보자, 그곳은 욕실이었는데 놀랍게도 21세기의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욕실과 비슷했다. 비록 좌변기는 없었지만, 한쪽에는 천으로 가릴 수 있게 된 나무로 만들어진 욕조가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서서 세수를 할 수 있는 높이에 세면대가, 그리고 세면대가 붙어있는 벽에는 거울이 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나 보고 저 거울을 보라고 이 곳으로 데려와 준 듯 했다. 그런데, 저 남정내 때문에 욕실에 있는 정령이 모조리 나간데다 그 남정네 또한 욕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 서 있는 바람에 욕실 안은 무척 어두웠다. 그러고보니, 아까 정령들이 방 안에서 모조리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방 안의 사물을 구분할 수 있었던거 보면, 저 남자의 몸에서도 빛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그걸 눈치채지 못한 채 그를 그냥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니 나는 정말 둔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욕실 안에 거울이 있어본들 안이 어두컴컴하여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어두워서 잘 안보이는데요?" 그러자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대더니 손을 가볍게 허공에다 휘저으며 낮은 톤으로 중얼 거렸다. "정말 가지 가지 하는군. 니트라스!" 그러자 마치 민들레씨 처럼 생긴 빛의 구가 생기더니 욕실로 들어와 사방을 훤히 밝혀주는 거였다. 놀라서 그 빛의 광구를 바라보자 그 빛의 광구는 마치 반갑다는 듯이 빛을 깜빡 깜빡 거렸다. "이게... 뭐죠?" "빛의 하급 정령, 니트라스다." "그럼... 얘도 정령이예요? 하지만, 쟤네들 처럼 사람처럼 안 생겼네요." "정령이라고 다 똑같이 생긴 건 아니지. 거울 안 보냐?" "아..." 그제야 황급히 거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 니트라슨지 다무슨지 때문에 사방이 밝아져 전보다 훨씬 잘 보이기는 했지만, 하필 그 빛의 정령이 내 뒤쪽에 동동 떠 있었기에 얼굴에 그림자가 져 앞은 더욱 안 보였다. "얘, 얘, 거기 있지 말고 이 앞쪽으로 좀 와바." 그 동안 물의 정령들과 바람의 정령들과 이야기를 해서인지 나는 뒤도 안 돌아본 채 그냥 손짓만으로 그 빛의 정령을 불렀다가 처음 본 내 말을 들어줄 까 싶어 아차 했지만, 의외로 니트라스는 순순히 내 말에 따라 앞으로 와 줬다. "아... 고마워." 그러자 왠지 빛의 정령이 방긋 웃는 것만 같았다. '거참... 그냥 기분 탓인가...' 하지만 지금 내 기분이 낭만적인 분위기에 폭 빠져 있는게 아니라 무지 심각한 상태였기에 단순히 기분 탓만은 아닌 듯 했다. 뭐, 어쨌든간에 그에 대한 생각을 계속 붙들 순 없었기에 나는 차근히 거울을 바라보았다. 170cm나 되는 여자 치고는 좀 큰 키에 당연히 혼혈이라 생각했을 정도로 작고 이목구비가 뚜렸한 얼굴, 그게 바로 나였다. '아니, 평소 그대로고만... 도대체 뭐가 증거라는 거야? 얼굴이 닮은 것도 아니고.' 얼굴은... 인정하기 싫지만 저 남자 쪽이 훨씬 훠어어얼씬 잘 생겼다. 비록 나도 키도 크고 항상 커트 머리를 하고 다녀 여학교에서 보이쉬한 매력으로 애들에게 한 인기를 받고 있는 몸이었지만, 저 남자에게 비하니 명함도 못 내놓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두 얼굴이 닮은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다시 한번 얼굴을 확인한 후에 그에게 고개를 돌려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냐고 물으려는 찰나, 다시 급작스럽게 거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 눈에 뜨인 거였다. 너무 놀란 나는 아예 거울에 바싹 붙어서 들여다보다가 정 안되겠기에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하나 뽑았다. "이젠 별 짓 다 하는군..." 내 모습을 계속 지켜보던 남자가 기가 찬다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에 대꾸해줄 여력이 없었다. "내 머리.... 내 머리가...." 정말 기가막히게도 그 흑단 같이 까매서 염색해도 제대로 물도 안 들던 내 머리가 저 남정네와 똑 같은 연한 파란색, 혹은 좀 진한 하늘색(간단히 물색)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동양인임을 증명하는 흑갈색 눈동자가 저 남자와 똑같이 파란색으로 변해 있었다. 저 남자의 눈동자는 비록 파란색이지만 빛의 각도에 따라 파란 색으로 변했다가 은색으로 변했다가 했는데, 내 눈동자도 똑같이 그러는 거였다. "이... 이럴수가... 이게 도대체...." 내가 망연자실하게 서 있자, 그 남자가 기분 나쁘게 히죽 거리며 말을 건넸다. "어때? 확실한 증거지?" 그러나 이대로 수긍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를 향해 바락 바락 우겨댔다. "이건 사기야. 분명히 내가 자고 있는 동안에 염색을 해 놓은게 틀림 없어. 나는 원래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였단 말예요!!" 물론 이게 억지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루 아침... 은 아니고 한 순간에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이 바뀔 수도 있는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갈뿐더러, 이 현실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저 남자와 똑같은 머리색과 눈동자색이라니... 만약 인정한다면, 내가 저 사람의 딸이라는 걸 인정하게 될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그걸 저 남자도 눈치 챘는지 그는 아까 처럼 비웃거나 이죽대는 대신 몸을 돌리며 지나가는 투로 말을 던졌다. "억지 부리지 마라. 네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은 이 세상에서 나와 너만이 가지고 있는 색이니." "하, 하지만... 한국에 있을 때는 분명히 검은 눈동자와 검은 머리카락 이었단 말이예요. 동양인 같은..." 그의 모습이 벽에 가려져 사라질 것 같자 나는 얼른 그의 뒤를 쫓아가며 반박했다. "그건... 아마도 네가 있던 곳까지 내 힘이 미치지 못해서 그런 걸 테지. 이 세상에는 내 힘이 미치니까 본래의 색으로 돌아온 걸 테고..." 비록 단정 짓고 있기는 했지만, 그의 말은 추측에 가까웠다. 그걸 알아챈 나는 그 곳에서 희망을 발견한 기분으로 얼른 다시 반박했다. "그 반대일 수도 있잖아요. 원래 검은 색인데 이 곳에 와서 색이 변한 것일 수도..." 하지만,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가 몸을 획 돌리며 날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기에 나는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어물거렸다. '젠장... 내가 왜 주눅이 드는 건지...' "네 머리는 물고기 대가리냐? 내가 아까 말했지? 넌 이곳에서 태어 났다고. 태어날때 본 네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은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색이었어." "그... 그래도..." 할 말 없게 만드는 말이었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기에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런 나를 그 남자는 귀찮다는 듯 쳐다보더니 거실에 놓여진 소파의 한 자리에 앉으면서 나를 향해 손짓했다. 그래서 주춤 주춤 그의 손짓에 따라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자 그가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한가지 더 증거를 대주지. 너는 내 기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 존재하는 정령들을 볼 수도, 게다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지 않느냐? 그건 같은 정령들 외에는 아무도 못하는 일이다. 신의 자식이며 자연을 사랑하고 조화로운 종족인 엘프도 자연에 분포해 있는 정령을 보지도 못해. 단지 정령과의 친화가 유달리 뛰어난 엘프라면 중급이나 상급 정령의 기운을 겨우 느끼긴 하겠지만... 이게 바로 내가 네 친부라는 증거다." "하아...."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그냥 한숨만 내쉬었다. "게다가 지금 너는 모르겠지만, 너에게서는 나와 같은 기운이 느껴지고 있어. 그러니 부인 할 수는 없을 거다." 제 2화 믿을 수 없는 이야기 (4) "그렇다면, 한가지 더 증거를 대주지. 너는 내 기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 존재하는 정령들을 볼 수도, 게다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지 않느냐? 그건 같은 정령들 외에는 아무도 못하는 일이다. 신의 자식이며 자연을 사랑하고 조화로운 종족인 엘프도 자연에 분포해 있는 정령을 보지도 못해. 단지 정령과의 친화가 유달리 뛰어난 엘프라면 중급이나 상급 정령의 기운을 겨우 느끼긴 하겠지만... 이게 바로 내가 네 친부라는 증거다." "하아...."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그냥 한숨만 내쉬었다. "게다가 지금 너는 모르겠지만, 너에게서는 나와 같은 기운이 느껴지고 있어. 네가 나의 계약자가 아닌 이상 이 세상에 나와 같은 기운을 풍기는 자가 있는 건 불가능 하지. 정령이 후손을 생산할 수 없다는 걸 감안해본다면 더 말할 것도 없고. 그걸 보면 넌 나와 관련된... 뭐, 뭐냐?" 그 남자는 설명해주다 말고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와 만난 이래 그의 이런 표정을 처음 보는 거라 통쾌하기 짝이 없었지만, 난 그럴 여유도 갖지 못한 채 그의 멱살이라도 틀어쥘 모양새로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그의 멱살을 틀어 잡고 싶었지만, 그와 내가 앉아 있는 가운데에 소파 탁자가 놓여 있는 바람에, 팔이 짦아 그의 멱살은 잡지 못하고 대신 탁자만 부서져라 내리쳤다. 하지만, 그 탁자는 뭔 나무로 만들어졌는지 큰 소리만 날 뿐 멀쩡했고, 대신 내 손만 엄청난 통증과 함께 새빨개졌다. 하지만 그 손을 부여잡고 호호 부는 대신 나는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그게 무슨 소리냐구요?" "뭐, 뭐가 말이냐?" 너무 당황스러운지 그가 말까지 더듬었다. 그가 처음으로 내 기세에 밀린 것이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갔다. "당신 정령이라면서요? 정령왕 맞죠?" "그, 그런데?" "정령은 후손을 생산하지 못한다면서요? 근데 당신이 어떻게 내 친부가 될 수 있다는 거죠? 그렇다면 당신이 내 친부가 아니거나 정령이 아니란 소리잖아요. 맞죠?" 그러자 그가 나에게 밀려 깨트린 포커 페이스를 다시 회복했다. 계속 나에게 밀릴 줄 알았던 그가 의외로 본래 신색을 되찾자 나는 어리벙벙했지만,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제자리로 돌아온 그는 이런 내 모습에 눈, 아니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라. 올려다 보기 귀찮다." 다시 풍기기 시작한 그의 카리스마 덕에 나는 주춤 주춤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자 역시나, 내 쫄은 모습에 그가 픽 하고 웃었다. '저 나쁜 자식!! 분명히 내 친부라는 것도 다 뻥일 거다!!' 그는 소파에 등을 편안하게 기대고 다리를 꼬더니만, 약간 내리깐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확실히... 정령은 후손을 생산 못하지. 후손을 생산할 수 있는 생식기 자체가 없으니까. 우리 정령은 정령계에서 탄생하고 소멸한다." "거봐요. 그러니까 당신은 내 친부가..." "말 끝까지 들어. 도대체 누굴 닮아서 그렇게 예의가 없는 거냐? 네 친모는 마법사이자 정령술사였지." "마법사? 모자에서 비둘기 꺼내고, 손수건에다 넣은 동전 사라지게 만들고... 그런 묘기를 보이는 사람 말하는 거예요? 내가 살던 곳에서는 마술사라고 하는데..." 내가 다시 한번 끼어들자 그의 눈썹이 꿈틀 거리더니 매서운 눈빛을 나에게 보냈기에 나느 찔끔 하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는 눈썹을 약간 치켜 뜬 그 상태로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끝까지 들으랬지? 그리고 그런 재주를 가진 자를 누가 마법사라고 하는 거냐? 마법사라면 적어도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불덩어리나 물줄기, 혹은 얼음 덩어리라도 생성해낼 수 있어야지." "설마..." 다시 한번 입을 열려고 하다가 또 한번 매서운 눈길을 받은 나는 얼른 입을 다물고 속으로만 생각 했다. '슬레이어즈에 나오는 리나 같은 사람이 이 세계에 있나보네...' "정말.... 누가 널 키웠는지...." '젠장... 누가 데려 오랬나? 나도 한국에서 있고 싶다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또 눈길을 받을 것만 같아서 나는 속으로만 중얼 거렸다. "정령술사는 알겠지?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정령들과 계약을 맺어 그 능력을 빌어 쓸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네 친모는 마법사이자 정령술사였어. 물론 마법보다는 정령술이 더 뛰어났지. 나 까지 소환해 계약을 맺을 정도였으니...." 설명하다 말고 잠시 회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던 그는 내가 눈만 말똥말똥 뜬 채 그를 바라보자 다시 입을 열었다. "뭐냐, 그 표정은?" "묻고 싶어도 물을 수가 없어서 설명만 기다리는 표정이요." 내가 투명스레 대꾸하자 그가 다시 한번 나를 찌릿 노려봤다. "아아, 또 그게 얼마나 대단한건지 모르겠지? 정말 설명하는 건 귀찮군. 그러니까... 내가 네 엄마와 계약을 맺기 전 인간과 계약을 맺어본 건 내가 태어나서 단 한번도 없었다. 몇백년 전에 바람의 정령왕은 어떤 인간과 한번 계약을 맺어봤다고 하지만 말야. 그러니까 알겠냐? 정령왕과 계약을 맺을 수 있는 뛰어난 정령술사는 몇백년마다 한번 나올까 말까야. 그 외에 대부분의 계약자는 엘프나 드래곤이지." "드래곤?" 너무 놀라서 끼어들지 말라는 말을 잊고 내가 입을 열자 또 다시 찌릿 한 눈길이 나에게 쏟아졌다. 물론 이번에는 내가 몰라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드래곤, 얼마나 많이 들어본 말인가? 동양에는 용, 서양에는 드래곤, 성경책에도 나올 정도로 그 유명한 - 비록 실존하지는 않지만서도 - 영물(?)의 이름이 나오는데 내가 어찌 안 놀랄수가 있을까? 내가 묻고 싶은건, 한국에서 알던 드래곤과 이 곳에 있는 드래곤이 똑같은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드래곤은... 아, 정말 귀찮아. 그건 나중에 가르쳐 줄께. 정말 암 것도 모르는 애 가르치려니 귀찮군. 그러니까 궁금한 건 잘 간직했다가 나중에 질문해, 알았어?" "예...." "좋아. 다시 한번 설명을 끊었단 봐라... 내가 어디까지 설명했더라? 아, 맞아. 드래곤과 엘프가 정령술이 더 뛰어나단 이야기까지 했지? 우선 드래곤이라는 놈들은 나중에 설명하고, 엘프가 자연과 가까운 존재라고 하나 인간 보다 조금 더 나을 뿐, 정령왕까지 불러낼 수 있는 능력자는 극히 드물어. 그러니 네 엄마는 정말 대단한 정령술사라고 할 수 있는 거지." 그러면서 날 바라보는 시선이 '알아 듣겠냐?' 라고 묻는 것 같아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 물론 네 엄마는 하프 엘프였지만... 아, 하프 엘프는 인간과 엘프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을 말한다. 가끔 엘프와 인간 사이에서 후손이 태어나기도 하지. 어쨌든, 네 엄마는 인간 중에서도, 또한 엘프 중에서도 뛰어난 정령술사이긴 하지만, 마법은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 200살이 되어서야 겨우 7클래스의 마법사였으니까." "헉...." 내가 두 눈을 크게 치켜뜨며 놀란 탄성을 자아내자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날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놀래? 설마, 마법 실력이 너무 낮아서 놀란 건 아니겠지?"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제 친모가 200살이나 넘게 사셨다고요?" "그야 당연하지. 네 엄마는 하프 엘프라고 했잖아? 아, 넌 아무것도 모르지... 엘프는 보통 1000년 동안 살아. 인간은 100년 동안 살지? 그래서 인간과 엘프의 혼혈은 보통 400에서 500살 정도 살지." 거기까지 말한 그는 날 매섭게 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 엄마는 너 때문에 최소한 200살은 더 살 수 있었던 생을 버렸던 거라고. 알겠어?" "예..." 비록 내가 원한 건 아니지만, 나 낳은 뒤 돌아가셨다니 내가 뭔 할 말이 있겠는가? "뭐, 그건 그녀의 선택이었지만... 후우, 정말...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맘대로 죽어 버리다니..." '생사를 누가 맘대로 정할 수 있는감? 다 자기 운명이지...' 내가 속으로 또 꽁알 거리고 있을때 다시 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험,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샜군. 어쨌든, 네 엄마는 날 소환한 뒤에 인간도, 엘프도 없는 오지로 가서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물론, 나와 같이 있었지. 우린 그렇게 둘이 행복하게 살았어." 거기까지 말한 그는 또 다시 회상모드로 돌입하여,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 이곳 세계로 소환된 나는, 설마 내가 그녀와 사랑에 빠질 줄은 몰랐지. 처음에는 그녀와 참 많이도 투닥대었는데... 나는 감히 정령왕인 나에게 바락 바락 대 들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건 꿈에도 상상 못했어. 우리 정령왕에게는 비록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한수 양보해 주는데 말이야." '당신 성격이라면 나도 가만 안 있겠다... 지가 무슨 성격이 좋은 줄 아남? 하여간, 내 친모라는 분의 성격도 만만치 않았나보네. 그러니까 둘이 그렇게 투닥 대다가 정이 들었단 말이지?' 그렇게 잠시 꿈속을 거닐던 그가 중요한 대목에 이르렀는지 다시 현실로 돌아와 나를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 그녀가 갑자기 나의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하더군. 하지만, 내가 그녀의 원을 들어주고 싶어도 정령은 후손을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어. 그녀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그 말을 들었을 당시에는 난 이룰 수 없는 바람을 이야기라도 해본 줄 알고 그냥 흘려들었었지. 하지만, 그녀는 그게 아니었던 거야." 거기까지 말한 그는 탁자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녀가 마법사라는 걸 내가 잠시 잊은 거지. 마법사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였으니까 말이야. 그녀는 그때부터 어떻게 하면 나의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거야." 점점 이야기속으로 빨려 들어간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는 탁자를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 날 바라보며 말했다. "어느날, 그녀가 나에게 나의 기운을 달라고 하더군. 아주 간절한 소망이라고 하면서... 내가 가진 기운의 약 1/10 정도를 달라고 하는 거야. 그건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절대 들어주지 않았을 좀 무리한 요구야. 그로 인해 내 수명이 1000년 정도 줄어들 테니까." 그의 말에 내가 다시 한번 입을 떠억 벌리자 그가 아차 싶었는지 얼른 설명해 주었다. "아아, 그래... 넌 내 수명을 모르지? 우리 정령은 급에 따라 수명이 다른데, 보통 하급 정령은 평균 50년 정도, 중급은 100년, 상급은 500년, 최상급은 1000년 정도 살지. 그리고 나 같은 정령왕들은 만년 정도 살다 소멸한다. 나는 이미 5000년 가까이 살아왔지." "허거걱... 그렇게나 오래?" 내 입이 떠억 벌어지자 그가 어깨를 살짝 으쓱해 보였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엄청 오랜 세월이지만... 나에게는 별 감흥이 없는 시간이다.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녀가 너무 간절히 부탁을 했기에 나는 내 수명을 1000년 단축시키는 셈 치고 그 부탁을 들어줬지. 하기사, 그녀가 내 기운 절반을 달라고 했다 하더라도 난 들어줬을 거다." '헤에... 생각 외로 꽤 사랑에 목숨 거는 타입이었네...' 내가 피식 피식 웃자 그가 날 찌릿 하고 노려봤다. "뭘 웃냐? 난 단지 그녀가 마법 실력이 너무 늦게 늘어나는 것을 답답하게 여겨 내 기운의 힘을 빌리려는 줄 알았다. 내 기운이야 마법사들이 보면 물의 기운을 띈 마나였으니, 내 기운을 받으면 그녀의 마나가 증포 될 테고, 그럼 8클레스의 마법사가 되는 것도 가능했을 테니까. 아아, 넌 또 마나가 뭔지 모르지? 그건 나중에 설명해주마." 거기까지 말한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깊은 한숨도 한번 내쉬고, 잘 넘겨진 머리도 괜히 한번 쓸어 넘기고, 시선도 소파를 향했다, 탁자를 향했다 하는 걸 보니 이제부터 말하려는 건 좀 말하기 어려운 내용인 듯 했다.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가 그녀에게 내 기운을 넘겨주고 갑작스럽게 기운을 잃은 몸을 회복하기 위하여 정령계로 돌아가 있는데, 그녀의 주변에서 마족의 기운이 느껴졌다. 너무 놀란 나는 채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녀 곁으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그녀를 만날 수가 없었지. 마족을 불러내어 계약을 맺는 동안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으려고 집 주위에 강력한 방어 결계를 쳐 놓았던 거야. 그녀 혼자만의 힘이었으면 비록 다 회복 못한 나라도 어떻게 해서든 뚫고 들어갔겠지만, 마족의 힘까지 합쳐 졌던 터라 나는 그녀 곁으로 갈 수가 없었다." 마족이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너무 분위기가 심각했기에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 거렸다. "하는 수 없이 정령계로 돌아와 그녀 주변에서 마족의 기가 사라지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나는 사라지자마자 그녀에게 돌아갔지. 가서 왜 마족과 계약을 하는 그런 위험한 짓을 했냐고 따졌지. 물론 그녀를 위해서 하는 소리였어.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는 내게 너무나 냉정하게 날 몰아 붙였고, 그 모습에 화가 난 나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정령계로 돌아가 버렸다. 그녀와 계약으로 묶인 관계라 그녀가 부르면 가야 하겠지만, 그 전에는 절대 돌아가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말이다." 거기까지 말한 그는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폼을 보아하니 그때 그랬던걸 너무나 후회하는 모양이었다. "그녀 또한 날 부르지 않았지. 10개월이 넘을 동안 단 한번도 부르지 않았어. 그녀에게 소환되어 계약을 맺은 뒤로 매일 매일 같이 지냈던 우리가 처음으로 오랜 시간동안 떨어져 있었던 거야. 그리고.... 10개월이 지난 뒤 그녀가 처음으로 날 불러지.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달려갔을 때 본 것은 마족에게 잡혀 마악 마계로 끌려가는 그녀의 시체와, 이 집에 덩그라니 남아 있는 너, 그리고 네 옆에 고이 접혀진 그녀의 편지 뿐이었다. 난 널 보는 그 순간 알 수 있었지. 모를 수도 없었을 거다. 네 몸에서는 내 기운이 강렬하게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네가 그녀가 말한 나와 그녀의 아이라는 걸 말이야. 아마 그녀는 내가 후손을 생산할 수 없자, 나의 기운을 마족의 능력으로 아기의 씨로 만들어 그녀의 몸 속에 받아 들인 듯 해." '그러니까... 저 남자의 기운이 정자가 되어서 내 친모의 난자와 만나 내가 만들어졌단 소리지? 에혀... 친부 맞네... 그럼 내가 저 남자를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나...?' 내가 속으로 그렇게 고심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널 본 순간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래서 그 즉시 널 한번 안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차원의 문을 열어 다른 세계로 보내 버렸지. 네 몸이 차원을 넘나들기에는 약한 것도 생각지 않았고, 어떤 세계로 떨어지던, 혹 잘못 되어 차원의 틈에 떨어져 죽어버린다 해도 아무런 상관 없었다." 너무나 냉정한 말에 나는 입이 저절로 떠억 벌어지는 걸 느꼈다. '지, 진짜 친부 맞아? 절대로 아버지라 안 부를 거다!!' "그리고, 그녀가 내게 남긴 편지를 보지도 않고 그대로 그녀와 내가 살던 집을 결계로 단단히 막아, 내 영역인 이 바다속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혔다. 어떠한 이의 손도 닿지 않게 말이야." 제 2화 믿을 수 없는 이야기 (5) "그리고, 그녀가 내게 남긴 편지를 보지도 않고 그대로 그녀와 내가 살던 집을 결계로 단단히 막아, 내 영역인 이 바다속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혔다. 어떠한 이의 손도 닿지 않게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그는 입을 다물었다. 아마 자기가 할 말은 다 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기사, 처음 말을 시작한 이유가 그 남자가 내 친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그리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 물어볼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는 뜻 같았다. '뭐야... 제일 중요한 건 안 가르쳐 놓고선...' 그가 내 친부라는 것 보다 가장 중요한 것... "그런데, 그렇게 보내 버렸으면서 왜 절 다시 데려 오신 거예요?" '한국에서 잘 살고 있었는데....' 물론 내가 실수로 생겨서 버려진게 아니란 걸 알아서 기분은 좋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출생에 대한 호기심에 불과한 일이었을 뿐, 나는 내 가족이 있고, 있어야 할 곳은 한국이라고 여기고 있었으므로 내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서 '여기서 아부지랑 살겠습다!' 라고 할 마음은 요만큼도 없었다. 내가 없더라도 저 성격 드러운 남자는 잘만 살것 같은데 일부러 옆에 있겠다고 힐 필요도 없을것 같고 말이다. 그래서 이제 이야기도 다 들었으니 기회를 봐서 '돌려보내 주세요~' 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내 질문에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기에 나는 부탁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네 친모가 원했으니까." "예?" "귀 먹었냐? 네 친모가 원했다니까." "어, 언제요? 제 친모는... 에.. 그러니까..." 차마 나 낳고 죽은 다음에 시체 마저 마족이 가지고 갔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말끝을 흐렸지만, 그 정도면 충분히 알아 들을 수 있었기에 그 남자는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면서 입을 열었다. "물론 내가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했지. 젠장... 그 마족이 어떤 놈인지는 알아 놨어야 했는데... 어쨌든, 네 친모는 내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미리 미리 준비를 해 놓은 거지. 네 옆에 놓아둔 편지를 보니 널 보살펴 달라고 하더구나. 그래서 널 데려왔다. 그녀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하...." '이거 이거....' 왠지 단호한 그의 말에서 불안함이 느껴졌다. "저어... 저는 그 곳에서 잘 살고 있었거든요? 양부모님도 아주 좋은 분들 만나고, 동생도 생겼고요. 양부모님이 절 친자식 처럼 대해주고 계세요. 그러니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으시구요, 아마 친모께서도 하늘 나라에서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니 이만... 돌려보내 주셨으면... 엄마 아빠가 무지 걱정하실..." 쾅~!! 나는 움찔 놀라서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 남자가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날 바라보며 소파용 탁자를 주먹으로 강하게 내려 친 거였다. 물론 탁자는 멀쩡 했지만, 그 소리와 그 남자가 뿜어내는 분위기는 날 쫄게 만들기 충분 했다. "한가지 말해두겠는데, 네가 엄마라고 부를 존재는 이 세상에서 단 한명 뿐이다. 이미 죽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엄마라고 부르는 건 내가 용납 못해, 알겠냐?" "하, 하지만, 그 분들은..." 쾅! "알.겠.냐.고.물.었.다." "예에..." '흑흑흑... 내가 언제 이리 비굴하게 되었누....' 역시 법보다는 주먹이 가깝다는 말은 진리였다. 억지로 대답하긴 했지만, 그게 마음에 든 듯 그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끼자 나는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저 이만 가봤으면 좋겠는데요... 아무래도 너무 오래 여기 있어서리..." 그러자 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가며 날 바라 보았다. "어딜 가?" "예? 저, 저기... 집에요..." "내 말을 뭘로 들은 거냐? 이제부터 여기가 네 집이야." "예에? 하, 하지만..." 그런 황당 무개한 말에 내가 막 반박을 하려고 하려는데 그가 내 말을 가로채며 자신의 말만 했다. "아까 말했다시피, 난 네 엄마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내가 널 돌봐줄 것이다." '이봐 아자씨, 당신과 사느니 차라리 소녀 가장이 되겠다.' "저기요, 정말 그러실 필요 없다니까요? 저 거기서 잘 살고 있었다고요. 제가 거기 있는게 편해요." 나는 정말 간절한 애원조로 말했다. 그러나 이 남정네는 내 말을 단지 콧방귀만큼 취급했다. "흥, 내 아들이 그런 하찮은 인간들의 보살핌을 받는다니... 절대 용납할 수..." 그러나 이번에는 물의 정령왕이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그의 말에 분노한 내가 벌떡 일어나 두 손으로 탁자를 내려쳤기 때문이었다. 물론... 탁자는 멀쩡하고 내 손만 아팠다. "정말, 이 영감탱이가 누구 보고 하찮대? 그 분들이 내 부모님이라고 했잖아요!! 날 친딸처럼 키워주신 분들이라고요!! 당신이 내 친부라면, 어떻게 가족 같은 사람이랑 갈라놔요? 난 돌아 갈 거야!! 돌아 갈 거라고!!" 내 분노에 찬 외침에 정령왕은 잠시 움찔 했지만, 그건 정말 잠시일뿐, 다시 남을 깔보는 듯한 그러한 분위기의 무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입 아프게 하지 마라. 넌 여기서 사는 거야!" 전 같으면 그의 차가운 말투에 움찔 해서 주눅이 들었겠지만, 지금은 너무 분노에 찬 나머지 나는 바락 바락 대들었다. "누구 맘대로! 난 돌아갈 거야." 그러자 이 남정네가 진하게 비웃는 미소를 띄우며 날 바라보았다. "킥, 어디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가 봐라. 마법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령왕도 아닌 네가 차원의 문을 열수나 있을까?" "이... 이 영감탱이가!!" "누구보고 영감탱이라는 거냐?" "5000년이나 살았다면서요? 그럼 영감하고도 한참 영감이지. 빨랑 나 보내줘요!! 난 절대로 여기서 안 살아. 납치범으로 고소해 버릴까부다!!" "납치범? 누가 납치범이라는 거냐? 내 아들 내가 데려 온걸 누가 뭐라고 그래?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감히 나 물의 정령왕 엘라임에게 누가 뭐라 할 수 있다는 거지?" "누가 영감탱이 아들이라는 거예요, 누가? 난 여자라구요. 여.자! 딸! daughter!" 나는 한국에 살때 남자 같다는 말에 조금 민감했다. 내가 가슴이 좀 적고, 여자 치고 큰 키에 머리도 항상 커트 머리를 하고 다녀 내가 봐도 남자처럼 보이긴 했지만, 나는 유난히 남자 같다는 말에 크게 반응하고는 했다. 하지만 솔직히 스스로 생각해 볼때, 내가 그렇게 보이던 말던, 그런 소리 듣던, 말던 크게 상관은 없었다. 단지 날 부모님의 양녀라는 증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혼혈이라는 말에 직접적으로 화를 낼 수 없다보니, 그 대신 남자 같다는 말에 대신 민감하게 굴곤 했는데, 그게 어느새 버릇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지금도 아들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벌컥 한 거였다. "하, 네가 어딜 봐서 여자라는 거냐. 네가 여자라는 증거 있어?" "이... 이 영감탱이가!! 척 보면 몰라요? 목에는 아담즈 애플이 없잖아요. 그리고, 비록 너무 작아서 안 보이지만 분명히 나는 여기에... 어라, 어라라?" 너무 분노한 나머지 내 가슴을 꾹 누르며 말을 하던 나는 평소와는 다른 좀 이상한 감촉에 말을 멈추고 가슴을 더듬어 보았다. "어라... 어라라??" 그러자 그 모습에 엘라임이 손등으로 머리를 받치면서 무지 한심하다는 어투로 물었다. "너... 지금 뭐하냐?" 그의 말에 지금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나는 얼굴이 확확 타올랐다. "뭐, 뭘 보는 거예요? 잠시만 기다려요!!" 나는 후다닥 튀어서 맨 처음 내가 누워 있던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 곳에는 맨 처음 내가 봤던 것 처럼 초록색 정령들이 모여서 허공에서 떠돌다가 내가 뛰어 들어오자 동그래진 눈으로 나에게 모여 들었다. [아, 우리를 볼 수 있는 인간이다!!] [인간이 다시 왔어!!] [어떻게 된 거야, 인간?] "시, 시끄러!! 너희들도 다 나가!!" 그러자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 정령들이 삐졌는지 볼을 퉁퉁 불렸다. [싫.다!] [안 나갈 거야!!] [우리가 왜 나가야 하는데?] [맞아, 맞아.] [우린 여기 있을 거야!] "너희들... 그럼 저 밖에 있는 영감탱이 불러 온다? 물의 정령왕이라고 하는..." 그러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령들은 헛바람을 삼키더니 쏜살같이 방에서 사라졌다. [히익!!] [알았어. 나간다구!] [나가면 되잖아!] [정령왕님은 불러오지 마!] 그러나 단 한명, 안 나간 정령이 있었으니... 아까 내가 욕실에 들어갈 때부터 불려와 계속 내 머리 위에 동동 떠 있는 빛의 하급 정령 니트라스 였다. 이 애는 아까 정령왕이 불러내어 나에게 붙여준 후로 계속 날 따라다니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날 따라와 방으로 들어온 거였다. "너도 보면 안돼?" 비록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아서 괜찮을 것 같으면서도 조금은 불안해서 다짐을 받으려 하자 그 빛덩어리가 알겠다는 뜻인지 살짝 아래 위로 움직이더니 위로 날아올라가 천장에 찰싹 붙었다. 그제야 나는 안심하고 후다다닥 윗 티를 걷어 올렸다. 비록 내가 수영장에서 납치(?)를 당한거긴 하지만, 이 곳에서 눈을 떴을 때 환자복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엄마가 날 데려다 놓은 줄 알고, 엄마가 갈아 입혔겠거니.. 하고 아무렇지 않게 있었는데, 지금은 이 옷을 입고 있는게 무지하게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그 보다도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비록 A 컵이라고 하나 내가 여자라는 걸 증명해주는 가슴이 안 느껴지고 그냥 허허 벌판 같이만 느껴지는 감촉이었다. 그래서 후다닥 티의 앞섭을 걷어보니... 이게 왠일인지... 내 가슴이 남자처럼 평평하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호, 혹시...." 너무 놀란 나는 말까지 더듬으며 부들 부들 떨리는 손으로 바지를 풀러 보았다. 그러나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고추는 달려 있지 않았다. "후우... 다행이다."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정령왕이 들어왔다. "뭐가 다행이라는 거냐?" "꺄아아악~~~" "우악!!" 반사적으로 내지른 내 비명에 엘라임 조차 놀라서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뭐, 뭐냐?" "뭐냐니요, 뭐냐니요? 숙녀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오다니!! 이런 실례가 어디 있냐구욧!!" 나는 재빨리 바지를 추스리고 티의 윗섭도 내리면서 그에게 쏘아 붙였다. 그러자 엘라임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누가 숙녀라는 거야? 아직도 네가 여자가 아니라는 걸 모르겠냐?" "내가 여자가 아니면 남자인가요? 나 남자 아니예요! 확인(?)도 했다고요!!" "물론 남자라고 할 수도 없지. 흠...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길래 성이 있을 줄 알았더니만... 하지만, 너도 보다시피 넌 성이 없어. 무성이라고 해야 할지, 중성이라고 해야 할지... 내 기운이 강해서 그런 건가?" 손가락으로 턱을 쓸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엘라임의 말에 나는 입이 떠억 벌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예요? 제가 중성이라니요? 저 여자예요." "너 여자 아니야. 정령이 여자 남자 나뉘어 있는 거 봤어? 정령에게는 성이 없지. 그런고로 내 아들인 너도 성이 없는... 건가? 허참, 너 같은 종족은 이 전에도 없고 이 후에도 없어서 잘 모르겠군. 하지만 보통 성이 없으면 남자로 지칭되지 않나?" 엘라임이 고개를 갸웃 거리며 내뱉은 말이 내 머리 속에서 뱅뱅 도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여자가 아니라니... 남자도 아니라니... 차라리... 남자로 변하는게 났지... 이게 도대체 뭔 일이래...' 머릿속이 계속 빙글 빙글 돌아가자 시야까지 뱅뱅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나는 이 세상에 둘도 아닌 단 하나밖에 없는,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자라는 것. 1/4은 엘프의 피가, 1/4은 인간의 피가, 1/2 은 정령의 기운이... 거기에 마족의 기운이 쬐께 보태진게 나.... '그러면... 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제 3화 기묘한 동거(?) 생활(1) 나중에 생각해보면 계획적이라고 해도 모두 납득할 만큼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엘라임은 내가 충격 받은 틈을 타서 지 멋대로 내가 이 곳에 사는 것으로 정해버리고 - 물론 그 전부터 난 이 곳에 살아야 한다고 우기긴 했지만...- 그냥 사라져 버렸다. 나 혼자만 달랑 집에 남겨놓고 사라진 것이다. "이래놓고 자기가 날 돌봐준다느니 어쩐다느니 떠들어대다니.... 돌봐주긴 무슨 개뿔이 돌봐줘?"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뒤 - 저 쬐그만 정령들은 빼고 - 집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나서 방에 있던 침대를 걷어차며 투덜 거렸다. 그러나, 이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침대는 멀쩡하고 오히려 내 발만 아파 나는 한동안 아픔을 참느라 낑낑 대야만 했다. "도대체 이런 집에서 어떻게 사느냐구우~!!" 바닥에 털푸덕 주저 앉아 크게 외쳐봤지만, 돌아오는 건 허공에 떠다니는 정령들의 재미있다는 소근거림 뿐이었다. [저봐, 저봐. 인간이 화났다.] [저게 화난 거야?] [소리치잖아.] [우와, 신기해.] [이봐 인간, 정말 화 난거야?] '동물원 원숭이가... 나와 같은 심정일까?' "시끄러. 보면 몰라? 화 난거야." [거봐, 화 났다니까.] [저게 화가 난 거구나.] [그래, 화가 난거라구.] [인간이 화가 났대.] 예전에 어디 만화에서 본 이야기 같은데, 사람이 우울해 하고 싶어도 분위기가 따라주지 않으면 하지 못한다는 걸 읽은 기억이 난다. 지금 내 상황이 바로 그짝이었다. 이왕 이렇게 처량히 바닥에 털푸덕 주저 앉아 있는거, 절망과 비애감 어린 주인공의 분위기를 만들어 이 상황을 곱씹어 보고 싶었지만, 저 신기해 하는 정령들의 눈초리가 잘 보이고, 흥미가 가득 담긴 말소리가 잘 들리자 나는 괜히 허탈해지는 것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냥 자리 털고 일어나면서 괜히 정령들에게 말을 걸었다. "야야, 그만좀 인간이라고 해라. 듣는 인간 기분 나쁘시다. 내 이름은 해인이야. 해.인. 얼마나 듣기 좋고 부르기 좋은 이름이니? 앞으로 해인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 [해인? 이름이 해인이야?] [해인, 해인, 해인...] [해인이래, 해인.] "아, 그만 좀 불러 대." 그러자 정령들이 꺄르르 웃으면서 날아가는가 싶더니 다시 내 앞으로 내려와 빙빙 돌며 입을 열었다. [우린 실프야. 인간들은 우리를 실프라고 불러.] 그렇게 자신들을 소개한 건 초록 요정들이었다. "실프... 너네가 바람의 정령이라고 했지. 바람의 정령은 실프군." 내가 몇번이고 실프라는 이름을 되새기자 이번에는 파란 색의 정령이 날아와 내 앞에서 뱅뱅 돌았다. [우리는 운디네, 운디네야.] "응, 응... 운디네.. 운디네... 물의 정령은 운디네... 그리고, 얘는 니트라스." 내가 여전히 내 머리 위에 동동 떠 있는 정령을 보고 말하자 니트라스가 맞다는 듯이 한바퀴 뱅 돌았다. 얘는 엘라임이 사라졌는데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이 내 곁에 남아 있었다. 아마도 엘라임이 특별히 신경 써 준듯 했지만, 조금도 고맙게 느껴지지 않았다. "음음, 그래...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잘 부탁한다." 그러자 정령들이 허공으로 흩어지며 재잘댔다. [꺄르르르~~ 잘 부탁한대!] [부탁, 부탁~!!] "하여간... 생긴 것도 애인데, 하는 행동도 애이구만..." 나는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침실을 나섰다. 어떻게 해서든 한국으로 돌아갈 결심이었지만,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이 집에서 살아야 하니까 집안이라도 둘러 볼 생각이었다. 내가 나온 곳, 즉 침실을 기준으로 침실 바로 곁에 붙어 있는 곳이 욕실, 그리고 오른쪽에 문 대신 입구를 천으로 반쯤 가려놓은 곳이 부엌, 부엌 맞은 편에 있는 방은 서재였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사람이 오랫동안 살지 않아 썰렁한 기운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집안은 마치 누군가가 청소한 것 처럼 깨끗했다. 엘라임이 이 곳을 드나들었긴 했겠지만, 그 정령왕의 성격으로 봐서는 절대로 그가 비와 걸레를 들고 청소를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흐음... 도대체 누가 청소를 한 것일까? 아, 혹시 이 애들 부려먹은 건가? 음음, 그럴 수도 있겠군." 고개를 갸웃 대는 내 눈에 꺄르르 대며 따라다니는 정령들이 들어오자 그제야 이해가 갔다. 서재에는 넓은 책장과 안락해보이는 의자, 그리고 가운데에 푹신한 소파가 놓여 있고, 입구가 있는 벽과 그 맞은 편 벽을 제외한 양 옆 벽에는 벽을 다 가리며 땅에서 천장까지 닿는 책장이 있었고, 그 곳에는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런데 내가 한국에서 흔히 보던 그런 가볍고, 얋은 책들이 아닌, 겉표지는 가죽으로 덮여 아주 두툼하고, 책 하나 하나가 백과사전 만큼이나 크고 무거운 책들이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책 아무거나 하나를 뽑아 그 무게에 감탄하며 펼쳐보니, 이 곳이 한국이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듯 처음 보는 꼬부랑 글씨가 쓰여 있었다. "쳇... 역시나..." 엘라임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건 느낄 수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엘라임이 사기치는 것이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옛날 형태의 책에 처음 보는 글자가 쓰여있는 순간 그러한 작은 바램까지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에 착잡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쩌비... 글이라도 내가 읽을 수 있는 거였으면 조금 나았을텐데..." 나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그 곳에서 나와 맞은편에 있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한국에서 보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나무로 만들어진 싱크대가 있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분명 개수대 처럼 보이는 곳이 있는데 어디에서도 물을 틀 수 있는 수도꼭지는 보이지 않는 거였다. "어라? 그럼 물은 어떻게... 아아, 이 곳은 한국이 아니었지? 아마 물을 그냥 퍼다... 가 아니라 정령을 이용 했겠군. 하기야 물의 정령왕이 옆에 있었을 텐데 물 떠올 필요가 있으려나?" 싱크대 위에 만들어져 있는 그릇을 놓는 찬장에는 몇개 없는 그릇들이 차곡 차곡 엎어져 있었다. 오랫 동안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부엌은 물기가 하나도 없이 건조했지만, 집안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먼지 없이 깨끗했다. "거참... 청소를 했으니 먼지가 없는 걸텐데... 그럼 습기라도 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싱크대 곁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식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그 곁에 있는 의자는 두개였다. 식탁 위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통이 두개가 놓여 있었는데 열어보니 하나에는 후추 가루가 들어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소금이 들어 있었다. "헤에... 양념 통이었군." 향긋한 후추 가루를 음미하며 중얼거리자 갑자기 배 속에서 냇물이 흘러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꼬르르륵~~ 인간의 몸이란 참 웃긴 것이, 그 동안은 정신이 없어서 배고픈것도 몰랐는데, 후추 냄새를 맡으니 그제야 꼬르륵 거리더니 너무 배가 고파오는 것이었다. "아... 배고프다..." 그제야 생각 난 것이지만, 나는 이 곳에 온 뒤로 정령들이 준 몇 모금의 물만 마셨을 뿐,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지금까지 있었던 것이다. 점점 배가 고파지던 배는 너무 고프다 못해 급기야는 아프기 까지 하자 나는 얼른 몸을 돌려 싱크대 이곳 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비록 오랫동안...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자마자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었으니 거의 17년이나 비어 있었으니 아무것도 없을지 모르지만, 양념통에 후추와 소금이 있는 거 보니 혹시 다른 것이 더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말 아쉽게도 싱크대 밑에는 기름과 향료 같은 양념통 몇개는 있었지만, 정작 음식을 할 수 있는 주재료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으음... 정말 아무 것도 없나?" 실망한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부엌 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밀가루 같은 것을 싱크대 밑이 아닌 다른 곳에 둘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가정에서 쌀을 싱크대 밑이 아닌 쌀통에 따로 보관하듯이 말이다. 역시나... 이 집에서도 그랬는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게 싱크대에 가려 있는 작은 쪽문을 발견했다. 너무 작아서 그 안으로 들어가려면 허리를 구부려야 하는 문이었는데, 그 곳을 보자마자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는 얼른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랬더니, 오랜 시간 동안 식품을 보관하는 곳이 으례 그렇듯 약간 퀴퀴한 냄새가 제일 먼저 나를 반겼다. "오옷, 역시 이 곳이 식품 창고였어." 그러나 정말 아쉽게도 약 5평쯤 되는 그 식품 창고는 텅 비어 있는 것이었다. "으윽.. 이러다간 한국에 돌아가기도 전에 굶어 죽겠다. 부디 뭐라도 있어야 할텐데..." 부디 햄 한조각이라도 발견하길 간절히 기원하면서 창고 안을 샅샅이 뒤지자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창고 맨 구석에서 기름 종이에 쌓인, 내 주먹만한 뭔지 모를 고기 한 덩어리와, 입구 근처에 있는 큰 단지에서 간신히 단지 밑바닥을 가리는 정도의 밀가루를 찾아 낼 수 있었다. "아,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고기는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색이 검은 곳이 하나 없는 붉은 색인 게 상한 것 처럼 보이지는 않았고, 밀가루에도 곰팡이가 핀 듯한 기색은 없었다. "후우... 다행이긴 다행이네. 설마 이 곳의 고기는 상하면 빨갛게 변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밀가루와 고기 한덩어리를 챙겨 든 나는 이것으로 무엇을 만들어 먹을지 고민하면서 창고에서 나왔다. "으음... 고기는 그냥 구워 먹을까? 밀가루는... 팬케익이라도 만들어 먹어야지." 그렇게 결심한 나는 커다란 그릇을 꺼내 정령들과 힘을 합하여 밀가루를 반죽했다. 비록 계란, 베이킹 파우더, 우유, 버터는 없어서 넣지 못했지만, 지금 내 처지에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에 기냥 없으면 없는대로 반죽을 해야 했다. 그런걸 안 넣어도 팬 케익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으윽... 부디 먹을만 해야 할텐데..." 그리고 고기는 식칼을 찾아 내서 적당한 크기로 자른 다음 소금과 후추 가루를 뿌리는 걸로 양념을 끝내고 후라이팬을 찾아 낸 다음 기름을 뿌렸다. "자, 그 다음은..." 이제 잠시 후면 뭔가를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과 기쁨에 차 있던 나는 부엌을 돌아보다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한 가지, 아주 중요한 것을 생각 못했던 것이었다. 물론 내가 살던 한국에서라면 모든 부엌에 당연히 있었겠지만, 여기는 내가 살던 한국이 아니었다. 그걸 다시한번 상기하며 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불이 없어..." 제 3화 기묘한 동거(?) 생활(2) 정말 허망한 일이었다. 솔직히 내 잘못이긴 했다. 부엌을 샅샅이 살펴 봤으면서도 가스렌지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으니.... "저기, 혹시 불 낼수 있는 정령?"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을 꺼내봤지만, 내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정령들은 모두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댔다. "에휴... 역시나... 하기야, 물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이니 당연한 건지도... 얘, 혹시 너라도 안될까?" 내 머리위에 동동 떠 있는 니트라스를 바라보며 묻자 그 애도 불가능 하다는 듯 좌우로 동동 떠다녔다. "안돼?" 그러자 이번에는 맞다는 듯 위 아래로 떠다닌다. "히유우우우~~" 나는 절망적인 눈으로 탁자 위에 놓여진, 이제 불에 익혀져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재료들을 바라보았다. "히유우우우~~" 꼬르르륵~~ 다시 한번 한숨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뱃속에서 요동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제는 곧 뭔가를 먹을 수 있다는 기대에 배고픔이 조금 가시는 듯 했는데, 이제는 먹을 수 없다는 절망감이 몰려들자 그와 동시에 눈이 빙글 빙글 돌 정도로 엄청난 배고픔이 몰려왔다. 꼬르르륵~~ 정령들은 내가 이리 괴로운데도 그게 웃긴지 꺄르르 대고 웃고 있었다. "으윽... 이것들아, 남이 괴로운 것이 그리 즐겁냐?" 나는 다시 한번 웃어대는 녀석들을 노려봐준 다음, 고개를 돌려 부엌을 나섰다. 탁자 위에서 자신들을 익혀 달라고 간절히 외치는 녀석들(?) 을 외면하자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 곳에 있어봤자 좋은 방도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기에 날 잡아 당기는 그 외침(?)을 뿌리치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다고 먹는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 사람을 찾기 위해 현관문을 열었을때 집에 딸려 있는 자그마한 뜰에 나무가 하나 말라 죽어 있던 걸 본 것이 기억 났던 것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라는 말이 있듯이, 가스렌지가 없으면 원시적인 방법으로라도 불을 만들 생각이었다. "젠장, 젠장, 젠자아앙~~ 뭐? 돌봐줘? 웃기고 있네. 지금 배고파 돌아가시게 생겼는데... 한번만 더 돌봐준다고 했다가는 이번에는 익사 시키겠다." 현관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가자 역시나 집을 둘러싼 바다속 풍경이 보이고 그 속에서 노닐고 있는 물의 정령 운디네들이 보였다. 바다 속에서 노니는 운디네들은 실프들이 우르르 내 주위에 몰려 들며 재잘거리자 신기하다는 듯 바라봤지만, 집 주위에 쳐진 결계 때문인지 내 곁으로 오지는 못하고 마치 유리창으로 안을 들여다 보듯 바라볼 뿐이었다. 그 정령들에게 인사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너무 배가 고파 그럴 기운이 없었기에 그냥 히죽 웃어주기만 하고 비칠 비칠거리며 마당으로 내려갔다. 역시 내 기억대로 집을 둘러 친 울타리 곁에 빼짝 말라있는 나무가 간신히 라는 말에 어울리는 폼으로 서 있었고, 주위에는 잘 말려진 풀들이 있었다. "으음... 부디 잘 되어야 할텐데..." 그 나무에서 내 키가 닿는 곳에 있는 나뭇가지 몇개를 꺾고, 근처에 있던 마른 풀들을 긁어 모아 놓은 뒤 그 위에 굵은 나뭇 가지를 내려 놓고 단단히 고정 시켰다. 그리고 그 위에 조금 가는 나뭇 가지를 올려 놓고 열심히 비볐다. "붙어라, 붙어라..." 정령들은 내가 뭘 하든지 신기한지 이번에도 옹기종기 내 주변으로 몰려들어 조용히 내가 하는 폼을 말똥말똥 지켜보고 있다가 내가 계속 나뭇가지만 비벼대니까 이상한지 저희들끼리 소곤대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몰라.] [난 이런 거 처음 봐.] [나도 나도..] [재미있는 놀이가 아닐까?] [그런가?] '이것들아... 너희 눈에는 내가 노는 것으로 보이냐?' 라고, 그들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나뭇가지를 비벼대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으므로 입을 꾸욱 다문 채 계속 작업에만 열중했다. 그런데, 이놈의 나무가 빼짝 마른 주제에 뭘 그렇게도 뻐팅기는지 꽤 뜨거워 진 것 같은데도 연기가 안 오르고 불이 안 붙는 거였다. 손바닥은 무지 뜨거워지고 그 열기 덕분에 이마에서도 땀이 송글 송글 맺히기 시작했는데도 나무는 요지부동 탈 생각을 안 하는 거였다. 결국 나는 이 방법으로 불을 얻는 걸 포기하고는 나뭇가지를 던져 버렸다. "에잇, 몰라, 몰라!!" 손이 시뻘개지고 화끈화끈 거렸지만, 그렇게 노력해서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과, 이제는 음식을 못 먹게 되었다는 사실이 합쳐지자 너무 서러워짐과 동시에 눈에서 눈물이 마구 솟아났다. "훌쩍, 훌쩍... 으허어어엉~~~ 엄마... 잉잉잉... 해인이 여기서 굶어 죽어요... 나쁜 영감탱이를 만나서..." 내가 땅에 털푸덕 주저 앉은 채 이상한(?)짓을 하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자 정령들이 이상한지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왜 울어?] [그 놀이가 슬픈 거였나봐.] [그런가?] [그러니까 놀다가 우는 거 아니야?] [인간들은 이상하네... 놀다가 울고...] "흐어어엉... 불쌍한 내신세야.... 흑흑흑... 왜 이리 되었누... 흑흑흑..." 나는 너무 내 신세의 처량함에 푹 빠져 정령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네 신세가 왜 불쌍한데?"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내 뒤에 엘라임이 언제 왔는지 떡 하니 버티고 서서는 날 내려다 보고 있었다. "훌쩍... 뭐, 뭐예요? 흐끅... " "그러는 넌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청승맞게시리 왜 앉아서 질질 짜구 있어? 그럴 거면 어디 가서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마라." "훌쩍, 이, 이게.. 흐끅, 누구 때문인데.. 흑끅. 후아아아... 당신 때문에 그러잖아요." 자꾸 딸꾹질이 나오는 걸 간신히 멈추고 말하자, 엘라임이 황당하다는 듯 물어왔다. "아니, 내가 뭘 어쨌길래?" "돌봐준다는 사람이 그렇게 사라져요? 난 배고파 죽겠다구요. 솔직히 말해봐요. 돌봐준다고 해놓고 나 아사 시키려고 궁리하고 있죠?" 내가 이렇게 톡 쏘아 붙이면 금방 화난 어조로 맞받아쳤던 엘라임이 의아하게도 지금은 맞받아치는 대신 어리둥절 한 얼굴로 혼자 중얼중얼 거리기만 했다. "배가 고프다고? 흐음... 실체가 있어서 그런 건가? 그래도 내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 배고픔 같은 건 못 느낄 줄 알았는데... 역시 실체가 있으면 배가 고픈 것도 느끼나 보군." "혼자 뭘 중얼대는 거에요?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이왕 온거 불이나 붙여 줘요. 이 곳에는 도대체 불을 어떻게 붙이는지 모르겠다니까." 그러자 엘라임이 혼자 중얼대다 말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불?" "예, 활활 타오른 불 말이예요. 지금 불이 없어서 음식을 못 만들고 있단 말이예요. 직접 요리해줄 거는 아니죠? 그러니 불이라도 만들어... 우아악~~" 쨍알쨍알, 마치 바가지라도 긁는 것처럼 그에게 투덜대자, 그게 또 듣기 싫었는지 엘라임이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나에게 불덩어리를 확 던져 버렸다. "시끄러. 애처럼 쫑알 대기는..." 다행이도 그 불 덩어리가 살아있는 것 처럼 나에게 곧장 날아오다가 옆으로 샤삭 비켜서 나에게 닿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런 그 공격에 나는 너무 놀랐다. "무, 무슨 짓이예요? 이제는 굶주리게 하는 것도 모자라 화상을 입힐 작정이예요?" 엘라임에게 화난 어조로 소리를 빽 지르자 엘라임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시끄러. 네가 불 달라매? 그래서 줬더니 뭔 잔소리가 그리 많아!!" "누가 나에게 던지래요? 불을 붙여 달랬지!! 하마터면 맞을 뻔 했잖아요." "짜식이 겁이 많기는... 쯧쯧, 도대체 넌 누굴 닮은 거냐? 불의 하급 정령을 보고 놀래기는... 에잉... 맘에 안 들어." 그의 말에 한마디 뭐라 해주고 싶었지만, 그 보다 먼저 내 옆으로 사삭 비켜섰던 불의 하급 정령이라는 불덩어리가 나에게 인사를 하려는지 내 코 앞으로 날아 올라 나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자세히 바라보니, 그건 그냥 불 덩어리가 아니라 새의 모습을 하고 있는 불덩어리였다. "새?" 그러자 그 불의 하급 정령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비록 부리였지만, 그렇게 보였다. [카사라고 해요.] 같은 하급 정령인데도 불구하고 운디네나 실프보다 조금 성숙하고 침착한 목소리였다. "아, 응.. 나는 해인이라고 해." '헐... 다 같은 하급 정령이라도 이렇게 다르구나...'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나에게 멀리 떨어져서 이쪽만 힐끔 힐끔 보고 있는 어린애 같은 운디네와 실프들을 바라보며 피식 실소를 흘렸다. 제 3화 기묘한 동거(?) 생활(3) '헐... 다 같은 하급 정령이라도 이렇게 다르구나...'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나에게 멀리 떨어져서 이쪽만 힐끔 힐끔 보고 있는 어린애 같은 운디네와 실프들을 바라보며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렇게 내가 아까의 서러움도 잠시 잊고 딴 생각을 하고 있을때 엘라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그럼 내가 있을 필요는 없지?" 또 어디론가 사라지려는 듯한 말투에 나는 황급히 외쳤다. "잠깐만요!!" 그러자 엘라임의 인상이 팍 찌그러지며 정말 귀찮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낸 채 나를 바라보았다. "또 뭐냐?" "먹을 게 없어요." "뭐?" 황당하다는 듯이 날 바라보는 엘라임 눈초리에 난 당당하게 말했다. "먹을 게 없다구요. 식량 창고 뒤져서 간신히 조금 찾아낸 거 지금 먹으면 이제 먹을 게 없다구요. 설마 굶어 죽으라고 하지는 않겠죠? 그러니까 조금 있다가 먹을 것 좀 가져다 주세요, 아셨죠?" "너, 너..." 마치 시종 부리는 듯한 - 물론 일부러 그랬다. 내가 그 동안 배고파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동안 저 정령왕은 멀쩡히 잘 있었을 테니까 일종의 보복이라고나 할까? - 나의 말투에 엘라임이 분노에 차서 온 몸을 부들 부들 떨며 말도 제대로 못 꺼내는 사이 나는 재빨리 집 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이제 곧 터져 나올 그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그가 날 뒤쫓아 와 뭐라 할라치면,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던데..' 란 말로 맞받아 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가 카사와 니트라스를 데리고 부엌으로 와서 재료를 다 챙길 때까지 이상하게도 엘라임이 문을 박차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기색이 없었다. 의아해서 후라이팬과 재료를 챙기고 슬그머니 집 밖으로 나가보니 엘라임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뭐, 뭐야? 왜 그냥 갔지? 호, 혹시... 나중에 보복하려는 건... 아니겠지?" 생각해보니까 지금까지 봐 온 엘라임의 성격 상 그럴 가능성이 충분했다. "서, 설마... 먹을 것을 안 가져다 줘서 한 며칠 굶게 한다거나... 그러는 건?" 그제야 한 순간의 감정으로 절대 건드려서는 안될 상대를 건드렸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히 그냥 넘어가지 않고 속으로 벼르고 있을 게 뻔했다. '그리고 그건 다음에 만날 때 터져 나오겠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가시는 느낌과 함께 등골이 오싹해졌다. '허걱... 우짜지?' 하지만 그런 걱정도 잠시... 꼬르르륵~~ "하.하.하... 뭐, 아무렴 어때?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우선 먹고 보자. 먹고 죽은 귀신 때깔도 곱다더라." 새로 엘라임에게 얻은 카사의 도움을 받아 마른 나무에 불을 지피려 했지만, 놀랍게도 그럴 필요 없이 카사 혼자만 있어도 충분히 후라이팬을 데울 수가 있었다. 나무에 불을 지피려 할 때 땔감도 걱정이 되어 다음에 엘라임 만날 때 땔감도 가져 오라고 해야 겠다고 생각 했는데, 카사만 있으면 그런 걱정은 필요 없을 듯 했다. 카사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어쨌든 카사 위에다 후라이팬을 올려 놓고 기름을 두르니 잠시 후에 후라이팬이 달궈 지면서 기름이 지글지글 끓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나는 이 곳에 와서 처음으로 음식이란 걸 먹을 수 있었다. 비록 뭔지 모를 고기는 질겼고, 팬 케익이 아닌 밀가루 빵은 단지 소금과 설탕 간만 했을 뿐이라 평소면 해다 줘도 안 먹을 것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었다. 하지만, 수십, 아니 수백명은 될 듯한 정령들이 말똥말똥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에서 허겁지겁 먹어 치운것은 조금, 아니 엄청 많이 쑥스러운 일이었다. "얘들아... 먹을 때는 처다보지 마라. 창피하잖아. 세상에서 제일 추한게 누가 먹는 거 쳐다보는 거라더라." 그러나 이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령들은 그냥 꺄르르 웃어댈 뿐 날 바라보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하아, 정말... 이래서 인기인은 피곤한 거야." 천진 난만한 정령들의 반응에 나는 더 뭐라 할 수도 없어 그냥 그렇게 농담을 하며 넘어 가려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나 이러한 내 농담을 받아주는 차가운 어조가 있었으니... "누가 인기인이냐?"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와 말투에 나는 순간적으로 온 몸이 굳어 버렸다. 그리고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드뎌, 올 것이 왔구나...' 였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보니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엘라임이 거기 서 있었다. '저 정령은 어떻게 저렇게 귀신처럼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지 모르겠다니까...' 속으로 그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며 잠시 불안함을 감춘 나는 그를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질문을 던졌다. "어? 먹을 거는요? 설마 제 말을 잊고 빈 손으로 오신 거예요?" 그러자 엘라임이 무지 한심하다는 눈길로 날 바라보며 이죽댔다. "멍청하기는... 네 눈은 그냥 장식품으로 달렸더냐? 네 주변에 먹을게 지천으로 널려 있는게 보이지 않느냐?" "먹을 거요? 도대체 어디에요?"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뜰에는 시들다 못해 다 말라빠진 풀들과 나무 한그루만 서 있을 뿐이었다. "누가 이 뜰에 있다고 했느냐? 내가 말한건 바로 저기다." 엘라임이 손을 들어 가르킨 곳은 집을 감싸고 있는 바다였다. 해초가 해류의 흐름에 따라 하늘거리고 형형 색색의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니는, 언제 봐도 멋진 장면을 연출하는 바다 속이었다. 물론 이 곳이 바다 속이라는 것도 알고, 바다가 만고의 보물 창고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먹을 것은 물론 각종 광물도 풍부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보이기만 할 뿐 손에 잡을 수 없는데 천만금의 보화가 무슨 소용이며, 산해 진미가 무슨 소용일까? "저기 있는 걸 어떻게 하라고요? 잡지도 못할텐데..." 그러자 엘라임이 날 아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 내 아들 맞냐?" "전 딸인데요." 능청스러운 내 말에 엘라임은 즉각적으로 응징을 가했다. 갑자기 허공에서 물방울들이 모여들더니 망치 모양을 형성하자마자 내 뒤통수를 후려 갈겼던 것이다. 따악~!! "끄아~!!" 뒤통수를 부여 잡으며 낑낑 대자 엘라임이 고소하다는 눈으로 날 내려다 보며 말했다. "도대체 누굴 닮아서 저렇게 버릇이 없누? 넌 얼굴만 네 엄마를 닮았구나? 쯧쯧, 그나마도 제대로 닮을 것이지, 비슷하게 생긴 얼굴인데도 어떻게 지 엄마와 미모가 하늘 땅 차일꼬?" '성격은 분명히 당신 닮은 걸 거다.' 나는 속으로 이를 바드득 갈며 중얼거렸지만, 겉으로는 아파서 계속 낑낑 거리는 체 했다. 하지만 난 곧 엘라임의 냉정한 말에 고개를 들어야 했다. "엄살 부리지 말고 똑바로 못 일어나? 안 그러면 한대 더 때려 준다." "쳇, 너무 한 거 아니예요? 누가 보면 친자식이 아닌 줄 알겠어요." "시끄러. 다 네가 잘못 한 거야." "젠장, 이렇게 못살게 굴 거면 데려 오지나 말든... 푸학..." 나는 꿍시렁 대다가 갑작스레 내 얼굴을 덥친 물 때문에 놀라서 말을 끝내지 못하고 바둥 거리며 뒤로 넘어가 엉덩 방아를 쪘다. 그러자, 내 얼굴을 갑자기 덥친 물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어리둥절하고 놀라서 고개를 들어보니, 길다란 물 기둥이 마치 밧줄 처럼 엘라임의 손에서 부터 내 앞까지 길게 죽 늘어서 있는 것이었다. 물론 공중에 떠서 말이다. 내가 경의와 놀라움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그걸 바라보자, 엘라임이 킥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그 물로 된 밧줄이 하트 모양도 그렸다가, 한번 꼬이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물로 뭉쳐진 뒤데 한 줄의 밧줄이 되기도 하고, 물결 모양을 만들었다가 소용돌이 모양을 만들기도 했다. 마치 체조 선수가 길다란 리본을 가지고 여러가지 쇼를 선보이는 듯 해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우와..." "뭘 놀래? 내 기운을 받았으면 너도 할 수 있을 텐데..." 엘라임의 무덤덤한 말에 놀라서 난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정말요?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요?" 그러자 엘라임의 정말 간단 명료한 대답이 나왔다. "잘." 그의 대답에 나는 이마에 혈관이 뽀록 솟는게 느껴졌다. "지금... 장난 하자는 겁니까? 무슨 대답이 그래요?" "시끄러. 나는 태어나자마자 할 수 있었는데 왜 너는 못하는 거야?" "저는 태어나자마자 못했으니까요." "그건 네가 덜떨어져서 그러는 거야." "그러는 게 어디 있어요?" "시끄러. 못하는 주제에 시끄럽기는 되게 시끄럽네. 어쨌든, 못한다면 귀찮지만 내가 나중에 가르쳐 주마. 큰 영광이라 생각하고 감사히 여겨." '영광은 무슨 얼어죽을 영광...' 속으로 그렇게 이죽대고 있는데, 엘라임이 날 쓰윽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우선은... 먹을 것을 구하는 것 부터 가르쳐 놔야겠군. 안 그랬다간 굶겨 죽인다느니 마느니 계속 시끄럽게 굴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가 바다 속에서 물고기를 낚는 방법이라도 가르쳐 주려나 보다 하고 귀를 쫑긋 세운 채 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그런데 너무나 황당 하게도 엘라임이 내 멱살을 틀어쥐어 날 허공에 번쩍 치켜 들더니 다짜고짜로 휙 집어 던지는 것이 아닌가? 근육이 조금 붙어 있긴 했지만, 그리 힘세 보이지 않았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나는 좁은 뜰을 벗어나 집 주위를 감싼 결계까지 곧장 날려갔다. "우악!!" 유리막 처럼 보이는 투명한 결계에 부딧힐거란 생각에 눈을 꼭 감고 조금이라도 충격을 막아보자 몸을 움츠리는 순간, 마치 젤리와 같은 느낌의 얇은 막과 부딧혔고, 그에 어리둥절해 두 눈을 뜨는 순간 나는 그대로 결계를 통과하여 바다 속에 빠졌다. '우갸갸갸~~!!' 제 3화 기묘한 동거(?) 생활(4) 유리막 처럼 보이는 투명한 결계에 부딧힐거란 생각에 눈을 꼭 감고 조금이라도 충격을 막아보자 몸을 움츠리는 순간, 마치 젤리와 같은 느낌의 얇은 막과 부딧혔고, 그에 어리둥절해 두 눈을 뜨는 순간 나는 그대로 결계를 통과하여 바다 속에 빠졌다. '우갸갸갸~~!!' 너무 황당한 일이지만, 또한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나는 놀랄 겨를도 없이 오직 살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을 쳐야 했다. 평소 수영을 왠만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던데다, 잠수 하는 걸 무지 좋아할 정도로 물을 친근하게 여겼었는데,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 소용 없었다. 오직 눈 앞에 있는, 결계로 감싸진 작은 오두막으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만약 숨을 참을 수 있는 시간 안에 결계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죽을 것이 뻔했기에, 눈 앞에 결계가 있는데도 엄청 무서웠다. 결계 안에서 보던 바다 속의 풍경은 단지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했는데, 막상 바다 속으로 떨어지고 보니 어둡고 공포스러웠으며, 누군가.. 그러니까 귀신이 나타나 내가 결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바지 가랑이라도 잡고 끌어 당기는 것 같아 무서웠다. 허부적, 허부적~ 평소, 아니 한국에서 돈 내고 강습 받았던 그 멋진 수영폼은 어디로 다 던져 버리고 필사적으로 팔 다리를 저어 겨우 결계에 손이 닿으려는 찰나, 정말 하늘도 무심하시지, 갑자기 강한 해류가 발생하여 나를 결계로부터 멀리 떼어 놓는 거였다. '허걱, 우째!!' 그렇지 않아도 두려움에 떨던 마음이 결계와 사이가 멀어지자 다급해지고 초조해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숨이 가빠져 왔다. 빨리 결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정말 익사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까 너무 허부적 댔는지 몸이 힘들어서 팔과 다리가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거였다. 게다가 다시 한번 해류가 일어 나를 더욱 더 멀리 밀어놓고 있었다. '어무이~ 나 죽어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마구 솟아나자 눈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숨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빠져왔고,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더 이상 팔을 휘젓지 못하게 되자 시야까지 점점 흐려졌다. '흑흑흑... 엄마, 아빠, 해민아... 이번에는 정말 천국에서 만나보자꾸나...' 결국 여기서 죽나보다... 란 생각에 몸에서 힘을 빼고 눈을 감자 마음이 편해졌다. '으음... 익사하는 거 꽤 고통 스러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별로 안 고통 스럽구나. 익사해서 죽는게 다행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살할때 물에 많이 빠지는 구나...' 별 시덥잖은 생각까지 하면서, 이제 정말로 천사가 와서 - 물론 여기가 내가 살던 한국이 아니라서 천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 내 영혼을 데리고 천국으로 가길 기다리고 있는데, 꿈에서도 잊지 못할 차갑고 빈정거리는 어투가 들려 왔다. [뭐하냐? 지금 자냐?] 반사적으로 눈을 떠보니 내 옆에 엘라임이 상체만 약간 들어 팔꿈치로 머리를 받치고 누운, 아주 편안한 포즈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 우갸, 꿀꺽~" 뽀글 뽀글... 난 단지 어떻게 된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평소와 같이 입을 열어 말을 하려다가 밀려드는 바닷물을 어찌 하지 못해 그대로 꿀꺽 삼킨 것이었다. '우에~ 짜~~' 오만 상을 찌푸리며 바닷물의 맛을 온 몸으로 표현하자 엘라임이 한심하다는 어조로 다시 말했다. [멍청하기는... 그래, 먹어보니 맛있냐?] '바닷물이 맛있겠습니까? 표정 보면 몰라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정말 속으로만 말할 수 있는 거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내가 마음속으로 이야기 한 걸 엘라임이 알아 듣고 대꾸를 하는 것이 아니냐? [아니, 네 표정 보니까 맛있는 거 같길래...] '맛있기는 개뿔이.. 허거걱~~!!' 멋도 모르고 그의 말에 또 속으로 씨부렁 대던 나는 엘라임의 답변이 내가 속으로 한 말에 대한 것이라는 걸 깨닫고는 경악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서, 설마... 지금 내가 속으로 한 말을 듣는 건...' 그러자 엘라임이 나에게는 잘 보여주지 않는, 그러니까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약간 킥킥 거리며 대꾸했다. [당연한 거 아니냐? 정령에게는 실체가 없다. 그러니 의지로 대화할 수 밖에... 입으로 이야기 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인간들이 주고받는 말이란 인간의 몸 속으로 들어간 공기가 밖으로 나올 때 목에 있는 성대를 울리면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냐? 하지만, 정령에게는 몸 속으로 공기를 들여보낼 수가 없으니 사람처럼 말을 못할 수 밖에...] '그, 그랬어요?' 라고 속으로 대꾸해 주면서 나는 오들오들 떨었다. 왜냐, 지은 죄가 있어으니까.. 그 동안은 겉으로 엘라임에게 고분 고분 굴었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씨부렁 씨부렁 댔는가? 그걸 엘라임이 다 듣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엘라임의 설명은 계속 되었다. [네가 정령들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도 그것과 같은 방법이지. 너는 네가 모르는 사이에 정령들이 대화하는 방법도 같이 사용하고 있던 거였어. 내 기운을 물려받았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그럼... 이제는 생각도 내 맘대로 못하겠군.... 요.' 생각까지도 남에게 - 정확히 말한다면 정령들에게지만... - 들킨다는 건 참 기분 나쁜 일이다. [그건 아니야. 넌 지금 네가 정령들이 대화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해서 생각과 동시에 표출하는 것이지만, 그 방법만 안다면 생각할때 의지를 표출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그래요? 그거 참 다행이네요. 그럼 정령들의 대화 방법이란 무엇이죠?' [멍청하긴.. 아까 말했잖아. 의지를 표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하는 거냐구요!' [지금 네가 하고 있잖아. 잘 하고 있구만...] '이건 생각과 같이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생각 하래 의지를 표출하지 말라니까.] '그걸 어떻게 안 하냐구요!!' [잘!] '잘 밖에 몰라요?' 내가 바락 대들자 그 동안 약간은 풀어진 얼굴을 하고 있던 엘라임의 얼굴이 다시 차갑게 굳어지면서 날 노려 보았다. [시끄러! 난 태어날 때 부터 할 수 있었던 걸 못하는 주제에 말이 많군!] '제대로 안 가르쳐 주면서...' [시끄러. 말하는 법을 누가 가르쳐 주냐?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하는 거지. 그냥 네가 알아서 깨우쳐!] '젠장.. 그럼 그때까지는 생각도 마음대로 못하는 거잖아! 못된 영감탱이... 헉.' 평소 엘라임의 말에 뭐라 대꾸 못할 때 속으로 꿍시렁 대던 버릇 그대로 이번에도 꿍시렁 대던 나는 엘라임이 이 말도 들을 거라는 생각에 황급히 입을 닫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지만, 엘라임이 왠일인지 그냥 못들은 척 딴데만 보고 있었다. '왠일...'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동안 꿍시렁 대던 것도 엘라임은 다 들었을게 분명한데 그냥 묵인해주고 있었단 소리 아닌가? '헤에, 엘라임에게도 이런 면이.. 그럼 그냥 마음껏 꿍시렁 댈까?' [죽을래!] '헤헤헤...' 이 곳에 떨어지고 나서 나는 처음으로 마음 편안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걸 깨닫고 나 스스로도 약간 놀랬지만, 그만큼 이 곳 생활이 불편하다는 거였다. 아직도 이 곳을 집이라 생각 안 하고, 어쩔 수 없어서 잠시 머무는 곳이라고 여기고 있으니까 말이다. [자, 그럼 정신 차렸으면 네 식량이나 구해 봐라.] '식량? 식량이라뇨?'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된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엘라임을 바라보자 그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멍청하긴! 네가 왜 바다 속으로 들어온 지 잊어버린 거냐?] '바다... 속?' 그러고보니 난 지금 바다 속에 있었고, 아까까지만 해도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바다 속에 떠 있었다. '헉, 커억, 켈록, 켈록....' 그걸 깨달은 순간 너무 놀라서 반사적으로 헛바람을 들이키려다가 신선한 공기 대신 바닷물이 코 속으로 밀려 들어오자 그걸 토해내기 위해 격렬하게 기침을 해댄 것이다. 그 모습에 엘라임이 손을 이마에 얹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정말 멍청해...] 몇번이고 심한 기침을 하고 난 뒤 나는 몸을 좀 진정 시키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마쉬려 했다. 하지만, 그 보다도 먼저 엘라임이 그런 내 낌새를 눈치채고 달려들어 내 입과 코를 손으로 틀어 막았다. [숨 쉬지마 멍청아! 정말 죽고 싶은 거냐?] 그러나 격렬한 기침을 하고 난 뒤여서 코와 입이 틀어막히자 정말 숨이 막혀서 괴로웠다. 그의 손을 뿌리치기 위해 몸을 뒤틀었지만, 엘라임은 나를 꼭 틀어 쥐고 나주질 않았다. [잠시만 참아. 그럼 괜찮아 질 거다. 멍청하기는... 아무리 네가 내 기운을 이어 받았다 하나, 네 절반은 인간이란 걸 - 정확히는 1/4만 인간, 1/4은 엘프지만... - 잊은 거냐? 바닷물이 폐 속으로 들어가면 너라도 목숨은 장담 못해!] 그의 나직하고 강한 어조에 나는 괴로웠지만, 몸부림 치는 대신 괴로움을 꾸욱 참았다. 그러자 정말 그의 말대로 마치 숨이라도 쉬고 있는 것 처럼 몸이 천천히 안정을 되찾아 가는 거였다. [이 곳에 있는 정령들은 자연에 흐르는 마나를 몸에 받아들여 형체를 유지하는 거다. 너 또한 절반은 물의 정령이라고 할 수 있으니 물 속에서 숨을 쉬지 않아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그의 말을 가만 듣고 있자니 좀 황당했다. '뭡니까.... 그럼 예상이 틀렸다면 전 죽는 거였잖아요! 딸내미의 목숨 가지고 실험하신 겁니까?' [네가 저 안에서도 마나를 조금씩 조금씩 흡수하는 걸 봤기 때문에 확신했던 거야. 내 아들이 물에 빠져 죽는다는게 말이나 돼냐? 아, 하지만 물 속에서는 숨을 안 쉬어도 살수 있다고 하지만 다른 곳에서라면 받아들일 수 있는 마나의 양이 극히 적어 숨을 유지하는 데 부족할 거다. 그러니 죽고 싶지 않으면 다른데 가서는 실험하지 마.] '하, 하지만... 공기 중에도 물의 정령이 있던데...' [멍청하기는... 공기 중에도 수분이 있으니 가능 한 거지. 하지만 넌 그 정도의 수분 가지고는 택도 없어.] '에... 그런가요?.' 제 3화 기묘한 동거(?) 생활(5) '에.... 그런 가요?' 내가 완전히 안정을 되찾자 엘라임은 아무 말 없이 손을 풀어 나를 놔줬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죽고 싶지 않으면 절대로 물 속에서 숨을 쉬지 마라.] '예이, 예이. 절대 안 쉴게요.' [좋아. 그럼 이제 식량을 구해 볼까?] 엘라임은 이제 모든게 다 해결 되었다는 표정과 태도였지만, 나는 그와는 반대로 암담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바다 속은 확실히 먹을 것이 많았다. 주위에 하늘거리는 해초도 많고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도 많은 것으로 보아, 내가 사는 곳이 바다 생물이 가장 많이 산다는, 수심 200m 안팎의 지점인듯 했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하겠는가. 나는 다시마며, 미역이며, 김이 바다 속에 산다는 건 알고 있지만, 바다 속에서 어떤 모양으로 사는 지 알지 못해 섣불리 아무 해초나 잡을 수가 없었고, 주위에 물고기가 많이 헤엄쳐 다니기는 했지만, 그들을 잡을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속으로 한숨만 푹푹 쉬면서, 주위의 먹을 것(?)들만 침울한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자, 엘라임이 기다리다 못했는지 먼저 물어왔다. [뭐 하냐?] '예?' [뭐 하냐고. 아 식량 안 구할 거야?] '하지만....' [왜?] '해초 중에서 어떤게 먹을 수 있는지도 모르는데다, 물고기를 잡을 방법도 없는 걸요.' [아무거나 먹으면 안되는 건가?] 내 앞에서 모르겠다는 듯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엘라임의 모습에 나는 조금 신기함을 느꼈다. 항상 자신만만하고 무엇이든지 다 알것 같이 굴던 그였기에 그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헤에... 어떤게 먹을 수 있는 건지 영감님도 모르시는 군요?' [시끄러. 내가 인간이냐? 이런 걸 먹게? 알고 있는게 더 이상한 거야. 뭐, 어쨌든, 해초를 못 먹겠으면 물고기를 잡아 먹으먼 되잖아. 그것도 못 먹는 게 있어?] '에... 물고기 중에 복어라고 잘못 먹으면 그냥 즉사하는 물고기가 있지만... 그건 둘째치고 잡지도 못하는 걸요.' [왜 못잡는데? 그냥 잡으면 되잖아.] '너무 무책임한 소리라고 생각 하지 않으세요? 어떻게 그냥 잡아요? 손으로 잡으려고 해도 저 물고기들이 저보다 훨씬 빠르다고요.' 나는 그 뒤에 몇마디 더 붙이려고 했지만, 말하는 대신 놀라움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떠야 했다. 엘라임이 우리 근처를 헤엄쳐 지나가던 재수 없는 왠 물고기를 향해 손을 쓰윽 뻗자 그 물고기가 마치 진공 청소기에 먼지가 빨려 들어가듯 빨려와서 손바닥에 착 달라 붙는 것이었다. '허...' 그 놀라운 묘기에 가까운 기술에 내가 아무 말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뜨자 엘라임이 자신이 잡은 물고기를 건네 주며 물었다. [이건 먹을 수 있는 거냐?] '에... 뭐, 먹을 수 있겠죠.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한 거죠? 영감님이 직접 가서 잡은게 아니라 마치 물고기가 스스로 잡혀준 것 같아요.' 아직 펄펄 살아있는 물고기라 어떻게 해서든 내 손아귀에서 도망치려고 발버둥 치는 걸 막기 위하여 꼬옥 붙들면서 내가 존경의 눈빛을 보이며 엘라임에게 묻자 그가 뭐라 말로 설명하기 힘든, 심오한 표정(?)으로 날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다. [역시... 이런 일을 할 수 없는 건가? 아무래도 인간의 피가 섞이는 바람에 태어나면서 부터 정령의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가보군. 후우, 알았다. 우선 당분간 네가 물을 다룰 수 있을 때까지는 내가 잡아주마. 그래, 몇마리면 한끼 식사를 때울 수 있지?] 엘라임이 잡아준다면야, 걱정할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아핫핫핫, 제가 물고기를 아무거나 골라도 될까요? 저는 생선 보다는 문어랑 오징어를 좋아 하거든요. 생선은 하나 잡았으니까 으음.. 문어 한 마리만 잡아 주세요!' [문어?] '예에, 머리는 동그랗고 다리가 10개 달리고 주둥이는 튀어 나와서 거기서 먹물을 뿜어대는 거 있잖아요.' 내 말을 듣고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엘라임이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우리가 있는 근처에서는 문어가 위협을 느껴 다 숨었는지 어째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흐음... 문어라... 안 보이는 군.] 엘라임은 잠시 주변을 살펴보다 안되겠는지 손을 들어 살짝 까딱 거렸다. 그러자 저 멀리서 왠 정령 하나가 쏜살같이 달려와 엘라임 앞에 섰다. [부르셨습니까.] 그건 내가 처음 보는 정령이었다. 몸체는 파란 색이었고, 바다 속에 있으며 엘라임의 명령을 듣는 것으로 보아 물의 정령이 분명한 듯 한데, 운디네 보다 훨씬 큰데다가 어린 소녀가 아니라 완전 성숙한 처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파란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려 바다 물결에 하늘 하늘 흔들리게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하지만, 엘라임은 늘 봐와서 그런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명했다. [문어 한마리만 잡아 와라.] [알겠습니다.] 완전... 군인 못지 않은 위계 질서에 명령 체계 였다. 그녀는 엘라임의 말에 즉시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어디론가 또 쏜 살같이 사라졌다. '헤에.. 저 아가씨도 물의 정령이죠?' 그녀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내가 묻자 엘라임이 몸을 돌리며 대꾸했다. [그래, 물의 중급 정령 운다인이다. 자, 우리는 이만 돌아 가자.] '자, 잠깐만요~!!' 엘라임은 마치 평지를 걷듯, 아니 그러니까 신선이 구름을 타고 이동하는 것 처럼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은데도 스스르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따라가기 위해 나도 황급히 몸을 돌렸지만, 양 손은 열심히 몸부림 치는 생선 한마리를 꼬옥 잡고 있었고, 엘라임 처럼 갈 재주는 없었기에 열심히 두 발을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발장구를 쳐도 그의 속도를 따라 갈 수가 없었기에 결국 나는 바닥으로 가라앉아 발로 바닥을 차며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통~ 통~ 통 '같이 가요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한참 멀리 떨어져 있었던 관계로 내가 결계를 통과하여 숨을 쉴 수 있었을때는 나는 너무 힘들고 지쳐서 생선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그대로 드러누어 숨을 헐떡 거렸다. "헥, 헥, 헥, 헥..." [쯧쯧, 그렇게 몸이 허약해서야... 그까짓 바다 속을 좀 오간거 가지고 그렇게 지치면 어떻게 하냐?] "헥헥, 영감님, 헥, 속도에, 헥, 맞추느라고, 헥헥, 무리해서, 헥, 그러는, 헥, 거잖아요, 헥헥..." [핑계는... 앞으로 체력도 단련 시켜야 겠군.] 그러면서 엘라임이 손을 가볍게 휘젖자 내 몸을 쫄딱 적시고 있던 물이 갑자기 허공으로 솟아 올로 그대로 증발 해 버렸다. 덕분에 비에 젖은 생쥐꼴을 하고 있던 나는 옷을 새로 갈아 입고 머리를 말린 것 처럼 온 몸이 뽀송뽀송하게 말랐다. "헤에... 대단해. 정령왕이라서 그런가요? 신기한 능력을 많이 가지고 계시네요." [흥, 이 정도에 놀라다니... 내 능력을 볼때 이정도는 미미한 능력일 뿐이야.] '잘난체는...' 나는 속으로 중얼 거리다가 다시 화들짝 놀라서 생각을 중단 했다. 엘라임이 비록 그냥 모르는 체 넘어가주기는 했지만, 그가 내 속마음까지 다 듣는다는 걸 아는 이상 전 처럼 편히 쫑알쫑알 댈 수가 없었다. '어휴, 빨리 정령들의 대화법인지 뭔지를 알아 내야지, 이거 피곤해서 살 수가 있나....' 엘라임의 눈치를 살피며 속으로 한탄을 하고 있을 때, 아까 본 물의 중급 정령인 운다인이 커다란 문어 한 마리를 끌고 결계 가까이에 도착 했다. [가져 왔습니다.] 그 문어는 내가 한끼 식사로 다 해치우지 못할 정도로 엄청 컸다. [여기다 던져 놔라.] [예.] 운 없는 그 문어는 운 없는 생선 옆에 떨어져서 내 한끼 식사가 되어야 할 처지를 면해보자 마지막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모습을 싸악 외면한채, 다시 멀어져가는 중급 정령을 보다가 엘라임에게 물었다. "저기요, 정령예도 계급이 있어요? 운디네는 하급이고 방금 본 운다인은 중급이라면 상급도 있겠네요? 그 다음이 정령왕인가요?" [정령은 보통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 - 혹은 나이트라고도 함- 정령왕으로 나뉜다. 하지만, 이렇게 계급이 있는 것은 네 계열의 정령뿐, 나머지 자연의 정령은 계급이 없지.] "네... 계열이요?" [그래, 자연을 유지하는 네 가지 큰 속성 말이다. 내 속성인 물, 불, 바람, 땅이 바로 그것이지.] "헤에, 그럼 정령왕도 네명이네요? 에... 그럼 혹시 불의 정령왕과 앙숙인 거 아니예요? 물과 불은 상극이잖아요." [멍청하긴... 그렇다고 앙숙이냐? 우리는 단지 속성이 다를 뿐, 본질은 같은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같은 동족이다. 인간으로 치면 남성과 여성 같은 거지. 인간이 맨날 남자와 여자끼리 편 갈라서 싸우는 거 봤어? 서로 반대되는 성을 가졌으면서 같이 어울려져서 살아가지 않느냐? 우리도 그와 마찬가지야. 더구나 불의 정령왕은 우리 정령왕들 중 가장 부드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지.] "에, 그럼 정령왕들도 모두 성격이 제각각인가요?" [그래. 너희 인간들도 모두 같은 인간이면서 성격이 제각각이지 않느냐? 우리도 마찬가지야. 불의 정령왕 처럼 부드러운 성격이거나, 나 처럼 침착하고 위엄있는 정령왕도 있는 반면, 바람의 정령왕 처럼 싸가지 없는 놈도 있지.] '하... 싸가지? 쿡쿡... 아, 안돼,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내가 무념 무상의 경지에 오르기 위하여 열심히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걸 본 엘라임이 헛 웃음을 보이더니 물어왔다. [그렇게 중얼 거릴 시간에 저것들이나 어떻게 해라. 설마 그냥 날로 먹을 거냐?] "에? 아아...." 엘라임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그제야 잠시 잊고 있었던 내 한끼 식사거리를 생각해 냈다. 내가 딴 짓을 하고 있었던 시간이 좀 길었는지 불운한 한 마리의 생선과 한마리의 문어는 이미 죽어 있었다. "음음, 너희들에게 애도를 표하마. 하지만, 사람이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지 않니? 너희들이 재수 없었다고 할 수밖에... 대신 너희들은 내 몸의 살과 피가 되어 살테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말거라." 나는 그 둘을 들어 올리며 삼가 명복을 빈 뒤 요리를 하려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단 한걸음을 뗀 뒤 멈춰서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엘라임이 나를 따라 움직이려다가 내가 멈추자 같이 멈춰서는 날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저기요... 혹시, 생선 요리하는 법 아세요?" 제 3화 기묘한 동거(?) 생활(6) "저기요... 혹시, 생선 요리하는 법 아세요?" 내 질문에 순간적으로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엘라임이 곧이어 인상을 팍 찌그러트렸다. [넌 내가 인간인 줄 아냐? 내가 그런걸 어떻게 알아?] "에휴... 그냥 물어 봤어요. 으음... 이걸 어떻게 요리한다...." 생각해보니 난 생선을 요리할 줄 몰랐다. 라면이나 끓이거나, 계란 후라이는 부칠 줄 알고, 팬케익은 만들 줄 알았지만, 생선은 한번도 요리는 커녕, 만져 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난 생선은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넌 인간으로 자랐으면서 그런 것도 모르냐?] "생선 요리는 별로 안 좋아했단 말이예요. 회라면 모를까... 으음, 그냥 회쳐먹을까? 하지만 회뜰줄은 모르는데..." 중얼중얼 거리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엘라임이 나란히 옆에서 걸어가면서 참견을 해왔다. [그냥 구워 먹으면 안되는 건가? 인간들은 보통 그런거 구워 먹던데...] "그래요? 그런데, 이거 비늘 벗겨내고 내장도 빼고 구워요, 아니면 그냥 구워요?" [내가 그런걸 어떻게 아냐? 그냥 한번 구워 봐.] "그러다 못 먹으면 어떻게 해요." [문어도 있잖아. 그래, 문어는 어떻게 먹을 거냐?] "으음... 삶아 먹을까 하는데... 문어 그냥 삶으면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문어도 내장이란게 있을텐데... 으음... 하지만, 삶아봤자 찍어 먹을 고추장도 없는데... 그냥 소금 찍어 먹어야 하나?" [소금? 바닷물 가져다 주리?] "으음... 한번 바닷물에 삶아 볼까요? 그냥 짭자름하게 먹도록... 하지만, 그렇게 하면 맛있으려나? 그런데... 이거 껍질 안 벗기고 그냥 삶아도 되려나? 아아, 이럴 줄 알았다면 전에 엄마가 문어 삶아줄 때 옆에서 보기라도 하는 건데..." 집 안으로 들어와 부엌으로 향하며 중얼대는데 엘라임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인상을 굳혔다. [야, 내가 네 엄마는 단 하나뿐이라고 했지. 자꾸 그 인간 보고 엄마라고 할래?] "너무 한거 아니예요? 솔직히 난 누구 누구 때문에 친엄마는 얼굴도 못 보고 타 세계로 넘어가서 17년 동안 그 분을 엄마라고 부르며 자랐단 말이예요. 그런데 단 한순간에 그 분을 엄마라고 못 부르게 하다니..." 나도 걸음을 멈추고 엘라임에게 당당하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조리있게 반박했지만, 엘라임은 내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시끄러. 내가 하라면 하는 거야.] "독재자!" [쓰읍... 자꾸 그렇게 반항 하면 내가 생선 잡아주는 대신 널 바다속으로 계속 집어 넣어 버린다? 네가 잡도록?] "헉..." 엘라임이 한쪽 눈을 치켜뜨며 하는 협박에 나는 더 뭐라 하지 못하고 얌전히 부엌으로 향해야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나마 반항이라도 하느라 그에게 그러겠다는 대답도 안 했다. "쳇... 치사하다, 치사해. 먹을 거 가지고 협박하다니.." 엘라임이 뒤 따라오는 줄 알고 나는 일부러 들리게끔 - 뭐, 속으로 쫑알대도 그가 들을 수 있겟지만.. - 크게 중얼중얼 거리면서 부엌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정말 허망하게도 내 뒤를 따라 오면서 그 투덜거림을 들어야 할 엘라임은 내가 부엌으로 들어와 냄비를 꺼내어 운디네에게 부탁해 물을 받는 동안에도 들어오지 않는 거였다. "뭐야, 왜 안 들어오는 거지? 그냥 가버렸나?" 할 줄 모르지만,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문어를 조물락 조물락 거리며 씻은 다음 생선도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깨끗이 씻어 구울 준비를 마친 동안에도 엘라임이 부엌으로 들어오는 기색이 없자, 나는 냄비에 문어와 이름 모를 생선을 담아가지고 슬그머니 부엌 밖으로 나가봤다. 하지만 거실 어디를 봐도 엘라임이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봤지만, 거기에도 엘라임은 없었다. "에... 갔나보네..." 왠지 모를 약간의 서운함을 느끼며 나는 마당으로 내려왔다. "으음.. 내가 그 영감탱이가 갔다는데 왜 서운함을 느끼는 거지? 쳇...." 엘라임이 바닷물을 받아 주기로 했지만, 솔직히 그가 없어도 바닷물 받는 건 쉬웠다. 결게 가까이 가서 냄비를 결계 밖으로 뺐다가 다시 잡아 당기면 땡이었다. 그럼 그 냄비 안에 바닷물이 가득 담기는 거였다. "으음... 이렇게 하면 정말 괜찮을까나? 부디 먹을 만 해야 할텐데..." 생선을 구울 때 소금을 약간 뿌려 짭짜름한 맛을 내는 건 알고 있었기에 - 물론 반찬할 때나 그렇게 하지만... - 생선도 바닷물에 담궜다가 굽기 시작했다. "헤헤헤, 카사 부탁할 게." 내 곁에 항상 머물러 있는 니트라스와 마찬가지로 결계 안에서는 - 당연하겠지만, 바다 속에는 못 들어갔다. - 카사에게 이럴때만 말을 거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부탁하자 카사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카사가 단 한명 뿐이라 두개를 동시에 할 수는 없어서 문어는 나중에 삶기로 하고 우선 생선을 석쇄에 올려 놓고 굽고 있는데 갑자기 집의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어디론가 가버린 줄 알았던 엘라임이 나왔다. [뭐냐, 벌써 하고 있는 거냐?] "어? 안 갔어요? 난 간 줄 알았는데..." [흥, 요리 못해서 쩔쩔 매고 있는 네 녀석이 하도 불쌍해서 이걸 찾아 왔지. 멍청한 네 녀석이 이걸 생각이나 했겠어?] 그렇게 잘난체를 하며 엘라임이 나에게 쓰윽 내민 것은 겉이 파란 가죽 표지로 된 채 금박으로 책의 제목인 듯한 글자가 써 있는 책이었다. "이게... 뭐예요?" [척 보면 모르냐? 책이지... 쯧쯧, 네가 네 엄마 피를 잇긴 이었나 보다. 네 엄마도 요리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나랑 둘이 은거할때는 할 줄 아는 요리가 하나도 없었거든. 그래서 네 엄마가 마련한 책이 바로 이거지. 이름하여 요리책이다. '초보자도 쉽게 할 수 있는 맛있는 음식' 이라는 이 웃긴 제목이 안 보이냐?] 엘라임이 책 겉표지에 써 있는 금박으로 박아 넣은 글자를 가르키며 말했지만, 난 멀뚱히 엘라임을 바라볼 뿐이었다. "저... 여기 글 모르는 데요?" [메야? 쯧쯧, 이렇게 무식하기는... 글도 모르다니...] 엘라임의 혀 차는 소리에 나는 발끈 했다. "무식 하기는 누가 무식하다는 소리예요? 저 전의 세계에 있을 때 거기의 언어와 글을 다 배웠다고요. 하지만, 거기 글이랑 여기 글이 다른 걸 저보고 어쩌라고요?" 하지만 엘라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자기 신세 한탄만 했다. [에잉, 내가 어쩌다 저런 녀석 글이나 가르치게 생겼지? 한심한 노릇이군...] "뭡니까? 데려 왔으면 책임을 져야 하잖아요. 그럴러면 누가 데려 오래요?" 내가 바락 바락 대들자 엘라임이 딴데 보고 있던 시선을 갑작스레 나에게 돌렸다. 그런데 그 시선이 차갑게 굳어 있어서 나는 순간적으로 쫄아버렸다. "왜, 왜요? 내, 내가 뭐 틀린 말 했나요?" 그대로 물러날 수가 없어 다시 한번 말을 해봤지만, 쫄아서 기죽은 내 말투는 내가 들어도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런 날 엘라임이 무지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더니 입을 열었다. [야, 생선 탄다.] "헉!" 그러고보니 생선 뒤집는 걸 깜빡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엘라임의 말에 번개같이 몸을 돌려 구워지고 있는 생선에게로 달려갔지만, 너무 늦은 바람에 생선 반쪽이 새카맣게 타버린 뒤였다. 그나마 반쪽이어서 나머지 반쪽은 구우면 그럭저럭 먹을 수 있었지만, 엘라임에게 대들다가 생선을 태워 먹은 나는 힘이 쭈욱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에휴, 도대체 이게 뭔 꼴이다냐...' 그런데 옆으로 다가온 엘라임이 그 모습을 보더니 나엑 이렇게 묻는 거였다. [으음... 이거 못 먹겠지? 그럼 하나 더 잡아다 줄까?] 그 말이 평소와는 달리 되게 상냥한 편에 속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컥 하는 감정이 솟아 나왔다. "됐어요. 그나마 반쪽은 먹을 수 있다고요." [그러냐? 그럼 맘대로 해라. 그리고, 이 책은 지금 못 보니 필요 없겠지? 내가 가지고 들어간다. 넌 다 먹고 들어오도록 해라.] "아, 안 가요?" 내가 약간 퉁명스럽게 묻자 엘라임이 집으로 향하다 말고 돌아보더니 내 말투를 흉내 내며 대꾸했다. [아, 데려 왔으면 책임 지라며? 먹구 잽싸게 들어오도록 해.] '도대체 뭘 어떻게 책임을 진다는 거야?' 제 4화 엘라임의 교육 (1) [자.] 수많은 정령들이 빤히 지켜보는 가운데 쑥스럽게 혼자 식사를 끝내고 집 안으로 들어오자, 기다리고 있어다는 듯이 엘라임이 나를 거실에 있는 자신의 맞은편의 소파에 앉게 하고는 왠 책을 내밀었다. 탁자에 올려진 갈색의 가죽 겉표지로 둘러쌓인 책과 엘라임을 바라보던 나는 어리둥절함을 숨기지 않은 채 물었다. "왠 책이예요? 저 이곳 글은 못 읽는다니까요." [내가 너 처럼 멍청한 줄 아냐? 네가 책을 못 읽는다기에 내가 준비한 거 아니냐. 네 엄마 서재를 뒤져보니까 한 쪽에 고이 모셔져 있더구만. 아마 너를 위해 네 엄마가 준비해준 모양이더라. 아, 그리고 이것도...] 엘라임이 책 위에 올려놓은 것은 곱게 접힌 하얀 종이와 왠 반지였다. "이게... 뭐예요?" 그 둘을 집어들며 엘라임을 향해 묻자 엘라임이 슬쩍 내 시선을 피한 채 대꾸했다. [네 엄마가 너에게 남겨준 거다. 그 반지는, 네 엄마가 항상 끼고 다니던 거였지.] "헤에..." 반지는 백금인지 은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은빛 금속으로 된 링에 가운데는 내 새끼 손톱의 반 정도 크기의 작은 수정이 박혀 있었다. 어디다 낄까 고민 하다가 내 손가락보다는 약간 큰 거 같아서 검지 손가락에 꼈더니만 그래도 약간 헐렁했다. "으음... 크기를 좀 줄여야 겠네요. 두 번째 손가락에 끼었는데도 헐렁한데요?" 그런데, 놀랍게도 내 말이 끝나자마자 반지에서 희미한 하얀 빛이 솟아나더니만 내 검지 손가락에 맞도록 크기가 착 줄어 들었다. "어? 어어어... 이, 이게 뭐야?' 그 모습에 너무 놀란 내가 눈을 크게 뜨고 반지를 이리저리 살펴 봤지만, 반지는 자신이 언제 뭔 일을 벌였냐는 듯이 시침을 뚝떼고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히 헐렁 했었는데..." 고개를 갸웃 거리며 다른 손가락에 끼려고 반지를 빼려는 순간, 다시 한번 놀랍게도 이 반지에 접착제라도 발랐는지 손가락에서 빠지지를 않는 거였다. 돌아가기는 돌아가는데 빠져 나오지 않으니 황당한 노릇이었다. 반지가 손가락에 비해 작아서 꽉 낀 바람에 안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착 달라 붙어서 안 나오는 거였다. "뭐야, 이, 이거 왜 안 빠져요?" 엘라임에게 도움을 구하기 위해 그를 바라보며 반지를 돌리자 엘라임이 무지 한심하다는, 예의 나를 보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에휴, 그거 마법의 반지야. 어느 손가락에 들어가든 저절로 크기가 늘었다 줄면서 맞춰지지. 게다가, 한번 손가락에 끼면 낀 자가 죽거나 그 반지가 깨지기 전에는 절대로 안 빠져." "에? 정말요? 뭐 이런 반지가 다 있담?" [쯧쯧, 내가 알기로 인간들이 마법 물품을 가지고 있는 건 아주 극소수라고 알고 있고, 하나라도 얻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데 넌 그런 귀중품을 그딴 식으로 취급하냐?] 엘라임의 말에 인상을 찌푸린 채 반지를 빼기 위해 계속 이리 저리 돌려보던 나는 행동을 딱 멈췄다. "에... 그래요? 뭐, 그렇다면 잃어버릴 염려는 없겠지만, 어쨌든 엄마의 유품이니 소중히 간직할게요." 그러면서 나는 반지를 빼기 위해 잠시 무릎 위에 내려놨던 편지라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보니 겉에는 영어 필기체 같은 부드러운 꼬부랑 글씨로 뭐라고 써 있었는데, 이 곳 언어를 모르는 나로써는 읽을 수가 없어 엘라임에게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여기... 뭐라고 써 있는 거예요?" 엘라임은 내가 가르키는 곳을 쓰윽 보더니 다시 시선을 휙 돌리며 대답했다. [사랑하는 미래의 내 아이에게.... 라고 써 있다.] "에... 그래요?" 어째 정이 가득 담겨 있는 다정한 말에 나는 즉시 읽어보고 싶지만, 내가 글을 모르는데다 엘라임의 분위기가 어째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것이 읽어달라고 할 수도 없어 나는 나중에 글을 배워 읽기로 하고 옆에다 잘 나뒀다. 뭐, 사실 편지란 남이 읽어주는 것 보다 나 혼자 읽는게 더 좋지 않게는가? 사생활이라는 것도 있고 말이다. "자, 그럼 글이나 가르쳐 줘요." 엘라임을 둘러싼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기 위해 일부러 나는 명랑하게 말하며 책을 펼쳤다. 안에는 처음 글을 배우는 아이들을 위한 책이라 그런지 한 페이지에 글 하나가 쓰인 다음, 그 글자로 시작되는 단어와 그 단어가 나타내는 듯한 그림이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었다. "쩌비... 그림 책이군. 에휴, 이 나이에 그림책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그렇지 않아도 영어 과목도 점수가 낮은데 큰일이군. 이거 언제나 다 익히려는지..." 맨 처음 나타난 글자는 영어 알파벳의 소문자 에이가 조금 기묘한 형태로 변형되어 어떻게 보면 한자의 숫자 오 처럼 보이기도 하는 글자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딸린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나타난 그림 중 위에거는 젊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행복한 표정으로 포옹하고 있는 거였고, 다른 하나는 왠 소년이 서서 손을 귀에다 가져다 대고 뭘 듣고 있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이건 뭐예요?" 내 질문에 엘라임이 시선을 돌려 책을 바라보더니 약간 성의 없는 말로 대답했다. [그건 '아' 자다.] "음음, 아라구요. 그럼 이것들은 어떻게 읽지요?" 글자에 딸린 단어 두개를 가르키며 묻자 이번에도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위에건 '사랑하다' 이고 밑에거는 '듣다' 라고 읽지.] "음음, 사랑하다, 듣다. 한국말이랑 같네요? 사랑하다, 듣다...." 내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중얼거린 말에 다시 딴 곳을 보고 있던 엘라임이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록 고개를 빠르게 휙 돌려 심각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왜, 왜요? 내가 틀리게 읽었나? 가르쳐 준 대로 읽은 거 같은데..." 그 모습에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약간 졸아든 내가 물어보자 그에 대한 대꾸는 안 하고 엘라임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시 한번 읽어봐라. 너 지금 뭐라고 읽었지?] "사랑하다, 듣다." 또박 또박 읽어주자 엘라임의 인상이 조금 더 굳어졌다. [다시 한번 더.] "사랑하다, 듣다." 이번에는 조금 더 천천히 읽었다. 그러자 이제는 엘라임의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젠장할... 그걸 깜빡 했군....]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엘라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혼자 중얼중얼 거리며 거친 발걸음으로 서재로 향했다. [거기에 있을라나? 있어야 하는데... 안 그럼 귀찮아지는데...] 갑작스런 그의 돌발스런 행동에 나는 어리벙벙해졌다. 뭔가 일이 잘 못 된거 같기는 한데, 그게 나 때문인지 아닌지 그걸 모르겠는 거였다. '아니, 잘 가르쳐주다 말고 왜 저런대? 내가 잘 못 읽었나? 가르쳐준 대로 제대로 읽은 거 같은데... 봐, 그림이랑 단어랑 같잖아? 사랑하다, 듣다... 맞는데... 근데.. 좀 이상하다? 여기 글은 한글이 아닌데, 언어는 한국어랑 같냐?'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갸웃 거리는 동안 엘라임이 들어간 서재에서는 그가 뭘 찾는지 부스럭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한참동안이나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에 서재에서 나오는 엘라임의 손에는 똘똘똘 말린 두꺼운 종이가 들려 있었다. [후, 다행이도 있었군.] 주어와 목적어가 몽땅 빠져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중얼거린 채 엘라임이 내 앞 소파에 와서 털썩 주저 앉더니만 나에게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건넸다. [자.] 주는 거니까 일단 받기는 했지만, 받았다고 그게 뭔지 알수는 없던 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는 손에 들린 종이와 그만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게... 뭐예요?" 제 4화 엘라임의 교육 (2) "이게... 뭐예요?" [스크롤 이라는 거다.] "스크롤?" 뭔가 무지 대단한 것 같아 조심조심 펴보니, 이곳의 언어가 금박으로 박혀 있고, 맨 밑에는 마치 계약서 처럼 사인 같은 것이 써 있는 위에 기묘한 문양의 도장이 꽝 찍혀 있었다. '여기는 계약서를 스크롤이라고 하나봐... 그런데 계약서를 왜 나에게 넘긴 거지?' 스크롤이라고 하는 계약서와 엘라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거리자 엘라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역시... 의지로 대화를 하기 때문에 저 녀석에게는 내가 말하는 이 곳 발음이 전혀 전달되지 않고 있었군.] "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더욱 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에게 묻자 엘라임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러니까... 정령은 의지로 대화하는 거라고 말해 줬지? 넌 너와 내가 다른 세계에서 살다가 만났는데도 아무런 불편함 없이 대화가 통한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껴본 적도 없냐?] "에? 하, 하지만... 이 곳이 한국어를 사용하는게..." 물론 처음에는 약간 이상하게 생각 했지만,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넘어간 일이었다. [그게 아니지. 네가 한국이라는 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왔다 해도 너와 난 대화가 통했을 거다. 왜냐하면 언어로 대화 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로 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또한 그것 때문에 난 너에게 이곳 언어를 가르쳐 줄 수가 없어. 내가 아무리 이곳 언어로, 그래, 예를 든다면 아까 너에게 가르쳐 준 '사랑하다'란 단어를 이 곳 언어로 가르쳐 준다 해도 네가 듣기에는 네가 살던 그 한국이란 곳의 언어로 들릴 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냐?] '그 정도 까지 이야기 했는데 설마 못 알아 들을까...' "아, 예에... 대충 무슨 뜻인지 알았어요. 그럼 저는 글을 못 배우는 건가요?" [나에게는 못 배우지.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 하나 잡아와서 네 선생 노릇을 시킬 수는 없는 일이니 편법을 써야지.] "편법? 어떤?"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계속해서 질문만 던지는 나에게 엘라임은 내가 손에 들고 있던 그 '스크롤'이라는 것을 가르켜 보였다. [그것이 바로 편법이다. 너, 마법이 뭔지는 대충 알겠지? 허공에 바람을 일으키고 불을 만들고 하는 거 말이다.] "예." [스크롤이란 그 종이 안에 마법 한가지를 봉인해 놓은 것을 말한다. 그걸 찟으면 그 안에 봉인된 마법이 실현되지. 네가 들고 있는 그 스크롤에는 이 곳의 언어를 머리 속에 주입하는 마법이 들어있다. 아마도, 네 엄마가 널 걱정해서 일부러 만들어 놓은 듯 해. 나는 너에게 인간의 언어를 가르치지 못할 테니까.] "엄마가요? 헤에..." 나는 새삼스레 들고 있던 스크로를 살며시 쓸어 보았다. '친엄마라는 분은 나를 정말로 사랑했나보네....'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17년 동안 살아오면서 친 부모를 두고두고 원망해 왔던 나에게는 아릿한 감동을 주었다. 그렇게 내가 감상에 빠져 있는데 그게 못마땅했는지 엘라임이 차갑게 한 마디 해서 감상 무드를 깨버렸다. [뭐 하냐? 얼른 안 찢어? 그거 붙들고 평생 살래?] '뭐가 저리도 못마땅한 건지...' 나는 불만이 가득 한 눈으로 엘라임을 힐끔 바라본 뒤 그 스크롤을 부여잡고 세로로 쫘악 찟었다. 그 스크롤이 두 조각이 나자 그 곳에서 강한 섬광이 한순간 번쩍 거렸고, 그와 함께 반사적으로 두 눈을 감은 내 머리속에 무엇인가가 급속도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마치 머릿속이 물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다 파란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려서 퍼트리는 것만 같았다. '뭐, 뭐야.. 이게...'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어질 어질 해져서 나도 모르게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누워 버렸는데, 이게 참 의아한 것이 어느 한순간 어지러운 기운이 싸악 사라지고 다시 멀쩡해 지는 거였다. 그에 두 눈을 반짝 뜨고 앞을 바라보니 엘라임이 날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내가 눈을 뜨자 말을 걸어왔다. [어떠냐?] 나는 몸을 일으켜 바로 앉으면서 고개를 갸웃해보였다. "이게... 뭐가 뭔지... 통 모르겠는데요..." 그러자 엘라임은 탁자에 펼쳐져 있던 책에 손을 뻗더니 페이지를 뭉텅 잡아 한꺼번에 넘기더니 그 곳에 있던 단어중 하나를 가르켰다. [이게 뭐냐? 읽을 수 있겠어?] 그 곳에는 삐까 번쩍한 갑옷을 입고 멋진 붉은 망토를 달고 검과 사자 그림이 그려진 방패를 든 남자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커다랗게 이곳 언어로 '기사'라고 쓰여 있었다. 내가 어떻게 이걸 아는지 의아하는 것도 잠시, 아까 내 머릿속으로 침투하던 것이 이 곳의 언어라는 걸 깨달은 나는 쉽게 납득했다. "기사, 맞죠?" [그래. 다행히 마법이 제대로 작동 했군. 하기야, 네 엄마도 7 클래스의 마법사였으니 말이다.] "마법이라는 거 참 편하네요. 마법만 있으면 외국어 공부는 안 해도 되겠어요." 한국에서도 이런 스크롤만 있었다면 영어 점수는 따논 당상이었을 텐데 말이다. 엘라임에게 꼼짝없이 잡혀 몇달, 아니 길면 몇년간 이 곳 언어를 익혀야 한다는 생각에 죽었구나... 싶었는데, 다행히 친엄마가 남겨 놨다는 마법 덕분에 한 시간도 안되어 이 곳 언어를 익히게 되자 나는 무지 기분이 좋아져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러자 곧장 날아온 엘라임의 차가운 한마디. [입 다물어라. 침 흐르겠다.] '쳇...' 다시 부루퉁한 얼굴이 된 나를 엘라임이 슬쩍 한번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가게요?" 나도 따라서 일어나며 묻자 엘라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 수업은 끝났으니 이만 가련다. 식사는 조금 있다가 운다인을 통해 보내마. 아아, 그리고 요리책은 네 엄마 서재 책상 위에 올려놨으니까 요리도 못하면서 혼자 끙끙대지 말고 한번 읽어 보도록 해.] "예? 아, 예." 내가 기껏 예의 바르게 대답을 했건만, 엘라임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만, 놀랍게도 그의 몸이 물기둥으로 변하더니 바닥으로 스르륵 내려 앉는 거였다. "뭐, 뭐야?" 엘라임이 오고 가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나는 그런 당혹스러운 모습에 입을 쩍 벌리고 엘라임의 몸이었던 물기둥이 내려앉은 탁자 넘어로 가보았다. 그런데 더욱 더 놀랍게도 그 곳에는 내 키보다 더 큰 물기둥이 내려앉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물은 커녕 물에 젖은 흔적 조차 남아있지 않은 거였다. "허... 이게 바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하는 거지? 인간이 아니라서 이럴 수 있는 건가?" 머리를 긁적이며 소파에 앉는데, 탁자 위 한쪽에 잘 모셔 놨던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친 엄마가 나에게 보냈다는 그 편지를 보자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 두근 거렸다. 엘라임도 가버렸겠다, 나도 이제 이곳 글을 읽을 줄 알겠다, 편지를 읽는데 방해할 요소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편지를 집으려고 뻗는 손이 바르르 떨리고, 편지를 집는데 엄청 오래 걸리는 듯 했다. 거기에다 편지를 내 앞에 끌어다 놓고도 손도 무지 떨리고 두근 두근 대던 심장이 이제는 막 쿵쾅쿵쾅 거려 도저히 편지를 펼칠 수 가 없었다. "어휴, 내가 왜 이렇게 떨리지? 이거 참... 남자에게 고백 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어휴...." 도저히 안되겠어서 나는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하고 편지를 잡았다. 맨 위에는 아까 엘라임이 말해준 대로 '사랑하는 미래의 내 아이에게...' 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왜 봉투에 안 넣었지? 이러니까 그냥 쪽지 같잖아?" 너무 떨리는 심장을 조금이나마 안정 시키고자 실 없는 소리를 하며 곱게 두번 접힌 종이를 펼치자, 드디어 친엄마가 나에게 쓴 글자들이 들어났다. [ 사랑하는 미래의 내 아이에게.... 에휴, 편지라는 거 처음 써보는데 이거 참 쓰기 어렵구나. 이것도 벌써 몇 번째 쓰는 편지인지 모르겠다. 부디 이번 편지는 끝까지 쓸 수 있기를 바라며 시작할께. 우선은, 너에게 미안하다는 말 부터 하고 싶구나. 나는 네가 딸인지 아들인지 아직 모르겠거든? 으음, 하지만 이름은 지어 놨어. 딸이면 버지니아, 비앙카, 엘리아나 이고 아들은 알렉, 클레이튼, 휴 아하하하, 이름이 세개씩이니까 이상하지? 사실... 처음에 생각한 이름들은 너무나 많은데 그 중에서 추리고 추린거야. 하지만, 이 세개의 이름 중 뭘 할지는 도저히 정할 수가 없어서 말야. 그러니 네가 맘에 드는거 하나 고르렴. 미안... 이름 같은 건 내가 정해줘야 하는데 말야. 그래도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우아하고 예쁘고 멋진 이름들만 골라 놨으니까 이걸로 봐주라, 응? 내 아이는 마음씨도 예쁘니까 엄마를 용서해주길 바래. 으음... 너에게서 엄마란 소리 한번만 들어 봤으면 원이 없겠는데... 하기야, 네가 세상에 태어나주는 것만 해도 나에게는 너무나 큰 축복인데, 엄마가 너무 욕심을 부리는 구나. 엄마는... 널 보지 못할 거야. 네가 태어나는 즉시 엄마는 사라질 거거든. 왜 그런지 이유는 묻지 말아주길 바래. 단지, 널 위해서만 그랬다고 알아줬으면 좋겠어. 아, 그렇다고 죄책감을 가지라는 건 절대 아냐. 혹시라도 네 아빠가 그런 소리를 했다면, 내가 하늘에서도 가만 안 있을 거라고 전해줘. 나는 널 무척 사랑한단다. 비록 널 보지는 못하겠지만, 지금 내 뱃속에 있는 널 느끼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오르고 너무 너무 행복해. 내가 없더라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세상은 아름다운 거라고 여겼으면 좋겠고, 멋진, 아니면 아주 예쁘고 마음씨 착한 네 반려를 만나 아들 딸 낳고 오손도손 살았으면 좋겠어. 바로 나 처럼 말야. 끝으로, 혹시라도 네 아빠가 널 살갑게 대하지 않더라도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 아빠가 쑥스러움을 잘 타거든. 그래서 따뜻한 말 한마디나, 로맨틱한 말 같은 건 낯간지러워서 죽어도 못해요. 하지만, 마음씨만은 누구보다도 따뜻한 분이란다. 널 무척 많이 아껴주실 거야. 난 그렇게 믿어요. 그럼, 행복하게 잘 살거라. 비록 얼굴도 못 본 엄마라고 해도, 하늘 나라에서 늘 널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해주렴. 추신 : 내 반지를 너에게 남기마. 이건 엘프이신 네 외할머니께서 나에게 물려준 반지인데, 마법 반지야. 네가 마법사라면 큰 도움이 되겠지? 여기에는 3서클의 마나를 저장할 수 있고, 마법도 한가지를 부여해놓을 수 있단다. 물론 3서클이 한계이긴 하지만,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혹시라도 네 외할머니를 만난다면 네가 누구인지 알려줄 증거품이기도 하지. 추신 2 : 아, 그러고보니 내 이름과 외할머니 이름을 안 알려 줬구나? 내 이름은 주디스 오스번이란다. 네 외할아버지 성이 오스번이었거든? 그리고 네 할머니는 페라쉬야. 엘프라서 성은 없어. 나중에 할머니 만나거든, 엄마는 행복하게 살다가 잠들었다고 전해주렴. ] 엄마라는 분은 밝고 명랑한 분인 듯 했다.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두 눈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 떨어지는 거였다. "아, 아하하하..." 나는 오랫동안 소파에 앉아서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며 실실 웃어댔다. 제 4화 엘라임의 교육 (3) 다음 날 아침, 내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른 시각에 아무런 언질도 없이 불쑥 찾아온 엘라임은 달게 자고 있는 날 깨우지도 않은 채 그대로 들어 올려 집 밖의 바다 속으로 던져 버렸다. '우갸갸갸~~!!' 잘 자다가 갑자기 물 속에 던져진 경험을 과연 이 세상 사람들 중 몇몇이 가지고 있을까? 나는 순간적으로 죽는 줄 알았다. 다행이 엘라임의 명을 받은 것인지, 처음 보는 물의 정령이 기다리고 있다가 얼른 내 입과 코를 막아줘서 살았지, 그렇지 않았다면 얼결에 바닷물을 폐 깊숙이 들이 마시고 익사했을 것이다. 그 정령은 내가 잠에서 깨어 정신을 차릴 때까지 날 보호해주다가 내가 똑바로 서게 되자 그제야 손을 놓고 물러났다. '아, 정말 고마워. 그런데 넌 누구지?' 나는 엘라임의 명을 받았던 - 그러리라 짐작은 되었지만 - 안 받았던 일단은 날 도와준 거니 그 정령에게 생긋 웃으며 감사의 말을 건넸다. 그 정령은 운다인 (물의 중급 정령) 보다 조금 더 큰 몸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보아 온 물의 정령들이 사람의, 그것도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반해, 그 정령은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어다. 단지, 물 속에 있는데다 몸이 파랬기에 물의 정령이라는 것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런데 운디네 같았다면 꺄르르 웃으며 그 인사를 그냥 받아들였을 텐데, 운다인은 오히려 심히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누구 십니까?] '에?' 저음임에도 불구하고 맑은 느낌을 주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냥 같이 웃어주거나 고개를 끄덕여 내 감사의 인사를 받을 줄 알았지, 이렇게 직설적인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던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버벅거렸다. '에... 그러니까.. 뭐라 말해야 하나?' 그런 나를 대신하여 그 정령이 자신의 느낌을 꺼냈다. [당신은... 엘프의 피가 섞인 인간인 것은 알겠습니다. 정령의 기운이 강하게 뿜어져 나오기에, 단지 당신을 뛰어난 정령술사라 여겼지요.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정령술사라 하더라도 정령들이 대화하는 법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우리 정령들 처럼 나에게 말을 건네시는 군요. 당신은 누구시죠?] '그러니까 말이지...' 나는 더더욱 당황하며 - 왜 당황되는지는 모르겠지만 - 설명하려는 찰나, 내 말을 끊고 어느새 나타난 엘라임이 대신 설명했다. [내 아들이야.] '딸이라니까요.' [네가 어딜 봐서 여자냐? 인간은 여자가 아닌 이상 다 남성으로 지칭하잖냐. 그러니 아들이지.] '글쎄, 그래도 저는 지금까지 여자로 컸다고요. 그러니 딸이예요.' [시끄러, 앞으로 남자가 될지 여자가 될지 아님 영원히 중성으로 살다 죽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들이야. 나중에 여성이 되면 그때 딸이라고 해줄게.] '그러는게 어디 있어요?' [시끄러, 내가 아들이라면 아들이야.] '딸이라니까요.' [아, 정말 누굴 닮아서 이렇게 고집불통인게냐?] 그때 옆에서 조용히 나와 엘라임의 설전을 지켜보고 있던 그 늑대 모양의 정령이 슬며시 끼어들었다. 처음에는 대화가 끝나길 기다린 모양이었지만,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무례를 무릎쓴 듯 했다. [정령왕님이시여...] 그러자 엘라임은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주의를 그 정령에게로 돌렸다. [뭐냐?] [궁금한 것이 있어 감히 당신께 여쭙겠습니다. 저 분이 아드님이시라고요? 하지만, 정령은 후손을...] 그러자 엘라임이 뭔 질문인지 알아챈 듯 손을 들어 그 정령의 말을 끊었다. [그래, 그래 후손을 생산할 수 없지. 하지만 인간들의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지. 예외 없는 법은 없다. 이 애가 바로 그 예외에 속해. 이 애 엄마가 그렇게 만들었지. 이 애의 절반은 내 기운으로 만들어진 거야.] [그렇습니까? 그래서 이 분에게서 당신의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군요. 저는 또 당신의 새로운 맹약자가 나탄 줄 알았습니다.] 그러더니 그 늑대는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까 저에 대해서 물으셨지요? 저는 물의 상급 정령 엔다이론 이라고 합니다.] '헤에... 당신이 물의 상급 정령이군요.' 운디네가 어린 아이이고, 운다인이 이제 막 소녀 티를 벗은 처녀의 느낌이라면, 엔다이론은 한층 더 발전하여 세상 일에 어느정도 익숙해진 듯한 장년의 기운이 느껴졌다. 인간으로 치면, 한 3, 40대의 느낌이랄까? '혹시... 나이트는 세상 다 산 노인들의 느낌이 드는 거 아닌가 몰라.' 나는 내 생각이 그대로 의지가 되어 정령에게 전달된다는 걸 잠시 깜빡 하고 속으로 그렇게 중얼 거렸다. 그러자 엔다이론이 빙그레 - 늑대가 웃어 봤자지만...- 웃으며 말했다. [저를 그렇게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최상급인 나이트 정령들은 아마 저와 비슷한 느낌일 겁니다.] '에, 그, 그래?' 그제야 내 생각이 읽혔다는 걸 깨달은 나는 얼른 그렇게 얼버무렸지만, 순간적으로 화들짝 놀라 당혹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에휴, 빨리 정령들의 대화법을 알아내야지, 심장 떨려 못 살겠다.' 그렇게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는데 엘라임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래, 부디 빨리 좀 그래다오. 너무 둔한 네 녀석이 창피해서 딴 정령들 앞에 내 아들이라고 내 놓을 수 있겠냐?] '딸이라니까요.' [아, 시끄러. 앞으로 나는 계속 아들이라고 할 거야. 어쨌든, 그래서 내 귀찮지만 오늘부터는 네가 정령의 능력을 자각하도록 교육 시킬 생각이다.] '정령의 능력이요?' [그래, 얼마나 미숙하고 덜떨어졌으면, 대화하는 것도 못해서 생각까지 의지로 표출하게 만드냐? 그러니 빨랑 빨랑 능력을 자각하는게 너도 편하고 나도 편하고, 안 그래? 그래서 이 몸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왜 잠에서 깨기도 전에 바닷 속에 처박혀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잠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딸내미를 바다 속에 쳐 넣은게 그 교육이란 말이죠?'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해 화를 낼 타이밍을 놓쳐버린 나는 펄펄 뛸 수도 없어 엘라임을 찌릿 노려보며 말했지만, 그런거에 눈썹 하나 까딱 할 엘라임이 아니었다. [흥, 그래. 그래서 불만이냐? 그럼 네가 정령의 능력을 자각 해.] '쳇....' 그렇게 나오니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입을 꾸욱 다물고 있자 - 물론 바다 속이라 입은 계속 다물고 있었지만...- 엘라임이 승리의 미소를 살짝 지으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넌 정령의 기운 조차 감지하지 못하잖냐. 그건 아마도 네가 살었던 세계에서는 정령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어서 네 능력에 대한 자각이 둔화된거라 생각해. 그러니, 그 감각을 다시 깨우치려면 정령이 많은 곳을 자주 접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여겼다.] '에, 하지만 집에도 정령들은 많을 걸요? 정령을 접하는 거라면 집에서도 충분한데 뭐하러 바다 속으로 들어와요?' 내가 불만 어린 어조로 반박하자 엘라임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치켜 올라갔다. 그에 내가 얼른 불만 어린 표정을 풀자 그제야 설명을 계속 했다. [물론 집에도 공기의 정령이 있긴 하지. 하지만, 거기는 너무 적은 공간이라 중급 정령조차 없잖느냐? 게다가 넌 나, 물의 정령왕의 기운을 타고 났으니 이 세상에서 물의 정령이 가장 많이 존재하는 바닷속이 네 감각을 조금이라도 빨리 깨우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여겼다.] '흐음.... 무지 일리있는 말이네요. 그런데, 바다 속을 그냥 돌아다니기만 하면 되요?' 가만 듣고보니 정말 맞는 말 같아 수긍하며 묻자 엘라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건 나도 몰라.] '에?' [내가 누차 이야기 했지만, 너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는 있을지 없을지 모를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다. 그러니 내가 너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딱 잘라 단언할 수가 없단 말이다. 단지 그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거지. 우선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해보는 거야.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시간은 많으니 한번 해보자고.] '헤에... 영감님이 이런 세세한 면도 다 있네요? 놀라워라...' 내가 새삼 다시 봤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자 엘라임의 인상이 팍 찌그러지더니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거센 물결이 생성되어 날 저 멀리로 휩쓸고 가버렸다. '우갸갸갸~~' 비명을 지르며 휩쓸려가는데 엘라임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자기 할 말만 전달해 왔다. [옆에 엔다이론을 붙여줄 테니 점심시간까지만 돌아다니다가 돌아 와. 아, 올때는 식량도 가져 오고. 이제는 내가 안 잡아 줄 거야.] '몇칠이나 잡아 줬다고 생색 내기느으으으은~~~ 아직 아침도 못 먹었느은데에에에~~~ 자식을 굶긴다아아아~~~' 그러고보니, 며칠 전에 엘라임에 나 보고 식량 마련하라고 바다 속으로 던져 넣었을때 강한 물결이 날 집에서 멀리 떨어뜨려 놨었는데, 그 것도 엘라임이 일부러 한 짓이었나보다. '어쨌든, 배고프다아아~~ 내일 부터는 아침 먹고 한다고 해야지이이~~' 물결이 얼마나 강한지 엘라임이 저 멀리 점이 되어 이제는 보이지 않는데도 나는 계속 휩쓸려서 떠내려 갔다. 제 4화 엘라임의 교육 (4) 얼마나 멀리 떠내려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한참이나 휩슬려 떠내려가자, 강한 물살의 힘이 조금씩 사그라 들다가 결국 사라져 나는 그제서야 겨우 물 속에 멈춰 설 수 있었다. '도대체 이 곳이 어디메냐?' 내가 살고 있는 집 근처보다는 삭막한 환경이었다. 해초와 물고기의 숫자가 훨씬 적은 대신 큼지막한 바위들과 골짜기, 절벽을 형성하고 있는 그 곳은 왠지 어두컴컴하고 음침한 곳 처럼 보였다. 혼자 있었다면 그 모습에 겁부터 먹었겠지만, 지금은 내 머리 위에 자리잡고 있는 나트라스와 옆에 엔다이론이 있어서 마음 한 구석이 든든했다. 비록 크기가 내 허리에도 미치지 못하긴 했지만, 그래도 상급 정령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들이 같이 있다고 해도 이 곳은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 아니었다. '으음... 우리 여기 있지 말고 딴데로 가자. 엔다이론... 이라고 했지? 내가 지금 방향을 잃어버려서 그러는데, 우리집이 어느쪽에 있는지 혹시 알아?' 그러자 엔다이론이 기다렸다는 즉시 앞장 서서 물을 헤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쪽입니다. 따라 오십시오.] '아, 응.' 엔다이론의 자신있는 태도에 나는 역시... 라고 생각하며 서둘러 마치 들판을 달리는 늑대처럼 물 속을 달리는 엔다이론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팔 다리를 휘저어 열심히 그의 뒤를 따르려고 해도 평지처럼 달리는 엔다이론의 속도를 따라가기는 무리였다. 엔다이론은 처음에는 한참 앞서 가다가 멈춰서서 내가 따라오길 기다리고, 또 앞서 가다가 멈춰 서서 날 기다리고 하더니, 결국 달리는 걸 포기하고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내 나름대로 엔다이론의 속도에 맞춰 가려고 열심히 허부적 대던 나는 곧 지쳐버리고 말았다. '헥, 헥, 헥, 헥....' 물론 정말로 쉰 건 아니지만, 너무 힘들어서 까딱 잘못하다 코로 물을 들이마쉴까봐 걱정된 나는 손으로 코와 입을 막은 채 속으로만 헐떡 거렸다. '헥헥, 아... 정말... 헥헥... 내 체력이... 헥, 이렇게... 헥, 약했다니...' 물 속에서 마치 개가 땅에 앉은 폼으로 동동 떠 있던 엔다이론은 내가 얼마 가지도 못해 헥헥 거리자 고개를 갸웃 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지금... 체력을 키우기 위해 운동 하시는 겁니까?] '헥헥, 엥? 헥, 그 무슨 물고기가 헥, 물에 빠져 죽는 소리야? 헥...' [그렇지 않다면, 뭐하러 육체를 이용해 물 속을 이동 하시는 겁니까? 이 곳은 집과의 거리가 꽤 되기 때문에 육체의 힘 만으로 돌아가려면,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엄청 힘드실텐데요?] 겨우 몸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던 나는 엔다이론의 말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저, 정말? 그렇게 멀리 떨어졌단 말야? 으윽.. 이 영감탱이가~! 나 아침도 못 먹었는데, 점심도 굶기려는 건가?' [점심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속도로는 오늘 하루 종일 가셔도 도착할까 말까 할 겁니다.] '허거거거.... 그게 사실이야? 젠장, 죽었구만... 이 무슨 날벼락이냐... 어휴... 아니 도대체 왜 이렇게 날 멀리 보낸 거야?' 그러자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하던 엔다이론이 다시 말했다. [식사를 못 하시는 게 걱정이라면, 빨리 가시면 될 거 아닙니까? 일부로 육체의 힘을 사용할 것 없이, 그냥 가시면 될텐데....] 그 말에 나는 엔다이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엔다이론, 혹시.. 정령의 힘을 이용하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하지만, 아까 영감님이 말했다시피 난 정령의 힘을 이용할 수 없어.' [정령의 힘을 일부러 사용하실 것 까지야 있습니까? 그냥 빨리 이동하시면 될 것을... 지금 자연스레 물 속에서 존재하시거나 아니면 저희 정령들과 대화하시는 것 처럼 말입니다.] '그것도.. 일종의 정령의 힘이잖아. 나는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못해.' 그러자 엔다이론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 이런 것도 못하신단 말입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대충 짐작하겠는데, 나는 17년 동안 인간으로 살아왔다고. 얼마 전까진 물 속에서 얼마 버티지도 못해 숨이 막혀 밖으로 나갔는걸?' [물... 속에서 숨이 막혀요?] 이젠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말했잖아. 인간으로 살아 왔다고... 그러니 물의 정령들이 물 속에서 이동하는 것 같은 그런 방법은 모르고 단지 인간들이 헤엄치는 방법만 알아.' 엔다이론은 물끄러미 날 바라보더니 조금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왜 정령왕님께서 일부러 당신에게 정령의 힘을 자각시키려고 하시는지 말입니다. 당신은 정령의 힘을 전혀 모르고 계셨군요.] '뭐... 그렇지.' 예전에는 그런 것 따위 모르던 말던 아무런 상관이 없었는데, 지금은 왠지 내 의무를 다 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라 되게 어색했다. 엔다이론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우선 물 속에서 이동하는 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지금 해인님의 속도로 간다는 건 아무래도 문제가 있으니까요.] 뭘 어떻게 하려나 싶어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엔다이론의 몸이 조금씩 조금씩 커지더니만 급기야는 그의 등 높이가 내 허리 높이까지 육박했다. '오~ 정령들은 자신의 크기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었나 보지?' [물이 많은 곳에 있거나, 아니면 정령을 이끌어 낸 정령술사가 많은 마나를 보유하고 있어야 가능 합니다.] '마나?' 전에도 엘라임에게서 그 단어를 들어본 것 같아 내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 거리자 엔다이론이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마나를 모르십니까?] '아아... 그게 말이지....' 내가 이 세상에 살지 않았다는 걸 어찌 설명해야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엔다이론이 날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는지 슬그머니 화제를 돌려 버려다. [뭐, 제가 설명해 드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인간들의 시각에서 설명하지는 못할테니, 나중에 인간들이 말하는 기초 마법서를 보십시오. 그럼 쉽게 설명되어 있을 겁니다. 그건 그렇고, 어서 제 등에 타십시오.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정령은 육체가 없는 일종의 영 상태라 아무리 엘라임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나라도 육체를 지니고 있는 이상 정령들을 만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타라고 하는 엔다이론의 말에도 나는 선듯 그 등에 타지는 못하고 슬며시 손으로 그 등을 만져보니 놀랍게도 엔다이론의 몸은 말랑말랑한 젤리 같은 느낌을 주며 내 손을 통과 시키지 않는 거였다. 그래서 슬쩍 그의 등에 올라타니 손과 마찬가지로 날 통과시키지 않은 채 거뜬히 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늑대의 모습을 한것과는 달리 뽀송뽀송한 털의 느낌 대신 약간 서늘하고 매끌매끌한 막의 느낌이 느껴졌다. '헤에... 이건 일부러 힘을 사용한 건가?' [그런 셈입니다. 자 그럼 출발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려 막 출발하려는 포즈를 취하려는 찰나, 나는 다급하게 엔다이론을 불렀다. '저기 말이지...' 그의 행동을 방해하는 것 때문에 무지 미안함을 느꼈지만, 엔다이론은 화를 내지 않고 평소와 같은 담담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 그게... 그 영감님이 올때 식량은 알아서 구해 오라고 했거든? 이왕 도와주는 거 물고기 한, 두마리만 잡아주지 않을래?' [.... 아무거나 잡으면 됩니까?] '아핫핫핫... 뭐.. 그렇지. 이왕이면 문어나, 오징어나, 꼴두기도 좋고, 아, 조개류도 좋은데...' [그럼 조개류로 잡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조개는 한 10개 정도가 되어야 하거든?' 왠지 내 자신이 무지 뻔뻔스럽다는 걸 느꼈지만, 나는 그냥 그대로 밀고 나갔다. 그렇지 않으면 집에 가서 틀림없이 굶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 그럼 이번에야말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엔다이론의 몸이 앞으로 이동하는데, 평지를 딛고 달리는 것 처럼 네 다리를 움직이며 앞으로 이동함에도 불구하고 엔다이론의 등에 탄 나는 조금의 진동도 느낄 수가 없었다. 마치... 기차를 탄 느낌이라고나 할까? 앞으로 달려가는 속도는 느껴지는데 위아래, 혹은 좌우로 흔들리는 느낌은 거의 나지 않는 거였다. 게다가... 엔다이론의 등에 타서 편하게 달려가니 기분이 무지 좋아서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에헷헷, 진작에 부탁할 걸...' 엔다이론의 목에 팔을 둘러 그의 몸에 내 몸을 밀착시킨 채 눈 앞을 휙휙 지나가는 바다 속 풍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 거렸다. 우리가 집에 도착한 때는 솔직히 어느때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배가 너무 고프다 못해 아프다가 아예 감각이 사라져버린 시점이었다. 엔다이론은 중급 정령인 운다인이 뚫지 못한 집 주위에 쳐진 결계를 가볍게 뚫고 뜰에까지 들어와 나를 내려줬다. 그런데, 내가 그의 등에서 내리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뒤쪽을 보는데, 거기에는 놀랍게도 언제 그렇게 긁어 모았는지 내 손바닥 만한 크기의 조개 10개가 물로 된 밧줄에 묶여서 끌려와 있었다. "어? 이거 조개 아니야? 언제 잡은 거야?" [이 곳으로 오는 도중에 보이길래 그 중 큰 것만 골라 잡은 것입니다. 이 정도면 식량으로 충분 한 것입니까?] "그러어엄~, 이야, 정말 고마워. 나는 부탁 해놓고서도 깜빡 잊고 있었는데 말야. 아, 잠깐만, 조개를 담을 그릇을 가져 와야겠다." [제가 옮겨 드리겠습니다.] 황급히 엔다이론이 나서는데 나는 두 손으로 그를 만류했다. "아냐, 아냐. 거기 있어. 나는 뜰에서 요리를 해먹거든. 필요한 재료를 가지고 나오려는 거야." 그러면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내가 현관문 바로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면서 엘라임이 걸어 나왔다. "흠, 제 시간에 맞춰 왔군. 역시 엔다이론이 도와준 거냐?" 뜰에 앉아있는 엔다이론에게 힐끔 눈길을 준 엘라임이 말을 건네왔다. "예. 저 혼자 도저히 올 수가 없어서 말이죠. 그런데, 너무 한거 아니예요? 어떻게 아침도 못 먹고 내쫓을 수가 있어요? 배고파서 죽는 줄 알았다고요." 대답하다보니, 아까 물결에 휩쓸려가며 처절하게 외친 것이 기억 난 나는 너무하다는 눈으로 그를 보며 따졌다. 하지만, 이런 내 말이 엘라임에게 먹힐 리가 없었다. "안 죽었잖아. 어쨌든, 빨리 먹기나 해. 다음 교육을 시작할 거니까." 순간 속으로 꽁시렁 꽁시렁 대고 싶은 기분이 마구 마구 솟구쳐 올랐지만, 속으로 말해봤자 엘라임이 다 듣는다는 걸 안 나는 꽁시렁 대는 대신 마음을 안정 시키는 주문을 외우며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가다. '참을 인, 참을 인, 참을 이이이인~~' 내가 잽싸게 조개를 구워먹고 엔다이론을 비롯한 나트라스와 카사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엘라임이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앞 탁자에는 물이 가득 담겨진 나무 컵이 놓여 있었다. "앉아 봐라." 그런데 날 교육 시킨다고 해놓고는 딸랑 물이 담긴 나무 컵 하나만 놓인 채 아무것도 안 가지고 있자 나는 어리둥절한 채 그의 맞은 편에 앉았다. 엔다이론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작아져서 내 옆 소파에 올라 앉았다. 엘라임은 내가 자리를 잡고 그가 뭔가 설명해주길 기다리고 있자 나무 컵을 내 앞으로 스윽 내밀었다. 나는 더욱 더 어리둥절해져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물... 마시라고요? 목 안 마른데...." 제 4화 엘라임의 교육 (5) 나는 더욱 더 어리둥절해져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물... 마시라고요? 목 안 마른데...." 내 말에 엘라임의 인상이 살짝 찡그려지는 순간, 나무 컵에 담겨있던 물 속에서 내 검지 손가락 만큼 가느다란 물줄기가 솟아 오르더니만 마치 손가락을 구부리는 것 처럼 끝이 살짝 구부러지더니 내 이마에 대고 튕겨졌다. 따악~ "아코~"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얻어맞은 나는 손으로는 이마를 감싸쥐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엘라임을 향해 항의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짓이예요?" 그러나 엘라임은 내 말에 오히려 날카로운 눈으로 날 쏘아보며 질책했다. "멍청하기는... 내가 너 물 마시라고 준 줄 알아? 너 교육 시키려고 준 거다." "그럼 설명을 해야 할 거 아니예요? 가타부타 말 없이 컵만 내밀면 내가 어떻게 알아요?" "설명 하려고 했어. 그런데 네가 설명도 안 듣고 지레 짐작 한 거잖아." "내가 상식적으로 틀린 생각 했어요? 그리고, 틀렸으면 틀렸다고 말해주면 되지 왜 때려요!!" 내가 하나도 안 지고 바락 바락 대들자 엘라임의 눈썹이 하늘 높이 치켜 올라가더니만, 곧 컵에 담긴 물에서 부터 아까 보다 두배는 더 굵은 물줄기가 치솟아 올랐다. 그게 곧장 나에게로 달려 들었기에 나는 물줄기에 맞지 않으려고 얼른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러나 이 물줄기는 내가 한번 피하면 순순히 물러갈 것이지, 치사하게도 내가 고개를 숙인 걸 이용하여 내 뒤통수를 내리쳤다. 찰싹~ 물론 가볍게 따린 거라 차갑다는 느낌 외에는 별로 아프지도 않았지만, 기분은 되게 나빴다. 그렇다고 다시 엘라임에게 바락 바락 대들자니 또 맞을게 자명했기에 나는 퉁퉁 부운 얼굴 그대로 입을 다문 채 불만 가득한 눈초리로 엘라임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쳇, 쳇, 쳇....' 그런 내 모습에 엘라임은 힐끔 노려보더니만 냉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땅바닥에 내던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 해라. 정말 버릇이 없다니까... 어쨌든, 방금 내가 사용한 수법이 바로 네가 익혀야 할 것이다. 물이 있는 곳에서 물을 다룰 수만 있게 된다면 정령의 능력을 대충 자각 했다고 할 수 있겠지." '물을 다룬다라....' 물을 다룰 수 있게만 된다면, 저 엘라임의 무지막지한 공격도 어느 정도는 커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엘라임이 마음만 먹으면 나 정도야 간단하게 다룰 수 있겠지만, 죽이려고 공격하지는 않으니까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물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된다는 점은 무지 매력적인 일이 아닌가? 비록 가르치는 자는 맘에 안 들지만, 그런 이유로 안 배우겠다고 뻐팅긴다는 건 바보 짓이었다. 게다가, 내가 안 배운다고 뻐팅겨봤자 엘라임이 가만 안 둘것도 자명했고 말이다. "어떻게 하는 건데요?" 내가 자세를 바로하며 진지하게 묻자 엘라임도 표정을 누그러 뜨리고 손을 컵쪽으로 향해 뻗었다. 그러자 이 컵이 엘라임의 손에 닿지도 않았는데 스르르 미끌어져 엘라임의 손에 닿는 지점까지 움직여 가는 거였다. 엘라임은 그렇게 가까이 다가 온 컵 속에 손가락을 집어 넣어 손가락 끝이 약간 물에 잠기게 하더니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물이 엘라임의 손가락에 찰싹 달라 붙어서 가느다란 물기둥을 형성하며 올라가는 거였다. "우와...." 언제봐도 신기하고 경이로운 그의 능력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데 엘라임의 설명이 들려왔다. "우선은 마음 가짐이 중요하다. 물이란, 우리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음... 왜 인간들 사이에도 그런 말이 있잖냐. 모체라고... 우리에게 물이란 그렇다. 물을 그렇게 여긴 다음에는 물에게 네 뜻을 정중히 부탁하는 것이다." "하지만, 물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부탁을 한다는 거죠?"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그러니까... 네 의지로써 물을 강제로 움직이려 하지 말고, 물이 스스로 네 뜻을 따라 주도록 만들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물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닌데...."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라니까? 음음.... 그래, 쉽게 설명하자면 마나를 네 의지로 움직여 물을 같이 움직이는 거지만, 그걸 강제로 하는게 아니라 흐름에 맡겨서 마치 네 수족을 움직이듯이 움직여야 하는 거야." 나는 엘라임과 엘라임의 손가락 끝에 매달려 있는 물기둥을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말인지는 이해가 가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또 멍청하다고 뭐라 뭐라 할 줄 알았던 엘라임이 의외로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정령의 기운도 느끼지 못하는 네가 알리가 있겠냐? 하나 하나 가르쳐 줄테니까 열심히 해봐." 그러면서 물을 도로 컵 안에 집어 넣은 엘라임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와서 엔다이론의 반대편인 내 오른쪽에 와서 털썩 주저 앉더니만 내 오른 팔을 잡아 들었다. "자, 힘을 빼고 느껴봐라. 손가락은 피고..." 엘라임의 주문에 따라 팔에서 힘을 빼고 손가락을 살며시 피자 엘라임은 또 다시 저쪽으로 간 컵을 오게 하더니만 내 손가락을 그 속에 담긴 물에 살짝 담궜다. 그러자 그 순간 내 팔을 잡고 있던 엘라임의 손으로 부터 부드럽고 시원한 기운 같은 것이 스르르 흘러 나오더니만, 내 팔을 타고 손가락 끝으로 가서 물 속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엘라임이 천천히 내 팔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컵으로 부터 떼어 내자 놀랍게도 아까 엘라임이 했던 것 처럼 내 손가락 끝에는 물이 찰싹 달라 붙어서 스르르 딸려 올라오고 있었다. "어? 어어어?" 그런데 엘라임이 내 팔에서 손을 떼자, 엘라임의 손에서 부터 흘러 나오던 그 신기한 기운 같은 것의 느낌이 사라졌고, 그 즉시 물은 내 손가락에서 떨어져 다시 컵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이게..." 나는 너무 신기한 나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말 하는 대신 물이 묻어 있는 내 손가락과 컵과 엘라임만 번갈아 가면서 바라 보았다. "아까 내가 네 팔을 통해 흘려 넣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냐?" "예? 아, 예. 그 이상한 기운 같은 거 말이죠?" 엘라임의 말에 나는 황급히 손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이 바로 내 기운이다. 너도 그러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 단지 네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해 맘대로 움직이지 못할 뿐이지. 그걸 움직일 수 있을 때 비로소 넌 물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엘라임의 말에 알겠다는 뜻으로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엘라임이 재차 말을 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쉽지 않겠지만, 네 기운을 전부 다 움직이라는 것도 아니고 아까 내가 했던 정도라면... 아주 적은 기운으로도 가능 한 거니까 우선은 그것 부터 해봐라. 조금 움직일 수 있게 된다면, 얼마 안 있어 전체를 다 움직일 수 있게 되겠지." 그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고 아까 엘라임이 했던 그 포즈 그대로 팔에서 힘을 뺀 채 손가락을 살짝 컵 안의 물 속에 담그었다. 그리고 엘라임이 내 팔을 통해서 흘려 보내 준, 내 몸속에도 있다는 그 기운을 일으켜 보려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우선 느껴야 일으키고 말고 할 것이 아닌가? 마치 무협지에서 내공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기분으로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히고 내 몸속에 있을 그 기운을 찾기 위해 온 몸의 감각을 집중했다. 하지만...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났어도 느껴지는 건 하나도 없었고, 힘 없이 들어 올리고 있는 팔만 아파왔다. "쳇...." 엘라임이 해줄때는 너무 쉽게 되는데다, 아주 조금의 기운만 있어도 된다길래 금방 해낼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이건 아예 감도 잡히지 않자 나는 무지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엘라임에게 이 기분을 말하려고 눈을 떴는데, 내 곁에 있던 엘라임은 어느새 가버렸는지 아무데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엔다이론만이 내 옆에 편히 누운 폼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이거 참.... 어떻게 해야 할지...' 가만 생각해보니, 난 아직 내 몸 속에 있는 기운을 느낄 수도 없으니, 물 속에 손가락을 넣기 전에 우선 기운 부터라도 느끼는 게 좋을 듯 했다. 그래서 무협지에서 흔히 나오는 - 무협지를 너무 많이 본 탓에 그에 물든 것 같았다. - 내공을 쌓거나 도를 닦을때 흔히 하는 폼인, 소파에 양반 다리를 하고 두 팔은 자연스레 손바닥은 하늘을 향해서 포갠 다음 배꼽 앞에다 가져다 놓은 다음, 허리를 꽂꽂이 편 채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뭔가 느껴질 줄 아았건만, 뭔가 느껴지기는 커녕 졸음만 다가왔고, 애써 꽂꽂이 편 허리와 등줄기까지 아파와서 나는 자세를 풀고 소파에 푹 등을 기댔다. '에휴... 안되네....' 물론 내가 그런 태도를 한지 한시간은 커녕 30분 조차도 안 흘렀지만, 애초에 도장 같은 데 가서 정좌도 안 해본 내가 이런 포즈로 뭔가를 느끼기란 사실상 어려운 일이었을 거였다. 게다가, 17년을 살아오면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 기운을 갑자기 느끼는 것도 어려울테고... 물론 이런걸 알고 있지만, 도대체 기운을 느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감 조차 잡히지 않는 나는 막막하기만 했다. '어쩐다....' 한숨만 푹푹 쉬면서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엔다이론이 어느새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는지, 앉은 자세가 되어서 슬그머니 말을 건네왔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어? 엔다이론이? 물론 도와주면 고맙지. 아, 내가 왜 너에게 도와달라고 할 생각을 못했지?" 그라면 상급 정령이니 무슨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혹시, 내가 기운을 느끼게 할 만한 좋은 방법이 없을까?" 엔다이론은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아무 말 없이 살짝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잠시 후에야 눈을 뜨고 날 바라보았다. [이게...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뭔데?"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무협지를 따라하는 상황에서 엔다이론이 제시한 방법이라면 뭐든 다 해볼 작정이었다. 솔직히 나로써는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아닌가? [제가 제 기운을 뿜어보이겠습니다. 혹시 제가 뿜어내는 기운을 온 몸으로 맞으시면, 몸 속에 있는 기운이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니면 제 기운에 밀려서라도 움직이지 않을까 해서 말이죠. 그럼 그 움직임을 포착하시면 될게 아니겠습니까?] "오오~" 그것 또한 무협지에서 읽어본 말이었다. 뭐, 영약을 먹어 몸 속에 기운이 잠재되어 있다가 큰 상처를 입으면 이 기운이 움직여 몸을 치료한다던지, 아니면 엄청난 내공의 고수가 내공 약한 사람의 몸 속에 내력을 불어 넣어 움직인다던지 하는게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역시.. 무협지도 읽어두면 쓸모가 있는 거였어.' 제 4화 엘라임의 교육 (6) '역시.. 무협지도 읽어두면 쓸모가 있는 거였어.'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엔다이론과 나는 소파를 벗어나 거실의 공간에서 서로간의 간격을 적당히 잡고 마주보는 상태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엔다이론이 신중한 표정으로 말하자 나 또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다. "응, 잘 부탁 해." [혹시 견디기 힘드실지도 모르니 처음에는 약하게 뿜도록 하겠습니다.] "알았어." 우리 집에서 같이 사는(?) 정령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받으며 엔다이론은 온 몸을 살짝 경직 시켰다. 그러자 그로 부터 조금씩 조금씩, 공기를 타고 바람은 아니되 시원한 기운이 나에게로 흘러오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마치 산들 바람 처럼 부드럽고 약하게 다가오다가 조금씩 조금씩 그 강도가 점점 강해졌다. 이것이 바로 엘라임과 엔다이론이 말하는 정령의 기운이라는 걸 느끼며 나는 혹시라도 엔다이론의 기운에 의해 내 몸속의 기운이 움직이지는 않는지 촉각을 곤두 세웠다. 그러나 엘라임이 내 팔을 통해 흘려 보낸 기운 보다 조금 더 강할 정도의 기운을 엔다이론이 내뿜어 보내는데도 불구하고 내 몸 속에 있는 그 정령의 기운이 움직이기는 커녕, 내 몸은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으음... 강도를 조금만 더 올려 볼래? 아직 아무것도 안 느껴지네..." [알겠습니다.] 엔다이론의 대답과 함께 그에게서 뿜어지는 기운이 한층 더 강해졌다. 이게 하급 정령들은 견디기 힘든 정도였는지 주위에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던 정령들은 물론, 내 머리 위에 자리를 잡고 있던 니트라스와 근처에 있던 카사까지 내 곁에서 멀찍이 떨어져 거실 구석으로 밀려가는 거였다. 그런데도 내 몸 속에 있다는 그 기운은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이그... 엘라임에게서 받은 기운이라 혹시 성격도 엘라임 같은 거 아냐?' 덕분에 엔다이론은 뿜어내는 기운의 강도를 한층 더 강화했고, 그래서 우리가 있는 거실에는 하급 정령들이 버티질 못해 모조리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고도 두번에 걸쳐 더 강도를 높였는데도 불구하고, 내 몸속의 그 엘라임 같은 기운은 조금도 움직이질 않았고, 결국 내가 엔다이론이 뿜어내는 기운을 견디지 못해 뒤로 날려가 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내가 바닥에 닿기 전에 엔다이론이 먼저 몸을 날려 날 잡아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엘라임이 아닌 엔다이론에 의해서 바닥에 내동댕이 쳐질 뻔 했다. [으음... 결국 실패 했군요.] "그러게... 아니 내 몸이 견디지 못할 정도의 강한 기운이었는데 왜 움직이지 않는 거지? 이거 참, 혹시 내 몸속의 기운은 내 몸이 망가져도 별로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게 아닐까?" [하.하.하... 그럴리가 있습니까?] 엔다이론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며 부정했다. 물론 나도 내 말이 황당하다는 건 알았지만, 워낙 답답해서 한번 해본 말이었기에 엔다이론이 부정하는 거에 뭐라 토를 달지는 않았다. "으음... 아무래도 나중에 영감님이 오면 물어봐야겠어." [영... 감님이라뇨?] 아무 생각 없이 혼자 중얼거린 말에 엔다이론이 의아함을 품고 물고 늘어지자 나 또한 의아해져서 그를 바라봤다. "응? 왜?" [방금.. 영감님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그게 왜?" [누굴... 영감님이라고 지칭하신 겁니까?] "누구긴 누구야. 정령왕 밖에 더 있어?" [하지만... 영감이란 인간들 사이에서 혈연이 없는 나이 많은 남자를 지칭하는게 아닙니까? 그런데 왜 정령왕님께 그런 칭호를 붙이시는 거지요? 정령왕님께선 당신의...] 나는 엔다이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급히 손을 들어 올려 제지했다. "아아, 거기까지. 미안...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지만, 나는 17년 까지 인간 양부모님 밑에서 자랐거든. 그 분들은 날 친 자식처럼 대해주신 분들이라 그분들 외에 다른 자에게 부모의 명칭을 붙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 뭐, 엘라임은 엄청 오래 살았다며? 그럼 영감이란 소리 들어도 할 말 없지 뭘 그래?" [그래도....] 엔다이론은 내 말을 반박하고 싶어 했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기에 다시 한번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 "미안... 엔다이론, 이건 내 개인적인 문제니까 너무 뭐라고 하지 말아줄래? 그리고 영감님도 그냥 묵인해주고 있잖아." 아마 엘라임은 내가 영감님이 아닌 엘라임이라고 불러도 아무 상관 안 했을 거였다. 단지 내가 내 친모를 엄마라고 부르기만 했다면 그것으로 족했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내가 극구 엘라임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은 이유는, 지금은 엘라임에 대한 감정이 조금은 희석되었을지 몰라도 아직은 그에 대한 감정의 색이 미움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내 부모 하면 망설임 없이 떠오르는 분들은, 한국에서 날 기다리고 계실 그 두 분이었다. 물론, 친모도 날 무지 사랑하셨다는 건 알지만, 엘라임은... 아무래도... 영....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나중이면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말이다. 그렇다고 엘라임, 엘라임 하고 이름 부르는 것도 뭣해서 생각해 낸 것이 '영감'이라는 지칭이었다. 평소에는 '영감님', 화가 났을 때는 '영감탱이' 엔다이론은 내 단호한 태도에 더 뭐라 하지 않고 그냥 입을 다물었지만,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눈빛만은 지우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내 생각을 바꿀 마음은 없었기에 나는 그냥 모른 체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하고 우리 물고기나 잡으러 가자. 아아, 아까 조개 맛있던데 이번에도 또 그거나 잡을까나?" 다음 날, 나는 잠자리에서 채 일어나기 전에 엘라임의 기습을 받고 또다시 바다 속으로 내동댕이 쳐져야 했다. 그러나, 전날 한번 당했던 터라 나는 금방 정신을 차린 채 엘라임에게 바락 대들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예요? 보낼 때 보내더라도 아침은 먹을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니예요?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더 곱다는 말도 몰라요?' [내가 5000년을 살아 왔지만,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 어여 갔다 오기나 해.] '쳇,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도 있다고... 컥! 켁, 켁...' 나는 아침을 굶을 수 없다는 집념 하나로 다시 한번 엘라임에게 대들었다가, 일찍 일어나 먹이를 잡기 위해 우리 집 근처를 헤엄쳐 지나갔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재수없이 엘라임에게 붙잡힌 물고기가 입 속에 쑤셔 박히는 경험을 해야 했다. 산 물고기를 머리 부터 입 속에 넣어 파닥파닥 거리는 걸 느껴본 경험은 정말 할게 못됐다. 얼마나 놀랐는지 나는 하마터면 코로 숨을 쉴 뻔했고, 두번째로 그 물고기를 통채로 삼킬 뻔 했다. 그랬으면 아마 목에 걸린 파닥이는 물고기의 몸부림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행히 내 옆에 있던 엔다이론이 얼른 내 코를 막아주고 물고기를 잡아 입에서 꺼내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난 이번에는 물고기가 목에 걸려 죽던지 아니면 익사했을 거였다. '아, 정말 나 죽이려고 작정 했죠!!' [시끄러. 기껏 아침거리 잡아 줬더니 뭔 불만이 그리도 많은 거냐?] '살아 있는 걸 어떻게 먹어요? 회 뜨는 법도 모르는데... 초고추장이 있다면 또 몰라....' 나는 엔다이론에게 잡혀 있는 물고기를 건네받아, 이왕 잡은 거 놓아주기는 아까워서 집 마당에다 던져 놓으며 투덜 거렸다. '거 그 물고기 좀 부엌에 가져다 놔주세요. 이왕이면 냄비에 바닷물 붓고 거기에 넣어 주세요.' [뭐, 뭣?] 엘라임이 너무 어이가 없는지 말까지 더듬으며 노려봤지만, 난 태연하게 말했다. '아, 딸내미 아침 굶기면서 그 정도도 안 해줄 거예요? 그러면서 어떻게 보호자로 자청할 수가 있어요? 어쨌든, 잘 부탁해요.' 그리고는 잽싸게 몸 돌려 튀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엘라임에게 붙잡힌 재수 없는 물고기가 바닷물을 뚫고 날아와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퍼억 '우갸갸갸~~' 그 재수 없는 물고기는 나와 부딪힌 충격 때문인지 기절한 채 물에 동동 떠다녔고, 그걸 엔다이론이 회수하여 다시 결계 안쪽에다가 가져다 놓으며 물었다. [도대체... 정령왕께서 가만 계시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 왜 그러신 겁니까?] 엘라임은 식식 거리며 집안에 들어갔기에 엔다이론이 편히 나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거였다. '아침까지 굶기는 저 사악한 보호자 말을 고분 고분 듣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지.' [하지만, 그러시면 그에 대한... 응징이 가해지시지 않습니까?] '그냥 편히 얻어 맞는다고 그래. 한 두번 맞은 것도 아니고... 내가 저 영감탱이에게 얼마나 많이 맞았는 줄 알아? 전에는 침대에 있는 날 물로 후려치는 바람에 난 물줄기에 얻어 맞는 것도 모자라 날려가서 벽에 부딪혀야 했다고. 이 정도면 그때에 비해 약소한 거야.' [그렇다 해도... 응징을 받을 걸 아시면서 그러시는 건...] '고분 고분 말 듣는 것 보다 훨씬 나으니까. 이렇게라도 안 하면 난 속이 터져 홧병으로 죽고 말 거야. 내가 정령의 기운을 자각해 물을 다룰 수 있게 되면, 그때는 영감탱이의 공격을 막을 수도 있겠지? 그때를 바라보고 지금 이 고생을 견디는 거라고.' 그러자 엔다이론의 길쭉한 입의 끝이 싸악 말려 올라가면서 이빨을 살짝 드러냈다. [훗... 그거 아십니까? 해인님은 정령왕님의 성격을 그대로 빼다 박으셨다는 걸....] '에엑... 끔찍한 소리 하지마. 내가 저런 사악한 마왕 같은 영감님의 성격과 같다고? 어디가? 난 영감님에 비하면 성자 같은 성격이라고.' 제 4화 엘라임의 교육 (7) 그 날도 엘라임의 횡포(?) 때문에 아침을 굶은 채 바다 속을 돌아다니다 온 나는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다시 엘라임과 마주 앉아야 했다. 내가 거실에 들어와 소파에 앉을 때 까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엘라임은 어제 엔다이론과 같이 노력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성과가 없었다고 이야기 해도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인 채 그냥 넘어가더니만, 뭔 생각이 떠올랐는지 엔다이론이 주었던 도움에 관심을 나타냈다. "엔다이론이 도와줬다고?" "예. 결국 별 소용이 없었지만요..." "흐음... 어떤 방식이었지?" 이번에는 내가 아닌 엔다이론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로 시작된 그의 세세한 설명을 잠자코 듣고 있던 엘라임은 설명이 끝나자 의외로 눈을 빛내며 엔다이론과 나를 바라보았다. "호오... 그거 참 괜찮은 생각이로구나." "에? 하지만, 어제 엔다이론이 해줬는데도 별 소용이 없었다니까요." "아니야. 내 생각에는 엔다이론이 뿜어냈다는 기운이 네 몸을 위협할 만큼 강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 "엑? 강하지 않다니요? 제가 그 기운에 밀려서 뒤로 날려갔었는걸요?" 내 말에 이어 엔다이론도 거들고 나섰다. [그렇습니다. 그 기운이라면 보통 인간은 견디지 못하고 크게 다치거나 사망에 이를 겁니다.] 엔다이론의 말을 듣던 나는 두 눈이 둥그래졌다. 솔직히 어제 엔다이론의 기운이 강한 것은 느꼈지만, 죽을 뻔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기운이 보통 인간은 견디지 못할 정도로 강했다는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엘라임은 고개를 저었다. "쯧쯧, 물론 보통 인간이었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내 아들은 보통 인간이 아냐. 위대한 나 물의 정령왕의 아들이라고. 그런데 네가 뿜어내는 그 정도에 위협을 느꼈을 것 같아? 천만의 말씀. 비록 저 녀석이 체력이 좀 약해서 기운에 뒤로 밀리긴 했지만, 그거 외엔 멀쩡했을 껄?" "에... 물론 엉덩방아를 찌을 뻔 한거 외엔 별 다른 이상도 없었지만... 어제 그 기운이 대단한거로 느껴지지 않았는데요...." 아무래도 믿겨지지 않아 고개를 갸웃 거리며 말하자 엘라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네가 보통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 거라니까? 그리고 그 정도도 못 견디는 녀석을 어찌 내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제는 딸이라고 반박하는 것도 귀찮아졌다. 그냥 너는 아들이라고 해라, 난 딸이라고 여기련다... 라는 심정일까? [그럼, 오늘 다시 한번 제가 도와드릴까요? 으음... 하지만, 어제보다 강도를 조금 높이면 해인님이 또 견디지 못하고 뒤로 날려가실텐데요.] 나와 엘라임이 잠시 입을 다문 사이 엔다이론이 조심스레 입을 열며 끼어들자 엘라임이 의외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엘라임이 알았다고 고개만 끄덕이고 그냥 가버릴 줄 알았던 것이다. "아니다. 오늘은 내가 한번 해보마." '왠일이야...?' 엘라임 같지 않은 행동에 내가 고개를 갸웃 거리는데 비해 엔다이론의 두 눈은 휘둥그레 떠졌다. [저, 정령왕님께서 말입니까? 저어... 그냥 제가 하는 것이...] 엔다이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엘라임은 생각을 굳혔는지 듣지 않았다. "됐다. 내가 한번 하는게 확실하지. 자, 그럼 지금 곧장 시작해 볼까?" 그러자 엔다이론이 다시 한번 만류했다. [저... 정령왕이시어... 지금 해인님은 막 식사를 하셨는데 그냥 시작한다는 걸 좀... 하시더라도 조금 있다 하시는게 어떠실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엘라임이 엔다이론의 만류를 받아들였다.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그래, 그것도 그렇군. 그럼 한시간 정도 후에나 할까?" 도대체 엘라임이 하는게 어떻길래 엔다이론이 저러나 의아했지만, 항상 엘라임을 대할 때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 라는 속 편한 생각을 저 밑에 깔고 있던 나는 이번에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며 그냥 아무 생각없이 넘겨 버렸다. 이 무신경한 생각이 '날 많이 생각해주는 엔다이론이 만류할 정도였으니 뭔가 있다는 걸 눈치 챘어야 했는데...' 하고 땅을 칠 정도의 엄청난 후회로 뒤바뀌는 건 일이 다 끝난 뒤었다. 그때는 이미, 버스가 지나간 뒤에 손 든 격이었다. 엔다이론은 엘라임에게 한시간 후에 시행 - 이렇게 말하니까 되게 거창한데... - 하겠다는 말에 잠시 친구좀 만나고 오겠다며 황급히 자리를 떠나 버렸다. 이때가, 내중에 생각하면 뭔가 이상함을 눈치 챌 마지막 기회였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또 다시 무심히 넘어가 버렸다. 대신 그 한시간 정도 되는 시간을 엘라임에게 궁금했던 점을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알차게 보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랄까? "저겨, 제가 가지고 있는 그 정령의 기운이 마나라면서요?" "마나라고 할 수 있지. 물의 기운을 가진 마나." "그래요? 저기, 내가 책에 보니까 마나라는 걸 가지고 있으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서요?" 내가 이 바다 속에 있는 집에 콕 박혀 사는 동안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역시 이 곳의 언어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나는 심심하면 친엄마의 서재에 가서 이것 저것 뒤적이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엄마가 마법사라는 것에 흥미를 느껴 기초 마법서도 조금 읽어 봤던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흥미가 생겨서 읽기 시작했지만, 원래 전공 서적의 문체가 다 그렇듯이 재미 없는 설명에다가 점점 지루해지기 시작해 나중이라는 기약을 하고 채 반도 못 읽고 덮었지만, 그래도 아주 쬐금은 마법에 대해서 알게 되었던 것이다. 도대체 엄마는 왜 일반 소설 같은 책들은 안 가져다 놓았는지 원... "그래. 그런데 그건 왜?" "아뇨, 혹시 제가 가진 기운을 가지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나 싶어서요." "물론 사용할 수 있겠지. 왜? 마법을 배우려고?" "아하하하, 신기하잖아요. 배워봤으면 좋겠어요." 엘라임의 직설적인 질문에 나는 쑥스러워져서 귀 밑을 손가락으로 비비며 대답하자 엘라임이 어깨를 살짝 으쓱 거렸다. "그럴 필요가 있나? 네가 정령의 기운을 자각하기만 하면, 마법 따윈 배우지 않아도 물에 관련한 마법과 같은 위력을 나타낼 수 있는데... 더구나 인간들이 마법을 사용하는 과정은 드래곤들과 달리 엄청 복잡하거든. 그래서 머리가 따라주지 않는 인간들은 마법을 배우는 것도 어렵다고 하던데..." "에... 그래요? 뭐, 대단한거 배울 생각은 없고요, 그냥 간단한거나 좀... 뭐, 물에 관련된 거 말고 다른 마법들도 많잖아요." "많지..." 별 관심 없다는 듯한 태도로 대답하는 엘라임을 향해,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웃음 중 가장 귀엽고 깜찍한 (우욱... 갑자기 속이... ) 미소를 지으며 엘라임을 바라봤다. 그러자 엘라임이 날 보더니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뭐냐 그런 표정은? 너 답지 않으니까 빨랑 지우지 못해? 기분이 다 이상해진다." "쳇, 기껏 웃은건데 꼭 그리 말해야돼요?" 그런 말 듣고 계속 웃고 있을 내가 아니었기에 금방 얼굴을 풀고 투덜거렸다. "너에게 안 어울리니까 그렇지. 왜, 나에게 바라는 거 있어?" '그렇게 말하면 또 안 말할 수가 없지....' "에.. 그러니까 마법 좀 가르쳐 달라고요. 에헤헤..." "마법? 난 마법 쓸 줄 몰라." "예?" 전혀 뜻밖의 대답을 들은 나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며 되물었다. "아니, 정령왕이라면서 마법도 못 써요?" 어이 없다는 듯이 그를 보고 묻자 엘라임은 한심하다는 듯이 날 바라보며 되물었다. "넌 정령이 마법 쓰는 거 봤냐?" "에, 그.. 그러니까... 못봤죠." "거봐. 난 마법은 못 사용해. 정령의 기운이라면 모를까..." "그럴수가...." 마법에 대해 꽤 알고 있는 듯 하길래 나는 당연히 엘라임이 마법을 쓸 줄 알았다. 거 왜 몸을 유지하고 있는 기운 전체가 다 마나라고 하지 않았는가? 내가 멍 하니 자리에 앉아있자 엘라임이 어깨를 살짝 으쓱하더니 입을 열었다. "정령은 배우지 않아. 처음 태어날때 부터 타고난 능력을 죽을때까지 간직하고 살지. 그러니 마법 이라는 걸 배웠겠어? 그런거 보면, 뭔가를 배울 수 있다는 건 참 축복받은 걸지도..." "에... 그런가요? 그래도 처음 부터 대단한 능력을 타고 났다는 것도 대단한 거 같은데...." "처음 부터 대단한 능력을 타고 난다면, 거기에 안주하여 더 이상의 발전은 없지. 하지만, 처음에 빈 손을 가지고 태어나 배울 기회가 주어진다면, 발전할 가능성은 무궁무진한 거 아닌가? 그런거 보면, 예전에 어떤 드래곤이 한 말이 맞는거 같긴 해." "뭐라고 말했는데요." "창조주께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종족은 인간인것 같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자신들이 받은 축복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데... 흥, 거기다 잔인하기까지 하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혈육이고 뭐고 없는 종족이 바로 인간이니까." "하.하.하...." 아마도 엘라임이 말하는 건 왕족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왕위 다툼을 위하여 형제이건 아버지건 죽이는 일을 말하는 것일 거다. 뭐, 그것 말고도 다른 여러 다방면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긴 하지만... 나는 엘라임의 말에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그냥 웃어 넘긴 채 얼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제 4화 엘라임의 교육 (8) 그렇게, 내가 질문하면 엘라임이 대답을 해주는 식으로 해서 한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는데도 날 걱정하며 엘라임을 만류하던 엔다이론은 나타나지 않았다. 엔다이론이 가기 전에 보여준 행동으로 보아 날 위해 뭔가 해주려고 그러는 것 같았는데도 불구하고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내가 잘못 생각했나하고 고개를 갸웃 거리는데 갑자기 엘라임이 피식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쉴 만큼 쉬었으니 슬슬 해볼까나?" "옙, 잘 부탁 합니다." 비록 좋아하지는 않지만, 날 위해 수고해주는 그를 위해 예의는 차려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깎듯이 인사했다. 그리고 엘라임과 나는 어제 엔다이론과 자리를 잡았던 것과 같은 모양으로 거실의 빈 공간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어제 엔다이론과 할 때는 멀찍이 서서 구경하던 정령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거였다. 물론 엘라임이 오면 정령들이 두려움을 느껴 근처에 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항상 내 곁에 붙어있던 니트라스와 카사까지도 사라져 버린 거였다. '거참...' 하지만, 의아함도 잠시, 어디 밖에 있나보다... 하고 맘 편하게 생각한 엘라임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엘라임은 그냥 평소와 같이 편안하게 서 있었지만, 왠지 그의 주위에 흐르는 공기가 엘라임의 모습에 바싹 긴장한 것 처럼 느껴져 나도 모르게 자세를 취한 거였다. 그러자 엘라임은 기다렸다는 듯이 천천히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엔다이론과 같이 아주 약한 기운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긴장한 내 자신이 우스워 긴장을 풀려고 하는데 이 기운이 아주 잠깐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에 갑자기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는 거였다. 처음에는 방 한칸짜리의 오막살이를 보는것 같았는데, 눈 한번 깜짝하자 그게 2층 양옥집으로 변하더니, 다시 한번 눈을 깜짝 하는 사이에 4층 건물, 그 다음에는 8층 빌딩, 16층, 32층, 64층.... 무려 연속으로 7번 눈을 깜빡이는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엘라임의 몸에서 뿜어나온 기운은 대단하다는 차원을 넘어서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마치 내가 몸뚱이 달랑 하나 들고 63빌딩을 마주보고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63빌딩이 나를 향해 쏟아져 내려오는데, 그 기분이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저기에 맞으면 분명히 죽을 것 같은데도 너무 거대한 기운이 쏟아져 내리는 바람에 도망칠 엄두 조차 나지 않았다. 온 몸이 굳어버렸는지 손 끝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고, 머리속으로는 도망쳐야 한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데 도망쳐 봤자 소용 없다는 식의 체념부터 드는 거였다. 그리고, 막 기운이 나에게 닿으려는 순간에는 이제는 죽었구나... 하는 생각과 머릿속이 그 동안 지내왔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새하얗게 변해서 아무것도 느껴지지도 않고 생각 나는 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그려진 것이 없는 백지가 머리에 떡 하니 들어찬 것만 같았다. 게다가, 무서워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데, 입조차 내 맘대로 벌어지지 않는 거였다. 단지 너무 두려워 목에서 부터 김빠지는 것 같은 신음만이 흘러 나올 뿐이었다. "끄으으윽~" 이제는 정말 죽는구나... 하는 - 도대체 이 곳에 와서 몇번이나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지.... - 기분을 느낀 순간, 놀랍게도 내 몸속에서 마치 물과 같이, 부드러우나 가볍지 않은, 장중한 느낌이 드는 기운이 서서히 일어나더니만 내 몸을 보호하려는 듯 덮쳐 오는 엘라임의 거대한 기운에 맞서는 거였다. '이, 이것이...' 엔다이론과 엘라임과 내가 그토록 일으키려고 노력했던 바로 그 정령의 기운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제일 먼저 든 감정은 괴씸함 이었다. 진작 진작 안 나오고 엉덩이 무겁게 구니까 이 기운 하나 이끌어 내려고 이렇게 무서운일을 당해야만 했으니 안 괴씸하게 여겨지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닌가? 그 다음에 느껴지는 감정은, 이제는 살았다... 하는 거였다. 이 기운 이끌어 내려고 시작한 일이었으니 이제는 되었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내 짐작과 마찬가지로, 내 몸에서 정령의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엘라임은 그 즉시 자신이 뿜어내던 기운을 거두어 들였다. 63빌딩처럼 느껴지던 기운이 순식간에 싹 사라지자 나는 어리둥절함을 느낄 새도 없이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대로 드러눕고 싶은 것을 꾸욱 참고 그대로 앉아 있으려니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 팔로 바닥을 디뎌 상체를 지탱하고 싶어도 맘대로 되지 않아 결국 쓰러지려는 찰나, 부드러운 기운이 내 몸을 감싸며 지탱해 주었다.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뒤섞여 시야도 제대로 안 보였는데, 무언가가 날 보호해 주려는 듯 받쳐주자 그제야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린 내가 돌아보니, 거기에는 아직 안 도착했을 줄 알았던 엔다이론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똑같은 푸른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엔다이론이 네명이나 더 있었다. 그런데 왠지 그들의 푸른 얼굴이 약간 기운 없이 느껴지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엔다이론에게 의아함을 물어볼 기회도 없었다.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리자 아까 아침 겸 점심으로 먹었던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욱...' 하지만, 그 자리에서 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부리나케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고 자리에서 비칠 비칠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아직 안정된 다리가 내 의지를 제대로 따리주지 못해 나는 조금 몸을 일으키다가 다시 주저앉야아만 했다. '우욱...' 그 바람에 다시 한번 솟구치는 구역질을 참기 위해 양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참아내고 있는데, 내 상태를 눈치 챈 것인지 엔다이론이 재빨리 나를 집 바깥으로 데려가줬다. "우웨에에에엑~~~ 우웩, 우웩..." 땅을 보자마자 정신없이 토하는데, 얼마나 심하게 토했는지 위장까지 입을 통해 나올 것만 같았다. 한참을 토하니 아침겸 점심으로 먹었던 것은 모조리 나와 위장이 비었는데도 구역질은 멈추지 않아 위액만 계속 토해대던 나는 결국 토하다 못해 지쳐서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헥, 헥... 우욱..." 하지만 쉬는 것도 잠시, 또 다시 속에서 올라오기에 나는 힘 없는 몸을 일으켜 다시 땅을 바라보며 토해야 했다. "헥헥... 우욱..." ........ "헥헥... 우욱..." ........... 정말, 술을 엄청 마셔도 이정도 까지는 아니었을 거다. 나는 거의 몇시간을 토하다 쉬고, 또 토하다 쉬고를 반복해야 했다. 얼마나 심하게 토해 댔는지 위장이 다 위로 쏠린 듯한 기분이었고, 집을 둘러싼 바다가 노랗게 보이는 한편 눈이 뱅글뱅글 돌았다. [괜찮으십니까?] 계속 옆에서 지켜보던 엔다이론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난 대답해줄 기운도 없었다. 그래서 힘 없이 고개만 저었는데, 그게 또 어지러움증을 유발해서 또 구토증을 일으켰다. "우웨에엑~~" [그냥 가만히 있겠습니다.] 그 모습에 엔다이론이 미안함을 느낀 듯 했다. 결국 신나게 구토를 한 나는 나중에 지치다 지치다 못해서 그냥 뒤로 넘어가 정신을 잃어버렸던 것 같다.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잠시 쉬려고 몸을 약간 뒤로 젖혔는데, 그와 함께 머리 위쪽에 있던 노랗게 물든 바닷물이 보이더니만 그 뒤로 온 세상에 깜깜해져 버렸던 것이다. 다시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나는 누군가가 옮겼는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 허공에 정령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니 엘라임은 돌아간 모양이었다. "끄응..." 신음 비슷한 소리를 내며 윗몸을 일으키자 그제야 정신이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려다 보니 침대에 눕히기 전에 씻기고 옷도 새로 갈아 입힌듯 정신을 잃기 전에 입고 있던 옷이 아닌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물론 이 옷들은 다 엄마의 옷들이었다. 속은 여전히 미슥미슥 거리는데도 불구하고 서서히 배가 고파왔다. 거기에다 몸은 마치 체력장이라도 하고 난 것 처럼 온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으며 알이 배긴 것 처럼 쿡쿡 쑤셔왔다. "에구구..." 다시 드러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랬다간 머리가 더 어지러울 거 같아 눕는 대신 베개를 쿠션 삼아 슬쩍 기대어 앉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말을 건네는 이가 있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쭈욱 내 곁에 있었던 모양인지, 침대 옆의 바닥에서 엔다이론이 앉은 자세로 날 올려다 보고 있었다. "죽겠어... 에구에구... 내가 얼마나 잔 거야?" [꼬박 하루동안 정신을 못 차리셨습니다.] "에휴... 그럴만 했지... 아구구.. 삭신이야. 난 정말 죽는 줄 알았다고. 쳇... 정령왕이라는 건 정말 대단한 건가봐. 그 동안은 그냥 막연히 정령들 중에 가장 힘 센 자라는 걸로만 알아는데... 아, 나 물좀 줄래?" 내 말에 엔다이론이 미리 준비한 듯 침대 옆의 작은 탁자위에 놓여진 나무컵에 물을 담아 건네줬다. [정령들 중에 가장 능력이 뛰어나다는 묘사로는 부족하지요. 해인님에게 보여주신 그 능력이 정령왕님의 본 능력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고 하면 짐작 하시겠어요?] 엔다이론의 말에 나는 물을 마시다 말고 놀라서 둥그래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나에게 보여준 것이 절반에도 못 미치는 힘이란 말야? 허허... 정령왕이 아니라 정령신 아냐? 실제 힘을 한번 보였다가는 세상 다 망할 거야." [정령계에서는 정령왕의 능력은 거의 전지전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계에서는 그 능력을 1/10 정도 밖에 발휘할 수가 없지요.] "에? 왜?" [정령계와 인간계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이 곳은 정령왕님이 주관하시는 물 속이라 그정도까지 힘을 마음대로 사용하실 수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이정도까지는 불가능 하지요. 뭐, 계약자가 있으면 가능합니다만...] "이건 내 생각인데 말야, 나에게 보여준 힘의 절반만 사용해도 작은 마을 하나 초토화 시키는 건 쉬울 것 같던데?" [바로 보셨습니다. 그 만큼 정령왕님의 힘이란 건 대단하지요.] "거 참..." 기분이 되게 묘했다. 내 친부라는 자가 엄청 대단한것에 은근히 기분 좋은 것 같으면서도, 엘라임이 엄청 대단하다니 또 기분이 나빠졌다. 마치, 지금까지 라이벌로 여겼던 사람이 내 능력으로는 쨉도 안되는 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낸 기분이랄까? 그 상반되는 감정을 떨쳐버리기 위해 나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고는 화제를 돌렸다. "저기, 아까 혹시 친구들이랑 같이 오지 않았어? 엔다이론이 너 말고도 4명이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친구... 글쎄요, 인간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친구라기 보다는 형제라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 같습니다만, 그들은 저와 같이 정령계에 태어나 이 바다를 관장하기 위해 온 이들입니다. 제가 관장하는 영역의 옆에 있던 이들이라 급히 데려올 수 있었지요.] 여기서 잠깐 설명하자면, 정령들도 그들이 관장하는 구역이 따로 있다. 예를 들어, 하급 정령 한명이 가로, 세로 높이가 약 1m 정도의 공간을 관장한다면, 중급 정령은 하급 정령이 100명을 관장한다. 그리고 상급 정령은 중급 정령 100명 정도를 관장하고, 그런 식이다. 뭐, 예를 든것 뿐이고 정령에 따라서 관장하는 영역도 틀리고 넓이도 틀려서 대충 그렇다는 것만 알지 나도 바람의 정령은 어느 정도, 물의 정령은 어느 정도라는 건 정확히 모른다. 그러니 하급 정령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지만, 중급 정령 부터는 그가 관장하는 공간이 있는 곳이 아니면 볼 수 없다. 가장 쉬운 예로 울 집에는 하급의 바람의 정령은 많은데 중급 정령은 볼 수 없는 이치다. 중급 정령이 관장할 정도로 넓은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하급 정령들만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이 관장하는 영역안에서만 있어야 하는 건 아니고 자신의 힘이 미칠 수 있는 곳까지는 얼마든지 나돌아다닐 수 있다. 울 집에 있는 바람의 정령들이 끼리 끼리 모여서 노는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엔다이론이 자신의 영역 바로 옆을 관장하는 엔다이론들을 데리고 올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런 이치다. 물론 이건 이 세계의 자연계에 소속된 정령들만이고, 정령계에 있는 정령들은 그런 영역에 구애를 안 받는다. "그래? 그런데 왜 그들을 데려온 건데?" [그건, 정령왕님의 힘을 이 집이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정령왕님께서 해인님에게 기운을 뿜어내시는 동안 집을 보호했습니다. 저희 다섯이 이 작은 집을 겨우 겨우 보호할 수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이 집이 마법에 걸려 있는데다 작지 않았기에 가능했지, 이들 중 하나라도 벗어났다면 이 집은 지금쯤 산산조각이 나 있을 겁니다.] "아... 하긴..." 엘라임의 힘을 직접 겪어본 나로써는 엔다이론의 말이 십분 이해가 갔다. 아마도 63빌딩을 단층집에 쑤셔 넣으려는 것과 같은 이치였겠지. 마법이라고 해서 생각난 건데, 이 집은 마법에 걸려 있다. 이 집 주위에 쳐진 결계가 바로 그 영역인데, 시간정지 마법이 바로 그것이다. 뭐, 다른 말로 하면 보존 마법이라고나 할까? 물론, 살아있는 생물에는 영향을 못 끼치고, 무생물에게만 끼친다. 그러니 마당에 있는 나무와 풀들이 말라 죽은 것이지만, 그와는 반대로 시간이 아무리 오래 흘러도 무생물인 집은 안 무너지고, 가구가 안 낡는 것이다. 시간 정지 마법에 걸려서 제일 좋은 건, 먼지가 안 쌓인다는 거다. 그래서 따로 힘들게 청소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 내가 맨 처음 이 집에 와서 사람이 오랫동안 살지않아 썰렁함에도 불구하고 집안이 깨끗했던 것이 바로 그런 이유였던 것이다. 그 마법 덕분에 엘라임이 탁자를 강하게 내리쳐도 금이 안 가고 당당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만, 그게 엔다이론들에게 도움을 준 듯 했다. "헤에... 그러니까 네가 갔던게 네.. 형제들을 데리러 갔던 거야?"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정령왕께서 직접 나서시는 걸 보고 어지간한 기운은 아닐거라고 여기고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역시나 저 혼자의 힘으로는 택도 없었지요.] "오오... 그렇군. 나중에 그들에게도 인사하러 가야겠어. 아, 너에게도 무지 고맙게 생각하는 거 알지?" 그러자 엔다이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중에 그들 영역에 갈때 제가 그들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래. 그런데... 지금 아침이야, 밤이야?" [새벽입니다. 곧 정령왕님께서 오실 때가 되셨습니다.] "헉... 오늘은 몸이 안 좋은데... 그런데도 바다에 던질까?" [그, 글쎄요... 아마도 그러시지 않을까....] 난처한 듯 대답하는 그를 보며 나는 침대에서 얼른 몸을 일으켰다. "우리.. 빨리 나가 있자. 안 그럼 오늘도 아침 굶어야 할... 으그그그..."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일어서려고 하다가 다시 침대에 주저 앉았다. 온 몸이 아직 회복이 안 되어서 무리하게 일어나려고 하니까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댔던 것이다. "으갸갸... 아무래도 수영을 좀 해서 체력을 단련시켜야 겠다. 저기, 나좀 부축해 줄래?" 애절한 눈으로 엔다이론을 바라보자 그가 피식 웃었다. [그냥 제가 옮겨드릴테니 가만히 계십시오.] 제 4화 엘라임의 교육 (9) [그냥 제가 옮겨드릴테니 가만히 계십시오.] 엔다이론의 도움을 받아 거실로 나오니 그 즉시 몸에서 반응이 왔다. 꼬르르르륵~~ "배고프다...." 그러자 엔다이론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만도 하실 겁니다. 하루를 꼬박 아무것도 안 드시고 누워 계셨으니까요.] 엔다이론의 따뜻한 말에 나는 방긋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훗.. 엔다이론, 그래서 말인데..." 엔다이론은 내가 뭔 말을 할지 짐작도 못하면서 정령 주제에 식은땀 까지 흘릴 것 처럼 당황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리 바라보십니까? 그냥 평소 처럼 하시지요. 왠지 불안합니다.] "내가 뭘 어쨌다고. 내가 평소에 말도 안되는 일을 부탁한 적 있어?" [물론 그러신 적은 없지만, 평소와 다르시니까 왠지...] "나는 내가 지금 도저히 몸을 못 움직일 거 같으니까 내 아침좀 부탁하려고 했는데?" 나는 정말 아무런 사심 없이, 그냥 평소 날 잘 도와주던 엔다이론에게 부탁하는 마음으로 말한 것 뿐인데 내 말을 들은 엔다이론이 입을 떠억 벌렸다. [아, 아침이요? 저는... 인간들의 요리는 할 줄 모르는데요?] "괜찮아, 내가 옆에서 가르쳐 줄게." [아.하.하.하... 그러니까... 그것이....] "왜 그래? 내가 앞치마까지 두르라고 한 것도 아닌데... 안될까?" 그러고보니 엔다이론이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왔다갔다 하면... 되게 귀여울 것 같았다. 그게 머리속에서 그려지자 원하지 않았건만 입이 저절로 벌어졌고 웃음이 튀어나왔다. "쿡쿡쿡..." 그러자 엔다이론이 눈을 가늘게 해서 날 바라보며 투덜 거렸다.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앞치마라니...] "아하하하.. 미안... 큭큭큭.. 하지만, 넘 귀엽다. 엔다이론, 한번 해볼래? 음.. 그러고보니 엄마 옷장에 앞치마 비슷한 것이 있던데..." [사양하겠습니다. 그냥 아침이나 마련해 드리죠. 생각해보니까, 해인님의 식사는 거창하게 요리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문어를 삶거나 조개를 구우면 그만이니까. 카사의 도움을 받아서 해드리죠.] "어우... 그렇게 말하니까 좀 처량하다. 그러고보니 조미료도 대충 떨어져 가는데... 큰일 났군. 소금이야 바닷물로 어찌한다지만... 으음.. 그러고보니 고추장 먹구싶다... 조개 구운거나 문어 삶은 거는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게 최고인데..." [밖에서 드실 거죠?] "응.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밖으로 좀 데려다 줘." 엘라임은 내가 엔다이론과 카사가 구워 준 조개 5개째를 먹고 있을 때 스르르 나타났다. 그가 나타날 때는 사라질때의 정 반대의 현상을 일으켰다. 아무 것도 없는 바닥에 물이 어느 순간 스르르 모여들더니 거기에 물기둥이 부드럽게 솟아 올라 엘라임의 모습으로 바뀌는 거였다. 그거 보면서 나는 터미네이터 2 가 생각이 났다. "다 먹었냐?" 말투가 꼭 내가 밥 다 먹길 기다렸다가 나타난 듯 했다. "에... 오늘도 바다 속에 들어갔다 와야 해요? 몸도 안 좋은데..." 무지 가기 싫다는 것을 역력하게 드러내며 내가 물었지만 엘라임은 눈썹 하나 까딱 안 했다. "내가 죽으라고 보내냐? 게다가 네 엄마가 말하길, 사람은 몸이 안 좋을 수록 더 움직여야지 집 안에만 콕 박혀 있는 것도 안 좋다더라." "쩌비..." 그의 말이 다 옳았기에 나는 더 이상 뭐라 말하지 못하고 어기적 어기적 일어났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엔다이론이 날 들어서 바다 속으로 넣어 줬다. 확실히 그냥 침대에 누워 있는 것 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 날은 엔다이론이 날 데리고 멀리 바다 속을 구경 시켜주는 대신 집 근처에서 그냥 놀았(?)는데, 바다 속으로 들어가자 시원한 감촉에 몸이 안 좋아 발생하는 열을 가라앉혀 주었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바닷물결 덕에 쿡쿡 쑤시는 온 몸의 근육통이 약간은 해소된 느낌이었다. '으음... 나오길 잘 했네.' 내가 온 몸을 쭉 펴 바닷물에 몸을 맡기며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엔다이론이 빙긋 웃었다. [정령왕께서 당신께 해가 되는 일을 지시하시겠습니까?] '뭐... 상당히 도움이 됐다는 건 인정 하지만...' 나는 천천히 팔 다리를 휘저어 앞으로 나가며 중얼 거렸다. 하지만, 이건 분명히 내 생각인데, 엘라임이 내 몸이 아픈 것을 걱정하여 바다 속으로 내몬 것이 아니라, 그냥 매일 바다 속으로 몰아 넣었기에 오늘도 그런 것 같았다. '맞아, 영감님이 그렇지...' 몇 시간동안 물 속에서 놀아서 그런지 몸의 근육통이 많이 완화되어 집에 돌아갈 때에는 엔다이론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내 스스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 "왔냐?" 거실 소파에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던 엘라임 앞에는 예의 그 물이 담긴 나무 컵이 놓여 있었다. 이제 내가 엘라임의 도움 - 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 을 받아 정령의 기운을 느꼈으니 한번 시도해 볼 만 했고, 어쩌면 성공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엘라임이 뭐라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엘라임 맞은 편에 앉아 물컵에 살짝 손가락을 담궜다. 그런데 막 몸 속에 있을 정령의 기운을 느끼려는데 엘라임과 엔다이론이 무지 진지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닫자 나도 모르게 웃겨서 실실 웃었다. "왜들 이리 진지해요?" 그 분위기를 좀 풀어보고자 가볍게 말을 던져는데 돌아오는건 엘라임의 질책이었다. "장난 치지 말고 빨리 해봐. 되나 안 되나 보게." 그 말에 찔끔한 나는 얼른 정신을 집중하여 몸 속에 있을 정령의 기운을 찾았다. 엘라임이나 엔다이론은 아주 손쉽게 찰나의 시간도 필요 없이 곧바로 정령의 기운을 뿜어낼 수 있었는데, 나는 아니었다. 나는 정령의 기운을 다시 찾는데만도 몇분, 아니 몇십분이란 시간이 소요 되어야 했다. 그 동안 물 컵에 손가락을 담근 채 있어야 했기에 팔이 아파 죽는 줄 알았다. 그나마 다행히 정령의 기운을 찾을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찾지도 못했으면 아마 한시간이라도 그러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엘라임의 덕을 보긴 했는지 내가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날 내 몸속에서 뿜어져 나왔던 기운을 기억하며 조용히 몸 속을 더듬어가자 이 정령의 기운들이 한번 안면을 익혔다고 모습을 드러내 주었다. 그 정령의 기운은, 마치 몸 속을 돌고 있는 피 처럼 내 몸이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 내 몸 구석 구석을 감싼 채 조용히 흐르고 있어다. 일정한 규칙이나 질서, 아니면 방향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그냥 내 몸이라는 연못 속에 기운이라는 물이 사방으로 조용히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히유....' 이번에도 실패인가 싶어 약간 걱정과 조급함을 가지고 있던 나는 그 기운을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이 기운을 손 끝으로 내뿜어서.....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생각이 막히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거기에는 여전히 진지하게 날 바라보고 있는 엘라임과 엔다이론이 있었다. "왜 그래? 기운을 찾는 것 같던니만... 뭐가 또 안돼?" 엘라임이 내가 눈을 뜨자마자 질문을 던졌다. "아뇨... 그게 아니라... 이거 어떻게 하는 거죠?" 나는 난색을 표하며 물어보기는 해야겠는데, 뭘 어찌 설명할지 몰라 주어 목적어 다빼고 그냥 물었다. "뭘 어떻게 해?" 엘라임이 답답하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아니... 그러니까.. 기운을 찾기는 찾았는데... 그냥 손 끝으로 기운을 뿜으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는 물이 안 딸려 올라올 거 같은데..." 그러자 순간적으로 엘라임과 엔다이론은 서로를 마주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마치 인간이 태어날때부터 숨쉬기를 할 수 있듯이 물을 다룰 수 있는 자들이었기에 내 의문에 뭐라 답을 해야할지 몰라 당황했던 것이다. 물론 나도 그들의 심정을 알지만, 아무래도 난 처음 하는게 아닌가? 어떻게 하는지 설명을 들어야 하지 그냥 무작정 할 수는 없었기에 그들이 뭐라고 설명해주길 기다렸다. 그리고 그 틈에 아래 30도 각도로 오랫동안 내리뻗구 있어 힘들다 못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는 팔을 재빨리 내려 쉬게 해주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엔다이론은 엘라임에게 다 설명을 위임한 듯 엘라임의 곤혹스러운 표정을 슬그머니 외면하더니만 슬쩍 배를 소파에 깔고 엎드렸다. 엘라임은 잠시 심각하게 고민 고민 하더니만, 컵을 자신의 앞으로 가져 와서 처음 해보는 사람 처럼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손가락을 컵 안의 물 속에 담궜다가 다시 들어 올려 물기둥을 만드는 걸 여러번 반복해서 해보는 거였다. 한번 만들고 다시 손가락을 담궜다가, 다시 한번 물기둥을 만들고, 또 손가락을 담궜다가... 그러길 5번째가 넘어가더니만 드디어 설명할 수 있겠던지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네 말대로 그냥 손가락 끝에서 무작정 기운을 뿜어내는 게 아니라, 네 기운에 네가 원하는 마음을 담아서 물 속에 기운을 퍼트리는 거야. 네가 원하는 범위까지... 그리고 그 물 속에 있는 기운 - 에...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마나 말이다 - 와 네 기운을 섞어서 움직이는 거지... 이해가 됐냐?" "에... 뭐, 대충..." 내가 선선히는 아니더라도 고개를 끄덕이자 엘라임의 눈에 찰나적으로 안도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아마도 그는 이것 보다 더 자세하고 쉽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엘라임은 즉시 내 앞에 컵을 밀어놔주며 말했다. "그럼 이제 해봐라." 그에 나는 다시 컵에 손가락을 집어 넣어야 했다. 아까 집어 넣었던 오른 팔이 너무 아팠기에 이번에는 왼팔을 들어 올렸다. 정령의 기운을 찾는 것도 처음이 아닌 두번째여서 그런지 아까보다는 훨씬 단축된 시간에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기운을 팔을 통해 보내서...' 그러자 내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라임이 참견을 해왔다. "일부러 멀리 있는 거 끌어 당길 필요 없어. 네 손에도 기운이 있을 거 아니냐? 그거 사용해." '그래요, 그래요... 그러니까 손에... 기운이... 아, 있다 있다.. 이걸 손가락 끝으로... 의지를 담으라고 했으니까... 물기둥, 물기둥, 물기두우웅...' 그런데, 이 정령의 기운이라는 녀석이 내가 아무리 손 끝으로 밀어 내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꿈쩍도 하지 않고 손가락 끝에까지 갔다가 싸악 유턴을 해서 다시 손 안으로 들어오는 거였다. '우쒸.... 제발 좀 나가라.... 제발 좀 나가!' 하지만, 아무리 속으로 애원을 해도 이 정령의 기운은 내 애원을 싸악 무시했다. 나중에 깨달은 거지만, 나는 내가 스스로 정령의 기운을 움직여서 손가락 끝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 그렇게 흘러가는 흐름을 따라 의식이 쫓아간 것 뿐이었다. 그러니, 처음 부터 정령의 기운을 느낄 수는 있되, 움직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기야, 이제 막 느끼기 시작한 주제에 움직이려고 하는 건 너무 큰 욕심을수도... 그러나 엘라임과 엔다이론은 그런 날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아니, 정령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면서 왜 못 움직여?" "그러니까... 한번도 안 움직여 봤잖아요.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르겠어요." "뭘 또 어떻게 움직이는지 몰라? 그냥 움직이면 되잖아. 그것도 법이 있냐?" 엘라임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댔다. "아니... 안 움직이는 걸 어떻게 해요? 나도 움직이고 싶다고요..." "에잉... 그럼 내가 다시 기운을 내뿜어 줄까?" 엘라임은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나와 엔다이론은 사색이 되었다. "엑? 나 죽일 일 있어요? 절대 안돼요!!" [정령왕이시여... 그건 좀...] "왜들 그래? 덕분에 정령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잖아?" "정령의 기운 느끼려다가 죽을 뻔 했다고요. 아마 기운을 내 맘대로 움직이기 전에 내가 죽을 걸요?" [게다가, 그 방법은 정령의 기운을 해인님의 의지에 상관 없이 멋대로 튀어 나오게 하는 방법이었을 뿐, 움직이는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될지도 모릅니다.] 나와 엔다이론이 결사적으로 반대하자 엘라임은 자신의 의견이 꺾이는 것에 대해 기분 나빠 했지만, 당사자인 내가 안 하겠다고 버팅기자 순순히 의견을 접었다. "그럼... 이대로 무작정 기다려야 하나?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을때 까지?" 아주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것에 나는 뭐라 좋은 의견을 제시했으면 좋겠지만, 이런일에 전혀 아는 것이 없는 터라 그냥 엘라임의 시선만 슬쩍 피하는데, 다행히도 엔다이론이 나섰다. [조금 더 지켜보심이 어떨지요? 이제 정령의 기운을 느끼실 수 있으니 얼마 후엔 곧 움직이게 되실 지도 모릅니다.] "흐음... 뭐 그럴지도 모르지." 제 4화 엘라임의 교육 (10) 정령 중에서 가장 치사한 정령을 꼽으라면 난 주저 않고 바람의 정령을 꼽을 것이다. 울 집에서 같이 보낸지도 여러날이 되어 꽤 친해진 것 같았지만, 그들은 날 호기심과 재미의 대상으로 볼 뿐이었다. 뭐, 나도 그들과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은 그다지 없었지만, 그래도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자그마한 부탁 하나 안 들어준다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바람의 정령왕들은 절대로 내 부탁을 안 들어줬다. 전에 몇번 부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들은 체도 안 하던가 아니면 엉뚱한 걸 가져오곤 했기에 나는 그 뒤로부터 그들에게 부탁하는 건 아예 포기해버렸다. 게다가 바람의 정령들은 자신들의 호기심과 흥미가 있을때에만 나에게 말을 걸 뿐 그 외에는 내가 말을 걸어도 꺄르르 웃으며 못들은 체 하곤 했다. 정말 치사하고 치사한 녀석들이었다. 그렇다고 애들 같은 그 정령들을 상대로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런일을 겪은 뒤 엘라임에게 투덜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엘라임이 말한 게 걸작이었다. "정령왕을 닮아서 바람의 정령들은 모두 싸가지가 없어." 그에 비하면 불의 정령인 카사는 일찍 철이 든 애 같았다. 바람의 정령들 같은 장난끼도 별로 없었고, 그렇다고 아예 조용하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에 엘라임이 전해 말해준 적이 있었다. "불의 정령왕의 닮아서 불의 정령들은 성격이 괜찮지." 언듯 보기에 불의 정령들은 열혈성격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와 같이 있는 카사가 엘라임의 부름을 받고 내 곁에 있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숙한 애 처럼 항상 침착하고 부드러웠다. 처음에는 불의 속성을 가졌다는 것에 안 어울린다 여겼지만, 나중에 곰곰히 생각해보니, 불의 속성의 정령들이 바람의 정령 같은 장난기가 없는 건 창조주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만약 불의 정령들에게 바람기가 있다면 인간은 불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을 것 아닌가? 불의 정령들이 장난을 친다면 모르긴 몰라도 툭하면 화재 같은 크고 작은 사건들이 발생할테니 말이다. 아직 땅의 정령들은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땅의 정령들은 성격이 어떨지 궁금했다. 그래도 불의 정령들 처럼 장난기가 없을건 분명했다. 만약 그들에게 장난기가 있다면 이 세상에서는 크고 작은 지진이 하루에도 몇번씩 일어났을테니까 말이다. 울 집은 물론 바다 속에도 땅은 존재했지만, 땅의 정령들이 땅의 표면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게 아니라 땅 속에서 지낸다고 들었다. 뭐, 그들을 보고 싶기는 했지만 아직은 그리 절실한 것도 아니고, 그들의 도움 또한 필요치 않았기에 나는 아직까지 그들과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물의 정령은... 내가 보기에는 불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이었다. 내가 물의 속성을 띈 정령의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처음 만났을 때 부터 나에게 친근하게 굴었고, 도움도 주었었다. 게다가 지금도 가끔 부탁하는 건 거의 다 들어주곤 했다. 물론, 엔다이론이 곁에 있은 후로는 일부러 운디네들에게 부탁하는 적이 거의 없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런 운디네들도 장난은 무척 좋아했다. 아무래도 정령왕들과는 달리, 하급 정령끼리는 - 그 이상의 정령들은 아직 못 봤으니까... - 바람의 정령들과 물의 정령들이 친하게 지내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러나 바람의 정령들과는 달리 나와 친하게 지내는 물의 정령들의 장난은 귀엽게만 보여질 뿐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엘라임이 날 그냥 두고 보기로 한지 며칠이 지난 날이었다. 그 날도 평소와 같이 잠에서 깨기도 전에 엘라임에게 들려 바닷물 속으로 집어넣어져 - 매일 겪다보니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오히려 바닷물 속에서도 잘 정도가 되었다. - 엔다이론과 함께 바닷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제는 내 스스로가 바다속을 돌아다니는 걸 즐겨서 엘라임이 시키는 아침때 외에도 오후에 시간 있으면 엔다이론과 함께 바닷속을 헤엄쳐 다니는 것이 일상이 되어 있었다. 덕분에 울 집 근처에 있는 바다속 지리는 너무 자주 가본 탓에 그날에는 내가 한번도 가 보지 못한, 좀 더 멀리 있는 곳까지 이동했었다. 그 곳은, 내가 맨 처음 엘라임에 의해 잠에서 깨기도 전에 바다 속으로 던져질때 엘라임이 일으킨 물결에 의해 휩쓸려 가다가 도착했던 곳으로 수많은 물고기들과 해초가 있는 대신,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었다. 바위들이 절벽을 이루기도 하고 골짜기도 이루기도 하는 이 곳은 높은 곳은 수면 가까이에 닿을 정도였다. 아마도, 그런 것이 바로 암초라고 불리는 걸거다. 그렇게, 수면까지 닿는 커다란 바위 절벽들로 인하여 햇빛도 잘 안들어와 약간 어두컴컴한데다가, 물고기도 잘 안오고, 볼 것도 별로 없는 이 곳에 온 이유는 혹시 침몰한 배가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보통 바닷속이 나오는 영화나, 저 유명한 애니메이션인 '인어공주'에서도 나왔다시피, 이런 바위 - 위에서 보면 암초겠지만... - 가 많은 곳에는 의례히 침몰한 배가 있었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배를 발견한다면, 그 배 속에 있는 것들은 제일 먼저 발견한 자가 임자가 되는 것이지.... 으흐흐흐...' 내 속말을 듣던 엔다이론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 곳으로 오자고 하신 이유가...] '핫핫핫... 뭐, 침몰선이라는 거 한번 구경해 보고 싶기도 하고... 겸사겸사라는 거지.' 배시시 웃어보이는 내 얼굴을 엔다이론이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며 피식 웃었다. [그럼... 침몰한 배가 크면 클 수록 좋겠군요?] '오호호호... 물론.' [사실... 이 곳이 배들이 많이 침몰하는 곳이긴 합니다. 뭐, 예전에는 자주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졌는지 요즘은 뜸하긴 하죠. 최근에 침몰된 배도... 음... 대충 10년 정도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설명해주면서 엔다이론은 나를 데리고 그 지역을 깊숙이 들어갔다. 처음에 엘라임 때문에 이 곳에 떠내려 왔을 때는 약간 어두컴컴한데다가 물고기도 별로 다니지 않는 것 때문에 약간의 두려움을 느껴 둘러볼 생각은 커녕 이 곳을 빠져나가기 급급해서 제대로 못 봤는데, 엔다이론에게 이끌려 바위로 된 언덕을 하나 넘어 가파른 바위 절벽을 지나가니까 여기저기에 파손된 배의 잔해물들이 널려 있었다. 너무 많이 회손이 되어 나무 조각 몇개만 남은 배부터 시작해서 그나마 형태가 제대로 갖춰진 배까지.... 그나마 배라는 것을 알수 있는 것들만 대충 봐도 10개가 넘어 보였다. 엔다이론은 그 잔해물 너머로 나를 이끌었다. 그 곳에는 그렇게 많이 파손되지 않아 조금만 손을 보면 다시 바다 위에 띄울 수 있을 것만 같은 배 한척이 얌전히 드러누워 있었다. 그 배가 있는 바닥이 다른 곳과는 달리 모래로 되어있는 공간이었는데 돗대는 부러졌는지 옆으로 비죽이 튀어나와 있었고 배의 밑창이 위쪽을 향해 뒤집혀 있는 바람에 나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배 안으로 들어가는 갑판이 바닥과 완전히 붙어 있었기에 그 곳이 아닌 입구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내 난감함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엔다이론은 나를 배 반대편으로 이끌었다. 부러진 돗대와 배의 난간 약간 외에는 부서진 곳을 찾을 수 없었던 저쪽 면과는 달리 엔다이론이 데리고 온 쪽에는 배 면 또한 파손이 되어 있어 나 하나 들어가기에는 충분한 구멍이 나 있었다. '헤에... 엔다이론은 여기 와봤나봐? 이쪽에 입구가 나 있는 걸 알고 있었다니...' [몇번 온 적은 있었습니다. 이 곳은 제 영역 바로 옆 영역이거든요.] '그래? 어쨌든... 들어가보자.' 나는 흥분과 기대로 부푼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비록 안은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웠지만, 내 머리 위를 항상 지키고 있는 니트라스가 있었기에 어둠때문에 걱정하지는 않았다. 뭐, 니트라스가 없었어도 배 안에 있는 물의 정령들 때문에 크게 어둡지는 않았지만... 재잘 거리다가 갑자기 등장한 나 때문에 대화를 멈추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날 바라보는 그들에게 나는 한번 씨익 웃어주며 손을 흔들고는 그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이 세계에 와서 아직 인간 세상에 가지 못한 내가 보더라도 꽤 크다는 느낌을 주는 배였기에 나는 화물선인줄 알았는데 호화 여객선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들어간 곳은 배면에 붙은 복도였는데 복도가 꽤나 넓직하고 내 머리에 붙은 복도 바닥에는 융단이 깔려 있었다. 게다가 복도 양 옆 나무 벽면에는 우아한 무늬가 일정 간격을 두고 새겨져 있었고, 그 무늬 사이 사이에는 꽃 모양으로 만들어진 청동 등불이 붙어 있었다. '호오... 이거 운이 좋은데? 척 보기에도 이렇게 고급스러운 여객선이라면 여기에 묶은 사람들도 돈이 많았을 거 아냐? 이거 이거... 오늘 운수 캡이다.' 내가 들어간 복도가 손님들이 묵는 객실이 주르르 있는 층인 모양이었다. 이것으로 보아 아마 이 밑으로 내려간다면 선원들의 숙소와 창고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나는 우선 배 끝으로 가서 그 곳에 있는 문 부터 하나 하나 열고 들어가 뒤지기 시작했다. 울 집 거실만한 방에는 침대와 탁자가 내 머리 위의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고, 고정되지 않은 의자를 비롯한 여러가지 잡동사니가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이 배가 침몰할때 천천히 침몰해서 사람들이 다 탈출 할 수 있었는지 시체는 없었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탈출하면서 귀중품은 다 가지고 탈출했는지 방 안에는 의복 같은 건 많았지만, 내가 내심 기대하고 있던 보석 같은 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쳇.... 이거.. 괜히 좋아했네...' 첫번째 방에서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나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다음 방에, 그리고 그 다음 방을 차례 차례 가봐지만... 역시 보이는 건 자질구레한 물품들 뿐, 보물은 커녕 하다못해 동전 하나 보이지 않아 나는 실망감을 안고 그 윗층, 그러니까 갑판 바로 밑층으로 내려갔다. - 는게 맞는 어법일 것이다. 지금은 그쪽이 아래쪽이니까.- 그 층이 특실이 있는 층이었던 듯 했다. 아래층 - 그러니까 위쪽에 있는 층 - 은 입구도 문이 한짝이었고 객실 안도 원룸 형식이었는데, 이 곳은 문도 두짝이고 거실과 침실로 나뉘어 있었다. '오옷... 그래, 혹시 여기에서는 발견할 수 있을지 몰라.' 그런 기대감을 안고 나는 차근 차근 뒤져봤다. 그곳의 방들에는 윗층보다 더 많은 의복류가 널려 있었다. 아마도 잔뜩 가져왔다가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다 그냥 두고 간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걸 하나 하나 살펴보면서 오늘은 자루를 안 가져왔으니 몇개만 챙기고 예쁜게 많으면 나중에 다시 와서 가져가기로 결심했다. 처음 들어간 곳에는 아마 여자가 있었는지 엄청 많은 호화스런 드레스가 옷장에 고스란히 있었다. 아마 잽싸게 귀중품만 추스린 듯 옷장문은 열려 있었고 밑의 서랍은 모조리 빠져 나와 있었는데, 나는 그 곳에서 운 좋게도 초록색의 보석이 박힌 금팔찌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가운데 동그란 초록색 보석이 있는 걸 제외하고는 별 다른 무늬 없이 단순한 링 형태의 팔찌였지만, 깨물어보니 이빨 자국이 남는 것으로 보아 진짜 금인 것만은 확실했다. '헤헤... 횡재했다.' 몇몇 파티용으로 보여지는 엄청 화려한 드레스에도 반짝이는 보석들이 붙어 있었는데 그것들도 어쩜 진짜일지 몰랐다. 물론 드레스들은 내 취향이 아니었기에 나는 예쁘다기 보다는 그 드레스에 달린 콩코물이 더 좋아 따로 챙겨뒀다. 그 다음 방은 아무도 안 묵었는지 의류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아서 포기하고 그 다음 방을 들어가니, 거기에는 남자가 묵었는지 옷장에는 남자옷만 주르르 걸려 있었다. 그 방에서는 금화 몇개를 찾아 낸 내 입은 참을 수 없어서 약간 벌어져 있었다. '에헤헤헤...' 팔찌는 팔에 차고 금화는 바지 주머니에 넣은 나는 다음 방을 향해 헤엄쳐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동안 조용히 따라오던 엔다이론이 한마디 던졌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그러엄~ 나도 인간인걸. 이런걸 좋아하는게 당연하잖아.' 그리고 그 다음에 있던 방문을 벌컥 열어 제끼던 나는 문고리를 잡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곳에서는 배에서 미처 탈출하지 못한 자가 동동 떠서 날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으... 으... 으...' 입을 열어 비명을 지르고 싶은데 온 몸이 굳어져 입 조차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입을 열면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가 비명을 막았을테지만 말이다. 그는 남자였는데 두 눈이 감겨지지 못한 채 흰 동공이 부릅떠져 마치 튀어나올 것만 같았고, 물에 얼마나 팅팅 불었는지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도 늙었는지, 젊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 얼굴을 들어가자마자 정면에서 마주 보았던 것이다. 영화에서 시체는 많이 봤지만, 실제로 본 건 처음인데다 물에 오랜 세월 푹 불은 시체는 더더욱 처음이었기에 나는 그 충격에 머릿속이 텅 빈 것만 같아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해인... 님?] 엔다이론은 이런 날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마 내가 두려워 한다는 걸 알아챘더라면 그렇게 굳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날 데리고 나가줬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너무나 아쉽게도 엔다이론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평소 너무 예쁘게만 보았던 운디네들의 장난기가 발동되었다. 그들은 배 안에 들어온 직후 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쫓아다니다가 내가 아무런 행동도 못하고 얼어있자 고개를 갸웃 거리더니 내 시선을 쫓아 그 익사한 가여운 사람을 보고는 포로롱 그에게로 헤엄쳐가 그를 내 쪽으로 밀었던 것이다. 아주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친절하게 팔까지 들어 흔들어주며 말이다. 그 모습에 나는 경악을 넘어 두려움과 공포에 젖어버렸고,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지만, 공포에 굳어버린 내 팔다리는 너무 원망스럽게도 내 의지를 배반한 채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운디네들의 장난에 휘말린 그 가여운 사람이 점점 내게 다가와 조금만 더 있다간 그와 만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내 심정을 절박하게 만들자 그 순간 나는 누군가가 날 도와주길 진심으로, 너무나 간절하게 소원했다. 누군가가 저 시체를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해주길 말이다. 그러자 그 동안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라는 식으로 내 말은 조금도 안 듣던 정령의 기운이 내 편을 들어줬다. 너무나 강렬한 내 의지에 반응하여 정령의 기운이 내 몸에서 뻗어 나왔고, 그에 반응한 내 주위의 바닷물이 매섭게 휘몰아치며 나에게 다가오던 그 불쌍한 남자의 시신을 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도 모자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콰과과과~~!! 그리고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더 뻗어나간 소용돌이는 내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모조리 부수고 뚫고 뻗어나가 내 눈에 바다 속 정경이 들어오도록 해줬다. 그러니까 아예 배에다 다시 커다란 구멍을 뚫어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 몸 속의 기운을 움직이는 방법은 엘라임이 말했던 대로 '부탁'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쉽게 설명하자면... 정령의 기운은 나와 다른 이물체가 아니라 내 몸의 일부였던 것이다. 마치 팔이나 다리처럼 말이다. 그런데 팔이나 다리를 움직이려 할때 그들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면 그들이 움직일 것이라 믿고, 그들 또한 내 믿음 대로 움직이듯이, 정령의 기운 또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내 의지를 발현하면 정령의 기운이 당연히 그대로 움직여줄 것으로 믿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동안 그 정령의 기운은 나와 다른 존재인 것 처럼 의식하고 자각했던 것이다. 아마 그래서 정령의 기운이 삐져서 내 부탁은 안 들어준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일으킨 현상에 나 스스로도 놀라 멍하니 있다가 언듯 정신을 차려보니 아까 장난을 치던 운디네들은 놀라고 또 내 기운을 느껴서 그런지 두려움에 떨면서 저 멀리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엔다이론과 언제 왔는지 엘라임이 놀란 얼굴로 있었다. [너... 너... 이제 정령의 기운을 사용할 줄 아는 거냐?] 엘라임의 놀람에 찬 질문에 나는 순간 이해를 못하고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아마도 할 수 있게된 거 같아요.' 나는 평소처럼 대답한다음 저 멀리서 이쪽을 힐끔 힐끔 보고 있는 운디네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거참... 저들에게 고마워 해야 할지, 뭔 짓을 한거냐고 화를 내야 할지...' 그러자 엘라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 시선을 따라가 그쪽에 겁을 먹고 있는 운디네들을 보다가 날 보며 물었다. [뭐냐, 왜 저들을 보며 히죽 히죽 혼자 웃고 난리야?] '에? 아니... 그게... 음... 그대로 말하려면 영감님이 화내려나? 그런거에 겁먹었다구 한마디 하는 건 아니... 에구구...' 나는 막 엘라임에게 설명을 하려다 시체에 겁을 먹어 움직이지 못했다는 걸 엘라임이 알면 뭐라 할까봐 어찌 말할지 고민하는데, 그것도 잠시 속으로 이야기 할때는 엘라임도 듣는다는 걸 알고 다시 화들짝 놀라는 등 혼자 쑈를 하는데, 그걸 본 엘라임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말했다. [뭐하는 거냐? 혼자 인상을 찡그렸다 말았다..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에? 뭔 말이예요? 제가 한 말 못 들으셨어요?' [네가 뭐라고 했는데?] '에? 그, 그러니까...' 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뭔가 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아까 내가 혼자 생각하던 걸 저 영감님은 못들었다는...'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스스로에 놀라서 엘라임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기, 지금 제가 생각하는 거 들으셨어요?] [뭐라고 했는데?] 엘라임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본 나는 그에게 제의했다. [저기요, 지금 제가 뭐라고 말하는지 한번 들어보세요.] 그리고 속으로 생각해다. '엘라임은 바보다.' 그 후에 엘라임을 보며 말했다. [제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그러자 엘라임이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 냉정한 얼굴에 아주 옅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훗... 드디어 의지로 말하는 법을 터득한 거냐?] [헤헤헤... 그런거 같죠? 아마 정령의 의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된 후부터 그런거 같아요.] 그러니까 정령의 의지는 내가 상대방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말을 생각하면 전달해줬지만, 그게 아니라 나 혼자 스스로 생각하는 말은 안 전달해줬던 것이다. 왜냐, 정령의 의지는 내 자신의 일부분이니까. [이제 겨우 정령의 의지를 쓸 수 있게 된 주제에 좋아하기는...] 내가 너무 좋아하니까 엘라임이 한마디 툭 던지고 돌아섰다. 제 5화 새로운 체험(?) (1) 나는 내가 이제 정령의 기운을 다룰 줄 (물론 아직 익숙한 건 아니었지만서도) 알게 되었으므로 엘라임 방식의 그 교육이라는 것이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왠걸... 처음 정령의 기운을 다룰 수 있게 되어 가라앉은 배의 1/4 가량 - 나중에 배에서 나와 보니 배 가운데에 엄청나게 커다란 구멍이 뻥 뚤려 있었다. - 을 부순 날, 나는 드뎌 교육에서 해방된 줄 알았다. 그래서 그날 밤에는 '아, 드뎌 나도 늦잠을 잘 수 있게 되었구나...' 라는 생각에 정말 기쁨에 설레이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었다. 그러나, 왠걸.... 그 다음날 이른 아침, 나는 어김없이 미처 깨지도 못했는데 엘라임에게 잡혀 바다 속으로 던져졌다. [아, 정말... 이제 정령의 기운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아침마다 잠에서 깨기도 전에 바다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잖아요!!] 하도 매일 겪는 일이다보니 그렇게 화가 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늦잠을 잘 수 있을거라는 희망이 산산조각나자 허탈해져서 한마디 건네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랬더니 엘라임이 하는 말이... [네 엄마가 그랬는데, 사람은 죽을때 까지 교육을 받아도 부족하다고 하더라.] [에... 그....]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나도 그 이야기를 학교에서 들었던 터라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는데, 엘라임은 그냥 해본 말이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 뭐... 그 말이 아니더라도, 넌 아직 정령의 기운을 쓴다고 할 수도 없어. 제대로 쓰려면 아직 한~ 참 멀었다. 그러니 잔말 마고 갔다 와.] [예이...] 그렇게 해서 다시 시작된 교육은 전에 받던, 무조건 정령의 기운을 느끼거나 움직이게 하려는 목적이 아닌, 어찌 보면 날 재주꾼으로 만들려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첫 날 내가 한 일은 맨 처음 엘라임이 나에게 시도한 일로, 물컵에 담겨있는 물을 가지고 손가락에 붙어 딸려 올라가는 물기둥을 만드는 일이었고, 그 다음 날은 손을 안 대고 컵과의 거리가 약간 떨어진 상태에서 단순히 정령의 기운만을 사용해 물기둥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 다음에는 물컵에 담긴 물을 허공에 떠오르게 하는 것 부터 시작하여, 허공에 떠오르게 한 큰 물방울 한개를 여러개로 나누고 찌그러트리게 하더니만 밧줄 모양으로 길게 늘여서 자유 자재로 움직이게 만들어야 했다. 나중에는 아주 가느다란 줄이 되어 내 몸을 감싼 채 소용돌이를 일으키게 하거나 아니면 실제와 똑 같은 사물의 모양으로 변형을 시킬 수 있어야 했다. 책이면 책, 꽃이면 꽃, 물로 만들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엘라임이 내놓은 사물과 완전히 똑같은 모양을 만든다는 건 참 어려웠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엘라임은 내가 물을 굉장히 세밀하고 자유 자재로 다룰 수 있도록 신경써준 것 같았다. 물론 그때에는 광대로 만들어서 내보내려는 줄 알았지만... 아마 엘라임이 정령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내 재주로 돈 벌려고 그러는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뭐, 덕분에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한 4, 5달쯤 흐른 뒤에는 - 바다 속에만 있었기에 날짜 관념이 별로 없었다. - 내가 물을 다루는 실력은 상급 정령인 엔다이론까지는 안되지만, 중급 정령을 뛰어넘는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물론, 내 정령의 기운만으로 보면 나는 상급 정령보다 좀 더 우위에 있다고 했다. 음.. 아무래도 그 경계가 상급 정령과 최상급 정령 사이인 듯 했다. 덕분에 이제는 바다속을 돌아다닐때도 엔다이론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나 스스로도 정령의 기운을 사용해 빠르게 돌아다닐 수 있었고, 멀리 있는 물건도 물로 만들어진 밧줄로 이용해 집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는 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물이 사람들 눈에 보일 정도가 아닌, 그러니까 공중에 미세하게 떠있는 작은 물방울들 외에는 물이 없을 경우 일반 정령들은 그 공중에 있는 미세한 물방울들을 쉽게 모으고 불려서 물을 가지고 기둥을 만들건, 대접에 담건 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가 내 마음대로 물을 불리고 조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의 양은 일반 물컵의 반컵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이었다. 그러니까 내 두 손을 모아 뜰 수 있는 최대의 양의 물이 있어야만 내가 보통의 정령들 처럼 물을 불리고 기둥을 만드는 등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정령들은 물의 양에 구애 받지 않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정령의 기운에 의해 자신이 낼 수 있는 능력에 한계를 보이지만, 나는 물의 양에 따라 능력도 비례하게 나타났다. 그러니까 물이 적으면 적을수록 큰 힘을 쓰지 못하고, 반대로 물이 많으면 많을 수록 큰 힘을 나타낼 수 있다는 거다. 덕분에 만약 싸움이 벌어진다면, 물이 없는 허허 벌판에서는 하급 물의 정령인 운디네에게도 꼼짝 못하지만, 물이 엄청나게 많은,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바다 속과 같은 환경이라면, 조금 더 단련이 되었을 경우 상급 정령인 엔다이론도 제압하는게 가능하다고 했다. (이건 엘라임이 말해준 거다) 그래서 최상급의 정령과 비교하면 어떠냐고 물었더니 엔다이론과 엘라임은 엄청나게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더니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최상급의 정령은 다른 정령들처럼 이 자연계에 나오지 못했다. 그들의 임무는 정령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기에 때가 되면 이 자연계로 나오는 정령들의 대열에 끼지 못했고, 그렇다고 정령왕들처럼 정령계와 이 자연계를 마음대로 왔다갔다 하지도 못한다. 단지, 그들이 이쪽으로 올 수 있는 경우는 이 곳에 사는 이들과 계약을 하는 경우인데, 그렇게 되면 정령계에서 사용하는 힘을 100% 다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지금의 내 능력 (그러니까 상급 정령보다 좀 더 뛰어난 수준 ) 으로도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반대로 정령계에서는 상급 정령과는 비교도 안되는 능력을 낼 수 있는 최상급의 정령이라 정령계에서는 틀림없이 내가 쨉도 안될 터였다. 그러나 정령계는 오로지 정령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육체를 가진 내가 갈 수가 없었기에 순수한 힘만으로 본다면 최상급 정령이 우위이지만, 주위 배경으로 보면 내가 유리하기에 다른 정령들 처럼 비교를 할수가 없다는 거였다. 그런데... 그런 경우 내가 더 우위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뭐, 물이 없는 곳에서라면 그 반대이겠지만 말이다. 그러고보니 난 물의 양에 따라 제약을 받으니 엘라임과 엔다이론 말처럼 누가 우위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마 물의 양에 따라 능력을 제약 받는 것이 내가 순수한 정령이 아닌 실체를 가진 인간, 엘프, 정령의 혼혈이라서 그러는 듯 했다. (나 같은 이가 없었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그렇게 지내는 동안 나는 가라앉은 배들이 있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어쩌다 그 쪽으로 갈라치면 잽싸게 방향을 틀어 그 곳에서 멀어나곤 했다. 엘라임과 엔다이론은 내가 그 곳으로 안 가는게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내가 처음에 그 곳으로 간 이유 - 그니까 콩고물을 얻기 위하여 -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니까 그 종이 다 그런가보다... 하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시체 하나 봤다는 이유로 그 곳에 다시 가는 자체를 두려워하는 걸 이해 못하는 거였다. 하지만... 그냥 무서운걸 어떻게 그들에게 설명하겠는가? 그냥 무조건 싫다고 도리질을 치는 수 밖에... 그런데, 그 곳에 못가는 대신 내 마음 속에는 바다 밖에 있을 인간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런 마음은 바다속에 가라앉아 있던 배들을 보고 난 다음 부터 생기기 시작한 거 같았다. 엄마 집을 볼때는 바다 바깥에 어떤 인간들의 세상이 있을지 같은 건 별로 관심 있지도, 호기심이 생기지도 않았는데... 왜 배를 보고 난 뒤로 그런맘이 생긴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다시 그 배들이 있는 곳으로 가지 못하니까, 그 대신 엄마의 서재에서 혹시라도 바다 밖의 세상에 대한 책이 있을지 궁금해 찾아봤는데... 없었다. 엄마의 서재에는 온통 마법, 마법, 마법에 관한 것들 뿐이었다. 그 중에 유일하게 마법에 관련된 책이 아닌 건, 맨 처음 엘라임이 나에게 찾아준 요리책 뿐이었다. 그건 엄마가 엘라임과 은거할때 요리를 못해서 밥해먹고 사는데 지장이 되었기에 하나 특별하게 장만한 거라니... 그런거 보면 내 친모라는 분은 마법 외에는 세상사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게 하나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 하나 있기는 했다. 내 친부... 라고 할수 있는 엘라임. 어쨌거나, 배가 가라앉은 곳에는 못가는데다 엄마 서재에서 바다 바깥 인간들 세상에 대해 알 수 있는 책 하나 찾지 못하자 나는 이 세상의 인간사회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더 커져갔다. 왜, 사람의 마음이란 청개구리 같아서 속시원히 보여주면 오히려 호기심이 감소되는 법이지만, 안 보여주면 호기심이 두배, 세배로 커지지 않는가? 그리하여 나는 어느날 중대한 결심을 했다. '인간 세상에 가보자.' 내 수중에는 그날 배에서 건진 금팔찌 하나와 금화 다섯개밖에 없었지만, 뭐, 여차하면 다시 바다 속으로 돌아오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돈이 없거나 인간 세상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다는 건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곳에서 좀 떠돌아다니는 바람에 바다에서 멀어졌다 하더라도 아무 강이나 하나 찾아서 그 안으로 들어가면 바다로 가는 건 쉬운 일일테니까. 그런데...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니까 문제가 하나 생겼다. 그건 즉, 내가 인간 세상으로 나간다 하면 엘라임이 허락해 줄것인가 말것인가 하는 거였다. 인간 세상 잠깐 좀 구경하는 것이 뭐가 그리 큰일이겠냐만은, 왠지 엘라임은 허락 안 해줄 것만 같았다. 뭐, 보통 부모들이야 걱정이 되니 반대하겠지만, 엘라임은 내가 인간 세상 나가면 날 돌봐주는게 조금 더 귀찮아지니까 반대할 거 같았다. 그리고 엘라임이 반대를 한다면 나는 이 바다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란건 직접 겪어보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엘라임이 바로 물의 정령왕이 아니었던가? 그가 한마디 명령만 내리면 이 바다에 있는 모든 물의 정령들이 날 못 가게 막을 터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중대한 결심을 했다. '가출하자.' 나중에 생각하면 참 바보같은 생각이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한 엘라임의 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이 세상에 물이 없는 곳은 없고, 그 곳에는 어디나 물의 정령들이 있고,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엘라임은 그 어디나 마음대로 돌아디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난 그때까지 바다에서 벗어나면 엘라임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줄 알고 있었으니... 게다가, 그때까지는 엘라임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엘라임이 날 못 보는줄 착각까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주 대담무쌍하게도, - 엘라임이 보면 엄청 웃겼게지만...- 가출할 생각을 할 수 있었을테지만.... 그리하여, 나는 그 결심을 한 날부터 가출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제 5화 새로운 체험(?) (2) 그리하여, 나는 그 결심을 한 날부터 가출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이대로 육지가 있는 곳 까지 헤엄쳐가서 뭍으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그렇게 했다간 육지에 도착하기 전에 들킬 거 같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배'였다. 흔히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면 바다에서 지나가는 배에 구조 요청을 하면 대부분 다 들어주었던 거에서 생각해낸 것이다. 뭐, 실제로 바다에 빠져 있는 사람을 그냥 모른 척 지나갈 양심 불량의 배가 그렇게 많지 않을테고 말이다. 나중에 생각하면 그냥 헤엄쳐 가는 거나 배에 구조 요청을 해서 타고 가는 거나 그게 그거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배에 타면 엘라임의 시선에서 벗어날 것만 같았기에 아주 좋은 계획으로 보였었다. 이건 내 생각인데 그때 엘라임은 날 지켜보면서 배를 잡고 웃었을 것 같았다. '멍청한 녀석'이라고 한마디 중얼거리기도 했을테고 말이다. 어쨌든, 그 다음에는 배가 자주 다니는 일명 '뱃길'이라는 곳을 찾는 거였는데, 그건 쉬웠다. 엔다이론에게 물었더니 쉽게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아마 그때 엔다이론은 내가 가라앉은 배 가까이에는 못 가니까 바다 위를 떠가는 배를 보고 싶은 걸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엔다이론 덕분에 난 생각지도 않게 바다 물 표면까지 올라가서 배가 지나가는 것 까지 목격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계획대로 착착 이루어지자, 그 다음에는 항상 나와 같이 다니던 정령들이 걸림돌이 되었다. 평소 날 도와주는 아주 좋은 녀석들이었지만, 엘라임의 명에 의해 내 곁에 온 녀석들이니 미안하지만 떨궈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배들이 자주 다니는 지점을 알아내고 익힌 나는 그 다음에는 정령들에게 '언제까지 너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나 혼자 한번 다녀 보겠다.'란 말로 떨궈 놓은 다음 집 근처부터 시작하여 천천히 혼자 다니는 연습을 했다. 솔직히 인간 세상에 가면 혼자 다녀야 할테니 미리 미리 연습해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았다. 그리하여... 대망의 가출 계획 실행일날... 나는 내가 찾은 뱃길에 배가 얼마나 자주 다니나 미리 계산해 놨지만, 그게 하루나 이틀 정도의 오차가 발생했기에 아주 가슴 두근 두근 거리며 집을 나섰다. 시간은... 아침에 엘라임에게 바다 속으로 던져졌다가 돌아와서 엘라임에게 그 동안 물 다루는 연습의 성과를 확인한 다음, 과제 하나를 받은 뒤 엘라임이 돌아간 시각 부터 어두워지기 전까지 였다. 아마, 오후 2시 부터 저녁 6시나 7시 경쯤? 이 곳에는 시계가 없어서 정확한 시각은 몰랐지만, 날이 초여름 정도였으니까... 해가 아마 그때쯤에 질 것이다. 그때는 어두우니까 다른때는 나 혼자 내버려 두던 엔다이론이라도 해가 지면 곧장 날 찾아와서 내 곁에 있어주니까 그전까지는 배를 타야 해다. 만약, 못 타면 나는 내일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바다에 빠진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뭔가 바다에 잘뜨는 걸로 잡고 있을 물체가 필요해서 진작에 약간 큰 나무 기둥 조각도 하나 준비해 놨다. 그걸 왜 가지고 나가는지 의아해 하는 엔다이론에게는 걍 씨익 웃으며 필요할 데가 있다고만 말했다. 드뎌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수면 위로 나간 나는 수면 위에 양반다리 하고 앉아서 - 정령의 기운을 사용할 수 있게 된 후로 나는 물 위에서 걸을 수도, 달릴 수도, 춤을 출 수도 있었다. 음홧홧홧홧... 부럽지? - 초조하게 아무데서나 배가 나타나길 기다리기 시작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나는 그 말이 그 당시에 따악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한 1시간 정도 물 가지고 장난치면서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는 내 눈에 드디어 저 멀리서 배가 보이기 시작하는 거였다. 처음에는 자그마한 점으로 보이던 그것은 잠시 후에 조금씩 커지면서 배의 형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앗싸~!" 나는 재빨리 옷 매무새를 정리하고 손목의 팔찌와 주머니 속에 넣어둔 금화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옷은... 이 곳 사람들이 뭘 입고 다니는지 몰랐기에 그냥 내가 보기에 괜찮을 듯 하는 바지와 셔츠를 찾아 입고 있었다. 엄마가 여자라고 치마만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그리고 배가 나로부터 약 100m 쯤 왔을때 부터 나는 한 손으로는 나무 기둥을 잡고 다른 한손을 열심히 휘저으며 소리쳤다. "여기요오~, 살려주세요오~" 바다에 떠 다니는 사람치고 너무 목소리가 팔팔한거 아닌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지금은 배를 우선 잡는게 관건이었으므로 그냥 밀고 나가기로 했다. 배에서 날 봤는지 움직이던 배가 천천히 멈추더니 배쪽에서 첨벙~ 하는 뭔가 큰 물체가 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배에서 내려진 듯한 작은 보트가 내 쪽으로 저어 오기 시작하는 거였다. 드뎌 계획이 성공했구나... 하는 기쁨에 그 보트를 향해 헤엄쳐 다가갔다. 뱃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모두들 한 근육하는 보트에 탄 남정네들이 내가 다가가니까 보트를 멈추고 날 잡아 끌어올려주었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기쁨에 차서 진심으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보트 위에 있던 3명의 남자 중 유일하게 노를 안 잡고 있다가 날 끌어 올려준 남자가 씨익 웃으며 친절히 대답해줬다. "뭐... 뱃사람이라면 당연한거 아니겠어?" 나는 그의 대답이 너무 고마워 배에서 내릴 때 내가 가지고 있는 금화로 사례라도 해야지.. 하고 결심할 정도였다. 그런데... 배에 올라가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불룩 나온 배가 좋은 몸집으로 인하여 부유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뿐, 조금도 둔해 보이지 않는 남자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게. 정말 운이 좋았군."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그에게 한국식으로 - 이게 이곳 예법에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허허허, 그렇게 감사해 할 것 없네.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도리가 아닌가? 그런데.. 보아하니 꽤 어려 보이는데... 나이가 몇인가?" 나를 아래 위로 쓰윽 바라보며 묻는 말에 당연한 궁금증이라 생각하며 대답했다. "17입니다." 내가 이 곳에 와서 얼마나 오래 바다 속에 머물렀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있을때는 이제 고 1의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던 터였기에 그쪽 나이로 치자면 18세가 맞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외국에서 나이를 이야기할 때는 만으로 이야기 했기에 한살 줄여 17세라 말한 것이다. 그러자 그 남자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만 입을 열었다. "음... 얼굴이 약간 동안이로구만. 많이 봐줘야 17세로 보이는데 말야. 몸도 호리호리하고..." 내가 키는 컸지만 여자로 지낸 탓인지, 아니면 엘프와 정령의 혼혈이라서 그런지 근육은 없었다. 그래도 운동 신경은 제법 있는 편이라서 체육대회를 하면 반 대표 선수로 나가곤 했었다. 운동도 즐기는 편이었고.... "그래, 집은 어디인가?" 갑작스런 그의 질문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보니 이런 질문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생각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곳 인간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이곳의 나라 이름이나 지역 이름은 하나도 몰랐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바다 속이라고 할 수도 없고... "아... 아마 못 들어보셨을 거예요. 좀 구석진 시골이라서..." 그래서 이렇게 얼버무렸더니 그 남자는 사람 좋게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내가 이 세상 모든 지역을 아는 것도 아니니 그럴 수도 있겠구먼. 뭔가 사정이 있으니 내 더 묻지 않음세." 그러면서 그가 가볍게 손짓하며 뒤로 물러나자, 날 구해주기 위해 보트를 저어왔던, 그리고 지금 내 뒤에 가만히 서 있던 두 남자가 갑자기 내 팔을 하나씩 붙잡으며 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제압하는 것이었다. "어?" 갑작스런 그 상황에 내가 어리둥절하며 보는데, 맨 처음 날 끌어 올려주고 내 인사에 친절히 대답도 해 주던 그 남자가 예의 그 친절한 웃음을 보이며 나서더니만 내 온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다행이... 고추가 있을 곳(어험험...)은 안 더듬었지만, 그래도 바지 주머니에 넣어 놨던 금화는 들켜서 고스란히 빼앗 겨 버렸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물론 배에서 내릴 때 어느정도 사례는 하려고 했지만, 그냥 빼앗기다니 되게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 남자는 내가 손목에 차고 있던 금팔찌까지 빼앗아 갔다. "호오... 생각보다 부자구만?" 그렇게 놀리면서 말이다. 그리고는 곧 손가락에 있는 은반지로 보이는, 엄마의 유품을 보더니 그것도 빼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주인이 죽거나 손가락이 잘리기 전에는 절대로 안 빠지는 마법 반지라 내 하얀 - 바다 속에만 있어으니 내 피부는 아기 피부처럼 무지 하앴다. 물론 잘 타는 체질도 아니지만... - 손만 시뻘개질 뿐 반지가 빠지지 않자 그건 그냥 포기했다. "쳇...." 하지만 무지 아쉬운 듯 바라보는 걸 보아 나는 혹시라도 내 손가락을 잘라서 빼려는게 아닌가 싶어 긴장한채로 그를 바라보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듯 그는 그냥 뒤로 물러나 날 제압하고 있는 두 남자를 향해 지시했다. "데러가." 내가 얼이 빠져서 황당해 하고 있는 사이, 그 두남자는 갑판 밑으로 날 끌고 내려가더니만, 창고로 쓰는 법한 맨 밑에층에 도달해서야 커다란 쇠 자물쇠로 잠겨 있는 문앞에서야 멈췄다. 그 곳에는 그들 못지 않은 우락부락한 덩치의 대머리 남자가 문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지루하다는 듯 몸을 꼼지락 거리다가 우릴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그러며 날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징그럽게 웃었다. "이거.. 왠 놈이야? 히야... 사내 녀석 맞아? 피부가 여자 못지 않게 뽀샤시 하구만?" 말함과 동시에 내 얼굴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내 오른쪽 팔을 붙든 남자가 그런 그를 제지했다. "건들지 말고 문이나 열어. 애들 건드리는거 대장이 안 좋아하잖아." 그러자 그 대머리 남자는 흠칫 하더니 뒤로 물러나며 투덜거렸다. "쳇... 젠장... 그냥 한번 만져보는 것도 안되냐? 그나저나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애야?" 허리띠에 쇠사슬로 이어져 허공에 대롱 대롱 매달려 있던 열쇠를 잡아 자물쇠를 열며 묻자 내 왼쪽 팔을 잡고 있던 사내가 그 사내와는 조금 친한지 냉큼 대답해줬다. "바다에서 건졌지. 큭큭큭... 우리가 누군줄도 모르고 구해주니까 좋아하는 꼴이라니..." 아까부터 뭔가 잘못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냥 갈때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그냥 지켜보는 내 눈앞에 굳건히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어두운 공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대머리 남자가 있는 곳도 창이 없어 햇볓이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 곳은 그나마 등불이라도 있어 어둠을 밀어냈지만, 문 안쪽의 공간은 등불도 없어 무지 어두웠다. 그런 공간을 향해 두 남자는 나를 거칠게 밀어 넣었다. "자, 얌전히 들어가." 내가 그 둘의 힘에 밀려 문 안으로 들어가자, 그걸 기다렸다는 듯 대머리 남자가 얼른 문을 닫았고, 밖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이 곳에 와서 간뎅이가 부었는지 별로 두려운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어리둥절한 마음은 여전했다. '도대체... 여기가 뭐하는 데야?' 제 5화 새로운 체험(?) (3) 문이 닫힐 때에는 모든 빛이 갑자기 차단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잠시 후 나는 그 안을 떠도는 바람의 정령들 몸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들 덕분에 방안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나 외에도 약 20명쯤 되는 애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자리잡고 있었는데, 워낙 쥐죽은 듯이, 존재감도 없고 미동도 없이들 있는탓에 나는 그들에게 말 걸기가 머쓱해져서 그냥 빈 공간으로 찾아가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거야 원... 설마 이곳 정부같은데에서 가출한 애들 잡아다 집에 돌려보내주는 건 아닐테고... 조직 같은데 넘겨서 소매치기나 도둑으로 키우려는 건가?' 모두 내 또래로 보이는 것 같은데, 그 나이때에는 호기심이 왕성해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으면 한번쯤 시선이라도 보내야 정상일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곳에 있는 애들은 인생사를 초월했는지 날 바라볼 생각도 안한 채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뭍고 있거나, 아니면 맨 바닥에 몸을 쪼그린 채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하기야, 방이 어두우니 보이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맨 처음 문이 열릴때 시선을 들어 한번쯤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반응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런 것도 없었다. 문이 열리건 말건 자기와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거 참...' 그들끼리도 속닥거리는 애들이 없는 걸 보면 각자 안면이 있는 애들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야기를 나누면 무지 혼을 내던가... 그런 그들이 사람처럼 움직임을 보이는 때는 식사때가 되어 한 몸집하는 사내들이 식사를 가져올 때 뿐이었다. 식사는 의외로 괜찮게 나왔다. 비록 밀가루로 만든 죽과 빵, 그리고 물 뿐인 식사였지만, 죽도 허여멀거기만 한게 아니라 들어간 것이 비록 고기는 없더라도 야채가 섞인 꽤 먹을만 한 것이었고, 빵도 검고 딱딱한게 아닌 하얀 밀빵이었다. 더구나 바다 속에서 요리를 할 줄 몰라 매일 고기와 연체동물을 비롯하여 조개만 매끼마다 구워먹기만 했던 나로써는 약간 맛이 없다 해도 오랜만에 접하는 밀가루 음식이었기에 눈물이 나올 만큼 감격했다. '헤에... 비록 이들이 뭐 하는 사람들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괜찮은 놈들이었군.'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식사는 하루에 두번 뿐이었고, 생리현상은 식사가 끝난 후에 단 한번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니까 식사때가 되면 다섯명의 사내가 들어오는데, 두명은 아무도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 문을 막고 서 있고, 세명의 사내가 각각 자신이 담당하는 식사 (죽과 빵과 물) 을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우리가 다 먹을때까지 그 자리에서 감시를 한다. 그리고 식사를 끝낸 우리가 접시를 - 숟가락은 안 준다. 그래서 죽은 그냥 마셔야 했다. - 놓으면 그걸 치운 다음 생리 현상을 해결하고 싶은 사람을 따로 분류한다. - 물론 대부분이 다 생리 현상을 해결한다고 하지만... - 그럼 그들을 일열로 쭈욱 세워놓은 다음 입구를 지키는 두명만 빼고 세 사람이 각각 한명씩 방에서 빼내어 밖으로 데려가서 일을 보게한 다음 다시 데려온다. 식사 시간이 유일하게 그 방에 등불이 들어오는 시간이었다. 어두운 곳에서는 밥을 먹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인 듯 하지만, 감시하는 것을 수월하게 하려는 듯 했다. 뭐, 솔직히 나는 빛 한점 안 들어오는 곳이라 하더라도 정령들이 보이는 이상,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 어려움도 없는데다가, 엘라임 덕분에 하도 아침을 굶다버릇해서 하루에 두끼만 먹는 것에 버릇이 들린 이상, 두끼만 준다해도 기분 나쁠 것 없었기에 그 곳에 있는 것에 어려움은 없었다. 단지 그 곳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과, 할일이 없어서 심심하다는 것, 그리고 잠자리가 딱딱한 그냥 나무 바닥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러고보면, 나는 식사할 때를 제외하고 움직이는 시간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잘때 몸 뒤척거리는 것을 빼면 말이다. 볼일 보러 갈때 움직이지 않냐고 물어본다면, 솔직히 나에게는 생리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땀은 나는데 큰 일과 작은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나 할까? 한국에서 인간으로 살때는 화장실에도 꼬옥 가고 그랬었는데, 이 곳에 오면서 갑자기 그게 사라졌다. 엘라임의 말로는 이 곳에 와서야 정령의 기운이 활동하기 시작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화장실 안 가서 편하긴 편했지만, 배설의 쾌감을 잃어버리니 뭔가 좀 허전한 거 같기도 하고,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더더욱 내 자신에게 각인되는 거 같기도 해서 기분이 좀 심숭생숭 했다. 지금이야 익숙해져서 덤덤하긴 하지만 말이다. 뭐 그리하여, 약... 10번정도의 식사를 받아 먹었을때... 음, 그러니까 대충 5일 정도 지났을때 배는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하여 정박했다. 배의 밑쪽 선실에 갖힌 내가 어찌 알 수 있었냐 하면, 수다쟁이 정령들에게 들었다. 물론 내가 물어보면 바람의 하급 정령인 실프는 장난만 칠 뿐 제대로 대답을 안 해줬지만, 그들 사이에 간간이 섞여 있는 물의 하급 정령인 운디네들도 있었으니까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바람의 정령들에게도 내가 약간의 정령의 기운만 보여주면 대답을 들을 수 있었지만, 어린 여자애들 모습을 하고 있는 녀석들에게 힘을 사용해 대답을 듣는다는게 영 내키지 않은 일이라 나는 그냥 운디네들과 대화하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의 식사를 받아 먹고 '여긴 우리가 내리는 곳이 아닌가벼...' 하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식사를 한지 별로 시간이 흐르지 않았는데도 문이 열리며 일단의 남자들이 들어왔다. 맨 앞에서 들어온 남자는, 전에 날 건져 주며 거짓 친절을 베풀었던 그 남정네였다. 그는 갑자기 밝혀진 등불에 적응 못하여 인상을 찡그리는 아이들을 쓰윽 바라보더니 예의 그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 너희들이 내릴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규칙은 잘 알고 있겠지만 다시 한번 이야기 하지. 절대로 이야기를 하지 말 것.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것. 잠시 후에 조용히 배에서 내려 준비된 마차에 올라타면 된다. 어려울 것 없지?" 그가 거기까지 이야기 했을 때 밖에서 한 남자가 들어오더니 이야기를 하던 그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그 남자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줄로 서라." 그러며 근처에 있던 한 아이를 일으켜 자신 앞에 세우자, 아이들은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머뭇거리지도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아이 뒤에 일렬로 주르르 섰다. 그래서 나도 그들 틈에 살짝 끼어 줄을 섰다. 그렇게 아이들이 다 일렬로 서자 이야기를 한 남자가 몸을 돌려 나갔고 아이들도 그 뒤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남자와 같이 들어온 다른 네명의 남자들은 방 안에 들어서서 남은 아이는 없는지, 우리가 허튼 짓은 하지 않는지 감시하다가 아이들이 다 밖으로 나가자 뒤에서 따라왔다. 밖은 밤이었다. 배가 정박한 항구에는 인적이 없었고, 오직 내가 타고온 배에만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들 또한 조심하고 있는지 소란스러운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게다가, 사방을 밝히기 위한 등불은 하나도 켜있지 않았기에 하늘에 걸린 반달의 빛에 의존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배에서 내리자 말 두마리씩 매인 마차 수십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배에 타고 온 애들은 나와 같이 갖힌 애들 뿐이 아니었는지, 우리 앞에는 아이들이 탄 듯한 마차가 막 떠나고 있었고, 그 다음 마차에는 나와 갖힌 아이들이 아닌, 처음 보는 아이들이 막 마차를 타고 있었다. 그 애들은 치마를 입고 있는 걸 보아 여자애들인 듯 했다. 나와 같은 방에 있던 애들은 모조리 남자애들이었던 터라 나는 새삼스레 그 쪽으로 시선을 주었지만, 그것도 잠시, 우리들을 감시하고 있던 남자가 날 툭툭 쳐서 얼른 시선을 내리고 앞의 아이를 따라갔다. 우리가 탄 마차는 밖을 내다보거나, 아니면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창이 다 막혀있는데다, 마차 안에는 앉을 의자도 없이 그냥 바닥만 있었기에 마차에 탄 애들은 배에서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차 바닥에 그냥 쪼그려 앉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큰 마차가 아니었던 탓에 열명이 타자 나는 발을 편하게 피기는 커녕, 무릎을 구부려 가슴에 바짝 붙였는데도 옆의 애와 밀착될 수 밖에 없었다. 곧 마차 문이 닫히고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놈의 마차가 얼마나 덜컹 덜컹 거리던지 나는 바닥에 붙인 엉덩이가 무지 무지 쑤셔왔고, 그 반동으로 허리까지 아파왔다. 게다가 덜컹거리는 강도가 심해서 한번 덜컹 거릴때마다 입에서 저절로 '윽, 윽' 소리가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딴 애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데 나만 '윽윽' 거리는 것도 웃겨서 나는 입을 꼬옥 다문 채 소리가 안 나게 조심했다. 다행인것은, 그러한 불편한 마차를 오래 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시간 관념이 확실하지 않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1시간은 안되었다... 싶을 즈음 마차는 드디어 멈춰섰고, 그러자 누군가가 와서 우리가 타고 있는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항구에서 처럼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는지 횃불로 사방이 환하게 밝혀 있었다. 아마 어느 저택의 안뜰인 듯 했지만, 저택을 구경할 시간도 없이 우리는 곧바로 한떼의 남자들의 인도와 감시를 받으며 그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거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얼굴과 손을 씻을 수 있었다. 배에 있을 당시에는 마실 물만 주었기에 목욕은 커녕 머리를 감지도, 세수를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 다음 네명씩 잘려져 감옥처럼 한쪽 벽이 쇠창살로 막힌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비록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곳이기는 하지만, 쥐가 돌아다니거나 지저분 하지는 않았고, 배에서와는 달리 한쪽에 짚더미가 깔려 있었다. 비록 지하라 약간 습하기는 했지만, 맨 바닥에서 안 자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뻐서 그 곳에 얼른 가 몸을 뉘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다시 한번 세수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하고 나자 우리가 갖힌 방이 주르르 있는 층에서 맨 안쪽에 있는 아이들부터 차례차례 데리고 나가기 시작 했다. 그러니까 방 한칸에 있는 아이들 네명을 데리고 나간 뒤, 잠시 후에 또 다른 방에 갖힌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고, 얼마 후에 또 다른 방에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고... 그런 식이었다. 드디어 이제 여기에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감에 두근두근 거리는 가슴을 부여앉고 기다리고 있자니 결국 우리 방 차례가 왔던지 한 덩치하는 남자가 방 앞에 서서 잠긴 철창문을 열었다. "나와라." 그에 같이 방에 있던 아이들이 조용히 일어서서 차례차례 나갔더니 그 남자는 '허튼 짓 하면 재미 없을 줄 알아.' 라는 듯한 시선으로 우리를 지긋이 바라보며 손에 쥐고 있던 채찍을 슬그머니 들어 보이더니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남자와 같이 왔던 또 다른 남자는 우리가 걸어가기 시작하자 우리의 뒤쪽에서 따라왔다. 제 5화 새로운 체험(?) (4) 그들이 우리를 데려간 것은 응접실 처럼 화려하게 꾸며져 있지만, 우리가 들어간 작은 문과 그 문의 두배 정도 되는 두개의 문이 달린 커다란 입구 외에는 창문이 없어 사방이 막혀 있는 어느 넓직한 방이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화려하고 폭신해 보이는 커다란 안락 의자에 앉아 있는, 부유한 티를 팍팍 내고 있는 두 명의 중년 남자와 그들의 뒤에 서 있는 호위병인 듯한 한 몸집 하는 남자들, 그리고 보좌관인 듯이 두툼한 종이 뭉치와 깃털 펜을 들고 있는 두 남자가 각각 자신의 상관인 듯한 사람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들어간 작은 문 가까이에 서 있던 사람은 우리가 들어오고 우리를 안내한 남자가 한쪽 공간에 우리를 일렬로 세우는 것을 보더니 앉아 있는 남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 이번에도 남자 아이들입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다시피, 이번에 데려온 아이들은 꽤 괜찮은 물건들이죠. 그러니 전 보다는 30%는 더 주셔야 합니다. 이만한 애들 찾아서 데려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아시겠죠?" 그러자 앉아 있던 두 남자 중 입 둘레를 동그란 수염으로 감싸고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너무 비싸군. 우리가 어디 한두번 거래한 사이도 아닌데 말야... 하지만, 이번 애들이 전보다 났다는 건 사실이니... 10%정도로 하세." 옆에 같이 앉아 있던 매부리 코의 남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은 그 정도로 봐주게나. 사실, 요즘 내 쪽이 심상치가 않아. 내 주요 고객 중 한명이 슬쩍 귀뜸해주길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인 단속이 일어난다더군. 이번에 온 것도 나로써는 큰 모험을 감행한 걸세." 일어서 있던 남자는 과장되게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너무들 하십니다. 두 분들도 제 사정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요즘 위쪽에서 아이들 데려오는 값도 많이 뛰었다고요. 최소한 25%를 더 주시지 않으면 본전도 못 건집니다. 그럼 저희는 이 장사를 때려 칠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매부리 코의 남자가 그의 엄살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허, 자네가 이 장사를 때려친다고? 난 내 생애에 그런 날을 못 볼줄 알았는데, 잘 하면 볼 수 있다니.. 이거 영광이군." "절 그렇게 대단히 봐주시다니 저야말로 영광이군요. 하지만, 10%는 정말 너무하신 겁니다. 이번 아이들은 그 정도로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두분 다 제가 얼마나 공평한지 아시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변변치 않으면 오히려 제가 가격을 내려 드렸습니다." 그러자 동그란 수염 남자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물론,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우리도 잘 아네. 그러니 지금까지 거래를 유지하는 것이고... 좋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15%로 하지." "20%! 그 밑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완강한 남자의 말에 매부리 코의 남자와 동그란 수염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눈짓을 주고 받더니 결국은 승낙했다. "좋네. 단 나중에 나오는 아이들까지 괜찮다는 조건 하에서만." 동그란 수염 남자가 말하자 일어서 있는 남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 양심상 어찌 돈을 더 올려 받으려 하겠습니까?" 그의 말에 내 옆에 있던 우리를 데려왔던 남자가 기도 안 찬다는 듯한 표정으로 김빠지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기야, 사람을 가지고 돈 거래를 하는 인간이 어찌 양심 운운 할 자격이 있겠는가? 일어서 있던 남자는 가격 흥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까보다 활기찬 얼굴로 앉아있는 두 남자를 재촉했다. "자자, 그럼 어서 골라들 보십시오. 이러다 오늘 안에 거래를 끝내지 못하겠습니다?" 그 말에 앉아 있던 두 남자는 진지하게 가만히 서 있는 우리를 마치 물건 감정하듯이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상의도 벗겨 보고 뒤도 돌아보게 하더니만 둘이 또 숙덕숙덕 거리며 의논 끝에 입을 열었다. "나는 저 특이한 파란 머리 색의 아이로 하겠네." 매부리코의 남자가 날 가르키면서 결정하자 동그란 수염 남자가 뒤이어 입을 열었다. "난 나머지." 서 있던 남자는 우리 주위에 있는 남자들에게 눈짓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런데... 벨레니쪽은 오늘 적게 선택하시는 군요. 이번 아이들을 놓치면 무척 아쉬우실텐데 말입니다." 나는 나를 데려온 남자에게 이끌려 매부리 코 남자 뒤쪽에 서 있던 한 덩치 하는 남자들에게 넘겨졌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쪽에서 대대적인 단속이 펼쳐질 거라네. 물론 걸리지는 않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내가 들을 수 있는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날 넘겨받은 남자는 자신들 뒤쪽에 있는 커다란 문을 열고 날 데리고 나갔던 것이다. 동그란 수염 남자쪽으로 넘겨진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문 밖으로 인도되더니만 나와는 반대편으로 이끌려갔다. 그렇게 그 방을 나온 내가 다시 도착한 것은 또 어떤 방이었다. '또냐...' 그런 생각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남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그 곳 역시 내가 들어온 입구 외에는 창문이 없어 등불로 방 안을 밝혀 놓았는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함인지 덩치 좋은 남자 한명과 여자 한명이 채찍을 들고 의자에 편히 앉아 있다가 우리가 들어서자 시선을 보내왔다. "자, 들어가." 그 안에는 나 말고도 8명이 되는 아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 있었는데, 지금까지와는 달리 여자 애들도 5명 섞여 있었다. 내가 두리번 거리며 방 안을 살펴보자 채찍을 든 여자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뭘 보는 거야? 빨리 자리에 앉아. 엉뚱한 짓 하면 혼날 줄 알아?" '별걸 다 가지고 시비네... 그렇게 히스테릭 하면 시집도 못 갈텐데...' 나는 속으로 꽁알꽁알 댔지만, 순순히 자리를 잡고 얌전히 앉았다. 나도 채찍으로 맞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내가 들어온 뒤에도 한참 후에 한명씩 한명씩 세명이 더 들어오더니 더 이상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쪽 사람들은 좀 치사한지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식사는 커녕 물도 안 주면서 한 여자애가 조심스럽게 화장실 가고 싶다고 말하는데 매정하게 참으라고 하는 거였다. 그 여자에는 울상이 되었지만 더 이상 아무말도 못하고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여자애가 볼일을 보러 밖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나 말고도 뒤에 세명의 애들이 더 들어오고 한참이 지나서야 다른 두 명의 채찍을 든 여자들이 들어오고 나서였다. 아마 아이들 감시를 교대하러 온 듯 한데, 그들이 오고 나서야 우리들에게 식사가 배급되었다. 빵 하나와 사과 하나, 그리고 물이 다였는데, 이 곳에 와서 처음 접한 과일인데다 나에게 익숙한 사과란 사실에 나는 감격이 넘쳤다. '아... 이곳에도 사과가 있구나...' 사과를 나눠준걸 보니 아마 이곳 계절이 지금 가을인 듯 싶었다. 하긴, 배를 타고 오면서 여러 아이가 한 방에 있는데도 더운 것을 느끼지 못했으니 쌀쌀한 계절임이 분명했다. 그 날은 그 방에서 보내야 했는데, 바닥에 무지 오래된 것 처럼 보이는 양탄자라도 깔려 있어서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찬 바닥에서 자야 했을 것이다. 다음 날이 되어 우리는 방에서 주르르 나와 다시 마차에 올라야 했다. 그래도 배에서 내렸으니 이제 이것만 타면 여행은 끝이겠구나... 생각하며 슬슬 탈출계획을 세우려고 했는데, 이게 왠일인지 그건 여행의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 마차에서 내리니,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또 배였다. 비록 처음에 탄 그 배만큼 큰 건 아니었지만, 또 배를 보자니 제일 먼저 드는 건 지겹다는 감정이었다. 그래도 이대로 바다 속으로 뛰어들긴 싫어서 몇칠을 꾸욱 참으니 드디어 배에서 내릴 수 있었는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배에서 내려 맨 처음 탔던 그런 텅 빈 마차에 아이들이 남, 녀로 구분되어 탔다. 비록 덜커덩 거리는건 여전했지만, 발을 뻗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다 바닥에도 폭신하게 짚이 깔려 있어 되게 고맙게 여기고 있었는데, 그것도 잠시 뿐, 곧 내릴 줄 알았던 우리는 하루종일이 아니라 며칠 동안 마차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마차에서 내릴 경우는 볼일을 보고 싶다는 때에만 한 사람씩 내릴 수 있었는데, 나는 볼 일을 보지 않으니 영... 마차에서 내릴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마차에서 식사를 받아 먹어야 했고, 마차에서 자야 했으며, 그 동안 세수 하는 건 정말 생각도 못했다. 그 동안 마차는 밤을 제외하고 계속 몇날 몇칠을 달리기만 했다. 이러다가 이가 생기는 건 아닌지 걱정하며, 엘라임에게 혼나던 말던 그냥 돌아가버릴까... 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데 드디어 마차 문이 열리더니 한 덩치의 남자가 얼굴만 쑥 들이민 채 말했다. "내려." 이제야 여행의 끝인가 싶었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란 걸 알게된 것이 여러번 이었기에 나는 이번에도 별 기대를 안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를 목욕 시켜주고 - 목욕할때는 단체로 했기에 밑의 속옷은 안 벗었다. - 새 옷도 주기에 혹시나.. 했는데, 왠걸 다음 날에는 그 동안 탔던 마차가 아닌 좀 황당하게 설계된 짐마차에 타야 했다. 그 짐마차는 좀 커가지고 물건을 많이 실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커다랗고 튼튼해 보이는 괴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높이는 대충 1m 는 안되어보였지만, 길이가 2미터는 되어 보였고, 너비도 넓어서 사람 대여섯은 충분히 들어갈만큼 보였다. 물론 들어간다면 꼼짝없이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하겠지만... 그런데, 그 곳이 우리가 들어갈 곳이었다. 아마도 우리가 들어간 뒤에 그 괴짝 위에다 짐을 잔뜩 실어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감출 셈인 듯 했다. 그런거보면, 이 앞에 무슨 검문이 있다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곳이 바로 벨레니라는 나라로 넘어가는 국경이었다. 그러니까, 날 선택한 그 매부리코 남자는 벨레니라는 나라에서 이런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남자들은 우리에게 아침 식사 후에 내 새끼 손톱만한 웬 알약을 하나씩 나눠줘 먹게 했는데, 그 것이 수면제 였던지 먹고나서 그 괴짝에 들어가 누워 있자 잠시 후에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정신없이 잠이 들고 말았다. 제 5화 새로운 체험(?) (5)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때에는, 여전히 빛 한점 안 들어오는 어두컴컴한 궤짝에 갖힌 채 달리고 있었다. 다행히 궤짝 바닥에는 몸의 상함과 부딧힐때 나는 소리를 방지하기 위하여 짚이 깔려있었지만, 그 짚더미 만으로는 마차의 덜컹거릴때 느끼는 충격을 많이 흡수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자마자 제일 먼저 느꼈던 건 삭신을 마구 마구 엄습하는 통증이었다. '에구구구... 삭신이야...' 생각 같아서는 가볍게 체조를 해서 몸을 풀고 싶었지만, 겨우 누워있는게 최상일 만큼 낮고 좁은 공간이라 나는 자세를 옆으로 돌아 눞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히익~!!' 나는 헛 바람을 삼킨 채 얼른 바로 누웠다. 내 옆에는 나와 같이 탄(?) 아이가 죽은 듯이 미동도 않고 누워 있었는데 정령들의 몸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에 비춰 보이는 그 아이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푸르게 보여 마치 시체 같이 보였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던 것이다. 슬쩍 만져보아 그 아이의 몸에서 따뜻한 온기를 느낀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다시 그 아이를 볼 용기는 나지 않았기에 천장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나도 유전의 절반의 절반은 인간이라 그들이 먹인 약발이 들어 잠들긴 했지만, 나머지 1/4이 인간이 아닌지라 나와 같이 약을 먹은 아이들보다 약발이 덜 들은 모양이었다. '에... 그럼 독약을 먹더라도 난 죽지... 않으려나? 호오.. 어쩜 그럴지도. 그나저나... 이렇게 팔려 다니는 것도 곤란하니... 슬슬 탈출해야 할텐데... 근데, 이 곳이 어딘지나 알아야 탈출을 하던지 말던지 하지.' 하지만, 내 수중에는 돈도 한푼 없었다. 인간 세상에서 돈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며, 돈 없는 자가 얼마나 처량한지 잘 알고 있던 나는 막상 내가 빈 손이라는 걸 깨닫자 곧바로 드는 생각은 '이대로 갈 수는 없다' 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처음 바다 속 집에서 가출할 당시에 가지고 있던 금팔지를 비롯하여 금화 다섯개를 배에 오르자마자 고스란히 털렸던 것이 생각이 나 나도 모르게 이가 빠드득 갈렸다. '그래, 튈때 튀더라도 빈 손으로 튈 수는 없지. 암, 암... 그렇고 말고. 어차피 이들도 그 배에 있던 사람들이랑 똑같은 일당일테니 돈 털리는 일 정도는 겪어도 싸.' 그렇게, 내 생각에는 무지 괜찮은 계획을 세워 흡족해 하는데, 순간 배에서 내가 세운 계획의 결점을 가르쳐주며 보완하라는 듯 항의를 해왔다. 꼬르르륵~~ '아... 가기 전에 잔뜩 먹고 가야 겠다. 먹고 죽은 귀신 때깔도 곱다잖아. 공짜로 주는 거 다 먹고 가야지.' 한번 배가 고프다는 것을 깨닫자 점점 그 배고픔이 심해지더니 나중에는 속이 막 쓰려왔다. '아구구... 이거 너무 배고픈데?' 정신 없이 자다 일어났기에 나는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를 데려가는 사람들은 매 끼마다 (비록 하루에 두끼기는 하지만...) 꼬박꼬박 식사를 챙겨줬었기에 나는 한끼 식사를 굶었거니.. 하고 있었는데 내 배가 엄청 고프다 못해 쓰리 걸로 봐서는 한끼 정도가 아닌 듯 했다. '아...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돌아가시겠다... 으윽... 이 사람들이 혹시 내가 탈출할까봐 기운 없게 하려고 일부러 굶기는 거 아냐?' 그런 쓸데 없는 생각까지 하면서 혼자서 한참 동안을 배고픔과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부스럭 부스럭거리며 옆에 누운 아이가 움직이는 기척이 들려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나는 다시 한번 흠칫 놀라 비명성을 삼키며 다시 잽싸게 고개를 천장 쪽으로 돌려 버렸다. 마침 그 옆의 아이가 자신도 오랫 동안 가만히 누워 있어 온 몸이 결리는지 움직이느라 옆으로 드러 누웠는데 그게 하필이면 내 쪽으로 돌아누웠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그 아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거고... '히이익~' 그런데, 그 아이의 어둠 속이라 초점이 잡히지 않은 눈이 퀭 하고 쏙 들어간 데다가 피부가 푸석 푸석 거리고 약간 야위어 보이는 것이 며칠은 굶은 사람 같아서 더더욱 시체처럼 보였던 것이다. 우리가 비록 뭘로 팔려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식사는 매끼 꼬박꼬박, 그리고 꽤 괜찮게 나왔던 터라 잡혀가는 아이들의 얼굴은 피부도 윤이 났고 볼도 붉으스름하게 건강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고 일어났더니 저리 며칠 굶은 사람 얼굴처럼 되었다는건... 우리가 정말 며칠 굶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쩐지... 엄청 배가 고프더라. 아구 배고파... 치사한 인간들... 혹시 식사비 아끼려고 우리에게 약 먹여서 며칠 재운 거 아냐?' 속으로 그렇게 밖의 사람들에게 욕을 해대고 있는데 이제는 반대쪽에서 부스럭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약효가 다 해 나머지 애들도 다 깨어나는 듯 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쉬지 않고 계속 달릴 것 같던 짐마차가 정지하고, 우리가 누워 있던 궤짝 위에 올려놨던 짐들이 내려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이 궤짝에서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배 속에서 한층 더 요란하게 꼬르륵 소리를 냈다. 우리를 이렇게 굶겨 놨으니 설마 지금 우리를 꺼낸 뒤에 아무것도 안 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드디어, 궤짝의 뚜껑이 위로 들어 올리며, 바깥의 시원한 공기가 괴짝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자, 나오너라." 밖은 이제 막 저녁을 맞이하는 상황이었던지 태양이 막 지면서 마지막으로 서쪽 하늘의 한 귀퉁이를 붉게 물들이고, 사방은 어둑 어둑 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깜깜한 궤짝 안에 있던 나로써는 그 정도의 빛이라도 밝게 보여 사방을 둘러보는데 별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리둥절하게도 일행이 멈춰 서 있는 곳은 어느 건물 안이 아닌, 아무런 건물도 보이지 않는 허허 벌판이었다. 한쪽에는 꽤 높아 보이는 산이 시작되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아마도 산을 끼고 돌아가는 것 같은데, 마을이나 성읍을 만나지 못해 오늘은 노숙을 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흐음... 한 며칠은 탈출 못하겠는데?' 내가 노리고 있었던 때는 우선 도시 안으로 들어간 뒤 마차에서 내리게 해 여관 같은 곳에서 하루 묵게 하는 날이었다. 바람의 정령들에게 내가 가진 힘을 보인다면 마차 안에 갖혀 있더라도 탈출 하는 건 문제가 아니겠지만, 도시가 아닌 이런 허허 벌판이라면 내가 도망치는 모습이 쉽게 포착될 것이었다. 물론 산으로 가면 괜찮겠지만, 나 홀로 산 속을 헤매며 인간 마을을 찾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뭐, 그것도 안 붙잡힐 때의 이야기겠지만.... 내가 이렇게 생각을 하며 사방을 둘러보자 우리를 지키고 있던 남자들 중 한명이 날 툭툭 치며 한쪽을 가르켰다. 그 곳에는, 우리가 짐마차에 실린 괴짝 안에 타기 전에 타고 이동하던 예의 그 마차가 서 있었다. 오늘 탈출할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휘청 휘청 거리는 걸음으로 겨우 그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 거기엔 나보다 먼저 들어온 아이들이 맥 없는 모습들로 등을 마차 벽에 기댄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잠시 후 마차 문이 다시 열리면서 우리에게 식사가 주어졌는데, 치사하게도 달랑 묽은 죽 한 그릇을 주는 거였다. 내가 너무 기가막히고 분노하여 죽을 나눠주는 그 남자를 째려보자 그 남자가 이런 내가 어이없었는지 피식 하며 입을 열었다. "허, 성깔 있다 이거냐? 하지만, 이틀이나 굶어서 빵은 못 먹어. 다 너그들을 위한 거니 얌전히 먹어라. 내일은 좀 더 나은 죽을 주마." 우리가 며칠 굶었을 거라는 예측은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날 이틀이나 굶겼다 이거지? 흥, 네 놈들은 이로써 내가 도망갈때 잃을 돈들이 두 배로 더 많아졌다.' 그렇게 혼자 속으로 씩씩 거리는 동안 마차에 갖힌 채 이동되는 여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속으로 '도시로 들어가기만 하면, 도시로 들어가기만 하면...' 이라고 되내며 빨리 그날이 오기를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날 비웃기라도 하듯 며칠 후 우리가 내린 곳은 3층으로 된 멋들어지게 지어진 어느 저택 앞이었다. 문제는... 그 저택이 인적 드믄 산 속에 나무들을 벗삼아 홀로 지어진 건축물이라는 것이었다. 그런거 보면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딱 좋은 별장이었지만, 탈출을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는 열받는 일이었다. '이런... 열받게시리... 이 일당들에게서 훔쳐가려고 했는데, 날 사가는 사람에게 훔쳐야 하잖아? 우쒸....' 속으로 하염없이 투덜댔지만, 겉으로는 내색 못한 채 나는 그들이 이끄는 대로 고분고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우릴 기다리고 있는 건 커다란 욕조가 들어 있는 목욕탕이었다. 그 곳에서는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는 여자 한명이 채찍을 들고 있다가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채찍을 들어 바닥을 한번 내리쳐 아이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면서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자, 각자 옷을 벗고 머리와 몸을 깨끗이 씻는다, 알았나? 나중에 검사해서 지저분한 곳이 있는 녀석은 채찍 맛을 보여주겠어!" 욕조 안에는 따뜻한 물이 가득 담겨 있었고, 그 옆에는 우리를 도와주려는 듯 우리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 서 있었다. 이런 일을 무지 많이 했는지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 애들이 겁에 질려 옷을 벗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애는 이번에 들어온 애들은 어떻다느니 하면서 옆의 아이와 작게 수다떠는 것이었다.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여자이다보니 나는 팬티에 해당되는 속옷 바지는 안 벗은 채 몸을 씻을 수가 있었다. 몸을 다 씻고, 채찍을 든 우람한 여자에게 검사를 맡은 우리가 밖으로 나가니 거기에는 꽤 고급스런 옷감으로 만든 듯한 옷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까지 걸치고 나자, 나는 우리가 어떤 용도로 이들에게 붙들려 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 때빼고 광내니 한결 같이 꽃같은 미모를 드러냈던 것이다. 아마 여자애들도 나랑 같이 있는 남자애들 못지 않게 예뻤을 것이다. '허, 참...그러니까... 노리개였냐?' 나는 내가 그렇게 예쁘게 생겼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이들이 날 그렇게 여겼다는 것에 화를 내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갈등이 생겼다. 하기사, 그러고보니 내가 여학교 다닐때는 한 인기 했었다. 물론... 큰 키와 보이쉬한 분위기를 풍기는 시원 시원한 외모 때문이긴 했지만.... '쳇... 그러고보니 남자 치고 한 외모 한단 거였잖아? 여자로써 예쁜게 아니라.. 쩌비.. 좋다 말았군. 쳇, 이 일당들 돈을 싹싹 쓸어갔어야 하는 건데....' 옷을 갈아 입은 뒤 우리는 우리를 사러 올 사람들이 올 때까지 대기하는 방으로 옮겨졌다. 그렇게 옮겨가는 와중에 저택의 창문으로 힐끗 보니 저 아래에 호수가 보였다. '호오... 여차 할때 이용하면 되겠다.' 그러니까 이 저택은 산 속의 절벽 위에 세워진 곳인듯 한데, 뒤쪽에 있는 벼랑 밑에 호수가 있는 듯 했다. 얼핏 봐서 얼마나 큰지는 모르겠지만, 절벽도 잘 안 보이는 창문에서 호수의 물이 보이는 거 보니 꽤 큰 모양이었다. '이 일당들.. 되게 부자인가 보네. 산 속의 이렇게 경치 좋은데에다 별장 짓고 말야.. 여기서 우리를 파는 거 같은데...' 우리를 꽃단장 시킨다는 건 상품의 포장 단계일테니, 곧 구매자들에게 선보인다는 소리 아니겠는가? '에잉... 아까워라... 이 곳이 도심 속이었다면, 여기에 있는 돈들 내가 싹 쓸어가는 건데... 아... 다시 생각해봐도 아쉽네...' 제 6화 세상 일은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1) 우리가 사람들에게 선을 보인 건, 맨 처음 그 별장에 도착한 날로 부터 이틀이나 지난 날 오후였다. 나는 솔직히 우리를 오자마자 깨끗히 때빼고 광내길래 그날 저녁에 사람들에게 선을 보일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단순히 본격적으로 때빼고 광내는 작업의 시작이었을 뿐, 우리는 다음 날 부터 본격적으로 때빼고 광내는 작업을 당(?)해야 해다. 하루 왼종일 온몸의 팩 하고, 맛사지 하고, 향기나는 오일 바르고, 온갖 약재가 들어간 물로 머리를 감고... 누가 보더라도 초호화 대접을 받는 거였지만, 막상 받는 애들의 표정은 '무'그 자체였다. 나야 아랫도리 안 벗으려고 우리 시중(?)을 들어주는 여자애들이랑 바락바락 싸우기도 했지만, 그 애들은 마치 세상사 고난을 다 당해 초월한 애들 마냥 뭘 해도 아무런 표정 없이 묵묵히 시키는 대로만 움직였기에, 마치 로보트를 보는 기분이었다. 아마 그랫기에 우리를 때빼고 광내는 작업하던 여자애들이 나에게만 더 짓궂게 굴었는지도 모르겟지만... 어째든, 그 덕분에 나는 저녁이 되었을때 다른 애들보다 두 배는 더 지쳐서 저녁을 먹자마자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전날에 비해서는 가볍게 목욕을 하고 머리도 멋지게 기름 발라 뒤로 넘기고, 옷도 전에 비해 고급스럽고 멋있는 옷이 제공되자 아이들의 얼굴은 더더욱 굳어지고 말았다. 그쯤이면 드디어 시간이 되었다는 걸 어느 누구라도 눈치를 챌 수 있었던 것이다. 과연 누가 나를 살 것인가... 란 생각에 두근 두근 거리는 마음에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 꽃단장을 하고 하릴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시간이 되었는지 방 문이 열리며 떡대의 사내가 들어와 손짓했다. "따라 와라." 그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경매가 진행되고 있는 방이었다. 그 방은 두꺼운 천으로 방을 큰 공간과 그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공간으로 나누고 있었는데, 각각의 공간에 문이 따로 달려 있었다. 물론 작은 공간은 작은 문이, 큰 공간은 문이 두짝인 큰 문이 달려 있었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작은 공간으로, 그 곳은 다음 경매대에 설 아이들이 대기하는 곳이었다. 경매가 직접 벌어지는 곳이라 경비가 더욱 삼엄했는데, 우리가 들어가는 입구 바깥쪽에 두 명의 남자가 서서 지키고 있었고, 안에는 네모난 공간 안에 각 모서리 마다 한명씩 서서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커튼 뒤쪽에서는 한창 경매가 진행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우리보다 여자 아이들의 경매가 먼저 시작되었는지, 작은 공간 안에는 마지막으로 보이는 듯한 한 여자 아이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초조하게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서성대고 있었다. 그 아이는 가볍게 화장도 하고 예쁜 옷을 입고 있었는데, 황당하게도 그 아이가 입은 옷은 얇은 천으로 되어 있어 나폴나폴 거렸고, 가슴쪽에 묶은 매듭 하나만 풀어도 쉽게 벗어질 것만 같은, 거의 가운에 가까운 옷이었다. 그에 비하면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레이스가 달린 셔츠와 단순한 바지 차림이었다. '으음... 여자라고 안 하길 잘 한거 같네...' 그 여자아이의 모습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나는 이 사람들에게 잡혀 끌려온 후 처음으로 내가 과연 여기 있는 것이 잘 하는 것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전에는 여차하면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도 없이 단지 호기심에, 그리고 쉽게 사람들이 사는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무작정 따라 왔는데, 지금에 와서야 경매를 앞 둔 아이들의 절망적이고 불안하고 초조한 얼굴들을 보니 가볍게 생각하고 있던 내가 괜히 미안해지기 시작한 거였다. '이 별장 근처에 큰 호수도 있는데... 이 애들 도와주는 셈 치고 별장을 한번 크게 엎어버릴까? 그래서 도망갈 수 있게 말이야.' 그러다가 잠시 후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그들을 탈출할 수 있게 도와준다 하더라도, 그 뒤의 일까지 책임질 수가 없어던 것이다. 그러니 탈출만 시켜줄테니 그 뒤의 일은 알아서 하라... 는 무책임한 일을 벌일 수 없는데다, 저들이 탈출한 다음 집으로 돌아가 잘먹고 잘 살거라는 보장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면 다행이지만, 그 전에 어찌될지도 모르고, 또 집으로 돌아간다 해도 잘 먹고 잘 살거라는 보장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뒤의 일은 각자의 팔자려니.. 여기고 무시한다면, 지금 여기서 나 혼자 탈출하는 것보다 더 무책임한 일 같았다. 만약.. 내가 저들까지 탈출 시켜 이 곳 사람들의 이목을 사방으로 흩어 놓으려는 심보로 이 곳을 뒤집어 놓으면 몰라도 말이다. '뭐.. 어찌되었건, 내가 저들을 도와줄 방법은 없구나... 역시, 사람은 힘이 있고 봐야 하는 거군. 배경 좋은 집에서 태어난 것도 정말 복이야...' 다시 한번 초조한 얼굴로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고 있는 여자 아이의 얼굴을 본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방 안에 경비를 서고 있는 사람들이 제지하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움직여 경매가 벌어지고 있는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지금 탈출할 건 아니지만, 어떤 상황인지 미리 봐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았고, 누가 와 있는지도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두꺼운 천이 내려져 있어 막 경매대에 올라가 있는 어떤 여자 아이를 소개하는 소리만 들려올 뿐, 커튼 바깥쪽의 일이 보이지 않자 나는 처음으로 바람의 정령들에게 부탁하기 시작했다. [얘들아, 저 커튼 좀 살짝 치워주면 안될까?] 그 공간 안을 날아다니던 실프들은 사람으로 보이는 내가 말을 걸어오자 눈을 휘둥그래뜬 채 나에게 날아왔다. [오오.. 사람이 우리에게 말을 한다.] [말을 했어, 말을 했어.] [이봐 인간, 우리 말을 할 줄 알아?] 정확히 말하면 우리 말이 아니라 우리가 대화하는 방법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런 그들의 말에 성실해 대꾸해줬다. 편하게 고개를 끄덕여 대꾸를 대신했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주위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기에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이야기 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이야. 그러니 지금처럼 이렇게 말을 건네는 거 아니겠어? 저기, 부탁이 있는데, 저기 커튼 보이지? 저걸 아주 조금만, 살짝 젖혀주면 안될까?] 그러자 실프들의 치기 어린 외면 - 요즘 꼬마 애들은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득이 없으면 안 한다. 물론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3살 정도의 어린애들은 시키면 순순히 하지만, 조금 세상을 알아가는 5, 6, 7살짜리 어린 애들은 절대로 말 안 듣는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탕 하나 줄께!' 하면 왠만한건 다 들었는데, 요즘은 그 정도로는 약발이 안 먹힌다. 과자 한봉지 정도라야 어느정도 먹힐 지경이니, 왜 '미운 5살', '미운 7살' 이란 말이 나오는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실프들이 딱 그짝이었다. - 이 시작되었다. [왜 우리가 해야 하는데?] [직접 하면 되잖아.] [맞아, 맞아.] '하여간... 얄미운 녀석들이라니까.' 이럴때는 정말 엘라임의 말에 100% 공감이 갔다. 엘라임의 성격이 아무리 개떡 같다고 해도, 그가 괜히 바람의 정령왕을 미워하는게 아닐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뭐, 솔직히 하급 정령들만 봐서 중급과 상급 정령들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그들까지 저렇게 나오면 정령왕이 어떨지는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갈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슬쩍 정령의 기운을 밖으로 표출해 보이며 씨익 웃었다. [응? 얘들아, 부.탁.할.게.] 날 지켜보던, 모퉁이에 서 있던 남자가 내가 뜬금없이 웃자 어이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는 실프들을 움직이게 하는게 더 중요 했기에 나는 웃는 얼굴을 그대로 고수했다. 아마 그들은 보통 사람이었기에 내 몸에서 방출되는 정령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겠지만, 실프들은 정령들이었기에 태연하지 못했다. 그들은 내가 기운을 뿜어내자마자 즉시 당황하며 풀이 죽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알았어, 알았어.] [부탁을 들어주면 되잖아.] [그러니 제발 기운을 걷어 줘.] 정령들은 위계질서가 굉장히 잘 잡혀 있었다. 그러니 자신들보다 상급 정령의 말에는 무조건 순종을 했는데, 그건 자신보다 상급의 기운을 가진 자에게 반항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나았다. 지금처럼 자신보다 조금 더 강한 정령의 기운을 느끼면 본능적으로 두려워 움츠러 들기 때문이었다. 뭐, 사실... 정령이 아니면서 이렇게 정령의 기운을 내뿜으며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자가 이 세상에 나 한명 뿐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일반 정령사들도 정령들과 계약을 맺었기에 몸에 정령의 기운을 지니고 있지만, 그들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정령들을 볼 수 없었기에 나 처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뭐, 그러고보니 정령이 아닌 자가 정령을 볼 수 있는 것도 나 뿐인가? 나는 그에 다시 피식 웃으며 정령의 기운을 거두어 들였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부탁해.] 그러자 실프들은 처음처럼 얄밉게 구는 대신 재빨리 커튼이 있는 쪽으로 날아가 약한 바람을 일으켜 커튼을 옆으로 살짝 밀어제꼈다. 비록 그렇게 넓은 틈새는 아니었지만, 커튼 뒤쪽을 보기에 충분했고, 사람들도 넓은 틈새가 열리지 않은 터라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커튼 바로 앞에는 낮고 넓은 단상이 있었고, 그 곳에는 여자 아이 한명과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그 중년 남자가 아이들을 소개시키며 경매를 진행시키는 사회자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단상 위에 서 있는 여자 아이는 가슴부터 시작되어 허벅지 중간쯤에서 끝나는 원피스 형의 하늘 하늘한 속옷만 입은 채 창백한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너무한 건 그 속옷 안에 아무것도 안 입었는데, 그 속옷이 너무 얇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의하여 속이 다 비쳐보이는 거였다. 그런 차림으로 사람들 앞에 섰으니 죽고 싶을 정도로 창피한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단상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단상 구석에 서 있던 감시자 겸, 보조 진행자인 20살은 넘어 보이는 여자가 다가와 강제로 그 여자 아이의 얼굴을 들게 했는데, 고개를 드는 여자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하지만 울고 싶지는 않은지, 아니면 울지 않도록 교육을 받았는지 입술을 꼬옥 깨문 채 눈물을 꾹 참고 있었다. '젠장....' 나는 얼른 걸음을 옮겨 커튼 틈새로 비치는 광경이 바뀌도록 했다. 밑에는 단상을 반원으로 둘러싼 채 앉아있는 사람들이 대충 10명 정도 되어 보였는데, 그들은 모두 신원을 가리기 위함인지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비싸보이는 옷에 커다란 보석 장신구를 달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무지 부자라는 건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런데 남자들만 앉아 있는 건 아니었다. 비록 남자보다 적은 숫자지만, 여자들도 드문 드문 앉아있는 것이었다. 시선을 돌려 벽쪽을 바라보니, 그 곳은 우리가 대기하고 있는 방보다 훨씬 경비병이 많았다. 우선 커다란 문 양 옆에도 한명씩 있었고, 모서리에도 한명씩, 그리고 벽 가운데에도 한명씩 붙어 서 있었다. 내가 있는 공간 맞은 편의 벽에는 커다란 창문이 두개 있었는데 경비병은 그 창문 사이의 벽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있는 공간 쪽에는 창문이 없어서 그런지 두명의 경비가 있다고 실프들이 알려줬다. '으음... 탈출한다고 해도 여기서 탈출하기는 무리겠네. 아무래도... 정말 팔려간 다음에 기회를 노리는 것이...' 그러나 나는 곧 그 생각을 수정해야 했다. 여자 애들은 그래도 누군가에게 넘겨질때까지 그 얇은 원피스형 속옷 - 물론 입으나 마나 하지만.. 그래도.. - 을 입고 있을 수 있었는데, 남자애들은 그런것도 없이 다 벗기는 거였다. 그거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만약 내가 첫 타로 경매 단상에 올라갔으면 큰일날 뻔 했다. '안돼겠어. 여기서 탈출 해야겠어. 하지만.. 무슨수로 탈출하지? 경비가 너무 많은데... 여기 있는 모든 실프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라나?' 그제야 큰일났다는 생각에 나는 안절부절 못하며 머리를 굴리는데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내가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건, 이 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때려 눕히는 것이 아니라 내 한몸 슬쩍 빠져 나가는 거였기에 나는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곳의 경비들이 너무 많자 그제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자각하게 된 것이다. '어쩌지.. 어쩌지? 그냥 무조건 들고 튈까?' 이렇게 혼자 초조해 하는 사이 결국 내 차례까지 다가오고 말았다. 커튼이 좌우로 열리고 우릴 감시하던 남자 중 한명이 내 팔뚝을 강하게 잡더니 질질 끌다시피 단상으로 데리고 올라가 가운데에 세워놓는 거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날 보고 작게 감탄사를 흘리는게 내 귀에 들어왔다. 그 소리에 나는 그 와중에서도 '내가 잘 생겼나?' 하는 태평한 질문을 떠올렸지만, 사회자가 망치로 탁자를 탁탁 내리쳐 자신에게 시선을 모이게 하자 얼른 정신을 차렸다. '도망 가야 해, 도망을... 내 옷을 벗기기 전에...' "자, 이번에 나온 녀석을 보십시오. 머리 색과 눈의 빛깔이 너무나 신비스럽지 않습니까? 게다가 피부 또한 귀공자 못지 않게 티 하나 없이 하얗고 매끄럽습니다." 그러자 어떤 여자 하나가 소리쳤다. "온 몸의 피부가 하얀지 어떻게 알지?" 그에 사회자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후후후, 물론 궁금하실테지요. 물론 곧 보여드릴 겁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전체를 다 보지 않고 이 아이의 눈과 머리칼만 봐도 소유하고 싶은 생각이 마구 마구 솟으실거 같은데... 제 짐작이 틀렸습니까?" '윽...' 나는 사회자의 말에 온 몸에 소름이 쫘악 끼치는 걸 느끼며 그 사회자를 노려보기 위해 시선을 옆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그 순간, 사회자 너머로 보이는 창문이 내 눈에 들어왔다. 비록 창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창으로 보이는 건 상록수들의 끄트머리와 하늘밖에 없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아무리 이 곳이 높은 곳이더라도 바람의 정령들 도움을 받으면 충분히 안전하게 뛰어내릴 수 있을 것이었다. 거기까지 떠오른 나는 즉시 정령의 기운을 뿜어내며 실프들에게 부탁했다. [내가 창문 가까이 뛰어가면 창문을 열어줘. 그리고 뛰어내릴 때 안전하게 받쳐줬으면 좋겠어.] 실프들이 보기에는 거의 명령이겠지만, 지금 나는 그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막 보조 진행원이 내 옷을 벗기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실프들이 내 말에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날아가는 걸 본 나는 보조 진행원이 내게 가까이 오는걸 기다렸다가 그녀를 확 밀치고 창문 쪽으로 뛰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놀라 당황했지만, 경비원들은 침착하게 날 붙잡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내가 도망가는 쪽이 창문이라 그런지 약간 느긋한 모습들이었다. 하기사, 솔직히 말하면 창문 사이에 있던 남자와 커튼 쪽에 서 있던 남자만이 천천히 움직였을 뿐, 다른 경비원들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은 채 구경하기만 했다. 내가 사회자를 지나쳐 창문으로 다가가자 실프들이 기다렸다는 듯 창문을 활짝 열어줬다.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낀 두 경비가 좀더 속도를 내어 날 붙잡으려는 찰나 나는 실프들에게 급하게 외쳤다. [날려버려!!] 그러자 실프들은 그 즉시 강한 바람을 형성하여 나에게 달려드는 두 남자를 뒤로 넘어가게 만들었고, 나는 그 틈을 타 창문으로 그냥 뛰어 내렸다. 그 곳은 발코니도 없는 그냥 창이었는데, 저택 뒤쪽으로 난 창이었기에 뛰어 내리자 제일 먼저 절벽에 있는 커다란 호수가 보였다. '운이 좋군.' 경매가 벌어지던 방도 2층에 자리잡고 있던 터라 실프들의 도움을 받은 나는 빠르게 땅에 내려서서 절벽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방쪽에서 비상 사태를 알리는 신호인지 커다란 폭죽음이 터져 나왔다. 저택이 절벽에 가까이 지어졌다고 하나 저택과 절벽 사이에는 약 50여미터에 달하는 공간이 있었고, 절벽 위에는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담이 둘러쳐져 있었다. 하지만, 절벽 밑의 호수를 쉽게 내려다볼 수 있게 함인지 높이는 약 1m 정도 밖에 안 되어 왠만한 사람은 훌쩍 뛰어넘을 수 있었다. 달리던 속도 그대로 담 위로 훌쩍 올라간 나는 그냥 뛰어내리려고 하다가 밑을 바라보고는 멈칫 했다. 저택에서 바라볼 때는 몰랐지만, 이렇게 직접 절벽을 내려다보니 높이가 대충 아파트 10층 정도 - 위에서 내려다 보느라 더 높아 보이는지도 모르겠지만... - 되는 거 같아 뛰어내리기 무서웠다. 게다가 절벽 바로 밑에까지 호수 물이 차 있었지만, 그 물 위로 바위들이 빠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어 더욱 무서웠다. 잘못 그 위로 뛰어내리면 난 그대로 즉사가 아닌가? 하지만, 곧 허공에서 꺄르르 대며 움직이는 실프들을 보고 나는 두려움을 떨쳐 버렸다. 저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절벽을 뛰어 내리는 것과, 물 위에 빠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바위를 지나 물만 있는 곳으로 떨어지는 건 어려운일이 아닐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한번 정령의 기운을 뿜어내 실프들에게 반 어거지로 도움 약속을 받아낸 뒤 뛰어 내리기 위해 무릎을 살짝 굽혔다. '하나, 둘, 세에에에?' 보통 이런 건 셋을 센다음 뛰어내리는거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도 셋을 셈과 동시에 뛰어 내리려고 했는데, 그 보다도 먼저 내 허리를 낚아채는 강한 손길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담 위에서 너무 지체하느라 저 일당들에게 잡혔나 보다 하고 내 허리를 잡은 손을 뿌리치기 위해 몸을 뒤틀었는데, 그러자 더욱 더 강한 힘이 내 허리를 잡더니 날 번쩍 들어 자신의 앞으로 끌어 당기는 거였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엉덩이에 희안한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날 낚아챈 사람은 말을 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열심히 몸부림치자 그 사람은 양 팔로 날 꽈악 붙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괜찮아, 괜찮아. 널 해치려는 게 아니야. 도와주려고 왔어." 생각보다 굉장히 젊은 남자의 목소리에다가 도와준다는 말에 나는 몸부림을 멈추고 당황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침 그때 날 내려다보고 있던 남자의 눈과 그대로 마주칠 수 있었는데 내 눈을 본 그 남자의 눈에 신기함이 떠올랐다. 그 남자의 눈은 푸르른 산과 같은 짙은 녹색이었는데, 그의 검은 머리칼과 꽤나 잘 어울렸다. 나이는... 대략 20대 초반으로 젋은 남자였는데, 강인한 턱선이 인상적인 꽤 괜찮게 생긴 남자였다. 내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보자 그가 피식 웃으며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두려워 하지 않아도 돼. 난 네가 생각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데... 넌 참 신기한 색의 눈동자를 가졌구나? 아니, 머리 색도 참 독특해... 이런 색은 처음 보는데?" 그러며 무지 신기한 장난감 보는 듯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올려 내 머리를 살짝 만져보는 그에게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 누구세요?" 제 6화 세상 일은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2) "누, 누구세요?" 정말 왜 그렇게 바보같이 굴었는지... 그냥 당당하게 '누구냐?'라고 물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만은, 너무나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침착성을 잃은게 문제였다. 이런 내가 우스운지 남자가 다시 한번 부드럽게 웃고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는지 막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보다도 먼저 말을 타고 저택을 돌아 나오는 왠 남자 하나가 날 잡고(?)있는 남자를 부르며 달려왔기에 그 남자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쪽으로 돌아갔다. "조엘니임~~!!" '헤에... 이 사람 이름이 조엘이었군. 그런데... '님'자가 붙여서 불리는 거 보니 지위가 높은 사람인가보지?' 말을 타고 우리에게 막 달려오는 남자는 그 조엘이라는 남자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는데 고동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 머리에 옅은 갈색 눈을 가진 남자였다. "아아...데니." 조엘이라는 남자가 데니라는 남자 쪽으로 말머리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데니라는 남자 뒤쪽으로는 약 10여명에 가까운 말을 탄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혼자 먼저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그 애는 누구입니까?" 데니라는 남자는 가까이 다가와서야 날 발견했다는 시선을 날 힐끔 보며 물었다. "아아... 여기 잡힌 애들 중 하나 같은데, 절벽으로 떨어질 뻔 한걸 구했지." '구하기는 무슨 개뿔이 구해? 도망 가려는걸 방해 놓은 주제에...' 속으로 그렇게 꽁알거렸지만, 어느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들이 없었기에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들은 내가 아예 없는 사람처럼 무시한 채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대체 왜 그냥 물러나신 겁니까? 이래서는 모든 공이 다 랭포드 기사단으로 넘어 갈 겁니다." 데니라는 남자의 말에 조엘이라는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어쩔 수 없지. 지금 작전의 지휘는 랭포드 자작에게 있으니 말야. 나야 랭포드 자작의 명에 따를 수 밖에 없는 입장이잖아." "그야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냥 물러나신건 말이 안됩니다. 랭포드 자작에게 항의하셨을수도 있지 않습니까?" "항의 하고 싶었지만, 그 보다도 먼저 신호탄이 터졌잖아. 이럴때는 뒤로 물러난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 해. 지금은 공을 세우는데 급급하기 보다는 작전을 성공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 "물론 그렇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랭포드 자작의 심보가 너무 빤히 드러납니다. 어떻게 오자마자 우리 기사단 보고 저택 뒤쪽을 포위하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이 저택 뒤쪽은 절벽이라서 아무도 나오지 않을텐데요. 이건 분명히 랭포드 자작이 조엘님이 공을 세우지 못하도록 수작을 부린 것이 틀림 없어요." 거기까지 말했을때 뒤따라 오던 나머지 남자들이 도착했기에 데니라는 남자는 불만어린 표정이어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보니 조엘이라는 남자나, 데니라는 남자나, 그리고 뒤에 다가온 10여명의 남자들은 모두 가슴과 팔뚝, 어깨, 그리고 정강이를 가린 정도의 갑옷 차림에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가슴 보호대에는 하강하는 듯한 포즈의 매가 새겨져 있었다. 그들의 모습과 데니라는 남자의 말을 들어보면 이들이 모두 같은 기사단의 일원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조엘이라는 남자는 싱긋 웃는 표정으로 그렇게 모인 이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자자, 모두 들었겠지만, 우리가 맡은 임무는 저택 뒤쪽의 포위이니까 적당한 간격으로 벌려서서 있자고. 명을 듣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뒤따라온 남자들은 대부분 30살쯤으로 보였는데도 아무런 이의 없이 조엘이라는 남자의 말을 따르는 것으로 보아 이 조엘이라는 남자가 대장인 듯 했다. 그들이 멀리 떨어지자 데니라는 남자가 또 투덜 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랭포드 자작이 괴씸하기 그지 없습니다. 솔직히 이 저택을 알아낸 것은 우리 기사단의 공로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와서 자신이 알아낸 양 모든 공을 가로채려 하다니..." 그러자 조엘이라는 남자가 하하 웃었다. "너무 그러지 마. 우리 기사단 일원은 이번에 너와 나를 비롯하여 단 12명밖에 안 왔다고. 그에 비하면 랭포드 기사단은 20명이 넘게 왔다고. 그러니 그들이 앞장 서는 건 당연한 것 아니야? 이곳을 영지로 가지고 있는 그린모어 백작의 사병들도 저택을 포위할 뿐 앞장 서지 못하고 있잖아." "그건 당연한거 아닙니까? 자신의 영지 안에서 인간 경매라는 천인공노할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몰랐으니 말입니다. 이번 일로 그린모어 백작은 여왕폐하의 문책을 피하지 못할 겁니다. 혹시, 그린모어 백작이 이들 조직의 뒤를 봐주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그건 아닐 거야. 그린모어 백작이 상업에 관심이 많긴 하지만, 노예매매까지 할 사람은 아니거든." 조엘이라는 남자의 말에 데니라는 남자도 수긍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조사하는 동안 그린모어 백작이 저 일당들과 관계하고 있다는 증거나 심증은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이 저택을 알아낼 때도 그쪽에서 적극적으로 도운거보면 조엘님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그 애는 왜 데리고 계시는 겁니까? 데리고 가셔서 시종으로라도 삼으시게요?" 데니라는 남자의 지적에 조엘이라는 남자의 시선이 나에게로 내려왔다. 그래서 나도 말똥말똥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 남자는 왜 날 계속 자신의 앞에 태우고 있는 건지... "하하하, 글쎄.... 미처 생각도 못해봤지만, 그것도 좋을 거 같은데? 이봐, 네 이름이 뭐지?" "저, 저요?" 갑작스런 질문에 날 가르키며 물어보자 데니라는 남자가 끼어들었다. "그럼 여기에 너 말고 더 있냐? 너 왜 여기 온 거냐? 집이 어디지? 부모님은?" "예? 에... 그, 그게..." 친부랑 같이 살기 싫어 가출했다가 여기 온 거고, 집은 바다 속이라고 하면 이들이 믿으려나? 그래서 머뭇머뭇 거리고 있는데 조엘이라는 남자가 날 구해주려는 듯 입을 열었다. "어이, 데니.. 너무 하잖아. 지금 심문 하는 것도 아니고 말야. 얘가 겁 먹잖아." "조엘님이야 말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척 보니까 대충 16살 정도 된 것 같구만... 사내 녀석이 그 정도면 다 큰거 아닙니까? 그런데도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어리버리한 것이... 생긴 것도 꼭 여자처럼 가냘프게 생겨서 이런 일당들에게 잡힌 거 아니겠습니까?" "어이, 어이, 세상 모든 남자들이 다 자네처럼 씩씩한 건 아니라고." 조엘이 은근히 데니를 씩씩한 남자라고 추켜 세워주자 그걸 알아차린 듯 데니의 얼굴이 펴지면서 은은한 홍조가 돌았다. "험험, 말씀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신원이 불확실한 애를 데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이 애는 그냥 그린모어 백작에게 넘겨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집으로 돌려보낸다는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며 머리에는 엘라임이 떠올랐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아마 난 엘라임에게 두들겨 맞을 것이 자명했기에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오옷... 안돼... 어떻게 해서든 방법이... 그래, 그래. 이럴 땐 동정심 유발 작전으로...' 나는 얼른 고개를 푹 숙이고 안 나오는 하품을 억지로 짜내서 크게 했다. 그러자 그 결과 눈에 눈물이 잔뜩 고이게 되었고, 코도 약간 맹맹해져 훌쩍 거릴 수 있었다. 그리고 최대한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저는...." 그렇게 띄엄 띄엄 말을 시작한 후 눈동자만 돌려 힐끔 조엘과 데니라는 남자가 날 주목하는 지 살펴본 뒤에 그 다음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안 계세요. 저를... 낳다가 돌아가셨대요. 훌쩍, - 우는 게 절대 아님. 콧물을 훌쩍 거린 것임. - 아버진 그것 때문에 절 미워하셔서 집에도 제대로 안 돌아오시고... 훌쩍, 돌아오실 때마다 절 가만 두지 못하세요... 훌쩍, 그래서.. 그래서... 너무 견디기 힘들어서..." 뒤로 갈 수록 목소리도 점점 가라앉히자 마치 목소리가 떨리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났다. 그러자 데니라는 남자가 당황해서 날 잡고 흔들어 자신을 보게 하려다가 내 눈에 고인 눈물을 보더니만 더더욱 당황해버렸다. "야... 아, 야... 에.. 그러니까, 에잇, 사내 자식이 뭐 그런 걸로 우냐? 응? 야, 그... 그래, 얼른 눈물 닦아라. 사내란 자고로 눈물을 보이는게 아냐." 그러며 허둥지둥 자신의 망토를 잡아 내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그러나 난 그런 그의 손을 붙잡은 채 가장 애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 하지만... 흐윽... 절, 집으로... 돌려보내신다면서요? 훌쩍, 전... 전....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데니라는 남자는 날 달래려는지 쥐어짜는 목소리로 황급히 외쳤다. "야, 야, 누가 널 돌려보낸대? 걱정하지 마. 조엘님이 반대 하셔도 내가 널 데리고 가마, 응? 그러니 울지 마라. 사내 자식이..." 그러면서 거친 손길로 내 눈물을 슥슥 닦아주는데, 힘이 얼마나 센지 얼굴 살갓이 빨개지고 쓰라릴 지경이었다. 뭐, 덕분에 울어서 눈이 퉁퉁 분 것 같이 되긴 했지만... 그러나, 데니의 말은 내가 의도한 것과 약간 다르게 나아가자 나는 다시 정정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 보다도 먼저 데니가 조엘에게 강력히 건의하고 있었다. "조엘님, 이 자식 우리가 데려가죠? 마침 조엘님의 시종 하나를 들여 놓으려고 했는데 잘 되었습니다. 뭐, 비리비리해서 걱정이 되긴 합니다만, 제가 확실히 체력 단련을 시킬테니 데리고 가시지요?" "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이대로 그냥 보내주세요... 라고 하려고 했다. 이들과 같이 가려고 했던 게 아니라... 그런데 상황이 이들이 날 데려가는 것으로 바뀌고 있었다. "뭐, 좋겠지.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까. 해럴드에게 부탁하면 그가 잘 돌봐줄 거야." "저, 저기요..." 이들 맘대로 내 앞길이 결정되는 거 같아 난 조금 더 큰 소리로 나에게 이목을 집중 시키자 데니가 물어왔다. "왜, 어디 갈 데라도 있어?" "아, 아뇨. 그건 아닌데..." 그러자 이번에는 조엘이 물어왔다. "그럼, 돈이라도 있어?" "에? 아니... 물론 없지만..." 내 말에 두 남자는 시선을 돌리고 자기네끼리 다 결정해 버렸다. "그럼, 돌아갈 때까지는 우리가 데리고 있다가 본가에 도착하면 헤럴드에게 부탁하지 뭐. 이 참에 내가 시종을 데리고 있는다고하면 헤럴드도 좋아할 거야." "그럴 겁니다. 해럴드 집사님이 그 동안 조엘님께 시종 하나 붙이려고 얼마나 절치부심 하셨는지 아십니까? 아마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겁니다. 물론..." 잠시 말을 끊은 데니가 날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이 녀석이 고생 좀 하겠지만요. 뭐, 제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헤럴드 집사님께 맞기면 체력 단련은 충분히 될 겁니다." 그의 말에 왠지 나는 늑대굴 피하려다 호랑이 굴에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 6화 세상 일은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3) 날 데리고 있는 일행이 이렇게 한가하게 잡담을 하는 동안 멋진 별장 건물 안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검끼리 부딧히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하면, 물건들이 내던져지며 부서지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간간히 이어져 들려왔다. 그 중에서는 기사단이 침입해 들어오자 너무 급한 나머지 창문으로 뛰어 내려 몸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었다. 물론 건물 높이가 2층이었기에 뛰어 내려도 죽지는 않을테지만, 문제는 저택 뒤에는 아주 한가해서 지루하게 몸을 배배꼬는 또 다른 기사단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지만... 뛰어 내리는 사람들도 밑에 누가 있는지도 보지도 않고 급한 마음에 뛰어 내리다가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을 보고 그제야 경악성을 내뱉으며 발버둥 치는 사람에다가, 뛰어 내리다가 다리를 다쳐 낑낑대는 사람에다가, 하여간 별별 모습을 다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별장 뒤쪽을 지키는 기사들이 지루하지는 않아서 좋았겠지만, 어째 그들은 기사 차림을 하고 있으면서 검을 한번 휘두르지 않고 대신 떨어져 내린 일당을 체포하거나, 그들의 다리를 응급 처지 해주는 소일이나 하는 자신들이 무지 한심한지 한숨만 푹푹 내쉬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건물 앞에 포진하고 있던 병사들과 별장 안으로 쳐들어 갔던 기사단은 자신들의 임무를 착착 진행하여 약 2, 3시간쯤이 흐르자 더 이상 건물 안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도 대충 다 진압 하고 정리도 거의 다 된 듯 했다. 나와 같이 있던 두 남자, 그러니까 조엘과 데니라는 남자 또한 그렇게 생각한 모양입니다. "조용해진 걸 보니 슬슬 정리가 된 모양입니다, 조엘님." "그런것 같군. 그럼 우리도 슬슬 가볼까나?" 그러면서 조엘이라는 남자가 말 머리를 돌려 움직이기 시작하자 데니라는 남자도 주위의 기사들에게 신호를 보내며 조엘 뒤를 따라왔다. 건물을 돌아 별장 앞쪽으로 가니, 그 곳에는 갑옷을 차려 입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많은 사람들을 건물 안에서 끌어내고 있는 한편, 앞뜰에다 포박하여 꿇어 앉히고 있었다. "호오.. 다 정리가 된 모양이군. 이거 우리가 할 일은 별로 없겠는걸?" 무지 기분이 좋다는 듯 싱글 싱글 웃으며 조엘이라는 남자가 중얼거리자 같이 움직이던 데니라는 남자가 다시 투덜댔다. "마냥 좋아하실게 아닙니다. 이로써 모든 공이 랭포드 기사단으로 넘어가게 되었지 않습니까?" "쯧쯧.. 데니, 너무 그렇게 눈 앞의 공을 다투다간 큰 것을 잃을 수도 있어. 단지 여왕폐하의 명을 무사히 완수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마땅하지 않아?" "그래도... 이건..." "자, 그만. 여기서 우리만 불퉁하게 있을 수는 없지. 얼굴 펴라고. 이제 드디어 집에 갈 수 있게 되었잖아. 게다가 비록 큰 공은 세우지 못했더라도 우리에게도 포상은 돌아올 거라고." 조엘이라는 남자가 데니라는 남자를 그렇게 타이르며 자신의 부하 기사들이 포박한 사람들을 병사들에게 넘기는 걸 보고 있는데, 갑자기 건물 쪽에서 돼지 멱따는 듯한 꽥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못 놔!! 너희들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이러는 거냐? 감히 이 나라의 왕족에게 무례히 행하다니!! 랭포드 자작!! 도대체 나에게 이럴 수 있는가? 내 왕궁으로 돌아가면 이번 일을 여왕폐하께 아뢰어 너희 렝포드 기사단을 왕족 모독죄로 처벌 받게 하겠다!!" 별장 입구에서는 어떤 50대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무지 화가 났는지 시뻘개진 얼굴로 자신을 제압한 기사들에게 고래 고래 고함을 지르며 끌려 나오고 있었다. 얼굴에는 가면이 쓰여있지 않았지만, 옷차림을 보아하니 아이들을 경매할 때 그 곳에 앉아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틀림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조엘이라는 남자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호오.. 드디어 이번 낚시에서 가장 큰 대어가 끌려 나오는 군." 그 성난 돼지를 연상시키는 남자들 뒤로 기사 차림을 한 일단의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조엘은 그 중에서 아는 사람을 발견했는지 말에서 내려 그쪽으로 다가갔다. "축하드립니다, 랭포드 자작님. 이번에 큰 공을 세우시게 되겠군요." 아마 화가 난 중년 남자 뒤에서 우르르 걸어 나오는 기사들 중 한명이 이번 작전을 지휘한다는 그 랭포드 기사단의 단장이자 자작인 남자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랭포드 자작 (아직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이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그 화가 난 중년 남자가 애타게 부르짖었다. "오오... 맥알파인 자작이 아니신가? 이보게, 나좀 구해주게. 자네도 기사단을 끌고 왔겠지? 그렇다면 이 무례한 랭포드 기사단에게 왕족에 대한 예의가 무엇인지 알려주게나. 그렇게만 해준다면 내 여왕폐하께 자네의 공을 직접 말씀드려 하사하게 하겠네." 그러자 조엘이라는 남자가 과장되게 그 남자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심히 안타깝다는 어조로 말했다. "말씀은 정말 감사합니다, 공작님. 하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제가 이번에 여왕폐하의 명으로 랭포드 자작의 지휘를 받게 되었지 뭡니까? 저도 공작 각하를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랭포드 자작의 지시가 없는 한 움직일 수가 없군요." 익살스러운 그의 모습에 공작이라는 그 남자의 표정은 X를 씹은 표정이 되어 입을 다물었고, 대신 그 뒤에 있던 남자 한명이 웃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수고 했습니다, 맥알파인 자작. 이번 작전의 성공은 우리 랭포드 기사단 뿐만이 아니라 링클레더 기사단의 공 또한 크다는 것 저도 잘 압니다." 아마 그가 랭포드 자작인 모양이었다. 진한 밤색 머리에 훤칠한 키에 그을린 얼굴이 약간 길죽하고 살이 별로 없어 광대뼈가 튀어 나와 보이는 남자였다. 그 때문에 부드러운 면 보다는 마치 강철 같은 강인함을 풍기고 있었다. "별말씀을... 저희 기사단이 한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렇게 둘이 서로의 공에 대하여 칭찬을 늘어 놓는 중에 공작이라는 남자의 입이 다시 한번 벌어졌다. "이런 무례한 것들!! 너희들이 그러고도 기사인가? 감히 왕족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내 너희들을 결코 가만 두지 않으리라!!" 그러자 랭포드 자작이 그 남자를 서늘한 눈빛으로 쓰윽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왕족이면 국법을 어겨도 되는 겁니까?" 그 말에 잠시 움찔 거리던 공작은 다시 침을 튀길 정도로 열변을 토했다. "구, 국법을 어기다니!! 누가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단 말이냐? 나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 나는 왕족 중에서도 가장 청렴결백 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야!!" "그럼 국법을 어기는 천인공노할 인간들만 모인 이 곳에 왜 공작님 께서 계신 것입니까?" "말했지 않나? 난 친구 이름으로 초대장이 와서 와본 것 뿐이라고. 맹세코 난 이런 곳이 처음일세. 무엇을 하는지도 몰랐단 말이야!!" 그러자 조엘이라고 하는 맥알파인 자작이 슬며시 끼어들었다. "저런... 그렇다면 공작님 별장에서 발견된 여자 아이들은 누구입니까? 시녀라고 하기에는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방에 갖혀 있던데..." 조엘의 말에 다시 한번 움찔 거린 공작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 그애들은... 내가 양녀로 삼으려고 한 애들이네. 그러나 너무 버릇이 없어 벌을 내리느라 가둬둔 것 뿐이야." "호오... 공작님은 그럼 양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시나보죠? 의외군요. 청렴 결백하기로 소문난 공작님께서 근친상간 같은 파렴치한 짓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조엘의 뒤를 이어 랭포드 자작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공작님은 폐하를 뵐 수 있으실 겁니다. 이번 일은 페하께서 친히 명하신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폐하의 앞에서 변명하시기 바랍니다. 공작님의 변명을 듣다간 해가 다 질 것 같으니까요." 그러면서 랭포드 자작과 조엘은 그 공작에게서 등을 돌렸다. 공작은 그 뒤에서 뭐라고 뭐라고 더 악을 질렀지만, 아무도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직, 그를 제압하여 끌고 가는 두기사만이 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소음에 인상을 찡그릴 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데니라는 남자는 설래설래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쯧쯧... 저 공작이 이렇게 몰락할 줄 누가 알았을까? 여왕폐하의 숙부랍시고 큰 권력을 쥐고 흔들던 사람이었는데... 이로써 우리 나라의 공작가문 하나가 사라지겠군." 그의 말에 호기심이 생긴 나는 슬그머니 물었다. "저분이... 여왕폐하의 숙부님이란 말이예요? 그럼.. 큰 벌은 안 받는 것 아니예요?" 그러자 데니라는 남자는 피식 웃었다. "저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세상 일은 계획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잖냐? 저 공작은 여왕폐하가 어렸을때는 어리다는 이유로, 지금은 아직 미숙하다는 이유로 왕권을 자기가 마음대로 쥐고 흔들던 사람이었거든. 아마 저 인간은 평소 고분 고분하게 나오시던 폐하가 이번에도 자신을 봐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훗, 폐하께서는 아마 이 기회를 타서 저 공작을 없애려고 벼르고 계실걸?" "헤에... 그렇군요." 내가 그의 설명을 듣는 동안 랭포드 자작과 가벼운 말을 주고받던 조엘이라는 남자가 대화가 끝났는지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자, 슬슬 출발할 준비 하자고." "아아... 드디어 집으로 가는 겁니까? 공은 차지하지 못했어도 집으로 간다니까 좋긴 좋군요." 데니의 말에 조엘은 자신의 말에 올라 타면서 피식 웃었다. "랭포드 자작이 공을 절반씩 나누기로 했어. 그런 면에서는 공정한 사람이지. 난 랭포드 자작의 그런 면이 좋다니까!" "어련 하시겠습니까? 어쨌든, 자작이 공을 모두 차지하지 않는다니 그나마 다행이군요." 제 7화 아, 내 신세여.... (1) 벨레니 왕국에서는 역사상 반역이 일어난 때를 제외하고 유례없는 가장 많은 귀족들을 처벌하였다. 죄목은 국법으로 제정되어 있던 인간 노예 매매 금지를 어겼다는 것이 었는데, 그로 인하여 거의 10명에 가까운 귀족 가문들이 풍지박살이 나자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실 그 동안 권세 있는 귀족들이나 부유한 상인들 간에 국법을 피하여 은밀히 인간 노예 매매가 이루어 지고 있었다는 건 알만한 이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국가에서도 단속은 하지만, 그 노예들을 사들이는 사람들이 모두 빽이 든든한 사람들이다보니 그들에게 걸려도 가벼이 벌금 형이나 경고로 넘어가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왕의 명으로 인간 노예를 매매하다가 걸린 권세 잡은 귀족들은 물론, 여왕의 숙부인 공작까지 귀족 작위를 박탈 당하며 모든 영지와 재산을 몰수 당하는 일이 벌어졌으니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백성들의 여왕에 대한 민심이 좋아지고, 국가 기강이 바로 서는 듯 보여도 나와는 하등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시종이란 무엇인가?" "첫째도 주인을 위하여, 둘째도 주인을 위하여, 셋째도 주인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입니다." "시종의 의무란?" "주인에게 해가 되는 요소를 배제하고, 주인께 이로운 것이라면 이 한몸이라도 기쁘게 바치는 것입니다." "음... 아주 좋았어. 거기에 한거지 더, 시종이라고 모시는 주인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시중을 드는 것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항상 주인에게 꼭 필요한 사람요 도움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하도록, 알겠나?" "예." "목소리가 작다. 알겟나?" "예엣~!" "좋다. 그럼 가서 오늘 너의 할 일을 시작하도록." '젠장... 도대체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나에게 한바탕 교육을 한 채 등을 돌리고 가는 사람은 맥알파인 공작 집안의 집사로 있다는 것을 자부심으로 알고 살아가는 해럴드 집사였다. 160cm 를 약간 못 미치는, 남자치고는 작은 키에 통통하다는 소리를 들을 몸매, 인상 좋아보이는 둥그스름한 얼굴에 앞대머리인 그는 맥알파인 가문의 가장인 맥알파인 공작과 그의 후계자이자 날 이 곳으로 데리고 온 조엘 맥알파인, 그리고 그의 여동생에게는 무지 충성스럽고 부드러운 집사이지만, 이 집안의 식솔들에게는 무지 엄격한 교관이었다. 특히나 나에게는 더더욱이나 엄격하게 굴었다. 조엘에게 자신이 기대하던 시종이 생겼다는 것에 그는 무지 감격해 했지만, 그 시종이라는 것이 어디서 보도 못한 비리비리한 녀석 - 그가 직접 표현한 것임 - 이 나타나 떡 하니 되었으니 이 집안을 관리하는 집사로서 도저히 그대로 놔둘 수 없다고 외친 그는 날 보자마자 자신이 맡겠다고 나섰다. 그리하여, 나는 이 집에 도착한 날 부터 대 맥알파인 공작 집안의 하인이자 조엘 맥알파인 자작의 시종으로써 - 한마디로 꼬봉이라고 하면 될걸 무엇이 이리도 거창한지.. - 합당한 몸가짐과 행동거지를 가지기 위한 교육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도대체 귀족 집안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일일이 귀찮은 예법은 왜 배워야 하며, 시키는대로 하는 시중의 일에 왜 우아함과 기품이 들어가야 하는 건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힘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해럴드 집사가 내리는 벌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었다. 벌을 줌으로써 체력도 기르게 하고, 또 집안일 한가지를 줄여 집안에 있는 하인들의 노고를 더는 일석 3조를 노리는 방법이었다. 이름하여... 집안일 하기... 보통 집안의 하인들은 몇개의 조로 나뉘어 하인들끼리 같이 식사를 하게 된다. 바쁘면은 그냥 빵에 물만 먹고 냅다 뛰는 적도 있긴 하지만, 그런 일은 집안에 파티가 있거나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별로 없기에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루 수 있는데, 대부분 평민 출신인 그들만이 모여 식사를 하는데 귀족들의 예법이 왜 튀어 나오겠는가? 그저 그들끼리의 수다를 떨면서 배를 불리는 것에만 열중할 뿐이지... 그러나, 나는 그렇지가 못했다. 나는 식사를 할 때 항상 해럴드 집사와 식사를 했다. 그것도 귀족식 예법을 써가면서 말이다. 하나 틀리면 벌을 받아야 했고, 초기에는 식사 한번 끝낸 뒤 나에게는 밤을 새도 다 해결 못할 엄청난 양의 작업이 할당되곤 했었다. 물론... 빨래나 설거지 같은 경우에는 운디네들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고 그 와중에 나는 잠을 자곤 했지만... 이럴때는 정령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지 편했다. 해럴드 집사가 나에게 이런 귀족들과 같은 몸가짐과 예법을 강조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조엘이라는 남자의 시종이었기 때문이다. 시종은, 항상 자신이 모시는 주인과 같이 행동을 해야 했는데, 그것은 귀족 파티나 심지어 왕성에 들어갈때 조차 해당되곤 했다. 물론, 왕성에 들어갈 때는 같이 들어가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고, 조엘도 날 이 곳에 데려다 놓은 이후 밖에 나갈 때는 아직 한번도 데리고 간 적이 없지만, 그게 다 해럴드 집사가 아직 내가 제대로 된 교육을 안 받았다고 말리는 통에 그렇게 된 것이란 추측도 가능했다. 어찌되었든, 그렇게 자신의 시종이 다른 귀족들과 그들의 시종들 앞에서 예의도 모른 채 어벙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것이야 말로 시종이 모시는 주인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되는 셈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귀족, 혹은 기사들의 시종은 자신들의 주인 못지 않게 귀족의 예의에 정통해야 했고, 몸가짐에도 우아함과 기품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해럴드 집사의 지론이었다. 그에 모법을 보이듯이 해럴드는 귀족들의 예의에 정통했으며 행동 하나 하나도 여유있고 기품이 - 자신의 딴에는... - 배어 있었다. 물론, 그 기품 있게 행동하는 것이 해럴드의 몸매에는 전혀 안 어울렸지만... 그는 항상 자신의 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맥알파인 공작 집안의 집사로 지내온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해럴드의 할아버지는 왕국의 시종 출신이었다. 그 분은 그러니까... 현 조엘 맥알파인의 증조부의 시종이었는데, 조엘 맥알파인의 증조부는 그 당시 왕실의 5번째 왕자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조엘 맥알파인은 왕족의 피를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어찌되었는 조엘의 증조할아버지는 태자가 아니었기에 자신의 형이 왕의 자리를 물려받고 자신에게도 아내가 생기자 왕성을 나오면서 공작의 작위를 하사받은 것이고, 그때 '맥알파인'이라는 성까지 하사받은 것이었다. 그때 해럴드의 할아버지도 조엘의 증조할아버지와 함께 왕성을 나와 맥알파인 집사가 되었는데 그가 명을 다 하자 집사의 자리는 그의 아들에게, 또 그가 명이 다하자 다시 해럴드에게 3대째 이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럴드 집사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그도 원래는 젊었을때 - 현 그의 나이가 50이란다 - 결혼을 해서 아내가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잘못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못가 운명했다고 한다. 그의 아이도 사산되어 나왔기에, 해럴드 집사는 졸지에 부인과 아이를 동시에 잃은 비운의 사나이었던 것이다. 그 뒤로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아직도 독신으로 산다는 이야기를 이 집안에서 오랜 기간 일해온 시녀들에게 얼핏 들었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은 뒤에 혹시나 해럴드가 날 자신의 후계자로 삼아 차기 집사로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슬그머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무리 조엘의 시종이라지만, 이렇게 엄격하게 교육을 시킨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왜 시종이 계산에도 밝아서 장부 정리도 해야 할줄 알아야 하는 것인가? 어쨌든, 이래저래 나는 이 곳으로 온 후 잘 왔다고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게 다... 그놈의 돈이 왠수였다. 나는 원래 그 '인간 노예 매매 현장'을 기사단들이 급습하여 그 일당들을 싸그리 잡은 뒤 그 일행과 같이 근처에 있던 큰 도시에 갔다가 거기서 그 기사단 일행에서 슬그머니 빠져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돈이 한 푼도 없다는 사실이 아주 끈질기게 내 발목을 잡은 거였다. 돈이 없으면 자는 것 먹는 것 입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 무지 어려워진다. 게다가 돈이 없으면 내가 원체 목표로 했던, 즐겁고 편한안 인간 세상 구경은 물건너간 채, 돈을 벌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던지, 아니면 그냥 이대로 돌아가 엘라임에게 무지 혼나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것이다. '아윽... 그냥 맨 처음 배에서 내린 다음 갔던 건물에서 싸그리 몽땅 훔친 다음에 튀었어야 했어...' 그렇다고 이 기사단들에게 여행 경비를 훔치자니 양심상 허락되지 않았고, 거기에 이들에게 들키지 않고 경비를 훔칠수나 있을지 미지수였다. 이렇게 절망적인 나에게 조엘과 데니의 시종 자리 제의는 정말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이것도 유혹이라고 해야 하나?) 이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거기에 한달에 꼬박꼬박 월급 나온다는 것만 해도 은근히 쏠리는데, 거기에다 다른 하인들보다 일도 힘들지도 않다는 말에 두번 생각할 것도 없이 승낙해버렸다. 그러나... 그렇게 편안하게 되기 전에 받는 교육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나중에 안 거지만, 평민이 귀족 집안에 하인으로 들어오는 것은 꽤 큰 행운중에 속하며, 그 중에서도 그 집안 후계자의 시종이 된다는 것은 더더욱이나 큰 행운이었다. 시종의 일이란 주인의 시중만 들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하인들보다 여유도 많고 힘든 일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더구나 귀족들과 안면이 익혀지고 친해진다는 건, 자신에게 능력만 있다면 미래가 탄탄 대로로 펼쳐지는 데에 크게 한몫 단단히 해줄 매력적인 여건이었다. 하지만, 나는 인간 세상에서 돈 많이 벌어 부자로 떵떵 거리며 산다거나, 아니면 출세해서 권세를 누린다거나, 정권에 진출하여 내 이상형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는데에 하등 관심이 없고 오로지 여행하며 구경하는 것이 목표였던 터라 기껏 엘라임의 눈을 피해 가출까지 한 주제에 시종으로 발목잡혀 주저앉은 내 자신이 한심스러울 뿐이었다. '우우...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던가...' 나는 그날 아침에도 일어나자마자 해럴드 집사의 '시종으로써의 몸가짐' 교육을 받은 뒤 터덜터덜 내 일거리인 조엘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 7화 아, 내 신세여.... (2) 내가 아침에 일어나자마 해럴드 집사에게 잡혀 교육을 받는 동안 조엘은 자신의 저택에 머무는 기사들과 함께 아침 수련을 한다. 조엘이 지금 머물고 있는, 벨레니 국가의 수도인 루더포드 도시에 있는 맥알파인 저택을 수비하고 있는 건 맥알파인 집안의 사병들과 더불어 맥알파인 집안에서 키우고 있는 사설 기사단인 링클레터 기사단의 일원이었다. 이 링클레터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바로 데니의 아버지인 보가드 링클레터로 그의 성을 따서 기사단의 이름이 만들어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조엘의 아버지인 맥알파인 공작이 보가다 링클레터와 함께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왕실 근위대와 수도 경비대를 제외하고는 수도에 들어올 수 없다는 국법에 따라 링클래터 기사단 본대는 수도 밖에 존재했고, 몇몇 일원만이 저택에 들어와 저택 수비와 함께 사병 훈련 지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 중에는 링클레터 단장의 아들인 데니 링클레터도 포함되어 있는데 데니는 조엘의 근위 기사로 와 있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근위 기사라기보다는 시종 및 친구 대용인 듯 했지만... "타압~!!" "으얍~!!" "하앗~!!" 그 기사들과 사병들이 수련하는 연무장이 가까워질수록 그들이 내지르는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것들 봐라. 기합 소리가 작다! 아침 먹기 전에 기합이 팍팍 들고 싶은가 보지?" 저렇게, 내가 한국에서 있을때 봤던 군대의 교관 모습을 보이며 기사들 및 사병들을 겁주고 있는 사람은 이 저택에 머무는 기사들 중 가장 높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 레오 더글라스 라고 하는 기사였다. 그는 링클레터 기사단에서도 랭킹 2위의 실력을 가진 실력자인데 -랭킹 1위는 당연하겠지만, 보가드 링클레터다. - 맥알파인 공작의 근위기사 및 이곳 경비 기사들과 사병들의 지휘관으로 와 있었다. 평소에는 기사 답지 않게 농담도 잘 하고 장난도 즐기지만, 훈련할 때 만큼은 호랑이보다도 더 무섭게 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처음 이 곳에 사병이 들어오면, 평소 그의 모습만 보고 훈련때 은근슬쩍 제대로 안 하다가 걸려 된통 당하는 것이 이곳 사병들의 신고식이라는 뒷소문 까지 있을 정도다. '흐음... 마무리 하는거 보니 거의 다 끝났군.' 나는 연무장에서 사람들이 훈련 및 수련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수건과 냉수가 담긴 통을 들고 뒤쪽에 가만히 서 있었다. 조엘과 대니는 기사들이 있는 곳에서 맨 뒤쪽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좋아. 오늘 아침 훈련은 이것으로 마친다. 해산!" "수고하셨습니다!!" 더글라스 경의 훈련을 끝낸다는 소리에 기사들과 사병은 기쁨에 찬 목소리로 크게 외치고는 우르르 흩어져서 세면장으로 달려갔다. 그런 그들을 한번 일별한 후 나는 나를 발견하고 다가오는 두 남정네를 향해서 걸어갔다. "좋은 아침이야!" 싱긋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네는 조엘과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대신하는 데니에게 나도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예. 아침 훈련 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두분." 그러면서 수건과 냉수를 내밀자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것들을 집어 들었다. "후우... 이거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군요. 올해도 벌써 다 갔습니다." 이른 아침이라서 더 쌀쌀한 기온에 말을 할때마다 입김이 뿜어져 나올 지경이었다. 자신도 그걸 알면서 차가운 냉수를 그대로 들이붓는 건 또 뭔지... 수건을 들어 땀을 닦던 조엘은 데니의 말에 싱긋 웃으며 돌아보았다. "헤에.. 뭐야, 왠 노친네 같은 소리를 하고 그래? 오호라.. 알겠다. 올해 안에 장가를 못 가서 그러는 구나? 훗훗훗.. 너무 상심하지 마. 내년에는 꼬옥 갈 수 있을 거야. 아무리 노총각이라지만 데니는 그걸 커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잖아." 장난기가 가득한 조엘의 말에 젖은 머리를 닦던 데니의 손길이 딱 멈췄다. "크아아악~~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제 나이가 어때서요? 전 조엘님 보다 딱 한살이 더 많다고요!" "아니.. 노친네 같은 소리를 하길래... 난 결혼하고 싶어하는 줄 알았지." "훗, 그거 조엘님 이야기 아닙니까? 하긴... 그러고보니 조엘님께 중매가 많이 들어왔다지요?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 공작님께서 무지 좋아하실 겁니다." "오호.... 데니이이이~~? 우리 내 방으로 가서 우리가 그동안 같이 해온 세월의 이야기를 쭈욱~ 해볼까나아~?" 조엘이 은근한 눈초리로 단어 끝을 끄는 소리로 이야기 하자 데니가 얼른 수건과 물통을 나에게 건네주고는 조엘에게서 황급히 떨어졌다. "핫핫핫... 사양하겠습니다. 전 지금 배가 무지 고파서 말이죠. 그럼 잠시 후에 뵙도록 하죠." "훗훗훗... 그래... 나중에... 보도록 하지." 마주 씨익 웃어보이는 조엘의 모습에 데니는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사라져 갔다. 요즘 조엘에게는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가 바로 '혼인'이라는 소리였던 것이다. 보통 귀족들은 일찍 결혼하거나 아니면, 혼처가 일찍 일찍 정해진다. 귀족의 한명인 조엘 또한 이곳에서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공작 집안의 후계자에다 생긴 것도 꽤 미남 축에 들어가는 편이고, 정계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인정 받으며 입지를 확실히 구축해 가는 미래가 기대되는 유망주였으니 중매가 들어오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나, 얼마전 귀족들이 대거 철퇴를 맞은 후로 무슨 일인지 몰라도 더욱더 중매가 급증했기에 공작 부인의 입이 쫘악 찟어졌다. 하지만, 당사자가 극구 싫어하고 기피하고 있는 상황이라 조엘은 공작 부인에게 요즘 달달달 볶이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걸 찔러댔으니... 아마 오늘 하루 데니는 좀 고달플 것이었다. 비록 만나서 겪어본지 얼마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그나마도 조엘에 대해 알아낸 것이 있다면 적으로 만들면 상당히 고달픈 인간이라는 것이다. 평소에는 싱글 싱글 웃으며 다니고 누구에게 친근하게 구는 그였지만, 어느 누구가 그에게 해를 입혔다 하면 인정 사정 봐주지 않고 그대로 돌려주는 그였다. 설사 당장에 반격을 못한다면, 그걸 두고 두고 꼭꼭 싸매고 있다가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몇배로 갚아주곤 하는 성격의 소유자다. 좋게 말하면 손해 안 보는 성격이고, 나쁘게 말하면 옹졸한 인간이라고나 할까? 뭐, 그래도 안 건드리면 좋게 지낼 수 있는 인간이었으니 그나마 나은 건지도 모르겠다. 조엘의 뒤를 따라가며 그에 대한 생각을 하던 나는 그의 방에 도착하자마자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세수를 하는 동안에 그가 오늘 입을 옷을 찾아놓고 옷 입는 걸 시중 들어야 했다. 뭐, 시중 든다고 해봐야 그가 자기 옷은 자기가 입었으니 옷 구겨진 곳이 없나 살펴주고 옷 매무새를 단정하게 해주는 정도였지만... 그나마 조엘이라는 귀족은 보통 귀족들 보다 자기가 할 일은 알아서 하는 축에 속했다. 그 동안 시중 없이 혼자 손수 한 덕분이긴 했지만, 보통 귀족들은 세숫물도 떠줘야 했고, 세수 다 하면 수건도 건네주고, 옷도 입혀줘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난 운이 참 좋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뭐, 조엘이 조금 더 옷매무새에 신경쓰는 스타일이었으면 더 편했을지도 -아니, 더 피곤했을라나? 자신의 맘에 안 드는 옷을 내오면 날 피곤하게 굴테니까... 그는 아무거나 내줘도 그냥 주는 대로 입는 스타일이었다. - 모르지만, 그는 왠만큼 옷이 구겨지거나 비뚤어지는 거는 그냥 넘어가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그런건 내가 일일이 신경을 써야 했다. 나도 왠만한 거는 그냥 넘어가는 타입이지만, 해럴드 집사에게 걸리면 내가 혼났기에 조엘 옷차림은 신경 써야 했다. 머리 손질에도 신경을 안 쓰는 편이라 전에는 세수를 한 뒤에는 손으로 머리를 쓱쓱 몇번 빗으면 그게 머리 손질 끝이었다. 물론 머리가 짧은 편이라 별로 지저분 하지는 않았지만, 신경써서 머리 빗은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기에 내가 온 뒤로는 그의 머리를 빗기는 것은 내 담당으로 넘어왔다. 그의 머리는 흑단같이 까만 머리색이었는데, 머리카락이 굵은 편에다가 반곱슬이었기에 무지 잘 뻗쳤다.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그의 머리를 다듬으려면 필연적으로 물에 적시거나 머리기름이 필요했는데, 요즘은 그냥 단정하게만 하는 것도 재미 없어서 몇몇 스타일로 도전해보고 있었다. 그 첫번째 스타일로 정가르마에 양 옆으로 앞머리를 살짝 세워 늘어뜨렸는데 꽤 잘 어울려서 나도 흡족하고, 해럴드 집사도 흡족해 했다. "자아, 다 되었습니다." 오늘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올린 내가 내 작품(?)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뒤로 물러나자 조엘이 그런 날 보고는 피식 웃었다. "너도 하고 다니는 거 보면 머리 모양에 신경쓰는 타입은 아닌데, 남 머리 만져주는 건 좋아하나보지?" "하하하.... 뭐,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왕 하는 거 멋있으면 기분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고보니... 나도 머리가 거의 단발이 되어 있었다. 이 곳에 오면서 별별 몸의 변화를 겪긴 했지만, 머리가 길어지고 손톱이 길어지는 건 바뀌는 것이 없었다. 손톱이야 그냥 자르면 되었지만, 머리야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내가 잘 자를 실력도 없는데다, 머리를 맡길 사람이 없어서 그냥 있다보니 꽤 길어서 조금만 더 길면 하나로 질끈 묶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해럴드 집사에게 지저분하다는 소리를 가끔 듣기에 그냥 묶고 다닐까... 생각 중이다. 조엘은 내가 뒤로 물러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을 한번 쓰윽 보더니 문으로 향했다. 이제 그가 공작과 함께 - 공작 부인은 늦게 일어나는 편이라 항상 아침은 공작과 조엘 둘이서 한다. - 아침 식사를 하고 왕성으로 출근하면 내 아침 일과는 끝이 난다. 그 뒤에는 저녁에 조엘이 오는 동안 해럴드 집사의 업무를 돕거나 아니면 다른 잔일을 하지만, 그때가 하루 일과중 가장 한가한 때라서 나는 요즘 책이라도 읽어볼까.. 생각 중이었다. 전에는 이런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조엘의 시중을 들지 않는 모든 시간이 해럴드 집사에게 예절 교육을 받거나 아니면 뭔가 잘못해서 벌로 내려진 일을 해내느라고 잠 잘 시간도 줄어들 정도로 바빴다. 그리하던 것이 예절을 거의 완벽하게 몸에 익히게 되자 벌 받는 것이 없어지면서 시간이 조금씩 남아돌게 되었던 것이다. 그 여가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독서를 할까 생각중인데, 이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어느 누구도 공작이나 조엘, - 아니면 그 여동생이나 부인도 해당 하지만.. - 의 허락 없이는 이 집안 서재에 들어갈 수도 - 청소 하는 건 빼고. - , 책을 만질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들의 성격이 깐깐한게 아니라서 나는 오늘 저녁쯤 때를 봐서 조엘의 허락을 구해볼까... 생각하고 있는 차였다. 공작과 조엘의 출근을 배웅하고 해럴드 집사와 함께 아침 식사를 - 항상 이때 한다 - 한 뒤 조엘의 방을 정리 - 청소가 아님. 청소는 시녀들이 하고 나는 단지 정리를 함 - 를 하기 위해 그의 방으로 향하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해인아." 제 7화 아, 내 신세여.... (3) 공작과 조엘의 출근을 배웅하고 해럴드 집사와 함께 아침 식사를 - 항상 이때 한다 - 한 뒤 조엘의 방을 정리 - 청소가 아님. 청소는 시녀들이 하고 나는 단지 정리를 함 - 를 하기 위해 그의 방으로 향하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해인아." 뒤를 돌아보니 익숙한 얼굴의 두 하녀가 깨끗하게 빨려 잘 개어진 옷가지들을 한아름씩 안고 있었다. "아아.. 누나들." 그녀들은 나보다 (현 내 나이 만으로 17세라고 말해놓고 있음) 1살씩 많아 나이 차이가 별로 없는데다가 해럴드 집사에게 벌 받을때 빨래하는 것도 상당수 끼어 있었기에 꽤 친해져 있는 사이였다. 그녀들은 이 가문에 있는 시녀들 중 아직 미혼인데다가 가장 나이도 어리고, 얼굴도 단정하게 생겨 사병들이나 남자 하인들에게 은근히 인기가 많아 그녀들과 친근하게 지내다보면 남자들의 질시와 부러움이 섞인 눈초리를 곧잘 받기도 했다. 나는 그녀들이 옷가지들을 잔뜩 들고 있는 걸 보자마자 도와주기 위해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이리 줘요. 내가 들어줄게요. 으음.. 조엘님 것도 있죠?" 내가 조엘의 시종이기에 당연하겠지만, 조엘의 모든 옷은 내가 관리하고 있었다. "됐어. 별로 안 무거운데 뭐... 그것 보다도 여기 위에 있는 것들 도련님 건데 마침 만났으니까 네가 가지고 가라. 지금 도련님 방에 가려는 거지?" 두 시녀 중 짙은 금발머리의 시녀가 나에게 옷더미를 가르키며 말했다. 그녀의 이름은 노라였고, 그 옆의 갈색 머리의 시녀가 낸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예. 음... 어디보자... 아, 점심 먹었어요?" "아니, 아직 안 먹었지. 이것만 다 정리하고 먹으려고." "그럼 제가 도와드릴까요? 공작님것도 있으면 저 주세요. 제가 가져다 놓을게요." 그러자 낸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됐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닌데 뭐. 그냥 도련님 옷이나 가져가. 참, 매기 시녀장님이 너 요즘은 부엌으로 원정 안 오시냐고 물으시던데?" "훗... 제가 언제나 계속 원정 갈 거라고 생각하심 오산이예요." 원정이란 다름아닌 해럴드 집사의 벌을 받아서 집안일 하러 가는 것을 말한다. 부엌에서 하는 일이란 다름아닌 은식기 닦는 것인데, 이런 집안 빵빵한 귀족집에서는 식기를 다 은으로 만들어서 사용한다. 더 빵빵한 집안이라도 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것보다 은으로 된 것을 선호하는데 그 이유가, 그런 집안 사람들중 대다수는 암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란다. 암살 중 흔이 사용되는 독살을 방지하기 위해 ( 은은 독과 닿으면 까맣게 변색하니까 ) 은으로 된 식기를 사용하는게 이제는 아예 풍습으로 굳어졌는데, 이 은을 비롯한 보석류는 ( 물론 모든 물건이 다 그렇겠지만...) 오래 되면 색이 바래진다. 그 색이 바래진 것을 박박 문질러 닦아 다시 새것 처럼 광택을 내는 것은 빨래 하는 것 보다 더 귀찮고 힘든 일인데 이것 또한 나에게 주어진 벌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부엌에도 자주 내려갔기에 그 곳에서 안면을 익혀놨는데, 그 덕에 가끔 부엌에 내려가면 파이 한 조각이라던지 쿠키 하나씩 얻어먹기도 했다. "헤에.. 부엌쪽에서는 너 오길 은근히 바라더라." "해인이가 가면 일거리가 많이 줄잖아. 그건 우리도 바라는 바 아냐?" 낸시의 뒤를 이어 노라가 킥킥 거리며 말을 받았다. "너무 합니다. 제 원정이 줄어들면 축하해줘야 하는 거 아니예요? 은근히 원정 가길 바라다니..." "호호호... 얘는 뭘 그런거 가지고...." "우리야 네가 원정 오면 좋잖니." 그렇게 우리 셋이 복도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데, 지나가던 하인 한명이 그런 우리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어이, 낸시.. 그렇게 일 안 하고 수다만 떨다 시녀장님에게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나보다 약간 더 큰 키에 평범한 체격의 이 남자는 낸시에게 관심이 있는지 오가다 그녀를 만나면 항상 말을 걸곤 했다. 그러나, 낸시는 그 남자가 별로 눈에 차지 않는지 항상 쌀쌀맞게 대하곤 해서 나는 그 남자를 가엽게 여기고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부드럽게 웃던 낸시의 얼굴에 쌀쌀맞은 기운이 감돌았다. "흥, 당신이 무슨 상관. 가자 노라. 해인아, 나중에 보자." 낸시가 갑자기 몸을 돌려 걸어가는 바람에 노라도 얼른 서둘러서 걸음을 옮겨야 했지만, 낸시에게 찬 바람 맞은 그 남자에게 동정의 눈길을 던지는 걸 잊지 않았다. 노라도 그 남자가 가엽긴 가여운 모양이었다. 다시 한번 낸시에게 쌀쌀한 반응을 받은 그 남자의 표정이 굳어져버리자 그 남자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무지 어색해서 나도 슬그머니 그 곳을 지나쳐 얼른 조엘의 방으로 향했다. '쯧쯧... 그렇게까지 차갑게 굴 필요 있나? 그냥 예의는 차려주지... 저 남자가 뭐 잘못한거 있나? 하지만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아, 혹시 낸시가 저 남자에게 맘이 있는 거 아냐? 그러니까 괜히 차갑게 굴고 튕기는 거 아냐?' 그렇게 혼자 이런 저런 추측을 해보면서 조엘의 옷을 다 정리한 나는 해럴드 집사에게 가기 위하여 그 방을 나왔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방 바로 앞에 아까 그 낸시에게 찬 바람 맞은 남자가 서 있는게 아닌가? '허걱.. 뭐야. 왜 여기 있는 거지?' 나는 놀랍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해서 그 남자에게 입을 열었다. "저... 무슨 일이세요?" 그러고 보니, 난 이 남자의 이름을 몰랐다. 예전에 한번 얼핏 들은 거 같은데 어쩌다 가끔 얼굴만 마주치는 사이인데다가 이 남자 또한 낸시와 내가 친하다는 이유로 날 좋게 보지 않는 인물들 중 한명이었기에 이야기도 한번 안 해본 사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아까 인사도 안 하고 그냥 슬그머니 물러난 거고... 그런데 그런 남자가 지금 날 똑바로 - 물론 기분 나쁜 눈초리로 -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야, 너 나좀 보자." "왜, 왜요?" 평소 나를 째려보기는 했어도 말 한마디 안 걸던 인간이 갑자기, 그것도 좋게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닌, 마치 시비 거는 것 처럼 말을 건네자 선듯 응하고 싶은 기분이 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자 이 남자는 내가 움츠러든 줄 알고 더욱 더 건들거리며 말했다. "아 좀 보자면 봐." 그러면서 자기가 먼저 등을 돌려 걸어가는 거였다. 무시하고 이대로 갈까... 생각도 했지만, 거만하게 건들거리는 남자의 태도도 웃겨서 어디 한번 어떻게 나오는지 보려고 그 뒤를 따라갔다. 그 남자가 날 데리고 간 곳은 저택에서도 좀 멀리 떨어진 마굿간 뒤쪽이었다. 말들에게 아침 식사를 주고 청소를 하는 것이 모두 조엘과 공작이 출근하기 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에는 마굿간에는 말들 외에 아무도 있지 않았다. 아마 그렇기에 저 남자가 그 장소를 택한 건지도 모르지만, 그 작태를 보자니 왠지 학교의 체육관 뒤가 생각이 났다. 한 사람이 평소 점찍어둔 상대를 교실에서 불러내어 평소 사람이 다니지 않는 체육관 뒤로 데리고 가면 그 곳에는 불량배들이 모여들어 기다리고 있는 그런 흔한 스토리 말이다. 역시나 그 곳에도 날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두 명의 남자가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남자와 내 모습이 보이자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헐... 이 곳의 불량배들이신가...' 그 모습에 나는 실소를 흘리며 바라보고 있는데, 그게 기분 나쁜 듯이 나에게 다가오는 남자 중 나보다도 키가 더 작은 남자가 옆으로 침을 탁 뱄으며 입을 열었다. "어쭈구리, 웃네? 이게 우리가 아주 우습게 보이나보지?" 그러자 옆에서 같이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남자가 그의 말을 받았다. "하기야... 오자마자 도련님의 시종이 되어서 집사님과 도련님의 귀여움을 받는 분이시니 어디 우리가 눈에 뵈겠어?" '평소 니들이 얼굴 제대로 보여주 주기나 했냐?'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우선 저들의 의도를 묻고자 입을 열어다. "무슨 볼일이십니까?" 크으~ 해럴드 집사의 교육 영향이 벌써부터 내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다른때 같으면 나도 같이 건들거리며 '뭐냐?' 라고 물었을텐데 하도 해럴드의 닥달을 들으며 언제 어느 상황에서도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익히다보니 저런 날건달 같은 녀석들에게도 나도 모르게 정중모드로 나가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게 또 저 녀석들에게 아니꼽게 비춰졌는지 그들의 시선에 못마땅함이 가득 들어가 있었다. 하기야, 벌써 미운털이 박혔는데 뭔들 예뻐 보이겠는가? 나 보다도 키가 작은, 그러니까 땅딸막한 남자가 다시 한번 침을 뱉으며 - 거 침이 많기도 하다. - 이죽거렸다. "하이고... 고상한 분이시라 말도 참 고상하게 하는구마이... 이거 어디 우리 같은 예의도 모르는 것들이 어디 황송해서 말이라도 걸겠나?" 그래서 나도 한마디 해줬다. "볼 일이 없으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커억... 이게 아닌데... 한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이 XXX들이 어디서 XX야?' 험험... 설마, 내가 한국에 있을 때 한 날나리 했었나보다... 라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 어쨌든, 그렇게 말한 내가 몸을 돌리려고 하자 날 데리고 온 남자가 내 어깨를 잡아 내 쪽으로 다가오는 남자들쪽으로 밀쳤다. "어딜 가려고?" 제 7화 아, 내 신세여.... (4) 어쨌든, 그렇게 말한 내가 몸을 돌리려고 하자 날 데리고 온 남자가 내 어깨를 잡아 내 쪽으로 다가오는 남자들쪽으로 밀쳤다. "어딜 가려고?" 처음 부터 정령의 기운을 믿고 기고만장해 있던 나는 그들을 깔보고 있었던 탓에 전혀 긴장을 하고 있지 않았다. 덕분에 갑작스럽게 뒤에 있던 녀석이 밀치는 대로 비틀거리며 두 남자가 있는 쪽으로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두 녀석이 달려들어 내 양 팔을 하나씩 붙잡아 나를 제압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도 황당하다는 기분을 느낄 뿐 위험하다거나 큰일 났다는 감정을 - 정령 기운을 얻은 뒤로 간뎅이가 부었다 - 전혀 못 느끼고 있던 나는 그런 그들이 우스울 뿐이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속으로는 그들을 비웃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그걸 내보일 수가 없었기에 웃음을 참느라고 얼굴이 잔뜩 굳어져 있었다. 거기에 목소리까지 웃음을 참느라 가늘게 떨리고 있었기에 날 둘러싸고 있는 남자들은 내가 겁먹은 줄 알았는지 무지 의기양양해 했다. "우헷헷... 이 녀석 겁먹었나본데?" "크크크... 고상한 도련님의 시종께서도 주먹 앞에서는 별 수 없나보지?" 내 양 팔을 잡고 제압한 남자들이 그런 나를 비웃자 앞에서 어깨를 주무르며 다가오는 녀석도 한마디 했다. "흥, 이게 다 네 녀석이 자초했다는 걸 기억해라. 오자마자 도련님의 시종이 된 것도 고까운데 감히 낸시까지 넘봐? 넌 오늘 잘못 걸렸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보여주기에 어깨 운동을 하며 다가오는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의 말을 들으며 황당함을 금치 못해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내가 언제 낸시를 넘봤다는 거지?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제가 언제 낸시 누님을 넘봤다는 겁니까?" "시끄러워! 매일 낸시에게 해실해실 대면서 꼬리치는 주제에... 정말 꼴 사나워서 못봐주겠더군.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해주지." 그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나에게 다가오며 주먹을 내뻗어 내 복부에 강타를 먹였다. 퍼억~! "쿠엑!" 별로 듣기 좋은 비명소리는 아니었지만, 나는 맞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런 비명을 내뱉고 말았다. 되게 얕보고 있었는데 의외로 주먹이 매웠던 것이다. 물론 엘라임에게 비하면 약과였다. 엘라임에게 정식 - 그것도 엘라임 입장에서는 죽지 않을 정도로 봐준 정도 - 으로 맞으면 비명도 못 지를 만큼 엄청 아팠다. 그 동안 바다 밑에 있는 집에서 살면서 엘라임에게 하도 얻어맞아서 왠만큼 맺집이 달련되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자리에서 주저 앉거나 눈물을 흘리는 등등의 꼴불견을 보일 뻔 했다. 그러나 주먹의 타격에 의해 자연스레 상체를 앞으로 숙이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는데, 나에게 주먹을 먹인 그 남자는 그걸로는 성치 않았는지 상체를 숙이고 있는 내 멱살을 틀어쥐어 다시 자신을 치켜보게 하더니 다른 쪽 손으로 만든 주먹을 정확히 내 얼굴의 콧등을 향해 뻗어왔다. 아무래도 내 얼굴에 자신의 멋진 작품을 만들려는 듯 했다. '이런...' 나는 얼른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내 양 팔을 잡고 있는 두 녀석때문에 여의치 않아 얼른 고개를 숙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보다도 먼저 내 앞에 있는 녀석의 주먹이 정확히 내 왼쪽 눈 부위에 작렬했다. 퍼억~! 머리가 띵 하고 두 눈에 별이 반짝 거리자 나는 계속 여유만만하게 남자들을 비웃으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배는 그럭저럭 봐줄 만 했는데 감히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자 부아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비록 지금 내가 남자 행세를 하고 있지만, 17년 간 여자로 살아온 나였기에 아직도 날 여자라 생각하고 있던 터라, 여자의 얼굴에 손을 대는 녀석은 그냥 놔둘 수가 없었다. '이 자식들.. 이제 죽었어.' 솔직히 마굿간 뒤쪽으로 왔을 때 날 기다리는 두 남자가 더 있다는 걸 보고 나는 상황이 이리 될 거라 대충 짐작은 했었다. 솔직히 뻔할 뻔자 아니겠는가? 날 때린 남자가 낸시때문에 날 질투하는 점이 좀 의외긴 했지만, 이들이 먼저 이 집안의 하인이 되었답시고 후배 군기를 잡는다던지, 아니면 텃세를 부린다던지, 아니면 폭력으로 내 기를 팍 죽여놓아 날 자신들의 꼬봉으로 만들려는 것이리라 짐작했던 것이다. 뭐, 이런 이유들도 모두 섞여 있는 거겠지만... 그.러.나, 정령의 기운 때문에 물을 마음대로 다룰 - 물론 물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지만.... - 수 있게 된 내 앞에서 이들이 쨉이 되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이들에게 쓴 맛을 보여주기 전에 이들이 신나게 기고만장해 하게끔 한대나 두대 정도는 맞아주려고 했던 것이다. 게다가 나중에 혹시라도 이 일이 알려지게 된다면 이들이 내가 세 사람을 끌고 와서 일방적으로 때렸다 그러면 난 할말이 없는게 아닌가? 그러나, 먼저 주먹을 휘두르면 폭력이지만, 한대 맞고 휘두르면 그건 정당방위가 된다는 사실을 - 뭘 이상한 눈초리로 보는가? 자네는 사회시간에 그런거 안 배우고 뭐 했지? - 알고 있던 탓에 나중에 혹시라도 문제가 될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려고 일부러 몇대는 맞아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 동안 엘라임에게 자주 맞고 산 덕에 이 녀석들의 한 두대쯤이야... 하는 생각도 한 몫 했고 말이다. 그러나, 날 이곳으로 데리고 온 남자의 안면 강타에 나는 생각을 바꾸어 버렸다. -물론 이미 두대나 맞았긴 하지만...- 처음에는 그냥 쓴 맛만 보여주려고 했는데 이제는... ".... 당신들... 죽었어!" 눈 부위를 크게 한방 맞은 탓에 다시 한번 휘청였던 몸을 바로세우며 이빨까지 빠드득 갈며 말했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 채 이런 나를 비웃기만 했다. "하이고.. 시종님께서 화가 나셨네?" "큭큭큭.. 그래봤자 지가 어쩔겨?" "사내새끼가 얼굴이 계집애같이 생겨 맘에 안 들었는데, 오늘 내가 멋진 사내 얼굴로 만들어 줄테니까 기대해봐." "칼자국이라도 만들어 주게?" "큭큭큭.. 그것도 좋지." "나중에라도 입을 나불거릴 수 있는지 두고 보자구." "아 왜 안 나불 거리겠어? 우리 앞에 딱 무릎 꿇고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형님들.. 하고 싹싹 빌어야 할텐데..." "하하하하, 그것도 그렇군." 그렇게 그들끼리 히히덕 거리는 틈을 타서 나는 오른 발을 들어 슬그머니 뒤쪽으로 빼었다가 내 오른쪽 팔을 잡고 있는 남자의 종아리 뒷부분 가운데를 힘껏 찼다. 그 곳에는 사람의 약점이 있는데 그냥 꾹 눌러도 아프지만, 잘못 세게 맞으면 한참 동안 다리에 힘을 줄 수 없을 정도다. 그 곳을 노리고 찬 것이다. 퍼억~!! "으악~!!" 갑작스런 기습에 놀라고 통증에 두번째 놀란 내 오른쪽 팔을 잡고 있던 땅딸막한 사내는 그 자리에 주저 앉으며 비명을 질러댔다. 덕분에 오른쪽 팔이 자유로워지자 나는 뒤로 몇걸음을 물러나면서 내 왼쪽 팔을 잡고 있던 남자를 내 앞을 막게 하여 나에게 주먹 두방이나 먹인 남자를 견제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왼쪽 팔을 부여잡고 있는 남자 역시 왼발을 들어 뒤꿈치로 무릎 뒷부분을 강하게 내려찼다. 그 곳 또한 약한 부위였기에 저절로 다리가 꺾인 그 남자가 놀라서 그런지 순간적으로 내 왼팔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빠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나는 오른 손으로 내 왼팔을 잡고 있는 손을 풀어냄과 동시에 그의 손목을 잡아 꺾고, 풀린 왼손으로 그의 어깨를 내려누르며 제압한 뒤 상체가 숙여진 그의 복부를 오른쪽 무릎으로 강하게 올려찼다. "크억~!!"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나에게 한방 안 맞은 남자가 당황해 있다가 내가 내 왼팔을 잡고 있던 남자까지 쓰러뜨리며 뒤로 물러나자 그제야 정신을 수습하고 나에게 달려들며 외쳤다. "이 자식이~!!" "자식 자식 하지마 임마. 듣는 분 기분 나뻐!!" 나는 그에게 그리 화답하며 가운데 손가락까지 한번 먹여준 후 재빨리 달려 마굿간을 돌아 나왔다. 마굿간 뒤로 가기 전에 그 앞쪽에 말들에게 마시울 물을 가득 담아 둔 커다란 통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령의 기운을 사용하기 전에 다시 한번 다른 사람들이 없는지 살펴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막 마굿간을 돌아 나오다가 말을 끌고 온 어떤 사람과 딱 마주쳐 버리고 말았다. "허걱~!"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 딱 멈추는 순간, 뒤에서 이를 모르는 멀쩡한 한 남자와 나에게 맞은 부분을 절룩 거리는 두 남자가 이를 갈며 쫓아 달려왔다. "이 자식!" "걸리면 죽었어!!" "거기 못 서!" 제일 먼저 달려온 남자는 내가 제자리에 서 있자 그걸 이상하게 여기고 상황을 살펴봐야 할 눈치는 없는지, 아님 너무 흥분해서 이성이 마비 되었는지 그냥 뒤에서 태클을 걸어왔다. "잡았다!!" "우악!!" 앞에서 마주친 남자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엉거추춤 서 있던 나는 그대로 태클에 당해 앞으로 고꾸라져버렸고, 뒤에서는 두 절룩대는 남자가 환호성을 외치며 달려오다가 내 앞에 있는 남자를 보고 놀라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잡았어?" "이 자식, 가만 안둔... 허거걱..." ".....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제 7화 아, 내 신세여.... (5) ".....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평소 항상 웃는 얼굴로 있던 조엘이 오늘따라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나와 떨거지 셋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 조용한 사람이 화나면 무섭다더니만, 평소 웃고 있던 얼굴이 차가워지니까 왠지 모를 위압감과 함께 무섭고 긴장되었다. "도, 도련님..." 그 순간 우리 네 사람의 심정은 아마 같았을 것이다. '왜 하필이면 지금...' 아까 공작이랑 같이 왕성으로 출발한 인간이 어떻게 여기 나타났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등장으로 패닉 상태에 빠져버린 인간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리기만 했다. 나에게 태클을 걸어 쓰러뜨렸던 남자가 허둥지둥 일어나자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 순간 나도 당황해서 뭘 어찌해야 할지 모랐던 것이다. 그런 우리를 조엘은 가만히 바라보고 있더니만 한사람 한사람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내 얼굴에 와서는 딴 사람에 비해 두배 정도의 시간을 들여 한~ 참 바라보고 있다가 나에게 태클을 걸어 넘어뜨린 남자를 다시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은 것 같은데?" 평소의 부드러운 어투가 아닌,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덕분에 세 남자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싹~ 가셨다. "아니.. 저기.. 그게, 그러니까..." 차마 사실대로 대답은 못하고, 그렇다고 그럴듯한 변명을 하자니 좋은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는지 계속 버벅거리기만 하는 그 남자를 보다 못한 옆에 있던 땅딸막한 남자가 대신 입을 열었다. "그냥.. 저희 끼리 장난을 좀 쳤을 뿐입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키 큰 남자도 얼른 거들었다. "예, 예. 신찬에게 마굿간을 구경시켜 주다가 서로 장난을 치게되는 바람에... 에헤헤헤.. 도련님, 다 그렇게 해서 친해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 조엘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림과 동시에 꽉 다문 입술 한쪽 끝이 올라갔다. '오옷.. 저것은 분명 비웃는 미소... 어쩜 저리 엘라임이랑 똑같냐...' 내가 그 모습을 보며 놀라움을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조엘의 시선이 나에게 돌아왔다. "사실이야?" "예? 아... 예." 그럼 거기서 어떻게 '아뇨, 사실은요 저 녀석들이 절 집단 구타 하려고 마굿간 뒤로 불러내서 때리고 있는 사이 제가 반격을 하려고 도망치던 중이었거든요.' 라고 조잘조잘 일러 바치겠는가? 게다가 조엘의 시선이 나에게 쏠리자 옆에 있던 세 남자들 또한 나에게 애원과 협박이 섞인 눈을 너무 처절하게 보내는 바람에 그들의 편을 들어줬다. 뭐, 솔직히 복수란 자신의 힘으로 해야 더 맛있는거 아닌가? '훗훗훗.. 나중을 기대하라고... 너희들 지금 그냥 지나가면 다행이라고 안심하겠지만... 훗훗훗.. 두고 봐. 오늘 못 다한거 이자까지 쳐서 손봐줄 테니까.' 세 남자는 나의 의미심장한 눈길에 어리둥절해 했지만, 자신들 편을 들어주자 아무래도 좋다는 듯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조엘은 그게 못마땅한지 굳은 얼굴에 이제는 찬 기운까지 감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까지 장난치고 있었다고 말하자 뭐라 할 명분이 없어졌기에 입만 다불고 있다가 세 남자들에게 잡고 있던 말 고삐를 건넸다. "잠시 들린거니 마굿간 안에 넣지는 말게." 그러자 땅딸막한 사내가 재빨리 앞으로 나와 허리까지 숙이며 말 고삐를 건네 받았다. "알겠습니다." 조엘이 찬 바람 날 정도로 몸을 홱 돌리며 걸어가자 나는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시종이란 원래 자신이 모시는 주인 곁에 항상 있어야 하는 법이다. 조엘이 평소 같이 않게 잔뜩 굳은 얼굴로 뚜벅 뚜벅 걸어가자, 그가 왕궁에 있어야 할 시간에 모습을 보이는 것에 놀란 집안 사람들이 그의 평소 같지 않은 표정에 다시 한번 놀라면서 황망하게 인사를 건네며 지나쳐 갔다. 평소 같으면 '어, 도련님 어떻게 되신 거예요?' 라고 한마디쯤 말을 건넬 시종들이 그의 차가운 분위기에 고개만 꾸벅 숙이고 지나쳐 가기만을 기다리는 모습에 나는 괜히 내 탓인거 같아서 양심이 찔려왔다. 솔직히, 잘 따져보면 날 불러낸 녀석들이 잘못한 거긴 하지만 말이다. '아니, 솔직하게 안 불고 녀석들 편을 들어준 내 탓인가? 에이, 설마... 그것 때문에 저렇게 화가 났을려고... 단지 자신 집안의 하인들끼리 싸움한 걸 보니까 화가 난 거겠지...' 자신의 방에 도착한 조엘은 문을 거칠게 열어제끼고는 뚜벅뚜벅 들어가 가타부타 없이 자신의 서재 및 업무를 보는 방으로 들어갔다. 조엘의 방은 무지 커다란 방을 5개의 공간으로 나눈 형태를 띄고 있었다. 하나는 침실이고, 하나는 그의 드레스룸 (남자에게도 이런게 있을 줄이야...), 그리고 욕실과 거실, 마지막으로는 그의 서재 겸, 집에서 업무를 볼 때 사용하는 사무실 용도로 사용하는 방이었다. 조엘이 거칠게 열어제낀 문을 조심스레 닫고 그의 뒤를 따라 그 방으로 들어가니 조엘은 서류함 맨 밑을 뒤적거리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왠만한 건 날 안 시키고 자신이 직접 하는 조엘이었기에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는 웬지 폭풍 전야의 고요함을 느끼며 긴장한 채 그의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후, 결국 원하는 걸 찾았는지 서류함을 탕 소리 나게 닫으며 일어서는 조엘의 손에는 두 손바닥을 나란히 펼친 것보다 조금 큰 상자를 들고 있었다. "거기 앉아." 턱짓으로 소파를 가르키며 말한 조엘은 자신도 소파에 앉으며 탁자 위에다가 상자를 내려 놓았다. 그래 나도 조심 조심 그의 맞은 편에 앉았더니만 조엘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누가 거기 앉으래? 여기 앉으란 말야." 그러면서 그가 가르킨 곳은 그의 바로 옆자리였다. "예? 아, 예..." 왜 자기 옆에 앉으라는 건지 의아해 하면서 주춤 주춤 그의 옆에 엉덩이만 걸친 채 앉자 그제야 조엘이 상자를 열었다. 그 상자는 겉에 별다른 표식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곳의 구급함이었던 모양이다. 손이 들어갈 정도로 입구가 넓고 높이가 낮은 여러개의 병들이 약임이 분명한 것을 담은 채 입구가 잘 봉해져서 넣어져 있는 가 하면, 붕대나 거즈로 사용하는 듯 보이는 천이 깨끗하게 접혀져 있었다. 조엘은 그 중에서 병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대!" "예?" 뜬금 없는 그의 말에 어리둥절해 하며 되묻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얼굴 대라고. 눈덩이가 퉁퉁 부었건만, 그러면서도 그런 녀석을 편을 들어주고 싶어?" 그의 질책어린 말에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조금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병 뚜껑을 열고 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연고를 손가락에 살짝 묻히더니만 내 눈 주위에 조심조심 발라줬다. "제대로 맞았군... 이거 내일 멍들겠는데?" "예? 멍요?" 엘라임에게 맞을때는 엘라임이 봐줬는지 모르겠지만, 심하게 맞아도 어디 부러지거나 멍들거나 부은 적이 없었다. 아마 그래서 그들에게 두대나 맞아도 태연했는지 모르겠지만, 눈 주위에 멍들거라는 소리를 듣자 나는 큰일났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내일 부터 팬더눈을 하고 다닌다면, 사람들이 한번씩 다 왜 그러냐고 물을테고, 그러면 뭐라고 변명한단 말인가? 아니, 그것은 둘째치고 이걸 해럴드 집사가 안다면, 주인을 모시는 녀석이 몸을 함부로 굴린다고 또 혼날게 분명했다. '아냐... 괜찮을지도 몰라. 난 원래 멍도 잘 안드는 체질이고...' 그렇게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는데 조엘의 말소리가 들려 나는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다른데." "예?" 어벙하게 되 묻는 날 보며 조엘은 참을성 있게 다시 말해줬다. "또 다른 맞은 곳 대라고. 설마 얼굴에만 한방 맞은 건 아니겠지?" 맞은 곳이 하필이면 배라는 것이 문제지만... "아니... 뭐.. 괜찮은데요?"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일어나려는 조짐을 보이자 조엘이 손을 뻗어 내 어깨를 꾹 누르며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사양 할걸 사양해라. 멍청이 같이 맞고 다니면서 약 발라주는 걸 사양해? 빨리 말해. 어디야?" 그에 나는 기분 나쁨을 느끼며 조엘의 손을 탁 쳐내며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맞고 다닌다니요. 제가 분명히 말씀 드리는데요, 그때 조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 녀석들이 저에게 두들겨 맞았을 겁니다. 그냥 한대 맞아준 다음에 반격을 하려는데 조엘님이 오신 거라구요." 정색을 한 채 조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엄청난 짓 - 해럴드 집사 입장에서는- 을 저지르며 또박또박 말하자 황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조엘의 얼굴이 서서히 풀리면서 그가 피식 웃었다. "훗... 그러냐?" "왜 웃으세요? 제가 그런 녀석들에게 당할 것으로 보이십니까? 그런 녀석 셋 정도는 문제 없다고요. 조엘님 덕에 산건 제가 아니라 그녀석들이라니까요." "하하하, 그래, 그래... 잘못 봐서 미안하다. 보복 하려는 것을 방해해서 미안하고... 하지만, 맞은 데는 치료 해야지. 어딜 맞은 거야?" 그에 나는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며 물러났다. "괜찮습니다. 이정도 쯤이야 뭐 거뜬하지요. 아, 그런데 왜 오신 거예요? 지금쯤이면 왕성에 계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황급히 화제를 돌리는 날 지긋이 바라보던 조엘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씨익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감추려고 하는데? 혹시 엉덩이라도 걷어차인 거야? 그렇게 안 보여 주려고 하니까 궁금하잖아. 아무래도 안돼겠어. 확인해 봐야지." 그러면서 은근슬쩍 일어나는 조엘의 모습에 위험을 느낀 나는 얼른 두어 발자국 물러나며 손을 내저었다. "감추긴 누가 감춘다는 겁니까? 별것 아니니까 그렇지요. 누가 엉덩이를 걷어차였대요?" "그런데 왜 안 보여주는 건데? 한번 보자니까? 정말 엉덩이를 맞은 거 아냐?" 한걸음 두걸음 나에게 걸어오는 조엘의 모습에 나는 다시 한번 뒷걸음질 쳤다. "왜 다가오시는 거예요? 음흉한 그 표정은 뭡니까?" "훗훗훗.. 뭘 그리 쑥스러워 하는 거야? 같은 남자끼린데 어때?" '누가 남자라는 거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 말은 그냥 속으로 꾹 누른 채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런 표정을 보이시니까 더 불안하잖아요. 다가오지 마세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또 다시 뒤로 훌쩍 물러는 날 보던 조엘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입을 씰룩거리더니만 곧 배를 잡고 크게 웃어젓혔다. "푸하하하~~ 뭘 그렇게 겁먹은 거야? 누가 잡아 먹기라도 한대?" "이게 누구때문인데 웃으시는 겁니까?" 조엘의 반응에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바락 외쳤지만, 조엘은 그 모습에 더욱 더 웃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한 나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입을 열었다. "시킬 일이 없으시면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나가려는 것 처럼 몸을 돌리자 그제야 조엘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큭큭큭.. 알았어. 안 웃을께... 끄윽, 끄윽... 그러니까 화내지 말고, 맞은데나 보여줘.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만 할거니까. 안 그러면 확 덮쳐서 옷을 다 벗겨 버린다?" 조엘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명분이 없어 나는 쭛볏 거리며 티셔츠를 들어 올려 배를 보여줬다. 아까 심하게 맞은 건 알았지만, 나도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됐는지 몰랐는데 빨간 주먹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거였다. 그 모습에 조엘은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다가와 아까 그 약을 조심스레 바르기 시작했다. "으이그... 이것 봐라. 그런데도 치료 안 하고 그냥 넘어가려고 했단 말야? 내가 고집 안 피웠으면 어쩔 뻔 했어?" 그렇게 골고루 약을 다 바른 뒤 약병을 챙기던 조엘은 나를 돌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해인, 너 내일 부터 나와 같이 새벽에 훈련 하자." "예엣? 갑자기 왠 훈련이요?" "내 시종이면서 맞고 다니게 할 수는 없지. 더글라스 경에게 말해둘테니까 내일부터 참가하도록. 알았지? 내일 새벽 부터야." "아니.. 그게..." 나는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조엘은 듣고 싶지 않다는 듯한 단호한 동작으로 등을 돌려버렸다. 제 8화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안다 (1) 다음 날부터 나는 정말 새벽에 기사들과 사병이 하는 훈련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 전날 조엘이 말하긴 했지만, 설마 하는 마음에 나는 일어나자마자 늘 했던 그대로 용모 단정하게 하고 해럴드 집사에게 교육을 받으러 갔다. 하지만, 해럴드 집사는 그런 날 보고는 왜 왔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거였다. "왜 일로 왔냐?" "예?" 그 말 뜻을 제대로 이해 못한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되묻자 해럴드 집사의 눈썹이 성큼 치켜 올라갔다. "어허, 이 녀석이 그 동안 가르친 것은 다 어디다 잊어버리고..." "예에?" '내가 뭘 잘못 했는데 그러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하게 잘못한 것은 기억나지 않아, 설마.. 어제 마굿간 뒤에서 있었던 사건이 들켰나... 하는 걱정을 하고 있는데 해럴드 집사의 말이 들려왔다. "시종에게 있어서 가장 최 우선으로 해야 할 것은?" 그거야 무지 상식적인 일이기도 하거니와, 하도 해럴드 집사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라 자고 있던 날 깨워서 물어본다 해도 쉽게 대답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주인의 명."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입을 열자 술술 나온 대답에 해럴드 집사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맞았어. 그런데 넌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지? 조엘 도련님께서 어제 너에게 따로 명하셨다고 하던데?" 그제야 어제 조엘이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지만, 나는 그냥 해보는 말이려니... 하고 그냥 흘려 들었던 것이다. 솔직히 시종에게 갑자기 기사들과 사병들이 훈련하는데 끼라고 하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설마... 정말 저보고 새벽 훈련에 참가하라고 말씀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그건 정말 말도 안된다고요. 제가 시종이지 기사나 사병입니까?" 그러자 해럴드 집사의 눈이 가늘어지며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건 그가 서서히 화가 났다는 증거이고, 이럴때 그를 자극한다면 나는 평소 받을 벌을 두배는 불려서 받게 될 거라는 걸 그 동안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던 터라, 온 몸을 긴장시킨 채 조심스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물론.... 좀 어리둥절하긴 해." 잠시 뜸을 들인 뒤에 나온 해럴드 집사의 말에 나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완전히 긴장을 풀지 않았다. 왜, 한국에는 이런 말이 있지 않는가?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고... 해럴드 집사가 전생에는 한국 사람이었는지, 이 말은 그에게 딱 들어맞았다. "하.지.만...." '역시.. 내 그럴줄 알았지...'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런건 시종이 판단할 일이 아니다. 너는 얼른 주인의 명을 시행하기나 해." 그의 말에 주저없이 나는 살짝 목례를 한 뒤 몸을 돌려 그 방을 빠져 나가면서 속으로 꽁알됐다. 엘라임과 바다 밑 집에서 살때부터 생긴 버릇인데, 이게 안 좋은 버릇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째 고쳐지질 않았다. 아무래도 속으로 꽁알댈 일이 그만큼 많다는 소리겠지만... '정말... 전에는 주인이 잘못된 판단을 하면 목숨을 걸고라도 막아야 하는게 시종이 할 도리라면서... 이게 뭐야, 시종이 판단할 일이 아니라니... 역시 법이란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 거기까지 쫑알거리자 방 문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내가 너무 천천히 가는 것 같은지 해럴드 집사가 뒤에서 내 발걸음에 시동을 걸어줬다. "한가지 경고하는데.. 오늘 훈련에 지각했다는 소리를 더글라스 경에게 듣게 된다면, 넌 오늘 잠을 못 자게 될 줄 알아라." 밤 새도록 해도 다 못할 어마어마한 양의 일거리를 떠넘긴다는 소리였다. '젠장...' 난 그 소리를 듣는 즉시 방문을 닫을 생각도 못한 채 냅다 뛰기 시작했다. '어쩌지? 지금이면 다 모였을 시간이야... 이대로 뛰어가도 시간이 부족해...' 복도를 두다다다 달려가면서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기사들과 사병들의 숙소는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3층 건물이었고, 연무장은 그들의 편의상 그 건물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이 곳에서 온 힘을 다해 뛰어가면 약 5분 정도 걸릴 거리였다. '이런... 안돼겠어. 여기가 3층인데, 계단을 일일이 뛰어내려 갈 시간이 없어.' 나는 저 앞에 있는 계단을 바라보며 달리다가 복도에 급정거를 하고는 그대로 옆에 있는 커다란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뛰어 내렸다. [얘들아, 부탁좀 하자.] 내 정령의 기운을 슬며시 뿜어내며 부탁조로 말하자 실프들이 두 말 않고 바람을 일으켜 내 몸을 받쳐줬다. 다행인지 복도 창문은 저택 뒷면에 나 있기에 내가 3층에서 뛰어 내리는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건물 밖으로 나온 나는 숨 한번 돌릴 틈도 없이 잽싸게 달리기 시작했다. 다다다다다~~ 그렇게 열심히 달려온 보람이 있었는지, 앞에 보이는 연무장에서는 다행이 사병들과 기사들이 이제 마악 집합하고 있는 터라 훈련이 아직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휴우~ 세입인가...' 얼마나 빨리 달렸던지 흙먼지까지 일으키며 멈춰 선 날 모든 이들이 황당함 반 흥미 반이 섞인 시선으로 보고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헥헥 거리는 숨을 고르며 이번 일의 원흉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엘과 대니가 날 찾고 있었던 듯 내가 멈추자마자 나에게로 다가왔기에 그들을 찾을 수고는 덜 수 있었다. "호오... 제법 빨리 달리는데?" 새삼 다시 봤다는 눈초리로 날 보는 조엘이 무지 얄미워 보여 아무런 대답도 안 한채 살짝 목례만 해 보이자 그가 피식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런 조엘에게 데니가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해인이에게 훈련에 참가시킬 생각이십니까? 검술을 가르쳐 주실 거라면 새벽 훈련에 참가시키지 않고 제가 틈틈히 가르쳐도 될텐데요." 그러자 조엘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좀 있다가 데니에게 부탁하려고 했지. 지금은.. 데니도 좀 바쁘니까... 어차피 처음에는 기초적인 동작과 체력 단련을 해야 할테니 새벽 훈련에 참가시키는 것이 피차 좋을 거라 생각했어. 해인이도 할 일이 있을테니 말야." "아, 그렇습니까? 조엘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군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곁으로 다부진 체격의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그가 바로 새벽 훈련의 교관이자 이 곳 기사들과 사병들의 지휘자인 레오 더글라스 경이었다. "훈련에 참가 시키고 싶다고 하신 아이가 이 아이입니까?" 그와는 아직 직접 이야기를 나눈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단지 새벽 훈련을 끝낸 조엘에게 가다가 마주쳐 목례만 건네거나, 아니면 공작이 출근, 혹은 퇴근할 때 같이 있는 그와 마주친 적만 있어 안면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조엘이 아무리 공작의 아들이고 차기 공작이라고 해도 이 저택 안에서 행해지는 기사나 사병에 관한 훈련은 이 사람의 소관이었기에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 허락을 받는 것이었다. 더글라스경은 조엘에게 시선을 돌려 무표정한 시선으로 날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만, 어깨를 으쓱거렸다. "참가 시키는 것은 문제가 아니겠지만, 금방 익숙해질지는 모르겠군요. 평소 익숙하지 않아 오늘 훈련을 하고 난 뒤에는 근육통으로 꽤 고생할텐데요..." 그의 말에 나는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가시는 걸 느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하고 있었지?' 한국에 있을때, 체력장을 하고 난 다음날이면 어깨와 다리, 배 등등에 알이 배겨 고생한 것이 매년 연례행사였기에 그 고통을 아주 자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오늘 혹은 내일에... 아니 어쩌면 이번 주 내내 겪어야 할지도 몰랐다. 나는 슬그머니 발을 뒤로 가져가며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보다도 먼저 조엘이 내 팔을 딱 잡아 못 움직이게 한 채로 싱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이래뵈도 이 녀석이 깡다구가 있거든요. 자, 그럼 훈련을 시작하시죠?" '뜨어어어~' 데니의 심히 안됐다는 동정이 가득 담긴 눈초리를 받으며 나는 기사들과 사병이 쭈욱 도열해 있는 곳으로 가서 조엘 옆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리고 더글라스 경은 오늘 새벽 훈련을 시작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서 질서 정연하게 서 있는 이들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오늘 훈련을 시작하겠다. 먼저, 늘 했듯이 팔굽혀 펴기 50번, 실시!!" 떠억~ '오, 오십버어어언~~?' 모든 이들이 더글라스 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엎드리는 걸 보아하니 매일 아침마다 하는 것 같았다. '흐미... 나 죽었다.' 온갖 우거지상을 다 지으며 다른 이들과 같이 팔굽혀 펴기를 하기 위해 엎드리는데 그 위에 더글라스 경의 끔찍한 선언이 떨어져 내렸다. "제일 늦게 끝내는 녀석 10명은 10번 더 하는 거 알지?" '신이시여어어~~!!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제 8화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안다 (2) "제일 늦게 끝내는 녀석 10명은 10번 더 하는 거 알지?" '신이시여어어~~!!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 곳에 와서 갑자기 정령의 기운을 자각하게 되었다고 하나 체력은 여전히 대한민국 여자 고등학생의 체력을 가지고 있던 나였기에, 결국 새벽 수련 하는 이들 중 가장 늦게 팔굽혀 펴기 50번 하는 10명의 사람 중 한명으로 뽑히는 영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아아아~ 영광스럽게도, 늦게 팔굽혀 펴기를 끝낸 이들이 상으로 10번을 더 하고 모두 팔굽혀 펴기를 끝낸 뒤에도 헥헥 거리며 50번을 채 끝내지 못해 그들 훈련을 방해하게 된 나는 더글라스경의 친절한 말까지 들을 수 있었다. "이봐, 훈련 방해 되니까 저~ 기 구석에 가서 해. 아, 10번 더 하는 거 잊지 말고." 너무 힘들어서 부들 부들 거리는 내 팔이 애처럽지도 않은지 더글라스경의 말은 냉정했다. 그리하여 나는 눈물을 머금고 휘청거리며 연무장 구석으로 가서 다시 엎드려 뻗처야 했다. '어무이이이~~' 그래도 내가 아직 익숙지 않아 힘들어 하는 걸 아는지 더글라스 경을 비롯하여 기타 등등은 내가 한번 하고 한참 쉬고, 또 한번 하고 한참 쉬는데도 불구하고 그거 가지고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참으로 아주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아, 쌍씸지가 치켜 올라간다...) 결국 내 새벽 수련 첫날은 팔굽혀 펴기 60번으로 마감하게 되었다. 조엘 자식은 (이젠 조엘님도 아니다.) 무지 지친 얼굴로 부들 부들 거리는 팔을 부여잡고 있는 날 보더니 미안하기는 했는지 평소 내가 챙겨줬던 차가운 물 한 컵과 수건을 가져와 건네 줬다. 하지만, 팔의 근육이 너무 아프고 부들부들 떨려서 물을 마시기는 커녕, 컵이나 수건 조차도 받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원망스런 눈으로 조엘만 노려보고 있자 그가 피식 웃으면서 내 이마에 송글 송글 맺히다 못해 뺨선을 타고 흘러 내려 목덜미를 적시는 땀을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자, 이 정도면 화가 좀 풀렸지?" '이, 이정도오오오~~? 이 자식아... 너 같으면 이 정도로 봐주겠냐? 젠장, 바다만 옆에 있었으면 널 바다 속으로 쳐넣어서 물 속 깊이 박아주고 물먹이고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했다가 상어 앞에다 던져 줬을텐데... 으윽... 내가 왜 가출을 했던고오...' 속으로 이렇게 통탄하며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한숨만 쉬고 있을 때 같이 다가온 데니가 싱긋 웃으며 조엘에게 말을 건넸다. "이 녀석 무지 무지 화가 났나본데요?" 그러면서 나에게 다가와 내 머리를 몇번 쓱쓱 쓰다듬어 헝클어뜨리고는 내 귓가에 대고 살짝 속삭였다. "조엘님 방에 가면 약을 달라고 해서 발라. 조엘님에게 근육통에 잘 듣는 약이 있거든. 그거 바르면 훨씬 나을거야." 그러면서 데니가 먼저 걸어가버리자 조엘 또한 발걸음을 옮겼기 때문에 나는 후들 거리는 팔 다리와 땡기는 배를 부여앉고 끙끙 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 가야 했다. 팔굽혀 펴기는 그냥 보기에는 팔과 어깨의 근육만을 발달 시키는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이건 의외로 온 몸의 근육을 몽땅 다 쓰는 운동이다. 솔직히 팔과 어깨는 몸을 내렸다 올렸다 쓰고, 허리야 상체와 하체를 평형으로 유지하느라 힘을 주는데다 다리는 디딤돌로 사용되느라 힘을 주는 건 알겠는데 왜 윗배까지 무지 땡기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윗몸 일으키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휘청 휘청 거리며 조엘 방에 도착하자마자 조엘이 자신의 서재 겸 사무실 겸으로 사용하는 방으로 가더니 곧장 구급약통에서 연고 비스므리 한 것이 담긴 병 하나를 꺼내왔다. "자, 아픈데 발라라. 내가 발라주고 싶지만, 출근 준비를 해야하기 때문에..." 싱글 싱글 웃으며 나에게 연고 병을 건네는데, 오늘따라 저 웃는 얼굴이 꼬옥 악마의 미소 같이 보여서 되게 기분 나빴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바다 속에 있을때 수영이라도 해서 체력을 많이 단련시켜 두는건데에....' 연고는 냄새가 무지 고약했다. 어제 맞은 부위를 발라 주던 연고와는 또 다른 것인지 색깔도 시커머죽죽해서 바르기가 왠지 무지 꺼림직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 그게 개똥이라고 해도 근육통을 조금이마나 해소해줄 수 있다면 바르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나는 망설이지 않고 연고를 찍어 발랐다. 다행히 그게 정말 명약이었는지 바르자마자 시원한 느낌과 함께 근육통이 조금 나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파스를 바른 듯한 기분이었다. '헤에... 진짜 좋은 약이네. 이러니까 저 녀석이 가지고 있는 거겠지만...' 그렇게 시작된 근육통은 그로부터 거의 2주 동안이나 나에게 달라부터 끈질기게 날 괴롭혀댔다. 덕분에 그 동안 계속 조엘의 그 연고를 바르고 살아야 했기에 그 동안 나에게는 고약한 냄새가 한 순간도 가시질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 내가 참가하는 훈련은 새벽 훈련, 딱 하나 밖에 없어서 그정도에서 끝낼 수 있었지, 낮에도 하고 저녁에도 하는 훈련에도 참가했다면 나는 한달 정도는 끙끙 앓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이제 완연한 가을이라 아침 저녁으로 무지 쌀쌀해지고 정원에 있는 나무들이 빨갛고 노란 옷으로 갈아 입었다가 이제는 아예 벗으려고 하는 무렵에 공작가에 때 아닌 이산가족 상봉이 일어났다. "엄마아아아~~~" "안젤라아아아~~~" "엄마, 보고싶었어요오오~~" "오오, 내 딸 안젤라야~~ 그 동안 힘들었지?" 공작가의 커다란 현관문 앞의 홀에서 두 모녀는 누구의 시선도 신경쓰지 않은 채 부등켜안고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뒤에는 해럴드 집사와 내가 조용하고 바른 자세로 서 있었다. "저분이 안젤라 아가씨세요?" "그래. 넌 처음 뵙지?" 안젤라 맥알파인. 그녀는 공작가의 딸이자 조엘의 동생이다. 내가 처음 공작가로 왔을 시점에는 벨레니 왕국 학교에 있던 터였기에 지금 처음 보게 되는 거였다. 해럴드 집사 말에 의하면, 그 왕국 학교는 현 여왕의 몇대 고조부인 무슨 무슨 왕이 세운 거라 귀족들의 자제와 왕족들만 다녔는데, 요즘은 돈 있는 상인이나 평민, 혹은 기사 집안의 자제들까지 다닐 수 있게 완화 된 국립 학교라고 한다. 일년에 두번,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을 제외한 나머지 학기에는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기에 안젤라 맥알파인 역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가 지금 겨울 방학을 맞이하여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러니 저리 짐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온 거겠지만...' 나는 안젤라가 타고 온 마차에서 짐을 내려 열심히 윗층으로 나르고 있는 하인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 거렸다. 그녀를 직접 본 건 이번이 처음이긴 하지만, 해럴드 집사에게 공작 집안에 대해 전부터 들었기때문에 그녀에 대해 알고는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현 16세, 머리카락은 공작 부인을 닮아 검은 색이지만, 눈은 공작을 닮아 파란색이었고, 하얗고 약간 통통한 동그란 얼굴은 뺨이 붉어서 그런지 예쁘다기 보다는 귀여워 보이는 타입이었다. 아마, 조금 더 자라서 살이 빠지고 키가 조금 더 큰다면 예쁘다는 말이 어울릴 여자가 될 것이 틀림 없었다. 그녀는 머리를 양갈래로 따아 리본으로 둥글게 묶었는데, 그 모습을 보자니 빨간 머리 앤에 나오는 앤의 절친한 친구 다이애나가 생각났다. '호오, 그러고보니 딱 다이애나네. 거기서 다이애나도 약간 통통해서 동글동글한 얼굴에 뺨이 붉었었는데...' 저녁에 공작과 조엘까지 돌아오자 공작가 가족들은 무지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마치 지금까지는 공작가가 썰렁해 있었던 듯이 느껴질 정도였다. 역시, 그런거 보면 아무래도 집안에 아들만 있는 것 보다는 딸이 있는 것이 집안 분위기가 좋은 거 같았다. 뭐, 아들 중에서도 분위기 매이커가 있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조엘 성격상 공작이나 공작 부인에게 아양을 떨거나 삐진 척 하거나 하지는 못할 테니 이 집안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려면 안젤라 같은 딸이 꼬옥 필요한 거 같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런 분위기가 며칠을 가지 못한다는 것이겠지만... 학교를 다니는 나이 16세라면, 아무래도 가족 보다는 친구들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시기가 아니겠는가? 비록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덕에 오랜만에 보고 싶은 가족을 만나 즐거웠겠지만, 그것도 몇칠 뿐이었고 가족들도 평상시 자신들의 생활이 있었으니... 공작, 공작 부인이나 조엘 모두 안젤라를 아껴주기는 했지만, 공작과 조엘은 아침에 출근 하여 저녁에나 돌아오는데다 돌아 오더라도 집에 와서까지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던 터라 안젤라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다. 집안에 있는 공작 부인이 그녀와 많은 시간을 보내기는 했지만, 규칙적인 생활을 하느라 공작과 조엘이 출근하는 시간쯤에 일어나 배웅하는 안젤라와는 달리 아침과 점심의 딱 중간 즈음에 일어나는 공작 부인이었으니 시간대가 맞질 않았다. 게다가, 그 나이때의 여자 아이들은 왜 엄마랑 같이 안 놀려고 하지 않는가? 뭐, 처음 몇칠 동안은 쇼핑이다 구경이다 해서 점심 먹고 매일 같이 나가는 것 같았지만, 그것도 한 5일 정도 지나자 점차 시들해져서 집안에만 있게 되었다. 사실, 이 추운데 나가 돌아다니는 걸 누가 좋아하겠는가? 21세기의 한국 처럼 난방이 무지 잘되는 백화점이나 동대문 쇼핑 상가가 있으면 몰라도, 마차 타고 상점 하나 하나를 이동해야 하는 일이니 날이 따스하면 몰라도 추운 날에는 그렇게 즐겨할 만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뭐, 그렇다고 안젤라가 집안에만 콕 박혀 있는 스타일도 아니었기에, 그녀 또한 한 일주일 정도만 가족들과 보내고 그 뒤에 친구네 집인지 별장인지에 놀러가기로 계획이 쭈욱 짜여져 있어던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오자마자 이 추운 날 공작 부인이랑 쇼핑을 줄기차게 갔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녀의 이런 행복한 계획은 그녀가 다니는 벨레니 왕국 학교에서 보내 온 그녀의 학교 성적표가 도착하자 와장창 깨져 버리고 말았다. 제 8화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안다 (3) 그러나, 그녀의 이런 행복한 계획은 그녀가 다니는 벨레니 왕국 학교에서 보내 온 그녀의 학교 성적표가 도착하자 와장창 깨져 버리고 말았다. "아, 안젤라아아앗~~!!" 하필... 이라고 해야 할지 재수 캡이라고 해야할지, 안젤라의 성적표를 공작 부인에게 가져다 준것이 바로 나였다. 원래 해럴드 집사의 일이었는데, 그는 요즘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때문에 업무가 무지막지하게 쌓여 있었기때문에 이런 일들이 모두 나에게 떠넘겨졌던 것이다. 공작 부인은 은접시 위에 놓인 여러개의 편지들 중 다른 거는 다 관심 없이 옆으로 제껴놓고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멋드러진 필체로 '벨레니 왕국 학교' 라고 쓰여진 편지를 골라 펼쳐들더니만, 얼마 안 있어 기대감이 어려있던 약간 미소가 깃들인 얼굴이 딱 굳어지더니만 한참 뒤에 그 방에 있지도 않은 딸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는 것이었다. '쯧쯧... 성적이 떨어졌구만...' 내가 어디 그런 일을 한두해 겪었던가? 나도 자그만치 4년동안, 그것도 일년에 4차례씩 겪은 일이었기에 척하면 삼천리로 눈치 챌 수 있었다. 공작 부인은 성적표를 그대로 움켜쥐더니만 경악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날 돌아보며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다, 당장 가서 안젤라를... 아, 아니.. 내가 직접 가야겠군. 넌 빨리 가서 해럴드를 불러와라. 내가 지금 당장 보잔다고 해!" "예." 내가 기껏 대답을 했건만, 공작 부인은 그걸 제대로 듣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날리듯이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문으로 향했다. 얼마나 빨리 발걸음을 옮겼는지, 그녀는 앉아있고 나는 서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의 방 밖으로 나오는 사이에 한발 앞서 방 밖으로 나간 그녀는 벌써 복도 저만치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집사니임~" 해럴드 집사가 책상위 가득 서류들을 쌓아 놓고 업무를 보고 있는 방에 도착한 나는 급한 마음에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서류 더미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해럴드 집사가 피곤한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근엄한 기색을 띄운 채 눈썹을 치켜 올리며 날 노려봤다. "해인군, 내가 남의 방에 들어올때 노크는 기본 예의라고 했지?" "아아.. 죄송합니다. 급해서 그만.... 마님께서 급하게 찾으시는데요?" 내 말에 해럴드는 들고 있던 펜을 펜대 위에 잘 꼽아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마님께서?" "예. 아까 마님께 아가씨 학교에서 온 편지를 가져다 드렸더니만 엄청나게 분노하시면서 아가씨 방으로 향하시던데요? 그러면서 집사님을 모셔 오래요." "저런.. 안젤라 아가씨 성적이 또 엉망인 모양이군. 저번 학기는 무사히 넘어갔다 했더니만..." 해럴드는 일어나자마자 옷 매무새를 고치고 항상 집사복 안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는 빗으로 머리를 한번 빗어 넘긴 후 빠른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리하여 나와 해럴드가 빠르게 안젤라의 방에 도착하자 거기에서는 이미 한바탕 끝났는지 공작 부인의 분노에 찬 소리는 나지 않고 대신 애절한 안젤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너무해요 엄마. 어쩌면 그럴 수가 있죠? 약속 하셨잖아요?" 그 뒤를 잇는 공작 부인의 냉정한 목소리... "내가 언제 약속을 했다고 그러니? 네가 친구네 집에 간다기에 알았다고 했을 뿐, 어떤 일이 있어도 꼬옥 보내주겠다고 내 입으로 말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너무 하세요. 그게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신게 아니고 뭐예요? 이제 내일이면 출발 해야 한다고요... 그런데, 오늘 이러시다니..." 안젤라의 말은 해럴드가 그녀의 방 문을 노크함으로 인하여 끊어졌다. 똑, 똑, 똑... "들어와요." 공작 부인의 냉랭한 허락이 떨어지자 해럴드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부르셨습니까, 마님." 안의 광경은 내가 예상했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냉기를 폴폴 풍기는 얼굴로 단호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 공작 부인과, 그 앞에서 분노 때문인지, 억울함 때문인지, 붉어진 얼굴에 눈물이 그렁 그렁 맺힌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고 있는 안젤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공작 부인은 딸의 그러한 애절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딸로부터 냉정히 시선을 돌리더니만 해럴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 해럴드 마침 잘 왔어요. 지금 당장 안젤라의 가정 교사를 좀 알아봐주세요. 과목은 역사하고 수학이예요. 빠를 수록 좋겠군요." 그 뒤에 공작 부인은 안젤라에게 시선을 돌리더니만 그녀에게 통첩을 내렸다. "안젤라, 넌 한달동안 외출 금지다. 쇼핑은 물론, 내일 친구네 집에 가는 것은 꿈도 꾸지 마!" 그러자 안젤라가 너무나 처절한 표정으로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오오~~~ 안돼요오오~~ 너무 해요 엄마. 공부는 친구네 갔다가 와서 시작해도 되잖아요. 겨우 일주일간만 놀다 올 거라구요." "절대로 안돼. 선생님이 오실때까지는 집에서 근신하고 있어." "너무해요오~!!" "흥~!!" 공작 부인은 땅에 털푸덕 주저앉은 딸에게 냉랭한 눈길을 한번 던지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덕분에 해럴드와 나도 그녀에게 동정의 눈빛을 한번 던지고는 공작 부인을 따라 그대로 그녀의 방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헤에.. 여기 교육열이 한국 못지 않네.. 성적 떨어졌다고 놀러 가지도 못하게 하고, 거기에 보태서 한달간 외출 금지라니...' 뜨거운 교육열로 유명한 한국에서 살았던 나로써는 안젤라의 모습이 왠지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아 - 그렇다고 내가 저런 일을 당했다는 건 절대 아니다 - 왠지 타향에 와서 조국 동포를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평소에는 그저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이 무덤덤 하게 여겼던 공작 부인에게 왠지 안 좋은 감정이 피어올랐다. 공작 부인과 헤어져 해럴드 집사의 사무실 겸 방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해럴드 집사에게 이런 내 마음을 은근슬쩍 돌려서 말해봤다. "헤에... 마님이 교육열이 굉장 하시네요. 혹시 아가씨께서 수석이나 아니면 학급에서 몇등 안에 못 들어서 저렇게 화를 내시는 건가요?" 그러자 해럴드 집사가 피식 웃었다. "그런건 아니야. 하지만, 그래도 도련님이던 아가씨던 나라를 대표하는 큰 귀족 집안의 자제이다보니 중간 까지는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뿐이지. 그래도 웬만한 성적 가지고는 뭐라고 안 그러시지만, 단 한가지는 절대로 용납 못하시지." "그래요? 그게 뭔데요?" "낙제점." "에?" "낙제 말이다. 아, 넌 이해를 잘 못할지도 모르겠구나. 학교에서는 한 학기에 한번 그 동안 배운 걸 테스트 하는데 일정한 점수의 아랫 점수가 나오면 공부를 안 한걸로 여기고 다시 공부를 하게 하는데, 그걸 바로 낙제 점수라고 하지." "헤에..." '여기에도 낙제라는게 있구나... 역시,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같은 법인가?' 내가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는 사이 해럴드 집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마님께선 아무리 점수가 낮아도 낙제 점수가 안 나오면 그냥 넘어가시지만, 낙제 점수는 절대로 용서 안 하시지. 그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안 하고의 차원을 떠나서 공부에 무성의함을 보이는 가라고 생각 하시거든. 어떤 일을 하던 최소한의 노력은 보여야 한다고 여기시는 분이라서 말야." "이야아~, 거 참 훌륭하신 사상을 가지고 계시는 군요." 내가 진심으로 감탄 어린 말을 내뱉자 해럴드 집사 또한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나도 마님의 그런 면을 좋아한단 말야. 하지만..." 거기까지 말한 해럴드는 안젤라 생각을 하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아가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건 열심히 하지만, 싫어하는 건 전혀 하지 않으려고 드시니 문제야... 그래도 아가씨는 현명하시니 조금만 노력했다면 낙제점은 면할 수 있을텐데도 싫어하는 과목은 아예 손도 안 대니..." "에... 그럼 이번에 초빙할 가정 교사를 아가씨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골라서 모셔오면 어떨까요? 젋고 잘생기고 매너 좋은 사람으로... 아, 이왕이면 귀족 가문 자제분중에 한 분을 초빙해오는 게 어떨지..." 그러자 해럴드가 자신의 손바닥을 주먹을 딱 내리쳤다. "아, 그거 좋은 생각이다. 한번 마님께 여쭈어 봐야겠군. 좋아, 그럼 넌 이대로 장부 좀 정리하고 있거라. 아무래도 난 가정 교사를 알아봐야 하니까 좀 늦게 올 지도 모르니까." "예이~" 저녁이 되어 공작과 조엘이 돌아오고,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안젤라가 온 뒤로 공작가의 모든 가족이 모여 함께 하는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지만, 안젤라는 낮에 공작 부인에게 선고 받는 것의 영향 때문인지 식당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그에 공작과 조엘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공작 부인을 바라보았지만, 그녀 또한 아무런 말 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하인이 날라다 준 음식을 씹는게 아니라 거의 절단내는 모습에 공작과 조엘은 시선을 교환한 뒤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해 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안젤라가 낙제를 받아 엄마에게 벌 받는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이번에 또 낙제를 받아 놓고서 친구들과 놀기로 약속까지 한 그녀가 어느 한편으로는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저녁 식사 후 조엘은 나를 불러 안젤라에 관해 뭐 아는 것이 없냐고 물어왔기에 나는 낮에 있었던 일을 성심 성의껏 알려주었다. 그러자 조엘은 피식 웃으며 '역시...'라고 중얼거리며 나를 데리고 안젤라의 방으로 향했다. 똑, 똑, 똑... 조엘이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방 안에서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안젤라 없어." '없는 척 할거면 대답도 하지 말 것이지, 자기 입으로 자기가 없다는게 무슨 꼴인지...' 나는 안젤라의 그러한 반응에 속으로 황당해 하고 있었지만, 조엘은 그게 또 뭐가 좋은지 싱긋 웃더니만 입을 열었다. "안젤라, 오빠 들어간다." 그리고는 대답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제 8화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안다 (4) "안젤라, 오빠 들어간다." 그리고는 대답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솔직히 이런데 따라 들어가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종이란 자신이 모시는 사람이 물러가란 명을 내리지 않는 이상 항상 옆에 대기하고 있는 처지였기에 쫄랑쫄랑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저녁이라 불을 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촛불을 가져다 놨을 시녀들도 못 들어오게 했는지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그래도 어두운 건 견딜 수 있지만, 추운 건 견딜 수 없었는지 방 한 구석에 위치한 커다란 벽난로에는 많은 장작이 불에 활활 타고 있었다. 안젤라는 커다란 침대 위에 쪼그리고 앉아서 무릎 위에 손을 얹고 그 위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조엘을 그런 그녀에게 가만히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으며 그녀를 불렀다. "안젤라~" 그러자 그녀는 얼굴도 들지 않고 팔만 들어올려 조엘의 손을 쳐냈다. "놔! 누가 들어오래?" 그렇게 매정하게 군다고 물러날 조엘이었으면 처음 부터 들어오지도 않았기에 조엘은 피식 웃고는 아예 그녀 앞 침대에 털썩 주저 앉더니만 안젤라를 그대로 감싸 안았다. "어이구, 우리 공주님~ 울었어?" "몰라!!" "후후후... 아, 해인 거기 수건좀 물에 적셔 올래?" "아, 예." 혼자 문가에 멀쭘이 서 있던 나는 조엘의 말에 황급히 대답하고는 서둘러 움직였다. 그냥 찬 물에 수건을 적실까 하다가, 날이 추운데 찬물에 젖은 건 안 좋을거 같아서 아예 그녀의 방을 나서서 뜨거운 물을 구해가지고 와서 수건을 적셔 조엘에게 건네줬다. 내가 뜨거운 물을 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가 온 그 동안에 조엘이 뭔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내가 다시 방에 들어오니 안젤라는 그냥 편한이 앉아서 조엘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어이구~ 그래서 화가 난거야?" "몰라. 엄마는 내 말도 안 들어주고서는... 그 역사 선생이란 사람 정말 치사한 놈이야. 꼴에 또 후작 동생이라서 교장 선생님도 함부로 할 수가 없다는 거 믿구 설치는 꼴이라니..." "후후후... 그래서 네가 혼내줬다며?" "흥, 난 그렇게 능력도 없는 놈이 빽 믿고 잘난 척 하는게 싫어. 그래도 솔직히 혼낸 건 아니다 뭐... 물벼락 한번 맞게 했을 뿐이지... 그런데, 그 인간 내가 했다는 증거도 못 찾았어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챈 듯 했는데 어쩐 일인지 가만히 있길래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뒷통수를 치다니... 나쁜 자식..." "헤에, 역사는 점수가 나빠서 낙제를 한게 아니란 말이지?" "당연하지. 내가 낙제 점수를 받으면 엄마가 얼마나 화낼지 뻔한데, 아무리 내가 선생이 싫다고 해도 낙제 점수를 받으려고 하겠어? 오히려 빨랑 그 수업을 끝내서 다시는 그 선생 수업 안 듣는게 현명하지..." "오오.. 정말 현명한 생각인데? 하지만, 내년에 다시 들어야 하겠네?" 그 둘의 대화를 방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듣고 있을 수도 없던 나는 젖은 수건만 들고 눈치만 살피고 있었는데, 다행이 조엘이 그런 날 눈치 챈 듯 안젤라가 눈치 못 채게 손만 내밀었다. 그리하여 내가 얼른 그 손에 수건을 건네주자 고맙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짓으로 문을 가르켰다. 그에 얼른 문 밖으로 나와서 더 이상 그 오누이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안젤라의 성격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헤에... 선생이 맘에 안 든다고 물벼락을 맞게 하다니.. 성격 한번 대단한데?' 한국에서라면 정말 꿈도 못 꿀 짓을 - 아마도 이 곳에서도 그건 하기 힘든 일이겠지만.. - 하는 그녀가 왠지 밉질 않았다. 오히려 감탄 스러우면 감탄 스러웠지... 어찌 되었든, 그렇게 조엘이 가서 달래준 보람이 있었는지 다음날 안젤라는 단 한나절동안의 은둔을 깨고 방 밖으로 나왔다. 물론, 완전히 달래진 건 아니었는지 엄마와 이야기를 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공작은 그것 만으로도 안젤라가 이뻐 보였는지 출근하려는 자신을 배웅하는 안젤라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며 귓속말로 작게 뭐라고 속삭였다. 아무래도 안젤라에게 선물을 약속하는 거였는지, 그의 말을 듣던 안젤라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정말이죠 아빠?" "그러엄. 내가 언제 우리 공주님에게 거짓말 한 적 있남? 대신, 엄마에게는 비밀이다?" 한쪽 눈을 찡끗하며 말하는 공작을 향해 안젤라는 환한 미소를 보이며 공작을 두 팔로 껴안았다. "에헤헤, 물론이죠. 사랑해요 아빠." 역시 안젤라는 막내라서 그런지 어리광과 애교가 많았다. 그 모습에 나는 입에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한편으로 한국에 있는 가족이 생각났다. '흐미.. 어무이, 아부지, 해민아... 보고싶다...' 그 뒤로 며칠이 지나자 안젤라의 가정 교사가 초빙되어서 공작가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내가 해럴드 집사에게 말한 것 처럼 귀족 가문의 젊고 잘생긴 남자가 아니라 50을 넘긴 지긋한 나이에 허연 수염을 기른, 손자 두 셋은 있어보이는 할아버지 선생님이었다. 내가 제안한 것은 해럴드 집사 또한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했지만, 공작 부인에게는 그리 달가운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딸 가진 엄마라면 당연한 생각이려나? 그리고 그 기간에 나에게도 한가지의 변화가 생겼다. 새벽마다 참가하던 훈련에서 기본 체력 단련에서 한 단계 진전하여 드디어 검술의 기본 동작을 수련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런 연고로 인하여 더글라스경에게 검을 한 자루 하사받을 수 있었다. 비록 진검이 아니라, 검술을 배우는 자들이 제일 먼저 잡는 목검이지만, 목검이 아니라 종이검을 받는다고 해도 지겹고도 지겨운 체력 단련에서 벗어난다는 것만으로 나에게는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그 동안 팔굽혀 펴기, 엎드려서 상체 들어 올리기, 윗몸 일으키기, 제자리에서 앉았다가 일어나기, 오래 달리기 등등의 체력 단련을 하면서 얼마나 조엘을 원망하고 원망하고 또 원망했는지 모른다. 아마 조엘도 그걸 알기 때문에 나만 보면 평소보다 더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일도 잘 안 시키고 새벽마다 내가 챙겼던 수건과 냉수를 자신이 챙겨서 나에게 넘겨주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내 분이 풀릴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언젠가 저 조엘의 반반한 면상에다 그 동안 길러진 체력의 힘과 울분이 가득 담긴 펀치를 먹여주리라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그것 때문인지, 나는 내 스스로 생각해도 기특하게 정령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력으로 그 길고 험난했던 체력 단련을 해냈다. 아마 이 힘 가지고 이다음에 조엘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집념과, 이정도도 이겨내지 못할까보냐... 하는 자존심이 버무려진 듯 했다. 이런 자존심은 한국에 있는 해민이 녀석이 친절하게도 나에게 심어준 것이었지만... 해민이 녀석은 아마 기억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렸을때는 남자애들이 자기네 노는데 여자애들을 잘 끼워주지 않았었다. 물론, 지금 내 또래 되는 녀석들이야 여자애들을 못 끼워줘서 안달이지만서도... 딴데는 모르겠지만, 내가 어렸을때 해민이 녀석은 분명히 그랬었다. 물론, 녀석도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여자애들은 툭하면 운다느니, 잘 삐진다느니, 힘이 약하다느니 등등등.... 그리하여 나 조차도 빼놓고 남자애들하고 자기만 끼리끼리 노는 거였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그들이랑 같이 놀고 싶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무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해민이 녀석에게 애원하기도 하고 울기도 많이 울고 그랬었다. 편 갈라서 전쟁 놀이를 하는 것이나 총놀이, 탐정 놀이를 한다고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어 보일 수가 없는 거다. 왜 어른들은 여자 아이에게는 보통 인형을 사주고 남자 아이에게는 장남감 총이나 검을 사주지 않는가? 울 부모님도 그런데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분이었기에, 나에게는 곰돌이 인형이 가득했고, 해민이 녀석에게는 장남감 총이나 칼이 가득했다. 그런데, 난 곰돌이 인형 보다는 아빠가 소지하시는 군인용 총이나 칼 - 아빠가 군인이셨다 - 이 그렇게 멋져 보일수가 없었고, 그것과 비슷한 걸 가지고 있는 해민이가 무지 무지 부러웠다. 하지만, 해민이 녀석은 어린 아이의 소유욕과 치기로 자기 장남감을 내가 절대 못 만지게 했었다. 내가 내 곰돌이 인형이랑 바꾸자고 해도 인형에게 시선을 준체만체였다. 그렇다고 아빠 총검을 만지면 무지무지 혼나고... 이런 상황이다보니, 남자애들끼리 노는데 어떻게 끼이게 되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총이라던지 검을 가지고 있지 않은 탓에 자연적으로 놀이에서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때에 나에게 들려온 명언이 있었으니, '안되면 되게하라.' 였다. 그 뒤는... 훗... 아마도 모두 쉽게 짐작하겠지만, 애원해도 안빌려주니 그 뒤에는 힘으로 빼앗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해민이도 만만치 않았기에 처음에는 내가 덤벼도 맨날 내가 졌었다. 그러니까 생기는게 오기였고 자존심이었다. 아마 그 뒤부터였을 것이다. 해민이 녀석의 영향이었는지 남자에게서 '할수 있겠냐'는 듯한 시선을 받으면 무한한 오기가 생겨나서 어떻게 해서든 해내고 마는 성격이 생겨 버린 건 말이다. 어찌되었든,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나는 다른 기사들과 사병들이 연무장에서 간단한 스트레칭과 체력 단련으로 몸 풀기를 끝내고 검술 기본 동작을 반복 훈련 하는 동안, 연무장 구석에서 조엘과 데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더글라스경에게 경건한 자세로 목검을 하사 받았다. "자, 이것이 이제 네 검이다." "감사합니다." 아랫 사람에게 주는데도 불구하고 더글라스 경은 한 손이 아닌 두 손으로 검을 수평으로 잡고 내밀었기에 나도 양 손을 뻗어 검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옆에서 조엘과 데니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축하한다." "이야, 드디어 고생 문이 훤하게 열렸구나." 제 8화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안다 (5) 그러자 옆에서 조엘과 데니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축하한다." "이야, 드디어 고생 문이 훤하게 열렸구나." 그들에게 나는 히죽 웃어보인다음 목검의 손잡이를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헤에.... 목검이 이렇게 생긴 거구나..." 그건 거의 일반 나무 몽둥이나 다름 없었다. 단지 손잡이 부분은 원기둥이고, 검신 부분은 넙적한 타원형기둥으로 깎아 놓은 정도랄까? 검날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갑자기 따악~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눈앞에 별이 반짝 했다. "아코~!!"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픔을 느낄 새는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비명을 내뱉고 그 뒤에야 서서히 통증을 호소하는 이마를 쓰다듬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날 때린 범인임이 분명한 더글라스경이 아직 주먹을 펴지 않은 채로 날 엄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에... 저기..." 뭔가 내가 잘못했다는 분위기이기는 한데, 그게 뭔지 몰랐기에 묻고 싶었지만, 더글라스 경의 분위기가 워낙 엄해 보였기에 나는 묻지도 못했다. 더글라스 경은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보며 뭐라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 보다도 먼저 옆에 있던 데니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날 바라보는 더글라스 경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쏠리게 만들면서 입을 열었다. "저어, 해인이는 아직 검에 대한 예를 배우지 못했지 않습니까? 실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의 말에 더글라스경은 그를 한동안 빤히 쳐다보더니 잠시 후 더글라스 경의 엄격한 빛을 발하던 눈이 부드럽게 풀리며 입가 또한 평소 그가 항상 달고 다니던 사람 좋은 미소를 그렸다. "물론, 나도 알고 있지. 그러니까 이 정도로 끝낸 거고... 그런데 데니? 그렇게 나서서 감싸줄 정도로 해인이를 아끼고 있었나보지? 좋아, 내 너에게 임무를 하나 내리겠다." "예?" '갑자기 왠 임무?' 더글라스경의 말에 데니는 물론, 나 까지도 긴장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 우리를 더글라스경은 왠지 모를 음모가 가득 든 것만 같은 음흉한 미소를 씨익 지으며 번갈아 보더니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데인 링클레터는 지금 이 순간부터 책임지고 해인에게 검에 대한 예의를 철저히 가르치도록, 알겠나?" "예에에~?" 더글라스 경의 말에 나는 데니보다도 더욱 놀라버렸다. 어차피 나야 검술에 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고, 새벽 훈련 조차도 내가 원해서가 아닌, 조엘 녀석의 강요에 의해서 참가하게 된 것 뿐이었기에 여기에서 검술을 배운다 해도 밖으로 나가서 검사 행세를 하고 다닐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검에 대한 예를 배운다고 해봤자 이 곳에서 나간다면 별로 쓸모가 (물론 검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사용하게 되겠지만...) 없다고 여겨져 검에 대한 예를 배운다고 해도 - 물론 이전에는 있는지도 몰랐지만 - 시큰둥한 마음 뿐이었다. 그러나, 더글라스경이 아닌 데니가 날 가르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더글라스경에게 배운다면 그냥 대충 대충 익혀도 되고, 나중에 검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 해도 더글라스경에게 혼나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데니가 날 가르친다면 이후 내가 검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면, 그건 나와 함께 데니에게도 책임이 전가되기 때문이다. 더글라스경이야 자신이 잘못 가르친 책임을 진다고 해봐야 내가 혼나기밖에 더 하겠는가만은, 데니에게 책임이 전가된다면 나와 같이 벌을 받게 될 테니 나로써는 무지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더글라스경의 말에 내가 놀란 것이었다. 그러나, 데니는 결코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는지 태연한 얼굴로 순순히 더글라스 경의 명(?)을 받아 들였다. "알겠습니다." "에엣?" 그의 태연한 행동에 내가 두번째로 놀랐지만, 거기 있는 사람들 중 이런 나에게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더글라스경은 데니가 시원 시원하게 받아들이자 마음에 들었는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덧붙였다. "좋아. 아, 그리고 이왕 가르치는 김에 기본 동작도 가르치겠나? 나는 크게 신경 써 주지 못할 것 같아서 말야." "예, 그러죠." 이번에도 다시 나온 데니의 시원 시원한 대답에 더글라스경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한번 쓰윽 돌아보더니 씨익 웃고는 몸을 돌려 가버렸다. 아마도 연무장에서 열심히 기본 동작을 반복 훈련하고 있는 기사들과 사병들을 지도하러 가는 것이리라... 그러자 조엘 또한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둘다 잘해보라구." 조엘과 데니는 내가 목검 하사 받는 걸 옆에서 지켜보기 위해 (그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 아직 기본 동작 훈련을 시작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내가 목검도 받았겠다, 검에 대한 예의를 가르치는 선생(?)도 정해졌겠다, 조엘이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도 오늘 훈련을 해야 하고 말이다. 그가 우리 둘에게 손을 흔들며 제자리로 가자 데니와 나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데니는 태평한 얼굴이었지만, 나는 마음에 부담이 팍팍 다가왔기 때문에 얼굴이 활짝 펴 있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에 데니가 씨익 웃으며 손을 들어 내 앞머리를 흐트렸다. "짜식.. 뭐냐? 얼굴이 굳어서는... 내가 가르쳐주는 게 싫어?" "그게 아니구요... 나중에 제가 혹시라도 실수하면 더글라스기사님께 기사님까지 같이 혼나시잖아요... 그게 걱정이 되어서..." 더글라스나 데니나 모두 기사 작위를 수여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성 뒤에 '경'자를 붙여서 불러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건 같은 기사 작위거나 그보다 높은 작위를 가진 귀족이나 왕족 뿐, 나 같은 평민은 (난 아무런 작위를 안 가지고 있으니까) 더글라스 '경' 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일반 기사 앞에서 그래다간 당장에 목이 떨어져 나가도 할 말이 없는 무례인 것이다. 참내, 이 곳은 웃긴게 호칭에도 신분 제도가 있었던 것이다. 나를 비롯한 평민은 '경' 대신에 '기사님'이라고 불러야 했다. 조엘이야 자신의 이름을 불러도 좋다고 허락을 했지만, 아직 이들은 그런 허락의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뭐, 데니는 몰라도 더글라스 경이야 나랑 친하지 않은 사이였으니 그런 말 들을 생각은 꿈에도 못하지만 말이다. 그러자 데니는 앞머리에 만족하지 않고 정수리 부근의 머리를 다 흐트려 놓으며 피식 웃었다. "오호라, 내 걱정을 한 거냐? 기특하구만... 아, 그런데 해인아.." "예?" 내 머리를 아예 까치집으로 만들려고 작정한거 같은 데니의 손길에 속으로 한숨을 쉬며 대답하자 데니가 뭔가 기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전부터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말야,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면서 기사님, 기사님.. 하고 부르니까 내가 닭살이 돋을거 같다. 그러니까 편하게 형이라고 해." "형... 이요?" "그래, 마... 내가 기사 작위가 있다고는 하지만 평민이랑 다를게 뭐냐? 어차피 기사 작위 받기 전에는 완전 평민이었고 말이다. 그런데도 꼬박꼬박 대접받으려니 불편해서 말야. 너라도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해라, 응?" 이 곳에 사는 평민의 소년에게라면 정말 파격적인 대우가 아닐 수 없다. 기사는 이 곳의 신분제로 본다면 엄연히 평민 보다 한 단계 위의 자리인데 말이다. 물론, 나에게는 별 감흥은 없었지만... '형'이라고 부르는 말에 한숨이 나왔다. "형... 이요? 그래도 될까요?" 물론 겉으로는 내색을 못했지만... 이러다가 정말 남자가 되어버리는건 아닌지 더럭 걱정이 들었다. 하기야, 공작가의 시녀들에게도 누나, 누나 그러는데 거기서 형이라고 부를 사람 하나 생긴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지만... "물론이지.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 아니겠냐? 앞으로는 나 보고 형이라고 해야 한다?" 게다가 이렇게 친절한 호의까지 받는데 거절할 수 없어서 기분 좋은 표정으로 받아 들였다. "좋아요, 데니 형." "그래." 내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데니 또한 같이 웃으며 마지막으로 머리를 마구 엉크러트렸다. 데니는 내가 이 곳으로 온 것에 책임이라도 느끼는지 신경을 꽤 많이 써주고는 했다. 물론 정말로 이것 저것 챙겨주는 건 없지만, 마음으로 말이다. 아무래도 그가 외동아들이다보니 날 동생으로 느끼는 듯 했다. 지금도 '형'이라고 부르라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기야, 이 공작 집안에는 데니보다 어린 사람이 나와 안젤라를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하인들이나 시녀들은 나이가 적은 축이라고 해봐야 모두 조엘이나 데니 또래였던 것이다. 아, 그러고보니 시녀들 중에 데니보다 한살 적은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여자들이라 친하게 지내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한마디로 내가 제일 만만한 상대라고나 할까? 뭐, 데니가 나쁜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어서 나에게도 나쁠 건 없지만 말이다. 제 8화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안다 (6) "자, 그럼 검에 대한 예의를 가르쳐주마." 그러면서 데니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근처에 있던, 연무장 경계를 뚜렷하게 하기위해 가져다 놓은 듯한 돌 위에 앉았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긴 가보다. 그에 나는 조금 긴장을 한 채 그의 옆에 앉아서 입을 열었다. "그 전에요, 아까 제가 뭘 잘못한 거죠? 아무래도.. 검에 대한 예의를 안 지킨 것 같은데..." "아아.. 그거? 그래, 그때도 실례를 했지. 네 검이 아니라 남의 검이었다면 더더욱 큰 실례를 한거고. 그때 네가 잘못한 것은 우선 검 날을 손으로 만진 것 하고 검신을 앞에 두고 입을 열은 것, 바로 이 두 가지를 잘못한 거야." 그의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황당해졌다. 아니 검신을 아예 입에 대고 말한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큰 잘못이라고... 게다가 검날을 손으로 만진 것 또한 뭐가 그리 큰 대수인지 모르겠다. 보통 사람들은 검날이 날카로운지 알아보기위해 손으로 쓰윽 쓰다듬지 않나? 내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데니가 또 한번 머리를 쓰다듬는 걸 빙자하여 헝클어뜨리며 입을 열었다. "우선 검은 검집과 검이 있는 것 알고 있지? 검집에 넣어져 있는 상태가 아니면 몰라도 검집에서 검이 빠져 나온 상태라면 무척 조심해야 하는 거야. 자신의 검이건 남의 검이건 검을 검집에서 빼낸 상태에서는 절대로 검날을 손으로 만져서는 안돼. 왜냐하면 사람의 피부에는 땀때문에 소금기가 있거든. 소금기는 철을 녹슬게 하지. 항상 날카로은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검날에게는 소금기는 치명적이지 않겠어? 그러니까 절대로 검의 날은 손으로 만지면 안돼. 그걸 목검을 가지고 있을 때 부터 몸에 습관을 들이는 거지." "아하... 에, 그럼 입을 열었다는 건요." "침 때문이지. 아아..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라. 사람이 말을 하면 적든 크던 침이 튀게 마련이거든. 습기 또한 검날에는 치명적이기 때문에 검날을 앞에 둘때는 말은 커녕 절대로 입을 벌리지 않는 것이 예의야. 검날을 살펴 보려면 우선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은 다음 검 날은 팔의 옷깃 위에 올려 놓고 앞 뒤를 살펴봐야 해. 아아, 남의 검이라면 주인의 허락을 받는 것은 필수적인 거 알지?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남의 검은 허락 없이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돼." 비록 목검이기는 하나 직접 시범까지 보여가면서 설명해주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아한 점이 있어 입을 열었다. "에에... 물론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되겠지만, 되게 조심스럽네요." "당연하지. 검은 무기야. 잘못 다루면 피를 부른다고. 그런걸 어떻게 함부로 할 수 있겠어? 그렇기에 기사는 자신의 검을 항상 조심스레 다루어야 하고 남의 손에 들어갈 때는 지켜보고 있어야 하지. 검을 항상 자신의 주위에 가지고 있는 건 비상 사태를 대비함도 있지만, 남의 손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도 있는 거야. 너 만약 기사가 검을 마음대로 두고 다니다가 그걸 어린애가 잡았다고 생각해봐라, 어떻겠어?"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무척 위험해요. "바로 그거야. 더구나 검은 사람을 베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무기, 그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절대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되는 거야, 알았어?" "예에." "그리고 상대방에게 검을 받거나 넘겨줄때는 항상 두 손으로 해야 한다는 것. 아까 목검 하사 받을때 더글라스경께서 너에게 목검 주시던 모습 기억하고 있지? 그런 모습으로 주고 받아야 하는 거야." "예." "음... 또... 그래, 검은 절대로 떨겨서는 안돼. 검을 잘못 떨어뜨리다가 누가 상처라도 입게 되면 큰일이잖아. 검을 떨기는 것은 물론 그래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그건 기사는 물론 검을 잡을 자격 조차 없는 사람이야. 너는 항상 이 사실을 유념 하도록 해. 목검이라고 해서 편하게 있지 말고 진검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야 해, 알았지?" "예." "네가 오른손 잡이라면 검을 가지고 다닐때는 항상 왼쪽에, 들고 다닐때는 허리 높이로 가지고 다녀야 하고, 아니면 허리에 차고 다녀야 한다는 것. 그리고 들고 다닐때는 검 손잡이가 아닌 검격 (검날과 검손잡이를 구분짓는 부분) 밑의 검집을 잡아야 하는 거야. 네가 오른 손으로 검을 허리 위로 치켜 들고 있다면, 그건 상대방을 공격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내는 거니까 주의 하도록 해." ............... 검에 대한 예의는 생각 외로 되게 많았다. 처음에는 그냥 검 들고 다니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것 저것 다 따져가면서 주의를 요하자, 검사라는 것도 그냥 검 들고 휘두르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이것도 아무나 못하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하기야, 세상의 그 어떤 일이 쉽겠냐만은... 검에 대한 예의 말고도 검의 여러가지 모양과 각각의 명칭, 검의 명칭까지 세세하게 듣고 나자 새벽 훈련은 거진 다 끝나 있었다. 덕분에 그날 나는 처음에만 약간 몸 풀기 운동만 하고 그날 훈련을 끝낼 수 있었다. 데니는 오늘 처럼 이야기를 많이 한적이 없는지 이야기를 끝맺을 즈음에는 턱하고 입이 아파서 입 운동을 자꾸 해야할 지경이었다. 그 모습에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지만, 나 때문에 입아파 하는 데니 앞에서 웃을수는 없었기에 꾸욱 참아야 했다. '그러기에 수다 떠는 것도 하는 사람만 할 수 있는 능력이라니까. 그런 면에서 수다 떠는 여자들도 대단한 거야.' 목검을 하사받은 첫날에는 신나게 강의만 들었기 때문에 기본 검술 동작을 배운 건 그 다음 날 부터였다. 몸 풀기 위한 간단한 스트레칭과 운동이 끝나자 데니는 날 데리고 평소 나 혼자 체력훈련을 해왔던 연무장 한쪽 구석으로 날 데리고 갔다. "자, 이제부터 기본 동작을 가르쳐 줄테니까 잘 봐. 우선은...." 검술은 한마디로 검 들고 휘두르는 동작이다보니 척 보기에는 상체가 중요할 거 같지만, 상체의 힘으로 검을 휘두르는 동안 그것을 지탱하고 있을 하체의 힘도 무지 중요시 했다. 그리하여 그 동안 내가 받은 훈련 중에는 하체의 힘을 기르는 앉았다 일어나기를 비롯하여 토끼 뜀에 오리걸음까지 있었다. 그걸 시키는 더글라스경은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친절하게 위로의 말을 건넸었다. "야, 그거 잘 하면 이 다음에 결혼하면 부인에게 많은 사랑 받을테니 미래를 위하여 꾹 참아봐." 도대체 그게 여자에게 할 말인지 원... 그런데, 하체의 힘을 기르는 거 하고 아내에게 사랑 받는 거하고 무슨 상관이지? 하여간 그렇게 하체를 단련시킨 덕분에 나는 지금 데니가 시범을 보여주는 기마세를 한 채 꽤 오랜 시간 동안 버틸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자세를 한 뒤 데니는 검을 잡고 머리 위로 올리다 못해 거의 검날이 등에 닿을 정도로 뒤로 넘겼다가 곧바로 앞으로 쭈욱 내려 검 끝이 거의 무릎 위치까지 오자 멈춰섰다. "자, 잘 봤지? 이게 바로 정면 내려 베기야. 할 수 있겠지?" "예." "좋아. 그럼 오늘은 첫날이니까.. 정면 내려 베기 200번만 해." "예? 이... 것만요?" 내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며 바라보자 데니가 정색을 하며 날 바라봤다. "어어? 그렇게 얕보지 마.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 이건 검을 들고 싸울때 상대방과 처음 맞부딪힐때 사용하는 아주 중요한 거라고. 이걸로 상대방의 힘을 예측하는 거다, 너?" "예에..." '누가 안 중요하댔나? 그런데.. 별거 없는 거 같은데...' 그냥 단순히 기마자세를 취한 채로 검날을 세로로 세운 뒤 머리 너머로 넘겼다가 똑바로 내리는 것 밖에 없었다. 그걸 200번이나 하라니... 황당해 할 만도 하지 않는가? "자, 그럼 열심히 해! 나도 지켜볼 거고, 더글라스경도 가끔 돌아보실 거니까 딴청 피면 안된다?" "예에..." 뭐, 솔직히 기초 배울때는 지루하다는 것도, 그러나 중요하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날 하루 정말 열심히 했다. 다음날 새로운 걸 배우길 기대하면서... 그런데 그것도 보기에는 쉬워 보이는데 한 20번 정도 하니까 어깨부터 시작해서 팔이 조금씩 힘들어지기 시작하는 거였다. 그러더니만 점점 한 동작 하는 시간이 늘어나더니 결국 처음 50번 하고 한번 쉬고, 그 다음 30번 하고 한번 쉬고, 20번 하고 한번 쉬고... 나중에는 10번씩 하고 한번씩 쉬어야만 다시 검을 들어올릴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날은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해서 새벽 훈련을 끝내기 전에 200번을 간신히 채울 수가 있었다. 속으로는 '아, 오늘 걸 끝냈으니 내일은 새로운 걸 배우겠지?'하는 뿌듯한 마음을 가진 채로 말이다. 하. 지. 만... 그 다음날 새벽이 되자 데니가 오더니 하는 말, "오늘은 정면 내려 배기 300번." 그러고는 몸을 돌려 가버리려는 거였다. "어어? 저기.. 새로운거 안 배워요?" 황당한 내가 얼른 그를 불러세우며 묻자 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훗... 5일 동안은 그거만 할 거야." 왠지 무지 좋아하는 것 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인지... 어쨌든, 그렇다는데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냥 해야지... 속으로 열심히 '지겨워, 재미 없어, 내가 왜 이걸 해야 하는거야.. 이게 다 누구 때문이더라...' 를 열심히 되내면서 말이다. 제 8화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안다 (7) 한가지만 죽어라고 하자니 정말 지겨웠다. 그래서 나중에는 데니가 시킨 분량을 마구 마구 속이며 (예를 들면 200번 하라는 거 한 150번만 하고 다 했다고 한다던지 하는...) 시간만 때우기도 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서 5일이 지나자 데니는 자신이 말한대로 그 다음 동작을 가르쳐 주었다. 일명 좌우 대각선 베기인데, 오른쪽 위쪽에서 왼쪽 아래, 그리고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사선으로 내려 베기이다. 그러나 그 사선의 각이 땅과 약 45도가 아니라 거의 80도 혹은 75도로 기울기가 극히 작았다. 잘못 보면 정면 내려 베기라고 오해할 정도라 그런걸 일부러 배울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데니가 머리를 한번 흐트러 뜨리며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자, 이것 좀 봐." 내 앞에 똑바로 선 데니는 오른 손을 들어 왼쪽 어깨 가운데를 가르켜 보였다. "사람의 몸에 있는 뼈 중에서 가장 약한 곳이 어디인줄 알아? 바로 여기에 있는 뼈야. 쇠골이지. 다른 곳의 뼈는 모두 이중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만은 단 하나의 가느다란 뼈로 되어 있거든. 그래서 자르기가 제일 쉽지. 게다가 여기 밑에는 중요한 기관까지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데니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사선을 그으며 몸을 따라 살짝 내려왔다. "자, 봐. 여기에는 폐가 있지. 여길 베어 버리면 사람은 숨을 쉬지 못하지. 거기에 여기로 내려오면, 여기에는 심장이야. 어깨에서 여기까지 단 한뼘의 길이만 베어버리면 사람은 죽는 거야, 알아?" 그 말을 하는데 몸이 왠지 모르게 섬뜻했다. 검술이라 하면 나는 제일 먼저 생각하는게 심신을 단련하는 일종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그것 보다도 먼저 기본적으로 검술이란 사람을 죽이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전에도 그거야 알고 있었지만, 한국에서 검술 가지고 사람 죽이는게 그리 흔한 일이 아니고, 또한 검도장 같은데는 정말 사람을 죽이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기에 막연하게 짐작했지만, 데니가 내 앞에 서서 직접 자신의 몸을 가르키며 그렇게 말하니까 새삼스럽게 검의 본질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동작 하나 하나가 어떻게 하면 검으로 사람에게 치명상을 입히며, 어떻게 하면 죽이느냐 하는 걸 가르치는 것이 바로 검술이었던 것이다. 그걸 생각하자 온 몸에 찬 물을 한번 뒤집어 쓴 것만 같은 기분과 함께, 그 동안 안일한 생각으로, 조엘의 강요에 못 이겨 한다는 식의 이런 기분으로 배워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기특한 생각까지 떠올랐다. 그러는 동안에도 데니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더구나 대각선 베기에는 가장 약한 부위를 노리는 것 말고도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어. 바로 갑옷의 틈을 노리는 거지. 네가 엄청난 고수가 되어서 강철도 두부 자르듯이 싹둑싹둑 자르게 되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갑옷이 감싸고 있는 부위는 검을 들이대봤자 아무 소용이 없잖아? 그러니까 갑옷의 틈새를 노려야 하는 거야. 이 어깨 부위는 투구와 어깨 보호대가 이어지는 곳으로 틈이 있어. 여길 다 한 철로 감싸버리면 목을 움직이지 못하니까 이 곳에는 어쩔 수가 없이 틈을 만들어야 해. 대각선 베기는 그 틈을 노리는 거야. 이렇게..." 손을 세로로 세워 쓰윽 자신의 몸을 베는 데니의 모습에 마치 내가 검을 들고 사람을 베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 나는 다시 한번 몸서리치며 다시 한번 검술이란 위험한 것임을 자각했다. 그 뒤에 데니가 나에게 혼자 연습할때 보면서 하라고 가져다 준 사람 모형을 보며 착잡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물론 길다란 나무 막대 두개를 십자형으로 묶고 그 위에 짚으로 뭉쳐서 사람 모형을 만들어 놓은, 일명 짚인형에 불과하지만, 그 짚인형을 향하여 어깨에서 부터 반대쪽 옆구리까지 쫘악 베는 연습을 한다는 것이 영~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짚 인형은 옆에다 잘 모셔 두고 그냥 허공에다 대고 연습을 하고 있는데, 그 동안 새벽 수련을 하면서 안면을 익힌 기사 한명이 어슬렁 거리면서 다가왔다. 그가 이렇게 다가온 걸 보니 아무래도 자유 훈련시간인듯 했다. 새벽 훈련은 다 같이 동작을 맞춰서 훈련하는 시간과, 자신이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하는 훈련 시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때는 힘들면 쉬기도 하고, 더글라스 경에게 조언도 듣고, 서로 의논도 하고 대련도 하는 시간인데, 아마 이 기사는 잠깐 쉬는 와중에 나에게 다가온 듯 했다. 이 사람도 가끔은 내가 하는 걸 보고 잘못된 건 바로 잡아주고 조언도 해주는 기사였기에 나는 검을 휘두르면서 그에게 눈짓으로 아는 체를 했다. "여어~ 해인아, 잘 되가냐?" "스물 여덟, 에거.. 그냥... 스물 아홉, 하는 거죠 뭐.. 서른... 후우..." 백 서른을 채우자 나는 잠시 쉬기 위해 검을 내렸다. "에고... 힘들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있던 기사의 눈에 언듯 장난기가 스쳐 지나가더니만 기사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해인아, 내가 재밌는거 가르쳐 줄게 목검 좀 줘봐라." "재밌는 거요?" 평소 나에게 친근하게 굴던 이들 중 하나였기에 순순히 목검을 내밀면서 호기심을 드러내자 그가 싱긋 웃었다. 기사들은 훈련할때 목검이 아닌 가검과 진검을 사용한다. 진검은 진짜 날이 살아있는 검을 말하는 거고, 가검은 진짜 검과 같은 모양, 같은 크기, 같은 무게인데 날이 뭉툭한 검을 말하는 거다. 진검은 기본 동작이나 검술 동작, 그리고 나무나 집단 베기를 할때 사용하고 가검은 대련을 할때 사용한다. 대련하다가 크게 다치면 서로 안 좋은 일이므로 날이 없는 검을 사용하는 것도 있지만, 진검은 정말 강하게 두세번만 부딧히면 날이 나가버리기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거다. 검사는 자기 검을 소중히 다룰 줄도 알아야 하니까 검의 수명을 재총하는 짓을 안 하려는 거고, 또 검이 나가버리면 날을 가는 것도 귀찮은 일이니까. 그냥 생각하면, 검날을 가는데 숫돌로 싹싹 금방 갈거 같지만, 정식으로 갈면 하나 가는데 3시간 정도 걸리고, 그냥 쓰윽 가는 정도도 1시간이 걸린다. 거기다 검이 될 수 있으면 안 상하고 검날만 날카롭게 해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집중과 세밀한 신경을 써서 갈아야 하기 때문에 보통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기사라면 항상 검날이 날카롭게 서 있도록 상태를 보존 시켜야 하지만, 한번 갈면 날이 나가거나 녹슬지 않는 한 검을 보호하는 기름만 발라주는 정도만 신경쓰고 곱게 보관하는 것이다. 그래도 매일 매일 수련할때 사용하니까 매일 닦아야 하겠지만, 수련할때 진검을 사용하는 이유는 진검이 자신의 몸에 완전히 익히다 못해 몸의 일부처럼느낄 정도로 익숙해지고 또 익숙해 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뭐, 설명이 길어졌지만... 어찌 되었든간에 이러 저러한 이유들로 그 기사는 목검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나는 그에게 목검을 내주었다. 그대신, 이라고는 뭣 하지만 나는 목검을 넘겨받는 그 보다는 그의 허리에 매어져 있는 가검을 반짝반짝 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저어... 저기... 그 가검 제가 한번만 만져보면 안될까요?" 가짜 검이라고 해도 진검과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나는 아직 가검을 만져본 적이 없었다. 비록 검사로 나갈 생각은 없다고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데 호기심이 없다고 하면 오히려 거짓말일 터, 게다가 조엘이나 데니는 내가 한번 보여달라고 하면 절대 안된다고 도리질을 치기 때문에 - 장난이라는게 뻔하지만...- 단념하고 있다가 이 기사에게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져본 것이었다. "가검? 뭐.... 그래라. 진짜 검도 아니니까 그렇게 조심스레 다룰 필요는 없어." 흔쾌히 허락하며 한손으로 쓰윽 빼내어 주는 걸 양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자 그 기사가 피식 웃으며 하는 말이었다. 가검은 오래 되었는지 여기저기 흠집이 많이 나 있었다. 아무래도 진짜 검이 아닌데다가 연습용으로 사용하다보니 소중히 다뤄지지도 않은것도 모자라 험하게 굴려지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왠지 가짜 검인데도 불구하고 검과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검집에서 검을 빼내는데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오옷... 이거 목검보다 무거운데요?" "당연하지. 목검은 나무고 진검은 철로 만들어졌잖아." 기사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자세를 잡고 한번 정면 내려베기 동작을 취해봤다. 목검을 휘두를때는 약간 둔탁한 바람소리가 났는데 가검을 휘두르자 싸악~ 하는 가벼운 바람소리가 나며 목검보다 좀더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옷... 대단해. 역시 검은 검이구나..." 그러면서 검을 옆으로 싸악 한번 베었다가 멋드러진 동작으로 검집에 탁 꼿아 넣으면서 혼자 흐뭇해 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내 목검을 건네 받았던 기사가 나보다 더 멋진 폼으로 목검을 손가락에 끼워 마치 볼펜 돌리듯 휘리릭 돌리더니 손으로 만든 검집 구멍 - 목검에는 검집이 없다 - 에 끼우는 것이었다. "오옷~!!" 순수하게 감탄만 가득찬 그 소리에 기사가 날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이야.. 오랜만에 목검으로 하니까 좀 어색하다." 그러면서 다시 목검으로 발검 - 검집에서 검을 빼내는 동작-을 하더니만 오른쪽에서 한번 휘리릭, 왼쪽에서 한번 휘리릭 돌려보이는 것이었다. "오오옷~ 대단해요." 짝짝짝... 어색하다면서 무지 멋진 모습을 해 내는 그에게 나는 박수까지 치며 찬사를 보내자 그가 히죽웃으며 좌, 우로 모자라 이제는 머리 위에까지 그 목검 돌리는 영역을 넓혀갔다. "우와, 우와, 우와..." 그런데, 그 순간 그가 너무 목검을 세게 돌렸는지 머리 위에서 한번 휘리릭 한 다음 다시 왼쪽으로 내려 휘리릭 돌리는 순간 목검이 그의 손가락에서 튕겨나와 버렸다. 타, 타닥.... 휘둘러지던 힘이 있던 탓에 목검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는 쪼끔 요란했다. 그 순간 기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가시더니 얼른 주위를 돌아보며 검을 주워 들었다. 덕분에 나까지 긴장하며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더글라스경은 어디 갔는지 안 보이고 다른 기사들과 사병들은 자신들의 할 일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우리쪽을 보고 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에 기사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는 나에게 은근 슬쩍 다가와 한쪽 눈을 찡끗하며 낮게 속삭였다. "해인아, 우리의 의리를 배신하진 않겠지? 이건 비밀이다? 내가 대신 검 돌리는 방법 가르쳐 줄게." "당연하죠. 의리를 저버릴 수는 없잖아요." 제 8화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안다 (8) 다가와 한쪽 눈을 찡끗하며 낮게 속삭였다. "해인아, 우리의 의리를 배신하진 않겠지? 이건 비밀이다? 내가 대신 검 돌리는 방법 가르쳐 줄게." "당연하죠. 의리를 저버릴 수는 없잖아요." 비밀이란 바로 그 기사가 검을 떨어뜨렸다는 거다. 앞서 내가 데니에게 검에 대한 예의를 교육 받을때 단단히 주의 받은 일 중 하나가 바로 검을 떨어뜨리지 않는 거였다. 그것은 모든 것들 중 가장 주의를 요하는 것으로 목검이든 가검이든 진검이든 떨어뜨렸다간 더글라스경에게 호된 질책을 당했다. 물론, 목검보다 가검, 가검보다 진검을 떨어뜨리면 그 질책이 더욱 커진다는건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하지만, 나는 그런거에 별로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고, 신경 쓰고 있었다 해도 이를 맘도 없는데다가 목검 돌리기에 혹해 있었기에 얼른 고개르 끄덕였다. 그러자 기사가 환하게 웃음 지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후훗, 그래, 그래... 넌 역시 의리의 싸나이다." 그러나 그 순간... 마치 지옥에서나 올라온 듯한 음침한 소리가 들렸으니... "그.. 의리라는 것에 나도 껴주면 안될까?" 이 순간 엘라임이 나타났다 해도 덜 놀랐으리라 생각될 만큼 그 기사와 나는 무지 놀라버렸다. 기사는 그래도 오랜 기간동안 숙련한 자라 목검을 떨기지 않았지만, 나는 너무 놀라서 들고 있던 가검을 떨기고 말았다. 땡그랑~!! 너무나 맑고 투명한 소릴 내며 떨어지는 가검의 모습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쏠렸고, 그와함께 햇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빛나는 가검의 검신 못지 않게 내 얼굴도 헬쓱해졌다. "으헥..." 요상한 비명을 지르며 얼른 검을 주워들었지만, 지나간 버스에다 대고 손을 흔든 격이었다. 쏟은 물은 주워담을 수 있지만, 버스 지나간 뒤에 손을 흔들었으니... '난 죽었다...' 속으로 복창하면서 더글라스경의 눈치를 살폈지만, 역시나... 더글라스경 앞에서 일을 벌였으니 벗어나지는 못하는 법... "훗... 해인군... 그 동안 내가 안 돌봐줬더니 팔 힘이 약해진 모양이군. 팔굽혀 펴기 100번 한다, 실시!" "실시!!" 이때 '실시'란 말을 작은 소리로 하면 벌은 두배로 늘어나기 때문에 나는 울며 겨자 먹기의 심정으로 큰 소리로 복창한 다음 엎드렸다. "하나, 둘, 셋...." 그러는 내 머리 위로 내 목검을 들고 있던 기사에게 하는 더글라스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는 뭐하는 건가? 자수하여 광명찾자는 말도 모르는가? 쯧쯧.. 그런 훌륭한 명언을 모르다니 안됐군. 자넨 두배야. 팔굽펴 펴기 200번, 실시!!" "실시!!" 내 옆으로 죽상을 한 기사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바로 내 옆에 엎드렸던 것이다. 그런데 잠시 후 기사의 표정이 묘하게 더 찡그러졌다.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 슬쩍 위를 바라보니 기사의 등어리에 더글라스 경의 그 근육질 다리가 올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를 동정할수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더글라스경의 나머지 다리는 내 등짝으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자자, 한가지 친절한 말을 해주자면, 날 떨어뜨리면 두배로 늘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날 안 떨어뜨리려면 둘이 똑같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야겠지?" 일명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공포의 팔굽혀펴기...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다시 조엘의 그 말 잘듣는 연고의 효력을 다시금 빌려야 했다. 뭐, 아주 소오오올찍히 고백하자면 한 30번까지 하고 난 뒤 도저히 힘들어서 버틸 수 없던 나는 실프들을 협박(?)해서 도움을 받기는 했었다. 홍홍홍... 그날 오후, 해럴드 집사의 명을 받아 기사들과 사병들이 사는 건물에 땔감과 겨울 시트등등을 하인들과 함께 배달(?)하러 갔다 오는 길에 연무장을 지나칠 때였다. 마침 근무가 없는 기사들과 사병들이 잠시 휴식하는 틈을 타서 한국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스포츠라고 할수 있는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기사들과 사병들이 자주 즐기는 놀이에는 두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여러명이 하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둘, 혹은 셋 정도의 인원이 즐길 수 있는 놀이었다. 여러명이 즐기는 건, 한국에서도 많이 즐기는 '족구'로 편을 갈라 한 편에 6명, 혹은 7명씩 해서 즐겼는데, 이거 가지고 내기도 많이 하곤 했다. 다른 하나는 '히킥'이라고 해서 우리 나라의 제기 같은 거였다. 물론 동전을 넣어 종이를 쭉쭉 찟은 제기가 아닌, 자그마한 천 주머니, 아니면 가죽 주머니 속에 모래, 혹은 곡식을 넣은 한국명 '오재미'를 가지고 하는 거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제기와 다른 방식이 있다면 절대로 손을 잡아서는 안되지만, 머리를 사용할 수는 있다는 거였다. 그리하여 오재미가 떨어져도 손으로 줍지 않고 두 발로 잡아 허공으로 띄워 올려 차서 상대방에게 넘겨 주고 받고 했다. 그런데, '히킥'을 하고 있던 두 명의 기사 중 한명이 아까 새벽 훈련때 나와 같이 벌을 받던 기사였다. 나는 정령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해도 어깨가 아파 연고를 발랐는데 그 기사는 나보다 두 배를 더 했음에도 괜찮은지 팔팔하게 뛰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여어~ 해인아, 너도 같이 할래?" "사양할래요. 지금 어깨가 아파서 움직이는게 힘들다구요. 그런데 기사님은 펄펄 하시네요?" 내 장난기 어린 말에 그 기사랑 같이 하고 있던 다른 기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거야 이 녀석은 그런 일에 익숙하니까 그렇지." 그 말에 나와 친한 기사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훗... 자네, 지금 자네 이야기를 하는 건가?" "호오, 자네는 요즘 귀가 잘 안들리나보군. 아직 나이도 젋은데 벌써부터 귀가 그렇게 먹어서야 되겠는가? 벌써 늙는 건가?" "후후, 무슨 그런 서운한 소리... 나는 아직 자네보다 팔팔하다네." "그걸 누가 믿는데?" "아마 자네 말고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일 걸?" "훗.. 어디 한번 얼마나 팔팔한지 볼까?" "좋지..." 왠지... 재미로 시작된 '히킥'의 경기에 살벌함이 묻어 나오기 시작한 건 내 착각이련지... "그럼 즐겁게 노세요." 나는 그들에게 웃으며 작별 인사를 했지만, 그들은 서로를 노려 보느라 내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기분이 나쁜 것 보다는 우습다는 감정이 날 지배하고 있던 터라 나는 후후 웃으며 그들을 지나쳐 저택으로 향했다. 그런데 얼마 걷지 않아, 나는 연무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정원의 나무 밑에 서서 연무장에서 열심히 놀고 있는 기사 및 사병들을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안젤라를 발견했다. 아마 서 있은지 좀 오래 되었는지 그녀는 추위에 오돌 오돌 떨며 서 있었지만, 저택으로 들어갈 마음이 없는지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그 곳을 떠지 않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조금 안되어 보여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아가씨, 여기서 뭐 하세요?" 내가 다가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멍하니 서 있던 안젤라는 내 말에 흠칫 놀라 날 돌아보다 나의 의아한 시선을 눈치 채고는 얼굴에 히미한 홍조가 떠올랐다. 하지만, 일명 공녀가 일개 하인에게 부끄러워 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싫은지 얼른 고개를 홱 돌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냥 산책하는 중이었어." 하지만 홱 돌린 고개가 다시 연무장에서 한창 재미있게 노는 기사들과 사병들에게 향하는 걸 보고 나는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16세의 나이라면, 한창 친구들과 놀고싶을 때, 그런데 그런 팔팔한 나이에 두 과목을 낙점 받았다는 이유 하에 친구네 놀러가지도 못하고, 외출도 금지 당한 채 가정교사와 공부만 해야 하는 처지에 지금 신나게 놀고 있는 사병들과 기사들이 부러워 보이는 건 당연했다. 더욱이 이 저택에서는 자신의 또래는 하나 없고(그녀의 시녀 또한 그녀보다 다 나이가 많은데다, 나이가 비슷하다 해도 어찌 공녀랑 같이 놀겠는가?) 그녀에게 잘해주는 오빠와 아빠는 매일 왕성에 출근하느라 같이 놀아주지도 않고, 엄마와는 냉전중이었으니... 그렇게 보니 그녀는 의도 하지 않았지만, 지금 저택에서 한마디로 '따' 를 당하고 있는 처지였다. 그 동안 그냥 얼굴만 마주치고 인사만 하고 쓰윽 지나치는 사이였기에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지만, 부러운 눈길로 연무장쪽을 바라보며 추운 날 속에 서 있는 그녀를 보자니 왠지 어렸을 때의 내가 생각 났다. 물론, 그녀와 같은 처지는 아니었지만, 해민이 녀석이 한창 남자 애들이랑 어울리느라 나하고 잘 놀아주지도 않을 그 시절의 추운 어느날, 나는 골목에 서서 신나게 웃으며 뛰어가는 해민이를 비롯한 남자애들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한참동안이나 서 있다가 온 몸이 꽁꽁 얼어버린걸 엄마가 발견해서 집안으로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추운 날 그러고 서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평소 잘 걸리지 않던 감기에 크게 걸려서 끙끙 앓았고 덕분에 해민이는 부모님에게 실컷 혼났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깝게도 나는 아파서 정신이 없던 상황이라 부모님께 혼한 해민이 녀석이 엉엉 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걸 봤어야 했는데... 뭐, 세월이 지나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안젤라 덕분에 다시 그 시절을 떠올린 나는 바빠서 놀아줄 처지가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조엘 녀석이 왠지 엄청 얄미워졌다. 동생은 이렇게 놀 사람이 없어 따를 당하고 있는데 뭐하고 있는 거냐며 속으로 욕을 하며 나는 안젤라를 향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어... 안젤라 아가씨... 부탁을 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 그에 안젤라의 시선이 나에게 돌려졌다. "응? 뭔데?" "저기.. 괜찮으시면 저에게 역사를 가르쳐 주시지 않겠어요?" "역사?" 다시 되묻는 안젤라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졌다. 역사란 그녀가 낙제 받은 과목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에 나는 얼른 진지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하는 체 했다. 그리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안젤라를 향해 손짓한 다음 연무장이 보이지 않는 정원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갔다. 어리둥절함과 호기심이 어우러진 표정의 안젤라가 나를 따라 오자 나는 안젤라를 향해 정색을 한 채 속삭였다. "안젤라 아가씨, 아가씨께선 비밀을 꼬옥 지켜주시는 분이시죠?" 제 8화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안다 (9) "안젤라 아가씨, 아가씨께선 비밀을 꼬옥 지켜주시는 분이시죠?" '비밀'이란 말에 안젤라의 눈빛이 반짝 반짝 빛났다. 하기야, 어느 누가 남의 비밀 이야길 듣는다는데 호기심이 동하지 않겠는가? 그 당사자가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이지. 넌 이 안젤라 맥알파인이 가벼운 사람으로 보이는 거야?" 짐짓 화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의 눈에 가득찬 호기심으로 인하여 오히려 우스워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웃음을 꾸욱 참은 나는 무지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 처럼 낮은 목소리로 소근 거렸다. "당연히 아니죠. 그러니까 지금 제가 안젤라 아가씨께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슬쩍 앉자 안젤라도 덩달아 바닥에 주저 앉아 나에게 몸을 바싹 밀착 시키며 소근 거렸다. "그래, 무슨 이야기인데?" "사실은요, 이건 조엘님도 모르시는 건데요, 저는 이 나라 사람이 아니예요." 물론 조엘이 모르는 건 사실이었다. 그는 아마도 짐작이야 했겠지만, 어디 사람인지는 절대로 추측해내지는 못할테니까... 어쨌든, 안젤라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듣다가 고개를 들고는 어이없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뭐야, 그게 비밀인 거야?" 무지 실망했다는 눈초리... 물론 한 나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공작 집안에 비록 하인일 지언정 다른 나라 사람이 들어오기는 힘든 일이지만, 내 신분을 공작의 아들내미인 조엘과, 그의 심복 데니가 보증하고 있는 이상 크게 문제될건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딴 나라 사람이라고 떠벌리고 다녀도 집에서 쫓겨나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 거였다. 하지만, 내 이야기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설마, 제가 그걸 비밀이라고 아가씨께 말씀 드렸겠습니까?" 내 말에 안젤라의 고개가 다시 숙여지고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래, 그랬구나. 그럼 뭔데?" "사실 저는요, 보통 인간이 아니예요." 내 말에 안젤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정말? 그럼 뭔데?" "제 몸에는 엘프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진짜?" 안젤라의 눈이 더 커졌다. 그리고는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럴 거 같긴 해. 나는 너 처럼 신기한 눈색과 머리카락색을 가진 사람은 처음 봤거든. 네가 엘프와 혼혈이라서 그렇구나..." 평소에는 연한 파란색처럼 보이지만, 햇빛에 비치면 은색으로 빛나는 머리색과 눈동자색을 바라보며 안젤라가 납득하자, 나는 생각해둔 뒷 말을 이었다. "저는 얼마 전까지만해도 사람들과 살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세계가 있다는 것도 몰랐죠. 사람들이 갈 수 없는 아주, 아~주 깊은 곳에서 살고 있었거든요." "어머, 정말? 그러니까 엘프들이랑 펜사 산맥에서 살았구나... 어머, 어쩜...." 그녀의 말에 이번에는 내가 어리둥절하게 쳐다 보았다. "펜사 산맥이요?" "얘는, 너는 네가 살았던 곳도 모르니?" "당연하죠. 저는 인간들이 부르는 이름을 전혀 몰라요. 이 곳이 벨레니라 부르는 나라라는 것도 얼마 전에야 알았는걸요? 이 세상에 어떤 나라가 있는지, 바다 이름이 뭔지, 산맥 이름이 뭔지도 몰라요. 아주, 아~주 깊은 곳에서 살았다니까요." "아.. 맞다. 그랬지... 그럼 그럴수도 있겠지... 펜사 산맥이란 엘프들이 살고 있는 산맥이야. 그러니까 네 고향이네." 내가 살았던 곳이 바다속이라고 이야기를 안 해서 그런지 안젤라는 혼자 추측하고 납득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잘 풀려간다고 속으로 좋아하면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제가 그렇게 아주 아주 깊~은 곳에 살던 어느날 저는 인간이라는 생물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간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호기심을 가지고 집에서 가출 했죠." "어머, 가출한 거야?" 놀라움이 가득 담긴 탓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나는 얼른 입가에 손가락을 하나 가져다 댔다. "쉿, 목소리가 너무 커요." "아, 미안." 내 말에 얼른 입을 막는 안젤라를 향해 미소를 보이며 나는 다시 소근댔다. "그런데 인간 세상에 대해서는 제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같은 사람을 노예로 잡아 판다는 것도 몰랐죠." 그 말에 안젤라는 같은 인간으로 수치심을 느끼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저런... 하, 하지만 우리 나라는 안 그래. 우리 나라는 국법으로 엄격하게 금하고 있거든.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건 라센이라는 나라라구." "저도 지금은 알아요. 아마 제가 처음 갔던 나라가 그 나라였던 모양이예요. 덕분에 저는 거기서 잡혀서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어요. 다행히도 벨레니라는 나라로 와서 노예 경매까지 갔는데 그때 조엘님과 기사단이 짜잔 하고 나타나서 절 구해주신 거예요." "어머... 어쩜... 우리 오빠가 불법 노예 매매를 저지르는 일당을 소탕했다고 하던데, 네가 거기에 있었구나." "예, 조엘님이 친절하게도 저를 이 곳으로 데려와 주셨지요." 그 말에 안젤라가 감동했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그런데 왜 나에게 역사를... 아아,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싶지 않아 인간 세상에 대해 알려고 하는 구나?" 다시 한번 혼자 추측하고 납득하는 안젤라...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반박하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얼핏 듣기로는 인간세상에 대해 알려면 그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했거든요. 하지만, 조엘님이나 데니 형에게 부탁하기는 왠지 껄끄럽고... 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러면서 안젤라를 향해 '당신만은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란 시선으로 초롱초롱하게 바라보자 안젤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부여잡았다. 물론 그녀의 손보다 내 손이 더 따스했지만, 나는 가만히 있었다. "저런... 인간에 대해 실망해서 오빠까지도 불신하는구나. 그러지 마. 우리 오빠라서 하는 말이 아니지만, 오빠는 믿을 만한 사람이야." "예, 하지만 완전히 믿기가 아직 어려워요. 제가 그런 일을 당하고 아직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아, 그때의 일이 잊혀지지 않았거든요." 그러자 안젤라가 동정어린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저런... 가엽게도... 얼마나 험한 일을 당했기에 그랬을까... 걱정하지 마. 여기서는 너에게 해를 가할 사람은 없으니까." "예. 그래서 조금씩 안심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래도 인간 세상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요. 알려 주실거죠?" "물론이지. 그래, 오늘부터 내가 당장 가르쳐 줄게." "감사합니다. 대신 제가 재미있는 놀이를 가르쳐 드릴께요." 내 말에 안젤라의 눈이 반짝 거렸다. "정말?" 너무나 순진하고 기대에 찬 그녀의 눈길에 나는 미소가 저절로 나오는 걸 느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이죠." 내가 안젤라에게 역사를 가르쳐 달라는 이유는 간단했다. 물론 인간의 역사야 책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지루한 책은 별로 읽고 싶지 않은데다, 안젤라와 같이 놀아줄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는 한편 그녀의 공부를 도와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스스로 공부한 것보다는 내가 익혀 누군가를 가르쳐주는 것이 더 기억에 잘 남는 법이기에, 안젤라가 나에게 가르쳐줌으로써 더 공부가 되게 하려는 나의 친절한 배려였던 것이다. "좋아. 그렇다면 지금 즉시 시작하자, 오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반짝 반짝 빛나는 눈으로 날 내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나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 보이려다가 갑자기 떠오른 한가지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으악, 큰일이다~!" "뭐, 뭐야? 왜 그러는데?" 갑작스런 내 행동에 당황한 안젤라도 덩달아 다급하게 물어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제자리에서 방방 뜨면서 빠른 말로 대답했다. "큰일이예요. 해럴드 집사님이 절 기다리고 계실 거라구요. 아가씨랑 이야기 하느라고 깜빡 했어요? 어쩌죠?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저 먼저 가볼께요. 조금 있다가 기회를 봐서 아가씨 방으로 찾아 갈께요!" 그러고는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잽싸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마 해럴드는 나에게 기사들이 머무는 저택의 겨울 준비 상황을 듣기 위해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직까지 해럴드 집사의 일이 줄어들지 않고 있는 상황인데 노닥거리는 날 기다리게 했다간... 으윽...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행히도 잽싸게 뛰어 들어간 덕인지, 아니면 내 생각보다 안젤라랑 노닥거렸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 것인지 해럴드 집사는 크게 화가 나 있지 않았다. 아니, 화가 날 시간도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했으리라. 내가 그의 집무실에 들어갈때도 그는 정신없이 서류더미를 처리하느라고 바빴으니까 말이다. 덕분에 나는 해럴드 집사에게 무사히 보고를 끝낼 수 있었다. 그 뒤 나는 안젤라와 한 약속 대로 공작과 조엘이 퇴근해 오기 전에 잠시 짬을 내어 안젤라의 방으로 찾아갈 수 있었고, 그것을 시작으로 안젤라와 교분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런건 그녀가 학교로 돌아가기 전까지였지만 말이다. 내가 안젤라에게 배우게 된 것은 벨레니라는 나라만의 역사가 아닌 이 세계의 역사였다. 그러한 역사를 알아야만 벨레니라는 나라의 역사의 시작을 이해할 수도 있었던 것이지만, 솔직히 안젤라가 배운 벨레니 나라의 초대 왕과 그 다음 왕들과 그들의 업적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 없었다. 안젤라도 자신의 나라 역대 왕들의 업적 보다는 옛날 이야기에 가까운 역사의 이러 저러한 이야기를 해주는 걸 더 좋아했기에 나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서서히 겨울이 시작될 무렵, 안젤라에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안젤라와 같은 학년, 같은 반이자 절친한 친구들 중에 한명이었는데, 공작이 특별히 초청하여 연말과 연초를 함께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 예전에 공작이 안젤라에게 약속한 일이 바로 이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공작 부인 또한 안젤라 혼자 풀이 죽어서 지내는 모습이 보기 안쓰러웠던지 그녀의 친구가 온 것에 대해 뭐라 하지는 않고 따스하게 대해주었다. 그러나 안젤라의 친구가 왔다고 해서 안젤라와 나 사이가 소원해진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안젤라와 내가 노는데 그녀까지 끼워서 셋이서 같이 놀았다. 제 8화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안다 (10) "자, 이게 바로 세계 지도야." "오옷..." 그날도 어김없이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 잠시 짬을내어 안젤라의 방에 그녀와 그녀의 친구에게 역사를 배운다는 명목하에 - 진실은 놀러 간 거지만... - 갔을때 안젤라가 미리 찾아 두기라도 한 듯 탁자 위에 커다란 종이를 펼쳐 놓았다. "헤에... 세계 지도구나? 나도 집에서 몇번 본적이 있지." 안젤라의 친구인 마르시아가 탁자에 앉으며 말했다. 여기서 잠깐 마르시아에 대해 소개하자면, 그녀는 귀족 집안은 아니었다. 대신 왕립 학교에 갈 만큼 부~자인 상인 집안의 딸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정식 이름은 마르시아 로블레스로 로블레스 상가의 셋째 딸이라고 했는데, 내가 이 곳의 상권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나중에 해럴드 집사에게 듣기로는 벨레니 왕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큰 상인 집안이라고 했다. 그녀는 안젤라보다 약간 작은 키에 - 이곳 여자애 치고는 그리 작은 키는 아니다. 아담한 편이라고나 할까? 안젤라가 160이 약간 안되는 키였으니까. - 밝은 금갈색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안젤라에게 역사를 배우다가 지나가는 말로 들은 이야기인데, 이 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모두 갈색 계통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뭐, 그렇다고 붉은 색의 머리카락이나 금발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것도 갈색 계통의 계열이라 정말 금으로 만든 듯한 밝은 금발이나 백금, 혹은 은발은 쉽게 볼 수 없다고 했다. 안젤라나 조엘이 가지고 있는 짙은 검은색의 머리는 흔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볼 수 있는 색이라나? 그에 비하면 내 머리색 같은건 이 나라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색이니만큼 - 뭐, 전 세계 어딜 봐도 보기 불가능 하겠지만... - 머리색만 보면 딱 이 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은 뒤에야 나는 조엘이나 데니가 날 처음 보고 벨레니 왕국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던 걸 납득할 수 있었다. 나와 비슷한, 옅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은 남대륙이라고 했다. "자, 여기가 바로 남대륙이야. 내가 전에 말해준거 기억 하지?" 안젤리아가 탁자 위에 놓인 지도를 보며 재잘거렸다. 지도에는 바다에 둘러쌓인 단 하나의 커다란 대륙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대륙이 바로 이들이 살고 있는 그라함 대륙이었다. 마치 몸통 굵은 버섯이 밑에 꼬리를 길게 달고 있는 듯한 모양이었는데 이 대륙은 크게 중앙 대륙, 서대륙, 북대륙, 남대륙으로 나뉘어 있었다. 버섯에서 마치 우산 처럼 활짝 펼쳐진 윗 부분이 서대륙과 북대륙으로 불리는데 서대륙과 북대륙은 중앙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커다란 산맥인 엔더비 산맥에 의해 양쪽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대륙에는 거대한 산맥이 3개가 있었는데 엔더비 산맥은 그 중 하나이고 나머지 두개의 산맥은 중앙 대륙의 아래쪽에서 마치 중앙 대륙을 받치고 있는 듯이 위치해 있었다. 그 중에서 서쪽에 있는 펜사 산맥이 바로 엘프들이 살고 있다는 곳이었다. "자, 여기가 벨레니 국가야. 내가 말했지? 중앙 대륙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안젤라가 가르키는 손가락 끝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정말 맨 아래에 있군요. 그러고보니 남대륙의 두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요?" 벨레니는 중앙 대륙과 남대륙이 만나는 지점, 그러니까 사람으로 치자면 허리 부분을 몽땅 차지하고 있었기에 남대륙을 둘로 나눠 가지고 있는 두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덕분에 중앙 대륙과 남대륙의 무역 통로가 되어 상업이 무지 발달할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했다. 그건 상인 집안 사람이라고 그런데 능통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마르시아, 애칭 마시가 설명해줬다. "무역을 하려면 많은 물건들이 오가야 하잖아. 그러면 차라리 육지 보다는 배가 훨씬 더 편하거든. 게다가 이렇게..." 마시는 지도에 그려져 있는 남대륙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더니 거기서 바다를 통해 서대륙으로 선을 그려 보였다. "자, 이렇게 바다를 통해 가면 육로상으로 거리가 거의 비슷하지? 게다가 배를 이용하니 편하고 훨씬 많은 짐을 한번에 실어 나를 수가 있지." 그녀의 말에 쉽게 납득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럼... 벨레니 왕국은 중간 무역으로 이득을 별로 보지는 않겠네요?" 그러자 마시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많은 이득은 없지. 육로를 통해 오가는 건, 우리 나라와의 직접적인 교류거나 아니면 시간을 다투는 일 밖에 없거든. 전체 교류양에 비해 그런 일이 얼마나 차지하겠어? 뭐, 하지만.. 그 덕분에라고 할지, 우리 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도로가 잘 정비되었고, 더불어 운송업도 상당히 발전 되었지. 그건 좋은 거 같아." "오.. 그렇군요." 어쩐지 조엘, 데니가 나를 만나서 데리고 온 곳이 왕국의 변두리 지방이라고 들었는데 그 곳에서부터 왕국의 수도까지 길이 잘 닦여 있었다. 그때 나는 변두리라고 해도 다른 나라 국경 지대와 가깝기에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거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마시의 설명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젤라가 불쑥 나에게 물어왔다. "저기, 해인아 왜 우리가 살고 있는 대륙 이름을 그라함 대륙이라고 붙였는지 알아?" '당연히 모르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하하, 아뇨." 그러자 마시가 뭔가 눈치챘는지 안젤라에게 말을 걸었다. "헤에, 너 그라함 대제 이야기 하려고 그러는구나? 아직 말 안해줬어?" "그라함 대제요?" 그녀들의 말에 호기심을 느끼며 내가 묻자 안젤라와 마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날 바라보았다. "그래, 그라함 대제. 그는 기록으로 남아있는 이 대륙의 역사상 최초로 대륙을 통일한 사람이야." 안젤라의 말에 마시가 덧붙였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최후이지. 그라함 대제 이후 어느 누구도 대륙을 통일하지 못하고 있거든." "헤에.. 그래서 대륙 이름이 그라함이군요?" 그 뒤로 안젤라와 마시가 설명해주는 말은 간단히 말해, 천년전 아직 지금처럼 국가들이 안정되지 못하고 수많은 소국가들이 멸망했다 다시 건국되고 또 다시 멸망하는 어지러운 시기에, 어떤 소국가를 물려받은 젊은 청년 국왕이 이 난세를 평정하고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대륙을 모두 휩쓸어 통일했다... 하는 뭐, 한국에 있을때도 그 세계에서도 가끔 있었던 이야기였다. "음... 대단한 사람이네요." 뭐, 살다보면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고, 세월이 흐르다보면 이런 사건도 있고 저런 사건도 있는 법이라 그녀들의 말을 들은뒤에 예의상 가볍게 반응을 보여줬는데 그녀들의 눈이 오히려 그 이야기를 해줬을 때보다 더욱 더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역사 이야기는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위한 서론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하지만, 그라함 대제도 대단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런 그라함 대제라도 그를 옆에서 도와준 메이크피스가 없었다면 대륙 통일은 꿈도 못 꾸었을거라고 해." "메이크피스요?" 내가 궁금증을 보이자 그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안젤라와 마시는 번갈아가며, 거기에 침까지 튀겨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 그래. 메이크피스... 이 사람은 역사에 기록되기로 그라함 대제의 오른팔이자 엄청 대단한 마법사였다고 해." "그런데 역사책에는 그가 남자라고 나오지만, 그의 외모가 엄청 아름다웠대. 마치 백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진 듯한 아름다운 은발을 허리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하얀 로브를 입고 있는 그 사람은 마치 신계에서 하계로 강림한 천사에 비유 되었다니까." "게다가 그 그라함 대제는 위대한 왕이자 위대한 검사라고 알려져 있어. 타오른 황혼 같은 붉은 금발머리를 휘날리며 백마를 타고 전쟁터를 종횡무진 하는 그라함 대제의 위엄있고 늠름하고 멋진 모습은 지금까지도 음유시인들의 노래에 자주 등장하곤 하지." "생각해봐봐. 백금발을 늘어뜨린 인간같지 않은 너무나 아름다운 마법사와 붉은 금발을 휘날리는 당당한 검사..." 마시의 말에 안젤라와 마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꿈꾸는 표정으로 탄성을 내지르며 서로의 손을 맞잡고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꺄아~ 너무 낭만적이야." "이보다 멋질 수는 없어." 지금 앉아 있는 상태라 저 정도로 끝났지, 서 있었으면 방방 뜨고 침대로 달려가 뒹굴고도 남았을 거다. 그러나 흥분한 것은 그녀들뿐만이 아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 또한 꿈 많은 순수한 여고생이 아니었던가? 그녀들의 이야기에 나도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뒷 이야기를 재촉했다. "오옷~ 러브 스토리군요? 대제와 마법사의 러브 스토리... 낭만적이예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죠?" "야설에 의하면 그 마법사는 혹시 여자가 남장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나와. 그라함 대제를 사랑한 실력있는 여마법사가 그의 옆에 있기 위해 남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중에 여자라는 걸 그라함 대제에게 들켜 남에게 알리지 않고 둘만의 사랑을 나누는... 꺄아~~" 내 재촉에 안젤라는 신나하며 이야기해주다가 스스로 흥분을 주체 못하고 두 손으로 양뺨을 감싸쥐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마시도 그 못지 않게 흥분한채로 열변을 토했다. "아냐, 아냐. 이런 추측도 있어. 그라함 대제와 메이크피스 마법사는 금단의 사랑을 나눈 것이라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둘 다 위치가 위치라서 사람들의 시선에 뜨이다보니 드러내놓지는 못하고 가슴 속으로 몰래 둘만의 사랑을 키워나간... 아아... 얼마나 낭만적인 일이야?" "헤에.. 그래요? 그런데 그럼 그라함 대제는 누구랑 결혼 했어요? 둘다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얼굴을 붉힌 채 몽롱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들은 내 질문에 현실로 돌아왔다. "아? 아아.. 그라함 대제는 아무하고도 결혼을 안 했어. 메이크피스도 마찬가지지. 둘다 아무하고도 결혼하지 않았는걸." 안젤라의 말에 마시가 얼른 입을 열었다. "그봐. 그러니까 메이크피스 마법사는 남자인 거야. 그러니까 둘다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금단의 사랑이었기에 차마 결혼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서로를 잊지 못해 아무하고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다 죽은 거야." "어어.. 정말... 둘 다 결혼하지 않았으면.. 마시 아가씨쪽의 이야기가 더 신빙성이..." 내가 마시쪽으로 기울어지자 안젤라가 바락 반박해왔다. "뭐야, 아니라니까. 일설에 의하면 대륙을 통일한 후에 그라함 대제와 메이크 피스 사이에 불화가 생겼대. 그로인해 사이가 멀어진 두 사람은 따로 떨어져 살았잖아. 하지만 둘은 서로 사랑했기에 다른 사람과의 결혼은 꿈꾸지도 않고 서로를 그리워했지만, 떨어져 있은 덕택에 오해의 골은 깊고 넓어져 죽을때까지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지 못한 거야." "어? 그럼 대제와 마법사는 계속 같이 있었던게 아니라 떨어져서 살았어요?" 내 질문에 안젤라와 마시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을 통일할 정도로 엄청 대단한 수완가이자 그 자신 또한 뛰어난 검사였던 대제와 그의 오른팔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대 마법사 메이크피스는 대륙을, 정확히 말하면 대륙상에 존재하는 인간들의 나라를 모두 통일한 뒤에 견해의 차이로 인하여 사이가 틀어졌다고 한다. "역사서를 볼때 그라함 대제는 이 세계를 다스리는 건 인간이라고 여겼대. 그래서 다른 이종족들은 인간의 밑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 안젤라의 말에 나는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에... 설마... 이종족에 드래곤도 들어가는 건 아니겠죠?" "당연하지. 아무리 그라함 대제라고 해도 드래곤을 상대로 무사할 것 같아? 어디까지나 드래곤은 논외대상이였다고. 그가 말한 이종족이란 유사인종이나 몬스터로 분리되는 종족들이었어." 안젤라의 설명에 이어 마시 또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대마법사 메이크피스는 그 의견에 반대했대. 신께서 인간 말고도 다른 종족들을 이 땅에 창조하신 이상 그들 또한 이 대륙에서 살아갈 권한이 있으며 인간이 그 권한을 침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 그것때문에 대마법사 메이크피스가 혹시 인간이 아닌 엘프이거나 아니면,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드래곤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조심스레 떠돌기도 했어." "오오... 어쩜 그게 사실일지도 모르겠네요. 인간 같지 않게 무지 아름다웠다면서요?" 내 말에 마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인간 같지 않은 고귀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젋은 나이에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난 마법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말야. 그가 역사책에 기록된 최초의 대마법사야. 역사학자들과 마법사들은 그의 진정한 실력을 나타낸 기록이 없지만, 정황을 봐서 그가 최소한 8클래스, 나아가서는 9 클래스에 가까운 실력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레 추측하거든." "8클래스, 9클래스요?" 내가 쉽게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자 안젤라가 입을 열었다. "나도 마법사가 아니라서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드래곤의 마법이 9클래스래. 하지만 인간은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고 하던걸? 인간으로는 7클래스에 도달하면 대마법사라고 호칭이 붙는다고 했어." "헤에... 그럼 그 메이크피스라는 마법사는 정말 대단한 마법사였군요." "그러니까 드래곤이 폴리모프한게 아닐까.. 하고 여기지. 거기다 최초의 대마법사였다니까." "오오..." 그라함 대제가 대륙을 통일한 뒤에 세운 그라함 제국의 수도는 지금 중앙 대륙에 있는 세 국가이자 벨레니 왕국의 북동쪽에 위치한 녹스 왕국의 수도인 스케핑톤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제가 대륙을 통일한 뒤 이종족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자 메이크피스는 그 전쟁에서 빠지겠다고 단호히 선포한 뒤 녹스 왕국의 바로 옆나라인 마르타 왕국의 수도인 메이크피스로 왔다고 한다. 메이크피스는 거기서 마법사들을 끌어 모아 그 동안 중구난방 식이었던 마법을 정리하고 최초로 마법을 1클래스부터 9클래스까지 단위를 나누며 수식을 정리하는 등, 현 마법의 기초를 세웠다고 한다. 게다가 그 곳에는 마법사의 탑이라고 하는, 현재 마법 길드의 총 본부를 세웠으며, 그가 마법 길드의 초대 길드장으로 선임되었다고 한다. 그 수도 또한 메이크피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고 말이다. 곧 현 마르타의 수도에는 마법을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싶어하는 마법사들과, 마법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로 모여들었고, 지금까지도 그 명맥이 유지되어 메이크피스 하면 마법의 총 본산이라고 일컬어지며, 그곳을 수도로 하는 마르타 역시 마법 왕국으로 불리고 있다. 이렇게 메이크피스가 마법사에 길이 길이 남을 업적을 세우는 동안, 대제는 혼자서라도 이종족에 대한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노예로 삼아 부릴 수 있는 법안을 만들었지만, 메이크피스를 따르는 많은 마법사들의 공백과 만만치 않은 이종족들의 저항으로 많은 난항을 겪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가장 극심한 타격은, 엔더비 산맥에 있는 북드워프족을 치기 위하여 산맥을 잘못 올라갔다가 레드 드래곤의 영역에 발을 들여놔 그 곳으로 달려간 군대가 모조리 전멸 당한 일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그 뒤로 그라함 대제는 이종족에 대한 전쟁을 중단했지만, 그렇다고 메이크피스가 돌아오지 않아 돌은 죽을때까지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한편, 독신으로 살다 죽었다고 한다. "흐음... 그라함 대제가 잘못 했군요. 이종족에 대한 전쟁만 선포하지 않았다면 메이크피스 대마법사랑 헤어지는 일도 없었을텐데..." 내 말에 마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맞아. 그랬다면 현재 마법 왕국은 마르타가 아닌 녹스가 되었을 거야." "그런데, 그 뒤에도 이종족에 대한 전쟁은 하지 않았지만, 이종족을 노예로 부리는 법은 그대로 있었다면서요? 그런데도 제국이 꽤 오래 유지 되었네요?" 그라함 대제국은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라함이 제국의 초대 황제로 등극한 뒤로 거의 100년간이나 유지 되다가 멸망하고 지금 현재의 11개의 국가 (중대륙, 북대륙, 서대륙에 각각 3국씩, 남대륙에 2국)로 나뉘게 되었다. 100년동안 한 나라로 지냈던 탓에 지금까지 같은 언어를 쓰고 교류도 활발한거 보면 그라함 대제도 꽤 훌륭한 왕이었던 모양이다. 단지, 그 이종족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 옥의 티라면 티일까... 그걸 아직도 받들고 있는 나라가 바로 날 노예로 팔았던 라센이라는 국가였고, 다른 나라도 쉬쉬 하면서 음으로 교류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같은 사람도 노예로 사고 파는 모양이니 더 할말은 없지만... 그라함 제국이 무너지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이들이 바로 이종족들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북대륙의 세 나라중 두 나라인 새클턴 왕국과 로스 왕국이었는데, 그 덕분인지 이 두 나라는 이종족들과의 교류가 원활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와 같은 반란이 그라함 대제가 죽은 뒤 거의 50년이나 지난 후에 이루어진 것이 이상했다. 이종족과의 전쟁으로 그라함 대제가 살아 있었을 당시에도 그라함 제국의 병력은 많이 약화되었을게 뻔한데 말이다. "하긴... 이종족들의 힘도 많이 약화 되어서 힘을 기르느라 그렇게 시간이 걸렸던 걸까요? 내 질문으로 인해 그 동안 다른 이야기를 하느라 낭만적인 로맨스에 대한 흥분이 가라 앉았던 안젤라와 마시의 눈빛이 또다시 은근하게 빛났다. "아냐, 아냐... 거기에도 또 다른 일화가 있지." 안젤라의 말에 마시도 뒤질새라 잽싸게 입을 열었다. "그라함 대제는 '신의 축복'이라는 보석을 손에 넣었다는 거야." "'신의 축복'이요?" 내 질문에 두 아가씨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앞을 다투어 입을 열었다. "그 '신의 축복'은 인간이 이종족들에 비해 너무 능력도 없고 힘도 없으니까 이를 가엽게 여기신 신이 내려주신 건데, 이걸 얻는 사람은 무슨 소원이든 단 한가지를 들어주는 보석이래." "헤에, 그래요? 정말 무슨 소원이든?" "그래. 그런데 신기한건 이 보석을 얻는 사람에 따라 보석의 모양과 색이 변한다는 거야. 그래서 어느 누구도 이 보석이 어떤 색의 어떤 모양인지 모르고 단지 보석이라는 것만 알고 있대." "호오..." "그라함 대제는 항상 가슴에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보석이 박힌 금사슬을 달고 다녔는데, 그게 바로 '신의 축복'이라고 불리는 보석이었대. 그런데 그라함 대제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그게 '신의 축복'이었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죽을 때 자신의 무덤에 같이 묻어달라고 유언 했다나봐." "저런... 그런데 그게 '신의 축복'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죠?" "대제가 죽은 후에 그라함 제국이 멸망할때즈음 어떤 간 큰 도둑이 그라함 대제의 무덤을 도굴 했나봐. 거기서 우연치 않게 '신의 축복'을 손에 넣었는데, 그 도둑은 그게 '신의 축복'인줄도 모르고 단지 비싼 보석이라고만 여기고 있었다는 거야." "헤에... 그런데요?" "그런데 그 도둑에게는 부인이 있었는데, 어느날 그 부인과 대판 싸우다가 도둑이 이렇게 말해버렸대. '저놈의 마누라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만 하면 내가 소원이 없겠다.'" "헉.. 그럼 혹시..." "맞아. 그 도둑의 말이 끝나는 순간 도둑의 부인은 도둑이 보는 앞에서 마치 지우개로 지워지듯이 사라져버렸다는 거야." "저런... 말 한마디 잘못해가지고..." 내가 불쌍하다는 듯이 중얼거리자 마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의 불행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대. 그 도둑이 그래도 마음은 착했던 모양이야. 그 모습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도둑은 그걸 이기지 못해 그로부터 술을 마셔대기 시작한 거야. 그러다가 술에 취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걸 이야기 한 거고..." "그 사람은 그 도둑의 말에 혹해서 도둑을 죽이고 그 집을 뒤졌지. 하지만, 그 도둑이 '신의 축복'에 대한 이야기를 흘린게 한 두사람이 아니었나봐. 곧 '신의 축복'을 차지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의 목숨이 사라졌고 더욱이 그 보석이 어떤 모양인지도 모르니까 사태가 점점 커졌나봐." "나중에는 그 보석이 신이 인간을 가여이 여겨 내려준 것이 아니라 악마가 인간들 사이에 엄청난 피를 흘리게 하려고 던져 준 '악마의 유혹' 이라고 할 정도였어." "오... 그 말도 맞네요. 혹시나 삐둘어진 사람이 그걸 얻어서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멸망하는 거 아니예요? 으음... 그러고보니 대단히 위험한 물건이네요." "에이.. 설마, 정말 그런 소원을 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안젤라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하긴요. 그래서 그 뒤에 어떻게 되었어요?" 내 질문에 마시가 모든 걸 정리하는 듯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모습도 어떤 건지 모르는 보석을 가지고 난리치는 통에 사라졌었는데, 약 500년 전에 왈그린 나라의 어떤 시골 농부가 아주 허름한 차림의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식사를 대접해준 댓가로 그 보석을 얻었대. 그때는 그냥 쉽게 볼 수 있는 수정 모양을 하고 있었다는데, 농부는 그게 '신의 축복'인줄 모르고 그냥 손님이 준 댓가려니... 여기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런데 그 농부에게는 병이 든 딸이 한명 있었는데 손님이 수정을 주고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씻은 듯이 나았다는 거야." "오.. 그래서 그 수정이 '신의 축복'인 줄 알았던 거군요." "그래, 하지만 그때 그 농부는 워낙 시골에 살았던 사람이라 그냥 단지 손님이 신이 보내준 천사라고 여겼던 모양이야. 병에 걸려 오늘 내일 한 딸이 그냥 씻은 듯이 나으니까 너무 감격하여 수정하고 딸을 근처 신전에 받쳤다고 하던걸? 그게 그 보석의 마지막이었대. 그 뒤로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 "어? 하지만 그 보석을 받은 신전은요?" 이번에는 내 질문에 안젤라가 대답했다. "그 신전에 있던 고위 신관이 현명했던 분인가봐. 농부에게서 수정과 사연을 들은 그는 위험이 닥칠 줄 알고 신관들을 다른 곳으로 피난 시키고 자신도 종적을 감췄대. 그래서 그 뒤로 아무도 종적을 모르게 된 거지." "헤에... 그럼 그 고위 신관이 가지고 도망간거군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자신 혼자 도망가지 않고 신관을 정리한 거 보면 나쁘게만 볼 수 없지 않을까?" 안젤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건 그래요." "그런데 안젤라, 만약 네가 그 보석을 손에 넣으면, 넌 무슨 소원을 빌거니?" 갑작스런 마시의 질문에 안젤라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더니만 곧 얼굴을 발그레 하게 붉히고는 입을 열었다. "나, 나는... 아주 아주 멋~ 진 사람과 불타는 연애를 해보고 싶어. 물론 그 사람과 결혼한다는 전제 조건으로 말야. 마시 너는?" 안젤라의 말에 마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가락을 입술에 척 걸치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곧 이어 입을 열었다. "호오, 그거 아주 멋지다. 으음... 그럼 나는 이 세상의 상권을 휘어잡는 멋진 여자 상인이 되어볼까나?" "오오... 넌 역시 너희 집안 일을 할 생각이구나?" "당연하지. 나는 요조 숙녀로 얌전하게 살 생각은 없다고. 아, 해인아? 너라면 무슨 소원을 빌 거야?" 갑작스레 질문의 화살이 나에게 돌아왔지만 나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싱긋 웃으며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저는 당연히 금의환향 이지요." '아니, 그냥 돌아가도 상관은 없지만... 한국으로 말야.' 제 9화 울~고 싶어라 (1) "아아... 봄이네..." 어떻게 하루 하루를 살다보니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와 있었다. 의외로 이 곳도 한국처럼 뚜렷한 사계절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보니 매일 같이 놀던 안젤라와 미즈도 다시 학교가 개학을 했기 때문에 일주일 전에 학교로 출발해버렸다. "아아... 쓸쓸해라... 쳇..." 바다 속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곳에 있었던 기간을 빼고도 내 나이를 계산해보면... "에휴, 내 나이... 한국으로 치면... 19살... 고 3이네... 한국에 있었으면 대학 때문에 걱정할 시기... 해민이 녀석, 공부 잘 하고 있을라나..." 조엘 방을 정리하고 나오는데 복도의 커다란 창 너머로 보이는, 벚꽃(으로 보이는.. 솔직히 진짜 벚꽃인지는 잘 모른다.)이 흐트러지게 핀 나무를 보자 왠지 기분이 싱숭생숭 해지면서 한숨이 나왔다. "에휴.... 젠장, 그러고보니... 영감탱이 때문에 이 세계로 끌려들어와가지구 작년 생일을 그냥 넘겨 버렸잖아? 체엣, 이왕이면 생일 선물 받은 뒤에 끌고 올 것이지.. 에엣, 그러고보니 올해도 그냥 넘겨버렸다. 에엥... 그래봤자.. 여기서 내 생일 챙겨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더욱 더 의기소침해진 나는 죄 없는 머리만 박박 긁어대다가 기껏 깔끔하게 묶은 머리가 지저분해지자 혼자 스트레스 받으며 머리를 묶고 있던 가죽끈을 거칠게 풀어버렸다. "에잇... 괘니 이사안 새아으 해가이고... (괜히 이상한 생각을 해가지고 <= 지금 가죽끈을 입에 물고 있느라 제대로 된 발음이 안되고 있음. - 작가 주- ) 한국에 있을때는 머리가 약간 자라 지저분해지면 엄마가 먼저 챙겨줘서 미용실에 가곤 했었는데, 이 곳에서는 날 챙겨주는 사람도 없고 미용실도 없고... 덕분에 지금 나는 커트 머리에서 어깨까지 닿는 단발 머리가 되어 있어 항상 가죽끈으로 머리를 묶고 다녔다. "아아.. 처량한 생각만 떠오르는 구나... 봄이라서 그런가?" "뭘 혼자 중얼중얼 거리고 있는 게냐? 그렇게 할 일이 없어?" 머리를 묶으며 힘 없이 천천히 걷고 있는데 뒤에서 해럴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 놀라서 뒤를 돌아보는 나에게 해럴드 집사가 한 뭉치나 되는 서류를 나에게 던졌다. "자, 할 일이 없으면 이거나 기사단 숙소에 가져다 주고 와." "예에..." 기운 없는 표정으로 서류를 받아들자 해럴드 집사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거렸다. "왜 기운이 없어? 어디 아픈 게냐?" "에헤헤.. 아뇨.. 그냥 좀... 그럼 다녀 오겠습니다." 의아한 표정의 해럴드를 뒤로한 채 나는 얼른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급한 일이 아닌 이상, 복도에서 뛰면 해럴드 집사에게 혼난다. - 막상 건물 밖으로 나오자 따뜻한 봄의 기운에 마음이 더욱 싱숭생숭 해졌다. "아아... 날씨 조오오오~~타. 이런 날에는 데이트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서류를 가져다 주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금방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사이, 이름 모를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걷고 있는데 처음 들어보는 낯선 목소리가 날아왔다. "이봐, 거기." "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보니, 그 곳에는 마치 중국식처럼 소매가 넓은데다 발등까지 덮을 정도로 긴 가운 비스므리한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서서 나에게 손짓 하고 있었다. 이제 공작가에서 살게된지 거의 반년이 다 되어가는 나였지만, 저택 내에서 처음 보는 남자였기에 그 즉시 그를 손님이라 여긴 나는 그에게 다가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무래도 정문을 지키고 있는 사병들이 들여보내준 사람이라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남자에게서는 뭐라 정의내리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전혀 낯선 것이 아닌 어떤 커다란 기운이 풍겨나오고 있었기에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내가 이렇게 예의를 차려 정중하게 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남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근차근 살펴보더니 한박자 뒤에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지?" '머냐... 이 인간은...' 꽤 먼 길을 걸어온 듯 먼지 투성이인 그 남자는 짙은 회갈색 머리에 회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눈썹이 굵은 편인데다 눈이 둥그스름한게 아니라 거의 직사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눈을 살짝 내리뜨기만 해도 무지 매서운 눈길로 노려보는 것 처럼 보였다. 뭐, 그렇다고 그 남자의 눈길에 쫄아든 것은 아니지만, 손님인지도 모르고 신분도 모르는데 함부로 대할 수가 없어서 성의껏 대답해주었다. "해인이라고 합니다." 내 말에 고개를 한번 기우뚱한 남자는 손으로 턱을 턱 받치면서 입을 열었다. "성은 없나? 흐음.. 평민인가보군.. 뭐, 아무래도 상관 없지. 그래, 나이는?" "18세.." '아마도...' 왜 이런걸 물어보는지 몰라 얼떨떨해하며 대답하는 나에게 그가 다시 한번 질문을 했다. "너... 정령술사냐?" "엣?" 물론, 내가 정령을 볼 수 있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지만, 그건 내가 절반은 정령... 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 정령사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에... 그게... 아닌것 같은데요... 정령술사란 정령이랑 계약을 맺은 사람이잖아요. 저는 정령이랑 계약을 맺은 적도 없고... 물론... 내가..." 혼자 중얼 중얼 이야기를 하는데 그 중년 남자는 내 이야기를 끝가지 듣다 말고 그냥 쓰윽 날 지나쳐 걸어가기 시작하는 거였다. "어어?" 이런 황당한 상황을 처음 겪은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벙벙하게 그 자리에 서 있는데, 날 지나쳐 갔던 그 중년 남자가 몇걸음 가다가 내가 따라오지 않는다는 걸 느꼈는지 멈칫 하더니 뒤를 돌아봤다. "뭘 그리 멍청히 서 있는 거냐?" '뭐, 뭐냐... 이 자기 멋대로인 인간은...' 자신을 따라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기에 나는 얼른 발을 놀려서 그 사람의 뒤에 따라붙었다. '거참... 보통은 내가 손님을 안내해야 하는 거 아냐? 이건 마치 내가 이 사람의 시종 같잖아?' 속으로 이 황당한 상황을 가만 냅둬도 될지, 아니면 내가 얼른 앞장을 서야 할지 갈등하고 있는 사이, 이 제멋대로의 중년 남자는 척척 걸어가 공작가의 정문에 당도하자 마치 자기네 집에 온 양 머뭇거림 없이 정문을 열고 보폭도 당당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 어어...."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공작가의 가족에 저런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너무 당당학 들어가는 그 중년 남자의 모습에 나는 내가 혹시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닌지 다시 한번 머리속의 기억을 검토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검토하고 또 검토해봐도 저런 남자에 대한 데이터는 떠오르지 않자 더럭 겁이 났다. 혹시나 저 사람이 몰래 들어온 것이라면 - 물론 몰래 들어온 사람이 저리 당당할 리가 없겠지만, 고난도의 술수를 쓰는 것이라면... - 저택 안으로 들어오도록 내버려 둔 난 큰일날테고, 그렇지 않고 그가 정말 손님이라 하면, 내가 손님을 안내하지 않고 어정쩡하게 손님 뒤를 따라 들어왔다는 걸 해럴드 집사가 알기라도 한 날에는... '그 날은 잠은 다 잤다... '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온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끼고 얼른 그 중년 남자 - 도대체 누군지 모르겠지만 - 를 멈춰서게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보다도 먼저 저택의 커다란 정문과 마주보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중앙계단에서 막 내려오고 있던 해럴드 집사가 그 중년 남자를 보고야 말았다. '허걱...' 해럴드 집사는 그 남자와 함께 그 뒤를 따라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날 보더니 눈썹을 미미하게 들어 올렸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 모르게 나의 잘못을 질책하는 표정... '우짜노~~' 내가 당황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해럴드 집사는 척척 계단에서 내려와 그 중년 남자의 앞에 딱 멈춰 서더니만...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스튜어트님." '역시~ 손님이었어어어어~~~ 큰일났다...' 해럴드 집사의 모습에 속으로 절규를 하고 있는데, 그 스튜어트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군 해럴드. 그런데... 이 아이는 누군가?" 그 순간 나는 경직될 정도로 긴장해서는 그의 입을 주시했다. 그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가는 오늘 밤 잠은 다 잔것이기 때문이다. 해럴드 또한 긴장한 목소리로 - 그는 항상 공작가 하인이 잘못하는 것은 자신이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해서, 잘못한 것을 걸리는 날에는 아주 확.실.한 교육을 받게 된다. - 그 중년 남자에게 물었다. "저 애가 혹시 무슨 잘못이라도..." 그러나 다행이도 그 스튜어트라는 남자는 양심이 아예 없는 사람은 아니었는지 해럴드 집사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단지, 이 애를... 내가 데리고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의 말에 해럴드 집사는 물론 나까지도 두 눈이 둥그래졌다. '아니, 이 인간은.. 도대체 날 만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해럴드 집사도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그는 역시나 3대째 집사의 길을 걸어온 집안의 장손 답게 자신의 의아함을 접어두고 스튜어트란 남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건 제 마음대로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저 아이는 조엘 도련님의 시종이거든요." "흐음.. 그래? 알겠네. 그럼 내가 나중에 조엘님을 만나서 이야기 해보지. 그건 그렇고, 내가 식사를 못해서 출출한데..." "알겠습니다. 곧 음식을 마련해서 올려 드리겠습니다. 목욕 준비는..." "아아, 그건 내가 알아서 할테니 신경쓰지 말게." "알겠습니다." 스튜어트란 중년 남자는 해럴드 집사의 대답에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해럴드 집사는 그 길로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해럴드 집사의 뒤를 종종종 쫓아가며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궁금증을 드러냈다. "도대체 저 분은 누구십니까? 공작 집안분은 아니신건 맞죠?" "저 분은 노만 스튜어트라고 우리 공작가의 마법사시다." "헤에... 마법사라고요?" 제 9화 울~고 싶어라 (2) "저 분은 노만 스튜어트라고 우리 공작가의 마법사시다." "헤에... 마법사라고요?" "그래. 나는 마법쪽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능력이 꽤 뛰어나신 분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도대체 네가 스튜어드님께 뭘 어떻게 보였길래 저 분이 널 데리고 있길 원하는지 모르겠구나." 중얼중얼 거리듯 말을 늘어놓던 그는 마침 주방에서 막 나오는 메기 - 공작가의 시녀장이자 주방장의 부인이다. - 아줌마를 보고는 발걸음을 멈췄다. "아, 메기 마침 잘 만났어요. 지금 스튜어트님께서 오셨는데 식사를 못하셨다는군요. 마일즈에게 간단한 음식좀 부탁해주겠어요?" 가리가리한 몸매로 청순 가련한 아줌마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지 깡다구있는 매기가 그렇지 않아도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떴다. "어머, 스튜어트님이 돌아오셨어요? 정말, 그분은 소리 소문없이 가시더니 소리 소문없이 도착하셨네. 알겠어요. 지금 즉시 마일즈에게 부탁하죠." "고마워요." 해럴드는 다시 서둘러 주방 안으로 들어가는 매기의 뒤에다 대고 말하고는 나를 데리고 식당을 나섰다. "자, 말해봐라. 스튜어트님께 뭘 어떻게 한거냐?"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는 별로 한 일이 없는 걸요. 집사님 심부름으로 기사님들 숙소에 갔다 오는길에 그 분을 뵈었는데, 제가 먼저 발견한 것도 아니었어요. 그분이 먼저 절 부르셨는걸요. 그런더니 이름 물어보시고, 나이 물어보신게 다예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하자 해럴드 집사가 짐짓 눈을 부라렸다. "그게 사실이냐?" "정말이라니까요. 집사님 말씀대로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시간안에 제가 뭘 어쩔 수나 있었겠어요? 더구나, 전 그분이 마법사인지도 몰랐단 말예요." "거짓말하지 마라, 인석아. 그분을 척 보면 마법사라는 걸 알 수 있잖냐. 마법사 로브를 입고 계시니..." "에? 마법사 로브요?" 내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다시 되묻자 해럴드 집사가 의아하다는 듯 날 바라봤다. "그래, 마법사 로브. 그 분이 입고 계시는 로브가 바로 마법사들이 입는 옷이잖냐. 아니, 넌 그런 것도 몰랐단 말이냐?" "아니 뭐... 아무래도 엄청난 시골에서 살았으니까요." 내가 좀 창피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하자 해럴드 집사는 납득한 표정이면서도 한마디 했다. "거참... 얼마나 시골 벽촌이길래..." "그러니까... 저희 집 가족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보기가 엄청 어려운 곳이라고나 할까요?" "그, 그정도냐?" 내 말에 해럴드 집사의 둥그래진 눈이 날 돌아봤다. "아하하하... 예." 그날 저녁, 공작이랑 조엘이 궁에서 돌아 왔을때 스튜어트는 나와 해럴드 집사, 그리고 공작 부인과 같이 현관으로 나가 맞이했다. "오오, 이보게 노만, 이게 얼마만인가?" 공작은 마치 오랜만에 친구라도 만난 양 스튜어트를 보자 그의 손을 맞잡고 반가워했다. 그 모습에 스튜어트는 익숙한 듯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응답했다. "생각보다 일이 많아져서 늦어졌습니다. 공작님은 여전히 건강해 보이시는 군요." "허허허, 나야 뭐... 별다른 일이 있겠는가?" 그렇게 노만 스튜어트와 공작이 한차레 인사를 나누자 노만의 시선이 그 옆에 가만히 서 있던 조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조엘님께서도 건강해 보이시는 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노만님." 노만은 그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조엘 옆에 서 있던 나에게 힐끗 시선을 준 후 조엘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조엘님을 뵙자마자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좀 뭣하지만,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노만의 말에 조엘의 눈이 의아함으로 커졌다. "저에게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에게 그 아이를 주시면 안돼겠습니까? 아까 해럴드에게 물어본 바로는 그 아이가 조엘님의 시종이라고 하더군요." 노만의 말에 그렇지 않아도 조금 커져있던 조엘의 눈이 더욱 더 커진 채 나를 돌아보았다. 나야 아까 노만이 해럴드에게 날 데리고 있고 싶어하는 뜻을 내비치는 걸 들었기에 덤덤하게 있었지만, 어찌 된거냐고 묻는 듯한 조엘의 눈빛에는 할 말이 없었기에 모르겠다는 듯 어깨만 살짝 으쓱여보였다. 나에게서 대답을 듣지 못한 조엘이 해럴드에게로 시선을 돌렸지만, 해럴드 또한 이유를 모르는 상태였기에 고개만 좌우로 흔들 뿐이었다. 그에 대답을 듯지 못한 조엘은 다시 노만에게로 시선을 돌린 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의 태도로 보아 이 집안에서 노만의 지위가 상당한 모양이었다. 조엘이 조심스럽게 대하고 공작 조차도 친구처럼 대하니 말이다. 하기야, 공작은 누구나에게 그리 대했지만... "저... 시종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다른 괜찮은 아이를 물색해 보겠습니다만..." 은근슬쩍 돌려서 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조엘의 말 속에는 날 주기(?) 싫다는 뜻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걸 알아들었는지, 노만은 잠시 아무말도 안 하고 물끄러미 조엘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만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물론 날카로워보이는 그의 인상에 비해 상당히 어색해 보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미소는 미소였으니까...- "훗... 아무래도 그 아이가 상당히 마음에 드셨나봅니다. 뭐, 저는 시종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저 아이에게 마법을 가르쳐볼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 조엘님의 시중을 들면서 틈틈히 저에게 마법을 배우게 하는 건 어떠실련지..." "엣?" "노만님의 제자를 말씀입니까?" "마법이요?" 공작과 조엘을 맞으러 나왔던 사람들의 입에서 놀라움에 찬 소리가 터져나왔다. 나 또한 노만의 말에 어리둥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갑자기 뜬금없이 마법이라니...' 주위 사람들이 놀라워 하는 것에도 아랑곳 없이 노만은 계속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마법에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 아이에게서는 희미하나마 마력의 기운과 진한 정령의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물어보니 정령사는 아니라 하고, 마법의 기운 또한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마법을 배운 적도 없는 아이가 이 정도라면... 제대로 마법을 배운다면 꽤나 괜찮은 마법사 혹은 정령사가 될 것 같습니다." 노만의 말에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 것이라면... 오히려 제가 부탁드려야겠군요. 부디 해인이를 잘 지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조엘은 곧 노만에게로 눈을 돌린 뒤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별말씀을... 저는 단지 흥미가 생겨서 가르쳐 보려는 것 뿐입니다. 마법도 안 배운 주제에 저렇게 마나를 뿌리는 녀석은 처음 보았거든요. 더욱이.. 정령사도 아닌데 정령의 기운까지 말입니다." 그러면서 날 바라보는 노만의 시선에는 무지 신기한 물건을 보는 듯한 흥미로운 눈초리라 나는 왠지 께름직해 슬쩍 시선을 피하는데 해럴드 집사의 질책이 날아왔다. "뭐 하는 거냐? 스튜어트님께 인사를 드려야지? 이제 네 스승님이 되실 분이 아니더냐?" "아? 아, 예.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인사하면 될라나?' 그렇게 노만의 제자가 된 후로 조엘이나 데니, 그리고 나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은 잘 되었다고 축하해주고 부러움이 담긴 눈길을 던졌지만, 노만의 제자가 된 뒤로 나는 하루 하루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게 되어 할 수만 있다면 제자가 된 거 뒤로 물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조엘이 직접 나서 잘 부탁한다고 한 마당이라 내가 이 집에서 가출하지 않는 한 나는 노만의 제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물론, 데니나 해럴드 집사의 말에 의하면 마법을 가르쳐주는 왕립 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이상 어느 마법사의 제자로 들어가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행운이라고 해도 지금 당장 무지 힘든 이상 사양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예전 영감님에게 내 친엄마가 마법사란 이야기를 들은 후 마법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서도 나는 꾹 참고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서는 여전히 조엘, 데니와 함께 훈련에 참가하여 검술을 배우는데, 이 검술이라는 것이 내가 아직 배우는 단계라서 그런지 점점더 힘들어졌다. 그래도 그 동안 배운 시간이 있어서 이제 겨우 검술이라는 걸 배우는데 그것도 한번에 다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한 동작을 배운 후 익숙해 져서 다음 동작을 나가곤 했다. 그러니... 이건 겨우 익숙해질만.... 하면 또 진도를 나가기에 더 힘들어지고, 거기에 또 익숙해질만... 하면 더 힘든 걸 나가니 매일 훈련이 끝나면 난 막말로 녹초가 되고야 말았다. 그런데 나보다도 더 열심히 훈련을 받은 데니나 조엘은 그냥 숨만 좀 거칠게 몰아쉴 뿐 멀쩡하게 씻고 출근하는 거 보면 정말 감탄을 금할수가 없었다. 뭐, 그들 뿐만이 아니라 기사들은 나와 함께 새벽 훈련을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오전, 오후 훈련이 - 뭐 이건 매일 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날은 오전만, 또 어떤 날은 오후 훈련만 하기도 한다. - 또 있다. 그러니까 하루종일 쉬고 훈련하고 당번 보초 서고 또 훈련하는 셈인데, 그런 일을 어떻게 견디는 건지... 정말 그런거 보면 기사나 사병이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그들에 비해 새벽 훈련으로 녹초가 된 나는 조엘을 재빨리 출근시켜 버린 후 - 왠지 어투가 좀... - 조엘의 방을 쉬엄 쉬엄 정리하면서 틈틈히 쉬는데다, 요즘은 봄단장을 끝낸 뒤라 해럴드의 일도 많이 줄어들어 오전에만 일을 후딱후딱 해치워 오후에 쉬거나, 아니면 오전에 할 일을 오후에 미뤄두기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만의 제자가 된 후로는 점심시간때 부터 조엘이 돌아올때까지 그의 시중을 들으며 마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에 일을 쉬엄쉬엄하기는 커녕 후딱후딱 해치워야 겨우 점심 시간에 맞춰 끝낼 수가 있었다. 그 뒤에는 노만의 점심 식사와 내 식사를 챙겨들고 노만에게로 향한다. 원래 이건 다른 시녀가 담당 했었다는데, 내가 제자가 된 후 아예 노만의 식사를 챙겨주는 건 내 몫이 되었다. 그렇게 저녁때까지 노만과 씨름을 한 뒤에 공작과 조엘이 돌아와 그의 시중을 들어주는 시간이 이제는 휴식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고 나서 저녁에는 노만이 내준 숙제와 씨름하는 한편, 해럴드 집사의 일을 도왔다. 원래 노만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해럴드가 나에게 강제로 일을 시키긴 했는데, 노만의 제자가 된 후로 내가 숙제를 부여잡고 끙끙 거리는 걸 보고 자신이 전담하려고 밤 늦게까지 그 나이드신 분이 일하는 모습에 왜 그렇게 양심이 찔리는지... 그래서 지금은 내가 나서서 일을 맡아하는 형국이었는데 덕분에 요즘은 예전보다 자는 시간이 두세시간 줄어버렸다. 아마 대충 봐도 밤 12시가 넘어서 잔 뒤 새벽 5시쯤 일어나는 형국... '쳇, 고 3 못지 않은 신세라니까...' 제 9화 울~고 싶어라 (3) '쳇, 고 3 못지 않은 신세라니까...' 그러나, 솔직히 학교 가서 저녁 늦게까지 지루한 수업을 받는데에 익숙해 있던 나는 처음에는 잠을 못자서 좀 피곤하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노만이 마법의 기초랍시고 마법이 어쩌고 저쩌고, 마법의 기본인 마나가 어쩌고 저쩌고를 가르쳐 줄때까지는 말이다. 뭐, 솔직히 마법의 정의나 마나의 정의라는 것은 우리가 한글 단어 뜻을 달달달 -물론 영어 단어는 외우지만... - 외우는 게 아니라 그냥 뜻만 대충 알고 있으면 되듯이 그러한 것이다... 라고 알고만 있었으면 되었기에 노만이 준 책을 다 읽어야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없었다. 물론 내용은 다 알고 있어야 하지만... 마법을 배우면서 힘들었던 일들은, 바로 그 뒤에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자, 대충 마나가 무엇인지 알았겠지?" "예." 그 동안 지겹게 읽었는데 모르겠는가? 물론 설명하라고 하면 더듬더듬 거리겠지만, 대충 뭔지는 알고 있다. 사실 노만도 처음에는 마나가 무엇인지 자신이 직접 설명해주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도 뭔지는 알지만 설명하기 어려운지 한참 버벅 거리다가 자신의 서재를 다 뒤엎다 시피 해서 찾아낸 '마법사로 가기 위한 기초 이론' 이란 책을 나에게 주며 읽으라고 했었다. 그게 내가 노만에게 받은 첫 숙제였다. "좋아. 그럼 1서클이란 무엇이라고 했지?" "마법을 시전하려면 마나가 필요합니다. 마법사는 자신의 몸 속에 자연에서 얻은 마나를 쌓아두고 있다가 마법을 시전할때 사용하는데, 이 마나란 것은 항상 뭉쳐 있으려 하지 않고 흩어지려 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정량의 마나가 모이면 그 자리에 뭉쳐 있게 되는데, 이렇게 뭉쳐 있을 수 있는 최소한의 마나 양을 1서클이라고 합니다." 내가 막힘 없이 술술 대답하자 노만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잘 알고 있군. 그리고 1서클 이하의 마나를 사용하는 마법을 바로 1클래스의 마법이라고 하지. 이건 당연히 알고 있겠지?" "예." "좋아. 마법사란 자신의 몸에 축적해놓은 마법을 사용해서 마법을 일으키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나를 자연에 있는 마나와 융합시켜 마법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때 미숙한 마법사 일수록 마법을 일으킬때 사용하는 대부분의 마나를 자신의 몸에 있는 것으로 사용하지만, 능숙한 마법사 일수록 자신의 것 보다는 자연에 있는 마나를 사용하지. 그렇기에 능숙한 마법사일 수록 더 많은 마법을 더 크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예." 라고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꽁시렁 꽁시렁 대느라 바빴다. '다 아는 이야기를 뭘 새삼스레...' "뭐, 그건 마법을 많이 사용하다보면 자연스레 익힐 수 있는 것이고... 그럼 해인아, 마법사는 마나를 어디에 축적한다고 했지?" "예. 심장 부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맞다. 정확히는 심장 둘레라고 해야 하지. 1서클의 마나는 심장 주위에 마나의 고리가 하나 생기는 것을 의미하고, 2 서클은 그 위에 또 하나의 마나 고리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단위에 '서클'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지." "예." '다 아는 거라니까... 괜히 또 하구 그래...' "흠,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구나?" 설명하다 말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씨익 웃어보이는 노만의 태도에 나는 흠칫 거렸다. '엣... 들켰나?' 속으로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데 노만이 책상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뭐, 다 아는거 다시 이야기해봤자 지루할테고... 나도 하고싶은 말은 다했으니..." '그게 뭐야? 날 배려하는 것 같지만, 결국 할 말 다했으니 그만 한다는 거 아냐?' 지금 상황을 잠시 설명하자면, 나는 노만의 엄청 복잡한 방에 간신히 자리를 잡고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노만은 그 앞에 놓여 있는 커다란 책상에 살짝 기댄 자세로 서 있었다. 사실, 노만의 방에는 여러명이 앉을 수 있는 소파가 있었는데, 노만이 좁다고 해서 다 내다 놓고 책상하고 그 의자만 달랑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방 안이 얼마나 복잡한지 짐작할 수 있겠지? 하기야, 책상 - 본명은 커다란 식탁이다. 노만이 책상으로 사용해서 책상이라고 하는 거지... - 이 방 안의 1/4을 차지할 정도로 커서 방이 비좁아 보이는데 한 몫 단단히 하지만... 노만은 자신이 기대고 있던 책상위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을 하더니만, 결국 별 수가 없었는지 팔로 자신 앞의 책상위에 있던 물건들을 그냥 쓸어 버리듯이 옆으로 밀어 버리고는 나에게 손짓했다. "자, 이리 와봐라." 그는 나를 자신이 약간의 공간을 만들어 놓은 책상 위에다 올려 앉혔다. "편하게 앉아봐라. 그렇다고 다리를 쭉 펴지 말고. 다리를 구부리고.. 그래. 그리고 허리를 똑바로 펴고 어깨도 펴고, 팔은 그냥 다리 위에 올려 놓고..." 노만이 지시하는대로 앉아보니 그냥 양반다리 하고 앉은 꼴이었다. "좋아. 내가 보기에 너는 네가 본능적으로 마나를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정말 타고난 본능이지. 지금부터 내가 마나를 쌓는 법을 알려줄테니 절대로 말도 하지 말고, 움직이지도 말아라. 아마 너는 내가 마나를 넣으면 금방 눈치 챌게다." 그렇게 긴 설명을 늘어놓은 노만은 내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내 등 중간... 그러니까 심장이 있는 부근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곧 그의 손바닥에서부터 스멀 스멀하는 기운이 뻗어나와 부드럽게 내 심장을 감싸고 한바퀴 돌더니만 그대로 다시 노만 손바닥으로 돌아갔다. "후우..." 이게 쉽지 않은 과정이었는지 노만은 내 등에서 손바닥을 떼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알겠는냐? 마나 받아들이는 방법은 책에서 읽었겠지? 이러한 자세로 명상을 하면서 길게 호흡할 때 자연에 있는 마나가 따라 들어온다. 이걸 심장으로 인도하여 심장을 감싸듯이 쌓는 거야. 주의할 점은 1서클 이상의 양을 모으지 못하면 그 마나는 다시 네 호흡기를 통하여 밖으로 나가버리니까 앉은 자리에서 한번에 1서클 이상을 모으도록 해라." "예." 노만이 내 몸속에 넣어줬던 것은 내 정령의 기운과 비슷한 것으로, 어차피 엘라임에 정령의 기운 또한 마나의 일종이라는 것을 들었던 후라 나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 당장에 마나 쌓기에 몰입했는데... 이게 참... 정령왕의 딸 이라는것 덕분에 태어날때 부터 많은 양의 정령의 기운, 그러니까 마나를 가지고 태어나서 자연에 있는 마나건 내 몸 속에 있는 마나건 쉽게 느낄 수 있는 건 좋은데, 내 몸속에 있는 정령의 기운이 질투가 많은지 자연에 있는 마나를 받아들이는 걸 가만 두고보지 못하는 거였다. 그날 밤 기껏 잠 안자고 양반다리 하고 앉아서 길게 들이마쉬고 잠시 쉬었다가 내뱉으며 자연에 있는 마나를 끌어다가 심장을 둘러쌓라치면, 몸속을 유유히 돌고 있는 정령의 기운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이 마나와 충돌해서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꼭 정령의 기운이 내가 들여보낸 마나보고 '우리 집에 왜 왔냐!!' 하며 화를 내며 때려서 쫓아 내는 꼴이랄까? 아주 적은 양, 그러니까 한, 두번 정도 호흡 해서 들어오는 마나는 그냥 냅두는데 그 이상 들어오기만 하면 그렇게 득달같이 달려드는 거였다. 아무리 정령의 기운을 심장에서 멀~리 밀어놓고 마나를 쌓아도 쌓이기만 하면 눈치 채고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내쫓는데, 도저히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럴때는 정령의 기운이 꼭 다른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거참.. 피도 같은 혈액형이면 그냥 받아들이던데, 얘는 왜 같은 마나인데 이렇게 거부 하는 거지? 아, 혹시.. 마나에도 혈액형 같은게 있나? 그러고보니.. 내가 가지고 있는 정령의 기운은 물의 기운을 띤다고 했고... 자연에 있는 건 아무래도... 음.... 그래, 그래, 바람과 음... 이게 대지의 기운인가? 하여튼 띄고 있는 성질이 달라서 이렇게 반항하는 건가?' 그렇게 혼자 고민 고민 해봤자 잘 알지도 못하는데다, 또 누구에게 물어볼 - 노만에게 물어보기도 쫌 뭐하고... - 사람이 없던 나는 결국 밤에 한, 두시간 혼자 끙끙대다가 결국 마나 쌓는 걸 포기해버렸다. '에잉... 이럴때 엘라임이 있었으면 물어보기라도 할텐데... 하는 수 없지. 나~ 중에나 물어봐야겠다.' 하지만, 아무리 자연에 흐르는 마나를 쌓는 건 포기했다 하더라도 마법을 배우려면 심장 부근에 '서클'이라 불리는 마나의 고리를 만들어야 했기에 나는 방법을 달리했다. 자연에 있는 마나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내 몸속에 있는 정령의 기운을 가지고 마나의 고리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얘들아, 이리 온~' 실제로 그리 부른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정령의 기운을 이끌자 녀석들이 말 잘 듣는 애완견처럼 - 표현이 좀... - 우르르 몰려 들었다. 그런 기특한 - 이럴 때만... - 정령의 기운을 가지고 심장을 둘러쌓더니 의외로 쉽게 쉽게 마나 고리가 만들어지는 거였다. '헤에.... 짜식들... 새로 들어온 마나를 거부하더니만, 말 되게 잘 듣네?' 하나가 만들어지더니, 또 그 위에 하나가 더 만들어지고, 또 그 위에 하나가 더... 눈 깜빡... 할 사이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이지만, 어쨌든 짧은 시간에 무려 7개의 마나 고리가 떡 하니 만들어지는 거였다. '오옷~ 세상에나.... 그렇다면 내가 7 서클의 마나를 가지고 있었단 말야? 하기야.. 정령의 기운 만으로는 내가 상급 정령이랑 최상급 정령 중간 정도 되니까... 어쨌든 이걸로 된 건가?' 7개의 고리를 순식간이라고 할 시간에 만들고 드디어 '됐다~!'는 생각에 혼자 싱글벙글 하고 있는데, 내가 잠시 마음이 풀어진 사이 기껏 만들어놨던 이 7개의 마나 고리가 스르르 풀어지더니만 다시 평소대로 내 몸 안을 흐르는 것이 아닌가? '어어? 이거 참... 야, 다시 모여!' 이렇게 다시 정신을 집중 하면 또 다시 순식간에 마나 고리를 만드는 것들이, 그냥 냅두면 다시 스르르 풀어져 버렸다. 마나 고리를 만들었다 다시 풀었다 만들었다 풀었다 하던 나는 결국 그냥 포기하고 정령의 기운들이 저희 마음대로 흐르도록 내버려 뒀다. '이거 참.... 이게 뭐 이래? 계속 여기에 신경쓸 수도 없고... 에라 모르겠다. 마법 쓸때만 서클을 만들면 되겠지 뭐...' 제 9화 울~고 싶어라 (4) 다음 날, 마법을 배우는 시간이 되어 노만에게 갔더니 그는 날 보자마자 아주 당연한 걸 묻는 듯이, 아니 되어 있는 걸 확인하는 투로 말했다. "어제 1서클 정도는 모았겠지? 그럼 오늘부터 마법을 직접 해보기로 하자." 당연한 듯이 덤덤하게 말하는 모건의 태도 때문에 나는 누구나 - 그러니까 마법사가 되려는 사람이라는 조건 하에 - 늦어도 하루 온종일 정도의 시간이라면 쉽게 1서클 정도의 마나는 모으는 줄 알았다. 아주 나~~아중에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러나 몸 속에 있는 정령의 기운으로는 쉽게 서클을 만들 수 있지만, 자연에 있는 마나를 받아 들여 서클을 만들지 못한 나는 괜히 자격지심에 기가 죽어서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정령의 기운으로 서클을 만들 수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뭐...' 내가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고 약간 주춤 거리자 노만이 의심스런 눈으로 날 보긴 했지만, 곧 알게 될 거라고 생각 했는지 시선을 거두며 옆에 미리 준비해 둔 듯한 책을 펼쳐 보이며 나에게 손짓 했다. "좋다. 우선 처음 해볼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 책은, 아마도 1클래스의 마법들이 적혀있는 모양있데, 노만이 지적한 것은 그 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것이었는지 책의 맨 첫장에서도 처음에 떡 하니 적혀 있는 것이었다. "어펙트 파이어?" "그래, 쉽게 설명하자면 불을 일으키는 거지. 자, 이 책을 가지고 따라 나와라." 노만이 그렇게 말하며 먼저 몸을 돌리고 걸어 가기 시작했기에 나는 얼른 책을 챙겨 그의 뒤를 쫓았다. 노만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내가 새벽마다 훈련을 받는 연무장이었다. "어? 여긴 연무장인데요..." 그 곳에는 잠시 자유시간을 활용해 각자 자신의 실력을 다듬는 몇몇 기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많은 기사들과 사병들이 경기를 하거나 그 경기하는 모습을 구경하느라 왁작지껄 했다. "그래, 솔직히 이 저택 내에서 여기만큼 마음 놓고 마법을 연습할 수 있는 곳도 적지 않지. 무너질 건물이 있길 하냐, 아니면 불타버릴 초목이 있길 하냐, 그렇다고 내 방처럼 좁길 하냐. 기껏 해봐야 땅이나 파이고 흙이나 날리는 것 외에 더 있어? 그거야 쉽게 복구할 수 있는 거니 너 데리고 마법 연습하기에는 여기만큼 만만한 곳이 없지." "에...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기사가 아닌 우리가 사용하면 더글라스 기사님이 화내실텐데..." "훗, 화내봤자...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내가 그렇게 막가파인줄 아냐? 미리 말은 해놨다. 공식 훈련이 없는 사이에 연무장 구석좀 쓰겠다고." "아, 그러셨군요." 우리가 사람이 없는 연무장 구석으로 내려가자 그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뭔 일인가 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노만은 그런 눈길이 전혀 안 느껴지는지 아니면 그냥 무시하는지 아무일도 없는 것 처럼 덤덤한 표정으로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래서 나도 얼결에 그 옆에 같이 쭈그리고 앉았는데, 그는 언제 준비를 해서 가지고 나왔는지 모를, 내 손가락 다섯개를 모두 합친 정도의 굵은 초 한자루를 품에서 꺼내는 거였다. "어, 초네요?" "그래, 초다." 그는 그렇게 싱거운 대꾸를 하며 흙바닥을 약간 파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안에 초를 넣고 흙으로 빈 공간을 메꿔 고정시키더니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 이제부터 시범을 보일테니 잘 보거라." "예." 노만은 진지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펴서 손바닥이 하늘을 보게 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곧 그의 손바닥에서 아지랑이 같이 마나가 피어 올라 동그랗게 뭉치더니 그 마나가 갑자기 불의 기운을 머금으며 뜨거워지더니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야구공 만한 불덩어리가 형성되는 거였다. "오옷~" "휘유~" "와~" 그 모습에 나는 물론 주위에서 호기심의 눈초리를 던지던 기사들이 놀라움이 섞인 감탄사를 내뱉었다. 노만의 손바닥에 있던 그 야구공만한 불덩어리는 형성되자마자 곧바로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골프공만하게 줄어들었다. 그러자 노만이 마치 공을 던지는 포즈로 그 불덩어리를 초 위로 던지자 그 불덩어리가 그대로 초 위로 옮겨 붙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와..." 그런 신기에 가까운 기술에 내가 놀라워하는데 노만이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잘 봤겠지? 이게 바로 네가 맨 처음에 해야 할 것이다. 손바닥 위에서 불을 만들어낸 뒤에 그것을 이 초에 옮겨 붙이는 것. 원래 어펙트 파이어란 불을 일으켜 붙이는 것이 목적인 마법이니까. 자, 그럼 네가 한번 해봐라." "저어.. 그런데 스승님? 스승님께선 지금 주문을 안 외우셨잖습니까?" "그거야 주문을 외울 필요가 없으니까 안 외운거다. 사실 주문이라는 건 자신에 대한 암시라고 할 수 있지. 마법이란 마나와 함께 그 마나가 변해 일어날 상황을 강력하게 원하는 마음, 즉 염원이 필요한데 사람이 언제 어느때나 그런 강력한 염원을 낼 수 없으니 그걸 주문으로 인한 암시로 대체하는 거다. 주문을 외우면 분명히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란 암시로 인한 강한 믿음으로 염원과 같은 효과를 일으키는 거지. 뭐, 그냥 마법을 일으킬 능력만 있으면 주문을 외울 필요는 없어. 처음부터 주문이라는 것도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었고... 천년 전에 대 마법사 메이크피스가 정리한 걸 그대로 받아들여져 지금에 와서는 이 주문이 아니면 마법이 안된다... 라는 인식이 생긴 건데, 거기 주문이 뭐라고 나와 있냐?" 노만의 말에 나는 얼른 책을 펴서 읽었다. "에... 불을 다스리는 자여 지금 내가 간절히 바라노니 내 앞에 그대의 숨결을 나타내 다오... 네요." "흠, 다시 들어봐도 역시 센스가 꽝인 주문이라니까. 잘 봐라, 내가 말하는 게 더 났지. 손대면 따뜻하고 동글동글 귀여운 불아, 내 앞에 나타나라.. 짠." '누구 센스가 더 꽝인지 원...' 그렇게 웃긴 주문을 외웠는데 노만의 손바닥 위에는 좀 전과 똑같은 불덩어리가 나타나 타올랐다. 노만은 손을 휘젓는 것으로 그 불을 없애더니 다시 손바닥을 펴고 노래하듯 중얼 거렸다. "수리수리 마수리, 알라까미 또깔라미디 얍!" 그러자 이번에도 또 다시 그 불덩어리가 생겨나는 거였다. "오오..." 노만은 다시 손을 휘저어 그 불을 없애고는 말을 이었다. "잘 봤지? 뭐, 처음 마법을 하는 애들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심어주고자 그 주문을 외우면 되는 것으로 가르치는데, 어떤 멍청한 녀석은 클래스가 높아져 주문 없이도 불 하나 일으킬 정도의 능력이 있어 보이는데도 꼭 주문을 외우더구만... 이게 다 세뇌식 교육의 부작용이라니까. 하여간 내 말은 네가 정 못하겠으면 주문을 붙들어도 상관은 없는데, 주문이 마법을 일으키는 만능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법이란, 네가 마법 이론 책에서 읽었다시피 마나와 너의 강력한 염원으로 이루어 지니까. 아아.. 하기야 그 녀석들도 다 이런 이론을 꿰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주문에 매달린다니까.. 너는 나중에 그런 멍청이가 되지 말거라." 노만은 예전에 이 주문 가지고 뭔 일이 있었는지 굉장히 흥분해서 일장 연설을 토해 냈다. "예." "좋아, 그럼 한번 해봐라. 뭐, 처음이니까 주문에 매달리는 것 쯤은 용납해주지. 어떻게 하는 건지는 내가 하는 걸 봤으니까 대충 눈치 챘겠지? 불을 만들어내고 싶은 지점에 마나를 흘려 보내놓고 그 마나에 대고 강력히 바라는 거다. 불이 생기라고 말이다." "예이." 노만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노만 처럼 손바닥 위에다 불을 만들어보려고 그가 했던 것 처럼 손바닥을 펴서 하늘을 보게 하고는 그 위로 정령의 기운을 흘려 보내 손바닥 바로 위 허공에서 뭉치게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입으로는 주문을 외우면서 머리속으로도 간절히 중얼거렸다. '생겨라, 불, 생겨라, 불, 생겨라, 부우우울~' 그러나 내 손바닥 위에 주먹만한 마나의 덩어리가 - 정령의 기운이지만.. - 뱅글뱅글 돌고 있는데도 그것은 노만이 했던 것 처럼 불의 기운을 머금으며 불로 변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거였다. "에... 왜 안되죠?" 주문을 다섯번이나 더 외우고 머리속으로도 간절히 중얼댔지만, 불로 변할 기미가 조금도 없자 나는 다시 그 마나를 손바닥을 통해 몸 속으로 받아들이면서 노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노만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인석아, 네 머리속으로만 열렬히 기원하면 뭘 하냐? 너 지금 신께 네 마나를 불로 바꿔달라고 기도라도 하는 거냐? 마법은 네가 일으키는 거야. 네 의지를 마나에 불어 넣어야지." "아...." 노만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손바닥을 폈다. '의지를 마나에 불어 넣으라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기운은 물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게 불의 성질을 가지게 해야 한단 말이지? 불이라...' 불, 하자 자연스레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카사였다. '좋아. 카사가 불의 정령이니까... 카사에게서 느껴졌던 기운으로... 불... 불...'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나를 본질부터 불의 기운을 가지도록 간절히 바라며 정령의 기운을 손바닥을 통해 밖으로 밀어 내었다. 나중에 생각하면 지금 내가 하고 이는 일이란, 내 몸 속에 있는 정령의 기운들에게 '너 물의 기운을 버리고 불의 기운을 가져.' 라고 막무가내로 떼를 쓴 것이었다. 그러자 이 불쌍한 정령의 기운들은 그래도 내 몸의 일부라고 내 바램을 어떻게든 들어주려고 - 아마 자연에 흐르는 마나를 받아들이는 걸 끝까지 방해해서 미안해 하고 있었나 보다 - 자기 딴에는 애를 쓰는 듯 했지만 물의 기운이 갑자기 불의 기운으로 바뀔 리가 없었다. 그러자 얘네들이 안되겠다 싶었는지 내 손바닥을 통해 밖으로 빠져 나가서는 노만이 했던 것 처럼 뭉치는 것이 아니라 흩어져서는 자연에 있는 불의 기운을 머금고 있던 마나를 마구 마구 끌고 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 내가 손바닥 밖으로 내 보낸 마나는 내 주먹만한 크기였는데 그렇게 되다보니 내 주먹 크기의 두배 가까이 커진 마나가 내 손바닥 위에서 맴돌게 되었다. 그러자 노만이 걱정이 되었는지 다급하게 외쳤다. "해인아, 마법을 시행할때 마나의 양 조절도 중요한 거야. 마나가 적으면 마법이 실현이 안되지만, 마나가 많으면..." 하지만, 노만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했다. 그가 말을 끝나기도 전에 내 주먹의 두배 가까이 커진 마나가 내 강력한 염원을 받아들여 불이 형성되는가 싶더니, 마나가 너무 많아서 그런지 그대로 폭발해 버렸던 것이다. 퍼엉~!! "꽤엑~!!" 바로 코 앞에서 터진 불길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던 나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여러바퀴나 굴려간 뒤에 그대로 흙바닥에 고꾸라졌다. 왜 나무를 깎을때는 잘 안 들던 칼이라도 손가락을 벨 때는 여느 날카로운 칼 못지 않게 잘 베지 않는가? 이 경우도 그런 경우 같았다. - 맞는지는 모르지만...- "이 멍청한 녀석~!!" 갑자기 일어난 폭발에 너무 놀란 탓인지 헤롱헤롱 하는 정신으로 흙바닥에 얼굴을 쳐박고 있는데 갑자기 노만의 노한 목소리와 함께 내 몸이 뒤집어지더니 반사적으로 뜬 눈에 하늘이 보이고 그 옆에 놀람과 다급함이 어린 눈을 하고 있는 노만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는 별 달리 다친 건 없었는데 그래도 갑작스런 폭발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는지 앞머리와 눈썹이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고, 얼굴과 옷에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그가 내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얼른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털고 가슴 부위의 옷을 벗기기 시작하자 그제야 얼굴과 가슴 부위에 화끈 거리고 쓰라린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물이요!" 누군가가 외치며 건네준 물에 노만이 수건을 적시더니 인정사정없이 얼굴을 닦아내는데 화끈 거리는 통증 보다 노만이 닦아주는게 더 아플 정도였다. "우갸갸갸~!!" 그래도 입은 다치지 않았는지 노만의 손길에 내가 통증을 호소하는데 노만의 눈썹이 역팔자를 그렸다. "시끄러워 이 녀석아. 어쨌든 크게 다치지는 않았구나. 화상도 심한게 아니라 다행이다." 아무래도 폭발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가벼운 화상 정도로 끝난 모양이었다. 노만은 날 잡아 일으켜주며 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번 사건으로 잘 알았겠지? 마법을 함에 있어 마나 양의 조절은 중요하다. 이제 겨우 처음 마법을 시전하려는 주제에 왠 마나는 그렇게 많이 집어넣는단 말이냐? 모든 일에 있어서 넘치는 것은 차라리 모자름 만 못하다고 마나가 적으면 마법이 실현되지 않지만, 마나가 많으면 잘못 조절하단 방금처럼 폭발해버린다. 알겠냐? 하기야, 이번 일로 뼈저리게 깨달았겠지?" 제 9화 울~고 싶어라 (5) "하기야, 이번 일로 뼈저리게 깨달았겠지?" 물론 화상까지 입을 정도로 혼났으니 뼈저리게 깨닫기는 했다. 하지만, 이 마법이라는게 뼈에 새길 정도로 큰 교훈을 얻었다고 해서 금방 익숙해 지고 잘 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정말 기초중의 기초인 초의 불 붙이기 ( 어펙트 파이어 ) 마법 가지고 며칠이나 끙끙 대야만 했다. 게다가 폭발을 일으킨 그 다음날 다시 한번 시도할 때 여전히 마나의 양을 조절 못해서 몇번이고 다시 폭발을 일으키는 바람에 - 한번 폭발을 일으키니까 그 뒤부터는 노만이 아예 실드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다치지는 않았다. - 귀하디 귀한 초를 다섯 개나 깨부셨다. 한국에 있을때는 초라는 것이 흔한데다 비싼 물건이 아니지만, 이 곳에서는 여유롭지 못한 서민들은 감히 촛불로 어둠을 밝힐 엄두를 못낼 정도로 비싼 물건이었다. 그걸 하루만에 - 비록 마법 연습을 한다고 하지만... - 다섯개나 뿌사 먹자 노만의 얼굴에 굵은 힘줄이 하나 빠직 생기는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그 뒤에 노만에게 된통 혼나고는 내 앞에는 초 대신 굵은 장작이 하나 자리했다. 하지만, 장작도 초가 장작으로 교체된 날에 10개나 뿌사먹고 그 다음날에도 10개 뿌사 먹은 뒤에 나는 겨우 겨우 장작에 불을 옮겨 붙이는 데 성공했다. 물론... 장작으로 옮겨 붙은 불은 잘 타지 않고 곧바로 꺼져 버렸지만... 하지만, 정말 그렇게 되기까지의 내 노력은 정말 눈물 겨운 것이었다. 옆에서 노만의 잔소리가 계속 날아들지, 주위에서 구경하는 기사들과 사병들이 자꾸만 웃어대지... 정신 집중을 중요하게 치는 마법 연습에서 주위가 그리 어수선하니 어찌 제대로 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며칠만에 해낸 내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기사들과 사병들, 심지어 노만까지도 이런 나의 대단한 재능은 알아보지 못하고 처음 할때 몇번... 폭발을 일으킨 거 가지고 나에게 '폭탄맨' 이라는 별명을 붙여버렸다. 다른 보통 마법사들은 처음에 시작할 때 마나가 너무 미약해서 가지고 있던 마나를 다 쥐어짜내야 겨우 커다란 불덩어리가 만들어진다는데, 나는 쪼금만 잘못 제어하면 마나가 너무 많아져서 폭발이 일어나버리니 마나를 세밀하게 조정하지 못하는 한 마법을 사용하게 할 수 없게되기 때문에 오히려 평범한 마법사들 보다 마법을 익히는 것이 두세배는 늦어지는 것이었다. "거참... 처음부터 많은 마나를 타고 나는 것도 좋은 것만은 아니구만..." 겨우 겨우 초에 불 옮겨 붙이기 (어펙트 파이어) 마법을 익히고 - 비록 초가 아니라 장작에 불을 옮겨 붙이는 거에 불과 했지만... - 그 다음 마법인 라이트 (주위를 밝히기 위한 빛의 구를 만들어 내는 마법, 정식 마법 명칭은 '댄싱 라이트') 를 시도하다가 다시 한번 폭발을 - 이번에는 빛의 폭발이었기에 실드도 소용이 없었다. - 일으키고 말았다. 그 때문에 한동안 눈이 아파 뜨지도 못하고 낑낑 거리던 노만이 겨우 시야를 확보하고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 앞에 서 있던 나는 할 말이 없었기에 고개만 푸욱~ 수그리고 발 끝만 쳐다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내 폭발 경력은 화려하게(?) 진행되었다. 공중에다 냉면 그릇으로 한 그릇 정도 되는 물의 양을 만들어 내는 마법을 배울 때는 그나마 자신 있게 시도했는데, 그 자신이 너무 넘쳤는지 냉면 한 그릇의 양이 아니라 커다란 다라에 가득 담길 정도의 물이 생겨나 흠뻑 젖기도 했고, 알람 마법을 배우는데 소리를 일으키는 마법의 마나 양을 조절 못해서 귀청이 떨어지게 만들 뻔한 적도 있었다. "아아... 마법이라는 것도 정말 어려워... 차라리 학교 다니는 게 더 쉬울 거 같아. 그건 그냥 디립다 외우기만 하면 됐는데 말야..." 내 몸을 흐르는 정령의 기운을 다루는 거라면 그 동안 엘라임에게 받은 교육도 있고 해서 자유 자재로 세밀하게 다루는 것은 자신 있는데, 마법을 실현 하려고만 하면 얘네들(정령의 기운)이 의욕이 넘쳐서 그런지 밖으로 내보내기만 하면 주위에 있는 마나들을 마구 마구 끌어들이는데 그 양을 정말 제어할 수가 없는 거였다. 노만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나 보다는 주위 자연에 분포하고 있는 마나를 사용해 마법을 실현하는 건 고위 마법사들이나 하는 고난위의 테크닉이라고 하더니, 정말 고난위는 고난위다. 이 정령의 기운들이 맨 처음 마법을 한번 해보려 할때 주위의 마나 끌어들이는데 재미를 들였는지 그 뒤에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내가 의도하지도 않아는데도 얘네들이 밖으로 나오면 스스로 마나를 끌어들이는데 정말 난처했다. 그렇게 해서 자꾸 폭발을 일으켰더니만 보다 못한 노만이 내가 마나를 조절할 때까지 마법 익히는 것을 금지해버렸다. 솔직히 마나가 폭주해서 폭발을 일으키는 건 그래도 어느 정도 마법에 빠져든 마법사들이나 일으키는 일인데 나는 초반부터 그래버렸으니 노만이 황당해 하는 것도 이해가 가고,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렇다고... 마나 양을 조절할 수 있을 때 까지 부려먹다니..." 노만은 모든 마법 사용을 금지했지만, 단 한가지 마법을 새로이 가르쳐 주면서 허용했다. 그것은 '컨트립' 이라는 마법인데, 이건 마법 그 자체를 익히는 것 보다는 마나를 어느 정도 모은 마법사들이 마나를 좀 더 자유 자재로 다루도록 훈련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하기야, 이 마법 자체가 어딘가에 꼭 필요해서 개발 된 것이 아니라 재미로 개발된 것으로 마법 시동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장난'하는 마법이다. 흔히 아이들이나 마법을 모르는 어른들의 눈을 현혹하기 위해서 많이 쓰이기도 한다는데, 하기야 공중에서 아름다운 음악이 들려오거나 허공에 꽃이 피었다가 시들거나,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오거나, 무지개가 생겨 나는 등등의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이 마법이다. 이건, 환영 마법과 비슷한 것도 같지만, 환영 마법은 실체가 없는 영상을 허공에 보이게 하는 것 뿐이지만, 이 마법은 실제로 그 물체가 허공에 생기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의 냄새가 나게 한다거나, 아니면 향기로운 냄새가 나게 한다거나, 아니면 뽀얗게 쌓여 있는 먼지를 일으켜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거나 춤추게 하는 건 실제로 먼지들을 움직이고 공기를 변형 시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이것들은 마나가 너무 많아서 마법이 폭주 하더라도 맛있는 냄새가 고약하게 변하거나 먼지가 산개하여 사방에 덮이는 것 외에 위험할 게 없었기에 노만이 안심하고 나에게 익히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뭐, 그리하여 노만과 같이 마법을 연습하는 대신 혼자 연습하고 나중에 검사맞는 매일이 지속되던 어느날, 노만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작스레 자신의 방 정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그의 방 정리를 도울 수 밖에 없었고 말이다. 노만의 방은 조엘의 방 못지 않게 큰 방임에도 불구하고 구질 구질한 잡동사니 (내가 보기에는 말이다) 너무 많이 얽키고 설켜 있어서 크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못하는 창고 같았다. 그런 곳에서 아직 초급에서도 상 초급자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방 여기 저기 구석에까지 끼여 있는 책들을 조심스레 꺼내 모아서 정리하는 일이었다. '후와... 정말 대단해... 바다 속에 있는 내 친엄마의 서재에도 책이 엄청나게 많던데... 아, 그러고보니 엄마는 7클래스의 마법사라고 했지? 으음... 그럼 대단한... 건가? 거겠지?' 나는 노만의 방 중앙에 있는 커다락 탁자 밑에 쑤셔박혀 있는 책들을 다른 잡동사니들이 와르를 무너지지 않게 조심스레 꺼내면서 목소리만 높여 탁자 위에서 물건을 정리하는 노만을 불렀다. "스승님, 궁금한게 있는데요?" "뭔데?" 노만은 그래도 괜찮은 선생님이라서 어느 상황에서건 내가 묻는 데에는 착실하게 대답해주었다. - 물론 모든 선생님이 그렇겠지만서도...- 그래도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대답해준다는 건 - 비록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 건성으로 대답하지만... - 그의 마음이 누구와는 달리 넓은 편이라는 걸 새삼 느끼며 나는 질문을 이었다. "마법사치고 7클래스의 마법사라면, 대단한건가요?" 그러자 곧장 노만의 대답이 날아왔다. "아니." "에? 별거 아니예요?" "아니, 엄청난 거다." "헤에... 그럼, 7클래스에 든 마법사들은 별로 없겠군요. 한... 100명 정도쯤?" "핫, 100명? 어림도 없는 소리. 지금 현재 마법사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마법사 중에서 7클래스를 넘긴 마법사는 30명에 불과하다. 그 중 단 3명이 8클래스의 마법사지. 현재 대마법사의 칭호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지." 노만의 말을 들으며 내가 있던 곳 근처에 있는 책을 모조리 꺼낸 내가 탁자 위로 머리를 들며 말했다. "오.. 그럼 7클래스의 마법사라는 건 정말 대단한 거네요." 탁자 위에 있던 물건을 열심히 분류하던 노만의 툭 던지는 듯한 대답이 들려왔다. "대단한게 아니라 엄청난 거라니까." "예, 엄청난거... 후후후..." 그 엄청난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내 친엄마였기에 나는 괜히 자랑스러워서 어깨가 으쓱 거리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노만이 날 힐끔 바라보더니 물었다. "뭘 그렇게 좋아하냐? 네가 아는 사람 중에 7클래스의 마법사라도 있었냐?" 그의 질문에 나는 혹시나... 노만 또한 마법사라니까 알까 싶어서 기대어린 마음에 물었다. "아... 혹시요..주디스 오스번이라는 마법사 아세요?" 그러자 노만이 인상을 찌푸리며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주디스 오스번? 흐음.. 주디스 오스번이라...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혹시, 네가 말한 7클래스의 마법사냐? 으음... 하지만 7클래스의 마법사 중에 그런 이름은...." 잠시 동안 중얼 중얼 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노만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는지 탄성을 내뱉으며 날 바라보았다. "아, 혹시... 네가 말한 그 주디스 오스번이라는 마법사가 요즘 사람이 아니라 100년쯤 전의 사람 아니냐?" "에? 그건 잘 모르겠는데..." 내가 엄마에 대해 아는 것은 200살이 되어서 7클래스의 마법사가 되었고, 그 뒤에 얼마 있지 않아 엘라임의 기운과 마족의 힘으로 나를 낳았다는 것 밖에 없다. 솔직히, 엄마가 몇세에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 엘라임의 말에 의하면 200년은 더 살수 있다고 했으니 하프 엘프가 400년에서 500년 정도 산다는 걸 감안하면 대충 200살에서 300살 사이 정도? 엘라임이랑 은거를 했다는 건 알지만 몇살에 은거를 했다는 걸 모르니 몇년 전까지 인간 세상에서 활동을 했는지 모르는 건 당연했다. 내 말에 노만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그 마법사 정령술도 사용할 줄 알았냐?" 그 질문에 나는 엘라임에게 들었던 게 있어서 얼른 대답할 수 있었다. "아, 예, 예. 마법보다는 정령술이 더 뛰어났다고 들었어요." "음, 그렇다면 그녀가 맞는 거 같네. 약 100년 전의 사람인데... 마법사 보다는 정령사로 더 유명했지. 왜냐하면 그녀는 물의 상급 정령까지 계약을 맺은, 상급 정령술사였거든. 아마, 하프 엘프라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마법은 5클래스 정도 익힌 걸로 알고 있는데? 하기야, 그것도 대단한 실력이긴 하지만 정령술에 비하면 한 수 뒤쳐지는 건 사실이라서... 음, 하지만 어느날 돌연히 사라져 버렸지." 노만의 말이 계속 이어짐에 따라 내 가슴이 점점 두근 두근 거리는 강도가 세어졌다. "저, 그 분이 그렇게 유명하세요?" "그 당시에는 꽤나 유명한 걸로 알고 있다. 음.. 어쩌면 지금까지 어디선가 살고 있을지 모르지... 하프 엘프니까 말야. 상급 정령사지, 5클래스의 마법사지, 거기다 엘프의 피를 타고나서 엄청난 미인이지... 어디 왕실이나 귀족에 소속되어도 좋을텐데, 그녀는 어디에 소속되는 걸 싫어해서 떠돌아 다녔거든. 그래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거겠지만..." "하, 그러니까 실력이 뛰어나서 알려진 게 아니라 사방으로 떠돌아다녀서 알려진 건가요?" "아니야, 아까도 말했다시피 그녀는 상급 정령술사니까... 돌아다닌 건 그녀에 대한 소문이 더욱 퍼지는데 일조했을 뿐, 그녀가 돌아다니지 않아도 상급 정령사인 이상 이름은 널리 알려졌을 거다. 특히나 나 같은 마법사나 정령사들 사이에서는 말이다." "헤에... 그렇군요..." 제 9화 울~고 싶어라 (6) "아니야, 아까도 말했다시피 그녀는 상급 정령술사니까... 돌아다닌 건 그녀에 대한 소문이 더욱 퍼지는데 일조했을 뿐, 그녀가 돌아다니지 않아도 상급 정령사인 이상 이름은 널리 알려졌을 거다. 특히나 나 같은 마법사나 정령사들 사이에서는 말이다." "헤에... 그렇군요..." 그래도 유명하다는게 어디인가? 나는 친엄마가 그렇게 대단하다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져서 해벌죽 한 얼굴로 작업을 계속 했다. 그러던 와중, 탁자 밑에서 꺼낸 책들을 차곡 차곡 정리하는데 그들 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어? 정령술?" 한국에서 항상 학교에 가지고 다니던 교과서들 보다 거의 두배에 가까운 두께지만, 노만이 가지고 있는 책 치고는 좀 얇은 축에 속하는 그 책은 다른 책이 새까맣게 손때가 타 있는 거에 비해 잘 보지 않은 탓인지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긴 했지만 깨끗했다. 나의 혼자말을 들었는지 노만이 고개를 돌려 내가 들고 있던 책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아아... 그게 거기 들어가 있었군. 그것도 너에게 읽히려고 했는데... 어쨌든 이왕 이렇게 발견한거 가지고 가서 읽어봐라. 나는 정령 친화력이 없어서 정령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너는 정령과 계약을 맺지 않았으면서도 정령의 기운이 느껴지니... 나중에 정령과 계약할 때 도움이 될거다. 거기에 정령과 계약 맺는 방법도 나와 있거든..." "헤에..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노만의 말에 나는 책을 쭈욱 훑어보면서 정령과 계약을 맺는 방법이 적힌 곳을 찾고 있는데 그 위로 노만의 냉정한 말이 떨어졌다. "이건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마나 제어도 못해서 툭 하면 폭주 시키켜 폭발을 일으키는 '폭.탄.맨' 주제에 나 몰래 정령과의 계약을 맺으려 하지는 않겠지?" 그의 말에 뜨끔해져서 - 한번 해볼라고 했었기에...- 그를 바라보자 노만이 정색을 한 채 날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비록 정령사가 아니지만, 정령과 계약을 맺을 때 그리는 마법진이 시공간의 틈새를 느슨하게 만드는 거라는 건 안다. 너 처럼 왕초보에 마나만 많이 가지고 있어서 제어도 못하는 놈이 그런 고난위도의 마법진을 그렸다가 폭주가 된다면... 그건 네가 지금까지 했던 기초 마법의 폭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나게 큰 일이 일어날 거다." "윽...." 노만의 말이 부엌칼이 되어 내 가슴을 푹푹 찔렀기에 나는 상당히 기가 죽어버려서 그의 말대로 정령과 계약을 맺기 위하여 노만 몰래 마법진을 그리는 건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밤에 그 책을 진지하게 읽어보니 노만의 말대로 정령과 계약하기 위하여 정령을 부를 때 시공간의 경계를 느슨하게 하기 위하여 마법진을 사용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아직 정령을 직접 만나지 못해 정령에 대해 감을 잡지 못하는 초보자들을 위해서 사용할 뿐이었다. 일반 사람들은 자연에 있는 정령을 보지 못할 뿐더러 계약을 맺는 정령은 정령계에 머물고 있는 정령이기 때문에 차원이 다른 그들을 좀 더 쉽게 부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마법진을 사용할 때는 계약을 맺으려는 자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라던지 선배들이 옆에서 마법진 운영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일단 하급 정령이라도 계약이 성공하면 그 다음에 다른 정령과 계약을 맺을 때는 정령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마법진 까지는 필요 없고 정령을 부르는 매개체, 예를 든다면 불의 정령과 계약을 맺고 싶으면 불이, 물의 정령과 계약을 맺고 싶으면 물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쓰여 있었다. "오호라... 그것 뿐이 아니라 정령과 친화력이 강하기만 하다면 초보자라도 마법진 없이 정령을 불러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쓰여 있군." 거기까지 읽은 나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나는 자연에 있는 정령들까지 볼 수 있고 대화까지 할 수 있는 몸, 이런 내가 마법진에 의존하여 정령계에 있는 정령을 불러낸다는건 무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마법진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지금 당장 해보려는 것이다. "훗... 그래도 매개체는 필요하겠지? 으음... 우선은... 어느 정령을 불러볼까나? 아앗.. 그래 바람의 정령을... 므흐흐흐..." 나는 기대에 들떠서 공중에 떠다니는 실프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내 시선을 느낀 실프들이 이상한 놈도 다 있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슬금슬금 나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 개의치 않고 침대 위에 단정하게 앉아 정령의 기운을 사용해 공기와 공명을 하려고 노력하며 머리속으로는 실프의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진실로 바라는 마음으로 주문을 외웠다. "바람을 다스리는 자여, 지금 내가 간절히 원하오니 내 부름에 응답해다오." 그러자 갑자기 내 바로 앞의 공기가 요동을 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회오리 바람을 일으켜 내 방의 물건들을 다 날려 버렸다. '허걱... 이렇게 요란하게 나타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밖에서 할걸... 저거 언제 다 정리하지?' 요란하게 날아다니는 물건들을 보면서 나는 해럴드 집사가 방에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나는 해럴드 집사의 방에서 같이 묶고 있는데, 그는 집사라서 그런지 꽤 넓은 방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조엘이나 노만같이 커다란 방은 아니지만... 그래도 방 두개에 거실까지 있다. 욕실도 따로 달려있고...) 그런데 내가 이 곳에 맨 처음 조엘의 시종으로 왔을 때 해럴드 집사가 날 교육 시킨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옆방을 줬는데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오늘 공작가의 하인 한명이 실수로 다쳐서 해럴드 집사는 지금 그를 데리고 병원에 갔는데 아직 안 오고 있었다. 그렇게 엉망으로 나뒹구는 물건들을 바라보며 혼자서 걱정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는데 어느덧 내 방안에 휘몰아치던 바람이 멎더니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부른 자가 바로 너냐?] 그에 깜짝 놀라 앞을 바라보니 내 앞에 투명한 여자가 서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20대 중반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투명한 초록빛의 생머리는 부드럽게 뒤로 흘러 내리고 있었고, 머리에는 고깔처럼 생긴 모자를 썼는데, 그 고깔모자 끝에는 하늘하늘한 망사가 달려 있어 그녀의 초록빛 생머리를 부드럽게 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하얀 빛의 투명한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망토가 한번씩 펄럭일때 부드러운 바람이 일었다. 손에는 창을 들고 있었는데 창에 달린 술이 바람에 나폴나폴 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처음 본 나는 화들짝 놀라 어벙하게 묻고 말았다. "어? 저... 누구세요?" 그러자 그녀의 이마에 혈관마크가 - 정령에게도 그런게 생기는 줄은 몰랐다- 빠직 하고 생기더니만 그녀의 목소리 톤이 조금 올라갔다. [너 지금 장난하냐? 네가 날 불렀는데 네가 모르면 어떻게 한다는 거냐?] "앗, 저기.. 저는 바람의 정령을 불렀는데... 기껏해야 실프들이 나오는 줄 알고..." 그녀의 모습에 나는 다시한번 당황하며 어색하게 묻자 그녀의 이마에 혈관 마크가 하나 더 생기고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실프라고? 그렇게 강하게 불러놓고서 실프가 나올 거라 생각했단 말이냐?] 그러니까, 정령을 불러낼때 정령을 불러내는 매개체에 쏟아붇는 마나의 양이 많고 부름이 강렬할 수록 상급 정령이 나온다고 책에 적혀 있었다. 한마디로 계약할때는 자신의 능력에 맞는 정령이 불려오는데 그게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소리일까나? '게다가 내가 처음 해보는데 강력하게 부르는지 약하게 부르는지 어떻게 아냐....' 그래도 그녀에게서 풍겨지는 기운과 말투로 보아 상급 정령이라는 건 분명한데 처음보는데 누구인지 알 수가 없던 나는 다시 조심스레 물을 수 밖에 없었다. "저기... 그럼 누구시죠? 바람의 정령이신건 맞는데..." 그러자 그녀는 오만한 포즈를 취하더니만 위엄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바람의 최상급(나이트라고도 함) 정령 실레스틴이다.] "오옷, 당신이 바람의 최상급 정령이었군요. 이야... 내 능력이 최상급 정령을 불러낼 정도라니..." 혼자 스스로의 능력에 감탄하고 있는데 실레스틴이 재촉했다. [야, 어쨌든 나랑 계약 하는 거지? 계약 할려고 불러낸 거 아냐? 그럼 빨랑 빨랑 하자고.] "아아, 예. 그럼 우리 계약합시다." 내가 대답하자 실레스틴이 허리를 숙여 얼굴을 내게 가까이 가져오더니만 내 이마에 부드럽게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이것으로 계약이 이루어졌다.] "에헤헤... 첫 계약 성공!! 이야, 처음부터 이렇게 대단한 정령이 나올 줄이야... 다음에는 어느 정령을..." 흥이 나서 싱글벙글 하던 나는 곧 내 방의 엉망진창인 모습을 보고는 울상이 되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젠장... 방 정리를 해야하잖아?" 그러자 내 바로 옆에서 실레스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그러길래 평소에 방 정리를 잘할 것이지...] 그 말에 발끈한 내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뭡니까? 이게 당신이 그렇게 만든 거잖아요." 그러자 그녀가 억울하다는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며 대꾸했다. [내가? 내가 언제?] "당신이 나타날때 바람이 휘몰아쳐가지고 이렇게 된 게 아닙니까?" [어머머, 얘는... 그게 어디 내탓이니? 계약을 맺을 때는 매개체가 나타는 정령의 힘에 비례하여 강력해 진다고. 이렇게 좁은 방에 나 같은 최상급 정령을 불러낸 네 탓이야.] 그 말에 찔끔한 나였지만, 내가 어디 실레스틴을 부르려고 했단 말인가? "윽... 당신이 나올 줄은 몰랐단 말예요. 그런데 왜 안 가고 있어요?" 그러자 그녀가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도리질 쳤다. [어머머.. 얘는... 왜 이렇게 무정하니? 나 인간계에 온 게 이번이 처음이란 말야.. 그런데 매정하게 가라고 하다니... 나 구경도 좀 해보자. 그리고 걱정 마, 얘 나는 다른 정령들이랑은 달라서 힘을 크게 쓰지 않는 한 내 능력으로 이 곳에 있을 수 있거든? 내가 여기 있다고 해서 네 마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너무 뭐라고 하지 마라. 훗훗훗.. 나는 운도 좋지. 정령계에서 임무를 맏기 전에 인간이랑 계약을 하게 될 줄이야... 어머머, 얘네들이 네 방에 있는 실프들이구나...] 왠지 그녀의 그런 모습에 역시 바람의 정령 답다... 라는 생각이 든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가 내 방에 있는 실프들과 장난 치는 걸 냅두고 방을 정리... 하려다가 그냥 내일을 기약하고 지저분한 것만 대충 한 곳에 놓아둔 뒤 방을 나섰다. 그러자 실프들이랑 장난하던 그녀가 황급히 내 뒤를 따라 나왔다. [어어? 어디 가는 거야?] "또 다른 정령들과 계약을 맺으려는데... 내 방에서 하면 아무래도 곤란할 거 같아서 밖에서 하려고요." 하지만 거실을 지나쳐 복도로 나가려던 나는 멈칫하고 다시 몸을 돌려 내 방으로 들어왔다. [어? 이번에는 왜 다시 들어오는 건데?] "아아... 다른 사람들 눈에는 뜨이고 싶지 않아서 말이죠. 실레스틴, 이왕 이렇게 온거 나좀 밑으로 내려줄래요?" [그래, 그래... 그런거야 쉽지 뭐.] 창문을 열며 부탁하는 나를 방긋 방긋 웃으며 살짝 안아든 실레스틴은 곧바로 창문을 훌쩍 뛰어 넘어 밑으로 내려갔다. [오우 야.. 너 되게 마나가 많다? 계약할 때도 알아봤지만... 정말 많은데? 음.. 너 인간 맞아?] 내 마나를 사용하여 나를 땅으로 내려준 실레스틴이 신기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음... 인간... 이라고 할 수 있겠죠. 혼혈이예요. 인간의 피도 흐르고 엘프의 피도 흐르고..." [헤에, 그렇구나.] 나는 순찰을 도는 사병들과 기사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며 그들이 순찰을 돌지 않는 정원 깊숙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제 9화 울~고 싶어라 (7) 나는 순찰을 도는 사병들과 기사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며 그들이 순찰을 돌지 않는 정원 깊숙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공작가의 저택은 한 국가에서 알아주는 귀족 집안의 저택 답게 무지 넓었다. 저택을 들어오는 대문에서 부터 저택의 현관문까지 걸어서는 30분이 넘게 걸리고 그에 알맞게 정원도 엄청 넓어서 사병이나 기사들이 많아도 그 구석 구석까지 순찰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게 정령을 불러내는 곳을 저택 내를 잘 알고 있는 내가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평소에 몇군데 봐둔 곳도 있고 말이다. 실레스틴과 함께 그런 곳 중 한 곳을 찾아간 나는 그 즉시 단정하게 앉아 촉촉한 정원의 흙바닥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고는 마나를 불어 넣으면서 간절한 마음을 담아 주문을 외웠다. "대지를 다스리는 자여, 지금 내가 간절히 원하니 나의 부름에 응답하라." 그러자 내가 손을 대고 있는 땅바닥이 갑자기 쑥쑥 올라오기 시작하더니만 내가 놀라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자 그 흙기둥은 곧 오그라들고 불어나고 하더니 건장한 구리빛의 근육을 가진 성인 남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머리는 짙은 흙갈색인데다 키가 거의 180정도 되는 잘 생긴 30대 장한은 그렇게 솟아나오자마자 엉거주춤 앉아 있는 날 바라보며 실레스틴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날 부른 자가 바로 그대인가?] 그러자 내가 대답하기 전에 옆에서 흥미진지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실레스틴이 불쑥 끼어들었다. [어머, 어머, 어머... 이야, 이번에는 노에아넨이네? 너 참 대단하다. 처음 정령을 불러내는데 모두 다 나이트급 정령을 불러내니?] "하... 이번에도 나이트급 정령인가요? 저는 대지의 정령은 처음 봐요." 그리고는 난 곧바로 그 노에아넨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예, 제가 바로 당신을 불러낸 자입니다. 저와 계약하시겠어요?" 그러면서 나는 걱정스레 그를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그와 계약을 하는데 실레스틴처럼 이마에라도 입을 맞추면... 부끄러운 일 아닌가? '더구나 실레스틴이 보고 있는데서... 차라리 실레스틴을 보내버리고 계약할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를 하며 노에아넨의 반응을 기다리는데 역시나.. 노에아넨은 상체를 숙여 내 입술에 살짝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댄 다음 말했다. [계약은 이루어 졌다.] 노에아넨이 숙인 상체를 펴고 입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벙~ 찐 상태로 가만히 있기만 했다. 너무 충격을 받은 상황이라 머리 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바람에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거였다. [어머? 왜 그러는데? 계약이 되었다니까?] 내 상태가 이상했는지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실레스틴이 내 옆구리를 콕콕 찌르자 그제야 제 정신을 차린 나는 너무 처량한 마음에 밤 하늘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별들이 오늘따라 와이리 예쁘노..." [뭐야, 너 이상하다?] "으흐흐... 내 첫키스가... 허허허... 이리 허탈할수가... 생애 첫 키스였는데... 이리 허무하게... 이럴줄은 몰랐나니.. 아아... 인생이란 허무한 것이어라..." 솔직히 노에아넨이 실레스틴 처럼 나에게 뽀뽀를 해올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었지만, 그게... 그게... 설마 입술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흐미... 으째 이런 일이..." 그나마 다행인것은 노에아넨이 나쁜 맘을 먹고 그런 것도 아니고, 그가 여자의 모습이 아닌 그래도 꽤 잘 생겼다고 할 수 있는 남자 모습인거랄까? 게다가, 더더욱 중요한 것은 아주 찌~인한 키스가 아니라 입술과 입술이 아주 사~알짝 맞댄 것 뿐인 유치원생들의 뽀뽀 수준인거다. "그래, 그래... 뭐, 불한당에게 뺏긴 것도 아니고... 잘 생긴 남정네랑 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지." 혼자 위안을 하면서 고개를 내리자 멀뚱멀뚱 날 쳐다보고 있는 노에아넨과 실레스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얼굴이 나도 모르게 화끈거리는 거였다. "뭐, 뭘 보는 거예요?" [아니 뭐... 신기해서. 인간은 다 그런 건가?] 실레스틴이 누구에게랄것 없이 질문을 던지자 노에아넨이 슬쩍 받았다. [글쎄... 나도 솔직히 인간은 처음 봐서....] "냅둬유.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유." 내가 그렇게 톡 쏘아 붙이고 슬금 슬금 자리를 옮기기 시작하자 노에아넨과 실레스틴이 졸졸 내 뒤를 쫓아왔다. [이봐 계약자, 이번에는 어디 가는 거야?] "마굿간 뒤쪽이요." [거긴 왜?] "이번에는 불의 정령을 불러보려고요. 그런데 불의 정령을 부르려면 불이 필요하잖아요. 미처 생각을 못해서 장작을 준비 못했어요. 마굿간 뒤에 가면 불을 붙일 쓸만한 나무가 있을 거예요." 호기심에 가득 찬 두 나이트급 정령을 데리고 나는 조심조심 마굿간 뒤로 가서 쓸모 없어 보이는 바짝 마른 나무 널빤지 조각 몇개를 주워들고 다시 조심조심 저택 뒤쪽의, 인적이 없는 곳으로 갔다. '에휴... 그나마 어펙트 파이어(불 옮겨 붙이는 마법)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이야. 아직도 제어를 못해서 폭발시키는 수준이었다면 불씨 가지러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갈 뻔 했잖아?' 그 곳에서 두 나이트급 정령이 구경하는 가운데 널빤지 조각에 불을 붙인 뒤 정령을 부르는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이번에는 작은 모닥불 수준인 불이 갑자기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더니 그 곳에서 내 키만한 - 나이트급 정령이 모두 크긴 했지만... - 불꽃으로 이루어진 새가 나오는 것이었다. 불꽃임이 분명한데도 붉은 눈과 부리와 머리 위의 공작 같은 예쁜 벼슬과 꿩과 비슷하지만 무척 부드러운 꼬리가 너무 섬세해서 마치 살아있는 - 물론 살아있는 정령이니까 당연하겠지만... - 진짜 새를 보는 것만 같았다. - 그런 새가 실제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와... 너무 아름답다." 그 새는 무척이나 우아한 자태로 불꽃 속에서 살포시 날아와 내 앞에 서더니만 부리를 열어 실레스틴과 노에아넨이 처음 말했던 그 말을 똑같이 읇었다. [날 부른 자가 그대인가?] 역시 불의 정령 답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고 그 불꽃의 새가 물었다. "예. 당신과 계약을 맺고 싶습니다." 내가 실레스틴이 뭐라 입을 열기 전에 재빨리 대답하자 그 불꽃의 새가 마치 웃는 것처럼 부드럽게 휘더니 우아하게 날아 내게 다가와 늘씬하고 긴 목을 기울여 부리를 살짝 내 뺨에 가져다 대었다. 그 부리 또한 불꽃으로 된데다가 불꽃에 휩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뜨겁지 않았고, 오히려 따뜻했다. [이것으로 계약은 성립 되었다.] 그러자마자 뒤에서 실레스틴과 노에아넨의 감탄사가 튀어 나왔다. [이야아~ 내 계약자는 정말 대단해. 불러내는 족족 다 나이트급 정령이네? 이번에도 불의 나이트급 정령인 셀레아나라니...] 실레스틴의 말에 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래, 당신이 왜 안 튀어나오나 했다..' 그 뒤를 이어 노에아넨도 솔직한 감탄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대단하군. 내가 알기로 하급 정령이라도 인간이 세 속성 이상의 정령과 계약을 맺는 것도 어렵다던데... 모두 다 나이트급 정령과 계약을 맺다니...] "훗훗훗, 당연하죠. 저는 보통 인간이 아니라고요.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단 하나뿐인 존재가 바로 저랍니다." 두 나이트급의 감탄 어린 말에 나는 괜히 으쓱으쓱해져서 불의 정령을 불러내기 위해 피워놓은 불을 끄고 다시 자리를 옮겨 마굿간으로 다가갔다. 마굿간 밖에 있는, 말들이 마실 물이 담긴 커다란 물통이 목적이었다. 그러자 내 뒤를 쫄랑 쫄랑 - 표현이 왠지...- 따라오는 세 정령 중에서 이번에도 실레스틴이 입을 열었다. [계약자, 이번에는 또 어디 가는 거야?] "마굿간이요. 이제 마지막으로 나머지 한 정령과 계약을 맺으면 끝나요. 후후후... 아, 그런데 말이죠, 자꾸 계약자, 계약자 하지 말고 이름을 불러줄래요? 제 이름은 해인이예요. 한국식으로 하면 이해인 -아앗, 처음으로 한국 성이 밝혀졌습니다. - 이고 이곳 식으로 하면 해인 오스번이 되려나? 뭐, 성은 아무래도 상관 없으니까 이름을 불러줘요, 이름." [그래, 그래. 그럼 해인이라고 부르지 뭐... 그런데 아직 계약할 정령이 남아 있어?] "그럼요. 지금까지 세 속성의 정령과 계약했으니 아직 한 속성이 남아있잖아요. 우훗훗.. 사실 제일 기대가 돼요. 저는 다른 정령은 몰라도 물의 정령은 하급 정령 부터 상급 정령까지 다 봤거든요. 후후후.. 물의 나이트급 정령은 어떻게 생겼을라나..." 그렇게 들떠서 설명하는 통에 나는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세명의 나이트급 정령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르 갸웃 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 것을 미쳐 알아채지 못했다. 마굿간은 저택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유는 냄새도 나고, 또 말들이 시끄럽게 소란을 피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기사들도 이곳 순찰을 잘 안했다. 아마도 뭔 일이 있으면 말들이 먼저 소란을 피울 것이라 여기기 때문인지 아니면 저택을 둘러싼 담을 수비하는 사병들과 기사들, 그리고 그 곳에 걸린 마법을 철썩같이 믿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덕분에 나는 안심하고 그 곳에서 물의 정령과 계약을 맺을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주위를 둘러보아 아무도 없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한 나는 내 뒤를 따라 온 세 정령에게 누가 오는지 봐달라고 당부한 뒤에 물로 시선을 돌렸다. 제 9화 울~고 싶어라 (8) 그래도 주위를 둘러보아 아무도 없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한 나는 내 뒤를 따라 온 세 정령에게 누가 오는지 봐달라고 당부한 뒤에 물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세 정령을 불러낼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세 정령은 그냥 누군가가 나타나기만을 - 사실 하급 정령이 나타나도 좋았다. - 간절히 바랬다면, 이번에는 다른 속성의 정령들과 마찬가지로 나이트급의 물의 정령이 나타나기를 바랬다. 이런 내 바람에 응답이라도 해 주듯 내 주문이 끝나자마자 커다란 물통에 들어 있던 물들이 갑자기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 "오옷...." 그리고 하늘로 치솟아 올랐던 물들이 다시 땅으로 떨어져 내리자 그 곳에는 당당한 위압감을 내뿜고 있는 용이 허공에 둥둥 떠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슴같은 뿔, 메기같은 수염, 뱀 같은 길다란 몸에는 비늘이 덮여있고, 등줄기를 따라서는 갈기가 나 있으며 매의 발 같은 발이 네개가 달려 있었으며 앞발에는 여의주로 추측되는 푸른 빛과 우유빛이 뒤섞인 커다란 구슬을 쥐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그 멋진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 뒤에서 아무 감흥 없이 보고 있는 세 나이트급 정령을 향해 물었다. "혹시.. 저게 드래곤인가요?" 그러자 제일 먼저 실레스틴이 대답했다. [아니, 쟤는 변종 드래곤이야. 진짜 드래곤은 도마뱀이 커다랗고 뚱뚱해진 모습을 하고 있지.] 거기에 노에아넨이 덧붙였다. [등에 날개가 달려 있고, 머리에 뿔이 달려있고 말야.] 셀레아나도 설명에 한 몫 거들었다. [이렇게 생겼지] 그러면서 셀레아나가 날개를 휘젓자 그 날개로부터 불덩어리 하나가 튀어 나오더니만 실레스틴과 노에아넨이 설명한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했다. 물론 내 손바닥보다 조금 큰 모습이라 멋있다기보다는 귀여웠지만... "헤에... 그렇군요." 그러자 내 호기심으로 인해 잠시 소외되어 있어던 물의 정령이 날 불렀다. [이봐요, 불렀으면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왜 불러낸 겁니까?] 굵고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였지만, 본의아니게 소외된 탓에 화가났는지 조금 노여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세 정령들이 맨 처음 나타나서 한 말과는 전혀 다른 말을 나에게 건네는 거였다. "아아, 미안해요. 모습이 신기해서 그만.... 어쨌든, 불러낸 이유야 당신과 계약을 하기 위해서죠." 그러자 그 물의 나이트급 정령 - 물의 정령인건 알겠는데 처음 보는 모습이라 그렇게 추측했다. - 은 아무 말 없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고 뒤에 있던 세 나이트급 정령이 그 대신... - 이라고는 뭐하지만 - 입을 열어 반응을 나타냈다. 실레스틴 [에? 왜?] 노에에넨 [웬 계약?] 셀레아나 [그럴 필요가 있나?] 다른 때와는 다른 그들의 반응과 내가 불러낸 물의 정령 반응에 어리둥절해서 그들만 번갈아바라보고 있는데 허공에 둥둥 떠있던 물의 용이 스르르 내려와 얼굴을 내 눈높이에 맞추고 입을 열었다. [저와 계약을 하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당신은 이미 물의 정령왕과 계약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의 말에 오히려 내가 놀라 물의 정령 - 이름이.. '엘레스트라'다 - 을 바라보았다. [내가요? 아니요, 안 했는데...] 내 대답에 뒤에 있던 세 정령과 앞의 한 정령, 도합 네명의 나이트급 정령이 놀라서 날 바라보았다. [그게 사실입니까?] [믿을 수 없어.] [그럼 이게 어찌된 거지?] [물의 정령왕님의 기운이 왜 계약.... 아니 해인이 네 몸에서 풍겨나는 거지?] 엘레스트라를 시작으로 실레스틴, 노에아넨, 셀레아나가 입을 열었다. "물의 정령왕의 기운... 아아..." 나는 그제야 그들의 반응이 왜 다른 정령을 불러낼때의 반응과 달랐는지 알 수 있었다. 내 몸에 있는 정령의 기운이 엘라임거니까 물의 정령왕의 기운을 풍기는 걸테고, 그들은 그걸 보고 내가 물의 정령왕과 계약을 맺은 줄 오해했던 것이다. 하기야, 정령사에게는 자신과 계약을 맺은 정령의 기운이 묻어 있으니까 그런 오해를 할 만도 했다. "에... 하지만 계약을 맺은 건 아닌데...." 내가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자 네 쌍의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가득 담긴 눈이 나를 향했다. 그들의 의아해 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생각하기에 아주 아~주 멋진 생각이 떠올랐다. "저기... 엘레스트라, 당신이 보기에 내가 물의 정령왕과 계약을 맺는게 가능하다고 보나요?" 엘라스트라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비록 내가 정령왕님과 계약을 맺은 인간은 한번도 보지는 못했지만, 너라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훗, 좋아요. 그럼 지금 당장에 계약을... 므흐흐흐..." '기다려라 영감탱이. 내가 계약을 하기만 하면... 푸하하하~~' 나는 두 손을 슥슥 비비면서 커다란 물통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엘라스트라가 뭔가 불안한지 얼른 자리를 비켜주었다. 정령왕과 계약을 맺는 건 다른 정령과 계약을 맺는 것과 차원이 틀렸다. 다른 정령들을 불러낼 때는 불러내는 자의 능력에 맞는 정령이 나오지만, 정령왕은 달랐다. 정령왕을 불러내는 주문은 따로 있는데다가, 정령왕이 나오는 건 불러내는 자의 능력이 되는지 안 되는지에 관계 없이 무조건 나왔다. 그런데다가 정령왕이 불려 나올때는 그가 정령왕이 이쪽에서 활동할 수 있게끔 마나를 충분히 대줄 수(?) 있는 지 시험하기 때문에 능력이 안 되는 자가 정령왕을 불러내려 했다가는 정령왕이 채 불려오기도 전에 몸에 있는 마나를 모조리 빼앗겨 죽고 만다. 이게 다 책에 쓰여 있는 것이었지만, 그걸 알고 있는 난 엘라스트라에게 내가 가진 마나로도 엘라임을 불러내기가 충분한지 아닌지 물어본 것이었다. 어쨌든, 그가 가능할 것 같기도 했겠다,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물통에 담긴 물을 향해 두 팔을 내뻗고 주문을 외웠다. "물을 다스리는 모든 자들의 왕이여, 지금 내가 간절히 바라오니 내 부름에 응답하소서." 제 9화 울~고 싶어라 (9) "물을 다스리는 모든 자들의 왕이여, 지금 내가 간절히 바라오니 내 부름에 응답하소서." 나는 솔직히... 물의 나이트급 정령인 엘레스트라도 그렇게 멋지게 등장했으니까 물의 정령왕의 등장 하면 되게 멋있을 줄 알았다. 뭐, 엘레스트라가 등장할때보다 더 크게 물이 솟구친다던가, 아니면 사방으로 물이 방울 방울 퍼져나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던가 뭐 그런거 아닌 다른 거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게 웬걸.... 내가 주문을 다 외우고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커다란 물통 안에서 뽀글뽀글 하고는 물방울이 몇개 솟아 오르더니만 그러다가 그냥 쓰윽~ 하며 물기둥이 하나 솟아 오르더니 그게 엘라임의 모습으로 변했다. 올만에 보는 엘라임의 모습은 내가 가출했을때와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나는 머리도 많이 길어서 이제 머리를 뒤로 묶고 다니고 새벽 훈련에다가 일도 한 탓인지 어깨에 약간 근육이 생긴 것도 같은데 말이다. - 근육이라고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같은 큰 근육을 생각하면 곤란하다. - 그는 나타나자마자 무지 띠꺼운 표정, 그러니까 날 처음 이 세계로 데리고 와 바다 속 집에 데려다 놨을때 정신 차린 내게 처음 보여준 그런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틱틱대며 물었다. "왜 불렀냐? 가출아." '힉....' 내가 엄청 찔리는 표정을 짓자 엘라임의 입을 열더니 그 동안의 창피했던 내 행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멍청한 녀석. 그렇게 몰래 나가면 누가 모를 줄 알았더냐? 빤히 보면서도 그냥 눈감아 줬더니만 내가 모르는 줄 알고 희희낙낙 하더니만 노예가 되어 팔려갈 뻔 하지 않나, 그것도 모자라 하찮은 인간의 시종이나 되고, 그래 가출하니까 좋더냐?" "윽... 아니... 그걸 어떻게...." "맹한놈.... 네 놈이 다른 차원으로 가지 않는 이상 내 눈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물 없는 곳이 있더냐? 넌 그것도 몰랐지?" "그, 그럴수가..." 내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 엘라임이 기분 나쁘게 씨익 웃더니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가출해가지고 고생 고생 하는거 느긋하게 구경하면서 돌아오면 뭐라고 변명할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네가 불러주다니...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야. 그래, 왜 불렀냐? 가출한 건 뭐라고 변명할래, 가출아?" "아니... 그게... 나는..." 내가 엘라임의 박력에 밀려 말도 제대로 못하고 떠듬거리자 엘라임이 그걸 즐기는 듯한 표정으로 더욱 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네가 뭐?" 그 모습에 왠지 뭔가 무지 억울함을 느낀 나는 엘라임의 박력을 이겨내기 위하여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끌어 모아 입을 열었다. "계약해요." 아, 이 한마디 하는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는 그 한마디 하고는 온 몸에 기운이 빠져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은 내가 편히 그 자리에 주저앉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나의 이 한마디를 들은 엘라임의 눈썹이 하늘로 치켜 올라감과 동시에 엘라임의 이마에 혈관 마크가 하나 둘, 자그만치 세개나 생기더니만 그의 분노에 찬 외침이 울려펴졌기 때문이다. "뭐, 뭐시라? 계야아아아악~? 이 무슨 운디네 물에 빠져 죽는 소리냐?" 그와 함께 그의 분노에 공명을 한 커다란 물통의 물이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솟구쳐 오르더니만 그대로 나를 향해 쏘아져 들어왔다. "우갸갸갸~!!" 그 모습에 얼이 빠질 정도로 놀라 주저앉은 나였지만, 저기에 맞으면 최소한 갈비뼈 한두개는 부러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 얼른 투혼을 발휘하여 땅바닥에 주저앉은 몸을 아예 뒤로 뉘여 옆으로 잽싸게 굴렀다. 퍼억~ 데굴데굴 굴러가는 내 귀에 왠 가죽북 터지는 소리가 들려 내 몸을 오싹하게 만들었는데, 그와 함께 엘라임의 음침하고 무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흐흐흐... 그래, 네가 피했다 이거지? 새벽마다 훈련인지 뭔지 하더니만 피하는 실력이 쬐까 늘었구마이... 그래, 어디까지 피하나 보자." 웬지 불량배 같은 말투로 속삭이듯 말하는 엘라임의 태도는 지금까지 보아온 그의 모습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었다. 그에 나는 앞뒤, 좌우 생각할 것도 없이 무조건 소리치고 말았다. "으아아악, 잘못했어요. 잘못 했다구요오오~ 으갸갸갸~~" 그 와중에도 물들은 마치 채찍... 아니, 탄도 미사일 마냥 간신히 피하고 있는 나를 줄기차게 쫓아오며 애꿏은 땅을 내리쳤다. 결국 몇번에 걸쳐 땅을 때린 물줄기 덕분에 파헤쳐진 구덩이에 발을 잘못 디딘 나는 그 매서운 물줄기에 복부를 한대 맞고 말았다. 다행히 나의 이 위급함을 느낀 기특한 정령의 기운들이 얼른 내 배 주위로 몰려들어 배가 터지거나 장이 파열되는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뒤로 날려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마 내일쯤에 배에 커다랗게 멍이 드는 것도 피할 수가 없으리라. "으갸갸갸~~" 뒤로 한참 날려간 내가 중력의 법칙에 따라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데, 하필이면 땅을 눈 앞에 두고 떨어져내려 날 무섭게 만들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몸을 최대한 웅크려 최대한 충격을 피하는 것 뿐이라 두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웅크리는데 갑자기 무엇인가가 내 몸을 덥썩 잡아채는 것이었다. 덕분에 허공에서 정지한 내가 의아함과 안도감이 섞인 마음에 눈을 뜨자 땅이 바로 내 코앞에 있었다. 거리는.. 대충 50cm 정도? '휴우.... 떨어지는 줄 알았네....' 그 모습에 오한이 몸을 한번 훝고가며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는데, 훗.... 사실 그때는 안도감을 느낄 시간이 아니었다. 내가 바로 밑에 있는 땅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날 잡고 있던 무언가가 그대로 날 놔버렸던 것이다. 쿵~!! 덕분에 나는 방심한 상태 그대로 땅과 멋지게 해딩을 하고 말았다. "으켁~!!" 그런 내 위로 엘라임의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멍청한 놈... 내가 네 속셈을 모를 줄 알았냐? 네 속셈은 뻔하다. 너 나랑 계약을 맺어서 날 어떻게 해보겠다는 모양인데, 멍청한 놈, 정령왕이 그리 만만한 대상인 줄 알았더냐? 정령왕과의 계약이란 명령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부탁을 들어주는 것 뿐이다." "젠장... 그게 그거지..." 땅과 부딧혀 얼얼한 콧등을 부여잡고 몸을 일으키며 내가 투덜거리자 엘라임이 찌릿 노려보았고, 힘 없는 나는 얼른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코의 양 콧구멍 속에서 뭔가 주르르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 소매로 쓰윽 닦아보니 그것은... "헉? 코피닷!" 그것도 쌍코피였다. 내 인생 지금까지 애들과 싸우다가 코피 터져본 적도, 밤 새서 공부하느라 피곤해서 코피 터져본 적도 한번 없던 터라 내 코에서 흘러나온 피가 너무나 신기해서 바라보고 있는데 엘라임의 일갈이 떨어져 내렸다. "멍청아, 뭐 하는 거냐?" 그는 나에게 한걸음에 달려오더니 내 뒷목과 이마를 부여잡고 강제로 머리를 하늘로 치켜 올렸다. "우갸~!!"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라서 바라보는데 엘라임의 손이 차가운 물로 변하더니만 내 이마와 목덜미, 그리고 콧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흠, 어쨌든 네놈도 피가 나긴 나는구나. 그것도 빨간 피가..." '누굴 외계인으로 아는 건감?' 차가운 물이 얼굴을 쓸고 지나가자 시원함과 상쾌한 기분이 들었고, 그 덕인지 몰라도 코피도 금방 멎었다. 비록 엘라임이 코피를 나게 한 원흉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런 반응을 보이니까 나는 고맙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뭔 짓이냐고 화를 내야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는데 참 타이밍이 굳이게도 저쪽에서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기사 내가 소리가 안 들리게 결계를 쳐놓은 것도 아니고, 엘라임이 그런거에 신경쓸 위인도 아니었으니, 이런 소란을 순찰하는 사병이나 기사들이 못 들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달려오는 인물등 중에는 내 마법 스승인 노만도 끼어 있는 거였다. 노만은 한달음에 달려와 흙에 뒹굴어 엉망진창인 내 꼴과 사방을 보더니 다짜고짜로 나에게 다가와 알밤을 한대 먹였다. "멍청한 녀석... 갑작스런 거대한 마나의 진동에 놀라 달려왔더니만... 너 이녀석 내 충고에도 불구하고 정령을 불러낸답시고 혼자 마법진을 그렸지?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 정도에서 끝나 다행이지 혹시라도 잘못 되었으면 어쩔 뻔 했어?" 그의 말에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 그 동안 정신이 없어 눈치 채지도 못했다. - 마굿간 주위의 땅이 온통 뒤집혀 있었고, 엘라임이 사용했던 물이 담긴 그 커다란 물통은 언제 뿌사졌는지 산산 조각 나서 물들이 땅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허... 언제 이렇게 됐지?"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내 옆에 아주 흥미진진한 얼굴로 구경하고 있는 네명의 나이트급 정령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두 아는체도 안 한 채 나만 바라보고 있는 거였다. 게다가 엘라임도 무시하고 있는 터라 나는 슬쩍 엘라임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성격에 자신을 무시하면 가만 있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뭔일인지 엘라임은 그렇게 무시당하고 있으면서 무덤덤하게 -아니 날 노려보고 있기는 했다 - 있는 거였다. "어... 그러니까..." 뭐라고 물어봐야 할지 몰라 - '무시당하는데 가만히 있네요?' 라고 물어볼 수는 없지 않은가. - 입만 뻥끗뻥끗 대는데 엘라임이 이런 내 궁금증을 느꼈는지 설명해 줬다. "멍청한 녀석... 이 세계에 자신의 힘으로 올 수 있는 정령은 사람 눈에 보이는 것도 자신 맘이다. 지금 이 인간들은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야." "오..." 자연에 속한 정령들이 인간의 눈에 안 보이기는 하지만, 계약을 맺은 정령은 계약자의 마나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낸다고 알고 있기에 이들도 당연히 그런 줄 알았던 것이다. 새로운 사실을 알아 혼자 '그렇구나...'하고 있는 나에게 노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오'는 뭐가 '오'냐? 너 이녀석 다시는 내 허락 없이 이런 고위 마법을 썼다가는 가만 안 둘 줄 알아?" 비록 마법진이 그려져 있지는 않았지만, 땅이 다 뒤집혀 버린 덕에 노만은 마법진이 지워진 줄 아는 모양이다. 게다가 내가 노만에게 얻은 정령서적도 가지고 있었던데다 엘라임이 난리치는 바람에 큰 마나의 진동까지 일어나버렸으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엘라임이 나타나서 그랬어요... 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엘라임이 명백히 '비웃는다'라는 걸 드러내는 미소를 지으면서 속삭였다. "그래, 가출해서 이렇게 지내니까 좋으냐, 이 가.출.아. 야."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엘라임은 불러내지 않는 건데...'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감히 엘라임과 계약을 해서 그를 어찌해보겠다고 생각한 걸 정말 진심으로 후회를 했지만, 이건 벌써 지나가버린 전철 붙드는 격이었다. '울~ 고오 시~퍼라 울고 시~퍼라 이마음...' 외전 - 해인이 친엄마의 이야기 (1) 내가 기억하는 나의 어린 시절은 꽤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때는 나는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몰라 부모님께 투정 부렸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비록 철이 없던 때였지만 - 없어도 무지 없었다. - 그때 부모님께 잘 해드리지 못했던 것이 내 일생 동안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다. 아양도 많이 많이 떨어드리고, 딸내미의 귀여운 짓도, 이쁜 짓도 많이 많이 해드릴걸... 하고 말이다. 그 뒤로 우리 가족은 평생, 헤어져 있어야 했던 것이다. 한살, 두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차츰 그때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숫자가 적어졌건만, 이상하게 요즘 유난히 그 시절이 떠오르곤 한다. 날씨가 매우 화창한 날이면 특히나 하루 종일 그 시절의 추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어젯 밤에는 그 시절의 일을 꿈에서 보기도 했었다. 아무래도, 지금 내가 사는 곳이 그 시절에 살던 곳과 비슷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바보 같은 누구 누구가 삐져서 날 혼자 냅두고 있어서인지, 그도 아니면... 후후후, 지금 내 뱃속에서 즐겁게 놀고 있는 아가 때문일지도... 요즘 들어 아이의 발길질이 부쩍 잦아졌다. 그 만큼 욘석이 많이 컸다는 소리겠지? 세상에 나와서 매일 자기 아버지랑 치고받고 싸우지나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아,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니 정말 너무나 아쉽다. 하긴, 아쉬운 걸로 치자면 한두가지가 아니지. 아이에게도 너무 미안하고... 나는 그래도 부모님 두분 모두와 함께 살았던 행복한 시절도 있었고, 아버지도 돌아가실때까지는 가끔 뵈었고, 어머니도 얼마 전에 뵈었는데... 내 아이는 날 보지도, 한번 안겨보지도 못할테니 말야. 그래도... 내가 무척 사랑했다는 건 알아주겠지? 아아... 오늘도 날씨가 무척 좋다. 가을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아침 저녁으로 쌀쌀하지만, 요즘 한동안 비 구경은 못했으니까... 이렇게 좋은날 소풍이나 갔으면 얼마나 좋으랴만은, 누구누구때문에 멀리 나가지도 못하고 단지 앞뜰에서 햇빛을 쬐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다니 좀 억울하다. 하지만 뭐, 이렇게 예전 일을 회고해보는 것도 좋을테지.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곳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 처럼 인적이 없는 산속이었다. 그 곳에서 나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나는 그 곳에서 살면서 나 이외의 사람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덕분에 나와 같이 놀 사람은 어머니와 아버지, 아니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고 있는 몇몇의 동물들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어머니께 동생을 낳아 달라고 졸랐지만, 그때마다 어머니는 꺄르르 웃을 뿐이었다. 왜냐, 아버지가 얼굴을 붉히며 모녀의 대화를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내 어머니는 엘프였다. 그래서 모든 일을 말함에 있어 얼버무리거나 아니면 은근 슬쩍 돌려서 말하는 것에 서툴렀다. 무조건 직설적으로 말했는데, 그것이 어린 나에게 동생이 왜 없는지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과, 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설명하는 것도 해당 되었다. 그러나, 인간인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그런 것을 설명하는 것을, 자신이 직접 하지도 않고 어머니에게 떠넘기는 상황이면서도 듣는 것 조차 용납할 수가 없는지 어머니와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얼굴을 붉힌 채 달려들어 대화를 방해하곤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반응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이다. 그럴때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나만 토라져서 뒤에 부모님이 나를 달랬는데 나중에는 그것이 가끔가다 행해지는 일과가 되어버렸다.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와 보라빛 눈, 단아한 이마까지 말이다. 내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은 갸름한 얼굴선과 길다란 목, 그리고 날씬한 체구와 귀 뿐이었다. 어렸을때는 어머니와 나만 귀가 길고 뾰족한데 반해 아버지는 우리보다 작고 둥글게 생긴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자신과 아버지의 종족이 달라서 그렇다고 했지만, 그때까지 나는 종족이라는 이름으로 갈린 울타리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 아버지만 이상하게 태어났구나... 하고 여겼었다. 세 사람 중에 크고 뾰족한 귀를 가진 이가 둘, 그렇지 않은 이가 한명이라면 그 한명을 이상하게 여기는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아버지가 아무리 나는 하프 엘프라서 그렇다고 설명해도 그때 당시의 나는 그냥 아버지가 별난 거라고 치부해버렸다. 그리고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와 어머니처럼 길고 뾰족한 귀를 가졌고, 아버지 같은 사람은 별로 없는 별종으로 취급되는 사람인 줄로만 여겼었다. 진땀을 흘리며 나를 이해 시키기 위해 고생하시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내가 처음 정령과 접하게 된 것도 그 시절이었다. 아마도... 7살인가 8살쯔음 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어머니는 불과 대지의 중급 정령까지 불러낼 수 있는 중급 정령이었는데, 바람과 물의 하급 정령도 불러낼 수 있었다. 내가 물의 하급 정령인 운디네를 만난 것은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 날의 정오무렵이었다. 우리가 사는 곳이 산속임에도 불구하고 그날따라 유난히 날이 더워서 뛰어 놀지도 못하고 더위에 지쳐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날 즐겁게 해주기 위해 엄마가 운디네를 불러내어 허공에다 무지개를 만들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무지개 주위를 날아다니는 운디네의 모습은 너무나 예뻐서 나는 한동안 정신 없이 운디네만 뚫어져라 바라봤었다. 그것을 인연으로 어머니께 졸라 정령술을 배우게 되었다. 다행이 나에게는 그쪽으로 재능이 조금 있었는지 약 반년 정도 지났을때 나는 물의 하급 정령인 운디네와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그때는 정말 천하를 얻은 것 마냥 무척이나 기쁘고 행복했었는데... 아, 아버지는 그런 쪽으로는 문외한이셨고, 그 분은 기사라고 했다. 매일 아침 일찍 길다란 작대기를 들고 어머니와 내 눈에 뜨이지 않는 숲속으로 들어가시면 어머니가 아침을 다 차리고 있을 즈음 땀에 흥건히 젖은 채로 돌아오곤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매일 아침마다 검술을 홀로 수련하신 것이고 기사가 무엇인지 알지만 그때만해도 나는 기사란 작대기를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다 대고 휘두르는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이 기사인 줄 알았다. 그러면서 일상 생활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그런 일을 하는 아버지가 도통 이해가 안 갔고 그런 이상한 일을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아버지도 이상했다. 그래서 어머니와 나와 다른 별종인 아버지는 별종이기 때문에 그런가보다... 하고 치부해버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이런 내 마음을 아셨으면 얼마나 황당해 하셨을까? 훗훗훗... 이런, 약간은 무료하지만 행복했던 나날은 내가 11세의 생일을 맞이하고 나서도 한달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때 깨어지고 말았다. 내 또래의 사람은 한 명도 없었기에 항상 정령이나 혹은 동물 친구들과 놀아야 해던 나는 그때쯔음 눈치 챘던, 우리가 살던 산 속의 아래에 있다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부쩍 호기심이 커져 있었던 때였다. 때마침이라고 해야 할지 운명이라고 해야할지, 그때 당시에 정령술의 실력이 쬐끔 늘어 바람의 하급 정령인 실프와의 계약에 성공한 나는 나 혼자 산 밑에 있는 마을에 내려가보겠다는, 어린 나에게는 정말 대담하고 용감무쌍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실프가 있는 한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는 배짱이 있었던 것이다. 평소 우리 집에서 사용하는 생필품은 아버지가 일정한 기간에 한번씩 마을에 내려가서 구해오곤 했는데,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에게 마을이 있다는 걸 숨기고 싶었는지 내가 모르게 마을로 가서 모르게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물론 우리가 사는 산 밑 어디 어디에 마을이 있다는 건 절대적으로 함구했고 말이다. 그.러.나, 그럴거면 교육이라도 시키지 말 것이지, 아버지는 내가 8살이 되었을 때 부터 글자를 가르쳤고 틈틈히 마을로 내려갔을 때 새로운 책을 구해오곤 하셨다. 그런데 그런 책들 중에는 어린이용 역사책 - 일명 옛날 이야기 책, 예를 들면 사악한 마왕에게 잡혀간 공주를 구하는 용감 무쌍한 기사, 혹은 왕자 이야기라던지, 아니면 나쁜 왕의 손아귀에서 불쌍하고 착한 백성을 구하는 영웅 이야기라던지 등등... - 또한 포함 되어 있었기에, 나는 점점 산 바깥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한 동경을 조금씩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부모님과 이야기 하다보면 간간이 바깥 세상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튀어나오곤 했기에 - 물론 그때마다 부모님은 황급히 말을 얼버무리며 다른 화제를 꺼내곤 했지만 말이다. - 호기심은 점점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왜 어른들이 감추고 싶어하면 싶어할 수록 아이들은 더욱 더 궁금해 하고 보고 싶어하지 않는가? 나 또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이였던 것이다. 아아... 내 아이는 그러면 안되는데... 어쨌든, 그날 나는 그 당시의 철 없던 마음에도 열심히 계획을 짜서 얼마나 멀리 있는지 모를 마을을 부모님이 눈치 채기 전에 다녀오려고 그 전날 저녁에 부모님께 숲으로 놀러 가겠다고 이야기 해 놓고 앙큼스럽게도 점심 도시락까지 싸가지고 집을 나섰다. 마음 속으로는 오늘 저녁때까지 돌아오면 부모님도 모르겠지... 하면서 말이다. 아버지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면 빨라도 2틀 후에 오셨다는 건 - 아마 마을에 다녀오는 동안 걸리는 시간이겠지만서도... - 그때 나에게는 문제가 안됬다. 그리하여 나는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실프에게 길 안내를 맡겨 놓은 채 룰루 랄라 하면서 발걸음도 가볍게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 집이 산속 아주 아~ 주 깊숙히 있었는지 나는 가도 가도 산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중에야 그 곳이 대륙을 3대 산맥중 한 곳인 펜사 산맥의 한 줄기였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 당시에 내가 그걸 알게 뭐겠는가? 그리하여 결국 나는 정오가 다 되도록 산을 벗어나지 못해 이대로 그냥 집으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조금 늦어서 부모님께 혼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한번 보느냐를 고민하면서 근처 양지 바른 곳에 앉아 싸온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그런데, 도시락을 다 까먹고 나니 배는 부르고, 햇빛은 따뜻하고, 거기다가 반나절을 계속 걸오는 바람에 피곤해진 몸이 잠시 달콤한 휴식을 취하니 노곤함과 함께 졸음이 몰려왔다. "우웅... 졸려..." 그리하여 나는 뭔 배짱인지 거기서 그대로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산 속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졸리다고 잠들어 버렸으니 그때의 내가 얼마나 무지하고, 겁이 없었는지... - 무지하면 용감한 법이지만... -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다 화끈 거릴 지경이다. 잘못하다가 위험한 산짐승이나 아님 더 위험한 몬스터라도 만났으면 어쩔 뻔 했는지... 그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정말 천운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그런것이, 우리 집 주위에는 어머니의 능력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능력인지 위험한 산짐승이나 몬스터들은 얼씬도 하지 않아서 나는 그 험한 산을 우리집 앞마당 처럼 안전하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튼 그렇게 태평한 마음으로 달콤한 잠에 들었는데 어느 순간 누군가가 나를 가볍게 흔드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얘야, 얘야?" "우웅...." 잠이 잘 떨어지지 않아 멍~ 한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리던 나는 화들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앞에는 왠 푸대자루 같은 옷(마법사 로브였다.)을 입고 있는 사람이랑, 삐가번쩍 거리는 옷(갑옷 이었다.) 위에 무지 좋아보이는 망토를 두르고 있는 사람들이 날 둘러쌓고 있었다. 그들 중 날 깨운 사람은 바로 푸대자루 같은 옷을 뒤집어 쓴 사람이었다. 중년 남자로, 인자하게 생긴 그 남자는 내가 일어나자 내 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괜찮니? 왜 이런데서 혼자 있는 거지?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아... 어.. 괜찮은데..." 나는 너무 놀라서 평소 잘 재잘대던 그 말솜씨는 어디다 잊어버리고 더듬거렸다. 그러자 날 살펴보던 중년 남자는 내가 무서워서 그러는 줄 알고 부드럽게 웃으면서 달랬다. "겁 먹을 거 없다. 우리는 나쁜 사람은 아니거든. 그래, 다친 곳이 없으면 돼었다." 사실, 난 겁먹어서 그런게 아니었다. 단지 놀랐을 뿐이었지... 그때까지 나는 이 세상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 모두의 귀는 나나 어머니처럼 길고 뾰족한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이 1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은 모두 별종이라고 생각했던 아빠 처럼 작고 둥그스름한 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라? 세상에는 내 생각 보다 별종이 많았던 모양이네...' 외전 - 해인이 친엄마의 이야기 (2) '어라? 세상에는 내 생각 보다 별종이 많았던 모양이네...' 그런데 그렇게 그 친절한 중년 남자는 내가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음에도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안 한 채 내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얘야, 넌 어디서 살지? 혹시... 이 산 속에서 살고 있는 거니?"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모르는 사람이 사탕 사준다고 가자 해도 절대로 가지 말라... 는 식의 교육을 받지 못한데다가, 아버지나 어머니 외의 사람을 처음 본데다가 무지 친절해 보였기에 순진 무구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예, 저~ 쪽에서 살고 있어요." "흐음, 그래? 혹시 네 아버지의 성함이 어찌 되는지 알 수 있을까? 아, 아버지하고 같이 살겠지?" "예? 아, 예... 그렇기는 한데..." 나는 거기서 말문이 막혀 어물 어물 거릴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 이름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비록 11년 밖에 안되는 인생이었지만, 그 동안 살아오면서 아버지 이름이 필요했던 적도 없었고 부모님께서도 가르쳐 주신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갑작스런 그 친절한 중년 남자의 질문은 내 짧은 인생의 허를 찌르는 것일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아버지를 항상 아버지라 불렀으니 이름을 알 필요도 없었고, 다른 사람들과 이웃하며 산 것도 아니었기에, 이웃 사람들이 '누구 누구 딸이다.' 라고 부르는 것도 들을 수가 없었고, '저는 누구 누구 딸이예요.' 라고 소개 할 필요도 없었으니 모르는 것도 당연했고, 알 필요성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답도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는데, 이 중년 남자는 그걸 어찌 해석 했는지 - 설마하니 자신의 아버지 이름도 모른다고 해석했겠는가? - 질문을 달리했다. "흐음... 대답하기 곤란한가보구나. 그럼... 혹시 네 아버지는 너 처럼 갈색 머리에 보라빛 눈을 가지신 분이니?" "예? 아, 예. 그런데요?" 그러자 뒤에서 조용히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서로 마주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멍청하게 수상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 뒤에 그 친절한 중년 사내의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는, 평생 후회할 짓을 저지르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럼, 너희 집으로 안내좀 해줄래?" "네에~" 에휴, 만약 지금의 내가 시간을 이동하여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갔다면 그리 대답한 어린 시절의 내 멱살을 잡고 뒤흔들며 소리쳤을거다. "이 화상아아아~~!!" 라고... 아무리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도 아버지에 대해서 집요하게 묻는 그들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쉽게 앞장 서서 집으로 돌아갔으니... 에휴, 지금 내가 생각해도 한심, 한심, 또 한심할 뿐이다. 설마... 내 아이도 이렇지는 않겠지? 나는 우리 집 앞뜰에서 한창 좋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던 부모님이 우리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보다가 경악으로 물들고 나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그 남자들보고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고, 또 내가 돌아가라고 한다고 돌아갈 것 처럼 보이지 않고 말이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그들을 데리고 온 것이 잘못이었다는 걸 쉽게 눈치 채고 부모님께 달려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우물쭈물 서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내 뒤를 쫓아 온 남자들은 치사하게도 어쩌지도 못하는 불쌍한 아이를 그냥 지나쳐 우리 집 앞마당으로 들어가더니 아버지를 향해 저벅 거리며 다가가 딱 멈춰섰다. 그때 아버지는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함인지 자신의 등 뒤에 놓고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혹시라도 싸움이 일어나는 건 아닌지 잔뜩 긴장한 채 여차하면 정령을 불러서 그들에게 공격 하려고 준비하며 바라보고 있는데 황당하게도 아버지 앞에서 멈춰 선 그들은 일제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도련님을 뵙습니다." "자네들...." 그러나 그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아버지는 썩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래, 나는 아버지와 아는 사람들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도 안심하지 못한 채 계속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버지와 나에게 친절하게 말을 걸었던 그 중년 남자 - 아마도 그가 그 남자들의 대표인 듯 했다. - 의 대화는 계속 되었다. "모시러 왔습니다." "돌아 가게. 나는 아버지와 자식의 연을 끊은 몸일세. 이제는 엠브로스 가문의 사람이 아니야." "백작님이... 곧 돌아가실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냉정하게 돌리던 아버지의 몸이 멈칫 거렸다. "아버지께서...?" 그때는 아버지의 아버지란 분이 '백작'이란 이름을 가지고 계셨구나... 라고 철없이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인간들 세상에서 소위 귀족 중 한명 이셨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저희가 떠나오기 전에도 백작님께선 일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빨리 돌아가시지 않으면 임종을 지키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부디 서둘러 주십시오." "하지만..." 무지 흔들리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망설이는 아버지를 향해 중년 남자가 결정타를 날렸다. "마님께서 두 분 사이를 허락한다 하셨습니다. 돌아 오시기만 하면 받아 들여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정실 부인은 되지 못하시겠지만, 그 정도라도 다행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아버지의 얼굴은 어머니 쪽으로 돌아갔다. "페라쉬..." 어머니는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눈치 챈 듯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흔들었다. "난 안 가요. 다시는 인간들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뭘 두려워 하는지는 알아. 하지만 걱정 하지 마. 이제는 내가 옆에 있잖아. 난 단지 내 부모님께 당신을 내 아내라고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 그러는 것 뿐이야. 아, 우리 아이도 소개시켜주고...." "하지만..." "걱정 하지 말라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우리는 다시 이 곳으로 돌아 올 거야. 바로 여기가 우리 집이잖아." 아버지가 그렇게 이야기 하자 어머니 또한 많이 흔들리는 듯 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이라고 해야 할지 아님 절묘한 타이밍이라고 해야 할지 중년 남자가 두 분 사이로 끼어들어 버렸다. "아마 가시면 돌아오시진 못할 겁니다. 도련님은 백작 작위를 계승 하셔야 할테니까요. 백작님의 후계자는 도련님 밖에 안 계시니까요." 그러자 흔들리던 어머니의 안색이 마치 인형처럼, 무표정으로 변한 채 뒤로 다시 한걸음 물러섰다. "역시... 난 안 가는게 좋겠어요. 나와 주디스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 당신 혼자 다녀 오세요." 아버지는 어머니의 그러한 반응에 무척 당황하신 모양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 혼자 가라니... 다 같이 가면 좋잖아? 이 기회에 주디스에게도 구경도 시켜주고... 여기에 둘만 두고 갈 수는 없어." "뭘 걱정하는 거죠? 당신이 빨리 돌아와주기만 한다면 걱정할 필요는 아무 것도 없어요. 당분간은 주디스와 나 단 둘이 있어도 괜찮아요." "왜 안 가려고 하는 거야? 내가 곁에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잖아. 게다가 어머니도 우리 둘 사이를 인정해 주신다고 하셨어." "그러는 당신은 왜 꼭 날 데려 가려고 하는 거죠?" "그게 무슨 말이야? 아까 말했잖아. 우리 가족을 아버지께 보여 드리고 싶다고..." "그게 아니 겠죠. 나와 주디스가 그 곳으로 가면 당신은 아무런 걱정 없이 백작 작위를 받고 인간 세상에서 살 수 있으니까 그런 것 아닌가요?" "무슨 말이 그래? 우리 집은 여기라고 했잖아. 아버지의 임종만 지키고 돌아 올 거라니까." 아버지의 안타까운 말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작게 고개를 흔들더니 뒤로 한걸음 더 물러나 아버지와의 사이를 넓혔다. "당신이 돌아간다면, 정말로 돌아오기 힘들 거예요. 당신 혼자 가서도 힘들 지언정, 만약 나와 주디스까지 간다면 더더욱 힘들겠죠? 나나 주디스가 인질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의 어조도 약간 굳어졌다. "페라쉬! 당신은... 우리가 돌아가면 내 어머니가 당신이나 주디스를 인질로 날 그 곳에 잡아 두기라도 할거라는 말이야?" "잘 아는군요. 그렇지 않겠어요? 당신은 하나 밖에 없는 후계자예요. 당신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 당신이 더더욱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당신은 그런 모든 걸 뿌리치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어요? 당신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다 같이 가자고 하는 거 아닌가요?" "페라쉬..." 어머니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입술만 스르르 움직여 미소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건 어머니의 무표정한 얼굴과 너무나 안 맞아서 어딘가 어색해 보였고, 그렇기 때문에 너무 슬퍼 보였다. "당신의 의견은 존중합니다, 오스번... 가겠다면 가세요. 나는 당신을 막을 권리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당신이 이대로 떠나간다면 나 우리의 약속이 지켜질것이라 믿을 수가 없군요." "좋아. 그렇다면 주디스는 데려가겠어. 당신이 여기 있겠다면 데려가지는 않겠어. 그리고, 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꼭 돌아올 거야."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곤 짐을 챙기시려는 듯 집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지도 않고 살짝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며 이제는 눈까지 웃는 그런 미소를 지어 보이시며 살짝 중얼거리셨다. "인간의 약속이란... 덧없는 것을..." 나중에 안 것이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 곳에 오셨을때 자신이 죽을때 까지 어머니와 나와 함께 이 곳에서 살거라고 굳게 약속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 지키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걸 알고 난 나는 나때문에 약속이 깨어진 것 같아 일생동안 두분께 죄스러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비록, 내가 아니더라도 그들이 산까지 찾아온 걸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가족을 찾아낼 수 있었을테지만, 나 때문에 그들이 더욱 더 일찍 찾아와 우리 가족이 헤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아버지가 집으로 들어가신 지 잠시의 시간이 지나자 다시 현관문이 거칠게 열리며 굳은 표정의 아버지가 걸어 나오셨다. 아버지는 평소 항상 입던 옷이 아닌, 나와 같이 왔던 사람들이 입고 있는 것과 비슷한 번쩍 거리는 옷과 망토를 입고 계셨다. 집에 그런 옷이 있는 줄 몰랐던 내 눈이 놀라움으로 휘둥그래졌지만, 어머니는 알고 있었던 듯 - 아니 아예 보지도 않았으니 그랬을 수도 있지만... - 미동 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자 주디스." 아버지는 성큼 성큼 걸어서 나에게 다가와 내 손을 잡아 끄셨다. 너무나 급박스러운 상황 전개에 어리둥절해 하는 날 잡고 그 사람들쪽으로 간 아버지는 어머니께 마지막 말을 던지셨다. "다녀 올게. 꼭 돌아올 거야." 하지만, 어머니는 무표정하게 바라볼 뿐 아무 말도 않으셨다. 단지 나에게만 다가와 날 살짝 안아주시며 귀에 작게 속삭였을 뿐이다. "나는 떡갈나무 숲의 엘프족이란다. 펜사 산맥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곳이지. 나중에 찾아오렴." 나중에 생각한 것이지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안 한건 어머니 나름대로 분노와 서운함을 표시한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제 저녁이 다 되는 시점에 집을 박차고 나온 것도 그와 같은 심정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래도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감으로써 어머니와의 연결 고리를 남겨 두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엘프들은 부모 자식과의 관계가 인간같지 않기 때문에 - 인간으로 보면 좀 냉정하다... 싶을 정도다 - 나 때문에 부모님이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다. 아마도... 아버지가 정말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백작의 작위를 받지 않으시고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가셨다면, 우리 가족은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대로 아버지는 그 곳으로 가자마자 할머니의 마수에 붙잡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외전 - 해인이 친엄마의 이야기 (3) 하지만, 어머니의 말대로 아버지는 그 곳으로 가자마자 할머니의 마수에 붙잡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어머니와 헤어진 나는 드디어 내가 원하던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올 수 있었다. 그것도, 그 나라에서 가장 큰 도시인 수도로 말이다. 생전 처음 보는 많은 사람들이 바글 바글 거리는 도시와, 생전 처음 타보는 무지 커다란 마차는 어머니와 헤어졌다는 슬픔을 순식간에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아버지를 데리러 온 사람들은 날 아가씨, 아가씨라 부르며 마치 공주님처럼 떠받들어주었으니, 나는 정말 꿈나라에 온 것인 양 철없이 행복해 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이렇게 좋은 곳을 왜 같이 안 가려고 했는지 의아심 마저 들 정도였다. 생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계시다는 곳으로 가면서 나는 예쁜 옷들과 장신구들, 그리고 내가 조금이라도 사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물건들을 잔뜩 선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얼마나 환상적이었겠는가? 게다가, '여기가 바로 아버지의 집이다' 라고 도착한 곳은 정문에서 부터 마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서야 겨우 집이라고 하는 거대한 건물을 볼 수 있었는데, 그 건물이란 책에서나 읽어보고 꿈에서나 그려봤던 그런, 공주님이나 살 법한, 성이라고 불려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그런 저택이었다. 그 저택의 커다란 현관문을 들어서자 현관문 양 옆으로 사람들이 일렬로 쭈욱 늘어서 우리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그리고 그런 그들의 끝에 서 있다가 한달음에 달려와서 아버지를 덥썩 끌어 앉는 왠 여자가... "오오, 오스버언~" "어머니..." 아버지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그녀가 별로 달갑지 않은지 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자신의 품에서 슬쩍 밀어 내었다. 하지만 그... 그러니까 아버지의 어머니, 즉 나에게 할머니가 되는 여자는 그런 곳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아버지의 얼굴을 살펴보며 부산을 떨어댔다. "어디 좀 보자. 그 동안 얼마나 고생 많았니? 이 에미가 보고 싶지도 않든? 자자, 빨리 올라가자꾸나. 네 아버지가 널 얼마나 보고 싶어하셨는지 아니?" 그러면서 그대로 아버지를 이끌고 이층으로 올라가버렸다. 덕분에 나는 혼자 덩그마니 서서 끌려가는 아버지의 뒷모습만 멍~ 하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이, 이게.. 도대체...' 뭐, 그래도 그 동안 아버지와 같이 왔던 일행의 대표인, 친절한 중년 남자가 날 손님 방으로 데려다 줘서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나는 아빠가 다시 돌아올 때 까지 현관 문 앞 홀에 홀로 서 있었어야 할 뻔 했다. 그러나, 손님 방에 가 있었다고 상황이 좋아진 건 아니었다. 처음에 내가 손님 방에 들어가고, 내 짐이 그 방으로 옮겨진 후 아무도 내가 있는 방에는 오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날 그 손님방으로 데려다준 그 친절한 중년 남자, 심지어는 하녀 한명까지 들여다보지 않았다. 결국 홀로 그 손님방에 우두커니 앉아서 누군가가 와주길 기다리던 나는 식사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그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아버지가 피곤한 얼굴로 나타나셨고, 그제야 나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얼굴을 씻고 옷도 갈아입을 수 있었고, 식사라는 걸 할 수가 있었다. 아버지는 계속 미안해 하셨지만, 식사가 끝나자마자 어떤 사람이 아버지를 부르러 왔기 때문에 또 날 혼자 두고 나가셔야 했다. 뭐, 그래도 그 뒤에는 때가 되면 하녀가 식사를 날라왔고, 저녁에는 하녀 한명이 와서 날 씻겨주고 옷도 갈아입혀주고 했지만, 그 외에는 나 홀로 계속 그 방에 있어야 했다. 물론, 혼자 노는 건 익숙해 있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난다는 사실에 한껏 부풀어 있었던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기는 커녕, 아버지 조차도 곁에 있어주지 않자 마음이 불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방 안에만 있지 말고 바깥에라도 나가보자는 심정으로 내가 묵고 있던 방 문을 여는 순간 어느 남자가 다가와선 날 방 안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나가시면 안됩니다. 여기 계셔야 합니다." "왜요?" "마님의 명이십니다. 여기서 얌전히 계세요." 그렇다는데 내가 별 수 있겠는가? 그냥 얌전히 들어갈 수 밖에... 그렇게 나는 꽤 오랜 시간동안 그 방에 거의 감금되다 시피 지내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충 한달 쯤 되는 시간이 아닌가 싶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허락 안되는 것은 물론이고, 나에게 식사를 가져다 주거나 밤에 잠깐 와서 시중을 들어주는 하녀 또한 나에게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다. 오로지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의 할 일만 하고, 그 일이 끝나면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도 그녀는 무조건 '저는 잘 모릅니다. 나중에 도련님이 오시면 물어보세요.'란 말로 일관했다. 뭐,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시간은 나에게 아주 무의미하고 외롭기만 했던 시간은 아니었다. 할 일이 없어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정령들을 불러서 같이 놀았으니까. 나와 같이 있어줄 이들이 정령 외에 아무도 없었기에 나는 그때 어린 마음에도 절실하게 정령들을 의지했던 듯 싶다. 그래서 덕분에 원래 정령술에 조금 재능이 있었던 것이 정령 친화력과 함께 마나 또한 급상승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랜 시간 홀로 지내다가 다시 아버지를 만났을 때, 아버지는 무척 많이 야위어 있었고, 온 몸으로 '나 우울해요~' 란 기운을 팍팍 풍기고 있었다. 그나마 나에게는 미소를 보였지만, 그것도 억지로 짓는 거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내 할머니란 사람과 정식으로 인사를 할 수가 있었다. "주디스라고 합니다." 나는 아버지가 가르쳐 준 대로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건만, 내 할머니란 사람은 무성의하게 고개만 끄덕여 보인 채 곧바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살았을 때라면 할머니란 사람에게 이런 대접을 받고 참으로 황당하고 분해 했겠지만, 오랜 시간동안 혼자 지내다보니 나는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내 자신이 이곳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기에 크게 서운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때까지는 조금 있으면 이 집을 나와 다시 어머니, 아버지와 같이 살던 그 작은 집으로 돌아갈 거란 희망이 있었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희망은 그 동안의 일을 설명해 주려는 아버지의 말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주디스... 우리는 여기서 좀 더 살 거야." 아마 오랜만에 보게 된 아버지의 얼굴이 무척 초췌해 진 것은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때문인 듯 했다. "왜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 우리마저 이 곳을 떠나면, 이 곳에는 할머니 혼자 남게 되셔." "그럼 우리와 같이 가시면 되잖아요?" 내 순진 무구한 말에 아버지는 슬픈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그건 안돼. 할머니는 이 곳에서 사시길 원하거든." '그럼 어머니는요?' 라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지만, 어린 마음에도 그건 물어보면 안된다는 걸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는지 그냥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때, 어머니를 다시 만나려면 내가 손꼽을 수도 없는 아주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하기야, 아버지가 그렇게 한다는데 아직 어린 내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그런가보다... 라고 여길 수 밖에... 그나마 아버지라도 같이 있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았건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아버지와 떨어지게 되었다. 이게 다 그 망할 할머니란 인간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내가 이 곳에 온 첫날 날 보지도 않은 채 아버지를 내게서부터 멀리 떨어지도록 끌고 간 것도 할머니란 인간이었고, 날 손님 방에 거의 갇히다 시피 지내게 한 것도 할머니란 인간의 명이었고, 내가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로 지내는 동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때 아버지가 날 데리고 돌아 가겠다고 하니까 너 가면 죽는다고 자살 소동을 벌여서 아버지에게 강제로 백작의 작위를 받게 해서 눌러 앉힌 것도 다 할머니란 인간의 짓이었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나와 아버지를 또 떨겨 놓은 것이었다. 물론, 그런 짓 한 할머니도 무지 싫지만, 할머니가 그렇게 한다고 그대로 따라간 아버지 또한 몹시 못마땅했다. 어머니한테도 꼼짝 못하는 면을 보이더니만, 아버지는 의외로 어머니에게 휘둘리는 기질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찌되었건,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난 후로 나는 거의 감금되다시피 한 생활에서 벗어나 커다란 저택을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지만, 한동안 이 곳에서 벗어나 산속에서 살고 있던 아버지가 갑자기 백작이란 작위를 이어받자 익히고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뭐... 그렇게 눈 코 뜰새 없이 바쁘게 일하고 저택을 들락 거리는 아버지에게 내가 또 어떻게 매달려 있겠는가? 나는 단지 내가 아직 어리다는 것이 너무나 억울할 뿐이었다. 그러는 틈을 타서 할머니는 때마침 신학기가 시작된 기숙사가 달린 학교에 나를 집어 넣어 버렸다. 하지만, 학교에서도 나는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은 서로 친해지고 친구를 만들었지만, 나만은 어느 누구도 같은 방을 쓰려고 하지 않아 혼자 독방을 써야 했고, 누구 하나 말을 건네지 않아 홀로 외로운 학교 생활을 보내야 했다. 내가 다가가려 하면 아이들은 자기들이 먼저 피해버린 채 멀리서 날 보며 저희들 끼리 수군대기만 했다. 그러나,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몰랐던 나는 답답하고 억울하기만 할 뿐이었다. 뭐, 그 이유도 곧 알 수 있었지만 말이다. 외전 - 해인이 친엄마의 이야기 (4) 뭐, 그 이유도 곧 알 수 있었지만 말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가 그러니까... 학교에 입학 한지 대충 3개월이 지날 쯔음 이었을 거다. 여전히 친구가 없었던 나는 그때에도 혼자 지내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한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들이 나를 따돌릴 지언정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는 거였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도 태어나서 10여년 동안 설움을 모르고 살았던 나에게는 힘겨운 일이었다. 물론, 할머니 덕분에 무시를 많이 당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곁에 아버지도 계셨고 그 친절한 중년 남자 - 백작가의 마법사이다 - 도 가끔은 날 보러 와줬기에 그럭저럭 참고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하나같이 나를 무시했으니, 할머니의 심술과는 차원이 틀렸다. 그날도 나는 수업을 마치고 그 다음 수업을 듣기 위하여 - 그 학교는 한 교실에서 한 과목의 수업만 했기에 한 수업이 끝나면 대부분 다음 수업을 듣기 위하여 이동해야 해다. - 이동하는 중이었다. 이 학교의 학생들 모두가 빵빵한 집안의 자녀들이었기에 그에 걸맞게 학교 건물도 크고 화려했고, 복도 또한 예외는 아니었기에 양쪽 벽면에 우아한 조각이 반복적으로 새겨져 있었으며, 사두 마차 한대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하지만, 잠깐의 휴식 시간 동안에 다른 교실로 이동하려는 수많은 아이들이 복도로 우르르 쏟아져 나오자 그 넓은 복도도 한창 북적이는 시장 골목처럼 좁고 복잡했다. 그래도 나는 다른 아이들이 내 곁으로 오지 않으려 애써 피했기 때문에 조금도 복잡하다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터벅터벅 다음 교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때 맞은 편에서 세명의 여학생들이 서로 웃고 떠들면서 오느라 미처 앞을 보지 못했는지 마주 오던 나와 왼쪽에 있던 여자 아이의 어깨가 부딪혔다. 물론, 앞을 제대로 안 보고 멍하게 다닌 내 잘못도 있었기에 나는 그 여자아이가 들고 있던 책이 떨어지자 얼른 정신을 차리고 그 여자 아이의 책을 주어서 건네줬다. "미안합니다." 이렇게 정중하게 사과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정말 어처구니가 없게도 그 여자아이는 내가 내미는 책을 쓰윽 보더니 책을 받기는 커녕, 자신이 입고 있던 윗옷을 벗어 나에게 휙 던지는 거였다. 그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가버리려고 했다. 너무 황당한 그녀의 행동에 어리벙벙해서 잠시 동안 할 말과 할 행동을 잊고 멍하니 서 있는데, 그녀와 같이 있던 여자 애 하나가 건네는 말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어떻게 하니... 그거 네가 아끼던 옷이었잖아." 그러자 그에 답하는 여자애의 말은 더 가관이었다. "아, 정말 재수 없어. 오빠가 생일 선물로 해준거라 아끼고 있었는데... 저런 천한 것과 부딪혀 버렸으니... 이제 오빠 얼굴을 어떻게 보지? 아앗, 소름끼쳐. 나 이대로 수업 못 받을 거 같아. 곧장 목욕하러 갈테니 네가 선생님에게 대신 말씀 드려줄래?" "그래, 그래. 어서 가봐." 정말 기가 막혔다. 저들이 언제 날 봤길래 천한 것 운운 한단 말인가? 아니, 그것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게 할 말이던가? 너무 화가났던 나는 그 여자 아이가 나에게 던진 윗옷과 책을 들고 뛰어가 그 여자 아이에게 던졌다. "당신거 당신이 가져 가요." 그런데 더더욱 황당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나는 그 여자아이에게 옷이랑 책을 던진 후 미련 없이 내 갈길을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 여자 아이가 뭘 잘못 먹었는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부들부들 떨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가는 거였다. 내가 여자아이 여자아이 그래봤자, 그때 그 애는 나보다 나이도 대충 2, 3살 정도 많은 아이였다. 그러니까... 대충 13, 4살 정도? 그런애가 내 한마디에 그렇게 되었으니 정말 저~~엉말 황당했지만, 그 애 옆에 있던 애들이 호들갑을 떨며 그 애를 부축하고 선생님을 부르라는 둥 난리를 쳐댔지만,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교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그 애가 그렇게 된 것은 누가 봐도 내 책임이었기에 쬐끔 겁이 나기도 했지만, 나중에 뭔 일이 있더라도 '그 애가 먼저 시비를 걸었어요.' 라고 하면 될 일 아니겠는가? 게다가 나에게 그렇게 기가막히게 군 그 여자애가 쓰러지자 조금 고소하기도 했고 말이다. 난 그렇게 속 편히 생각하고 교실로 들어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건 나 혼자만의 착각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수업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 나에게 말을 걸지도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던 담임이 나를 교실 밖으로 불러내는 거였다. 물론, 그때까지는 나야 아까 복도에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러는 거구나... 생각해서 별로 놀라지는 않았지만, 정말, 정말, 저어어어~엉말 황당하게도 (이말이 꽤 많이 나오는군...) 나는 담임에게 불려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대로 학교 반성실에 감금 되었다. 학교 다니는 애들이 워낙 빵빵하다보니 뭔가 잘못을 하면 마땅히 체벌할 것이 없었기에 좁고 침대와 변기만 있는 반성실이란 곳을 만들어서 잘못한 만큼 그 곳에 머물게 했는데 날 그 곳에 집어 넣은 것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예요? 내가 뭘 잘못 했다고?" 사실 반성실이라는 건 처음 학교에 입학하여 학교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을때 스쳐 지나가면서 들었기에 그 곳이 반성실이라는 것을 깨닫는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나는 단지 담임이 나와 상담하기 위하여 사람 없는 곳으로 가는 줄 알았지 그냥 반성실에 가둘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잘못 되었다고 깨달았을때는 담임이 벌써 날 반성실 한 곳에 집어 넣고 문을 잠근 뒤였다. 내가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러봤자 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담임은 그냥 가기 서운했는지 한마디는 해주고 갔다. "집안에서 학교에 보내주는 큰 은혜를 베풀었으면,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얌전히 다닐 것이지, 다닌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일을 벌이는 거냐? 천한 노예 주제에... 분수를 알아야지. 네 집안이 아니었다면 넌 태형(매 맞는 벌) 감이다." "예? 아니, 그게 무슨 말... 선생님!! 젠장, 도대체 왜들 그러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 내가 왜 노예라는 거야? 야!! 이봐~! 이 자식, 돌아오란 말야!!" 내가 아무리 목이 터져라 외쳐도 담임은 자신이 할말만 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가버렸다. 한창 동안 억울하고 분하고 당황스러워서 바락 바락 소리 질러봤지만, 그렇다고 해결 되는 일은 없었다. 결국 목이 쉬고 지쳐서 더 이상 소란을 피울 수가 없자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서 식식 거리고만 있는데 반성실 밖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이봐아~ 앞 방의 동지! 내 말 안 들려? 얼굴 좀 보여 보라고!" 의아해서 반성실 문 가운데 달린 철창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자 복도 건너편의 내 방과 마주보는 방 문의 철창에 처음 보는 소년의 얼굴이 바싹 붙어 있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어, 안녕?" 대충 15살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는 밤 갈색의 머리에 회색빛이 섞인 약간 탁한 파란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얼굴 전체에 '나 장난꾸러기요' 라고 써 있는 듯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익살맞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데 가만 있을 수가 없어 나도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아까 하도 혼자 생쑈를 해서 목소리가 다 쉬어 터져서 흘러나왔지만, 그 소년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나를 신기하단 눈으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헤에, 정말 귀가 길고 뾰족 하구나. 너네 엄마가 엘프라는 거 정말이냐? 너네 엄마도 너 처럼 귀가 그렇게 길고 뾰족해?" "예? 예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재차 물어왔다. "엘프들은 모두 예쁘다던데, 너희 엄마도 예쁘니?" 그의 질문에 나는 헤어진 어머니의 얼굴이 자연스레 떠올랐고, 그리움에 젖어 잔뜩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 무척...무척 아름다우세요." 아직도 그 집에서 아버지와 날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했고, 혼자 그렇게 있으면 괜찮을지 걱정 되었고, 보고싶기도 하고, 지금 내가 이렇게 된 걸 아시면 뭐라 하실지 궁금했고, 어머니의 따뜻한 위로를 받고 싶기도 하고... 하여간 복잡 다단한 감정으로 인하여 눈물이 복받쳐 올랐다. 그래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 그 앞 방에 있는 소년이 눈물을 보지 못하도록 감추며 눈물을 참는데, 소년은 그것만으로도 내 상태를 눈치 챈 모양이었다. "야, 우냐?"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체 할수 없을 정도로 흘러 나왔다. "아... 그, 그게.. 으흑흑... 우와아앙~~ 어머니.. 으흑흑흑.... 으헝, 으헝 으허허헝~" 처음 보는 소년 앞에서 - 비록 문이 가리고 있긴 하지만... - 창피한 줄도 모르고 한참 울고나자 그제야 속이 후련해졌다. 내 울음 소리가 잦아지자 그친 줄 알아챈 그 소년이 다시 말을 건네왔다. "야, 다 울었냐?" "예? 예에..." "짜식, 정말 많이도 운다. 하긴, 여자애니 당연한 건가? 어이구, 얼굴이 퉁퉁 부었네?" "에? 아, 저... 저기..." 그의 말에 내가 창피하기도 하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소년 다운 밝은 웃음이었다. 그의 웃음에 나 또한 밝아지는 것 같았지만, 이런 곳에 갖혀 있는데도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는지 신기하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다. "아하하하, 의외네? 일을 저지를 정도라면 베짱이 있는 줄 알았는데... 부끄러움을 탈 줄이야. 이야... 정말 의외야." 그의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예요. 전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어요." 내가 정색을 하고 외치자 소년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러냐? 뭐, 그럴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나저나, 넌 학교에 왜 온 거냐? 나야 어머니가 하도 애원해서 오기야 했지만... 너도 어머니가 학교에 가라고 애원했어? 학교에 보내줄 정도라면, 공부가 하고 싶었으면 그냥 가정 교사를 불렀어도 되었잖아? 일부러 학교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할 필요가 있나 싶은데? 아아, 뭐 나쁜 뜻으로 그런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말야." "예?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저는 학교에 오고 싶어하지 않았는데 그냥 할머니가 보내셨어요. 그런데 학교에 오면 고생을 하다뇨? 그게 무슨 소리죠?" 내가 철장을 붙잡은 채 간절하게 묻자 소년이 날 어리벙벙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뭐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네가 이런 학교에 오면 고생할 건 뻔하잖아. 이 곳에는 자기가 잘난 줄 아는 귀족 나으리들만 득시글 하는 곳이니 너 같은 노예 출신의 애는..." "노예요? 노예라뇨?" 내가 그의 말을 끊고 다급하게 묻자 소년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너희 어머니는 노예 출신이시잖아. 오스번 경이 노예 엘프에게 반해서 야반도주한건 너무나 유명한 일화라고." "그럼... 우리 어머니가... 노예? 하지만... 어머니는 엘프이신데...?" "맙소사,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구나?" 그렇게해서 시작된 그 소년의 설명으로 인하여 나는 이 세상의 인간들이 힘 없고 빽 없는 인간들은 물론 유사인종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만든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처음 부터 왕따를 당하게 된 것도 내 어머니가 노예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기가막힌 것은, 원하지도 않은 이들을 잡아서 강제로 노예로 만들어 놓고서는 그 노예를 사람 취급도 안 하고 마치 더러운 벌래라도 되는 양 대하는 귀족들의 모습이었다. 아니, 누구는 노예가 되고 싶어서 되었겠는가? 잘 살고 있는 유사인종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만든것이 누구인데... 그 소년의 설명으로 인하여 나는 어머니가 왜 나와 함께 오려고 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할머니가 왜 그렇게 나를 무시했는지, 이 학교의 모든 이들이 왜 나를 상대하려 하지 않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상대하려 하지 않는 나를 상대해주는 이 소년은 나와 비슷한 상처를 가진 이였기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외전 - 해인이 친엄마의 이야기 (5) 그렇게 모든 이들이 상대하려 하지 않는 나를 상대해주는 이 소년은 나와 비슷한 상처를 가진 이였기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소년은 리빙스톤 후작의 아들인데 정실 부인이 아닌, 평민 출신의 후실(그것도 세번째 후실이라고 했다.)이 낳은 아이였기에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사람들의 냉대를 받고 꾹꾹 참고 아무 사고 없이 지내는 대신 받으면 곱배기로 돌려주는 방법을 선택했다고 했다. 그리하여 이 반성실에 수시로 들날날락 거리게 되었기는 하지만, 이제 아무도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도 없어지고, 더불어 친구도 꽤나 많이 사귀게 되었다고 했다. 그의 말을 증명 하기라도 하듯 그의 설명이 거의 끝날 무렵에 대여섯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반성실로 달려왔다. 소년의 소개로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친해진 나는 그들 모두가 소년과 같은 상처를 지니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들 중 절반은 평범한(?) 귀족의 자식들이라고 해서 날 놀라게 했다. 이런 내 모습에 소년이 씨익 웃으며 "뭐, 어디에든 별종은 있는 법이지." 라고 설명하고 넘겼지만, 그 모습은 그 동안 받은 인상으로 귀족들은 모두 다 나쁜 놈들이다... 라고 여기고 있던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귀족은 다 나쁜 놈들이다' 라고 여겼던 내 의식이 '귀족이라고 다 나쁜 놈들만 있는 건 아니구나...' 라고 바뀌었다. 그러고보니 내 아버지도 귀족이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 유명한 야밤도주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아버지가 내 할아버지의 노예로써 팔려온 어머니에게 첫눈에 반해 둘이 도망친걸로만 알고 있었다. 나중에 아버지에게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어머니는 처음 부터 노예 사냥꾼에게 잡힌 것이 아니라, 잡힌 동족들을 구하기 위해 인간 세상으로 쫓아 왔다가 도리어 잡혔다고 한다. 정령사와 마법사였던 어머니는 즉시 마나를 다룰 수 없게 하는 족쇄 - 그렇게 하면 정령술도 마법도 사용하지 못한다. - 를 차고 할아버지에게 팔렸지만 그 상황에서 탈출을 시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아버지를 만나 도움을 받고 그때 당시에 정의를 부르짖던 신출내기 기사였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 사실 노예 매매는 국가에서 금하고 있었다 - 분기 탱천하여 어머니와 함께 집을 뛰쳐나와 노예로 팔린 유사 인종들을 구출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다 어머니와 정이 들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고 했다. 물론 집안에는 단지 통보만 해놓고 정식 허락은 안 받은 채 거의 도망치다시피 산속으로 들어가 신혼을 차린 거라 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내가 태어난 거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 소년의 덕분에 내가 따를 당한 이유를 알게 된 나는 소년을 본받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그 첫 행동으로 반성실 생활이 끝나는 날 - 사실 나는 내가 며칠 동안 감금되어 있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이게 다 담임이 아무런 말도 안 해주고 무조건 가뒀기 때문이다. - 날 데리러 온 담임에게 다짜고짜로 덤벼들었다. 물론, 어린 여자애일뿐인 내가 성인 남자인 담임을 이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동안 산에서 뛰어놀고,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아 제법 날쌘 날 귀족으로써 고이 자란 담임이 쉽게 제압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 이것도 그 소년이 가르쳐 준 거다. - 그리하여 방심한 상태로 날 보지도 않은 채 데리고 나가는 담임의 뒤통수를 다짜고짜로 들이 박은 채 쓰러지는 담임을 몇번 밟아주고 그가 정신 차리고 일어나기 전에 냅다 뛰었다. 그리고 그 소년의 친구들이 알려준, 나에게 한 마디 들었다고 열받아서 기절한 그 지지배가 수업을 받는 교실에 난입하여 놀라는 그 지지배에게 이단 옆차기를 날려 버렸다. 그 뒤에는, 내가 뭔 힘이 있겠는가? 학교 경비대가 달려와 날 끌어내었고 난 그 날로 1학기 정학 당하여 집으로 돌려 보내졌다. 나중에 소년에게 온 연락에 의하면 나에게 이단 옆차기를 당한 그 지지배는 쇼크로 쓰러져 2주 동안 정양을 해야 한다는 진단서를 받았고, 담임은 불의의 일격에 뇌진탕을 일으킨데다 앞으로 쓰러지다 이마까지 깨져서 그 또한 며칠 누워 있었다나? 이렇게 집으로 돌아온 날 보고 할머니는 펄펄 뛰었지만, 아버지는 크게 웃으셨다. 아마 그 분도 내가 학교가서 얼마나 힘겨운 생활을 했었는지 짐작하고 계셨던 듯 했다. 그런데, 조금 씁쓸한건.... 이 사건으로 인하여 아버지는 날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 했지만, 백작이란 지위로 인하여 바쁜 아버지가 항상 집에 머물러 있는 할머니가 몰래 날 학교에 집어 넣는 걸 막기는 어려웠기에 이 일을 가지고 타협을 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날 학교에 안 보내는 대신 아버지는 귀족집의 얌전한 딸내미와 결혼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다행이도 내 새 어머니는 전형적인 얌전하고 마음씨 고운 조강지처 타입이었는데 날 친 딸처럼 예뻐해줬다. 그래서 아버지가 집에 안 계시는 날에는 할머니의 심술에서부터 그녀가 날 보호해주는 역활을 하곤 했었다. 그런거 보면 나는 참 운이 좋은 편이라니까. 하지만,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심술을 막을 수 있으면 얼마나 막을 수 있겠는가? 집에 돌아온 나는 학교에서 처럼 왕따는 당하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심술로 인하여 툭하면 꼬투리를 잡혀서 체벌을 당하거나, 아니면 새어머니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틈을 타서 할머니의 명을 받은 하녀와 하인들에 의한 구타를 당해야 했다. 내가 정말 바보같았던 것은, 그렇게 당하면서 나는 나와 계약을 맺은 정령들을 불러내 도움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 어머니에게 배운 정령술은 정령을 불러내기 위한 마나를 수련하는 것과 정령을 불러내어 같이 노는 것만 생각했지, 그들을 불러서 남을 공격하게 하는 건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고스란히 집단 구타를 당했던 것이다. 정말 힘이 있어도 사용하지 못하는 멍청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던 어느날 이 모든 것을 역전할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날도 아버지가 볼일로 인하여 집을 비웠었는데, 그 틈을 타서 날 괴롭히려는 것인지 할머니가 날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오라면 힘 없는 내가 가야지 어쩌겠는가? 새어머니의 조심하라는 당부의 눈길을 받으며 - 새어머니가 아무리 날 감싸 주려고 해도 할머니 앞에서 잘못한 점을 잡히면 체벌 받는 걸 새어머니가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 할머니 방에 가보니 글쎄 탁자에 예쁜 도자기 찻주전자와 찻잔이 올려져있고, 약간의 다과까지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할망구가 차를 마시면서 내가 맞는 걸 구경하려고 하나... 하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그 할망구가 나에게 의자에 앉기를 권하면서 손수 차를 따라주려는 포즈를 취하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노망이 들 정도로 골골하는게 아니라 아직 죽을 날이 먼 것 처럼 팔팔 했기에 또 뭔 수작을 부리려는 걸까 의심하면서 탁자로 다가가는데 아니나 달라, 내가 탁자로 다가가 직전에 뒤에 있던 할머니의 하녀가 치렁치렁한 내 치마자락을 꽈악 밟아서 내 몸의 균형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발을 거는 것도 아니고 치마 자락이 좀 잡힌 것 뿐이었으니 조금 휘청 거리면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은 채 얼마든지 균형을 잡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눈치를 보니 이걸 가지고 '아직까지 숙녀의 몸가짐을 익히지 못했느니, 할머니 앞에서 추태를 부렸느니' 하면서 또 뭔가 날 골탕 먹일 벌을 준비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래서 나는 이왕 벌 받을 거 할머니도 가만 냅두지 말자 하는 생각에 일부러 몸을 크게 휘청거려 할머니가 있는 탁자쪽으로 몸을 쓰러뜨렸다. 덕분에 탁자가 뒤집히며 탁자 위에 올려졌던 뜨듯한 차와 과자들이 놀라움에 벌떡 일어선 할머니에게 몽땅 쏟아지고 말았다. "꺄아악, 마님, 마님..." "어떻게 해요, 빨리 의원을..." 결국 할머니는 너무 놀라서 안정제 같은 약을 먹어야 했고, 얼굴과 팔에 가벼운 화상을 입어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걸 고소하게 바라보고 있던 나는 할머니의 치료가 다 끝나고 할머니가 정신 차리자 그 즉시 할머니 방으로 불려갔다. "이, 이 천한 것이이이~~!!" 내 예상대로 할머니는 날 보자마자 엄청난 화를 내며 펄펄 뛰었고, 난 할머니에게 뺨을 수차례나 얻어 맞아야 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건 기가막히게도 가죽 채찍이었다. 그 동안은 아버지의 눈 때문인지 몰라도 체벌을 가해도 기껏 가느다란 회초리였는데 엄청 화가 나서 이성을 잃었던 듯 했다. "당장 쳐라!" 뭐, 그리하여 나는 결국 하녀들에게 양 손을 잡힌 채 바닥에 엎드려졌고 위에서 채찍이 내리쳐졌다. 하지만, 다섯대 쯤 맞았을때 갑자기 할머니 방 문이 벌컥 열리면서 분노한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달려들어왔다. 아버지는 들어오자마자 상황을 보고 분노하여 나에게 채찍을 내리치던 할머니의 수석 시녀에게 검집 채로 검을 휘둘러 내리쳐 날려 버렸다. 중년 나이의 여자가 몇십년동안 몸을 단련해 온 기사의 힘을 어찌 이기겠는가? 그녀는 정말 공중으로 붕 떠서 방 구석으로 쳐박혔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팔 뼈하고 갈비뼈에 금이 갔댄다. 새어머니가 달려 들어와 날 일으켜 세우는 사이 아버지의 명을 받은 사병들이 두려움으로 울부짓는 내 팔을 잡아 못 움직이게 하던 하녀들을 끌고 나갔다. 정말,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친것 같은 방안이 정돈되자 새파랗게 질린 할머니를 향해 아버지는 싸늘한 눈길만 한번 보내고는 휙 나가버렸다. 그 뒤로 새어머니와 그녀의 하녀의 부축을 받은 내가 나갔고 말이다. 내가 내 방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는 동안 아버지는 얼굴도 안 내밀고 있다가 아주 하~안참 뒤에나 모습을 드러냈다. 나중에 알고보니 내가 채찍으로 맞는 걸 보고 분노한 아버지는 집안을 발칵 뒤집어서 할머니의 명을 받아 나에게 손 댄 하인, 하녀들을 다 착출해 낸 뒤에 - 그게 백작 집안 하인, 하녀들의 절반에 육박했다고 한다. - 다 지하 감옥으로 끌고 내려가 모종의 벌을 내렸다나? 그 뒤로 할머니는 돌아가실때까정 나에게 손 하나 대지 못했고, 나는 그런 할머니를 살살 약올리면서 할머니가 돌아가실때 까지 그 집에 붙어 살았다. 나중에 아버지가 하인이나 하녀들에게 구타 당할때 왜 정령을 사용하지 않았냐고 물어을때, 내가 얼마나 허망해 했는지는... 정말 그 심정은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 뒤로 나는 새어머니의 배려로 정식으로 정령술과 마법을 배웠는데 스승은 날 이 집안으로 데리고 온 백작가의 마법사였다. 그리고 내가 13세가 되던 해와 16세가 되던 해 새어머니는 아들을 나았는데 첫째 아들이 나중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백작의 작위를 이어 받게 되었다. 뭐, 새어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난 그 애들과 사이 좋게 지내기는 했다.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달려와 도와주었던 것도 그런 인연때문이었다. 나는 친모가 엘프라는 것 때문에 귀족 사교계에 정식으로 소개되지 못했는데 새어머니는 그것 때문에 늘 미안해 하셨다. 자신이 한 일도 아닌데 왜 미안해 하는지... 덕분에 새어머니는 내가 나이가 차자 좋은 혼처를 찾기 위하여 사방으로 애를 쓰셨는데, 그게 참 나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새어머니의 결혼 압박을 피할 겸 정말 오랜만에 펜사 산맥에 살고 계실 친어머니를 찾아 나섰다. 그때가... 내 나이 18세였으니... 거의 7년만에 어머니를 찾아가는 나도 참 불효녀인 것 같다. 그것을 계기로 아버지 집안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에 발을 내민 나는 학교에서 처음으로 나와 친했던 그 리빙스톤 후작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어차피 자신은 후작의 작위도 못 받고 어머니 출신 때문에 귀족 대접을 못 받는 걸 알기 때문에 일찌감치 귀족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걷고 있었다. 상인이라는... 그때 나는 중급 정령까지 불러낼 수 있는 괜찮은 정령술사 ( 마법은 겨우 3 클래스...) 였기에 그의 밑에 들어가서 일을 돕기도 했었다. 사실... 그가 나의 첫사랑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이 따로 있었고 결국 그녀와 결혼하게 되었기에 나는 내 마음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고이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그가 사랑하는 여인이 귀족가의 영애였기 때문에 나는 그가 그녀를 포기하고 내게로 올 줄 알았었다. 그래서 그의 곁에 오래 붙어 있었던 것인데... 그리하여 그가 결혼하고 얼마 안 있어 나는 때를 보아 그와 헤어져 세상을 돌아다녔다. 그 동안 용병들과 일도 해보기도 하고, 혼자 떠돌기도 하고, 모험가 팀에 들어가기도 했었다. 내가 그러는 동안 세월은 흘러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새 어머니 또한 돌아가시고 내 이복 동생 조차 한살 두살 나이를 먹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손자까지 보게 되어 내가 갈 때마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맞이하는 걸 볼때마다 나는 왠지 모르는 소외감을 점점 진하게 느끼게 되었다. 어차피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대로인데 나와 친했던 이들이 모두 변해가더니 결국 사라져 가는 걸 보고 있자니 인식을 안 하려고 해도 나는 저들과 다르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될 뿐이었다. 친어머니에게 돌아갈까 생각도 했었지만, 에휴, 사실 친어머니께서는 다른 엘프와 재혼을 하셔서 가족을 이루고 살기 때문에 이제와서 그들 틈에 끼어들기도 매우 껄끄러웠다. 그래 혼자 우울증에 걸려 '아아, 내가 갈 곳은 어디인가? 이 넓은 세상에 과연 내 집은 없단 말인가?' 하고 혼자 엄청 우울해 하다가 나는 결국 '내가 왜 사나, 이러면서 꼭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은 사춘기때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던데... 나는 아무래도 하프 엘프다보니 사춘기가 늦게 찾아온 모양이었다. 이런 철 없는 생각을 100세가 넘은 나이에 했으니... 그래서 나는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인 목숨, 세상에 미련을 버리자는 (거창하게 말했지만, 한마디로 자살 하려는...) 정말 멍청 하고 한심한 생각까지 하게 됬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이왕 가는거 정령술사의 최후 답게 정령왕이나 한번 불러보고 가자는 결심을 한 나는 인적 없는 숲속의 작은 개울가로 가서 물의 정령왕을 불러내는 주문을 외웠다. 내 몸에서 엄청난 마나가 빨려 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와 함께 내 눈앞에서 점차 형상을 갖춰가는 물의 정령왕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감격에 넘쳐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아주 형편없는 생각을 하며 급격한 마나 소모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어 버렸다. 그러나 정말 신께서 보우하사 내 목숨이 그 정도로 짧지는 않았는지 나는 한참 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정말 다행이도 정령왕을 불러낼 마나를 내가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간발의 차로 목숨을 건진 듯 싶지만... 그렇게 부스스 눈을 뜬 나는 날 기다리고 있는 신비한 물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의 모습과 함께 그 특유의 틱틱대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야, 너 뭐냐? 불렀냈으면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제 10화 도망(1) 데니 형이 요즘 나에게 서운함을 느낀 모양이다. 한마디로... 삐졌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게 내 잘못때문에 그런거라... 나는 정말 몸둘 바를 몰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아아.... 정말... 내가 기사랑 마법사들이 서로 사이가 안 좋은 줄은 어떻게 알았겠냐고오오~' 이 일이 이렇게 된 계기는, 며칠 전의 일이었다. 엘라임을 불러냈다가 된통 혼나고 난 뒤 나는 부단히도 마나를 다루는 연습을 하여 자유 자재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폭발은 안 일으킬 수 있게 되어 다시 노만에게 마법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뭐,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이건 순전히 나 혼자만 부단히 연습하여 이루어낸 건 아니고, 엘라임을 불러낸 뒤 계속 내 곁에 붙어있는 네 나이트급 정령들과 엘라임의 도움을 받은 덕택이었다. 네 나이트급 정령들은 난 있을 필요가 없는데도 인간 세상을 구경 하는 건 난생 처음이라면서 어떻게 매정하게 돌아가라고 하냐고 난리를 쳐서 - 바람의 정령이 제일 그랬다. - 나는 하는 수 없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엘라임이 멍청하게 나이트급 정령들에게 휘둘린다고 잔소리 하고... 아아, 정말 내가 괜히 엘라임을 불러내가지고 그 동안 고생한 거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엘라임은 다행이 나보고 이왕 이렇게 나온거 구경이나 하고 집에 가라고 하더니만 - 난 처음에 엘라임이 평소같지 않은 모습을 보이지 뭔 일인가 하고 놀랬었다. - 놀기는 무슨 개뿔이... 그 뒤로 - 엘라임과 나이트 급 정령들은 자신이 맘만 먹으면 인간들 모르게 머물 수 있다. - 계속 내 곁에 붙어 있더니만, 새벽 훈련때는 인간들이 시키는 대로 한다고 종알대고, 대니 형에게 제대로 안 한다고 혼나면 또 혼난다고 잔소리 하고, 조엘 시중 들면 인간 따위 시중이나 들어 준다고 잔소리 하고... 등등등... 아마 엘라임은 내가 가출한 거 혼내줄려고 일부러 인간 세상에 머물게 해놓고 툭하면 잔소리를 하기로 작정한 거 같았다. 그래도 마나 제어를 서투르게 해서 자꾸 마법을 실패하면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도와주기도 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나에게 책임감을 느끼기는 느끼는가 보다. 웃기는 건 세 나이트급 정령 (물의 정령 빼고) 들이었다. 이 녀석들은 처음에 내가 계약을 맺자고 불러냈을때는 날 보자마자 반말을 해대더니만, 엘라임이 내 아들이다라고 하니까 그때부터 존대를 하는 거였다. 그러면서 내가 왜 그렇게 안면을 바꾸냐고 했더니만, 인간들은 자신의 존대를 받을 존재들이 못된다나? 나도 인간의 피가 흐른다고 했더니, 절반은 엘라임의 기운이라고 나는 예외란다. 그렇게 고생 고생 하면서 노력하여 결실을 맺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게다가, 노만과 함께 다시 기사 연무장에 가서 드디어 2클래스의 마법을 무사히 성공 시킬 수 있었던 나는 너무 기뻐서 환호성까지 지를 정도였다. 그러자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있던 노만이 나에게 말을 건넸다. "호오, 그렇게 좋으냐? 훗, 하기야... 그렇지 않고서 어찌 마법사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하... 아니 뭐..." 쑥스러운 마음에 몸둘바를 몰라하자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엘라임이 야유를 보냈다. [흥, 그 정도를 가지고... 네 엄마는 7클래스의 마스터였단 말이다. 네 엄마보다 못한 인간의 칭찬에 좋아하기는...] '내가 못살아...' 엘라임의 말에 티 안내고 속으로 한숨쉬고 있는데 노만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흐음, 이왕 이쪽 길로 들어선거 확실하게 하는게 어떠냐?" "예?" 영문 모를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노만이 자세하게 말해줬다. "아니, 솔직히 그 동안은 조엘님의 배려로 시간을 내서 마법을 배우기는 하지만, 보통 마법사들이 공부하는 시간에 비하면 택도 없지. 그러니 마법 수련하는 시간을 늘리잔 말이다. 으음... 그래, 새벽 수련을 그만두고 그 시간에 마법을 배우는 건 어떠냐?" "에에? 하지만, 그건... 조엘님이 시켜서 하는 건데..." 내가 미쳤다고 새벽부터 공부 한답시고 머리를 싸매겠는가? 차라리 몸으로 때우는 수련이 훨씬 났지.. 한국에 있을 때도 셤 공부 한다고 새벽에 일어나본적이 없는 나다. 그런데 이 곳에 와서 새벽에 공부를 하겠는가? 하지만 노만의 말을 거절할 명분이 없어 조엘의 핑계를 댄건데 노만은 오히려 잘되었다는 듯 반색 했다. "그러냐? 그렇담, 조엘님의 허락만 구한다면 새벽 수련을 안 해도 되겠지? 알겠다, 내가 오늘 즉시 말씀드려주마." "어? 아니, 그러니까..." '그게 아닌데....' 전에도 한번 이야기 했지만, 나는 검사가 될 생각도 없지만, 마법사가 될 생각도 없다. 그저 단지, 검술은 조엘의 강요와 함께 배워두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배우는 거고, 마법은 호기심을 충족할 정도만 배우며 충분하다고 생각할 뿐, 몇 클래스의 마도사가 되겠다던가 그런 마음은 요만큼도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대로가 너무나 만족스러운 상태였다. "새벽 수련을 말입니까?" 노만은 나에게 말한 대로 조엘이 왕궁에서 돌아오자마자 그의 방으로 쫓아가 다짜고짜로 나를 새벽 수련에서 빼 줄것을 부탁했다. "그렇습니다. 이제 해인이 녀석은 마나를 어느 정도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 마법학만 학습하면 마법 능력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때에 조금이라도 수업 시간을 늘리는 것이 해인이에게도 더 좋을 듯 싶습니다만..." "흐음..." 조엘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만 힐끔 나를 살펴 보았다. 나는 '아니예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노만이 옆에 있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대신 눈빛에다 거절의 의지를 가득 담아 조엘에게 필사적으로 보냈다. 그랬더니 엘라임이.. [쯧쯧, 눈 뜨고 못 봐주겠군. 그냥 확 집으로 데리고 가 버려?] [치사하게 한번 말한 걸 바꾸다니요. 아앗, 그럼 어쩌냐구요. 난 지금 힘도 없는데...] [힘이 없기는 왜 없어? 네 정령의 기운을 사용하면 되잖아.] [사용해서 어쩌라구요. 여길 뒤집어 엎으면 저는 검술이랑 마법을 배울 수 없게 되잖아요. 그래도 어느 정도의 실력은 가지고 싶다구요.] 솔직히.... 험, 험, 솔직히... 조엘 녀석이 날 새벽 수련에 집어 넣어 검술을 배우게 되었을 때 내 머리 속에는 정령의 기운과 검술을 쓰는 정의의 소녀 모습이 떠올랐었다. 쾌걸 조로 처럼 가면을 쓰고 나타나 악당들을 물리치는 '세느강의 별'의 여주인공처럼 말이다. 그러다가 노만에게서 마법을 배우자 이제는 세일러문이 떠오르더군. 얼마나 멋진 일인가 말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냥 돌아가면, 그런 모습을 보일 수가 없지 않겠는가? 물론, 이 곳을 나가서 검사로써 이름을 날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한편으로는 나중에 불량배들이나 건달들이 나에게 시비를 걸 때 멋드러지게 검을 쓰윽 뽑으면서 '덤벼라! 내 오늘 너희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마!'라고 소리쳐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뭐, 그러다가 혹시 아는가? 위험에 처한 귀족가의 잘생긴 도련님이나 부자집 아들내미를 구해 줘서 거액의 사례금을 받기도 하고, 그들이 내 모습에 반해 쫓아다니게 될 지도... '므흐흐흐...' [도대체 뭔 생각을 했기에 표정이 그리 음흉해 지는 거냐? 이야기 하다가 딴 생각을 하다니, 재주도 좋아...] '핫.' 엘라임의 말에 얼른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두리번 거렸지만, 다행히 조엘은 생각에 잠겨 있고, 노만은 조엘을 바라보고 있느라 아무도 내 모습을 보고 있지 않았다. 단, 한사람 데니 형을 제외하고는... '히익~!' 데니 형은 왠지 모르지만 얼굴이 살짝 굳어져서 날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노만님의 청을 들어주시지요. 해인이도 원하는 것 같은데..." 무감각한 데니 형의 목소리가 내 양심을 콕콕 찔러댔다. '아, 아니.. 내가 언제 원한다고...' [쿡쿡, 야, 저 녀석 너한테 삐졌나보다.] 갑작스런 데니의 말에 조엘이 데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날 힐끔 보다가 다시 데니를 보더니 왠지 기분 나쁜 미소를 씨익 지어 보이며 노만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안돼겠습니다. 저는 제 시종이 체력이 없어 비실비실 대는 마법사가 되는 건 원치 않거든요. 체력도 어느 정도 받쳐주는 녀석이길 바라거든요." 그러자 노만이 조금 아쉽다는 표정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흐음.. 그렇습니까? 물론 마법사들의 체력이 약한 건 사실입니다만... 뭐, 조엘님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으니... 그렇다면, 새벽 수련을 이틀에 한번이나 사흘에 한번 정도 나가는 걸로 타협하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체력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 정도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사실, 해인이가 마법을 익힌다면 검술 같은 거야 그다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자 아까는 나보고 새벽 수련을 그만두게 하라고 말한 데니 형이 분한 표정으로 나섰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해인이는 검술에도 재능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법은 혹시라도 모를 상황에 대비해 조금 도움이 되고자 배우게 한 것일 뿐, 사실 검술을 배우는 이 녀석에게는 크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뭐시라? 조.금. 도움이 된다고? 그거 지금 마법을 두고 하는 소리인가? 내 마법사도 체력이 너무 나쁘면 안 좋기에 지금까지 가만 두고 있었네만, 사실 마법사가 검술을 배울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마법 한방이면 만사 오케인데. 다칠 각오를 하고 검을 휘두르며 적을 직접 맞대야 하는 검사보다는 훨씬 나은게 아닌가?" "무슨 그런 실례의 말씀을. 비실 비실한 마법사가 뭐가 났단 말입니까? 마법을 못쓰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될 뿐인 존재인 것을... 그런 마법사야 가까이 가서 한방 쳐주면 찍 소리도 못하고 나가 자빠지지 않습니까?" "누가 한방에 찍 소리도 못하고 나가 자빠진단 말인가?" "누구긴 누굽니까?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콧대만 높은 비실이들이 그렇다는 거죠." "그렇다면 머리는 텅 빈채 힘 좀 있다고 칼을 휘둘러대는 이들이 났단 말인가?" "칼이라뇨. 건달들이 휘둘러대는 칼과 검사의 검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그게 그거지 뭐가 다르단 말인가?" "자자, 두분..." 노만과 데니 형 사이에 스파이크가 튀고 설전이 난무하자 엘라임을 비롯한 네 정령은 무지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다툼을 구경했는데, 보다 못한 조엘이 나서서 둘을 만류하자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제 10화 도망 (2) 노만과 데니 형 사이에 스파이크가 튀고 설전이 난무하자 엘라임을 비롯한 네 정령은 무지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다툼을 구경했는데, 보다 못한 조엘이 나서서 둘을 만류하자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 하시죠. 서로를 헐뜯는 것 만큼 보기 안 좋은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검술이나 마법 둘 모두가 서로 비교해서 어느 한쪽이 뒤쳐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둘 모두가 오랜 세월 동안 부단한 노력을 통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조엘의 말에 데니나 노만 모두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는 아니였지만 - 아무래도 조엘 또한 기사이니까.. - 조엘이 원하는 대로 입은 다물었다. 표정들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아 굳어진 상태였지만 말이다. 조엘은 그런 둘을 싱긋 웃으며 바라보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해인이는 양쪽 모두에 재능을 보인다니 배울 수 있을때 배워두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의 말은 곧바로 노만에 의해 반박되었다. "그건 좋지 못합니다. 토끼 두 마리를 쫓다가 둘 다 놓친다는 옛 말도 있지 않습니까? 역사 이래로 뛰어난 마검사가 가끔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검사가 운 좋게 마법 아이템이나 마법검을 얻어서 마법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보통 마법과 검술을 같이 배운 자는 둘 모두 뛰어난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이들이 거의 대부분 입니다. 초천재가 아닌 이상 마법과 검술 둘 다 뛰어난 경지까지 도달한다는 건 불가능 합니다." 노만이 진지하게 말했건만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조엘은 싱긋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훗, 해인이 녀석이 그 초 천재일지는 모르는 일 아닙니까? 혹시 압니까? 마법과 검술 모두 뛰어난 경지에 이를지... 후후후, 안 그래, 해인?" "에? 아하.. 설마요..." [훗, 인간인 주제에 보는 눈이 있었군. 암, 당연히 가능하지. 누구 아들인데...] 하지만 노만은 심각했다. "농담이 아닙니다. 저는 체력을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정도라면 저도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마검사로 키우기 위함이라면 반대합니다. 저 아이는 이제 겨우 마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선천적으로 마법에 대한 재능이 있다 해도 지금부터 마법에 매진해야 10년 뒤에야 겨우 괜찮은 마법사란 소리를 들을까말까 하단 말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번에는 데니가 나섰다. "검술 또한 이제 막 익히기 시작했는데 그만 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해인이가 검술에 재능이 없으면 몰라도 상당한 재능을 보이는데 이대로 그만 둔다는 건 너무나 아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섣불리 두개 다 손을 대었다가 둘 다 어중간하게 익히게 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깝더라도 과감하게 하나를 포기하고 하나만 집중적으로 익히는 것이 났다고 보네." 노만의 말에 데니가 지지 않고 반박했다. "그럼 그 포기 하는 한가지는 검술입니까?" "당연하지 않은가? 자네는 이 세상에 마법적 재능을 타고나는 이가 얼마나 되는 것 같은가? 전 세계 인구의 0.1% 도 안 된단 말일세. 그 중에서도 이 애처럼 뛰어난 재능은 그 0.1% 중에서도 극소수 밖에 없단 말일세. 하지만 검사라면 어떤가? 검사는 재능이 없더라도 자신의 노력하에 따라서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가? 타고난 선천적 능력이 없으면 되기 불가능한 마법사와는 다르지 않은가?" '호오, 내가 그리 대단한 인물 이었던가? 홋홋홋...' 노만의 열변 같은 말에 데니는 뭐라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모습이 반박하지 못하는 것이 되게 분한 모양이었다. 그걸 본 노만이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조엘이 데니의 편을 들고 나섰다. "물론, 노만님의 말대로 검술은 누구나 노력하는 것에 따라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를 수는 있습니다만, 검술에 탁월한 재능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도 극히 드뭅니다. 그러니 해인이의 그 재능을 살려주지 못하고 그냥 사장시켜 버리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이기 무슨... 너희들이 내 스승... 은 맞군. 어쨌든 뭐냐구... 자기네들이 내 부모라도 되는 것 처럼 자기들 마음대로 정하려고 하다니... 그런건 내 의견을 물어봐야 하는 거 아냐?' 나는 현재 내 상황상 그들의 격렬한 대화에 - 내 일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 끼어들지 못한 채 옆에서 불만스런 표정으로 그런 그들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이런 내 불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조엘이 날 보고 싱긋 웃더니 내 생각하던 바를 그대로 말했다. "하지만, 무엇이 어찌 되었건 이런 일은 우리가 정하기 보다는 당사자가 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정해봤자 당사자가 거부하면 소용 없으니까요." 100번 옳은 조엘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 명의 시선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나에게로 향했다. 그리고는 조엘이 대표로 나에게 물었다. "자, 말해봐라 해인아. 넌 어찌 했으면 좋겠지?" 조엘 녀석은 두 명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받고 난처해서 당황하는 내 모습이 재미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맙소사... 하필이면..." 노만과 데니는 '설마 내가 가르치는 걸 그만 두겠다고 하지는 않겠지?' 란 시선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무지 무지 난처했다. 사실 노만과 데니 둘 다 친한데 둘 중 어느 하나를 그만 두겠다고 할 수도 없고, 둘 중 제대로 익히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없고 그만 두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러나 둘 다 하겠다고 하자니, 노만이 이렇게 이야기 한 것이 모두 나를 위한 것인데 둘 다 하겠다고 하면 그런 노만의 마음을 거절하는 것 같아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정말 무지 무지 난처했다. 그래 내가 우물쭈물한 채 아무 말도 못하자 보다못한 엘라임이 말을 건네왔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단순한게 아니라고요. 내가 무엇을 선택하던 둘 중 한명의 배려는 거절하게 되는 거니.. 에휴... 왜 이렇게 되었지?] [뭘 그리 복잡하게 구는 거냐? 어차피 한 사람의 배려는 거절하게 되는 거라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되잖아?] [아, 그것도 그렇네... 하지만... 그래도 그럼 미안하잖아요.] [그럼 달리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그건 없죠.] [거봐.] '에휴....'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무지무지 미안한 표정으로 노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에... 스승님... 저는 둘 다 배우고 싶은데요..." 그러자 노만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래.... 하기사... 너에게 선택하라고 하는 자체가 선택을 못하게 하는 것임을.... 아무래도 조엘님과 링클레터 경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겠지. 그래, 알았다. 하지만 너무나 아쉽구나." 노만의 말은 어찌 들으면 조엘과 데니가 내 앞길을 막는 것 처럼 들렸기에 조엘은 그의 말에 쓴 웃음을 지었고 데니는 더욱 더 표정이 굳어졌다. [에엑, 스승님이 서운해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데니 형이 화나버렸어요. 어쩌죠?]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엘라임을 바라봤지만, 엘라임이라고 뾰족한 수가 없었는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하는 수 없지 뭐. 어쩌겠어? 내가 확 뒤집어 버릴 수도 없잖아.] 그래서 결국 나는 예전대로 새벽에는 검술을 배우고 오후에는 마법 수업을 받기로 결정 되었는데, 그 다음날 내가 새벽 수련을 하기 위해 연무장으로 가자 데니가 여전히 기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날 기다리고 있다가 구석으로 끌고갔다. "너, 정말 검술을 배울 거야?" 정색한 얼굴로 묻자 나는 괜히 긴장해서는 실실 웃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에이, 형... 왜 그래요? 내가 언제 검술이 싫다고 했남?" 하지만 데니의 얼굴은 풀리지가 않았다. "좋다고 하지도 않았잖아. 어제 곰곰히 생각해보니 너 이 새벽 수련에 참가하게 된 것도 조엘님이 강제로 시켜서 하게 된 거였잖아. 만약, 노만님의 말씀대로 마법에만 전념하겠다고 말한다면 새벽 수련에서 빼줄 수도 있어." "어어, 그러지 말아요. 물론 난 마법을 배우고 싶지만, 마법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고요. 그냥 마법이 어떤 건지 궁금한데다 나도 할 수 있으니까 배우는 거 뿐이지 이쪽으로 전력을 다하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게다가 난 검술도 배우고 싶구요." 내 말에 날 뚤어져라 바라보던 데니가 씨익 웃었다. "검술도 마법처럼 이거 열심히 배워서 검사나 기사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지?" "엣? 아니... 그게... 뭐... 아하하하..."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상대에게 자연스레 거짓말을 할 정도로 난 뻔뻔스런 철면피가 못되었다. 그래서 대답은 못하고 웃음으로 얼버무리려고 하는데... 콩 "아얏~!!" 역시나 대충 대충 하는 걸 가만 두지 못하는 데니가 내 이마에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녀석~! 검술 배울때 대충 적당히 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녀석이 검술을 배운다고 말했을 때 부터 알아챘지만... 솔직히 말해봐. 너 마법 수업도 적당히 넘기고 있지?" "앗, 아하하하... 뭐..." "좋아. 내 너의 그 적당적당히 하는 정신 상태를 뜯어 고쳐 주겠다. 오늘 부터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거다, 알겠냐? 마법 수업 시간을 늘리는 대신 계속 검술을 배우기로 한 이상 확실하게 가르쳐 주지." "엣? 그게 무슨..." "따라 와. 오늘 부터 내가 너만을 위한 특훈을 시켜 주겠다!" "어어, 형... 나는 지금 이대로가 좋은데... 저기~ 이봐요오~" 성큼 성큼 걸어가는 데니의 뒤를 종종 걸음으로 따라가면서 나는 근처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는 이제는 웃고 있는 조엘을 바라보며 어찌 해달라는 구원의 눈길을 보냈지만, 조엘 녀석은 그걸 싸악 무시한 채 손을 흔들어 보였다. "행운을 빌어. 데니 녀석은 한번 한다면 하는 녀석이거든. 이걸로 네 검술 실력이 팍팍 늘테니 열심히 하라고." '이 녀서억~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에에~~' =================================================================================== 제가... 그렇게 잠수를 많이 하나요? 잠수를 많이 한다는 소리를 들어서.. ^^:; 쩌비... 어쨌든, 현님 생일 축하드리구요, 칼실비아님 아버지 생신도 축하드려요. ^^ 제 10화 도망 (3) "행운을 빌어. 데니 녀석은 한번 한다면 하는 녀석이거든. 이걸로 네 검술 실력이 팍팍 늘테니 열심히 하라고." '이 녀서억~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에에~~' 따악~!! "아코~!!" "제대로 막지 못해? 다시 한번~~!" 콕~!! "켁!!" "어딜 보고 하는 거야? 상대의 검을 똑바로 보라고 했잖아!! 눈은 뒀다 뭐해?" "제대로 못해? 검법 배울때 뭐 했어? 너 연습 제대로 안 했지?" "검을 어딜 겨누고 있는 거야? 제대로 겨눠!!" "팔이 내려갔잖아. 똑바로 못 들어?" "으헥~!!" '우에에엥~!!' 사실 그 동안의 수련은 기본 연습을 한 다음 데니가 검법 동작을 가르쳐 주면서 몇번이고 반복해서 혼자 연습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데니가 가끔 짬을 내어서 '이 동작은 적을 어떻게 막고 어떻게 베는 것이며 어떻게 치고 들어가는 것이다.' 라고 설명해주는 것이 다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 동안의 배운 검법을 가지고 데니와 직접 검을 맞대어 대련을 하는 것이었다. '젠장... 그것도 겨우 검법 세개 익힌 사람에게....' 간단하게 검법을 설명하자면, 하나는 상대방이 내려쳐오는 검을 옆으로 흘려낸 다음 상대가 검을 수습하기 전에 상대를 내려치는, 일명 방어하고 공격하기 검법이었고, 또 하나는 상대와 검을 겨눈 채 대치 상태에 있다가 순간적으로 상대의 검을 쳐내고 공격해 들어가는 검법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상대가 내려쳐오는 검을 마치 뱀이나 덩쿨처럼 살짝 엮어서 옆으로 끌어내린 뒤 공격하는 검법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적절한 타이밍과 빠른 스피드, 그리고 바른 자세가 꼭 필요한 검법이었는데, 나는 아직 검법을 배운지 얼마 안 된 초짜중의 초짜였기에 이 모든 것이 완벽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 일 검법에서는 데니가 내려치는 목검을 눈 위에다 내 목검을 사선으로 들어 오려 막아 흘려내야 하건만, 맨날 제 위치에다 올리지 못하고 조금 낮은 위치에 올려서 그대로 데니의 목검에 이마를 얻어 맞곤 했다. 따악~!! "아코~!!" "팔 똑바로 올리라고 했지!! 넌 지금 머리에 검 맞아 죽었어!!" 거기다 사선의 각도가 제 각도를 내지 못하면 데니의 목검을 옆으로 흘려내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받아 내게 되었는데, 데니의 내려치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 한번 그렇게 받아내면 손목이 부러진 것 처럼 시큰 시큰 거리고 무릎이 저절로 꺾였다. "으객~!!" "각도가 틀렸잖아. 검 끝을 더 내리라니까!!" 이게 전부였다면 정말 나는 행복했을 거다. 그 다음 검법인 상대방과 검을 겨누고 있다가 순간적으로 상대의 검 끝을 쳐냄과 동시에 상대 품으로 파고들어 검으로 내려 치던지 아니면 찌르던지 둘 중의 하나인데 나는 데니의 목검을 쳐서 옆으로 튕겨내질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상대의 검을 옆으로 멀리 튕겨내고 파고 들어야하는데 검을 튕겨내지 못하니 그 다음 동작은 아예 할 수가 없었다. "힘이 없잖아, 힘이. 내가 지금 폼으로 검을 들고 있는 줄 알아? 힘껏 쳐내란 말야!" 게다가 방향을 잘못 잡으면 검 끝이 아닌 검 중간 부분을 치거나 - 그렇게 되면 데니의 검은 아예 꿈쩍도 않는다 - 검 밑의 허공을 그냥 헛치게 된다. 헛치게 되면 데니가 목검을 조금만 앞으로 내밀면 목검의 끝은 정확하게 내 목 바로 앞에 다가왔다. 콕~! "넌 죽었어." "에구~" "어딜 치는 거야, 어딜? 똑바로 보고 치라고 했지? 검 끝을 정확하게 힘껏 쳐야 상대의 검을 튕겨내지!! 내가 하는 거 잘 봐." 그러면서 데니가 시범을 보이기 위해 나와 검을 겨누면 나는 바짝 긴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래봤자 데니가 검 끝을 치고 들어오면 내 검은 옆으로 팍 튕겨 나가고 그 순간 데니의 검 끝은 내 목에 와 닿아 있었다. 내 검을 치고 들어오는 시간이 과장 좀 보태면 1초도 안 걸린다. 그만큼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게다가 쳐내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 예전에 무협지에서 검을 들고 싸울때 강하게 부딪히면 손아귀가 찢어지는 거 같다는 대목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정말 그짝이다. 나중에 검을 놓고 보면 손바닥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시뻘개져 있곤 했다. 그래서 검사들 손에 딱딱한 굳은 살이 백이는 걸 거다. 그렇게 새벽 수련을 끝내고 나면 나는 누가 살짝 건들기만 하면 폭 쓰러질 만큼 지치게 된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그 다음에는 노만과의 마법 수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노만은 자신의 계획대로 내가 검법을 그만 두지 않고 계속 하게 되자 노만은 이대로 가만 있을 수는 없다며 집중 수업 방식을 택해 쉴 틈도 없이 날 몰아쳤다. 게다가 이제 2클래스와 3클래스의 마법도 배우다보니 마법진에 대해서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러자 필연적으로 수학과 과학과 논리적인 사고와 세심한 관찰력 까지 필요하게 되었다. 마법은 단순 마법과 종합 마법으로 나눌 수 있는데, 단순 마법은 불을 일으키거나 물을 나오게 하거나, 빛을 비추게 하는 등등 한가지 요소가 필요한 마법이고 종합 마법은 두가지 이상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필요한 마법, 예를 든다면 물과 빛을 형성해서 무지개를 보이게 한다든지, 아니면 바람과 불을 혼합하여 불 회오리를 만든다던지 등등을 말한다. 지금까지는 마법에 익숙해지려고 단순 마법 위주로 배웠는데 이제 복합 마법을 배우게 되니 여러개의 요소에 각각 마나를 분배하고, 상황에 따라 필요한 요소는 집어 넣고 필요 없는 요소는 빼는 걸 배우다보니 머리가 다 지끈지끈 거릴 지경이었다. 그러자 숙제도 전보다 두배는 더 많아져서 잠 잘 시간 또한 팍 줄어들어 내가 완전히 시험을 코앞에 둔 고 3 수험생이 된 기분이었다. 이런 내가 너무 가여워 보였던지 해럴드 집사나 조엘은 내가 틈나는 대로 꾸벅 꾸벅 졸아도 모른 척 해주고 나에게 일을 맡기지 않으려고 애써줬다. 특히나 조엘 녀석은 내가 녀석을 시중들러 갔을 때 그냥 소파에서 자게 해 주고 자신혼자 다 처리한 다음 방을 나설때 날 깨워서 데리고 나가곤 했다. 보통 때 같으면 그런 배려가 고마웠겠지만, 이 모든 일의 원흉이 그 녀석이었기에 나는 하나도 안 고마웠다. 게다가 정령들 또한 시키지도 않았건만 기특하게도 내가 복도를 걷다가 꾸벅 꾸벅 졸아버리면 녀석들이 알아서 내가 쓰러지지 않게 받쳐주고 옆으로 부딪히지 않게 잡아주고 엉뚱한데로 가지 않도록 인도해줬다. 역시 나이트급 정령들이라 내가 특별히 그들에게 마나를 공급해주지 않아도 자신의 힘으로 적은 물리력은 행사할 수 있어 날 도울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이트급이랑 계약을 맺길 잘 했다니까.' 물론 노만은 내가 정령과 계약을 했다는 걸 모른다. 나이트들은 하, 중, 상급의 정령들과는 달리 정령왕 처럼 이 세계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의 생물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 조차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니, 노만에게 이들을 소개시켜줬다가는 내가 엘라임의 자식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건 시간 문제가 아니겠는가? 나는 될 수 있는 한, 가능한 한 내 주위 사람들에게 나는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하고 싶다. 뭐, 벌써 뛰어난 마법적 재능을 타고난 아이라고 비춰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인간이라고 봐주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17년이란 세월동안 인간으로 자라온 나는 내 정체를 솔직하게 밝힌다면 지금처럼 평범하게 지내지 못할 것이란 걸 알고 그걸 두려워 하는 것 같다. 약간 특이하게 보이는 것은 괜찮을지 몰라도 아예 차원이 다른 사람이라는걸 알게 되면 아무리 편하게 대하려고 해도 남들과 교류함에 있어 보이지 않는 벽이 쌓이게 될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아예 정령들과 계약을 했다는 걸 숨기게 된 것이다. 뭐, 노만은 자신이 정령사가 아니기 때문에 도와줄 수가 없으니 마법을 충분히 배워 어느 경지에 이르면 스스로 마법진을 그려 정령을 불러보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앞에다 대고 '벌써 정령들을 불러냈는데요?' 라고 말할 수도 없었고 말이다. 어쟀든, 이렇게 노만과 데니에게 집중적으로 수업을 받으며 고생하고 있는 날 신께서 불쌍히 여기셨는지 이 고생의 늪에서 벗어날 기회를 마련해 주셨다. ================================================================================ 유리엘님, 아일린느님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려요. ^^ 에.. 그리고 저는 주말에는 안 쓰긴 했지만... 평일에는 꼬박 꼬박 써서 올린 것 같은데.. 아, 아닌가요? ^^:; 제 10화 도망 (4) 어쨌든, 이렇게 노만과 데니에게 집중적으로 수업을 받으며 고생하고 있는 날 신께서 불쌍히 여기셨는지 이 고생의 늪에서 벗어날 기회를 마련해 주셨다. "흐음... 사냥이라... 이번에는 웨스트모어랜드 후작령인가?" 거의 모든 파티 초대장 같은 경우는 공작 앞으로 오기 때문에 조엘 앞으로 직접 온 초대장은 본 적이 없던 터라 나는 약간 신기해 하며 조엘에게 건넸는데 그는 익숙한 일인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초대장을 읽어본 후 옆에 서 있던 데니에게 넘겼다. "하기야, 이제 슬슬 올 때라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가시겠지요?" "당연히 가야지. 나도 슬슬 바람도 쐬고 싶고... 게다가 그 녀석들 얼굴 본지도 오래 되었거든." "그러고보니... 정말 반년 만에 뵙는 것인가요?" "아마... 그쯤 되었을 걸? 스테판 녀석이야 3달 전에도 잠깐 봤었지만, 볼레터 녀석은 반년만이야." "그러고보니 웨스트모어랜드 자작께서 녹스 왕국에 가 계셨었지요?" "그렇지. 자신이 돌아오면 부른다고 했는데 초대장이 온 거 보니 돌아온 모양이야. 그렇다고 성으로 안 오고 곧바로 영지로 내려가있다니..." 그 둘의 대화에 상황을 전혀 모르는 나는 끼어 들 엄두도 못 낸 채 그냥 멀뚱 멀뚱 서서 듣고만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문득 시선을 준 조엘은 씨익 웃더니 데니를 향해 다시 시선을 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어떨까, 데니... 이번 사냥에는 해인이를 데려가볼까?" 그러자 데니가 정색을 하고 펄쩍 뛰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런 위험한 곳을 간단 말입니까?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안됩니다." "흐음... 하지만 노만님과 같이 있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조엘의 말에 데니의 강경한 표정이 약간 풀리더니 생각에 잠겼다. "노만님이요? 흐음.. 하기야... 우리를 따라 앞으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그 분과 함께 있는 거라면 괜찮겠군요. 뭐, 솔직히 저도 위험하지만 않는다면 실전에서 검술이 어떻게 쓰여지는 지 볼 수 있게 데려가고 싶기는 합니다." "그렇지? 노만님과 함께 있게 한다면 괜찮을 거야. 게다가 검술은 물론 마법이 실전에서 사용되는 것도 보고 말이야." 조엘의 말에 데니의 표정에 순간적으로 못마땅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지만 내가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 얼른 그 기색을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게다가 사내 녀석을 언제까지 저택에만 콕 박아 놓을 수는 없으니까요. 이번 사냥행이 저 녀석에게는 좋은 경험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경험이나마나... 기껏 사냥 가는 거에 왜 마법사까지 총 동원되어가지고 간단 말이야? 거기다 난 위험하니 뒤에 있으라고? 거참... 저 인간들 그렇게 안 봤는데, 역시 온실에서 고이 자란 화초들이었군...' 그들이 말하는 '사냥'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나는 단순히 예전 한국에 있을때 알고 있었던 오리 사냥이나 아니면 여우 사냥 같은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속으로 정령들을 동원해서라도 혹시 가여운 새끼 동물들이나 아니면 새끼 달린 어미 동물들을 잡으려 하면 도망치게 도와주리라는 기특한 결심까지 하면서 여행 갈 준비를 했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이 저택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 가게 되었다는 사실에 한껏 들떠 있었다. 솔직히 이 곳에 와서 계속 저택 안에만 머물고 있다가 처음으로 이 곳을 벗어나 다른 귀족 영지에 간다는 사실이 마치 소풍을 간다는 것 처럼 들려 기대 되기도 하고, 이 세계의 귀족 영지라는 것이 궁금하기도 해 나도 모르게 기분이 붕 떠버렸다. 그 '사냥'이라는 것에 대해 듣기 전까지는... 그래도 준비하는 기간에는 해럴드 집사의 교육 영향인지, 아니면 이번 사냥을 주최하는 웨스트모어랜드 후작 영지에 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가르치려는 데니와 노만의 몰아침에 눌려 좋아하는 티를 조금도 내지 못했던 나는 드디어 일주일 뒤, 조엘이 왕성에 정식으로 휴가를 맞고, 그 '사냥'에 갈 가문 소속의 기사들이 뽑히는 등의 준비가 끝나 드디어 출발하는 날, 그 동안 티내지 못했 것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자신도 모르게 자꾸 주체할 수 없이 벌어지는 입 때문에 계속 싱글벙글 하고 있었다. 엘라임에게 칠칠치 못한 놈이라고 잔소리를 들었지만 그래도 입이 지 멋대로 벌어지는 걸 난들 어쩌겠는가. 게다가 놀러가는 것도 놀러가는 거지만, 갔다 오는 동안에는 데니의 검술 수업과 노만의 마법 수업도 잠시 방학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잠시 저택을 떠난다는 사실 보단 수업을 잠시 중단한다는 것이 더 좋았다. [훗훗, 영감님도 대한민국 학생이었어봐요. 그럼 내 심정 이해할 테니...] 그러자 같이 가는 기사들과 그들의 시종들은 나의 들뜬 마음을 이해하는지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미소만 지은 채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내 마법 스승인 노만은 달랐다. 조엘과 데니를 비롯한 다른 기사들과 시종들은 모두 말을 탔지만, 노만과 나 - 그러고보니 나는 이 곳에 와서 말을 한번도 타보지 못했다. - 는 말을 탈 줄 몰랐기에 공작가에서 내준 고급스러운 마차를 타고 가게 되었다. 마차 안에서도 계속 벌어지는 입을 주체못해 싱글벙글 웃고 있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만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좋으냐?" "아핫핫핫, 예. 괜히 들뜨게 되네요." 그의 질문에 나는 쑥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대답하자 노만이 마차 안의 푹신한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으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 '사냥' 가는 것이 좋은 거냐, 아니면 단지 여행을 간다는 것이 좋은 거냐?" "그야.... 저택을 떠나 딴 곳에 가본다는 것이... 전 사냥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라... 아, 물론 고기도 좋아하지만..." 육식을 좋아하는 주제에 사냥은 안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쪼끔 양심에 찔려 나는 노만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깐 채 대답했다. 하지만, 곧 들려오는 노만의 말에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동물? 그게 무슨 소리냐?" 못 알아듣겠다는 듯이 되묻는 그의 질문에 나는 내가 오히려 어리벙벙 해졌다. "무슨 소리냐뇨? 사냥을 가는 거잖아요. 동물들을 사냥하는 것 아닌가요? 멧돼지나 사슴 같은 것..." 내 말을 듣고 있던 노만의 표정이 묘해졌기에 나는 말 끝을 흐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잘못 말한 것은 없었기에 노만의 표정이 이해되질 않았다. '아닌가? 아니, 사냥이 동물을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뭘 사냥한다는 거지?' 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노만은 관자놀이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문제나 주위 상황이 이해가 되었을때 노만이 자주 보여주는 버릇이었다. "그래, 그래... 아무도 너에게 설명을 안해줬나 보구나. 해인아, 그냥 동물을 잡기 위한 놀이 같은 보통 사냥이라면 가문에서도 특별히 뛰어난 기사들만 골라내고 가문의 마법사인 나까지 동원하겠느냐?"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냥'하나 가면서 되게 요란떤다고 생각했던 거고... "그럼... 스승님의 말씀은 지금 우리가 가는 '사냥'은 보통 동물을 잡기 위한 사냥이 아니란 말씀이군요?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사냥하는 겁니까?" "몬스터." "몬.... 스터요?" '그게 뭐지?' 내가 아는 것이 당연하단 얼굴로 말하는 노만이었지만, 내가 전혀 모른다는 얼굴로 어리둥절한 채 노만과 내 옆에 앉아있던 - 물론 노만의 눈에는 안 보인다 - 엘라임의 얼굴을 바라보자 노만과 엘라임은 황당한 얼굴로 동시에 말했다. "설마... 몬스터를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뭐냐, 너. 몬스터가 뭔지 모르는 거야?] "저어... 모르겠는데요..." 왠지 모르는 것이 잘못이라는 그 둘의 반응에 나는 약간 움츠린 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말에 황당하다는 표정의 노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설마... 농담이겠지? 트롤이나 고블린, 가고일 같은 건 보지 못했어도 들어 봤을거는 아니냐?" '듣지도 못했는데...' "에... 그러니까 저기... 그게..." 내가 난처한 표정으로 볼만 긁적이고 있자 노만이 날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믿을 수가 없구나. 이 세상에서 몬스터를 모르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너 혹시 어디 딴 차원에서 온 사람 아니냐?" '바로 그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사실대로 말 할수는 없었기에 나는 항상 해럴드 집사에게 둘러댔던 말을 다시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게 말이죠... 제가 다른 사람은 만나지 못하는 아주 기~픈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제가 상식적으로 모르는 것이 많아요." "그렇다 해도 부모님이 몬스터에 대해 설명도 안 해주시더냐? 아니, 깊은 산속이나 숲속에서 살았다면 몬스터 한 두마리쯤은 볼 법도 한데..." "핫핫, 그게.. 지금까지 몬스터라고 불리는 것들은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다 부모님도 몬스터에 대해 한번도 말씀해주지 않았거든요." 나는 그렇게 변명하면서 옆에 앉아있는 엘라임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자 엘라임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래서, 지금 그게 내 탓이라는 거냐? 몬스터도 모르는 네가 이상한 거야.] [이상한게 아니네요 뭐... 내가 살던 곳은 몬스터라는 것이 없었단 말이예요. 이상한 거라면 바로 이 곳이 이상한 거예요.] [네가 있던 곳이 이상한 거야.] [그...] 나는 엘라임의 말에 뭐라 반박하려 했지만, 노만의 말이 들려왔기에 그냥 꾹 입을 다문 채 노만 쪽으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잘 듣거라. 몬스터란... 음... 거참,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나... 그래, 그래. 보통 동물이라면 사람을 만나면 어떤 반응을 보이지?" '그거야 뭐...' "보통은 사람을 보면 도망가지요." "그래, 보통 동물은 사람을 보면 몸을 피하지. 하지만 몬스터들은 오히려 그 반대다. 사람을 보면 해를 가하기 위해 덤벼들지. 그러니까, 사람을 보면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덤벼드는 생물들을 몬스터라고 여기면 대충 맞을 거다. 그 몬스터들 중에는 사람 만큼 지능이 높아서 대화도 할 수 있고 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있고, 지능이 낮아 본능적인 행동을 하는 종류도 있고, 하여간 엄청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가 있지. 아, 그래. 사람의 형상을 한 종류도 있어." "헤에... 그래요? 앗, 그럼 혹시... 유사인종들도 몬스터라고 불리나요?" "유사인종이 인간들에게 해를 입히더냐? 사람을 보면 잡아먹거나 죽이기 위해 덤벼드는 종만 몬스터라고 분류한 거야." "아하... 그렇군요. 그럼, 이번에 우리가 가는 사냥이 그러한 '몬스터'들을 잡으러 가는 건가요?" "그래. 놀이로 생각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만큼 엄청 위험한 사냥이지." 제 10화 도망 (5) "아하... 그렇군요. 그럼, 이번에 우리가 가는 사냥이 그러한 '몬스터'들을 잡으러 가는 건가요?" "그래. 놀이로 생각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만큼 엄청 위험한 사냥이지." "아니, 그러면 조엘님은 왜 그렇게 위험한 사냥에 가신대요?" '혹시나... 돈 많고 할 일 없는 녀석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높이기 위하여 몸을 던지는 건... 아니겠군. 조엘 녀석이 그렇게 멍청하다고 생각되진 않아. 게다가 강한 사람들만 뽑아서 가는 거 보니 준비도 철저한 거 같고...' "나도 자세한건 모르지만... 몬스터 사냥은 조엘님과 그 친구분들이 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시작되어 매년 이맘때쯤이면 누군가 한 사람의 주최로 사냥을 열더군. 뭐, 초여름과 늦가을이 몬스터들 위협이 가장 큰 때이니... 귀족들의 일종의 게임이라고 해도 백성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지. 설마, 그런 걸 생각하고 시작한 건 아닐테지만..." 그렇게 나에게 설명해주면서 노만은 짐마차에 싣는 대신 마차에 탈때 같이 가지고 온 책꾸러미 안을 뒤지더니 입맛을 한번 다셨다. "쩝, 역시 안 가지고 왔나?" 그 모습에 같이 노만의 짐을 꾸렸던 내가 의아해서 물었다. "뭘 찾으시는 건데요?" 노만은 한번 더 자신이 가지고 탄 책들을 훑어보더니 결국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몬스터 도감 말이다. 매년 이런 사냥에는 가지고 다녔었는데, 올해는 익숙해졌다고 안 챙겼나보다. 으음.. 너 공부 시킬 생각만 했지 몬스터에 대한 건 생각도 못하고 있었군.... 이왕 이렇게 된거, 자!" 노만은 책 꾸러미를 뒤지다가 골라 내 놓은 책을 펼치더니 그 사이에 끼워져 있던 종이를 나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숙제. 도착하려면 일주일 정도 걸리거든. 그 동안 네가 할 것들." '엑....' 저택을 떠난 그 시점 부터 수업은 중단된 줄 알았건만, 웨스트모어랜드 후작의 성에 도착할때까지 수업이 연장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노만의 폼을 보아하니... 그 웨스트모어랜드 후작의 성에 도착해도 틈만 있으면 수업을 시킬 것 같았다. '에거거.... 수업 안 하는 줄 알고 좋아했더니만...' 마차가 덜컹 덜컹 거리면 흔들려서 책을 읽기 힘들다는 핑계라도 대고 공부하는 것을 피하겠지만, 공작가에서 내준 이놈의 마차는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 한국에서 기차를 탔을 때 만큼 흔들림이 적어 책을 읽는데 큰 불편이 없었다. '우쒸, 이 마차 만든 놈 누구야?' 그러나, 그나마, 그나마 수업의 절반 (두개 중 하나)이 줄어든 것만 해도 어디냐는 식으로 나 자신을 위로했건만... 신께서는 무심도 하시지, 점심때 식사를 하고 지친 말들과 사람들이 쉬기 위해 잠깐 멈춘 것을 제외하고는 하루 왠종일 달렸건만, 그 정도로는 끄떡 없다는 무적의 체력을 자랑하는 데니가 어두워져 야영을 하기 위해 일행이 자리를 잡았을 때 나를 불러냈다. "해인아!" "예?" "자기 전에 수련하자." "저... 형 안 피곤하세요?" "견딜만 하다. 목검 가지고 저쪽으로 오거라." "예에..." 단호한 데니의 말에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부르짓었다. '이기 뭡니까아아~~!!' 물론... 마음속으로 말이다. 위스트모어랜드 후작령은 벨레니 왕국에서도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후작령으로 퀸모드 산맥의 한자락이 이어져 있었다. 물론 후작령까지 뻗어있는 산맥 자락은 대륙에서 3대 산맥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퀸모드 산맥에 비해 작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도에서는 퀸모드 산맥이라고 쳐주지 않지만(작은 것도 죄다.), 엄밀히 따지자면 퀸모드 산맥의 일부분이었다. 보통 대부분의 지도에서는 퀸모드 산맥은 오른쪽 위쪽에서 왼쪽 밑으로 내려오는 형식의 사선으로 그려져 있는데 후작령으로 뻗어 있는 줄기까지 그린다면 기울어진 Y자 형을 그리게 된다. 그런데 이 산맥 줄기는 퀸모드 산맥의 가지라고 하기에는 안 어울릴 정도로 능선이 완만하고, 계곡 또한 깊지 않은데다가 왈그린을 거쳐 서스턴 해로 빠져 나가는 거대한 강줄기의 근원이기도 해서 물이 많았다. 능선 완만하지, 물 많지, 사계절 뚜렷하고 온난한 기후까지 갖춰진 이 곳은 필연적이라고 할만큼 동물이 많았다. 그리고 인간들 관점에서 볼때 없어도 되는데 괜히 와서 수만 잔뜩 불려놓은 몬스터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뭐, 사실 그 산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하루 세끼를 챙겨먹을 수 있는 몬스터들은 산을 잘 내려오지도 않기 때문에 가끔 마법 재료나 아니면 무기를 만드는 재료를 구하기 위한 사냥꾼이나 관심을 갖지 근처 마을 사람들이 크게 신경쓰지 않지만, 문제는 지능도 딸리고 육체적 능력도 힘만 조금 세다 뿐, 둔한 몬스터들이었다. 그런 몬스터들은 자신들의 기척만 느껴지면 냅다 도망부터 가는 동물들을 사냥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몬스터들 계열 중에서도 하급에 속하니 다른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건 꿈도 못 꾸지만 먹고는 살아야 하기에 산 아래에서 마을을 이루고 사는 인간들에게 눈을 돌렸던 것이다. 하기야, 이 대륙에서 이처럼 몬스터들의 습격을 자주 받는 곳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이 후작령은 벨레니 국가에서도 몬스터들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이 곳은 1000년 전 그라함 대제 시절에 몬스터들을 막기 위한 특별 요새가 건립되었고, 11국가로 나뉘어 벨레니 국가가 건립되었을 때, 건국 공신 중 하나인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후작이 이 곳을 자신의 영지로 받아 대대로 몬스터들의 침입을 지켜냈다고 한다. 이 웨스트모어랜드 후작은 뼛속부터 기사라고 불릴 정도로 고지식한 인물이라 그런 곳을 영지로 달라고 할 수 있었겠지만, 그때부터 웨스트모어랜드 후작 집안의 남자들은 성인이 되면 산으로 몬스터를 잡으러 가야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무서운 몬스터 잡으면 인정 받고, 못 잡으면 수치로 낙인 찍히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덕분에 웨스트모어랜드 후작 집안은 국가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뛰어난 기사 집안으로 위명을 떨치고 있다고 한다. 재밌는건 웨스트모어랜드 후작 집안의 여성이 집안에서 정해준 혼처가 싫거나, 아니면 집안에서 인정 못하는 낭군님이 생겼을 경우, 몬스터 잡아서 가주에게 떡 하니 대령하면 자신이 원하는 날에 원하는 결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그 집안 전통이라나? 덕분에 웨스트모어랜드 집안은 뛰어난 기사 집안으로도 유명하지만, 여기사를 가장 많이 배출해낸 집안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그런데, 조엘이 학교다니던 시절 (데니도 조엘과 같이 학교를 다녔다.) 그의 친한 친구 중 한명이 웨스트모어랜드 후작가의 장남이었는데 학교 다니던 중 그의 성인식을 치르는 날이 와버린 것이다.(이 곳에서는 18세를 성인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나도 생일만 지나면 성인으로 취급 될테지만, 아무도 내 생일을 물어보지 않고 있다.) 후작가에서 성인식을 치르는 아이를 위하여 뛰어난 기사들과 용병들을 동행시키기는 하지만, 몬스터와 맞서 싸워 잡는 것은 오로지 그 아이의 몫이었기에 - 적당한 몬스터가 나타나면 홀로 맞서서 잡아야 하며, 이때 같이 간 기사들이나 용병들은 소년이 죽거나 아니면 능력이 안된다고 선언하기 전까지는 도와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몬스터를 잡을 기회가 단 한번 뿐인 건 아니고, 한번 실패하더라도 또 다른 몬스터에게 덤비면 된다고 한다. - 운이 없으면 몬스터도 못 잡고 크게 다치거나 죽는 일도 가끔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사실을 안 조엘과 또 한명의 친구인 윈체스터 백작가의 장남은 친구를 돕겠다고 나서서 같이 성인식 몬스터 사냥에 나섰다고 한다. "에휴, 그때 일을 생각하면..." 내 질문에 신나게 설명해주던 데니가 갑자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왜요? 그렇게 위험했어요?" "아아.. 물론 위험했지. 하지만, 그때 조엘님이나 그 친구분은 집에 안 알리고 몰래 간 거였거든. 물론 난 입다물고 있겠다는 조건으로 따라갔지만, 나중에 밝혀져서 난 아버지께 죽을 뻔 했다고." "하.하.하... 그런 일이..." 집에는 안 알렸지만, 성인식에 참여하려면 웨스트모어랜드 후작의 허락이 있어야 했는데, 후작은 조엘과 그 친구의 의리를 보고 호탕하게 웃으면서 허락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학교 졸업식 파티에 참여한 조엘 아버지와 친구의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발각된 거라나? 그때부터 소문이 나서 매년 열리는 몬스터 사냥에 참여하는, 이름을 날리고 싶거나 실력을 뽑내고 싶은 젊은 귀족들이나 기사들이 많이 참여하게 되었지만, 사실은 그 전에 후작 장남의 성인식때 같이 참여했다가 무사히 귀환한 것도 모자라 몬스터들 까지 잡은 그들은 간뎅이가 부어서 매년 여름 방학때 몬스터 사냥을 다녔다고 한다. 물론, 그것도 졸업식 전까지는 집안에 비밀로 하고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조엘이 간덩이만 크고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라, 몬스터 사냥을 갈 때는 항상 뛰어난 용병들을 고용해 같이 갔다는 것이다. 만약, 그들끼리만 갔다면... 어쩜 몬스터 사냥은 조엘이 졸업하기도 전에 중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여간, 그렇게 졸업식 이후로 참여자가 많아서 이제는 완전 매년 행사가 되어버린 몬스터 사냥은, 처음 몇명 없었을 때는 돌아가면서 사냥터를 물색하고 날짜를 잡았는데 이제는 몬스터 사냥에서 우승한 자가 그 다음 사냥을 주최할 수 있는 권한을 받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몇가지 규칙까지 만들어졌다고 한다. "헤에... 그럼, 몬스터들을 가장 많이 잡은 사람이 우승하는 건가요?" "많이 잡는다고 우승 하는 건 아니고... 몬스터도 강한거가 있고 약한 것이 있잖아. 그러니까 약한 거 한마리는 1점, 좀 더 강한 몬스터 한마리는 2점... 이렇게 단계별로 점수를 매겨서 총 합산하는 거야. 그리하여 점수가 가장 높은 사람이 우승하는 거지." "오... 그렇군요. 하지만, 그 점수는 어떻게 정하는데요?" "몬스터 도감이 있잖아. 마법사 길드에서 정식으로 몬스터를 등급 별로 구분한 거. 그것을 기준으로 하는 거야. 그리고 한 팀은 10명으로 제한되어 있지." 데니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하지만... 지금 같이 가는 우리 일행은 10명은 훨씬 넘는 걸요? 같이 가는 기사분들만 해도 20명이예요." "아아, 그건 팀원 중 한명이 부상 당하면 다른 사람으로 교체가 가능하거든. 팀원은 누구를 하든 상관이 없어. 용병이든, 마법사든, 기사든, 그건 팀장의 마음이야." "헤에...." "사냥하는 기간은 7일. 사냥터 근처에 캠프를 세우고 그 곳에서 출발한 날부터 시작하는 거야. 그리고 7일째 되는 날 해지기 전까지 돌아와야 해. 해진 후에 오면 아무리 몬스터를 많이 잡아도 실격이야." 웃기게도 이 사냥에는 주최측에서 선발한 공정한 심사단까지 구성되어 있고, 의무반까지 갖춰진다는 말에 나는 좀 황당해졌다. '완전... 서바이벌 게임이네... 이거 정말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한 거 맞아?' 제 10화 도망 (6) 웨스트모어랜드 후작의 성은 요새란 이런 것이구나... 라는 걸 보여주려고 만들어진 것 처럼 보였다. 수도의 성벽 보다도 더욱 더 높고 두터운 성벽은 오랜 세월동안 이 곳을 지켜주고 있었다는 것을 당당하게 내비치고 있었고, 성벽 여기저기에는 이 곳이 몬스터의 습격을 자주 받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듯 여기저기 흉터가 가득했다. 게다가 후작의 성 주위에는 깊은 해자가 파여 있는데다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 팔둑의 두배나 되는 굵은 강철로 촘촘이 엮어진 철문에다 두껍고 무겁고 단단해 보이는 커다란 나무 문을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와우...." 마차 안에서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자 노만이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이건 1000년 전 그라함 대제 때 만들어진 요새라서 그래. 뭐, 요즘은 몬스터의 습격이 그렇게 잦지는 않지만, 후작 집안의 성격 상 이런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 "대단하네요. 그렇다는 건 이 성이 1000년 전의 유물이라는 거잖아요." 나는 1000년 이라는 역사에 감탄을 금치 못했지만, 노만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1000년 전 유물 가지고 뭘 그러는 거냐? 엘프의 마을이나 드워프의 마을에 가면 1000년 전의 물건은 흔하고 만년 전 유물까지 있는데... 마르타 국에 있는 마법사 탑이나 녹스국의 성도 다 1000년 전 그라함 대제때 만들어진 게 아니더냐?" "아...." 그러고보니 새삼 생각난 거지만, 엘프의 수명은 1000년이었다. '그러니까 엘프들에게는 조선왕조는 한 엘프 수명의 절반 정도밖에 존재하지 못한... 쩌비...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처량하군.' 후작의 성에는 몬스터 사냥에 참가하기 위한 많은 사람들이 벌써 몰려와 있었다. 여기서 올 해 몬스터 사냥 개최 기념 및 사냥하기 위해 모여든 모든 사람들의 행운을 기원하는 파티,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전야제를 열고 이번 사냥터로 지정된 곳으로 출발하게 된다. "여어, 조엘~!!" "와핫핫핫, 이 자식~!!" 우리가 도착하여 그 성 사람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었던 듯 두 명의, 조엘과 데니 또래의 청년이 달려와 조엘과 기쁨의 포옹... 은 아니고 기쁨의 목조르기를 시행했다. 먼저 달려온 남자가 달려들었을 때 조엘은 쉽게 상체를 숙여 피했건만, 그 뒤에 달려온 남자는 미쳐 피하지 못하고 걸려들었던 것이다. "하하하, 짜식, 내 걸릴 줄 알았다. 나만 있는 줄 알았겠지?" 먼저 달려와 뒤에 달려온 이를 가렸던 남자가 호탕하게 웃자 조엘의 이를 빠득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윽, 너희두울~!!" 그러자 조엘의 목을 조르고 있던 남자가 그의 팔에 힘을 가하며 씨익 웃었다. "조에에엘~ 무지 무지 반갑다. 같은 수도에 있었는데 어떻게 머나먼 지방에 와서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있는 거냐?" "젠장, 스테판~!!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어, 됐냐?" 그런 세 남자의 모습에 내가 황당해진 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데니가 속삭였다. "저 두분은 조엘님과 가장 친한 친구분이시지. 저기 키가 크고 짙은 금발을 가진 분이 이번 사냥을 주최하신 볼레어 웨스트모어랜드경이다." 그 볼레어라는 남자는 조엘보다 키가 반뼘은 더 커보이는 것이 190cm는 충분히 되어 보였고, 큰 키에 걸맞게 큼직 큼직 시원 시원해보이는 이목구비는 제법 남자답게 생겨 지나가는 여성들의 시선을 한번 쯤 더 돌아보게 할 만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지금 조엘님을 마구 흔드는 분이 스테판 윈체스터경이시지." 그는 조엘보다 작은 키였는데 붉은 갈색머리에 무척 활달해 보이는 남자였는데, 인상이 친근감 있고 부드럽게 생겼다. "여어, 데니. 오랜만이군. 여전해 보이는 걸? 그래, 여자 친구는 사귀었어?" 한동안 조엘과 투닥거리던 스테판이 여전히 조엘의 목에서 팔을 떼지 않은 채 뒤에 가만히 서 있던 데니를 발견했는지 말을 걸어왔다. 그러자 데니는 쓴 웃음을 지으며 목례를 해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두분.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핫핫핫, 나야 수도에서 빈둥댔으니 살이나 찐 거고, 이 자식은 녹스국에 가서 그 곳의 미녀랑 놀다보니 얼굴이 환해진 거야. "어이 어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내가 너 처럼 바람둥이인 줄 알아?" "쳇, 맞아... 녹스국에는 내가 갔어야 했는데..." 심히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차는 스테판의 틈을 발견했는지 조엘이 그의 팔을 뿌리치고 겨우 몸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네가 녹스국의 외교사절로 안 뽑힌 건 여왕폐하의 현명한 처사셨다. 네가 갔어봐라, 분명히 녹스국의 유부녀들을 꼬셔서 그 남편들이 떼를 지어 널 잡겠다고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었을 걸?" "푸핫핫핫, 그 말이 맞다. 그 말이 맞아." 조엘의 말을 볼레어가 호탕하게 웃으며 긍정하자 스테판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시끄러워, 이 의리 없는 자식아!! 너가 그러고도 친구냐?" "자자, 그만하고 가자고. 조엘, 아버지께 인사 드려야지?" "뭐? 이번에 후작님도 오셨단 말야?" 놀라움을 표하는 조엘의 표정이 맘에 들었는지 스테판이 얼굴을 풀고 끼어들었다. "이번에 볼레어 동생 녀석이랑 사촌 동생 녀석이 성인식을 치르게 되었더다군. 그래서 그에 맞춰 사냥을 개최한 거고, 후작님도 친히 참석하신 거야." "호오... 그러냐? 그래서 너도 그에 맞춰 부랴부랴 온 거였군? 난 또 수도로 안 오고 왜 이리로 왔나, 의아했지." "훗, 어쨌든 가자고." 그렇게 세 명의 남자가 가버리자, 남아있던 우리들은 성 시종의 안내를 받아 숙소로 향했다. 우리와 같이 온 기사들은 후작 성의 기사 숙소로 안내 되었고 - 후작의 기사들은 사냥 터에 미리 가서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 후작의 본성에는 조엘의 시중을 들 나와 노만, 그리고 데니만이 남아서 방을 배정 받았다. 그런데... 심히 열받게도 조엘이나 데니나 노만은 모두 넓직한 - 물론 조엘의 방보다야 덜했지만- 손님 방을 배정받았는데, 나는 조엘의 방에 창고처럼 달려있는 시종 방이 배정되었다. 물론... 내가 시종이긴 하지만... '그래도 억울해.' 하지만, 힘 없는 놈이 어쩌겠는가? 이제와서 뒤집을 수도 없고. 마침이라고 해야할지, 엘라임이 옆에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꽤나 놀림을 받았을텐데... 조엘의 방에 비하면 무지 '검소'하고 무지 '아담한' 방에 나는 내 짐을 팽개치듯 내려놓고 화려 무쌍한 조엘의 방으로 달려가 그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성의 시종이 알려준 바에 의하면 파티는 내일 오후부터 밤까지라고 했다. 해럴드 집사에 배운 바에 의하면 보통 귀족들의 파티는 저녁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진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파티 다음 날 아침에 사냥 캠프로 출발하기 때문에 파티를 일찍 여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사냥 캠프로 떠날 때 다시 짐을 싸야 했으므로 나는 짐을 완전히 풀어 놓는 대신, 조엘이 이 곳에서 머무는 동안 충분히 갈아 입을 정도의 옷과 파티복만 꺼내어 옷장에 걸어놓은 뒤 내 방으로 돌아가서 대충 씻었다. 목욕을 하고 싶었지만, 내가 여기서 목욕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조금 있다가 후작과의 인사가 끝난 뒤 돌아 올 조엘의 목욕 준비도 해야 했기에 한가하게 목욕이나 하고 있을 시간의 여유 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물의 상급 정령 - 물의 상급 정령과는 계약을 안 맺었다. 그들의 말로 엘라임의 '일부분'이라 계약이 없어도 물의 정령은 내 맘대로 부릴 수 있다더군. - 이 곁에 있어서 옷을 입고 있건 벗고 있건, 좁은 곳에 있건 넓은 곳에 있건 쉽고 빠르게 온 몸을 씻을 수 있다는 점이랄까? 엘라스트라의 도움을 받아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은 뒤 성의 시종 도움을 받아 조엘 녀석의 목욕 준비를 해 놓고 그가 갈아 입을 옷을 꺼내놓는데 타이밍 좋게도 조엘 녀석이 돌아왔다. "나 왔어." "목욕 하셔야죠? 준비 해놨습니다." "땡큐~ 역시 해인이 밖에 없다니까~" 평소에 안 하던 대사라서 그런지, 뭔가 대사가 묘한 것 같았지만, 그것이 뭔지 생각할 겨를 없이 나는 얼른 조엘의 뒤를 따라 욕실로 들어갔다. -왜냐고? 당연히 목욕 하는 걸 돕기 위하여... 뭔 상상을 하는 건가?- 그리고 준비 된 팔팔 끓은 물을 욕조에 반쯤 붓고 찬 물을 섞어 온도를 맞추는 동안 조엘이 옷을 벗고 들어왔다. - 중요한 부분은 가리고 있었으니 이상한 상상은 하지 마시도록 - "아아, 이제야 살 거 같군." "수건은 여기에 두겠습니다. 두개나 놓으니까 나올 때 물 떨어뜨리시면 안됩니다. 그리고 갈아 입으실 옷은 밖에 두겠습니다." "그래, 그래." 제 10화 도망 (7) 그날 늦은 저녁이었다. 사냥에 참여하기 위하여 성에 도착한 이들이 후작의 초대를 받아 - 물론 난 아니다. - 성대한 저녁을 끝내고 각자의 숙소에서 내일을 위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을 시간에 나는 노만에게 마법 수업을 받기 위하여 그의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하루 일과를 거의 끝내 조용해야 할 아랫층에서 여러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늦은 시간인데 무슨 일이지?" 뭐, 잠깐 뭔 일인지 보고 가는 정도야 오래 걸릴 것 같지 않았기에 나는 슬그머니 발걸음을 돌려 아랫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남작 영애. 미처 오신다는 연락을 받지 못해 준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됐어요. 으휴, 이 성은 언제나 그렇듯이 여전히 음침하군." 아래에는 수십은 될 듯한 인원들이 활짝 열린 성의 정문을 통해 짐을 들여다 놓고 있었고, 그 앞에는 그 짐들의 주인이 분명한 젊은 여성이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러면, 그런 이 곳에는 왜 온거냐, 제네브라?"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대해 험담하는데 누가 좋게 들을 리 없었다. 이 성에 살고 있는 이도 마찬가지인 듯 그녀의 불만에 찬 중얼거림에 즉각 응수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에... 저 사람이... 아, 이번에 성인식을 치른다는 후작 차남이군.' 제네브라라고 불린 여자에게 응수하는 어조가 차가운 걸로 보아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이었다. 제네브라라는 아가씨는 그 후작의 차남을 보자 고개를 획 돌리며 대꾸했다. "흥, 누가 너 보러 온 줄 아니? 난 스테판님을 보러 온 거 뿐이라고." "그래, 그래. 아주 지극정성이구나. 스테판 형을 위하여 이런 음침한 귀신 집 같은 곳을 다 오고... 스테판 형이 이런 너의 정성을 알아줘야 할텐데 말이다." "어머, 알아주니 고맙구나? 그럼 숙소로 안내 좀 해줄래? 지금 내가 무척 피곤해서 말야. 널 상대해줄 기운이 없네." "누군 널 상대하고 싶어서 상대하는 줄 아냐? 집 주인의 의무를 다한 거 뿐이야, 불청객씨." 그리고 그 후작 차남은 그녀가 보기도 싫다는 듯 곧장 시선을 돌려 맨 처음 그녀를 맞이한 인물인 듯한 중년 남자에게 한마디 하고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 가버렸다. "안내해 드려." "이쪽으로 오시지요. 미처 준비를 못해 미흡한 점이 있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아, 걱정 말아요. 여기가 원래 후진 곳이라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쯧쯧... 성격이 정말 뭐 같은 여자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더 이상 볼 것도 없어 내 갈길을 가려고 했는데, 참 운도 지지리 없게도 한 발짝을 내 딛기 전에 밑에서 열심히 짐들을 옮기던 이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거기!!" "엣? 저요?" "그래. 지금 바쁘지 않으면 좀 도와줘." 몰래 엿보고 있었다고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거짓말을 좀 보태서 홀에 작은 동산처럼 쌓여 있는 - 뭔짐이 그렇게도 많은지... - 짐꾸러미들에 폭 파묻혀 간절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데 어찌 매정하게 '나 바빠요.' 라고 말하며 갈 수 있겠는가? "그러죠, 뭐..." 하면서 거들기 위해 내려갈 수 밖에... 그런데, 마침 중년 남자에게 안내를 받은 그 제네브라 라는 남작 영애 일행이 내가 내려오는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예의를 갖추기 위해 - 예의는 무슨 얼어죽을 예의... 빽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지... - 계단 한쪽 구석으로 몸을 비켜 그들이 지나가길 기다리는데 이 남작 영애라는 여자가 밑에서 부터 올라올 때 날 발견한 직후부터 날 빤~히 바라보며 올라오는 거였다. 그 시선에 의아함을 느껴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그녀는 내가 언제 널 봤느냐는 듯 얼른 시선을 돌려 척척 올라와 날 지나가버렸다. 내 코 앞을 바로 지나갔기에 나는 그녀를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그녀는 청흙색의 어깨에 닿을랑 말랑 하는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고, 피부도 무척 하얀데다 얼굴이 작고 오밀조밀해서 마치 도자기 인형을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파란 눈동자가 담긴 눈이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간데다 앙다물린 붉은 입술의 모양이 왠지 성깔 있다... 라는 걸 느끼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완전히 내 이상형의 소녀 모습이었기에 - 작고, 가냘프고, 보호해 주고 싶은 예쁜 소녀의 모습 - 나는 부러움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밑에서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어이~!!" "예, 예. 갑니다." 황급히 달려 내려가 그 곳에 있는 짐꾸러미 두개를 양 팔에 들고 나와 같이 짐꾸러미를 든 사내와 걸어 올라가는데, 그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 너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새로 온 애냐?" "아뇨. 저는 조엘 맥알파인님의 시종이예요." "아... 그 맥알파인 공작 집안의?" "예." "그런데 왜 여기서 짐을 나르고 있냐?" "아하하... 뭐, 어쩌다 보니... 돕게 되었네요." "뭐... 우리야 일거리가 줄어서 좋다만... 너도 참 멍청한 놈이구나." "하.하.하..." '젠장할... 그놈의 호기심 때문에...' 척 보아하니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그 남자를 따라 남작 영애의 숙소로 가보니 남작 영애는 폭신한 안락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하여 얼른 짐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오자 뒤따라 그 남자가 나오면서 날 툭 쳤다. "여, 예쁘지?" 누굴 가르키는 지 쉽게 알 수 있었던 터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엄청 예쁘네요." 내가 쉽게 수긍하자 그 남자는 씩 웃으면서 내 어깨를 툭 쳤다. "짜식... 너도 남자라고... 그래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라. 어디 우리가 감히 말이나 걸 수 있는 신분이냐? 거기다 성깔도 엄청 드러워서 우리 같은 것들은 벌래처럼 생각한다고." "헤에... 잘 아시네요?"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지. 전에도 여기 온 적이 있었거든. 얼마나 성깔을 부려댔는지... 얼굴만 안 예뻤다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니까." "그래요?" "그렇다니까. 그 윈체스터 백작가의 도련님만 불쌍하지..." "그 도련님이 왜요?"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그 남자는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뭐냐 너... 너 맥알파인 공작가의 도련님 시종이라면서? 두 분이 친구사인데 그것도 몰랐냐?" "그게.. 시종으로 온지 얼마 안되었거든요." "그래? 하긴 뭐... 그렇다면 모를 수도 있지." 그러면서 남자는 주위를 쓰윽 살펴본 다음 무슨 엄청난 비밀을 이야기 하려는 것인 양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아, 아까 그 남작 영애가 윈체스터 백작가의 도련님을 좋아해서 쫓아다니잖아." "그래요?" "그렇다니까. 척 보기에는 순해보이는데 얼마나 끈질긴 면이 있는지 그 도련님이 어딜 가나 쫓아간다는 거야. 아, 여기까지 쫓아 온 것좀 봐. 가능했다면 사낭터 까지 쫓아 갔을 걸?" "호오...." "에휴, 이제 우리만 죽어났지. 그 도련님이 사냥 가셨다가 돌아오실 때까지 여기 죽치고 있을테니... 그저 영애 눈에 안 띄길 바라는 수 밖에..." "하.하.하...." 그날 나는 그 남자와 함께 남작 영애의 수많은 짐을 옮기기 위하여 도합 세번이나 아랫층 홀에서 부터 남작 영애의 숙소까지 왔다갔다 한 다음 노만의 숙소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노만에게는 엄청 늦었다고 혼나고, 안 해도 될 일을 한 멍청이라고 잔소리까지 덤으로 들어야 했다. 다음날 새벽, 평소의 습관으로 인하여 일찍 일어난 나는 데니의 손에 이끌려 후작 성 안의 기사 연무장으로 향했다. 평소 데니와 함께 새벽 수련을 하는 조엘은 오늘은 자신의 친구들, 그러니까 볼레어, 스테판과 함께 성 안에 마련된 연무장을 사용하기로 했기에 우리와 헤어졌다. 뭐, 처음에 조엘도 데니와 나에게 같이 가자고 했지만, 그 곳에는 이번 사냥에 참여한 귀족들이 사용할게 뻔하다며 데니가 날 이끌고 바깥에 있는 기사 전용 연무장으로 향했던 것이다. 우리도 꽤 일찍 일어나서 향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곳에는 벌써 많은 이들이 와서 몸을 풀고 있었다. 그 곳 연무장은 얼마나 넓었는지, 수백은 될 것 같은 사람들이 넓게 간격을 잡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꽉 찬 느낌이 들지 않는 거였다. 아마 지금 있는 인원의 두배 정도 있어도 될 것 같은 크기의 연무장이었다. 새벽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갑옷을 갖추기 보다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와 몸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연무장에 있는 사람들은 각자가 알아서 수련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두 무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뭐, 딱히 금을 그어놓고 다른 무리 사람들 보고 넘어오지 말라고 팻말이라도 세워 놓은 건 아니었지만, 서로 시선을 주려고 하지도 않고, 어쩌다 시선이 향하기라도 할라 치면 얼른 돌려버리는데다,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기분 나쁘다는 감정이 가득 담긴 눈길을 한번 보낸 뒤 휙 돌려버리는 거였다. '뭐냐... 사냥할때 팀을 나눈다더니 벌써부터 팀끼리 싸우는 건가? 하지만... 팀은 여러개인데, 여기는 딱 두 무리잖아?' 제 10화 도망 (8) '뭐냐... 사냥할때 팀을 나눈다더니 벌써부터 팀끼리 싸우는 건가? 하지만... 팀은 여러개인데, 여기는 딱 두 무리잖아?' 데니는 그 곳을 둘러보다가 역시 아는 사람이 있는 곳이 좋다고 판단했는지 한쪽 구석에서 자리를 잡고 몸을 풀고 있는, 우리와 같이 온 링클레터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어, 데니. 좋은 아침이지?" 데니 또한 그 기사단의 소속이였기에 그가 가까이 가자 그들 중 한 사람이 데니를 발견하고는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벌써 나오셨군요. 이거, 제가 꼴찌인가요?" 그들 절반이 원래 공작가 저택에 있던 게 아니라 수도 밖에 있는 기사단에 있던 사람들인데다, 수도에서 부터 여기까지 같이 오기는 했지만 오는 내내 마차 안에서 노만이랑 같이 있었고, 마차에서 내릴때도 조엘이나 데니하고만 붙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낯이 안 익은 상태였다. 그래서 기사들과 친하게 인사를 나누는 데니 뒤에 멀쭘히 서 있는데 역시나 날 항상 챙겨주는 데니가 대충 인사가 끝나자 그들에게 날 소개시켜줬다. "해인아, 인사해라. 우리 링클레터 기사단의 기사분들이시다." "처음 뵙겠습니다. 해인이라고 합니다." 내가 꾸벅 그들을 향해 인사를 하자 데인이 내 말 뒤에 덧붙였다. "제 동생이예요. 지금 조엘님의 시종을 하고 있죠." "오호라, 이 녀석이 네가 동생 삼았다던 그 녀석이구나? 반갑다. 난 한센 프레스코라고 한다. 그냥 한센이라고 불러라." "예, 한센님." "한센님은 무슨... 그냥 한센 아저씨라고 해라." "예, 한센 아저씨." 기사 계급은 평민보다 한단계 윗계급라 그런지 보통 기사들은 평민들을 꽤나 깔보는 편이었다. 어차피 그들도 귀족 출신이 아니라면 귀족들에게 존중 받지 못하면서 계급이 뭔지, 평민 앞에서는 거만하게 (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 구는 그들 모습을 보며 되게 웃긴다. 물론 그들 앞에서는 비웃지 못하지만... 공작가에 있는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링클레터 기사단의 단장인 보가드 링클레터는 비록 기사 집안의 출신이었지만, 어렸을때 그의 아버지가 꽤 뛰어난 능력을 가진 기사가 아니었기에 집안이 가난해 평민들과 어울려 자라다보니 그런 편견이 별로 없는데다 공작 또한 그런거에 과히 신경쓰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링클레터 기사단에는 귀족 출신이나 기사 출신 집안 사람들은 물론 평민 출신 기사들도 적지않이 있었다. 그런데 평민 출신 기사들도 나에게 꼭꼭 이름 뒤에 '님'자를 붙이게 하거나 '경'자를 붙이게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거 보면 계급에 대한 한이 무지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친한 사이에 꼭꼭 '경' 자 안 붙인다고 그가 기사가 아닌 것도 아닌데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거 같다는 느낌을 받아 인사는 주고 받지만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사람들 중, 그런거에 신경쓰지 않고 이름 부르라고 하는 사람보면 정말 사람같이 보였다. 그리하여 오늘은 새벽부터 좋은 사람을 만나는 구나... 하는 생각에 매우 좋은 기분으로 있는데, 데니와 나와 인사를 나누는 바람에 링클레터 기사단의 기사들이 잠시 행동을 멈춘 틈을 타서 옆에 있던 사람들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어디 분들이신가 했더니만, 그 이름 높은 링클레터 기사단분들이셨군요. 이거 참 반갑습니다." "핫핫, 이름이 높긴요. 그래, 어디서 오셨습니까?" "아, 예. 저희는 윈체스터 백작가의 기사단입니다." "아, 그러셨습니까?" 그렇게 한 그룹(?)의 기사단이 와서 인사하자 그 옆에 있던 기사단 사람들도 이에 질세라 와서 하나 둘 인사하자, 연무장은 수련하는 곳이 아니라 화합을 다지는 화합의 장이 되버린 것 같았다. "어제는 못 뵈었는데 언제 오셨습니까?" "아하하.. 어제 저녁에나 왔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인사를 나누게 되었군요? 반갑습니다." "이쪽이야 말로." 그렇게 한쪽에서 화기애해한 말들이 주고받아지자 다른쪽에 있던 사람들의 수련에 방해가 된 모양이었다. 하기야, 누가 공부 좀 하려는데 옆에서 떠들면 공부가 되겠는가? 그렇게 수련에 방해가 되자 그쪽에 있던 사람중 하나가 되게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괜히 애꿎은 땅을 발로 차며 디럽게 가래 침을 퇘~ 뱉더니만 주위 사람이 다 들릴 정도의 큰 소리로 이죽거렸다. "제기럴~ 잘나신 기사 나으리들이 쫙 깔려 있으니 이거 어디 창피해서 무기를 휘두를 수 있겠나? 으쌰!!" 그렇게 말해놓고는 말을 끝내자마자 들고 있던 커다란 대검을 한번 크게 휘두르더니 땅에 푸욱 꽂았다. 그런데 이 사람의 힘이 얼마나 세던지 휘둘러지느 그 대검의 기세에 눌려 주위의 공기가 매섭게 밀려나며 땅에 꽂힐때는 대검의 절반 이상이 푹 꽂혀 버린 거였다. 그런 놀라운 모습에 기사들의 시선이 쏠리며 잠시 조용해지자 그 남자는 그런 반응이 맘에 들었는지 씨익 웃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남자 하나가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뭐, 대~단하신 기사 나으리야 모두들 원래부터 뛰어나신 분들이니 연습을 안 해도 몬스터들을 척척 잡으시겠지. 연습은 우리 같은 놈들이나 하는 거란다. 그러니 잔말 말고 더 연습해, 임마!" 그러면서 그가 발을 들어 땅에 꽂혀있던 대검의 호수(검에서 손잡이 부분과 검날 부분을 구분해주면서 검을 잡았을 당시 손을 보호하기 위하여 튀어나온 부분. 이 곳에 멋드러진 조각을 하기도 하고 보석을 박아 넣기도 합니다.) 부분을 강하게 걷어 찼다. 그러자 이 대검이 땅에서 쑥 뽑혀 나오며 처음 대검을 땅에 꽂아 넣었던, 대검 임자에게 날아가자, 대검 임자는 쳇, 하는 혀 차는 소리를 내며 가볍게 한 손으로 대검 손잡이를 잡아 한번 휘두르고는 등 뒤에 매고 있던 검집에 검을 집어 넣었다. 폼이야 무지 멋있기는 한데, 그들이 한 말이 이래저래 길게 말했지만 한마디로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기에, 이 말을 들은 기사들의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 말을 들은 기사들 중 분노한 몇몇은 허리에 찬 검집에 손을 가져갔고, 그들 보다 성격 급한 몇몇은 아예 앞으로 나섰다. "천한 용병 주제에 입만 살았군. 어디 그 입만큼 실력이 있는지 한번 볼까? 자신 있으면 나와라." 저들이 바로 이번 몬스터 사냥에 고용된 용병들인 모양이었다. "허, 이거 참 어디 무서워서 말이라도 제대로 하겠나? 잘못 말하면 목 베겠수." 땅에 꽂혀 있던 대검을 발로 차서 뽑아내는 것도 모자라 임자에게 날아가게 한 남자가 익살스런 표정으로 온 몸을 부르르 떨어보였다. 그러자 그 사람 주위에 있던 사람은 웃음을 터트렸는데 기사들의 표정은 더욱 더 굳어졌다. "나와라. 한수 가르쳐 주지." "나오라면 나가야지. 힘 없는 놈이 별 수 있나?" 그는 그렇게 이죽대며 걸어오는데 건들거리며 나오는 폼이 전혀 안 두려워 하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폼이 오히려 좋은 기회를 잡은 사람 같이 보일 지경이었다. '오옷, 싸움이다. 싸움이야.' 그 둘이 적당한 거리에 마주 서서 노려보자 나는 약간 흥분된 마음을 느끼며 그들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이 세상에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는 것이 어디 또 있겠는가? "놈, 그 입을 다시는 나불대지 못하게 해주지." "어디 능력 있으면 한번 해보슈." 하지만, 그 흥분되었던 마음은 그 뒤에 그들이 각자의 검을 꺼내들자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그냥 기사가 저 남자를 혼내주려고 할 뿐이니 가검을 사용할 것이라 생각 했는데, 그 기사는 허리에 찬 진검을 뽑아드는 거였다. 게다가 상대 남자 또한 진검을 뽑아드니, 이거 잘못 하다간 이른 아침부터 피 보게 생긴 거 같았다. 아무리 내 피 아니고, 다쳐도 내가 안 아프다지만, 아침부터 그런거 보면 기분이 안 좋지 않는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도 말리려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응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여어, 그래이. 날려 버리라고." "네 실력을 보여봐라~!" "음홧홧홧, 네가 이기면 내가 키스해 주마." "사랑해, 자기~!!" 그레이라 불린 사람은 그렇게 열심히 자신을 응원하는 이들을 향해 싱긋 웃더니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엿이나 먹어." "우하하하하~~!!" 뭐가 그렇게도 웃긴건지, 그들은 그레이라는 남자의 행동에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기사들쪽 또한 비록 용병들 처럼 대놓고 소리치며 응원하지는 않았지만, 눈길이 다 '저 시건방진 용병놈을 혼내주길' 간절히 바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레이라는 남자는 그렇게 용병들의 응원에 답례를 해준 뒤 자신의 검을 잡고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유들유들하고 여유만만했던 기색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의 모습에서는 진지하고 매서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제법이군." 내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데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를 상대하고 있던 기사 역시 그를 얕볼수가 없던지 신중하게 자세를 잡았다. "와라." 기사의 한마디에 그레이가 피식 웃었다. "사양않지." 그리고 말이 끝나는 즉시 달려가기 위해 한 발짝 내딛는 순간... "그만 두지 못해?" 갑자기 터져 나온 일갈에 그레이가 즉각 멈추려고 했지만 막 앞으로 나가려는 몸을 멈추려고 했으니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쿠당~!! "젠장, 대장~!!" 그레이라는 남자는 넘어진 쇼크가 너무 컸는지 일어날 생각은 못하고 상체만 일으켜서는 갑작스럽게 소리쳐 자신을 넘어뜨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190이나 되는 건장한 키에 단단해보이는 근육, 시커멓게 그을린 피부에 오랜 세월의 연륜을 보여주는 주름이 잡힌 얼굴의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매섭게 그레이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대장?" 의아함에 찬 내 말을 들었는지 데니와 함께 내 옆에 있던 한센 아저씨가 작은 목소리로 설명해 줬다. "저 자가 용병단의 대장이지. 대장 이름이 트래비스라고 용병단 이름도 트래비스야. 유명한 만큼 실력 또한 괜찮은 편이지." 그렇게 내가 설명을 듣는 동안 트래비스라는 용병단 대장은 척척 걸어와서 불만에 찬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레이의 뒷덜미를 잡은 채 그대로 끌고 용병들 틈으로 걸어갔다. "내가 쓸데없는 일 벌이지 말라고 했지? 지금 싸워서 뭐하자는 거야? 싸우고 싶으면 내일 몬스터들이랑 실컷 싸워!" "우쒸, 대장, 이것 좀 놓고 가슈~!! 내가 뭐 어린 앤감? 아 좀 놔줘요~!" 질질 끌려가면서 대장에게 사정하던 그레이였지만, 대장이 들은체도 안 하자 자신과 싸우려다가 자신이 대장에게 끌려가는 바람에 벙 쪄있는 기사에게 시선을 돌린 채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이, 기사 나리. 이렇게 되어가지고 당신이랑 못 싸우게 되었으니, 우리 나중에 봅시다아~!! 그럼 그때까지 빠빠이~!!" "뭐, 뭐냐... 저녀석..." 괜히 분노탱천 하여 검을 뽑아든 기사만 우습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그 기사가 그냥 가버리는 용병에게 달려가서 검을 내리 칠 수도 없으니 이빨만 빠드득 갈면서 검을 집어 넣을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싸움이 허무하게 끝나기는 했지만, 피는 안 보게 되어 나는 혼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영 기분이 안 좋았다. '아까는 오늘 일진이 좋을 거 같았는데... 왠지, 오늘은 일진이 안 좋을 거 같군...' 그렇게 양쪽이 잔뜩 긴장했다가 맥없이 탁 풀려버리자 모두 수련할 생각이 없는 듯 기사고 용병이고 가볍게 몸을 푸는 시늉만 하다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그래, 데니도 날 데리고 그냥 가볍게 몸만 풀다가 영 할 맘이 안 생기는지 날 툭툭 치더니 성을 눈짓으로 가르키며 말했다. "후, 오늘은 별로군. 해인아, 우리 이만 가자."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가버리는 상황에 우리만 남아 수련하기도 기분이 쫌... 그랬던 것이다. "그래요, 형." 거기에 수련 그만하자는데 내가 반대한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반색하며 목검을 내렸다. 그리고는 벌써 발걸음을 옮기는 데니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며 궁금했던 걸 물었다. "형... 궁금한게 있는데..." "뭔데?" "아까 보니까 기사님들하고 용병들하고 사이가 안 좋던데... 원래 그렇게 안 좋은 건가요?" 그러자 데니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우리에게 신경쓰는 이가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 해줬다. 혹시라도 용병들이 들을지도 모르니 큰 소리로 할 수는 없을 터였다. "사이가 안 좋은게 아니라, 기사들이 용병들을 안 좋게 보는 거지." "왜요?" "용병들이 뭐 하는 사람들이냐? 돈 받고 무슨 일이든 해주는 거 아니냐? 그들은 돈만 받으면 강도 짓이든, 암살이든 무엇이든 해주지. 주군을 섬기고 여자와 약자를 보호하는 우리 기사로써는 당연히 좋게 볼 수가 없는 것이지." "흐음...." 아무리 그래도 모든 용병들이 다 나쁘고 모든 기사들이 다 청렴결백한 정의의 용사겠는가? 그래서 쉽게 데니의 말을 납득하지는 못하자 이런 내 기색을 알아챘는지 데니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물론, 그렇다고 용병들이 다 그런 사람들은 아니고, 게중에는 괜찮은 사람들도 있지만,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배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안 좋게 보는 거지." "그렇군요." '그런데... 기사들 중에도 주군을 배신하는 사람이 있지 않남?' 제 10화 도망 (9) '그런데... 기사들 중에도 주군을 배신하는 사람이 있지 않남?' 뭐, 그렇게 따지자면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성으로 돌아온 나는 조엘의 시중을 들어준 뒤 노만에게 갔다. 점심 식사 후에는 파티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밖에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점심 식사가 끝난 뒤 조엘을 목욕 시키고, 머리 다듬고, 옷 입히고, 향수 뿌리고, 장신구 달아주는 등 부산하게 움직일 동안 후작성에는 주위에 있던 초대 받은 귀족들의 마차가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조엘 녀석이 단장을 거의 끝마쳤을때쯔음 조엘과 비슷한 파티복을 입은 데니와 평소의 후즐그래하고 오래된 로브가 아닌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만들어진데다 끝단에는 자잘한 수로 장식까지 된 멋드러진 로브를 입은 노만이 나타났다. "준비 다 되었어?" 나를 향해 묻는 데니의 말에 조엘 녀석 준비 다 시킨 건지에 대해 묻는 줄 알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 망토만 걸치시면 되요." 그러면서 때 안 타도록 의자에 조심스레 걸쳐 놓은, 이 계절에 잘 어울릴 초록빛 망토를 가지러 걸음을 옮기는데 데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조엘님 말고 너 말야." "저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돌아보는데 데니는 이런 내 의문을 해결해주는 대신 조엘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해인이 녀석은 안 데려 가실 겁니까?" "해인이? 글쎄..." 아마 조엘 녀석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던 거 같다. 그에 데니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어려운 자리가 아니니 데리고 갔으면 좋겠는데요. 괜찮은 기사들도 모여 들었으니 보여주고 싶고, 해인이도 파티 예절을 배웠으니 크게 문제될 것도 없고 말입니다." 그러자 노만도 끼어들었다. "저 또한 다른 마법사들도 만나게 해주고 싶어서 말입니다. 이번 파티에 다른 마법사들도 참석할테니까요." 날 챙겨주는 둘의 마음에 감동했지만,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에...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파티복도 안 마련했는데요?" 내가 파티에 참석해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니 마련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조엘 녀석이 씨익 웃으며 날 돌아봤다. "내가 특별히 챙겨 넣으라는 꾸러미 있었지? 그거 가지고 와봐." "예? 예." 갑자기 그건 왜 찾는건지 의아해했지만, 상관이 시키는데 별 수 있겠는가?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이 곳에 머무는 동안 필요하지 않을 거 같아서 가방에서 안 꺼내놨기에 나는 옷장안에 넣어 둔 커다란 가방을 꺼내야 했다. 그 꾸러미는 내가 조엘 녀석의 짐을 싸던 날 자신의 드레스 룸에 들어가 꾸물꾸물 대던 조엘 녀석이 보자기에 쌓인 그 꾸러미를 내밀면서 같이 챙기라고 했던 거였다. '챙겨두기는 했는데, 그게 뭐길래 지금 찾는거지?' 어차피 그 가방 안에 들어간 물건 모두 내가 집어넣은 거였기에 꾸러미를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비단 같은 부드러운 천에 쌓인 꾸러미를 조엘에게 건네자 조엘은 방에 있던 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걸 풀었다. "앗, 그건..." 안에서 나온 것은 옷이었다. 기껏 파티 복을 입혀줬는데 왜 또 옷을 꺼내는 건지 의아해 하는데 데니가 그 옷을 보고 뭔가 깨닫는게 있는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조엘을 바라보았다.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던 조엘이 데니니와 나를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내 혹시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챙겨뒀지. 내가 입던 것 중에서 괜찮은 걸 골라 왔는데..." '나보다도 키가 한뼘은 더 큰 인간 걸 어떻게 입냐?'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지만, 감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 뱉을 만큼 내가 간이 큰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단지 난처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하지만 데니는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엘에게 다가가 그 옷을 꺼내 보였다. "이건 조엘님이 학생때 입던 것이군요. 감회가 새로운데요? 이걸 입으신 조엘님 인기가 상당했죠, 아마?" "훗, 내 이야기가 아니라 데니 이야기 아냐? 그때 데니도 인기가 상당했는데... 그래서 바람둥이가 된 거구." "누가 바람둥이라는 겁니까? 자꾸 저를 조엘님과 동일시 하지 마시라구요." 데니가 꺼내든 옷은 짙은 청색의 윗옷이었는데 마치 한국에서 본 사관생도들 같은 스타일의 옷이었다. 겉으로 오는 옷자락이 절반을 지나 그 반대편의 절반을 덮을 정도로 큰데다 그 곳에 단추가 6개 달려 있었는데, 그 단추들이 모두 가운데 내 새끼 손톱만한 다이아가 박힌 금으로 되어 있었는데 크기가 100원짜리 동전만했다. 소매는 빳빳한 하얀 천이 마치 칼라처럼 접혀 있었는데 그 곳에는 가슴쪽에 달린 단추와 같은 모양이지만 크기는 조금 더 큰 금단추가 하나씩 달려 있었다. 게다가 그와 한세트로 보이는 허리띠는 가죽으로 된 것 같은데도 하얀색이었고, 백금으로 된 버클에는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호오... 해인이에게 잘 어울릴 거 같군요." 옆에서 보고 있던 노만이 다가와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제가 저 녀석에게 어울릴만한 걸 찾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흐뭇한 표정의 조엘과 괜찮은 것 같다는 듯한 표정의 데니와 노만의 모습이 마치 인형에게 옷갈아 입히는 놀이를 하려는 애들의 모습과 겹쳐지는 건 왜인지... '그런데 남자들도 인형놀이를 하던가?' 그들의 기대에 찬 눈길에 밀리다시피 옷을 들고 내 방으로 향한 나는 속으로 투덜투덜 거리며 옷을 갈아입었다. '쳇, 이렇게 옷 까지 준비해서 데리고 갈 생각이었으면 나도 목욕할 시간이나 주던지... 자기 혼자 실컷 단장해 놓고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갈아입으라고? 내가 정령들과 계약을 안 한 상태였다면 씻지도 못하고 옷만 갈아입을 뻔 했잖아? 그럼 그게 도대체 무슨 꼴이람... 에잉, 그런데 드레스도 아니고 제복 같은 옷이라니... 체엣...' 다행이도 길이는 대충 맞는데다 폼도 약간 헐렁하긴 했지만, 그렇게 보기 싫은 정도는 아니었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은 뒤 머쓱해진 표정으로 방을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세 명의 시선이 나에게로 쏟아졌다. "호오, 제법 귀공자 같은데?" "잘 고르셨습니다. 머리 색과 아주 잘 어울리는 군요." "훗, 내 안목도 제법 쓸만하지? 예상보다 훨씬 괜찮은데? 이거 저 녀석이 시종이 아니라 우리가 시종처럼 보이는 거 아냐?" 그렇게 찬사가 나에게 쏟아졌지만... '쳇, 남자 옷따위가 잘 어울린다는 찬사따윈 하나도 안 반갑다고! 나도 나폴나폴 거리는 드레스 한번 입어보고 싶어어~' 나는 하나도 안 기뻤다. 그렇게 해서 조엘의 어렸을때 옷까지 얻어 입은 나는 그들을 따라 쭐래쭐래 파티장으로 갈 수가 있었다. 용병과 기사의 싸움이 벌어질 뻔 했던 그 커다란 연무장의 거의 절반, 혹은 그보다 조금 더 큰것 같은, 실내에 있는 홀 치고는 엄청 엄청 큰 그 홀을 보는 순간 나는 이런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여기 꾸민 하인들... 죽어났겠군. 끝나고 저거 어떻게 다 치우냐...' 였다. 윽... 몇달 간의 시종생활로 나도 뼛속까지 시종화가 되어가는 것인가? 그렇게 마음 속으로 이 곳의 일하는 모든 분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하며 엉거주춤이 아닌, 그 동안 해럴드 집사에게 받은 교육을 십분 활용하여 너무나 보무도 당당히 데니의 뒤에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렇게 조엘을 비롯하여 데니 노만의 배려를 받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내 입장은 어디까지나 시종이었다. 그렇기에 조엘과 인사를 나누는 인물들에겐 데니와 노만까지는 소개가 되었지만, 나에게까지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나마 데니나 노만과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과는 데니의 동생으로써, 혹은 노만의 제자로써 소개가 될 수 있었다는 것만 해도 내 입장으로서는 꽤나 큰 배려를 받는 것이었다. 뭐, 사실 그 사람들과 내가 나중에라도 교류할 것도 아니고,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도 아닌 터라 별 상관은 없었지만, 조엘은 그게 꽤나 미안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조엘이 날 아껴주고 있지만, 상대방의 입장 또한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조엘은 날 계속 데리고 다니는 대신 자신은 슬쩍 자신의 친구들 틈에 끼어 버리고 나는 데니와 노만과 같이 가도록 떨궈(?)줬다. 하지만 데니도 돌아다니다가 안면 있는 기사들에게 붙잡혀 버렸고, 노만도 곧 자신과 같은 직업을 가진 이들과 만나 열렬한 즉석 토론회를 개최해버렸기 때문에 데니나 노만 옆에 서 있어도 되겠지만, 사실 내가 누누이 말했듯이 검이나 마법에 큰 흥미가 없었기에 곧 질려버려서 슬그머니 그들 사이를 빠져나오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내 눈에 뜨인 것은 파티장 한쪽 면에 멋드러지게 차려져 있는 부페 상이었다. 저렇게 맛있는 음식들을 잔뜩 가져다 놨는데 사람들은 먹는거에 별 관심이 없었는지 그쪽에는 별로 사람이 없었다. '쯧쯧, 먹는 거 빼면 무슨 재미로 사는 거람? 훗, 그럼 나라도 먹어줘야지. 기다려라, 내가 간다!!' 길다란 식탁 한쪽에 쌓여 있는 접시 하나를 꺼내 들고 식탁을 따라 걸어가며 맛있어 보이는 걸 하나 둘씩 집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다음 놓여진, 한 입에 들어가게끔 작게 잘려진 갈비 (뭔 갈비인지는 모르겠지만) 가 보기에도 무지 먹음직스럽게 붉은 소스가 발라져 샹드리에의 불빛을 받아 기름을 자르르 흘리며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한 손짓을 차마 거부할 수가 없어 몇개 집어주려고 손을 뻗는 순간, 누가 나보다도 먼저 그 것에 손을 댔는데, 내가 절반 정도 가져가도 이해는 하려고 했다. 어차피 나는 맛만 보려고 했던 것이다. 다른 먹을 것도 많았으니까, 절반을 먹던 몇개를 먹던 내가 먹을 한두개만 남기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하.지.만. 쟁반만큼 커다란 접시 통채로 몽땅 다 가져가버리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도대체 이런 XXX 없는 인간이 누구인가 싶어서, 순간 내 신분도 잊어버린 채 한마디 해주려고 그 인간을 향해 시선을 돌리니 마침 안면이 있는 얼굴이었다. "어?" 물론 그 인간은 날 모르지만 말이다. 내가 작게 소리를 내자 그걸 또 들었는지 그 남자가 날 돌아보았다. "응?" 그는 아까 새벽 수련때 연무장에서 기사들이 떠드는 소리에 한 소리 했던, 두 손을 사용해야 겨우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대검을 사용하던 용병이었다. '용병? 아, 그러고보니 용병들이 안 보이던데... 이 사람은 있네?' 그제야 깨달은 것이지만, 조엘과 데니와 노만을 따라 돌아다니면서 본 이들은 모두 귀족이거나 기사들 뿐 용병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 사실 처음부터 그들이 있던 없던 관심도 없었지만, 그를 본 순간 깨닫게 된 거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용병들이 없는 걸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기에, 그가 이 곳에 들어 왔다는게 신기하게 느껴져 잠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것 뿐인데 그게 그의 심기에 거슬린 모양이었다. 다짜고짜 인상을 팍 일그러뜨린 그가 험악하게 물어왔던 것이다. "뭐냐, 꼬마. 나에게 할 말이라도 있어?" 그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비굴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괜히 그를 건들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뇨, 실례했습니다." 그러자 앞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뭐냐, 덤버트?" '헤에... 저 사람까지 있었네?' 그는 한 기사와 싸울 뻔했던 용병 남자로, 지금은 단정히 파티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귀족처럼 보였다. '이름이... 그레이였던가?'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옷을 입어 답답했는지 맨 윗 단추와 소매 단추는 풀러놔서 한량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니, 왠 꼬맹이가 날 보기에..." 그 덩치 크고 대검을 쓰는 남자 이름이 덤버트였던 모양이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생각나는 건... '훗, 마치 덤프트럭 같잖아? 잘 어울리는 이름인데?' 그레이라는 사람은 날 한번 보고 다시 덤버트에게 시선을 돌려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야야, 내가 몇개씩 덜어 먹으라고 했잖아. 접시까지 통채로 가져가니까 이상해서 바라본 거 아니겠어? 다 떨어지면 또 가져다 놓을테니 접시는 놓고 먹어." "에잇, 접시까지 가져가면 접시도 새로 가져다 놓겠지. 깔짝 깔짝 먹으려니 성에 안 차서 그런단 말야." "너가 그렇게 다 가져가면 뒤에 있는 사람은 못 먹고 기다려야 하잖아." 그러더니 그레이는 덤버트가 들고 있던 접시에서 갈비 두개를 꺼내 나에게 내밀며 싱긋 웃어보였다. "자, 먹을래?" 먹고 싶었던 터이기도 하고, 또 내 사전에 먹을 걸 준다는 데 사양이란 말은 없었기에 나는 기꺼이 들고 있던 접시를 내밀었다. "아, 감사합니다." 그렇게 내가 그가 베푼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했건만, 그레이는 뭐가 그리 이상했는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갈비를 내 접시에 놓아주었다. "에? 아, 그, 그래..." "그럼..." 뭐, 그래도 갈비까지 받은 마당에 그가 황당해 하던 말던 나에게 피해가 없으면 아무 상관 없는 일이 었기에 간단히 인사를 한 후에 지나쳐서 그 너머에 있는 음식들에게 마수를 뻗치려는데 그레이가 나를 잡았다. "아, 잠깐만." "예?" 의아해서 뒤돌아보자 그가 싱긋 웃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거, 실례를 한 것 같은데... 우리 통성명이나 하지? 난 트래비스 용병단의 그래이라고 해." 뭔 실례를 했다는 건지 의아했지만, 그가 기껏 손까지 내밀었는데 그 손을 부끄럽게 할 만큼 그에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라 나도 마주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해인이라고 합니다. 조엘 맥알파인님의 시종으로 있습니다." "역시, 그랬었군." "예?" 이제야 알겠다는 듯한 그의 말에 의아함을 표시하자 그가 멋적게 웃었다. "아니... 사실은 그 갈비를 준게 널 놀리기 위해서 그런 거였거든. 귀족 나부랭인 줄 알아서... 귀족들은 기껏 그런걸 줘도 모욕으로 받아들이니까..." "하아... 그런 거였습니까?" 뭐, 모욕으로 안 받아들였으니 별로 기분 나쁠 건 없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을리가 없었다. "미안, 진심으로 사과할께." "뭐 크게 화난 것도 아니니 괜찮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귀족이었으면 큰일날 뻔 한거 아니었습니까?" "괜찮아, 괜찮아. 그런 나부랭이들 하나 난리치는 것 쯤은..." 무지 태평한, 어찌보면 무책임한 얼굴로 웃어보이던 그래이는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그의 말을 자르고 들려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전혀 괜찮지 않아, 그레이. 귀족들은 우리의 큰 고개들이니까. 내가 엉뚱한 짓 하지 말라고 했지?" "아하... 대장..." 기가 팍 죽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모습으로 그레이가 시선을 돌린 곳에서는 역시 새벽에 봤던, 트래비스 용병단의 대장이자 그의 이름 또한 트래비스였던 인물이 척척 걸어오고 있었다. 그 또한 멋드러진 파티복을 입고 있었는데, 불편한 듯 한 손으로 목을 감싼 스카프를 연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가 얌전히 있으라고 했을텐데? 후환이 두렵지 않은가보지?" 그러자 화들짝 놀란 그레이가 얼른 대답했다. "얌전히 있었다고요, 대장.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봐요, 아무 일도 없잖아요." 그러면서 날 돌아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치, 해인아?" 차마 그 눈빛을 외면할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이자 트래비스의 시선이 나에게 돌려졌다. "너는....?" 하지만, 그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레이가 나에게 달라붙어 친한 척 한 손을 내 어깨에 올리더니 내 대답을 대신 자기가 말했다. "아아, 여기에서 만난 애예요. 해인이라고, 맥알파인 공작 장남의 시종이라더군요." "흐음... 그런가? 만나서 반갑다. 난 트래비스라고 한다. 이 녀석이 철이 좀 없지만 악의는 없는 녀석이니 무례하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네가 이해하거라." 그러면서 그의 커다란 손을 내밀자 나도 자동적으로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딱딱한 굳은 살이 잔뜩 잡혔지만, 따뜻한 손이었다. "괜찮습니다." "이해해 주니 고맙군. 그럼 난 이만..." 저쪽에 있던 어떤 사람이 트래비스를 부르고 있었기에 그는 오자마자 뭐 하나 먹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걸 보고 있던 그레이는 과장되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대장도 불쌍하단 말이야... 귀족들이 부르면 쪼르르 달려가야 하는 신세이니... 난 용병대 대장 같은 건 절대로 안 할거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는 눈을 반짝 빛내며 물었다. "자, 해인군,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술이나 한잔 하면서 대화의 장을 만들어 볼까나?" '술이라고라고라? 미성년자에게 술을 권하다니...' 말해두지만, 한국에 계시는 우리 아빠는 군인이시기 때문에 좀 고지식한 면이 있어 학생이 술 담배 하시는 걸 무지 싫어하신다. 그래서 고등학교때 해민이 녀석이 수학여행때 술 마시고 온걸 들켜가지고 엄청 혼났지, 아마? 멍청한 녀석, 술냄새 풀풀 풍기는 걸 그냥 가방에 쑤 셔박은 채 가젹왔으니 안 들키고 배기겠나? 어쨌든,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나는 성인이 될때까지 술을 마시려는 생각은 커녕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뭐, 이 곳에서는 성인의 나이지만... 그래도.. 왠지... "핫핫, 죄송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곤란해서 말이죠. 그럼 전 이만..." 그래서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잽싸게 그의 손길에서 도망쳐 나왔다.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친하게 지내면 상당히 피곤할 것 같은 사람이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왠지 그는 나중에 다시 만날 것 같은 불길안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그의 손길을 피해서 물러난 나는 접시도 제법 음식물로 가득찼다 싶어 마음 놓고 이것들을 먹을 장소를 찾아 두리번 거렸다. 사람들이 앉아서 음식을 먹게끔 몇개의 작은 식탁과 의자가 놓여 있었지만, 왠일인지 그 곳에는 아무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서서 - 서 있는 것이 그렇게 좋은지...- 간단한 음식과 음료를 들고 있었기에 나는 식탁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결국 눈을 질끈 감은 채 그 곳에서 시선을 돌렸다. 아무도 없는데 나 혼자 그 곳에 앉아 먹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난 그렇게 얼굴이 두껍지 않단 말이다. 용병들이라도 그 곳에 앉아서 먹었으면 좋겠지만, 덤버트는 음식을 들고 작은 식탁에서 음식들이 놓여있는 큰 식탁까지 왔다갔다 하는 시간들이 아까웠는지 그냥 큰 식탁 근처에 서서 먹고 또 음식을 퍼서 그 근처에서 먹고 있었다. 그래서 어디 사람들 눈에 안 뜨여 맘 놓고 먹을 장소가 어디 없나.. 하고 두리번 거리며 살피고 걷다가 미처 옆에서 오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부딧혀 버렸다. 뭐, 그렇다고 해도 내가 발바닥에 땀나게 빠르게 달린 것도 아니고,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있던 터라 조심조심 걷고 있었던 덕에 누가 넘어지거나, 아니면 내가 들고 있던 음식이 상대방 혹은 내 옷에 튀는 일은 없었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나와 부딪힌 사람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신지요." 캬, 이 어디 내놔도 손색 없을 태도와 부드러운 말씨... 하지만, 나와 부딪힌 사람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뭐야? 앞을 똑바로 보고 다니지도 못해요?" 톡 까놓고 이야기 하자면, 두 사람이 부딪혔을때 그게 어디 한 사람의 잘못이던가? 두 사람이 미처 못 봤기에 두 사람이 부딪힌 것 아닌가? 그러나 이 XXX 없는 말투와 어조로 봐서 상대방은 무지 기분이 안 좋아 신경질 나기 직전인 귀족 여자. 여기서 잘못 건드렸다간 큰일이기에 나는 다시금 저자세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레이디.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재빨리 벗어나려는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에 고개를 들어 그 여자를 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다시 한번 사과의 말을 하고 가려는데 그 여자의 목소리가 날 붙들었다. "어, 너는...?" "예?" 그녀의 말투에는 날 아는 듯한 느낌이 들어 있었지만, 이 곳에서는 날 아는 여자가 없었기에 의아함에 고개를 들어보니, 나와 부딪힌 여자는 바로 밤 늦게 도착해 소란을 일으키고 나에게 짐까지 나르게 한 원흉이었던 그 베르쿠스 남작 영애였다. "아, 남작 영애셨군요. 다시 한번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그러자 그녀가 들고 있던 부채를 펴 자신의 입가를 가리더니 말을 건네왔다. "뭐니, 너. 이 후작가의 시종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차려 입고 있으니 제법 귀족 같은데?" "저는 조엘 맥알파인님의 시종입니다. 그 분의 배려로 이 곳에 있게 되었습니다." "조엘 맥알파인? 아아, 그 맥알파인 공작의?" "예. 그럼 전 이만..." "어? 야..." 그녀가 날 더 잡으려는 것 같았지만, 성격 안 좋은 그여자와 있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던데다 빨리 음식을 먹고 싶었기에 나는 못들은 체 하고 재빨리 그 곳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그 남작가의 영애는 그러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 이연참 할거 나눠 올리기 귀찮아서 그냥 올렸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이연참입니닷~!! 아셨죠? +_+ 아, 그리고 정승우님 생일 축하드리구요, 카페에 퍼가고 싶은 분들은 퍼가세요. 그런데 여기는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못 쓰던데... 퍼가시려면 직접 치셔야 할걸요? 뭐, 그렇더라도 책 나오면 꼭꼭 지워주셔야 합니다. ^^ 책은... 아직 나올라면 한달은 더 있어야 할걸요? ^^;; 제 10화 도망 (10) 하지만, 그 남작가의 영애는 그러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파티장 안에서는 적당히 먹을만한 장소를 못 찾은 나는 커다란 홀에 달린 자그마한 - 홀에 비해 작다는 거지, 꽤 넓직한 곳이다. - 테라스로 나갔다. "에구... 이거 먹기도 힘드네." 보통 귀족들의 테라스에 가 보면 테라스 너머로 보이는 멋진 경관을 보며 차 한잔 마실 수 있게 작은 탁자와 의자를 놓는 것이 보통이건만, 그 곳에는 그런 낭만적인 생각을 가진 이가 아무도 없는지 테라스에는 오로지 테라스(?)만 있었다. 그렇다고 서서 먹을 수는 없어서 테라스의 차가운 돌을 쌓아 만든 듯한 난간 위에 걸터 앉아 드뎌 시식을 하려고 하는 순간, 달갑지 않은 방해자가 나타났다. "어머, 혹시... 내가 먹으려던 걸 방해한 건 아니겠지?" 그렇게 눈치를 딱 챘으면 가주지 왜 나에게 다가오는 건지... 속으로 궁시렁 댔지만 내 입장이 "예, 방해이니 그냥 가주시겠어요?" 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쾌하단 내색을 전혀 하지 못한 채 상냥하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러자 제네브라라고 하는 남작 영애는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긋 웃고는 은근 슬쩍 나에게 다가왔다. '뭐, 뭐냐... 이 여자애...'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내가 서 있던 곳이 하필이면 난간 바로 앞이었기에 물러날 곳도 없었다. '뭐야, 뭐... 남자면 몰라도 왜 여자가 나에게...' 내가 그렇게 속으로 부르짓던 울상을 짓던 나에게 다가온 제네브라는 음흉한 미소를 씨익 지어보이며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손을 들어 살짝 내 볼을 어루만졌다. "어머나... 남자 주제에 나보다도 피부가 더 고운거 같잖아? 티도 하나 없고... 게다가 말랑말랑하기까지..." "나, 남작 영애..." 너무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안 움직이는 입술을 움직여 겨우 겨우 입을 열었는데, 그 목소리마저 떨려 나오자 내 스스로 더욱 더 당황해 있는데 제네브라의 미소가 짙어졌다. "쿡... 얼었네? 귀여워라... 게다가 이 신기한 색의 머리카락이라니... 어머, 엄청 부드럽잖아?" 나는 머리카락이 가늘고 생머리라 만지면 촉감은 죽여줬다. 대신 조금만 정전기가 일어나도 엄청 달라붙는데다 매일 착 가라앉기 때문에 머리 숱이 많지만 않았더라면 짧은 커트머리는 전혀 안 어울렸고, 숱이 많아도 아침마다 약간 떠 보이게 하기 위하여 매일 드라이를 해야만 했었다. 물론, 여기와서는 한번도 안 했지만... '젠장... 그런데... 이런 일은 여자에게 당하고 싶지 않단 말이다.' 나는 뒤로 물러나지 못하자 이제는 옆으로 슬금 슬금 피하면서, 경직된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띄우려고 노력했다. "나, 남작영애... 이러시는 것을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그러나 제네브라는 이런 내 말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가 할 말만 해댔다. "너... 조엘 맥알파인경의 시종이라고 했지? 그런 남자의 시종 따윈 관두고 내게로 오지 않겠어? 내가 엄청 귀여워 해줄테니까 말야. 그런 남자 밑에 있는 것 보다는 훨씬 편할 거야." "하,하,하... 말씀은 고맙지만..." 나는 차마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떨어내지는 못하고 그냥 몸을 움직여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손길을 피하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너무 그녀의 손길만 의식한 나머지 내가 먹으려다 먹지 못한 음식이 담긴 접시가 난간 위에 그대로 있다는 것을 그냥 잊어버린게 화근이었다. 몸을 움직이다보니 나도 모르게 난간 위에 있던 접시를 건드려버렸고, 덕분에 흔들린 접시는 난간에서 주륵 미끄러지면서 자신이 담고 있던 음식물을 그 앞에 있던 나와 남작 영애의 하체에다 쏟아부었다. 탁 주륵 좌르륵 챙그랑~!! 다행히 접시는 은접시라 깨지지는 않았지만, 바닥과 그대로 부딪히는 바람에 약간 찌그러져버렸고, 내 새하얀 바지와 제네브라의 화사한 연두색 빛 드레스 치마에 음식물 얼룩이 크게 생겨버렸다. "꺄악~!!" 제네브라는 그렇게 용을 써도 나에게 안 떨어지더니만, 자신의 드레스에 얼룩이 생겨버리자 화들짝 놀라 떨어져버렸다. "이게 뭐야? 얼룩이 져버렸잖아? 어떻게 할 거야?" '그게 내 탓이냐?'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더니 제네브라는 자신의 잘못은 생각도 안 하고 내 탓만 해댔다. '젠장... 억울하면 출세하라던 말이 딱 맞다니까.' 그리하여 나는 내 바지에 묻은 얼룩은 닦을 생각도 못한 채 얼른 가슴 부분의 주머니에 꽂아 두었던 손수건을 꺼내고 그녀 앞에 무릎을 굽혔다. "죄송합니다. 닦아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얄미운 여자의 치마를 억지로 닦으니 제대로 닦아질 리가 없는지 얼룩은 더 크게 번지고 말았다. "이런..."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내 탓만 하고 있는 남작 영애가 그걸 보고 가만 있을리가 없었다. "뭐 하는 거야? 얼룩이 더 번졌잖아? 제대로 못해?" 그녀의 날카로운 외침이 터지는 순간 나는 눈 앞에 불꽃이 번쩍 하는 희안한 일을 겪었다. 짝~!! 갑작스레 고개가 홱 꺾여진 덕분에 나는 잠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는지, 나는 내가 뭔 일을 당했는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 순간, 치켜 올라가 있는 그녀의 손과 뺨에서 얼얼해지는 통증이 느껴지자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뺨을 맞았던 것이다. 너무 기가 막혀서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 평생에 뺨을 맞아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치솟는 분노로 인하여 내 입장도,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어버렸다. 오직 눈 앞에 있는 저 여자 아이를 한대 패주지 않으면 속이 전혀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팔을 치켜드는 순간, 누군가가 내 팔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윽~!!" 돌아보니 그 곳에는 무지 차가운 얼굴로 날 매섭게 노려보는 조엘이 서 있었다. "뭐 하는 거냐?" 조엘의 그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그의 얼굴은 예전에 내가 마굿간 뒤에서 하인 세 녀석에게 몇대 맞아주고 복수하려는 찰나 만났던 조엘의 얼굴보다 100배는 더 무서워 내 머리 끝까지 치솟았던 분노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아... 저..." 게다가 그의 몸에서는 무지 무섭고 위험해보이는 기운까지 폴폴 날리고 있었다. 그는 그 모습 그대로 나에게 입을 열었는데, 말에서까지 냉기가 풀풀 날렸다. "어서 영애께 사과하고 물러 가거라." "에?"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그를 올려다봤지만, 조엘은 그것 조차 마음에 안들었는지 다시 일갈했다. "뭘 하는 거지? 내 말이 안 들리나?" 그의 차가운 행동에 나는 온 몸이 부들 부들 떨릴 정도의 분노를 맛보았지만, 이를 악문 채 덤덤한 표정으로 조엘에게 붙잡힌 손을 빼낸 뒤 정중한 동작으로 제네브라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남작영애. 용서해주십시오." "아, 뭐..." 제네브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뭐라 말하려 했지만, 나는 다 듣지도 않은 채 절도 있는 동작으로 몸을 돌려 그 곳에서 나갔다. 홀과 테라스를 연결시키는 유리문을 나가니 그 곳에서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은 채 서 있던 데니가 날 보자 반색하며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데니에게 다가가기보다는 얼른 몸을 돌려 그 홀의 입구를 향해 빠른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지금 데니와 이야기를 하면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이 홀에서 눈물을 흘린다는 건, 아니 그 남작 영애와 조엘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데서 눈물을 흘린다면 내 자존심이 산산조각 날 것만 같아서 얼른 그들이 있는 곳에서부터 멀어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 너도 귀족이란 말이지? 젠장할... 그깟 귀족이라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해서...' 제네브라라는 그 콱콱 밟아주고 싶은 남작 영애보다 조엘에 대한 분노가 더했다. 그에게서는 배신감까지 느껴졌던 것이다. 평소 괜찮게 여기던 녀석이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었다. 나는 그 남작 영애한테 뺨까지 맞았건만, 가제는 게편이라더니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같은 귀족이라고 그 여자 편을 들어 나에게 싸늘하게 대하던 그의 모습이란... '나쁜 자식, 나쁜 자식, 나쁜 자식, 나쁜 자식, 나쁜 자시이이이익~!!' 성큼 성큼 걸어 내 방에 도착한 나는 그제야 눈에서 주르르 떨어져 내리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낸 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가방을 꺼내들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래, 어디 너희들 끼리 잘먹고 잘 살아라. 나쁜 자식... 다시는 네 꼴 안본다. 내가 여기 아니면 갈 데가 없는 줄 알아?' 그렇게 얼마 안 되던 짐들을 거의 쑤셔 넣다시피 가방에 신경질적으로 던져 넣던 나는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멈칫했다. '가만, 지금 내가 뭐 하는 거야? 하... 나도 참...' 내가 짐을 싸서 여기서 나가버린다고 해도 조엘이나 그 남작 영애란 지지배한테 피해가 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어차피 나는 조엘에게 도움이 되는 것 보다는 그의 도움을 받는 게 더 많았으니, 내가 없어지면 그는 다른 시종을 구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 동안 오히려 데니가 더 고생하면 고생했지, 조엘이 고생할 건 하등 없었다. '그냥 갈 순 없어. 아암, 절대로 그냥 갈 순 없지. 어떻게 해서든 꼭 복수하고 가버릴 테다. 여길 그냥 콱 뒤집어 엎어버리고 이 곳에 있는 값 나가는 것들은 모조리 싹 쓸어서...' 두 주먹 불끈 쥐고 복수의 불을 활활 태우며 계획(?)을 짜고 있는데 누가 내 방문을 똑똑 두드려 날 방해했다. "해인아? 해인아, 거기 있니?" 언제나 날 챙겨주고 돌봐주던 데니의 목소리였다. '에... 어쩌지? 어쩌지?' 데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왠지 내가 계획(?) 했던 걸 데니에게 들키면 안된다는 생각에 - 머리로 생각한 것 뿐이어서 증거도 없는데, 데니를 보면 그게 다 들킬 것만 같았다. 내가 그렇게 바보일 줄이야... - 문을 열어주면 안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다고 저리 문 앞에 있는 데니를 모른 체 하고 있자니 양심에 찔리고... 그래서 혼자 열어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몇번 문을 두드려보던 데니는 이런 내가 열어주길 기다리지도 않고 자기가 열고 빼꼼이 고개를 디밀었다. "해인아!" 그러더니 방 중앙에 엉거주춤 서 있던 날 발견하고는 문을 열고 성큼 성큼 들어왔다. "어... 형...." 그의 모습에 찔끔해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는데 데니는 내 방에 들어오자마자 내 침대 위에 있던, 짐 싸고 있던 가방을 보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허... 뭐냐, 지금 가출이라도 하려고?" 그의 말에 욱 한 나는 몸을 홱 돌려 그 방을 나왔다. "몰라요. 여기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아요." 생각해보니 이 곳을 뒤집어 엎고 값나가는 물건을 다 싹쓸어 간다면 저런 자질구레 한 건 가지고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스승님이 주신 책은 챙겨가야 하는데...' 하지만, 다시 떠오른 생각에 그 책만은 챙기려고 몸을 돌리는데 날 따라 내 방에서 나오던 데니가 날 보자마자 내 목에 팔을 걸어 조이면서 다른 한손으로 내 머리를 마구 흐트러 뜨렸다. "바보 같은 녀석. 계집애 처럼 삐진 거야?" "우갸갸갸~ 혀엉, 놔요오~" "헤에, 너 정말 삐졌구나? 역시, 해인이가 삐졌대요~!!" "안 삐졌어요~!!" 데니의 흥얼거리는 듯한 놀리는 말에 화가 나 빽 하고 소리를 지르자 그 순간 내 머리를 흐트러 뜨리던 손길과 목을 조이던 팔이 사라져 나는 순간적으로 휘청 거렸다. 재빨리 균형을 잡지 않았다면 아마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을 거다. 황당해서 데니를 돌아보며 한 마디 하려고 했는데, 데니가 무척 부드럽지만 또한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기에 나는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데니는 그런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엉망이 된 내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물었다. "왜 화가 난 거야? 날 버리고 가버리려고 생각했을 만큼 화가 난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아....' 그러고보니 조엘 녀석에게 너무 화가난 나머지 데니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게 미안해서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데 데니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그 철없는 남작 계집애 한테 한대 맞았다고 화난 거야?" 그의 말에 나는 너무 놀라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형... 혹시..." 하지만 데니는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조엘님이 네 편을 들어주지 않아서 화가 난 거야?" "뭐예요, 다 보고 있었어요?" 나는 데니의 손을 슬쩍 치우고는 그를 지나쳐 다시 내 방으로 들어갔다. 데니를 만난 덕분에 아까의 그 끝도 없이 치솟아 오르던 분노는 가라앉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분까지 풀린 건 아니었기에 가지고 갈 짐을 챙기려고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자 데니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내가 한가지 가르쳐 줄까? 아마 그 철 없는 남작 영애는 다시는 너에게 추근대지 못할 거야." "그러던 말던 상관 없어요. 둘 다 보지 않을 거니까." "그럼 나는? 나도 안 볼 거야?" 그의 말에 내가 멈칫 하자 데니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해인아, 조엘님은 귀족이라서 귀족 편을 든게 아니야. 아까 너에게 그렇게 대했던 건 조엘님이 그 철 없는 남작 영애한테 경고하는 모습을 너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거라고." "그게 아니겠죠. 남작 영애한테 함부로 할까봐 화를 냈던 거겠죠. 형도 봤을 거 아니예요? 저에게 엄청 화내시던 모습..." "내가 보기에 너한테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그 남작 영애한테 화를 내는 것 같던데?" "조엘님 변호해 줄 필요 없어요, 형. 형께는 죄송하지만, 난 갈 거예요." 노만에게 가져다 줄 책과 내가 가지고 갈 책을 다 꺼내든 나는 이 곳을 떠나기 전 그에게 책을 돌려줄 요량으로 책들을 들고 내 방에서 나오는데, 그 순간 조엘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조엘은 아까처럼 냉기를 풀풀 풍기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그 상태로 방 안을 둘러보던 그와 눈이 마주쳤지만, 나는 그와 말도 하고 싶지 않았기에 무시해버렸고, 조엘 또한 아무말도 하지 않아 방안에는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러자 데니가 조엘에게 다가가더니 좀 과장된 쾌활한 어조로 그에게 입을 열었다. "핫핫, 조엘님, 저 녀석 삐져서 집 나간다는 군요. 조엘님이 삐지게 했으니 알아서 하세요. 대신 해인이 못 잡으시면 저도 화낼 겁니다." 그리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그렇게 내게 맘을 써주는 데니 형의 행동에 가슴이 뭉클해졌지만, 그래도 조엘 녀석과는 같이 있고 싶지도 않았고,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데니 말대로 삐지긴 엄청 삐진 모양이었다. 조엘이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도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던 나는 조엘이 뚜벅 뚜벅 다가오자 나 또한 걸음을 옮겼다. 조엘이 나에게 다가오는 건 알았지만, 그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를 비켜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 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조엘이 방문 바로 앞을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에 비켜서라고 할 수도 없어서 그가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보며 뚜벅 뚜벅 걷기만 해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나는 한 걸음 옆으로 가서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조엘의 팔이 내 앞을 가로막더니 그와 동시에 날 자신의 품으로 끌어 당겼다. '으겍...' 얼마나 강하게 날 끌어 안았는지 내 팔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그는 그렇게 날 끌어안은 상태로 내 귓가로 얼굴을 가져다 대더니 작게 속삭였다. "바보..." 그 한마디에 나는 다시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지금 누구 보고 바보라는 겁니까?" 그가 얼굴을 내 귓가에 대고 있는 바람에 내 얼굴 또한 그의 귓가에 가까이 닿아 있었다. 그런 상태로 소리쳤으니 그의 귀가 멍멍 했을 거다. 하지만, 이 인간은 좀 맛이 갔는지 잠시 멈칫 하더니 곧 쿡쿡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뭐가 그리 재미있으신 겁니까? 저는 하나도 안 재미있으니 이것 좀 놔주시겠습니까?" 나는 할 수 있는 한 땍땍 거리면서 말했건만 조엘 녀석은 여전히 쿡쿡 거리더니 날 놔주지는 않은 채 오히려 내 머리 끝에 간당간당 매달려 있는 짙은 남색 비단 리본을 끌었다. 아까 데니가 하도 머리를 흐트러뜨리는 바람에 엉망이 되어 있던 나는 조엘 녀석이 리본을 아예 벗기는 바람에 완전히 풀어져 흘러내렸다. 그래봤자 어깨에 닿는 정도였지만... "뭐 하시는 겁니까?" 안긴 상태에서 계속 땍땍 거렸지만, 조엘 녀석은 꿈적도 안 했다. 이제는 내 머리 카락을 자기의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더니만 슬쩍 나에게서 자기 몸을 떼더니 앞으로 흘러 내린 머리카락을 내 귀 뒤로 넘겨주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물론 나는 녀석에게 앙심에 가득 차 있었으니 하나도 안 고마웠다. 그래, 날 내려다보는 녀석을 지지 않고 마주 바라보고 있는데, 녀석이 평소 보다 조금 더 부드러워 보이는 미소를 짓더니 내 귀를 만지작 대고 있던 손을 옮겨 아까 남작 영애에게 얻어 맞은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자국이 남았군. 아파?" "궁금하시면 직접 맞아 보시죠?" 그러자 조엘 녀석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쿡쿡, 몇번 맞아봤지만 난 맞을 당시 조금 따끔하고 말더라고. 하지만, 네 피부는 무척 연약해보여서 말이지." 그러더니 이놈의 손가락이 볼에서 쓰윽 움직이더니 내 턱쪽으로 다가와서 아랫 입술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뭐 하시는 겁니까? 그리 할 일이 없으시면 좀 놔주시죠?" 그렇게 앙칼지게 외치면서 이놈의 손가락을 콱 깨물어 줄까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녀석이 능글맞게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싫.어." '뭐냐...이놈...' "지금 장난 하시는 겁니까? 심심하시면 아까 그 남작 영애랑 노시지요? 전 같이 놀아 줄 마음이 전혀 없으니까요." "호오... 삐진 거냐?" 조엘 녀석의 그 얄밉고 능글맞은 대답을 듣는 순간 열이 확 뻗쳐 올라 내 입가에서 왔다갔다 하는 녀석의 손가락을 콱 물어줄라고 입을 벌렸는데, 그 순간 조엘의 얼굴이 순식간에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아랫 입술에 부드럽게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너무 갑작스런 상황에 뻣뻣하게 굳어 있는데, 조엘 녀석이 그런 날 내려다 보다 귓가에 다시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댄 채 속삭였다. "절대로 안 놔줄 거야. 네 맘대로 가게 내버려 둘 줄 알아?" 그리고는 완전한 석상이 되어 있는 날 내버려두고 자기만 방에서 빠져 나가버렸다. ============================================================================== 에잇, 10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한번 더 써야 할거 같군요. 이번에도 이.연.참 분량입니닷 ^^ 아, 그리고 센프님 하사님 아르쥬나님 생일 축하드려요 ^^ 아, 그리고 16일에 생일이신 분이 계셨는데... 제가 그 분 닉넴을 잊어버려서리.. ^^:; 정말 죄송합니다 (__) 님, 님도 축하드려요 ^^ 제 10화 도망 (11) 주륵~ 타악~!! "악~!!" 조엘 녀석이 빠져 나간 뒤 나는 혼자 멍 하니 서있다가 손에 힘을 좀 뺐었는지 팔에 들고 있던 책이 내 팔 안에서 빠져나와 떨어지더니 정확이 내 발등을 가격했다. 덕분에 정신 차리기는 했지만 발등이 엄청나게 아파 나는 한동안 앉아서 낑낑 대야 했다. 마법서란 것들은 쓸데없이 표지 두껍고 책 두께가 두껍기에 들기에도 상당히 무거운데 그걸 발 등에 떨어뜨렸으니... 멍이 안 들면 다행이다. "으갸갸... 아퍼라... 젠장할... 조엘 자식 엉뚱한 짓을... 아호 아퍼... 이게 다 그 자식 때문이얏~!!" 혼자서 중얼 중얼 소리도 쳐봤지만, 덕분에 아까의 일이 다시 떠오르자 나는 얼굴이 화끈 거렸다. "쳇... 그래도 여자가 아닌게 다행이네... 뭐... 그래도 나쁘지는... 에엣, 내가 지금 무슨말을..." 혼자 중얼 거리던 나는 내가 한 말에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어 혹시 누가 이 말을 들었을까봐 몰라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하지만, 혼자 있던 방이었으니 내가 혼자 중얼 거리던, 생쇼를 하던 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냐. 체엣..." 혼자 별 짓 다 하고 스스로의 모습에 한심함을 느낀 나는 의기소침해져 한숨을 푹 내쉰 다음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 들었다. 조엘에게서 떠나기로 마음을 굳힌 뒤 노만에게 가져다 주려고 했던 책이었다. 그러나... "쳇, 절대로 안 놔준다고? 웃기고 있네... 짜식, 이제 봤더니 순 바람둥이잖아?" 그래도 나는 스스로의 입이 스르르 벌어지면서 아까의 그 분노한 감정이 어느새인가 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그래... 내가 그렇게 꼭 필요하다는데 있어주지 뭐... 그럼 앞으로 시종 일은...?" 나는 거기까지 중얼거리다 다시 한번 들고 있던 책들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세권의 책이 한꺼번에 내 발등을 내리찍고 말았다. 스륵~ 탁, 탁, 타악~!! "아으윽~ 젠장할... 아까 맞은 데 또 맞았잖아?" 다시 주저 앉아 낑낑거리는 나였지만, 딴 생각으로 인하여 머리가 혼란스러워 큰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휴~~ 이게 어찌된 거지? 난 분명히 지금 남장하고 있는데... 설마하니 엘라임 까지 날 아들이라고 부르는 마당에 내가 여자인게 탄로난 것도 아니고... 그럼, 조엘 녀석이 그... 뭐시냐... 거시기? 그, 그러면... 이 글은... 거시기물? 흐미... 우째 이런 일이? 이거 마냥 헤벌래 해 있을 일이 아니잖아? 그, 그럼... 내가 조엘 녀석에게 내가 여자라는 걸 밝히면... 그 자식은 뭐라고 할까? 오호, 통재라~ 어찌 나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아~" 혼자 앉아서 낑낑 거리고 생 쑈를 하고, 머리를 쥐어 짜며 고민 고민 하던 나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몰라, 알 수가 없어. 어떻게든 되겠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아~!!"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 난 뒤 떨어져 있던 책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항상 곁에 붙어 있던 나이트급 정령들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이녀석들은 처음에 계속 내 곁에 붙어 있으면서 구경 하더니만, 이제는 자기들 끼리 어디론가 놀러 다니곤 했다. 엘라임도 요즘 계속 정령계에 가 있는 거 같고... 하여튼 만약 엘라임이 이런 내 모습을 봤다면 애가 맛이 갔다고 당장 끌고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거 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지만... "몰라, 우선 이거나 스승님께 가져다 드려야 겠다." 다시 여기 머물러 있겠다고 생각을 바꿨어도, 어차피 이 책들은 노만에게 잠깐 빌린데다 이제 다 읽어서 돌려줘도 상관 없는 거였다. 아직 파티가 끝나려면 멀었기에 노만 역시 돌아와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방에다 책만 가져다 놓고 나오다보니 그제야 아직까지 음식 얼룩이 묻은 옷을 안 갈아 입었다는 걸 깨닫고 얼른 내 방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휴... 내 정신좀 봐. 너무 정신이 없다보니 옷 갈아 입는 걸 깜빡 했잖아?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런데... 이렇게 중얼 거린 것이 무색하게도 내 말이 끝나자마자 저쪽 꺾어지는 복도쪽에서 자박 자박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며 한 소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내 또래의 소녀이긴 하지만, 화려한 파티 복장이 아닌, 후작 성의 하녀 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두리번 두리번 거리면서 걸어오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반색하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 이런.... 하필이면...' 날 바라보며 걸어왔기에 피하지도 못하고 그냥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다가온 그 소녀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어, 혹시 맥알파인경의 시종 아니세요?" "아, 맞는데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아, 다행이도 일찍 찾았네요. 맥알파인경께서 찾으세요." "저를요?" 그녀의 말에 나는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 동안은 조엘이 나를 부르려고 할때 다른 사람을 시켜 말을 전하거나 데려오게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기야, 저택에 있을 때에는 조엘의 곁에 있거나 아니면 데니, 노만, 혹은 헤럴드와 함께 있는데다 내 행동 패턴이 거의 일정했기에 그와 떨어져 있을 시기에는 그가 직접 나를 찾으러 왔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여기는 맥알파인 공작 저택이 아닌데다가 나는 지금 조엘의 방에 있지도 않았으니, 그 가 다시 방에 갔다가 없으니까 지나가는 하녀에게 부탁한 모양이라고 나는 스스로 납득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지금 어디계시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하고 곧바로 몸을 돌려 종종 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하는 그녀 때문에 나도 얼른 그녀의 뒤를 쫓아야 했다. 그녀는 성을 빠져 나와 정원 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렇게 늦은 밤은 아니었지만, 해는 완전히 져버린 시각이라 성을 둘러 싼 정원 이곳 저곳에는 잠시 바람을 쐬러 나온 이들을 위하여 이곳 저곳에 등을 켜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등들이 정원 모두를 밝힐 수는 없는 법이라 정원의 깊숙한 곳은 어두컴컴했다. 이 후작의 성에 있는 정원은 수도에 있는 맥알파인 공작 저택의 정원에 비하면 크지 않지만,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때는 엄청 큰 곳이었기에 사람들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으슥한 곳도 많았다. 그런데 나를 안내하는 시녀가 그렇게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나를 안내하자 나는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니...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조엘 녀석은 이런 정원에서 왜 날 보자고 하는 거지?' 한번 시작된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져 결국 나이트급 정령들을 불러낼지 말지 고민하기까지에 이르렀을 때 시녀의 발걸음은 멈췄다. "저쪽에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조금만 더 가시면 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전 이만..." "에? 아, 감사합니다." 조엘 앞도 아니고, 조엘이 있다는 방향만 가르쳐 준 그녀는 내 감사의 인사에 고개만 한번 까딱 거리고 다시 총총 걸음으로 성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되게 바쁜가보네... 저렇게 서둘러서 가다니... 성실한 사람인걸?' 성으로 돌아가는 그 시녀의 뒷모습을 흘끗 바라본 나는 그녀가 가르쳐준, 조엘이 있다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곳은 등도 안 밝혀져 있어 오로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달빛과 별빛만이 정원을 비쳐주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조금 더 걸어갔건만,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고, 아무도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거였다. '얼마나 멀리 있는 거야?' 속으로 좀 짜증을 내면서 나는 조엘 녀석을 부르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조엘님? 어디 계십니까? 조엘님? 조엘니이이임~!!"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그 자리에 딱 멈춰 섰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좀 께름직한데다 거부감 마저 드는 기분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게다가 평소 같으면 활발하게 날아다니(?)는 정령들도 이상하게 숨을 죽인 채 - 어차피 지들이 떠들어도 딴 사람들은 듣지도 못하는데 - 나를 주시하고 있는 거였다. 마치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그들의 모습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좋지 않은 기분에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엘라스트라] 아무래도 제일 의지되는 건 물의 정령이었던 모양이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옆에 스륵 하는 공기의 움직임이 느껴지며 푸른 용이 조용히 나타났다. [예.] 그가 옆에 든든히 지켜주자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채 세 걸음도 떼지 못했을 때 엘라스트라가 말을 걸어왔다. [사람의 시체가 있습니다.] 그의 말에 혹시나 조엘인가 싶어 나는 얼른 엘라스트라에게 부탁했다. [안내해 줘.] 엘라스트라는 군 말 없이 매끈한 그의 몸을 움직여 허공에 둥둥 뜬 채 내 앞 허공을 스르르 미끄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라 뛰다시피 빠른 발걸음을 옮기는데 얼마 가지 않아 작은 정원 나무 아래 시커먼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엘라스트라는 그 시커먼 물체 위에 둥둥 떠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른 달려가보니 쓰러져 있는 건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였는데 등을 따라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죽음의 원인인 듯한 단검이 뾰족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상처에서 흘러내린, 주위에 흥건하게 고인 핏물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간 나는 무서운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얼굴을 덥고 있는 머리카락을 치웠다. 혹시라도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면서 내 손을 덥썩 잡을까봐 엄청 무서웠지만, 그 보다는 왠지 검고 긴 머리카락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히익~!!" 그리고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는 몸서리 치며 얼른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원한과 고통으로 가득 찬 표정에 눈도 부릅떠 앞으로 노려보고 있는 얼굴을 어두운 밤에 덤덤하게 마주 보고 있을 정도로 나는 강심장이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처녀귀신 저리가라 할 정도로 무섭게 일글어진 얼굴은 내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베르쿠스 남작 영애가..." 그 순간 나는 조엘이 날 이 곳으로 불렀다는 것도 잊은 채 엘라스트라 보고 여기 있으라고 당부한 뒤 잽싸게 성이 있는 곳으로 뛰었다. 그러나 성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주위에서 경호를 서고 있던 후작 성의 기사를 만날 수 있어 나는 그를 붙잡고 외쳤다. "큰일 났습니다. 베르쿠스 남작 영애가 죽어 있습니다." 30대 후반쯤으로 보였던 그 기사는 내 말에 무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자신과 함께 있던 병사 중 한명은 성 안으로 보내 이 일을 알리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병사 두명과 함께 나의 뒤를 따라왔다. 기사와 함께 한 내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기사가 그녀의 시체를 살피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사와 같이 달려온 병사 한명이 얼른 마중 나가 그들을 이끌었는데 그 곳에는 웨스트모어랜드 후작은 물론, 그의 장남과 차남, 그리고 장남의 친구인 스테반 윈체스터와 조엘 데니까지 보였다. "조엘님?" 여기서 날 기다려야 할 조엘이 후작들과 같이 달려오자 놀라서 그를 불렀는데, 내 모습을 본 조엘은 나 보다도 더 놀라 나에게 다가왔다. "아니,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 그의 반응에 나는 얼떨떨할 뿐이었다. "왜 있냐니요? 조엘님이..." 하지만 내가 채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나와 같이 이 곳으로 왔던 기사가 입을 열었다. "저 소년이 제일 먼저 시체를 발견해습니다." 물론, 그건 조엘을 향해 한 말이 아니라 후작에게 한 말이었지만, 그로 인해 그 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네가 시체를 발견했다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데니 마저 놀라면서 나에게 다가와 다그치는데 후작이 끼어들었다. "자자, 둘 다 진정하고, 괜찮다면 내가 질문을 하겠네." 제일 연장자이자 이 곳의 주인이 나서는데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불안한 눈치의 데니와 조엘이 뒤로 물러났다. "그래, 우선 자네가 누구인지 이야기 해 줄수 있겠나? 내 기억력이 딸려 자네가 누구인지 생각이 안 나는구만." 그는 내가 아직 조엘의 파티복을 입고 있는 터라 귀족의 자제인 줄 알았는지 무척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내가 시종이라는 걸 알아도 저 태도가 유지될 지 엄청 걱정스러웠지만, 나는 바른대로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저는 조엘 맥알파인님의 시종입니다." "그래? 흐음..." 내 말을 들은 그가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리더니 조엘에게 시선을 돌렸고, 조엘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자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조엘을 바라본 이유가 내 말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랬군. 어찌 되었든, 자네가 여길 맨 먼저 발견했다고?" 다행이 크게 행동이 변하는 건 없어 나는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같이 있던 사람은 없었는가?" 엘라스트라가 같이 있었지만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를 댈 수는 없었다. "저 혼자였습니다." "왜 여기 있었지?" 후작의 질문에 나는 잠시 조엘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조엘 님이 여기서 저를 부르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러자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엘의 놀란 외침이 들려왔다. "뭐라고?" 뭐, 내가 여기 있는 걸 보고 놀라는 조엘의 모습을 보고 대충 짐작은 했지만 막상 확인하고 보니 상당히 황당했다. 아니, 조엘이 날 여기 불러낸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날 불러낸 이는 누구란 말인가? 조엘의 태도로 보아 그가 정말 날 불러낸 것이 아니란 걸 깨달은 - 사실 누구라도 깨달을 수 있었겠지만 - 후작은 의심스런 표정으로 날 보면서 물었다. "누가 조엘이 여기서 널 불렀다고 했지?" '자네'에서 '너'로 호칭이 바뀌는 걸 듣고는 나는 사태가 나에게 안 좋게 흘러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후작의 말에 솔직히 대답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제가 성 안에 있을 때 성의 시녀가 와서 저를 정원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조엘님이 이쪽에서 절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들어왔는데 조엘님은 안 계시고 이렇게..." 나는 그렇게 말을 흐리면서 눈짓으로 여전히 쓰러져 있는 그녀의 모습을 가르켰다. "널 이 곳으로 데려온 시녀를 아는가?" "이름은 모릅니다. 사실 오늘 처음 봤기 때문에..." "인상 착의라도 말해봐라." "제 나이 또래에 등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자였습니다. 키는 저보다 좀 작았다는 것 외에는 모르겠습니다." 뭐, 이 정도까지만 이야기 해도 성 안에 있는 시녀들 중 범위가 상당히 좁혀졌을 것이다. 후작은 내 말을 듣자마자 근처에 있던 기사에게 입을 열었다. "당장 성으로 돌아가서 이 아이의 말에 적합한 아이들은 모조리 끌고 오게. 우리 성의 시녀가 아니라, 임시로 마을에서 데려온 애들도 모조리!" "알겠습니다." 그 기사가 병사 몇명과 함께 부리나케 성으로 뛰어가버리자, 시녀들이 올 때까지 나에 대한 심문은 잠시 미뤄졌는지 후작의 시선이 시신을 살펴보던 이들에게로 옮겨졌다. 그러자 후작의 시선을 느낀 듯 시신을 살펴보던 기사들 중 한명이 일어나며 궁금해할 점을 알려줬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 기습을 한 듯 싶습니다. 꽤 정확하게 심장을 찔린 것으로 보아 이런 일에 익숙한 이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그것 외에 다른 외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심장을 찌른 단검은 무기상에 돈만 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용병들이나 도둑이 자주 사용한다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 그럼... 범인은 용병이나 도둑이라는 것인가?" 후작이 혼자 중얼거리는 말을 옆에 있던 그의 장남 볼레어가 받았다. "어쩌면 암살자일 수도 있습니다. 남작 영애를 노리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런데... 왜 영애가 여기 혼자 있는 거지? 시녀도 없이 혼자 으슥한 곳에 말이야..."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이 내뱉는 스테판의 말에 후작의 고개가 근처에 있던 기사에게로 돌아갔다. "너는 지금 당장 가서 영애의 시녀를 데리고 와라. 어서!" "예!" 제 10화 도망 (12) "너는 지금 당장 가서 영애의 시녀를 데리고 와라. 어서!" "예!" 후작의 명을 받고 다다다 달려가는 기사의 뒤를 보면서 나는 긴장감이 점점 내 마음을 옥죄어 오는 걸 느꼈다. '후우....' 조엘과 데니는 걱정과 불안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을 뿐 감히 다가오지는 못하고 좀 떨어진 곳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에구... 영감님이라도 부를까? 아냐, 그랬다간 그냥 다 뒤엎을 거야. 그냥 나이트급 정령들이나...' 조엘, 데니와는 단지 몇 발자국 떨어진 거 뿐인데도 지금 심정으로는 그들과 천리 만리 떨어진거 같고, 사이에는 넓은 강이라도 떡 하니 존재하는 거 같았다. 지금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건 그들 뿐인데, 그들 조차 어찌할바를 모르자 왠지 기대고 있던 기둥이 갑자기 치워진 듯한 기분으로 마치 허허 벌판헤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 불안한 기분을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순간 존재도 잊고 있었던 엘라스트라가 쓰윽 나에게 다가오더니 마치 날 위로 하려는 것 처럼 그 길다란 몸으로 부드럽게 나를 감더니 자신의 커다란 머리를 슬쩍 내 어깨에 올려 놓았다. [훗.... 뭐야, 위로 하는 거야?] 내 웃음기 어린 말에 엘라스트라는 단지 씨익 웃어보이기만 했다. 잠시 후 날 이 곳으로 데리고 온 시녀를 찾기 위해 갔던 기사가 여러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후작님!" "그래, 수고했다. 거기 너, 이들 중에 네가 말한 시녀가 있느냐?" 병사들이 내 앞에 그들이 데리고 온 시녀들을 주르르 세워 놓았다. 그녀들은 다짜고짜로 끌려나와서 그런지 두려움에 떤채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어 나는 그녀들 가까이에 가서 얼굴을 봐야 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보면 움츠러드는 - 내가 괴물로 보이는지... - 그녀들을 살펴본 나는 유난히 날 피하려고 애를 쓰며 움츠리고 있는 시녀를 발견했다. "이... 아가씨입니다." 그러자 그 순간 그녀가 화들짝 놀라 도리질 치며 외쳤다. "아닙니다. 아니예요. 전 저 분을 모릅니다. 지금 처음 뵈었습니다." 그녀의 발악에 가까운, 두려움에 떨며 외치는 소리에 내가 더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이 애가 확실한가?" "아.. 예..." 그러자 그 시녀가 더욱 더 자지러지며 소리쳤다.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전 저분을 모릅니다. 믿어주세요. 정말입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왔다면 두려움에 떠는 건 당연할테지만, 저 시녀의 반응은 좀 지나치다 싶다고 여기는데 그때 남작 영애의 시녀를 데리러 갔던 기사가 돌아왔다. "후작님, 데리고 왔습니다." 병사 두명에게 둘러쌓여 거의 연행되다 시피 온 그 남작 영애의 시녀는 두려움에 떠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래도 남작 영애를 가까이서 모시는 시녀라 그런지 바들 바들 떨기는 해도 침착하게 다가와 후작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네가 남작 영애의 시녀라고?" "예... 그렇습니다." 떨리는 목소리지만 뚜렿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역시 성격 더려운 남작 영애를 모시는 시녀답다는, 이 상황과 전혀 안 어울리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후작의 질문이 다시 들려왔다. "네가 모시는 남작 영애가 어디 계시는 지 아느냐? 너는 왜 남작 영애 곁에 있지 않았지?" 아무래도 후작은 다른 사람들에게 남작 영애가 죽었다는 걸 알리지 않은 모양이다. 게다가 지금 남작 영애의 시신은 고이 천으로 덮여져 성 안으로 운반되고 있을 터였다. 이 시녀가 그걸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후작의 질문을 들은 시녀는 무지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다가 조엘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숙였다. "그, 그게... 그러니까..." 그녀가 대답을 못하고 어물거리자 후작의 목소리에 냉기가 깔렸다. "왜 대답을 못하지? 빨리 대답하지 못할까?" "저... 아가씨 께서는 그러니까... 잠시 바람을 쐬신다고..." "혼자 갔단 말이냐? 너는 왜 안 따라갔지?" "그게... 혼자 있고 싶으시다고 하셔서... 그래서..." 그녀의 대답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기에 후작은 그녀의 말에 꼬투리를 잡아 따져 물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잠시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후작의 입이 다시 열렸다. "너는... 네가 모시던 남작 영애가 죽었다는 걸 아느냐?" 그의 말에 남작 영애의 시녀가 경악을 하며 고개를 들어 후작을 쳐다보았다. "허억~!! 그, 그게... 그게 사실입니까? 아가씨께서... 아가씨께서?" "그래,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지." 귀족들은 프라이드라는게 무지 무지 높아서 평민들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면 엄청나게 불쾌감을 느낀다. 그래서 시종들은 항상 귀족 앞에 서면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 깔도록 교육을 받는다. 그런데 이 시녀는 너무 놀라서 그런지 그걸 잊고 그런 무례한 짓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뭐,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지 후작은 그냥 나두고 있었지만, 그 다음에 그 시녀는 서 있을 힘도 사라졌는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 그럴 수가..." 그녀의 얼굴은 핏기가 싸그리 사라져 유령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기야,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모시던 영애가 죽었으니 그녀 또한 영애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로 돌아가면 죽은 목숨이었던 것이다. 뭐, 그 남작이란 사람이 너그러우면 목.숨.만은 안 뺐을지 모르지만... 이로써 그녀의 인생은 끝장났다는 선고를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녀가 저러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망연자실하게 자리에 주저앉아 '아가씨가... 아가씨가...'라고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무한한 동정심을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그 시녀가 고개를 들어 사방을 살펴 날 발견하더니 곧바로 나를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저 자예요. 저자가 바로 아가씨를 죽였을 겁니다. 틀림 없어요!!" "에엑?" 이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싶어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보다도 먼저 그 시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아가씨는 저 자를 만난다고 하셨어요. 그러니 분명히 저자가 죽인 거예요. 아까의 앙갚음으로 그랬을 거예요!!"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경악으로 물들어 있는 나에게 모든 이들의 차가운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그리고 곧바로 후작의 질문이 날아왔다. "넌 아까 맥알파인 경을 만나러 왔다고 하지 않았느냐?" 나는 날 모른다고 극구 부인하는 시녀를 가르키며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저 시녀가 이곳에서 조엘님이 절 기다리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온 거구요." 그러자 후작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렇다면... 이 곳에 남작 영애와 너 단 둘이 있었다는 건 사실이군." "제가 남작 영애를 발견했을때는 이미 숨을 거두신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기사에게 달려가 알린 것이 것입니다. 만약 제가 범인이라면 도망가지 왜 기사에게 알렸겠습니까?" 거의 외치다시피 두다다다 나온 내 말에 사람들이 납득한 표정을 지었는데, 단 한사람만이 납득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뛰쳐나와 날 윽박질렀다. "닥쳐라. 네가 일을 저질러 놓고 아닌 척 알렸을 수도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그 자국은 뭐냐?" 그는 이번에 성인식을 치룬다는 후작의 차남이었는데, 그는 정확히 내 다리쪽을 가르키고 이었다. 그 곳에는 아까 남작 영애때문에 이리저리 도망가다 접시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음식물을 쏟아 자국이 생겼는데 시간이 흘러서 바짝 말라있었는데 하필 검붉은 색으로 말라 붙어 어두운 곳에서 잘못 봤다가는 핏자국으로 오해 받을 수도... "그건 남작 영애의 피가 튄 것이 아니더냐? 이 곳은 등불도 켜 놓지 않은 어두운 곳. 넌 남작 영애를 뒤에서 찌른 뒤 어두워서 자신의 몸에 피가 튄 것도 모른 채 기사에게 달려가 알린 것이겠지. 내 말이 틀렸느냐?" '젠장할...' "아닙니다. 이건 음식물이 튄 것으로 냄새를 맡아 보시면..." 그러나 내 다급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후작의 차남이 검을 뽑아 들고 나에게 덤벼 들었다. "닥쳐라. 네놈이 감히 제네브라를.... 용서 못해!!" 검을 뽑자마자 횡으로 크게 베어들어오는, 달빛에 시퍼렇게 반짝이는 검날에 나는 황급히 몸을 숙였다. 그 동안 데니에게 받은 교육 덕을 확실히 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후작 차남 또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검술 수업을 받은 사람 - 아마 나보다 훨씬 훠어얼~씬 오래 받았을 거다. - 내가 밑으로 숙여 앉는 걸 보자마자 한 걸음 나에게 더 다가와 숙이고 있는 내 얼굴을 그대로 올려 차버렸다. "꾸엑~!!" 그걸 피하지 못하고 턱에 그대로 맞은 나는 뒤로 나가떨어졌는데, 다행이 내 곁에 있던 엘라스트라가 땅에 쳐박히기 전에 슬쩍 받쳐줘 큰 충격은 받지 않았다. 하지만, 턱은 깨진 것 처럼 무자게 아팠다. '우욱.. 아파라... 하마터면 혀 깨물 뻔 했잖아?' 턱만 아픈 것에 안도하며 얼른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 보다도 먼저 내 가슴에 그 후작 차남의 발이 올라와 나는 다시 뒤로 넘어갔다. "그만 둬!!" "무슨 짓이야!!" "다니엘!!" "해인아~!!" 뒤에서 급하게 그를 부르며 - 차남 이름이 다니엘이었던 듯... - 달려오는 소리와 함께 날 부르는 소리도 들렸지만, 나는 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후작가의 차남, 그러니까 다니엘의 얼굴이 내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는... 놀랍게도 울고 있었다. 검을 매섭게 치켜들며 나에게 엄청난 살기어린 시선을 쏘아보내고 있었는데, 그 눈에 눈물이 맺혀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자식.. 혹시...' 그러고보니 제네브라라는 남작 영애가 밤 늦게 도착했을 때, 후작이나 그의 장남은 마중하지 않았는데 이 자식은 나와서 영애와 투닥댔었다. 그 모습에 나는 잠시 내가 어떤 입장에 있는지도 까먹고 멍하니 있다가 엘라스트라가 날 확 밀쳐버리는 바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밀어도 내 명이 아니면 큰 힘을 쓸 수가 없었던 엘라스트라는 내 상체를 옆으로 조금 밀어놓는 것이 다였지만, 그 덕에 나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멍 하니 있던 덕에 큰 고통을 격어야 했지만... 푸욱~!! "으악~!!" 엘라스트라가 날 밀어버린 덕에 내 목줄기를 노렸던 다니엘의 검이 내 오른쪽 어깨를 꿰뚫었던 것이다. 혹시, 칼에 크게 베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정말 안 좋은 경험이다. 평소에는 둔하디 둔한 신경도 이때만큼은 몇배로 민감해져서 검이 내 몸에 뚫고 들어오는 그 감각을 너무나 생생하게 내 뇌에 전달하는 것이다. 찔리는 순간에는 통증도 없다. 그저 차가운 금속이 내 어깨를 뚫고 들어오는 그 느낌만이 생생하게 느껴질 뿐... 그건 엄청 소름돋는 느낌이라 차라리 아픈게 훨씬 훠얼씬 났다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놈의 고통이란 놈은 엉덩이가 얼마나 무거운지 내가 그 느낌을 생생하게 느낀 뒤에 찾아온다. "끄윽~!!" 그 뒤에 찾아온, 통증에 내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녀석을 노려보자 이 놈은 나와 같이 매서운 눈으로 날 노려보며 검을 옆으로 비틀었다. "아윽~!!" 검이 신체에 파고 들면, 이 얄미운 녀석을 피부가 꽈악 붙들고 안 놓아주려고 하기 때문에 검을 다시 빼려면 달라 붙은 피부를 떼어야 하는데 그 방법 중 하나가 검을 툭 차서 떨구고 빼는 거고, 다른 하나가 바로 검을 옆으로 틀어서 안을 휘저어 놓고 빼는 거다. 그리고 잘 빼지는 건 당연히 후자다. "다니엘~!!" 그 놈이 검을 옆으로 한번 비틀고 난뒤 다시 내 어깨에서 검을 뽑아 다시 날 겨누는 순간 뒤따라 달려왔던 인간들이 녀석을 잡아서 나에게서 떨궈놨다. '빨리 좀 올 것이지...' 그리고 그 뒤에 도착한 데니가 바닥에 엎어져 바둥거리는 나를 부축해 겨우 앉히는 순간 나는 다시 한번 경악에 찬 얼굴로 앞을 바라봐야 했다. 그 앞에서는.... 갑자기 사방에서 몰려오는 물방울들이 하나 둘 뭉쳐져 커다란 물방울을 형성하더니 어느 순간 그 물방울이 터지며 수십배 수백배로 불어나 사방을 덮쳐 버렸던 것이다. 갑자기 공중에서 커지는 물방울의 모습에 사람들이 놀라 어리둥절해 피할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자신을 덥치는 커다란 물결에 그대로 휩쓸려 그대로 뒤로 날려가 버렸다. "크윽~!!" "커억~!!"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 물방울이 터진 그 곳에 엘라임이 떡 하니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도 엄청 분노한 얼굴로... 내가 이 곳으로 처음 왔을 때 멋도 모르고 엘라임 성질을 건드려 그의 분노를 샀을때보다 훨씬 훠얼씬 무서운 기운을 내뿜고 있는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갑자기 생겨난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뒤로 날려가버린 다니엘을 물줄기를 이용해 자신의 앞으로 끌고 오더니 한마디 했다. "죽고 싶지?" 그런데 이 다니엘이란 놈은 아까의 그 펄펄 날리던 살벌한 기운은 엘라임의 무서운 기세에 눌려 대답도 못하고 꺽꺽 거리고 있는 거였다. 하기야, 엘라임의 물줄기가 그의 목을 꽉 움켜쥐고 있었으니 말도 못하는게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엘라임도 그의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닌지 계속 자기 할 말만 했다. "감히... 내 아들에게 손을 대다니. 네놈들은 다 죽었어." 그런데, 무서운 말을 무표정으로 하면 그 무서운 기운이 훨씬 증폭되는 거 같았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처지였던 나 조차도 - 엘라임의 물결은 나에게는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아마 날 보호하고 있던 엘라스트라 덕인 것 같지만... 엘라임에게 기운을 받았나? - 오싹해질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니, 그걸 정면으로 받은 다니엘은... 아마 반은 넋이 나갔을 것 같았다. "죽어라!!" 그가 어쨌든, 엘라임은 자신의 할 말을 다 한 뒤에 손을 치켜 들었는데, 그의 손을 따라 밑에 있던 물에서 한 개의 물줄기가 솟아 오르더니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다니엘에게 떨어지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어떻게 해서든 엘라임을 멈추기 위해 외쳤다. "아, 아버지!!" 솔직히.. 나도 그때 내가 왜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는지 모르겠다. 뭐, 엘라임을 부르려고 했는데 얼결에 그렇게 나왔으니... 평소 내가 엘라임을 아버지라 여기고 있긴 여기고 있었나보다. 그렇게 내 아빠는 한국에 계신 그 분 뿐이라고 스스로 곱씹었건만 말이다. 그래도... 아빠라고는 안 했으니 조금 차이는 둔 건가? 그렇게 다급하게 부른 효과가 있었는지 엘라임은 그 즉시 행동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에 무척이나 놀랐다는 감정이 생생히 떠올라 있었지만, 나는 그걸 감상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나 죽어요~!! 이거 왜 피가 안 멈추지? 나 이러다가 출혈 쇼크로 죽는 거 아니예요?" 이 곳에 온 뒤로 내 머리와 눈이 물빛으로 변하자 나는 혹시나 내 피도 파란 색으로 변한 건 아닌지 걱정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걱정한 것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내 피는 붉었고, 그게 지금 철철 넘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엘라임을 부를때 머리가 띵하고 어질어질 한것이 정말 출혈 쇼크가 생길까봐 스스로 겁이 더럭 날 정도였다. 그러나, 내 말을 들은 엘라임의 행동은 신속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나에게 날아(?)와 나를 붙잡더니 어느새 크게 변화여 형상화 된 엘라스트라 - 그러니까 용 -을 냉큼 타고 하늘로 올라갔던 것이다. "어? 어디 가요?" "집으로." "상처는..." "집에 가서 해." "자, 잠깐만요.. 가는 건 좋은데... 이대로 가면 난 도망치는 꼴이잖아요오오오~~" 내가 처절하게 외쳤지만, 엘라임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나의 처절한 외침만 밤 하늘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제 11화 새로운 만남 (1) 욱신거리는 어깨의 통증을 느꼈을때 나는 내 자신이 어느샌가 정신을 잃었다가 이제 서서히 깨어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라라... 내가 언제 정신을 잃었더라? 아... 그러고보니...' 그렇게 충격적인 일은 아니었던지 금방 기억해낼 수 있었다. 웨스트모어랜드 후작성에서 엘라임이 다짜고짜로 날 끌고 날아 올랐을 때 이렇게 갈 수는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다가 열받은 엘라임에게 뒤통수를 한대 얻어 맞고 기절했었다. 그 생각까지 떠오르자 뒤통수까지 욱신 욱신 거리는 것 같았다. '젠장... 난 환자라고. 환자한테 그럴 수가 있는거야?'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부스스 눈을 뜨니 낯익은 통나무 천장이 들어왔다. '음? 여기가 어디더라?' 어딘가 많이 본 곳이기는 한데,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처음 들어보는 부드럽고 따스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 일어났군.] '에?' 낯익은 공간에 낯선 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려 그 낯선 목소리를 가진 이가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확인도 하기 전에 나는 어께에서 느껴지는 심한 고통 때문에 몸을 다시 바로 해야 했다. "아윽..." 그러자 곧바로 그 부드럽고 따뜻한 음성이 날아왔다. [갑자기 움직이니까 그렇잖니. 조심해야지.] '도대체 누구야?' 처음 들어보는 음성이 분명한데 되게 친한 척(?)하니까 부담스러웠다. 상대방은 나를 잘 아는 것 같은데 나는 모르면 미안하고, 내 기억을 의심하게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니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목소리의 말대로 조심스럽게 고개만 돌리는데도 어깨에서 아프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덜 했기에 나는 무시하고 목소리 주인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의아함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어?" 낯선 목소리 때문에 그 목소리의 주인공 또한 낯선 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의외로 내 침대 옆에 있던 이는 나에게 익숙한 자였다. "셀레아나?" 불꽃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새의 모습을 하고 있는 불의 나이트급 정령의 모습에 나는 어리둥절 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엘라임의 자식이란 소리를 들은 후 나에게 존대를 하던 녀석이었는데 갑자기 낯선 목소리에 말도 반말이라니...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셀레아네는 따뜻해보이는 붉은색의 눈을 부드럽게 휘며 웃어보이더니 내 말에 대한 답이 아닌 엉뚱한 말을 꺼냈다. [깨어 났는데, 안 볼 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뜬금 없는 셀레아나의 말에 멀뚱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놀랍게도 셀레아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허공에 커다란 물방울이 생겨나 길쭉해지더니 엘라임의 모습으로 변했다. [흥...] 갑자기 나타난 엘라임의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져 휙~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덕분에 어깨에서 다시 통증을 호소했지만, 차마 엘라임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내 행동이 엘라임의 성질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뭐냐, 너 왜 나 보더니 고개를 돌리는 거야?] "에? 아니... 그게...." 나는 더 더욱 엘라임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어물어물 거리는데 뭔가 차가운 것이 내 귀를 꽈악 잡더니 세게 잡아당기는 거였다. "아야야야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 짓이라는 건 뻔했다. 내가 자기 물음에 대답 안하고 어물거리며 더욱 피하자 화가 난 모양이었다. [너 지금 날 무시하는 거냐?] 얼마나 귀를 세게 잡아당기는지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우갸갸~~!! 아파요. 이것 좀 놔요오오~!!] 잡아당겨지는 귀를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하기 위하여 잡아당기는 쪽으로 딸려가다보니 나는 어느새 상체가 일으켜지고 엘라임쪽으로 얼굴이 돌려지고 말았다. 그러자 옆에 이던 셀레아나가 보다 못했는지 나서서 그 커다란 날개를 들어 엘라임의 팔을 뚝 끊어 놨다. 끄, 끊어? 그런 엽기적인 모습에 잠시 어깨와 귀의 통증도 입고 입을 쩍 벌리는데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라임의 치켜 올라간 눈길이 셀레아나쪽으로 향했다. [무슨 짓이야?] 셀레아나가 비록 불의 나이트급 정령이라고 하지만, 엘라임은 정령왕. 성질 더러운 엘라임에게 그런 짓을 했으니 크게 된통 당할 것 같아 나는 조마조마 하며 바라보는데 의외로 엘라임은 치켜든 눈으로 쏘아볼 뿐 아무런 짓도 안한 채 셀레아나의 날개에 의해 끊어진 팔을 다시 자신의 팔에다 붙였다. 그러니까, 내 귀를 잡고 있던 손이 잘려지자마자 물로 변해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그게 스르르 움직에 엘라임에게 스며들었고, 엘라임의 잘려진 팔에서는 피 대신 다시 새로운 손이 솟아났던 것이다. 신기하기는 하지만, 다시는 보고싶지 않은 경악스러운 장면이었다. 엘라임이나 셀레아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지 내가 경악하던말던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야말로 무슨 짓이냐고 묻고 싶군. 저 아이는 환자라는 걸 잊은 거야?] 셀레아나의 말에 나는 경악으로 벌어졌던 입을 더 벌렸다. 아무래도 셀레아나가 뭔 충격을 받아 뵈는게 없어진 모양이었다. 저 성격 드러운 엘라임에게 저리 대들다니 말이다. 나 같으면 목숨을 잠당 못하는 터였기에 나는 잠시 셀레아나를 향해 묵념을 보냈다. '부디 살아남길...' 하지만, 놀랍게도 엘라임은 셀레아나를 향해 공격하는 대신 시선을 돌리며 낮게 투덜투덜 거리는 거였다. [흥, 저 정도로 안 죽어.] [훗, 아까와는 말하는 것이 영 딴판이잖아? 아까는...] [시끄러. 아까는 아까야.] [훗훗... 그런가?] 그 모습에 나는 머리까지 어질어질 해 지는 기분이었다. '여기... 혹시 또 다른 차원 아냐? 세상에... 그 성깔 드러운 엘라임이... 엘라임이... 셀레아나에게 꼼짝을 못하지? 오늘 해가 어느 쪽에서 떴지?' 새삼 셀레아나가 너무나, 너무나 위대해 보였다. 생글 생글 - 새가 웃어봤자지만, 어쨌든... - 웃는 셀레아나의 표정을 마주 볼 수가 없었는지 엘라임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고개를 팩 돌려 버렸다. '세상에... 셀레아나가 엘라임을 이겼어...' 내가 보고도 믿지 못하는 상황에 경악을 한 나는 너무나 경의로운 눈으로 셀레아나를 보며 그를 불렀다. "저기... 셀레아나..." 내 부름에 셀레아나가 나를 돌아보았는데 대답은 엉뚱하게도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예?] "엥?" 내 침대 옆에서 엘라임과 당당히 맞서 이겼던(?) 셀레아나 말고 내가 앉아 있는 침대 위에 셀레나가 한명 다시 스르르 나타난 거였다. "어라? 어라라?" 침대 위의 셀레아네와 침대 옆의 셀레아네를 번갈아 바라보며 내가 어벙벙해 하자 침대 옆에 있던 셀레아네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 순간 침대 위에 새로이 나타났던 셀레아네가 내 침대 옆에 있던 셀레아네를 보자마자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거였다. [불을 다스리는 모든 자들의 왕을 뵙습니다.] "엥?" 셀레아네가 셀레아네보고 인사하는 모습에 내가 더더욱 놀라고 있는데 침대 옆에 있던 셀레아나가 이런 날 보고 다시 한번 빙그레 웃으며 설명해줬다. [후후, 날 셀레아나로 오해한 모양이구나?] "에에... 그게..." '그럼 아닌가?' 라고 묻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완벽하게 내 침대 옆에 있던 셀레아나는 셀레아나가 아니라고 하고 있었기에 나는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그 동안 천장 구석을 노려보며 무늬를 감상하고 있던 엘라임이 끼어들었다. [멍청하긴... 기운이 다르잖아, 기운이. 못 느끼겠어?] "기운?" 그제야 내 침대 위의 셀레아나와 내 침대 옆의, 자신이 셀레아나가 아니라고 말하려는 셀레아나(?)를 번갈아가며 살펴봤지만, 내 침대 옆의 셀레아나(?)의 기운이 침대 위의 셀레아나보다 더 강하다는 것 외에는 별로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없었다. "으음... 이쪽이 더 강해보이기는 한데..." [그건 당연한거지. 그런거 말고.] "으음...." 엘라임의 말 때문인지 쓴 웃음을 지며 내가 빤히 바라보는 걸 묵인해주는 침대 옆의 셀레아나에서 뭔가 다른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으음.... 글쎄요.... 음... 다른 나이트급 정령들을 불러냈을때는 함부로 맞먹어도 될 것 처럼 만만했는데... 이 셀... 아, 아니... 어쨌든 이쪽에 계신 분은... 만만해 보이지 않는달까....?" 그래도 딱 부러지게 말 못하고 고개를 갸웃 갸웃 거리며 더듬더듬 입을 열자 엘라임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쯧쯧... 멍청한데다 이제는 둔하기까지...] 엘라임의 말에 충격을 받은 내가 의기소침해 풀이 팍 죽어있는 걸 달래려 함인지 침대 옆의 셀레아나(?)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순수한 정령이 아니니 당연할테지. 어쨌든, 내 소개가 늦었구나, 아이야. 나는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라고 한단다.] "아아... 그러시군요." 뭐, 사실 내가 불러낸 셀레아나가 정중히 인사를 하기에 대충 짐작은 했었다. 단지, 이프리트가 셀레아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있었기에 어리둥절 했을 뿐이지.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라고 하면 예전에 엘라임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네 정령왕들 중 가장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정령왕이라고 했는데, 정말 실제로 만나보니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았다. 엘라임도 꼼짝 못할 정도로 대단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 불의 정령왕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아, 그러고보니... 여기는 바다 속 울 집이잖아?' 이런 내 생각이 표정에 나타났는지 이프리드는 내 얼굴을 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한 모양이구나?] 그러면서 슬쩍 엘라임을 바라보는 폼이 뭔가를 무지 재미이어 하는 것 같았다. 이프리트의 시선을 받은 엘라임은 움찔 놀라더니 그 특유의 틱틱대는 띠꺼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야? 쓸데 없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이제 됐으니까 그만 가보지 그래?] 하지만 이프리드는 그런 엘라임에게 전혀 꿀리지 않았다. 아니, 나 같으면 찔끔 할 엘라임의 모습에 눈썹 하나 까딱 하지도 않았다. [호오, 도와준 이를 매정하게 그냥 쫓아낸다 이거지?] [시끄러워!] 오히려 당황하고 허둥대는 건 엘라임이었기에, 나는 이프리트가 너무나 너무나 존경스럽고 대단하다는 감정이 무럭 무럭 솟아나고 있었다. 이프리트는 그런 엘라임을 생글 생글 웃으며 바라본뒤 날 바라보며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아이야, 네 아버지가 말이다...] [이프리트, 그만 두지 못햇!!] 엘라임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이프리트는 그에 굴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정령계에 있던 날 다짜고짜로 여길 끌고 왔지.] "예? 왜요?" [훗훗훗, 글쎄... 날 네 앞으로 데려오더니 다짜고짜로 널좀 살려 달라고 하더구나.] [이.프.리.트!!] 엘라임이 이제는 살기까지 뿜어내며 소리쳤지만, 이프리트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와 애꿎게 불려온 셀레아나만 두려워서 움츠러들 뿐이었다. 엘라임의 살기를 정면으로 맞서고도 태연하다니, 역시 이프리트도 정령왕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살기를 풀풀 풍겨내고 있는 엘라임을 바라보자 나는 나도 모르게 쑥스러운 웃음이 새어나와 헤벌쭉 웃어보였다. 엘라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보기 싫은 듯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그와 함께 엘라임의 몸에서 풍겨 나오던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훗, 쑥스럽냐?] [시끄럿!!]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내 오른쪽 귀 바로 옆에서 아주 조심스런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어... 피가 다시 나오는데요?] "....."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너무나 황당스러운 모습에 할 말을 잊어버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물의 하급 정령인 운디네였는데, 그녀는 - 여자 모습이니까... - 자신의 몸으로 상처가 난 내 어깨를 칭칭 감고 있었다. "허...." 그리고 그런 운디네의 투명한 몸 사이로 내 몸에서 흘러나온 듯한 피가 조금씩 새어 나와 퍼지고 있었다. "운디네... 붕대?" 상처를 붕대, 혹은 하다못해 천이 아닌 운디네로 감싼다는 것은... 아마 엘라임이 아닌 어느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할 방법이었을 거다. 내가 붕대가 되어버린 운디네를 보고 벙 쪄 있을때 다가온 이프리트가 내 상처를 보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이야, 내가 도와주겠다고 오긴 왔지만, 사실 해줄 수 있는 건 없구나. 이 세계의 존재를 치료해본 적은 한번도 없거든. 하기야... 정령들에게 치료란 개념 자체가 없으니... 그래도 본 적은 있어서 상처를 닦아내고 지혈 하고 체온이 떨어지지 않게 하기는 했다만... 아무래도 그 정도로는 부족하겠지?] "예? 아... 그렇죠. 의사에게 한번 보여야겠네요. 게다가... 계속 운디네를 감고 있을 수도 없고..." 그러면서 나는 내 어깨를 감싼 채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는 운디네를 향해 멎적게 웃어 보였다. "좀만 참아. 곧 해방시켜 줄게." 이프리트와 엘라임은 나름대로 치료를 하느라고 했지만, 어깨를 다쳤는데도 팔을 고정시켜 놓지도 않았고, 상처를 꿰매거나 약을 바르는 것도 하지 않았다. 하기야, 운디네를 붕대 대용으로 사용한걸 보면 그나마 이정도도 대단한 거라고 여겨지긴 하지만... '우선 팔 부터 고정시켜야 하나? 으음... 그러다가 잘못 움직여서 상처가 벌어지지 않으려나 몰라...' 생각해보니 나도 이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사실 한국에 있었다면 이런 거 고민하지도 않고 구급차를 부르던지, 아니면 병원에 달려가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혼자 고민하고 있는데, 나는 문득 이프리드가 계속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 저기...?" 그래서 의아하게 쳐다보니 이프리트가 부드럽게 웃으며 내 시선을 받아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멎적었을텐데, 그걸 그대로 받아내며 아무렇지도 않아 하다니.. 역시 괜히 엘라임이 꼼짝 못하는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 불쾌했다면 미안하구나, 아이야. 하지만, 아무리 봐도 신기해서 말이다.] 뭐가 신기한지는 뻔했기에 나는 피식 웃으며 응답했다. "아아, 제가 정령왕의 자식이라는 거요?" [그래. 네 아버지에게 들을 때는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했었지. 뭐, 지금도 사실 믿겨지지는 않는구나. 엘라임의 기운을 풍기지만, 엘라임이 아닌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이 말이야.] "하하, 뭐...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존재라잖아요." [맞는 말이다.] "아아, 그런데요, 제가 얼마나 자고 있었지요?" [으음? 아, 이쪽 시간에 의하면 하루 하고도 반나절 정도?]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구요." 나는 이프리트에게 어색하게 웃어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약간 어질어질하고 움직일때마다 어깨에 콕콕 쑤시는 통증이 생겼지만, 그렇다고 마냥 이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집안은... 거의 반년 정도나 비워 놨는데도 여전히 깨끗했다. 오래 비워놔서 썰렁하기는 했지만, 다시 보니 왠지 반가운 기분까지 들었다. 팔을 고정시킬 마땅한 것을 찾을 수가 없어서, 미안하지만 운디네를 한명 더 불러내서 팔을 고정시킨 뒤 어떻게 배를 채울지 고민하고 있는데 흥미 있게 나를 보고 있던 이프리트가 물어왔다. [배가 고프냐?] "예? 아, 예. 안 먹으면 배가 고파요. 음... 예전에 다른 세계에 있을 때는 화장실도 다녔었는 걸요. 이 곳에 와서 그런 건 없어졌지만..." [호오, 그래? 신기하구나...] 그러자 그 동안 존재감 없이 - 놀라운 일이었지만...- 가만히 있던 엘라임이 끼어들었다. [뭐야, 내 아들을 신기한 동물 보듯 하지 말라고.] [쿡쿡쿡, 그래, 그래, 미안하군.] 침실 바닥에는 피에 젖은, 조엘에게서 받았던 옷이 아무렇게나 내팽겨쳐져 있었다. 아무래도 피를 흘려서 옷을 갈아입힌 모양인데, 벗긴 옷을 어찌 처리하지 못해 그냥 바닥에 버려둔 채 방치한 모양이었다. 어깨에 구멍이 뚤린 데다가 피가 흥거니 묻어 있는 옷을 보자니 기분이 안 좋아져서 나는 옷에 달려 있는 금단추와 혁대를 풀러낸 뒤 옷장에 쳐박아 넣었다. 그러자 그걸 보고 있던 엘라임이 의아하다는 듯 물어왔다. [아니, 그건 왜 뜯어 내는데?] "아아, 이거요? 돈이 되는 거잖아요. 지금부터 치료 받으러 가야 하는데, 돈이 될만한 것이 없어서리... 이거 팔면 꽤 돈이 될테니까 이거라도 가져 가려구요. 음... 이 세계에도 병원 같은게 있으면 어깨 다 나을 때까지 거기 머물다 올테니 안 오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 11화 새로운 만남 (2) "아아, 이거요? 돈이 되는 거잖아요. 지금부터 치료 받으러 가야 하는데, 돈이 될만한 것이 없어서리... 이거 팔면 꽤 돈이 될테니까 이거라도 가져 가려구요. 음... 이 세계에도 병원 같은게 있으면 어깨 다 나을 때까지 거기 머물다 올테니 안 오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엘라임에게 그렇게 말한 나는 곧장 밖으로 나가서 엘라스트라를 불러낸 뒤 그의 등에 올라탔다. 처음에 엘라스트라를 불러냈을 때는 이런 거 생각도 못했는데, 후작의 성에서 엘라임이 한 걸 보고 되게 멋있게 보여서 가끔 필요할 때 애용할 생각이었다. 졸지에 말 대용이 되어버린 엘라스트라에게는 미안하지만, 엘라스트라는 하늘을 마음대로 날 수 있었기에 말 보다 빠르고 탑승(?)감 좋고, 길에 구애받지 않아서 좋았다. 아직 이 곳 지리를 모르는 나였기에 바다를 관장하는 엔다이론을 부탁해 가장 가까운 도시로의 길 안내를 부탁했다. 물론, 오랜만에 만나는 엔다이론과 감격적인 재회를 나눈 다음에 말이다. 엔다이론이 안내해 준 곳은 항구 도시였다. 하기야, 바다에서 가까이 있는 인간들이 사는 곳 중 큰 곳이라고 주문을 했으니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사람들의 눈에 안 뜨이는 곳에서 살짝 지상으로 착지한 나는 대로로 나와 지나가던 인상 좋은 중년 아저씨를 붙잡고 다친 곳을 치료해주는 곳이 어디인지 물었다. 병원이라고 묻고 싶었지만, 이 세상은 내가 잘 알던 한국이 아니었기에 '병원'이라는 말이 있는지 몰랐기에 그렇게 풀어서 물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 중년 남자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하게 히죽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실력은 좋지만 성격 드러운 의원이 있고, 실력은 좀 떨어지지만 친절한 의원이 있는데 어느쪽을 알려줄까?" 이 곳은 병원 역활을 하는 곳을 '의원'이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내 상처가 꽤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실력이 뛰어나도 성격 드러운 의원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 중년 남자는 내 선택에 난처하게 웃으며 길을 알려주더니 마지막으로 이 말을 덧붙이며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네가 선택한 거니 나중에 날 원망하지 말거라. 어쨌든, 행운을 빈다." 그의 말을 듣자니 왠지 엄청 불안했지만 성격이 드러워봤자 손님한테 얼마나 드러울까.. 하는 생각에 그 중년 남자가 가르쳐준 곳으로 향했다. 그 의원은 실력이 있다고 소문이 났으면서도 대로에 있지 않고 뒷골목 쪽에 있었다. 뭐, 그렇다고 음침하고 지저분한 거리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잘 찾는 곳 또한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 거리다가 환자가 있는 곳인데 조용한 곳을 찾는 건 당연한 거라고 혼자 납득했다. 의원이라는 건물은 회색 돌을 마치 벽돌 처럼 차곡 차곡 쌓아서 지은 2층 건물이었는데 현관문 위에 떡 하니 걸린 간판 중앙 윗쪽에 약병 - 으로 보이는 - 과 붕대가 그려져 있었고 그 밑에 그린모어 의원 이라고 써 있었다. 현관 문 옆에 매달려 있는 작은 종이 아무래도 방문하고 싶으면 울리라는 것 같아서 나는 조심스레 종에 연결되어 있는 줄을 흔들었다. 땡, 땡, 땡... 맑은 금속 소리가 울려 퍼지자 안쪽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며 곧이어 문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찰칵~ "어떻게 오셨어요?" 성격 더럽다고 들었던 터라 긴장하고 있었는데,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의외로 20대 초반의, 밝은 금발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고 새하얀 앞치마를 하고 있는 여성이었다. "아... 저기, 치료를 받으려고 왔는데요?" 이 여자가 혹시 그 의원은 아닌지 걱정되서 조심스레 말하자 그녀가 활짝 웃으며 현관문을 완전히 다 열어 나를 맞았다. "아, 그러세요. 어서 들어 오세요." "예에..." 안은 환자를 치유하는 곳 답게 깔끔했고, 나를 안내하는 여자 또한 친절했기에 나는 긴장을 풀면서 그녀의 뒤를 따라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그 곳이 진찰실이었던 듯 의자 두개와 간의침대, 그리고 몇개의 약병이 올려져 있는 탁자가 방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고, 수많은 약병이 놓여 있는 진열대가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의원님을 모셔 올게요." "그럴 필요 없어. 벌써 왔으니까." 내가 대답 하기도 전에 방문쪽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한 인물이 쑥 들어왔다. 이 곳에도 의원은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잔뜩 구겨지고 지저분한 가운을 입고 덥수룩한 더벅머리에 콧수염, 턱수염이 지저분하게 나 있어, 완전 털보 아저씨였다 . 얼마나 털이 많은지 가운 밖으로 나온 손등위에도 털이 수북히 나 있었고, 손가락은 가늘고 긴 것이 아니라 짧고 굵어 의원이라기 보다는 거친 일을 하는 선원이나 용병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 이사람이... 의원 맞아?' 이러내 내 뜻이 가득 담긴 불안한 시선을 나를 안내한 여성 -아마도 간호사인 듯- 에게 보내자 그 여성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였다. '저, 정말요?' 다시 한번 의원이라는 사람을 힐끔 바라보고 확인 차 그 여성을 쳐다보자 그녀가 이번에는 조금 더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 절대로 의원으로는 안 보이는 그 남자는 의자를 끌고 와 내 앞에 털썩 앉았다. "보자." "에? 에에... 뭐, 뭘요...?" 나는 순간적으로 그의 기색에 쫄아서 나도 모르게 내 옷깃을 안 벌어지도록 단단히 조여 움켜잡으며 물었다. 그러자 그 의원이 날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팔짱을 턱 끼는 거였다. "뭐냐, 너... 여자애도 아니고... 여기 치료하러 온 거 아냐? 그럼 아픈 곳을 보여야지?" "아...." 그의 말에 나는 내 추태를 깨달아 얼굴을 붉히며 주섬주섬 한 손으로 윗 옷의 단추를 끌렀다. 하지만 한 손으로 하기에 어려워 내가 꼼지락 대자 옆에서 가만히 서 있던 여성이 다가와 날 도와주었다. "이거만 풀어주면 돼요?" "아아, 예. 오른쪽 어깨를 다쳤거든요." 완전히 다 풀지는 않고 절반 정도만 풀은 뒤 내 어깨를 싸매고 있던 운디네를 돌려보내고 환부를 의원 앞에 드러내었다. 그러자 의원은 내 어깨에 고개를 쳐박을 듯이 얼굴을 내밀어 찬찬히 살펴보더니 어느 순간 손을 들어 상처를 꾹 누르는 거였다. "으아악~!!" 생각지도 못한 그 상황에 놀라고 아파서 나도 모르게 커다란 비명이 튀어 나왔다. "무, 무슨 짓이예요?" 그의 손을 떨쳐내며 빽 하고 소리를 지르자 그 의원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날 쳐다보더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귀따거워 죽겠군. 뭘 쳐먹었길래 목소리가 그렇게 큰 거야, 이 삐리리~ ( 심의 삭제)한 녀석아?" "에, 에?" 나는 사과까지는 안 바라더라도 '이렇게 해야 치료를 하지요' 뭐, 이런 설명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이 의원은 이런 내 생각을 완전히 깨버린 채 다짜고짜로 내 팔을 끌어당겨 어깨를 자기의 코 앞으로 다가오게 하더니 다른 손으로 꾹꾹 누르면서 자기 할 말만 하기 시작했다. "이런 삐리리~(심의 삭제)한 녀석 같으니라고!! 너 이거 상처 생긴지 며칠 됐지? 다쳤으면 진작 진작 오지 않고 뭘 믿고 삐리리~~ 하다가 이제 온거야, 이 삐리리~~ 한 녀석아!! 아, 삐리리~~ 한 녀석 때문에 삐리리~~ 하게 생겼잖아? 에잇, 삐리리~" 내가 움직이지 못하게 꽈악 잡고 꾹꾹 누르는데 얼마나 아픈지 눈물이 찔끔 찔끔 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거기에다 의원의 입에서 나오는 거친 말에 나는 거의 넋이 나갈 정도였다. '뭐, 뭐... 이런...' "에잇, 상처가 크게 벌어졌잖아? 제인, 저기 가서 저거하고 그것들 좀 가지고 오너라." "예." 날 안내한 여성 이름이 제인인 모양이었다. 그녀가 명랑하게 대답하며 약장에 가서 이것 저것 챙기는 동안 그 남자는 너무 아파서 눈물이 그렁 그렁 맺힌 나를 의자에서 강제로 일으키더니 근처에 있던 간의 침대에 날 눕혔다. 그리고는 밖으로 누군가를 소리쳐 부르기 시작했다. "매치슨, 매치슨~!!" "예에~!!" "후딱 튀어 와!!" 그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사람은 젊은 남자였다. 20대 중반의 남자로 어깨까지 올 것 같은 회색 머리칼을 하나로 단정히 묶고 눈이 나쁜지 땡그란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한데 비해 얼굴이 동글동글해서 순하고 우직한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키도 나보다 약간 큰, 대충 175쯤? 의원은 그가 진료실로 들어오자 날 턱짓으로 가르키며 말했다. "꿰맬 거다. 준비 해라." "예." 그 매치슨이라는 남자가 나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넨 뒤 어깨의 상처를 살펴 보는 동안 의원이 시킨 것을 다 준비한 제인이 나에게 다가와 헝겁 한 뭉치를 건넸다. "자요." "이건 왜요?" 왠지 불안한 기분에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플 거예요. 그 동안 이를 악무면 이가 상하니까 이거 물고 계시라구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이 아까 그 의사의 험한 모습보다 더 무서워 보여 나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자, 잠깐만요. 왜 아파요? 마취 안 해요?" 하지만 곧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깨달은 내가 화들짝 놀라 상체까지 일으키며 다급하게 묻자 제인이 준비한 약품을 점검하던 의원이 뒤도 안 돌아본 채 툭 내뱉듯이 말했다. "마취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 정도에 마취는 얼어죽을 무슨 마취야? 죽을 상처도 아닌데 그냥 할 거다." "허거걱...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마취 해줘요~!! 마취 안 하면 나 치료 안 받을 거야~!!" 의원의 말에 경악하며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에게 다가왔던 매치슨이 내 어깨를 잡아 꽉 눌렀다. "자자, 진정해. 걱정하지 마. 얼마 안 걸릴 거야." "미쳤어요? 내가 생으로 꿰매게? 나 안해, 갈 거야~~!!" 그러나 그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나려고 바둥바둥 거리며 소리를 꽥꽥 지르자 의원이 인상을 팍 찌그리며 다가왔다. "시끄러워, 이 삐리리 한 녀석아!! 마취 하면 상처가 덧 날 수도 있고, 잘 났지 않는단 말이다." "싫어요. 안돼요. 그냥은 못해!! 나 죽어~!! 그냥 갈래요오오~~!!" "이 삐리리한 녀석이~!!" 내가 자꾸만 안 한다고 반항하며 가려고 하자 의원이 열받았던지 그 특유의 어조로 한 소리 하더니 자그마한 방망이로 - 그게 어디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 내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꽥~!!" 제대로 맞았는지 까무륵 정신을 잃어가는 내 귓가에 의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한잠 자! 그럼 끝나 있을 테니까...." 너무 익숙해 보이는 그 모습을 보자니 나는 나 같은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제 11화 새로운 만남 (3)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나는 어떤 침대 위에 얌전히 눕혀져 있었다. 천장은 하얗게 칠해져 있었고, 침대 바로 옆에는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커다란 창이 약간 열려 있어 약간 축축하고 소금기가 배어 있는 바람이 산들 산들 들어오고 있었다. "여긴 또... 어디야?" 바다 속에 있는 우리 집의 내 침실 보다 더 커 보이는 그 방에는 내가 누워 있는 침대 말고 세개의 침대가 더 있었는데 그 곳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 곳은 내가 왔던 의원의 병실인 듯 싶었다. 고개를 이리 저리 돌려 사방을 살펴보는 동안 정신이 완전히 맑아졌고, 그와함께 어깨에서 욱신욱신 쑤시는 통증이 느껴졌다. "에구구..." 고개를 옆으로 최대로 돌리고 눈을 내리깔아 살펴보니 나는 상체에는 아무것도 안 입혀져 있었고, 대신 어깨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져 있었다. "휴유... 대충 치료는 끝났나보네..." 마취도 안 하고 그대로 꿰매겠다고 천을 물리려고 달려드는 그 의원외 두명을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때마침이라고 해야할 지 배에서 신호가 왔다. 꾸르르륵~ "윽... 배고파..." 그러고보니 나는 엘라임과 같이 후작의 성을 나온 이후로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었다. 엘라임이 날 기절시킨 후 하루 반만에 깨어나자마자 일어나서 여기 왔다가 의원에게 또 기절당해서 지금 깨어난 것... "앗, 그러고보니 후작의 성에서도 그 남작 영애인지 뭔지 하는 지지배 때문에 파티에서도 뭐 하나 먹지 못했는데... 으그극..." 그 지지배 생각만 하면 이가 빠드득 갈렸다. 물론 그때 조엘 녀석이 갑자기 냉담한 반응을 보였기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조엘 곁에 그대로 있기로 한 후 나중에 시간을 봐서 어떻게 해서든 복수를 해주겠다고 결심을 했었다. '으음... 그래도 그렇게 죽어버릴 줄이야... 도대체 그 애는 누가 죽인 거지?' 아직도 그 어두운 밤에 눈을 부릅뜬 채 죽어있는 그 애의 얼굴을 떠올리면 소름이 오싹 끼친다. '어우... 이 곳에 와서 벌써 시체를 실제로 두번이나 봤어. 이거 액땜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에 골몰해 있는데 다시 자신의 존재를 제발 알아달라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꾸르르륵~ "아... 배고프다." 꾸륵, 꾸륵, 꾸르륵~~ "젠장, 알았어, 알았다고. 얘들아... 나 좀 일으켜줘어~" 공중에서 잘 놀고 있는 정령들에게 괜히 협박 섞인 부탁을 해서 상체를 일으킨 나는 사람을 부를 수 있는 벨 같은 걸 찾으려고 했지만, 이 곳이 한국 병원이 아니라서 그런지 그런 건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엥... 내가 나가봐야 하나?' 내가 이 곳에 입고 왔던 셔츠는 잘 개어져 침대 옆의 자그마한 탁자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내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조엘이 준 파티복에서 떼어낸 단추들을 고이 넣어 둔 주머니가 올려져 있었다. 사람을 의심하면 안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주머니를 열어 안을 살펴보니, 세상에 맏을 사람 하나 없다고 자그마한 단추 하나가 없었다. "어, 어어... 이거.. 혹시..." 당장 내려가 그 의원을 만나 닥달을 할지 말지 고민을 하는데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쟁반을 든 제인이 들어왔다. "아, 일어 났어요?"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날 보며 반갑게 인사를 하다가 내가 주머니를 들고 의심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걸 보더니 풋 웃었다. "아아, 병원비로 단추 하나는 빼냈어요. 그거 묻고 싶었던 거죠? 치료비하고, 입원비 빼고 남은 돈은 퇴원할 때 돌려주라는 의원님의 명령이세요. 아, 일주일은 꼬박 입원하고 있어야 해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아... 그런데 보통 돈은 퇴원할 때 치르는 거 아닌가요?" 내 질문에 그녀는 입을 가리며 호호 웃더니 대답했다. "다른 곳은 어떨지 몰라도 이 곳은 선불이예요. 그리고 만약 거스름 돈이 있다면 그건 퇴원할때 주죠." "왜요?" "그건 말이죠, 가끔 성격 급한 환자들이 치료만 받고 움직이면 안되는데도 고집을 부리며 퇴원하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충분히 나을 때 까지 있으면 거스름 돈을 주지만 그렇지 않고 그냥 나가려고 하면 거스름 돈을 안 준다고 협박하죠. 뭐, 그래도 대부분의 환자들은 거스름돈 안 받고 그냥 가버리더라구요. 호호호, 덕분에 치료도 안 해주고 공돈이 생기는 경우가 많죠. 아,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돈 없는 사람들은 치료만 받고 돈 안내고 튀는 경우도 있으니까..." "하.하.하..." 그녀의 말에 내가 벙 쪄 허탈하게 웃자 그녀는 방긋 방긋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이것도 상업인걸요." "뭐... 맞는 말이네요." 그녀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그녀는 미소로 답례하며 들고 있던 쟁반을 나에게 넘겨 줬다. "식사 하셔야죠? 배고프실 거예요. 아, 먹기 불편하면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먹고 나서 빈 그릇은 옆에다 두세요. 제가 잠시 후에 와서 가져갈 테니까요. 아, 그리고 그 뒤에 의원님이 오셔서 상처를 살피실 거예요." "예." 쟁반에 담긴 건 약간의 버터와 빵, 그리고 스프 뿐이었지만, 나는 정말 게눈 감추듯 허겁지겁 먹어댔다. 제인양이 나간 후였기에 망정이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쪽팔렸을 거다. 그냥 먹으려고 했는데 오른쪽 팔이 불편해서 왼 손으로 빵을 통채로 들고 한 입을 뜯어 먹으니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거였다. 그리고 뜯자마자 다시 입이 벌어지며 빵이 들어가고, 또 한입 먹고 또 먹고, 숨이 막혀서 스프는 떠 먹는 대신 그릇 채 들어서 후르륵 다 마셔버렸다. 그리고 입가심으로 냉수 한잔. "아... 살 거 같다. 으윽... 그래도 이거 먹으니까 김치 송송송 쓸어 넣고, 돼지고기 넣은 김치 찌개 먹고시포오~ 김치 부침개도 좋구... 으윽, 김치 볶음바압~ 그리운 김치여... 나는 언제 너를 다시 볼 것인가아..." 그렇게 혼자 청승을 떨고 있는데 문이 달칵 열리며 의원을 비롯하여 그의 보조 역할을 하는 제인과 매치슨이 들어왔다. "팔팔해 보이는군. 역시 젊은 놈이라 회복이 빠르다니까. 이것 좀 풀어봐라." 날 쓰윽 보고는 자신의 할 말만 하던 의원이 뒤에 서 있던 매치슨에게 말하자 그가 앞으로 나와 내 어깨에 칭칭 매여있던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그가 붕대를 다 풀길 기다리며 의원은 이번엔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뼈는 이상 없는 것 같고, 근육이 찢어진 건 꼬맸으니 아물텐데, 검에 아예 꿰뚤렸더구만? 그래 신경이 잘려가지고 힐링 포션을 사용했다. 아무래도 젊은 녀석이 벌써부터 팔 움직이는데 불편하면 안 좋을 거 같아서... 그래서 쬐께 치료비가 많이 나올 거다. 뭐, 보니까 돈은 많은 것 같으니까 불만은 없지? 그런데 너도 참 신기한 놈이다. 그렇게 돈이 있으면 신전 가서 한번에 싸악 났도록 치유 받을 것이지 왜 이리로 왔냐? 하기야, 신성력으로 치유하면 순식간에 났는 장점이 있지만, 면역력은 약해지니 시간만 널널하다면 이렇게 치유하는 게 훨 났지." 그가 다다다 설명은 했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한 나는 어벙벙한 채로 그만 바라보다가 그가 입을 닫자 그제야 입을 열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아니, 다쳤는데 왜 신전으로 가요? 의원을 찾아야지." 그러자 그 곳에 있던 세 사람의 눈이 둥그래지면서 희귀한 생물 쳐다보듯이 날 바라보는 거였다. 그래 내가 또 뭔가 잘못 말했나... 싶어 당황하는데 갑자기 의원이 호탕하게 웃어제끼는 거였다. "음홧홧홧, 맞다, 맞아. 껄껄껄, 암, 암, 다치면 의원을 찾아야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암 것도 모르는 놈팽이들은 신전에 가면 저절로 모든게 다 해결된다고 착각들을 하고 있다니까? 암암, 이 짜식 맘에 드는 구만~ 핫핫, 신전에 있는 삐리리~ 한 짜식들은 암 것도 모르는 삐리리~ 한 주제에 상처도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디립다 신성력만 퍼주면 만사 오케인 줄 안다니까. 그건 절대로 잘못된 거야. 신성력도 상처에 맞게 적절하게 퍼줘야 대끼리지 그냥 무조건 퍼주면 되는 줄 아남? 아, 올만에 상식이 제대로 박힌 녀석을 만났구만? 너 맘에 든다. 핫핫, 맘에 들어." "하.하.하..." 너무 좋아하는 그 의원에게 신성력이 뭔가요 물어볼 수도 없어 나는 어색하게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중에 신전에 대하여 엘라임에게 물어보겠다고 결심하는데 그 동안 붕대를 다 풀어낸 매치슨이 뒤로 물러나고 의원이 다가와 내 어깨를 꼼꼼히 살펴보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주 좋아. 순조롭게 아물고 있구만. 이대로 빨리 회복 된다면 일주일 동안 있을 필요도 없겠다. 이게 다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비전의 약 덕분이지. 아주 좋았어. 자, 그러면..." 그러면서 의원이 뒤에 서 있던 매치슨과 제인을 향해 눈짓을 하자 이 둘이 나에게 순식간에 달려 들어 매치슨은 내 상체와 왼쪽 팔을 꽈악 붙잡고 제인은 내 입에 강제로 헝겁을 물리고 오른쪽 팔을 잡는 거였다. "음, 음음음 으음~~ (뭐, 뭐하는 거야?)" 그런 그들의 행동에 불안을 느끼며 소리쳤지만 헝겁이 입 안에 물려있던 터라 소리가 제대로 나올리가 없었다. 그래 의원을 향해 필사적으로 '허튼 짓만 했단 봐라. 가만 안둘 거다!!' 란 의미가 담긴 매서운 눈빛을 보냈건만, 이 의원은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더니 그가 가지고 온 병을 내 앞에 치켜 들어보였다. 유리로 된 그 병 안에는 탁하고 걸쭉해 보이는 녹색의 액체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훗훗, 이게 바로 우리 가문 비전의 약이지. 이건 다른 곳에 가면 구할 수도 없는 거야. 고통은 좀 심하지만 효과는 확실하지." 엄청 불안했다. 그 약의 뚜껑을 열고 나에게 조금씩 다가오는 그 의원의 모습이 마치 뾰족한 화살 꼬리를 가지고 박쥐 날개를 가진 악마처럼 보였다. 부들 부들 떨면서 뒤로 물러나려고 해도 매치슨과 제인이 날 꼭 잡고 있던 터라 나는 옴쭐달싹도 하지 못한 채 의원의 모습만 애절하게 바라봐야 했다. "자... 조금만 바를테니 겁 먹지 말거라." 약병이 기울여지고 의원이 다른 손에 들고 있던 하얀 천 위에 그 녹색의 질퍽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조금만 바른다며 뭘 그렇게 많이 붓는 거야?' "잠시만 참으면 될 거다." 보통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하는 거짓말을 하며 의원이 그 약이 발린 천을 내 어깨의 상처에 대는 순간... "%#@%&$#@@$%~~" 나는 이 의원에 와서 두번째로 기절해 버렸다. 제 11화 새로운 만남 (4) 내가 다시 정신 차렸을 때는 여전히 햇님이 방긋 웃는 낮이었다. "에구구... 내 신세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신세 한탄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 바를 때에는 과산화수소 소독약 보다 100배는 더 쓰라리고 수백개의 바늘이 콕콕 찔러대는 것 처럼 쑤시는 약이 그래도 효과는 좋았는지, 이번에는 정령의 도움 없이도 혼자 스스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게다가 아까는 화끈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던 어깨는 그때보다 한결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 약은 다시는 바르고 싶지 않아!' 약 바를 때 고통으로 몸부림 치느라 땀이 많이 났는지 온 몸이 끈적 거리고 침대 시트도 축축해서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운디네를 불런 간단하게 씻고 내가 누워있던 침대와 마찬가지로 창가에 있는, 건너편의 침대 위에 올라가 앉아 있으려니 문이 열리고 제인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먹을 것이 담긴 쟁반이 들려 있었는데, 어떻게 내가 깨어나는 시간에 딱딱 맞춰 식사를 가져 오는 건지 참 신기했다. 물론 단 두번 뿐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이런 일을 하도 겪어서 이제는 척하면 착 하고 아는 건지도... "일어 나셨군요. 식사 하셔야죠?" 인간성 좋게 생글생글 웃어 보이며 다가오는 제인이었지만, 이제는 그 모습이 험악한 의원보다 더 두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도 먹을 건 먹어야 했기에 나는 순순히 쟁반을 받아 들었다. 사실 음식 냄새를 맡자 배 속에서 다시 아우성을 쳤고 말이다. "예, 몇 시간 안 지난 것 같은데도 이상하게 배가 고프네요." 내 말에 나에게 식사가 담긴 쟁반을 넘겨주던 제인이 눈을 둥그렇게 떠 보이더니 여성스럽게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해가 떠 있어서 몇 시간 밖에 안 지났다고 오해를 하셨군요. 약 바른지 벌써 하루가 지났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쳐다 보았다. "하, 하루요?" "그렇다니까요. 계속 주무셨어요." '잔게 아니라 기절해 있었던 거지...' 황망한 눈으로 그녀를 계속 바라보자 제인이 다시 살포시 웃으면서 쟁반을 가르켜 보였다. "하루동안 아무것도 안 드셨으니 무척 배가 고프실 거예요. 어서 드세요." 그래도 하루 굶긴 것이 미안했는지 쟁반 위의 음식은 어제보다 풍성했다. 말랑말랑한 하얀 빵에 꿀을 섞은 버터, 싱싱한 과일 샐러드에 삶은 달걀과 스프, 거기에 새하얀 우유 한잔까지... '헤에, 이거 하루 더 굶으면 음식이 더 풍성해지는 게 아닐까?' 바로 어제 기절할 정도의 통증을 겪어 다시는 그런 일 겪고 싶지 않다고 방금 전에 생각했으면서 풍성한 식사에 그 결심이 바로 흔들린 것을 깨닫자 나는 스스로의 한심함에 의기소침 해졌다. '젠장... 내가 이리 먹을 것에 약했을 줄이야...' 그러면서도 눈 앞의 음식을 그냥 놔두지 못하고 하나 둘 집어 먹다보니 어느새 쟁반 위의 접시는 텅 비어 있었다. '쩌비... 맛은 있군.' 마지막으로 진한 우유 한잔을 쭈욱 들이키고 내려놓자 나가는 대신 옆에서 침대 시트를 갈고 있던 제인이 다정한 목소리로 알려줬다. "어머, 깨끗하게도 다 드셨네요. 이제 조금만 기다리시면 의원님이 오셔서 상처를 봐주실 거예요." 그녀의 말에 나는 온 몸이 딱 굳어지는 걸 느끼며 안 벌어지려는 입을 억지로 열어 물어보았다. "윽... 그, 그럼... 오늘도 그 약 발라요?" 그러자 내 질문에 제인이 너무나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아직 상처가 완전히 나으시지 않으셨잖아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서 문을 향해 달려갔다. 어떻게 해서든 의원이 내 상처를 보러 오기 전에 이 자리를 피해 있으려는, 아주 본능적이고도 어리석은 생각으로 인해서였다. 어차피 이 곳이 의원의 집인 이상 내가 퇴원하지 않는 한 나중에라도 의원과 대면할 수 있다는 아주 기본적인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말이다. 하지만, 이런 내 어리석음을 신께서 꾸짖으려 하시는지 내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며 나는 그대로 문에 코를 박고 말았다. - 보통 방문은 안쪽으로 열리기 때문에... - 쾅~! "으악~!!"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큰 통증에 얼얼한 코를 부여잡고 앉아서 끙끙 거리는데 그 틈을 타서(?) 밖에서 문을 벌컥 열었던 범인들이 들어왔다. "거기서 뭐 하냐?" 어차피 들어올 사람들이야 뻔했지만, 막상 목소리를 들으니 온 몸에 싸늘한 한기가 엄습했다. 그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의아하게 날 바라보는 의원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저 그 약 절대로 안 바릅니다!! 만약 그 약을 저에게 바르시려면 각오 하셔야 할 겁니다!!"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결연한 표정으로 외치자 의원이 어아니벙벙하게 날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뭐냐, 기껏 그 약 바르기 싫어서 이렇게 난리 치는 거냐? 거참 끈기 없는 놈 같으니라고... 다른 놈들은 그래도 3번 이상은 버텼건만, 겨우 한번에 이러냐?" "한번이고 뭐고, 다시는 바르고 싶지 않다구요!!" "조금 아프기는 하지만 효과는 좋잖아?" 잔뜩 긴장한 채 여차하면 튈 작정으로 결연하게 말하는데 그 의원이 평소의 거친 모습이 아닌 되게 여유 있는 표정으로 내 말을 받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이 그 약을 계속 바르느냐 아니냐를 결정 짓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의원과의 말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 의원이 평소와 다르게 능구렁이처럼 나오는 걸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효과가 좋더라도 절대 사양입니다. 차라리 며칠 더 아프고 말래요." 내가 도리질까지 치며 극구 사양하자 그 모습이 우스웠던지 허허허 웃던 의원이 돌연 웃음을 그치더니 갑자기 무언가를 느낀 듯 병실에 나 있는 커다란 창문 쪽을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나도 인간인 이상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냥 앞 건물의 모습만 보일 뿐 특별히 괴물이 나타났다거나 하는 상식을 깨는 일은 커녕 참새 한 마리도 없었다. 그에 의원이 왜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지었는지 의아해진 내가 다시 의원에게 고개를 돌려 물어보려는 찰나, 나는 나에게 바짝 다가선 험악한 의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번개처럼 내 배를 강타하는 의원의 매서운 주먹 맛도 볼 수 있었다. 푸욱... "커억...." '의원이 아니라 깡패나 해라.'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배에서 부터 올라오는 통증으로 인하여 입을 열기는 커녕 신음을 흘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다시 서서히 멀어져 가는 정신을 배웅하며 나는 속으로 다시는 이렇게 당하지 않겠다고 몇번이나 결심을 했다. 그 결심은 그 다음날 깨어나 더욱 더 푸짐해진 식사를 보고도 흔들리지 않았기에 나는 의원이 다시 내 상처를 보러 왔을 때 엘레스트라까지 불러놓은 상태로 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어제 같은 수법은 안 통할 겁니다." 비록 엘레스트라가 그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내 모습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제인과 매치슨은 평소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대신 긴장한 채로 나와 의원의 대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의원은 여전히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 없어. 오늘 부터 그 약은 안 바를 거니까." 그 순간, 내가 얼마나 허망했는지는....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를 것이다. 순간적으로 힘이 빠져 몸이 휘청거려지만, 나는 다시 떠오른 생각에 몸을 바로 세우며 의원을 노려봤다. "거짓말. 그렇게 날 안심 시켜놓고 다시 기절 시키려고 그러는 거죠?" "아 짜식, 속고만 살았냐? 이제 바를 필요가 없다니까 그러네..." "정말이예요?" "아, 정말이라니까." "진짜죠?" "이 자식이 정말..." 계속 태연하게 대답해주던 의원의 눈초리가 사나워지자 나는 더 이상 물어봤다가는 또 다시 그 약을 바르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이쯤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그에게 쐐기를 박는 걸 잊지 않았다. "좋아요. 만약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다시 그 약을 바르면, 이 의원을 통채로 무너뜨리고 튈겁니다." 내 협박 어린 경고에 의원은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푸허허허, 별 시덥잖은 경고도 다 보겠구만. 이 녀석아 그렇게 그 약이 싫으면 다시는 다쳐서 오지 않으면 될 거 아냐?" '다치더라도 이 곳으로는 안 올 거다.' 의원은 악속대로 그 엄청난 통증을 수반하는 약 대신 희뿌연 약을 발랐다. 그리고 그건 의원의 말대로 별 다른 통증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좋아. 순조롭게 아물고 있으니 며칠 뒤에 실밥을 뽑아도 되겠다. 그 동안 누워만 있느라고 수고 했으니까 이제는 돌아다녀도 좋아. 단지, 실밥 터지지 않게 심하게 움직이지 않도록 조심하고. 만약 실밥을 터트렸다간 다 나을때까지 그 약을 발라주겠어." 약을 바른 뒤 붕대를 감으며 의원이 해준 말이었다. "어, 그럼 의원 밖으로 나갔다 와도 돼요?" "좋을 대로 해라. 집이 가까우면 집에 있다가 하루에 한번 치료를 받으러 와도 좋아. 뭐, 그래도 잔금은 실밥 뽑을때 주겠지만..." "실밥 뽑을때까지 그냥 여기 머물게요. 하지만 밖에 나가는 건 허락했으니 마음대로 할 겁니다?" "다 좋은데 외출은 아침 먹은 후 부터 저녁먹기 전까지야. 그 전까지는 돌아오도록 해. 그리고 외출한다면 꼭 이야기 하고 가고. 저녁은 해질녘에 먹으니까 시간은 대충 알아서 맞춰라." 제 11화 새로운 만남 (5) "다 좋은데 외출은 아침 먹은 후 부터 저녁먹기 전까지야. 그 전까지는 돌아오도록 해. 그리고 외출한다면 꼭 이야기 하고 가고. 저녁은 해질녘에 먹으니까 시간은 대충 알아서 맞춰라." 의원의 허락을 받자마자 나는 희희낙낙 해가지고는 내 몇 안되는 소지품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며칠 더 입원해 있기로 한 거 그 동안 이 주위에 지리나 익혀 두었다가 나중에 집으로 돌아갈 때 수월하게 쇼핑을 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그때 사용할 돈도 마련할 겸, 며칠 째 기절해 있느라 계속 같은 옷을 입고 있었으니 갈아 입을 옷도 사올 겸 말이다. 물론, 옷이야 집에 갔다 오면 되겠지만, 나도 한번쯤은 옷 같은 걸 스스로 사보고 싶었던 터라 이 기회를 마다하지 않고 시내 중심가 쪽으로 향했다. 다행이도 의원이 있던 곳이 중심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나는 쉽게 중심가로 보이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그 곳은 정말 큰 도시 답게 중심가가 굉장히 넓었다. 게다가 골목 골목마다 비슷한 가게들이 몰려 있어 한 골목은 옷가게 골목, 다른 한 골목은 무기상 골목, 또 다른 골목은 식당가 골목을 이루고 있어 물건 사기는 쉬울 거 같았다. 우선은 돈을 마련해야 했기에 나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보석상점이 어디 있는지를 물어 그쪽으로 찾아갔다. 보석 상점 역시 골목을 이루고 있었는데 보석 상가가 시작되는 지점에 다이아몬드가 그려진 간판이 골목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이 곳부터 보석상가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뭐 대단한 보석이 아니고 단지 금단추에 달린 쬐깐한 다이아몬드 - 내가 언제부터 이런걸 깔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 를 팔려는 거였기에 나는 커다란 상가는 외면한 채 그 옆에 있는 조금 작은 곳으로 들어갔다. 물론 조금 작은 곳이라고 해도 내가 지금까지 쭉 보아온 다른 상가들에 비해 큰 편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내 또래인 듯한 소년이 나를 맞았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부모님 선물? 아니면 사랑하는 애인에게 줄 선물을? 이번에 새로 나온 커플링이 있는데 한번 구경해 보시겠습니까?" 내가 뭔 말을 하기도 전에 나서서 다다다 이야기를 건네는 통해 정신없어서 머뭇거리는데 그 점원 소년이 알겠다는 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하, 짝사랑하는 그녀에게 보내는 선물이군요? 여기서는 확실히 배달까지 해드리니 선물을 어찌 보낼지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 메시지는 넣을까요 말까요? 좀 신비스럽게 카드에 이니셜만 써서 넣으시는 걸 권해드리고 싶습니다만?" "아, 나는..." "아하, 그냥 비밀로 하고 싶어하시는 군요. 이니셜을 적으면 금방 알아챌 정도인가요? 그럼 꽃을 같이 곁들이시는 건 어떨까요? 일정 가격 이상의 물품을 구매하시면 꽃은 서비스로 같이 배달해 드리고 있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핫핫핫, 뭘 그렇게 부끄러워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우리 나이에는 뭘 해도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수줍어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손님 같은 분들을 제가 여러분 뵈었거든요." 내가 머뭇 거리다간 정말 끝도 없을 것 같아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물건 좀 팔고 싶은데요?" 그러자 활짝 웃는 얼굴로 이제는 막 신제품을 보여주려던 점원이 딱 굳더니 삐걱 거리며 날 돌아보았다. "뭐라고 하셨죠?" "물건 팔러 왔다고요." 그러자 무지 친절한 웃음을 띄우고 있던 점원의 얼굴이 딱 굳어져서는 사무적인 표정이 되었다. "아, 그렇습니까? 전 물건을 살 권한은 없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지점장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점원이 나가고 난 뒤 진열된 물건들을 구경하는데, 아무래도 앞쪽에 내 놓은 거라서 그런지 화려하고 큼지막한 보석들 보다는 작은 사이즈에 화려하지 않은, 즉 그렇게 크게 비싸보이지 않는 물건들만 진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 중 한가지가 내 눈길을 끌었는데, 가느다란 원기둥과, 그 기둥과 지름이 같은 작은 구가 반복적으로 연결되어 줄을 형성한 은 목걸이에 마찬가지로 은으로 된, 줄에 달린 것 보다는 조금 더 길고 굵은 원기둥 모양의 팬던트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팬던트 가운데에는 연한 푸른색의 자그마한 보석이 박혀 있었다. "아... 예쁘다." 나도 여자인지라 그 예쁜 목걸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바라보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지며 그와 함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걸이가 마음에 드십니까?" 돌아보니 인상 좋은 중년 남자가 서 있었는데, 통통한 몸매에 머리는 반 대머리라 옆머리를 길게 길러 반대편으로 넘겨 중앙의 벗겨진 머리를 가리고 있었다. 거기에 메기 수염을 기른 남자는 웃는 얼굴이었지만, 예리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목걸이가 너무 예뻐서요." "저희 가게 물건이 마음에 드신다니 저도 기쁘군요. 물건을 팔러 오신 분 맞으시지요?" "예,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그를 따라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니 그 곳에는 아까 보석이 진열된 곳과 비슷한 크기의 공간이 나왔는데, 아무래도 중요한 손님을 대접하는 곳인 듯 우아한 응접실 형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중년 남자가 가르키는 소파에 앉자 중년 남자는 손 안에 들어갈 정도의 작은 확대경을 가지고 내 맞은 편에 앉았다. "자, 그럼 물건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작은 금단추 6개와 조금 더 큰 단추 2개를 가지고 있었지만, 작은 단추 하나는 의원쪽에 치료비로 빼앗(?)겼기에 작은 단추 5개와 큰 단추 2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나는 나중에 필요할까 싶어 작은 단추 5개만 내놓았다. 내가 내 놓은 단추중 하나를 집어 살피던 중년 남자는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흠, 단추로군요. 순금에 다이아몬드라..." 그러더니 곧이어 확대경을 눈에 가져다 대고 이리저리, 내가 지루하게 느낄 만큼의 오랜 시간동안 이리저리 꼼꼼히도 살펴 보더니 만족한 표정으로 단추를 내려놓고 또 다른 단추를 들어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다섯차례, 다섯개의 단추를 다 살펴본 중년 남자는 그제야 확대경을 내려 놓고 목 뒤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하기야 다섯개의 단추를 살피는 내내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으니 목이 아픈 건 당연할 터였다. "좋습니다. 보관이 아주 잘 되어 있군요. 다이아도 세팅이 좋지만 세개에 흠집이 좀 있군요. 순금 쪽에도 흠집이 있지만, 아무래도 이대로 그냥 팔 수는 없으니 그건 문제가 아니지요. 흠집이 있는 단추는 금화 8개, 없는 단추 2개는 금화 10개씩 드리지요. 어떻습니까?" "음... 저기 한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내가 대답은 안 하고 엉뚱한 말을 꺼내자 중년 남자는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아까 제가 본 그 목걸이 말입니다. 그 은으로 된... 그건 얼마 합니까?" "아, 그 은 목걸이 말씀입니까? 은은 금에 비해 가격이 싼 편이지요. 그건 은화 30닢입니다. 은목걸이로만 치면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지만, 그 가운데 블루 사파이어가 끼어 있어서요.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해도 그거 하나만 치면 은화 20닢은 나갈 겁니다." 말이 작은 것이지 사실 그 블루 사파이어인가 하는 그 보석은 내 새끼 손톱의 1/4 정도의 크기 밖에 안되었다. 뭐, 하지만 이 중년 남자가 말한 가격이 비싼건지, 싼건지, 적당한 건지를 전혀 모르는 나는 고개만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이런 거래는 처음이라 더 달라고 실랑이를 벌일 재주도 없고 말이다. "좋습니다. 그 가격으로 하지요. 아, 그런데 제가 그 목걸이를 가지고 싶어서 그러거든요? 목걸이 가격은 거기서 빼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지요. 아, 그런데 그 목걸이와 한 세트인 팔찌가 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뭐, 흥미가 없으시면 그냥 목걸이만 사셔도 됩니다." 역시 그 남자도 상인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그 목걸이가 너무 마음에 들었기에 지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보여주시겠습니까?" 그 중년 남자가 보여준 팔찌는 목걸이와 마찬가지로 은으로 만들어진, 가늘고 긴 원기둥과 구로 줄을 이루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블루 사파이어가 박힌 팬던트는 없었고, 단지 연결 고리를 따라 줄이 한가닥 밑으로 늘어지게 되어 있었다. "아, 예쁘군요. 이건 얼마입니까?" "이건 은화 5냥입니다. 사시겠습니까?" 그 블루 사파이어가 있고 없고에 따라 차이가 정말 컸다. "좋습니다. 같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목걸이가 은화 30냥에 팔찌가 5냥, 손님이 파신 물건의 값은 다 합해서 금화 54냥이니까... 금화 53냥에 은화 65냥이 되겠군요. 제가 맞습니까?" 확인 차 물어보며 날 바라보는 중년 남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열심히 계산하고 있었다. '가만 있어봐라... 금화가 어차피 은화보다 비싼 거겠지? 그런데 금화 하나 빼서 목걸이랑 팔지 값을 계산하고도 65냥이니까... 아항, 은화 100냥이 금화 한냥이었군. 그런데, 이거 은화 밑에 또 다른 돈이 있는 건가? 뭐, 어차피 나중에 물건 사다 보면 알겠지.' 내가 혼자 그러고 있는 동안 중년 남자는 목걸이와 팔찌를 포장한 뒤 돈이 들어 있는 주머니와 함께 넘겨주었다. "자, 여기 있습니다. 부피가 너무 커서 백금화를 조금 섞었습니다. 백금화 5개에 금화 3개, 그리고 은화 65개입니다." '아항, 백금화라는게 또 있는데 그건 금화 10개짜리인가 보군.' "감사합니다." 그 중년 남자가 건네주는 꾸러미를 받아 들면서 인사하자 중년 남자가 마주 인사를 했다. "이쪽이야 말로, 저희 가게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또 보석에 관련된 볼일이 있으시면 저희 베지테크스 보석 상회를 이용해 주십시오." '흠, 이 가게 이름이 베지테크스였었나?' 가게 이름은 보지도 않고 크기만 보고 그냥 들어온 거였기에 나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그 곳을 나섰다. 하지만, 곧 손에 들린 그 은목걸이와 팔찌를 생각하니 무지 기분이 좋아져서 가벼운 걸음을 한 발짜국 내딛는데, 그 순간 급한 걸음으로 내가 방금 나온 보석 가게로 글어가려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혀 버렸다. 뭐, 심하게 부딪힌 건 아니라 약간 휘청 거리는 정도였는데 그 순간 나와 부딪힌 사람이 손을 뻗어 내가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었다. "아, 실례했습니다, 레이디..." '엥, 레이디?' 이 곳에 와서 처음으로 들어본 소리에 내가 너무 놀라고 감격하여 상대편 사람을 바라보니 그는 은발의 긴 머리를 가진 너무나 잘 생긴 남자였다. 눈은 옅은 파란색이었는데, 연애 소설에서나 읽어봤던 파아란 호수 같은 눈동자란 바로 이 눈동자를 말 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날 붙잡아 준 이 남자는 날 아래위로 훑어 보더니 서슴없이 다른 손을 내 가슴께에 턱 하니 올려 놓는 거였다. 그의 그런 행동에 화들짝 놀라 얼른 그를 밀치고는 후다닥 그에게서 멀어지자 그가 싱긋 웃으며 다른 손가락은 구부리고 검지와 중지만 펴서 붙인 오른 손을 살짝 이마에 붙였다가 떼며 그와 동시에 한쪽 눈을 찡긋 거리며 입을 열었다. "미안, 소년이었군." 그리고는 내가 뭐라 할 사이도 없이 그대로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너무 당황스럽고, 너무 혼란스럽고, 너무 창피하고, 너무 열받아서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런 감정들이 내 목을 꽈악 막았는지 나는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어 입만 벙긋 거리다가 주위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 그대로 몸을 돌려 그 곳을 벗어났다. 속으로는 그 자식의 면상을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으며 나중에 다시 만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수십번이나 결심하면서 말이다. 제 11화 새로운 만남 (6) 그 생기기는 꼭 기생 오래비 같이 생긴 녀석을 만난 뒤로 너무 기분이 안 좋았기에 나는 옷 쇼핑은 다음 날로 미루고 그냥 바다 속 집에 가서 뭐가 그리 웃긴지 키득대는 이프리드와 한심한 듯 쳐다보는 엘라임의 눈총을 받으며 갈아 입을 옷을 챙겨왔다. 그리고는 실밥을 풀고 퇴원할 때 까지 시내를 돌아다닐 생각은 안 하고 그냥 의원에서 뒹굴 거리고 있다가 퇴원하는 날 바다 속에 있는 집에 요리를 해 먹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시장이나 보려고 다시 시내를 향할 때였다. 때 마침 날씨가 여름인데다 항구 도시라 그런지 습기 많고 후덥지근한 날씨에 햇빛 까지 쨍쨍 내리쬐어 몸에 땀이 나서 딸랑 하나 입은 셔츠가 등에 달라 붙는 것은 물론이고, 단화 비스무리하게 생긴 가죽 신발 안의 발에서도 땀이 줄줄 흐르는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지금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저녁에 날이 좀 선선해질때 즈음 시장 보러 올까 고민을 하는 찰나, 지나가는 어떤 건장한 청년이 그냥 지나칠 것이지 내 모습을 힐끔 보더니 기가 찬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지나가는 거였다. 보통 같았으면 그런 청년에게 직접 가서 '뭐시여, 형씨? 나에게 무슨 감정이라도 있어?' 라고 할 용기는 없어도 뒤에다 대고 가운데 손가락이라도 치켜줄 만큼 무지 기분 나쁜 상황이었지만, 나는 그 보다도 그의 차림새에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소매가 없는 면 나시티에 무릅까지 내려오는 반바지, 거기에 휭하니 뚤린 샌들까지... 긴 셔츠에 긴 바지, 거기에 무지 질겨보이는 가죽 구두를 신은 나였기에 그의 차림 새가 무지무지 부러워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나는 옷은 몰라도 신발이라도 시원한 거 신자는 집념 하에 근처에 있는 신발 가게로 뛰어 들어갔다. 그래 아주 예쁘고 튼튼한, 남녀 공용이라고 해도 무방할 샌들 하나를 골라 값을 치르려는데, 그 순간 진열장에 놓인 너무나 예쁜 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납작한 바닥에 약 3~ 5센티 되어보이는 낮은 굽, 날씬한 자태, 발등 위를 가르는 한줄기 선과 그것과 교차되어 발목 아래를 감싸 신이 벗겨지지 않게 하는 또 다른 선이 마치 다이아몬드라도 박은 것 처럼 반짝반짝 거리면서 내 시선을 끌어 당기는 거였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하얀 색으로 되어 있어 너무 예쁘고 시원해 보였다. 그리하여 나는 두말 않고 그 샌달도 들어다 내가 고른 갈색 샌들 옆에 두고 외쳤다. "아저씨, 이것도 계산해 주세요." 반백의 머리에 인상 좋은 할아버지 같은 주인은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사시게? 그럽시다." 아, 이것이 바로 쇼핑의 즐거움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 너무 예쁜 샌들 꾸러미를 품에 안고 가게를 나와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장을 향해 걸어갔지만, 얼마지않아 다시 멈칫 거렸다. 생각해보니 샌들은 여성 용 샌들인데, 여기에 어울리는 옷이 없었다. 내 친어머니의 옷장에 분명히 여자용 드레스와 치마가 있기는 했지만, 이 샌들에 같이 입을 만한 옷은 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래 나는 그 즉시 시장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옷가게를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인연이었던지, 옷가게에 들어가자마자 날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진열장의 옷걸이에 걸린 원피스를 발견했다. 여름에 맞게끔 목선이 넓게 파이고 민소매에다가 하늘하늘한 소재로 만들어진 아이보리색 원피스는 그에 잘 어울리는 같은 색의 챙이 넓고 하늘하늘하고 긴 레이스가 달린 모자와 함께 옷걸이에 걸려 있었는데, 그 것을보자마자 나는 내가 원하던 옷이 바로 그 옷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주저하지않고 가게 주인에게 당당하게 외쳤다. "저거 주세요!!" 저 옷이라면 내가 보석상점에서 산 은 목걸이, 팔찌, 그리고 하얀 샌들에 무지 무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 기분은 오래 가지 못했으니... 내가 원피를 주문하자 주인인 중년 부인이 두 손까지 모아쥐며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어머나~ 정말 탁월하신 안목이시군요. 이 선물 누가 받으실지 모르지만 너무너무 좋아하시겠어요. 이거, 애인에게 선물할 건가요?" 그 순간, 나는 구름 위를 떠 다닐 정도로 붕 떴던 기분이 갑자기 바닥으로 추락하는 걸 느껴야만 했다. "하, 하, 하... 뭐...." '젠장할....'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 얼굴이 아무리 예쁘장하게 생겼다고 해도 얇은 셔츠, 그것도 땀으로 인하여 거의 달라붙은 셔츠를 입고 있는 날 여자로 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 거의 강탈하다시피 돈을 지불하고 원피스와 모자 꾸러미를 들고 가게를 빠져나온 나는 시장을 봐야 한다는 건 까맣게 잊은 채 그 길로 곧장 바다 속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집에서 이프리트와 노닥거리고 있던 엘라임이 기다렸다는 듯이 한 마디 던지는 거였다. "그건 왜 사왔냐? 누가 입으려고..." 그 순간 나는 머리속에서 빠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입지 못하긴 누가 입지 못해요오오옷~~!! 이건 내가 입을 거라구요, 내가 입을 거라구요오오옷~~!! 나두 여자란 말야. 나두 예쁜 옷 입구 싶다고!! 그런데 왜 다들 내가 안 입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아아앗~!!!" 갑작스런 내 반응에 엘라임이 놀랐던 모양이었다. 평소의 그 자만심에 가득 찬 듯한 틱틱 거리는 어조는 어디다 잊어버리고 당황한 채 어물거렸다. "아, 그, 그래... 누가 뭐랬냐? 왜 혼자 난리야? 입고 싶으면 입어라..." "하하하, 여자 옷이 그렇게 입고 싶었던 모양이구나?" 옆에서 이프리트가 한마디 거들었지만, 그것이 또 내 귀에 거슬렸다. "무슨 소리세요? 전 여자라구요. 여.자~!! 난 여자란 말이야아아~~!! 비록 가슴은 없어졌지만 여자예요~~!!" "그, 그래..." 땀을 삐질 흘리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이프리트를 향해 다시 한번 경고성의 시선을 찌릿 주고는 내 침실로 들어가 사온 원피스를 꺼내 갈아 입어 보았다. 원래는 옷가게에서 갈아입어보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들으려고 감히 거기서 갈아 입겠는가? 게다가 기분도 가라안은 상태였고... 집에 돌아와서 그 기분이 나아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옷이 나에게 잘 어울리는지는 알아봐야 했기에 갈아입은 것이었는데... '젠장, 이 곳에 와서 처음으로 입어보는 원피스인데에에에~~!!' 갈아 입고 전신 거울을 본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원피스로 갈아입은 걸 본 엘라임은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한마디 물었다. "야, 그 상태로... 괜찮은 거냐?" "뭐, 괜찮지 않을까? 나도 가끔 인간 세상에서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이프리트가 위안을 주려는 듯 말을 던졌지만, 그의 말은 위안은 커녕 오히려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내리꽂혔다. 그도 그럴것이, 내가 산 원피스는 아랫쪽은 치마가 얇은 천이 세겹으로 되어 있어서 시원하면서 풍성해보이지만, 윗쪽은 약간 달라붙는 타입에 목 주위가 넓게 파여 있는데 이런 원피스를 밋밋한 가슴인 내가 입어봤자 잘 어울리기는 커녕... '정말 남자가 여자 옷을 입은 꼴이 되어 버리잖아...' 다른 건 다 좋은데 바로 그게 문제였다. 사실 이 곳으로 넘어온 뒤 중성이 되었다지만 그렇다고 고추(험험.. ) 생겨난 건 아니었기에 성 가치관이 크게 혼란스러운 것도 없었고 - 사실 아무 생각 도 없었다. - , 게다가 지금까지는 일부러 남자인 척 살았었으니 가슴이 사라진 것 때문에 절망하거나 낙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나도 한국에 있을때는 비록 보이쉬한 모습으로 다니긴 했지만 TV에서 예쁜 옷이 나오면 입고 싶어 하고 대학 가면 꼭 예쁜 원피스와 치마 정장을 사서 입겠다는 소박한(?) 꿈을 가진 평범한 여고생이었었다. 그때는 안 어울릴까봐 입기를 꺼려하고, 불편해서 피했었지만, 언젠가는 그런걸 입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는데, 지금은 예쁜 원피스를 입었건만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니 내가 입어서는 안될 것 같은 모습이 거울에 비춰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자니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엇인가가 울컥 솟아나왔다. 주륵... 뚝... 뚝...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는데 한번 나오기 시작한 눈물이 정말 주체할 수없이 정말 닭똥 같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으흑.... 으허허어엉~~!! 훌쩍, 훌쩍, 우애애애앵~~!! 으흑흑흑... 엄마... 끄윽, 끅... 난... 으흐흑... 훌쩍... 여자란... 훌쩍... 말이예요.. 으흑흑흑... 어허허헝... 엄마아아...." "야, 야아~ 아니, 그런 거 가지고 우냐? 잘 어울리네, 응? 예쁘다니까? 야, 불덩어리 자식아,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라. 얘 울잖아?" 엘라임이... 내 눈물에 약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당시의 난 너무나 서러워서 엘라임이 당황해서 어떻게 해서든 날 달래보려고 하는 걸 무시하고 계속 서럽게 울어댔다. "아이야, 예뻐, 예브다니까? 그러니 그만 울거라. 네 아비 당황하잖니." "이 자식이! 내가 언제 당황했다고!! 야, 그만 좀 울라니까~!! 아씨, 정말... 내가 그 예쁜 옷 더 가져다 줄테니까 그만 뚝 그치지 못해!!" "흐에에에엥~~!!" 엘라임이 달래고 달랬지만 내가 계속 울어제끼자 그 성질 드러운 엘라임이 계속 참을리가 무방했다. 결국 쥐꼬리만한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엘라임은 참지 못하고 자신의 기운을 쏘아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뚝 그치라니까!!" 그의 거대한 기운에 나는 너무 놀라서 - 하급 정령들은 원래 두 정령왕을 대하지 못하고 저 멀리 가 있었다. - 나도 모르게 뚝 그쳤다. 덕분에 딸국질을 하게 되었지만... "끅, 딸꾹... 끅, 끅, 딸꾹..."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상태로 딸꾹질을 하며 엘라임을 바라보자 엘라임이 한숨을 내쉬며 기운을 거두어 들였다. "후우... 정말... 넌 누굴 닮아가지고 꼭 기운을 쓰게 만드는 거냐? 그만 좀 울어. 잘 어울리는데다 원한다면 내가 다른 옷들도 구해줄테니까." 그러면서 엘라임이 쓰윽 내 얼굴을 어루만지자 그와 함께 물방울들이 몰려와 내 얼굴을 깨끗이 닦아 주었다. 하지만, 그런 엘라임의 보기 드문 친절한 태도에도 나는 전혀 기쁘지 않은 채 오히려 눈물만 다시 나왔다. "흐윽..." "아, 또 우냐? 그만 울라니까!" "히잉... 딸꾹, 훌쩍, 누군... 딸꾹, 울고 싶어서, 딸꾹... 후아... 우는 줄, 딸꾹, 훌쩍, 아세요? 딸꾹, 훌쩍..." "야, 야, 정신 없다. 한 가지만 해라 응?" 머리를 누르며 손을 내젖는 엘라임의 모습에 열받은 나는 엘라임에게 다가가서 그의 옷자락 하나를 잡아 코를 크게 풀어댔다. 패앵~!! "으악, 이 자식... 무슨 짓이야?" 어차피 엘라임의 옷은 물로 되어 있던 거라 콧물은 물과 함께 아래로 떨어졌지만 엘라임은 되게 찝찝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눈물은 그칠 수 있었지만, 딸꾹질은 그래도 안 멈췄다. "딸꾹, 어차피, 딸꾹, 안 묻었는데, 딸꾹, 뭘 그거 가지고, 딸꾹... 흐읍~ 후아~ 딸꾹..." "뭐, 이제 울음을 그쳤으니 되었지. 그나저나 아이를 위해 옷을 구하려면 우리가 직접 인간 세상으로 나가야 하려나?" 옷 잔뜩 구해줄테니 마음 풀어라.. 하는 이프리트의 부드러운 말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딸꾹, 필요 없어요, 딸꾹... 어차피 딸꾹, 가슴이 없어서, 딸꾹, 입어봤자 지금 처럼 ,딸꾹, 안 어울린다구요, 딸꾹, 뽕브라 라도 있으면... 딸꾹, 맞아~!! 딸꾹," 거기까지 말한 나는 번뜩 떠오른 생각에 다시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맞아, 맞아, 그게 있었지?" 너무 기뻐 흥분한 나머지 딸꾹질도 멈췄다는 걸 모른채 나는 내 침실 한 구석에 고이 모셔져 있는, 내 마법 스승인 노만에게서 받은 책을 펼쳐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으음... 여기 어딘가에 있을텐데... 어디 있더라? 여기던가? 분명이 2클래스 마법에서... 아, 여기 있다!!" 나는 2클래스의 마법서에서 내가 원하는 마법을 찾아내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자 내 행동에 의아함을 느껴 같이 들어온 엘라임과 이프리트가 동시에 물었다. "뭐야?" "뭘 찾았는데?" 방금 엉엉 울었던 것도 잊어버린 나는 헤죽 웃으며 그 둘 앞에 마법서를 내밀어 보였다. "이거 말이예요. 올터 셀프 마법. 저 이거 사용할 수 있거든요." 그건 시동어가 두가지였다. 하나는 '올터 셀프', 또 다른 하나는 '올터세이션'인데 올터 셀프는 자기 자신에게 마법을 걸 때 사용하는 것이고, 올터세이션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나 다른 물체에게 사용할때 사용하는 것이다. 이 마법은 사람이나 물체의 모습을 약간 변형시킬 수 있는 마법인데, 노만에게 설명 듣기로는 아주 뛰어난 마법사라면 대상의 50%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눈 속임도 아니고 실제로 변화하는 것으로 이것과 비슷하지만 한단계 높은 마법으로는 아예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는 '폴리모프가'가 있다. 그러나 폴리모프는 자신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완전히 변할 수 있지만, 이 마법은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바꿀 수 없다. 단지 키를 조금 크게, 혹은 작게 만들거나 아니면 조금 더 뚱뚱하게, 날씬하게 만드는 정도이다. 아, 그리고 물론 부분 변환도 가능하다. 이 마법은 마나를 계속 지속시키는 한 언제까지고 안 풀리는데다 2 클래스의 마법이라 마나가 풍족한 나로써는 오랜 시간 유지시키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이 마법으로 나는 나 자신을 완전한 여자의 모습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어차피 한 부위만(?) 고치면 되니까. "호오, 마법이라... 좋은 생각이구나. 그런데 마법은 할 수 있니?" 뜻밖이라는 듯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이프리트의 모습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에헤헤... 사실 여기 오기 전까지 마법을 조금 배웠거든요, 지금 저는 2클래스 마스터고, 3클래스 유저예요." 몇달 배우고 거기까지 이른 경지가 놀라운 거 같지만, 노만의 말로는 2클래스는 거의 어려운 것이 없기에 마나만 충분히 모으고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면 누구라도 몇달 안에 이룩할 수 있는 경지라고 했다. 보통 사람은 마나를 모으고 다루는 기간이 오래 걸려 늦어지는 거 뿐이라나? 그리하여 나는 한국에 있을 때 보다는 - 그때도 사실 납작 가슴이라서... - 한 싸이즈 더 큰 가슴을 만들어 당당하게 원피스를 입고 만족할 수 있었다. 제 11화 새로운 만남 (7) 드디어 이제 여자 옷을 마음대로 입을 수 있게 된 나는 내친김에 새로 산 옷을 입고 시내로 놀러가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일 때에는 혼자 가도 상관 없었는데, 여자 차림을 하고 있자니 혼자 가기가 영 껄끄러운 거였다. 변명 같지만, 원래 여자애들은 학교에서도 매점을 가거나, 다른 교실로 이동하거나 하다못해 화장실을 갈 때도 볼 일 없는 친구를 끌고 가는 습성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이제 막 18세가 된 꽃다운 나이에 새 옷까지 입었는데 외로이 혼자 거리를 방황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성격은 드럽지만 인물 하나면 인간들 중 그 누구도 따라잡지 못할 존재가 옆에 있고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같이 나가자고?" 무지 귀찮다는 기색을 역력하게 드러내며 묻는 엘라임에게 나는 초롱초롱 거리는 눈으로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어차피 돈은 저에게 다 있으니 사달라그러지도 않을 거구요, 체력도 약하신게 아니니까 좀 걷는다고 해서 지치실 것도 아니구요, 게다가 지금 급하게 하실 일도 없으시잖아요, 예? 그러니까 같이 가주시면 안돼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기대하는 눈빛을 엘라임에게 보내며 말했건만, 엘라임의 드러운 성격은 가차 없었다. "싫다. 내가 그런 귀찮은 일을 왜 해야 하지?" "윽..." 요즘 들어 잘 해주는 일이 꽤 있어서 나는 조금은 기대 했었지만, 엘라임이 칼 같은 매정한 거절에 기대가 와르르 무너졌다. 하지만 그래도 혼자 나가는 것이 싫었기에 나는 먹지 못하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으로 다시 한번 매달렸다. "좀 같이 가주면 안돼요? 혼자 가기 싫단 말이예요, 예?" 나도 엘라임과 같이 가기는 싫었지만, 너무 처량하게도 이 곳에서 나와 같이 가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엘라임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계속 매달리자 엘라임이 귀찮다는 표정이면서도 하는 수 없었는지 승낙하려는 듯 했는데 그 보다도 한발 앞서 이프리트가 제안했다. "내가 대신 가줄까?" "아저씨가요? (엘라임이 아버지다보니 그와 동류인 이프리트는 아저씨라고 불렀다. 아줌마라고 하기에는 왠지 꺼림직해서...)" 그 마음은 고맙지만 내가 같이 가고 싶은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사람(혹은 그 모습을 하고 있는...) 이었기에 선듯 허락하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이프리트는 아름답긴 하지만 커다란 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내가 같이 가줄테니까 엘라임은 그냥 냅두고 우리끼리 가자." "에.. 하지만..." 딱 잘라 거절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자니 그것도 그래 나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하자 이프리트가 피식 웃었다. "훗, 내 모습때문에 그러는 거니? 그런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예?" 내 반문에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이프리트의 커다란 불새의 모습이 갑자기 일어난 불꽃에 휩싸이더니 그 불꽃이 가라앉자 거기에는 불꽃과도 같은 밝은 붉은 머리를 가진 20대 중반쯤의 잘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이 정도면 되었겠지?" 눈을 찡긋 거리며 입을 여는 이프리트의 모습에 나는 입을 떠억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저, 저기... 모습을 바꿀 수도 있었어요?" "다른 정령들은 크기만 조절이 가능하지. 하지만 우리 정령왕들에게는 정해진 모습이라는 게 없어. 그냥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언제든 바꿀 수 있지. 사람이든, 엘프든, 드워프든, 아니면 동물이든..." "헤에..." 엘라임의 친절한 설명에 나는 새삼스럽게 감탄하며 엘라임과 이프리트를 바라보자 이프리트가 다시 웃으면서 말했다. "자, 갈까?" 잘 생기고 친절한 남자가 같이 가겠다는데 사양할 마음은 요만큼도 없었기에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러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엘라임이 끼어들었다. "나도 간다." "예?" 뭐, 아까 허락해줄 것 같이 보였기에 크게 놀란 건 아니었지만, 귀찮아 했으니 이프리트가 같이 가주면 그냥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스스로 나서자 의아했던 것이다. 그런 엘라임의 모습에 이프리트가 피식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호오, 귀찮다며? 그냥 해인이랑 나만 갔다 올테니 귀찮으면 여기 있어." 무지 귀엽다는 듯이 - 엘라임에게 어울릴 형용사가 절대 아니지만... - 바라보는 이프리트의 모습에 엘라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시끄러워. 원래 아까 같이 가주려고 했어. 네 놈이 끼어든 거지." "호오, 그랬어?" "뭐냐, 네놈. 지금 내 말을 의심하는 거냐?" "쿡쿡쿡, 아니 누가 뭐래? 그냥 그렇다고 해두지 뭐." "그렇다고 해두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래." "그래, 그래." 이건 불의 나이트급 정령 실레스틴과 물의 나이트급 정령 엘레스트라에게 들은건데 이프리트는 엘라임보다 나이가 3000살이나 더 많다고 했다. 어차피 정령들은 자란다거나 발전한다는 개념 같은게 없으니 막 태어난 정령이나 이제 곧 소멸을 앞둔 정령이나 틀릴 건 없지만 - 그러니까 엘라임이 이프리트에게 떽떽 거릴 수 있는 거겠지만... - 엘라임이 이프리트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엘라임이 처음에 정령계에 태어났을 때 그를 지켜봐준 것이 지금의 이프리트라고 했다. 뭐, 정령에게 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 정령왕이 소멸하면 그 뒤를 이어 다시 태어나는 것이지만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자신을 지켜봐준 것이 어떤 인연으로 다가온 듯 했다. 그러고보니 정령들은 남이 태어나던 말든 기다리는 것도 없고 상관하는 것도 없다고 한다. 태어났으면 태어났나보다... 하고 같이 놀고, 사라졌으면 소멸했나 보다... 하고 곧 잊어버린다나? 그러니 엘라임이 첨으로 태어나는 걸 지켜봐준 이프리트도 참 독특한 정령 -물론 그는 정령왕이기는 하지만... - 이지만, 그렇다고 이프리트에게 이기지 못하는 -물론 대들기는 하지만... - 엘라임도 독특하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을때 이프리트도 그렇지만 엘라임도 참 인간적인 정령왕들이었다. 아마 그러니까 엘라임이 내 친엄마랑 사랑에 빠지는게 가능했을지도... 뭐, 덕분에 나는 물의 정령왕을 아버지로 두고 불의 정령왕을 아저씨로 두었으니 땡잡은 건가? 어쨌든 그렇게 나선 엘라임도 같이 우리 셋은 바다 속을 빠져나와 내가 전에 치료를 받았던 그레이험 항구 도시로 날아갔고, 나는 내가 원하는 만큼 마음껏 돌아다니며 놀았다. 그러나, 미남 둘을 하나씩 양 옆에 끼고 다니니 사람들의 부러움과 질시에 찬 눈빛을 받아서 무지 기분이 으쓱하기는 한데,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그 둘은 인간이 아니었기에 뭘 같이 먹을 수도 없었고, 식품이나 의류에 대해 의견을 구할 수가 없었다. 하기야, 내가 가슴이 없을때 원피스를 입고 나와도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봤을 뿐 별 달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두 정령왕에게 내가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그들은 정말로 날 그냥 따라와준 것 뿐이었다. 이런 쇼핑 같은 거야 같이 온 사람의 의견도 구하고 수다도 떨면서 가야 재미있는데 그 둘은 음식이란 걸 먹지 않으니 뭘 사먹어도 나 혼자 먹어야 하고, 식품을 골라도 나 혼자만의 의견으로 골라야 하고, 지나가다 예쁜 것이 있어서 '예쁘죠?' 라고 동의를 구하면 정말 예뻐서가 아니라 단지 날 위해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 뿐이었으니... 게다가 둘은 음식이라는 걸 먹지 않으니 길 가다 크고 멋진 식당을 봤는데 들어갈 수가 없었다. 셋이 들어가서 딸랑 일인분 시키기는 엄청 창피한 일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둘은 안 먹는데 아깝게 그들 것 까지 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정말 오랜만에, 아니 이 곳에 와서 처음으로 이렇게 놀러 나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어서 나는 오기로라도 끈질기게 해가 꼴딱 넘어가고 캄캄한 밤이 찾아와 상점들이 하나 둘 문 닫을때까지 돌아다녔다. "아, 정말 신나게 돌아다녔다~!!" 그 동안 산 식료품들은 다 엘라임과 이프리트에게 맡기고 빈 손으로 서 있던 나는 원 없이 돌아다녔다는 그 뿌듯함(?)에 밤 하늘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자 이런 내 모습에 엘라임은 이해 할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그렇게 재미 있냐? 정말 인간이란 이해 할 수가 없군. 그러고보니 네 엄마도 이렇게 돌아다니며 물건 사는 걸 무지 좋아했다만..." "당연하죠. 사고 싶은 물건을 산다는게 얼마나 즐거운데요. 게다가 평소 보지 못했던 새로운 거나 신기한 것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상당하다고요. 이게 바로 쇼핑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신나서 이야기하는 내 모습에 부드럽게 웃던 이프리트도 한마디 했다. "뭐, 우리들에게는 뭔가가 필요해서 산다는 개념 같은 건 없으니 이해는 못하겠지만, 네가 즐겁다니 그걸로 되었다. 자, 그럼 이제 돌아갈까?" "예이." 엘라임은 그 자리에서 날아 올라 돌아가려고 했지만, 사람들 눈에 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귀찮아 하는 그를 이끌고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아서 대로를 벗어나 좁은 골목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 궁금한게 있는데..." 걷다보니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나는 두 정령왕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까 나한테 옷 구해준다고 했잖아요, 맞죠? 그런데 정령들한테는 뭔가를 산다는 개념이 없다면서 어떻게 구하려고 했어요?" "그거야..."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태도로 엘라임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인간 세상으로 가서 옷이 있으면 가져오면 되잖냐. 녀석들이 내가 좀 가져 온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엘라임의 말에 당황한 건 오히려 나였다. "에엑? 그럼 안되잖아요. 그건 도둑이나 강도들이 하는 나쁜 짓이라고요. 정당한 댓가를 주고 가져오면 몰라도..." 내 딴에는 아주 진지한 태도로 말했건만 엘라임은 내 말에 코웃음만 쳤다. "웃기는 군. 그럼 인간들은 숲에서 나무를 가져갈 때도, 아니면 땅 속에서 광물을 캘 때나 바다에서 고기를 잡을 때 어떤 댓가를 지불하든? 댓가를 지불하고 물건을 받는 건 너희들 인간 사이에서나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더냐?" 그의 말에 나는 말문이 떡 하니 막혀버렸다. 생각해보니 엘라임 말은 구구절절이 옳았고, 그렇게 따지자면 엘라임은 물을 다스리는 자, 즉 자연의 일부분을 돌보는 존재이니 인간들의 법이나 규칙 같은 걸 따르라고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엘라임이 지나가다 옷가게 보이면 그 곳에 들어가서 옷들을 쓰윽 가져오게 냅둘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그의 말을 반박할 거리를 찾느라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에... 하지만... 음... 그러니까, 아, 그래, 아버지가 가져오는 옷은 나를 위한 거잖아요. 나 또한 인간의 피가 흐르니까 나를 위한 일을 하려면 인간의 규칙을 따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내가 말하면서도 그 말이 정말 옳다는 자신이 없었던데다 엘라임이 날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기에 내 말은 뒤로 갈 수록 점점 작아지고 흐려졌다. 그러자 이 모습을 재미있게 바라보던 이프리트가 날 도와주기 위해 나섰다. "옳은 말인데 뭘 그래? 우리야 인간들의 규칙에 얶매이지 않는 존재이긴 하지만 크게 보면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존재,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인 이상 그들을 해롭게 하는 건 옳지 못하다고 봐. 특히나 이 아이를 위한 일인데 하찮은 인간들이라 해도 그들을 괴롭히게 된다면 이 아이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지." "흥, 그깟 인간들을..." 이프리트의 말에도 코웃음을 치는 엘라임이었지만, 어느 정도 수긍은 했는지 반박 하지는 않았다. "아, 그리고 말이예요 저는 제가 입을 옷은 제가 고르고 싶다구요. 아버지는 아무거나 가지고 오실 거 아니예요? 그런 건 사양이라구요." 한번 엘라임을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이제는 자연스럽게 엘라임을 부를 때 아버지란 호칭이 흘러나왔다. 그런 자신에게 무지 신기해 하는데 이런 날 엘라임이 힐끔 쳐다보더니 시선을 딴데로 돌리며 대꾸했다. "마음대로 해라." 엘라임의 말에 나는 배시시 웃었지만, 막 떠오른 생각에 다시금 의기소침해져 풀 죽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 그런데... 생각해보니 돈이 별로 없네요. 내가 가진 전재산이라고 해봐 백금화 다섯개정도밖에 안 남았는데... 으음, 아무래도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할까봐요." 그러자 이프리트가 의아하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으응? 뭘 그렇게 걱정하는 거니? 네 아버지에게 부탁하면 되잖니. 바다 속에는 인간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보석들이 아주 많은데... 그거 뒀다 뭐하려고?" "아... 맞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에헤헤헤..." 생글 생글 웃으며 엘라임을 쳐다보자 엘라임이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얼만큼 원하는데?" "오옷~!!" 그의 반응에 내가 뛸뜻이 기뻐하며 얼마 정도 달라고 할지 고민하는데 갑자기 엘라임과 이프리트가 뭔가를 느낀 듯 멈칫 하더니 갑자기 엘라임이 날 잡고 근처에 있던 주택 지붕으로 날아 올라갔다. "어어? 왜 그러는데요?" 영문 모르는 내가 엘라임의 행동에 의문을 표하자 옆에서 같이 날아 올라왔던 이프리트가 대답해줬다. "누군가 이 쪽으로 오고 있어. 하지만, 아주 다급한 기운을 풍기는 것이 그들과 마주치면 안 좋을 거 같구나." 그의 말에 아래를 내려다보며 귀를 기울이니 과연 우리가 있던 골목 쪽으로 많은 인원이 달려오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고, 잠시 후 그 요란한 소리를 내는 인물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엥?" 그들은 내가 척 보기에도 참 황당한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온 몸을 검은 옷으로 감싸고 검은 두건을 써서 얼굴과 머리를 가린 채 눈만 빼꼼이 내 놓은, 전형적인 도둑이나 닌자 차림을 한 일단의 무리들이 엄청 화려하고 야한 옷을 입은 여자들을 수십명이나 이끌고 두다다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좀 떨어져서 그들을 뒤쫓는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 무리는 당당하게 얼굴을 드러내놓고 있는 차림이었는데 무기를 치켜들고 살벌하게 뒤쫓고 있었다. 그런데 뒤쫓는 무리 중에는 놀랍게도 사람 뿐만이 아니라,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존재들은 물론 얼굴은 여우인데 몸은 사람인 존재도 섞여 있는 거였다. "우와, 우와, 우와... 아버지 저것 좀 봐요. 늑대가 사람 옷을 입고 무기를 들었어요. 게다가 얼굴이 여우야. 저런 생물체도 있어요?" "저 늑대 모습을 한 녀석은 웨어 울프라는 거야. 지능이 높아서 사람과 대화도 가능하고 원래 성격이 흉폭해서 인간들이 피하면서도 같이 지내는 경우도 가끔 있지. 바로 지금 처럼 말이다." "그럼 저 얼굴이 여우인 거는요?" "그건 놀이라고 하는데 비열한 놈들이지. 무리를 지어 사는데 가끔 인간들과 교류하는 녀석들도 있더군. 그리고 저 얼굴은 여우가 아니라 하이에나야." "뭐 어쨌든요. 정말 희안한 종족이 다 있네요... 아, 혹시 저게 몬스터예요?" "그래." "헤에..." 나는 생전 처음 본 그 몬스터라는 존재를 신기해 하며 바라보고 있는데 그러는 와중에 쫓고 쫓기는 두 그릅 사이의 격차가 점점 좁혀졌다. 아무래도 쫓기는 쪽에서는 온 몸을 시커먼 옷으로 감싼 이들이 열심히 보호해주고 있다고 해도 여자들이 있다보니 흉흉한 기세로 쫓아오는 이들에 비해 속도가 느렸다. 그러자 도망가던 쪽에서 한명의 온 몸을 시커먼 옷으로 감싼 (에잇, 기니까 이제부터 시커먼스라고 하겠다.) 이가 잠시 멈춰서 뒤돌아 서더니 손을 치켜드는 거였다. 그러자 그의 앞에 바람의 중급 정령이 짠 하고 나타나더니 자신을 쫓는 이들을 향해 강력한 바람을 강타시켰다. 덕분에 쫓는 이들의 속도가 주춤해지자 그 남은 시커먼스가 얼른 자신의 그룹에 합류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보다도 먼저 도망가던 그룹이 뒤로 물러나 그 시커먼스 인간을 합류 시켰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멀리 도망가야 하는데 그들 앞에 일단의 무리가 나타나서 길을 막았기에 도망치지 못하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쫓아오는 무리를 저지하기 위해 남은 시커머스가 있는 곳 까지 이른 거였다. "호오, 저 앞에는 마법사가 있군. 이거 힘들겠는데?" 이프리트가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는 날 위하여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열심히 도망치던 그룹은 앞에는 이프리트가 말한 마법사를 포함한 일단의 무리와, 뒤에는 몬스터를 포함한 용병 무리에 의해 포위되고 말았다. "포기 하시지? 너희들이 도망칠 구석은 어디에도 없어. 얌전히 그 계집들을 넘긴다면 고통없이 죽여준다고 약속하지." 마법사가 있는 무리에서 야비하게 생긴 중년 남자가 걸어 나와 제안했다. 그러자 도망가는 무리에서도 시커먼스 한명이 앞으로 나섰다. "크윽... 어쩐지 쉽게 여자들을 구해냈다 했더니, 함정이었냐?" "훗훗훗, 그래. 그 동안 노예 매매상만 골라 전문적으로 털어온 네 놈들의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좀 준비를 하고 있었지." 그 비열한 남자는 도둑을 잡았다는 생각에 너무 기분이 좋아 떠들다가 해선 안될 말까지 해버렸다. 물론, 그 남자는 그걸 몰랐지만.... "호오... 노.예.매.매.상..." 어설프게 가출하다가 노예매매상의 배에 잡혀 가지고 있던 금화를 빼앗기고 노예로 팔려나갈 뻔 했던, 바로 내가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걸 몰랐으니 말이다. 나는 더 들을 것도 없이 엔다이론을 불러내어 그 위에 올라타고 옆에는 엘라스트라를 대동한 채 도망치던 그룹 위에 내려섰다. 갑자기 나타난 내 모습에 사람들이 휘둥그래져서 쳐다보았지만, 그런건 상관하지 않은 채 나는 야비한 중년 남자를 향해 물었다. "궁금한게 있는데, 방금 아저씨가 노예매매상이라고 하셨나요?" 그 야비한 중년 남자는 서슬 시퍼런 내 모습과 내 옆에서 자신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엘라스트라의 모습에 놀랐는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입을 열었다. "뉘, 뉘시요? 우리를 방해하면 재미 없을 거요. 우리는 버틀러 상회의 사람들이란 말이요." "아, 글쎄 아저씨가 버틀런지 버튼인지 제가 알 바 아니고요. 아저씨가 노예매매 상인지만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러자 이번에는 내 아래쪽에 있던, 그 야비한 중년 남자에게 대응해 앞으로 나섰던 그 시커먼스가 얼른 대답했다. "버틀러 상회는 그레이험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큰 노예매매상이요." "호오, 그러니까 노예상이라는 거죠?" 내가 다시 한번 확인차 묻고 있는데 비열하게도 그 중년 남자 뒤쪽에 있던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서더니 외치는 거였다. "매직 미사일!!" 그러자 그의 머리 위에 길죽한 에너지 화살이 세개가 생겨 나더니 빠른 속도로 나에게 쏘아져 오는 거였다. 그 동안 훈련만 받아 보았지 실제로 마법을 상대해 보거나 정령을 이용해 싸워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내가 그 모습에 놀라고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 매는데 그 보다도 먼저 위에서 구경하던 엘라임이 내 앞으로 훌쩍 뛰어 내려와 허공에 당당히 버티고 서서는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마치 천이 바람에 펄럭이듯이 물결이 쫘악 퍼져서 매직미사일을 덥쳐가더니 그대로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엘라임의 그런 모습에 매직 미사일을 날린 마법사를 비롯하여 주위 사람들이 경악 어린 얼굴로 바라보자, 그런 그들을 오만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던 엘라임이 한마디 했다. "다섯 세기 전에 사라지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하나, 둘..." 그러자 제일 먼저 나에게 매직 미사일을 날렸던 마법사가 잽싸게 뒤돌아서 도망치기 시작하는 거였다. 그와 함께 주위 사람들 또한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도망가는 사람들 보다는 - 엘라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기운을 보고 안 도망가는 놈이 이상한 거다. - 사람들을 순순히 도망가게 나두는 엘라임이 더 신기했다. "어, 도망가게 냅둘 거예요?" 전에는 나타나자마자 주위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으면서 말이다. 그러자 엘라임이 나를 보지도 않은 채 지나가는 말투로 대답하는 거였다. "어차피 네가 말릴 거 아냐?" '에... 죽이는 거는 말리겠지만 좀 혼내주는 거는 찬성인데...' 하지만 이미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도망간 사람들을 다시 끌어와서 혼내달라고 하기는 뭐 했기에 나는 그냥 웃어보이고 땅에 내려섰다. 그 곳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일단의 무리들이 우리를 감사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나는 그들 중 여자들을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엣, 귀가 기네?" 오늘 하루 인간이 아닌 또 다른 종족을 만난데 대한 놀라움과 흥분으로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엘라임의 한심하다는 목소리가 즉각 날라왔다. "너 바보냐? 엘프잖아." "엘프? 저들이... 엘프예요? 와..." 그러고보니 사람은 보통 자기와 다른 종족을 보면 뭔지 모를 껄끄러움을 느끼는데 그녀들은 처음 볼때부터 왠지 모를 친근감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내 몸 속에 엘프의 피가 흐르기 때문인가보다. 그러고보니 나는 나에게 엘프의 피가 흐른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엘프를 실제로 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라도 한번 해보려는데 그 보다도 먼저 시커먼스들 중 한 사람이 다가와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뭐예요?" 물론 그 사람은 나에게 인사하러 다가온 건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가 가려는 길이 막히자 인상을 굳히며 그 시커먼스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 시커먼스가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자신의 두건을 벗었는데 어디서 많이 본 은발 머리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그리고 곧 이어 들려온 능글맞은 목소리... "이야, 다시 만나니 반가운데?" 그 녀석은 내가 보석상에서 나오다가 부딪혔던, 그 재수없는 기생 오래비같이 생긴 녀석이었다. "너, 넌...!!" 제 12화 해인, 취직하다 (1) 생각지도 못한 녀석을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다시 만난데 대한 놀라움으 로 내가 눈을 크게 치켜뜨며 녀석을 가르키자 나를 지키려는 듯 내 옆에 서 있던 엘라임이 물어왔다. "아는 놈이냐?" "아니, 안다기 보다는... 한번 마주친 놈인데..." 그 마주침이 절대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엄청 얄미운 놈이라 그냥 가고 싶었지만, 그 마음 보다는 그가 관련된 것이 틀림 없는 이 상황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기에 가는 대신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이런 내 마음을 알아챈 것인지 먼저 제안해 왔다. "자자, 우선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떨까? 여기 이대로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까 말야. 도와준 것에 대한 답례를 하고 싶은데 같이 가겠어?" 그의 제안을 당장에라도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같이 있던 엘라임과 이프리트가 마음에 걸려 그 둘을 돌아보자 이프리트는 싱긋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줬고 엘라임도 마지 못한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좋을 대로 해라." 척 보기에도 '우리는 도둑 집단이요'라고 광고하는 듯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서 나는 이들이 우리를 안내하는 곳도 소설 속에서 흔히 보았던 뒷골목의 어두컴컴하고 음침하고 톡 건드리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은 허름한 건물 안의 비밀의 방일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 내 예상을 깨고 이들이 안내한 곳은 우리가 만난 곳에서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평범해보이는 주택의 뒷문이었다. 어차피 우리가 만난 곳이 크게 풍족하지는 못해도 넉넉하게는 사는 편인 중산층 사람들이 살 듯한 깨끗한 주택가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 곳에 있는 집들은 모두 2층짜리 주택에 아담한 정원이나 텃밭 정도는 넉넉히 꾸밀 만한 앞마당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이 안내한 곳은 그런 집들 중에서도 큰 축에 속하는 주택이었다. "이리로..." 그 주택 안에서는 사람이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가 도착하자 얼른 밖으로 나와서 우리를 보는 사람이 있나 없나 살피는 한편 얼른 우리를 안으로 끌어 들였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우리 셋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향으로 안내되었는데 그 곳은 화려하고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적당하게 우아하고 세련된 맛을 풍기는 응접실이었다. 그곳 가운데 마련된 푹신해 보이는 천 소파에 앉으려는데 나는 이상하게 뭔가가 자꾸 신경을 건드리는 걸 느껴 편하게 앉지 못하고 불안정하게 응접실을 왔다갔다 하며 뭐가 내 신경을 거스리는지 알아내려고 애썼다. 그러자 나와는 달리 편하게 소파에 자리잡은 엘라임이 의아하게 날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래? 뭐가 잘못 됐어?" "아뇨... 잘못된 것은 없는데... 거참..." 응접실을 한바퀴 삥 돌아보았지만 결국 신경이 거슬리는 원인을 알아내지 못한 나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아, 자꾸 뭔가가 신경을 거슬려요. 왜 그러지? 뭔가 되게 거북한데... 아까 뭐 잘못 먹었나? 아 되게 신경쓰이네..." 그러자 엘라임의 맞은 편 소파에 편히 앉아 있던 이프리트가 빙그레 웃으며 설명해줬다. "우릴 지켜보고 있는 시선이 있어서 그래. 그것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거 같은데 너무 신경쓸 필요 없으니까 편하게 앉아라." 이프리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였지만 그 말을 들은 나는 태평하게 '아 그렇습니까?' 하고 앉을 수가 없었다. "에에? 우릴 지켜보는 시선이라고요? 그럼 지금 우리가 감시 당하고 있단 말인가요?" "둔하기는... 그럼 몰랐었냐? 아주 뚜렷하게 기척이 느껴지는 구만..." 한심하다는 엘라임의 말이었지만, 나는 그의 말에 울컥 하기보다는 놀라움에 그의 옆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오오, 그런 것도 느낄 수 있어요? 대단해... 그런 건 오랫동안 수련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줄 알았는데..." "후후, 우린 보통 사람이 아니잖니." 부드러운 이프리트의 대답이 충분히 납득이 되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왜 난 눈치 못 챈거죠?" "멍청하니까." 내 질문이 끝나자마자 그 즉시 튀어나온 엘라임의 대답에 나는 기가 팍 죽었다. "으윽... 그렇다고 그렇게 말하다니... 우웅... 정말 난 둔한가요?" 이프리트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싶어 그를 쳐다보자 그가 난처한 듯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글쎄다... 넌 우리와 다르니 뭐라고 단정하기가 어렵구나. 하지만, 보통 인간에 비하면 예민한 거 아닌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래도 위로해주려고 하는 이프리트의 말을 엘라임이 가차없이 잘라버렸다. "내 기운을 이어받은 거에 비하면 둔한 거야." "윽... 너무해요." 내가 더더욱 기가 죽어서 웅얼거리자 이프리트가 내 편을 들었다. "맞아. 너무하잖아? 우리랑 비교하면 안돼지. 내가 보기에는 보통 인간에 비하면 훨씬 뛰어나구만." "하찮은 인간이랑 어떻게 비교를 해?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하지만, 저 녀석이 둔한 건 사실이야. 아, 글쎄 처음에 여기 데려왔을때 어땠는줄 알아? 아무것도 할 줄 아는게 없어가지고..." 엘라임의 입에서 내가 이 곳에 처음으로 와서 있었던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그래요. 나 못났어요. 그러니까 그만 하자구요. 그건 그렇고 왜 우릴 감시하는 거죠? 우린 자기들을 도와줬는데..." 기껏 화제를 돌리려고 했는데, 엘라임은 이런 나의 의도를 철저하게 뭉개버렸다. "거봐, 이 녀석이 이렇게 멍청하다니까. 인석아, 그건 인간사에 별로 관심이 없는 나라도 알겠다." 엘라임이 계속 날 면박주자 이프리트가 나서서 날 옹호해줬다. "아이고, 그만 좀 해. 성격 하고는... 이 아이는 아직 세상 경험이 없잖아? 우리야 오랜 세월을 살았으니 금방 눈치 챌 수 있는 거고." 그렇게 엘라임에게 한 소리 해준 이프리트는 나에게 시선을 돌려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아무래도 이들은 인간들 관점으로 봤을 때 떳떳이 드러내놓지 못할 일을 하니까 우리가 도와줬다고 해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이상 조심하는 거지. 왜 인간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 라는 말도 있잖아. 혹시라도 우리가 자신들에게 피해를 주게 될지도 모르니까..." 이프리트는 거기에서 말을 끊었지만, 나는 그 뒤에 올 말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한마디로 수 틀리면 우리를 없애려는 거 아닌가? 그들 입장에서 보자면 지극히 당연한 일일테지만, 나는 그들이 괜히 괘씸해졌다. 원래 그 은발의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놈이 별로 맘에 안 들었을뿐더러, 기껏 도와 줬더니만 - 물론 처음부터 그들을 도우려 했던 건 아니었지만... - 이렇게 감시를 해서 사람 신경을 건드리니 말이다. '이거 이거 도와준 사례를 한 몫 단단히 받아내야겠는 걸?' 내가 그렇게 단단히 마음 먹고 있는데 우리가 있는 응접실의 문에 정중하게 노크를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들어오라는 대답도 하기 전에 문이 달칵 열리며 예의 그 맘에 안 드는 은발머리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에 메이드 복을 입은 아가씨가 은쟁반에 도자기로 된 찻잔 세트와 간단한 다과를 담아 가지고 들어왔다. "실례 했습니다. 중요한 손님을 너무 기다리시게 한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그는 아까의 시커먼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있었는데 짙은 파란색 바지와 옅은 하늘색의 얇은 셔츠가 정말 기분 나쁘게도 녀석에게 잘 어울렸다. 하여간 한번 나에게 기분 나쁘게 낙인 찍힌 녀석이라 무엇을 해도 내 맘에 안 들었다. 180은 훌쩍 넘는 키에 - 왜 일케 모두 다 키가 큰 건지 모르겠지만... - 호리호리한 몸매, 허리까지 늘어진 부드러운 은발 머리, 거기에 나보다는 쬐께 못하지만 일반 인들에 비하면 무지 좋은 깨끗하고 윤기가 흐르는 피부,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는 보고 또보고 아무리 봐도 잘생긴 녀석이었다. '생긴거만 따지면 조엘보다 더 잘생겼잖아? 흐음, 하지만 남자다운 거는 조엘이 한 수 위야. 저 녀석은 남자다운 거보다는 쉽게 보지 못할 능구렁이 같은 기운이 풍겨.' 하지만 그 녀석과 깊게 연관하고 싶어하지 않는 나로써는 그가 능구렁이던, 비단 구렁이던 그냥 도와준 사례비만 넉넉하게 챙기고 난 뒤 헤어질 마음이었으니 상관 없는 일이었다. '아, 아니다. 돈을 두둑하게 받아내는데 지장이 있으려나? 안 주려고 머리쓸 테니까 말야. 으음... 상관 없는게 아닌데?' 내가 혼자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그 은발의 녀석은 소파 중앙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메이드 차림의 하녀가 우리 앞의 탁자 위에 자신이 가져 온 것을 내려 놓았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응접실에 있는 이들은 나와 두 정령왕, 그리고 지금 막 들어온 그 은발 녀석 이렇게 넷 뿐인데 하녀가 내려놓은 찻잔의 숫자는 다섯인 거였다. '어라? 그럼 이 하녀도 같이 마신다는 건가?' 내가 이렇게 의아하게 생각 할 무렵 다시 응접실 문에 누가 노크를 하더니 그 사람 또한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을 딸깍 열고 들어왔다. '뭐, 뭐야... 여긴 왜 이렇게 미남들이 많은 거지?' 그 또한 남자였다. 그는 어깨를 조금 넘는 밝은 갈색의 생머리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은발 머리 녀석보다는 약간 작은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졌다. 얼굴은 은발 머리 녀석 못지않게 잘생겼는데 그 보다 약간 더 갸름해서 중성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풍겼다. 그리고... '안경? 헤에, 이 세계에도 안경이 존재한단 말야?' 왼쪽 눈에 외알 안경을 차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몰라도 그는 얼굴은 나보다 대충 3, 4살 정도 많아 보이는데 안경 때문에 더 나이가 많이 들은 듯한 인상을 풍겼다. "실례하겠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해보인 그는 고개를 들자마자 날카로운 눈빛으로 실례가 안 될 정도로 나와 두 정령왕을 살펴 보는 거였다. '오옷, 참모 타입의 남자야. 머리가 좋아보이는데? 그럼 나머지 찻잔은 이 사람을 위한 거였나?' 그가 들어오자 은발의 남자가 우리에게 소개 했다. "저의 가장 절친한 친구 입니다. 제가 도움을 받은 분들을 모시고 왔다고 했던 같이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해서 말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밝은 갈색 머리의 남자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말씀은 들었습니다. 제 친구를 도와주셨다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가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온 그는 은발 머리 남자의 맞은 편에 앉았다. 덕분에 그의 가까이에 있게 된 나는 그에게서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어라? 이 남자...' 그에게서는 약간 진한 바람의 정령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다. '헤에, 정령사였구나. 바람의 정령하고... 음... 희미하지만 땅의 정령 기운도 느껴져.' 내가 그 남자를 새삼스럽게 살피는데 은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드시지요." 그러면서 그가 먼저 붉으스름한 차가 담긴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그래 나도 얼결에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는데, 당연하겠지만 엘라임과 이프리트는 손도 안 대었고 그 밝은 갈색 머리 남자 또한 찻잔에 손을 안 대는 거였다. 그러자 차 한 모금 마신 은발머리 남자가 찻잔을 내려 놓으며 싱긋 웃었다. "훗... 조심 성이 많으신 분들이시군요. 독이라도 탔을까봐 경계하시는 겁니까? 의심을 풀어드리기 위해 제가 시범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의 말에 나는 그제야 아차 싶었지만 이미 한 모금 마신 상태였다. '에구... 뭐, 한 모금이라면 괜찮겠지... 중독 되더라도 아버지랑 아저씨가 어떻게든 해줄테니...' 내가 이렇게 태평한 생각을 하는 와중에 그 은발 녀석 못지 않은 부드러운 미소를 띈 이프리트가 대꾸했다. "그런 경계는 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런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죠." 그러면서 날 바라보는 폼이 네 볼 일을 보라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엘라임과 이프리트는 나 때문에 여기와 앉아있는 거지 이 곳에 올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은발의 녀석은 이런 이프리트의 말을 달리 해석한 모양이다. "호오, 그럼 술을 즐기시는 모양이군요. 그걸로 대접해 드릴까요?" 폼을 보아하니 정말로 그럴 거 같아서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됐네요, 그런거 별로 관심 없으니까. 나는 단지 당신이 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서 따라 온 것 뿐이니까." 처음부터 내가 반말로 나가자 밝은 갈색 머리 남자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하지만, 난 꿀릴게 하나도 없었다. 먼저 반말을 한 건 은발 머리 녀석이었고,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좋은 감정 없는 녀석에게 존대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녀석들이 기분 나빠봤자 뭘 어쩌겠는가? 이렇듯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당당하게 나갈 수가 있는 거다. 이프리트나 엘라임이 가만히 있고 내가 나서서 이 곳에 온 용건을 이야기 하자 은발머리의 남자가 재미있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는데 그 눈은 맨 처음 녀석을 만났을 때의 장난기라고는 하나 없이 냉정, 침착, 치밀한 기색이 가득 들어 있어 나는 솔직히 좀 놀랐다. "호오... 그러니까 나에게 관심이 있었던 거야?" 목소리는 능글맞고 입가에는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지만, 상체를 내밀고 두 팔꿈치를 무릎 위에 댄 채 깍지 낀 양 손으로 턱을 바친 녀석의 모습은 절대 물렁하고 만만한 녀석이 아니라는 오로라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움츠러든 건 아니었기에 나도 마주 씨익 웃어주며 대답했다. "당신 자체가 아니라 당신의 상황에 관심이 있다는 거지." '저 녀석에게 밀린다는 건 내 자존심상 용납할 수 없지.' 제 12화 해인, 취직하다 (2) '저 녀석에게 밀린다는 건 내 자존심상 용납할 수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내 나름대로 치열한 말싸움을 할 거란 예상에 단단히 마음먹고 있는데 허망하게도 날 바라보고 있던 녀석이 싱긋 웃으며 숙였던 상체를 피더니만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등을 대고 다리를 턱 꼬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거기에 한 술 더 떠 무지 아쉽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쳇, 이 외모에 안 넘어오다니... 역시 넌 여자가 아니지?" "저게 주글라고~! 여기서 그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건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거의 반사적이라고 할 만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 바람에 내 바로 앞에 놓여 있던 찻잔이 흔들렸지만, 다행이 넘어지지는 않았다. 나의 이런 강한 반응에 은발 머리 녀석은 약간 과장되게 화들짝 놀라며 사과 했다. "아앗, 미안, 미안... 네 아픈 곳을 찌를 줄은 몰랐는데? 정말 미안해..." 이것도 사과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안 미안한 표정으로 몇번이고 사과해봤자 놀리는 걸로만 보일 뿐이었다. 물론 저 녀석이 일부러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냐, 너. 지금 나에게 시비 거는 거야?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네?" 녀석의 행동에 더더욱 열이 받은 나는 한 술 더 떠서 다리 하나를 탁자위에 올려 놓으며 여차하면 탁자를 뒤엎을 생각으로 녀석을 노려보자 녀석이 얼른 두 손을 내저었다. "이런, 이런... 사과 했잖아. 다시는 안 그럴테니 진정 하라고. 너도 싸우러 온 건 아니잖아?" '돈 받으러 왔지...' 녀석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기에 나는 탁자에서 다리를 내리고 다시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았지만 녀석을 향해 한 마디 하는 걸 잊지 않았다. "네 녀석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냥 싸우는 수도 있는데?" "하하하, 무서운데? 앞으로는 조심하지. 자, 그럼 내가 아까 왜 그런 모습을 보였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그가 본론으로 들어갈 것 처럼 보이자 나는 녀석을 노려보는 걸 그만두고 조용히 그의 입에서 나올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아, 그래, 아까 여러명이 같이 있는 걸 봤으니 나 혼자 난리쳤다고 해도 믿지는 않겠지?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속해있는 단체는 노예매매상만 집중적으로 노리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지." "노예매매상만 터는 도둑 집단이라고?" 나는 역시... 란 생각에 불쑥 물었는데 내 말에 은발 녀석이 인상을 약간 찡그렸다. "도둑이라...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듣기는 좀 그렇군. 그러나 우리가 야밤에 몰래 녀석들의 본거지를 터는 건 이 나라가 노예 매매를 합법적으로 허락하고 있기 때문이지, 노예 매매가 옳은 건 아니잖아? 특히나 조용히 잘 살고 있는 다른 종족의 사람들을 강제로 납치, 혹은 끌고 와서 노예로 만드는 것은 더욱 더." "헤에, 그럼 너희들은 그렇게 노예가 된 사람들을 풀어주는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이야?" 녀석의 말에 '의적'이란 단어를 떠올리며 묻는 내 말에 은발 녀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들은 아니야. 우리는 단지 이종족들을 구해줄 뿐이야." "엥?"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뜨는 날 바라보며 녀석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했다. "물론... 사람들도 가끔 구하기는 하지. 하지만, 그건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는 일부 사람들에 불과해." "그게 무슨 소리야? 노예가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 모두 기회만 있으면 도망치려고 하지 않겠어?" 내 말에 은발 녀석이 피식 웃었다. "뭐,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네 녀석에게 설명해 봐야 알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노예상에게서 탈출해봤자 먹고 살 길이 막막한 녀석은 오히려 노예로 있기를 원한다고. 여자인 경우는 특히나... 노예로 있는다면 힘들 지언정 먹고 살 수는 있으니까. 게다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없으면 한번 탈출을 했다 해도 다시 붙잡히는 경우가 허다하거든. 그러니 인간은 대부분 노예로 남아있길 원한다고." 그의 말에 나는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걸 느꼈다. "설마... 아무리 먹고 사는 길이 막막해도 그렇지, 그래도 노예로 있길 자처하다니 믿을 수가 없어." "훗, 네가 믿던 안 믿던 사실인걸? 우리도 처음에는 유사 인종 구할 때 같이 사람들도 구했었지.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제대로 도망치지 못하고 다시 잡히거나 아니면 다른 노예상에게 잡혀서 노예가 되더군." "그런..." 왠지 힘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는, 너무 냉정한 사회의 한 면을 보는 것 같아 착잡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는데 내 옆에 있던, 그 동안 가만히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밝은 갈색 머리의 남자가 내 옆에 앉은 뒤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자신을 지킬 힘이 없으면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약육강식... 이라는 거죠." 그의 냉정한 말에 응접실 분위기가 잠시동안 차가워졌다. 이 사람은 아무래도 사회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그게 현실적인 거겠지만, 그래도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는 건 너무 슬픈 일 같았다. 아직 20살도 안 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게 차가워진 분위기를 좀 바꿔보고자 은발 머리 녀석이 좀 과장되게 활기찬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핫핫, 저 녀석이 좀 냉정해서 말야. 너무 신경쓰진 말라구. 어쨌든 우린 노예 매매상에게 잡힌 유사 인종들을 구출해내서 그들이 살고 있던 곳으로 돌려 보내는 일을 하고 있어." 녀석의 말을 들어보면 녀석이 속한 집단이 꼭 의적의 집단 같았지만, 나에게 미운 털이 박힌 녀석이 정의로운 - 물론 법을 어기는 거지만... - 일을 한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도 않고, 믿고 싶지도 않아서 내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자 그가 삐질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핫핫, 물론... 조금 댓가는 받고 있기는 하지..." "조금?" 내침김에 더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묻자 녀석이 다시 삐질 웃으며 말했다. "핫핫... 그러니까... 우리 집단을 운영하는 정도는... 물론, 좀 풍족하게..." "훗, 챙길 건 다 챙긴다는 소리네?" 녀석이 오로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사도가 아니라는 걸 알자 무지 기분이 좋아진 내가 생긋 웃으며 말하자 은발 녀석이 마주 생긋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도 먹고 살아야지. 설마 날 정의의 사도로 생각한 거야? 난 이래뵈도 계산은 철저한 놈이라 이득이 없는 일에는 안 움직여." "후후, 그렇지?" 녀석의 말에 더욱 더 기분이 좋아진 -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생각하니 무지 기분이 좋았다. -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은발의 녀석이 더욱 더 진한 미소를 씨익 지어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너 아까 보니까 상당히 강한 정령사던데 우리 집단에 들어오지 않겠어?" "에에? 내가?" 나를 가르키며 눈을 둥그렇게 떠 보이자 은발의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옆에 앉아 있던, 두 정령왕을 바라보았다. "두 분도 같이 들어와주시면 더욱 좋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정령왕은 한꺼번에 입을 열었다. "필요 없어." "미안하지만... 관심 없군요." 그렇게 매몰차게 단번에 거절을 했건만 은발 녀석은 마치 예측을 했었다는 양 실망한 기색을 조금도 내 비치지 않은 채 수긍했다. "뭐, 싫으시다면 강요 할 수는 없지만..." 그러면서 날 바라보는 폼이 나는 자신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너는 어때? 너만이라도 들어온다면 상당한 전력이 될 거야. 네가 아까 불러냈던 그 정령... 정령사들에게 전설로만 내려오던 최상급 정령이었지?" 정령은 하, 중, 상급은 이 세계에서 활동하다보니 이쪽 세계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지만, 최상급 정령은 활동을 정령계에서 하다보니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게다가 정령왕 다음으로 불러내기도 힘든 정령이라 - 사실 상급 정령사라고 하면 7서클의 마법사와 동급으로 보기 때문에 최상급 정령을 불러내는 건 8서클에 도달하는 것으로 같이 취급 된다. - 계약을 맺는 사람도 100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 하기 때문에 정령왕과 함께 전설로 취급되고 있다. 하지만, 정령의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녀석이 정령사들 사이에서도 전설이다 시피한 최상급 정령을 알자 나는 되게 의아했다. "호오, 당신은 정령사가 아닌 거 같은데 어떻게 알았지? 아아..." 하지만 곧 내 옆에 앉아 있던 갈색 머리의 남자의 존재를 의식한 나는 그가 뭐라 말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정령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정령사인 그의 친구가 말해주면 얼마든지 알 수 있을테니 말이다. 내가 밝은 갈색 머리의 남자를 힐끗 거리며 수긍하자 은발 녀석이 맞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저 녀석도 정령사거든. 이미 알아챈 것 같지만... 어쨌든, 어때?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어? 물론 보수도 네 능력에 맞춰서 충분하게 지급될 거야." 내 어떤 면을 보고 자신의 말을 들을 것이라 생각한 건지 모르겠지만, 은발 녀석은 되게 자신만만했다. 그 모습이 또 무지 못마땅했던 나는 녀석이 원하는 대답과는 정 반대되는 단어를 내뱉었다. "싫.어." 악센트까지 넣어가면서 말이다. 제 12화 해인, 취직하다 (3) "싫.어." 악센트까지 넣어가면서 말이다. 내가 이프리트나 엘라임 처럼 단칼에 거절할 줄은 몰랐던지 은발 녀석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되게 당황한 모양이었다. "싫다고? 아니 왜?" 그래서 나는 녀석의 그 당황해 하는 모습을 즐겁게 구경하며 대답해줬다. "당신 밑에서 일하는 거잖아. 그건 절대로 싫어. 나 보고 당신 명령을 들으라고? 사양할래." 내 말에 한순간 벙 찐 얼굴을 하던 은발 녀석이 곧 이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풋, 푸하하하~~ 큭큭큭... 아하하하... 그, 그런 이유였어?" "뭐냐, 그게 그렇게 웃겨? 아니, 그럼 그거만큼 네 제의를 거절 할 더 중요한 이유가 어딨어?" "하하하, 맞다, 맞아. 그거 보다 더 큰 이유는 있을 수가 없지." 무지 재미있다는 듯이 손으로 무릎을 치며 웃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아까의 기분 좋았던 감정이 싸악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래서 냉정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대답했으니까 됐지? 이만 가겠어." 그화 함께 나를 따라왔을 뿐인 이프리트와 엘라임이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 갈 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내 옆에 앉아 있던, 과묵한 갈색 머리의 남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뭐라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보다도 먼저 은발 머리 녀석이 나를 제지했다. "잠깐만 기다려봐." 힐끗 돌아보니 녀석은 하도 웃어서 흘러 나온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고 있었다. 그 모습이 더욱 더 아니꼬왔던 나는 배배 꼬인 어조로 물었다. "뭐냐, 너?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어?" 그러나 은발 머리 녀석은 이런 내 배배꼬인 음성에 전혀 개의치 않고 싱긋 웃으며 대답하는 거였다. "물론, 너 같은 능력자를 그냥 놓친다는 건 너무 아깝잖아?" 아주 시원한 어조로 말한 녀석은 거기에 살짝 윙크까지 곁들이는 거였다. 마치 여자를 꼬시려는 것 처럼 말이다. 아마 녀석에게 악감정을 가지지 않은 보통 여자라면 얼굴을 붉힐 만한 모습이었지만, 녀석에 대한 악의로 똘똘 뭉친 나는 단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내 능력을 높이 봐주는 건 고맙지만, 아무래도 네 녀석 밑에서 일하는 건 싫다구." 그러자 은발 녀석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다시 한번 제안했다. "좋아. 밑에서 일하는게 싫다면 일을 의뢰하는 방식은 어떨까? 나는 너에게 일을 부탁할 뿐, 그 일을 하는 모든 과정에서 전혀 터치하지 않겠어. 물론 네가 요청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도와줄테지만 말야. 그리고 보수는 일을 끝낸 후에 흥정으로 결정하는 거야, 어때?" 녀석의 입장에서는 꽤 많이 양보하는 듯한 제안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내키지가 않았다. "그것도 싫어. 어차피 네가 나에게 일을 맡기는 식이고 내가 어떻게 하든 전혀 상관 안 하겠다고 하지만, 네가 시킬 일을 전혀 모르는 내가 나 혼자 어떻게 일을 해내냐? 어차피 네 도움을 받을 테고 그러면 알게모르게 네 지시를 따라야 하잖아. 게다가 너와는 같이 일하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아."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 세계는 물론 이 도시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이 곳에 와서 교육을 받은 거라고 해도 다른 나라의 수도에서 겨우 6개월, 그것도 저택에 콕 쳐박혀서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좋은 제안을 해줘봤자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는 오히려 부담만 될 뿐이었다. 차라리 내 입장에서는 아까처럼 녀석의 밑에 들어가는 게 더 좋은 제안이지만, 녀석의 밑에 들어가는 건 무지 싫으니 어차피 녀석의 제안은 나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그렇게 내가 다시 한번 거절하자 녀석은 포기했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 했다. "후우... 그래... 뭐, 정 내키지 않는 다면 하는 수 없지. 하지만, 정말 아쉽군.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되게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말하는데 나는 거기에다 대고 '그럼 우리는 갈테니까 우리가 도와준 사례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맘에 안 드는 녀석이라고 해도, 내 능력을 높이 사서 자기 딴에는 좋아 보이는 제안을 두번이나 했는데 나는 그걸 단칼에 거절해버렸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속으로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며 나는 녀석에게 작별을 고했다. "자, 그럼 볼 일은 끝났으니 이만 가볼께. 다시 만나면 인사는 해줄게." 그러자 이 은발 녀석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이상하게 대꾸하는 거였다. "말은 고맙지만, 우리는 다시 만날 일은 아마 없을 거야." "뭐? 으힉~!!" 녀석의 말에 이상함을 느낀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으려는 찰나, 일어났을 때 내 옆으로 와 있었던 이프리트가 정말 번개 같은 속도로 내 팔을 잡아서 날 자신의 곁으로 끌어 당기는 거였다.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런 질문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전에 내 목 바로 옆을 샥~! 하고 지나가는 어떤 물체 때문에 쏙 들어가 버렸다. 얼른 고개를 돌려보니 내 옆에 앉아 있던 그 밝은 갈색 머리의 녀석이 어느새 나에게서 훌쩍 멀어진 채 손가락 사이야 폭이 손가락 굵기 보다 약간 더 큰 단검을 끼운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냐..." 내가 무지 당황한거에 비해 되게 태연하고 침착한 엘라임이 덤덤한 어조로 그 은발 녀석을 향해 물었다. 그러면서도 내 옆으로 다가오는 폼이 여차 하면 날 보호하겠다는 태새였다. 그런데 그러는 와중에 응접실 문이 콰당 하고 열리면서 눈을 제외한 온 몸을 시커먼 옷으로 감싼 시커머스 십여명이 우르르 달려 들어오는 거였다. "이게 무슨 짓이야? 기껏 도와준 은인에게 이럴 수 있는 거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리를 해치려고 하는 녀석들의 태도에 너무 기가막힌 내가 은발 녀석을 노려보며 외쳤지만, 녀석은 내 말에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생글 생글 거리며 대꾸했다. "우리를 도와준 은인이라 살 기회를 주기 위해 제안까지 했잖아. 내가 무척 양보하면서 말야... 그런데도 그 제안을 거절한 건 바로 너야. 나도 무척 아쉽다고." "뭐, 뭐시라?" 너무 기가 막혀서 말까지 더듬는 나에 비해 은발 녀석은 너무나 얄미우리 만치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거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는 이 나라의 법에 접촉되는 행위를 하고 있는데다, 말은 안 했지만 우리에게 원한 가진 녀석들도 많아서 말이지. 우리 얼굴을 알고 하는 일도 알게 된 이상 너희들을 고이 보내줄 수가 없어. 나를 원망하고 저주해도 좋으니까 얌전히 죽어만 줘." 그래서 나도 녀석을 마음껏 비웃어줬다. "하, 정말 바보 아냐? 너 우리를 너무 얕보는 거 아니냐? 나만 해도 최상급 정령사라고. 내 힘만으로도 여기를 탈출하는 건 물론 이 집을 다 부셔 버릴 수도 있다고. 그런데 우리를 죽이겠다고?" 그러자 내 말에 녀석은 당황하기는 커녕 오히려 여유만만한 얼굴로 피식 웃어 보였다. "그렇게 대단한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겨우 매직 미사일을 막지 못해 쩔쩔맨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익~!!" 맞는 말이었기에 내가 뭐라 말하지 못하고 이빨만 빠드득 가는데 녀석의 말이 이어졌다. "게다가 우리는 미안하지만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우리가 아무런 준비 없이 너희를 여기로 불러 들였을 거라고 생각해?" "뭐? 무슨..."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내가 혹시 뭔가를 놓친건 아닌지 몰라 주춤 거리며 사방을 살펴 보았지만, 나를 비롯한 두 정령왕을 위협할 만한 어떤 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있다면 오로지 우리 눈앞에서 무기를 들고 있는 녀석들 뿐이랄까? "무슨 준비를 했다는 거야? 네가 말하는 준비란 저 녀석들이냐?" 그래도 혹시나 몰라 내가 은발 녀석을 향해 묻자 대답은 이프리트에게서 흘러 나왔다. "혹시... 마법진을 말하는 거냐?" "예?" 뜬금 없는 소리에 이프리트를 바라보니 그가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이 방 전체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을 말하는 거란다. 안티 매직 쉘이라고, 이 마법진이나 마법 법위 안에 있으면 마법을 전혀 못 쓰거든." "정말요? 어디예요?" 그의 말을 듣고도 다시 한번 둘러 보았지만, 내 눈에는 마법진은 커녕 그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내 모습이 엄청 띨띨해 보였는지 은발 녀석이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설명해줬다. "너 바보냐? 그런걸 누가 눈에 띄게 냅두겠어? 모두 가구나 장식장, 양탄자 같은 것으로 안 보이게 가렸지. 어쨌든 대단하시군요. 그런 걸 알아채는 걸 보면, 당신은 마법사이십니까?" "마법사는 아니고... 술사라고 할 수 있겠군요." 술사란 말은 내 마법 스승인 노만에게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술사란 태어 날 때부터 물, 불, 바람, 대지를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물을 움직일 수 있으면 물 술사, 바람을 움직일 수 있으면 바람 술사로 불리는데 이들이 그렇게 물이나 바람을 움직이는 원동력 또한 마나라고 한다. 내가 물을 움직일때 엘라임에게서 받은 물의 정령 기운을 사용하는 것 처럼 말이다. 오랜 옛날 아직 마법이 많이 퍼지지 않았을 때에는 이러한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 '술사'라는 이름으로 많이 활동을 했었지만, 마법학이 많이 퍼진 이후에는 이들이 마법에 선천적인 재능을 타고난 아이들로 인식되어 마법학계에서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세계에 스카웃(?) 하기 때문에 지금은 순수한 술사들은 보기 힘들다고 한다. 뭐, 모두 마법을 배우면서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겠지만 대부분 자신의 능력을 개발 하는 것 보다는 마법에 정진하는 것이 더 큰 힘을 얻기 때문에 순수하게 자신의 능력만 개발하는 이가 드물어 졌기 때문이다. 가끔 마법사의 길을 버린 자들 중에서 술사의 능력을 발휘하는 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정말 드문 경우라고 한다. 왜냐하면 마법사는 자신의 마법적 지식과 마나만 있으면 어디에서건 마법을 시전할 수 있지만, 술사들은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물체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 술사라면 근처에 물이 있어야 하고, 바람 술사라면 바람이, 불 술사라면 불이 주변에 있어야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노만에게서 그러한 설명을 들었을 때 완전히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하긴 그러고보니 엘라임은 물을 다루고 이프리트는 불을 다루니 술사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단지 물이 있고 없고, 불이 있고 없고에 하등 상관 없다는 것만 빼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걸 알리 없는 은발 녀석은 비죽이 웃었다. "그러십니까? 뭐, 당신이 어떤 술사이든 상관 없습니다. 아니, 마법사였다고 해도 상관 없군요. 안티 매직 쉘 마법진이 있는 이상 이 곳에서는 어떤 마법은 물론 술법도, 정령술도 - 정령술도 기본적으로 마나를 사용하여 정령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 - 사용할 수 없을테니까요. 이 방은 오직 자신의 육체적 능력만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이거든요. 그리고, 우리들은 그 육체적 능력에 자신 있지요." 한 마디로 우리의 능력은 모두 봉쇄 되었다는 말이었지만, 나는 그의 말에 분해 할 겨를도 없이 급히 내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으엑..." 내 가슴은 언제 볼록(?) 했냐는 듯 어느새 납작 가슴으로 돌아와 있었다. "히잉..." 울상을 지으며 재빨리 팔짱을 껴 가슴을 가렸지만, 너무 늦은 행동이었고, 오히려 덕분에 '갑자기 왜 저래?' 라고 하는 듯한 시선만 잔뜩 받았다. 내가 이러는 것에는 상관 없다는 듯 은발 녀석은 잠깐 나에게 향했던 시선을 이프리트와 엘라임에게 보내더니 씨익 웃으며 최후의 말을 던지듯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작별의 시간이군요." 그 말이 신호라도 되는 듯 십여명의 시커먼스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르르 달려들던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뒤로 와르르 물러났다. 그들이 채 우리에게 닿기도 전에 엘라임 주위에서는 거대한 물기둥이 소용돌이 치며 치솟아 올랐고, 이프리트의 주위에서는 거대한 화염 기둥이 화르르 치솟아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 작별의 시간이긴 작별의 시간이지." 엘라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날 돌아보았다. 녀석들을 살릴지 죽일지 결정하라는 듯 했다. "음... 그래도 받을 건 받고 처리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당장에 처리하자는 대신 어물 거리며 주저하자 엘라임이 얼굴을 찡그리며 한마디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무지 경악한 은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안티 매직 쉘의 범위 안에서 마법을 쓰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다. 안티 매직 쉘은 6클래스의 마법이기 때문에 그 이상의 서클을 가진 마법사라면 안티 매직 쉘 마법을 깨트리고 마법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정령왕은 당연하겠지만 그 보다 더 윗단계의 존재들이었기에 쉽게 물과 불의 기둥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은발 녀석은 이들이 정령왕이라는 걸 모르고 단지 술사라고만 알고 있었으니 마법진을 눈치 챘다고 해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던 거다. 이프리트는 경악하는 은발 녀석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당신들이 이 아이의 목숨을 노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눈빛이 매섭게 변하는데, 부드러운 어조로 살벌한 말을 하는게 되게 안 어울리면서도 차갑게 말하는 것 보다 더욱 더 살 떨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 보다도 이프리트의 나를 생각하는 그 마음에 헤벌죽 웃음이 나왔다. 내가 그러는 동아 이프리트는 긴장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는 자들을 향해 서서히 자신의 팔을 들어올렸고, 천천히 올라가는 그의 팔에는 작은 불꽃이 일어나더니 그의 팔을 따라 회전하면서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제 12화 해인, 취직하다 (4) 내가 그러는 동아 이프리트는 긴장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는 자들을 향해 서서히 자신의 팔을 들어올렸고, 천천히 올라가는 그의 팔에는 작은 불꽃이 일어나더니 그의 팔을 따라 회전하면서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뒤로 물러나!" 그 모습에 잔뜩 긴장한 표정의 은발 머리 녀석이 앞으로 한걸음 나서며 어디서 가지고 왔을 모를 검을 치켜들었다. 그 녀석도 호리호리해서 운동과는 거리가 먼 관리직에 있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녀석이 치켜든 검은 보통 검보다 폭이 약간 좁은 것이었는데, 그의 가슴까지 올라온 검 끝으로 부터 천천히 희미한 하얀 빛무리가 나타나 검을 감싸기 시작했다. "어라? 검에서 빛이 나네?"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모습에 두 눈이 휘둥그래진 내가 중얼거리자 이프리트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검기라는 거란다. 검술에서도 높은 단계에 이른 자만이 사용할 수 있지. 하지만, 내 상대는 아니야." '헤에, 저게 검기?' 내가 그렇게 신기해 하는 동안 이프리트는 이제는 커다란 화염이 된, 자신의 손바닥 위로 모인 불덩어리를 마치 장난감 공 던지듯 가볍게 던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갑자기 엘라임이 나서서 이프리트의 앞을 가로 막는 거였다. "저 녀석들은 내가 처리한다." "뭐?" 황당해하는 이프리트를 힐끗 돌아본 엘라임은 다시 은발을 비롯한 잔뜩 긴장한 녀석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 놈들은 내 아이를 해하려 한 놈들이아. 그러니 내가 처리하겠어. 너는 물러나 있으라고." 절대로 양보 못한다는 듯한 단호한 엘라임의 말에 이프리트는 피식 거리며 화염을 거두고 내 옆으로 물러났다. "그래, 그래. 내가 물러나지." 그러면서 나를 돌아보더니 눈을 살짝 찡긋 하는 거였다. 그래서 나도 그냥 피시식 웃어줬다. 앞으로 나선 엘라임은 녀석들을 향해 한번 코웃음을 날려주고는 오른 팔을 옆으로 들어 살짝 앞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엘라임의 손짓에 따라 아까 엘라임이 자신의 힘을 나타냈을 때 천장에 닿을 정도로 치솟았던 물기둥이 옆으로 쫘악 늘어나더니 마치 폭풍우가 칠때의 그 거대한 파도처럼 녀석들을 덮쳐가는 거였다. '오옷, 저것은 웨스트모어랜드 후작가의 성에서 보여줬던 여러명을 한번에 후려치는 비법....' 몇몇의 몸 놀림이 빠른 자들은 재빨리 문 밖으로 튀어 나가거나 아니면 소파 같은 가구 뒤로 숨어 자신을 덮치는 재앙을 피해냈지만, 미처 반응 못한 몇몇의 인물들은 거대한 물결에 정통으로 맞아 튕겨 나가다가 벽에 부딪혀버렸다. 콰앙~!! "크어억~!!" "커윽~!"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커다란 통나무로 문을 부수는 것만 같은 큰 소리가 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에구... 아프겠다...' 그 와중에 몸을 피한 몇몇의 인물에 포함된 밝은 갈색 머리의 남자는 물결이 자신을 향해 달려들자 훌쩍 소파 위로 뛰어 올라 그 소파의 등받이 부분을 재차 박차고 다시 한번 허공으로 날아올라 물결을 훌쩍 뛰어 넘었다. 그리고 그것 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채 밑으로 떨어질 때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단검 세개를 한꺼번에 엘라임을 향해 던지는 거였다. "위험~!!" 엘라임은 자신에게 단검 세개가 쇄도해 온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척까지 다가왔음에도 태연한 얼굴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래 곁에서 보고 있던 내가 더 다급하여 뭘 어떻게든 하려고 몸을 움직이려 하는데 그걸 이프리트가 막았다. "괜찮아, 괜찮아." "예?" 단검이 코 앞까지 날아왔는데도 가만히 있는 것이 무엇이 괜찮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막 이프리트를 향해 항의하려는 찰나, 결국 단검은 엘라임을 찔러 들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엘라임을 통과하여 마루 바닥에 꽂히고 말았다. "엥?" 그 모습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멍청해진 나를 향해 이프리트가 다정하게 웃으며 설명해줬다. "훗훗훗, 우리에게는 물리적인 힘이 통하지 않는단다. 단지... 저런 마나를 머금은 힘이라면 몰라도..." 그러면서 이프리트가 가르키는 다른 한쪽의 허공에서는 흰 빛으로 감싸인 검을 엘라임을 향해 겨눈 채 떨어지는 은발 머리의 녀석이 있었다. "오옷, 시간차 공격~!!" 그 밝은 갈색 머리의 녀석의 공격은 아마도 시선을 끌기 위한 것이고, 이번 은발 머리의 녀석의 공격이 진정한 공격일 터였다. 친구라더니만 호흡이 척척 맞는 녀석들이었다. "흥!" 그러나 엘라임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단검을 신경도 안 쓴 것처럼, 매섭게 달려드는 은발 녀석을 향해서도 힐끔 시선만 던지고는 코웃음만 날려주는 거였다. 대신, 은발 녀석이 치켜든 검이 엘라임에게 닿기도 전에 바닥에 잔뜩 고인 물에서 갑자기 하나의 물줄기가 치솟아 오르더니 그대로 허공에 무방비로 있는 은발 녀석의 복부를 꿰뚫어 버렸다. "커윽~!!" 덕분에 엘라임을 노렸던 그의 검은 엘라임으로부터 약 한뼘 정도 떨어진 허공에서 딱 멈추더니 그대로 밑으로 떨어졌다. "와우..." 피 튀는 그 모습에 내가 다시 한번 눈쌀을 찌푸리는데 엘라임은 자신의 발 밑으로 떨어진 녀석을 향해 무정하게도 물줄기를 다시 한번 쏘아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물줄기가 은발 녀석에게 닿기도 전에 저쪽에서 단검이 날아와 물줄기를 튕겨내었고, 그 틈을 타서 은발 녀석은 자신의 복부를 움켜진 채 황급히 몸을 굴러 그 자리를 피해냈다. "아앗, 물줄기를 튕겨 냈다?" "검기를 머금은 단검이었거든." "헤에..." 밝은 갈색 머리의 녀석 또한 검기를 다룰 정도의 경지에 다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알자 나는 녀석이 다시 보였다. 하기야, 여차하면 우리를 해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리를 상대 할 사람을 아무나 보내지는 않았을 터였다. 아마도 저 밝은 갈색 머리와 은발 녀석이라면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를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여겼을 거다. 밝은 갈색 머리가 있는 쪽까지 몸을 피한 은발 녀석은 비틀 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노려보았다. 그가 비틀 거리자 시커먼스 한 사람이 얼른 부축하려고 했지만, 은발 녀석이 자존심 상하는지 뿌리치고 자신의 힘으로 똑바로 섰는데, 손으로 감싸쥐고 있는 복부에는 피가 흥건했고 입에서도 가느다란 피 한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훗... 이건 정말 예상 외군요. 이렇게 강한 분들인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알았더라면 조금 더 철저하게 준비를 했을텐데..." "뭘 어떻게 준비하건 소용 없었을 거다." 엘라임의 냉정한 대답에 은발 녀석이 입술 끝을 올리며 비죽이 웃었다. "훗, 그렇습니까? 아주 자신만만 하시군요. 하지만, 저도 자신있게 말씀 드리겠는데, 당신이 여기 있는 우리들을 처리한다 하더라도 쉽게 이 저택을 빠져 나갈 수는 없을 겁니다." "웃기는군. 하프 엘프 주제에 죽기 전에 발악이라도 한번 해보겠다는 거냐?" 엘라임의 말에 은발 머리 녀석과 밝은 갈색 머리 녀석의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치켜 떠졌다. 하지만, 그들은 곧 엘라임이 범상치 않은 자였기에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을 거라 여겼는지 곧 침착함을 되찾았지만 나는 달랐다. "에엑? 하프 엘프? 저 사람들이 하프 엘프 였어요?" 나의 놀람에 찬 외침에 엘라임은 날 힐끗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프리트는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아니 모두는 아니고 저 은발을 하고 있는 이와 밝은 갈색 머리의 이만이 엘프의 피가 흐르고 있단다. 몰랐니?" "예에... 와... 하프 엘프래. 진작 좀 말해주지 그랬어요?" 내가 무지 신기해 하자 밝은 갈색 머리 녀석의 눈초리에 분노의 기색이 감돌더니 가시가 잔뜩 돋힌 말투가 튀어 나왔다. "하프 엘프가 그리도 신기한가? 미안하지만 우리는 구경거리가 아니다." 예전에 그것 때문에 맺힌게 많았는지 원한 가득한 그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서 사과하려고 입을 열었다. "에엣, 아니... 나는 그런 뜻이 아니고... 나는 나 말고 나와 같이 엘프의 피를 이어받은 이를 만난 게 너무 반가워서..." 하지만 나는 곧 녀석들의 냉담한 눈초리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안타깝군. 너도 하프 엘프였을 줄이야... 하지만, 우리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다." 은발 녀석의 냉담한 말에 나는 힘 없이 한숨을 내쉬는데 엘라임이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인아." "예?" "이 녀석들은 안 봐줄 거다. 저번의 그 녀석들이야 너에 대한 살기가 없는데다 네가 원하지 않으니 봐줬다만, 이 녀석들은 널 해하려 한 놈들이다. 하프 엘프던, 그냥 엘프던 그 댓가를 치르게 할 거다." 냉정하고 단호한 엘라임은 나에게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든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매서운 기새를 뿜어냈다. 그 기세가 얼마나 강했는지 응접실 안에 있던, 아까 엘라임의 물결 공격을 겨우 겨우 피해냈던 유리로 된 제품이나 도자기등의 깨지기 쉬운 장식품들이 와장창 깨져 버렸다. 아마 유리창이 있었다면 그 또한 견디지 못하고 모두 깨졌을 거다. 그리고 앞에 있는 녀석들도 엘라임의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해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는 녀석들도 있었다. '아아... 눈 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보는 건 싫은데... 그렇다고 엘라임을 말리기도 그렇고... 다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고 외면해야 하나?' 그나마 여기가 바다 속도 아니고, 엘라임이 이 곳에서 힘을 자유 자재로 사용할 수 없기에 망정이지 만약 저번에 나에게 정령의 기운을 깨우치게 한다고 힘 쓸때 처럼 기운을 내뿜었으면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을 거다. 내가 이렇게 갈등하는 동안 엘라임이 끝장을 보려는 듯이 녀석들에게 한발 다가갔다. 그러자 그때 뒤로 한 걸음 물러났을 뿐 엘라임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아도 버텨내고 있던 밝은 갈색 머리의 녀석이 단검을 치켜들더니 기합성을 지르며 엘라임에게 달려들었다. "이야아압~!!" "흥~!!" 하지만 그렇게 온 몸을 던지며 해오는 공격도 엘라임에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는지 엘라임은 코웃음을 치며 물 줄기 하나를 녀석에게 쏘아 보내는 것에 그쳤다. 어차피 그 물줄기는 엘라임의 조절을 받아 유도 미사일 처럼 녀석이 어디로 피하던 끝까지 쫓아갈 거였다. 역시나, 녀석이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는 물줄기를 얼른 고개를 숙여 피하자, 녀석의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갔던 물줄기가 다시 머리를 틀어 녀석의 등을 향해 달려 들었다. 뒤에서 보고 있던 은발 머리를 비롯한 시커먼스들이 그 모습에 경악성을 토하자 밝은 갈색 머리 녀석은 자신의 뒤에서 물줄기가 공격해 들어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얼른 바닥을 굴러 다시 한번 피해냈다. 그리고 곧바로 일어나서 엘라임에게 달려드는 거였다. 하지만 그는 채 몇 발자국도 가지 못해서 그의 허벅지를 물줄기에 꿰뚤려야 했다. 그가 서 있는 바닥은 엘라임이 불러낸 물천지였기에 물줄기는 어디에서든 솟아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크윽~!!" 그러나, 그때 그 밝은 갈색 머리의 녀석은 고통에 찬 신음을 내 뱉으며 힘 없이 옆으로 쓰러지는 척 하면서 엘라임을 비롯한 나나 이프리트가 경계를 거둔 틈을 타서 번개같은 솜씨로 단검을 던졌다. 그런데, 정말 황당하다고 해야 할지, 놀랍다고 해야 할지 그 단검은 엘라임을 향하여 날아간 것이 아니라 그와 좀 떨어져서 사태를 바라만 보고 있던 나에게 날아왔던 것이다. "으엑~!!" 내가 단검이 나에게로 날아왔다는 걸 알아차린 건 이프리트가 얼른 날 잡아 자신에게 끌어당기고 날아오는 단검을 불꽃으로 휘감아 멈추게 해 바닥으로 떨어뜨린 뒤였다. "어우..." 불에 타 시커멓게 그을린 채 떨어진 단검을 바라보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고 있는데 그 순간 고통에 찬 비명이 들려왔다. "커억~!!" 놀라서 고개를 들어보니 엘라임이 열받아서 그 갈색 머리 녀석의 옆구리를 직접 발로 차서 날렸던 것이다. 얼마나 세게 찼는지 녀석은 말 그대로 공중을 붕 떠서 녀석의 편이 있는 곳에 가서 털썩 떨어졌다. 그나마 시커먼스 녀석들이 재빨리 몸을 날려 녀석을 받아내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바닥에 그대로 나가 떨어질 뻔 했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원하는 대로 죽여주지." 엘라임의 말이 끝나자마자 수십개의 물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녀석들이 어찌 할 틈도 안 주고 한꺼번에 처리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이제야말로 정말 시체를 보게 되는 구나... 하며 걱정 반 불안 반으로 지켜보고 있는 그 절대 절명의 순간 고운 미성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날아왔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응접실의 거의 떨어져서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문을 통해 가냘픈 인영이 손살같이 뛰어 들어와 엘라임의 앞에 엎드렸다. "부탁입니다, 위대한 존재시여." 밝은 녹색의 길다란 생머리를 가진 그 아름다운 이는 머리카락을 뚫고 나올 정도로 길고 뾰족한 귀를 가지고 있었다. "엘프?" 놀람에 찬 내 물음에 확인이라도 해주는 듯한 엘라임의 물음이 곧바로 들려왔다. "뭐냐, 엘프여. 내 앞을 가로막다니, 너도 죽길 원하는 건가?" "감히 제가 위대한 존재의 앞을 어찌 가로막겠습니까? 그러나 잠시만, 잠시만 아량을 베푸시어 제 말을 좀 들어주십시오. 이렇게 부탁 드립니다." 엘라임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던 엘프는 다시 한번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갑자기 나타난 처음 보는 엘프가 다짜고짜로 애원조로 나오니 의아하기도 했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호기심도 있었기에 나는 엘라임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뭔지는 모르지만 한번 들어보는게 어때요?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닌데..." 제 12화 해인, 취직하다 (5) "뭔지는 모르지만 한번 들어보는게 어때요?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닌데..." 엘라임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작게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다. "쯧쯧, 무르긴... 그런 건 엄마를 그대로 닮았군..." 하지만 혹시나 가만 있다가는 은발 머리 녀석이나 혹은 그 동료 녀석들이 기회를 엿봐 도망갈까봐 문에다가 두꺼운 물의 막을 쳐 놓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봐라." 엘라임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 엘프는 너무 고마워 하면서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위대하신 존재시여." "아, 저기 말 하려는데 미안하지만... 이 분이 누군지 아세요?" 자꾸 엘라임보고 '위대한 존재, 위대한 존재'라고 하는 그 엘프의 모습에서 나는 그 엘프가 정말 엘라임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의아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 엘프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 또한 엘프의 피가 흐르는 자군요." 잠깐 보는 것 만으로도 척 알아채자 나는 입이 떠억 벌어졌다. "오옷, 아니,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그러자 항상 나에게 친절한 이프리트가 이번에도 나서서 다정하게 설명해 줬다. "엘프는 다른 종족 보다 육감이 상당히 발달해 있단다. 상대방이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있어도 느낌으로 이 사람의 기분 상태를 알 정도거든. 그렇기에 엘프 앞에서는 거짓을 말하지 못하지. 거짓을 말한다는 걸 느낌으로 알 수가 있으니까. 그래서 엘프를 진실의 종족이라고도 한단다. 엘프들 사이에서는 거짓을 말해봤자 금방 알아채니 거짓을 할래야 할 수가 없는 거야. 그러다보니 항상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예 엘프의 문화가 되어 버렸지." "아, 그래서 나에게 엘프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고, 아버지의 정체도 알아챈 건가요?" 이프리트의 설명에 내가 다시 한번 묻자, 이번에는 그 엘프가 대답했다. "아무리 그런 감각이 발달했다고 해도 자세하게 느끼는 건 아닙니다. 단지 막연하게 느낄 뿐이지요. 당신의 몸에 엘프의 피가 흐르는 걸 안 것은, 당신에게서 우리 엘프들 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감각이 희미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에... 그럼 제 아버지는요?" "저분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단지 저희가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의 존재라는 느낌을 받은 것 뿐이지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아마도 드래곤이 아니실런지..." 그 엘프가 그렇게 조심스레 떠보면서 엘라임을 바라보았지만 엘라임은 말해 줄 마음이 조금도 없는지 고개를 휙 돌리며 냉정하게 말했다. "네까짓게 알 거 없다." 그러자 엘프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빌었다. "아,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위대한 존재시여. 당신의 심기를 거스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엘라임 앞에서 조심스러운건 좋은데 그 정도가 너무 심하자 엘라임이 짜증스러운지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래서 나는 엘라임이 뭐라고 하기 전에 얼른 나서서 그 엘프를 재촉했다. "자자, 괜찮으니까요 본론으로 넘어 가자고요.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그러자 그 엘프도 엘라임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 챘는지 얼른 본론을 끄집어 냈다. "아, 예. 저기 그러니까... 부디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뭐? 너도 저 녀석들과 한패인가?" 엘라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그에게서 다시 매서운 기새가 폴폴 피어오르자 엘프는 두려움에 떠는 얼굴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런건 아닙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 "아따, 그만 좀 해라. 이왕 말 들어보기로 했으니 끝까지 들어보는 게 어때? 네가 무섭게 노려보니까 제대로 말도 못하잖아." 엘라임이 무섭게 다그치자 엘프는 더더욱 움츠러들어 말을 못했다. 하긴, 나도 이제야 알아챈거지만 그 엘프는 내 또래이거나 나보다 한 두살 정도 어려보이는 애였다. 나도 엘라임이 정색을 할 때는 무서워서 말도 못 꺼내는데 저 엘프는 어떻겠는가? 그래서 일부러 이프리트가 나서준 듯 했다. "흥!" 역시나, 엘라임은 이프리트에게는 꼼짝도 못하겠는지 기분 나쁘다는 티를 역력히 내면서도 기운을 거두어들였다. 나는 엘라임이 시선을 돌리자 이프리트에게 고맙다는 눈짓을 보낸 뒤 엘프를 격려했다. "자자, 걱정하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해봐요. 끝까지 들어줄테니까." "아, 예. 정말 감사합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푸른 숲의 엘프족인데 인간들의 노예 사냥꾼에게 붙잡혀 이 곳으로 끌려와 평생 인간들의 노리개가 될 뻔 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이도 저들의 도움으로 풀려나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위대한 존재께서 저들을 해하신다면 그 희망이 깨질지도 모릅니다." "흥,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간절한 엘프의 말에도 불구하고 엘라임이 냉정하게 반응하자 그 엘프는 울상이 되었다. "부탁입니다. 제발... 이 곳에는 저 말고도 다른 엘프들은 물론 다른 종족들도 많습니다. 이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데 이제와서 돌아갈 수가 없게 된다면 얼마나 절망하겠습니까?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 잠깐만요. 궁금한게 있는데, 왜 저들이 없으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죠? 당신들은 지금 탈출 한 상태잖아요." 엘프가 애원하는 걸 방해할 생각은 없지만,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의아해서 불쑥 물었다. 그러자 이에 대한 대답은 저 뒤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은발 머리가 나서서 대답했다. "이 나라를 빠져 나갈 능력이 없기 때문이야. 저들만의 힘으로는 어렵지.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간다면 노예증이 없는 엘프들은 당장에 관원들에게 걸려 노예 매매상에게 넘어가든지, 아니면 노예 사냥꾼들에게 붙잡혀 넘겨질 테니까. 이 나라가 이종족의 노예 매매를 합법한 이상, 이 나라에서 이종족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건 불가능해. 마을 하나는 손쉽게 날려버릴 정도의 능력이 있으면 모를까..." "아... 그렇구나. 몰랐어..." 은발 머리 녀석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어디 별세계에서 살다 왔냐? 다른 나라에서 왔다 해도 전 세계 사람이 다 아는 라센 국의 법칙을 모르다니... 정말 이해 할 수가 없군." "냅둬. 나도 나름대로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는 거야. 그런데, 너희들은 노예로 잡힌 이종족들을 구출 해주고 댓가를 받는 줄 알았더니만, 집으로 데려다주기까지 하는 거야?" "그래, 어차피 탈출만 시켜줘봤자 열에 아홉은 모두 붙잡힐게 뻔하니까. 차라리 아예 고향까지 데려다주고 더 많은 댓가를 받는게 저들에게나 우리에게나 좋은 일이잖아." "헤에... 그건 그러네." 은발 녀석의 말에 내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이에 엘프가 힘을 얻었는지 더욱 더 간절한 표정으로 엘라임에게 애원했다. "위대한 존재시여... 제발, 제발 이렇게 부탁 드립니다. 저 뿐만이 아닌 이 곳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당신의 자비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엘프는 엘라임이 그의 말을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결졍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엘라임은 그 엘프를 그냥 무덤덤한 눈으로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할 말은 그거 뿐?" 자신과는 전혀 상관 없다는 듯이, 소 닭 보듯 쳐다보는 그 시선에는 처음부터 그 엘프가 어떤 이야기를 하던 엘라임은 자신의 행동을 바꿀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단지 내가 부탁해서 엘프의 말을 들어주었을 뿐이었다. "예? 아... 예... 그러니까..." 그동안 간절히 말했던 엘프 또한 그것을 알아챘는지 절망에 가득 찬 눈으로 엘라임을 올려다보다 안되겠던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발 좀 어떻게 해달라는 그의 너무나 간절한 눈빛에 나는 뭔가 해주고 싶었지만, 갑자기 뭘 하려니 마땅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허둥대기만 할 뿐이었다. 그에 엘라임이 내가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하자 잠시 멈췄던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시선을 다시 그 은발 머리 녀석 일행으로 돌렸고, 그 엘프는 이제 다 끝났다는 표정으로 처연하게 천장을 올려다봤는데, 그 순간 그 엘프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그 엘프의 하얀 뺨을 타고 내려와 턱에서 방울져 밑으로 떨어지는 그 눈물 방울을 멍 하니 바라보는 순간 내 머리 속으로 물방울 다이아몬드란 단어가 스쳐 지나갔고, 그와 함께 좋은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물론... 내가 이렇게 보석을 좋아하는지도 처음 깨달았고 말이다. "아, 그러고보니 지금 생각난건데..." 한번 손바닥을 짝 마주치며 다급하게 입을 열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고, 엘라임 또한 자신의 행동을 잠시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또 뭔데?" "저 말이예요, 처음 부터 이 곳에 온 이유가 저 녀석들을 도와주는 댓가를 받으러 온 거였잖아요. 그런데 저 녀석들을 그냥 없애버리면 나는 빈 손으로 그냥 돌아 가네요." 그러면서 내 빈 손바닥을 엘라임에게 들어 보이기까지 했지만, 엘라임은 물러나는 대신 다시 은발 녀석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집에 가면 그까짓 보석들 쯤이야 내가 준다고 했잖아." "에엣, 아버지는... 그냥 받는 거랑 댓가로써 받는 거랑 같나요? 게다가 내가 기껏 도와줬는데 그걸 그냥 허공으로 날리기는 싫다구요." 그러자 엘라임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찡그린 얼굴로 날 돌아 보았다. "그러면, 녀석들이 가지고 있는 걸 탈탈 털은 뒤에 마음대로 하라고?" 그에 나는 무지 미안한 표정으로 애교스럽게 웃으면서 한가지 더 덧붙였다. "에헤헤헤... 그리구요... 아버지... 제가요 나쁜 녀석들만 골라서 몽땅 털면서도 그가 누구인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신비의 괴도 같은 역을 예전부터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말인데요..." 두 손까지 모아쥐며 배시시 웃는 나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던 엘라임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러니까... 저 녀석들을 봐주라고?" "핫핫핫, 뭐... 그래주심 고맙다는 거죠."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젠장... 요 근래에는 안 그러더니만...' 엘라임의 기분 나쁘게 틱틱대는 버전이 갑자기 실행되었다. 팔짱을 딱 낀 채 살짝 내려깐 눈으로 날 바라보며 하는 폼이 지금 되게 기분이 안 좋은 듯 했다. 그래서 나는 엘라임의 심기를 안 건드리는 선에서 되게 조심스럽게 주저리 주저리 이유를 늘어놨다. "아니 뭐... 그럴 이유는 없지만... 사실 말이죠... 제가 처음에 저 은발 녀석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우리는 극진히 대접 받고 집으로 돌아갈 거였으니까... 이렇게 된 데에는 제 책임도 있구요... 원래 저 녀석이 싫어서 제안을 안 받아들인 거였는데, 이 엘프의 말을 들어보니 그렇게 나쁜 녀석은 아닌거 같고요... 게다가 여기 있다는 엘프들이 가엽잖아요. 지금 얼마나 마음 졸이며 있겠어요? 집에 갈 수 있느냐 못 가느냐의 기로가 달려 있는데...." "그래서?" "그러니까... 제가 지금 저 은발 녀석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은데... 좀 봐주시면 안될까나... 하고..." 손가락을 배배 꼬며 힐끗 힐끗 엘라임의 표정을 살피는데 도통 엘라임의 표정은 안 변하고 그의 팔짱도 안 풀어지는 거였다. "싫다면?" "아... 좀 봐주세요. 만약 내가 제안을 받아들이면 저 녀석들도 우리를 공격할 이유가 사라지는 거니까 아버지에게 무례하게 대한 걸 백배 사죄할 거 아니예요? 아버지가 한번만 봐주시면 우리는 저 녀석들의 진심 어린 사죄와 함께 덤으로 선물 까지 듬뿍 받고 즐겁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라고요, 예?" "녀석들의 사과 같은 건 죽음으로써 하면 돼." "어우~ 아부지이~ 그리고..." 조금의 미동도 안 보이는 엘라임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무지 긴장한 채 나만 바라보고 있는 저 불쌍한 커다란 양들을 한번 힐끔 바라본 뒤 평소 잘 사용하지 않던, 정령들의 대화법을 정말 오랜만에 사용했다. [엄마도 하프 엘프셨다면서요... 비록 엄마를 보지는 못했지만, 엄마와 같은 하프 엘프들을 해한다는 게 좀 그래요... 어차피 나에게 처음 부터 살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충분히 서로 서로 좋게 넘어갈 수도 있고요... 게다가 혹시 친척일지도 모르는 엘프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그러니까... 안 될까요?] 애교가 안되자 나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진심으로 부탁했다. 그러자 이 마음이 통했는지 엘라임은 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몸을 휙 돌려 엘라임의 물결에 쫄딱 젖고 뒤집어져 있는 소파로 다가가 발로 걷어차 휙 뒤집더니 소파에 있는 물기를 한꺼번에 빨아내 말린 뒤 거기에 털썩 주저 앉았다. "좋을 대로 해라." "와앗~ 고맙습니다아~!!" 내가 두 팔을 들어올리며 환호성을 지르자 잔뜩 긴장한 채 지켜보고 있던 은발 머리 녀석을 비롯한 시커먼스들은 안심이 되자 힘이 빠졌는지 땅에 주저 앉았고 조마조마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엘프가 해결 됐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즉시 엘라임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위대한 존재시여~!!" "호오, 역시 자식에게는 약한 건가?" 그 동안 조용히 지켜보고만 이프리트가 싱글 싱글 웃으며 다가가 엘라임 곁에 털썩 주저 앉으며 말을 건네자 엘라임이 눈썹을 치켜 떴다. "시끄러워!!" 그때 밝은 갈색 머리의 녀석이 뚫린 배를 부여잡고 비틀비틀 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신세를 졌군. 이 빚은 나중에 꼭 갚겠다. 그리고... 구해줘서 정말 고맙다." "훗훗훗, 이자는 비싸게 쳐주길 바래." 녀석에게 기분 좋게 웃으며 손을 내밀자 그 녀석도 씨익 웃으며 내 손을 맞잡았다. 피가 잔뜩 묻은 손이라 좀 찝찝하긴 했지만... 뭐, 좋은게 좋은 거겠지. 밝은 갈색 머리 녀석과 악수를 하고 있는데 은발 녀석도 다가왔다. "어쨌든, 이걸로 한 팀이 된건가?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덕분에 죽을 뻔 했으니까 말야. 다음 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목숨은 절대로 노리지 못할 거다." "아, 그래. 가장 중요한게 있었지? 보수는 얼마나 줄래? 그리고 아까 도와준 답례도 당연히 하겠지?" "핫핫핫, 너도 돈 되게 좋아하는 구나? 그건 나중에 이야기 하자고, 나중에. 지금은 죽을 뻔 했다 살아나서 정신이 하나도 없으니까." 내 노골적인 질문에 은발 녀석은 땀방울을 흘리면서 하하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절대 만만치 않은 놈이라는 걸 다시한번 실감하며 전의를 다지던 중 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에 녀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기... 지금 문득 생각난 건데... 너 내가 최상급 정령사라는 거 알고 있었지? 아까 만났을 때 내가 최상급 정령을 데리고 나타났으니까." 그러자 은발 녀석이 나를 멀뚱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그런데 그게 왜?" 아무렇지도 않게 되묻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그게 왜라니? 너 바보 아니냐? 내가 최상급 정령사라는 걸 알면서 안티 매직 쉘 마법진 깔아놨다고 자신만만하게 검 들고 나서냐?" 내가 무지 한심하다는 듯이 녀석을 바라보자 녀석이 기분 나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야? 안티 매직 쉘을 깔아놨으니 당연히 네가 정령을 못 불러낼 줄 알았지." "아니, 내가 최상급 정령사라는 건 알았다며? 그럼 나에게는 그게 안 통할 거라는 건 알았을 거 아냐?" 내 말에 은발 녀석의 눈이 둥그래졌다. "뭐어? 그게 정말이야?" "..... 몰랐냐?" 어이가 없어진 내가 묻자 은발 녀석의 고개가 밝은 갈색 머리의 녀석에게로 휙 돌아갔다. 그러자 그 밝은 갈색 머리의 녀석이 움찔 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왜 날 보냐? 나도 몰랐다고." "야, 너도 정령사잖아. 그런데 왜 그걸 몰라?" "내가 정령사지 마법사냐? 내가 마법진에 대해 어떻게 알아? 마법을 배운 적도 없는데..." "뭐야, 그럼 도대체 거금을 들여 깔아 놓은 이 마법진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거였어?" 머리를 박박 긁으며 투덜대는 은발 녀석의 모습이 하도 안쓰러워서 나는 기꺼이 선생 노릇을 자처했다. "아니, 넌 네가 깔아 놓는 거에 대해선 잘 알아둬야 할 거 아니냐?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깔았어?" "이거 깔은 마법사 녀석이 드래곤이거나 마도사가 아닌 이상 힘을 못 쓴다고 했단 말야."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하는 은발 녀석을 향해 나는 무지 무지 한심하다는 시선을 마음 껏 팍팍 내 쏘으며 말했다. "맞아. 안티 매직 쉘은 6클래스의 마법이란 말야. 그러니 6서클 이하의 마법사에게는 통용이 되지. 하지만 7서클 이상의 마법사에게는 소용 없다고. 그리고 마도사란 7서클 이상의 마법사에게 붙여주는 명칭 아니냐? 그리고 최상급 정령사는 마법사로 치면 7, 8 서클의 마법사라고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준 나는 입을 떡 벌린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두 녀석을 향해 확인 사살을 해줬다. "그런 것도 몰랐냐?" "하... 이거 참... 무식한 자가 용감한 법이라더니... 드래곤 앞에서 마법사라고 깐죽 댄 꼴이었잖아?" 한참을 멍 하게 있던 은발 녀석이 무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물론 웃다가 배가 땡기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기는 했지만... "야, 너네 치료 안 받아도 돼냐? 하프 엘프라고 해도 배를 뚫렸는데 죽을 수도 있잖아." 지금은 피가 멎었지만, 아까 피를 철철 흘렸던 것을 기억해낸 나는 병원, 아니 의원에게 달려가지 않고 내 옆에 멀뚱히 서 있는 녀석들을 의아해서 물었더니 녀석들이 피식 웃었다. "괜찮아. 아까 상처가 너무 심해서 힐링 포션을 마셨거든. 게다가 우리 담당 의원에게는 빨리 가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말야..." "힐링 포션?" 전에 어깨를 치료해주던 의원에게도 들었던 말이라 나는 그게 무엇인지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보다도 먼저 밝은 갈색 머리 녀석이 나에게 질문을 해왔다. "아, 나도 궁금한게 있는데.... 여장이 취미야?" "에?" 뜻밖의 말에 뜨악 해서 녀석을 바라보자 녀석이 아주 진지한 얼굴로 계속 입을 열었다. "뭐... 난 남의 취향해 대해 참견할 마음도 없고, 너는 얼굴이 받쳐주니 제법 잘 어울리기는 한데... 이왕 하는거 완벽하게 가슴은 만들어 넣지 그래? 다 좋은데 가슴이 밋밋하니 전체적인 이미지를 완전히 망치는 걸?" "뭐, 뭣?" 내가 너무 기가막혀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은발 녀석이 얄밉게도 아는 체 하며 끼어들었다. "아아, 얘 가슴? 아까 만났을 때는 부풀어 있었어. 아마도 마법으로 해놨나보지? 여기 들어와서 사라진 거 보면 말야. 내 말이 맞지?" "흐음... 그래? 그럼 괜찮지만... 여장 하는 거 좋아하면 내가 괜찮은 의상실 소개해줄까? 이 나라는 좀 괴상해서 여장을 즐기는 남자들도 꽤 있거든. 그들이 즐겨 찾는 의상실을 알고 있는데... 어때?" "주....." "뭐?" "뭐라고?" "죽어버려어엇~~ 이 자식드으으으을~~~!!" 제 13화 베지테크스 상회 (1) '흠... 여긴가?' 번화한 중심가에 떡 하니 자리잡고 있는 3층짜리의 번듯한 건물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중얼 거렸다. '베지테크스 상회라... 제대로 찾아 온 거 같기는 한데...' 어제 그 난리가 있은 후 은발 머리 녀석과 밝은 갈색 머리 녀석은 의원에게 가지도 못한 채 엘라임과 이프리트에게 '죽을 죄를 졌습니다~'라고 백배 사죄한 뒤 푸짐한 만찬을 대접했다. 하지만 그렇게 잘 차려진 저녁은 달랑 나 혼자 먹었을 뿐, 두 정령왕과 두 하프 엘프는 손도 안 대는 거였다. 하기야, 두 정령왕은 원래 안 먹는 체질이고, 두 하프 엘프는 엘라임에게 각각 배를 뚫려 버렸으니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었을 터였다. 그리하여 나 혼자 신나게 먹고 마시고 돌아가려는데 은발 녀석이 내일 아무때나 중심가에 있는 베지테크스 상회 본점으로 와서 레이언이라는 사람을 찾으라고 하는 거였다. '그래서 오기는 왔는데 왜 여기로 오라고 하는 거지? 여기에 첩자라도 심어 뒀나?' 어쨌든 들어가서 그 레이언이라는 사람을 만나면 아는 일이었기에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정문 바로 뒤에는 넓은 홀이 있었고, 홀의 중앙에는 자그마한 분수와 함께 예쁜 꽃들이 심어져 있는 실내 정원이 꾸며져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원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고, 그 주위에는 십여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는 의자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마치 한국 호텔의 프론트 같은 곳에서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다. 보니까 이 곳에 용무가 있는 사람들도 다 그쪽으로 가서 문의를 하는 것 같기에 나도 그쪽으로 꼽싸리 끼어서 서류를 뒤적이고 있는 한 여성을 불렀다. "실례합니다." 그러자 그 여성은 사무적인 미소를 지어보이며 날 바라다봤다. "예,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레이언이란 분을 찾아 왔습니다만." "레이언 베지테크스씨 말씀이십니까?" 그녀의 되물음에 나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에... 성은 모르겠습니다만..." 그 은발 녀석이 알려줄때 레이언이라고만 말했지 성까지는 안 알려줬던 것이다. "그럼 약속은 되신 상태이신가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약속까지 해야 하는 거야? 젠장.. 그 은발머리 녀석 제대로좀 알려줄 것이지...' 나는 속으로 은발 머리 녀석에게 이를 빠드득 갈며 대답했다. "음... 제가 약속한 건 아니고 어떤 사람이 찾아가라고 알려줘서 온 것이거든요. 약속이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자 그녀는 나를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빤히 바라보더니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베지테크스씨께 여쭤보겠습니다. 실례지만 성함이..." 그녀의 말에 나는 그제야 나도 내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이런... 남 이야기 할때가 아니었네...' "하.하.하... 아마 말해도 모를 거예요." 무지 난처하게 웃으며 말하자 그녀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쪽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녀의 말대로 나는 분수대에서 가까운 곳의 의자에 털썩 앉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괜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휴... 이름도 모르는데다 약속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는데... 만날 수 있기나 하겠어? 그냥 어제 그 은발 녀석에게 돈이나 받고 말 걸 그랬나봐...' 그렇다고 여기까지 온 것도 아깝고, 프론트에 있던 아가씨에게 이야기까지 했으니 나는 조금만 기다려 보다가 정 안돼겠다 싶으면 그냥 가기로 마음 먹었다. '여기까지 나온 김에... 맛있는 거라도 사가지고 갈까? 으음... 뭘 사가지? 엥... 그냥 먹고 갈까? 어차피 가지고 가봤자 나 혼자 먹을텐데 뭐... 이래나 저래나 그게 그건가? 아아... 정말, 아버지나 아저씨나 먹는 재미 없이 어떻게 그 오랜 세월을 사나 몰라...' 혼자 의자에 앉아 작은 실내 정원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응?" 돌아보니 그 밝은 갈색 머리의 녀석이었다. "아..." 여기서 녀석을 볼 줄은 몰랐기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떠 보이는데 녀석이 고개를 살짝 까딱해 보인 다음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따라와." "아, 응..." 프론트에서 내 쪽을 바라보고 있던, 아까 내가 말을 건넸던 여직원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해보인 다음 녀석의 옆에서 보조를 맞춰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녀석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오후에나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왔네. 점심은 먹었냐?" "아니... 할 일도 없고 해서 일어나자마자 씻고 이리로 왔지. 아, 그러고보니 점심 때군." "안 먹었으면 점심이나 같이 먹자. 그런데... 오늘은 여장이 아니네? 난 또 여장하고 올 줄 알고 신비한 파란 색 머리의 여성이 찾으면 안내하라고 말해놨잖아." 장난치는 어조였다면 한바탕 하기라도 하겠는데, 농담조가 아닌 평상시의 덤덤한 어투라 화는 내지 못하고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은 나는 속으로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아... 젠장...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지? 그때 마법만 풀리지 않았다면 여자라고 빡빡 우길 수도 있었을 텐데...' "이쪽이야." 밝은 갈색 머리 녀석을 따라 가다보니 나는 어느새 이 건물의 꼭대기층인 삼층까지 올라와 있었다. "아, 궁금한게 있는데, 너 여기서 일하냐?" "응." "그럼 어제 말했던 일은? 낮에는 여기 일, 밤에는 그 일을 하는 거야?" "자세한건 잠시 후에 설명해 줄테니 지금은 참아줘. 자, 여기야." 그 녀석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삼층 복도의 맨 끝에 있는 방이었다. 똑, 똑 녀석이 예의 바르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되게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예." 달칵~!! 밝은 갈색 머리의 녀석이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기에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곳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은발 머리 녀석이 서서 나를 향해 친근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는 거였다. "역시, 너였구나. 생각보다 일찍 왔네?" "엥?" 그 곳에는 마치 어느 회사의 사장실 처럼 커다란 책상과 의자가 있었고, 햇볓 잘 들어오는 커다란 창을 피한 주위에는 책장과 서류함, 중앙에는 소파와 탁자가,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는 꽃 화분과 우아한 장식품이 보기 좋게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놀라움에 TV에서나 봤던 사무실만큼이나 멋들어진 방의 풍경을 둘러보는 대신 은발 녀석과 갈색 머리 녀석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너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 그러자 은발 녀석이 여유만만한 얼굴로 싱긋 웃으며 나에게 소파를 권했다. "뭐, 천천히 다 이야기 해줄테니 우선은 앉자고. 아, 뭐라도 마실래?" "식혜, 수정과, 파르페, 팥빙수, 과일 빙수 이 넷중에 아무거나." 녀석을 놀려줄 생각으로 나는 뻔뻔스럽게 한국에서 즐겨 먹던 것만 골라 주르르 댔고, 역시나 은발 녀석은 난처한 표정으로 머쓱하게 물었다. ".... 음... 그건 처음 들어보는 음료들인데... 미안하지만, 여기는 그런거 없거든. 다른 건 안될까?" "그래? 그런 것도 없냐... 그 좋은 것들을... 뭐, 없으면... 과일 쥬스로 만족해 주지. 이왕이면 얼음도 동동 띄워서." "그래, 그래. 잠시만 기다려." 과일 쥬스는 이 곳에도 있었는지 은발 녀석은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얼른 대답하고는 문쪽으로 향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보다도 먼저 밝은 갈색 머리 녀석이 나섰다. "그러지말고 그냥 점심 먹으러 가는게 어때? 지금 여기서 음료수 마시고 또 점심 먹으러 나가기도 그렇잖아." "아, 그럴까? 네 의견은 어때?" 은발 녀석이 갈색 머리 녀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도 어차피 아침도 혼자 먹기 싫어서 굶고 나온 상태였기에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더구나 오랜만에 누군가와 같이 식사를 하는 자리인데 말이다. "찬성." "그럼 가자고. 내가 자주 가는 식당이 있거든? 거기로 안내 하지. 이렇게 더운 여름 날씨에는 딱 좋은 음식이야." 정말 여름 날씨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음식이었는지, 은발 녀석이 앞장서서 안내한 그 식당에는 꽤 큰 이층 식당임에도 불구하고 일층은 꽉 차있고, 그 보다 조금 더 비싼 자릿세를 내야 한다는 2층도 거의 차 있었다. 그 곳은 중심 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었는데 위치한 지대가 다른 곳 보다 조금 높은 곳이라서 2층에 앉으면 바닷가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전망이 좋았다. 그 전망을 조금이라도 더 보게 하기 위하여 2층은 벽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지붕 처마가 길고 교묘한 각도로 꺽여져 있어 전망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따가운 햇볕은 조금도 들이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좋았기에 음식값 말고도 따로 자릿세를 내야 함에도 그게 충분히 이해가 될 정도였다. "호오..." "여기 정말 좋지? 나는 손님 대접할때는 대부분 이쪽으로 오지. 특히나 이 도시 사람이 아닌 타 지역 사람일때는 항상 이쪽으로 와." 운 좋게도 우리가 이층으로 올라갔을 때 전망 좋은 창가쪽에 자리를 잡았던 사람 일행이 막 식사를 끝내고 나오려던 참이었기에 우리는 잽싸게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래 내가 안쪽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에 감탄하자 은발 머리 녀석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거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녀석의 말에 부정이라도 한번 해보련만, 보이는 풍경이 너무 좋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녀석의 말에 수긍했다. "그러게. 정말 좋군." "음식도 괜찮아. 특히나 지금 우리가 먹으려는 것은 더더욱... 이 것은 이 식당만의 특유한 음식인데, 여기까지 와서 이거 안 먹으면 억울하지." 은발 녀석은 마치 이 곳의 주인인 양 신나서 떠들어대며 주문을 받으러 온 웨이터 비슷한 복장을 한 남자에게 음식 이름은 말 안 하고 3인분만 달라고 하는 거였다. 그런데 그 웨이터는 은발 녀석이 뭘 말하는지 알아챈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이 들고 왔던 메모지에 뭐라고 끄적이는 거였다. 아마 여기서는 '그것'하면 다 통하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떤 음식이길래...' 내가 황당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이 웨이터는 주문서를 다 작성했는지 우리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해 보인 후 몸을 돌렸다. 그렇게 웨이터가 주문서를 가지고 가자 은발머리 녀석이 진지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자, 음식이야 조금 기다리면 볼 수 있는 거니까... 그 전에 우리 정식으로 서로를 소개하는 게 어떨까? 아직 서로의 이름도 모르잖아. 난 레이언 베지테크스라고 해." 은발 녀석의 진지한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치켜 떴다. "레이언 베지테크스라고? 가만, 그러면 어제 그 베지테크스인지 베지밀인지 하는 상회에 가서 찾으라던 사람이 바로 너였냐?" 그러자 진지하던 녀석의 눈빛에 재미있다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맞아. 바로 나였어.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 "당연하지. 어제 중상을 입었던 녀석이 그 다음 날 생생하게 있을 줄 알았겠냐? 게다가 낮에 버젓이 번듯한 직장 자리에 앉아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고. 어, 잠깐, 잠깐... 네 성이... 지금 베지테크스라고 했지? 그럼 혹시..." 내가 의혹 어린 시선으로 은발 녀석, 아니 레이언을 바라보자 녀석이 무지 상큼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베지테크스 상회, 내가 대표자로 있어." "허... 너 되게 부자인가보다?" 나는 눈을 다시 크게 떠 보이며 못 믿겠다는 듯 물었다. 이 녀석이 한 상회를 - 그것이 무엇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대충 한국의 회사 같은, 상업을 하는 집단이라는 건 눈치 챌 수 있었다. - 운영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그 정도로 능력있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사람을 겉모습이나 첫 인상만으로 판단해 버리면 안됀다는 건 알지만 말이다. 이런 내 기색을 읽은 - 물론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니 모를 수가 없었겠지만... - 레이언이 약간 과장되게 서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야, 너... 내가 그렇게 못난 녀석으로 보였던 거냐?" 그러자 내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밝은 갈색 머리 녀석이 냉정한 표정으로 끼어 들었다. "네 녀석이 하는 꼴을 본다면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러면서 나를 바라보고는 푸념조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이 녀석이 할 줄 아는 건 여자들 꼬시는 것과 일을 크게 벌여놓는 것, 그리고 앞 뒤 생각 안 하고 무대포로 밀고 나가는 것 밖에 없어. 덕분에 뒷처리 하는 이들이 엄청 고생이지." "윽, 뭐야 이 녀석... 네가 그러고도 친구 맞냐?" 제 13화 베지테크스 상회 (2) "윽, 뭐야 이 녀석... 네가 그러고도 친구 맞냐?" 레이언이 상처 받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지만, 밝은 갈색 머리 녀석은 냉담했다. "친구기에 네가 너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도록 직언을 해주는 거잖아." "얌마, 그럼 나를 왜 상회 대표자 자리에 앉혀놨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상회를 설립한 건 이쪽이었어?"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내가 끼어들어 갈색 머리 녀석을 가르키며 묻자 레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처음에 상회를 만들자고 제안한 것도, 지금 현재 중요한 실무를 모두 담당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녀석이지. 지금 우리 상회의 부대표를 맡고 있어." "헤에...." 내가 역시나... 란 표정으로 밝은 갈색 머리 녀석을 바라보자 녀석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자신의 소개를 했다. "크리스토버 에이트라고 하지. 그냥 크리스라고 불러. 운 없게 저 녀석을 만난 뒤로 헤어지지도 못하고 혹사당하고 있는 실정이야. 현재 저 녀석이 말한대로 상회 부대표 자리에 있어." "얌마, 얌마..." 레이언이 손을 휘저으며 크리스의 말을 부정하려 해봤지만, 크리스나 나나 레이언 쪽은 쳐다 보지도 않았다. 어쨌든 크리스까지 자신의 이름을 밝혔기에 나도 가만 있을 수는 없어서 내 이름을 발혔다. "해인이라고 해. 해인 오스번." 친 엄마의 편지에 그 분이 나에게 지어 주고 싶었던 이름이 있었던 건 기억 하지만, 나는 내 이름을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친 엄마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름마저 바꾸면 한국에 계시는 양부모님과의 인연이 영영 끊어질 것 같아서 도저히 바꿀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해인이라는 이름이 이쪽에서 독특하기는 해도 불리기 어려운 발음도 아니고 말이다. 특이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매력 아니겠는가? 역시나, 크리스는 내 이름을 듣자 신기한지 고개를 갸웃 거렸다. "해인 오스번이라... 오스번이란 성은 중앙 대륙식인것 같은데 해인이란 이름은... 참 독특하군. 발음이... 북대륙 식인가?" 출신지를 궁금해 하는 눈빛이었지만, 나도 내 핏줄에 엘프의 피와 인간의 피가 섞여 있다는 것만 알지 둘의 출신이 어느 쪽이라는 것은 몰랐기에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글쎄... 내가 지은 게 아니라 부모님이 지어주신 거라서... 하지만, 아마도 북대륙 식은 아닐 거라고 봐." '확실히 아니지...' "그래? 흐음... 엘프 언어도 아닌 거 같은데... 다른 종족의 언어인가? 혹시 이름의 뜻이 뭔지 알려줄 수 있을까?" 어지간히도 알고 싶어하는 걸 보면 크리스는 학구파 타입인 것 같았다. 하기야, 척 보기에도 학자 타입의 미남이지만... 그래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며 바른대로 대답해 주었다. " '해인'의 '해'는 바다를 뜻하고 '인'은 인연을 뜻하지. 합치면 '바다의 인연'이라는 뜻이야. 어때, 멋지지?" "그렇군." 크리스는 말은 긍정을 하면서 표정은 잔뜩 고심하는 티가 역력했다. 아무래도 내 이름이 어디 언어인지 알아내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훗,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있나... 여기에 똑같은 글을 쓰는 곳이 없을 텐데...' 크리스가 고심하는 모습에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어 쓴 웃음을 짓는데 주문을 받아 갔던 웨이터가 큰 쟁반을 들고 다시 왔다. "주문하신 음식이 나왔습니다." "호오... 드디어..." 웨이터가 건내주는 커다란 대접을 받아 든 나는 기대에 찬 얼굴로 안의 내용물을 바라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그것은 가운데 동그랗게 말린 국수 위에 삶아진 듯한 각종 해물과 예쁘게 보이기 위한 싱싱한 야채가 얹어져 있었고, 주위에는 살얼음이 동동 떠있는 국물이 부어진 마치, 한국에서 본 회냉면 같은 모습이었다. "헤에... 여기에도 이런 음식이 있을 줄이야." 혼자 중얼거린 말을 들었는지 레이언과 크리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뭐? 네가 있던 곳에도 이런 음식이 있었단 말야?" "흐음... 확실히 면 종류의 음식은 중앙 대륙에도 퍼져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정말 이것과 똑같은 음식이란 말야?" 그 둘의 놀라움에 찬 말을 들으며 나는 포크를 들어 안의 내용물을 휘저은 뒤 한 가득 떠서 입에 넣으며 대꾸했다. "음... 우물우물.. 물론, 해물 넣은 것은 다르지만, 다른 건 거의 똑같아. 하지만, 여기 것도 꽤 맛있는데? 물론 내가 이런 음식을 본 곳은 중앙 대륙은 아니야. 그런데 이건 그냥 밀가루 면이군. 음음, 맛있다." '여기에 김치만 있으면 딱인데... 아아, 김치가 그리워라...' 해파리와 새우, 그리고 몇가지 종류나 되는 조개류의 살과 같이 씹히는 맛은 무척 괜찮았다. 뭐, 젓가락 대신 포크로 거의 떠먹다 시피 하는게 좀 흠이었지만... "뭐야, 그럼 넌 남대륙에서 살았던 거냐?" 내가 굉장히 맛있게 먹자 레이언도 참을 수가 없었는지 자신도 떠 먹으면서 물어왔다. "후르륵, 우물 우물... 아니... 그게... 내가 산 곳은 중앙 대륙하고 남대륙 경계 부근쯤일라나? 확실히는 모르겠어. 사람들과 같이 산 게 아니라 아버지하고만 사람들이 갈 수 없는 아주 기이이~잎 은 곳에서 살았거든." "그래? 그럼 이쪽에서 사는 건 아니란 말이군." "여기서 좀 멀어. 그래서 맨날 엔다이론이나 엘레스트라를 타고 다니지." "호오... 최상급 정령사란 좋구나." "부러우면 너도 정령사 해라." "핫핫핫, 나는 안돼. 나는 정령과의 친화력이 영~ 없는 모양이거든. 대신 몸으로 때우는 거는 어느정도 할 수 있지만 말야." 음식을 먹는 동안 대부분의 대화는 레이언과 나 사이에서 오고갔다. 크리스는 묵묵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중간 중간 끼어 들거나, 아니면 레이언의 말을 보충하는 정도였다. 어지간히 사교성이 별로 없는 녀석인 듯 했다. 하기야, 무뚝뚝하기가 엘라임 저리가라 하는 녀석이었으니... 어제 내가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줬다고 감사의 인사를 하러 왔을 때도 웃는 얼굴 대신 무지 진지한 표정을 짓던 녀석이었다. 뭐, 그래도 레이언의 사근 사근한 화술 덕분에 제법 화기애애한 식사시간이 끝나고 달콤하고 시원한 생과일 쥬스를 후식으로 즐기려는 찰나, 크리스가 무지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어왔다. 하기야, 원래 진지,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녀석이라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지만 날 바라보는 눈빛이나 분위기가 좀 전보다 심각했기에 난 그러려니... 하고 가벼이 생각할 수가 없어 나도 진지하게 녀석을 바라보았다. "해인, 정말 우리 상회에 가입할 거냐, 아니면 어제 한 말은 우리를 돕기 위해 한 말이었냐?" 크리스가 말을 꺼냄과 동시에 그의 곁에서 바람의 중급 정령인 슈리엘이 - 반투명한 녹색의 매 모습을 하고 있다 - 나타나 커지더니만 그 커다란 날개로 우리를 폭 덮었다. 고급 식당이라 그렇지 않아도 은은한 음악 외에 별 달리 큰 소음이 들려오지 않았지만, 덕분에 아예 슈리엘 날개 밖에서 일어나는 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크리스가 지금 우리가 나눌 대화 내용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걸 원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희를 도우려는 생각도 물론 있었지만, 너희 일을 같이 해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야. 뭐, 게다가 지금 내가 하는 일도 없고 말야." "왜 우리를 도우려고 했는데? 너도 우리와 같은 하프 엘프라서?" "그것도 이유가 돼긴 해. 그런데... 말은 바로 하자고. 난 하프 엘프가 아니야. 하프 엘프는 내 어머니였거든." "그러냐? 그건 어쨌든... 그럼 다른 이유가 있었단 말야?" "맨 처음 너희를 갑자기 돕게 된 것도 너희가 노예 매매상에게 쫓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야. 게다가 너희들이 그 곳에서 노예를 데리고 도망치는 것 같기도 했고 말이야." "노예... 매매상에게 쫓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너는 노예 제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정도가 아니라, 노예 제도는 세상에서 있어서는 안돼는 제도라고 생각해. 정말... 인간들이 자기와 같은 종족을 노예로 삼는 건 몰라도 다른 종족들을 강제로 노예로 삼는 건 창피한 일이라고." "왜 그렇게 생각하지? 혹시... 어머니가 노예셨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그러자 그 동안 대화의 주도권을 넘기고 가만히 듣고 있기만 했던 레이언이 다급하게 나서서 제지했다. "그만 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건 실례라고." "하지만, 이런 일은 확실하게 해두지 않으면 안돼. 해인, 미안하지만 확실하게 말해 주길 바래.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레이언의 만류에도 물러서지 않는 크리스의 모습에 나는 무지 난처함을 느꼈다. 사실 노예 제도를 안 좋게 보는 건 내가 한국에서 받은 교육의 영향이 크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교육 받았기 때문이야.'라고 대답한다면 저 크리스 녀석은 누구에게 교육을 받았냐, 왜 그 사람은 그렇게 가르켰냐고 꼬치꼬치 캐물을 것 같았다. "내 어머니는... 하프 엘프였지만 노예는 아니었던 것 같아. 마법사에 정령사라고 알고 있거든." 그러자 크리스 녀석의 눈이 놀라움으로 조금 커졌다. "하프 엘프면서 마법사에 정령사셨다고? 네 어머니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데?" 그러고보니 크리스 녀석도 중급 정령사였다. "아, 혹시 너희들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네... 내 어머니의 성함은 주디스 오스번이라고..." "뭐라고? 주디스 오스번님 이라고?" "그게 정말이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섭게 레이언과 크리스는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정도로 크게 놀랐다. 다행이 우리 주위를 슈리엘이 둘러싸고 있어 다른 사람들은 조금도 몰랐지만, 덕분에 나 혼자 심장이 벌렁 벌렁 댈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뭐, 뭐야.. 너희들... 왜 그렇게 놀래?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하기야... 정령사로써는 이름을 날릴 정도라고 들었지만..." 쾅~!! 하지만, 이번에도 내 말은 싹둑 잘렸다. 레이언 녀석이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탁자를 주먹으로 강하게 내리쳤던 것이다. 덕분에 탁자 위에 있던 다 먹지 못한 쥬스가 담긴 컵이 크게 휘청 거렸지만, 내가 얼른 잡아 채서 다행이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런 정도가 아니야. 그 분은... 우리에게는 크나 큰 은인이시다." "으, 은인...? 울 오마니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 갑작스런 레이언의 말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레이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정말 믿을 수가 없군. 네 어머니가... 정말 주디스 오스번님이시냐?" "내 어머니가 하프 엘프이자 마법사에 정령사에 이름이 주디스 오스번이신 분 맞아. 하지만... 그러고보니 단지 이름이 같을 수도 있잖아?" 하지만, 레이언 보다 먼저 냉정을 되찾은 뒤 자신도 자리에 앉고 레이언도 의자에 앉힌 크리스가 냉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름이 같은 경우라면 몰라도 하프 엘프에 마법사에 정령사인 점까지 같은 인물이 또 있을까?" "그렇군... 헤에... 이런 인연이 있나.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어떻게 너희들의 은인인 거야? 엄마는 100년 전쯤에 은거하셨다고 알고 있는 걸? 아마 너희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은퇴 하셨을 거 같은데..." 그러자 이번에도 크리스가 대답했다. "우리가 하프 엘프란 걸 잊은 거냐? 이래 보여도 나이가 100살이 좀 넘었어." "엑... 밎을 수가 없어." 크리스의 말에 내가 입을 떠억 벌리며 말하자 그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가 믿을 수가 없다는 거지? 네 어머니가 은퇴하시기 전에 아이를 낳았다는 소리는 못 들었으니까 아마도 은퇴 하신 후 널 낳으셨을 거 아냐? 그때 그 분의 나이도 거의 200살에 가까우셨을 텐데..." "아... 맞다. 아버지가 그러셨었지... 하지만, 나는 어머니를 한 번도 뵌 적이 없어가지고... 나를 낳고 곧바로 돌아가셨거든." 그러자 다시 한번 레이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정도로 놀라움을 표했다. "뭣이라? 그럼 그 분이 돌아가셨단 말야?" 제 13화 베지테크스 상회 (3) "뭣이라? 그럼 그 분이 돌아가셨단 말야?" 크리스도 레이언 처럼은 아니었지만 그도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 그 분이 돌아가셨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군. 어쩌다가...." "이유를 묻는다면... 아무래도 내 탓이 크지 않으려나? 하.하.하..." 나는 볼을 긁적거리며 어색하게 웃었지만, 나에게 맞춰 웃어주는 녀석은 없었다. "그랬군. 네가 그 분의 자식이라면 노예 제도를 싫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 분 또한 그러셨으니까." 한참을 가만히 있던 크리스가 곧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을 열어 침묵이 돌던 공간에 다시 대화의 장을 열기 시작했다. "음... 그래? 나는 아버지에게 그런 말 못 들었는데... 어머니도 그런 건 싫어 하셨구나..." 내 어머니 또한 나와 같은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 헤죽 거리는데 레이언 녀석이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넌 어떻게 네 어머니에 대한 걸 그렇게 모를 수도 있냐?" 그 말에 나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녀석을 쏘아보아줬다. "아, 그래... 몰라서 미안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걸?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해 잘 말씀해 주시지 않는단 말야. 그러니 내가 무슨 수로 알아내냐? 내 스스로 어머니에 대해 조사해 볼 수도 없고..." "엣? 그러냐? 아니 왜..." "몰라. 내가 알 수가 있냐? 아버지 맘인데..." 내가 거의 화가 난것 처럼 투덜 거리자 레이언이 머쓱하게 사과했다. "아... 미안. 화났냐?" "그래, 화났다. 어쩔래?" "앗... 아니... 그게..." 내가 생각하기에도 좀 유치하게 화난 모드로 밀고 나가자 레이언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자 그를 돕기 위해서인지 크리스가 나섰다. "그럼.... 너는 네 어머니의 영향을 거의 못 받았다고 할 수가 있겠구나? 그렇다면... 네 아버지가 노예 제도를 안 좋아 하셨냐?" 이야기가 옆으로 새는 것 같았지만, 나도 레이언 녀석을 계속 화난 모드로 밀어 붙일 것도 아니고 해서 순순히 대답해줬다. "음... 아닐 걸? 울 아부지는 세상사에는 별 관심이 없으셔서... 노예 제도가 있건 인간 식사화 제도가 있건 자기나 나에게 피해가 없으면 신경도 안 쓰실 분이지." "그럼 너는 왜 노예 제도를 안 좋아하는 건데? 설마... 그냥 이라고는 말 못하겠지? 인적도 없는 깊은 숲속에서 - 사람들은 인적이 없는 깊은 곳이라고 하면 모두 산이나 숲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뭐, 상식적인 일이려나? - 살았으면 다른 사람의 영향은 거의 못 받았을 거 아니냐?" 나는 크리스의 집요한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넌 참... 사소한 거에 목숨 거는 타입이구나? 그래, 그래, 뭐... 창피하긴 하지만 그렇게 필사적으로 숨길 만한 중요한 비밀은 아니니까 내 말해주지. 얼마 전에... 하도 집에만 갖혀 사는 것 같아 답답해서 집에서 가출 했었거든. 그러다가 노예 상인에게 잡혀가지고 벨레니란 나라에까지 팔려 간 적이 있었어. 뭐, 아버지가 찾으러 와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래서 노예 상인 이라면 이를 뿌드득 간다. 됐냐?" "흠... 그랬냐? 그렇다면 납득이 가지..." 내가 끝에서 귀찮다는 시선을 노골적으로 크리스에게 드러냈지만,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참내... 저 녀석도 어찌 보면 대단한 녀석이라니까...' 내가 크리스에 대해 속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젖고 있는 사이 나에게 미안한 감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레이언이 결론을 내리는 투로 끼어들었다. "그건 어쨌건 해인이는 오스번님의 아들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자격은 충분해. 더욱이 어머니 못지 않은 대단한 능력자인 이상, 네가 들어오겠다면 우린 환영이야." "그러냐? 환영해주니 고맙다만, 궁금한게 있는데... 우리 어머니가 너희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주셨는데 은인이란 소리를 하는 거냐?" "아아... 크리스와 내 어머니는 강제로 끌려와 노예가 되신 분들이었거든. 덕분에 우리도 어렸을 때 어머니와 헤어져 노예로 다시 팔려갈 뻔한 적이 있었지. 그 전에 너희 어머니가 나타나셔서 우리를 우리들의 어머니와 함께 구해주셨어. 그리고 거기에 더해 펜사 산맥에 있는 엘프의 마을까지 데려다 주셨지. 아마... 은퇴하기 직전에 우리를 만나 마지막으로 도와주신 거 같아." 레이언이 말을 끝맺자 크리스도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그런 일이 있었어? 아, 그런데 너희들은 왜 엘프의 마을에 있지 않고 여기서 상회를 운영하고 있냐? 아... 혹시..." 왕따라도 당한 건 아닌지 걱정되어서 물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는지 레이언이 피식 웃으며 밝은 어조로 대꾸했다. "괴롭힘 당하는 일 같은 건 없었어. 단지... 우리는 그 마을에서 엘프들이 자신의 마을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걸 계속 자각시켜주는 존재라서 조금 껄그럽긴 했지. 그래도 뭐, 어머니께서 날 미워한 건 아니고 교육도 착실히 받았고 말야. 그러다가 크니까 좀 답답하더라고. 그래서 이 녀석과 같이 마을을 나와 버렸지." "헤에... 그래서 상회를 설립한 거야?" 그러자 이번에는 크리스가 대꾸했다. "처음부터 상회를 만들 생각은 아니었어. 우리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용병대에 들어가려고 했었지. 하지만... 처음에 고용된 곳이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노예 매매 상이었어. 그런데 운명이라고 할지, 그 노예 매매상 놈이 참으로 악덕 업주였거든. 물론, 노예 매매상 하는 놈 치고 착한 녀석이 이을리가 없지만... 이 녀석은 조금 더 심했지. 일부러 처음에 이름 없는, 용병 된 지 얼마 안 되는 녀석들만 고용해서 온갖 빌미를 잡아서 월급을 주지 않는 거야. 게다가 그녀석은 수인족도 노예로 파는 녀석이었거든." "수인족?" "그래, 수인족... 성년이 되면 인간도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하지만, 아직 성년이 안 된 어린애들이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거든. 게다가 수인족들이 동물화 하지 않으면 엘프 못지 않게 예쁘기도 하고 말야. 특이한 걸 좋아하는 녀석들이 많이 찾지만 쉽게 잡을 수 없으니 값이 엄청 비싸거든." "아... 그래?" '나는 그런 걸 물은게 아닌데...' 수인족이란게 무엇인지 정말 몰라서 물은 것이지만, 레이언은 다르게 생각했는지 정작 내가 알고 싶어하는 건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래 거기다 대고 다시 묻기도 뭐하고, 이야기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나중에 엘라임이나 이프리트에게 묻기로 하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리다고 해도 수인족들은 웬만큼 연륜이 있고 실력이 있는 용병들 조차 함부로 다루기 어려운 녀석들이야. 그러니 용병이 된 지 얼마 안 되고 실력도 없는 녀석들은 수인족들에게 툭 하면 상처 입고 심지어는 죽어 나갔지. 원래 용병 일을 하다가 죽으면 그가 속해있는 용병단 혹은 연고자에게 위로금조의 좀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해. 그렇지만... 용병일을 얼마 안 된 녀석들이 힘 있는 용병단에 들어갈 수 있을리가 만무하잖아." "엥... 그러면?" "그걸 이용한 노예 매매 상인 녀석이 연고자에게 돈을 하나도 안 지불한 거야. 용병단에 등록되어 있다면 용병단에서 항의를 하겠지만, 용병 길드야 자기의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주의이기 때문에 뭐라 하지도 않고, 힘 없는 연고자야 용병 수십을 거느리고 있는 힘 있는 노예상에게 덤빌 수도 없는 일이니... 녀석은 그걸 노려서 경험이 없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용병들을 고용한 거지." "우와... 엄청 나쁜 놈이잖아?" "맞아. 그래서 그 녀석에게 고용된 모든 용병들은 불만이 많았지. 그러다가 앞 뒤 생각 안 하고 일만 크게 벌릴 줄 아는 저 녀석이 용병들을 선동하고, 때마침 잡혀와 갇혀 있던 엘프들과 수인족들의 도움을 받아 그 노예 매매상을 뒤엎었지." "오옷... 그게 바로 너희들의 일의 시초가 된 거였구나?" "맞아. 다행인지 녀석이 꽤나 알부자라 우리는 한 몫 가득 챙길 수가 있었지. 그 뒤에 나와 이 녀석이 거기 있던 용병들에게 이종족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다고 설득해서 그 즉시 거기 붙잡혀 있던 이들을 사는 곳 까지 데려다 주게 되었어. 전에 설명했듯이 이 나라에서는 구해주기만 한다고 해서 끝난게 아니니까 말야." "음음, 그랬지..." "하지만, 그게 정말 천운이었지. 노예로 팔려갈 뻔한 인간들이 기껏 풀어줬더니만 우리가 한 일을 다 불어버린 거야. 그래 돌아와봤더니만 우리가 지명수배 되어 있더군." "정말 기가 막혔지. 기껏 구해주니 그걸 다 불어버리다니... 놈들은 은혜도 모르는 건지..." 그때 일이 다시 생각 났는지 레이언이 열받은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뭐, 우리는 빨리 이종족들을 데리고 떠야 한다 생각해 급히 움직였기에 잡힌 이들은 없었지만 말야. 그렇게 지명수배가 되니까 용병 길드의 정보망은 돈이 있어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렇다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말야. 그래서, 생각한게 남은 돈으로 상회를 설립하는 거였지. 어차피 얼굴들이야 조금만 분장하면 되는 것이지만, 우리가 필요한 건 우릴 잡으러 다니는 녀석들을 피할 수 잇는, 떳떳하게 드러낼 직업과 정보망이었으니까. 이 곳은 상업이 잘 발달되어 있어 상회의 정보망이 다른 곳 못지 않거든." "그때에 마침 크리스와 내가 무리들을 이끌고 있던 참이었기에 우리 둘 중에 누군가를 대표로 세우려고 했어. 하지만, 크리스가 자신은 앞으로 나서기 싫다고 날 밀은 거였지. 그래서 상회 이름이 베지테크스가 된 거야." "음음, 그랬어? 그래도 잘 되었나보네." "처음에는... 거의 용병단 처럼 다른 상단을 보호하거나, 아니면 물건을 전달해주는 일이 전부였어. 뭐, 나중에는 우리가 직접 물건을 조달해 팔기 시작했지만..." "호오... 그러다가 상회가 커지니까 다시 노예 매매상을 급습하게 된 거야?" "그렇지. 상회를 키우다보니 자금이 많이 딸리더군. 하지만 갓 시작한 상회의 무엇을 보고 쉽게 돈을 빌려주겠어? 그러니 노린게 그거였지. 뭐, 그 전에 이종족들을 무사히 집까지 데려다 준 덕에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고... 크게 어렵지는 않았어. 게다가 다시 그들을 구출해 냈을 때에도 상회란 이름 밑에 쉽게 숨길 수가 있었으니까 말야. 그때부터 이쪽 길로 나가자... 해서 지금까지 오게 된 거야." "헤에... 그랬군." 제 13화 베지테크스 상회 (4) 그 길로 식당을 나온 레이언은 잠깐 상회에 들려 크리스를 데려다 놓고(?) 거기서 상회의 마차를 끌어낸 뒤에 나를 태우고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뭐야,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더니만... 그들은 상회에 소속된 것이 아닌가 보지?" 마차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점점 멀어지는 중심가의 모습을 바라보며 묻자 레이언이 맞은 편 의자에 깊숙히 몸을 기대며 나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니야. 그들도 상회에 소속되어 있어. 그들이 하는 일 모두가 상회의 일이니까 말야. 단지 도시 중심가에는 너무 이목이 많은데다가 땅값도 비싸서 그들이 거주할 만한 넓은 장소를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구했다 하더라도 유지하기도 힘들거든. 그래서 도시를 조금 벗어난 곳에 장소를 마련했지." "그래? 음... 넓은 장소를 필요로 한다라... 혹시 훈련 같은 게 필요한 이들인가 보지?" "오~ 놀라운 추리력인데? 맞았어. 그쪽에 있는 이들은 침입조하고 운반조 조원들이야." "침입조? 운반조?" 무슨 액션 영화에서 특공 대원 이야기가 나올 때 들려올 법한 단어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레이언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 거렸다. "뭐, 비밀 조직 같은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맡은 역할에 따라 분류한 건데..." '거창한 비밀 조직 맞잖아...' 나는 속으로 레이언의 말에 반박하면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상회는 크게 세가지 조직으로 구분되어 있어. 우선 상회 본업의 일을 하면서 주위 상황과 정보를 수집하는 행정 조직과 노예 매매상을 습격하는 침입 조직, 그리고 구해낸 이종족들을 안전하게 그들의 고향으로 데려다주는 일을 하는 운반 조직, 이렇게 세 조직이지. 뭐, 침입 조직은 겉으로는 상회의 경호 업무를 맡은 것으로 되어 있고, 운반 조직 또한 상회 물품 운반책으로 되어 있지. 실제로 그런 일을 하기도 하고 말야." "아하, 그러니까 지금 가는 곳에는 그 운반 조직하고 침입 조직이 숙식 하고 훈련하는 곳이구나?" "맞아. 그리고 구해낸 이종족들이 고향으로 떠나기 전까지 머무는 곳이기도 하고 말야." "음음, 그렇군. 그게 도시 외각에 있단 말이지?" "도시 외각이 아니라 도시를 좀 벗어난 외진 곳에 있어. 아무래도 인적을 최대한도로 줄이게 하다보니 그렇게 되더라고. 그러다가 너무 외진 곳에 사람들이 드나들면 수상해 할까봐 그 곳에 우리 상회 창고도 세워 뒀지." "흐음... 창고 까지? 항구 도시에서 보통 창고는 부둣가에 세우지 않아? 항구 도시에서는 운반할 때 배를 많이 사용할 테니까." "맞아. 그래서 부둣가에도 우리 상회 창고가 또 있어. 그런데 그거는 배 타고 나갈 물건들이나, 아니면 방금 배로 운반되어 와서 도심 밖에에 있는 곳으로 미처 옮기지 못한 물품이 잠시 머무는 데고. 본 창고는 지금 우리가 가는 곳에 있는 거야." "음... 그렇구나." 도시 안에서는 도로가 넓어도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하더니 도심에서 조금 멀어지자 그제야 속도를 내기 시작한 마차는 도시를 완전히 벗어나자 거의 나는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고서도 거의 1시간이 넘어서야 겨우 훈련소인지 창고인지 모를 건물이 보이기 시작할 정도였다. "너무 먼 거 아니냐? 게다가.. 여기도 바닷가네?" "이목을 피하려고 어쩔 수 없었다니까. 게다가.. 바닷가인 것은 항구 근처에 있는 창고에서 짐마차로 물품을 운반하기보다는 그냥 배로 이동하는게 더 편하니까 항구에서 떨어진 바닷가에 창고를 가지고 있는 상회도 많아. 물론, 우리야 바닷가가 꼭 근처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만..." "왜? 왜 바다가 곁에 있어야 하는데?" "이종족들 때문이지. 바다에 사는 종족들도 있거든." "헤에... 그래?" 그 곳은 남의 이목을 최대한 피하려고 했다더니만 아예 남들이 못 들어오도록 바다에 맞닿은 해변부터 시작해서 방책을 쭈욱 만들어 놓았고, 방책 위에 경비도 철저하게 서고 있었다. '와우... 뭔 경비가 저리도 살벌하다냐?' 마부와 마차에 타고 있던 레이언을 확인하고서야 방책의 커다란 문이 열려 마차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밖에서 봤을 때는 아무래도 일부분만 봐서 그런지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았는데 안을 들어가니 완전 종합 운동장 저리가라 할 정도로 넓은 공간이 보였고, 한쪽에 커다란 건물들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해변도 보였는데 그 해변은 넓은 백사장이 펼쳐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래로 된 부분은 얼마 없고 거의 다 바위 투성이었다. '어이구... 이거 해수욕은 생각도 못할 거 같잖아? 수영이나 제대로 할 수 있으려나 몰라...' 한쪽에 배를 댈 수 있게 나룻터가 있고 작은 보트 몇 척이 묶여 있는데 그 곳에도 경비가 서 있었다. "살벌하네... 뭔 경비가 이렇게 철저해?" 내가 마차에서 내리며 주위를 둘러보며 혀를 내두르자 레이언이 고개를 갸웃 거리며 반문했다. "철저하냐? 하지만 다른 상회도 보통 이 정도는 할 걸?" "그, 그러냐?" 그런데 왠지 한쪽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뭔가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훈련의 한가지인가 보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듯 레이언이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사람을 향해 물었다. "뭐야, 저기는...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에휴... 말도 마. 어제 온 녀석들 중에서 두 놈이 아주 속을 썩이고 있다." 레이언에게 다가온 사람은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로 용병인듯 아놀드 슈왈츠 제네거보다 쪼금 못하지만 그래도 근육질 몸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더운지 팔이 다 드러나고 목 둘레가 넓은 나시 티를 입고 있었다. 덕분에 팔둑에 한 장미 문신과 검게 그을린 피부 때문에 뚜렷이 나타나는 새하얀 흉터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얼굴은 그렇게 험악한 인상이 아니었는데, 골치가 무지 아픈지 찡끄려진 얼굴로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 얄상하게 생긴 사내 자식은 누구냐? '윽... 사.내.자.식... 아아... 나는 결국....'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나는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고 레이언이 나 대신 그에게 나를 소개해줬다. "아아, 이번에 새로 합류한 녀석이야. 저래 보여도 최상급 정령사라고. 아무래도 운반, 침입 둘 다 할 거 같아서 사다드에게 소개나 시켜 주려고. 그리고 실력도 한번 보고 말야." "흐음... 그래? 어쨌든, 네 녀석이 보증하는 실력이라니 무척 궁금하군. 만나서 반갑다. 난 이 곳 책임을 맡고 있는 빅터라고 하지." 그가 시커멓게 그을린 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나도 반사적으로 그 손을 잡고 인사했다. "해인 오스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빅터는 내 인사를 받을 생각은 안 하고 대신 내 손을 덥썩 잡아 올리더니 이모저모 살펴보는 거였다. "헤에... 이거 여자들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예쁜 손이네? 거기에 굳은 살도 없고... 이거 완전히 샌님 손이잖아?" 원래 굳은 살이 생기려고 했었다. 하지만, 워낙 검술을 배우는 기간이 짧다 보니 물집 몇번 생기다가 그냥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하기사, 6개월 배운 거 가지고 배웠다고 하기도 좀 뭐하지만... 어쨌든 자꾸 녀석이 내 손을 벗어나 손목까지 내리고 있던 셔츠 자락을 걷어 올려 내 팔뚝까지 이리저리 살펴보는 통에 내 인상이 찌그려지려는 찰나, 이런 내 기색을 알아 차렸음인지 레이언이 그를 만류했다. "그만 하라고. 어차피 이 녀석은 검사가 아니라 정령사야. 그러니 팔에 근육이 없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나저나 어제 옮겨온 자들이 어떻길래 그래?" 레이언의 말에 그제야 빅터가 내 손을 놓더니 골치를 썪이는 녀석들이 다시 생각 났는지 이마를 꾹꾹 누르며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어제 온 모든 녀석들이 그랬다면 내가 속 터져 죽었을 거다. 대부분은 이 곳으로 오기 전에 너나 크리스가 달래놔서 그런지 괜찮은데 두 녀석이 말을 안 들어." 빅터가 그렇게 푸념을 하면서 걸음을 옮기자 그 뒤를 따라가며 레이언이 되물었다. "두 녀석 씩이나? 왜?" "아 말도 마. 한 놈은 꼬맹이 수인족 녀석인데 뭔 일을 당했는지 우리를 당최 믿지를 않아. 보다 못해 엘프들이 나서서 달래봤지만 씨도 안 먹히는 걸. 수인족이 좀 외골수 적인 면이 있는 건 알지만... 엘프 말까지 안 믿다니 나원 참..." 한숨까지 푹푹 쉬면서 말하는 폼이 어지간히 그 어린 수인족 때문에 어지간히 고생한 모양이었다. "이 곳으로 옮겨올 때도 겨우 두 명이 붙들어서 옮겨 놨는데 하도 난리를 쳐서 그 두 녀석 지금 꼴이 말이 아니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방에 가둬 놨는데 아까 점심을 가져다 주며 달래려고 문을 열었다가 그새 도망쳐 버렸잖아." "아, 그래서 지금 그 녀석을 찾느라고 소란스러운 거였어?" "그래. 말도 마... 다리 몽둥이라도 하나 부러뜨리겠다고 펄펄 뛰는 밥도 달래느라고 난 이중으로 고생했다고." "쿡쿡쿡... 정말 고생 했겠군. 아, 저기 오는게 밥 아니야?" "응? 아... 트롤도 제말하면 나타난다더니..." 그들이 바라보는 쪽을 향하여 나도 시선을 들어보니 그 곳에는 더부룩한 밝은 금발머리를 한 건장한 남성이 이쪽을 향해 씩씩 대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얼마나 털이 많은지 드러난 팔뚝 부터 손등, 심지어 손가락 위에도 털이 수북했고, 얼굴에도 구렛나루와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나 있었다. 가까이 와서 보니 성이 나 한껏 치켜 떠진 눈은 황갈색이었는데 놀랍게도 눈동자가 마치 고양이처럼 아몬드형이었다. "어라라?" 그 모습에 내가 눈을 둥그렇게 뜨자 레이언이 내 곁으로 와 작게 속삭였다. "그는 수인족과 인간의 혼혈이라서 그래. 이상하게 보면 기분 나빠하니까 표정 관리 하라고." "아, 응..." 레이언의 말에 얼른 덤덤한 척 표정 관리를 했지만, 그렇게 내가 애 쓴 보람이 그냥 물거품 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그 밥이라는 남자는 용무가 있는 듯한 빅터만 줄곧 바라보고 왔기 때문에 나에게는 시선 하나 주지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빅터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여어... 애 찾기는 잘 되어가고 있어?" "말도 마. 그노무 시키... 정말 이번에 찾아내기만 하면 혼줄을 내줄 테다. 아니, 집으로 데려다 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귀찮게 하는 거야? 고맙다고 큰 절을 몇번이나 해도 모자랄 판에 말야." "그럼 아직도 못 찾은 거야? 혹시... 밖으로 나간 건 아니겠지?" 레이언도 그를 잘 알고 있는 듯 슬그머니 그에게 눈인사를 보내며 대화에 끼어 들었다. "밖으로는 못 나갔을 거야. 이래뵈도 여긴 경비가 철저한 곳이라고. 나갔다면 아마 경비 서는 애들의 눈에 발견 안 될리가 없어." 빅터의 말에 이어 밥이란 자도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투덜댔다. "젠장... 겨우 꼬마 녀석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난리야?" 쾅~!! 무지 열받는지 마침 옆에 있던 죄 없는 커다란 나무를 걷어 차던 그는 그 옆에서 멀거니 바라보고 있던 나를 그제야 발견했는지 의아한 얼굴로 돌아봤다. "응? 넌 뭐냐?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그러자 빅터가 끼어 들어서 나를 소개했다. "아아, 이번에 레이언이 데리고 온 아이야. 정령사라고 하더군." "흠? 정령사? 하기야... 좋은 냄새가 나는 녀석이긴 하군." '내, 냄새...' 나를 아래 위로 쓰윽 살펴보던 밥은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손바닥을 내려치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 그래... 너 정령사라고 했지? 그럼 정령을 불러서 그 꼬맹이좀 찾을 수 없을까?" "꼬, 꼬맹이요?" "아, 그렇군. 왜 그런 생각을 진작에 못했지? 정령을 이용하면 금방 찾을 수가 있잖아? 부탁 좀 하자. 한 10살을 조금 넘긴 듯한... 이만한 수인족 녀석이거든?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않아서 꼬리가 있고, 뾰족한 귀를 가지고 있어. 머리칼은 이 녀석 처럼 황금색이고." 내가 손짓 발짓까지 하며 설명하는 빅터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며 그 이미지를 머리 속으로 그리는 그때 갑자기 머리 위에서 나무가 뿌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지직~ 뚝~!! 그에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위쪽으로 고개를 쳐드는데 방금 빅터의 말을 들으며 그렸던 이미지가 현실로 나타나 내 머리 위로 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꾸엑~!!" 위를 쳐다보고 있던 덕분에 그 이미지를 얼굴 정면으로 받은 나는 그대로 뒤로 넘어가 뒤통수를 땅에 부딪힐 뻔 했지만, 그 전에 옆에 있던 레이언이 잽싸게 몸을 날려 날 잡아주었다. "조심해~!!" 그리고 그와 함께 밥과 빅터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녀석~!!" "찾았다~!!" 제 13화 베지테크스 상회 (5) "이녀석~!!" "찾았다~!!" "뭐, 뭐야.. 도대체..." 알고 봤더니 이 어린 수인족 녀석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다니다가 지쳐서 나무 위에 숨어 있었는데, 그 나무 밑에서 빅터, 레이언, 내가 밥을 만난 거였다. 그리고 옆에 있었다는 이유로 밥의 화풀이 대상이 된 운 없던 나무가 바로 그 꼬맹이 수인족이 숨어 있던 나무였다. 밥의 강한 힘으로 걷어 차이는 바람에 크게 흔들려 꼬맹이가 매달려 있던 나뭇가지가 부러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꼬맹이가 내 머리 위로 떨어진 거였고... "허, 참... 이런 우연이 있나..." 밥이 허탈한 표정을 짓다가 무서운 눈으로 수인족 꼬마를 노려보자 옆에 있던 빅터가 화재 진압에 나섰다. "찾았으니 잘 된거잖아. 자자, 그만 화 풀라고. 이제는 얌전해졌고 말이야." "후후후, 넌 참 대단하구나. 이 곳에 가입되자마자 일을 하나 해결하고..." "웃지마 임마. 그런데 왜 넌 나에게 달라붙는 거냐?" 그렇게 수인족 꼬맹이를 찾은 것 까지는 좋았는데, 이 꼬맹이가 왠일인지 내 얼굴 위로 떨어진 후로는 나에게 착 달라 붙어서 도대체 떨어지려 하지 않는 거였다. 그래 빅터의 안내로 건물 안으로 들어와 응접실에 앉아 있는 지금 현재도 내 왼팔에 감기다 시피 찰싹 달라 붙어서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만 바라보고 있는 거였다. 그런데 내가 귀찮은 표정으로 한 마디 하니까 귀부터 시작해서 축 늘어져 풀 죽은 폼이 완전히 나를 악당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였다. 그러면서도 안 떨어지는 건 뭔지... "거참... 나는 수인족을 처음 보는 건데... 얘 왜 나에게 달라붙는 거지?" 그래서 양심에 찔린 나는 고개를 돌려 괜히 레이언을 노려보며 묻자 레이언이 어깨를 으쓱 거렸다. "나도 모르지. 너에게 첫 눈에 반한 거 아니야?" 그러자 옆에서 아직도 씩씩 대고 있던 밥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수인족과 혼혈이라 그런지 수인족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너한테서 좋은 냄새가 풍겨서 그래. 뭐랄까... 기분 좋은 엄마 품 같은 냄새라고나 할까? 저 녀석도 그걸 알아서 너에게 달라붙는 거야." "내, 냄새요? 으음... 아까 식당에서 식사한 냄새가 옮았나?" 그의 말에 내가 당황하면서 옷에 냄새가 배었는지 킁킁 거리며 확인을 하자 밥의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누가 음식 냄새를 말하는 줄 알아? 왜 사람 냄새라던지 엘프 냄새 라던지 그런거 있잖아? 각각 조금씩 다른 냄새를 풍기는 거... 엘프 녀석들도 괜찮은 냄새를 풍기지만 네 녀석 냄새가 훨씬 더 좋거든. 그런데 너 인간 맞냐?" "예? 아, 아뇨. 혼혈인데요. 인간의 피도 있고, 엘프의 피도 있고..." '정령의 기운도 있고...' "그래?" 내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밥은 의아한 눈으로 레이언을 바라보았다. "야, 너도 같은 혼혈이면서 왜 너에게는 저런 냄새가 안 나는 거냐?" 그의 말에 레이런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아, 내가 어떻게 알아? 누군 좋은 냄새가 안 나고 싶어서 안 나남?" "뭐, 어쨌든 잘 되었지. 걱정 하나는 덜은 거잖아. 해인아, 정말 와줘서 고맙다." 빅터가 살았다는 표정으로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바라보자 나도 얼결에 웃어줬다. "에.. 뭐... 도움이 되었다면 기쁘네요." 그러는 중에 이 수인족 아이가 어제 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다며 구운 고기를 가지고 왔는데 그것이 우리 앞의 탁자에 놓여져도 물끄러미 바라볼 뿐 손도 안 대던 녀석이 내가 하나 집어 내밀자 냄새를 조금 맡아보더니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잘 먹네... 그렇게 배가 고팠으면서 왜 안먹고 있었냐?" 접시 한 가득 있던 걸 눈 깜짝 할 사이에 후딱 해치운 녀석의 모습에 입이 떡 벌어져 물을 건내주며 물었지만, 녀석은 대꾸도 없이 물만 벌컥 벌컥 마셔댔고 대신 빅터가 대꾸했다. "우리를 못 믿은 거야. 수인족은 의심스러우면 굶어 죽어도 손을 안 댄다고 들었거든." "그래요? 대단하네... 얘, 그런데 너 이름이 뭐니?" 물 한 대접을 다 마시고 기분 좋은 얼굴을 내 팔에 부비부비 하는 녀석에게 묻자 녀석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만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할 뿐 말을 안 했다. "어라... 말을 못하나?" 그래서 나도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이번에는 밥이 대꾸했다. "아직 어려서 그래. 수인족은 다 자라야 인간의 말을 할 수가 있거든. 그래도 알아 듣기는 할 거야." "그래요? 흐음... 그럼 이름도 모르겠네... 뭐, 그럼 집에 갈 동안만이라도 음... 그래 해민이라고 부를까? 어때, 괜찮은 이름이지?" 해민이... 한국에 있는 내 동생 이름이었다. 그러자 녀석, 아니 이제 해민이가 된 그 수인족 꼬맹이는 해벌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다시 내 팔에 얼굴을 부비댔다. "헤에... 귀엽네..." 이제 10살 안팍쯤 되었을 거라는 그 아이는 똑바로 서면 머리가 내 허리쯤에 올 정도로 키가 작고 얼굴이 예쁘장하게 생겼다. 물론 눈은 밥 처럼 고양이 눈에 귀는 눈 옆에 있는 게 아니라 머리 위에 고양이 처럼 있고, 손톱도 사람 손톱이 아닌 뾰족한 손톱을 가지고 있는데다 꼬리까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무지 귀여웠다. 어느새 내 다리를 베고 잠이 든 녀석의 황금색 머리카락을 슬슬 쓰다듬어주며 중얼거리자 그걸 바라보고 있던 밥이 피식 웃었다. "어리다고 얕보지 마라. 저래뵈도 성인 남자 두셋은 손쉽게 해치울 녀석이다. 날쌔기도 또 엄청 날쌘 놈이지. 그게 바로 수인족이라는 거야." "아... 그렇습니까?" 그래봤자 수인족을 지금 처음 본 나로써는 어리둥절할 뿐 마음에 직접 와 닿는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우리가 있던 응접실의 문이 쾅~ 하고 열리면서 또 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아아...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군요... 내 말도 안 듣다니..." "엥?" 갑자기 열린 문소리 때문에 해민이가 잠깐 눈을 떴지만, 고개를 들어 들어오는 사람들을 힐끔 바라보더니 다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물론, 한 사람에 한 엘프였지만... 어깨를 으쓱 거리며 한탄조로 중얼중얼 거리며 들어오는 이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엘프였다. "에... 그러니까.. 저 엘프를 어디서 봤더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레이언이 곧장 대답해 왔다. "어제 저녁에 봤잖아, 어제... 왜 갑자기 뛰어 들어서 네 아버지한테 애원했던..." "아아... 그 엘프~!" 내 말소리가 약간 컸던 것인지 그 엘프가 나를 돌아보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어어~!!" "여~!!" 잠깐 본 것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이 곳에서 안면 있던 자를 만난게 반가웠던지 나는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못하는 그 엘프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그 엘프는 놀란 기색을 그대로 유지한 채 내 앞으로 거의 뛰다시피 다가와 소리쳤다. "어떻게 당신이 여기 계시는 것입니까아~?" 그러더니 곧 휙휙 소리가 날 만큼 고개를 돌려 주위를 훝어 보더니 다시 나에게로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소리를 잔뜩 죽여 물어왔다. "혹시.. 혹시 그 위대한 존재들께서도 오셨습니까?" "아아... 우리 아버지랑 아저씨? 안 오셨는데?" 그러자 그 엘프는 이보다 더 안심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 내리는 거였다. "그, 그렇습니까? 하아... 그것 참 다행이군요. 그 분들이 계시면 저는 주눅이 들어서 입도 한부로 벙긋 하지 못할 것 같거든요." "뭐야, 너... 어제는 아버지 앞에서 잘도 말하더니만... 어제의 그 깡다구는 다 어디로 갔냐?" "그, 그때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앞 뒤로 절벽인데 어느 쪽으로 떨어지든 마찬가지잖아요. 그랬으니 말 할 수 있었죠. 지금 같으면 죽어도 못할 거 같다구요." "아아... 하기야... 어제가 좀 그랬지... 그런데 너도 여기 있었구나?" "예, 아직 성년이 안 지났기 때문에 돌아가야 하지만, 성년이 지나면 꼭 여기로 돌아와서 도울 생각이예요. 은혜는 갚아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결연한 표정으로 이야기 하는 그의 뒤로 아까 그와 같이 들어 왔던 사람이 나타났다.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인간 세상을 구경하고 싶은 거잖아." 그, 아니 그녀는 붉은 생머리를 목 바로 밑에서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대충 30대 초반 혹은 중반에 가까운 나이로 보이는 여성이었는데 용병이라 그런지 소매가 없는 옷을 입고 있어 드러난 팔뚝에는 근육이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우락부락한 건 아니었고, 군 살이 하나도 없어 날씬한 편이기는 했다. 하지만, 강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갈색으로 그을린 건강한 피부에 새파란 눈을 가진 그녀는 입에 시가처럼 굵고 거무 튀튀한 담배를 거의 질겅 질겅 씹다시피 물고 있었다. '담배? 헤에... 이 곳에도 담배라는 것이 있었네...' 그녀는 밝은 녹색 머리의 엘프의 어깨 너머로 날 빤히 바라보더니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물었다. "참... 독특한 머리색과 눈 색이군. 색이 꽤 예쁜데? 그래, 넌 누구지?" 그러자 이번에도 레이언이 나서서 소개했다. "오늘부로 우리 상회에 가입한 녀석이야. 이름은 해인 오스번. 아마 네 일도 자주 돕게 될 거 같아." "호오... 그 정도로 실력파란 이야기인가? 하지만... 보기에는 그리 강해보이지는 않는걸? 마법사인가?" 그 여성이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투로 말하자 레이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아니, 정령사야. 크리스보다 더 강하지." 레이언의 대꾸가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그 밝은 녹색 머리의 엘프가 끼어들어서 덧붙였다. "강하다는 정도로 끝날 것이 아닙니다. 저 분은 위대하신 존재의 아드님이란 말입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저분께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걸요?" "흠..." 붉은 머리의 여성은 열성적으로 말하는 그 엘프를 반쯤 감은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 쪽을 향해 손가락 하나를 까딱 해보였다. "손가락은 까딱할 수 있는데?" 그러자 그 밝은 녹색 머리의 엘프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그, 그런 소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 분께 해를 가하지 못할 거라 이말입니다. 죽고 싶어서 환장하지 않았다면 말이죠." 그의 말에 레이언을 뺀 주변 사람들이 날 다시 보는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런 거 전혀 달갑지가 않아 나는 되게 난처했다. '어이, 어이... 도대체 내가 강하다는 이야기야, 아니면 우리 아버지가 그리 강하다는 소리야?' "뭐, 어쨌든 우리 일에 도움이 꽤 되는 녀석이로군. 난 사다드라고 한다. 운반팀의 대장을 맡고 있지." 그녀가 나에게 씨익 웃으며 한 손을 내밀자 나도 내 다리를 베고 자는 녀석의 머리를 옆으로 치워놓고 일어나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 예. 잘 부탁합니다." 덕분에 해민이가 부스스 눈을 뜨며 일어나 두리번 거리더니 내 다리에 찰싹 붙어 얼굴을 부비댔다. 그 모습에 녹색 머리의 엘프와 사다드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바라보았고, 빅터가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다. "뭐, 도움이야... 벌써 되고 있기는 하지. 저 녀석을 휘어잡았으니까 말야." 빅터의 말에 밥이 그제야 생각 났다는 듯 사다드를 향해 물었다. "너희들이 갔던 건 어떻게 되었지?" 제 13화 베지테크스 상회 (6) 빅터의 말에 밥이 그제야 생각 났다는 듯 사다드를 향해 물었다. "너희들이 갔던 건 어떻게 되었지?" 그러자 사다드가 대답하기 전 그 밝은 녹색머리 엘프가 먼저 나서서 한숨을 푹푹 쉬며 입을 열었다. "하아...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된 것이 제 말도 안 듣더라니까요. 블루 엘프는 처음 보았지만... 어쩜 제 말도 안 들을 수가 있는 건지..." 저 엘프는 무지 활달한 녀석인 듯 싶었다. 아니면... 끼어들기를 좋아하는 녀석이던가... 하지만 나는 그보다도 처음 듣는 소리에 흥미를 느끼고 물었다. "블루 엘프라고? 그건 또 뭐지?" 그러자 그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가 돌려지더니 똑같이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냐...'라는 듯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는 거였다. "뭐야, 왜 그러는데?" "아니... 정말 신기해서... 어떻게 블루 엘프도 모른다는 거지?" 대표로 사다드가 하는 말에 그 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다시 한번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만나는 거지, 뭘 그래? 내가 모르는데 보태준 거 있어?" 그러자 녹색 머리 엘프가 어깨를 으쓱 거리며 입을 열었다. "뭐...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지만요... 우리 엘프 종족은 세 분류로 나뉩니다. 우선 저 같은 화이트 엘프, 그리고 다크 엘프, 블루 엘프로 말이죠. 그리고 화이트 엘프는 보통 그냥 엘프라고 불려요. 다크 엘프는 피부색이 검어서 다크 엘프라고 불리고, 블루 엘프는 피부색이 파란 색이라서 그렇게 불린다고 알고 있어요. 저도 다크 엘프는 마을에서 몇번 본 적이 있지만, 블루 엘프는 이번에 처음 봤어요." "그건 당연한 거야. 블루 엘프는 무척 희귀한 종족이거든. 수도 별로 없고 말야. 지금은 새클턴 국에만 있는 걸로 알고 있어." 레이언이 슬쩍 끼어들자 빅터도 한 마디 했다. "뭐, 1000년 전에 어떤 마법사가 엘프를 가지고 실험해서 탄생한 것이 블루 엘프라는 설도 있고 말야." "윽... 설마요..." 내가 인상을 팍 찡그리며 중얼거리자 빅터가 어깨를 으쓱 했다. "뭐, 정말 그랬다는 게 아니라 그런 이야기도 나돌았다는 거지. 그 만큼 수가 적고 보기 힘든 종족이라서 말야." "맞아. 그래서 나도 이번에 블루 엘프가 있어서 엄청 놀랐어. 나도 이야기로만 들었거든. 예쁘기도 예쁘지만, 파란 빛이 도는 피부가 정말 신비스럽더군." 사다드도 한 마디 건들자 나는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예, 예뻐요? 파란 피부라면 이상할 거 같아..." 파란 피부 하니까 파란 피와 함께 예전 한국에서 영화에서나 봤던 외계인들이 생각 났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에어리언은 피부가 초록색이였어...' "아니야, 정말 예뻐. 지금은 오랫동안 아무것도 안 먹어서 초췌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쁘던걸?" 사다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이언이 물어왔다. "그래, 그 예쁜 블루 엘프가 어쨌길래?" "아... 그게 말이야... 네가 이야기 해라." 레이언의 질문을 들은 사다드는 뭔가 이야기 하려고 했지만, 말하고 싶어서 근질근질 하는 것 처럼 보이는 녹색 머리의 엘프를 보더니 피식 웃으며 양보했다. 그러자 그 즉시 녹색 머리 엘프는 신이 나서 입을 열었다. 물론... 내용이 안 좋은 거라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말이다. "하아... 그게 말이죠, 계속 혀를 깨물려고 해서 그런지 약을 주입 한 듯 싶고 입에다가 혀를 깨물지 못하게 장치를 해 놓았더라구요. 그래서 그걸 빼려고 하니까 그 즉시 혀를 깨물려고 하지 뭐예요? 아무리 우리가 노예 매매상이 아니고 구해준 거라고 말해도 들은 척도 안 하는 거예요. 제가 직접 눈 앞에 가서 엘프임을 확인시켜주고 말해도 말이죠. 게다가 힘이 있으면 벽에 머리를 박아 자살하려고 해서 꽁꽁 묶어놓은 상태예요. 노예 매매상에게 잡혀 있을 때 그 애만 혼자 독방에 온 몸을 사슬로 꽁꽁 묶인 채 가둬져 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정도로 독할 줄은 몰랐어요." 그렇게 녹색 머리 엘프가 한바탕 떠들고 나자 그 뒤에 사다드가 조금 덧붙였다. "뭐, 그래서... 입 안의 장치도, 몸을 묶고 있는 것도 그대로라 이거지 뭐. 그냥 억지로 스프를 조금 먹여놓은 상태인데... 이대로라면 돌아가는 것도 무리일 거 같아." "그래? 곤란하군..." 녹색 머리의 엘프와 사다드의 말에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던 레이언은 옆에 앉아 잠든 수인족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 있던 날 힐끔 바라보더니 싱긋 웃었다. "어떨까... 어린 수인족 녀석을 반하게 만든 해인이의 매력이... 그 블루 엘프에게도 통할 수 있으려나?" 그러자 빅터가 자신의 손바닥을 탁 내리쳤다. "오... 그게 좋겠군. 저 녀석도 휘어잡는데 블루 엘프라고 못 휘어 잡을 건 없겠지." "에... 뭘 바라시는 거예요? 전 그런 능력 없다고요. 괜히 기대하지 마세요." 그들의 기대 어린 눈빛에 내가 난색을 표하며 고개를 젓자 물끄러미 날 바라보던 사다드가 입을 열었다. "기대... 라기 보다는 밑져야 본전이니 시도해 보는 거겠지. 갈 거라면 내가 안내하지." 그러면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자 녹색 머리의 엘프를 비롯하여 빅터와 밥, 그리고 레이언 녀석까지 따라 일어나는 거였다. 분위기가 지금 당장 가자는 것으로 되어버리자 나 혼자 버티기도 그래 자고 있는 해민이 녀석의 볼을 톡톡 두드려 깨워 업고 나도 일어섰다. "아무것도 해결 안 되어도 제 책임이 아닙니다." 꼭 해결할 거라 보고 있는 듯 해서 한마디 하자 레이언이 싱글 싱글 웃으며 내 말을 받았다. "걱정하지 마. 아무도 뭐라고 안 할 테니..." "글쎄, 그러면 기대하는 눈으로 보지 말라니까. 에휴..." 사다드가 일행을 이끌고 간 곳은 자그마한 방이었다. 대충 5평 정도 되는 작은 공간에 더블 사이즈로 보이는 침대가 놓여져 있었는데 그 침대는 마치 아기 침대처럼 굴러 떨어지지 않게 튼튼한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었고, 그 울타리 안쪽에는 부딪혀도 다치지 않게 폭신한 쿠션들이 붙여져 있었다. "헐... 이건 완전 확대판 아기 침대잖아?" 그 모습에 황당해진 내가 중얼거리자 사다드가 피식 웃으며 설명했다. "어쩔 수가 없어. 이렇게 안 해놓으면 자꾸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거나 벽에 몸을 부딪혀 몸을 상하게 하거든. 저 꼴을 좀 봐." 사다드가 가르키는 침대 중앙에는 거의 하얀 색에 가까운 옅은 파란 머리를 가진 누군가가 업드려 있었다.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등 중간까지 내려오는 듯한 머리는 온통 뒤엉켜 있었고 몸은 부드러운 천으로 칭칭 동여매여 있어서 마치 미라를 보는 듯 했다. "묽은 죽 한 그릇 먹이는데 거의 한시간이나 걸렸다니까. 먹이는 사람이나 먹는 사람이나 둘 다 지쳐가지고 나중에는 움직이지도 못하더라구." 다시금 설명하는 사다드의 말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난리를 치려는 이에게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레이언이 이런 나를 콕콕 찌르며 침대 가운데에 누워있는 미라(?)를 턱짓으로 가르키기에 나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침대 위로 올라가 미라에게 다가갔다. 그 미라는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몸을 움츠러뜨리는데 보는 내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저기... 있잖아요..." 존대를 할까 말을 놓을까 갈등하던 나는 처음 보는 녀석이라 존대를 쓰며 조심스레 불러 보았다. 하지만 이 미라는 더욱 더 움츠러들뿐 도대체 나를 보려고도 하지 않는 거였다. 그래 내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미라를 뒤집자 그제야 멍한 눈을 움직여 나에게 촛점을 맞췄다. 그 (혹은 그녀일지 모르지만...) 의 얼굴은 정말 연한 파란 빛이 도는 피부였는데 절대로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다드의 말처럼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예쁜 얼굴이었다. 게다가 눈은 남색에 가까운 짙은 파란색이었는데 물기가 가득 맺혀 있어서 그런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마치 보석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우와... 정말 예쁜 눈이네... 보석 같은 눈동자란 바로 이런 눈동자일까?" 그의 눈에 진심으로 감탄하며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눈가를 덮고 있던 그의 머리카락을 슬며시 뒤로 넘겨 주었다. 그러자 내 등에 매달려 있던 해민이 녀석이 질투를 했는지 얼른 뛰어 내려와 녀석의 눈을 몸으로 가리더니 - 한마디로 블루 엘프의 얼굴에 올라타서 - 초롱 초롱한 눈망울을 나에게 들이미는 거였다. "그래, 그래.. 너도 예뻐. 네 눈도 마치 보석 같아." 그 행동이 너무 귀여워 나는 해민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면서 품에 안고는 블루 엘프를 들여다 보았다. "저기... 에이, 정말... 뭘 어쩌라는 거야? 음음, 그래... 내 말은 알아들을 수 있죠? 식사도 제대로 안 한다고 하던데... 배 안 고파요?" 그렇게 말하면서 블루 엘프의 입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마치 아기들의 입에 가짜 젖꼭지를 물려 놓듯 시커먼걸 물려 놓았는데 떨어지지 않도록 끈으로 목 뒤로 해서 묶여 있었다. "음... 이게 혀를 깨무는 걸 방지하는 건가 본데... 이런거 하면 안 귀찮나요? 풀어줄까요?" 그러자 처음으로 블루 엘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거였다. 침대 밖에서 구경(?)하고 있는 이들 사이에서 작은 놀람 외침이 터져 나왔지만 무시하고 나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에... 그럼 혀 깨물지 않는다고 약속해 줄래요? 그럼 풀어줄게요." 그러자 이번에도 그 블루 엘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거였다. 생각 외로 쉽게 고개를 끄덕이자 조금 불안했지만, 도와줄 이들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고 해서 나는 조심스레 목 뒤에 있는 매듭을 풀고 입에 물려 있는 걸 빼냈다. 얼마나 오래 물고 있었는지 입 밖에 나와있는 부분까지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안에 있는 건 얼마나 씹어 댔는지 거의 너덜너덜한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다. '윽... 디러...' 침이 뚝뚝 떨어지는 그걸 빼든 나는 오래 들고 있고 싶지가 않아서 침대 밖에서 구경중인 이들에게 휙 집어 던졌다. 그랬더니 그들도 잡을 생각도 못하고 몸을 피하느라 아우성이었다. "으악~!!" "어디로 던지는 거야?" "비켜, 비켜~!!" 그런 그들의 모습에 나는 사악하게 한번 웃어본 뒤 운디네를 불러 내서 침 자국으로 얼룩진 그의 모습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똑바로 앉혀 놓고 머리도 가지런히 정리해 주고 몸을 묶은 천을 풀까 말까 고민하는데 그가 입을 열어 나를 불렀다. ".... 이름이... 뭡니까?" 하도 입을 틀어막고 있던 터라 발음이 어눌했고 목소리도 탁했지만, 그의 곁에 가깝게 있었기에 나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아, 해인이라고 해요." "... 나는 구출 된 건가요?" "예. 기운을 차리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가 말을 했다는 사실에 나는 너무 기뻐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고개를 기울이더니 갑작스럽게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엥?" 뭐, 진한 키스가 아니라 입술과 입술이 살짝 맞다은, 아니 거의 스쳐 지나간 가벼운 뽀뽀 수준이었지만, 그가 몸을 움직여 했다는 사실에 놀라 내가 굳어있는 사이 그가 약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블루 엘프족의 명예를 걸고, 당신에게 입은 은혜는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삐질 삐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겨... 당신을 구해낸 건 제가 아닌데요..." 제 14화 첫번째 임무 (1) "정말 믿을 수가 없군...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 레이언이 기가막히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 자신도 같은 심정이었기에 죄 없는 머리만 벅벅 긁었다. 그러자 내 옆에 딱 달라 붙어 있던 해민이 녀석이 자신의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마구 흩트러 놓기 시작했다. "아, 내가 알아? 나도 알았으면 좋겠다." "허 참... 사실 내가 블루 엘프에게 가보자고 말은 했지만... 정말 그게 즉효였을줄은 생각도 못했다." 내가 내 목 위에 거의 올라타다 시피 한 채 두 손으로 내 머리를 마구 뒤적이고 있는 해민이 녀석을 말리는 중에 허탈한 레이언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러한 심정은 방 안에 있는 인물들이 모두 같은 심정이었는지 앞으로 내려온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사람들이 레이언의 말에 동감한다는 눈빛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사실 머리로는 이해가 안 가는 일이지만... 왠지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어요." 뜬 구름을 잡는 듯한 어조로 나온, 근처에 앉아 있던 녹색 머리의 엘프의 말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사다드가 입에 물고 있던 굵은 담배를 한바퀴 돌리며 물었다. 그러자 녹색 머리의 엘프가 난처한 얼굴로 어물거리듯 입을 열었다. "아니요 그게... 음... 뭐라고 해야 하나... 음, 음... 글쎄요... 말로 설명이 될지 모르겠지만... 저분에게서는 믿어도 된다... 라는 느낌이 풍기거든요. 음, 음... 그게 어디에서 기원되는 기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 물론 인간적인 느낌도 풍기긴 해요. 하지만... 음... 뭐랄까... 나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거라는 기분이랄까요?" "호오... 이거 참...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하는 거야?" 머리를 갸우뚱 거리며 자신의 옆에 앉아 있던 밥을 바라보자 밥 또한 자신을 바라보는 빅터를 마주 보며 낸들 알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 거렸다. 어리둥절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허... 믿어도 되겠다는 느낌? 거참..." 이게 어찌 들어보면 좋을 것도 같지만, 가만히 인간적으로 따져보면 되게 부담되는 말이다. 말인 즉슨, 나는 항상 거짓을 말하면 안된다는 거 아닌가? 항상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현자나 아니면 성자지 나 처럼 평범한 인간이 어디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나도 한국에 있을 때 성적이 안 좋으면 엄마에게 쪼끔 뻥 튀겨서 이야기 한다던가 쪽지시험 있는데 말 안 한다던가, 문제지 산다고 거짓말 해서 그걸로 좋아하는 가수 테잎을 사는 등등... '헉... 생각해 보니 찔리는 일이 엄청 많다...' 그런 내가 '믿을 수 있는 이'란 말을 들으니 엄청 부담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자, 잠깐만... 나도 때로는 거짓말도 하고, 때로는 과장도 하는 평범한 인간 이라고. 그런 말은 나에게 해당 안 된단 말야. 사람 부담스럽게 하지 마." 내가 엄청 부담 된다는 얼굴로 퉁명스럽게 입을 열자 녹색 머리의 엘프는 나의 이런 반응이 이해가 안된다는 기색으로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물론... 당신에게선 보통 인간과도 같은 느낌이 들기는 합니다. 당신께 보통 인간의 피가 흐르니 그건 부정할 수 없겠지요. 단지... 제가 받은 느낌은... 뭐랄까... 그 보다도 더 근본적인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그러자 옆에 있던 사다드가 머리 아프다는 표정으로 뒤로 벌렁 넘어가 소파에 등을 깊숙히 기댔다. "뭐야 그건... 점점 더 알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제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잖아요. 저도 머리로 이해하기 어렵다고요." "뭐, 뭐, 됐어. 됐다고. 그냥 저 녀석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난다는 거 아니야?" 밥이 더 이상 말하지 말자는 투로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하자 주위에 있던 이들이 저마다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그들도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보니 더 이상 말해봤자 머리만 아파질 거라는 걸 은연중에 동의한 모양이었다. '윽...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필 냄새라니...' '냄새'라는 단어는 안 좋은 쪽으로 많이 쓰였기에 내가 약간 거부감을 느끼는데 그때 밥이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흠... 그런데 너도 혼혈이란 말이지? 음, 음... 하기사 엘프의 역겨운 냄새가 좀 풍기기는 했어. 그래도 저 녀석에게서 나는 건 별로 기분이 안 나쁘더라고." 밥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녹색 머리의 엘프가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겨운 냄새라니요?" 그러자 밥은 전혀 미안해 하지 않는 표정으로, 아니 오히려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 녹색 머리 엘프를 힐끔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야, 너..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야?" "이익..." 녹색 머리의 엘프는 무지 분한 표정이었지만 밥에게는 이기지 못하겠는지 이만 빠드득 갈면서도 섣불리 덤비지는 않았다. 그러자 밥이 노골적으로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고, 그 모습에 더욱 더 열이 받아 이기든 지든 한번 해보겠다는 듯이 녹색 머리 엘프가 움직이려는 찰나 레이언과 사다드가 적절한 타이밍에 나섰다. "자, 그만 하고 앉아." "그래, 그래. 아, 그런데 너 이름이 뭐지? 아직까지 이름도 모르고 있었잖아?" 사다드가 녹색 머리의 엘프 옷자락을 잡아 다시 앉히면서 말하자 레이언도 그 뒤를 이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녹색 머리의 엘프는 사다드의 강권에 못 이겨 앉는 척 하면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벨타예요. 푸른 숲의 벨타..." "벨타라. 그래, 잘 기억해 두지." 레이언이 녀석의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녀석은 여전히 시큰둥해 할 뿐이었다. 그 순간 우리가 있는 응접실의 문이 딸깍 열리며 블루 엘프가 걸어 들어왔다. 녀석은 아까 내가 풀어준 뒤로 씻고 옷을 갈아 입기 위해 다른 이들이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내가 같이 안 있으면 안가겠다고 완강하게 버티는 바람에 나는 녀석이 목욕을 하는 동안 욕실 옆에 붙어 있어야 했다. 그나마 옷은 옆방에서 기다리겠다고, 뭔 일 있으면 튀어 오면 된다고 달래서 겨우 우리가 있는 응접실의 옆방으로 갔던 것이다. 옷갈아 입은 거에 비해 시간이 걸린걸 보니 거기에서도 또 실랑이가 있었던 듯 싶었다. "아, 이제 오는 거야?" 그 곳에 있던 이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하자 그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이더니 곧바로 나에게 다가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던 해민이 녀석이 그 블루 엘프가 엄청 마음에 안 드는 듯 으르렁 거렸는데 그는 한번 힐끔 바라볼 뿐 곧바로 신경을 끊는 거였다. 덕분에 해민이가 더욱 더 열이 받아 날뛰려는 걸 얼른 무릎에 앉히고 쓰다듬어 주면서 달래야 했다. 내 옆에 정좌세로 앉아 팔짱을 낀 후 눈을 떡 하니 감고 있는 그의 모습은 광대뼈가 툭 튀어나올 정도로 말라 있었다. 아무래도 그 동안 아무것도 안 먹고 버텼으니 마른게 당연하겠지만서도... 뭐, 그게 보기 싫다는 건 아니었지만, 좀 딱딱해보이고 강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음... 지금 보다 조금 더 살이 쪘다면 인상이 좀 부드러워지고 훨씬 좋아보일 듯...'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빤히 바라보고 있자, 이런 내 시선을 느낀 듯 그 블루 엘프가 갑자기 눈을 뜨더니 날 돌아보았다. "나에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딴 사람에게는 말도 안 하면서 나에게는 이렇듯 정중하게 대하는게 엄청 난처했는데, 아까 벨타의 말을 들은 지금에 와서는 그게 난처를 넘어서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아, 아니... 그게... 저기... 아까도 말했다시피... 그쪽을 구한 건 제가 아니라요... 이쪽인데요..." 나는 그렇게 더듬거리며 손가락으로 레이언을 가르켰고, 그러자 레이언이 싱긋 웃으며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 거렸다. 그러자 가늘게 뜬 눈으로 레이언을 힐끔 바라본 그 블루 엘프는 오만한 표정으로 고개만 까딱 거리더니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당신께서 말씀하신다면 그렇겠지요. 그래서요?" 그의 되물음에 나는 황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그, 그래서... 음... 그러니까 당신이 은혜를 갚아야 할 쪽은 제가 아니라 바로 저쪽 이라는 거죠." 내 말에 블루 엘프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당신은... 저자와 같은 편이 아니었습니까? 전혀 상관 없는 타인인가요?" "예? 아, 물론... 같은 편이기는 하지만..." '그 같은 편이 된게 바로 오늘이거든요.' 라고 말할 기회는 없었다. 그 전에 블루 엘프가 내 말을 자르며 자신의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은혜를 갚아도 하등 상관이 없겠군요. 당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같은 편인 저자에게도 이익이 될테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 아, 아니... 그래도..." 내가 허둥지둥 그의 말을 부인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채 뭐라 하기도 전에 블루 엘프가 다시 자신의 말을 이었기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설사... 당신이 절 구출하는데 아무 힘을 안 보태었다 하더라도... 제 은인은 당신입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저는 아직도 저들을 의심하며 저들이 주는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은 채 죽을 궁리만 하고 있었을테니까요. 뭐, 지금도 완전히 의심을 푼 것은 아닙니다만..." "아, 그건 그렇지만... 에... 그래도..." 그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고 우물쭈물하며 레이언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자 레이언이 이런 나의 난처함을 해결해주기 위해 편한한 웃음을 띄우며 입을 열었다. "뭐, 저 분의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 우리 조직이 단지 돕기 위해 구출한 건 아니니 은혜라고 할 것도 없는데다, 널 돕는다는 건 우리 조직에 이익이 될테니 말야." "그, 그러냐?" 레이언까지 그리 말하는데 나는 더 뭐라 할 수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은혜를 갚니 뭐니 하면서 옆에 붙어있는건 너무나 거북 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저리 가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하아... 이거 야 원...' 제 14화 첫번째 임무 (2) '그렇다고 저리 가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하아... 이거 야 원...' 그래도 다행히 그는 툭 하면 '이거 해줄까요? 저거 해줄까요?'라고 묻는 게 아니라 조용히 있는 편이라 나는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레이언은 모든 상황이 대충 수습이 되자 다시 도시에 있는 상회 본점으로 돌아가 버렸고, 나는 그 곳에서 사다드를 비롯한 빅터와 밥에게 그 곳을 안내 받고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하다보니 저녁이 다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내친김에 그 곳에서 저녁까지 얻어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그 곳에 오늘 소속되기는 했지만, 아직 확실한 배치가 이뤄진 것도 아닌데다 그들이 내 실력을 확인한 것도 아니었기에 오늘은 단지 안면만 익히고 나머지 것들은 내일로 미뤄졌던 것이다. 그들은 그 곳 숙소에 자리를 마련해줄테니 편히 있으라고 했지만, 날 남자로 여기는 그들이 숙소를 내줘봤자 남자 기숙사에 자리를 마련해줄 건 뻔한게 아니겠는가? 그래서 집이 여기서 가깝다고 극구 사양한뒤 그 곳을 부리나케 빠져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나올때 해민이하고 그 블루 엘프하고 극구 나를 따라가겠다고 나서는 거였다. 엘라임과 이프리트가 떡 하니 버티고 있는 바다 속 집에 누구를 데려간다는 건 정말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해민이와 블루 엘프를 말릴 수 밖에 없었다. "저기... 있지... 내가 우리 집에 누구를 데려가는 게 난처한 일이거든? 내일 여기 꼭 올테니까 그냥 여기 있어라, 응? 내일 정말 여기로 온다니까?" 그래도 해민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내 팔을 붙들고 안 놔주는 거였다. "해민아, 착하지? 내일 오니까 그냥 여기서 자라. 네가 널 데리고 가고 싶어도 우리 집에는 엄청 무서운 이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널 데리고 갈 수가 없어. 그러니 네가 이해하고 여기 있어, 응?" 도리, 도리~ "해민아아~~" 도리, 도리~~ "그럼 나 화낸다? 너 여기다 그냥 냅두고 내일도 안 올꺼야~!!" 내가 약간 화난 듯이 딱딱한 어조로 말하자 해민이는 잠시 움찔 거렸지만 더더욱 꼬옥 달라 붙으며 고개를 젓는 거였다. "하아... 어쩌지?" 내가 난처한 눈으로 주위에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지만 그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게 아니었다. 벌써 한바탕 그 녀석을 나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난리를 친 뒤라 자신들도 난처하다는 눈빛으로 볼 뿐이었다. 덕분에 밥은 열받아서 씩씩 대다가 그를 말리는 여러 사람에 의해 건물 안으로 끌려 들어갔고 빅터와 벨타는 얼굴에 할퀸 자국이 생겨버렸다. 다행이 사다드는 해민이의 몸부림을 이리저리 잘 피해서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필사적으로 나에게서 안 떨어지려는 녀석을 얌전히 시키기에는 여의치가 않았는지 결국 두 손 들고 말았다. "그러지 말고 데려가지 그래? 네 곁에 있으면 얌전한데..." 빅터가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눈빛으로 제의해 왔지만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벨타가 펄쩍 쮜며 반대했다. "안돼요. 그 집에는 위대한 분이 계신다고요. 저 녀석이 견딜 수 있을리가 없어요. 게다가 저 애가 가서 그분의 심기라도 거스리는 날에는.... 이 곳은 끝장이라고요. 어떻게 해서든 저 애를 말려야 해요." "하지만, 어떻게?" 사다드가 재주 있으면 네가 해보라는 듯 턱짓으로 해민이를 가르켰지만, 별 다른 수가 없었던 해민이는 우물쭈물 거릴 뿐 딱 부러지게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아... 그래도... 안돼는데... 이건 다 저녀석을 위한 거라고요." "동감이예요. 제 아버지는 너그러우신 분이 아니시라고요. 나야 그냥 혼나면 괜찮지만... 이 애가 견딜 수 있으련지..." 한숨 섞인 나의 말에 사다드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네가 부탁해도 안돼?" "물론 제가 부탁하면 가만 냅두기는 하세요. 문제는... 가만 있어도 풍기는 위압감을 이 애가 견딜 수 있는가 하는 거예요. 게다가... 집에 가는 것도 그렇고..." 나야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지만, 해민이는 그렇지 못할 게 뻔했다. - 그게 당연한 거고...- 물의 정령을 사용하면 어떻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게 계속 숨을 쉬게 해 줄 수 있는 건지도 의문이고 한 번도 해보지 않아서 해민이를 데려가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집에 엘라임 있으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데도 하급 정령들이 버티지 못하고 도망가는데 못마땅한 기색을 내보일 게 뻔한 엘라임에 이프리트 까지... "해민아, 그냥 여기 있어라. 도저히 안돼겠어." 자기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나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해민이가 내 마음은 몰라주는 채 여전히 고개만 저어대며 안 떨어지자 큰 한숨만 나왔다. '어쩌지? 이거 참... 정령의 힘이라도 빌려야 하나? 아, 마법으로 재워야겠다. 가만있자... 슬립 주문이...' 그런데 그때, 나와 같이 가겠다고 나섰으면서도 해민이가 난리를 치는 바람에 한 발 뒤로 물러나 가만히 있기만 했던 블루 엘프가 갑자기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내 앞에 불쑥 나타나 내 팔에 매달려 안 떨어지려고 꼬옥 붙어 있던 해민이의 뒤통수를 수도로 (손을 세로로 세워 치는 것) 내려치는 거였다. 그 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놀랍고도 빠르고 정확한 기습 공격 이었다. 그러한 갑작스런 기습으로 인하여 해민이는 별다른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꼬르륵~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러면서 내 팔을 꼬옥 붙들고 있던 해민이의 팔에서 힘이 빠져 스르르 뒤로 넘어가는 그의 몸을 턱 받쳐 가볍게 안아 들더니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는 거였다. "저희가 같이 가는게 불편하시다면, 저희는 여기에 있겠습니다. 푹 쉬고 내일 돌아와 주십시오." "예? 아.... 예." 그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넋이 나간 내가 얼빵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시 한번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나와 마찬가지로 얼이 빠져서 자신만 바라보고 있던 빅터를 향해 말했다. "숙소로 안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 아, 예." 너무 놀란 빅터는 자신도 모르게 척 부동자세를 취하며 군인이 자신의 상관에게 대답하듯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거였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블루 엘프는 지금까지 나 외에는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었다. 대답이 별 필요 없는 일이라면 그냥 무시해 버렸고, 꼭 필요한 어쩔 수 없는 경우에라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걸로 대신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블루 엘프가 대답 하는 것도 아닌, 자신 먼저 스스로가 빅터에게 말을 걸었으니 그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기야 그 주위에 있던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너무 놀라는 바람에 평소라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어 제낄 일을 웃지 못하고 입만 떠억 벌린 채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빅터 자신도 그렇게 대답을 해놓고 자신의 우스운 행태를 깨닫는지 머쓱해 하며 얼른 몸을 돌려 건물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그런 그의 뒤를 블루 엘프가 해민이를 안아든 채 걸어갔다. "허... 이런 일이..." "할 수 있었으면 진작에 나서서 도와줄 것이지..." "하.하.하..." 그리고 그런 뒷 모습을 사다드와 벨타, 그리고 내가 허망하게 바라보며 한마디씩 흘렸다. 그 뒤 나는 내일 해민이를 만나는 것이 쪼금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홀가분하게 사다드와 벨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바다 속으로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 곳에는 역시나... 엘라임과 이프리트가 거실 소파에 떡 하니 앉아서 나를 맞이했다. "이제 왔냐?' "어서 와라." "다녀왔습니다~!!" "그래, 그 놈들이랑 노니까 재미 있냐?" 내가 그들의 맞은 편 소파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엘라임이 물어왔다. "아하하... 노는 건 아닌데요. 게다가 오늘 그냥 가서 얼굴만 익히고 인사만 한 것 뿐인데요 뭐... 내일 실력을 한번 테스트 해 보고 정식으로 배정해 준데요." "흥, 실력을 테스트 하기는... 지까짓 것들이 어떻게 한단 말이냐? 그냥 그 곳에 있는 녀석들은 네 한 주먹 거리도 안된다고 하지 그러냐?" 엘라임의 투덜거림에 이프리트가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말로 하는 것 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것이 좋겠지. 거기 있는 누구도 이 아이의 실력이 자기들 보다 낮다고 보지는 않아." 이프리트의 날 띄워주는 말에 나는 괜히 쑥스러워서 웃음을 흘렸다. "아핫... 그렇게 말씀해주신 고맙지만... 사실 저는 실전 경험은 별로 없어서 말이죠. 그래서 조금은 걱정이 돼요. 저번에도 매직 미사일이 날아오는 데 피할 생각도 못했고 말이죠." 그러자 엘라임이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너는 왜 그렇게 멍청한 거냐? 그런게 날아 왔으면 맞받아치던가 피하던가 해야 할 거 아니냐? 저번에도 멍청하게 있다가 검에 찔리질 않나... 쯧쯧..." "아니... 뭐... 운동 신경은 있는 편이긴 한데..." 엘라임의 말에 할 말이 없었던 나는 머쓱해져서 괜히 죄 없는 목덜미만 문지르며 중얼 중얼 거리자 역시나 다정한 이프리트가 날 위로해주기 위해서 나섰다. "아직은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한번 두번 겪고 나면 차차 나아지겠지." "글쎄...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니, 나는 처음부터 잘 했는데 쟤는 왜 저럴까? 띨띨한 인간의 피가 섞였나?" "그게... 뭐...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으음..." 순식간에 둔하고 멍청한 인간으로 전락한 나는 우물쭈물 변명을 해보려고 했지만 할 말이 없어 결국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자 이프리트가 이런 내가 안되어 보였는지 얼른 나서서 다시 위로의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저런... 이 아이를 우리와 동일시 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해인아, 너무 신경쓸 것 없다. 지상에서 위대한 생명체라 불리우는 드래곤 조차도 태어나자마자 그렇게 만능인 건 아니었단다. 너도 이제 채 20년도 못 살았잖니?" 역시 이프리트는 다정했다. 그의 말에 내가 고마움의 미소를 지어 보내자 엘라임이 눈꼴 사납다는 듯 휙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에휴... 정말... 해민이 데리고 왔으면 이꼴을 보일 뻔 했잖아? 안 데려온게 천만 다행이지... 내일 그 블루 엘프에게 고맙다고 해야 겠어. 아, 그러고보니...' 그 블루 엘프에게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두 정령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궁금한게 있는데 말이죠. 혹시 블루 엘프라고 아세요? 보통 엘프처럼 생겼는데 피부가 파란 빛을 띄우는... 신기한 엘프 말예요." 제 14화 첫번째 임무 (3) "저기... 궁금한게 있는데 말이죠. 혹시 블루 엘프라고 아세요? 보통 엘프처럼 생겼는데 피부가 파란 빛을 띄우는... 신기한 엘프 말예요." "블루 엘프? 아아... 그래, 그래... 여기서는 인간들이 그들을 블루 엘프라고 하지?" 이프리트의 말에 이어 엘라임도 한 마디 거들었다. "흐음... 그 마족 말인가?" 엘라임의 한마디에 나는 눈이 둥그래져서 나도 모르게 목청을 높여 부르짖었다. "마, 마족이요? 그게 사실이예요?" 내가 이래뵈도 한국에 있을때에는 착실하게 교회를 다니는 신자였었다. 그 곳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누누히 들어온 것은 인간을 달콤한 말로 유혹하는 사탄과 마귀를 조심하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엘라임이 마족이라하니까 얼핏 듣기에 기독교에서 흔히 나오는, 하나님께 대항하다 지옥에 떨어져버린 타천사 루시퍼를 수장으로 한, 인간들을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과 같이 지옥으로 떨어지게 하기 위해 별의 별 수단을 다 동원하는 간악하고 극악한 무리들 처럼 들렸다. 그래서 크게 놀란 - 블루 엘프보고 마족이라고 하니까 - 반응을 보인건데 이런 내 반응에 엘라임과 이프리트가 의아하고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뭐냐, 왜 그렇게 놀래?" "호오... 그들을 네가 알고 있더냐?" 그러나 나의 경악에 비해 너무나 무덤덤한 그들의 모습에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흥분해서 열변을 토했다. "아, 지금 내가 안 놀라게 생겼어요? 그 블루 엘프가 마족이라면서요, 마족?" "마족이 뭐 어떻다고? 그들이 네 돈이라도 떼어먹고 도망가기라도 했냐?" 엘라임의 시큰둥한 반응에 나는 더더욱 흥분해버려서 엘라임이 내 말투를 흉내내며 놀리고 있다는 것도 눈치 못 챘다. 덕분에 이프리트가 웃음을 참기 위해 재빨리 얼굴을 돌리고 있다는 것도... "아, 누가 그렇대요? 하지만 마족이라잖아요, 마족!! 그, 왜 뭐시냐... 그... 그래, 창조주께 반역을 했다가 오히려 창조주께 벌을 받아서 지옥으로 떨어졌다던 그들 아니예요?" "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아, 무슨 소리긴 무슨 소리예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마족은 가까이 해서는 안될 족속들이라는 거죠!" "아니야..." 흥분해서 엘라임에게 열성적으로 떠는데 부드럽고 진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봐요, 아니라잖...에?" 하지만 너무 흥분한 나머지 나는 그게 뭘 뜻하는지도 모르고 떠들다가 멈칫 거렸다. "에? 아니라고요?" 부드럽고 진지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분명한 이프리트를 향해 불신과 의아함이 뒤섞인 시선을 보냈다. 지금까지 진실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데 누가 쉽사리 받아들이겠는가?" "하, 하지만... " 내가 뭐라 더 이야기 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이프리트가 부드럽게 손을 들어 올려 내 말을 막았다. "아아, 그래, 그래...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안다. 하지만 우선 내 말 부터 들어 보거라. 네 말대로 아주 오랜 옛날, 인간들이 지금 처럼 제대로 번창하기도 전에 창조주께 반역을 일으켰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신이 있긴 있었다." "신? 천사가 아니구요? 천사장을 위시한 천사들로 알고 있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반문하자 이프리트도 고개를 갸웃 거렸다. "흐음.. 그러냐? 음... 아무래도 네가 있던 곳에서는 하급 신을 천사라고 하는가보구나. 하기야... 차원이 다른 곳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뭐, 어쨌든 이 곳에서는 창조주께서 창조하시어 이 세상의 균형을 잡는 일을 하는 이들을 신이라고 부른단다. 뭐, 이것도 다 인간들이 붙인 이름이지만... 처음에는 나와 네 아버지도 신이라고 불렸었단다. 나는 불의 신이었고, 네 아버지는 물의 신이었지." "아하... 그렇군요. 그럼 이해가 가요." "그러냐? 다행이구나. 어쨌든 그 반역을 일으킨 하급 신 사타니엘은 지금 나락에 갖혀있지만 그 곳이 마계는 아니란다. 마족은 처음부터 창조주께서 만들어내신 종족 중 하나일 뿐이야. 가끔 그들의 거친 성격 때문에 악으로 오인하는 인간들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아." "그, 그래요? 그 마족이 그 마족이 아니란 말이죠?" "그 마족이 그 마족이 아니라, 마족은 단지 창조주께서 만들어내신 많은 종족들 중 한 무리일 뿐, 절대 악 같은 건 아니라니까." "으음... 그렇군요. 그런데 마계는 뭐죠? 아까 마계란 말이 나온 것 같은데..." 그러자 이번에는 엘라임이 대답해줬다. "마계는, 지금 이 곳과 연결되어있는 다른 차원의 세계로 마족들이 살고 있는 곳이지. 우리 정령들이 살고 있는 정령계처럼 말이다. 물론, 그 곳에는 능력만 있다면 육신이 있어도 얼마든지 갈 수 있지만..." "그, 그래요? 그런데 그 마계라는 다른 차원에 살고 있는 종족이 왜 이 곳으로 온 거죠? 그런데... 다른 차원에도 엘프가 살고 있나요?" "그들은 엘프가 아니야. 마족이지. 단지 엘프랑 비슷하게 생겼기에 인간들이 그들을 엘프라고 부르는 것 뿐이야. 하긴... 이제는 마족이라고 할 수도 없을라나?" 엘라임은 슬쩍 다리를 고쳐 앉으면서 중얼거리듯 말하자 이프리트가 그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렇겠지... 아무래도 마계에 있는 이들은 모조리 전멸했고, 이 세계에 남은 이들 뿐이니까 말야." "그건 또 무슨 말인데요?" 내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둘이서만 주고받자 약간의 소외감을 느낀 내가 끼어들었다. "아니, 별건 아니고... 그, 너희들이 블루 엘프라고 하는 종족은 마족이라고 했지? 그런데 그 종족은 마족 치고는 싸움을 즐기는 편이 아닌데다가 성격도 온화한 편이라 마계에서도 적응을 잘 못하는 종족이었지. 그런데다가 마계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종족도 아니었거든. 이 곳에서는 강한 축에 들지만..." "헤에... 그래서요?" 이프리트의 말에 내가 눈을 빛내면서 묻자 엘라임이 별걸 다 재미있어 한다는 투로 끼어들어 이프리트의 뒤를 이어 자신이 설명했다. "그래서는 뭐... 그런 녀석들이 그 곳에서 제대로 견딜수나 있었겠냐? 그래서 대충 1000년 전쯤인가? 일족의 일부분이 마계에서 탈출을 해서 이 세계로 와서 정착 했지. 마계에 남아 있던 일족들은 전멸 되었던가?" "맞아, 전멸 당했어. 그래서인지 이 곳으로 옮겨온 일족들은 자신들이 마족이라는 걸 철저히 숨기는 것 같더군. 그들이 자신들이 마족이라고 떠벌리고 다닌다면 마계에 있는 이들이 가만 안 있을테니까..." "왜요? 왜 가만 안 있는데요?" "그들은 뭐랄까... 마족의 입장에서는 창피한 녀석들이니까. 지금은 자신들이 마족이라는 걸 숨기고 새로이 블루 엘프로 불리우며 자신들도 마족이라는 걸 잊으려고 노력하니까 가만 내버려 두는 거지." 이프리트의 말은 대충 이해가 갔다. 인간 사회에서도 집안에서 창피한 인물이 있다면 괜히 조용히 있어주길 바라고 나서는걸 꺼리는 것 처럼 마족들도 그런 심정이었던 모양이다. "으음... 거참... 그들도 가여운 종족이네요..." 그래도 거의 도망치다시피 이 세계로 넘어왔을 블루 엘프족들에게 동정을 금할 길이 없어 내가 혼자 중얼거리자 이프리트가 피식 웃었다. "저런... 그렇게 동정할 필요는 없단다. 그들은 마계의 시선에서 벗어나 숨통이 트인데다가 이 곳에서는 그들 또한 강자 축에 속하니 함부로 건드릴 이들도 없고 말이다. 지금 잘 정착해서 살고 있는데 괜히 동정할 필요는 없지 않니?" "음, 그건 그렇네요.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강하나요? 사람에게 붙잡힐 정도라면 크게 강할 것 같지는 않던데요." "아마도 붙잡힌 녀석은 제대로 싸워서 붙잡혔다기보다는 함정에 빠졌다던가 아니면 싸우지 못할 상태에서 붙잡힌거겠지. 그들의 능력은 완전히 자란 수인족에 비할만하거든. 특히나 검술 솜씨는 인간들의 검술 보다 훨씬 뛰어나지." "호오, 검술이요? 그들이 검을 사용하나보죠?" "그래, 검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녀석들이거든." "헤에... 그렇단 말이죠? 내일 한번 보여달라고 해야겠네요." "그런게 뭐가 신기하다고..." 가만히 듣고 있던 엘라임이 투덜투덜 거렸지만, 그런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아... 어떤 검술일까나...' 그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여전히 거실에 앉아 있던 - 이들은 잠도 안 자는지 - 엘라임과 이프리트에게 인사를 하고 나는 성 밖에 있는 베지테크스 상회의 커다란 창고 겸 소속인들의 기숙사겸 훈련소로 향했다. 평소 같았으면 신나게 늦잠을 자고 정오가 거진 다 되어서야 느긋하게 향했겠지만, 어제 블루 엘프가 기절 시켜서 나에게서 떼어놨던 해민이가 걱정 되었던 것이다. '아아... 부디 난리는 치지 말고 있어야 할텐데... 으음... 그렇다고 혼자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 훌쩍이고 있는 것도... ' 하지만 다행이도, 그 곳에 도착하고 보니 아무 일도 없던 듯 평화롭기만 했다. 아, 물론... 내가 공중에서 뚝 떨어지는 바람에 경비를 서던 사람들이 놀라서 달려왔지만, 내가 빅터의 이름을 대자 순순히 그에게로 데려다 줬다. - 비록 나에게 살기등등하게 창과 검을 들이댄 채였지만... - "뭐냐, 너. 왜 그런 꼴로 오는거야?" 이 곳의 책임자라고 하더니만, 그에게도 서류를 처리하는 업무가 있었는지, 사무실 같은 곳에 앉아 오만가지로 인상을 찡그리며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던 그가 경비병들에게 거의 끌려오다시피 들어오는 나를 황당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아하하하... 그게 말이죠... 그냥 공중에서 뛰어 내렸더니 이렇게 달려들데요?" "응? 너도 참... 엉뚱한 녀석이구만? 정문으로 들어왔으면 될걸... 아니, 그건 둘째치고 조직패를 보여주면 될 거아니냐? 조직패는 고이 모셔뒀다가 뭐하게?" "조직패요? 뭔 조직패?" 빅터의 한심하다는 듯한 말에 내가 두 눈을 똥그랗게 뜨며 묻자 그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어제 줬잖아. 이 조직에 소속되었다는 걸 증명하는 패 말야. 어디다 잊어 버렸어?" "무슨 패요? 나 어제 받은 거 아무것도 없어요." "아, 왜 없어. 네가 소속된... "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한 소리 하려던 빅터는 '소속'이란 말이 나오자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다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자리에 앉았다. "아... 맞다.. 너 아직 정확한 소속이 정해지지 않아서 패가 지급이 안되었지? 아... 그랬군... 미안, 미안.. 내가 정신이 없어서... 어이, 그만 가봐. 저 녀석 어제부로 우리 조직에 들어온 녀석이니까 경계 안 해도 돼." 무지 미안한 표정으로 머쓱하게 웃던 빅터는 여전히 긴장한 채로 나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던 주위 사람들에게 손짓하며 그들을 물렸다. 그러자 그들은 마치 잘 훈련된 군인들 처럼 절도있는 동작으로 그에게 경례를 하고는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호오... 대단한 군기네요? 이거 이거, 정규군 못지 않은데요?" 어제는 껄렁껄렁한 (레이언을 비롯하여 밥이랑 사다드 등등...) 인물들만 보다가 오늘 군기가 딱 잡힌 인물들을 보자 놀라움과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그런 내 모습에 빅터가 스스로가 으쓱한지 기분 좋은 미소를 씨익 지어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아, 그럼 여기가 만만한 곳인 줄 알았어? 평소에는 적당한 선만 지키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지만, 경비 같은 일을 맡게 되면 조금의 흐트러짐도 용납 안 해." "오옷... 그렇습니까?" "그나저나, 일찍 왔군? 아하, 그 꼬맹이 수인족놈이 걱정되어서 눈 뜨자마자 부랴부랴 온 거야?" 빅터가 먼저 앞장서서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며 물었기에 나도 그의 뒤를 따라 그 곳을 나서며 대답했다. "하하하, 뭐.. 그렇죠. 해민이는 얌전히 잘 있어요?" "글쎄, 나도 오늘은 아직 못 봐서 말이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마. 아, 그래 아침은 먹었어?" "아니요, 아직.... 그녀석이랑 같이 먹으려고요." 제 14화 첫번째 임무 (4) "아니요, 아직.... 그녀석이랑 같이 먹으려고요." 빅터가 나를 안내한 곳은 빅터가 일하고 있던 그 건물의 오른쪽에 있는, 이 세계의 건물 치고 높은 4층 건물인데다 - 이 세계의 건물은 기껏해야 2층이나 3층이다. - 위에서 보면 양 옆으로 길쭉한 직사각형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남자 기숙사다." "호오... 꽤 크네요. 이곳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요?" 들어가기 전 밖에서 건물의 크기를 한번 쓰윽 본 내가 감탄하며 물어보자 빅터가 뭔가 비밀스런 미소를 씨익 지어보였다. "우리 조직원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건 3층까지야. 4층은 여기에 잠시 머무는 손님들이 사용하지." "아항..." 손님들이란 누구라고 말해주지 않아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노예 매매상의 손아귀에서 구해내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까지는 여기서 머문다고 하더니만, 이 곳 사람들이 사용하는 숙소를 같이 사용하는 듯 했다. "그럼 해민이와 그도?" "4층에 있어." "그렇군요. 하지만... 한 층이 아예 손님들 방이라고 쳐도 3층까지라니... 도대체 몇명이죠?" "음... 이 곳에 머무는 녀석들만 합한다면... 대충... 400명쯤 되겠군." "아... 많은 건가요?" 건물이 워낙 커서 엄청 많을 줄 알았는데, 400명 정도라면 한국에 있는 왠만한 중, 고등학교의 학생들 숫자였기에 그다지 많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어 나는 좀 당황감을 느끼며 물었다. 그러자 빅터가 오히려 황당하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뭘 바란 거냐? 머리 숫자만 채우려는 어중이떠중이 병사 집단에 비하면 적을지는 몰라도 여기만 해도 제법 큰 기사단 수준이라고. 이 이상 애들을 더 불렸다간 무슨 군대라도 조직하는 줄 알고 시선을 모을게다. 뭐... 사실 이게 전부는 아니지만..." "오, 그래요?" "이 곳보다는 못하지만, 수도를 제외한 이 나라의 가장 큰 도시 10곳에 이런 곳이 또 있어. 거기에다 상회가 들어가 있는 다른 나라에도 하나 씩 있고..." "헤에, 그럼 합치면 제법 많겠네요?" "당연하지. 다 합치면 반역이라도 일으킬 수 있을 거다." "오옷... 그 정도예요?" "다른 상회들에 비하면 좀 과한 편이지... 다른 상회는 이렇게 직접 경호원들을 훈련시켜 키우기보다는 큰 용병단에 아예 맡겨버리지. 상회 경호라던지, 물품 운송 경호라던지 말야. 그게 훨씬 돈이 적게 들어가거든. 하지만, 우리 상회는 그들과 다르잖냐." "음...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요? 여기만 용병대와 계약하지 않고 직접 경호원들을 키우고 있으면..."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모두들 어느정도는 직접 키우고 있는데다가, 우리 상회는 처음에는 거의 용병단 수준이었으니까 말야. 지금은 상회도 커지고 다른 사업도 하긴 하지만, 첫 이미지란 쉽게 지워지는게 아니라서.... 거기다가 우리도 가끔은 용병을 고용하기도 하고 말야. 크리스 녀석이 적당히 조절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크리스? 레이언이 아니라요? 그 녀석이 상회 대표잖아요." "그 녀석은 말뿐인 대표지. 모든 사무적인 일은 크리스가 다 한다는 걸 알 만한 녀석들은 다 안다고." "하긴..." 어제 레이언, 크리스와 같이 식사할때도 그런 이야기를 크리스에게서 들었었다. 그렇게 빅터에게 이것 저것 물어보며 대답을 듣는 사이 우리는 어느새 4층까지 도달해 있었다. 1층 부터 3층까지 올라오는 동안은 그 곳에 거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다 일어나 밖으로 나간 탓인지 조용한 편이었는데, 그 곳에서는 이제 막 일어났는지 소란스러웠다. "오옷... 저들이 이번에 온....?" 그들 대부분은 아직 어린티를 못 벗은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종족들이었다. 가끔 수인족도 보이고 겉 보기에는 인간인 - 혹시 아닐 지도 모르지만... - 아이들도 있고, 피부가 검은 엘프도 보였지만, 그들 중 절반은 모두 엘프 소년이었다. '허... 엘프가 제일 만만한가보네...' 이 곳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안 써도 되는 모양인지 마음 편하게 길다란 귀를 내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녀석이 나를 발견하더니 아는체를 하며 뛰어왔다. "와앗, 위대한 존재의 아드님께서 여긴 어쩐일로..." 어제 같이 돌아다닌, 밝은 녹색 머리의 소년 엘프 벨타 녀석이었는데, 녀석의 목소리가 너무 큰 덕에 그 주위에 있던 소년들이 일순간 멈칫 하더니 나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덕분에 소란스러웠던 4층 복도는 일순간 고요한 정적이 흘렀고, 오로지 나에게 달려오는 벨타 녀석의 타닥 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어어..." 순식간에 수 많은 시선을 받게 된 나는 무지 난처해서 어쩔줄을 몰라했는데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에게 다가온 벨타 녀석은 놀라움과 반가움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긴 어쩐일이세요? 이렇게 일찍? 어라라? 빅터씨도 같이 오셨네요?" "아하하... 안녕?" 나는 모두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삐질삐질 웃으며 인사를 했는데, 빅터는 이런 시선을 받는 것이 익숙한지, 아니면 자신에게 오는 시선이 아니라서 그런지 여유만만한 얼굴로 벨타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어~ 잘 잤어?" "뭐, 숲에서 자는 것 보다는 덜 상쾌하지만, 그런대로 잘 잤어요. 그런데 두 분은 이렇게 아침 일찍 이 곳에... 아하... 그들을 보러 오셨군요? 그렇죠?" 어제 나와 같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었던 일을 그 녀석은 자신이 알아챘다는게 무지 자랑스러웠는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그런 모습이 아직 어린애 같아서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들은 일어났어?" "우웅... 글쎄요... 저도 이제 막 일어난 참이라서요... 지금 그들을 보러 갈 참이었어요. 아, 이렇게 오셨으니 같이 가면 되겠군요?" 두 번째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고개를 갸웃 거리더니 곧바로 좋은 생각이라도 해낸 듯 손뼉을 한번 짝 치면서 말하는 그의 모습은 엄청 귀여웠다. '크윽~ 이렇게 귀여울수가... 해민이 못지 않게 귀엽잖아? 아아, 정말... 한국에 있는 해민이 녀석도 이렇게 귀여우면 좀 좋았을까?' 너무나 천진난만하고 밝은 그의 모습에 나는 이 녀석 때문에 이 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기꺼이 동행을 허락해 줬다. "그래, 그래. 그럼 같이 갈까?" 그러면서 내 옆에 서 있던 빅터에게 빨리 안내하라는 시선을 보내니 빅터가 피식 피식 웃으면서 우리가 서 있던 근처의 방문을 손가락으로 가르켜 보였다. "바로 여기야." 이 건물에는 비상구가 건물 양 끝과 중앙, 이렇게 세군데였다. 그 중에서도 빅터와 내가 올라온 곳은 빅터가 일하던 건물과 가장 가까운 곳의 비상구, 이 건물로 치자면 가장 왼쪽에 있는 곳이었는데, 그 비상구의 바로 옆 방이었던 것이다. "헤에... 맨 끝이잖아?" 내가 놀라움을 드러내며 빅터를 바라보자, 그는 이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괜히 머쓱해 하며 내 시선을 피했다. "하하하... 그게... 그들에게 방을 배정해준 게 늦은 시각이라..."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자자, 들어가보자구요." 나는 그런 그에게 피식 웃어준다음 그가 가르켰던 문으로 다가갔다. 똑, 똑~ "해민아? 일어 났니? 들어간다?" 그리고 조심스레 문 고리를 잡고 열어보니 그 안에서는 황당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엥? 이게 무슨 일이야?" 놀란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그 뒤로 고개만 디밀고 방 안의 풍경을 바라보던 빅터와 벨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조심스레 들어오는 거였다. 그 방 안은 가운대 난 창을 기준으로 양 옆의 벽에 침대가 붙여져 있었고, 그 창 턱에는 공간이 있어서 꽃이 꽂힌 화병이 놓여.... 있는게 원래 모습이었겠지만, 그 화병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었다. 그리고 양 옆의 침대 위에 잘 놓여져 있어야 할 시트와 덮는 이불은 구석에 심하게 구겨져 박혀 있었으며 베개는 그 안에 들어 있을 깃털을 사방에 흩날리며 바닥에 쳐박혀 있었다. 그리고 해민이는 잔뜩 털을 곤두세우고 손톱과 날카로운 이빨을 들어낸 채 블루 엘프에게 깔려 있었다. "허... 아무래도 일어나자마 또 한바탕 한 모양이군." 블루 엘프 또한 편한이 해민이를 깔고 앉은 건 아니었다. 그가 입고 있던 편해보이는 면티와 바지는 여기저기 찢겨져 있었고, 그 사이로 피가 나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양 팔과 얼굴에도 할퀸 자국이 잔뜩 있었고, 거기에도 붉은 피가 맺혀 있었다. '우와, 블루 엘프도 피가 붉구나...' 그 상황을 바라보며 나는 순간 딴 생각을 했지만, 시커먼 그림자가 휙 하고 나를 덥쳐 왔기에 퍼뜩 정신을 차려야 했다. 포옥~!! "해, 해민아?' 내가 들어온 걸 본 블루 엘프가 해민이의 위에서 내려와 서 있었고, 그 틈을 타 그에게 해방된 해민이가 폴짝 뛰어 내 품에 안겨왔던 것이다. "키잉~ 키잉~!!" 아직 인간의 언어를 하지 못하는 그였기에 뭐라고 하지는 못하고 대신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너무 했다는 듯한 울음소리만 내었다. "아... 미안, 미안... 그런데... 너 안 가길 잘했어. 갔어봐. 주눅이 들어가지고 제대로 고개도 못 들고 있었을걸?"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내 옷자락을 꼬옥 붙잡고 있는 해민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며 나는 나에게 다가오는 블루 엘프에게 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죄송해요. 많이 다치셨어요?" "별로 대단한 건 아닙니다. 편히 주무셨습니까?" 왠지, 그의 정중한 모습에서 맥알파인 공작 집안의 해럴드 집사 모습을 떠올린 나는 비식 비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예. 저는 잘 잤지만... 편히 못 주무셨을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잠은 잘 잤습니다. 이렇게 된 건 저녀석이 깨어난 직후였으니까요." 블루 엘프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자 나는 머쓱해서 그냥 웃어보이기만 했다. 그러한 나 대신 빅터가 불쑥 나서서 그에게 손짓하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상처부터 치료하자고. 설마 그런 상태로 계속 있을 건 아니겠지? 아침 먹으러 가기 전에 의무실 부터 갔다 와야겠군." ============================================================================== 오늘은 공지가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곧 책이 나온다고 글을 지우라고 하는군요. 으음... 책은 대충 3월 중순쯤 나온다고 하던데... 그래서 다음 주 월요일, 즉 3월 3일날 지우겠습니다. 그런데... 1, 2권 같이 나오는지 아니면 하나 하나 나오는지 몰라서... ^^;; 우선 1권 분량만 지우고요, 만약 다 지우라면 다시 공지 하지요. 그러니까 퍼가시는 분들, 우선 1권 분량까지만 지워주세요. 1권 분량은 6화까지입니다. 아, 그리고 내일 3. 1절이군요. 모두 모두 태극기를 달자구요 ^^ ============================================================================== 제 14화 첫번째 임무 (5) "어쨌든, 상처부터 치료하자고. 설마 그런 상태로 계속 있을 건 아니겠지? 아침 먹으러 가기 전에 의무실 부터 갔다 와야겠군." 그렇게 말한 빅터는 블루 엘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재차 입을 열었다. "의무실은 아까 그 건물에 있어." 그리고는 안내하려는 듯 먼저 몸을 돌려 문으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무엇인가 떠올린 듯 멈칫 하더니만, 그의 뒤를 따르려고 하는 우리를 돌아보았다. "앗차차차... 아마도 지금 의무실은 좀 복잡할 거야. 이 곳 의무실 주담당 의원 회진 시간이 바로 지금쯤이거든. 그리고 내 막 생각난 건데, 큰 상처가 아니면 그냥 이 곳에서 간단히 처리할 수 있도록 여기에 상비약을 준비해 놓고 있거든. 그냥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 지금 가서 붕대랑 사처에 바를 약을 가져올 테니." 그의 말에 나는 블루 엘프를 돌아보았다. 사실 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빅터의 말에 찬성이었다. 블루 엘프가 입은 상처는 크게 베이고 찟긴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해민이에게 할퀴어진 상처였기에 의원에게 보일 정도는 아니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고, 사실 블루 엘프가 상처를 입은 것은 내 탓인 데다, 혹시 수인족에게 상처를 입었을 때 내가 모르는 독으로 인하여 부작용이 생길 지로 모르는 일이었기에 뭐라 하지는 못하고 그의 눈치를 살폈던 것이다. "뭐, 대단한 상처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그러는게 좋겠네요." 벨타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지 슬쩍 블루 엘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자 블루 엘프가 나와 벨타를 한번씩 쓰윽 보더니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무덤덤한 어조로 대꾸했다. "약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그냥 간단히 씻고 옷이나 갈아 입을 생각이었습니다." "에이, 그래도 약은 바르는게 좋을 거야. 체력도 많이 약해졌는데 상처까지 치료 안 하고 그냥 냅두면 쓰나? 씻고 있어. 내 금방 약을 가져올 테니." 그렇게 말한 빅터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휭 하니 약을 가지러 나가버렸다. 블루 엘프는 그가 그러던 말던 상관 없다는 표정으로 그 방 한 구석에 있던 옷장에서 깨끗한 티와 바지를 꺼내다가 멈칫 하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준비가 덜 되었으니 먼저 가시지요. 곧 준비하고 뒤따르겠습니다." 아마, 날 기다리게 하는게 걸렸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던 나는 그가 준비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기꺼이 기다렸다가 같이 갈 생각이었다. "아, 저는 괜찮은..." 그러나, 입을 열며 블루 엘프에게 자연스레 시선을 주던 나는 그러한 내 의지를 그에게 전하기도 전에 기겁해서 그에게 시선을 주던 것 보다 100배는 빨리 고개를 돌렸다. 이 블루 엘프는 방 안에 손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은지 여기저기 찟겨져 너덜너덜한 티를 벗고 막 바지도 끌르고 있었던 것이다. '히익~!' 육체는 중성이 되었을지 몰라도 스스로를 여자라 여기고 있던 나였기에 그 모습에 거의 반사적이다시피 눈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해민이와 벨타를 이끌고 황급히 문으로 향하며 블루 엘프에게 말을 던졌다. "아앗, 저희는 나가서 기다릴게요." 그러면서 문을 나서던 나는 혹시나 블루 엘프가 나의 기다린다는 말 때문에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나올가봐 문을 닫기 전에 한 마디 덧붙였다. "아, 그렇다고 서두르지 마시고요, 천천히 하고 나오세요." 그리고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그 블루 엘프에게 한번 씨익 웃어주고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우와, 우와... 하마터면 그의 알몸을 볼 뻔 했어... 에고 놀래라... 그런데... 블루 엘프는 마족이라던데... 알몸이 인간이랑 똑같을까?' 닫힌 문에 잠시 몸을 기댄 채 두근두근 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했건만, 오히려 갑자기 떠오른 요상한(?) 생각 때문에 얼굴까지 빨개지며 심장 또한 덩달아 더욱 더 날뛰기 시작했다. '으헤에엑~ 나좀 봐...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안돼,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아... 그런데.. 되게 마른 몸이었어... 갈비뼈가 보일... 으헥, 안돼, 안돼. 딴 생각, 딴 생각으을....' 그렇게 혼자 속으로 난리를 치고 있던 나는 소매가 잡아당기는 느낌에 정신을 차리지 않았으면 아마 빅터가 약을 들고 돌아왔을때 까지 그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응?' 겨우 생각에서 빠져 나와 고개를 돌려보니 그 곳에는 해민이가 커다란 눈망울에 의아함을 가득 담은 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아주 순진하고 맑은 눈망울에 나는 순간적으로 뜨끔해서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 어차피 남의 생각도 읽을 수 없었을테지만...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나 할까? - 나도 모르게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아하하하... 왜 그러는데?" 그러자 해민이가 나를 여전히 말똥말똥 거리는 눈망울로 바라보면서 손가락으로 내 옆을 가르키는 거였다. "응?"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니, 그 곳에서는 벨타를 비롯하여 마악 복도로 나와 있던 주위의 이종족들이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하하하... 아하하하..." '이런...' 엄청 창피했지만, 그렇다고 얼굴을 가린 채 이 곳을 피할 수도 없어서 나는 괜히 뒷머리를 긁적 거리며 웃어보였다. 그러자 그 곳에 있던 이들이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한번씩 더 바라보더니만 서로 속삭이면서 제갈길로 흩어져 버렸다. "뭐야, 저 인간은?" "벨타 말로는 위대한 존재의 자식이라던데?" "저 인간이 맞기는 한 거야?" "몰라... 아닌 거 같지?" "아니나마나, 되게 푼수적인데?" "험, 험...." 그들의 속삭이는 말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왔기에 나는 괜히 일부러 큰 소리로 헛기침을 해댔다. 그러자 그렇게 수근거리던 이들이 흠칫 하더니만 입을 딱 다물고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그들의 뒤를 괜히 한번 힐끗 바라본 나는 여전히 멀뚱멀뚱 서서 나를 바라보는 벨타와 해민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 그러고보니, 벨타, 넌 준비 다 했어?" "당연하죠. 남의 처소를 방문하는데 제 스스로의 준비도 끝내지 않고 가겠습니까? 그러나저러나 해민이는 준비가 하나도 안 된 것 같은데요?" 벨타의 말에 나는 그제야 아차 싶어 해민이를 바라보았다. 아까 블루 엘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해민이를 끌고 나올 것만 생각했지, 내가 오기 전 까지 둘 다 아무런 준비도 못한 채 엎치락 뒤치락 하고 있었던 걸 깜빡 했던 것이다. "에구... 맞다. 해민이도 옷을 갈아 입어야지?" 그는 길이가 좀 긴데다 해민이에게는 좀 큰 편이라 끝단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커다란 티 한장만을 잠옷삼아 걸치고 있었는데, 아까 블루 엘프랑 한바탕 난동을 벌이는 바람에 블루 엘프의 피가 여기저기 묻어 있는데다 옷도 조금 찟어져 누가 보면 크게 싸운 것만 같은 - 물론 실제로 싸웠지만... - 몰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옷을 갈아 입혀야겠는데 도저히 지금 상태로는 블루 엘프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나는 괜히 문 앞에서 머뭇머뭇 댔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벨타나 다른 이에게 옷을 빌려 입히고 싶었지만, 바로 앞에 해민이의 숙소를 두고 다른 이의 숙소로 간다는 것도 웃긴 일이고, 그렇다고 지금 뭐 하고 있을지 모르는 블루 엘프가 있는 방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도 그렇고... 그래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이런 나를 제치고 벨타가 앞으로 나서더니만 우리가 방금 나와 내가 문을 쾅 닫은 그 문을 똑똑 두드렸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깜빡 잊은 일이 있어서요..." '으, 으헤엑...' 아직 블루 엘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 볼 마음의 준비가 안됐는데도 불구하고 벨타가 들어가려고 하자 나는 기겁해서는 그를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안에서 블루 엘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벨타가 문을 열었기에 벨타를 말리려고 뻗었던 내 손은 허무하게 허공만 한번 움켜쥔 채 재빨리 밑으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벨타가 먼저 쓰윽 방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바람에 나도 쭈볏거리며 해민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니 블루 엘프가 사각팬티 바람으로 수건을 물에 젹셔서 온 몸을 슥슥 닦고 있다가 날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다시 들어올 거였으면 뭐하러 아까 나갔냐고 묻는 기색이 역력했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황급히 변명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하하... 그게... 해민이 옷을 안 갈아입혔더라고요. 신경쓰이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러자 그는 더욱 더 멀뚱거리며 날 보더니 쓱 시선을 돌리고는 자신의 할 일을 계속 하는 거였다. 그런거 전혀 상관 없다는 듯이... "별로... 괜찮습니다." 덕분에 괜히 변명만 늘어놓은 나만 더욱 더 머쓱해졌다. '하아... 정말... 대하기 힘든 타입이구나... 피곤해...' 내가 이렇게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사이 옷장을 뒤적여 해민이의 것으로 보이는 작은 사이즈의 티셔츠와 바지를 꺼낸 벨타가 해민이를 돌아보았다. "자, 해민아.. 옷은 여기 있으니까... 씻는 것은 공동 목욕탕으로 갈까?" "공동 목욕탕?" 벨타의 말에 의아함을 느낀 내가 묻자 그가 설명을 해줬다. "예. 여기는 층마다 목욕탕이 있더라고요. 10명 정도는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는 커다란 욕조가 있는 곳인데요, 여러사람이 사용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욕조 안에서 씻지는 못하고 바깥에서 씻으라고 하더군요. 뭐, 지금은 아침이라 목욕할 사람도 별로 없으니 한가할테지만요. 해민이도 몸을 씻어야 할 거 같아서요." 이 곳은 방마다 간단하게 씻을 수 있도록 세숫대야와 물을 가져다 놓지만, 목욕할 수 있도록 욕조를 가져다 놓을 수는 없으니 공동 목욕탕을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흐음... 그런데 블루 엘프는 왜 거기 안 가고 여기서 불편하게 씻는 거지? 그냥 물로 닦을 정도면 좀 찝찝할텐데... 다른 이들이 있는 곳은 불편한가?' 내가 그렇게 고개를 갸웃 거리는 사이 벨타는 해민이에게 다가와 그의 팔을 살짝 끌었다. "자, 씻으러 갈까? 내가 씻겨줄게." 하지만, 내가 있는데 굳이 그곳 까지 갈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벨타를 만류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냥 여기서 씻자고." 그러면서 의아하게 날 바라보고 있는 벨타에게 한번 씨익 웃어보인 뒤 운디네를 소환했다. "이 녀석좀 씻어주겠어?" ================================================================================== 으음... 빨리 빨리 진행을 해야 하는데 말이죠.. ^^:; 왜 자꾸 늦춰지는지 원... 아, 오늘 제 동생이 입학을 했습니다. 홋홋홋... 제가 졸업한 고등학교예요 동생이 후배가 되는 것이죠. 오늘 개학하고 입학하신 분들 많으실텐데요 모두 모두 축하드려요 ^^ 그리고... 2권도 같이 나오나봐요. 2권 분량까지 지우라는군요. 하지만, 이번주 내로 지우면 된다고 했으니 오늘은 1권 분량 지우고요 이번주 금요일에 2권 분량 지우겠습니다. 2권은 외전까지입니다. 퍼가시는 분들, 그때 다 지워주세요 ^^ 제 14화 첫번째 임무 (6) 그러면서 의아하게 날 바라보고 있는 벨타에게 한번 씨익 웃어보인 뒤 운디네를 소환했다. "이 녀석좀 씻어주겠어?" 그렇게 내가 해민이를 씻겨 - 물론 운디네가 한 거였지만... - 주고 나서 벨타가 미리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혀줄 즈음 방 문에 노크하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미처 블루 엘프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빅터가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이제 막 새 옷을 다 갈아 입은 블루 엘프를 보더니 무지 서운하다는 투로 투덜거렸다. "어이, 옷을 입고 있으면 어떻게 해? 내가 약을 가져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지 그랬어? 다시 벗어야 하잖아?" 그러면서 빅터가 블루 엘프를 향해 다가가자 그 블루 엘프는 그를 피하려는 듯 슬쩍 옆으로 물러나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약을 바를 생각은 없습니다." "응? 하지만, 비록 작은 상처처럼 보여도 약을 발라두는게 좋잖아. 내가 기껏 가지고 온 성의를 봐서라도 고집 부리지 말고 옷 벗어봐, 발라줄테니..." 블루 엘프가 한사고 거절하자 빅터도 오기가 났는지 블루 엘프에게 성큼 다가서며 그의 어깨를 잡으며 매달렸다. 그런데, 그 순간 블루 엘프가 딱 굳어 버리더니 너무나 살벌한 표정으로 빅터를 노려보는 거였다. 그 때문에 순간 당황한 빅터가 그의 어깨에서 손을 놓고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자 블루 엘프는 살벌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그 못지 않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제 몸에 손대지 말아주십시오. 만약 그랬다가는 아무리 당신이라도 제가 어떻게 나올지 저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호의를 베푼 것임에도 불구하고 블루 엘프가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도 모자라 저런 살벌한 경고성의 말을 내뱉자 나는 아무리 사람 좋은 빅터라고 해도 화를 낼거라 생각하고 긴장해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 어... 그래, 조심하지." 하지만, 다행이도 빅터는 그 정도에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잠시 당황하던 표정을 곧 추스리고 블루 엘프의 경고를 부드럽게 받아 넘겼다. 그러자 블루 엘프는 살벌한 표정을 지우고는 내 옆으로 다가와 멈춰서는 거였다. 자기 때문에 방안의 온도가 몇도 내렸다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무덤덤한 블루 엘프의 표정에 괜히 나만 빅터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기도 하고, 그렇다고 이 상황에 나서서 뭐라 하기도 뭣해서 난처한 시선을 같은 입장인 벨타와 나누고 있는데 빅터가 다가와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활기차게 입을 여는 거였다. "자자, 뭐 하고 있는 거야? 가서 아침 먹자고. 배 고프지도 않아?" "예? 아, 예..." 그리고는 그는 얼결에 대답하는 나와 벨타의 팔을 잡아 이끌고 밖으로 향했다. 그에 순순히 끌려가주기는 했지만, 정말 괜찮은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서 빅터를 힐끔 힐끔 바라보자 이런 내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빅터가 우리 뒤쪽에서 따라오는 블루 엘프를 한번 힐끗 바라보더니 슬그머니 내 쪽으로 고개를 숙여 블루 엘프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아아,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이번에는 확실하게 내가 잘못한 거니까..." "엥?" 내가 보기에는 틀림없이 블루 엘프가 빅터의 호의를 너무 냉정하게 뿌리친 것인데 엉뚱하게도 빅터 스스로가 자신이 잘못했다고 나서니 나로써는 어리둥절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빅터의 속삭임을 같이 들은 벨타는 그의 말에 납득을 했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게 아닌가? 남들은 다 수긍하는데 나만 그러지 못하니 내가 뭔가 모자라나... 의심이 들기도 하고 왕따 당하는 거 같아 되게 찝찝함을 금할 수가 없었지만, 뒤에 따라오는 블루 엘프를 의식해서인지 그런 짧은 속삭임 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는 빅터와 벨타의 모습에 묻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대며 식당으로 향했다. 어제 저녁을 먹었을 때에는 처음인데다 사람들을 소개받는 중이었기에 특별하게 몇몇 사람들만 응접실에서 같이 먹었는데, 사실 이 곳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공동 식당에서 급식 받아서 식사를 하게 되어 있었다. 굉장히 길~쭉한 단층 건물은 미처 들어가지도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음식 냄새를 폴폴 풍기고 있어 식사 시간이라는 걸 알리고 있었다. 사실 시간도 아침 식사 시간대라 나는 그 안의 자리가 꽉 차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헌데, 이게 왠일인지 그 안의 자리는 절반이나 텅텅 비어 있는 거였다. 그나마 절반을 차지하는 이들 대부분은 이종족들이었고, 사람들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뭐지? 지금이 식사 시간대가 아니었나?' 한국 학교에서 급식을 받던 것과는 크게 다르지 않는 구조였기에 나는 빅터가 하는 대로 커다란 접시에 포크와 나이프를 가지고 푸짐하게 쌓여 있는 음식들을 먹을만큼 일정량 덜었다. 그 곳은 식당 아주머니들이 음식을 퍼주는 것이 아니라 부페식으로 자신이 먹고 싶은 걸 먹을만큼만 담아가지고 가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저리로 갈까?" 먼저 음식을 담고 나머지 일행 - 나를 비록한 해민이, 벨타, 그리고 블루 엘프- 이 음식을 다 담기를 기다렸던 빅터가 가르킨 곳에는 한 사람이 홀로 6인용 식탁을 차지 한 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여어~게빈. 혼자 식사하냐?" 빅터의 친근한 말에 접시에만 시선을 집중한 채 음식을 먹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보았다. "아아... 빅터님. 이렇게 식사 하러 오시는 걸 보면, 제가 아까 가져다 드린 서류들을 다 처리하셨나보군요?" 그는 키가 190 정도 되어보이는 큰 키에다가 덩치도 밥 못지 않게 좋았다. 게다가 검은 머리를 한국의 군인들 처럼 엄청 짧게 깎고 있어서 얼핏 보면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조폭들을 보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해주는 남자였다. 이 곳의 조직을 운영해 나가는 데 중요 인물 중의 한 사람이라 어제 잠깐 소개를 받았지만, 그를 보면 항상 깍두기가 생각나 비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얼굴이 네모형에다가 파란 눈은 항상 눈꺼풀에 의해 반쯤 가린 상태로 맹~ 하게 풀려 있었다. 그런, 책과는 전혀 관계 없고 오로지 육체젹인 능력에만 관계 있을 것 처럼 보이는 이 사람이 이곳의 사무 처리 책임자이자 회계 담당자라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역시... 사람이라는 건 겉모습만 보고 모르는 일이라니까.' 어제 소개받았을때는 빅터의 보좌관 역을 맡고 있다고 해서 부관인가보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사무 및 회계 담당자라는 말에 입이 떠억 벌어질 뻔 했었다. 그러면서 항상 가죽 바지에 가죽 조끼, 징이 달린 가죽 부츠를 신고 다녀서 정말 저어어엉~말 사무와는 동떨어진 분위기를 풍기는, 참 별종인 사람이었다. 재미있는 건, 이 사람은 평소 다른 일에는 맹~ 한 표정으로 그냥 그냥 넘어가는데 사무 처리나 회계에 관해서는 엄청 철두철미해서 이 곳의 총 책임자인 빅터 조차도 그런일에 관해서는 게빈을 이기지 못한다고 했다. 저번 달에는 월별 수입 지출 보고서를 쓸때 은화 한 닢이 공중으로 붕 뜨는 사건이 발생했었는데, 그런 것쯤 누가 은화 하나 내서 해결하면 될 걸 가지고 자신의 밑에 있는 부하들과 함께 일주일간 철야를 해서 결국에는 찾아내는 전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그였기에 빅터는 게빈의 질문에 얼굴이 헬쓱해져서는 허허 웃었다. "아니.. 그게 말이지... 열심히 사인을 하고 있는데 해인이가 와서 말야... 밥 먹고 하면 안될까?" 그러자 그의 반쯤 감긴 눈이 빅터를 쓰윽 지나쳐 그의 뒤에 서서 난처한 얼굴로 서 있던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접시로 떨어졌다. "정오까지는 끝내주셔야 합니다." "그럼, 그러엄~ 그때까지는 끝낼 테니 걱정 마." 빅터는 한 고비 넘겼다는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그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았기에 나도 엉거주춤 그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게빈이 반쯤 감긴 멍한 눈을 들어 다시 나를 바라봤다. "왔냐?" "아, 예. 안녕하세요?" 얼결에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나를 그는 멍한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 너 배정이 어디로 되었지? 혹시... 너 글 읽을 줄 아냐? 이왕이면 덧셈과 뺄셈도 할 줄 알면 좋겠는데?" "예? 아, 예... 물론 할 줄 압니다만..." 나는 이번에도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사실, 그런거 감추고 자시고 할 생각도 없었으니 반사적으로 대답한 건데 그 순간 그 동안 반쯤 풀린 멍한 눈을 하고 있었던 게빈이 지금까지의 행동들이 모두 그가 했다는 것을 믿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벌떡 일어서며 반개했던 눈을 활짝 떠 날카롭게 빅터를 노려보았다. 그건, 너무나 순식간의 상황전환이었기에 나는 막 포크에 콕 찍어서 입에 넣으려던 고기 조각을 입 앞에서 멈추고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왜?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게빈의 모습에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빅터 또한 움찔 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고보니, 어제 게빈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때 그의 반개된 눈을 다 뜨이게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은 것 같았는데...' 내가 어제 들었던 이야기를 되새겨보는 사이 게빈이 빅터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녀석 내 밑으로 줘, 알았지? 얜 내 거야!!" 얼마나 다급했으면, 아까의 존대는 어디다 가져다 버리고 건방지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반말로 내뱉는 그의 모습에 나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떻게 들으면 참 묘한 어조의 말이었지만 부릅뜬 눈에서 매서운 빛을 발하며 확답을 받으려는 게빈의 태도는 그런 어조에서 파생될 수 있는 이상한 생각들을 원초에 다 깨버렸다. 그의 열혈적인 반응에 빅터는 식은땀을 비질비질 흘렸지만, 그의 말을 다 들은 다음에는 지금까지 그에게 쩔쩔 매던 모습은 어디로 버렸는지 단호하게 한칼에 거절했다. "안돼." "뭣이라?" 부릅뜬 눈으로도 모자라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게빈의 눈초리가 매서워졌지만 빅터는 꿋꿋이 버텼다. "안돼. 이 애 능력은 네 밑으로 넣기에 너무 아깝단 말이야. 운반조나 침입조 쪽으로 넣을 생각이야." "웃기지 마. 지금 네가 내 일을 우습게 보는 것이냐? 내 일 또한 운반이나 침입 못지않게 무척 중요한 일이라고. 지금 우리쪽 애들이 일손이 모자라 월말에는 철야 작업하는 거 몰라?" 게빈이 식탁까지 내려치며 반박했지만, 빅터 또한 이런 일이 많이 익숙한 듯 태연하게 받아쳐다. "그래서 이번에 새로 두명이나 배정해 줬잖아." "두명 가지고는 택도 없단 말야!!" "그래도 안돼." "저 녀석이 얼마나 잘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 왠만하면 내쪽으로 넘겨주면 안돼?" 빅터의 코 앞으로 얼굴을 숙이며 노려보는 게빈의 모습에 빅터는 잠시 움찔 했지만 곧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 같으면 최상급 정령사를 단순 사무직이나 회계 잡무를 시키겠냐?" "... 최상급... 정령사라고... 이 녀석이?" 빅터의 말에 잠시 벙찐 표정이던 게빈은 나에게 시선을 돌려 진득하니 바라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아아, 나도 믿기지는 않지만 어제 캡틴 녀석이 데리고 와서 실력을 보증하더구만. 뭐, 사실인지 아닌지는 곧 알 수 있겠지만... 사실이라면 네 밑으로는 안돼." 빅터의 말에 실망하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은 게빈이었지만, 그래도 나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던지 다시 한번 제안해왔다. "젠장... 그럼 일 없을때 보조 형식이라면 안돼겠습니까?" 이번에는 정신을 차렸는지 깍듯한 존대였다. "뭐... 해인이가 괜찮다면 그래도 되겠지만... 이제 갓 들어온 애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말라고. 게다가... 레이언 녀석이 말한게 사실이라면, 아마 곧 일을 맡아야 할 거야." "아... 하긴..." 빅터의 말에 순순히 납득한 게빈이 다시 반개의 눈을 하며 접시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이번에는 빅터가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애들이 없는 거야? 오늘 단체로 소풍이라도 간 거야?" "뭐... 비슷합니다. 오늘 신입 애들이 신고식 치르는 날이니까..." "앗, 그게 오늘이었나?" 앗차 싶은 얼굴로 빅터가 묻자 게빈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짧게 끄덕였다. "뭐, 아침 훈련 끝에 시작한다고 했으니... 지금 한창 하고 있을 시기죠." 제 14화 첫번째 임무 (7) "뭐, 아침 훈련 끝에 시작한다고 했으니... 지금 한창 하고 있겠군요." "이런... 그래? 으음... 안되겠어. 해인군, 우리 아침은 갔다 와서 먹자고. 지금 한가하게 먹고 있을 시간이 아니야." 게빈의 말에 잠시 자신의 앞에 놓여진 음식을 바라보며 고민을 하던 빅터는 결국 음식 보다는 다른 일이 더 급했는지 이제 겨우 세 포크째 먹고 있는 내 팔을 잡고 강제로 일으키더니 식당 밖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어엇, 잠깐만요.. 먹다 어디 가는데요? 다 먹고 가면 안돼요?" "안돼. 그럴 시간이 없다고. 이봐 게빈, 우리 음식좀 맡아주고 있어!!" 그렇게 홀로 식사를 계속 하고 있던 게빈에게 외친 빅터는 거의 뛰다시피 건물 입구로 향했고, 덕분에 갑작스런 빅터의 행동에 놀라서 바라보고 있던 세명의 이종족들도 황급히 일어나서 따라 나왔다. '으윽... 그래도 밥은 먹구가지이~~ 먹을 때는 안 건드리는 법인데에~' 점점 멀어지는, 나를 간절하게 부르고 있는 탁자위의 음식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빅터의 억센 손아귀에 잡힌 팔 때문에 나는 눈물을 머금고 끌려가며 속으로 처절하게 외쳤다. 아침도 못 먹게 한 채 빅터가 급히 우리를 끌고 간 곳은 엄청나게 넓은 연무장이었다. 이 곳에 있는 연무장은 웨스트모어랜드 후작의 성에서 봤던 연무장 만큼이나 엄청 큰 곳이었는데, 지금 그러한 곳의 중앙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호오, 아직 늦지 않았군." 멀리서 그 모습을 본 빅터는 반색하며 그렇지않아도 빠른 걸음이었는데 아예 뛰다시피 해서 그 곳으로 나를 끌고 갔다. 가까이 다가보니 그들은 그냥 모여 앉아있었던 게 아니라 가운데 넓은 공간을 남겨두고 그 주위를 빙 둘러싼 채 촘촘히 모여 앉아 있었는데, 그 가운데 공간에는 사다드가 무지 태평한 얼굴로 담배까지 꼬나문 채 어떤 두 사람과 마주보며 서 있었다. 빅터는 맨 뒤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자마자 강제로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젠장, 어떤 놈이야?" "윽! 누구야?" "늦게 왔으면 뒤에서 보라고!!" "죽을래?" "체엣..." 너무 촘촘히 앉아 있어서 사람들을 밀어 낸다고 해도 틈이 벌어지는데는 한계가 있어 그들을 뚫고 앞으로 나가는 건 무척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빅터는 사람들 사이에 틈이 생겼던 말던 무조건 비집고 들어가는 바람에 어떤 사람들은 다리고 발이고 마구 밟히는 사태가 발생했다. 덕분에 뒤에서 따라가는 나는 너무나 곤혹스러웠지만, 여전히 빅터가 내 팔을 놔주지 않았기에 미안하다는 표정만 지어보인 채 빅터의 뒤를 따라 그들의 다리를 밟고 지나가며 여기 저기서 터져 나오는 불평들을 고스란히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젠장, 이 자식들아~!!" "죽고 싶어엇~!!" "야, 임마. 앉지 못해? 앞이 안 보이잖아?" "이 자식들이~!!" '아... 뒤에 또 있었지...' 뒤에서 또 터져 나오는 험악한 소리들에 나는 양심이 콕콕 찔렸지만, 빅터는 익숙한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꿋꿋이 사람들을 헤치고 나가 결국에는 가운데 부근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는 대충 열명 정도 되어보이는 사람들이 한쪽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밥이 팔짱을 턱 낀채 서서 우리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어, 시작한지 한참 되었어?" 그런 그에게 한 손을 들어보이며 빅터가 다가가며 묻자 밥이 다시 공간 중앙에 있는 사다드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꾸했다. "아니, 이제 시작이야." "그래? 그거 참 다행이군. 그런데, 오늘은 어떻게 사다드가 나섰네?" 밥 옆에 나란히 서서야 겨우 내 손을 놔준 빅터가 다시 묻는말에 밥이 친절히 대꾸했다. "흥, 저 놈들이 멍청했지. 사다드가 이제 곧 있을 운반에 투입될 녀석들을 뽑으러 왔다가 선택 당했거든." "허, 운도 지지리도 없는 놈들... 사다드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나보지? 훗훗훗... 네놈들은 오늘 죽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설명 해주실 분 없으세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니 대충 사다드와 대치하고 있는 두 남자가 사다드에게 싸움을 걸었다는 거 같은데, 괜히 시비를 걸어 싸움이 생긴 건 아닌 듯 싶었다. 이 곳에 오기 전에 게빈이 '신입들의 신고식'이란 말도 들었고 말이다. 역시나 이런 내 생각이 맞은 듯 빅터가 입을 열어 설명해 줬다. "그러니까... 일종의 신입 신고식인데... 새로운 녀석들은 이 곳에 있는 어떤 이던지 한 명을 선택해서 겨뤄야 해. 물론, 신입이 이겼을 경우, 그 신입을 상대한 놈은 그 날로 죽는거지만..." "하. 하. 하... 진짜 그런 경우도 있어요?" "물론 있지. 하지만 대부분은 신입이 얻어맞아." "신입인데 안 봐줘요?" 보통 대학이나 하다못해 동아리에 신입생이 들어오면 환영하는 뜻에서, 혹은 신입을 귀엽게 생각해서 봐주는 것을 생각하며 물었는데 의외로 빅터는 이런 내 말에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봐줘? 신입에게 선택 당했다는 건 그 신입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처럼 약해 보였다는 뜻이야. 그런데 그런 녀석이 어디가 이쁘다고 봐주겠어? 괘씸한 녀석이니 반쯤 죽여 놓지..." "하아... 그, 그렇군요." 그렇게 빅터가 설명해주는 와중에 사다드를 선택한 두 신입은 잠시 기다려도 사다드가 공격을 해오지 않자 자신들이 직접 공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보통 장검 길이의 목검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권법을 주로 하는지 손등 부분에 징이 박힌 가죽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먼저 공격한 쪽은 목검을 들고 있는 사람이었다. 가벼운(?) 신고식이다보니 큰 상처가 나지 않도록 진검을 사용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2대 1로 싸울 수도 있어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묻자 이번에는 밥이 대답해줬다. "원래는 1대 1인데... 제일 먼저 누가 나서겠냐고 했더니 저 두 녀석이 나섰거든. 그런데 둘 다 사다드를 지목하니까 사다드가 두번 싸우기 귀찮다고 둘보고 한꺼번에 덤비라고 해서 저렇게 된 거야." 그러는 동안 먼저 사다드에게 덤벼든 검을 든 남자가 우선 가볍게 사다드의 기량을 확인 해 보려는 듯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쳤고, 마찬가지로 목검을 들고 있던 사다드는 목검을 가로로 뉘여 그 검을 막았다. 그러자 뒤에서 틈을 보고 있던 남자가 사다드의 옆으로 들어가며 그녀의 옆구리에 발차기를 날리는 거였다. 앞에서 목검 들고 있는 남자를 막고 있느라 일순 그녀의 빈 옆구리에 그대로 다른 남자의 발차기가 작렬하는가 싶었는데, 놀랍게도 사다드는 상대방 남자의 목검을 막고 있는 자신의 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몸을 숙여 한바퀴 돌며 두 검이 만들어 낸 공간 밑으로 슬쩍 빠져 나오는 거였다. 덕분에 힘차게 내질러진 남자의 발은 허공을 지나 땅을 찼고, 사다드의 몸은 시선만 반대 방향으로 볼 뿐 어느새인가 목검을 든 남자의 옆에 나란히 있게 되었다. 사다느는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거기서 한발 짝 앞으로 나가 목검을 든 남자를 지나쳐 가면서, 동시에 한 손으로 멋드러지게 목검을 휘익 돌려 척 잡더니만 그 남자의 뒤통수를 정확하게 내리쳤다. 퍼억~!! 덕분에 목검을 든 남자는 사다드에게 내려치기 딱 한번 해보고 뒤통수를 얻어 맞은 채 K.O패 당하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사다드의 입에서는 담배가 떨어지기는 커녕, 검이 돌아갈때 같이 한바퀴 휘릭 도는 묘기까지 선보이는 거였다. "오옷, 대단하다..." 순식간에 한 사람을 보내버린 그녀의 실력에 나는 나도 모르게 손뼉까지 쳐가며 감탄을 하자 빅터가 피식 웃었다. "저래뵈도 사다드는 나도 상대하기 힘들다고. 이 곳에서 그녀의 유일한 적수는 밥 정도일까나?" "헤에... 그래요?" 주먹을 사용하는 남자는 자신과 같이 덤볐던 남자가 허망할 정도로 쉽게 무너지자 섣불리 공격하지 못한 채 신중한 눈으로 사다드를 노려보며 몸을 낮췄다. 그러자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를 자근 자근 밟아주고 있던 사다드가 그런 남자의 신중한 모습을 보더니만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목검을 슬쩍 허리에다 걸쳤다. 마치 검집에 검을 넣은 모습처럼 말이다. '어머낫, 그렇다는 건 혹시...' 그리고는 어느 순간 밟고 있던 남자를 박차고 굉장한 스피드로 앞으로 뛰어나가 신중하게 자세를 낮추고 있던 남자에게 쇠도해 들어가는 동시에 허리에 걸친 목검을 뽑아 찔러 들어갔다. "웃!" 남자는 그걸 막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급히 몸을 오른쪽으로 이동시켰는데, 사다드는 그걸 예측했다는 듯 남자가 있던 자리에서 멈춰서 몸을 옆으로 회전 시키자 들고 있던 목검 또한 자동적으로 회전하며 남자가 피한 쪽으로 뻗어 나가는 거였다. 따악~!! "으윽~!!"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신음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에는 사다드가 거의 쭈그려 앉았다시피 몸을 낮추면서 오른 손과 오른 발이 뻗어 있었는데, 그녀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목검의 끝이 정확히 남자의 정강이에 틀어박혀 있었다. "아프겠다..."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 아파보일 정도였으니, 실제로는 엄청 아팠을 터였다. 역시나 그거 한대 맞은 남자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서는 한대 엊어 맞은 정강이를 부여잡고 끙끙댔다. "저거 한대 맞으면 잠시 동안은 움직이지 못하지." 빅터는 마치 겪어본 일이라는 듯 끙끙 대는 남자 처럼 오만상을 찡그린 채 심이 측은하다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자, 그럼 감히 날 지목한 댓가를 받아야겠지? 아침도 먹기 전에 날 뛰게 만들다니 간덩이가 부은 녀석들이군." 그런 두 가여운 남자들을 무지 냉정하고 살벌한 눈초리로 쳐다보던 사다드가 사악하게 씨익 웃으며 두 남자에게 다가갔고, 그 뒤로는 무자비한 목검 구타가 이어졌다. "끄아아악~~!!" "허... 사다드씨도 의외로 무서운 구석이 있었네요?" 그런 무서운 광경을 슬쩍 외면하며 묻자, 빅터가 싱글 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은 배고플때 움직이는 걸 무지 싫어하거든. 그래서 평소보다 엄청 화가 났을 거야." "저 놈들이 운이 없었던 거라니까." 밥이 한 마디 덧붙이는 걸 들으며 나는 사다드가 배고플 때는 절대 건드리지 말자고 다짐했다. =========================================================================== 죄송, 죄송.. ^^;; 어제는 3권 분량 수정 작업하느라구요.. ^^;; 으음... 그리고 책은 3월 중순 이후에나 나온다는군요. 저도 아직 표지도 못 봤습니다. 그리고 케루비아님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려요 ^^ 제 14화 첫번째 임무 (8) 밥이 한 마디 덧붙이는 걸 들으며 나는 사다드가 배고플 때는 절대 건드리지 말자고 다짐했다. "자, 그럼 다음!!" 사다드가 두 남자를 신나게 두들가고 나자 대기하고 있었던 듯 한쪽에서 네명의 남자가 즉각 튀어나와 거의 넝마가 되어 정신을 못차리는 두 남자를 데리고 건물 쪽으로 뛰어갔다. 그러자 밥이 잔뜩 쫄아 있는, 신입임이 분명한 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하자, 그 말에 따라 그들이 엉거주춤 하며 일어섰다. 하지만, 아까 사다드에게 두명이 엉망으로 당하는 것을 봐서 그런지 서로 눈치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앞으로 나서는 이가 없었다. 하긴, 그 마음 십분 이해가 갔다. 나도 저들과 같은 입장이라고 해도 겁장이라고 불릴 지언정 앞으로 나서고 싶지 않았을 거다. 그들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신참 신고식은 먼저 나서는 자를 순서로 하는 듯 다들 일어났음에도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않자 밥이 일부러 도발 하려는 듯 노골적으로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향해 이죽거렸다. "뭐야? 아까는 너도나도 나서려고 하더니만... 누가 네 녀석들을 뽑은 거지? 그렇게 몸을 사릴 거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만둬!! 애송이 같은 녀석들..." 노골적으로 도발하려는 건 좋은데 너무 노골적으로 자존심을 찌르니 나는 오히려 한숨이 나왔다. '너무 노골적인 거 아냐? 일부러 그런다는 거는 애들이라도 알겠다. 설마 이런 말에 욱하는 단순한 놈이...'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다섯이나 되는 녀석이 앞다투어 식식대며 나서서 나를 비틀거리게 했다. '허... 있었네? 정말 만화 같은 이야기야...' 그 중에 식식대며 앞으로 나섰다가 자신들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자 아차하며 무지 후회하는 표정을 짓던 녀석 한명이 우물쭈물하다가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주먹을 불끈쥐며 밥에게 물었다. "저기... 정말 아무나 지적해도 되는 거죠?" "물론이지." 뭘 그런걸 새삼 묻느냐는 밥의 표정을 힐끔 바라보던 녀석이 손가락을 뻗으며 외쳤다. "저 사람으로 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양심에 무지 찔리는지 시선은 다른쪽으로 향했는데, 하필 그 손가락이 가르키는 쪽에는 내가 서 있었다. 하지만, 내가 서 있는 곳에는 나 말고도 블루엘프와 해민이, 벨타, 빅터, 밥, 그리고 막 우리 곁으로 온 사다드까지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둘러보다가 은근히 시선을 회피하고 있는 녀석에게로 향했다. "누구? 정확하게 말해야 할 거 아니야?" 그러자 녀석이 되게 찔린다는 듯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저기... 파란 머리의 히멀건 녀석..." "에? 저요?" 히멀건 거는 모르겠지만, 파란 머리라고 하면 이 곳에서 나 밖에 없었기에 나는 황당해하며 재차 묻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찔리는 양심의 통증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지 한마디 작게 덧붙였다. "아무나 된다면서요..." "우우~ 비겁한 놈~!!" "그렇다고 저런 꼬맹이를 찍냐~!!" "사나이 답게 괜찮은 놈을 찍어라~!!" "야이, 집에 가서 애나 봐라. 허약한 놈." "간뎅이가 작아서 일이나 제대로 하겠어?" 녀석이 지적한 것이 나란 것이 확인이 되자 사방에서 야유가 터졌다. 그 사람도 자신이 되게 치사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빅터는 그런 그를 허탈하게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참내... 야 임마, 이 녀석도 신참이야. 넌 신참끼리 싸울래?" "예? 윽, 그 그럼..." 빅터의 말에 거의 땅을 파고 들어갈 것 처럼 보였던 그 사람의 고개가 휙 하니 들려지더니 무지 당황한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을 찾으려는 듯 했다. 그런데 그때 사다드가 끼어들었다. "아니야, 그냥 하자고."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의 말에 밥과 빅터가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태연했다. "뭐 어때? 다른 녀석과 달리 이 녀석은 특별 케이스잖아. 그러니 신입이라고 해도 특별한 대우좀 받으면 어때서 그래? 안 그러면, 이 애를 너희들이 상대할래? 미리 말해두겠는데, 나는 절대 사양이야." "이봐, 이봐, 넌 미소년은 손대지 않는 주의잖아?" '헛, 사다드가 연하의 미소년을 좋아했어?' "으음... 그렇다면 너는 어때?" 나를 한동안 지그시 바라보던 빅터가 밥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묻자 밥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뭐... 저 애와는 싸우고 싶지 않아. 이기고 지고 문제를 떠나서 싸우고 싶은 마음이 안 들거든." "그래? 나는 그런 건 모르겠는데... 레이언 녀석이 적극 영입한 녀석이라 한번 대결해보고 싶기도 하고..." 다시 나를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빅터의 말에 식은땀 나는 걸 느끼며 억지로 웃어 보이는데 사다드가 끼어들었다. "그럼 너도 한번 싸워보든가. 하지만, 저 녀석이랑 붙인다고 해도 크게 잘못될 건 없잖아? 사실 나는 이 녀석이랑 누굴 붙여야 하나 고민했거든? 너는 저 애들이 붙고 난 뒤에 붙어보면 되잖아?" "그럴까?" 그런데, 정말 황당하게도 빅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에서 엉거주춤 사태를 바라보고 있던 나머지 신입들이 일제히 나서며 외치는 거였다. "저도 저 사람과 대결하겠습니다!" "저도!!" "저도..." "뭐, 뭐야?" 그런 그들을 황당하게 바라보던 내가 일을 이렇게 만든 장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다드를 향해 원망의 시선을 돌리자 그녀가 하하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정 안되겠으면 중단시켜줄테니 마음 놓고 하라고." 그러면서 나를 슬그머니 중앙쪽으로 밀어 넣는 거였다. "아니... 그러니까... 정말 꼭 대련해야 해요?" 그녀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그녀가 나보다 훨씬 힘이 쎄었기에 조금씩 밀려 들어가면서 내가 애처럽게 묻자 사다드가 피식 웃었다. "당연하지. 신입은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야 한다고. 자, 자 그러니까 마음껏 네 능력을 발휘해봐." "우엥..." 사다드에게 밀리고 밀려 중앙에 서자 안도감이 가득 찬 신입들의 눈빛이 나에게 쏟아져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아이고... 참말로..." 그런데 그런 내가 난처하게 서 있자 기특한 해민이와 블루 엘프가 슬그머니 나에게 다가서는 거였다. 해민이는 은근히 으르렁 거리며 신입들을 노려보고 있었고, 블루 엘프는 어느새 챙겨 들었는지 목검을 한손에 들고 있었다. "어머, 날 도와주려는 거야? 이렇게 고마울수가..." 그런 그 둘의 모습에 내가 약간의 안도감과 고마움을 느끼며 입을 여는데 사다드가 다짜고짜로 해민이와 블루 엘프의 팔을 잡더니 바깥으로 끌어내는 거였다. "안돼, 안돼.. 너희들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고. 너희들은 얌전히 여기서 구경이나 해." 그러더니 열심히 사다드의 손아귀에서 벗어 나려는 해민이는 밥에게 던져버리고 자신의 손을 차갑게 뿌리치는 블루 엘프에게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알겠어? 이건 해인이를 해치려는게 아니라 그의 실력을 보려는 것 뿐이야. 만약, 그걸 방해한다면 네 녀석을 콱 안아주겠어." 그녀의 황당한 협박을 들은 블루 엘프는 움찔 하더니 얌전히 뒤로 물러나 빅터의 옆에 섰고, 해민이는 밥의 품에 갇혀 열심히 바둥거렸지만, 그가 뭐라 뭐라 속삭이자 축 늘어져서는 애처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에구... 이거 참..." 그러는 와중에 맨 처음 나를 지목했던 괴씸한 녀석이 슬쩍 앞으로 나서고 다른 이들이 구경하려는 태세로 뒤로 물러나자 사다드가 또한번 나섰다. "아니야, 너희들 다 덤벼." "에엑~!! 자, 잠깐만요 사다드. 지금 누구 죽일 일 있어요?" 그녀의 말에 내가 경악하여 외쳐지만 사다드는 뻔뻔스럽게 씨익 웃을 뿐이었다. "괜찮다니까. 정 안되겠으면 내가 중단시켜줄게. 하나 하나씩해서 언제 다 끝내려고 그래? 후딱 해치우고 밥 먹으러 가자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러는 법이 어디..." 하지만, 내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 괴씸한 신입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들고 나에게 다가와 있는 거였다. "허... 참... 당신들은 양심도 없나요? 여러명이서 한 사람을 노리다니... 기가막혀서 말도 안 나오네." 그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사다드의 얄미운 한마디가 날아왔다. "그러니까 본때를 보여주라고." "누구때문에 이렇게 되었는데요?" 내가 그렇게 투덜거리고 있는 동안에 녀석들이 나를 둘러싸기 시작했고, 사방은 심각하게 구경하느라 조용해졌다. "나원 참... 무기도 없는 사람을 공격하려고 하다니... 뒷골목 깡패들 같아." 그런 그들을 쓰윽 돌아보며 투덜거리자 녀석들이 움찔 거리더니 머뭇머뭇 대는 거였다. "그, 그럼 빨리 무기를 쥐던가..." 자기들도 심히 양심에 찔리는지 한 사람이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내가 무슨 재주가 있다고 무기를 쥐겠는가? 검술을 배운 것도 겨우 6개월... 아마 한국에서 배웠다고 해도 겨우 파란띠 아니면 빨간 띠 딸 시간이었지 초단(검은띠) 딸 시간도 못되는데 목검을 잡고 저들을 상대할 자신은 정말 요만~큼도 없었다. '게다가... 마법은 2클래스까지 마스터 했다지만... 아직 다 외우지도 못했구.. 실전에서 써먹은 적도 없구...' 그러니 결국 남은 건 딱 하나... "뭐해? 무기 안 들거야?" 다른 사람이 다시 한번 재촉하자 나는 씨익 웃어보였다. "준비 됐어요." "뭐? 빈손으로?" 내 말에 한사람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다른 사람이 그걸 어떻게 해석 했는지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가 그렇게 우습게 보인다는 거야? 여러명이 한꺼번에 덤빈다고 깔보지 마!!" 그러자 다른 사람도 그의 말을 받아 외쳤다. "어, 어쩔 수가 없잖아!!" "아, 누가 뭐래요? 당신들 탓이 아닌거 알아요." 나는 정말 사심없이 말한건데 그 말에 한 사람의 얼굴이 붉어지더니만 목검을 꼬나쥐고 달려들었다. "이익~!!" 제 14화 첫번째 임무 (9) 나는 정말 사심없이 말한건데 그 말에 한 사람의 얼굴이 붉어지더니만 목검을 꼬나쥐고 달려들었다. "이익~!!"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황급히 두 손을 올리고 소리쳤다. "잠깐만요!!" "뭐, 뭐야?" 어차피 날 죽이려고 달려든 것은 아니었기에, 이런 나의 돌발적인 행동에 목검을 들고 달려든 사람은 그대로 멈춰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오옷, 영화에서 이런 장면 보고 한번쯤 해보고 싶었는데, 정말 서네? 우헷헷...' 예전에 음... 제목은 잊어버렸지만, 코믹 액션 영화에서 봤던 장면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그냥 한번 해본건데 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를 향해 달려들던 이들이 딱 멈춰서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비식 나와버렸다. 이제 막 대련을 시작하려는 순간에 나도 참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스스로 생각하기에 머쓱한 감정도 한 몫했을 그 웃음을 상대방은 안 좋게 생각했는지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지금 장난하는 거냐?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물론 그런건 아닌데... 어찌된 영문인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하기야,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실제 상황도 아닌데다 그 동안 데니에게 무지막지하게 당한 연륜에 엘라임에게 당한 걸 종합해보면 숫자가 많다 하더라도 두렵지 않은 건 당연할지도... 게다가, 지금 나에게는 믿는 구석도 있고 말이다. 그렇다고 그걸 그대로 말해서 화를 돋굴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정말 미안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하하하.. 그건 아니고요, 저기... 공간이 너무 좁은데요? 좀만 넓혀줬으면... 하는 바램이..." 내가 대련을 해봤으면 얼마나 해봤다고 공간이 넓으니 좁으니 따지겠는가? 단지 이유를 대야 할텐데 마땅히 가져다 붙일 그럴싸한 변명이 생각나지 않은 와중에 나를 둘러싼 이들의 모습에 그냥 퍼뜩 생각난 걸 주워 섬겼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걸 또 안좋게 받아들였는지 주위에 있던 이들이 저마다 인상을 찡그리며 한마디씩 툭툭 뱉는 거였다. "얼마나 잘난 놈이기에..." "어디 한번 실력을 보지." "쳇, 만약 졌으면 공간이 좁았다는 변명을 댈거였나?" .... '음... 아무래도 내가 안 좋게 찍힌 모양인데... 그게 크게 자존심을 상하게 할 말이었나?' 그들의 안 좋은 반응에 괜히 머쓱해서 죄 없는 머리카락을 배배꼬며 멀뚱히 서 있는 사이, 이런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빅터와 밥, 그리고 사다드가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는 구경꾼(?)들을 뒤로 물려서 공간을 늘리기 시작했다. "자자, 들었지? 뒤로 좀 물러나라고." "각자가 뒤로 열발자국씩 물러나봐." "빨리 빨리 움직이지 못해? 밥 먹기 전에 뺑뺑이를 돌려줄까?" 마지막으로 터져 나온 사다드의 매서운 호통에 구경꾼들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후다닥 물러섰다. 덕분에 순식간에 공터는 훨씬 넓어졌고, 그와 함께 나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도 다시 뒤로 물러나 나는 넓은 공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저들까지 물러난 거지? 이왕 다가온 거 가까운 거리에서 공격할 생각도 못했나?' 나에게서 멀어진 뒤에 다시 공격할 자세를 잡은 그들을 보며 나는 조금 황당한 감정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사정거리 밖에서 다시 재공격을 할 준비를 하는건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었다. 단지, 내가 아직 그런 상식에 능통하지 못해 그들의 행동에 어리둥절하는 것 뿐이지... 그렇게 그들은 일정 거리 떨어져서 나를 노려보더니 이제는 누가 먼저 나서서 공격할 것인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까 내말에 괜히 혼자서 열받아 달려들던 그 사람도 열이 식자 신중하게 나가기로 했는지 이제는 먼저 나서지 않고 사태를 바라보고 있는 거였다. 그 모습들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던 나는 그냥 계속 가만히 있으면 좋았을 걸 아까 탁자위에 몇 입 못 먹은채 내버려두고 왔던 음식을 떠올리며 한마디 했다. "공격... 안 하시나요? 어찌되었든 빨리 끝냈으면 좋겠는데..." 아예 음식을 안 먹었으면 모르는데 아주 조금 감질나게 음식을 먹었던 탓에 슬슬 배가고파지기 시작해 나는 다른 때 같았으면 별로 사용하려 들지 않았을 정령들을 불러서라도 빨리 매듭지을 생각이었다. 그래 그들이 공격 안 하면 내가 그들을 공격할 마음까지 먹었다. 어차피 원수를 만난 것도 아니었으니 항복만 받아내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그래 내가 누구를 불러 공격을 시키면 크게 다치는 일 없이 빨리 끝낼 수 있을가를 고민하는데 그 와중에 나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이 의논을 끝냈는지 그곳에 있던 인원 중 절반이, 그러니까 다섯명이 슬그머니 앞으로 나섰다. "응?" "타앗~!!" 그리고는 한 사람이 내지른 기합을 신호로 사방에서 다섯명이 동시에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매서운 모습에 나는 생각을 중단하고 거의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셀레아나, 불의 장벽!!" 그러자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땅에서부터 나를 중심으로 둥근 원을 형성한 불의 기둥이 솟아 올라왔다. 쿠과과과~!! 불의 장벽은 보기만해도 무지 뜨거워보이는 불꽃을 날름거리며 계속 치솟았지만, 나는 셀레아나가 보호해서 그런지 약간 뜨듯하다는 열기만 느낄 뿐이었다. 그러나 불의 장벽 바깥에서는 그렇지 못한 모양인지 사람들이 경악성을 내뱉으며 뒤로 분분히 물러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욱~!!" "뒤로 물러나!!" "아뜨뜨~!!" "젠장!" 그들을 물러나게 하려는 내 의도는 잘 먹혀 들어갔지만, 불의 장벽이 너무 높아서 바깥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기에 다시 셀레아나를 불러야 했다. "조금 낮춰봐. 바깥이 안 보이잖아." 그러자 그 순간 내 키의 두배는 높게 솟아 올랐던 불의 장벽이 순식간에 수그러들어 내 어깨 높이정도로 내려왔다. 그 너머로 바라보니 몇몇 사람의 얼굴이 약간 그을려 있었다. 아무래도 먼저 나에게 달려들던 이들이 갑작스레 솟아난 불의 장벽을 미쳐 피하지 못하고 약간 덴 모양이었다. '에... 좀 미안하긴 하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았으니 다행이지.' "젠장, 치사하게 불속에 웅크리고 있다니, 그러고도 네가 사내냐?" "남자라면 정정 당당히 공격을 하란 말이다!!" 불의 장벽에 둘러싸인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게 또 마음에 안 들었는지 몇몇 사람이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이렇게 내가 불에 둘러쌓여 있자니 그들도 공격하기가 애매했는지 날 그 곳에서 나오게 할 생각인 듯 했다. 하지만, 정령사의 좋은 점이란 자신이 직접 움직이지 않고 정령에게 마나만 공급해주면 멀리 있는 적도 정령들이 알아서 해결해준다는 거 아니겠는가? 나는 그들에게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자,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 끝내겠습니다. 노에아넨, 울렁 거리는 땅!!" 말이 좀 웃겼지만 노에아넨은 용케 내 말을 알아듣고 내 주변의 땅을 크게 요동치게 만들었다. "어어어..." "이게 어찌된 일~!!" "우왓~!!" 갑작스런 땅의 요동에 사람들은 당황하며 그 자리에 주저 앉거나 균형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했다. 그렇게 그들이 정신이 없는 사이 나는 마지막 마무리를 위해 입을 열었다. "마지막! 실레스틴, 바람의 주먹으로 뒤통수 후려치기!! 단, 기절 할...." "컥~!!" "크윽~!!" "꾸엑~!!" ..... 실레스틴은 성격이 급했던지 내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사방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 뒤통수를 맞아서 고꾸라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 정도로만 부탁해." 그리고 그건 내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나를 공격하려 했던 자들이 모조리 쓰러짐 으로써 끝이 났다. "빠르네...." [후후후... 당연하지.] 생글 생글 웃으며 쓰러진 자들 위로 날아다니는 실레스틴의 모습에 내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는데 사다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빅터? 저 녀석들이 쓰러지면 네가 한번 상대해본다며? 지금이 그 시기라고 생각하는데?" '엑....' 이제 다 끝이 나서 못다 한 아침을 먹으러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사다드의 말에 아직 멀었나.. 싶어 빅터를 바라보니 그가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하... 왠지 아까의 말을 철회하고 싶어졌는걸? 나와는... 차원이 틀린 실력이잖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기껏해야 크리스정도의 실력일 거라고..." '크리스 정도? 그도 꽤 능력이 뛰어난데... 헤에, 그럼 빅터가 그 정도의 실력자란 소리잖아?' 그의 실력이 높을 거라고는 짐작 했지만, 단검에 검기를 맺히게 할 정도의 실력자와 비슷하다는 말을 듣자 나는 새삼 빅터가 다시 보였다. 물론, 정령사로 치면 내가 크리스보다는 몇단계 높은 실력자지만, 그거야 내가 노력해서 이뤄진게 아니라 아버지 잘 만난 덕일 뿐이었기에 나는 내심 나보다는 크리스나 레이언을 몇배나 높은 실력자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내 검술 실력만 보자면 그들의 발끝에도 못 미치고 말이다. '하기야, 검술 실력만 치자면 저들 - 지금 실레스틴에게 얻어 맞고 널부러진 이들- 중 누구와 상대한다고 해도 이기지 못하겠지만...' "호오, 그래? 한 입가지고 두 말 할 생각이냐?" "천하의 빅터께서 겁을 먹고 물러서다니, 이거 참 오래 살고 볼일인데?" "그러게. 상대 안되는 이라 하더라도 한번 달려들고 보는 무대포께서 말이야." "이봐, 이봐, 그건 내 이야기가 아니라 밥 이야기라고." "너도 크게 다를 건 없잖아." "으윽..." 내가 자신의 실력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고 있는 사이, 둘이 연합하여 신나게 빅터를 놀리던 밥과 사다드의 말에 주변의 구경꾼들이 호응하며 나섰다. "삐익~ 빅터님, 그 실력 오랜만에 다시 한번 보자구요오~!" "맞아, 맞아. 물러나면 사나이의 수치다~!!" "빅터, 빅터, 빅터어~!!" 아무래도 저 빅터란 남자는 평소 부하들에게 알게모르게 원한을 많이 맺어 놓았던 모양이다. "으윽~ 네 놈들... 어디 조금있다 두고 보자~!!" 그런 구경꾼들을 원한 서린 눈으로 둘러보며 빅터가 빠드득 이를 갈자 밥이 구경꾼들을 옹호하고 나섰다. "저 놈들은 나중에 내가 실컷 봐줄테니까, 너는 지금 저 녀석이나 보라구." "젠장.... 젠장..." 결국 빅터는 사람들의 놀림과 기대에 못 이겨 목검을 들고 내 앞으로 걸어왔다. "으음... 꼭 해야 하나요? 나는 안 했으면... 하는 바램인데..." 그 모습에 내가 중얼거리자 사다드가 쐐기를 박았다. "안 끝내면 우리 아침 먹으러 못 간다고!!" "윽... 그러면, 빅터하고만 끝내면 먹으러 가는 거죠?" "물론이지!!" 사다드의 말에 나는 빨리 끝내려는 마음으로 빅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움찔 놀랐다. 아까의, 억지로 떠밀려서 하는 듯한 빅터의 기가 죽고 못마땅한 표정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지금은 무척 진지한 자세로 목검을 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거였다. 질때 지더라도 제대로 해보자는, 결의에 불타는 그의 눈을 보자니 나는 나도 모르게 대충 대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노에아넨, 땅 흔들기~!!" 이번에도 엉뚱하다 싶을 정도의 말이 튀어나왔지만, 노에아넨은 잘 알아듣고 빅터가 서 있는 땅을 울렁거리가 했다. 하지만, 역시나 빅터는 아까의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실력자였던 듯 그는 그렇게 흔들리는 땅을 박차고서도 잘만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그리고는 그는 내가 다른 수를 쓰기도 전에 속전속결로 끝내려는 듯 곧장 찔러 들어오는 거였다. 그 기세가 너무나 빨라 아까처럼 셀레아나에게 불의 장벽을 부탁한다 하더라도 그가 뚫고 들어올 것만 같아 나는 다른 이를 불렀다. "엘라스트라, 잡아! 노에아넨, 구덩이!!" 나의 외침에 허공에서 생겨난 물줄기가 마치 체조선수가 휘두르는 리본마냥 나선형으로 쏘아져가서 나에게 달려드는 빅터의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는 바로 그 밑에 떡 입을 벌리고 있는 구덩이 속으로 옴쭉달싹 못하는 빅터를 대동댕이쳤고, 그가 들어오자마자 구멍은 순식간에 닫혀져버렸다. 다행히 빅터가 구멍 안에 떨어지자마 바닥을 박차고 튀어 나가려고 했기 때문에 고개만은 구덩이 밖으로 내밀 수 있었지만, 덕분에 머리만 내 놓은 채 아래에는 완전히 땅에 파묻힌 꼴이 되고 말았다. "크하하하핫~~!!, 빅터야, 빅터야, 완전히 거북이 꼴이구나~~ 푸하하하~~!!" 대놓고 놀려대는 밥을 선두로 그 모습에 주변의 사람들이 크게 웃어제꼈고 빅터는 얼굴이 벌겋게 익어버렸다. "아앗, 죄송합니다. 급해서 그만..." 빅터가 무지 창피해 하면서 고개도 못 들자 나는 내가 미안해져서 그를 꺼내주려고 했다. 하지만, 정말 친구가 맞는지 의심스럽게도 밥이 그런 나를 제지하는 거였다. "어엇, 그만 둬. 그만... 이런 멋진 광경은 한나절 정도 그대로 둬야 다른 사람들도 보지. 꺼내지 말라고." "밥, 너 이자시익~!!" 빅터가 이를 갈며 매섭게 노려보았지만, 밥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더 놀려대었다. "어엇, 살기를 뿜는 거북이다앗~!! 아아, 이왕 꺼내주려고 했으니 손만 꺼내주는 게 어때? 얼굴 양 옆에서 까딱까딱하게 말이야. 우하하하하~!! 그럼 정말 볼만 할 거야." 자신이 직접 손을 머리 옆으로 들어올려 까딱까딱 해보이는 밥의 모습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다시 한번 배를 잡고 뒹굴렀다. "하아... 완전히 어린애들이잖아..."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노에아넨에게 부탁해 빅터를 꺼내주고는 다시 한번 사과했다. "죄송해요. 이럴 줄 알았으면 구덩이는 피하는 건데..." "됐어. 네 탓이 아닌 걸 뭐. 어쨌든 좋은 경험이었다." 그래도 뒤끝은 없는 사람이었는지 빅터는 내가 무지 미안해하자 옷에 뭍은 흙을 툭툭 털며 씨익 웃었다. 하지만, 밥만은 용서할 수 없었는지 대충 흙을 털어내자마자 검을 꼬나쥐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바아아아압~~~ 내 오늘 끝장을 보고 말리라아아~~!!" "우헤헤헤~~ 어디 할 수 있다면 해보시지~~!!" 물론, 밥은 내가 빅터를 구덩이에서 꺼내줄때 부터 그가 덤벼들 걸 눈치채고 이미 저만큼 도망 간 상황이었지만, 빅터는 그에 굴하지 않고 질풍처럼 땅을 박차며 그의 뒤를 쫓아갔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자주 있었는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들이 그러건 말건 삼삼오오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이동을 하는 거였다. 아, 물론 간단한 내기를 주고받으면서 말이다. "오늘은 누가 이길 거 같아? 나는 빅터님 쪽에 걸지." "흠, 하지만 밥님은 못 잡을걸? 좋아. 나는 밥님 쪽에 10실링이다." "그럼 난 빅터님쪽에 5실링!!" ..... 밥과 빅터의 어린애 같은 모습에 황당함을 금치 못하던 나는 주위 사람들의 모습에 더욱 더 황당해져서 입을 떠억 벌렸다. 그러자 사다드가 이런 나에게 다가와 어깨를 탁 쳤다. "그렇게 놀랄 것 없어. 자주 있는 일이거든. 너도 여기 있다보면 자주 보게 될 거다." "하... 그렇습니까?" "저 멍청한 놈들은 냅두고 우리는 아침이나 먹으러 가자고. 그나저나 너 참 대단하더라. 레이언이 이야기 했지만, 이 정도일줄은 상상도 못했거든." 사다드는 그렇게 입을 열면서 빅터와 밥이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끌었다. "아니 뭐... 대단한건..." 그녀의 감탄 어린 말에 나는 남이 한 일을 대신 칭찬 받는 것 같은 기분에 입을 열었지만, 사다드가 그런 내 말을 가로막았다. "그런게 대단한게 아니면 어떤게 대단한건데? 겸손한 것도 좋지만, 너무 겸손해도 안 좋은 법이라고." "아, 예..." "뭐 그건 그렇고, 때마침 네가 들어와서 정말 다행이다. 곧 있을 해로 운송을 걱정했는데 한시름 놨어." "예?" 혼자 중얼거리듯한 그녀의 말에 내가 어리벙벙해서 쳐다보자 사다드가 나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네 첫번째 임무가 결정 되었다고. 곧 있을 해로 운송 경호 담당이다." "하아...?" 제 15화 해상 운송(1) 베지테크스 상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운송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바닷 길을 이용하는 해상 운송, 다른 하나는 그와 반대 격인 육로 운송. 하기야, 베지테크스 상회의 본점이 항구 도시에 위치해 있으니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 중 가장 어려운 운송은 이종족들을 자신들의 집에 데려다주는 운송이었다. 모든 운송이 다 가지고 있는 위험에 더하여 이종족들을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하는 위험까지 더불어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뒷구멍으로 노예 매매를 하더라도 법으로는 금지하고 있으니 여자나 아직 어린 이종족들을 데리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괜히 의심을 사서 귀찮아지기 때문이다. 본국인 라센 국가에서도 법적으로 이종족과 인간 노예를 허용하고 있었지만, 국가의 상업을 주름잡고 있는 노예 매매상들을 털었으니, 그들이 데리고 있다가 도둑(?) 맞은 노예들과 같이 있다는 걸 알면 베지테크스 상회는 끝장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바닷 길을 통해 가는 것은 그런 위험을 덜 가지고 있지만, 단 한가지는 육로를 통해 가는 것 보다 훨신 더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상회의 운송 중 가장 어려운 운송이지." 크리스의 말에 방 안에 있던 이들이 무지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 거렸다. 그들의 심각한 표정에 나도 덩달아 긴장이 될 정도였다. 지금은 늦은 저녁 시간, 원래 내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내 집에 돌아가 있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저녁 먹기 전 즈음 레이언과 크리스가 이 곳을 방문하여 같이 저녁을 먹고 빅터의 사무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그 운송에 내가 참여한 단 말이지?" 내가 크리스를 바라보며 묻자 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최상급 정령사를 이런데에 빼놓을 순 없으니까." "어떤 운송인데 그렇게 긴장하는 겁니까?" 그 동안 묵묵히 옆에 있던 블루 엘프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는지 끼어들었다. 그는 내가 이번 해상 운송에 투입 된다고 결정되었을 때 부터 자신도 그 곳에 참여하겠다고 나서서 같이 가게 되었다. 하기야, 블루 엘프들은 뛰어난 검사라고 하니 상회 쪽에서는 그런 뛰어난 검사가 자신해서 같이 가주겠다는데 반대할 이유는 없을터였다. 게다가 나에게 달라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해민이까지 덤으로 말이다. 그렇게 자신이 참여할 운송이 되게 어렵다고 하니 그가 알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거였다. "다른 특별한 운송과 마찬가지로 이종족들을 집으로 데려다 주는 거야. 그런데 이번에 데려다 줄 이종족들이 좀 특이한 환경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게 어렵다는 거지." 크리스의 말에 모든 이들이 공감한다는 듯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거참... 물고기 처럼 물이 없으면 숨이라도 못 쉬나보죠?" 도대체 어떤 환경이 필요하기에 그러는지 의아해서 툭 던진 말이었는데 황당하게도 사다드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못 쉬는 건 아닌데... 오래 버티지는 못하지." "예?" 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사다드의 뒤를 이어 크리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데려다 줄 이종족들이 바로 인어거든." 나는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가 잠시 후 간신히 입을 열어 되물었다. ".... 인어? 인어라고?" "응." "그... 상체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고, 하체는 물고기의 모습을 하고 있는?" "뭘 새삼스레 물어? 맞어. 그런 모습 말고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인어 종족도 있나?" "허..." 하기사, 이 곳에는 정령도 있고, 엘프도 있고, 드래곤도 있고, 마족도 있으니 인어가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겠지만, 나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충격이었다. 엘프나 마족은 한국에서 잘 들어보지도 못한데다가, 드래곤도 있다 해도 전설에나 나오는 종족이었지만, 인어는 그들과는 좀 달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인어도 전설에 나오는, 정말 있는지 없는지 모를 종족이었지만, 그 유명한 '인어공주'의 동화 덕분인지 한국이 있는 세계에 있으면 몰라도 이 곳에 있다는게 너무 놀라웠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일본에서는 인어의 고기를 먹으면 장수를 한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설마... 여기도 인어의 고기를 먹으면 장수한다던가, 그러는건..." 생각하던 중에 얼결에 직접 입으로 말이 흘러나왔는데, 뜻밖에도 내 이야기를 빅터가 받았다. "어? 너도 알고 있었냐? 네가 살던 곳에도 알려졌나보지?" "에엑?" 내가 다시 한번 입을 떠억 벌리며 놀라움을 표하자 빅터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놀라? 어차피 이 나라에서는 서민들도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예전에는 엘프의 고기에도 그런 효험이 있다고 하는 소문도 돌았다고." "하, 하지만.... 그런 건 다 지어낸 이야기 아닌가요?" 얼빠진 내 물음에 크리스가 고개를 저어보였다. "사실이야. 뭐 예전에는 불로불사 한다는 엉터리 소문도 나돌았지만, 몇십년 전에 어떤 마법사가 직접 실험을 해서 정확하게 밝혀졌지." "허걱... 시, 실험? 그럼 인어의 고기를 먹었다는....? 그런 반인륜적인 짓을..." 다시 한번 내가 경악을 하며 눈을 부릅뜨자 밥이 어깨를 으쓱 거렸다. "연구에 미친 놈들이 뭔 짓을 못하겠냐? 마법사들 중에는 그렇게 빡돌은 놈들이 많다고 하더라. 어떤 놈들은 사람을 가지고 실험을 한다던데?" "허거걱... 서, 설마.. 그런 일이..." 오늘은 경악의 연속이었다. 다시한번 경악의 포즈를 취해 보이는 날 힐끔 바라보며 크리스는 친절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100년 전까지는 마법 연구에 심취한 마법사들에 의해 인체 실험도 많이 이루어 졌었어. 하기야, 이 나라가 같은 사람을 노예로 만들어 사고 팔으니 돈만 있다면 실험 재료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지. 하지만 너무 그런 일이 만행하자 생각있는 현자들과 왕들, 그리고 마법사들이 일치 단결하여 사람은 물론 이종족들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 걸 금지했어. 혹시라도 그런 마법사가 있다면 이유불문하고 척결 대상이 되었지. 그래서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 "이거... 장난이 아니네? 그럼, 그 몇십년 전에 인어의 고기를 실험하 건?"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은 나머지 나는 골까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번 듣기 시작한 거 끝까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질문을 하자 역시나 크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사람에게 실험을 한 것도 아니니까 괜찮았지. 하기야, 사람에게 실험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 하고 싶어도 못했을걸?" "그래, 효과가 있긴 있대?" 부디 그런 이야기가 엉터리이길 바라며 묻는데 크리스의 대답은 이런 내 바램을 냉정하게 무시했다. "응." "허걱... 미치겠군..."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인어 고기를 적당량 먹으면 10년이나 20년 정도 수명이 늘어나는데다 젊음도 오래 유지되는 것이 판명 되었지만, 그 이상을 먹으면 그것이 독이 되어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는 게 밝혀졌어." "그나마 다행이네. 엘프의 고기는?" "엘프의 고기는 거짓이라고 밝혀 졌지. 그건 아무런 효험도 없었대." "그럼 엘프는 잡아먹힐 위험은 없겠네. 인어는... 그래도 잡아 먹하려나?" "장수하는 것과 젊음을 유지하는 건 사람의 오랜 숙원이니까 말야. 죽음을 각오하고 먹는 사람들도 꽤 있는 모양이야. 그래서 죽는 사람도 예전에는 꽤 많이 나왔지. 그 적당량이라는게 사람마다 조금씩 틀렸거든. 뭐, 지금은 대충 효험이 떨어질 망정 죽지는 않을 정도의 양이 알려져서 인어 고기 먹고 죽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 적당량이 어느 정도인데?" "자신의 엄지 손가락 크기." "조금이구나... 그런데, 그렇게 적당량을 알았으면 정기적으로 복용하는 거 아냐?" "5년에 한번씩 먹어야 한다더군. 아니면 몸 안에 조금씩 쌓인 효험이 일정량 모여 독으로 변한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유사인종인데 먹고 싶을까? 같은 사람의 고기를 먹는 기분이라서 께름직 할거 같은데..." "인간이란, 필요하면 얼마든지 잔인해 질 수 있는 종족이니까 말야." 나의 기가막히다는 말투에 크리스가 냉정하게 답했다. "아아... 이럴때는 내가 사람이라는 게 정말 싫어진다니까." "그런 놈들은 싸그리 없애버려야 한다니까." 크리스와 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다드와 밥이 한 마디씩 하자 빅터가 얼른 나서서 화제를 바꾸었다. "자자 그건 그거고, 어쨌든 이번에 우리가 무사히 데려다 줘야 할 이종족이 바로 인어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아. 인어들이 사는 곳은 호바트해인데 거기에 가려면 빨라도 두달은 걸리거든. 게다가 인어는 물이 없더라도 숨을 쉴 수가 있기는 하지만, 피부가 마르면 살 수가 없기 때문에 항상 물이 곁에 있어야 해." "바닷길로 가는데 물 때문에 고생을 해요?" 바로 옆에 물이 있는데 뭐가 문제인가 싶었다. 배에서 나가기만 하면 사방천지가 물일 텐데 말이다. 그래 내가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빅터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인어들은 물이 없는 곳에서는 거의 움직이지 못해. 그런 이들을 배에 태워서 2달이나 되는 먼 거리를 간다고 생각해봐. 일정 시간마다 피부를 물에 적셔줘서 죽음은 면한다고 해도 움직이지도 못한 채 2달이란 오랜 시간동안 견딜 수 있을 거 같아?" "아니, 그러면 차라리 그들은 바다를 헤엄쳐 가고 우리는 배로 가면 되잖아요?" 내 반론에 이번에는 크리스가 나섰다. "그들도 생물인 이상 그렇게 먼 거리를 계속 헤엄쳐서 갈 수 있을 거 같아? 게다가 바다 속에는 그들을 위협하는 몬스터들도 많은데 바다 속에서 공격을 당하면 우리는 제대로 도와줄 수가 없다고." "아...." "그리고 그들도 쉬고 잠을 자야지. 우리는 배로 계속 진행할텐데 그들이 쉬고 잠을 자면서 배를 쫓아올 수 있을 거 같아? 거의 불가능해." 크리스의 뒤를 이은 빅터의 설명에 나는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었다. 이게 생각 외로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면 일정 시간 배에 태웠다가, 또 일정 시간 바다에 내려 놓았다가 해야겠군요?" "맞아.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어. 그렇기때문에 도착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다 항상 바다를 감시해줘야 하고, 만약 그들을 위협하는 몬스터가 나타난다면 재빨리 배로 옮겨야 하기 때문에 주의할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 "게다가 바다 위에서 싸우는 건 땅에서 싸우는 것과는 틀리기 때문에 만약 몬스터가 나타난다면 엄청 골치 아프지. 우리는 배 위에서가 아니면 싸우기는 커녕 살지도 못하니까 말야." "그래서 다른 운행때와는 달리 인어를 데려다줄 때는 우리 상회의 총력을 기울이게 돼. 마법사에 정령사에 능력 있는 검사들은 몽땅 끌어 모으지. 나와 레이언까지 매번 참여했고 말이야. 사실 그래도 몇명의 인어의 피해는 감수해야 할 정도야. 뭐, 이번에는 너를 믿고 평소보다 인원을 많이 줄였지만..." "전에 한번은 배까지 침몰할 뻔 했었다고." 크리스와 빅터가 번갈아가며 설명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자니 그렇게 위험한데 인어들을 계속 도와주고 있다는게 이상했다. 사실 레이언은 노예매매를 안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는 의리나 정의를 부르짖는 자가 아니었기에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댓가 없이 그들을 도울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위험한데 지금까지 잘 도와줬네? 인어들을 도와주면 그만큼 댓가가 큰가보지?" 이런 내 질문에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설명했던 크리스가 씨익 웃었다. "맞아. 사실 인어들은 그만큼의 위험을 각오할만 만큼의 댓가를 주거든." "역시나.... 아마 바다 속에 있는 보화들이 그 댓가인가보지? 인어들은 바다속이 제집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말야. 진주나 산호 같은..." "그거 뿐만이 아니야. 인어들이 사는 호바트해는 물살이 세고 곳곳에 암초가 많거든." 그렇게 말하는 크리스가 마치 음모라도 꾸미는 것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자 나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금방 눈치챘다. 나 또한 그와 같은 생각을 예전에 한번 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러다가 한번 크게 혼이 났지만... "침몰선과 함께 같이 가라앉은 귀중품을 노리는 구나?" "맞아. 사실 마법이나 정령사들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인어들의 능력만은 못하거든. 게다가 인어들에게는 그런 것들은 전혀 가치가 없는 물건들이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은게 아니겠어?" "그래, 그래... 누가 상인 아니랄까봐." 이렇게 우리가 대화하고 있는 동안 평소 답지 않게 말 없이 앉아서 빅터가 건네준 서류들을 훑어보고 있던 레이언이 끼어들었다. "다 좋은데.... 이게 뭐야?" 이번에 내가 그 인어들을 데려다 주는 해상 운송에 끼어드는 바람에 크리스는 이번 일정에 빠지게 되었지만, 레이언은 참여한다고 했다. 인어들을 데려다 주는 일 말고도 다른 일이 있다나? 경험도 많은데다가 검기 까지 사용하는 검사였으니 자연스레 이번 항해의 리더가 된 그는 이번 항해에 참여할 인원의 명단을 살펴보고 있었는데 명단에서 의아한 점을 발견한 듯 서류를 가르키며 사다드를 바라보았다. "왜, 뭐가 잘못 됐어?" 다른 사람들 같으면 상관 - 반말을 쓰는 사이라도 상관은 상관이었다. - 이 그렇게 나오면 조금은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련만, 사다드는 태평한 모습이었다. "맨 마지막에... 블루 엘프 한명이라니? 누군지는 알겠지만, 명단에 블루 엘프가 뭐야, 블루 엘프가? 배에 타서 그를 부를 때도 블루 엘프라고 부를 거야?" 그러자 사다드 대신 빅터가 끼어들어 대답했다. "그럼 어쩌냐? 이름을 안 가르쳐 주는걸. 우리가 아는 건 단지 그가 블루 엘프고 남자라는 것 뿐이라고." 그리고 그의 말이 끝냄과 동시에 크리스와 레이언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해 레이언과 크리스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무슨 소리야, 이름을 안 가르쳐주다니? 깜빡 잊고 이름을 안 물어본 거 아니야?" "이름은 아까 낮에 물어 봤다고. 하지만 가르쳐 주기 싫다는데 낸들 어쩌냐?" 레이언이 믿기 어려운 듯 재차 묻자 빅터가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의 말 그대로, 아까 낮에 블루 엘프가 나와 같이 이 해상 운송에 참여하기로 결정 되었을 때 빅터가 이제 동료가 되었으니 이름이나 알자고 물었었다. 물론... 나는 그때까지 그의 이름을 물을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그랬더니만 블루 엘프가 정말 빅터의 말 그대로 당신에게 가르쳐 줄 의무가 없다고 한 마디 한뒤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그래 밥이랑 빅터 둘이서 멍청한 놈이라고 부른다느니 그렇게 하면 동료간에 그러면 되겠냐느니 회유하고 협박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있기만 해 결국 포기하고 명단에도 '블루 엘프'라고 썼던 것이다. 그런 설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레이언은 미심쩍은지 블루 엘프를 향해 물었다. "정말... 이름을 안 가르쳐 주실 겁니까?" 그러자 블루 엘프가 역시나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거였다. "이름 말고, 실력이라도 알려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한 배를 타게 된 이상 당신의 실력이라도 대충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레이언의 말을 거절하자 이번에는 크리스가 나서봤지만 여전히 블루 엘프의 입은 열리지가 않았다. 그래 크리스와 레이언이 난처하다는 눈빛을 주고받다가 결국 체념했는지 더 이상 뭐라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레이언이 명단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람들도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슬슬 헤어질 분위기를 조성하는 거였다. "그러면... 내일 운행에 참가하는 이들을 여기로 집합 시킬테니 세부 사항을 의논 하자고. 인어들과 인사도 시키고..." 레이언의 말에 사다드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이번에 다른 운행을 맡았으니 참여 안 해도 되지? 그 녀석들과 의논할 게 있거든." "좋도록 해." 레이언이 허락하자 빅터가 물었다. "언제 집합할 건데?" "점심 시간때에 맞춰서 올 거니까 여기 있는 이들도 그때 모이게 해줘." "그러지. 해인이는, 내일 아침에?" "예. 저는 내일 아침 여기로 올게요." 빅터의 말에 대답한 나는 블루 엘프를 돌아보았다. 오늘도 역시... 해민이는 데리고 갈 수가 없으니 그에게 맡기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막상 그를 향해 입을 열자 해민이를 잘 부탁한다는 대신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저어... 그럼 뭐라고 불러 드릴까요? 이름을 알려 주시면 좋겠지만..." 그러자 황당하게도 블루 엘프가 미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불쑥 대답하는 거였다. "듀비라고 합니다." "예?" 나는 순간적으로 그게 이름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내가 다른 말을 잘못 들은 줄 착각해서 멍청하게 되물었다. "제 이름은 듀비입니다. 인간 처럼 성은 없고, 다만 남부 부족 출신 듀비라고 불립니다." "아... 그, 그러세요? 그런데 아까는 왜 이름을 말씀 안 하시다가 지금 제게는 말씀 하시는지..." 이름을 알았다는 것 보다는 그게 더 황당했다. 그러자 그 듀비라고 이름을 밝힌 블루 엘프가 당당하게 대답하는 거였다. "저희 부족에서는 이름은 제일 먼저 은인께 밝혀야 합니다." "엣? 아, 그, 그러셨습니까?" 이제야 밝히는 거지만, 그 동안 나는 그에게 이름을 물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실 그가 나를 은인이라고 쫓아다니지만 나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까 빅터등이 듀비에게 이름을 물어볼 때도 그가 밝히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나에게는 그가 말하기 싫어하는 것을 물어 볼 권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그 동안 헛고생 한 빅터와 밥 등등이 나를 노려보고 있지만... "핫핫핫.... 이런... 죄송해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저, 그럼 실력은 어찌 되시는지...?" 그들의 시선에 빨랑 실력도 물어보라는 뜻이 포함되어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물어 보았고, 이번에도 그는 순순히 대답해줬다. "저희 부족은 쌍검을 사용하는데, 저는 저희 부족 중에서도 중간쯤 정도 되는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순순히 대답해 줬지만, 블루 엘프족의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모르는 우리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음.... 내일 한번 저와 겨루어봐도 될까요? 쌍검을 사용하는 이와는 별로 겨루어 본 적이 없으니 한번 겨루어보고 싶군요." 그래 레이언이 조심스레 물어오자 그가 의외로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 먼저 알려주었으니 이제는 다른 이들에게도 기꺼이 알려주려는 모양이었다. "진작 좀 물어보지." 나중에 사다드가 장난스레 눈을 흘기며 한마디 하기에 나는 멋적게 웃으며 대답했다. "죄송해요오~" 제 15화 해상 운송(2) 다음날 아침 일찍 상회의 비밀 기지(?)로 간 나는 입구에서 그 전날 헤어지기 전에 레이언이 건네준 증표를 보여주고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건 내 손바닥 만한 직사각형의 은도금이 된판이었는데 목에 걸 수 있도록 끈이 매여 있는 데다가 앞에는 베지테크스 상회라는 글자가 멋부린 꼬부랑 글씨로 새겨져 있었고 뒤에는 섬세하게 꽃이 핀 화초가 새겨져 있었다. 작은 종을 뒤엎은 것과 같은 꽃이 가느다란 줄기 끝에 매달려 있는 그 꽃은 야생화의 일종으로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생명력이 강하고 끈질기기 때문에 상회의 특성을 그대로 나타낸다나 어쩐다나 해서 상회를 상징하는 상징물로 선택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상회의 소속이라는 걸 증명하는 이 판은 4단계로 구별되는데, 제일 높은 판은 백금판, 그 다음이 금판, 은판, 구리판 순이었다. 내가 아는 이들 중에 백금판을 가지고 있는 이는 레이언과 크리스 뿐이었고, 밥과 빅터 사다드는 금판이었다. 나는 비록 최상급 정령사이기는 하지만, 전투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한단계 낮은 것을 줬다는 것이 레이언의 설명이었다. 백금판은 경험과 실력은 물론, 책임자 중에서도 상회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만 받을 수 있는 거고... 뭐, 나야 이 곳에서 높은 지위에 있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분위기가 자유스러워 레이언이나 빅터 등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쓰는 것도 아니어서 나쁠 건 없었지만, 한 가지 걸리는 건 은판은 금판이나 백금판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 비해 매달 월급을 적게 받는 거라고나 할까?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내가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처음 맡게 된 임무가 가장 어려운 일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낸다면 금판으로 올려 주겠다고 레이언이 약속 해서 그렇게 크게 낙담되지는 않았다. 내가 그렇게 금방 금방 승진이 되어도 괜찮을 실력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나야 맡은 것만 제대로 하면 될테니...' 나는 머리를 한번 쓸어 넘겨 그런 생각들을 털어버리고 해민이와 듀비가 있을 남자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보니 듀비도 참... 이해할 수가 없단 말야. 이번에 가는 곳이 그의 고향과 가까운 곳이라면서 은혜를 갚기 전에는 안 돌아간다고 버티다니... 그럴 거면 임시로 라도 패를 받던가...' 이번에 내가 포함된 운송단의 일정을 간략히 이야기하면, 라센의 그레이험 항구를 출발하여 대륙의 남해라고 볼 수 있는 케르겔렌 해(이 속에 울 집이 있다)를 가로질러 북해인 호바트해를 거쳐 북대륙과 서대륙의 경계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엔더비 산맥에 갔다오는 거였다. 엔더비 산맥에는 상회와 거래를 트고 있는 북 드워프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 산맥이 호바트 해에 인접한 곳 까지 줄기가 뻗어 있었기에 호바트해에만 살고 있는 인어들을 데려다 줄때마다 그 곳에 들렸다 오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블루 엘프족이 살고 있다는 새클턴 국 또한 북대륙에 위치해 있었기에 이번에 가는 길에 듀비도 고향으로 돌려보내려고 했었다. 물론, 상회쪽에서는 듀비를 무사히 구출한 것을 기회삼아 블루 엘프족과의 거래를 틀려고 했을 거였다. 그런데, 그걸 못마땅하게 여겼는지 아니면 원래 부족의 전통이 그러했는지 듀비가 나에게 은혜를 다 갚기 전에는 절대로 부족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해서, 그 근처까지 가는데도 불구하고 블루 엘프족이 사는 곳에는 가지 못한 채 돌아오기로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를 구하는데 하등 도움이 안된 나로써는 한숨만 푹푹 나오는 일이었지만... 그래서 잠시동안 상회에 머무르게 되어 레이언이 나에게 은패를 건네줄때 듀비에게도 같이 패를 건네주려고 했었다. 물론 듀비는 상회에 소속되지 않겠노라 단호하게 밝힌 뒤라 단지 임시로 상회에 소속 되었음을 알리는 증명패에 불과했지만, 그는 나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필요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레이언과 크리스가 여러가지 일례를 들으며 어떠한 돌발 상황이 있을지도 모르니 그냥 가지고 있으라고 해도 그는 어떠한 돌발 상황에서도 날 떠나는 일은 없을 거라며 거절했던 것이다. 어리석은 건지, 아니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졌기에 저리 자신이 넘치는 건지 모르겠다고 빅터랑 밥이 뒤에서 소근대는 걸 들은 나도 심히 동감이 갈 정도였다. 해민이야 한시도 나나 듀비 (한번 떨겨 놨더니 이제는 알아서 저녁이 되면 떨어진다) 곁을 떨어지지 않은데다가 아직 어려서 인간과 대화도 통하지 않아 지급되지 않았다. 사실 처음에는 팔찌나 목걸이 형태로 (애완견은 아니었지만...) 상회 문장이 새겨진 자그마한 판을 주려고 했었는데, 노예 매매상에게 잡혔을때 심하게 결박을 당한 경험이 있던 아이라서 그런지 단순한 악세사리 처럼 생긴 거라고 해도 목이나 팔목에 닿는 걸 격렬하게 거부하는 통에 그것도 포기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그 둘의 신분 증명을 위해서라도 항상 곁에 있어야 하게 되었다. 뭐, 여기 있는 동안이야 듀비나 해민이가 밖으로 나갈 일은 없다지만, 이제 같이 배를 타고 머나먼 여행길을 가게 되었으니, 정말 레이언과 크리스의 말마따나 어떠한 돌발 상황이 발생할지는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배 위에서야 괜찮겠지만서도... '아아... 이래저래 걱정만 늘어나는 거 같아. 에잇, 몰라 몰라... 그렇다고 이제와서 해민이를 떨어뜨릴 수도 없는 거고... 일이 벌어지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고개를 흔들어 그러한 고민들을 털어버리고 해민이와 듀비가 있는 숙소로 더욱 더 빠르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앗, 이제 오세요?" 어제와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는 1, 2, 3층을 지나쳐 4층으로 올라가자마자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시선을 보내보니 벨타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어, 잘 잤어? 왠지 어제보다 더 활기차 보이는데, 무슨 좋은일이라도 있어?" 아닌게 아니라, 원래 활달한 녀석이었는데 오늘은 왠지 다른때보다 묘하게 눈이 반짝반짝하고 어딘지모르게 들떠 있는 듯 보였다. 마치, 소풍을 앞둔 초등학생의 모습이랄까? 내 말에 벨타는 더욱 더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헤헤... 사실은요, 드디어 고향으로 출발할 날짜가 정해졌다고 어제 사다드님께 들었거든요. 물론, 여기를 떠난다는게 섭섭하기는 하지만 부모님을 다시 뵐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뻐요." "아... 맞다. 그러고보니 내가 속한 팀 말고도 사다드가 인도하는 또 다른 팀도 곧 호송을 시작한다고 들었는데, 그게 너희들을 데려다주는 거였구나?" "헤헤헤, 그런가봐요." "그래, 그래. 좋겠다." 헤벌쭉 벌어지는 입을 주체 못해 웃음을 흘리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같이 웃어주며 해민이와 듀비가 머무는 방문을 두드렸다. "해민아, 듀비, 일어났어요?" 그러자 어제와는 달리 안쪽에서 덤덤한 듀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십시오." '어라? 오늘은 괜찮은 건가?' 사실 어제는 해민이와 듀비가 한바탕 하느라고 내가 노크를 했는데도 대답할 겨를이 없어 대답도 안 듣고 문을 열었었는데, 오늘은 내가 당연히 대답을 못할 거라 생각하고 그냥 문을 열려고 했는데 그 전에 듀비의 목소리가 들려온 거였다. 그래 해민이가 하루만에 듀비에게 얌전해졌나... 싶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봤더니 왠걸... "이런, 오늘도 역시나네? " 그나마 오늘은 차가운 바닥이 아니라 폭신한 듀비의 침대 위에 있었지만, 해민이는 어제와 같이 듀비에게 깔려 있었다. '뭐, 그나마 어제와 같이 피가 흐르는 혈전은 없었던 거 같지만, 그래도 매일 아침마다 해민이와 듀비가 한바탕 하게 된다면 내가 난처한데...' 듀비의 밑에서 빠져나와 내 품으로 달려드는 해민이를 안아주며 듀비에게 미안하다고 한 마디 하려고 했는데 그 보다도 먼저 벨타가 입을 열었다. "하하하, 아무래도 폼을 보아하니 눈 뜨자마자 해민이가 듀비님을 덥쳤나보네요. 어제 듀비님에게 당한 복수라도 하려고 했던 걸까요?"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해민이가 침대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듀비를 째려보며 낮게 이를 빠드득 갈았다. '아, 아무래도... 벨타의 말이 맞나봐... 그런데... 이거 계속 듀비에게 해민이를 맞겨도 괜찮은 걸까? 더 걱정이 되는데...' 나에게 목례를 보낸 듀비가 나갈 채비를 하는 걸 보고 나도 해민이를 씻기려고 운디네를 불러내는데 벨타가 말을 걸었다. "그러고보니, 당신께서도 운송 경호를 나가신다면서요?" "응? 아아... 네가 가는 쪽과는 다른 쪽을 맡게 되었어." "그렇군요. 저희와 같이 가셨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만약 같이 가신다면 제가 사는 엘프 마을을 구경시켜 드렸을텐데..." "그러게, 나도 아쉽네. 하지만 뭐, 나중에 너희 마을에 갈 기회게 오겠지. 그때 구경시켜줘." 그러자 벨타가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언젠가 오시면 저희 부모님과 친구들도 소개시켜드릴게요." "그래, 기대하마. 아, 오늘도 같이 식사할래?" 어제도 같이 했었기에 나는 그가 당연히 수락할 거라 기대하고 말한 거였는데 의외로 벨타는 고개를 내저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오늘은 제 친구들과 먹을래요." "엥?" 뜻밖의 반응에 내가 놀랐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벨타가 머쓱하게 웃었다. "뭐, 별 뜻은 없고요... 사다드님께 이제부터 출발 준비를 해야하기 때문에 정신 없을거라고 들었거든요. 저는 상회의 일원이 아니니까 일하시는데 같이 있을 수는 없잖아요." "아...." 그러고보니 어제 벨타는 아침 식사까지는 같이 했는데 그 뒤로 슬그머니 사라져 내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뭐, 하도 정신이 없어서 신경도 못 쓰고 있긴 했지만, 나에게서 떨어졌던 게 그런 이유 에서였던 모양이다. "그래?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뭐." "아, 그리고... 일주일 뒤에 출발하기는 하지만, 그 동안에 바쁘실테니 혹시라도 제대로 작별 인사를 못 드릴지도 모르니까 지금 작별 인사를 드릴게요." "응? 나는 매일 아침 여기로 올텐데?" 벨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벨타는 헤헤 웃으며 나 말고도 해민이와 듀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혹시라고 했잖아요. 어쨌든, 모두 만나서 정말 정말 즐거웠구요, 이번에 헤어지더라도 저 잊지 마세요. 혹시라도 나중에 만나게 된다면 꼬옥 말 걸어주시고요. 그리고 모두 건강하세요." 지금 당장 헤어질 것도 아닌데 벨타는 아쉬움이 가득 찬 얼굴로 그렇게 자신만 작별 인사를 늘어놓더니만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손을 흔들어보이며 방에서 뛰어나갔다. "아니... 내일 당장 갈 것도 아니고... 벌써부터 작별 인사 할 필요는 없잖아?" 제 15화 해상 운송(3) "아니... 내일 당장 갈 것도 아니고... 벌써부터 작별 인사 할 필요는 없잖아?" 벨타의 이른 작별 인사에 나는 괜히 기분이 가라앉아서 터덜터덜 거리며 식당으로 향했다. 그 넓은 식당 안에는 어제와는 달리 수많은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는데, 그것 으로도 모자랐는지 부풰식으로 음식이 주르르 놓여져 있는 길고 커다란 식탁 앞에도 사람들이 주르르 줄을 서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음식을 퍼가는데 얼마나 위대한(?) 사람들인지 개개인에게 지급되는 식판용의 커다란 접시가 부족할 만큼 산더미처럼 쌓아서 가져가는 거였다. 그러니 식탁 위에 아무리 음식을 많이 가져다 놓아도 대충 다섯 명 정도만 그 앞을 사라지면 커다란 쟁반 두세개는 비워져 버렸고, 다른 대여섯개의 쟁반은 절반 이상이 사라져버리는 거였다. 덕분에 조리실과 통하는 곳으로 보이는 입구에서는 대여섯명의 등치 좋은 아주머니들이 쉴새 없이 음식이 가득 든 쟁반들을 들고 와서 비어 있는 쟁반들과 교체하고 있었다. "어엇, 이봐, 이봐... 치사하게 싹싹 긁어가냐? 그거 나도 먹으려고 했던 거라고." "억울하면 네가 먼저 오지 그랬냐?" "베니~! 이거 다떨어졌어요." "시끄러워! 재촉하지 말란 말이다. 안 그래도 네 놈들 먹성에 맞추느라 온 몸의 뼈가 달그락 거린단 말이다!!" 음식을 담고 있던 한 남자가 빈 쟁반을 가르키며 조리실 쪽으로 외치자 그 안에서 하얀 모자와 앞치마를 두른 풍채 좋은 한 아주머니가 국자를 휘두르며 화답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와아~ 웃어 제꼈다. 아마 그 아주머니의 이름이 '베니'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아주머니가 그렇게 말을 했어도, 그 다음에 조리실에서 나온 쟁반에 가득 담겨 있던 음식은 한 발 늦게 오는 바람에 앞사람에게 음식을 다 빼앗겨야 했던 그 남자가 원하던 음식이었다. 활기찬 식당 안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거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비해서 싸움이 적고 사람들은 질서를 지켰으며, 화기 애해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주변 사람에게 피해가 될 정도로 크게 웃고 떠드는 사람이 없었다. '호오... 훈련을 되게 시켰나보구나. 대단한걸?' 내가 다니던 학교의 급식소의 식당 보다도 몇 배는 사람이 많으면서도 덜 복작복작한 모습에 감탄을 흘리면서 음식을 담아 빈자리를 찾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여어~ 해인아~!!" 고개를 돌려보니 밥이 사다드와 함께 한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짓했다. "이리 와라. 같이 먹자."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은 마침 그 둘이 앉은 자리 외에 나머지는 비어 있었기에 나는 기꺼이 그 쪽으로 향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런데 빅터는 안 보이네요?" 그 테이블에 앉으면서 인사를 건네자 밥이 키득 거리며 웃었다. "아아... 그 녀석은 말이지, 어제 나랑 노느라고 어제 정오까지 끝내야할 업무를 하나도 못 끝냈거든. 그래서 지금 게빈에게 붙잡혀 있어." 그러고보니 어제 아침 이 곳으로 빅터와 함께 식사를 하러 왔을 때 그를 만났었다. '그때 게벤이 빅터보고 서류 처리를 정오까지 끝내달라고 했었지 아마?' 빅터는 정오까지 끝내겠다고 대답을 하긴 했지만, 그 뒤에 신입 신고식 보러 갔다가 밥과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 놀이(?)를 벌여서 정오가 훨씬 지난 뒤에야 업무에 복귀 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언과 크리스가 찾아와 운송에 참가하는 인원 배정하고 의논하느라 바빴던 것으로 기억된다. "게빈이라는 분.... 자신의 업무에 관한 일이라면..." 내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하자 그 뒤를 사다드가 받았다. "물불을 안 가리게 되지. 만약,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그대로 폭주해버리고 말야." "핫핫핫, 빅터가 고생했겠네요." 어제 아침에 잠깐 보여준 그의 일에 대한 열정을 떠올리자 빅터가 얼마나 당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밥이 이런 내 말에 다시 한번 키득대며 웃었다. "장난 아니었지. 뭐, 한달에 한번쯤은 보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덕분에 그 녀석은 식사도 못하고 서류더미에 파뭍혀 있을걸? 그럴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여기 총 책임자 자리를 녀석에게 떠넘기기를 잘했다니까." "하.하.하...." 지금쯤 사무실에서 게빈에게 붙잡혀 낑낑대고 있을 빅터를 떠올리며 그에게 마음 속으로 묵념을 보내고 한 입 떠먹으려고 하는데 사다드가 나에게 말을 건네왔다. "업무 하니까 생각난건데, 해인아 너 오늘도 지금 온 거냐?" "예? 아, 예. 오자마자 해민이하고 듀비와 같아 온 건데요?" 뭔가 잘못되었나 싶어 그녀의 안색을 슬슬 살피며 조심스레 대답하자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네가 여기에 들어온지도 며칠 안된데다 소속 받은 것도 바로 어제 일이니까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너 오늘 너와 함께 운송 경비에 참여할 사람들이랑 만나게 되지?" "예." "그러면 내일 부터 직접적인 훈련이 이루어질텐데 내일도 이시간에 오면 너무 늦어. 우리는 훈련을 새벽부터 하는 것 알지?" "아, 항상 그러는지는 몰랐어요. 어제 아침 먹기 전에 훈련 하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어제는 신입 신고식이 있었으니까 특별한 건 줄 알았거든요." "아냐, 아냐. 우리는 훈련이 새벽부터 이루어져. 매일 매일 그 시간에 훈련을 하지." 밥의 설명에 이어 사다드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 이유로, 우리쪽은 아까 모임이 이루어졌었거든. 뭐, 네쪽의 대장은 지금 본점에 있기 때문에 잠시 후에 모임을 갖기는 하지만, 오늘 다 모이는 이상 내일부터 그 쪽도 새벽 훈련을 시작할 거야." "에구... 그럼 일찍 와야 하겠군요." 맥알파인 공작 저택에 있었을 때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났었기에 일찍 일어나는 건 크게 어려운일은 아니었지만, 늦잠 자는 걸 포기하려니 무지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뭐, 이 애는 몸으로 때우는 쪽이 아니니까 꼭 훈련에 참가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런 내 아쉬움을 느꼈는지 밥이 슬쩍 끼어들었지만, 사다드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얘네 쪽 대장을 맡게 된 사람이 누군 지 몰라서 하는 소리야? 다른 사람과 같이 훈련하지는 않겠지만, 훈련에 어떤 식으로든 참가해야 하기는 할 거야." "레이언 녀석이 아니가? 항상 그 녀석이 맡아 왔잖아." 사다드의 말에 밥이 고개를 갸웃 거리며 대답하자 그녀가 틀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전체적인 대표고... 호송 경호 대장은 머튼이 맡게 되었다고." "엑, 그 머튼?" 밥이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젓는 모습에 나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왜요, 그 사람이 무서운 분인가보죠?" "무서워? 차라리 무서운게 났지... 그 사람은 유능하기는 한데 엄청 고지식하고 깐깐 하거든... 규칙맨이야 규칙맨. 규칙에서 벗어나는 걸 절대로 가만 못 둔다니까. 엄청 피곤한 스타일이지. 절대로 상종하고 싶지 않은 인물이야." 밥이 고개와 함께 손까지 설래설래 저으며 설명하는 말에 사다드까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우리와 같은 금판급인데, 얼마 안 있어 백금판급으로 승급될거라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실력있는 사람이야. 하지만, 유일하게 흠이 있다면 아까 밥이 말했듯이 철저한 규칙맨이라서... 지각도 절대 용납 못한다니까." "윽... 큰일이네..."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그 사람의 눈에 한번 벗어나면 능력이고 뭐고 없이 엄청 피곤해 지니까 말야. 내일 부터는 해 뜨기 전에 오도록 해. 새벽 훈련은 동이 틀 즈음에 시작 되거든." "하아... 왠지 엄청 걱정이 됩니다." 사다드와 밥에게 그런 말을 들어서인지 점심시간에 이번 해운 운송에 참여하게 될 이들이 모여을 때 나는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모인 사람은 대략 40여명이었는데, 나는 그들 중에서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곤 레이언 뿐이었기에 그에게 다가갔는데, 내가 미처 다가가기도 전에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레이언이 내 기척을 느꼈는지 돌아보았다. "여, 어서들 와." 그러자 그와 가까이 있던 중년 남자가 나를 눈짓으로 가르키며 레이언에게 물었다. "저 아이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정령사라는 아이입니까?" "예. 저 아이 덕분에 인원을 많이 줄일 수 있었죠." "흐음...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운송에 투입시키기에는 너무 어린 것 아닙니까?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막상 싸움에 임했을때 침착함을 유지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을테니까요. 차라리 경험을 더 쌓게 한 후 나중에 투입하는게 좋을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괜찮을 겁니다. 여차 하면 믿는 구석도 있으니까 말이죠." '그... 믿는 구석이라는 게 아무래도 아버지를 말하는 거겠지만... 기분은 좋지 않은데?' 옆에 다가와 레이언의 말을 듣고 있던 내가 살짝 인상을 찡그리자 레이언이 헤실 거리는 웃음을 보냈다. "그렇습니까?" 그 중년 남자는 이 능글맞은 녀석을 믿는 것인지 더 이상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나를 아래 위로 훑어보는 폼이 왠지 나를 불안한 요소로 여기는 듯 했다. 그런 그 중년 남자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언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여 말을 꺼냈다. "자자, 다들 모인 것 같으니 서로 인사나 합시다. 우선 저야 얼굴이 잘 팔려 있으니 다들 아시겠죠?" 레이언 녀석이 잘난 체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사방을 둘러보자 여기저기서 약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그들에게 레이언 역시 싱긋 웃어보이며 재차 입을 열었다. "뭐, 이번에도 대표로써 가게 되었으니 잘 좀 부탁 합니다. 자, 그리고 이번에 여러분들을 실질적으로 이끌, 경호 대장인 머튼입니다. 이 분도 유명하니 다들 잘 아시겠죠?" 레이언이 아까 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던 중년 남자를 가르켜 보이며 말하자 방금 레이언이 자신을 소개했을때 가벼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머튼이란 남자는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부족하나마 대장을 맡게 되었다. 앞으로 짧지 않은 여정 동안 잘해보자." 그 뒤에 같이 가게 된 마법사 세명이 소개 되었다. 남자 두명과 여자 한명으로 구성 되었는데 제일 나이 많은 사람 이름은 가레스로, 연륜이 있어서 그런지 셋 중 가장 강한 마법사였고, 나머지 남자 한명과 여자 한명은 비슷한 또래로 마법 실력은 비슷하다고 했다. 뭐, 내 마법 스승인 노만에게 듣기로 마법사의 실력이란 마나가 높고 마법 클래스가 높은 것보다도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할 수 있는 정신력과 그 상황 상황에 알맞는 마법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지혜를 더 높이 산다고 한다. 덕분에 평생 학교나 연구실에 틀어박혀 연구, 혹은 남을 가르키는 일만 한 마법사 보다 싸움의 경험이 많은 마법사가 클래스나 서클이 낮아도 더 높게 쳐주는 일 또한 많다고 들었다. '그럼 스승님과 저들 중 누가 더 실력이 뛰어날까? 서클이야 스승님이 더 높은데 말야.' 그들을 힐끗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사이 나와 또 다른 남자가 정령사로 소개 되었다. "자, 이쪽은 정령사들입니다. 이쪽은... 다들 알고 계실거라 생각하지만, 우리 상회의 꽃미남 중 한 사람인 잭슨군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이번에 새로 우리 상회에 들어 온 해인 주디스라고 합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해인군의 정령술 실력은 우리 상회에서 제일 높으니까 어리다고 무시하면 큰 코 닥칠 겁니다." 그러자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일부 사람들은 레이언의 말에 공감하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아마 저들은 이 곳에 있다가 어제 아침에 내가 치른 신고식을 본 듯 했다. 그렇게 내 소개가 끝난 뒤 각자 나머지 사람들의 소개도 끝나자 레이언이 물러나고 머튼이 그 뒤를 이었다. "자, 그럼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조를 짜기로 하겠다. 너희들의 실력은 대충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동안 실력이 늘어난 사람도 많고 또 새로 들어온 사람도 있으니 우선 실력을 확인하도록 하지. 확인 대상은..." 거기서 잠시 말을 끊고 사방을 둘러 본 머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본인과 대표, 그의 보좌관, 그리고 마법사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다." 이번 운송에서 드워프와의 거래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것을 위함인지 대표에 레이언 말고도 실무자 한 사람이 레이언 보좌관으로 같이 가게 되었는데, 그는 싸움이라는 건 전혀 해 보지 못한 듯 보이는 사람이었기에 전력에는 조금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레이언 옆에서 조용히 서 있는 그를 힐끔 보는 와중에 머튼의 설명이 계속 들려 왔다. "실력을 확인하는 방법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씩 마법진에 들어가 환각 마법으로 형성된 몬스터들과 싸우는 것이다. 오래 버틸 수록 강한 몬스터가 나오는 건 알고 있겠지?" 그의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슬그머니 레이언에게 다가가 그를 툭 쳤다. "아니, 단지 실력을 알아보려는 건데 무슨 마법진까지 동원이 돼? 거기다가 꽤 고난위의 마법이잖아?" 단지 환각을 보여주는 거라면 나도 할 수 있을 정도로 클래스가 낮았다. 하지만 그런 거는 가까이 다가가 손만 한번 휘저어주면 그냥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환각과 싸우게 하려면 쉽게 사라지지도 않고, 정말 실물 처럼 소리도 들리게 하고, 한대 맞으면 정말 아픈 것 처럼 착각하게 해야 하기 때문에 난위도가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아직 높은 클래스거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5클래스 이상일 정도로 고난위도인데...' "아니 두 사람을 싸우게 하면 아무래도 사상자가 나잖아. 마법진을 사용하면 자신이 실수 해서 어딘가 부러뜨리지 않는 한 다치는 일이 없으니까 운송을 얼마 안 남겨둔 시점에서는 자주 사용하고 있어. 마법사 좋다는게 뭐냐? 게다가 가레스가 그런 마법진을 잘 만들기 때문에 훈련할 때도 그 마법진을 사용할 거야. 어차피 일주일 정도만 사용하는 임시기 때문에 크게 어렵지도 않다고 하더군." "그래? 흐음... 그렇다면... 저분이 최소한 5클래스까지는 익히고 계시겠군? 유저인지 익스퍼트인지 마스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법 스승인 노만보다는 마력이 적은 것 처럼 보이니 아직 6클래스에 도달하지는 못한 게 분명했으니 높아봐아 5클래스 마스터일 것이다. "헤에, 너 마법에 대해 꽤 아는 구나? 하긴, 저번에 그 마법진에 대해서도 네가 말해준 거지? 마법이라도 배웠냐?" 내 중얼거림에 가까운 말을 들은 듯 레이언이 지나가는 투로 묻자 나도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배우다 말긴 했지만 기초적인 건 다 떼었거든. 뭐, 아직 2클래스 마스터 3클래스 유저 밖에 안되었지만..." "에엑? 그럼 너 마법도 할 줄 알았냐?" 제 15화 해상 운송(4) "에엑? 그럼 너 마법도 할 줄 알았냐?" 방정맞다 할 정도로 큰 소리로 놀라움을 표하는 레이언의 모습에 나는 오히려 내가 더 놀라서 녀석을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놀래? 내가 마법을 한다는게 그렇게 놀라운 일이야?" 내가 황당하해 하며 녀석을 바라보자 레이언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니 뭐... 그래, 네 어머니께서 마법사셨으니 마법을 배웠다는 게 크게 놀랄 일은 아니지만... 너는 지금의 정령술만 해도 다른 사람들은 꿈도 못 꿀 경지에 도달해 있잖아? 그런데도 또 마법을 배우고 있었던 거냐? 도대체 얼마나 더 강해지려고?" 기가막히다는 듯이 말하는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자니 나는 괜히 머쓱해졌다. "음... 뭐... 일부러 강해지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그게... 사실 정령술이라는 건 내가 노력해서 얻게 된 힘이 아니라 아버지 잘 만난 덕분에 사용할 수 있는 거라서 왠지 그거는 내 힘이 아닌 것 같아서 내 힘인양 마음대로 쓰면 안 될 거 같더라구... 그리고 나도 내 스스로 노력해서 뭔가를 익혀보고 싶었거든... 물론, 아버지 덕분에 다른 사람들 보다는 쉽게 익히고 있지만..." 우물쭈물 이어지는 내 변명 같은 이야기를 듣던 레이언은 기가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참내, 보통 사람이 들으면 배부른 투정 같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통 사람 중 한 사람이었던 나로써도 잘 알고 있는 일이었기에 화가 나기는 커녕 풀이 죽어서 어깨가 축 쳐졌다. "하지만..." "응?" 그런 나를 돌아보며 레이언이 씨익 웃어보였다. "객관적으로는 훌륭한 생각이라고 봐." "엥?" 아까는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으면서 이제와서 훌륭하다니, 병 주고 약 주는 건가 싶어 살짝 인상을 찡그리자 레이언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니, 사실 부모 잘 만나서 떵떵 거리며 사는 녀석들 중에는 그게 자신이 만든 힘인 양 착각하며 거들먹 거리는 재수 없는 녀석들도 많잖아? 하지만, 너는 그러는 대신 네 스스로 능력을 얻고 싶어하니까 말야. 기특하다고 생각해.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필요할때 정령술을 안 쓰면 내 쪽에서는 널 채용한 보람이 없는데 말야." "아니... 여차하면 당연히 쓰기는 쓸 거야. 단지, 그런 걸로 으스댈 수는 없으니까, 나는 내 스스로 자신있게 내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 가지고 싶은 것 뿐이야. 음... 이렇게 말하니까 되게 거창하긴 하지만..." "그런게 기특하다는 거야. 그러면, 너는 마법쪽으로도 전력이 가능하겠군? 비록 큰 보탬은 안되겠지만..." 기대어린 시선을 보내며 묻는 레이언의 말에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으음... 그게 말이지... 3클래스 유저라고는 해도 아직 미숙한데다가... 실전 경험도 전혀 없어서 제대로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거든. 요즘은 공부도 제대로 안 하고 있고..." "그래? 하지만 뭐, 이번에는 못 되더라도 다음에는 괜찮지 않을까? 마법 쪽으로 계속 나갈 거 아냐?" "엥? 아아 그게말이지... 아직 심각하게 생각은 안 해봤는데... 뭐, 우선은 공부는 계속 할 생각이지만..." 그러고보니 나는 장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집에서 가출할 때도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는 목적도 있었지만, 사실 이 세계의 세상 구경을 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던 것이고, 조엘네 집에 가서 검술과 마법을 배운 것도 그냥 한번 해보고 싶었던 마음 뿐이었지, 그 쪽으로 진로를 잡을 생각은 전혀 없었고 말이다. 게다가 여기가 내가 태어난 곳이고 친 부모님도 이 세계의 존재였다고 해도, 언젠가는 한국에 돌아갈 생각이라 이 곳에서 뭘 하고 싶다, 하겠다라고 고민해 본 적도 없었다. 엘라임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어도 그런 근본적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곳에서의 생활은 잠시 현실을 벗어나 여행을 왔다는 듯한 기분이라 뭘 해도 진지해지지 않았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고민 또한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랬으니... 이제와서 고민한다고 해봐야... 어차피 돈을 벌 필요성도 없고, 공부는... 한국에 돌아가서 할 것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장사 같은 건 흥미 없고, 출세... 를 그렇게까지 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고... 으음... 모든게 어영부영인 거 같네...' 생각하다보니 점점 더 고민이 깊어져가 나는 지금이 어떤 상황이라는 것도 잊어버린 채 끙끙댔다. 그런 나를 정신차리게 한 것은 내 옆구리를 쿡 찌른 레이언의 손가락이었다. "응?" 정신을 차리며 녀석을 돌아보자 레이언은 내 앞쪽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입을 열었다. "어이, 어이... 그런 고민은 나중에 하라고. 시간은 얼마든지 있을테니..." 녀석이 가르키는 손가락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니 그 곳에는 언제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 세 명의 마법사가 달라붙어서 가운데가 텅 빈 커다란 마법진을 마악 완성시키고 있었다. "자자, 보라고. 이제 곧 시작하겠어." 마법사들이 쪼그리고 앉았던 몸을 완전히 펴고 마법진의 바깥쪽의 세 지점, 그러니까 정삼각형 모형에서 꼭지점에 해당하는 부분에 마법진 안쪽을 보는 형태로 서다. 마법진은 아직 햇병아리 마법사인 내가 보기에도 환영 마법에다가 주위의 마나를 모으는 마법진 까지 섞여 있는 듯 했다. "으음... 마법사가 서 있는 세 점이 마나를 모으는 기준 점인 것 같은데... 주위의 마나를 모으는 마법진을 넣었다고 해도 마법사가 그 마법진의 기준점이 된다면 마법사의 마나도 많이 소모될텐데 저래도 괜찮을까?" "뭐가?" 내 딴에는 무지 심각하고 진지하게 말했건만 레이언은 지나가는 투로, 그러니까 예의상 말을 받아주는 식으로 묻자 나는 좀 황당했지만, 계속 입을 열었다. "자신의 실력을 보여야 하는 사람이 너하고 머튼, 마법사까지 빠진다고 해도 30명이 넘는데, 그들이 다 마법진을 사용하고 나면 마법사들이 크게 지치지 않겠어?" "뭐, 그렇긴 하겠지." 이번에도 시큰둥하게 대꾸해주는 레이언의 태도에 나는 기가막혔다. "이봐 이봐, 그렇게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말할 게 아니잖아? 저 마법진을 일주일 정도 사용할 거라면서? 그럼 마법사들은 출발할때 쯔음에는 거의 파김치가 되어 있을 거라고. 저 마법사들을 보니 체력은 보통 사람 정도 같은데, 그러면 쉽게 회복이 안 될 거란 말야." 그러나 레이언은 씨익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는 거였다. "괜찮아, 괜찮아. 뭐, 내가 마법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서도 예전에 보니까 파김치는 아니고 약간 지친 정도더라고. 그리고 출발할때도 곧바로 마법사들의 힘이 필요할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테니까 쉬는 시간은 충분할테고 말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못미덥다는 듯이 중얼거리자 레이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뭐, 가레스에게 전에 듣길 이것도 마법사들에게 훈련이 된다고 하더라고. 게다가 그렇게 크게 힘든 일이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일주일이나 되는 시간동안 마법진 가동을 맡은 거겠지. 이것 때문에 파김치가 되어 정작 실전에 도움이 안된다면 이런 방식을 계속하지 못했지. 우리가 원했다 하더라도 마법사들이 가만 안 있었을걸?" "에? 아, 하긴..."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나는 약간 기가 죽었다. 마법사나 레이언이나 모두 바보가 ㅇ닌 이상 이것 저것 다 생각한 후에 이런 방식을 채택한 걸텐데, 나는 그런 것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혼자 흥분했으니, 나만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뭐, 해인이 너도 마법을 익혔다니 다음부터는 너도 마법진 만드는데 동참할지도 모르겠네. 아, 혹시 내일부터 가레스가 너를 동참시키는 거 아닐까?" 약간 풀이 죽은 나를 위해주려는 건지, 레이언이 은근히 나를 치켜주려고 하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와다. "네가 동참시켜 달라고 부탁해도 절대로 안 끼워줄 거야. 마법진을 가동시키는데 참여하려면 마나 다루는데 아주 익숙해야 한다고. 나 같이 마나 다루는데 서툰 초짜가 끼어든다면 까딱 잘못했다간 큰일나." "마법진이 작동 안되나보지?" "그 정도에서 끝나면 엄청난 행운이지. 운이 안 좋으면 마법진이 폭주해서 주변이 초토화 될 수도 있어." 별거 아닌 것으로 여겼던 레이언은 나의 진지한 말에 입을 떠억 벌렸다. "헉, 그정도야?" "당연하지. 특히나 나 같이 마나는 많은데 컨트롤 능력이 낮은 마법사라면 더더욱 배제해야 해. 오죽했으면 내 마법 스승이 나에게 4클래스 마스터가 되기 전까지는 마법진 가동시키는 건 꿈도 꾸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셨을까?" "하하하... 그랬냐? 너는 그 컨트롤 능력이 별로 없었나보지?" "에휴, 말도 마라... 마법을 익히는건 왜 이렇게 어렵던지... 기초 마법익힐때 얼마나 폭발을 일으켰는지 넌 모를거다." 그 고생 고생 했던 때가 떠오르자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이 푸욱 새어나왔다. 그렇게 내가 레이언과 잡담하는 사이, 마법진이 완성된 걸 확인한 머튼이 주변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좋아. 이제 시작하도록 하지. 호명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기를 들고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는 거다. 뭐, 그전에 지원자 없나? 원한다면 먼저 하게 해주겠다." 그의 말에 마법진 바깥쪽에 모여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주위를 돌아보며 눈치를 살피며 머뭇대는 중에 용감한 한 사람이 슬그머니 손을 들며 일어났다. "제가 먼저 해보죠." 약간 잿빛이 섞인 밝은 갈색 머리를 가진 그는 입주이를 감싸는 텁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있어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대충 30대 중반 혹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보통 수염을 기르면 나이가 좀 더 들어보이니 실제 나이는 그 보다 조금 적을지도 몰랐다. "좋아. 마법진으로 들어가라." 머튼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주저없이 그 안으로 척척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니 이런 일을 몇번 겪어본 경험자인 듯 싶었다. "음, 존스터군. 저 사람도 꽤 실력이 좋아. 경험도 많고 말야." 레이언의 말을 들으며 나는 마법진 안에 자세를 잡고 서 있는 남자를 긴장과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았다. 제 15화 해상 운송(5) 레이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이제 마악 마법진 중앙에서 걸음을 멈춘 남자를 긴장과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았다. 그가 자신의 무기로 사용하는 것은 1미터가 좀 안되어 보이는 길이의 도였는데 짧아서 그런지 한손으로 휘리릭 자유 자재로 돌리다가 왼손 오른손 번갈아 던져 쥐는 모습이 되게 멋들어져 보였다. 그렇게 도를 몇번이고 휘둘러 본 그는 가볍게 제자리에서 톡톡 뛰더니 곧 이어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세를 낮추었다. 그가 싸움에 임할 준비를 갖추자 그제야 마법사들이 마나를 모아 마법진에 주입 시키기 시작했다. 곧 이어 바닥에 새겨진 마법 문자가 마나의 영향을 받아 빛을 내기 시작하자 세 마법사 중 리더 역활을 하는 가레스가 시동어를 외쳤다. "에드벤스트 일루전!!" 그러자 마법진이 우웅~ 하고 작게 울리면서 마나가 뿜어져 올라와 공간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마법진 중앙에 들어간 남자가 가려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 사람 주위를 아지랑이 같은 것이 감싸고 있어, 마치 허공에 랩 같은 것이 한꺼플 씌워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존스터의 앞에 어떠한 생물체가 스르륵 나타났다. 그 생물체는 키가 2미터는 훌쩍 넘는데다가 키에 비해 약간 뚱뚱 하다고 느껴질 몸체를 가지고 있어, 그 생물체를 보자마자 생각나는 건 예전 영화에 봤던 거대한 킹콩이었다. 존스터라는 사람도 이 곳 사람 치고는 평균을 넘는 키에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그 생물체와 같이 있자 마치 어른과 어린이가 서 있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할 정도였다. 거기에다 피부는 파란색과 초록색을 섞어 놓은 듯한, 마치 냄새 고약하고 질퍽하고 생물도 살지 못할 것 같은 늪을 생각나게 하는 색이었고, 내 쪽으로는 뒷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얼굴은 모르겠지만 머리는 머리카락 한 올 없는 대머리에다가 귀는 마치 돼지 귀 처럼 생겼다. 웃긴건,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으면서 귀에는 멀리 있는 나에게 보일 정도로 굵고 뻣뻣해 보이는 털이 숭숭 나 있다는 거였다. 옷은 마치 원시인 처럼 가죽으로 하체만 가려 맨 등과 굵은 팔다리가 다 드러나 있었는데 한쪽 팔에는 그의 무기인 듯한, 내 팔뚝 두개를 합친 것 보다 더 굵어 보이는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엑? 저건 도대체 뭐지?' 생전 처음 보는 괴 생물체의 모습에 내가 입을 떠억 벌리고 있을 때 내 궁굼증을 해소해주는 레이언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호오, 첫 타자가 트롤인가?" '트롤? 트롤이라...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언제 들었더라?'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름이기에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도대체 떠오르지 않아 자신의 기억력을 의심하며 고심고심하고 있는데, 이런 날 돕기 위해 신께서 보내셨는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곁에 다가와 있던 잭슨이라는 녀석이 레이언의 말을 받으며 내 의문을 해소시켜 주는 거였다. "이거 이거, 첫 몬스터가 트롤이면 두번째는 웨어울프가 떼로 나오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맞다, 몬스터!!' 내가 아직 맥알파인 공작 집안에 있었을때 조엘 녀석과 같이 웨스트모어랜드 후작령으로 몬스터 사냥을 가던 중에 아버지와 마법 스승인 노만에게 잠깐 들었던 이름들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란 생각에 그러려니... 하며 흘려 들었었는데, 그렇게 들은 걸 언뜻 기억하고 있었다니 내 기억력도 크게 나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에헷... 역시나, 나도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라니까... 아, 저게 그 트롤이라는 몬스터였구나. 에구, 어쨌든 오늘 집에 가면 어머니 서재에 가서 몬스터 도감집이라도 찾아봐야겠다.' 내가 이렇게 속으로 히히덕 거리고 있는 사이, 마법진에서는 그 트롤이라는 몬스터와 존스터라는 남자의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몬스터의 덩치가 존스터보다 훨씬 컸고 힘도 강해보였지만, 존스터는 두려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물론, 긴장하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크워어어~~" 트롤이 기지개를 켜듯 두 팔을 치켜 올리며 괴성을 지르는 사이 존스터는 그 잠깐의 틈을 노리고는 트롤에게 달려가 몇 발짜국 안되는 거리에 도달하자 제자리에서 뛰어 올라 그대로 트롤의 목을 향해 도를 날렸다. 잘 하면 한방에 트롤의 목을 칠 것 같은 분위기에 나는 순간적으로 감탄 보다는 허탈함이 앞섰다. '참내... 저놈은 자기가 무슨 킹콩이라고 덤빈다고 선전 포고를 하다가 그냥 간대? 멍청하기는...' 하지만, 그 트롤은 내 생각보다 그리 멍청한 녀석은 아니었는지 존스터가 자기에게 달려 들자 치켜올린 팔을 그대로 그에게 내리쳤다. 덕분에 존스터는 한방에 트롤을 보내버리는 것이 여의치 못해지자 재빨리 도의 방향을 조금 더 틀어서 목을 치는 대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굵은 팔뚝을 막아갔다. 그러자 트롤의 팔은 존스터를 내려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도에다가 가져다 대는 모습이 되어 버렸고, 그 모습 그대로 트롤의 팔뚝에는 도가 그대로 박혀 들어갔다. 푸욱~ 고기를 찌르는 듯한 섬득한 음향과 함께 트롤의 녹색 피가 튀었다. "크워어어~~" 놀라움과 아픔이 담긴 괴성을 지르며 트롤은 본능적으로 팔을 휘저어 자신의 팔뚝에 박힌 도를 빼내려고 했다. 덕분에 그 도를 꽈악 쥐고 있던 존스터는 트롤이 팔을 휘처음에 따라 휘익 날려졌고, 그가 크게 휘청임에 따라 트롤의 팔뚝에 박힌 도가 빠져 버리자 실 끊긴 연처럼 멀리 날아갈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법진에는 일루전 마법은 물론, 마법진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실드 마법까지 같이 쳐저 있었는지 마법진 가까이 날려오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그대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쾅~!! 마치 진짜 벽 마냥 소리까지 리얼하게 들리기에 엄청 아플 듯해 내 눈쌀이 저절로 찡그려 졌지만, 존스터에게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는 땅에 닿자마자 낙법을 사용해 몸을 둥글게 말아 한바퀴 데굴 구르면서 충격을 완하하는 동시에 용수철 처럼 몸을 벌떡 일으켜 다시 트롤을 향했다. 그와 함께 분노한 트롤이 그를 향해 돌아섰는데, 덕분에 나는 그제야 트롤의 정면을 볼 수 있었다. 왕눈이 못지 않게 툭 튀어나온 커다랗고 둥그런 두 눈은 동공은 까만데 주위는 노란 빛을 띄어 꼭 황달 걸린 사람의 눈 처럼 보였고, 코는 주먹만한것이 들려올라가서 비가 오면 빗물이 그대로 들어갈 것만 같았다. 입은 얼마나 큰지 볼이 입때문에 반 정도 줄어든 것 처럼 보일 지경이었고, 그 사이로 뾰족하고 누런 이빨은 얼마나 큰지 하나 하나가 오백원짜리 동전보다 클 것 같았다. 한 마디로 되게 못생긴 얼굴이었다. 물론, 외모 가지고 뭐라고 하는 건 안 좋지만 말이다. 트롤은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더 크게 부릅뜨고 쿵쾅거리며 존스터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트롤이 다시 치켜 올린 팔에는 존스터의 도에 의한 상처가 생각보다 길게 나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상처는 눈에 보이는 속도로 아물어 들어가는 거였다. '허걱, 저, 저게 그냥 아물었어?' 그리고 잠시후에는 언제 상처가 있었냐는 듯 멀끔해지는 그 트롤의 팔뚝을 다시 보고 또 봐도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만약 그 주위에 피가 묻어 있지 않았다면 상처가 났다는 것이 내 착각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완벽하게 아문 트롤의 팔뚝을 보자니 나는 고개가 설래설래 저어졌다. '완전... 괴물이네, 괴물이야.... 누가 몬스터 아니랄까봐...' 존스터는 트롤이 무섭게 달려드는데도 침착하게 가만히 자세를 잡고 있더니 트롤이 그에게 거의 다가와 그 굵디 굵은 팔을 내려칠때 잽싸게 움직여 트롤의 겨드랑이 사이를 빠져 트롤의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트롤이 괜히 애꿎은 땅을 내려치는 동안 트롤의 무릎 뒤쪽을 강하게 내리쳤다. 아무리 재생이 빠른 트롤이라고 해도 그 순간의 타격은 그대로 전해지기때문에 트롤은 다시 한번 아픔의 비명을 토해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아픔을 준 존스터를 가만 냅둘 수가 없었는지 뒤쪽으로 커다란 팔을 휘둘렀지만, 존스터는 몸을 납작하게 숙이는 것으로 그 공격을 가볍게 피해 내고는 그 팔이 뒤로 젖혀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자마자 등 뒤에서 목을 향해 도를 힘차게 휘둘렀다. '윽...' 그에 나는 트롤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라 예상하며 인상을 찡그렸는데, 이런 내 예상을 깨면서 트롤은 목에 도가 닿자마자 먼지가 바람에 날리듯 사라져 버리는 거였다. '휴유... 죽으면 사라지게 해놨나보구나.' 당사자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보는 이로써는 어렵지 않게 트롤을 쓰러뜨리는 모습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올렸다. "훗... 저래뵈도 존스터도 꽤 실력이 높다고. 트롤 한마리 정도는 가볍지." 레이언도 역시나... 하는 표정이면서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였다. 그가 트롤을 해치우자 마법진으로 부터 올라와 마법진 공간을 감싸고 있던 마나들이 서서히 흩어지며 다시 마법진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함께 존스터가 승리의 씨익 지어보이며 거기서 걸어 나왔다. 아무래도 한 사람 당 한번씩 일루전 몬스터를 상대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사, 계속 상대하다보면 아무리 그 사람의 실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지칠테니 제 실력을 발휘할 수는 없을 터였다. 물론, 체력도 실력을 이루는 중요한 바탕이지만 말이다. "좋아. 아주 잘 했다. 자, 그럼 다음에는 누가 하겠는가?" 머튼 또한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존스터의 모습에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자, 이번에는 아까 존스터가 자원할 때 보다 더 빨리 누군가가 손을 들고 나섰다.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좋아." 이번에도 자원한 사람이 마법진 안에 들어가 가볍게 몸을 풀고 자세를 잡자 다시 한번 가레스의 시동어와 함께 마법진이 발동했고, 그러자 아까 그 트롤과 똑같은 트롤이 또다시 그를 향해 덤벼 들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마법진에 들어가서 트롤과 싸우고 나오고, 싸우고 나오고 하는 동안 일반 무사들 차례는 다 끝나가고 드디어 나와 잭슨만이 남았다. 가장 위험한 운행에 뽑힌 사람들만 이 곳에 모아 두어서 그런지 트롤을 힘겹게 이겼으면 이겼지 진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러자 머튼이 같이 서서 구경하던 나와 잭슨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누가 먼저 들어가겠나?" 그 동안 계속 일루전 트롤들이 계속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을 봐온 나였기에 한 번도 싸워 보지는 않았어도 두렵지는 않아 먼저 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먼저 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크게 내키지는 않아 잭슨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마침 잭슨 또한 나를 바라보려고 시선을 돌렸다가 나와 시선을 마주쳤는데, 화들짝 놀라는 내 반응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싱긋 웃으면서 머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먼저 하죠. 신참보고 먼저 시킬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는 폼이, 그의 실력으로도 트롤은 가볍게 물리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분명 그도 정령사라고 알고 있는데 의아하게도 잭슨은 마법진에 들어가자마자 다른 일반 무사들처럼 가볍게 움직여 몸을 풀더니 척 하고 검을 뽑아드는 거였다. "엥? 저 사람 정령사라더니만 검술도 할 줄 알아?" "뭘 그렇게 놀라? 검 차고 있는 거 보면서도 눈치도 못 챘어?" 물론... 봤으면 눈치 챘겠지만, 그에게 별 관심이 없어서 자세히 보지도 않아 그가 검을 차고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몰랐다. "아... 뭐... 그런데 나이도 젊어 보이는데 대단한 사람이네? 정령술 하나 익히기도 힘들다고 하던데, 거기에 더해 거술까지 익혔으니... 으음, 그럼 정령검사인가?" "대단하긴 하지.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대단한 하프 엘프야. 저 녀석도 하프 엘프거든." "헤에, 그래? 어쩐지, 되게 잘생겼다 했다." 제 15화 해상 운송(6) "헤에, 그래? 어쩐지, 되게 잘생겼다 했다."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그 잭슨이라는 하프 엘프는 턱선까지 내려오는 단발 머리를 하고 있어서 그가 움직일때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그의 연보라빛 머리카락이 찰랑찰랑 흔들렸다. 거기에 엘프 특유의 날씬한 몸매에 하얗고 깨끗한 피부, 거기에 마치 소년 처럼 장난기가 가득 들어차 반짝 반짝 빛나는 그의 짙은 보라빛 눈동자는 그를 이제 막 소년 티를 벗은것처럼 보이게 했다. 실제 그의 나이가 28세라고 듣지 않았으면 나도 그를 나보다 많아야 2, 3살 많다고 만 여겼을 것이다. 하기야, 하프 엘프의 연령으로 치자면 아직 어리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말이다. "저 녀석 말이야..." 얼굴이 어떠니 저떠니 하는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는 날 정신 차리게 한 건 레이언의 말 소리 때문이었다. "응?" 하지만 딴 생각 하고 있느라 잘 못들었던 터라 나는 레이언을 바라보며 다시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저 녀석 말이야, 무슨 정령과 계약을 맺었는지 알겠어?" 마법진 안에서 이제 막 나타난 트롤을 상대하고 있는 잭슨을 가르키며 레이언이 다시 묻자, 나는 자연스레 잭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음... 글쎄... 그냥 옆에 있으면 대강은 알 수는 있는데, 지금은 마법진 때문에..." 그런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법진 안에 갑자기 실프 두명이 나타나더니 트롤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셀리맨더가 한 마리 나타나더니 잭슨의 검을 자신의 몸으로 감싸는 거였다. 그러자 잭슨의 검은 마치 검 자체가 불꽃을 내 뿜는 것 같은, 일명 화염의 검과 같은 모습이 되어버렸다. "우와... 정령을 저렇게도 사용할 수 있었네? 신기해라..." 정령을 불러내서 무언가 부탁하는 것만 알았지, 잭슨 처럼 검을 둘러싸 검의 효용을 높이는 건 보도 듣도 생각도 못했던 터라, 나는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저 녀석은 정령술과 검술을 따로 따로 익히지 않고 둘을 같이 사용하려고 하더라고. 예를 들면 검술을 행할 때 바람의 정령을 이용하여 속도, 혹은 힘을 더 강화 시킨다던지, 아니면 방금 처럼 불의 정령을 사용하여 상대에게 타격을 크게 만든다던지 하는..." "헤에... 정말, 그런 방법도 있었네. 하지만, 그럴려면 정령술과 검술 두 가지가 모두 뛰어나야 하겠는걸?" "어느 정도까지는.... 하지만, 검술은 진정한 경지에 오르기는 힘들 거야. 검술을 익힐 때 힘과 속도를 모두 정령에게 의지하려고만 할테니, 스스로의 능력이 키워지겠어?" "뭐, 대신 정령술이 늘지 않을까?" "글쎄... 그러기라도 했으면 좋겠지만... 나는 그쪽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뭐든지 한가지에 매달려 집중해도 성장할까말까 할텐데, 저 녀석은 저렇게 둘 다 잘하겠다고 까불 거리니, 정령술이라도 제대로 성장할지 모르겠다." "에이, 크리스도 검술하고 정령술하고 둘 다 잘 하잖아. 잭슨도 그렇게 되겠지." 그렇게 레이언과 내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잭슨이 실프 때문에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트롤을 셀리맨더가 합쳐진(?)검으로 쉽게 보내버리고 마법진에서 나왔다. "자, 그럼 마지막인가?" 마법진 안을 계속 지켜보고 있던 머튼의 시선이 나를 향하자 레이언도 내 어깨를 툭 쳤다. "잘해보라고." "그래, 그래." 응원해주는 레이언 녀석에게 씨익 웃어보이며 나는 해민이를 품에 안은 채로 마법진 쪽으로 향했고, 그 뒤를 듀비가 따랐다. 사실, 해민이야 수인족이라고 해도 아직 어린 아이기 때문에 실력을 보여주지 않아도 내 책임하에 있으니 상관 없었지만, 듀비는 자신의 일은 자신이 처리할 수 있는 성년 블루 엘프 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에게도 실력을 증명하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가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데다가 실력을 증명하는 것 자체를 기분 나빠했기 때문에 레이언이 그냥 우리는 셋이 같이 하라고 했던 것이다. 하기야, 어차피 듀비의 실력이 어떻게 되든 그는 나와 계속 붙어 있을테니 같이 하는 것도 좋을 터였다. 마법진 안에 들어서서 자리를 잡자 준비하고 있던 세 마법사가 다시 마법진을 가동시켰다. 그러자, 내가 바깥에서 볼 때에는 안에 있던 사람과 일루전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트롤이 다 보였는데, 안에 있자니 사방이 안개로 뿌옇게 가려지고 일루전으로 형성된 트롤만 보이는 거였다. 주위 사람들만 가려진 것이 아니라 마법진 까지 사라져 그냥 허허 벌판에 우리 셋과 우리를 향해 덤빌 트롤만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트롤 한마리씩만 만들어졌는데, 우리는 인원이 세명이라고 세 트롤들이 나타나서 다가오는 거였다. "나원.... 그렇다고 무서운건 아니지만..." 나타난 트롤이 세명이니 나도 정령 셋을 불러낼지 아니면 그냥 최상급 정령 한명을 불러 다 해결할까 갈등하고 있는 동안, 그 나타난 세 트롤은 마치 세 쌍둥이처럼 한번에 같이 허공을 향해 포효를 하더니 달려들었다. "이런... 엔다... 어어?" 그래 나는 고민은 관두고 익숙한 엔다이론을 불러내 맞서게 하려고 입을 벌렸는데, 채 부르기도 전에 내 뒤에 있던 듀비가 먼저 오른쪽에 있던 트롤에게 달려드는 거였다. 그리고 그에 질세라 내 품에 얌전하게 안겨 있던 해민이까지 뛰쳐나가 왼쪽에 있는 트롤에게 달려들었다. 듀비는 이번 운송에 같이 참여하게 되었기에 상회측에서 그에게 검을 지급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곳의 무기고에 있는 검 중에는 그에게 맞는 게 없었기에 듀비는 따로 두 자루의 검을 주문했는데, 그 주문한 시기가 바로 어제 오후였기 때문에 그 검 대신 약 1m 길이의 보통 검을 들고 있었다. 그에 비해 해민이는 수인족이 싸움을 할때 모두 그러하듯 변형이 되어 있었다. 송곳니는 길어져 입술 밖으로 삐져 나와 있었으며 굵고 끝이 뾰족한 손톱은 길어졌으며 뺨과 목덜미에 빳빳한 털이 나와 곤두서 있었다. '그래도... 보기 싫은 정도는 아니라서 다행이라니까.' 그렇게 엉뚱한 생각을 한번 한 나는 엔다이론(물의 상급 정령)을 불러내 내 앞을 지키게 하는 한편 혹시라도 모를 만약을 대비하여 실라이론(바람의 상급 정령)을 불러내어 대기 시켰다. 실라이론은 키가 이미터도 넘는 거인이었는데, 그는 인간형을 하고 있지만 겉 모습은 인간이 아닌 마치 로보캅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로보캅이 조금 더 각이 진 모양이지만, 어쨌든 바람의 정령들은 모두 부드럽고 날쌔게 생겼을거란 내 예상을 깬 모습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상급 정령 두명을 불러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그냥 정령계로 돌아가야 했다. 해민이가 왼쪽에 있는 트롤을 없애는 사이 듀비가 자신이 맨 처음 맡은 트롤을 없애는 것도 모자라 가운데 있던 트롤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해결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듀비와 해민이가 뛰쳐 나가 당황하다가 얼른 정신을 수습하고 정령들을 불러낸 그 짧은 시간 동안 잽싸게 달려가 포효를 하며 이제 공격하겠다고 선포하는 오른쪽에 있던 트롤의 허리를 한번에 그냥 동강 내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자신을 지나쳐 나에게 다가가려고 했던 트롤의 허리까지 그대로 날려 버렸던 것이다. "와우..." 그 동안 다른 사람들도 쉽게 쉽게 트롤을 해결했지만, 듀비처럼 단 한방에 그것도 너무나 빠른 시간에 트롤 두 마리를 해결한 사람은 없었기에 나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그렇게 두 마리의 트롤이 사라지자마자 듀비는 해민이가 트롤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것을 힐끔 쳐다보더니 도와줄 생각은 않고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척척 걸어와서 항상 그가 서 있던 내 뒤에 와서 떡 하니 서는 거였다. 그에 비해, 해민이는 한번에 트롤의 목을 날리 거나 허리를 날려버릴 힘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 처럼 여러번 공격을 해서 겨우 쓰러뜨렸다. 그 동안 내가 도와줄까말까 열심히 고민 했지만, 해민이가 싸우는 와중에 듀비가 벌써 두 마리나 처리한 것을 본 뒤로 무지 열받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더욱 더 열렬하게 공격을 했기에 도와줬다가 그 녀석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거 같아서 그냥 보고만 있었다. 하기야, 상급 정령도 두 명이나 불러내었겠다, 위험하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럴 수 있었던 거지만... 결국, 그렇게 해서 나머지 한 마리를 해민이가 처리했기에 내가 기껏 불러낸 두 명의 상급 정령은 트롤과 싸우는 모습만 잠깐 구경하다 그대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서 구경하는 것 외에 아무 한 일 없이 터덜터덜 나오는 나를 향해 레이언이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맞이했다. "뭐, 그래도... 아직 끝난 건 아니잖아." "아니... 그게... 난 솔직히 싸우는 건 조금도 원하지 않았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나오는 것도 기분 안 좋은 일이네." "하하하, 네 기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하지만, 이번 운송이 끝날때 까지는 네 안위 걱정은 안해도 되겠는걸?" "그것도... 사실, 내가 뭔가를 해서 친구를 얻은 거였으면 좋았으련만... 아무것도 안 하고 받기만 하는 거라서... 에휴, 기분이 좋지만은 않아." "그러면 앞으로 그 만큼 해주면 되잖아, 안 그래?" 한쪽 눈을 살짝 찡긋해보이며 활달하게 말하는 레이언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명씩 하기는 했지만, 한 사람당 트롤을 해결하는데 크게 시간이 걸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까지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많이 지나가지 않았었다. 대충 내 예상으로는 오후 2시, 혹은 2시나 3시 사이일 것 같았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더 첫 사람 부터 새로운 일루전 몬스터를 맞이하여 실력 발휘를 해야 했다. 이번에 나온 것은 보통 성인 남자의 키에 근육 덩어리의 커다란 등치를 가졌지만, 그 근육들이 몸에 수북히 난 털로 인하여 제대로 안 보이며, 목 아래는 대충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목 위로는 돼지 모양을 하고 있는 오크라는 몬스터였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5마리가 한꺼번에 덤볐는데 그들 각자도 사람처럼 도끼라든지 검 같은 무기를 들고 있는 거였다. 제 15화 해상 운송(7)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5마리가 한꺼번에 덤볐는데 그들 각자도 사람처럼 도끼라든지 검 같은 무기를 들고 있는 거였다. 비록 이전 몬스터인 트롤 보다는 덩치가 적어 그 보다 힘도 덜 강할 것 같았지만, 보통 사람보다는 강하고 빠른 것만은 분명했다. 게다가 아직 싸움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는 내가 보기에도 한 마리도 아니고 5마리였기에 그들에게 둘러싸인다면 고전을 면치 못할 것 같았다.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 그 오크들을 상대하는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인 듯, 그들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대신 포위되는 것을 경계하며 하나씩 해결하는 작전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의 몸으로 다섯 마리의 오크를 상대하기는 벅찼던 듯 트롤을 상대할때보다도 시간이 더 많이 걸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고, 비록 일루전에 불과하지만 커다란 부상을 입는 사람들도 속출했다. 물론, 그것들은 모두 환상이라 마법진을 빠져 나오면 정상적인 몸으로 되돌아가지만, 정신적인 충격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기에 마법진 안에서 쓰러지는 사람들도 많아서 제 발로 걸어나오지 못하고 부축을 받거나 심하면 실려 나오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오크 다섯마리를 상대하는건 크게 다치건 아니건 모두 통과를 했지만, 그 다음 관문(?)에서는 해보기도 전에 기권하는 사람도 셋이나 나왔고, 몬스터를 상대 하다가 안돼겠던지 그 안에서 기권한 사람도 5명, 끝까지 하다가 결국 몬스터를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쓰러진 사람도 2명이나 나왔다. 이로써 실력을 발휘하는 인원 중 1/3 이 세번째 관문에서 탈락된 거였다. 그쯤이 되자 머트는 한시간 정도 휴식 시간을 주었다. 세번째 관문이 끝날 즈음에는 해가 긴 계절이라 아직 어둑어둑 해지지는 않았지만, 저녁 식사 시간이 거진 다 되었기 때문에 저녁 먹을 시간을 준 거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관문은 저녁을 먹은 뒤 또 시작될 거였다. 물론, 이번에는 세번째 관문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하지 않으니 조금 더 빨리 끝날 거 같았다. 마법사들도 잠깐 잠깐씩 마법진을 발동 시키는 거였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동안 그러고 있었기에 머튼의 '휴식'이란 말이 떨어지자 제자리에 주저 앉아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었다. "괜찮으십니까?" 그 모습을 본 머튼이 가레스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머튼이 그쪽으로 가자 레이언 녀석과 잭슨까지 그쪽으로 향했기에, 그들과 계속 같이 있었던 나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당연하지. 내 나이가 몇인데 이 정도에 벌써 빌빌 거리겠느냐? 헥헥, 그냥 조금... 지쳤을 뿐이다." 가레스가 당당하게 말했음에도 그의 안색은 헬쓱했고 지친 것 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었기에 머튼이 그런 그에게 손을 내밀어 잡아주려고 했지만, 가레스는 그것을 뿌리치고 비틀 거리며 혼자서 일어섰다. 그러자 머튼은 많이 겪은 일인 듯이 그냥 피시식 웃으며 뒤로 물러났고, 대신 가레스와 마찬가지로 지친 기색이 역력한 두 마법사들이 다가왔다. "아아... 정말, 무사들의 실력이 늘었군요. 작년에는 세번째 관문에서 절반쯤은 탈락했었는데... 기분 좋으시겠습니다, 머튼 대장?" 그래도 그들 중 젊고 남자랍시고 용케 안 비틀거리며 걷던 마일즈가 기운 없는 미소를 보이며 머튼을 향해 말을 건네자 그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겉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꽤나 흡족한 모양이었다. "흥, 덕분에 우리만 더 오래 고생을 했잖아요. 에휴, 다음 부터는 우리도 마법사 한명 더 늘려줘요." 그 모습에 무지 기분 나쁘다는 듯 투덜거리던 린제이가 레이언을 향해 부탁하자 레이언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아... 가능하다면 그렇도록 하지." 그러면서 마지막에 나를 보고 씨익 웃는 폼이 내년에는 나도 마법사로써 활약하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으음... 내가 열심히 공부한다면 말이지... 하지만, 난 한국에서도 스스로 공부는 잘 안 했는데...' "이번에 같이 갈 사람들의 실력이 한층 높아진 것도 좋은 일이지만, 저는 솔직히 상급 정령사의 실력이 제일 기대되요. 한시간 후에 다시 치뤄질 실력 검증에서는 실력이 제대로 발휘 되겠죠?" 같이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잭슨이 기대어린 눈빛으로 나와 가레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묻자 가레스도 내 쪽을 향해 눈빛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이제까지는 자네에게 가벼운 몸풀이에 불과했을테지만, 잠시 후에는 그렇지 못할테니 각오해 두라고. 나도 최상급 정령사는 처음이라 기대가 되는구만." "하.하.하...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한건데..." 사실 두번째 실력 검증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다섯 마리의 오크를 상대한 것에 비해 나를 비롯한 듀비와 해민이는 15마리나 되는 오크를 상대해야 했었다. 그러니 나는 최소한 그들에게 포위 되지 않으려고 애를 써봤지만, 3명이서 15마리를 상대하면서 포위 안 당하려고 하는 건 무지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엄청나게 빠른 발을 가지고 있거나 하늘을 날지 않는 한 말이다. 물론, 정령을 불러 내어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얼마든지 하늘을 날 수 있기는 하지만, 단지 실력 테스트에서 하늘을 날아도 되는지 몰라서 - 이런거 보면 나도 멍청한 면이 있다. - 그러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듀비와 해민이가 분전을 해주었지만, 두 명이서 15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할 수는 없어서 나에게도 오크가 달려들었었다. 뭐, 그때도 나는 만약을 대비하여 엔다이론과 실라이론을 불러내어 대기 시키고 있어서 크게 놀라거나 걱정하지는 않았는데 이 두 녀석들은 오크가 달려드니까 자기들이 상대하기에 너무 가소로운 녀석들이라 직접 나서기도 귀찮았는지 운다인과 슈리엘, 그러니까 자기들 보다 한 단계 낮은 중급 정령들을 불러내서 처리 시키는 거였다. 물론, 상급 정령은 자신보다 하급 정령들을 얼마든지 불러낼 수가 있지만 - 어차피 마나는 정령사가 다 감당을 해야 하니 정령사 능력이 되는 대로 - 내가 자기들을 시켰건만 자기들은 움직이지 않고 중급 정령들을 불러내 시키는 녀석들의 태도에 나는 순간적으로 황당 스러웠다. 이게 다 내가 정령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서 그런 듯 싶었다. 하기야, 중급 정령들로도 충분히 오크를 해결하고 남을 수 있었지만, 내가 오크라는 몬스터도 오늘 처음 보는데다 정령들도 그렇게 자주 불러내지 않았던 탓에 오크를 충분히 처리하고도 남는지 아닌지 모르니까 혹시나 싶어 상급 정령을 불러낸 건데, 이 녀석들이 저번에도 기껏 불려왔다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돌려보내지니까 기분이 별로 안 좋았었나 보다. 이번에도 불려와서는 '혹시나...'하는 눈으로 나를 보다가 오크들을 처리하라고 하니까 실라이론이 그 모습과 걸맞는 걸걸한 목소리로 투덜댔던 것이다. [저까짓 녀석들을 꼭 우리가 나서서 해결해야 합니까?] 그래서 내가 황당해 녀석을 바라보며 [그럼, 어쩌라고?] 라고 물으니까 이 녀석이 당당하게 의견을 제시하는 거였다. [중급으로도 충분 하니까 그녀석들을 불러내서 시키죠?] 물론, 물의 정령인 엔다이론은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바람의 상급 정령은 자기가 중급 정령을 불러내서 오크를 상대하게 하는데 엔다이론만 직접 움직이게 하기는 뭣해가지고 엔다이론 에게도 원한다면 너도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만, 기다려다는 듯이 운다인을 불러내서 시키는 거였다. 참내, 정령들에게도 자존심이 있었을줄이야... 그래서 세번째 단계에서도 자기들이 직접 움직이지 않고 중급 정령들과 하급 정령들을 불러내서 처리했던 것이다. 그것도, 난 가만히 구경이나 하고 있었고 자기들이 중급, 하급 정령들을 지휘해서 처리 했으니 이번에도 난 정령들을 불러낸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중급 정령들까지만 나와서 몬스터들을 상대한 것으로 보여졌을 것이다. 뭐, 가레스나 같은 정령사인 잭슨은 상급 정령까지 소환 되었다는 걸 눈치 챘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상급 정령들이 직접 나선 것도 아니니 어차피 같을 거였다. 지금 잠깐 설명하자면, 정령사들이 소환된 정령들을 보통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그 정령들이 보통 사람들에게도 보이게끔 정령사들이 마나를 주입해줘서 그러는 것이다. 만약 정령사들이 마나를 주입해주지 않는다면, 일반 사람들은 정령이 소환 되었는지 아닌지도 모를 거였다. 뭐, 마나에 민감한 마법사라던지, 아니면 검기를 다룰 수 있는 경지의 검사라던지, 같은 정령사들이야 눈치는 채겠지만... 우리 팀이 저녁을 먹고 조금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실력 검증을 재개할때 쯔음, 드디어 해가 서쪽 수평선에 슬그머니 자신의 끝부분을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아직 해가 완전히 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머튼은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마법사들이 마법진에 설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하기야, 머튼의 폼을 보니 해가 완전히 지고 달 뜨고 별 떠도 모든 사람들의 실력 검증이 끝나기 전까지는 사람들을 고이 보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자, 그러면 슬슬 다시 시작하자." 그러자 통과 못한 사람들은 마법진에서 좀 떨어진 자리에 주저 앉아 구경할 태세를 취했고 통과한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한 곳에 모여 서서 들어갈 준비를 했다. 그 중에는 맨 처음 자원한 존스터라는 사람도 있었고, 잭슨도 물론 끼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존스터라는 사람이 제일 먼저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세번째 단계에서는 두꺼비가 나타났다. 그런데 보통 두꺼비가 아니라 사람보다 더 큰 두꺼비에 그 녀석이 입을 열어 혀를 빼낸다음 그것으로 공격을 하는데 그 길이가 2 미터 혹은 3미터에 가까운게 문제였다. 보통 두꺼비를 보면 무지 징그러웠는데, 그렇게 큰 녀석이 나타나니까 더욱 더 징그러웠다. 거기에다가 혀 끝에서는 뾰족한 침이 달려 있었는데 거기에서 침 같은 타액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데, 그게 아무래도 독인 듯 존스터는 그 타액에 닿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는 거였다. 하기야, 그 타액에 닿으려면 그 커다란 두꺼비의 혀, 혹은 혀 끝에 있는 침에 닿아야 할테니 피하는게 무리는 아니었지만.... "으엑... 나는 절대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데..." 내가 그 모습에 진저리를 치자 내 품에 안겨 있던 해민이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레이언이 피식 거리며 웃었다. "뭐야, 마치 귀족 집안의 레이디 같은 그 반응은... 여자면 모를까 사내 녀석이 저 프로그 정도의 생김새는 애교로 봐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노무 시키가... 난 여자라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해봤자 여장이 취미인, 혹은 자신을 여자로 착각하는 놈으로 비춰질까봐 그 말은 꼭꼭 삼킨 채 나는 녀석을 노려봐줬다. "그래, 너 잘났다." 그 프로그라고 불리는 커다란 두꺼비 같은 몬스터는 보통 두꺼비처럼 피부가 투명하고 매끈매끈한 점액질로 둘러쌓여 있어 검을 내리쳐도 그냥 미끄러지거나 아니면 쏙 들어갔다 다시 나오며 되려 검을 튕겨낼 뿐, 왠만해서는 상처 하나 입지를 않았다. 게다가 그 큰 덩치로도 점프력은 엄청 나서 한번 마음 먹고 도약하면 사람 키의 서너배는 훌쩍 뛰어 오르는데다, 한번 땅에 착지하면 그 커다란 몸집을 가지고 있는 것 답게 땅이 흔들려서 착지할 때 주위에 있다가는 같이 흔들려서 중심 잡기도 어려워 보였다. 짧은 거리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서 움직이는데 그나마 그 움직임은 재빠르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대신 혀를 놀리는 솜씨 만큼은 마치 크리스가 단검을 던지는 것 처럼 재빨라서 그 공격을 피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내 경우에는 그 모습만으로도 엄청난 무기였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존스터의 경우도 그 거대한 두꺼비 몬스터를 상대로 엄청난 고전을 치뤘다. 그는 그래도 꽤 실력이 있다고 평가 받는 사람이었던 터라 그 두꺼비 몬스터 피부에 상처를 입히기는 했지만, 그 몸집에 비해 큰 타격이 아닌, 사람으로 치면 피가 좀 날 정도로 긁힌 거에 불과했기에 오히려 프로그의 성격만 돋구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혼신의 힘을 담아 날린 그의 도가 프로그의 한쪽 눈에 적중하자 그 몬스터 녀석이 아픔을 이기지 못해 펄쩍 펄쩍 뛰었다. 그러다 재수 없게 땅의 흔들림 때문에 미처 균형을 잡지 못해 피하지 못한 존스터가 프로그의 거대한 앞발에 맞아 튕겨 나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 뒤로 한쪽 눈을 잃은 프로그가 촛점이 잘 안 맞는지 매번 공격을 엉뚱한 곳으로 했기에 위기를 넘기고 겨우 겨우 쓰러뜨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도 엄청 힘들었는지 마법진이 꺼지자마자 그대로 그 자리에 뻗어서 두 사람이 달려 들어가 그를 들고 옮겨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 5명이 그 자리에서 포기를 했다. 하지만, 잭슨은 무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쉽게 그 모스터를 쓰러뜨려, 나는 그가 정말 굉장한 실력자인 줄 알았다. 하기야, 다른 사람을 상대할때에 비해 그 프로그도 잭슨을 상대할때는 왠지 무서워서 제대로 덤비지 못하는 것 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보니 그 몬스터는 불에 꼼짝도 못한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던 거였다. 그리고, 잭슨은 불의 중급 정령과 계약을 맺은 정령사였고 말이다. 제 15화 해상 운송(8) 그러나, 나중에 알고보니 그 몬스터는 불에 꼼짝도 못한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던 거였다. 그리고, 잭슨은 불의 중급 정령과 계약을 맺은 정령사였고 말이다. 그걸 알았으면 나도 불의 정령을 불러내어 가볍게 처리했을 텐데, 그 생각은 못하고 그저 그 커다란 두꺼비만 눈 앞에서 사라지게 할 생각에 땅의 중급 정령을 불러내어 그냥 땅 속에 파묻어 버렸다. 뭐, 그래도 당분간 꼼짝 못하게 되어 그걸로 무난히 통과가 되었긴 했지만, 나중에 레이언의 말을 들어보니 그 정도로 죽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이번에 통과한 사람은 나와 존스터, 잭슨을 합하여 도합 7명 뿐이었다. 그리고 그쯤 되자 해가 막 서쪽의 수평선으로 넘어가 마지막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기 전 보다 적은 인원이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상대한 몬스터가 까다로운 몬스터이다보니 인원이 많을때와 비슷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흠... 아무래도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 같지 않아?" 성격이 쾌활해서 그런지 처음 보자마자 자신보다 나이 어리다는 이유로 나에게 말을 놓으며 친근하게 구는 잭슨이 긴장된 시선으로 마법진을 바라보는 나머지 다섯 사람들을 보며 작게 속삭였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나도 더 이상 싸우고 싶지는 않거든." 비록 잭슨이 데니보다 나이가 많다는 건 알았지만, 그는 어려보여서 도저히 존대를 붙이고 싶지 않아 처음에 말 놓는 그를 따라 은근슬쩍 말을 놓았었다. 뭐, 그도 그게 편한 듯 자신을 잭슨이라고 불러달라고 해서 이제는 아예 마음 놓고 반말을 하고 있지만... "맞아. 내일 부터 고생할텐데 오늘은 빨리 가서 푹 쉬기나 했으면 좋겠다." 그의 말에 의아한 듯 한번 쳐다보기는 했지만, 어차피 내일 부터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간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말하는 건가보다 하고 그냥 넘어갔다. 잭슨의 말대로 마지막 단계가 될지 모르는 실력 검증을 행하기에 앞서 머튼은 존스터를 재촉해 마법진에 들어가게 하지 않고 잭슨과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떤가, 마지막인데 먼저 해볼 생각이 없는가?" "에?" 지금까지는 존스터가 맨 처음 먼저 하겠다고 나섰다는 이유로 계속 그가 먼저 시작해왔었다. 그래 이번에도 그럴 줄 알고 있었다가 머튼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나는 선듯 뭐라 하지 못하고 당황스러운 표정만 지었다. 하지만, 잭슨은 쾌활하게 대답하고는 마법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죠. 차라리 먼저 하고 쉬는게 나으니까요." "저 잭슨이라는 사람, 아니 하프 엘프는 이런 경험이 많아? 무슨 몬스터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되게 여유있네?"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 자세를 잡는 잭슨을 바라보며 레이언에게 묻자 그가 피식 웃었다. "글쎄다... 그 나이 치고는 많은 편이긴 하지... 저 녀석 능력도 높은 편이라서 일찍 부터 일에 투입되었거든." "젊은 애를 몬스터를 상대하는 일에 투입시키다니... 너도 은근히 나쁜 사람이구나?" 레이언의 옆모습을 슬쩍 째려보며 묻자 그가 하하 웃었다. "난 하프 엘프라니까? 하지만... 음... 좋은 하프 엘프는 아니겠지? 아직 20살도 안된 너도 투입시키고 있으니까 말야." "뭐, 나야... 내가 원해서 끼어든거지만... 역시, 보통 사람들은 젊었을때부터 이런일 안 하겠지?" 그러자 레이언이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는 다시 마법진쪽으로 시선으로 딜리며 입을 열었다. "하기야... 너는 대단한 아버지 밑에서 철저한 보호를 받으며 살아왔을테니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는 능력도 안돼고 나이도 어리면서도 먹고 살기위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을 맡는 사람이 많아. 차라리 우리 상회처럼 큰 곳에 들어가는게 오히려 안전한 거지. 능력을 가진 동료들을 많이 붙여주니까 말야. 게다가 능력이 안되면 투입도 안시키고..." "능력이 없는자는 서럽다 이건가?" "서러운걸로 끝나면 다행이게? 보호해줄 울타리도 없고 능력도 없다면 살아남기도 힘들어." 왠지 레이언의 목소리에 절절함이 배어 있다고 느낀것은 내 착각이려나? 그 말을 끝으로 레이언이 입을 다물었기에 나도 덩달아 입을 다문 채 마법진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잭슨은 아까의 여유스러운 표정은 버리고 무지 진지한 표정으로 눈 앞에 나타난 몬스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몬스터 또한 내가 처음 보는 몬스터였는데 외형은 아까의 그 커다란 두꺼비보다는 괜찮았지만, 그래도 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충 덩치가 큰 개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머리가 세개이고 꼬리는 뱀 꼬리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목 주위에는 내 팔뚝 보다 더 굵은 뱀들이 달려 있어 각자가 혀를 날름 거리며 잭슨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우, 켈베로스라니... 역시 이번에 끝내려고 가레스가 대단한 녀석을 내놓았구만?" 이번에는 잭슨에게도 힘겨운 상대였는지 그는 예전처럼 불의 정령을 자신의 검에 휘감는 대신 공중에 떠오르게 했고, 불의 중급 정령 말고도 하급 정령과 바람의 하급 정령들을 자신의 능력이 되는대로 몽땅 불러냈다. 아무래도 상황을 보니 자신의 모든 힘을 내어 한번에 제압하려는 것 같았다. "타앗~!!" 나 또한 그의 기세에 긴장한 채 바라보고 있어서 그런지 잭슨의 기합 소리가 귓가에 크게 들려왔다. 그가 기합 소리를 내지르며 땅을 박차자 그와 함께 정령들이 켈베로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켈베로스도 그에게 같이 달려들었는데 놀랍게도 켈베로스의 목 위에 달려있는 세개의 머리 중에서 양 옆에 있는 것들이 불덩어리와 칙칙하고 질퍽한 죽덩어리처럼 보이는 것을 내뱉는 거였다. 그리고 이들도 시간차 공격을 하려는 것인지 그 뒤를 이어 켈베로스의 목에 달려 있는 뱀들이 몸을 쭈욱 늘리면서 잭슨에게 달려들었다. "우에... 아니, 저 개는 왜 뱀을 데리고 있는 거야? 그게 없으면 좀 나아보이겠구만..." 수십마리의 뱀이 몸을 쭈욱 늘리면서 달려드는 모습은 무서움은 둘째치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몸서리가 쳐지는 장면이었다. 내가 그렇게 쓸데없는 말을 내뱉으며 투덜거리는 동안, 잭슨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불덩어리와 거무죽죽한 죽덩어리를 실프를 통해 막고 그 뒤에 달려드는 무수히 많은 뱀 대가리들은 카사들을 통해 막으며 계속 전진하였다. 그러자 켈베로스 녀석이 안되겠던지 자신도 네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달려가며 잭슨에게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불리해진 건 잭슨이였다. 아무래도 덩치가 잭슨 쪽이 작은데다가 힘도 켈베로스가 더 강할테니, 그대로 충돌하면 잭슨 쪽이 날아갈게 뻔했다. 잭슨도 그걸 알았던지 하는 수 없이 옆으로 슬라이딩 식으로 비켜나 몇번 데굴 데굴 굴러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미처 자세를 잡기도 전에 다시 옆으로 굴러야 했다. 켈베로스가 잭슨이 옆으로 피한 것을 보고 자신도 방향을 바꿔 그대로 잭슨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마다 켈베로스의 목둘레에 붙어 있던 뱀들이 같이 달려들었지만, 그때마다 실프들이 잭슨의 주위를 둘러싸며 보호했기에 그나마 잭슨이 여유를 가질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켈베로스의 목 위에 있는 개 머리 세개는 못당하겠는지 잭슨은 정면으로 붙지 못하고 계속해서 피해다니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도저히 이대로 있을 수가 없겠던지 잭슨은 검을 굳게 부여잡고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켈베로스를 바라보며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아무리 잭슨의 검술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무섭게 달려드는 켈베로스를 정면으로 상대할 수는 없을 거 같아 나는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초조해 하며 그 모습을 보는데, 켈베로스가 5m 앞까지 다가왔을 쯔음 갑자기 잭슨이 몸을 낮추며 땅을 구르는 거였다. 저 녀석이 뭔 짓을 하는가 당황해서 쳐다보는사이, 켈베로스는 잭슨이 몸을 낮추며 한바퀴 앞구르기 하는 것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달려들 던 속력이 있는지라 멈춰 서서 잭슨을 물지 못하고 그대로 그의 몸을 훌쩍 뛰어 넘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몸을 낮추고 있던 잭슨이 번개같이 일어 나더니 셀리맨더를 자신의 검으로 불러 들여 그대로 자신의 몸 위를 뛰어 넘느라 고스란히 드러낸 켈베로스의 배를 찔렀다. 깨개개갱~~!! 호되게 얻어 맞은 개 마냥 비명을 지르며 땅에 착지한 켈베로스가 비틀거리자 그때를 놓치지 않은 잭슨이 그대로 덤벼 들었다. 좌우에 있던 개 머리들이 각자 화염과 질척한 죽덩어리를 뱉어냈지만, 그건 정령들이 막아 줬기에 잭슨의 발걸음에는 거침 없었다. 왼쪽에 있던 개 머리가 뱉어내는 건 아무래도 산성 물질인듯 정령들의 보호막에 튕겨 나와 땅으로 떨어지자 애꿎은 땅만 태우며 연기를 뿜어냈다. 그러자 가운데 있던 개머리가 안되겠던지 입을 별려 시커먼 연기를 뿜어냈다. "독연이군." 내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레이언의 말에 나는 잭슨이 이대로 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잭슨의 검을 감싸고 있던 불의 중급 정령이 튀어나와 둥글게 잭슨의 몸을 감싸안자 그 시커먼 독연기는 잭슨에게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그러고보니, 독도 불에는 약하다는 소리를 어디선가 들어본 거 같기도 했다. '음... 그럼 이번에는 나도 불의 정령을 불러내야겠다.' 그렇게 해서 잭슨이 무사히 켈베로스를 물리치자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무사들이 환호성을 올렸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존스터를 비롯한 다섯 무사들은 그 자리에서 포기선언을 했다. 그리고 잭슨은 온 힘을 다해 켈베로스를 물리친 바람에 기운이 다 빠졌는지 비틀 거리며 제대로 서지 못해 두 사람이 달려 들어가 그를 부축해서 나와야 했다. "그럼, 드디어 마지막인가?" 레이언이 기대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아까 부터도 계속 그런 시선들을 받아왔지만, 여전히 얼굴이 따끔거리는 거 같아 나는 빠른 발걸음으로 마법진 안으로 향했다. 뭐, 그 안에 들어가 있어도 사람들 시선이 쏠리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내 눈에 그들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시선 또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내가 듀비, 해민이와 함께 마법진 안에 자리를 잡자 곧 익숙한 안개가 내 주위를 감싸더니 켈베로스 세마리가 나타나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아까 커다란 두꺼비 몬스터가 나타날때까지만 해도 전혀 두려움 없이, 아니 오히려 듀비에게 뒤질세라 앞으로 나서서 어떻게 해서든 공격을 하던 해민이가 이번에는 놀랍게도 두려운지 벌벌 떨면서 내 품안으로 파고드는 거였다. 하기야, 켈베로스의 세개의 개머리에 달린 여섯개의 붉은 눈이 쏘아보내는 살기는 다른 몬스터 보다도 훨씬 무서워서 아까 마법진 밖에서 봤을때는 몰랐지만, 그 눈초리를 직접 받으니 나까지 움찔할 정도였다. 아, 무서운건 절대 아니다. 그냥 약간 놀란 정도일 뿐이지... 물론, 듀비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켈베로스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도 다른때와는 달리 긴장한 듯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 게 내 눈에도 보였다. '으음... 안돼겠다. 이번에는 혼자 해결하도록 부탁을 해야겠는걸?' 그렇게 결심한 나는 낮은 목소리로 듀비에게 나서지 말라고 말해놓고 내가 생각하기에 두번째로 듬직한 - 사실 제일 듬직한 정령은 물의 최상급 정령인 엘레스트라였다. - 이를 불러냈다. "셀레아나, 부탁할게~!" 내 말이 끝나자마자 내 앞에 켈베로스보다 세 배는 더 커다란 불꽃 새가 나타나서 나와 켈베로스 사이를 가로막으며 그 세 녀석들을 쓰윽 노려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세 마리의 켈베로스들이 감히 덤빌 생각은 안하고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나다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기야, 셀레아나가 뿜어내는 위암감은 비록 정면으로 받지 않고 보호 받는 입장에 있는 듀비 조차도 입을 떠억 벌릴 정도였으니, 정면으로 받는 켈베로스들이 꼼짝도 못하는게 당연한지도 몰랐다. 사실 나 조차도 셀레아나가 이렇게 대단한 위압감을 발하는지 미처 몰랐던 터라 나도 놀랐다. 물론, 엘라임의 힘을 직접 받은 거에 비하면 약한 힘인데다가 엘라임과 바닷 속 울 집 주변을 담당하고 있는 엔다이론의 말에 의하면 나도 이 세계에서는 최상급 정령과 삐까삐까한 힘을 가지고 있다니 정면으로 받는다 해도 정 못 버틸 건 아닐터였다. 하지만, 그 동안 최상급 정령들은 나와 싸울 것도 아니고, 또한 지금 셀레아나 처럼 대단한 적을 맞서 자신의 힘을 보일 기회도 없었던 터라 나는 최상급 정령들을 정령들 중 최고라고 생각했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물론, 그 생각은 지금 바뀌어지만... 혹시나, 이보다 더 대단한건 아닌가 몰라.'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켈베로스들이 모두 사라지자 나타나서 눈에 한번 힘만 준 셀레아나는 즉시 몸이 줄어들어 나를 돌아보았다. 나를 돌아보았을때는 아까의 그 거대하고 무서운 기운이 씻은듯이 사라진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미안... 기껏 불렀는데 할 일이 없었네...." 어쨌든, 그런 셀레아나에게 나는 괜히 부른 거 같아 미안한 미소를 지어보이자 역시나 다정한 셀레아나는 따뜻한 미소를 보여주고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괜찮아요.] '역시... 어느 어느 정령과는 다르다니까.' 제 15화 해상 운송(9) 이번 단계에서는 나와 잭슨만이 통과 했었지만, 잭슨은 너무나 지쳐 있는 상태였기에 머튼은 더 이상 진행시키지 않고 그쯤에서 끝냈다. 하기야, 그도 그럴 것이 어차피 실력 검증이라는 것은 무사들의 실력 확인과 그들을 몇개의 조로 나누기 위해 실시한 것인데다, 나는 그 곳에 그냥 꼽사리 끼었을 뿐인지라 내 실력을 모두 다 드러낼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나는 그들 조에 끼이지 않고 마법사들과 한 팀에 넣어질거였으니까 말이다. 물론, 잭슨은 정령검사였기에 무사들 조에 합류하지만... "좋아. 오늘은 모두 수고했다. 내일은 다른 팀과 마찬가지로 새벽부터 수련을 할테니 늦지 않도록 해라. 전에 나와 한번 일해본 녀석들은 늦으면 어떤 벌이 기다리는지 잘 알고 있겠지? 혹시라도 모르는 이가 있다면 꼬옥 물어봐서 확인하도록. 조는 내일 새벽 훈련 전에 발표해 주겠다. 그럼, 이만 해산!!" 머튼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우르르 흩어졌다. 그리고 레이언도 그 건물로 갈 것 처럼 몸을 돌리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너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갈 거지?" "그래야지." 무지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해민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며 대꾸하자 레이언이 재차 말을 이었다. "그래, 아, 내일은 일찍 와야 한다는 거 잊지 마. 네가 정령사라고 하지만 머튼은 어떻게 해서든 너를 훈련에 참여시킬 거야. 녀석은 그런데 좀 깐깐하거든." "이미 사다드와 밥에게 충고 들었어. 에휴, 내일부터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게 조금 가슴 아플 뿐이다." "하하하, 그런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니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을 대하는 듯한 그의 미소에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째 너랑은 상관 없다는 듯한 표정이다?" 그러자 레이언이 머쓱한 표정으로 괜히 머리카락만 만지작댔다. "아, 그게... 나는 훈련에 참여 안 해도 돼거든... 그러니 나는 이대로 본사로 돌아갔다가 출발할 때에나 나타날 거야." "에엑? 그러는게 어디 있어? 너도 검사잖아!!" "아니... 검사기는 하지만, 내가 이번 운송에 참여하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상회의 대표로..." "에엣, 치사하다~!! 아무리 네가 상회 대표라고는 하지만, 뛰어난 검사인 것도 사실이잖아!!" "핫핫, 뭐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나는..." 나는 내일부터 아침 일찍 일어나 훈련에 참가하게 생겼는데 레이언 녀석은 그 훈련의 마수에서 빠져 나간다니 열받아서 눈을 치켜뜨며 다가가자 레이언이 실실 웃으며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마법사들과 같이 건물로 간 줄 알았던 잭슨이 다가왔다. "아니, 거기서 뭐해요?" 그러더니 나와 레이언을 바라보며 물었다. "안 가요? 너도 안 가?" 잭슨은 어렸을때 부터 레이언, 크리스와 같이 생활해왔던 터라 그들이 자신과 같은 또래로 보여도 존대를 하고 있는 거였다. 그가 중간에 갑자기 끼어든 탓에 나는 레이언 녀석에게 뭐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타이밍을 놓쳐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레이언은 후다닥 뒤로 달려가며 나에게 얼른 작별 인사를 고했다. "아아, 지금 막 가려고 했어. 그럼 둘다 출발일날 보자고~!!" "이익, 치사한 레이언~!!" "하하하, 미안, 미안. 훈련 잘 해봐라~!!" "에잇, 에잇, 자기만 훈련에 쏙 빠지고..." 내가 소리쳐봤자 이미 저만큼 멀어진 레이언은 그냥 귓등으로 흘려 들으며 손만 흔들어 보였다. 그 모습에 열받은 내가 투덜거리자 잭슨이 피식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억울하면 사무쪽으로 진로를 바꾸던가. 나는 좀이 쑤셔서 서류 더미에 파묻혀 앉아 있는 건 도저히 못하겠더라만..." "에엥... 내일 훈련이 어떤지 한번 보고 진지하게 고려해봐야겠어요. 오랜 시간 앉아서 일하는 건 자신 있으니까." 한국에서 고등학교 다닐때 이른 아침에 학교 가서 밤 늦게까지 수업에 붙들려 있었던 거 생각하면 사무일이라고 해도 그까짓꺼~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 그러냐? 난 개인적으로 젊은 사람은 밖으로 돌아다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뭐, 네가 그렇다면야... 자, 그럼 들어갈까?" "엥? 들어가다니?" 나를 이끌고 건물,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 무사들이 머무는 숙소로 향하려는 잭슨은 내 말에 멈칫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안 들어가? 가서 자야지. 넌 피곤하지도 않냐? 아, 하긴... 네가 직접 움직이는 일은 없었으니..." 말하다 말고 마법진에서 나의 무용(?) 이 생각 났는지 피식 피식 웃으며 잭슨이 말하자 나는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 그래 나 능력 없다. 쳇, 쳇... 어차피 나는 집에서 통근하니까 여기 숙소로 갈 필요 없어. 집에 갈 거야." 그러며 그가 잡은 손을 부드럽게 뿌리치자 잭슨이 놀랍다는 듯 돌아보다가 내 옆에 스르륵 나타나는 엔다이론을 바라보며 뭔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 정령을 이용해서 통근하는 건가? 쳇, 아쉽네... 너가 여기서 묶고 있다면 너랑 같은 방을 쓰려고 했는데..." "헹, 안됐네요. 나는 내 집에서 편하게 쉬다 올테니까..." 아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잭슨에게 나는 살짝 혀까지 내밀어 보이며 냉큼 엔다이론의 등에 올라타자 잭슨이 피식 웃었다. "짜식, 삐졌냐? 네가 직접 안 움직였다고 네가 능력이 없는 건 아니잖아? 어차피 마법사들도 몸으로 때우는 건 아니니까. 여기서 네가 가장 능력이 뛰어나다는 건 모두 알고 있는 거라고." "몰라. 그것도 내가 노력해서 얻은 능력이 아닌걸 뭐. 갈거야. 아, 해민아, 듀비 내일 보자. 내일은 내가 깨우러 못 갈 거 같으니까 집합 장소에서 보자고." 엔다이론이 서서히 공중에 떠오르자 나는 잭슨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옆에, 내가 가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서 있던 듀비와 해민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듀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해인이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잭슨도 슬그머니끼어들어 작별 인사를 했다. "같이 못 자는게 아쉽기는 하지만... 하는 수 없지. 그럼 내일 보자구." "그래, 그래.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될 거야. 그럼 모두 빠이 빠이~!!" 집으로 돌아온 나는 여전히 같이 사이좋게 거실에 있는 엘라임과 이프리드에게 인사만 하고 대충 씻고 그냥 잠에 빠졌다. 물론, 엔다이론에게 새벽에 깨워달라는 부탁은 잊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느끼는 거지만 엘라임과 이프리트는 항상 거실에서 나를 맞이하면서도 나의 일과에 대해 전혀 묻지 않는게 조금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게 아니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는 건 좀 이상했다. 아무리 관심 없어도 예의상 한두가지는 묻는게 아니던가? 물론, 그들이야 인간이 아니니 관심이 없으면 묻지도 않겠지만, 그들이 관심이 없는게 아니라는 걸 아는 나로써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마치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은 분위기랄까? 뭐, 그런 생각도 곧 잠에 빠져 드느라고 곧 잊어버렸지만 말이다. 다음날, 엔다이론은 내 부탁 대로 해가 뜨기 약 한시간 전쯤에 나를 깨웠고 나는 거의 반쯤 감긴 눈으로 대충 대충 세수만 한 채로 엔다이론 등에 올라탔다. 맥알파인 공작 집안에서 거의 반년 동안이나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버릇을 들여놨는데 이 곳으로 와서 대충 한달 쯤 늦잠을 잤더니만 새벽에 일어나는 게 힘에 부쳤다. 그래도 다행이 엔다이론의 등에 올라타고 상회로 향하는 동안 차가운 새벽 공기가 계속해서 내 정신을 깨웠기에 상회에 도착할쯔음에는 완전히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그 곳에는 이제 겨우 해가 뜨려고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오는, 훈련 시작 시간보다 약간 일렀지만 우리 팀은 벌써 다 모여서 머튼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어, 다행이 늦지는 않았네? 집에서 통근한다고 해서 혹시나... 하고 있었는데 말야."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서자 잭슨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고, 해민이가 나에게 달려들어 품에 안겼다. "시간 약속은 잘 지키는 편이라고. 더구나 지각했다가는 엄청난 벌이 기다리고 있다면서? 그런건 절대로 받고 싶지 않아."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아, 저기 대장이 온다." 잭슨이 눈짓으로 가르키는 시선을 바라보니 머튼이 세 명의 마법사와 같이 걸어오고 있었다. "다들 모인 거 같군. 이번에는 지각하는 사람이 없어서 참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부디 이런 모습이 출발하는 날까지 이어지길 바란다. 그럼 조를 발표하겠다." 머튼이 말한 조는 5개의 조로 각각 7명씩 배치가 되었다. 나는 당연히 마법사들과 뒤쪽에서 무사들을 지원, 보조 하는 역을 맡았고, 듀비와 해민이는 나와 떨어지지 않았기에 마법사들, 정확히는 나를 지키는 역을 맡았다. 5개의 조는 몬스터가 나타났을 경우 제일 먼저 앞장서서 몬스터와 맞서는 조 부터 시작하여 마법사를 호위하는 조 까지 각각 역할이 나누어졌는데, 잭슨은 가장 먼저 몬스터와 맞서는 조에 속하게 되었고, 나와 마법사들을 호위하는 조의 조장은 존스터가 맡았다. 그렇게 조가 짜여지자 머튼은 곧바로 훈련을 시작했다. 그런데 머튼이 얼마나 깐깐한지 나는 무사가 아닌 정령사여서 훈련에 직접적인 참가는 안 했지만, 듀비와 해민이는 무사들 훈련에 참여시킨 거였다. 물론, 처음에 듀비와 해민이는 헛소리로 치부하여 들은체 만체 했지만, 그 뒤에 머튼이 훈련에 참여 안 하겠다면 일행에서 빼겠다고 협박하여 그 둘은 어쩔 수 없이 훈련에 참여해야 했다. 훈련은 기초 체력 훈련과 대련, 그리고 마법진 훈련으로 나뉘어졌다. 그래 나도 반년 동안 검술을 배웠던 터라 괜찮으면 그들 훈련하는데 꼽사리 끼려고 했었는데, 머튼이 그들을 훈련시키는 걸 보자마자 그 생각이 싸그리 사라지며 내가 무사가 아니라는 것이 너무 너무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내가 맥알파인 공작가에 머물때 그 곳에서 기사와 사병들을 훈련 시키던 레오 더글라스 기사도 무지 엄격하고 철저하게 훈련을 시키는 사람으로 이름 높았는데, 머튼에 비하면 그는 너무나도 관대하게 보일 정도였다. 새벽에는 마법사들이 미처 마법진을 마련 못했기에 기초 체력 훈련과 각 조끼리의 대련으로 채워졌는데, 기초 체력 훈련이라는 것은 그 넓은 연무장을 - 축구 경기장보다 조금 더 커보이는 크기다 - 10바퀴 달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오리 걸음으로 한바퀴, 토끼 뜀으로 한바퀴를 돌아야 했다. 그 것이 끝나고 팔굽혀펴기 100회, 윗몸 일으키기 100회를 하는데 이것도 빨리 빨리 해야지 힘들어서 낑낑 대거나 늦게 하는 기색이 보이면 무조건 배로 해야 했다. 거기에다가 체력과 순발력을 기른다는 명목하에 머튼의 구령에 맞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앞으로 구르고 뒤로 구르는, 내가 보기에는 완전 똥개 훈련을 하고나면 모든 사람들이 녹초가 되어 헉헉 거렸는데, 구경하고 있는 나에게도 머튼이 악마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것이 끝나면 약간의 휴식 시간을 가진 후 조끼리 대련을 하는데, 공작가에서 보았던 기사들의 연습 대련만 보아 왔던 내 눈에는 그건 완전 아비규환이었다. 왜냐하면, 그 대련에서 진 조는 머튼의 체력과 순발력을 기르는 훈련을 더 받아야 했기에 모든 조가 이기려고 치열하게 싸워댔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모두 익히는 기술이 다른데다 철저하게 실전형이었기에 무기와 무기가 맞서서 챙챙거리는 게 아니라 - 물론 여기서 무기는 다 나무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 주먹과 발차기는 물론이고, 심하면 꼬집고 머리 끌어당기는 짓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렇게 처절하게 싸우는 그들 틈에 끼어들고 싶지 않고, 안 끼어들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조 끼리 마법진에 들어가서 일루전 몬스터를 조원이 합심하여 물리치는, 실전 대비 훈련이 제일 나아보이는 것 같았다. 같은 조끼리 마음과 호흡을 맞추기 위하여 - 물론 다른 훈련들도 그런 목적 아래 행해지는 것이지만... - 한 조의 조원 모두가 같이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 조장의 지휘아래 일루전 몬스터를 물리치는 훈련이었는데, 실력을 검증 받을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나타는 몬스터는 -물론 한 사람이 감당 못할 정도로 대단한 몬스터다 - 바다 속에서 사는 몬스터들 뿐이라는 거다. 거대한 오징어와 문어를 합쳐놓은 것 처럼 생긴 몬스터에다가, 동양의 용 처럼 생겼지만 앞면이 철판처럼 넓적하게 생긴 몬스터에 공룡처럼 생긴 몬스터도 나왔다. 하나같이 무지 강해보이고 흉흉해보이는 몬스터들이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악착같이 달려드는 그들의 모습을 보자니, 실력 검증할때도 그렇게만 했더라면 마지막 단계까지는 전원... 은 불가능하더라도 절반 이상은 남았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렇게 그들이 훈련을 하는 동안, 내가 한 일은 그들 뒤치닥거리였다. 대련 할때 혼전 중에 쓰러지면 정령들에게 부탁해 그를 끌어 내어 외각에 내려 놓는다던지, 정신을 잃고 기절하면 그 위에 물을 뿌려준다던지, 대련할때 감정이 격해져 완전 너 죽고 나 죽자는 싸움으로 번질때면 그 싸움을 뜯어 말린다던지 하는 일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소한 일들이 은근히 많이 발생해서 나는 새벽 훈련부터 저녁에 훈련이 끝날때까지 정말 정신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만 했다. 훈련에 참여하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긴 후 남들이 훈련할 때 나는 할일이 없으면 구석에서 마법을 조금이라도 수련 하려고 했었는데, 머튼이 나에게 맡긴 일 때문에 뒤로 미뤄져 버렸다. 혹시나 배 위에서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 임무가 인어들이 바다 속에 있을때 그들에게 아무 일이 없도록 지키는 거였기에 아무래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못할 듯 싶었다. 그렇게, 무사들은 무사들 대로 마법사는 마법사대로 나는 나대로 하루 하루를 바쁘게 보냈고 시간은 흘러 출발일이 다가왔다. 제 16화 인어의 섬으로 (1) 출발일을 며칠 앞둔 어느날이었다. 저녁 즈음에 그날도 무사들의 진을 다 빼놓는 격렬한 훈련을 마칠 즈음,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어오는 게 느껴졌다. 물론, 그 상회 - 정확히 말하면 창고와 무사들 숙소 - 건물이 잡리잡은 곳이 해변가인 터라 평소에도 선선한 바닷 바람이 불어오기는 했지만, 그날 저녁에 느낀 바람은 평소에 훈련하는 사람들의 땀을 씻어주는 부드러운 바람이 아니라 뭔가를 예고하는 듯한, 어떠한 기운을 품은 바람이었다. 바람으로 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것은 나 뿐이 아닌지, 다른 무사들 처럼 땅에 철퍼덕 주저 앉아서 헥헥 거리고 있던 잭슨도 진지한 표정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바다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머튼을 향해 소리쳤다. "여어, 대장님... 아무래도 내일 오후쯤이면 시작될 거 같은데요? 징조는 아침부터 시작될 거 같습니다." "그래? 하긴, 슬슬 시작될 때도 되었지... 하지만, 그래도 훈련은 계속 될 거다." "으엑... 그래도 심할때는 빼주실 거죠?" "정 어려울 거 같으면..." "하아, 이번에는 부디 강하길 바래야겠네?" "그러지 않는게 좋을껄? 까딱 잘못하다가는 훈련 기간이 배로 늘 수도 있을테니..." "아하하하... 하긴..." 주어가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척척 말이 통하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도대체 뭐에 대해 이야기 하나 궁금했지만 그냥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어차피 나와 관련이 없는 일이라면 궁금하기야 하겠지만, 꼭 알아야할 필요성도 없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고, 나와 상관 있다면 그들이 내가 묻기도 전에 알게될 거였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그쯤에서 대화를 끝낸 머튼이 마법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일쯤에 폭풍이 올거라니 세 분은 내일 훈련은 빠지셔도 좋습니다." 그제야 나는 머튼과 잭슨이 한 말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나 강하길 바라다 까딱 잘못해서 훈련 기간이 배로 늘어난다는 건 '아하~' 하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쉽게 이해가 되었다. 폭풍이 강하다면 훈련을 못할테지만, 그와 함께 우리가 타고 갈, 지금 항구에 정박해 있을 배에 피해가 가기라도 한다면 그 배를 수리하느라 출발일이 늦춰질테고 그러면 그와 함께 훈련 기간도 늘어난다는 건 당연할 거였다. 그런 걸 이해하며 내가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데 머튼이 나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너도 내일은 훈련에 나오지 않아도 좋아. 아니, 아니, 넌 집에서 통근하지... 음... 그렇다면 넌 이번 폭풍이 물러갈 때까지 집에서 푹 쉬도록 해라. 폭풍이 끝나면 오도록."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잭슨의 부러움이 가득 담긴 말이 날아왔다. "좋겠다아~ 폭풍이 끝나려면 적어도 3, 4일은 걸릴텐데... 그 동안 집에서 놀 수 있다니..." 잭슨의 말에 하하 웃는데, 그 순간 누군가가 내 손을 꼬옥 쥐는게 느껴졌다. 의아해서 돌아보니 거기에는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해민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집에서 쉰다는 건 여기에 안 온다는 이야기니, 그건 폭풍이 끝날 동안 해민이와 내가 헤어져 있어야 한다는 소리였으니, 나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해민이가 그러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미안한 감정 보다는 그런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해민이를 품에 꼬옥 안고 쓰다듬어주었다. "에구 에구, 그런 표정 할 거 없어. 단지 며칠 뿐인데 뭐... 며칠 후면 다시 올 거야, 응? 그때까지 잘 놀고 있어?" 그렇게, 칭얼대는 애 달래서 놀이방에 맡겨놓는 엄마의 심정(?)으로 해민이를 듀비에게 맡겨 놓은 나는 생각지도 않은 며칠의 휴가 동안 무엇을 하며 보낼까 골몰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폭풍이, 아니 폭풍이 아니라 태풍이 온다고 해도 바다 속 깊숙히 있는 우리 집까지는 그 기세가 닿지 못할 거였다. 게다가 집 주위에는 엘라임이 친 결계도 있고 말이다. 그러니 평화로운 집안에서 엘라임이나 이프리트와 쎄쎄쎄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천상 혼자 놀 거리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다 이왕 며칠의 시간을 번 것 오랜만에 마법 수련을 해볼까 하는 기특한 결심을 했는데 하늘이 내가 마법 익히는 걸 별로 달가워 하지 않는지 나는 며칠의 휴가 내내 마법책의 단 한줄도 읽지 못했다. 새벽부터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첫날 아침, 신나게,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느지막히 일어난 나는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어머니의 서재로 향했다. "좋아, 우선 복습부터 해야지." 평소에 아침에 일어날때면 거실에 앉아서 내 아침 인사를 꼬박꼬박 받던 엘라임과 이프리트가 거실에 없었지만, 내가 늦게 일어나서 어디 간거려니... 하고 편하게 생각한 나는 서재로 들어가 전에 어머니의 서재에서 찾아 뒀던, 1클래스와 2클래스의 마법서를 빼서 마악 펼치려고 하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아이야~] 익숙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니 문가에는 여전히 불새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프리트가 허공에 둥둥 뜬 채로 나에게 부드러운 미소짓고 있었다. "아, 좋은 아침이예요. 아까는 어디 다녀오셨나보죠?" 그러자 이프리트의 부드럽게 휜 눈에 개구쟁이 같은 장난기가 어리며 빛나기 시작했다. [후후후, 바쁘지 않으면 같이 가련?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단다.] "재미있는 거요?" 물론 마다할 내가 아니었기에 나는 기꺼이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순순히 이프리트를 따라 서재를 나섰다. '공부는 조금 있다 와서 해야지...'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이프리트는 불의 정령이면서도 자신의 집인 양 아무렇지도 않게 엘라임의 결계 너머의 바다로 뛰어 들어 위로 향했다. 정령왕쯔음되면 자신의 기운과 반대되는 곳이라도 별 큰 피해는 입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아버지도 불 속에 자유자재로 드나들까나?' 그런 시덥지 않은 생각을 하면서 이프리트의 뒤를 따르던 나는 - 바다 속이라면 이제 정령의 도움 없이도 내 마음대로 자유 자재로 다닐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 이프리트가 멈춰 선 곳에 다다르자 의아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곳은 우리 집에서 바다 쪽으로 조금 멀리 간 해수면 위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곳에는 아침에 안 보이던 엘라임이 있었는데 무지 기분이 나쁘다는 기분을 팍팍 풍기며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아버지?" 그런 엘라임의 모습에 더더욱 어리둥절해진 내가 엘라임에게 말을 걸려고 했는데 이프리트가 내 팔을 살짝 건드리는 거였다. 그래 그를 돌아보았더니 그는 여전히 장난기가 가득 든 눈으로 웃으면서 작게 속삭였다. [그냥 놔두거라. 지금 심기가 심히 불편하거든.] "예? 아니... 그게 왜..." [후후후, 잠시만 기다리면 그 이유를 알테니 조급하게 굴지 말거라. 다 알면 재미기 없지 않니?] 평소 온화하고 부드럽고 인자하고 현명하고... 하여간 성자 혹은 군자 같은 면모만 보여주던 이프리트에게 이렇게 장난스러운 면이 있을 줄은 몰랐던 나는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프리트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기에 저리 재미있어 하는가 무척 궁금하기도 해서 그가 시키는대로 아무 말도 안 하고 엘라임에게서 약간 떨어진 해수면 위에 이프리트와 함께 주저 앉아서 뭔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폭풍이 다가 오는 중이라 그런지 바람이 강하게 불고, 구름이 해를 가려 날도 추웠지만, 그러한 것은 이프리트의 옆에 있는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프리트가 나를 위하여 자신의 기운으로 내 주위에 결계를 쳐주고 있는 듯 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흐르자, 나는 엘라임이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저 멀리 수평선 쪽에서 한 무리가 날아오는것을 볼수 있었다. [온다.] 그 뭔지 모를 무리가 이프리트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이프리트의 눈이 기대감으로 더욱 반짝였다. 그에 나도 뚫어져라 그 무리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무리들은 엄청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는지 점점 내 눈에 완전한 형상이 보였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엄청난 바람을 동반하고 있는 바람의 정령들이었다. 물론, 공기중에 바람의 정령은 많이 보이지만 강한 바람을 동반한데다가 그 곳에는 평소 쉽게 볼 수 없는 바람의 상급 정령 실레스틴이 열명이나 앞장서고 있었고, 그 뒤에는 그 보다 더 많은 중급 정령 실라이론들이 그 거대한 몸집이 무겁지 않은 양 떠억 버티고 날아오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아직 그들과의 거리가 한참 멀고도 먼데도 우리 주위에 있던 - 물론 엘라임과 이프리트의 존재 때문에 멀찍이 떨어져 있긴 했지만... - 하급 정령인 실프와 운디네들이 두려움에 떨며 사방으로 흩어져 그들과 거리를 조금이라도 넓히려고 전전 긍긍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기야, 그들의 위세가 얼마나 위압적이었는지 멀리 있는데다가 이프리트의 기운으로 보호 받고 있는 나에게까지 전달 될 정도였으니 하급 정령들이 그리 두려워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평소에 보기도 힘들고 같이 어울리는 일은 더더구나 드믄 상급과 중급 정령들이 저렇게 험악한 분위기로, 마치 패싸움이라도 하러 가는 조직원들 처럼 떼거지로 우르르 몰려 오는 모습에 어리둥절하여 고개가 갸웃 거려졌지만, 나는 곧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이 바로 폭풍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헤에, 폭풍이 저들이라면... 화산 폭발은 불의 상급, 중급 정령들이 험악한 기세로 나오는 거고, 해일은 물의 상급, 중급 정령들이 그러는 걸까나?' 처음 보는 생경한 모습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계속 그 모습을 주시했다. 그런데, 무지 덩치들이 큰 실라이론들 위로 누군가가 또 날아오는 모습이 내 눈에 포착 되었다. 실라이론들이 너무 큰 모습을 가지고 있어 미처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한 거였다. 그는 황당하게도 승전하고 돌아온 대장군 처럼 떡하니 폼 잡은 모습으로 중간에 있는 실라이론의 등에 올라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내가 한국에 있을때 봤던 그리스 신화의 만화에 나오는 포세이돈의 모습과 흡사했다. 하얗고 풍성하고,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머리카락과 입 주위를 뒤덮고 있는 풍성하고 곱슬 거리는 수염은 몸을 감싸고 있는 하얀 천과 마찬가지로 바람에 거칠게 휘날렸지만, 그의 건장한 근육질의 몸은 그런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 꿋꿋하게 서 있었다. 거기다가 그의 손에는 포세이돈이 삼지창을 들고 있는 것 처럼 하얀 색의 지팡이를 들고 있었는데 가끔가다 한번씩 그 지팡이를 휘두를때마다 그 거센 바람들이 요동을 쳐서 그의 저~ 밑에 있는 바다까지 크게 출렁였다. 그러면 그것이 기분이 좋은지 아주 커다랗게 광소를 터트리는 거였다. [크핫핫핫핫~~!!] 그 모습에 그쪽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던 엘라임이 한마디 했다. [미친놈!] 아주 철천지 원수에게 이를 갈며 하듯 절절한 감정이 배어있는 엘라임의 그 말에 나는 어리둥절 해서 옆에 있던 이프리트에게 속삭였다. "저 분이 아버지하고 아는 분이세요?" 그러자 이프리트는 그게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후후후, 아직 눈치 못 챘니? 그가 바로 네 아버지와 앙숙 사이인 바람의 정령왕이야.] 제 16화 인어의 섬으로 (2) [후후후, 아직 눈치 못 챘니? 그가 바로 네 아버지와 앙숙 사이인 바람의 정령왕이야.] "헤에, 저분이 말이에요?" 사실 바람의 상급 정령들과 중급 정령들을 앞세우고 장군처럼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눈치 못 채는 게 더 이상한 일일거다. 나도 어느정도 어렴풋이, 그러니까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눈치 채고는 있어서 이프리트의 확인에도 크게 놀라지 않고 그렇구나...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바람의 정령왕이 다가오는 모습만 노려보고 있느라 나나 이프리트에게는 조금도 신경 안 쓰고 있는 줄 알았던 엘라임이 내 말을 들었는지 흥분해서 말을 내뱉았다. [저 '분' 이라니! 저 놈은 '놈'이라는 말도 아까운 녀석이다. 그런 놈에게 '분'이라는 존칭을 써 줄 필요는 없어!] 엘라임의 기세에 밀린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자 속으로 피식 피식 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뭘 그리 시시콜콜한 거 까지 따지고 드는지... 정말 둘 사이에 쌓이고 쌓인 감정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 상급 정령들과 중급 정령들을 거느린 바람의 정령왕은 우리쪽으로 빠르게 다가 왔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엘라임은 바람의 정령왕이 어느정도 가까워진 시점에서 갑자기 자신의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방출하는 건 아니었고, 마치 적을 앞둔 병사가 싸움을 하러 가기 전에 자신의 무기를 점검하는 것 처럼 엘라임의 몸에서 뻗어나온 기운은 그의 주변을 감싸며 부드럽게 요동 쳤다. "저, 저기... 아버지 모습이 심상치 않은데..." 그 모습에 약간 불안을 느낀 내가 이프리트에게 속삭였지만, 이프리트는 태연하게 웃을 뿐이었다. [후후후, 내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다고 했잖니.] "예? 그, 그렇다면 혹시..." [아, 글쎄 두고보면 안다니까.] "하아..." 이프리트의 말에 나는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약간 불안한 마음으로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광소에 가까운 웃음을 터트리며 날아오는 것만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 이프리트 아저씨 까지 있으니 어떻게 되지는 않겠지...' 그렇게 속으로 낙천적으로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빠르게 날아오던 바람의 정령들 위에 당당히 버티고 서 있던 실피드가 갑자기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분명히 내가 그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랬는데도 어느 순간, 정말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나는 내가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살펴 보았지만, 여전히 빠르게 날아오는 바람의 정령들 위에 떡 하니 버티고 있던 실피드는 정말로 없었다. 그에 얼떨떨해진 내가 이프리트를 향해 실피드의 존재가 사라졌음을 알리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는 입을 떠억 벌리고야 말았다. 저 하늘 높은 곳에 있어야 할 그 실피드가 어느새 내 앞에 떠억 하니 서 있는 것이었다. "저, 저, 저..." 너무 놀라 내가 실피드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말을 더듬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런 나의 버릇 없는 모습은 신경쓰지 않았다. 모두의 이목이 실피드를 향해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 있는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실피드의 시선은 그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엘라임에게 향해 있었다. [여어, 오랜만이지?] 실피드는 오랜 친우를 만나는 것처럼 친근한 목소리와 미소를 띄우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엘라임 못지 않게 무지 매서운 빛을 띄우고 있었다. [오랜만? 네 놈은 내 평생 만나고 싶지 않은 놈이야. 왜 이렇게 너를 만나는 시간은 빨리 빨리 돌아오는 거지?] 그에 못지 않은 매서운 빛을 발하는 엘라임이 이죽거렸지만, 실피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흥,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주는군. 너 빨리 소멸할 생각 없냐?] [네 놈보다는 더욱 더 오래 살아서 너 소멸하는 건 꼭 지켜볼 거다. 다음에 나올 바람의 정령왕은 네 놈보다는 더욱 더 센스 있길 바라지. 취향도 성격처럼 형편없는 네 놈보다 더 형편 없을 수는 없겠지만 말야.] [호오, 네 녀석이 성격을 따지다니, 이건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인걸? 성격 드러운 걸로치면 나보다 네가 한수 위 아니였던가?] [남말하고 있네. 누구 성격이 누구보다 났다는 거야?] 두 정령왕이 성격가지고 티격태격 대자 말릴 생각은 안 하고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이프리트가 소리 죽여서 웃어댔다. [네놈의 드러운 성격에 비한다면야 내 성격은 성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성자가 가다가 넘어져 뒤통수깨지는 소리하고 있네. 누구 성격이 드럽다는 거야?] 웃고 있는 이프리트나 애들 처럼 흥분해서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두 정령왕이나 우습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계속 바라보고 있는 사이 두 정령왕의 흥분은 점점 높아갔고, 그와 함께 두 정령왕의 몸에서 빠져나오는 기운은 점점 강해지고 거칠어져 갔다. 그러자 두 정령왕의 기운에 반응하여 주위에 있던 바람이 거칠게 소용돌이치자 그에 못지 않게 바닷물도 크게 출렁거려 높은 파도를 만들어내며 치솟아 올랐다. [이 자식이 보자보자하니까 한번 해보자는 거냐?] [웃기고 있네. 야, 언제 네놈이 나를 보고 있었냐?] [시끄러워. 네 놈은 떠드는 것 밖에 재주가 없지?] [하, 정말 소멸되고 싶어 환장한 놈이로구나. 오냐 소원이라면 내가 친히 소멸시켜 주지.] [흥, 누가 누구를 소멸시킨다는 거야?] 그 둘은 말 싸움으로 부족한지 정말 서로를 향해 공격을 하기 위하여 동시에 뒤로 물러나 실피드는 허공에 둥둥 떴고, 엘라임은 바다 위에 똑바로 서서 실피드를 노려 보았다. "저기... 정말 치고받고 싸울 거 같은데... 그냥 둬도 괜찮을까요?" 점점 더 거칠게 뿜어져 나오는 두 정령왕의 기운에 반응해 사방의 물과 바람이 요동을 치자 나는 불안한 마음이 커져서 이프리트를 향해 물었지만, 이프리트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매년 이 정도로 싸웠는걸 뭐.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지.] "하아?" 대치하고 있는 두 정령왕을 바라보다 힐끗 위를 바라보니 빠르게 날아가고 있던 실레스틴들과 실라이론들이 어느새 내 머리 위쪽에 도착해서 멈춘 채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네 놈을 손봐주기로 하지.]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실피드의 말에 매섭게 받아친 엘라임이 문득 생각난 듯 내 쪽을 힐끔 돌아보다가 못내 불안한 듯 입을 열었다. [좀 더 멀리 가 있어. 위험하단 말야.] 그러자 이프리트가 배실배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호오, 역시 이 애가 걱정되나 보지? 걱정 말라고. 내가 확실하게 보호할테니...] [뭣? 누, 누가 걱정을 한단 말이냣? 나는 네 놈을 믿지 못하는 것 뿐... ] 이프리트의 말에 엘라임이 화들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 하지만, 그는 말을 다 끝내지 못한 채 놀란 표정을 지으며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허공에서 엘라임과 대치하고 있던 실피드가 어느새 왔는지 우리 앞에 떡 하니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흐음...] 아까 살벌하게 풍겨대던 기운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그는 놀라움과 신기함, 그리고 호기심을 가득 담은 눈으로 나에게 다가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비록 이프리트가 나를 자신의 기운으로 감싸고 있기는 했지만, 그걸로는 실피드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는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척척 바다 위를 걸어 나에게 다가와 살펴보더니 그걸로는 만족을 못했는지 갑자가 그의 커다란 손을 뻗어 내 팔을 잡고 자신쪽으로 끌어 당기는 거였다. "우, 우악... 무, 무슨 짓이예요?" 너무 당황스러웠던 나는 이프리트에게 고개를 돌려 도와달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실피드에게 나를 해할 기운이 없어서 그런지 그는 싱긋 웃기만 하고 가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 그에게 원망어린 시선을 보내는데 갑자기 우악스런 손길이 내 턱을 잡더니만 실피드 쪽으로 확 돌리는 거였다. "우갸갸갸~!!" 실피드는 내 코 바로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어 나를 요조모조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흐음... 이거 참... 신기하군... 신기해...] 그러더니 내 팔을 다시 한번 꼬옥 잡아 보기도 하고, 볼을 콕콕 찔러보기도 하고, 내 옆구리를 쓰윽 만져 갈비뼈를 확인해 보기도 하고... 어찌보면 마치 변태에 가까운 그 행위에 몸둘바를 몰라 어찌할바를 몰랐지만, 당황스러울 뿐 소름이 돋는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 비록 실피드가 건장한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눈에는 호기심과 신기함이 담겨 있을 뿐 다른 야리꾸리한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편한 건 사실이라 나는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려고 꼼지락 거렸지만, 그의 힘이 워낙 세어서 나는 그에게서 조금도 떨어질 수가 없었다. 이렇게 불편한 상황에 처해 있는 날 구해준건 역시 엘라임이었다. [이 변태같은 자식!! 당장 그 손 놓치 못해?] 그러자 그때까지도 계속 내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있던 실피드가 행위(?)를 멈추고 고개만 살짝 들어 엘라임을 바라보았다. [네놈이 뭔데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야?] [뭣이라? 아니, 이놈이 이래도...] 엘라임이 실피드의 말에 흥분해서 곧바로 달려들 태세를 취했건만, 실피드는 그런 엘라임을 싸악 무시한 채로 여전히 한 팔로는 날 잡은 채 이프리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봐, 이 녀석 뭐냐?] [보면 알잖아?] 이프리트는 여전히 싱글 싱글 웃으며 장난스레 슬쩍 대답을 회피했다. 그에 실피드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실피드 또한 이프리트에게는 함부로 못하는 모양인지 뭐라 하지는 못하고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넌 뭐냐?] 그에 나는 정말 얼결에 대꾸했다. [사람인데요?] 내 대답에 실피드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사람? 사람이라고? 네가? 너 지금 날 물로 보는 거냐? 네 몸에 흐르는 엘프의 기운은 그럼 뭐냐?] [이 자식이! 물이 뭐가 어때서 그래? 네 놈을 물에 비유하면 물에게 실례야~!!] 엘라임이 옆에서 흥분한채로 방방 뛰었지만, 그는 내가 실피드의 손아귀에 있어서 그런지 함부로 덤비지는 못하고 제자리에서만 방방 뛰었다. 그에 실피드가 신기하게 엘라임을 쓰윽 바라보더니 다시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흐음... 너 솔직히 말해봐. 너, 엘라임의 맹약자냐? 아니지? 맹약자라고 하기에는 정령의 기운이 지나치게 많잖아? 안 그래?] [맹약자는 아니고... 저 분이 제 아버지신데...] 그러면서 나는 실피드에게 붙잡히지 않은 팔을 들어 엘라임을 가르켰다. 그러자 내 팔을 따라 엘라임을 한번 힐끗 바라보는 실피드의 눈이 다시 나를 향했는데 그 곳에는 가소롭다는 감정이 잔뜩 들어 있었다. [허, 참... 기가막혀서 말도 안나오는 군. 너, 지금 내가 누군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왜 모르겠는가? 이프리트가 친절하게 가르쳐줬는데 말이다. 하지만 실피드가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라는 걸 눈치 챘기에 나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실피드가 기가 막히다는 시선을 그대로 엘라임에게 던지면서 피식 거렸다. [야, 이 놈이 네 자식이래는데? 너 언제 자식이 생겼냐?] 제 16화 인어의 섬으로 (3) [야, 이 놈이 네 자식이래는데? 너 언제 자식이 생겼냐?] 실피드는 아마 엘라임을 열받게 하기 위하여 놀린 듯 싶었지만, 엘라임은 흥분해서 펄펄 뛰는 대신 살벌한 기운을 풀풀 풍기기는 했지만 착 가라앉은 채 실피드만 가만히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실피드는 엘라임의 반응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피식 웃으면서 이프리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 저 녀석이 너무 열받아서 말도 못하는 모양인데? 안 그래, 이프리트? 감히 천한 이종족의 혼혈아 주제에 정령왕의 자식이라고 떠들어대니 화가 안 나고 배길 수가 있겠나.] 그러자 이프리트는 이전까지의 장난스러운 미소보다는 약간 미안함이 담긴 - 아마도 나에게 보내는 감정이겠지만... - 미소를 머금으며 조심스레 대꾸했다. [글쎄...] 이프리트 조차 자신이 생각하던 반응이 아닌, 어정쩡한 반응을 보이자 실피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뭐. 오늘 둘 다 뭐 잘못 먹었어? 평소 답지 않게 왜 그런대? 소멸할때가 다 되었나?] 그렇게 둘의 반응을 의아해 하면서도 실피드는 내 팔을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더 꽉 쥐어서 나는 아픈 건 둘째치고 피가 안 통하는지 나는 팔이 마비된 거 같아 고통스러워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이런 내 모습을 봤는지 엘라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더니 버럭 호통이 터져 나왔다. [바보같이, 지금 뭘 맹하니 있는거야? 여기가 어디 인지 잊었어?] [응? 누가 뭘 어쨌다고?] 실피드는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인 줄 알고 엘라임에게 인상을 쓰며 한마디 했지만, 나는 그게 나를 향해 하는 말이라는 걸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여기? 어디긴 어디야. 바다... 아항...' 여기는 바다 위, 그리고 바다 위면 엘라임의 영역이자 내가 나의 힘을 전부 끌어내어 쓸 수 있는 곳이었다. 그때 다시 한번 나를 재촉하는 듯한 엘라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맹하니 있냐고 했다.] [뭣이라?] 나를 채근하는 줄은 몰랐던 실피드가 - 어차피 그는 내가 엘라임의 자식이라는 것을 전혀 믿고 있지 않았으므로 나에게 말한 것이라고는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을 터였다. - 흥분한 채 엘라임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동안 나는 심호흡을 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기운을 아래 바닷물에게로 뻗었다. '부탁해~!!' 그러자 나의 의지와 기운을 받은 내 발 바로 아래의 바닷물이 순식간에 치솟아 올라 검처럼 날카롭게 변하여 실피드가 앗~ 하는 사이 내 팔을 잡고 있는 그의 손목을 잘라냈다. 예전에 이프리트가 엘라임의 팔을 잘라낸 것을 본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 실피드의 손목을 잘라낼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그에게는 큰 타격이 가지 않을테고, 형체가 없는 그의 손은 잘렸다 해도 다시 만들어질 것이 뻔했으니까. 역시나, 그의 손은 실피드의 몸에서 떨어져나오자마자 바람으로 변하여 허공으로 흩어졌고, 실피드의 잘린 손목에서는 피가 나는 대신 다시 손이 생겼다. [이 녀석이 감히~!!] 큰 타격은 없었지만, 얕보던 나에게 불의의 기습을 당한 실피드가 분노하여 나를 돌아보았지만, 그때는 이미 엘라임이 달려와서 나를 자신의 등 뒤로 보낸 뒤였다. [누구 보고 이 녀석이라는 거야? 네 놈이야말로 내 아들에게 해를 가하려 했으니, 오늘은 절대 용서 못 한다!!] "하아... 딸이라고 해줬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는데..."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강하게 주장하지는 못하고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나에게 이프리트가 다가왔다. [괜찮으냐?] 무지 미안함이 담긴 그의 목소리에 나는 싱긋 웃어줬다. 아무래도 내가 실피드에게 잡히는 상황은 이프리트도 예상 못했던 듯 했다. "뭐, 크게 다친건 없어요. 단지 팔이 좀 저릿저릿 하네요." 그러면서 소매를 올려 실피드에게 잡혔던 부위를 보니 손자국 모양이 그대로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어지간히도 손아귀 힘이 셌던 모양이다. "어쩐지... 팔이 마미되는 것 같더라니..." [이런, 이런... 네 아버지가 정말 화난 것 같구나...] 내 팔뚝에 난 멍자국을 바라본 이프리트가 그의 불꽃 날개로 내 팔을 가볍게 감싸쥐며 말했다. 그에 화들짝 놀란 내가 돌아보니 엘라임이 막 실피드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내 아들에게 상처를 내다니~!! 넌 죽었어!!] 지금까지도 매서운 기운을 뿜고 있었지만, 그래도 서로 정말 죽이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힘 겨루기를 하는 것과 같은 분위기였는데, 이제 엘라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날카로운 살기였다. "허걱..." 그 살기가 나에게 향한 것이 아니고, 게다가 나는 이프리트의 기운으로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몸이 저릿저릿 할 정도였다. 실피드도 그와 같은 엘라임의 반응에 놀랐는지 그대로 맞서지는 못하고 뒤로 물러서며 소리를 질렀다. [너,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네놈한테 무슨 아들이 있다는 소리냐?] [보고도 몰라? 저 애가 내 아들이란 말야!!] [무슨 바람의 정령이 추락하는 소리하고 있네. 우리가 후손을 어떻게 만들어? 안 그래 이프리트?] 엘라임이 너무 살벌하게 달려들자 실피드가 이프리트에게 도움을 바라는 시선을 보냈다. [물론... 우리는 불가능하지만, 인간들은 가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수가 있거든.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뭐야, 그럼 저 이종족의 혼혈아가 정말 엘라임의 자식이 맞다는 소리야?] 여전히 엘라임의 공격을 맞서지 못한 채 피하면서 실피드가 소리치자 이프리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해. 이 아이는 엘라임 자식이 맞아.] [웃기는 소리. 믿을 수 없어!!] 실피드가 고개까지 저으며 못 믿어하자 그게 또 엘라임을 열받게 한 모양이었다. [네놈이 믿건 말건 상관 없어!!] 엘라임의 기운에 의하여 바닷물들이 마치 거대한 창 처럼 뾰족하게 솟아 실피드를 공격하자 실피드가 두 손을 휘저으며 공중으로 높이 떠올랐다. 그러자 강풍이 불어와 바닷물로 된 창을 향해 쏘아져 갔고, 허공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그 여파로 인하여 바람과 바닷물이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고, 충돌 여파가 얼마나 강했는지 바다에 거의 100m에 달하는 구덩이가 순식간에 생겼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 구덩이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여파로 인하여 그 구덩이 깊이만한 엄청나게 높은 파도가 일어나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파도는 곧바로 육지쪽으로 향했다. 영화에서나 봤을까한, 아니 그 보다 더 큰 파도의 모습에 입을 떠억 벌리고 있는데 옆에서 걱정스러운 듯한 이프리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이런, 올해는 아무래도 해일이 무지 크겠는데? 으음... 인간들의 피해가 심각하겠군...] "해일... 해일이라면... 바닷물이 육지를 덮치는 거죠?" [그렇지.] "거기에다가... 바람의 정령왕이 아마도... 그 쪽으로 가고 있었죠? 내가 듣기로는 폭풍이 온다고..." [맞아.] "큰일이다아앗~~!!"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정확하다면, 지금 그레이험 항구의 부두에는 이번에 내가 타고 갈 배가 정박해있을 터였다. 그런데, 아무리 먼 바다로 항해하는 배라 튼튼하게 지어졌다고는 해도 10층 높이의 파도가 한번 휩쓸고 지나간다면 그게 무사히 남아있을리가 없었다. 비록 내가 해일의 피해에 대해 직접 겪어본 것은 아니지만,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기에 나는 황급히 바다 속으로 뛰어 들어 항구로 향했다. 위로 날아갈 수가 있지만, 거기는 지금 엘라임과 실피드가 싸우고 있었기에 날아가기가 어려울거라 생각하여 판단한 거였다. [해인아? 어디 가니?] 뒤에서 이프리트가 다급하게 물으며 쫒아왔다. [항구에요. 거기에 이번에 제가 타고 갈 배가 있거든요. 아무래도 무사할 것 같지가 않아서요. 한번 보러 가려구요.] 비록 그 배를 직접 보지는 못하고 말로만 있다고 들었지만, 어차피 배에 상회의 문장이 새겨져 있을테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저기요, 저는 아무래도 그 배를 사수해야 할 거 같으니까, 아저씨는 부디 아버지 좀 말려주세요. 부탁드릴께요~!!] 나는 뒤따라오는 이프리트에게 거의 고함을 지르다시피 - 어차피 바다 속이라 정령들의 대화법을 사용해야 했지만, 어쨌든 - 부탁하고는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빠른 속도로 바다를 가로질렀다. 항구에 도착하니 작은 보트들은 항구 위로 끌어 올려져 단단히 묶여 있었고, 그렇지 못한 수많은 배들은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지만, 거친 바다의 물결과 바람에 의하여 마구 들썩이고 있었다. 그 많은 배들 중 빨리 배를 찾아내기를 바라며 부둣가를 달려가는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막 내 앞을 스쳐 지나가는 크리스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달리지 않고 정령들의 보호를 받으며 공중으로 날아가고 있던 터라 나는 즉시 엔다이론을 불러내어 그의 옆으로 나란히 달리면서 소리쳤다. "크리스~!! 지금 배를 향해 가는 거지이이이~~!!" 그러자 크리스의 고개가 휙 돌려지더니 그의 눈에 놀라움과 다행이라는 감정이 뒤섞인채 나를 바라보았다. "너 어떻게 여기 와있냐아~~?!" "폭풍이 심해져서 걱정이 되어서 와봤어~~!! 그런데 배는 어디 있는 거야아아아~~!!" "큰 배라서 깊은 데에 정박해 있어어어~~!! 너가 와줘서 다행이다아아~~!! 우리로 충분할까 걱정이 되었는데에에~~!!" 그렇게 고함을 질러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부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몇 척의 커란 배들이 정박해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 큰 배들은 덩치에 걸맞지 않게 마구 흔들리고 있었는데, 크리스는 그 중에 한 배에 다가가 내려섰다. 그의 뒤를 쫓아 내려서보니, 그 배 위에는 벌써 가레스를 비롯한 마법사들이 배 주위에 결계를 펴고 있었고, 잭슨은 그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왔어요?" 우리가 도착한 것을 제일 먼저 잭슨이 발견하고 반색하며 다가왔다. "상황이 어떠냐?" 그의 인사에 크리스는 살짝 고개만 끄덕여주고 곧바로 사태를 묻자 잭슨도 미소를 지우고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안좋아요. 이번 폭풍은 제가 그 동안 겪은 거에 비해 엄청 심하다고요. 게다가 아무래도 큰 해일도 일어날 거 같아요. 우리로써 배를 보호할 수 있을지..." "어떻게든 해봐야지. 마법사들의 상태는 어때?" "아무래도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 아까부터 방어 마법을 펼치고 있어요. 하지만, 배가 워낙 커서 지금 무지 힘들어하는 거 같아요." 잭슨의 말이 아니더라도 배의 갑판 중앙에서 마법을 펼치고 있는 마법사들의 얼굴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글 송글 솟아나 얼굴선을 타고 흘러내릴 정도였고, 안색도 무지 안좋아보였다. "좋아. 교대를 하자. 우선 해인아, 너 혼자 이 배를 보호할 수 있을까?" 크리스가 다급하게 나를 돌아보자 나는 약간 망설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도 해보지는 않았지만... 할 수는 있을 거 같아요." "좋아. 그럼 네가 먼저 나서라. 만약 네가 지치면 그 뒤에 나와 잭슨이 나서마!!" 제 16화 인어의 섬으로 (4) "한번도 해보지는 않았지만... 할 수는 있을 거 같아." "좋아. 그럼 네가 먼저 나서라. 만약 네가 지치면 그 뒤에 나와 잭슨이 나서마." "알았어." 크리스에게 대답한 나는 즉시 바람과 물의 상급 정령을 불러내었다. 마법사들의 모습을 보니 조금만 더 마법을 유지시키다간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실드로 배를 보호하고 있다고 해도 바다 위에 배가 떠 있는 형태였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파도에 의해 전체적으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람과 물결이 더욱 더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신경써서 균형을 잡지 않으면 갑판 위에 제대로 서 있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러한 상황은 마법을 유지하는데에만 집중을 해야 할 마법사들에게는 체력 저하보다도 더욱 더 치명적이었기에 나는 조금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이 배가 부서지지 않게 보호해줄래?" 내 부름에 응하여 모습을 드러낸 두 상급 정령들에게 부탁하자 그들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인 뒤 서로 마주보았다. [내가 겉에다 할까?] [좋겠지. 힘들면 말해. 교대해줄테니.] [호호호, 언젠가 힘들어진다면...] 가볍게 의견 교환을 한 실레스틴이 웃으며 날아오르자 그 뒤를 엘라스트라가 뒤따랐다. 뭐, 그래봤자 그 둘의 능력으로 배 전체를 바람과 물의 방어막을 친 뒤에 다시 내 곁으로 내려왔지만... 그들이 방어막을 치자마자 크리스틴의 신호로 마법사들은 실드를 없애고 저마다 자리에 주저 앉아서 얼굴의 땀을 닦으며 가뿐 호흡을 내쉬었다. 그러한 그들을 잭슨과 크리스가 부축하여 갑판의 구석에 데려다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점점 배의 흔들림이 심해져서 아무것도 없는 갑판 가운데 앉아 있다가는 잠시 후에 이리 데구르르 저리 데구르르 구를 지도 모랐기에 뭔가를 잡아서 몸을 지탱할 수 있는 곳에다 마법사들을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 나 또한 배 위의 흔들림에서 자유롭지 못했기에 배의 난간을 손으로 잡아 몸을 지탱하며 바다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서는 이제 아주 쬐끄마하게 엘라임과 실피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두 정령왕이 쉴새없이 교차하고 떨어지고, 그와 함께 주변이 요동치는 걸 보니 아직까지도 격력하게 싸우는 모양이었다. "아아... 부디 적당히 해줬으면 좋겠는데... 이프리트 아저씨는 어디에 계시는 거지?" 둘 사이에 이프리트의 모습은 안 보였기에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엘라스트라가 그 말을 받았다. [뒤쪽에 계시는데요?] 아무래도 나 보다는 엘라스트라의 감각이 한 수 위인 듯 싶었다. "끄응... 말려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냥 두고 보시려나?" [제가 알기로는 매년 두 분 정령왕께서는 세계 이곳 저곳에서 싸우신다고 하시던데요? 그러니 이제와서 불의 정령왕께서 말리시기도 어려우실 거예요.] "아니... 물론 싸우는 건 알고 있는데.... 이번에는 나때문에 더 커져버렸거든..." 나를 그 곳으로 데려간건 이프리트였으니 이 싸움이 커진 데에 그도 일조한 셈이라 그에게 둘의 싸움을 적당히 말려달라고 부탁한 건데 아무래도 여의치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말 대단하군요. 저는 두 정령왕께서 대결하시는 모습은 처음 봐요. 정령계에서는 다른 정령왕들께서 막으시기때문에 저 정도까지 대결하시는 적이 없거든요. 하기야, 두 분은 정령계에서도 잘 마주치시지도 않지만...] 나는 심란해서 한숨을 푹푹 쉬는데 실레스틴은 경의와 감탄, 놀라움을 가득 담은 시선을 바다 넘어 저 편으로 보내며 중얼거렸다. "으윽... 지금은 감탄할 때가 아니라고. 두 분 때문에 이곳이 난장판이 될 판이라는 거 몰라?" 만약, 실피드가 그때 나를 무시하고 그냥 엘라임과 투닥거렸으면, 이 곳이 난장판이 아니라 허허 벌판이 되었다고 해도 이 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안쓰러운 마음의 동정만 보냈을 뿐 나와는 상관 없는 일로 치부해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상회의 배야 여차 하면 달려와서 지켜줬겠지만... 하지만, 이번에는 나 때문에 피해가 커질지도 모르는, 아니 거의 확실하다는 것을 느끼자 마음속에서 죄책감이 일어 어찌할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사실, 내가 한국에 있을때에도 우리 나라에 매년 태풍이 한두번씩은 와서 휩쓸고 가는 바람에 태풍의 피해를 어느정도 아는데다가, 다른 나라에 심각한 피해가 일어나는 모습도 뉴스에서 봤었기에 그런 피해가 나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하니 태연하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내 심정을 아는 것인지 엘라스트라가 위로의 말을 건네왔다. [이 곳에 폭풍과 해일이 일어나는 건 해인님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년 일어나야 할 자연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해인님이 아니었더라도 이 곳은 폭풍과 해일의 피해를 입어야 했으니 그 피해가 조금 커졌다고 해도 해인님이 마음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게다가 이 곳에 사는 이들도 매년 그러한 일을 겪었을테니 아마 대비하고 있을테지요.] "으음... 그래도, 그래도... 히익~!!" 마음 한 구석에서는 엘라스트라의 말이 맞다고 내가 이럴 필요는 없다고 외쳤지만, 또 다른 한 곳에서는 그래도 내 탓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고 외치고 있어서 나는 웅얼웅얼대며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바다 저편의 두 정령왕을 보는데, 갑자기 내 눈 앞에서 엄청나게 커다란 파도가 일어 배를 덥치자 나도 모르게 놀라 뒤로 주춤 주춤 물러났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배 갑판의 난간을 조금씩 넘는 정도의 파도 - 그것도 높은 파도 - 만 오다가 갑자기 내 머리 위까지 화악 덥칠것 같은 엄청난 높이의 파도에 정말 나를 덮치는 줄 알고 순간적으로 움찔해서 눈까지 감아버렸다. 머리로는 이 배 주위를 실레스틴과 엘라스트라가 방어막을 쳐놨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본능적인 반응은 어쩔 수가 없었다. 덕분에 그 뒤에 배가 크게 흔들리는때 미처 난간을 잡지 않고 있다가 그대로 뒤로 넘어가 데굴데굴 굴러갈 뻔 했지만 옆에 있던 엘라스트라가 얼른 내 몸을 잡아 지탱해줬기에 갑판 위를 데구르 구르는 사태는 면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나의 이런 위태위태한 모습을 본 잭슨이 자신도 심하게 흔들리는 갑판위를 조심스레 균형을 잡아가며 천천히 걸어서 다가왔다. "괜찮아?" "아아, 조금 놀랐을 뿐이야." "그러게 왜 거기 서 있어? 이리와, 저기 돗대에 있으면 괜찮을 거야." 그도 위태위태하게 서서 나를 도와주려는 듯 손을 내미는 모습이 마치 나를 혼자 두기 불안한 어린아이로 보는 것 같아 순간적으로 허탈해졌지만, 그것은 잠시였고, 나를 생각해주는 그의 마음이 고마워 그가 내미는 손을 기꺼이 잡았다. 물론, 엘라스트라가 나를 잡아주고 있어 넘어질 염려는 없었지만, 그의 호의를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인도에 따라 위태위태 걸어가 배의 가장 중앙에 있는 커다란 돗대의 굵은 밑둥에 도착하여 갑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미리 앉아 있던 크리스가 말을 건네왔다. "괜찮아? 지치면 말해라." "응? 아아... 아직은 끄떡 없어." 그러자 그가 피식 웃어보였다. "하기사... 하지만 정말 대단해. 혼자서 이 큰 배를 감당하다니 말이야. 최상급 정령사란 중급 정령사와는 차원이 다르구나..." 부러움이 약간 담긴 듯한 그의 어조에 나는 머쓱해져서 히죽 웃어보였다. "뭐... 그래도 크리스는 나보다 검술이 뛰어나잖아. 검술로 한다면 나는 아마 한방 감도 안 될걸?" 그는 내가 자신을 위로하려는 줄 알았던지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물론, 위로의 목적도 있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에 대한 부러움 또한 담겨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크리스와 마찬가지로 입을 다물고 실레스틴과 엘라스트라가 쳐놓은 방어막 밖으로 보이는 광경을 주시했다. 그날 나는 밤을 꼬박 새어가며 배를 지키느라 갑판에 머물러야 했다. 그 동안 배가 너무나 많이 흔들려 한명의 마법사가 멀미때문에 얼굴이 노랗게 되어 크리스와 잭슨에 의해 실려나갔고, 배가 너무 흔들리는 바람에 배를 고정하고 있던 닻과 연결되었던 부분이 망가져서 닻이 떨어질뻔 했던 일이 일어나 마법사들이 그렇게 요동치는 배 위에서 동분서주 해야 했다. 나는 그때 마법사들이 마법을 쓰는데 집중할 수 있도록 배가 흔들리지 않고, 물결에 따라 배가 흘러가지 않게 고정시키는 역활을 맡아야 했다. 물론 나는 부탁만 하고 엘라스트라가 힘을 써줬지만, 지금까지 정령들이 내 부탁을 들어주면서 사용했던 마나의 양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마치 예전에 엘라임과 계약을 맺겠다고 그를 불러냈을때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마나의 양과 비슷한 마나가 빠져나가 머리가 띵할 지경이라 그 이상으로 마법사들을 도와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배를 그냥 보호하는 것에 비하여 요동치는 바다에서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키는 것이 몇배는 더 어렵고 힘든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 엘라임과 실피드의 다툼은 내 머리위를 지나 결국은 육지 위로 올라가더니 결국 실피드가 엘라임의 공격을 피해 정령계로 황급히 가버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엘라임도 바다가 아닌 육지 위에서는 큰 힘을 못 쓰는지 실피드가 돌아가자마자 곧바로 바다로 되돌아갔지만, 결국 큰 해일이 일어 항구를 그냥 덮어버렸다. 다행이 이 곳은 매년 이런 폭풍과 해일을 겪는 터라 건물들과 시설들이 튼튼하게 지어져 초토화되는 일은 없었고, 이프리트의 중재로 인하여 엘라임도 온 힘을 쏟아 부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 영향력은 밤새도록 계속 되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겨우 잠잠해져 노심초사 하며 밤을 꼴딱 세운 난 일출을 바라보며 그대로 갑판 위에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제 16화 인어의 섬으로 (5) 우리가 출발하는 날은 참으로 날씨도 화창하고, 뜨거운 햇볕에 헥헥 거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시원한 바닷 바람이 불어와 어루만져주는 그런 날이었다. "아아, 정말 며칠 전에 폭풍이 몰아쳤다는 것을 못 믿겠구만."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기분 좋게 기지개를 키는 레이언 녀석의 중얼거림에 그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나는 나도 모르게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뭣이라? 그럼 저것들은 뭔데?" 내가 가르킨 항구의 부둣가에는 여기저기에서 이번 폭풍때문에 부서지고 날아가서 없어진 건물 곳곳을 수리하느라 수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뚝딱뚝딱 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건물들을 튼튼하게 지었다고는 해도 그 강한 폭풍에 피해가 전혀 없을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바닷물까지 쳐들어 오는 바람에 항구 도시의 절반이 침수 피해를 입어 아마 몇주간 동안은 꼼짝없이 그 뒷처리를 해야할 판이었다. 특히나, 도시 밖의 해변가에 세워진 수많은 상회의 커다란 창고들을 비롯하여 우리 상회에도 바닷물이 덮쳐 들어와 내가 배를 지키느라 고군분투 하는 동안 그 곳에서도 물건들을 바닷물에 젖지 않게 하기 위해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리뛰고 저리 뛰었었다. "하.하.하... 뭐, 그렇다는 거지." 그러는 와중에, 상회의 대표라는 이 녀석은 이렇게 위급한 상황일 수록 달려와서 솔선 수범은 보이지 못할 망정, 검사라는 이유로 배를 지키는데에도 정령사와 마법사만 보내놓고 자신은 쏙 빠지는 것도 모자라 - 하기야, 배를 지키는데에는 그의 말대로 그다지 도움이 안될테니 이해가 갔다. - 도시 밖에 있는 기지에 - 대외적으로는 창고라 명칭된 - 바닷물이 덥쳐 왔을때는 어딜 갔었는지 사라져서 그 다음날 새벽에 폭풍과 해일이 물러갔을쯔음에 슬그머니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녀석이 마치 자신도 그때 아주 열심히 일했다는 듯이 날씨타령을 하는 모습에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와 같이 있던 크리스나 잭슨도 마찬가지인듯 그들은 레이언 녀석에게 한번씩 찌릿한 눈길을 보내더니 나에게는 잘했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나는 꼼짝없이 배가 망가지겠다 싶었는데 말입니다." 가레스는 그날 일이 생각하기도 끔찍한듯 몸을 한차레 부르르 떨더니 감격스러운 시선으로 저 멀리 보이는 배를 바라보았다. "맞아요, 정말 다행이에요. 저도 꼼짝없이 훈련 기간이 늘어나는 줄 알았거든요." 지금 우리는 부두에 선 채로 짐을 커다란 배로 옮겨 싣기 위하여 작은 보트로 쉴 새 없이 부둣가와 배를 왕복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대부분의 짐은 어제 다 실어놨고, 오늘은 식료품을 비롯하여 나머지 짐만 옮기면 되었기에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자, 그럼 다녀올테니까 그 동안 상회를 잘 부탁해." 그 모습을 본 레이언은 이제 사람들을 실어 나르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는 보트를 힐끔 바라보더니 우리를 배웅하러 나와준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네가 아니어도 나는 상회를 잘 이끌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 걱정은 네놈이 과연 드워프들을 살살 구슬릴수 있을까 하는거야. 저번처럼 한판 뜨자고 방방 안뛰었으면 좋겠는데..." 무지 걱정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크리스의 시선에 레이언은 감히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은근슬쩍 비껴내더니 크리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하하하, 그래도 그 뒤에 마음이 잘 맞아서 해결 되었잖아? 이번에도 잘 될거야." "글쎄... 내가 믿는건 이번에 또 있을지도 모를 불확실한 네놈의 운이 아니라서..." 회의적으로 중얼거린 크리스가 레이언 옆에서 피식 거리며 웃고있는 사무요원을 바라보았다. "잘 부탁해. 왠만하면 내가 갈텐데... 요즘 이곳 분위기가 수상해서 본사를 비울수가 없으니 너만 믿겠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침착, 냉정, 듬직스럽게 대답하는 시무요원을 믿음직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크리스가 그와 악수를 나누는 모습을 레이언은 머슥하게만 보고 있었다. 그래 이 기회를 또 놓칠 내가 아니라 나는 레이언 녀석의 옆에 슬그머니 다가가 속삭였다. "쯧쯧, 어지간히도 신뢰를 못 받는구나." "하하하..." 그렇게 배웅 나온 이들과 떠나가는 이들의 인사가 한차례씩 끝나자 레이언을 비롯한 경호 담당 무사들과 마법사들, 그리고 잭슨은 보트에 올랐다. "그럼 나중에 보자." "알았어." 그리고 나는 크리스와 함께 보트를 타고 큰 배로 향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내가 그들과 합류하는 건 오늘 밤이었다. 크리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깊은 바다로 나가 타국으로 가거나, 아니면 해변가를 따라 국내의 다른 항구를 갈 때마다 국가에 소속된 직원이 나와서 배를 검사한다고 했다. 아무래도 이 나라도 노예를 법적으로 허락한다고 해도 무역을 금지한 물품은 있을 터이고 그런한 것은 반도인 이 나라에서는 많은 부분 배를 이용하여 운송될테니 말이다. 게다가, 그러한 검사는 내국을 운행하는 것 보다 타국으로 가는 배가 더 철저할게 뻔했다. 그런데, 노예매매가 아닌 일반 물품을 다룬다고 등록이 되어있는 베지테크스 상회에서 타국에서 국내로 들여오는 것이 아닌, 국내에서 타국으로 나가는 배에 노예로 분류되는 인어가 타고 있다면 의심을 살 것이 뻔했다. 노예 매매를 한다고 등록되어 있는 상회라면 이 나라에서는 노예도 타국으로 수출(?) 하기도 하니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말이다. 지금은 폭풍이 휩쓸고 간 뒤라 그런 검사가 전보다는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 물론 상회쪽에서는 그걸 노리고 폭풍이 지나가자마자 육로와 해로 양쪽으로 이종족들을 운반하는 거다 - 조심해서 나쁠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물의 최상급(나이트급 정령이라고도 한다) 정령과 계약을 맺은 내가 지금 인어들을 보호하고 있는 도시 외각의 상회소속 기지 근처의 바다 속에서 인어들을 데리고 라센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바다까지 가서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배와 만난다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크리스와 함께 얌전히 레이언과 그 일행들을 배웅하고는 곧바로 도시 외곽에 있는 상회 소속의 기지로 달려갔다. "잘 할 수 있겠어?" 이번에도 배웅하러 온 크리스가 해변가에서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았다. "음... 한 번도 안해 봤지만... 어쨌든 한 명도 안 잃어버리면 되는 거 아냐?" "그래, 잭슨이 계속 정령들을 보내서 길을 인도한다고 했으니까 너도 정령 한명을 바다 위로 내보내 놓는게 좋을 거야." "그 이야기는 어제 다 했잖아." "그래, 그래.... 어휴, 이렇게 인어들을 데리고 가게 된 건 또 처음이라 내가 다 긴장되네." "걱정하지 말라니까. 자, 그럼 나 이만 간다." "부디 조심해라." 크리스에게 씨익 웃어보인 후 그 옆에 있는 밥과 빅터 등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자 그들도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냥 바다 속으로 들어가도 숨이 막혀 죽을 염려는 없었지만, 나의 이런 신체를 인어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는 귀찮아서 그냥 엔다이론을 불러 공기가 가득 든 구체를 형성하게 하여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미리 이야기된 대로 12명의 인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라함 대륙의 북쪽 바다인 호바트 해에는 바닷물이 따뜻하고 해초류가 풍부하여 다른 바다들 보다도 더 많은 물고기들이 산다고 한다. 하지만, 덕분에 다른 바다 보다도 더 바다의 몬스터들이 많았고, 또 곳곳에 암초가 숨겨진 해류가 엄청 강한 곳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함부로 배를 가지고 돌아다니지 못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인어들도 그 곳에 사는지도 모르겠지만... 인어들 또한 무시무시한 몬스터로 부터 자신들을 지켜내며 살아야 했기 때문에 바다 속에서 무리를 이어 산다고 했다. 그 인어들 무리가 사는 영역에는 바다 위로 자그마한 바위섬이 솟아 올라 있었는데, 영역 안에 있다보니 가끔 인어들이 그 위에 올라가 노는 모습이 항해 하는 사람들 눈에 가끔 띄었기에 그 바위섬은 이제 인어의 섬으로 불리고 있었으며, 그 주변이 인어의 영역이라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다행이도 그 곳은 노예매매상들이 감히 침범치 못하는 곳이었다. 인어들 또한 바다속에서 무서운 적들로 부터 자신들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대단한 무기로 중무장한 그들이라도 인어들이 철저하게 지키는 그 곳을 침범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인어들의 무기란 바로 물을 다루는 능력이었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물술사'라고 불릴 수 있는 바로 그 능력인데 바다 속에서 평생 살기 때문인지 인간들의 마법에 맞설 수 있을 정도로 무척 강력하다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능력이 한가지 더 있었는데 그 능력을 이 곳에서는 '음파'라고 불렀다. 그건 원래 인어들이 물 속에서 서로 대화를 하기 위한 방법인데, 이게 여차 하면 상대방의 정신을 쏙 빼놓거나 심하면 목숨까지 잃게 만드는 공격 능력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우리 식으로 한다면 엄청나게 큰 소리를 질러서 상대방의 귀를 멀게하는 형식과 비슷한 것인 듯 싶었다. 게다가 이 능력은 또 다르게 우리 같은 육지에 사는 종족들이 물 속에 들어가면 엄청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하는 것 처럼 들려서 예전에는 인어의 목소리는 천상의 목소리라고 일컬어지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 또한 너무나 아름다워 사람들을 홀릴 지경이었기에, 세이렌이라는 몬스터 -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홀리게 한 뒤 그 사람의 피를 빨아먹어 죽이는 몬스터 - 와 착각되기도 했었다고 한다. 물론, 그런 그들의 천상의 목소리는 물 밖으로 나오면 괴상하게 꺽꺽 거리는 목소리로 변하기 때문에 이제는 그 앞에 '물속에서' 란 단서가 꼭 붙기는 하지만... 그래서 인어들은 노예매매상에게 잡히면 제일 먼저 목소리를 제압 당하고 마나 제어기를 달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영원히 말을 못하게 하는 건 아니고 마법을 걸어 놓는 것이기 때문에 마법만 풀리면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가끔 그렇게 찬사를 받는 인어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고객이 꼭 있기에 함부로 말을 못하게 할 수 없다나? 덕분에 우리에게 구출 받은 인어들은 그러한 구속에서 모두 풀려났기에 나는 솔직히 크게 긴장하지 않고 있었다. 혹시라도 모를 사태가 있을때에 그들은 내가 도와주기위해 다가갈 잠시의 시간을 벌 정도의 능력들은 모두 충분히 가지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이 곳은 울 아부지의 영역이고 말이다. 훗훗훗.... '그래도 완전히 나태하면 안되겠지만...' 제 16화 인어의 섬으로 (6) '그래도 완전히 나태하면 안되겠지만...' "자, 그러면 우리도 출발하도록 하죠?" 내가 먼저 앞장서서 바다속을 헤치며 나아가자 그들도 곧 뒤를 따랐다. 그 인어들의 양 옆쪽과 뒤쪽에는 내가 불러넨 물의 중급 정령 운다인들이 호위하듯 따르고 있었고, 내 앞에는 이 주위를 담당하는 엔다이론이 붙어 있었다. 이 주위에는 내가 놀았던 구역(?)이 아니었기에 나는 만약을 대비하여 그에게 같이 있어줄 것을 부탁했던 것이다. 인어의 섬에 도착할때까지는 인어들이 바다 속에 있을때 나는 계속 그 근처에 있는 엔다이론 들을 불러내어 같이 있어줄 것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나는 내 옆에서 조용히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는 엔다이론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지어준 후 뒤를 따르는 인어들을 힐끔 바라보았다. 지금 나는 내 힘으로 바다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불러낸 엔다이론이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 물론 엔다이론에게 내 마나를 공급하기는 하지만... - 내 앞의 장애물을 신경쓸 필요가 전혀 없어 이렇게 딴짓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지테크스 상회에서 구출된 다른 이종족들은 힘이 없는 어린 아이들이나 아니면 여자들인 것에 비하여 지금 내가 데려가는 인어들 중 8명이 성년이 남자였다. 물론, 성년이 된지 얼마 안되긴 했지만... 그리고 나머지가 성년 여성이고, 아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고 하니,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인어들의 영역 주위에는 인어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몬스터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탓에 인어들은 태어나자마자 성년이 될 때까지는 어른 인어들이 보호하는 영역에서 조금도 나갈 수가 없었다. 그걸 철저하게 금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 영역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성년이 된 해부터였기에 그때 호기심으로 갓 성년이 된 인어들이 나이 많은 인어들의 충고를 무시하고는 처음부터 영역에서 너무나 먼 곳으로 갔다가 몬스터들에게 당하거나, 아니면 그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노예매매상들에게 잡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지금 내 뒤를 따르는 그 인어들이 바로 그 어른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멀리 멀리 갔다가 노예 매매상에게 잡힌 이들이었다. 이런 경험이 있는 인어들이니, 아마도 이들은 인어들의 영역으로 돌아가면 이제부터는 어른들이 아니라도 다른 사람들의 충고를 아주 잘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의 지시를 아주 잘 따라줄테고 말야.' 바다 속에서 산다는 몬스터를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믿는 구석이 있는 터라 크게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 나는 이번 일정이 시간만 오래 걸릴 뿐 크게 어려울 게 없으리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런 태평한 나의 예상은 곧 며칠이 지나지 않아 깨어지고 말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될 줄 모르는 나는 나를 잘 따라주는 인어들이 좋게만 느껴졌다. 가끔가다 한번씩 돌아보아 그들이 잘 따라 오는지 확인하는 걸 잊지 않으며 앞으로 전진 하는데 바다 표면에 보내놨던 운디네가 내 곁으로 내려왔다. 잭슨이 보낸 실프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좋아, 앞장 서줄래?" 바다 위의 허공에서는 실프가 잭슨을 향해 날아가고, 운디네가 바다 표면에서 그 실프를 쫓아 가면, 바다 밑에 있는 엔다이론이 운디네를 쫓아 길을 안내하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는 형식이었다. '아아, 줄줄이 비엔나란 바로 이런 것이겠지? 잭슨이 물의 정령과 계약을 맺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잭슨이 보내온 실프를 따라서 30분 정도 빠른 속도로 바다 속을 질주하다보니 저쪽에 바다 속으로 푹 들어와 있는 배 밑동이 보였다. 굵고 길다란 쇠사슬에 매달린 닻이 내려져 있는 걸 보니 잭슨이 정령을 보낸 뒤 우리가 올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다른 배일 수도 있는 일이라 나는 인어들은 바다 밑에 잠시 머물게 하고 나와 엔다이론만 위로 올라가 고개를 내밀어 보니 그 곳에는 계속 그러고 있었던 듯 레이언과 잭슨, 그리고 해민이와 듀비가 배 난간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어~ 일찍 도착했구나?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 알았으면 닻은 내리지 않는건데..." 먼저 내 얼굴을 발견한 레이언이 손을 흔들며 외치자 나도 그 배 밑으로 다가가며 대꾸했다. "헤에, 너네도 지금 막 멈춰선 거였냐? 듀비, 당신은 배를 타고 가는데 괜찮았어요? 해민이는?" "저는 괜찮습니다. 이 곳에 올때도 배를 타고 왔으니까요. 하지만... 이 녀석은 조금 지친 듯 싶습니다만..." 그러자 해민이가 즉시 으르렁 거렸지만, 왠지 안색이 별로 안 좋아보였다. "으음... 해민이는 배를 처음 타는 거지? 이거 괜찮으려나?" 해민이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스레 중얼거리자 잭슨이 끼어들었다. "괜찮을 거야. 아까 약을 먹였으니까 심하지는 않을테고, 밥이 그러는데 수인족들은 쉽게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고 했으니 아마 내일이나 모래쯤이면 팔팔해질 거야."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의 말에 작게 안도한 내가 주위를 둘러보니 아주 저~~ 멀리 그레이험 항구도시가 있을, 육지인 듯 싶은 아주 까맣고 내 엄지 손톱만한 점이 보였다. 그 외에는 하늘과 바다만 보이는 것이, 이 넓은 바다 위에 우리 배 한척만 달랑 떠 있었다. 하기야, 며칠 전의 그 강한 폭풍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배가 망가졌다는 소릴 들었으니 지금 항해할 수 있는 배는 거의 없을 터였다. "음... 생각보다 꽤 많이 왔네." "운이 좋았지 뭐. 좀 나오자마자 순풍이 불어와가지고 생각보다 더 빨리 올 수 있었거든." 내가 저 멀리 까만 점으로 보이는 육지 쪽을 바라보며 말하자 레이언도 나와 같은 쪽을 바라보며 냉큼 말을 받았다. "뭐, 그게 아니라도 빨리 올 수 있었잖습니까? 원래는 마법사분들께 부탁해서 마법으로 바람을 불게 할 생각이셨으니까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괜히 마법사들 기운을 빼지 않게 되어 다행이잖아?" 잭슨과 레이언이 말을 주고받을즈음, 인어들도 하나 둘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자, 그러면 배로 옮겨타실래요? 전속력으로 달려왔을테니 힘드셨을텐데..." 그들을 향해 레이언이 묻자 인어들은 일제히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두, 세시간 정도는 정말 빠른 속도로 달려왔건만, 그들의 체력상으로는 이 정도는 까딱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배는 엄청 피곤해서 나가떨어질 정도가 아니면 타고 싶지 않거나... "그래요? 그럼 조금 더 바다 속에 계세요. 하지만 힘들면 해인이에게 말씀하셔서 배 위로 올라와야 합니다." 레이언이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한 말투로 말하자 그들은 모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 거리고 다시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레이언이 나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그렇게 되었으니까 조금 더 부탁한다." "그러지 뭐."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에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옆에 있던 잭슨이 히죽 웃으며 말을 건넸다. "좋겠다~ 저렇게 미남 미녀들에게 둘러싸여서 갈 수 있다니... 완전 천국에 온 기분 이지?" "천국?" 그의 말에 피식 실소가 나왔다. '원한다면 기꺼이 교체해줄 수도 있는데...' 인어들의 피부는 햇볕을 많이 받지 않아서 그런지 안의 실핏줄이 보일 정도로 하얗고 투명 한데다가 바닷물로 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함인지 약간 끈적끈적한 분비물이 둘러쌓고 있었는데 - 마치 개구리의 피부 처럼 말이다 - 그 분비물 때문인지 피부는 마치 기능성 화장품을 잔뜩 바른 피부처럼 촉촉하고 기름기가 자르르 흘렀다. 거기다가 인간과는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니 기미 주근깨는 물론 여드름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에 옅은색의 눈동자는 정말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게다가 머리카락은 대부분 원색에 가까운 빨강, 주황, 밝은 초록, 에메랄드색, 밝은 파랑, 금발 등등이라서 그들의 아름다운 외모를 한층 더 빛나도록 받쳐주고 있었는데, 나는 아름다운 건 둘째치고 어두침침한 바다 속에서도 확 눈에 뜨이는 색들이라는 것 하나는 무지 마음에 들었다. 어쨌든, 이런 조건들 때문에 인어들이 미남 미녀로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순전히 햇볕 아래에서나 그렇게 보이는 거지, 햇볕이 잘 안 드는 어두침침한 물속에서 창백한 얼굴 주위에 빨갛고 파란 머리카락이 구불구불 헤엄치는 걸 보면 소름이 오싹 끼친다. 햇볕이 강해 바다 속 깊이까지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 낮에는 인어들을 보면 정말 신비스러운 분위기이지만, 햇볕의 기운이 약한, 이른 아침이나 어둑어둑해질때의 저녁에 보면... 예전에 영화에서 본, 지저분한 물속에 마네킹이 가라앉아 물결에 따라 하늘하늘거리는 몰골을 실제로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나마 지금은 그다지 깊지 않은 곳에서 움직이고 있어 괜찮지만, 출발하기 얼마 전 저녁에 인어들과 인사를 하느라 바다 속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느꼈던 오싹한 기분이란... 더구나 예전에 물속에서 팅팅 불은 시체를 한번 만나 크게 놀랐던 경험이 있었던지라 더더욱 몸서리치는 건지도 몰랐다. 그 뒤에 왜 저녁에 그들을 만나러 갔을까... 하고 얼마나 후회를 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훈련때문에 낮에는 시간을 낼 수가 없어 저녁에 빅터가 그들을 만나게 해준 거였는데 아마 빅터 또한 어두컴컴한 곳에서 그들을 본 적이 없어 아무 생각없이 짬이 나는 그 시간대에 만나게 해준 것일지도 몰랐다. 그때 한번 놀란 뒤로는 아무리 낮에, 빛에 의하여 아름답고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그들과 같이 동행하게 되었다고 해도 절대로 아름답게 비춰지질 않았다. 레이언의 출발하자는 말에 따라 배는 다시 닻을 올리고 천천히 출발했고, 나는 인어들을 데리고 바다 속에서 그런 배를 따라 움직였다. 해질때까지 아무 사고없이 무사히 항해를 한 후 밤이 되어서 인어들이 잠자리에 들고 싶어하자 나는 그제야 인어들을 위하여 미리 마련된 배 위의 미니 풀장 같은 곳에 그들을 옮겨 두고 나에게 배정된 선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곳에는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듯 해민이가 평소보다 기운 없는 몸짓으로 나에게 달려들어 품에 안겼다. "에구, 미안... 해민이 괜찮아?" 녀석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묻자 해민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해 보였지만, 아무래도 안색이 파리한게 평소보다는 좀 안좋아 보였다. "저녁은 제대로 먹은거야?" 내 질문에 배시시 웃어보이기만 하는 해민이를 대신하여 듀비가 대꾸했다. "조금밖에 못 먹었습니다. 그것도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해서 겨우 겨우 먹은 거죠. 지금은 약도 다시 먹은 상태입니다." "그래요? 으음... 나 때문에 해민이만 고생시키는 거 같네?"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중얼거렸는데, 녀석은 그걸 자신을 놓고 올 걸 그랬다는 푸념으로 생각했는지 얼른 나에게 더욱 더 꼬옥 달라붙는 거였다. 그에 나는 하하 웃으며 해민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데 듀비가 말을 걸어왔다. "내일도 바다 속에서 계셔야 합니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거 같아요. 오늘 보니까 인어들이 될 수 있는 한 바다 속에 있으려고 하는 것 같더라구요." "하지만, 해인님이 힘드실텐데요."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는 듀비의 시선에 나는 괜히 찔려서 얼른 손을 내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오늘 해보니까 크게 힘들지도 않더라구요." 내 몸둥이 하나 바다 속에 빠져도 잘 살수 있는 나였는데 말이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힘들면 그 인어들이 뭐라 하더라도 그냥 배 위로 올라오십시오." "하하하, 그럴게요." 제 16화 인어의 섬으로 (7)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힘들면 그 인어들이 뭐라 하더라도 그냥 배 위로 올라오십시오." "하하하, 그럴게요." 듀비의 걱정스러운 말을 흘려들으며 나는 태평한 마음가짐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생각했던 것 보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정이 될 거 같다고 여유롭게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뒤 나는 생각을 조금 수정했다. 어렵지는 않지만 엄청 열받게 하는 일정이라고 말이다. 그레이험 항구를 떠나 무사히 레이언등이 타고 있는 베지테크스 상회의 배와 조우한 후 호바트해를 향해 출발하는 며칠동안은 정말 하품이 나올 정도로 따분했다. 아침이 되면 인어들을 바다 속으로 내려주고, 그 곳에서 배가 항해하는 것을 따라 쭈욱 전진하다가 인어들이 피곤하거나 아니면 잘 시간이 되면 다시 배로 올려주는 것이 내가 한 일의 전부였으니 말이다. 오죽했으면 엄청 지루해서 내가 그 바다 속에서 마법책을 보며 공부할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을 할 정도였을까? 내가 이 정도였으니 한창 피 끓는 나이(?)의 젊은 인어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처음 사람들 눈을 피해 올때만 해도 직접 말은 안 했지만 무지 긴장해서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더니 며칠 동안 아무일도 없자 슬슬 긴장이 풀리면서 주위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거였다. 거기에는 배의 속도도 한 몫을 했다. 이 무지 커다란 배는 오로지 바람의 힘을 받아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으니 바람이 잘 불어주는 날에는 전진 속도가 빠르지만 약한 날에는 현저없이 느려지는 거였다. 그렇다고 언제 어느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마법사들이 바람 없다고 마법을 써줄 수도 없는 일이고, 나도 바다 속에서 인어들에게 매어 있는 몸이라 힘을 써줄 수도 없어 그냥 바람이 불어주는 거에 맡겨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속도가 바로 문제였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 배가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간다고 해도 그건 인어들이 바다 속에서 빠르게 헤엄치는 속도에 비하면 느린 속도였다. 그나마 그럴때는 그래도 많은 거리를 가야하기 때문에 인어들이 장거리를 뛴다 생각하고 배의 주위에 얌전히 붙어 있기는 했지만, 속도가 느려지면 몸을 배배 꼬면서 지루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거였다. 그러더니만 기어코 '조금만 놀다 올께요.' '잠시만 갔다 오면 안될까요?' '저기만 갔다 올게요.' 에서부터 시작하여 '앗, 저기에 뭐가 있는 거 같아요.' '생선을 잡아올께요.' 등등의 별의 별 핑계를 다 가져다 대면서 배에서 멀리 떨어져 돌아다니는 거다. 처음에는 안된다고 했지만, 그러니까 이제는 슬그머니 말도 없이 뒤로 빠지는 거다. 물론, 그때마다 내 곁에 항상 붙어있는 엔다이론의 눈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럴때마다 잠시만, 잠시만... 그러면서 무지 애처럽게, 아니면 엄청 귀찮게 졸라대는 거였다. 그러면서 정말 아주 잠깐 동안만 갔다오면 내가 또 이렇게 열이 받질 않는다. 그렇게 허락해줬으면 내가 걱정하기도 전에 올 것이지 이건 내가 정령을 보내서 끌고 올때 까정 감감 무소식인 것이다. 얼마나 열받았으면, 부글부글 끓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깍듯이 예의를 지켜 '이제 가셔야죠.' '시간이 되었습니다.'걱정 했잖아요.' 등등 공손하게 대했던 내가 일주일 쯤 지나자 막가회에 가입서를 내고 회원이 되어버렸겠는가? '야, 안와?' '확 끌고 온다?' '묶어놓을까보다!!' '당장 안 오면 배로 던져 버린다?' 등등의 반말은 기본이고 협박까지 서슴치 않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협박은 그들에게 씨알도 안 먹혔다. 처음에는 하도 자기들 멋대로 해서 바다 속으로 데려다 주지 않고 그냥 배에 두었더니만 이들이 자신의 능력, 즉 물을 다룰 수 있는 술사의 능력으로 - 주위가 온통 물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 배를 빠져나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그래서 열받아서 운디네들을 잔뜩 불러서 그들을 거의 묶다시피 해 내가 끌고다녔더니만 얼마나 서럽게 울면서 징징대는지... 정말 성년이 된 게 맞는지 심히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것도 12명이나 되는 인어들이 내 주위에서 서로 풀어달라고, 이럴수가 있냐고, 약속이 틀리지 않냐고 떠들어대니 그들의 입을 막지 않고서는 내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내가 입을 다 막아버리면 그들이 노예매매상에게 잡힌 것과 뭐가 다르겠냐고 내 고충을 모르는 레이어 녀석과 잭슨 등등이 - 인어들이 그들에게 다 꼰질렀던 것이다. - 나에게 사정사정을 해서 입을 막지 않는 대신 내 주위에 정령들을 동원해서 소리가 통하지 않는 방어막을 쳐버렸다. 그랬더니만... 이 괘씸한 인어 녀석들이 시끄럽게 짹짹대도 안 통하는 것을 깨달은 뒤에는 자신들의 힘으로 운디네의 결박에서 벗어나서 도망치는 거였다. 그래서 한동안은 바다 속에서 인어들을 잡기 위한 정말, 열받고도 열받는 술래잡기가 벌어지기도 했었다. 이 인어 녀석들은 그걸 또 무지 재미있는 걸로 생각해서 사방으로 잽싸게 도망을 치는데다 자신들의 능력을 다 동원하여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바람에 아무리 나라 해도 그들을 모조리 잡는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러다보니 배와의 거리가 멀어져서 황급히 배를 쫓아가고... 그 다음날 부터 정말 며칠간은 그런 술래잡기에 재미를 붙인 인어들은 내가 미처 선실에서 나와 그들을 바다 속으로 넣어 주던지, 아니면 협박을 해서 배애 잡아두기도 전에 자기들 끼리 배를 빠져나가 도망가는 것이다. 나보고 잡으러 오라는 것인 양... 그러면 레이언 녀석은 또 뭔 일 있을지 모르니 데려와달라고 사정사정하고... '어휴... 내가 못살아, 정말...' 바람난 남편을 둔 부인이 하는 대사를 내가 하루에도 수십번씩 중얼거리게 될 줄이야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내 한국에 있을때 요정들이나 무지 장난꾸러기라고 들었지만서도, 살다살다 -비록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 이렇게 말 안 듣는 철 없는 장난꾸러기들은 정말 처음봤다. 겉만 멀쩡하고 우아하고 현명하게 생겼으면 뭘 하겠는가? 자기네를 지켜주는 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데 말이다. 물론 나이 지긋한 인어들은 어떨 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데리고 가는 인어들은... 에휴, 정말 내가 나이가 좀 더 많았다면 엎어놓고 엉덩이를 팡팡 때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아니, 그렇게 어른들 말 안 듣고 혼자 멀리 멀리 갔다가 노예 사냥꾼들에게 잡혀서 그렇게 무시무시한 경험을 - 설마 노예가 된 것이 그냥저냥한 경험이었겠는가? 목숨이 왔다갔다 했을 그런 경험이었겠지... - 했으면 이제 정신을 차리고 좀 지루하더라도 자신들의 영역에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안전한 곳에 있어야 하는게 아니냔 말이다. 그것도 솔직하게 액션 영화나 공포 영화를 보면 사람들 중에 꼬옥 몇몇은 말 안듣고 혼자 행동하다가 위험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었지만, 우째 내가 데리고 가는 인어들은 한, 두명도 아니고 전체가 다 이럴수가 있는건지... 나는 정말 그들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이가 빠득 갈릴 정도였다. 결국 그들에게 시달리다 시달리다 못한 나는 제풀에 지쳐서 그냥 그들을 내버려 두게 되었다. 단지 그들 옆에는 운디네를 한명씩 붙여 놓아 어디에 있든지 금방 내가 알 수 있게 하고는 어두워질때쯔음 해서 엔다이론과 운다인들을 수십명 불러내어 한꺼번에 잡으러 가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되어버렸다. 그래 그들이 어디서 뭘 하건 신경을 끄고 나도 내 시간을 가졌다. 물론 그들이 배에서 멀리 떨어지는 건 막기 위하여 그들 개개인에게 운디네를 붙여놓는 것 말고도 운다인들을 불러 감시하게 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그들도 운다인 정도는 충분히 막을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개개인이 가지고 있으니 있어봐야 그리 큰 일이 나겠나 싶었다. 그러는 동안 배는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여 아스타르드 국에 속해있는 어떤 항구 - 나는 인어들을 데리고 멀찍이 떨어진 바다 속에 대기하고 있느라 가보지는 못했다. - 에 잠시 들려 식량과 물을 공급 받았다. 레이언 말에 의하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거리만 봤을때 드디어 1/3 정도 왔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드디어'가 아니라 '이제 겨우'였다. 1/3 정도 오는데 그렇게 골머리를 썪게하는 인어들이었는데 나중의 2/3 거리를 갈 때는 과연 어찌할것인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 생각이 너무 강했던 것인지, 아스트라드국의 항구에서 보급을 마치고 다시 깊은 바다로 나온 배와 조우할 때 레이언이 조심스레 나에게 충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냥 흘려듣고 말았다. "여기서부터는 가끔 바다의 몬스터들이 나온다고 해. 그러니 지금까지보다 조금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사실은, 그 몬스터라는 것을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그런가보다... 라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그렇게 다시 배와 조우한 우리는 호바트 해를 향해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인어들은 여전히 멋대로 내 곁을 벗어나 자기들끼리 놀러 다녔고, 나 또한 그들이 너무 배 주위에서 벗어나 운다인들이 경고를 보내오기전에는 조금의 관심도 쏟지 않은 채 엔다이론의 등에 올라타 마법책을 펴들고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주위에서 느껴지는 색다른 기척에 놀라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기척은 고요하고도 무척 거대해서 마치 조용하고 도도하게 흐르는 커다란 강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그런 감정과 비스므무리 했다. 과연, 내가 시선을 보낸 그 곳에는 내가 한국에서 봤던 한강만큼이나 아주 거대한 물체가 스르륵 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 배가 지나가고 있는 것은 무척 깊은 바다 위라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 밑바닥이 어두움에 휩싸여 보이지 않아 과연 얼마나 깊은지 나도 모를 정도로 깊었다. 아마 최소한 바다 속에 있는 우리집 주위의 바다 깊이보다 두 세배는 더 깊은 곳일 거다. 그래 인어들이 너무 아래쪽으로 내려갔다가 혹시 뭔 일이 있으면 어쩌나싶어 신경을 안 쓰려고 했어도 어쩌다보니 나도 우리 배의 밑동이 내 손바닥 두 세개 정도 합친 것만하게 보일 정도로 꽤 깊이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커다란 바다 속 생물체를 - 그건 절대 물고기가 아니었기에 - 만나도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그 생물체는 커도 너무 컸다. 지구에서 가장 큰 생물체는 흰수염고래라고 들었던 적이 있는데, 이 생물체하고 그 고래하고 비교한다면 삐까삐까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거대한 생물체가 움직이는데 바다 속은 평소와 같았다. 그 큰 몸체가 움직이는데도 천천히 움직여서 그런지 큰 물결의 요동이 일어나지 않는 거였다. 하기야, 그 생물체의 생김새도 물결이 요동치지 않게 하는데 한 몫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생물체는 전체적으로 보자면 가오리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세모꼴의 몸통에 뒤로는 엄청 굵고 길다란 꼬리가 천천히 좌우로 흔들려서 마치 남산 타워가 왔다갔다 하는 것만 같았다. 가오리처럼 양 옆에 눈이 달려 있고 입은 몸의 아래쪽에 있었는데 주식이 생선인지 상어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살짝 튀어나온게 언뜻 보였다. 몸 전체는 두가지 색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위에는 정말 청명한 파란색이었고, 아래에는 하얀 색이었는데 거대한 몸에 너무 잘어울려 전체적으로 그 커다란 가오리는 너무 아름다웠다. "와우~!!" 그렇게 거대하고 아름다운 가오리가 천천히 내옆을 지나가는데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뭉클한 감동이 마음속에서 부터 솟아나와 온 몸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그 가오리를 조용히 바라보는데 마침 가오리의 눈이 바로 내 눈 높이의 위치에서 스르륵 지나갔다. 그런데 그 와중에 가오리가 바다 속에 동동 떠 있는 내가 신기했는지 새까맣고 커다란 눈동자를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보는 거였다. 아기의 순수한 눈동자 같으면서도 어딘지 함부로 범접 못할 그런 기운이 서려있는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데... 이런 일은 정말 직접 당해보지 못한 사람은 이런 감동 모를 것이다. 나를 위해 하려는 것도 아니니 두려움은 생기지 않았다. 단지 위대한 자연의 산물을 보는 것만 같은 경의로움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아마도, 높은 산에 등산하러 올라가 꼭대기에 다다라 안개와 구름이 가득하게 낀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동이 이와 같을지도 몰랐다. 평소 쉽게 느낄 수 없는 그러한 감동에 도취된 나머지 나는 그 거대한 가오리가 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스윽 지나쳐 저 멀리 사라져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 엄청 거대한 가오리가 아주 조그마한 점이 되고도 아예 눈에서 안보일때까지 계속해서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와.... 정말 엄청나게 대단하구나. 저렇게 큰 생물은 정말 처음 봤어." 내가 여전히 가오리가 사라진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내 옆에 붙어 있던, 이 근처를 담당하는 엔다이론이 말을 받았다. [이 주위에는 저렇게 큰 생물체가 많지요. 인간들이 몬스터라고 부르는, 공격형 생물도 꽤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엔다이론의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양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주위 바다 속을 흔들었다. "꺄아아악~~!!" [인어가 공격 당하고 있습니다!] 그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한명의 운디네가 나에게 달려와서 알렸지만, 그 전에 이미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눈치챈 나는 대충 고개만 끄덕여준 채 비명소리가 들린 쪽으로 달렸다. 제 16화 인어의 섬으로 (8) [인어가 공격 당하고 있습니다!] 그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한명의 운디네가 나에게 달려와서 알렸지만, 그 전에 이미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눈치챈 나는 대충 고개만 끄덕여준 채 비명소리가 들린 쪽으로 달렸다. 그 인어는 얼마나 멀리 가 있었는지 내가 있는 곳으로부터 한참 더 밑으로 내려가고 거기서도 더 배에서 멀리까지 가서야 겨우 그 인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인어의 뒤로는 아주 거대한 뱀 모양의 시커먼 괴물체가 뾰족한 이빨이 다 드러나도록 커다란 입을 벌린 채 인어를 쫓고 있었다. 인어는 그런 무서운 기세에 넋을 잃은 듯 멍하니 있었고, 대신 내가 그의 곁에 붙여 놓았던 운디네가 그를 이끌고 열심히 도망치고 있는 거였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인어들도 한 인어의 비명 소리를 들었는지 그 주위에 몰려와 위험한 자신의 동족을 어떻게든 도우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너무 두려워 가까이 가지 못한 채 자신들의 힘을 써서 그런지, 아니면 그 거대한 뱀 괴물이 그 정도에는 까딱도 안 해서 그런지 그들의 능력은 그 괴물 뱀의 속도를 조금씩 늦춰주는 역할을 했을 뿐, 그 괴물 뱀에게 큰 타격을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우와, 도대체 저게 뭐지?" [일이라는 대형 뱀장어 몬스터입니다.] "뱀장어?" 그러고보니 뱀장어처럼 길쭉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원체 얼굴이 흉악하게 생겨서 뱀장어도 뱀도 전혀 안 닮았다. 단지 길쭉한 몸이 비스무리 하달까? 나는 엔다이론을 세명이나 더 불러낸뒤 인어들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모두 배로 가. 빨리, 빨리~!!" 그리고 운디네를 한명 더 불러서 온 몸이 굳어진 인어를 힘겹게 끌고 오는 운디네를 돕게 했다. 엔다이론을 불러내기는 했지만 너무나 거대한 괴물이라 나는 죽인다는 생각은 못하고 우선 인어들이 배에 가는 시간을 벌어야겠다고만 생각했다. 나의 부탁을 들은 세 엔다이론은 그렇지 않아도 나 만큼이나 큰 몸집을 더욱 더 크게 만들어 -그래봤자 그 괴물 뱀장어보다는 작았지만... - 괴물 뱀장어에게 달려 들었다. 한명은 꼬리를, 한명은 중심부를, 한명은 그 머리 부위를 꽈악 물고 늘어지자 괴물 뱀장어의 속력이 줄어들었다. 아니, 자신의 몸에 들러붙은 엔다이론을 떼어내기 위하여 잠시 그자리에 멈춰서서 온 몸을 비비 꼬며 뒤흔들어댔던 것이다. 나는 그틈에 이제 나에게 가까워진 인어를 받아들고 잽싸게 배쪽으로 달려갔다. 바다 밖으로 나와보니 레이언을 위시한 많은 무사들이 긴장한 눈빛으로 바다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내가 뛰쳐 나오자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괴물 뱀장어가 나타났어. 저기 인어들은 다 왔지?" "그래, 무사히 왔다." "다행이군." 레이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인어를 재빨리 다른 인어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고 왔다. 그때 즈음에는 이미 머튼의 지휘 아래 무사들과 마법사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리를 잡은 채 긴장한 모습으로 바다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괴물 뱀장어가 어디로 튀어나올 지 모르기 때문에 무사들은 거의 배 갑판을 빙 둘러 서다시피 하여 배의 사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출발하기 전에 교육(?) 받은 대로 듀비와 해민이를 데리고 다른 마법사, 잭슨과 함께 갑판 중간쯤에 서 있었다. 선원들도 배를 조정할 최소 인원만 남고 모두 갑판 밑으로 내려간 상태였다. 하지만, 처음 몬스터가 나타나는 거라서 그런지 대부분 안전하게 몸을 숨기고 있다기 보다는 여차하면 들어갈 태세로 몸을 반쯤 밖으로 빼내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레이언과 그의 부관으로 온 사무요원도 마찬가지였다. 레이언 녀석은 실력이 있다고 아예 대놓고 우리 옆에 버티고 서 있었고, 사무요원은 다른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선실로 들어가는 입구에 반쯤 몸을 넣은 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밖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상회에서 사무 처리에 관한 경험은 풍부했지만, 이렇게 호바트해로 가는 항해에 참여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었으니 평소 냉정 침착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해도 궁금증을 참기 힘들었나보다. 그런데,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한참을 기다려도 괴물 뱀장어가 나타나기는 커녕 날치 한마리 나타나지 않는 거였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사람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계속 기다렸지만, 그래도 계속 안 타나서 머튼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왜... 안 나타나는 거지?" "글쎄요..." 뭐 그 또한 나에게 정확한 답을 구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지 작게 한숨을 쉬고 다시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냥 간 거 아닐까? 네가 너무 빨리 도망쳐서 네 흔적을 놓쳤다거나..." 레이언이 슬쩍 말을 해봤지만 자기 스스로도 그럴 확률이 적다고 느껴졌는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듣고보니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음... 어쩌면 그럴수도 있겠네... 사실, 내가 인어를 데려오면서 너무 급해가지고 엔다이론들을 불러서 저지시키고 왔거든." 내가 머쓱하게 입을 열자 잭슨이 놀란 어조로 끼어들었다. "엔다이론? 물의 상급정령?" "응, 급하니까 엔다이론을 부르게 되더라구." 그러자 잭슨이 허망하다는 어조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너 최상급 정령사였지? 이봐, 일 정도면 너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지 않아? 엔다이론만으로도 충분할 걸? 우리로써도 약간 힘들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처리 못할 정도의 몬스터는 아니라고." "그, 그래?" 그런건 생각도 못해봤다. 처음 보는 몬스터라 어느 정도 강한지도 모르는데다, 인어들이 너무 무서워해서 나도 덩달아 어찌해볼 생각은 못하고 냅다 줄행랑을 쳐서 배로 돌아오는 것 밖에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아니, 그런데 그 정도면 인어들의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았을라나?' 인어들에게도 각자 물술사의 능력이 있었으니 쉽게는 안되더라도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더구나 나도 도왔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것도 모르고 무조건 놀라고 무서워해서 도망쳤으니 그 인어들은 어지간히 바다 속 경험이 없었나보다. 물론, 나도 몰라서 같이 도망쳤으니 할 말은 없지만... "네가 엔다이론을 불러서 저지시켰다면 아마도 지금쯤 계속 거기서 엔다이론과 대치하고 있는게 아닐까?" "그, 그럴지도..." 그럴지도가 아니라 정말 그러고 있는 듯 했다. "저기... 아무래도 내가 한번 갔다오는게 좋을 거 같아." 나 혼자 몬스터가 있는 바다 속에 들어갔다고 온다고 하는데도 아무도 말리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래 잘 생각했다.' 라는 눈빛을 보내는 이들까지 있었으니... '참내, 내 실력을 믿어주는 건 좋지만, 너무들 하는 거 아냐?' 나는 속으로 투덜투덜 거리며 유일하게 나의 편(?) 이라고 할 수 있는 듀비와 해민이를 돌아보았다. "자,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듀비와 해민이는 무지 염려스러운 기색이었지만, 그들이 바다 속에 따라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십시오." 듀비의 걱정스러운 당부의 말과 해민이의 포옹을 기분좋게 받으면서 나는 배에서 훌쩍 뛰어 내렸다. "잘 갔다와~!!" "올때 이왕이면 물고기도 잡아와주면 고맙고~!!" 옆집 놀러가는 애 배웅하는 듯한 잭슨과 레이언 녀석의 배웅에는 대꾸도 안 한 채 나는 바다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혹시나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여 엔다이론을 옆에 불러내서는 아까 괴물 뱀장어를 마지막 으로 봤던 곳을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니 그 곳에는 세 엔다이론이 괴물 뱀장어를 물고 늘어져 꼼짝도 못하게 제압하고 있었다. [헤에... 정말 엔다이론만으로도 처리가 가능하잖아?] 세 엔다이론은 정말 여유만만해 보였기에 나는 조심하면서도 슬그머니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다가가는 내 기척을 느낀 것인지 꼼작 못하는 상황에서도 괴물 뱀장어가 까만 눈을 돌려 나를 바라보는 거였다. 그에 괜히 놀라서 움찔 거리는데 이 뱀장어가 나를 계속 바라보면서 제압당해 제대로 못 움직이는 몸을 자꾸 꿈틀거리는 거였다. 이 녀석이 영리해서인지 내가 엔다이론을 불러 자신을 제압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듯 싶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를 바라보는 뱀장어의 눈에 눈물이 촉촉히 고이기 시작하더니 무지 애처러운 울음소리까지 내는 거였다. 끼이익~~ 끼이익~~ 엔다이론에게 제압당해 움직이도 못하는 상태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애처럽게 우는 그 뱀장어를 보자니 처음에 무서운 감정이 사라지고 왠지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따지고보자면 이 뱀장어도 우리에게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먹이감(?)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달려들었을 거였다. 그건 자연의 섭리일 뿐 큰 잘못도 아니고, 게다가 우리 일행이 다친 것도 아니고 나에게 제압된 상태이니 위험해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 또한 어떻게 되었나 보기 위해서 내려왔지 이 뱀장어를 꼭 죽여버리겠다는 마음 같은 건 없었기에 그 뱀정아거 그렇게 애처럽게 구니까 마음이 되게 약해졌다. [으음... 그냥 놔줄까? 불쌍한데... 이대로 놔주면 그냥 도망치지 않을까?] 그 뱀장어의 모습을 보며 옆에 나를 따라왔던, 이 주변을 담당하는 엔다이론에게 묻자 그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글쎄요... 하지만, 좋을대로 하십시오. 이대로 놔준다고 해도 저 녀석이 위협이 되는 것도 아닐테니까요.] [저기, 너는 여기서 오래 있었을테니까 예전에 저 녀석이 혹시 인간의 배를 습격한 일을 본 적 없어? 그때는 저 녀석이 어떻게 했지?] [음... 인간이 타고 있는 배를 일부로 공격을 한 적은 없습니다. 가끔 공격을 할 때도 인간들이 저 녀석의 성격을 어쩌다 건드려서 그렇게 된거지만... 그럴때는 악착같이 공격을 하죠.] [그, 그래? 으음....] 악착같이 공격한다는 말에 나는 그냥 여기서 놔주지 말고 엔다이론들에게 부탁해서 저~ 멀리 끌고 가서 놔주라고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이런 나의 망설임을 어떻게 생각 했는지 엔다이론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자신이 상대도 안된다고 여기면 그냥 물러나는 녀석이죠. 그러니 그냥 놔주심이 어떨까 싶습니다만... 일부러 생명을 해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원하시는대로 하십시오] 원래부터 마음이 많이 악해져 있는데다가 은근히 그냥 놔주길 바라는 엔다이론의 말까지 듣고나자 나는 쉽게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는 마음이 약해져 있기는 하지만, 그 괴물 뱀장어가 몬스터라는 사실에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죽여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사람들 사이에서는 몬스터 하면 그 몬스터가 어떤 것인지 성격 파악(?)을 하기에 앞서 없애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나도 은연중에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 괴물 뱀장어거 불쌍하게 생각되었어도 그냥 놔주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엔다이론까지 그렇게 말해주니 나는 망설임을 접을 수 있었던 거다. [그렇지? 역시 그냥 놔주는 것이 좋겠어.] 내가 손뼉까지 짝 치면서 말하자 왠지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던 괴물 뱀장어의 눈에 살짝 빛이 스쳐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이 녀석은 내가 정령의 대화법으로 엔다이론과 말을 하고 있는 건데 알아들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분위기를 보아 대충 때려잡던가... 하지만 막상 놔주려니 그 거대한 몸체를 바로 앞에 두고 그냥 놔주기도 왠지 무서웠다. 생각해보라. 아무리 내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만, 지금까지 그걸 마음대로 자유자재로 쓴 적도 없어 내 능력을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하는데다가 나보다 수십배는 더 큰 커다란 덩치를 내 코앞에서 그 속박을 풀어주는데 쪼금이라도 떨리면 떨렸지 태연할 수는 없으리라고 본다. 그렇다고 기분 좋게 놔주는데 무섭다고 엔다이론에게 부탁해 내 주위를 수호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놔주라는 말을 하기전에 녀석과 약간이라도 간격을 넓히고 싶어서 슬그머니 위로 떠올랐다. 그러면서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는 엔다이론에게 애써 웃어보이며 필요 없는 변명을 했다. [아하하... 이 녀석 놔주면 할 일도 없으니 다시 배로 돌아가야 할 거 같아서...] 생각해보니 배로 돌아갈거면 그냥 옆으로 가도 될걸 괜히 위로 떠오른 것 같아 아차 싶었지만, 이제와서 다시 옆으로 갈 수도 없어서 계속 떠오르며 어느정도 거리가 멀어진 거 같자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능청스럽게 그 괴물 뱀장어를 속박하고 있는 엔다이론에게 말했다. [아, 맞다. 저 녀석도 놔줘야지? 이제 그만 풀어줘.] 그러자 뱀장어의 주위를 둘러 싸고 있던 엔다이론들이 자신들의 힘을 풀어버리고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괴물 뱀장어는 자신을 꼼짝도 못하게 묶고 있던 힘이 사라지자 마치 정말 사라졌는지 확인을 하듯 슬그머니 몸을 움직여보면서 여전히 자신의 주위에 있는 엔다이론들을 둘러 보았다. 아무래도 여차 하면 자신을 다시 속박할 것 같아 그들의 눈치를 보는 듯 했다. 하지만 내 부탁이 없으니 엔다이론이 뱀장어에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자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는지 엔다이론의 포위망에서 스르륵 빠져 나왔다. 그런데, 포위망을 빠져 나가더라도 밑으로 빠졌으면 좋았으련만 하필이면 슬그머니 위쪽 으로 올라오는 거였다. '뭐, 뭐야?' 그에 놀란 내가 슬그머니 더욱 더 위쪽으로 올라가는데 우연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건지 슬쩍 고개를 돌린 괴물 뱀장어와 내 눈이 따악 마주쳐버렸다. '엑?' 그랬으면 내가 기껏 놔줬으니 고맙다는 시선을 보내고 자신의 갈 길을 가야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이 뱀장어가 무슨 속셈인지 자신의 머리 위쪽에 있는 나에게 스르륵 다가오는 거였다. 처음에는 그에 움찔 놀라서 엔다이론을 부르려고 했지만, 나를 위협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듯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기에 나는 엔다이론을 부르지도 못하고, 또 녀석에게 겁을 먹었다는 걸 보여주기 싫었기에 더 이상 녀석에게서 멀어지지도 못한 채 속으로만 초조해 하면서 녀석이 다가오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뱀장어 녀석은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다가 어느 순간 슬그머니 멈춰섰다. 그와의 거리는 대충 10여미터 정도로 사람과 마주하고 있다면 안심할 수 있는 거리였겠지만, 덩치 큰 녀석과 마주하고 있으니 그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10배나 더 먼 거리라도 안심할 수가 없었기에 나는 긴장한 채 녀석을 쏘아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 어차피 이 주위에는 인어들도, 또한 상회의 배도 없었기에 나는 내 능력으로 물 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 물을 다루는 내 능력을 사용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말이다. 이런 내가 위협적이었던지, 아니면 처음 부터 나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었던지 이 뱀장어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순간적으로 씨익 웃어보이는 거였다. 물론, 뱀장어가 정말 입을 벌려 웃어봤자 그게 웃음으로 보이지도 않겠지만, 어쨌든 그런 느낌이었다. '헤에, 역시 고마워 하는 건가?' 녀석의 그런 반응에 나는 은혜를 아는 놈이라 생각하며 마주 웃어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잔뜩 긴장하고 있던 것도 스르르 풀렸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그 틈을 노렸던 모양이다. 내가 씨익 웃어주자 놈은 이제 돌아가는 듯 슬그머니 몸을 돌리더니 갑자기 축 늘어져 있던 꼬리를 무섭게 휘둘러 나를 쳐버렸던 것이다. [꾸에에엑~~] 아무런 경계 없이 방심하던 차에 당한데다가 녀석의 내 몸뚱아라보다 더욱 더 굵은 꼬리의 힘찬 공격에 정면으로 맞은 나는 그대로 날려가버렸다. 하필이면 놈이 꼬리를 내리고 있다가 휘돌리면서 올려 처버렸기에 내 몸은 바다 표면까지 떠오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높은 허공까지 날려 올라가버렸다. '젠장, 저노무시키이이~~' 그 와중에 바라본 놈은 회심의 일격을 나에게 먹이자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잽싸게 도망치고 있었다. 간덩이가 부은 놈이라고 해도 후환이 두렵지 않을리가 없었던 것이다. '으아아아~~ 다음부터는 몬스터란 녀석들을 그냥 놔주더라도 반쯤은 죽여버리고 말겠어어어~~~' 온 몸의 뼈와 근육이 아우성을 치는 고통 속에서도 빠드득 이빨을 갈며 다짐하고 있는데 내 몸을 지배하던, 날 공중으로 날아가게 했던 힘이 다 했는지 서서히 멈추다가 다시 밑으로 추락하는게 느껴졌다. 어차피 아래는 바다였으니 죽지는 않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물 표면에 욱신거리는 몸을 그대로 헤딩시키는 것은 엄청 아팠기 때문에 통증때문에 자꾸 사방으로 흩어져버리는 정신을 간신히 간신히 끌어당겼다. [에, 엔다이....] 하지만, 내가 미처 엔다이론을 부르기도 전에 갑자기 내 몸을 누군가가 떡하니 붙잡는 거였다. 다행이 내 상태를 알고 있는 자였던지 부드럽게 잡았기에 나는 큰 통증을 느끼지 않고 허공에 멈출 수 있었다. [아, 고, 고마...에엑~!!] 내가 아까 곁에 데리고 있던 엔다이론인줄 알고 감사의 인사를 하며 돌아보는데, 생각도 못하고 있던 자가 나를 붙잡고 서 있자 나는 감사의 인사도 다 못한 채 두 눈과 입을 떠억 벌렸다. 너무나 놀랍게도 나를 잡고 있는 사람은 탐스러운 은빛 머리칼과 수염을 휘날리며 우람한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하는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였던 것이다. 전에 엘라임과 싸울때 나를 대하던 태도로 볼때 절대 나에게 이러한 친절을 베풀 것 처럼 보이던 위인이 아니었는데, 그가 나를 떡하니 잡아줬으니 내가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엘라임과 싸우던 당시 내가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팔을 잘랐던 것이 - 어차피 큰 타격도 아니었지만... - 생각나자 나는 잔뜩 긴장된 채 그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 설마 그때의 앙갚음을 하려고 하는건....' 그를 직접 겪어본 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평소 엘라임에게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놈, 싸가지 없는 놈, 치사한 놈 등등... 안 좋은 묘사만 들은데다가 그때 잠깐 겪었을때도 좋은 상황이 아니었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위인이라 생각 되었다. 그래 나이트급 정령들을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부른다고 상대가 될까 안될까, 머리 속에서 온갖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실피드가 갑자기 팔을 쓰윽 뻗어 내 뺨을 꾹 찔렀다. "엥?" 별거 아닌 행동이었지만, 무척 긴장을 하고 있던 상태라 소스라치게 놀라 그를 바라보는데 실피드는 혼자서 뭘 생각하는지 고개를 갸웃 거리다 끄덕끄덕 하는 거였다. [흐음... 역시 실체군, 실체야.] "무, 무슨..." 그의 영문 모를 행동에 내가 움츠리자 실피드가 나를 바라보더니 픽 웃었다. [그렇게 겁 먹을 것 없다.] '그렇게 말해도 어떻게 겁을 안 먹냐...' 속으로 투덜거리며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자 그가 다시 한번 픽 웃더니 내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힘이 나를 감싸고 있는지 나는 밑으로 추락하지 않은 채 여전히 허공에 동동 떠 있었다. 그런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구석 구석을 세심하게 바라보던 실피드는 신기하다는 기색을 드러내며 다시 나와 시선을 맞췄다. [정말 신기하구나... 신기한 존재야. 내가 직접 보고 이프리트에게 이야기를 들었지만서도... 다시봐도 정말 신기하군. 어떻게 너 같은 존재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걸까?] '원해서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서도... 동물원 원숭이 보는 듯한 그 시선을 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고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실피드가 무서운 관계로 입을 꾸욱 다물고 그의 눈치만 살폈다. 내가 그렇게 계속 굳어있자 실피드가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굳어 있는 거냐? 겁 먹을 필요가 없다니까? 이프리트하고는 잘 논다면서? 내가 이프리트보다 무섭게 보이냐?] 위압감만 가지고 본다면, 사실 엘라임이나 이프리트나 실피드나 다 비슷비슷했다. 하기야 셋 다 정령왕이니까 어느 누가 더욱 더 강하거나 그렇지는 않겠지만서도... 이프리트와 엘라임은 사이가 좋지만, 실피드와는 그렇지 못하지 않은가? 그러니 당연히 긴장하고 있을 수 밖에... [아니... 뭐... 험험, 그러니까... 아버지하고.... 바람의 정령왕님하고... 사이가... 음.... ] 곧이 곧대로 사이가 나쁘니까 나에게 해꼬지 할지도 모르잖아요... 라고 말할 수는 없어 얼버무렸지만, 그 정도만해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다. [흐음, 엘라임 녀석이 너에게도 나에 대한 험담을 잔뜩 한 모양이지? 하여간 속 좁고 성질 급한 녀석이라니까. 그러니 자극하는 재미가 있지.] [아니... 뭐...] 그의 말에는 아주 심히 공감하는 바였지만, 그의 앞에서 '맞아요, 맞아.' 라며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던 터라 나는 머뭇거리기만 했다. 그런데 말하는 폼을 보니 엘라임과 매번 투닥거린다고는 해도 그를 미워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뭐, 내가 엘라임과 사이가 안 좋은 건 사실이긴 하지.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너에게 뭘 어떻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말야. 설사 안 좋은 감정이 있다고 해도 너처럼 신기한 존재를 없애버리고 싶지도 않고...] [누가 누굴 없앤다고?] 실피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옆에서 차갑고 띠꺼운 엘라임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갑작스런 엘라임의 등장에 약간 놀랐는데 실피드는 눈치채고 있었던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누가 없앤다고 했냐? 그러고 싶지 않다고 했지. 남의 말좀 제대로 듣는 게 어때?] [네놈 말은 듣고 싶지도 않아.] 실피드의 유들유들한 말에 엘라임이 인상을 팍 쓰면서 틱틱 거렸다. [하여간 속 좁은 놈이라니까.] [누굴 보고 속 좁다고 하는 거야? 네놈이야 말로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속을 가지고 있잖아!] [내 속이 밴댕이 소갈딱지면 네놈 속은 밴댕이 소갈딱지만도 못하다.] [뭣이라? 이...] 엘라임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누군가가 그의 말을 싹둑 잘라버렸다. [아이고, 그만들 좀 해라. 언제까지 계속 싸울 거냐?] 부드럽고 따뜻한 말투, 이프리트의 등장이었다. 그러자 실피드가 얼른 변명하려는 것 처럼 입을 열었다. [아니, 이 녀석이 기껏 자기 아들을 도와줬더니만 시비를 걸잖아.] [뭐? 네 놈이 안 도와줘도 이 녀석은 잘만 살아. 솔직히 말해보시지, 네놈이 왜 여기와서 내 아들에게 찝적 거린 거야?] [찝적 거리다니? 순수한 호의로 도와준 거 뿐이야.] [순수한 호의가 다 사라졌냐? 네놈이 순수한 호의를 보인다고 하면 지나가던 지렁이가 웃다 까무러칠 거다.] [호오, 그래? 그럼 네놈이 말해봐라. 내가 네 아들에게 뭘 어떻게 했다는 거야? 바다로 떨어지는 거 기껏 잡아줬더니만...]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래? 바다로 떨어지는 걸 왜 잡아? 그리고, 네 놈이 방금 내 아들 볼을 은근슬쩍 만진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신기해서 그냥 한번 만져본 것 뿐이야.] [웃기지 마! 네 놈의 시커먼 속을 봐서는 절대 그냥 만졌을리 없어. 내 아들에게 흑심을 품은 거지?] [뭐? 네놈이야말로 속이 비뚤어졌으니 모든게 비뚤어져 보이는 거 아냐?] 엘라임과 실피드의 티격거림이 계속 이어지자 이프리트가 또 나섰다. [둘다 정말 그만두지 못해? 아니, 아니다. 내가 이 아이를 데리고 갈 테니 둘이서 신나게 싸워라. 얘 아픈거 보이지도 않아?] 안 그래도 엘라임과 실피드의 티격거림을 구경하고 있는 동안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지금 몸이 안 쑤시는데가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그래서 틈을 봐서 이 상황에서 빠지려고 했는데 이프리트가 이런 내 상태를 알애채준 것이었다. 덕분데 티격대던 두 정령왕이 잠시 입을 다물고 내쪽으로 시선을 보내왔다. 그래 어색해서 웃을 기분이 아닌데도 얼굴 근육을 움직여 웃어보였더니 실피드가 다시 엘라임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여는 거였다. [맞아, 이렇게 아픈 애를 기껏 도와줬더니 말야,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 망정...] [내 아들은 이 정도로는 까딱 없어. 네 놈이 도와줄 필요가 없단 말이다.] [하이고, 네 아들은 정말 너 같은 아버지를 둬서 불쌍하구나?] [누가 불쌍하다는 거야? 나 같은 대단한 아버지를 둬서 행운이지!] 이프리트 때문에 잠시 중단되었던 티격거림이 다시 시작되자 이프리트가 한숨을 쉬더니 그의 커다란 날개로 나를 살며시 감싸앉아 실피드의 힘으로 부터 나를 빼내었다. [그래, 싸워라 싸워. 덕분에 소멸할때 까지는 심심하지 않겠다.] 혼잣말 같았지만, 두 정령왕에게 들릴 정도로 컸기에 나는 그의 품에 조심스레 안기면서 힐끔 두 정령왕의 표정을 살폈다. 실피드는 머쓱한 표정이었고, 엘라임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다가 내가 힘 없이 이프리트의 품에 안기자 그제야 다가왔다. [이리 줘. 내가 데려다 줄께.] [저런, 실피드와는 다 싸운 거야?] 장난기가 가득 어린 이프리트의 질문에 엘라임의 표정이 다시 한번 구겨졌다. [누가 싸웠다는 거야? 나는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야.] 그러자 뒤에 가만히 있던 실피드가 끼어들었다. [뭐가 사실이야? 너의 비뚤어진 시각이 사실을 제대로 볼 수 있겠냐?] [누가 비뚤어진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네 놈이 착각하는 거지!] 실피드의 이죽거림에 엘라임이 참지 못하고 받아치자 이프리트가 피식 웃으며 나를 데리고 그 곳을 떴다. 멀어지면서 바라보니 엘라임은 내가 가는지도 모르고 실피드와 계속 티격거리고 있었다. [착각? 흥, 네놈이 착각하는게 아니고?] [하, 착각도 유분수다, 이놈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뭐가 어쩌고 어째? 여기서 한판 해볼까?] ........ [왠지... 두분은 서로를 정말 미워하는게 아닌 것 같은데요?] 점점 멀어지는 두 정령왕을 보자니 그런 생각이 들어 이프리트를 향해 묻자 이프리트가 피식 웃었다. [그렇지. 뭐, 엘라임이나 실피드나 둘 다 정말 서로를 미워하는 건 아니란다.] [그렇죠? 으음... 바람의 정령왕님도 그렇게 나쁜 분은 아닌 거 같아요. 하지만, 저렇게 만날때마다 티격거리시면 질리지도 않으실까요?] [후후후, 서로 은근히 즐기고 있는 걸테지. 사실 옆에서 보고 있는 나도 재미있거든. 덕분에 소멸할때까지 심심하지는 않을 거 같아.] 이프리트의 웃음에 나도 마주 웃어주고 몸을 살짝 움직이는데 욱신거리던 몸이 움직이지 말라는 듯 격한 통증을 유발시켰다. "에구구구..." 나도 모르게 고통에 신음성을 흘리자 이프리트가 나를 안스럽게 바라보았다. [저런, 많이 아프냐? 그러게 조심하지... 아무리 너라고 해도 그런 덩치 큰 녀석에게 맞으면 견디겠느냐?] [이런... 보고 계셨어요? 잠시 방심하는 바람에... 움직이지 않으면 괜찮아요.] [후후후, 네가 엔다이론을 불러내는 걸 보고 혹시나 싶어서 엘라임과 지켜보고 있었지. 설마 실피드도 보고 있을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아, 저 배에 내려다 주면 되지?] 이프리트가 시선으로 가르키는 곳을 바라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는지 상회의 배에 거의 다 도달해 있었다. [예에.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후후후... 자, 나는 그 둘에게 가봐야겠구나. 몸 조심 하거라.] 배 위의 사람들이 놀라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이프리트는 갑판 위에 살짝 나를 내려놓고는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해인?" "해인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놀라서 나에게 다가오는 이들을 바라보며 나는 멋적게 웃어보였다. "아하하... 그게 말이지..." 제 17화 인어도 인어 나름 (1)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이프리트는 불의 최상급 정령 셀레아나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배 위의 일행들은 그가 내가 불러낸 셀레아나인줄 알고 있었다. 그래 이프리트가 나를 배의 갑판에 내려놓고 사라지던말던 신경쓰지 않고 갑판 위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해 주저 앉은 나에게 놀라서 달려와 부축하려고 했다. "아그그극... 사살, 사살 좀... 에구구..." 제일 먼저 듀비가 달려와 내 팔을 잡아 나를 세우려고 했지만, 온 몸의 뼈가 삐그덕 거리는 것 같고, 근육이 쿡쿡 쑤시는 상태라 듀비가 잡으니 근육들이 아프다고 일제히 고통을 호소 했다. 그걸 견디지 못한 내가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인상을 찡그리자 당황한 듀비가 그대로 나를 다시 갑판에 앉혀주었다. 그리고 그 뒤를 달려온 마법사 가레스가 익숙한 태도로 내 몸을 살펴보았다. "괜찮으냐?" "전혀 안 괜찮아요." 듀비가 나를 일으켰을때는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근육통이 생겼지만, 다시 갑판에 가만히 내려놓자 그나마 통증을 견딜 수 있었기에 나는 가레스의 질문에 성의껏 대답했다. 이런 내 대답을 들은 가레스는 피식 웃으면서 온 몸의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는지 골대를 조심스레 쓸며 입을 열었다. "훗... 입이 살은 거 보니 죽지는 않겠구나... 그래... 다행이 뼈가 부러진 데는 없군. 음음, 타박상이 좀 심할 뿐이지만... 젊은 녀석이니 약 먹고 며칠 푹 쉬면 금방 나을 거다. 네 선실로 가 있으면 내가 약을 보내주마." "예, 감사합니... 윽..." 대충 진료를 끝낸 가레스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나도 감사의 인사를 하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곧 온 몸이 고통을 호소하는 바람에 반쯤 일으키다 다시 갑판에 앉아버렸다. "쯧쯧,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있던 레이언이 가레스가 물러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혀까지 차면서 말을 걸어왔다. "아니, 뭐... 그 녀석을 상대하다가 한 방 먹었지 뭐..." 방심하고 있다가 꼬리에 차여서 허공으로 날려 갔다고 말하기에는 창피해서 그냥 그렇게 얼버무렸는데 다행이 주위에 있던 이들은 그 정도로 충분히 납득한 표정이었다. "그래, 그럼 확실하게 처리한 거야?" 다시 묻는 레이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녀석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야." 기껏 놔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나에게 한방 먹이고 튄 녀석이었으니 내가 무서워서라도 다시는 나타니지 못할 것이다. "그럼 다행이고... 혼자서 수고했어." 내 확신에 찬 어조를 들은 레이언은 안도와 미안함이 뒤섞인 눈으로 웃어보이자 나도 마주보며 씨익 웃어줘다. "말로만 치하할 셈이냐?" ".... 나중에 특별 수당을 지급해주마." "훗, 당연히 그래야지." 한대 얻어 맞은듯한 표정을 보이는 레이언 녀석에게 내가 다시금 씨익 웃어보이는데 이제껏 가만히 있던 잭슨이 나섰다. "자자, 이제 이야기도 끝난 것 같으니 그만 해인이를 선실로 옮기지요? 이 애는 환자라고요." 그러면서 부축해줄 것 처럼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나는 기겁하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뭐야, 이대로 잡아서 부축하려는 건 아니지? 그러면 아프단 말야." 내 말에 잭슨은 안심하라는 듯 양 손을 벌려 보이며 싱긋 웃었다. "걱정 마. 나는 손을 안 댈 테니까. 대신에..." 그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흐림과 동시에 실프 두명이 나타나더니 각각 내 상체와 하체를 떠받들어 나를 부드럽게 허공에 띄우는 거였다. "오오... 이런 방법이 있었군." 미처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잭슨이 나를 들어올리자 나는 나도모르게 감탄사를 터트리며 대단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때, 아프지 않지?" 내 시선 때문인지 잭슨이 의기양양하게 묻자 나는 그의 애 같은 태도에 피식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웃는 대신 무지 고맙다는 시선으 그에게 팍팍 보내주며 대꾸했다. "그러게, 정말 너무 고마워." 잭슨 덕분에 편안하게 선실로 옮겨진 나는 이번 항해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인어들에게 신겅 안 쓴채 마음 편안히 하루를 마감할 수 있었다. 그게 너무 행복했기에 나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나댕길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지만 완쾌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고 그날 하루 더 선실에서 뒹굴 거렸다. 인어들은... 상식을 가진 보통의 경우라면, 자신들을 보호 하려다가 내가 타박상을 입었으니 하루 하고도 반나절 즈음은 좀 답답하더라도 배 위에서 얌전히 머물러 주기를 기대하겠지만, - 어차피 같이 바다 속에 들어가 그들을 보호해줄 나도 없고 말이다. - 나는 이 철없는 인어들이 그렇게는 못할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기에, 나 대신 그 인어들을 담당할 잭슨과 레이언이 무지 고생하게 될 것이란걸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래 그들이 가엽기도 하고, 그 동안 나 혼자 떠맡았게 했던 레이언 녀석이 그 인어들에 의해 고생할 것이 너무 고소해서 혼자 키득키득 거렸다. 역시나, 내 예상과 틀리지 않게도 밤이 지날 때 까지는 얌전히 배에 머물던 인어들이 아침이 되자 바다로 나가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레이언과 잭슨이 내가 아파서 같이 가줄 수가 없으니 오늘만은 참으라고 달래고, 내가 누구때문에 아픝데 다 나을때 까지 참아줄 수 없냐고 양심에 호소하고, 당신들 끼리 바다 속에 들어갔다가 만약 몬스터에게 잡혀간다면 이번에는 우리쪽에서 아무도 돕지 못하니 당신들끼리 해결해야 한다고, 끌려가면 구해줄 수 없으니 그냥 잡아먹히는 수 밖에 없다고 으름장을 늘어놔서 정오때까지 버텼지만, 결국 오후가 되자 인어들의 생떼에 밀려버렸다. 그렇다고 그들을 그냥 바다 속으로 내보내 줄 수는 없는 일이라 약간의 타협을 봐서 바다로 들어가기는 하되 바다 깊이 들어가지 말고, 배에서 보이는 깊이와 거리에서만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는 걸로 하여 인어와의 논쟁을 끝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그렇게 인어와 협상(?)을 끝내자 몸과 마음이 다 지쳐서 축 늘어진 레이언이 휘청 휘청 거리며 내 선실로 와서 나에게 하소연 한 것이다. 그때 나는 폭신한 침대 위에서 배게를 등에 받치고 편안히 앉아 해민이가 가져온 간식을 먹으며 마법서를 탐독하던 중이었다. 그래 절인 배추처럼 힘 하나 없이 흐물흐물 한 레이언 녀석의 모습이 너무 고소해서 웃음이 막 비져 나오려는 걸 참느라고 혼났다. 그나마 레이언은 협상을 끝낸 뒤 인어들과 헤어져 내 선실로 와서 하소연이나마 할 수 있었지만, 잭슨은 정령사란 이유 하나로 실프들을 불러 인어들을 감시(?)하게 하는 동시에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여 갑판에서 저녁까지 떠나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하루는 뒹굴거릴 수 있었지만, 그 다음날 또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뒹굴거릴 수는 없었기에 나는 눈물을 머금고 그 다음 날 아침 선실을 나섰다. 그러자 제일 먼저 잭슨이 헬슥해진 얼굴로 달려와서 내 두 손을 꼬옥 부여잡으며 너무나 기뻐하는 거였다. "일어났구나~!! 다행이다, 이제 몸은 괜찮은 거냐?" 내가 다 나았다는 사실만 가지고 순수하게 기뻐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의 심정 절실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나도 그의 두 손을 맞잡으며 대꾸했다. "고생했지? 이제 내가 왔으니까 걱정 마." "응, 응, 고마워 해인아. 정말 고마워." 그의 손등을 토닥 토닥 두들겨주며 말하자 잭슨은 정말 눈물까지 그렁 그렁 맺혀서는 너무 고마워 하는 거였다. 그런 잭슨의 뒤로 머쓱한 표정의 레이언이 슬금슬금 다가오기에 나는 씨익 웃어보이며 지긋이 바라봤다. 이러한 나의 눈길에는 '이렇게 힘든 일을 나 혼자 맡았으니까 봉급을 더 올려줘야 하지 않아?' 란 시선이 노골적으로 들어있었기에 잭슨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그래도 안색이 안 좋은 레이언은 순간적으로 비틀 거리며 식은땀을 삐질 삐질 흘렸다. 그 뒤로 나는 다시 인어들을 데리고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인어들은 어제 그렇게 생떼를 써서 바다에 들어가 놓고서도 내가 같이 들어갈 때보다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해 불만이었는지 내가 같이 들어가주자 무지 반가워했다. 하지만, 그들이 순전히 자신들을 위하여 날 반기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반가워 해줘도 전혀 고맙지 않아 쓴 웃음만 흘렸을 뿐이다. 제 17화 인어도 인어 나름 (2) 인어들은 어제 그렇게 생떼를 써서 바다에 들어가 놓고서도 내가 같이 들어갈 때보다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해 불만이었는지 내가 같이 들어가주자 무지 반가워했다. 하지만, 그들이 순전히 자신들을 위하여 날 반기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반가워 해줘도 전혀 고맙지 않아 쓴 웃음만 흘렸을 뿐이다. 그렇게 내가 다시 인어들을 전담하게 된 지 며칠이 지났다. 인어 녀석들은 괴물 뱀장어를 나 혼자서 처리한 사건 이후로 나에 대한 믿음(?)이 견고해 졌는지 예전보다 더욱 더 겁 없이 나돌다 나녔다. 덕분에 나는 전보다 더 많은 물의 정령들을 불러내어 인어들에게 붙여놔야만 했다. 그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나는 저녁에 인어들을 배로 옮겨놓을 즈음이면 전보다 더 파김치가 되어 선실로 들어가자마 그대로 골아 떨어지곤 했다. 그런데 그것이 내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에 다다를 정도로 많은 정령들을 하루종일 불러 내서 피곤한 건지, 아니면 이제 보기만 해도 스트레스가 쌓이는 인어들로 인하여 생긴 정신적인 피로 때문에 녹초가 되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어휴, 정말... 다음에 몬스터가 나타나면 죽기 직전까지 가만 냅둬볼까보다... 한번 크게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리지...' 하지만, 노예매매상들에게 붙잡혔다가 구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짐스레 움직인 것은 단 며칠 뿐이었으니 몬스터에게 혼이 난다고 해도 그 효과가 오래 지속될 것 같지 않았다. 하루나... 길어봐야 이틀? '그래도... 그 정도의 시간만이라도 얌전히 있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이런 나를 신께서 가엽게 여기셨는지 그로부터 이틀 뒤 나의 바램대로 바다 몬스터가 나타났다. 그날도 나는 많은 운디네와 운다인들을 불러내어 인어들을 감시하게 하고는 나는 엔다이론에게 몸을 의지한채로 마법 공부를 하고 있었다. 꺄아아아악~~ 저~ 멀리에서 인어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이자 나는 나도 모르게 가슴이 따끔 거렸다. 이틀 전 내가 생각했던게 기억 난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때 생각한대로 정말 인어들이 죽기 직전에 갈 때까지 냅둘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엔다이론에게 힘없이 말했다. "어쨌든... 가보자고." 이번에 나타난 건 거대한 문어였는데, 저번에 상대한 괴물 뱀장어보다 더 커보였다. 그 뱀장어는 일자고 이 문어는 공 모양이라서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커다란 덩치로 바다 밑바닥의 울퉁불퉁한 바위 옆에 가만히 있다가 멋도 모르는 인어가 다가가자 그 굵은 발로 휘릭 잡은 모양이었다. 내가 그 곳에 가보니 한 인어가 문어의 거대한 빨판에 잡혀서 마악 입으로 가는걸 나 보다 먼저 그 곳에 도착한 인어들이 열심히 자신들의 능력을 사용하여 저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문어의 다리는 그 인어를 잡은 다리만 있는게 아니라 그것 말고도 7개나 더 있었기에 문어는 자신이 식사하는 걸 방해하는 주위의 다른 인어들을 잡으려고 그 7개의 다리를 사방으로 휘저어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인어들은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에도 급급해 문어에게 잡힌 인어를 제대로 돕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인어의 수가 거대 문어 다리의 숫자보다 많았기에 간간히 문어의 식사를 방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마나 문어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한 채 겨우 겨우 간신히 막고 있는 것이, 인어들이 물술사라고 하지만, 이제 겨우 성년이 된지 얼마 안된 인어들이었기에 큰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탓이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물술사라고 하면서 자신의 몸 하나는 지킬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기에 나는 솔직히 그들이 내 능력 정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다. 물론, 내 능력이 높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런건 내가 직접 겪어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엔다이론이나 엘라임이 말해준거라 솔직히 정말 얼마나 높은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나 말고도 다른 물술사를 처음 만나보는데다 그들이 몸 하나는 지킬 실력이 된다고 자신있게 말하니 직접 보지는 않고 나 정도 될 거라고 오해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왠걸... 저번에 일, 그러니까 그 괴물 뱀장어를 상대할때보니까 그 능력이라는 것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터무니없이 약한 거였다. 그래 그 상황에 장난칠 일은 없을테니 처음에는 얼어가지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제대로 못 펼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한번 시켜보니... 그들의 능력으로 공격을 하는 건 2 서클의 마나를 넣은 매직 미사일 정도의 효과를 나타내는 거였다. 그 중에서 능력이 가장 높다 하는 인어도 3서클의 마나를 넣은 매직 미사일 정도였다. 물론... 매직 미사일이 1클래스의 마법이기는 하지만 사람 하나는 죽음에 이르게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공격 마법이고 실력이 높은 마법사가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그보다 몇 단계 높은 공격 마법 못지 않은 효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1 서클의 마나를 사용한 단 하나의 매직 미사일의 공격 효과를 봤을때, 그건 실력 있다고 이름난 검사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검사에게 전혀 영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째든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의 큰 타격은 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대충 2 클래스의 공격 마법에도 아픔만 느낄 뿐 치명적인 타격은 받지 않는 일이나 지금 나타난 거대 문어 녀석에게는 별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자꾸 귀찮게 만들어 분노하게 만들었으니 오히려 역효과가 나버린 상황이었다. '정말... 저 정도면서도... 자신의 몸 하나는 지킬 수 있다고 큰 소리치냐...'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쉰 나는 거대 문어에게 잡힌 인어쪽으로 운다인들을 급히 보냈다. 그 인어는 정말 문어의 입 바로 앞에 도달해 있었는데 그나마 인어들 중 능력이 높은 인어가 문어의 다리를 필사적으로 얽어매고 있었기에 아직도 안 먹히고(?)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래 버틸 수 있는 것 같지는 않아서,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운다인을 두명 보내어 한명은 그 다리를 잡아 입으로 가까이 못 하게 끌어당기고 다른 한명은 그 다리를 잘라버리라고 했던 것이다. 나의 부탁을 들은 운다인들은 거대 문어가 사방으로 휘두르는 그 굵직 굵직한 다리 사이를 샥샥 피해 인어가 잡힌 다리로 다가가더니만 한 명의 몸이 길쭉하게 늘어나 그 다리를 한번 동여맨 뒤 잡아 당기자 다른 한명의 몸은 아주 얇아짐과 동시에 날카로워지더니 그 다리를 향해 내리쳤다. 쿠워어어~~ 인어들의 공격은 잘 버틸 수 있었지만 운다인의 공격에는 그렇지 못한 듯 한대 맞자마자 문어는 온 몸을 비틀면서 괴로워했다. 그도 그럴것이 운다인이 마치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해 내리치자 완전히 자르지는 못했지만, 그 굵은 다리를 절반 정도 잘랐던 것이다. 거대 문어의 고통을 호소하는 몸부림에 인어들은 위협을 느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다행히도 운다인에게 반쯤 잘린 거대 문어의 다리는 힘을 못 쓰게 되었는지 스르륵 풀려 뱀처럼 감고 있던 인어의 몸을 놔주기는 했지만, 그 문어의 다리에 달린 큰 빨판에 인어가 떡 하니 붙어가지고 안 떨어지는 거였다. '정말... 골고루 하는구만...' 문어의 반쯤 잘린 다리에서 피가 마구 쏟아지는데다 문어가 몸부림을 치며 온통 주변의 물을 휘저어놓아 피가 주위로 점점 번지고 있었다. 이대로 피가 계속 나오다가는 주변의 시야가 피 때문에 아예 안 보이게 될 거 같아서 나는 문어에게 가까이 다가가있던 운다인들에게 그 빨판에 붙은 인어를 떼어서 데리고 오라고 손짓한 뒤 주위에 있던 인어들에게 빨리 배로 돌아가로 소리쳤다. 그러면서 이번에도 엔다이론들을 불러내서 문어를 막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다행이 거대 문어가 자신의 상처에 대해 신경을 쓰느라고 우리를 쫓아오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한편으로 약간 안심을 하면서도 거대 문어를 계속 주시하는 상태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데 운다인 둘이 인어를 문어 빨판에서 떼어 냈는지 그 인어의 양 팔을 하나씩 잡고 빠른 속도로 나에게 다가왔다. 보니까 그 빨판에 찰싹 붙었던 인어의 등짝은 얼마나 빨판에 강하게 붙어 있었는지 그 자리가 시뻘개져 있었고, 빨판의 끝 부분에 살짝 걸린 허리 아래쪽의 비늘들은 반쯤 뜯어져서 덜렁덜렁 거렸다. 그게 꽤 아팠는지 인어는 물살때문에 비늘이 이리저리 흔들릴때마다 인상을 찡그리며 작게 신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비늘이 뜯어진 부분을 감싸주고 있을 만한 시간적인 여유는 없었기에 나는 그 인어를 붙잡은 운다인들에게 그를 - 인어가 남자였다. - 배로 옮기라고 지시한 후 나도 재빨리 배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면서 바라보니 문어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있을 뿐 우리를 따라올 생각은 하지 않는 듯 보였다. 대신 아까처럼 아파서 마구잡이로 몸부림은 치지 않고 그냥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게 화가나서 노려보는 건지, 아니면 먹이(?)들이 달아나니까 아쉬워서 보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안 쫓아오니까 거대 문어를 상대 안 해도 된다는 것과 이제 인어들이 배로 돌아가 얌전히 있을테니 오늘 하루 일과는 끝이 났다는 생각에 나는 배에 다다랐을 즈음에는 기분이 좋아져서 입에 미소가 떠오를 것만 같았다. 정오가 지난지 몇시간이 안되어 인어들이 다급하게 바다에서 뛰어 올라 속속들이 배 위에 내려앉자 - 인어는 다리가 없어서 서 있지 못한다. - 갑판에서 배의 경호를 서던 - 경호라기 보다는 대기하는 것 같지만... - 무사들이 깜짝 놀라 비상종을 울렸고, 그러자 덕분에 선실로 연결된 갑판 문에서 무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뭐야, 이번에는 무슨 일이야?" "또 몬스터가 나타난 거야?" "젠장... 이번에도 그냥 대기만하다가 끝나는 거 아냐?" 비상종은 미처 내가 갑판에 내려서기도 전에 울렸기 때문에 나는 우르르 나오는 무사들을 보고 나올 필요 없다고 하기도 그래서 머쓱하게 갑판에 내려섰다. 그러자 우르르 나오는 무사들 틈에 섞여 같이 달려나온 레이언과 잭슨, 그리고 마법사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뭐가 나타난 거야?" 긴장이 배인 어투로 묻는 레이언의 뒤로 역시나 긴장이 가득한 잭슨이 다급하게 물어왔다. "해인아, 혹시 다친 건 아니겠지?" "아아, 나는 괜찮아. 이번에는 직접 상대하지 않고 그냥 도망쳐 왔거든." 머쓱하게 대답하는 내가 멀쩡한 걸 확인한 잭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레이언이 다시금 물었다. "상대 안 하고 도망쳐 왔다고? 뭐가 나타났는데?" "거대한 문어. 인어 한명이 잡혀서 거의 먹힐뻔해가지고 그녀석을 빼내서 곧바로 이리로 왔어. 하지만, 오면서 보니까 쫓아올 생각은 안 하는..." 그런데 이런 내 말이 무색하게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크게 진동하는 거였다. 덕분에 갑판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비틀거렸지만, 모두 실력 있고 경험 많은 사람들이었기에 재빨리 주위에 있는 무언가를 잡거나 중심을 잡아 넘어지는 사람들은 없었다. 단지 인어들만이 놀라서 비명을 질러댔지만 말이다. "뭐, 뭐지?" "온 건가?" "어떻게 된 거야?" 그렇다고 그 상황에 태연하게 있는 건 아니었기에 무사들이 당황스런 목소리로 한 마디씩 하는데 그 와중에 배의 한쪽 면에서 갑자기 굵고 길다란 문어의 다리 네개가 바다로 부터 쭈욱 올라오더니만 그대로 배의 옆면에 달라붙는 거였다. 너무 거대한 녀석이 그렇게 달라붙으니 커다란 배라고 해도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 쪽으로 기울자 무사들이 당황해서 갑판 위까지 올라온 다리 끄트머리를 무기로 마구 때려서 떼어 놓으려고 했다. "뭐야? 안 쫓아 온다며?" 그 모습을 본 레이언이 나를 바라보며 묻자 나는 무지 난처해졌다. "아니... 안 따라 오던데... 언제 쫓아 왔지?" 내가 머쓱하게 대꾸하자 레이언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재빨리 자신도 검을 빼들었다. "젠장, 어쨌든 저 녀석을 빨리 떼어 내! 이러다가 배가 넘어지겠어!!" 머튼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무사들은 열심히 문어의 다리를 때려서 떼려고 했지만, 문어 다리의 끄트머리만 떨어질 뿐 배 아래 쪽은 문어의 다리가 여전히 붙어 있었기에 머튼이 다시 소리쳤다. "마법사들, 어떻게좀 해봐요. 잭슨, 해인, 너희들도 빨리~!!" 제 17화 인어도 인어 나름 (3) 머튼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무사들은 열심히 문어의 다리를 때려서 떼려고 했지만, 문어 다리의 끄트머리만 떨어질 뿐 배 아래 쪽은 문어의 다리가 여전히 붙어 있었기에 머튼이 다시 소리쳤다. "마법사들, 어떻게좀 해봐요. 잭슨, 해인, 너희들도 빨리~!!"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문어도 크지만 우리가 타고 있던 배도 컸기에 문어가 배를 완전히 감싸지는 못하고 한쪽 면에 달라붙어서 배 위로 기어 올라오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거였다. 완전히 감싸였다면, 사방에서 배에 달라붙은 문어 다리를 떼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사방으로 인원이 분산 안 된건 좋은데 대신 배가 문어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안전하게 선실에 들어가 있어야 할 선원들이 배의 균형을 위하여 우르르 몰려 나와서 바다 위로 껑충 솟은 갑판에 거의 기다시피 올라가 매달려 있어야했다. 그리고 우리는 푹 꺼진 갑판 쪽에서 바다로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무언가를 꼬옥 잡고 문어 다리를 떼어내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배를 부수지 않게 조심해!" "지금 그거 따질 때야?" "하지만, 배가 부서지면 우리는 끝장이라고~!!" "젠장..." "시끄러워. 거기 떠들지 말고 네놈들 일이나 해! 마법사쪽은 배에 강화 마법 좀 걸어줘요!" "배 전체에 거는 건 불가능해. 우리가 무슨 마도사인 줄 알아?" "그럼 이쪽에다만 해주면 되잖아요!" "좀 기다려봐." "아악~ 내 검 떨겼어." "괜찮아요. 제가 잡아드릴께요." "잭스으으은~~ 불의 정령으로 공격하면 어쩌자는 거야? 배 태울 일 있어?" "젠장, 조심하면 되잖아요!!" "으아아악~~ 린제이! 배에 구명이 뚫렸잖아아~~!!" "어머.. 하지만 그렇게 크지도 않잖아요!"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저런 건 안에서 수리하면 돼요. 어이, 비토하고 빌, 빨리 내려가서 살펴봐!!" "해인구우우운~~ 배 부수지 말라니까?" "죄, 죄송해요. 하지만... 너무 세게 달라붙어서 잘 안 떨어지는 걸요..." "강제로 떼지 말고 스스로 떨어지게 만들어봐!" "그렇게 잘 하면 네놈이 해봐라 이놈아!!" 정말.. 그 괴물 문어가 나중에는 우리의 공격을 견디다 견디다 결국 질려서 엄청난 양의 먹물을 우리에게 뿜어대고 사라질때까지 우리는 정말 정신없이 움직였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는 것 같았다. 여기서 머튼이 소리치면 저쪽에서 조장들이 잔소리 하고, 레이언도 한 몫 거들고, 거기에 대꾸하고.. 무슨 정신으로 내가 뭘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우리 배 위로 기어 오르려는 문어와의 처절한 사투는 반나절이나 다 되어서야 끝났다. 마지막에 괴물 문어의 머리가 갑판 위로 불쑥 솟아 올랐을때는 배가 부서질까봐 너무 두려워서 엘라임을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 하필이면 오후까지 인어들을 감시하는 많은 운다인과 운디네들을 불러내 유지하고, 또 지금까지 그들을 불러 문어와 사투를 벌이느라 문어의 머리가 갑판 위에 올라왔을 때에는 나는 너무 지쳐서 헉헉 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행이 문어는 그 큰 머리를 갑판에 떨어뜨리지 않고 대신 엄청난 양의 먹물을 갑판 위에 떨어뜨려놨다. 얼마나 그 양이 많았는지 나는 작은 폭포를 보는 것만 같았고, 갑자기 닥친 먹물 세례 때문에 그 먹물에 휩쓸려 몇몇 사람들이 바다에 떨어지는 사태도 발생했다. 다행히 그 괴물 문어는 먹물만 뿜어대고 내뺐으므로 그들은 바다에 빠지는 것 외에 다른 사고를 당하지 않아 무사히 배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쯔음에는 갑판에 있는 나머지 일행들도 멍하게 먹물을 뒤집어 쓰고 있다가 그 괴물 문어가 가버렸다는 것을 깨닫고는 환호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 모습도 정말 난리였다. 옆에 있는 사람을 얼싸앉고 방방 뜨는 것은 그나마 정상적인 반응이었고, 어떤 이들은 갑판에 찰랑고여있는 먹물을 다른 사람에게 뿌려대질 않나, 그 위를 뒹굴지 않나, 거기에서 레스링을 벌이지 않나... 그것도 그나마 봐줄만 했다. 왜 기분이 좋은데 주먹을 날리는 건지... 괴물 문어와 사투를 벌일 때 가장 많은 잔소리를 해댔던 머튼은 부하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했고, 레이언은 그걸 알아차리고 도망치려다가 선실 문앞에서 잡혀서 질질 끌려와 바다로 던져졌다. 가레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투덜대며 먹물덕분에 아예 검은 로브가 된 마법사 로브를 쥐어짜고 있던 그에게 무사들이 덥쳐서 바다에 던졌고, 괴물 문어를 무찔렀다는 기쁨에 찌인한 키스를 나누던 마일즈와 린제이 - 이 둘은 연인 사이였나보다. - 는 애인 없는 무사들에 의하여 눈꼴시다는 이유로 둘이 밧줄로 칭칭 동여매어 바다에 떨어져야 했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가 날린 주먹에 턱을 얻어맞고 그대로 바다 위로 떨어졌다. 젠장할... 그래서 열받은 내가 갑판 위에 있는 녀석들을 모조리 바다 위로 쳐넣으려고 했는데, 더욱 더 열받게도 그들은 내가 그렇게 손을 쓰기도 전에 갑판에서 벌이던 난리에 더욱 더 흥분한채로 모조리 바다위로 뛰어드는 거였다. 거기서도 얼마나 맛이 간 모습을 보이던지... 나는 내가 정말 이 집단에 들어온 것이 잘한 일인지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볼 정도였다. 그렇게 두 번째 몬스터를 물리쳤다고 안도하는 것도 잠시, 나는 그로부터 3일 후에 범고래에게 팔을 물려 피를 철철 흘리는 인어를 들고 배로 달려야 했다. 이 인어가 그냥 잘 지나가는 범고래떼에 다가가 괜히 장난을 하다가 범고래가 성이 나서 인어의 팔을 콱 물어버렸던 것이다. 그나마 그 인어가 재빨리 도망치고, 내가 그에게 붙여준 운디네와 근처에 있던 운다인이 도와줘서 그정도로 끝냈지 그 인어 혼자 있었다면 아마 고래떼에 둘러싸여서 큰 일을 당했을 것이다. '하여간... 정말 가지가지야... 어휴... 이건 특별 수당이 아니라 월급을 두배로 올려 받아야 하는 거 아닐까?' 그 일은 그래도 인어들에게 교훈을 줘서 그 뒤로 인어들은 함부로 다른 바다 생물들에게 장난을 치거나 만지지 않았다. 그래, 그 뒤로 정말 편안한 여행이 계속...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만은... 이번 운송에 마가 끼었는지 우리는 그로부터 5일 뒤에, 또 일주일 뒤에, 또 4일 뒤에... 하여간 며칠에 걸러 한번씩은 꼭꼭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일주일이 넘게 몬스터가 안 나타나면 괜히 막 불안하고 일찍 나타나면 한 건 넘겼다고 안심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하니 이건 너무 심한 거 같았다. 우리 배야 다행히 실력 있는 무사들도 많았고, 마법사에 정령사까지 타고 있었으니 어찌 어찌 잘 헤쳐 나갔지만, 만약 이런 실력자들이 없는 배는 어디 남아나겠는가? 그래 또 다른 몬스터 - 이번에는 거대 오징어였다. 그걸 보아하니 아마 꼴뚜기 모습을 한 거대 몬스터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 를 물리치고 난뒤 모두가 쉴거였기에 그 틈을 타 레이언에게 다가가 슬쩍 물어보았다. "있지... 원래 이렇게 몬스터들의 습격이 잦아?" "응? 뭐... 그런 셈이지...." 그런데 그렇게 대답하는 레이언 녀석이 어물어물 하며 말끝을 흐리는 것이 왠지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는 것만 같았다. "정말? 그럼 너 예전에 인어들을 운반(?)할 때도 이렇게 며칠에 한번씩 몬스터가 습격해왔단 말야?" "음... 그게... 뭐... 이렇게 자주는 아니고... 가끔 왔었지." "가끔? 얼마나 왔는데?" 자꾸 내 시선을 피하며 어물어물 대답하는 레이언의 모습을 보며 내가 자꾸 캐묻자 레이언이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게... 보름에 한번쯤? 많으면 한달에 세번정도..." "뭐? 아니, 그런데 이번에는 왜 며칠에 한번씩 꼴이야?" 기가막혀서 입이 떡 벌어지는 걸 느끼는데 레이언이 이런 날 힐끔 보더니 다시 한숨을 푸욱 쉬며 말했다. "에휴... 그게 말이지... 그 전에는 인어들이 바다 속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았으니까... 이번처럼 매일 들어가지 않고... 며칠에 한번 정도... 그것도 하루 종일은 불가능 하고 몇시간정도 잠깐씩 이 주위를 도는 것 뿐이니까." "뭐야, 그럼 인어들이 매일 매일 바다 속에 있는 거하고 몬스터 습격이 잦은거하고 관련이 있다는 소리야?" "뭐... 말하자면 그렇지." 머쓱하게 대답하는 레이언의 말을 이해못한 나는 다시 물었다. "아니 어떻게 관련이 있는데?" 그러자 레이언이 나를 쓰윽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아니 그럼... 너는 주변에 먹이가 왔다갔다 거리는데 안 나오겠냐?" "머, 먹이? 으음... 뭐, 그건 그렇군..." 생각해보니 이해 불가능한 게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함께 또 다른 생각도 떠오르는 거였다. "어, 잠깐만... 그렇다는 건 앞으로도 인어들이 계속 바다 속에 들어가있으면 우리는 계속 몬스터의 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거네?" "그렇지..." 힘 없이 대답하는 레이언을 향해 나는 눈을 부라렸다. "그렇지가 뭐야, 그렇지가... 아니, 너는 그럼 몬스터가 습격하는 원인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인어들이 매일 바다에 나가 하루종일 있는 걸 그냥 냅뒀단 말야? 당장 내일부터 바다 속에 들어가는 시간을 줄이던지 해야지!" 내가 그렇게 속사포처럼 따지고들자 레이언이 무지 처량하고 힘 없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해인아... 그러면 네가 인어들을 설들 시킬 자신이 있냐? 나는 절대 인어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다." "윽...." 레이언의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레이언도 레이언이지만 나 또한 그 인어들의 생때를 겪어봤던 것이다. 그거는... 몬스터와 싸우면 싸웠지 다시는 상대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냥... 이대로 가자." "그렇지?" "응..." "에휴...." 레이언과 나는 오랜만에 의기투합하여 아주 긴 한숨을 바닥이 꺼져라 내쉬었다. 제 17화 인어도 인어 나름 (4) 레이언과 나는 오랜만에 의기투합하여 아주 긴 한숨을 바닥이 꺼져라 내쉬었다. 성질 같아서는 생떼를 쓰던말던 그냥 엉덩이를 몇대 패주고 밧줄로 꽁꽁 묶어 배 안의 창고에 콕 쳐박아둔 채 데리고 갔으면 좋으련만, 이들은 그동안 인어 종족과 베지테크스 상회간의 우정(?)과 신뢰를 더욱 더 견고하게 - 한 마디로 거래를 더욱 쉽게 해줄 - 해 줄 녀석들이니 함부로 대하지도 못하는 입장이라 우리쪽은 그냥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어쩌면 처음에 인어들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배려하려고 생각한 것 자체가 너무 오버 였는지도 모른다. 지금껏 인어들을 데려다주는 것만으로도 인어 종족과의 거래는 원활하게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이번에 거래 상대 서비스 차원에서 괜히 인어들 편의를 생각해주다가 미처 그 동안 알지 못했던 인어들의 성격때문에 두 배로 고생하고 있는 신세를 생각하니 레이언이 평소의 유들유들한 성격을 잃어버리고 한숨만 푹푹 쉬는 것도 당연했다. 아니, 두배가 아니라 수십배라고 해야 하나? 한번 이렇게 인어들을 데리고 가줬으니 그 다음부터는 계속 이러한 상태로 데리고 가야할 테니까 말이다. '으음... 왠지 내 고생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안돼겠어. 이번에 가면 엘라임에게 사정을 해서라도 인어들을 그냥 확 쥐어잡아버릴까? 음음... 물론 레이언 녀석 몰래 해야겠지? 상황을 보건데, 레이언 녀석이 내가 엘라임의 딸이라는 걸 안다면 그 즉시 인어들과의 거래를 끊어버리고 나와 거래를 하자고 할 것이 뻔해. 레이언이 아니라도 크리스가 알았다간 그렇게 되겠지? 휴우.... 내 아버지가 엘라임이라는 걸 숨기길 아주 잘 한거 같아. 그런데... 인어들에게는 그걸 밝혔다가 그게 레이언 귀로 들어가면 어떻게 하지? 으윽... 분명 그럴 가능성이 있어. 으음... 그럼 어떻게 하지?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둬야 하나? 그렇다면 다음 운행에도, 그 다음 운행에도 고생할 게 뻔한데? 지금 인어들이 이런데 다음 인어들 성격이 좋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잖아? 으윽....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할까?'' 레이언은 레이언 대로, 나는 나대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고민고민하는 사이 시간은 이런 우리의 상황에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유유히 흘러 우리 배는 드디어 서대륙의 3국을 지나 대륙의 북해에 해당하는 호바트 해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제 거의 다 왔다는 기쁨에 선원들은 물론이고 배에 타고 있는 무사들까지 얼마 안 있으면 이 지긋지긋한 배에서 내려 땅을 밟게 된다는 희망에 찬 얼굴로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것을 손꼽아 기다리는 모습들에 배의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 게다가 인어들 또한 자주 몬스터들에게 습격을 당한 탓에 이제는 겁도 없이 혼자 멀리 가지 않고 배와 내 주위에서만 머무려고 하는 덕에 나도 조금은 편해진 상태라 다른 사람들과 같이 약간 들떠 있었다. '이제 2주 정도만 버티면 되는 구나아... 아, 정말 길고도 긴 세월이었어....' 기분이 들뜨다보니 그 동안 인어들을 외면하느라 억지로라도 잡고 있던 마법서가 손에 안 잡힌 탓에 나는 잠시 책을 덮고 엔다이론의 위에 길게 드러누어 편안히 바다 속을 감상했다. 호바트해는 북쪽에 있는 바다임에도 불구하고 무척 따뜻했기에 내가 살던 케르겔렌 해 보다 좀 더 아름다운 바다 속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 키보다 더 크게 자란 해초들 사이 사이로 보이는 산호초들의 모습과 그 위를 헤엄쳐 다니는 화려한 색들을 가진 물고기때들, 그리고 그들을 노리느라 그들 틈에서 노는 것 처럼 보이는 커다란 물고기와 고래들, 그들 틈에 간간히 보이는 인어... '인어? 어휴, 또 저 속에 들어가있네? 저러다가 멀어지려면 어쩌려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천진하게 웃는 인어를 째려보았다. 이 곳에는 내 손바닥 만한 아주 작은 물고기들이 엄청나게 많은 수가 모여 다니는 모습을 종종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 인어들이 그들 틈에 은근슬쩍 들어가 장난치다가 너무 거기에 열중해서 - 물고기 떼가 엄청 크기 때문에 시야도 잘 안 보일 정도다 - 우리와 거리가 너무 멀어지는 바람에 잃어버릴 뻔 한 적이 한번 있었다. 물론 그 인어에게 운디네를 붙여 놓아둬서 잃어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때는 하필이면 인어들이 스스로 배에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웬만큼 멀어지면 제제를 가하던 운다인들을 불러내지도 않았을때라 그 인어는 물론이고 나 또한 그 인어가 멀어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저녁에 인어들을 배로 옮기면서 숫자를 세어보다가 한 녀석이 빠지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려 얼마나 놀랬던지... 그래도 운디네를 붙여놔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는데, 발견했을때 그 인어는 자신만 혼자 남겨진 줄 알고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사방으로 우리를 찾으며 다니고 있었다. 이 곳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길에 잠깐 놀다가 일행을 잊어버렸으니 우리가 어느 쪽으로 갔는지도 몰라 새파랗게 질려서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다가 결국 못찾아서 엉엉 우는 모습이라니... 그때 내가 짠 하고 나타나자 다짜고짜로 나에게 안겨서 엉엉 우는데 완전 어린애 같았다. 하기야, 성년이 지났다고 정신까지 온전한 어른이 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 뒤로 내가 다른 인어들에게도 주의를 줬는데도 또 저렇게 내 말을 안 듣고 물고기 떼에 들어가 놀고 있는 거다. '그래... 어디 한번 너도 일행을 잃어버려가지고 저번의 그 인어처럼 눈물 콧물 다 짜면서 울어봐라.' 나는 인어를 발견하는 그 즉시 그 인어에게 뭐라고 하는 대신 속으로 벼르면서 그 인어에게 운다인을 붙여줬다. 눈물 콧물 다 짜면서 엉엉 울기 전에는 절대로 데려오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말이다. '훗... 오늘 저녁에는 엉엉 우는 인어의 모습을 오랜만에 보겠군? 훗훗... 레이언하고 잭슨도 불러서 같이 구경이나 할까?' 요근래에는 인어들이 나나 배 주위에서만 맴돌았던 탓인지 몬스터의 습격이 한동안 없어서 나는 순간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무책임한 판단을 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태평하게 드러누워 바다 풍경에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이런 나의 안일한 태도를 신께서는 그냥 냅두지 못하셨나보다. 태평하게 바다 풍경을 구경하다가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있는 나에게 운디네 한명이 다급하게 다가와서 알렸다. [인어가 몬스터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엑!!" 덕분에 엔다이론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나다 엔다이론 등에서 떨어질 뻔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엔다이론이 얼른 자신의 늑대 앞발을 들어올려 균형을 잡아준 탓에 비틀 거리기는 했지만, 굴러 떨어지지는 않았다. "어디야, 어디? 안내해줘." 그 와중에 용케 정신을 차린 나는 다급하게 나에게 다가온 운디네에게 재촉했다. '어휴... 내가 왜 몬스터 생각은 못했지? 어우, 어우, 어우, 요근래 좀 안타나났다고 헤이해 져서는...' 운디네의 뒤를 따라가며 나는 초조해서 입술을 깨물며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동안 여행하면서 계속 그래왔듯이 그 주변의 바다를 담당하는 엔다이론들에게 부탁하여 혹시라도 인어들에게 무슨일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인어들은 나에게는 물론 바다를 담당하는 엔다이론들에게 보호를 받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혹시나 아까 내가 방치해둔 그 인어가 몬스터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엄청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 인어에게는 운다인까지 붙여 두었으니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아냐, 아냐... 그런데 내가 부탁한 거는 그 인어 녀석이 엉엉 울때까지 가만 내버려 두라고 한 거였으니... 그 인어가 안 울면 말짱 꽝인데...' 그렇게 생각하니까 더욱 더 초조해졌다. 그러는 와중 운디네는 빠른 속도로 계속 앞으로 있는 거였다. '어우, 이노무시키는 도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젠장... 이러면 괜찮을라나 몰라. 제발 목숨만은 붙어 있어도....' 그렇게 초조하게 달려가다보니 드디어 운디네가 말한 그 문제의 인어가 보였다. 그 인어는 일, 그러니까 거대한 뱀장어의 날카로운 이빨에 꽈악 물린 채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능력으로 그 거대 뱀장어를 채 공격해보지도 못하고 뱀장어가 휘두르는 대로 그대로 휘둘리고 있는 거 보니 사태가 심각한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앞뒤 생각할 것 없이 너무 다급하여 엘레스트라를 불러냈다. "저 인어 좀 구해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괴물 뱀장어 앞에는 갑작스레 거대한, 그러니까 괴물 뱀장어보다도 더 큰 엘라스트라의 몸집이 스르륵 하고 나타났다. 원래는 그보다 한 절반 정도... 그러니까 괴물 뱀장어보다도 작은 모습으로 나타나고는 했는데 나의 다급한 마음이 전달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바다 속이라서 그런지 엄청나게 큰 모습으로 나타난 거였다. 그러자 입에 물고 있던 인어를 흔들어대고 있던 괴물 뱀장어가 엄청 놀랬는지 머리를 흔드는 것도 잊어버리고 두 눈을 휘둥그래 뜬 채 입을 떠억 벌렸다. 덕분에 일의 입에서 마구 마구 흔들리던 인어가 일의 날카로운 이빨에 걸려 덜렁대며 늘어져 있는 걸 내가 다가가서 얼른 빼내어 뒤로 물러났다. 물론, 일이 공격할까봐 걱정되긴 했지만 그 녀석은 엘레스트라의 모습에 겁을 먹어 딱 굳어있는 바람에 내가 가까이가도 나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기에 안심하고 얼른 인어를 데리고 올 수 있었던 것이다. 평소 같으면 그런 엘레스트라의 위압감에 감탄 할 법 했지만, 지금은 내 품에 축 늘어져서 미동도 않고 있는 인어의 안위가 더욱 급했기 때문에 나는 재빨리 한마디 하고 배로 향했다. "저기, 미안하지만 그 놈 대충 쫓아주고 와." 제 17화 인어도 인어 나름 (5) "저기, 미안하지만 그 놈 대충 쫓아주고 돌아가!" 내가 다급한 마음에 너무 빠른 속도로 전진하다보니 배에 뛰어 오를 때에는 내 뒤로 물보라가 촤악~ 하고 높이 솟아 올라 갑판위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달려왔다. "뭐야, 뭐. 또 나타났냐?" "종을 울려! 비상 사태야!!" 그들을 둘러보던 나는 갑판 위에 가레스가 없음을 깨닫고 다급하게 외쳤다. "가레님 어딨어요? 빨리 불러와요!!" 내 외침에 한 선원이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 한 나는 품에 안고 있던 인어를 조심스레 갑판 위에 누이다가 어리둥절 해졌다. 인어의 얼굴이 내가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었던 것이다. "누, 누구지 이 인어는?" 인어라고 해서 우리가 보호하는 인어인줄만 알았지 생전 처음보는 인어인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창백한 얼굴로 누워 옅은 숨을 내쉬고 있는 그 인어는 우리가 보호하는 인어들보다 몇살 정도 어려보이는 인어였는데 양아치인 듯 싶었다. 뭔 놈의 장식품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는지 양쪽 귀에는 각각 두개,개씩 구멍을 뚫고 거기에 커다란 귀거리를 하나씩 차고 있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코에도 구멍을 똟고 내 새끼 손톱 반만한 다이아 코거리를 한데다가 목걸이는 최소한 다섯개 이상을 걸고 있었다. 거기에 팔찌도 양쪽 손목에 몇겹씩 한데다가 팔뚝에도 금으로 보이는 환(고리)을 차고 있었다. 게다가 유두와 배꼽에도 피어싱을 하고 있었는데 그 두개의 피어싱을 또 금줄로 이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길다란 꼬리 끝의 지느러미 양 끝에도 구멍을 뚫어 거기에도 뭔가가 하나씩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괴물 뱀장어에게 물려 흔들리는 와중에서도 용케 안 떨어지고 잘 붙어 있었다. "어휴... 이렇게 달고 다니면 안 무거울라나?" 그 인어의 모습에 내가 황당함을 금치 못하자 옆에 같이 와 있던 한 무삭 조심스레 물었다. "이거... 떼줘야 하나, 그냥 냅둬야 하나?" "그, 글쎄요... 그냥 냅두고 잠시후에 가레스님이 오시면 물어보기로 하죠?"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가레스가 헐래벌떡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헉헉, 뭐, 뭐냐? 무슨 일이야?" 그가 다가오자 인어 주위를 감싸고 있던 사람들이 길을 터주어 가레스는 쉽게 인어에게 다가올 수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나는 입을 열었다. "일에게 물려서 신나게 흔들렸습니다." 가레스는 나에게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인어를 향해 있었다. 그 인어 곁에 앉은 가레스는 우선 인어의 코에 손을 대어 숨을 확인하고 맥을 잡아 심장이 제대로 뛰는 지도 확인했다. 그런 다음에야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꼬리를 살폈다. 그 꼬리는 절반이 넘게 비늘이 다 뜯겨지고 일의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난 건 둘째치고 하도 물고 흔들어서 그 이빨 자국의 상흔이 길게 찢겨져 있었다. 오는 도중 지혈은 할 줄 몰라 우선은 운디네를 불러내 예전에 엘라임이 나에게 했던 것 처럼 붕대로 감았던 탓인지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힐!!" 가레스가 그 곳에다 손을 가져다대고 시동어를 외치자 곧 그의 손에서 파르스름한 빛이 뿜어져 나와 인어의 상처 부위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마치 실개울처럼 끈임 없이 흐르던 피가 차차 멈추어지며 벌어졌던 상처도 아주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아물어갔다. 어느정도 상처가 회복되자 가레스는 마법 시전을 멈추었다. "후우... 대충 된 거 같군." 마법은 위험할때는 아주 유효하기는 하지만 자주 쓰면 오히려 면역력이 약해져 쉽게 병에 들게 하거나 욱체를 약화시키는 단점이 있기 때문에 보통 치료할때 완치를 시키는 대신 위험한 고비를 넘기는 정도로만 치유하는게 상식이었다. 그래 가레스 또한 그 상식 그대로 완벽하게 치유하는 대신 위험한 수준만 넘긴 정도로 마법을 시전하고 가지고 왔던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인어는 누구냐?" 가레스 또한 인어의 얼굴을 다 알고 있었는지 내가 데리고 온 인어가 우리가 보호하는 인어가 아니라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그의 물음에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가레스가 잠시 날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새로운 인어가 나타난 걸 보니 인어의 섬에 거진 다 온 모양이로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가레스가 붕대의 매듭을 묶고있는데 인어가 정신을 차렸는지 신음을 얕게 흘리며 몸을 뒤척였다. "크에에..." 하지만, 그 인어의 목소리는 물 속이 아니었기에 금속과 돌이 마찰되는 듯한 거북한 음성으로 들려왔다. "이런, 이런... 깨어나나보다. 너 빨리 이 녀석 바다 속에 집어 넣어라. 그리고 누구인지 신원은 꼭 물어보고." 가레스 또한 대기 속에서 울려퍼지는 듣기 거북한 인어의 목소리를 듣고싶지 않았던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서서 나에게 손짓했다. 그 모습에 나는 황당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피식 실소를 흘리면서도 가레스가 시키는 대로 인어를 조심스레 안아들고는 다시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갑판 위에서 정신을 차리려고 하던 인어는 바다의 차가운 물에 담기자 완전히 정신을 차린 듯 눈을 뜨고는 그를 안고 있던 나를 바라보았다. "흐에에엑~~" 그리고 그 순간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날 밀쳐냈기에 나는 순간적으로 되게 기분이 나빴다. "아니... 내가 그렇게 괴물처럼 생겼어요? 왜 그렇게 놀라요?" 이래뵈도 뛰어난 미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괜찮게 생긴 축에 속한다는 이야기를 듣던차에 마치 괴물이라도 보는 듯한 반응을 보이니 내 입에서 나간 말투가 곱지 않을리가 없었다. 그 인어는 내 품에서 떨어져 나갔다가 내가 가만히 서서 그를 째려보자 그제야 이상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날 보더니 머쓱한 표정으로 밝은 은회색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까 갑판에 있을때는 그의 긴 머리가 완전히 뒤엉켜 뭉쳐있는 탓에 몰랐는데 그의 머리에도 장식품이 달려있는 거였다. '어휴... 머리에서 발끝, 아니 꼬리 끝가지 장식품을 안 단데가 없구만...' 그 모습에 기가막혀서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그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머리에 달아 놓은 장식품이 손에 걸렸는지 장식품을 빼내어 손으로 머리를 쓱쓱 빗어 정리한 다음 다시 장식품을 달았다. 그제야 머리가 단정해져서 앳되고 깔끔한 얼굴이 드러났지만, 나는 시큰둥하니 그 인어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인어는 머리를 매만지자 이제는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 손목의 팔찌 등등 몸에 착용한 장신구를 일일이 확인하다가 자신의 꼬리에 두툼하게 매여있는 붕대를 발견하더니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머쓱하게 웃었다. "저기..." 하지만 녀석에 대한 인상이 좋지 못했던 터라 나는 즉각적으로 퉁명스레 대꾸했다. "왜? 없어진 거라도 있어?" 나의 반응에 순간적으로 움찔 거린 그 인어는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며 헤헤 웃어보였다. "아뇨... 그게 아니라...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구요." 공손하게 인사까지 하는 그였지만, 한번 꽁한 마음이 풀리지 않았던 나는 여전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래." 이런 나의 반응에 그는 다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주위만 살펴보는데, 배 주위에 있던 다른 인어들이 우리를 발견했는지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런데 그 중 한 인어와 이번에 구해준 인어가 아는 사이인지 눈이 마주치자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는 거였다. "어?" "시, 시노웍?" "혀.. 형?" "시노웍~~!!" "혀어어엉~~!!" 그들의 놀란 외침 덕분인지 멀리 있던 다른 인어들또한 막 달려와 나는 인어들의 주위에 둘러쌓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인어들 중 물고기 떼에 혼자 들어갔던 인어의 모습도 보이는 거였다. '엑... 저놈 용케 일행을 안 잃어버리고 따라왔네? 체엣, 엉엉 우는 모습을 보게 되는 줄 알았더나미나...' 나는 그렇게 속으로 안타까움을 느끼며 그 인어대신 엉엉 울어주고 있는 두 인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혀어어엉~~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어어~~ 우에에엥~~~" "으흑흑~~ 나도 마찬가지야아아~~ 어흑흑... 이렇게 널 다시 보게 되다니이이~~" 그들은 한참이나 울다가 드디어 진정을 했는지 벌겋게 부어오른 눈을 나에게로 돌렸다. "훌쩍, 이, 이놈은... 제 동생입니다." 나는 철 없는 인어 녀석들에게 열받은 탓에 반말을 하게 되었지만, 인어들은 계속 나에게 존대를 해주고 있었기에 이제는 완전히 그렇게 굳어진 탓에 나는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이번에 새로 구한 밝은 은회색 머리의 인어를 바라보았다. "네가 여기 있다는 건 아마 인어들 섬이 가까워졌다는 이야기 같은데... 그럼 이 근처에 다른 인어들이 있는 거야?" 이제껏 다른 인어들에게 반말을 해왔는데 새삼 다른 인어에게, 그것도 나이가 더 어린 인어에게 존대를 하기가 또 어색해서 그냥 반말로 물었다. 사실, 아까도 기분이 안 좋았던 터라 처음부터 반말로 나갔고 말이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질문에 시노윅이라는 밝은 은회색 머리의 인어가 눈에 뜨일 정도로 움찔 거리는 거였다. 그래서 혹시나 이 녀석도 혼자 멀리 나온 케이스인가 싶어 녀석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아니나달라, 이 녀석이 자꾸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거였다. 그러자 나 대신 이 녀석과 얼싸안고 이산가족 상봉의 장면을 연출했던 형 인어가 자신의 동생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뭐냐, 시노윅... 너 혹시 혼자서 몰래 나온 거야?" 그러자 시노윅이라는 인어가 화들짝 놀라 얼른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 아니야. 형... 나는 분명히 허락 맞고 온 거라고." 하지만 형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지우지 못하고 자신의 동생을 물끄러비 바라보더니만 뭘 알았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지금 하고 있는 거..." 그러자 시노윅이 다시 흠칫 거리더니 이제는 숨길 수가 없었는지 배시시 웃어보였다. 그와 함께 형은 시뻘개진 눈 못지 않게 얼굴이 시뻘개지더니 동생을 향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너, 너, 너어어어~~ 또 혼자서 난파선의 보석 탐험에 나선 거냐? 내가 혼자 가지 말라고 도대체 몇번이나 말했어? 그런데 또 나왔던 거야?" "아니... 그게..." "하여간 정말 말 안 듣는 녀석이라니까? 너 집에 가면 혼날 줄 알아. 도대체가 바다 무서운 줄을 몰라요, 이놈이. 바다에는 얼마나 위험한 요소들이 많은줄이나 알아? 그런데 아직 능력도 미미한 놈이말이야, 혼자서 돌아다니다가 몬스터라도 만나면 어쩔 뻔 했어? 앙? 네가 아직 그런 일을 안 당해봐서 이렇게 기가 살았지? 엥?" 그렇게 내가 평소 인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마구 동생에게 퍼붓던 형 인어의 눈길이 동생 꼬리에 있는 붕대를 발견하고는 눈이 둥그래져서 동생의 양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이거, 이거 왜 그래? 응? 이거 어디서 다친 거야?"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형에게 마구 흔들리는 바람에 제대로 대답도 못해주는 동생을 위하여 내가 대신 대답했다. "일에게 깨물려서 그래." 내 말에 형 인어의 몸이 일순 굳더니 그의 무시무시한 시선이 다시 동생에게로 향했다. "너, 너어어어~~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어? 혼자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지? 그런데 왜 말 안 들어? 응? 응? 하여간 내 그러 줄 알았어. 저 분이 안 도와줬으면 어쩔 뻔 했어?" "자, 잘못했어 혀엉~ 다시는 안 그럴께에~~ 응? 그러니 제발 놔줘어~~" 앞뒤로 연신 흔들리면서도 동생이 애절하게 외치자 그제야 진정한 듯 형이 동생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너, 집에가서 두고보자. 이번 일은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무지 기가막혔다. '남말하고 있네... 자기도 멀리 나왔다가 노예매매상에게 붙잡힌 주제에...' 그렇게 한바탕 형과 아우의 소동이 끝나는 것 같자 인어들은 또 흩어져서 배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새로운 인어를 만났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들떠 보였다. 하기야, 그 인어가 혼자 멀리 나왔다고 해도 어린 인어가 혼자 올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자신들의 고향이 있다는 소리였으니 당연할터였다. 그렇게 인어들이 삼삼 오오 흩어지고 형은 아우의 곁에서 찰싹 붙어서 데리고 다니려는 듯 폼을 잠는데 시노윅이라는 인어가 그러한 형을 잠시 제지하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 이 녀석이 왜이러나...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 애가 주저주저 하더니 나에게 자신의 목에 걸린 줄 하나를 꺼내어 주는 거였다. "응?" 어리둥절하기는 했지만, 주는 걸 마다하는 성격이 아니라 나는 그가 주는 걸 받아들었다. 그러자 녀석이 헤헤 웃으며 말하는게 아닌가? "절 구해드린 답례로 드리고 싶었어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옷, 이 녀석은 그래도 다른 녀석들보다는 났네.' 라고 기특하게 생각하고 싶었지만, 녀석의 폼을 보아하니 다른 목걸이들은 모두 줄 조차 화려하게 장식된 금줄, 혹은 백금줄인데 지금 주는 건 줄은 낡은 가죽끈이었고, 팬던트는 시커머튀튀한 금속에 보석이 몇개 박혀 있는 거였다. 그러니까 녀석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다른 목걸이들 중에 가장 안 예쁜 걸로 골라준 것이다. 그래 기가막힌 나는 녀석에게 말했다. "널 구해준 건 나지만, 치료해준 건 다른 분인데 나에게만 주면 어쩌지?" 그러자 내 말에 흠칫한 녀석은 무지 망설이더니만 자신의 팔뚝에서 여러개의 팔찌 중 하나를 빼서 나에게 건넸다. "그, 그럼... 이걸 그 분께..." 그리고는 내가 뭐라 더 말할까봐 두려운지 잽싸게 몸을 돌려 형에게 다가가는 거였다. 그 모습에 나는 기가막혀 하면서도 녀석이 준 걸 살펴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것들은 그 녀석이 가지고 있는 장식품 중 가장 초라한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은은한 마나가 감지되는 것이 아무래도 마법이 걸린 물품인 듯 싶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아무리 초라한 것이라도 마법이 걸린 물품은 엄청 화려한 장신구보다는 몇배나 가치가 있는 거였다. "뭐, 화려한 걸 좋아하는 인어에게는 별 소용이 없는 걸라나? 어차피 인어들이 마법을 쓴다는 소리도 못 들어봤고 말야." 그러면서 나는 그가 준 물품을 주머니에 잘 넣어뒀다. 아직 마법에 대한 지식이 낮은 나로써는 이것들에게 걸려있는 마법이 뭔지 알아낼 수 없었기에 조금 있다가 가레스에게 보여줄 참이었다. 물론, 저 인어가 가레스에게 준 팔찌도 전해줄 겸 말이다. "훗... 그래도 다른 인어들보다는 났네. 다른 인어들은 아마 고맙다는 말만 하고 지나쳤을 텐데... 아직 어려서 순진해서 그러는 건가?" 제 18화 엔더비 산맥 (1) 그날 저녁 나는 한명 더 늘어난 인어들을 배 위에 데려다주고는 가레스를 찾아갔다. 그는 마일즈와 같은 방을 쓰고 있어서 나는 마일즈가 보고 있는데 나와 가레스만 받은 마법 물품을 보이고 이야기 하는게 쫌 꺼름직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계속 가지고 있으면 안될것 같아서 그냥 그날 저녁 찾아간 거였다. 방 문을 노크하자 기다리라는 가레스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그가 직접 방문을 열어주었다. "엥? 네가 왠일이냐?" 방문을 연 가레스는 나를 보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자신의 방에 들어오도록 비켜서줬다. "실례하겠습니다." 선실로 들어가니 다행이도 마일즈는 린제이 방에 갔는지 없었고 가레스 혼자 마법책을 읽고 있다가 나를 맞았는지 방 가운데 있던 탁자 위에 마법서가 펼쳐져 있었다. 내가 선실을 슬쩍 둘러보자 가레스가 오해를 했는지 웃음기 어린 어조로 말을 건넸다. "저런, 마일즈를 찾아온 거냐? 그녀석 지금 데이트 가고 없는데..." 그말에 나는 황급히 가레스를 돌아보며 부정했다. "아하하.. 아뇨. 가레스님을 뵈로 온 거예요." "응? 나를? 왜? 아, 이런 손님을 계속 서 있게 했군. 이리로 앉아라." 다시 한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마일즈는 내가 서 있는 모습을 보더니 아차 싶은지 작은 탁자로 나를 안내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나는 마일즈가 오기 전에 용건을 끝내야겠다 싶어서 단도직입적으로 본론부터 꺼냈다. "아까 낮에 가레스님이 치료해주신 인어 기억하시죠?" "내가 치료해준 인어? 아아... 그래, 그 장식품을 주렁주렁 달고 있던 녀석?" 바로 오늘 낮의 일이니 가레스가 기억 못할리가 없었다. "예, 그런데 그 인어가 치료해줘서 고맙다고 가레스님께 이걸 전해달래요." 그 말을 하면서 나는 팔찌를 그에게 건넸다. "흐음... 이 팔찌를 말이냐?" 아무 무늬가 없는, 내 새끼 손가락만한 굵기의 단순한 링 모양의 금팔찌였지만, 자세하게 살펴보면 팔찌 안쪽에 아주 자잘하게 무엇인가가 음각되어 있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이것도 사실 내가 그 팔찌에서 마나가 느껴져서 세세하게 살펴보다가 알아챈 거였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몰랐을 거였다. 가레스 또한 그 팔찌를 받아 드는 순간 그 팔찌에 어려 있는 마나를 눈치챘는지 표정이 진지해졌다. "아무래도... 제가 보기에는 마법이 걸려 있는 듯 해요." "그렇구나. 잠시만..."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팔찌를 자세히 살펴본 가레스는 곧 팔찌 안쪽에 음각되어 있는 걸 발견했지만, 너무 작게 새겨져 있어 잘 보이지 않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쪽 침대 옆에 있던 커다란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쪽 침대를 가레스가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그 곳에서 자그마한 확대경을 꺼내더니 다시 탁자로 돌아와 눈에 확대경을 끼고는 팔찌 안쪽을 아까보다 더 자세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흐음... 이런... 어두워서 잘 안보이는 구만. 라이트!" 하지만 곧 등불만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지 마법을 써서 빛의 구를 하나 만들어 낸 뒤에 다시 살피는 거였다. 너무 집중하고 있는 그 모습에 나는 감히 말을 건네지도, 심지어 함부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숨을 죽여 그가 다 살펴보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기를 거의 30분이 지났을 무렵, 팔찌를 천천히 돌려가며 그 안에 음각된 무언가를 다 읽은 가레스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확대경을 눈에서 떼었다. "훗... 그렇군." "뭔데요? 무슨 마법이 걸린 거죠?" "레비테이션이 걸려 있구나. 흠, 괜찮군." 역시 그 또한 마법사라서 그런지 낮은 클래스의 마법이 걸려 있다고 하나 마법 아이템을 얻게 된 것이 무지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레비테이션 마법은 물체나 사람을 떠오르게 하는 마법으로 2클래스 마법에 속한다. 뭐, 3 클래스의 플라이 (날아다니는 마법)을 익힌 사람에게는 별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여러 상황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고 내 마법 스승 노만이 말해줘서 나도 익혀놓고는 있다. 이 마법은 그냥 위로 떠오르게만 할 뿐 양 옆으로 이동은 못하는 거라서 높은데서 떨어질 때 안전하게 착지할 수는 있게 해주지만, 그 외에 어디에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가레스가 기분 좋아하니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틈을 타서 내가 받은, 팬던트를 꺼내들었다. "저기..." "응?"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는 가레스를 향해 나는 멋적게 웃으며 그 커다란 팬던트를 그에게 보였다. "저도 이것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이것에도 마나가 느껴져서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뭔지 잘 모르겠어서 말이죠." "어디, 이리 줘봐라." 가격으로 치자면 아무래도 가레스가 받은 팔찌 보다는 내가 받은 팬던트가 조금 더 비싸 보였다. 예쁘지는 않더라도 보석이 6개나 박혀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팬던트의 모습을 보자마자 가레스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해버리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혹시나 내가 더 비싼 걸 받아 가레스가 마음이 상한 줄 지레 짐작하고 그걸 왜 그에게 보여줬을까 하며 마구마구 후회하는데 내가 그러건 말건 가레스는 다시 확대경을 눈에다 대고 그 팬던트를 살펴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내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갔지만, 그가 뭐라고 할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한참을, 그러니까 팔찌 살펴보는 시간 보다 더 오랜 시간이 흐르자 가레스는 긴 한숨을 내쉬며 팬던트로부터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그가 뭐라 말할까 겁이 나 초긴장한 상태로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후우... 이거 참..." "왜, 왜요?" 그런데 처음 나오는게 무지 난처하다는 목소리였기에 나는 위가 조여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끄응..." 가레스는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서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팬던트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이거 참... 어떻게 보면 대단한 물건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실패작인 것 같기도 하고..." "실패작이요?" 실패작이란 말에 나는 일순 그걸 나에게 건넨 시노윅이란 인어 녀석에 대한 괴씸함이 치솟아 올랐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가레스는 낮은 클래스라고 해도 확실한 마법 아이템이고 나는 조금 더 비싸 보여도 실패작이니 가레스의 맘이 크게 상하지는 않을거 같아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 되었다. 그래 차라리 정말 실패작이길 바라며 묻자 가레스가 팬던트를 내 쪽으로 좀 밀어 나도 잘 보이게 한 후 설명했다. "이걸 보면 말이다..." 그러면서 그가 가르키는 건 팬던트 앞면의, 6개의 보석이 박힌 곳이었다. "여기 있는 보석들은 각각 마법으로 가공되어 꽤 많은 마나를 가지고 있는 마법석이다. 그게 하나도 아니고 6개를 박아놓은 걸 보니 엄청난 물건을 만들려는 것 같거든?" 마법석은 보석을 마법으로 가공해 놓은 것을 말한다. 보통 마법사들이 마법 아이템을 만들때 많이 사용하는 것이 보석인데, 이건 예쁘게 보이거나 비싸게 받아 먹으려는 것의 여부를 떠나 보석이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마법을 가공할때 필수적으로 재료에 마나를 집어 넣어야 하는데 강도가 약한 것들은 마나를 받아들일때 견디지 못하고 깨져버리기 일수다. 보통의 철이나 돌의 경우에도 마나 주입할 당시에는 견딜 수 있을지 모르나 며칠 못가 마나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깨져버릴 정도니 일반 나무나, 유리 등등은 엄두도 못내는 것이 당연했다. 뭐, 철이나 돌은 마나를 주입할 때 견딜 수 있으니 정 그것을 사용하고 싶으면 (예를 들면 마법검을 만들때 말이다.) 계속 마나의 힘을 견딜 수 있도록 강도 강화 마법을 따로 걸어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생략하고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보석이라 마법석 하면 대부분이 보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이 마법석은 얼마나 많은 마나를 품고 있느냐, 어떤 마법이 저장되어 있느냐에 따라 원 재료 값보다 적게는 수십배에서 많게는 수백, 혹은 엄청 대단한 마법이 있을 경우 수천배 더 비싼데, 그러한 마법석을 6개나 모아 박아뒀으니 엄청난 물건을 만들려고 했다는 건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왠만한 마법 아이템에도 마법석이 두개 이상 들어가지 않는다는 걸 봐서도 말이다. 뭐, 사실 내가 이제까지 본 마법 아이템이 몇개 없지만서도... '그러고보니 엄마가 물려주신 반지도 마법 아이템이었지? 아하하하...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네...' 속으로 실소를 흘리는 그 와중에도 가레스의 설명이 계속 들려왔기에 나는 얼른 그의 말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 6개의 마법석이 오성망 마법진을 이루고 있어. 봐라, 다섯개의 보석이 별 모양의 꼭지점에 위치해 있고, 가운데 하나가 버티고 있지? 아마 이 마법진이 움직인다면 엄청난 마나가 나올 거야. 최소한... 5, 6서클 정도는 무난하지." "헤에, 그래요?" 5 서클이라면 가레스와 같은 경지지만, 6서클이라면 그보다 한 단계 높은 경지다. 그리고 그 정도만이라고 해도 마법 세계에서는 무지 괜찮은 마법사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겉으로 드러난 이 마법진 말고도 또 다른 마법진이 있는 거 같아. 아무래도... 이 팬던트 안에 있는 듯 한데... 아마 이 팬던트는 두개의 판을 겹쳐서 만든 걸 거야. 그런데 문제는..." "문제는요?" 가레스가 잠시 말을 끊자 나는 다급해져서 얼른 그의 말을 재촉했다. 하지만, 이런 내 심정을 무시한 채 그는 찬찬히 팬던트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문제는 이 결과물이 실패작인 것 같다는 거지. 아니면 아직 완성되지 못했거나... 어떤 마법진이든지 다른 마나가 치고 들어오면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하는데 이건 전혀 반응이 없거든. 마치 보통 돌이나 나무처럼 말야. 그렇다고 마법진이 온전히 드러나 있지 않으니 뭘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요?" "그래. 뭐, 내가 보기에는 실패작인 것 같다만... 이것 좀 보거라." 그러면서 가레스가 가르킨 것은 팬던트의 옆면이었는데 거기에는 멋드러진 글씨체가 양각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멋드러진 글씨체에 비해 내용은 조금 장난스러운 것이었다. "'위대한 현자이자 천재 마법사인 아름답고 우아한 맥키니언 데모스테네스님'? 이건 이걸 만든 돈이 무지 많아 넘쳐나는 어떤 멍청한 녀석이 만들다 실패하니까 자화자찬 하기 위해 재미삼아 새겨 넣은게 틀림 없어. 내 이때까지 위대한 현자이자 천재 마법사란 칭송을 받는 이들 중에 맥키니언 데모스테네스란 자가 있다는 말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하.하.하..." 가레스의 한심하다는 말에 내가 어색하게 웃자 가레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마도 이걸 만든 녀석은 다시 부시려고 했나보다. 하지만, 뭐 어쩌다보니 이렇게 온전히 남아 네 손에 들어왔구나. 그래, 너도 마법 공부한다고 했었지?" 팬던트를 만지작 거리다 다시 나를 보며 묻는 가레스에게 나는 얼른 대답했다. "예, 아직 낮은 클래스까지 못 익혔지만요." "뭐, 그걸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요는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느냐니까. 어쨌든, 내 결론은 그러니까 그냥 가지고 있다가 돈 없을때 여기 있는 마법석이라도 팔아 먹거라. 하긴, 그것 만으로도 너는 엄청나게 횡재한 거다." 가레스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장난스레 눈을 찡긋 거렸다. 그 모습에 그가 내가 더 비싼 거 받았다고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는 기색은 없어 나는 안도감으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18화 엔더비 산맥 (2) 가레스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장난스레 눈을 찡긋 거렸다. 그 모습에 그가 내가 더 비싼 거 받았다고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는 기색은 없어 나는 안도감으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팬던트를 다시 받아들때 느껴지는 묵직함을 생각하면 가격도 가격이지만, 여차할 때 무기로 써도 무방할 것 같았다. 마법석이라는 이름은 돌보다도 단단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트레이드 마크니까 말이다. 하지만 계속 그걸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는 무겁고, 그렇다고 소지품에 넣어두고 다니자니 엄청 비싼거라 불안해서 팬던트에 달려 있는 가죽끈을 새로 갈아 목에 걸고 다녔다. 처음에는 목에 묵직한 무게감 때문에 몸까지 휘청일 것 같았지만, 배 위에서는 내가 크게 움직이는 것도 없는 일이라 크게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며칠 지나자 차차 익숙해져서 괜찮아졌다. 그러는 동안 우리 일행은 순풍을 받아 빠르게 항해를 할 수 있었고, 드디어... 드디어 인어의 영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처음에 목표를 인어의 섬으로 잡았기는 했지만, 그건 바다 위에는 이정표가 없어서 목표로 삼은 것 뿐이고, 인어의 섬 근처에는 암초가 많아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배 처럼 큰 배가 다가가기도 힘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인어의 섬이라고 불리는 것도 커다란 바위가 바다 위로 빼꼼하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라 그 위에 장정 열명 정도밖에 올라가 있지 못할 크기었다. 바위치고는 무지 큰 편이지만, 섬이라고 하기에는 무지무지 작은 축에 속하는 것이라 처음 부터 그 위에 올라가서 인어들과 협상을 하기도 어려운 환경이라 우리 배는 인어 영역의 근처에 도달하자 멈춰서서 닻을 내렸다. 그리고 나는 인어들을 데리고 배 옆 수면 위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고, 인어들과 협상을 할 레이언과 또 한명의 사무요원,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마법사들을 비롯한 무사들이 갑판위로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자 잠시 후에 기다렸다는 듯이 배 앞쪽 바다 위에서 세명의 인어가 불쑥 솟아 올랐다. 그걸 기다리고 있었던 듯, 레이언 녀석은 인어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그들이 뭐라 하기 전에 다급하게 외치는 거였다. "베지테크스 상회에서 나왔습니다. 족장님을 뵙고 싶습니다." 뭘 저렇게 다급하게 말하나 싶어 황당하게 레이언 녀석과 인어들을 바라보는 사이 세 인어 중 가운데 있던 인어가 배에 걸린 베지테크스 상회를 상징하는 깃발과 레이언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인어들만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던 레이언 녀석이 다급하게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서 기다고 있겠습니다. 부디 족장님을 모셔와 주십시오." 아마 그 인어는 족장님을 모셔올테니 여기서 기다리라고 말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걸 레이언이 잽싸게 가로채며 말하자 불만인 듯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화내는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자신의 양 옆에 있는 두 인어를 데리고 바다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거였다. 그 모습에 왠지 모르겠지만 잔뜩 긴장한 채 갑판 위에 있었던 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거였다. "뭐, 뭐야?" 왜들 그러는지 이해를 못해 나는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는데 마침 레이언 근처에 있던 가레스가 레이언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잘했다, 잘했어." 뭘 잘했다는 지 모르겠지만, 레이언은 그런 가레스의 말에 씨익 웃어보이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아아... 정말 긴장했어요." 그 모습에 의아함이 더욱 더 커진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갑판 위를 향해 외쳤다. "뭐야? 도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는 거야? 나도 좀 알게 설명좀 해봐!" 그러자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던 레이언이 머리를 긁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그게... 핫핫핫... 인어들의 목소리는 물속에서 들으면 아름답지만 물 밖에서 들으면 그렇잖아..." 그의 말을 듣던 나는 일순 황당해졌다. "뭐냐... 그러니까.. 아까 그렇게 잔뜩 긴장한 채 급하게 말했던건... 인어들이 말할 틈을 안 주려고 그랬던 거란 말야?" "아하하하... 말하자면 그런 거지..." 레이언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옆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인어들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들은 지금 고향에 돌아 왔다는 감격에 폭 빠져 옆에서 뭔 이야기를 하던 말던 상관 없는 듯 했다. "나원 참... 그러면 이전에는 어떻게 대화를 한 거야?" 그런 레이언과 인어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나는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장난삼아 말하는 듯 해도 그 어조에 절절한 감정이 들어 있다는 걸 눈치 챈 나는 그런 거에 질색하는 그들의 모습이 웃겼지만, 그렇다고 이해 못하겠는 것도 아니었기에 놀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확실히, 물 밖에서의 인어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걸 이해하기에 아까 그 인어도 불만인 듯 했지만 그냥 물러나준게 아니었을까? 뭐, 내가 좋을대로 해석한 거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그 인어들이 자신들의 족장을 부르러 간 사이 대략 30여분쯤이 흘렀을까, 우리가 여기 도착했을 때 맨 처음 나와서 맞아(?) 준 인어가 아닌 다른 인어들의 모습이 하나 둘 바다 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다가오지는 않고 약간 떨어진 곳에서 우리쪽만, 정확히 말하면 내 옆에 있는 인어들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내 옆에 있는 인어들과 가족인 듯 한데, 그렇다면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가족의 얼굴을 보게 되었으니 기뻐해야 할텐데 내 옆에 있던 인어들은 그러기는 커녕 괜히 하늘이나 바다 속을 살펴보며 그들의 시선을 피하는 거였다. 그래 순간적으로 황당해 얘들이 왜 이러나 싶었지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하게 달려 나온(?) 인어들의 시선에는 다시는 볼 줄 알았던 가족을 만난 기쁨도 있었지만, 그 기쁨 못지 않은 분노도 같이 존재했던 것이다. 하긴, 여기 있는 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안 듣고 젊은 혈기로 인하여 멀리 멀리 나갔다가 노예 매매 상에게 잡힌 이들이 었으니 말이다. 부모님 말 안 듣고 멀리 나갔다가 늦어서 경찰 아저씨의 인도를 받아 집으로 돌아온 말썽꾸러기의 심정일거다. '쿡쿡쿡... 기쁨 보다는 두려움이 앞서 존재하겠지?' 내가 데려온 인어들의 가족들이 다 온듯 더 이상 바다 위에서 인어들이 솟아 오르는 것이 멈추고 잠시 시간이 지나서 맨 처음 우리를 맞이한 인어들이 다른 인어들을 데리고 솟아 올랐다. 그 인어들 중 머리에 금테를 쓰고 있는 한 인어가 앞으로 나왔다. 아마 그 인어가 족장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 족장이 채 앞으로 와 입을 열기도 전에 레이언이 먼저 나서서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족장님. 갑작스레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대화를 나누면 안되겠습니까?" 그러자 족장 인어가 멈칫 하더니 의아한 시선으로 레이언을 바라보며 뭐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먼저 레이언이 잽싸게 그의 말을 가로채며 입을 열었다. "뭘 걱정하시는지 압니다만, 저희 일행중에 물의 정령을 다루는 자가 있어서 제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에 어려운점은 없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허락해주셨으면 합니다." 레이언 녀석이 왜 그러는지 알아챈 듯 족장 인어는 피식 웃더니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주고 자신이 먼저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자, 이러한 이유로 잘 부탁해 해인아." 족장 인어가 바다 속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레이언은 곧바로 나에게 시선을 돌려 한 마디 하는 듯 하더니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옆에 있던 사무요원의 뒷덜미를 잡고 그대로 배 위에서 뛰어내렸다. "우아앗, 야 임마~!!"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놀라기는 했지만 떨어지는 그들을 못 잡아줄 건 아니었다. 날 이렇게 놀라게 하는 괴씸죄를 적용하여 그냥 바다에 빠뜨려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사무 요원의 품에는 이번 거래를 위한 서류가 안겨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이 바닷물에 닿기 전에 잡아줬다. "하하하, 고마워. 자 이제 우리도 들어갈까? 족장님을 기다리게 하는 건 실례라고." 정말 오랜만에 레이언 녀석의 능글맞은 표정을 보는 것 같았다. 하기야, 그 동안 이 녀석도 인어섬에 도착할때까지 나름대로 긴장하고 있다가 드뎌 조금 긴장을 풀었다는 뜻일 것이다. "웃기고 있네." 나는 이죽거리면서도 순순히 운다인(물의 중급 정령)을 불러내어 레이언 녀석과 사무 요원을 보호하게 하며 밑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데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요." 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가 다가가자 족장 인어가 먼저 말을 건네왔다. "그건 족장님도 마찬가지 아니신지요. 그 모습은 여전하십니다." 레이언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녀석 특유의 능청스런 목소리로 대답하자 족장 인어가 피식 웃었다. "당신의 말투 또한 여전합니다. 어쨌든, 다시 만나서 반갑고, 제 동족들을 무사히 데리고 와 줘서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약간 기가막혔다. 레이언 녀석이야 인간 세상에서 상회를 운영해 나가니 다른 이들을 대할 때 겉치례에 불과한 인사를 하기도 하지만, 족장 인어까지 그런 말을 주고받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긴, 내가 인어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고 - 그동안 당한 거에 의하면 무지 철없다는 것 외에 - 내가 상대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나는 곧 그 감정을 접고 그 곳에서 물러났다. 어차피 운디네야 내가 여기 없어도 정령계로 돌아가지 않을테고, 그렇다고 내가 족장 인어와 거래를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 레이언 옆에 있던 사무 요원에게 살짝 눈짓한 나는 그 둘을 감싸고 있던 운디네에게 그들이 부탁하는대로 하라고 말해놓고 위로 올라왔다. 그러자 갑판 위에서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던 가레스가 날 발견하고 물어왔다. "끝난 거냐?" "아뇨. 그냥 뒤에서 지켜보는 것도 지루해서 그냥 나만 올라 왔어요." 가레스에게 대꾸하며 나는 허공을 훌쩍 날아올라 갑판 위에 내려섰다. 물론, 내 힘으로 한 게 아니라 엔다이론이 그렇게 해준 거지만... "야... 이제 너도 좀 쉴 수 있겠다. 그 동안 매일 불려 나와서 나 태우고 다니느라 정말 고생했다. 내일 부터는 당분간 그럴 일도 없을테니 돌아가서 푹 쉬어라." 이제 인어들을 넘기고 나면 매일 아침마다 바다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을테니 그런 인사를 한 거였다. 내가 엔다이론의 등을 쓱쓱 쓰다듬고 그를 정령계로 돌려보내자 내 말을 듣고 있었던 듯 잭슨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아... 정말 그 동안 고생했어. 어휴, 사실 여기까지 어떻게 견디면서 왔는지 신기하다니까." "얼씨구... 네가 왜 살아다는 표정을 짓냐? 그 동안 인어들을 끼고 살았던 건 바로 나라고." 잭슨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는 말에 내가 기가막혀 녀석을 흘겨보자 그가 하하 웃었다. "아하하하... 나도 마음으로 같이 애써줬다는 거지. 내가 네 고생을 잘 아니까 힘내라고 마음속으로 얼마나 응원을 해줬는지 알아?" "쳇, 아프지 말라고 빌었었겠지. 내가 아프면 네가 내 대신 인어들을 데리고 있어야 하니까." "아하하하, 짜식이 그런 걸 가지고 뭘... 내 돌아가면 한턱 쏠테니 그만 맘 풀어. 게다가 이제 저 인어들과도 작별이잖냐." "그래, 이제 정말 작별이다. 아아, 난 다음에 이 운행에 끼고 싶지 않아. 만약에 나 보고 다시 참여하라고 하면 월급을 세배로 줘야 한다고 할 거야. 뭣도 모르고 참여했다가 정말 고생 무지 많이 했잖아?" 그렇게 내가 투덜투덜 대는 동안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던 몇몇 무사들 사이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온다!" "빨리, 빨리 받을 준비 해!" "어이, 이쪽으로 모이라고!!" "뭐, 뭐야?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야?" 무사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에 내가 또 의아하여 묻자 잭슨이 씨익 웃으며 설명해줬다. "뭐긴 뭐야, 힘들게 왔으니 댓가를 받는 거지." "엥?" '이건 또 무슨 말이야?' 하지만 그 질문을 입 밖에 내기도 전에 나는 굵은 물줄기가 커다란 궤짝들을 든 채 솟아 오르더니 그것들을 갑판 위에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았다. "에엑~!!" 내가 입을 떠억 벌리는 사이 여러개의 물줄기는 계속해서 올라와 물건들을 갑판 위에 계속 떨어뜨렸다. 쿵, 쿠쿵, 쿠당탕탕~~!! "에엣, 좀 사살 내려 놓으란 말이다!!" "어, 거기 거기.. 그건 받아. 그냥 떨기지 못하게 해!!" "아앗, 여기 찌그러졌잖아?" 제 18화 엔더비 산맥 (3) 쿵, 쿠쿵, 쿠당탕탕~~!! "에엣, 좀 사살 내려 놓으란 말이다!!" "어, 거기 거기.. 그건 받아. 그냥 떨기지 못하게 해!!" "아앗, 여기 찌그러졌잖아?" "이봐, 거기 빨리 저쪽으로 치워! 또 떨어지잖아!!" "아앗, 좀 천천히좀 줄 것이지...!!" "바로 저것 말이다. 인어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댓가지." 가레스는 그 모습을 가르키며 히죽 웃었다. 하기야, 물을 다루어서 물건을 건넬 수 있는 이가 여기에서 나 외에는 인어들 밖에 없겠지만, 그 힘을 이용해 물건을 옮기다니 좀 황당하기도 했지만, 인어들이 사용할 만한 방법 다워 나도 가레스처럼 히죽 웃었다. 바다에서 부터 물줄기에 휩싸여 허공에 떠올랐다가 갑판 위로 떨어지는 물건들은 다양했다. 뭐가 들었는지 모를 궤짝부터 시작하여 녹이 슬고 찌그러진 투구에다 물이끼가 잔뜩 붙어 무슨 그림이 그려져 있는지도 모를 액자까지... 무사들은 허공에서 떨어지는 그 물건들이 갑판에 부딧히기 전에 받거나 아니면 떨어진 물건들을 재빨리 주워다가 갑판 구석으로 옮겨놨다. 그렇지 않으면 그 다음 허공에서 떨어지는 물건들과 부딪힐 위험이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사들은 아주 익숙한 듯 한 마디씩 투덜 거리면서도 아주 재빠른 손길로 떨어지는 족족 잽싸게 옮겨 놓아 물건끼리 부딪히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허공에서 떨어지는 물건들이 - 내 눈에는 솔직히 잡동사니들로 보였지만... - 작은 언덕을 이루었을 무렵 더 이상 줄 물건이 없었는지 바다 위에서 물줄기가 물건을 들고 솟아 오르는 일이 멈췄다. 그 대신 내가 불러낸 운다인에게 보호 받으며 물 속에서 족장 인어와 이야기를 하던 레이언과 다른 한명의 사무요원이 바다로 부터 나와 갑판위에 올라섰다. "이야기는 잘 끝났나 보지?" 열심히 일하는 무사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하여 갑판 한쪽 구석에 가만히 서 있던 가레스가 다가가며 묻자 레이언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안될 이유도 없으니까요. 그냥 예전에 맺었던 계약을 다시 확인하고 약간 수정하는 작업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냐? 그럼 이제 출발할 수 있는 건가?" "아뇨, 아마 빨라야 내일 쯤에나 출발할 수 있을 겁니다. 물건은 확인해야 하니까요." "물건을 또 확인해? 거래하는게 한 두번도 아닌데 알아서 줬겠지." "그래도 확실하게 해야죠. 만약 확인도 안 하고 그냥 출발했다는 걸 크리스 녀석이 알았다간 저는 그날로 죽습니다." "헹, 크리스 녀석 핑계 대지 말거라. 크리스 녀석이 그런 말 안 했어도 네 스스로가 했을 것 아니냐?" "하하하..." 가레스가 녀석을 살짝 흘겨보며 말하자 레이언은 그걸 부정하지도 않은 채 그냥 웃어 넘기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자니 평소 대충 대충 지내는 것 같지만 괜히 크리스가 그를 상회 대표로 세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그날 늦은 저녁까지 갑판 위에서는 인어들이 건네준 물건들을 확인하는 작업이 벌어졌다. 거기에는 가레스를 비롯한 마법사들과 잭슨까지 동참했지만, 나는 아직 물품 감정을 할 줄 몰랐기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냥 옆에서 멀거니 구경만 했다. 처음에는 나 같은 인력을 낭비하는게 아까웠는지 감정된 물건을 더 이상 상하지 않게 물기를 말릴 겸, 표면에 붙은 물이끼를 닦는 작업을 시켰는데 내가 또 의욕이 넘쳐서 깨끗하게 닦으려고 빡빡 문지르는 걸 보고 기겁하며 뺏더니 그 뒤에는 아무것도 안 시키는 거였다. 뭐, 덕분에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있었지만... 하지만 오래 바닷물에 잠긴 채 있어서 잔뜩 녹이슬고 해초까지 덕지덕지 묻은 갑옷이라던지 투구까지 아주 소중한 것인 양 유리처럼 조심스레 다루는 모습이 되게 웃겼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옛날 금화라던지 아니면 금, 은 보석으로 꾸며진 귀중품들도 대거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것들이야 내가 보기에도 비싼 것들일테니 조심스레 다루어지는 것은 이해 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아무리 골동품이라지만, 이 세계에서는 1000년 된 유품들도 흔하던데 저런 낡은 갑옷을 누가 비싼 돈을 주고 산다는 건지... 뭐, 한국에서라면 비싸게 팔지도 모르겠다. 티비 같은데서 보면 유럽의 어떤 부자들은 그렇게 오래된 갑옷이라던지 검 같은 걸 취미로 수집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 같으면 돈 주고는 안 살거 같다.' 그때 이런 내 생각을 뚫고 린제이가 마일즈에게 건네는 말이 들려왔다. "호오, 이것 괜찮은 걸 건졌는데요?"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은 다른 물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녹이 슬고 낡고, 거기다가 찌그러지기 까지 한 투구였다. 그 투구는 안면 가리개가 없어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 머리만 보호하게 되어 있었는데 얼굴이 드러나게 뚫린 구멍쪽의 테두리를 부드럽게 쓸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여기좀 봐요. 백금을 입혀놨군요. 거기에다가 이 가운데 박힌 건 제법 큰 오팔인데요?" 정정해야겠다. 저런 보석들이 있으면 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드디어 다음날 우리는 인어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그 곳을 떠나 엔더비 산맥으로 향했다. 나는, 이번 항해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아침에 갑판에 서서 푸른 하늘과 바다, 그리고 열심히 배웅하느라 손을 흔드는 인어들을 바라보며 배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 정말.. 이게 정말로 배를 타는 거지. 그 동안은 내가 운송에 참여하는 건지 운송을 쫓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니까.' 점점 멀어지는 인어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잭슨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 드디어 헤어졌구나. 이제 저들을 다시 만나려면 3년을 기다려야 하나, 5년을 기다려야 하나..." 기지개를 쭉 펴며 시원하다는 듯 말하는 그를 향해 나는 씨익 웃었다. "뭐야? 섭섭해? 그럼 당장이라도 다시 만나게 해줄 수는 있는데..." "사양할랜다. 이왕 다시 만날 거면 아주 오래, 오~~ 래 있다가 만났으면 좋겠어." "키득키득키득, 동감이야." 서로 동질감이 가득 담긴 시선을 교환하며 둘이 웃는데 나는 문득 내 옆에 조용히 서 있는 듀비의 모습을 발견하고 의아함을 느꼈다. 뭐, 듀비가 내 곁에 있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뭐랄까... 그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던 것이다. 평소 내 곁에 있을 때에는 항상 나에게 시선을 주고 있지 않아도 나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내 옆에 있어도 내가 있는 줄 아는건지 모르는 건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바다 저 너머만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거였다. 그 동안 항해를 하면서 나는 인어들에게 시달리느라 마음 편하게, 운행을 시작하기 전 처럼 그와 같이 있어본 적이 없었기에 배에서 항상 이러고 있었는지 아닌지도 몰랐기에 이런 그의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듀비?"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무지 조심스럽게 그를 불러봤다. 그가 내 곁에 있는 게 불편하기는 했지만,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린다고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런 그의 모습이 신경쓰였다. 왜 사람도 평소 안하던 짓 하면 오래 못 산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그래 혹시 무슨 일이 있는건가 싶어 그를 불렀더니 예의, 평소와 다름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 나를 향했다. "예?" 그 모습을 보니 아까 내가 느꼈던 그런 이상한 모습은 사라지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듀비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어 나는 내가 잘못 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왕 부른거 한번 물어보자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음, 혹시 무슨 일 있어요? 뭔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가라앉아 보여서..." 그러자 오히려 듀비가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아뇨, 별 일 없습니다만... 제가 이상하게 보였습니까?" 그렇게 되묻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나는 삐질삐질 웃으며 그냥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아니예요. 제가 잘못 봤나 보죠. 아무 일 없으면 됐어요." "왜, 무슨 일인데 그래?" 옆에 있던 잭슨이 갑작스런 내 질문에 의아했던지 물어왔지만, 이번에도 그냥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아냐, 내가 잘못 봤나봐."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니 헛게 보이냐?" "그동안 하도 시달려서 몸이 허해진거 같아. 몸 보신이라도 해야 할까봐." "쿡쿡쿡, 그래 우리 돌아가면 맛있는거 많이 많이 먹자고." "훗, 네가 한턱 내기로 했었지? 난 잊지 않았다고." 듀비가 괜찮다고 해서 그런지, 나는 내가 잘못 본 거라 치부해버린 뒤 잭슨이 걸어온 장난에 맞대응하며 킥킥 거렸다. 제 18화 엔더비 산맥 (4) 그 뒤로 우리는 일주일동안 정말 평화로운 항해를 계속 했다. 그 동안 항해한 것 처럼 깊은 바다 위를 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 인어들을 데려다 줬으니 마지막 종착지점인 엔더비 산맥을 향해 가는 것이었기에 점점 얕은 바다로 다가가고 있는 상황이라 더 이상 바다 몬스터들이 습격해오는 일도 없었다. 하기야, 그 동안 바다 몬스터들을 유혹(?)해서 우리를 습격하게 만든 원흉이었던 인어들이 없으니 더욱 더 습격 받을 확률이 낮아졌을 거다. 그래 나는 그 동안 해보지 못했던 한가하고 평화로운 배 여행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었다. 갑판 위의 햇볕이 따끈따끈하게 비치는 곳에 안락 의자를 가져다 놓고 편안하게 누워 일광욕을 즐기며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게으름을 피워댔다. 선글라스와 선크림이 없는게 크게 흠이었지만, 뭐 없으면 없는대로 살아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이렇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뭘 하던 상관하지 않고 놀기만 했지만, 아무도 나에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기야, 이건 내 생각이지만서도 그 동안 배 위에 있던 이들 중 가장 고생한 사람이 선원들 빼고 바로 나 아니겠는가? 물론, 육체적으로는 크게 힘든 건 아니었지만,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생을 했으니 말이다. 뭐, 그것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이제 얼마 후에는 목적지에 도착해 땅을 밟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들떠 전체적으로도 약간 느슨해진 분위기였다. 그러는 와중에 해민이도 오랜만에 나와 같이 있게 되어서 기쁜지 내 곁에 찰싹 붙어서 같이 일광욕을 즐기면서 지냈다. 고양이들이 햇볕 쐬는 걸 좋아한다는 걸 들어본 적은 있는데 수인족들도 그런 걸 되게 좋아 하는 모양이었다. 듀비 또한 예전처럼 계속 내 근처에 있었는데 그는 일광욕을 별로 즐기지 않는지 근처 그늘에 자리를 잡은 채 햇볕 가까이는 오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문득 그를 돌아보면, 멍한 시선을 무작정 저 멀리 바다쪽으로 던지고 있어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가 계속 괜찮다고 했기에 나중에는 배 위에서 할 일 없이 있는 터라 무료한 나머지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버렸다. 뭐, 원래 그는 항상 자신의 일은 모든 걸 스스로 챙겼고, 또 남이 챙겨주는 걸 부담스러워 했기에 나는 그에게 거의 신경 안 쓰고 살았다. 대화 또한 필요한 말 외에 안 했기에 아마 처음에는 신경 썼을지 몰라도 그의 존재에 익숙해진 후로 부터 점점 신경을 끄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으음, 이럴때 보면 나도 참 개인주의인 성격인 거 같다. 하기야, 아버지가 군인이시라 나도 여기저기 이사를 다녀 나라 곳곳에 친구들을 사겼지만 그 지방을 떠난 뒤에는 그쪽 친구가 연락을 하면 주고 받긴 했지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먼저 연락하는 적이 없었고, 그러다보면 곧 친구를 잊곤 했던 것이다. 그러한 성격이 지금도 통해서 항상 나에게 달라붙어 애교를 부리는 해민이는 자주 챙겨주고, 내가 먼저 쓰다듬어주곤 했지만 듀비에게는 거의 관심도 안 가졌던 것이다. 물론, 듀비도 날 좋아해서 내 곁에 있는 게 아니었으니 내가 이러던 말던 크게 상관 없는 눈치라 나는 내가 그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빈둥대는 와중에도 배는 목적지를 향해 착실히 항해를 계속하여 며칠 뒤에 드디어 저 멀리 푸르른 옷을 입고 있는 엔더비 산맥 끝자락이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육지다아~!! 육지가 보인다아~!!" 제일 먼저 그 모습을 발견한 사람은 역시 배의 중앙 돗대 위의 망루에 있던 선원이었다. 그가 기쁜 음성으로 크게 고함을 지르자 사람들이 우르르 갑판위로 올라와 바다 저 너머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그리고 잠시 후, 갑판 위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서서히 자그마한 점 부터 시작된 육지가 보이자 서로 들떠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우와, 드디어 땅이다 땅~!!" "아, 이 감격~!! 이 얼마만에 보는 육지란 말이더냐~!!" "으핫핫핫, 잘 있었느냐 엔더비 산맥이여! 내가 다시 돌아왔노라~!!" "오 마이 스위트 러브 땅~!! 나는 영원히 너만 사랑하리라아~!!" 그런데, 이런 그들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감격은 육지에 내려서 하고 지금은 짐 부터 챙겨라. 내릴 준비를 해야 할 거 아니냐?" 무덤덤, 냉정한 머튼의 목소리.. 그는 오랜만에 육지를 봤는데도 기쁜 감정은 없는지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사무적인 태도였다. 그는 무지 들떠서 날뛰는 사람들을 몇마디로 냉각시키더니만, 그래도 미적미적대며 갑판에서 떠나지 못하는 이들을 거의 등떠밀다 시피 갑판 밑으로 내려보내는 거였다. '아직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남았을테니 좀 좋아하게 나둬도 좋으련만... 쯧쯧, 저렇게 살면 능력은 인정 받을지 몰라도 인생 살아가는데 재미가 별로 없을거 같은데... 과연 누가 저 남자랑 결혼할 것인지... 아, 그러고보니 머튼이 결혼 했던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노친네처럼 속으로 쯧쯧 거리는 와중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걸 직접 당사자에게 물어보기는 -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머튼은 대하기가 어려 워서... - 뭣해서 다른 누군가에게 물어볼 이가 없을까 두리번 거리는 그때,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그렇게 급하게 할 것 까지는 없잖아? 거리를 보아하니 오늘 저녁쯤에야 해변가에 다다를 것 같고, 그러면 상륙은 내일 아침에나 할텐데..." 레이언이었다. 하지만 머튼은 레이언에게도 가차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준비 해야죠." 그 한마디를 끝으로 머튼 또한 짐 싸는(?) 이들을 지휘하려는 듯 서둘러 갑판 밑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뒷 모습을 바라보며 레이언은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저리 살면 인생이 삭막할텐데..." 그 순간 나는 아까 내가 떠올린 생각은 그 동안 레이언 녀석과 같이 지내면서 그 녀석의 영향을 받아서 하게 된게 아닌가... 심각하게 고찰해봐야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녀석을 닮아가는 것은 정말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건지 모르는 건지 레이언은 머튼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갑판 한쪽 구석에서 편안히 앉아 있는 나에게 다가와 내 발치께의 의자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여어, 팔자 좋은데?" 그의 몸에 내 다리가 살짝 닿자 나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치운 채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았다. 녀석과 신체적 접촉을 하면 왠지 녀석을 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레이언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고울리가 없었다. "넌 뭐 하냐? 짐 정리 안 해?" 나는 당연히 할 게 없었다. 처음 부터 이 운송에 참여할 때 내 임무는 오로지 인어들을 관리하는 것뿐. 그러니 이 배 화물칸에 있는 얼마만큼인지도 모를 짐을 관리하는건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 지금 이렇게 태평하게 빈둥대고 있을 수 있는 거였다. 육지에 내릴때 나는 단지 내가 이 배에 가지고 온 짐만 가지고 내리면 되는 거였다. 뭐, 그렇다고 해도 다시 라센국으로 돌아갈때 이 배를 또 타고 갈테니 그 모든 걸 다 챙기는 대신 드워프를 만나고 돌아오는 기간에만 사용될 몇가지 물품만 챙기면 되니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였다. 하지만, 레이언 녀석은 드워프와의 거래를 직접 담당하니만큼 알게모르게 챙길 것들이 최소한 나보다는 많을 터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빈둥댈 수 있나?' 이런 내 생각을 알아차린 듯 레이언이 히죽 웃었다. "이게 다 상관의 좋은 점 아니겠어? 어차피 서류는 나와 같이 온 녀석이 다 챙길 테고 나도 내 짐만 챙기면 되겠지." "쯧쯧, 너 같은 녀석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불쌍타... 아, 그러면 나도 불쌍한 건가? 으음... 상회에 남는걸 심각하게 고려 해봐야겠는걸?" 왠지, 이 곳에서 지내면서 나도 모르게 말발이 늘어가는 것만 같았다. "으악, 내가 크리스에게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나 좀 봐줘어~" "네가 어디가 예쁘다구... 널 보면 더더욱 있고 싶지 않아." "그럼 크리스를 봐서라두..." "내가 크리스에게 빚이라도 졌남?" "돌아가면 내가 한 턱 쏜다!!" "겨우 한번?" "그럼 두번." "뭘루?"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훗, 고려해 보지." 씨익 웃으면서 그쯤에서 - 어차피 처음부터 다 장난이었지만... 아무래도 레이언 녀석이 나에게 미안한 감정이 많았던 모양이다. - 타협을 보는 날 보던 레이언이 고갤 갸웃 거렸다. "너 어째 점점 상인틱 해진다? 상회에 들어와서 그러는 거냐, 아니면 원래 천성이냐?" 제 18화 엔더비 산맥 (5) "너, 어째 점점 상인틱 해진다? 상회에 들어와서 그러는 거냐, 아니면 원래 천성이냐?" "훗... 글쎄다..." 그날 저녁이 되자 레이언은 갑판 위에 선원을 비롯하여 모든 일행을 집합 시키더니 이제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여 마지막 볼 일을 본다면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느니, 도착하면 창고에 가지고 온 맥주를 풀어낼테니 힘내자느니 하면서 사람들의 분위기를 띄웠다. 드디어 육지를 보게 되었다는 소식이 이미 배 구석구석에 퍼져 그렇지 않아도 흥분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 말에 뛸뜻이 기뻐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한 분위기 덕분인지 그 뒤에 다시 머튼의 닥달로 인하여 상륙할 준비를 밤 늦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신나하면서 움직였기에 예상보다 일찍 끝나는 대 업적을 이룬 모습을 지켜보자니 레이언 녀석이 이 효과를 노리고 일부러 이 시점에 사람들의 마을을 띄워 놓은 건 아닌지 심히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러나, 배는 해안가에 가까워지자 강한 바람이 사라진 덕분에 속력이 느려져서 당초 늦은 저녁때쯔음이면 도착 할거라는 예상을 깨고 그 다음 날 이른 새벽에야 원하던 지점에 도착하여 닻을 내릴 수 있었다. 뭐, 그래봤자 닻을 내리기까지 대기하고 있는 선원들이나 잠을 못 자 퀭한 눈을 하고 비틀 거렸지, 상륙하는 인원들이야 짐 정리를 다 하고 각자 자신의 선실에서 잠을 청했기에 아침 일찍 상륙하는 일정에는 크게 차질이 없었다. 해가 떠오르자 다른 때 같으면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선실에서 달콤한 잠에 빠져 있고, 단지 임무가 있어 달콤한 잠의 유혹을 힘겨이 뿌리친 몇 사람들만이 조용히 배 위를 돌아다녔을 그 시각에 그날은 모든 이들이 선실을 박차고 나와 분주하게 움직였다. "자, 빨리 빨리 움직여!!" "이봐, 창고에 있는 거 다 가지고 올라 왔어?" "아직 반도 안 올라온거 안 보여?" "거기, 보트 내릴 준비 다 됐지?" "짐을 싣기만 하면 돼." "선원들도 내려 가나?" "오랜만에 도착하니 지금 내려가고 저녁에나 다시 배로 돌아온다던데?" "그래? 그럼 배에는 누가 남아 있는 거야?" "몰라. 선원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런데 신경쓰지나 말고 일이나 하라고." "쳇, 난 그런 것도 모르는 거냐?" "거기, 잡담하지 말고 일이나 해!" "히익..." "거봐, 내가 일이나 하라고 했잖아." 두 무사가 일 하는 와중에 잡담하다 머튼에게 걸려 호통을 받는 모습에 주위에 있던 무사들이 숨죽여 킥킥 거렸다. 그렇게,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식사도 못하고 부지런히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해변에 모든 이들이 상륙했을 때는 아침때도 한참 지난, 거의 점심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그때문인지 사람들은 그토록 원하던 육지에 상륙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기는 커녕 잽싸게 몇개의 팀으로 나뉘어 캠프를 치고, 짐 정리 하고, 음식을 만드느라 바빴다.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가운데 한가하게 앉아 그들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으니... 몸을 움직이는데는 하등 도움이 안된다고 자부하는 세 마법사와 레이언의 보좌관 역할로 따라온 사무요원, 그리고 대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일에 쏙 빠지는 레이언녀석과, 의욕은 있는데 요령이 없어 의욕이 무색할 정도로 하등 도움이 안되는 나와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해민과 듀비가 바로 그들이었다. 평소 나 아니면 레이언과 같이 놀던(?) 잭슨은 의욕은 나보다 좀 딸려도 이런 일에 경험이 많아 요령이 좋았기에 머튼에게 붙들려서 캠프 세우는 팀에 참여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그래도 남들 일할 때 최소한 방해는 하지 않으려고 해변 공터의 한쪽 구석에 얌전히 쭈그리고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드디어 도착했구나." "저런, 좋아하기는 아직 일러. 아직 고생이 남아 있다고." "나 안 좋아 했어. 배가 너무 고파서 좋아할 기력도 없는 걸 뭐. 다른 사람들은 배고프지도 않나, 어떻게 저렇게 잽싸게들 움직이지?" "배고프니까 더욱 더 잽싸게 움직이는 거야. 머튼은 정리가 다 안되면 식사도 못 먹게 하거든." "으윽.... 머튼 대장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할지도..." "역시 배고파서 안되겠군. 이번에 돌아가면 캠프 차리는 거라던지, 짐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는 마법을 한번 개발해 봐야 겠어." 우리 옆에 힘 없이 앉아 있던 가레스도 견딜 수가 없었던지 투덜거렸다. 그러자 마일즈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것 보다는 머튼 대장에게 최면을 걸어 짐 정리나 캠프 차리는 것 보다 우선 식사 먼저하게 하도록 하는게 빠를 걸요?" "음, 그렇지만 나중에 최면에 걸렸다는 걸 알아차린 머튼의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요?" 살짝 끼어든 린제이의 질문에 마일즈가 하하 웃으며 머리를 긁적 거렸다. "아하하하... 하긴... 머튼 대장에게 그랬다간 난 반은 죽어나겠지?" "그건 그렇고... 이봐, 이름 뿐인 대표." 뜬금 없이 가레스가 레이언을 부르자 그 주위에 앉아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다 그에게로 쏠렸다. "예?" "이번에 북드워프족 마을에 찾아갈때 말이야... 이 늙은이도 같이 가야 하나? 그냥 이 싱싱하고 젊은 두 녀석만 데리고 가면 안될까?" 평소에는 늙었다거나 노친네라는 소리를 들으면 펄펄 뛰며 자신은 정정하다고 주장하던 가레스가 스스로 늙은이라고 지칭하는거 보니 북드워프족 마을로 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예? 아하하... 그래도 같이 가주시는게 일행들에게 큰 힘이 되지 않을까..." 가레스의 뜨거운(?) 눈빛을 받으면서도 일행에 참가시키려는 레이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레스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나 보다도 강하고 젊은 새로운 전력도 보강 되었겠다, 나 하나 빠져도 괜찮잖아." "무슨 그러한 말씀을... 그래도 경험 많으시고 실력이 뛰어나신 가레스님께서 참여 하셔야 든든하죠." "흥,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면서 이렇게 대단한 인력을 모시면서도 푸대접이나 하는 주제에..." "푸, 푸대접이라뇨, 저희가 뭐 섭섭하게 해드린 거 있습니까?" "당연하지. 이 늙은이를 보고 산을 걸어 올라가게 하잖아. 그것도 좀 낮은 산이야? 저렇게 높은 산을 5일은 헤매고 가야 하잖아? 아니지, 저번에는 길을 잃어서 일주일이나 넘게 헤매다가 신호를 보고 마중 나온 드워프들에게 구조 되어가지고 간신히 도착했지 아마?" "아하하하.. 그, 그때는..." "시끄러워. 그때도 날 그냥 걸어 올라가게 했잖아! 그때는 나이가 그래도 좀 젊었으니까 견딜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절대 그리는 못한다. 날 삭신이 쑤셔서 죽게 할 작정이 아니면 나 데리고 갈 생각 하지 마. 아니면 누구보고 엎고 가게 하던지, 가마를 태우고 가던지." "그, 그런..." "뭐, 이번에는 나 빼도 전력이 크게 낮아지는 것도 아니잖아? 나는 배를 잘 지키고 있을테니 나머지 녀석들이나 데리고 잘 갔다 와." "예? 으음... 아니.. 그게..." "아니면, 나를 모시고 갈 수단을 강구해보던가." 레이언이 제대로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가레스가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가레스 또한 자신이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니까 저렇게 레이언을 놀리며 안 간다고 하는 것이고, 레이언 또한 괜찮으니까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하는 걸 거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레이언이 평소의 여유만만한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모습이 재미 있어서 지켜보는데, 내 무릎 위에 얌전히 앉아 나의 쓰다듬음을 즐기고 있던 해민이가 슬그머니 나를 톡톡 치는 거였다. "응?" 그래 의아한 마음에 그를 내려다보니 해민이가 나와 시선을 마주치다가 살짝 고개를 돌려 내 뒤에 앉아 있는 듀비를 바라보는 거였다. "으응?" 그래 해민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항상 존재감 없이, 요즘 들어 더더욱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듀비가 앉아 있었는데, 오늘도 배 위에 있었을 때 처럼 시선을 딴 곳으로 던지고 있었다. 그가 시선을 보내는 곳에는 엔더비 산맥의 끝자락이 있었는데 가만 보니 시선이 그 산맥의 끝자락을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멍하게 있는 것은 아니고 뭔가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 듯 한데... '뭔가를 바라봐?' 거기서 뭔가가 떠오른 나는 옆에 앉아서 계속 가레스에게 당하는 - 아니면 당하는 척 해주는 - 레이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응?" 느닷없는 내 옆구리 공격에 레이언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그가 그러던 말던, 내가 그의 얼굴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대어 그가 기겁을 하건 말건 나는 그의 귀를 손으로 꽈악 잡아 도망가지 못하게 막은 후 아주 조그맣게 속삭였다. "있지... 엔더비 산맥 너머에 뭐가 있지?" 내 질문이 의외였던지 레이언은 나에게 귀가 잡혀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이녀석 귀 안 아픈가?' 정말 안 아픈지 레이언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여전이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내가 진지한 표정을 하고 녀석을 마주바라보자 어깨를 한번 으쓱해보이더니 자신도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뭐긴 뭐가 있어. 엔더비 산맥이 프스카야국 과 아메리 국의 경계선이잖아. 그러니 동쪽으로는 아메리 국이 있고, 서쪽으로는 프스카야국이 있지." 그렇게 말해줘봤자 방향 감각이 없는 나로써는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어디가 동쪽이고 어디가 서쪽인데?" 그러자 레이언은 무지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내가 노려봐주자 순순히 입을 열었다. "어디가 어디긴, 이쪽이 동쪽이고 저쪽이 서쪽이잖아. 해가 저쪽에서 뜨는 거 보면 몰라?" "오... 그렇군. 미처 생각을 못했네..." 그렇다면, 듀비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엔더비 산맥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엔더비 산맥 동쪽 너머에 듀비와 관련이 있는 뭔가가 있던가? 아메리 국에 친척이 있는 것도... 아, 맞다.' 그제야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른 나는 나의 무관심함을 탓하며 다시 레이언을 향해 속삭였다. "있지... 푸른 엘프족이 사는 곳이 어디에 있지?" "푸른 엘프족? 아아..." 의아한 듯 되묻던 레이언은 내 뒤에 조용히 앉아 있던 듀비를 힐끗 곁눈질 하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층 목소리를 낮춰 내 귀에 속삭였다. "푸른 엘프족은 새클턴 국의 밀림에 살고 있잖아. 그리고 그 곳은 아메리국의 바로 옆이라고." "역시나..." 자기 자신이 극구 우겨서 내 곁에 남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살던 곳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에휴... " 나는 여전히 자신이 살던 곳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는 듀비를 살짝 곁눈질해 본 후 다시 레이언에게 속삭이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이봐..." 제 18화 엔더비 산맥 (6) 나는 여전히 자신이 살던 곳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는 듀비를 살짝 곁눈질해 본 후 다시 레이언에게 속삭이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이봐..." "응?" 나와 마찬가지로 내 뒤에 있는 듀비를 힐끔 훔쳐보던 레이언이 즉각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듀비말야, 언제까지 상회에 묶어둘 거야?" "응? 으음... 그게..." 내 단도직입적인 말에 레이언은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에휴, 지금까지는 듀비 같은 타입이 없어서... 뭐, 나야 돕기위해 남는다면 딱히 반대하는 것도 아닌데..." "지금까지 이종족들은 어떻게 했는데?" "흐음... 보통은 자신들 종족과 거래 할때 수월하도록 돕는다던지... 상회에 와서 도울때도 자신의 종족에게로 돌아가서 그 곳 가족과 어른들에게 허락을 맞고 다시 오니까... 뭐, 일년에 한번 쯔음은 가족에게 갔다 오도록 배려도 해주니까... 음.. 하지만 듀비처럼 집이 너무 먼 경우는 없어서... 대부분은 집과 가장 가까운 지부에서 일하도록 해주니까 말야. 뭐, 그래봤자 우리 지부가 있는 국가는 라센과 왈그린 뿐이라서... 이쪽에 집이 있는 이종족들은 전부 집으로 돌아갔거든..." "원래 그러는게 정상이라고 봐." 내 작은 중얼거림에 레이언이 심히 동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사실 그러는게 나도 편해. 그냥 그들을 채용한다고 생각하면 돼니까. 하지만, 듀비의 경우는 다짜고짜로 집에 갈 생각도 안하고 은혜를 갚겠다고 눌러 앉았으니... 이거야 원, 주군을 선택한 고지식한 기사도 아니고..." 레이언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곤란한 시선을 저 너머 바다로 던지자 그 모습에 괜히 화가 난 나는 투덜거렸다. "널 따르는 것도 아니잖아. 듀비가 머무는 건 내 곁이라고. 네가 나보다 더 곤란하냐?" "물론, 너도 곤란해 하는 거 알아. 듀비가 네 곁에 있겠다고 선언한 후 며칠 동안은 네가 무지 불편해 하는 게 보였으니까 말야." 레이언의 단호한 말투에 나는 속이 뜨끔했다. '윽... 그렇게 내가 티를 많이 냈나?' 물론, 그때 갑자기 듀비가 달라 붙어서(?) 속으로 엄청 불편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걸 레이언 녀석이 알아차렸다면 듀비가 모르고 있을리가 없었다. '으음.. 혹시.. 듀비가 내가 불편해 하니까 일부로 존재감 없이 조용히 지내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내가 듀비에게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잘못을 해온 것 같았다. 일부러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모르는 사이 그가 곁에 있는 걸 불편하게 느끼고 그를 서운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덕분에 그는 내 곁에서 존재감 없이 지내게 되었고, 그렇게 되자 나는 이제 그에게 완전히 무관심 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아아... 생각하면 할 수록 그에게 잘못한 일만 떠오르는 구나...' 거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바늘로 콕콕 찔리다 못해 이제는 송곳으로 찔려 무지 아픈 양심을 부여잡았다. 그는 그 나름대로 자신을 구해준 이들에게 보답을 하고 싶어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을 꾸욱 눌러 참고 여기 머물고 있는 건데 말이다. 나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이 자꾸 커지자 그걸 어떻게든 해보려고 물빛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단정하게 뒤에서 묶은 머리카락이 마구 삐져나오고 흐트러졌지만, 그에 별로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러는게 이해가 되었는지 레이언은 잠시 내가 진정하길 기다리더니 입을 열었다. "뭐, 너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나름대로는 곤란했다고. 그의 위치가 어정쩡하니 말이지. 하지만, 너에게 붙어 있으니 내가 함부로 어쩔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그 동안 가만히 있었던 거야." "그러냐? 그럼 네 생각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내 질문에 레이언은 아무말 안 하고 있었어도 생각해 둔 건 있었는지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가 그를 구하기 위해 노력해서 구한 것도 아니고, 어차피 우리가 평소 하던 일을 하는 와중에 그랬던 거니 그에게 큰 댓가를 안 받아도 손해볼 건 없어. 그래도 이왕 구한 거 처음에는 블루 엘프족들과 새로운 거래를 위한 포석으로 이용하려고 생각했었지. 그래봤자 우리에게 이득이고 그쪽은 손해인 거래가 아니라 양쪽 모두 이득인쪽으로 하려고 한 거니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 의심스런 눈초리로 레이언을 바라보던 나는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건 다행이네. 하기야, 그러니까 다른 종족들과 계속 거래를 유지하는 거겠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노예매매상을 터는 것 만으로도 이득은 충분히 본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종족들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는 거니까 그들 종족간의 거래를 위한 포석으로 그들을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거 뿐이야. 그런데 블루 엘프는 자신의 종족을 구해줘도 은혜 입은 자는 스스로 은혜를 갚으라는 원칙인 듯 하니 거래를 틀 포석이 생기지도 않은데다, 듀비 또한 은혜를 갚을때 까지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니 블루 엘프와의 거래는 틀렸다고 봐야지. 우리가 그들과 거래를 틀기 위해 정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그들을 찾아 헤매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야. 게다가 블루 엘프가 우리들에게 어떤 이득을 줄 수 있는지도 모르고." "설명이 장황하군. 그래서 결론은 뭔데?" "결론이라고 해봤자... 우리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거지. 지금 당장 듀비가 집으로 간다고 해도 보내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그 혼자 머나먼 길을 가게 나두겠냐? 그 길이 험하다는 것도 충분한데 말야. 그래서..." "그래서?" "듀비와 이야기를 해봐야지. 그가 원한다면... 우리가 라센으로 돌아갈때 약간 먼 길을 돌아 가게 되더라도 새클턴의 해안에 그를 내려줄 용의도 있어. 인어도 없으니까 해인이 네가 힘을 좀 보태주면 그리 오랜 기간이 걸릴 것 같지도 않고..." "듀비가 순순히 가려고 할까?" "만약 그가 은혜를 다 못 갚아서 못가겠다고 버티면, 다음에 다시 이 곳으로 올때 그가 돌아가는 것으로 하면 어때? 우리가 그를 구해준 은혜가 그리 큰건 아니라고 인식시킨다면, 다음에 여기 올때는 빨라야 3년, 늦으면 5년쯤 걸릴 테니 그 동안이면 충분히 은혜를 갚을 시간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때는 듀비 덕분에 블루 엘프에 대한 걸 좀 알게 될테니 블루 엘프족과 거래를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야. 그도 딱 정해진 기일이 끝난 후에 집으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 생각 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싶은데." "흐음... 괜찮은 생각이라고 봐." 레이언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문득 내가 듀비와 헤어지는데 대해 아무 감정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이라도 빨리 떨기려고 한 느낌이 나지 않았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무리 웬수 같은 사이라고 해도 막상 헤어질때면 미운정이라고 해서 조금이나마 서운함을 느끼기 될 텐데, 듀비에 대해서는 오히려 안도감이 드니 말이다. 그러니까 더더욱 듀비에게 미안해졌다. '아... 내가 이렇게 이기적일줄이야... 내가 이럴줄은 처음 알았어.' 아마 해민이와 헤어지게 된다면 너무 서운해서 붙들고 엉엉 울지도 몰랐다. 물론, 순순히 보내주기야 하겠지만서도... '으음... 아무래도 지금부터라도 그에게 좀 관심을 가져야겠어.' 그렇게 스스로를 탓하는 동안, 어느새 각자의 일을 끝마친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 입만 놀리는 우리들을 불렀다. 벌써 캠프가 다 차려지고, 짐도 정리가 다 되고, 늦은 아침 겸 점심 식사까지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내 생각에 빠져 있느라 몰랐지만, 마법사들쪽은 벌써 그걸 눈치채고 우리를 부르기 전에 일어나 그쪽으로 다가가 있었다. 해민이나 듀비, 그리고 레이언만 내가 움직이지 않으니 그냥 내 옆에 있어줬던 것이다. 그러다가 잭슨이 우리를 부르러 오자 레이언이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자, 가서 우선 점심 부터 먹자고. 그리고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해.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그래, 우선 먹고 보자." 그날, 점심을 먹고 난 후 모든 일행이 약 1시간 정도의 휴식을 가진 뒤 그날 저녁에 가지게 될, 육지에 오르게 된 기쁨을 나눌 파티 준비를 시작했다. 이때는 나도 도울 수 있었는데, 내가 할 일이라고는 바다 속에 들어가서 맛난 생선을 잡는 거였다. 그리고 내가 잡아올린 생선들은 선원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받아서 곧바로 손질하기 시작 했다. 해민이와 듀비는 잭슨과 레이언, 그리고 몇몇 무사들과 함께 근처 산에 가서 사냥해오게 되었다. 해민이와 듀비는 나와 떨어지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바다 속에서는 그들이 나에게 도움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기에 떨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들만 또 우두커니 앉아 있기는 싫었는지 레이언이 사냥하러 같이 가지고 제안하자 순순히 받아들였다. 하기야, 수인족은 보통 산에서 살아간다고 들었고, 블루 엘프족 또한 정글에서 살아간다고 했으니 산 속은 그들에게 익숙할 터였다. 음... 뭐, 듀비에게는 좀 추울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마법사 일행들은 캠프의 주위에다 임시용 결계 마법을 치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에 땅을 밟게 된 것이니 만큼 오늘은 보초도 세우지 않고 모든 이들이 파티에 참여 하기로 했기에 만약을 대비하는 것이다. 하기야, 마법사들이 있었으니 그럴 수 있는 것이겠지만... 그리고, 이번에는 대단한 정령사 - 바로 나다. 에헴... - 까지 있었으니 선원들도 오늘 하루는 배를 비우고 파티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리고 배는 내가 불러낸 정령들이 하루 동안 지켜주고 말이다. 뭐, 하루동안 뭔 위험이 있지 않아 보이지만, 그래도 유비무환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저녁이 가까워질 무렵,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캠프의 공터에서는 여기저기 커다란 모닥불이 여기저기에서 피워졌고, 근처 가까운 산으로 사냥을 나갔던 이들이 기쁜 표정으로 많은 습득 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무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들어 손질을 시작했고, 배에서 날라져 온 수많은 짐들 중에서 술통 여러개가 끄집어내져 공터로 날라져 왔다. 술은 맥주가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무지 기뻐했다. 다른 술도 있었는데, 폼을 보아하니 오늘 사람들이 엄청 마셔댈 것 같으니까 아마 꺼내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포도주와 위스키 - 나는 맥주를 제외한 노란 색의 술은 모조리 위스키라고 한다. - 는 맥주보다 비싸니까 엄청 마셔대면 아마 감당이 안되어서 못 꺼내는 걸지도... 제 18화 엔더비 산맥 (7) 하기야, 포도주와 위스키 - 나는 맥주를 제외한 노란 색의 술은 모조리 위스키라고 한다. - 는 맥주보다 비싸니까 엄청 마셔대면 아마 감당이 안되어서 못 꺼내는 걸지도... 나는 아직 맥주건 와인이건 입에 안 대는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식사할 때 한잔씩 권하기도 했지만, 내가 딱 한마디 하니까 더 이상 권하지 않는 거였다. "울 아부지가 못마시게 해서리..." 물론, 그때 내가 말한 아버지란 한국에 계시는 엄격한 군인 아버지를 말하는 거였고, 그 뒤에 '성인이 될 때까지'란 단서가 붙는다는 걸 말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내 나이로 나는 성인이지만, 한국은 만 20세가 되어야 성인이니 그쪽으로 하면 나는 아직 성인이 아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뭐, 이 곳 사람들이 내가 말한 아버지가 엘라임이라고 착각하건 말건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까지 술을 입에 대지 않을 수 있었다. 사실, 그 아버지께선 여기 안 계시니까 한모금 마시던 고주 망태가 되게 마시던 상관 없을테지만, 개인적으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해가 안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말이다. 한국에 있는 해민이 녀석이야 친구들이 유혹하니까 거기에 넘어가서 마셔본 적이 있긴 하지만, 나는 친구들이 유혹을 해도 그 쓴 물을 무슨 맛으로 먹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뭐, 맥주야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맛으로 마신다고 하지만... 어쩌면 술을 마셔본 적이 없어 이해를 못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마셔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리하여 모든 이들이 긴장을 풀며 술과 모닥불에 지글지글 구워지는 바베큐에 흠뻑 빠져 즐기고 있을 때 나는 돗수가 약한, 배에 같이 타고 온 주방장이 나를 위하여 특별히 만들어준 칵테일 같은 혼합 음료를 다른 음식들과 같이 홀짝이고 있었기에, 절반이 넘는 이들이 취해서 쓰러진 한밤중이 되어도 말짱한 정신으로 사슴인지 멧돼지인지 모를 고기를 즐기고 있었다. 레이언 녀석은 얼마나 술이 강한지 그 곳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에게 권한 술을 사양하지 못하고 다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취하지 않고 말짱한 얼굴로 아까부터 취한 가레스에게 붙들려 곤욕을 치루는 마일즈를 놀리고 있었다. 가레스는 의외로 술에 약해서 맥주 몇 잔과 와인을 조금 마시더니 그대로 정신이 흐려져서 마일즈를 붙들고 있었는데, 그는 취하면 아무나 붙잡고 수다를 떠는 타입인 모양이었다. 원레 가레스는 마일즈와 린제이 둘 다 붙들었는데 마일즈가 정의감(?)을 발휘하여 가레스의 모든 관심을 자기에게 쏠리게 만들어 린제이를 풀려나게 했던 것이다. 하기야, 마일즈의 폼을 보아하니 이런 일을 한두번 당한 것도 아닌 듯해 보였다. 머튼은 이럴 때에도 고지식한 자세를 유지하며 술은 적당히 거절하고 대신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부하들을 챙기고 있었다. 잭슨은 자신보다 나이 많은 선원이나 무사들의 장난 어린 놀림의 대상이 될 까봐 일찍부터 자리를 피해 주방장을 돕는다는 핑계를 대고 바베큐 굽는데 전념하고 있었다. 뭐, 그 주방장이라는 사람도 아까부터 자신의 본업을 내팽개치고 다른 이들과 어울려서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 공터의 모습을 쭈욱 둘러본 나는 내 무릎에 앉아서 남들이 맛나게 마시는 술잔을 힐끔 힐끔 바라보면서 고기를 먹고 있는 해민이와 - 내가 술을 안 마시니까 아직 성년이 안 됀 해민이도 술 마시는 걸 엄금하고 있었다. - 마찬가지로 내 옆에서 조용히 가끔 가다 고기 한점 씩 맛보고 있는 듀비를 바라봤다. 해민이는 너무 늦은 시각이니까 이제 재워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바라본 거고, 듀비는 그와 오랜만에 대화를 해보고 싶어서 바라본 거였다. '우선 그러려면 해민이부터 재워야겠지?' 그렇다고 해민이 혼자 천막에 재울 수는 없어서 - 아무리 우리보다 강한 수인족이라고는 하나 아직 어린애라 혼자 두는게 걱정스러웠다. - 주위를 둘러보다가 가레스에게 잡혀 연신 그의 횡설수설을 들어주고 있는 마일즈를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는 린제이가 보였다.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많지만, 우선은 여자라는 이유로 - 물론... 나는 남자라 인식되어서 이 곳에 있는 이들 중 해민이 다음으로 어린 나이지만 아무도 들어가서 자라고 하지 않구 있었다. - 아까 들어가서 자라는 권유를 받았는데 마일즈가 걱정되는지 고집스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녀라면 해민이를 데리고 가서 잘 수는 있겠다 싶어, 나는 듀비에게 잠시만 있으라고 손짓한 후 그녀에게 다가갔다. "린제이." 조용히 그녀의 어깨를 치며 부르자 그녀가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생각지 못한 그녀의 반응에 나는 미안하다는 뜻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여기 계속 있을 거예요?" "응? 아, 아니.. 이제 들어가야지. 왜?" "아뇨, 혹시 지금 들어가실 거라면 해민이를 부탁할 수 있을까 해서요." 내 말에 품에 안긴 해민이가 항의하는 듯 낮게 으르렁 거렸지만, 녀석의 눈에 가득 담긴 졸리움 때문인지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 내가 있으니까 계속 옆에 있긴 했어도 아까부터 졸리긴 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지금이 평소 그 아이가 자던 시각보다 훨씬 늦은 시각이었으니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 해민이 녀석의 반응이 귀여워 녀석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자 그 모습을 보던 린제이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뭐... 나도 슬슬 졸리던 참이었으니까 내가 데리고 자줄 께. 너는 조금 더 있을 모양인가 보지?" 그녀가 의외로 순순히 허락하자 조금 놀라웠지만 부탁하는 내 입장으로써야 나쁠게 없었기에 기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해민이를 넘겼다. "너무 심하면 가레스님 좀 재워줘요." 그녀는 가기 전 근처에 앉아 있던 레이언에게 당부의 말을 던지고는 해민이를 안고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곧바로 린제이의 당부를 들은 지 얼마 안되는 레이언을 잡아 끌었다. "어이, 이리 와봐." 뜬금 없는 나의 말에도 불구하고 레이언은 짐작하는 게 있었는지 순순히 일어나 나를 따라왔다. 그가 따라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듀비에게 말했다. "듀비, 잠깐 이야기좀 할래요?" 그러면서 그와 레이언을 데리고 사람들이 없는 한적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가려고 했지만 내가 몸을 돌렸는데도 불구하고 둘은 요지부동 거기서 움직이지 않는 거였다. "뭐야, 왜 안 따라오는 건데?" 의아함과 약간의 분노를 섞어 물어보는데 오히려 레이언이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거였다. "어딜 가려고?" "어디긴 어디야. 좀 조용한 곳으로 가려는 거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나를 보며 레이언이 피식 웃었다. "이 주위에는 결계 마법이 펼쳐져 있다는 걸 잊었어? 결계를 깨지 않는 한 우리는 가고 싶어도 못 나간다고." "아... 맞다." 듀비와 이야기를 할 생각에 그걸 깜빡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머쓱해진 표정으로 머리를 긁으며 슬그머니 몸을 돌려 원래 내 자리로 와서 앉았다. 그 모습에 레이언이 다시 씨익 웃더니 내가 노려보자 얼른 듀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듀비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는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고, 진지함과 부드러움 만이 감돌고 있었다. 나와 레이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지 듀비도 요즘 계속 짓고 있던 멍한 표정을 지우고 우리를 조심스레 바라봤다. "저에게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나는 심호흡을 한번 깊게 내쉬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듀비... 있죠, 아까 레이언과 좀 이야기를 해봤는데... 여기서 듀비의 고향과 그렇게 멀지 않다면서요?" 내 말에 듀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시선이 흔들리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저는 아직 돌아갈 마음이 없습니다." 잠시 뜸을 들인 듀비는 단호하게 말했다. 고향 이야기를 꺼내니까 우리가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내 뒤를 이어 레이언이 입을 열었다. "뭐, 지금 당장은 우리도 당신을 보내줄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당신 혼자 고향으로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인간 세상에 대한 경험이 없는 당신 혼자 나라 하나를 건너고 또 다른 국경을 넘을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거기다 엔더비 산맥도 넘어야 하고..." 그렇게 말하며 레이언이 공터 뒤쪽부터 이어져 있는 산을 슬쩍 바라보며 말 끝을 흐리자 듀비도 그 시선을 따라 자신의 뒤쪽을 바라보더니 다시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 건지..." 레이언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되려 듀비에게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게 있는데... 당신은 은혜를 갚기 위해 여기 있는다고 했는데, 그 정도가 얼만큼이죠?" "예?" 듀비가 금방 이해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자 레이언이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몇년 동안 있는다던지, 아니면 얼만큼 상회에 도움이 된다던지, 뭐 그런거 말예요. 정확히는 당신도 말하기 힘들테니까 대충이라도..." 그 말에 듀비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노예매매상에게 잡혔을때 저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럴때 저를 구해주신 거죠. 단순히 노예매매상에게서 구한 차원이 아니라 제 목숨을 구해주신 것입니다." 왠지, 이야기가 거창해져서 나는 약간 불안함을 느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 은혜는 제가 죽는 날까지 보답해도 모자르다고 생각합니다만..." "에엑?" 나는 기껏해야 한 몇년 정도 봉사하다 돌아가겠다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평생이라니.. 레이언도 무지 놀란 표정으로 듀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 둘이 놀라움을 숨김없이 나타내자 평소 무표정한 듀비의 얼굴에 그늘이 생겼다. "제가... 여기 있는게 불편하신 겁니까? 최대한 신경쓰지 않게 해드린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제 노력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그의 말에 나와 레이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예요. 절대 불편하지 않아요." "불편이라니요, 당신이 우리 상회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고 있는데 그런 소릴 합니까?" "그럼, 왜들 그렇게 놀라시는 건지..."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나는 은근 슬쩍 레이언을 바라봄으로써 모든 설명을 그에게로 떠 넘겼고, 레이언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다가 입을 열었다. "난, 아니 우리 집단은 상회입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죠.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상회의 일을 꾸려오면서 깨달은 원칙은 모든 이익에는 그만한 댓가가 있다는 겁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나도 묻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상인이 어쩌구저쩌고 이야기를 꺼내는 레이언을 이해하기 힘들어 뭔 소리냐는 시선으로 레이언을 바라보았다. "듀비, 당신이 우리에게 고마워 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구해준 이종족들 모두가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당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냥 그 상황에서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때 죽을 운이 아니었던 거 뿐이죠. 목숨을 구함 받은데 대한 감사는 당신의 명을 길게 정해놓은 신께 감사하세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단지 운이 좋은 만남에 대한 고마움이면 충분합니다. 당신이 평생 우리에게 은혜를 갚을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그건 우리가 치룬 댓가에 비해 너무나 엄청난 이득이라 우리는 도저히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제 18화 엔더비 산맥 (8) "듀비, 당신이 우리에게 고마워 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구해준 이종족들 모두가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당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냥 그 상황에서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때 죽을 운이 아니었던 거 뿐이죠. 목숨을 구함 받은데 대한 감사는 당신의 명을 길게 정해놓은 신께 감사하세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단지 운이 좋은 만남에 대한 고마움이면 충분합니다. 당신이 평생 우리에게 은혜를 갚을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그건 우리가 치룬 댓가에 비해 너무나 엄청난 이득이라 우리는 도저히 받을 수가 없습니다." 레이언의 말을 다 듣고 난 뒤에도 듀비는 그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려는 듯 잠시 가만히 있더니 가라앉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가 부담스럽다는 말이군요?" 빙빙 돌려서 말했지만, 바로 그 말을 한 거였기에 레이언이 삐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에 듀비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슬쩍 나에게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나 또한 괜히 그의 시선에 찔려 삐질삐질 웃는데 듀비가 진지하게 물어왔다. "그럼,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해인님께서 원하시는데로 하겠습니다." 그가 진지하게 묻는데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하면 그게 또 듀비한테는 실례일 것 같아 나도 애써 듀비처럼 진지한 표정을 고수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솔직히 이야기 하면 처음에 듀비한테 이야기 했듯이 내가 듀비를 구한 것도 아닌데 당신이 나에게 은혜를 갚는다고 해서 되게 부담스러웠거든요?" 그에 듀비가 움찔하며 뭐라고 입을 열려는 것 같아 나는 얼른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아, 잠깐만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아요. 내가 아니면 다른 이들은 믿을 수가 없다는 거죠? 사실, 나도 은혜는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녀석(레이언)의 말이 아니라도 당신이 곁에 있겠다면 그것도 좋을 거라고 여겼거든요."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고 있는 듀비에게 배시시 웃어보인 뒤 재차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부담스러워 한다는 거 알고 조용히 있어주는 바람에, 내가 신경 많이 못 쓴거 같아서 듀비에게 무지 미안해요. 게다가... 요즘 기분도 안좋은데 그것도 눈치도 못 채고... 집에 가까이 왔는데 돌아가지 못해서 마음 아프지 않아요?" 내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듀비의 표정이 눈에 뜨이게 흔들렸다. 하기야, 자신이 살던 곳 가까이 왔는데 가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야 하는데 마음이 안 아프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의 고지식한 청년 듀비는 미안한음 표하는 내 말을 자신을 질책하는 것으로 알아 듣고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것이었다. "신경쓰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나는 속으로부터 안타까움이 절절 배인 한숨이 흘러나오는 걸 느꼈다. "그게 아니예요. 오히려 이제야 알아채서 듀비에게 내가 너무 미안한걸요. 그래서 말인데..." 나는 듀비가 다시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는 걸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레이언에게 말해봤더니, 아까 그가 당신에게 이야기 했듯이 이제까지 당신이 상회를 도와준 것 만으로도 당신을 구해준 댓가는 충분하대요. 그러니 당신만 원한다면 드워프의 마을에 갔다 온 뒤 우리가 약간 시간이 더 오래 걸리더라도 블루 엘프족이 살고 있는 새클턴 국의 정글까지 데려다 줄 수 있대요. 물론... 블루 엘프족의 마을까지는 같이 동행하지 못하겠지만..." 내 말이 끝나자 듀비는 갈등이 생기는지 잠시동안 망설였다. 하지만... 역시나 그의 고지식한 사상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감정을 이겼는지 듀비는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냥... 해인님 곁에 있겠습니다." '에휴우...' 나는 속으로 깊이 한숨을 내쉬고는 옆에 있는 레이언 녀석을 힐끗 돌아보았다. 레이언은 우리가 어쩌겠냐는 뜻으로 어깨를 슬쩍 으쓱해 보였다. "뭐, 정 그러시다면... 하지만, 들어보니까 드워프의 마을까지 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가 보던데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은혜는 갚지 않을까... 싶은데... 뭐, 아직 다시 배를 타고 출발 하기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생각해 보세요." "아, 그리고..." 내가 말을 끝맺으려고 하자 레이언이 얼른 끼어들었다. 그래 듀비와 내가 그를 바라보자 레이언이 나를 향해 눈짓을 주며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이번 여행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이 된다면, 한... 3년이나 5년 동안이라면 은혜를 갚기 충분한 시간이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이번에 돌아가면 다시 올때까지 그 정도의 시간이 걸리거든요. 그때는 드워프의 마을에 오기 전에 먼저 새클턴 국에 들리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앗, 그걸 깜빡 했다.' 레이언이 말을 안 했으면 듀비에 대한 안타까움에 젖어 있느라 잊어버릴 뻔 했었다. 그래 머쓱함과 고마움이 담긴 시선을 레이언에게 보내는데 듀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겠노라고 약속은 못 하겠지만... 유념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여전히 거절하는 분위기였지만, 다음에도 다시 올 기회가 있다는 걸 알았는지 듀비의 얼굴에 있던 그늘이 가신 것 같았다. "그래요. 뭐, 솔직히 이야기하면 당신이 여기 머물러준다면 우리야 좋긴 하죠. 단지... 너무 과한 이익을 꿀꺽 해서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지만... 자, 그럼 이야기는 이걸로 끝내고, 나는 내일을 위하여 이만 자러가야 겠군요. 먼저 실례할께요." 레이언은 듀비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내 어깨를 두어번 툭툭 치며 씨익 웃어보이고는 자신의 숙소 쪽으로 버렸다. 덕분에 갑자기 둘만 덩그라니 남아버리자 나는 무지 어색함을 느꼈다. 그 동안 듀비와 있을때면 항상 해민이도 같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해민이가 듀비를 질투하는지 미워하는지 모르겠지만, 듀비에게 시선을 보내지 못하도록 계속 내 곁에 들러 붙어서 내 시선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던 해민이를 아까 린제이 손에 붙여 재우러 보내버렸으니 나는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 되자 되게 당황스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진작 듀비와 대화도 좀 해보고 친해질 걸... 하는 후회를 했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라고 누가 그랬더라?' 나는 속으로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리며 이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를 어떻게 해보려고 입을 열었다. "저기..." "저어..." 그런데 그 순간 듀비 또한 뭐라고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 둘은 서로 말을 하려 했다는 걸 알고 놀라 멈칫 거리며 입을 닫았다. 그렇게 둘다 입을 다무니 또 다시 우리 주위에 침묵이 내려앉아 나는 피식 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세요." 그러자 이에 질세라 듀비도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먼저 말씀 하십시오." "저는 별거 아니니까 먼저 말씀하세요." "저도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이러다가는 끝도 없을 거 같아, 나는 하는 수 없이 먼저 하려던 말을 꺼냈다. '아... 정말 별거 아니었는데...' "아니... 나는 그 동안 듀비에게 너무 무관심 했던거 같아서 사과하려고요. 생각해보면 갑자기 낯선 곳에 떨어져 당황스럽고, 아는 이도 없어서 혼자 힘들었을텐데..." 내가 그 기분 잘 안다. 나만큼 살던 곳에서 멀리 떨어져 본 사람 있겠는가? 기껏 떨어져봐야 바다 건너 다른 대륙이겠지, 설마 차원을 넘어온 사람이 지금까지의 세월 동안 과연 몇이나 있었을지... 그런 경험을 한 주제에 듀비에게 동변상련은 느끼지 못할 망정 무관심 했었으니... '에휴... 매번 새로이 미안함을 깨닫게 되는 구만...' 그러면서 듀비의 눈치를 힐끗힐끗 살피는데 놀랍게도 듀비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그 동안 항상 무표정을 유지하고 무슨 일 있을때 잠깐 어두운 표정을 유지했지 이처럼 그가 웃는 모습은 한번도... 아니다, 그와 맨처음 만났을 때 기습적으로 내 입술에 뽀뽀하면서 약하게 웃어 줬던가 같기는 하다. 어쨌든, 그렇게 희귀하고 보기 힘든 그의 미소를 다시 보게 되자 - 그것도 되게 멋진 미소를 - 나는 순간적으로 놀라움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나도 모르게 얼굴에 피가 몰려 화끈 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듀비가 무뚝뚝하게 굴기는 해도 잘생겼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그런 이의 보기 힘든 미소를 보게 되었으니... '아앗, 그래도 이게 왠 요상한 반응이람?' 내가 예상치 못한 나의 반응에 당황하고 있는데 듀비의 음성이 들려왔다. "괜찮습니다. 절 부담스레 여겨주시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은혜를 갚는다고 해인님 곁에 머무는 것이 약간은 억지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해인님 곁이 아니라면 안심이 되지 않아 고집을 부린 것이었는데, 그런 절 받아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탐탁지 않게 여기시기는 했지만..." 화끈 거리는 얼굴을 진정시키면서 듀비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나는 화들짝 놀라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게 그런게 아니라니까요. 그러니까..." 그러자 듀비가 다시 피식 거리며 웃었다.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대로 해인님 곁에 있으니까 말이죠." "아니 뭐... 그게... 어쨌든, 이제는 조금 더 신경 쓰도록 노력할게요." 듀비의 말에 나는 머쓱해진 표정을 감추고자 슬쩍 고개를 숙이며 거의 중얼거리다시피 말했는데 쿡쿡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거였다. 그래 설마.. 하는 생각에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드니 놀랍게도 내 앞에 있는 듀비가 작지만 그래도 소리를 내어 웃는게 아닌가? 나의 놀란 시선과 마주치자 겸언쩍어 하면서 얼른 웃음을 그쳤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헤에, 오늘은 듀비의 새로운 면모를 또 보게되네...' "크흠,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게 신경쓰시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훗훗, 해민이가 계속 방해할 거 아닙니까? 해인님께서 전보다 더 제게 신경을 쓰는 걸 본다면 아마 더더욱 심하게 방해를 할 거 같습니다만.. 후후후..." 살짝 주먹진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는 듀비의 모습은... 되게 멋져 보였다. 레이언 녀석도 잘 생긴건 인정 하지만, 그 녀석은 항상 웃음을 헤프게 흘리고 다녀서 잘생긴건 인정하지만 기생 오라비라고 여겨질 뿐 멋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듀비의 웃음은 흔히 볼 수 있는게 아니라서 그런지 오랜만에 활짝 웃는 그의 모습이 생각지도 않게 멋지게 보이는 거였다. 그에 넋을 잃고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자 그가 쑥스러운 듯 슬그머니 내게서 얼굴을 돌리고는 입을 열어싸. "흠 흠, 그런데... 이제 주무셔야지요? 평소 주무시는 시각보다 많이 늦었지 않습니까?" "예? 아, 자야지요. 그래요, 우리도 얼른 자러 가죠?" 듀비의 말에 또다시 화들짝 놀란 나는 얼른 몸을 돌려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리면서 대꾸했다. 그리고 먼저 저벅저벅 우리의 숙소로 걸어가는 나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그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화들짝 놀랐다. '헉... 그, 그러고보니 나 듀비랑 같은 방을 쓰지? 그런데.. 오늘은 해민이가 없으니... 단 둘... 뿐이네?' 제 19화 거기 서! 아, 영감이 떠오른다~ (1) 다음 날 아침, 나는 항상 그랬던 것 처럼 해민이가 내 품에서 꼼지락 대면서 나를 가지고 장난치는 걸 깨달으며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우웅... 해민아... 간지럽다니까..." 내 투덜거림에도 목덜미의 간지러운 느낌이 가시지 않자 나는 가지 않으려고 들러붙는 잠을 아쉬운 마음으로 쫓아내며 눈을 떴다. 그러자 역시나 황금색의 눈동자를 가진 쬐끄마한 녀석이 날 보고 방긋 웃는다. "요녀석, 간지럽다니까~!!" 그 귀여운 모습에 참지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킨 나는 해민이를 잡아 옆구리를 마구 간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문뜩 떠오른 생각에 대신 놀란 눈으로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 그러고보니 너 어떻게 여기 있는 거니?" 내 말에 해민이가 뚱한 표정으로 웃음을 싹 지우고는 삐졌다는 듯이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어제 자신만 린제이 손에 떨궈놨던 것이 못내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미안한 듯 하하 웃으며 해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도 고개를 갸웃 거리는데 듀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그 여자 마법사가 데리고 왔더군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여기로 오고싶어 했나 봅니다."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돌아보니 벌써 일어나 씻고 깔끔한 모습으로 서 있는 듀비의 모습이 보였다. "아, 잘 잤어요? 일찍 일어났나봐요." 어제 일도 있고 해서 방긋 웃으며 아침 인사를 건네는데 해민이가 갑자기 뛰어 오르더니 내 얼굴을 덮치는 거였다. "우게겍~~!!" 덕분에 기껏 일으켰던 몸이 뒤로 넘어가 나는 다시 간이 침대에 눕고 말았다. "우엑, 해민아~!" 잠시 해민이와 장난이 섞인 실랑이를 하고 일어나보니 듀비는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에 해민이 머리를 살짝 쥐어박고는 나도 얼른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리는 해민이랑 장난치느라 완전 엉망인데다 정전기까지 일어나 사방으로 뻗어 있었고, 잠옷 대신 입은 편안한 티셔츠도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어제 밤에 듀비와 단 둘이서 잔다고 해서 되게 긴장했었지만, 어차피 한 침대도 아니고 일인용 간이 침대가 따로 떨어져서 있었기에 아무 일도 없었다. 그걸 알고도 긴장한 내가 한심스럽게 느껴지게 말이다. '뭐, 그렇다고 뭔 일이 있기를 바란 것도 아니잖아? 도대체 뭐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요즘들어 가끔 헛된 망상을 하는 날 정신차리게 하기 위하여 운디네에게 아주 차가운 물을 달라고 해서 머리까지 감고 나자 그제야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해민이를 돌아보니 그 녀석도 아직 씻지도 않고 자다가 일어난 상태 그대로 나에게 달려온 듯 해서 그 아이도 씻기고 옷 갈아입고, 나도 머리 빗고 옷 갈아입고 나서 느긋하게 천막을 나오는데 밖에 듀비가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어라?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어요?" 내가 준비한 시간이 꽤 걸린걸 생각하며 미안함과 놀라움이 뒤섞인 얼굴로 묻자 듀비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잠시 어디 갔다가 왔습니다. 여기 도착한 건 방금 전이었는 걸요." "아,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기다리게 했다면 정말 미안해요." "기다리지 않았으니 미안해 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제 일 덕분인지 조금 더 친근한 대화가 오가는 듯 했는데, 그건 나만의 느낌이 아니었는지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있던 해민이가 듀비를 향해 인상을 팍 찡그리며 가볍게 으르렁 거리더니 나를 끌고 앞으로 나가는 거였다. "그래, 그래. 간다니까..." 캠프가 차려진 공터에는 많은 사람들이 벌써 일어나서 모여 있었다. 그러나, 엉망인 폼을 보아하니 어제 신나게 술을 마시고 그대로 여기서 엎어져 자다가 일어난 듯 보였다. '그러길래.. 왜 술들을 마시는지 모르겠다니까?' 얼마나 마셔댔는지 그들 가까이 가자 술냄새가 코를 찔렀고, 숙취 때문인지 사람들의 안색이 다 누렇게 떠 있었다. 공터 가운데에는 세개의 모닥불이 모여 있었는데 각각의 모닥불에 커다란 솥이 올려져 있었고 그 안에는 스튜가 보글보글 끓으며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는 어제 자신의 일은 잭슨에게 떠넘기고 술파티에 참여했다가 결국 뻗어버린 주방장이 누렇게 뜬 얼굴에 퉁퉁부어서 반쯤 풀린 눈을 한 채 커다란 국자를 들고 스튜를 휘젓고 있었다. 가끔가다 그 큰 입을 있는대로 다 벌려 하품을 해대는 폼을 보아하니 그 스튜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기는 하지만 과연 맛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잠시 후에 그 모닥불 근처로 빵이 가득 든 커다란 바구니를 가져온 주방 보조가 스튜의 상태를 힐끔 보더니 활활 타는 모닥불에게서 나무를 몇개 빼내어 불을 줄이더니만 주위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알아서 퍼가세요. 오늘 아침은 닭고기 스튜에 빵이예요." 그러자 사방에서 기운 없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하나 둘 어기적 어기적 일어나 그 커다란 솥으로 다가갔다. 그러는 동안 다른 주방 보조들이 또 다른 빵이 담긴 바구니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그릇과 스푼이 가득 담긴 통들을 가져왔고, 멍하니 서 있는 주방장의 손에서 국자가 빼앗아지더니 솥에 살짝 걸쳐졌다. 그 모습에 나도 다가가서 내 아침을 챙기려는데 그 순간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 해인아 잘 잤어?" 그 곳에는 어제 가레스에게 잡혀서 수다를 들어주느라 제대로 술을 마시지 못해(?) 지금 현재 멀쩡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마일즈가 있었다. "아, 잘 잤어요?" 그래 나도 같이 웃어주며 인사를 하는데 그가 무지 반가운 얼굴로 다가와 내 두 손을 부여잡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 반갑다. 잘 만났어." "에에?" 그러면서 어리둥절한 나를 이끌고 다른 사람들이 먼저 스튜를 퍼가기 전에 잽싸게 자신이 맨 앞 자리를 차지하더니만 내 손에 그릇들을 올려 놓는 거였다. "에에에??" 그것도 모자라서 해인이의 손과 듀비 손에도 올려놓고는 싱글벙글 웃어대는 거였다. "아, 정말 다행이야. 사실 나 혼자 이걸 다 어떻게 가지고 갈지 걱정이었는데..." 그러면서 우리가 들고 있는 그릇에 스튜를 가득 퍼 담더니 숟가락과 빵을 챙겨들고는 씨익 웃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너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지 뭐냐? 자, 어서 가자?" 아무래도 폼을 보아하니 자신의 것 말고도 다른 사람들 아침까지 나르는 임무를 받은 듯 한데, 그가 가레스와 같이 있고 린제이의 남자 친구이니 그들것을 가지고 간다지만 그릇 숫자가 좀 많았다. '으음... 마일즈하고 가레스님거하고 린제이, 나, 듀비, 해인이면 여섯개이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그릇은 총 아홉개이니... 누가 또 있는 거야?' 이러한 나의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쉽게 풀렸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공터를 지나 한적한 곳으로 가자 그 곳에는 무지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가레스를 비롯하여 내가 예상한 린제이 말고도 레이언 녀석과 그 녀석의 보좌관, 그리고 잭슨까지 앉아있는 거였다. "여~ 혼자 어떻게 우리것을 가져오나 했더니만, 해인이를 끌어들인 거야?" 우리를 보자마자 손을 들어 흔들면서 반갑게 인사하는 레이언 녀석의 모습에 나는 같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기 보다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녀석을 째려보았다. "뭐냐? 너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왜 가만히 앉아서 받아 먹으려는 거야?" 그러자 레이언이 들었던 손을 내리며 무지 억우류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게 아니야. 저 마일즈가 가위 바위 보에 져서 혼자 갔다 오게 된 거라고. 그리고 가면서 자기 혼자 충분하다고 했단 말이야." "뭐? 그럼 우리는 왜 끌고 간건데요?" 레이언의 말에 따라 다시 마일즈를 째려보며 묻자 그가 머쓱하게 웃으며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했다. "아니, 나는... 그냥 너희가 보이길래 같이 아침을 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 뿐이야." "뭐야, 그게... 쳇..." 내가 투덜거리자 잭슨이 내 손에서 그릇을 받아들면서 웃었다. "뭐, 좋잖아? 덕분에 같이 아침도 먹고 말야. 음~ 육지에서 처음 맞는 아침이라 그런지 기분이 되게 좋은걸? 공기도 짠 내음 보다 신선한 내음이 더 많이 나고 말야." 바다가 바로 옆에 있어서 여전히 짠 소금기가 배인 바람이 불어왔지만, 그래도 산이 바로 옆에 있어서 그런지 흙의 향기와 풀내음이 같이 날라져와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래 나도 기분을 풀고 가져온 그릇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는데 마일즈는 린제이에게 음식을 넘겼는지 둘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내가 같이 가겠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어제 늦게 자서 피곤하잖아." "당신 보다는 일찍 잤는 걸요." "나는 체력이 받쳐주잖아. 그리고 이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고." "그래도..." "으맇게 왔으니 다 잘되었잖아. 자자, 그만 하고 식기전에 어서 먹어." "당신도 어서 드세요." '으윽... 저들이 저렇게 닭살스러운 커플이었던가?' 평소 사람들 앞에서는 잘 티를 안 내더니만 오늘은 왠지 마구마구 하트를 날리고 있었다. "에구에구, 속이야..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는 건가? 예전에는 이 정도에 끄떡 없었는데..." 그들이 옆에서 그러건 말건 마일즈는 퀭한 눈을 한 채로 투덜거리며 힘겹게 스튜를 떠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주위에 있던 이들이 저마다 작게 소리를 죽여 웃기 시작하는 거였다. '아니, 노인네게 숙취로 힘겨워 하는게 그리 웃기남? 자기들도 늙어보라지.' 그래 동방예의지국에서 자라 노인 공경을 일상 생활하 해야 한다고 생각(만?)하던 내가 좋지 않은 시선으로 그들을 째려봤지만, 그들은 전혀 웃음을 멈출 생각을 안 했다. 오히려 잭슨은 나에게 다가와 웃음기 가득 담긴 목소리로 속삭이기까지 하는 거였다. "푸후후후... 너 말야 어제 가레스님이 술을 얼마나 마셨는 줄 알아?" 내가 비록 마법사 일행 근처에 앉아 있었기는 하지만 그들을 계속 지켜본 것도 아니고 나 먹는 데만 신경쓰고 있었는데 알게 뭐겠는가? 그래 부루퉁한 얼굴로 고개만 저어 보이자 이번에는 옆에서 웃던 레이언 녀석이 끼어들었다. "맥주 딱 세잔이라고. 맥주 세잔." 그러자 잭슨 녀석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호오, 놀랍네요? 그래도 한달 전보다 늘었잖아요? 그때는 맥주 한잔에 와인 한잔에 갔는데..." "맥주... 세잔?" 내 비록 술을 안 마시는 대한민국의 모범 학생이지만, 맥주는 술과 음료 사이에 꼽사리 끼는, 그러니까 알코올 돗수가 극히 낮은 술이라는 건 안다. 그래 맥주 한두 잔이면 그냥 음료 마시는 것과 같은 거라고 들었는데... "그거 마시고 취하신 거란 말야?" 나의 황당한 목소리에 레이언과 잭슨이 다시한번 키득 거렸다. "쿡쿡쿡, 가레스는 술을 못하거든. 그러면서 술자리는 꼬옥 끼려고 한다니까." "키득키득키득, 그리고 그 다음 날은 숙취로 고생하면서 꼭 하는 말이 저거야. 매번 레파토리가 똑같다니까." "푸후후후.. 그러게 말야. 이제는 바뀔 때도 되었는데..." 그러면서 둘이 서로를 부여잡고 또 키득대며 웃는 거였다. 다행히 가레스가 아직 술이 덜깨서 정신이 온전치 못해 다행이었지, 아마 정신만 또렷했다면 이들은 머리에 매직 미사일을 한방씩 맞아도 찍 소리 못했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나원 참... 누구 모습이 더 웃긴 건지... 그렇게 웃어대는 너희들도 꼴불견이다." 그들에게 설명을 들었음에도 차마 내 정신 상태 상 같이 웃지는 못하고 대신 그 두녀석의 모습에 혀를 끌끌 차주며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평소 아침 먹을때면 항상 하는 생각을 오늘도 하면서... '아, 김치 먹고 시포라... 배추김치도 좋고, 딸랑무도 좋고, 열무김치도 죽이고, 크윽... 깍두기도 먹고 시포... 오이 김치도... 어무이... 그립습니다...' 제 19화 거기 서! 아, 영감이 떠오른다~ (2) 어제 저녁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신나게 술독에 빠져서 그런지 사람들은 오후가 되어서야 하나 둘 정신을 차렸다. 폼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오늘 출발하기는 글렀다... 생각했는데 역시나 오후가 되어 사람들이 완전히 제정신을 차리자 그제야 머튼이 모든 사람들을 불러모아 나머지 일정을 설명해 줬다. 뭐, 대략적인 내용을 이미 레이언에게 들었던 나는 집중해 듣지는 않았지만, 우선 드워프의 마을에 갈 사람들과 이 곳에 남아 있는 사람으로 나뉘는데,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이 곳 캠프와 배를 지킨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이 곳에 남아 캠프와 배를 지키는 이들은 몇몇의 무사들과 이번에 배를 움직여온 선장을 비롯한 선원 절반 가량 뿐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다 드워프의 마을로 이동한다는 거여다. 물론, 캠프 주위에는 어제 밤 같은 대단한 결계는 아니더라도 몇몇의 만약을 대비한 결계가 쳐 있을 테고, 마법사 중에서 가장 강한 가레스가 남아 있는다고 하지만 사람 없는 곳에 너무 인원을 적게 남기는게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어제 오늘 아무 일이 없었지만, 그래도 배와 캠프 양 쪽을 지키는 인원이 30여명 정도라는 것은 한쪽에 있는 이들이 15명 정도, 그것도 하루를 3타임으로 나눠 지킨다고 계산하면 한 타임에 보초를 서는 이들은 다섯명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니 아무리 내가 이런데에 경험이 전무하다고 해도 괜찮을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 정도로 충분하려나?'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당연한 듯, 아니 오히려 몇몇 무사들이 속삭이는 소리로는 전보다 조금 인원이 많아졌다는 소리를 듣고 그러한 의문을 속으로 삼킬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다음날이 되자 나는 왜 선원들까지 가능한 한 많은 이들을 드워프의 마을로 데려 가려는지 알아차렸다. 드워프의 마을로 가져가야 할 짐이 엄청났던 것이다. 처음에 배에서 많은 짐들을 내려 캠프에 가져다 놓을때 드워프의 마을로 뭔가 거래를 할 것들을 가져 가겠지만, 그거 말고도 우리가 드워프의 마을에 갔다 올 동안 이 곳에 남을 사람들이 - 그때는 선원들은 모두 남고 무사들도 절반정도는 남을 거라고 생각 했었으니까 -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 했었다. 그런데, 그 많은 것들을 몇개 안 남기고 다 가져가니 나는 순간적으로 그럼 우리는 갈때 뭘 먹고 갈 것인가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도 그럴것이, 이렇게 많은 짐 들의 90%가 식품이었던 것이다. 제일 많은 것은 와인과 맥주, 그 다음으로 밀과 쌀, 보리 같은 산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곡식류, 그리고 요리하는데 사용되는 여러가지의 양념과 향신료, 기름 같은 것들이었다. '누가 보면 마트 하나 새로 생기는 줄 알 거야.' 그 많은 짐들을 바라보며 입을 떠억 벌리는데 잭슨이 나에게 다가와 꾸러미를 내밀었다. "자, 배급 식량." "응?" 나에게 주기에 순순히 받아 들었지만, 열어보니 커다란 빵 한 덩어리와 치즈, 그리고 말린 고기를 비롯한 비스킷 등이 들어있었다. "드워프의 마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산길을 가야 하니까 요리를 못해 먹거든. 그러니까 각자 자신의 식량을 가지고 끼니때마다 그걸 먹는 거야. 빵과 치즈는 며칠 있으면 상하니까 제일 먼저 먹고, 그 뒤에 빵 대신 비스킷을 먹도록 해. 그거는 오래 가니까." "으응..." "그리고 자신의 식량은 자기가 챙기도록 되어 있지만, 해민이는 어리니까 네가 잘 챙겨주고. 아, 물통도 각자 가지고 가야 하니까 챙겨두도록 해." "으으응..." 물이야 뭐, 나야 언제든지 운디네를 소환할 수 있었으니 따로 물통을 가져가지 않아도 걱정 없었다. 잭슨도 곧 그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 그렇군. 넌 물의 정령과 계약을 맺었으니 꼭 챙기지 않아도 되려나? 후후, 나중에 물이 없을때 잘 부탁한다." "아니 뭐... 그래도 일부러 안 가지고 갈 생각은 없는데 말야." 아침을 먹고나자 일행은 곧바로 공터에 모여 각자 짐을 챙기고 출발 준비를 했다. 짐이 얼마나 많았던지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모든 사람들이 같이 감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커다란 짐을 짊어져야 했다. 그리고 나도 거기서 예외는 아니라서 어른 남자 둘이 양 팔을 쭉 뻗어야 겨우 감쌀 만큼 커다란 맥주 세통이 배당되었다. "에엑? 이걸 어떻게 나 혼자 들고 가란 말이야?" 커다란 세개의 통이 하나로 묶어져 내 앞에 놓이자 나는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레이언 녀석을 노려보았다. 그건 다른 건장한 남자 무사들보다도 더 많은 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레이언은 능글맞은 미소를 띄우며 태연히 나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아내는 거였다. "네가 충분히 그걸 들고 갈 능력이 되니까 맡기는 거 아니냐. 원래는 한 통 정도는 더 맡겨도 될 거 같았는데 말야." "뭣이라? 너는 내 힘이 그리 강하다고 생각했단 말이야?" "충분히 강하다고 보는 걸? 혼자 배 하나는 보호할 능력이니까 말야." 그 말을 듣자 나는 순간적으로 허탈해져서 눈에서 힘을 뺐다. "뭐, 뭐냐... 그러니까 너 지금... 정령들을 불러서 이걸 운반하라고?" "그렇지. 잘 부탁해." 생글 생글 웃으며 저만치 몸을 돌려 달아나듯 빠르게 걸어가는 레이언을 한번 노려봐준 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나에게 할당된 짐덩어리(?)를 보다가 듀비에게 몸을 돌렸다. 그 또한 커다란 밀이 담긴 자루를 두개나 짊어지고 가야 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듀비, 무거우면 내가 하나 정도 들어줄까요?" 그걸 굵은 천으로 된 끈으로 묶어 막 어깨에 짊어지려는 듀비에게 말하자 그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생각보다 무겁지 않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머튼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하지. 여기에 있는 모든 것들은 실제 무게보다 가볍게 하려고 마법을 걸어 놨으니까 말야. 안 그러면 이 많은 물건들을 옮길 엄두는 못 냈지." 머튼도 이번 산행에 짐을 안 짊어지고 가는 몇 안돼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레이언 녀석과 힘 쓰는데 전혀 도움이 안되는 그의 보좌관, 그리고 마법사 둘과 아직 어린 해민이를 제외한 머튼을 비롯하여 11명의 무사였다. 이들은 만약을 대비해 일행의 앞 뒤, 그리고 사이사이에 포진하여 사람들을 보호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무사들은 한 번 휴식 시간을 가질때마다 다른 이들로 교체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길 안내를 한다는 레이언과, 일행 맨 뒤에서 가게 될 머튼은 교체를 안 한다나? '그 말인 즉슨, 나는 드워프 마을에 도착할때 까지 짐을 들고 가야 하고 레이언 녀석은 안 들고 간다는 소리잖아? 에잉... 맘에 안 들어.' 속으로 궁시렁 거리면서 나는 바람의 중급 정령 슈리엘을 불렀다. 그는 매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짐을 들게 하기에는 쬐께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로 상급 정령을 - 우람한 거인의 모습이라 짐 들게 하기에는 딱이지만... - 부르기는 뭣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뭐, 그래도 딱 한명을 불렀는데 그 가늘고 작은 - 물론 내 짐에 비해서지만... - 발로 짐을 쥐더니 거뜬히 허공으로 날아 오르는 거였다. 아무리 가볍게 하는 마법을 걸어 놨다지만, 그래도 최소한 통 하나 무게는 나갈텐데 말이다. 사실 거기에는 맥주가 꽉 차 있어서 한 통 만으로도 성인 남자 혼자가 들기 버거운 무게였던 것이다. '뭐, 정령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실제 힘과는 별로 관련이 없지만, 그래도 별로 기분이 안 좋네...' 속으로 머쓱하게 중얼거리며 저쪽을 보니 잭슨이 실프 네명을 불러내서 커다란 맥주통 - 으로 보이는 - 두개를 들게 하는 걸 보니 비실 웃음이 나왔다. 잭슨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려우니 정령들을 이용해 옮길 생각인 듯 했다. "자, 준비가 다 되었으면 이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공터 중앙 바닥에 놓여 있던 짐들이 사람들의 등과 어깨 위로 모두 올라간 듯 하자 맨 앞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레이언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그가 몸을 돌려 걸어감으로 인하여 일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잘 다녀 오십시오!" "조심해서 다녀 오십시오!" "어이, 몸 조심들 해~!" "길 잃고 울지 말고 사람들 잘 따라 가라~!!" "나중에 보자." 뒤에서 남아 있는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일행은 드디어 드워프의 마을을 향해 산으로 한발 한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산은 처음부터 가파르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어서 - 아마도 상회 사람들이 몇년에 한번씩 사용하지 않았다면 아예 없었을 것이다. - 길이라고는 나있지 않았다. 그래 앞에서 가는 무사들이 일일이 나뭇가지를 쳐내고 풀을 베어 길을 내어야 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제대로 드워프의 마을을 찾아갈 수 있을지 심히 불안했지만, 레이언이 몇번 와 본데다 자신의 핏줄을 믿으라고 (그 동안 잊고 있엇지만, 그는 하프 엘프였다.) 큰소리를 치니 한번 믿어볼 뿐이었다. 산속에서의 밤은 빨리 찾아왔다. 아침을 먹고 출발하여 점심을 먹기 전에 한번 쉬고, 점심을 먹기 위해 한번 쉬고, 저녁 먹기 위해 한번 쉰 다음 저녁을 먹을 때가 되기 전에 벌서 사방이 어둑어둑 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행은 재빨리 근처에서 공터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인원이 너무 많아 같이 있을 만한 넓은 공터를 찾기가 어려웠기에 인원을 3팀으로 나뉘어 조금씩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봤자 아주 평평한 공터를 찾지는 못했지만, 편안하게 천막을 치고 잘 것이 아니었기에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사방 여기저기에서 모닥물이 타오르기 시작했고, 내 앞에도 듀비가 피워놓은 자그마한 모닥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산행이라고 해봐야 한국에 있을때, 중학교 수학여행때 설악산에 가본 것 하고, 아버지와 친하신 두 아저씨들이 의논하여 휴가때 세 가족이서 지리산을 갔다온 것, 그리고 고등학교 수학여행때 제주도에 있는 한라산을 올라가본 것이 전부였기에 나는 거의 맨 몸으로 올라왔음에도 지쳐서 저녁을 먹기 위해 자리를 잡았을때는 빵을 꺼내 먹기도 힘들었다. 하기야, 한국에서 산에 올라갔을때에는 관광객들을 위하여 길이 다 나 있었고, 산장도 있어 힘들면 편히 쉬기도 할 수 있었지만, 여기는 그런게 전혀 없는 완전 서바이벌이지 않는가? "에구, 힘들어... 산에서 해가 일찍 진다는게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에고고고..." 해민이는 비록 짐을 들고 올라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같이 걸어 올라왔건만 아직도 생생해 보였다. 역시, 산 속에 사는 수인족이라서 그런 건가? "벌써 그렇게 지치면 어떻게 해? 아직 며칠 더 이러고 가야 하는데..." 잭슨 또한 힘들어 보여지만, 나 만큼은 지쳐서 완전 파김치가 되어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법사들도 나만큼은 지쳐 보이지 않았다. 그게 당연한 것이, 마법사들은 그래도 전공이 마법이라고 마법을 사용하여 올라 왔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레비테이션(부유) 마법을 사용하여 허공에 살짝 떠오르면 다른 한 사람이 떠오른 사람을 잡고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지치면 교대하고... 레비테이션 마법은 2 클래스 마법이라 각각 4클래스까지 도달한 그들로써는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말이다. '에휴, 사실 나도 정령을 불러 편하게 올라왔으면... 했는데...' 그런데 그러자니 나 혼자 편히 가려니 양심에 찔리고, 듀비와 해민이를 같이 데리고 가자니 또 다른 사람들이 걸리고... 그래 결국 나는 씩씩하게 내 두 발로 걸어 올라왔던 것이다. 덕분에 지금 이렇게 축 늘어져 있게 되었지만... '으윽... 내일도 이 고생을 해야 하다니... 그냥 양심이고 뭐고 혼자 편하게 갈까?' 그나마 내가 다른 이들 보다 나은 것은, 다른 이들은 이 더운 날 열심히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근처에서 물을 찾지 못해 그냥 찝찝한 가운데 자야 하지만, 나는 씻고 잘 수 있다는 거였다. 더불어 내가 안고 자는 해민이도 씻기고, 듀비도 원한다면 해주려고 했지만 해민이의 끈질긴 방해로 인하여 듀비가 그냥 포기 했다. 해민이 녀석이 요즘 유난히 듀비를 미워하는 것 같던데 이러다가 또 전처럼 듀비에게 무관심 하게 되는 건 아닌지 약간 걱정이 들었다. 완전히 해가 어두워지고 사방이 깜깜해지자 편히 앉아서 쉬고 있던 마일즈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마법을 시전하는 거였다. 대단한 마법은 아니고 환각 마법을 응용한 듯 싶은데, 밤 하늘 높이에서 마치 불꽃을 터트리는 것 처럼 아름다운 빛의 문양을 수놓았던 것이다. 물론, 그 문양은 상회를 상징하는 야생꽃 모양이었지만 깜깜한 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배경으로 갑자기 나타난 빛의 문양은 무척 예뻤다. 그러나,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나는 밤하늘의 색다른 쑈를 구경하기보다는 어리둥절하여 마일즈만 바라보았다. '갑자기 이 산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 여기 있어요~ 라고 선전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아닌 밤에 홍두깨라고 뭔 짓을 하는 거야?' 이런 내 황당함을 알아챈 것인지 잭슨이 피식 웃으며 설명해줬다. "드워프들에게 우리가 오늘 아침에 출발했다는 걸 알리는 거야. 매번 올때마다 산을 출발한 첫날 밤에 이런 표식을 하도록 약속이 되어 있거든. 그럼 며칠 내에 우리가 도착한다는 걸 알고 그쪽에서도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마중나오니까 말야." "아... 그런 거였어?" "후후, 그럼 할 일 없이 그러는 줄 알았냐?" "아니, 뭐..." 제 19화 거기 서! 아, 영감이 떠오른다~ (3) 다음날 아침이 되자 산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한국에 있을때 보다 빨리 회복되는 체력 덕분에 거뜬히 일어나서 오르기 시작했지만, 이런 산행을 하루도 아니고 며칠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쓰러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대체, 왜, 드워프라는 종족들은 산 속 깊이에서 사는 거지? 산속에 뭐가 있다고... 에휴...' 하지만, 아무리 산을 좋아하는 종족이라 하더라도 산 꼭대기라던지, 아니면 엄청나게 깊은 산속에서 살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 드워프들도 단체로 터전을 마련해서 살아간다는데, 집도 짓고 길도 내고 하려면 어느정도 공터는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 고비만 지나가면 드워프들이 자주 들락날락 거리며 만들어놓은 산길이 보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 산다면 한 며칠 거리 정도의 산속 정도는 왔다갔다 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레이언 녀석은 자꾸만 산 속 깊이 깊이 들어가는 듯 보였다. 그래도 처음에는 산 속에 살고 있다는 종족이라서 그렇겠거니... 했지만, 가도 가도 누군가가 산다는 흔적은 커녕, 보통 동물들도 살기 힘든 곳으로만 줄창 들어가는 거였다. 그러한 모습에 나는 왠지 산행을 출발하기 전 가레스에게 들었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저번에... 레이언 녀석이 길을 잘못 들어가지고 산속을 꽤 오랫동안 헤맸었다고...' 그래도, 출발하기 전 레이언 녀석이 호언장담한 걸 일부러 생각하며 나는 스멀스멀 피어오르 려고 하는 불안감을 애써 내리 눌렀다. 아무래도 이렇게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산속을 지나가면서 몬스터의 공격은 커녕, 산속에서 볼 수 있는 그 흔한 동물 한마리 보지 못해서 괜히 쓸데없는 생각만 하는 것 같았다. "이상하다... 보통 산 속으로 가면 동물 한마리쯤은 볼 수 있는 거 아냐? 하다못해 토끼 한 마리 안 보이네..." 나는 괜히 주변을 살펴보며 소리내어 중얼거리자 옆에서 같이 가고 있던 듀비가 피식 웃으며 설명해줬다. "동물들은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답니다. 특히나 자신의 안전에 관한 한 무척 예민하죠. 그런 동물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가는 길목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는 못할 테죠. 만약, 동물의 모습이 보고 싶으시다면 몇 사람들과 조용히 오르셔야 할겁니다." 역시, 정글에서 오래 산 블루 엘프 답게 동물에 대해 아는 점도 많았다. "호오, 그런가요? 그럼 몬스터는 왜 안 나타날까요? 나는 위험하다고 해서 무척 긴장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몬스터도 마찬가지 일겁니다. 많은 무리가 몰려다니는 종족이 아닌 이상, 아무리 자신의 힘을 과신하는 녀석이라 하더라도 나타지 못할 테죠. 음... 가고일이나... 와이번 정도라면 모를까요. 하긴, 와이번이나 가고일 녀석들도 다 떼를 지어 사는군요." "그, 그래요?" 역시 아는 것도 많다. "그럼 혹시 그 녀석들이 나타나는 건 아닐까요?" "그런 녀석들은 이렇게 숲이 많이 우거진 곳에는 잘 안 나타나요. 하늘에서 먹이를 낚아 챌때 이렇게 나무들이 빽빽하게 있으면 어려우니까요. 보통 작은 나무들이 있는 곳이나 평원을 노리죠." "오오.... 그렇군요." 그의 설명에 왠지 학생이 된 기분으로 듣고 있는데 내 팔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가던 해민이 녀석이 갑자기 듀비와 내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해민이는 내 왼쪽에서, 듀비는 오른쪽에 있었는데 해민이가 내 오른쪽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그 아이는 아직 말을 못해서 대화가 불가능하여 거의 바디랭귀지로 자신의 뜻을 표현했는데 그게 요즘들어 되게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듀비와 이야기하는 게 점점 늘어나서 그런가? 은근히 나와 듀비 사이를 벌리며 자신만 보라는 듯이 매달리는 해민이를 쓰다듬어주며 나는 슬그머니 걸음을 빨리해서 일행의 앞쪽으로 갔다. 아무래도 혼자 불안을 안고 끙끙 거리기보다 차라리 물어보는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이봐, 레이언?" "응?" 레이언은 저 앞의 길을 가늠해보며 열심히 손에 든 날카로워보이는 도로 길을 만드는데 열중한 채로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있지, 너 지금 가는 길 제대로 가는 거 맞아?" 그에 레이언은 잠시 손을 멈추고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뜬금 없는 소리야?" "아니, 계속 산속 깊이로만 들어가는 거 같아서..." "내가 길 안다고 했잖아. 이 길 맞으니까 걱정 마." "정말 맞아?" "그렇다니까." "나중에 여기가 아닌가베... 하는 건 아니지?" 예전에 한국에 있을때 읽은 우스개 이야기에서 나폴레옹이 적이 포진해 있다는 제보를 받고 군대를 이끌고 산에 올라갔는데 적은 없었다고 했다. 그래 이 산이 아닌가베... 하고 다시 군대를 이끌고 그 옆산으로 갔는데 그 곳에도 적이 없자 나폴레옹이 산을 둘러보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까 그 산이 맞는가베..." 그러자 뒤에 있던 졸병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지? "저거 대장 아닌가베..." 한국인이라면 대다수 알고 있는 이야기라 내가 이렇게 말했으면 농담삼아 하는 말인 줄 알아 챘겠지만, 레이언은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걱정 말라니까. 날 그렇게 못 믿냐?" '물론 믿고야 싶지만...' 하지만 그 다음 날이 되도록, 우리는 여전히 누구의 손길도 없는 산속을 걸어가고 있는 거였다. "레이언, 정말 이쪽으로 가는 거 맞아?" "맞다니까." 그러나 그 다음날에도 우리는 드워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산속을 걷고 있었다. "레이언, 지인짜 맞는 거지?" "아, 그렇다니까." 그리고 그 다음날... "레이언~!!" 내가 레이언을 부르자마자 레이언이 휙 돌아보았다. "아, 정말!! 이 길이 진짜 지이이인~~ 짜 맞다니까 그러네!!" 레이언은 자신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온 몸을 부르르 떨며 외쳤지만, 나는 녀석의 그런 몸짓을 무시한 채 한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봐, 이봐... 저기 있지, 저... 쪽에 있는... 그... 어쨌든 저기 있는 사, 아니, 분이 그... 드워프라는 종족?" "엥?" 차마 손으로는 가르키지 못하고 눈으로 그쪽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묻자 레이언이 내가 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서는 나무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인영이 앞으로 걸어나와 자신을 우리 시선 속에 완전히 드러냈다. "여어~ 에... 그러니까.. 이름이... 레이칸이라고 했던가?" 대충 130이나 140cm 로 보이는 키에 단단한 근육이 붙어 키에 어울리지 않는 굵은 몸집을 가지고 있고, 더부룩한 갈색 머리에 그와 같은 색의 수염이 뺨과 턱에 띄엄띄엄 나 있는 그는 레이언을 알아보고 활짝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러자 레이언은 그를 보고 마주 웃어주는 대신 버럭 성을 내었다. "레이언이라고 했잖아, 레이언!! 그새 또 잊어버린 거냐?" "아, 그래 레이언... 뭐, 레이칸이나 레이언이나 그게 그거구만." "그게 그거라니! 남의 이름은 좀 확실하게 알아두면 덧나냐?" "쳇, 별거 가지고 쫀쫀하게 굴긴. 역시 쫀쫀한 엘프의 피를 타고 나서 그런가?" "뭣이라? 너희 종족을 위해 그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와준 이에게 할 말이 그거냐?" "그러니까... 사람, 아니... 저분이 드워프?" 레이언과 아옹다옹 하는 작달막한 인영을 보고 중얼거리자 어느새 앞으로 나온 마일즈가 내 질문에 답을 해줬다. "맞아. 출발한 날 표식을 보고 마중 나와준 모양이군." "헤에, 그럼 맞게 왔다는 소리였네?" 이런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그 마중나온 드워프와 핏줄을 가지고 아옹다옹 하던 레이언이 휙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몇번이나 말했잖아." "아, 그래 그래. 미안 해." 뭐, 드워프까지 만난 이상 레이언의 말에 토달 이유가 없었던 나는 순순히 사과했고 그러자 레이언이 다시 그 드워프에게로 시선을 돌려 뭐라고 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드워프가 먼저 입을 열어 레이언의 말을 막았다. "나도 사과하지. 사과 할테니 그만 하고 가자고. 여기서 밤 샐거야?" 그 드워프에게 쌓인게 많은데 다 풀지 못했다는 듯 레이언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 드워프의 말이 옳은데다 사과까지 하니 뭐라 더 할수가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걸어왔다고. 이왕 멈춘 거 여기서 조금만 쉬었다가 가도록 하지." "좋도록 해." 드워프의 마을은 그 곳에서부터 다시 산 꼭대기로 더 올라갔다가 그 꼭대기를 넘어서 어느 큰 골짜기 밑으로 내려가자 그제야 보였다. 골짜기의 밑 바닥은 원래 공간이 좁아 보였지만, 아예 양 옆의 절벽을 파고 들어가 공간을 크게 넓혀 2, 3백 가구는 넉넉히 들어가 살 정도의 터전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게다가 골짜기 가운데로 냇물이 졸졸 흘러 물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골짜를 따라 내려오면서 절벽 중간 중간에 마치 오목 거울 같은 커다란 유리로 보이는 장치가 보였다. 처음에는 그게 뭔지 몰랐는데 밑으로 내려와 하늘을 잘 보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평지에 있는 것 처럼 빛이 잘 들어오는 것을 깨닫고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 그것들은 골짜기 위에서 빛을 모아서 아래로 보내주는 역할을 하는 듯 했다. '밤에는 달빛을 모아 주려나?' 게다가 골짜기를 내려올때는 날카롭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내려왔는데 그 마을에다는 무슨 수를 썼는지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지금까지 우리가 맞으면서 왔던 바람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거였다. 바람도 없지 빛을 잘 받아서 환하고 따뜻하지, 물 있지, 먹는 문제만 빼면 생물 살기에는 참 좋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곳이었다. 마을 주위에는 적을 방어하는 목적인 듯한 튼튼하고 커다란 성벽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입구가 있었는데, 입구에는 그 큰 입구에 딱 맞는 청동으로 된 문이 달려 있어 왠만한 공격에는 끄떡도 없어 보일 정도로 튼튼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청동 문에는 그 큰 문에 걸맞는 엄청나게 큰 드워프가 그려져 있었는데, 한 손에는 망치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끌을 들었다. 그리고 그 드워프의 뒷 배경에는 드워프를 다 감쌀 정도로 커다랗게 타오르는 불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은 문 두개가 딱 맞물렸을때 제대로 보였고, 문을 열때에는 불과 드워프가 세로로 두쪽으로 쪼개지게 되어 있었다. 우리가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때에는 마침 문이 닫혀 있어서 그 그림을 볼 수 있었던 거였다. 우리를 안내한 드워프가 문에 다가가서 드워프의 키에 걸맞도록 밑에서 약 100cm 높이에, 그러니까 내 허리 만한 높이에 약간 돌출 된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그게 초인종 역할을 하는 것이었는지 문 안쪽에서 마치 실로폰 소리 같은 맑은 소리가 들려왔다. 딩~ 동댕~ 딩~ 동댕~ 딩~ 동~ 댕~ 처음 들어보는 간단한 멜로디의 실로폰 소리가 들리자 문 위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 프레스냐? 어서 들어와라.] 제 19화 거기 서! 아, 영감이 떠오른다~ (4) [아, 프레스냐? 어서 들어와라.] 고개를 들어보니 성벽 위로 빠꼼하게 두개의 깔대기 같은 장치가 보였는데, 하나는 망원경 처럼 생겼고, 다른 하나는 가운데가 뻥 뚤린 것이 나팔이거나 소리를 증폭 시키는 장치 갔았다. 아마 성벽 위에서 그 장치로 방문자를 확인하고 방문자에게 이야기를 하는 듯 싶었다. 평소 다른데서는 보기 힘든 그 모습에 듀비와 해민를 비롯한 몇몇 무사들은 놀라움에 찬 시선과 감탄사를 터트렸지만, 이 곳에 몇번 온 이들은 익숙한 듯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나 또한, 한국에 있을때 그 보다 훨씬 시설 좋은 것들을 많이 봤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단지 이 세계만의 장치에 호기심을 느꼈다고나 할까? 이 곳에 오기전에 드워프라는 종족에 대해서 듣길 뛰어난 장인에 발명가에 예술가라고 하더니만 입구에서부터 그런 걸 조금씩 확인하게 되는 것 같았다. 성벽 위의 그 말이 들리고 그 커다란 청동 성문이 부드럽게 양 옆으로 열렸다. 그러자 프레스라는 그 드워프는 안으로 들어서는 대신 옆으로 비키더니 우리를 향해 정중하게 그 짧막한 상체를 숙이는 거였다. "저희 북 드워프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 모습을 보자니 한국에 있을때 새로 가게가 오픈되어서 그 앞에서 예쁜 언니들이 가게 홍보 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듯 했다. 물론, 한국에서는 늘씬하고 예쁜 옷을 입은 예쁜 언니들이었고, 여기는 짜리몽땅한 드워프라는 점이 다르지만... '음음, 외모가지고 비교한다는 거 알면 기분 나쁘겠지?' 일행 맨 앞에 서 있던 레이언이 그런 드워프의 모습을 한번 일별하고는 스스럼없이 척척 안으로 들어가자, 그의 곁에 있던 나도 자연스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문 옆에 서서 우리 일행이 들어가는 걸 보고 있던 프레스라는 드워프가 일행이 모두 안으로 들어가자 성벽 위를 향해 뭐라 뭐라 소리치더니 그 짧은 다리로 도도도 달려와 일행 앞쪽 대열에 끼어 들었다. "상회에서 온다는 걸 알고 족장님께서 기대하고 계셔." 그의 말에 레이언이 그 드워프와 만난 뒤 처음으로 느긋한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아아, 이번에 새로운 여러가지를 가지고 왔으니 충분히 만족시켜 드릴 수 있을 거야." 자신있게 레이언이 대답했건만, 아쉽게도 레이언의 대답이 프레스가 기대한 대답과는 틀렸던 모양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너희들이 오기 얼마 전에 대회 시작이 선포 되었거든."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레이언을 비롯한 몇몇의 무사들이 그자리에 얼어붙었다. "엑!!" "어억~!" "큭!!" "서, 설마..." 하지만, 그들 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뭔 일인지 감을 잡지 못한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레이언과 프레스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레이언은 충격에서 헤어나느라 설명을 못하고 있었고, 프레스는 다른 설명 없이 단지 이렇게만 말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기대하고 있지. 때맞춰서 잘 왔지 뭐야? 뭐, 아쉬운게 있다면 이번에 우리 아버지는 제비뽑기에서 떨어지셔서 못나가신다는 거지만... 만약 뽑혔다면 내가 도움이 되어 드렸을 걸..." 도대체 뭔 소린지 하나도 몰랐지만, 상황이 물어볼 엄두도 못내게 만들고 있었기에 우리는 묵묵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크윽... 젠장... 때를 잘 못 맞췄잖아? 어휴... 운도 지지리도 없지..." 레이언이 오만상을 찌푸린 채 투덜거리자 프레스가 무지 기분 좋다는 듯 히죽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자자, 어서 오라고. 족장님이 기다리실 거야." 프레스의 뒤를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나는 주위를 둘러보기에 바빴다. 한국에 있을 때에나, 아니면 이 세계에 있을때에도 큰 도시라 해도 비슷비슷하게 생긴 건물들이 -달라봐야 크게 다르지 않은 - 쭈욱 늘어서 있는 모습에 익숙했던 내게는 이 곳은 별천지 처럼 보였다. 건물 - 정확히 말하면 집이지만 - 건물이 쭈욱 늘어서 있는데 놀랍게도 이 건축물들이 전부 생김새가 달랐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똑같은 구석이 없다고 하는게 옳을 듯 했다. 게다가 쭈욱 늘어서 있다고 해도 똑바로 늘어선게 아니라 서 있는 위치가 각각 틀렸고, 각도 또한 틀렸다. 어차피 햇볕은 사방에서 내리쬐니 꼭 남향을 지향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심지어 울타리라던지 앞마당에 있는 화원이라든지, 아니면 길 앞에 난 골목길 하나 조차도 각각의 집 앞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곳이 하나도 없었다. 각자의 개성을 최대한 살린 그러한 모습들에 저절로 감탄이 나오는 걸 느끼며 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쿵쾅쿵쾅 하는 소리가 들리며 커다랗고 굵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 거기 섯, 이봐, 거기 좀 서라니까?" 불리는 당사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라면 호기심에 한번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겠지만, 나는 주변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던데다가, 설마 나를 불렀으랴 하는 생각에 그냥 걷다가 듀비가 나를 잡아 멈춰 세우는 덕에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일행이 모두 멈춰선 채로 쿵쾅쿵쾅 달려오는 한 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나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프레스보다 약간 더 크고 더 듬직한 체구를 가진 드워프가 그 굵은 발을 열심히 놀리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레이언이 약하게 떨며 프레스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내 귀에 들려왔다. "으윽... 버, 벌써 시작인 거냐?" 그에 반해 프레스는 무척 여유로운 말투로 대답했다. "아니. 저 분은 이번에 족장님으로 뽑히는 바람에 대회에 출전하지 못하시거든." "그, 그러냐? 그럼 우리를 마중 나오신 건가?" "그럴걸?" 그들이 거기까지 대화하는 동안 열심히 뛰어오던 드워프가 우리 일행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좀 멈칫 하더니 그것도 잠깐, 득달같이 다가왔다. 그러자 족장이 다가오는데 일행의 대표인 레이언이 가만 있을 수가 없어 앞으로 나서며 그 드워프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제와서 이야기지만, 레이언과 그 프레스라는 드워프가 평어체로 대화를 주고받는 이유는 그 동안 몇번 이 곳에 오면서 계속 만났던 데다가, 둘 다 100세도 약간 넘은 비슷한 나이였기에 편하게 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족장은 나이도 훨씬 더 많은 어른이니 편하게 대할 수는 없을 터였다. "안녕하십니까, 족장님. 오랜만에..." 그런데, 참으로 허망하게도 그 족장 드워프는 정중하게 인사하는 레이언을 그냥 지나치더니 그 뒤쪽에 서 있던 내 팔을 덥썩 잡는 거였다. "에엑?" 반사적으로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족장 드워프의 팔 힘이 얼마나 센지 나는 옴쭐달싹 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날 잡은 족장 드워프는 까치발을 해서 내게 얼굴을 들이밀듯 이모저모 살펴보더니 금방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나더니만 부르짖는 거였다. "오오~~ 영감이 떠오른다, 영감이! 너, 여기 가만히 있어. 내 곧 갔다 올테니 꼼짝 말고 여기 있어야 한다." 그러더니 다시 부리나케 달려가는 거였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라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로 레이언을 돌아보자 그가 쓴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다가와 내 어깨를 툭툭 치는 거였다. "힘 내. 아마도 이 곳에 머무는 동안 너 뿐만이 아니라 이 곳에 있는 모든 일행이 그러한 일을 겪을테니... 어쩌겠냐? 재수없이 때를 잘못 맞춘 것이거늘... 다 운명이려니 해라." "엉뚱한 말만 늘어놓지 말고 알아듣게 설명좀 해봐라. 뭐가 어떻다는 거야? 이곳에 머무는 동안 일행이 다 겪을 거라니..." 내가 인상을 팍 쓰며 묻자 프레스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뭐, 이왕 설명해줄 거 가면서 하죠? 어차피 족장님은 집으로 가셨을 테고, 우리도 목적지가 그 쪽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하여 걸음을 옮기면서 시작된 레이언과 프레스의 설명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드워프의 마을에서는 일정기간에 대회를 연다고 한다. 최고의 장인이자 예술가로 칭송받는 이들이니 당연히 여는 대회도 '누가 누가 멋진 물건을 만드는가?'하는 대회인에 인간 세계에서의 대회와 다른 특이한 점이 인간 세계에서는 물건이 다 만들어져 모이는 날을 정하지만, 이 곳에서는 만들기 시작하는 날을 정한다고 한다. '자, 오늘부터 만들기 시작합니다!'라고 족장이 선언하면 그때부터 만들기 시작하는데, 기간은 무제한이라고 한다. 언제까지 만들어야 한다고 기간을 정하는 것은 최고의 물건을 만드는데 지장이 된다나 어쩐다나 하면서 말이다. 뭐, 그들이야 인간보다 오래 오래 산다고 하니 - 여기서 잠깐 설명하자면, 드워프의 수명은 평균 500살 정도라고 한다. 성년은 100살. 하프엘프와 수명이 비슷하여 프레스와 레이언이 서로 말을 놓을 수 있었던 듯 - 상관이야 없지만, 그래도 5년이고 10년이고 참석자 개개인이 모두 다 마음에 드는 대회 출전 물품을 완성할때까지 기다려 그제야 대회를 개최한다니 무지 황당하게 여겨졌다. 대회를 열때까지 수십개를 만들었다 부쉈다 한다니 기간이 엄청 오래 걸릴 것 같기는 하다. 그러니 대회가 열리는 기간이 일정치 않은데, 처음 대회를 시작하겠다고 선언한 뒤 한 일년 정도는 참가자들이 대회에 출품할 물건에 대한 영감이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별의 별 짓을 다 한다고 한다. 어떤 자는 온 산을 돌아다닌다거나, 어떤 자는 몇날 며칠이고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방 구석에 처박힌다거나, 어떤 자는 죽어라 일을 한다거나... 그러는 와중에 외부에서 들어온 신선한 자극, 그러니까 외부에서 들여온 물품이라던지, 아니면 외부 인사 - 딱 우리 같은 - 들이 왔다 하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경향이 심하다고 한다. 그런데다 이 마을 풍토가 '대회에 참여하는 자들에 대해 최대한 배려를 해줘야 한다' 이기 때문에 외부 이사든, 이 마을에 사는 자던 대회 참여자가 이리와라 하면 와야 하고 손 들어봐라 하면 들어봐야 한다는 거다. 참여자들을 최대한 배려해야 하는 것이, 대회 참여는 아무나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일을 가르친 스승이나 아버지가 '이제 너에게 가르칠 것이 없으니 하산 하거라... -물론 하산 하지는 않겠지만.. -' 란 소리를 들은 드워프만 자격이 주어지는데 그 연령대가 보통 300살 이후라고 한다. 그러니 대회 참가자들은 다 마을의 어른이니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터였다. 그래서 그 대회 시작한 후로 일년을 '마의 일년'이라고 한다나? 그래도 시작한 지 일년 후가 되면 모두 왠만큼 출품작을 정해 만들기 시작하기 때문에 괜찮은데 하필 우리가 그 수많은 기간을 나두고 그 마의 일년에 딱 맞게 온 거였다. 심사위원은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아 일선에서 물러난 원로들과 4장로, 족장이라고 한다. 드워프의 세계에는 8명의 장로가 관리하는데 족장은 매번 대회가 끝났을때 제비뽑기를 통하여 장로 중 한명을 뽑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매번 대회가 끝난 뒤 다음 대회를 위하여 8장로들이 제비뽑기로 4명을 뽑는데 그 중 한명이 족장이 되어 나머지 네 장로들과 다음 대회를 준비하고 제비에 안 뽑힌 세명의 장로들은 대회에 참여할 수 있는 영예를 얻는거라고 한다. 그리고 프레스의 아버지 또한 이번에 불행하게도 제비를 뽑아서 대회 출전은 못하고 준비 운영을 맡은 불행한 장로 중 한명이고.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나는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잠깐만, 대충 이해는 하겠는데 그럼 나는 아까 왜 붙잡힌(?) 거야? 족장은 대회에 참가 할 수 없다면서?" 내가 질문을 다 끝내자마자 레이언의 대답 대신 아까 그 드워프 족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어디 가는 거야? 내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그 근처에 있던 어떤 버섯 같이 생긴 앙증맞고 귀여운 집에서 아까 그 족장 드워프가 문을 걷어차며 득달같이 뛰어나오는 거였다. 그의 양 손에는 기타처럼 생겼지만, 그보다 작은 악기와 종이와 펜이 들려있었다. "족장님이 집에 가실 것 같으니까 여기로 모셔온 거예요. 덕분에 족장님과 빨리 만날 수 있었 잖아요." 무섭게 달려오는 족장의 모습에 내가 얼어붙어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프레스가 끼어들어 대신 입을 열었다. "그래? 뭐, 좋아. 어쨌든 다시 만났으니까. 자, 잠시만 그러고 있어. 내 금방 끝날테니." "에? 에에에?" 그는 그의 굵고 투박한 손으로 내 팔을 잡아 끌어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공간에 세우더니 나를 본 채 뒤로 물러나며 신신당부를 하는 거였다. 제 19화 거기 서! 아, 영감이 떠오른다~ (5) "그래? 뭐, 좋아. 어쨌든 다시 만났으니까. 자, 잠시만 그러고 있어. 내 금방 끝날테니." "에? 에에에?" 그는 그의 굵고 투박한 손으로 내 팔을 잡아 끌어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공간에 세우더니 나를 본 채 뒤로 물러나며 신신당부를 하는 거였다. 그 족장 드워프가 그렇게 신신 당부하지 않았어도, 그 전에 레이언의 말도 있고 해서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그 자리에 엉거주춤 가만히 서 있었다. 족장 드워프는 그렇게 나를 앞에 세워두고는 떡 하니 흙바닥에 앉아서는 아까 같이 챙긴 딱딱한 판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뭔가를 열심히 휘갈겨 쓰더니만 대력 30여분쯤, 아니 그것은 조금 안 된 시간이 흐르자 환호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는 거였다. "좋았어. 다 됐다. 음음, 내가 봐도 멋진 작품이란 말야." 나를 모델로 한, 비록 뭔가 만들지는 않았지만, 최고의 장인이라고 일컬음 받는 드워프가 완성한 멋진 작품이라는게 은근히 기대 되어 볼 수 있나 싶어 그에게 슬금슬금 다가가는데 족장 드워프가 그런 나를 보고는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어보였다. "너도 내 작품이 기대돼지? 보여줄까?" 그걸 기대하고 간 건데 거절할 이유가 없어 얼른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그러자 족장 드워프의 뒤쪽에 서 있던 레이언과 프레스라는 드워프가 묘한 미소를 흘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어서 그가 완성한 '무엇인가'를 보여주길 기대했다. 족장 드워프는 내 반응에 기분 좋은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면서 자신이 들고 나왔던 기타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조금 작은 악기를 턱 하니 손에 쥐고는 그 굵고 짜리몽땅한 손가락으로 줄을 딩딩 튕겨보는 거였다. '오호라, 나를 모델로 노래를 지었나보지? 과연 무엇이라 지었을까나?' 그 모습에 족장 드워프가 무엇을 끄적 거렸는지 대충 감을 잡은 나는 더더욱 기대감에 눈을 빛내며 족장 드워프를 주시했다. 그의 목소리가 굵기는 했지만, 성악가들도 그런 목소리로 멋진 노래를 하지 않는가? '아아, 역시 목소리가 크다 했더니만 노래를 하는 드워프였구나...' 잠시 악기의 음을 잡은 족장 드워프는 흠흠 하며 목청을 다듬더니 드디어 딩가딩가 하면서 밝고 명랑한 리듬의 간주를 시작하고는 입을 열었다. 음바음바 음바바바 신비한 색의 머리칼을 가진 소년이 산길을 걷고 있었다네. 음바음바 음바바바 햇빛이 소년의 머리카락에 내려앉자 소년의 머리카락은 푸른 하늘빛으로 빛났지. 음바음바 음바바바 허공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던 산비둘기 한 마리가 소년의 머리 또한 푸른 하늘인줄 알고 그대로 통과하려다 꽝~ 하고 부딪혔다네. 눈에서는 불이 번쩍, 천지는 핑그르르~~ 산비둘기는 그대로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지. 그러자 하늘을 날던 그 제비가 너무 우스워 배꼽을 잡고 웃다가 나는 걸 깜빡하고 자신도 떨어지고 말았다네. 푸하하하~~ 아이고 우스워라 푸하하하~~ 이럴 수도 있었구나. 순식간에 두 마리의 새를 땅으로 떨어뜨린 신비스런 하늘빛의 머리카락 소년~~ 노래의 흥에 빠져 어깨와 발로도 박자를 맞춰가며 열심히 부르던 족장 드워프는 노래의 끝을 멋드러지게 맺고는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때, 멋지지? 환상적이지? 배우고 싶지?" "하... 하.하.하... 하.하.하.하..." 기대에 차서 노래를 듣고 있던 나는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어이 없는 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물론, 내 머리카락이나 눈의 색이 빛의 각도나 양에 따라 약간씩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이렇게 햇볓을 정면으로 받고 있으면 구름 한 점 없는 파아란 하늘빛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걸로...' 웃어 넘겨야 할지, 예의상 괜찮다고 아부를 해야 할지 갈등하고 있는 사이, 말이 나오지 않아 흘린 웃음을 어떻게 생각한 것인지 족장 드워프가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호오, 너무 감격하여 말을 못하는 구만? 좋아, 좋아. 내 노래의 모델이 된 기념으로 내가 친히 이 노래를 가르쳐주마. 너도 좋지?" '허걱, 그, 그딴 노래는 배우고 싶지도 않단 말이닷!!' 나는 속으로 기겁을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거절의 말을 할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배우겠다고 말하기도 싫었기에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 하며 서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날 구원해준 것은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해준 프레스란 드워프였다. "족장님, 지금은 그럴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우선은 상회 일원들을 숙소로 안내해준 다음에 그들이 가져온 식품을 저장고에 가져다 놔야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햇볕에 노출되도록 나두면 맥주랑 와인들이 다 뜨끈뜨끈 해지겠습니다." 그의 말에 족장 드워프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렇군. 큰일날 뻔 했어. 자자, 어서 움직이지? 자네들이 묶을 곳은 저번과 같은 곳이니 어서 서두르자고." 우리들이 가져온 식품들은 오랜 기간 동안 배로 운반을 해와야 했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상하지 않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특히나 맥주나 와인 같은 경우에는 발효기간 (맥주나 와인은 발효기간과 숙성 기간을 거쳐야 진정한 와인과 맥주로 거듭난다) 만 거친 제품들이었다. 물론, 우리가 먹기 위한 것들은 숙성 기간까지 거친 거지만... 그리하여 이 술들은 모두 배로 옮겨지는 동안 숙성된 거였는데, 이 숙성 기간동안에는 숙성 온도 (처음 며칠간은 통에서 재발효를 해야 하기 때문에 실온 - 18~25도 사이 - 에 있어야 하지만 그 뒤에는 저온 - 냉장 온도. 3~5도 - 에 맞춰서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모두 저온 마법에 걸린 통 속에 담겨 있다. - 통은 저온 마법에, 온도 보존 마법, 거기에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한 마법까지 걸린 마법 물품이다. -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마법에 걸렸다고 해도 역시 직사광선은 피해야 했기에 족장 드워프가 서두르는 거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렇게 드워프의 마을 까지 운반하는 동안 알게모르게 햇볕을 쐬었을 텐데 여기에다 더 쐬면 안좋을테니 말이다. 일행은 거기에서 둘로 나뉘어 한쪽은 - 그래봤자 10여명의 사람들 - 일행의 짐을 가지고 우리가 묶을 곳으로 향했고, 나를 비롯한 나머지 많은 인원들은 서두르는 족장 드워프와 프레스를 따라 드워프족 공동 창고로 향했다. 그 곳은 절벽 사이에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을 조금 다듬어 창고로 쓰는 듯 했는데, 동굴 앞에 튼튼하게 달아 둔 문을 족장 드워프가 열쇠로 자물쇠를 풀고 - 여기도 몰래 훔쳐먹는 이가 있었는지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 문을 열자 시원한 냉기가 화악 몰려 나왔다. 역시나 식량 창고라서 그런지 창고 내 온도를 낮게 유지시키는 모양이었다. 그 곳에다 들고간 식량을 창고 구석에 조심스레 쌓아 두자 같이 갔던 마일즈와 린제이가 식량 부대들과 술통에 걸어놓은 모든 마법들을 해체 시켰다. 아무래도 마법사들을 동행 시킨 이유가 운행에 닥칠 위험을 방어하는 이유도 있기는 하지만, 이런 통 같은 데에 마법을 걸거나 해체 시키기 위해 같이 동행하는 이유도 있는 듯 했다. 이런 마법들은 계속 유지 시키려면 마나를 모으는 결계를 따로 새겨 넣거나 그러한 마법을 걸어 줘야 하는데 이 마법이 고난위의 마법이라 가레스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그러한 결계 하나 하나 치는 것도 가격이 많이 드니까 아무래도 가레스를 비롯한 동행 마법사들이 자주 자주 바꿔 걸어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드워프족 창고에 들어간 이상 그럴 필요가 없을테니 그들의 임무도 한가지가 끝나 이제는 어깨위의 짐이 한결 가벼워 졌을 것이다. 우리는 그 곳에 식량들을 놓고 내려왔지만, 족장 드워프와 프레스는 그 곳에 남았다. 아마 우리가 가지고 온 것들을 점검하고 정리하는 일들이 남아 그런 것이겠지? 게다가, 레이언 녀석이 이 곳에 온 적이 몇번 있어서 우리가 머물 숙소를 알았기에 따로 안내는 필요 없어 프레스의 안내도 필요 없었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아... 어쨌든, 이것으로 운반은 끝난 건가?" 상회 일행이 우르르 창고에서 나와 숙소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나는 이제 내 일이 거의 끝이 났다는 것에 기뻐서 - 어차피 갈 때는 인어들이 없으니 내가 할 일은 배에서 뒹굴뒹굴 하는 것 뿐... 음, 심심하겠군. - 기지개를 피며 중얼거리자 레이언이 무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있지... 갈때도 운반할게 좀 있는데..." "윽..." 기지개를 펴던 모양 그대로 굳어버리자 레이언이 조금 더 설명했다. "아니... 이 곳에는 거의 물물 교환을 하러 온 것이기 때문에... 드워프들에게 물건을 가져다 줬으니 또 받아가야지." "그, 그러냐?" 내가 힘 빠진 얼굴로 중얼거리자 레이언이 웃으며 내게 다가와 어깨를 툭툭 쳤다. "힘 내. 내가 돌아가면 맛난 것 사준다니까." 그러자 뒤에서 따라오던 무사 한 명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아, 그러고보니 이번에는 대장의 노래를 듣지 못했네? 쿡쿡쿡, 대장의 노래도 아까 해인이 노래 처럼 재미있는데 말야." 아무래도 그 무사는 전에 레이언과 함께 이 드워프의 마을에 왔던 다른 이들 중 한명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무사가 끼어들며 그 말을하자마자 레이언의 얼굴이 다급해지면서 무사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왁, 왁~ 그건 말하지 맛!!" 하지만, 그걸 가만 두고볼 내가 아니었다. 나는 재빨리 레이언의 손길이 무사에게 닿으려고 하는 걸 차단하면서 무사에게 물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레이언의 노래라뇨." 그 무사는 나의 지원에 힘을 입어 슬그머니 레이언의 손길을 피하면서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니, 전에 왔을때는 너 대신 대장이 아까 그 드워프에게 잡혀서 노래의 모델이 되어줘야 했거든. 그 노래도 참 웃겼는데... 내용이 뭐였더라?" "으악~ 말하지 말라니까!!" 레이언의 말에도 불구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무사의 입에서 그 노래의 내용이 흘러나왔다. "아, 맞아.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 반짝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이 정말 은인 줄 알고 멀리에 있던 까마귀가 날아와서 머리카락을 한웅큼 뽑아갔다네~ 음음, 그랬더니 그 소년이 아파서 눈물을 찔끔찔끔~" 그 무사는 이야기 하는 도중 멜로디가 기억 났는지 떠듬거리며 엉성한 노래까지 불러댔다. "호오, 레이언 노래는 그거였단 말이죠?" 내 노래에 비하여 정말 손색이 없는 노래에 내가 씨익 웃어보이자 레이언이 냉큼 반박했다. "무슨 소리야? 내 노래는 그게 아니라고. 너 말이야 기억 하려면 제대로 기억할 것이지... 내 노래는 가고일이 나타나서 내 머리카락을 잡아채려고 했지만, 그걸 오히려 내가 역습해서 한방에 가고일을 날려버린다는 내용이라고." "에이~ 정말?" 내가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레이언을 바라보자 아까 그 무사가 다시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내가 부른 노래였는데, 대장이 내가 그렇게 약해 보이냐고 펄쩍 뛰어가지고 다시 가사를 바꾼 게 그 내용이 된 거야." "헤에, 그래? 으음, 그럼 아까 나도 펄쩍 한번 뛰어볼 걸 그랬나?" "넌 뭘 가지고? 그래도 너는 약해서 까마귀에게 머리 뽑히고 우는 건 없었잖냐?" "쿡쿡쿡, 아 그건 그렇네..." 약간 불만인 듯 투덜대는 레이언의 모습에 주위 사람들이 쿡쿡 거리는 동안 계속 걷고 있던 덕에 우리는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곳은 처음에 만들어졌을 때 부터 이 곳을 방문할 상회 사람들을 위해 맞춰진 거라 다른 드워프의 건물에 비하면 큼직 큼직 했다. 그렇다고 드워프들의 건물이 그에 비해 모두 작다는 게 아니라, 사실 우리가 묶는 건물은 단순한 직사각형 모양의 2층 건물이었다. 단순히 층수만 따지자면 드워프의 건물들 중 낮은 축에 속하지만, 드워프들은 자신들의 작은 키를 고려해서 그런지 문도 낮고, 한 층의 높이도 작고 아담한 사이즈로 만들어졌으니 그것들을 보다가 우리에게 맞는 건물을 보니까 큼직하게 느껴진 것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우리가 드워프의 식량 창고로 갔다 오는 동안 먼저 이 곳에 왔던 이들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드워프들이 이 건물을 지어서 우리에게 주었지만, 그건 임대를 해줬다는 것이 뿐 관리까지 해주는 건 아니었기에 우리가 직접 와서 - 물론 이 곳에 올때만... - 청소 하고 사용하다가 다시 정리해놓고 간다는 거였다. 이 곳을 비워 놓는 동안 가구들 위에 먼지가 쌓이지 않게 하기 위해 덮어 두었던 하얀 천들이 현관문과 직통해 있는 넓은 거실에 한가득 쌓여 있었다. 가구 대신 먼지를 맞아 준 천들 덕분에 그 거실 또한 먼지 투성이라 사방의 문이란 문은 다 열린 채 먼지들을 없애려고 했지만, 워낙 먼지가 많았기에 별로 효과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한쪽에서는 먼지를 가라앉힌다고 문을 몽땅 열어놨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집안 구석 구석에서 가구 카바를 벗겨 내어 자꾸 가져다 던져 놨으니 먼지를 내보내도 내보내도 소용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이왕 가져대 놓을 것 뒷뜰에다 가져다 놓지, 왜 여기에다 가져다 놓는 거야?" 허공을 꽉 채우는 먼지를 조금이나마 덜 마시기 위하여 입과 코를 막으며 잭슨이 투덜댔지만 모두들 먼지를 피해 다시 밖으로 피하느라 제대로 듣는 사람은 없는 듯 했다. 나 또한 그 안에 먼지가 가득한 것을 보자마자 얼른 해민이를 데리고 뒤로 물러나느라 그가 뭐라 중얼거린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래 저 먼지 속에서 잘도 입을 벌리고 싶나.. 하고 생각하는데 잭슨이 자신의 말에 아무도 동의를 안 해주자 한숨을 내쉬더니 실프들을 불러서 거실에 쌓여 있는 먼지 투성이 천들을 들어서 밖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제 19화 거기 서! 아, 영감이 떠오른다~ (6) 그래 저 먼지 속에서 잘도 입을 벌리고 싶나.. 하고 생각하는데 잭슨이 자신의 말에 아무도 동의를 안 해주자 한숨을 내쉬더니 실프들을 불러서 거실에 쌓여 있는 먼지 투성이 천들을 들어서 밖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뭐하게?" 어차피 집 안에는 사람들이 청소한답시고 먼지 투성이로 만들고 있었기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나는 잭슨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면서 물었다. "뭐 하긴. 어차피 며칠 머물다가 돌아갈 때 다시 가구들을 덮을 거 아냐? 그때 이 먼지 투성이를 그대로 덮을 수는 없으니 빨아 둬야지." "헤에, 네가 빨려구? 너 빨래도 하냐?" "너도 혼자 살아봐라. 그럼 원하지 않아도 빨래 뿐만이 아니라 집안 일에 능통해진단다." "에? 너 혼자 살아? 뭐, 레이언이나 아니면 크리스와 같이 사는 거 아니야?" "처음 상회에 들어왔을때에는 몇년 간 같이 살았는데... 다 커서까지 같이 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나도 독립해야 겠다 싶어서... 혼자 산지... 한 5년쯤 되었나?" "그래? 흐음... 혼자 살면 귀찮을 텐데... 집안 일을 너 혼자 다 해야 하잖아?" 내 말에 잭슨이 날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말이지.... 후후후, 사실 청소 같은 건 실프들에게 거의 맡기다 시피 하고 있어. 그래서 물의 정령과도 계약을 맺으려 했는데... 물과 나는 상성이 잘 안 맡는 모양이야." "정령들이... 니 쫄따구냐? 그런걸 다 시키게..." 나는 허공에 있는 실프들이 잭슨의 말을 듣고 눈을 부라리는 걸 보고는 심히 동감한다는 시선을 보내주며 투덜 거렸다. 어쩌면, 나는 집안 전체에 마법이 걸려 있어 청소할 필요가 없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 내가 다 청소 해야 하고 빨래 해야 했다면... 아마 잭슨처럼 변하게 되었을지도... '하지만... 나는 설겆이는 내가 하는데... 음... 빨래는... 엇....' 그러고보니 집에 있을 때 나는 한번도 내가 빨래를 안 했었다. '에구머니나... 그럼 그 동안 벗어놓은 옷들은 누가 빨아놓은 거였지?' 내가 집에 머문지 꽤 되었는데 그 동안 한 옷만 계속 입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돈은 어느정도 가지고 있었기에 필요할 때마다 계속 쇼핑을 해온 데다가, 친엄마의 옷들도 꽤 많았기에 옷을 매일 매일 갈아 입으며 살았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매번 옷을 갈아 입을때 나중에 빤다고 생각하고 한쪽 구석에 놓곤 했었는데... 그 다음 나갔아 오며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나중에 보면 다시 옷장으로 들어가 있는 걸 발견하긴 했는데... 지금까지 그걸 이상하게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헤구미... 나는 도대체 신경이 얼마나 둔한 걸까?' 한국에서 살때도 항상 부모님과 같이 살았으니 세탁 같은 건 다 엄마가 해줘서 그런데 신경을 안 쓰고 살았더니만, 이 곳에 와서도 그 버릇 그대로 살았었나 보다. '아니.. 그럼 도대체 누가 빨래를 한 거지? 설마... 아버지가? 에이... 그건 정말 설마다. 아냐, 어쩌면 그럴지도... 자신이 직접 빨래할 필요가 없잖아? 자기 쫄다구를 시키면 되는 거니... 아니, 그렇다면 계속 신경 써줬다는 건데... 정말 그랬나? 아니면... 그냥 한 정령을 불러놓고 다 맡겼나...?' 내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우리는 뒷뜰에 도착해 있었다. 그 곳에는 앞뜰과 마찬가지로 쭈욱 푸른 잔디가 - 물론 잔디는 아니고 여러 잡초들이 섞여 있었지만, 모두 발목 아래로 낮게 관리가 되어 있었기에 잔디 깔린 것과 비슷했다. - 깔려 있었는데 그 중앙 쪽에는 판판한 돌이 넓게 깔려 있었고, 그 공터 중앙에는 작은 우물이 있었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데 우물을 만들어 놓다니 좀 황당하기는 했지만, 뭐 덕분에 아침마다 물 길러 가는 일이 없을테니 편하기는 했다. 그 우물에는 한국에서 옛날에 쓰던 방식으로 두레박을 깊은 우물 안으로 던져 넣어 물을 떠 올리는 것이 아니라 - 작은 우물이라 크게 깊지는 않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대략 120 ~ 150cm 정도? 애 하나가 빠져도 충분히 빠져 나올 수 있을 정도로 보였다. - 우물 한쪽 구석에 어떤 장치가 달려 있었는데 손잡이를 잡고 돌리면 우물 안으로 들어간 관을 통해 물이 빨려 올라 와서 밖으로 뻗어 나온 관으로 물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변형된 펌프로구만...' 잭슨은 그 변형 펌프 앞에다가 천들을 쌓아 두더니 뒷문을 통해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가 커다란 나무 통을 들고 나왔다. "해인아, 할 일 없으면 나랑 같이 빨래나 하지?" "그러지 뭐. 어떻게 하면 돼?" "이렇게 큰 천들은 일일이 손으로 빨기 힘드니까 발로 빨아야 해?" "발?" 왠지 그렇게 말하니까 이불 빨래가 생각 났다. 내가 아직 한국에 있었을 때, 중학생이 되고 난 뒤에 울 집에 성능 좋은 새 새탁기를 들여놔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만, 그 전에는 봄이나 가을쯔음에 엄마랑 같이 이불 빨래를 했었던 것이다. 이불 빨래란 욕조에 물을 받아두고 그 곳에 가루비누를 푼 다음 이불을 넣고 그 위에 올라가서 신나게 밟는 것이다. 이게 그냥 평지를 밟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다. 발 밟는데가 물이 있고 이불이 있어 물컹물컹 하기 때문에 일반 평지를 걷는 것보다 무척 힘든 일이다. 그래서 한 10분 정도만 밟고 나면 온 몸에 기운이 쫘악 빠진다. 혹시나... 그것 처럼 하는 건가 했더니 아니었다. '헛헛헛, 사람 예측이 가끔은 틀릴 수도 있지 뭐...' 잭슨이 커다란 나무 통을 들고 나오는데, 그 뒤로 세명의 무사가 끙끙 거리면서 아주 커다란 솥을 들고 나오는 거였다. 갑자기 왠 솥인가 싶어서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 공터에 무사들이 솥을 놓고 가버리자 잭슨은 뜰 구석에서 커다란 돌 세 덩어리를 들고 와 솥 밑에 받치더니만 날 돌아보았다. "해인아, 이 솥에 물좀 채워주라." "그러기야 하겠는데... 이 솥은 뭐냐?" 나는 순순히 운디네를 불러서 간단히 지시를 하며 잭슨을 돌아보자 그가 피식 웃었다. "뭐긴 뭐야? 빨래를 삶아야지." "삶아? 아니 왜?" 왠만한 비누칠로 잘 안 빠지는 때가 끼었거나, 아니면 하얀 면 옷감이 너무 오래 입고 있어서 누렇게 변했을 때 하얗게 되라고, 아니면 소독하기 위해 빨랫감을 비눗물에 넣어 푹푹 삶는다는 건 알고 있다. - 이래뵈도 가사 점수는 좋은 편이었던 것이다. - 그러나, 이건 밖으로 입고 나다닐 옷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옷도 아니고, 단순한 가구 카바이면서 먼지만 쌓인 것 뿐인데 꼭 삶을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냥 비누칠 해서 빨면 되는 거 아닌감?' 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 곳에 와서 빨래를 한 번도 안해본 주제에 - 물론 한국에 있을 때도 대부분 엄마가 해주셨지만... -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어 그냥 멍한 채로 그만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이 세계에 비누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급할때면 그냥 정령들에게 부탁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세수 하거나 머리를 감거나 목욕을 할때 나는 분명히 비누를 사용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곳에는 내가 살던 한국보다 문화가 뒷쳐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상당히 발전해 왔기 때문에 비누라고 해서 무궁화표 빨래 비누 같이 생긴 것이 아니라 모양도 예쁘고 향기도 좋았다. 더욱이 샴프나 린스, 혹은 바디 클린저 같은 것이 없는 대신 머리 감을때 쓰는 비누, 목욕 할때 쓰는 비누, 세수 할때 쓰는 비누, 혹은 미용 비누 같은 비누들이 다양하게 개발되어 있었다. 물론, 이것들은 돈이 있는 사람들이나 소유할 수 있을 정도로 비쌌지만 어쨌든, 있기는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빨래 할때도 하이 타이 같은 가루 비누는 아니라 하더라도 무궁화표 빨래 비누 같은 비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직접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우리 집에는 그런 비누가 없었고, - 아예 모든 비누가 없어서 내가 사와야 했다. - 그런 비누를 볼 수 있는, 맥알파인 공작가에 있을때... '아, 그때 빨래를 한 적이 있긴 하다. 처음에 해럴드 집사님께 벌 받을 때 많이 하기는 했었는데... 그때는 할 일이 너무 많아 피곤해서 그런 거는 다 정령들에게 부탁해서 있었는지도 모르겠네... 물론, 그 뒤에는 하녀들이 내 옷까지 다 빨아줬고 말야.' 이런 내 의문을 알아 챘는지 잭슨이 흐뭇한 표정으로 - 왜 그런 표정을 짓는 지는 모르겠지만... - 입을 열었다. "훗훗훗, 이게 바로 살림살이 5년차 선배가 충고하는 건데, 빨랫감이 적을 경우에는 일일이 비누칠을 해서 주물럭대는 게 빠르지만, 이렇게 빨랫감이 엄청 많을 때는 한꺼번에 삶았다가 행구는게 더 편해. 언제 이 많은 빨래에 비누칠을 해서 주물럭 거릴래? 그럴려면 반나절이 다 가도 모자를 걸?" "오, 그런 거야?" "그렇다니까." "그럼 이거 - 엄청난 빨랫감- 솥에 넣기만 하면 돼?" "잠깐만, 그 전에 이것들을 먼저 넣어야지. 빨랫감을 넣은 뒤 넣으면 완전히 물에 안 풀려서 어떤 빨래는 잘 안 빨린단 말야." 그러면서 잭슨은 물이 가득 찬 솥에 내 주먹 반의 반 만한 (그러니까 1/4 만한) 하얀 덩어리 세개를 집어 넣었다. "그건 뭔데? 비누야?" "비누는 아니고, 빨래 삶을 때 같이 넣는 건데, 이걸 넣으면 때가 완전히 지고 빨래가 하얗게 돼. 자, 그럼 빨래를 집어 넣어." 잭슨은 나에게 그렇게 지시를 하고 자신은 불의 중급 정령을 불러 내어 솥을 달구기 시작 했다. 빨랫감은 먼지 투성이라 직접 손을 대기 싫었던 나는 정령들을 불러 - 역시 나도 이런 놈이었다. 위에 잭슨을 향해 뭐라 뭐라 했던 건 다 취소 해야지.- 빨랫감을 솥 속에 넣었고, 그 뒤에 잭슨이 솥뚜껑을 닫았다. 잠시 후에 솥뚜껑과 솥 틈 사이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며 열심히 삶아지고 있다는 증거가 나타나자 잭슨은 솥뚜껑을 열고 언제 챙겨 왔는지 길고 커다란 나무 주걱 (처럼 생긴 것) 으로 안에 있던 빨랫감을 휘휘 젓고는 다시 뚜껑을 닫았다. 그런데, 그 폼이 너무나 익숙해 보여서 나는 왠지 웃음이 나왔다. "이야, 되게 익숙한데?" "당연하지. 매년 봄과 가을에 집안 커텐들이나 시트들을 다 갈아야 하거든. 그러니 많이 해봤지." "호오, 그렇구나. 너 장가가면 부인에게 사랑 많이 받겠다." 내 말에 잭슨은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훗훗훗, 당연한 말씀. 나 같은 일등 신랑감이 어디 있겠냐? 거기에 집도 있겠다, 안정적인 수입 있겠다, 얼굴 잘 생겼겠다, 이제 참한 신부감만 구하면 딱이지." "헤에, 결혼 할 맘이 있는 거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럼 넌 평생 혼자 살 거야?" "글쎄... 나는 아직 생각을 안 해봐서..." "헤에... 그래? 그게 넌 아직 어리다는 거야. 그래도 애인 사귈 생각은 있겠지?" "음... 그건 그렇지만..." '중성인 나는 누굴 사귀어야 하는지... 아니, 둘 다 사귈 수 있을라나? 그래도 여자랑 사귀는 건 좀...' "후후후, 아직 연애도 안 해봤지?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 생겨봐라. 그럼 결혼 할 생각 들게 될 거다." "엥? 뭐야, 그럼 잭슨은 좋아하는 사람 있다는 소리야?' "우헤헤헤~~ 그건 비밀 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헤벌쭉 벌어지는 입을 보니 누군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과연 누구이련지... 나중에 레에언에게 살짝 물어봐야 겠군.' 그러는 동안 이제 충분히 삶아졌다고 생각 되었는지 잭슨은 불의 정령을 돌려보내고 솥뚜껑을 열었다. 척 보기에도 엄청 뜨거워보이는 김을 모락모락 솟아내는 천들이 제법 먼지를 떨어낸 채 동동 떠 있었는데, 잭슨은 그걸 한번 휘휘 저어 뒤집어 보더니 만족 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돌아봤다. "자, 해인아 저 통 있지? 저기에다 찬 물 좀 채워 줘." 그러고서 그는 커다란 통에 채 물이 채워지기도 전에 솥에서 빨랫감들을 건져 통에 집어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 채우지는 않고 한 1/3쯤 채우자 빨랫감 옮기는 걸 멈추고는 신발을 벗고 양말도 벗고 바지도 걷어 올렸다. "자자, 너도 가만히 있지 말고 이렇게 해. 해민아, 너도 할래? 이거 참 재미 있는 거란다." 해민이야 신기한지 잽싸게 자신의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렸다. 잭슨은 듀비도 끼어들게 하고 싶은지 그를 슬그머니 돌아보았지만, 듀비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차마 말도 꺼내지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 역시나, 내가 통에 물을 가득 채우자 잭슨은 우물에서 퍼 올린 물로 간단히 자신의 발과 해민이 발을 씻은 다음 그 통에 들어가 철벌철벅 밟아대기 시작했다. "자자, 뭐해? 빨리 들어와." 왠지 그 폼을 보니... 한국에서 봤던 티비 프로 '그때 그 시절을 아십니까?'가 생각났다. 세탁기는 커녕 빨랫 비누도 없었던 시절, 빨래를 빨아야 하는 아낙네들이 냇가 빨래터에서 커다란 솥에 잿물(볏집을 태워서 생긴 재에 물을 부어 만든 물) 을 넣고 빨래를 넣고 삶았다가, 거기서 건진 빨래를 냇물에 넣고 발로 밟아 빨던 모습이 방영된 적이 있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모습이 딱 그 모습이었다. 물론, 티비에서는 냇가였고 여기는 우물 가라는 것이 다르지만... '그리고 나는 한국에 있을때 이불 빨래를 해봤기 때문에 이런게 전혀 신기하지도 재밌지도 않단 말이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까 도와준다고 했는데 투덜댈 수는 없는 일이라 순순히 신발 벗고 양말 벗고 통 속으로 들어갔다. 찬 물을 집어 넣어다고 해도 빨랫감이 푹푹 삶아져 뜨거웠었기때문에 물은 따뜻했다. 거기에 천은 물 속에서 부드럽게 흔들려 밟는 감촉도 기분 좋아서 나는 인상을 풀고 철벅철벅 밟기 시작했다. 해민이는 처음 해보는 발 빨래에 신이 나서 물을 사방으로 튀기면서 밟아대고 있었고, 그 옆에서 잭슨은 잘한다며 해민이를 은근슬쩍 띄워줘, 해민이로 하여금 더욱 더 큰 힘을 내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덕분에 거기 말려들어 그날 빨래를 거의 혼자 하다시피 신나게 밟아대던 해민이는 저녁을 먹기도 전에 꼬꾸라져서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게, 보기에는 쉬워보여도 아까 말했다시피 엄청 힘든 작업이었던 것이다. 뭐, 해민이 덕분에 뒷처리만 한 - 그것도 대부분 정령들에게 부탁해서 했다. 역시.. 나도 이런 놈이었던 것이다. - 잭슨과 나는 멀쩡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 많은 빨래를 했다는 이유 만으로 이 곳에 있는 며칠 동안 운 좋게도 설것이 당번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 이 곳에 있는 동안 우리가 밥해먹고 있어야 했기에 식사 당번과 설것이 당번이 필요했던 것이다. - 제 19화 거기 서! 아, 영감이 떠오른다~ (7) 그래도 그 많은 빨래를 했다는 이유 만으로 이 곳에 있는 며칠 동안 운 좋게도 설것이 당번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 이 곳에 있는 동안 우리가 밥해먹고 있어야 했기에 식사 당번과 설것이 당번이 필요했던 것이다. - 하지만... 그 다음날이 되자 나는 그런 당번 뭐하러 정했나 싶었다. 전혀 필요가 없었는데 말이다. 하긴, 그날 저녁에는 필요가 있었다. 저녁이 되자 집안 곳곳이 깨끗하게 청소가 되었고, 식사 당번들은 우리가 가지고 온 식량 말고도 드워프족에서 공급해주는 - 이 곳에 있는 동안 집과 식량은 드워프들이 준다 - 싱싱한 식료품으로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항상 식사를 할 때면 생각했던 김치를 바라는 마음이 쏙 들어갔다. 김치고 뭐고 제대로 된 식사만 있으면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는, 내가 생각해도 기특한 사상을 갖게 된 것이다. 그 동안 이 산속을 헤매면서 제대로 된 식사 대신 매일 말린 건어물이나 육류를 그냥 먹는 거나 불에 구워 먹거나 해서 때웠으니... 반찬 투정하는 녀석들은 한 이삼일만 이런 생활을 하게 한다면, 반찬 투정은 그 다음 부터 쏙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정말 오랜만에 지붕이 있는 진짜 집에서 식사다운 식사를 하고,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한 뒤 폭신 폭신한 침대에 몸을 누이면서 행복함에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이런 행복함이 이 곳을 떠나기 전 까지는 계속 되리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다음 날이 되기 전 까지는... 아직 일어날 시간이 아니었기에 그때까지 정말 달콤한 잠 속에 빠져 있던 나는 다급하게 우리 방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놀라 잠이 깼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내 품에 꼬옥 안겨 자던 해민이가 깨는 바람에 덩달아 깬 것이지만... 그런데, 더욱 당황스러운 건 우리 방 문을 누가 거칠게 두드려서 그 소리에 놀라 깬 것이 아니라 그 달콤한 시간을 방해 한 우리방의 침략자는 노크도 없이 그대로 방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것이었다. 그래 이 겁 없는 놈이 누구든 가만 두지 않을거라 속으로 이를 빠드득 갈면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 보다도 먼저 이 못된 침략자가 성큼 성큼 내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오더니만 거칠게 내 몸을 흔들어 깨우는 거였다. "이봐, 이봐아~ 얼른 일어란 말야. 어서, 어서..."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치미는 짜증을 억누르지 못한 채 오만상을 쓰며 눈을 뜨고 그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노려보았다. "우쒸.. 무슨 일이야? 너 별일 아니면 대장이고 뭐고 반은 죽여놓을 줄 알아." 졸음이 가득 한 목소리로 협박을 해봤자 별로 큰 효과는 없었겠지만, 설사 엄청난 효과를 볼 수 있엇다 하더라도 내 방에 침입한 간 큰 녀석은 그런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한 녀석이었다. 역시나, 그 놈은 이런 내 반응에도 꿈쩍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별일이니까 문제지.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 급하단 말야!!" 내가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레이언은 내 몸을 흔들어가며 다급하게 속삭였다. 그의 그러한 모습에 급한 일이라는 걸 깨달은 나는 몸이 엄청나게 반항함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일어나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눈을 비비며 녀석을 바라보자 이런 내 말에 동의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나도 무지 알고 싶은 사항이야." "엥?" 의아해 하면서 바라본 그 곳에는 나처럼 졸음에 겨워하는 잭슨이 서 있었다. "너는 또 여기 왠 일이냐?" "글쎄, 그건 나도 알고 싶은 사항이라니까? 잘 자고 있는데 갑자기 깨우더니 이리로 끌고 왔단 말이야." 그러면서 레이언을 바라보는 잭슨의 눈에는 불만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하지만, 레이언은 이런 우리들의 시선에는 전혀 기죽지 않은 채, 아니 기죽는게 아니라 신경을 쓰지도 않은 채 우리 방 창으로 다가가 밖을 살펴보며 재촉했다. "지금 그렇게 투덜댈 때가 아니라니까. 빨리 여기서 몸을 피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창문을 열고 몸을 내밀어 좀 더 자세히 밖을 살피는 레이언의 모습에 방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어리버리 할 뿐이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빚장이라도 쫓아 와?" "그 보다 더 지독한 작자들이 쫓아오니까 그렇지. 자자, 정신 차렸으면 빨리 나가자." 그러면서 레이언이 먼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뛰어 내리자 - 내가 머무는 숙손느 2층에 있었지만, 검기까지 다루는 실력자인 레이언에게는 크게 높은 곳이 아니었다. - 우리도 얼떨떨했지만, 어찌 되었는 그의 뒤를 따라가는 수 밖에 없었다. 듀비 또한 - 레이언과 비해 어떨지 모르겠지만... -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내가 어떻게 해주기 전에 가볍게 창문에서 뛰어 내렸고 잭슨과 나는 각각 실프를 불러내어 편안하게 날아 내려왔다. 해민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충분히 뛰어 내릴 수 있었겠지만, 나에게서 떨어지기 싫은지 내 품에 안겨 같이 날아 내려왔다. 그렇게 우리가 땅에 섰을때는 아직 해도 뜨지 않아 주위가 캄캄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맞아. 이렇게 나왔으니 이유라도 좀 알자." 잭슨과 나의 채근에도 레이언은 사방을 주의깊게 살피면서 자신의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쉿! 큰 소리로 말하지 말란 말야. 자, 빨리 이쪽으로..." 몸을 작게 숙이고 재빠르게 이동하는 그 모습을 보자니 나는 검은 옷만 입었다면 영락없는 도둑일 거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상회 사람들이 머무는 건물 주위에서 벗어나자 곧바로 드워프들의 개성적인 집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집들 만큼이나 개성적인 정원의 그늘에 숨어 자꾸만 자꾸만 이동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렇게 숙소에서 멀어지니 아침을 제 시간에 먹기는 틀린 것 같다는 거였다. 그렇게 우리가 조심스레 움직이는 동안 서서히 시간은 지나 드디어 동이 트고 주위가 밝아져 왔다. 그러자 드워프 족들은 부지런한 사람들인지 여기 저기에 있는 집에서 잠에서 깨어 일어나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런... 너무 늦었어. 최소한 성벽 가까이는 가야 하는데..." 그런 기척을 느낀 레이언은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더욱 더 조심스레 움직였다. 그리고, 드디어... 드워프의 마을의 가장 변두리에 위치한 집에 닿았다. 이제 이 집만 지나친다면 레이언이 말하는 - 어딘지는 모를 - 목표에 도착하게 될 듯 했다. 그래도 레이언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조심스레 그 집 뒤쪽으로 해서 슬그머니 돌아갔고, 우리 또한 덩달아 긴장한 채로 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허어, 일찍 일어났구만? 그래, 아침 산책이라도 가는 건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레이언을 비롯한 우리는 죄 지은 것도 없건만 화들짝 놀라서 몸을 바로 폈다. 그런 우리를 싱글벙글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 사람.. 아니 드워프는 바로 어제 날 붙잡고서 웃긴 노래를 지은 족장 드워프였다. 이름이... 토드라고 했던가? 레이언은 토드 족장의 모습을 보고 작게 낭패다... 라고 중얼거렸지만, 토드 족장에게 다가갈 때는 그런 기색을 씻은듯이 지웠다. 역시나, 상회를 이끌어가는 대표 다운 표정 관리였다. "아니, 족장님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여기는 족장님의 집도 아닌데 말이죠." 그러자 변두리에 있는 독특한 모양의 집 정원에 뒷짐을 진 채로 느긋하게 서 있던 토드 족장이 허허 웃었다. "허허허... 어제 이 집 주인 녀석이 나를 초청하는 바람에 여기서 묶었다네. 하지만, 우리 집이 아닌지 일찍 잠이 깨어서 아침 산책이나 하러 나왔더니만 이렇게 손님과 만났네 그려..." 하지만 토드 족장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잠시 번뜩이는 것을 보아하니 그가 직접 말한 그런 단순한 이유만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짐작은 레이언의 작은 속삭임으로 인하여 더욱 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젠장... 지키고 있었군..." 도대체 우리를 왜 지키고 있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자자, 이렇게 만났는데 아침이나 같이 하는게 어떻겠나?" 아주 부드러운 토드 족장의 제안에 레이언의 얼굴이 일순 경직되는 것 같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의 순간이었고 레이언의 표정은 무지 안타까운 것 처럼 일그러졌다. "아... 정말 고마운 제안이십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저희는 숙소로 돌아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말도 안 하고 나와서 그대로 아침 먹을때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일행이 걱정할 것입니다." "허허허, 그런 걱정은 할 것 없네. 내 아이를 시켜 자네들 숙소에 연락을 줄테니 말야. 오랜만에 온 손님과 아침을 먹게 된다면 이 집 주인 녀석도 무지 기뻐할 거야. 그러니 사양 말고 어서, 어서 들어오게나." 그러면서 토드 족장은 레이언이 다른 말을 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한 채 레이언의 손을 꼬옥 붙잡고 -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무지 다정한 이종족간이라고 생각 하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어쩐지 도망 못 가게 잡는 듯 했다. - 집으로 향했다. 그러니 레이언의 뒤만 졸졸 쫓아온 우리들도 자연스레 그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집은 드워프의 마을에 있는 아주 개성적인 집들 사이에 그나마 우리가 흔히 보는 집 모양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무와 황토로만 지어져 그 집을 본 순간 떠오르는 건 황토 찜질방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황토를 그대로 드러낸 벽과 천장, 그리고 바닥과 황토와 비슷하지만 옅은 색을 가진, 나뭇결을 그대로 드러낸 가구가 배치되어 있어 너무나 아늑하고 황토 특유의 싱그러운 흙냄새와 나무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는 은은한 멋이 있는 집이었다. 거기다 혹시라도 어두우면 집안 전체가 칙칙하게 보일까봐 햇볕이 들어오는 창문이 집에 비해 꽤 크게 나 있었고, 현관문 바로 들어가면 보이는 거실 한쪽 구석에는 황토를 구워 만든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듯한 벽난로가 보였다. 그 벽난로 위에는 매끈하게 다듬어진 베이지색 돌이 얹혀져 있었는데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우아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오오, 어서 오게나. 밖에서 하는 이야기는 잘 들었네. 좀 있다가 손님들을 한번 보러 가려고 했는데 손님쪽에서 먼저 오다니 무척 반갑구만." 회색 머리를 가진, 그러나 토드 못지 않은 건장한 몸을 자랑하는 드워프가 거실에 있는 밝은 베이지색의 낮지만 커서 날씬한 사람이라면 두 사람은 충분히 앉을 수 있는 의자를 혼자 남김없이 차지한 채 앉아 있다가 우리가 들어서자 일어나며 반겼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로님. 여전히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레이언과는 안면이 있는 드워프였는지 레이언이 그를 보며 인사하자 그 장로라는 드워프가 활짝 웃었다. "허허허, 자네 또한 여전히 비리비리 하구만. 한대 치면 부러질 것 같으이. 그 동안 많이 먹고 살좀 찌지 그랬나." "하하하, 저야 체질이 이런 것이라니까요." 한국의 여자들이 들으면 엄청 부러워 할 말을 내뱉으며 레이언은 토드 족장에게 이끌려 거실에 있는 큼지막한 소파에 앉았다. 이 곳 대부분의 집들이 보통 사람보다 키가 작은 드워프의 신체에 맞게 건축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낮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살짝 뛰어오르면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의 높이기는 했다. 뭐, 그래도 집안에서 뛰어다니지 않는 이상 움직이는데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단지, 천장이 우리가 생활하던 집들 보다 너무 낮아서 잘못 움직이면 부딪힐까봐 괜히 걱정이 되기는 했다. "얘들아, 손님이 오셨단다. 어서 나와서 인사 해야지?" 레이언에게 비리비리하다고 한 그 드워프 장로가 안쪽을 향해 소리치자 곧 이어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안쪽에서 한 드워프가 걸어 나왔다. 그는 우리가 왔다는 것을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별로 놀라지 않는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 드워프를 바라보고 놀랬다. 그는 바로 우리를 안내해 드워프 마을로 왔던 프레스였던 것이다. "여, 잘 잤냐? 족장님께 잡히다니 재수 더럽게 없는 녀석들이구나?" "엥?" 저렇게 말하는 프레스의 태도를 보아하니 그 또한 뭔가를 알고 있는 듯 했지만, 족장과 자신의 아버지 앞이라 그런지 거기까지만 말 하고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그것만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그를 다그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프레스가 나온 쪽이 아닌 그 옆쪽에서 다른 드워프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버지? 손님이시라구요? 그럼 식사를 더 준비할까요?" 프레스와 약간 큰 키에 - 그래봤자 도토리 키재기지만.. 어쨌든, 엄밀히 말하면 조금 더 컸다. - 더 듬직한 체구를 가진 그 드워프는 커다란 앞치마를 두르고 한 손에는 야채를,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식칼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라고?' 보통 이런 가정집에 들어오면 부엌에서 나오는 쪽은 어머니와 아내 역할을 하고 있는 여성 이 아니었던가? "자자, 내 아들들을 소개하지. 레이언 자네는 알겠지만, 이번에 새로 오신 손님들은 모르실테니... 저 쪽에 있는 애가 내 큰 아들로 테릭이라고 하네. 진로를 요리쪽으로 선택했지. 그리고, 저쪽은 여러분들을 마중 나갔을테니 이미 안면이 있을테지? 프레스라고 내 둘째 아들이야. 아직 진로를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폼을 보아하니 내 뒤를 이을 것 같아." '진로?' 의아했지만 속으로만 그랬을 뿐 겉으로는 티를 안 냈는데, 레이언이 설명해 줬다. "드워프라고 모든 장인 기술을 다 섭렵할 수는 없으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선택해서 그쪽 일을 배우는 거야. 그걸 자신의 진로라고 하지. 이건 보통 성년을 전후로 결정하게 돼." "헤에..." 역시 드워프와 그 동안 교류를 해온 탓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맞았어. 나는 건축쪽의 길을 걷고 있고, 이 친구는 악기쪽 길을 걷고 있지. 스스로도 자칭 음류 시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말이야." 레이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테릭과 프레스의 아버지가 덧붙여 설명을 했다. 역시 그 족장 드워프는 툭 하면 노래를 짓는다고 하더니만, 악기쪽을 전문으로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말해봤자, 이번에는 둘 다 대회에 나가지 못하는 떨거지 신세인 걸 뭐. 안 그래 호세?" 족장 드워프는 우리에게 손짓을 하며 자신이 먼저 그 호세라고 불리는 장로 앞으로 가서 털썩 주저 앉았다. "쳇, 제비를 잘못 뽑은 탓이지 뭐. 아쉽지만 다음 번을 기약하는 수 밖에... 아, 그래 테릭아 이 손님들 식사도 같이 준비하거라." "알겠습니다. 재료가 부족하니 조금 더 가지고 와야겠군요. 프레스, 나 좀 도와줘." 그렇게 테릭이 프레스를 데리고 거실을 나가버리자 우리는 족장 드워프의 손짓에 따라 주춤 거리며 낮지만 무지 넓고 편해보이는 소파에 조심스레 엉덩이를 걸쳤다. "그런데, 두 분의 부인들께선 어디 가셨습니까? 안 보이시는군요." 모든 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순간적으로 침묵이 깔리면서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역시나 이들과 전부터 안면이 있는 레이언이 입을 열었다. "아아, 그녀들은 이번에 대회를 나갈 수 있게 되어서 말이야. 지금 아이디어를 찾겠다고 서재에 틀어박혀 있어." "호오, 그렇습니까? 그 두분은 대회에 나가시는 군요." "운이 좋았지. 에잉, 내가 뽑으려던 제비를 그녀가 뽑아가지고서리..." 족장이 투덜거리자 호세 장로가 받아쳤다. "쯧쯧, 그 이야기를 제비 뽑은 날 부터 하더니만... 아직까지 투덜 거리고 있냐? 몇번만 더 하면 천번이겠다." "시끄러워. 그럼 네가 족장 할래?" "네가 족장 제비를 뽑아서 족장이 된 건데 누굴 탓해?" "누가 뽑고 싶어서 뽑았냐?" "네 운이 나빴던 거지. 나도 재수없게 이번 대회 운영임원이 되어잖아? 그러니 투덜거리지좀 마라. 나이가 몇인데..." "너보다 50살 밖에더 안 먹었다, 꼬맹아." "정확하게 말하면 49세야." 우릴 초대해 놓고는 안중에도 없이 두 사람, 아니 드워프의 언쟁에 본의 아니게 소외된 우리는 그렇다고 이 자리를 피할 수도 없어서 그저 멀거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릴 소외시킨 채 둘이서만 투닥거리던 드워프는 잠시 시간이 지나 멀거니 그들만 바라본 채 앉아 있는 우리를 눈치 채고는 자기네들도 미안한지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허허, 이거 우리가 손님들을 앉혀놓고는 추태를 부렸구만." "이게 다 너때문이잖아. 나이도 어린게 어른에게 대들기는..." 하지만, 사과한지 채 일분이 지나지 않아 다시 둘이서만 투닥이기 시작하는 두 드워프였다. "하여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칭 음류 시인 속이 밴댕이 소갈딱지 만해서야..." "뭣이라? 내 오늘 손님들도 있어 인심 좀 써서 이번에 새로 지은 노래를 - 그 순간 나는 괜히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다. - 불러주려고 했지만, 도저히 안되겠다. 네 놈에게는 내 노래를 들려주지 않을 테다!" "누가 네 엉터리 노래를 듣고 싶다고 했어? 매번 노래 지을때마다 들어달라고 애원애원 하기에 잠시 트롤 괴성을 들어준다 셈 치고 들어줬더니만..." "뭣이라? 트롤 괴성?" "사실이지 뭘 그래? 네놈 노래를 듣느니 차라리 탄광 속에 들어가서 곡괭이 소리를 듣던가, 아니면 대장간에 들어가서 망치질 소리를 듣는게 훨 났다." "네놈이 내 예술의 세계를 이해 못하다니... 어허... 이런 녀석이 우리 드워프 마을의 장로라는 것이 한탄스럽도다." "놀고 있네. 네놈이야 말로 진정한 예술이라고는 모르는 주제에 예술이랍시고 엉터리 노래를 부르고 다니니 우리 드워프족의 수치야." "뭐, 뭣? 이놈이 한번 해보겠다는 거야?" "그러면 누가 무서워 할 줄 알아?" "그래, 그렇다면 오늘 한번..." 족장 드워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을 붕붕 휘두르며 선전포고를 하려는 찰나, 형 처럼 앞치마를 두른 프레스가 뛰어나와 소리쳤다. "식사 준비 다 되었으니 오시래요~!!" 그러자 그 순간 족장 드워프와 호세 장로 사이에 흐르던 험난한 기류가 거짓말처럼 싹 사라지는 거였다. "호세야, 식사가 다 되었단다." "그래, 우리 우선 먹고 놀자. 배고팠다." 손님이라는 존재 조차도 말릴 수 없었던 투닥거림을 순식간에 해결한 식사의 위대함을 새삼 깨달으면서 우리가 멀거니 앉아 있기만 하자 막 발걸음을 옮기던 두 드워프가 의아하다는 듯 돌아보았다. "뭐 하는 겐가? 식사 안 할 겐가?" "아니 자네들은 배도 안 고픈가?" "예? 아, 예." 그제야 제 정신을 차린 레이언이 얼른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우리도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이 집에 있는 식당은 - 다른 곳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니까... - 한국에서 보던 것과 마찬가지로 부엌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는 프레스와 그의 형 테릭이 분주하게 넓다란 식탁에다가 여러가지 음식을 옮겨놓고 있었다. "자자, 어서 들 앉게나. 이래뵈도 내 아들 요리 솜씨는 좋다네. 이제 겨우 50년 차인데 이 정도라니 이쪽 길로 꽤 소질이 있었던 거지." '5, 50년... 그 정도면 능력 없는 사람이라도 충분히 대단한 요리사가 되어 있겠다.' 나는 속으로 약간 기가막혔지만, 내색은 못하고 그들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좀 황당하게도... 소파는 편히 앉았으니 약간 낮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딱딱한 식탁 의자가 낮으니 이건... 왠지 초등학생 의자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못 앉을 정도로 불편한 건 아니었지만, 무릎이 의자에 닿지 못한 채 허공에 뜨고 다리를 똑바로 펴지도 못하니 자세가 엉거주춤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우리와는 달리 너무나 편안한 자세로 자리를 잡은 드워프들은 무지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음식들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자, 드시게나. 음식은 제때제때 먹어야지, 식으면 맛이 없다네." 아까는 애들처럼 티격태격 대면서 싸우더니만, 음식을 앞에 두자 인자한 어른이 되어 우리에게 권하고는 먹기 시작하는 두 드워프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래도 음식을 두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기에 우리도 각자 포크와 스픈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 이 음식을 만든 테릭은 그래도 50여년동안 요리를 배웠다더니 제법이 아니라 무척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었기에, 나는 먹는 와중 아까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쌓여 있던 레이언을 향한 원망이 스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번만은 그냥 봐주겠다는 눈짓을 보내려고 레이언을 슬쩍 쳐다보는데, 왠일인지 레이언 녀석이 음식을 먹는 듯 마는 듯 하며 무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거였다. 물론, 드워프들에게 티를 안내려는 듯 얼굴은 침착해 보였지만, 음식을 집는 폼이나, 자그마한 빵 조각 하나가지고 완전 물이 될 때까지 계속 계속 씹고 있는 모습이 뭔가가 무척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래 왜 저러나... 하고 쳐다보고 있는 그 순간, 갑자기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집안으로 난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야? 어디 있는 거야?" "야, 빨리 안 나와!!" "호세! 여기 있는 거 다 알고 왔어!! 당장 나오란 말야!" "토드, 너도 여기 있지?" 무지 화가 난 듯한 급박하고 거친 목소리를 들어보니 갑자기 난입한 인물은 한두명이 아닌 듯 싶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정작 이 집안의 주인이자, 저들이 찾는 주인공인 두 드워프는 태연하게 음식을 마저 먹는데 반해, 아까부터 불안해 하던 레이언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놀라 사레가 들려 켁켁 거리는 거였다. "어어, 괜찮아요? 자자, 이거..." 옆에 앉아 있던 잭슨이 놀라 물컵을 건넸지만, 레이언은 손을 저어 그걸 거절하면서 가슴을 두들기며 켁켁 댔다. 그러는 동안 집안에 난입한 이들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더니만 기어코 식당을 발견했는지 문을 박차고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여기 있다!!" "여기 있었구나!!" 그 바람에 레이언이 한층 더 놀랐지만, 정말 우습게도 그 덕분에 목에 걸렸던 음식물이 쑥 내려가 그가 기침을 멈출 수 있게 되었다. "으힉, 켁... 콜록... 아, 내려갔다." 제 19화 거기 서! 아, 영감이 떠오른다~ (8) 그 바람에 레이언이 한층 더 놀랐지만, 정말 우습게도 그 덕분에 목에 걸렸던 음식물이 쑥 내려가 그가 기침을 멈출 수 있게 되었다. "으힉, 켁... 콜록... 아, 내려갔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보고도 웃지 못하는 것이, 족장 드워프와 호세 장로를 신나게 찾던 드워프들은 정작 자신들이 찾던 이들은 본체 만체하고는 기껏 조용히 식사하고 있는 우리 일행들을 에워싸는 것이었다. "어어어?" 그 모습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를 에워싼 드워프들 중 한 드워프가 상석에 앉아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식사를 마저 하고 있는 족장 드워프와 호세 장로를 향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냐, 네 놈들은? 이번 대회에 나가지도 않는 주제에 외부 손님들을 차지해?" 그러자 그 드워프의 말에 동조한다는 듯 우리를 둘러 싼 드워프들이 일제히 상석의 두 드워프에게 살기 어린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헌데, 정작 그 많은 드워프들의 살기를 받는 두 드워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대꾸하는게 아닌가? "무슨 소리야? 우리가 도망가는 녀석들을 잡아서 너희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 줬잖아. 자, 이제 우리 역할은 끝났으니 마음대로 데려가게." "헉..." 족장 드워프의 그 말로 인하여 나는 모든 사항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제 대회를 선포한 지 얼마 안 되어 아마 우리를 되게 못살게 굴 거라고 레이언에게 충고를 들었음에도불구하고 우리가 잠자리에 들때까지 프레스와 족장 드워프 외에 다른 드워프들이 콧빼기도 안 보이자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왜 안 보이는지 의심도 안한 채 말이다. '크윽... 내가 이렇게 단순했을 줄이야...' 스스로 자책을 하면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건너편에 앉은 레이언의 얼굴을 바라보니, 절망스럽게도 그의 얼굴에는 체념의 빛이 서려 있었다. "휴... 결국은 붙잡히고 말았군. 이럴 줄 알았으면 잠이나 푹 자둘 걸." 그러자 족장 드워프가 껄껄 웃으면서 그의 말을 받는 거였다. "허허허, 그러지 그랬나? 내 그대들을 신경 써줘서 손님 쟁탈전을 오늘 아침까지 미뤄줬건만..."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내 뒤쪽에서 놀라움에 찬 목소리를 듣고 흠칫 놀랐다. "우와... 이 녀석 머리카락좀 봐. 이런 신비한 색이 있나? 오오... 영감이 떠오를 듯 말듯... 좋았어. 이 녀석은 내가 데려 간다!" 그러면서 그 드워프의 손길이 내 팔에 닿는 순간 듀비와 해민이가 움찔 거렸지만, 그 보다도 먼저 다른 드워프의 손이 그 손길을 쳐냈다. "무슨 소리야? 이 녀석은 내가 여기 들어오자마자 발견해서 찜해 놓은 거란 말이야. 네 녀석은 다른 걸 찾아 봐." "뭣이라? 눈으로 찜해놓으면 다냐? 먼저 잡은 자가 임자 아니냐?" "웃기지 마. 이건 내가 찜한 거니 내 거야." 그 순간 다른 드워프는 듀비의 모습을 이제야 알아 차린 듯 감탄사를 중얼 거렸다. "오옷... 이자는 이 파르스름한 빛이 도는 피부하며 뾰족한 귀로 볼 때 블루 엘프족이구만. 오오,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야. 거기다 오오오옷, 이 근육좀 봐. 우리 드워프보다는 못해도 저 허약한 엘프보다는 났잖아?" "이봐, 이 아이는 나에게 양보해. 넌 가구 전문이지만, 난 무기 전문이란 말야. 마침 이번에 특이한걸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이 아이에게 맞추면 되겠군." "잠깐만 기다려. 나도 이 애를 모티브로 가구를 만들어보고 싶단 말이야." "뭐? 하지만..." "아아, 이러면 되겠다. 너는 이 애를 계속 데리고 있어야 할 지 모르지만, 난 스케치만 해 놓으면 되거든. 그러니까 잠깐만 빌려줘. 스케치만 하고 너에게 넘길 테니까." "좋아. 그렇게 하지. 그럼 네 작업실에 들렸다가 가자." 그렇게 합의를 끝낸 두 드워프가 양쪽에서 듀비의 팔을 하나씩 잡고 번쩍 일으키는 거였다. 그래봤자 듀비가 그 둘보다 키가 작았기에 완전히 일어나는데 무리가 있었지만, 그 두 드워프는 그런거에는 상관 안 하고 무작정 그를 끌고 식당을 나서는 거였다. 듀비는 그들의 손길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두 드워프의 힘이 워낙 강했던지 여의치 못해 질질 끌려나갔다. "듀비!!" 그의 그런 모습에 놀란 내가 벌떡 일어서자 그 순간 나 또한 다른 드워프의 손길에 잡혀버렸다. 그리고 내 품에 있던 해민이 또한 다른 드워프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캬옹~ 크르르~~" 아직 말을 못하는 해민이가 한껏 이빨과 손톱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렸지만, 그 드워프는 오히려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 지 껄껄 웃는 거였다. "허허허, 귀엽기도 하지. 암암, 이렇게 성깔 있는 녀석이어야 해. 아... 영감이 떠오르는 듯 하구만. 잊어버리기 전에 빨리 가야겠다." "해민아아아~~!!" 평소 해민이가 이빨과 손, 발톱을 빼고 위협을 하면 아무리 쬐끄만 녀석이라도 꽤 위협적으로 보였는데, 그 드워프에게 잡혀 있는 모습을 보자 오히려 안되는 일을 가지고 애쓰는 것 같아 애처러워 보였다. 그런 상태로 멀어지는 해민이를 바라보며 안타까이 부르던 나 역시 다른 드워프의 손에 잡혀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나를 도와주는 손길은 아무도 없어서 원망 섞인 시선이나마 보내려고 뒤를 돌아 보았지만, 잭슨과 레이언도 어느새 끌려갔는지 사라져 있었고, 몇몇 드워프들은 여전히 거기서 소리 높여 다투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드워프가 사라진 걸 보니 아마도 그들은 먼저 내 일행을 데리고 - 정확히 말하면 강제로 끌고 간 - 드워프의 뒤를 쫓아간 것 같았다. 그 예로 나를 끌고 가는 드워프가 내가 안 끌려 가려고 버티고 있자 아예 번쩍 들어 어깨에 들쳐메고 그 짧은 다리로 열심히 뛰어가는데 뒤쪽으로 세 명의 드워프들이 게섯거라~!! 를 외치며 열심히 좇아오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에휴..." 물론, 목숨이 왔다갔다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라면 쓰기는 탐탁지 않아도 정령들을 불러내서 어떻게든 해결 하겠지만, 어제 레이언이 신신 당부한 말도 있고, 또 나를 데려가서 뭔가 대단한 작품의 모델로 쓰겠다니 은근히 기대도 되어서 이 정도에서 가만히 있는 거였다. 뭐, 한편으로는 어제의 그 우스꽝스러운 노래 같은 작품이 나오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이들이 이렇게 거의 광적으로 우릴 잡아가는게 대회에 출품할 작품 때문이라니, 그냥 아무렇게나 만드는게 아니라 열과 성을 다해 만들 작품의 모델이 되는거였으니 은근히 기대가 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나를 이렇게 들쳐 메고 열심히 뛰어가던 드워프는 나를 데려가 모델로 삼을 행운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열심히 뛰었건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뒤에서 쫓아오던 드워프들에게 따라잡힌 게 아니라, 앞에서 다른 드워프 둘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손님을 내놔라!" "너 같으면 내놓겠냐? 절대 안돼." "흥, 그러면 힘으로 해결할 수 밖에!" "네 놈들이 손님이 뭐가 필요하단 말이야? 그냥 머리 짜내서 할 수도 있잖아!!" "무슨 소리. 나도 모델은 필요하다고!!" 그렇게 외치며 앞을 가로막은 두 드워프가 달려들자 날 들쳐메고 가던 드워프는 안되겠던지 나를 옆에다 조심스레 내려놓고 앞으로 돌진했다. "그래, 어디 오늘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모델 하나 차지하는데 정말 피 터지도록 처절하게 싸우는 그 모습을 보아하니 왠지 한국의 대학 입시 지옥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한국에서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하여, 여기서는 멋지고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처절하게 애를 쓰는 모습이 왠지 가엽게 느껴졌다. '하기야... 괜히 드워프가 존경을 받는 거겠어? 다 저렇게 피나게 노력하니까 위대한 장인이라고 우러름을 받는 거겠지... 어휴, 그래도... 왠지 한국의 고 3 수험생들을 보는 기분이야.' 그러는 동안 뒤에서 쫓아 오던 드워프들이 가까이 당도했고, 그 중 제일 먼저 뛰어온 드워프가 싸움터로 뛰어드는 대신 옆에 얌전히 서 있는 내 허리를 잽싸게 낚아채고 튀었다. 하지만, 나 보다도 작은 드워프가 내 허리를 낚아챘다고 해서 내가 허공으로 뜬 게 아니라 오히려 발이 땅에 닿아 질질 끌리는 바람에 그 드워프가 달리는데 방해가 되었다. 덕분에 아까는 같이 뛰어오다가 이제는 그 드워프를 쫓던 다른 두 드워프가 금방 따라잡아서 날 낚아채서 튀던 드워프를 덥쳤다. 덕분에 나는 달리던 중 드워프의 손길에서 벗어나 그대로 좀 더 날아가다 땅에 부딪히고도 모자라 몇바퀴나 떼굴떼굴 굴러가야 했다. 그나마 항상 내 곁에 있어주던 상급 정령들이 안 다치게 도와줘서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말고도 멍이 들고 긁히는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젠장할, 모델로 세울 거라면 극진히 모셔야 할 것 아니야!!' 그렇게 속으로 투덜대며 몸을 일으키는데 그 순간 또 다른 드워프가 나타나 내 팔을 낚아챘다. '으아악~~ 이거 모델 한번 하기도 전에 골병 들겠다아~!!' 그 드워프가 가장 운이 좋았는지 그 드워프는 다른 드워프들의 방해 없이 자신의 작업실에 나를 데리고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처음에 그가 나를 데리고 골짜기에 나 있는 구멍으로 데려가기에 겁이 덜컥 났는데, 그건 그냥 단순히 음침한 동굴이 아니라 어디론가 이어진 통로였었다. 그 모든 구조가 드워프 위주로 만들어져 천장도 낮고 계단도 낮아서 나는 자꾸 발이 계단에 걸려 넘어지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그 드워프가 나를 잡아줘서 겨우 겨우 나자빠지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이런, 이런... 조심 해야지. 그렇게 안 보이냐?" "아, 예. 죄송합니다." 동굴 안이 어두운 것은 아니었다. 동굴 안에는 횃불이 일정 간격으로 걸려 있는 게 아니라 중간 중간에 빛을 내는 어떤 보석이 박혀 있어서 내부를 환히 밝히고 있었다. 그런데, 그 보석은 정말 보석이 아니라 가까이 가서 보니 크리스탈에 둘러 쌓인 볼록 거울이었다. 그러니까 어딘가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볼록 거울이 반사해 내면 그 볼록 거울을 감싸는 크리스탈이 프리즘 처럼 빛을 사방으로 퍼트려 복도를 환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 뿐만이 아니라 그 빛이 더 이상 퍼지지 않는 한계선 쯔음에는 그와 비슷한 크리스탈에 감싸인 또 다른 볼록 거울이 달려 있어 그 빛을 받아 다시 반사해 내어 다른 쪽을 퍼트리는 거였다. '호오... 역시... 과학적인 원리가 상당히 도입되어 있구나. 빛의 각도와 반사를 알지 못하면 이런 구조는 만들어 낼 수 없었을텐데...' 거기다가 볼록 거울을 감싼 크리스탈은 절묘하게 세공이 되어 있어 빛을 반사하는 것 말고도 크리스탈 자체가 반짝반짝 빛을 내는 것 처럼 보여 마치 진짜 보석처럼 보이고 있었다. 그 동굴 안에는 여러가지 갈래 길이 가끔 나왔는데, 갈래길 마다 마치 도로 표지판 같은 안내판이 붙여져 있었는데, 글이 쓰여져 있는게 아니라 마치 무슨 암호 처럼 숫자가 써있거나 기호가 섞여 있어서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그렇게 그 드워프의 뒤를 졸졸 쫓아 드디어 끝에 도착하자 투박하지만 튼튼해 보이는 나무문이 나왔고, 그것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서 환한 빛이 드러나 나는 살짝 눈을 찡그려야 해다. 물론, 우리가 통과한 복도가 어두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 보다 더 강한 빛이 그곳에는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빛에 익숙해진 내가 내부를 둘러보자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우와아~~" 투박한 문 바로 맞은편에는 거대한 면이 다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창으로 부터 밝은 햇빛이 그대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유리창 너머로 건너편 골짜기가 보이는 것을 보니 여기는 아마 골짜기 중간쯤인 듯 했다. 이 드워프 마을로 올때 골짜기 여기저기에 뭔가 장치가 보였는데, 그건 단순히 드워프 마을에 햇빛이 닿게 하는 장치 뿐만이 아니라 이런 드워프들의 작업소도 끼어 있었던 모양이다. 유리창으로 가까이 가 살펴보니 골자기에서 약간 돌출되어 있는 면이 사선으로 되어 최대한 햇빛을 많이 받게 하고 있었고, 위로는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작업실 안에는 도대체 어떤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온통 푸른 하늘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거기에 하얀 뭉게구름까지 그려져 있었다. 그것도 사방 벽과 천장 뿐만이 아니라 바닥까지 그렇게 그려져 있어 마치 내가 하늘에 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내가 감탄의 기색으로 사방을 둘러보자 드워프가 무지 기분 좋았던 모양이다. "훗훗, 어때 멋지지?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끝이 보이지 않는 광할한 푸른 창공 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이번에 너를 보자마자 딱 내 작품 모델이라는 걸 깨달았지." "아하, 제 머리색 때문에요?" "뭐, 네 신비한 머리색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지만 말야. 이번에는 좀 특이하게 드워프가 아닌 다른 종족을 대상으로 물품을 만들어보고 싶었거든." "헤에, 어떤 진로를 걷고 계시는데요?" "나? 나는 장신구쪽인데, 이번에는 목걸이를 한번 만들어 보려고." "그렇군요." 그러면서 주위를 돌아봤는데, 아까는 이 작업실의 모습에 감탄하느라 미처 깨닫지 못한 건데 이 작업실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보통 작업실에는 일을 하기 위한 도구가 있기 마련 아닌가? 작업대와 의자, 그리고 물품의 재료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이 곳에는 아무것도 없이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이 곳이 작업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내 생각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 여기... 혹시 작업실이 아닌 거 아냐? 내가 잘못 알았나?' "저기... 여기가 작업실인가요?" 내가 조심스레 묻자 드워프가 의아하다는 듯 돌아보았다. "응? 맞아. 여기가 내 작업실이야. 왜?" "아니, 작업실 치고는 너무 깨끗해서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예 아무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내 말에 드워프가 피식 웃었다. "아아... 그건 이번에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시작하려고 비워놨어. 뭐, 그래봤자 필요한 도구는 바로 옆 창고에 다 있으니까 의아해 할 필요는 없구." 그러면서 그가 한쪽 벽으로 다가가서는 중간쯤을 쓰윽 밀었다. 그러자 그 벽이 빙글 돌아가면서 벽 건너편의 또 다른 공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헤에..." 그 벽에는 티가 잘 안 나도록 회전문이 하나 달려 있었고, 그 너머에 그 드워프가 말한 창고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창고에도 작업실보다는 조금 약하지만 창이 있었는지 환했다. 드워프가 그 안으로 들어가자 달리 할 일도 없었던 나는 쫄래쫄래 그 뒤를 따라 창고로 들어갔다. 창고는 말 그대로 물건을 놓기 위하여 만든 장소라 작업실처럼 특별하게 공을 들이지 않아 사방이 바위벽이었다. 그나마 잘 다듬어놓아 벽은 매끄러워보였고, 어떤 공사를 했는지 흔히 동굴 속이라면 보이는 작은 물줄기는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그러고보니 아까 작업실쪽으로 연결되던 그 계단 동굴도 그런 물줄기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거기는 약간 습기가 있었는데 이 곳은 습기가 거의 없이 건조했다. 그러니까, 공기중에 물의 정령들이 거의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창고에 습기가 많으면 물건들이 상하기가 쉬울테니 어떤 조치를 취해놓은 모양이다. 그런데 그 곳은 오만가지 잡동사니가 그득 쌓여 있어 함부로 들어가 움직였다가는 그 물품들과 부딪힐 것 같았고, 그랬다간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는 그 물품들이 와르르 무너질 거 같아 나는 몸을 움츠린채 조심조심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나와는 달리 이곳 주인인 그 드워프는 물건과 부딪히던 말던, 그 물건들이 와르르 무너지건 말건 사방을 헤집더니만 잠시 후에 원하는 걸 찾은 모양이었다. "아, 여기 있었군." 그래 조심스레 그의 뒤로 가보니 거기엔 이 곳에 처박힌지 좀 오래되었는지 척 보기에도 무지 낡은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건 예전 보물섬이라는 영화에서 봤던, 밑에는 직사각형 이었고, 뚜껑은 반원 모양인 그런 나무 상자였는데 잠그지는 않았는지 그냥 쉽게 열었는데 안에는 옷이라고 추정되는 천 뭉치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으음... 이거 오랜만에 열어봐서...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디 있더라... 아, 여기 있군." 그 드워프가 조심스레 옷가지를 헤치다가 드디어 발견한 한 옷을 조심스레 꺼내 들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자, 이것으로 갈아 입거라." "에에엑~~?" 그것은 은빛 천으로 하늘하늘하게 만들어진, 한 눈에 척 보기에도 무지 예쁜 여자용 드레스였다. 제 19화 거기 서! 아, 영감이 떠오른다~ (9) 그 드워프가 조심스레 옷가지를 헤치다가 드디어 발견한 한 옷을 조심스레 꺼내 들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자, 이것으로 갈아 입거라." "에에엑~~?" 그것은 은빛 천으로 하늘하늘하게 만들어진, 한 눈에 척 보기에도 무지 예쁜 여자용 드레스였다. 나는 기가막히다는 시선으로 그 드워프를 바라보았다. "이건... 여자 옷이잖아요?" 물론, 나는 내 인생 대부분을 여자로써 살아왔기 때문에 그 드레스를 입는데 아무런 위하감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예쁜 옷을 돈 주고서라도 구입해서 입고 싶어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남들에게 남자로 인식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 이런 나에게 여자 드레스를 주면서 입으라고 하다니 순간적으로 거부 반응이 일면서 혹시나... 하는 눈으로 그 드워프를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다. '혹시... 이 드워프 미소년에게 여장을 시키고 즐기는 그런 거시기한 놈 아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드워프는 그런 거시기한 놈이 보통 가지고 있다는 음흉하고 느믈스러운 눈빛이 아니라 단지 영감을 얻어내려는, 좀 광적인 기질이 섞여있었지만, 진지한 눈빛이었다. "뭐... 남자가 여장한다는게 좀 탐탁치야 않겠지만, 신기한 경험 한번 한다 셈 치고 좀 도와주지 그래? 네가 비록 이번에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에 많이 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자 녀석을 세워두고 영감을 얻기는 좀 그렇잖아? 남자용 목걸이도 아니고 말야." "아니,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왠지 내키지가 않아 - 여자로 봐주는 거 하고 남자인 줄 알면서 여장시키려고 하는 거하고는 차원이 틀리니까 - 망설이는데 드워프가 그 은빛 드레스를 옆에 조심스레 내려 놓더니 다시 상자 안을 뒤적였다. "흐음... 하기야 좀 꺼림직한 게 있겠지? 잠시만 기다려 봐. 그것도 여기에 나뒀던... 아 여기 있군." 그러면서 상자에서 꺼내 들어 나에게 내미는 물건을 본 나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으에에엑~~!! 그게 뭐예요?" 그것은 햇볕에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색을 하고 있었는데, 척 보기에도 약간 말랑말랑하게 보이는 인조 가슴이었다. 마치 브레지어처럼 생겼지만, 가슴을 감싸는 부위가 있는 대신 거기에 가슴 모양의 형체가 달려 있다는 게 달랐다. 물론 그게 뭔지 몰라서 묻는 건 아니었지만, 그 드워프는 순진한 건지 내 질문에 곧이 곧대로 대꾸했다. "뭐긴 뭐야? 가슴이지. 넌 여자가 아니니 가슴이 없잖아. 그러니 드레스를 입더라도 어디 어울리겠어?" "그... 그, 그러니까.. 아니, 드워프들은 그런 것도 만듭니까?" 왠지 그걸 보니까 정말 변태 소굴에 온 것만 같아 소름이 쫘악 끼쳤다. 여기가 특수 분장실이면 몰라도 말이다. 그러자 그 드워프는 나와 인조 가슴을 번갈아 보더니 머쓱하게 웃었다. "아... 하기야... 좀 이상하게 보일 테지? 오해는 하지 말라고. 이건 내가 만든게 아니라 내 친구 녀석이 만든 거야. 뭐, 지금은 이 마을에 없는데... 떠나면서 자신이 만든걸 다 나에게 주고 갔거든." 그 친구 취향 한번 괴상하다고 속으로 부르짓던말던 그 드워프는 아련한 눈빛을 하며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라고. 그 녀석은 진로가 옷을 만드는 쪽이었는데, 여자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이 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이런 것도 그런 의미에서 만들어진 거야. 뭐, 그러다가 드워프의 체형은 아름다운 옷을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부르짖으면서 엘프들의 체형에 심취해 있다가 마을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나가버렸지만..." 예술가들 중에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가 많다고 하더니만, 드워프들 중에서도 괴상한 사상을 가진 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냥 여자 체형을 잘 알면 되었지, 자기가 직접 여자 체형이 되어야 한다는 그 사상은 뭐냐?' 속으로 그렇게 꽁알대면서 온 몸에 솟은 닭살을 집어 넣는데 그 드워프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아, 그러고보니 그 친구가 너희 상회에 소속되어 있을걸? 그 반쪽 엘프 녀석이 엘프 체형과 비슷한 인간 체형을 마음껏 보며 연구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꼬여서 데리고 갔거든? 못 봤어?" 있다는 소리도 못들었지만, 그런 드워프라면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못 봤는데요? 저는 이 상회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되었거든요." "그래?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나중에 그 녀석 만나면 안부나 전해 줘. 아마 거기서 인간들 몸에 맞는 옷을 만들고 있겠지? 흐음... 그런데... 이건 그 녀석 몸에 맞게 만든거라 너에게 너무 클 거 같다." 여전히 손에 들고 있던 인조 가슴과 날 번갈아 바라보며 눈대중으로 칫수를 재고 있었는지 그 드워프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거였다. "어쩌지? 다른때 같으면 이쪽 진로 녀석에게 줄여달라고 부탁을 하겠는데... 지금 기간이 기간 인지라... 아무래도 저 애 칫수를 잰답시고 빼앗아 갈 거 같고... 내가 한번 만져볼까나?" "돼, 됐어요. 그런거 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알아서 할테니 그냥 드레스 주세요." 나는 드워프의 말에 다시 한번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낚아채다 시피 그의 옆에 고이 모셔져 있는 은빛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 "그래? 뭐, 그럼 네가 알아서 해라. 하지만... 가슴이 없으면 여자 티가 안 날텐데... 우웅... 여자 목걸이의 생명은 여자의 가슴과 얼마나 조화가 되는 것이냐 하는건데.. 괜찮을까... 뭐, 우선 이미지만 잡아보고 정 안되면 내 딸에게 부탁을 좀 해야 겠군." 그 드워프는 그렇게 혼자 궁시렁 궁시렁 대면서 창고에서 몇몇 물품을 챙겨서 작업실로 나갔다. "젠장... 내 신세가 왜 이리 되었누..." 창고 문이 닫혔다는 것을 확인 한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들고 있던 드레스를 그제야 자세하게 살펴 보았다. 촉감이 마치 실크처럼 부드러웠고 힘 없이 하늘하늘 하는 것이 입었을때 감촉은 좋을 것 같았다. 창고 안이라 거울이 없어 옷매무새를 제대로 잡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쉬운대로 우선 옷 부터 갈아 입었다. 드레스는 소매가 없는 나시티 형태에 가슴이 약간 파여 있었고 그 곳에서부터 마치 파도가 치는 것 처럼 횡으로 부드럽게 주름이 지면서 몸에 살짝 붙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예전에 했던 방식 그대로 마법을 써서 가슴을 만들면서 마음 속 깊이에서 우러 나오는 한숨을 다시금 내쉬었다. "에휴..." 거울이 없어서 내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볼 수 없었던 나는 그냥 눈으로 보이는 부분만 대충 정리를 하고는 작업실로 향했다. "아, 나오는 군. 어때? 그건 내 친구가 마을을 떠나기 전에 엘프들 체형에 맞춰 만들어본 몇개 안 되는 드레스였는데... 제법 너에게도 맞는 군." 그는 나를 훑어보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작업실 가운데에 나를 세워두고는 자신은 창을 등진 채 의자에 앉았다. 그의 앞에는 이젤과 같게 생긴 받침대가 있었고, 거기에는 종이가 걸려 있었는데, 폼만 보면 그 드워프가 내 초상화를 그리려는 것만 같았다. "자자, 거기에 서봐. 헤에... 가슴이 있잖아? 어떻게 된 거야?" "마법을 쓴 거 뿐이예요." "그래? 마법사였나? 뭐, 어쨌든 다행이군. 자, 그 머리 묶은 것좀 풀어봐. 흠... 생머리구만. 잠시만 그러고 있어." 그 드워프의 요구대로 질끈 묶은 머리를 풀어 손으로 쓱쓱 빗어 내리자 머리카락이 내 어깨 너머 등을 간지르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 드워프는 나를 그렇게 세워두고는 한참 동안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자신의 앞에 놓인 종이 위에 뭔가를 슥슥 그리고는 - 글을 썼을지도 모르지만... - 또 한참을 뚫어져라 보다가 그리다가 이제는 내 배경 - 그래봤자 작업실 벽이었지만... - 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또 그리다가 하는 거였다. 그렇게 잘은 모르겠지만 한, 한시간 정도 지나는 것 같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옆으로 좀 돌아봐. 아니, 너무 돌지 말고. 그래... 그 정도로..." 대충 45도 정도 틀어 세우더니 아무 말 없이 나를 봤다가 또 종이에 그렸다가 아무 말 없이 봤다가 종이에 그리는 일이 또 다시 반복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 드워프의 앞에 있던 종이는 하나 둘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마 처음부터 여러장의 종이를 앞에다 겹쳐놓았던 모양이었다. 어떤 거는 망했는지 커다랗게 엑스 자가 그려지기도 했고, 또 어떤 거는 심히 구겨지기도 했고, 또 어떤 거는 그냥 내버리듯 땅에 떨어지는데 나는 드워프쪽을 보지 못하고 약간 옆을 비껴 봤기 때문에 종이가 떨어진다는 건 알았지만, 거기에 무엇이 그려지거나 쓰여져 있는지는 볼 수가 없었다. "좋아. 잠시만 고개를 좀 들어 보겠어? 아니, 너무 올리지는 말구. 그렇지. 아, 조금 내려봐. 음음, 좋았어. 그러고 있어봐..." "고개좀 내려봐. 좋아. 잠시만... 음음, 이번에는 옆으로 돌려봐. 아니, 몸 말고 고개만..." "뒤로 돌아봐. 옳지. 그러고 있어봐...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좀 돌아봐. 음음..." "상체만 틀어봐. 조금만 더.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목걸이 하나 디자인 하는데 이런게 도대체 무슨 필요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말을 순순히 따르는 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그의 지시에 따라 자세를 취하면서 계속 서 있자니 어느샌가 다리가 무지 아파왔다. 거기에다 배에서 꼬르륵 거리는 걸 보니 점심 시간도 지난 듯 싶었다. 물론,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창가에서 좀 떨어져 있어 해를 보지 못하니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정오는 지난 것 같았다. 그래 좀 쉬고 할 수 없겠냐고 물어보기 위해 드워프를 바라보았는데, 그는 아까부터 나를 정면으로 보게 한 후 부터는 그 동안 땅에 떨어뜨려 놨던 종이들을 몽땅 가지고 살펴보며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그런 후에는 나를 바라보는 일도 없어졌기에 나는 모델이 된 후로 한 자세로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그러니 온 몸이 더 쑤시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그의 상념을 깬다는 건 정말 미안했지만,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그를 불렀다. "저기요..." 하지만, 너무 작게 불렀는지 그는 미동도 안 했다. "저기요오~" 그래 다시 한번 크게 불렀는데 그래도 미동도 안했다. 아니 아예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 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슬그머니 옆으로 한 발짝 옮겨갔다. 그래도 못 알아차리자 나는 이번에는 두어 발짜국을 옮겨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자신의 생각에만 빠져 있어서 못알아차리는 거였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이번에는 일부러 걸음 소리를 내면서 몇발자국을 걸어 보았지만 그래도 못 알아차리자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창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없어진 걸 알고 그가 화를 낼 지도 모르겠지만.. 차라리 나중에 화를 받더라도 지금은 이 자리를 피해 나가서 밥이나 먹고 쉬는게 더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창고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그 드워프는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아예 의자에서 내려와 종이를 바닥에 쫘악 펼쳐놓고 뚤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일까나? "저기요, 저 이만 가볼께요." 내가 그렇게 말을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드워프는 듣지도 못하는 지 미동도 없었다. 속으로 한숨이 나왔지만 나는 작별 인사까지 했으니 나중에 화를 내면 못 들은 드워프 탓으로 돌려야지... 하는 핑계거리를 생각하며 말이다. 그러면서 나는 슬그머니 작업실 문을 열고 나왔다. "어휴... 만약 다른 드워프들에게 붙들려 모델이 되었어도 이 고생을 했을까나?" 그 생각을 하면 마을로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곳에 있는다고 해서 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랫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튀어야겠어. 다시 이 고생을 하느니 차라리 몬스터랑 싸우는 게 백배 났지.' 올때는 위로 올라왔으니 갈 때는 아래로 내려가면 다 되는 줄 태평하게 생각하고는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쭈욱 나 있는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얼마쯤 걸어가자 나는 문득 이상한 것을 느꼈다. 그 동안 내가 걸어 내려온 계단은 모두 돌을 반듯하게 잘라서 만들어놓은 거였는데 어느새 그 돌 계단은 사라지고 단순한 흙으로 된 계단이 내 발에 밟히는 거였다. 의아함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달라진 건 그거 뿐만이 아니었다. 복도 중간 중간에 있어던 조명을 담당하는 크리스탈에 둘러쌓인 볼록 거울 장치도 어느새인가 사라져 있었다. "어? 어라? 내가 잘못 들어왔나? 좀 이상한데?" 아까 그 드워프를 따라 이 곳으로 왔을때 여기가 마치 나무 밑 기둥부터 시작하여 올라갈 수록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지 같은, 올라갈때는 여러 갈래 길이 나오지만 내려올 때는 그 갈래길이 하나로 합쳐지는 듯한 구조 같길래 아무런 망설임이나 생각 없이 그저 한 길만 쭈욱 따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 여기고 혼자 나왔던 거였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뭔가 잘못된 길을 온 거 같은 생각이 들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다시 되돌아가 그 드워프의 작업실을 찾으면 될 거 같지만, 벌써 몇 개의 갈래길이 합쳐진 길을 왔던 터라 찾아가라고 하면 못 찾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자니 어딘지도 모르는 엉뚱한 곳을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에 쉽사리 발걸음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래도 모험심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냥 혼자 헤매고 다니느니 정령의 도움을 받고자 실프를 불러내려는 그 순간, 나는 다른 곳과 이 곳이 다른 큰 차이점을 하나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곳에는 허공에 동동 떠다니는 정령들이 없었던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제 20화 임무 끝~! (1) 이 곳에는 허공에 동동 떠다니는 정령들이 없었던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아버지에게 듣기로는 이 세상에 정령이 없는 곳은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곳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거였다. 그것을 깨닫자 왠지 나는 너무 불안해져서 어서 빨리 이 곳을 벗어 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정령의 이름을 빠르게 불렀다. "엘라스트라!" 하지만 평소에는 내가 부르지 않아도 항상 내 옆에 머물면서 여차하면 도와주었던 엘라스트라가 지금은 내가 간절하게 부르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거였다. 그러니까 겁이 덜컥 났다. 내가 그 동안 그를 불러낸 이래 처음으로 내 부름에 나타나지 않는 그를 속으로 원망한 채 나는 침착하자고 되네이며 엘라스트라 다음으로 제일 믿음직한 불의 정령을 불러냈다. "셀레아나?" 하지만 이번에도 나타나지 않는 거였다. "시, 실레스틴..." 그 정도가 되자 나는 애써 침착하려고 하는데도 불안이 너무 커져서 목소리가 저절로 떨려 나왔다. 하지만, 실레스틴 마저 나타나지 않자 이제는 절망스러워 다리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 앉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저 앉으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애써 떨리는 팔로 벽을 지탱해 간신히 서 있는 채로 나는 마지막으로 나머지 정령의 이름을 불렀다. "노, 노에아네에엔...." 그러자, 너무나 기쁘게도 내 바로 앞의 계단이 흐물흐물 해지더니 흙기둥이 쑤욱 솟아나며 그가 나타는 거였다. "흐에엥~!!" 그가 이렇게 듬직하게 보이는지는 정말 처음 알았다. 그의 모습에 나는 순간적인 안도감으로 인하여 눈물이 마구 솟구쳐 오르며 온 몸에 힘이 빠져 스르르 주저 앉았다. [쯧쯧, 그러길래 처음부터 저를 부르지 그러셨습니까.] 이런 내 모습을 본 노에아넨이 노인처럼 혀를 끌끌 차더니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자신의 등을 돌려대는 거였다. [자, 업히세요.] "우엥~ 고마워. 도대체 다른 녀석들은 왜 안 오는 거야아~!!" 나는 얼굴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되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얼른 그의 등에 업혔다. 노에아넨은 너무나 가뿐하게 내 몸을 들쳐 업더니만 앞으로 향했다. [그거야...] 그러면서 내 질문 아닌 질문에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나는 놀라서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흐엑? 노에아넨,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뒤로 가야지!" 내가 쭈욱 앞으로만 오다가 이상한 길로 들어섰으니 그 곳에서 빠져 나가려면 당연히 뒤로 가야 했다. 그런데, 이런 걸 노에아네는 몰랐는지 나를 업더니만 그대로 앞으로 걸어가는 거였다. 하지만, 이런 나의 놀란 외침에도 불구하고 노에아넨은 여전히 앞쪽으로 걸어가며 대꾸했다. [아닙니다. 이 앞쪽에 해인님을 기다리는 분이 계십니다.] "날 기다린다고? 도대체 누가?" [그건 가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가보면 알게 되다니... 그럼 여길 계속 가야 한단 말이야? 아니, 잠깐만... 그런데 너는 왜 그 사람 말을 듣는 거야?" [그것도 가 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노에아넨이 내 질문에는 대답도 안 하고 마치 앵무새처럼 가보면 알 거라는 말만 되풀이 하자 나는 아까 완전히 사라졌던 불안감이 다시금 솟구쳤다. 아까는 다른 정령들은 못 와도 노에아넨 한명이라도 오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타난 노에아넨이 내 의사는 싸그리 무시하고 이 앞에서 날 기다리는 누군가의 말만 듣고 움직이는 걸 보니 괜히 불러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혹시.. 노에아넨이 그 사람의 최면에 걸려 내 말을 안 듣고 그 사람 말에만 복종하게 된 건... 헉, 그럼 난 함정에 빠진 걸까? 그런데... 정령도 최면에 걸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정령들을 부르지 말고 그냥 내가 뒤로 빠질 걸... 아무래도 안되겠다. 그냥 여기서 멈추라고 하고 슬쩍 내려서 뒤로 도망갈까? 노에아넨이 쫓아 오면... 으윽... 가만있어봐... 실드의 주문이 어떻게 되었더라?' 나는 여차하면 노에아넨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튈려고 실드 주문까지 막 생각해 놓고 있는데 노에아넨이 걸음을 딱 멈췄다. 그때가 하필이면 막 마나를 끌어 올려 실드를 전개할려는 찰나였기에 나는 노에아넨이 혹시 내가 마나를 끌어 올리는 걸 눈치 채고 막기 위해 멈춘 줄 알고 지레 놀라 얼른 끌어올린 마나를 풀어 버렸다. "왜, 왜 멈추는 건데?" [다 왔습니다.] "엥?" 나는 도망갈 생각만 하느라 어느덧 내 주변 공간이 계단만 나 있는 작은 동굴이 아니라 약 10여평의 원룸은 충분히 들어갈 정도의 넓은 동굴이 되어 있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어어..." 내가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노에아넨은 조심스레 나를 땅에 내려 놓아줬다. 드디어 나를 보고싶어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무진장 떨리고 누구인가 싶어 호기심도 일었지만, 그래도 여차 하면 튀어야 한다는 생각을 여전히 가지고 있던 터라 나는 도망갈 통로를 미리 확인해 놓기 위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 정확히 말하면 날 업은 노에아넨이 - 걸어왔을 통로가 있어야 할 곳에는 그냥 흙으로 된 벽만 덩그라니 있는게 아닌가? "에엑?" 그래 주위를 둘러보니 그 곳은 입구가 전혀 없는, 사방이 다 막힌 완벽한 밀실이었다. '이, 이럴수가... 이렇게 해서 어떻게 도망을 가지? 역시... 아까 노에아넨이 이상하단 걸 깨달았을 때 도망가야 했었나?' 망연자실하게 우리를, 아니 정확하게 나를 가로막고 있는 사방을 바라보며 서 있는데, 어디선가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들리며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건네왔다. "호호호호,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단다." "헉!"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라서 그쪽으로 몸을 돌리니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어느새 나타났는지 한 아름다운 여성이 나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여성은 거의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길다란 황갈색 생머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동양인 같은 살구빛 피부에 머리카락과 같은 황갈색 눈동자, 그리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는, 엄청난 미인은 아니지만 꽤나 예쁜 편인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의 몸 전체에서 우아함과 부드러움이 뿜어져 나와 왠지 우러러 보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거기에 땅에 질질 끌릴 정도의 길다란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목까지 감싸는데다가 손등을 거의 덮는 길이의 소매는 무척 긴 것이 무협 영화에서나 봤던 송나라나 명나라의 여성 복장과 비슷해 보였다. 물론, 비슷한 스타일이라는 것이지 옷 가운데 새겨진 황금색 무늬라든지 디자인은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그러고보니 이 곳에는 정령들도 없고, 불도 없고, 빛이 들어오는 창문도 없어 어두컴컴해야 정상일터인데 이상하게도 밝아 그녀를 보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마치... 우리를 둘러 싼 흙벽 전체가 미약한 빛이라도 발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도대체... 여기는 어떻게 되먹은 구조인 거야?' 그녀에게서 다시 시선을 돌려 사방을 살펴보며 속으로 다시금 한숨을 내쉬는데 그녀의 우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시금 들렸다. "저런... 너무 서 있으면 다리 아플텐데 앉지 그러니?" 이프리트 못지 않은 부드러움과 따뜻한 목소리였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수긍하기보다는 속으로 이죽거렸다. '여기에 뭐가 있다고 앉으라는 건지...' 그도 그럴 것이 아까 여기 들어와 살펴본 바로는 이곳에는 사방을 막고 있는 흙벽과 내가 딛고 서 있는 흙바닥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누군지도 모를 그녀에게 직접 대놓고 이야기 할 수는 없어 그냥 땅바닥에도 앉아야 할지 고민하면서 그녀를 힐끔 쳐다보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벌써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의자에 떡 하니 앉아있는 거였다. '에엥? 저 의자는 도대체 어디서 나왔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탁자가 하나 나타나 있었고, 돌아보니 내 바로 뒤에도 그녀가 앉은 것과 똑같은 의자가 어느새 생겨 있는 거였다. '허어... 이런 걸 가지고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하는 거겠지?' 내가 그 의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자 그녀가 다시 한번 재촉했다. "자자, 어서 앉아라. 그래 보여도 무척 편안하단다." 그래 엉거주춤 엉덩이를 걸쳤더니 의외로 의자는 폭신했다. 물론 솜을 두툼하게 넣은 쿠션처럼 쏙 들어간 건 아니었지만, 약간 붉으스름한 이 의자는 그냥 보면 딱딱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단단하면서도 포근한 맛이 느껴져 꽤나 안락했다. 그 기분에 등받이에 등을 편안하게 기대고 싶은 욕구가 생겼지만, 눈 앞에 정체불명의 인물을 두고 태연하게 있을 수는 없어 괜히 등을 곧게 세우고 몸을 긴장 시켰다. 그러자 이런 내 모습을 본 그녀가 손 등을 덮는 소매로 살짝 입가를 가리며 호호 웃는 거였다. "호호호, 저런...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는데..." 그녀의 부드럽고 다정하게 대해주는 태도를 보아하면 긴장을 풀어도 될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녀의 정체를 알기 전에는 방심할 수 없는 거였다. 그래 나는 무례하지 않게끔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저기... 누구세요?" "응? 나 말이니?" '그럼 여기에 댁 말고 누가 있수? 허걱? 그러고보니 노에아넨은 어디로 간 거야? 아까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는데?' 그러고보니 노에아넨이 내가 가란 말도 안 했는데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으음... 아무래도 이거... 노에아넨을 계속 데리고 있을 수가 없겠는데? 정령계약에 계약 파기 법도 있을라나?' 속으로 이렇게 중얼 거리는데 그녀가 다시 웃는 소리가 들렸다. "호호호, 노에아넨은 내가 심부름을 시켰단다. 그렇게 찾지 않아도 곧 있으면 돌아 올 거야." 내가 두리번 거리는 걸 보고 눈치 챈 모양이었다. "에? 아, 아뇨... 그냥 갑자기 안 보여서 의아해서 말이죠." 내가 그의 계약자인데, 나와 계약한 정령에 대한 이야기를 딴 사람에게 듣는다는게 기분이 좀 안 좋았다. '도대체 이 아가씨? 아줌마? 어쨌든 이 여자분은 뉘신데 노에아넨에게 심부름을 시킨 거야? 노에아넨이 걸려도 단단히 걸렸나 보네...'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는데 이런 날 빤히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지어 보였다. "이런, 이런... 아까 내가 누구냐고 물을때는 알면서도 모른체 하는 건가 했더니만... 정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가 보구나? 아직도 모르겠니?" 솔직히... 나중에 생각하면, 내가 이 당시 침착했더라면 벌써 알아챘을 거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 나는 너무 당황스러운 일만 계속 겪었던 터라 침착하게 사고할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었기에 그녀가 그렇게 말해봤자 논리적인 추측을 하기는 커녕 속으로 투덜대기만 했다. '처음 보는데 내가 어찌 안단 말이야? 가르쳐 주지도 않았으면서...' 제 20화 임무 끝~! (2) '처음 보는데 내가 어찌 안단 말이야? 가르쳐 주지도 않았으면서...' 속으로야 그렇게 궁시렁 댔지만, 겉으로 표현할 수가 없었던 나는 가만히 고개만 저어 보였다. "아앗, 정말 몰라? 우웅... 처음 보자마자 알아챌 줄 알았는데..." 무지 서운한 듯한 그녀의 표정에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못된 애 처럼 느껴져 미안한 감정이 드는 거였다. "아, 아니... 그게... 죄, 죄송해요..." 그러면서 속으로 내가 왜 사죄를 해야하는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분위기상 사과를 안 하면 안될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나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그녀의 모습에 날 어떻게 할 거란 위협은 보이지 않아 차츰 차츰 긴장을 풀자 그제야 이 여인이 나와 아는 사이었던가... 하고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 했다. 하지만, 그러기 시작한 타이밍이 너무 늦어,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눈치 채기 전에 그녀가 먼저 자신의 신분을 밝혀버렸다. "나는 땅의 정령왕이란다. 노아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 "아... 그러셨군요." 그녀에게 그렇게 대답하면서 나는 내 머리의 둔함을 다시한번 통감했다. '우에... 아버지가 멍청하다고 한게 사실이었나봐... 노에아넨이 내 말을 안 듣고 움직이는 것만 봐도 금방 눈치 챌 수 있었을텐데...' 물론, 그때는 평소 내 곁에 있어주던 다른 정령들이 갑작스레 모습을 보이지 않아 너무 당황 스럽고 놀라느라 제대로 생각을 못한 탓이기는 하지만... 그런거 보면 나는 은연중에 정령들을 많이 의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 덕에 노력하지 않고 생긴 능력이라 잘 쓰고 싶지 않네 어쩌네 하면서 말이다. '우웅... 내가 이런 인간이었다니...' 그렇게 속으로 내 자신을 한탄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는데, 이 분위기에 너무나 안 어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꼬르르륵~~ 그건 당연히 내 배에서 나는 소리였다. '허걱!' 나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저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에구, 에구... 이게 도대체 무슨 추태냐...' 어쩌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아침에 일어나서 채 아침 식사를 끝내기도 전에 드워프에게 반 강제로 끌려가 점심도 못 먹구 지금까지 모델을 서주다 겨우 빠져나오는 길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창피한 건 창피한 거였다. 내 귀에도 또렷하게 들리는 그 소리를 노아스도 들었는지 그녀가 호호호 웃었다. "호호호, 저런... 배가 고팠나 보구나. 식사 하러 가는 걸 내가 붙잡은 거니?" "아니... 뭐..." 내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여는데 갑자기 혀 끌끌 차는 소리가 들리는 거였다. "쯧쯧... 에잉, 하여간 내 망신은 네가 다 시키는 구나?" '허걱...'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차마 마주 바라보지는 못하고 고개만 살짝 돌려 바라보니 역시나... 거기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아버지가 떡 하니 서 있었다. 그런데 그 뿐만이 아니라 이프리트에다가 실피드도 같이 서 있는 거였다. '허걱... 저 정령왕들이 왜 여기 다 모인 거래? 에구구... 망신살이 뻗쳤다...' 덕분에 나는 얼굴이 더욱 빨개져서 고개가 더욱 더 아래로 내려갔다. "배고픈 애를 데려다 놨으니 그렇지. 애가 식사를 한 뒤에 데려 오던가..." 이건 항상 나에게 따뜻한 이프리트의 말. "호오, 배가 고프다? 정말 생물이잖아?" 이건 실피드의 말. '내가 무슨 동물원 원숭이냐?' 그 와중에도 나는 무지 신기하다는 실피드의 말에 속으로 투덜투덜 거리는데 아버지가 실피드를 향해 쏘아붙이는 말이 들려왔다. "아니, 네 놈은 왜 따라 온 거냐?" "왜? 나는 따라오면 안돼?" "내 아들 만나러 오는데 네가 왜 끼어드는 거야?" "뭐 어때서 그래? 안면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너도 지금 내 아들을...." 아버지와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다시 투닥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 굳 타이밍이라고 해야 할지 그 둘의 싸움을 잠시 소강 상태에 들어가게 하는 소리가 났다. 꾸르르륵~~ "푸, 푸하하하~~!" 그렇지 않아도 창피해서 얼굴을 푹 숙이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한번 더 배가 요동을치자 나는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이런 내 심정을 배려하지도 않은 채 실피드가 마구 웃어 제끼는 거였다. "으하하하~~ 그거 참 신기하네. 야, 야 한번 더 해봐라. 자꾸 들으니까 재밌다." "뭐냐, 네놈. 내 아들이 장난감이라도 되는 줄 알아?" "뭐 어때? 신기하니까 그러는 거지. 한번 더 해준다고 해서 크게 손해날 것도 없잖아." "그렇게 신기하면 네놈이나 햇!" "아따, 되게 치사하게 나온다. 좀생이처럼..." "뭐, 뭣?" "둘다 시끄러워. 그렇게 싸우려면 나가서 싸우던가. 애가 배고프다는데 그게 그렇게 재밌냐?" 항상 내 편인 이프리트가 두 정령왕에게 핀잔을 주면서 나에게 다가와 노아스에게 물었다. "너도 그래. 배고픈 애를 왜 불러들인 거야? 좀 먹을 만한 것 없을까?" "호호호, 미안해라... 그런건 미처 생각을 못했네. 으음... 기다려봐. 내가 애들을 시켜서 좀 가져오게 할테니."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 바로 옆 흙바닥이 볼록 솟아 오르더니 왠 드워프보다 조금 더 키가 작고 허연 수염이 난 통통한 할아버지로 변하는 거였다. 햇볕에 그을린 짙은 피부색에 뺨은 발그레 한게 어찌보면 귀엽게 보이기까지 했다. 노아스가 그 땅딸막한 할아버지에게 가볍게 손짓을 하자 그걸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그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다시 땅으로 사라지는 거였다. "헤에... 저 할아버지도 땅의 정령인가요?" "응? 어머, 처음 보니? 땅의 하급 정령인 놈이란다." "오오... 사실 땅의 정령은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서요.. 헤에, 처음 봤어요." "하기야... 이 세계에 있는 대부분의 땅의 정령들은 땅 속에 있을 뿐 겉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이해 한다는 듯이 노아스가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아까 이프리트의 핀잔에 투닥거림을 멈췄는지 두 정령왕이 다가왔다. "그런데 너도 참 웃긴 녀석이다. 내 아들을 한번 만나보려는데 여기에 네 공간을 만들건 또 뭐냐? 여기가 네 담당 구역이기는 하지만 정령계가 아닌 이상 꽤 힘겨운 일일텐데..." 아버지가 노아스가 막 만들어주는 - 그러니까 엘라임이 서 있던 자리 바로 뒤에 땅에서 솟아 오른 - 의자에 앉으면서 핀잔 섞인 말을 건네자 노아스가 호호 웃으면서 부드럽게 받아 넘겼다. "호호호, 뭐 지금은 크게 힘 쓸 일도 없으니 상관 없잖아. 게다가 이 세상의 유일무이한 존재를 처음 만나는 건데 평범하게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고." "엉뚱하기는..." 아버지는 그렇게 툴툴 댔지만 괜히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는 걸 보니 그녀의 말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는, 아버지의 영원한 앙숙인 실피드가 갑자기 뜬금 없는 말을 꺼냈다. "노아스 이런 말 들어봤어?" "무슨 말?" 갑작스런 그의 말에 노아스가 의아하게 대답했지만, 의아했던 건 그녀 뿐만이 아니었기에 다른 정령왕들과 나 까지도 그를 주목했다. 실피드는 우리의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쓰윽 돌아보며 씨익 웃더니 말했다. "인간 세상에서는 자기 자식에게 폭 빠져가지고 자식 말이라면 간이라도 빼어 주는 부모보고 이렇게 말한다더구만."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춘 실피드가 아버지를 바라보며 기분 나쁘게 씨익 웃어보이며 말을 마저 이었다. "팔.불.출 이라고..." 왠지 '팔불출'이라는 단어에 악센트가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이련가? 그 말을 들은 아버지가 가만히 계실 분이 아니었다. 그 즉시 탁자를 손으로 강하게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실피드를 노려봤다. "누가 팔불출 이라는 거야?" 하지만, 실피드는 이런 걸 예상했다는 듯이 태연한 표정으로, 아니 거기에다가 기분 나쁜 미소까지 곁들이며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니, 왜 흥분하고 그러실까? 나는 그냥 그런 말이 있다고 한 것 뿐인데? 흐음... 괜히 찔리는 면이 있나보지?" "뭣이라?" 아버지가 더더욱 화가 나서 눈을 치켜뜨는데 노아스가 끼어들어 아버지 편을 들어줬다. "어머, 팔불출이 어때서 그래? 너는 그렇게 예뻐할 자식도 없잖아. 괜히 부러워서 그러는 거지?" 그녀의 갑작스런 말에 실피드는 앗뜨거라 하는 표정으로 얼른 부인 했다. "무, 무슨 소리야? 나는 단지 재미있어서 그랬을 뿐이라고. 우리 정령들에게 자식이라니, 그런게 가당키나 해?" 그러자 생글 생글 웃으며 실피드를 바라봤던 노아스가 시무룩 해지며 대꾸했다. "맞아... 우리는 자녀를 볼 수 없어. 그래서 난 엘라임이 부러워." 그러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막 입이 벌어지려는 걸 간신히 참고 있던 아버지를 바라봤다. "엘라임, 그래서 말인데... 저 애 내 아들로 주면 안될까? 넌 성격이 더러워서 제대로 돌보지도 않을 거 아냐? 내가 무척 예뻐해줄게." "뭣이라? 운디네가 물 속에서 익사하는 소리 하고 있네. 내 아들을 누구에게 줘?" 제 20화 임무 끝~! (3) "뭣이라? 운디네가 물 속에서 익사하는 소리 하고 있네. 내 아들을 누구에게 줘?" 평소 같으면 무지 감격할 아버지의 말이었지만, 나는 감사는 못할 망정 다시금 분위기를 깨는 소리를 내야 했다. 꼬르르륵~~ '허걱...' 일부러 낸 소리는 아니었지만 네 정령왕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하자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겨우 겨우 들었던 고개를 다시 푹 숙여야 했다. "푸, 푸하하하하~~" 그러자 정말 얄밉게도 실피드가 기다렸다는듯이 마구 웃어제끼는 거였다. 그의 모습에 화가 난 아버지는 나에게 매서운 눈길을 한번 보내고는 실피드에게 버럭 화를 냈다. "왜 웃는 거야? 그게 그렇게 웃겨?" "푸하하하, 웃기잖아. 정령의 기운을 이어받은 존재가 실체가 있는 것도 모자라서 배가 고파 꼬르륵 소리를 내다니 말야." "배고프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게 뭐가 웃기다는 거야?" "좀 웃으면 어때서? 그런 거 가지고 째째하게 굴기는..."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바에 의하면 - 몇번 보지도 못했지만... - 아버지가 펄펄 뛸 정도로 화를 내어도 능글맞게 대응할지언정 절대 물러서지 않는 실피드였건만, 이번에는 이프리트 아저씨가 그를 비난하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어서 그런지 슬그머니 물러났다. "아, 이제 가져오는구나." 기다렸다는 듯한 노아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땅이 뽀록 솟아 오르며 아까 봤었던 땅의 하급 정령 놈이 생겼다. 그 땅딸막한 할아버지의 품안에는 무엇인가가 한아름 들고 있었는데 탁자 위에 올려 놓는 것을 보니 고구마와 감자와 같은 먹을 수 있는 식물 뿌리였다. '에... 고구마와 감자? 쩌비... 땅의 정령이라서 그런지 땅 속에 있는 먹을 걸 가져 왔나보구나...' 비록 무지 배가 고픈 상황에 주어진 먹을 것들이었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서 그 먹을것들을 보자마자 제일 먼저 드는 감정은 실망이었다. 내가 한국에 있을 당시만 해도 고구마와 감자는 요리에 들어간 것은 잘 먹었지만, 그것들만 먹고 싶어서 찾지는 않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뭐, 한 겨울에 따끈따끈한 군 고구마라던지, 초등학교때 학교에서 야영을 할때 모닥불에 구워 먹던 감자야 별미라고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지만 식사 대용으로 먹을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쩌다 가끔, 그것도 간식으로 먹는다면 몰라도 말이다. 하지만, 나는 곧 생각을 고쳐 먹었었다. 드워프의 마을로 오기 위하여 험한 산행을 하던 기간 중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해서 먹었던 건량과 맹물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그 뒤 드워프의 마을에 도착해서 다시는 음식 투정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런 결심을 한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또 이렇게 못마땅해 하는 것인지... '그래, 이거라도 감사하게 먹자.' 그렇게 기특한 생각을 한 나는 노아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면서 고구마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런데, 막상 집어들고보니 무지 난감한 문제를 떠올렸다. '헉... 그러고보니 나 고구마를 날로 먹어본 적이 없는데...' 그것도 깨끗하게 씻겨진 고구마가 아니라 아직도 군데 군데 흙덩어리가 붙어 있는, 지금 막 땅에서 캐낸 것과 같은 그런 고구마였던 것이다. 뭐, 흙이야 내 옷자락으로라도 툭툭 털고 쓱쓱 씻어내면 어떻게든 될 것 같지만 - 이래뵈도 비위는 꽤 좋은 편이다. - 안 익은 고구마는 한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서 과연 내가 먹을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곧 내 옆에 있던 이를 보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에헤헤~~ 아저씨이~~!!" 아버지와는 다른 쪽에 있던 이는 이프리트, 그는 온 몸이 불로 되어 있는 불의 정령왕이었던 것이다. "응? 왜, 왜 그러니?" 갑작스런 내 행동에 의아한 듯 바라보는 이프리트였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들고 있던 고구마 말고도 탁자 위에 있던 감자와 고구마 몇개를 더 들고 그에게 내밀었다. "아하하... 이것 좀 궈주세요. 그냥은 못 먹을 것 같아서..." 그러면서 생긋 웃자 이프리트가 피식 웃더니 그의 커다란 날개 - 그는 지금 셀레아나 모습을 하고 있다. - 를 내미는 거였다 "그래, 그럼 어디 여기 위에 올려나봐라." 그래 내가 얼른 그의 넓적한 불꽃으로 된 날개 위에 고구마와 감자들을 올려놓자 그는 다른 편의 날개로 그 위를 살포시(?) 덮는 거였다. 그러자 잠시 후에는 정말 향긋한 냄새가 풍겨 나오며 고구마와 감자가 잘 익어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거였다. '오옷... 혹시나 해서 부탁한 거였는데 정말 구워지잖아?' 냄새가 무척이나 진해지자 그제야 이프리트는 고구마와 감자 위를 덮었던 날개를 들어 올렸다. 그렇게 드러난 날개 아래에는 먹음직스럽게도 노릇노릇 구워진 고구마와 감자가 있었다. "우와~"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막 구워져 따끈따끈한 고구마와 감자들을 들어 올렸다. 비록 간이 하나도 안 되어 있어서 약간 싱겁긴 했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나는 정말 정신 없이 그것들을 입 안으로 집어 넣었다. "맛있니?" 노아스가 신기한듯, 그리고 기분 좋은 듯 - 아무래도 자신이 가져다 준 음식들을 맛있게 먹으니 그런 듯 - 물었지만 나는 거기에 대답할 여력도 없었다. "천천히 먹어라. 이게 다 네가 먹을 건데 왜 그렇게 급하게 먹니?" 이프리트가 걱정스레 충고했지만, 나는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채 급하게 먹다가 결국 목에 걸리고 말았다. 군 고구마를 즐겨 먹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고구마에는 물고구마와 밤고구마가 있는데 물고구마는 물기가 많아서 약간 질척하고 말랑말랑한 맛이 있고, 밤 고구마는 물기가 적어서 퍽퍽한 맛이 있다. 그런데 내가 지금 허겁지겁 먹은 고구마가 바로 그 밤고구마였던 것이다. "켁, 켁, 켈룩, 켈룩..." 가슴을 탁탁 치며 기침을 하자 실피드는 다시 웃어댔고, 아버지는 그런 그를 향해 버럭 화를 냈으며 이프리트와 노아스는 놀라서 나에게 다가왔다. "저런... 그러니까 천천히 먹지 그랬니?" "어머, 괜찮니? 이건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거지?" 이런 일에는 등을 두드려 주면 좋았지만, 정령왕들은 육체가 없었기에 이러한 상식에는 무지 했다. 그러니 옆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두 정령왕에게 나는 계속 기침을 하면서도 애써 그들을 안심 시키기 위해 웃으려고 노력했다. "켈룩... 괘, 괜찮아요.. 켈룩, 켈룩... 크아~ 아, 아... 내려 갔다. 에휴, 살았네..." 가슴이 아플 정도로 두드리며 기침을 해 댄 보람이 있는지 목에 막혔던게 밑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막상 숨통이 트이고 나니까 나는 물이 먹고싶어졌다. 하지만, 여기는 땅의 정령왕이 만들어낸 공간이라 아무것도 없고 단지 네 정령왕과 나 뿐이었으니 물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래 아버지에게 물이라도 좀 달라고 하려던 나는 막상 실피드와 투닥거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에헤헤...' 그래 아버지에게 슬쩍 다가가 그를 부르는 대신 그의 옷자락을 들어 올려 입에 넣고는 한 입 깨물었다. "엥? 뭐 하는 짓이냐?" 아버지가 황당하게 돌아보았지만, 나는 의기양양하게 씨익 웃어보일 뿐이었다. 역시 나의 이빨에 쉽게 잘려진(?) 아버지의 옷자락은 내 입 안에서 깨끗한 물로 변하여 내 목 너머로 쓰윽 내려갔던 것이다. "허... 이젠 아버지도 잡아 먹나?" 황당하다는 실피드의 중얼거림에 아버지가 다시 도끼눈을 해서 쳐다보려고 했는데, 그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버지, 한 모금만 더 마시면 안될까요?" 그러면서 슬그머니 옷자락을 하나 더 집어들자 아버지가 그 옷자락을 확 채어갔다. "차라리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해라. 내 옷자락을 먹다니, 넌 내가 물로 보이냐?" 그러면서 아버지가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채 나에게 내밀자 그의 손바닥에서 작은 물방울들이 방울방울 솟아 오르더니 내 주먹 반만한 커다란 물방울로 합쳐졌다. 아버지가 거의 던지는 것 처럼 그걸 나에게 넘기자 나는 얼른 입 안으로 집어 넣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 맞는데...' 아버지에게 물을 얻어 마신 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이번에는 감자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실피드랑 투닥 거리느라 잠시 비운 자리에 노아스가 쓰윽 앉는 거였다. 그에 나는 의아한 듯이 한번 바라봤지만, 이곳 주인이 아무데나 앉는데 내가 뭐라 할 수는 없는 일이라 나는 다시 감자 껍찔 까는데에 열중했다. 그런데 그녀가 손을 들더니 내 뺨에 자신의 손바닥을 쓰윽 가져다 대는 거였다. 그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그녀가 이상야릇한 눈빛으로 나를 빤~ 히 바라보고 있는 거였다. 그 모습에 왠지 소름이 쫘악 돋은 나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뒤로 빼 그녀의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했는데, 그러자 그녀가 씨익 웃으면서 나에게 더 다가서며 손을 떼지 않으려고 하는 거였다. "왜, 왜이러시는데요?" 무지 당혹스러워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그녀가 다시금 생긋 웃었다. "어머머, 애 파르르 떠는 것 좀 봐... 어쩜... 볼도 말랑말랑 하고... 따뜻하구나... 우리에게는 없는 온기가 있네..." 그녀의 마지막 말에는 왠지 모를 부러움이 담겨 있어 나는 그녀의 손길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잠시 멈추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프리트가 헛웃음을 지으며 끼어드는 거였다. "온기라면 나에게 얼마든지 있는데? 원한다면 너에게도 얼마든지 나누어줄께." "훗, 고맙기는 하지만 나도 내 능력으로 얼마든지 열을 만들 수 있어.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가지고 있는 체온을 말하는 거야. 식물이든 동물이든 다 조금씩이지만 체온을 가지고 있거든. 그런걸 느낄때면 아, 이 생물체는 살아있구나... 하는 걸 느끼지." 갑자기 노아스가 주책 맞은 여자에서 진지한 여자로 바뀌어 나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고 여전히 노아스의 손에 한쬭 뺨을 내어준 채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아버지와 계속 투닥거리던 실피드가 불쑥 다가와 끼어들었다. "뭐야, 그럼 우리는 죽은 거냐? 열을 내지 않으려면 얼마든지 안 낼 수 있으니까 말야." "죽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있냐?" 이프리트의 말에 이어 아버지도 쏘옥 끼어들었다. "멍청하기는... 우리는 이 세계의 존재들이 아니니까 살아있다는 증거도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잖아." "호호호, 맞다, 맞어." 노아스는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는게 미안했던지 화사하게 웃어보였다. 그런데 화사하게 웃기만 했으면 좋았으련만, 그러면서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거였다. 그에 내가 흠칫 놀라자 아버지가 그녀의 손을 탁 쳐내줬다. "그런데 넌 언제까지 내 아들에게 손대고 있을 거야?" "어머, 뭐 어떠니? 좀 만진다고 닳는 것두 아닌데..." "충분히 닳아. 그러니까 만지지 말란 말야." 그러자 실피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끼어들어 이죽거렸다. "쳇, 자기 아들이라고 유세떨기는..." "흥, 부러우면 너도 아들 만들어라." "쳇..." '오옷, 아버지가 실피드를 말발로 눌렀다! 이런 놀라운 일이...' 평소에는 아버지가 화를 내도 능글맞은 말발로 받아치던 실피드였는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그런 실피드를 말발로 눌렀던 것이다. 제 20화 임무 끝~! (4) '오옷, 아버지가 실피드를 말발로 눌렀다! 이런 놀라운 일이...' 평소에는 아버지가 화를 내도 능글맞은 말발로 받아치던 실피드였는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그런 실피드를 말발로 눌렀던 것이다. 실피드에게도 그게 놀라운 일임과 동시에 엄청 분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아버지를 한번 째려보더니만 슬그머니 내 뒤에 와 서더니 갑자기 내 양쪽 볼을 잡아 쭈욱 늘리는 거였다. "흐, 흐겍...." 갑작스레 당한 일이라 나는 너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른 정령왕들도 그의 이런 행동은 예상치 못했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는 가운데 아버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실피드의 손을 잘라내려고 했다. "이놈이 무슨 짓이야?" 하지만 실피드는 아버지의 손이 자신에게 닿기도 전에 재빠르게 내 뺨을 놓고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아버지의 손은 허공을 쳤다. "뭐 어떠냐? 나도 체온좀 느껴보자." "이놈이, 그게 체온을 느끼는 거야? 내 아들 괴롭히려는 거지." "흥, 그런 거 가지고 째째하게 굴긴... 팔불출 같으니라고..." "뭣이라? 네 놈이 오늘 해보자는 거냐?" "흥, 맨날 툭하면 오늘 해보자는 거냐고 묻데? 맨날 똑같은 말 하면 지겹지도 않냐? 레파토리좀 바꾸지 그래?" "오냐, 그렇다면 오늘 내가 네 놈을 소멸시켜 다시는 그 말을 안 해도 되도록 하마." "하, 그 이야기도 매번 나오지?" "시끄러워!" 그러고보니 우리 아버지는 물의 정령왕이면서 성격이 매우 급했다. 물의 이미지와는 안 맞다고나 할까? 왜 물의 이미지는 쉽게 화를 내지 않을 것 같고 - 물론 한번 화 내면 엄청 무서울 것 같기는 하지만... - 항상 부드럽고 온화하고, 뭐 이러한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울 아버지는 그런거와는 정 반대니... 하기야, 내가 만난 정령왕들 중에서 내가 생각한 이미지에 맞는 정령왕이 있었던가? 불의 정령왕은 호탕하고 급한 성격인 줄 알았건만, 그 반대인 온화하고 자애스럽고 침착하고, 바람의 정령왕은 상큼 깨끗 발랄랄 한 대신 능글맞은데다 아버지에게 시비 걸기를 좋아하고, 땅의 정령왕은 부드럽기야 하지만 그 보다는 주책스러움이 더 강하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아버지와 실피드의 투닥거림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 어찌된고 하니, 항상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지내는 나머지 두 정령왕 이프리트와 노아스가 말렸던 것이다. 평소 같으면 그냥 냅두고 구경했을테지만, 이 곳이 정령계가 아니라 아무래도 노아스가 만들고 유지하는 곳이라서 그녀에게 부담이 클 까봐 그런 듯 했다. 하기야, 아버지와 실피드도 그걸 아니까 그쯤에서 끝내고 자리에 앉은 거겠지만... 그렇게 네 정령왕이 탁자에 둘러앉자 나는 아까부터 입에 달고 있던 고구마를 탁자에 내려 놓았다. 그러자 나에게 계속 신경쓰고 있었던 듯 노아스가 그 즉시 물어왔다. "어라? 아니 왜 그만 먹어? 아직 이렇게나 많은데..." 탁자 위에는 구은 고구마와 감자 말고도 안 구운 고구마와 감자도 가득 놓여 있었다. 하지만... 내 평소 고구마와 감자를 즐겨 찾는 편도 아니었던 터라 너무 배가 고파서 먹기는 했지만 조금 배가 차니까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여길 나가서 우리 숙소로 가면 맛있는 스프와 빵, 그리고 고기가 기다리고 있을테니 이런 것들로 배를 채우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요. 많이 먹었는 걸요." 그래 생긋 웃으며 사양의 말을 꺼냈지만, 노아스는 이런 내 맘을 몰라주는 듯 했다. 아니, 날 너무 생각해줘서 오히려 넘친 거랄까? "많이 먹기는... 겨우 한개 반 먹어 놓고서... 그걸로 배가 차니?" '헉... 그런 건 언제 보고 있었대? 게다가 자신들은 먹지도 않으면서 배가 안 찬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지?' 나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겉으로는 배시시 웃었다. "괜찮아요. 예전에 산행 할때는 건량 몇개로 한 끼 식사를 때우기도 했었는걸요. 그때에 비하면 이건 진수성찬이죠." "그래?" 내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노아스는 수긍한 듯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나는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이프리트의 시선과 마주쳤다. '허걱...' 이프리트의 눈빛에는 내가 먹기 싫어서 안 먹는 다는 걸 다 알아챘다는 듯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장난스럽게 웃기만 했을 뿐 아무 말도 안 했다. 하기야, 그는 아버지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나와 같이 지냈던 이였으니 내가 먹기 싫어서 내려놨다는 걸 금새 눈치챌 수 있었을 거였다. 그래 나도 그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어보였다. 내가 네 정령왕들에게서 빠져나와 숙소로 돌아온 것은 해가 거의 져서 어둑어둑 해질 무렵 이었다. 뭐, 그들이 순순히 놓아줬다기보다는 노아스가 그 공간을 유지할 힘이 점점 약해져서 그 공간을 없애고 정령왕들이 모두 정령계로 돌아가버리는 바람에 나 혼자 남게 된 것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숙소에 도착해보니 날이 어둑어둑해졌는데도 불구하고 불도 안 켜져 있고 사람들이 있다는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거였다. "뭐야, 어떻게 된 거지?" 땅 속을 나와서 숙소까지 도착하는 동안 드워프들의 눈에 뜨이지 않기 위하여 조심스레 움직이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가 숙소 안에 들어가서야 겨우 알아챘던 것이다. 식당을 지나쳐 부엌으로 들어갔지만, 오늘 식사당번을 맡은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부엌도 오랜 시간 비워뒀는지 싸늘함만이 감돌고 있었다. 그래 그 곳을 나와 다른 이들의 침실을 비롯하여 숙소 전체를 뒤졌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모두 드워프들에게 잡혀(?) 가서 아직까지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어휴... 이게 도대체 왠 난리냐..." 나는 투덜투덜 대면서 다시 부엌으로 내려갔다. 아무도 없으니 내가 알아서 식사를 챙겨 먹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까 노아스가 만든 공간 안에서 고구마를 좀 먹기는 했지만, 그건 잠시 허기를 쫓기 위해 먹었을 뿐 배 부르게 먹지도 않았고, 또 아침부터 먹은게 별로 없었기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이 곳에 와서 제대로 된 요리를 해본 적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지만 여기에는 여러가지 재료가 있으니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뭐, 한국에 있을 때 가사 실습에서는 항상 좋은 점수를 받은데다가 집에서 어머니가 잠시 부재중이실때 유일한 딸이라는 이유로 밥도 해봤기 때문에 요리하는데 크게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진 것이 아니라 어둑어둑 하기는 해도 사방이 잘 보였기 때문에 나는 등불을 키지 않은 채로 부엌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싱크대 비스무리한 곳을 몇개 열어봤을까, 갑자기 저 멀리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빠르게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 거였다. 그래 일행이 돌아온 모양이라 생각하고 반갑게 부엌 문을 나서려는 찰나, 나는 눈을 희번떡 거리며 살기 등등하게 들어오는 드워프의 모습을 볼 수 있엇다. 내가 미처 부엌 문을 나서지 않아 다행이었지, 나섰다간 꼼짝 없이 그에게 들켜 잡혀갔을 거였다. '히익... 아직도 여길 드나드는 드워프가 있을 줄이야...' 나는 그 드워프의 모습에 기겁을 해서 얼른 바람의 중급 정령 슈리엘을 불러내었다. 그리고 그의 도움을 받아 부엌 천장에 등이 닿을 정도로 떠오른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자마자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그 드워프는 부엌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왔다. 하지만 위를 쳐다보지 않은 이상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자 그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다시 발걸음을 돌리는 거였다. "거참 이상하군... 누군가가 왔다갔다 하는 걸 본 것 같은데... 잘못 봤나? 아님, 벌써 다른 녀석이 채어 갔나..." 그 드워프의 중얼거림에 나는 심장이 막 뛰는 것을 느꼈다. 이 숙소 근처에 드워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안심을 했는데, 가끔 이 주위를 기웃 거리는 이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큰일 날 뻔 했군.... 젠장, 내 신세가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꼬...' 나는 그 드워프가 숙소를 나가 기척이 사라지는 걸 느끼고 나서야 조심스레 바닥으로 내려왔다. '어후... 식사 하나 먹는 것도 힘들구만...' 그 뒤로 나는 부엌에 있는 창을 다 가려 놓고, 그것으로도 안심이 안 되어 깜깜함에도 불구하고 불도 안 키고 - 어차피 허공에 있는 정령들 덕에 아예 안 보이는 건 아니었으니 괜찮았다 - 소리도 안 나게 발 뒤꿈치를 든 채 살금 살금 걸어다니며 부엌을 조용히 뒤졌다. 그렇다고 거창하게 요리할 엄두도 안 났기에 아침에 먹다가 남은 듯한 음식들을 찾아내어 빵 사이에 고기와 야채들을 끼워 대충 입 속으로 쑤셔 넣었다. 빵이야 차가워도 그냥 먹을 수 있겠지만, 고기는 고기 기름이 하얗게 굳어 붙어 있었기에 그냥 먹을 엄두가 안나 어찌할까 하다가 불의 정령을 불러냈다. 그라면 연기 없이 데워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의 정령의 몸에서 나오는 빛이 바깥으로 나갈까봐 무서워서 부엌 한 가운데 있는 탁자 밑으로 기어 들어가 최대한 불의 정령을 쬐끄맣게 해가지고 데웠다. 뭐, 이왕 데우는 김에 빵도 버터를 발라 구워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기는 했지만, 들킬까봐 조마조마 하면서 먹는 바람에 잘못 먹을까봐 체할 것 같았다. 제 20화 임무 끝~! (5) 뭐, 이왕 데우는 김에 빵도 버터를 발라 구워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기는 했지만, 들킬까봐 조마조마 하면서 먹는 바람에 잘못 먹을까봐 체할 것 같았다. 그렇게 대충 저녁을 - 솔직히 말하면 노아스에게 얻어 먹은 점심보다는 훨씬 진수성찬 이었지만... - 때운 나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편안히 있지 못하고 긴장의 하루였던 오늘이 무사히 지나갔음을 감사하며 내 숙소로 올라갔다. 물론, 드워프들에게 들킬까봐 불은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간단하게 세수만 하고 잠옷으로 갈아 입은 채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아아... 힘든 하루였어... 부디 내일은 오늘보다 좀 더 나았으면 좋으련만... 에휴, 해민이나 듀비는 괜찮으려나?' 하지만 그들에 대한 걱정은 점점 몰려오는 잠에 의하여 사라져버리고, 나는 곧바로 정신없이 잠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잤을까... 나는 잠결에 어떤 인기척을 느끼고는 정신이 들었다. 누군가가 내 방으로 들어오는 거였다. 그래 나는 집 안을 뒤져보는 드워프인줄 알고 놀라서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내 방에 들어온 인영은 오히려 소리를 낼 새라 살금살금 나에게 다가와 다짜고짜 내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 오는 거였다. 그래 순간적으로 변태 드워프인줄 알고 한대 치고 도망가려고 하는 순간 그 보다도 먼저 내 침대에 기어들어온 인영이 그것으로도 모자라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너무나 익숙한 그 모습과, 그리고 너무나 익숙한 인영의 촉감에 나는 잔뜩 긴장했던 몸을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해민이었구나... 너도 도망쳐왔니?" 나는 안도감이 섞인 목소리로 작게 속삭이며 해민이의 몸을 조금 더 바싹 당겨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해민이도 엄청 힘들었던 모양이다. 평소 같으면 한참이나 내 품에 얼굴을 부비고 내 눈과 마주쳐 생긋 웃고 그럴텐데 지금은 몇번 부비더니만 곧바로 잠에 골아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나만 편하게 있었던 거 같아 괜히 미안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시 듀비에게까지 시선이 미쳤다. '부디 무사해야 할텐데... 지금 한번 찾아 볼까나?' 그러나 너무 편안한 침대의 유혹은 한번에 물리치기에는 너무나 달콤했다. '으음...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죽이려는게 아니라 단지 작품을 만들려는 구상에 도움 좀 받자는 건데... 좀 피곤하기야 하겠지만 무사하겠지...' 그렇게 듀비에게 너무나 미안한 생각을 품은 나는 침대 시트에 몸을 한번 비비적 거리며 거기서 오는 감촉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해민이에게 시트를 잘 덮어주고 다시 잠 속으로 퐁당 뛰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꽝~! 하고 다시 들려온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어야 했다. 다행이 그 커다란 소리는 내 방 문에서 들려온 것이 아니라 바로 아래층, 우리 숙소 건물의 현관에서 들려온 것이기는 했지만, 나와 해민이가 벌떡 일어나게 만들 충분한 위력이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들려온 소리에 내 품에 안겨 있던 해인이는 순간적으로 굳어 버렸다. "이놈의 꼬맹이 수인족 녀서어어억~!! 잡히기만 해봐라, 절대로 가만 두지 않겠어. 내가 한창 구상을 하고 있는데 도망을 가? 그것 때문에 겨우 잡을 듯 말듯 하고 있는 구상을 완전히 잊어버렸잖아아아~~!! 크아아아~~!!" 드워프가 아니라 왠 오거나 트롤 같은 몬스터가 온 것 같았다. 몸집은 작으면서 목청은 왜 저렇게 좋은지... 어쨌든 그의 괴성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그가 해민이를 강제로 끌고 갔던 드워프인 모양 이었다. '저 드워프가 한눈을 파는 사이 해민이가 탈출(?) 하니 다시 잡으러왔나본데... 그렇다고 다시 잡으러 오다니... 그냥 구상이나 할 것이지...' 겉으로는 해민이를 꼬옥 품에 앉은 채 잔뜩 긴장해서 도망가려고 조심스레 내 방 창문을 열며 속으로 중얼거리던 나는 순간적으로 멈칫거렸다. '헉... 혹시... 혹시... 날 데리고 간 그 드워프도 날 찾으러 다니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털어 버리고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렇지 않으면 건물에 난입하여 이곳 저곳 쑤셔대던 드워프에게 해민이는 물론 나까지 덤으로 잡혀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들켜도 도망갈 수야 있지만, 드워프 족장을 비롯한 레이언 녀석에게 대회 나가는 드워프들을 거슬리면 안된다고 강한 경고를 받았기에 저 드워프의 눈 앞에서 도망갔다가는 어떻게 될 지 몰랐다. 그러니 그에게 들키기 전에 몰래 도망가는게 최선이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아주 천천히 창문을 여느라고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그 드워프가 내 방이 있는 층에 올라오기 전에 완전히 창문을 연 나는 얼른 실프를 불러 밤 하늘을 날아 오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저 멀리서 두다다다 하는, 우리 숙소로 누군가가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와 함께 드워프 마을도 모자라 밤 하늘을 쩌렁 쩌렁 울리는 외침이 들려왔다. "야아아아아~~~ 너어어어어~~~" "헉...." 나는 드워프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사실 옆에서 이 드워프가 누구다라고 말해 주지 않는다면 구분을 못한다. 아마 동양 사람들이 서양 사람 구분 못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지금 저 멀리에서 살기를 뚝뚝 흘리며 날 뚫어져라 쳐다보는 드워프는 옆에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허거걱... 하, 하필이면...' 나는 해민이를 품에 안고 창문 밖으로 뛰어 나가기 위하여 창문 턱에 한 발을 걸친 채로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런데, 정말 하필이면 그때 내 방 문이 벌컥 열리면서 아까 숙소 건물로 쳐들어왔던 드워프가 들어왔다. "아앗~ 여기 있다~!!" 이런 걸 바로 머피의 법칙이요, 산넘어 산이요,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하는 거겠지? 그렇지 않아도 창문 밖으로 보이는, 날 뚫어져라 바라보며 두다다다 달려오는 드워프 덕분에 굳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그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내 방으로 침입한 드워프는 잽싸게 달려와 창문에 반쯤 몸을 걸치고 있는 날 끌어 당겼다. "이놈! 왜 도망가는 것이냐?" 그러면서는 나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오로지 내 품에만 있는 해민이를 꺼내(?) 들고서는 짤짤 흔들면서 고함을 지르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웃기게도 이런 이 드워프의 모습이 창 밖에서 달려오는 드워프에게는 나를 끌고 가려고 하는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너무나 다급해서 현관 문으로 들어올 생각은 못하고, 그 드워프가 해민이를 강제로 끌고 방 문을 나가기도 전에 이층을 그대로 벽을 타고 올라와 창문으로 뛰어든 드워프는 다짜고짜로 해민이를 데리고 있던 드워프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 드워프가 데리고 있는게 내가 아닌 해민이라는 걸 너무 흥분해서 미처 깨닫지 못한 듯 했다. "거기 서지 못해!!" 이층이라면 보통 남자 아이들에게는 약간 어렵고 위험하기는 해도 기어 오르는데 크게 문제되지 않을 높이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 기준이었고, 그 보다 작은 드워프의 관점에서 본다면 약 3층 정도 되는 높이일 텐디 그걸 순식간에 기어 올라 내 방에 들어온 드워프의 능력이 놀라웠다. '드워프는 목소리만 큰 것이 아니라 몸 놀림도 이렇게 잽싸구나...' 내가 방 한 구석에서 흥분한 두 드워프에게 잊혀져 멍청하게 있는 사이, 해민이를 데리고 가다 갑작스레 공격을 받은 그 드워프는 상황을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냅다 그대로 공격을 맞받아 치는 거였다. "이 놈은 내 꺼야. 너는 포기하란 말야!" "무슨 소리! 아까부터 내가 찾고 있었단 말야!" 그 틈을 타서 해인이가 드워프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와 얼른 내 품으로 돌아왔지만, 그 두 드워프 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인물이 각자 다르다는 걸 깨닫지 못한 채 열심히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앞으로 펀치~ 뒤로 펀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땅딸막한 몸을 이리저리 날쌔게 움직이며 상대의 주먹을 막고 자신의 주먹을 벋는 두 드워프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예전에 한국에서 봤던 '동물의 왕국'프로그램이 생각났다. 그때 거기에 등장한 동물이 캥거루 였었다. 팔딱 팔딱 뛰면서 마치 권투 선수처럼 싸웠던 그 캥거루의 모습이 드워프들의 모습에서 생각 나는 건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둘 다 주먹을 쥐고 싸운다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캥거루는 크고 드워프는 작은데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비교하자 두 드워프가 살벌하게 싸우는데도 불구하고 되게 웃기는 거였다. 다른 때 같으면 그렇다 하더라도 예의가 아닌 이상 웃음을 억지로라도 참았을텐데, 지금은 두 드워프가 주변에는 상관하지 않고 - 나 조차도 잊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 싸움에만 열중하고 있으니 내가 조금 웃더라도 모를 것 같았다. "킥, 킥킥킥..." 그래도 소리는 죽여서 웃는다고 웃었는데 내가 그렇게 웃자마자 두 드워프가 싸움을 딱 멈추더니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날 보는 거였다. "헉, 히끅... 히끅..." 너무 놀란 나는 웃음을 딱 멈추고 시치미를 떼려고 했는데 참 몸이 이런 내 생각을 미처 못 따라준 채 오히려 딸꾹질을 내보내는 거였다. "히끅.... 히끅...." 너무나 무안하게도 두 드워프들은 그런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미동도 안 하는 거였다. 그렇다고 내가 움직일 수도 없어 나도 가만히 있고 싶었지만, 이놈의 딸꾹질은 자꾸 멈추려고 해도 더 더욱 끈질기게 나와 적막이 깔린 내 방 안에는 내 딸꾹질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그렇게 방 안의 네 존재가 얼마나 오랫동안 움직이지도 않고 대치를 하고 있자 나는 너무 난감했다. 이렇게 석상처럼 가만히 서서 아침을 맞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까지 될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 한 드워프가 움직여주기 시작했다. 물론 나에게서는 시선을 떼지 않고 슬금 슬금 발만 움직여 자신과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한 다른 드워프와 멀어지더니 잠시 후에는 마구 고개를 돌려 방 안을 훑어 보면서 뭔가를 찾는 거였다. 처음에는 눈으로만 살펴보며 찾더니 원하는 걸 찾지 못하자 이제는 아예 방 서랍이란 서랍, 상자란 상자는 다 열어보고 뒤져보면서 찾는 거였다. "뭐, 뭐하시는 거예요?" 그 모습에 기가막힌 - 내 소지품을 누군가 뒤지려고 하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 나와보라고 그래 - 내가 빽 소리를 지르자 그 드워프는 나에게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입만 열었다. "야, 펜 없냐? 종이하고 펜좀 다오." "페, 펜하고 종이요?" 아무래도 뭔가 구상이 떠오르는데 적어 놓을 데가 없으니 저리 남의 소지품임에도 불구하고 마구 뒤졌던 모양이다. '대회에 나가는 드워프들은 작품에 대해서라면 눈에 뵈는게 없다더니만...'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드워프의 손에 들려 마구 파헤쳐질 위기에 처한 내 가방을 거의 빼앗다시피 받아 들어서 그 안에 있던 펜과 종이를 건네줬다. 다행이 어제 숙소에 모든 일행들이 모여 있을때 레이언이 피치 못할 상황이 생기면 메모를 남겨두라고 하면서 펜과 종이를 나눠줬던 덕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건네자마자 드워프는 후다닥 나를 다시 아까 내가 서 있었던 창가 자리에 내몰더니 자신은 그와 좀 떨어진 바닥에 종이를 놓고 엎드렸다. 이 드워프가 아까 나를 데리고 있었던 그 드워프였던 듯 했다. 그러자 다른 드워프는 아까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작업에 들어가자 방해하지 않으려는지 아주 조심스럽게, 그가 신경쓰이지 않을 거리를 두고 앉더니만 열심히 놀려지는 펜을 부러움 반 호기심 반 어린 시선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였다. 불 하나 켜지 않아서 오로지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만이 방을 밝혀주는 빛의 전부였건만 그 드워프는 전혀 불편하지 않는지 열심히 손을 놀렸다. 운 좋게도 이번에는 나는 서있고 드워프는 거의 엎드리다 시피 한 포즈였기에 나 또한 종이 위에 그려지는 그림을 볼 수 있었다. 그건 아마 목걸이 인 듯 - 그 드워프가 아까 나에게 목걸이를 만든다고 했으니 그럴 것이다. - 여러가지 모양으로 구부러진 타원형의 선에 어떤 것은 동그랗고 네모난 도형이 더해지고 어떤 건 선이 더해지고, 어떤건 더해지지 않고... 그 곳에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을 휘갈겨 써넣는데 악필이라 그런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문자라 그러는지 전혀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내가 건네 준 10여장 정도의 모든 종이를 소비하고 나자 그 드워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만 종이를 손에 움켜쥔 채 부리나케 내 방을 나갔다. 아마 얼른 작업에 들어가고 싶어서 그러는 듯 했다. 그렇다고 나는 물론 같이 있던 드워프까지 무시하고 나가다니 좀 너무하다 싶어 남은 드워프를 슬쩍 바라보니 그 드워프는 처음에는 엄청 부러운 눈으로 다른 드워프가 나간 문만 바라보는가 싶더니 갑자기 눈을 활활 불태우며 해민이를 노려보는 거였다. "질 수는 없지. 가자. 나도 빨리 구상을 끝내야 겠다." 깨갱~ 그리하여 결국 해민이는 그 드워프의 손에 이끌려 내 곁을 떠나고야 말았다. 나중에... 아주 나아아중에 내가 다시 레이언 녀석에게 넘어가 다시 드워프의 마을에 왔을때 나는 지금 난리를 치고 나간 두 드워프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정말 아쉽게도 대회에서 우승은 차지하지 못했지만 꽤 괜찮은 작품이라는 이야기는 들을 수 있었던 수준의 작품이었다 - 그만하면 인간계에서는 엄청 뛰어난 작품이다. - 나를 모델로 탄생된 작품은 아까 내가 달빛을 받으며 어두운 방안에 서 있는 모습에 착안된 것으로 나중에 그 드워프의 말을 듣자니 은은한 달빛을 받아 신비스러운 빛을 내뿜은 내 머리카락 색을 내려고 엄청 고생했다고 한다. 내 머리카락과 비슷한 색의 수많은 보석들을 가루로 만들고 백금을 가루로 만들어 이리 섞고 저리 섞었지만 쉽게 성공을 못해서 과장 섞어 그렇게 해서 부숴진 보석이 커다란 한 바구니에는 가득 찼을 거라나? 그렇게 해서 탄생된 목걸이는 단 한 줄에 아무 무늬는 커녕 보석 하나 박히지 않은 매끄러운 줄이 하나 딸랑인 형태였다. 그것도 거의 목에 착 달라붙다시피 하는 스타일의 작은 사이즈의 목걸이였는데 거의 은색에 가까운데 빛의 각도에 따라 은은한 하늘색 빛이 나기도 하고 연한 비취빛, 혹은 에메랄드 빛이 나기도 했다. 옥색 같기도 하고... 하기야 그 모든게 조금씩 섞였다니 그렇게 여러가지 빛이 나기도 하겠지만, 그 목걸이의 색 하나는 너무 끝내줬다. 그러니 그 드워프도 감히 그 색에 어울리는 무늬나 아니면 다른 보석 장식을 찾을 수가 없어서 색 하나만 믿고 밋밋한 스타일로 만들었다는 거겠지만... 그런거 보면 내 머리 색이 그만큼 예쁘다는 소리였겠지? 해민이가 모델이 되어 만들어진 작품은 원래 기본은 무기인데 너무 아름답게 만들어져 평소에는 장식품으로 사용될 만한 것이었다. 한 쌍으로 되어 있었는데 각각 손 등을 덮게 되어 있는 그것은 위급시에는 방패도 되고 주먹으로 공격할 때 힘을 더해주는 징 같은 역할도 하는 무기였다. 해민이의 황금색 눈을 본따 만들어진 아몬드 형의 몸체에 왠만한 공격에도 쉽게 부서지지 않도록 황금과 다이아몬드를 섞고 그 아래에는 얇은 미스릴 판을 받친 그것은 주위에 가느다란 금사슬에 작은 다이아몬드들을 중간 중간에 박아넣어 움직일 때 마다 흔들려 반짝반짝 빛이 나는 형태였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을 보게 된 것은 아주 훗날의 일이었고, 그 작품들을 볼때에는 모델을 서준 것에 대한 보람도 느꼈지만, 지금 당시에는 대단한 작품이고 뭐고 상관없이 모델의 '모'자만 들어도 진저리가 처질 정도였다. 나는 두 드워프들과 해민이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가가 그 방 문을 꼬옥 닫고 다시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해민아... 부디 살아 돌아오너라...' 그렇게 속으로'만' 해민이의 무사함을 기원하며 다시 눈을 감는 내 위에는 어느덧 뿌옇게 밝아 오기 시작하는 새벽의 빛이 내려앉았고, 그렇게 새로운 하루가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제 20화 임무 끝~! (6) 우리가 드워프의 마을을 떠날 수 있었던 건 이 곳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다른 때에는 우리가 가져온 식료품을 확인하고, 그들에게 인수받을 물품들을 확인 하는 작업이 오래 걸린다 쳐도 늦어야 3, 4일 후면 출발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족장이 대회에 출전 하는 드워프들을 위하여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며칠 늦게야 자신들이 인계할 물품 들을 보여줬던 것이다. 하기야, 그 동안에는 우리 일행 모두가 작품에 대한 기발한 착상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된 드워프들에게 이리저리 쫓겨 다니느라 제대로 족장과 마주할 기회가 없었기는 했다. 그래도 다행이 4일 정도가 지나자 그렇게 혈안이 된 드워프의 손길이 뜸해져 그제야 본격적으로 드워프 마을과 거래를 할 시간이 난 것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일행 모두가 해민이와 나 처럼 작품 구상에 도움을 준 것은 아니었다. 기실 나의 경우만 해도 그 목걸이를 만드는 드워프가 그렇게 가고 난 다음 날 다른 드워프들이 나에게 찾아와 어떠한 감이라도 얻으려고 했지만 아무도 얻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나와 해민이 외에 우리 일행 중 대회 출품작의 모델이 된 행운아는 단 한명 밖에 없었다. 그렇게 극성맞게 우리를 쫓아 다녔던 드워프들의 열성에 비한다면 너무나 미미한 결과라 좀 어이가 없었지만, 구상 하나 떠올리기 위하여 몇년을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는 게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제품들이니 '뛰어나다'라는 말은 못 듣고 '괜찮다'라는 말을 듣는 수준의 제품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무척 뛰어나다' 라는 소리를 들을 수 이는 건가 보다. 물론,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들 만큼이나 노력하는 장인들이 있지만, 이들 만큼 뛰어난 제품을 내놓는 이가 없으니 선천적인 재능도 무시 못할 듯 하지만... 우리에게 넘겨지는 제품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드워프들의 높은 기준으로 '뛰어난; 수준이 아니기에 마을 회랑 - 대회에서 우승 하거나 장로들 중 3명 이상의 인정을 받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이 곳의 물품을 처분하려면 족장을 비롯한 장로 전원의 동의를 얻어야 할 정도로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 에 전시되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재활용(?) 하기 위하여 부수기는 아까워 마을 '창고' 에 자리만 차지한 채 처박혀 있는 물품들이었다. 이걸 창고 정리할 겸 덕분에 부수입도 올리게 해주겠다고 꼬득여서 상회에 넘기도록 했던 것이다. 그 꼬드김에는 맥주와 포도주가 단단히 한 몫을 했다고 한다. 드워프는 술을 즐길 줄 아는 종족이라 여러 종류의 술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술들 중 무척 좋아하는 편이지만 구하기가 어려운 술들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맥주와 포도주였다. 이유인 즉슨, 드워프들은 깊은 산속 골자기에서 살고 있고, 맥주와 포도주의 주 재료인 밀과 포도는 넓은 평야 지대에서만 생산 되었기 떄문이다. 게다가 그러한 주 재료들도 기후와 토양의 조건에 따라 품질이 달라지는데다가 그에 따라 완성품인 맥주와 포도주의 품질도 각각의 수준 차이가 천차 만별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워프쪽으로서는 보통 맥주와 포도주 구하는 것도 어려운데 일등품 제품들을 구하는 건 꿈에서나 생각할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 상회에서 특등품을 떡 하니 가져다 주니 그에 혹해 반쯤 넘어갔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그 녀석들이 우리가 이 곳에 올때 절반이나 넘는 엄청난 짐으로 돌변해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지만... 그렇게 해서 거래가 시작 되었는데, 이 거래는 내 생각외로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냥 우리가 가지고 올 수 있을 만큼의 물품을 가지고 와소 가지고 갈 만큼의 물품을 가지고 가는 줄 알았건만 그게 아니었다. 우리 상회측은 물론이거니와 드워프쪽에서도 손익 계산에 상당히 밝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나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래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절대로 속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 해 물품을 샀을 대 운 좋게 세일 가격으로 샀다면 세일된 가격을 솔직히 제시했고, 운반료로 몇배를 받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드워프들의 물품도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 하나 감정을 하여 가격을 제시했다. 물론, 그 사이 사이 물품의 트집을 잡아 가격을 내리려는 실랑이가 있기는 했다. 그것도 보통 실랑이가 아니라 주부가 시장에 가서 상인에게 콩나물 값 10원이라도 깎으려고 실랑이를 벌이는 것 보다 더 치열한 공방이 오고 갈 정도였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조그마한 흠 하나 가지고 확대경까지 동원해서 트집 잡으면서 싸우니 잘못 걸린 제품은 하나 가지고 몇 시간동안 설전을 벌이기도 할 정도였다. 그런 거 보면 드워프들도 남녀노소 구분 없이 인간 세계에 떨궈놔도 살림 잘 해서 잘 먹고 잘 살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모든 물품의 가격이 정해지면 그 가격에 맞추어 드워프제 물품을 가져오는 거였다. 뭐, 우리가 가지고 온 물품에 비하면 가지고 갈 수 있는 물품의 가격이 더 높거나 그 반대의 경우 외상도 가능했다. 이런 거래에도 외상이 있다는 게 웃겼지만, 우리 상회와 거래하는 장부도 있으니 뭔들 없겠는가. 그렇게 거래가 끝이 나면 포장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고가치의 귀중품들이다보니 운송할 때 망가지기라도 하면 큼일이니까 말이다. 제품 하나를 몇겹의 천으로 둘러싼 뒤 각각 그 제품의 크기에 맞는, 안에는 두터운 가죽이 덧대어져 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건초가 넣어져 있는 상자에 하나씩 넣어진 뒤 커다랗고 튼튼하며 역시 건초가 그득 담긴 상자에 넣어져야 포장이 끝이 난다. 이렇게 말로 하면 간단한 일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맨 처음 물품을 부드러운 천으로 싸는 것은 꼼꼼함과 세심함, 그리고 능숙함을 요하는 일이라 이런 거래에 많은 경험이 있는 이들 외에는 손도 못 대게 한다. 그러니 나 같은 경험이 적은 이들이 할 일이란 물품이 넣어진 작은 상자들을 큰 상자에 넣는 것 분이었다. 그것도 제품의 안전이라는 이유 하에 건초에 잘 쌓여져 있는지 일일이 확인을 했기 때문에 작업 속도는 상당히 더딜 수 밖에 없었다. 뭐, 어려운 작업은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나 성가신 일이라 무지 귀찮았다. 내 여기를 따라 오면서 그냥 호위만 할 줄 알았지, 일꾼에 잡역까지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하나도 안 해주고 그냥 가주면 된다고 말한 레이언 녀석이 엄청 어어엄~ 청 얄미웠다. '그래, 그래봤다 이거지? 어디 두고 보자구.' 그렇게 포장 하는 데에만 하루 반을 소비하여 드디어 우리가 이 곳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지나고 그 다음 날 우리는 다시 짐들을 바리바리 싸짊어 지고 드워프의 거대한 성문을 나설 수 있었다. 이제 다시 건량과 물 만으로 끼니를 때우며 며칠 동안 산 속을 헤매야 하지만, 그래도 그 며칠만 견디면 다시 배를 타고 편안히 고국으로 - 뭐 내 나라는 아니지만... -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모든 이들의 얼굴은 무지 밝아져 있었다. "이번에도 수고 많았네. 아니, 이번에는 다른 때보다 조금 더 수고를 했나?" 왔을 때와는 달리 우리가 간다니까 대회에 나가는 이들을 뺀 나머지 장로들과 족장이 다 나와서 우리를 배웅했다. 족장이 조금은 미안했는지 허허 웃으며 말하자 레이언이 씨익 웃었다. "저희의 수고를 알아주신다면 물건 가격을 좀 깎아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러자 족장이 마주보고 씨익 웃는 거였다. "고렇게는 못하지. 공은 공이고 사는 사 아닌가?" "훗, 저희는 이 곳에 와서 한 모든 일이 공입니다만?" "어허... 우리 사이에 그런 일 쯤은 사라고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뭐, 족장님께서 저희에게 그만큼 친근함을 보여주시면 사라고 해드릴 수 있는 용의가 있습니다만..." "헛헛헛, 아, 이거 내가 자네를 너무 오래 붙들고 있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갈 길이 먼데 어서 어서 가게나." "훗, 그러죠. 뭐, 다음에는 로스 국의 귀한 술을 서비스로 가지고 오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겠군요?" 레이언이 사악하게 웃으며 말하자 족장이 순간 움찔 했지만, 역시 그도 노련했는지 허허 웃었다. "허허허, 물론이지. 공은 공이고 사는 사 아닌가?" "물론이죠. 공은 공이고 사는 사." "허허허.." "하하하..." 무지 사이 좋게 웃고 있는 두 드워프와 하프 엘프 사이에 스파크가 파바박 튀는 것은 내 눈의 착각이려나? "자, 그럼 저희는 이만 가겠습니다. 족장님 말씀대로 갈 길이 머니 너무 지체할 수는 없지요." "그렇군. 그럼 다음에 또 보세나." "그 동안 건강하게 계십시오." 그렇게 족장 드워프와 레이언이 인사를 나누자 옆에서 구경하던 장로들도 간단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우리는 드워프의 마을을 뒤로 하고 골짜기를 올라 갔다. 골짜기를 벗어날 때 까지는 우리가 여기 올 때 마중 나왔던 프레스가 다시 안내를 해줬다. 그렇게 골짜기를 벗어난 뒤 일주일 전 우리가 만들어 놨던 흔적을 따라 산을 내려가자 그리운 바다와 함께 우리가 처음 출발할 때 만들어 놨던 캠프가 보였다. "어이~ 어어이~~" 캠프 쪽에서 지루하게 경계를 서던 사람이 먼저 우리를 발견하고는 신이 나서 양 팔을 흔들며 달려오자 아까까지만 해도 힘들다는 표정으로 산속을 걷던 사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팔팔하게 뛰어가며 마주 소리쳤다. "어어어이이~~" "이야, 이번 임무도 무사히 끝났군요." 힘차게 달려가는 이들 뒤로 느긋하게 천천히 걸어가던 일행 중 한명인 마일즈가 한시름 덜었 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머튼이 얼른 꼬집었다.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야. 무사히 상회에 도착해야 끝난 거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머튼의 말에 긍정하면서도 마일즈는 싱글벙글이었다. "아아, 이번에는 다른 때보다도 유난히 힘들었던 거 같아요." 잭슨의 말에 모든 이들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거의 다 끝났잖아요." "아직 다 끝난게 아니라니까." 린제이의 말에 다시 한번 반박하는 머튼이었다. "예이이~" 제 21화 두번째 임무 (1) 돌아가는 길은 편했다. 날 귀찮게 하는 인어들도 없었고, 그로 인하여 침흘리며 덤벼드는 바다 몬스터도 없었다. 그와 더불어 내 임무도 사라지자 내가 할 일이라고는 자고, 먹고, 뒹굴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 뿐이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난 정말 기특하게도 이 철철 넘치는 여유시간을 알차게 보내고자 서운하다는 해민이의 눈빛을 뒤로하고 씩씩하게 마법 책을 펼쳤다. 하.지.만, 내가 처음 부터 죽어라 책을 파는 공부벌레도 아니었고, 마법이란 학문의 매력에 푹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 물론 처음에는 마법을 배우고 하나 둘 내가 마법을 실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는 흥미를 느끼기도 했지만, 점점 복잡해지고 골치 아파져 가는 마법이 이제는 의무 적으로 익혀야 하는, 마치 교과서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 마법사 지망생도 아니었으니, 지루한 수식과 딱딱한 설명이 빽빽하게 쓰여진 책을 매일 매일 하루 종일 붙들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아, 나는 내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다니까...' 그나마 첫날은 조금 성실히, 둘째 날은 비틀리는 온 몸을 겨우 겨우 다잡으면서 책을 붙들고 있었지만, 사흘째가 되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에잇, 이렇게 좋은 날씨에 선실에 틀어박혀서 책이나 파고 있다는 건 좋은 날씨와 젊은 내 혈기에 대한 실례얏!" 하고 소리치며 책을 탁 덮은 것 까지는 좋았는데, 이런 기운찬 내 행동에 어떠한 반응을 보여 주는 이는 없었다. 지금 선실에는 나 혼자 있었기 때문이다. 나만 빤히 쳐다보고 있는 해민이나, 비록 나에게 시선을 주고 있지는 않지만 신경쓰고 있다는 것이 분명한 듀비와 한 선실에 있자니 무지하게 신경 스여서 방해 된다는 핑계로 둘 다 내쫓았던 것이다. 덕분에 선실을 혼자 차지하게 되었긴 했지만, 이제 공부를 포기한 나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질 못했다. 차라리 해민이라도 있었으면 그 녀석 애원조의 시선에 못이기는 척 하며 같이 갑판에 나가 놀거나 할 수 있었을테지만, 아무도 없으니 누구에게 방해 받아 잠시 공부를 중단했다고 변명할 거리도 없지 않겠는가? 그래 나가지도 못하고 혼자 선실에서 뒹굴거리며 시간을 때웠던 나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심심함과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선실을 나섰다. 갑판 위로 올라가려는데 마치 시장에 가까이 간 것 처럼 무척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오는 거였다. 어리둥절함과 호기심에 올라가보니 갑판 위에는 많은 이들에게 둘러쌓여 때아닌 격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상처가 심히 날 걸 걱정해서인지 무기를 들지 않은 맨손으로 서로를 상대하고 있었는데, 정말 어이 없게도 그 중 한 사람이 해민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많은 이들은 선원들과 호위 무사들, 거기에 마법사들과 레이언과 레이언 보좌관, 그리고 심지어 듀비까지 끼어 있는 거였다. 척 보아하니 바다 몬스터가 출연하지 않아 평호로운 날이 계속되자 지루해진 이들이 대련삼아 격투를 벌인 듯 했다. 여기에 구경꾼이 모여들고 내기라는 양념도 살짝 곁들어진 것 같지만... 그런데 여기에 나에게서 쫓겨나다시피 갑판으로 내몰린 듀비와 해민이가 어쩌다가 끼어들 게 된 듯 했다. 평소 너무 나에게만 붙어 있어 대인 관계에 조금 걱정이 되기까지 했던 그들이 다른 이들과도 어울리게 된 것 같아 안도감과 기쁨을 느꼈을 텐데,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물론 이런 감정은 내가 못되고 속이 좁아서 생긴 거였다. 듀비와 해민이는 내 공부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나에게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선실을 나섰다가 우연히 끼어든 것 뿐이고, 마법사들이나 레이언도 우연히 같이 구경하게 된 것 뿐일텐데 지금은 꼭 나만 빼놓고 저희들끼리만 놀려고 했던 것 처럼 느껴져 기분이 몹시 나빴던 것이다. 소위... 왕따된 기분이랄까? 머리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괜히 나 혼자 삐진 거다. 그러니까 괜히 사람들 눈을 피해 혼자서 궁상을 떨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선실로 가면 완전히 음침해질 것 같아 다른 곳을 찾아 두리번 거리다가 딱 좋은 곳을 발견했다. 우리가 탄 배에는 중앙에 가장 큰 것고, 그 앞뒤로 약간 작은 두개의, 도합 세개의 돗대가 있었다. 가운데의 가장 큰 돗대 위에는 망을 보는 사람이 있어 그 곳은 피하고 가장 뒤의 돗대가 다른 사람들 눈에 띄이지 않고 좋을 것 같았다. 돗대에는 그물막이 쳐져 있어서 정령의 도움 없이도 어렵지 않게 올라갈 수 있었다. 가장 꼭대기 기둥은 아니고, 그 아래에 있는 굵은 기둥까지 올라가 걸터 앉자 멀리까지 바다와 하늘, 그리고 그 둘이 맞다은 수평선이 보이는 탁 트인 시야와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덕에 상쾌함과 함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런데 그 순간 이런 날 놀리기 위함인지 갑자기 커다란 함성과 웃음소리들이 터져나오는 거였다. "우쒸..." 그 소리를 듣자 나는 나도 모르게 화가 났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나 빼고 저희들끼리만 노는 저들을 방해하고야 말겠다는 심술이 뭉클 뭉클 피어오르는 거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순전히 나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해서 생긴 감정이었다. 처음에는 저들이 있는 곳에 물벼락이라도 내릴까 했지만, 그랬다간 뒷감당이 안되었기에 나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엘라스트라, 실레스틴!!" 물가 봐름의 최상급(나이트급) 정령을 불러낸 나는 실레스틴에겐 돗단에바람의 힘을, 엘라스트라에게는 배의 하단에 물의 힘을 부여하게 했다. 한마디로 배의 속력을 높이게 했다는 거다. 갑자기 배의 속도가 빨라지면, 그에 따라 배도 많이 흔들릴테니 갑판 위에 있는 이들은 뭔가를 붙잡지 않으면 나뒹굴게 될 것이다. '흐흐흐... 무지 당황하겠지?' 하지만, 최상급 정령 둘이서 힘을 쓰는데도 불구하고 배의 속도는 아주 천천히 높아지는 거였다. 워낙 배가 크다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이랬다간 밑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 당황해서 갑판 위에 나둥그라지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렇게 속도가 높아지는데도 갑판 위에서는 떠들썩한 소리가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들려와 내 속을 긁어놓는 거였다. '에잇~ 둘 다 힘 좀 써봐아~!!' 그래 나는 화가 나서 내 모든 힘을 개방해 두 정령들에게 보내버렸다. 그러자 돗단은 찢어질 듯이 부풀고, 돗대는 갑작스러운 강한 바람의 힘을 견디기가 힘겨운지 삐그덕 거렸다. 게다가 배를 둘러싼 바다가 마치 소용돌이처럼 요동치며 배를 앞으로 앞으로 강하게 밀어 붙이는 거였다. 그때부터 정말 배의 속력이 높아졌는데, 얼마나 빨라졌는지 마치 모터 보트처럼 바다 표면을 튕겨 날아오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거였다. 그런데 배가 한번 튕겨 오르자 돗대 위에 올라가 있던 나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와 나는 그만 잡고 있던 밧줄을 놓치고는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우갸갸갸~~!!" 다급해서 하급 정령 아무나라도 부르려고 했지만, 하필 두 정령들에게 모든 힘을 부여해 주느라 정작 나에게는 하급 정령을 부를 힘조차 남아 있지않았다. 하기야, 돗대에서 튕겨 나간 것도 너무 갑작스런 힘을 사용해버려 몸이 지쳐버린 탓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돗대에서 튕겨 나가자마자 배가 두 최상급 정령 덕에 쏜 살 같이 앞으로 나아가버려 갑판 위에 떨어져 납작 오징어가 되는 대신 바다 위로 떨어질 수 있었다. 배의 속도가 너무 빨랐고, 내가 떨어진 곳이 배의 맨 뒤쪽에 있는 돗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떨어진다아~~ 합!" 바닷물을 먹지 않으려고 입을 딱 다물며 바닷물에 닿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몸을 웅크리는데 내가 떨어질 부근의 바닷물이 갑자기 날 받아주려는 양 부드럽게 벌어지면서 양쪽에서 두 줄기의 물줄기가 올라와 나를 받쳐주는 거였다. 덕분에 나는 거의 충격을 받지 않고 바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들어가자마자 날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멍청하기는....] [아하하하...] 하기야, 내가 아무리 물의 정령왕 딸이라지만 바다 스스로가 움직여서 날 받아줄 리가 없었다. 머쓱하게 웃는 날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는 내 아버지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었다. [도대체 뭐 하는 짓이냐? 힘이 넘쳐난다고 해도 그렇게 허망하게 써버리다니... 에잉... 쯧쯧...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렇게 막 쓰지는 않는다. 힘도 쓸 줄 모르다니...] [에? 제가 뭘 어쨌다구요?] [어쩌긴 뭘 어째. 힘이란 무조건 많다고 좋은게 아니다.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 공급을 해줘야지 한꺼번에 다 쓰지도 못할 만큼 줘버린다면 그 힘은 그냥 허공에 흩어져버리고 만다. 게다가 네가 힘을 다 줘버리면 지금처럼 그 뒤에는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버리잖아?] [아... 뭐...]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건 생각도 못했다. 지금이야 한번 겪어봐서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럴 줄이야 몰랐죠 뭐... 설마... 거기서 떨어질 줄이야...] [그거야 네가 칠칠치 못해서 그런 거고, 다른 일이 생겼으면 어쩔 뻔 했어? 항상 만약이란 사태에 대비하고 있어야지.] [아하하... 앞으로 조심할게요.]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서 말인데...] [왜, 왜요?] 아버지가 은근하게 말을 끌며 날 바라보자 나는 은근히 불안해졌다. [너 목적지에 도착할 때 까지 내가 친히 교육을 시켜주마. 생각해보니까 내가 너에게 정령의 힘을 사용하는 법은 가르친 것 같은데, 정령을 다루는 법은 안 가르쳤더라고. 네가 내 아들 답지 않게 띨띨하다는 걸 잠시 깜빡 한 거지.] [엥? 아니, 정령 다루는 법도 방법이 있나요?] 지금까지는 그냥 그들에게 내가 부탁을 하면 그들이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내 부탁을 들어주는 거라고 여겼다. 그러니, 정령을 다른 방법으로 다루는 방법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부탁하는 거에 방법이라는 게 있다는 것 자체가 웃긴 거 아닌가? 물론, 사람 사이에 부탁할때에는 어떤 사람에게는 진지한 모드, 어떤 이에게는 애교 모드 등등의 방법이 있기야 하겠지만서도... 그런데 내 말에 아버지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는 거였다. [법이라... 으음...] [뭐, 뭐예요, 그 반응은?] 선듯 대답을 못하고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 아버지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어리둥절 하기도 해서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더니만, 그게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린 듯 했다. [시끄러워. 덜떨어진 네 녀석에게 설명을 하려니 고민이 되니까 그런 거잖아.] [내, 내가 뭘요...] 괜히 억울한 내가 항변하자 아버지가 날 노려봤다. [뭣이라? 너 지금 나에게 반항 하냐? 나는 태어나자마자 다 할 줄 알았는데 네 놈은 하나도 못하니까 덜떨어진 거 맞잖아?] [아니...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호기있게 주장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눈길에 쫄은 내 목소리는 끝으로 갈 수록 기어 들어갔다. [쓰읍... 반항하냐? 그 동안 오냐오냐 해줬더니 이젠 맘 놓고 기어오른다 이거지?] [... 아뇨...] 아버지의 눈길에 기가 팍 죽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아버지는 의기양양해진 눈빛이었다. 그런 거 가지고 기분 좋아하는 아버지가 이해가 안 되었지만.. [훗, 그러면 그렇지...] 그 순간 항상 나를 감싸주는 이프리트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히 구박하는 척 하기는.... 놀라서 제일 먼저 달려나온 주제에...] [뭣이라? 누가?] 뜨끔한 표정으로 되묻는 아버지의 말을 받는 이는 의외로 다른 이였다. [누구기는 누구야? 어떤 팔불출인 정령왕이지.] [네놈은 또 왜 온 거냐?] 이프리트의 뒤를 이어 등장하는 실피드에게 아버지가 인상을 팍 쓰며 묻자 그에 대한 대답이 또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호호호, 네가 급하게 달려가길래 뭔 일인가 하고 궁금해서 왔지.] [아니, 네 녀석들은 도대체 왜 다 우르르 몰려온 거냐?]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뉘집에 무슨 구경이라도 났는지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오는 두 정령왕 - 이프리트는 안 그러니까. - 이 엄청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제 21화 두번째 임무 (2) 뉘집에 무슨 구경이라도 났는지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오는 두 정령왕 - 이프리트는 안 그러니까. - 이 엄청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을 하는지 마는지 노아스는 생글 생글 웃으면서 부드럽게 대답했다. [아까 말했잖아. 궁금해서 왔다고...] [궁금할 것도 쌨다. 그렇게도 할 일들이 없냐?] [응.] 아주 단정적으로 대답하는 실피드에 아버지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순간적이긴 하지만, 실피드 때문에 그랬다는 거에 아버지는 무척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방해하면 가만 안 둘 거다.] 씹어 내 뱉듯이 경고를 한 뒤 그 기세를 몰아 날 바라보는데 덕분에 아무 잘못 없는 나는 괜히 쫄아서 감히 아버지의 눈을 마주보지 못하고 딴청만 피웠다. [너 말야...] [예?] 아버지는 다시 나를 불러 자신을 보게 하더니 뭔가 말을 하려고 했는데 여의치 못했는지 말을 못하고 인상만 팍팍 찡그려댔다.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그러자 아버지를 놀리는 일을 인생 낙으로 삼고 있는 듯한 실피드가 싱글 싱글 웃으며 끼어들었고 덕분에 아버지는 인상을 더욱 찡그리며 실피드를 향해 뭐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보다도 먼저 노아스가 끼어들어 실피드를 질책했다. [넌 왜 끼어들고 그래? 가만히좀 있어 봐. 엘라임이 너 때문에 할 말도 못하잖아?] [왜 괜히 내 탓을 하고 그러냐? 이 녀석이 암 말도 못하니까 거들어 준 거 뿐인데...] [그게 거들어준 거냐?] [둘다 그만 좀 해라. 너희들 구경만 한다고 해 놓고선 왜 방해를 하는 거야?] 보다 못한 이프리트가 끼어들자 두 정령왕은 억울한 표정이었다. [우리가 언제 방해를 했다고 그래?] [얘는 했을지 몰라도 난 아니라고.] [뭣이라? 나도 방해 한 건 아니야.] '아... 시끄러워...' 정령왕들이라는 존재들이 이렇게 수다장이였을줄은 정말 몰랐다. 결국, 정작 입을 열어야 했던 아버지는 세 정령왕들의 수다에 밀려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가 기어코 화를 내버렸다. [너희드을~ 당장 썩 돌아가지 못해? 네 녀석들 때문에 교육이 안 돼잖아?] [어머머... 그게 왜 우리 때문이니?] [맞아. 네가 제대로 설명을 못하니까 답답해서 우리가 거들려고 했던 것 뿐이잖아.] 노아스와 실피드의 맞공세에 이프리트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한 마디 하려고 했다. [이봐들... 그게 거들어...] 하지만 이프리트의 말은 아버지의 말 때문에 싹둑 잘려 버렸다. [그게 거들어주는 거야? 거들어주는 거냐고? 앙?] [뭐냐? 그럼 네가 설명을 잘 했으면 됐잖아?] 그러자 역시나 아버지와 티격태격 하는 걸 즐기며 사는 실피드가 강하게 반박하고 나왔다. [뭣이라? 그럼 네놈이 해봐라. 얼마나 잘 할 수 있나!] [헹, 하라면 못할 줄 알아? 네 놈 보다는 훨씬 잘 할 수 있다!] [그래, 어디 얼마나 잘 하는지 한번 보자. 빨리 해봐.] 그리하여, 얼덜결에 나에 대한 교육 설명 - 뭘 설명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 은 얼결에 실피드에게 떠넘겨져 그가 내 앞에 섰다. [에헴... 아이야... 그러니까...] 뭘 얼마나 거창하게 설명하려는지 헛기침으로 말문을 열던 실피드는 그러니까... 를 연발 하더니 엘라임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뭘 설명해야 하는 거지?] [이 멍청한 놈아아아~~!!] 아버지의 생각에 동감이었다. 실피드에게 이런 멍청한 면이 있을 줄이야... [아, 가만히좀 있어 봐. 네 녀석이랑 떠들다가 잠깐 잊어버린 거 가지고... 그러니까, 정령을 잘 다루려면 말이다... 으음... 그냥 녀석들에게 명령을 잘 내리면 돼.] [죽여버리겠어어어~~!!] 거의 창백한 것 처럼 희던 아버지의 피부가 엄청난 분노 때문인지 시퍼렇게 변했고, 주위의 바닷물이 아버지의 분노에 동화하여 막 거칠게 일렁이려고 했다. 그러자 이프리트와 노아스가 재빨리 아버지에게 매달려 수습에 나섰다. [자자, 너무 흥분하지 말고 진정해.] [그래, 그래. 저 놈이 저렇게 실없던 적이 어디 한 두번이야? 바다같이 넓은 마음으로 네가 참으라고.] [아따... 농담 한 마디 한거 가지고 날뛰기는... 쯧쯧...] [저, 저놈이이이~~!!] [자, 둘다 그만하자고. 실피드, 너 제대로 설명 못할 거면 당장 물러나. 그리고 엘라임 너도 좀 진정 하고. 실피드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그렇게 일일이 흥분하니까 실피드가 재밌어서 더 그러는 거잖아?] 이프리트가 안되겠다 싶은지 약간 냉정한 표정으로 둘에게 질책하자 아버지도 흥분을 가라앉혔고 실피드도 머쓱한지 헛기침을 했다. '오오, 역시 이프리트 아저씨는 대단하구나...' 내가 존경스러운 눈으로 이프리트를 바라보는데 실피드가 이제 정식으로 설명을 해주려는지 헛기침으로 나의 시선을 끌었다. [어험험... 자, 그럼 농담은 이쯤에서 그만 하고... 아이야, 내 너를 그 동안 살펴본 바에 의하면 너는 정령을 제대로 다루지 않더구나.] [예?]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싶었다. 그럼 그 동안 내가 정령들을 불러내서 뭔가 일을 시켰던 건 그들을 다루는게 아니라 뭐란 말인가? [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꼬... 그러니까 그 동안 네가 정령들을 부리는 걸 살펴보면 너는 그들에게 처음에 명령만 내린 뒤 그들에게 힘을 보내주는 것 뿐, 그 뒤로는 그들이 어떻게 하든 전혀 터치를 안 하더군. 마치, 너희들이 알아서 내 명을 수행하라... 하는 식이랄까?] 그의 말에 나는 황당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아니, 그렇게 하는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부탁하는 입장에서 정령들이 어떻게 하든 부탁만 들어주면 되지 뭘 더 바래요?] 내 말에 당황한 건 실피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예 말을 잃고 나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거였다. 그래 나는 내가 혹시 뭔가 말을 잘못했나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주위의 정령왕들은 그런 날 그냥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 거였다. 그래 결국 나는 실피드에게 시선을 돌려 조심스레 의문을 해소할 수 밖에 없었다. [에.. 왜 그렇게 바라보시는 데요?] [아니... 흐음... ] 실피드는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허옇게 난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옛날 생각이 나서... 옛날에 너와 같은 녀석이 하나 있었거든... 사람들은 그놈을 뛰어난 정령사니 천재니 치켜세웠지만, 실상 그놈은 무지 얼빵한 놈이었는데...] [옛날에 너와 계약을 맺었던 인간 말이냐?] 실피드의 중얼거림 비슷한 말에 이프리트가 뭔가 알아챘다는 듯 입을 열자 아버지와 노아스도 한마디씩 던졌다. [흠... 그러고보니 옛날에 그런 일이 있긴 있었지...] [저 녀석 그때 그 인간에게 푹 빠져 살았잖아.] [맞아. 그 인간이 죽은뒤로 정령계에 백년간동안 꽁 하니 처박혀서 음침하게 굴었지, 아마?] [그건 엘라임 너도 마찬가지 였잖아.] [시끄러워...] 옆에서 떠들던 말던 실피드는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와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네가 왜 정령들을 그렇게 다루는 지 알겠다. 너는 하급 정령이든 상급 정령이든 가리지 않고 그들을 하나의 객체로써 존중하는구나.] [예?] [다른 이들은 말이다... 그래, 아무리 정령과 친화력이 강한 엘프들이라고 해도 정령을 어떻게 다루는줄 아느냐? 그들은 단지 정령을... 그래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뛰어난 능력을 가진 무기라고 생각할 뿐이란다.] [에엑? 설마요...] [그건 사실이다. 흠... 넌 마법도 한다고 했지? 그래, 네가 마법을 구현할때 그 마법 하나 하나에 인격이 있다고 생각해서 존중해주느냐? 그건 아닐테지. 그냥 네가 필요할때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할걸?] [그, 그거야... 마법은 살아 있는게 아니잖아요. 하지만 정령들은...] [다른 정령사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물론, 정령들이 살아있다는 건 안다. 그들은 정령들이 아파 하거나 괴로워하는 걸 분명히 느끼니까. 하지만, 너처럼 하나의 객체로 존중해주지는 않지. 음... 네가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춘 실피드는 부드럽게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마도... 다른 존재들과는 달리 네가 정령들과 대화를 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 [에... 그렇겠죠?] 직접 마주보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를 단지 이용할 수 있는 물건으로 본다는 건 어려운 일일 테니까 말이다. [그래, 그래.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 오히려 우리 입장에서는 고맙다고 해야 할라나?] [고맙기는 왜 고맙냐? 내 아들인 이상 그건 당연한 거지.] 그동안 실피드의 말을 듣고 있던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그런가? 뭐, 어쨌든... 그렇게 정령들을 존중해주는 건 좋은데... 그럴 경우 여러 정령들에게 부탁을 할 경우 불필요한 낭비가 많을 거다. 그들을 통제하는 높은 정령을 하나 세우지 않는 한 말이지. 심하면 같은 일을 한답시고 두 정령이 충돌한다면 그 여파는 모두 네가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그럴 경우 차라리 다른 정령사들이 정령을 부리는 방법이 더 났겠지. 그때는 비록 정령들이 존중은 받지 못할지라도 정령들이 움직이는 것이 훨씬 체계적이고 불필요한 움직임은 적을테니 말이다.] [그렇겠군요.] [그러니 같은 급의 여러 정령들을 불러낼때는 차라리 네가 그들을 통제하는게 좋을 거다.] [그리고 또 한가지 더 있어.] 갑작스레 끼어든 아버지에 실피드와 나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뭔데요?] [너말이다, 힘이 남아 주체할 수가 없는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무분멸하게 낭비하는 것도 좋지는 않아.] [예?] 내가 언제 남아도는 힘을 주체못해 쓸데없이 낭비를 했다고... 제 21화 두번째 임무 (3) 내가 언제 남아도는 힘을 주체못해 쓸데없이 낭비를 했다고... 황당해하는 나에게 엘라임은 비교적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정령들은 각 등급별로 능력이 다른만큼 이 세상에서 활동할때 계약자에게 요구하는 마나의 양이 달라진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정령들은 한번에 계약자에게서 받아들일 수 있는 마나에는 한계가 있지.] [에? 정말요?]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거였다. 내 마법 스승인 노만에게서 받은 책에서도 그런 이야기는 안 나와 있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내가 불러낸 정령들도 내가 보내준 힘이 크던 작던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주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런 건 속으로만 생각했지만, 말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내가 생각한 것을 눈치 챘는지 설명해줬다. [정령들이 받아 들일 수 있는 한계를 넘어버린 힘은 그대로 허공으로 분산되고 만다. 정령 자체가 안 받아들이게 되니까 말이지. 그렇기에 네가 모든 힘을 보내도 정령들에게는 전혀 부담이 안되는 거야. 단지 네가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게 될 뿐이겠지만... 사실, 그것도 네가 힘이 너무 많아 주체를 못해서 그러는 거지 다른 존재들이라면 어림도 없을 거다. 드래곤쯤 되면 몰라도...] [아하하...] 내가 어색하게 웃어보이자 아버지가 가늘게 뜬 눈으로 날 바라봤다. [칭찬이 아닌 거 알지? 뭐든 쓸데없이 낭비를 한다는 건 옳지 않다. 이건 네 엄마가 해준 말이지.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 게다가 그렇게 힘만 보내준다고 해서 효율적인 것도 아니지.] [에...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요?] [그걸 지금부터 내가 친히 가르쳐주겠다는 거다.] 그러자 지금껏 가만히 아버지가 설명하도록 자신은 물러나있던 실피드도 끼어들었다. [물론, 나도 같이 거들어주마.] [네 놈은 왜 끼어들어?]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아버지가 아니었기에 한마디 했지만, 실피드는 당당했다. [지금까지 설명한 걸 도와준게 누군데 그래? 게다가 너 보다는 내가 경험이 많으니 내가 훨씬 더 도움이 될 걸?] [그건 맞다.] 노아스까지 끼어들고 이프리트까지 동감한다는 표정이자 아버지 혼자 고집 부리기도 뭐했던 모양이다. [흥, 맘대로 해라.] 그렇게 해서 나는 그날부터 두 정령왕이 구경하는 가운데 두 정령왕의 코치를 받으며 정령들을 다루는 연습을 해야 했다. [그래, 보아하니 너는 빨리 돌아가고 싶은 모양인데 잘 되었네. 쓸데없이 엉뚱한데 힘을 쏟는 것 보다 그걸로 연습하는게 났겠다.] 그렇게 말하며 실피드가 시킨 일은 바람의 정령과 물의 정령을 불러내어 배를 미는 일이었다. 뭔가 거창한 일, 이를테면 큰 파도를 만들었다가 그걸 가른다던가 하는 걸 기대한 내가 황당해 하자 단순한 일일 수록 경험이 없는 내가 좀 더 쉽게 정령들에게 보내는 힘 조절이라던가 컨트롤을 연습하기에 좋을 거라고 설명해주는 거였다. 뭐, 그건 확실하게 맞는 말이었지만, 사실 그들이 시키는 일이 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좀 의아스러울 뿐이었다. 어차피 이런데 신경쓰지 않아도 내가 힘을 보내주면 정령들이 알아서 자기네들이 힘을 받아 내 부탁을 들어준데다가 그렇게 하다가 문제가 생긴 적도 없어 별로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 아버지의 말대로 힘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단지 정령들이 일순간에 내 힘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가만 알면 되는 거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 뭔 힘이 있겠는가? 두 정령왕이 이래라 하면 얌전히 따를 수 밖에... 덕분에 더 이상은 선실에서 지루하게 마법책을 파고 있지도 않아도 되고, 심심함에 몸을 비틀지 않아도 되어 좋기는 했다. 게다가 항해의 속도도 엄청 빨라졌고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갈 때의 딱 절반의 기간에 라센 국의 그레이험 항구에 도착할 수 있는 쾌거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게 다 내 덕이란 말씀 캬캬캬~~' 그때문인지, 마법으로 연락을 받고 우리가 도착할때쯔음 마중나온 크리스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동료들을 만났다는 기쁨 보다는 얼떨떨함이 가득 차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제대로 갔다 오기나 한 거야?" "아하하, 물론이지. 날 못 믿는 거냐?" 그런 크리스의 얼굴이 재미있다는 듯 레이언이 크게 웃으며 답하자 크리스는 더욱 더 아리송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크리스가 레이언을 제대로 못한다고 많이 구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그를 많이 믿고 있었기에 이번에도 그를 믿고 싶어했지만, 믿을 수 없는 시기에 우리가 도착했으니 믿기 어려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어찌할바를 몰라했다. 평소 냉정 침착한 크리스가 그의 포커페이스를 잃고 당황하는 모습이 무지 재미있게 느껴져 레이언 뒤를 따라가는 나는 숨죽여 킥킥 웃었다. 그런데, 이러한 재미를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닌 듯 레이언도 크리스가 자꾸 어떻게 된 영문이냐고 묻는데도 웃기만 할 뿐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 거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일찍 도착하게 된 이유를 아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지간히도 크리스의 포커 페이스를 무너뜨리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평소에는 그에게서 빈틈을 찾기 어려우니 이번 기회에 말은 안 했지만, 모두 한마음이 되어 그를 놀리고 있는 듯 했다. 뭐, 나도 그들과 조금도 다를 게 없었지만 말이다. 크리스는 아마도 사무실에 돌아가서야 레이언의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이었다. 거기서도 레이언이 크리스를 조금 더 놀릴 수도 있을 거다. '크리스의 차가운 분노를 뒤에 감당할 수만 있다면 말야. 쿡쿡쿡...' 그 자리에 같이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아직 이 상회의 행정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사무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먼저 떠나고 나를 비롯한 경호 담당팀은 일꾼들이 배의 짐을 준비된 짐마차에 모두 다 옮겨 실을 때 까지 버티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더해 창고까지 이동한 후 거기서 다시 옮길때도 옆에서 지켜줘야 했기에 우리가 일을 끝냈을 때에는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그때까지 저녁도 못먹고 계속 경비를 서고 있었던 우리는 그제야 숙소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는 한편,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저녁을 못 먹는다는 사실에 절망해야 했다. 우리가 짐을 옮긴 창고는 성내 항구 근처에 있었고, 우리의 숙소는 성 바깥에 있었으니 도착 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던 것이다. "아아... 배고프다..." 한 무사의 서글픈 중얼거림을 다른 무사가 받았다. "나도..." "언제 가서 언제 저녁 먹냐?" 다른 무사의 기운 없는 질문에 또 다른 무사가 위로한답시고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저번 보다는 나아. 저번에는 한밤중에 일이 끝나가지고 딱딱한 빵과 치즈로 저녁을 대충 때우고 자야 했잖아." "말하지 마. 그때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얼마나 억울했는데..." "아아... 따끈따끈한 스튜가 눈 앞에서 아른거린다아..." 비록 그들과 대화를 하지는 않았지만, 옆에서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나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게 무지 배가 고팠던 것이다. "배고파...." 내가 힘 없이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잭슨이 내 말을 받았다. "말하지마. 그럼 더 배고파..." "젠장, 치사한 마법사들... 저희들 먼저 가고..." 그랬다. 마법사들은 사무 요원들과 같이 자리를 떴던 것이다. 뭐, 그들이 사무실로 직행한 건 아니라 체력이 떨어진다는 이유 하나로 상회에서 따로 나온 마법사들과 교대하고는 저희들끼리 쉬러 갔던 것이다. 치사하게 이왕 교대시켜줄 거면 무사들도 같이 교대시켜주지 어떻게 마법사들만 골라서 교대시키는 건지 모르겠다. 배 타고 오면서 할 일 없이 빈둥댔지 않냐고 따진다면 할 말은 없지만 - 너무 빨리 오는 탓인지 아니면 주위에 네 정령왕이 떡 버티고 있어서 그런지 우리는 오는 동안 단 한번도 몬스터의 공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 - 그렇게 치면 마법사들도 빈둥댔는데 말이다. 그놈의 체력이 좀 약하다고... '에휴... 누구는 체력이 약해서 좋겠다...' 그렇게 속으로 푸념을 하는 그 순간이었다. 창고 책임자와 이야기를 하러 간 머튼이 돌아와서는 우리를 향해 외치는 것이다. "자, 좋은 소식이다. 상회에서 너희들을 위하여 식당을 하나 전세냈단다. 비용은 전체 상회에서 담당하기로 했으니 원하는 만큼 먹고 마시도록!" "우와아아~~!!" 머튼의 말이 끝나자마자 무리는 창고가 무너져라 함성을 질러댔다. 머튼이 우리를 이끌고 도착한 곳은 식당 겸 주점인 곳이었는데 전세를 낸 탓인지 사람은 한명도 없고 단지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부부와 몇몇의 종업원들이 분주히 탁자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식기들을 놓고 있다가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와서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곳은 비록 시내 중심에 있는 고급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중상쯤이라고 생각 될 만큼 넓고 깨끗한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탁자 사이를 돌아다니는 종업원이 5명이나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우리가 채 탁자에 앉기도 전에 주방에서는 미리 준비된 듯한 커다란 맥주통과 간단한 전채 요리가 날라져 오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원하시는 요리가 있으셨을텐데 아무래도 배들이 고프실 듯 해서 저희가 주문도 받지 않고 알아서 준비했습니다. 그래도 저희 식당에서 자신있는 것들을 준비했으니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중년 남자가 우리를 향해 사과를 했지만,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딱 한사람 머튼만이 그에게 다가가 괜찮으니 음식이나 내오라고 했을 뿐이었다. '역시나...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니까.' 각각의 탁자에 커다란 맥주통과 컵, 그리고 간단한 전체 요리가 놓여지자 그 후에는 식사들이 줄줄이 이어져 나왔다. 따끈한 고기 스튜, 막 구워 김이 모락 모락 오르는 빵, 두툼하게 썰어 구운 베이컨, 통째로 구운 거위, 입가심할 과일 야채 샐러드... 나는 머튼과 같은 탁자에 앉았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배가 고팠던지라 정말 정신 없이 나오는 음식들을 먹어치웠다. 평소 머튼에게 약간 기가 죽어 사는 해민이 조차도 먹느라고 바빠서 머튼과 한 자리에 있다는 것도 잊었던 듯 했다. 마지막 남은 거위 조각을 잭슨에게 안 뺏기려고 탁자 위에 올라가서 으르렁 댔으니까 말이다. 뭐, 그 뒤에 다시 새로운 거위 구이가 도착해서 싸움까지는 번지지는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후식으로 아주 커다란 쵸코 케잌이 나와서 나는 너무너무 행복했다. 체력이 적어서 먼저 간 마법사들이 안됐다고 생각 될 정도로 말이다. '역시 체력은 국력이라니까.' 제 21화 두번째 임무 (4) "안녕히 가십시요오~ 다음에 또 들려 주십시오오~" 피곤에 잔뜩 절었지만, 하루 일과가 드디어 끝났다는 해방감인지, 아니면 오늘 매상이 엄청 커서 행복한 탓인지 힘찬 주인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헤롱헤롱 하는 정신을 부여잡은 채 그 주점 겸 식당을 나올 때는 새벽녁인 듯 했다. 달이 거의 서편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술 한잔 입에 대지는 않았지만, 걸신이라도 잠시 들렸는지 엄청 먹어댔다. 그런 걸 가지고 안주발이라고 했던 가? 평소에 먹던 양의 몇배는 더 먹었던 것 같다. 사람이 술을 마실 때 술에 취하기도 하지만 분위기에도 취해 마신다고 하더니만, 나는 분위기에 취해 쉼 없이 음식들을 집어 먹었던 듯 했다.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을줄은 몰랐지만... '내가 이리 식탐이 많았을 줄이야.' 덕분에 지금 속이 거북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며 휘청이고 있지만...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을 거예요. 우욱... 이, 이정도 쯤이야... 철도 소화시킬 나이인데... 꾸륵..." 그것뿐이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 새벽까지 안 자고 분위기에 휩쓸려 신나게 떠들고 웃어댄 덕에 무지 피곤하고 졸려서 눈이 반쯤 감긴 상태였다. 조금만 정신을 흐트리면 이놈의 눈꺼풀이 주인의 의지를 무시하고 스르르 내려와 감기는 거였다. 그러다가 거북한 속이 뒤틀리면 다시 확 정신을 차려 눈을 뜨고, 그러다 눈꺼풀이 기회를 봐서 다시 내려오고, 거북한 속이 용트림을 하면 다시 정신을 차리고... 그런 일이 반복되니까 아주 죽을 지경이었다. 옆에서 듀비가 날 거의 들어올리다시피 부축해 주지 않았다면 난 걷지도 못했을 거였다. 너무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동료 무사들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이야 취해서 길거리에 쓰러져 자던 말던, 누가 일일이 챙겨 숙소까지 옮겨주던 말던 내 코가 석자인 터라 신경 쓰고 싶어도 쓸 처지가 아니었다. 뭐, 그 와중에 힐끗 본 거에 의하면 잭슨과 머튼이 동료를 수습하고 삯마차를 불러서 태우는 등 그들을 챙기는 듯 했지만 말이다. "그러길래 왜 그렇게 많이 드신 겁니까? 적당히 드시지요..." "우욱... 그, 그게... 나도 모르게... 에구, 에구..." "숙소에 도착하면 약을 구할 수 있을테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견디시겠 습니까?" "그, 그래야죠..." 말하기도 힘겨웠다. 더럽기는 하지만 잘못 했다가는 속의 음식물이 올라올 것 같아... '우욱... 생가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무념무상... 무념무상...' 그쪽으로 생각하니까 더욱 더 쏠렸던 것이다. 아버지가 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하실지... '허걱... 이 모습을 절대 보여줄 수는 없지.' 그 생각을 하니까 정신이 확 깨이는 듯 했다. 그런 내 앞에 아까 머튼이 있는대로 다 불러댔던 삯마차 중 하나가 우리 앞에 와서 섰다. "거기분들, 타시렵니까?" 이제 완연한 가을이라 해가 떨어지면 찾아드는 추위를 견디기 위하여 두툼하게 차려 입은 마부가 우리를 불렀다. "성 밖의 베지테크스 창고로 가주시오." 다른 지역의 성에서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라지만, 이 곳 그레이험성에서는 밤에도 성문이 열려 있다. 원체 외적이나 몬스터등에 의한 침략이 없는 곳인데다가, 성이 세워진 이유 또한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국가에서 계획적으로 항구를 만들면서 성을 같이 세웠던 것이다. 게다가 성 바깥에 많은 상회의 창고가 있던 터라 늦게까지도 왕래하는 경우가 빈번하여 어느때 부터인가 아예 성문을 낮이나 밤이나 열어놓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성문을 수비하는 경비대를 세워두기는 했지만 어차피 이 성으로 들어오는데 까다로운 검문을 하지는 않았던 터라 거의 형식적이었다. 그만큼 이 곳에 많은 나라들의 사람들과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수시로 왕래했기에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만... 그리하여 이렇게 삯마차에게 성 바깥까지 가 달라고 당당히 요구를 할 수 있는 거였다. 그만큼 돈을 많이 달라고 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자, 천천히 오르십시오. 발 조심하시고..." 듀비의 부축을 받아 힘겹게 마차 안으로 올라탄 나는 걱정스레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삯마차를 불렀네요? 돈은 있어요?" "저는 없지만 머튼 대장 말로는 그 곳에 도착하면 거기서 지불해 줄 거라고 하더군요." "아..." 듀비의 말에 나는 안도함으로 인하여 고개를 끄덕이고 초라한 마차 내부의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의자에는 얇은 천 방석만이 깔려 있어 나무의 딱딱함을 그대로 전달해주고 있어 불편했지만 지금 내 상태로는 정령들을 불러낼 처지도 아니었기에 이 정도에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 생각은 뒤바뀌었다. 고급 마차가 아니라서 그런지 마차의 덜컹거림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번 덜컹 거릴때마다 속이 같이 울렁 거려 그렇지 않아도 안 좋은 속이 더더욱이나 안 좋아 참는게 정말 고역이었다. 덜컹~ "우욱~" 더커덩 "우우욱~"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히는게 느껴졌다. 아마 내 얼굴은 누렇게 변했을 터였다. '다시는... 다시는 이렇게 과식을 하지 말아야지. 다시는...' 덜컹~ "우욱~" 그렇게해서 성 밖 베지테크스 상회 창고라고 불리는 곳에 도착하는 길은 너무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그 길을 어떻게 참아냈는지, 그러고보면 내 인내도 꽤나 강한 듯 싶었다. - 이게 인내심과 별로 상관이 없을지라도 말이다. - 그리하여 겨우 겨우 도착하자마자 잽싸게 바깥으로 내리자 시원한 공기가 나를 덥쳤다. 좁은 삯마차 안에서는 덜컹거리기도 하거니와 답답해서 더욱 더 버티기 힘들었는데 이 두가지가 사라지자 그나마 살 것 같았다. "에구.. 에구..." 물론 완전히 살아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날 힐끔 바라본 듀비는 대기하고 있던 한 무사에게 다가가서 정중하게 요청을 했다. "약 좀 구할 수 없겠습니까?" 그러자 그 무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한쪽을 가르키고 그 곳에는 뭔가 바구니를 가지고 있던 무사가 서슴없이 자그마한 나무통을 내미는 거였다. 듀비는 주저없이 그것을 받아들고 나에게 왔는데 나무통 안에서 찰랑거리는 액체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아마 물약인 듯 했다. 듀비가 나에게 먹여주려는 듯 마악 마개를 빼내고 나에게 가까이 대자 알싸한 약초 냄새가 풍겨왔다. 그 냄새를 맡으며 부디 이거 먹고 효과를 보길... 하며 입에 대려 하는 순간 나는 나보다 한 발 늦게 도착하여 대기하고 있던 무사에게 부축을 받으며 내려 선 만취한 무사가 나와 같은 물약을 받아 마시는 걸 보고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이거... 무슨 약이야?"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너무나 작았기에 내 말을 받은 듀비가 약을 나눠주는 무사에게 다시 물을 수 밖에 없었다. "이거 무슨 약입니까?" 그러자 그 무사는 내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이제 속속 도착하는 무사들에게 열심히 약을 나눠 주면서 성의없이 대꾸했다. "숙취에 좋은 거니까 그냥 먹여요." 그 소리에 나는 그렇지 않아도 기운 없는 몸이 아예 땅으로 꺼질 듯한 기분이엇다. "나는... 술에 취한 게 아니라 배탈이 난 거야..." 결국 그 약을 먹지 못한 나는 거의 듀비에게 업히다시피 해서 의무실로 향했다. 한 밤중이라 한산할 줄 알았던 의무실은 황당하게도 꽉 차 있었다. 나는 혹시나 곤히 자고 있는 의무반 사람을 깨울 거 같아 되게 미안하게 생각했었는데, 왠걸, 의무실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나는 들어가지 못하고 듀비가 혼자 들어가서 겨우 약을 얻어내야 했다. 술에 취하면 괜히, 쓸데없이 자신의 온 몸을 내던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니만, 아무래도 이번 동료 무사들 중에도 그런 인물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내 기억으로는 식당 안에서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셨어도 싸움 같은 건 일어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음... 장난치다가 나뒹굴었을 수도...' 아마 싸우고 싶어도 머튼이 떡 하니 버티고 있었으니 꿈도 못 꿨겠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듀비가 바쁜 의무반 사람을 못살게 굴어서 간신히 얻어 온 어두운 초록색의 냄새도 고약한 두개의 알약을 건네 받았는데, 약이 우황청심원보다 조금 더 커서 물하고 같이 삼키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절망스럽게도 그 약은 물과 같이 먹으면 약효가 떨어진다나 어쩐다나 하면서 그냥 씹어 삼키라는 거였다. "이, 이걸... 그냥요?" 듀비가 그 약알을 처방해준 것이 아니라 그도 별 다른 수가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냉정하게도 듀비는 내 말에 고개를 그냥 끄덕이는게 아닌가? "그냥 씹어 드셔야 한답니다." "에구구구..." 나는 절망적으로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 위에 올려진 그 시커머튀튀한 약을 바라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먹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내 상태가 너무 안 좋았기에 어쩔 수 없이 눈을 꽉 감고 알약을 털어 넣었다. "우엑..." 냄새도 고약하더니만 맛은 더 고약했다. 속을 다스리는 약이라더니 맛으로도 속을 더 안 좋게 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버틴게 너무 아까워 이를 앙 다물고 버티는데 듀비가 갑자기 내 등과 무릎 뒤 쪽에 손을 집어 넣더니 날 조심스레 안아 드는 거였다. 그래 놀라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입을 여는 거였다. "혼자 걷기에는 무리이실 것 같고, 업자니 아무래도 속이 안 좋으시겠지요? 이렇게 안아서 옮겨드리는게 나을 것 같아서요." "아... 욱..." 고맙다고 입을 열려고 했는데 입을 열자마자 왠지 약이 식도에 걸린 것만 같은 냄새가 확 올라오는 게 느껴져 재빨리 입을 다물어야 해다. '에고고.... 속이야...' 평소 같으면 해민이가 그런 듀비를 향해 으르렁 거렸겠지만, 지금은 내 상태가 워낙 안 좋아서 그런 것도 잊어버렸는지 듀비 옆에서 날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며 따라오고 있었다. 결국 그날 나는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 갈 기운도 없었으려니와 갔다가 이 꼴을 아버지께 보여 뭔 소리를 들을까 무서웠기에 - 해민이에게는 쬐께 미안했지만 그의 침대를 차지한 채 드러 누웠다. 그나마 그 고약한 맛의 약은 그래도 효과가 좋아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약효가 서서히 돌아 나는 속이 편안해져 잠들 수 있었다. 만약 안 그랬다면 아마 같은 방에서 자는 듀비와 해민이가 나의 끙끙 앓는 소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을 것이다. 새벽 늦게 잠자리에 누워서 그런지 눈을 떴을때는 햇살이 강한 것이 아무래도 한 낮인듯 싶었다. "우우우웅~~~"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서 그런지 찌뿌둥한 몸을 기지개를 펴서 풀며 일어나보니 해민이와 듀비는 벌써 일어나 나갔는지 방에 없었다. 아마 내가 너무 곤히 자서 깨우지 않고 저희들끼리 나간 모양이었다. 그래 우선 나가서 얼굴이라도 씻으려고 몸을 일으키며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 배고프... 헉..." 세상에 어제 그렇게 과식해서 고생을 해놓고서도 이놈의 위장은 자존심도 없는건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배고픔을 호소하는 거였다. "헉... 내가... 이런 식충이었을 줄이야..." 스스로에 대한 실망으로 의기소침하여 터널터널 문을 나서던 나는 마악 듀비와 해민이의 방 문쪽으로 향하던 잭슨과 마주쳤다. "엑?" 그에 놀라 눈을 똥그랗게 뜨는데 잭슨이 반가운 표정을 떠올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아, 이제 일어나는 거야?" "아? 에? 응..."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그의 말에 놀라 얼결에 대답하자 그가 다짜고짜로 내 팔을 잡아 끌었다. "자, 가자." "응? 어디를?" 그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묻자 잭슨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상회 본부. 그쪽에서 너와 나를 호출했어." "아앗, 밥도 못 먹었는데?" 이럴때도 밥 타령을 하고 있다니, 나는 어쩔 수 없는 식충이었나보다. "늦게 일어난 네 탓이야." "잠깐만, 해민이하고 듀비도 데려가면 안돼? 그 둘은 내가 없으면 찾아다닐 거라고." "식당에서 식사하기에 내가 널 데리러 간다고 했어.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지금쯤 거기 있을 거야." 정령왕의 딸 6권 제 22화 그랜드마 지부에서 출발은 순조로웠다. 아니, 순조로운 정도를 지나서 엄청 빠른 출발이었다. 우리가 상회 본부에 갔다온 바로 그날, 새로운 임무를 받아 떠나게 되었다는 것을 보고하기 위하여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빅터의 사무실로 찾아갔었다. "여어, 어서 와. 본부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제 오는 거야?" 지금 계절은 바야흐로 가을, 가을 하면 작물의 추수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계절이다. 덕분에 각 지방의 특산물이 항구를 통해 들어오고,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시기이기도 했기에 운송업을 담당하는 우리 상회 역시 굉장히 바쁜 계절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보다 한발 앞서 도착한 사다드팀은 벌써 또 다른 운송을 맡아 밖으로 나가 있었고, 그랜마국의 각 지점에서도 많은 실력있는 무사들이 쏟아지는 운송 주문으로 인하여 일손이 부족한 판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어제 막 이 곳에 도착한, 엔더비 산맥에 있는 북 드워프 마을에 갔다 온 운송팀도 많이 쉬지는 못하고 내일이나 모래쯤 다시 새로운 운송을 맡아 나가게 될 거리는 이야기도 들었던 터였다. 덕분에 그에 따른 여러가지 서류 작업 또한 엄청 늘어나 요 근래 며칠동안 빅터가 게빈에게 엄청난 닥달을 당하며 밤샘 작업을 하고 있는 차였다. 그런 와중에 잠시나마, 아주 잠시나마 우리가 그의 일을 방해(?) 하게 되자 그는 마치 몇달 못 만난 애인을 만나게 된 양 무지 기뻐하며 우리를 맞았다. "그것 때문에 말씀 드릴 게 있는데요." 빅터의 엄청난 환영때문에 잭슨을 비롯한 우리 일행은 왠지 모를 거부감을 느끼며 재빨리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렇지 않았다간, 빅터를 돕는다는 명목하에 그의 사무실을 같이 쓰고 있던 게빈의 붉게 충혈된 눈이 치켜떠져 우리를 노려보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억 하고 있을 것이다. 게빈의 반쯤 감긴 눈을 크게 뜨게하면 큰일 난다는 것을... 그렇지 않아도 붉게 충혈된 눈을 보아하니 며칠 밤샘 작업을 해서 스트레스를 받을대로 받은 상태인 것 같은데, 이 시기에 폭발 시키기라도 했다간 뒷감당이 엄청날 듯 했다. 그래, 그의 무언의 압력을 받은 잭슨과 나는 미리 의논을 하지 않았어도 재빨리 본론만 이야기 하고 이 곳을 나가자고 속으로 일치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조금이라도 붙들려는 심산인지 빅터는 서류더미가 왕창 쌓여 있는 커다란 책상을 돌아 나와 우리에게 자리를 권하는 거였다. "자자, 우선 앉지? 앉아서 이야기 하자고." 하지만, 우리가 채 그가 권하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빅터의 뒤쪽에서 살기를 품은 듯한 날카롭고 북극의 눈보라만큼이나 차가운 냉기가 휘몰아치자 우리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하하하.... 대단한 일도 아니니 그냥 이야기 하고 나가겠습니다. 바쁘신 것 같은데 오래 시간을 뺏을 수도 없잖습니까?" 그리고 잭슨은 더욱 더 빨리 이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 차가운 냉기에 입까지 얼어붙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 그래? 그렇다면 뭐 하는 수 없지." 빅터는 무지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그 조차도 뒤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맞대응 하고 싶지는 않은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너희들끼리만 따로 어떤 임무를 받은 모양이지?" 빅터는 우리가 본부에 불려간 것으로 대충 짐작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예. 이번에 그랜드마 지부 지원을 맡게 되었습니다." 잭슨의 대답에 빅터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랜드마? 거기라면 왈그린 국의 수도를 말하는 거냐?" "예." "멀리도 가는 구나. 그래 출발은 언제지?" '엥?' 나는 솔직히 그 먼 곳까지 간다면 의아해서라도 이것저것 물어볼 줄 알았다. 뭐, 빅터는 이 상회에서 꽤 중요한 자리에 위치해 있으니 그가 우리 임무에 대해 알아도 잘못 될 건 없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는 우리가 맡은 임무에는 일절 질문 없이 기본적인 것만 묻는 거였다. 하기야 자리가 자리인 만큼 우리에게 직접 묻지 않아도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었을테지만.. '음, 그래서 안 물어본 건가?' 나의 이런 의아함에는 상관 없이, 잭슨은 빅터의 질문에 착실히 대답하고 있었다. "이번 일에는 시일이 촉박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준비가 되는 대로 곧 출발할 생각입니다." "준비가 되는 대로라... 그럼 오늘 저녁에라도 준비만 된다면 출발할 건가?" "그럴 생각입니다." "일찍 가겠다는 의욕은 좋지만, 말을 타고 가려면 밤에 출발하는 건 안 좋을텐데?" 빅터의 염려 섞인 충고에 잭슨은 대답 하는 대신 나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이 뭘 뜻하는지 아는 내가 마주 웃어 보이자 빅터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이, 어이, 뭐냐구? 너희들 끼리만 알지 말고 나도 좀 알자." "아하하, 별 건 아닙니다. 사실 이번에 시일이 너무 촉박해서 말 대신 다른 걸 타고 가라라는 명을 들었거든요." 잭슨은 거기서 잠시 뜸을 들인 후 씨익 웃어보였다. "정령을 타고 이동하래요." "호오..." 빅터는 잭슨의 기대대로 놀랍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가 놀란 것이 생각지도못한 말을 들어서인지, 아니면 그런 생각을 해낸 레이언측 - 사실 나도 그 방법을 누가 생각했는지 몰라서 - 의 머리에 감탄한 건지 모르겠지만... 빅터는 나를 쓰윽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에게 기대를 거는 거군?" "그렇죠. 얼마나 빨리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 보다 빨리갈 수는 있을 거예요." 잭슨의 확신에 찬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라는 회의로 바뀌는 건 며칠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빨리 출발해 정해진 시일 안에 도착하여 레이언이 제시한 휴가와 머니를 받아야 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물론,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휴가가 절실했던 게 아니라 정작 휴가를 받게 된다면 무엇을 할까 고민하겠지만, 그래도 휴가를 받는다는 건 기분 좋은 일 아닌가? 게다가 주 목적은 머니고 말이다. '뭐니 뭐니해도 머니가 최고지.' "그렇다면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지. 다만," 거기서 빅터는 잠시 나에게 눈길을 줬다. "네가 견딜 수 있다면 말이지." 그의 걱정이 담긴 눈길에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걱정 없어요. 늦게까지 자서 오늘 밤도 샐 수 있을 거 같은 걸요." "그렇다면 머뭇 거릴 이유가 없겠지. 좋아, 내가 다른 기본적인 건 준비해 놓으라 일러둘 테니 너희들은 너희들의 짐이나 챙기도록 해라. 다 챙기면 듀비씨의 방에 가져다 주라고 하마. 말을 타고 가는게 아니니 정문을 통해 가지는 않겠지? 어디로 갈 지 모르니 배웅은 안 하마. 너희들도 간다고 말 하지 않고 가도 좋아. 안 보이면 간 줄 알테니..." 거기까지 말한 빅터는 잠시 뒤쪽으로 눈길을 주더니 말을 이었다. "하기야, 배웅 할 시간도 없고 바쁜데 더 이상 방해 받는 것도 안 좋겠지." 빅터의 말에 게빈이 정말 오랜만에 옳은 소리를 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우리는 더 이상 그 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럼 저희는 이만..." 그리하여 재빨리 빅터의 말을 받아 인사를 하고는 도망치듯 그 곳을 빠져 나왔다. "휴우... 정말 무서웠어." 잭슨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리자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맞아.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점점 수명이 줄어드는 듯한 기분이었다니까." "맞아, 바로 그런 기분이었어. 저런 분위기에서 일하는 빅터님이 왠지 가여워지는 군." "쿡쿡, 그 분께 묵념..." 그렇게 우리는 수다를 떨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방으로 향했다. 어차피 우리는 어제 도착했기에 짐도 채 풀지 않은 상태였고, 나는 집에 들리지 않은 상태라 내 짐은 고스란히 듀비와 해민의 방에 있었다. 채 빨지 못한 옷들이 좀 걱정이 되기야 했지만, 그건 우선 이 곳에다 맡겨두고 대신 다른 옷들을 좀 빌려서 가면 괜찮을 터였다. 그렇게 하면서 짐을 챙기다보니, 정말 출발 준비를 하는데는 크게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게다가 잭슨이 자기 짐을 챙겨 우리 방으로 오자마자 얼마 있지 않아 빅터가 보낸 꾸러미가 도착했다. 총 네 꾸러미로 하루치 식량은 무척 맛있어보이는 샌드위치에 통닭, 거기에 생과일 쥬스까지 곁들여져 누가 보면 소풍이라도 가는 듯 보일 터였다. 물론, 그 뒤의 식량은 딱딱한 건량 일색이었지만 어차피 산을 타고 가는 것도 아니기에 시간만 괜찮다면 근처 식당에 들려 먹던지 아니면 음식을 사먹을 수도 있을 터였다. "흠흠흠, 다른때의 운송도 이랬으면 정말 바랄 게 없을 텐데~" 푸짐한 식사 거리를 - 아무래도 슬슬 저녁때가 다 되어가다보니 준비된 음식이 꽤 있었던 모양 이었다. - 잘 챙겨넣는 잭슨의 입에서는 저절로 노래가락이 흘러나왔다. 식사거리와 같이 나온 만약을 대비한 이동비 - 한국으로 치면 교통비라고나 할까? - 는 나와 잭슨, 그리고 듀비가 각각 나누어 챙겼다. 혹시 일이 잘못 되어 한 사람이 잃어버리더라도 다른 사람들게 무사하면 다행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물론, 다 같이 잃어버리면 큰일이겠지만... 해민이도 우리 셋이 돈을 나누는 걸 보고 자신도 가지고 싶어 했지만,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패스 당했다. 그리하여 짐을 다 챙긴 우리는 이제 막 붉어지려는 서쪽 하늘을 뒤로 하고 - 왈그린국은 라센국의 동쪽에 있었다. - 날아가기 시작했다. "자, 출발~!!" 이라고 호기있게 외치면서 말이다. 그렇게, 힘차게 출발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래, 정말 좋았지.' 나는 출발할때를 생각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정말... 괜찮아?"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거의 기진맥진한 채 내 앞에 드러누운 세 인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대답할 기력도 없는지 고개도 움직이지 못한 채 누렇게 뜬 얼굴로 나만 애처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한심해, 한심해... 세상에 비행 멀미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 네 눈에는.. 우리가 사람으로 보이냐?" 내 투덜거림에 잭슨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자 그 모습이 더 기가막혔다. "하... 정말... 그런 말에 대꾸할 기운은 있어? 아니, 배멀미는 안 하면서 왜 비행 멀미는 하는 거야?" "아니... 뭐... 내가... 이럴 줄 알았나?" "하아.. 이거야 원... 이러다가 제 시간에 도착하기는 커녕, 일 다 끝나고도 못 도착하겠다." 나의 푸념에 가까운 중얼거림에 차가운 땅바닥에 누워 있는 세 인영은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우리가 그레이험 항구를 떠난지는 삼일째 되는 날 밤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 이제 겨우 3일 밖에 안 지났는데...' 그 생각을 하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든든한 동료라고 느껴졌던 저 세명이 지금은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져 절로 이가 빠드득 갈렸다. 내 이가는 소리가 들렸는지 세명의 몸이 움찔 거렸지만 전혀 상관을 안한 채 나는 홀로 투덜투덜 거리며 그들 주위에 자그마한 모닥불을 피웠다. 그리고 멀미로 인하여 진을 뺀 그들 위에 차가운 물수건을 올려 놓는 걸 잊지 않았다. '하아... 정말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출발할 때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듯 보였다. 이번 이동에는 아무래도 내가 주된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내가 정령을 불러내 일행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 거창한 일이 아니라 단지 빨리 날아가는 것이 주 목적이었기에 바람의 중급 정령을 불러낸 뒤 매의 모습을 하고 있는 슈리엘의 몸을 크게 부풀리게 하여 일행에게 그 위에 올라타게 했다. 잭슨이야 먼 거리는 아니라 하더라도 정령을 타고 허공을 난 적이 있었기에 별 망설임 없이 올랐지만, 듀비는 이런 일은 처음이었던 터라 약간 긴장된 자세로 올라 자리를 잡고 앉는 거였다. "그렇게 걱정할 거 없어요. 그냥 편하게... 으음... 그러니까... 말타는 것처럼..." 남은 기껏 듀비를 안심시키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내 알맞는 표현을 생각해 내려고 했건만, 잭슨이 내 말을 듣더니 마구 웃는 거였다. "푸하하하~~ 말을 타는 것 같다고? 푸흐흐흐~~ 말이라고는 한 번도..." 까딱 잘못 하다가는 떼굴떼굴 구르다 떨어질 것 같아 보이는 - 그냥 확 떨어졌으면 더 좋았겠지만...- 잭슨을 째려보며 올라타기를 망설이고 있는 해민이를 안고 올라탔다. "그렇게 웃겨? 그럼 네가 한번 표현해 봐. 얼마나 잘 표현하는지 한번 보게." "아하하~~ 화났냐? 난 표현이 잘못 되었다기 보다 말 한번 타본적이 없는 녀석이 말 타는 거에 비휴하니까 그게 웃겼을 뿐이야." 잭슨이 멋적게 웃으며 변명조로 말했지만, 내 화를 누그러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 그래 알았으니까 어디 한번 표현해 보라니까!" 전혀 누그러지지 않는 어조로 잭슨에게 말하는 사이, 우리가 다 올라타자 거대한 슈리엘 매는 서서히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바다의 내음이 가득 찬 바람이 부드럽게 우리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그 바람에 나부끼는 연보라빛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고민고민 하고 있던 잭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바람 부는 풀밭에 앉아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때요?"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듀비가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하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풀밭은 하늘로 떠오르지는 않잖습니까?" 지금 그는 어딘가 잡아서 몸을 지탱하고 싶은데 잡을 데가 없어 - 슈리엘의 몸을 감싸고 있는 녹색의 깃털들은 모습만 그럴듯 해보일 뿐 듀비의 손에는 잡히지 않는다. 우리를 태우고 있는 건 순전히 슈리엘의 힘이라... - 앉은 자세로 몸의 균형을 잡느라 애쓰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잭슨이야 경험이 있으니 편히 앉아 있고, 해민이는 내 품에 안겨 나를 붙잡고 있었지만, 듀비는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음... 사방이 트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기분인데... 아무래도 사방에 벽이 없고 발판만 있다면 엘리베이터에 익숙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좀 불안하겠지?' "불안하면 저라도 잡으실래요?" 아무래도 엄청 불안해보여 내가 듀비에게 제안을 하자 그가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 말을 들은, 아래를 안 내려다 보려고 내 품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해민이가 번쩍 고개를 들어 듀비를 노려보았다. '잡지마, 잡지마, 잡지마아아~~!' 그런 기색이 노골적인, 거의 살기까지 들어간 해민이의 눈빛이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해민이의 기분 보다는 듀비를 안심 시키는게 먼저일 거 같아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그를 잡으려고 했지만, 나 보다도 먼저 잭슨이 듀비의 옆으로 엉덩이를 슬쩍 옮기며 그의 팔을 잡아주는 거였다. "이쪽은 내가 담당할테니, 넌 그 꼬맹이나 맡아." 잭슨이 잡아주자 그나마 듀비의 표정이 나아지는 걸 보고 나는 안심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헤에, 그래주겠어? 그럼 잘 부탁해." 사실 지금은 듀비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여겼지만, 그래도 해민이의 반항도 신경쓰였던 것이다. 잭슨이 듀비를 잡아주면 나도 좋고, 듀비도 해민이 신경 안 쓰고 몸을 지탱할 수 있어서 좋고, 해민이도 좋으니 그야말로 일석 삼조였기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안심하고 듀비를 맡겼건만... 그러는 와중에도 슈리엘은 서서히 고도를 높여 어느덧 우리가 손을 뻗으면 구름에 손이 닿을 정도까지 올라와 있었다. 아무래도 사람들 눈에 뜨이면 안되니까 낮게 날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날다가 새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새가 불쌍하니까 새들이 올라오지 않을 정도의 높이까지 올라올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이건 다 내가 세심하게 배려한 게 아니라 슈리엘이 그렇게 말해준 거다. 그렇게까지 올라오자 슈리엘은 본격적으로 속력을 내어 앞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처음에 기차가 천천히 갔지만, 서서히 빨라지는 것 처럼 점점 속도가 빨라지자 우리는 온 몸으로 부딪혀 오는 강한 공기의 저항에 제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슈리엘의 몸에 납작 업드려봤자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슈리엘의 몸을 잡을 수가 없으니 그대로 휭 하니 날려갈 판이었다. 그래 나는 또 다른 슈리엘을 불러서 우리를 보호하게 해야 했다. 하기야, 어차피 고도가 너무 높아 산소가 부족해지는 바람에 다른 이들이 숨 쉬는데 너무 어려워 하는 바람에 다른 바람의 정령을 불러내려고 했었다. 그런데.. 왜 나는 그런거에 영향을 안 받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다른 이들이 헐떡대며 힙겹게 숨을 쉬지 않았으면 깨닫지도 못했을 거였다. 덕분에 다른 이들은 숨쉬기도 편해졌고, 매섭게 다가오는 공기의 저항도 사라져 우리는 다시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쓔아아아아앙~~ 다른 슈리엘에게 우리 주위를 보호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리 차단까지는 안 되었는지 슈리엘로부터 빠르게 공기를 가르는 잔울림이 느껴지는 동시에 귓가로 빠르게 날아가는 비행기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오옷... 빠르다.' 공기의 저항을 안 받아서는 잘 모르겠지만, 눈 앞에서 휙휙 사라져가는 구름들의 모습을 볼때, 잘은 모르겠지만 청룡 열차 속도 못지 않은 듯 했다. 아니, 그 보다 더 빠를라나? 덕분에 가까이 있는 구름들을 보고 있으면 너무 빨리 지나가기 때문에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멀리 있는 허공을 바라보며 두 슈리엘에게 보내는 기의 흐름에 집중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나는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아 작게 흔드는 걸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이, 이봐... 이봐아아..." 팔을 흔드는 덕분인지 왠지 목소리까지 떨리는 것 처럼 느껴지는 잭슨의 얼굴을 보니 핏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고, 나를 붙든 손 말고 다른 손으로는 듀비를 잡고 있는게 아니라 자신의 입가를 가리고 있는 거였다. "왜그래? 아니, 듀비는 안 잡아주고 뭐하는 거야?" 그러고보니 듀비는 철푸덕 엎드러져 슈리엘의 깃털 속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고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듀비? 뭐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단지 잭슨이 그를 잡아주지 않아 균형을 잡기 위해 아예 엎드러져 있는 줄 알고 잭슨을 째려보며 그를 불렀는데, 듀비가 이런 내 부름에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손만 들어보였다. 그런데, 그 손이 올라가는게 무지 힘겨운지 부들부들 떨리는 거였다. "듀비?" 그에 내가 놀라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자 잭슨이 날 잡은 손을 꼭 붙들고 안 놔주는 거였다. "야, 왜 그래?" 기가막혀서 그를 돌아보니 그가 힘겁게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야아... 우리.. 조, 좀만... 쉬었다 가자..." 그제야 그의 상태도 안 좋다는 걸 깨달은 나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래 떴다. "이봐? 왜 그러는 거야? 아까 먹은게 뭐가 잘못되기라도 한 거야?" "우, 우우욱... 그, 그게 아니라...머, 멀미가..." "엥?" 입을 막으며 간신히 말하는 폼을 보니 조금만 더 지체 한다면 슈리엘의 등에다가 아까 먹은 걸 모조리 내놓을 태세라 나는 기겁을 했다. "야! 조금만, 조금만 참아!! 응? 너 슈리엘 위에다 토하면 가만 안 둬~!!" 그에게 다급한 말투로 신신당부 하는 와중에 내 의지를 들은 슈리엘은 빠른 속도로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빠, 빨리좀..." "지금 가고 있으니까 조금만 참아, 응?" 그런데 참으로 엎친데 덥친 격이라고, 내가 막 잭슨의 입을 거의 틀어쥐려고 하는 그때 그 동안 있는 듯 없는 듯 쥐죽은 듯이 가만히 앉아 있던 해민이가 부들부들 떨면서 날 흔드는 거였다. "응? 해민아, 왜 그러니?" 그렇게 말은 했지만, 아기 처럼 하얗던 그 애의 피부가 누렇게 뜨면서 눈이 게슴츠레 해지는데 못 알아챌리가 없었다. "어이구, 너도 멀미냐? 에? 그렇다면... 듀비도?" 그가 괜히 얼굴을 슈리엘의 기털 속에 처박고 있었던게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미쳐~ 아니 도대체 왜들 그러는 건데에~?" 그리하여, 슈리엘이 땅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거의 구르다시피 슈리엘의 등에서 내려와 땅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뒤로는... '이 꼴들이 된 것이지.' 나는 널부러진 세 인영들을 바라보며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아까의 식사 거리를 다시금 꺼내 확인해보고는 지쳐서 그 옆의 맨 땅에 드러누운 세명을 바라본 나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슈리엘을 돌려 보냈다. 어차피 저들의 상태를 보아하니 더 이상 이동하기는 힘들었고, 날도 캄캄해져 있어 이왕 이렇게 된 거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는 게 좋을 듯 싶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슈리엘이 급하게 내려선 곳은 주위에 인가가 보이지 않는 대신 작은 숲이 보이는 어느 대로변이었다. 라센국은 상업이 발달한 나라라서 그런지 주위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 같은 것이 없는데도 길은 잘 닦여 있었다. 국가에서 일부러 길을 낸 것인지, 아니면 많은 이들이 자주 오고간 덕에 생기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슈리엘의 보호를 받으며 허공을 날아갈 때에는 몰랐지만, 막상 땅에 내려서자 깊은 가을의 차가운 밤 공기에 피부에 소름이 오싹 돋을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팔을 한번 쓰다듬고는 얼른 길과 조금 떨어진 곳의 공터에다 카사를 불러놓고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세 명을 질질 끌어다가 그 주위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거기에 더 친절을 베풀어 각자의 짐에서 침낭을 꺼낸 뒤 그들을 데굴 굴려 침낭 위에 올려 놓았다. 덕분에 그들 옷이 흙투성이에 마른 잎들이 묻었지만 그런거 까지 일일이 신경 써줄 기분이 아니었던 터라 싸악 무시해 버렸다.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는 세명이 널부러진 덕에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을 찬 공기와 찬 땅에서 해방시켜준 후 나는 다시금 아까 그들이 만들어 놓은 흔적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약간 멀찍이 떨어진 곳에 쪼그리고 앉아서 단검으로 땅을 파 생긴 흙들을 그 흔적들 위에다 뿌렸다. 미관상 보기도 안 좋고, 혹시 밤 바람에 날려 우리가 노숙하는 곳 까지 냄새가 풍길 수도 있어서 조취한 거였다. 물론, 땅이 정령에게 부탁하면 훨씬 간단한 일이었지만, 내 깨끗한 양심상 차마 이런 일을 부탁할 수가 없어서 내가 직접 했다. 그러고 난 뒤에야 나는 일행과 카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앉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편히 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실프를 불러내어 찬 물을 부탁한 뒤 내 얼굴과 손을 씻은 뒤 수건에 물을 적셔서 세명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제야 그들은 정신이 난 듯 눈을 뜨고 날 바라보았다. "어이구, 이제 정신이 드냐? 물 좀 줄까? 아, 시원한 우유가 있는데 그걸로 주리?" 드뎌 대충 할 일을 끝내고 출출하다 싶어 음식 꾸러미를 뒤적일 생각이었다. 내 말에 잭슨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간신히 입을 떼었다. "근야... 물이나 좀..." "그래, 그래." 세 명에게 돌아가면서 물을 먹이고 나니 그제야 살았다는 표정들이었다. "샌드위치 좀 먹을래?" 물론 나는 그들이 거절할 줄 알고 예의상 물어본 말이었다. 지금도 계속 속이 울렁거려 우유도 못 마시는데 샌드위치를 어떻게 먹겠는가? 아무리 그게 엄청 맛있는 거라고 해도 말이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세명이 고개를 흔들자 나는 사악하게 씨익 웃으며 그들이 보는 앞에서 맛있게 냠냠 먹어줬다. 세명의 부러움과 원망이 가득 담긴 눈길을 당당하게 받아 내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출발한 첫 날이 지나갔고, 다음날이 되자 겨우 속이 가라앉은 그들은 간단하게 빵을 물에 적셔서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같이 베이컨을 비롯한 여러 야채와 과일까지 들어간 샌드위치를 할당 받았지만, 감히 먹을 엄두를 못 내 손도 못 대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지만, 기실 나는 그들이 비행 멀미를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었기에 멀미에 좋은 약 같은 건 챙겨오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그들 또한 자신들이 비행 멀미를 할 줄은 생각 못했으리라. 특히나 잭슨은 더더욱... 그는 자신이 멀미를 한다는 것에 너무나 황당해 했다. 나 보다 오랜 시간 동안 상회에서 일해온 그는 이 시대의 운송 시설이란 시설은 다 겪어본 터였다. 배, 마차를 비롯하여 단거리지만 정령타고 하늘을 날아보기 까지한 그였다. 그래 아주 자신있게 나섰는데 이렇게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릴 줄이야... "괜찮겠어?" 그나마 어제 보다는 나아졌다고 해도 약간 창백한 그들을 불러보며 묻자 그들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괜찮아. 설마 죽기야 하겠어?" "곧 익숙해질 겁니다." "키잉~!!" "그래, 정말 그러길 바래. 에휴, 그래도 금방은 익숙해지지 않을테니 제일 먼저 나오는 좀 큰 도시에 들러서 멀미약을 마련할테니까 그때까지만 좀 참아." 그렇게 해서 다시 출발한 나는 금방 또 속이 울렁거려 얼굴빛이 노래진 이들을 보고 다시금 한 숨을 내쉬고는 제일 먼저 보이는 제법 큰 도시에 내려서 멀미약을 구해야 했다. 그래, 거기서 잠시 쉬며 멀미약을 복용하고, 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속이 안 좋아 못 먹는 맛있는 샌드위치를 얼마 안 있으면 상한다는 이유 하에 다 빼앗아 먹은 뒤 우리는 또 다시 출발했다. 다행이 멀미약이 효과가 있는지 그 뒤로는 처음처럼 구토 증세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비행하고 나면 왠지 힘을 쓴 나 보다도 더 녹초가 되어 흐물거리는 그들이었다. 원래는 내가 지치면 그 뒤를 이어 잭슨이 우리를 데리고 이동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보다도 더 지쳐 나가떨어지는 그를 보고 차마 나와 체인지를 하자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배에도 금방 익숙해졌으니 비행에도 금방 익숙해질 것이라 여기고 멀미약만 먹인 채 계속 속행을 했지만, 3일이 지나도 여전히 내가 힘들어서 땅으로 내려오면 나보다도 더 흐느적 대는 그들이었다. 그러니까 나만 억울했다. 그들을 데리고 이동하는 것도 순전히 나 혼자인데다가 내가 힘들어서 내려서면 어찌된 일인지 그 동안 보였던 그 많은 마을들은 다 어디가고 허허 벌판만 펼쳐져 있는 거였다. 그러니 노숙하면서 필수인 불침번을 세워야 하는데, 나 보다도 더욱 더 흐느적 거리는 그들에게 차마 불침번을 서라고 할 수가 없는 거였다. 평소 내 힘이 팔팔하다면 정령들을 불러내서 부탁이라도 하겠지만, 내가 정령술을 쓰다가 지친 거라 정령에게 불침번을 부탁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러니 천상 나는 지친 상태에서 감기는 눈과 필사적으로 싸우며 그들 중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기운을 회복하여 일어나줄 때 까지 버티는 수 밖에 없었다. 크으~ 이 얼마나 힘든 상황인가? 하기야 어디 불침번 뿐인가? 식사 준비도 다 내가 해야 했고, 심지어는 지쳐서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에게 물을 먹여주는 등의 뒤치닥거리도 다 내 몫이었다. 그러니, 이건 동료들이 아니라 짐덩어리들이었다. 그래, 사흘째 되는 날 밤 나는 도저히 이대로 가다간 내가 견디지 못할 거 같아 대책을 강구했다. "이봐들, 나좀 봐봐." 생각 같아서는 똑바로 앉아서 경청할 준비를 하라고 하고 싶지만, 아예 땅과 착 들러붙다시피 누워있는 이들에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내 말에 눈이나마 나에게 향한 채 내 말을 들으려고 하는 그들의 모습에 만족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있지, 이대로 가다간 내가 지쳐서 쓰러질 거 같아." 내 말에 그들은 그 동안 나에게 되게 미안했는지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너희를 원망... 안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쨌든 어쩔 수 없어서 그런거니까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내가 너무 힘드니까 우리 방법을 달리하자." 그러자 의아한 눈으로 다시 나를 바라보는 세 짐덩어리들... "있지, 내가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너희들이 날아가는데 익숙하지 못해서 힘들어하는데 굳이 너희들이 다 깨어날때 까지 기다렸다가 날아갈 필요는 없는 거 같아. 그러니 차라리 너희들이 잘때 이동하는게 어떨까? 그러면 내가 지칠 때쯔음에는 너희들이 좀 어질어질 하더라도 최소한 피곤하지는 않을 거 아냐? 슈리엘의 등 위는 편안할테니... 그러니까 내일 부터는 너희들을 재워서 데리고 가려는데, 어때?" 나는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내어 생각했건만 이런 내 말에 한 하프 엘프와 블루 엘프, 그리고 어린 수인족은 시큰둥한 표정이다. "그게... 그렇게 효과가 좋을까?" 회의어린 잭슨의 말에 듀비는 동감한다는 눈빛이었지만, 내 의견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싶지는 않았던지 아무 말도 없었다. 뭐, 해민이는 아무 생각 없이 다시 침낭에다 얼굴을 파묻었지만... 그런 세 명의 반응에 나는 이마에 힘줄이 뾰록 하고 솟는 것이 느껴졌다. "우쒸, 뭐야? 하여간, 내 맘대로 할 거야. 너희들은 결정권이 없어. 불만 있으면 혼자 알아서 오든지 말든지... 흥, 내일부터는 너희들을 재워서 데리고 갈 거다, 알간?" 세 명을 째려보며, 특히나 잭슨을 위주로 째려보며 말하자 그가 뭐라 하겠는가? "그래, 그래... 네 맘대로 해라. 그래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테니..." "좋을대로 하십시오." "키잉~" 엎드려 절받는 거란, 이런 기분일까나? 나는 세 녀석이 매우 매우 괴씸해서 내일 부터는 그들이 아무리 힘겨워해도 손수 물을 먹여주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들이 알아서 먹건 말건 내비둬야지. 흥...' 하여간, 나도 꽤나 쪼잔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들 셋은 내 제안에 시큰둥 했지만, 그들에게는 놀랍게도 내 제안은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내가 제안을 한 그 다음 날 자고 일어나보니 다른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약간 기운을 회복하여 안색이 안 좋은채였지만, 그래도 멀쩡하게 일어나 있었다. 거기에다 마지막 불침번이었던 듯한 잭슨은 아침식사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그 동안 나 혼자만 하게 했던 것이 꽤나 미안했었나보다. 물론, 내 아침 식사는 푸짐했지만, 나머지 세 명은 아직 속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 였기에, 게다가 오늘도 그들을 괴롭게 하는 이동이 시작되기 때문에 스프가 아침 식사의 전부 였다. 그렇게 식사를 끝내고 노숙한 자리를 정리하고 나자 나는 어제 이야기한 대로 그들을 잠재웠다. '슬립' 마법은 1클래스의 마법이라 3클래스 유저인 나에게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스르르 잠에 빠진 그들을 내가 불러낸 슈리엘이 따로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이 알아서 등에 태우고 내가 올라타기를 기다렸다가 하늘로 날아 올랐다. 슈리엘의 등에 올라타고 날아가는 일을 어려워하는 그 세 명을 잠재우자 나는 모든 면에서 편하다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다른때 같으면 그들이 혹시 속이 안 좋아 땅으로 내려가야 하지 않을까 전전 긍긍하며 그들의 안색을 살피느라 긴장하고 있는데다가, 식사 때마다 땅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휴식 시간을 주면서 식사도 먹어야 했는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푹 잠들어 있으니 나는 느긋하게 주위를 감상하며 비행을 즐길 수 있었고, 잠들어 있는 그들을 깨울 필요 없이 배고프면 슈리엘 위에서 마치 간식을 먹듯 챙겨온 음식들을 우물 거릴 수 있었다. '히야~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렇게 편안한 상태에서 비행을 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욱 더 빠르게 날아간데다가 더 오랜 시간동안 비행 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내가 지쳐서 땅으로 내려간 시각은 한밤중이었다. 사실 조금 더 갈 수도 있었는데, 하루 종일 슈리엘 위에서 잠들어 있던 그들이 깨어날 기미를 보였기에 아래로 내려간 거였다. 그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아침에 출발할 때 나는 그들이 오래오래 푸욱~ 자라고 마법을 사용할 때 마나를 쬐게 좀 과하게 넣었었다. 그랬더니 평소대로 마법을 걸었더라면 늦어도 점심때쯤이면 깨어났어야 할 그들이 저녁이 다 되도록 안 깨어나는 거였다. 그래서 쬐께 걱정을 했지만, 심장도 제대로 뛰는 데다가 숨도 규칙적으로 쉬기에 그냥 가만 냅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랬던 것이 정말 탁월한 선택이라고 느껴졌다. '훗... 마법도 강하게 걸기를 참 잘했던 거 같아.' 그리하여 그들이 잠에서 깨어날 기미를 보이자마자 잽싸게 아래로 내려간 나는 노숙할 자리를 찾고 모닥불을 피워 그들이 완전히 깨어났을 무렵에는 노숙 준비를 다 갖추고 태연하게 모닥불 가에 앉아 베이컨을 굽고 있을 수 있었다. "우웅... 엇, 어떻게 된 거야?" 잠에서 깨어나 제일 먼저 어두운 밤 하늘과 자신의 주위에서 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을 발견한 잭슨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몸을 일으켰다. "하, 이제야 일어나냐? 아무리 내가 마법을 걸어 재웠다지만, 정말 오래도 잔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놨으면서, 나는 뻔뻔스럽게 잭슨을 향해 한심하다는 어조로 핀잔했다. 그러자 우리의 순진한 미스터 잭슨께서 정말 자신이 잠들었다가 늦게 일어난 줄 알고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안해 어쩔 줄 몰라하는 거였다. "아... 이런... 정말 미안해. 내가 그 동안 좀 피곤했었나봐..." 그의 어쩔 줄 몰라하는 태도에 나는 비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얼른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에게 웃는 모습을 보이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아주 착한 척,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응? 어어... 그러고보니 훨씬 괜찮아진 거 같은데?" "그래? 그거 참 다행이네. 그럼 식사는 할 수 있어?" "그, 글쎄... 그래도 지금 상황이라면 빵은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헤에... 정말?" 생각지도 않은 잭슨의 말에 난 좀 놀랐다. 그가 괜찮다고 하기는 했어도 나에게 미안해서 예의상 하는 말인 줄 알았던 것이다. "으응... 아무래도 우리를 자면서 데리고 간다는 네 제안이 유효 해나봐." "그러게..."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듀비와 해민이도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다른때 같으면 멀미하느라 지쳐서 나에게 와서 안기기는 커녕 누워서 비실비실 거리느라 바빴을텐데 오늘은 비틀 거려도 나에게 다가와 폭 안기는 거였다. "헤에... 너도 오늘은 좀 괜찮은가 보다. 듀비도 그래요?" 해민이의 금빛 곱슬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듀비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너무 오랫동안 자서 머리가 좀 어지럽긴 합니다만, 그 외에는 다른때 보다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잤다는 말에 가슴이 뜨끔 했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척 하며 웃었다. "잘 됐네요. 그럼 오랜만에 스프가 아닌 빵으로 식사를 할 수 있겠군요?" 그들은 그날 늦은 저녁이었지만, 뭔가를 씹어 먹을 수 있다는 것에 - 그것이 비록 빵일 뿐이라 그렇게 씹는 맛을 즐길 수는 없었더라도 - 무척 만족해하며 저녁 식사를 했다. 그렇게 기분 좋아하는 얼굴들로 보아 내일은 정상적으로 식사를 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저녁을 끝내고 나의 도움을 얻어 간단하게 씻은뒤에 그들은 불침번을 자청했고, 거부할 이유가 없었던 나는 너무 자서 도통 잠이 안 올 것 처럼 말똥말똥해 하는 세명을 나두고 내 침낭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다른때 같으면 해민이가 같이 들어와 자려고 했겠지만, 지금 그는 전혀 졸립지가 않고 오히려 그 동안 너무 움직이지 않아 좀이 쑤셨는지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해민아, 너무 멀리가지 마라~" 나는 그에게 한마디 주의를 준 후 하품을 하며 눈을 감았다. 내일도 그들을 잠재운 뒤 날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흔드는 느낌에 나는 부시시 정신을 차렸다. "해인아, 일어나봐." 어깨가 흔들리는 바람에 잠시 떨어졌던 잠이 끈질기게 다시 붙으려는 걸 애써 떨겨 놓으며 눈을 뜨는데 아직 채 밝아지지 않아 어두컴컴한 새벽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우웅... 뭐야.. 아침도 아니잖아?" 다시 침낭에 몸을 파묻으며 눈을 감으려는데 또 다시 어깨가 흔들렸다. "일어나보라니까." "왜에? 불침번 서라고?" 그에 졸리움이 가득 묻은 목소리로 투덜대며 일어나보니 어느새 보닥불은 꺼져 있는 것도 모자라 흙으로 덮여 있었고, 다른 이들의 짐이 깔끔하게 챙겨져 있는 거였다. "어라? 뭐 하는 거야, 이 새벽에?" "출발하려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자 나를 깨우기 위해 내 곁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잭슨이 일어서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뭐?" 남은 아직 잠이 덜깨서 비몽사몽이건만, 이런 상태의 나보고 또 힘을 쓰라는 건가 싶어서 그를 째려보자 잭슨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내 의문을 해소시켜 줬다. "내 몸 상태가 좋아진거 같아서. 그 동안 너 혼자 이동하느라 잠시 잊었겠지만, 원래는 네가 힘들때 내가 대신 일행을 이동시키기로 했었다고. 그 의무를 지금 이행하려고." 그렇다고 잘 자는 사람을 이 꼭두 새벽에 깨워야 했을까? 나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투덜댔다. "그런건 아침에 해도 되잖아? 왜 꼭 꼭두새벽에 해야 하는데?" 내가 다시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갈 기색을 보이자 잭슨이 날 잡아 일으켰다. "아니, 그 동안 속이 안 좋아서 스프만 먹었더니만 영양이 모자라는 거 같아서. 오랜만에 우리 아침에 맛있는 것 좀 먹자고. 지금 이동하면 아침에는 어떤 마을에든 도착할 거 같으니까. 내가 이동시키는 동안 너는 자면 되잖아. 너도 갓 짠 우유에 따뜻한 스프, 갓 구운 빵을 아침으로 먹고 싶지 않아?" 내가 먹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는 잭슨이 유혹했다. "쳇..." 역시나 그걸 차마 뿌리치지 못한 나는 침낭에서 빠져 나와 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은 벌써 준비를 다 끝마치고 있었기에 내가 내 짐을 챙기자마자 잭슨이 실프들을 불렀다. "그럼 출발할까나?" 높은 상공에서 날아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잭슨은 실프들에게 낮은 비행을 부탁했다. 너무 이른 새벽이라 근처에 마을이 있더라도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이는 아마 없을 터였다. 실프들이 내 몸을 부드럽게 떠받들어주며 날아가자 차갑게 느껴지는 새벽 공기가 내 몸을 스쳐 지나갔다. "에구... 추워." 하지만, 그 차가운 공기 조차 다시 들러붙는 잠에게는 이기지 못하여 나는 곧 해민이를 품에 안고 듀비의 어깨에 기대어 다시금 잠에 들고 말았다. 그러다 다시 잠에서 깨어나을때에는 우리는 제법 큰 어떤 성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이른 시각은 아니었던지 성문이 활짝 열려 있어 우리는 그 곳 성문을 지키는 경비대에게 상회 소속 패를 보여준뒤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성 안에는 이제 하루 일과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고, 우리는 좀 돌아 다니다가 제법 크고 깨끗한 여관으로 들어가 잭슨이 말한 대로 맛있는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그 뒤로 우리의 이동 속도는 정말 빨라졌다. 내가 수면 마법으로 그들을 데리고 이동하다가 지치면 잠시 쉬었다가 잭슨이 우리를 데리고 또 이동을 했다. 그리고 식사는 잠시 쉬는 동안 이루어지거나, 아니면 잭슨이 이동하는 동안 이루어져 - 고공 비행할때는 멀미하는 이들이 그나마 비행에 익숙해졌는지 잭슨의 저공 비행할때는 멀쩡한 거였다 - 이동 속도가 전보다 훨씬 빨라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처음 레이언 녀석에게 말한 9일 보다 하루 늦은 10일 후에 - 국경은 고공 비행 하는 와중에 그냥 넘어버렸다. - 우리는 드디어 왈그린 국의 수도 그랜드마 도시에 도착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호오... 정말 도착 할 수 있었을 줄이야. 본부에서 연락을 받고서도 반신반의 했건만..." 그랜드마 지부에 들어가 당당하게 도착했음을 알렸을때 그 곳 지부장은 놀란 눈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자신을 퍼거슨이라 소개한 지부장은 40대 줄에 이른 것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혈색 좋은 동글동글한 얼굴에 눈꼬리가 아래로 쳐져 있어서 아무런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아도 마치 빙그레 웃는 것 처럼 보이는 인상이었다. 양쪽 뺨이 통통해서 꼭 만두나 찜빵 같이 보이는 이 남자는 잘생기지는 않았어도 호감 좋은 인상이라 상업쪽에서 종사하기에는 딱인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회색 머리를 안 어울리게시리 목덜미 바로 위에서 꽁지머리로 질끈 묶고 있는 그는 우리를 향해 웃고 있었지만 - 인상 때문에 그리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 말투는 왠지 탐탁지 않은 기색이 들어있었다. "어디보자..." 뭔 잡동사니들이 그렇게 많은지 비좁아 보이는 그의 사무실로 데리고 가 그나마 그 사무실에 있는 것들 중 가장 깨끗해 보이는 소파에 앉혀놓은 뒤 자신의 책상에 놓여 있는 한 뭉치의 서류를 들여다보는 거였다. "흐음... 어디보자... 정령 검사에 최상급 정령사? 가만, 최상급 정령사는 또 뭐야? 그냥 상급 정령사라고 하면 될 걸..." 전에도 이야기 한 것 같은데 최상급 정령, 즉 나이트급 정령은 이 세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정령이 아니기 때문에 - 정령왕보다도 더 보기 힘들거다. - 최상급 정령사라는 것은 정령사들 사이에서도 전설로나 회자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상급 정령과 계약을 맺은 정령사도 엄청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실정이었으니 최상급 정령사라고 해도 상급 정령을 두개 이상 맺은 정령사겠거니... 하고 여길 뿐이었다. 사실 내가 상회에 소속된 이후 최상급 정령을 드러낸 적은 - 물론, 상회에 소속되고 신입 환영회 에서 실력을 보일 때 최상급 정령들이 날 도와주기는 했지만, 그때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터라 본 이들이 없었다. - 드워프 마을에 갈 때 이프리트가 셀레아나 모습으로 나를 배로 데려다 줬을 때 딱 한번 뿐이었다. 사실 그때도 셀레아나의 모습을 본 이들은 그 모습이 최상급 정령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 오로지 같은 정령사였던 잭슨이나 내가 실제로 최상급 정령을 다루는 걸 직접 목격한 크리스와 레이언만이 사실에 근접하게 알 뿐 - 그들도 내가 물의 정령왕의 딸이라는 건 모르니까 말이다 - 이었다. 그러니 정령사도 아닌 보통 인간으로 보이는 그랜드마의 지부장은 최상급 정령사라고 내 능력이 떡 하니 쓰여 있어도 상급 정령 둘 정도 부리는 정령사인 걸로 생각해버렸다. "그래, 무슨 무슨 정령들과 계약을 맺었지?" "바람, 불, 물, 땅." 왠지 그는 날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걸 숨길 마음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 나도 사무적으로 대꾸하자 그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 참 대단하군... 보통 정령사들은 4속성을 한꺼번에 다 가지고 있기는 힘들다고 하던데... 하기야, 그러니까 그 나이에 상급 정령과 계약을 맺은 거겠지?" 그의 중얼거림에 잭슨이 왜 가만히 있느냐는 듯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저 남자랑 계속 일할 것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생각하라지...' 어차피 그도 내 말을 들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고 말이다. "어디보자... 블루 엘프? 호오... 쉽게 보기 힘든 종족을 보게 된 건 영광이지만,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의 중얼거림에 잭슨이 끼어들었다. "검술만으로 친다면 저 보다도 높은 수준의 실력입니다." "여기도 그렇게 나와 있긴 하네. 일류 검사를 상회하는 실력이라고..." 퍼거슨, 그러니까 그랜드마 지부장은 잭슨이 끼어든게 못마땅하다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수인족 꼬마라..." 우리에 대한 서류를 다 읽었는지 그는 서류를 자신의 복잡한 책상 위에 던져 놓고는 곧바로 사무실 문으로 향했다. "자, 그럼 따라 오게나." 우리에 대한 보고를 다 읽었으면 이번 임무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건만 거기에 대한 설명 한 마디 없이 다시 사무실을 나서려는 퍼거슨의 모습에 우리가 환영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우리가 이번 임무에 그렇게 도움이 안 될 것 처럼 보인단 말인가? '히유... 레이언 녀석이 제시한 걸 받기는 다 틀렸군...' 그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자신의 사무실과 같은 층에 있는, 바로 옆에 있는 다른 이의 사무실 이었다. 똑똑~ "클리프, 안에 있는가?" 퍼거슨의 목소리에 답하는 굵은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십시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가는 퍼거슨의 뒤를 따라 들어가자 나는 퍼거슨의 사무실 못지 않은 복잡한 사무실과 함께 그 가운데에 위치한 소파에서 다섯명의 남자들이 자리에서 막 일어나며 우리를 맞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다섯 명의 남자들 중 상석의 자리에 있던 남자가 퍼거슨의 뒤에 엉거주춤 서 있는 우리들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본부에서 지원해준 이들이 도착해서 데리고 왔다네. 어쨌든 지원해 줬으니 이번 작전에서 뭔가 임무를 줘야 할 것 아닌가?" "저들이 지원자들입니까?" 그렇게 묻는 사람은 상석에 있는 사람의 오른쪽에 있는 자였다. 그는 약간 기가막히다는 듯한 시선으로 우리를 쭈욱 둘러보았는데, 사실 퍼거슨의 말을 듣자마자 보인 나머지 사람들의 시선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아 나는 점점 기분이 가라앉았다. "소개하지, 이쪽이 정령검사라고 하는 잭슨, 그리고 최상급 정령사라는 해인, 이쪽은 블루 엘프이자 검사인 듀비, 마지막으로 아직 성년이 안된 수인족인 해민." 퍼거슨의 소개에 우리가 고개를 숙여 보이자 소파 상석에 앉아 있다가 일어난 이가 이들 중 가장 높은 자였던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어서 오게나. 와줘서 고맙네. 사실 지원 요청을 하기는 했지만, 시일이 너무 촉박해서 기대는 못하고 있었거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왼쪽에 서 있던 남자가 혼잣말 하듯, 그러나 우리에게도 다 들릴 정도의 크기로 중얼거렸다. "하기야, 아예 없는 것 보다는 났지." 상석에 있는 남자가 그에게 엄한 눈길을 보내 입을 다물게 하기는 했지만, 이미 그가 전달하고 싶었던 바는 다 뱉은 후였다. "에헴, 그럼 나는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볼테니 서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게. 아, 그리고 이들에 대한 건 클리프 자네가 담당하도록 하게나." 상석에 있던 남자의 이름이 클리프였던 듯 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험험, 그럼 잘들 알아서 해보게나. 나중에 저녁때 쯤 보고를 받도록 하지." 퍼거슨은 그렇게 말하고는 우리를 내버려둔 채 혼자 나가버렸다. "자자, 그 쪽에 서 있지만 말고 이쪽으로 오게나. 이번 일을 같이 하게 된 동료들인데 인사를 나누어야지." 부드러운 어조로 우리를 부르는 클리프가 그나마 이 곳에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문가에 엉거주춤 서 있던 우리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우선 나부터 소개하자면, 이름은 클리프라고 하고 평민이라 성은 없다네. 이곳 경비 책임을 맡고 있는 덕에 이번 작전에서도 대장을 맡게 되었지." 그렇게 말하는 그는 이 곳에 있는 이들 중 키가 제일 작았다. 대충 눈으로 가늠해서 나와 비슷하거나 아니면 약간 작은 듯 했다. 그러나 무척 단단해 보이는 몸은 그가 거저 경호대장이 된 것이 아니라는 걸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오른족에 서 있는 두 남자는 비슷한 또래로 보인다 했더니만, 동갑에 같이 상회에 들어와 지금까지 붙어 다니는 친구사이라고 했다. 붉은기가 도는 갈색 머리가 톰슨, 짙은 금발머리는 싱거라고 했다. 그리고 왼쪽에는, 아까 우리를 깔보는 듯한 발언을 한 은회색 머리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 이 곳에 있는 다섯 남자 중 가장 어려보이는 - 녀석이 도터라고 했고, 그 옆에 있는 갈색 머리의 평범한 인상의 남자가 루터라고 했다. "지원자들은 자네들이 전부인가?" 보고를 받아 다 알고 있을거면서도 확인차 물어보는 루터의 질문에 잭슨이 대답했다. "예. 시간이 여의치 못해 많은 인원이 같이 오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군. 본부에서 지원해줄 정도에 그 먼 거리를 열흘안에 주파할 정도니 꽤 능력이 높은가 보군. 하지만, 문제는 경험이겠지. 이런 일은 몇번이나 해봤지?" 그의 건조한 질문에 잭슨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두번 밖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나머지는..." 거기서 잠시 머뭇거리던 잭슨은 한숨처럼 나머지 말을 내뱉았다. ".... 아직 한 번도 참여해 보지 못했습니다. 상회에 가입한 지 얼마 안 되었거든요." 변명처럼 붙인 뒷 말은 차라리 안 붙인 것이 더 나을 뻔 했다. 잭슨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까 나에게 단단히 찍힌 그 녀석이 이죽였던 것이다. "하, 그럼 신입을 우리에게 보내 준 거란 말이야? 이거 참 대단한 지원인걸?" 신입인 걸 부정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었다. '젠장, 그냥 여길 뒤엎어 버리고 가버릴까?' 기분 나쁜 건 나뿐만이 아니었기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고 말았다. 그러자 그걸 타개하기 위함인지 클리프가 나섰다. "그만 하거라. 같은 동료끼리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냐? 강한 동료애로 묶여도 모자를 판에." 그렇게 우선 그 녀석을 향해 질책을 한 후 그는 우리를 돌아보았다. "자네들이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잘 알겠네. 그러나, 이런 일에는 경험이 없으니 작전 짜는 건 우리에게 맡기고 그에 따라주게나." 사실 처음부터 내가 작전 회의에 참여해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참견할 생각도 없었다. 그의 말대로 경험도 없었고 말이다. 어차피 그가우리를 작전 회의에 참여시킨다 해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처럼 구경만 하다 결론이 나면 고개나 끄덕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으로 축객령을 듣게되자 굉장히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나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잭슨이 클리프의 말을 거들며 나섰다. "알겠습니다. 저희도 사실 레이언님으로부터 이 곳 지시를 따르라는 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럼 저희는 인사도 나누었으니 이만 쉬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렇군. 내 자네들이 막 도착했다는 걸 깜빡 했구만. 미안허이. 내가 안내해줄 테니 따라 오게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클리프 사무실에 들어가서 소파에 한번 앉아 보지도 못하고 클리프를 따라 부리나케 그 곳을 나와야 했다. 그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지부 건물 뒤쪽에 있는 또 다른 건물이었다. 지부 건물보다는 높이는 작았지만 면적은 좀 넓은 편으로 정원과 담벼락이 딸려 있었다면 어느 거대 저택으로 보일 만 했다. 물론, 실용성 위주의 건물이라 아름다운 면이 별로 없는 밋밋한 회색 돌로 지어진 건물이었지만 말이다. "이 곳은 기숙사라네. 자네들이 이번 임무를 끝낼때 까지 이 곳에서 지내게 될 거야. 이번 임무를 맡은 애들이 다 여기 있거든." 건물 입구에는 경비원인 듯한 세 남자가 앉아서 잡담을 하고 있다가 우리가 일어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대장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그 중 한 사람이 클리프의 뒤에 짐을 들고 서 있는 우리를 힐끗 보면서 묻자 클리프가 우리를 소개시켜줬다. "아아, 이들은 본부 소속 사람들인데 이번에 잠시 우리 지부에 합류하게 되었네. 그래서 며칠 여기서 머물테니 안면들을 익혀두게나." "아... 그렇습니까?" 그들도 이번에 있을 작전을 알고 있었는지 그의 말에 즉각 '아~' 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런데, 그 뒤에 우리를 바라보면서 미심쩍다는 저 눈빛들은 뭔지... "어차피 나중에 인사를 정식으로 시킬테니 그때 다시 보기로 하고, 3층에 그 방 비었지?" "뭐, 요즘 대부분의 녀석들이 운송에 나가서 빈 방은 많습죠." "그런거 말고. 3층의 그 방 말이야." "예. 비어 있습니다. 그 동안 새로 들어온 신입도 없었잖습니까?" "알겠네. 아, 그 방에 아무것도 없을테니 필요한 것들 좀 가져다 주겠나?" "그러죠." 건물 입구에 있던 세 남자 중 계속 클리프와 이야기를 하는 한 남자가 선선히 대답하자 클리프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리를 데리고 계단으로 향했다. "시선들이 좋지 않더라도 이해를 해줬으면 좋겠군. 아무래도 본부에서 지원이 온다고 해서 우리는 경험도 많고 능력도 인정할 만한 이들이 올 줄 알았거든. 뭐, 시즌이 시즌이라 그쪽도 바쁘겠지 만서도... 어쨌든, 기대를 좀 많이 해서 그런거니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게나." 클리프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기야, 그렇게 노골적으로 못마땅하다는 시선들을 보내오는데 안 미안할 수가 없겠지. 어쩌면, 그도 우리를 보고 내심 실망을 해서 그에 대한 미안함도 있을지도 모른다. "이해 합니다." 잭슨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고개는 끄덕여 보였다. "그래도, 레이언님이 추천한 사람들이니 나는 기대하고 있다네. 부디 이번 작전에서 큰 활약을 해주길 바라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 자, 다왔군. 이 방이네." 그렇게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3층 복도의 맨 구석쪽에 있는 방문 앞에 도착한 클리프가 문을 열어 보였다. "사실, 지금은 빈 방들이 많아서 2인실로 두개를 줘도 좋지만... 그 방들은 원래 임자가 있는 거니 좀 불편하더라도 이쪽 방을 주는게 좋을 거 같아서 말야. 이 방은 다른 방들보다 크기도 크다네." 그 곳은 양쪽 벽에 2층 침대가 각각 하나씩 붙어 있는 4인실 방이었다. 그래도 제법 넓직하여 좁아 보이지는 않는데다 방 가운데에 안락 의자 4개가 놓인 탁자도 있었다. 항상 청소가 되어서 그런지 깨끗하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방이라 썰렁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시트나 세면대 등은 곧 가지고 올 걸세. 필요한 거나 궁금한게 있으면 그 사람에게 물어보도록 하게나. 내가 지금 일하다 나온 거라 세세히 도와줄 수가 없겠군. 우선 푹 쉬다가 오늘 저녁이나 같이 하도록 하세." "신경써주셔서 감사 합니다. 저희는 알아서 할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러지. 그럼 푹들 쉬게나." 잭슨이 우리 일행 대표로 - 어느새인가 그는 우리 일행의 대변인이 되어 있었다. - 인사를 하자 클리프가 뒤에 있던 우리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하고 나가버렸다. "쳇... 어쩐지... 그 째째한 레이언님이 왠일로 거한 조건을 걸었나 했더니만..." 클리프가 나가자마자 싱긋 웃고 있던 잭슨이 짐을 던지다시피 방 한 구석에 내팽개치더니 안락 의자에 털썩 주저 앉으며 투덜댔다. "키잉..." 그 동안 내 팔에 들러붙은 채 내내 조용히 있던 해민이가 기운 없는 표정으로 아직 시트도 깔리지 않은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해민이도 피곤한가보네. 하기야, 익숙치 않은 여행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래도 해민아 조금 있으면 시트 올테니까 그때까지만 참았다가 시트 깔고 자. 그냥 자면 춥잖아." 잭슨이 그런 해민이를 바라보며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지만, 해민이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오른쪽에 있는 이층 침대의 아래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으음, 많이 피곤했나보네." 걱정스러워서 다가가 머리를 쓸어 넘겨줬는데 해민이는 꼼작도 안 했다. 그러고보면 녀석의 이마가 좀 따뜻한 거 같기도 하고... 익숙하지 않은 여행을 너무 오래 해서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걱정스러워 하는데 잭슨이 안락 의자에 앉아서 기지개를 쭉 펴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으갸갸 ~ 에구, 나도 피곤하다. 시트 오면 빨랑 잘란다. 야, 그 전에 우리 침대나 정하자. 해민이야 벌써 하나 차지하고 누웠으니... 넌 어디 쓸 거냐?" 잭슨이 나를 보며 말하자 나는 침대들을 둘러보다 어깨를 으쓱 했다. "뭐, 아무데나 상관 없지만... 듀비는 어디 쓸래요?" "저도 아무 곳이나 상관 없습니다만..." 거기까지 말한 듀비는 정신없이 자고 있는 해민이를 힐끔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저 아이는 해인님과 떨어지기를 싫어하니 저는 이쪽 침대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듀비가 해민이가 사용하는 것의 맞은편에 있는 침대를 가르키며 말하자 잭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민이가 하도 나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그런지 이제는 내 주위 사람들이 나와 해민이가 붙어 있는 걸 당연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 아래인가 위인가가 문제인가?" 듀비가 입을 다물자 은연중 듀비와 한 침대(?)를 쓰게 된 잭슨이 문제를 제시하자 듀비는 이번에도 선선히 대답했다. "저는 아무쪽이나 상관 없으니 좋은 쪽을 고르십시오." "그럴까요? 그럼 제가 아랫쪽을 사용할테니 듀비가 윗쪽을 사용하시죠?" "좋습니다." 그렇게 대충 사용할 침대를 정했을 무렵 누군가가 우리 방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예." 마침 문 가까이 서 있었던 듀비가 대답하며 문을 열어주자 두 남자가 양 손에 한아름 짐을 들고 들어왔다. 아까 입구에서 봤던 세 남자들 중 대답을 안 하고 가만히 있기만 하던 두 남자였다. 잭슨 또래로 보이는 두 남자는 한명은 침대 시트를, 다른 한명은 세수대야와 물이 가득 담긴 단지를 가지고 와서는 탁자 위에 우르르 내려놨다. "우리 조장님 말씀이 좀 답답하겠지만서도 정식으로 소개가 될 때까정 건물 안을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시우. 뭐, 그래봤자 저녁때쯔음에는 소개가 될 테니 한잠 푹 자고 일어나면 시간은 다 지나가 있을 거요." 침대 시트를 가지고 온 남자가 무뚝뚝하게 말하자 세수 대야와 물이 가득 든 단지를 가지고 온 남자도 입을 열었다. "물이 부족할 거 같으면 지금 말씀하세요. 더 가져다 드릴테니. 아, 그리고 또 다른 필요한 건 없으세요?" "물은 되었습니다. 단지 수건 좀 가져다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저희가 가지고 있는게 더러워서... 그리고 빨래 거리가 있는데 처리할 수 있을까요?" 그나마 세수대야와 단지를 가져온 남자는 무뚝뚝하지 않아서 그런지 잭슨이 그를 향해 정중하게 요청했다. "본부도 마찬가지겠지만, 여기서는 빨래 담당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어요. 그래 이 곳에 머무는 녀석들이 내놓은 걸 한꺼번에 모아 빨아서 가져다 준답니다. 헌데 사람이 많다보니 옷의 양도 장난이 아니기 때문에 옷 안에다 이름을 서 놓지 않으면 잃어버리는 경우도 허다해요. 옷에 이름을 써놨나요?" 물단지를 가져온 남자의 친절한 설명에 우리는 선듯 빨래감을 내놓지 못했다. 잭슨이나 나나 개인집에서 살고 있었기에 옷에 이름을 새겨 넣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흠, 그런가요? 그러면 저희는 안되겠군요. 그럼 그건 나중에 처리하도록 하죠." "그러세요. 수건은 곧 가져다 드리죠." 잭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물단지맨(?)은 나가려는 듯 몸을 돌렸지만, 시트맨(?)은 그러는 대신 우리를 하나 하나 훑어봤다. "그런데... 당신들은 뭔가 한 가락 하나보지? 여기까지 파견된 거 보면. 아니면 거기서 제일 능력이 딸려서 이쪽으로 쫓겨온 건가? 당신은 특기가 뭐요?" 시트맨은 자기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잭슨을 제일 먼저 겨냥했다. 자신의 실력에 꽤 자신이 있었던 모양인지 잭슨을 약간 깔보는 눈치였다. "정령 검사입니다. 검술은 겨우 이류 딱지 뗄 정도이고 정령술은 중급이죠." "그렇수? 흐음... 능력이 있기는 있었구만. 그럼 이 젓비린내나게 생긴 곱상한 녀석은?" 잭슨의 말에 조금 주춤 거렸지만, 자기가 뛰떨어진다고 생각되지 않는지 전혀 주눅들지 않은 표정으로 날 가르켰다. 그에 나가려고 몸을 돌린 물단지 맨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그러나 나는 시트맨의 태도가 너무 기분 나빴기에 대답해주고 싶지 않아 그들의 시선을 무시해 버렸다. 대신 잭슨이 대답해줬지만... "그 애는 최상급 정령사로 저래뵈도 상회에서 손.꼽.히는 실.력.자입니다. 그리고 그 옆은 일류급 검사이지요." 잭슨은 시트맨의 거만한 태도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는지 '손꼽히는 실력자'란 말에 악센트를 팍팍 넣었다. 그에 두 남자의 눈이 휘둥그래졌지만, 날 다시금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 꼬맹이가?" "에이... 설마요." 그들은 잭슨이 과장 했다고 여기기로 한 모양인지 더 이상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내 또래중에서 좀 뛰어난 실력을 가졌을 거라고 추측한 모양이다. "최상급 정령사는 무슨... 그저 기껏해야 중급 정령사겠지." "그래도 저 나이 또래치곤 대단한 거잖아. 지원으로 보낼 만 했네." 우리 방을 나가며 저희들끼리 수그런거리는 소리에 내 예상은 확신으로 다가왔다. "그래봤자 꼬맹이야. 저런 애를 어디다 써먹어? 벌벌 떨며 아무것도 못하는 혹덩어리가 안되면 다행이겠다." '우쒸...' 그들이 목소리를 전혀 낮추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텅텅 빈 복도 구조상 작은 소리라도 잘 울려 퍼져서 그런지 귀를 가만히 기울이고 있지 않아도 멀어져가며 주고받는 그들의 목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게다가 그 시트맨의 마지막 소리는 내 귀에뿐만이 아니라 내 가슴속에까지 크게 울려퍼졌다. 빠드득... 나도 모르게 이를 갈았는지 방 안에 이 가는 소리가 울려퍼지자 잭슨이 다가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너무 화내지 마라. 어차피 여기 계속 있을 것도 아니고, 작전 들어가면 네 실력을 저 보는 눈도 없는 녀석들에게 유감 없이 보여줄 수 있잖아." "흥, 필요 없어. 어디 얼마나 뛰어난 놈들이기에 우리를 무시하는 건지 한번 두고 보겠어. 레이언 녀석, 우릴 이딴 곳으로 보냈단 말이렷다? 어디 돌아가서 한번 두고 보자." 그 순간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저 국경 너머에 있던 레이언 녀석은 오한이 들었을 거다. 아주 깊고 절절한 한을 담아 씹어 내뱉었으니 말이다. "자자, 그만 흥분하고 잠이나 자자. 줄기차게 달려왔는데 피곤하지도 않냐? 난 씻고 자련다." "쳇..." 잭슨이 먼저 그들이 가져다 준 대야와 물을 한쪽 구석으로 가지고 가며 씻으려고 하자 나는 그쯤에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시트들을 펼쳤다. "내가 말이지, 이 먼 곳까지 와서 왜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하냔 말야. 안 그래요 듀비?" 각각의 침대 위에 시트를 깔면서 투덜거리자 듀비가 피식 거리며 웃었다. "그럼 돌아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생각 같아서는 다 뒤집어 엎고 돌아가고 싶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빈 손으로 돌아가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요. 악작같이 작전에 참여해서 레이언 녀석이 제시한 그것들을 다 받아내야죠. 음, 그래도 이 억울함이 안 풀릴 거 같은데..." "작전 들어갈때 네 실력을 보여서 이곳 녀석들을 한방 먹이라니까." 세수를 하려다가 아직 수건이 도착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은 잭슨이 세수 대야에 물만 채우고는 돌아서서 끼어들었다. "흥, 내가 실력을 발휘하면 이 곳 녀석들에게나 도움이 되는 거잖아. 별로 돕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말야. 고생하는거 구경하며 놀려주면 안될까나?" "이봐, 이봐. 그러다 작전이 실패하기라도 하면 우리도 위험하다고." 잭슨이 난처하게 웃으며 말하지 않아도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쳇, 그랬으면 속이 시원하겠다는 거지. 젠장..." "적들을 때려 부셔서 이 울분을 푸는 건 어때? 좋은 생각이지?" "몰라." 그때까지 울분을 참고만 있고 싶지 않았던 내 손 아래 죄 없는 시트들만 신나게 팡팡 두들겨졌다. 자고 있는 해민이에게 시트를 덮어주고 나머지 빈 세 침대에도 시트를 다 깔았을 즈음 물단지맨이 다시 돌아왔다. "수건을 가지고 왔습니다. 네 분이시라 하나씩 쓰시라고 가지고 왔으니 부족하진 않으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물단지맨은 혼자 와서 그런지 방 안에 들어오지 않고 그냥 문 밖에서 수건만 넘겨주고 돌아갔다. 그에게 항상 우리 일행의 대변자로 활약(?)하는 잭슨이 수건을 받고 돌아서서 문을 닫고 나자 우리는 부산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먼저 씻는다?" 잭슨이 자신이 쓸 수건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탁자 위에 올려 놓고 잽싸게 세수대야 쪽으로 달려가자 나는 사악하게 씨익 웃었다. "어?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내가 씻는 거 도와주려고 했는데, 그냥 얼굴만 씻으려고? 그럼 좋을 대로 해." 나의 사악한 말에 멈칫 한 책슨이 우거지상이 된 얼굴을 내쪽으로 돌렸다. "엇.... 이이~ 치사하게..." 사실 직접 물 속에 들어가서 피부를 쓱쓱 싹싹 씻는게 더 개운하고 시원하기야 하지만, 지금은 목욕할 처지도 안되는 데다 다들 피곤해서 잠시 눈을 붙이려고 하는 상황이었으니 운디네의 도움은 정말 달콤한 유혹이었다. "캬캬캬캬~~" 우여곡절 끝에 우리 일행은 각자의 침대 속에 몸을 파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자지도 못한 것 같았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잠 속에서 강제로 끌어 올려졌다. 쾅, 쾅, 쾅~! 노크 소리도 아니고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는 소리에 화가 왈칵 치밀어 올랐다. "무슨 일이시죠?" 이런 일에 가장 잽싼 듀비가 제일 먼저 일어나 방 문을 열어보니 그 곳에는 시트맨이 서 있었다. "아따, 무지 피곤했었나보구만? 한~ 참을 두드렸는데 이제야 나왔네." 싱글싱글 웃으며 태연하게 말하는 시트맨의 얼굴에 매직 미사일을 한다발 먹여주고 싶었다. 내 단언하건데 저 녀석은 처음에는 작게 노크를 하다가 우리가 안 나오자 점점 큰 소리로 문을 두들긴 것이 틀림 없었다. 처음부터 문이 부서져라 두들겼을거고 그 시간도 짧았을 거였다. 이 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좋은 청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무리 깊이 잠들어 있었다고 해도 보통의 노크소리도 듣고 깰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참을 두들겼다고 말하다니... '되게 뻔뻔한 인간이네. 완전 철면피야.' 시트에 몸을 돌돌 말고 눈만 빼꼼이 내밀어 노려보기만 하는 나와는 달리 듀비처럼 침대에서 일어나 문가로 다가간 잭슨은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았다. "다시 만나게 되었군요.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잭슨과 눈이 마주친 시트맨이 움질 거리는 걸 보니 잭슨이 얼굴은 웃고 있어도 눈에서는 매서운 빛이 뿜어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러는 것도 잠시, 다시 태연한 신색이 된 시트맨이 그렇게 우리를 깨운 이유를 밝혔다. "저녁 식사 시간이 다 되어서 말이오. 잠시 후에 다시 데리러 오기야 하겠지만서도 미리 알려주지 않으면 그때까지 계속 잘 거 같아서..." 자신이 이런 친절을 베푸는데 고마워 해야 당연한 거 아니냐고 말하는 듯한 표정의 시트맨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저녁때가 다 되었을 정도로 우리가 그렇게 오래 잤나 싶어서 창 밖을 바라보니 어둑어둑해지기는 커녕 밝은 햇빛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시간을 확인한 잭슨이 다시 시트맨에게로 눈길을 돌렸지만 그의 철면피 신공은 엄청 높은지 그는 안색의 변화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군요. 그런데... 저녁 식사를 언제 먹죠?" 화를 억누르고 있는지 잭슨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그에 아무리 두터운 철면피 신공을 터득하고 있다 하더라도 불안함을 느꼈는지 시트맨은 서둘러 대답했다. "곧 먹을 거요. 잠시 후에 데리러 올테니 준비하고 있으시오." 그리고는 우리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잽싸게 몸을 돌려 가버리는 거였다. "젠장!" 시트맨이 저 멀리 가버리자 잭슨이 낮게 중얼거리며 죄 없는 방문을 부서져라 세게 닫아 버렸다. 그러고도 화가 안 풀렸는지 아직도 침대 속에서 꼬물꼬물 거리고 있는 내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이봐, 일어나. 저녁 먹으러 갈 준비를 하고 있으랍신다." "우쒸... 여기는 도대체 저녁을 언제 먹길래 벌써 먹는 거야? 아직 해도 지지 않았구만..." 잭슨 못지 않은 분노를 담아 투덜대며 나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해민이는 평소의 그 예민하던 감각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여전히 자고 있는 거였다. 다른때 같았으면 나 보다도 먼저 일어나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 많이 피곤한가보다... 라고 생각한 나는 해민이는 깨우지 않은 채 나두고 나만 일어나 서둘러 움직였다. 그렇게 푹 자지도 못하고 잘 자던 와중에 억지로 일어나서 준비랄 것 까지도 없이 깨끗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앉아있는데 잠시 후에 데리러 온다던 녀석은 커녕 생쥐 한 마리도 오지 않는 거였다. "잭슨아..." 낮게 깔린 내 목소리에 잭슨 역시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응..." "우리 당한 거지?" "아마도..." "내가 만약 이 곳을 뒤집어 엎어 버리고 그 넘을 찾아내어 신나게 두들겨 주고 돌아가면 뭐라고 할래?" 내 말에 잭슨은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 "바보 멍청이." "왜?" 잭슨을 째려보며 묻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럼 돌아가서 뭐라고 할 건데? 어떤 싸가지 없는 놈에게 놀림 당해서 열받아서 뒤집어 엎고 왔다고 할 거야?" "그럼 너 같으면 어떻게 할 건데?" "우선은 참아야지. 지금 뒤집어 엎어봤자 이 지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 뿐이야. 게다가 우리는 이 곳 사정을 모르니 더욱 더 불리할 뿐이고. 그러니까 참고 기다리다가 기회가 왔을 때 자근자근 밟아주는 거야." "만약 그 기회가 오지 않으면?" 그러자 잭슨은 아주 무시무시하게 씨익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럼 가기 전에 여기 뒤집어 엎어서 그 자식을 찾는 거지. 네가 안 해도 나는 할 거고, 만약 네가 한다면 도와주겠어." "그거 맘에 든다. 아, 그리고 시트맨 말고 아까 사무실에서 그 싸가지 없는 넘도." "두말하면 입 아픈거 아니냐?" "듀비는 어때요? 참여 할래요?" 혹시 듀비는 이런데 관심이 없어 빠질까봐 걱정했는데, 이런 내 걱정을 날려주려는 듯 듀비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해인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좋았어. 그럼 우리 셋이 가기 전에 여길 한번 뒤집어 엎고 가자고. 아, 그런데... 레이언 녀석 에게는 뭐라고 변명하지?" "훗훗훗, 네 아버지를 대면 만사 오케이일 걸?" 걱정 없다는 듯 태평한 잭슨의 말에 나는 쬐께 마음이 걸렸다. 내 힘이 아닌 아버지의 힘을 이용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기분이 안 좋았던 것이다. "우리... 아버지? 으음... 에잇, 아무려면 어때? 열받는데 이용할 건 다 이용하는 거야. 좋았어, 그 자식들 어디 두고보자고." 그렇게 우리 셋이서 머리를 맞대고(?) 그 괴씸한 넘들에게 복수하려고 이를 빠득빠득 갈고 있을때 드디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어떤 놈이 어떤 얼굴로 왔는지 볼까나?" 탁자에 앉아 있던 잭슨이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문을 여니 거기는 물단지맨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러다 깔끔하게 옷을 다 차려입은 잭슨을 보고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는 거였다. "어라라? 벌써 일어나서 준비까지 하셨어요? 저는 지금 일어나시라고 깨우러 왔는데..." 빠드득... 그 시트맨이 더욱 더 괴씸해지는 순간이었다. 잭슨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차마 눈 앞의 물단지맨에게 화를 내기도 그렇고 시트맨이 우리를 놀려주려고 아까 와서 깨우고 갔다고 고자질 할 수도 없었던지 그냥 웃으며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아, 별로 피곤하지 않았는지 금방 눈이 떠지더라구요." '금방 눈이 떨어지기는 개뿔이...' 아, 정말 이 곳에 와서 나의 단정한 언어 생활에 마구마구 금이 가는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나는 입이 거친 미소녀가 - 뜬금 없이 무슨... - 되는게 아닐까? 요즘은 약간 삐딱한 기질이 있는 애들이 인기가 많다던데... 나도 이렇게 된거 이쪽 노선으로... 쿨럭..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그러셨군요. 체력이 정말 대단하신... 아, 혹시 잠자리가 불편해서 잠을 잘 못 주무신건 아니신지...?" 물단지맨은 정말 우리를 염려하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아까 시트맨에게 당한게 너무 열받은 상태였기에 저 사람이 시트맨과 한통속이라 다 알면서도 연기를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아아... 이렇게 서로 의심하니까 각박한 세상이 만들어지는 건데.. 크흑흑.. 하지만 아까 그 시트맨이 너무 얄미워서.... 같은 그릅의 녀석이라는 것 때문에 쉽게 믿을 수가 없어어...' 내가 이러건 말건 잭슨과 물단지맨의 화기애애한 - 겉으로만 그럴 뿐인지 몰라도 -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아닙니다. 잠자리는 정말 편안했습니다. 저희가 그냥 일찍 깬 것 뿐입니다." "그렇습니까? 역시 본부에서 지원 나오신 분들이라 뭔가 다르셔도 다르시군요." '다르긴 개뿔이...' "그런데, 저희를 깨우러 오셨다니 저녁 식사 시간이 다 되었나봅니다?" "예. 곧 여러분을 데리러 올 겁니다. 아무래도 상회 분들이니 준비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아서 좀 늦게 왔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네요. 잠시 후에 다시 데리러 오겠습니다." "아, 얼마 안 남았다면 그러 필요 없이 지금 나가죠. 괜히 두번씩이나 왔다갔다 하실 필요 없이 말이죠." "그러실까요? 그러면 저도 편하죠." 흔쾌한 물단지맨의 말에 잭슨이 우리를 돌아보았다. "어때? 그래도 괜찮지?" 준비야 아까 대 했으니 안될 것도 없었다. "물론..." '물론이지'라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한쪽 침대에서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 해민이가 눈에 띄이자 저절로 말 끝이 흐려졌다. 아까 깨워도 안 일어나기에 그냥 냅뒀지만, 피곤하더라도 저녁은 먹고 자야 할 것 같아서 나는 곤히 자는 해민이에게 다시 다가갔다. "해민아, 일어나. 저녁 먹어야지? 해민아?" 하지만 어깨도 흔들어보고 불러보아도 해민이는 요지부동 꼼짝도 안 하는 거였다. 그래 걱정되어 이마에 손을 대어보니 미열이 있는 것 같던 아까보다 조금 더 뜨뜻해져 있었다.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해민이를 바라보자 잭슨과 듀비가 의아했는지 다가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꼬마가 어디 아픈 겁니까?" 그래도 그 동안 같이 여행을 해서 정이 들었는지 둘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음... 열이 있는 거 같아. 수인족이라고 해도 아직 어린애인데 이번 이동이 무리가 되었나 보네." "그럼 그냥 쉬게 나두지? 건강한 애였으니까 푹 쉬면 나을 거야." 약간 열이 있는 것 외에는 크게 아픈 것 같지 않자 잭슨은 대수롭지 않은 걸로 여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듀비도 마찬가지였다. "저녁을 못 먹는게 걱정되시면 식사를 끝내고 오며 뭔가 먹을만한 걸 가지고 오면 될 겁니다." "그, 그럴까?" 나 또한 그 동안 해민이가 아픈 걸 못 본데다 이번 이동에서 크게 힘든 일은 없다고 봤기 때문에 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해민이는 듀비와 이동 내내 자면서 왔기 때문에 지친 것 외에 몸에 다른 어떤 해가 가해진 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약간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애써 떨치고 대신 시트나 한번 잘 덮어준 후 방을 나섰다. "이쪽은 라센국에 있는 본부에서 온 이들이다. 잠시동안 우리와 같이 일을 하게 되었으니 그 동안 잘 지내도록." 내가 항상 식사를 해결하던, 그레이험 항구 도시 외곽에 있는 기숙사(?) 식당보다는 작지만, 실내 장식은 훨신 더 깨끗하고 멋지게 꾸며놓은 식당의 맨 앞에다가 우리를 세워놓고는 클리프가 소개의 말을 하자 우리는 예의상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잭슨입니다. 잘 부탁 합니다." "해인이라고 합니다." "듀비 입니다." 그러자 예의상이라고 느껴지는 박수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저희들끼리 우리를 힐끔 바라보면서 속닥 거리는 모습들도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처음에 우리를 맞은 지부장이나 아니면 이번 작전의 수뇌급들이 보인 것 처럼 노골적인 실망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의아함과 호기심, 혹은 자신의 영역에 침입한 적을 보는 듯한 경계나 긴장 정도? 거기에다 가끔가다가 아까의 물단지맨처럼 주변의 분위기에 상관 없이 반갑게 환영해주는 자도 있었다. 말 그대로 아주 가아아아아끔 보이는게 문제면 문제겠지만, 그래도 아예 없는 것 보다는 나은 거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만나서 반가워요. 본부에서 오셨다고요?" 방긋 웃으면서 우리에게 다가온 사람은 아가씨였다. 그것도 보통 아가씨가 아니라 엄청 예쁜 아가씨였다. 나보다도 반뼘은 더 커보이는 키에 들어갈데 들어가고 나올데 나온, 남자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멋진 글래머 몸매, 거기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하고 곱슬곱슬하는 금발 머리에 파란 눈, 섹시하게 그을린 피부에 도톰하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붉은 입술... "와우~" 인생의 대부분을 여자로 살아온 나 조차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섹시한 미녀였다. 그러나 마치 여우처럼 살짝 치켜 올라간 눈에 날카로운 빛이 어린 걸 보아 흔히 말아는 골 빈 글래머는 아닌 듯 했다. 뭐, 그건 어쨌든 나 조차도 눈을 떼지 못하는 미녀였으니 남자들인 잭슨이나 심지어 듀비 마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를 쳐다보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왜 멋진 미남이나 예쁜 미녀에게 눈이 돌아가는 건 인간으로써 당연한 본능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물단지맨이 와서 그녀와 우리들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야, 벌써 이야기를 나눈 건가요? 내가 소개해주려고 했는데..." 그의 말에 나는 그제야 무례하게도 그녀의 질문에 대답도 안 한 채 그녀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자리에서 사과의 말을 건넸다. "정말 죄송합니다. 너무 아름다우셔서 저도 모르게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너무 정중한 나의 사과에 금발 머리의 쭉쭉 빵빵 미녀는 놀랍다는 둣 눈을 동그랗게 치켜 뜨더니 호호 하고 웃었다. "호호호~ 어머나, 그렇게 정색을 하고 사과를 할 것 까지는 없잖니. 내가 무안하게시리... 아직 젓살도 다 빠지지 않은 어린 녀석이 그런 말투를 쓰다니... 애늙은이 같잖아?" '허, 허거걱... 애, 애늙은이?' 그녀의 말에 경악한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붕어처럼 입만 벙긋 거렸다. 그녀의 말투를 보아하니 나를 어린 애 취급하는 듯 하는데, 그럼 아까 우리에게 다가올 때 사용한 존대는 잭슨과 듀비를 향한 것이었단 말인가? '내, 내가... 그렇게 어려보이나?' 상회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런 취급을 조금도 당하지 않았었는데, 이 상회에 들어와서는 툭하면 툭하면 애송이라 불리며 어린 취급을 당해야 했었다. 뭐, 사실 그런 취급 당해도 할 말은 없는 것이, 상회에 들어와 같이 어울리는 이들 중 내 또래가 하나도 없이 모두 나보다도 나이가 적게는 몇 살에서 몇 십살, 심지어 레이언이나 크리스 같은 경우에는 백 몇살까지도 차이가 났으니 그들이 나를 애 취급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머리로 이해는 해도... '계속 그런 대접 받으면 열받는단 말이다.' 자신들도 내 나이였던 적이 있었으면서 그 생각은 안 하고 항상 어른이었던 것 처럼 구는 모습에 솔직히 약올랐다. 그리고 괜히 나는 왜 이렇게 늦게 태어난 걸까... 하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물론, 그럴때마다 나이 많은게 좋더냐... 하고 그 생각을 지워버리지만 말이다. 내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건 말건, 뒤늦게 정신을 차린 잭슨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랜드마지부의 미녀 버지니아는 외모 만큼이나 내면도 아름답다더니 그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그 유명한 버지니양을 만나 참으로 영광입니다. 그레이험 본부의 잭슨이라고 합니다." "호호호, 본부에 있는 분들은 모두 그렇게 아부를 잘 하시나요? 하지만... 뭐, 듣기에 나쁘지는 않군요." '헉... 나는 애송이 취급을 하더니만... 잭슨이랑 나랑 몇살 차이가 난다고 저 넘은 성인 대접을 해준단 말이냐아아아~~' 버지니아라 불린 그 금발 미녀의 반응에 내가 어떤 생각을 하던 상관없이 매끄러운 잭슨 녀석의 답변이 이어졌다. "제 말이 귀에 거슬리지 않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잭슨이 귀족들이나 하는 식으로 한 손을 배에 얹고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 - 어차피 아부하려고 그러는 것이겠지만... - 우리를 보고 있었던 듯한 어떤 넘의 이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이고, 본부에 있는 넘들은 모두 기름통에 한번 빠졌다가 나온 모양이지? 본부에 가면 느글 느글 거려서 우째 살랑가 모르겄군." 그러나 모두들 이런 일에는 익숙한 듯 그의 말을 못들은 척 눈길은 커녕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대화에나 집중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합석하시겠습니까? 제 일행들을 소개시켜 드리죠." "기꺼이 합석하도록 하죠. 아, 이쪽은 이미 아시는 사이겠죠? 제 동생이예요." 그녀의 말에 혼자 속으로 궁시렁 궁시렁 대던 나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우연이 있나. 그런건가요?' 잭슨의 반응에 물단지 맨은 하하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보니 정식으로 소개할 시간도 없었군요. 비토라고 합니다." "하하하, 그렇네요. 도움은 받았으면서 정작 서로 소개할 시간은 없었으니... 저는... 아, 들어서 아시겠지만 잭슨이라고 합니다." 아까 버지니아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옆에 비토도 있었다는 걸 상기해낸 잭슨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자 비토가 사람 좋게 웃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이쪽은 듀비입니다. 블루 엘프죠. 그리고 이쪽은 해인이." "아, 그러고보니 어린 수인족도 같이 있지 않았습니까?" "무척 피곤했는지 일어나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푹 쉬라고 나두었습니다." "그런 거였습니까? 체력 강하기로 이름 높은 수인족이 나가 떨어질 정도라니... 무척 힘든 이동이었나보군요?" "하하하, 그렇다기 보다 익숙하지 못해서 그런 걸 겁니다. 아마도..." 맨 처음 이동할 때 고생한 것이 떠올랐던지 잭슨의 안색이 잠시동안 헬쓱해졌지만, 그는 곧 하하 웃으면서 얼버무렸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버지니아와 비토 남매랑 친해질 수 있었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날 저녁 식사 이후로 그들을 자주 만날 수가 없었다. 이유인 즉슨, 그들은 우리가 지원하기 위하여 온 이번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버지니아양은 남들 눈에 확 뜨이는 외모와 그에 못지 않는 실력으로 인하여 그랜드마 지부의 버지니양 하면 너무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번 처럼 비밀스러운 임무에 투입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그녀를 눈치 챈다면, 그 즉시 베지테크스 상회 그랜드마 지부를 쉽게 연관짓게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비토 또한 버지니양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덩달아 유명해져서 어느 사이엔가 그 두 남매는 비밀스러운 임무에는 제외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명한 것도 가끔은 안 좋은 점도 있는가 보다. 하기야, 어떤 일에든 다 장단점이 같이 있기 마련이지만 말이다. 이러저러한 일들이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간 이번 작전에 참여할 인원이 다 모이자 작전 계획은 금방 짜여질 수 있었던지 그 다음날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그 작전이라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제 23화 내가 물로 보인다 이거지? 해민이는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가 저녁을 먹고 방으로 되돌아 갔을때에도 여전히 자고 있었다. "얘 아직도 자네?" 침대에 웅크린 채 눈을 감고 있는 해민이의 머리카락을 슬며시 쓸어 올리며 중얼 거리자 잭슨이 다가왔다. "왠지, 아까보다 더 안색이 창백한 거 같다?" 그가 잠든 해민이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한마디 하자 나는 새삼 해민이의 얼굴을 다시금 살펴 보았다. 방금 전에는 원래 애 얼굴이 흰 편인데다가 날이 어두워져서 그런 것이려니... 하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평소 발그레한 뺨이 핏기가 하나도 없는 거였다. "정말 그러네? 어디 아픈 거 아냐?" 놀라 잭슨을 바라봤지만, 그는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글쎄... 미안하지만 수인족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어서..." 잭슨이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난처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수인족은 물론이거니와 엘프나 인어같은 이종족들을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들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을리가 없었다. "어쩌지? 여기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볼까?"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달리 방법도 없었다. "우선은... 내일까지 두고 보자. 그래도 안 깨어나면 그때 이야기 하자고." "내일까지 기다리다가 혹시 늦는 거 아니야?" "설마... 크게 다친 것도 아니잖아. 단순한 몸살일 수도 있어. 어쩌면 내일은 팔팔하게 일어나서 돌아다닐 지도 모르지." "그랬으면 좋겠지만..."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잘 덮혀있는 시트를 괜히 다시 정리해줬다. 스스로 해민이의 보호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정작 해민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워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자기 비하에 빠질 것만 같아서였다. 수인족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아무것도 못한 채 걱정만 하지 않고 그를 위해 뭔가 조처를 취해줄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에휴, 내일 기회가 된다면 당장 수인족에 대해 알아봐야겠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는데도 해민이가 여전히 안 좋은 안색으로 일어나지 못하자 우리는 결국 비토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가 수인족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랜드마 지부에서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극소수의 인물 중 한명이라 도움을 청하려니 떠오르는 이가 그였던 것이다. 다행이도 비토와 친한 이중 한 사람이 수인족에 대해 제법 알고 있다고 했다. 그래 비토가 그의 도움을 구하러 가는 사이 우리는 아침 먹으러 갈 생각도 못하고 비토가 수인족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를 데리고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기다리던 이는 아니 오고 정말 보고싶지 않았던 시트맨이 온 거였다. "무슨 일이죠?" 그 넘에게 당한게 있었으니, 아무리 타인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잭슨이라도 고운 말투가 나올리가 만무했다. 그런데 그 시트맨 넘은 지가 한 짓은 다 잊어버렸는지 아주 가관으로 목소리를 쫘악 낮게 깔아 대꾸하는게 아닌가? 그렇게 말하면 멋져 보이는줄 아는감? "제 3 연무장으로 집합하라는 호출이요." "지금 당장?" 아픈 - 아직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 해민이를 데리고 갈 수도, 그렇다고 그 혼자 두고 갈 수도 없는 터라 우리가 망설이자 그 시트맨 넘이 아주 못을 박듯이 내뱉는 거였다. "지금 당장 모이랍시오." 시트맨의 단호한 말에 잭슨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나를 돌아보았다. "우선 갔다 오자." "해민이는?" 내 항의 어린 시선에 잭슨이 작게 웃더니 듀비를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듀비가 해민이랑 같이 있어주겠어요? 어차피 듀비는 작전에서도 해인이랑 같이 행동할거잖아요. 아무래도 이번 작전에 해인이는 큰 역할을 맡게될 거 같으니까... 해인이는 작전 설명에 직접 가야 할 거 같고... 게다가 우리 중에서는 이런 일에 내가 경험이 많으니까 나도 가야 할 거 같고..." 잭슨은 듀비를 혼자 남게 한다는거에 좀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 끝을 흐렸다. 그러자 듀비는 잭슨을 생각해서인지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여기 남을테니 걱정 마시고 다녀 오십시오." "정해졌으면 빨랑빨랑 갑시다잉? 이거 늦었다고 나만 혼나는거 아뇨?" 그 말을 들으니까 왠지 더욱 더 꾸물꾸물 대서 정말 그 녀석을 혼나게 만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잭슨이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깨를 툭툭 치며 먼저 앞장서서 방을 빠져 나가자 어쩔 수 없이 나도 서둘러 밖으로 나가야 했다. 하지만, 도저히... 이대로 참다가는 도저히 열받쳐서 견딜 수가 없을것 같아 나는 슬며시 복도 공중에서 동동 떠다니고 있는 죄 없는 애들을 노려봤다. 씨익~ 내가 그렇게 슬며시 웃자마자 그와 동시에 우리의 발걸음 소리만 들리던 적막하던 복도에 요란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이쿠~" '우하하하~~' 라고... 생각 같아서는 속으로나마 신나게 웃어주고 싶었지만... 더욱 더 열이 받게도 그 넘은 소리만 요란하게 질렀지 앞으로 넘어지려고 하자마자 몸을 둥그렇게 말아 낙법으로 유연하게 한번 구르고 벌떡 일어나는 게 아닌가? 거기에다 더불어 뒤를 슬쩍 돌아보며 기분 나쁘게 씨익 웃는 거였다. 마치 내가 수작을 부렸다는 걸 다 알아챘다는 듯이... '열받아, 열받아, 열받아아아~~' 그 넘이 고꾸라지면 놀려줄 말까지 다 생각해 놓고 있었는데... 저 녀석의 몸이 저렇게 재빠를 줄은 몰랐던 것이 실수였다. 그래 다시 어떻게 하면 저 녀석을 혼내줄까 속으로 고민 고민 하고 있는데 잭슨이 내 어깨를 툭 치더니 고개를 설래설래 저어 보였다. '쳇....' 시트맨의 안내를 받아 가게 된 연무장은 건물 지하에 있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되는 작전 훈련을 하게 되다보니 특별히 마련된 듯 했다. 그레이험 항구 도시에 있던, 내가 훈련 보조를 빙자한 잡업을 하던 그 곳 보다는 작지만 (그 곳은 종합 운동장 크기 였다. ) 그래도 실내에 있는 공간 치고는 꽤나 넓은 (보통 학교 운동장 만했다.) 그 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클리프를 비롯하여 우리가 이 곳에 온 첫날 클리프의 사무실에서 봤던 네 남자들도 함께 있었다. 시트맨이 빤히 쳐다보는 그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모여있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자 - 그도 이번 작전에 참여하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잭슨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 것 같았는데 내 착각이려나? - 클리프가 잭슨과 날 힐끔 바라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해민이와 듀비가 없는 것에 대해 뭐라 한 마디 할 줄 알았는데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괜히 찝찝한 것이 이걸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아무리 같은 상회 일원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아랫 사람이 아니라서 함부로 터치하지 못하는 걸라나?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만...' 아무래도 이 곳에 와서 푸대접을 많이 받다보니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가 괜히 찝찝하고 혹시 무슨 의미가 있는 건 아닌가.. 하고 고민하게 되었다. '아아,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해... 레이언 녀석, 혹시 이 곳에 와서 이런 푸대접을 받게 될 줄 알고 한달이라는 휴가를 약속한게 아닐까?' 지금 심정으로는 그 휴가가 절실하게 필요 했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잽싸게 돌아가서 어디 좋은 온천 휴양지라도 알아봐야겠다. 내가 임무 끝에 다가올 행복한 휴가 - 절대적으로 행복해야 한다. 안 그럼 열받아서 내가 뭔 짓을 할지 모른다. - 를 상상하며 피곤한 정신을 달래고 있는데 클리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다 모였으니 이번 작전을 설명하겠다. 우선 이번 작전은 세 조로 나누었다. 임무에 따라 조 이름을 잠입조, 혼란조, 회수조라고 부르겠다." 거기서 잠시 클리프가 말을 멈추고 고개짓을 하자 기다리고 있었던 듯 네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혼란조는 따로 두 팀으로 나뉜다. 그럼 조합 4개의 조가 되제? 회수조는 내가 직접 지휘한다.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조니까 말이다. 혼란 1조는 루터가, 혼란 2조는 도터가 맡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잠입조는..." 거기서 잠깐 나를 바라보던 클리프는 단숨에 내뱉었다. "본부에서 지원 나온 해인군이 지휘한다." '엑? 나? 잭슨도 아니고 나? 이게 도대체...' 나는 물런이거니와 잭슨도 약간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니, 솔직히 이런 일에 경험이 전무한 나를 조장으로 세운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 아닌가? 모인 무사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날 대놓고 애송이 취급한, 도터를 비롯한 세 남자도 아무런 말도 안 하는 거였다. 뭐, 그들이야 사전에 이야기가 되었겠지만 무슨 근거로 내가 조장 되는 걸 납득했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혹시 클리프가 자신의 직위로 내리 누른 건가? 그렇다고 남들 가만히 있는데 내가 나서서 못하겠다고 하기는 또 뭣해가지고 황당해 하는 와중에 그냥 잠자코 있는 사이 - 사실 말할 겨를도 없었다. 곧바로 조원 호명이 있었기에... - 조장 밑에 조원들이 척척 나누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더더욱 황당한건 잭슨이 루터가 지휘하는 혼란 1 조에 배치된 거였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잭슨이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자기가 배속된 혼란 1조 조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리고 황당하게도 내 곁으로 톰슨과 싱거가 다가온 거였다. 오늘 하루동안 올 해 놀랄 일을 다 당하는 듯한 심정이었다. 그들은 나 외에 다른 조의 조장을 맡은 이들과 함께 작전 계획을 짜는 자리에 참여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래 나는 아까 조장을 발표할 때 잠입조 조장으로 그들 중 한 명이 맡을 것이라 여겼었다. 그런데 조장은 내가 되고 그들은 내 지휘를 받을 조원이 된 거였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잭슨이 중얼거리던 말을 되내이며 나는 클리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는 어떤 두 사람을 시켜 커다란 궤도를 가지고 오게 했는데, 그 곳에는 커다란 저택의 되면이 그려져 있었다. 이번에 우리가 방해할 경매가 열리는 장소였다. "잘 들어라. 이번 경매는 이 저택 지하에서 열린다고 한다.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이번 특상품은 임신한 수인족 여인이라고 하더군." 수인족이 노예로 팔리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왜 임신한 수인족 여성이 특상품인지는 그 당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두명이라서 특상품이라고 불리는 것이려니 했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갓 태어난 수인족의 아이를 어머니에게서 떼어 놓고 인간 손에서 길들이면 그 인간에게 충성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거였다. 한번 충성하게 만들면 인간과는 달리 배신을 모르는데다가 왠만한 장정 서넛, 심지어는 대 여섯 정도는 쉽게 처리할 능력이 있었으니 보디가드로는 최상이었고, 외모 또한 아름다웠기에 돈 많은 넘들의 애완용으로 부르는게 값일 정도로 비싸게 팔린다고 한다. 왠만한 저택 값은 쉽게 상회하는 가격이라나 어쨌다나... 게다가 덤 - 이렇게 말하면 뭣하지만 - 으로 여자 수인족까지 얻을 수 있었으니 가격은 배로 치솟았다. 여자 수인족이 있다면 아기 수인족을 나중에 또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방법이 인간적으로 해서는 안될 짓이었지만 말이다. 그런거 보면 인간은 잔인해지려면 악마 저리가라 할 정도로 잔인해 지는 생물이었다.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번 작전의 목표는 그 가여운 수인족 여인을 구출하는 한편, 그녀를 사기 위하여 돈이 많아 주체를 못하는 넘들이 바리바리 싸 가지고 온 귀중품들도 덤으로 챙기는 거였다. "잠입조는 경매에 참가한 것 처럼 꾸며 잠입해 있다가 혼란 1, 2조가 혼란을 야기시켰을 때 경매에 참가한 자들을 잠시 묶어두도록 한다. 그때 저택의 무사들이 달려들겠지만, 혼란 1, 2조가 상대할테니 잠입조는 경매 참가자들에게만 신경 쓰도록. 그리고 회수조는 저택의 시선이 그 쪽으로 쏠려 있을때 목표물을 회수한다. 회수 완료시 신호탄을 쏠테니 그때 전원 철수한다, 이상. 질문 있나?" 클리프가 말을 끝내길 기다렸다는 듯 잭슨이 손을 번쩍 들었다. "다른 조는 몰라도 잠입조는 임무에 비해 인원이 너무 적은 것 아닙니까?" 클리프는 그런 질문이 나올 줄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 막힘 없이 대답했다. "그건 나도 안다. 하지만, 잠입조에 인원을 더 보태주고 싶어도 불가능 하거든. 경매에 참여하는 사람은 본인 이외에 경호와 수행원을 다 합하여 최대 3명가지 데리고 갈 수 있다는 규칙이 있다. 그런 규칙이 없다면 경호원들을 우르르 데리고 와 분란을 야기시켰을 테니 그쪽으로서는 필수조건이겠지만... 그리하여 우리 지부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와 본부에서 손.꼽.힌다는 실.력.자를 배치한게 아닌가? 우리로써는 가능한 한 최대한의 지원을 해 준 거야." 그에 잭슨의 입이 막히자 이번에는 내가 손을 들었다. "질문이요." "뭔가?" "그럼 저와 같이 가는 이들은 누구누구죠? 이 두분하고 듀비나 해민이 둘 중 한명입니까? 지금 말씀드리자면 그 둘은 저와 떨어지려 하지 않을텐데요?" "수인족은... 그 곳에서는 애완 동물 취급하기 때문에 허용 인원수가 찼다 하더라도 데리고 들어가는 게 가능하다. 그러므로 너와 같이 가는 이들은 저 둘과 너와 같이 온 그 둘이 되겠지." "그거 다행이군요. 그럼, 이번 경매에 참여하는 이들은 대충 몇명 정도 되죠?"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50여명쯤? 참가 인원이 그 정도이니 경호 무사들까지 합한다면 100명은 넘는다고 보면 될 거다." 그의 말을 가만 듣고 있자니 좀 기가 막혔다. "그러니까... 다섯명이서 백명을 훨씬 넘는 이들을 상대하라는 겁니까?" "말하자면 그렇지." "하..." 두려운 건 아니었다. 임무의 성공이나 실패에 상관 없이 내 몸 하나 무사히 빠져나올 자신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기가 막힌건 클리프가 이 임무를 나에게 맡긴 것이 내 실력을 높이 사서 그랬다기 보다는 날 희생양으로 세운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물론 이쪽 지부의 실력파 둘을 나에게 보내주기는 했지만, 뭐랄까... 그건 나에게 도움이 되라고 보냈다기 보다는 변명할 거리를 만들기 위해 보내준 것 같았다. 지금은 나를 희생양으로 세운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나중에 혹여라도 -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 내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우리쪽에서는 최선을 다해 도와 줬다.'라는 식으로 변명할 수 있게끔 말이다. "왜? 못할 것 같나?" 이죽거리는 내용이었지만, 말투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삐딱한 반응을 이끌어내기에는 충분 했다. "그렇다면 어쩌실 겁니까? 이제와서 작전을 변경하기라도 하실 겁니까?" 팔짱까지 딱 끼고 건들거리며 이죽거리자 클리프의 주위에 있던 지부 사람들의 눈이 치켜 올라갔지만, 정작 당사자인 클리프는 옅게 미소만 띄울 뿐이었다. "불가능하단 것을 자네도 알고 있겠지? 그리고 자네는 우리를 돕기 위해 온 것이 아닌가? 어렵더라도 임무를 완수해주기를 바라네. 참고로 말하자면 정체만 들키지 않는다면 그 곳에 있는 자들을 죽여도 무방하네." "말은 참 쉽게 한다." 나는 잭슨과 우리에게 주어진 방으로 돌아오면서 투덜 거렸다. 해민이가 걱정되 걸음은 자연적으로 빨라졌지만, 그 와중에 연무장에서 들었던 작전에 대해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참 이 감정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우습게도 클리프에게 서운한 감정이 전혀 안 들었다. 이 곳에서 그 동안 감정이 너무 안 좋았기에 아마도 나는 쉽고 편안한 임무를 맡겼더라도 혹시 내가 큰 공을 차지할까봐 날 배척하는지 의심부터 했을 거였다. 그래 그 임무를 맡을때 그럴 줄 알았다...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다 싶었다. 게다가 또 다른 문제는 다른 조들은 곧 자신들의 임무에 맞게 훈련에 들어간다는데, 우리조는... "어휴, 정말... 뭘 해봤어야 훈련을 하자 그러던지 말던지 하지?" 기가막히게도 내 조원으로 들어온 두 녀석이 그냥 개인적으로 알아서 하자고 하는게 아닌가? 그래 내가 기가막혀서 바라보니까 "그럼 할게 있나보지?" 라고 하는 거였다. "아으... 열뻗쳐. 정말... 훈련을 핑계삼아 둘을 확 두들겨 패버릴까?" 다른때 같으면 나의 이런 투덜거림을 거들던지 달래던지 하면서 뭐라 반응을 보였을 잭슨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그래 의아해서 힐끗 돌아보니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거였다. "뭘 생각해?" "아니... 그냥 좀..." "그냥 뭐?" "별거 아니야." 무지 심각한 얼굴로 별거 아니라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만은, 자기가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데 캐묻기도 뭐해서 그냥 신경 끊고 발걸음만 재촉했다. 그런데, 방에 도착해보니 무척이나 황당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크르르르..." 해민이는 드디어 정신을 차렸는지 눈을 뜨고 침대 위에 있었는데 평소의 반짝반짝 빛나는 예쁜 황금색 눈동자는 어디가고 살기가 가득 든 가늘어진데다 초점도 제대로 맞지 않는 눈이 사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방에는 듀비와 비토는 물론 버지니아에 처음 보는 왠 중년 남자가 조심스레 해민이를 바라보고 있는 거였다. "무슨 일이에요? 해민아?" 그들이 혹시나 해민이에게 위협이라도 가해 애가 저렇게 된 건 아닌가 싶어 그들 사이를 지나쳐 해민이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가까이 가기도 전에 해민이가 몸을 더욱 낮추며 나에게 살기를 드러내는 거였다. "카오옹~!!" "해민아?" 설마 나에게 이럴 줄은 몰랐는데, 여차하면 나에게 달려들 것 같은 해민이의 모습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 그때 방에 있던 중년 남자가 날 잡더니 반 강제적으로 방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거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방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몰려 나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딱히 누구를 집어 물을 수 없어 방에 있던 이들을 향해서 묻자 나를 데리고 나왔던 중년 남자가 대답해줬다. "큰 일은 아니니까 그렇게 걱정할 것 없다네. 수인족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할 과정을 지금 겪는 것 뿐이니까." "예?" 뭔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되묻자 그제야 좀 더 자세한 설명이 돌아왔다. "지금 수인족의 성년식을 치르는 거라네." "성년식이요?" "그래. 수인족은 성년이 되는 날을 기해 한 며칠 정도 저런 상태가 된다네. 수인족들은 그걸 '각성의 시기' 라고 부르는데 저 아이가 겪는게 바로 그거지." "그, 그런 겁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그냥 내버려 두면 돼. 수인족들이야 어디 아무도 없는 동굴 같은 데에 혼자 가둬두고 정신 차리면 스스로 나오게 하지만, 여기서야 어디서 동굴을 구하겠는가? 그냥 방에 가둬 둬야지. 혼자 가만히 내비두면 자기가 알아서 정신 차릴 거야." "아... 그렇습니까?" "아, 그리고 한가지 더 주의할 게 있는데 저 상태에서는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하거든. 그러니 정신 차릴 즈음 무척 배가 고플 걸세. 그러니 한 사을 뒤쯤에 방 문 앞에 먹을 것을 가져다 놓고 그걸 다 먹을때까지 가까이 가지 않도록 하게. 안 그러면 덤벼들 수도 있거든." "예? 서, 설마요." "믿기 어려워? 갓 성년이 된 수인족의 50%가 '각성의 시기'를 끝내자마자 죽는다는 걸 알면 놀라겠군." 중년 남자의 말에 나는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서로 잡아먹는 건가요?" "아하하하... 상상력이 참 대단하구만. 수인족이 아무리 피를 좋아하고 호전적인 종족이긴 하지만 같은 종족을 잡아먹지는 않는다네. 단지 막 성년이 되어 혈기가 마구 넘치는데다 배까지 고파서 신경이 무척 날카로운 상태가 되기 때문에 작은 자극에도 마구 공격을 하게 되는 거야. 사실 수인족들 사이에서는 서로 힘을 겨루는 건 흔히 있는 일이고, 그 일로 인해 다치거나 죽는 것도 다반사니 이상할 건 없는 일이지." "하아아..." "그래서 주의하라는 거지 잡아먹힐까봐 그러는 게 아니야." "아하하... 예..." "자, 그럼 해줄 말은 다 했으니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 "예에? 이렇게 도와주셨는데 무슨 사례라도..." 갑작스런 중년 남자의 말에 잭슨이 당황하며 입을 열자 그 남자가 손을 휘휘 저었다. "됐어. 뭘 바라고 온 것도 아니고, 단지 친한 녀석의 부탁을 받은 것 뿐이니 자네가 사례할 필요는 없네. 게다가 말로만 듣던 '각성의 시기'를 겪는 수인족도 봤고 말이야. 뭐, 구경 당한 당사자야 무지 신경이 날카로워졌겠지만... 허허허... 그럼 난 이만..." 사람 좋게 웃으며 등을 돌려 걸어가는 남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잭슨은 비토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 하는 사람이예요?" "여기 정보 처리 부서에 속해 계시는 분이세요. 여러가지 아는게 많으신데, 특히나 이종족에 대해 잘 알고 계시죠." "헤에..." "그나저나 이제 어쩔 거죠? 아무래도 다른 방을 찾아야 할 거 같은데." "그래야죠. 가까이 가지 말라는데 해민이 있는 방에서 같이 생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아앗~!!" 버지니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하던 잭슨이 갑자기 비명을 질러 나는 화들짝 놀랐다. "왜? 왜그러는데?" "짐! 우리 짐이 그 방에 있잖아!!" "헉스..." "어쩌지? 해민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다시 한번 들어갔다가 나올까?" "위험할 겁니다. 아까 그 녀석이 우리를 향해 덤비려고 했던 것 좀 보세요. 문가에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서 그나마 나았지,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면 지체 없이 덮쳤을 걸요?" 토드의 말에 잭슨이 나를 돌아보았다. "해인아, 네 정령술을 사용하면 안될까?" "에... 그 방법 밖에 없는 거냐?" 그러자 버지니아가 끼어들었다. "그러지 말고 며칠만 버티지 그래? 어차피 사나흘 뒤면 저 애는 정신 차릴텐데. 그때까지 급하게 필요한 거라도 있어? 왠만한 거는 내 동생에게 빌려서 쓰면 될 테고, 식사야 식당에서 하니까." "아,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그렇게 하자. 그렇지 않아도 아까 사람들이 있어서 상태가 안 좋을텐데 거기다가 더 자극하고 싶지 않아. 듀비도 괜찮죠?" 내가 버지니아의 제안에 적극 찬성하며 잭슨과 듀비를 바라보자 그 둘도 딱히 나쁠 건 없었는지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뭐... 선심 한번 쓰지." "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그럼 제가 빈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었다. 그래 잭슨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연무장으로 가가 바빴고 밤 늦게 파김치가 된 몰골로 흐느적 거리며 돌아와 침대 위로 푹 고꾸라졌다. 식사도 조원들끼리 훈련이 끝나고 같이 했기 때문에 그와 얼굴 마주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명색이 잠입조 조장인 주제에 무지 한가했다. 작전 계획일이 일주일도 채 안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뭐, 그래도 아주 빈둥대고 놀기만 한 건 아니었다. 첫날에는 건방진 조원 톰슨과 싱거가 찾아와 듀비의 실력을 알고싶네 어쩌네 하면서 대련을 신청하기에 내가 듀비에게 가능하다면 죽지 않을 정도로 밟아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랬더니만 듀비가 정말로 그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지 못할 만큼 목검을 몽둥이 삼아 두들겨 팬 것이 아닌가? 캬~ 그때 얼마나 시원하던지, 체한 것이 한꺼번에 쑥 내려간 기분이요, 며칠 동안 꽉 막혔던 코가 뻥 뚫린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그들 둘은 의무실에서 사람이 나와 들것으로 싣고 데려가야 했다. "캬아~ 듀비, 너무너무 잘 했어요. 듀비도 저 둘에게 쌓인게 많았나봐요?" 들것에 실려 연무장을 빠져 나가는 둘의 모습에 내가 너무 좋아하며 듀비에게 말을 걸자 그가 옅은 미소를 보이며 어깨를 으쓱 거렸다. "그런 가닙니다. 저희 마을에서는 자신보다 실력이 낮은 자가 가르침을 청했을 때 저만큼의 가르침을 내려주는 것이 예의인지라 그에 따랐을 뿐입니다." "녜?" "그러니 어른들께 가르침을 받으려 할때는 반 죽는 건 각오해야 합니다.더욱이 가르침을 받다가 다치는 건 치유술사들의 치유도 못 받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2, 3주는 꼼쩍 없이 누워 있어야 하죠." "허, 허걱... 진짜요? 그러다가 죽는 거 아니예요?" 내 두 눈이 휘둥그래지자 듀비의 미소가 진해졌다. "정말 죽이려고 가르침을 내리는 어른은 없죠. 그냥 온 몸에 피멍이 들거나 뼈가 부러지는 정도입니다. 그 정도에 죽을 정도로 저희 종족이 약하지는 않답니다. 게다가 한번 가르침을 받으면 얻는게 정말 많거든요. 각오하고 가르침을 받을 만 하죠." 그렇게 말하는 듀비의 얼굴에는 종족에 대한 것인지, 자신에 대한 것인지 모를 자부심이 가득 했다. "그, 그래요? 그렇다면 듀비도 그런 가르침을 받았나요?" "후후, 당연히 받았었죠. 일년의 절반을 침대에서 살았던 적도 있었는 걸요?" "허허... 그러면서 골병 안 들고 용케 지금까지 살아남았군요." "후후, 그 정도에 죽을 정도면 블루 엘프라고 할 수 없답니다." "그, 그런가요? 블루 엘프들은 정말 대단한가봐요." "어느 종족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그렇게 듀비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의무실에 실려간 둘은 집중적인 치료를 받아 작전 실행일 이틀 전에야 간신히 정상적으로 회복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우리 해민이가 드디어 '각성의 시기'를 무사히 넘기고 진정한 수인족으로써 거듭났다. 단지 며칠동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간동안 급속한 성장이 이루어져서인지 나보다 반뼘은 작았던 해민이가 나보다 약간 더 커져 있었다. 손, 발은 나보다 한 마디씩은 더 길어졌고, 커트 정도의 길이었던 금발 고수머리도 어깨에 닿을 듯 말듯 길어져 꽁지머리를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신체가 커지자 덩달아 위까지도 커졌는지 해민이는 그가 나오기 전에 미리 준비해 방 문 밖에다 가져다 준 음식을 다 먹고도 배가 차지 않아 식당으로 가서 장정 3인분의 음식을 더 먹어 치웠다. "엄청 먹는구나. 그렇게 배가 고팠어?" 같이 식당으로 가서 먹는 걸 지켜본 내가 놀랍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말을 건네자 식사를 다 끝내고 우아하게 냅킨으로 입가를 닦던 해민이가 씨익 웃으면서 대꾸하는 거였다. "당연하죠. 며칠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는걸요?" "허거걱..." 막 20대에 들어선 남자 같은, 맑고 청아한 목소리에 나는 입이 떠억 벌어졌다. 그러고보니 수인족은 성년이 되면 인간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듣기는 했다. 그러나 들어서 알고 있는 것 하고 실제로 접하게 된 것하고 어디 같겠는가? 머리로는 언젠가 해민이와 대화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막상 해민이가 말하는 걸 보게 되니 어쩐지 해민이가 낯설게 느껴졌다. 뭐랄까... 아직 결혼은 커녕 연애 한번 못해본 내가 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 어쩐지 어린애였던 자식이 갑자기 어린이 되어 나타난 걸 보는 심정이랄까? 이런 미묘하고 심숭생숭한 마음에 말을 못하고 가만히 있자 해민이가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많이 이상해요?" 그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꾸해줬다. "하아... 왠지 아들 녀석이 갑자기 여자 한명을 데리고 와서 결혼하겠다고 말하는 걸 듣고 있는 듯한 심정이야." 그러자 같이 와줘서 내 말을 듣고 있던 버지니아가 깔깔 웃으면서 내 등짝을 때렸다. "쬐끄만 녀석이 하는 말 하고는... 호호호, 너 그렇게 애늙은이처럼 굴면 여자애들에게 인기 없다고." "하, 하아아..." '여자애들에게 인기라니... 그런 건 이쪽에서 사양하고 싶은 거라구...' 우리는 해민이가 성년이 된 걸 기념하여 조촐한 파티를 하기로 했다. 비록 잭슨은 바빠서 참여할 수가 없었지만, 두 조원을 의무실로 실려가게 하는 바람에 더욱 더 한가해진 나하고 듀비, 버지니아와 비토 남매, 그리고 해민이를 살펴봐준 중년 남자까지 불렀다. 장소는 해민이가 각성의 시기를 보낸 넓직한 4인실 방, 음식은 비토가 준비해주었고, 나는 버지니아의 도움을 받아 밖으로 나가 해민이에게 줄 멋진 옷을 샀다. 해민이의 몸이 커지는 바람에 전에 가지고 있던 옷들이 안 맞아던 것이다. 뭐, 듀비나 잭슨, 아니면 비토의 옷을 빌릴 수도 있지만, 새로이 성년이 되었는데 남의 옷만 빌려 입힐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게다가 자금도 여유로워 나는 기분 좋게 지갑을 열었다. "자, 해민이가 성년이 된 것을 축하하며, 건배~!!" "건배~!!" 파티는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그날 저녁 당장에 열렸다. 어차피 시간이 많은 사람들만 있었던 터라 준비하는데 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뭘 거창하게 차린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단지 축하 케잌이랑, 해민이가 좋아하는 새끼 돼지 통구이를 비롯한 몇몇의 음식, 그리고 어른들이 마실 맥주랑 내 차지인 음료수 정도였다. 그런데 해민이 녀석이 건배하는 걸 보더니 자신도 맥주를 마시겠다고 나서는 거였다. 그래 당연히 나는 반대를 했다. "안돼!" 그랬더니 요 녀석이 컸다고 반항하는 거였다. "왜요? 저도 이제 다 컸다구요." "그래도 안돼." "안돼는 이유가 뭔데요?" '허걱...' 이 녀석이 머리가 굵어졌다고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려고 했다. 그리고 참으로 안타깝게도 나는 논리적으로 안돼는 이유를 설명할 껀덕지가 없었다. "에... 그러니까 많이 마시면 안 좋으니까 그러지." "그럼 적당히만 마시면 돼죠?" 내가 버벅거리자 요녀석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얄밉게 대답하는 거였다. "뭐? 아니.. 그게..." 그래 내가 못 마시게 하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려는데 정말 정말 얄밉게도 주변 사람들이 해민이를 응원하는게 아닌가? "뭐 어때? 이제 성년이잖아." "그래요, 그래요. 자자, 해민아 한잔 하거라. 성년이 된 걸 축하한다." 비토는 아예 잔을 해민이 손에 쥐어주고 맥주까지 가득 따라주는게 아닌가? "아니 이 사람들이 정말~!!" 내가 매섭게 주위 사람들을 노려보며 경고조로 말했지만, 허망하게도... 아무도 내 말에 신경 쓰지 않는 거였다. 게다가 해민이도... "조금만 마실께요. 그럼 괜찮죠?" 라고 말하며 냉큼 맥주를 마셔버리는게 아닌가? '크흐흐흐... 벌써 다 컸다고 내 말을 안 듣다니.... 이래서 자식 키워봤자 소용 없다는 말이 나오는 거야아아~ 내 귀여운 해민이가, 해민이가아아~~' 그날 나는 처음으로 나도 술을 마시고 싶어졌다. 해민이는 신체적으로도 성장했지만, 정신적으로도 성장했다. 문제는... 정신적으로 성장했다고 무조건 좋게만 볼 수 없다는 거겠지만 말이다. 전에는 항상 내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매사에 조심스러우며 방어적인 성격이었는데, 이제는 다 컸다고 매사에 자신감이 넘쳤다. 뭐, 자신감이 넘치는 건 좋지만, 혈기까지 같이 넘쳐서 녀석의 행동 하나 하나가 어디로 튈지 몰라 불안하다는게 문제였다. 더군다나 이 곳 지부 사람들 대부분은 우리에게 안 좋게 대하는데, 성년이 된 해민이는 그런 걸 못 참아 대놓고 으르렁 거리는 거였다. 그럴때는... 사실 조금은 속이 시원하기도 하지만... 마음에 안 든다고 무조건적으로 화를 내며 정면으로 대응하는게 옳다고는 볼 수 없지 않는가 말이다. 하지만, 그게 또 수인족의 방식이라니 - 마음에 안 들면 싸움을 걸며 무조건 승자가 옳은 것 - 어쩌겠는가? 오히려 지금은 해민이가 으르렁 거리면 지부쪽 사람들이 슬슬 피하는 형편이라 전보다 수월하게 지낼 수 있기는 하지만 왠지 마음 한편이 불안한 것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가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아... 이런게 자식을 키우는 기분인가 봐." 그러는 동안 시간은 착실히 흘러 작전 결행일은 하루하루 다가왔다. 경매가 열리는 그 저택의 도면을 머리 속에 기억 시키고, 퇴로로 지정된 거리를 직접 찾아가 눈으로 확인하는 등등의 잡다하지만 꼭 필요한 일들을 하다보니 나는 네개의 조 중 가장 한가한 조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 와중 얼결에 맏게 되었지만 그래도 의무는 다 하고자 내 머리 속에도 잠입할 방법이 착착 세워졌다. 그래봤자 손님으로 잠입한다는 계획 테두리나 준비는 다 지부에서 해줬지만, 세세하게 다듬는 것도 중요한게 아니겠는가? "여장을 해야겠어요." "에?" 내 선언이 갑작스러웠음인지 그 동안 나와 몰려다닌 일행들의 눈이 둥그래졌다. "그게 편할 거 같아요. 아무리 위세당당한 기사들을 데리고 있다 해도, 여자면 으례 조금은 안심하잖아요. 게다가 노예를 사러 다니는 어린 귀족 여자라면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어린애라 여길테니 경계까 늦춰지겠지요. 얼굴을 가리고 신분을 밝히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그런 자들이야말로 경계 대상의 일위지 않겠어요? 임무를 완수하려면 경게 대상이 되는 건 피하는 게 좋겠죠." "흐음, 기분 좋은 말은 아니지만 일리는 있네. 게다가 해인이는 얼굴이 곱게 생겨서 여장이 잘 어울릴 거야. 아, 그래. 내가 여장하는 거 도와줄까?" 버지니아가 눈을 반짝이며 제안하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우신 말씀. 사실 제가 부탁을 드릴 생각이었어요." "호호호, 넌 아주 훌륭한 코디를 만난 거라구. 기대해 내가 아주 예쁘게 꾸며줄게." "아하하... 예, 잘 부탁 드려요." 버지니아가 너무 좋아하며 말하자 조금 불안했지만, 여기서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그녀밖에 없었으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처음에는 그녀에게 이런 계획에 대해 말할 엄두도 못 냈었다. 처음 상회에 가입했을 때 상회 안에는 이런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과 그냥 단순히 운송 상회인 줄 아는 이들로 나뉘어 있다고 들었기에, 버지니아가 어느쪽인지 모르니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참 어이없게도, 그녀는 내가 잠입조 조장이 된 걸 이미 알고 있었고 며칠동안 친하게 지낸 것도 인연이라고 날 걱정해 주었던 것이다. 그녀도 지부쪽에서 나를 희생양으로 세운 거라고 엄청 흥분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를 - 그 대목이 쬐께 허망했지만... - 그런 자리에 밀어 세울 수 있느냐는 거였다. 잘 하다가는 지부장에게 쳐들어 갈것만 같아 - 이미 그럴려고 했다가 여러 사람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무산되었다는 건 나중에 안 일이었다. - 내가 죽지는 않을 거라고 자신있게 말해 흥분을 가라앉히기는 했지만... 이것도 나중에 같이 안 사실인데, 버지니아와 비토 남매의 실력이 높아 그들이 유명해지기 전에는 이런 일에 항상 참여했었고 지금도 가끔 다른 지방 지부에 지원을 나가기도 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이번에 너무 실력자들이 모자라 두 남매를 참여시키는 걸 심각하게 고려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본부에서 우리를 보내주겠다고 해서 그 안건이 철회된 거라나? "머리는 어쩔 거야? 솔직히 그 예쁜 머리카락을 그대로 이용 했으면 좋겠지만, 흔한 색이 아니라서 위험하겠지? 게다가 귀족 여자치고는 너무 짧아." "그렇죠? 그래서 가발을 썼으면 하는데요. 그리고 눈 색도 바꾸었으면 좋겠어요." "흐음, 그래야지. 아, 가면도 쓸래?" "좋죠." "그럼 은발 머리에 은색 가면은 어때? 무척 신비스러울 거야. 거기에 머리 장식이랑 귀걸이 목걸이도 다이아몬드에 은으로... 아니, 아니다. 빵빵한 귀족 아가씨가 은 장식을 한다는 건 말이 안돼니까, 백금으로 하자. 장식은 백금 한 세트로 통일하고, 드레스에 구두까지도 같은 계통의 색으로 차려입는 거야." "에엑? 그러면 너무 화려한데... 눈에 띄지 않을까요? 저는 그냥 단순하게 검은색 드레스로 하려고 했는데요." "노, 노. 안돼지. 그런데는 수수한게 오히려 눈에 튄다고. 화려하게 꾸며야 오히려 그런 쪽 분류로 보일 거야. 기사들도 가문의 문장은 없지만 삐까번쩍한 갑옷과 고급 망토를 걸쳐야겠지." 검지 손가락을 내 코앞까지 들어 올려 좌우로 흔들면서 좔좔좔 내뱉는 버지니아의 모습에 입이 떠억 벌어졌다. 평소 그녀가 몸매의 아름다움은 잘 살리면서 야하지는 않고 세련되게 입고 다닌다 생각 했더니만, 이런데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자자, 그럼 대충 정해졌으니 의상을 구해볼까나? 이런 것도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나도 덩달아 일어나며 물었다. "저도 도와드릴까요?" "아냐, 네가 돌아다니며 옷을 산다면 그쪽 사람들 눈에 뜨일지도 몰라. 그럼 안돼지. 특히나 너는 눈에 쉽게 뜨이고 잘 기억되는 타입이거든." 그녀의 말에 나는 내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입을 열었다. "제 머리카락때문에요?" 내 머리카락색이 이 세상에서 아버지와 나 단 둘 뿐이라는 걸 잘 알기에 이곳에서 외촐할 때는 항상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릴 수 있도록 챙 넓은 모자를 깊숙히 눌러 쓴 채 다니곤 했었던 것이다. "그것도 그렇지만, 너에게는 독특한 매력이 있어서, 외모가 아니라도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거든. 그러니까 너는 그냥 여기 있어. 나는 같이 잘 다니던 이들이 있으니까 그들이랑 가면 돼."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니 한 가지 걱정이 떠올랐다. "저기, 그런데... 버지니아가 산 옷을 제가 입고 나타나면 당신과 관련이 있다는게 들통나지 않겠어요?" 나는 무지 진지하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크게 웃어보였다. "오호호호~ 걱정할 거 없어. 나랑 같이 쇼핑하는 사람들도 네가 입을 전체 코디는 절대 모를테니 말야. 나만 꽉 믿고 있으라고." 그러면서 나에게 한쪽 눈을 찡끗해 보이는 거였다. 너무 자신 넘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더 이상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 그렇습니까?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변장 문제가 해결 되어 만사가 다 해결 되었다고 안도하고 있었건만, 또 다른 문제가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절대 싫습니다." "하아~ 정말... 이번 한번 뿐이라고 했잖아, 응? 이번 따악 한번마안~!" "실습니다." "자꾸 그렇게 고집 피울 거야? 그럼 이번 작전에 빠질 생각이란 말이지?" "그, 그건..." "그러니까아~ 응? 평소에는 이런거 절대로 안 시키잖아." "왜 하필 저만 그래야 합니까? 저도 기사처럼 꾸미고 가겠습니다." "나도 가능하면 그렇게 해주고 싶지만, 이미 설명했다시피 같이 갈 수 있는 인원수가 정해져 있으니까 그렇지." "그렇다면 다른 한 사람을 줄이면 되잖습니까?" "히유... 자꾸 억지 부릴 거야? 그렇지 않아도 인원이 적어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지 없을지 걱정되는 구만, 꼭 인원수를 줄여야 하겠어?" 그랬다. 문제는 해민이였다. 앞서 지부쪽에서 계획한 대로 나는 신분을 밝히기 싫어하는 어느 돈 많은 상인 혹은 귀족가의 자제로, 그리고 듀비와 지부에서 지원해준 톰슨과 싱거는 날 호위하는 기사로, 그리고 해민이는 다른데서 구입한 수인족 노예로 하기로 되어 있었다. 물론, 이게 해민이의 의사도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된데다 해민이의 역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거여지만, 인원을 한명이라도 더 채우려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었다 해도 해민이에게 못할 짓을 하긴 한 거지만...' 나는 찔리는 양심에 속으로 부터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하아...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누...' 그렇다고 고집 부리는 해민이를 작전에서 빼놓기는 너무 아까웠다. 성년으로 성장한 해민이의 능력이 얼마나 상승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성년식을 치르지 않은 해민이의 능력으로도 톰슨이나 싱거의 실력을 윗돌았기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톰슨이나 싱거를 다른 조로 넘기고 해민이는 그가 원하는 대로 기사로 분장 시켜 데리고 갈까 했는데, 톰슨과 싱거가 자신들을 떼어놓으려면 차라리 둘 다 안 하겠다고 강짜로 버티는 거였다. 참, 내 기가막혀서... 그래서 그럼 차라리 그러라고 했더니만 클리프가 와서는 기껏 보내준 실력자를 왜 다시 제하려고 그러냐고 펄펄 뛰는 거였다. 아직 어려 경험이 없다지만 그렇게 생각이 없느냐는 소리부터 시작해서 자신네 지부에서 보내준 이들을 다 보내는 건 우리 지부를 무시하는 처사라고까지 하는 거였다. 그래서 느낀 거지만... 남의 지부에 지원 나와서 조장까지 한다는 건, 정말 못해먹을 짓이었다. 그렇다고 듀비를 떼어 놓는다는 건 생각도 못하겠고... 그러니 어쩔 수 없이 해민이가 어렵겠지만 이번 한번만 눈을 딱 감고 해준다면 다 해결이 될 듯 했는데... 저렇게 필사적으로 싫어하니 한숨만 푹푹 나올 뿐이었다. "하아... 어쩔 수 없지. 그럼 이번 작전에서는 아쉽지만 해민이를 빼고..." 그러자 해민이가 무지 상처받은 눈으로 나를 돌아본다. "어떻게...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에휴휴휴~~ 해민아... 나도 너를 꼬오옥 데리고 가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잖니. 내 마음만 강요해서 네가 무지무지 하기 싫은 차림을 시키는 것도 차마 못할 짓이니..." 그러자 해민이의 입이 댓발 튀어나왔지만, 자신도 할 말은 없었는지 아무 말도 못했다. 그래, 나는 결국 해민이는 참여시키지 않은 걸로 결정을 내리고 힘 없이 그걸 다른 조원들에게 -그래봤자 세명이지만... - 알리려고 몸을 일으키는데 해민이가 나를 불렀다. "잠깐만요." "응?"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해민이를 바라보니, 해민이는 몇번이나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이를 빠득 빠득 갈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얼굴은... 가릴 수 있는 거죠?" 그 순간 나는 너무 기뻐서 해민이에게 달려들어 녀석을 얼싸안고 부비부비 댔다. "어흐흐흐~~ 그럼, 그럼. 그 정도는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해줄 게. 에고, 예쁜 녀서어억~~ 고마워, 고마워어어~~" 정말... 힘들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나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버지니아의 손에 이끌려 몸단장을 해야 했다. 불쌍한 해민이는 누군가의 소유물이라는 표식을 팔목에 차고 후드 달린, 땅에 끌릴 정도로 긴 망토를 둘러 머리부터 발 끝가지 가렸다. 그리고 듀비는 머리카락으로 귀를 덮고 그 위에 넓적한 띠를 둘러 길고 뾰족한 귀를 가렸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피부에는 진한 갈색의 향료를 발라 인간 같지 않은 파르스름한 피부를 가렸다. 그러니까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색을 가진 늠름한 인간의 기사처럼 보이는 거였다. 그리고 나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의 연한 금발의 가발을 쓰고 눈은 이미지 마법으로 밝은 청록색이 되었다. 얼굴에는 눈 주위와 콧등을 가리는 은색의 광택이 나는 가면을 썼고, 머리는 반 묶음 식으로 틀어 올려 높은 곳에서 묶어 교묘하게 옆 얼굴을 가리도록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게 하고는 다이아몬드와 자수정으로 꾸며진, 자그마한 왕관 모양의 머리장식으로 고정시켰다. 거기에 몸에 두른 것은 연한 보리빛의, 보기에도 엄청 거추장스러운 드레스였다. 상체와 엉덩이 부분까지는 연보라색이고 치마 아랫단으로 내려갈 수록 색이 흐려져 종아리 부분 부터는 아이보리색으로 변해버렸는데, 드레스 전체에는 자잘한 다이아몬드들이 드문드문 매달려 있어 움직일때마다 반짝 반짝 빛을 발했다. 목 주위는 넓게 파여 목이 날씬하고 길게 보이도록 했으며, 그 주위는 굵은 레이스 처리로 되어 있었고, 어깨는 마치 새가 양 날개를 펼친 것과 같은 모양새였으면, 소매는 팔꿈치를 덮었다. 거기에 치마자락은 엄청나게 길고 풍성해서 치마 속에 애들 한 두명은 쉽게 숨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걸로도 모자라 허리에 마치 스카프 처럼 보랏빛 천을 덧대어 둘렀다. 그리고 전혀 보일 것 같지 않은 발에는 흰색 가죽으로 만들어져 진주로 장식된 화려한 하이힐이 신겨졌다. "꺄아~ 내가 한 거지만 너 정말 예쁘다." 화잘발로 인하여 뺨은 발그레하고 입술은 분홍빛으로 촉촉하게 빛났다. 하이힐 때문에 불편한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전신 거울을 바라보던 나는 흐믓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버지니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엄청 예쁘기는 한데... 처음에 말하던 것과는 많이 다르네요. 그때는 흰색 일색이 될 줄 알았는데..." "호호호, 그게 말이지 쇼핑을 하다보니 생각지 못했던 에쁜 것들이 너무 많더라고. 그래서 생각을 바꿨지. 마음에 안 드니?" "설마요. 이런 말 내 입으로 하기는 뭣하지만 이렇게 꾸미니 저도 엄청 미인으로 보이네요." "오호호호~~ 나도 같은 생각이야. 자 마무리를 하고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남정네들에게 가 보자고." 그러면서 버지니아가 건네주는, 팔뚝 중간까지 올라오는 흰색 실크 장갑을 끼고 밖으로 나가니 기다리고 있던 세 남자 - 해민이는 시커먼 후드를 뒤집어 쓰고 있었기에 눈이 안 보였다. -의 눈이 휘둥그레 떠져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버지니아는 무지 만족스러워 했다. "호호호, 어때요? 누가 봐도 있는 집안의 영애지요? 아아, 생각 같아선 귀족 사교계에 내놓고 싶다니까요. 해인아, 혹시 그럴 생각 있니?" "아하하하... 별로요..." "웅... 아쉽네." "자, 서둘러 주십시요. 여기서 지체하다가는 경매 시간에 늦을 것입니다." 버지니아는 몇 마디 더 하고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싱거의 재촉에 다른 말은 못하고 마지막으로 치마자락을 정리해 주면서 나에게 속삭였다. "임무를 무리해서 꼭 성공시키려 하지 말고 무사히 돌아 올 생각이나 해. 네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다 해도 여기서 널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예, 명심할게요." 건물 밖으로 나가니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급스러운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마부는 물론 상회 사람이었다. "부디 몸 조심해." 걱정이 가득 담긴 버지니아의 표정에 나는 생긋 웃어줬다. "걱정 마세요. 무사히 돌아올테니까요." 나와 해민이, 듀비가 마차에 오르자 문이 닫혔고 - 톰슨과 싱거는 말을 타고 동행하기로 해다. - 곧 마부의 '이럇!'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다그닥, 다그닥~ 경쾌한 말 발굽 소리를 들으며 마차 안의 세명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치 007을 생각나게 하는 이런 일을 처음 맡았기에 다들 긴장과 흥분으로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거였으면 얼마나 좋겠는가만은, 마차 안에서 초긴장 하고 있는 것은 나 뿐이었다. 불안해 하는 것도 긴장의 연속으로 봐준다면 말이다. 그 이유가 앞으로 해야 하 일때문이 아니라 바로 옆 해인이 때문이라는 것이 좀 허망하지만, 곧 있을 작전은 마차 안에 있던 우리들에게는 있으면 있으려니... 하는 그저 무덤덤한 일이 되어 있었다. 원래 말이 별로 없던 듀비는 인간 기사로의 분장이 어색한 듯 가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갑옷을 만지작 거릴 뿐, 예의 무덤덤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었고, 해민이는 처음부터 자신의 배역에 불만이 많았던 터라 마차 안에서도 망토에 달린 후드를 깊숙히 눌러쓰고 팔짱까지 떠억 낀 채 '나 지금 엄청 기분이 저조하오' 란 메시지가 가득 담긴 오라를 풀풀 풍기며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나는 괜히 그에게 미안해서 말을 걸지도 못한 채 혼자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전 같으면 해민이가 화 났을 때 꼭 껴안고 부지부지 하면 조금후에 모르는 척 풀어져서 헤헤 웃어주고는 했는데, 이제는 다 컸다고 그 방법이 안 통했다. 하긴, 자신이 먼저 매달려 오는 일도 없어졌으니 부비부비 전법이 안 통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하아, 애가 성장해서 늠름해진 건 좋은데 귀여운 맛이 사라졌어. 흑흑, 내 귀여운 해민이를 돌리도...' 수인족은 성년이 되면 그 즉시 부모와 떨어져 한 명의 당당한 수인족으로써 살아간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런 해민이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성인이 되어도 부모와 쉽사리 단절 하지 못하는 인간들 틈에서 자라온 나로써는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변해버린 해민이의 모습이 당혹스럽고 섭섭하게도 느껴졌다. 이제 해민이는 나와 듀비가 붙어 있어도 질투하지 않고 그저 무덤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해민이를 볼때마다 왠지 나는 이제 해민이에게 필요 없어진 존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 되게 씁쓸했다. 하긴, 나는 해민이에게 '주인'이 아닌 '보호자'였으니 말이다. "에휴..." 그런 일련의 생각들이 떠오르자 내 입에서는 다시금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창 밖을 바라보던 듀비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요즘들어 한숨을 많이 쉬시는 군요." "에? 아하하... 그러네요. 나도 모르게 그만... 후우..." 나는 애써 밝게 대답하려 했지만, 점점 기운이 빠지더니 마지막에는 다시금 한숨이 푸욱 하고 새어나왔다. "이번 일이 걱정 되십니까?" "아... 그것도 있고.. 다른 일도 있고요." 솔직히 이번 일이 그렇게 크게 어렵게 생각 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식은 죽 먹기 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저는 이번 일을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 잘 될테니 걱정 마십시오." 듀비의 위로에 나는 빙긋 웃었다. "그래요. 그래야겠죠. 하지만 너무 안심하고 있어도 안 될 것 같아요. 상식적으로 볼때 저희가 뛰어들 곳은 무척 위험한 곳이거든요." "괜찮을 겁니다. 만약... 위험한 상황이 된다면 제가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해인님은 꼭 지켜드릴테니까요." "쿡..." 이건 절대 내가 웃은 게 아니다. 나는 듀비의 말이 너무 고맙다고 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 보다도 먼저 해민이가 입을 열어버린 것이다. "쿡쿡..." 지금까지 답답하지도 않은지 푹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 뒤로 넘기면서 얼굴을 드러낸 해민이는 조롱이 가득 담긴 어조로 이죽거렸다. "쿡쿡쿡, 여차하면 목숨을 바쳐 지켜드리겠다고? 키득키득, 우습군... 지금 누가 누굴 지킨다는 거지?" 수인족의 습성 중 한가지는 부모나 자신이 인정한 자 외에는 절대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게 아무리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자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수인족의 특성상 인정한다는 건 자신보다 강하다는 거고, 서열도 그렇게 정해진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이 곳에서 해민이의 존대를 받는 이는 나 외에 아무도 없었다. 뭐, 나야 해민이보다 강해서 존대를 받는다기 보다는 얼결에 보호자였으니 받는 거였지만... 본부에 돌아가면 생길지 모르지만, 여하튼 지금은 그랬다. 듀비조차도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 하긴, 내가 뭘 알겠는가만은... 어쨌든 - 듀비 정도면 해민이의 인정을 받을 만도 한 것 같은데 말이다. 특히나 해민이는 듀비의 실력을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년이 되기 전에는 툭하면 듀비에게 싸움을 걸어 그에게 지던 해민이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해민이는 말을 할 수 있자마자 듀비에게 하대를 했다. 뭐, 듀비야 해민이가 하대를 하던 존대를 하던 별로 상관하지 않는 눈치였고, 해민이도 성년이 된 뒤 듀비에게 일부러 싸움을 걸지 않아 아직까지 충돌은 일어나지 않고 있어 내심 다행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필 지금 해민이가 '열받던 차에 잘됐다'는 식으로 나오자 나는 심장이 벌렁 거렸다. '왜 하필 지금인거야아아~~!!' 하지만, 놀랍게도 듀비는 그런 이죽거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해민이를 직시 했다. "그렇군, 너도 있었군. 너도 조금은 도움이 되겠지." '헉, 듀비에게 이적거림을 받아 칠 능력이 있었단 말인가?' 그러자 반대로 해민이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뭣이라? 조, 조금? 이게 지금 누구에게..." 이까지 빠드득 갈며 불끈 쥐어진 주먹에서 전에 봤던 것 보다 더 굵고 긴 손톱이 튀어 나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내 심장도 입 밖으로 튀어 나오는 줄 알았다. 까딱 잘못하다간 경매가 벌어지는 저택에 도착 하기도 전에 마차 안에서 유혈 사태가 벌어질 것 같아 난 황급히 해민이를 말리려고 했다. 허나, 내가 채 입을 열기도 전, 그리고 해민이가 채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먼저 듀비가 입을 열었다. "뭐냐, 애송이. 설마 이제 갓 성년이 된 네 녀석 주제에 자신은 애송이가 아니며 이번 작전에서 나 보다도 더 해인님께 도움이 될 거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의 표정은 '감히 네까짓게...' 라고 말하고 있는 듯 엄청 거만하고 오만해 보였는데, 듀비의 그런 모습은 색다른 멋으로 다가왔다. '오호, 저 표정도 제법 잘... 헉, 아니 이게 아니지. 지금 듀비의 얼굴을 보고 감상할 때가...' 나도 예쁘고, 아름답고, 멋있고, 잘 생긴 것에 시선이 쏠리는 보통 인간인지라 듀비의 색다른 멋있는 모습에 잠시나마 빠져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눈보라가 날리는 것만 같은 살벌한 주위 분위기 덕에 잽싸게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애, 애송이? 지금 그거 나에게 하는 소리냐?" 해민이는 이제 완전히 변이하여 살기까지 흩뿌리고 있었다. 그래 나는 조마조마해 질식 할 것만 같았구만, 듀비는 여전히 태연자약 했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 "으득... 오냐, 다시는 그 입을 놀리지 못하게 해주마." 듀비의 말이 끝나자마자 해민이는 순식간에 한 손으로 듀비의 멱살을 거머쥐고 손톱이 길게 빠져 나온 다른 한 손은 허공으로 치켜 올렸다. "해민아!!" 너무 위험 수위에 다다른 해민이의 모습에 나는 더 이상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어 정령들을 불러내서라도 그를 막으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전에 듀비가 해민이의 어깨 너머로 날 바라보며 눈짓으로 만류하는 거였다. 내가 잘못 봤나 싶었지만, 그와 함께 해민이의 옆구리 옆으로 빠져나온 듀비의 손은 가만히 좌우로 저어지고 있었다. 그에 나는 황급히 일으키던 몸을 주춤거리며 다시 앉는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그렇게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 듀비는 다시 해민이에게 시선을 돌려 눈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증명해 봐라." "뭐?" 듀비의 뜬금 없는 말에 당장이라도 내려칠 것 같았던 해민이의 손이 멈칫 거렸다. 그 틈을 타서 듀비가 다시 한번 더 입을 열었다. "네가 애송이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번 작전에서 나 보다도 더 도움이 될 거라는 걸 내게 증명해 보이란 말이다." "무슨 헛소리야? 그런 내가 여기서 네 놈의 멱을 따면 다 증명이 될텐데..." 해민이는 듀비의 말이 당혹스러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듀비의 멱살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러나 듀비는 여전히 오만하게 해민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이제는 그의 입가에 진한 비웃음까지 매달렸다. "지금? 여기서? 훗, 네놈은 그래서 내게 애송이란 소리를 듣는 거다." "무슨 헛소리야?" 해민이가 이제는 듀비의 멱살을 양 손으로 붙잡고 그를 거의 들다시피 하여 듀비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대며 으르렁 거렸지만, 듀비는 여전히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쯧쯧, 그것 까지 설명해 줘야 한단 말이냐? 이래서 애송이들이란..." "죽여버리겠어!!" 듀비의 비웃는 말에 해민이는 그대로 그의 목줄기를 물어 뜯으려는 양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바로 직전에 듀비의 멱살을 잡은 해민이의 양 손은 듀비의 양 손에 살포시 덮이더니(?) 그대로 해민이의 몸통과 함께 옆으로 비틀려 넘어졌다. 그러니까 듀비가 해민이의 양 손을 붙잡자마자 그의 손목을 비틀어 넘어뜨리자 해민이의 몸통 까지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는 것 처럼 같이 쓰러지는 거였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자 해민이는 듀비에게 거의 눌리다시피 제압 당해 마차 바닥에 누워 있었다. "제기랄~!! 이거 못 놔? 이거 놓으란 말야, 이 자식아!!" 그러나 듀비는 친절하게 해민이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그가 잡고 있던 해민이의 손목을 조금 더 사알짝 비틀어줬다. "정말, 요즘 애송이들은 너무 무례하다니까." "아윽!" 순식간에 해민이의 인상이 오만상으로 찡그려지는 걸 보면 무지 아픈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자존심이 있는지 이를 악물고 신음소리를 삼키는 거였다. "호오, 그래도 자존심은 있다는 이건가? 그래봤자, 넌 지금 나에게 제압당해 바닥에 쓰러져 있잖아, 애.송.이.씨. "빠드득..." 해민이의 이 가는 소리가 너무 살벌하게 마차 안에 울려 펴져 나 조차 흠칫할 정도였지만, 듀비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걸 보며 듀비의 간이 얼마나 큰지 한번 해부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듀비의 설교는 계속 되었다. "내가 힘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 걸로 착각했다면, 넌 그야말로 애송이 중 애송이다. 지금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있다는 걸 모르는 거냐? 잠시 후면 아주 중요한 작전을 실행해야 한단 말이다. 그런데 한 순간의 감정으로 인해 그걸 다 망치려고 해? 그래서 넌 애송이라는 거다. 내 말이 불만이라면 네 스스로 이번 작전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도록 잘 협조해서 네가 당당한 수인족이라는 걸 증명해 봐라." 해민이의 귀에다 아예 입을 가져다 대고 조용 조용하게,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속삭인 듀비는 그쯤 하고 해민이를 풀어줬다. 그에 나는 다시 해민이가 듀비에게 덤벼드는 건 아닌가 조마조마 했지만, 다행이도 듀비의 설교가 먹해 들었는지 해민이는 듀비를 죽일 듯이 노려볼 뿐 그낭 비틀린 손목을 어루만지면서 자신의 자리에 앉는 거였다. 그런 모습에 듀비에게 경탄이 일기도 하고 해민이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우선은 이 상황이 잘 마무리 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해민이가 만지고 있는 손목을 바라보았다. 듀비가 얼마나 강하게 쥐고 있었는지 벌써 빨갛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많이 아파? 찬 물좀 내줄까?" 그래 걱정이 되어 해민이에게 말을 건넸는데 해민이는 오히려 흠칫 하더니만 망토 속으로 자신으 손을 집어 넣어 가리는 거였다. "괜찮아요. 별 거 아니예요." '별게 아니긴...' 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해민이의 자존심을 더 이상 건드리고 싶지 않은데다 듀비가 그냥 가만히 냅두라는 눈짓을 보내오기에 그냥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았다. 나중에 듀비에게 무사히 해결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으면서 말이다. 그 뒤 얼마지 않아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굵은 철창살들을 엮어서 만든 아치형의 우아하고 커다란 정문을 지나 엄청나게 넓은 정원을 지나자 멋들어진 저택이 있었다. 저택 정문 앞에는 이미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손님들이 하나 둘 마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저택 안에서는 뒤이어 도착하는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한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내가 탄 마차가 저택 정문 앞에서 멈추고 싱거가 즉각 마차 문을 열고 날 에스코트하여 내리게 하자 대기하고 있던 한 남자가 다가왔다. 짙은 금발에 멋들어진 팔자 콧수염을 기른 중년 남자였는데 흰 색 셔츠 위에 검정색 정장을 입고 있어 마치 커다란 저택에 있는 집사를 연상시켰다. "어서 오십시오, 아름다운 레이디. 저에게 당신께 인사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내 앞까지 다가온 그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이에 싱거가 긴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머리기름을 발라 올백으로 넘긴 그 중년 남자의 머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이 이번 경매를 주최한다는 이 저택의 주인인가보죠?" 그러자 중년 남자는 굽혔던 허리를 피더니 미소를 띄었다. "아닙니다, 레이디. 저는 그 분을 모시는 일개 보좌관에 불과 합니다." "보좌관이라고요? 실례지만 성함이..." 나는 일부러 당황한 척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물어보았다. 그에 나를 에스코트하느라 내 손을 받치고 있던 싱거의 팔이 긴장으로 인하여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번에도 싸악 무시했다. 보좌관이라는 남자는 송구스럽다는 듯 머리를 살짝 숙여보이며 내 질문에 답했다. "저는 프랭클린이라고 합니다. 평민이라 성은 없으니 편하게 프랭이라 불러 주십시오."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기가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노려봤다. "뭐, 뭣이라? 평민? 감히, 감히 나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네까짓게 뭐라고 나불대는 것이냐!" 나의 갑작스런 반응에 내 일행들이 놀라는 것이 느껴졌지만, 정작 내 분노를 고스란히 받는 프랭클린은 태연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이다. '역시나...' 나 또한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라 놀라지는 않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다시 분노에 찬 외침을 터트렸다. "이, 이 무례한 녀석 같으니라고! 가겠다. 이런 무례한 놈이 있는 곳에는 한시라도 있고 싶지 않아!" 그러면서 정말 갈 것처럼 몸을 홱 돌리자 싱거와 톰슨의 입이 뜨억하며 벌어졌다. 그들은 돌발적인 내 행동을 제지하려 뭔가 하려고 했지만, 그 보다 한발 앞서 프랭클린이 내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척 꿇는 것이었다. 계속 도착하는 손님들이 다른 이들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며 힐끔힐끔 쳐다보았지만 그나 나나 상관하지 않았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하해와 같으신 너그러움으로..." 그러나 나는 매정하게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시끄럽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으니 썩 비키거라!" "고귀하신 레이디, 부디 화를 풀어주십시오. 분노를 잠시만 가라앉히시고 경매에 참가해 주신다면 제 평생의 은인으로 알겠습니다." "네 따위의 은인은 되고 싶지도 않아!" 프랭클린의 간절한 부탁을 다시 한번 거절하자 싱거는 이마를 짚었고 톰슨은 더운지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그런 그들을 보며 속으로 웃고 있는데 프랭클린의 간절한 어조가 다시 들려왔다. "경매를 구경하시기 위해 먼 곳에서 이곳까지 오신 게 아닙니ㅏ? 그냥 돌아가신다면 제가 모시는 분이나 레이디께서나 무척 안타까우실겁니다. 그러나, 만약 레이디께서 경매에 참여해 주신다면 제가 모시고 계신 분께서 이놈을 용서해 주신 레이디께 친히 감사의 인사를 드릴 것입니다." "이 경매의 주최자가?" 어차피 경매를 망치기 위해 온 것이였기에 나는 주최자가 누군지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나중에 그 사람을 다시 만난다면 그가 엄청난 악인이 아니라면 좀 미안할 거 아니겠는가? 어차피 노예를 사고 파는 상인이 착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정말 경매를 구경하기 위하여 온 철없는 귀족 아가씨라면 경매 주최자를 만나는데 흥미가 있을터였다.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니라 오랜 인연이 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 나는 속으로는 시큰둥 했지만, 겉으로는 약간 흥미가 있다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얼른 허락하지 않고 생각하는 척 뜸을 들이자 톰슨은 애가 탔는지 얼른 받아들이라는 눈짓을 눈알이 빠져라 열심히 보냈다. 현 상황이 아니라면 마구 웃어줬을테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속으로만 신나게 웃었다. 평소 톰슨이 나에게 괜찮게 보였으면 즉시 그 사인을 받아줬겠지만, 밉보이던 놈들 중 한 명이라 나는 거기에 더 뜸을 들여 톰슨과 싱거의 애간장이 다 타서 재가 되도록 만들어준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그렇게 사죄를 하니 용서해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무지 감격스럽다는 듯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의 인사를 한 그는 벌떡 일어나 약간 흐트러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말했다. "추한 꼴을 보여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이제 경매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프랭클린의 뒤를 따라 들어가는 동안 내 뒤에서 - 아까 그 사건 이후로 싱거가 에스코트를 포기하고 뒤로 물러났다. - 따라오는 두 남정내의 원망과 책망 섞인 시선을 받는 건 무지 재미있는 일이었다. 뭐, 잠시 후에 이 일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겠지만... 경매장에 가는 길은 생각외로 길었다. 나는 저택에서 한다고 해서 저택 안에 있는 파티 홀 같은 곳에서 하리라 예상을 했었다. 그러니 아무리 멀어봐야 저택의 종단 혹은 횡단, 거기에 좀더 보태 일, 이층 위의 거리일텐데 내가 걸어간 거리는 내가 예상한 최장거리보다 더 길었다. 분명히 저택 안으로 들어가 어떤 문을 지나자 길다란 복도가 나와 거기를 쭈우욱 걸어갔는데 90도 직각으로 꺾이거나 갈래길이 나온 건 아니었지만, 직선이 아니라 은근히 구부러진데다가 점점 밑으로 내려가는 거였다. 경사가 무척 작아서 걸어가는 것만으로는 밑으로 내려간다는 걸 몰랐는데, 지하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땅의 정령들이 문득 문득 눈에 뜨이는 걸 보고 알아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알아챘다는 걸 겉으로 들어낼 수는 없어 묵묵히 중년 남자의 뒤를 따라가면서 예상한 것 보다 조금 더 주의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렇게 길다란 복도를 끝내자 활짝 열린 커다란 문이 나왔는데 그 안쪽이 바로 경매가 열리는 홀이었다. 날 안내한 중년 남자는 입구에서 나에게 인사를 하고 사라졌고, 나는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금단추가 달리고 테두리를 짙은 남색으로 마무리한 흰색 제복을 입은 다른 남자에게 인계 되었다. "입장권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정중한 요청에 나는 슬쩍 손을 올리는 것으로 대신 답했고, 내 손짓에 대기하고 있던 톰슨이 자신의 품에서 손바닥 만한 금색 카드를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걸 본 제복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장섰다.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그 커다란 홀은 앞쪽에 넓은 단상이 있었고, 그걸 반원으로 둘러싼 형태로 손님들의 좌석이 있었다. 그런데 그 좌석들은 마치 영화관처럼 뒤쪽으로 올 수록 점점 자리가 높아져 어디서든 단상이 잘 보이게끔 되어 있었다. 내 좌석은 약 10여개의 층을 이루는 좌석 중에서 중간 층에 있는 곳이었다. 같은 층에 있는 각각의 좌석들은 좀 멀리 떨어진데다가 2미터 정도 되어보이는 칸막이가 양 옆으로 쳐져 있고, 뒤쪽에는 두터운 천이 내려져 있어 옆에 누가 있는지 모르도록 설치되어 있었다.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니 동그란 작은 탁자가 있었고 그 주위로 무척 편안하고 우아한 소파가 자리하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장미 한 송이가 꽂힌 작은 꽃병이 있었고, 자그마한 금종이 그 옆에 놓여 있었다. 나를 안내한 제복맨은 탁자 위에 있는 금종을 가르키며 설명했다. "뭔가 필요한 게 있으시면 이 종을 울리시면 됩니다. 그럼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올 것입니다. 간단한 음료와 다과, 식사까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주문하셔도 됩니다. 경매는 잠시 후에 시작될 것입니다." 이 말을 얼마나 많이 했던지 막힘 없이 줄줄이 읇던 제복맨은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필요하신게 있으신지요?" "됐어요." 내가 손짓하며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자 싱거가 얼른 준비하고 있던 은화를 제복맨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제복맨이 정중히 인사를 한 뒤 칸막이 밖으로 나갔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는 걸 확인한 싱거와 톰슨은 험악한 시선을 나에게 돌렸다. 올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이었지만 긴장되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뭔 일이냐는 시선으로 마주 봐주었다. "설명을 들어야겠습니다. 아까 왜 그런 것입니까? 그러다가 그 놈이 사과를 안 했으면 우린 그냥 되돌아가야 했다고요!" 다른때라면 톰슨이 나에게 존대를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내가 이 팀의 팀장이었기에 그는 나에게 존대를 하고 있었다. 분노가 가득차 있었지만, 그래도 상황을 잊어버릴 만큼 그가 바보는 아니었기에 그의 목소리는 무지 작았다. 그래 나도 그와 같은 크기의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화를 내지 않고 그에게 인사하는 것을 허락했다면 우리는 그 즉시 당장 의심을 받았을 겁니다. 저택 정문에서 그 남자가 그랬던 건 내가 진짜 귀족의 여식인지 아닌지 시험한 거였습니다. 그걸 모르시겠습니까?" "예?" 어리벙벙한 톰슨의 얼굴을 향해 씨익 웃어준 나는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다. "신분을 밝히지 않아도 된다 하나 아마 경매 주최측에서는 대충 이 곳에 들어오는 이들이 누구인지 짐작은 하고 있겠죠. 그러나, 갑자기 나타나 입장권을 산 내 신분은 모를테니 당연히 경계를 했을테죠. 그래서 정말 타국에서 온 귀족인지 아닌지 시험을 해본 겁니다." "그게 시험이었다고요? 그렇다면 왜 그의 인사를 받아줬다면 귀족이 아니라는 겁니까? 그는 분명히 귀족식 예법으로 인사를 했는데..." 싱거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어조로 물었다. "맞아요. 분명히 그는 귀족식 예법으로 인사를 했죠. 그러나 귀족 입장에서 볼때 귀족의 레이디 에게 그런 인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기사의 작위 이상을 가진 사람 뿐입니다. 즉, 기사도 아닌 평민 이하는 그런 인사를 할 수 없죠. 그랬다간 오히려 귀족 모독죄로 당장에 끌려가 처형 당할테니까요." 이렇게 설명했는데도 알아듣는 눈치들이 아니라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예법상으로는... 아, 그러니까 이론상으로는 말이죠 예의를 차리는데 그런거 구분은 안되 었지만, 귀족들에게는 그런게 있지 않습니까? 자신들과 평민은 다르다고 말이죠. 아까 그 남자의 인사 답례가 뭔지 아시겠지요? 레이디가 손을 내밀면 남자쪽에서 그 손등에 입을 댈 수 있죠. 귀족이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평민이 자신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 대는 걸 참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건 정말 귀족들 사이에서 지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제야 이해한 듯 두 남자가 작게 감탄사를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왠만한 하급 기사들까지도 귀족 레이디에게는 그런 인사는 꿈도 못 꿉니다. 그 남자도 알고 있는 것 같더군요. 내가 무례하다고 화를 내도 전혀 당황하는 눈치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이게 시험이라는 것을 눈치 챘죠." "그런데 이상하군요. 우리는 귀족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어째서 우리가 귀족이라고 생각한 걸까요? 만약 그 남자의 인사를 그냥 받아줬다면 우리를 평민 출신의 상인 집안 사람들 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싱거의 질문에 나는 다시 한번 설명을 하기 위해 입을 열어야 했다. "아니요. 그들은 처음에 우리가 신분을 숨기려고 했을때 이미 귀족이거나 아니면 모종의 이유로 이 곳에 잠입하려는 사람들이라고 예상했을 겁니다. 그러니 만약 인사를 받아들였다면 즉시 수상한 인물로 점찍었겠죠." "어째서죠?" "만약 상인 집안의 여식이었다면 신분과 얼굴을 숨기지 않으려고 했을테니까요. 이 경매를 주최 하는 자는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커다란 상회를 가지고 있는 자. 그런 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언제 어느때라도 이익을 추구하려는 상인이 이 기회를 놓치려 하겠습니까? 신분을 숨기려는 자는 그러한 이익에 신경 쓸 필요없는 부자란 소리겠죠? 그런 자가 누구일까요?" "귀족 이겠군요. 괜찮은 영지와 튼튼한 권력 기반을 가지고 있는... 그런 집안의 여식이라면 돈 쓰는 일만 알고 있을테죠?" 톰슨이 마음에 안 든다는 투로 대답했다. 사실 평민이라면 부모 잘 만나 태어날때 부터 죽을때까지 노동이라는 걸 모르며 호위호식하다가 죽는 귀족이 마음에 들리 없었으니 말투가 곱지 않은게 쉽게 이해가 갔다. "정답이예요. 그러면 이제 내 행동에 대한 설명이 되었나요?" 내가 씨익 웃으며 묻자 싱거와 톰슨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하긴, 애송이라고 여기던 녀석에게 한방, 그것도 제대로 얻어 맞았으니 기분 좋을리가 있나? 그 반대인 나는 무지 고소했지만 말이다. 톰슨은 얼굴을 굳히는 것으로 끝냈지만, 싱거는 뭐 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리는 거였다. '아쭈구리... 그래, 너 잘났다. 어디 두고 보자구.' 내가 싱거의 모습에 속으로 이를 가는데 가만히 있던 듀비가 입을 열었다. "누군가 이쪽으로 옵니다." 그러자 나와 같이 소파에 앉아 있던 해민이가 후다닥 일어나 내 뒤쪽으로 가서 서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톰슨과 싱거도 얼른 자세를 바로하고 표정도 근엄하게 바꿨다. 우리 주위의 좌석이 비어있어 그 자리의 주인이 온 것일지도 모르지만, 혹시나 모르는 일이었기에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우리에게 볼 일이 있는게 아니라 옆 좌석을 차지하러 온 거라면 이런 사적인(?) 대화도 위험했다. 아무리 칸막이가 쳐져 있고, 우리가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눈다고 하더라도 완벽한 방음이 안되는 이상 주의할 필요는 있었다. 그러나 우리쪽으로 다가오던 그 발자국 소리는 우리 좌석 뒤에서 멈췄고, 곧 간이벽에다 대고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그에 톰슨이 좌석을 가리고 있는 천을 약간 들춰서 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 주인님께서 레이디를 뵈러 오셨습니다. 잠시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마 밖에 서 있는 자는 그의 시종이었던 듯 했다. 톰슨은 거의 형식적으로 나를 돌아보더니 내가 미처 뭐라 눈짓을 주기도 전에 다시 고개를 돌려 시종을 바라봤다. "저희 레이디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내가 언제?' 하지만 이런 황당한 내 기분과는 상관 없이 밖에서 감사의 인사가 들렸고 곧 천이 크게 젖혀지며 밝은 회색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가 시종을 대동한 채 들어왔다. 그에 나는 무지 못마땅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저에게 용무가 있으시다고요?" "그렇습니다, 아름다우신 레이디. 좀 전에 제 보좌관이 크나큰 무례를 저질렀다 들었습니다. 수하를 잘못 다룬 점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 그러니까 당신이..." 내가 미처 말을 맺기도 전에 중년 남자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이 저택의 주인이자 이번 경매의 주최자입니다." 그는 이 나라에서도 손꼽힐 만큼 커다란 상회를 가진 자 치고는 무척 평범하게 생긴 중년 남자였다. 나이에 비해 흰 머리가 많아 회색으로도 보이는 반백의 머리에 보통의 키를 가진, 잘 차려 입은 점만을 빼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보통의 중년 남자였다. 큰 상회를 운영하는 사람다운 카리스마라던가 위엄이라던가, 아니면 무지 지혜로워보이는 매서운 눈길 같은 건 전혀 없어 이 사람이 정말 상회를 운영하는 사람이 맞나 의아할 정도였다. 나는 그에게 자리를 권하고 나도 마주 앉으면서 약간 당혹스럽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으음... 생각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계시군요." 내 말에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습니까? 하긴, 그런 말을 많이 듣는 편이죠." "귀족... 이신가요?" "하하하, 아닙니다. 저는 평민 출신의 상인이죠. 저희 증조할아버지때부터 저희 집안은 대대로 상인의 길을 걸어왔답니다." "그러세요?" 나는 예의 바르게 대답하면서도 시큰둥한 기색을 슬쩍 내비치는 걸 잊지 않았다. 돈은 많지만 잘생긴 것도 아닌 평범한 중년 남자에게 부유한 귀족가의 여식이 무슨 흥미를 느끼겠는가? 그걸 알아차렸음인지 - 어쩌면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 그는 날씨 같은 무난한 몇가지 화제로 대화를 나누다가 다시한번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는 경매 시작을 핑계로 금방 돌아가버렸고, 나도 당연하겠지만 잡지 않았다. "저 사람이 정말 노예매매상이예요? 전혀 그렇게 생기지 않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봐도 이종족들을 강제로 납치해 팔아 넘기는 악당으로 생각되어지지 않아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묻자 싱거가 투덜거리는 어조로 대꾸했다. "아니, 노예매매상은 뭐 이마에 '노예매매상인'이라고 써붙이고 다닌답니까? 저 놈이 맞아요." "그래도... 악당처럼 생기지 않았는데..." "원래 멀쩡한 놈들이 더 나쁜 악당인 법이라고요." 싱거의 퉁명스런 대답에, 나는 정말로 진지하고 순진하게 대답했다. "에... 그럼 내가 악당인가?" 그에 잠시 주위가 얼어붙었지만, 미리 예상했던 거라 나는 미소 짓는 얼굴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 나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던 터라 나 조차도 얼어붙게 만들었다. "해인님은 절대 악당이 아닙니다." "아.하.하... 고마워요 듀비." 잠시 후에 정신을 차린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하자 싱거가 못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획 돌리며 씹어 내뱉듯 입을 열었다. "우린 놀러온 게 아닙니다. 임무에 집중해 주십시오." 그 뒤 좌석쪽 천장에 배치된 모든 조명들은 꺼지고 각자 좌석에 있는 작은 마법등만이 남자 단상을 향한 밝은 조명이 켜지며 약간 능글맞은 기가 있는 남자가 올라왔다. "오늘 이 곳에 와주신 신사숙녀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 상회에서는 항상 최상품의 물건만 여러분께 제공드리기 위해 불철주야로 노력하고 있으니 결코 여러분들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아... 서론이 기네. 어디든 너무 형식을 따진다니까. 그냥 이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하고 시작하면 좀 좋아? 아, 해민아 뭐라도 좀 먹을래?" 내 앞 안락의자에 편히 자리를 잡은 해민이를 위해 뭔가를 시키려고 하는데 톰슨이 작게 충고 했다. "시키지 않는게 좋아요. 어차피 먹지 못할테니까." "예?" "여긴... 구역질 나는 인간들이 모여있는 곳이거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음식을 먹을 정도로 비위가 강한게 아니라면 음식을 시키는 건 낭비가 될 겁니다." "으음..." 톰슨이 경멸하는 인간들이 모였다고 해서 음담패설이 난무하고 소란스러운건 아니었다. 약간의 웅성거림은 있었지만 소위 배운자들만 모아놔서인지 조용하고 원활하게 경매가 진행 되었던 것이다. 큰 소리를 내는 건 경매를 이끌어가는 단상위의 중년 남자 밖에 없었다. 그의 지휘 아래 대기하고 있던 이번에 팔릴 상품(?)들이 하나 하나 단상위로 올라왔고 그에 따라 설명이 이어졌다. 한명 한명 올라오는 이들은 약을 먹었는지 촛점 없는 눈동자로 그들을 이끄는 이가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자, 이 엘프로 말씀드리자면..." 그렇다고 해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나는 괜스레 듀비나 해민이를 보기가 창피해져서 단상위를 바라보는 대신 안락한 의자에 앉아 몸을 깊숙히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자리를 잡고 조용히 경매를 관람하던 톰슨이 내 팔을 툭툭 쳤다. "왜요?" 그래 감았던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니 톰슨 뿐만이 아니라 싱거까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잠시 주위를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조금 있으면 작전이 실행될텐데,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우선 건물 안의 퇴로는 알아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러고보니 여기에 들어오는 것만 생각하느라 이 홀 안을 살펴보는 건 깜빡 잊고 있었다. "그러세요. 조심하시구요." "여러분도 조심하시길." "다녀 오겠습니다." 평소 내가 마음에 안 들었어도 예의는 깎듯이 지키는 톰슨과는 달리 건들거리며 날 깔보는 티를 역력히 드러내는 싱거마저 왠일로 정중히 인사를 하고 칸막이를 빠져 나갔다. 그에 저 놈이 왠일인가... 싶어 바라보았지만, 의아함도 잠시 나도 곧 할 일을 생각해냈기에 그들에 대한 건 잊어버렸다. [슈리엘!] 나는 듀비나 해민이가 신경쓰지 않게 정령의 대화법으로 슈리엘을 불러 이 주위에 사람이 몇명이 있는지, 입구는 몇군데인지, 어디에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곧이어 네 명의 최상급 정령들을 불러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본격적으로 일이 벌어질 시간이었던 것이다. "자, 모여봐요." 주위에서는 경매가 한창이었지만, 나는 거기에서 신경끄고 해민이와 듀비를 불렀다. 주위를 살펴보고 온다던 싱거와 톰슨은 조심하느라 그런지, 살펴볼게 많은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운디네를 불러서 탁자 위에 물로 우리가 있는 홀 안의 모습을 그렸다. "자, 이 안은 부채꼴 모양이예요. 여기 뾰족한 부분이 단상이고요. 층은 다섯층이래요. 첫 층에는 좌석이 5개, 두번째 층에는 7개, 10개, 14개, 19개로 총 좌석은 56개고요, 지금 현재 이 안에는 48개의 좌석만 채워져 있다는 군요. 우리가 있는 건 세번째 층의 7번째 좌석에 있는 거고요." 고개를 끄덕이는 듀비와 해민이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다시금 설명을 이어 나갔다. "입구는 세 곳이예요. 단상 옆에 하나, 그리고 맨 뒤에 손님들이 출입하는 가장 넓은 부분에 양 옆으로 하나씩." "그렇다면... 우리팀이 셋으로 나뉘어 입구를 하나씩 맡아야 하겠군요. 이 곳을 잠시동안 고립 시키려면 말이죠." "그럼 내가 하나, 이 블루 엘프 녀석이 하나, 그리고 가장 약한 인간 두 놈이 하나를 맡으면 되겠군?" 해민이가 흥분된 어조로 끼어들었다. 성년식을 치루고 난 뒤 누군가와 싸우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하던 녀석이었으니 지금도 무지 날뛰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해민이가 강해졌다고 하나 그 애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좋은 작전이지만, 벽을 등지고 하는게 아니라서 위험해. 아까도 말했지만, 이 곳에는 48좌석이 차 있다고. 그들이 모두 자신의 호위 무사를 3명씩 다 데려왔단 말야. 거기다 밖에서도 공격할텐데, 그러면 사방에 적들이 둘러쌓이게 되잖아?" "난 문제 없어요.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요. 그리고 저 시퍼런 엘프 놈도 충분히 감당하겠죠. 문제는 약해빠진 두 인간 녀석인데, 그 놈들이야 해인 누님이 도와주시면 되잖아요?" "그러지 말고 내가 세 입구를 정령들에게 부탁해서 막을테니까, 너희들이 날 보호해주면 어떨까? 그러면 앞뒤로 협공을 당할 걱정도 없고, 이 안에서 우리도 힘을 합쳐서 같이 싸울 수 있잖아?" 내 의견에 해민이는 별로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듀비가 끼어들었다. "폼을 보아하니 혼자 들뛰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다면 해인님의 주위에서 멀찍이 떨어져 혼자 날뛰면 되잖아? 해인님 보호는 나와 두 인간이서 하며 되니까. 대신 네 놈이 위험해도 도와주러 가지는 않을테니 알아서 하도록 해." "흥, 웃기지 마라. 내가 나서서 놈들을 금방 다 처리해줄테니 네 녀석들이 할 일은 별로 없을 거야." "좋을대로. 어쨌든, 그러면 해인님의 계획대로 하는 건가?" "응? 으음... 뭐, 나야 신나게 싸운다면 계획이야 어떻던 상관 없지." '허... 아까 마차 안에서도 느낀 거지만... 듀비 정말 너무 대단하다.' 내가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걸 느꼈음인지 나에게 시선을 돌린 듀비가 옅게 웃어 보였다. "자, 그렇다면 이젠 작전을 실행하기 전에 두 인간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면 되는 건가? 사실 안 돌아와도 상관은 없지만... 그 전에 작전이나 실행 되었으면 좋겠어." 해민이는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벌써부터 길다란 손톱을 꺼내들고 안절부절 못했다. "진정해, 그러다가 신호가 오기도 전에 네가 먼저 난리치겠다. 해가 지면 시작할 거라고 했으니 금방 신호가 올 거야." 우리가 이 곳에 도착한 시간은 붉은 노을이 서쪽 하늘을 막 물들이기 시작할 때였다. 여기에 들어온지도 한참 시간이 지났으니 지금쯤이면 어둑어둑해지고도 남을 터였다. '흐음... 여긴 창이 없으니 알 수가 없잖아? 하지만...' 나는 곧 공중에 동동 떠다니는 애들을 보고는 생긋 웃었다. [얘들아? 밖에좀 보고 와주련?]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정령들이 내 기세에 눌려 밖으로 나가보기도 전에 멀리서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다. 콰과광~ "시작입니다." 멀리서 난 소리라고 해도 워낙 큰 소리였기에 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다 들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경매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경매가 잠시 중단될 정도로 홀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아아, 여러분 진정해주십시오. 저희 쪽에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금세 조치할 터이니 걱정 하실 것 없습니다." 경매를 진행하는 남자가 큰 소리로 외쳐 소란이 잠시 가라앉나 싶었는데, 중년 남자가 참 허망 하게도 또 다시 굉음이 들려왔다. 콰과과광~ "신경 쓰실 거 없습니다. 자자, 아직 오늘의 하일라이트인 물건이 아직 안 나왔습니다. 여러분께 선 보일 물건이 많이 남았습니다만, 성격 급하신 몇몇 분들이 있으신거 같으니 지금 그냥 내놓도록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오자 경매를 진행하던 사람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말은 효과가 있었는지 소란스러운 소리가 멈췄다. 그러자 한숨 돌린 중년 남자가 더욱 더 신나게 외쳤다. "자자, 기대하십시오~ 오늘의 하일라이트 임신한 수인족 계집입니다~!" 주변이 술렁거렸지만, 그건 아까처럼 당혹스러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어쩌시렵니까? 신호가 왔으니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듀비가 나를 보며 말했지만 나는 선뜻 움직이자고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비 오는 날 먼지나게 두들겨 패주고 싶은 두 놈이 아직 안 돌아왔던 것이다. "톰슨과 싱거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잖아요. 지금 밖에 있는 거라면 내가 정령들에게 부탁해 입구를 막았을때 그들은 둘이서만 밖에 고립된다구요." [우리 애들이 찾아올 수 있어요!] 만약을 대비해 불러놓은 최상급 정령들 중 실레스틴이 나섰다. 그녀도 지금 무지 상기된 얼굴 표정을 보아하니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무지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하는 거예요, 누님? 지금 나가려는 놈들이 생겼어요. 이러다가 다 나가면 어떻게 해요?" 천을 조금 젖혀 바깥 상황을 살피던 해민이가 다급하게 외쳤다. "어차피 그 둘은 이런 경험이 많으니 처신을 잘 할 겁니다." "좋아요. 그럼 우리끼리 시작하도록 하죠. 실레스틴, 잘 부탁해." [맡겨만 주시라고요.] 실레스틴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섯 마리의 슈리엘이 허공으로 나타나 사방으로 흩어져 갔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나는 내 힘을 끌어 올렸다. [노에아넨! 셀레아나!] 그그그~~ 내가 그들을 부르자마자 뭔가가 긁히는 듯한 커다란 소음이 들렸고 그와 함께 놀란 외침이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헉, 저, 저게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엇! 입구가 다 막혀버렸다!!" "뭐냐, 네 놈들. 우릴 여기에 가둔 것이냐?" "이건 함정이야. 우리를 죽이려는~~" 그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 부탁을 받은 노에아넨이 입구를 막고 그 주위를 셀레아나가 일으킨 불꽃이 감싸고 있어 사람들은 막힌 입구 근처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 진정해 주십시오. 이건 뭔가 착오가 있는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경매 진행자가 당혹스러운 와중에서도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아까부터 불길한 소음이 들려와 사람들이 조금씩 불안해 하는 상황인데다가 갑작스레 입구까지 막혀 버렸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놀라움에 패닉 상태에 빠져 그의 말을 듣지도 못했다. "저놈 잡아라! 저 놈을 잡아 이게 어찌된 일인지 알아내야 한다!" "마법사, 입구를 부셔버려. 어디 누구 다른 마법사 없소?" 사람들이 난리를 치며 자신의 칸막이에서 빠져 나오기에 우리도 슬그머니 빠져 나와 상황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이 무사일 줄 알았는데 상당부분 마법사도 섞여 있어 그 마법사들이 막힌 입구를 향해 마법을 난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입구를 막고 있는 건 나였던 터라, 그 곳에 마법이 난사되면 그 타격이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온다는 걸 듀비는 알고 있었는지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보다도 먼저 아무도 모르게 내 옆에 있던 노에아넨이 투덜거렸다. [저놈은 날 뭘로 보는 거야? 저까짓 인간들의 공격 쯤이야 가렵지도 않다고.] "하하하, 저 정도라면 괜찮대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 곳에 있는 마법사들 중에 소위 고위 마법사는 없었던 모양이다. "누님, 저쪽은 이미 싸움을 시작했는데, 저도 가면 안될까요?" "응?" 낮게 속삭이는 해민이의 말에 그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그 곳에는 경매를 진행하던 진행요원(?)들이 다른 사람들의 호위 무사들에게 이미 포위되어 있었다. "이놈,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냐?" "당장 익실직고 하란 말이다!!" "모릅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희 상회에서 손님 여러분께 폐를 끼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저건 저희가 한 것이 아니라 필시 어떤 놈들의 음모가 있음이 틀림 없습니다." 벌써 몇대 맞았는지 몰골이 아니었다. 그들은 강제로 제압된 채 단상에 끌려와 있었다. 그 옆으로 이번 경매의 하일라이트였던 임신한 수인족 여성이 굵은 쇠창살 우리에 갇혀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풀어줄까요?" 해민이는 그녀가 무척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그래 그녀쪽을 자꾸 바라보며 안달하고 있는데 듀비가 그런 그를 제지했다. "지금은 우선 나두는 것이 좋아. 좀 불편하겠지만, 위험하지는 않잖냐. 만약 그녀를 풀어준다면 우리는 그녀를 안정시키는 한편 그녀를 지켜야 하는 이중고를 겪겨될 거다." "네 놈에게 묻지 않았어!!" 그때였다. 소란스러운 홀 내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울려퍼졌다. "저자다. 저 가면을 쓴 여자가 입구를 막은 거야!!" 나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외치는 그자의 주위에 땅의 중급 정령 노임이 떠억 버티고 서 있었다. 아마 나와 같은 정령술사였기에 입구를 막는 것이 정령의 힘이고 그 원천이 나였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그자의 옆에 있던 노임이 스르르 땅으로 스며들더니 곧장 나를 향해 뻗어왔다. 비록 홀 바닥으로 들어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정령의 기운이라면 내 감각을 숨긴 채 나에게 다가올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공격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중급 정령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 주위에 있던 경호 무사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저들을 잡아라!!" "우선 제압해버려!!" "나서라 해민아." 듀비가 낮게 속삭이며 쌍검을 빼어들자 해민이가 힘차게 자신을 감싼 망토를 벗어제꼈다. "으랏차, 드디어 내 실력을 보여줄 때가 왔구나~!!" "수인족이다. 조심해!" "거 보십시오. 저희 상회에서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단상 쪽에서 외치는 소리를 귀로 흘려들으며 나는 훌쩍 허공으로 뛰어 올라야 했다. 원래는 내 주변에 대한 일은 해민이와 듀비에게 다 맡기고 나는 가만히 구경이나 하고 있으려고 했는데, 한 손으로 열 주먹을 다 막을 수 없는 법이라고 해민이가 내 주위에서 멀어져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듀비가 내 앞을 가로막아도 적은 그 둘을 몇 겹으로 에워싸고도 남을만큼 많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결국 듀비가 나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여 허공으로 뛰어 올라가 준 것이다. 내가 허공으로 뛰어 오르자마자 맨 처음 나를 발견한 정령술사와 계약한 노임이 내 바로 발 밑에서 나를 따라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지만,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엘레스트라와 - 나는 네 최상급 정령들의 모습들을 모두 숨기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내 기운을 받아 확실하게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 부딪히자마자 깨갱하고는 다시 땅 속으로 사라졌다. 그에 그 정령술사가 잠시 경악하기는 했지만, 노임이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자 재차 공격을 감행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정령들이 나와 같은 생물들이라고 생각하기때문에 이번에도 그 노임이 공격해왔어도 심하게 다쳐서 정령계로 보낼 마음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 전력차이도 엄청나 노임의 공격 같은 건 나에게 별로 대수롭지 않아 그냥 방어만 한 것 뿐인데 노임과 계약한 정령술사는 이걸 모르는 모양이다. 아니면 알면서도 가만 있을 수가 없어 계속 공격을 감행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뭐, 그 만이 아니라 몇몇의 무사들이 내 쪽을 향해 단검 같은 걸 던지거나 몇몇 마법사들도 마법 공격을 시행했지만, 엘라스트라가 거뜬히 막아주고 있었기에 나는 관심을 끄고는 듀비랑 해민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민이는 아까부터 우리에게서부터 멀찍이 떨어져 나가 완전히 변이한 상태로 종횡무진 하고 있었고, 듀비 또한 지켜줘야 했던 내가 스스로르 보호하자 이제는 쌍검을 빼어들고는 멋들어진 검무를 한바탕 추고 있었다. 적이 우리 셋을 개개인으로 둘러싸고도 남을 만큼 많다지만, 그래도 한 명을 에워싸고 공격할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될 수 밖에 없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같은 무리가 아닌 여러 무리가 섞여서 공격을 할때에는 공격자끼리는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넓은 공격 범위를 확보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공격할수 있는 자는 많아야 셋이나 넷 뿐이었다. 우리로써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불행한 건 그렇게 적은 수에 둘러쌓여 그들을 쉽게 쓰러뜨리는 건 좋은데 그들을 쓰러뜨려도 곧바로 그 뒤에 다른 놈들이 다시 공간을 채우기 때문에 듀비와 해민이는 좀처럼 쉬지 못하고 계속 몸을 움직여야 했다. 그들이 보통 인간들보다 체력이 강하다고 해도 이 안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다 쓰러질때까지 상대하는 건 어려울 거 같았다. '뭐, 지금은 둘다 펄펄 날고 있으니까... 나중에 정 힘들면 그때 내가 도와주면 되겠지. 아, 그런데 톰슨이랑 싱거를 찾으러 간 정령들은 왜 이렇게 소식이 없지? 도대체 그 둘은 어디까지 갔길래...' 그러자 재밌게도 마치 내가 그 생각을 할 땔 기다렸다는 듯 내가 그 둘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자 마자 그 둘을 찾으러 보냈던 슈리엘들이 돌아왔다. [그 둘을 찾았습니다.] [그래? 그 둘은 어디에 있지?] [여기서 좀 떨어진 어느 커다란 건물의 3층의 커다란 방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커다란 건물? 그렇다는 건 우리가 이 곳에 올때 본 그 커다란 저택? 아니, 그 두 녀석은 왜 거기까지 간 거지?'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정령들을 바라보았다. [그 둘은 거기서 뭐하고 있었지?] [방 안을 열심히 뒤지고 있었습니다.] [방안을 뒤져?] 우리가 우리가 맡은 임무를 수행할때 도움이 되라고 이 주변을 둘러보고 온다던 이들이 왜 멀리 떨어진 저택까지 가서 어떤 방을 뒤지고 있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설마하니 이 주위를 눈으로 봐도 도대체 어떻게 된 구조인지 알 수가 없어 아예 본체에 이 곳 설계도면을 찾으러 간 것일까? 하지만, 나는 이러한 내 추측이 어리석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언제 작전이 실행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이곳 설계 도면을 찾으러 간다는 것 자체가 황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정말 하고싶지 않은 결론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에휴... 그러니까... 이용... 당한 건가? 어쩐지...' 그러니까 그 둘은 처음부터 내 작전에 동참할 맘이 없었던 것이다. 단지 작전이 실행되기 전에, 아니면 실행되는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어떤 물건을 찾으라는 명을 받고 우리와 함께 잠입한 듯 했다. 우리 셋은 희생물로 내놓고 말이다. '하... 그래놓고 뭐? 자기네 지부에서도 최대한도로 지원해줄 만큼 해준 거라고? 나원 참 기가 막혀서...' 아무리 본부에서 지원으로 보내줄 만큼 실력자라고 해도 이런데 생판 경험이 없는 나를 조장으로 세우고 가장 어려운 임무를 맡긴다 했을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과 설마하니 같은 상회 소속이자 같이 일하게 된 동료에게 위해를 끼칠 생각을 했겠는가 싶어서 안일하게 그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왔던 것 뿐이었다. '그런데... 허어... 정말 이럴 줄이야...' 어차피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던 사람들이라 '어떻게 이럴수가...' 라는 절망감 같은 건 들지도 않았다. 게다가 따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만약을 대비하여 - 정말 만의 하나였을 거다. 우리가 살아돌아오리란 걸 생각 못했을테니 말이다. - 그 둘이 사라진거에 대한 변명거리도 준비해 놨을 거다. 그 둘이 우리를 버리고 다른 일을 보러 갔다는 증거가 없는 이상 우리가 따지고 들어봤자 이미 처음부터 한통속이었던 그들에게 씨도 안 먹힐거고 말이다. '허어... 이 곳에 와서는 된통 당하기만 하는 구나...' 그렇다고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이 분노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화가 난다고 무작정 그들을 쥐어팰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두손 놓고 얌전히 당하는 것도 열받는 일이었으니 뭔가 내 감정을 풀어줄 방법이 필요했다. 내가 멀쩡이 짠 하고 살아돌아온다고 그들이 '헉, 이럴 수가...' 하면서 절망하지는 않을 터였다. 내가 화난 건 충분히 예상 하겠지만, 같은 상회 사람들이니 증거 없이 그들에게 함부로 해꼬지 못하리란 건 그들도 알고 있을테고, 게다가 난 이쪽 지부 사람이 아니라 이번 작전만 끝나면 곧바로 여기를 떠나니 조금만 버티면 나는 이만 빠드득 갈다가 가버릴 거라고 계산해 놨을 거였다. 그렇다고 엉뚱한 이들에게 화풀이 할 정도로 내가 어리석지는 않고 말이다. '하아... 정말 열받네... 뭐 좋은 수가 없나?' 이제와 생각하면 내가 맡은 임무가 목숨을 내놓고 할 정도로 꼭 필요한 것이었는지 의심스러웠다. 이 손님들이 아무리 봉이라고 해도 상회가 자신들의 모든것을 버려가면서까지 지켜줄 필요가 있는 건지 말이다. '에이... 하지만, 그건 아닐 거야. 밖에서 여길 뚫으려고 하는 걸 봐서는 그나마 우리를 희생물로 세우기는 했지만 타당성 있는 임무를 맡긴 거 같기는 해. 하지만.. 이용당한 건 변함없는 사실이겠지...' 아버지에게 확 꼰질러가지구 상회를 뒤엎어서 레이언 녀석이 이 곳 지부장을 끌고와 내 앞에 무릎을 꿇히고 싹싹 빌게 만들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러면 괜히 찝찝할 거 같아 역시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해보는게 나을 것 같았다. '문제는... 내가 여기서 뭘 얻을 수 있느냐는 건데... 살아가는 건 둘째치고 빈손으로 간다면 나만 억울하지. 그러니까 여기서 뭔가를 가지고 가서 녀석들의 배를 아프게 하고 내 기분을 좋게할까나?' 아래에서는 듀비와 해민이가 열심히 이리뛰고 저리뛰고 하고 있건만, 허공에 있는 나는 엘라스트라의 안전한 보호 아래 엔다이론의 등에 올라타서 태평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뭐, 어차피 해민이나 듀비나 저들에게 쉽게 당할 이들이 아니었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지만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다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듀비는 내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인지 여전히 내 아래쪽에서 무사들에게 둘러쌓여 있었는데, 그의 주위를 둘러쌓고 있는 무사들은 듀비의 실력을 의식해서인지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있어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그에 비해 해민이는 적들에게 둘러쌓이는 대신 오히려 자신 스스로가 적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한바탕 난리를 친 뒤 다른 곳으로 뛰어 들어가 또 휘저어 놓는 식으로 동분서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민이의 기세 또한 너무 매서웠기에 무사들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얼른 몸을 피해 해민이가 다른쪽으로 갈 때까지 몸을 사리는 거였다. 그래 해민이를 바라보니 왠지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는 듯 했다. 해민이가 술래이고 적들은 술래인 해민이에게 터치 당하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쪽이고 말이다. 그러다보니 무사들에게 둘러쌓여 그들만 상대하는 듀비에 반해 해민이는 무사들 뿐만이 아니라 안전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손님들에게까지 가끔 손길을 뻗었다. 그때마다 그들을 보호하는 무사들이 앞을 가로막고 뒤에 있는 손님들은 혼비백산해서 사방으로 몸을 피했는데, 황당하게도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그 순간에 자신들이 품고 있던 보따리들을 챙기느라고 정신이 없는 거였다. '오호라~!' 물론, 나는 그런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보따리 안에는 이번 경매에서 상품(?)을 사기 위해 바리바리 싸들고 온, 저 사람들이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금화 앤드 보석들이 들어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덕분에 나는 여기서 내가 얻을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훗훗훗, 지금 나는 도둑인데다가 저 사람들은 어차피 사람의 수치이니 약간의 벌을 줘도 상관은 없으렸다?' 경매의 절반이 훨씬 넘었을때 작전이 시행되었지만,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오늘의 하일라이트 상품(?)이 아직 팔리기 전이었기에 사람들의 주머니는 두둑했다. 거기에다 내가 여기에 들어올 때 커다란 자루를 준비해 가지고 온 건 아니었지만, 나는 왠만한 자루보다는 커다란 자루를 가지고 있었기에 여기에 있는 모든이들이 공평해질 수 있도록 싹 쓸어갈 수 있었다. [자아, 슈리엘~ 너희들이 할 일이 있어.] 아까 두 녀석을 찾으러 갔다 왔다가 정령계로 돌아간 바람의 매들이 다시금 나의 부름을 받고 이쪽 세계로 넘어왔다. 그들은 내 설명을 듣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하라면 해야 하는 입장이거늘... 내 설명을 들은 그들은 내가 지적한 한 뚱뚱한데다가 '나 돈 많아요~!'라고 광고를 하려는 듯 엄청 화려하고 비싸게 치장한 중년 남자를 향해 날아갔다. "우아아악~!! 이게 무슨 일이야? 살려줘~ 나 좀 살려줘어어~~" 내가 죽이려는 것두 아니고, 단지 슈리엘이 바람을 이용해 그를 허공으로 들어 올렸을 뿐인데도 그 남자는 숨넘어갈 듯 새파랗게 질려서 비명을 질러댔다. [에잉, 누가 보면 내가 엄청 잔인하게 고문하는 줄 알겠네. 체엣... 빨리 끝내야겠군. 노에스 손 벌려줘~] 노에스는 땅의 상급 정령으로써 엄청 거대한 거인이다. 그는 너무 커서 본체를 다 드러내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몸체 대부분은 땅 속에 있게 하고 필요한 부분, 예를 든다면 손가락이나 발가락이나 아니면 기껏해야 팔 정도만 드러내게 해서 일을 부탁한다. 뭐, 정령술사가 능력이 있다면 자신과 계약한 정령의 크기를 얼마든지 크게 할 수가 있기는 하지만, 노에스는 워낙에 크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그가 팔을 뻗기만 하면 커다란 배도 띄울 수 있는 큰 강에 순식간에 다리를 만들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전체가 얼마나 큰지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만약 그를 크게 만든다면 한 대륙 정도는 다 차게 할 정도로 커질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도 지금 그의 몸체를 드러내게 하지는 못하고 단지 한쪽 손바닥만 벌리게 했는데 그것도 너무 커서 우리가 있는 홀 바닥 전체가 들고 일어날 것 처럼 울렁거렸다. 그래 나는 황급하게 부탁을 변경해야겠다. [아앗, 미안한데... 전체를 드러내지 말고 손가락 끝 정도 크기만 드러내주면 안될까나? 슈리엘이 있는 곳 바로 아랫부분으로 말야.] 그러자 울렁거리던 바닥이 진정되더니 잠시 후에 슈리엘이 들고 있던 중년 남자의 밑바닥에 장정 한명이 쉽게 들락날락 거릴 것만 같은 크기의 시커먼 구멍이 열렸다. [슈리엘~] 사람들이 헛바람 들이키는 사이 내 부름을 받은 슈리엘은 곧 자기가 들고 있던 중년 남자를 탈탈탈 흔들기 시작했다. "우,아,아,아,아,아~, 사,라,암,사,알,려,어,줘,어,어~" 흔들리는 와중 잘못 입을 벌리면 혀를 깨물텐데도 그 중년 남자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구해줄 수가 없는 것이 내가 나머지 두 슈리엘에게 혹시라도 우리 작업(?) 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막으라고 부탁해놨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꽤 무거울 것 같은 중년 남자를 들고 탈탈 터는 슈리엘 덕분에 중년 남자의 몸에 있던, 비싸 보이는 장신구라던지 주머니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보석 같은 것들이 아래로 후두득 떨어져 노에스의 손가락 구멍(?) 사이로 들어가버렸다. "우,아,아,아~,내,보,서,어,억~" 탈탈 털리는 와중에서도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들을 봤는지 중년 남자가 처절하게 외치며 손을 뻗었지만, 참으로 얄밉게도 그의 손길을 샤샤삭 빠져나간 보석들은 곧장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한 1, 2분쯤 털고 나자 처음에는 후드득 거리며 떨어지던 것이 더 이상 떨어지는 것이 없자 슈리엘은 그를 땅에다 내려놨다. "어구, 어구, 어구구구~~ 내 보석드으을~~" 한참을 흔들리고 난 뒤라 그 중년 남자는 어지러워서 내려놓자마자 제대로 서지도 못했건만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보석들을 찾기 위하여 엉금엉금 기다시피 구멍쪽으로 다가갔지만 그 중년 남자가 닿기도 전에 구멍은 쏘옥 땅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자, 그럼 다음은...] 나는 그 중년 남자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진 어떤 중년 부인을 지목했다. [여자분이니까 특별히 치마는 잡아주도록 해.] "꺄아아악~~" 내 말이 끝나자마자 째지는 비명이 사방을 울렸고 이번에는 나이 지긋한 중년 부인이 허공으로 붙들려 올라가 탈탈 털리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보석으로 치장한 사람들이 연이어서 계속 털리자 사람들은 허겁지겁 자신의 몸에 두르고 있던 보석들을 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목표는 그들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화려하게 차려 입은 손님들의 몸에도 물론 보석들은 많았지만, 그 보다도 손님들과 같이 온, 일명 호위 무사들에게도 한보따리씩 있었던 것이다. 보석이나 금화 같은 것들은 덩어리로 있으면 고가치 못지 않게 무게도 상당했는데, 그렇게 무거운 것들을 부자들이 스스로 들고 다닐리가 만무했다. 다 힘센 고용인들에게 들게하지. "으아악~ 안돼, 안됀단 말이다~!!" "사수해! 목숨을 걸고서라도 사수해!" 잠시 전까지만 해도 완전 밀실이 된 이 홀을 나가기 위해 움직였는데, 이제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보화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덕이라고 해야할까? 내가 직접 나서기 전에는 해민이야 자신이 사방을 들쑤시고 다녀서 자신이 직접 공격을 하는 편이었지만, 듀비는 내 주위에서 단지 무사들의 공격을 방어하는 편이었다. 그러다 내가 나서게 되자 자신이 직접 공격을 하는 해민이는 상관 없었지만, 방어만 하던 듀비는 자신들의 고용주 보화를 사수하는데 모든 정신이 집중되는 바람에 조금 여유로워졌다. 그러자 그는 가만 있지 않고 쓸모 없는 줄 알면서도 계속 나에게 공격을 하는 이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홀 안은 한쪽에서는 나에게 보화를 털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해민이에게 들쑤시고 있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이 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고심하는 등, 완전 아수라장이었다. 그러니까 홀 안의 15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단 세명에 의하여 완전히 휘둘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서 나는 열심히 보화를 많이 가지고 있는 듯한 사람들을 지목하면서 바깥 사정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비록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이 홀을 막고 있는 실레스틴과 노에아넨이 변동사항이 생기면 그때 그때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건물 바깥에 보초(?)로 세워놓아 신호탄이 쏘아지면 알려달라고 부탁해놨던 실프가 언제 연락을 가지고 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이다. 거기에다 신호탄이 쏘아지면 이 곳을 빠져나가는 방법도 강구해야 했다. 비록 셀레아나와 노에아넨의 능력을 이기지 못해 번번히 실패하고 있기는 하지만서도, 홀의 세 입구 바깥쪽에서도 입구를 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내가 홀의 입구를 막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화를 털고 있는데다 해민이도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녔기에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신경이 여러갈래로 분산되어 우리가 이렇게 쉽게 홀 안 사람들을 휘두르고 있지만, 만약 내가 입구를 개방시킨다면 홀 안 사람들이나 바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우리 셋에게로 집중될 것이 뻔했다. 뭐, 그래도 죽지 않고 빠져나갈 자신은 있었지만, 현재 나는 최상급 정령 셋과 ( 입구를 막고 있는 셀레아나와 노에아넨, 그리고 날 보호하고 있는 엘레스트라) 상급 정령 두명 (나를 데리고 허공에 떠있는 엔다이론과 땅 속에서 열심히 보화를 챙기는(?) 노에스 ), 그리고 중급 정령 셋 (보화들을 털고 있는 슈리엘들) 에게 한꺼번에 힘을 보내주고 있었기에 내 정령 기운의 소비가 장난이 아니게 많았다. 이렇게 많이 사용한 적은 아버지와 실피드에게 정령을 부리는 교육을 받을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없었기에 솔직히 조금 긴장은 하고 있는 중이었다. 뭐, 그래도 대충 내 기운의 크기를 재면서 소비를 최소한으로 조절하고 있는데다, 아직 서너시간은 충분히 버틸 자신은 있지만서도, 이 곳을 벗어나 무사히 돌아갈때까지 어떤 변수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니 만약의 사태까지 생각해 놔야 했다. 그냥 직빵으로 돌아간다면 편할테지만, 우리가 상회 사람이라는 걸 감춰야되니 남들 눈에 뜨이지 않게 돌아가는 것만 해도 쉽지는 않을 터였다. 게다가 지금 해민이와 듀비가 아직까지는 팔팔하기는 했지만, 계속 쉬지 않고 날뛰면 얼마 후에는 지쳐버릴게 뻔했으니 그때는 내가 저 둘까지 보호해야 한다는 것도 계산에 넣어야 했다. 겉으로는 여유만만하게 방실방실 웃고는 있었지만, 머리속으로는 이러한 여러가지 생각과 긴장으로 인하여 내 딴에는 꽤 복잡했다. 하기야, 이러한 일을 행하면서 여유만만하길 바라는 건 무리였지만 말이다. 그나마 죽을까봐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큰 행운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불안하지만 여유만만한 상황은 점점 바뀌고 있었다. 내가 여전히 홀 안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나에게 보화를 털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수록 보화를 사수하기 위해 긴장하는 쪽보다는 빼앗긴 분노로 인하여 나에게 덤벼드는 숫자가 많아졌던 것이다. 덕분에 듀비는 다시 방어하는 쪽으로 돌아섰고, 해민이는 전보다 좀 더 강경한 반발에 맞서야 했다. 아직까지는 둘 다 지친 기색 없이 잘 움직여주고 있었지만, 우리를 향한 공격이 점점 더 거세질 수록 나는 괜히 걱정스러워서 빨리 신호탄이 터지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내가 홀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다 탈탈 털고 난 뒤에도 신호탄은 올라오지 않는 거였다. 덕분에 해민이와 듀비는 처음 우리가 이 홀을 막았을때보다도 더욱 더 거센 공격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시간이 많이 흘러 듀비와 해민이에게 점점 지친 기색이 보이는 듯 하자 나는 차라리 나중에 뭔 소리를 듣더라도 신호탄에 관계 없이 이 곳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그러자면... 여기를 빠져나가야하는데... 어쩌지? 입구를 개방한다고 해도, 입구를 열기 위해 안쪽에서나 바깥쪽에서나 입구쪽에 몰린 사람이 너무 많은데... 그들을 다 정면으로 치고 나가기는 어려울 거 같고...' 그러면서 나는 천장을 바라보았지만,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수 밖에 없었다. 이 곳이 지하 깊은 곳이라서 천장을 뚫을때의 어려움은 둘째치고라도 천장을 뚫을 때 많은 잔재물들이 떨어지리라는 건 쉽게 짐작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걸 무사히 해결해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가능하다 치더라도, 위로 올라가 허공으로 날아가면 너무 사람들 눈에 띄였다. 물론, 지금이 한밤중이라 시내에 있는 주택가들은 잠에 빠져 있겠지만, 최소한 이 저택 내에 있는 사람들은 두 눈에 불을켜고 있을테니 천장을 뚫고 위로 올라가는데 눈에 안 뜨일 리가 없었다. '하늘도 안되고, 땅 위도 어렵고... 참내 그냥 땅 속으로 꺼지는 방법 없나? 가만... 땅 속?' 투덜대던 나는 문득 내가 떠올린 생각에 무릎을 쳤다. '그렇군. 땅 속이 있었지? 아아.. 내가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을까?' 물론 내가 땅굴을 팔 능력은 안되지만, 나에게는 노에스가 있었다. 그의 손바닥이라면 우리 셋을 땅 속으로 이동시켜주고도 남을 것이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얼른 이 곳을 빠져 나가기 위하여 해민이와 듀비를 불러 올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내 눈에 이런 소란 속에서도 용케 무사히 있던, 단상위의 쇠창살 속의 임신한 수인족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임신한 상태라 그런지 다른 이종족 노예들처럼 약을 먹이는 대신 쇠창살로 만든 정육면체의 우리에 갖혀서 단상위로 올라 왔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또렷한 눈동자 속에 담긴 절망감이 이미 팔려서 홀 안 곳곳에 있는 다른 이종족들의 모습보다 더 날 사로잡았는지 모른다. '아아... 그러고보니 여기 있던 다른 이종족들도 깜빡 하고 있었잖아? 에휴... 이들을 이대로 놔둘 수는 없으니... 아무래도 힘좀 써야겠군.' 그리하여 나는 조금이라도 힘을 아끼고자 날 보호하고 있던 엘라스트라에게 보내던 힘을 끊고는 내 보호는 전적으로 엔다이론에게 맡겼다. 그리고 홀 안에서 열심히 보화들을 털어내던 슈리엘들을 돌려보내고 대신 엄청난 수의 실프들을 불러냈다. [자, 그럼 여러부우운~ 한바탕 시작해 보자구요오오~] 내가 불러낸 정령들을 향해 방긋 웃으며 말하자 갑자기 홀의 바닥이 크게 흔들리며 그 위에 서 있던 모든 이들이 균형을 잃게 만들었다. 그 틈을 타서 단상 부분의 바닥에서부터 큰 흙더미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하자 단상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기겁을 하며 흔들리는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그 곳에서부터 멀어지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또 다른 아수라장이가 벌어지는 사이 내가 불러낸 수많은 실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약의 기운에 취해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는 이종족들을 잡아 날라오기 시작했다. 단상 위에 있는, 우리에 갖힌 수인족 여성은 커다란 흙더미가 솟아오르는 바람에 위태하게 허공으로 올라갔다가 흙더미 안으로 굴러떨어지는 듯 보였지만 아마도 노에스가 잘 잡아줬을 터였다. 그리고 나를 데리고 있던 엔다이론은 빠르게 아래로 하강하여 해민이와 듀비의 목덜미를 입으로 잡아 채 잽싸게 흙더미가 솟아 오른쪽으로 날아갔다. "뭐, 뭐야?" 당황한 해민이가 엔다이론을 향해 손톱을 휘두르려고 했지만, 그 보다도 내가 먼저 잽싸게 그를 제지했다. "나니까 놀라지 말고 가만히 있어." "뭐 하시는 거예요, 누님? 적들을 두고 도망치려 하시다니요?" "여기에 더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이제 그만 가려고." 내 대답에 해민이가 불만에 찬 표정으로 뭐라 더 하려고 했지만, 하필 그때 엔다이론이 해민이와 듀비를 흙더미 가운데에 나 있는 구멍에 떨어뜨려서 그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실프들이 속속 이종족들을 데리고 도착하자 구멍은 더욱 더 넓어져서 그들을 맞이했다. 나는 구멍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대신 십여명의 셀리맨더 ( 불의 중급 정령 ) 들을 불러내어 사람들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사방으로 보냈던 실프들이 다 도착하자 나는 내가 불러낸 홀 안에 있는 모든 정령들을 돌려보냄과 동시에 흙더미 안에 있는 구멍으로 뛰어 들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에 맞춰 노에스는 입구를 닫고 우리를 안전한곳 까지 땅 속으로 끌어 내렸다. "해인님, 무사하십니까?" 사방을 노아스가 막고 있어 빛 한 점이 없었지만 엔다이론의 몸에서 나는 희미한 빛 때문에 주위를 분간하는 건 가능했다. 그러나 어둑어둑한건 여전했기에 나는 카사 한명을 불러내며 듀비의 부름에 답했다.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둘은 어때요? 해민이는 다친데 없어?" "나야 뭐... 조금 더 싸우지 못하고 돌아 온게 아쉬울 뿐이라고요." 해민이는 아까 갑자기 끌고 온 불만이 아직 안 풀렸는지 부루퉁한 얼굴로 대꾸했지만, 이제 싸움이 끝났다는 걸 인식했는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미안해. 내가 더 버티기 힘들 거 같아서 그만 끝내려고 한 거야. 하지만 너도 많이 운동했잖아? 오늘은 그 정도로 만족해주라." "하는 수 없죠 뭐. 나중에 또 다른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저 오늘 도움 많이 되었죠?" "그러엄, 네가 없었으면 이번 작전은 실행하지도 못했을 걸 뭐. 수고했어." "저 시퍼런 엘프보다도 더요?" 해민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마구마구 칭찬해주자 해민이가 두 눈을 빛내며 한번 더 물었다. 그에 헉... 하면서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해 하는데 이런 날 듀비가 구제해줬다. "네가 몇명을 해결했는데?" "뭐?" 그의 질문이 뜻밖이었는지 해민이는 그를 휙 돌아보다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걸 누가 일일이 세고 있어? 그냥 되는 대로 쓰러뜨렸지." "그러면 누가 더 많이 해결했는지 알 수가 없지 않아? 나는 정확히 53명을 쓰러뜨렸다." 듀비의 말에 해민이는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헹, 겨우? 나는 모르긴 몰라도 그 보다는 더 많이 쓰러뜨렸을걸?" "그걸 누가 믿지? 일일이 세어본 것도 아니고 단지 짐작일 뿐이잖아?" "뭐? 누님, 제가 더 많이 쓰러뜨린거 맞지요?" 듀비의 말에 말문이 막혔는지 해민이는 나를 돌아보며 도움을 구했다. 그러나, 내 입장이라는 것이 누구를 편들기 너무 애매했기에 나는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할 수 밖에 없었다. "미안... 어떻게 빠져 나갈지 궁리하느라 제대로 보지는 못했어." "예? 허걱... 그, 그럴 수가..." 무지 서운한 듯한 모습으로 날 바라보기에 나는 미안한 마음에 얼른 덧붙였다. "아, 그러니까 네가 몇명을 쓰러뜨렸는지를 제대로 못 봤다는 거지, 네가 싸우는 건 잘 봤어. 굉장히 멋있던걸?" "그, 그래요? 흐음... 뭐, 하는 수 없죠. 저도 쓰러뜨린 놈들을 세고 있지는 않았으니... 이봐, 퍼런 엘프 다음 부터는 그런 건 미리 미리 말하라고. 미리 말했으면 나도 셌을 거 아냐?" "흐음... 그렇군. 나도 그건 미처 생각을 못했군. 그럼 이번은 무효로 하고 대결은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지?" "쳇... 하는 수 없지." 해민이가 아쉽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듀비의 말에 수긍하며 물러나자 나는 감격에 찬 시선으로 듀비를 바라봤다. '듀비~ 훌륭해요오오~~' 그렇게 땅 속으로 이동한 우리가 다시 밖으로 나온 곳은, 이번 작전에 투입된 인원들이 훈련을 하던 그 실내 연무장이었다. 이동하는 와중 우리에 갇혀 있던 수인 족 여성을 우리에서 꺼내어주고 손목과 발목에 차여 있던 두터운 쇠 수갑도 풀러주었다. 그런데 그녀는 성년식을 예전에 치른 성년 수인족이라서 그런지 해민이가 날 처음에 보자마자 믿었던것과는 달리 쉽게 날 믿지 못한 채 경계하는 바람에 좀 애를 먹었다. 그나마 듀비에게처럼 보자마자 전이해서 달려든 것은 아니었지만, 도와주러 온 거라고 해도 쉽게 믿지 못해서 달래고 달래서 겨우 손목 발목의 수갑만 풀었지, 수갑 때문에 생긴 그녀의 상처는 건드리지도 못했다. 그래 해민이 보고 그녀를 설득하게 하려고 했는데, 좀 어이없게도 그녀는 해민이 에게서 인간 냄새가 풍긴다는 이유 하나로 해민이를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손에서 자란 것으로 의심하는 바람에 수인족의 수치라고 해민이에게 덤벼들려는 걸 말리느라고 진땀 흘렸다. 정정당당하게 싸우다가 능력이 딸려서 지는 바람에 굴복하는 건 괜찮지만, 처음부터 인간의 손에 길들여져 싸워보지도 않고 인간을 주인으로 섬기는 건 수인족들이 수치로 여긴다나? 그래서 내가 그녀보고 당신도 인간에게 져서 잡힌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만, 함정을 파놓고 여러 명이서 떼로 덤벼드는 것은 비겁한 행위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기는 건 이기는 걸로 여기지 않는다는 거였다. 뭐,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그렇습니까?' 하고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가 자신은 수인족의 수치라고 자살하려고 하지 않는 것만 해도 우리로써는 다행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녀가 해민이 보고 수인족의 수치니 뭐니 하면서 덤벼들때 나는 혹시나 그녀가 스스로 자결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지금이야 아이를 가졌기에 자결을 미룬 거지만, 나중에라도 그렇게 되면 아이는 졸지에 어머니를 잃는 셈이 되니 안타까운 일 아니겠는가? 그러한 작은 소동을 겪으며 연무장 바닥을 뚫고 도착해보니 새벽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었고 불은 다 꺼져 있었다. 하기야, 그 연무장에서 훈련하는 이들은 모두 작전에 투입 되었을테니 다른 시간이었더라도 사람은 없었을 거였다. 듀비에게 부탁해서 우리가 이 곳에서 안면을 튼, 이번 작전에 합류하지 않은 버지니아와 비토 남매를 불러오게 하는 동안 나는 노에스의 손바닥 안에서 구해온 이종족들을 벗어나게 한 뒤 멍하니 앉아 있는 이종족들 옆에 주저 앉았다. "에구... 힘들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무리 정령의 기운을 많이 가직 있는 나라도 오랜 시간동안 상급 정령들이나 최상급 정령들에게 힘을 마구 마구 보태준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계속 긴장하고 있던 몸에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퍼지자 나도 모르게 기운이 쭈욱 빠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안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이가 있었으니... "여긴 어디지?" 수인족 여인은 당장이라도 대답을 안 하면 손톱을 빼어내 달려들 기세로 날 노려보며 물었다. "여긴 왈그린 국에 있는 베지테크스 상회 그랜드마 지부예요." 내 대답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기색을 보이는 수인족의 여인을 위해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에... 그러니까, 이번에 당신이 팔릴 뻔한 경매를 엉망으로 만들고 이종족들을 구출해낸 단체의 본부라고나 할까요? 뭐, 정식 본부는 다른 나라에 있긴 하지만, 이번 작전은 여기서 한 거니까..." 수인족 여인은 내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경계하는 어조로 다시 물었다. "너희 단체에서 이종족들을 구해서 뭘 하려고 그러지? 설마... 네놈들도 우릴 잡은 놈들과 같은 일을 하는 거냐?" 끝에가서는 매서운 살기까지 보이는 그녀였기에 나는 얼른 손을 내저으며 대답해야 했다. "설마요. 정말 우리가 그런 일을 하는 단체였으면 당신을 왜 우리에서 꺼내주고 수갑 까지 풀어 줬겠어요? 으음...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종족들을 구해내는 건 단지 부차적인 일이래요. 원래 목적은 당신들을 사고 팔때 모여드는 자금을 털려고 하는 거죠." "그럼 우리는 어쩔 거지?" "어쩌긴요, 당연히 집으로 돌려보내 드리죠." "뭐?" 수인족 여인은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뭐,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만... 사실이예요." "믿을 수가 없군. 인간들은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는 종족이야. 아무 댓가 없이 우리를 도와줄 리 없어." "맞아요. 당신들을 마을로 데려다주는 댓가로 당신들과 거래를 하더라구요. 으음... 저는 저번에 이 곳에서 구출한 인어들을 데려다 줬는데... 그 댓가로 바다 속에 침몰한 배에 있는 물품들을 건져 주던데요? 뭐, 저도 이 단체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아직 다른 종족들을 데려다 준 적은 없지만... 엘프들을 그들의 마을로 데려다 주는 건 봤어요." 내 말에 그녀가 약간은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이냐?" 나 같으면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아무리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줘도 의심했을텐데, 아니 친절한 건 더수상히 여겼을텐데 수인족 여인은 내 말을 믿는 눈치였다. 뭐, 그렇다고 내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사실이예요. 아마 당신도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하면 당신 마을에 데려다 줄 걸요? 수인족 하고는 어떤 거래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거기까지 말했을때 버지니아가 뒤에 듀비를 달고 연무장 안으로 들어오며 내 말을 받아줬다. "수인족에게는 보통 무력을 빌린다던가, 아니면 비싼 값에 팔리는 몬스터들을 거래하곤 하지. 수인족은 산에서 제왕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말야." "아, 그렇군요. 그런데... 몬스터를 사는 사람도 있나요?" 내가 실제로 본 - 뭐, 훈련 받을때 마법으로 이미지화 된 몬스터를 보긴 했지만, 실제는 아니었 으니까.. - 몬스터라고는 바다에 사는 뱀장어나 문어 괴물 같은 것들 밖에 없었기에 그런 걸 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어리둥절 할 뿐이었다. '으음... 그런 것도 먹을 수 있나? 하기야, 먹을 수만 있다면 엄청난 식량을 얻는 거긴 하네.' "그럼, 몬스터들의 힘줄이나 가죽 등은 보통 동물들보다 질기고 부드러운 경우가 많아서 비싼 값에 팔리지. 거기다 각질 또한 무척 단단하며 가벼워서 그런걸로 만든 무구도 엄청 비싸고 말야. 아, 트롤의 피 같은 건 잘 정제하면 포션을 만들 수 있으니... 몬스터들도 잡으면 돈 덩어리지." "헤에..." 포션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돈이 되는거긴 되는 건가 보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에게 버지니아는 생긋 웃어보이더니 유일하게 이종족들 중 또렷한 정신을 가진 수인족 여인 앞으로 다가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저희 상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희 상회는 이종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하니 그렇게 경계 안 하셔도 돼요." 수인족 여인은 버지니아를 경계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나를 한번 힐끗 보다가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우선 숙소로 안내해 드리죠. 몸도 씻으셔야할테고, 상처도 치료하셔야 하잖아요." "흥, 이까짓 상처 쯤이야... 치료 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생각하셔서 조심하셔야죠." "우리 수인족은 그렇게 약해빠지지 않았어." "예, 예. 하지만 좀 씻는 건 원하시겠죠?" 어쩐지 듀비와 버지나아만 왔다 했더니만, 비토는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오느라고 좀 늦은 모양이었다. 연무장 문이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에 수인족 여인이 놀라 벌떡 일어나며 전이를 하려고 하자 버지니아가 황급히 말렸다. "괜찮아요, 괞찮아. 우리 상회 사람들이예요. 여러분들 몸이 안 좋을 거 같아서 도와달라고 부른 거예요." "사실이냐?" "그렇다니까요." 수인족 여인은 버지니아에게 확답을 받는 것으로 성이 안 찼는지 나를 돌아보았다. "이 인간 여자의 말이 사실이겠지?" "사실 맞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얼굴을 덮고 있는 가면을 벗으며 방긋 웃어줬다. 화장 위에다 가면까지 쓰고 있어서 엄청 답답했었는데, 이제야 겨우 그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어 나는 무지 행복했다. "버지니아~ 나 빨리 화장 지우고 싶어요." "어머? 왜? 너무 잘 어울리는데 아깝게시리..." "어휴, 너무 답답한 걸요? 여자들은 이런 화장을 어떻게 즐겨 하는지 원... 아무리 화장을 하면 예뻐 보인다지만..." "쯧쯧, 너는 여자의 마음을 너무 몰라." "모든 여자가 화장 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을 걸요?" "아, 그건 그렇고 해인아...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니? 다 같이 왔을 거 아냐?" "같이 안 왔어요. 저희만 곧장 온 걸요." "뭐? 아니 왜? 퇴각하고 한 지점에서 만나서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잖아?" "물론 그랬죠. 그런데 퇴각하고 만나는 장소를 아는 톰슨과 싱거가 작전을 실행하기 전에 경매장을 빠져 나가서 돌아오지도 않는데다가 힘은 떨어지는데 퇴각하라는 신호탄은 올라오지 않더라고요." "뭐? 아니, 그러면... 너하고 듀비하고 해민이 단 셋이서 경매장안을 막았다는 거야, 지금?" "어쩔 수가 없었어요. 작전을 시행하라는 신호는 오는데 톰슨과 싱거는 돌아오지 않고... 나중에 정령들에게 부탁해서 찾으니 엉뚱한데 가서 딴 일 하고 있던 걸요?" 그 동안 걷지를 않아서 크게 불편함은 못 느꼈지만, 그래도 내 여린 발을 꽈악 물고 놔주질 않는 괘씸한 구두를 벗어 들며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지만 내 말에서 버지니아는 뭔가를 알아챈 모양 이었다. "뭐? 으음.... 그래, 알았어. 어쨌든 피곤할테니 올라가서 쉬어." "그러죠 뭐. 뒷일은 부탁할게요." 버지니아가 알아채든 말든 나는 쉬라는 말에 기뻐서 생긋 웃으며 해민이와 듀비를 이끌고 우리 방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런 내 앞을 가로막는 이가 있었으니... "어딜 가는 거지?" 무척 초최한 상태였으면서도 어디서 그런 힘이 있는건지 잽싸게 내 앞으로 달려와 날 가로막으며 무서운 기색으로 물어보는데 나는 어리벙벙 할 뿐이었다. "네? 아, 저 피곤해서 쉬러 가는데요?" "나도 같이 가겠다." "예?" 뜬금 없는 수인족 여성의 말에 나는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러자 수인족 여성이 눈을 가늘게 해서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날 바라보는 거였다. "뭘 그렇게 놀라지? 내가 같이 가면 안된다는 건가?" "아뇨, 안될 건 없는데..." "그럼 뭐가 문제지?" "아뇨.. 아무 문제는 없는데..." "그럼 됐군. 이만 가지. 나도 피곤해서 쉬고 싶군." "에? 아, 예." 버지니아를 힐끔 보니 그녀가 그렇게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길래 나는 얼른 수인족 여성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나를 버리고 작전을 성공시키려고 했던 나머지 팀들이 돌아온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조금만 더 늦게 왔다면 날이 새어서 곤란했을 정도로 무척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잠이 들어 그들이 돌아왔는지도 몰랐을텐데, 그날은 예민하게 구는 수인족 여성 때문에 피곤한데도 잠을 못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나를 따라 왔으면서도 나를 완전히 신용하지 못해 내가 조금만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도 퍼뜩퍼뜩 일어나 나를 노려보는 거였다. 차라리 그녀가 눕기 전에는 빤히 보고 있었으니 그나마 덜했지만 그만 자라고 눕히니 이건 완전히 신경이 더 예민해져가지고 오히려 더 안정을 취하지 못하는 거였다. 덕분에 나까지 덩달아 예민해져가지고 잠도 못 자고, 그렇다고 함부로 움직여 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하느라고 고역이었다. 그래 결국 그녀에게 슬립 마법을 걸어 푹 재우고 나도 자려고 할때 그들이 돌아온 거였다. 별로 일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잭슨이 조금 걱정이 되어 그를 만날 겸, 톰슨과 싱거가 무사히 돌아온 날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도 궁금해서 슬금슬금 찾아오는 잠을 냉정하게 외면하고 방을 빠져 나왔다. "수고 하셨습니다. 작전은 성공 하셨는지요?" 그들도 이 곳에 도착하자마자 실내 연무장으로 직행을 하기에 나도 슬금슬금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가니 버지니아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클리프를 맞으며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아니. 이번 작전은 완전 실패야. 그쪽에서 단단히 준비를 하고 있더군. 덕분에 아까운 마법 스크롤만 잔뜩 날렸지. 이번 경매의 하일라이트라는 그 수인족 여성은 커녕 이종족들은 한명도 구하지 못하고, 경매로 인하여 모인 자금도 얼마 탈취 못했어. 이번 작전은 완전 적자야, 적자." 연무장에 모인 사람들은 클리프를 비롯하여 모두 위험한 고비들을 넘겼는지 몰골들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에 있던 잭슨 또한 작전을 수월하기 실행하기 위하여 얼굴에는 시커먼 복면을 쓰고 약간 달라붙은 검은 색 바지와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군데 군데 찟겨 있었고 한쪽 어깨와 얼굴은 불덩어리라도 맞았는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거기에 복면을 벗자 한쪽 뺨이 데여서 빨개져 있었는데 한쪽은 하얗고 한쪽은 붉은데다 군데 군데 검게 그을리기 까지 해서 얼룩덜룩하자 되게 웃겼다. "푸, 푸하하하~~ 야, 잭슨 너 그게 무슨 꼴이야?" 클리프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모두 작전이 실패 했다는 걸 알고 있던 탓인지 분위기가 침울한 와중에 내 웃음소리가 울려퍼지자 모든 이들의 매서운 눈길이 나를 향해 꽂혀왔다. 하지만, 나는 무지 당당하게 그 시선들을 맞으면서 생글생글 웃으며 클리프를 향해 다가갔다. "여~ 많이 늦으셨네요? 그래도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네요." 클리프는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가 곧 나인 것을 알고 흠칫 놀라더니 또 금세 그 기색을 지우고는 분노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벨이 잔뜩 꼬여있는 내가 그런 꼬투리를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호오, 참으로 표정 변화가 다양무쌍 하시군요." 내 말에 클리프의 눈꼬리가 꿈틀 거렸다. "재밌나?" 매서운 목소리였지만 나는 그대로 받아쳤다. "구경하는 건 재미있네요." 그러자 클리프의 눈꼬리가 다시 한번 꿈틀거렸다. "왜 여기 있는 거지?" "잠을 아직 못 잔 데다가, 같은 작전을 수행했던 다른 사람들은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 해서요." 어깨를 으쓱거리며 평상조로 대답하자 클리프가 으르렁 거리듯 다시 되물었다. "내 말은, 살아 있었으면 집합 장소로 오지 않고 왜 여기로 곧장 온 거냐고 물은 것이다. 우리 같은 비밀 단체에서 개인 행동은 곤란하다는 걸 모르는 건가? 아니, 퇴각 신호탄을 보고 퇴각을 하기나 한 거야?" "물론, 우리도 퇴각 신호탄을 보고 퇴각해서 집합 장소로 가고 싶었지요. 그.러.나." 나는 거기서 잠시 말을 끊고 날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클리프를 같이 매섭게 바라보며 나머지 말을 이었다. "단 세명이서 그 홀 안의 100명이 넘는 인원수는 물론이거니와, 밖에서 홀 안으로 진입하려는 사람들을 막는게 좀 힘에 부치더군요. 그래서 미리 그 곳을 빠져 나온건데, 우리를 안내하겠다고 호언 장담한, 지부 측에서 제공해준 두 잘난 남자들은 작전을 시행하기도 전에 홀을 빠져나가 돌아오질 않더군요. 그래서 못 갔는데요? 그 두 남자는 어딨나 궁금하네?" 그러면서 나는 생각난 김에 홀 안을 다시 살펴보다 구석에서 조용히 서 있는 톰슨과 싱거를 찾을 수 있었다. "헤에, 잘 살아 왔네요? 나는 우리 작전지인 홀과 엄청 멀리 떨어진 저택 안 어느 방안을 뒤지고 있다고 해서 둘이 잘 살지 걱정했는데... 그런데, 그런 옷들은 언제 준비해가서 갈아 입었지요? 나랑 갈때는 경장 갑옷 차림이었는데... 마치.. 처음부터 우리와는 다른 임무를 가지고 간 사람들 처럼 말예요." 그들은 휘황찬란했던 옷차림을 벗어 던지고 다른 이들과 마찬 가지로 검은색 일색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로써 클리프가 나와 듀비, 그리고 해민이만 그 홀 안에 냅두게 하고 저 둘은 빼돌리려 했을 것이란 추측이 명백한 사실로 다가왔다. 그 둘은 피로한 기색에 몸도 성치 못해 고생한 흔적이 역력해서 그나마 내 분노를 가라앉혀 주었지, 만약 그 둘이 아무런 상처 없이 멀쩡했다면 나는 그 전에 생각했던 것들은 모두 우주 너머로 날려버린 채 저 둘에게 분노의 펀치를 가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클리프에게서부터 시선을 돌리고 있자, 클리프는 헛기침을 해서 자신에게로 주의를 돌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해도 멋대로 이 곳으로 돌아온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누군가에게 들키면 어쩔 뻔 했지? 아니지, 벌써 들켰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러자 그 동안 가만히 사태를 주시하고만 있던 버지니아가 내 대신 나서서 대답했다.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땅 속으로 이동해 왔으니까요." "응?"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클리프에게 버지니아는 다시 한번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 했다. "그러니까 해인군은 일행 둘과 함께 단 셋이서 많은 이종족들을 구해 땅 밑으로 이동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잘 메우기는 했지만, 약간 티가 나는 연무장 바닥을 가르키자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클리프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인가? 어떻게 땅 밑으로 이동해 왔지?" "땅의 정령에게 부탁했는데요?" "땅의... 정령? 그런 것도 가능한 건가?" "해보니까 되데요." 무성의한 내 대답에 클리프의 눈썹이 다시 한번 꿈틀 거렸지만, 그는 화내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너희 셋이서 이종족들을 구해 온 게 사실인가? 어떻게 구했지?" "홀 안에 있기에 그 곳에서 빠져 나올때 같이 데리고 온 것 뿐이예요." 생각 같아서는 '잘요'라고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예의상 제대로 대답해준건데 클리프의 눈썹이 또 꿈틀 대더니 화를 버럭 냈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내가 장난하는 걸로 보입니까?" 그래도 쫄 이유가 없었던 내가 당당하게 대꾸하자 클리프가 부들부들 떨더니만 허리에 찬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건방진..." "호오, 해보시게요?" 날 따라 왔던 듀비와 해민이가 흠칫 하며 나서려고 했지만, 나는 그들을 제지한 채 내 옆에 거의 항상 있어주는 엘라스트라를 불렀다. 나와 듀비, 해민이를 감싼 거대하고 날씬한 수룡이 그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자 클리프와 같이 검을 손에 가져갔던 지부 사람들이 헉 하는 신음성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건 엘라스트라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클리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엘라스트라를 처음 보는지 입이 떠억 벌어져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던 것이다. "드, 드래곤?" "드래곤이 아니라 용인데요?" 내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지만, 내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엘라스트라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약간 놀라게 해주려고 했던 것 뿐인데, 놀라는 것 뿐만이 아니라 두려움까지 보이자 왠지 흐뭇해지면서 여기서 뭔가를 더 보여줄까~ 고민하는데 이 상황에서 침착성을 유지하고 있던 두 인물이 이런 내 생각을 눈치 챘음인지 나를 말렸다. "자자, 해인아... 네 기분은 이해 하겠는데 이제 그만 해라. 아무리 그래도 같은 상회 소속인데 이러는 건 너한테도 안 좋을 거야." 버지니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날 달래려고 하자 잭슨도 나섰다. "그래, 그래. 야, 난 빨리 가서 쉬고 싶다고. 너 때문에 소동이 일어나서 내가 침대에 눕는 것이 지체된다면 나는 너무 슬플 거야. 날 봐서라도 좀 봐주라. 우리 그냥 빨리 가서 자자, 응?" 잭슨이 늦게까지 잠을 못 자서 눈이 빨개지건 눈을 못 뜨건 나랑은 상관 없었지만, 사실 나도 지금까지 피곤한 가운데에서도 자지 못하고 나왔던 거라 잭슨의 빨리 가서 자자는 말에 귀가 솔깃 했다. 거기다가 내 상태도 아까 힘을 많이 썼지만, 아직 회복이 안 된 상태였기에 지금 엘라스트라에게 뭔가를 시키는 것도 힘든 상태였다. 뭐, 하기야...처음부터 엘라스트라에게 뭔가를 시키려는 게 아니라 단지 모습을 드러내게 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을 조금 놀래키려는 것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래 나는 순순히 엘라스트라에게 보냈던 힘을 뺐다. "그래, 그래. 그만 가서 자자. 나도 슬슬 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서는 나는 뒤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지부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연무장을 빠져 나갔다. '후훗... 그래도 한마디는 해서 기분은 좋네. 거기다가... 우히히히~~ 홀 안에서 싹슬이한 보화들두 다 내차지구나... 키득키득...' 그 생각을 하자 기분이 너무 좋아서 혼자 키들키들 웃자 같이 가던 잭슨이 의아하다는 듯 날 쳐다보았다. "뭐야? 뭐가 좋아서 혼자 그렇게 웃어? 아까 클리프에게 한 마디 한게 그렇게 기분이 좋냐?" "응? 아아... 뭐, 그것도 그거지만.. 후후후... 딴 것두 있어가지구... 아, 그건 그렇고 잭슨 깜빡할 뻔 했는데 말야, 너 아무래도 네 침대 못 쓸거 같다." 잭슨의 말 덕에 방에 있던 수인족 여성을 떠올린 내가 말하자 그가 어리둥절한 듯 고개를 갸웃 거렸다. "내 침대를 못 쓸거 같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아, 그게 말이지... 이번에 구한 이종족 중 한 명이 우리랑 같이 있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같이 있게 되었는데... 아까 재우려고 할 때 네 침대만 비어 있어서 네 침대를 줬거덩..." "뭐, 뭐야아~? 그럼 나는 어디를 쓰라고?" 기겁을 하면서 잭슨이 우리 셋을 돌아보자 해민이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으르렁 거렸고 나는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피했다. 결국 잭슨은 마지막 남은 듀비를 애절하게 붙들 수 밖에 없었다. "으흐흐흑~~ 듀비이이~~" 그에 듀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와 같이 쓰시죠." "고마워요오오~~" 제 24화 펜사 산맥을 향하여. "내가 왜요?" 나는 너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그랜드마 지부장을 노려봤다. 하지만 이 얄미운 그랜드마 지부장 퍼거슨은 태연한 표정으로 내 시선을 받아내는 거였다. "그거야, 자네가 지금 현재 이 지부에 있는 모든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라고 클리프가 추천했기 때문이지." '빌어먹을 클리프 자식' 나는 속으로 이를 빠드득 갈았다. 도대체가 날 희생 시키려 한 주제에 이제와서 무슨 얼굴로 날 천거할 수 있느냔 말이다. 아니면, 어제 내가 한 마디 한거 가지구 날 괴롭히려고 수작을 부리는 걸까? 지금 그 인간이 눈 앞에 있었다면 같은 상회 소속이고 나발이고 한바탕 하고도 남았을 거다. 하지만 대신 나는 분을 속으로 삼키고 지부장을 노려보며 또박또박 대꾸했다. "제가 받은 명은 이번 작전을 도우라는 것 뿐입니다. 그 작전도 어제부로 끝났으니 저희는 오늘 돌아갈 것입니다." "누가 돌아가지 말라고 했는가? 내 말은 가는 길에 좀 도와달라는 말이지. 어차피 자네들이 돌아가는 길과 크게 틀린 것도 아니지 않는가?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같은 한 식구인데 도와주면 좋지 않나?" "하, 한 식구?" 이 인간이 내가 뭔 일을 당했는지 모르고 말하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능청을 떠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모른다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이제 본부에서 받은 명은 다 지킨 이상 내가 지부 사람들을 도울 의리나 의무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죄송하지만 말씀하신 그 길과 제가 가려는 길은 달라서 말이죠. 거절하겠습니다." 단호하게 딱 잘라 거절한 뒤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퍼거슨이 무지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가? 뭐, 그렇다니 하는 수 없지만... 버지니아가 무척 서운해 하겠군." "예?" 아니 여기서 왜 뜬금없이 버지니아가 튀어나온단 말인가? 나는 멈칫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 퍼거슨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계속 앉아 있고 싶은 마음은 요만큼도 없었지만, 버지니아에 관한 일이라면 달랐던 것이다. 이 곳에서 유일하게 우리 일행에게 살갑게 대해준 존재가 버지니아 남매였으니 말이다. 퍼거슨은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히미하게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도대체 제가 이 일을 거절하는 것과 버지니아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죠?" "아아, 모르고 있었나? 그렇지 않아도 우리 지부에 인력이 딸리는데, 어제 작전에 투입된 인원들 중 자네팀만 제외하고는 대부분 부상을 당하고 돌아왔지 않나? 대장이었던 클리프 까지도 말이야. 그렇다고 이번 운송을 미루기도 어렵고 해서 버지니아가 이번 운송의 대장을 맡게 되었어. 언제인가는 그녀에게 운송 대장을 맡기려고 했던 거라 좀 이르기는 하지만 이번에 맡긴 거지. 하지만... 처음으로 대장을 맡은 운송에 인원이 너무 없어서 말야. 그래서 자네들에게 가는 길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했던 건데..." "하..." 아, 정말 얄미웠다. 이 지부 인간들은 평생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을 밑바닥 까지 달달 긁어내서 이용할 수 있을까만 궁리했던 사람들 같았다. 원래 그랜드마 지부에서는 작전을 시행하기 전에 보호하고 있던 이종족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 이번 작전에서 이종족들을 구출하게되면 전부터 보호하고 있던 이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려보내줄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클리프가 지휘하던 이들이 이종족들을 구해내지 못한데다가 투입되었던 인원들도 많은 부상을 당하고 와 그 운송은 뒤로 미뤄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떡 하니 많은 이종족들을 데리고 온 것이었다. "허긴... 그들은 자네가 구한 거였지? 이왕 구한거 끝까지 책임을 져야 도리가 아닌가." 나는 아무래도 여길 떠날 때 왕소금을 팍팍 뿌리고 가고 다시는 이 지부와 상종을 말아야 할 듯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버지니아가 마음에 걸리니 아까처럼 단호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 좀 생각해보죠." "아, 그러겠나?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니 그러도록 하게. 하지만, 빠르면 내일 출발한다니 늦어도 오늘 저녁까지는 결정해 주겠나?" "그러겠습니다." 그 쯤에서 대화를 마친 나는 퍼거슨의 사무실을 박차고 나와 숙소로 달려갔다. "에이이잇~! 이게 다 너때문이얏~!!" "우에에에~~ 내가 뭘 어쨌다구우우우~~" 다친 몸을 치료하고 방 안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던 잭슨은 갑작스레 난입하여 멱살을 쥐고 흔드는 나 때문에 기겁 했다. "에잇, 시끄러워! 이게 다 네놈이 다쳐서 온 탓이란 말야!" "내, 내가 뭐얼?" "네놈이 다친 바람에 너 대신 내가 이 지부장 놈에게 갔다 와야 했잖아! 왜 다쳐서 날 가게 하냐구우우~~" 나는 잭슨의 멱살을 잡고 신나게 흔들어 어느정도 기분이 풀리자 슬그머니 그의 멱살을 놓고 침대에 앉자 잭슨이 슬금슬금 다가와 물었다. "캑캑... 아, 죽는 줄 알았네. 왜? 그가 또 뭐라고 그래?" "아니, 내일인가 있는 운송에 참여해달래." "어디로 가는 건데?" "펜사 산맥. 이번에 그쪽에 사는 엘프들을 데려다 줄 건가봐. 에잇, 젠장... 이제 더 이상 이 지부와는 연을 끊고 싶었는데..." "그럼 거절하면 되잖아? 우리가 이쪽 지부의 명령을 들을 이유도 없는데..." 왜 고민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잭슨을 향해 나는 기나긴 한숨을 푸욱 내쉬어 보였다. "에휴~ 그걸 내가 모르냐? 나도 처음에는 딱 잘라 거절했지.그런데 이번 운송의 대장이 버지니아라잖아." "뭐? 클리프가 아니고?" 내 말이 뜻밖에었는지 잭슨의 눈이 둥그래졌다. "그 놈이었으면 내가 이렇게 고민도 안 하지. 그 인간은 이번에 부상 당했다고 빠진댄다."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 든 내 말에 잭슨이 이해 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번에 그가 무리를 좀 했지." "무리는 무슨 얼어죽을 무리. 팔 하나 다리 하나 잘려서 온 것도 아닌데... 우이씨..." "그래서 받아 들였어?" "생각해 본다구 그랬어. 어제 작전으로 인해 이번 운송에 참여할 인원이 대폭 줄었나봐. 그러니 그냥 외면할 수도 없구..." "하긴... 버지니아를 그냥 냅둘 수는 없겠지. 그럼 그냥 받아들이지 그래? 솔직히 그들 말대로 펜사 산맥이라면 우리가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려도 되는 거잖아." "물론 그렇기야 한데... 그 지부장이란 놈의 청을 허락하는게 마음에 안 드는 거지." "쿡쿡쿡... 그건 그렇군..." 내가 잭슨 침대에 앉아 한숨을 푹푹 쉬고 있을때 내 침대에 - 아침에 내가 일어나는 바람에 수인족 여성이 내 침대로 옮겨오고 잭슨이 자신의 침대를 돌려 받았다 - 누워 뒹굴 뒹굴 하고 있던 수인족 여성 - 수인족은 자신이 인정한 사람에게만 이름을 가르쳐주는데 나는 아직 그녀에게 인정(?) 을 못 받아서 수인족 여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 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흐음... 너는 그 지부장이란 인간 보다 약한가보지?" "에? 으음... 직접 싸워보지는 않아서 모르겠지만... 약하지는 않을 걸요?" 갑작스런 질문에 난처해서 더듬더듬 말하는데 잭슨이 끼어들었다. "하하하, 무슨 소릴. 이 녀석보다 강한 인간은 여기에서 없을 걸요?" "그래? 그런데 왜 너 보다 약한 녀석에게 쩔쩔 매는 거지?" 잭슨과 내 대화를 듣고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아하하... 그게 말이죠... 아, 그건 이 녀석이 더 잘 설명할 거예요. 저는 지금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겠네요. 잠시만 실례할게요. 잭슨아, 잘 부탁한다." 그런 그녀에게 설명을 하려고 해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던 나는 잽싸게 말발이 좋은 잭슨에게 그 설명을 떠넘기고 숙소를 나가 버지니아를 찾아갔다. 그녀는 지부 건물 뒷편의 널다란 마당에서 곧 있을 운송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원래 이종족들을 데려다 주는 것이지만, 사람들 이목을 피하기 위해 다른 물품을 이동시키는 것 처럼 위장을 해야했기에 그 준비 과정이 결코 간단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버지니아~!" 열심히 목록과 물품을 체크하고 있던 버지니아는 내가 부르며 다가가자 돌아보았다. "헤에, 어떻게 된 거니? 오늘 아침을 먹자마자 출발할거라고 장담하더니." "그게 말이죠, 아침을 먹자마자 지부장에게 호출을 받았거든요." "호출? 왜?" 다시 목록과 짐더미를 실은 마차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무덤덤히 묻는 그녀의 옆에 서며 나도 담담한 어조로 설명했다. 아무리 지부장 퍼거슨이 미워도 그 사람 밑에서 일하는 버지니아 앞에서는 그걸 함부로 드러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 버지니아가 대장을 맡은 운송에 투입될 인원이 턱없이 부족하다면서요? 어차피 목적지가 펜사 산맥이라니 우리가 돌아가는 길에 같이 가줬으면 하더라구요." 내 말에 버지니아는 멈칫 하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부장이 나를 들먹이던?" "들먹인게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 뿐이겠죠. 버지니아가 이번 운송에서 대장 맡은게 맞죠?" 내 말에 버지니아는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쩐지... 관심 없다는 나에게 사정 사정 하면서 대장을 맡기더라니... 널 끌어들이려는게 목적이었군?" "것도 그렇지만, 이번에 클리프가 다쳐서 운송에 참여하지 못한다면서요?" "아아, 다치기는 좀 많이 다쳤더라. 멀쩡하게 서 있기에 괜찮은 줄 알았더니만, 의무실에 가자마자 곧 쓰러졌어. 보니까 갈비뼈가 두개가 나간데다가 그 상태로 너무 무리하게 뛰어다녀서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찌를 뻔한데다가 탈수 현상까지 나타나더구만. 그런 그가 부탁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맡은 건데..." "그래요? 무리를 했다고 들었는데, 정말 무리를 했네요." "흥, 솔직히 그래도 쌌지. 아마 너도 그렇게 생각할걸?"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보이자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었다. "하하하..." "에휴, 너도 우리 지부에 오만 정이 다떨어졌겠다. 우리 지부장이나 대장은... 자신의 사람은 철저하게 보호하고 아껴주는 편인데,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은 이용할대로 이용해 먹는 사람들이거든. 아마 이번에 누군가를 희생해야겠는데 같은 지부 사람을 희생할 수 없으니 널 지목한 거겠지." "그래요? 그나마 지부 사람들은 아낀다니 다행이네요." "그래서 어쩔 거니? 이번 운송에 참여할 거니?" "버지니아는 어때요? 우리가 참여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이렇게 되물을 줄 몰랐다는 듯 버지니아의 눈이 커졌지만, 곧 부드럽게 휘어졌다. "나야 뭐... 사실, 이번에 인원이 턱없이 부족한 건 사실이라 너희들이 참여해주면 좋겠지만... 부탁할 면목이 없잖니." "흐음... 어쨌든 우리가 같이 가주길 원한다는 거군요. 사실, 우리도 버지니아를 그냥 외면할 수는 없잖아요. 잭슨도 그렇게 생각하더라구요. 뭐, 지부장의 청을 들어준다는 게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하는 수 없죠." 그렇게 해서 본부에서 지원 온 우리들은 그랜드마 지부의 운송을 돕기로 되었는데, 일행에 변화가 생겨버렸다. "부탁 드릴 것이 있습니다." 성년이 되어 어리광이 사라져 약간은 서운하게 느껴졌던 해민이가 엄청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으응? 부, 부탁? 뭔데 그렇게 진지한 얼굴을 하는 거야? 내가 네 부탁이라면 당연히 들어 줘야지." 해민이의 진지한 모드에 아직 적응을 하지 못한 나는 조금은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해민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정말 뜻밖의 말을 꺼내는 거였다. "절 여기에 남게 해주십시오." "뭐어어어~~?" 너무 뜻밖의 말이라 나는 나도 모르게 큰 목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아니, 해민아.. 그게 무슨 소리니? 여기에 남겠다니?" "진정해, 진정해. 뭘 그렇게 놀라? 뭔가 이유가 있겠지..." 내가 너무 당혹스러워하자 옆에 있던 잭슨이 내 어깨를 두드려 정신을 차리게 하면서 해민이를 돌아보았다. "그렇지? 뭔가 이유가 있지?" 그러자, 놀랍게도 해민이가 얼굴이 붉어진 채 말하기를 주저주저 하는 거였다. "으음... 그게... 저기..." "해, 해민아?" 내가 다시 한번 당혹스러워서 그 아이를 불렀더니 이제는 손가락 가지고 꼼지락 꼼지락거리며 얼굴을 더더욱 붉히는 거였다. "아니... 그게... 있죠... 저, 저기... 우리가 갈때... 그녀는 안 데리고 간다면서요?" "그, 그녀?" "그... 왜... 임신한..." "아, 수인족 여인? 그거야 어쩔 수가 없잖아? 못 미더운 곳이긴 하지만, 해산할때가가까운 임산부를 데리고 여행할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여기도 이종족들은 잘 보살펴준다니까..." 처음에 우리가 간다고 했을 때 수인족 여성도 자신도 가겠다고 했지만, 우리가 올때처럼 정령을 타고 간다면 모를 까 - 아니 솔직히 그렇게 가면 수인족 여성 또한 비행 멀미로 탈진하니 더 안 좋을수도... - 펜사 산맥까지 말이나 마차를 타고 가야 하니 최소한 한달은 넘게 걸릴테니 여행 도중에 애를 낳고 싶지 않는 이상 도저히 데리고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 아직도 이 지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지 않는 그녀를 위하여 그, 수인족에 대해 잘 아는 정보부 사람이 달려오고 이종족 처소에서 쉬고 있던 엘프들 - 엘프들은 다른 종족 사이에서도 거짓을 말하지 않는 걸로 유명했기에 지부를 믿지 않는 이종족들을 설득할때 자주 애용(?) 하고 있다. - 까지 동원해서 겨우 겨우 여기 머무는 걸로 설득했던 것이다. 대신, 혹시 이 지부 사람들이 그녀에게 뭔 해를 가하면 내가 꼬옥 철저하게 응징을 해주겠다고 굳게 약속을 하고 말이다. 사실, 그녀가 아이를 낳고 몸을 추슬렀을때 내가 데리러 오고 싶었지만, 그때는 본부로 가는 것 보다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나을테니 그런 약속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사람이란 앞 일을 모르는 것이니, 약속 했다가 다른 사정으로 인하여 지키지못하게 된다면 것도 안 좋은 일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녀하고 해민이하고 무슨 상관이라서 지금 해민이가 그녀를 거론한단 말인가? "그녀가 왜?" "제가 여기 남아서 그녀를 돌봐주고 싶습니다." "에엑?" 내가 두 눈을 휘둥그래 뜨자 해인이의 그렇지 않아도 붉어진 얼굴이 이제는 잘 익은토마토 마냥 새빨개져서는 고개를 푹 수그리는 거여다. "해, 해민아..." 도대체 만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말인가. 이러한 심정은 잭슨도 마찬가지였던지 그가 놀란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니... 만난지 겨우 이틀 된 사이면서 벌써 반한 거야?" 그러자 해민이가 잭슨을 노려보며 딱 잘라 대꾸했다. "사랑하는데 시간은 상관 없어. 이틀이면 충분한 시간이라고." "해, 해인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네가 성년이 된지 얼마나 되었다고..." 내가 허탈한 어조로 중얼 거리자 해민이가 움찔 하더니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랑하는데 성년이든 아니든 그런건 상관 없잖아요. 안될... 까요?" 나중에 안 거지만, 막 성년이 된 수인족들은 혈기가 너무 넘쳐서 탈인 시기라 평소 조금 호감이 있는 여성 수인족들에게도 사랑한다고 청혼을 한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 수인족 여성의 남편이나 - 그때는 눈에 뵈는게 없어서 유부녀도 안 가린다고 한다 - 아니면 그 수인족 여성을 찍어놓은 남성 수인족들에게 엄청 두들겨 맞는적도 많지만, 운 좋게 솔로인 수인족 여성을 만나 맺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뭐, 대부분은 아무리 솔로라고 해도 이제 갓 성년이 된 풋내기에다 자신보다 실력이낮은 녀석이 대쉬해오면 기분 나빠서 수인족 여성들이 스스로가 패버린다고 하지만... 그런데 이번에 우리가 구한 수인족 여성은 인간들에게 너무 시달린다다가, 낯선 환경에 갑자기 처한 상태에서 그나마 신용할 수 있었던 우리까지 떠난다고 하자 불안했던지 해민이의 사랑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원래 성년이 된 수인족은 규칙을 어기지 않는 한도내에서 - 수인족들 사이에도 엄연히 규칙이 존재했다. -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해민이도 내 곁을 떠난다고 나에게 허락을 구할 필요 없이 통보만 하면 되었지만, 이 지부에 머물기를 원하는 거라 나에게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였다. 어려운 건 없었지만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라 나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선듯 대답하지 못했던 것인데 해민이는 그걸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기 힘들다는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안됀다면... 하는 수 없지요. 그녀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에엑?" 내가 다시 눈을 둥그렇게 뜨자 해민이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녀를 이 곳에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제가 데리고 갈 겁니다." 누가 뭐라고 하건 자신의 뜻대로 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이는 해민을 향해 난 얼른입을 열어야 했다. 조금만 더 늦게 설명했다간 그녀를 데리고 갈 마차라도 준비할 것 같아서였다. "자, 잠깐만 해민아... 너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데, 나는 네 부탁을 못 들어주겠다는 게 아니라 네 부탁이 생각지도 못했던 거라 놀라서 그런 거야." "그럼?" 내 말에 해민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뭐... 네가 원한다니 지부장에게 말해놓을게. 네 부탁인데 내가 안 들어줄수 있겠니?" "감사합니다." 그렇게 해서 해민이는 지부에 남게 되었다. 어차피 나나 잭슨이 부탁하지 않고 해민이가 스스로 남겠다고 해도 지부에서는 허락할테니 어려울 건 없었다. 단지... 좀 서운한게 있다면 우리가 떠나는 날에도 해민이는 수인족 여성 옆에 붙어서 그녀의 얼굴만 보고 있느라 배웅도 제대로 안 했다는 것 정도? "허... 참... 자식 키워봐야 소용 없다더니만... 그게 이런 심정일까나?" 우리에게 대충 인사하고 우리가 채 떠나기도 전에 얼른 수인족 여성을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해인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중얼거리자 잭슨이 쿡쿡 웃었다. "너도 애인 생겨봐라. 아마 더하면 더했지 해민이보다 덜하지는 않을 걸?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 애인이랑 단 둘이 같은 방을 쓰게 되었는데 밖에 있고 싶겠어?" 해인이는 수인족 여인이랑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여성 남성으로 갈려있는 이종족 숙소를 사용하지 않고 우리가 사용하던 4인실을 그대로 수인족 여성과 둘이서 사용하기로 했다. 뭐, 어차피 그 숙소를 사용하는 이들이 모두 상회의 본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기에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지만... "어째 이해한다는 말투다? 애인도 없는 주제에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내가 그렇게 묻자 잭슨은 기다렸다는 듯이 잘난체 하는 포즈를 취햇다. "우하하하, 내가 이나이때까지 설마 애인 한번 없었겠냐? 지금이야 없지만, 예전에는 나도 잘 나갔던 몸이었단다." "퍽이나..." "어허, 이 형님 말을 못 믿네? 정 못 믿겠으면 본부에 돌아갔을 때 물어봐라? 크리스님이 아마 내 화려했던 시절 이야기를 잘 해주실 거다." "쳇...." 내가 기분 나빠져서 고개를 팩 돌려버리자 잭슨은 크게 웃으며 마차에서 멀어져 갔다. 나는 이 세계에 와서 한번도 말을 타본 적이 없는데다 말 타는 걸 배울 시간도 없었기에 이번 운송에서도 짐마차의 마부석에서 앉아 되었다. 듀비는 한번도 타본 적이 없다면서도 이번이 처음인데도 불구하고 금방 승마를 배워서 말을 타고 가는데도 말이다. '에휴... 나도 나중에 기회 있을때 말 타는 법을 배워야겠어. 이거야 원... 폼이 안나잖아 폼이. 게다가... 마차가 편한 것두 아니구... 에구구.. 엉덩이야... 에구구... 허리야... 어구, 삭신이야...' 짐마차는 고급 마차가 아니었기에 덜컹거리는 충격을 완화하는 장치도 안 되어 있었고 엉덩이에 깔고 앉은 쿠션도 폭신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뼈마디가 결리고 삭신이 쑤시는 고통을 맛보기시작했다. "에이이잇~ 안돼겠다. 엔다이로온~" 결국 짐마차의 덜컹거림과 앉은 자리의 불편함을 참지 못한 나는 짐마차의 마부석에서 벗어나 엔다이론을 불러냈다. 그러자 그 즉시 잭슨의 따가운 눈초리가 나에게로 날아왔다. "마차를 탄지 얼마나 지났다고 정령을 불러내냐? 그러다 사람들의 눈에 뜨일려면 어쩌려고?" "쳇, 온 몸이 쑤시는 걸 그럼 어쩌냐? 하지만... 에잇, 정말 안되겠군. 하는 수 없지." 그래서 나는 결국 마부석이 아닌 짐마차 위에 올라가 엔다이론을 내 밑에 깔고 드러누웠다. 졸지에 쿠션이 된 엔다이론이었지만, 의외로 폭신하고 짐마차의 진동이 전혀 전달이안 되었기에 무지 편안했다. - 불쌍한 엔다이론... - 펜사 산맥은 서대륙에 있는 아스트라드 국에서 시작하여 중대륙의 마르타국과 벨레니 국을 거쳐 라센국의 국경에서 그 끝을 맺는 거대한 산맥이었다. 우리가 목적으로 하는 엘프의 마을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벨레니 국경 안에 있었지만, 벨레니 국경을 통과해서 가려면 이종족들의 모습이 너무 눈에 뜨이기 때문에 우리는 라센 국으로 넘어가서 펜사 산맥의 끝자락을 타고 올라가기로 했다. 펜사 산맥 또한 거대한 만큼 그 산을 통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엘프들이 길을 안내해주는데다가 일행 대부분이 이런 일에 경험이 많으니 가능했던 일이었다. 게다가, 엘프 마을에 가지고 갈 짐도 거의 없고 말이다. 엘프는 베지테크스 상회에서 가장 많이 구해주는 이종족임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도 엘프 마을과 거래하는 양은 이종족 마을들 중 가장 적었다. 엘프들은 대부분 거의 자급자족을 하는 사회였기에 우리 상회측에 요구하는 것이 거의 없는데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종족이라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연을 해치지도 않아서 우리가 그들에게 요구할 것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의 유일하게 그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마법 물품이었다. 엘프들은 인간들보다 엄청 오래 사는데다가 마나에도 민감한 종족이라 정령술에다가 마법에도 능통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뭐, 따지고 보면 다른 이종족들과 거래하는 물품들 못지 않게 아주 좋은 물품을 받아오는 거지만, 그렇게 받은 건 대부분 상회의 거사(?)를 위해 사용할 뿐, 팔아먹지는 못한다는 게 - 대륙에서 거래되는 모든 마법 물품들은 마법 길드의 손을 거쳐야 한다. 뭐, 품질도 확실하고 누가 만들었는지도 명명 백백해서 좋지만, 길드 손을 한번 거치기 때문에 조금 비싼게 흠이다. 그래도 뒷거래로 거래되는 마법 물품들은 불량품이 많아서 돈 있는 사람들은 마법 길드에게 인증을 받은 물품을 선호 한다. - 흠이라면 흠이지만 말이다. 만약 팔수만 있다면 엄청난 이익을 볼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팔려면 마법 길드의 인증을 받아야 하고, 그렇게 되면 엘프들이 만들어줬다는 걸 그들이 알게될테고 - 인증 받을 때 마법사가 그 마법 물품을 만들었는지 길드에서 직접 마법사를 만나 확인을 한다. - 그러다 잘못 되면 상회와 엘프들의 상관관계에 대해 밝혀질지도 모르니 상회측으로서는 위험을 감수하느니 그냥 이익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러한 이유로 엘프들을 데려다 주는 댓가로 받는 마법 물품들은 대부분 용량이 크지 않는데다가 쉽게 망가지지도 않기 때문에 잃어버리지 않는 것만 주의한다면 어렵지 않게 운반이 가능했다. "그건 좋네. 드워프의 마을에 갈때마다 바리 바리 싸들고 가는 거에 비하면 말야. 어휴, 만약 다른 이종족들에게도 항상 그렇게 해야 한다면, 나는 아마 상회를 때려칠지도 모르겠어." 내 투덜거림에 잭슨이 나를 향해 핀잔을 했다. "네가 뭘? 너는 사실 그때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덜 고생했잖아." "그렇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일을 하나 몰라." "그거야 그만큼 댓가를 지불하니까 그렇지. 사실 우리 상회는 다른 상회보다 임금이엄청 후하거든. 거기다가 대우도 좋은 편이라서, 보통 상회에 들어오면 특별한 일이없는 한 퇴직할때까지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래." "그래? 헤에.... 하기야, 힘든 일을 하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라센 국경으로 넘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왈그린 국도 라센 국 못지 않게 상업을 장려하고 있는 나라라 라센과의 무역이 많았고 베지테크스 상회는 라센 국에나 왈그린 국에나 모두 지부를 두고 있었기에 심하게 수색하고 따지는 건 없었던 것이다. 뭐, 대충 보니 왠만하면 그냥 형식적으로 확인만 하고 통과시켜주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거기다가 펜사 산맥의 끝자락도 국경에 닿아 있었기에 펜사 산맥의 끝자락에 도착하는 것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펜사 산맥의 끝자락에 가장 가까운 마을에 도착한 우리는 그 마을에 여관이 없어서 촌장 집에 돈을 쥐고 위장을 위하여 가지고 온 짐마차들을 맡겨놓았다. 그런 것들은 산을 올라갈 때는 필요 없지만, 다시 산을 내려와 지부로 돌아갈때 필요했기 때문 이었다. 마을의 늙은 촌장님은 상회 사람들로부터 그런 일을 몇번이나 부탁 받았었는지 선선히 마차를 맡아주는 건 물론이거니와 마을 사람들을 불러서 친절하게 우리의 잠자리도 마련해 주었다. 뭐, 이런 친절이야 다 나중에 댓가를 받기에 그런 거겠지만... 그 마을에서 하루를 푹 쉬며 보낸 운송팀은 다음 날 아침 산행을 위한 최소한의 짐만 챙긴 채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부를 출발하여 국경을 넘어 이 펜사 산맥 자락과 가장 가까운 마을에 도착할 때 까지 탈출한 이종족 노예들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여러가지로 변장, 혹은 위장 - 너무 어려 짐꾼이나 호위 무사로 꾸밀 수 없는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짐보따리로 위장시켜야 했다. - 하고 있었던 엘프들이 가장 행복해 했다. 아직 그들의 마을에 도착하려면 며칠을 더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벌써 다 온 것인양 변장을 풀고 이리저리 날뛰었다. "뭐,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마을까지 무사히 데려가야 하는 우리로써는 엄청 난감 하거든. 그러니까 기뻐 날뛰려면 너희 마을에 도착해서 해주련?" 버지니아가 일행에서 가장 멀리 벗어난 소년 엘프에게 단검을 던져 - 물론 맞히려는 게 아니라 놀라게 해주려는 것 뿐이다. - 경직 시킨 후 한 말이었다. 그러자 그들의 호송 임무를 맡은 무사들은 동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기뻐 날뛰던 엘프들은 버지니아의 엄격한 표정에 시무룩 해져서는 일행의 대열에 끼었다. "하지만 너무 느려요. 이대로 가다가는 언제 도착할 지 모를 지경이라구요." 버지니아로부터 단검 한 자루를 선물(?) 받을 뻔 했던 소년 엘프가 불만인 듯 양 볼을 부풀린 채 투덜댔다. "흐음, 그래? 그거 참 미안하구나. 우리는 숲의 종족이 아니니 어쩔 수 없잖냐. 하지만, 네가 협조만 잘 해준다면 속도가 좀 더 빨라질 것도 같은데 말야." 버지니아의 말에 가장 말썽을 부리던 그 소년 엘프도 더 이상 아무 말 못하고 얌전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올~ 버지나아, 대단한데요? 애를 잘 다루는 걸 보니 애를 좋아하시나봐요? 내가 감탄하며 그녀의 곁으로 가서 묻자 버지니아가 질색인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애를? 천만에, 난 애라면 질색이라고." "에엑? 정말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움을 표하자 근처에서 걸음을 옮기던 비토가 하하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사실이에요. 누나는 애 갖는게 싫어서 아직까지 결혼을 안 하고 버티고 있다는 걸요.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시끄러워." 비토의 말이 창피했던지 버지니아가 인상을 팍 쓰며 노려보자 비토가 하하 웃으며 얼른 멀어져 갔다. "비토 말이 사실이에요?" 그녀의 그러한 반응에 비토의 말이 진짜인가 싶어 묻자 버지니아가 나에게도 험악한 시선을 보내왔다. "지금 뭐라고 했지?"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의 시선에 찔금한 내가 얼버무리자 그녀가 시선을 거뒀다. "흥, 원래 애들을 싫어하는 사람이 애들을 잘 다루는 법이야. 애를 좋아하면 휘어잡지 못하고 오히려 오냐 오냐 하면서 끌려 다니거든. 애를 싫어하면 최소한 끌려 다닐 일은 없잖아." "하아, 그, 그런 건가요?" "내 친구 중 한 애는 나보다도 더 애들을 싫어하거든. 그러니까 눈빛 만으로도 애들을 제압 하더라고." "에엣, 정말요?" "그렇다니까. 너는 아직 잘 모르나본데, 요즘 애들이 얼마나 영악한 줄 알아? 눈치가 귀신이라고. 딱 봐서 만만하다 싶으면 온갖 앙탈을 다 부려 뜯어낼대로 뜯어내지만 만만하지 않겠다 싶으면 자기가 알아서 얌전히 군다니까." "아하하하... 그, 그래요?" "아아, 내가 어렸을때만해도 애들은 순진했는데... 요즘 애들은 영..." 엘프의 마을에 도착하는 건 드워프의 마을에 도착하는 것 보다 두배는 더 오래 걸렸다. 드워프의 마을에 갈 때 처럼 무거운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가지 않는데다 엘프들의 길 안내를 받아 가는 덕에 속도가 두배는 더 빨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기야, 드워프 마을은 엔더비 산맥 끝자락 부근에 위치하고 있지만, 엘프 마을은 좀 더 산맥의 중앙 부근에 위치해 있으니 그럴 지도 몰랐다. 게다가 드워프의 마을은 딱 한군데만 들리면 되었지만, 이번에 우리가 데려다 줄 엘프들은 총 세개의 마을 엘프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 곳을 다 들려야 했는데 그 엘프 마을들이 펜사 산맥 안에 띄엄 띄엄 흩어져 있어서 다 들리려면 꽤 오래 걸릴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번에 엘프들을 다 데려다 주려면 거의 펜사 산맥의 절반 정도를 왕복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하아, 짐이 별로 없다는게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렇게 험한 산을 헤매고 가야 한다는 건...' 나는 약간 체력이 딸려 헥헥 대면서 거의 길이 안 보이는 산속을 마치 평지 걷듯 아무런 거리낌 없이 샥샥 걸어가는 엘프들을 향해 원망 반 부러움 반이 섞인 시선을 보냈다. 드워프들이나 엘프 들이나 왜 이렇게 깊은 산속에 둥지를 트는 걸 좋아하는 건지... 저번에 갔던 북 드워프의 마을이야 거의 산맥 끝자락에 있어 안내자가 없어도 어찌 어찌 - 조금 헤멜 확률은 높았지만 - 마중 나온 드워프를 만날 수 있었지만, 엘프의 마을은 안내자 없이 찾으러 나섰다가는 찾기는 커녕 길을 잃어 산속을 헤매다 지쳐 죽기 쉬울 거 같았다.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우리가 가장 가까운 첫 엘프 마을에 도착한 것은 산을 오르기 시작한 날로부터 2주가 지나서였다. 그동안 고생한 걸 생각하면... 으흑흑.. 눈물이 앞을 가린다. 고생이란 딴게 아니었다. 물론, 험한 산을 오르는 것도 힘들었고, 몇번 몬스터와 마주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건 인원수가 월등히 많은 우리쪽이 수월하게 해결해서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엘프들의 잔소리였다. 하아, 정말... 우리가 구해줘서 집에까지 데려다 주는데 잔소리가 가당키나 한 것인가? 뭐, 솔직히 이야기하면 그런거는 내가 인어들에게 시달린 것에 비하면 천상의 소리로 들렸을지도 모르지만, 인어와의 인연은 끝났고 지금은 엘프들과의 인연에 충실해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나는 그 이후로 듀비가 그냥 엘프가 아닌 블루 엘프라는 점을 신께 감사드릴 정도 였다. 그들의 불만이 뭔고 하니, 자연을 괴롭힌다는 거였다. 사실, 저녁마다 추위를 쫓고 식사를 마련하고 사위를 밝히고, 동물들을 물리치기 위한 모닥불을 피울때 살아 있는 나뭇가지를 꺽지 않고 죽은 나무를 베게 한다거나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만 주워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이해가 갔다. 나 또한 한국에 있을때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살아 있는 나무는 수분을 함유해서 불에 잘 타지도 않아 땔감으로는 바짝 마른 죽은 나무가 더 좋고 말이다. 하지만, 길도 없는 산속을 헤치고 나가는데 살아있는 나무들을 꺾고 낮은 덤불들을 밟는 거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특히나 아예 앞으로 갈 수 없도록 덩굴들이 나무들 사이를 칭칭 감고 있을 경우에는 더더욱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식물들에게는 아무 피해 없이 샥샥 지나치는 엘프들이면 몰라도 땅을 딛고 걸어갈 수 밖에 없는 평범한 인간들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지나가다 모르고 덤블을 밟거나 나무 가지를 꺽이게 하는 건 그냥 내버려 두더니 우리 앞길을 막는 덩굴을 다 잘라냈더니만 막 화를 내면서 길길이 날뛰는 거였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느냐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그 뒤로는 노골적으로 - 아마도 그 전에는 말하고 싶어도 말을 못했던 모양이었다. - 우리에게 식물들을 헤치는지 아닌지 감시의 눈초리를 보내는데 장난 아니게 피곤했다. 거기에다가 식사를 할때 육포를 먹으면 얼마나 눈총을 주는지 모른다. 그건 인간들의 식습관이라니 말은 못하고 단지 '야만인, 야만인~'이라고 부르짖는 듯한 시선을 보내는데, 그런 시선을 받고 있자니 내가 정말 잘못하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완전, 세뇌하는 시선이었다. 그러는 정도니 산행을 하다 잠깐 잠깐 만나는 동물들을 사냥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산행한지 일주일 정도 된 어느날 매일 삼시세끼 야채 스프와 ( 이건 엘프들과 같이 먹으니 육포를 넣을래야 넣을 수가 없었다 ) 구운 육포에 질린 내가 고기 먹구 싶다고 했다가 듀비가 그 근처를 지나가던 사슴인지 노루인지 모를 동물 한 마리를 잡아온 적이 있었다. 듀비가 아직 엘프들의 습성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신경을 안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래서 엘프의 성격을 아는 인간들끼리 - 엘프들은 30명에 가까운데 인간들은 20명이 채 안되었다. 그나마 엘프들이 상황을 잘 알고 우리들을 따라줘서 다행이었지, 인어들처럼 날뛰었다면 우리는 절반 정도는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 몰래 엘프들과 떨어져서 그 동물을 구워 먹으려고 하다가 들킨 적이 있었다. 그 뒤는... 상상에 맡기겠다. 하여튼 그래가지고 거의 다 익은 고기를 눈물을 머금으며 땅에 고이 묻어줬어야 했다. 조금만 더 익었으면 맛있는 고기 먹을 수 있었는데 거의 다 익을 즈음 들켜버리니, 정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냥 덜 익은 걸 먹을걸 하고 얼마나 후회를 했던지... 그렇다고 우리가 데리고 가던 엘프들 전체가 다 방방 뛴 건 아니었다. 아무리 같은 엘프라고 해도 마을마다 습성이 조금씩 달라서 한 마을에는 절대 육류는 입에 대어서는 아니된다고 - 마치 절 같다. - 교육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 곳에서는 동물을 죽이면 안되나 이미 죽어 있거나, 요리된 건 먹어도 된다고 하고, 나머지 한 곳은 정 먹고싶으면 잡아 먹되 살생은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고기 굽다가 들켰을때 방방 뛴건 두 마을의 엘프들이라 우리가 쪽수로 밀려 어쩔 수 없이 져야 했다. 그 사건이 있은 이후 일주일이 더 지나 엘프 마을에 도착하자 나는 기쁨 보다는 슬픔의 눈물이 나왔다. 한 마을에 도착하는데 2주 걸리면 다음 마을에 가는데도 그 정도 걸리지 않겠는가? 엘프의 마을은 멀리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한달은 넘게 딱딱한 육포와 야채, 과일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였으니, 아깝게 빼앗기다시피 땅에 묻어준 노릇노릇했던 바베큐 고기가 눈앞에 아른 거려 울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엘프 마을에서 환영 받고 야채와 과일만으로 차려진 진수성찬을 대접받고 버지니아가 그 엘프 마을 장로들과 거래를 하는 동안에도 내 마음은 밑바닥을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엘프 마을에서 하루 푹 쉰 뒤 그 다음 날 아침 출발 하려고 엘프 마을 입구로 나선 나는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 곳에는 새하얀 몸체에 이마 정 중앙에는 파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수정 같은 뿔을 단 십여마리 정도의 말들이 모여 있는 것이었다. "헉, 유, 유니콘?" "호오, 잘 아네?" 나도 모르게 놀라 뱉은 말에 대답하는 이가 있었으니... "엥? 정말 유니콘이야?" 싱긋 웃으며 설명해주는 잭슨 녀석이었다. "깨끗한 숲의 깊은 곳,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만 살고, 순결한 처녀를 좋아하는 성스러운 동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변태 바람둥이에다 쓸데없는 자존심만 높은 녀석들이지." "그, 그래? 그런 애들이 왜 여기 있는 건데?" "유니콘은 자기 자식을 자기가 안 키워. 젖만 떼면 내버리지. 하지만, 유니콘의 뿔은 마나가 엄청 담겨 있는 보물인데다가 유니콘의 피는 귀한 약재로 쓰이거든. 그러니 인간들이 엄청 눈독을 들이기때문에 보통 유니콘들은 성년이 될 때까지는 근처의 엘프 마을에 의탁한 채 살아. 성년이 되면 마법을 사용할 줄 알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신을 보호할 수 있으니 혼자 놀러다니는 거지만." "헤에, 그래? 엘프들은 숲의 종족이라더니 그런 일도 하네." "뭐, 대신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엘프들의 말 역할도 해주니까 말야. 그래서 유니콘을 성스러운 동물이라고도 하지만 엘프의 말, 혹은 요정의 말 이라고도 불리지." 하프 엘프라서 그런지 아는게 많았다. "이야.... 하지만, 정말 예쁘긴 예쁘다. 성스러운 동물이란 말이 딱일 정도야." "글쎄, 겉만 보고 그렇게 방심하면 안된다니까. 유니콘 녀석들은 모두 바람둥이들이라고." 잭슨과 내가 소근거리는 사이 마을 입구에 우리 일행이 다 나오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엘프들이 앞으로 다가왔다. 맨 앞에 있는 엘프가 이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족장이라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20대 중반이나 초반으로 보일 만한 미남자였다. 역시... 엘프들은 오래 살고 죽을때까지 젊음을 유지해서 좋을 것 같았다. 뭐, 그 때문에 예전에 아직 무지한 인간들이 엘프의 피를 마시면 자신도 오래 살고 젊음도 오래 오래 유지하는 줄 알고 엘프를 죽여 피를 구하려고 혈안이 되어 많은 엘프들이 고생을 하기도 했다지만 말이다. "우리 마을의 애들을 구해주신 것 다시 한번 감사드리오." "별말씀을. 충분한 댓가를 받았으니 오히려 저희가 감사드려야 하는데요." 버지니아가 겸양의 말을 표하자 엘프 족장이 피식 웃더니 말머리를 돌렸다. "그대들을 위해 안내자를 준비했소." "예? 아니, 저희는 유니콘만 빌려주시면 되는데... 안내자야..." 버지니아의 당혹한 말에 고개가 갸웃해진 나는 잭슨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저게 무슨 말이야? 유니콘을 빌려주다니?" "아아, 그게... 다른 엘프의 마을에 갈때는 좀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도록 엘프 마을에서 유니콘을 빌려주곤 했었거든. 우리는 빨리 가서 좋고, 엘프들로써는 우리가 괴롭힐 식물 숫자가 줄어들어서 좋고, 서로 상부 상조 하는 거지." "헤에, 그럼 우리가 저걸 타고 간다고?" 내가 입구에 얌전히 서 있는 유니콘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사이 버지니아와 족장의 대화는 계속 되었다. "물론, 그대들에게 다른 마을의 엘프들이 있다는 건 나도 아오. 그런데, 요즘 이 근처에 어떤 드래곤이 레어를 장만했다오. 아무래도 그쪽은 피해가는 게 좋지 않겠소? 게다가 드래곤이 레어를 만드는 바람에 이 근처에 몬스터도 많아져서 더더욱 조심하는 게 좋을 거 같으니 우리쪽 전사들을 몇몇 더 붙여주도록 하겠소." 그러고보니 족장 뒤쪽에 커다란 활을 메고 있는 엘프들이 족장 엘프가 말하는 그 전사들인 듯 했다. 그런데... "드래곤?"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나에게 설명해주는 걸 기쁨으로 아는 잭슨이 내 말을 받아줬다. "몰라? 이 세계 최강의 생물체이며 마법의 종족이라는..."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가 잭슨의 말을 잘랐다. 드래곤은 물의 정령왕인 아버지에게 들어 존재하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알아, 알아. 내 말은 여기에 드래곤이 살았냐는 말이지." "몰랐어? 여기 뿐만이 아니야. 이 대륙의 3대 산맥에는 드래곤들이 다 살고 있는 걸. 저번에 우리가 갔던 드워프의 마을에서 조금 더 깊숙히 들어가면 그린 드래곤 레어가 하나 있다고 들었어." "에에? 정말이야? 히야... 그럼 잘만 하면 드래곤을 볼 수도 있겠네?" 내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하자 잭슨이 뭘 잘못 먹었냐는 시선으로 날 쳐다봤다. "뭣이라? 이봐, 죽고 싶으면 얌전히 혼자 물에 빠져 죽던가 하라고. 애꿏은 다른 사람 끌어들이지 말고." 잭슨의 말에 나는 사나운 눈초리로 그를 봤다. "뭔 소리야? 나는 그냥 드래곤이 보고 싶다고..." 하지만 내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번에는 잭슨이 내 말을 잘랐다. "드래곤이 산 속을 지나가다 가끔 보는 동물처럼 쉽게 볼 수 있는 줄 알아? 우리는 그의 영역에 발을 디디자마자 목숨이 달랑달랑 거릴 걸? 드래곤은 자신의 종족이 아닌 다른 종족을 벌래 취급 한단 말이야. 자기 영역에 발을 들여놓으면 마치 벌래 잡아 죽이듯이 죽이려고 한다고." "그, 그래?" 잭슨과 내가 소근 거리는 사이 버지니아는 엘프 족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끝내고 일행을 밖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일행들 숫자에 비해 유니콘의 숫자가 적었기에 한 마리 당 두 명씩 올라탔는데, 나는 말을 탈 줄 몰랐기에 유니콘 역시 사양하고 나의 사랑스러운 엔다이론을 불러냈다. "자, 그럼 다음 마을로 출발~!!" 제 25화 떡갈나무 숲 엘프족의 페라쉬 유니콘들은 정말 빨랐다. 아직 성년을 지내지 못해, 일반 말에 비유하자면 망아지였을텐데도 불구하고 말 발굽 소리 없이 샤샤삭 숲을 달려가는데 혀가 내둘러질 지경이었다. 장애물(?) 이 하도 많아 아무리 뛰어난 명마라고 해도 뛰기는 커녕 걸어가며 장애물을 피하기 급급했을텐데, 이 어린 유니콘들은 무슨 재주인지 몰라도 장애물들을 잘도 샤사삭 피하며 달려가는 거였다 등 뒤에 사람들 둘씩이나 태우고 달리면서도 나무의 잔가지 하나 부러뜨리지 않고, 덩굴 하나 뜯기지 않게 달려가는 재주가 정말 용했다. 오히려 문제는 나였다. 유니콘이 아무리 빨라도 엔다이론은 그들의 속력을 쉽게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유니콘과 같이 장애물을 피하는 데에는 영 재주가 없었던 거였다. 그래 엔다이론은 장애물을 정면 돌파하며 질주하는 걸 선택했는데, 그러자 엔다이론의 앞에 있는 모든건 - 그것이 아름드리 나무이던 굵은 덩굴이건 말이다. - 엔다이론은 지나가는 족족 절단이 나서 내가 지나간 길을 뚜렷히 나타내줬다. 그러자 기겁하는 건 길 안내와 함께 지원하기 위해 나온 엘프들이었다. 맨 처음 도착한 엘프 마을이 극성으로 자연보호를 외치는 마을이었던 것이다. 결국 나중에는 그들이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아서 나는 유니콘의 옆에서 같이 달리는 대신 나 혼자만 하늘 높이 떠올라 위에 쫒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말썽덩어리였던 내가 하늘로 사라져 주자 유니콘들을 지휘하던 - 우리 일행들은 유니콘 위에 올라탔다고 해도 그들을 이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유니콘의 도음을 얻는 것 뿐이라 얌전히 등 뒤에 올라 떨어지지 않게 유니콘을 붙잡고 있었을 뿐이고, 유니콘들은 맨 앞에서 길을 인도하던 엘프의 지휘를 받았다. - 엘프는 마음 놓고 속력을 낼 수 있었다. 그 전에는빨리 달리면 내가 앞의 장애물들을 모조리 절단내며 따라왔기에 내가 장애물(?)들을 피할 시간을 주느라 제대로 속력을 내지 못했었던 것이다. 그리하겨 만약 걸어갔다면 최소한 2주는 걸렸을 거리를 우리는 단 7일 만에 도착하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원래 직진으로 쭈욱 갔으면 5일 정도 걸렸을 텐데, 이번에 새로 자리를 잡는 드래곤의 영역을 피해 멀리 돌아가느라 이틀이 더 걸렸다는 거였다. 그래도 이번에는 식사는 부실했어도 - 산을 오르기 전에 우리가 준비해 왔던 음식들은 첫번째 엘프 마을에 도착할때 쯔음 다 떨어졌기에 엘프의 마을에서 새로운 음식을 마련해 출발 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육포 조차 없이 오로지 과일 뿐이었다. 그나마 나은 것은 벌꿀 정도일 까나? - 편안하게 도착했기때문에 나는 엘프의 마을을 둘러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사실 첫번째 엘프의 마을에 도착했을 때에는 열악한 식단과 오랜 시간의 산행으로 인하여 체력 좋은 나도 지쳐서 얼른 씻고 폭신한 침대에 드러눕는다는 생각뿐이라 신비로운 엘프 마을의 모습도 눈에 제대로 안 들어왔었다. 그리고 푹 자고 난 다음날에는 다시 출발 해야 했기에 마을을 둘러볼 여유 같은 것은 없었고 말이다. 두번째 엘프 마을에서도 도착한 날은 그 곳에서 쉬고 다음 날 다시 출발해야 했지만, 도착 한 당시 크게 힘든 건 없는데다 아직 저녁때가 되기 전이라 마을을 둘러볼 여유가 있었다. 엘프라는 종족은 숲의 종족, 자연 친화적 종족이라고 불리더니만 그들이 사는 마을 역시 그렇게 생겼는데, 이 곳에서도 각자 마을만의 고유 문화라는 것이 있었던지 첫 마을과 - 제대로 둘러 보지는 못했지만, 그 마을 중 한 집에서 잤기 때문에 대충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 두번째 마을이 조금씩 틀렸다. 첫번째 엘프 마을의 집들은 굉장히 커다랗고 굵은 - 얼마나 굵은가 하면 그 곳에 있는 보통 굵기의 나무와 15평짜리 방을 포함하고도 남을 정도다 - 나무 안에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다가 살림을 차린 것이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엘프들이 15평 규모의 원룸을 가지고 있는 듯 싶었다. 아마도 결혼 해서 같이 살거나 거기에 애를 낳아 기른다면 조금 더 굵은 나무에다가 집을 장만했겠지만 말이다. 살아 있는 나무 안이라 그런지 내가 잤던 나무 집은 추욱 산 속의 가을 날씨에 불을 피우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훈훈하고 아늑했다. 게다가 그 곳에서 눈을 감고 드러누워 귀를 가만히 기울이고 있으면 쭈웁~쭈웁 하고 나무가 물을 빨아 올리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그러니 사시 사철 건조하지도 않을 것 같고, 여름에는 지금과는 반대로 시원할 것 같았다. 단점이 있다면 넓은 창이 없이 햇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지만, 어떤 집은 재주도 좋게 용케 얼굴이 드나들 정도의 자그마한 구멍을 만들어 창을 내기도 했다. 그게 창으로써의 효과를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창이 없어 안쪽이 어두컴컴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꽤 살만한 집이었다. 그에 비해 두번째 엘프 마을의 집은 커다란 나무 - 이 곳 나무도 첫번째 엘프 마을 못지 않았다. - 위의 굵은 가지 위에다 초막집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서 살았다. 그런데 황당한 건 집과 집을 이어주는 다리나, 혹은 집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전혀 없다는 거였다. 능력 있으면 뛰어 올라가거나 정령, 혹은 마법을 이용해 위로 올라갔고, 정 능력이 없으면 나무를 타서 올라가고는 했다. 옆집을 방문할때에는 자신의 능력껏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건너 뛰었는데, 나무와 나무 사이가 넓어도 나무들이 워낙 카서 방대하게 가지를 뻗고 있어 대부분의 나무들끼리는 가지가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아 옆집을 방문하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 균형을 잘 잡고 살아있는 외나무 다리를 건너갈 수 있다면 말이다. 뭐, 내가 바라볼때 마치 평지를 다니 듯 아무렇지도 않게 다니는 엘프들을 보니 떨어질 위험 같은 건 적을 것 같았다. 초막집은 겉에서 보기보다 훨씬 아늑했다. 사실 집을 겉에서 봤을 때에는 건초만 보여서 여름에는 시원할지 몰라도 겨울에는 무지 추울 것 처럼 보여 오늘 잘때 추위에 떨며 자는 건 아닌지 족므 걱정스러웠었다. 뭐, 정 추우면 불의 정령 한명 불러서 껴안고 자면 되겠지만서도 말이다. 그러나 안에 들어가니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의외로 찬 바람은 들어오지 않았고 아늑했다. 그리고 집 가운데에는 마치 일본 식으로 집 가운데 바닥에 돌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화로가 있어 정 추울때에는 나무를 땔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 화로 위에 냄비 같은 것을 걸 수 있는 걸쇠가 있는 걸 보니 이 곳에서 간단한 요리를 만들어 먹는 모양이다. "아아, 육포가 있으면 몰래 궈먹었을텐데... 으음, 우리 지금 당장 나가서 뭐라도 잡아 올까?" 내가 화로를 보며 미련을 보이자 잭순이 웃었다. "아서라, 그러다가 들키면 큰일 난다. 여기서도 동물들을 잡는 건 금지하고 있단 말야. 뭐, 목숨을 위협받을 위험한 상황이라면 괜찮지만..." "에잇, 그러니까 가서 죽은 거 가지고 온 거라고 하면 되잖아." "이 근처에서는 불가능 할걸? 엘프들의 영역 안은 그들이 철저하게 순찰한단 말야." "쳇... 아쉬워라." 안된다니 어쩌겠는가? 나는 입맛을 다시며 미련을 접어야만 했다. 이 마을 족장을 만나러 가는 건 버지니아를 비롯한 몇몇 지부 사람들과 우리를 안내해 온 첫번째 엘프 마을에서 같이 온 전사 엘프들 - 아무래도 영역이 맞다아 있다보니 자주 왕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 뿐이었으므로 잭슨과 나, 듀비는 저녁을 먹고 엘프 마을을 둘러 보았다. 잭슨도 하프 엘프라고는 해도 그는 인간 세상에서 태어나 쭈욱 그 곳에서만 살아왔기에 엘프 마을이 익숙치 않았다. 하기야, 운송때 몇번 와본 것이 다라는데, 그때도 하루만 묵고 곧바로 떠낫을테니 익숙해지고 자시고 할 시간도 없었을 거 같다. "아... 목아파. 마을이 위쪽에 있으니 이거야 원..." 엘프들은 나뭇가지 사이를 뛰어 다녔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 왠지 떨어질 거 같아서 무서 웠기에 - 땅으로 내려와 구경하고 다녔더니만, 자연스레 고개가 계속 뒤로 젓혀져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목이 아파왔다. 그래 목을 주무르며 투덜댔더니 잭순이 즉시 핀잔을 줬다. "그러게 우리도 엘프들이 다니는 걸로 다니자고 했잖아. 봐라, 아래에서 다니는 사람은 우리 밖에 없다." "싫어, 그러다가 부딪히거나 잘못 발을 디뎌서 떨어지면 어쩌라고? 나는 땅 위를 걸어다닐래." "뭐야? 고공 비행은 잘만 하는 주제에 겁이 많기는..." "그때야 정령을 옆에 데리고 있었으니까 그렇지. 에휴, 이 곳 엘프들은 애를 낳아서 기를때 겁나지 않을까? 까딱 잘못해서 애가 떨어질까봐 말이야." "뭐, 알아서 조치를 취하겠지." "듀비, 혹시 듀비네 마을도 집이 이렇게 위쪽에 있어요?" 내가 듀비쪽으로 화제를 돌리자 그가 피식 웃으며 설명해줬다. "저희는 절벽 바위 안쪽을 파서 보금자리를 마련합니다. 그러니까 절벽을 보면 아래, 위, 중간 할 것 없이 모두 보금자리가 있는 셈이지요." "헤에, 그래요? 한번 보고 싶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기대할게요." 첫번째 엘프 마을에서 우리를 안내해줄 겸 같이 왔던 엘프들은 그 다음 날 자신들의 마을에서 데리고 오 유니콘들을 이끌고 돌아가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두번째 엘프 마을에서 마련해 준 또 다른 유니콘들과 안내자 엘프를 지원 받아 출발할 수 있었다. "자, 이제 드디어 마지막 마을인가?" 내가 다시 엔다이론을 불러내 올라 타며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잭슨이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러게... 거기만 갔다 오면 네가 드디어 소원하던 고기를 먹을 수 있겠네?" "그렇지, 음... 하지만 그래도 거기 갔다가 다시 산맥을 통과해 라센 국경쪽으로 내려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리지 않을까? 그 곳 까지 마지막 엘프 마을에서 지금처럼 유니콘과 안내자를 붙여줄지 모르는 일이고." 내가 한숨을 푹푹 쉬며 내 추론을 늘어놓지 잭슨이 피식 피식 웃었다. "무슨 소리야? 엘프들을 모조리 마을로 데려다 줬는데 뭐하러 산속을 헤매? 마지막 마을에 들리면 곧장 산을 내려갈 거야." 잭슨의 말에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밀입국을 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건 들키면 감금되어 추방 당하는 거 아닌가? "에? 그래도 돼? 우린 국경을 몰래 통과한 거잖아?" 하지만 잭슨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 거렸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우리가 국경을 몰래 통과한 건지, 제대로 통과한 건지, 아니면 우리가 이 나라 사람인지도 모를텐데." "그, 그래? 뭐, 여긴 그렇다치고 국경을 넘어갈땐?" "별거 있어? 그냥 상인 이라는 신분증만 보여주면 대충 통과될 텐데. 수출입 금지 물품을 가진 것도 아닌데 큰일 날 것도 없잖아?" 잭슨이 오히려 걱정하는 날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더니 유니콘의 등에 올라탔다. '아.. 그렇구나... 여기는 한국이 아니었지?' "자, 어서 출발하자고. 마지막 떡갈나무 숲 엘프 마을만 가면 끝이다." 엔다이론을 타고 허공으로 떠오르는 나를 향해 외치는 잭슨의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빨랑 도착했으면...." '에, 그런데... 떡갈나무 숲 엘프? 웬지 어디서 들어본 듯한.... 아닌가?' 유니콘과 길을 잘 아는 엘프 덕분에 마지막 마을에도 빨리 도착했다. 마지막 엘프 마을은 떡갈나무 숲 엘프 마을이라고 하더니만 과연 그 엘프 마을 주변은 수많은 떡갈나무로 이루어진 숲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그 엘프 마을은 특이하게도 어느 낮은 산 봉우리 안에 깊숙히 생긴 분지 안에 형성이 되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분지는 꽤나 넓고 높은 산의 차가운 바람이 엄습하지 않고 따뜻하여 인간 세상에서 멀지만 않았다면 벌써 인간들이 차지하고 살았을 정도로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 분지가 시작되는 부분 부터 가운데 엘프 마을이 있는 곳 까지 빼곡하게 떡갈나무 숲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늦은 가을이라 - 계획은 겨울이 시작되기 전까지 인간 마을로 내려간다 였다. - 사방에 떡갈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가 수북했고, 그걸 노리는 다람쥐과 동물들이 쉽게 눈에 뜨였다. "헤에, 여기 꽤 살기 좋잖아?" 우리가 그 분지에 도착한 시각은 정오를 약간 넘긴 시각이었다. 그래 떡갈나무 숲으로 들어가자 예쁜 가을 옷을 입은 떡갈나무 사이로 햇볓이 낙엽 깔린 바닥을 쭈욱 비춰주고 있어 무지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한 주위 관경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떡갈나무 숲을 통과하여 엘프 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그 곳에서는 이미 우리가 오고 있는 걸 눈치 챘음인지 몇몇 엘프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베지테크스 사람들이여.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군요." 맨 앞쪽에 서 있던, 허리까지 내려오는 짙은 밤색 곱슬 머리를 하고 있던 미청년이 우리를 보자 마자 한 말이었다. 그러자 버지니아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꾸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떡갈나무 숲 엘프 마을의 족장님." "이번에도 우리 마을이 마지막인가보군요?" 우리 뒤쪽에 있는 엘프들을 바라본 족장이 입을 열자 버지니아가 웃었다. "호호호, 그게 이 마을이 가장 안쪽에 있어서 어쩔 수가 없답니다." "뭐, 가까이 있는 곳 부터 들리는 거야 당연한 순리이겠지요. 자, 어쨌든 들어갈까요?" 그렇게 족장이 이야기를 하고 먼저 몸을 돌려 걸어가자 그 주위에 있던 다른 엘프들은 물론 우리 일행까지도 그의 뒤를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내 착각일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나와 한번 눈이 마주쳤던 - 별 의미는 없었던 것이다. 그냥 마중 나오던 엘프들을 둘러보다 어쩌다 마주 쳤을 뿐이었고, 곧 시선은 엇갈렸으니까 - 한 여성 엘프가 자꾸만 나를 흘낏 거리며 바라보는 거였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 안거겠거니 했었는데 마을 공터로 들어가 족장을 따라가는 팀(?)과 엘프 마을 에서 마련해준 휴식처로 가는 팀이 갈라질때 - 그 여자 엘프는 족장을 따라가는 팀이었다 - 나를 노골적으로 빤히 쳐다보는데 내가 착각했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 무지 난처한 나는 괜히 머리를 긁적이고 턱을 쓰다듬고 양 손을 깍지껴 스트레칭을 하는 등 그녀의 시선을 신경 안 쓰는 척 하며 얼른 멀어져갔다. "헤에, 저 아리따운 엘프 아가씨가 너에게 관심이 있는가본데? 눈길이 뜨겁더라?" 그녀의 눈길을 눈치 챈 것은 나만이 아닌듯, - 하기사 그렇게 노골적으로 바라봤는데 못 알아 채는 사람이 이상한 거겠지만... - 숙소로 가는 길에 잭슨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농담조로 말했다. "너는 저 눈길이 뜨겁게 느껴지더냐? 나는 무서워서 얼어 붙는 줄 알았다." "아하하, 엘프 아가씨들은 호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눈길은 다 그런 건가보지." "글쎄다..." 잭슨이 호탕하게 웃으며 나에게 잘 해보라는 둥 농담을 던졌지만 나는 시큰둥 할 뿐이었다. 아니, 사실 정말 호감 있다고 다가오면 어쩌나 싶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 우리가 배당 받은 숙소에서 저녁을 막 다 먹고 쉬려고 할 즈음 그녀가 날 찾아왔다. "예?" 믿겨지지 않았던 터라 내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되묻자 그녀가 참을성 있게 질문을 다시 해줬다. "지금 시간이 있냐고 물었어요." "아, 예. 그건 그런데... 무슨 일로..." 설마 정말 잭슨의 말대로 되는 건 아닌가 싶어 그녀를 경계하며 묻자 그녀가 피식 웃었다. "오해할까봐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남편이 있고 자식이 있는 몸이예요. 그러니 이상한 걱정 하지 마시고 시간 있으면 이야기좀 해으면 하는데요?" 그녀의 말에 내심 정곡을 찔린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하... 그러죠." 그녀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우리 처소와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다른 엘프의 집이었다. 이곳 엘프 마을의 집은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첫 엘프의 마을처럼 나무의 도움을 받은 집을 가지고 있기는 있었는데, 그 집의 중요한 기둥들은 땅을 솟아 오른 굵은 나무의 뿌리이거나 아니면 밑으로 내리뻗어 땅에 닿을 듯한 굵은 나뭇가지였다. 벽은 그 기둥들을 사이를 흙으로 메운 것이었고, 지붕은 기둥이 되어준 나무의 윗가지들이 자연스레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그정도로 지붕이 될 수 있나 싶었지만, 비바람이 새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거침 없이 집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이 집이 그녀네 집인 모양이었다. "실례합니다." 그래 혹시 다른 식구들이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 쭛볏쭛볏 들어갔더니 다른 이는 아무도 없고 그녀 혼자였다. "자, 들어와서 앉아요." 내가 문가에서 주춤 거리며 들어갈 생각을 안 하자 그녀가 날 부르며 집 한 가운데에 있는 고풍스러운 나무 탁자를 향해 손짓했다. 집 한가운데에 있는 탁자는 굉장히 굵은 나무 밑둥이었고, 그 주위에 있는 의자들은 그보다 조금 덜 굵은 통나무를 가운데를 깎아내어 멋진 등받이가 있는 의자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내가 그들 중 한 의자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걸치고 앉자 그녀는 칸막이로 가려 놓은 집의 한 구석에 들어가 달그락 거리며 목소리만 높여 물어왔다. "차 좋아해요?" "예? 아, 즐길 줄 몰라서... 달콤한 거는 좋아하는데요?" "그래요? 그럼 꿀차를 좋아하겠군요." 그렇게 대꾸하며 그녀는 투박해 보이는 나무 쟁반 위에다 역시 투박해보이는 나무컵을 비롯하여 몇몇가지를 담아가지고 왔다. 달그락~ 달그락~ 그녀는 쟁반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뒤 내가 마실 꿀차와 그녀가 마실 차 - 뭔지는 모른다. 그냥 잘 말린 찻잎을 넣고 만들었는데 냄새가 분명 녹차나 홍차는 아니었다. - 를 만드는데 열중했다. 그녀가 차를 만드는 동안 할 일은 커녕 할 말도 없었던 나라 조용히 입을 다물고 뻘쭘히 앉아 있었는데 그녀가 드디어 작업을 끝냈는지 나무컵 하나를 내밀었다. "들어요." "아, 감사합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차에서는 벌꿀의 달콤한 향이 느껴졌다. 양 손으로 컵을 감싸쥐고 호호 불며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는데 그녀가 날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왜, 왜 그렇게 보시는데요?" 아까 전에도 그렇지만, 나에게 호감이 있다거나 그런게 아니라 약간 신기함과 놀라움이 담긴 시선으로 노골적으로 빤히 바라보는데 되게 부담스러웠다. 지금도 그러한 시선이라 난처한 내가 삐질거리며 묻자 그녀가 손가락을 펴 내 왼손을 가르켰다. "그... 검지에 끼어 있는 반지..." "아, 이거요?" 그녀의 말에 나는 왼손을 펴서 손등을 그녀쪽으로 돌려 확실하게 보여주며 설명했다. "아, 시시때때로 끼고 있다는 걸 깜빡하는데요, 제 엄마가 물려주신 거예요." 그러고보니 계속 그 반지가 마법의 반지라는 걸 잊고 있어서 한번도 그 반지를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으음, 그러면 그냥 이 기회에 한번 사용을 해볼까나? 그런데 무슨 마법을 입력 시키지?' 내가 그렇게 잠시 딴 생각에 빠져 있을때 그 엘프 여성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어머니라면... 성함이?" "예. 주디스 오스번이라고 하시는데요?" "역시..." 내 대답에 그녀는 예상 했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반응이 마치 내 친모를 아는 듯해 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어? 혹시... 제 엄마를 아세요?" 그러자 그녀가 피식 웃는다. "푸훗... 모를 리가 없지. 내가 낳은 아이인데..." "네에?" 내가 더 이상 클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눈을 뜨고 되묻자 그녀가 푸후후 하고 웃었다. "아니,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니?" "에?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믿겨지질 않아서요..." "어머, 나에 대해 말을 안 했나보지?" 말은.... 아니라 글로 남겼지만... 엘프들이 오래 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정말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해 봤기에 엄마의 편지에서 외할머니께서 어디의 누구라고 쓰여 있는 걸 보기는 했지만, 그런가보다 하고 그 뒤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떡갈나무 숲의 엘프 마을이 어디서 들어본 것 같더라니만...' 그러면 뭐하나, 나는 지금 외할머니의 성함 조차 기억 못하고 있는데...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터라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아뇨, 아뇨, 그러고보니 말씀 하셨어요." 그런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 엘프 여성, 그러니까 외할머니께서는 피식 웃으며 이렇게 묻는게 아닌가? "하지만, 내 이름이며 어디 사는지는 잊고 있었지?" '허걱....' 정곡을 찔린 나는 감히 부인도 하지 못하고 쩔쩔 맸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후후후..." 그런 날 바라보며 웃는 외할머니를 향해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죄송해요." "저런, 미안 할 건 없지. 내가 너에게 해준 것도 없는데 날 기억하길 바라는 게 오히려 잘못 된 거 아니겠니?" "아니 뭐... 그래도.... 아, 그래서 아까 절 그렇게 보신 거였군요? 제가 엄마 반지를 끼고 있어서 혹시나 하신 건가요?" 외할머니가 엄마 반지를 못 알아 보실리가 없었다. 그건 친모께서 외할머니께 받은 것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언제 어느새 내 손에 있던 반지를 본건지 모르겠지만, 가리고 다니는 건 아니었으니 불가능 한 것도 아니었고, 충분히 설득력 있는 추측이었다. 하지만 내 추측에 외할머니는 고개를 설래설래 저어 보였다. "아니야. 반지는 혹시나에 그렇군 하게 해준 거고, 처음 네 얼굴을 봤을때 혹시나 한 거야." "예?" "네 얼굴... 엄마를 쏘옥 빼닮았거든. 아마, 네 엄마를 아는 자라면 누구라도 눈치 챌 수 있었을 거다." "헤에..." 그러고보니 아버지도 나에게 엄마를 닮았다고 했었다. 단지, 아름다운 엄마의 얼굴을 닮았는데 왜 너는 못생겼냐고 타박을 들었지만... '아... 나도 친모의 얼굴을 한번 보고싶기는 하다. 아, 그러고보니 친모의 초상화가 있다고 했는데... 어디었더라?' 꿀차를 다시 한 모금 마시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데 갑자기 외할머니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안쪽으로 들어가셨다. "가만있자... 네 엄마가 나에게 맡겨 놓은게 있었는데 말이다. 내가 아마 여기다 놨을텐데..." "엄마가요?" "그래... 음... 그러고보니 네가 몇살이지? 20살인가?" "아직 안 됐어요. 이번 겨울만 넘기면 20살이죠." "그래? 그럼 널 가지기 직전이었겠군. 가끔 연락이나 하던 아이가 오랜만에 직접 날 찾아 왔더구나. 그러더니 이걸 맡기고 갔어." 외할머니는 뭔지 모를 물건을 찾으셨는지 그 말씀을 하시며 안쪽에서 다시 나오셨다. 그 분이 들고 있는 건 내 한쪽 손 바닥 안에 들어갈 정도로 자그마한 나무상자였는데, 오래 되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인지 꽤나 낡아 있었지만, 소중하게 보관된 듯 깨끗해보였다. 외할머니는 그걸 탁자에 내려놔 내 쪽으로 밀고, 자신은 자리에 앉으면서 물었다. "엄마는... 편안하게 갔니?" 안에 뭐가 들어있을까 궁금해 하며 상자만 바라보고 있던 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허둥거리며 되물었다. "예? 가다뇨?" "네 엄마 말이다. 편안히 눈을 감았냐고." 탁자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턱을 괴며 조용히 말하는 외할머니의 모습에 - 그런 모습이 절대 할머니 같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쩌랴, 혈연상의 할머니신걸.- 나는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에.... 알고 계셨어요?" 사실, 그녀가 외할머니라는 걸 안 순간부터 친모가 돌아가셨다는 걸 언제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 무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외할머니가 그걸 벌써 알고 계셨다면 나는 쓸데없는 고민만 한 셈이었으니 허탈할 수 밖에... "갑작스레 찾아와서는 이상한 부탁을 하고 가버리니... 짐작하고 있었지. 그런데... 수명이 다 했다기엔 너무 이른 거 아니니?" "아... 그게... 절 낳다가 돌아가셨대요." 괜히 내가 미안해져서 외할머니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애꿎은 나무컵만 노려보며 간신히 대답하자 할머니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그래? 흐음... 어쩐지..." "에? 그것도 알고 계셨어요?" 의아해서 고개를 들고 외할머니를 바라보자 외할머니가 내 쪽으로 민 자그마한 나무 상자를 턱으로 가르켜 보여다. "네 엄마의 부탁이라는 게 그거였거든. 그걸 나중에 혹시라도 만나게 될 자신의 아이에게 주라고 하더라고. 아마 네 엄마는 자신이 직접 그걸 전하지 못하게 될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던 게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걸 나에게 맡길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 "아..." 외할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상자를 바라보자 외할머니가 손을 뻗어 상자를 내쪽으로 조금 더 밀어주며 입을 열었다. "열어 보려무나." 뚜껑을 조심스레 열어보니 폭신해보이는 천 위에 무척 오래된 듯한 굵고 커다란 황금 반지가 들어 있었다. 들어올려보니 묵직함이 느껴질정도로 반지 치고는 꽤 무거웠다. 내 엄지 손가락에도 약간 헐렁할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던데다 남자 반지인 듯 반지의 링의 너비 또한 두터운 편이었다. 반지의 앞에는 내 엄지 손톱만한 황금 판에 문장이 새겨져 있었는데, 역삼각형의 방패 모양의 테두리가 두개 그려져 있었고, 그 안에 굵고 탐스러운 나무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음... 꽤 중요한 것 처럼 보이는데요? 그런데.. 남자 반지인 거 같은데..." "인간 세상에 벨레니라는 왕국이 있는데 아니?" 모를리가 없었다. 조엘 녀석이 그 나라 공작 집안의 아들이었으니까. "예. 어, 이 반지가 그 나라랑 연관이 있나요?"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그 나라의 엠브로스 백작이라는 가문의 후계자 반지니까." "녜?" '갑자기 왠 백작?' 내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되묻자 외할머니는 괸 턱을 풀고 이제 막 식어가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너는... 외할이버지에 대해 아는 거 있니?" "아... 인간이셨다는 거요. 엄마가 하프 엘프이시니까..." "흐음, 그거 말고는..." 외할머니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을 더듬다가 고개를 저었다. 하기야, 외할머니에 대한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외할아버지에 대한 거라고 기억하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외할머니에 대한 건 적혀 있었어도, 외할아버지에 대한 건 못 본거 같았다. "아아, 하나 더 있다. 외할아버지 성이 오스번이었다는 거요. 뭐, 그러니까 어머니 성함이 주디스 오스번이겠지만..." 그러자 외할머니가 부드럽게 웃었다. "저런... 네 엄마가 하나도 말을 안 해준듯 싶구나. 오스번은 네 외할아버지의 성이 아니라 이름 이란다." "에? 아, 하지만... 엄마는 성으로 쓰시던데요..." 내가 어리둥절해하며 말하자 외할머니의 눈이 더 부드럽게 휘어졌다. "후후후, 그게 사연이 있어서 말이지. 네 외할아버지의 정식 이름은 오스번 엠브로스라고 하지." "오스번 엠브로스요? 아, 그러면..." 내가 들고 있는 반지가 엠브로스 백작 가문의 후계자 반지니까, 이건 외할아버지의 것인게 틀림 없었다. 내가 반지를 바라보자 외할머니는 내 생각을 짐작 하신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네 외할아버지는 엠브로스 백작 가문의 후계자였지. 그건 네 외할아버지가 자신이 백작이 되고 난 뒤 네 엄마에게 물려준거라고 하더구나." "와... 아, 아니 그런데 엄마는 왜 엠브로스란 성을 안 쓰시고 할아버지 이름을 성으로 쓰신 건데요?" 엄마가 백작가의 후계자란 사실이 뜻밖이라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지만, 내가 알기로 엄마는 백작이 아니었다. '그러고보니 엄마는 하프 엘프 정령사이자 마법사로 대륙을 떠돌아 다녔다고 하셨는데...?' "그건 말이다... 네 외할아버지가 나와 만났을 무렵 엠브로스 백작가와 의절한 적이 있었단다. 그래도 기사의 직함은 가지고 있어서 오스번 경이라고 불렸는데, 그 영향으로 그런 듯 싶구나." "오오, 외할아버지가 집안이랑 의절했었다고요? 왜요?" 흥미진진한 옛날 이야기가 나오자 내 눈은 반짝 거렸다. "그게... 그때 내가 노예로 엠브로스 집안으로 팔려갔었거든. 네 외할아버지는 그 당시 정의를 지키기 위한 사명감에 불타는 기사라 날 보자마자 분노하여 집안과 연을 끊었지." "우와~ 외할아버지 멋장이시네요." 내 반응에 외할머니는 다시 한번 싱긋 웃더니 인자한 어조로 옛날 이야기를 풀어나가셨다. 지금 벨레니국가는 여왕이 노예 매매는 커녕, 노예 소유를 강하게 단속하고 - 뭐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렇게 하는 거긴 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 있지만 옛날에는 기사 나라라는 이름때문에 법으로는 허용치 않았지, 능력있는 사람들은 노예를 데리고 있는 것이 보편화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만난 시기가 그때쯔음이라, 외할머니가 인간 세상에 나가신 것도 인간들에게 잡혀간 동족들을 구출하기 위해서란다. 그러다가 되레 잡혀서 엠브로스 가문으로 팔려간 거였는데, 그게 하늘의 뜻이었는지 거기서 외할아버지와 만나신 거였다. 그 길로 외할머니를 데리고 집을 나선 할아버지는 그때부터 할머니와 뜻이 맞은 여러 동료들과 함께 노예로 잡힌 이종족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 활약으로 외할아버지의 이름이 쫌 유명해졌고 사모하는 여성들도 많았다나, 어쨌다나. 그래도 다른 여자들에게 눈길 안 주고 외할머니께 열렬히 구애하여 결혼하여 살았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들은 외전을 참고 하시길... - 헤어져 외할머니는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셨고, 외할아버지는 내 친엄마를 데리고 엠브로스 백작 가문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뒤 엠브로스 백작 가문을 나온 친엄마가 외할머니를 찾아 오셔서 다시 연락을 주고받게 된 것이고 말이다. "음... 그런데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왜 이 반지를 엄마에게 주셨을까요? 백작의 지위는 엄마의 이복 동생분에게 물려졌다면서요." "글쎄다... 아마도 네 엄마가 백작 가문을 나서니까 자신과의 연결이 끊어질까봐 걱정이 되어서 그랬을지도... 그걸 가지고 있는 한 네 엄마는 자신이 엠브로스 가문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을 거 아니냐?" "그런가요? 하지만, 그래도 다른 걸 줬어도 됐을텐데... 음, 혹시 외할아버지께선 엄마에게 백작 지위를 물려주고 싶으셨던게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잘 모르겠구나." 그 뒤 외할머니와 나는 밤을 새워서 도란도란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 으면 좋았겠지만 대화는 거기에서 끝이었다. " 자, 네 엄마가 부탁한 건 이제 대충 다 전해준 거 같구나." 외할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제 대화를 끝내려는 것인 양 자리에서 일어나는 거였다. " 예?" 그에 내가 좀 얼떨떨해서 바라보자 외할머니가 의아하다는 듯 날 바라보는 거였다. " 왜 그러니? 나에게 더 묻고 싶은 거라도 있니?" " 예? 아, 아뇨. 그건 아닌데요." " 그래? 그럼 이만 일어나자꾸나. 벌써 늦은 시각인데다가, 곧 있으면 내 가족들도 돌아올 시간이거든." " 아... 예." 외할머니의 재촉에 나는 어정쩡하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거야 원...' 보통 외할머니하면 '아이고 내 강아지...' 하며 따뜻하게 보듬어주시고 어머니 같은 사랑을 베푸는 걸 떠올리지 않는가? 그런데 내 외할머니는 할머니 얼굴이 아닌 20대 중반의 미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내가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외할머니의 이미지와는 어딘가 틀렸다. 물론, 그렇다고 나에게 못되게 군건 아니고, 친절하고 자상하게 대해주긴 했지만, 뭐랄까... 그건 마치 아는 사람의 부탁을 받아 처음 보는 모르는 아이에게 잘 대해주는 것 같았다. 비록 잘 대해주기는 했지만, 남이라는 것을 뚜렷이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랄까? 그녀가 외할머니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나는 가족이 새로 생긴 거라고 생각했건만, 그녀는 그냥 아는 아이가 하나 생긴 거라고 여기는 듯 했다. 그리하여 친엄마가 나에게 남겨줬다는 엠브로스 백작 가문의 후계자 반지를 가지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외할머니의 안내를 받아 숙소로 돌아온 나는 심정이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숭생숭했다. 복권에 당첨이 되어 많은 돈을 받게 되었는데 그 돈의 대부분을 세금으로 뜯긴 심정이랄까? 이런 내 심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던지, 숙소에서 날 맞이한 내 동료들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 표정이 왜 그래? 꼭 일 보고 뒤 안 닦은 사람처럼." 잭슨의 말에 나는 단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 윽... 표현을 해도 꼭 그런 걸로 하냐? 너 네 애인에게도 그렇게 했다가는 평생 솔로로 살 거다." " 이런~ 네가 기분이 안 좋아서 좀 풀어주려고 했던 내 깊은 아량을 못알아 채다니..." " 그게 기분을 풀어주려는 거냐? 더 더럽게 만드는 거지." 내가 투덜대며 숙소 안에 마련된 침대로 가서 털썩 주저 앉자 잭슨과 듀비가 슬금 슬금 내 주위로 모여드는 거였다. " 뭐야? 왜 그러는데?"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내가 경계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자 잭슨이 내 침대 곁으로 의자를 끌어 당겨다 그 위에 털썩 주저 앉으며 물었다. " 말해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까 그 엘프 여자랑 밀어를 속삭이는데 그 엘프 여자 남편이 쫓아와서 널 두들겨 패기라도 했어?"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임마?" 내가 잭슨을 째려보며 빽 고함을 지르자 이번에는 내 침대 옆에 슬며시 앉아 있던 듀비가 입을 열었다. "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해인님의 그런 표정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 내 표정이요? 내가 어쨌길래요?" " 글쎄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게 마치 쓴 맛, 단 맛, 신 맛, 짠 맛을 한꺼번에 입 안에 넣고 있는 사람 표정 같아." 잭슨의 말에 나는 황당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 도대체 그게 뭐냐?" 그러자 이 어이없는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이는게 아닌가? " 그거야 나도 모르지. 나도 아직 그렇게는 먹어본적이 없으니..." " 그러면서 그렇게 먹은 사람이 나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건 잘도 알고 있구나?" " 그만큼 네 표정이 꾸릿꾸릿 하다는 이야기지." " 쳇..." 나는 그쯤에서 입을 닫았지만, 집요하게 날 바라보는 두 쌍의 눈동자들때문에 부담스러워서 다시 입을 열어야 했다. " 에잇, 그렇게좀 보지 말아라. 별 일 아니었어. 그냥 아까 나 데려다 준 그 엘프 여자가 내 외할머니래." " 그런데?" " 아니... 그게... 으음... 엘프라서 그런가... 내가 생각했던 외할머니 이미지하고 틀려가지고..." 뻘쭘하게 우물쭈물 이야기를 하자 잭슨이 피식 웃더니 다가와서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줬다. " 어이구... 이 녀석 아직 애였군. 할머니 품이 그리웠던 거냐?" " 야, 죽을래?" 내가 녀석을 노려보자 잭슨이 하하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 인간 외할머니와 엘프 외할머니와 틀린 건 당연한 거야. 엘프들 사이에서 조부모와 손자 사이는 거의 남이나 다름 없으니까." " 에?" 내가 어리둥절해서 쳐다보자 잭슨이 설명을 덧붙였다. " 그러니까... 엘프들 사이에서 가족이란 부모와 자식, 형제까지야. 형제야 부모로부터 독립해 나가면 그때부터는 거의 남처럼 되고." " 정말? 우와... 되게 삭막하네?" 내가 눈을 둥그렇게 뜨자 잭슨이 어깨를 으쓱했다. " 그렇다고 그렇게 볼 수는 없는 거지. 인간들 시점에서 보면 삭막할지 몰라도, 그게 엘프 종족의 특성인 걸 뭐." ?으음... 그런가?? 잭슨의 말에 내가 납득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잭슨은 듀비를 돌아보았다. ?블루 엘프족은 어떤가요? 가족관이 엘프쪽에 가까운가요, 아니면 인간쪽에 가까운가요?? 그의 질문에 듀비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으음... 저는 아직 인간이나 엘프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저희 종족에서는 한 핏줄이면 같은 가족이라고 생각하죠. 인원이 좀 많아서 가족이라고 하기 보다는 가문이라고 하지만...? ?헤에, 그래요? 그럼 그건 인간과 비슷하군요. 그럼 듀비에게도 할아버지나 할머니, 작은 아버지, 사촌들이 있겠군요?? 인간과 비슷하다는 거에 왠지 반가운 마음이 들어 물었더니 잭슨이 잠시 고개를 갸웃 한 다음 대답했다. ?물론, 저희 집안에도 가주를 놓고 경쟁하는 자들이 많긴 하죠.? ?예?? 왠지 내가 원한 답과는 동떨어진 대답이 들려오자 어리둥절 할 수 밖에 없었다. 그에 듀비는 나에게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한 가문에 태어난 같은 대의 아이들은 가주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을 하게 됩니다. 우선 먼저 태어나 성년의 관문을 거친 자가 가주의 후계자 자리를 물려받지만 그 다음에 성년의 관문을 거친 자의 도전을 받게 되죠. 그러한 도전을 모두 물리쳐야만 진정한 가주의 후계자로써 나중에 가주가 돌아가시면 가주의 자리를 물려받게 되죠.? ?그런가요? 인간 사회와 비슷하긴 하지만 좀 더 살벌하네요. 꼭 도전을 해야 하는 건 아니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거잖아요.? 내 질문에 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도전을 안 한다는 건 자신이 약하다고 선전하는 거나 마찬가지라서요. 하기야, 정말 약한 자들은 성년의 관문을 거치지 못하고 죽겠지만...? ?헉... 성년의 관문을 거칠 때 죽는 이들도 있나요? 에... 그럼 혹시 도전하다 죽는 이도...?? 내 조심스러운 질문에 듀비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년의 관문은... 종족의 비밀이라 자세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꽤 거친 거라 10에 3, 4명은 돌아오지 못합니다. 뭐, 돌아오는 자들도 대부분 무사히 돌아오는 자는 거의 없지만... 게다가 가주 후계자에게 도전할 때 항복하지 않는 자는 죽일 수밖에 없어서요. 가끔 죽는 자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뭐, 대부분 죽기 전에 항복을 하지만 말이죠. ?그, 그래요? 그거... 혹시 남자만 합니까, 아니면 여자도 같이 합니까?? ?남자 여자 구별 없는데요? 모두 동등하게 합니다.? ?오...? 인간 세상에서는 여자와 남자를 동등하게 대해주는 곳이 없었는데 블루 엘프족은 그런 것 같다니 뭔가 인간 사회보다 진보한 사회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그건 정말 잠깐이었다. ?에... 그러면 아무래도 형제끼리 좀 살벌하겠네요. 아, 듀비는 어때요? 성년 관문을 통과 했죠? 그럼 가주 후계자에게 도전한 건요? 설마, 듀비가 가주 후계자인가요?? ?아, 그건 아닙니다. 저는 성년의 관문은 무사히 통과했지만, 가주 후계자에 대한 도전에서는 졌거든요. 제 형님께서 지금 꿋꿋이 후계자 자리를 지키고 계시죠.? 그렇게 형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듀비의 얼굴에는 약간의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헤에... 아무리 형제끼리 경쟁자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살벌하기만 한 건 아니구나. 음음, 역시 이 세계에는 별의 별 가족관이 존재하는 군. 하기야, 사람들끼리도 지역에 따라서는 문화가 조금씩 틀리니 이종족끼리야 말할 나위도 없겠지.? 그 다음 날 우리가 엘프 마을을 떠날때 외할머니는 배웅을 나오기는 하셨지만, 그건 왠지 날 보러 나온게 아니라 엘프 마을의 장로로써 - 외할머니는 이 엘프 마을의 장로였다. 그만큼 나이가 많은 걸까나? - 손님들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 듯 싶었다. ' 으윽... 아무리 엘프들 사이에서는 조부모와 손자 사이가 거의 남과 같다고 해도 이거야 원...' 그래도 그나마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 무시하지는 않고 살짝 고개는 끄덕여 주시는 거였다. 이로써 드디어 운송이 끝나 우리는 펜사 산맥을 내려가게 되었다. 그래 나는 다음 엘프 마을에 갈 일이 없으니 걸어서 내려가겠구나.. 생각했는데 의외로 엘프 마을에서는 이번에도 유니콘들과 안내자 엘프를 붙여주는 거였다. 물론, 인간 마을까지 가는 건 아니고, 인간들의 손길이 닿는 곳까지만 데려다주는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겠는가? " 아아, 이번에도 수학량은 두둑했어. 나는 엘프 마을에 운송 오는게 제일 좋더라. 갈때, 올때 짐이 적지, 거기에다 엘프 마을에 도착할때면 유니콘들을 빌려주지. 여기 만큼 편한 운송은 없어." 버지니아는 운송이 끝나서 한시름 놨는지 밝은 얼굴로 말했다. ' 뭐, 먹는 것까지만 좋았다면 금상첨화였을테지만... 우후후.. 그래도 이제 곧 고기를 먹을 수 있구나아~~ 기다려라 내가 간다~!!' 제 26화 엠브로스 영지 외할머니가 계시던 떡갈나무 숲 엘프의 마을을 빠져 나와 3일쯤 유니콘을 타고 이동한 우리들은 여기저기 숲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는 어떤 공터에서 멈춰 섰다. "자, 우리는 여기까지 입니다." 안내해주던 엘프가 말하지 않아도 여기저기에 인간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보이는 곳이었기에 우리는 이쯤에서 그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동안 유니콘들 덕분에 편안하게 이동해왔다가 이제 그들과 헤어져 다시 걸어가야만 했지만, 그래도 일행들은 곧 인간 마을에 도착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인지 서운함 보다는 기쁨이 가득했다. "여기까지 데려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상회 사람들이 유니콘의 등에서 다 내려서자 버지니아가 일행을 대표로 우리를 안내해 온 엘프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천만에요. 저희야말로 저희 종족들을 무사히 데려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버지니아의 인사에 엘프들 또한 정중하게 답례하고 그들은 곧 유니콘의 머리를 돌려 달려갔다. "우리도 출발하지. 빨리 출발해야 그만큼 마을에 빨리 도착하니까 말이야." 엘프들의 모습이 금방 수풀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자 버지니아도 일행들을 돌아보며 힘차게 말했다. "와아~" 그에 일행들도 기쁜 환호성으로 대답을 하고는 우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둘러 길을 따라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엘프들과 헤어진 후 하루가 지난 날, 아침부터 왠지 날이 흐리더니만 점심때쯤에 눈발이 하나 둘 날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올 해의 첫눈이 내린 것이었다. 문제는 그게 하필 우리가 아직 산 속에 있을때라는 거지만... "안되겠군. 서둘러라. 최대한 빨리 내려간다." 버지니아의 다급한 외침이 아니라 하더라도 일행들의 얼굴에는 약간의 초조함이 어려 저절로 발걸음들이 빨라지고 있었다. 다행이 함박눈이 아닌 싸리눈이라 시야를 가리는 건 없었지만, 그러한 눈이라도 산길에 쌓이자 조금씩 미끄러웠고, 이 눈이 그치면 날씨도 더 추워질 것이 틀림 없었다. 이럴때에 천막도 없이 단지 침낭 하나에 모닥불로 밤을 새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그걸 아는 사람들이었기에 더욱 서두르는 건지도 모르지만... "해인, 네가 위로 올라가서 근처에 인가가 있는지 살펴봐줄래? 그리고 우리가 제대로 내려가고 있는지도 봐주고." 첫 대장 직을 맡았을때 산 속에서 눈을 맞게 되니 버지니아가 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알았어요. 금방 다녀올 게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곧장 엔다이론을 불러내어 올라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엘프들이 유니콘을 데리고 돌아간 후 나는 나만 혼자 편안하게 가는게 미안해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산 속을 걸어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위로 올라가니 산 속에 있을때는 잘 못 느꼈던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나를 엄습했다. "웃... 추워..." 아무래도 산 속에서는 나뭇잎이 다 떨어져 앙상하기는 하지만 빽빽하게 있는 나무들이 바람을 막아주고 있어서 덜했던 모양이다. 나는 몸을 한번 부르르 떤 후 엔다이론에게 부탁해서 내 주위에 물리적 방어막을 치고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다행이도 나는 멀지 않은 곳에서 한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 버지니아에게 알리고 나는 위에서 일행이 그쪽으로 향할 수 있도록 방향을 인도했다. 위에서 볼때에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은데, 산길로 가자니 시간이 꽤나 오래 걸려 우리가 그 마을에 도착했을때에는 한밤중이었다. 산 기슭에 있는 그 마을은 보통 산골 오지에 있는 곳 치고는 가구 수가 무척 많았고, 커다란 여관까지 존재했다. 게다가 마을 둘레에는 굵은 통나우와 커다란 바위돌로 만들어진 - 비록 커다란 성 둘레에 있는 성벽보다는 허술하지만 - 목채까지 있는 거였다. 그래 우리가 도착했을때에는 목채의 커다란 문이 굳게 닫혀 있었지만, 다행이 보초병이 있다가 우리를 보고 문을 열어줘 무사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그 보초병은 덕분에 두둑한 수입을 받게 되었고 말이다. "아, 오늘은 노숙을 피하게 되었군. 정말 다행이야." "그렇네. 눈 오는 날 노숙한다는 건 너무나 괴로운 일이지." "어, 춥다." 커다란 여관에 도착하자 일행들은 안도한 마음을 한 마디씩 표현하며 홀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착한 어린이들은 모두 꿈나라로 가 있을 시간이지만, 나쁜 어른들에게는 아직 이른 시간인지 식당 겸 주점인 듯한 여관의 커다란 홀은 절반 정도 사람들이 채우고 있다가 갑자기 들이 닥치는 우리를 쳐다봤다. 그런데 우리가 날을 잘 못 잡았는지, 아니면 장소를 잘 못 잡았는지 홀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자인데다가 모두 한 근육 하는 우락부락 맨들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장식으로 거친 흉터까지 있어 내 눈을 둥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다른 일행들은 무지 익숙한 곳인 듯 아무렇지도 않게 척척 들어가 빈 자리를 찾아 앉고 - 눈 때문에 길을 서두르느라 저녁도 못 먹고 휴식 시간도 없이 줄기차게 걸어 왔던 것이다. - 버지니아와 비토만이 주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홀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고 있으면서도 시종 주눅들지 않고 당당했다. "18명이 사용할 방이 필요해요. 거기에 독방 하나 포함시켜 주시고요." 그녀의 말에 카운터에 있던 주인은 장부를 뒤적이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얼마나 묶으시게?" "하루요. 내일 아침에 출발할 겁니다." 그러자 주인이 난처한 빛을 띄우며 말했다. "어쩌우? 지금 빈 방이 별로 없어서... 다 수용하지 못할 듯 싶은데?" "방이 몇개 남았는데요?" "으음... 3인실 세개에 2인실이 하나 밖에 없군. 시간이 너무 늦어서 잘 집을 구하기는 어려울 텐데..." 주인의 말에 버지니아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수 없죠. 그거라도 주세요." 버지니아의 말에 주인은 놋으로 만든 열쇠들을 건네주며 설명했다. "침낭 빌리는데도 돈을 내야하우. 하나 빌리는데 3실링. 그리고 방 값은 선불이요. 2인실은 20실링이고 3인실은 30실링. 여기 파란색이 3인실이고 초록색이 2인실." 주머니를 뒤적여 은화 하나와 동전들을 꺼낸 버지니아는 열쇠꾸러미와 교환하며 물었다. "침낭은 됐어요. 우리도 침낭을 가지고 있거든요. 아, 지금 식사가 가능할까요?" "간단한 거라면." "좋아요, 그럼 가능한 걸로 18인분 부탁할게요. 될 수 있는 한 푸짐한 걸로 준비해주시고, 따끈한 스튜나 스프도 포함시켜주세요." "그러지요." "식비도 선불인가요?" "아니, 그건 후불인데... 내일 아침까지 먹고 갈 거면 내일 아침에 같이 주슈." "그러죠." 그렇게 버지니아가 주인과의 이야기를 끝내고 우리가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오자 주위에서 휘파람과 함께 야한 농담이 쏟아졌지만 버지니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빈 의자에 앉았다. 주위 사람들도 그렇게 노골적인 농담을 던지기는 했지만, 우리 일행이 많은데다가 우리 일행 대부분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사람들이었기에 직접 다가오는 사람도 없었고, 얼마 안 있어 그들도 우리에게 신경 끄고 자신들끼리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자아... 이걸 어떻게 나누냐가 문제인데... 대충 3인실에는 5명이 들어가고, 2인실에 3명이 들어가면 될 거 같은데..." 그러자 비토가 냉큼 입을 열었다. "그러면, 3인실 하나에 누나하고 나, 그리고 본부에서 온 세 지원자가 들어가도록 하죠? 괜찮죠, 누나?" 비토의 말에 버지니아는 나와 잭슨 듀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것도 괜찮겠군. 그쪽도 괜찮죠? 좋아, 그럼 하나는 그렇게 정했고... 나머지는 알아서 정하기로 하죠?" 뭐, 그렇게 해서 얼결에 버지니아 남매와 -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다. 다른 지부 사람들이랑 쓰느니 차라리 그게 나았다. 뭐, 나는 솔직히 우리 셋만 한 방 쓰는 거 보다는 버지니아 남매와 같이 쓰는게 훨 좋았다. - 한 방을 쓰게 되었지만,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방을 배정 받고 따끈하고 푸짐한 식사를 끝낸 뒤 방에 들어가니 세개의 일인용 침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으음... 침대를... 우선 난 숙녀니까 내가 하나 쓰고, 해인이가 여기서 제일 어리니까 해인이 하나 쓰고... 나머지 하나는... 어쩌지?" 아무리 일인용 침대라고 해도 좀 넓직했으면 낑기더라도 한 침대에 둘이서 자게 했겠지만, 침대가 한 사람 누우면 공간이 거의 남지 않을 정도로 좁아서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그래 버지니아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평소 일행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리다고 어린애 취급 받아와서 불만이었는데, 이렇게 행운으로 작용하는 날도 있었을 줄이야. 어쨌든, 이렇게 아무런 일도 안 했지만 침대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던 나와는 달리 침대 하나를 놓고 아직 침대를 차지하지 못한 세 남정네의 치열한 신경 쟁탈전이 시작되었... 다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이었다. "저는 아무데서나 자도 상관 없으니 바닥에서 자겠습니다. 침대는 두 분이 알아서 써주시길." 그렇게 듀비가 먼저 침낭을 피고 두 침대 사이의 바닥을 차지하고 눕자 비토와 잭슨이 무안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는 거였다. 그러다 결국 비토가 입을 열었다. "에... 나도 노숙을 많이 해봐서 꼭 침대가 아니라도 불편하지는 않으니까요. 잭슨씨께서 쓰시죠?" 그러면서 비토까지 바닥 한 구석에다 침낭을 깔자 혼자 남은 잭슨은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도 바닥 한쪽 구석에다 침낭을 깔았다. "저 혼자 어떻게 쓰겠습니까? 그냥 다 같이 바닥에서 자죠. 찬 바람과 이슬을 막아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니까요." 그리하여 결국 세 남정네는 바닥에서 자고 나랑 버지니아는 편안하게 침대에서 잤다. 그런데, 침대에서 잔다고 다 편한 건 아니었다. 침대가 작은 것을 보고 알아챘다시피 밑에 깔린 매트도 두껍고 푹신한게 아니라 얇아서 거의 딱딱한 바닥 감촉이 느껴지고 찬 기운도 올라오는 바람에 결국 나와 버지니아도 자기 전에 침대 위에다 침낭을 깔고 자야 했다. 어쩐지, 주인이 침낭 대여를 한다고 하더니만, 그건 사람이 너무 많아 침대 대용으로 빌려주기 위해 있는게 아니라 매트 대신 깔라고 있는 듯 싶었다. 뭐, 그래도 잭슨의 말대로 노숙하는 것보다는 훨 나았기에 그 다음 날 아침 기분 좋게 잠에서 깨어난 나는 차가운 공기에 몸을 움츠렸다. 어제 눈이 와서 그런지 기온이 뚝 떨어져 있는데다가 어제 밤에 활활 피워났던 벽난로의 불도 거의 다 꺼져 방 안이 추웠던 것이다. "어... 추워라." 이럴때는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따끈따끈한 온돌방안에 이불 폭 뒤집어 쓰고 들어앉아서 부침개를 먹으며 만화책이나 소설책을 이따시만하게 쌓아 놓고 보는게 최고인데 말이다. "아아, 온돌방이 그리워... 이번에 돌아가면 집안에다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해볼까?" 차마 침낭을 뒤집어 쓰고 걸어다닐 수는 없어서 시트를 뒤집어 쓴 채 두터운 옷을 찾느라 짐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시트를 확 걷어갔다. "우왁~" "폼이 그게 뭐냐? 시트를 뒤집어 쓰고 뭐 하는 거야?" 뒤돌아보니 잭슨이 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얇은 옷차림으로 당당하게 선 채 날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우쒸, 무슨 짓이야? 춥단 말이야." 녀석의 손에 들린 시트를 빼앗고자 손을 뻗었지만, 그 보다도 먼저 잭슨이 내 손이 닿기 전에 얼른 침대 위에다 던져 버렸다. "이게 뭐가 춥다고 그렇게 움츠려 있어? 그리고 춥다고 움츠리고 있으면 더 춥단 말이야." "그래도 추운 걸 어쩌냐? 에잇... 정말..." 나는 투덜투덜 대며 내 짐 속에서 찾아낸 두터운 옷을 걸쳤다. "쯧쯧, 이렇게 비실 거려서야 원... 널 보고 누가 우리 상회에서 손꼽히는 실력자라고 생각하겠어?" "그렇게 봐주길 바라지도 않네요." 그렇게 잭슨과 투닥거리며 아침 식사를 위해 밑으로 내려가니, 어제 밤에 봤을때보다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들 모두가 한 덩치 하는데다 부리부리한 인상의 사람들이었다. "허걱... 아니, 여기에는 한 덩치하는 사람들만 모이는 곳인가?" 내가 주위를 둘러보다 질린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리자 버지니아가 그걸 들었는지 피식 웃었다. "당연한 거야. 여기는 몬스터 사냥꾼들 때문에 생긴 마을이니까. 지금 이 곳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몬스터 사냥꾼이거나 아니면 그 몬스터 사냥꾼들이 잡은 포획물을 사기 위해 온 사람들일걸?" "헤에, 그래요? 아아, 그래서 산 속에 있는 마을인데도 불구하고 인구가 많고 튼튼한 목책까지 설치할 수 있었던 거군요?" "맞아. 그렇게 안전하게 마을을 관리하는 덕분에 마을에는 몬스터 사냥꾼들이 포획해온 사냥물들을 가공하는 장인들도 많이 있어. 어차피 몬스터 사냥에 쓰이는 물품을 사냥꾼들이 대부분 여기서 구입하기때문에 왠만한 건 다 있을 걸? 그것도 괜찮은 것들로 말이야." "오옷, 그래요? 에... 하지만 우리는 곧 출발해야 하니 구경할 시간은 없겠죠?" 내가 좋다 말았다는 표정으로 묻자 그녀가 피식 웃었다. "아니야, 출발하기 전에 일행들이 타고 갈 말들을 구해야 하니 시간이 좀 있을 거야." "어? 정말요? 그런데 왠 말이요? 산에 오르기 전에 그 마을에 맡겨놓은 말들은 다 어쩌구요?" "응? 그건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잖아. 그거 때문에 국경까지 걸어가려면 너무 힘들지 않겠어? 게다가 그건 이미 다른 동료들이 끌고 국경에 와 있을 걸 뭐. 우리가 다시 거기까지 가는 건 시간낭비잖아." "오오... 그렇군요." 잘은 모르겠지만, 일행이 그 곳까지 다시 가서 말과 마차를 이끌고 국경을 또 넘어 지부로 돌아 가는 것 보다는 그게 훨씬 합리적일 듯 했다. 거기다가 말과 마차를 끌고 오는 동료들도 어차피 라센국으로 일 나갔다가 돌아오는 이들이라니 더더욱 말이다. 그래 나는 아침을 맛있게 먹고 말 고르는 일은 전적으로 지부쪽 사람들에게 맡기고 나는 신나게 구경 다녔... 으면 무지 좋았겠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어딜 가려구?" 아침을 다 먹자마자 듀비와 함께 냉큼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잭슨이 내 뒷덜미를 잡아 끄는 거였다. "어디긴 어디야? 여기에 괜찮은 물건들이 많다면서? 할 일도 없는데 그거 구경가려는 거야. 너도 같이 갈래?" "할 일이 없다니? 시간도 빠듯하구만 뭔 소리야?" 그러면서 잭슨이 내 손목을 잡고 여관 뒤쪽으로 끌고가는 거였다. "야, 야? 어딜 가는 거야? 내가 무슨 할 일이 있다고..." "따라와보면 알아." "어어어..." 그렇게 잭슨에게 끌려가 여관 뒷마당에 가보니 거기에는 톰슨이 왠 말 한 마리를 끌고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어라? 톰슨은 왜 여기 있어요? 버지니아와 같이 말 사러 간 거 아니었어요?" 내가 의아해서 묻자 톰슨이 하하 웃었다. "말 사는데 모든 사람이 우르르 갈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 잭슨씨의 부탁과 누나의 허락을 받아 여기에 남았죠." 그의 말에 의아해서 잭슨을 돌아보니 잭슨이 날 말쪽으로 밀며 말했다. "이게 다 너때문이잖아." "에? 내가 왜?" "내가 왜에? 우리 일행중에 말 탈줄 모르는 건 너뿐이잖냐. 그렇다고 너 때문에 마차를 살 수도 없는 거고. 또 마차가 있으면 진행 속도도 상당히 뎌뎌지고 불편한 것도 한두가지가 아니잖아. 그래, 우리가 일행이 출발하기 전 까지 네가 말을 타고 갈 수 있도록 훈련시키기로 했다. 어때, 고맙지?" "허걱... 그거... 꼭 배워야 해? 그냥 나는 네 뒤나 아니면 듀비 뒤에 타고 가면 안될까?" "언제까지 그럴려고? 언젠가는 배워야 하니 이 기회에 배워두면 좋잖아." "그렇다고 꼭 오늘일 필요는 없잖냐. 날도 추운데..." 잭슨이 자꾸 말쪽으로 날 밀었지만, 나는 말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아 안 가려고 버팅기며 투덜댔다. "시끄러워. 이 추위를 무릅쓰고 가르쳐 준다고 하면 고맙다고 할 것이지 뭔 불만이 그렇게 많아? 얼른 가지 못해?" "안돼. 난 말을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단 말야." "그러니까 오늘 타보란 말야. 우리가 옆에 있으니 겁먹을 거 없다니까." "그, 그래도..." "아, 거 말 되게 많네." 잭슨에게 밀리고 밀려서 억지로 말 가까이에 간 나는 말이 쓰윽 나를 돌아보자 움찔 뒤로 물러섰다. 말을 무서워 하는 건 아닌데 - 사실 말과 가까이 할 기회도 없었지만... - 막상 타려고 하니 뭔가 묘하게 무서움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 동안 내가 타고 다니는 것은 살아있는게 아니었으니 - 물론 엔다이론은 제외하고 말이다 - 자기 맘대로 움직이지도 않고 꿈틀거리지도 않고 심장이 뛰지도 않았는데, 말은 그렇지가 않았다. "무서워 하지 말라니까." 내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나자 잭슨이 다시 날 말 가까이로 밀었다. "무서워 하는게 아니야. 그냥.... 좀... 에.. 익숙하지 못해서 그럴 뿐이지." "시끄러워. 시간 없으니까 어여 어여 해봐." "뭐, 뭘?" 잭슨이 내 뒤에서 날 도망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사이 말 고삐를 쥐고 있던 비토가 다가와 나에게 말 고삐를 넘겨줬다. "우선은 말과 친숙해져야 할 거 같군요. 자, 여관 주인에게 부탁해서 순한 말을 빌린거니까 겁을 먹지 말고 얼굴을 한번 쓰다듬어줘봐요. 이렇게요." 비토가 먼저 시범을 보이느라 말 콧등을 슬슬 어루만져주자 말이 기분 좋은지 가만 있었다. "자, 한번 해보세요." 비토가 옆으로 비켜서며 말을 가르키자 나는 머뭇머뭇 대면서 떨리는 손으로 어색하게 말의 콧잔등에 손을 살짝 댔다. 그러자 갑자기 말이 히히힝 거리며 입을 쩌억 벌리더니 고개를 숙여 내 뺨에 자기 콧등을 쓱쓱 문지르는게 아닌가? "우아악~!!" 하지만 나는 말이 날뛰는 줄 알고 놀라서 고삐를 놓고 뒤로 펄쩍 물러났다. "괜찮아요, 괜찮아. 말이 좋아서 그러는 거예요." 그에 비토가 얼른 말 고삐를 잡으며 그 말이 더 이상 나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막아줬고 잭슨도 얼른 날 안아서 날 도망못가게 막았다. "야야, 괜찮으니까 진정해." "헉, 헉... 너 같으면 진정 하게 생겼냐? 순한 녀석이라며?" 너무 놀란 나는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잭슨을 노려보자 그가 하하 웃었다. "아하하하~~ 거칠게 날뛴게 아니라 네가 좋아서 히죽 웃은 거 뿐이야." "저, 저게 좋아서 웃은 거라고? 두번만 좋아했다가는 덮치려고 달려들겠다." 내가 기가막혀 중얼거리자 잭슨이 얼른 날 만류했다. "야야, 그러지 마. 말도 사람 말 알아듣는다고." "엥?" "저봐, 저 녀석 삐졌다." "허..." 그의 말을 들어서 그런가, 말을 바라보니 그 녀석이 고개를 휙 돌려버리는 거였다. "거봐라. 당사자를 앞에다 놓고 그렇게 말했으니 화가 났지." "어어..." 그에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비토와 잭슨을 바라보니 톰슨이 하하 웃으면서 손짓했다. "이리와서 달래줘요. 그럼 괜찮아요." 그에 쭈뼛쭈뼛 말에 다가갔지만 그 녀석이 정말 토라졌는지 또 다시 고개를 반대쪽으로 획 돌려버리는 거였다. "어, 어떻게요?" 그에 당황한 내가 비토를 바라보니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잭슨이 다가와 장난처럼 속삭였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미안하다고 사과 해야지."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아무리 말이 삐졌다고 해도 - 정말 말이 삐질 수 있는 건지 아직 의아스럽지만 - 잭슨의 말이 너무 농담같아 녀석을 찌릿 째려보며 물었지만 잭슨은 너무 당당하게 대답하는 거였다. "아까 네가 말 잘못해서 말이 삐진 거잖아. 그러니 삐진 걸 풀어주려면 사과를 해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 "그, 그런가?" "그렇다니까." "정말이지?" "거참, 정말이라니까 그러네." '아무리 그래도 말한테 사과를 하라니...' 나는 속으로 궁시렁 거렸지만, 내가 잘못한게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 무지 어색함을 느끼면서, 주위를 힐끔 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어... 음... 아, 그러니까... 음음, 그게 미, 미안... 내가 말 실수를 한 거 같아..." 그렇게 무지 어렵사리 사과를 했건만, 이 얄미운 말 넘이 내 사과는 들은 척 하지도 않고 여전이 고개를 팩 돌리고 있는 거였다. "뭐야? 사과를 했는데 여전히 삐져 있잖아? 너 거짓말 한 거지?" 그에 잭슨에게 놀림당했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든 나는 잭슨의 멱살을 잡아 짤짤짤 흔들면서 화를 냈더니 이 녀석이 그 와중에도 끝까지 자기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아.그.그.그.무.슨.소.리.야.그.건.사.실.이.라.구.우.우." "웃기지마. 그럼 저 녀석이 왜 계속 삐져 있는 건데?" "거야, 해인씨가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 것 같지 않으니까 그런 거겠죠." 비토가 불쑥 끼어들자 나는 잭슨을 흔들던 손길을 멈추고 의심스럽게 비토를 바라봤다. "정말요?" "정말이라니까요. 이래뵈도 말은 굉장히 영리하고 민감한 동물이에요." '음... 그런 말은 예전에 한국에 있을때에도 들어본 거 같긴 해.' "자자, 다시 한번. 이번에는 진심을 담아서..." 비토가 날 다시 말 앞으로 이끌어갈때에도 그 말 녀석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해인아, 시간이 별로 없다. 우리 말 타고 갈때 넌 걸어서 갈 거냐? 빨리 하고 말 타는 법을 배워야지." 잭슨의 재촉에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말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야... 음... 미안, 내가 말을 잘못했어. 그렇다고 네가 미워서 그런 건 아니고 음... 좀 놀라서 그냥 말이 막 나와버렸네. 아까 그건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어." '어휴.. 정말..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속으로 한심해서 한숨이 나왔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가 잘못을 하기는 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말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하기는 좀... 그래서 땅을 쳐다보며 - 그래도 말은 진심으로 했는데... - 사과를 기껏 했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 슬쩍 고개를 들어 말을 살펴보니 이 넘의 말이 어느새 고개를 내쪽으로 돌리고 있는 거였다. "으헥? 뭐, 뭐야? 갑자기 말의 얼굴이 코앞에 있자 나는 나도 모르게 또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나려고 했는데 이넘의 말이 날 빤히 바라보더니 히히힝 하구 히죽 웃더니 혀를 낼름 내밀어 내 뺨을 핧는 거였다. "우아악~~" 강아지가 얼굴을 핥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말이 그럴줄은 몰랐기에 나는 이번에도 무쟈게 놀라버렸다. 그러한 우여곡절을 격으며 드디어 말이 삐진 걸 풀어준 나는 잭슨의 잔소리와 비토의 격려를 들으며 말타기를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체육 신경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단 몇시간 만에 다 배울 수 있을리가 없었다. 결국 말과 부족한 노숙 물품을 보충하러 나간 일행들이 돌아올때까지도 승마 기술을 마스터 하지 못한 나는 일행이 출발할 때 혼자 말을 타고 갈 수가 없어 듀비의 뒤에서 타고 가야 했고, 내 몫으로 사온 말은 나와 듀비의 짐을 실은 채 가야 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 그 고생은 뭐하러 시킨 거냐?" 내 옆에서 말을 몰고가는 잭슨을 째려보며 투덜대자 잭슨이 날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야? 처음부터 네가 금방 승마 기술을 배우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어. 내 목표는 우리가 본부에 도착할때에는 너 혼자 능숙하게 말을 타게 하는 것이라고. 설마 아까 걸로 가르침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헉.. 아, 아니냐?" "당연히 아니지. 이제부터 매일 매일 틈나는대로 가르칠테니까 명심해. 후후후..." 왠지 잭슨은 날 가르키는게 무지 즐거운 모양이었다. "허거걱..." 겨울에 노숙을 하면서 이동하겠다고 하는 건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다. 해가 떨어지면 기온이 급속도로 하강되는데다 언제 눈이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노숙을 각오하더라도 국경을 향해 쭈욱 일직선으로 가면 빠르겠지만, 그건 다른 계절에나 가능한 일. 그리하여 버지니아는 조금 멀리 돌아가더라도 될 수 있는 한 노숙을 피하고 마을이나 성을 거쳐 가는 길을 택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헉, 지금 우리가 여기 있다고요?" 몬스터 사냥꾼의 마을 근처에는 이렇다할 마을이 없었기에 우리는 이틀을 추운 날 밖에서 노숙한 후 겨우 작은 영지의 성에 들어와 있었다. 그 곳에서 다음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 버지니아가 펼쳐든 지도를 보고 난 나는 벙찔 수 밖에 없었다. "어? 몰랐어?" "아니,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멀리까지 와 있었을 줄은..." 나는 우리가 멀리 와 봤자 기껏 벨레니 국가의 한 중간쯤 왔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버지니아가 가르킨, 현재 우리가 있는 지점은 마르타국과 벨레니 국과의 국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벨레니 국을 거의 종단한 셈이었다. "그렇게 먼 거리를 달려놓고도 몰랐단 말야?" "아, 아니... 그게 그렇게 먼 거리를 달렸을 줄은... 어휴, 정말 멀리도 왔네요. 그럼 갈때 시간이 더 걸리겠는데요?" "당연하지. 너는 유니콘들이 얼마나 빠른지 모르는구나? 왠만한 명마보다는 훨씬 빠른데다가 하루에 1000km는 여유있게 주파한다고." 참고로 천리마는 하루에 400km 를 달릴 수 있는 거다. ( 10리 = 4km ) "그걸 타고 2주 내내 달린 거리를 보통 말을 타고 되돌아간다고 생각해봐." 버지니아의 말에 경악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비토까지 끼어들었다. "거기에 우리가 걸어갔던 거리도 더해야지." "헉... 그렇네요. 그럼 대충 얼마나 걸려요?" 내 질문에 버지니아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입을 열었다. "음...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코스로 최대한 빨리 간다고 해도... 국경에 도착하는 것만 한... 두달? 두달 반?" "아아... 지부에 도착할때쯤이면... 새해겠군요." "그렇겠네. 으음... 올해 마지막 날을 밖에서 보내야하다니... 어휴..." "넌 그나마 작년에는 집에서 보냈지만, 난 작년이나 올해나 다 밖에서 보내야 한다고." "참내... 이쪽 일이 수입은 짭짤하지만, 이런 건 안 좋단 말이야. 명절에 오히려 일거리가 더 많으니..." 버지니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위에 있던 지부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나는 뭐, 새해를 집 밖에서 넘기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게 아니라 - 그러고보니 작년 마지막 날과 올해 첫날에는 조엘네 집에서 보냈었다. - 이 추운 겨울 내내 밖에서 이동을 하고 있는게 싫어서 그랬던 건데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겨울에 이동하는 건 익숙한듯 그런 건 안중에도 없고 새해를 밖에서 보내야 하는 것만 가지고 투덜대고 있었다. '으음... 새해라... 한국에 있었다면 가족과 함께 보냈겠지만 여기서는... 아버지랑?' 거기까지 생각한 난 아버지인 물의 정령왕 엘라임을 떠올려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버지가 새해라는 것에 의미를 둘 것 같지는 않은데? 같이 떡국을 끓여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닐테구... 우움... 그냥 썰렁하겠군. 그럼 차라리 이맘때쯤 밖에 있는게 나으려나?' 새해를 밖에서 보내야 한다는 결론(?) 으로 인하여 일행들의 분위기는 가라앉았지만 그래도 국경을 향하는 발걸음은 늦추지 않았다. 아니, 하루라도 더 빨리 가서 새해에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하늘이 무심하게도 기후는 이런 우리를 지지해주지 않을거면 가만히 있기라도 할 것이지 열심히 방해 하는 거였다. 벨레니 국가는 양 옆으로 바다가 인접해 있기는 하지만, 각각 펜사 산맥과 퀸모드 산맥에게 막혀 있었다. 그리하여 케르겔렌해나 애버트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해풍이 모조리 막힌데다가 비구름 또한 산맥에 걸리는 바람에 벨레니 국가를 찾는 것은 북대륙을 통한 차가운 대륙바람이거나 아니면 남대륙에서 한번 걸러져 다 식은 서스턴해의 바람이었다. 그래서 벨레니국의 겨울은 눈은 적지만 차가운 바람이 강하고 매우 추웠다. 그런 상황에서 말을 달려야 했으니, 우리는 아무리 두꺼운 외투로 꽁꽁 싸매고 있어도 몇 시간만 지나면 사람이건 말이건 모두 꽁꽁 얼어붙었다. 버지니아가 하루만에 다음 마을에 도착할 수 있는 길만을 골라 달리고 휴식 시간을 최대한 줄였으며, 적은 휴식 시간이나 점심을 먹을때에는 내가 일행 주위에다 찬바람을 막아주는 결계를 펴고 잭슨이 불의 정령을 불러내어 일행들의 몸을 잠시나마 녹이게 해줬지만, 그래도 힘든 여정이었다. 그나마 일행들이 이런 일에는 익숙한 사람들인데다가, 일행 중 가장 체력이 약한 나는 정령들의 보호를 받고 있어 추위를 느끼지 않을 수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거였다. 그렇게 힘든 가운데에서도 강행군을 고수하길 약 보름 정도 되었을 어느 날 저녁이었다. 그날도 하루종일 추운 날씨 속에서 말을 달리느라 온 몸이 꽁꽁 언 일행들이 잽싸게 여관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는데, 이게 왠일? 여관 대부분이 다 차버려서 빈 방이 없는 거였다. 그나마 다행이도 우리가 도착한 그 곳이 조금 큰 성내라 다른 여관도 있어서 일행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 다른 여관으로 흩어졌다. 비록 우리가 마을들이 붙어 있는 곳으로 골라 가느라 벨레니 국 중심쪽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이처럼 한 성내의 여관이 거의 찬 적은 처음이라 좀 어리둥절 했다. 거기다 대부분이 장사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호위하는 무사들로 보여 같은 상업에 종사하는 일행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사람들이 많군요. 원래 겨울에도 이렇게 사람이 많습니까?" 나는 이번에도 듀비, 잭슨과 함께 버지니아 남매와 같은 여관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에 내려오자 비토가 궁금했던지 주인에게 슬쩍 물어보는 거였다. "어라? 손님들은 엠브로스 영지로 가시려는 게 아니었나보군요?" "엠브로스 영지요?" 나는 솔직히 상인들이 많이 있건 말건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주인의 입에서 내가 아는 단어가 나오자 귀가 솔깃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나도 모르게 불쑥 끼어들었더니 비토와 주인이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말을 재촉하는 내 시선에 주인은 계속 입을 열었다. "아아, 예. 모르셨습니까? 이 옆 영지가 바로 엠브로스 영지가 아닙니까?" 거기에서 주인이 다시 입을 다물자 비토가 재촉했다. "아니, 옆 영지가 엠브로스 영지인거하고 상인들이 많은거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그게 말이죠, 현 엠브로스 백작님의 생신이 겨울이랍니다. 그래 엠브로스 영지는 현 백작님이 백작님이 되신 뒤 부터 백작님의 생신 축하 겸, 설을 맞이할 겸 1주일간이나 축제가 성대하게 벌어지지요. 그래서 지금 근처에 있는 상인들이 거기서 한 몫 잡기 위해 이렇게 몰려가는게 아닙니까? 뭐, 덕분에 겨울에 이렇게 손님들이 많아서 저희야 좋지요." "엠브로스 영지라..." 외할머니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그 곳은 내 외할아버지 가문이었다. 뭐, 그럼 내 가문도 되는 걸까나? 어차피 내 아버지는 인간도 아니니 아버지네 가문을 따라갈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거기다가 내 품속에는 엠브로스 백작 가문의 후계자 반지가 곱게 품어져 있고 말이다. '으으음... 되게 신경 쓰이네... 뭐, 외할아버지도 진즉에 돌아가셨고, 친엄마도 돌아가셨지만... 아, 맞아. 엄마 초상화가 거기 있다고 들은 거 같은데? 아아... 가보고 싶다. 지금 누가 백작인지 한번 얼굴도 보고 싶고.... 으음... 한번 보러 갈까? 어차피 그 가문으로 들어가려는 게 아니라 몰래 한번 보고 그냥 올 건데 괜찮지 않나?' "가보고 싶어?" "헉." 혼자 고민 고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들려온 질문이 내 정곡을 찔렀기에 나는 놀라버렸다. 그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일행이 나를 빤~ 히 바라보고 있는 거였다. "뭐, 뭐야요? 왜 날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데요?" 당황한 내가 일행들을 둘러보며 묻자 버지니아가 다시 생글 생글 웃으며 물었다. "가보고 싶냐고." "어, 어딜요?" "어디긴 어디야, 엠브로스 영지 말이지." "아... 으음.. 그, 그게...."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고, 또 가고 싶다고 하면 그 이유를 어떻게 대야 할지 고민스러웠기에 딱 부러지게 대답도 못하고 끙끙대자 버지니아가 배시시 웃으며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 거였다. "아유~ 귀여워라." "허걱... 버, 버지니아?"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내가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자 버지니아는 여전히 생글 생글 웃으며 마치 날 귀여운 동생 바라보듯 보고 있었다. "역시 아직 어리다니까. 그런 축제에 가고 싶어서 안달이나 하고 말야." 피시 웃으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건 잭슨이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왠 축제?' 황당해서 잭슨을 바라보며 묻자 잭슨이 아니라 비토가 대꾸하는 거 아닌가? "엠브로스 영지에서 축제가 있다니까 꽤 가고 싶어하는 얼굴로 고민했잖아요." "아직 어리다는 증거야." 잭슨의 장난기 어린 어조에 나는 발끈했다. "뭐야, 어린 애들만 축제 좋아하라는 법 있어? 축제는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좋아하잖아." "거기서 나는 빼도. 그런데 가면 날 가만두지 못하는 여자들 때문에 피곤해서... 아아, 잘생긴 것도 죄라니까." 잭슨이 잘난체 하는 표정으로 말을 해서 한 마디 쏘아주려고 했더니만, 의외로 버지니아도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아아...동감이야. 그런데 가면 날파리 녀석들이 너무 많아서..." '허걱...' 그녀의 말에 경악을 하느라 아무 말도 못하는데 버지니아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흐음... 그러고보니 해인이도 인기가 많을 거 같은데 의외로 축제를 좋아하네?" 그러자 나보다도 먼저 잭슨이 대답했다. "그게 저 녀석이 아직 어리다는 증거라니까요." '저 녀석이...' 내가 잭슨을 째려보는데 버지니아의 말이 들려왔다. "으음... 하지만 미안하게도 우리는 그쪽으로 안 갈거야. 그러니 축제는 못 보겠는걸?" "아... 예." 물론 그건 알고 있었다. 설사 우리가 가는 방향에 엠브로스 영지가 있다 해도 한창 축제 준비로 인하여 복잡할 그 곳을 피해가면 피해갔지 들려서 갈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고 싶어. 아, 물론 축제가 보고 싶다는 게 아니라... 엠브로스 백작이란 사람도 보고 싶고... 그 백작 저택의 서재에 있다는 엄마 초상화도 보고 싶어. 그 초상화가 아직도 걸려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아, 그리고 외할아버지 초상화도 보고 싶어. 그러고보니 조엘네 가문에도 대대로 가주와 그 부인 초상화가 그려져 걸린 곳이 있었지? 엠브로스 가문도 백작가라고 했으니 있을거 같은데... 보고싶다... 보고싶다...' 저녁 식사 시간 내내 그에 대한 생각으로 끙끙 거리느라 뭔 대화가 오고 갔는지 - 사실은 일행이 끙끙 거리는 날 구경하느라 대화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 뭘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저녁을 다 먹었을때 결론을 내린 나는 버지니아를 바라보았다. "버지니아, 할 말이 있는데요." "아아, 가고 싶다고?" 내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미리 선수치는 버지니아의 말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에? 어, 어떻게 그걸..."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야. 식사 시간 내내 끙끙 대는 널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걸?" "아... 내가 그렇게 심각하게 끙끙 댔나요?" 그녀의 말에 내가 머쓱하게 웃어보이자 버지니아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가고 싶어?" "아, 예." "흐응... 네가 그렇게 축제를 좋아할 줄은 몰랐네. 그렇게 가고 싶어서 안달이라니..." "아하하하... 그게 뭐..." '축제를 보러 가는 게 아닌데... 뭐, 어쨌든.' "죄송해요. 금방 갔다 오면 안될까요? 제 능력이라면 일행을 따라잡는데 크게 무리는 없을테니까... 며칠만 빠질게요." "혼자 갔다 오게?" "예? 아, 그럴려고 했는데요?" '백작가에 몰래 숨어들어갈텐데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날 혼자 보낼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무슨 소리야? 어린 애 혼자 어떻게 보내?" "저는 해인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잭슨과 듀비가 이렇게 나서는 걸 보니 말이다. 문제는 하나도 안 고맙다는 거지만... "아? 나는 괜찮아. 그냥 며칠 갔다올 거니까 그냥 여기 있지 그래?"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길을 잃어버리고 엉엉 울면 어쩌려고? 애는 보호자랑 같이 있어야 하는 거야." "잭슨? 왠지 그 말이 굉장히 열받는데?" "어쨌든." 잭슨이 슬그머니 내 매서운 눈길을 피하며 중얼거리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가 어쨌든이야?" 그 순간에 버지니아가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나는 잭슨에게 달려들어서 한방 먹일 수 있었을 거였다. "아, 잠깐만 해인아... 나 좀 볼래?" "예?" 하지만, 버지니아가 날 만류하며 끼어드는 바람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에 앉아야 했다. "해인아... 사실, 네가 가고 싶다면 나에게 꼭 허락을 맡을 필요는 없어." "예?" 버지니아의 말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나는 당혹스러웠다. "처음부터 네가 지부장에게 받은 부탁은 우리가 엘프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호송에 참여해주는 거였지, 올때도 같이 와달라는 건 아니었잖아? 그러니까 너희들의 임무는 마지막 엘프 마을에 도착하는 걸로 끝난 거지." "에... 그랬나요?" 그녀의 말에 나는 지부장을 대면했을때의 기억을 곰곰히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내 말이 맞아. 뭐, 나야 너희들이 국경까지 같이 가주는게 좋은데다 어차피 가는 길도 같으니 가만 있었지만, 아마 잭슨씨는 알고 있었을 거 같은데요?" 버지니아가 잭슨을 돌아보며 묻자 그가 하하 웃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서둘러 갈 필요성을 못 느껴서 말이죠. 거기다 버지니아씨 말대로 길도 틀린 게 아니잖아요." 이건 내 생각이지만, 녀석은 하늘을 휭 하니 날아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에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 있었을 거다. "그랬나요? 어쨌든, 그런 이유로... 해인이 네가 가고 싶다면 난 막을 수 없으니까 그렇게 애원하지 않아도 된다 이거지. 넌 단지 '저는 여기서 엠브로스 영지로 가겠습니다.' 하고 가면 되는 거야. 이후에 우리 일행에 다시 합류해도 좋고, 아니면 네가 알아서 본부로 돌아가도 상관은 없고 말야." "으음... 그런가요?" 내 말에 버지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야. 그럼, 이제 어쩔 거니? 역시 엠브로스 영지로 갈 거니?" "예. 저는 그렇게 할 생각이예요. 음... 그리고 일행에 다시 합류하지 않아도 된다면 거기서 곧바로 본부로 돌아가고 싶은데요?" 버지니아와 같이 가는 건 나쁘지 않았지만, 단지 이 추위에 아직도 서툰 승마술을 가지고 말을 타고 가야 하는게 무지 싫었을 뿐이다. 슈리엘을 타고 가면 그런 불편 없이 편안하게 갈 수 있으니 말이다. "엑... 다시 합류 안 할거냐?" 그러나 잭슨은 슈리엘을 타고 가는게 질색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곧바로 지부로 돌아간다니 난색을 표하는 걸 보니 말이다. "그럴 생각이야. 그러니까 너는 그냥 여기에서 같이 가지 그래? 꼭 같이 갈 필요 있어?" '나도 혼자 가는게 좋고 말야.' 내 말에 잭슨은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듀비는 여전히 단호했다. "저는 그냥 해인님과 같이 가겠습니다." '윽....' "아하하하... 그냥 저 혼자 가도 괜찮은데... 으음... 돌아갈 때 괜찮겠어요?" 듀비 또한 잭슨처럼 날아가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근근히 그걸 들먹이며 여길 남길 바랬지만 듀비는 꿎꿎했다. "괜찮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 그래요? 그럼 뭐, 같이 가도록 하죠." '백작가 저택에 숨어 들어갈때는 재워 놓고 가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나는 여전히 고심하고 있는 잭슨을 돌아보았다. "넌 여기 남을거지? 그럼 나 하고 듀비하고만 간다?" 그러자 잭슨이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쳇, 하는 수 없지... 나도 간다." "엥? 넌 또 왜?" "본부에서 온 일행 중에 나만 떨어질 수 없잖아. 올때도 같이 왔으니 갈때도 같이 가야지. 같이 갈래." '헉... 하는 수 없지. 둘 다 재우고 갈 수밖에...' 다음 날 버지니아는 일행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본부에서 지원 온 우리들이 여기서 헤어진다고 선언했다. 나는 지부에서 당한 일들 때문에 이번 운송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그건 순전히 버지니아 때문이라 나머지 사람들과는 거의 이야기도 안 해서 친분을 쌓지 않았건만, 놀랍게도 그 와중에도 쬐끔은 정이 들었었는지 지부 사람들이 조금 서운한 표정을 짓는 거였다. " 헤에... 정말 의외네? 저 사람들이 작별 인사를 할 줄이야... 나는 우리가 가던 말던 아무런 관심도 없을 줄 알았는데..." 내가 멀어져가는 지부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놀랍다는 어조로 중얼거리자 잭슨이 피식 웃었다. " 에이... 아무리 그래도 몇 달 동안 같이 움직였는데 있는 듯 없는 듯 무관심 할 수 있겠냐? 게다가 지부 사람들이라고 모두 나쁜 녀석들만 있는 건 아니니까." " 거야 그렇긴 하겠지만... 직접적으로 느낀 적이 없어서 말야. 그래서 되게 신기해." " 아하하.. 그렇다고 신기할 것까지야... 아, 춥다. 우리도 여기 서 있지 말고 어서 이 말들이나 처분하고 출발 하자." 우리는 날아갈 거기 때문에 - 사실 듀비나 잭슨이 몸서리쳐 하긴 하지만, 그것만큼 편하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는가? - 말이 필요 없었다. 그래 말들을 버지니아 측에 넘기려고 했는데, 버지니아가 그건 우리 거라며 받지를 않는 거였다. 우리가 필요 없으면 차라리 팔아서 그 돈을 가지라나? 그리하여 우리는 출발하기 전에 말을 처분해야 했다. 다행이 그 성이 작은 곳이 아니라서 마시장이 있었고, 거래를 잘 하는 잭슨이 있었기에 잭슨과 말 상인의 열띤 격론 끝에 우리는 거의 말을 샀을 때의 가격에 가까운 - 나는 몰랐지만, 잭슨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 " 자, 그럼 출발할까?" 말 가격까지 괜찮게 받자 기분이 좋아지는 나는 그대로 출발하려고 했지만, 잭슨이 날 말렸다. "기다려봐. 우리는 출발 준비가 전혀 안 되었잖아. 우선 노숙하게 될지 모르니까 식료품 챙기고 비상 약초 챙기고, 그리고 너 엠브로스 영지가 어느 쪽인 줄은 알아?" 그의 말에 나는 머쓱하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 아... 그 생각은 못하고 있었군." 엠브로스 영지에 간다는 생각에 들떠가지고 미처 그런 건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 내 그럴 줄 알았지. 거봐, 내가 같이 안 갔으면 어쩔 뻔 했어?" " 그래, 그래. 같이 가줘서 무지 고맙다." 지도를 구하려고 했지만, 지도를 파는 가게가 있을 정도로 큰 곳이 아니라 그냥 방향을 아는 것에 만족하고 나머지 비품도 대충 구한 뒤 우리는 곧 출발했다. 그때는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시각이었지만, 바로 옆 영지이니 슈리엘을 타고 가면 저녁 전에는 도착할 수 이을 거였다. 물론, 잭슨과 듀비는 자면서 가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참으로 허망하게도 옆 영지라고 해서 나는 쉽게 찾을 줄 알았건만... " 예? 여기가 아니에요?" " 아니라니까. 잘못 왔어. 엠브로스 영지는 바로 저쪽으로 쭈욱 가야 있는 걸?" " 헉스..." 친절한 가게 주인이 가르쳐준 방향으로 날아온다고 온 건데 제일 먼저 보이는 커다란 성에 내려서 물어보니 아니라는 거였다. 그래 그 곳 성 문지기 병사가 가르쳐준 방향으로 날아갔는데, 또 방향이 어긋나버렸다. " 이런, 잘못 왔구만? 바로 옆 영지인데..." " 아이고..." 잭슨과 듀비를 재워 놔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이 일 가지고 두고두고 놀림 당했을 거였다. 그래 나는 정말 두 번의 착오 끝에 - 나중에 안 거지만 자꾸만 방향이 어긋나서 엠브로스 영지를 가운데 두고 그 주위 영지를 뺑뺑 돈 거였다. - 드디어 엠브로스 영지에 제대로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이도 슈리엘의 속도가 무척 빨라 저녁시간쯤에 엠브로스 영지에 도착할 수 있어서 듀비와 잭슨은 내가 두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걸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 저기, 여기 엠브로스 영지 맞죠?" " 맞아. 여기가 엠브로스 영지야." 귀찮은 듯 내던지는 성문을 지키는 병사의 대답이었지만, 나는 무지 고마웠다. " 아, 그렇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축제를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추운 겨울날인데도 불구하고 거리에는 인파가 많았고 분위기도 한껏 들떠 있었다. 거기에다 이 성의 성주이자, 이 영지의 영주인 엠브로스 백작의 생일에 초대받아 가는 듯한 화려한 마차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보였다. " 우선 여관부터 잡아야지? 저녁도 먹어야 하잖아."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 내 딴에는 지리를 파악하는 거였지만... - 구경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있자 잭슨이 날 잡아 이끌며 말했다. " 이왕 온 거 네가 원하는 만큼 며칠동안 머물러줄 테니, 오늘은 그만 하구 내일부터 실컷 구경해." " 아... 그래..." 구경하려고 온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보러 - 친엄마랑 외할아버지 초상화와, 현 엠브로스 백작 얼굴을 - 온 건 사실이었기에 나는 부정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축제를 보러 여러 지방에서 모여들었는지 여관은 대부분 방이 차있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방을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를 정도는 아닌데다, 우리 일행 수가 많은 것도 아니라서 몇 개의 여관을 돌아다니자 괜찮은 수준의 방을 구할 수 있었다. 그것도 1인실로 3개를 말이다. 셋이서 한 방을 썼다면, 나중에 백작성에 몰래 숨어들어갈 때 그 둘을 언제 재울지 걱정했겠지만, 각방을 쓰게 되어 그럴 염려가 없어서 - 잔다고 하고 들어가 문을 잠그면 될 테니 말이다. - 더 좋았다. 그렇게 여관을 잡고 저녁까지 먹고 나자 나는 곧바로 나가서 성 주위라도 살펴보려고 했다. 당당하게 들어가는 것이 아닌 이상 사전 조사는 필수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런 날 잭슨이 막아서는 거였다. " 쯧쯧, 뭐가 그리 급하다고 오자마자 가냐? 너 우리를 데리고 오느라 피곤했을 테니 오늘은 이만 쉬도록 해. 네가 원하는 만큼 여기에 머물러준다니까." " 별로 안 피곤해. 그리고 잠깐만 둘러보고 올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 글쎄, 잠깐이고 오래고 오늘은 그만 쉬라니까." ' 우쒸... 이 녀석을 왜 데리고 왔을까? 그냥 버리고 올걸...' 생각 같아서는 마법으로 재우고 가고 싶었지만, 오늘 오는 내내 수면 마법으로 재운 채 데리고 왔기 때문에 다시 걸릴지도 의문이고, 또 그러기도 미안했다. 수면 마법으로 강제로 재우고 나면 그 뒤에 잠이 안 와서 고생하기 때문이다. 너무 자주 걸면 불면증에 걸릴지도 모르고 말이다. " 너는 오는 내내 자면서 왔으니 피곤할것두 없잖아. 그런데 벌써 또 자려구?" 나의 뚱한 질문에 잭슨이 피식 웃었다. " 내가 곰도 아닌데 하루 종일 잘 수는 없지. 그래서 네가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나가서 지리를 익혀둘 생각이야. 그래야 내일 널 데리고 다니지." " 켁... 내일 같이 나가려구?" 내 목적이 단순한 구경이 아닌 이상, 내 목적을 알지 못하는 다른 이와 같이 다녀야 하는 것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래 싫은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지만, 잭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 당연하지. 내가 비록 사람 많은 곳이 싫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널 혼자 다니게 하겠어?" 너무나 당당하게 대답하는 잭슨의 태도에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지만, 한 가지 결심은 확고하게 할 수 있었다. ' 그래, 네 녀석이 불면증에 걸리던 말던 넌 기필코 재워두고 나가겠어.' 하지만, 지금은 계속 잭슨과 실랑이를 하기도 귀찮고, 또 그의 말도 맞았기에 충고를 받아들여 순순히 올라갔다. ?그래 뭐... 여기까지 왔으니 급할 건 없겠지. 천천히 하자고, 천천히...? 듀비는 몸을 풀겠다고 여관 뒤뜰로 나갔고, 잭슨은 정말 지리를 익히려는 건지, 아니면 그 핑계로 - 뭐, 스스로는 축제를 안 좋아한다고 하기는 했지만... - 밖으로 나가더니만 밤이 늦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그 다음 날 아침, 늦게 들어와 - 주인 말에 의하면 동틀 녘에 들어왔다고 한다. - 잠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잭슨 녀석을 반 강제로 끌고 내려와 아침을 먹이고 나니 내가 재울 필요도 없이 잭슨이 다시 숙소로 잔다고 기어 올라갔다. 그래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듀비가 걸렸다. 처음에는 그도 그냥 재워놓고 갈까 했지만,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그에게 그러기도 미안하고, 또 그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그에게는 사실대로 이야기 하고 협조를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미처 말하기도 전에 듀비가 자신은 그냥 여관에 남아 있겠다고 하는 거였다. 그가 먼저 뭘 하겠다고 스스로 말한 적이 별로 없어 좀 놀랍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미안했다. 그가 원래 돌아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기도 했지만, 왠지 어제 내가 혼자 가길 원한다는 기색을 내비쳐서 그 때문에 남겠다고 한 듯싶었던 것이다. 이런 내 심정을 눈치 채고 내 미안함을 덜어주기 위함인지, 아니면 정말 필요로 해서 그런 건지 그는 방에 남아서 오랜만에 홀로 수련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 좁은 방에서 뭘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블루 엘프족 수련법에도 명상이라는 게 있으려나?' 듀비에게 좀 미안하긴 했지만, 그의 호의가 필요했던 나는 정말 고마워하면서 그의 호위를 받아들여 혼자 밖으로 나갔다. 성을 찾아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성이 일반 주택가보다 지대가 높은 곳에 있어서 복잡한 거리 어디에서나 성의 뾰족한 지붕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주택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가 주변에는 허허 벌판이라 누군가가 다가가면 성 망루에서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환경이라 성을 살펴보기 위하여 인적 없는 곳에서 하늘로 떠올라 높은 허공에서 살펴 볼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성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인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성을 감싸고 있던 내 성벽 주위가 벌판인데다 안쪽에 또 엄청나게 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안에 승마 코스로 보이는 작은 숲까지 있었으니 그 넓이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봐도 멋진데 그 숲과 벌판이 푸르르게 물들어 있었으면 더더욱 멋질 게 틀림없었다. 그 숲의 옆쪽에 성이 서 있었는데 위에서 보면 마치 U 형태로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닫혀 진 쪽이 뒤 쪽이고 열려진 쪽이 앞쪽인지 열려진 곳으로부터 내성의 성문까지 넓은 길이 쭈욱 뻗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U자 모양의 가장 안쪽에 고풍스럽고 커란 입구가 있는게 보였다. 건물로 삼면이 쌓인 넓은 성의 앞마당은 가운데에 앞발을 번쩍 치켜들고 있는 말 위에 멋진 갑옷을 입고 망토를 휘날리며 검을 빼어 하늘을 향하고 있는 기사의 모습을 한 석상이 올려진 거대한 분수가 있었다. 지금은 겨울이라 물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 분수 주위를 무릎 키의 잘 다듬어진 관목들과 화단이 둘러쌓고 있었다. 그 곳 또한 겨울이라 아무것도 없었지만, 아마 봄이 되면 멋진 모습을 연출하리라. 성은 가운데에 하나 그리고 그 양옆에 두개 끝에 두개, 이렇게 다섯 개의 커다란 건물들 사이에 그보다 작은 건물들이 끼어 커다란 건물들을 주르륵 잇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원래 하얀색인데 약간 빛이 바래 베이지색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처음 지어졌을 당시의 위용과 우아함을 여전히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 헤에... 엄마가 바로 여기서 사셨단 말야? 그런데... 척 보기에도 엄청 넓은 이 곳에서 백작의 개인 서재를 어떻게 찾지? 매일 밤 들어가서 뒤져야 할라나?' 하지만, 너무 거대한 구조물이라 무작정 들어가서 찾아다니는 건 엄두도 안 났다. ' 아아... 이래서 정보의 중요성이 절실하다니까... 참내, 성 안의 도면을 알 수 있는 방법 없나? 어휴, 이럴 때 안을 투시할 수 있는 마법이라도 알고 있었으면... 아, 그렇군. 정령들이 있었지?' 혼자 고민 고민 하던 나는 정령들에게 생각이 미치자 손바닥을 따악 쳤다. 그리고는 곧바로 바람의 최상급 정령인 실레스틴을 불러 부탁했다. [ 잘 좀 부탁해. 저 성 안에서 초상화들이 쭈우욱 걸려 있는 회랑하고, 서재가 어디 있는지 좀 알아봐줘.] 실레스틴은 재미있는 게 아닌 시시한 부탁을 한다고 입을 삐죽이기는 했지만 순순히 성 쪽으로 날아갔다. ' 자아... 그럼 실레스틴이 오는 대로 오늘 밤 당장 가봐야지.' 정령왕의딸 7권 제 27화 예상치 못한 만남, 예상치 못한 사건 나는 실레스틴이 오면 쉽게 들어가서 내 볼일을 보고 나올 수 있으리라 여겼다. 아무리 정령사라도 실레스틴이 마음만 먹으면 그녀의 기척을 쉽게 숨길 수 있을테니 그녀가 저 성 안에서 서재의 위치를 찾아 오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였다. 하지만, 한참 뒤에 그녀가 돌아왔으때 나는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커다란 성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면서 미처 예상하지 못한 내 어리석음때문이었긴 하지만... [서재로 보이는 방이 정확히 23개던데요?] [아, 그, 그래?] 조금만 생각해보면 서재가 그쯤 되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수도에 있던 조엘네 커다란 저택만 해도 그랬다. 조엘네 아버지인 공작 서재는 물론이거니와 조엘 개인 서재에 그 여동생에게도 공부방 비스무리한 작은 개인 서재가 있었다. 거기에 집사에게도 개인 서재가 있었고, 기사단장에게도 개인 서재가 딸려 있었다. 뭐, 서재라고 해봐야 거의 사무실 용도로 쓰이고 정작 수많은 책들을 보관하는 도서관은 따로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서도 백작과 그의 직계 자손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을 다스리는 지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 서재를 가지고 있을 거였다. 아니면, 예전에 어떤 사람들이 사용했다가 비워놓은 곳이거나... 그래서 나는 다시 실레스틴에게 부탁해했다. [저기... 미안하지만, 다시좀 가줄래? 이번에는 지금도 쓰고 있는 서재이며, 그 서재에 커다란 여자 초상화가 걸려 있는 곳이면 돼.] 생각 같아서는 백작 개인 서재를 찾아달라고 하고 싶지만, 내가 불러낼때까지는 정령계에서만 살던 실레스틴이라 아직 인간 사회에 대해 잘 모르기때문에 백작이 뭔지 잘 모르고 있었다. 만약 내가 그 백작이란 사람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면 부탁하기가 쉬웠겠지만 말이다. 내가 다시 성으로 그녀를 보내자 실레스틴은 무지 불만에 찬 표정을 해보이더니 다시 성으로 날아 들어갔다. 실레스틴이 내 두번째 주문에 맞는 서재들을 찾아 돌아왔을때에는 점심 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아아, 어차피 성에 숨어 들어가는 건 한밤중이니까... 지금은 우선 밥부터 먹어야겠어. 배가 무지 고프거든.] 내 말에 실레스틴이 다시 한번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이 서재에 대해 알아오자마자 들어갈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녀가 내 부탁에 불만 어린 표정을 지어 보여서 잠시 후에 성에 몰래 잠입해 들어갈 때 내 호위를 그녀에게 맡기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호위할때 그녀는 정령이 아닌 실체를 가진 인간처럼 행동하게 해주겠다고도 해서 그녀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몇시간 뒤로 미뤄졌으니 실레스틴이 불만스러운 것도 당연했다. [에이, 그런 표정 짓지 마. 어차피 성으로 들어가는 건 한밤중에 할 거였다고. 게다가 들어갈 때 내가 배가고픈 상태라면 곤란하잖아.] 그래서 실레스틴을 그렇게 달래놓고 다시 마을로 돌아간 나는 오늘 밤 백작의 성에 잠입해 들어 가리라고 결심했다. 하지만, 잡입 결행일은 또 하루 미뤄지고 말았다. 식사를 하러 우리가 방을 잡은 여관에 갔다가 잭슨 녀석에게 붙잡혔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아무데나 가서 배를 채우고 돌아다니며 시간을 때우려고 했는데, 축제 분위기가 고조 되었기 때문인지 너무 거리가 복작복작 해서 어디가 어딘지 몰라 헤매다가 짜증이 나서 그냥 여관으로 돌아 왔던 것이었다. 하기야, 아무데나 음식 파는 곳으로 갔다가 맛없는데 걸려서 돈 버리고 입맛 버리면 어쩌는가? 그냥 잘 아는 안전한 곳으로 가는게 났지 싶어 갔다가 식당에 있던 잭슨과 마주쳐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하필 그때 이 녀석이 식당에 있을 건 뭐람. 점심 시간이 지나도 한참이나 지나 있었는데...' 그리하여 나는 그 다음 날에야 잭슨과 듀비를 재워두고 몰래 성에 잠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그 날이 백작의 생일이라 성에서는 거대한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흐음... 이걸 좋아해야 할지... 어쨌든 복작복작해서 경계가 삼엄하지는 않겠군. 그럼 그냥 가볼까?' 나는 하늘이 어두워져감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불을 밝히고 시끌시끌한 성을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아래로 내려갔다. 원래는 조용히 숨어 들어갈 장소를 찾아 내려고 어둑어둑해질 즈음 미리 성 위로 날아와서 살펴 보다가 성의 불이 다 꺼진 한밤중에 몰래 숨어들어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파티가 열린다면 아마 새벽까지 저렇게 환하게 밝혀 있을테니 저녁이나 한밤중이나 그게 그거일거 같아서 기다리지 않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때를 기다려야 하는 일도 아니니 말이다. 나를 태워주고 있던 슈리엘이 인적이 없어보이는 3층의 어떤 커다란 창문 앞에 나를 내려줬다. 비록 창문이 잠겨 있었지만, 정령들이 내 곁에 붙어 있는 한 나에게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해인님, 눈 앞에 보이는 인간들은 모조리 쓰러뜨리면 되는 거죠?] 소리나지 않게 조용히 방 안으로 내려서자 미리부터 내 옆에 형상을 드러낸 실레스틴이 흥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냐, 아냐, 내가 부탁할때만 나서서 쓰러뜨리면 돼. 아, 그리고 명심해야 할 건 절대로 죽이면 안된다는 거야.] [에이, 보는 족족 모조리 쓰러뜨리는게 아니었어요?] 실망한 표정의 실레스틴을 보며 나는 땀을 삐질 흘렸다. [나는 이 성을 접수하기 위해 온 게 아니거덩. 그러니까 내가 부탁할때까지는 절대 나서서두 안돼고, 사람들에게 들켜서도 안돼, 알았지?] [네에~] 불만 어린 대답이었지만, 그녀의 대답을 들은 나는 안심하고 빈 방을 가로질러 커다란 방 문에 귀를 대 밖에 누가 있어 소리를 내는지 들으려고 하는데 실레스틴이 흥미 어린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지금 뭐하세요?] [뭐 하긴, 밖에 누가 있나 없나 알아보려는 거지.] [에, 그런건 제가 할게요.] 내 말에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실레스틴이 문틈에 얼굴을 가져다 대자 그녀의 얼굴이 마치 문을 그대로 통과한 듯 쑥 밖으로 나가는 거였다. '헉... 유령 같다...' 내가 그 장면을 보고 경악하고 있는 순간 문 밖으로 나갔던 실레스틴의 머리가 다시 안으로 들어오더니 생긋 웃는 거였다. [아무도 없네요.] [아, 그, 그래? 그럼 가자. 여기서 가장 가까운 서재가 어디 있지?] [음... 이 윗층에도 한 군데 있습니다.] [그래? 그럼 우선 그쪽으로 가보지.] 우리가 몰래 들어온 건물은 성을 정면에서 바라봤을때 오른쪽에 있는 두 커다란 건물 중 끝에 있는 곳이었다. 그래 여기에 과연 백작의 서재가 있을까 싶었지만, 하나 하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이.. 복도 끝에 있으려나?] 몰래 숨어 들어오기는 했지만, 복도에 아무도 없었고, 옆에 든든한 실레스틴까지 있자 나는 간덩이가 부었는지 몰래 숨어 살금살금 가는 대신 당당하게 실레스틴을 대동하고 계단을 찾아 걸어갔다. 그런데 너무 긴장을 풀고 있었던 모양이다. 막 복도 끝에 다다랐을 즈음, 복도 끝에 있던 계단을 올라오는 시녀의 기척을 눈치 채지 못했으니 말이다. 조금 긴장하고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면, 아무리 복도와 계단에 두툼한 양탄자가 깔려 있는 바람에 시녀의 발걸음 소리를 못 들었다고 해도 기척은 느낄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허걱...' 나는 무지 놀라 멈칫 거렸지만, 실레스틴은 뭐가 뭔지 모르니 태연하게 그 시녀가 올라오는 계단 쪽으로 다가가는 거였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시녀는 계단을 올라오는 중이라 앞만 바라보고 있다가 옆에서 실레스틴이 다가오자 그제야 그녀를 알아차리고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실레스틴이 지나가도록 비켜서는 거였다. 아마도 실레스틴의 옷차림이 화려해서 성으로 초대 된 손님 중 하나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실레스틴이 지금 바람의 창은 숨기고 있지만 옷차림만은 귀족 영애들이 입는 드레스 못지 않게 우아하고 아름다운 초록색의 드레스 였던 것이다. 시녀의 행동에서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나는 멈칫했던 발걸음을 다시 떼고 얼굴에서도 당황한 기색을 지운 채 그 시녀에게 다가갔다. 실레스틴을 초대 된 손님 중 하나라고 오해했다면, 그걸 이용해먹을 생각이었다. "저기, 백작님의 서재가 어디지? 거기로 레이디를 모시고 오라는 명을 받았는데..." 나는 실레스틴이 어느 귀족가의 영애라는 걸 은근히 강조하면서 묻자 시녀는 아직 경험이 많지 않았는지 날 똑바로 바라 보지도 못하고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네, 네. 백작님의 서재는 본관 2층에 있습니다." "그래? 고마워." 나는 그녀가 보지도 않았지만 생긋 웃으며 위쪽으로 올라가려는 실레스틴을 이끌고 아래로 내려갔다. 하지만, 순간 나는 멈칫 거릴 수 밖에 없었다. [에... 본관이 어디야?] 분명 이 성을 이루고 있는 커다란 다섯 건물 중 하나인건 분명한데, 그 중 어디인지 내가 알 리가 없었다. 다시 그 시녀를 붙들고 본관이 어디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눈치 챌까봐 물어볼 수도 없고... '끄응... 어쩌지?' 실레스틴과 계단을 내려가던 나는 곧 이어 또 다시 계단을 올라오던 다른 시녀를 보고는 고민을 맺을 수 있었다. '질문을 달리 하면 되잖아?' "이봐요, 본관을 어떻게 가죠? 아직 여기가 익숙하지가 않아서..." 아까 그 시녀가 실레스틴을 귀족 영애로 오해한 걸 보고 난 뒤 나는 아예 그렇게 밀어붙이기로 했다. 뭐, 귀족 영애가 시녀가 아닌 시종을 데리고 있는게 어쩌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거야 귀족 영애 맘 아니겠는가? 내 질문을 받은 시녀 또한 실레스틴을 귀족가 영애인줄 알고 감히 바라 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가르쳐줬다. 이 성은 위에서 보면 다섯 건물이 통째로 다 이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 그러니까 일층은 돌아가면서 일층대로 쭈우욱 연결 되어 있고, 이층은 이층대로 쭈우욱 연결 되어있는... 그런 식으로 말이다. - 안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각 건물은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큰 건물과 건물을 잇는 통로로 보이는 것도 따로 독립된 건물이었던 것이다. 그래 본관으로 가려면 이 건물을 나가 마당을 가로 질러가야 했다. 심정 같아서는 인적이 없는 곳으로 가서 하늘에서 떠 올라 누구의 눈에 뜨이지도 않게 본관 건물로 향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그것대로 귀찮을것 같아서 - 인적이 없는 곳으로 가서 또 인적 없는 곳으로 골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니... - 될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실레스틴을 앞세워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심정 같아서는 인적이 없는 곳으로 가서 하늘에서 떠 올라 누구의 눈에 뜨이지도 않게 본관 건물로 향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그것대로 귀찮을것 같아서 - 인적이 없는 곳으로 가서 또 인적 없는 곳으로 골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니... - 될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실레스틴을 앞세워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건 정말 잘 선택한 방법이었다는 걸 나는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가 본 건물로 가는 동안 수상하게 보는 사람이 있기는 커녕 친절한 안내까지 받아 가며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모든 호의는 내가 아닌 실레스틴을 향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내가 모자를 깊숙히 눌러 써 머리와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실레스틴의 시종이라고 하면 만사 오케이였다. 본 건물은 양 옆의 건물들을 이어주는 가운데 부분에 있던, 성의 가장 큰 건물이었다. 하기야, 성의 커다란 입구가 그 곳에 있는데다 건물도 성을 이루고 있는 건물 중 가장 컸으니 누구라도 쉽게 눈치 챘을 것이다. 못 알아챈 내가 어리석은 거지. '쩌비... 별로 긴장을 안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네. 이런 단순한 것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얼어 있었다니...' 커다란 본관의 홀에 들어서며 나는 남 모르게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실레스틴에게 속삭였다. [실레스틴, 2층으로 가자.] 오늘 저녁에 열리는 백작의 생일 축하 파티는 1층에 있는 파티장에서 열릴 예정이라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쪽으로 향하고 있어 우리만 2층으로 올라가는게 의아하게 여겨질 수도 있었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우리는 당당하게 계단을 올라갈 수 있었다. 그렇게 2층까지 온 건 좋았는데... '도대체 이 많은 방들 중 어디가 백작의 서재인 거야?' 넓고 길다란 복도 위를 걸어가며 나는 난감한 눈으로 쭈우욱 늘어서 있는 고풍스럽고 커다란 나무 문들을 바라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방 문마다 열어서 확인하고 싶었지만, 복도를 바삐 오가는 하녀들이나 시종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지나가는 시녀 아무나 붙들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반년 가까이 공작가에서 시종 노릇을 한 덕에 쌓인 내 경험이 그건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었기에 감히 그러지 못했다. 사실 공작가에서도 내가 아무리 조엘의 시종이라고 하지만, 백작의 서재에는 함부로 드나들 권리가 없었다. 그 곳은 백작의 직계 가족과 백작의 신임을 받는 몇몇 부하들만이 드나드는 것이 가능했다. 청소 조차도 해럴드 집사와 시녀장이 특별히 고른 시종과 시녀들이 담당했고, 다른 시녀나 시종이 들어갔다간 큰 벌을 받았다. 그런건 백작 가족들이 사용하는 침실이나 개인 서재도 마찬가지였다. 뭐, 나야 조엘이 이상하게 신임을 해서 그의 방을 담당할 수 있었던 거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내가 어떤 사정에 의하여 - 예를 든다면 해럴드 집사나 조엘의 심부름으로 - 백작의 서재에 간다고 해도 그때는 항상 서재에 백작과 그의 심복들이 있을 시간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해럴드 집사, 혹은 대니 형과 항상 동행한 상황에서였다. 거기다가 그런 중요한 곳이 있는 구역은 그 집안에서 오랜 세월 일을 해온 베타랑 시종이나 시녀가 담당하고 있었기에 지금이 아무리 바쁜 시기라고 해도 어딘가에 담당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곳에서 백작 서재의 위치를 묻는 다는 건 '나 수상한 사람이요'라고 광고하는 거나 다를 바 없는 행위였다. 물론, 여기서 멀찍이 떨어진 별관이라면 아직 경험이 별로 없는 초짜 시녀나 시종들이 담당할 테니 수상하게 보일 염려 없이 당당하게 물어볼 수 있는 거였지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백작 서재의 위치를 알아내야 하거니와 그 곳에 들어가는 것도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들어가야 했다. 아마, 이 복도를 계속 비워두려 하지는 않을테니 밖의 창쪽으로 들어가야 할테지만 말이다. '그건 그때가서 생각하고 우선은... 백작 서재의 위치를 알아야 하는데...' 내가 투명인간이 아닌 이상 저 많은 눈들 모르게 알아내는 건 불가능 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 존재가 내 곁에 있었으니... '아, 정말... 자꾸 실레스틴의 능력을 잊어버린 단 말이야...' 나는 내 머리의 능력에 다시금 회의를 느끼며 실레스틴을 불렀다. [실레스틴, 이 층에 서재가 어디 있는 줄 알아?] 그러자 실레스틴의 뚱~ 한 대꾸가 들려왔다. [다음 다음 방문이요. 지금 제 안내로 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나는 그녀의 뚱한 반응보다는 그녀의 말에 놀라서 물었다. [뭐? 아니 너는 서재가 어디 있는 줄 알고 있었단 말이야?] 그러자 실레스틴의 기가 막히다는 투의 대꾸가 돌아왔다. [이 성에 들어오기 전에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 있는 서재들의 위치를 알아내라고 하신 건 해인님이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알고 있죠.] [아앗~ 맞다. 그랬었지?] '아아~ 내가 오늘 왜 이럴까?' 지금 옆에 잭슨 녀석이 없다는 걸 극히 다행으로 여기며 나는 다시금 속으로 한 숨을 내쉬었다. 실레스틴과 나는 2층 복도를 당당하게 지나 3층으로 올라갔다. 밖으로 나가기는 나가더라도 우선은 시선이 없는 곳으로 가야 했으니 말이다. 다행이 3층 복도는 2층과는 달리 돌아다니는 시녀들이 없이 조용했다. 뭐, 가끔 시녀들이 왔다갔다 했지만, 우리가 아래층 서재와 가깝고 비어있는 방을 찾았을 즈음에는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좋아, 들어가자.] 그 다음 서재로 다시 몰래 들어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지 서재가 2층이라 지상에서 가까운 곳이었기에 다른 사람들 눈에 쉽게 뜨일까봐 걱정을 했지만, 그것도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실레스틴이 흙먼지를 동반한 바람을 불게 했기 때문이었다. 추운 겨울날 차가운 바람이 불어도 사람들은 저절로 몸을 움츠러뜨리기 마련인데, 거기에다 흙먼지까지 동반 되었으니 그것들이 눈에 들어가지 안도록 자연스레 눈을 감거나 찌푸리는게 당연했다. 그렇게 흙먼지 때문에 시선들이 흐트러진 사이 나는 다시 실레스틴의 도움을 받아 잠긴 서재의 창문을 쉽사리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쯤에는 갑작스런 흙먼지 바람은 그쳤고 말이다. 아무도 없는 서재는 불 조차 모두 꺼놨기에 어두컴컴했지만 - 물론 서재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했지만 말이다 - 실레스틴과 내가 주위를 보는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나는 서재 안으로 들어와서 깊숙히 눌러 쓴 모자를 벗고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재는 꽤나 넓었다. 레이언 녀석의 사무실의 두배 정도? 커다란 커튼에는 얇은 레이스 커튼과 두꺼운 빌로드 커튼들이 이중으로 쳐져 있었고, 바닥에는 푹신해 보이는 고급스러운 카펫이 깔려 있었다. 커다란 책상이 창문 앞에 떠억 버티고 있고 그 앞에는 고급스러운 소파 세트, 주변에는 화려한 장식장과 무지 견고해보이는 책장이 있는 것이 전형적인 서재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듯한 커다란 벽난로가 있었고, 그 위에 내가 찾던 것이 있었다. "아~" 내 상반신을 다 가릴 정도의 커다란 초상화에는 대충 17 ~ 18세의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실제로 만지면 무척 부드러울 것 같은 갈색 머리를 늘어뜨린 그 소녀는 당당하고 지적인 빛이 흐르는 제비꽃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실레스틴... 이분이 내 어머니야.]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받은 채 하얗고 고급스러운 의자에 우아한 자태로, 그러나 허리와 어깨를 반듯이 펴 당당함을 잃지 않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 모습에서 내 어머니는 자존심 있고 당찬 여인이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하기야, 저 성질 드러운 엘라임이 폭 빠진 여인이었으니 말이다. 목이 넓게 파인 연한 보라색 실크 드레스를 입어 눈과 하얀 피부가 화사하게 돋보였고, 목과 귀에는 한 세트로 보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귀걸이가 걸려 있었고, 무릎에 가지런히 올려진 엄마의 손에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두 개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외할머니께서 물려주신 마법 반지는 왼손의 검지에, 그리고 외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후계자 반지는 오른손 중지에 끼워져 자신의 존재를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나도 모르게 내 목에 - 후계자 반지는 너무 커서 끈에 꿰어 목에 걸구 있었다 - 걸린 후계자 반지를 만지작 거렸다. '헤에.. 저때에 벌써 가지고 계셨구나.' 어머니는 화려한 다이아 장신구나 우아한 드레스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아름다우셨다. 얼굴은 나와 똑같은데 말이다. 뭐, 그래도 내가 흉내 낼 수 없는 위엄과 우아함을 지니고 계셨지만 말이다. 그 모습을 바로 대하자니 인정하구 싶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핀잔이 새삼 납득이 갔다. 엄마를 쏘옥 빼닮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쩜 그렇게 못생겼냐는... '쳇... 이제는 아버지가 그 말을 해도 아무 말도 못하게 생겼잖아?' 나는 속으로 혀를 차고는 실레스틴을 돌아보았다. [실레스틴, 이제는 초상화가 주르르 걸려 있는 화랑을 찾아줘. 네가 돌아올때까지 나는 여기 있을게.] [그럴게요. 아, 지금 이대로 가도 될까요?] [아앗, 그건 절대 안돼. 미안하지만 모습을 숨기고 가주라.] [에엣... 너무하세요. 저는 오늘 여기와서 한번도 안 싸워 봤다구요오~] [너 혼자 있을때 수상한 행동을 하면 안된다구. 나중에 또 그 모습으로 있게 해줄게.] [그때도 싸울 일이 없으면요?] 그 정도로 실레스틴을 달래서 보내려구 했는데, 얘가 이번에는 쉽게 안 넘어갔다. [아앗... 으음.. 뭐, 그때는 가기 전에 한바탕 하게 해줄 수도 있는데?] 그래 그녀를 달래기 위해 얼결에 내뱉은 말이었는데, 그 말에 실레스틴의 눈이 반짝 거리는 거였다. 그때야 나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버스가 지나간 뒤에 손을 드는 격이었다. [정말이죠? 그럼 약속하신 거에요?] [그, 그래... 아주 잠깐이긴 하지만...] 그래 '아주 잠깐' 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되게 불안했다. '부디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넘어갔으면...' 이런 내 마음과는 반대로 실레스틴은 무지 기쁜 표정을 짓더니 바람으로 화해서 사라졌다. 그녀가 휭 하니 사라지자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어머니의 초상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록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은 달랐지만, 내가 보기에도 어머니의 얼굴은 나와 흡사했다. 매일 거울 속에서 보던 얼굴을 이렇게 초상화속에서 마주보자니 기분이 되게 묘했다. 거기다가 초상화 속은 한번도 보지 못했던 내 어머니고 말이다. '아아... 보고 또봐도 절대 질리지 않을 거 같아. 어쩜 저렇게 예쁘게 생기셨을까? 울 아버지가 반한 것도 이해가 돼.' 어쩌면 화장발일 수도 있지만, 커다랗고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에 오똑한 코, 거기에 고집스럽게 다물린 분홍빛 입술... '아, 그러고보니 귀를 그냥 드러내셨네...' 어머니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은 뾰족한 귀 뒤로 넘어가 있었다. 외할아버지께는 어머니가 하프 엘프라는 것이 꼭꼭 숨길 정도의 비밀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그러니까 백작가랑 의절하고 외할머니랑 결혼해서 사실 수 있었던 거겠지만... '으음... 어머니의 초상화를 여기에 냅두고 가려니 차마 발걸음이 안 떨어질 거 같아. 이거... 훔쳐가면 안될까? 어쩌면 아버지도 무지 좋아하실지도 모르는데... 거기다가.. 내 어머니 초상화 가지구 가는데 그게 잘못된 거라구 볼 수도 없지 않을까?' 처음에는 그냥 딱 한번 보고 가려구 했지만, 한번 보고 나니까 차마 발걸음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 가지고 갈까 말까 하는 고민에 끙끙 거리느라 나는 서재 문이 벌컥 열어질때까지도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벌컥~ ".... 아닙니까?" "허허허, 그렇게 생각... 누구냣?" "허걱..." ================================================================== 공지입니다. 6권이 곧 나온다는 군요. 그리하여 6권 분량을 지워야 합니다. 분량은 26화까지입니다. 다른 곳에 올리시는 분들은 내일 모래까지 지워주세요 ^^ 여기두 목요일날 지우겠습니다. 벌컥~ ".... 아닙니까?" "허허허, 그렇게 생각... 누구냣?" "허걱..." 어두운 방 안이었지만, 허공에 떠 있는 정령들의 몸에서 희미한 빛들이 발산되고 있었기에 사방을 보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정령들의 몸에서 나온 빛은 어디까지나 희미한 빛이었기에 갑자기 열려진 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환한 - 그래봤자 형광등에는 비교할 수 없는 밝기였지만, 어두운데 있던 나에게는 엄청 밝은 빛이었다 - 빛 때문에 갑작스레 적응을 못한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려야 했다. 그때문에 나는 갑작스레 서재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달랐다. 내가 빛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사이 나에게 척척 다가와 내 팔을 붙들었던 것이다. "누구냐니까?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그제야 겨우 빛에 적응한 나는 정신을 차리고 나를 붙들고 호통을 치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대충 쉰 중반 혹은 그 보다 더 나이를 먹어보이는, 중년대 남자였다. 나 보다 반 뼘 정도 큰 키에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고 굵고 빳빳해 보이는 짙은 밤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세월의 힘 때문에 귀 밑에 히끗 히끗한 새치가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어두운 눈은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매섭게 날 노려보고 있었고, 내 팔을 붙든 가느다란 손가락에 들어간 힘도 강했다. 그러나 그렇게 강건해 보이는 중년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놀라움으로 인하여 눈이 치켜 떠지며 당혹한 감정을 드러내는 거였다. "너, 너는..." 그리고 그와 같이 들어왔던 다른 남자 또한 당혹함이 가득 든 감정으로 입을 여는 거였다. "혀, 형님... 혹시..." 그에 그제야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는 날 잡은 남자와 비슷한 연령대인 듯했는데, 혈색 좋은 얼굴에 약간 통통하다 - 절대 뚱뚱한 것이 아님 - 싶은 정도의, 좋게 말하면 풍채 좋은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 이들은 서재에 몰래 침입한 자를 대하는 것 치고는 좀 당혹스러운 면을 보이는 것 같아 나는 내가 무지 안 좋은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도 잠시 잊은 채 멀거니 그들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내 팔뚝을 잡고 있는 중년 남자가 당혹스러운 감정을 가라앉혔는지 침착한, 그러나 무시 못할 날카로운 기색이 담겨 있는 어조로 물었다. "넌 누구지? 주디스 오스번님과 무슨 사이냐?" 어머니의 초상화를 본 다음에야 내가 어머니와 무지 닮았다는 걸 깨닫기는 했지만, 다짜고짜로 어머니와의 관계를 추궁받게 될 줄은 몰랐던 나는 당황해서 눈이 동그래졌다. "어, 어머니신데요..." 나의 더듬거리는 대답에 그 두 중년 남자의 눈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지만, 곧 납득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게도 내가 어머니의 자식이라는 걸 납득했으면 놔주던가, 아니면 여기에 어떻게 들어 온 거냐고 추궁을 할 것이지 그 두 중년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둘이서 나는 이해하지 못할 시선을 주고받더니 사태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듯 하던 풍채 좋은 중년 남자가 달려들어 내 나머지 팔을 한 손으로 틀어쥐더니만 어느새 꺼내들었는지 모를 손바닥 크기의 짤막한 단도를 꺼내 내 목에 들이대는 거였다. "움직이지 말게나. 이게 이렇게 작아 보여도 목에 있는 동맥까지는 충분히 닿는다네." "히익..."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새파란 날을 번쩍이는 단도가 내 목에 차가운 감촉을 선사하고 있는 바람에 나는 감히 움직일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체격 좋은 중년 남자가 그렇게 나를 제압하자 빼빼 마른 중년 남자는 좀 요상한 시선으로 체격 좋은 중년 남자를 쓰윽 바라보더니 날 잡고 있던 손을 놓더니 우선은 활짝 열린 서재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대신 어두컴컴해진 사방을 조금이나마 밝게 하기 위하여 서재의 커다란 창문에 쳐진 커튼들을 활짝 열어 제쳤다. 그러자 밖의 환한 불빛들과 달빛까지 쏟아져 들어와 보통 사람인 그들이라도 그럭저럭 사방을 분간할 수는 있을 수준이 되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형님?" 체격 좋은 중년 남자가 빼빼 마른 중년 남자에게 물었다. 아까도 그렇게 부른 듯 싶었더니만 빼빼 마른 남자가 풍채 좋은 남자의 형님이었던 모양이다. 빼빼 마른 중년 남자는 나를 한번 힐끔 바라보더니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숨겨 둬야지. 축제가 끝나 귀족들이 다 돌아갈때까지 숨기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최소한 오늘이 지날때까지만이라도 숨겨야 해." 그러면서 그는 두터운 커튼 안 쪽의 얇은 레이스 커튼으로 다가가 그걸 쭈욱 찢기 시작했다. "죽여야 하지 않을까요?" 체격 좋은 중년 남자의 말에 나는 기가막혔다. '아니, 내가 뭘 잘못... 아니, 물론 여기 몰래 들어온 게 잘못이긴 하지만.. 그거 가지고 사람 목숨을 없애려 하다니 너무하잖아?' 이런 내 항의어린 시선을 알아챈 것일까? 길게 찢어진 레이스 커튼 조각을 가지고 온 빼빼 마른 중년 남자가 나에게 조금은 미안하다는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하필이면 오늘 여기 나타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며칠 후, 아니 최소한 내일 왔더라면 이렇게까지는 않했을 텐데 말입니다. 운이 없었다고 생각 하십시오." 그러면서 찢어진 커튼 조각으로 우선은 내 입을 막고 손 발을 꽁꽁 묶는 것이었다. 이럴려고 그 예쁜 레이스 커튼을 찢었던 모양이다. 체격 좋은 중년 남자까지 형님을 거들자 나는 금세 꽁꽁 묶여 서재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이 자를 어떻게 처리할까요? 역시 죽여야..." 그런 나를 바라보며 체격 좋은 중년 남자가 입을 열었지만,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빼빼 마른 중년 남자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지금 죽일 수는 없어. 우선은 여기에 숨겨 두자. 어차피 내 서재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으니 쉽게 발견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처리는 내일 생각하자꾸나." 하지만 체격 좋은 중년 남자는 형님의 의견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너무 무르십니다. 우리가 여기에 이대로 이 녀석을 두고 갔다가 이 녀석이 탈출이라도 하면 어쩌시려구요? 철저하게 경비가 세워져 있는 지하 감옥도 아니고, 쇠사슬로 결박한 것도 아니니 얼마든지 탈출이 가능하다고 생각 안 하십니까?" 동생의 주장에 형님의 마음이 흔들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날 없애는 것이 께름직 한지 빼빼 마른 중년 남자는 주저했다. "하지만... 그래도 죽일 것 까지는... 그러다가 시체를 들키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이냐?" "그건 걱정 마십시오. 형님이 말씀하셨듯이 이 곳에 숨겨 두면 누구도 쉽게 찾아내지 못할 겁니다. 설사 시체를 들켰다 해도 백작의 서재에 몰래 침입했다가 들켜서 죽여버렸다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 자의 정체를 아는 건 우리 둘뿐이니 우리만 입다물고 도둑으로 몰면 그만입니다. 설사 알아채는 자가 있다 해도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뭐라 말도 못할테구요." '내 정체가 뭔데?'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입도 봉해진 상태라 나는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어야만 했다. 둘의 대화에서 내 목숨이 왔다갔다 했지만, 정말 죽을까봐 겁나는 건 아니었다. 내가 그 상태가 되자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이 세계로 넘어올 수 있는 나이트급 정령들이 벌써 내 곁으로 와서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고, 심부름 보냈던 실레스틴도 벌써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들 모르게 모습을 숨기고 있을 뿐이지... 이미 실레스틴이 그들 둘을 처리하겠다고 말했지만, 내가 사태를 두고보자고 하며 말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까지는 직접적으로 날 죽이려 하지 않으니 말이다. '거기다가 왜 날 죽이려는지도 궁굼하고...' 뭐, 최상급 정령들에게 부탁해 잡아서 엎어놓고 패면 쉽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들을, 거기다가 몰래 잠입한 장소에서 그랬다가 일이 커지면 또 머리 아파질 수도 있는 일 아니겠는가? 그래서 가만히 사태를 주시하고 있는 거였다. 나중에 정말 죽을 위험에 처한다면 그때 정령들에게 도움을 청할 거였다. 그러는 동안 그 둘의 대화는 계속 되었다. "어떻게 죽이려고? 피를 흘리는 건 절대 안돼. 여기에 숨겨놓을텐데 혹시라도 누가 들어 온다면 쉽게 들킨다고. 아무리 내 서재라고 해도 아무도 안 들어온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니까." 빼빼 마른 중년 남자의 말에 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내 서재? 여기가 자기 서재라면... 저 남자가 백작이었단 말이야? 아니, 자기가 백작인데 왜 날 죽이려고 하는 거지?' 상황을 지켜보면 지켜볼 수록 사태를 이해할 수가 있는게 아니라 더욱 더 복잡해져 가기만 했다. 그런 와중 체격 좋은 남자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 피를 내야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건 아니죠. 익사 시킬 수도 있고, 목을 조를 수도 있고, 질식 시켜서 죽일 수도 있고... 모두 피를 안 흘리고 죽이는 방법 아니겠습니까?" 어째 재미있다는 기색까지 느껴지는 말투였다. 그 남자의 말도 기가 막혔지만, 그 보다는 그런 엽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는 백작의 모습이 더 기가막혔다. "흐음... 여기는 물이 없으니 익사는 불가능 하겠고, 목을 조르는 건 나중에 시체를 들켰을 때 수상하게 여겨질 수 있겠지. 아무래도 질식 시키는게 나을 듯 하군." "옳으신 말씀이시군요. 그럼 질식 시키죠." 사람을 죽이는 말을 그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가막혔지만, 우선은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아, 물론 안 죽을 수 있게 조치는 취해놓고 말이다. [실레스틴, 나 질식 안 하게 해줄 수 있지?] [그거야 해줄 수 있지만, 언제 나서게 해주실 거예요? 저 녀석들을 그냥 냅둘 거예요?] [글쎄... 지금 생각 중.] [헉... 언제까지 생각만 하고 계시려구요?] [아하하... 글쎄...] 내가 그렇게 실레스틴과 투닥 거리는 동안 두 중년 남자는 이미 자신들이 의논한 것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우리는 시간이 없으니 죽을때까지 옆에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 그러니 우선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다 숨겨 놓고 알아서 질식 되게 조치를 취해야 해."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그렇게 쑥덕인 둘은 낑낑 대며 나를 들어 올려 - 내가 그렇게 무거운지 몰랐지만... -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큰 책장과 벽 사이의 어두운 공간에다 나를 집어 넣었다. 그 공간의 위치는 창문쪽가 가까워서 입구라고 볼 수 있는 곳이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런 곳이니 누군가가 서재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내가 아무 소리도 못 내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터였다. "자, 그러면..." 내가 그 어두운 공간에 처박히자 만족스런 표정으로 보고 있던 체격 좋은 중년 남자는 서재 안을 두리번 거리더니 곧 고급스러운 소파로 다가가 그 위에 보기좋게 놓여 있던 두툼한 쿠션들 중 하나를 가져왔다. "이거면 충분히 질식할 겁니다." 그러더니만 쿠션으로 내 코와 입을 틀어막고는 그 위를 남은 레이스 커튼 조각으로 칭칭 감았다. 그려면 그들이 쿠션을 잡고 있지 않아도 충분히 질식 되고도 남을 터였다. 물론, 보통 사람이라면... 나는 실레스틴이 미리 대기하고 있었기에, 너무 꽈악 묶여 머리쪽이 아프다는 것만 빼면은 숨쉬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날 죽게 만들어 놓고 물러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내가 있는 공간을 커튼으로 잘 가려놓기 전에 서재의 문이 조심스레 열리고는 누군가 들어오는 거였다. 비록 나에게는 서재의 문쪽이 안 보였지만, 어두운 공간에 갑자기 빛이 들어왔기에 문이 열린 걸 짐작할 수 있었고, 백작과 그 동생이 물러나는 대신 황급히 내가 구겨져 있는 공간으로 들어와 몸을 숨기기에 누군가가 들어 왔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이 방의 주인이니 떳떳하게 있으면 어두운 방에 있었다 해도 아무런 의심을 안 받았을텐데 그 둘이 하고 있던 짓이 옳지 못하니 반사적으로 몸을 숨긴 듯 했다. "어떤 녀석이 들어온 거지?" "글쎄요... 아, 저 자는 얼마 전에 저희집에서 고용한 기사인데... 여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요." "조용히... 우선은 두고보지." ==================================================================== 6권이 나왔습니다. 늦장 부리다가 책이 나온다음에 지우게 생겼군요. 퍼가시는 분들도 6권 분량 다 지워주세요. 저도 오늘 지우겠습니다. ^^ 두 중년 남자는 내 앞을 가로막은 채 커튼의 틈사이로 서재 내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탁! 저벅, 저벅, 저벅... 문이 닫히는 가벼운 소리가 난 다음 서재로 들어온 남자가 어디론가 걸어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서재 안의 불을 켰는지 내가 있는 공간을 가리고 있는 커튼이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누군지 몰라도 대담한 놈이군. 허락도 없이 들어온 주제에 불까지 키다니." 백작이 마음에 안 든다는 어조로, 그러나 그 남자에게까지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어찌 된 영문인지 어떤 소음도 들려오지 않는게 남자가 아예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움직이거나 아니면 가만히 있는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후자인듯 백작이 다시 기가 막히다는 어조로 낮게 중얼거렸다. "뭐냐, 저놈? 들어 왔으면 목적을 실행할 일이지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아앗, 움직였다." 내가 실프들에게 부탁해 상황을 알아보지 않아도 백작이 알아서 중계 방송을 해주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드디어 이 서재로 들어온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남자의 발소리는 얼마 안가 멈췄다. 그리고 잠시후... 이번에는 백작 동생의 중계방송이 들려왔다. "저, 저놈 참 여유가 많군요. 이 상황에 초상화 감상이라니..." 황당하다는 백작 동생의 말이었다. '초상화? 어머니의?' 내 의문을 해소시켜주는 백작의 말도 곧 이어 들려왔다. "주디스님이 그만큼 아름다우시기는 하지." 누군지 몰라도 어머니의 모습에 폭 빠진 모양이었다. 한~ 참이 지나도 초상화 앞에 있을 그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저 놈은 왜 온거지?' 이런 내 기가막힌 심정과 백작의 심정은 같았던 모양이다. "저놈 여긴 왜 온 거야?" "이거 참 문제군요. 시간이 없는데... 이러다가는 옷도 못 갈아입고 파티장에 나서게 생겼는걸요?" "끄응..." "어쩌죠? 그냥 나설까요?" "아냐, 잠시만 더 두고보자. 그래도 아무 짓도 안 하면 그때 나서지." "그런데.. 여기에 있던 걸 뭐라고 해명하죠?" "흥, 우리가 왜 해명을 해야 하지? 해명을 해야 할 건 허락도 없이 내 서재에 들어온 저 놈이다." "하긴, 그건 그렇군요. 그럼 이제..." 그 둘의 소건거리는 대화는 누군가가 서재를 노크하는 소리에 중단 되었다. 똑똑~ 그리고 노크한 이는 안에서 허락의 말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서재의 문을 벌컥 열었다. "아버지? 갑자기 왠 호출... 누구지?" 목소리로 보아하니 성인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안에 자기가 기대하지 않은 인물이 있는 걸 보고 놀라움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단아함과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멋대로 들어온 거라면 어서 나가도록 해요. 다른 이가 봤다면 당신은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그녀는 가만히 초상화를 바라보는 남자가 별 다른 짓을 하지 않고 있기에 너그럽게 용서를 해줄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그녀의 그러한 너그러움을 받을 생각이 없었던지 나가는 대신 입을 열었다. "들어 오시지요, 에르미아 엠브로스양. 당신이 여기에 왜 오셨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엠브로스? 헤에, 그럼 저 여자도 백작가의 사람이었군?' 탁! 다시 가볍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남자의 발걸음 보다 좀 더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마 에르미아 엠브로스라는 여자가 안으로 걸어 오는 모양이었다. "그대는 누구지? 그러고보니 낯이 익기는 한데... 아버지의 명으로 여기 있는 건가?" 그러나 남자는 에르미아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엉뚱한 말을 꺼냈다. "이거 참 영광이군요. 몇번 스치듯 마주쳤을 뿐인데 제 얼굴을 기억해주시다니 말입니다. 당신의 현명함은... 여전하시군요." 왠지 묘한 어조의 남자 말이 끝난 뒤 잠시 침묵이 찾아 왔다 에르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날 알고 있는 듯한 어조로군. 우리가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었던가?" "그렇습니다.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이었죠." 남자의 목소리는 즐거운 듯 했지만, 그 밑에는 무시 못할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걸 알아챘음인지 그 뒤를 이어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에 불안감이 가득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당장 사람을 부르겠다." "원하시는대로 기꺼이... 저는 제프리 찬탈이라고 합니다. 10년 전 당신 때문에 인생을 망친 불운의 기사이지요." 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소개가 끝나자 놀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정말 에르미아와 잘 아는 사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건 백작도 마찬가지인 듯 백작의 몸이 경직되는게 눈에 보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상황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왠지 백작은 나설지 말지 무지 갈등하는 것 처럼 보였다. 하기야, 숨어있다가 이제와서 나서려니 모양새가 무지 않좋았으니 갈등하는 것도 이해가 되기는 했지만... 그러한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제, 제프리..." 침울한 에르미아의 말을 뒤이어 거친 제프리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안하십니까? 미안 하실 것 없습니다. 곧 당신도 나와 같은 고통을 맛보게 될 테니까요. 커스트 틴더!" "꺄아아악~~!!" 남자가 마지막에 외친 건 마법 주문이었다. 그와 함께 여자가 비명을 지르자 백작이 놀라서 갈등하던 것도 다 제쳐두고 뛰쳐 나갔다. "에르!!" 그리고 그 뒤를 백작의 동생이 쫓았는데, 그는 커튼을 나가기 직전 날 힐끔 바라보았다. 그래 나는 얼른 눈을 감아 죽은 척, 혹은 죽어가는 척 했지만, 눈을 감기 전 그 남자의 얼굴에 떠오른 회심어린 표정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뭐, 뭐냐... 저놈...' 커스트 틴더는 남을 괴롭히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마법이었다. 말 그대로 저주스러운 발화였으니까 말이다. 틴더라는 마법은 3클래스의 마법으로 단순한 발화 마법이었다. 건조한 장작 더미에서 갑자기 불이 붙게 하는 그런 류의 마법 말이다. 물론, 강력한 마법사가 인간에게 사용하면 사람의 몸에서 불길이 치솟기도 하지만, 사실 어떤 마법이든 사람에게 잘못 사용하면 위험한 건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런데 커스트 틴더는 순전히 인간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만들어진 마법이었다. 이것은 처음부터 불꽃이 보이는 틴더 마법과는 달리 처음에는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속에서 부터 타들어가기 때문에 어느정도 탈 때까지는 불꽃은 보이지 않고 연기만 피어 오른다. 그리고 어느정도 탄 뒤에야 겉으로 불꽃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러면 때는 늦어서 그때 불을 끈다 해도 이 마법에 걸린 생물체는 대부분이 죽는다. 거기다가 천천히 타들어가서 당한 사람을 될 수 있는 한 오래 고통 당하게 하다 죽게 만든는 엄청 악질적인 마법인데다 5서클의 마법이라 그 이상의 마법사가 오지 않는 한 쉽게 끌 수도 없었다. "에르~!! 게 누구 없느냐? 밖에 아무도 없느냔 말이다~!!" 백작의 다급한 외침에 화답하듯 서재의 문이 벌컥 열리며 여러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신관을, 아니, 마법사를.. 하여간 빨리 아무나 모셔오거라. 어서!! 그리고 저놈을 잡아라!" "찬 물을 가져와라!" "다른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도록 신중히!" "기사들은 저놈을 잡아라." 소란스럽게 들려오는 소리들을 들으며 나는 실레스틴에게 부탁해 내 몸을 결박하고 있는 천조가리들을 뜯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도 오랫동안 꽁꽁 묶여 있었던 터라 팔 다리를 주물러가며 근육을 풀고 있는데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소란스러움을 뚫고 들려왔다. "이런... 에르가 엉망이 되었군요. 이래가지고서야 오늘 파티에 나서지도 못하겠는데요? 오늘 백작 작위를 물려주겠다고 다 공포하셨는데 에르가 이지경이 되어서 어쩌십니까, 백부님?" 그 동안 들은 소리로 추측건데 지금이 무지 다급한 상황이라는 건 분명했다. 그런 와중에 참으로 얄밉게도 침착한 목소리였다. "이스파엘.... 네 이놈..." 백작의 이 가는 소리를 뒤이어 백작 동생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 애의 말이 틀린 건 아니죠, 형님. 그렇지 않아도 곧 파티 시간이 다되어가지 않습니까? 오늘 에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형님은 물론이거니와 저희 백작가는 웃음거리는 물론 구설수에 오르게 될 겁니다." "에르는 나가게 될 거다!" 백작의 단호한 외침 뒤에 낯선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사님을 모셔왔습니다." "오, 어서..." 커튼 틈새로 빼꼼히 내다보니 마법사 로브를 입고 있는 대략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급하게 몸을 숙이고 있는게 보였다. 사람들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는 폼이 그 에르미아가 바닥에 눕혀져 있는 모양이었다. ================================================================== 조엘은 이번 화의 끝에, 끄으으으으테 나온다니까요. ^^;; 잠시 후 에르미아를 살펴보던 마법사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드는게 사람들 사이로 얼핏 보였다. "어떤가?" 백작의 다급한 음성에 마법사는 무지 죄송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이건 제 실력으로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단지... 기세를 조금 늦출뿐..." "어떻게 안되겠는가?" "완전히 해결하려면 안티 매직 쉘을 익힌 마법사를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6서클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라면 어떻게든... 최선을 다 해보겠습니다만, 제 능력으로는 완전한 해결은 불가능 합니다." 마법사의 말이 끝나자 백작이 털썩 주저 앉았다. "백작님." 옆에 있던 자가 놀라서 백작을 부축했지만, 백작은 넋 나간 표정으로 자신의 딸만 바라볼 뿐이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허어... 이거 참... 에르도 저 모양이고 형님도 이 지경이시니... 이거 참 난처하군요. 어쩔 수 없이 제가 나서야 하나요?" 무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기는 했지만, 어쩐지 은근히 좋아하는 기색을 풍기는 백작 동생이었다. '하, 눈가리고 아웅한다는 게 저런 걸까나?' 나는 백작 동생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렸다. 그러한 심정을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던지 주의의 몇몇 사람도 눈쌀을 찌푸리는게 보였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백작 동생은 여전히 좋아하는 기색이 깔린, 안타까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님보도 한참이나 부족한 제가 나서서 백작가의 명예에 흠집이나 내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백작 대신 나서는 걸 기정 사실화 하는 백작 동생의 말에 주위 사람들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하기야, 백작 딸도 죽니 사느니 하는 가운데 있었고, 백작 또한 딸의 상황에 반은 넋이 나가 있었으니 오히려 동생이 백작 대신 나서는 것이 옳은 것일지도 몰랐다. 단지, 은근히 좋아하는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백작 동생이 노리는 건 그것 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에르가 저렇게 되었지만,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제 아들이 있으니까요.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 저 녀석 정도라면 백작으로써 엠브로스 가문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드러내놓고 아들을 바라보며 씨익 웃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순간까지 멍하니 엉거주춤 서 있던 백작의 몸이 곧추서더니 눈에서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다. 파티에는 내가 나갈테니까."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에 백작 동생이 움찔 했지만, 금방 능글 맞은 웃음을 베어물며 대꾸했다. "그러십니까? 하기야, 제가 제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는 것 보다는 백작이신 형님께서 물려 주시는 게 더 모양새가 좋을테지요." 백작 동생의 말에 백작의 입꼬리가 묘하게 뒤틀렸다. "네 아들? 미안하지만, 네 아들이 작위를 물려받지는 못할 것 같구나." 그러자 백작 동생의 눈초리가 치켜 떠졌지만, 그는 다시금 능글맞은 표정을 회복했다. "후후, 고집을 부리시는 군요. 그래봤자 현제 제 아들 말고 백작 작위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에르는... 정말 안됐지만 지금 죽을지 살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 하지만 그래도 네 아들에게는 절대 주지 않겠다." "후후후, 그러십니까? 그럼 누구에게 주시려구요? 엠브로스 백작 가문 사람들 중 제 아들보다 작위 계승권이 높은 사람이 더 있는 줄 몰랐는데요?" 여전히 여유 있는 백작 동생의 얼굴은 그 다음 나온 백작의 말에 일그러져 버렸다. "아니, 한 사람 있지." "그게... 누굽니까? 제가 모르는 사람이 있는 줄 몰랐군요." "너도 알텐데?" 그렇게 말하며 백작은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백작님!" 그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는지 아까까지 계속 백작을 부축하고 있던 중년 남자가 다시 부축 하려고 했지만 백작은 그 손길을 뿌리치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어째 그가 다가오는 방향이 내가 있는 쪽인 듯 했다. 백작 동생도 그렇게 느꼈는지 비식 비웃음을 흘렸다.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설마라고 생각하지만 말입니다." "잘 아는 구나." 백작이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옮기며 대꾸하자 백작 동생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 졌다.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형님도 곤란하실텐데요." "네 아들에게 작위를 넘기느니 차라리 내가 곤란한 게 났다." 백작 동생의 얼굴에서는 이제 여유있는 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매서운 눈길을 흘리며 백작에게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우습군요. 과연 백작 작위를 제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 있을까요? 저는 이미 늦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두고보면 알겠지." 그러던 백작은 내가 있는 쪽을 똑바로 바라보며 정중하게 요청했다. "나와주시겠습니까? 제 짐작이 맞다면 당신은 이미 결박을 풀고 태연하게 서 계실 것 같은데요." "쓸데 없는 짓입니다." 옆에 있던 동생이 비웃었지만, 내 쪽을 바라보는 백작의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 나는 괜히 머쓱한 표정으로 커튼을 제치며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백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고, 반대로 백작 동생의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어, 어떻게..." "우리가 한가지 간과한게 있지. 주디스님은 뛰어난 마법사이자 정령술사셨지. 그 분의 아들이 아무런 힘 없이 우리에게 잡혀서 결박 당한 것이 이상하다고 여겨지지 않나?" "이익..." 일그러지는 백작 동생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며 백작이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작위가 자네 아들에게까지 돌아가지 못해서 어쩌나?" 하지만 백작 동생은 최후의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형님도 참 순진하시군요. 저자가 주디스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다고 그걸 믿으신단 말입니까? 주디스님과 닮았다는 거야 저도 인정하지만, 이 세상에 닮은 사람이야 또 있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영문은 모르겠지만, 저 백작 동생이란 남자에게 그런 취급 당하니 나는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 목에 걸고 있는 엠브로스 가문 후계자 반지와 손가락에 끼고 있는 마법 반지를 들어 보였다. "이거면 됩니까?" "충분 하군요. 주디스님의 반지에 백작 후계자 반지라..." 백작가에서 후계자 반지가 사라진지 꽤 오래 되었을테지만, 어머니의 초상화에 섬세하게 그려진 채 남겨져 있었던 터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이익..." 백작 동생이 낭패한 표정으로 이를 빠드득 갈며 뒤돌아 서는 사이 백작은 내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이런 부탁 할 자격이 없다는 건 알지만... 부탁이 있습니다." 무지 진지하고 간절한 백작의 표정에 나는 나도 모르게 물었다. "무엇입니까?" "할 수 있으시다면.. 제 딸을 살려주십시오. 다른 건 건 바라지 않겠습니다. 목숨만 붙어 있게 해주시면 됩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보잘 것 없는 제 목숨이라도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나를 죽이려고 했던 주제에 참 뻔뻔스럽기 그지없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다른 부탁이라면 단칼에 거절하겠는데, 나에게 무릎까지 꿇으면서 부탁하는 것이 딸을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라 나는 차마 거절하겠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나 또한 내 어머니가 목숨을 버리시면서까지 날 살려서 이 세상에 내놓으셨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제 겨우 3클래스 유저 마법사인 내가 5클래스의 저주 마법을 풀 능력 또한 없었기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내 옆에 있던 엘라스트라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엔다이론 정도면 충분히 도울 수 있습니다.] [그래?] 옆에 있던 실레스틴이 투덜댔지만 나는 두 부녀를 도울 수 있게 되어 진심으로 잘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엔다이론을 불러냈다. "엔다이론, 저 아가씨를 도와줄 수 있을까?" 나의 부름에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커다란 파란 빛 늑대는 우아한 동작으로 이제는 피부가 뜨거운 열기로 인해 마구 일그러져가는 에르미아의 몸에 자신의 커다란 앞발을 턱 하니 올려 놓았다. 그러자 그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발화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애를 쓰던 마법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났다. 에르미아는 몰골이 너무 일그러져 처음의 그 단아했던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무척 괴로울텐데 미동도 없는 걸 보니 아마 그 고통을 못 이겨 기절했거나, 아니면 주위에서 그녀를 위해 기절시켜 놓은 듯 했다. 이제와서 엔다이론이 도와줘 마법을 푼다 해도 그녀가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기는 어려울 듯 싶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던 말던 엔다이론은 그녀의 몸에 올려놓은 발을 통해 그녀의 몸속으로 엄청나게 차가운 물의 기운을 흘려넣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뜨겁게 달아오르는 그녀의 몸을 식혀주는 한편 그녀의 몸 속에 있는 불의 기운을 차츰 차츰 잠재우기 시작했다. 푸른 연기가 피어 오르던 그녀의 몸에서는 이제 불의 기운과 엔다이론의 물의 기운이 맞부딪혀 만들어지는 듯한 수중기가 뿌옇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오, 불의 기운을 물의 기운으로써 막는 방법이 있었군. 나는 마법을 어떻게 풀 것인가만 고민하고 있었잖아?] 엔다이론의 방법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실레스틴이 옆에서 또 삐죽였다. [왜 저런 자를 도와주시는 건데요? 해인님을 죽이려 했던 자의 딸이잖아요.] [물론 그렇긴 하지만... 왠지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말야.] 우리가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동안 엔다이론이 집어 넣은 거대한 물의 기운을 이기지 못한 에르미아의 몸 속에 있던 마법적인 불의 기운은 점차 사그러들더니 결국에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엔다이론이 에르미아의 몸에서 발을 떼었고, 잠시 쉬고 있던 마법사가 다가와 그녀의 몸을 살펴보더니 안도의 빛을 보이며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초조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백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목숨은 건지셨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마법사의 말에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어든 백작이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말을 몇번이나 중얼거렸다. 설마 나를 죽이려 했던 자에게서 이런 대접을 받을 줄 몰랐기에 쓴 웃음만 지우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주위에 있던 어떤 중년 남자가 갑자기 헛기침을 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어흠, 백작님... 이럴 때 이런 말씀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만...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습니다. 서둘러 파티장에 가셔야 합니다." "아, 그렇군." 아마 주위에 있던 사람들 모두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파티에 대한 건 까맣게 잊고 있었을 터였다. 백작은 다시 고개를 들어 신색을 회복하더니 주위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지시를 내렸다. "에르를 방으로 조심스레 데려가게. 다른 분들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신관을 모셔오도록 하고. 엘버트, 첼릿, 자네 둘에게 이분을 맡기겠네. 이 분이 누구신지는 다들 잘 알겠지? 자네들에게 부탁하는 내 뜻을 알리라 믿네." 백작의 말에 파티 생각을 일깨운 중년 남자와 기사 차림을 하고 있던 한 남자가 공손히 머리를 숙여 보였다. "자, 그럼 이쪽으로..." 중년 남자가 나를 이끌고 나가려고 하는 그때였다. "가만 두지 않겠어!!" 이를 빠드득 갈며 원한에 찬 목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사람이 있었다. 백작 동생이었다. 그는 야차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에는 아까 날 제압할 때 썼던 작은 소도를 들고 나를 향해 몸을 던지고 있었다. "위험!" 나를 맡을 기사가 내 앞을 가로막으려고 했지만, 그 보다도 먼저 원한에 찬 사람을 낚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쿠당탕~!! 한번 나서고 싶어 안달을 했던 실레스틴이었다. 그녀는 백작 동생의 팔을 잡고 그가 달려들던 속도와 힘을 이용해 업어치기를 했던 것이다. 덕분에 백작 동생은 서재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기다리고 있었던 듯 기사들이 검을 빼어 그를 겨눴다. [꺄하~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의 놀라운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분 좋은 얼굴로 방방 뛰던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게 생긋 웃어보이고는 사르르 모습을 감춰 버렸다. "저, 저분은...?" 날 이끌고 가기 위해 내 곁으로 다가왔던 중년 남자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묻기에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 호위 무사요." "하아...?" 내 설명에도 중년 남자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그는 곧 신색을 회복하고 나를 끌었다. "어쨌든, 이쪽으로 오십시오. 한시가 바쁩니다." "어쨌든, 이쪽으로 오십시오. 한시가 바쁩니다." 그 중년 남자에게 반쯤 끌리다시피 해서 내가 도착한 곳은 누군가의 침실로 보이는 커다란 방이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중년 남자는 나를 침실 가운데에 세워 놓은 채 방 한쪽 구석에 있는 자그마한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아, 이거야 원...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 중년 남자의 모습이 문 안쪽으로 사라지자 나는 내 뒤를 따라 온 짙은 금발의 기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기사는 이런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내 얼굴만 빤히 바라보더니 아련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거였다. "정말... 어머님을 많이 닮으셨군요." "예? 아... 예. 그렇더라구요." 내 어정쩡한 대답이 이상했던지 기사가 의문 어린 표정이었다. "어째... 대답이 불안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아하하... 그게... 실제로 어머니의 얼굴을 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거든요." 머쓱한 내 대답에 기사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지만,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스님은... 돌아셨군요.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묘한 슬픔이 담긴 그의 말에 이상함을 알아챌 수 있었던 나는 기사를 향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어째... 어머니를 알고 계신 듯 하네요?" 그러자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거야 당연합니다. 절 이 백작가로 데리고 오신 분이 바로 주디스님이셨는걸요." "예" 더욱 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가 되물었지만, 그는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고는 다른 말을 꺼냈다. "그건 나중에 자세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선... 아,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해인이에요. 해인 오스번... 음.. 정확하게 말하면 해인 오스번 엠브로스가 되겠지만..." "그러시군요. 해인님... 아, 죄송합니다. 해인님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예? 아, 예. 좋을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해인님,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황스러우시겠지만 해인님은 곧 있을 파티장에서 백작의 지위를 물려받으시게 될 겁니다." "예?" 아까 백작과 그의 동생 사이에서 작위 운운 하는 하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 동안 이런 세계와는 동떨어진 세계에서 살아왔던 나로써는 현실감 없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랬으니 그 기사의 말에도 어리벙벙할 뿐이었다. 다행이 그 기사는 이런 날 '왜이래?' 라고 바라보는 대신 이해 한다는 표정으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모든 걸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은 아니실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주디스엠브로스님의 아들이시라는 것만 항상 기억하십시오." "아... 뭐..." '여기서 '난 아들이 아닌데요?' 라고 말하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겠지?' 그런 생각에 난 떨떠름하니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러다가 정말 내 스스로도 '난 아들이다'라고 여기게 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 분의 아들이신 이상, 당신은 얼마든지 백작의 작위를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십니다. 잠시 후 겪으실 행사에서 이걸 기억하시고 당당하게 행동하십시오. 갑작스레 생소한 일을 겪으시게 될 테니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제가 곁에 있을테니 너무 걱정하시 마십시오. 해인님은 제가 시키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아, 예..." '작위 계승식이라...' 그러고보니 나는 공작가에 있는 동안 그런 걸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기야, 일년도 있지 않았으니 귀족가의 모든 행사를 본다는 것도 불가능 했을테지만... 그런 일에 내가 직접 참여하게 되었는데도 아직 피부로 직접 와닿지 않아서 그런지,아니면 내 신경이 둔감해서 그런지 두렵고 떨리기는 커녕 별 걱정도 되지 않았다. 금발 기사는 그 뒤로도 몇가지를 더 이야기 해줬고, 내가 그에 한 귀로 흘려 들으면서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방 한쪽의 작은 문 뒤로 사라졌던 중년 남자가 급한 걸음으로 다시 나왔다. "자, 어서 이걸로 갈아 입어 주십시오." 그의 손에는 옷꾸러미가 들려 있었는데 중년 남자는 그걸 근처에 있던 의자에 걸쳐놓고 또 한쪽에 있는 서랍장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더니 서랍을 빼어 안을 열심히 뒤적거리는 거였다. '옷? 여기서?' 중년 남자의 예상치 못한 주문에 놀란 나는 감히 옷을 갈아입을 생각은 못한 채 쭈뼛대고 있는데 친절하게 여러가지를 이야기해주던 짙은 금발의 기사가 답답했는지 나에게 달려들어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서두르십시오." "에엑? 제가 할게요. 그런데, 꼭 여기서 갈아 입어야 하나요?" 기사의 손길에 벗겨지려는 옷자락을 부여 잡으며 내가 주춤 물러나자 저쪽 서랍을 열심히 뒤지던 중년 남자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소리쳤다. "남자끼린데 뭐가 어때서 그러십니까? 그리고 여기서 갈아 입으셔야 제가 시중을 들어드릴 수 있지요. 어서 벗으십시요. 지라르경, 서둘러 주세요!" 중년 남자의 외침에 지라르라 불린 기사의 손길이 단호해졌다. "시간이 없으니 무례를 범하겠습니다." "우아아악~~!!" 그의 손길을 뿌리치려 열심히 몸부림치자 지라르 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꾸 그러시면 시녀들을 불러 덤비게 할겁니다." "헉... 그러니까... 제가 벗겠다니까요." 내가 단호하게 옷자락을 부여잡으며 뒤로 계속 물러나자 지라르경이 한숨을 쉬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럼 빨리 벗으시죠. 안 그러면 제가 벗겨드릴 겁니다." 그가 양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꾸물꾸물 대자 지라르 경의 눈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자꾸 그렇게 천천히 하실 겁니까?" "그, 그게... 남이 보는 앞에서 벗은 적이 없어서..." '젠장, 내 평생에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옷을 벗게 될 줄이야...' 바로 눈 앞에서 날 빤히 바라보는 남자를 대하고 옷을 벗으려니 정말 손이 안 움직였다. 이때 저쪽 서랍장을 뒤지던 중년 남자가 뭔가를 찾아 들고 몸을 돌리다가 아직 내가상의도 채 못 벗고 있는 걸 본 모양이었다. "지라르경, 정말 시간이 없단 말입니다." 중년 남자의 재촉에 지라르 경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단호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해인님, 정말 죄송합니다." "녜?" 뜬금 없는 지라르경의 사과말에 내가 되물었지만, 그는 대답해주는 대신 행동으로 보여줬다. 쉬익~ "우악~!!" 뭔가 매서운 바람이 날 가르고 지나갔다 싶었는데, 그 순간 내 겉옷들이 산산 조각으로 흩어져 몸에서 스르르 떨어지는 거였다. 나와 마주보는 상황이었으면서도 언제 검을 빼들어 휘둘렀는지 모를 정도의 빠르기였다. 희멀건 내 피부가 그대로 드러나 나는 황급히 내 가슴을 가리려 했지만, 그것도 내 마음대로 못했다. "잘 하셨습니다, 지라르 경. 자, 도련님 빨리 이걸 입으시지요." 중년 남자가 가슴을 가리려는 내 팔뚝을 잡아 채어서 부드러운 실크 셔츠의 소매에 집어 넣었던 것이다. "우에~" 내가 언제 도련님이 된건가 싶었지만... 그걸 물을 상황이 아니었다. "지라르경, 바지좀 가져다 주세요." "알겠습니다, 집사님." 나에게 익숙한 손놀림으로 아이보리색의 실크 셔츠를 입히며 중년 남자가 백작가의 집사였던 모양이다. "자자, 도련님 팔좀 벌려 주십시오." 집사의 요청에 이어 의자에 고이 올려져 있던 바지를 가지고 온 지라르 경의 요청이들어왔다. "다리 한쪽만 들어 보세요." "아고고~~" "고개 좀 들어 주십시오." 실크 셔츠를 다 입히자 집사는 실크 셔츠의 깃을 빳빳하게 세우더니 거기에 흰색 레이스로 된 길다란 타이를 매었다. 타이의 매듭에는 블루 사파이어로 된 육각형의 커다란 브로치를 달았다. 지라르경이 입혀준 바지는 전체적으로 흰색인데 양쪽 다리 바깥 부분에 세로로 허리선에서부터 시작해 밑단까지 금줄과 은줄이 서로 꼬인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무늬는 곧이어 집사가 입혀준 재킷의 소매 단과 테두리에도 있었다. 자켓 또한 바지처럼 하얀 색이었는데 차이나 칼라처럼 칼라가 세워져 있었고 길이가무릎 위까지 내려왔다. "자자, 거의 다 되었습니다. 잠시 머리좀..." 집사는 내 머리를 질끈 묶고 있던 가죽끈을 풀더니 빗을 가지고 와 단정하게 빗어 내렸다. 그렇게 내가 거의 옷을 다 차려입고 있을 무렵 급한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침실 문을 다급하게 두드렸다. "집사님, 집사님!" "들어와라." 집사의 허락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시종은 커다란 붉은 망토를 들고 있었다. "빨리 가셔야 합니다. 백작님이 파티장에 나서셨어요." "이쪽도 다 됐다. 자, 도련님 어서 가시지요." 마지막으로 내 옷 매무새를 정리해준 집사는 잰 발걸음으로 나를 이끌고 침실을 나섰다. 그 뒤를 지라르경과 붉은 망토를 들고 온 시종이 따랐다. 지라르 경은 걸음을 좀 더 빨리해 내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빠른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해인님이 들어서시자마자 작위 계승식이 시작될 겁니다. 우선 해인님이 입장하실 문에서부터 붉은 융단이 백작님이 앉아 계시는 단까지 이어져 있을 겁니다. 그 길을가운데에서 쭈욱 따라 가셔서 단위에 오르시면 백작님이 자리에서 일어서실 겁니다.백작님과 두세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서신 다음 거기서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댄 자세로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이십시오. 이때 왼손은 몸에 붙이시고 오른손은 살짝 주먹을 쥐신 상태로 왼쪽 가슴에 가져다 대셔야 합니다." 그건 기사가 자신의 주군을 섬긴다는 맹세를 할때나 혹은 귀족이 왕을 배알할때 사용되는, 벨레니 국의 귀족 예법 중 상대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극상의 인사법이었다. '아, 그러고보니 작위 계승식에서 쓰이기도 한댔지?' 내가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공작가의 후계자를 가장 가까이서 모셔야 할 시종은 귀족의 예법에 통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헤럴드 집사에게서 배웠던 게 생각이 난다. 그동안은 한번도 사용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가 지라르 경의 말을 들으니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난 뒤 천천히 일어나셔서 백작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백작님이 맹세문을 읇으신 다음 맹세하겠냐고 물으실 테니, 맹세하신다고 대답하시면 됩니다." 그의 빠른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우리는 벌써 일층으로 내려와 한창 파티가 열리고 있는 홀로 향하고 있었다. "원래는 작위를 물려 받으신 새 백작님께서 맹세문을 읇으셔야 하지만, 해인님이 그걸 외우실 시간이 없어서 백작님이 대신 해주시는 겁니다. 그 뒤에 백작님이 해인님께 엠브로스 백작 가문의 검과 백작의 반지를 주실 겁니다." 거기까지 지라르경이 설명했을 때 집사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날 돌아보았다. "아차차, 깜빡 했습니다만.. 후계자 반지 가지고 계시지요?" "아, 예." "그거 얼른 손가락에 끼십시오. 작위 계승식을 할때 후계자는 후계자 반지를 끼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야 후계자 반지를 주디스님이 가지고 계셨으니 후계자 반지를 주위 사람들에게 보이는게 생략 되었지만, 후계자 반지가 돌아왔으니 해야지요." "엣? 그런가요? 하지만.. 이거 나에게는 너무 큰데..." "대충 엄지 손가락에라도 끼고 계십시오." 집사의 말에 나는 목에 걸고 있던 끈을 풀러 후계자 반지를 꺼내 왼쪽 엄지 손가락에 끼는데 지라르경의 설명이 이어졌다. "우선 백작님께선 해인님의 손가락에 끼인 후계자 반지를 빼낸 다음 그 자리에 백작의 반지를 끼의줘실 겁니다." "그럼 후계자 반지는?" "대기하고 있던 보관 상자에 넣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해인님의 후계자가 생길때까지 그 곳에 보괸될테지요." '후, 후계자라... 으음...' "검은 받은 뒤 한 손에 들고 계십시오. 그 뒤 백작님께서 작위가 계승되었음을 선포하시고 자리를 비켜주실테니 백작님이 앉아 계시던 의자에 앉아 계시면 됩니다." "그게 끝입니까?" "아닙니다. 그 뒤에 저희 백작가에 소속된 기사들의 충성 맹세를 받으셔야 합니다. 한 명씩 아까 말씀드린 그 자세로 해인님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할 겁니다. 그럼 해인님은 들고 계신 검으로 그의 오른쪽 어깨에 한번 왼쪽 어깨에 한번 대시며이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엠브로스 백작 작위를 이어받은 나 해인 오스번 엠브로스는 그대의 충성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라고요." 지라스경이 자신의 검을 빼어들어 시범을 보여주며 해준 말을 입속으로 다시 읇조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집사가 내 뒤로 다가와 시종에게서 받아 든 붉은 망토를 어깨에 걸쳐 줬다. 그 붉은 망토의 등에는 금실로 엠브로스 백작 가문의 문장이 크게 수놓아져 있었고,테두리는 모피로 둘러져 있었다. "이건 대대로 작위 계승식을 할때 후계자께서 걸치시던 것입니다." 그 망토는 두터운데다 엄청 커서 묵직한 무게감을 내 어깨에 전달해줌과 동시에 내 뒤로도 멀리까지 질질 끌렸다. "윽... 이걸 파티 끝날때까지 걸치고 있어야 합니까?" 내가 알고 있기로 귀족가의 파티는 기본이 3 ~ 4 시간이었다. 거기에 파티의 주인공은 중간에서 빠지지 못하니 끝까지 나는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할 터였다. 그러니 그 동안 이걸 계속 걸치고 나면 내 어깨가 무사하지 못할거란 생각에 기겁을하자 지라르 경이 싱긋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충성 맹세를 다 받으시고 다시 파티가 제개 되면 적당한 때를 봐서옆의 시종에게 넘겨주시면 됩니다. 파티때 여러 귀족들과 안면을 익히게 되실텐데 망토를 걸친 채 파티장을 종횡무진 하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가요? 그건 다행이군요." 그때였다. 파티장 안쪽에서 누군가 큰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 들려왔다. "해인 오스번 엠브로스님입십니다." 그것을 신호로 굳게 닫혀있던 파티장으로 통하는 문을 대기하고 있던 시종 둘이 조심스레 열기 시작했다. "자, 이제 시작입니다. 허리와 어깨를 똑바로 펴시고 정면을 바라보십시오. 당당하셔야 합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남의 이야기를 듣는 걸로 여겨졌는데, 파티장의 문이 서서히 열리고 그 안에 있던 시선들이 일제히 나에게로 쏠리자, 그제서야 이게 바로 현실이라는것이 피부에 와 닿기 시작했다. '헉... 이거 잘못 걸린 게 아닐까?' 일순 그런 불안감이 들었지만, 뒤에서 누군가 슬쩍 떠밀자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하고 발을 내딛었다. '에라, 될대로 되라지.' 당당하게 걷는 건 일부러 의식할 필요 없었다. 사실 조엘네 저택에서 지낼 때도 나의 행동이 조엘의 명예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나는 공작 부부와 조엘, 그리고 그의 여동생 안젤라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비굴하게 굴지 않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곳에서 머무는 기사들에게도 예의는 깍듯이 지켰지만, 필요 이상으로 굽실거리며 지내지는 않았고, 항상 어깨와 허리를 꼿꼿이 펴고 정면을 바라본채 걸어다녔다. 그 교육의 효과가 수많은 시선을 받아 약간 떨리는 이 자리에서도 여실히 발휘되어 나는 무의식적으로 당당하게 단 위에 있는 백작을 바라보며 붉은 융단위를 걸어갔다. "잘 하시고 계십니다." 드디어 단 위에 도착하여 백작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무릎을 굽힐 때 내 망토 자락을 정리해주는 척 가까이 온 지라르 경이 낮게 속삭였다. '뭐... 처음 해보는 일이 아니라서...' 그렇게 예를 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초최해진 백작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해인 오스번 엠브로스여..." 라는 말을 서두로 하여, 백작은 나라에 충성하고 백작가의 명예에 먹칠하지 않으며... 등등의 레파토리를 읆기 시작했다. '흐음... 세계는 달라도 어디나 사람이 생각하는 건 비슷비슷 한가보군.' 백작의 말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를 흘려들으며 속으로 피식 웃던 나는 마지막으로 백작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 한 백작이 될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그 진실된 맹세를 믿고 이 자리에서 그대에게 백작 작위를 물려주겠노라." '진실되기는 개뿔이...'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걷으로는 어디까지나 진지한 표정을 고수한 채 나는 어서 빨리 이 식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백작의 손짓에 대기하고 있던, 제복을 입은 기사가 조심스레 폭신해 보이는 빌로드로 감싸인 쿠션이 붙은 쟁반을 가지고 앞으로 나섰다. 그 위에는 여러 보석으로 장식된 삐까번쩍한 검이 한 자루 올려져 있었다. "이제 나는 그대에게 후계자 반지 대신에..." 백작은 다시 입을 열며 내 손을 들어 주위 사람들이 내 손에 끼인 후계자 반지가 잘보이도록 했다. 뭐, 그래봤자 저쪽 멀찍이 있는 사람들이 이 반지를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의문이었지만, 단 근처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보인 모양이었다. 주위에서 놀람에 찬 작은 소리들과 웅성거림이 들려오는 걸 보니 말이다. 그에 백작은 만족한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천천히 내 손가락에서 후계자 반지를 빼내어 옆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내민 섬세한 세공이 된 상자에 내려놓고 자신의 손가락에 끼인 반지를 빼내어 내 손가락에 다시 끼워줬다. "엠브로스 백작가를 상징하는 반지를 끼워주노라. 또한..." 그리고는 기사가 들고 있던 쿠션 쟁반에서 화려한 검을 들어 나에게 건네줬다. "뒤를 돌아 사람들을 보며 검을 천천히 치겨 드십시오." 지라스 경의 지시에 나는 천천히 뒤돌아서 검을 치켜 들었다. 그러자 뒤의 백작이 내가 현 엠브로스 백작이 되었음을 선언했고, 아래에서 우렁찬 함성과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 백작은 단에서 내려가고 나는 백작이 앉아 있던 의자에 당당한 자세로 앉았다. 지라스 경은 내 오른쪽 뒤에 섰고 말이다. "그럼 다음은 엠브로스 백작님께 대한 충성 서약식이 있겠습니다." 진행자인 듯한 시종의 외침에 단상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붉은 융단 위로 올라와 나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일어서십시오." '젠장, 이렇게 금방 일어서게 할 것을 뭐하러 앉게 했담...'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순순히 일어서서 그의 앞에 섰다. " 저 엠브로스 기사단 단장 진 윙겟 남작은 엠브로스 기사단을 대표하여 해인 오스번 엠브로스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쯧쯧... 진부하게 엠브로스 기사단이 뭐야? 좀 멋있는 이름을 지을 것이지...' 속으로 그렇게 중얼댔지만,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위엄 있는 표정으로 - 내가 그런 표정 지으면 웃길지도 모르지만... - 지라스 경이 시킨 말을 읇조리며 검을 진 윙겟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기사의 양 어깨에 가져다 댔다. "엠브로스 백작 지위를 물려받은 나..." 그렇게 해서 시작된 충성 서약식은 10여명이 앞으로 나서서 읆조리자 끝났다. 5명쯤 지나자 슬슬 지겨워진 나는 설마 수십명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건 아니었다. 그만큼 엠브로스 백작가가 큰게 아닌건지, 아니면 대표들만 나온 거라서 짧게 끝난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서약식이 끝나고 진행자의 유연한 진행으로 인하여 다시 파티가 재개되었을때 나는 백작, 그러니까 전 엠브로스 백작의 인도에 따라 망토를 벗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내 뒤는 여전히 지라르경이 따르고 있었다. "인사 하십시오. 이쪽은 저의 영지의 이웃 영지를 다스리고 계신..." 전 백작이나 지라르 경이나 내가 혹시라도 실수할까봐 무지 긴장한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내가 자연스레 귀족 예법으로 다른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며 축하를 받는 걸 보고 눈이 둥그래졌다. "주디스님께서 귀족 예절까지 가르치셨습니까?" "아뇨. 다른 사람에게 배웠는데요." "그렇습니까? 누군지 몰라도 그 분께 감사해야 겠군요. 사실 어색해 하실까봐 걱정 많이 했습니다." '어색하하는게 아니라 다른 귀족들에게 비웃음을 살까봐 걱정한 거겠지만... 그나저나 나에게 예법을 가르친 사람이 맥알파인 공작가의 집사라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전 백작의 말에 피식 웃음 지으며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전 백작이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이상하군요. 분명히 참석 하셨는데 어디 있는 거지?" "누가 말입니까?" "이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중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안 보이는군요." 계속 두리번 거리던 백작은 그 누군가가 안 보이는 지 결국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시만 자리를 피해 쉬고 계시겠습니까? 제가 찾아보고 오도록 하죠." 그렇지 않아도 얼굴도 기억 안 나는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좀 피곤했던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 테라스에 나가있죠." "알겠습니다. 찾으면 그쪽으로 데리고 가던지 시종을 보내던지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렇게 해서 전 백작과 헤어진 나는 지라르 경을 데리고 사람들 틈을 헤치며 테라스로 향했다. 유리 문을 열고 파티장 밖으로 나서자 매서운 겨울 바람이 엄습했지만, 파티장의 시끄러운 소리들과 복작스러움이 사라진 곳이라 그런지 오히려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정 추우면 정령들에게 부탁하면 되고 말이다. "춥지 않으십니까?" "견딜만 한데요 뭐." "다행이군요. 아, 아직 아무것도 안 드셨을텐데 뭐라도 요기할 걸 가지고 올까요?" 그 동안은 어린애 돌보는 유모처럼 내 뒤를 따라다니던 지라르 경이었는데 테라스에는 다른 사람들이 없어 잠시 날 혼자 나둬도 괜찮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주겠어요?" 그의 친절한 말에 출출함을 느낀 내가 반색하며 묻자 지라르경이 피식 웃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고마워요." 내 감사의 인사를 뒤로 하고 지라르 경이 다시 파티장 안으로 들어가자 혼자 남겨진나는 테라스에 놓여진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쿠션이나 방석 같은게 없어 차가운 기운이 엉덩이를 타고 올라왔지만, 피곤한 몸을 쉬게 하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아아... 힘들었다. 정말 지겹다니까? 저놈의 파티는 도대체 언제쯤 끝나는 거야?" 차가운 기운을 무시하고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대고 머리까지 뒤로 젖힌 나는 눈을 감고 온 몸을 타고 올라오는 시원한 기운을 느꼈다. 그런데 그때 테라스를 향한 문이 조심스레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라스경이 벌써 왔나 싶은 나는 좀 더 편한 자세로 있고 싶은 유혹을 애써 떨치며 몸을 일으켰다. "아, 지라스경 벌써..." 하지만,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내 눈앞에는 다른 인물이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이야." 장난기가 가득 들어있는 녹색눈이 부드럽게 휘었지만, 생각지 못한 인물을 만난 탓에 나는 마주 웃어주지 못하고 눈을 크게 치켜떴다. "에?" 그러자 그가 섭섭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반갑지 않은 거야? 나는 무척이나 반가운데..." 그러며 놀라서 굳어진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 그는 손을 뻗어 바람에 휘날려 뺨을 간질이는 내 머리카락을 잘 정리해 귀로 넘겨줬다. "흐음.. 머리를 많이 길었는데?" 그의 행동에 정신을 차린 나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으윽... 정말... 여전하시군요, 조엘님은." 그랬다. 내 앞에 나타난 이는 전에 잠시 내가 몸을 의지한 공작가의 장남인, 조엘 맥알파인 이었던 것이다. 나의 투덜거림에 조엘의 얼굴에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장난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도대체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지?" ===================================================================== 에구, 드디어 조엘이 등장했군요. 이 넘이 그렇게 좋으신감? 제 28화 재회 "도대체 그 동안 어디 있었던 거지?" "에... 그게... 아버지에게 끌려서 집으로 갔었죠." "아버지? 웨스트모어랜드 후작성에 갑자기 나타났었던 그 물술사?" "예." 내 말에 조엘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앉았던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랬군. 그럼 그때 거기서 여기로 온 건가?" 조엘이 앉기에 따라서 그의 맞은편에 앉았던 나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어리둥절 해졌다 "예?" 그래 뭔 소린가 하고 조엘을 쳐다봤더니 아까의 그 미소는 어디로 버렸는지 그의 얼굴은 겨울 밤바람 못지 않게 차갑게 굳어진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정말 놀랐지. 아까 파티장에서 작위를 계승받기 위하여 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널 봤을때 나는 순간적으로 환각을 보는 줄만 알았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널 여기서 볼 줄이야. 그것도 당당한 백작이 된 널 말야." "아... 그게..." 얼결에 된 거라고 말하면 절대 믿어줄 것 같지 않은 분위기라 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조엘의 차가운 질문이 다시 들려왔다. "왜지?" "예?" 쾅! "왜 날 속였느냔 말이다!" 조엘은 무척 분노한 어조로 외치며 주먹을 탁자로 내리쳤다. 어지간해서는 흥분한 내색도 안하는 녀석이었는데 저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걸 보니 무지 화가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억울한 건 나였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요. 제가 언제 조엘님을 속였다는 겁니까?" 내 반박에 조엘의 입매가 비웃음으로 일그러졌다. "하긴... 속인 건 없지. 너는 단지 아무 말도 안 했을 뿐이니까." "예?" 점점 알수가 없어졌고, 머리까지 지끈지끈 아파왔다. "부디... 알아듣게 설명좀 해주시겠습니까?" 하지만, 조엘 녀석은 계속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 "현 엠브로스 백작.. 아니지, 이제는 전 백작이라고 해야겠군. 전 백작의 외동딸을 제치고 작위를 받을 수 있는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귀족이었으면서 어떻게 자존심을 억누르고 반년동안 내 시종 노릇을 했는지 이해 할 수가 없군. 그랬는데 이제와서 백작으로 나서다니... 역시 엠브로스 가는 우리 맥알파인 공작가와 다른 길을 걷겠다는 건가?" "예에?" 이거 왠지... 내가 원하지 않았으면서도 아주 복잡 다단한 세계로 점점 끌려들어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와 함께 내 머리속도 점점 복잡해져갔다. 그러는 와중에 조엘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네가 우리집에 시종으로 들어온 시기다. 그때는 엠브로스 백작가나 우리나 다 같은 친여왕파였는데 무엇때문에 네가 우리 집안에 잠입한 거지? 그래서 얻을 수 있었던 이익이 도대체 뭘까?" "잠입이요? 내가 도대체 왜 조엘네 집에 잠입 했다는 겁니까?" "나도 그걸 알고 싶어. 말해봐, 해인. 왜 네 신분을 숨기고 우리 집안에 들어온 거지?" "숨기긴 누가 뭘 숨겼다는 거예요? 절 시종으로 잡아둔 건 조엘님이셨잖아요." "물론 널 잡은 건 나지. 하지만, 네 신분을 밝혔더라면 널 시종으로 삼는 대신 엠브로스 백작가로 고이 돌려 보내 줬을 거야." 조엘의 그 말에 나는 그제야 그가 뭔 이야기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백작가 사람이라는 걸 숨겼다는 겁니까?" 내 말에 조엘이 피식 웃었다. "숨긴게 아니지. 아까 네가 말했지 않나? 숨긴게 아니라 단지 말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조엘의 비아냥에 나는 피식 웃었다. "나원 참... 기가막혀서..." 좋아서 웃었던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가막혀서 저절로 나온 웃음이었다. 내가 픽~ 하고 웃자 조엘의 눈꼬리가 꿈틀 거렸지만, 나는 싸악 무시했다. "내가 언제 말 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했습니까? 조엘님이 혼자서 추측하고 단정한 거지. 이런걸 바로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한다는 거겠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조엘이 날 매섭게 쏘아보기에 나는 지지 않고 마주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숨기던 말 하지 않던 내가 백작가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 그럴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막말로, 저는 제가 백작가 사람이라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다고요." 하지만, 이 사실이 조엘에게 안 먹힌 모양이었다. 내 말에 조엘은 천천히 차가운 의자 등받이에 등을 대더니 팔짱을 터억 끼면서 이렇게 대꾸했으니 말이다. ".... 그 말을 내가 믿을 거라고 보는가?" "믿든 안 믿든 그건 사실입니다. 엠브로스 백작 성에 온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고요." "그러니까... 처음 오자마자 백작이 널 알아보고 백작 작위를 물려줬다? 아예 백작이 산속 깊은 곳에 유거하는 널 찾아와서 백작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하지 그래? 그게 더 믿음이 가는데..." 조엘의 비아냥에 나는 발끈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보다 침착한 목소리가 조엘의 말을 맞받아쳤다. "해인님 말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자작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 됩니다만?" 시선을 돌리니 거기에는 언제 돌아왔는지 지라르경이 여러가지 음식이 조금씩 담긴 접시를 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고마워요." 조엘은 싸악 무시한 채 지라르 경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며 접시 위에 있던 포크를 막 집어들려고 하는데 조엘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믿기 힘들군." "그러니까 믿거나 말거라니까요. 그래도 지구는 돈다." 내 말에 조엘과 지라르경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 무슨 소리야?" "지구가 뭐죠?" "아하하하... 그러니까... 그런게 있어요." "흐음... 하지만, 누구라도 믿기 어려울 거야. 사실 오늘 작위를 물려주겠다는 선포를 들었을 때 나는 전 백작의 친 딸 에르미아 엠브로스가 받게 될 거라고 예상했었거든." "원래는 그 아가씨가 받기로 되어 있었을걸요?" 나는 접시에 올려져 있는, 먹음직 스럽게 두툼하지만, 한 입에 넣을 수 있게 작은 샌드위치를 콕 찍어 입에 가져가며 조엘의 말을 거들었다. "커흠흠..." 그 순간 내 뒤에 서 있던 지라르경이 추운지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조엘은 그런 그에게 시선 조차 돌리지 않고 나만 똑바로 바라본 채 물었다. "그래? 그런데 왜 네가 받게 된 거지?" 그래 나도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나도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조엘님께 얼결에 끌려갔듯이, 이번에도 얼결에 끌려 나온 거거든요." "해, 해인님!" 지라르경이 뒤에서 다급하게 부르자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요, 지라르경?" "아니, 그, 그게..." "예?" 말똥 말똥 거리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지라르경은 안절 부절 못하다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가요?" 그의 말에 나는 다시 접시쪽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풋, 푸하하하하~~" 갑자기 조엘이 마구 웃어제꼈기 때문이다. 이 넘은 또 왜이러나.. 하는 시선으로 내가 그를 바라보며 한 입 크기의 고기 꼬치를 먹는 동안 신나게 웃어제낀 조엘이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본다 말이야?" "예?" "아니... 훗훗, 그런게 있어. 아니, 아니... 이제 백작님이 되셨으니 나보다는 지위가 높으신 분께 하대를 할 수가 없겠군. 어쨌든,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엠브로스 백작님. 아참, 데니가 저와 동행했는데 만나 보시겠습니까? 그도 백작님을 보면 무척 기뻐할 겁니다." "하아?" 데니형도 왔다니 반갑기는 했지만, 그 보다도 갑작스레 변한 조엘의 행동에 적응이 안되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얼떨떨 하기만 했다. 내가 이러던 말던 조엘은 다시 내가 알던 조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그때 이 요상한 분위기를 타개해준 인물이 등장 했으니... "아이고, 여기다 모여 계셨군요." 나에게 백작 작위를 물려준 전 백작이었다. 그때 이 요상한 분위기를 타개해준 인물이 등장 했으니... "아이고, 여기다 모여 계셨군요." 나에게 백작 작위를 물려준 전 백작이었다. 그의 모습을 보자 조엘이 예의상 자리에서 일어났고 덩달아 나도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나만 앉아 있는 건 좀 그렇지 않겠는가? "안녕하십니까, 백작님." 조엘이 먼저 나서서 전 백작에게 인사를 하자 전 백작이 허허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허허, 백작님은 무슨... 이제는 물러난 노물일 뿐입니다. 엠브로스 백작은 바로 저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나에게 다가온 전 백작이 조엘을 가르켜보였다. "백작님, 이 분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그 분입니다. 제가 소개시켜드리려고 했는데, 먼저 인사를 하고 계셨군요." "아, 그렇습니까?" 이번 파티에서 가장 신경써야 할 인물이 조엘이었다는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은 비록 나보다 한단계 낮은 자작이지만, 누구나 인정하는 이 나라 안에서 손꼽히는 맥알파인 공작의 후계자, 그러니까 미래의 공작이었으니 현재 그보다 한 단계 높은 위치에 있는 전 백작 또한 그에게 함부로 하대를 못하는 거였다. 자작이라는 작위는 국법상으로 백작 아래의 단계에 있지만, 이 자작이라는 작위가 공작이나 후작의 후계자에게 내려지는 작위였으니 말이다. "하기야, 맥알파인 공작가라면 알고 계신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겠군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가문 아닙니까?" 슬쩍 조엘을 띄워주는 전 백작의 말에 조엘이 겸양의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슨 과찬의 말씀을... 엠브로스 백작가야말로 요 근래에 여왕 폐하의 크나 큰 신임을 받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하하, 무슨 말씀을요. 아, 이번에 새로운 백작님을 여왕폐하께서 잘 봐주셨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아직 경험이 많지 못하신 분이니 조엘님께서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뭘 어떻게 하지 않아도 여왕폐하의 신임을 한 몸에 받으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대충 상대편을 높이는 인사치례를 끝내려는 듯 조엘이 화제를 바꾸려 했다. "예?" 그에 전 백작이 예의 바르게 반응을 해주자 조엘이 나와 전 백작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전 백작님의 뒤를 이어 백작이 된 거라면... 현 백작님이 전 백작님보다는 아랫 사람일 것 같은데... 어째 전 백작님이 윗 사람 대하듯 하는 것 같아서 말이죠. 제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 나도 그게 궁금 했다. 뭔 사정으로 인하여 나에게 백작 작위를 넘겨 준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나를 깍듯이 윗사람 대할 것 없잖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전 백작을 쳐다보자 그가 빙그레 웃었다. "그건 간단합니다. 현 백작님은 제게 할아버지뻘이시거든요." "네?" 조엘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내가 더 놀랐다. 내 외할아버지가 아마도 전 백작 전대의 백작인 건 알겠는데 아직 나와 전 백작의 확실하게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할아버지 뻘이라니... 아직 결혼도 안 한 나에게 50대의 손자는 너무한 거 아닌가? 하지만 전 백작은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아아, 여긴 너무 춥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여기에 계속 계신다면 감기에 걸리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모두들 들어가시지요." 그러자 지라르경도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밖에 너무 오래계셨습니다. 이만 들어가시지요, 해인님." "아, 그럴까요?" 그렇게 전 백작과 지라르 경의 권유로 인하여 다시 파티장 안으로 들어간 나는 조엘과 계속 붙어 있기는 했지만, 우리 주위로 몰려드는 다른 귀족들로 인하여 더 이상 개인적인 이야기는 나눌 수 없었다. 드디어 몇 시간이 흐른 후 재미 없는 파티가 끝나자 전 백작과 지라르경은 나를 침실로 데리고 갔다. "헤에... 여기는..." 그 곳은 내가 옷을 갈아입던 바로 그 방이었다. "여기는 대대로 엠브로스 백작이 쓰던 방이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백작님이 되셨으니 당연히 이 방을 쓰셔야지요. 파티 동안 급하게 준비시켜 부족한 게 많을 겁니다." 전 백작이 미안하다는 듯이 말하자 나는 한숨을 쉬고 그를 돌아보았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외할아버지가 백작이셨다는 것도 몰랐고,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화려한 생활을 했던 것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생활했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과분하게 여겨질 정도이니 그런 건 걱정 마시고요, 이제 제대로 된 설명을 들었으면 하는데요." 거기까지 말한 나는 백작의 안색을 살피고는 덧붙였다. "피곤하시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전 백작은 딸내미가 죽을 뻔 했고, 그 딸에게 물려줄 작위를 나에게 넘겨야 하는 충격속에서도 티 하나 안 내고 꿋꿋하게 파티에 참석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이 파티 주최자이니 자리를 비우지도 못하고 끝까지 버티고 있었으니, 온전한 정신일때도 피곤했을 거였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는 티를 안 내더니만 여기에 우리끼리 있어서 그런지 창백한 안색과 피곤한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들을 권리는 있었다. 나도 익숙지 않은 파티에 붙들려 있어서 그런지 정신이 하나도 없고 빨랑 편하게 눕고 싶었지만, 그 보다도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속시원하게 알고 싶었다. 내 말에 전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신 겁니다. 실례지만... 좀 앉아도 되겠습니까?" "아, 그러세요." 전 백작이 폭신해 보이는 소파를 곁눈질로 보며 말하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말 죄송하지만, 한 잔 해도 되겠습니까?" "좋을대로 하세요." 내 허락이 떨어지자 전 백작이 어딘가로 걸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보다도 먼저 지라르경이 그를 제지하며 나섰다. "제가 가지고 오겠습니다. 전 백작님은 우선 앉으시지요." "고맙군." 전 백작이 정말 고맙다는 표정으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자 지라르경이 나를 바라보았다. "해인님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전 됐어요." 그의 말을 거절하며 전 백작의 맞은 편에 앉자 전 백작이 정신을 차리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는 것이 보였다. "후우, 정말... 제 생애에 오늘 처럼 피곤한 날은 없었던 것 같군요. 몇년 전 반대파를 치기 위하여 동분서주 할 때도 이만큼은 피곤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힘 없는 전 백작의 말에 나는 쬐께 미안해졌다. "너무 힘드시다면... 내일로 미룰까요?" 전 백작이 내일 아침 당장 도망갈 것도 아닐테니 내가 조금만 참아줄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는데 전 백작이 힘 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런 설명은 빠를 수록 좋겠지요. 아, 고맙네." 전 백작은 지라르 경이 건네준 크리스탈 술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신 뒤에 나를 바라보았다. "우선, 제 이름은 이브스햄 엠브로스라고 합니다. 저와 백작님의 관계를 말씀드리자면... 제 아버지가 주디스님 막내 동생의 손자이십니다. 그러니 백작님께서 제 할아버지 빨이신 거죠. 절 불러주실때 그냥 이브스햄이라고 불러주심 됩니다." "헉... 그, 그런 겁니까?" 나의 기겁하는 표정에 백작이 피식 웃었다. "뭐, 이렇게 나이 많은 손자를 두고 싶어하지는 않으시겠지만, 주디스님이 백작님을 늦게 나으시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니 어쩔 수가 없죠. 그리고 이쯤 하면 아시겠지만... 제 딸에게 갈 작위를 백작님이 가로챘다는 생각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작위는 원래 백작님 것이었으니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가 그렇다니 그런 건줄 알아야겠지. "그, 그런 가요?" 그래서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더니 전 백작, 그러니까 이브스햄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모양입니다. "원래... 작위는 주디스님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백작님, 그러니까... 제 고조 할아버님이자 백작님의 할아버지께서는 후계자를 주디스님으로 삼으셨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말씀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만, 그러한 결정은 감정적인 것이었지 우리 엠브로스 가를 위한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 당시의 벨레니 국가에서는 이종족이나 이종족의 피가 섞인 사람을 천대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에 대한 설명은 외할머니께 들었었던 터라 나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예." "그런데, 이걸 아셨던 건지 아니면 단순히 인간 세상이 싫으셨던 건지 주디스님께서 성년이 되시자마자 가문을 떠나셨지요. 그렇다고 아예 모습을 감추신 건 아니었지만, 백작님의 할아버님 께서 돌아가시고 백작 작위를 물려받을때는 나타나지 않으셨답니다. 그래 그 분의 바로 아래 동생, 그러니까 제게는 큰 증조 할아버지가 되시겠군요. 분께 돌아갔지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작위가 제 거는 아닌 것 같은데요." "뭐, 그 당시에는 주디스님의 허락 하에 동생분께서 작위를 이어받으시고 그 분이 돌아가시자 그분의 장남이 이어받으시고, 또 손자께서 이어받으셨지요. 거기까지는 사실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손자분... 그러니까 백작님의 조카뻘 되시는 분이 사고로 돌아가셨을때 일어났답니다. 혹시, 저희 나라의 작위 계승에 대한 법을 아십니까?" "대충은요. 우선권은 아들에게 있지만, 아들이 없을 경우 딸에게도 물려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내 말에 이브스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시는 군요. 그런데 거기에는 단서가 붙지요. 결혼하지 않은 딸이라는 것 말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백작님의 조카뻘 되시는 분이 사고로 돌아가실 때 작위를 물려받을 아들까지 있었던 게 문제였지요. 그래 작위가 딸에게 돌아야 했지만, 그 당시 딸들은 모두 결혼을 한 상태였거든요." "저런... 그래서 제 어머니에게 돌아갔어야 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원래 처음부터 작위는 주디스님 것이었으나 그 분이 사양해서 동생분께 간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분의 대가 끊기는 바람에 계승권의 1순위는 다시 주디스님이 되신 거죠. 그래 정석으로라면 주디스님을 찾아서 그 분께서 사양 하셔야 그 다음 순위로 넘어가야 했습니다만..." 거기서 잠시 말을 끊은 이브스햄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또 한모금 마셨다. "후우... 그 다음 순위의 계승권자는 제 아버님이셨습니다. 운명인지 모르겠지만, 주디스님의 바로 밑 동생분께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작위를 물려받으시는 분을 제외한 나머지 분들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돌아가셨거든요. 거기다가 작위를 물려받으신 분도 외아들을 낳으셨고 말입니다. 그 분의 아들은 작위를 물려받을 아들과 사망하셨고... 그래서 주디스님의 막내 동생의 장손 이셨던 제 아버님께 순서가 올 수 있었던 것이었죠." "그랬군요." "나쁜 놈이라고 말씀하셔도 할 말은 없지만, 제 아버님께서는 주디스님을 찾지 않고 그대로 작위를 물려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곧 제게 물려주셨지요. 이름뿐인, 아무런 힘도 없는 집안을 백작가로 만들고 싶었던 욕심 때문이셨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이브스햄의 모습에 나는 괜히 멋적어져서 위로의 말을 건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어머님이라면 그냥 당신의 아버님께 작위를 넘겼을테니까요." "아, 예... 사실 제 아버지의 변명도 그랬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제게 작위가 넘어왔고, 저 또한 제 아들에게 물려줄 작정이었지요. 그런데... 아마 벌이었던지 제 아들은 10살이 되기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지요." "그, 그러셨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우셨겠군요." 내가 뭐라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어찌할 바를 몰라하자 이브스햄이 피식 웃었다. "위로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래전 일이라 상처는 많이 가라앉았으니까요. 그런데 저에게는 아들이 그 녀석 하나 뿐이었거든요. 그 외에는 딸이 한명이었습니다. 저는 이 아이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싶었지요. 그러나 제가 죽을 즈음에는... 아마도 딸은 결혼한 상태일 겁니다. 우리 나라 법으로는 결혼한 딸에게는 작위를 줄 수가 없지요. 그래서 저는 딸이 결혼하기 전에 작위를 물려주려고 했던 겁니다." "위로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래전 일이라 상처는 많이 가라앉았으니까요. 그런데 저에게는 아들이 그 녀석 하나 뿐이었거든요. 그 외에는 딸이 한명이었습니다. 저는 이 아이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싶었지요. 그러나 제가 죽을 즈음에는... 아마도 딸은 결혼한 상태일 겁니다. 우리나라 법으로는 결혼한 딸에게는 작위를 줄 수가 없지요. 그래서 저는 딸이 결혼하기 전에 작위를 물려주려고 했던 겁니다." "그날이 오늘이었군요." "예...." 내 말에 이브스햄이 내 눈치를 살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에는 아랑곳 없이 나는 계속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 내가 나타나자 놀라셨겠군요. 따님에게 작위를 물려주는데 방해가 될 거라 생각하셨나보죠?" "....죄송합니다." "하지만, 나 보다도 먼저 그... 에, 이름은 모르겠지만, 하여간 동생분이 문제였군요. 그분도 자기 아들에게 넘기려고 사건을 꾸몄던 거 같은데." 내 말에 이브스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 녀석은 제 아버지의 동생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제 사촌 동생이지요. 제 딸 다음으로 작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넘어가면 제 딸이 후손을 보지 않고 죽지 않는 이상은 작위는 물건너 갈테니 오늘을 노린 것 같습니다." "흐음... 그랬군요. 그래서 그분도 저란 존재의 등장이 반갑지 않았겠네요." "그랬을 겁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 말을 긍정하는 이브스햄을 바라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고 죽이려는 건 너무 하지 않았어요?" 분노나 살기가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건만, 이브스햄은 최후의 통첩이라도 받은 것 처럼 얼굴이 하얗 질린 채 굳어버렸다. 이해를 못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 정도에 죽을 내가 아니라 겁먹은 것도 아니었고, 또 죽을 걱정이 없었으니 이브스햄이나 그 동생이 날 죽이려고 할때도 어리둥절할 뿐 별로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분노나 이해를 떠나서 이브스햄의 행동은 용서가 안되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정령사가 아닌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엄마의 초상화 한번 보려고 했다가 - 물론 보통 사람이었다면 몰래숨어들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한번 보고싶으면 정문으로 찾아 가 정식으로 요청 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 이 세상을 하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권력이라는 것에 눈이 어두우면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옳게 여기는 건 아니었다. 뭐, 이브스햄이야 내가 복수할 생각으로 그러는 건지, 인간적으로 용서할 수 없어서 그러는 건지 모를테지만 말이다. 아니, 아무래도 상관 없으려나?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당장에 이브스햄을 어떻게 할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그냥 냅둘 수도 없었다. 지금 그의 사촌 동생이 나를 죽이려 했기 때문에 - 이브스햄 딸내미도 죽이려 했지만, 그건 아직 증명이 안 되었으니까 - 잡혀 있었다. 그런데, 내게는 그 사촌 동생이나 이브스햄이나 똑같아 보이는데 이브스햄을 용서해주면 사촌 동생만 혼줄이 나는 거 아니겠는가?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무지 난감했다. 이브스햄도 그걸 알고서 내 앞에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말씀... 어떻게 생각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처분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처분은 모든 파티가 끝난 다음에 내려 주십시오. 제가 갑자기 사라지면 다른 이들이 이상하게 여길 겁니다." 그의 말에 난감해 하고 있던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죠." "그럼..." 내 말에 슬슬 대화의 장을 파하려고 했던 이브스햄의 말은 다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에 끊겨 버렸다. "백작님, 백작님!" "무슨 일이냐?" 나 대신 내 뒤에 있던 지라르경의 말에 문이 열리고 기사 차림을 한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큰일입니다. 지하 감옥에 가둬놨던 벤자민 엠브로스와 이스파엘 엠브로스가 탈출했습니다." 아마 그 둘은 이브스햄의 사촌 동생과 그의 아들일 것이다. 기사의 말이 끝나자 이브스햄이 벌떡 일어나며 놀라움을 포했다. "뭣이라? 어떻게?" "밖에서 도와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하 감옥을 습격하여 그 둘을 데리고 갔습니다." "아마, 벤자민 엠브로스가 데리고 온 자들일 것입니다. 만약을 대비했나보군요." 침착한 지라르 경의 말에 이브스햄이 나를 돌아보았다. "어서 그들을 잡아들이라고 하십시오. 그 둘을 나두었다간 우환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브스햄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나는 보고하기 위해 달려온 기사에게 물었다. "도망자들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예? 아, 그, 그것이..." 그 기사는 내가 백작이 되었다는 걸 몰랐던 모양이다. 나에게 존대를 하는 이브스햄의 말에 당황하느라 내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버벅거리자 지라르 경이 나섰다. "뭐 하는 건가? 백작님께서 묻고 계시지 않는가?" 지라르경의 호통에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부동 자세를 취하며 재빨리 대답했다. "아, 예. 아직 성을 빠져나가지는 못했고,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진 단장은 뭘 하고 있지?" 이브스햄의 물음에 기사는 부동 자세를 여전히 유지한채 대답했다. "단장님께선 일단의 기사들을 데리고 뒤쫓고 계십니다." "골치 아프군. 다른 귀족들이 알기 전에 빨리 잡아들여야 할텐데..." 이브스햄의 중얼거림에 지라르경이 나를 바라보았다. "백작님, 부디 제가 다녀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나는 모르고 있는 사이 지라르경이 내 호위 기사로 결정 된 모양이었다. 호위 기사가 호위 대상을 떠날때는 꼭 호위 대상의 허락이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여기 혼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 더욱이 아까부터 툴툴대고 있는 실레스틴을 달랠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는 일이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그러니 앞장 서 주세요." "예? 아, 예." 보고 하러 온 기사보고 앞장 서라고 했더니만, 그가 순간적으로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이브스햄까지 갈 필요는 없겠죠?" 내 말에 이브스햄이 고마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딸에게 가겠습니다." "그러세요." 조용하게 성을 빠져나와 성 옆에 있는 숲으로 달려가니 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숲속에 들어가 수색하고 있었다. "단장님!" 보고하러 왔던 기사는 단장이 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고, 그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던 단장은 나를 보고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백작님까지 오셨습니까." "상황이 어떻습니까?" "좋지 않습니다. 저쪽은 꽤나 실력자들만 있더군요. 숲을 포위하고는 있는데, 병사들로는 상대가 안 될 것입니다. 지금은 그저 포위망을 좁혀 도망가지 못하게 막은 후 기사들에게 상대 하게 하는게 상책이지만, 저쪽은 둘러쌓이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겠지요." "아직 숲을 빠져나가지는 못했겠지요?"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수색하고 있는 병사들과 기사들을 숲 밖으로 내보내 주시겠습니까?" 뜻밖의 내 말에 단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 저들을 풀어주실 생각 이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단지 저에게 생각이 있어서 그러니 모든 기사들과 병사들은 단지 숲만 포위하게 해주십시요." "그, 그런..." 막 뭐라고 하려던 단장은 내 뒤쪽에 있던 지라르 경의 얼굴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지요." 그가 몸을 돌려 옆에 있는 기사들에게 뭐라 지시를 내리자 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곧 이어 신호인 듯한 피리 소리들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런데, 정말 방법이 있으신 겁니까?" 불신의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단장에게 나는 싱긋 웃어보였다. "네. 자, 모두 다 나왔나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의 말대로 잠시 기다리자 곧 사방에서 병사들이 달려와 모두 숲 밖에서 포위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어쩌긴요, 잡아야죠. 실레스틴!" 내 말에 옆에 있던 실레스틴이 환한 미소를 보이며 뛰쳐 날아갔다. [녜에~ 기다리고 계세요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에 내 부름에 아무런 변화가 없자 단장을 비롯한 모든 병사들과 기사들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날 쳐다보는게 느껴졌다. 그런 그들에게 씨익 웃어준 채 잠시 기다리자 멀리서 끄아아악~ 하는 비명소리가 메아리쳐 울리더니 곧이어 하늘에서 뭔가가 내 앞으로 뚝 떨어졌다. 그건 기절해 있는 사람이었다. "이, 이자는!" "어서 잡아라!!" 병사들과 기사들은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재빨리 달려들어 포박을 했는데, 채 포박을 해서 한쪽에다 끓어다 놓기도 전에 또 떨어져다. 올려다보니 실레스틴에게 불려 나온 듯한 슈리엘이 다시 숲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실레스틴이 잡아서 기절 시킨 녀석들을 날라다 놓는 모양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단장이 휘둥그래진 눈으로 날 바라보며 물었지만, 나는 배시시 웃을 뿐 대답해주지 않았다. 대신 지라르경이 자신의 생각을 물어왔을 뿐이었다. "정령을 불러내신 거군요?" 그에 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녭. 이래뵈도 정령술사거든요." "하아, 정말 놀랍습니다. 정령술사셨다니... 그런데 이런 일도 하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단장이 감탄어린 어조로 말하는 동안에도 숲속에서는 계속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더불어 슈리엘들이 날라오는 사람들도 계속 늘어났다. .. 단장이 감탄어린 어조로 말하는 동안에도 숲속에서는 계속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더불어 슈리엘들이 날라오는 사람들도 계속 늘어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주변의 몇몇 기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기사들과 병사들이 바삐 움직이는 가운데 이번 일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이브스햄의 사촌과 그의 아들이 하늘에서 떨어졌고, 마지막으로 실레스틴이 무지 개운한 얼굴로 땅에 우아하게 착지했다. 이번에도 역시 그녀의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우훗, 너무 즐거웠어요!] 너무 좋아하는 그녀의 모습에 내가 그녀에게 이상한 취미가 생기게 해준 건 아닌지 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좋았다니 다행이네. 어쨌든, 사람들을 기절 시키는 선에서 끝내줘서 고마워.] [그거야 해인님이 원하셨잖아요.] 그렇게 실레스틴의 행복해 하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나는 쉽게 이번 일을 끝낸 덕에 무지 좋아 하는 기사들과 병사들을 뒤로한 채 지라르경과 내 방으로 돌아갔다. "역시... 라고 해야 할까요? 아까 레이디 엠브로스양을 구해주실 때도 대단하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더 대단하시군요." "칭찬은 고맙지만 크게 기쁘지는 않네요. 이건 다 부모님 잘 만나서 생긴 능력이거든요." 내 말에 지라르경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스님께 물려받으신 거겠죠? 주디스님도 정말 대단한 정령사셨습니다." 지라르경은 어머니에게 도움을 받아서 그런지 거의 숭배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아마도 나의 이런 능력은 어머니보다 아버지 영향이 더 컸을테지만,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머니께 물려 받은 것도 있고, 아버지께 물려 받은 것도 있죠." 그러자 지라르경이 나를 바라봤다. "제가 주제 넘은 질문을 드리는 건지 모르겠지만... 해인님의 아버지라는 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주디스님의 배우자 되시는 분이니 결코 평범하지 않을 듯 싶습니다만..." "절대 평범하지 않죠. 아마 이 세상에 어머니 같은 분은 단 한분이었을걸요?" '정령왕을 남편으로 삼다니 말야.' 하지만 이 말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그쯤에서 입을 다물자 지라르경은 내가 말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우리는 그런 침묵 속에서 내 침실에 도착했다. 안에는 나보다 서너살 어려 보이는, 그러니까 대충 16, 7세쯤 보이는 소년이 침대보를 정리 하다가 내가 들어서는 걸 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누구지?" "녭, 이제부터 백작님 시중을 들어드릴 캘빈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햇볕에 그을린 건강해보이는 피부에 나와 비슷한 키를 가진 그 소년은 반짝 반짝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머리에 황금색이 섞인 갈색 눈을 가진 그 소년은 콧잔등에 주근깨가 나 있고 뺨은 발그레한 것이 아직 어린애의 모습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 소년의 씩씩한 인사에 지라르경이 설명을 덧붙였다. "집사인 엘버트님의 막내 아들입니다. 몇달 후면 17세가 되지요." "아, 집사라면... 아까 그?" 계승식 전에 지라르경과 같이 내 옷을 갈아 입히던 사람을 떠올리며 묻자 지라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어딘지 집사와 이 소년의 얼굴이 닮은 듯 했다. "그래... 네가 내 시중을 들게 되었다니... 잘 지내보자." 작위를 이어받아 백작이 된 나에게 내 시중을 담당할 전속 시녀나 하인이 없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머리로는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평생 시중을 받으며 살아본 적이 없던 내가 막상 시종을 갖게 되니 조금은 어색했다. 그래 어색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자 켈빈이 다시 싹싹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녭. 이제 주무실 거지요? 목욕하시고 주무실 건가요, 그냥 주무실 건가요?" "간단하게 씻고 그냥 잘 거야." "그럼 제가 옷을 벗겨 드리겠습니다. 씻을 준비도 해드리구요." 켈빈이 부지런을 떨며 나에게 다가오자 지라르경이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뵙도록 하지요. 혹시 제가 필요하실 일이 생기면, 제 방은 백작님 바로 옆 방이니 쉽게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세요. 지라르경도 푹 쉬세요." "예." 지라르경이 침실 밖으로 나가는 사이 켈빈이 익숙한 솜씨로 실크 레이스로 된 타이를 풀고 겉옷을 벗겨 정돈했다. 그 소년이 내 겉옷을 구겨지지 않도록 의자에 걸쳐 놓는 모습에 나는 그 동안 계속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아, 그러고보니 켈빈 깜빡했는데..." "녜?" "너, 혹시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니?" "물론이죠. 15세가 된 후부터 어머니 심부름으로 자주 마을에 갔다 왔는 걸요. 무슨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래, 잘됐구나. 그러면... 아, 아니다." 나는 켈빈을 통해 잠시 잊고 있었던 듀비와 잭슨에게 연락을 취하려고 했지만, 생각해보니 지금은 새벽이었기에 연락을 취하기에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무슨 일이신데요?" "그게... 그래, 펜하고 종이좀 가져다 주겠니? 아, 씻을 물 준비해주고 갔다주면 좋겠어." 그렇다고 내일 아침 일찍 사람을 보낼 생각을 하니, 지금 자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듯 싶었다. 그렇다고 지금 보내기는 그렇고 해서,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녜. 아, 그리고 이거 갈아입으실 옷인데요, 제가 시중 들어드릴까요?" 잠옷으로 보이는 옷을 꺼내들고 묻는 켈빈에게 나는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나 혼자 갈아 입을 수 있으니까 걱정 마." 간단하게 씻고 잠옷으로 갈아 입은 뒤, 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 채 며칠 성에 머물겠다고만 쓴 편지를 써서 슈리엘을 통해 잭슨에게 전달 한 후에야 나는 침대에 들 수 있었다. 폭신한 침대에는 부드러운 실크로 된 이불 위에에 털이 고스란히 달린 동물 가죽으로 만들어진 이불이 얹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따뜻한 물이 담긴 가죽 주머니가 들어 있어 침대 안을 따스하게 뎁혀 놓고 있었다. "오오, 좋은데? 이 맛에 사람들이 귀족이 되려는 걸까나?" 침대 안의 기분 좋은 따뜻함에 녹아내린 나는 마악 쫓아오는 잠을 반갑게 맞으면서 중얼 거렸다. 하지만 그 다음날이 되자 나는 인상을 북북 쓴 채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왜 귀족이 되려는 거지? 이렇게 귀찮은데 말이야." 그도 그럴 것이, 약간 늦잠을 자고 일어난 나를 기다리는 건 정말 귀찮은 빽빽한 스케줄이었던 것이다. 아침 겸 점심을 먹은 나에게 일단의 하녀들이 달려와 내 옷의 치수를 재고 나자 이브스햄과 집사가 와서 대강의 스케줄을 말해주는데 한숨만 푹푹 나올 뿐이었다. 우선 그 날은 점심때부터 오후 늦게까지 성 밖에 있는 넓은 숲에서 사냥이 있었고, 저녁에는 그날 포획한 사냥물로 벌어지는 가벼운 만찬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낮에는 귀족들과 같이 온 기사들 끼리의 검술 대회가 있었고 - 거의 귀족들 구경거리였지만, 진검을 사용하는 무시무시한 대회였다. 물론 진료팀은 대기하고 있었고, 큰 상품도 걸려 있었다. - 그날 저녁에는 그 기사와 주군을 축하하는 파티가 있었다. 그 다음날에도 또... 하여간, 매일 파티, 파티, 파티가 있었는데 이놈의 파티는 올 해의 마지막 날 밤이자 새해 첫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때까지 나는 항상 전 백작과 조엘과 같이 있었지만, 그들 말고도 다른 귀족들에 둘러 쌓여 있었기에 개인적인 이야기는 전혀 할 수 없었고, 대니 형을 만나기는 했지만, 다른 이들의 눈 때문에 제대로 인사 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새해 파티를 하고, 새해 첫날에는 파티의 피로를 씻고 그 다음 날이 되어 귀족들이 모두 자기 영지로 떠나고나서야 나는 드디어 크게 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아, 정말 지겨웠어. 도대체 무슨놈의 파티를 그렇게나 오래 하는 건지 원..." 자신의 영지를 향하는 귀족들을 배웅하고 돌아서자마자 나는 그동안 계속 미소 짓고 있느라 경련이 일 것만 같은 볼을 주물러 근육을 풀어주며 투덜 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브스햄이 - 사실 그에게 불평 하느라 투덜댄 거였다. -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귀족의 세력이 크면 클 수록 파티의 기간 또한 늘어나니까요. 파티의 날짜는 그 귀족의 부와 권위를 자랑하는 한 수단이거든요." "그래도요... 어휴, 다시는 이런 파티 하고 싶지 않네요." "뭐, 좋을 대로 하십시오. 이제 백작님은 당신이시니까요." 공손한 어조로 말하는 이브스햄을 힐끗 곁눈질한 나는 그 동안 묻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못해 묻지 못했던 걸 꺼냈다. "그나저나... 따님은 어떠세요? 이제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내 질문에 이브스햄의 얼굴이 흐려졌다. "정신은 차렸습니다만... 아직 침대에서는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계속 회복되고 있으니 얼마 후에는 일어나 걸어다닐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이게 모두 백작님 덕분이지요." "그런가요?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럼 완전히 회복될 수 있는 겁니까?" "정상... 으로는 돌아오지 못한답니다. 우선은... 얼굴도 문제고... 여자애인데..." "아..." 그러고보니 엔다이론이 그녀를 도와줄때에는 그녀의 얼굴이 화상으로 인해 본래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해 있었다. 그건 완전히 회복이 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후우... 제 잘못으로 인한 벌을 딸이 대신 받는 느낌입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 죽겠다는 소리를 하지 않지만... 그건 자기 얼굴을 아직 못 봐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레이디 엠브로스양께 무슨 일이 있나보죠?" 이브스햄이 죄책감 어린 어조로 중얼거리듯 말하는데 뒤에서 누가 끼어들어 우리 둘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브스햄의 딸인 에르미아 엠브로스의 일은 물론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이스파엘과 벤자민에 대한 일 모두를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조엘이 싱글 싱글 웃으며 서 있었다. 다른 귀족들은 다 자기 영지로 돌아갔는데 조엘만은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이다. "레이디 엠브로스양이 안 보여서 이상하다고 생각 했는데, 무슨 일입니까?" 그가 다가오며 이브스햄을 향해 묻자 이브스햄은 금방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미소까지 띄우며 대답했다. "별거 아닙니다. 그냥 제 딸 아이가 몸이 안 좋아 요양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낀 건데, 귀족이 되려면 연기 솜씨도 뛰어나야 할 듯 싶었다. "그렇습니까? 그거 참 안타깝군요. 제가 위로차 방문하고 싶습니다만..." "감사하지만,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절대적인 안정을 취해야 해서요. 대신 맥알파인 자작의 고마운 마음은 전해 드리죠." "그래주시겠습니까?" 그들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 보다는 우선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버트!" 커다란 홀에서 하인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던 엘버트 집사를 발견한 나는 그를 부르며 다가 갔다. 그러자 엘버트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나를 맞았다. "부르셨습니까, 백작님." "사람 좀 데리고 왔으면 하는데요." "말씀 하십시오." 나는 엘버트에게 잭슨과 듀비가 머물고 있는 여관의 이름을 대면서 그들을 데리고 와줄 것을 부탁했다. 귀찮은 귀족들도 다 보내 버렸으니 어떻게 된 영문인지 궁금해 하며 날 기다리고 있을 듀비와 잭슨을 데리고 오는 것은 물론, 내가 백작이 된 것도 알려줘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잭슨을 통해 레이언과 크리스에게도 연락을 취하고 말이다. 상회를 그만 둘 생각은 없지만, 얼결에라도 내가 백작이 되었으니 상회와의 관계도 바뀌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브스햄과 그의 사촌 동생에 대한 일도 결정을 내려야 했다. 더블어 에르미아 엠브로스를 죽이려 했던 그 괴인에 대한 처리까지도 말이다. '골치 아파.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못 잡았는데...' '골치 아파.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못 잡았는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제는 내 전용 서재가 된 백작의 서재로 향했다. 그 곳에서는 여전히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어머니가 부드럽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나는 계속 잊고 있었던 또 다른 사실 한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내 그림자처럼 행동하는 지라르경을 돌아보았다. "지라르경, 미안하지만 자리 좀 비켜주겠어요?" 지라르경은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내가 단호한 표정을 하고 있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랜만에 연무장을 갔다 오도록 하죠. 한시간이면 되겠습니까?" "네, 충분해요." 그가 서재 문을 열고 나가자 나는 재빨리 서재의 탁자에 고이 올려져 있는 주전자를 들어 컵에 따랐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불렀다. "아버지~ 좀 나와 보실래요?" 원래 지라르경이 있어도 아버지의 모습은 그의 눈에 보이지 않을테고, 정령의 대화법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그가 전혀 눈치채지 못할테지만, 사람을 앞에 두고 안 그런 척 하기도 미안해서 아예 그를 내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불러내는 것도 물의 정령에게 부탁을 할 수도 있었지만, 예전에 아버지에게 이 세상의 모든 물은 아버지와 연결이 되어 있기에 그 모든 물들이 아버지의 귀이자 눈이라는 말을 들어 한번 해본 거였다. 그런데, 정말 역시나... 내가 부르자마자 컵 속에 얌전히 담겨 있던 물이 공중으로 치솟더니 쭈욱 늘어나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런데, 웃기게도 나온 건 아버지 뿐이 아니었다. 서재 한쪽에 마련된 커다란 대리석 벽난로 안에서 타오르며 서재 안을 훈훈하게 뎁혀주던 불꽃이 화르르 치솟아 오르며 그 곳에서 이프리트가 모습을 드러냈고, 창문도 안 열었는데 갑자기 부드러운 소용돌이 바람이 생기며 그 곳에서 실피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재의 마루바닥 틈새에서 흙가루가 마구 솟구치더니 허공에서 뭉쳐저 노아스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거였다. "어라, 나는 아버지만 불렀는데..." 그들의 모습에 내가 난처한 표정을 띄우며 중얼거리자 실피드가 즉각적으로 반응해왔다. "왜, 우린 오면 안돼냐?" "에... 그건 아니지만... 그게...."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여주려고 부른 건데 다들 몰려오면 창피하지 않겠는가? 그래 아버지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하며 아버지쪽으로 시선을 돌렸더니만, 내가 뭐라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눈은 그리움에 젖은 채 어머니의 초상화를 줄곧 바라보고만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이런 아버지의 무방비스러운 상태를 가만히 놔둘 실피드가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실피드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한번 쳇 거린 후 고개를 돌리더니 못본 척 해주는 거였다. 그리고 이프리트와 노아스도 슬그머니 아버지의 주위에서 물러나 그가 다른데 신경 쓰이지 않도록 배려해주는 거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나는 왠지 마음이 따뜻해져 옴을 느꼈다. 그리고 신께 정령왕이 단 한 명이 아닌 네명이나 있게 해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아버지가 정신 없이 어머니의 초상화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이프리트와 노아스는 나와 실피드를 데리고 서재와 연결되어 있는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옆방과 서재는 두터운 나무 문이 달린 입구로 연결 되어 있었는데, 그 옆방에는 커다란 책장에 책 대신 수많은 서류들이 질서 정연하게 놓여져 있었다. 즉, 그 옆방은 백작의 사무실이었던 셈이다. 그 모든 서류들은 엠브로스 영지와 백작가에서 벌인 일에 대한 기록들과 보고서들이었다. 그리고 책장들 사이로 청동으로 만들어진 굳건해 보이는 커다란 서류함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중요한 서류들만 따로 추려 보관되어 있었다. 서류함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달려 있었는데, 그 자물쇠의 열쇠는 며칠 전에 이브스햄이 나에게 넘겨 줬었다. 그리고 그 방 한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이브스햄과 집사가 골라 놓은 서류들이 두툼하게 쌓여 있었다. 이것들은 현재 엠브로스 백작가에 대한 보고서들로 백작이 된 내가 가문에 대한 걸 파악하게 도와줄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것들을 나에게 넘겨 주면서 집사와 이브스햄은 내가 서류를 제대로 이해 하도록 도와주려 했지만, 이래뵈도 한국에서 고등 학교 수업까지 받았고, 반년 동안 공작가의 집사일을 돕던 나였기에 - 그때 배운 것들을 지금 써먹게 될 줄은 몰랐지만 -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뭐, 어차피 생소한 분야의 전문 지식이 아닌, 단순한 보고서였으니 말이다. "이것들은 뭐냐?" 실피드는 사무실 가운데에 마련된 소파에 털썩 앉으며 그 앞 탁자에 놓여 있던 서류들을 가벼운 바람으로 허공에 날리며 물었다. "아앗, 건드리지 마세요. 그거 나중에 제가 다 검토해야 할 것들이라구요." "헤에, 그 경호 무사인가 뭔가를 한다더니만, 이제는 서류 가지고 씨름도 하냐?" 실피드는 순순히 내 말대로 서류들을 다시 제 자리에 얌전히 내려놓더니만 그 서류들 중 하나를 가져와 읽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엠브로스 영지의 현황? 너 언제 엠브로슨지 엠브런슨지 하는 영지의 관리인이 되었냐?" 실피드 뿐만이 아니었다. 이프리트와 노아스도 자리를 잡고 앉아 흥미진진한 얼굴로 서류들을 읽기 시작하는 거였다. 정령왕들이 언제 인간의 영지 관리에 관심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그래 나도 자리를 잡아 앉으면서 푸념했다. "관리인이 아니예요. 어머니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얼결에 여기 백작이 되었단 말예요." "호오, 백작? 그거 인간들 사이에서는 꽤 높은 자리에 있는 거지?" 노아스의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묻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하지만, 높은데 있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더라구요. 백작 된지 이제 일주일이 지났건만 골치 아픈 일을 해결해야 한다고요." "저런 무슨 일인데 그러니?" 이프리트의 부드러운 말에 나는 그 동안 백작의 성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모조리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하다보니 좀 이상했다. 다른때 같으면, - 가끔 심심할때마다 내가 뭘 하나 보기는 했지만도 대부분은 내버려 뒀었다 - 내가 갑작스럽게 정령들을 부르면 무슨 일인가 꼭 살펴보는 정령왕들이, 이번에는 나이트급 정령들이 놀라서 내 곁으로 달려 왔는데도 무슨 일인지 알아보지는 않았단 말인가? 어쨌든, 나는 쭈욱 있었던 이야기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물어봤다. "그런데, 정말 몰랐어요?" 내 질문에 이프리트는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했고, 대신 노아스가 깔깔 거리며 대답했다. "모르긴! 엘라임이 네가 꽁꽁 묶인 거 보고 당장에 달려가려고 하는 걸 우리가 막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니? 이프리트가 네가 태연하게 가만히 있는 걸 보고 뭔가 생각이 있는 거 같다고 해서 엘라임을 못가게 막았다고. 우리 잘 했지?" "아하하... 정말 잘 하셨어요." 그때 아버지가 나타났으면 어떻게 될지 쉽게 상상이 갔다. 아마... 성이 통채로 물바다가 되던지 터져 나가든지 했을 거였다. 저번에 웨스트모어랜드 후작령에서처럼 피가 안 멈춘다고 소리치며 아버지의 정신을 딴 데로 돌려놓을 수도 없었을테니까. 하지만 그 생각을 하면서 나는 왠지 커다란 마음의 짐을 덜어 놓은 듯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 동안은 이브스햄이나 그의 사촌 동생 부자, 그리고 에르미아와 그녀를 죽이려 했던 그 정체 모를 남자를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 지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 의논을 해야 할지 몰라 혼자 전전긍긍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라르경이나 집사가 나에게 극진히 대해주기는 했지만, 그들은 모두 이브스햄에게도 그렇게 해왔을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브스햄이 나에게 공손히 대한다 해도 그가 처벌 받을 당사자였으니 그에게 의논 하는건 더더욱이나 어려웠다. 시내의 여관에 묶고 있는 듀비나 잭슨은 마음을 터놓는 친구이자 동료라고 생각은 하지만, 집안 일을 시시콜콜 이야기해주며 조언을 구하고 싶지는 않았고, 조엘은 이브스햄에게 어떻게든 이 집안에 대한 정보를 얻어 내려고 - 나에게 안 그러는게 신기하지만, 나에게 다가오기만 하면 이브스햄이 대신 나서거나 지라르경이 막긴 했었다. 그렇다고 포기하는게 이상하긴 했지만.. - 탐색전을 벌이고 있었으니 더더욱 불가능 했다. 그래 의논할 대상 하나 없어 불안함 속에서도 외로움마저 느끼고 있었는데, 이렇게 아무런 어려움 없이 터놓고 이야기할 대상들을 생각해내지 못했다니 웃음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하기야, 솔직히 정령왕들은 인간 세상에 관심을 표하지 않았으니 관심 없는 일에 끌어들이는 게 미안해서 처음부터 아예 이런 일에 대한 의논 상대에서 제해놨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은, 진지하게 들어주건 건성으로 듣고 잊어버리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다시금 느끼는 순간이었다. '앞으로는 그들이 귀찮아 하건 말건 이런 일에 자주 애용해야지. 우후후...' 내가 그런 생각을 하던 말던 세 정령왕은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더니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기 시작하는 거였다. 그러다 잠시 후 실피드가 머리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내뱉었다. "에잇, 정말 골치 아프군. 그냥 다 죽여 버리면 돼잖아?" 하지만, 그 뒤를 노아스가 즉각 반박했다. "그 이브스햄이라는 녀석은 죽이면 안됀다잖아." 절대로 죽이면 안됀다는 건 아니었다. 단지... 곤란하다는 거였지. "안돼긴 뭐가 안돼? 그냥 간단하게 죽여 버려. 골치 아프게 머리썩히지 말고." 실피드의 투덜거림에 노아스가 또 반박했다. "하지만, 해인이가 죽이기 싫다잖아." "그럼 그냥 살리던가." "하지만 해인이를 죽이려 한 녀석들을 어떻게 그냥 놔둬?" "그럼 죽여!" 그런 어린애들 같은 논쟁을 중단 시킨 건 이프리트였다. "자자, 둘다 장난은 그만하자고." 그러자 정말 그게 장난이었던지 둘은 금새 입을 다무는 거였다. 이프리트는 둘이 조용해지자 온화하지만, 오래 산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연륜 있는 깊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해인아,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지?" 그의 질문에 나는 삐질 웃으며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그래서 말씀 드린 건데..."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모든 상황을 제외하고 그들만 놓고 본다면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사실... 그냥 놔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약간 머뭇거리며 말하자 실피드가 찌푸린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바보냐? 너 죽이려고 했던 놈들을 그냥 놔줘? 본때를 보여줘도 모자를 판에..." "으음... 그렇기는 하지만... 뭐랄까... 미워지지가 않는 걸요. 그들이 정말 저를 죽일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구... 아마, 죽이지 못하리란 걸 알아서 그런가?" "이런, 멍청이. 그렇다고 그냥 냅둘 거냐? 어쩌면 그 녀석들은 네가 이번에 그냥 봐주면 얼씨구나 하고 다음에 또 죽일 기회를 노릴지도 몰라." 실피드의 실랄한 말을 노아스도 거들었다. "음, 그건 그러네. 해인아, 네 말에 의하면... 네가 사라지면 다시 작위는 그 이브스햄인지 소시지 햄인지 하는 그 인간 딸에게 넘어가는 거잖아. 그 딸이 없어지면 그 사촌 아들인지 뭔지에게 넘어가고. 그러니 그들이 또 널 죽이려 하지 않을까?" 그녀의 말에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 생각은 미처 못했어요. 저는 단지 이브스햄 사촌이 감옥에 갇혀 있고,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날 죽이려 했은 처벌을 면치 못할 거라는 생각만 했죠. 제가 보기에는 이브스햄이나 그 사촌이나 똑같은데 명분이나 필요성 때문에 한 사람은 처벌하고 한 사람은 냅둔다는 건 싫거든요." "아, 그럼 좋은 생각이 났어. 널 죽인다고 해도 백작 작위가 그들에게 안 넘어가게 하면 되잖아? 그럼 그들이 널 죽일 필요가 없으니, 너는 네가 좋을대로 그들을 그냥 냅둬도 괜찮지 않을까?" 노아스가 손벽을 짝 치며 하는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거 참 괜찮은 생각인데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실피드의 말도 이어졌다. "거기다 그 사촌 녀석인지 뭔지 하는 녀석도 너에게 도움이 될 거 같은데?" 그에게 시선을 돌리니 그는 아까 들었던 서류 뭉치 중 앞장을 몇 장 넘긴 채 읽고 있다가 우리를 향해 서류를 들어 보였다. "여기에 의하면 그 녀석이 영지를 꽤나 잘 다스린 모양이야. 그 녀석이 다스리기전에는 별 소득이없던 영지인데 그 녀석이 다스린 후 3년이 지나자 소득이 점차 올랐군. 여기에 덧붙여진 설명에 의하면 그 녀석이 뭔가를 개발했다고 쓰여 있는데?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호오, 그래? 그럼 그 사촌 녀석이 네가 없어도 작위를 못 받게 할 방법은 있는 건가?" 노아스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국법에 의하면 혈연이라 할지라도 정당한 근거에 의해 가주가 계승권을 박탈 할 수 있어요. 지금처럼 벤자민 엠브러스가 나를 죽이려 한 이상 그건 쉽겠죠. 그에게 엠브러스라는 성을 빼앗으면 돼요. 문제는... 에르미아 엠브로스는 그게 어렵다는 거죠. 그의 아버지인 이브스햄이 절 죽이려 했지만 백작으로 만들어준 사람이니까요." "뭐가 문제야? 그 여자애는 크게 다쳤다며?" "다쳐도 살아 있는 한 작위 계승권이 있죠. 여자라서 결혼하지 않는 한..." 내가 말하는 중에 실피드가 얼른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잘됐네. 얼른 결혼시켜버리면 돼잖아?"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문제는 그녀가 결혼한다 해도 계승권을 가질 수 있다는 거죠. 작위를 가진 사람이 후손 없이 사망했을 때 그 작위를 물려받을 가까운 친적 남자 (우리나라로 말하면 6촌이다. 할아버지가 형제인 경우까지) 가 없으면 결혼을 했다 해도 딸이 물려받는게 가능해요." 내 말에 세 정령왕이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거였다. "하기야, 저 녀석이 후손을 생산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생산 할 가능 성이 있기나 한 거야?" "모르지. 저 녀석 엄마도 엘라임에게서 후손을 보게 했으니..." 그들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저 크게 헛기침을 했다. "험험, 어쨌든... 그래도 이브스햄의 말에 의하면 그녀가 정상으로 돌아오기는 힘들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그녀는 그냥 놔둘까봐요. 몸이 안 좋은데 작위가 무슨 소용 있겠어요? 게다가 이브스햄이 날 죽이려 한다 해도 제가 쉽게 죽어주지도 않을테고 말예요. 이브스햄에게는 딸이 저렇게 된게 가장 큰 형벌일테구요. 뭐, 우선은 제가 그녀를 직접 보고 판단할 거지만요." ==================================================================== 에구, 감기때문에 정신이 없습니다. ㅡ.ㅡ;; 그렇지 않아도 교정기를 끼는 바람에 며칠째 식사도 제대로 못해서 기운도 없는데 감기까지... ㅠ.ㅠ "뭐, 네 일이니가 너 좋을대로 해라." "그래, 그래. 여차하면 우리도 있으니까 걱정 말고." 실피드와 노아스의 말에 이프리트도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도움을 기대하지 못했던 세 정령왕 덕분에 어느정도 결정을 내릴 수 있어 홀가분해진 나 또한 그들에게 가벼운 미소를 되돌리는데 서재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백작님, 저 집사입니다." 그래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갔다. "네, 무슨 일입니까?" 내 대답이 들리고 나자 서재의 문이 열리며 언제나처럼의 단정한 모습을 한 엘버트가 들어왔다. "말씀하신 분들을 모셔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응접실에 계십니다." "제가 직접 가보도록 하죠. 아, 그 둘이 머물게 될지도 모르니 방을 마련해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엘버트 집사가 나간 후, 나는 여전히 어머니의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를 힐끗 보면서 그냥 놔두고 나갈 지, 아니면 나 나간다고 말을 해야 할지 갈등하고 있는데 사무실 쪽에서 우르르 나온 세 정령 중 이프리트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냅두거라. 지금 무슨 이야기인들 귀에 들어 오겠냐. 이럴때는 그냥 놔두는게 제일이란다." "그럴까요? 그런데, 저 이만 나가봐야하는데 어쩌실래요?" 내 말에 노아스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는 해인이 따라갈래." 그러자 그녀의 뒤를 이어 실피드도 오만하게 입을 열었다. "바쁜 몸이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같이 가주도록 하지." "아.하.하.하... 이거...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요? 아, 이프리트 아저씨도 같이 가실 거죠?" 나는 삐질 웃으면서 세 정령왕을 달고 응접실로 향했다. 그 곳에는 듀비와 잭슨이 마치 자기 집에 온 양 고급스러운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서 대접으로 나온 다과를 즐기다가 응접실에 들어서는 나를 보더니 눈이 휘둥그래진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 손을 들어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두 녀석은 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나에게 득닥같이 달려와 멱살이라도 쥐고 흔들 태세로 외쳤다. "야, 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해인님!!" "아하하~~ 오랜만이지?" 내 태연한 말에 잭슨 녀석이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오랜만인건 아냐? 응? 도대체가 말이야, 당분간 백작의 성에 있어야 할 것 같다는 편지 한장 보내놓고 지금까지 아무 연락 없으면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애탈지 생각이나 해봤어? 너 우리 생각이나 한 거냐?" 쉼 없이 다다다 나온 잭슨의 말에 나는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말투가 매섭기는 해도 그 안에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 그 동안 사정의 여의치가 못해서 연락도 못하고 너희들도 못 불렀어. 자, 자,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우선 좀 앉자." 내 말에 그 둘은 진정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여전히 나에게 원망의 시선을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걱정 많이 했습니다, 해인님." 듀비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잭슨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영문을 모르겠다. 네가 백작의 성에는 왜 온 거냐? 나는 혹시나 붙들려 온 건 아닌가 싶어서 걱정했는데 어째 그건 아닌 거 같다?" 그의 말에 나는 삐질 웃었다. "으음... 그게말이지... 내가 얼결에 여기 백작이 되어버렸어." 내 말에 듀비는 '그런가보다...' 하는 표정이었지만, 잭슨은 그렇지가 못했다. ".... 해, 해인아?" "응?" 부들부들 떨리는 잭슨의 목소리에 내가 부드럽게 응답해주자 그가 얼빠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요 며칠 피곤했는지 헛것을 들은 것 같아. 미안하지만 다시 말해줄래?" "으음... 그게 말이지... 내가 얼결에 엠브로스 백작이 되어버렸다구." 내 대답에 여전히 얼빠진 표정의 잭슨이 물었다. "그게... 가능한 거냐?" "그게... 내 외할아버지께서 엠브로스 백작이셨다네." "그, 그럼... 너 귀족이었냐?" "으음... 그게.. 그렇게 되겠지?" 내 말에 잭슨은 벌떡 일어나더니 이번에는 정말 내 멱살을 잡고 탈탈탈 흔들었다. "으음이 아니야, 으음이!! 지금이 그렇게 태평하게 말할때야?" 고함을 지르듯 소리 친 잭슨은 그쯤에서 내 멱살을 쥔 손을 탁 놓더니만 절망에 빠진 포즈를 취했다. "아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오랜만에 괜찮은 녀석이랑 동료가 되었다고 생각 했더니만, 그 녀석이 재수없는 귀족 녀석이었다니~~ 거기다가 이제는 뭐? 백작이 되었다고? 아아, 정말 운도 지지리도 없지...." "이봐 잭슨... 그러니까... 나도 얼결에 되었다니까?" 내 말에 잭슨은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나를 째려봤다. "얼결은 무슨 얼어죽을 얼결!! 원래 작위를 받을 녀석이 어떻게 되기라도 했어? 갑자기 덜컥 너에게 떨어지게!!" "응." 내 단호한 말에 잭슨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응?" "으응. 그렇다니까. 그래서 정말 얼덜결에 내가 받게 된 거라구." 틀린 말은 아니었다. 뭐, 원래 계승권은 내가 일순위였지만 이브스햄은 딸내미가 아프기 전까지는 그녀에게 물려줄 계획이었으니까. 이런 내 말에 '그랬군.' 이란 표정을 지으려 했던 잭슨의 눈초리가 뭔 생각이 떠올랐는지 다시금 치켜 올라갔다. "그래도! 그래도, 왜 네가 귀족이라는 걸 말 안 했어?" "그거야... 나도 얼마전에 알았으니까." 내 말에 잭슨은 흥 하고 콧방귀를 끼었다. "말도 안돼. 태어나서 지금까지 모르다가 얼마전에야 알았다고? 그럼 얼마 전에는 어떻게 알았냐?" "거야... 외할머니를 만났으니까." "외할머니?" 내 대답에 뒤통수를 한대 맞은 것 처럼 멍한 표정을 짓던 잭슨은 곧이어 고개를 갸웃 하더니 풀죽은 표정이 되었다. "으음... 으음... 그, 그랬구나... 으음... 미안해... 아, 저기... 늦었지만, 백작 된거 축하한다." 그의 풀 죽은 사과에 나는 싱긋 웃어보였다. "원해서 된건 아니지만, 어쨌든 고맙다." 잭슨이 미안해하는 건 내 외할머니가 엘프라는 걸 지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벨레니국은 흔하지는 않지만, 라센 국이나 왈그린 국에는 하프 엘프가 흔했다. 사람과 엘프가 종족을 초월하는 사랑으로 인하여 탄생 한 것이었으면 나쁘지는 않았을테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잭슨 또한, 그런 아픔을 가진 하프 엘프였던 것이다. 뭐, 내 외조부모님은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신 거고, 그래서 어머니가 태어나신 거지만, 아마 어머니도 이 나라에서 하프 엘프라는 것 때문에 이런 저러한 상처를 많이 받으셨을 거였다. 나는 때를 잘 만나고 부모님을 잘 만난 덕택에 그런 일은 전~ 혀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고보면, 아버지가 날 태어나자마자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보낸 걸 고맙게 여겨야 할 듯 하다. 어쨌든, 잭슨은 나 또한 엘프의 혼혈이었기에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어도 이런 저러한 상처를 받았으리라 오해하고, 그런 날 몰아붙인걸 미안하게 생각하는 거였다. 그리고, 엘프의 혼혈이면서도 백작이 된 걸 축하해주는 거였고 말이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냐? 상회는 그만 두게 될 거냐?" 다시 진정을 하고 자리에 앉은 잭슨은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와 나의 인연은 같은 상회에 소속 되었다는 걸로 시작되었으니, 잭슨에게는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물론, 나도 그때문에 그를 불렀고 말이다. "그게, 사실 시작한지도 얼마 안됐고, 나쁘지도 않아서 그만두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아무래도 백작이 된 이상 전 처럼 계속 할 수는 없을 거 같아서... 그리고 레이언과 크리스의 의견도 들어봐야 할 것 같고 말야." "그렇겠지?" 내 말에 잭슨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듀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해인님은 돌아가지 않으신 겁니까?" "으음... 그게 말이죠 듀비, 아무래도 내가 여기서 새로운 일을 맡게 되어서요. 당분간은 계속 여기에 있어야 할 듯 하거든요." "그, 백작이라는 일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그럼 그만 두시면 되잖습니까?" [멍청하기는, 그걸 왜 그만 두냐?] [쉽게 그만 둘 수도 없는 거야.] [어쩔 수 없잖냐? 저 블루 엘프는 인간이 아니니...] 실피드, 노아스, 이프리트로 이어지는 세 정령의 잡담을 한 귀로 흘려 들으며 나는 삐질 삐질 설명하기 시작했다. "으음, 으음... 제가 맡은게 말이죠, 한번 맡은 이상 제가 하기 싫다고 그만 둘 수 있는게 아니라서요... 에... 그러고보니 듀비는 어쩌실래요? 저는 당분간 여기 있고 잭슨은..." 내가 말 끝을 흐리며 잭슨을 돌아보자 그는 내가 뭔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냉큼 말을 받았다. "나는 여기서 제일 가까운 지부로 돌아가서 본부에 연락을 취해야 해요. 그래서 아무래도 우리 둘이 떨어질 것 같은데, 듀비는 어떻게 하실래요?" 잭슨의 말에 듀비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해인님은, 그 상회 일을 그만 두시는 겁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나는 상회 일을 계속 하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다른 형태겠지요." 잭슨도 불쑥 끼어들었다. "아마 본부측에서도 백작이 참여하겠다는데 마다할 리가 없을 걸요? 해인이가 그만 두겠다고 해도 끝까지 붙들고 늘어질 겁니다." "문제는... 다른 일도 맡는 바람에 제가 전적으로 상회 일만 할 수 없다는 거지요." "음, 음." 내 말에 잭슨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줬다. 우리 둘의 이야기를 들으며 열심히 고민하고 있던 듀비는 드디어 결정을 내렸는지 단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그냥 해인님 곁에 남아 있겠습니다. 그래도 상회에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하겠지요?" "에... 뭐... 해인이가 상회를 돕게 될 테니, 해인이가 잘 되는 게 상회로써도 이롭겠지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간접적일텐데..." 아무리 듀비가 나 때문에 상회에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나와 상회 중 나를 선택할 지는 몰랐는지 - 듀비는 아무래도 뛰어난 무사였기에 잭슨은 은근히 같이 가기를 원했던 모양이다. -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솔직히, 나는 듀비가 내 곁에 남아 있어주겠다는 것이 기뻤지만, 앞으로 내가 백작으로써 살다가보면 듀비가 상회에 있던 것 보다 힘들어질게 뻔했기에 걱정도 되었다. "듀비, 같이 있어주겠다는 건 정말 고마운데요, 제가 이번에 새로 맡게된 일은 인간들 속에서만 활동하는 거거든요. 상회에서는 여러 이종족들이 같이 있어서 어느정도 괜찮았겠지만, 제 곁에 있는다면 훨씬 더 불편할 거예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내 걱정스러운 말에도 듀비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저는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그의 단호한 말에 잭슨은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인간들이 어떤지 아직 잘 몰라서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거예요. 막상 당해보면 힘들텐데..." "괜찮습니다." "뭐, 좋을대로 하세요. 나중에 힘들면 그때 상회로 돌아가셔도 될테니까." 잭슨이 그렇게 말하며 날 힐끔보자 나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럼, 잭슨 혼자서 가는 걸로 하고...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도와줄테니까. 언제 출발할래?" "이왕 성까지 온거, 호사는 한번 누려보고 가련다. 내일 출발할게. 도와주려면... 후후후, 여비나 쬐께 보태줘. 아앗, 말도 필요하다." "알았어. 아, 방을 준비해 놓으라고 했는데 가서 쉴래?" 내 말에 잭슨이 반갑다는 듯 손을 번쩍 들었다. "응응, 나는 가서 쉬련다. 아, 목욕도 할 수 있을까?" "시종을 붙여주라고 할테니까 시종에게 말해. 듀비는 어쩔래요?" "저는 별로 피곤하지 않으니까 해인님과 함께 있겠습니다." "그러세요. 할 일이 있으니 이만 갈까요? 으음... 그런데 듀비?" 막 일어나려던 나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듀비를 바라보았다. "예?" 아무 사심 없이 대답하는 그에게 나는 정말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으음... 정말 미안한데요... 듀비가 제 곁에 있으려면... 아마도 호위 무사로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 물론 지금까지도 듀비는 나를 지켜주는 형식으로 내 곁에 있었지만, 그래도 '동료'로써 같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호위무사'로 있는 건 나는 고용주고 듀비는 고용된 자가 되는 걸 뜻하는 거라 괜시리 듀비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듀비는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했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거였다. "상괜 없습니다. 해인님이 편하실대로 하십시오." 내가 말하는 것의 정확한 뜻을 알고도 괜찮은 건지, 아니면 몰라서 괜찮은 건지 몰랐지만, 그래도 그가 쉽게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왠지 더욱 미안해졌다. 그래서 듀비를 단순한 무사가 아닌, 기사로 만들 방법을 궁리하며 잭슨을 시종딸려 올려 보내고 듀비를 데리고 지라르경이 있을 연무장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듀비를 단순한 무사가 아닌, 기사로 만들 방법을 궁리하며 잭슨을 시종딸려 올려 보내고 듀비를 데리고 지라르경이 있을 연무장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타앗~!" "하앗~!!" "거기! 동작이 틀렸잖아!!" "제대로 못하겠나!!"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이 성에 온 후로는 이런 저러한 일 때문에 연무장에는 이번에 처음 오는 거였다. 하지만, 왠지 분위기가 무척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이, 연무장이라는 곳은 어디나 비슷 비슷한 듯 싶었다. 1월의 차가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연무장에서는 가벼운 옷차림을 한 기사들이 열심히 교관들의 호령에 따라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러한 모습들은 맥알파인 공작가 저택에 있는 연무장에서 봤던 모습과 비슷했다. 단지, 다른 점이라고 하면 그 곳에 있던 연무장보다 조금 더 큰 곳이라는 것과, 인원수는 훨씬 많다는 것, 그리고 연무장에 있는 이들은 모두 기사들, 혹은 그들의 종자나 견습 기사들 뿐이라는 거였다. 내가 있던 공작가의 저택은 수도 안에 있어서 - 수도 안에서는 각 작위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수도 안으로 들여놓을 수 있는 기사의 수가 한정되어 있었다 - 공작가의 사설 기사단 모두가 들어올 수 없었지만, 이 곳은 엠브로스 영지 였기에 백작가의 사설 기사단이 버젓이 백작의 성에 같이 상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간 곳이 사설 기사단용 연무장이었고, 병사들용은 또 따로 있었다. 질서 정연하게 줄을 맞춰서 선 채 똑같은 검법을 선 보이는 기사들 사이로 교관들이 지나다니면서 틀린 부분을 지적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의 지대가 높은 곳에서는 몇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거기에는 내가 찾던 지라르경 말고도 생각지도 못했던 조엘과 데니까지 나와서 구경하고 있는 거였다. 사설 기사단의 훈련 모습을 남에게 보여줘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지만... 왜 무협지에 보면 남의 무공을 수련하는 걸 보는 건 큰 실례라고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게 하등 상관 없는 모양이었다. 그들 쪽으로 다가가자 사람들이 내 기척을 알아챘는지 나를 돌아보고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명목상으로든 어쨌든 여기 있는 이들 중에서는 - 정말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거지만 내가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조엘과 인사를 나누고 기사 단장인 진 윙겟 경, 부 단장인 지라르경과 가벼운 목례를 주고받은 뒤에야 나는 조엘 뒤에 목석처럼 서 있는 데니 형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나 무표정한 얼굴로 그냥 예의에 맞게 고개만 숙여 보이는 모습에 침울해진 나는 가벼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조엘과 다시 재회한 그 파티 날에는 다른 이들때문에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지만, 그 뒤로는 몇번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내가 맥알파인 공작가에 있을때 마치 친 형처럼 대해준 그였기에 이번에도 아무 생각 없이 - 신분제가 없는 세상에서 살다 온 나로써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그런거에 별 생각이 없어서 - 반가이 그를 대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게 왠일인지 대니는 전혀 나와 몰랐던 사이였던 듯, 딱딱하게 예의를 차려가면서 거리를 두는 거였다. 조엘처럼 화라도 냈으면 상황 설명이라도 할 수 있었으련만, 전혀 모르는 사이처럼 대하니 이건 아예 말을 붙일 엄두 조차 나지 않는 거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게 증오나 미움이 아닌 아예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무관심이라더니만 그 말이 정말 맞다는 걸 새삼 깨닫는 중이었다. 조엘도 갑자기 백작이 되어 나타난 나에게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으니 데니 형 또한 그 비슷한 반응을 보이리라는 것 쯤은 예상을 했지만, 그래도 나와 사이가 좋았으니 금방 풀고 전처럼 친해질 수 있을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이건 마치 까마득히 높은 절벽을 밑에서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었으니... 상황이 이러니 조엘도 어중간하게 끼어들어 중재하기도 난처했는지 그냥 수수방관하는 형편이었다. '에휴우~ 차라리 예전이 나았던 거 같아...' 잠시 데니 형 때문에 침울 모드에 빠져 있던 나는 사람들이 나와 같이 온 듀비에게 시선이 쏠려 있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다가 지라르경의 말에 의해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백작님, 같이 오신 분은 누구십니까? 아무래도... 사람은 아니신 듯 한데요." "아, 사실은 이 분을 소개시키려고 나왔습니다. 인사하세요. 이 분은 얼마전에 저와 인연을 맺게 된 블루 엘프족이십니다. 당분간 저와 함께 있을 거예요." 내 소개에 듀비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서 꾸벅 인사를 했다. "듀비라고 합니다." 다른 종족을 보는 신기함에 사람들이 듀비를 찬찬히 살펴보는 사이 나는 지라르경을 향해 설명을 덧붙였다. "지라르경, 사실 듀비는 인연을 맺은 후 부터 계속 저를 보호해주고 계셨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저를 보호해 주시려고 하는데요." 내 말에 지라르경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내 호위는 전적으로 지라르경의 담당이었는데 그걸 듀비와 같이 하게 되었으니 약간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듀비를 기사로 만들 방법을 의논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지만, 내친김에 다 말해버렸다. "그래서... 아무래도 아직 인간 세상에 적응을 못했는데 그냥 제 곁에 있는다면 어려움이 많을 것 같아서요. 듀비씨께 기사 작위를 주는게 어떨까 싶은데..." 내 말에 다시금 지라르경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백작님의... 호위 기사 말씀이십니까?" "예. 물론, 지라르경께도 계속 부탁드릴 겁니다." 내 말에도 지라르경은 못마땅한 눈으로 듀비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조금 지난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이 아니시니... 인간들 사이의 예법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지만, 실력은 확인해봐야 할 듯 싶군요. 괜찮겠습니까?" "아, 실력은 제가 보증합니다. 일류 검사의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죠."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지라르경의 말에 내가 황급히 나서서 대꾸했지만, 지라르경은 물러서지 않았다. "물론, 백작님께서 그러시니 믿음은 갑니다만, 이 나라에서는 일반 검사들과 기사들과의 기준은 좀 차이가 나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직접 확인을 해봐야 확신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내가 아닌 듀비를 보며 말하자 계속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던 듀비가 나섰다. "원하신다면." 듀비의 말에 지라르경이 피식 웃더니 자신의 허리에 찬 검을 두드렸다. "제가 상대해도 좋겠습니까?" 그러면서 은근 슬쩍 지라르경에게서 매서운 기세가 피어 올랐지만, 듀비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나 상관 없습니다." "호오, 자신만만 하시군요. 좋습니다." 지라르경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홱 돌려 연무장에서 열심히 검법을 수련하는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전원 동작 그만!!" 타닥!! 그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모든 이들이 하나같이 자신이 하던 동작을 멈추고 우리가 있는 쪽을 향하여 부동 자세를 취하는 거였다. '오오, 멋있다.' "지금부터 대련을 할테니 자리를 마련 하도록." 또 다시 떨어진 지라르경의 말에 사람들은 일사분란하게 흩어져 연무장 가운데 커다란 자리를 마련했다. 그 모습을 만족스레 훑어 보던 지라르경은 듀비를 향해 말했다. "가실까요." 지라르경의 살벌한 기세 때문에 혹시나 진검으로 대련을 하는 건 아닐까 걱정 했지만, 다행이 지라르경은 연무장으로 내려가서 듀비에게 목검을 건네주는 거였다. 기사들끼리의 대련은 보통 가검으로 하지만, 듀비에게는 가검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가검은 가짜 검이라고 해도 쇠를 두드려 만든 것이기 때문에 꽤나 비싼 거라, 일반 용병이나 무사들은 가검을 소지하고 있지 않고, 돈이 엄청 많거나, 아니면 기사들이나 소지하는 거였다. 대련이 있다고 해서 대련할 자리를 마련해주는 기사들은 그 장소에 지라르경이 직접 나서는 걸 보고 놀란 듯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와 함께 듀비를 향해 호기심 어린 시선이 쏟아지는 게 보였다. "아아... 정말 왜 이렇게 되었지? 여기 온 뒤로는 잘 되는 일이 없는 거 같아." 둘이 자세를 잡는 걸 보며 나는 한숨을 푹푹 쉬며 투덜거리는데 내 옆에서 같이 구경하고 있던 기사 단장 윙겟 경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걱정 마십시오. 저 블루 엘프라고 하는 분은 크게 다치지 않을 겁니다. 지라르경은 저래뵈도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거든요." 자신의 부하라서 그런지 윙겟 경의 표정에는 자부심이 가득해보였다. 그의 표정만 보면 지라르경이 절대로 질 것 같지 않지만, 듀비의 실력도 엄청 뛰어나다는게 문제였다. 그리고... 연륜도 훨씬 훠어어얼~ 씬 지라르경보다 많을 거고 말이다. 지금에서야 밝히는 거지만, 듀비는 나이가 많았다. 뭐, 인간의 나이 치고는 쌩쌩한 청년의 나이지만, 인간으로보자면 엄청난 나이다. 무려 233세니까 말이다. 아, 새해가 지났으니까 이제 234세인가? 그걸 떠올린 나는 다시금 한숨이 나왔다. "에휴... 쉽지 않을텐데...." "에휴... 쉽지 않을텐데...." 내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자리를 잡은 둘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대련하기 전의 예를 취하고 목검을 천천히 치켜 올렸다. 듀비는 왼손은 마치 뒷짐이라도 진 것 처럼 뒤로 돌려 그 손에 들고 있던 중검(70cm) 길이의 목검은 등에 세워 붙여놓고, 오른 손에 쥔 장검(1m) 길이의 목검을 앞으로 치켜 들고 무릎은 약간 굽힌 상태로 지라르경을 바라보았다. 그에 비해 지라르경은 장검 길이의 목검을 두 손으로 잡고 검 끝이 미간까지 올린 정자세를 취한 채 금방이라도 공격 할 듯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마주 보는 둘 사이에서는 천천히 매서운 기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이 긴장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우선은 시선 싸움, 즉 기선 제압과 서로에 대한 상대방 탐색에 들어갔다. '으음... 듀비에게 미리 지라르경을 다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할 걸 그랬나?' 하지만 지금 보니 기세 만큼은 지라르경도 듀비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 거였다. 게다가 무지 진지한 지라르경의 표정을 보니 그런 부탁을 했다는 걸 나중에라도 알게 된다면 엄청 자존심 상해 할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의원을 대기시켜 놓는게 좋을 거 같은데...' 성에는 성 사람들을 위한 의원 뿐만이 아니라 약사는 물론 그들의 보조원까지 따로 상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에르미아를 치료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느낀 건데 이 성의 사람들은 다친 사람을 치료 하는데 의원과 약사보다는 마법사나 신관을 더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거였다. 내가 잠깐이나마 마법을 배워서 아는 거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힐링 마법을 배운다고 해서 그걸 배울때 사람의 인체와 상처가 났을때의 대처법, 혹은 하다못해 기본적인 의료 행위에 대해서 자세하게 배우는 건 절대 아니었다. 아마, 치유 마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마법사나 공부하면 몰라도 말이다. 단지 힐링 마법의 원리와 마나 응용, 그리고 마법을 발현하는 법만을 배울 뿐이었다. 그 보다 더 윗단계의 회복 마법인 리커버리 마법을 배울때도 그건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러니 그냥 치유 마법만 배운 마법사보다는 처음부터 사람의 인체와 병에 대해 연구한 의원이나 약사가 훨씬 훠어얼~ 씬 에르미아에게 도움이 될 거였다. 그런데, 금방 눈에 보이는 마법이라는 것 때문인지 사람들은 의원이나 약사를 마법사보다는 한 단계 낮게 취급하는 거였다. 그건 신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에르미아 때문에 영지 내에 있는 신관을 모셔온다기에 얼떨떨해서 그제서야 신관에 대해 알아본 나였지만, 아무리 신의 축복을 받아서 엄청난 고위 신관은 떨어진 팔다리도 순식간에 붙여 버린다고는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런 능력을 개발하는데만 힘을 쏟을 뿐 의원들처럼 처음부터 의학을 공부하는 건 아닌 듯 했다. 게다가 중환자도 순식간에 살려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능력을 가진 고위 신관들은 이 세상을 통틀어 채 몇십명도 안된다고 한다. - 사실 생각해보면 고위 마법사들도 그 정도의 능력은 가지고 있었다. 그런거보면 마법사나 신관이나 비슷한 점도 많은 듯... - 그래서 제법 큰 영지라는 엠브로스 영지에 상주하는 신관들 중 가장 높은 신관이 달려와서 보여준 능력이래봤자 백작가의 마법사인 벨헤븐이 할 수 있는 힐링 마법 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라고나 할까? 뭐, 그것도 그녀에게는 도움이 많이 되겠지만서도, 그래도 내 생각에는 의원과 약사가 더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말이다. 하긴, 그들도 그녀 곁에 붙어서 꾸준히 치료하고 있기는 하지만, 마법사나 신관이 오면 그들이 의원과 약사를 제치고 치료를 주관하는 거였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내가 어깨를 다쳐서 치료를 받던 그레이험 항구의 그 그린모어 의원이 내가 신전 대신 의원을 택했다고 무지 좋아했던게 쉽게 이해가 갔다. "타앗~!!" 내가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 눈싸움이 끝나고 본격적인 육탄전으로 돌입했다. 먼저 움직인 건 지라르 경이었다. 지라르 경은 한 걸음 듀비를 향해 다가가며 그가 내밀고 있던 검을 옆으로 크게 쳐냄과 동시에 듀비의 품으로 파고 들어 그의 가슴을 향해 올려 베기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듀비가 여유있게 슬쩍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등 뒤로 숨기고 있던 중검을 쓰윽 앞으로 빼내어 가로막자 오히려 지라르경이 검을 향해 몸을 들이미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도 지라르경은 침착하게 올려 베기를 하려던 검으로 듀비가 앞으로 내민 중검을 쳐내고 다시 그의 가슴을 찌르려고 했다. 허나 그때는 지라르경이 먼저 쳐냈던 듀비의 오른 손에 들려진 목검이 지라르경의 목을 노리며 날아들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라르경은 듀비를 공격하는 대신 다시 그의 검을 막아야만 했다. 그런데, 그렇게 듀비의 오른 손에 들린 검을 지라르 경이 막는 사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듀비의 왼 손에 들린 검이 지라르 경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절대 절명의 순간, 지라르경은 손목을 살짝 틀어 위에서 내리 누르고 있는 듀비의 검 위로 자신의 검이 올라가게 하면서 부드럽게 팔을 돌려 듀비의 오른 손의 검을 움직여 듀비의 왼손의 검을 막아내는 거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듀비의 두 검이 부딪히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두 검을 한꺼번에 걷어내면서 듀비의 비어있는 옆구리를 향해 다가갔다. "오오~" 그 동작이 마치 물이 흐르는 것 처럼 얼마나 자연스럽고 멋있었는지 보고 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절로 흘려 내었다. 나 뿐만이 아니었다. 보고 있던 기사들은 물론이거니와 조엘과 데니까지 한 순간 넋을 잃는 모습에 윙겟 경이 마치 자신이 감탄을 받은 것 마냥 뿌듯해 하며 중얼 거렸다. "지라르경의 능력은 대단하다니까요." 하지만, 그 뒤에 보인 듀비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듀비는 검이 허공으로 올려쳐진 상태에서 지라르경이 자신의 옆구리를 향해 공격해 들어오자, 지라르 경의 검이 들어오는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부드럽게 몸을 회전하며 검을 피해내는 동시에 쳐 올려졌던 오른 손에 들린 검을 아래로 하강시켜 허공을 찌른 지라르경의 검 중앙 부분을 강하게 내리쳤다. "크읏~!" 어지간히 큰 충격을 받은 듯 지라르경이 인상을 약간 찡그리며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지만, 검을 놓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충격을 무시하지는 못하겠던지 더 이상 공격해 들어가지 않고 잠시 뒤로 물러나서 숨을 골랐다. "후우, 대단하시군요."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한 지라르경이 진정으로 감탄한 얼굴로 말하자 듀비가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신 역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윙겟 경은 놀란 감정을 숨기지도 않은 채 중얼거렸다. "세상에나... 저 스승님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있었다니..." 너무나 작은 소리라 바로 옆에 있던 나 밖에 들을 수 없었던 말이었지만, 윙겟경의 말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스, 스승? 누가? 누구의? 아니, 도대체 어떻게?' 대련하고 있는 둘 중 윙겟경이 아는 자는 바로 지라르경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윙겟경은 엠브로스 기사단의 단장이고 지라르경은 그 밑의 부단장이었다. 게다가 척 보기에도 윙겟 경은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였고, 지라르경은 기껏해야 20대 중반, 많으면 후반으로 보이는 쌩쌩한 젊은이었다. 물론, 20대의 나이로 보이는 주제에 실제 나이는 그보다 엄청나게 많은 자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내 눈앞에서 지라르경과 대련을 하고 있는 듀비만 해도 그렇고, 내가 아는 이들 중, 외할머니를 비롯하여 레이언과 크리스또한 100살이 넘는 주제에 쌩쌩한 20대 젊은이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몇천년의 세월을 살아왔으면서도 태어난 그 순간부터 소멸될 그 순간까지 조금도 변화가 없을 네 정령왕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인간 세상에서, 그것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종족들을 노예로만 생각하던 이 나라에서 기사의 작위까지 받은 사람이 인간이 아닐 수가 없을 터였다. '아니면 그걸 숨기고 있던가...' 하지만 그런 건 숨긴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법을 이용하거나 변장을 해서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점점 성장하거나 늙어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한 계속 똑같은 모습을 가진 자를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리가 없었다. '아아, 몰라 몰라 몰라. 생각하지 않을래.' 내가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내고 대련 장소를 바라봤을때 지라르경과 듀비는 다시 자세를 잡고 있었다. 지라르경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두 손으로 잡은 검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데 반해, 듀비는 아까와는 달리 오른 손을 약간 위로 더 들고 왼 손의 검은 가로로 눕혀 배 높이에 둔 채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아까 자세는 방어 위주인 것에 비해 지금은 적극적으로 공격을 할 태세 같았다. "핫!" 짧은 기합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듀비가 먼저 움직였다. 오른 손에 들린 검으로 지라르경의 검을 쳐내고 왼 손에 들린 검으로 지라르경의 손목을 노리고 들어가자 그 빠른 공격에 지라르경은 분분히 뒤로 물러나며 검을 좌우로 움직여 양쪽에서 쇄도해 들어오는 검들을 막기 바빠 보였다. 그래도 지라르경의 얼굴은 침착했고, 듀비의 공격은 번번히 지라르경의 검에 막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듀비는 방금 전까지 계속 해오던 것 처럼 듀비의 손목을 노리며 강하게 그의 검을 쳐냈다 싶더니만 갑자기 그 자리에 주저 앉는 자세로 몸을 낮추며 오른 손에 든 긴 목검을 뻗어 지라르경의 다리를 노렸다. 너무 순간적인 일인데다가 그 방금 전에 듀비가 지라르경의 검을 쳐냈기에, 지라르경은 검을 내려 듀비의 검을 막을 생각을 못했다. 대신 검을 잡은 한 손을 놓아 균형을 잡은 채 재빨리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 지라르경에게서 멀어짐과 동시에 검을 놓은 손으로 땅을 짚고 몸을 재빨리 한바퀴 굴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멋진 구르기.' 흠 잡을 데 없는 동작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지라르경이 우위를 점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지라르경이 듀비와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듀비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도 지라르경과 같은 방향으로 구르더니면 지라르경이 자세를 잡자마자 아래쪽으로 치고 들어왔다. "핫!" 다급한 지라르경의 기합소리를 들으며 듀비는 왼손에 들린 목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지라르경의 검을 견제함과 동시에 더욱 더 지라르경의 품으로 파고 들어 그의 턱 아래에 목검의 끝을 가져다 댄 거였다. 그 순간 나는 옆에 있던 윙겟 경의 놀람에 찬 작은 중얼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이건... 말도 안돼..."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지라르경이 싱긋 웃으며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나자 듀비 역시 차분한 얼굴로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제가 졌습니다. 이런 대련, 정말 오랜만이군요." "저 역시, 이쪽 세계로 온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듀비의 진심 어린 말에 지라르경이 환하게 웃었다. "그렇습니까? 이거 참 영광이군요." 지라르경은 자신이 졌음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홀가분하고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덕분에 혹시나 그가 듀비에게 져서 자존심 상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던 내 마음도 한시름 놓았다. "좋으시겠습니다, 백작님. 정말 뛰어난 호위 무사를 두게 되셨군요." 쭈욱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조엘이 대련이 끝나자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운이 좋았지요." "좋으시겠습니다, 백작님. 정말 뛰어난 호위 무사를 두게 되셨군요." 쭈욱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조엘이 대련이 끝나자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운이 좋았지요." 조엘이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나 또한 예의 바르게 겸양의 말을 중얼거렸다. 그에 조엘이 잠시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더니 돌연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아까 듣기로는 저 블르 엘프분에게 기사 작위를 주길 원하신다고 하신 듯 한데..." 그의 입에서 듀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나도 모르게 약간 긴장했다. 조엘의 인격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듀비에게 기사 작위를 주면 어떨까라고 생각할 때 부터 듀비가 이종족이라는 것 때문에 반대를 당할까봐 걱정하고 있었던 탓에 그에 대한 말이 나오자마자 반사적으로 경계하게 되었던 것이다. 뭐, 처음부터 듀비에게 기사 작위를 주려는 이유가 내 곁에 있을 때 이종족이라는 이유로 괜한 고생을 할까봐 걱정되어서 였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럴 의도는 없었건만 조엘의 말에 나도 모르게 약간 예민하게 반응해버렸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잔뜩 경계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가시를 세운 어조로 물었으니 조엘이 당황해 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의 반응에 아차 싶었지만, 이미 '당신을 경계하고 있습니다.'란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고 난 뒤었다. '에구...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덕분에 조엘보다 더 당황해버린 내가 얼버무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조엘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조엘이 이런 내 기색을 알아챈 것인지 피식 웃더니만 평이한 어조로 말을 꺼내는 거였다. "제가 실수를 했군요. 백작님의 결정에 제가 뭐라고 할 권한은 없는데 말입니다." "아, 아뇨. 저야말로... 너무 예민하게 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신 겁니까?" 내 말에 조엘이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블루 엘프분께 기사 작위를 내리시는 걸 다시한번 재고해 주시는게 어떨까 싶은데요." "예?" 그의 말을 듣자니 '역시나...' 란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이종족에 대한 별다른 편견이 없어 보이는 조엘도 어쨌거나 사람인지라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하게 되나보다. 묘하게 조엘에 대한 실망감이 피어오르면서, 내가 엘프와 혼혈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짖궃은 궁금증마저 생겼다. 하지만, 우선은 그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으니 그렇게 말한 이유까지는 들어봐야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뭔지 들어도 될까요?" 그런데 내가 미처 조엘의 대답을 듣기 전이었다. 어느새 우리가 있는 곳 까지 다가온 지라르경이 불쑥 끼어드는 것이었다. "백작님, 그런 이야기는 성으로 돌아가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연무장은 아무래도 중요한 말씀을 나눌 적당한 장소는 아닌듯 싶습니다만..." 주위를 둘러본 나는 지라르경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고 조엘을 서재로 안내했다. 조엘로써는 처음으로 서재에 들어오는 거라, 그 서재에 들어오자마자 눈에 확 들어오는 내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고 잠시 넋이 나갔다. 아마, 이제부터 내 안내를 받아 서재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들은 다 저럴 것이다. 놀란 표정으로 초상화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는 저런 행동 말이다. "아... 음... 굉장히 아름다운 분이신데 처음 보는 분이군요. 그런데, 백작님과 굉장히 닮았네요. 실례가 안된다면 누구신지 물어도 될까요?" 평소 같으면 그런 모습을 재미있게 봐주련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대답하는 내 말투는 약간 퉁명스러웠다. "제 어머니십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이유를 들어도 되겠습니까?" 원래 예의상 차라도 권해야겠지만, 그런 예의 조차도 차릴 기분도 아니라서 완전히 다 무시해 버린 채 나는 조엘의 대답을 재촉했다. '아아, 그러고보니 외할아버지의 초상화는 아직도 못 봤잖아? 으윽... 이렇게 정신이 없어서야... 여유가 없어, 여유가... 어쨌든, 지금 일 마무리 짓고 외할아버지 초상화를 보러 가야지.' 하지만, 이번에도 조엘의 대답이 들려오기 전에 지라르경의 말이 들려왔다. "백작님, 우선은 자리부터 권하시는 게 어떠실지요? 그리고 차를 준비시킬까요?" 그러고보니 내가 팔짱을 떠억 낀 채 책상에 기대고 서 있는 바람에 서재로 우르르 들어온 모든 사람들, 그러니까 조엘과 지라르경을 비롯하여 듀비와 데니까지 멀쭘히 서 있었던 것이다. "하아... 그렇군요. 그럼 다들 앉으시겠습니까? 조엘 자작, 차 드실래요?" 예민하게 굴지 말고 침착하자고 마음속으로 다시한번 다짐하며 자리에 앉자 조엘도 마주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조금 전에 전 백작님과도 같이 티타임을 가졌거든요." "그렇습니까? 아, 듀비 이쪽으로 앉으세요. 그리고, 데, 아니 링클레터경과 지라르경도 앉으시지요." 데니형의 성은 링클레터였다. 그는 이미 기사의 작위를 받았기에 지금처럼 찬바람이 쌩쌩 부는 상황에서는 링클레터 경이라고 정중하게 부르고 있는 중이었다. 내 권유에 듀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옆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지만, 지라르경과 데니형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제의는 감사합니다만, 이대로 있겠습니다." 지라르경이나 데니형 같은 경우는 나나 조엘을 하루종일 따라다니면서 결코 같은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았다. 뭐, 데니 형은 조엘과 단 둘이 있을때에는 같이 앉기도 하고, 지라르경도 필요에 의하면 가끔 자리에 앉기도 하지만 대부분 저렇게 곁에 항상 서 있었다. 그 이유가 호위 기사는 언제 어떤 상황에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므로 항상 몸을 긴장 상태로 유지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나? 그런거 보면 호위 기사라는 직종은 엄청 다리가 튼튼해야 할 듯 싶었다. 그런 그들의 사양에 나는 그런가보다 하고 더 이상 아무말 않고 조엘쪽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그와 마주쳤다. "조엘 자작?" 도대체 그 표정의 의미가 뭐냐고 물은 거였는데 조엘은 예의 편안한 미소를 띄우며 자세를 바로했다. "그거 아십니까? 만약 저 블루 엘프 분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신다면, 블루 엘프분은 지금처럼 백작님 옆자리가 아닌 지라르경 옆에 서 있어야 할겁니다." "음..." 조엘의 말은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었기에 나는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그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뒤에 서 있던 지라르경이 끼어들었다. "백작님, 저도 사실 블루 엘프분께 작위를 드리는 것에 반대합니다." "지라르경은 왜요?"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그래도 이번에는 태연한 신색을 유지하려 애쓰며 물었는데, 대답은 조엘이 했다. "아마, 저와 같은 생각일 겁니다." 그의 말에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 들자 조엘이 설명해줬다. "기사라는 건, 물론 평민보다는 많은 특권과 권리가 있습니다만 그만큼 의무와 책임도 같이 있으니까요. 거기다가, 이제부터 백작님께서 몸을 담그시려는 귀족들의 세계에서 기사의 작위라는 건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블루 엘프분을 보호하시려고 작위를 주시려는 것 같은데, 그게 오히려 블루 엘프분을 보호하지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조엘의 말에 이어 지라르경이 덧붙였다. "기사가 되면 그에 따르는 의무를 지셔야 하는데, 인간이 아니신 분이 그 의무를 어떻게 받아 들이실지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이종족으로 계신다면 그런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으며, 귀족들도 계급을 내세워 함부로 굴수도 없겠지요." "몇년 전이라면 이종족이라는 이유로 업신여김을 당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여왕폐하께서 이종족과 인간은 동등하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고수하고 계시니까 이종족이라고 해도 대할 수는 없을겁니다. 뭐, 뒤에서 뭐라고 하는 건 어쩔 수가 없을테지만요." "아, 예..." 조엘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지라르경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아직 기사가 뭔지 제대로 모르는 분께 함부로 기사 작위를 받아라 받지 말아라고 말할수는 없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인간 세상에 대해서 잘 아시게 되었을때 의견을 물어야 하는게 아닐까요?" "핫... 으음... 그렇군요..." 그 생각은 전혀 못했다. 듀비에게 기사 작위를 주는 것만 생각하느라 다른 생각은 조금도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역시, 백작이라는 것도 쉬운 직업은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는 것과 동시에 나는 아직도 너무나 경험과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미안해요, 듀비." "무엇이 말입니까?" 그는 옆에서 자기 이야기가 한참 오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이것 저것, 모두 다요. 어쨌든, 미안해요." "죄송하실 것 없습니다." "그래도요... 아, 그리고 조엘 자작, 충고 정말 감사드립니다. 지라르경도요. 두 분이 아니었다면 큰 실수를 할 뻔 했군요." 내 진심 어린 감사에 빙긋 웃던 조엘이 막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이제야 생각 난 건데 말입니다." "네?" "혹시, 베르쿠스 남작 영애를 기억하십니까?" "예?" 뜬금 없는 조엘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그게 누구일까 생각해봤지만, 영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백작이 되었다지만 귀족들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라서 내가 아는 귀족이라고 해봐야 전 엠브로스 백작이었던 이브스햄과 조엘, 그리고 그의 가족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계속 생각해 내지 못하자 조엘이 설명을 덧붙였다. "2년 전에 웨스트 모어랜드 후작령에 몬스터 사냥을 가지 않았습니까? 그때 만났던 버릇 없던..." 거기까지 말하자 나는 그제야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헉..." 그리고 그 기억의 책장을 펼치자마자 하얗게 굳었다. 그 동안 이 나라에 올 일이 없었던 터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때 아버지에게 끌려서 집에 가기 전 나는 그 남작 영애를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그 남작 영애를 좋아한 듯 보였던 후작가의 차남, 다니엘 웨스트모어랜드 녀석에게 어깨를 찔리기도 했고 말이다. "아앗, 그러고보니 그거 어떻게 됐습니까? 일이 잘 해결 되었습니까?" 잘못하다간 계속 범인이라고 누명을 쓰게 되는 건 아닌가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는데 조엘이 빙그레 웃었다. "그 사건은 2년전에 이미 해결이 되었답니다." "엣? 그럼 범인이 밝혀졌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녀의 유모가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남작 영애가 고용한 용병들을 데리고 나갔다고 말해주더군요. 그래 그들을 찾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성문 수비대에게 잡혀 있더라구요." "어떻게요?" "수비대측에서는 몰래 성을 빠져나가려고 하기에 수상해서 심문하기 위해 잡았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수월하게 잡았지요. 그 녀석들에게는 불행이지만, 우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녀석들이 용병이 된지 얼마 안되는 건달들이라 우리가 들이닥치자 지레 겁을 먹고 순순히 실토하더군요." "그 둘이 남작 영애를 죽였다고요? 왜 죽였대요?" "실수로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밟았는데, 엄청 화를 내면서 뺨을 때렸더랍니다. 평소 그녀의 무례한 행동으로 인해 안 좋은 감정이 그렇지 않아도 쌓여 있었는데, 그 일을 계기로 폭발해서 우발적으로 죽인 거랍니다." 잠깐 만난 사이였지만, 그때 당한 일을 생각해볼때 절대로 이해가 안 가는 일은 아니었다. "으음... 정말 그 둘은 운이 안 좋았네요..." 얼굴도 모르는 그 둘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중얼거리자 조엘이 피식 웃었다. "그렇습니까? 어쨌든, 나중에 다니엘 웨스트모어랜드 경을 만나면 그때 일을 사과할겁니다." "아아... 뭐..." 그 일로 그도 아버지에게 거의 죽을 뻔 했으니 피장파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 그 일로 그도 아버지에게 거의 죽을 뻔 했으니 피장파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그를 괴씸하게 여기고 있지 않아 사과를 받는다는 말에 좀 얼떨떨 했다. 물론 나야 억울하게 당한거고, 그는 당해도 쌌지만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은 수도로 가셔야 겠지만 말입니다." 조엘의 말에 나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아, 그 전에 할 일이 많아서 문제겠지요. 끄응... 저는 다음 일을 또 처리하러 가야 할 듯 하군요." "그러십시오. 저는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아, 저도 나가야 하니 같이 나가시죠." 그렇게 문 밖으로는 조엘과 같이 나왔지만, 그와 나는 갈 길이 달랐기에 문앞에서 다시 헤어졌다. "그럼 저녁 식사 시간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녜." 조엘과 헤어져 역대 백작과 그의 부인 초상화가 주르르 걸려 있는 화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지라르경이 조심스레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물었다. "한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그의 말에 별 뜻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라르경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렵사리 질문을 꺼냈다. "혹시... 조엘 자작님과는 전부터 알고 계시던 사이였습니까?" "아아... 예. 몇년 전에 우연치 않게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후에 다시 헤어졌었지만..." "평범한 인연은 아니었나봅니다. 조엘 자작께서 자청해서 수도로 같이 가주시기로 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이브스햄이 연 파티가 모두 끝나 다른 귀족들이 다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조엘이 남아 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나와 같이 수도로 돌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귀족이 작위를 물려받게 되면 왕궁으로 가서 국왕을 알현하여 자신이 작위를 물려 받았음을 고하고 국왕에게 새로이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 뭐, 진심으로 하는게 아니라 거의 형식적인데다 요즘은 귀족들도 많아서 절차도 무지 간단한데, 그래도 이제 작위를 가지게 된 귀족으로써 정식으로 국왕과 처음으로 얼굴을 맞대는 자리라 그 자리에는 평소 친분 있는 작위를 가진 귀족들을 대동하게 되는데, 이 것은 그 사람의 힘이 되어줄 거라는 걸 알리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왠만큼 친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잘 참석치 않으려고 했고, - 물론 힘 있는 귀족이( 예를 들면 공작 정도?) 알현하는 자리라면 친하지 않아도 참석하려 하겠지만 - 알현하는 측도 자신이 알고 있는 이들 중 될 수 있는 한 높은 작위를 가진 자가 참석하기를 원했다. 그 자리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우르르 가는게 아니라 최소한 5명까지만 같이 참석할 수 있었다. 증인 비스무리한 역할로 말이다. 그런 자리에 조엘 녀석이 참여해주겠다고 하는데다 - 물론 이브스햄이 은근슬쩍 부탁하기는 했지만, 그도 조엘이 덥썩 허락할 줄은 몰랐을 거다 - 왕성으로 갈때 같이 가기 위해 빈둥대면서도 성에 머물러 있으니까 엄청난 친분이 있는 걸로 보이는 거다. 조엘이 지금 나보다는 낮은 작위인 자작이지만, 금방 죽지 않는 한 미래의 맥알파인 공작, 그러니까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큰 귀족가의 장남이었으니 한마디로 나는 킹카중의 킹카를 잡은 셈이었던 것이다. "뭐... 독특한 인연이었지요." 차마 조엘의 시종 노릇을 반년간 해줬다고는 말할수가 없어서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리려고 했는데, 지라르경이 무지 심각한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백작님..." "예?" 마침 그때 초상화들이 걸린 회랑에 도착했던 터라 나는 걸음을 멈추고 나 바로 전 백작이었던 이브스햄의 초상화부터 바라보고 있는데 지라르경의 무지 심각한 음성이 들리자 당황해서 고개만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랬더니만, 그가 음성 못지 않은 심각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만 천천히 검을 빼어 땅을 짚더니 것두 모자라 한쪽 무릎을 꿇어 땅에 대는 거였다. 그 와중에서도 그의 시선은 절대 내 눈을 떠나지 않았다. "지, 지라르경?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생각지도 못한 그의 행동에 당황한 내가 그를 일으키려 했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들어주십시오, 해인님." "지라르경,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다 들어줄테니까 그만 일어나세요.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저는 당신을 진정한 제 주군으로 삼았습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제 모든 것을 바칠 각오를 하고 있다는 걸 왜 몰라 주십니까?" "지라르경... 충성 서약이야 이미 전에..." "해인님, 이건 제 진심입니다."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우선 일어나서..." "그럼 제 마음을 믿어주시겠습니까?' 나는 우선 그를 달래서 일으키려고 했었다. 그런데 지라르경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자 차마 그렇다는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가 의지가 되는 사람이고, 나에게 해를 가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물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엠브로스 백작가의 기사이기때문에 의무적으로 그런 것일 뿐, 나에게 정말 충성을 다한다고는 믿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와 내가 안지 이제 며칠이나 되었는가? 만약 그가 충성을 받치고 있다면 오랜 시간 그가 모신 이브스햄에게 받치고 있을 거라고, 현재 이브스햄이 자신의 잘못 때문에 나를 극진히 모시고 있어 그도 같이 그러는 것 뿐이라고, 이브스햄이 나에게 등을 돌리면 그 역시 주저없이 그럴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호감이 가기는 했지만 마음 한쪽 구석에서는 그를 완전히 신임하지 않고 거리를 두려고 하고 있었다. 그가 언제 등을 돌리더라도 '쩝,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아쉽군...'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릴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랬기에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자신을 믿느냐고 묻자 대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선을 피하면 '예'라고 거짓말이라도 하겠는데,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본채 묻고 있으니 마치 누군가가 내 입을 막고 있기라도 한 양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가 않는 거였다. 그래 아무 말도 못하고 머뭇거리고만 있자 지라르경이 쓸쓸하게 웃어보였다. "물론... 이해는 합니다. 이제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제 말을 의심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이겠지요." "저기... 지라르경... 물론 저는 당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지라르경이 입술 끝을 비틀며 웃었다. "사람이 아닙니다." "예?" 순간적으로 뭔 소린가 싶어서 되묻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프 엘프입니다." "엑?" 두 눈이 크게 떠지고 입이 떠억 벌어졌다. 내가 그렇게 놀라던 말던 지라르경은 계속 입을 열었다. "저 첼릿 지라르는 사람이 아니라 하프 엘프입니다. 제 어머니는 누군지 모릅니다. 단지 운 나쁘게 노예 사냥꾼에게 붙잡힌 엘프라는 것 외에는... 저를 낳고 얼마 후에 돌아가셔서 저는 노예 상인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이름도 없이 팔릴 날만 기다린 채 희망 없이 살아가는 저를 구해주신 건 주디스 오스번님이셨습니다. 그 분이 저에게 이름을 지어 주셨고 이 엠브로스 백작가로 데리고 오셨습니다." 뜻밖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계속 그의 이야기에 귀만 귀울이고 있었다. "저에게 그 분의 귀를 보여주시며 자신도 하프 엘프라고 말씀해 주셨지요. 그러면서 제 귀는 엘프들의 귀를 닮지 않고 인간의 귀를 닮은게 행운이라는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그 분이 힘써 주셔서 저는 엠브로스 기사단의 시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의 추천으로 훌륭한 스승님을 만나서 검술도 배우고 기사가 될 수 있었지요. 그 뒤로 저는 실력을 쌓아 언젠가는 그분께 은혜를 갚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요?" 그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고 있던 나는 그가 말을 멈추자 얼른 재촉했다. 그러자 그가 나를 향해 쓰게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어느정도 제 능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이 정도면 주디스 오스번님께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을 무렵, 주디스님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헛... 그런 일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겠다는 불확실한 말만 남기고 말이지요." 슬픈 미소를 띄우는 그를 보자니 왠지 그가 어머니를 짝사랑 한게 아닐까 싶었다. '에휴, 어머니는 알고 계셨나 몰라.'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동안 지라르경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래서 저는 계속 기다린 것입니다. 주디스님이 다시 돌아오시기를... 그리고 이제, 해인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의 넋두리 비슷한 말에 나는 손을 들어올려 말을 끊었다. "자, 잠깐만요. 여기 계속 있었다구요? 어떻게요? 아, 저기.. 실례지만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죠?" "제 나이는 올해로 136세입니다." "헉..." 그건 레이언이나 크리스보다도 더 많은 나이었다. 아마 그 둘을 구하기 전 어머니께서는 지라르경을 먼저 구하신 모양이었다. "제 정체는 전전전 백작님부터 대대로 백작님들께서 알고 계셨습니다." "아, 저기 혹시... 기사단장도 알고 있었나요?" 내 조심스러운 질문에 지라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대로 백작님들과 기사단장들의 도움으로 제가 하프 엘프라는 걸 숨기고 계속 여기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겁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현 기사단장은 제 제자입니다." "아..."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래서 기사단장인 진 윙겟 경이 지라르경에 대해 그렇게 자부심을 느끼고 듀비에게 졌을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래서 '스승님'이라고 했던 거고 말이다. "이제 저를 믿으시겠습니까? 만약 제 말이 의심스러우시다면 전 백작님이나 현 기사단장에게 물어보셔도 됩니다." "아, 아니요. 믿어요. 그러면... 지라르경이 나에게 충성을 받치는 것도 어머니의 은혜를 갚기 위함이겠군요? 어머니 대신 말이에요."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세상에 그 분이 안 계시는 이상 은혜를 갚을 길은 이것 뿐이니까요." 내 말에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나는 왠지 머쓱해졌다. "그러다가 내가 굉장히 나쁜 놈이라면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당신은 주디스님의 아드님이시니까요. 게다가, 정말 심성이 나쁜 분이셨다면 엠브르스양을 도와주지도 않았을 거 아닙니까?" "하아..." 이제는 아들이라는 말을 들어도 덤덤했다. 완전히 포기 상태라고나 할까? "그럼, 이제 조엘 자작과의 인연에 대해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아?" 순간적으로 혹시 지금까지 한 모든 이야기가 조엘과 나 사이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이야기 한 건가 싶었지만, 그래도 이제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거라 허탈하지는 않았다. "그러죠. 그럼 우선 일어나는게 어때요? 나까지 불편해지잖아요." "알겠습니다." 그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검을 도로 차자 나는 다시 초상화들쪽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처음부터 간략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몰래 집에서 가출해서 노예상인에게 잡혀서 팔릴 뻔하다가 조엘과 만난 이야기부터 웨스트모어랜드 후작령에서 살인범으로 몰려 검에 찔린 채 집으로 돌아간 이야기 까지. 그리고 내친김에 상회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물론 간략, 간략하게... 그 사이 사이 있었던 해프닝은 완전히 다 빼고 말이다. "거참... 조엘 자작의 시종 노릇을 하셨다니... 뭐, 덕분에 귀족 사회에 대해 조금쯤은 경험을 하게 되셨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런데... 해인님의 아버님께서 살아계신다는 말씀입니까?" "예." "그럼 그 분은 왜 안 오시는 겁니까?" '아까도 왔다 갔는데요?' 라고 말할 수는 없어서 나는 항상 사람들에게 변명하는 걸 그에게도 그대로 들려주었다. "내 아버지는 엄청나게 특이한 분이시라서요. 인간 세상에 절대 관여 안 하시고 관심도 없으시죠." "그, 그렇습니까? 그래도 해인님이 백작님이 되셨는데 아무렇지도 않으시겠습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죠. 아마, 그런 귀찮은건 왜 맡았냐고 핀잔이나 주실 걸요?" 어머니 초상화에 푹 빠져 있는 모습에 내가 백작이 된 뒤로는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십중 팔구는 분명히 그랬을 거다. "하하하..." 지라르경의 황당함이 가득 담긴 웃음을 흘려 들으며 내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내 6대 위의 백작 초상화가 있는 곳이었다. 바로 내 외할아버지셨던 오스번 엠브로스 백작님 말이다. 그 분은 부드러워보이는 갈색 머리에 보라빛 눈동자를 가졌다는 것 외에 어머니와 닮은 구석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선이 굵고 강해보이는 턱,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해보이는 눈을 보자니 정말 강직한 기사외에는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이 분 체형을 닮지 않았다는 게 무척이나 고마웠다. 하지만, 어머니를 지극하게 사랑하셨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매섭게 나를 쏘아보는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왠지 무척이나 친근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 외할머니가 아닌 검은 머리에 인자해보이는 초록색 눈을 가진 가리가리한 귀부인의 초상화가 있었다. 그 분이 바로 울 어머니의 새 어머니이지만 어머니를 친딸처럼 사랑해주신 백작부인이셨다. '안녕하세요, 두분? 해인 오스번 엠브로스라고 합니다. 만나뵙게 되어 오랜만이에요. 나중에 기회 있으면 아버지와 같이 오겠습니다. 아버지를 보시면 아마 엄청 놀라실 거예요. 후후후...' 제 29화 왕성에 도착하기까지. 화랑에서의 일이 있고 그 다음날 아침, 나는 그 동안 아무런 언질도 없이 가만히 내버려 두었던 일을 해결하기 위하여 기사단장을 불러 들였다. "감옥에 가두어 놓은 벤자민 엠브로스와 그의 아들 이스파엘 엠브로스, 그리고 제프리 찬텔을 데리고 오십시오." 제프리 찬텔은 에르미아 엠브로스를 죽이려 했던 그 남자의 이름이었다. 기실 나는 백작이 된 이래 처음으로 백작의 의무이자 권리를 행사하려 하는 것이었다. 진 윙겟 경이 절도 있게 대답하고 수하 기사들을 데리고 가는 모습을 보며 그들에게 내릴 판결을 다시금 곰곰히 생각해보고 있는데, 내 뒤에 서 있던 지라르경이 조용히 물어왔다. "제프리 찬텔경은 어떻게 처리하실 것입니까?" "글쎄요... 우선은 제가 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으니 그와 이야기를 해볼 작정입니다. 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엠브로스양과 전부터 알던 사이라는 것,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원한이 있어 복수를 하러 돌아왔다는 것 뿐이니까요." "그와 벤자민 엠브로스간에 모종의 계약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백작 작위를 물려 받던 날 일어난 사건이라 그들이 감옥에 갇힌지도 며칠이나 흘러 갔지만, 그 동안은 내 주변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워 나는 그들에 대해 따로 뭐라 명을 내리질 않았었다. 덕분에, 그 동안 그들에 대한 심문이나 문초 같은 게 없어 나는 알고 있는게 전혀 없었다.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테지만... "이제부터 알게 되겠지요. 그런데 지, 아니... 첼릿 나는 이 자리에 에르미아 엠브로스양을 참여시켰으면 좋겠는데요, 그건 너무 이기적일까요?" 지라르경은 어제 일이 있은 후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부탁해왔었다. 그래 사적인 자리에서는 이름을 부르기로 했는데, 처음부터 계속 지라르경 지라르경 이라고 불러와서 자꾸 그를 부르려 할때 성이 먼저 튀어나오려 했다. "아무래도, 엠브로스양께는 어려운 일이겠지요. 여성에게 얼굴을 다치는 건 큰 충격이 아니겠습니까? 우선 오늘 심문을 한다고 이야기는 전하게 했습니다." "끄응...잘 했어요. 에휴, 아무리 얼굴을 가린다고 해도 사람들 앞에 서는건 역시 무리겠지요? 그나저나 이브스햄은 불렀는데 안 보이네요?" "엠브로스양께 잠시 들렸다 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흐음... 아, 혹시 첼릿도 그 제프리라는 사람을 알고 있죠?" "그는... 전에 엠브로스 기사단의 일원이었습니다. 소질도 있고, 열심히 노력하는데다가 성품도 좋아서 저와 진이 눈여겨 보는 자중 한명이었지요." "오, 유망주였다는 소리네요?" "얼굴도 잘 생긴데다가 매너 또한 좋아서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답니다. 문제는... 그에게 호감을 가진 여자들 중에 에르미아 엠브로스양도 있었다는 거지요." "엥? 왜 그녀가 제프리 찬텔에게 호감을 가진게 문제라는 거지요? 백작가의 딸에게 잘 보이면 좋잖아요?" 잘만 하면 그녀와 결혼해서 신분이 상승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이다. "그는 백작가의 딸이라는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엠브로스양에게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거든요. 그렇다고 무시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항상 거리를 두고 타인에게 대하듯 예의만 차렸으니까요. 그가 그렇게 대하니 엠브로스양은 내성적이라 과감하게 다가서지도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며 전전긍긍 하고 있었지요." "그녀가... 내성적이라고요?" 이브스햄과 벤자민에게 잡혀서 꽁꽁 묶여 있던 날, 비록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침착하고 당당하게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똑똑히 기억했다. 그런 말투로 이야기하는 여성이 내성적이라니... 내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자 첼릿이 허허 웃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말이죠. 그때 엠브로스양은 소극적이고 내성적이고 나서기를 싫어했지요. 하지만 10년 전의 그 사건과 전 백작님의 교육으로 인해 지금은 많이 당당해진거랍니다." "10년전의 사건이라뇨?" 첼릿의 말에 나는 그 사건이 아무래도 에르미아 엠브로스와 제프리 찬텔이 연류되었음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멀리서 바라보았지만, 전혀 돌아봐주지않자 엠브로스양의 마음에 앙금이 가라앉기 시작한 거죠. 그렇게 쌓이고 쌓인 감정이 한번에 폭파되었던 겁니다. 사실, 엠브로스양이 그랬다는게 정말 믿겨지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무슨 일인데요?" "저도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만, 제프리가 엠브로스양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어떤 다정한 행동을 다른 여성에게 했던 모양입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엠브로스양의 하녀에게 말이죠. 그걸 엠브로스양에게 들킨 거죠." "저런..." "제프리는 엠브로스양에게 어떤 일말의 기대를 주지 않으려고 다른 여성들에게와는 달리 냉정하게 대했거든요. 그런데 그게 엠브로스양을 더욱 서운하게 한 거죠." "그래서 어떻게 됐죠?" "너무 화가난 엠브로스양이 그 즉시로 백작가 마법사의 방으로 달려가 황산을 가져와 제프리에게 던져 버렸습니다." "허걱...." "그래도 주위에 다른 기사들이 있던 터라 급히 조치를 취했기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만, 얼굴과 성대는 영영 망가지고 말았답니다. 최고위 신관이나 고위 마법사들이 있다면 고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을 만나는 건 국왕 폐하를 만나는 것 만큼이나 어렵고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테니 일개 기사인 제프리로써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죠.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제프리는 백작가에서 조용히 사라졌답니다. 다시 돌아올 줄은 몰랐지만..." "하아... 그래서 그가 엠브로스양에게 원한이 생긴 거군요." "예." 내가 한숨을 쉬자 첼릿도 낮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런데 그의 말투에 무지 안타깝다는 감정이 절절하게 서려 있어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를 아끼십니까?" "아까도 말씀 드렸다시피 정말 좋은 인재였으니까요. 가르치는 재미도 쏠쏠했고, 진이 정말로 아끼던 아이였거든요. 지금 진 녀석 표현은 못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무척 끙끙 앓고 있을 겁니다." "흐음... 그래요?" 어차피 이번에 판결에서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없을 터였지만 제프리라는 사람들은 제일 큰 벌을 받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봐야 처형은 아니고 추방쯤 되겠지만... 묘한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지만 그에게 원한 같은 건 없었던 터라 다른 용병들처럼 그냥 풀어 줘도 괜찮지만, 이브스햄이 그냥 놔주려고 할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도가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이브스햄이 원하는 쪽으로 하려고 했는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윙겟 경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겠는걸?' 그렇게 결심하고 있을 즈음, 홀의 문이 열리더니 이브스햄이 모습을 드러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어라?" 예의상 나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의 뒤를 따라오는 한 사람의 모습에 나는 내뱉던 인사를 끝내지 못하고 놀라서 입을 벌렸다. 여기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조차 못했던 엠브로스양이 아버지의 뒤를 따라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백작님을 뵙습니다." 높은 열로 인해 성대가 상해 여성의 고운 목소리가 아니라 거친 허스키한 음색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어서 오세요, 엠브로스양. 직접 오실줄은 몰랐는데요. 몸은 좀 어떠세요?" "많이 나았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나았기는 나았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충격 때문인지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도 힘겨워 하던 그녀가 지금 하녀의 부축을 받고 있기는 해도 걷고 있었으니 말이다. 얼굴은 얆은 베일로 가린 채 눈만 내놓고 있었고, 손에도 얇은 실크 장갑을 낀 채 겉으로는 피부를 조금도 노출 시키지 않고 있는 그녀를 보자니 정말 안됐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좀 앉겠습니까?" "그리 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곳은 정식으로 손님을 맞거나 아니면 판결을 내릴때 사용되는 홀이라 단상 위에 나만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있을 뿐이라 다른 이들은 모두 서 있어야 했다. 그러나, 백작의 허락 하에 단상 밑에 다른 이들이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을 수가 있었다. 엠브로스양처럼 여성이거나 아니면 나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거나 할때 말이다. 이브스햄은 전 백작이기는 했지만, 혈연상 내 손자였기에 앉지 않고 서 있는 거다. 한 병사가 의자를 가져와 그녀가 그 위에 몸을 앉힐 무렵 홀 문이 열리고 진 윙겟 경을 선두로 감시의 눈길을 번뜩이는 기사들과 감옥에 갇힌 자들, 그리고 그들을 묶은 줄을 잡고 있는 사병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죄인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벤자민 엠브로스와 이스파엘 엠브로스를 맨 앞에, 제프리 찬탈이 그 뒤에, 또 그 뒤에는 벤자민 엠브로스가 고용한 듯 싶은 용병들이 주르르 무릎이 꿇혀졌다. 추운 날 난방이 절대 되지 않는 차가운 지하 감옥에 며칠 갇혀 있었던 탓인지 아무런 문초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빨리 해결하고 풀어줘야겠다 마음 먹으며 첫 말을 어떻게 꺼낼지 궁리하고 있는데 이런 내 생각이 허무하게도 첼릿이 나섰다. "죄인 벤자민 엠브로스, 그대는 감히 백작님을 살해하려고 했다. 이는 네 목숨으로 갚아야 하는 큰 죄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그러자 창백한 얼굴에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하고 있던 벤자민이 갑자기 회심의 표정을 지으며 씨익 웃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글쎄올시다... 내 죄가 크다면 다른 사람의 죄도 클게 분명한데, 나는 감옥에 갇히고 다른 사람은 멀쩡하게 서 있다니 이거 참 아이러니하지 않소?" 그러면서 한쪽에 서 있는 이브스햄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거였다. "안 그렇습니까 형님?" 그러자 이브스햄이 헬쓱해지더니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익, 닥쳐라. 네 놈의 죄는 명명 백백하다. 이제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아아,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저도 할 말은 있습니다만? 설마 말도 못하게 하고 죽이는 건 아니겠지요?" 벤자민의 말에 이브스햄이 분노해 뭐라 더 말하려고 했지만, 첼릿이 먼저 나섰다. "벤자민 엠브로스!!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뭐, 어차피 너는 현행범이라 시인을 하던 부인하던 상관 없지만, 변명할 거리라도 있는가?" "아아, 물론 시인합니다. 저는 단지 제 모든 죄상을 명명백백하게 고하려고..." "네놈이 정녕 죽고싶은 게로구나. 그나마 옛 정을 생각해서 목숨만은 구하도록 노력하려고 했더니!!" 이번에도 이브스햄이 벤자민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그에 첼릿의 눈초리가 살짝 찌푸려졌지만, 이브스햄이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지라 아무 말도 안 하는 듯 했다. 이브스햄이 자꾸 그렇게 벤자민의 말을 자르고 흥분하자 오히려 벤자민은 더욱 더 여유로운 표정으로 빙그레 웃었다. "호오, 제 목숨을 구해주려 하셨습니까? 이거 참 눈물 나게 고마우신 말씀입니다." "이익, 네 이놈!!" 능글맞은 벤자민과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이브스햄의 모습을 보자니 아무래도 벤자민은 이브스햄이 자신과 공모해 나를 죽이려 했다는 걸 밝히려고 하고, 이브스햄은 그걸 막으려는 듯 해보였다. 그런데, 웃긴건 그건 내가 다 알고 있고 그 동안 이브스햄도 거기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둥의 말도 안 했으면서 - 물론 나도 가만 있었지만 - 이제와서 벤자민이 말할까봐 전전긍긍 하는 거였다. 이브스햄은 내가 증거가 없어서 그를 가만 나두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내가 정말 그가 미웠다면 내 능력만으로도 얼마든지 그를 해칠 수 있다는 걸 이브스햄도 알텐데 말이다. 아니면, 나나 그나 덮어 두려고 했는데 벤자민이 들춰내서 내가 어쩔 수 없이 이브스햄에게 벌을 내리게끔 하려는 걸 막는 걸까? 그의 죄가 드러나더라도 내가 용서해주면 땡일텐데 말이다. 지금 상황에서 모든 일의 결정은 내 손안에 있으니 아무리 증거가 명명백백하더라도 내가 안 보면 그만이었다. 그걸 모르는 이브스햄이 아닐텐데 그는 너무나 전전긍긍했다. 그래 이상하다 싶어 벤자민과 이브스햄의 언쟁을 제지하지 않은 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이브스햄이 자꾸만 이야기하면서 힐끗 힐끗 이쪽을 쳐다보는 거였다. 처음에는 내 눈치를 살피는건가 싶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는 거 보면 그게 아닌 듯 싶었다. 그래 가만 보니 앞으로 나선 첼릿의 눈치를 자꾸 살피는 거였다. '왜? 아아, 그러고보니 대대로 백작은 첼릿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했지? 그래서 그러는 건가? 호오, 그러고보니 기사단장이 첼릿 제자라고 했지? 그러면 첼릿이 기사단을 꽈악 잡고 있는 거겠네? 그래서 그러나?' 내가 그렇게 고개를 갸웃 갸웃 하는데 벤자민의 능글맞은 언행에 분노할대로 분노한 이브스햄이 나를 쳐다보았다. "백작님, 더 이상 이 녀석의 말을 들으실 필요 없습니다. 죄가 명백한 이상 그냥 처형 하시지요." "오오,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죽기 전에 신관의 기도는 받을 수 있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는 있는 법이라구요, 형님." 처형 당하기 직전의 사람이 저렇게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지 기가막혔지만, 아마 벤자민도 겉으로는 여유롭게 굴어도 속으로는 외줄을 타고 절벽을 건너가는 심정일 거였다. "닥쳐라. 네 목숨을 잃기 전에 네놈의 혀를 뽑도록 하겠다!" "아아, 왜 제 혀에 그렇게 관심이 많으실까?" 뭐, 그거야 아무래도 좋았다. 물어보면 모든게 밝혀질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구경하는 건 관두고 슬슬 나서기로 했다. "둘다 그만 하시죠. 당신들의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다 들어줄테니까, 우선은 거기 용병들." 내 부름에 뒷쪽에 옹기종기(?) 무릎 꿇고 앉아 있던 용병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지하감옥에 무단 침입하여 죄인을 이끌고 도망친 죄가 있기는 하지만, 그거야 당신들이 돈을 댓가로 저지른 일이니 크게 탓하지는 않겠습니다. 뭐, 일을 실패했으니 댓가도 못 받겠지만... 해서, 가벼운 벌금형을 내리기로 하겠습니다." 내 말이 의외였던지 용병들의 눈이 둥그래졌지만, 대부분은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벌금은 얼마정도..." 한 용병이 조심스레 묻자 나는 시선을 다시 벤자민쪽으로 돌렸다. "벤자민 엠브로스경, 저들에게 계약금을 얼마나 줬지요?" 내 질문이 의외였던 듯 벤자민도 얼떨떨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대꾸했다. "아... 그러니까... 한 사람당 은화 30씩..." "흐음, 그래요? 윙겟경, 그 정도면 저들의 수준이 어느정도라는 이야기인가요?" "계약금은 보통 약속한 금액의 10%를 주니까, 대충 저들은 금화 3개씩 받는다는 이야기군요. 그 정도라면... 2급 정도요? 가장 활동을 많이 하는 괜찮은 실력을 가진 용병들이 그 정도 입니다. 일급은 그보다 10배정도, 특급은 100배정도 받지요. 일급 용병 이상이면 착수금부터 금화나 백금화밖에 취급을 안 한답니다." "헉... 차이가 심하군요. 뭐, 어쨌든 벌금은 한 사람당 은화 20씩으로 하도록 하죠. 윙겟경, 저들은 그렇게 정했으니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우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멋쟁이!!" 내 선언에 눈에띄게 안도하는 기색을 보이는 용병들은 윙겟경의 눈짓에 따라 자신들을 이끄는 기사들에게 순순히 끌려나갔다. 그들의 모습에 첼릿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소근거렸다. "너무 가벼운 형벌을 내리신게 아닙니까?" "생각 같아서는 그냥 풀어주고 싶었는 걸요. 사실 저들은 벤자민에게 고용되었을 뿐이잖아요."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그럼 됐으니까 그 정도로 넘어가요. 지금 중요한건 저들에 대한 처분이 아니잖아요." "그렇군요. 그럼 저들은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첼릿은 그러면서 눈짓으로 이제 남은 세 명을 가르키고 있었다. 벤자민은 여전히 이브스햄과 치열한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고, 그 옆의 이스파엘과 그 뒤의 제프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흐음..."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재로 가죠. 윙겟경, 저들을 서재로 데려와 주세요. 그리고 이브스햄, 엠브로스양 그대들도 서재로 와주세요." "배, 백작님?" 나의 갑작스러운 명에 이브스햄은 물론이거니와 윙겟경이나 첼릿, 그 주변의 기사나 사병들, 무릎꿇고 있던 벤자민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는 그들을 싸악 무시한채 듀비를 데리고 척척 걸어 그 홀을 빠져나갔다. "해인님, 뭘 어쩌시려고요?" 내가 척척 걸어가자 첼릿이 다급하게 쫒아오며 물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려구요." "예?" 내 말에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첼릿에게 나는 싱긋 웃어주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하지만,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서 듣기 보다는 마주 앉아서 듣고 싶어서 그래요. 그들도 무릎을 꿇은 채 이야기 하는 것 보다는 소파에서 앉아서 하는게 더 좋지 않겠어요?" "그들은 죄인입니다." "압니다. 하지만, 뭐랄까... 내가 너무 무른 걸지도 모르지만 그들을 무릎 꿇혀 놓고 위에서 닥달하고 싶을 만큼 그들이 밉지가 않네요." "하, 하아..." 첼릿이 아무말도 못하고 한숨만 내쉬자 그 동안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듀비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그들이 해인님께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흐음... 아까 늙은 인간이 자신의 아들에게 백작 작위를 넘겨주고 싶어 했지요. 그런데 중간에 내가 나타나서 작위를 가로채게 되니까 날 죽이려고 했어요." 간단 명료한 내 설명에 듀비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간단하게 대답했다. "죽여야겠군요." 그러자 그 뒤를 첼릿이 있었다. "당연한 겁니다. 해인님을 죽이려 한 죄는 그 무엇으로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죄인을 소파에 앉게 해서 이야기를 들어보시겠다니..." "죽이지 않습니다." "예?" 첼릿의 말을 자르고 불쑥 내 던진 내 말에 놀란 첼릿이 그도 모르게 소리를 높여 되물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죽이지 않겠다니요? 그럼 평생 감옥에 가두시게요?" "아뇨." 간단하게 대답한 나는 서재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도대체 그들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저도 묻고 싶군요. 갑자기 저들을 서재로 데려오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첼릿이 서재로 들어오자마자 나를 다그치는데, 그 뒤로 서재 문이 벌컥 열리고 뛰어온 듯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헥헥거리는 이브스햄이 들어오더니 다그쳐 묻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대답하지 않고 소파에 자리를 잡으며 자리를 권했을 뿐이었다. "진정하고 앉으세요. 아, 차 드실래요?" "백작님, 지금 차가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들은 즉결 처형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죄인들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더 들으시겠다는 겁니까?" 엄청 흥분한 듯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외치는 이브스햄의 말을 칼칼한 음성이 부인했다. "모두 다는 아니에요. 최소한 한 사람은 그렇지가 않아요." "에르!!" 놀란 이브스햄이 돌아보는 가운데 그녀는 천천히 소파쪽으로 다가왔다. 그래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자리를 권해야 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엠브로스양. 차 한잔 하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백작님. 차는 방금 전에 마시고 와서 생각이 없어요." 그녀가 자리를 잡고 앉자 이브스햄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서재의 문이 열리며 윙겟경이 들어왔다. "죄인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윙겟경. 아, 미안하지만 그들 포박도 좀 풀어주시겠습니까?" "예에? 아, 예..." 내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뜬 윙겟경이었지만, 빙긋 웃으며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자 그는 서둘러 대답하며 포박을 풀었다. "자, 거기 세분,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아, 그래, 차 좀 드시겠습니까?" 서재에 들어와 나는 열심히 차를 권했지만, 아무도 마시질 않았다. 지금 세명도 마찬가지인 듯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힐끔 바라본 채 대답은 안 하고 꾸물 꾸물 내가 가르킨 소파로 와서 앉았다. "거참, 별로 내키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듀비, 차 마실래요?" "저는 주십시요." "좋아요, 윙겟경은?" 듀비의 긍정적인 반응에 방긋 웃으며 문 가까이에 서 있는 윙겟경을 바라보자 그는 아직도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아, 저, 저는 됐습니다." "그래요? 그럼 차 두잔만 가지고 오라고 하세요. 기사분들은 나가셔도 좋습니다." "예에? 그러다가 죄인들이 무슨 일을 벌이면 어쩌시려고요?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제프리는..." 윙겟경이 크게 놀라며 외쳤지만, 나는 그의 말을 싹둑 잘라버렸다. "걱정이 된다면, 윙겟경은 남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여기 있는 누구도 함부로 행동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아... 그, 그거야..." 더듬 거리는 그를 보며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윙겟경은 어쩌실 거죠?" ".... 여기 있겠습니다." "그러세요." 상황이 무지 어색해서그런지 시종이 차를 가지고 올 때까지 감히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윙겟경은 내가 의자를 권했지만, 사양하면서 첼릿 옆에 섰고, 듀비는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달콤한 냄새를 피어올리는 차를 기분 좋게 한 모금 마신 나는 긴장으로 인해 침묵이 흐르는 주변을 한번 훑고는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이야기를 해볼까요? 벤자민 엠브로스, 원하는게 뭐죠?" "예?" 내가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는지 그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에 싱긋 웃어준 나는 소파에 편하게 자세를 고치고 다리를 한번 척 꼰 뒤 재차 입을 열었다. "아까 보니까, 이브스햄과 무슨 거래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던데... 내가 잘못 본 겁니까?" "아, 그, 그게..." "백작님, 그 무슨..." 벤자민과 이브스햄이 동시에 입을 열었지만,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는 못했다. "제가 틀린 겁니까?" 또 한번 묻는 내 말에 벤자민이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제 아들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 있다면, 제가 감옥에 갇힌 걸 그냥 둘 수 없어 용병들을 고용해 감옥을 습격한 것 뿐입니다. 그 전에 있던 모든 사건들은 제가 꾸민 짓이며 아들은 조금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이해해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이브스햄 생각은 어떠세요?" "말도 안됩니다. 이스파엘이 전혀 몰랐을 수가 없어요. 이스파엘도 같이 꾸몄을 겁니다." "너무 단정하시는 것 아닙니까 형님?" "흥, 네 녀석이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내가 아니다. '그' 일로 날 협박해서 아들을 살리려는 모양인데, 백작님께서 날 그냥 두고 계시는 걸 보고도 모르겠냐?" "백작님이야 형님이 어떻게 했을 수도 있겠지만, 지라르경은 어떨까요?" "지라르경은 백작님의 수하다." "그렇긴 합니다만..." "지라르경." 이브스햄과 벤자민의 격렬한 언쟁에 갑자기 내가 끼어들면서 첼릿을 부르자 이브스햄과 벤자민은 입을 다물었고, 첼릿이 대답했다. "예." "벤자민 엠브로스와 그 아들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습니까?" 그의 대답은 간결했다. "처형 하십시오." "왜요?" 이번에도 간결했다. "백작님을 해하려 했으니까요." "아들은 나에게 직접적으로 손을 쓰지 않았는데요?" 허옇게 질린 두 부자를 힐끔 바라보며 다시 묻자 첼릿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백작님을 해하려 했던 죄인을 구출하려 했으니 공모죄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브스햄과 벤자민이 같이 나를 죽이려 했으면 어땠을까요?" 이번에는 이브스햄까지 하얗게 질렸다. "이자를 잡을까요?" 첼릿은 사실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내 말이 끝나는 즉시 검을 빼들어 이브스햄의 목을 겨눴던 것이다. "배, 백작님..." "검을 거두세요, 지라르경. 나는 이야기를 듣고 싶을 뿐입니다." 내 말에 첼릿은 그 즉시 검을 거두고 너무나 간결한 대답을 내뱉았다. "처형하십시오." 그의 대답에 나는 피식 웃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까?" "예." "그렇군요. 그럼 한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한 어린 아이가 무지무지 미워하는 청년이 있었답니다. 그 아이는 이 청년이 죽기를 바랬는데 청년은 건강해서 당장 늙어 죽거나 병들어 죽을 확률이 극히 낮았지요. 그래서 고민고민 하던 아이가 꾀를 써서 이 청년이 잘 다니는 길에 자그마한 함정을 팠답니다. 이 함정에 발이 빠져 나자빠져서 머리를 부딪혀 죽게끔 말이지요. 그걸 모르는 청년은 그 길을 지나다가 정말 그 작은 함정에 발이 빠져 넘어져 버렸지만, 아쉽게도 죽지는 않고 작은 타박상만 입었답니다. 그럼 여기서 이 어린 아이를 살인 미수죄로 잡아서 처형해야 할까요?" 뜬금 없이 엉뚱한 말을 좔좔좔 내밷는 날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그건 첼릿도 마찬가지였던지 - 그는 내 뒤에 서 있어서 얼굴을 볼 수가 없다 - 황당함이 가득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말씀을요. 그 정도로는 그 청년이 죽을리가 없지 않습니까? 재수가 없어서 넘어질때 머리를 짱돌에라도 박아서 뇌진탕에 걸리지 않는 한 말입니다." "하지만 죽이려는 목적으로 함정을 팠고, 청년이 거기에 걸렸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어린애가 한 일에 청년이 죽을까봐 겁을 먹지는 않았을 거 아닙니까? 청년 또한 그런 일 정도로 어린애가 처형되기를 원치 않을 겁니다. 가볍게 혼내기야 하겠지만..." "그렇군요. 그럼 저도 그 청년으로써 가벼이 벌을 내리고 끝내도록 하죠." "예?" 내 말에 첼릿이 다시 소리를 높였다. "이브스햄과 벤자민이 나를 죽이려 했던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죽었습니까? 저 둘이 나에게 한 일은 내가 말한 어린애가 청년을 죽이려고 작은 함정을 판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그 정도로는 죽는다는 위협도 못 느끼거든요." "아니, 그래도..." 첼릿이 뭐라고 더 하려고 했지만, 나는 무시하고 벤자민을 불렀다. "벤자민 엠브로스, 당신이 관리하는 영지에 대한 서류를 봤는데, 확실히 영지 관리하는데 유능하더군요. 아직 어리숙한 나지만 당신같은 인재를 놓치기는 아깝더군요. 해서, 당신의 지위는 그냥 보장해드리지요." "그, 그게 정말입니까?" 벤자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당신에게서 엠브로스란 성은 빼앗겠습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제게 소속 된 영지 관리인이자 영주 대리인일 뿐, 엠브로스 가문 사람은 물론 제 손자도 아닙니다. 당연히 작위 계승권도 박탈되겠지요. 아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벤자민은 소파에서 내려와 땅에 무릎을 꿇고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대신, 사건의 전모를 다 알았으면 좋겠는데요? 당신이 그 날 엠브로스양에게서 작위를 빼앗으려 했던 모든 일을 말입니다." 그러자 벤자민은 차마 소파 위로 올라가서 앉지도 못하고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띄엄띄엄 이야기를 시작했다. 벤자민과 이브스햄은 지금 남아있는 엠브로스 사람들 중, 그나마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에 어렸을때는 물론,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서도 자주 왕래가 있었던 모양이다. 벤자민이 엠브로스 영지 중 가장 척박한 곳을 골라 가서 거기를 크게 부흥시킨 것도 반은 이브스햄을 돕기 위해서라고 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다보니 제프리 찬텔과 에르미아 사이에 있었던 일까지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제프리를 단지 안됐다고만 생각 했는데, 몇년 전 이브스햄의 아들이 죽고 그에게 자식이라고는 에르미아만 남게 되자 작위에 대한 욕심이 생기면서 그를 다시 떠올렸다고 한다. 혹시나 그를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를 수소문 했지만, 에르미아가 결혼을 하면 작위는 자연스레 이스파엘에게 넘어오게 되었기 때문에 그냥 알아만 두고 있자는 생각이었단다. 그러나, 에르미아가 다른 귀족가 여식들과는 달리 혼기가 차도 결혼 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처음에는 제프리 사건때문에 충격을 받아서 그러는가 보다 싶었지만... - 나중에 이브스햄이 그녀에게 본격적으로 여러가지 영지를 꾸려가기 위한 교육을 받는 걸 보고 안되겠다고 생각 해서 일을 꾸몄다고 한다. 마침 제프리가 에르미아에대한 복수심도 가지고 있었기에 일의 진행은 수월했다고 한다. 대신 어려서부터 친딸만큼 예뻐한 아이였기에 죽이지는 않기로 했는데 제프리가 자기 마음대로 죽이려 했다는 거였다. 그 말 그대로, 그때 그 자리에 내가 없었다면 에르미아는 정말 죽은 목숨이었다. 아들인 이스파엘과도 처음부터 논의가 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계획은 우선 벤자민이 어떤 핑계를 대든 이브스햄을 서재에 데리고 가 있는 사이, 그들이 있는 줄 모르는 제프리가 서재로 와서 에르미아를 불러내어 그 곳에서 복수를 한다는 거였다. 원래는 그녀의 얼굴에 약한 황산을 끼얹기로 했었단다. 제프리가 당한 것만큼은 아니지만, 그나마 비슷하게 말이다. 그리고 그때 둘이 튀어나가 제프리는 잡히고 - 나중에 벤자민 부자가 구출해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제프리는 거기서 잡혀서 자기도 죽으려 했던 듯 싶다 - 에르미아는 파티에 못 나가니 대신 이스파엘이 나가 작위를 받는 다는 스토리였다. "거참... 그런데, 궁금한게 있는데... 정말 작위를 가지고 싶다면 꼭 그렇게 엠브로스양을 다치게 하지 않아도 방법이 있잖아요. 둘은 6촌이니까 결혼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둘이 결혼 시키면 되잖아요?" 이 나라에서는 같은 친척이라도 6촌 이상으로 먼 친척이면 결혼이 가능했다. 불가능한 건 4촌이나 5촌 까지만... "그, 그게...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스파엘에게는 벌써 사랑하는 아내가 있어서 말입니다." "그래요? 유부남이었군요." "예에..." "그래요,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아, 그리고 이브스햄." 내 부름에 이브스햄은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에게는 따로 처벌을 내리지 않겠습니다. 그대는 벌써 큰 벌을 받은 것 같아서 말이죠." "감사합니다, 백작님." "그대에게는 따로 처벌을 내리지 않겠습니다. 그대는 벌써 큰 벌을 받은 것 같아서 말이죠." "감사합니다, 백작님." 안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이브스햄이었지만, 순간 슬쩍 첼릿의 눈치를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하기야, 그는 지금까지 내가 아무 말도 않고 잠자코 있었으니 자신에게 아무런 처벌을 내리지 않을 걸 짐작하고 있었을 터였다. 문제는 첼릿이었지... 첼릿이 여기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줄 정말 몰랐었다. 하기야 100년이 넘는 기간동안 계속 엠브로스가를 지키고 있었으니 그게 당연한 걸라나? "자, 그러면 남은 사람은 제프리 찬탈, 당신 뿐이군요. 당신은 할 말이 없습니까?"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더 숙이며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없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에..." 그의 남의 일을 이야기 하는 듯한 무관심한 어조에 내가 황당해하자, 그 즉시 내 뒤쪽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그게 무슨 망발인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겠는가?" 윙겟 경이었다. 첼릿이 말해주길 그가 제일 안타까이 여기고 있을거라더니만,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해라.' 라는 듯한 제프리의 행동에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하지만 윙겟 경의 호통에도 제프리는 고개만 더 푹 수그렸을 뿐이었다. 그의 얼굴은 에르미아 얼굴 못지않게 흉측하게 일그러진데다가 색도 거므틱틱하게 변해 있었다. 엠브로스양은 그나마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는 죄인의 몸이었기에 그나마 가리지도 못해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 밖에 없었다. "할 말이 없다면 하는 수 없지요. 그럼 이브스햄, 저 자를 어떻게 할까요?" 이브스햄은 내가 자신에게 물을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저는... 그러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지금까지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던 에르미아가 끼어들었던 것이다. "백작님, 제가 감히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그녀의 의견도 들어보고 싶었던 터라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백작님, 제프리 찬탈이 저에게 했던 일은 제가 먼저 그에게 했던 일에 대한 복수였습니다. 그러니 만약 제프리 찬탈이 벌을 받게 된다면, 그 원인을 제공한 저 또한 그와 같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그래서요?" 내가 그녀의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묻자 그녀가 당황한 기색을 떠올렸다. "예? 아, 예, 제 말씀은 그러니까... 만약 제프리 찬탈에게 벌을 내려주신다면 저도 같이 벌을 받게 해주십사하고..."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참고하도록 하지요. 할 말은 그게 다입니까?" "예, 예에... 감사합니다." 내가 너무나 산듯하게 받아들이자 그녀는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던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끝맺었다. "이브스햄은요? 할 말이 없으신가요?" 내 말에 이브스햄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백작님이 알아서 해주십시오." "따님의 인생이 망가졌으니 원한이 클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제 딸 또한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쳤으니 벌을 내려달라고 간청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제 딸은 회복할 수 있거든요." "호오, 그래요? 어떻게 말입니까?" "수도에 있는 고위 신관을 찾아갈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백작님께서 수도로 가실때 딸과 같이 동행을 허락해 주십사 간청하려고 했었지요." "그 고위 신관이 고치는 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할 겁니다. 완벽하게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대신 돈이 좀 많이 들겠지요?" "허허허...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러나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렇군요." 이브스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그의 말을 듣는 도중 좋은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원래 제프리에게도 큰 처벌을 내리고 싶지 않았던 데다가, 에르미아 엠브로스와 이브스햄까지 큰 원한이 없는것을 보고 그냥 놔주려고 했지만, 그 보다 더 좋은 해결책이 보였던 것이다. "자, 그렇다면... 제프리 찬텔, 그대는 어떤 처벌을 내리든 감수하겠습니까?" "네." 그는 체념한 듯 대답했지만, 내 뒤쪽에서 긴장감이 전해져 왔다. 아마도, 진 윙겟일 듯... "좋아요. 아, 윙겟 경, 물어볼게 있는데... 제프리 찬텔이 전에 엠브로스 기사단의 기사라고 했었죠?" "예? 아, 예. 그렇습니다." "실력이 어느정도였지요?" "에... 예전에는 저희 기사단의 중간 레벨 정도 였습니다." "그래요? 그럼 실력이 꽤 있는 건가요?"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흐음, 그렇군요. 그럼 한가지 더? 엠브로스 기사단은 월급이 좀 많겠지요?" "예? 아, 뭐.... 괜찮은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괜찮은 편이 어느 정도인데요?" "그러니까... 에... 1급 용병이 평균적으로 버는 수준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윙겟경이 내가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주려고 애썼지만, 용병 세계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알 수 있을리 없었다. 하지만, 아까 듣기로는 1급 용병들은 선금으로 금화를 받는다고 했으니 꽤 받는다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그래요? 좋군요. 좋아요, 제프리 찬탈, 몰래 백작가의 서재에 잠입한 죄, 그리고 엠브로스 가문 사람을 죽이려 한 죄에 대한 처벌을 내리도록 하지요. 우선, 기사단으로 복귀할 것." "예? 그게... 처벌입니까?" 제프리가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에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당연하죠. 망가진 얼굴때문에 기사단을 버리고 나간 것 아닙니까? 내 생각에는 꽤 심한 형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거기다가 그게 끝이 아니거든요. 두번째는 이번 수도에 갈때 동행 하도록 하세요." "윽...." 내 친절한 설명에 제프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브스햄, 엠브로스 양의 얼굴을 치료하러 갈때 제프리 찬텔도 같이 동행 시키세요. 그리고 거기에 드는 비용은 엠브로스가에서 빌려주는 형식으로 하겠습니다. 매달 이자는 10% 씩 해서 다 갚을때까지 제프리 찬텔의 월급에서 50%씩 차압하도록 하세요. 제프리 찬텔, 당신은 평생이 걸리더라도 그 돈을 다 갚을때까지 기사단직을 수행해야 할 겁니다. 혹여 오랜 세월동안 기사단에서 빠져서 실력이 현저하게 낮아졌다면 중노동을 시켜서라도 돈을 다 받아낼테니 실력을 크게 키우는게 좋을겁니다. 이브스햄은 이와 같은 내용이 들어간 저 자에 대한 계약서를 작성해서 저에게 가지고 오세요. 이런 일은 직접 문서로 남겨두는 게 좋겠죠?" 줄줄이 내뱉는 내 선언에 앞에 있던 이들이 놀라움으로 눈을 휘둥그래 떴다. ".... 허, 허허허... 허허허허... 이거 참... 왠지 백작님이 무섭게 느껴집니다만... 알겠습니다. 곧 계약서를 작성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브스햄의 얼빠진 목소리에 다른 사람들이 심히 동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내가 또 입을 떼자 사람들은 뭔 이야기를 할까 긴장한 눈으로 - 특히 제프리 찬텔이 - 나를 주시했다. "엠브로스양, 아까 말씀하시길 제프리 찬텔과 같이 벌을 받겠다고 말씀하셨지요?" "아, 예에..." 무지 긴장했는지 그녀가 두손을 마주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나타나기 전에는 백작 작위를 이어받기 위하여 여러가지 교육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사실입니까?" "네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만족스럽게 바라본 나는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당신은 치료를 받고 난 후 제 보좌관으로 임명하겠습니다. 설마 얼굴이 망가졌다는 이유 하나로 기껏 받은 교육을 썩힌 채 수나 놓으면서 빈둥빈둥 놀면서 지내려는 건 아니겠지요? 그건 제가 용납 못합니다. 아시겠습니까? 혹여 실력이 낮다고 생각한다면 치료와 공부를 병행 하시는게 좋겠지요. 만약, 당신이 형편 없다 생각되면 서류 정리만 죽어라고 시킬테니 각오 하십시오. 대신, 월급은 드리겠습니다. 물론, 당신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높아질테지만, 낮다면 그만큼 월급도 낮아질겁니다." "네, 네!" "이브스햄, 엠브로스양에 대한 이와 같은 계약서도 같이 작성해서 가지고 오도록 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좋아요. 제 판결은 끝이 났습니다. 윙겟경은 즉시 제프리 찬탈을 기사단쪽으로 인도해 가시고, 벤자민 엠... 아, 그렇군요. 두 부자는 성부터 새로 정하셔야겠군요. 오늘 하루는 여기서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 전까지 새로운 성을 마련해서 기록하고 가시구요. 질문 있습니까?" "어, 없습니다." "저, 저도..." 이브스햄과 벤자민이 벙찐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모두 나가보세요." 내 축객령에 다른 사람들이 엉덩이를 소파에서 떼려고 하는데 에르미아 엠브로스가 가만히 손을 들어 나를 불렀다. "저, 저기... 백작님." "네?" "괜찮다면 오늘부터 일하고 싶은데요? 저기... 백작님 의향은 어떠실지..." 거절 당할까봐 주저주저 말하기는 하지만, 일에 대한 의욕이 있다는 건 마음에 들었다. "저야 보좌관이 금방 생기는 게 좋기는 하지만, 비실대는 보좌관은 싫습니다. 그 마음은 고맙지만 혼자 잘 걸어다닐 수 있을때까지 참고 계시는게 좋을 듯 하군요. 그때까지는 이브스햄이 엠브로스양 역할을 해줄 겁니다." "네에..." 푹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향해 빙긋 웃고는 나는 다시 한번 축객령을 내렸다. "좋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들 보세요." 그에 이제야 정말 사람들이 슬금 슬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명에 따라 진 윙겟 경도 제프리 찬텔을 데리러 내 뒷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는데, 그 전에 슬쩍 내 귓가로 얼굴을 가져다 대더니 작게 속삭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백작님." 그에 나는 싱긋 웃어보였다. "별말씀을..." 고위 신관을 만나 뭔가 부탁을 하려면 큰 돈이 들어간다고 들었다. 제프리 찬탈이 그 돈을 갚으려면 아마 반 평생 뼈빠지게 고생좀 할 터였다. 그들에 대한 판결을 내리고 나서 평화로운 며칠이 흘러갔다. 나는 여전히 이브스햄과 엘버트 집사의 도움으로 영지에 대한 파악을 하고 있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이브스햄과 조엘에게 벨레니 국가의 귀족 사회와 정계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태어날때부터 귀족가에서 태어나 착실하게 그 세계에서 교육받고 자라온게 아니라서 그런지 이브스햄은 날 왕성으로 보내는 걸 엄청 걱정했다. 그나마 조엘이 옆에 있어줘서 나았지만, 그래도 완전히 안심한 건 아니었던지 틈만 나면 날 붙잡고 귀족 사교계와 정치 세계에 대하여 설교를 늘어 놓았다. 웃긴건 그런 이브스햄과 조엘이 완전 쿵짝이 잘 맞아가지고 나중에는 아예 이브스햄이 날 붙잡고 설교할때는 조엘도 같이 합석하는게 당연하게 되어버렸다. 그런데, 한 일주일 정도 더 지나고 나자 대충 교육시킬건 다 시켰다고 봤는지 이제는 은근히 왕성으로 출발했으면... 하는 눈치를 보였다. 원래는 영지에서 작위 수여식을 한 다음 - 아니면 전대가 죽으면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 - 될 수 있는한 빠른 시일 내에 (보통 일주일 내외에) 왕성으로 향하는게 보통이었다. 뭐, 언제까지 꼭 와야 한다고 기간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왕에게 정식으로 충성 맹세를 하기 전까지는 작위를 완전히 받았다고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서두르는 거였다. 늦으면 늦어지는 만큼 정식으로 작위를 가진 귀족으로써의 활동도 늦어지니까 말이다. 만약 정계에 진출할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늦어질수록 손해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는 이브스햄의 걱정도 있었고, 또 작위 수여식 파티때 일어났던 자그마한 소동 처리도 있고 해서 일주일이 훨씬 넘는 시간동안 왕성으로 출발할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가까워지게 생기자 날 보내는 걸 걱정하던 이브스햄이 이제는 너무 늦는게 아닌가 싶어 걱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 어느날은 단도직입적으로 나에게 왕성행에 대해 운을 떼었다. "이제 슬슬 가셔야 할 때가 아니신지요?" "어딜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묻자 이브스햄의 얼굴이 굳어졌다. "왕성 말입니다. 설마 모른다고 하시지는 않겠지요?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조엘 자작이 계속 이 곳에 머물고 계시는 것 또한 백작님과 같이 왕성으로 가기 위해서라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아, 그랬지요." "보통 귀족이 작위를 받게 되면 벌써 출발해서 왕성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백작님은 너무 늦으셨어요. 그러니 이제 출발 하셔야지요." "급할 것 없잖아요? 어차피 기간이 정해진 것도 아니라면서요." "급할 게 없다니요. 사실 생각 같아서는 파티가 끝나자마자 왕성으로 출발시키고 싶었다고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우리 엠브로스가문으로써는 요즘 시기가 무척이나 중요하다고요." 엠브로스 가문은 몇년 전까지만 해도 중앙에 진출하지 못한, 그저 작위만 가진 지방 영주에 불과한 가문이었다. 그러나, 전 엠브로스 백작이 친여왕파에 가담하고 친여왕파가 몇년 전 노예 매매상들을 싹 쓸어버리는 걸 계기로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을때 드디어 중앙 진출에 대한 꿈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중앙 진출하여 권력을 가지게 되는 건 모든 귀족들의 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지방 귀족에게는 그 꿈을 이루는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걸 가능하게 한 사건이 바로 몇년 전, 그러니까 내가 집에서 가출하다가 노예매매상에게 잡혀 팔려가기 직전 조엘과 만나게 했던,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펼쳤던 노예매매상 척결 사건이었다. 전 국왕의 외동딸이었던 현 여왕이 왕위로 등극할 때에는 나이가 불과 15세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녀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그녀의 숙부였던 공작이 섭정을 펼쳐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권력을 차지하는 이들은 모두 숙부의 측근들이었고 말이다. 원래는 여왕이 성년이 되면 그가 물러나야 했지만, 사람의 심리가 어디 그렇겠는가? 섭정을 펼치던 숙부는 여러가지 핑계, 또는 그가 장악하고 있는 권력의 힘을 이용하여 물러나지 않고 버텼다고 한다. 그리하여 여왕은 그를 물러나게 하기 위하여 뒤로 힘을 모았지만, 굵직 굵직한 중앙 귀족들은 이미 숙부의 측근들이라 힘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이때 조엘의 아버지인 멕알파인 공작과 전 국왕의 측근이었던 렝포드 후작 - 조엘과 만났을 당시 작전 지휘를 하던 렝포드 자작이 그 후작의 아들내미였다. - 그리고 혜성처럼 나타나 벨레니 국가 최연소 소드 마스터로 이름을 날리는 리건 블랜차드라고 하는 후작이 여왕의 측근이 되어 주면서 그제서야 친 여왕파가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세 귀족은 친 여왕파의 세 기둥이며, 그녀의 가장 큰 측근이자 신임을 받고 있어서 굵직 굵직한 자리를 하나씩 꿰어 차고 있다고 한다. 하기야, 조엘 아버지만 봐도 그가 재상 노릇을 하고 있었으니...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게 큰 자들이 여왕에게 붙어 세력이 커졌지만 - 이때 우리 엠브로스 백작가도 친 여왕파에 들어갔다. - 정권을 잡고 있는 건 여전히 여왕의 숙부와 그 측근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을 한꺼번에 제거하기 위해 노예매매상인의 척결 사건을 일으킨 것이었다. 국법으로는 금지하고 있지만, 능력있는 자들이 뒤쪽으로는 다 가지고 있다는 걸 이용한 것이었다. 거기다가, 그녀의 측근들은 노예를 소지하고 있지 않았고 말이다. 나중에 이브스햄이 털어놓기를, 원래 우리 가문도 중앙에 진출해 있는 꽤 큰 가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내 외할아버지인 오스번 엠브로스 백작께서 내 어머니를 친딸로 인정하고 데리고 있는 바람에 그 일로 인하여 거의 왕따가 되다시피 해서 중앙에서 물러나 지방 귀족이 된 거라나? 그런 상황이었으니 이브스햄이 아무리 애를 써도 여왕의 숙부측에 붙지는 못했을 거라고 했다. 지금으로써는 그게 엄청난 행운으로 작용했지만 말이다. 그 노예 매매상인 척결 사건때 엠브로스 백작가도 두 팔 걷어 부치고 나서서 크고 작은 공들을 세웠기에 여왕의 신임을 받아 드디어 중앙쪽으로 진출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게 바로 몇년 전 이야기인데, 아직 중앙쪽에다 탄탄한 기반을 잡기전에 내가 덜컥 백작이 되어버린 것이다. 원래 이브스햄은 아직 미미할 때 자신이 기반을 잡기 보다는 아예 딸에게 물려줘 그녀가 확실한 기반을 잡아 정권에 진출하거나, 아니면 거기서 큰 가문의 남자와 엮어 명실공한 중앙 귀족으로 굳어지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벤자민 엠브로스가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이를 빠드득 가는 폼을 보니, 내가 용서해줬다고 해도 앞으로 벤자민 부자가 쫌 고생을 할 듯 싶었다. 자업자득이긴 했지만, 이브스햄과 벤자민 사이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나에게는 유익이었다. 뭐, 지금에와서 이야기지만, 사실은 그 두 부자를 살려준 이유가 이브스햄을 견제하기 위함 이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장 크게 작용하기는 했지만, 그 밑에는 그 두 부자를 죽이고 이브스햄 부녀를 그냥 놔두었다가는 만약 에르미아 엠브로스가 자식을 낳았을 경우 그 애를 백작으로 세울 계획을 또 꾸미지 않는다고 단언을 못했으니 말이다. 지금이야 에르미아를 구해줘서 나에게 고마워하고 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언젠가 변하는 거 아니겠는가? 그러나 만약 벤자민 두 부자를 지위를 보장하고 나둔다면 이브스햄과 그 두 부자 사이는 견원지간이 될 테고, 만약 이브스햄이 뭔가를 꾸민다면 두 부자는 든든한 내 아군이 되어줄 터였다. 비록 서류상으로 보기만 한 거지만, 벤자민은 꽤나 현명한 자였으니 그런 상황에서 꽤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 거다. 게다가 그 둘에게서는 엠브로스란 성을 앗아버렸으니 백작이 되려할 꿈도 버렸을 거고 말이다.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그 둘은 서로를 견제하며 나에게 더 잘보이기 위해 애쓸테니 이러나 저러나 나에게는 이익 아닌가? 으음, 이렇게 말하니 나도 엄청나게 나쁜 사람처럼 느껴지는데... 솔직히, 이건 나중에 곰곰히 생각하니까 떠오른 거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조금만 더 있다가 출발할게요." "언제요?" "글쎄요... 하지만, 슬슬 출발 준비는 시작하고 계세요." "하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으시며 안됩니다." 내 말에 이브스햄이 그쯤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나라고 귀찮아서 미루고 있는 건 아니었다. 뭐, 사실 아직도 찬바람이 쌩쌩 부는 이 추운 겨울에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게 내키지 않기는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잽싸게 제일 가까운 지부로 달려간 잭슨 녀석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벨레니 국가에는 아직 지부가 진출하지 못해서 국경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더니 정말 오래 걸렸다. 그가 돌아 와서 레이언 녀석과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나누고 떠나려고 했던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내 능력으로 잽싸게 다녀오고 싶었지만, 아무리 나라도 며칠 이상이 걸리는 거리인데다가 그 동안 여길 비워놓는 걸 이브스햄에게 뭐라고 변명을 해야할지 마땅치도 않았다. 아직 이브스햄에게는 내가 상회 사람이라는 걸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으음, 그러고보니 첼릿에게도 말 안 했네. 나중에 서운해 하는 거 아닌가 몰라.' 만약 그 이야기를 했다간 둘다 똑같이 당장 그만 두라고 펄펄 뛸거라고 짐작 되지만 말이다. 정 오래 걸리면 잭슨에게 천천히 다녀 오라고 하고 나도 왕궁에 갔다와서 만나면 될 게 아니냐고 묻고 싶겠지만, 왕성에 가면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기 때문에 이리 서두르는 거였다. 그렇다고 수도로 찾아 오라고 그럴 수도 없고... 그 동안은 이브스햄이 나에게 여러가지 교육(?)을 시키느라 그가 보내주지 않아서 시간을 지연시킬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가 직접 보내려고 하니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전에 부디 잭슨이 돌아와줘야 할텐데...' ================================================================ 오늘은 좀 짧습니다. ^^;; '그 전에 부디 잭슨이 돌아와줘야 할텐데...' 그러나 잭슨은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날로부터 5일이 더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쯤 되자 이브스햄의 빨리 출발하자는 압력도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백작님, 출발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아, 그래요? 엠브로스양은?"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회복되어 이제 장거리 여행도 괜찮을 거라고 합니다. 더욱이 마법사도 같이 동행을 하니 염려 놓으셔도 될 겁니다." '그러니까, 마법사 보다는 의원이나 약사가 더 도움이 될텐데...' 여전히 의원이나 약사를 마법사보다 아래로 보는 이브스햄의 고정관념에 한숨이 나왔지만, 내가 뭐라고 한다고 해서 고쳐질 것도 아니라 나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러니 이제 출발 하셔야죠?" "그렇군요. 그럼 날씨 좋은 날을 선택해서 출발하도록 하죠?" 내 말에 이브스햄의 얼굴이 환히 펴졌다. "요즘 날씨가 계속 좋았으니 내일도 좋을 것이라 생각 됩니다. 내일 출발하시는 건 어떠신지요?" "내일이라... 나쁠 건 없겠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이브스햄의 눈이 둥그래졌다. 그 동안 계속 미뤄 왔는데 이제와서 선선히 그러겠다고 하니까 기다리던 대답이긴 했지만, 오히려 믿겨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정말이십니까?" "어? 나쁜가요?" 그의 말에 내가 장난스레 되묻자 그가 얼른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아닙니다. 나쁘다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알겠습니다, 내일이란 말이지요?" 몇번이나 다짐을 받은 그는 내가 마음이 변할새라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혀를 쏘옥 빼물었다. '가겠다고 한 적은 없는데? 나쁘지 않다고만 했지.' 이러한 내 모습을 뒤에서 다 지켜보고 있던 첼릿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해인님...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거죠?" 그의 말에 나는 생긋 웃어 보였다. "나쁜 생각." 날짜를 미루는 게 힘들다면, 아예 출발할 수 없게 만들면 된다. 이번 여행의 중심 인물은 바로 나, 이런 내가 없어진다면 왕성으로 출발 할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이렇게 잭슨이 늦을 줄 알았으면, 차라리 여기에 큰 소동이 벌어지더라도 처음부터 내가 직접 나서서 그를 찾아가는 게 나았을 거였다. 잭슨이 여기로 오는 중이라면, 늦어도 며칠 안에는 그와 조우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아무 소동 없이 무난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면 더없이 만족스러웠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이런 내 생각을 알아차린 것일까? 첼릿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발 엉뚱한 생각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런 그에게 빙긋 웃어보이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자, 이 이일을 듀비에게도 알려 줘야지." 듀비는 현재 내 곁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벤자민 부자와 제프리 찬텔에 대한 판결을 내린 날 저녁, 듀비의 실력을 높이 산 첼릿이 그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던 것이다. 둘 모두 이 곳에서는 최강으로 손꼽히는 - 물론 둘 중 듀비가 더 강하지만, 첼릿도 기사단에서는 첫번째로 꼽히는 실력자였다 - 실력자이므로 항상 둘 모두 내 곁에 붙어 있을 필요는 없다는 거였다. 사실, 내 자신도 스스로의 몸쯤은 지킬 수 있는데다가, 여기서는 날 위협하는 위험 같은 건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듀비와 첼릿은 하루를 둘로 나누어 교대로 내 곁에 있기로 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스스로를 위한 수련을 하고 말이다. 그 제안은 사실 첼릿 스스로를 위한 제안이었다. 첼릿은 그 동안 자신 정도라면 이 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라 자부하고 있었기에 수련도 전보다는 약간 게을리 하고 있었는데, 듀비에게 한번 꺾인 이후로 자부심도 같이 꺾여져 더욱 더 수련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 거렸다고 한다. 그런데 내 호위기사로 있는 바람에 한시도 내 곁에서 떨어질 수 없었으니 수련을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조엘의 심복이자 호위 기사인 데니형 같은 경우에는, 조엘 스스로가 시간 있을때마다 몸을 단련 했기에 그 시간에 데니 형 또한 수련을 할 수 있었지만, 나는 몸을 단련하는 걸 아예 포기해 버렸으니 첼릿이 생각할 시간이라고는 내가 잠들어 다른 기사들이 내 침실을 지켜줄 때 뿐이었다. 하지만, 듀비와 교대로 한다면 듀비가 내 곁에 있는 동안 수련 하는 게 가능했다. 듀비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던 터라 기꺼이 수락되었고, 그 둘은 하루씩 번갈아가면서 내 곁을 지키기로 했다. 내 생각으로는 수련을 한다고 하면 최소한 며칠 정도는 계속 그에 몰두해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 둘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뭐라 그러겠는가? 그 둘은 나보다도 그쪽에 대해서는 훨씬 더 잘 아는 이들인데 말이다. 그리하여 오늘은 듀비가 수련을 하고 첼릿이 내 곁을 지키는 날이라, 듀비는 지금 성 옆에 있는 숲에 가 있었다. 정글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살아오면서 검술을 습득했기 때문인지, 연무장을 이용하는 첼릿과는 달리 듀비는 숲속에 자리를 잡고 거기서 수련을 했다. "어차피 새벽에는 돌아올텐데요. 그때 이야기해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럴수는 없었다. 새벽에 출발할 예정이니까. "산책겸 한번 가보죠 뭐. 정 몰두하고 있으면 그냥 오고요." 내 말에 첼릿은 아무 말 없이 내 뒤를 따랐다. 숲으로 가는 방향에는 기사들 전용 연무장이 있었다. "하앗~!!" "하앗~!!" 오늘도 그 곳에서는 우렁찬 기합 소리가 들려오며 열심히 훈련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숲으로 가는게 급한 일은 아니었던 터라 연무장이 가까워지자 나는 발걸음을 늦추며 연무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같이 그쪽으로 시선으로 돌리던 첼릿이 입을 열었다. "아, 오늘은 수련 기사들이 하는 날이군요." "그래요?" 수련 기사들은 아직 정식 기사가 되지 않은 상태로 기사단에 있는 사람들을 말했다. 기사 학교를 졸업 하거나, 아니면 뛰어난 자질을 가진 것이 인정된 사람들을 뽑아 기사단에서 2년 이상의 수련 생활을 하고나면 나중에 정식으로 기사의 작위를 받을 수 있는게 정석이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수련 기사 과정을 겪어야 하는 건 귀족이던 평민이던 상관 없이 기사를 목표로 하는 모든 이들의 의무였지만, 수련 생활이란 한마디로 기사의 시종 노릇을 하는 거였으니 권력 있는 귀족들이 자신의 자제들에게 그런 일을 시킬리가 없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보통 기사 학교를 졸업하면서 자연스레 귀족 작위를 받게 되고 수련 기사가 되는 사람들은 힘 없는 귀족이나 평민이 대부분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수련 기사가 되면 기사들이 훈련 받을때 같이 훈련을 받지만, 이렇게 그들만 모아 놓고 기사들이 지도를 해주는 날이 며칠에 한번 씩 따로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던 모양이다. 연무장 높은 지대에는 윙겟 경이 몇몇 고참 기사들과 지켜보는 가운데 기사들이 수련 기사들을 한명씩 맡아서 지도해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자식아, 검술을 똑같이 흉내 낸다고 그게 다 되는 줄 아냐? 네걸로 만들어야지, 네 걸로!" 멋드러지게 검법을 선보이고 만족해서 히죽 웃어보이는 수련 기사에게 그를 맡고 있던 기사가 엄한 목소리로 질책을 던졌다. "야,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갔잖아! 너 도대체 학교에서 뭘 배워 온 거야? 그것도 제대로 못해? 다시!" "옙!!" 내가 보기에는 잘 하고 있는 듯 보이는데, 지도해주는 기사의 눈에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기사의 질책에 수련 기사가 잽싸게 처음부터 다시 자세를 잡았다. "너 이작식, 그 동안 놀고만 있었냐? 검 하나 제대로 못 다뤄? 네가 검을 휘둘러야지, 너가 검에 휘둘리고 있잖아!! 그만!! 안돼겠어, 이 자식. 풋샵 50회 실시!!" "실시!!" 한쪽에서는 기사의 호령에 수련 기사가 잽싸게 엎드려 우렁찬 구령을 붙이며 팔을 굽히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빨리빨리 못하나?" "넷, 다섯, 여섯..." '으음... 역시 기사가 안 되길 잘한 듯...' 무지 엄격해 보이는 모습에 몸을 한번 부르르 떨며 시선을 돌리는데, 연무장 한쪽 구석에 아무도 지도해 주는 이 없이 홀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눈 주위와 콧등, 그리고 뺨 절반을 가려주는 검은 가면을 쓴 그는 주위의 소란에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묵묵히 가검을 들고 정면 내려베기를 하고 있었다. "제프리 찬탈이군요."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안 첼릿이 입을 열었다. 그는 흉악한 얼굴을 남에게 절대로 안 내보이려고 했기에 항상 모자나 망토를 두르고 있게 할 수는 없어서 가면을 쓰고 있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적응은 잘 해가고 있나요?" "진의 말에 의하면 수련에 몰두해 있다고 합니다. 다른 기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게 좀 걱정 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차차 나아지겠죠. 갑자기 잘 어울리기는 힘든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군요. 실력은 어때요?" "기사단에서 나가기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세상을 떠돌아 다니면서 경험이 쌓인 탓이겠죠. 그는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검사로써는 오히려 잘 된 일이겠죠. 검에만 몰두할 수 있을테니까요." "어쨌든, 저 사람도 얼굴이 치료됐으면 좋겠는데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제프리를 힐끗 바라보며 숲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하는 찰나, 저 멀리서 누군가가 열심히 나를 부르며 달려오는 게 보였다. "백작님~ 백작니이이이임~~" 내 시종으로 배정된 켈빈이었다. 그는 얼마나 열심히 뛰어 왔는지 내 앞에 도착해서 말도 못 꺼내고 한참동안이나 헥헥 거리는 거였다. 그가 숨을 다 고를때까지 기다린 나는 켈빈이 겨우 몸을 똑바로 세우자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켈빈?" "손님이 오셨어요. 그 왜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지신 잘생기신 분 있잖아요?" 내가 아는 사람 중 연보라색 머리에 잘 생긴 얼굴을 가진 이는 딱 한 사람 밖에 없었다. "드디어 왔군. 그래, 지금 어디 있지?" "응접실에요." 켈빈의 말을 들으며 급하게 발걸음을 옮긴 나는 성에 도착해 응접실 문을 박차듯 열고 들어가며 외쳤다. "잭슨, 너어어~~ 왜, 왜그래?" 원래는 왜 이렇게 늦어냐고 한 마디 하려고 했지만,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 말은 쏘옥 들어가버렸다. "여, 여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하는 잭슨의 모습은, 한 일주일은 밥을 못 먹은 사람 처럼 피골이 상접해 있었고, 온 몸은 먼지 투성이에 피로한 기색이 가득 들어 있었다. 척 보아하니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쉬지도 못한 채 열심히 달려왔음이 분명했다. 그런 사람에게 늦었다고 화를 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괜찮냐? 살아 있어?" "아아... 죽지는... 않았다... 나.. 물, 물좀..." 내가 따로 시종을 부르지 않아도 그때쯤 시녀가 따뜻한 우유가 담긴 대접을 가지고 들어왔다. 잭슨의 꼴을 보자마자 집사가 준비해서 보낸 모양이었다. 잭슨은 그걸 보더니 번개같이 낚아채 벌컥벌컥 들이마시는데, 까딱 잘못하다가는 체할 것 같아 겁이 날 정도로 엄청 빠른 속도였다. "야, 야아... 천천히 마셔. 그러다 체하겠다." "꿀꺽, 꿀꺽, 꿀꺼억~ 크하~ 살았다." 내 우려와는 달리 한 방울도 남김 없이 싸악 마신 잭슨이 그제야 혈색이 도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더 줄까?" "응. 이왕이면 우유 말고 먹을걸로 줘." "그래,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시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아아, 정말 힘들었어. 도대체 왠 놈의 거리가 그렇게 먼 거냐?" 시녀가 밖으로 나가자 잭슨이 소파에 털썩 드러누우며 투덜거렸다. "레이언하고는 연락 됐어?"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묻자 잭슨이 아차 하는 얼굴로 벌떡 일어나 앉더니 자신이 가지고 온, 그와 마찬가지로 엄청 지저분한 가죽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 상자 안에는 왠만해서는 깨지지 않게 솜이 사방에 깔려 있었고, 가운데에는 네모난 받침대에 고이 올려진 내 주먹보다 조금 더 큰 수정 구슬이 있었다. 받침대와 수정 구슬은 붙어 있는 형태였는데, 그걸 탁자 위에 올려놓은 잭슨은 받침대에 빨간 구술이 박혀있는 쪽이 내 앞으로 오게 하더니 입을 열었다. "자, 네가 마법을 할 줄 알아서 마법사는 안 데리고 왔어." "이게 뭔데?" "뭐긴 뭐야? 통신용 구슬이지. 너무 거리가 멀어서 화면은 안 뜨고 소리만 들릴 거야." "오오, 이게 통신용 구슬이야?"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건 처음이라 나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그걸 들어 이리저리 돌려보며 살펴봤다. 얼만큼 능력 있는 마법사가 만들었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꽤 좋은 것들은 한 나라 안에서 -물론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까지는 안되겠지만서도 - 영상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국경이 바뀌면 영상을 보이는 건 힘들고 이야기만 나눌 수 있다고 한다. 그런 통신용 구슬들은 각각 한 세트로 있어서 같은 세트의 구슬들 끼리만 주고받을 수 있지 다른 걸로는 연락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다른 걸로도 연락 가능하다면, 자기가 연결되고 싶은 상대 말고도 다른 상대와 연결되는 수가 종종 있지 않겠는가? "거기 빨간 구슬 보이지? 거기에 빛이 나올때까지 마나를 주입하고 이야기 하래." "누가 받는데?" "통신 담당 마법사겠지. 본부 직통이니까 누군가가 받으면 레이언 대라고 하면 돼. 아, 마나는 계속 주입해줘야 한댄다. 빛이 꺼지면 연락이 끊어진대." "알았어." 그때 음식을 가지고 온 시녀가 도착하여 우리는 대화가 잠시 끊겼다가 시녀가 나간 뒤에야 나는 통신용 구슬을 탁자위에 놓고 마나를 주입했다. 약 2서클에 해당하는 마나를 주입하자 그제야 빨간 구슬에 빛이 들어왔다. "이제 이야기 하면 되는 거야?" 그 빛을 확인하고 내가 잭슨에게 묻자 잭슨의 대답 대신 구슬로부터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네? 여보세요? 거기 누구십니까?] "아앗, 네, 네. 베지테크스 상회 본부입니까?" [네, 그런데요? 본부 사람이라면 등급과 이름을 대십시오.] 등급이란, 무슨 패를 가지고 있느냐를 말하는 거였다. 나는 은패를 가지고 있었기에 은 등급이었다. "아, 저는 은등급의 해인 오스번이라고 합니다. 레이언 베지테크씨를 뵙고 싶은데요." [잠시만요, 신원을 확인하겠습니다. 은등급, 은등급이라... 아, 예. 여기 있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말소리가 끊겼다. "오, 뭐야. 여기는 신원 확인도 하냐?" 내가 구슬에 대고 이야기를 하는 동안 시녀가 가지고 온 오트밀을 열심히 퍼먹던 잭슨이 대꾸했다. "당연하지. 아무나 바꿔주는 줄 알아?" "그래봤자 등급하고 이름만 확인하네 뭘... 딴 사람이 등급하고 이름을 알아내서 연락하면 어쩔껴?" 내 물음에 잭슨은 다시 오트밀 그릇에 얼굴을 박고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모르지. 난 통신 담당이 아니니까." 잠시 후 구슬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해인, 너 해인이냐?] "오옷, 크리스? 레이언이 안 나오고 왜 너가 나오는 건데?" 내가 놀란 목소리로 묻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나 여기 있어.] "그래? 어쨌든, 둘 다 잘 있었냐?" [우리야 잘 있지. 그러다가 네 소식을 듣고 엄청 놀랐다. 너 백작이라면서?] 크리스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지." [하기야, 주디스 오스번님의 인간 아버지가 귀족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거 같아. 아마 그쪽 이겠지?] "응, 정확하게 말하면 벨레니 국가의 엠브로스 백작이셨지." [그래, 어쨌든 네가 상회를 탈퇴하지 않는다는 건 고마운 일이야. 우리도 슬슬 그쪽으로 진출을 해볼까 하는데 도움이 많이 될 거 같아.] 기대어린 크리스의 말에 나는 삐질 웃었다. "기대를 깨서 미안한데 크리스, 엠브로스 백작가는 중앙 귀족이 아니라서 아마 큰 도움은 못 될거야. 이제 슬슬 진출하려고 하기는 하지만 내가 잘 할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러자 레이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말씀? 네가 어때서? 넌 잘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사실 네가 중앙 귀족이던 지방 귀족이던 우리로써는 귀족과 친하다는 건 엄청난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크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너 혼자 어떻게 할 필요도 없어. 비록 나라가 다르지만, 우리 상회의 정보력은 그 나라까지 뻗어 있거든. 네가 우리 상회를 탈퇴하지 않는 한 우리가 널 힘껏 도와주마.] [바로 그거야. 그까짓 중앙 귀족? 걱정마, 걱정마. 우리가 팍팍 밀어주고 끌어주고 응원해줄테니! 이 레이언 베지테크스를 믿어 보라고!] [확실하게 자금력은 대줄테니 걱정 마라. 우리 상회 재력이라면 큰 도움이 될 거다.] 둘이 번갈아가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 둘이 너무 든든하게 느껴진다는 거였다. "아하하.. 그렇게까지 도와줄 건 없는데." [무슨 소리? 너 같은 인재에게 이 정도 도움은 당연한 거지. 거기다 우리도 그만큼 네 배경을 써먹을테니 빚을 진다고는 생각하지 마. 투자한 만큼 뽑아낼 거다.] 크리스의 덤덤한 말에 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어디 잘해봐라. 그럼,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되지?" [지금은 네가 중앙으로 진출해서 자리를 확실하게 잡는 것만 생각해. 어중간한 위치에서 상회 일도 같이 하려다가는 둘다 안되는 수가 있으니까 하나씩 확실하게 하자고. 우리나 너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아. 게다가, 벨레니국으로 진출하는 건 생각만 하고 있었지 아직 어떻게 하자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거든. 우리도 이제부터 좀더 자세한 정보를 착실하게 모으고 계획을 짜야지. 하지만, 우선은 널 명실공한 중앙 귀족으로 만드는 것 부터 시작될 거 같다.] "그렇구나. 아, 그럼 연락은 어떻게 할건데?" [생각 같아서는 잭슨을 너에게 붙여주고 싶지만, 이제 곧 봄이잖아? 상회가 또 바빠질 시기라 잭슨같은 녀석이라도 절실할 때라서... 어느정도 체계가 잡힌다면 우리가 먼저 너에게 소식을 보낼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최대한 빨리 연락할께.] "내가 언제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우리 상회의 정보력을 무시하지 말라니까. 우리에게 벨레니 국가에서 엠브로스 백작 찾는 건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그래, 알았어. 그럼 나는 이쪽 일에 전념하도록 하지." 슬슬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하자, 레이언의 진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인아, 우리가 연락하기 전에는 상회 일을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돼, 알았지? 네가 그쪽 일을 잘 해나가는 건 우리 상회에 크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너는 예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베지테크스의 사람이야. 아, 그러고보니 이 소식 안 알려줬지?] "무슨 소식?" [너 이번 해부터 금 등급으로 올랐다. 그랜드마 지부에서 한 일 덕분인줄 알아.] "아하하, 그러냐? 그럼 월급은 꼬박꼬박 줄겨?" 내 농담에 크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챙겨놓고 있으니 걱정 마라. 레이언 녀석이 약속한 보너스까지 벌써 계산해놨다.] "아하하, 대단한걸? 나중에 받을 돈이 크겠어." [그래, 기대하고 있으라고. 나중에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해라.] 크리스의 말에 이어 레이언의 말이 들려왔다. [잘 있어. 아, 그리고 그 통신 구슬은 잭슨 녀석보고 가지고 오라고 했으니까 잘 챙겨주고. 나중에 만나면 백작님이라고 해야 하나?] "됐네요. 그런 호칭으로 불리고 싶은 마음 별로 없어. 어쨌든, 나중에 만나자." [그래] 레이언의 대답으로 통신이 끊겼다. 그러자 벌써 음식을 싹 해치운 잭슨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겠다, 벌써 금 등급이라니. 쳇, 나는 언제나 거기까지 올라가나?" "후후, 부럽냐? 아아, 사실은 네가 늦어가지고 너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예정대로 나는 내일 출발해야겠는걸? 너는 내가 여기에 이야기를 해놓을테니 있고 싶은 만큼 있다가 가도록 해." 내 말에 잭슨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너도 없는데 내가 무슨 재미로? 아, 그래 나도 내일 쫓아가련다." 그의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눈을 휘둥그래 떴다. "엥? 그럼 너도 여기 수도로 가려고?" "수도까지는 가지 않고, 길이 같은 곳만 가려고. 너랑 같이 가면 편하게 이동할 거 아니냐? 아무래도 백작께서 이동하시는 건데. 상회에는 봄이 되기 전까지만 도착하면 되니 시간은 좀 널널해서 괜찮아." "그래? 그럼 너 좋을 대로 해라." "그러지. 아, 나는 이만 자러 갈란다. 내일 아침까지 계속 잘거니까 저녁 먹으라고 깨우지 마라. 대신, 아침은 푸짐하게 차려놔." 입이 찢어져라 크게 하품을 하는 잭슨 녀석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자라." 다음 날, 성의 앞마당에는 엠브로스가의 문장이 새겨진 고급 마차 여러대와 짐 마차, 그리고 기사들을 위한 수십마리의 말이 몰려들었다. "그러니까... 기사단도 같이 간다고요?" 나는 오늘 아침에야 들을 수 있는, 이번 왕성행의 일행의 규모에 입이 떠억 벌어졌다. "당연한 일입니다. 백작님을 호위 해야죠. 하지만, 왕성의 규칙상 다는 못가고 일부만 갑니다." "허어..." 나는 기껏해야 나와 나를 호위할 기사 몇명, 그리고 이브스햄과 그녀의 딸을 위한 기사 몇명, 나와 그 기사들의 시종, 그리고 이브스햄과 에르미아를 위한 시종 몇명... 그러니까 다 합해봐야 20명쯤 될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에르미아양이 있으니 그 정도는 허용해 줘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건 기사단장 윙겟을 비롯해 호위 기사만 30명이었다. 거기에 사병에 시종들에 에르미양을 위한 시녀에 짐꾼들까지 합하니 숫자는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뭔 짐이 그리도 많은지, 짐마차가 사람이 타고 가는 마차의 두배였다. 조엘이 이 영지에 들릴때 데니 형만 동행하고 와서 다행이었지, 조엘까지 형식을 갖춰서 왔다가는 수도로 돌아가는 일행은 이보다 더 불어 있을 거였다. 성 앞마당에 와글와글 모여있는 인원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자 조엘이 슬그머니 다가와 속삭였다. "후후후, 제가 딸랑 둘만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계셨죠?" "족집게시군요. 이거야 원 너무 거창해서... 어디 외출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뭐, 사적인 외출은 이정도 까지는 아니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지금은 공적인 외출이라서 그러는 거랍니다. 거기다가 국왕의 공식적인 나들이에 비하면 약소한 거라고요." "하아...."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분주하게 출발 준비를 하는 일행들 속으로 한번 파고들었지만, 모두들 그에 대비에 두툼한 망토를 걸치고 있었기에 추위를 타게 하지는 못했다. 나 또한 이브스햄이 부랴부랴 마련해준, 안쪽에 부드러운 털이 그대로 달린 고급스러운 망토를 걸치고 있었기에 크게 춥지는 않았다. 부드러운 털의 느낌이 좋아서 나는 아까부터 은근슬쩍 손등을 털에 대고 부비고 있었다. 많은 시종들이 달라붙어 분주하게 움직인 덕에 잠시 후에 출발 준비가 다 되었다. 이브스햄과 그의 딸, 그리고 그녀를 위한 시녀들과 백작가의 마법사인 엘버트가 마차에 오르고 모든 기사들이 말위에 오르자 나도 나를 위해 준비된 새하얀 백마 위로 올라갔다. 원래는 나도 마차를 타고 편안하게 가고 싶었는데, 조엘이 말을 타고 가는 바람에 손님이 말을 타고 가는데 주인이 마차를 타고 갈 수가 없어서 반 강제적으로 말을 타고 가게 된 것이었다. 조엘이나 데니 형이야 기사 수련을 받은 사람들이고, 여기 올때 말을 타고 왔으니 갈 때도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그가 그러는 거에 나까지 영향을 받는다는게 좀 황당하기는 했다. 뭐, 이브스햄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마차를 타고 가게 되었지만... "오, 그렇게 하니까 귀족 같다." 내 옆에 준비된 말에 오른 잭슨이 쿡쿡 웃으며 속삭이자 나는 입술을 비쭉였다. "뭐냐, 옷만 잘 차려입은 거 뿐이잖아. 그럼 고급 옷 입은 사람들은 다 귀족으로 보이냐?" "아니지, 너는 원래 얼굴이 말끔해서 그런지 은근히 귀티가 났으니까." "남말하고 있네. 너는 안 그러냐? 아, 너 그렇게 말해서 은근히 네 자랑 하는 거지?" "헤헷, 들켰나?" 그렇게 우리 둘이 속닥 거리는중에 윙겟 경의 큰 소리가 들렸다. "자, 그럼 출발~!" 그의 외침과 더불어 선두에서 엠브로스 백작가의 깃발과 기사단의 깃발을 든 기사들이 제일 먼저 말을 몰았고, 그 뒤에 선 일행들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행은 순조로웠다. 비록 라센국이나 왈그린 국처럼 모든 길이 잘 닦여있지 않았고, 날은 무척 추웠지만, 그 외에는 우리 일행이 움직이는데 위협이 될 만한 건 없었다. 가끔 인적이 드믄 곳에서는 들짐승들이나 몬스터들이 나온다고 하기는 했지만, 수십명이, 그것도 완전 무장한 기사들이 눈을 부랄리고 있는 일행을 덥칠 만큼 어리석은 이들은 없었다. 일행이 많다보니 속도가 느려서 그 다음 마을에 도착하지 못해 노숙하는 날이 많았지만, 노숙에 익숙한 나였기에 견디지 못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백작이라는 이유 하나로 노숙한다고 해도 두터운 망토를 두르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시종들이 다 알아서 해줬으니, 오히려 전에 노숙하던 것 보다는 훨씬 편했다. 문제는... 기사들과 잭슨의 사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나는 하찬은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어차피 잭슨은 며칠 뒤 우리와 헤어질테고, 그가 친한건 나지 기사들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기사들이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더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가만히 보니 잭슨이 우리 일행에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나와 듀비 뿐이었다. 그나마 듀비는 원래 말이 없으니 천상 나와 주로 대화를 했었는데, 나는 그 말고도 여러 사람들, 그러니까 일행 진로에 대해서 윙겟 경과 계속 이야기를 해야 했고, 조엘이나 이브스햄과도 이야기를 해야 했으니까 잭슨에게 크게 신경을 써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 날도 우리는 날이 저물때까지 마을에 도착하지 못해 적당한 공터를 잡고 야영을 해야만 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잠시 이브스햄과 에르미아를 살펴보고 돌아오던 중, 앞쪽에 있던 잭슨을 발견하고는 반가이 부르려는데, 그 보다도 먼저 잭슨이 옆을 지나가던 기사와 슬쩍 부딪혀 버렸다. 다행이도 강하게 부딪힌건 아니라 누구 하나 다친 사람이 없었고, 둘 다 단련한 사람들이었기에 넘어지지는 않고 약간 몸을 휘청 거리는 정도로 끝날 수 있었다. 그런 부딪힘이 있고 난 후 잭슨은 자기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예의상 먼저 그 기사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런데, 그 괴씸한 기사 녀석이 잭슨의 사과를 받으면 뭔가 대답이라도 해줄 것이지 마치 아무 말도 못 들은 양 그냥 쓰윽 지나치는 것 아닌가? 잭슨을 완전히 무시하고 말이다. "저저~!!" 아무리 엠브로스 백작이 되었다지만 엠브로스 기사단의 기사 보다는 잭슨을 가깝게 여기고 있던 나였기에 그 즉시 그 기사를 불러 뭐라 한마디를 해주려고 달려가려는데 내 뒤를 따르던 첼릿이 나를 잡았다. "해인님." "첼릿, 설마 지금 저 기사의 편을 들어주려는 건 아니겠지요?" 말리는 기색이 다분한 첼릿의 기색을 알아챈 내가 노골적으로 화를 들어내며 말하는데, 내 말이 조금 컸던지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잭슨이 내 머리를 폭 눌렀다. "야야, 됐어." "돼긴 뭐가 돼? 저런 무례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어떻게 하긴?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지. 넌 엄연히 내 손님이라고. 그런데..." "그래서?" 흥분해서 막 떠들던 나는 잭슨의 조용한 한마디에 가로막혔다. "그, 그래서라니?" "그 기사에게 한마디 하고 나서는 어쩔거냐고?" "어쩔 거냐니? 당연히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해야지." "뭘? 뭘 못하게 해?" 잭슨의 냉담한 반응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방금 전에 당한 일은 잭슨이 아니라 오히려 나 같지 않은가? "뭐냐니? 널 무시 못하게 하는 거지." 그러자 그 동안 조용히 듣고 있던 첼릿이 나섰다.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듯 싶습니다. 잭슨씨도 그걸 알고 계시는 듯 한데요." "에?" 내가 그의 말을 이해못해서 되묻는데 잭슨이 씨익 웃었다. "저 기사분의 말이 맞아. 너는 그냥 가만히 있는게 나아. 내가 네 손님인 덕분이 이나마의 대우를 받는 거라고. 그보다 나은 대우를 받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내 능력에 따라 달린 거니까. 너는 그걸 가지고 이래래 저래라 할 수는 없는 거야." "물론,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지만... 아까 그건 너무한 거 아니냐? 사과를 했는데 무시해버리다니..." "그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너와의 친분 없이 저들을 만났다면, 나는 저들에게 함부로 말도 못 걸 처지인걸? 그런 상황에서 아까처럼 부딪혔다면 내가 한대 얻어맞아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그런데 너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이렇게 활개를 치고 다니니 저들은 날 같은 기사급으로 존중해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낮게 취급할 수도 없으니 무시하는게 최선일 수 밖에." "끄응.... 신분이라는 거 꽤 골치 아픈거네..." 잭슨의 말에 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리자 잭슨이 하하 웃으며 어깨를 툭 쳤다. "그래, 정말 쓸데없이 골치만 아픈 거지." "어휴, 그럼 내가 잘못했나봐...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너 따로 가게 해줄걸..." 내가 후회 막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잭슨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무슨 소리야? 여기에 낀건 내 의지였다고. 네 덕에 편안한 여행을 해왔는데 그깟 무시좀 당한다고 무슨 대수냐? 혼자 여행하는 것 보다 훨 났다고. 뭐, 그나마 그것도 얼마 안 남았다만..." "미안, 내가 좀 더 신경을 써줘야 했는데...." "네가 미안할게 뭐 있냐? 그리고,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내가 당하기만 하는 멍청이로 보이냐? 걱정 마. 여길 벗어나기 전에 그 녀석들에게 멋드러지게 한방 먹여 줄 생각이니까." 잭슨은 부기사단장인 첼릿이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그러자 첼릿이 씨익 웃었다. "어떻게 하실지 기대가 되는 군요. 쉽게 당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만약 당한다면 녀석들의 불행이겠죠." 의미심장한 첼릿의 미소를 보자니, 왠지 잭슨에게 당한 기사들은 그걸로 끝이 아니라 그 뒤에 기사단장과 부기사단장의 분노가 기다리고 있을 듯 했다. "기대해도 좋습니다. 아주 확실한 방법이거든요." 그 방법이라는 것은 다음 날 저녁에 알 수 있었다. 그 날 우리는 다행이 자그마한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곳은 무슨 백작이라는 작위를 가진 영주가 직접 관리하는게 아니라 영주 대리인이 관리하는 곳이었는데 우리 일행이 오자 성에서 몇몇 기사가 나와 정중하게 우리를 초대했다. 성이 없는 마을에서라면 몰라도, 성이 있는 곳에 도착할때면 항상 그런 대접을 받아왔기 때문에 나는 이번에도 자연스레 초대를 받아들여 성으로 향했다. 이렇게 하면서 주위의 귀족들과 자연스레 안면을 익힐 수 있는 거라는 이브스햄과 조엘의 충고를 들으면서 말이다. 그래 그들의 말대로 몇몇 귀족들과 얼굴을 익혔지만, 그들은 나보다는 조엘에게 더 큰 관심을 나타냈기 때문에 크게 친해지지는 못했었다. 이번 영주 대리인에게도 별 호감을 느끼지 못한 나는 예의상 대화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주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루어두고는 얼른 식사를 끝내고 침실로 물러갔다. 그러자 나와의 친분 때문에 같이 저녁 식사에 참여한 잭슨이 같이 일어나 나오다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해인아, 내일 너희 일행이 출발하기 전에 나는 나 먼저 떠나려고 한다." 이 성에 도착하기 전에 잭슨이 여기서부터 길이 갈라질 거라고 귀뜸해줬기에 나는 크게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침은 먹고 갈 거지?" "물론이지. 그래도 너희들은 아침 먹고 준비할게 많을테니, 나는 먼저 갈 거라고. 그래서 말인데..." "응?" "오늘 그 기사들 콧대를 눌러주려고." 씨익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잭슨의 표정에 나도 피식 웃었다. "어떻게?" "다 방법이 있지." "구경가도 될까?" "안돼. 보려면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봐. 네가 보는데 창피를 당하면 그 기사들이 무안하잖아. 아무리 얄미워도 그 정도 배려는 해줘야지. 지금부터 그 기사들에게 갈테니까 너는 모른체 하라고." "어디서 할 건데?" "마굿간 있는데서. 그럼 간다." 그러면서 걸음을 옮기는 잭슨의 등에다 대고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 해봐라." 그리고는 잭슨의 모습이 사라지자 나도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첼릿이 아니라 듀비가 내 곁에 있어주는 날이었기에 나는 듀비를 보며 물었다. "나는 몰래 보러 갈 생각인데, 듀비는 어때요? 같이 갈래요?" 그러자 그도 씨익 웃어보이며 대답했다. "그가 어떻게 할지 궁금하군요." "좋아요." 방으로 돌아온 나는 내 시종으로 따라온 켈빈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고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그를 얼른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잠시 기다린 후 듀비를 데리고 조용히 창문으로 방을 빠져나왔다. 비록 잠옷 차림이긴 했지만, 실프들에게 방어벽을 부탁했기에 추위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남의 시선도 말이다. 어차피 듀비와 나는 몰래 살펴보려고 했을 뿐이라 실프들에게 의지하여 허공에 떠 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어두운 허공에 누군가가 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할 거였다. 우리가 성 뒤쪽에 있는 마구간을 찾아냈을 즈음, 잭슨이 어떻게 했는지 - 아마도 기사들의 자존심을 건드려 발끈하게 했겠지만... - 분노한 기사들 몇명을 데리고 그 곳에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윙겟경과 첼릿이 포함된 몇명의 기사들이 구경꾼으로 같이 있었다. 그런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잭슨은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허리에 검을 차더니 들고 있던 왠 푸대자루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가, 감자?" 그 뭔가가 감자란 걸 확인한 나는 황당해서 중얼거렸다. 그건 거기 나온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던 듯 황당해서 잭슨을 바라보는게 보였다. 그들은 아마도 잭슨과 대련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감자를 꺼내들었으니... 잭슨은 감자 세개를 꺼내들더니 말발로 그 이유와 대결 방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 손님으로 온 거니 기사와의 사이에서 피가 나면 내 입장이 난처하지 않겠느냐는 이유로 대련하자는 기사들의 의견을 묵살시켜버리고 자신의 제안을 당당하게 관철시켰다. 그의 제안은 단순했다. 감자 세개를 베어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기사라면, 아니 검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물체를 베는 연습을 했을 터였다. 그것이 대나무던지, 각목이던지, 집단이던지, 아니면 허공에 던져진 과일이나 채소라던지 말이다. 그렇기에 기사들은 잭슨이 감자를 베는 거라고 말하자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어지는 베는 방법을 듣고는 황당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 방법이라는 것이 우선 한 발은 앞에, 한 발은 뒤로 놓은 채 앞으로 내민 발 등에 감자 하나를 올려 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감자는 검을 드는 손에 쥐고 - 검은 허리에 차고 있는 상태이다. - 나머지 하나는 누군가가 맞은편에서 들고 서 있는 거였다. 그래 손에 들고 있는 감자를 허공으로 던져서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빼어들어 대각선으로 벤 다음 앞으로 내민 발 등에 있는 감자를 허공으로 차 올려 감자의 허리(?)를 베고, 마지막으로 상대방이 던져주는 감자를 베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잭슨이 직접 시범을 보여주는데 세 감자의 몸은 너무나 간단하게 갈라지는 거였다. 그에 그걸 보고 있던 기사들이 우습다면서 자기들도 하겠다고 나섰다. 잭슨이 한번 연습을 해보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너무 자신감에 차 있던 기사들은 그의 권유를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검을 허리에 차고 감자 하나는 발등에, 하나는 손에 쥐었고, 상대편에서 감자를 던져 주는 기사도 대기했다. 그래서 성공 했을까? 답은 당연하게도 실패했다였다. 아마도 잭슨은 그걸 노리고 있었겠지만... 검사들은 검을 휘두를때 몸을 지탱하기 위해 하체를 단련하지만, 그와 함께 모든 상황에 재빠르게 반응하기 위한 훈련을 한다. 검을 들고 상대방을 노릴때 몸을 낮추는 이유가 몸을 긴장시켜서 여차하면 쉽게 몸을 이동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발 등에 올린 감자를 차 올려 베기 위해서는 손에 들린 감자를 허공에 던져 벨때까지는 발을 조금도 움직이지 말아야 했다. 동그란 감자는 투박한 가죽 신 위에서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있었으니 조금만 움찔해도 옆으로 데구르르 굴러 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기사들은 우선 손에 들린 감자를 허공에 던져 베는 것에 집중했기에 자신도 모르게 발을 조금이라도 움직여 감자를 발등에서 떨어뜨리는 거였다. 그러니 벨 수 있는 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자 하나만 벤 채 대결은 끝나버렸다. "이런... 거 보십시오. 그러니까 미리 연습을 하셔야 한다니까..." 맨 처음 나섰던 기사들이 모두 다 실패하자 잭슨이 당연한 거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발끈한 몇몇 기사들이 또 나섰다. 이번에 그들은 한번씩 연습을 했지만, 기사가 되기 위하여 목검을 손에 쥔 순간부터 몸에 익어버린 것이 한 순간에 주의한다고 금방 바뀌는 건 아니었다. 결국 10여명의 기사가 실패하고 그 뒤에 한 기사가 가까스로 성공 했지만 - 발 등의 감자만 떨어뜨리지 않는다면 감자 베는 건 그들에게 식은죽 먹기였으니까... - 이미 기사들측은 기가 팍 죽어 있었다. "잭슨씨가 머리가 좋군요. 기사들의 버릇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에 반하는 대결을 펼쳤으니..." 원래 그 정도 대련쯤이야 조금만 연습하면 기사들에게는 정말 식은죽 먹기보다 쉬웠을 거다. 단지 한 번도 안 한 일을 갑작스레 할려니 어려웠을 뿐이지. 결국 그리하여 그 대결은 잭슨의 승리로 끝났고, 그쯤해서 나는 방으로 돌아왔지만, 아마도 그 기사들도 윙겟경이나 첼릿에게 한 소리야 듣겠지만 크게 혼나지는 않았을 듯 했다. 그들은 잭슨의 실력에 진 것이 아니라 재치에 진 것이니까 말이다. 뭐, 재치도 실력의 일환이려나? 그 다음 날 잭슨은 정말 아침식사 후 나와 듀비에게만 작별 인사를 건넨 후 조용히 먼저 떠났다. 그리고 그 뒤 우리 일행이 출발하려 하는데 몇몇 기사들이 괜히 내 근처를 기웃 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기색을 보이는 거였다. 결국 원하던 이를 찾지 못해 돌아서는 그들의 얼굴에는 아쉬운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왜 아쉬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우리도 곧 수도를 향해 출발 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만 수도에 도착할 것입니다." 윙겟경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편해서 좋았기는 하지만 추운 날에 여행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군요. 다음에는 따뜻할 때만 골라서 다녔으면 좋겠네요." ===================================================================== 으음, 으음, 으음... 다음주가 마감인데요... 우하하하~~ 이번에는 과연 마감일 안에 원고를 넘길 수 있을지... ^^:; 제 30화 리건 블랜차드 잭슨과 헤어진 뒤, 별 다른 일 없이 무사히 수도에 도착한 우리는 조엘, 데니 형과 헤어졌다. 조엘이 여왕을 알현할때 같이 있어주기로 했지만서도, 어차피 수도에 자기네 집(?) 이 있는데 여기까지 와서 구태여 우리집에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조엘네 집이나, 이제 내 집이 된 엠브로스가 저택이나 같은 구역에 있었고 말이다. 왕래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도의 번화가보다 더 넓어 보이는 길은 - 사람들이 복작복작 대지 않아서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 길거리에서 흔하게 보이는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러니까 어쩐지 바닥에 깔린 평평한 돌들도 번화가에 깔린 것들 보다 더 깨끗하고 고급스럽게 보일 지경이었다. 내가 이 곳에 반년 넘게 있었지만, 저택 밖으로 나온 적은 저택으로 갈때와 웨스트모어랜드 후작령으로 갈때 외에는 한번도 없었기에, 지금 다시 보는 고급 저택가의 거리가 새삼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깨끗한 거리를 쭈욱 따라, 엄청나게 길다란 담과, 경비병이 근엄하게 서 있는 크고 화려한 몇개의 대문들을 지나치자 선두에 선 윙겟 경이 멈춰섰다. "다 왔습니다." 그가 가르키는 곳에는 지금까지 지나친 몇개의 대문과 비슷하게 생긴, 굵은 철창들 여러개가 엮어져 우아한 아치형 모양을 그리고 있는 커다란 정문이 있었고, 그 앞에는 익숙한 문양이 그려진 갑옷을 입은 두 명의 경비병이 창을 들고 서 있었다. 그리고 대문의 아치형 꼭대기 위에는 엠브로스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커다란 동판이 붙어 있었다. 윙겟경은 나에게 보고를 하더니 그 경비병 앞으로 말을 몰고 가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엠브로스 기사단장 진 윙겟이다. 백작님을 모셔왔으니 문을 열어라!" 그렇지 않아도 우리 일행이 다가올때부터 계속 바라보고 있던 두 경비병은 윙겟경의 말에 황급히 안쪽으로 연락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문이 열리며 기사 한명이 헐래벌떡 뛰어 나왔다. "단장님, 오셨습니까?" "오랜만이군. 백작님을 모셔왔으니 어서 문을 열게." "알겠습니다." 그 기사의 손짓에 두 경비병은 황급히 대문을 활짝 열었고, 우리 일행은 윙겟경의 인도에 따라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대문 안쪽에는 작은 경비 초소가 있었고, 그 안에 있었던 듯한 몇명의 기사와 사병들이 밖으로 나와 도열해 있었지만, 윙겟경은 그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하여 따로 멈추지는 않고 곧바로 안쪽으로 들어가기만 했다. 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느끼며 그 곳을 지나쳐 널다란 정원을 통과해 저택에 도착하자 수많은 시종과 시녀들이 저택의 정문 밖으로 나와 쭈욱 도열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앞에 일행이 멈춰 서서 말과 마차에서 내리자 맨 앞에 있는, 집사 제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오랜만이군, 크레이그." 그 모습을 알아본 이브스햄이 아는체를 하자 크레이그라 불린 중년 남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이브스햄님." "그래, 자네에게 이 저택의 새 주인을 소개해줘야겠지? 백작님, 이 사람이 이 저택의 총 책임을 맡은 집사입니다." 이브스햄의 소개에 나는 앞으로 나섰다. 내 모습을 본 집사의 눈에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것은 잠시 그는 나에게 다시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작님. 집사인 크레이그라고 합니다." "잘 부탁해요." 뒤에서 이브스햄이 옅게 한숨을 내 뱉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방긋 웃었다. 사실 내가 백작이 된 뒤로부터 내 주위사람들이 제일 많이 고치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던 것이 내 존대였다. 보통 귀족들은 귀족이 아닌 다른 계급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절대로 존칭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계급이란 것에 얽매어 있지 않은 나는 백작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해 이브스햄을 비롯하여 첼릿이나 윙겟경, 심지어는 집사나 나이 많은 시종들에게도 여전히 존대를 했던 것이다. 아마, 내 시종이 연륜이 많은 사람이 아닌, 나보다 어린 켈빈이 맡게 된 것도 시종에게 존대를 쓰지 못하게 하려는 집사와 이브스햄의 배려(?)때문일 것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 차차 나아지겠지... 했지만, 여전한 내 모습에 수도에 와서는 절대 그러면 안된다고 몇번이나 신신당부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걸 싸악 무시하고 오자마자 그랬으니 이브스햄의 입에서 한숨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 존대에 크레이그 집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그건 정말 잠깐이었고 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저야말로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백작님께서 피곤하실테니 방으로 안내해 드리게." "알겠습니다." 짐 정리 같은 건 어차피 아랫 사람들 몫이었다. 이브스햄의 말에 순순히 몸을 돌리는 집사의 뒤를 따라 나는 두 줄로 도열해 고개를 숙이는 시종, 시녀들 사이를 당당하게 걸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엠브로스 영지에 있는 성 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능력 있는 귀족가의 저택답게 내부는 고급스레 꾸며져 있었다. 그런 저택 내에서 가장 좋은 방일 백작의 방은 옅은 베이지와 금색으로 엄청 고급스럽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목욕물을 준비하라 이를까요?" 방 안을 둘러보는 나에게 크레이그가 조심스레 묻자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됐습니다. 그건 나중에 하도록 하죠. 이만 나가보세요." 집사가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 방까지 따라 들어왔던 이브스햄이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부릅 뜨고 입을 열었다. "백작님!! 여기서는 그러지 말라고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하지만 집사 정도에게는 괜찮지 않겠어요?" 배시시 웃어보이는 나에게 이브스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됍니다. 절대로 안됍니다. 여기는 본 성과 틀리다고 몇번이나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본 성의 엘버트야 대대로 우리 엠브로스가문과 함께 해온 집안 사람인데다 그도 백작님의 배경을 알고 있으니까 괜찮지만, 저 크레이그 집사는 아니란 말입니다." 엠브로스 백작가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중앙 귀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도에 따로 저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몇년 전에 여왕이 숙부파를 완전히 제거하면서 엠브로스 가문이 세운 공에 대한 상으로 영지와 이 저택을 내려줬던 것이다. 이 저택은 예전에는 여왕의 숙부였던 공작파 소속의 어떤 백작 소유의 저택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숙부가 실각 되면서 같이 망해버려서 우리 가문으로 넘어온 거라 크레이그 집사가 우리 가문 사람이 된지는 이제 채 몇년 안 되었던 것이다. 그래 이브스햄은 아직도 그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에게 얕보이는 것을 크게 경계하고 있었다. 귀족들은 왜 아랫사람들에게 존칭을 쓰는게 얕보이는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미 존대를 해버렸는걸요? 이제와서 다시 바꾸는게 더 우스울 거에요." 내 말에 이브스햄은 다시금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러면 부디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그러지 말아주십시오. 제발,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에... 그러도록 노력하죠." 내 말에 이브스햄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사실, 그 동안 노력하겠다는 말로 은근슬쩍 그들의 당부를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몇번 그 말에 당했던 이브스햄이라 이번에 그냥 고이 넘어가질 않았다. "노력 가지고는 안됩니다. 절대로 그러지 않으셔야 합니다. 절.대.로.요! 아시겠습니까?" "네, 네. 그러지요."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단호하게 대응하는 이브스햄의 모습에 나는 낮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전부터 계속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만..." "예?" 무척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묻는 이브스햄의 태도에 나는 의아하게 바라보며 되물었다. 언제 나를 이렇게 어려워했다고 전부터 묻고 싶은게 있는데도 못 묻고 참았단 말인가. "물어 보세요." 내 말에 이브스햄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가 방문을 똑똑 두드리는 거였다. 그래 들어오라고 허락을 하니 내 짐을 들고 있는 시종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 모습에 이브스햄이 헛 웃음을 짓더니 나에게 말했다. "서재로 가시지요. 가서 자세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전에는 조엘 자작이 있어서 자세하게 말씀 드리지 못했습니다만, 지금 현재 친여왕파는 세갈래로 분열되고 있습니다." 서재로 자리를 옮긴 이브스햄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자리에는 첼릿과 나중에 내 보좌관이 될 에르미아 엠브로스양까지 참석해 있었다. 에르미아가 백작이 되기 위하여 교육을 받았다고 하나, 그녀 또한 원래 이런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듯 싶었다. "우선 맥알파인공작파, 그리고 맥알파인 공작의 라이벌이라 칭해지는 랭포드 후작파, 마지막으로 블랜차드 후작파가 바로 분열의 중심이지요." "호오? 그 셋이 사이가 안 좋은가요?" "원래 맥알파인 공작과 랭포드 후작은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블랜차드 후작은 그런데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 했지만, 친여왕파의 세 기둥 중 한명이다보니 어쩔 수 없이 한 세력으로 형성된 거였지요." 이브스햄의 말에 뒤이어 에르미아가 설명을 덧붙였다. "맥알파인 공작을 중심으로는 여왕의 숙부에 의해 잠시 정권에서 밀려났던 전 중앙 귀족들이 모여들었지요. 랭포드 후작 곁으로는 실력은 있으나 세력이 적은 지방 귀족들이, 블랜차드 후작 곁으로는 혈기가 넘치는 젊은 기사들과 열혈 귀족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에르미아의 설명에 이브스햄이 은근히 자랑스러움이 배어있는 시선으로 그녀를 한번 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맥알파인 공작은 아무래도 왕족의 핏줄을 타고난 분이니까요. 그래서 현 왕족들이나 개국공신 귀족들은 그쪽을 밀고 있답니다." "그럼 랭포드 후작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정말 진정한 귀족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시죠. 귀족이라면 자신들이 누리는 특권 만큼이나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시거든요. 그래서 집안만 좋고 무능한 귀족들을 제일 싫어하시죠. 덕분에 맥알파인 공작과는 사사건건 충돌이 있답니다. 사실, 제가 봐도 맥알파인 공작님은 그 자신의 능력보다는 배경때문에 그 위치에 오른 것으로 보여지거든요. 그렇다고 그 분이 무능력하다는 건 아닙니다만, 그분은 자신의 능력을 보이기도 전에 그 자리에 앉으신 분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러니 실력은 있어도 위에서 꽉 누르고 있어 제 능력을 펼치지 못한 지방 귀족들이 랭포드 후작에게 붙는 건 당연하겠군요. 아, 혹시 우리도 그쪽으로 붙으려고 했던 거 아니었습니까?" 내 말에 이브스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사실 저는 그렇게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작님께서 조엘 자작과 깊은 친분을 나누신 것 같아서 말이죠. 그걸 노리고 이번에 폐하를 알현할때도 그분께 같이 참여해 주십사 한 거지만... 뭐, 그쪽도 크게 나쁘지 않기는 합니다. 다만, 저희로써는 그쪽에서 한 자리 차지할 기회가 없을 거 같아서 생각을 못하고 있었던 거죠." "그, 블랜차드 후작은 어때요?" "블랜차드 후작가는 지금까지 그저 그런 귀족들중 하나였습니다. 중앙 귀족이기는 해도 정권의 가운데에 있지 못하고 변두리에 겨우 발을 얹고 있는 것에 불과했지요. 하지만, 현 후작인 리건 블랜차드가 앞으로 나서면서 그게 확 바뀌었지요. 뭐니뭐니해도 그는 최연소 마스터 소드인 천재이니까요. 우리 나라가 기사를 제일로 치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의 앞에는 탄탄 대로가 쭈욱 깔려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헤에, 그런가요?" "물론이죠. 이제 30대 초반인 그가 왕실 기사단의 단장인걸요? 물론, 몇년전 그 사건에서 큰 공헌을 세우기는 했지만, 최연소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면 그것도 힘들지요. 제가 말씀 드렸지요? 왕실 기사단장이라는 것은 위급한때에 국방장관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법으로는 랭포드 후작의 아래에 있지만, 그와 비슷한 지위를 겨우 30대 초반의 나이에 손에 넣은 겁니다. 지금 현재 그는 우리 나라 모든 기사들의 우상이지요. 이건 기사의 나라라는 우리 나라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입니다. 거기다가 현재 왕실 기사단의 기사들은 그의 열혈 추종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랍니다." "오..." 왕실 기사단이란, 여왕과 왕실을 보호하는 임무를 띤 기사단으로 여왕 직속 기사단이다. 그들 가운데에서 여왕을 비롯한 주요 왕족들을 보호하는 친위 기사들을 뽑는데다가 그들은 여왕과 기사단장의 명령밖에 안 들었다. 거기다 전쟁이나 반역같은 나라의 위급 상황이 터졌을 때 수도에 있는 모든 전력을 통솔할 수 있는 지휘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수도 경비대를 비롯하여 수도 안에 거주하는 일반 귀족들의 기사단, 사병들, 혹은 수도 시민들까지, 싸움이 가능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지휘 아래에 들어간다. 그러니 왕실 기사단은 벨레니 국의 모든 기사들 중의 기사, 엘리트 중의 엘리트이며 여기에 소속된다는 건 가문 대대로의 영광이었다. 뭐, 거기에서 또 단계도 있지만 기사가 아닌 나는 잘 알지 못하고, 어쨌든, 그런 기사단의 단장이라는건 엄청 대단한 거였다. 이브스햄이 말한 벨레니 국 전체의 군수권을 가진 국방장관과 동등하다는 건 결코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자리에 앉은 사람네 가문이 중앙 세력의 하나로 우뚝 선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자리에 앉은 사람네 가문이 중앙 세력의 하나로 우뚝 선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 랭포드 후작은 국방장관이고, 맥알파인 공작은 재상이라고 했죠? 거기에 블랜차드 후작은 왕실 기사단 단장... 오우, 셋 다 대단한 자리를 하나씩 꿰어 차고 있군요." 내 말에 이브스햄이 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럼 뭐가 또 있어요?" "더 중요한게 있지요. 랭포드 후작의 장남인 달스턴 랭포드 자작은 현재 나이 31세로 독신이죠. 그리고 맥알파인 공작의 장남인 조엘 맥알파인 자작 현재 나이 25세로 독신이고, 블랜차드 후작 역시 33세로 독신입니다. 이해 하시겠습니까?" 이 정도면 알지 않겠느냐는 이브스햄의 시선에 나는 고개만 갸웃 거렸다. "모두 독신인게 어때서요?" 그러자 에르미아가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 현재 이 나라를 다스리고 계시는 여왕폐하도 아직 미혼이시죠." 그제야 나는 뭔가가 떠올랐다. "오라, 그러니까..." 내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이브스햄도 마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습니다. 현재 그 세 사람이 여왕 폐하의 가장 강력한 신랑 후보죠. 물론, 다른 귀족 청년들도 많습니다만, 지위로 보나 배경으로 보나 그 세사람과 대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걸요?" "헤에... 아니, 그러다가 우리가 지지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해서 결혼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내 말에 이브스햄은 어깨를 으쓱 거렸다. "그럼 운이 없는 거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금방 어떻게 되는 건 아닙니다. 그냥 조금 유리해진다 아니다일뿐이죠. 그래도 이왕이면 조금 더 유리해지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사실, 혈통쪽으로 보면 조엘 자작이 제일 유리하거든요. 왕족들은 다 조엘 자작을 지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여왕폐하께서 누굴 제일 좋아하느냐가 문제겠죠. 지금 현재는 누구에게 제일 관심을 가지고 계시죠?" "그게 말입니다, 그걸 전혀 내색을 안 하셔서요. 하기야, 내색을 하시면 그쪽으로 붙던지, 아니면 반대파의 암살에 시달리게 될테니 그러지도 못하시겠지만... 그래서 지금까지 결혼을 안 하고 계시는 건지도 모르죠." "제 생각에는 차라리 그 세분이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에르미아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게 정말 좋겠군요. 하지만, 역시 결정은 여왕폐하께서 하시는 거겠죠?" 그러자 이브스햄이 자신에게로 주의를 집중 시키고자 슬그머니 헛기침을 했다. "험험, 본론으로 돌아가서 말씀입니다만, 그럼 백작님께서는 맥알파인 공작쪽 사람이 되기로 마음을 굳히신 겁니까?" "굳히고 말고 할게 있나요? 어차피 제가 여왕 폐하를 알현할때 조엘 자작이 함께 참여한다면 제가 그쪽 사람이라고 광고하는 꼴이 될텐데요." "그럼, 아무래도 조엘 자작과 같이 일을 하시게 되겠군요?" 뜬금없는 이브스햄의 말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같이 일을 하다뇨?" "중앙에 진출하시려면 당연히 왕성에서 한 자리 맡으셔야 할 것 아닙니까? 사실 저는 백작님이 정령을 다루시는 걸 보고 국방쪽에 들어가시는걸 은근히 바랬습니다만... 맥알파인 공작가 사람을 랭포드 후작이 받아주시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말이죠. 뭐, 그래도 사무직 쪽으로 진출 하셔도 손색은 없어보이시니 괜찮지 않을까요? 백작님도 그쪽으로 생각을 하고 계셨던 거 아닙니까?" 이브스햄의 말에 나는 배시시 웃어보였다. "아아... 그쪽은... 생각 안 해봤는데요..." 왕성에서 일을 한다는 건... 꿈에도 생각 안해봤다. 나는 그저 여왕을 알현하고, 그 뒤에 당연한 수순이라는 사교계 파티에 몇번 참석하고 다시 영지로 내려가려고 했던 것이다. '에... 그러고보니 중앙 귀족, 중앙 귀족 떠들어대기만 했지 정작 어떻게 할 건지는 하나도 생각을 안 해놨잖아?' 내 대답이 의외였던 듯 이브스햄은 눈을 치켜떴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제가 처음부터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저희 가문은 이제 중앙쪽으로 진출해야 한다고요. 그럼 당.연.히 왕실 안에서 자리 하나 맡으시는 건 생각해 두셨어야지요. 그럼 어떻게 중앙 귀족이 되려고 하셨습니까아~?" 흥분한 이브스햄의 모습에 나는 더욱 더 난처한 표정으로 웃으며 얼버무리려 했다. "아아... 그게... 난 별로..." "백.작.니이이임~!!" 그러나 이브스햄은 그에 넘어가지 않고 무시무시한 표정의 얼굴을 나에게 디밀었다. "네, 네?" "지금부터 충분히 심사숙고 하셔서 조엘 자작과 여왕폐하를 알연하고 돌아오실때까지 왕실에 괜찮은 자리를 하나 마련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네, 네." "그럼 백작님만 믿겠습니다." "네, 네." "우리 엠브로스가문이 중앙 귀족 가문으로 진출하여 부흥하느냐, 아니면 다시 지방 영주로 주저 앉느냐는 이제 백작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겁니다. 제발 명심해 주십시오." "네, 네." '하지만, 아무리 명심하라고 해도 말이지...' 그날로 부터 3일 뒤, 드디어 여왕 폐하를 알현하기 위하여 - 왕실에서 일하지 않는 귀족이 국왕을 알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알현 신청을 하고 허가를 받아야 왕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왕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뭘 알아야 고르던 말던 하지. 하기야, 지금 내가 뭘 고를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끄응... 여긴 공무원 시험도 없나? 이브스햄보고 알아보라고 해봐?' "뭔가 고민이 있으신가보죠?"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조엘이 이런 내 모습에 의아한듯 바라보았다. "예? 아... 예, 좀..." 생각 같아서는 조엘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러면 이건 나에게 자리좀 주세요... 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배시시 웃어 넘길 뿐 말은 목구멍 밑으로 꿀꺽 삼켜 버렸다. "혹시라도 제가 도울만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 능력껏 도와드리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예의 바르게 감사의 인사를 하자 조엘이 피식 웃더니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바깥 경치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여왕을 알현한 곳은 접견실이었다. 응접실처럼 화사하고 안락하게 꾸며지기는 했지만,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소파 대신 여왕을 위한, 성인 한 사람이 충분이 누워 잘 수 있을 정도의 우아한 긴 의자 하나와, 그 의자 머리맡에 탁자가 다였다. 우리가 그 접견실로 안내되어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서성거리며 기다리자 조금 후에 문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왕 폐하 드십니다." 그에 우리는 문쪽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왕족은 보통 자신보다 높은 지위를 가진 귀족 대하듯이 대하면 됐지만, 왕에 대한 예절은 보통 귀족간의 예의와는 꼭 다른 구석이 있었다. 왕이라고 특별대우 하는건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맥알파인 공작가 저택에서 해럴드 집사에게 구박을 받아가며 배울때 왕이라고 잘난체 하는 거냐고 속으로 굉장히 씹어댔던 게 기억이 났다. 그 예절 중 왕이 허락하지 않는 한 절대로 왕의 얼굴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안되는 것이 있었다. 시선을 볼 수 있는 것은 가슴께까지로, 그러기 위해서는 처음에 왕을 만날때 고개를 숙여야 했다. 왕의 허락 없이 고개를 들면 그건 불경죄로 처형당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왕의 얼굴을 보지 않을 준비를 하고 기다리자 문이 열리고 여러 사람이 들어 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발소리는 우리를 지나 조금 더 가다가 멈춰 서더니 여성의 곱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고개를 드시오." 여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제야 우리는 고개를 들고 문쪽을 향하고 있던 몸을 소리가 난 쪽으로 돌렸다. 그 곳에는 긴 의자 앞에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여왕이 있었다. 벨레니국의 여왕은 얼굴 만으로보면 약간 괜찮게 생긴 편이었지만, 온 몸에 흐르는 당당함과 우아안 기품으로 자신을 돋보이는 그런 여성이었다. 밝은 갈색 머리에 곧은 초록색의 눈을 가진 그녀는 160 이 약간 넘는 키를 가지고 있는 듯 한데 어깨와 허리를 당당하게 피고 턱을 들고 있어서 그보다 더 큰 키를 가지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갈색 머리를 틀어 올려 그 위에 단순한 모양의 왕관을 썼고, 몸에는 초록색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를 향해 한번 빙긋 웃어준뒤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 뒤에는 그녀의 호위 기사 셋과 시녀, 그리고 시종들이 자리했다. "조엘자작, 오랜만이오. 그래, 그대가 이번에 새로 엠브로스 백작이 된 자의 알현에 참관하는 거요?" 여왕의 질문에 조엘이 허리를 약간 숙이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이번에 엠브로스 백작이 되신 분과 친분이 있어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소? 흐음.... 그래, 그대가 이번에 엠브로스 백작의 작위를 이어받은 자이오?" 조엘의 대답에 여왕의 시선이 나에게로 돌아왔다. 그녀의 질문을 신호로 나는 그녀의 정면으로 걸어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연습했던 말을 내뱉았다. "그렇습니다, 폐하. 신, 해인 오스번 엠브로스가 벨레니국의 주인이신 폐하를 뵙습니다." "엠브로스가라면 나에게 큰 힘을 보태준 가문이구려. 그런데, 내 엠브로스 가문 사람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거늘, 그대는 어째 처음 보는 얼굴이군." "소신은 얼마전에야 엠브로스 가문 사람이라는 걸 알고 가문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호오, 그렇소? 그런데 어떻게 백작이 될 수 있었던 거지?" "신은 제 26대 엠브로스 백작이신 오스번 엠브로스의 외손자이옵니다. 그러한 이유로 전 엠브로스 백작보다는 작위 계승권이 더 높았나이다. 그걸 안 전 백작이 저에게 작위를 양위해준 것이옵니다." "내 전 엠브로스 백작에게는 친딸이 있는걸로 알고 있는데, 그대가 전대의 백작 외손자라고는 하나 그녀보다 계승권이 높다는 건 이해할수가 없군. 어떻게 된 것이오?" "전 엠브로스 백작과 그 전 백작은 원래 가문의 직계 자손이 아니라 방계 자손이옵고, 저는 전대 백작의 외손주로 직계이옵니다. 그래서 전 백작의 딸은 물론 전 백작보다 계승권이 높았던 것이옵니다. 전 백작은 직계 자손이 없는 줄 알고 작위를 물려받은 것이옵고, 저 또한 제가 엠브로스 가문 사람인 줄 몰랐다가 뒤늦게서야 그걸 알게된 제가 가문으로 돌아왔고 전 백작이 저에게 돌려준 것입니다." "그런 사연이 있었구려. 알겠소. 그런데, 그대가 비록 전 백작의 친자가 아니라 하나 전백작과 마찬가지로 내게 큰 힘이 되어주리라 믿어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폐하. 소신 폐하께 충성을 다받치겠습니다." 형식적인 말이었지만, 왠지 가슴이 뜨끔뜨끔 거렸다. 내 말에 여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소." 여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다가와 보라색 빌로드 쿠션을 내밀었다. 그 위에는 온갓 보석으로 호화스럽게 꾸며진 장식용 검이 올려져 있었는데, 여왕은 검을 집어 들어 검집을 빼고 - 어차피 장식용이라 날이 서지 않은 가검이었다 -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슴 앞에서 검 끝이 하늘로 향하게 똑바로 든 채로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바야흐로 여왕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신하로 인정받는 식이 진행되는 것이다. "나 벨레니국의 주인 르윌라르 벨레니가 묻노니, 해인 오스번 엠브로스여, 그대는 나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봉사할 것이며, 백성들을 인정으로 다스릴 것을 맹세하겠는가?" "맹세합니다." "좋다. 나 르윌라르 벨레니는 그대 해인 오스번 엠브로스를 벨레니국의 백작으로 임명 하노라." 여왕이 마지막으로 말하며 들고 있던 검을 내 왼쪽 어깨에 한번 오른쪽 어깨에 한번 가져다 대었다. 이로써 너무나 간단한 형식은 끝났고, 비로서 나는 정식으로 엠브로스 백작이 된 것이다. 이로써 너무나 간단한 형식은 끝났고, 비로서 나는 정식으로 엠브로스 백작이 된 것이다. "그런데... 엠브로스 백작, 그대는 기사인가? 기사치고는 음... 몸이 무척 가늘군." 간단한 왕에 대한 충성 맹세식이 끝난 후 우리는 여왕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여왕은 장의자에 편안히 앉아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녀 주위에 서 있는 상태였다. 처음에는 백작이 된 걸 축하한다는 인사부터 시작하여 간단한 이야기가 오가 어느정도 분위기가 화기애애 해졌을때 여왕이 조심스레 나를 살펴보며 묻는 거였다. 그에 나는 머쓱하게 웃어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기사가 아닙니다, 폐하. 검술을 할 줄 모르거든요." "그렇소? 오오, 그렇다면 맥알파인 자작과 같이 일을 하려는 거로군." 여왕은 내가 검술을 할 줄 모르니 맥알파인 공작쪽에서 일을 하려는 걸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에... 그게... 사실은 아직 결정을 못했습니다. 제가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또 맥알파인 자작 일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어서..." 난처한 표정으로 어물어물 대답하자 옆에 있던 조엘이 씨익 웃으며 끼어들었다. "엠브로스 백작은 재주가 많아서 어느 방향으로 갈지 결정을 못하는 겁니다. 폐하, 이래뵈도 엠브로스 백작은 마법을 할 줄 알거든요." 어물대는 내 대답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여왕은 조엘의 말에 놀란 시선으로 다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 마법사였소?" "에... 아뇨, 그건 거의 취미삼아 하는 것으로... 이제 겨우 3클래스 유저일 뿐입니다." 그래 황급하게 내 실력을 밝히는데 조엘이 냉큼 또 끼어들었다. "놀라지 마십시오. 제가 알기로 엠브로스 백작은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지 겨우 몇달만에 1클래스 유저가 되었다고 합니다. 엠브로스 백작이 마법에 전적으로 몰두하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그보다 더 높은 단계의 마법사가 되어 있었을 겁니다. 아마, 지금 마법을 배운지 2년이 되었던가요?" 조엘의 말에 여왕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정말 대단하군. 아마 궁중 마법사가 알면 입에 거품을 물고 그대에게 달려들거라 생각되오. 내 알기로도 마법을 처음 하기까지는 약 1년 정도 걸리는게 보통이라고 하던데... 게다가 마법을 배우려면 머리도 뛰어 나야 한다고 들었소. 호오, 그러면 내무부쪽으로 가도 큰 도움이 되기는 하겠구려." 그게 보통은 맞다. 단지 내 경우가 특별해서 그렇지...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것만 볼때 엠브로스 백작은 뭔가 대단한 재주를 또 가지고 있는게 틀림 없습니다. 마법에 그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법사가 되지 않으려 한다는 건, 마법 못지 않은 다른 능력이 있다는게 아니겠습니까?" 또 끼어들어 날 띄워주는 조엘의 말에 여왕이 물었다. "정말 또 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소? 이왕 이렇게 된거, 그대가 가지고 있는 재주를 다 털어놔 보시구려." "저... 정령술을 좀 할 줄 압니다. 그 외에 제가 할 줄 아는 건 없습니다만..." "호오, 정령술사였소? 뛰어난 정령술사는 마법사보다 극히 드물다고 들었소만... 그러고보니 우리 왕실에도 마법사보다 정령사가 적군. 정령사도 등급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대의 등급은 무엇이오?" "최상급 정령사입니다." "최상급? 상급은 알고 있는데 최상급이라?" 내 말을 이해 못한 여왕이 고개를 갸웃 거리자 뒤에 있던 기사가 나보다도 먼저 대답했다. "상급 정령을 둘 이상 불러낼 수 있는 자를 최상급이라고 합니다." 최상급 정령은 정령사들 사이에서도 아는 자가 드무니 정령사가 아닌 기사가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소? 가만, 그렇다면 지금 우리 왕실 소속 최고 정령사보다도 더 대단한 거잖소? 그는 상급 정령사라고 들었는데..." "백작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습니다." 여왕의 말에 대답하며 불신의 시선으로 날 보는 기사를 보자니 괜히 불편해지는게 그냥 상급이라고 말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거기다가 놀랍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조엘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호오, 이거 참 대단하군. 그렇다면 국방부쪽에서도 그대를 탐내겠구려. 그러고보니 왕실 기사단에서는 어떻소? 왕실 기사단에도 마법사나 정령사를 영입할 수 있지만, 지금 영입된 마법사나 정령사는 하나도 없지 않소? 국방부쪽에는 많이 영입해서 데리고 있던데..." 여왕이 뒤쪽에 서 있는 기사를 보며 묻자 그가 공손히 대답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 그런 일은 단장이 결정하는 거니까요." "하긴, 그렇구려. 하지만, 엠브로스 백작 정도의 인재라면 탐낼만하지 않을까 싶은데... 오, 그렇군. 얼마 후에 열리는 왕실 파티에 랭포드 후작과 블랜차드 후작이 모두 모이니 그들의 의향을 알아볼 수 있겠군. 엠브로스 백작, 그대도 그 파티에서 볼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폐하. 기꺼이 참석할 것입니다." 내 대답에 여왕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때 조엘 자작도 같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영광입니다, 폐하." "오늘 그대들을 만나 즐거웠소. 엠브로스 백작, 맥알파인 자작, 얼마 뒤의 파티때 다시 봅시다." 명확하게 작별 인사를 건네며 여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조엘과 나는 동시에 허리를 깊숙히 숙이며 인사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여왕 무리가 방을 나가자 우리는 그제야 굽혔던 허리를 바로 펼 수 있었다. 그러자 조엘이 섭섭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뭐야, 너무 하잖아 해인. 정령사라는 걸 말해주지 않다니..." 갑작스레 편안한 하대로 돌아선 조엘의 말투에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라, 왠일이에요? 갑자기 편하게 하대를 하고?" 그러자 조엘이 피식 웃으며 접견실 문으로 향했다. "내가 말 놓으니까 기분 나빠?" 그에 나도 얼른 그의 옆으로 나란히 걸으며 대꾸했다. "뭐, 나쁠 건 없지만... 그 동안 꼬박꼬박 예의를 지키다가 갑자기 변하니까 이상하잖아요." "그때는 다른 사람들이 있으니 예의를 지킨 거지. 만약 편하게 했다가는 지라르경의 무서운 눈초리를 견딜 수 있었겠어? 아, 원한다면 해인이도 말 놔." "됐어요. 저는 이게 편하네요. 흐음, 그럼 지금 데니형하고 첼릿이 없어서 편하게 대하는 거군요?" "바로 그거야." 여왕을 만날때에는 허락받은 자만이 대면이 가능했다. 그자의 일행이나 호위 기사가 같이 가는 건 금지되어 있었기에 첼릿과 데니 형은 접견실과 멀리 떨어진 대기실에 있었던 것이다. 사실 왕궁 안에서는 왕실 기사단과 병사들외에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 것도 불법이었다. 그래서 기사 작위를 가진 조엘이나 데니, 첼릿도 모두 성 입구에다 자신들의 무기를 맡겨놓고 맨 몸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왕궁 안에서 무기를 소지한 호위 기사를 데리고 다닐 수 있는 건 왕과 그의 가족들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언제 정령사가 된 거야? 우리 집을 나갔을때 부터?" 조엘이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나는 피식 웃으며 순순히 대답했다. "아니요. 노만 스승님께 정령술에 관한 책을 받았을때요. 아, 이거 스승님께는 비밀입니다. 사실 스승님께서는 좀더 마법에 능숙해지면 하라고 하셨는데, 말 안 듣고 몰래 한거거든요." "호오, 그랬군. 하지만, 최상급 정령사라니 정말 대단한걸? 노만님께서 네가 타고난 정령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정도일줄은 몰랐어." "뭐, 부모님 잘 만난 덕이죠." 내가 삐질 웃으며 대답하자 조엘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래? 뭐, 그 덕이 있을 수도 있겠지. 부모 잘 만난 것도 복이야." "알고 있어요." 가끔가다 그런걸 깨달을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아버지 덕에 내가 이렇게 최상급 정령술사가 된 거라 그런걸 자랑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때때로 위급할때는 그것이 나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줄때마다 내가 배부른 투정을 부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 특히나 나와 같은 정령술사들이 보면 내가 가진 이 혈연의 축복은 정말 부러운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흐음, 네가 그래서 나에게 자리를 부탁하지 않은거야?" 왕실 복도를 걸으며 잠시 침묵을 지키던 조엘의 느닷없는 말에 나는 내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예?" "왕성으로 올때 한숨을 푹푹 쉬던거, 자리를 어디에서 잡을지 고민하는 거였지? 나한테 한 마디 할 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능력이 너무 많아서 어디로 갈지 고르고 있었던 거잖아?" 싱글 싱글 웃는 조엘을 보며 나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뭔 소리에요?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괜히 아무데나 갔다가 도움은 커녕 방해꾼 취급만 받으면 어쩌려고요. 그러니 섣불리 선택하기도 어렵고... 또 조엘님 당신에게 일자리 부탁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어요." "조엘'님'이 아니라 조엘이야, 이제..." "에?" 뜬금없는 말에 의아하게 바라보자 조엘이 싱긋 웃었다. "이제 이름을 그냥 불러도 되잖아? 넌 나와 같은 이 나라의 귀족이라고. 그러니까 아무도 없는 데서는 편하게 조엘이라고 불러." "뭐, 어쨌든요. 아아... 이브스햄이 중앙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닥달만 안했다면 그냥 영지로 조용히 내려가 살았으면 좋으련만... 도대체 어떻게 자리를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한숨을 푹푹 쉬며 투덜투덜대자 조엘이 입을 열었다. "뭐야, 그런건 쉽게 알아볼 수 있는데... 매년 왕실에서 주관하는 시험이 있다고." "헉? 정말요? 그런게 있었단 말이에요?" 여기에도 공무원 시험 같은게 있었나 싶어 놀란 눈으로 조엘을 바라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 거렸다. "뭐야, 몰랐어? 하기야... 그랬을 수도 있겠지. 그런 시험 공고는 학교에만 하니까." "에이, 그러면 지방 귀족들도 충분히 이쪽에 직업을 얻을 수 있었던 거잖아요? 그럼 나도 그 시험을 보면 되겠네..." 시험 공부를 하기는 싫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조엘의 설명이 날아들었다. "시험 쳐서 자리를 얻는 건 말단이지.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출세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보통 거물들은 시험 보는 흉내만 낼뿐 처음부터 중급으로 끼어드는 거 몰라? 그러길 바란다면 상관 없지만 아마도 전 엠브로스 백작이 길길이 날뛸걸?" "헉... 여기도 그런 비리가..." "어허, 비리라니... 귀족들에게 평민과 같이 말단부터 일하라는게 무리한 요구 아니야?" "그럼 보통 귀족들은 어떻게 자리를 잡는데요?" "보통은... 아는 사람들의 보좌관 자리로 시작하지. 거기에서 능력을 인정 받으면 작은 일이라도 책임지는 자리를 맡아 나가서 성장하는 거고, 능력 못받으면 그냥 집에 콕 처박혀서 놀면서 사는 거고..." "허허허, 줄을 잘 타야겠네..." 그의 말에 내가 허탈한 표정을 짓자 조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나도 동감이야. 이런 제도 너무 후졌다고 생각하지 않아? 귀족들도 차라리 귀족들 끼리 셤 보는 제도 하나 마련했으면 좋겠어. 사실 이건 내무부쪽 이야기고, 국방부쪽은 그나마 귀족이라도 능력 테스트는 하는데 말야." "흐음..." 국방장관을 맡고 있는 랭포드 후작이라는 사람이 무능력한 귀족은 싫어한다더니만, 그 영향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래 그쪽을 택할까 고려하고 있는데, 조엘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그런데, 혹시라도 국방부쪽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만두는게 좋을 거야." "왜요?" "랭포드 후작이 왠만큼 공정한 분이기는 한데... 한 가지에는 편견이 심하거든."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춘 조엘이 날 힐끗 보더니 중얼거렸다. "너도 아마 알걸? 귀족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니까. 랭포드 후작과 내 아버지 사이가 안좋다는 거. 그래서 우리 가문과 연관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편견을 가지고 보거든. 네 정령술을 살리고 싶은 거라면 차라리 왕실 기사단쪽을 택하길 바래. 블랜차드 후작은 정말 모든 면에서 중립적인 사람이니까 그쪽이 훨씬 나을거야. 문제는... 그 사람 마음에 들어서 기사단에 들어가는 능력자가 아직까지 없다는거지만..." "헤에, 그 블랜차드 후작이란 사람은 기사만 좋아하나봐요?" "그건 아니야. 내가 보기에는 후작의 기준이 높은 거지. 기사단에 기사들만 있는건... 어쨋든 기사단의 정원수는 채워야 하니까 기사만 있는 거지. 정령사나 마법사들은 쉽게 능력을 업그레이드 시키기 어렵지만, 기사들은 좀만 굴리면 부쩍부쩍 성장하거든. 블랜차드 후작에게 걸리면 귀족이고 뭐고 없지. 처음에는 그에 반발했다가 침대 신세를 진 녀석들도 꽤 많지, 아마?" "정말요? 왕실 기사단은 블랜차드 후작의 열렬한 지지자들이라고 들었는데..." "그건 최근의 일이지. 처음에 블랜차드 후작이 기사단장이 되었을때는 난리도 아니었어. 왕실 기사단 연무장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살기가 가득했다고 하지, 아마? 지금은 한 절반 정도가 교체된 상태야. 왕실 기사단이라고 하면 실력도 실력이지만, 자존심도 엄청 높은 기사들 뿐이거든. 거기다가 세력도 빵빵하고. 그런 자들을 연무장에서 굴렸으니... 그런데 블랜차드 후작도 대단하지. 자기에게 반항하는 녀석들을 모조리 연무장에 모아놓고 덤비라고 했다더 군. 그래서 하나 하나 상대해서 다 때려눕혔대. 랭포드 후작이 그 점은 마음에 들어하더군." "그 사람은 검술의 천재라면서요? 이기지도 못할텐데 잘도 덤벼들었군요." "아아, 그게... 그 사람 혼자를 상대로 여러명이서 한꺼번에 덤볐다고 하던데? 그러니 덤빌 엄두를 낸 거겠지. 뭐, 그랬던 녀석들은 지금 왕실 기사단을 모조리 나가 있을걸? 최연소 소드 마스터니 검술의 천재니 하는 말도 많이 듣지만, 왕실 기사단 절반을 때려눕힌 걸로도 유명한 사람이지." "하하하... 그런 사람이 제가 맘에 들겠습니까?" "설마, 최상급 정령사를 마다하겠어? 네 능력이라면 어딜가든 어서옵쇼~ 할텐데. 사실 이런 말도 있더군. 능력이 뛰어난 듯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국방부에서 파격적인 대우로 데리고 가는 바람에 기사단쪽으로 기웃 거리는 사람들은 그보다 못한 능력자들 뿐이었대. 그 말이 진짜인거 같기도 해. 그러니 블랜차드 후작이 모두 마음에 안 든다고 거절했겠지." "흐음...." "설마, 최상급 정령사를 마다하겠어? 네 능력이라면 어딜가든 어서옵쇼~ 할텐데. 사실 이런 말도 있더군. 능력이 뛰어난 듯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국방부에서 파격적인 대우로 데리고 가는 바람에 기사단쪽으로 기웃 거리는 사람들은 그보다 못한 능력자들 뿐이었대. 그 말이 진짜인거 같기도 해. 그러니 블랜차드 후작이 모두 마음에 안 든다고 거절했겠지." "흐음...." 그렇게 이야기 하다보니 우리는 어느새 대니와 첼릿이 기다리고 있는 대시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해인님, 어떻게 돼셨습니까?" "어떻게 될 것이 있나요? 그냥 간단한 형식을 치른 것 뿐인데..." 무지 걱정하고 있었던 첼릿에게 배시시 웃어주자 첼릿과 같이 있었던 데니형이 뚜벅뚜벅 나에게 다가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백작님이 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여전히 딱딱하게 예의를 차리는 그 모습에 나는 쓴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링클레터경..." 내가 돌아오길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건 첼릿만은 아니었다. 저택으로 돌아오니 이브스햄이 잽싸게 달려와서 여왕의 알현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던 것이다. 나야 단지 간단한 형식을 치르고 온 거라고,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이들은 그게 아니었다. 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자와의 첫 대면이라 그런지 엄청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나, 사람은 첫 인상에 많이 좌우되기 때문에, 왕의 얼굴을 쉽게 볼 수 없는 지방 귀족인 이브스햄은 엄청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제 중앙 귀족으로써 진출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우리 가문의 방향이 여왕이 본 나의 첫 인상에 달려있다니 새삼 인생이 좀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알현실에 있었던 일을 꼬치꼬치 캐묻던 이브스햄은 내가 최상급 정령사라는 이야기까지 나왓다고 하자 무척이나 기뻐했다. 사실 이브스햄도 내가 정령사라는 건 알았지만, 그 등급이 뭔지는 몰랐던 것이다. - 물론, 내가 밝히지 않은 거긴 했지만... - 그랬는데, 현재 국방부에 소속되어 있던, 가장 뛰어난 실력의 정령사보다 한 단계 더 위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입이 옆으로 쫘악 벌어질만도 했다. "참으로 잘된 일입니다. 백작님의 실력이 그 정도일줄이야 정말 몰랐군요. 그걸 진작에 알았더라면 이렇게 마음 졸이고 걱정하지는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아아, 정말 잘못했어요. 아무리 조엘 자작과 친분이 있다고 해도 그냥 랭포드 후작쪽으로 붙을걸... 안타깝습니다." "하.하.하... 그런가요?" "그래도... 조엘 자작도 정말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니.. 그 친분도 아깝고... 으음, 어쨌든 저도 조엘 자작 말에 찬성입니다. 랭포드 후작쪽은 포기하도록 하죠. 백작님이 아무리 뛰어난 정령술사라고 해도 우리가 맥알파인 공작쪽 사람이라는걸 알면 높은자리까지 올라가게 냅두지는 않을 겁니다. 블랜차드 후작쪽에서 백작님 영입을 좋아해줬으면 더할 나위가 없을텐데 말입니다. 뭐, 제 생각에는 양쪽 다 안되면 여왕폐하께서 어떤 자리를 마련해서라도 백작님을 붙들어 두실 듯 하니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흐음, 그런가요? 어쨌든, 능력밖의 일을 맡지나 않았으면 좋겠는데..." "우선은 얼마 뒤에 있을 왕실 파티에나 신경 쓰십시오. 아아, 그때를 위해서 옷부터 마련해야 겠군요. 크레이그~ 크레이그, 어디 있나?" 이브스햄은 무척 신이난 표정으로 집사를 찾아 나섰다. 엠브로스 가의 성에서 이브스햄의 주최로 벌어진 파티도 규모가 엄청 크다고 생각했는데, 왕실에서 열리는 파티를 보자니 그 생각은 싸악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하기야, 왕실과 엠브로스 가의 성은 성 자체의 규모만 해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니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무척 복작복작한 마차 대란 사이를 뚫고 성 안으로 들어서자 성의 입구에서부터 파티가 열리는 홀까지 마치 길 안내라도 하듯 붉은 비단 줄이 복도 양 가에 쭈욱 걸려 있었다. 왕실 파티에는 귀족들만 참석할 수 있었기에 날 호위해 왔던 기사들은 성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기다려야 했고, 나와 이브스햄만이 시종의 안내를 받아 파티가 벌어지는 홀로 향했다. 홀 입구에서는 왕실 시종 몇명이 입장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받고 있었다. 나와 이브스햄에게도 커다랗고 두터운, 고급스러운 종이와 펜을 건네기에 거기에다 대고 멋들어지게 해인 오스번 엠브로스 백작이라고 써줬다. 힐끔 보니 이브스햄도 거기에 전 백작이라고 쓰는 거였다. 입구에 서 있는 다른 시종이 그걸 재빨리 눈으로 확인한 뒤 우리가 홀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안쪽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쳐 우리의 방문을 알렸다. "엠브로스 백작님과 전 백작님 납시요오~!!" 조엘은 자신의 아버지와 같이 와야 했기에, 여기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홀 안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높다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였다. 엄청 커다란 3단짜리 크리스털로 된 샹들리에가 상석 천장에 매달려 있었고, 그걸 기준으로 마치 부채꼴로 그거보다 작지만, 역시나 화려한 2단짜리 크리스털 샹드리에가 천장의 곳곳에 매달려 엄청나게 넓은 홀 구석구석에 휘황찬란한 빛을 뿌려대고 있었다. 홀은 너무 넓어 천장이 안 무너지게 하려 함인지 홀 가의 군데 군데에는 장정 세 사람이 양 팔을 좌우로 뻗어 겨우 손이 닿을 정도로 굵지만 우아한 기둥이 천장을 받치고 있었다. 그 틈사이로 한쪽에 자리잡은 밴드는 경쾌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지만, 홀 안에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와 웃음 소리에 파묻혀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다. 우리 뒤로도 줄줄이 귀족들이 등장하고 있었기에 시종이 큰 목소리로 계속 어느 어느 귀족 납시요~ 라고 외쳤지만, 홀 안의 사람들은 눈길도 주지 않고 자신들의 대화에만 관심을 쏟았다. 아직은 홀 안이 꽉 차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수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이거야 원... 여기서는 사람 하나 잃어버리기 쉽겠군요. 이런데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찾을지..." 그러자 이브스햄이 피식 웃었다. "조엘 자작 찾을 게 걱정이시라면, 염려 하실 것 없습니다. 나중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조엘 자작 정도의 굵직한 귀족들은 등장할때 부터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고, 그 주위에 많은 날파리들이 몰리기 때문에 찾기가 어렵지 않답니다." 그의 말에 주위를 다시 둘러보니 아직 그렇게 사람이 몰린 곳이 없었다. "헤에, 아직 조엘 자작 정도의 귀족은 안 온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그 정도의 귀족은 천천히 오는 법이지요." "그래요? 쩌비.. 그럼 우리는 그 정도의 귀족은 아닌가보군요." 쓰게 입맛을 다시는 내 표정으로 보더니 이브스햄이 하하 웃었다. "원한다면 더 늦게 올 수도 있었는데요. 하지만, 백작님은 경험이 적으시니 미리미리와서 익숙해지시라고 일부러 서두른 것입니다." "익숙해질 것 까지야... 그냥, 예의바르게 대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괜히 일찍온 거 같아 투덜대는 식으로 말하는데 이브스햄이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백작님은 이런 말씀도 모르시는군요. 파티장은 무기 없는 전투장이다." "엥?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까?"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기에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이브스햄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호화롭게 꾸미고 와서 아무생각 없이 노는 것 처럼 보이지만, 여기서도 중요한 정보가 오가기도 하고 상대방에 대한 탐색전이 펼쳐지며, 상대 진영의 위엄을 떨어뜨리기 위한 치열한 신경전이 오고간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보면 흥겹지만, 조금만 주의해서 본다면 얼마든지 알아차릴 수 있지요." "하아..." "이번 기회에 그런 걸 잘 봐두도록 하십시오. 흥미 없다고 저번 파티처럼 무관심하게 시간만 때우시면 안됩니다. 이제 백작님도 이런 세계에 몸을 담그고 헤쳐 나가야 하시니까요." "윽..." 이번 파티에서도 그 랭포드 후작이란 사람과 블랜차드 후작, 그리고 조엘만 보고 얼렁뚱땅 슬쩍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이브스햄이 그걸 알아차리고 사전에 막은 거였다. "어차피 여왕폐하께서 자리를 지키시는 한, 귀족은 아무도 돌아갈 수 없답니다. 자자, 얼마 안 있으면 굵직한 귀족들이 올 테니 그 동안 연습좀 하시지요." 그렇게 말한 이브스햄은 신 사탕을 입에 물고 있는 듯한 표정의 나를 이끌고 사람들 틈으로 합류했다. "아이고, 전 엠브로스 백작님 아니십니까?" "오오, 이거 욜란다 남작 아니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여기서 이웃을 만나니 기분이 참 좋습니다. 아, 이번에 새로 작위를 받으신 백작님도 오셨군요." 욜란다 남작은 엠브로스 영지 바로 옆에 영지를 가진 지방 귀족으로, 그는 여왕과 숙부가 신경전을 벌일때 어느쪽을 택하지 않고 중립을 지킨 귀족이었다. 덕분에 지금도 여전히 지방 귀족으로 남아 있었는데, 그때문인지 이번에 중앙 진출을 꿈꾸는 우리 가문에 은근히 공을 들이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욜란다 남작님. 그리고, 남작 영애." 그의 옆에 다소곳하게 서 있는 남작의 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그녀도 마주 인사를 해왔다. "두 분을 뵙습니다." 남작은 은근히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자신의 딸을 오늘 파티에서 내 파트너로 밀어 붙이려고 했지만, 이브스햄이 솜씨 좋게 은근슬쩍 떼어 놓고 그들과 멀찍이 떨어져서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운이 없는 사람이지요. 조금이라도 여왕 진영에 보탬이 되었다면 이번에 영지 한자락이라도 하사 받을 수 있었을텐데..." "뭐, 여왕 숙부파에 붙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내 말에 이브스햄이 코웃음을 쳤다. "여왕 숙부파에요? 흥, 그때 숙부파는 한창 잘 나가고 있었습니다. 굵직한 중앙 귀족들이 그쪽에 잘보이려고 줄줄이 줄을 서는데 작은 지방 귀족이 전재산을 들고 찾아온다고 한들 거들떠 보기나 했겠습니까? 이번에 중립을 지켰다고 하는 귀족들은 대부분 여왕 숙부파에는 들지 못하고, 그렇다고 친여왕파에 붙자니 불안해서 그냥 가만히 있었던 사람들이에요." "흐음, 그래요?" 그 뒤로도 이브스햄은 나를 이곳 저곳 끌고 다니면서 조금이라도 안면 있는 사람들에게 나를 인사시켰다. 그러면서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단순한 인사가 끝나면 그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그들은 중립이었느니 여왕파였는니 설명을 해주며 그 다음 무리로 끌었는데, 보니까 내가 그들과 안면을 익히길 바라는게 아니라 그냥 처음 만난 귀족들과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기 위한 연습을 시키는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예의만 가지고 인사를 해도 그 뒤로 어떤 화제를 끄집어내지 못하면 대화는 단절되고 마는게 아니겠는가? 이브스햄은 내가 그 화제를 끄집어내거나, 아니면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화제에 자연스레 끼어들게 하기 위한 훈련을 시켰던 것이다. 나중에 굵직한 귀족들에게 써먹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면서 그 무리에서 빠져 나오면 그들과 그들이 나누던 화제에 대해 좀더 자세한 설명을 해주는 식으로 한 대여섯 무리를 지나치는데 드디어 우리가 기다리던 굵직한 귀족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랭포드 후작님과 후작 부인, 그리고 랭포드 자작님 납시요오~!!" 시종의 외침이 들리자 그 동안 시선 조차 주지 않았던 많은 귀족들이 대화를 중단하고 단번에 홀의 큰 입구로 관심을 돌렸다. 랭포드 자작은 조엘을 처음 만났을때 잠깐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에게 관심도 없어서 얼굴 생김새는 잊어버리고 큰 키에 강할 것만 같다는 인상만 기억에 있었는데 다시보니 내 기억이 맞다는 걸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여전히 큰 키에 짙은 밤색머리의 그는 당당하지만 무표정하게 아버지 뒤에서 걷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인 랭포드 후작을 보니 아들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들 못지 않은 장신에, 가끔 새치가 보이는 짙은 밤색머리, 그리고 당당한 기색을 띤 부리부리한 눈... 그 옆에 있는 랭포드 부인은 정말 키가 작았다. 한... 150 조금 넘으려나? 그런데 장신의 랭포드 후작 옆에 나란히 서 있으니, 완전히 고목나무에 매미가 매달린 느낌이었다. 약간 통통한 그녀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띈 채 남편의 팔에 매달려 있었는데, 가끔가다 랭포드 후작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대 사람들에게 부딪히지 않도록 그녀를 감싸주는 걸 보니 부부 사이에 금슬이 좋은 모양이었다. '음, 보기 좋은걸?' 그들이 도착하자 이브스햄의 말대로 그들 주위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부인의 모습은 곧 가려졌으나, 사람들 머리 위로 랭포드 부자의 머리는 쑥 올라와서 어디에 있든 쉽게 찾을 수는 있을 거 같았다. 뭐, 내가 그들에게 볼 일은 없지만 말이다... "키가 큰 것도 때로는 크게 도움이 되는 군요." 내가 그쪽으로 보며 말하자 이브스햄이 금방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를 채고 웃었다. "후후후, 그렇지요? 그럼 백작님도 좀 많이 많이 드셔서 키좀 키우시지 그러셨습니까?" "윽... 그래도 저 정도까지는 크고 싶지 않아요." 사람들이 랭포드 후작쪽으로 몰려들기에 우리는 그 사람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게 뒤로 물러 나려고 하는데 시종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맥알파인 공작 내외분과 자작님, 그리고 공작 영애 듭시요오오~~!!" "맥알파인 자작이 왔군요. 인사하러 가셔야죠?" "벌써요? 아마 저쪽도 사람들이 우르르 몰릴 거 같은데..." 낮익은 맥알파인 공작 가족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하자 이브스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에구, 벌써 사람들이 몰려 가네요. 우리는 잠시 뒤에나 가볼까요?" 그래서 또 다시 뒤로 물러서는데 시종의 큰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블랜차드 후작님 듭시요오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내 몸이 살짝 긴장되는게 느껴졌다. "왔군요." 이브스햄의 목소리에도 긴장감이 가득했다. "그러네요." "먼저 가볼까요? 아니면 조엘 자작을 먼저 만날까요?" "글쎄요... 이브스햄은 어떻게 하는게 좋을 거 같아요?" 내 질문에 이브스햄은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대답했다. "우선은... 조엘 자작을 먼저 만나는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의 말에 공작 식구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먼저 들었는데, 이런 내 고민은 어이없게도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렸다. 조엘이 식구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나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오셨습니까, 조엘 자작." "어서 오세요." 이브스햄과 내가 인사를 하자 조엘은 예의상하는 일상적인 대화는 모두 생략해 버리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엠브로스 백작님, 블랜차드 후작님을 한번 뵈어야죠?"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하지만, 저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야..." 내가 블랜차드 후작 주위로 몰려들어 그의 모습까지 가려보이는 사람들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조엘이 씨익 웃었다. "아, 그건 걱정 마세요. 저들은 잠시 후면 제풀에 떨어져 나갈테니까." "예?"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조엘은 웃기만 할 뿐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대신 이브스햄이 한 마디 해줬을 뿐이었다. "그냥 보고 계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그의 말에 의아해 하면서도 잠자코 그들처럼 나는 블랜차드 후작쪽만 지켜보았다. 그랬더니 과연, 잠시후가 되자 사람들이 슬그머니 하나 둘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에는 다른 귀족, 그러니까 랭포드 후작네나 맥알파인 공작네에 비해 정말 적은 사람들만 남아 있는 거였다. "어, 어라?" 그 모습에 내가 눈을 둥그렇게 뜨자 조엘이 후후 웃으며 설명해줬다. "블랜차드 후작님은 냉정하기로도 이름이 높으시죠. 쓸데없는 말에는 대꾸는 커녕 아예 무시를 해버리시거든요. 잘 모르는 분들이야 멋도 모르고 가까이 가지만, 잘 아는 분들은 특별한 용무가 없는 한 잘 가까이 가지 않죠." 그의 말에 나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나도 가봤자 소용 없잖아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디 상대나 해주겠어요?" "그래도 인사는 받아준답니다. 거기다가, 아마 백작님께 지금 호기심을 가지고 계실 걸요?" 자신있게 말하는 조엘의 말에 나는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에이... 한번도 안 본 사람인데 어찌..." "아닐걸요? 아마 백작님에 대한 신상명세서가 블랜차드 후작에게 들어가 있을 겁니다."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폐하를 알현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폐하 뒤에 누가 있었습니까? 바로 폐하를 호위하는 기사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는 왕실 기사단 소속, 그러니 그때 있었던 이야기는 바로 후작의 귀로 들어갔을 겁니다. 뭐니뭐니해도 우리나라 최고의 정령사 이야기인데요." 조엘이 은근슬쩍 날 띄워주자 나는 부담이 되어 표정이 안 좋아졌는데, 옆에 있던 이브스햄은 반대로 표정이 환해졌다. "오오, 맥알파인 자작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구료. 백작님, 그럼 자작을 믿고 한번 가보시지요. 뭐, 아니면 어떻습니까? 그냥 인사나 한다 생각 하시고..." "그럼요, 그럼요. 이제 슬슬 사람들도 많이 떨어져 나갔으니 지금이 딱 좋을때 같습니다." "으음..." 나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마감, 마감, 마가아아아암~~~ ㅡ.ㅡ;; 나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블랜차드 후작 주위에 사람들이 적다는 건 그에게 괜히 접근하여 이야기를 걸어오는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지, 사람 자체가 없다는 건 아니었다. 이건 블랜차드 후작에게 가까이 접근하면서 깨달은 건데, 다른 두 가문 사람들에게와는 달리 블랜차드 후작에게 말을 걸기 위해 접근한 사람이 없는 건 블랜차드 후작자신이 냉담하게 구는 것도 있겠지만, 그 보다도 후작 주위에 포진해 있는 사람들의영향이 더 큰 듯 싶었다. 후작이 이 나라 기사들의 영웅이라고 하더니만, 그의 주위에는 젊은 청년들이 마치 호위를 하듯 포진해 있다가 누군가가 다가가면 병아리 지키는 어미닭처럼 매서운 눈초리를 보내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나서서 뭐라고 하는 건 아니었지만, 보통 사람은 그냥 기가 죽어 물러나게 할 정도의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 아닌 조엘과 이브스햄은 그런데에 전혀 굴하지 않고 척척 그들 사이를 태연하게 지나 후작에게 다가가는 거였다. 그들 뒤를 어쩔 수 없이 따라가던 나는 후작의 모습을 보자 그 자리에 멈춰섰다. 깊디 깊은 심해의 바다빛처럼 검푸른 머리카락에 무엇이든 꿰뚤어볼 것만 같은 파란눈을 가진 블랜차드 후작은 남자다운 매력을 물씬 풍기는 강인한 인상의 미남이었다. 랭포드 후작이 뜨거운 용광로에서 수십번 달구어지고 두들겨져 제련된 강철 검과 같은 느낌이라면, 블랜차드 후작은 오랜 세월의 비바람을 견디며 꿋꿋하게 가지를 핀 절벽 위의 아름다운 소나무나 절경 위에 서 있는 고고한 바위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그런 그의 매력적인 외모가 아니었다. 그의 외모 뒤에 조용히 존재하고 있는 무언가 거대한 기운 때문이었다. 그가 날 바라보는 것도, 누군가에게 살기를 풍기는 것도 아닌데 나는 그 뒤에 버티고 있는 너무나 거대한 기운때문에 감히 그에게 다가가는 것 조차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높디 높은 산을 눈앞에 두고 있는 느낌... 이렇게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기만 하는데도 손바닥에 땀이 축축하게 배이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백작님?" 잘 따라 오던 내가 갑자기 멈춰섰으니 앞서가던 이브스햄과 조엘이 의아해서 뒤돌아보는 것도 당연했지만, 나는 그에 뭐라고 응해줄 기분이 아니었다. 조엘과 이브스햄이 이상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것도, 주위에 있던 젊은 청년들이 비웃음이 가득한 시선을 던지는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생각나는 것은 저 존재에게서 멀어져야 겠다는 것 뿐이었는데,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옮겼다가는 저 존재의 거대한 힘 속에 빨려들어갈 것만 같아서 차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런 느낌... 어디선가... 어디선가... 세상에나...' 전에 이와 같지는 않지만 엇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건 놀랍게도 바다 속 우리 집에서 아버지가 나에게 정령의 기운을 이끌어내준답시고 자신의 모든 기운을 끌어 올려냈을때 받았던 느낌이었다. 뭐, 그때처럼 기운이 날 향해 쏟아져 오는게 아니라 절망적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뭐랄까... 딴 곳을 보고 있는 호랑이의 곁에 있는 기분이랄까? 지금은 나를 향해 있지는 않지만, 내가 잘못 움직였다간 호랑이가 날 바라볼 것 같은 두려움이 날 꽈악 묶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드워프의 마을에 갔다 오는 배 위에서 실피드와 아버지가 내 정령을 다루는 실력을 길러주겠다고 훈련을 시킨 뒤로부터 나의 이런 기운에 대한 감각은 더욱 더 예민해져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온 몸의 털이 곤두서고 피부가 찌르르 하는 아픔을 느낄 정도였다. "백작님!!" "헉!" 너무 그 느낌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던 나는 조엘이 내 팔을 강하게 잡아 한번 흔들어주자 그제야 그 느낌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보는 이브스햄을 향해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날 보는 누구라도 내가 괜찮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마와 손바닥에는 식은땀으로 축축했고, 손발은 피가 통하지 않아 엄청 차가웠다.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얼굴까지 창백해져 있을 거였다. "몸이 안 좋으신가 보군요. 좀 쉬시는게 어떻겠습니까?" 조엘의 제안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지만, 언듯 든 생각에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조엘과 이브스햄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도 저 자의 강대한 기운때문에 잔뜩 긴장을 했는데, 이들은 나 보다도 더 가까이 그자에게 갔었으면서도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조엘과 이브스햄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어느 누구도 약간 긴장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만큼이나 긴장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마치... 마치 그 블랜차드 후작 모습 뒤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기운을 모르는 듯이... '어떻게,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저렇게 거대한 기운인데...' 내가 당혹해 하는 사이 조엘이 얼른 내 팔을 잡아 날 부축했다. "정말 몸이 안 좋으신가보군요. 이렇게 힘이 없으시다니..." "도대체 어떻게 되신 겁니까, 백작님..." 그건 나야말로 묻고 싶었다. 이들은 도대체 저 기운을 느끼지 못한단 말인가? 어쨌든, 그걸 알기 전에 우선은 이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나는 순순히 조엘의 부축에 몸을 기대고 이 곳에서 멀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채 한 발을 떼기도 전에 나는 다시 굳어버렸다. 그 거대한 기운이 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백작님?" 조엘이 의아하게 바라보는 것에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중저음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울려왔다. "맥알파인 자작, 인사 하러 오는 줄 알았는데 그냥 가는 건가?" 나는 그 목소리를 그냥 무시하고 갔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현실은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목소리에 조엘이 나를 부축한 채 돌아섰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그자를 다시 정면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실례했습니다, 후작님. 이번에 새로 작위를 받으신 엠브로스 백작님을 소개해 드리려고 했는데 백작님께서 몸이 갑자기 안 좋아지신 모양이라서요." 무엇이든 꿰뚫어볼 것만 같은 새파란 눈동자가 나를 향하자 나는 나도 모르게 아랫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자가?" 날 슬쩍 살펴본 파란 눈동자에 호기심이 어리더니 블랜차드 후작이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이거, 괜찮으신가? 안색이 많이 안 좋은 듯 한데..." 그러면서 손을 내밀자 나는 질겁하여 날 부축하는 조엘을 밀쳐버리고 얼른 그에게서두어 걸음 물러났다. "배, 백작님?" "킥킥..." 이브스햄이 당황스럽게 날 부르는 목소리도, 주위에서 노골적으로 비웃는 웃음소리도 나에게는 멀리서 들리는 소리일 뿐이었다. "호오?" 그러나 날 주시하는 눈동자는 당혹해 하지도, 비웃지도 않았다. 오히려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가더니 눈가에 장난기가 스윽 지나가는 거였다. 그러더니 곧이어 그의 몸에서 내가 그렇게나 기피하고 싶은 기운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욱..." 그러자 그에 질세라 그 동안 호시탐탐 나갈 기회를 노리고만 있던 내 정령의 기운도피어 올라 나를 감쌌다. "호오..." 파란 눈동자에 잠시 감탄의 기색이 스쳐 지나가더니만, 또 다시 장난기가 피어 올랐다. 그러더니 그의 몸에서 피어 오르는 기운이 좀더 강해졌다. 그에 맞춰 내 몸의 기운도 더 강하게 피어 올랐고, 그러자 후작이 기운을 또 좀 더 강하게 하는 거였다. 아직까지 그 정도는 무난히 버틸 수 있었기에 내 몸에서도 그의 기운에 맞대응하여 정령의 기운이 계속 피어났다. 처음에는 약하게 시작했다가 점점 강해진 기세 싸움은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강해져서 나에게 쏘아져 들어왔다. 비록 나에게 집중된 것이긴 했지만, 나 또한 그에 못지 않은 기운으로 맞대응 하고 있었기에 주위에는 두 기의 충돌 여파로 소동이 일어났지만, 나는 그 하나 감당하기도 벅찼기에 주위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열받는 건, 그 자식은 무척이나 여유 만만한 표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주위에는 전혀 신경을 안 쓰는 거였다. 주위에서 뭔 일이 있건 말건 상관 없다는 듯이 말이다. 하기야, 여기는 왕성이었으니 곧 마법사들이 달려와 주위에 피해가 가지 않는 결계를 쳐주거나 저 자를 막아줄터였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그때까지만...' 그런데 그때였다. 강하게 나를 밀어 붙이던 기운의 가운데에서 갑자기 그 보다 더 강하고 응축된 기 한줄기가 마치 쏘아진 화살처럼 튀어 나오더니 그의 기운을 막고 있던 내 기운을 뚫고 들어와 내 몸에 부딪혔다. "커억!!" 정확히 가슴을 때린 그 충격은 엄청 강한 뒤돌려차기를 한대 맞은 것만 같아 나는 나도 모르게 신음을 토하며 뒤로 크게 휘청거렸다. 다행이 볼썽사납게 뒤로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그 틈을 타 내 정신의 조정을 받던 정령의 기운이 흐트러졌고 블랜차드 후작의 기운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순식간에 내 기운을 뚫고 나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헉..." 이젠 끝이다.... 라고 절망적으로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사방으로 흩어졌던 내 기운이 내 앞으로 순식간에 모여들더니 날 덥쳐오는 블랜차드 후작의 기운을 튕겨냈다. "커억..." 두개의 기운이 충돌하는 여파로 나는 다시 뒤로 크게 휘청 거리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다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순간, 누군가가 내 몸을 부드럽게 받쳐주는 게 느껴졌다. [정신 차려라!!] 그와 동시에 내 기운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내 주위를 단단히 감싸는게 느껴졌다. 어리둥절해서 눈을 떠보니 나는 이프리트의 부드러운 날개 품에 안겨 있었고, 내 앞에는 엄청 분노한 기운을 뿜어내는 아버지와 실피드, 그리고 노아스가 버티고 서 있었다. 내 기운을 조정해 날 보호한건 아무래도 아버지가 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내 기운은 원래 아버지 기운이었기에, 이제는 내건데도 여전히 아버지가 마음만 먹으면 조정이 가능했던 것이다. "호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최상급 정령사라고 하더니, 정령왕과도 계약한 건가?" 난 다시 들려오는 블랜차드 후작의 말에 놀라 얼른 몸을 똑바로 세웠다. 블랜차드 후작은 세 정령왕과 대치를 하는 와중인데도 여전히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들이 정령왕이라는 걸 한 눈에 알아본 것도 놀랍지만, 정령왕들을 대하고서도 긴장하지 않는 모습이 더 놀라웠다. 게다가, 정령왕들은 지금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주위를 슬쩍 보니 이 소동을 듣고 잽싸게 달려온 여러명의 마법사들이 힘을 합쳐 결계를 치고 있었는데, 그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정령왕들은 보이지 않는지 계속 나와 후작만 주시하고 있었다. '아니, 그럼 저 후작은 어떻게 정령왕들을 보는 거지?' 내가 속으로 당황하고 있는 동안에도 블랜차드 후작은 여유가 너무 많다 못해 넘쳐나는지 아버지를 비롯한 정령왕들에게 태평하게 인사까지 하는 거였다. "여어, 이거 참 오랜만에 보는군, 엘라임. 실피드하고 이프리트는 한번 봤고... 그럼 이쪽이 노아스인가? 정말 미친 생각 같지만... 저 인간이 설마 네 정령 모두하고계약한 건 아니겠지?" 그의 태평한 인사에 성격 급한 엘라임과 실피드가 버럭 소리쳤다. [시끄러, 이 시퍼런 도마뱀 녀석아!! 너때문에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맞아.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벌써 죽고 싶어 환장한 거냐?] 거기에 노아스까지 가세했다. [너무 하잖아? 해인이가 너에게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해인이 괴롭히는 거라면 우리가 먼저 상대해 주겠어!!] 너무 과격한 정령왕들의 반응에 블랜차드 후작은 벙찐 표정이었다. "이봐... 정말 모두 저 인간하고 계약한 거야? 왜 그렇게 화를 내?" [그럼 화를 안 내게 생겼어? 이 삶아 죽일 도마뱀 녀석!! 까딱 잘못했다가는 다칠 뻔 했잖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실피드가 나섰다. [삶아 죽이는 걸로는 성이 안 차. 우선 네 다리하고 네 날개를 몽땅 잘라 주겠어!!] [거기에 덤으로 바위 송곳으로 온 몸을 찔러주지!!] "어... 어어어...." 점점 더 과격해지는 세 정령왕의 언행에 나까지 얼이빠질 지경이었다. 그러자 언제나 세 정령왕을 말리는 역할을 하는 이프리트가 이번에도 나섰다. [자자, 셋 다 모두 진정해. 우선 어떻게 된 연유인지부터 알아야 하는게 순서 아니야?] 하지만, 아버지는 그 말에 더욱 더 흥분한 표정으로 외쳤다. [연유는 무슨 얼어죽을 연유!! 내 아들이 죽을 뻔 했다고!!] [맞아. 우리가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일날 뻔 했어.] 노아스까지 거들고 나자 블랜차드 후작이 머리가 점점 아파지는 모양인지 인상을 팍찡그리며 자신의 이마를 짚더니만 세 정령왕을 불렀다. "어이, 어이. 말은 똑바로 하자고. 나는 죽이려 한 적 없어." 그러자 아버지가 눈을 매섭게 치켜 올리며 소리쳤다. [뭣이라? 죽이려고 한 적이 없다고?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단 말이다. 내가 나서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어? 네 놈의 기운에 내 아들이 짜부될 뻔 했잖아, 이 멍들어도 티하나도 안 나는 시퍼런 도마뱀 녀석아!!] "이봐, 엘라임. 내 드래곤 하트에 대고 맹세코 죽이려 한게 아니었다니까. 아까도 그 기운을 막아내지 못하는 것 같길래 내가 거둬들일 생각이었다고!" 그 말에 아버지는 말 문이 막힌 듯 아무말도 못했고, 대신 실피드가 나섰다. [그럼 왜 그렇게 늦게까지 안 거둬들이고 있었던 거지? 우리가 놀랄 정도로 말야.] "아니, 나는 저 녀석이 막아낼 줄 알았어. 그런데 못 막으니까 막 거둬들이려고 했는데 그때 당신들이 나타난 거야." 블랜차드 후작의 말에 노아스가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확인했다. [그게 정말이야?] 그러자 블랜차드 후작이 화난 표정으로 오른 손을 자신의 가슴께에 가져다 대며 되물었다. "드래곤의 맹세를 못 믿는 거냐?" [웃긴 드래곤 녀석 같으니라고!! 네가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아버지가 다시 흥분한 소리로 외쳐댔지만, 더 이상 날 죽이려고 했다는 것에 대한 왈가왈부는 없었다. 블랜차드 후작의 말을 완전히 믿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블랜차드 후작이나 나나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말이 있었으니... "그런데, 저 녀석이 네 자식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그런데, 저 사람이 드래곤이라뇨, 그게 무슨 소리에요?" 그러자 네 정령왕 모두가 블랜차드 후작은 싸악 무시해버리고 나에게만 고개를 돌려답변을 해주는 거였다. "그러니까 저 녀석이 썩을 도마뱀 녀석이야." 아버지의 말에 이어 실피드가 대답했다. "그것도 블루족 녀석이지." "나이가 3000살 좀 넘은 어린 녀석이야. 겁 먹을 건 없어." 노아스의 말까지 이어지자 나는 정리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니까... 저 사람이... 3000살이 넘은 블루 드래곤이라구요? 헉? 그럼 사람이 아니었어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내 말에 엘라임이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사람은 무슨, 내가 전에도 말했지? 사람 중에는 널 당할 자가 없다고 말이야. 저 녀석 기운을 보면 못 알아채겠냐?] "에.. 그, 그게..." 내가 어찌 알겠는가? 드래곤이라는 종족과는 한번도 마주한적이 없었는걸... [어쩔 수가 없잖아? 해인이는 지금 드래곤을 처음 본 거라고.] 이프리트가 이런 내 마음을 알아줬는지 내 편을 들어줬다. "저기... 이봐요들, 이제 그만 나 좀 봐주지 그래?" 그 동안 얼결에 정령왕들에 의하여 왕따가 된 블랜차드 후작, 아니 블루 드래곤이 끼어들자 정령왕들은 - 아, 물론 이프리트는 빼고 - 나에게 대하던 것과는 정 반대로 인상을 팍 쓰면서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뭐냐?] "허.... 무섭네... 이렇게 차별대우를 하다니...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잖아? 아니, 저 인간이 도대체 너희들의 뭐냐? 자식이라니.. 요즘은 계약자를 자식이라고 하나보지?" 정령왕들의 험악한 인상에도 눈 하나 까딱 안 하는 블루 드래곤이 여유있게 묻자 정령왕들이 인상을 팍팍 쓰면서도 대꾸해줬다. [멍청한 놈, 계약자를 계약자라고 하지, 왠 자식?] 이번에는 실피드가 먼저 운을 떼었고 그 뒤를 노아스가 이었다. [말 그대로야. 얘는 우리 아들이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끝마무리를 했다. [누구 마음대로 '우리' 아들이야? 얘는 내 아들이라고.] 정령왕들의 대답을 들은 블루 드래곤의 반응은 황당했다. 그는 갑자기 새끼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 후비적 파면서 혼자 중얼중얼 댔던 것이다. "내가... 벌써 노망이 들을 나이던가? 왠 환청이 이렇게 들린담...." [저, 저노무시키가아아~~!!] 아버지가 블루 드래곤의 반응에 발칵 화를 내며 달려들려고 하는데, 그 순간 우리는일제히 행동을 멈췄다.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파티장에 피해가 가지 않기 위하여 황급하게 달려온 왕실 마법사 ( 내 추측이긴 하지만, 여기서 급히 달려올 수 있는 이들이 그들 밖에 더 있겠는가? ) 들에 의해 생긴 결계가 팍 하고 사라졌던 것이다. 덕분에 우리가 여기가 어딘지를 깨닫고 아차 싶어하는 사이, 멀찍이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이 쫘악 갈라지면서 여왕이 호위 기사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오, 블랜차드 후작?" 그에 블루 드래곤은 황급히 허리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그래 나도 얼결에 같이 예를 표하는 수 밖에 없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하지만, 여왕은 화가 나서 그런지 우리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만 고개들 드세요. 그리고 후작, 내가 듣고 싶은건 그대의 인사가 아니라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이오." 그에 고개를 든 후작은 주변을 둘러보다 마지막으로 날 보더니 묘한 미소를 짓고 입을 열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이번에 뛰어난 인재가 들어왔다 하여 잠깐 시험해본다 하는 것이 생각 이상이라 호승심이 일어 제가 잠시 상황을 잊었나이다. 부디 용서하소서." 그의 대답에 여왕이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 "그대가 호승심에 상황을 잊어버렸다? 엠브로스 백작의 실력이 그정도였단 말이오?"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폐하." "호오, 그렇소?"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승리는 후작 것이었나 보구려. 엠브로스 백작, 안색이 좋아보이지 않소이다." 그렇지않아도 혼자 서 있기는 했지만, 아까 블루 드래곤에게 가슴을 한방 맞은게 지금 꽤 욱신거리고 있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으려 애를 쓰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송구스럽습니다, 폐하. 후작님의 실력은 제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나이다." "아니오. 후작이야 우리 나라 제일의 검사가 아니겠소? 그에게 진 것이 수치스러운 것은 아닐터요. 게다가, 후작의 인정까지 받지 않았소이까." 그 즈음 대화에 끼어드는 누군가가 있었다. "블랜차드 후작에게 호승심을 불러 일으킬 정도라니 정말 대단한 인재입니다. 비록 파티가 엉망이 되었다 하나 우리 나라에 저 정도의 인재가 등장 했다는 건 참으로 기쁜 일이옵니다." 랭포드 자작이었다. 그는 여왕에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무섭도록 번쩍이는 눈은 나에게 고정시키고 있어 심히 부담 될 지경이었다. 그때 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허허허, 엠브로스 백작은 첫 만남부터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이더니만, 블랜차드 후작께 인정받을 정도의 실력자였군." 맥알파인 공작이었다. 그는 조엘에게 나에 대한 설명을 들었던지 놀란 표정을 짓는 대신 반갑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에 나도 겨우 웃어보이며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 각하." 그 순간 나를 향해 눈을 반짝 반짝 빛내던 랭포드 후작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어져버렸다. "맥알파인 공작님, 엠브로스 백작과 아는 사이셨습니까?" 그에 반해 맥알파인 공작은 싱글 싱글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아, 예. 예전에 우연한 인연으로 안면이 좀 있는 사이랍니다." "끄응... 그랬구려..." 무지 아깝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입맛을 쩝쩝 다시는 랭포드 후작을 보아하니 이브스햄과 조엘의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윽..."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려고 했는데, 웃기도 전에 가슴의 통증이 심해져 나는 나도모르게 인상을 찡그리며 작게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백작님..." 그러자 아까 내 주위에 조심스레 다가와 있던 조엘과 이브스햄이 다가와 부축해주려고 했는데, 그 보다도 먼저 날 부축하는 손길이 있었다. "흐음, 내가 좀 과했던 모양이오. 사과하지." '그게 좀 과한 거냐?'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는 억지로 웃어 보일 수 밖에 없었다. "괘, 괜찮... 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라면 누구라도 안 괜찮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였다. 그래 염치 불구하고 파티를 빠져 나가는 허락을 구하려고 했는데, 나 보다도 먼저 블랜차드 후작이 여왕을 보며 요청했다. "폐하, 소신의 실수로 인하여 엠브로스 백작이 크게 다친 것 같으니 제가 데리고 나가 치료해주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러시오. 백작이 아무래도 많이 안 좋은 것 같으니 서두르도록 하시오." "망극하옵니다, 폐하." 여왕의 허락에 대해 감사의 인사르 하자마자 블랜차드 후작은 거의 나를 들쳐 메다시피 해서 파티장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브스햄이 황급하게 뒤따랐다. 파티장을 나오자 이브스햄이 무지 걱정되는 음성으로 물어왔다. "백작님, 괜찮으신 겁니까?" "에구구구... 죽지는 않을거 같아요... 끄응..." 블랜차드 후작이 내 팔을 자신에게 두르게 하고 부축하는 형식이었지만, 거의 날 들고 있는 판국이라, 파티장을 빠져 나왔을즈음에는 어째 가슴의 통증하고 어깨의 통증하고 비슷한 경지에 이르러 내 인상을 찡그리게 했다. 그 자세는 블랜차드 후작도 불편했는지, 그는 파티장을 나와 몇 걸음 걷다 말고 혀를 한번 쯧 차더니만 내 몸을 부축하고 있지 않은 손을 갑자기 내 무릎 밑으로 집어넣어 날 번쩍 드는 거였다. "우악~!!"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후작님!"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나와 이브스햄이 놀라 외쳤지만, 전혀 상관하지 않은 채 그는성큼 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야, 호리호리하더니만 엄청 가볍잖아? 내가 콧바람만 불어도 날아가겠다." 하지만, 그렇게 안아 드는 것이 내 어깨도 안 아프고 숨쉬기도 훨씬 편해 가슴의 통증도 덜했다. 단지... 폼이 좀 요상하다는게 문제면 문제겠지만... "지금 어디로 데려가는 거에요?" "내 집무실." 내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한 후작은 계속 성큼성큼 걷다가 계속 뒤를 졸졸 쫓아오는 이브스햄이 신경쓰였는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고개만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이봐." "예?" 후작이 갑자기 멈추자 덩달아 걸음을 멈춘 이브스햄이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대는 이만 가보도록 해. 있어봤자 도움이 될 건 없으니까." "하, 하지만..." 단호한 축객령에 이브스햄이 당황하면서도 머뭇대자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말이 많군. 내일 아침에 멀쩡하게 만들어서 보내줄테니까 걱정 말고 돌아가기나 해. 어린애도 아닌데 뭘 그렇게 걱정하는 거지?" 그러자 이브스햄이 난처한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그래 내가 기꺼이 나서줬다. "거, 나이 많으신 분께 말투가 그게 뭐예요? 어쨌든, 이브스햄은 후작님 말씀대로 걱정말고 돌아가세요. 나도 조금 쉬다가 괜찮아지면 알아서 갈테니까." 후작이 날 반듯하게 안아 올려준 덕분에 가슴의 통증이 많이 완화되어 말도 잘 할 수 있게 된 거였다. "아... 저,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브스햄이 주저하며 묻자 나는 싱긋 웃어보였다. "괜찮아요, 괜찮아. 아, 지라르경에게는 말 잘해주세요." 정말 조금도 걱정이 안됐다. 이브스햄 뒤에 네 정령왕이 줄줄이 따라 오는데 뭐가 걱정이 되겠는가? "알겠습니다. 백작님이 그러라고 하신다면... 그럼, 나중에 조심해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이브스햄이 몸을 돌려 왕실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자 블랜차드 후작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고, 그제야 정령왕들이 편하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해인아, 많이 아파? 많이 아프면 이 녀석 좀 더 때려줄 걸 그랬나?] 노아스의 걱정 어린 말에 나는 싱긋 웃어보였다. "괜찮아요. 아까보다는 많이 나았어요." [그 정도 가지고 뭘... 저 녀석은 어깨를 꿰뚫려도 안 죽은 녀석이라고.] [어깨좀 뚫렸다고 인간이 죽냐? 저 정도도 한숨 푹 자면 났는다고.] 아버지의 말에 실피드가 핀잔을 주자 아버지가 발끈했다. [시끄러워!! 그럼 네놈이 다쳐봐라. 어디 얼마나 잘 났나 보자. 네놈이 어깨나 뚫려봤어, 이놈아?] [뚫려보고 싶어도 못 뚫린다. 너 정령이 어깨 뚫려서 피 철철 흐르는 거 봤냐?] [그러니까, 네 놈은 알지도 못하면서 뭘 아는체 하는 거야?] [아니, 어깨 안 뚫린다고 그런 것도 모르냐? 나도 알 건 다 안다.] [네가 알긴 뭘 알아?] 티격태격하는 와중에도 용케 안 뒤쳐지고 잘 따라오는 아버지와 실피드의 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보던 블랜차드 후작이 날 바라봤다. "이봐... 엘라임과 실피드는 맨날 저러냐?" "아하하하... 만날때마다 저래요." "거, 참..."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블랜차드 후작은 어느 커다란 문 앞에 멈춰서더니 주위를 슬며시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한마디 했다. [열려라.] 그러자 굳게 닫힌 문이 활짝 열리는게 아닌가. "오옷..." 그 모습에 내가 눈을 뚱그렇게 뜨자 아버지가 핀잔을 줬다. [뭘 그런거 가지고 놀래? 도마뱀 녀석들이라면 다 쓰는 용언 마법이잖아.] "와, 이게 용언 마법이었어요?" 불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방안을 아무렇지도 않게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커다란 쇼파 위에 조심스레 날 내려놓은 그는 손짓 하나로 열린 문을 다시 닫게 하고 등불을 켜 방 안을 밝혔다. "우선, 치료부터 해주지. 리커버리!" 내 가슴에 척 손을 대더니 주문도 안 외우고 바로 시동어로 8 클래스의 고위 마법을시전하는 걸 보고 눈이 다시한번 동그래졌다. 마법이란 학문에 손을 담근 나로써는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곧 그의 손에서 부드러운 빛이 빠져나와 내 가슴 부위를 맴돌자 싸아아~ 하고 약간 있던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우와아아... 나 리커버리 말로만 들었지 처음 봤어요. 오오, 이거 정말 대단하잖아?" 그가 손을 떼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감탄의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훗, 이까짓걸 가지고 뭘... 우리 드래곤에게는 간단한 일이야." "오오, 나도 다시 마법쪽을 진지하게 공부해볼까나?" 공부하는 게 귀찮아서 마법에 쪼끔 흥미가 있지만, 익히는 걸 자꾸 미루기만 했는데의욕이 다시금 불타오르는게 느껴졌다. 그 의욕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뭐, 그건 네 사정이고... 아까 못한 이야기를 다시 해볼까?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네가 엘라임의 자식이라니. 그러자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아, 거 자식 말귀 되게 못 알아 듣네. 아까부터 계속 이야기 했잖아. 얘는 내 자식이고, 나는 얘 아버지야.] 블랜차드 후작은 아버지의 말에 인상을 팍 쓰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 나이 이때까지 왠만한건 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만, 정령에게 자식이 있다는 걸 이해하라니... 이건 정말 너무한거 아니냐? 그걸 도대체 누가 믿어?" [누가 네놈 보고 믿으라냐?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아버지가 계속 틱틱대며 대답하자 블랜차드 후작은 인상을 찡그리며 다른 정령왕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러자 다른 정령들의 대답은 더 가관이었다. [말 되잖아?] [쟤 말 사실이야.] 블랜차드 후작에게 감정이 많은지 실피드와 노아스는 아버지처럼 틱틱대며 대꾸했고, 그나마 이프리트가 좀 났게 대답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라네.] "허..." '이것들이 단체로 날 놀리나...'하는 표정으로 정령왕들을 바라보는 블랜차드 후작의 모습에 결국 내가 나섰다. "이런 말이 있다지요, 마법사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자다. 제 어머니가 마법사셨거든요. 어떤 방법을 쓰셨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의 기운을 이용해 아이를 배셨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답니다. 그게 바로 저에요." 그러자 그제야 블랜차드 후작이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가 마법사라고? 흐음... 그랬었군. 진작 그렇게 설명을 할 것이지... 호오... 그럼, 넌... 정령의 기운을 이용한 키메라냐?" [야, 이 자식아~~!! 너 죽을래애애애~~~!! 누구보고 키메라래애애애~~!!] 아버지가 제일 먼저 흥분해 날뛰었고, 실피드와 노아스도 매섭게 후작을 노려봤다. [저, 저자식이 아직 매서운 맛을 못 봤구만!] [나에게 맡겨. 땅 속에 파묻어 주겠어!!] 그리고 이번에는 이프리트도 합세했다. [잰 좀 맞아도 싸다. 때려줘라!!] 세 정령왕이 무섭게 달려들자, 후작은 잽싸게 방 안과 자신의 주위에 결계를 펼쳤고, 그 위를 세 정령왕에 무섭게 두들겨 댔다. 키메라란 두 가지 이상의 다른 생명체를 자연스러운 방식이 아닌 마법적인 방법으로합성하여 새로이 만들어낸 생물체를 말한다. 그런데, 키메라는 대부분 마법사들이 자신들의 지식을 위한 연구로 만들어 내는데다가 용어 자체도 마법사들 사이에서 나온 거라 새로운 생명체를 일컫기보다는 실험체를 일컫는 경향이 더 강했다. 그러니 나에게 그런 말을 쓴다는 건 대단한 모욕인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정령왕을 말리지 않고 가만히 앉아 구경했다. 사실 내가 안 달려든것만해도 대단히 고마워 해야 할 일 아닌감? 블랜차드 후작도 그걸 알고 있는지 결계 뒤에서 공격할 생각은 못하고 사과의 말만 크게 외쳤댔다. "우왓, 우왓, 미안하다. 내가 실언했어!! 그 말 취소한다니까아~~!!" 하지만 정령왕들의 공격이 멈춘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로, 그것도 신나게 두들겨서 화가 풀린 게 아니라, 정령왕들의 기운이 거의 떨어져 정령계로 소환되기 직전에서야 어쩔 수 없어서 멈춘 거였다. [너, 너어~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하면 정말 가만 안둔다! 내가 소멸 하던 네 놈이 죽던 둘 중 하나가 될 거다] 아버지가 흥분해서 바락바락 외치자 후작은 자신의 잘못을 정말 통감했는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내가 정말 잘못했어. 한 번만 용서해주라." [저 녀석이 아직 어려서 철이 없는게야.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실피드가 씩씩대자 후작은 이번에도 순순히 사과했다. "알았어. 미안하다니까. 다신 안 그럴께." 그리고는 날 보고 다시 한번 사과했다. "미안하다. 정말 진심으로 사과하마." 그래 나도 너그러이 대답했다. "많이 미안해 하세요. 그 말 좀 충격이 컸거든요." "정말 미안하군. 사과하는 의미에서 한 가지 소원이 있으면 말해라. 내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 아니라면 뭐든 들어주마." "에?" 후작의 뜬금없는 말에 아버지가 바락 소리쳤다. [웃긴 놈. 들어줄 거면 네 놈 목숨도 걸어야지, 그게 뭐냐?] 그러자 후작이 목숨까지는 걸기 뭣 했는지 삐질 웃었다. "어어, 이봐.. 나도 목숨은 소중하다고. 하지만, 목숨이 위협 당하지 않는 선에서 드래곤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거 아니냐? 단 한번뿐이기는 하지만..." "어어... 으음... 하지만, 지금 그렇게 원하는 소원은 없는데요?" 아무리 궁리해도 지금 당장 그의 도움을 받을 만한 일이 없어 내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 괜찮다는 말은 죽어도 안 한다. - 후작이 씨익 웃었다. "아아, 지금 당장 말 안해도 돼. 네가 죽던지 내가 죽지 않는 한 아무때나 말해도 상관 없다. 드래곤 하트에 맹세코 언제 말하든 내가 꼬옥 들어주마. 아, 하지만... 이왕이면 나 잘때는 피해다오." [어이구, 소원 들어준다는 녀석이 조건도 많다.] 실피드의 핀잔에 후작이 하하 웃더니 돌연 진지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아,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는데..." "네?" "내가 지금 유희 중이거든. 네가 알지 모르겠다만, 드래곤들 사이에서는 유희 중인 드래곤의 정체는 모른체 해주는게 관례란다. 넌 드래곤이 아니니 그 관례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특별이 부탁하건데, 다른 이들에게는 내 정체를 밝히지 말아주겠나? 나는 여기서는 검술에만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인간일 뿐이다." 그의 진지한 부탁에 나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절대로 말 안할게요." "그래, 고맙다. 대신, 그 답례로 내가 할 수 있는 한 널 돕도록 하지. 아, 그러고보니 아직 자리를 정하지 않았으면 왕실 기사단으로 들어오는게 어때? 그럼 내가 널 쉽게 도와줄 수 있을 거야." "하하하.. 그러다가 제가 반란을 일으키자고 하면 어쩌려고요?" 나는 농담으로 그렇게 말한 건데 후작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거였다. "네 소원이라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 "헉... 그게 농담인 건 아시죠?" 진지한 후작의 반응에 내가 땀을 삐질 흘리는데 아버지가 끼어들어 투덜댔다. [마음에 안 들어. 네 녀석 내 아들에게 혹여 뭔 흑심이라도 품고 있는 거 아니냐? 그랬다간 가만 안 둘 줄 알아.] 그러자 이프리트 아저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후후후, 흑심이 있다 한들 뭘 어떻게 할 수나 있겠어? 아버지가 눈에 불을 키고 감시하고 있을텐데...] ================================================================== 헥헥헥... 힘들었습니다. 헉... 지금이 새벽 4시 7분이군요. ㅡ.ㅡ;; 어쨌든, 이번화는 여기서 끝이고. 아마 여기까지가 7권 분량일 듯 합니다. 그래서... 내일은 글 못 올릴 듯 합니다. 원고 정리해서 넘겨야 하거든요. 부디, 내일 안에 다 끝낼 수 있길 기도해 주세요... ㅠ.ㅠ 그럼 전 이만 자러 갑니다 휭~ ------------------------------------------------------------------------------ 에구에구.. 급하게 퍼오느라 중간에 몇 줄 빠뜨렸더군요; 내용이 바뀐 것은 아니고 그저 중간에 몇 줄뿐입니다만... 그래서 다시 수정했습니다(<-...도망;;) 정령왕의딸 8권 제 31화 기사단 생활 그날 나는 이브스햄을 돌려 보냈기 때문에 블랜차드가 자신의 집으로 날 데려가서 재워주고 그 다음 날 아침 또 다시 날 데리고 왕성으로 출근했다. 옷은 새벽에 내 저택으로 후작네 집에서 머문다고 전갈을 보냈을때 거기서 준비해서 다시 돌아 오는 시종편에 보내온 것이었다. 어제 블랜차드 후작이 기사단으로 들어오라고 하기에 - 이브스햄이나 조엘도 그쪽으로 생각 하고 있으라고 하기도 했고 - 순순히 받아들였더니만, 그 다음날 당장 가서 기사단에 등록 하라고 데리고가는 거였다. "저기... 후작님이 기사단장인거는 알고 있지만, 이렇게 아무나 막 등록 시킬 수 있는 거예요? 그... 뭐냐, 임원들끼리 회의 같은거 안 해도 돼요?" 왕성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남들은 잘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만 뽑는다는 기사단에 너무 쉽게 들어가는 것 같아 불안한 마음에 물었더니 블랜차드 후작, 아니 이 시퍼런 도마뱀 세르반느 (이게 진짜 이름이랜다)가 훗 하고 쿨 하게 웃어 보였다. - 젠장, 얼굴이 잘 생기면 뭘 해도 멋있어 보인다더니만, 폼 잡고 있을때도 멋있었는데, 웃어도 멋있었다. - "걱정 할거 없어. 뭐, 입단 시험은 안 보겠지만... 사실 12 기사 중 한 사람의 추천으로 입단하는 사람도 간단한 테스트는 보거든? 하지만, 내가 인정했다는데 누가 실력 좀 보자고 테스트 한다고 달려들겠어?" "허어... 그거 권력 남용 아니예요?" "어라라? 나는 테스트 하지 말라고 한 적 없어. 단지 그들이 내 기준을 자신들의 기준과 같게 보는 것 뿐이지. 사실, 어제 그 파티장에 있었던 녀석들 중 네 실력에 감탄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거다. 내 기운을 그 정도로 버텨낸 사람은 없으니까. 하기야, 내가 그 정도까지 기운을 끌어낸 적도 없지만... 너에게는 당연한 거겠지?" 후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버지가 나타나며 대꾸했다. [당연한 거 아니냐?]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나머지 세 정령왕이 - 이제는 그게 지극히 당연하게 느껴진다 - 줄줄이나타나며 말을 이었다. [네 녀석이 어제 그렇게 비겁한 수만 안 썼어도, 해인이가 진 것 처럼 보이지는 않았을 거다. 누가 가르쳤는데... 암, 암.] 실피드가 잘난체 하며 나오자 노아스가 콧등을 찡그렸다. [그거 한번 가르쳐준 거 가지고 잘난 척 하긴...] 네 정령왕들은 내가 후작네 집에 도착했을 즈음 힘을 보충한다면서 정령계로 돌아갔었다. 비록 정령계에서는 거의 무적에 가까운 그들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계약자가 없이는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에도 많은 힘을 써야 했다. 그러니까, 세 정령왕이 달려들었지만 드래곤의 결계 하나 - 비록 그게 엄청난 결계이기는 했지만..- 깨지 못하고 힘만 잔뜩 소진해버렸던 거였다. 그때 정령계로 소환되기 직전에 멈추기는 했는데, 그래도 힘에 부쳤는지 내가 후작네 집에 도착 했을때 작별 인사도 없이 휭 하니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어라? 벌써 회복하신 거예요? 호오, 대단한 회복력이군요." 내 질문에 맨 마지막으로 나타난 이프리트가 비죽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덜 회복 되었는데 엘라임이 가니까 줄줄이 쫓아온 거지. 다시 가서 더 회복 시켜야해.] 이프리트의 말에 후작이 피식 웃었다. "뭐야, 너도 쫓아온 거잖아." [훗, 나는 이 철없는 것들을 다시 데려가려고 온 거야. 그럼, 오늘은 이만...] 이프리트의 말이 끝나자 이프리트의 날개가 부쩍 커지면서 불꽃의 날개가 세 정령왕을 감쌌고 그대로 네 정령왕은 사라져 버렸다. 세 정령왕의 항의 소리와 함께 말이다. "아, 그러고보니 이프리트 아저씨는 어제 힘을 많이 안 썼지..." "거참, 저 녀석들은 맨날 옆에서 조잘대냐? 그럼 엄청 시끄럽겠군?" 블랜차드 후작의 황당하다는 질문에 나는 삐질 웃었다. "맨날은 안 오세요. 그냥 어제처럼 제가 위급한 것 처럼 느껴질때만... 아니면, 가끔 심심할때 불쑥...." "훗, 같이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겠는걸? 이참에 내가 그냥 엘라임과 계약을 해버릴까?" 그러자 내 옆에서 갑자기 엘라스트라가 불쑥 나타나며 아버지의 전언을 전했다. [정령왕께서 '네 놈과는 절대로 계약 안 한다.' 라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엘라스트라의 말에 후작은 더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가 웃었다. "쿡쿡쿡~~ 재밌군, 정말 재밌어." 간단한 확인 절차만 가지고 쉽게 왕성 안으로 들어온 후작은 마차에서 내리자 주위에서 건네 오는 인사들에 간단하게 답례하며 날 성 안의 큰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그 방은 어제 블랜차드 후작이 날 데리고 간 방이 아닌, 다른 방이었다. "어라? 여기는 어제 그 방이 아니군요." 그 곳은 기사단의 상징이라는, 마치 왕가의 문장을 보호하려는 듯 - 물론, 왕실 기사단이 왕가를 수호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이긴 하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띈 걸지도 - 가슴에 품고 표효하는 그리프 (날개 달린 사자처럼 생겼다) 문양이 커다랗게 새겨진 문 양 옆에 두 명의 기사가 매서운 눈을 번뜩이며 지키고 있다가 후작의 모습에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에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례한 후작은 척척 문을 열고 들어가며 대답했다. "여기는 내 집무실이야. 어제 널 데려간 데는 기사단 휴게실이고." 그래서 어제 그 방에 커다란 소파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뭐, 소파야 왠만큼 큰 집무실에는 다 있었지만 말이다. 블랜차드 후작은 턱짓으로 소파를 가르키며 날 거기에 앉게 한 후 자신은 커다란 책상 위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서류더미들을 뒤적거리더니 귀찮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한숨을 한번 쉬더니 몇몇 서류들을 챙겨 자세하게 읽더니만 나를 바라보았다. "아,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봐. 잠깐 보고를 좀 하고 와야겠어. 아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그러더니만 그는 커다란 책상 뒤에, 그 못지 않게 큰 책장으로 가서 두툼한 책을 한권 꺼내 나에게 던졌다. "심심할테니 그거나 읽고 있어. 기사단에 들어올테니, 기사단 구조는 대충 알고 있어야지." 그리고는 서류를 주섬주섬 챙겨 서둘러 나가는 거였다. 그가 닫고 나간 문을 황당하게 바라보던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왕실 기사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이렇게 쉽게 입단이 되어도 되는 건지도 걱정이 되고, 도대체 여기서 내가 뭘 할수 있는지고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다행이 입단하기 전에 아는 사람 하나 만들어놔서 다행이다 싶었다. '에... 물론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든 여기서는 사람 행세를 하고 있으니...' 어쨌든, 그가 주고 간 책이나 보자는 생각에 소파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읽기 시작했다. 왕실 기사단의 인원은 단 50명 뿐이었다. 그 50명 중에서도 등급이 있었는데 - 뭐 사실 그 50명의 실력을 모두 파악하여 1순위부터 50순위 까지 순위가 쫘악 매겨진다고 한다 - 1순위와 2순위는 당연히 기사단장과 부기사단장인데, 그들을 포함해서 12순위까지의 12명의 기사를 '12 로얄 기사' 이라고 불리웠다. 그런데 재미 있는 건, 왕실 기사단 소속중 레벨이 13위 부터 50위까지는 모두 기사인데 반하여 이 1위부터 12위까지는 기사가 아닌 자도 포함될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보통 왕실 기사단에 기사가 아닌 다른 능력자 - 그러니까 마법사나 정령사나, 혹은 마검사나 정령검사 - 가 영입 되었을 경우 그 능력을 테스트 해서 레벨 12위의 기사를이길 정도의 실력이면 당당하게 레벨을 가진 왕실 기사단 소속 기사 아닌 기사(?)가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그냥 왕실 기사단 소속이란 명패만 가질 뿐이었다. 이게 언듯 보기에는 기사들만 우대하는 거 같지만, 어째 다르게 보면 기사들이 마치 능력 테스트의 기준 눈금으로 취급 되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1순위부터 50순위까지는 모두 기사이고 그 외에 기사단에 영입된 다른 능력자는 아무도 없다는 거였다. 나 빼고는... '으음... 나도 오늘에서야 영입 되었으니 우선은 그냥 기사단 소속이겠지?' 그 뒤로 왕실 기사단 산하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왕성 수호 기사단과, 왕실 경비대 (이건 병사들) 에 대한 부분을 읽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래, 후작이 벌써 들어온 줄 알고 고개만 들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내 눈앞에 떠억 버티고 선채 날 마구 째려보고 있는 거였다. "누구시죠? 누구신데 여기 함부로 들어와 계시는 겁니까?" "예? 아... 저는..." 그의 매서운 반응에 나는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저... 후작님이 여기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셔서요." 내 말에 그의 눈썹이 못마땅한 듯 꿈틀 거리더니 차갑게 내뱉는 거였다. "블랜차드 후작님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여기서는 단장님이라고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네네."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그에게 뭘 잘못 보였나... 고민이 되었다. 그 정도로 그의 반응이 냉담했던 것이다. "당신이 누구신지는 아직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전히 딱딱하고 차가운 그의 말에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아, 해인 오스번 엠브로스 백작이라고 합니다." 내 말에 그는 아직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별 말 없이 눈길을 돌렸다. "그럼 앉아서 기다리시죠." "아, 네." '네가 오기 전에는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구.' 나는 속으로 궁시렁 댔지만, 겉으로는 얌전히 다시 소파에 앉아서 책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갑자기 등장한 인물에 대한 호기심때문에 책에 있는 글이 눈에 잘 안들어왔다. 그래 책을 읽는 척 하면서 힐끔 힐끔 그 인물을 조심스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와 비슷한 또래, 그러니까 이제 갓 20살이 되었거나 아니면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런데, 하프 엘프가 아닐까 오해할 정도로 엄청 희고 뽀샤시한 피부에 갸름한 턱, 동그랗고 큰 눈에 오똑한 코, 붉은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아아, 하프 엘프가 보다는 여자로 착각하겠다. 것두 꽤 미인...' 그나마 여자라고 착각하지 않는 건, 여자치고는 굵고 낮은 목소리 때문이었다. '아? 아니지... 여자라고 해도 일부로 목소리를 굵게 낼 수도 있는 거잖아? 아, 그럼 혹시 여기사일까?' 한번 물어보고 싶은데 아까의 냉담한 태도 때문에 물어볼 엄두가 안 났다. 그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푸른 빛이 도는 검은 머리를 뒤통수에서 한번 질끈 묶은 채 목덜미를 시원하게 드러냈는데, 가늘고 긴데다가 얼굴 피부처럼 하얀 피부가 드러난게, 목걸이 모델하면 딱일 듯 했다. 거기에 신비로운 검은 눈동자의 그를 보니, 동양적인 미가 물씬 풍기는 듯 했다. '아아, 그러고보니 여기서 동양인 처럼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은 처음 보는 거 같아. 오오... 왠지 친근감이...' 하지만, 그 친근감은 차가운 그의 눈동자와 마주치자마자 사그라들었다. "뭘 보시죠?" "아, 죄송합니다."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금씩 본다는 걸 나도 모르게 뚫어져라 계속 쳐다본 모양이었다. 무안한 마음에 얼른 책으로 시선을 떨구는데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아하니, 저와 비슷한 처지이실 것 같은데..." "예?" 의아해서 그를 바라보니 그는 비웃는 것 처럼 예쁜 입술 끝을 약간 비틀며 입을 열었다. "남들에게 여자로 오해받거나, 약할 것 처럼 보이는 거 말입니다. 아닙니까?" "에...? 아, 뭐..." 나는 내가 스스로를 여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자로 오해받는게 오히려 기뻤다. 단지, 그 뒤에 '남자였잖아?' 하면 배로 기분이 나빠지지만... 그런데, 이 사람은 그게 엄청 기분 나쁜 일이었나보다. 뭐, 대신 이로써 그가 남자라는 게 더 확실해졌지만... ==================================================================== 음... 매일 매일 연재를 하려고 했는데, 개인적으로 바쁘다보니까.. 불가능 할 듯... ^^:; 아마, 크리스전까지는 불규칙하게 며칠에 한번 꼴로 글을 올릴 것 같습니다. ^^;; ======================================================== 제 31화 기사단 생활 (2) "저기..." 조심스런 내 말에 그 남자가 냉정한 검은 눈을 나에게로 향했다. "뭡니까?" "생각해보니까, 제 소개는 한 것 같은데, 그쪽 소개는 못 들은 거 같아서요." 내 말에 그는 인상을 한번 찌푸렸지만, 내 말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대답했다. "조르디 엘리노어라고 합니다. 엘리노어 남작가의 장남이고, 지금은 기사의 작위만 가지고 있습니다." 자작이란 작위는 공작이나 후작의 장남에게만 주어질 뿐이라서 백작이나 남작의 장자들은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기 전에는 그냥 기사의 작위의 호칭인 '경'이라고 불릴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사의 작위만 가지고 있다 해도 왕실 기사단의 기사라는건 자작이라는 작위만큼이나 대단한 것이었다. 그게 귀족 작위 중 가장 낮은 남작의 장자라고 해도 말이다. "아, 그러시군요. 저... 그럼 후, 아니 기사단장님을 뵈러 오신 건가요?" 내 질문에 엘리노어경이 다시 한번 눈을 찌푸렸지만, 이번에도 순순히 대답했다. "저는 기사단장님의 보좌관 입니다." "그러셨군요." 그래서 기사단장 집무실에 있는 날 경계한 걸까? '음, 그럼 무슨 감정이 있어서 나에게 차갑게 대한게 아니겠군.' 처음 만난 사람에게 그러한 대접을 받게 되면 누구나가 무척 당혹스러울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뭔가 잘못한게 있을까... 고민도 하고 말이다.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전보다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앉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서 분위기가 좋아진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다시 침묵 속에서 책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길 대략 10여분쯤 지났을까? - 물론 이건 내 느낌이기때문에 정확한 시간은 아닐 것이다 -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이 방의 주인인 블랜차드 후작이 뒤에 누군가를 달고 척척 들어왔다. "귀찮군. 그렇다면 그런 줄 알지,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건지. 그래봤자 결국에는 물러날 거면서..." 그들의 등장에 엘리노어경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기에 나도 따라서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갑자기 들어온 두 사람 모두 우리에게는 눈길도 안준 채 저희들끼리의 대화에만 열중했다. 블랜차드 후작이 들고 있던 종이뭉치를 책상에 던져 놓으며 투덜거리자 뒤따라 들어오던 남자가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아하하, 그들이야 무슨 꼬투리라도 잡으려고 애쓰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들이 그러는게 어디 하루이틀이었습니까?" "흥, 처음부터 변한게 하나도 없어. 이건 맨날 억지로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니..." "그렇게 하면 자기들이 똑똑하게 보일 줄 아나보죠." "우습지도 않아. 이젠 좀 논리적으로 타당해 보이는 꼬투리를 잡히고 싶군. 이건 보고하러 갈 때마다 애들 달래러 가는 심정이니..." 후작은 인상을 찡그려졌지만, 그 뒤의 기사 - 차림하고 있는 사람 - 는 웃고 있었다. "그래도 결국에는 단장님의 의견이 다 받아들여지지 않습니까?" 후작의 뒤를 따라온 기사 - 차림을 하고 있는 사람 - 의 말에 후작은 정색을 해 보였다. "당연하지. 내 제안을 안 받아들이고 거절한다면, 난 그 사람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게 될 거야." 너무나 당당하게 잘난체 하는 후작의 모습에 나는 황당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후작의 뒤를 따라 들어온 기사 - 차림을 하고 있는 사람이 - 나 엘리노어경이나 매일 보는 장면인지, 아니면 저희들도 맞다고 생각하는지 태연한 표정들이었다. 덕분에 잠시 대화가 끊어지고 틈이 생기자, 엘리노어경이 기다렸다는 듯 슬그머니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단장님, 엠브로스 백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잊혀진 날 블랜차드 후작에게 일깨워주는 건 좋은데, 엘리노어경의 표정은 마치 귀찮은 존재를 먼저 처리해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기에 전혀 고맙지가 않았다. 뭐, 그래도 덕분에 후작의 시선이 나에게 날아왔지만 말이다. "아, 미안. 오래 기다렸지?" "뭐, 심심하지는 않았는데요." 후작의 시선이 나에게로 날아온 덕분에 엑스트라로 물러난 기사와 엘리노어경은 후작의 친근한 어투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만, 책을 슬쩍 들어보이며 친근하게 받는 내 말에는 입까지 떠억 벌렸다. 그런 그들의 반응에 나는 왠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후작은 그들이 그러던 말던 상관하지 않은 채 자신의 뒤를 따라 단장실로 들어온 기사를 향해 날 소개했다. "이번에 우리 기사단에 입단시키고 싶은 녀석이야. 능력을 보면 로얄 기사 테스트를 받게 하고 싶지만, 어리버리한 녀석에게는 너무 이르니 당분간 내 보좌관으로 나둘 생각이네." "아, 다, 단장님 보좌관이요? 호, 혹시... 어제 파티에서..." 그 기사는 후작의 발언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는지, 인상에 안 어울리게 말을 더듬으며 단장과 날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후작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눈치챈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어제 나와 소동을 벌인 그 녀석이야. 그정도면 자격은 충분하겠지?" 후작의 말에 그 기사는 당황한 정신을 수습하다말고 놀랍다는 시선을 나에게 보냈다. "저... 험, 저 백작께서 단장님의 호승심을 불러 일으켰다는 그 분이시군요. 생각과는 다른 모습이신데요?" "후후후, 그거야 정령술사니 아무래도 외모와는 크게 상관이 없지 않을까? 자, 해인아 이쪽은 에아머스 차트워드경이다. 로얄 기사중 랭킹 10위의 기사지. 로얄 기사가 뭔지는 알겠지?" "아? 아아, 물론이죠. 만나서 반갑습니다, 차트워드경." "네, 왕실 기사단에 입단하시게 된 걸 축하드립니다, 에... 백작님." "예? 아, 예." 나는 기사가 아니다. 만약 로얄 기사가 되겠다고 한다면 '경'자를 붙여도 상관 없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라 그냥 왕실 기사단에 입단하기 때문에 엠브로스 '경' 이 아니라 그대로 엠브로스 백작이라고 불리게 될 거였다. "입단하면, 차트워드경에게는 존대를 못 받을 거야. 너는 일반 기사단원이고 차트워드경은 어엿한 로얄 기사니. 억울하면 로얄 기사 테스트 받을래?" 지금은 난 엄연한 작위가 있는 귀족이고, 차트워드경은 기사 작위만 받은 귀족 - 아마 부모님이 안 돌아가셨거나, 아니면 형이 작위를 물려 받거나 둘중 하나겠지만 - 이기 때문에 지금은 내가 그에게 존대를 받게 되겠지만, 기사단에 입단하게 되면 작위의 유무나 나이에 상관 엇이 순수하게 랭킹만을 따지기 때문에 입단한다면 일반 기사단원인 나는 로얄 기사인 그에게 깍듯이 존대를 해야 한다. "아니, 아까는 나중에 테스트 받게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뭐, 그건 내 생각이고. 네가 원한다면 받게 해줄 수도 있는데?" "됐어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받더라고 익숙해진 다음에 받을랍니다." "그래라. 그러면..." 후작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고 뭔가 말하려고 했는데 엘리노어경이 불쑥 끼어들었다. "말씀중에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사뭇 비장하게 보이는 그의 표정에 후작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기는 했지만, 질문을 허락했다. "뭐냐?" "방금 단장님께서 저 분을 보좌관으로 두신다고 하셨는데,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고보니 엘리노어경이 후작의 보좌관이었다. 그러니 그의 질문은 당연한 거였다. 나 또한 그 대답이 궁금해서 후작을 주시하고 있는데, 막상 후작은 별거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될 것도 없어. 너는 그대로 내 보좌관이 될 거니까." "예? 하, 하지만..." "명색이 내 보좌관이면서 왕실 기사단의 규칙을 잘 모르는 것 같군. 기사단장은 보좌관을 셋까지 둘 수 있는 걸로 아는데? 하지만, 현재 내 보좌관은 너 하나뿐이다. 질문에 답이 됐나?" 질책 어린 후작의 말투에 엘리노어경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예. 죄, 죄송합니다." 그의 모습에 왠지 내가 미안해지는 것 같아, 나는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보좌관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날 어떻게 써먹으려고요?" "써먹긴 지금 당장 널 어디다 써먹냐? 우선은 엉뚱한 짓 못하게 옆에다 두는 거지. 뭐, 좀 지나야 써먹을데가 생기면 모를까..." "쩝... 하기사..." 후작이랑 친근하게 말을 주고받는 날 가만히 바라보던 차트워드가 대화가 끊어지자 슬쩍 끼어들었다. "그런데... 두분이 전부터 아는 사이셨습니까? 어제 처음만난 사이같지는 않으신 것 같은데..." "만난 건 어제가 처음이야. 그런데, 알고 봤더니 저 녀석 아버지가 전에 나와 알던 사이더군. 덕분에 내가 떠맡게 되었지만..." "백작님의 아버님이시라면... 설마 전 엠브로스 백작이신건...?" "아아, 아니야. 하지만, 남의 집안 일에 대해 말하기가 좀 곤란하니 더이상 묻지는 말게." "아, 예. 죄송합니다. 그럼 백작님의 입단서는..." "그래서말인데.. 자네가 저 녀석 좀 입단 시켜주겠나? 내가 해주려고 했는데 오늘 좀 바쁠 것 같아서... 대강 해주고 나중에 여기에다 데려다 놓으면 돼네." "아하하... 그래서 절 데리고 오신 거였습니까?" "자네 지금 바쁜 일은 없잖은가, 바쁜가?" 후작의 말에 차트워드경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기꺼이 해드리죠. 그런데... 검은 어떻게 할까요?" "검? 흐음... 그냥 하나 줘, 폼으로라도 가지고 있게." "검술은 전혀 못하시나보죠?" "글쎄... 해인아, 검술 할 줄 아냐?" 후작의 말에 나는 비질 웃었다. "6개월 배우고 말았는데요." "그렇다는군." 내 말에 후작이 차트워드경을 돌아보며 대답하자 차트워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 그럼 추천인의 인장은..." "나중에 찍어줄테니 한가하면 가지고 오라고 해." "그러죠. 자, 그럼 백작님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잘 갔다 와. 나중에 여기 왔을때 혹시 나 없더라도 말은 해놓을테니까 여기서 기다려라." 후작은 엘리노어경이 건네준 서류를 들여다보느라 나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손만 들어 인사를 했다. "그러죠." 어디에는 그렇겠지만, 왕실 기사단에 입단하는데에도 여러가지 절차가 있었다. 후작이 차트워드경에게 부탁한 것이 바로 그 절차를 밟는데 같이 있어달라는 거였다. 원래 정식으로 테스트를 받아서 입단 하는 거면 절차가 좀 형식적인 면도 가미하여 복잡하고 화려했을텐데, 나는 홀로 추천을 받아 입단하는 거라서 그런 형식적인 면이 모두 축소 및 생략 되었기에 입단 절차 밟는데 반나절 정도 걸렸다. 우선 입단 서류 작성하고 - 서류에는 추천일 경우 추천한 사람의 사인, 혹인 인장을 찍어야했다. 후작이 말한 인장 받으러 오라는게 바로 그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 옷을 맞추러 갔다. 왕실 기사단에는 우선 공식적인 자리에 입고 나가는 제복과, 공식적으로 싸우러 나갈 일이 있을때 입는 갑옷, 그리고 업무를 볼때 입는 옷과 훈련 할때 입는 옷이 따로 있었다. 마치 군대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옷을 모두 기사단 내에 재단사를 두고 그들이 제작, 수리하게 하는 거였다. 나도 거기가서 옷을 맞춰야 했는데, 나는 기사가 아니기 때문에 입을 일이 없는 갑옷과 훈련복은 제외 되었다. 제복은 눈처럼 하얀 일색이었는데, 안에 받쳐 입는 하얀 셔츠와 겉에 입는 정장 스타일의 바지, 그리고 차이나 칼라에 한쪽 옷자락이 다른쪽 옷자락의 절받을 덮는 스타일의 자켓과, 그 위에 걸치는 흰색 망토로 이루어져 있었다. 업무를 볼때 입는 옷은 밝은 베이지색으로 승마바지처럼 다리에 약간 붙는 스타일의 바지에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자켓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한 복장에는 모두 가슴 부근과 - 제복의 경우에는 망토 고정핀 - 오른쪽 팔뚝에는 얇은 금판에 세공된 왕실 기사단 문장이 부착되어 있었다. 그런데, 일반 기사인 경우에는 그리프 및에 랭킹이 쓰여진 리본이 있었고, 로얄 기사인 경우에는 그리프 위쪽에 랭킹이 쓰여진 리본이 있었기에 랭킹이 바뀔때마다 이 문장을 매번 바꿔 달아야 했다. 그것때문에 기사단 제복을 관리하는 재단사가 따로 기사단에 상주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랭킹이 없어서 그리프 및에 아무것도 안 쓰인 리본이 있을 거였다. 그리고 며칠 안에 옷을 완성하겠다는 답을 들은뒤 곧바로 검을 받으러 갔다. 이것도 원래 테스트를 해서 입단하게 되면 우선 제복을 맞추고 그것이 완성되면 멋드러지게 차려 입고 여왕을 비롯하여 왕실 기사단의 수뇌부들(?)이 주를 있는데서 여왕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그녀에게 검을 하사받는 식을 거쳐서 검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 이것도 몇년에 한번, 많아야 일년에 한번 몇명이 입단되기 때문에 가능한 형식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기사단 내에서 처리했을 거다. - 그 뒤에 신참 기사들끼리 기사단 내에서 랭킹을 알아보는 테스트가 행해졌을 거고, 기사단 내의 세분된 조직 자리에 끼워지며 선배 기사들과 안면도 익히고 그럴텐데, 그런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생략된 것이다. 어차피 기사가 아니니 로얄 기사 테스트를 받는게 아닌 이상 랭킹을 알아보는 일도 없고, 자리도 후작이 직접 자기 보좌관으로 만든다고 했으니... '이렇게 누군가의 추천을 받아 입단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더니만, 이건 완전 낙하산 타고 입단한 기분이잖아? 그래서 추천이 없는 걸까나?' 덕분에 이 모든 것을 끝내고 다시 단장실로 왔을때에는 점심시간 조금 전이었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아~~ 모두 즐거운 성탄절을 보내셨는지요. 저는... 이제 모든 크리스마스 행사가 끝이 나서 본래 생활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기다리게 해서 정말 죄송하구요. 아, 그리고 7권이 나왔답니다. 절 그렇게 닥달하더니만 올해가 가기 전에 나와부렀네요. ^^ 그리하여, 빠르지만 7권 분량을 오늘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범위는 30화까지 입니다. 퍼가시는 분들도 모두 삭제해 주세요 ^^ 그럼 모두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__)(--) ====================================================== 제 31화 기사단 생활 (3) 덕분에 이 모든 것을 끝내고 다시 단장실로 왔을때에는 점심시간 조금 전이었다. 그렇게 입단에 대한 모든 절차를 일찍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정식으로 입단이 된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 날 아침에 내 제복이 완성되어 기사단으로부터 제복을 입고 출근하라는 전갈과 함께 저택으로 배달된 거였다. 그래 정말 그렇지는 않겠지만, 기사단에는 제복이 완성되어야 입단할 수 있는 건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게 했다. 그러면서 여왕에게 선보일 것도 아닐텐데 무슨 제복씩이나 입고 출근하라고 하나 투덜거리면서도 시키는대로 얌전하게 제복을 입고 우려반 기대반이 뒤섞인 시선으로 날 바라보는 이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첫출근을 했다. - 입단 절차를 끝냈더니만 블랜차드 후작이 연락이 있을때까지 집에서 기다리라고 하기에 줄곧 저택에 있었던 것이다. - 왕실 정문에서 간단한 신분 확인을 끝내고 단장실로 향하는데, 채 그 곳에 당도하기도 전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매서운 눈길의 엘리노어경을 만났다. "오, 여기서 만나게 되는 군요, 엘리노어경." 이제 같이일하게 되었기에 나는 웃으면서 인사를 했는데, 그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고개만 끄덕여 인사를 받더니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따라 오시지요. 모두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엥?" 후작이 날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면 쉽게 납득하겠지만, '모두들'이란 단어에 선듯 이해를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엘리노어경은 이런 내 표정을 싸악 무시하고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앗, 잠시만요." 딱딱한 그의 태도에 뭔가 잘못 찍혔구나... 하는 걸 느낌과 동시에 앞으로 직장 생활이 순탄하지 못하리란 예감이 팍팍 들었다. 엘리노어경이 날 데리고 간 곳은 왕실 기사단의 회의실이었다. 왕실 기사단 50명이 다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방 안에는 앞쪽에 초승달처럼 길게 휘어진 탁자에 10명쯤 되는 기사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고, 나머지 기사들은 그 탁자를 반원으로 에워싼 형태로 정렬해 있었다. 탁자의 가운데에는 익히 잘 알고 있는 후작이, 그리고 끝에쯤에는 내가 입단 절차 밟는 걸 도와준 차트워드 경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탁자 위에 앉은 사람들은 로얄 기사들이고, 그 뒤에 정렬해 있는 사람들이 그 아랫 단계의 왕실 기사단 기사들이었던 것이다. 나보다 먼저 화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느라 그들에게서 잠시 날 가리고 있던 에아머스 경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 그들 사이로 끼어들자, 그 곳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쏟아졌다. 날카롭고 예리한 시선들이 해부라도 하려는 듯이 날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훝고 지나가는 걸 느끼는 건 결코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마음대로 투덜댈 수 있는 분위기 또한 아니었기에 조용히 기다리고 있자, 잠시후에 후작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 소개하지. 이번에 우리 기사단에 새로 입단한 해인 오스번 엠브로스 백작이다. 기사가 아닌 정령사로 입단했지. 이제 한 식구가 되었으니 다들 잘 지내길 바란다." 아무래도 보통 신입 기사들처럼 신입 테스트로 선배들에게 얼굴을 선보일 기회가 없는 나를 위해 일부러 자리를 마련해준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째 잘 지내라는 후작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나에게 보내오는 시선에는 호의가 별로 들어있지 않았다. 뭐... 이해가 안 가는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보통 기사단은 같은 소속이라는 소속감이 무엇보다 우선시 되겠지만 - 물론, 나는 기사단에 소속된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 , 왕실 기사단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렇다고 소속감이 없다는 건 아니고, 왕실 기사단의 기사들이라는 건 동료라기 보다는 라이벌이라는 의식이 조금 더 강했기 때문이었다. 일년에 한번 왕실 기사단끼리 서로 대련을 해서 서열이 일년에 한번씩 바뀌고, 서열이 떨어지면 낙오자가 되는 거요, 올라가면 엘리트중의 엘리트가 되는 것이니 새로 신입이 들어왔다고 마냥 좋아할 수가 없는 거였다. 특히나 내 경우는 후작의 호승심을 불러 일으켰다고 파다하게 소문이 나 있는데다가, 후작의 추천으로 입단을 했으니, 보통 기사단은 몰라도 로얄 기사들은 긴장해 있을 터였다. 기껏 어렵디 어렵게 로얄 기사가 되었는데 내가 가운데 쏙 끼어들어서 마지막 기사가 그냥 보통 왕실 기사가 될지도 모른다면 내가 예뻐 보일리가 없지 않겠는가? 보통 왕실 기사라고 해도 나라에서는 알아주는 엘리트중의 엘리트지만, 그 엘리트들만 모아놓은 기사단 안이었으니 경쟁 또한 치열할 터였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기사단 안에서 정년까지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는 기사들도 꽤 있는 모양이었다. 후작이 그렇게 간단하게 내 소개를 하고 입을 다물자 회의실 안에서는 어느 누구하나 입을 열지 않아 갑작스레 침묵이 감돌았다. 그 어색한 분위기 속에 내가 잘 해보자고 인사를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막 고민하고 있을 무렵 다행이도 누군가가 나보다도 먼저 입을 열어줬다. "엠브로스 백작은 로얄 기사 테스트 희망자입니까?" 그 질문은 로얄 기사들이 앉아있는 테이블에서 흘러나왔다. 그러자 후작이 다시 씨익 웃었다. "당분간은 아니야. 실력이 어찌 되었든, 저 녀석은 신출내기니까. 우선은 내 보좌관으로 내 옆에 둘 생각이다." 그의 말에 다시금 시선들이 나에게 쏟아졌고, 회의실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결국 블랜차드 후작이 - 일부러인지는 모르겠지만 - 의자끄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대충 신입 얼굴을 익혔으면 이제 흩어지도록 하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탁자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고, 후작은 그들이 그러던 말던 신경쓰지 않은 채 뒤에 엘리노어경을 달고는 나에게 다가왔다. "가자." "예? 아, 예." 정말 허망하고 허무하고 황당하게도 그렇게 기사단 사람들과의 첫 선을 보이는 자리가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렇게 내 기사단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건... 별로 좋은 일상은 아니었다. 매일 기사단으로 출근을 하면서, 차라리 상회 생활이 백배는 났다고 한숨을 쉬는 신세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어렵거나 힘든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기사단에서 가장 한가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뭐, 로열 기사중에는 마치 용병처럼 임무가 있을때 가끔 왕실에 들리지만, 그렇지 않을때는 자기 저택에 있거나 놀러다니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차라리 그렇기라도 했으면 나도 편하게 놀러나 다닐텐데, 이건 직함이 보좌관이라서 매일 매일 출근해야 했으니 말이다. 내가 한가한 이유는 단순했다. 나와 같은 블랜차드 후작의 보좌관인 엘리노어경이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같으면 일이 적든 많든 관계 없이 같이 할 사람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일을 적게 하려고 일을 나누었을텐데, 엘리노어경은 그 반대였다. 적으면 적다는 이유로 자신이 모든 일을 도맡았고, 많으면 아직 익숙하지 못한 내가 감당 못할꺼라면서 무리를 해가면서 나에게 조금도 넘겨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를 미워할 수 없으니, 한숨만 푹푹 나올 뿐이었다. 그의 무조건적인 적대에 처음에는 내가 뭘 잘못했나... 나를 반성하다가 도저히 알수가 없어 대놓고 물어도 말을 안해주기에 나도 그를 미워할까... 생각했는데, 그걸 후작에게 투덜댔더니 그가 마구 웃어제끼는 거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귀엽게 봐주라나?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는데, 나중에 천천히 살펴보니 허탈한 웃음만이 나왔다. 조르디 엘리노어는 블랜차드 후작을 존경하다 못해 거의 숭배하고 있는 거였다. 그 배경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사단에 입단하여 후작에게 발탁받아 그의 보좌관이 된 걸 자신의 기쁨이자 긍지로 여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란 이물질이 떡 하니 나타나 후작의 추천을 받아 기사단에 입단을 하더니 자신과 마찬가지인 보좌관이 되버린 거였다. 거기다가 남들이 쉽게 대하지도 못하는 후작과 친근하게 지내니 내 존재가 엄청 눈에 거슬린 거였다. 그리하여, 더 이상 후작의 신임을 못 받고, 자신이 더 신임을 받도록 후작을 돕는 일은 모조리 자신이 쓸어가 도맡아 하는 거였다. 아, 그러고보니 딱 하나 넘겨주는게 있기는 했다. 그건 바로 다른 기사들을 호출해 오는 일이었다. 그런데, 엘리노어경이 나에게 모조리 넘겨준다는 거에서 눈치 챘겠지만,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로얄 기사같은 서열이 높은 기사들에게는 엄청 쉬운일이겠지만, 서열이 낮거나 아니면 기사단에 들어온지 얼마 안된 이들에게는 그렇지가 못했던 것이다. 어느 집단이든지 새로 들어온 신입생에게 꼬옥 치르게 하는 -선배들의 장난 겸, 괴롭힘 겸 - 신입생 신고식이 있게 마련인가보다. 이 곳에서도 바로 그런게 있었는데, 내가보기에는 엄청 유치한 방법이었다. 바로 상관의 명을 받고 호출하러 온 신입을 괴롭히는 거였으니 말이다. 어떻게 하는고 하니, 호출하러 다가온 신입의 말을 그냥 무조건 무시해 버리거나, 아니면 어떤 핑계를 대서 엄청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거였다. 그리고는 호출에 느지막히 가는 거다. 그러면 호출한 당사자는 호출받은 사람이 늦게 왔으니 부르러 간 사람을 혼낼 수 밖에는 없는 일이다. 만약 암것도 모르는 신입이 그가 자신의 말을 무시했다고 이르면 그 신입은 호출 받은 사람에게 혼나는 거였다. 그러니 이렇게하든 저렇게하든 그 신입은 어떻게든 혼나는 것이 수순이었다. 후배라고 해서 함부로 뺑뺑이를 돌리거나 대련 하는게 금지되어 있는 - 여긴 모두 실력이 좋아서 감정적인 대련일 경우 가벼운 부상으로 끝나는 일이 적기때문에, 아예 그러한 대련은 금지되어 있었다. - 왕실 기사단이고보면, 유치하지만 정말 확실하게 신입을 괴롭힐 수 있는 방법이었다. 엘리노어경 또한 이곳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되는 풋내기에다가, 서열도 맨 밑 - 그는 49위였다. - 이라 그런걸로 놀리기 가장 만만한 상대였다. 배경이라도 빵빵하면 몇번 정도에 끝내고 - 이것도 웃기게 왕실 기사단 전통이라 배경이 빵빵한 집안의 자식이라도 몇번은 당한다고 한다. - 말겠지만, 엘리노어경은 크지 않은 남작가 집안의 장남이라 별로 어려운 상대도 아니었고, 거기에 단장의 보좌관이니 호출하러 엄청 많이 다녔을 터였다. 그러니 아무리 나와 일을 같이하는 걸 싫어하는 엘리노어경이라도 누군가를 호출해 오는 일은 나에게 다 넘기는 거였다. 뭐, 이것도 나중에야 알았지만 처음에, 아무 할 일 없이 단장실에서 빈둥빈둥대며 노는 나에게 후작이 명한 호출자를 데리러 가는 일을 나에게 떠넘기는 엘리노어경의 표정은 의미심장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제가 일이 좀 많아서 그러니 이 일은 백작님께서 해주시겠습니까?" "네?" 단장실의 푹신한 소파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던 나는 - 후작을 어려워하지 않는 나는 단장실에서 유일하게 뻣뻣하게 있지 않는 사람이었다. - '얘가 왜 이래?' 하는 표정으로 엘리노어경을 올려다봤다. "부탁드립니다." 그랬더니 아예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게 아닌가? 상대방이 그렇게 나오는데 사람이 어떻게 거절하는가? 더욱이 놀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래 나는 미심적은 표정을 하면서 자리에서 미적미적 일어났다. 그러자 후작이 피식 웃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였다. "뭐, 하루 이틀 누워있는 정도는 봐줄테니까 알아서 데리고 와." "에엥?" 뜬금없는 말에 나는 더욱더 어리둥절했지만 후작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서류더미 속으로 파묻혔고 - 단장이라서 그런지 서류 업무가 꽤나 많았던 것이다. - 나는 엘리노어경에게 거의 쫓겨나다시피 단장실을 나서야 했다. ============================================================ 에구, 정말 죄송하다는 말 외에는.. ^^:; 아핫핫... ^^;; 올해도 이제 두시간도 채 안 남았군요.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많이 받으세요 ^^ ====================================================== 제 31화 기사단 생활 (4) 뜬금없는 말에 나는 더욱더 어리둥절했지만 후작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서류더미 속으로 파묻혔고 - 단장이라서 그런지 서류 업무가 꽤나 많았던 것이다. - 나는 엘리노어경에게 거의 쫓겨나다시피 단장실을 나서야 했다. 호출 대상은 로얄 기사는 아니었지만, 왕실 기사중에서도 순위가 높은 편에 속하는 자였다. 바로 17위였으니말이다. 거기다가 나이도 30대 후반인데다가 나와 같은 백작 작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전혀 나에게 꿀릴게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나이에 내가 밀리면 모를까. 그런데, 그러한 정보를 어느 누구도 - 후작이나 엘리노어경이 - 알려주지 않았기에, 내가 그에대해 아는 건 딸랑 이름뿐이었다. 그래 지나가는 사람을 물어 물어 그를 찾아가니 그는 왕실 기사단 전용 실내 연무장에 있었다. 다른 기사들은 아무리 기사 작위를 가졌다 해도 지도할 교관, 혹은 선배들을 데리고 일정한 훈련시간에 맞춰 모두들 같이 훈련을 했지만, 왕실 기사단은 달랐다. 모두들 한가락 하는 실력자였기에, 자신의 실력은 자신이 유지하던 증진 시키든 하는 주의였던 것이다. 그래 따로 훈련시간도 없었다. 자기들이 한가한 틈에 왕실에 마련된 실내 연무장을 이용하던가, 아니면 남에게 수련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으면 집에서 혼자 하던가 각자 내키는 대로였다. 이번에 후작의 호출을 받은 파블로 백작인지 파슬로 백작인지 하는 사람은 남들이 보건 말건 틈틈이 훈련하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엘리트중의 엘리트를 위한 연무장이라 그런지, 엄청 멋드러지게 꾸며져 있었다. 연무장 둘레에는 은은한 베이지색 대리석으로 쌓여 있었고, 왠만한 충격에는 깨지지 않게 강화 마법까지 걸려 있었다. 거기다 연무장 바닥은 일반 흙바닥이 아니라, 뭔 처리를 한듯한 약간 푹신 푹신한 매트가 깔려 있는 거였다. 천장도 멋들어진 조각이 되어 있었고, 천장 바로 밑에 창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낮에는 햇볕이 들어오고, 밤에도 환하게 연무장 안을 밝히도록 천장 여러군데에 샹드리에가 달려 있었다. 넓이도 엄청 넓은 그 곳 가운데에 웃통을 다 벗어 제껴서 멋드러진 근육질의 맨 몸을 드러낸 파블로 백작이 가만히 서 있었다. 벌써 한바탕 몸을 움직였던 듯 얼굴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졌고, 등에도 땀으로 번들번들 했다. 그런 상태에서 뭔가를 깊이 숙고하는 표정으로 한 손에 들고 있던 목검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나는 차마 그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 잠시 옆에서 생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한 5분쯤 기다린 것 같은데 여전히 생각에 빠져있는 거였다. 그래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나는 그를 불렀다. "파블로 경이십니까?" 그러나 그는 너무 생각에 깊이 빠졌는지 내 말에 미동도 안 했다. 그래 나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 목청을 높여서 다시 불렀다. "파블로 경이십니까아~?" 그래도 여전히 꼼짝 하지 않자 나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그의 팔을 툭 쳤다. "파블로경?" 그러자 그 동안 가만히 있었다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는 잽싸게 고개를 돌려 날 노려보며 차갑게 말하는 거였다. "귀 안 먹었어." 그의 반응에 나는 황당해졌다. 그렇다면, 그동안 내 말을 들었으면서도 못들은 체 하고 있었다는 거 아닌가? '뭐야, 이 사람...' 그의 반응에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려는 찰나, 내 귀가 주위에서 숨죽여 킥킥 웃는 소리를 포착했다. '응?' 의아해진 내가 주위를 둘러보니, 파블로 백작 말고도 연무장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와 삥 둘러서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눈에 기대감과 기분 나쁜 즐거움이 어려 있는 것으로 보아 날 구경하고 있는게 확실했다. '뭐지?' 황당한 일을 겪기는 했지만, 그게 퍽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터라 그들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곧 어깨를 한번 으쓱해 무시해버리고 나는 내 목적으로 주의를 돌렸다. "파블로경, 단장님께서 찾으십니다." 하지만, 정말 기가막히게도 그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파블로인지 파리똥인지 모를 기사는 내말을 듣는 둥 마는둥 다시 목검쪽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심사숙고하는 자세로 돌아가는 거였다. "파블로경, 단장님께서 찾으신다니까요!" 그래도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었다. 못들었는가보다.. 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아까 겪었던 황당했던 경험이 이번에도 파블로인지 파리똥인지 하는 작자가 내 말을 싸악 무시하고 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 화가난 나는 말투를 바꿨다. "야 임마. 후작이 너 보잔다니까." 그 순간 흥미롭게 날 구경하던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내 앞의 파리똥 작자도 순식간에 얼어 붙어버렸다. 그리고는 드디어 그 파리똥 작자가 나를 향해 잘 움직여지지 않는 돌덩이 움직이듯 힘겹게 목을 돌려 매섭게 쏘아보는 거였다. "지금 뭐라고 했지?" 눈길 만큼이나 살벌한 목소리였다. 그에 나는 찔끔해서 말투를 얼른 바꿔 대꾸했다. "단장님께서 찾으십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나에게서 시선을 홱 돌리며 차갑게 대꾸했다. "내 수련이 끝나면 찾아가 뵙겠다." 그러면서 목검을 고쳐쥐는 폼이 생각을 끝내고 다시 몸을 움직일 모양이었다. 그래 나는 그가 목검을 휘두르기 전에 얼른 질문을 던졌다. "수련이 언제 끝나시는데요?" 그러자 전과는 달리 그는 즉시 대답해줬다. "나도 모르지." 그의 대답에 나는 머리가 뜨거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열받았단 소리였다. 그리고 그와함께 후작이 나에게 던진 의미심장한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하, 하루 이틀정도 누워있을 정도는 괜찮다고 했지?' 후작은 이미 파리똥 백작이 이렇게 나올 걸 알고 은근슬쩍 방법을 제시해준 거였다. 날 무시하면 완력을 써서라도 끌고와도 괜찮다는... 본격적으로 발을 내딛으며 목검을 휘두르기 시작하는 파리똥 후작의 뒤통수와, 주위에서 들려오는 키득거림소리를 들으며 나 또한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고 중얼거렸다. "엔다이론!!" 평소라면 보통 늑대보다 약간 큰, 그러니까 내가 등에 올라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나타나던 엔다이론이 내 의지를 받아 파리똥 백작을 고고하게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되어 떡하니 그의 앞에 나타났다. "헉!!" 그래도 실력있는 자라고, 자신이 진행할 진로에 갑자기 굵은 기둥만한 늑대 다리가 나타나자 그는 헛바람을 삼키면서도 재빨리 몸을 비틀어 굵은 다리에게서 살짝 비껴갔다. 어차피 부딪혀봤자 그대로 통과해갔을테지만 말이다. 정령들에게는 이 세계의 물리력은 통하지 않았다. 단지 검기, 혹은 마법 무구에만 타격을 받을 뿐이었다. 그래봤자 죽는 일은 없고, 그 타격은 모두 정령사에게 돌아가며 정령들은 정령게로 소환될 뿐이지만.... "엔다이론." 모든 이들의 경악속에서 엔다이론은 내 부름을 듣고 경악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본 채 움직일 생각을 못하고 있는 파리똥 백작을 향해 그 커다란 입을 쩌억 벌렸다. 비록 살아있는 늑대들처럼 침이 흐르거나 뜨거운 김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무시무시한 광경임은 틀림 없었다. 파리똥 백작은 엔다이론이 자신을 향해 입을 벌리고 다가오자 황급히 목검을 앞으로 치켜들며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엔다이론이 어디 보통 늑대던가? 엔다이론의 힘에 의해 생겨난 가느다란 물줄기가 이미 파리똥 백작의 두 발목을 칭칭 감고 있었기에 파리똥 백작은 한 걸음도 물러나지 못하고 그대로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엉덩이가 땅과 키스를 하기 전 엔다이론의 커다란 입이 그의 상체를 물고 허공으로 들었기때문에 다행이 그럴 일은 없었다. 대신, 그는 엔다이론의 입속에 얼굴을 들이민 채 허공에 떠야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돼지만 말이다. -엔다이론의 몸체는 반투명했기에, 그의 입속에 들어간다고 해도 주위를 볼 수 있엇다. - 그렇게 파리똥 백작이 상체는 엔다이론에게 물리고 하체는 밖으로 축 늘어진 채 물줄기에 발이 꽁꽁 묶여 발버둥도 못치는 상태가 된 걸 만족스레 바라본 나는 몸을 돌렸다. "가자." 그리고 앞서자 파리똥 백작을 입에 문 엔다이론이 우아한 걸음으로 내 뒤를 따라왔다. 지나가는 모든 이들의 경악 어린 시선을 받으며 걸음도 당당하게 단장실에 도착하자 단장실 안에 있던 엘리노어경의 입은 떠억 벌어졌고 후작은 책상을 치며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 그 앞에 엔다이론이 파리똥 백작을 뱉어놓고 사라지자 파리똥 백작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향해 살기를 줄기줄기 쏟으며 외쳤다. "이이이익~~ 감히 나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결투닷! 네 놈에게 결투를 신청하겠어. 당장 공증인을 대라!" 그의 말에 - 절대 결투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 결투에 정령을 써도 되는지 몰라서 입을 못 열었을 뿐이다. -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 날 대신해 후작이 나서줬다. "미안하지만 파블로 경, 왕실 기사단 일원끼리의 결투는 금지된걸로 아는데? 그리고, 자네를 데리고 오라고 한건 나였으니 설사 결투를 신청한다 해도 나에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헉... 아니, 그건..." 눈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있기는 했지만, 그 넘어에 고요히 가라앉아있는 무언가를 눈치 못 챌 사람이 아니었던지, 파리똥 백작은 헛바람을 삼키며 입을 닫았다. 그가 입을 다물자 후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고했어. 한바탕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조용히 처리했는걸?" '오, 이럴 줄 알았으면 몇대 때려주고 데리고 올걸 그랬나?' ====================================================== 제 31화 기사단 생활 (5) '오, 이럴 줄 알았으면 몇대 때려주고 데리고 올걸 그랬나?' 그 뒤로 기사단 내에서는 블랜차드 후작이 내 뒤를 봐주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버렸다. 그 덕분인지 그 파리똥 백작 뒤로 다른 이들을 호출하러 갈 때에는 군말 없이 즉시 잘 따라와 주는 거였다. 뭐, 블랜차드 후작이 무서운 건지, 아니면 엔다이론의 커다란 입에 물려서 단장실로 가는걸 꺼려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쩌다가 '날 건드리면 이꼴이 될 것이다'란 광고의 희생양이 된 파리똥 백작은 그 뒤로도 나만 보면 살벌한 눈빛을 보내며 이를 빠드득 갈았으나, 그에게는 정말 안타깝게도 나에게 직접 복수를 할 수 없었기에 이만 빠드득 갈고만 있었다. 내가 기사였다면 일년에 한번 있는 대련을 복수의 기회로 삼았을테지만, 기사가 아니었기에 대련에 참여하지 못하니 생각도 못할터였다. 혹시라도 내가 로얄 기사가 되기 위한 테스트를 받는다면 대련하겠지만, 파리똥 백작이 로얄 기사가 아니기 때문에 내 상대를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기사단에 있는 사람들 모두는 내가 얼마 안 있어 로얄 기사 테스트를 받으리라 생각하고 -아무래도 엔다이론보고 파리똥 백작을 물고 가게 한것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든건지도... - 있었기에 파리똥 백작은 현재 나와 한판 뜨기 위하여 로얄 기사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었다. 그리고 로얄 기사들도 날 긴장한채 주시하고 있었다. 지금 현재 로얄 기사인 이들은 모두 기사를 제일로 생각하고 있는 엘리트 기사들이었다. 그런데 혹시나 기사가 아닌 내가 그들 사이에 끼어든다면 그 자부심에 타격을 주는 것이고, 혹시나 나에 의해서 서열이 아래로 내려가게 된다면, 같은 기사에 의해 서열이 밀려나는 것에 비해 더 큰 충격을 받을 터였다. 서열이 높은 기사들은 '설마 이 서열까지 올라오랴...' 하고 안심하고 있겠지만, 서열이 낮은 기사들은 '혹시...'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는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덕분에 왕실 기사단에는 때아닌 수련 열풍이 휩슬고 있었다. 물론, 전에도 그들은 자신을 단련하고, 서열을 높이기 위해 꾸준히 수련을 하고 있었지만, 그때는 일반 수련이었고, 지금은 특훈을 하고 있는 거였다. 덕분에 왕실 기사단쪽 내부 공기는 바짝 긴장되어 잘못하다간 스파크라도 튈 것 같았고, 그러한 영향이 왕실 기사단 산하 기관인 왕성 수호 기사단과 왕실 경비대에까지 미쳐서 괜한 사람들까지 얼어붙게 만들고 말았다. "끄응.... 나원 참... 당분간은 로열 기사단 테스트를 받을 생각이 없는데..." 아무리 할 일이 없어 빈둥빈둥 놀고 기사단 일에 별로 관심을 안 가지고 있는 나라도 숨막힐 정도로 긴장된 공기를 못 알아챌리 없었다. "쿡쿡쿡, 뭐 좋잖아? 검을 든 자들이 너무 태평한 것도 안 좋은 거야. 항상 적당하게 긴장하고 있어야지." "이건 그 적당히가 아닌 것 같은데요? 너무 심하다고요." "괜찮아, 괜찮아. 아, 그래. 오늘 윈체스터 백작가에서 파티가 있다고 하던데, 갈건가?" 기사단 내를 시찰하던 중 후작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 했다. "윈체스터요? 글쎄요... 뭐, 아는 가문도 아니고..." 처음에 내가 수도로 올라왔을 즈음에는 아직 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탓에 다른 귀족가의 초대장 같은 건 날아오지 않았었다. 그러나 왕궁에서 있었던 파티때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고, 후작의 추천으로 왕실 기사단에 입단하게 되자 나에게 호기심을 느꼈는지 슬그머니 여러 가문에서 초대장을 보내왔던 것이다. 이브스햄은 무척이나 반색하면서 나에게 괜찮은 집안의 초대장을 골라주며 초대에 참석할 것을 종용했지만, 아는 사람이기는 커녕 얼굴조차 모르는 사람집에 뭐하러 간단 말인가? 그런데, 내가 이럴 걸 미리 알아챘는지, 아니면 이브스햄이 뒤에서 뭔가 언질을 넣었는지 조엘 녀석이 자주 찾아와서 날 파티에 끌고 다니는 거였다. 웃기는 건, 내가 그렇게 끌려가는 대부분의 파티에는 평소 파티에 별 흥미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블랜차드 후작까지 꼬옥 나타나서 조엘과 같이 내 곁에 머물러 있었기에 나는 엄청나게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귀찮지만 날 돌봐주기로 했으니 어쩔 수 없다나? 그러면서 파티 중간에 지겹다고 날 끌고 나가는 거였다. 뭐, 나 또한 재미 없었기에 그가 갈때 순순히 응해주기는 하지만.... 파티때 다른 귀족들이 나와 친해지고 싶다고 - 솔직히 그들의 목적은 나라기 보다는 내 옆을 지키는 조엘과 블랜차드 후작이 목적이겠지만 - 인사를 하러 다가오는 것 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젊은 녀석들이 현재 이 나라의 정치 경제에 대해 논의하는 것도 들어줄만 했다. 문.제.는, 수줍은 척 나에게 다가와 은근히 눈빛을 빛내는 귀족가의 영.애.들이었다. '크어어어~~' 그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건지... 난 18년간 여자로 살아온 몸이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예쁘게 차려 입은 여자들이 다가와 수줍은 척 말을 건네고 춤 신청하길 바라는 시선을 파악, 팍 쏟아오는 거였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런건 얼굴이 따끔거리기는 하지만 무시하면 돼니까. 하.지.만, 가끔은 현기증이 난다면서 은근슬쩍 내쪽으로 넘어지며 안기려고 하는 건 뭔지... '아아아... 생각하기도 싫어. 으아악.... 전율이 흘러어어~~!' 후작 녀석이 쓸데없이 파티 이야기를 꺼내 파티에서 매번 겪는 그런 일들까지 떠오르자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이 후작 녀석이 내가 뭔 생각을 하는 지 눈치챈 듯 능글맞게 웃는 거였다. "뭐야? 좋아서 그러는 거야?" 그래 나는 마음놓고 후작에게 매서운 눈길을 팍팍 보내며 쏘아줬다. "지금 몰라서 묻는 겁니까? 아아, 정말... 조엘만 아니라면 그런 파티따위..." 내가 조엘에게 약한 건 정말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처음 조엘을 만났을때 녀석의 보살핌 덕에 그의 저택에서 무사히 보낼 수 있었고, 마법이나 무술, 그리고 해럴드 집사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그 뿐이 아니라 여왕을 접견할때 옆에 있어줬고, 우리 가문이 수도에서 자리 잡을때도 확실히 그의 도움이 컸었다. 물론, 후작의 도움도 있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그가 와서 파티 가자고 끌고가면 단호하게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그게 다 나를 위해서 신경써주는 거라는 걸 뻔히 아는데다, 이브스햄까지 철저하게 조엘의 편을 들어버리니... 그래도, 그나마 끝까지 남아있지 않고 중간 중간, 대충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머문 뒤에 파티장을 떠나니 견딜 수 있는 거지만 말이다. 내 중얼거림에 후작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맥알파인 자작 말인가? 그에게는 무척 약하군." "말씀 드렸잖습니까? 맥알파인 자작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그렇긴 하지만... 나는 도대체 그가 왜 잘해주는지 이해를 못하겠단 말이야." "제가 재밌대요. 이런 애 처음 봤다나?" "훗, 장난감 취급인거냐?" "아마 어느 정도는 그럴지도... 아아, 그나저나 그 웬체스터 백작 집안은 어떤 집안이죠? 무시 못할 집안이라면 조엘이 분명히 와서 끌고 갈텐데..."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었다. 내가 그렇다는 건 뭔가 한 자리 잡고 있는 집안이라는 건데... 아무래도 나는 아직은 귀족 사회의 사교계라는 것에 익숙해지지 못한 것 같아 한숨을 쉬고 있는데 후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모르냐? 윈체스터 백작의 장남이 그 맥알파인 자작이랑 친하잖아. 맥알파인 자작과 웨스트 모어랜드 자작, 그리고 윈체스터 백작가의 장남이면 사교계에서 이름난 삼총사잖아." "예? 어어어... 아아, 그...." 그제야 생각나는게 있었다. 내가 아직 조엘의 시종으로 있었을 시절, 웨스트모어랜드 후작령에서 행해질 몬스터 사냥에 따라 갔을때 조엘을 굉장히 반갑게 맞이했던 두 사람이 바로 조엘과 가장 친하다는 친구였다. 그러고보니 그 당시에 녹스국에 가서 미녀와 데이트 하고 왔다고 놀림 받았던 사람이 바로 볼레어 웨스트모어랜드 자작, 그러니까 웨스트모어랜드 후작의 장남이자 최연소로 왕실 기사단에 입단하여 화제가 된 남자였다. 지금은 같은 기사단 일원으로 기사단 내에서 나와 인사를 나누는 몇 안돼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게 그의 동생이 내 어깨를 괜히 찌른 것 덕분인지, 아니면 조엘 입김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 당시 웨스트모어랜드 자작은 녹스국의 외교 사절 경호로 동행했다가 돌아왔다고 했었다. '아, 그러고보니 그때 녹스국에 가고싶다고 했던 사람이 윈체스터 백작가의 장남이었던가?' 내가 뭔가를 떠올린 듯 하자 후작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고보니 웨스트모어랜드경은 오랜만에 친구를 보러 가겠군. 윈체스터 백작가의 장남이 외교 사절단에 끼어 녹스국에 갔다와서 돌아온 기념으로 여는 파티라고 하니 말야." "헤에..." 그때의 기억으로 보면 윈체스터가의 장남은 외국에 무척이나 가고싶어했었다. '가고싶어하더니만, 드디어 소원을 성취했군. 그러고보니... 이름이... 뭐였더라?'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후작의 말이 들려왔다. "그러고보니 이번에는 동생이랑 같이 얼굴을 보이려나?" 볼래어의 동생이자 내 어깨를 찌른 장본인인 다니엘은 왕실 기사단 바로 산하에 있는 왕성 수호 기사단 소속이었다. 아직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왕실 기사단 후보 물망에 오를 정도로 유망주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기야, 뭐니뭐니해도 그들은 현 벨레니국에서 첫번째 기사로 손꼽히는 웨스트모어랜드 후작의 아들들이었으니 말이다. 현재 왕실 기사단 소속에서의 랭킹 1위는 블랜차드 후작이었지만, 벨레니국 전체에서 공식적인 1위는 바로 웨스트모어랜드 후작이었다. - 내 생각에 비공식적으로는 블랜차드 후작일 것 같지만 말이다. - 웨스트모어랜드 후작도 소드 마스터이다. 그는 블랜차드 후작 전, 전에 왕실 기사단장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처형된 여왕의 숙부가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 고지식한 웨스트모어랜드 후작이 숙부편을 들지 않자 권력으로 찍어 눌러서 물러나게 했던 것이다. 뭐, 숙부파를 싹쓸어버릴때 큰 공을 세워 원래 그에게 다시 기사단장 자리를 맡게 하려고 했었는데, 그 후작이 얼마나 고지식한지 여왕이 힘들때 주군을 곁에서 지키지 못했다나 어쨌다나 하는 이유로 자격이 없다고 해서 블랜차드 후작에게 단장 자리가 돌아가게 된 거였다. 그래서 정권에서 은퇴해서 후작령에서 머물고, 대신 장남과 차남이 왕실 기사단과 왕성 수호 기사단의 기사로 활동하고 있는 거였다. "아아, 그렇다면 분명히 맥알파인 자작이 와서 데려가려고 하겠는걸요? 에휴... 다른 건 다 견딜 수 있어도 귀족 영애들의 시선을 받는 건 싫은데..." "호오, 네가 은근히 인기 있다는 건 아냐? 귀엽다고 귀부인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오르내린다던데..." 후작의 말에 나는 소름이 쫘아악 돋았다. "헉, 그 무슨 끔찍한 소리를...." "쿡쿡쿡, 정 그게 싫다면 드레스를 입고 가면 어때? 나도 한번 보고싶은데... 이렇게 된거 지금까지 남자인걸 숨겨서 죄송하다고, 원래는 여자였다고 발표하는 거야." 내 정체를 모두 아는 후작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후작의 의견에 나는 솔깃 했지만, 곧 떠오른 생각에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오... 정말 그럴까... 싶지만, 안돼요. 베지테크스 상회 녀석들은 내가 남자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고요. 만약 내가 여자랍시고 드레스를 입고 나간다면 그쪽에서 내가 여장 남자 변태라고 소문을 낼 게 틀림 없어요." 그것만은 절대 사양이었다. "그으래? 그럼 어쩔 수 없네." "에휴... 이게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 음... 아린 이야기가 만화책으로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허걱... 정말 믿겨지지 않지만... 사실인가보네요. 그런데.. 아직 보질 못해서... 그게 과연 어떻게 그려졌는지.... ㅡ.ㅡ;; ====================================================== 제 32화 삼국회담 (1) 내 예상대로 퇴근해서 집에 돌아니까 조엘이 보낸 전갈이 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서 이브스햄이 함박 웃음을 지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맥알파인 자작이 연락을 해왔더군요. 오늘 저녁에 윈체스터 백작 저택에서 있을 파티에 동행하자는데요? 준비는 다 되어 있습니다." 이브스햄은 전보다 혈색이 더욱 더 좋아져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수도에 처음 왔을때 에르미아와 찬텔경의 치료를 위해서 수도에 있는 최고위 신관을 만나기 위해 신전을 망문했을때 그를 만나기는 커녕 기약 없는 청탁만 넣고 돌아서야 했었다. 그나마 고위신관을 만나 에르미아와 찬텔경의 상세를 살펴보게 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그때에는 백작이라고는 해도 중앙쪽에는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지방 귀족 집안 중 하나였으니 힘 한번 못써보고 언제 올지 모를 신전쪽의 연락이 오기를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랬던 것이 내가 블랜차드 후작을 만나고, 기사단에 입단한 뒤 때를 보아 맥알파인 공작가에 정식으로 인사차 방문한 뒤 블랜차드 후작과 맥알파인 공작가 (정확히는 그의 아들 조엘)의 배경을 가지고 다시 신전을 방문하자 그 즉시 최고위 신관과의 면담 날짜와 시간을 잡아주는 거였다. 신을 받들고 만민을 평등하게 대한다고 하는 신전에서도 권력 핵심과 가까이 있다보니 그런데 영향을 받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리하여 에르미아와 찬텔은 그 뒤 최고위 신관을 만났고 치료를 받게 되었다. 대신, 명목상 신전을 위한 기부금, 실제로는 치료비인 어마어마한 비용을 대야 했지만, 이브스햄은 자신의 재산 절반을 내준다고 해도 감지덕지한 모양이었다. 최고위 신관의 능력은 정말 대단했다. 고목나무 껍질 같아 스스로 드러내기를 거부하던 찬텔경의 얼굴을 원래대로 돌려놓았으니 말이다. 거기다가 에르미아의 얼굴도 거의 예전대로 돌아왔다. 단지, 그녀의 경우는 외부에서 생긴 열기로 인해 화상을 입은게 아니라 내부에서 발생된 열로 인해 입은 화상이라서 약간 불그스름한 기색이 남는 건 어찌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도 진한게 아니라서 언듯 보면 얼굴이 약간 붉어진 것 처럼 보일뿐이라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얼굴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에르미아는 본격적으로 내 보좌관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파티에도 내 파트너로 참석하기도 하고, 백작가의 안주인 노릇도 하고, 수도의 여러 소문이나 정보도 모으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브스햄의 말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 침실이 있는,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위쪽에서 에르미아가 황급히 내려왔다. "아앗, 죄송합니다 백작님. 파티복을 준비하느라 미처 오신 줄 몰랐어요." 무척 미안해하는 그녀의 표정에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아요." 내 미소에 에르미아도 미소를 되돌리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서두르셔야 할 거예요. 맥알파인 자작께서 좀 일찍 오신다고 하셨거든요." "그래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게 될 테니 일찍 가려는 것도 이해가 갔다. "준비는 다 해놨습니다." 집사의 말에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르미아를 바라봤다. "그럼 잠시후에 준비를 끝내고 만나기로 하죠."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에르미아는 나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보이자마자 다시 황급히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 뒤를 이어 나도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자 켈빈이 반색하며 맞았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백작님! 이게 오늘 입으실 파티복이에요." 그가 들어보이는 건 하얀 실크 블라우스와 하얀 바지 위에 걸쳐 입는 검붉은 색의 화려한 겉옷이었다. 엄청 화려한 건 물론이요, 어찌보면 약간 야시시해보이는 스타일에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도대체 이 옷은 누가 고른 거야?" "어? 마음에 안 드세요? 에르미아 아가씨와 제가 오전 시간을 투자해서 고른건데..." "마음에 안 든다기 보다는.... 끄응... 부담스럽군..." "걱정 마세요. 무척 잘 어울리실 거예요." 무척 자신있게 장담하는 켈빈에게 뭘 믿고 자신있냐고 묻고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질문을 채 입밖으로 내밀기도 전에 나는 여기서 내 시중을 들어주는 또 다른 시종과 신이난 켈빈의 재촉에 욕실로 향해야 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오늘 퇴근이 좀 늦으셔셔 시간이 별로 없으십니다." "어서요, 백작님. 씻으실 준비는 다 해놨어요." 그 둘의 재촉을 받으며 간단하게 씻고 나와 파티에 갈 채비를 하는데 다른 시종이 황급하게 침실 문을 두드렸다. "백작님." "들어와!" 내 허락이 떨어지자 나이 지긋한 시종이 잽싼 놀림으로 들어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맥알파인 자작님이 오셨습니다. 지금 집사님께서 마중하고 계세요." "흠, 그래? 엠브로스양은 준비를 끝내셨나?" "아직... 좀 더 시간이 필요하실 것 같답니다." "그래? 그럼 차 한잔 내드리라고 해. 곧 내려갈테니." 그 시종이 나간뒤 황급히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내려가자 조엘 녀석이 마치 자기네 집에 있는 것 처럼 응접실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서 차를 홀짝이고 있다가 내 모습을 보고 손을 들어 보였다. "여~ 오늘 무척 화려한걸?" 그 또한 빳빳하게 세워진 황갈색 재킷에 하얀 실크 타이를 매어 멋드러진 모습을 과시하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그 옆에 얌전히 앉아있던 안젤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를 보내왔다. "안녕하세요, 해인." 그녀는 내가 전에 시종이었다는 것이 전혀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오히려 내 부모님 이야기를 신분의 차이를 극복한 멋진 로맨스 - 사실 그건 내 외조부모님 이야기이고, 부모님은 전혀 아닌데 말이다. - 로 생각하고 있어 날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2년 전의, 아직 어린애의 모습을 탈피하지 못한 어린 소녀에서 한층 성숙해져 있었다. 검은 머리는 반쯤 우아하게 틀어 올리고 반은 부드럽게 흘러내리게 놔둔데다 다홍색의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었다. "이야, 오늘도 눈이 부시네요 안젤라." 그녀의 손을 살짝 들어 하얀 실크 장갑을 낀 손등에 살짝 입술을 대자 그녀가 답례로 무릎을 살짝 굽혔다. "과찬의 말씀이세요." 그렇게 인사를 나눈 후 우리가 자리에 앉자 - 조엘은 계속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내 몫의 찻잔을 내왔다. "일찍 오실 줄 몰랐어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 다른때보다 좀 늦게 퇴근했거든요." 내 사과의 말에 안젤라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그냥 오빠가 서두른 건데요 뭐. 아무래도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려니 설래나봐요." "오랜만은 오랜만이지... 반년... 만인가? 작년 가을에 갔었으니..." "그럴 거야. 가기 전에 잠깐 우리집에 들렸었잖아. 녹스국에 가서 많은 미녀들을 사귀고 온다고 호언장담 했는데, 그렇게 됐을라나 몰라." "아서라. 그런 호색한 녀석에게 관심을 가지면 안돼. 내 친구녀석이지만, 그 넘은 너무 밝혀. 그녀석 가까이 가지 않는게 최고다." 조엘의 말에 안젤라가 까르르 웃었다. "그 이야기를 스테판 오빠가 들으면 어쩌려고?" "상관 없어. 그 녀석은 자기가 바람둥이라는 걸 자랑으로 생각하니까." "스테판 오빠는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잖아. 해인, 혹시 스테판 오빠 알아요?" "한번 본적이 있긴 한데... 몇년 전이라 잘 기억이 안 나는군요. 오늘 보면 확실하게 알게 되겠지요." "꽤 잘생겼어요. 그래서 학교 다닐때 러브레터도 많이 받았을걸요? 학교다닐때부터 유명 했으니까요." 그렇게 스테판 윈체스터를 도마위에 올려놓고 셋이서 맛있게 씹는동안 서둘러 준비를 끝낸 에르미아가 윗층에서 내려왔다. 부드럽게 웨이브를 넣은 갈색머리가 그녀의 드러낸 어깨 위에서 찰랑거렸다. 녹색 드레스는 그녀의 녹색 눈과 그녀의 목에 걸린 에매랄드 목걸이와도 잘 어울렸다.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죠?" 그러자 내가 내려올때는 일어날 생각도 안 하던 조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차렸다. "아닙니다. 정말 아름다우시군요, 엠브로스양." 에르미아의 손을 살짝 잡아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대자 에르미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과찮이세요, 자작님." "자, 그럼 다들 모인거 같으니까 출발하도록 하죠." 조엘 남매는 맥알파인 공작가의 멋드러진 마차를, 나와 에르미아는 엠브로스 백작가의 마차를 타고 각각의 호위병을 데리고 출발했다. 조엘이 하도 서둘러서 우리가 윈체스터 백작가에 도착했을때에는 손님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어다. 아니, 딱 한곳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바로 웨스트모어랜드 자작 형제였다. 그들은 파티가 열리는 커다란 홀이 아니라 안락한 응접실에서 도수가 약한 알코올 음료를 대접받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 곳으로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가니 편안하게 앉아 있던 두 형제와 그들과 같이 있던 스테판 윈체스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님. 그리고 아름다우신 두분 레이디. 조엘, 오랜만이다." 스테판 윈체스터가 대표로 일일이 인사를 하자 그 뒤쪽에 있던 두 형제는 간단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야, 여기들 다 모여 있었구만. 스테판, 정말 오랜만이지?" 조엘을 바라보는 스테판의 얼굴이나, 스테판을 바라보는 조엘의 얼굴이나 둘다 환하게 피어 있었다. 우리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건넨 스테판이 친구에게 두 팔을 벌리자 조엘은 서슴없이 친구에게 다가가 따뜻한 포옹을 했다. 그 사이 볼레어 웨스트모어랜드경이 동생을 데리고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다시 뵙는군요, 엠브로스 백작님." "여기서 뵐거라 예상했습니다." "이쪽은, 제 동생 다니엘 웨스트 모어랜드입니다. 잘 아시겠지만서도..." 볼레어가 쓴 웃음을 지으며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생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오랜만이군요. 왕성 수호 기사단에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내가 먼저 미소를 띄운 채 인사를 건네자 그가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전에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제가 크나큰 오해를 했지요." "덕분에 제 아버님께 죽을뻔 하지 않았습니까? 피장파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그때 일이 생각났는지 다니엘이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볼레어가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허... 그때... 저는 정말 다니엘을 잃는 줄 알았습니다. 제 아버지의 분노를 직면하는 것 보다 더 무서운일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니까요." 그에 나도 쿡쿡 웃으면서 가볍게 그의 말을 받아줬다. "웨스트모어랜드 후작님의 분노라... 상상만해도 두렵군요. 하지만, 그때 웨스트모어랜드경의 분노도 무서웠습니다." 내 말에 다니엘의 얼굴에 쓸쓸한 표정이 지나갔다. 그제야 나는 아차 싶어 내 혀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이어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실언을 했군요." 그가 왜 분노했는지를 깜빡 했던 것이다. 몇년이 지났지만, 속으로 좋아하던 여성과 그렇게 이별하는 것은 아픈 상처로 남아있을텐데 말이다. 내 말에 다니엘이 고개를 들어 날 잠시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아, 저를 다니엘이라 불러주시겠습니까?" "그럼 당신도 나를 해인이라 불러주시죠." 귀족 세계에서는 이름을 부르게 하는 건 친해지고 싶다는 표시였다. "대단한 정령사라면서요?" 다니엘과 내가 부드러운 미소를 교환하는데 스테판이 끼어들었다. 그러자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볼러가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쿡쿡쿡, 대단하지. 네가 기사단에서 있었던 일을 봐야 했는데... 키득키득..." "뭐야, 파블로 백작일을 말하는 거야?" 조엘의 말에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라? 조엘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어떻게 알기는요. 아마 귀족 사교계에 파다하게 퍼져 있을 겁니다. 그게 요즘 파블로 백작이 사교계에 얼굴을 안 내밀고 틀어박혀서 수련에 매진하는 이유일걸요?" ====================================================== 제 32화 삼국회담 (2) "어떻게 알기는요. 아마 귀족 사교계에 파다하게 퍼져 있을 겁니다. 그게 요즘 파블로 백작이 사교계에 얼굴을 안 내밀고 틀어박혀서 수련에 매진하는 이유일걸요?" 볼레어가 신이나서 입을 여는데 스테판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자자, 서서 이야기를 해도 좋겠지만, 어차피 조금 있다가는 진저리가 날 정도로 서 있어야 할테니 우리 다 앉는게 어떨까? 이 저택은 꽤 튼튼하게 만들어져서 천장 안 무너진다구." 그의 말에 우리는 그제야 계속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실소를 흘리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하녀들이 사람수에 맞춰 음료를 내왔다. "내가 돌아와서 들었던 제일 놀라운 소식이 블랜차드 후작이 누군가를 추천해서 왕실 기사단에 입단 시켰다는 이야기였지." 스테판의 말을 볼레어가 웃으며 받았다. "너 뿐이겠냐? 기사단도 발칵 뒤집혀졌단다. 윗순위의 기사들, 특히 로열 기사들이 심상치가 않았지. 단장님이 추천할 정도니 당장 로열 기사 테스트를 받을 거라 생각했거든. 그래서 단장님의 보좌관으로 둔다고 했을때 다시한번 놀랐지." 볼레어의 말에 스테판이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봤다. "호오, 그 대단한 소문의 주인공이 백작님이란 말씀이시죠?" "아하하하.... 그, 그게..."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어색한 미소를 짓는데 조엘 녀석이 냉큼 끼어들었다. "소문만 대단한게 아니라 실력도 대단했지. 내가 왕실 기사단쪽으로 생각해보라고 권유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거든. 그런데 블랜차드 후작님과 첫 대면을 한 그순간 갑자기 기세 대결로 들어가는데... 허... 근처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온 몸에 소름이 쫘악 끼치더라니까." "소름 뿐이더냐? 나는 손이 덜덜 떨려서 검도 쥘 수 없을 것 같더라. 그때 파티에 참석하느라 검을 소지하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지." "저도 그 장면을 잠깐 봤었습니다. 운 좋게 파티장 경비 근무를 서는 바람에 일이 생겼을때 들어갈 수 있었죠. 정말 대단하더라구요. 저는 후작님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는것도 무척 긴장되던데 말입니다." 웨스트모어랜드 형제의 말이 이어지자 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앗, 절 너무 띄워주시는 것 아닙니까? 여기 계신 여러분또한 주목받고 있는 유망주들 아니었던가요?" 그러자 에르미아가 얼른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말이에요. 그러고보니 윈체스터님께서는 이번에 외교관으로써의 실력을 남김없이 발휘하고 돌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만...."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스테판이 예의있게 겸손의 미덕을 보이자 볼레어가 냉큼 끼어들었다. "천만에. 그 곳에서 네 바람끼를 잘 다스려서 분노한 남편들의 결투신청을 받아 외교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을 한 거다. 그거 아냐? 네 아버지께서 널 보내시면서 얼마나 노심초사 하셨는지." "어허, 낭만을 모르는 자의 질투는 추한 거라네, 친구." "낭마안? 낭만이 모두 바다건너 저세상으로 갔나보군." 친우들간의 장난기가 가득 든 투닥거림이 간간이 끼어드는 화기애애한 대화는 노크 소리에 의해 잠시 중단되었다. "큰 도련님, 손님들이 도착하셨습니다." 시종의 말에 스테판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자, 슬슬 파티가 시작될 모양이니 이만 나가보자구." "그러지. 아, 그런데 네 동생은 잘 있대냐?" 스테판의 말에 맞장구치며 몸을 일으키던 조엘이 막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윈체스터 백작가에는 두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은 스테판이었고, 차남은 오스턴 윈체스터라고 마법사 지망생인데 현재 마르타국에 유학을 가 있다고 했다. 뭐, 이곳에도 마법을 가르쳐주는 학교가 있기는 했지만, 마르타국은 뭐니뭐니해도 최초의 대 마법사인 메이크피스가 세운 마법사의 탑과 마법길드 총본부가 있는 곳이었으니 다른 국가의 마법사 지망생들이 많이 유학을 가기도 하는 곳이었다. "내 동생? 몰라. 뭘 하는지 연락도 거의 없다. 저번에 연락온게 2년 전이었나? 혹시 마르타국에 보낼 외교사절이 있다면 꼬옥 끼어들어야겠어. 동생 녀석 면상을 못 본지 몇년인지도 모른다." "훗훗,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요. 돌아오면 대단한 마법사가 되어 있을지도 몰라요." 다니엘의 말에 스테판도 가벼이 웃어 넘겼다. "그러길 바래야지. 안 그러면 그 동안 어머니 속 끓인 거에 대한 응징을 철저하게 내려줄 거다."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홀로 들어가니, 이미 십여명쯤 되는 사람들이 홀 안에서 삼삼 오오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 틈에 끼어드는 대신 파티장 입구에서 주인 노릇 하느라 사람들을 맞이하는 윈체스터 백작 부부에게 다가갔다. 원래 여기에 도착하자마자 인사를 나누었어야 하는데 그 부부가 아들 친구들끼리 놀라고 배려를 해준 탓인지 모습을 보이지 않아 미처 인사를 나누지 못했던 것이다. "안녕하셨습니까 백작님, 백작 부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두분." "아, 어서들 오너라." "여전히 멋지구나 조엘. 안젤라도 아름답고. 호호호, 그래 요즘 안젤라에게 귀족 청년들의 청혼이 줄을 잇는다며?" "아이, 아니에요." 아들의 친구라서 그런지 부부는 격식 없이 조엘 남매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들이 인사를 끝내기를 기다렸다가 나도 에르미아와 함께 앞으로 나섰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윈체스터 백작님, 백작 부인." "와줘서 고맙네, 엠브로스 백작. 어서 와요, 엠브로스양." "즐거운 시간이 되길 바래요." "감사합니다, 두분." 스테판과 조엘이 친구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윈체스터 백작은 맥알파인 공작파 사람이었다. 아마 오늘 이 파티에 초대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맥알파인 공작과 친한 사람들일 터였다. 그렇게 둘에게 인사를 나누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역시나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이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속속들이 도착한 사람들이 계속 홀 안으로 들어오고, 준비하고 있던 악단이 부드러운 음악을 연주하며 본격적으로 시종들이 음료를 들고 서빙을 시작하자 분위기가 마구 무르익었다. 대충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다시 조엘 남매와 스테판, 그리고 볼레어 형제와 한 무리를 이룬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슬그머니 젊은 청년들이 다가와 대화에 끼어들었다. 처음에 조엘이나 이브스햄에게 끌려 파티장에 참석할때에는 조엘이나 이브스햄이 잡아놓지 않으면, 이렇게 다른사람들이 다가와 무리가 커질 경우 슬그머니 기회를 봐서 빠져나가기 십상이었는데, 이제는 나도 얼굴이 많이 팔려서 그런지 나에게도 이야기를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잠시 후에 맥알파인 공작 부부가 와서 인사를 나눌 즈음 블랜차드 후작이 도착했다. "아, 단장님이 오셨군." 그 특유의 자신감에 찬 오만한 표정과 태도로 뭇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는 후작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작이 워낙 사교성이 별로 없어서 사람들이 인사나 혹은 특별한 볼일이 없는 한 그 주위에 대화를 하느라 붙어있는 경우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의 곁에 붙어 있기만 하면 의례적인 대화에 신경쓸 필요가 적었다. 나는 에르미아가 안젤라와 찰싹 붙어 귀족 영애들 무리 틈에 끼어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는 맥알파인 공작 부부에게 양해를 구하고 후작에게 걸음을 옮겼다. 이미 파티장에 있던, 기사로 활동하고 있는 청년들이 인사를 하기 위하여 그의 주위에 몰려 들어 있었다. 어차피 인사만 하면 물러날 거였지만... 그들이 인사를 하고 옆으로 비켜주기를 바라며 천천히 다가가는데 예의상 고개를 끄떡여 인사를 받아주며 주위를 휙 돌아보던 후작과 눈이 딱 마주쳤다. "여어, 일찍 왔는 걸?" 그가 먼저 웃으며 말을 걸자 주위에서 웅성 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기야, 후작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경우가 극히 드무니 사람들이 놀라는게 당연할지도. 이러니 내가 후작의 편애를 받고 있다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오셨습니까?" 가까이 다가가서 꾸벅 고개를 숙이자 그가 내 주위를 살펴봤다. "혼자 왔냐?" "설마요. 좀 전에 이브스햄도 도착했고, 에르미아는 저쪽에 있어요. 조엘은 저기서 다른 사람들에게 잡혀 있고요." 내가 눈짓으로 사방 여기저기를 가르키며 말하자 후작이 쿡 웃었다. "그래, 일행을 저렇게 뺏겨 버렸으니 내가 그리워졌겠군?" "곁에 있으면 편하다는 건 인정하죠. 어째 말걸어오는 사람이 적거든요. 거기다가 중간에 빠져 나가기도 편하고." "쿡쿡쿡... 부인은 못하겠군." 볼레어와 다니엘이 스테판과 같이 와서 인사를 건네는 바람에 우리 둘의 대화가 잠시 중단 되었다. 하지만 스테판은 곧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느라 또 바삐 움직여야 했고, 볼레어와 다니엘 형제에게는 다른 청년들이 들러붙어버렸다. "오늘 우리집에서 잘래? 오랜만에 네 아버지좀 보자." "그럴까요? 에르미아에게 갈때 옷을 보내라고 하면 되니까. 저도 요즘 아버지 얼굴 못 본지 꽤 되었거든요. 이프리트 아저씨도..." "후후후, 재미있을 거야." 저쪽에서 무리의 가운데에 있던 조엘이 나와 후작의 모습을 보고 다가 오려고 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옆에서 누가 그에게 말을 거는 바람에 그의 발걸음이 멈춰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아쉬운 미소를 지으며 멀리서 고개만 숙여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에게 주의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며 후작이 다시 쿡쿡 웃었다. "저래서 인기인은 피곤하다니까." "인기인 나름이죠. 사실 리건도 인기인 아닌감요?" 리건은 블랜차드 후작의 이름으로 그가 사적인 자리에 있을때 이름을 부르라고 허락해줘서 마음대로 부르는 거다. 물론, 기사단에 있을때는 절대로 그러지 못하지만... "훗, 나는 인기가 있는게 아니야. 추종자가 많은 거지. 인기와는 엄연히 틀린 거라고." "어련 하실려구요." 다시 저쪽에 있는 조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래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더니 그가 익살맞게 처량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거였다. 그런데, 내 옆에 있던 리건을 보더니 그 웃음이 씁쓸하게 바뀌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이려나? "쿡쿡, 불쌍한 맥알파인 자작..." "엥?" "아니... 후후후..." 영문을 모를 리건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는 와중, 손님들이 다 모였는지 주인인 윈체스터 백작이 와준 손님들에게 자신의 아들을 인사 시킨 후 파티의 시작을 알렸다. 그제야 흥겨운 춤곡이 연주되기에 나는 리건과 잠시 헤어져 에르미아와 한곡, 안젤라와 한곡, 그리고 맥알파인 공작 부인과 한곡을 추고 잽싸게 그의 옆으로 다시 돌아왔다. "내가 네 피난처냐?" "잘 아시면서 뭘 묻습니까? 언제 빠져나갈 거에요?" "흐음... 글쎄.... 봐서..." 리건이 말을 흐렸지만, 그가 파티 끝까지 남아있는 경우는 여왕이 참여했을때 - 것도 여왕이 나가면 그 즉시 파티장을 빠져 나갔지만... - 뿐이라는 걸 아는 나는 고개만 끄덕이고는 그의 옆자리를 지켰다. 그러자 윈체스터 백작 부인과 한곡 춘 조엘이 슬쩍 우리곁으로 다가오는게 보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블랜차드 후작님." 예의바르게 꾸벅 인사하는 조엘에게 리건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씨익 웃어주며 대꾸했다. "뭐, 자네 상황이 어땠는지 이해하니 괜찮네." "해인이를 좋게 봐주시더군요. 그와 친한 저로써는 무척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조엘의 말에 리건이 다시 씨익 웃었다. "뭐, 자네가 감사해 할 것 없네.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까." "그렇다해도 감사한건 감사한 일이죠." "그런가? 그런데 꼬옥 말하는 폼이... 누가 보면 자네를 해인이 보호자로 생각하겠군." "친구는 서로 돌봐주는 거 아니겠습니까? 상사와는 다른 관계죠." "훗... 그런가? 친구라..." '으음... 왠지 분위기가...' 어째 리건과 조엘 사이의 분위기가 경직된 것 같았다. 뭐, 리건은 여전히 여유만만하게 조엘을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이었는데, 조엘에게는 그게 영 마음에 안 든 모양이었다. "뭐, 자네와의 대화는 즐거웠네. 새로운걸 알았군." "제 부족한 생각이 당신께 새로운 걸 알려드렸다면 영광이죠."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나는 이만 가봐야 겠군. 약속이 있어서 말야..." "그러십니까? 아쉽군요. 나중에 다시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리건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조엘은 나를 향해 리건에게 작별 인사를 안 하느냐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초창기때에는 리건을 따라 파티 중간 중간에 슬그머니 빠져 나갔던 나였지만, 요근래에 에르미아와 같이 파티에 참석하면서부터는 후작과 가는 대신 에르미아와 조금 더 있다가 가곤 했기에, 에르미아와 같이 온걸 아는 조엘로서는 당연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참 공교롭게도 그때 리건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거였다. 빨리 조엘에게 작별 인사를 하라는 메시지를 가득 담고서... 이미 리건과 그의 집에 가기로 약속을 한 상황인데다, 에르미아에게는 아까 같이 한곡 추면서 이야기를 끝낸 상황이라 나는 조엘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왠지 조엘의 분위기가... 차마 작별 인사를 못하게 만드는 거였다. 그래 내가 우물쭈물하자 리건이 재촉했다. "안 갈거야?' 조엘이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리자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고래 싸움에 등터지는 새우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나? "에... 사실 블랜차드 후작님 집에 가기로 해서..." 그런데, 타이밍이 정말 좋게도 내가 채 작별인사를 끝내기도 전에 한 시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후작님, 급히 찾으시는 기사분이 계십니다." "날? 알았다. 잠시만 기다려." 나에게 기다리라고 말해놓고 시종의 뒤를 따라 리건이 사라지자 조엘이 묘한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호오, 블랜차드 후작네 집에 가기로 했다고?" 왠지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째 내가 엄청 잘못을 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 그게... 어쩌다보니..." 내 대답이 시원치 않자 조엘이 의심스런 표정으로 낮게 물었다. "그 사람네 집에 자주가?" "에... 가끔요." "얼마나 가끔?" "글쎄요... 일정하지는 않는데... 지금까지 네번 갔나?" 고개를 갸웃하며 기억을 더듬는데 조엘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 노만이 너 기다리던 눈치던데..." 저번에 조엘네 집에 방문했을때 노만은 내가 백작이 되었다니까 그런가부다... 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딱 하나만 묻는 거였다. "그래, 그래서 이제 마법은 계속 배울거냐, 말 거냐? 뭐, 안 배운다고 해도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서 가끔 찾아와서 배우겠다고 대답해버렸었다. "앗... 스승님도 뵈어야 하는데..." 조엘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리건이 모습을 감추니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슬그머니 다가와 조엘을 둘러쌌던 것이다. 그래 사적인 대화를 잠시 접고 그들과 대화를 하는데 시종을 따라 갔던 리건이 다시 돌아왔다. "해인아, 가자. 왕실에서 호출이다." 그말만 던지고 몸을 돌려 걸어가는 그의 모습에 나는 조엘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둥 마는둥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가 그의 뒤를 쫓아가야 했다. "에엣... 아, 자작님 그럼 다음에... 저, 저기... 실례하겠습니다." ================================================================= 으으음... 오타가 많아서 죄송합니다. 없게 하려고 하는데도.. 실수가 있네요 ^^:; 지적해주신 곳들 수정할때 꼬오옥 고치도록 할게요. 지송 지송, ====================================================== 제 32화 삼국회담 (3) 파티장 밖에서 리건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왕실 경비대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날 보자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밖에 대기시키고 있던 마차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런데 우리가 막 마차에 올라 출발할 즈음, 누군가가 급하게 말을 달려 안으로 들어오더니 떨어질듯이 뛰어내려 안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저 사람도 누굴 부르러 가는 걸까요?" 출발하는 마차 창으로 사라지는 그 사람의 등을 보며 중얼거리자 리건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모르지." "아, 그런데 단장님을 호출한 건데 왜 나까지 끌고 가는 거에요?" "넌 내 보좌관이잖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했지만, 보좌관이라고 해도 말 뿐, 엄무에 관한 건 조르디 엘리노어 경이 다 맡아서 하고 있으니 데리고 간다면 엘리노어경을 데리고 가야 했다. "혹시, 엘리노어경에게도 연락 했어요?" "연락할 거 있나? 그 녀석은 기숙사에서 사는 걸 뭐." 왕성 내에는 밤에 야간 근무를 하거나, 아니면 집이 멀어서 출퇴근 하기가 어려운 기사들을 위해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볼레어 형제도 거기서 숙식하고 있었다. 원래 웨스트모어랜드 후작 저택이 따로 있었지만, 후작이 자신의 영지로 내려간데다가 두 형제 모두 독신이라 저택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있었던 저택을 처분했던 것이다. 어차피 기숙사라고 해서 몇시에 기상해야 하고, 몇시까지 들어와 잠을 자야 하는 등의 학교 기숙사 같은 엄한 규칙이 있는 게 아니라 마치 여관 같이 자유롭고, 그쪽 담당의 시종들까지 딸려있어서 기사들의 불편을 최소화 해주고 있다고 들었다. "필요하면 왕성에 도착하서 불러오면 돼. 아직 늦은시각이 아니니 자지 않고 있겠지." "그런데, 갑자기 왠 호출이에요? 이런 일이 가끔 있나요?" "요 근래에는 없었지. 몇년 전이라면 몰라도 요즘에는 계속 평화로웠으니까. 이번 호출도 위급 상황이라기보다는 급한 중요한 일이 생긴걸 거다." '그렇다면 내가 더더욱이나 필요 없는거 아닌가?' 속으로야 그렇게 생각 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걸 그가 모를리가 없을텐데도 데리고 가는 걸 보면 뭔가 이유가 있나보다 싶어 그냥 입다물고 있었다. 우리를 데리러 온 병사가 무척이나 재촉을 했는지 마부는 성도 내를 쌩쌩 달려 - 마침 밤이 다 된 시각이라 거리에 사람들이 없어 속도를 내는데 하등 어려움이 없었다. - 평소보다 엄청 빠른 시간 내에 왕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단장님." 그리고 입구에는 엘리노어경이 기다리고 있다가 반색을 하며 맞았다. 물론, 뒤에 있던 나에게는 찌릿한 눈길을 한번 던지고는 외면해 버렸지만 말이다. "무슨 일이지?" "저도 자세한건 모르겠습니다만, 마법 길드쪽에서 뭔가 요청을 한 모양입니다. 보고를 받으신 폐하께서 당장 단장님을 비롯해서 몇몇 분들을 왕성으로 부르라고 하셨거든요. 도착하시는 즉시 백합 회의실로 모시라 하셨습니다." "백합 회의실? 흐음..." 왕성 내에는 그 커다란 규모에 알맞게 여러개의 회의실이 존재했고, 각 회의실마다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 회의장들의 이름이 모두 꽃이름이라는 게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백합'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그 회의실에는 들어가는 두짝의 하얀 문에 큰 백합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안에 들어가니 옅은 회색빛의 커다란 타원형의 탁자가 가운데 놓여 있었고, 그 주위에는 탁자 보다 약간 더 진한 회색의 편안해 보이는 의자가 10여개 정도 놓여 있었다. 방안에서 감지되는 마나의 기운으로 보아하니 아마 이 곳에서 오고가는 모든 대화가 바깥으로 절대 새어나가지 못하게 마법 결계를 펼쳐 놓은 모양이었다. 회의실 안에서는 두 남자가 종이 뭉치를 든 채 막 들어서는 후작을 반가이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후작님. 파티장에서 곧장 오셨나 보군요." 두 남자중 나이 많은 중년 남자가 웃으며 인사하자 리건이 정중하게 답례를 했다. "파티장에서 전갈을 받아서 말입니다." "아, 이런... 즐거운 시간을 방해한 것이 아니길 바랍니다." "괜찮습니다. 막 빠져나가려던 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아키볼트 백작?"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직 오실 분들이 다 오시지 않으셔서 말입니다. 아, 차 한잔 드릴까요?" "그래주면 고맙겠소." 멋진 은발머리를 가진 아키볼트 백작이 자신의 옆에 있던 젋은 남자에게 손짓하자 젊은 남자가 회의실 구석에 마련된, 차를 탈수 있게끔 준비된 탁자로 다가가 리건의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리건은 탁자 주위에 놓인 의자 중 가까운 것을 끌어당겨 편안하게 앉았다. 물론, 나와 엘리노어경은 그의 뒤에 자리를 잡고 서 있어야 했지만 말이다. "자, 우선 이걸 봐주시겠습니까? 후작님을 늦은 시각에 오시게끔 한 이유를 대략 적어 놓은 것입니다." 아키볼트 백작이 넘겨주는 종이 뭉치를 덤덤한 표정으로 받아 탁자에 펼쳐 놓자 나와 엘리노어경의 시선이 은근히 그쪽으로 쏠렸다. 리건이 감추려 하지도 않았고, 아키볼트 백작이 보좌관들을 내쫓지 않는 걸 보아하니 국가 기밀 정도의 사항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호오... 던젼이라..." "마법 길드에서 정식으로 요청온게 꽤 오랜만의 일 아닙니까? 그것도 던젼에 대한 일 때문이니... 아마 다른 국가측에서도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렇겠군." 약간 흥분한 기색의 아키볼트 백작의 말에 리건이 시큰둥하니 긍정하는데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며 일단의 무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아키볼트 백작, 도대체 무슨 일인가?" 씩씩하게 걸어들어와 다짜고짜 묻는 이는 랭포드 후작이었다. 그의 옆에는 랭포드 자작이 따라 들어오고 있었고, 그 뒤로 맥알파인 공작과 조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십시오." 아키볼트 백작이 그 둘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하자 리건도 연장자를 대하는 예의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셨습니까?" "흠."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는군, 블랜차드 후작." 리건의 인사에 가볍게 고개만 끄덕여 예의만 차리는 랭포드 후작에 비해 맥알파인 공작은 사람좋은 미소로 인사를 건네왔다. "자자, 다들 앉으시지요. 이런 늦은 시각에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그만큼 흥미 있는 일이라서요. 가이, 공작님과 후작님의 차도 부탁하마." 한쪽에서 리건의 차를 준비하고 있던 젊은 남정네의 이름이 가이였던 모양이다. 그가 리건 앞에 차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의 차를 준비하러 옆으로 자리를 비킨 사이 아키볼트 백작은 자리를 잡고 앉은 랭포드 후작과 맥알파인 공작 앞에 리건에게 준 것과 같아보이는 종이들을 내밀었다. "자자, 이것좀 보시겠습니까?" "이게 늦은 시각 우리를 오게 한 이유인가?" 맥알파인 공작이 종이를 받아 자신의 앞에 펼쳐 놓으며 묻자 아키볼트 백작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참 흥미 있지 않습니까? 마법 길드에서 최근에 발견된 던전에 조사단을 파견 하는데 정식으로 협조를 요청하다니 말입니다." "흐음... 그 던전의 존재를 벌써 다른 나라에 들켰다는 거겠지." 랭포드 후작 또한 진지한 눈길로 종이위에 써진 내용을 훑어보며 말을 던졌다. 그들이 말하는 내용이 도통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나는 물을 생각도 못한 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필요하다면 나중에 리건이나 조엘에게 물어보면 설명해줄테니 말이다. "아마도 그럴겁니다. 마법 길드에서 온 내용에 따르면 마르타국과 녹스국에도 정식으로 요쳥을 했기에 자세한 이야기는 삼국이 모인 뒤에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군요." 아키볼트 백작의 말에 리건이 살짝 눈쌀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이 저녁에 우리를 모을 필요가 없지 않소? 자세한 내용도 모르는데다가 삼국이 모여 협상을 하는 거라면 외교부쪽 담당 아니오? 던전을 발견했다는 건 분명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그냥 내일 통보해도 되었을텐데..." "다른 경우였다면 그렇게 했을 겁니다만... 이번에는 좀 독특한 상황이라서 말입니다. 우선 길드쪽에서는 최대한 빨리 조사팀을 파견하려고 하기 때문에 삼자 회담도 빨리 모았으면... 하는 바람이라..." 아키볼트의 대꾸는 랭포드 후작의 시큰둥한 말에 끊겼다. "그쪽이야 던전 하나 발견하면 빨리 빨리 조사하고 싶어 근질거리는 사람들 아니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아, 물론 후작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던전이 발견된 장소가 새클턴국에 있는 그 유명한 새클턴 정글 안에 있다는 군요." 아키볼트의 말에 탁자에 앉은 세 남자의 인상이 단박에 찡그려졌다. "흐음... 그래서 삼국에 요청을 한거로군." "쳇, 약삭빠른 노친네들 같으니라구..." 맥알파인 공작과 랭포드 후작의 말에 이어 리건이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랭포드 후작님과 날 부른 것이었군. 우리쪽의 협조를 얻어야하니까." 리건의 말에 아키볼트 백작이 반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삼국과 협상하는 거야 저희쪽 담당이지만 이번에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아무래도 그 협상 자리에 저희쪽 사람 말고도 기사단측 사람이나 국방부측 사람이 같이 참석했으면... 합니다. 이번 삼국 회담에서 길드 측에 지원해줄 기사나 병사들 숫자도 나올게 뻔하고, 다른때 같으면 회담 전에 미리 두 후작님과 의논해서 대충 윤곽을 잡아 가겠지만, 이번에는 어찌 될지 몰라서 말이지요. 혹시나, 다른 국가에서 협조를 포기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입니다." "글쎄... 과연 그럴까? 그 악명 높은 새클턴의 정글에다가 던젼을 만들 정도라면 모르긴 몰라도 대단한 자가 만든게 뻔할텐데.... 그렇다면 그만큼 대단한 것들이 숨겨져 있을거라 여겨질 것 같은데..." 랭포드 후작의 말에 이어 맥알파인 공작의 질문이 던져졌다. "폐하께도 말씀 드렸겠지? 폐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 "위험한 장소인데다 던젼에 뭐가 있는지는 흥미 없지만, 만약 그 곳에 위험한 물건이 있고 그 것이 다른 나라에 넘어가게 될지도 모른다면, 그것만은 확실하게 확인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시더군요." 아키볼트 백작의 말에 리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던젼에서 뭘 얻느냐보다는 다른 나라에 뭐가 넘어가느냐가 문제겠지." "그렇다는 건 우리는 마법 길드에 협조를 해야 한다는 소리겠군. 아마,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래서 마법 길드 녀석들이 음흉하다는 거야. 차라리 그쪽으로 전부 넘어갔으면 좋았을텐데..." 맥알파인 공작의 뒤를 이어 랭포드 후작이 투덜 거리자 맥알파인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쪽으로도 뭐가 넘어갈지는 알아두는 편이 좋아. 마법 길드는 가끔가다 미치광이 마법사가 나타나 난리를 칠 위험 요소가 높은 곳 아닌가?" "그래봤자 일차적인 방어는 마법 길드고, 이차적인 방어는 마르타국에서 할텐데 뭐. 우리 타자는 그 다음이니 조금은 여유가 있는 거 아닌가? 쳇... 도대체 어느 나라에게 던전이 있다는 걸 들킨 거지? 아, 혹시 새클턴 국인가? 에잉...." 랭포드 후작의 투덜거림에 리건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다른 나라에 들키지 않았어도 협조를 요청했을 듯 합니다. 새클턴의 정글은 그만큼 위험한 곳 아닙니까? 모험가들과 용병을 불러 모아봤자 각 국에서 제공할만큼 대단하지는 못할테니까요." "그럴 듯 하군. 그럼 백작, 회담의 장소와 날짜는?" "사흘 뒤입니다. 장소는 길드측에서 제공한다는 군요. 내일 저녁이나 최소한 모래 아침에는 각 국가의 수도에 있는 마법 길드 지부에 통고를 하면 그쪽에서 마법진으로 알아서 보내준답니다." "흠... 그럼 우리들을 불러모은 이유가, 각각 우리측에서 회담에 참여시킬 인재를 뽑아달라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대충 길드에 협조할 테두리도 정하고 말입니다. 이번에 길드측에 보낼 기사는 어떻게 하실건지요? 국방부와 기사단측 생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왕실 기사단의 첫번째 목적이 왕과 그의 가까운 친족들을 지키는 것이고, 둘째로는 왕성과 수도를 지키는 것이지만 평화로운 이때에 엘리트중의 엘리트들을 몽땅 그 일에 투입시키는 건 인력 낭비었다. 그래서 왕과 그의 가족을 지키는 건 왕실 기사단과 왕성 수호기사단이 반씩 섞여서 하고, 왕성을 경계하는 것도 왕실 기사단 기사의 지휘를 받는 왕성 수호 기사단과 왕실 경비대의 몫이었다. 대부분의 왕실 기사단, 특히 그 중 로열 기사단은 이렇게 국내, 혹은 국외에서 벌어지는 위험한 일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그러는게 인력을 적절하게 잘 사용하는 것 아니겠는가?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왕실 기사단이라는 건 어디 내놔도 대표자로서 꿀릴 게 없는 지위에 있다는 확실한 증표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국방부 또한 이러한 트러블이 그들의 일이기도 했으니, 이런 일이 있을때마다 항상 국방부와 왕실 기사단측이 치열하게 아웅다웅 하는 거였다. 중요해서 공을 세울 일에는 서로 해결하려고 할 터였고, 공도 변변찮으면서 귀찮은 일은 서로 상대에게 떠넘기려고 하는 그런 다툼 말이다. 그래도 양측에는 서로의 장점과 단점이 있기는 했다. 국방부는 인력은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으나, 그들이 모두 엘리트가 아니란 점이었고, 기사단은 엘리트들만 골라서 내보낼 수 있으니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이 소수라는 점이었다. 양이냐 질이냐의 차이일까나? 아키볼트 백작은 그걸 잘 알고 있을테니 지금 조심스레 두 후작을 살펴보는 거였다. 사실 이런 일은 랭포드 후작에게 먼저 말하거나 아님 리건에게 먼저 말했다면 나중에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쁠테니 확실하게 둘 다 불러놓고 터놓고 이야기하는게 좋을 듯 했다. 그 자리에서 열심히 눈치를 보게 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 새클턴 정글이라는 곳이 엄청 위험한 곳이라면 엘리트중의 엘리트인 기사단 측이 주도하는게 났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정글이 위험한 건 환경이 위험한 거였으니 실력보다는 정글을 잘 아는 사람이 더 필요하겠지만서도 말이다. 두 후작 또한 서로를 살피면서 섣불리 뭐라 입을 여는 사람이 없어 회의실은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그 적막을 깨뜨린 건 맥알파인 공작이었다. "기사 뿐만 아니라 마법사도 필요하겠지?" ====================================================== 제 32화 삼국회담 (4) 그 적막을 깨뜨린 건 맥알파인 공작이었다. "기사 뿐만 아니라 마법사도 필요하겠지?" 공작의 말에 아키볼트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마법 길드의 마법사들 뿐만 아니라 각국에서도 보낼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왕실 마법사들의 협조를 얻을 생각입니다." "위험한 곳인데 왕실 마법사들이 선듯 가려고 하겠소?" 공작의 걱정스러운 말에 아키볼트가 피식 웃었다. "마법사들이 어떤 자들인지 잊으셨습니까? 던전의 위험을 제일 잘 알면서도 '마법'이라는 유혹에 넘어가 물불을 안 가리는 그들이지요. 이번에 발견된 던전이 새클턴 정글에 있다고 하면 대단한 물건이 있나보다 싶어 제일 먼저 우르르 달려들 겁니다." "허긴.... 아, 그러고보니 랭포드 후작, 후작 산하에도 뛰어난 마법사들이 많다고 알고 있는데 이번에 그들도 참여시킬 생각이오?" 맥알파인 공작의 말에 랭포드 후작이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들며 대꾸했다. "글쎄요... 블랜차드 후작과 이야기도 안 된 상횡에서 뭐라 말씀 드리기가..." 그러자 리건이 싱긋 웃으며 시원하게 대꾸했다. "그 건은 좋을대로 하십시오. 저희 기사단측에는 마법사가 한 사람도 없어서 전적으로 왕실 마법사측이나 후작님측에 의지해야 할 판이니까요." "허긴, 그렇겠군요. 왕실 기사단에는 아직 전속 마법사가 없지요?" "으허허험...." 리건의 말에 아키볼트 백작이 맞장구를 치자 랭포드 후작의 미간 주름이 더더욱 깊어졌다. "그러고보니... 이번 던전은 새클턴의 정글이니... 기사단의 능력은 별로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후작님께서 전담하시는게 어떠실지요?" "험험, 그건 우리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정글이라니... 허허, 이거 참..." 랭포드 후작이 못마땅하다는 투로 내뱉을때 아키볼트 백작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제 생각으로는.... 이번 일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그런 위험한 곳에 던전을 만들 실력자라면 뭐가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테니까요. 그러니 누군가는 꼬옥 가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그 물건들은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랭포드 후작이 여전히 인상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투덜 거렸다. "다 아는 걸 또 말할 필요가 있나?" "아, 죄송합니다 후작님. 전 단지 이번 일이 중요하다는 걸 말씀 드리고 싶어서... 험험, 어쨌든 제 의견으로는 이번 일이 무척 위험한 일이자 중요한 일인 것이 확실한 만큼 어떤 상황에서도 충분히 살아 돌아올 수 있는 실력자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키볼트의 말에 오랜만에 랭포드 후작의 표정이 밝아졌다. '옳은 말이야. 삼국에서 지원을 할테고, 마법사 길드에서 따로 용병들과 모험가들을 고용한다고 하니 많은 인원은 필요 없겠지. 한 사람이라도 살아 돌아올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안 그런가 블랜차드 후작?" 랭포드 후작의 말에 리건이 피식 웃었다. "요컨데... 소수 정예가 필요하단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거네. 그게 내가 하고싶은 말이야. 그리고 소수 정예하면 바로 왕실 기사단 아닌가? 그러니 이번 일은 그쪽에서 전담하는게 어떨까... 싶은데?" 엄청 중요한 일이라면서 서로 상대방측에 떠넘기려고 하는 그들의 태도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번 일이 엄청 어렵기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다른때 같았으면 중요한 일은 서로 떠맡으려고 아웅다웅 했을텐데 말이다. 왕실 기사단에게 이번 일을 전적으로 떠넘기려는 의도가 다분한 랭포드 후작의 말에 리건은 여유있게 씨익 웃어보였다. "후작님께서 양보해주신다면야 제가 기꺼이 맡도록 하죠. 후작님의 인정을 받게 되다니 이거 참 영광인걸요? 하기야, 어떠한 위험 속에서도 살아 돌아올 수 있는 실.력.자.가 필요한 곳에는 역시 우리 왕실 기사단이 나서야겠지요? 사실 이번에 지원해줄 사람들 중 짐덩어리가 끼어들어가는 건 아닌지 은근히 걱정 했답니다. 제 휘하의 엘리트들이 그러한 짐.덩.어.리들까지 챙기느라 골머리를 앓는건 아닌가... 했지요. 그러한 제 걱정을 알아서 덜어주시다니, 역시 후작님은 현명하신 분이시군요. 다시 한번 감탄했습니다." 요컨데... 너희 국방부쪽에는 새클턴 정글에 들어가서 살아 돌아올 만큼 유능한 인재가 없지? 란 말을 은근히 빙빙 돌리는 척 하면서 완전히 노골적으로 드내며 국방부를 깔아 뭉개자 랭포드 후작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변했다. 아무래도 국방부측의 소중한 인재를 잃지 않기 위해 우리측에 완전히 떠넘기려고 한 듯 한데 덕분에 자존심이 퍽퍽 깨지게 생겼으니 속이 온전치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나서지는 못하고 뭐 씹은 표정으로 속만 부글부글 끓이는데, 맥알파인 공작이 나섰다. "이번 일은 왕실 기사단이 전담하는 건 그리 좋지 못하다고 보네. 물론, 왕실 기사단 일원들의 능력이야 누구나가 인정하는 사실이네만, 검술이 뛰어난 것 하나만 가지고 장담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새클튼 국의 정글 아닌가? 기사도 필요하겠으나, 그 못지 않게 다른 능력자또한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보네. 마법사야 마법사 길드나 왕실 마법사측에서 제공하겠지만, 그 외의 능력자, 즉 실력이 높은 정령술사나 마검사, 혹은 정령검사들은 대부분 국방부측에 있지 않은가? 랭포드 후작, 이번 일은 국방부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줘야 할 것이오." 그러자 아키볼트 백작이 찬동하고 나섰다. "예,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랭포드 후작님, 국방부에서도 도와주십시오." 아키볼트 백작까지 간절하게 말하자 랭포드 후작은 못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크허허험, 뭐, 두 분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생각해 보도록 하죠." 랭포드 후작의 허락에 아키볼트 백작의 시선이 리건에게로 향했다. "물론, 왕실 기사단측에서도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이런 일에 왕실 기사단측이 빠진다는 건 말도 안되니까요." "그러겠소. 뭐, 나는 처음부터 지원자를 보내려고 했었으니까... 단지... 내 휘하의 녀석들 성격이 좀 괴팍해서 짐덩어리는 어떻게되든 거들떠보지 않을텐데... 그게 문제겠군." 끝까지 랭포드 후작을 살살 약올리는 리건이었다. 그에 아키볼트 백작이 난처한 표정으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 보다도 먼저 랭포드 후작이 입을 열었다. "흥, 누가 짐덩어리가 되건, 몬스터의 먹잇감이 되건 두고 봐야하지 않나?" "물론입니다, 랭포드 후작님." 그에 리건이 참 얄밉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내가 당하는게 아니라서 그렇지, 당하는 입장에서는 속에서 화산이 안 터지면 다행일 것 같았다. "자, 그러면... 시간을 충분히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만, 내일 오전까지 몇명을 보내 주실 수 있을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이왕이면 그들의 분야가 무엇인지까지 말씀해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그리고, 회담에 같이 갈 사람도요." 그렇게 아키볼트 백작이 긴급 회의를 마무리하자 맥알파인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나마 나는 좀 나은 편이군. 우리쪽에서 투입할 인원은 없으니까. 두 후작, 잘좀 부탁하고... 아키볼트백작은 나중에 보고서나 올려주게." "알겠습니다, 재상 각하." 아키볼트 백작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임으로 답례한 공작이 자리를 뜨자 조엘 또한 얼른 백작에게 목례하고 공작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랭포드 후작이 리건을 한번 째려보고나서 자리를 떴다. 마지막으로 리건이 아키볼트 백작에게 인사를 하고 그 곳을 나오자 나는 궁금했던 것을 꺼내려고 했다. "궁금한게 있는데..." "아아, 잠깐만... 여기서 이야기하지말고 내 집무실 가자." 하지만 하나 꺼내기도 전에 리건에게 제지당하는 바람에 엘리노어경의 비웃음을 한번 받고 리건의 집무실에 도착할때까지 입을 꼬옥 다물고 있어야 했다. 그곳에 도착할때까지 리건은 아마도 누굴 보낼지 고민 고민 하고 있었던 듯 집무실에 도착 하자마자 집무실 한켠에 잘 자리잡고 있는 서류철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말을 던졌다. "그래, 궁금한게 뭐냐?" "새클턴 국의 정글이 어떤 곳인데 살아 돌아오느니 마느니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질문을 입 밖으로내자마자 엘리노어경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리건을 제치고 나에게 대답을 해줬다. "아니, 그걸 지금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세클턴 정글은 유명한 곳 아닙니까? 어느 누구도 정글 전체를 탐험하기는 커녕 가로지르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그 밀림을요? 덕분에 그 안에 어떤 생물이 사는지, 인간이나 유사 인종이 사는지의 유모도 모르며, 어떤 질병이 기다리고 있는지, 지리는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죠. 정글 중심부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게 여긴 수십명의 탐험대가 도전을 했지만, 대부분이 깊숙히 들어가기 전에 되돌아 오거나, 아니면 들어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는군요." "오... 엄청 위험한 곳이군요." 내 말에 리건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그 곳은 새클턴 국의 1/4 을 차지하고 있는, 규모 또한 어마어마하지. 한쪽으로는 호바트해를 접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아메리국 국경을 접하고 있어." "그런 곳에 던전이 있다고요? 헤에, 그런데 그걸 사람들이 잘도 찾아냈군요." "게중에는 가끔 맛이 갔으면서도 운이 엄청 좋은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아니면 실력이 엄청 나거나... 덕분에 나만 귀찮게 되었다 이거지." 그렇게 투덜대덜 리건은 서류함에서 몇몇개의 서류를 뽑아내 책상 위로 던지며 심각한 눈으로 그걸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몇명 보낼 건데요? 아, 로얄 기사를 보낼 건가요?" "글쎄... 이번에는 너무 여러가지를 생각해야해서. 정글 안으로 보낸다는 건 아마 10사람을 보내놓으면 7, 8 명은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걸 염두에 둬야 해. 그러니 돌아올 확률을 높일 살력이 있는 자이면서, 만의 하나를 대비해 죽더라도 뒷탈이 크지 않는 녀석들을 골라야 하지." "엥?" 선듯 그의 말을 이해 못한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리건이 다시 설명했다. "그러니까 까놓고 말해서, 빽 없고 실력이 높은 녀석들을 골라야 한단 이야기야. 뒷배경이 든든한 녀석들을 보냈다가 잘못되면 골치 아파지니까. 하긴, 내가 보내려고 해도 그쪽에서 안 보내려고 갖은 압력을 다쓰겠지." "저런... 빽 없는 것도 서럽네... 아니, 그럼 다른 위험한 임무는 어떻게 맡긴대요?" "보통은... 아무리 위험한 임무라고 해도 빽의 유무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능력대로 일을 맡기는데... 이번에는 그걸 초월하는 곳이라... 실력의 높낮이에 상관 없이 어떤 변수에 의해 목숨을 잃을지 모르지. 새클턴의 정글은 바로 그런 곳이야." "헤에... 그럼 단장님이 가시면 되겠네요. 딱이잖아요, 살아 돌아올 확률 100%!" 내가 농담조로 말하며 웃자 엘리노어경이 정색을 하며 바락 화를 냈다. "그런 무엄한!!" 하지만 엘리노어경의 말을 자르며 리건이 끼어들었다. "흐음... 그럴까? 사실 내가 단장직을 맡은 후로 지금까지 휴가 한번 없이 일만 했는데 말야. 잠시 머리 식힐겸 갔다올까?" "단장님! 지금이 농담하실 때입니까? 절대로 안됩니다!!" 리건의 말에 엘리노어경이 정색을 하며 바락 대들었지만, 리건은 한 귀로 흘려들으며 날 바라보았다. "해인아, 넌 어때?" "내가 뭘요?" "네가 갈래?" ====================================================== 제 32화 삼국회담 (5) "말도 안됩니다!!" 웬만한 일에는 이성을 잃지 않던 첼릿이 무척 흥분해서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높였지만, 대충 예상 했던 일이라 나는 놀라는 대신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 수 있었다. "자자, 진정하고 앉아요, 첼릿." "지금 진정하게 됐습니까? 블랜차드 후작님이 정말 너무하시는 군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당연히 거절 하셨겠지요?" "아하하하... 그게 말이죠..."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하는 첼릿을 보자니 덥썩 '그럴까요?'라고 대답했대는 걸 알면 당장이라도 날 잡아 흔들거나 리건에게 쳐들어 갈 것 같았다. 하지만 얼버무리려는 내 대답에 뭘 눈치챈 것인지 첼릿은 가늘게 뜬 눈으로 날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그러마.. 하고 대답하신 건 아니겠지요?" "아하하하... 그게, 그러니까..." "설마... 가겠다고 하셨습니까?" "아니 뭐..." "말도 안됩니다. 지금 당장 제가 블랜차드 후작에게가서..." 그냥 놔뒀다가는 정말 리건네 저택으로 쳐들어갈 것 처럼 첼릿이 몸을 돌리며 말하자 나는 급히 일어나 그의 팔을 붙잡았다. "첼릿, 진정하라니까요." 그러나 첼릿은 진정하는 대신 나를 돌아보며 분노를 표출했다. "해인님도 너무 하십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시면서 상사가 가라고 했다고 덥썩 가겠다고 하신답니까? 잠시 보류라도 하셨어야죠!" "자자, 첼릿...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블랜차드 후작이 말한 건 반은 농담이었으니까. 우선은 삼국 대표와 마법사 길드에서 회담이 끝난 뒤에 결정될거라니까요." "어차피 회담 내용은 몇몇이 보낸다는 걸테고, 왕실 기사단에서도 최소한 두세명은 보낼 것 아닙니까? 그럼 분명히 후작은 그 인원에 해인님을 넣을 생각을 할 겁니다." 그의 말은 맞을 거였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리건으 누구를 보낼지 무척 고심하는 듯 했으니까. 리건 자신처럼 보내도 살아서 돌아올 확률이 100%에 가까운 사람이라면 많은 보너스라도 약속하면서 맘 편하게 보내겠지만, 이번에는 10명이 가서 2, 3명이 돌아오면 성공이라는 곳으로 보내려니 고심하는 건 당연할 터였다. 기사단 내에 리건이 괴씸하게 여기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모를까. 하지만 나라면... 리건 만큼 살아서 돌아올 확률이 높을 거였다. 비록 정글이란 곳에 한번도 가본적이 없고, 여기 정글은 지구에 있는 정글과는 차원이 틀린 것 같지만서도, 내게는 든든한 빽이 4분이나 있었으니 말이다. 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는 분들이자 어디에 있던지 아무 탈 없이 돌아올 수 있는 분들이었으니, 리건도 정령왕들을 생각하고 나에게 마음 편하게 그런 제의를 했을 터였다. 나 또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말이다. 그러나, 정령왕들의 존재를 모르는 첼릿은 당황하는게 당연했다. 특히나, 날 무척이나 아껴주는 그라면 말이다. 그걸 알고 있는 나는 그에게 미안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소파로 이끌었다. "첼릿, 블랜차드 후작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한건 내가 충분히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요.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요." 첼릿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혔는지 내가 이끄는대로 순순히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근심으로 인해 딱딱했다. "일부러 과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 해인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건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절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곳은... 저 조차도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고 장담을 못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그 정도예요? 헤에, 첼릿은 그 곳을 잘 아나보죠?" "사실... 가본적은 없습니다만, 그만큼 위험하다고 들었습니다." 약간 자신 없이 말하는 첼릿의 모습에 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게 뭐에요? 솔직히 첼릿도 그 곳에 대해 잘 모르잖아요. 그러면서 잘 아는 것 처럼 말하기는..." 내가 약간 어이없다는 식으로 말하자 첼릿이 눈을 부라렸다. "지금까지 그 곳을 횡단한 이는 물론이거니와 그 곳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아는 이가 없다는 것만 봐도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알 수 있습니다." "괜찮아요, 내 곁에는 그 곳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있거든요." 그랬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내가 리건의 제의를 좀 더 진지하게 고려하는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예? 서, 설마..." 눈치를 챘지만 선듯 못 믿는 표정의 찰릿에게 환하게 미소 지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듀비의 고향이 바로 거기죠. 아, 그러고보니 이 이야기를 듀비에게도 해주고 싶은데 듀비좀 불러와줄래요? 흐음... 그리고 이브스햄에게도..." 내 부탁에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키던 첼릿이 잠깐 멈칫 했다. "그럼... 아직 전 백작님께는 말하지 않은 겁니까?" "아직은요. 첼릿에게 제일 먼저 말해주는 거에요." 거기다가 지금은 너무 늦은 시각이라 - 리건을 왕성에두고 나만 돌아왔는데 다른 사람은 다 잠들어 있었고, 집사와 첼릿만이 깨어 있었던 것이다. 아, 듀비는 수련중이고 말이다. - 이브스햄에게는 내일 말해줄 생각 이었다. "그렇다면... 전 백작님께는 확실하게 결정된다음에 말씀하시는게 어떠십니까? 그게... 가실 확률이 높다 해도 말입니다." 첼릿의 말에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하지만, 듀비에게는 말해도 괜찮겠죠?" "물론입니다. 그러나, 듀비씨에게도 비밀 엄수를 당부해 주십시오." "듀비가 그런걸 떠들고 다니지도 않을테지만... 그러도록 하지요 뭐." "감사합니다." 첼릿이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자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등을 깊숙하게 기댔다. 첼릿이 그렇게 말하는 건 이브스햄이 백작 자리를 자신의 딸에게 물려주는 생각을 품을까봐 걱정했기 때문일터였다. 그리고, 리건의 제안을 곰곰히 생각하면서 내가 제일 걱정한게 바로 그거였다. 지금은 내가 우리 가문을 키우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데다가 이브스햄 또한 자신의 잘못으로 전에 품고 있던 생각을 완전히 포기한 것 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딸도 거의 예전 모습을 되찾았으니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가 날 어떻게 하려고 계획한 게 아니라 내 스스로 사지에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는 거니까 혹여나 거기서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되길 내심 바라게 되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다시금 생각해보면 내가 백작 자리에 연연해 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물론, 백작님 백작님 하며 떠받들어주는 건 기분 좋지만, 처음부터 내가 백작이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지금 다시 백작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고 해도 이 자리를 지키려고 갖은 애를 쓸 것 같지는 않았다. 뭐, 조금은 아쉬운 감이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내가 계급이 없는 사회에서 높은 자리때문에 서러움 같은 걸 당하는 일 없이 살다보니 이런데에 크게 미련을 갖지 않은 듯 했다. 거기다가 어차피 살아서 돌아올 자신감이 팽배한데 그런 걱정을 뭐하러 사서 하나 싶었다. 그가 정말 그럴건지 안 그럴건지 확실치도 않은데다, 그 일은 아주 나중의 일이니까. 만약, 나중에 돌아와서 이브스햄이 자신의 딸과 가문을 자신있게 차지하고 있다면 어머니 초상화나 가지고 순순히 물러나주리라 생각했다. '아, 괜찮다면 할아버지 초상화도 부탁할까봐. 역대 백작 초상화가 필요하다면 똑같은 거 하나 더 그리라고 하고 말야.' 그렇게 태평하게 이브스햄에대한 생각을 정리해버린 나는 곧이어 고향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기뻐할 듀비를 기대했다. 그러나, 듀비는 이러한 내 기대를 산산히 부서뜨렸다. "그렇습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대답하는 듀비의 모습에 나는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자신이 태어나고 200여년동안 생활해 온 곳으로 돌아간다는데 남 이야기 듣는 것 처럼 저 무덤덤한 표정이라니... 아니, 무덤덤하지는 않았다. 못마땅하다는 듯이 인상을 약간 찌푸리고 있었으니가. 거참, 아무리 안면 한 번 없는 남의 이야기라고 해도 고향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머, 잘됐네.' 하면서 기분 좋게 생각해주는 게 당연한거 아닌가? 하물며 자신의 이야기임에야. 듀비가 고향을 전혀 그리워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예전 북 드워프의 마을에 갈때를 생각하면 그건 절대로 아니었다. 게다가 수련할때 연무장이 아닌 될 수 있는 한 커다란 나무들이 빼곡한 곳만 찾는 걸 보면 내색을 안 하기는 했지만 고향을 그리워하는게 틀림 없었다. '쳇, 지금은 저렇게 무덤덤하고 있지만, 아마 내색을 안 하는 것 뿐 속으로는 무척 좋아하고 있을 거야. 워낙 나에게 부담 되는 걸 싫어하니까.' 나는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그렇게 혼자 납득하고 있었는데, 그 다음에 이어진 듀비의 말은 이러한 내 납득을 완전히 짜부시켜 버렸다. "그럼... 세클턴 정글에 언제 출발하시는 겁니까?" "확실한건 삼국 대표단의 회담이 끝나봐야 알겠지만, 빠른 시일 내일거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최소한 서너달은 걸릴지도 모릅니다. 삼국의 보조도 보조겠지만, 정글에 같이 데리고 갈 모험가들이나 안내자들을 모집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걸릴테니까요." "그렇겠군요." 첼릿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듀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안내자...를 따로 데리고 갈 겁니까?"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겠죠? 정글 전체를 아는 사람은 없더라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있을테니까요. 깊숙히 들어가지 않는 선에서 정글에서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아니면 약재를 구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어어요. 그런 사람들을 고용하는 걸테죠." 내 대답에 듀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제가 동행하지 않아도 될 듯 하군요." "예에?" 듀비의 말에 나와 첼릿은 너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동행하지 않겠다니요?" "당신만큼 정글을 잘 아는 분이 또 어디있다고 같이 가지 않겠다는 겁니까?" 아무래도 첼릿이 놀란 이유는 나와는 다른 것 같지만 말이다. 그러나 듀비는 우리의 놀람에는 상관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요청했다. "오래 걸린다면... 저는 상회로 잠시 돌아가 있었으면 하는데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의 요청에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제대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아, 아니.. 그, 그러니까... 괜찮고 안 괜찮고를 떠나서, 같이 안 갈 거에요?" "제 도움이 꼭 필요하시다면 같이가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거라면 죄송합니다만 별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어... 어어... 으으음...." ====================================================== 제 32화 삼국회담 (6) "어... 어어... 으으음...." 벙 찐 나는 그 뒤에 듀비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면 나가보겠다고 말할때에도 어떻게 고개를 끄덕였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내가 제정신을 차렸을때에는 듀비는 사라지고 당황한 첼릿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듀비씨의 고향이... 그 곳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죠... 으음... 좋아할줄 알았는데, 이건 반대로 가기 싫어하는 거 같죠?" "글쎄요... 무척 난처해 하는 것 같더군요." 내 질문에 자신 없이 대답하는 첼릿의 모습에 나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가기 싫어서 내 요청이 난처했나보죠."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내 말에 첼릿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고향에 돌아가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마, 무슨 연유가 있나봅니다.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아...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첼릿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려 나는 혹시 내가 괜한 짓을 한게 아닌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이거.. 내가 실수한 걸까요?" 내가 불안하게 묻자 첼릿이 싱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설마 듀비씨가 해인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겠습니까? 아마도 듀비씨를 위해서 해인님이 그 곳을 가기로 결정했다는 걸 눈치채고 마음속으로는 고마워 하고 있을 겁니다." "하아... 그랬으면 좋겠는데요..." 문득 레이언과 크리스가 그리워졌다. 그들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뭔가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첼릿이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듀비에 대한 일이다보니 이종족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요 그들과 교류한 경험이 풍부한 레이언과 크리스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첼릿도 하프 엘프이기는 했지만, 그는 인간 세상에 태어났고 어렸을때 내 어머니에 의해 백작가로 들어와서 지금까지 인간처럼 살았으니 이종족에 대한 지식은 레이언과 크리스보다 못할테니 말이다. '그들보다 나이는 많지만... 아, 그러고보니 상회쪽에서 연락 안 오나? 레이언과 크리스에게 첼릿을 정식으로 소개해주고픈데...'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이제 잠자리에 들라는 첼릿의 권유에 나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이 밝으면 출근도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다 했으니 계속 서재에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슬슬 상회측에서 연락이 올때가 된 것 같은데 말이야. 그냥 내가 먼저 연락할까? 아아... 새클턴국에서 던전이 발견된걸 알까? 그 정보가 상회에 도움이 되려나? 어차피 국가 기밀도 아니니 말해준다고 해서 잘못될 건 없겠지?' 내 시중을 들어주는 켈빈이 잠들어 있었기에 나는 혼자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런데, 너무 늦게까지 안 자고 있는 바람에 졸린 시간이 지나버린데다가 듀비일 때문에 마음이 심란했던터라 계속 뒤척거리게 될 뿐 잠이 오질 않았다. '끄으응... 이러다 밤 새겠네... 출근해서 거기서 조는 거 아냐?' 속으로 투덜거리며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다가 결국 잠에 못들자 내 자신에게 스스로 슬립 마법을 걸어 볼까, 아니면 그냥 밤 샐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허공에 있는 정령들의 재잘거림이 뚝 멈췄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 생활할때 정령들의 모습이나 그들의 재잘거림이 안 보이는 척, 안 들리는 척 무시하면서 지내지만 그래도 여전히 잘 보이고 잘 들리고 있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주위에 아무도 없이 나 혼자 있는 밤일때는 더더욱이나... 다른때는 그들의 재잘거림을 자장가삼아 잠에 들었는데, 오늘은 잠이 안오다 보니 그들의 재잘거림이 오히려 잠을 못자게 하는 방해 요소로 느껴저 조용히 시켜볼까 잠깐 고려해보기도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재잘거림이 뚝 멈추자 나는 의아해져서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이렇게 대화를 중단하는 경우는 딱 두가지였다. 그들이 무시 못하는 대단한 존재가 나타났거나, 아니면 그들의 흥미를 끄는 어떤 일이 생긴 경우가 바로 그것인데, 지금은 그들에게 긴장감이 흐르지 않고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듯 눈을 반짝이며 있는 걸 보니 후자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럴때는 잠시의 침묵 후에 마치 둑이 터져 물이 갑자기 쏟아지는 것 처럼 그들의 말이 마구 터져나오기 마련이었다. 과연 내 예상대로 금방 여기저기서 소란스러운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런데, 그들의 속삭임을 듣고 있자니 내가 그냥 무시할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꺄하, 이리로 오는 거야?] [어디? 어디쯤 왔어?] [어느 방으로 들어갈까?] [아앗, 이쪽으로 온다. 거의 다 왔어.] [여길 지나갈까?] [꺄아~ 여기로 왔어.] 실프인지 운디네인지 헷갈리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나는 내 방 창문쪽에서 달칵 하는 소리가 나는 걸 들을 수 있었다. 평소라면 못 듣고 지나갈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지금은 정령들의 소리를 들으려고 청각에 집중한 상황이라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때마침 정령들이 다시 침묵을 지켰고 말이다. [아앗, 열었다.] [여기로 들어오려나봐.] [꺄아~ 왠일이라니~] [여긴 이미 다른 사람이 있는데...] [자고 있나?] [안 자는 거 같은데? 아, 지금은 자나?] [깨워볼까나?] [네가 어떻게 깨워?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리지도 못할텐데...] 하급이나 중급 정령들은 내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다. 단지 정령과 계약한 정령술사라고만 생각할 뿐이라서 내가 그들을 똑바로 보고 말을 걸면 엄청 놀라워했다. 그러다가 아버지를 비롯한 정령왕들이 나타나면 더욱 더 놀라워 했지만... 자연게에 퍼져있는 정령들이 워낙 많다보니 그들에게 일일이 내 존재를 인식시키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라 나는 왠만해서는 그들을 못보는 척 못 듣는 척, 보통 사람처럼 행세하고 다녔다. 특별한 일일경우는 빼고 말이다. 그래서 지금 현재 내 침실에 있는 정령들 또한 나를 보통 사람들 중 하나로 여기고 있는 거였다. 정령들의 재잘거림을 뚫고 창문이 천천히 열리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곧 이어 누군가가 내 방으로 들어섰다. [와아앗, 들어왔어, 들어왔어~!] [꺄아~ 어떻게 해...] '왜 너희들이 더 난리냐?' 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면서 정령들의 재잘거림에 계속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내 침실에 침입한 간큰 인물이 누구인지, 또 그를 어떻게 할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도둑일까?] [그럴지도 몰라.] [아앗, 이쪽으로 온다.] [오옷, 침대로 다가가고 있어.] [도둑이 왜 침대로 다가가지?] [도독이 아닌가봐.] [그럼 누구야?] [아, 나 저 녀석 본적이 있어.] [나도, 나도. 저 녀석... 여기 사는데...] [으응, 그런거 같아. 밖에 있는 실프들이 저 녀석 여기서 사는 녀석이래.] [그럼 왜 들어왔지?] [침대에 있는 인간에게 볼 일이 있나봐.] 내 침실에 침입한 누군가가 이 저택에 사는 인물이라는 소리에 놀랐지만, 그가 침대로 다가 온다는 소리에 더 놀랐다. 바닥에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서 그런지, 아니면 침입자가 발소리를 안 나게 조심하고 있어서 그런지 발걸음 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지만, 정령들의 눈은 틀리지 않았을 거였다. 그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할지 볼 요량으로 나는 자는 척 눈을 감고 숨소리도 고르게 했다. 그러면서 엔다이론을 모습을 숨기게 한 채 불러놓고 그가 어떻게 나올지 기다렸다. 정령들의 재잘거림은 엔다이론이 나타난 뒤로 뚝 끊겨 버렸다. 사람들의 눈에는 안 보이지만, 같은 정령들의 눈에는 엔다이론이 뚜렷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였다. 눈을 감고 있는데다가, 엔다이론때문에 정령들의 대화도 뚝 끊겨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자 나는 왠지 모르게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괜히 엔다이론을 불렀나? 급할때 부를 걸 그랬나봐. 그렇다고 지금 돌려보내기도 그렇구... 에라...' 나는 잠결에 그러는 척 괜히 한번 뒤척여 엎드린채로 엔다이론에게 속삭였다. [엔다이론, 내 방에 침입한 자가 뭘 하고 있지?] 그러자 정말 뜻밖의 소리가 들려왔다. [침대 곁에 조용히 서서 해인님을 바라보고 있는데요?] [뭐, 뭐?] 엔다이론의 말이 머리에 인식되자 나는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날 뻔 했다. 간신히 그러는 것은 막았지만, 움찔 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 이번에도 꿈을 꾸다가 그런 것 처럼 일부러 '끄응...' 하는 신음을 내고는 다시 뒤척여 몸을 바로 누웠지만, 고개는 침입자쪽으로 돌릴 수가 없어 그 반대편을 고수했다. 그러자 잠시 후에 조용한 한숨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자가 침대에 앉은 듯 침대 한쪽이 푹 꺼지는게 느껴졌다. [엔다이론, 엔다이로온~ 지금 어떻게 됐어?] 내 다급한 외침에 엔다이론이 재빠르게 대꾸했다. [그 자가 해인님 옆에 앉았습니다. 아, 지금 손을 뻗는데요.] [소, 손? 어디로?] 하지만, 나는 엔다이론이 대답하기전에 그자의 손이 어디로 뻗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내 머리에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던 것이다. [으아아아~~ 도대체 누구야?]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내 질문에 엔다이론은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듀비라는 이름을 가진 블루 엘프군요.] [듀, 듀비?] 엔다이론의 대답에 내가 놀라 움찔 했지만, 마침 그때 듀비가 내 이마를 덮은 머리를 부드럽게 귀 뒤로 쓸어 넘겨주던 때라 듀비는 자신의 손길때문에 그런 줄 알고 황급히 손을 치웠다. [도대체 듀비가 왜....] [얼굴이 굳어있군요.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듯이 말입니다.] 엔다이론의 말에 나는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에구... 혹시 아까 고향에 가자는 이야기를 해서 그런가...' [아, 저 자가 슬그머니 손을 뻗는 군요.] 내가 잠시 동안 움직이지 않고 계속 숨을 고르게 내쉬며 자는 척을 하자 듀비가 내가 완전히 잠든 줄 알았던 모양이다. 머리카락에 다시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기분이 좋아져서 나는 나도모르게 표정이 풀어졌는지, 듀비의 손길이 좀 더 대담해졌다. 머리카락쪽에서만 움직이던 손길이 얼굴쪽으로 넘어와 이마와 뺨을 부드럽게 쓸어 내렸던 것이다. 다시금 한숨소리가 들리고는 그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향이라..." 그의 목소리에는 그리움과 슬픔이 짙게 담겨 있었기에, 그 한마디에 내 가슴이 뭉클해질 지경이었다. '아니, 그러면서 왜 안간다고 하는 거야? 사람 헷갈리게... 새클턴 정글에 가면 기회를 봐서 돌려보내줄 수 있을텐데...' 이해할 수 없는 듀비의 행동에 나는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어깨를 잡고 해골이 덜그럭댈때까지 흔들어주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자는 척 한것도 있고 해서 잠자코 있었다. 평소에는 잘 드러내지 않는 그의 심정을 들을 수 있는 기회인 것도 같았던 것이다. 평소라면 이렇게 감정이 가득한 음성으로 말하지는 않을테니까 말이다. 내 예상이 맞은 듯 듀비의 손길이 다시 머리카락쪽에서 느껴지더니 다시금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간다면... 그 곳에 남아야 할지도.... 지금은... 조금만 더 당신 곁에 있었으면... 이러한 내 감정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알때까지만이라도..." 낮게 띄엄띄엄 속삭이는 듀비의 말이 완전히 끊어지자 나는 그에게 들키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그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모양이었다. 듀비가 여기서 좀더 있고 싶어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어차피 고향이 지금 당장 어디 딴 세상으로 이사를 갈 것도 아니니 조금더 다른 환경을 구경하다가 돌아가도 될 터였다. 그런데 나는 이 한숨을 다 내뱉기도 전에 멈추고 말았다. 듀비가 천천히 몸을 수그려 내 이마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던 것이다. '헉스...' 따뜻한 입술이 이마에서 멀어지자 갑자기 머리가 추워지는 것만 같았다. 생각 같아서는 시트를 머리위로 올려 추위를 타는 머리를 감싸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다행이도 듀비는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멀어져 가느라 딱딱하게 굳은 날 눈치 못 챘을 것이다. [그가 가고 있는데요.] 엔다이론의 목소리에 나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물었다. [...완전히 갔어?] [아직... 잠시만요. 창문을 넘어가는군요. 흠, 창문을 완전히 닫고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엔다이론의 말이 끝나고도 한참을 침대에 웅크리고 있던 나는 벌떡 일어나 엔다이론을 침대 위로 불러올려 그의 목덜미에 붉어진 얼굴을 파묻었다. "우갸갸갸... 우와, 우와, 우와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 제 32화 삼국회담 (7) 결국, 그날 나는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엔다이론을 끌어 안고 생각하다 하다 지쳐 나도 모르게 잠이 얼핏 들었는가 싶었지만, 채 깊이 잠에 빠져들기도 전에 지난 밤 푹 자서 쌩쌩한 켈빈이 활기찬 발걸음으로 들어와 평소의 쾌활한 어조로 나를 깨웠던 것이다. "백작니이임~, 이제 일어나셔야 해요." "끄으응...." 켈빈이 창문에 드리워진 두터운 커튼을 열어 제끼자 밝은 햇살이 쏟아져들어와 잠을 못자 피곤한 내 얼굴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평소라면 기분 좋게 느꼈을 햇볓이지만, 잠을 못자 반쯤은 정신이 나간 오늘 아침에는 따겁고 귀찮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커다란 베게에 얼굴을 파묻고 시트를 뒤집어 씌웠지만, 켈빈이 얼른 다가와 시트를 젖혔다. "일어나셔야 해요. 출근 하셔야지요." "으으윽..." 오늘 하루 결근하면 어떨까... 싶은 유혹이 너무 강렬했다. 어차피 가봤자 할 일도 별로 없어서 한가할텐데 말이다. 오늘 하루 결근한다고 해도 일에 크게 지장있는 것도 아니고, 아마 엘리노어경은 환영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엄격한 대한민국의 군인을 아버지로 두고 18년간 자란 덕에 몸에 배인 범생이 기질이 엄청 달콤한 결근의 유혹을 사정없이 물리쳐버렸다. 요즘 부모님들은 자식이 감기가 심하거나 아플 경우에는 쉽게 조퇴나 아니면 결석을 시켜 주시지만, 한국에 계신 내 아버지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팔다리가 부러져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거나, 너무 아파서 정신을 잃을 정도가 아니라면 학교에 결석하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덕분에 나도 몸을 운신하기도 힘들지 않는 이상 직장에 나가는 건 당연한 거라 여기고 있었기에 켈빈의 '출근'이란 말에 내 몸은 자동적으로 몸을 일으켜 어기적 거리며 넓은 침대를 빠져 나갔다. 입으로는 연신 투덜거리면서 말이다. 켈빈히 준비해놓은, 세숫물이 있는 곳까지 가는 몇 걸음 동안에도 몇번이나 잠에 들었다가 깼다를 반복할 정도였다. 거기다가 켈빈이 준비해놓은 따뜻한 세숫물은 호시탐탐 날 지배하려 노리고 있는 잠의 활동을 더욱 더 부채질 해버렸다. "으으윽... 안돼겠어. 운디네, 이 물좀 아주 차가운 걸로 바꿔줘." 보통때 왠만하면 정령들에게 부탁하는 대신 켈빈에게 - 켈빈도 그러는 걸 바랬기에 - 시중을 들게 했지만, 오늘은 켈빈에게 찬물을 가져오라고 했다간 그가 나갔다 오는 동안 잠들 거 같았기에 운디네를 불렀던 것이다. 세수대야에 운디네가 모습을 드러낸다 싶었더니만 김을 모락모락 피워올리던 물이 살얼음이라도 끼인 것 처럼 엄청나게 차가워졌다. 그 물에다 얼굴을 푹 담그고 정신을 깨려고 했는데, 그만 거기서 잠들어버렸다. 어차피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었기에 숨이 차서 살려고 정신이 번쩍 들 일이 없었던 것이다. 얼굴이 차가워진것을 빼면 잠이 날 지배하는데 방해할만할 요소가 없었기에 세수대야에 얼굴을 박고 잠이 들었던 나는 잠시 후에 켈빈이 기겁해서 날 들어올릴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우아아악~~ 백작님, 정신 차리세요!!" 켈빈의 놀란 고함소리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듀비가 허겁지겁 들어왔고, 얼굴이 온통 젖은 채 찬물 때문에 파랗게 질린 내 얼굴을 보고 익사하기 일보직전인줄 착각하고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내 뺨을 인정사정없이 때려버렸다. 짜악, 짜아악~ "정신 차려요, 해인." 덕분에 정신이 다시 들기는 했다. 제대로 눈을 못 뜨자 다시 때리려고 손을 치켜드는 듀비 덕분에 더욱더 빨리 몸을 일으킬수 있었고 말이다. "허걱, 나 괜찮아요, 듀비." "정말 괜찮은 겁니까?" 의심스럽다는 듀비의 시선에 나는 얼얼한 양뺨을 부여잡고 울상을 지었다. "단지 졸려서 잠깐 졸았던 것 뿐이라고요." 그러자 여차하면 다시 뺨을 때릴 것 같던 듀비의 기세가 누그러들었다. "그럼 얼굴은 왜 그렇게 젖은 겁니까?" "그, 그게..." 차마 세숫물에 얼굴을 담그고 자고 있었단 말을 할 수가 없어 더듬거리는데 켈빈이 냉큼 끼어들었다. "큰일날 뻔 하셨어요. 하마터면 세숫물에 익사하실 뻔 했다니까요." 그러자 다시 의심스러운 듀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괜찮은 거에요." 정말 억울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물에 익사할 확률은 제로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걸 이들에게 이해시키기는 어려운 터라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함으로써 그들을 안심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듀비는 안심이 안되는지 밖에서 기다리는 대신 아예 침실 안에서 내 행동을 주시하다가 내가 조느라 비틀거리면 와서 부축하며 물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정말 괜찮은 거예요. 단지... 졸린 것... 후아아암... 으윽..." 그러한 작은 해프닝 덕에 잠을 못 자고 듀비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라 고민고민하던 나는 당황하지 않고 평소대로 대할 수 있었다. 하긴, 조느라고 아무 생각이 없었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 그날 왕성에 도착할때까지 괜찮냐는 말을 수백번도 더 들은 것 같았지만, 짜증이 일어나지 않았다. 평소에는 절대 거르지 않던 - 자느라 못 먹은 건 제외하고 - 아침도 못 먹고, 말 타고 출근도 못할 거 같아서 마차를 타고 자면서 출근한 덕에 다른 기사들의 비웃음을 당했다 하더라도 정신이 없었기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되신 겁니까? 얼굴이 말이 아니시군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겨우 겨우 리건의 집무실에 도착하자 쌩쌩한 얼굴로 일을 하고 있던 엘리노어경이 그 꽃미소년 얼굴에 차가운 비웃음을 담고 예의바르게 물어왔다. "아아, 잠을 못잤어요." 집무실에 있던 소파에 쓰러지듯 드러누우며 대꾸하자 엘리노어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럴만도 하군요. 악명 높은 새클턴 정글에 가시게 되었으니까요." 그는 내가 가는걸로 완전히 결정된 것 처럼 말했다. 하긴, 거의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지만... 날 안 좋게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살아 돌아오는 게 불가능 하다는 곳으로 가게 되는 걸 좋아할 만큼 날 싫어하는 건 아니었던지 그의 차가운 얼굴에 약간의 안됐다는 기색이 언듯 비쳤다. 물론, 졸려서 제정신이 아니었던 내가 제대로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에구에구, 미안하지만 단장님이 오실때 깨워주실래요? 너무 졸려서..." 나는 그 이야기만 겨우 하고 곧바로 소파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지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고개를 들어야 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엘리노어경처럼 쌩쌩한 리건이 의아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끄응... 졸려서요... 나 자면 안될까요?" 그러자 그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졸리면 그냥 집에서 자지 뭐하러 출근했냐?" "아으으... 성실을 철칙으로 삼으시는 아버지 때문에..." 잠결에 정직한 대답을 하던 나는 리건의 어이없다는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네... 아버지가 성실하다고?" "에... 뭐... 가끔은..." 그렇게 얼버무린 나는 다시 헤롱거리며 소파 쿠션들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그러자 리건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다시 흔들었다. "해인아, 졸리면 집으로 가." "갈 정신이 없을 거 같아요오... 여기서 좀 자면 안돼요?" "나도 그렇게 해주고 싶지만, 오늘은 부단장하고 몇몇 로열 기사들하고 의논할 일이 좀 있어서 그들이 수시로 들락날락 할건데? 아마 네가 불편할 거다." "끄으응..." 리건의 말이 맞았기에 나는 힘겹게 휘청거리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결근할걸, 걸, 걸... 속으로 중얼거리며 말이다. 내가 어기적 거리자 리건이 한 손으로 날 잡아 지탱해더니 엘리노어경을 불렀다. "엘리노어경, 엠브로스 백작을 집에까지 대려다주겠나?" "네." 엄청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리건의 말을 거역 못하는 그가 순순히 대답하자 나는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저 혼자 갈 수 있습니다. 그럼, 내일 뵙죠." 정신을 차린 척 몸을 똑바로 세운 나는 리건과 엘리노어경에게 인사를 하고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흔들며 왕실 출입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대신 왕성 뒤쪽 정원으로 향했다. 그 곳에는 여왕만을 위한 넓다란 정원이 있었다. 그녀의 산책 코스였기에 그 곳을 지키는 왕실 경비대와 왕성 수호 기사단이 정원 울타리 쪽에 띄엄 띄엄 있을 뿐 안쪽에는 정원사나 있을까, 인적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딱히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는 건 아니었지만, 누가 경비대가 두 눈을 부릅뜨고 지키는데다가 여왕이 가끔 조용히 산책을 즐기는 곳에 수시로 들날날락 거리겠는가? 나처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적이 없는 곳을 찾는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원래는 나도 이 곳에 여왕이 좋아하는 정원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직접 와본적은 처음이었다. 이 곳을 찾은 이유는 단지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고 엔다이론을 불러 타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저택으로 보내 날 데리러 오게 하던가, 아니면 왕실 기사단 마굿간에서 말을 빌려서 타고가는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택에서 날 데리러 올때까지 왕실 기사단용 휴게실에서 잘 수도 있었지만, 쉽게 기사들이 들날날락 하는 곳에서 자고 싶지 않았고, 이렇게 정신 없는 상황에서 말이나 제대로 탈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기에 제일 안전한게 엔다이론을 부르는 거였다. 엔다이론이라면 내가 자던말던 사람들 눈에 띄이지 않게 나를 안전히 내 방 침실로 데려다 놓을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일찍 돌아갈 줄 알았다면 아까 마차를 돌려보내지 말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라고 했던가?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들어 살금 살금 들어오는 잠을 쫓아버리고 병사들의 시선을 피해 정원으로 살며시 숨어 들어갔다. 그들의 기강이 무너진 건 아니었지만, 사실 사람들이 들어갈 엄두도 안 내는 곳이었으니 아무래도 경계가 다른 곳 처럼 철두철미하지 않았기에 나 정도도 몰래 숨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평소에 간 큰 시종이나 시녀들도 편안히 쉬기 위해 종종 애용할지도 몰랐다. 어느 정도 깊숙하게 들어와 병사들의 거리를 대충 가늠해보고 이정도면 불러도 되겠다고 생각 하는데 그 순간 내 눈에 넓다란 인공 호수가 들어왔다. 맑은 물이 잔잔하게 출렁이는 꽤나 넓은 호수 주변에는 따뜻한 봄을 반기듯 이제 파릇 파릇하게 새 순과 새싹이 많이 돋아 있었고, 재빠른 몇몇 녀석들은 꽃봉오리까지 보이고 있었다. '하, 이제 완연한 봄이로구나.' 졸려서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와중에도 그 생각을 한번 하는 나는 잠에 시달리며 엔다이론을 불러서 올라타고 집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다시 호수가 눈이 들어오자 나는 생각을 바꿨다. '그렇군. 집에만 좋은 침대가 있는 건 아니잖아?' 나는 반쯤 감긴 눈으로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엔다이론을 타고 집으로 향하는 대신 호수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봄이 따뜻하다고는 해도 수영을 하기에는 물이 차가운 계절이었지만, 엔다이론이 나를 보호 해주는 덕분인지 기분 좋은 시원함은 느꼈지만 춥지는 않았다. 호수 깊이 가라앉아 엔다이론의 털 속에 머리를 파묻고는 휘둥그레 날 바라보는 운디네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기분좋게 눈을 감았다. '아아, 물 속에 들어와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구나.' ===================================================================== 음음, 내일 모래가 설 연휴지요. 저도 설을 세러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설 연휴 기간에 아무래도 연재를 못할 듯 싶은데요... ^^;; 아핫핫핫... 내일은 올릴 겁니다. 아.마.도... ====================================================== 제 33화 어어어...? (1) 기분 좋은 잠자리 속(?)에서 달콤한 잠을 맛나게 즐기던 날 방해한건 하루 삼시세끼 꼬박꼬박 챙기려드는 성실한 위장 때문이었다. 꼬르르륵~~ 얼마나 요동을 쳐대는지 그 끈질긴 잠 조차 위장의 요동에는 한발 양보를 해서 나는 정말 뜨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눈꺼플을 들어 올렸다. 슬그머니 호수 위로 올라와 해를 가늠해보니 대충 정오가 가까워진 듯 했다. [쳇... 이거 대충 세시간 잤나?] 시각을 계산해보며 투덜거리자 이에 반항하듯 위가 다시 한번 요동쳤다. 꾸르르륵~~ 이 녀석이 이렇게 요동을 치는 것도 이해가 가는 것이, 출근 전에 너무 조는 바람에 우유 한 잔도 못 마시고 빈 속으로 출근했던 것이다. 그때까지는 잠이 배고픔을 꺾어놓고 있었는데, 점심때라는 지원군에 의해 힘을 얻은 배고픔이 졸려움에게 역전승 해버린 모양이었다. 꼬르르륵~~ 마치 그렇다는 듯 다시 한번 아우성치는 위 덕분에 나는 쏘옥 들어간 것만 같은 배를 움켜쥐고 엔다이론 위에 올라탔다. [배고파... 졸립고 배고프다. 여기에 추위까지 탄다면 완전 거지중의 상거지겠군.] 다행이 호수 주위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기에 나는 마음 놓고 허공으로 솟아 올랐다. 어느정도 정신을 차린 터라 식사를 하기 위해 집으로까지 갈 필요 없이 기사단 식당에서 제공되는 식사를 해도 괜찮았지만, 사실 먹고 또 잘 생각이었기에 일부로 집으로 향한 거였다. 게다가 리건에게 집으로 가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아놓은 상태였으니 먹고 여기서 뒹굴 대는 것 보다는 집에서 편히 있는게 더 좋지 않겠는가? 내 저택의 높은 담은 그냥 훌쩍 뛰어넘어 저택의 멋드러진 정문에 내려서서 당당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지나가던 하녀들이 놀란 표정으로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게 보였다. 그런 그녀들의 시선을 뒤로한채 빠른 걸음으로 식당안에 들어서는데, 운이 좋은건지 나 보다도 먼저 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푸짐한 식사를 즐기는 존재들이 있었다. 둘 모두 내가 잘 아는 자들이었다. 한명은 내가 들어서는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다 나를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다른 한명은 누가 들어오건 말건 상관 없이 식사에 계속 열중했다. "일찍 오셨군요. 어떻게 되신 겁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자는 듀비었다. 나는 그에게 미소를 지은채 빠른 걸음으로 커다란 식탁으로 다가가 그 위에 올려진, 달콤하게 보이는 빵을 덥썩 집어 한 입 크게 베어물며 대꾸했다. "피곤해서요. 오늘 조퇴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 녀석은 어떻게 된 거에요?" 질문은 듀비에게 했지만, 시선은 내 옆에 천연덕스럽게 앉아서 자신의 눈 앞에 있던 스테이크에 정신을 집중하는 잭슨의 뺨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야, 내가 왔는데 쳐다보지도 않냐? 앙? 그게 그렇게 맛있어?"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잭슨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먹느라 바빴다. "말 시키지 마라. 바쁘시다." 귀찮다는 듯 대꾸하고 우유를 원샷하는 잭슨을 어이없이 바라보는데 듀비가 설명해줬다. "방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오자마자 식사하기를 원하더군요. 아마 아침을 못 먹은 듯 싶습니다." "그래요? 뭐, 덕분에 나도 오자마자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네요. 나도 아침을 못 먹어서 배가 고팠거든요. 아, 듀비도 마저 드세요." 내가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앉으며 식당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내 몫의 음식을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아침 뿐만이 아니야." 내가 잭슨의 옆자리에 앉자 잭슨은 불만에 찬 표정으로 투덜댔다. 그 와중에서도 손은 부지런히 입으로 음식물을 나르고 있었다. "식사를 제대로 한지가 언제인지도 기억이 안 나." "급했나보네? 무슨 일인데?" "네가 출발하기 전에 도착해야 했거든." "출발? 어라? 내가 곧 출장을 갈지도 모른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막 구운 듯 따끈따끈한 빵에 버터와 땅콩 잼을 듬뿍 바르던 나는 의아한 듯 잭슨을 바라보았다. 내가 곧 출장을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건 듀비와 첼릿만 알고 있었고, 그것도 확률이 높다는 거였지 확실하게 정해진 게 아니었다. 게다가 출장 갈 일도 국가 기밀은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비밀로 취급되고 있는 터라 기사단 내에서도 몇몇 사람들만 알고 있는 일이었다. "다 먹고 나서 설명해줄게. 잠시만 기다려." "흐음...." 어차피 상회에서 나에게 급한 볼일이 있어서 이렇게 잭슨을 급파한걸 터였다. 그러니 잠시 후면 자연스레 모든 상황을 잭슨이 설명해줄 터, 성급히 재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 나는 의아함을 접고 시종이 막 가지고 온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프로 관심을 돌렸다. 잠시 후 내가 일찍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듯한 이브스햄과 그녀의 딸인 에르가 황급히 식당으로 달려왔기에 내가 점심을 끝낼쯔음에는 네명 모두가 다 같이 식사를 끝마치고 있었다. 원래 예정은 식사를 끝내고 달콤한 낮잠을 즐기는 거였지만, 나 만큼이나 피로해 보이는 잭슨이 조용히 면담할 것을 권했고, 나 또한 그가 온 이유가 궁금했기에 다른 이들은 모두 물리친 채 듀비와 잭슨을 데리고 내 서재로 향했다.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인데 급하게 온 거야? 너 며칠동안 식사를 제대로 하기는 커녕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또 달려온거 맞지?" 아까는 그가 음식을 먹는데 바빴기에 알아채지 못했지만, 서재의 푹신한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하는 잭슨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니 얼굴 밑에 검은 그늘이 졌고, 예전의 윤이 자르르 흐르고 티 하나 없는 피부는 윤기를 잃고 푸석푸석해진데다가 눈이 퀭했다. "말도 마. 언제 네가 출발할지 모르는 일이라 시간 맞추려고 고생했다. 후아아암~~ 도대체 내가 이 무슨 고생이냐? 예전에는 이렇게 급하게 뛰어다닐 일이 없었는데... 에구구 삭신이야."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고 덕분에 흘러나온 눈물을 닦으며 잭슨은 챙겨들고 온 꽤죄죄한 가방에서 낯익은 상자를 꺼냈다. "자, 나는 잘테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회장님께 들어라. 나도 사실 네가 출발하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는 것만 알지 잘은 몰라." 그가 꺼내서 자신의 앞 탁자 위에 올려 놓은 것은 마법의 통신 구슬이었다. "나 원...." 잭슨은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내가 구슬을 꺼내기도 전에 소파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기에 뭐라 말은 못하고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쳇, 좋겠다.' 하지만 피곤함으로 치면 잭슨이 나보다도 몇배는 더 피곤하다는 것이 뻔했기에 나는 잭슨을 깨우는 대신 마법 통신 구슬에 집중했다. 예전에 한번 사용해본 적이 있었기에 작동 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잭슨이 통신 구슬을 나에게 배달하는게 이번이 두번째네. 후후후, 이러다가 아예 나에게 통신 배달 전용이 되는건 아닐까나?' 아무래도 잭슨은 상회에 있는 이들 중 엠브로스 가문 사람들에게 얼굴을 익힌 두 인물 중 한명이니 - 다른 한명은 듀비 - 나에게 연락하려 할때 그가 움직이는 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구슬이 작동되고 낯선 목소리가 들리기에 상회 내에서 가지고 있는 내 직함을 말한뒤 레이언과 크리스를 불러달라고 했다. [이야, 다행이 네가 출발하기 전에 잭슨이 도착했나보네.] 레이언은 여전히 쾌활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다행이라고 할 것도 없어. 내가 출장가는 것도 아직 확실하게 결정난 것도 아니란 말야. 그런데 내가 출장갈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뭐야? 출장가는게 결정나지도 않았다고? 어, 그럼 넌 아직 모르는 건가?] 당혹감이 배어있는 레이언의 목소리에 나는 시큰둥하니 대꾸했다. "뭘 몰라?" 그러자 이번에는 예의 침착한 크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연락한건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새클턴 국에 있는 악명이 자자한 정글에서 새로운 던전이 발견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야. 우리 예상으로는 너희 국가에서도 알고 그 곳에 사람들을 보낼 준비를 했을 듯 했는데... 우리가 너무 앞서 나간건가?] 크리스의 설명에 나는 역시란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호, 그 정보를 너희도 알고 있었단 말이야? 우와, 여기보다 속도가 빠르잖아? 이쪽에는 어제 저녁에 도착한 듯 한데." [그래? 우리는 늦었는줄 알고 잭슨을 엄청 재촉했었는데, 잭슨만 불쌍하게 됐군.] 웃음기 어린 레이언의 말에 나도 같이 피식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에게 이 구슬 넘겨주자마자 소파에 드러누웠다. 엄청 피곤했나봐. 그런데 무슨 일이야? 설마, 상회에서도 이번에 발견되었다는 던전에 관심이 있는거야? 상회에서도 던전 발굴 같은걸 하나?" 그럴 가능성이 낮은 건 아니라고 생각하며 물었다. 사실, 위험도가 높긴 했지만 발굴에 성공하여 뭔가 괜찮은걸 건지기라도 한다면 이익을 많이 낼 수 있는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곧바로 들려온 크리스는 이런 내 예상을 부인했다. [아니야. 우리는 그런 곳에 별로 관심 없어. 뭐, 상회에 소속된 마법사들이라면 혹할지 모르겠지만, 상회가 지향하는쪽은 그 분야가 아니니까.] "그럼?" 설마 그 정보가 사실인지 아닌지 나에게 확인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그것때문에 잭슨을 닥달해여기까지 달려오게 할 필요가 있을것 같지는 않았다. 그게 뭐 상회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정보도 아닌 것 같으니 말이다. [사실은, 북드워프 마을에서 요청이 들어왔어. 새클턴 정글에 탐사대를 파견할때 혹시 마을 드워프를 끼워줄 수 있겠냐고.] "에? 드워프들도 던전에 관심을 가지나?" 그런데는 마법사나 학자들, 아니면 그 곳에 있을지 모르는 보물을 노리는 사람들 뿐일거라고 생각 했는데 말이다. '하긴, 드워프들이 그 곳에 있는 보물들을 노릴수도 있겠군.' 나름대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크리스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이번에 던전을 발견한 모험가들 틈에 북드워프 마을의 드워프도 끼어 있었던 모양이야. 그런데 그 드워프의 말로는 그 던전이 드워프가 만든 것 같다고 하더라고. 던전 주위에 쳐진 결계 때문에 자세하게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다시한번 자세하게 살펴보고 싶다고 도와줄 수 없겠냐고 상회에 물어왔어.] "헤에..." 북드워프들이 다른 종족과는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 상회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뭐, 아주 가아아끔은 특별한 손님들이 찾아오기는 한다지만... 그건 아주 가아아아끔 일이고 - 거의 고립 되다시피 살아가지만, 견문을 넓히거나 아니면 작품 구상을 위해 마을을 떠나 여행을 하는 드워프들도 종종 있다고 들었다. 상회와 교류를 시작한 후 부터 인간 세상을 둘러보고 싶은 경우에는 상회측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더니만, 아마 상회측의 도움으로 여행자들 틈에 끼었다가 운 좋게 새클턴 정글에서 던전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웬만한데라면 그냥 우리측에서 모험가들을 소개시켜주는 선에서 끝냈겠지만, 새클턴 정글에 있다니까 웬만한 곳이 아니게더라고. 그쯤에서 아마 이 정보가 마법사 길드쪽에서 삼국으로 들어갔을 거고 그러면 삼국에서 탐색대를 파견하지 않을까 여긴거지. 벨레니 국에서 파견될 인물등 중에는 네가 들어갈 확률이 높고 말야.] 중앙 대륙에 있는 삼국, 그러니까 마르타국 녹스국 벨레니국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덕분에 여러가지 협정 조약을 맺고 있는데 그 중 '마법사 길드 협력 조약'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삼국이 각 나라의 마법의 부흥 발전을 위하여 마법 길드와 긴밀한 협력체계를 구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사실은 마법사 길드 본부가 있는 마르타국에서 마법 길드를 자기들의 나라에 흡수할까봐 염려한 녹스국과 벨레니국이 마찬가지 이유로 걱정하는 마법사 길드와 손을 잡고 마르타국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였다. 그로써 벨레니국과 녹스국은 마법 길드가 마르타국에 복속되는 걸 막을 수 있어서 좋았고, 마법 길드도 계속 국가와는 상관 없이 독립된 단체로써 활동할 수 있어서 좋았다. 마르타국에만 안 좋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체결된 조약에는 마법사 길드에서 정한, 엄청 위험하지만 탐험해볼 가치가 높은 던전을 발굴할때 삼국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이건 삼국 중 하나나 아니면 그 외 국가에서 던전이 발견된 경우, 그 국가에서만 혼자 독식하는 걸 방지하고 - 외교적 압박이나 회유등을 통해서 - 같이 공유하자, 뭐 이런 취지에서 만들어진 거였다. 이에 대항해서 다른 대륙에 있는 나라들도 협력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지만, 그라함 대륙에서 강대국이라고는 전부 중앙대륙이나 남대륙에 있는 국가들이었으니 - 서대륙은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돼서 혼란기, 북대륙은 원래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국가 - 새클턴 국에 중앙 대륙의 세 나라가 발굴하러 간다는 건 어려울 게 없었다. 단지 문제라면 남대륙의 라센국과 왈그린 국이었다. 힘도 비등한 그들이 참여하겠다고 하면 막을 명분이 없었던 터라, 삼국은 그들에게 정보가 가기전 잽싸게 탐험대를 출발시키려 했던 것이다. 혹여 나중에 알게되어 참여한다고 해도 먼저 가서 뭔가라도 발견한뒤에 그들이 도착한다면 삼국이 먼저 발견한 것에 대한 권한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키볼트 백작이 전갈을 받자마자 나라의 삼대 기둥을 부르는 한편 삼국 회담에 보낼 자들을 물색하는 등의 부산을 떨었던 것이다. 남대륙과 중앙대륙과도 협약이 있기는 했지만, 그 협약중에 던전이 발견되었다는 걸 알려줘야 하는 의무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일련의 설명들을 크리스에게 듣고 앉아 있었다. 놀라움에 입을 떠억 벌린채 말이다. "히야, 나야 이제 중앙에 진출한지 얼마 안되었다고 하지만, 너는 도대체 그런걸 어떻게 알고 있었냐?" [쯧쯧, 내가 상회를 운영하는 경력이 언제인데 아직까지도 이러한걸 모르겠냐? 모름지가 상회 운영에 정보는 당연한 거야. 게다가 우리 상회같은 경우 더더욱 그렇지. 가끔 노예들을 데리고 피신할때가 있거든. 타국으로 피신할 경우 나라간 조약에 대해 빠삭해야 하는건 필수 아니겠어? 혹시 죄인 체포 협력 조약이라도 맺고 있는 나라에 갔다가는 국경 넘느라 고생한게 말짱 도루묵이 되니까 말야.] "오오, 그렇군. 존경스러워." 레이언 같으면 내가 이런말을 할 경우 잘난척을 했을텐데, 크리스는 좋아하는 기색 하나 없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여행자들 틈에 있었던 드워프의 말에 의하면 그 모험가들이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탐험하기 불가능하니까 그냥 마법사 길드에 신고하고 약간의 포상금이나 받을 거라고 하더라구. 그래서 혹 너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급히 연락한거지. 가능해?] "단언은 못하겠지만,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그런데 내가 거기 가게될건 어떻게 알았어? 안 가면 어쩌려구?" [네가 갈 확률이 높잖아. 네 가문은 아직 세력을 크게 키우지 못한데다가 너는 실력이 높은 정령사니까. 너처럼 위험한데 보내기 쉬운 케이스가 네 나라에 과연 몇명이나 있을까?] "그, 그냐? 쩝..." 위험한데 보내기 쉬운 케이스라니, 알고는 있었지만 크리스에게 직설적으로 들으니 허탈했다. [어쨌든, 내 예상으로는 넌 분명히 마법사 길드 지원자들중에 끼어들거야. 아직 결정이 안 났다면 이삼일내로 나겠지. 출발을 앞두고 있다면 중간에서 합류시키려고 했는데, 며칠 여유가 있는 것 같으니 램버트를 너에게 보내마. 그래도 되겠지?] "램버트?" [던전을 발견한 북드워프 말이야.] "아아, 뭐 이쪽으로 보내는 건 상관 없는데, 던전을 발견한 모험가들 틈에 끼어 있었다면 따로 내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었을텐데. 길 안내를 위해서 던전을 발견한 모험가들도 데리고 갈 거라고 들었거든." [물론 그렇겠지. 그런데 램버트가 정글을 나오자마자 그 모험가들과 헤어져서 마을로 돌아가 우리측에 연락을 한 거거든. 마법사 길드에서 데리고 가려는건 램버트가 빠진 나머지 모험가들 이겠지. 사실 그쪽도 이종족을 데리고 가는 것 보다는 같은 사람을 데리고 가는게 더 편할테고.] "그럼 그 드워프는 어디 있는데?" [마르타국에. 우리에게 연락을 하고 엔더비산맥을 따라 쭈욱 내려와 마르타국에 보낸 상회 사람과 벌써 접촉을 해서 벨레니국쪽으로 출발했다더군.] "그랬구나. 어, 그래도 여기에 도착하는데 꽤 걸리지 않을까?" [그건 괜찮아. 공간이동 시킬거거든. 이럴때는 우리가 엘프랑 거래를 한다는게 좋단 말이야. 높을 클래스의 마법 스크로를 쉽게 쉽게 쓸 수 있으니까. 아마 며칠안에 너희 나라에 도착할 거라고 봐.] 이번에는 레이언이 끼어들어서 대답했다. 그 동안 크리스옆에 입다물고 가만히 있는게 심심했나보다. "그렇구나. 알았어. 드워프 한 명이 찾아올 거라고 이야기를 해놓도록 하지." [그래. 그럼 출발 사항이 결정되거나 램버트가 도착하면 다시 연락해줘.] "그러도록 할게." 그렇게 잭슨을 만나 크리스, 레이언과 연락을 취한 날로부터 이틀이 지난날 아침, 평소처럼 출근해서 하루 일과를 보내고 있는 나를 리건이 가만히 불렀다. "해인아." 엘리노어경을 물리치고 단 둘이 마주한 상황에서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으면 좋았으련만 그는 태연한 얼굴로 용건을 말했다. "새클턴국에 같이 좀 가자." 악명이 높다는 곳에 가는 것이 마치 옆집에 놀러가자는 것처럼 말하는 거였다. 물론, 그는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존재이긴 했지만 말이다. 어차피 크리스도 내가 갈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그 전에 리건과의 대화를 통해 예상하고 있었던 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지만, 대신 리건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같이'요?" "그래, '같이'." "누구랑 '같이'요?" "나." "헤에, 같이 가려구요?" "그래, 오랜만에 놀러 가볼 생각이다." '노, 놀러...' 아무리 리건이 보통 존재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가 그렇게말하니까 그 악명 높다는 새클턴 국이 마치 성 밖의 숲처럼 느껴졌다. 그래 속으로 그렇게 여겨도 되나 황당해하던 나는 곧 떠오른 생각에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물어볼게 있는데..." "뭔데?" "이번에 갈때 나 혼자 가야해요? 내가 누구 좀 데리고 가면 안될까요?" "데리고 갈 사람이 있나보지? 누굴 데려가던 그건 너 마음대로 해도 좋아. 뭐, 다른 사람들도 시종 겸 호위를 한둘씩은 데리고 갈테니까. 지나치게 많이 데리고 가지만 않으면 돼." "다행이네요. 그런데 기사단에서는 누구누구 가요?" "너하고 나하고 또 한사람." "세명?" "기사단에서만. 국방부에서는 몇명을 차출하는지는 아직 몰라. 외교부쪽에서 공문이 오길 최소한 로얄기사 한명이 포함된 3명 이상을 차출해달라고 부탁했으니까." "그, 그래서 딱 3명입니까?" "어차피 따라가서 상황만 파악해서 보고만 하면 되니까. 많이 갈 필요도 없잖아? 3명도 많은 거지." "그, 그렇군요." 아, 저 오만함이란... 그런데 웃기게도 다른 사람 같으면 눈쌀이 찌푸려졌을 모습이 리건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가 드래곤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리건에게서는 그가 말하는 모든걸 당연하게 여기게 만드는 분위기랄까? 하여간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런 기운이 풍겨나왔다. "그래, 언제 출발합니까?" "모래 아침에 집합이야. 데리고 갈 자가 있다면 내일까지는 준비를 시켜두는게 좋겠지. 육체적인 준비든 마음의 준비든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마음의 준비'라는 단어에 마치 성 밖에 있는 가까운 숲으로 놀러가는 것처럼 가볍게 생각하던 머리가 약간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거기에 리건이 말꼬리를 느리자 나는 자연스레 그의 뒷말에 집중했다. "한가지 확실하게 해둘 것이 있어. 네가 누구를 데리고 가던 상관은 않겠다만, 혹시 그 곳에 가서 그가 위험에 처할 경우 넌 네 힘으로 그를 도와야 할거야." 그에 약간 긴장하고 그의 뒷말에 집중하던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거야 당연한거 아닌가요? 같이 가는 일행인데 안 돕는게 이상한거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런데 만약 네 힘으로도 그를 돕는게 어려울 경우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말아라. 이게 내가 하고싶은 말이야." "예?" 긴장을 풀어서 그런가, 나는 선듯 그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리건이 평소 태연한 표정이 아닌, 단호한 눈빛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물론, 일행이 위험에 처했는데 가만히 있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돕는 건 벨레니국의 왕실 기사단의 서열 제 일위 기사의 능력 안에서야. 혹여, 어떤 변수가 발생해서 네가 네 능력으로도 벗어나지 못할 위험에 처한다면 - 설마 그럴리가 없다고 여겨지고, 그렇다 해도 네 정령왕이 나설테니 내가 개입할 여지가 있을까마는 - 드래곤으로써의 내 능력으로 널 도울것이다. 그러나 드래곤으로써의 내 도움을 받을 수 있는건 너뿐이라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 리건의 말에 나는 속으로 움찔 했다. 물론, 일부러 어떠한 위험이 닥치면 드래곤인 그의 힘을 빌려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은연중에 '그가 도와주겠거니...'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리건은 이러한 내 생각을 꿰뚫고 있었던 모양이다. 전에 리건이 자신은 유희중이니 드래곤이라는 걸 알리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했었어도, 그와 나만 있을때에는 거리낌 없이 드래곤인 걸 숨기지 않아서 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안 도와준다고 해서 드래곤인걸 밝히겠다고 협박할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움찔한 내 표정을 한번 힐끔 본 리건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네 능력으로 돕지 못할 일이 있을까 싶지만 만의 하나의 경우가 있으니 말해두는 것 뿐이다." "아, 네." 왠지 공과사는 철저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 듯한 기분이었다. ===================================================================== 아핫핫핫... ^^;;; 어쩐지 들어오기가 무섭더라니... 엄청난 리필이 기다리고 있었네요... ^^;;; ====================================================== 제 33화 어어어...? (2) 그날 저녁, 평소와 다름없이 퇴근을 해서 집에 돌아오니 조엘에게서 온, 만나길 원한다는 전언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조엘이 나에게 신경을 써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다가, 전에 공작가를 한번 방문하여 마법 스승인 노만을 만난 뒤로는 시간 있을때마다 자주 공작가를 찾아가는 실정이었다. 휴일이면 간단한 티타임을 가지자는 초대를 받아 에르와 동행하여 하는 적도 많았기에 조엘이 급히 와달라는 전갈을 보냈어도 나는 크게 의아함 없이 옷만 갈아입은채 조엘네 집으로 향했다. 어차피 오늘이나 내일쯤 공작가를 방문하여 공작 부부를 비롯하여 조엘과 노만에게 새클턴 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전하고 작별을 하려던 차였다. 물론, 재상이라는 공작의 직위를 생각해볼때 내가 그 곳에 가는 탐사대에 파견된다는 정보를 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테지만, 그래도 아직은 익숙하지 못한 사회에서 친분이 있는 어른에게는 직접 뵙고 알려드리는게 도리일 듯 했다. 게다가 어차피 노만에게도 들려야 했고 말이다. 그래 조엘의 전갈을 받았을때 내심 잘됬다 싶어 그 기회를 빌어 작별 인사까지 다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저녁도 안 먹은 채 따라 나서겠다는 첼릿을 집에 있게한 채 - 조엘이나 노만과 이야기할때는 첼릿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해야 할 것 같아서 아예 혼자 가기로 한 것이다. - 공작가에 갔더니만, 공작에게 인사도 하기 전에 날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조엘에게 붙들려서 그의 방으로 향했다. 평소의 여유만만한 웃음은 어디로 보냈는지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나를 자신의 개인 서재 겸 사무실로 밀어넣은 조엘은 감정 섞인 손짓으로 거칠게 문을 쾅 닫더니만 그 문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는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뭔 일인지 모르겠지만 어지간히 감정이 들끓어 그걸 가라앉히기 위해 애쓰는 듯 했기에 나는 그를 방해하는 대신 권하지도 않은 소파에 마음대로 앉아서 태평하게 여기서 저녁을 먹고 갈까 고민하면서 조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녁을 먹고 갈까 갈등하던 것이, 그래도 내 저택에 듀비와 잭슨도 있는데 아무래도 거기서 먹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가닥이 잡혀갈 무렵, 조엘이 눈을 번쩍 떴다. 열려진 그의 눈에서 나오는 눈빛이 너무 매서워서 나는 순간적으로 찔끔하며 아무래도 여기서 저녁을 권유하면 예의상 먹구 가야하나보다... 라고 생각하는데, 조엘이 여전히 무서운 눈빛으로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와 내 맞은 편 소파에 털썩 주저 앉으며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밑도끝도 없이 무슨 생각이냐고 하면 내가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무슨 생각이라니요?"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니 조엘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이번 일 말이다. 새클턴 정글에는 왜 가겠다고 한 거냐?" 조엘이 그걸 벌써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지만, 나는 내색 안 하고 시큰둥하니 대꾸했다. "단장님이 가라고 하시는데 제가 뭐라고 합니까?" "가기 싫으면 거절할 수도 있었어." 조엘의 단호한 말이 틀린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괜히 천장을 바라보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왜 그랬어? 네가 거절했으면 받아들여졌을 거야. 혹시, 아무생각없이 '예' 한건 아니겠지? 새클턴 정글이 어떤 곳인지 알기나 해?" 조엘의 목소리에는 분노 말고도 나에 대한 걱정이 가득 들어 있었기에 나는 시선을 그에게로 돌려 웃어보였다. "뭐, 조엘 말고도 그 곳에 관해 역설하는 누군가 덕분에 귀따갑게 들었어요. 하지만, 괜찮을테니 걱정하지 마요." "그 곳으로 가는게 단순히 옆나라에 가는 건줄 알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내일 당장, 아니 지금이라도 당장 블랜차드 후작에게 가서 안가겠다고 말씀 드려. 너 혼자 가기 어렵다면 내가 같이 가줄께." "벌써 같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그래요?" "지금 목숨이 달려있건만, 자존심이나 명예를 따질 때야? 그 곳에서는 여기처럼 내가 널 보살필 수 없단 말이다!" 조엘이 화가 더 났는지 버럭 소리를 질러 깜짝 놀랐다. "조엘, 난 정말 괜찮아요. 내 몸 하나는 충분히 지킬 수 있는데다 블랜차드 후작님도 같이 가시잖아요." 다급하게 나온 내 말에 흥분한 조엘의 몸이 딱 굳어버렸다. ".... 뭐? 그가?" 내가 가는 걸 알고 있기에 리건이 가는 것도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조엘의 반응을 보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에... 몰랐... 어요?" 그래 그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며 묻는데, 조엘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블랜차드 후작...." 씹어 내뱉듯 중얼거리는 조엘의 시선이 날 향했다. "그가 가는 이유가, 너를 보호하기 위해서냐?" 잠시 휴식을 취하여 소풍가는 식으로 가는 거라고 알고 있었지만, 그걸 곧이 곧대로 말할 수 없었던 터라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그, 글쎄요... 저는 잘...." 하지만 허망하게도 내가 이렇게 애써 얼버무리는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은채 조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건 종종 조엘이 깊은 생각에 잠겼을때 자주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소파 주변을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그는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안 보내는게 났다고 봐. 네 뒤에는 내가 있는데다 그의 능력이라면 다른 이들이 반발한다해도 얼마든지 무시해버릴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거기서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조엘이 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설마... 해인이 너 블랜차드 후작이 간다고 하니까 쫓아가는 거냐?" 그에 조엘의 모습을 눈으로 쫓고있던 나는 실소를 흘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내가 후작님이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내가 간다고 대답한 후라구요. 거기다가 내가 왜 후작님이 간다고 쫓아가요?" 내 말에 조엘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내 팔을 붙들었다. "그럼 잘됐군. 가지 마. 네가 그렇게 위험한 곳에 가도록 놔둘 수는 없어." "조엘, 저는 괜찮을 거에요. 거기다가 저도 여기서는 별 할일이 없어서 약간은 지루했는 걸요, 뭐. 이번 일을 무사히 끝낸다면 경험이 좀 생겨서 다른 임무도 맡을 수 있을 거에요." 내 변명조에 조엘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넌 지루하다고 거길 가냐?" 물론 나도 내 변명이 너무 빈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른 때, 혹은 다른 일 같았으면 조엘이 이 정도 말리면 나도 달리 생각해보겠지만, 하필이면 이번 일에는 상회쪽에서 해온 부탁도 있었고, 게다가 리건도 같이가준다고 하는데다가 든든한 배경까지 있어 별달리 걱정이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지금와서 리건에게 안 간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조엘이 말려서 못간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는가? "조엘, 정말 괜찮아요. 전 분명히 살아 돌아온다니까요. 내기라도 할까요?" 내 말에 조엘은 내 팔을 여전히 붙든채로 내 옆에 앉아 날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 팔을 붙들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손가락 끝으로 내 뺨을 쓸어 내렸다. 너무나 친밀한 그의 행동에 나는 순간적으로 웨스트모어랜드 후작령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그 뒤에 조엘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 전에 살인자로 몰린데다가 아버지에게 강제로 끌려가서 다시 조엘을 만났을때는 상당한 시일이 지나있는데다, 얼결에 백작까지 되어있는 둥 상황이 복잡해서 그때의 일을 되새길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안정된 후에도 시간이 너무 지나버린 일이라 조엘도 없었던, 아니면 잊어버린 듯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해서 나도 머리 저 깊숙히 내려보냈는데, 갑자기 지금 밑바닥에 내려보냈던 기억이 떠올라버렸다. 덕분에 이 상황이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졌고, 조엘이라는 존재가 너무 강렬하게 인식되어 차마 그의 시선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그래 슬며시 시선을 비껴 그의 어깨를 돌아보는데 이게 왠일, 조엘이 뺨을 쓰다듬던 손을 턱선을따라 스르륵 내리더니 내 턱을 잡고 자신과 시선을 맞추게 하는 거였다. '허걱...' 너무나 묘한 분위기에 나는 어쩔줄 모르며 그에게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기 위하여 상체를 뒤로 제꼈다. "조, 조엘... 지금 도대체 뭔 짓을..." 그런데, 그건 정말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엉덩이를 소파에 붙인 채 상체만 뒤로 제꼈으니, 나는 자연스레 뒤로 누울 포즈를 취하게 되는 거였다. 그걸 깨닫고 황급히 소파에서 내려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조엘이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가해 내가 소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더니 그대로 날 뒤로 내리눌러 소파에 아예 눕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두 팔을 소파에 지탱해 자신의 팔 안에 나를 가두는 한편 내 위에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거였다. '허거거...' 그에 기겁을 한 내가 조엘을 쳐다보자 그가 싱긋 웃더니 한 팔을 들어 내 이마로 흘러 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서 뒤로 넘겨줬다. "예전 생각이 나는데? 그때가 그립군." "예, 예전이라뇨...?" 설마 웨스트모어랜드 후작령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게 아니길 간절히 빌며 더듬거리자 조엘이 서글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예전에는 내게 속해 있었잖아. 거기서 절대로 벗어나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느새 너는 나와 동등한 위치에 오르더니 이제는 내게서 점점 멀어지는구나. 이러다가 다시는 내가 잡을 수 없는 위치로 가버리는 거 아니냐?" "누가 누굴 잡아요? 조엘은 날 처음부터 잡을 수가 없었다고요." 약간은 장난스럽게 튕기듯 말했는데 조엘은 내 말을 못들은 척 자기가 할 말만 했다. "생각을 잘못했어. 내 손아귀에 있을때 내거라는 낙인을 확실하게 찍어버리는 건데." "허거걱... 무, 무슨 소리예요? 조엘, 자신의 취향을 다시한번 돌아보는게 어때요? 공작 부인께서는 이 사실을 알려나 몰라." 내가 기겁을 해서 바둥거리며 그의 팔 안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자 조엘이 쿡쿡 웃으면서 자신의 몸을 일으키더니 내 팔을 잡아 나도 일으켜서 바로 앉게 해줬다. "무슨 소리야? 내 취향이 어때서?" 나는 바로 앉자마자 잽싸게 다리를 움직여 조엘에게 멀찍이 떨어 앉으며 그를 수상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취향이 어떻다뇨? 그걸 몰라서 물어요? 지금 방금 한 짓만 봐도, 이건 여자들에게 수작걸때나 사용하는 거라고요." 다른때라면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내 가슴을 찟어지게 만들었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너무 요상해서 그런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러자 조엘이 가증스럽게도 순진한 표정으로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 거리는 거였다. "흐음, 나는 잘못됐다는 걸 모르겠는걸?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 그에 나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조엘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조엘... 나는 정말 이 질문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저기... 정말 미안한데... 혹시.. 남자... 를 에... 흠흠, 좋아해요?" 차마 '거시기'냐구 물을 수가 없어 더듬거리며 최대한 돌려 조심스레 묻자 조엘이 마치 뒤통수를 세차게 맞은 듯한 표정으로 멍하게 날 바라보는 거였다. 그래 내가 혹시 너무 심한 질문을 한게 아닌가 자책하는데 순간 조엘의 입에서 마치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풋..." 처음에는 내가 잘못들은 것이라 생각 했었다. 그런데 그 다음 갑자기 조엘이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받치며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거였다. 허리까지 숙여가며 말이다. "푸하하하하~~~ 아하하하하~~~" '뭐, 뭐야?' ====================================================== 제 33화 어어어...? (3) "푸하하하하~~~ 아하하하하~~~" '뭐, 뭐야?' 조엘의 갑작스러운 웃음에 나는 어찌 반응해야할지 몰라 그를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는 동안 조엘은 너무 웃어서 배가 아픈지 배를 부여잡고 웃더니만 나중에는 숨이 차서 헐떡 거리느라 겨우 웃음을 멈췄다. "하아, 하아... 아구구 배야... 이렇게 웃은 것도 오랜만이네." 그렇게 말하는 조엘의 눈은 여전히 웃음기를 담고 있었다. 그는 힘들다는 듯 소파 등받이에 드러눕다시피 상체를 기대더니 눈동자만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그에 얼이 빠질 지경인 나는 황당하다는 기분을 여과없이 드러내며 물었다. "괜찮아요? 갑자기 왜 그러는 거에요?" 지금 조엘의 꼴을 보면 영락없이 맛이 간 사람이었다. 그에 정말 그런건 아닌지 그를 면밀히 관찰하며 조심스레 묻자 그가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미안. 너무 웃겨서..." "뭐가 웃기는데요?" "내가 너에게 그런 식으로 느껴졌다는 게 말이야.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혹시 다른 사람도 그렇게 볼 수 있었겠지? 내 어머니께서 이런 모습을 보셨다면 아마 기절하셨을거야." 그걸 떠올리는지 조엘이 다시 쿡쿡 거리며 웃었다. 그 말에 나는 깊이 동감하면서도 그를 한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아니, 자기 어머니가 뒤로 넘어가는 걸 상상하며 웃는 아들이 어디있대요? 이제 보니 엄청 불효자였군요?" "쿡쿡쿡, 어머니는 이미 몇년 전 부터 날 불효자라고 말씀하시는데 뭘. 하여간, 네 정체를 남들이 눈치챌까봐 남들 앞에서 이러지 않은게 다행이야. 하마터면 이상한 소문이 돌 뻔 했잖아?" 가벼운 어조로 내뱉는 조엘의 말에 나는 흠칫 거렸다. "내... 정체요?" 드래곤인 리건도 내 정체를 믿지 못해서 아버지를 비롯한 사대 정령왕에게 몇번이고 확인을 했었는데, 인간인 조엘이 한눈에 보고 내 정체를 알아차렸단 말인가? 내 반응에 조엘은 자신의 생각을 더욱 확신했는지 싱글 싱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걱정할 것 없어. 남들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않을테니까. 혹시나 했는데 맞았구나." 나는 확신에 찬 조엘의 표정을 조심스레 관찰하며 입을 열었다. "제 정체가 뭔데요?" 그러자 조엘이 싱긋 웃더니 상체를 똑바로 세워 앉았다. "너 테오르도족이지?" "네?" 듣도보도못한 단어가 조엘의 입에서 나오자 나는 벙 쪄버렸다. 그런 내 반응에 아랑곳 않은 조엘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앉더니 손을 들어 내 눈 주위와 머리칼을 만지기 시작했다. "테오르도족은 신비한 색의 머리카락과 눈을 가졌다고 했더니 그게 사실이구나. 널 처음 봤을때 정말 신비하면서도 아름다운 색이라고 생각했어. 이제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의 잊혀져가는, 전설속의 종족을 만나게 될 줄이야." 혼자 추측하고 결론 내리고 확힌하는 조엘의 모습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허... 조엘, 도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테오르도족이요? 난 그런 종족이 있다는 걸 지금 처음들어보네요." 그러자 조엘은 내 얼굴에서 손을 떼고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래, 뭐... 네 종족의 특성상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고 경계하는건 이해한다만.... 그렇다고 나를 못 믿는건 너무하잖아? 내가 그렇게 못 믿을 놈으로 보여?" "믿고 안 믿고 나는 정말 테오르도족이라는 말을 처음들어본다니까요." 다시 한번 강력하게 주장하며 조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자 그가 날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혹시나 네 부모님께서 숨겼을수도 있으니까..." "숨기긴 뭘 숨겨요?" 나는 허탈해해며 속으로 이런 황당한 대화를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건지 투덜대고 있는데 조엘이 조심스럽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 무성이지?" 그의 말 뜻을 깨닫는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걸 깨닫는 순간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엘이 앉아 있는 소파로부터 멀찍이 멀어졌다. "해인아!" 내 행동에 놀란 조엘이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날 부르자 나는 놀란 나머지 한 옥타브나 올라간 목소리로 외쳤다. "엘라스트라!!" 엔다이론도 아니고 엘라스트라를 부른 걸 보니 나는 나도모르게 엄청 놀란 모양이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넓은 조엘의 개인 서재이자 사무실을 비좁게 보이는 엘라스트라의 거대한 몸체가 날 보호하려는 양 날 감싼채 나타났다. "해인아." 조엘이 다시금 날 부르며 다가오려고 했지만 나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외쳤다. "다가오지 말아요!" 그와 함께 엘라스트라가 경고조로 매서운 눈빛을 조엘에게 보내자 조엘이 한숨을 쉬며 뒤로 물러나서 내가 진정하기를 기다리겠다는 몸짓을 보였다. 그런 그를 노려보며 나는 침착해지려고 노력했지만, 한번 거칠게 뛰기 시작한 심장은 진정을 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몇차례 심호흡을 했지만, 그것 역시 마찬가지라 결국 진정하기를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자 조엘이 침착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널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어." "어떻게 알았냐니까요?" 그가 날 진정시키려고 한다는 걸 알았지만 무시해버리고 날카롭게 묻자 조엘이 포기하는 듯한 한숨을 내쉬며 털어놓았다. "우연치않게 네 몸을 보게됐어." "언제요?" "널 처음만났을 때... 여관에서 우연히..." 내가 눈썹을 치켜들어올리자 조엘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여관에서... 너 목욕하게 해줬잖아. 옷이 없는 것 같아서 데니가 근처 가게에서 네 옷을 사가지고 왔잖아. 기억 하냐?" "예. 그런데요?" "시간이 저녁때였잖아. 나는 원래 너를 데리고 기사들과 같이 저녁을 먹으려고 했는데, 데니가 혹여 네가 불편할지 모르니까 우리 셋이서 방에서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하더라고." 그들을 처음 만났을때 나는 그들의 배려로 매끼마다 식사를 방에서 했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엘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데니보고 식사를 가지고 오라고 하고 내가 네 옷을 가져다주려고 했지. 그때까지 나는 네가 남자인줄 알았기에 같은 남자끼리 노크하는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어. 아직 목욕을 다 못끝냈을거라 생각하고 욕실로 수건하고 옷을 가져다주려고 문을 여는데, 하필 목욕을 다 끝낸 뒤라 욕조에서 일어나고 있더라고." 조엘의 말에 나는 잠긴 목을 쥐어짜 겨우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봤군요." "너는 뭔 생각을 하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느라 내가 있다는 걸 눈치 못 챈 모양이더라. 그래서 그냥 조용히 문을 닫고 밖에서 다시 널 불렀지."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 바다 속에서 아버지와 같이 생활했을때에는 주위에 있는 정령들을 모른체 할 필요가 없어 가끔 말도 걸고 그들의 장난도 받아주며 생활하다가 인간 세상으로 나온지 얼마 안되었던 터라 실프들의 재잘거림을 무시하고 바깥 동정에 귀를 기울일 정도로 훈련이 안되어 있었다. 주위에 사람들이 없어서 욕조에 있는 운디네들에게 말을 걸었다가 신기하게 여긴 허공에 있던 정령들의 질문들이 쏟아져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조엘이 욕실 문을 열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게 당연했다. "혹시... 데니형도 그걸 알아요?" "내가 그에게 말하지는 않았어. 어쨌든, 그 일로 인해서 나는 네가 테오르도족인 걸 안 거야. 그 전까지는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었지. 네 신비한 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네가 다른 유사인종과의 혼혈이기때문에 그런줄만 알았었으니까. 다시한번 말하지만, 널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어. 그걸 가지고 널 괴롭힐 생각은 물론이거니와." "그... 테오르도족이 무성인가요?" 조엘은 내가 진정한 기미를 보이는 것 같자 안심한 표정으로 웃음까지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는군. 테오르도족은 태어날때부터 무성인데 성년이 되어 단 한번 성별을 결정할 수 있었어. 내가 읽은 책에 의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경우라더군." "그래요?" 이 세상에 나와 비슷한 존재가 있다는게 신기했다. 그런데 나는 곧 떠오른 생각에 다시 다급하게 물었다. "혹시... 다른사람도 내가 무성이라는 걸 눈치채는건...?" 내 걱정스러운 말에 조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야. 테오르도족은 자취를 감춘지 굉장히 오래됐다고 들었어. 나도 우연치않게 오래된 책에서 간단하게 언급된 걸 보고 알게된 거지. 테오르도 족이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고대 문서를 연구하는 몇몇 학자나, 혹은 마법사뿐일걸? 그 외에는 테오르도라는 종족이 있었는지도 모를 거야." "그렇군요." "자, 그럼 이제 모든게 설명된 거지? 이제 좀 진정되었으면... 그 정령좀 돌려보내지 그래? 엄청 살벌해서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을 정도야." 조엘은 내가 완전히 진정했다고 생각했는지 익살맞은 표정으로 엄살을 떨었다. 그에 나는 싱긋 웃으며 엘라스트라를 돌려보내고는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그 테오르도족에대해 꼭 물어보리라 결심했다. 내가 엘라스트라를 돌려보내자 조엘은 조용히 다가오더니 묘한 표정으로 씨익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성별을 택할때 꼬옥 여성을 택해주길 바라고 있어. 네가 만약 여자가 된다면 엄청난 미인이 될 거라고 봐. 그때는 다른 늑대들이 널 보고 침을 흘리지 않게 방어하느라 힘들게 되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오죽이나 좋겠는가만, 확실한건 나는 테오르도족이 아니기 때문에 성별을 선택 하기는 커녕 무성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는 거였다. "흠..." "하지만, 우선은.... 새클턴 정글에 무사히 갔다오는게 중요하지. 도대체 왜 그렇게 가려고 하는 거냐? 어떤 잘생긴 남자가 너에게 꼬옥 가달라고 부탁이라도 하든?" 조엘은 농담삼아 하는 말이었겠지만, 그게 거의 진실에 가까웠기에 나는 다시한번 움찔 거렸다. 그러자 오히려 농담을 하고 웃을 준비를 하던 조엘이 얼굴이 굳어지며 예리한 눈으로 나를 살피는 거였다. "뭐야, 그게 사실이었어?" "아니, 그게 그러니까..." 상회에 대한 이야기를 모르는 조엘이었으니 오해하는게 당연했지만, 조엘에게 상회에 대해 이야기 하기는 좀 난처했던 터라 나는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첼릿은 내 사람이지만 조엘은 그렇지 못했으니 말이다. 조엘이 전적으로 날 도와준다고 해도, 아무래도 그에게 상회 이야기를 하는 건 레이언이나 크리스의 허락을 받아야 할 듯 했다. "도대체 어떤 녀석인데 널 그 곳으로 보내려는 거냐?" 조엘이 날카롭게 물었지만, 나는 이번에도 삐질 거리며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뭐, 제 실력을 믿으니까 그랬던거겠지만서도..." "혹시... 블랜차드 후작은 아니겠지?" 이번에는 나는 아무런 꺼리낌이 없이 고개를 좌우로 저을 수 있었다. "아닌데요." 그러자 황당하게도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엉뚱한 반응이 조엘에게서 터져 나왔다. "뭐어? 그럼 도대체 네 주위에는 얼마나 많은 남자가 있다는 거야?" 절망스럽다는 조엘의 외침에 나는 다시한번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어어어? 이, 이게 아닌데...' ====================================================== 제 33화 어어어...? (4) 그 뒤로 조엘은 새클턴 정글에 가는 것에서 더 이상 뭐라 하지는 않았고, 나는 그 뒤에 조엘의 방에 나와서 마법 스승인 노만에게 들렀다. "죽으러 간다면서?" 노만은 언제나 그렇듯이 엄청 복잡하게 어질러진 방 구석탱이에 쭈그리고 앉아 두툼한 마법서에 골몰해있다가 내가 들어가지 잠시 고개를 들어 날 확인하고는 다시 마법서로 눈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언듯 보면 매정하게 보일 수 있는 광경이지만 늘상 무뚝뚝했던 - 사실 초창기 나에게 마법을 가르칠때는 나의 연이은 실수와 사고 덕분에 흥분하고 화내는 모습도 자주 보여주기는 했지만...- 그의 모습에 익숙해 있는데다가 그러한 모습 밑에는 나에 대한 걱정도 있는 것 같아 나는 싱긋 웃을 수 있었다. 엉망인 그의 방 물건들을 건드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죽으러 가다뇨? 던전을 탐사하러 가는 것 뿐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탐사하는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구경가는 식이지만..." "흥, 탐사대를 보호하는 역할이잖냐. 그게 죽으러 가는거지." "아하하하... 꼭 그렇게 말씀하실 것 까지야... 그런데, 스승님은 던전이 발견되었다는데 관심이 없으세요?" 노만은 그의 괴팍한 성격대로, 내가 백작이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스승으로 대하겠다고 하자 시종 노릇을하던때와 똑같이 대하고 있었다. 뭐, 그래도 그 또한 맥알파인 공작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상태였기에 나와 같은 귀족이라 작위 차이만 아니면 나에게 전혀 꿀릴게 없어서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물론... 아예 관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목숨을 걸만큼 매료되지는 않았다. 그것 말고도 지금 내가 세우고 있는 목표를 이루는 것만해도 바빠. 그나저나 내가 내준 숙제는 다 했느냐?" "아, 네... 뭐, 대충..." "그래? 내놔." 내가 공작 저택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또한 현재의 위치때문에 자주 드나들지 못해 노만과의 만남은 그만큼 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거의 노만과의 만남은 숙제를 내주고, 내가 해온 숙제에대한 평가와 설명이 대부분이었다. '숙제를 가지고 오길 잘 했지...' 오늘도 다른때와 변함없는 노만의 행동에 나는 속으로 쓴 웃음을 지으며 준비해가지고 온 노트와 책을 넘겨줬다. 그런데, 나에게서 그것들을 받자마자 펼쳐서 살펴볼 줄 알았는데 노만은 내 예상을 깨고 그것을 받자마자 자신의 옆에 아무렇게나 놓더니만 자신의 앞에 쌓아 놓았던 다섯권의 책을들어 나에게 남겨주는 것이었다. "받아라." "에?" 주는거니 얼결에 받기는 했지만,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노만이 여전히 자신의 무릎 위에 있는 책 쪽에만 시선을 준 채 입을 열었다. "숙제야. 이번에는 다음에 만날때까지의 시간도 넉넉한것 같으니, 거기에 있는 마법들을 모두 다 익혀 오도록 해." "에에?" 아무리 나에게 마나가 풍족하다고 해도 하나의 마법을 익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이 아버지와 실피드의 특훈으로 인하여 마나를 좀더 섬세하고 부드럽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해도, 마법을 하나 일으키는데에는 마나를 다루는 것 말고도 여러가지 요건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마나와 공중에 있는 마나의 양을 계산하고, 마법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마나 배치를 따라서 주문을 외워야 하나의 마법을 겨우 겨우 발현시켰다. 아버지를 잘 만난 덕에 마나를 풍족하게 가지고 있다 해도, 마법에 푹 빠져 있는게 아니라 띄엄 띄엄 공부했기에 간단한 1서클의 마법이 아니라면, 왠만한 2 서클의 마법이라고 해도 발현하는 데에는 1, 2분 걸리고 복잡한 3서클의 마법은 그것보다 더 시간이 걸렸다. 그러한 상황이니, 두툼한 책의 마법을, 그것도 한권에 있는 걸 다 익히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장담을 못하는데 다섯권의 마법서를 다 익혀오라니... 새클턴국에 갔다오는데 아무리 오래 잡아도 1년 정도 생각하고 있는 나로써는 난감할 뿐이었다. 거기에 갔다 오는 동안 여유 시간이 널널하다면 몰라도, 아마 여기서 기사단 생활을 할때보다 더욱 더 시간이 없을게 뻔한데 마법을 실현해보기는 커녕 익히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았다. 게다가 스윽 보니 세권이 3클래스의 마법서이고, 두권은 4클래스의 마법서였다. '헉, 지금 내가 3서클의 마법을 배우는 중인데 이걸 다 어떻게?' 혼자서 끙끙대며 마법을 익힐 생각만으로도 - 리건이 드래곤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그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로 필사적인 건 아니었고, 또 유희중인 그는 뛰어난 검사일뿐, 마법에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만에게 배우는데 리건에게 도움을 받는 건 왠지 노만에게 실례인 것 같아서 말이다. - 끔찍해서 나는 숙제를 줄여달라고 부탁하려고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몇 클래스라고 적혀있는 마법서 제목 밑에 또 다른 제목이 쓰여있는게 눈에 띄였다. '공격마법' 지금까지 노만은 내가 초창기에 마법을 배우면서 일으킨 엄청나게 많은 사건들때문에 나에게 마법을 가르쳐줄때 공격 마법을 제외하고 가르쳐줬었다. 아직 내가 대단한 공격 마법을 배울 수 있는 수준도 안되었거니와, 보통 간단한 불을 일으키는 것 같은 일상 생활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마법만으로도 크고 작은 사건을 일으키기 일수였는데, 만약 공격 마법을 배우다가 사고를 일으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래서 노만 스승은 자신이 허락할때까지 공격 마법을 익히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 시켰었다. 그런데, 그렇게 엄하게 금지시키다못해 보지도 못하게 했던 공격 마법이 적힌 것, 그것도 내가 아직 채 입문하지도 못한 4클래스의 공격 마법이 적힌 마법서를 숙제랍시고 나에게 내준 것이었다. "어어어..." 그걸 발견한 내 입에서는 하고 싶은 말 대신 엉뚱한 신음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노만이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다. "뭐냐?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똑바로 해. 요상한 소리 내지 말고." "어? 아... 으으음.... 이거 어떻게 다 익힐지 한숨이 앞서는걸요?" 나는 절망적인투로 중얼거렸지만, 입가가 슬며시 벌어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내가 미소를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걸 눈치챘던지 노만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흥, 다 못 익혀오면 그 두배로 숙제가 나갈 줄 알아. 어차피 거기서는 연습해보기도 쉬울 테니 마음껏 연습해두는게 좋을 거야." 나는 가죽으로 된 두툼한 마법서 표지를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쓸었다. 이 마법서는 노만이 날 걱정해주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 곳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 노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위험에서부터 날 보호해 줄 방법을 최대한 마련해준 것이었다. 물론, 혹여 위험이 다가온다면 나는 마법보다는 정령들을 먼저 부를테니 이 마법서들은 무거운 짐이 되어줄 뿐 별 필요가 없겠지만서도, 노만의 마음이 들어있는 이상 무거움을 개의치 않고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다섯권의 두툼한 마법서들을 잘 챙긴다음 노만의 눈치를 살폈다. "어, 숙제 해온거 안 보세요?" 그러자 노만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퉁명스레 대꾸했다. "지금 나 바쁜거 안 보이냐? 검사는 다음에 만날때 해놓으마." "헤에, 검사할 거 많으시겠네요. 오늘 가지고 온 숙제도 검사 해야 하고, 여기있는 마법 익힌 것도 검사해야 하고..." "내 걱정은 말고 갔다오기나 해. 용건 끝났으니까 이만 나가봐라. 바쁜데 방해하지 말고." 퉁명스레 대꾸하며 축객령을 내리는 노만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가뿐하게 몸을 일으켰다. "네이~ 그럼 다음에 다시 뵐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거, 너무 연구에만 몰두하지 마시고 삼시 세끼는 꼬옥 드세요. 거참 식사를 챙겨주는 사람까지 있는데 안 먹으면 챙기는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는 거라고요." 노만의 방을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잔소리를 했더니 노만의 성난 목소리가 내 뒤통수를 때렸다. "너나 잘 챙겨 먹어라." "나원 참, 기껏 생각해줘서 말해줬더니만..." 노만의 방 문을 닫고 나오며 투덜대는 내 입술에는 말투와는 달리 미소가 어려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미소는 공작 부부에게 인사를 하러 가기위해 돌아서는 순간 경직되고 말았다. 노만의 방문 건너편 벽에 데니가 팔짱을 떠억 낀채 등을 벽에 대고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몸을 일으켜 바로 서더니 여전히 정중하지만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안녕 하셨습니까, 엠브로스 백작님." 딱딱하게 예의바른 그의 태도에 나는 한숨이 나오는 걸 꾹 참으며 같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 네. 경께서도..." 데니는 내가 들고 있던 책들을 보더니 자연스레 손을 내밀었다. "주시겠습니까?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운동을 될 수 있는 한 안 하려고 피해다니는 나로써는 조금 버겁게 느껴지는 무게였기에 나는 주저 않고 책 두권을 그에게 내밀었다. 마음 같아서는 세권을 넘기고 난 두권을 들고 싶었지만, 양심상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데니가 내가 내미는 책 두권을 받아 들다가 내가 세권을 든것을 보더니 한 권을 더 가지고 갔다. "앗, 저기... 죄송해서 어쩌죠?" "괜찮습니다. 공작님께 가시는 거라면 안내해드리죠." "아, 예." 데니가 먼저 몸을 돌려 걸어갔기에 나는 뒤늦게 대답하고는 허둥지둥 그의 뒤를 쫓아갔다. 복도에는 쉽게 보이던 하녀들이 오늘따라 단체로 휴가를 갔는지 한 명도 보이지 않아 데니와 나 단 둘이서 조용한 복도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나란히 걸어가면서 내가 백작이 되었다는 걸 안 뒤로 거리를 유지하는 데니였기에 오늘 와서 인사를 하는 대상에는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이왕 만난거 인사를 해야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데니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새클턴 국에 가신다고요?" 이 집안에서 그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궁금해질정도로, 오늘 내가 만나는 공작가 집안 사람들은 내가 말하기도 전에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나는 입을 열었다. "예. 이미 알고 계셨군요." 거기서 데니가 뭐라고 해야 대화가 이어질텐데, 안타까이 데니의 입이 꾸욱 다물어지는 바람에 대화는 끊기고 말았다. 그래 나 또한 묵묵히 그를 따라 복도를 지나쳐 계단으로 내려가 공작이 있는 듯한 서재 앞에 도착하자 데니가 날 돌아보며 아무 말 없이 책을 내밀었다. '쩌비...' 가기 전에 뭐 예의상이라도 잘 갔다오라거나 아니면 조심하라는 둥의 말을 할줄 알았는데 아무 말 없이 책만 내밀자 나는 약간의 서운함과 영영 데니와는 좋은 관계를 회복할 수 없나보다... 하는 체념을 느끼며 책을 받아들었다. "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감사의 말에 대니는 고개를 숙이며 그냥 갈 것처럼 휙 몸을 돌렸다. 그러나 한 발 내딛기 전에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러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사히...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인사는 들었지만, 힙겹게 나온 그 인사가 역시 예의바른 존대라는 걸 알아챈 나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대답을 듣기 싫은 양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로부터 대략 30여분 후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거대한 공작가의 우아한 철제 정문을 나서고 있었다. "후우.... 나 원...." 물론, 공작과 조엘은 저녁을 같이 하자고 나를 붙들었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비록 그들이 친절하게 대해주기는 했지만, 마치 사지로 들어가는 사람 대하는 양, 이제는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는 것 처럼 구니 엄청 불편했던 것이다. 그러느니 배고픔을 조금 참고 집에 가서 늦은 저녁을 먹는게 훨씬 나을 거 같았다. '아, 그러고보니 이브스햄과 에르에게도 이야기를 해놔야 하는군. 어떻게 반응할까나...' 저녁을 먹고 나서 할까, 먹기 전에 미리 말하고 맘 편하게 식사를 할까 골똘히 생각하면서 말 옆구리를 살짝 쳐서 말이 걸어가게 했다. 그런데, 평소 말을 잘 듣던 말이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내 신호에도 꼼짝 않고 가만히 서 있는게 아닌가? '응?' 그에 의아해서 말을 내려다보니 말 고삐를 쥐고 있는 다른 손이 보였다. '어라라?' 그 손의 임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아주 익숙하지만 뜻밖의 존재가 길에 서서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여긴 어쩐 일이에요?" 나는 황급히 말에 내리며 그의 뒤에 있는 존재들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 그리고 세분..." 놀랍게도 내 말고삐를 쥐고 있는 이는 리건이었고, 그의 뒤에는 네 정령왕이 몽땅 출동해 있었다. 그러자 리건이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자신의 뒤에 포진한 네 정령왕을 힐끗 바라보았다. "말도 마라. 난리도 아니었다." "엥?" 리건의 뜬금없는 말에 나는 자세한 설명을 바라는 표정으로 아버지와 이프리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버지가 눈썹을 치켜뜨며 펄펄 뛰었다. "그 멍청한 표정은 또 뭐야? 아주 폭 빠져서 정신이 없구만? 그 놈이 그렇게 좋더냐?" "에엥?" 더욱 더 어리둥절해진 내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되묻자 아버지가 더욱 더 펄펄 뛰었다. "에엥은 무슨 에엥이야? 너 솔직히 말해봐. 그 놈에게 반한 거냐? 그 하찮은 놈에게?" "그러니까 그 하찮은 놈이 도대체 누군데요?" "누구긴 누구야? 저번에 너에게 키스하고 이번에도 야리꾸리한 짓을 한 그 놈말이야! 그 놈 밖에 더 있어?" 그제야 아버지가 조엘을 말한다는 걸 알아챈 나는 헛 웃음을 지으려고 했지만, 다음 순간 그것 말고도 또 다른 깨달음이 떠올라 경악해버렸다. "에에엑? 그걸 모두 보고 있었어요?" 이프리트는 미안한 미소를, 실피드와 노아스는 재미있다는 웃음을 짓는 걸 보니 아버지 말고도 몽땅 다 보고 있었던 듯 했다. "으악, 뭘 그런걸 봐요오~~!" 얼굴이 화끈거려 나도 모르게 항의의 소리가 크게 튀어나오자 아버지의 매서운 목소리가 지지 않고 튀어나왔다. "시끄러! 도대체 어떻게 된게 그런 놈하고 키스를 할 수가 있냔 말이다!" "누가 하긴 누가 해요? 나는 엄연히 당한거라고요." "얼마나 멍청했으면 그런 놈에게 키스를 당해!!" "내가 키스를 할 줄 어떻게 알았어요? 불가항력이었다고요!" "불가항력은 무슨 놈의 불가항력?" "몰라요! 아버지도 너무해. 어떻게 그런걸 엿볼 수가 있냐구요?" "엿보긴 누가 엿봐? 당당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아악, 그런건 엿본다고 하는 거라구요!" "시끄러워. 나는 당당하게 지켜본 거라고!" "아버지는 툭하면 시끄럽대!" 아버지와 나의 투닥거림에 노아스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런데 해인아, 너 그 인간을 좋아하는 거니?" 그러자 아버지와 내가 동시에 노아스를 바라보며 반박했다. "에엑, 좋아하긴 누가 누굴 좋아해요?" "누가 그런 하찮은 인간을 좋아한다는 거야?" "그으래? 에잉, 나는 엘라임이 펄펄 뛰는 걸 더 보고싶었는데... 정말 아쉽네..." 노아스가 어개를 으쓱이며 실망스럽다는 어조로 중울거리자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언제 또 펄펄 뛰었어요?" "윽, 무, 무슨 소리야?" 내 시선에 아버지는 황급히 얼굴을 돌리며 대꾸했지만, 그 어조에 당황스러움이 배어있다는 건 어린애라도 쉽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런 일에 빠질 실피드가 아니었기에, 그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아버지에게 다가왔다. "아항? 아까 날뛰던 녀석이 누구였더라? 당장 이 세계로 넘어가는 걸 말리느라고 얼마나 고생 했다고?" 그러자 노아스까지 다시 끼어들었다. "맞아, 맞아. 끝까지 넘어가려고 하기에 블루 드래곤쪽으로 방향을 트느라 고생했어." 노아스의 말에 리건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거드는 거였다. "갑자기 분노한 엘라임을 데리고 세 정령왕이 나타나서 얼마나 놀랐다고? 거기에 엘라임은 당장 조엘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펄펄 뛰지..." 어조는 힘들었다고 푸념하는 것 같았지만, 얼굴 기색을 보니 재미있어 하는게 다분히 보였다. "이, 이것들이 진짜!!" 아버지가 다시 한번 폭발했지만 그에 눈썹 하나 까딱할 위인들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이프리트까지 끼어드는 거였다. "그게 바로 아버지의 질투라는 거지. 훗훗..." 한바탕 소동을 겪은 뒤, 아버지를 세 정령왕이 정령계로 데리고 가고 나서야 나는 리건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저녁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거리에서의 한바탕 소동 덕분에 약간 늦게 도착하여 크리에그 집사는 당연히 먹고 왔겠거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가 내 대답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아직 못 먹었으니까 준비 좀 해줘요." "예? 아, 알겠습니다." 그러나 노련한 집사의 경력은 금세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 그리고... 전 백작님과 에르미아는 어디 있죠?" "예, 지금 전 백작님 서재에 함께 계십니다." "그래요. 내가 저녁 먹고 좀 보잔다고 전해주세요. 아, 그리고 지라르경하고 듀비, 그리고 얼마 전에 온 내 손님은 식당으로 불러줘요. 저녁 먹으면서 좀 보게." "알겠습니다." 간단하게 씻고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 입은 뒤 식당으로 내려오자 첼릿과 듀비, 잭슨은 먼저 와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인데 식당으로 부른 거냐? 미리 말하지만 나는 벌써 저녁 먹었다." 잭슨의 말에 나는 싱긋 웃으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랬냐? 나는 아직 안 먹어서 말야." "설마... 혼자 먹기 심심해서 부른 건 아니겠지?" "뭐, 그것도 있고, 할 말도 있고..." 내 말에 첼릿이 정색을 한 채 날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 "그게... 새클턴 정글에 가라는 명령을 오늘 정식으로 받았어요. 준비는 내일 모래까지라는 군요." 잭슨이야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첼릿까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하게 있는 건 좀 놀라웠다. 비록 내가 정식으로 명령이 내려오기 전에 먼저 가게될지도 모른다고, 확률이 높다고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흥분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대신 첼릿은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에?" 당황한 내 표정에 첼릿은 확고한 어조로 대답했다. "혹시 혼자 가야 한다는 둥의 말도 안돼는 소리로 저를 떨어뜨려 놓으려고 해도 소용 없을 겁니다. 보통 기사도 자신의 종자 몇명을 데리고 다닌다는 건 상식, 왕실 기사가 움직인다면 그에 일행 몇명이 붙는건 허용이 될 걸요. 안 그렇습니까?" "에... 그건 그렇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잭슨이 끼어들었다. "그렇다해도 난 빼라. 마음 같아서는 나도 같이 가주고 싶지만, 너에게 드워프를 인계해주고 돌아가야 하거든." 잭슨의 말에 나는 문득 듀비 생각이 떠올랐다. "아, 듀비도 너와 같이 갈 거야. 내가 출장 가 있는 동안 상회에서 머물겠다고 했었으니까." 그러자 잭슨이 당황한 표정으로 듀비를 바라보았다. "어... 그게 사실인가요? 하지만, 전 당신이 같이 가실 줄 알았는데요." "듀비가 거기 꼭 갈 의무는 없잖아. 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는 거야." "그, 그래? 으음... 캡틴이 당혹해 하겠네. 캡틴은 둘이 같이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잭슨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내 말에 수긍했다. '음음, 내 네 심정 안다. 나도 엄청 당혹스러웠거든.' 그리고 이브스햄과 에르미아도 엄청 당혹스러워했다. "새, 새클턴 정글 말씀이십니까?" 서재로 그 둘을 부른 뒤 출장 간다는 사실을 통보하자 이브스햄은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다. "예. 아무래도... 시일이 꽤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그 동안 두 분께 집안 일을 맡기겠습니다. 잘 해주실 거라 믿어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세요? 거기가 어딘줄 알고 가신다고 하시는 거에요? 블랜차드 후작님도 정말 너무하시는 군요." 에르미아는 걱정이 가득 담긴 어조로 물었다. "크게 걱정할 건 없어요. 거기가 어딘지는 이미 귀가 따갑게 들어왔고, 난 멀쩡하게 돌아올 테니까." "안 가실수는 없는 건가요?" "기사단에 입단한 이상 위에서 내려온 명령은 착실하게 수행해야죠." 에르미아의 질문에 싱긋 웃으며 대답하자 그 동안 조용히 있던 이브스햄이 입을 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가시기로 결심을 굳히신 것 같군요. 그럼 조심해서 다녀 오십시오. 무사히 돌아오시길 기다리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들이 나간 후 나는 나에게 올려진 보고서를 - 기사단에서 일을 안 하지만 그래도 집안 일은 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 검토하고 사인할건 다 한 후에 서재를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막 서재 문을 나서려는 순간 조용히 서재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던 듀비가 날 가로 막았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데 그렇게 심각해요?" 듀비의 표정이 너무 딱딱하게 굳어 있기에 나는 가볍게 웃으면서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비는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예?" 뜻밖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듀비가 다시금 확고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말을 바꿔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역시 해인님을 따라가야 할 듯 합니다." "에... 저야 듀비가 같이 가주시면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괜찮으시겠어요?" 조심스레 듀비의 얼굴을 살펴 보았지만, 원체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인지라 이번에도 무슨 심정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알아내기가 어려웠다. "괜찮습니다. 같이 가게 허락해 주십시오." "듀비가 가준다면 저야 환영이죠." ==================================================================== 헉... ㅡ.ㅡ;; 대, 댓글이... ㅡ.ㅡ;; 지금 이 시점에서 분명하게 밝히지만, 며칠 못 들어온 건 절대 제 탓이 아니라구요. 청어람 홈피가 안되던데.... 님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나보죠? ^^:; ====================================================== 제 34화 새클턴 정글 (1) 다음 날 오후, 상회측에서 데리고 가라고 부탁 받았던 그 드워프가 도착했다. 벨레니국에 파견 되어 있던 상회측 사람과 같이 도착한, 자신을 북 드워프족에서 손꼽히는 건축가라고 소개한 드워프는 마치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출발하기 전에 도착하기 위하여 먼 길을 급하게 달려왔을텐데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지치지 않은 듯 지금이라도 당장 새클턴으로 출발할 것만 같은 기세로 눈을 빛내는 거였다. 그 모습을 보자니 다음날 아침에 출발한다는게 참으로 다행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만약 며칠 더 있다가 출발했다면 그는 자기 혼자, 아니 나에게 인도를 맡겼으니 나를 끌고 다른 이들은 무시해버린채 먼저 새클턴 국으로 출발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를 데리고 온 상회 인물이 엔더비 산맥에 있는 북드워프 마을에서 여기까지 달려온 것 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는 램버트 - 그 드워프의 이름 - 를 나에게 넘기는게 너무 기쁜 듯 나와 만나서 상회 본부측에 그를 넘겼다는 보고를 하자마자 차 한잔 마시고 가라는 내 제안을 거절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부리나케 가버렸다. 폼을 보아하니 아마 집에가서 사흘 밤낮은 침실에 콕 박혀 잠만 잘 듯 보였다. 그 드워프가 도착함으로 인하여 우리 가문에서 출발할 사람들은 다 정해졌다. 우선, 직접적으로 명령을 받은 나와 나때문에 가겠다고 나선 듀비와 첼릿, 그리고 던전을 발견하고 그 곳을 탐험하고 싶은 드워프 램버트, 이렇게 넷이었다. 이브스햄과 에르는 기사든 마법사든 더 데리고 가라고 했지만, 많이 데리고 가봤자 내가 일일이 신경쓰기 힘들기 때문에 나는 소수 정예가 가는 게 좋았다. 그 곳이 위험한 곳이라면 나 보다는 그들이 위험할 확률이 높을테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다음 날 간단하게 여행 준비를 하고 왕실 기사단 전용 마굿간 옆 마당에 가보니 이미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리건 - 아마 이번 일행의 리더일 듯 - 과 그의 보좌관 엘리노어경, 그리고 부기사단장을 비롯한 몇몇 왕실 기사들, 이번 여행에 동행하게 될 듯한 마법사 차림의 몇몇 사람들, 거기에 조엘과 웨스트모어랜드 형제들까지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내가 다가가자 일제히 날 돌아보았다. "백작, 이번에 출장 가신다고요?" 엄청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온 웨스트모어랜드 형제에게 나는 씨익 웃어보였다. "예, 기사단에 입단하고 나서 처음 받은 임무에요." "첫 임무치고는 좀 어려운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나와 같은 왕실 기사단 소속인 블레어가 조심스레 입을 열자 나는 하하 웃었다. "좀 그런거 같죠? 그래도 이왕 맡은거 열심히 해야죠." "그런데, 일행이 참 독특하군요. 백작님께서 블루 엘프와 친분이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드워프와도 친분이 있을 줄 몰랐는데요?" 조엘이 내 곁에 따악 붙어 있는 일행들을 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에 나는 삐질 웃으며 얼버무렸다. "아하하하... 도움이 되어주실 분들이에요." "그렇습니까?" 조엘은 뭔가 더 묻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때마침 리건이 날 불러서 나는 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해인, 이리 와라. 이번 임무에 같이 갈 일행들을 소개하마." "아, 예." 랭포드 후작의 명을 받아 우리와 같이 갈 국방부측 사람들도 이 곳에 모여 있었기에 나는 같이 소개받을 수 있었다. 국방부 소속으로 이번 일을 맡게 된 사람은 세명, 왕실 마법사에서 지원 나온 마법사는 둘이었다. 그리고 왕실 기사단에서 나와 리건 말고 가게된 사람은... "여, 잘 부탁해." "어라라, 차트워드경? 이번 임무에 같이 가세요?" 그는 내 입단을 도와준 걸로 인연이 되어 왕실 기사단 내에서 나와 친한 몇 안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인 에아머스 차트워드 경이었다. 그는 차트워드 백작가의 장남인데다가 아직 어린 자식까지 딸린 유부남이라고 들었는데, 이번에 같이 가게 되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가 비록 장남이라고는 해도 어머니가 측실이라서 왕실 기사단에 입단하기 전에는 어려움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언듯 들었는데, 이번에도 그 영향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하하하,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네? 같이 가게되었으니 잘 해보자고." "저야말로 잘 부탁 드려요." "우리야 말로 잘 부탁하네. 부디 무슨 일이 있으면 잘좀 지켜주게나." 그러면서 끼어든 사람은 왕실 마법사인 파블로 클라우드 남작이었다. 그는 이번 일에 순전히 자신이 지원해서 가는 거였는데, 스스로 소개하길 고문서와 유적, 던전 연구 전문이라고 했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을 가진, 평범한 인상의 그는 이번 일이 무지 기대되는 듯 눈을 반짝 반짝 빛내고 있어 자신의 제자를 - 아마도 원하지 않았는데 스승이 자원한 덕에 같이 가게 된 신세인 듯 보였다 - 한숨 짓게 만들고 있었다. 그 제자는 앤더슨 스니볼리라는 사람으로 스니볼리 백작가의 세째 아들이라는데, 아름다운 은회색 머리와 남색 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 소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 사교적이기보다는 연구실에 처박혀서 연구에 몰두할 타입이었다. 그래 그를 소개받고 나서 든 생각은 '아, 저 외모가 아깝다.' 였다. 아무리 마법사들 대부분이 마법에 푹 빠져 있느라 결혼은 커녕 연애도 도외시 한다고 하지만, 조금만 활달하게 사교 활동을 한다면 인기를 끌 것 같은데 말이다. "쥬디 블러드무어라고 합니다. 정령술을 조금 쓸줄 아는 검사입니다. 당신은 정령술사시라고요." 그리고 당찬 표정으로 씩씩하게 인사를 건네온, 국방부 소속이자 이번 일행의 공식적으로 유일한 아가씨가 나섰다. 아름다운 금발머리에 파란 눈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꾸미는 걸 귀찮게 여기는 성격인지 예쁜 금발 머리가 짧게 잘려져 있었다. 거기에 경갑옷에 검까지 찬 모습에 말하는 폼을 보니 여자라고 우습게 봤다가는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것만 같았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봐서는 바람과 땅의 정령들과 계약한 것 같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왕실 기사단 소속 정령술사입니다." 그녀가 내민 손을 마주 잡고 가볍게 흔들자 그녀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최상급 정령술사라고 들었습니다. 이번 임무중에 귀하의 능력을 기대해도 되겠지요?" 무척 기대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아하하하... 기대하실 것 까지는..." 그녀의 다음으로 소개된 국방부 소속 사람은 요크 스페이스로 평민 출신으로 기사 작위를 받을 사람이라고 했다. 검은 머리에 회색 눈을 가진 그는 깍듯이 예의를 차리기는 했지만 말 수가 무척 적어서 데니를 떠오르게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번 임무에서 그 둘을 휘하에 둔 뉴먼 몬트리올경은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것이 여러 임무를 많이 맡아봤던 경험자인 듯 했다. 그때문에 이번에도 국방부팀 리더로써 임무를 맡은 것 같았다. 그렇게 모두 소개가 끝이 나자 - 시종들은 따로 소개를 안 했다. 게다가 셋 씩이나 따로 일행을 데리고 가는 건 나 밖에 없었다. - 리건의 명에 의해 우리는 출발하기 위하여 각자의 말에 올랐다. 단지 드워프인 램버트는 혼자 말 위에 타는 걸 무척 불편해 한 덕에 듀비와 같은 말을 타고 가게 되었다. 리건도 내 옆에서 자신의 말에 오르려는데 엘리노어경이 불만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뭣하러 단장님께서 저들을 배웅 가시는 건지요?" '배, 배웅?' 엘리노어 경의 뜻밖의 말에 내가 어리둥절해 있는데, 리건의 대답이 들려왔다. "어차피 가는 방향이 같으니 겸사겸사 가는 거지." "그래도..." 엘리노어경은 리건의 말에도 표정을 풀지 않고 있다가 리건이 말 위에 완전히 오르자 뒤로 물러났다. 리건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날 한번 쓰윽 바라보더니 엘리노어경 뒤에서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부 기사단장에게 의미심장한 눈짓을 한번 해보이고는 말의 옆구리를 박찼다. "가자!!" 그의 뒤를 따라 말을 달리면서 나는 부 기사단장이 리건의 눈짓에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분명히 봤다. 수도를 감싸고 있는 외성을 벗어나서 - 시내에서는 말을 달릴 수 없다 - 속도를 가해 신나게 달리던 일행은 말이 얼추 지쳐갈때쯤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나는 리건을 바라봤다. "엘리노어경이 한 말이 무슨 뜻이에요? 배웅이라뇨?" 그러자 리건이 삐질 웃었다. "아하하하... 그게 말이지... 사실 서류상으로는 왕실 기사단에서 지원자는 너하고 차트워드경 뿐이야." "엥?" 이해를 못한 내가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리건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줬다. "아아, 너무 인기가 많아도 귀찮은 법이지. 내가 워낙 인기가 많다보니 왕성 좀 떠나려고 하면 난리도 아니거든. 이번에도 분명히 같이 가겠다고 하면 난리날게 뻔하니까 서류 상으로는 너하고 차트워드 경만 보내는걸로 했지." "헐... 그럼 무단으로 가는 거에요?" 기가막히다는 어조로 묻자 리건이 씨익 웃었다. "무슨 소리. 나는 오늘부터 휴가야." "에?" "내가 기사단장을 맡은 뒤 부터 휴가 한번 못 받고 줄곧 일만 해왔거든. 그래서 이번 기회에 좀 쉬겠다고 휴가를 냈지. 휴가 기간에 내가 어딜가던 그들이 무슨 상관이야? 그게 새클턴 정글이라 해도 말이지." "허.허.허... 그, 그래도 되는 거에요?" "왜, 뭐 잘못된거라도 있어?"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돌아보니 할 말이 없었다. 하기야, 자기 휴가 기간에 자기 맘대로 간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오래 걸릴텐데... 괜찮아요?" "괜찮아. 장기 휴가를 냈거든. 뒷일은 부기사단장이 맡아줄 거고, 여차하면 자기 영지에 콕 처박힌 웨스트모어랜드 후작 영감탱이도 있으니까." ====================================================== 제 34화 새클턴 정글 (2) 가는 길은 순조로웠다. 길을 서두르는게 아니라면 마치 어디 소풍이라도 가는 것인 양, 평화로웠다. 일행 모두가 한가락하는 실력자들인데다가 그 수도 많았기에 인적이 없는 길로 가더라도 어떠한 해를 입을까 두려워 하는 것도 없었다. 게다가 내 경우에는한 첼릿이 시종 노릇을 자처하여 일일이 다 챙겨주고 있어 그에게는 쬐께 미안하기는 했지만, 번거로운 일이 그만큼 적어 편안했다. 리건 또한 수도 외성 밖에 있던 어떤 마을에서 합류한 두 명의 기사가 그의 시중을 들어주고 있었기에 태평하게 있었다. 식사들도 모두 고급스러운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을 보면 그 험하다는 정글에 들어가서도 이렇게 팔자 좋게 지낼 수 있겠거니.. 하는 은근한 기대감과 함께 지위가 높다는게 좋긴 좋은거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이래서 사람들이 남들 위에 올라가려고 그렇게 노력을 하는가보다. 내 생각이야 어쨌든, 일행은 열심히 녹스국을 향해서 달렸다. 이번 일에 마법사들이 동행하기는 했지만, 우리 일행에만해도 7서클 이상의 마법사는 없는데다가 설사 있다해도 많은 인원 - 국방부측 셋, 왕실 기사단측도 셋, 왕실 마법사측 둘, 거기에 딸린 일행이 7명 (나와 리건 말고도 쥬디 블러드무어경에게 개인 경호 기사가 둘이나 딸려 왔다) -, 그 일행들이 탄 말들까지 데리고 국경까지 간다는 건 너무나 벅찬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거 보면 엔더비산맥에서부터 벨레니국 수도까지 단 한명이기는 해도, 대부분의 거리를 공간 이동 시켜온 상회의 저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우리는 마르타국과 벨리니국, 그리고 녹스 국, 이렇게 삼국의 국경이 맞다은 지점에서 마법 길드의 마법사들을 호위한 마르타국쪽 사람들을 만날 예정이었다. 거기서 두 국가 사람들이 합류하여 녹스국을 가로지르는 와중에 녹스국 사람들과 만나 새클턴 국으로 향할 것이었다. 이번, 마법사의 던젼이 새클턴 국에서 발견된 이상 비록 새클턴국이 중앙 대륙 국가들에 비해 힘이 약하다 하나 그 나라의 참여를 배제 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새클턴 정글을 새클턴 국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테니만큼, 그들의 도움 또한 꼬옥 필요했다. 뭐, 협조 요청이야 삼국의 외교부쪽과 마법 길드에서 처리할 일이고, 그 일은 벌써 끝이 났는지 새클턴 정글 근처의 마을에서 우리와 같이 동행할 용병들과 새클턴 국에서 나온 사람들과 합류할 예정이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 용병들과 새클턴 국 사람들은 마법 던전이 있는 부근의 지형에 대하여 정보를 모으고 그 곳에 갔다 오는 방법, 그리고 가기 위해 필요한 물건들과 안내자들을 준비해 두고 있을 터였다. 우리는 그 곳에 가서 그들이 준비해둔 물품을 들고 안내자의 인도를 받아 마법사들의 신변만 보호하면 땡이었다. 원래 그 곳에 뭐가 있으며 그것이 어디로 가는 것인가 하는걸 감시하는게 주된 임무였지만, 그런거야 국가에서 파견된 각국의 마법사들이 알아서 할 문제였으니까 내가 신경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쪽 일행들만 해도 16명인데 나머지 3국 사람들과 마법 길드 사람들, 그리고 같이 들어갈 용병들과 안내자까지만 하면 인원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날테고, 그들 또한 한가락 하는 실력자들만 왔을테니 아무리 악명 높은 새클턴 정글이라고 해도 크게 위험할 것 같지 않게 생각되었다. 내 능력이 얼마만한 건지를 떠나서 말이다. 날씨는 이제 초여름으로 향하고 있어서 밤에 노숙할때도 추위로 인해 고생하는 일은 적어졌다. 새클턴 정글에 들어갈 인원이 최종적으로 집합할 때의 시간은 초가을쯤으로 잡고 있었다. 녹스국이라면 몰라도 그 나라를 통과해야만 새클턴국에 도달할 수 있는, 마르타국과 벨레니국에서 오는 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넉넉하게 잡은 것도 있지만, 여름에 새클턴 정글에 들어가는 건 현명치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라함 대륙을 감싸고 도는 사해가 모두 따뜻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대륙 가에, 그러니까 바다를 접하고 있는 나라들은 비교적 따뜻한 기후를 가지고 있었다. 반대로 대륙 가운데로 들어갈 수록, 바다를 멀리하는 나라일수록 기온이 점점 낮아졌기에 그라함 대륙에서 분할된 네 대륙 중 중앙대륙이 가장 날씨가 추웠다. 그렇게 따뜻한 나머지 세 대륙 중 북대륙이 가장 따뜻했는데, 그 덕분에 기온이 따뜻해도 사계절이 뚜렷한 다른 두 대륙 ( 서대륙과 남대륙)에 비하여 북대륙에서는 사계절의 구분이 뚜렷하질 못했다. 북대륙 중 가장 아랫쪽에 있는 로스국이야 그나마 사계절을 나눌 수 있었지만, 아메리국과 새클턴국은 여름과 겨울(그것도 계절을 나누느라 겨울이라 명칭을 붙인 것이지, 그 나라의 겨울은 중앙 대륙의 봄이나 가을 정도의 따뜻한 날씨를 자랑했다.), 딱 두 계절로 나뉠 지경이었다. 그거기에 새클턴국은 강과 호수가 엄청 많은 것을 보면 눈치챌 수 있듯이, 겨울에는 그나마 비가 적었지만, 여름에는 엄청난 강수량을 자랑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하냐하면 굵은 장대비가 쫙쫙 쏟아질때에는 사람들이 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한다고 할 정도였다. 비를 맨 몸으로 맞으면 다음날 심하게 두들겨 맞은 것 처럼 멍이 들고 아프다나? 다른 나라에서 생각하는 소나기나 장대비 수준이 아니라고 한다. 특히나, 새클턴 정글에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그러한 수준의 장대비가 여름에 내리는 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하니 그 시기에 정글에 들어간다는 건 죽으러 간다는 말과 동일했다. 하긴, 그렇게 비가 많이 오고 따뜻하니까 악명 높은 정글이 생겨나고 지금까지 그 위명을 날릴 수 있는 거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정글에 드나들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여름에는 꼭 그 곳에 들어가는 걸 피했다. 그런거 보면 차라리 계절을 여름하고 겨울로 나누지 말고 우기와 건기로 나누는게 좋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그렇게 비가 왕창 쏟아지는 우기 여름은 짧으면 두달, 길면 세달 정도 뿐이고 나머지는 건기 - 그렇다고 비가 아예 안 오는 건 아니다 - 겨울이라니, 새클턴 국 식으로 하자면 건기 겨울이 시작될 즈음 도착해서 정글에 들어간다면 일년 후 우기 여름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나오면 되니 시간적으로는 여유가 넉넉했다. 뭐, 얼마나 대단한 곳이기에 탐사하는데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릴까 싶지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반달이라는 시간동안 열심히 달려 마르타국과 벨레니국, 그리고 녹스 국의 국경이 맞다아 있는 쿤라트라 불리는 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동안 장거리 여행은 물론이거니와 이러한 노숙은 경험해본 적도 없었던 댄더스 스니볼리가 빠른 장거리 이동에 적응을 못해 탈진해 며칠 끙끙 알았다거나, 리건이 이번 여정에 처음부터 끝까지 동참한다는 걸 나머지 일행들에게 밝혀 놀라게 했다거나, 쥬디 블러드 무어경이 램버트의 작은 키를 가지고 실수로 한마디 했다가 램버트의 쌍도끼와 결투를 할 뻔한 등등의 몇몇의 소소한 사건이 있었지만, 어쨌든 일행들은 무탈하게 한 명도 빠짐 없이 도착했다. 쿤라크라는 지역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 벌판이었다. 세 나라의 국경이 맞다아 있는 곳이라 활발한 교역 도시가 있을법도 한데, 사람들이 사는 작은 마을이 있기는 커녕,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 조차도 없었다. 단지 메마른 붉은 토양으로 뒤덥혀 바람에 이리저리 붉은 먼지가 일었다. 뭐, 그 위로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모습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 모습만 빼면 완전 황폐하기 이를데 없는 풍경이라 마치 초원 한 가운데에 덩그라니 사막이 놓여 있는 것만 같아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묘하기도 하고 믿기 어렵기도 하고, 하여간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어... 어라..." 그 붉은 대지를 벗어난, 벨레니 국경 도시는 삼국의 국경이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시 답게 엄청나게 번화하고 바글바글한데 말이다. 그 도시를 벗어나 녹스국으로 건너가기 위하여 국경 수비대측에 간단한 통과 절차를 받는 동안 처음 본 쿤라트 지역은 마치 딴 세상 같았다. 파릇파릇한 봄 같은 집안에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차가운 눈보라가 쌩쌩 날리는 겨울을 보는 느낌이랄까? "저기, 여기는 땅이 왜 이런대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다녀서 그런 건가?" 절차를 끝내고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이동하는 상인 대열의 뒤를 따라 저~ 멀리 보이는, 녹스 국의 국경 도시쪽으로 향하며 리건에게 묻자 그가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닌다고 땅이 이지경이 되겠냐?" "그럼 원래 이랬어요?" "천만의 말씀. 이 지역은 몇백년 전까지만 해도 엄청 기름진 땅이었지. 소위 말하는, 인간들이 제일 탐내는 그런 땅이었어." "헐... 그런데 왜 이렇게 변했대요?" "전쟁 때문에. 그라함 대제가 죽고 그의 제국이 멸망한 뒤 혼란스러운 시기가 도래했을때, 이 땅은 중앙 대륙에 난립한 국가들이 가장 탐내는 땅 중 하나였어. 얼마 지나지 않아 마구 난립 되었던 수많은 국가들 중, 작고 능력 없는 국가들은 멸망하고, 중앙 대륙에서 현재의 세 나라만 남았을때도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세 나라의 전쟁은 계속 이어졌지." "헤에..." 왠지 삼국지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 같아 사람 사는데는 어디나 같나보다... 생각하며 리건의 이야기에 계속 귀를 기울였다. "전쟁이 길어지자, 나중에는 이 땅을 꼬옥 빼앗아야겠다는 게 아니라 어떻게는 이겨야 겠다는 자존심 대결로 이어졌지. 다른 나라가 차지하지 못하도록, 한 나라가 차지하면 다음 날 다른 두 나라가 쳐들어왔어. 수많은 병사들로도 한 나라가 우세를 점하지 못하자, 차츰 체계를 잡아가 세력을 키워나가던 마법사들도 대거 투입되었지. 수많은 마법이 남발되었고, 심지어는 독까지 사용되었어." "헐... 땅이 견디지 못했겠군요." "맞았어. 결국 이 땅은 죽어버렸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어. 결국, 전쟁을 끝나게 해준 건 다른 대륙의 나라들이었지. 중앙 대륙을 차지하고 있던 세 나라가 아웅다웅 하자 먼저 조약체결로 안정을 찾은 남대륙의 두 강대국 나라가 중앙 대륙을 넘보기 시작했지. 거기에 북대륙쪽은 물론이거니와, 서대륙에서도 패잔한 나라가 중앙대륙쪽으로 넘어오기 시작했어." "호오, 그래서 자기들끼리 싸우면 다른 대륙의 나라에게 도움밖에 안된다는 걸 깨닫고는 전쟁을 멈췄군요?" "맞았어. 한 국가를 세우고, 혼란기에서 끝까지 나라를 지탱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머리가 뛰어난 편일테니 계속 전쟁을 한다는 건 자기들만 죽어나가는 꼴이라는 걸 알아챘겠지. 그래서 세 나라는 자존심도 접고 조약을 맺은 거야. 어차피 죽어버린 땅을 소유해봤자 자존심을 세우기야 하겠지만, 오히려 관리하는데 애만 먹을게 뻔했으니 세 나라 모두 여길 포기하자고 했지. 그리고 국경은 이 곳을 벗어난 곳에 세우고, 여기는 중립 지역으로 선포했지. 그게 삼국 침략 불가 협약이었던가?" "오오... 그럼 결국 애꿏은 땅만 죽어버렸네요. 가엽게도..." '이것도 자연파괴겠지?' "인간이란 그런 거지." 리건의 말에 화가났지만 반박 못하는게 더 분했다. '쳇, 드래곤들은 안 그런가?' 그래서 부루퉁해져서는 속으로만 꽁시렁 대는데 내 구원단(?)이 나타났다. [얼씨구? 자기네들은 안그러는 척 하고 있네. 네놈들의 비만 도마뱀들은 안그런다니? 네놈들이 한번 난리치면 인간들이 몇백년은 난리치는 꼴을 내면서 그러냐?] 실피드를 필두로 정령왕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맞아, 맞아. 500년 전인가? 한 실버 드래곤 녀석이 난리치는 바람에 큰 산 하나가 몽땅 날아갔잖아!! 거기서 관리하고 있던 땅의 정령들 수천명이 갑자기 정령계로 송환당하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이프리트, 너도 그런일 당했었지?] 노아스가 투덜거리며 이프리트를 들먹이자 아저씨가 쓴 웃음을 띄우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화산 활동이 한번 일어났는데, 하필 그 장소가 왠 실버 드래곤 녀석 근처인 바람에, 녀석이 시끄럽게 군다고 화산을 자신의 냉각 브레스로 얼려버려 단체로 정령계를 떠났던 불의 정령들이 순식간에 다시 송환되어버린 적이 있었지.] 그러자 아버지가 다시 끼어들었다. [그것 뿐이야? 300년 전에는 왠 시뻘건 드래곤 녀석이 호수 정령이 자신에게 말대꾸 한번했다고 열받아서 호수 하나를 통채로 없애는 바람에 물의 정령들이 비명을 지르며 정령계로달려왔었다고.] [어.허.허.허....] 정령왕들이 토론하는 불만들에 나는 황당함을 느끼며 리건을 바라보니 리건은 괜히 먼 곳을 보며 딴청만 부렸다. [흥, 드래곤 놈들이 일반 정령들을 발가락의 때만큼도 보지 않는게 어디 하루이틀 일이야?그나마 정령들이 죽지는 않고 정령계로 소환 되는데다가, 그런 일이 자주 있는게 아니었으니까 망정이었지, 만약 상해를 입었다면 드래곤들과 결판낸게 아마 한두번이 아니었을 거다.] 실피드의 말에 세 정령왕이 맞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자 리건의 시선은 더 멀리로 날아갔다. "호오..." 정령왕들의 말에 내가 씨익 웃으며 리건을 바라보자 그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어험험...." 녹스국 국경을 통과하여 도시 안으로 들어가니 그 곳 역시 벨레니국 국경 도시 못지 않게 엄청 번화한 곳이었다. 그 복잡 다단한 곳을 누비며 약속된 여관을 찾아가니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아직 마르타국쪽 사람들은 도착하지 않았다. 일단은, 중앙 대륙의 삼국과 새클턴 국, 그리고 마법 길드의 탐사가 끝날때 까지는 새클턴 정글에서 발견된 던전 이야기는 숨기기로 했기에 우리는 어떠한 - 정말 있는지도 모를 - 상단의 이름을 대고 여관에 방을 잡아놨다. 먼저 도착한 쪽이 방을 잡고 나머지 쪽 사람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봤자 비슷한 시기에 출발했을테고, 걸리는 시간도 비슷할테니 아마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터였다. 얼굴도 모르는, 단지 역사 속의 이야기로만 접한 그라함 대제지만, 그 사람 덕분에 가장 좋은 거는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왔는데도 외국말을 하지 않아도 말이 통하게끔 만들어 놨다는 거였다. 물론, 마치 지방 사투리처럼 각 나라, 혹은 멀리 떨어진 지역마다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그렇다고 아예 말이 안 통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바닷가 속의 집에서 나와 인간 세상에서 생활 하면서 가장 부러웠던게 바로 그것이었다. '하아, 한국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그러면 영어를 배울 필요도, 제 2 외국어를 배울 필요도 없었을텐데...' 그랬다면 수험생들의 과목이 두개나 줄어들고 영어 단어를 외우기 위하여 머리를 쥐어 뜯지 않아도 되고, 외국말을 잘 하기 위하여 해외 연수나 유학을 갈 필요도 없고 말이다. 거기에다 외국 여행 갈때 말이 안 통할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고... '아아, 정말 좋은 일이야. 이왕이면 한국인이 그라함 대제같은 일을 해줬으면 더더욱 바랄 게 없지. 키득키득키득...' 지구상의 모든 세계의 언어가 한국어로 통일되는 걸 상상하고 혼자서 키득키득 웃다가 다른 사람들의 이상하다는 시선을 받게 되자 얼른 정신을 차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묘한 표정으로..." 리건의 질문에 나는 다시 헤죽 웃었다. "아뇨, 갑자기 전에 살던 세상이 생각 나서..." "전에 살았던 세상? 흥, 살아봤자 네 아버지랑 살던 깊은 곳(?)이 아닌 이상 인간 세상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새삼스러울 거 있나?" 리건에게는 나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를 했지만, 내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에게 버림 받아서 간 곳이 다른 차원의 세계인 한국이라는 건 이야기 안 했다. 단지 버림받아서 마음씨 좋은 어느 부부 손에서 컸다고만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리건은 아마도 이 세상 어딘가 다른 지방인줄로만 생각했을 거였다. '흠... 뭐, 비슷비슷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다른 세상이니까... 헤에, 리건이 거기로 넘어가면 과연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나? 리건이 세상을 정복할까? 아니면 첨단 과학 무기를 앞세운 그 세계 사람들에게 잡혀서 해부가 되고 박제가 될까나? 어쩌면 양패구상?' 리건에게 한국을 가르쳐줘서 그 곳에 넘어가 한국인으로써 세게 정복을 해보라고 하면 어떨까... 까지 생각에 미치자 나는 다시 헤죽헤죽 웃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리건의 질문에 나는 흠칫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리건과 21세기의 세상을 대결 시키는 걸 상상하고 있었다는 걸 차마 말할 수가 없어서 - 거기서는 리건이 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 나는 서툴게 얼버무렸다. "아, 아뇨. 그냥, 새클턴 정글은 어떤 곳일까 하고..." 그러자 그걸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 동안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나에게 말을 건 일이 전혀 없는 국방부측 리더인 뉴먼 몬트리올경이 차가운 목소리로 충고했다. "무슨 생각인지 뻔하군요. 그 곳에가서 당신 실력을 발휘해 공을 세우겠다는 거겠지요? 백작의 능력이 높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그 곳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러니 부디 가셔서 공을 세운답시고 혼자 나서지는 말아 주시길... 이번 임무는 일행 모두 같이 움직여야 한다는 걸 명심해 주십시오." "아, 예..." 혼자 날뛸 생각 같은 건 가지고 있지도 않았지만, 나는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첼릿과 굳은 표정을 한 채 몬트리올경을 쏘아보는 듀비를 향해 배시시 웃어보였다. "자네... 미움 받구 있구만?"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램버트가 각자 정해진 숙소로 올라갈때 나에게 속삭였다. "아하하하... 그, 그런거 같죠?" ====================================================== 제 34화 새클턴 정글 (3) 다음 날 오후, 마르타국 사람들과 마법사 길드측 사람들이 도착했다. 마르타국 사람들은 모두 20명, 마법사 길드에서 나온 마법사들은 5명, 총 25명의 사람들이 더 늘어난 것이었다. 거기에 마르타국에서는 마법사가 5명이었고, 정령사, 혹은 정령 검사나 마검사가 10명, 기사가 5명이었다. 놀라운 것은, 마르타국에서 온 마법사나 정령 검사 중에는 엘프와 하프 엘프가 섞여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놀랄 것은 없어. 마르타국은 그라함 대국 시절, 그라함 대제의 이종족 정복 정책때문에 피해를 보던 이종족들을 보호한 곳이었거든." "아, 메이크피스 대 마법사 말이군요." "맞았어. 그때문인지 마르타국은 이종족들을 사람들과 똑같이 대우하고 있지. 또한 그때의 이종족들의 후예들이나, 아니면 타 종족간에 태어난 혼열아들또한 많이 남아 있고 말야. 특히나 엘프들이나 하프 엘프들은 그들의 특줄한 능력으로 왕실 여러 곳곳에 꽤 많이 진출해 있거든. 마르타국 왕실에서 이종족들을 보는 건 흔한 일이지." "오오..." 리건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러한 설명때문인지 마르타국측 이들에게 은근히 호감이 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마르타국측 사람들은 이런 내 호의를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들이 오고 난 뒤, 우리측 일행들과 그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기 때문이었다. 주도권 싸움이었다. 삼국이 공동으로 한다는 협정을 맺었기는 했지만, 삼국에서 모인 사람들을 잘 통솔할 지휘자가 필요했고, 그 일은 세 사람이서 한꺼번에 하기는 불가능했다. 어차피 삼국에서 각각의 일행들을 통솔할 리더가 있기는 했고, 그들이 공동으로 지위하기로 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 와중에서 가장 뛰어난 한 사람이 암묵적으로 전체적인 리더가 되리라는 건 자명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리더 된 자가 자신의 나라 사람들에게는 유리하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불리하게 작전을 진행시킨다 해도 막기는 어려웠다. 뭐, 항의야 할테고 그도 눈에 뜨이게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만, 논리적인 이유로 막아버린다면 불가능했다. 게다가, 위험한 환경으로 들어가는데 리더의 명에 불복종하여 팀이 분열된다면 팀 전체가 위험 하다는 걸 모두가 잘 알고 있었을테니 약간의 불만은 다 감수해야만 할터였다. 그러니 두 나라 일행은 만나자마자 드러내놓고 노골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상대편을 제압하기 위한, 안 보이는 기세싸움에 들어갔던 것이었다. 아마, 녹스 국 일행과 새클턴 일행까지 만난다면 이 싸움은 더 치열해질 터였다. 뭐, 내가 보기에는 정글에 들어가서 몇번 위험한 상황을 겪고 나서야 아마 리더가 결정될 것 같으니 벌써부터 힘들게 이럴게 있나 싶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이러한 기세 싸움은 우리 일행 사이에서도 있었다. 바로 국방부측 사람들과 왕실 기사단측 사람들 사이에 말이다. 물론, 국방부측쪽에서는 국경을 넘기 전까지는 리건이 동행할 줄은 - 그들은 어디까지나 리건이 우리를 배웅하는 줄로 알았다고 했다. 리건도 그들에게 확실하게 밝히지 않았고 말이다. - 몰랐기에, 에아머스 차트워드경에게 통솔권을 넘기지 않기 위해 기세 싸움을 걸었었다. 물론, 리건이 간다는 걸 알고 있는 차트워트경은 그런걸 무시했고 말이다. 그걸 더 약올라 하던 뉴먼 몬트리올 경은 국경을 넘어가서 리건이 끝까지 동행한다고 밝히자 자신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줄 알고 뒤로 넘어가려고 했었다. 그러더니 그 다음에는 리건이 리더를 몬트리올경에게 위임한다고 선언하자 엄청 허탈해 했다. 아마 내가 그에게 한소리 들은 것도 그가 그러한 충격을 받은데 데한 분풀이도 쬐끔은 들어 있었을 거였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허탈과 분노의 늪 속에 빠져 있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 날 마르타국 사람들이 도착하여 나라간의 기세 싸움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은 그 던전에 뭐가 있느냐를 떠나서 위험한 장소에 들어가는 것이니만큼, 각 나라에서는 신경을 써서 실력자들을 보내왔을터였다. 뭐, 마르타국도 벨레니국과 마찬가지로 빽이 강한 사람들은 모두 빼놨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번 새클턴 정글 안 던전 탐험에서 누가 리더자리를 차지하느냐는 각 나라의 자존심이 달려있는 문제였다. 거기다가 어느 나라 사람들이 더 많이 살아 남느냐 하는 것 또한 말이다. "치밀하게 서로를 견재 하면서도, 위험한 곳에 들어가니 상호간의 긴밀한 협조를 해야 하는 상황이지." 이런 분위기를 간략하게 설명하는 리건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참으로 복잡한 상황이군요. 그렇게 위험한 곳이라면 그냥 맘 편하게 가도 부족할텐데..." "인간의 마음이란 그런 거지. 보면 볼수록 재미있단 말이야." 흥미 진진한 표정으로 양 국간의 일행들 사이에 흐르는 냉기류를 구경하는 리건의 모습을 보니 나는 문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이번에 합류한 이유가 이걸 구경하기 위해서인거 아니에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리건을 바라보니 그가 씨익 웃었다. "뭐, 그런것도 있고." 그래도 다행이 그러한 기세 싸움은 조금 더 격렬해지기는 했지만, 노골적인 것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겉으로는 화기애해하게, 서로 깎듯이 예의를 지키면서 여행할 수 있었다. 사실, 그런게 투닥투닥 싸운다고 해서 금방 정해지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서로 계속 견제는 하면서 확실하게 승부(?)를 낼 수 있을때까지 기다리는 거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기세와 견제 싸움은 녹스국측 사람들과 합류하면서 더욱 더 심해졌다. "인간들은 이상하군. 저렇게 할거 차라리 한바탕 하는게 났지 않아? 이거 언제까지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지내야 해? 내가 상관할바는 아니지만, 옆에서 오래도록 있자니 나까지 짜증 나는구만." 인간들 일에는 상관하지 않는 램버트조차도 그러한 냉랭한 기류가 엄청 신경쓰이는지 자신의 쌍도끼를 은근히 어루만지며 투덜거렸다. "아하하하... 아무래도 정글에 도착할때 까지는 저럴거라는데요."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설명조로 입을 열자 램버트도 대충 눈치채고 있었던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리 근처에 조용히 서 있는 듀비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그거지만, 저 놈좀 어떻게좀 해봐라. 이거야 원... 저 인간들이야 나랑 상관 없는 일이려니.. 하고 신경을 끊는다손 쳐도, 기껏 일행이라고 있는 놈이 왜 저러냐?" "그, 그게... 저도 잘..." 하루 하루가 지나갈 수록 우리는 그만큼 점점 더 새클턴 정글에 가까워졌고, 그럴수록 듀비의 얼굴도 그만큼 굳어졌다. 원체 말수도 적고, 표정 변화도 없는 그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초 알수가 없었는데, 요즘에는 얼굴이 잔뜩 굳어있는것이 엄청 긴장해 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문제는, 그가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굳어 있는지 모르니 어떻게 해줄수도 없었다. 고향에 가까워진다는 게 기쁜데 그걸 내색 안 하느라 그러는 건지, 아니면 예전 밤에 혼자 중얼 거리던, 갔다가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때문에 그러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말이다. 그가 무슨 일이 있을때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스타일도 아니니, 어떻게 해줄까요 라고 물어볼 수도 없고, 괜히 아는체 했다가는 그날 밤에 안 자고 있던 걸 들킬까봐서도 선듯 나서기도 어려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때 일어나가지고 듀비가 놀라든말든 딱 잡아 앉히고 대화를 해볼껄... 하는 후회도 들었지만, 그런다고 듀비가 순순히 말할 타입도 아니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바른 길이 보이질 않았다. 녹스국측 사람들까지 합류하여 70명이나 된 엄청난 일행이 녹스국과 새클턴국의 국경을 가로 질렀을때 새클턴 왕실에서 보낸 사자가 우리를 맞이했다. 처음에는 그들이 어떻게 우리가 온 걸 알 수 있었을까 의아했지만, 곧 일행을 보자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처럼, 누군가를 호위하는 일도 없는데 대단한 실력자들이 한 무리를 이루어 이동하는 건 엄청 눈에 뜨일 수 밖에 없을터였다. "새클턴 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새클턴 정글 근처까지 모시고 가라는 임무를 맡고 있는 쿠르즈 펜워렐이라고 합니다." 그는 마치 인도 사람들처럼 짙은 색의 피부에 곱슬 거리는 검은 머리칼을 가지고 있는 40대쯤 보이는 남자였다. "안내자가 있을 줄은 몰랐군. 새클턴 정글 근처에서 합류하게 될 줄 알았는데." 매르타국측의 누군가가 의심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쿠르즈라고 소개한 중년 남자가 피식 웃었다. "원래는 그럴 예정이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중앙 대륙과 저희 북대륙의 환경이 틀리다보니 안내자가 있는게 좀더 편안히 오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게다가 중앙 대륙 쪽에서 오는 용병들도 마침 얼마전에 도착했고 말입니다. 그들을 데리고 가는 김에 이왕이면 여러분들도 안내해드리는게 좋겠다 싶어서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일행들이 믿는 눈치가 아니었던지 쿠르즈가 품에서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며 입을 열었다. "여기, 저희 왕실에서 보내는 제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문서가 있습니다. 그래도 의심스러우시면 왕실측과 연락을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결국 삼국의 일행들은 그 남자가 내민 통신용 수정 구슬을 통해 새클턴 왕실로 연락을 하고 나서야 그를 완전히 믿었다. 다른 삼국 사람들은 처음 보자마자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놓고서는, 왜 새클턴 국에서 나온 안내자는 못 믿는지 의아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삼국, 아니 새클턴국까지 4국에서는 서로 자신들이 파견하는 사람들 중 리더에 대한 초상화와 간단한 인적 사항을 서로 교환해놨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벨레니국에서는 에아머스 차트워트경과 뉴먼 몬트리올 경의 초상화가 다른 삼국의 리더 손에 들어가 있는 식으로 말이다. 게다가 던전에 대한 이야기도 정식으로 발표가 되기 전이라서 낯선 이가 아는 척 다가오니 의심을 한 것이었다. 물론 새클턴 왕실 측도 그걸 알기에 쿠르즈에게 그의 신분을 증명할 문서와 통신용 수정 구슬을 챙겨준 것이겠지만 말이다. "숙소는 미리 잡아놨습니다. 출발은 내일 아침에 할 예정인데, 혹여 다른 계획이 있으신지요?" 쿠르즈가 삼국의 리더를 보고 말하자 각 국의 리더들은 서로 눈빛을 한번씩 교환하더니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 식사를 하시고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필요한 물품들은 저희측에서 미리 준비해 놨으니 따로 필요한게 있으시면 저에게 말씀해주십시오. 가능한한 내일 아침까지는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혹여 직접 가시겠다고 하면 안내해 드리도록 하구요. 그리고, 저희측에서 고용한 용병대가 와 있는데, 대장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삼국의 리더들은 다시 시선을 교환하더니만 녹스국의 리더가 입을 열었다. "뭐, 벌써 볼 필요는 없고, 내일 출발할때 잠깐 보도록 하지." "그러도록 하십시오.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같은 중앙 대륙인 녹스국은 벨레니국과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그 나라를 통과할 때는 마치 벨레니국을 지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새클턴 국은 그라함 대륙에서 가장 덥다는 북대륙이라서 그런지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달라진 환경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뜨거운 태양을 피하기 위하여 대부분 머리에 터번, 혹은 밀집 모자를 쓰고 다녔고, 옷도 태양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면서도 통풍이 잘 되도록 고안된 옷들이었다. 건물들 근처에 드문 드문 서 있는 나무들은 잎이 굉장히 넙적한 야자나무처럼 생겼다. 거기에 우리가 들어간 건물들은 창이 크게 나 있었고, 문틀이 가느다란 대나무 같은 것을 엮어서 만들어 통풍이 잘 되게끔 되어 있었다. 거기다 처마가 길어 햇볕이 들어오지 않고, 건물 자채도 햇볕에 쉽게 달구어지지 않는 돌이나 진흙 같은 재질로 만들어져 시원함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쿠르즈는 우리가 이쪽 대륙의 기후에 맞는 옷들을 미처 준비 안 한걸 알고 있었던 듯, 새클턴국의 옷들을 한아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여긴 햇볕이 너무 뜨겁기 때문에 햇볕에 너무 피부를 노출시켰다간 가벼운 화상이나 물집이 생길수도 있답니다. 거기다가 일사병은 쉽게 걸리지요. 그러니 외출하실때는 꼭 모자를 쓰시고 피부는 될 수 있는 한 내놓지 않는게 좋습니다." 사실, 새클턴국에 오는 동안 여름이라는 계절때문에 더운 날씨를 뚫고 와서 더위에는 익숙해 있었는데, 이게 막상 새클턴국에 오니 더운데다가 습한 기온 때문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그런데다가 피부를 다 가릴 만한 길다랗다 못해 치렁치렁한 옷을 보니 더 답답해보였다. 이 더위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긴팔 긴 바지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그쪽 사람들이 건네준 옷을 입어보니 피부에 달라붙지 않고 바람이 술술 통하는데다 까끌까끌한 감촉이 무척 시원하게 느껴졌다. 마치 모시를 입은 것 처럼 말이다. 아마 그러니까 사람들이 덥고 습한 날씨에 이런 옷들을 입고 다닐 수 있는 거겠지만... 사실 벨레니국에서 입고 온 옷들은 몸에 약간 달라붙는데다 땀이나 습기를 쉽게 흡수해버려서 새클턴국경을 넘어서자마자 축 늘어져 몸에 딱 달라붙어서 답답하고 덥게 느껴졌었던 것이다. "이거야 원... 괜히 옷을 많이 마련해온 거 같은데요? 여기서는 전혀 쓸모가 없잖아요?" 거기서 제공해준 옷으로 갈아 입고 일행을 만난 자리에서 투덜대자 오랜만에 듀비가 입을 열었다. "정글에서는 이렇게 풍성한 옷자락은 오히려 거추장스럽답니다. 그 곳에서는 차라리 벨레니국에서 입었던 옷을 입으시는게 좋을 겁니다." "그, 그래요? 그럼 무척 더울텐데..." "여기보다는 덜 합니다. 아무래도 그늘이 많으니까요." "그렇군요." "던젼만 아니라면 별로 오고싶지 않은 곳이야. 왜 이렇게 더운건지 원..." 덥수룩한 수염과 머리카락들 때문에 본인은 물론이거나와 남들도 더워보이게 만드는 램버트가 목으로 줄줄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투덜댔다. "램버트... 그 머리카락 말인데요, 더우면 좀 묶지 그래요? 저 처럼요." 나는 애당초 귀찮아서 벨레니국에서 출발할때부터 머리를 묶고 다녔지만, 램버트는 그냥 그대로 다녔던 것이다. 하긴, 워낙 덥수룩해서 묶는다고 잘 묶어질지도 의심스러웠지만,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묶는게 나을 것 같았다. 그의 덥수룩한 머리를 보자니 그렇지 않아도 더운데 더 더워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끄응... 그럴까? 전에 새클턴 정글에서는 이정도까지는 아니었던거 같은데... 확실히 여기가 더 덥긴 더운가보군." 그 또한 어깨를 덥는 머리가 답답했던지 내 제안에 쉽게 승낙했다. 그래 나는 여관측에 부탁해서 시원해보이는 파란색 리본을 구해 정성스럽게 램버트 머리를 빗겨준다음 리본으로 머리를 묶어줬다. "자, 어때요? 시원하죠?" "흠, 그렇군. 앞으로는 계속 이러고 다녀야겠는걸?" 무척이나 만족한 표정의 램버트는 기분 좋게 밖으로 나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상을 험악하게 찡그려야 했다. 파아란 리본으로 붉은 머리를 묶고 나타난 드워프의 모습을 본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식탁에다 머리를 박고 어깨를 들썩였던 것이다. 차마 그의 앞에 대놓고 웃지를 못하니 억지로 참으려고 했지만, 웃는 걸 참는 것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어디 있을까? 뺨과 배에 경련을 일으켜가면서도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가련해 보일 지경이었다. 안타까운건 그렇게 안 웃기 위해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램버트가 눈치를 채버린 점이었지만... "왜 웃는 거야? 지금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야 뭐야? 앙?" 그 동안 나와 듀비, 첼릿하고만 이야기할 뿐 다른 사람과는 전혀 대화를 하지 않던 램버트가 다른 사람에게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 제 34화 새클턴 정글 (4) 다음 날, 너무 많은 인원수를 수용 못하여 다른 여관에 묶었던 용병들이 우리와 합류하기 위하여 우리가 머물고 있는 여관에 도착했다. 그때쯤에는 우리도 아침 식사를 끝내고 출발 준비를 마친 상태였기에 모두들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1층 홀에 내려와 있는 상황이었다. 일단의 무리들이 우르르 들어와 비어 있는 자리를 잡고 앉는 사이 쿠르즈가 왠 중년 남자를 데리고 들어오더니만 삼국의 리더들끼리 앉아있는 테이블로 인도했다. "이번에 우리와 동행하게 될 용병단의 리더입니다." "트래비스라고 합니다." 간략하게 자신의 소개를 하면서 고개를 꾸뻑 숙이는 중년 남자에게 무심하게 시선을 던지고 있던 나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어라... 왠지 낯이 익는 것 같은데...' 상회 생활을 한지 얼마 안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국경도 몇번 넘으면서 운송을 한 적이 있었던 터라 그러는 동안 알게 모르게 스쳐 지나간 남자인가보다 여겼다. 그래서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시선을 돌리는데 누가 친근하게 내 어깨를 탁 치는 거였다. "이야아, 이게 누구야?" "응?" 의아해서 시선을 돌리는데 깔끔하게 생긴 낯익은 얼굴이 날 내려다보며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분명히 낯이 익기는 익었는데 누구였는지 생각이 안 나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시간을 끌며 누구인지 생각해 내려고 했는데, 상대방이 말을 이었다. "이것도 참 인연이네. 이게 몇년 만이지? 2년이 넘었던가?" 무척 반갑게 말하며 내 손을 덥썩 잡고 흔드는 거였다. "아, 예." 얼떨떨하게 손을 잡혀 흔들리는 상태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2년 전이라는 힌트로 그가 누구인지 애써 생각하는데, 그 남자가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고개를 돌리며 누군가를 손짓해서 부르는 거였다. "어이, 이봐 덤버트! 여기 아는 녀석이 있어. 얼른 와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도 무시한 채 큰 소리로 불러제끼는데 덩달아 시선을 받게 된 나는 얼굴이 화끈 거릴 지경이었다. '아앗, 그렇다고 그렇게 큰 소리로... 가만, 덤버트? 아하, 덤프트럭!!' 그 이름을 듣자 그제야 겨우 기억이 났다. 이들은 내가 아직 조엘의 시종으로 있었을 때 웨스트모어랜드 후작령에서 만났었던 용병들이었다. 그때 몬스터 사냥에 고용되었었는데, 아침 수련 시간때 한 기사와 시비가 붙어 한판 하려다가 못하던 거구가 바로 덤프트라는 용병이었다. 그의 덩치 때문에 덤프트럭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내 손을 마주잡고 흔드는 자가 그와 절친한데다가, 파티때 잠시 나와 마주쳐 인사를 나누었던 그레이라는 용병이었다. 이들 모두 트래비스라는 용병단 소속이었다. '아, 맞어. 용병 대장 이름이 트래비스여서 트래비스 용병단이라고 했었지?' 한 가지가 기억이 나자 나머지도 손쉽게 연이어 기억이 났다. 그래 나는 내 기억대로 여전히 덩치가 큰 용병이 다가오자 반갑게 인사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저 기억 하세요?" 그러자 그가 나를 쓰윽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때 그 갈비 꼬마군. 많이 컸네?" 그러더니 큰 손을 들어 친근하게 내 머리를 툭 치는 거였다. "가, 갈비..." 날 그렇게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파티때 내 바로 앞에서 내가 먹으려고 찜해 뒀던 갈비를 싹 쓸어가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본걸 인연으로 몇마디 나누었던 것이다. 참내, 그것도 인연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이런 무엄한!!" 날카로운 한 마디 외침과 함께 어느새 뽑혀져 나온 롱스드의 날카로운 검 끝이 덤버트의 목에 겨누어져 있는 거였다. "체, 첼릿?" 덕분에 덤버트는 내 머리를 툭치고 손을 내리던 그 자세 그대로 얼어 붙어버렸고, 그 옆에 있던 그레이는 자신의 허리에 찬 검 위에 손을 얹은 채 긴장한 자세로 검을 주시했다. 어리벙벙해진 내가 얼빵하게 부르는 거 무시한채 첼릿은 무서운 살기를 흩날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분이 뉘신줄 알고 네까짓게 감히 어디다 손을 대는 거냐? 당장 무릎 꿇고 사죄하지 못할까?" 그제야, 나는 여기서 내 위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기사단 측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매서운 눈으로 상황을 주시하며 검에 손을 얹고 있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구경하고 있었지만... "너, 높은 사람이었냐?" 침을 한번 꿀꺽 삼킨 그레이가 이 분위기를 타개하고 싶었는지 전혀 긴장감 없는 목소리로 장난 스레 말을 건네왔다. 물론 그의 눈빛은 전혀 장난스럽지 못했지만...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에 일이 커져버리자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신분 계급이라는 거 아직도 익숙하질 못하다니까...' "첼릿, 검 내리세요. 예전에 알던 분이라서 반갑게 인사한 거예요. 이들은 아직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구요." 내 말에 첼릿은 검을 내렸지만, 여전히 매서운 눈으로 덤버트를 쏘아보고 있었다. "어떻게 아는 사람이냐?" 분위기를 타개하는 걸 돕기 위해서인지 리건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예전에 웨스트모어랜드 후작령에 갔을때 만났던 분들입니다." "'분'이라니요? 해인님, 이들은 한갓..." 첼릿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지만, 손을 들어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나는 다시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예, 예, 용병이라는 이야기죠? 하지만 첼릿, 나도 얼마 전까지는 내가 귀족인걸 모르고 살았다고요." "흠, 그럼 지금은 귀족... 이십니까?" 분위기 때문인지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런 그에게 약간 쓸쓸한 표정으로 싱긋 웃어준뒤 대답했다. "정식으로 소개하지요. 해인 오스번 엠브로스라고 합니다. 황공하옵게도 벨레니국의 백작이란 작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덤으로 벨레니 왕국 왕실 기사단 소속이지요." 장난스러운 에아머스 차트워드경의 말에 그렇지않아도 둥그렇게 된 두 남자의 눈들이 찟어질 듯 더 커져버렸다. "왕실 기사단?" 왕실 기사단이란 곳이 유명했던지 둘은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아는 눈치였다. "어쩌다보니 말이죠." 내 말에 그들이 황당한 기색으로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뉴먼 몬트이올경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작님, 이야기가 끝나셨으면 이제 슬슬 출발했으면 하는데요?" 그의 말에 입을 열려던 두 남자는 입을 다물고 자신들의 일행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고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예. 죄송합니다." 각 나라 리더들의 출발하자는 말에 사람들이 우르르 자신들의 짐을 챙겨들고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여관의 넓다란 뜰에는 쿠르즈 펜워렐 준남작과 같이 온 시종들이 말들에게 짐을 싣고 있었다. 나 또한 일행들과 함께 우리가 타고온 말을 향해 다가가는데 첼릿이 다가와 불만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해인님, 이제는 지위에 익숙해지신 줄 알았더니 또 그러시는 군요. 지금은 벨레니 국 귀족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귀족들까지 있으니 아직 익숙해지지 못했다 하더라 조심하셔야지요." "끄응... 너무 신경쓰는 거 아닌가요?" "제가 예민한게 아니라니까요. 전 백작님도 얼마나 신신 당부를 하신 일입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첼릿, 나는 상회에서도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모두 존대를 한다구요." "에휴, 상회 일을 계속 하게 해드리는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드는군요. 하지만, 거기서는 그렇게 한다고 해도 이쪽에서는 그러시면 안됩니다. 상회 사람들도 해인님이 갑자기 하대 한다고 해도 이해할테구요. 저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으으음...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정말 주의하셔야 합니다?" "예, 예." 마치 학생에게 주의를 주는 선생님 같은 표정으로 재차 당부하는 첼릿에게 대답하고 나는데 램버트의 묘한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너네 인간들은 참 이상하단 말이야. 뭘 그렇게 시시콜콜한것 까지 다 따지냐? 네가 편한데로 하지." "하하하, 그러게나 말이에요. 정말 복잡하답니다." "흠,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은게 정말 다행한 일이야. 그렇게 살다가는 머리가 복잡해서 제명대로 살지 못할 거야." '히유, 나도 이렇게 살고 싶었던 건 아닌데 말야. 역시 귀족이라고 좋은 것만은 아니라니까.' 속으로 램버트의 말에 긍정하면서 말에 오르자 곧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출발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따갑게 느껴지는 햇볕에 눈쌀이 저절로 찌푸려지며 빨랑 정글에 도착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고 해도, 이 햇볕만 하루종일 대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어다. 그러면서 새클턴국에 들어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이 한심했지만, 그만큼 햇볕이 매서웠다. 그래도 이 곳에 와서 받은 이 나라 복장 덕분인지 그럭저럭 버티면서 앞으로 나아가는데, 그레이가 탄 말이 슬금슬금 나에게 다가왔다. 덕분에 첼릿이 신경이 곤두선채 그를 째릿 노려보았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근처에 다가오더니 말을 거는 거였다. "저어..." 그가 다가올때부터 첼릿이 긴장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는 나는 존대도 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그에게 고개를 돌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라는 시선만 보냈다. 그러자 그가 씨익 웃더니 헛기침을 한번 험 하고는 입을 열었다. "험험, 에... 그러니까 백작님? 여쭈어볼게 있는데... 아, 백작님께서는 편하게 말을 놓으셔도 됩니다. 저 같은 용병이 백작님의 존대를 받는게 어디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그의 능청스러운 말에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그래, 물어볼 말이란?" '아, 정말... 하대 하기 진짜 힘드네.'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쿠, 질문을 허락해주셔 감사합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우리가 받은 임무가 정확하게 뭔지 몰라서 말이죠." 그의 말에 나는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걸... 왜 나에게 묻는... 거요? 대장에게 물어야지." "글쎄 저희 대장도 자세한걸 모르지 뭡니까? 그래서 이 궁금함을 풀었으면 하는데.... 아, 안면이 있는 귀족 나리라고 해봐야 백작님밖에 없으니 염치 불구하고 이렇게..."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 하다가 물었다. "당신네 대장이 정확하게 뭐라고 했는데...?" "여기 있는 일행분들을 호위하고 위험에서 지키는 일이라고 하더군요." "흠, 틀린 말은 아니... 군." 또 다시 존대를 할 뻔 한걸 겨우 겨우 수습하며 말을 맺는데 그레이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런데 이상하단 말입니다. 백작님도 왕실 기사단 단원이라고 하시고, 백작님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다들 한 가락 하는 실력자 이신것 같은데, 우리의 호위가 필요합니까? 실력만이라면 우리가 보호를 받아야 할 듯 한데요. 거기다가 단순한 호위라는 임무에 비하여 댓가가 엄청나게 많거든요." "그거야 당연 하지... 그만큼 위험한 곳이라고 하니까." "설마 새클턴국내에서 내전이 일어났다거나, 전쟁이 일어났다거나, 폭동이 일어나서 나라 안을 배회하는 것도 엄청 위험하다고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도대체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이 사람이 그걸 진심으로 몰라서 묻나 싶어서 그를 바라봤지만, 그는 정말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왠지 말하기가 망설여졌다. 혹시 어떠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새클턴 정글로 간다는 걸 말 안해준 모양인데, 내가 함부로 말했다가는 곤란한 일이 생길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갔다가 대처하지 못해 위험해 빠진다면, 그건 말 안해준 사람들의 잘못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 나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새클턴 정글." 그가 엄청나게 놀라는 걸 각오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오히려 내가 황당하게도 그는 계속 고개만 갸웃하고 있었다. "거기 어디요? 새클턴 정글이 어디 자그마한 마을이랍니까? 저는 정확한 장소를 알고 싶은 거라고요." 그제야 나는 새클턴 정글에 가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달으면서 내가 괜한 짓 하는건 아닌지 하는 불안감을 씻을 수 있었다. "흠, 새클턴 정글이 넓긴 넓다고 들었지만... 나도 거기까지는 알지 못해. 그냥 새클턴 정글에 들어간다고만 알고 있거든." "에엣, 세상에나... 그런 게 얼마나 대단한 비밀이라고 백작님께도 말씀 안드린답니까?" 그의 너스레에 나는 피식 웃었다. "글쎄.... 말을 안 해줬는지, 아니면 듣고도 내가 잊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별로 그런데 상관을 안 해서. 어차피 지명을 들어봤자 어딘지도 모르고..." 기껏 첼릿의 눈총을 받으며 나에게 다가와 이것저것 물었는데도 별 소득이 없자 그는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쩝쩝 다시며 물러섰다. "그렇습니까? 이거 참.... 뭐, 백작님도 모르신다니 하는 수 없지요. 그럼 전 이만..." ====================================================== 제 34화 새클턴 정글 (5) 새클턴국은 강수량이 많아서 그런지 다른 나라에 비해 커다란 강이나 호수가 많았다. 특히나 한개의 강은 옆 나라인 아메리국까지 이어질 정도였고, 다른 강은 녹스 국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녹스국의 중요한 젓줄 역할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 하기야, 그 두 갈래로 갈라진 두 강이 녹스국에서는 큰 강들에 속하였으니, 그 두 강줄기가 합해진 새클턴국의 강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을 터여다. 그런데 그렇게 큰 강이 하나도 아니고 세개씩이나 존재했고, 그 보다 작은 강들은 더 많았다. 우리가 녹스국을 통과할때 녹스국에서 부터 시작되는 강을 타고 내려가면 좀더 쉽게 새클턴국에 도착할 수 있었을테지만, 그렇지 않고 육로를 강행한 것은 그게 더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빠른 시간 내에 도착하길 바랬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새클턴 국으로 넘어오자 오히려 배를 타고 가는 것이 더 빠른게 되어 버렸다. 엄청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 덕분에 말이 쉽게 지쳐서 다른 국가에서처럼 오래 달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걸어가면 몰라도 말이다. 그걸 잘 알고 있던 쿠르즈는 우리를 하루 정도 걸리는 거리에 떨어져 있는 뱃터로 안내했다. 그 곳에는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던 듯 날씬한 선채를 자랑하는 배가 정박한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희 새클턴국에서 자랑하는 쾌속선이랍니다. 이걸 타고 가는 것이 말을 타고 달리는 것 보다 훨씬 빠르지요." 그 배가 떠 있는 강은 아메리국으로 부터 시작된 지류가 흘러와 새클턴 정글을 통과하여 호바트해로 이어져 있었다. 두 줄기가 그쪽 정글로 향해서 흐르는데, 우리가 있는 곳에서 새클턴 정글까지 가장 짧은 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게 쿠르즈의 설명이었다. 하루 정도의 거리를, 그것도 말을 타고 오는 주제에 따가운 햇볕과 밑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인한 더위로 헥헥대던 일행에게는 배를 타고 간다는 건 너무나 기쁜 일이었다. 따가운 햇볕은 몰라도 최소한 밑에서 올라오는 열기는 없을테니 말이다. 거기에다 말을 타고 가는 것 보다 속력이 빠르다니 그보다 반가울 수는 없었다. 새클턴국은 커다란 강이 많고, 그 강이 나라 전체에 넓게 분포된 탓에 강을 따라 운행되는 선박 제도가 무척이나 발달되어 있는 나라라고 한다. 이렇게 더운 나라에 말타고 다니기가 어려울테니 강이 많다는 건 참 대단한 복인 듯 싶었다. 최소한 몇주는 더위 속에서 말을 타고 가야할 줄 알았던 일행이 뜻밖의 행운에 고마워하며 승선을 마치자 곧바로 배는 강 가운대로 밀려나가 부드럽게 운행하기 시작하였다. "이야... 배를 타는 건 또 오랜만이네...." 뜨거운 햇볕에도 불구하고 갑판으로 나와 그나마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감회에 젖어 있는데 듀비가 다가왔다. "조심하십시오.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롭지만, 호바트해 못지 않게 위험한 곳입니다." "예?" 뜬금 없는 그의 경고 어린 말에 선듯 이해를 못해 어리둥절해 하는데 저쪽에서 첨벙~ 하는 뭔가가 물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이 더위를 피해 강으로 뛰어든 모양이었다.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나도 미소를 짓는데 듀비가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큰일 났군요."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니 이상한 이질감이 느껴지 정도였다. "큰일... 이라니요?" 하지만 그 이질감을 곱씹는 대신 듀비를 향해 설명을 부탁하는데, 배의 선원들과 쿠르즈가 허둥지둥 그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빨리 올라오라고하세요!" "큰일이야, 큰일. 빨리 밧줄을 던져!!" 모두 새파랗게 질린 채 허둥대는 모습에 삼국의 사람들이 어리둥절함을 감추지 못한 채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선원들이 재빠르게 달려가 밧줄을 던져 강 속으로 들어간 사람을 건져 올리려고 했다. "빨리 올라와요, 빨리요!" "어서, 어서." 그들의 소란에 호기심이 생긴 나는 듀비와 함께 슬그머니 그쪽 갑판으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강 속에서 여유있게 헤엄치고 있다가 선원들의 소란에 당황하여 그들이 던진 밧줄을 잡고 끌려 올라오는 사람은 녹스국측으로 이름이 커티스 홀리스터라고 했다. 이번 일행 중에 나를 제외하고 나이가 어린 축에 속한 사람이었는데, 콧잔등에 난 주근깨 때문인지 몰라도 쾌활하고 장난기가 많은 사람처럼 느껴졌었다. 다른 말로 하면 나이에 안 맞게 철이 없다고나 할까? 아마 젊은 혈기에 시원하 강물을 보자 참지 못하고 달려든 것 같았다. 거기다가 물의 하급 정령과 계약까지 하고 있었으니 잠시 배에서 떨어진다고 해도 문제될 건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뛰어 내릴까... 갈등하고 있었던 차였으니 그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고, 먼저 뛰어내린 그의 용기가 부럽기까지 했다. 뭐, 그의 이런 즐거움은 선원들의 유난스러움에 금방 중단이 되었지만 말이다. 선원들이 안도감과 초조감이 반쯤 뒤섞인 표정으로 그를 물 위로 끌어올릴 무렵, 갑자기 배 밑에서부터 커다랗고 시커먼 그림자가 쓰윽 나타나더니만 막 허공으로 끌려 올라가는 커터스를 따라 위로 팍 솟구쳐 오른 것이었다. "서둘러!" 내가 그 시커먼 그림자를 발견할때 선원들 또한 발견했던지 그들이 재빨리, 그리고 더 세게 커터스가 잡고 있는 밧줄을 잡아당겨 물 속에서부터 튀어 오른 괴물체의 입에서 아슬아슬하게 커터스를 건져 올릴 수 있었다. "헉..." "저게 뭐야?" "이럴 수가..." 같이 갑판에서 그 소동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놀람의 경악성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선원들은 더욱 서두르며 커터스를 끌어 올렸다. "빨리, 빨리!" 선원들이 그렇게 노력해준 덕분에 커터스가 막 갑판 위로 올라올 무렵, 그 시커먼 괴물체가 커터스를 노리고 다시 한번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욱 힘껏 몸을 날렸(?)기에 나는 아까보다 그 괴물체의 모습을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아주 엄청나게 커다란 못생긴 생선처럼 생겼다. 얼굴 부분이 뾰족하게 튀어나왔는데, 주둥이 부분은 아래 턱 부분이 길게 앞으로 튀어 나왔는데 그 길이가 대략 봐도 1 ~ 2 m 는 되어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튀어나온 아래턱 끝에는 마치 갈고리처럼 뾰족한 끝이 윗쪽으로 구부러져 있어 무언가를 한번 걸면 쉽게 놓치지 않을 것 처럼 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그 길게 나온 아랫턱에서 입술처럼 생긴 가죽으로 감싸인 안쪽에는 상어 못지 않게 뾰족한 날카로운 이빨이 빼곡하게 나 있었는데, 그건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쫘악 끼치게 만들었다. 생선의 두 눈에서는 흉흉한 기운이 흘러 나왔고, 햇볕에 은청색으로 반짝이는 엄청나게 길고 굵은 몸체는 전율스러울 정도였다. 물론, 호바트해로 향하면서 만난 괴물 뱀장어보다는 크기가 작았지만, 그 작은 몸체로도 얼마나 힘이 세었는지, 커터스를 낚아 채려고 뛰어 올랐다가 잡지는 못하고 떨어져 내릴 때 우리가 타고 있는 배에 몸을 한번 부딪혔는데, 커다란 쿵~ 소리와 함께 배가 크게 출렁일 정도였다. "헉!" "이런, 전투 준비!!" 선원들이 빠르게 움직여준 덕에 커터스를 놓친것이 분했는지 이 커다랗고 못생긴 생선 녀석이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가 이번에는 배를 노리고 다시 한번 뛰어 올랐다. 쿠궁~!!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갑판 위에 있던 인물들은 모두 한가락 하는 실력자들이었기에 비록 선상에서의 전투에 익숙지 못해 배가 흔들릴때 균형을 잡지 못하고 같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그 와중에서도 착실하게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기사들은 검을 꺼내 들었고, 마법사들은 자신 있는 주문을 준비하기 시작했으며, 정령 검사들은 정령들을 불러내었다. 그러자 그 틈사이를 쿠르즈가 뛰어들어 목청껏 외쳤다. "안됍니다!! 공격하면 안돼요!! 멈추세요오오~~!!" 그의 필사적인 외침에 막 공격하려던 사람들이 멈칫하는 사이, 아까 선실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던 세명의 선원들이 끙끙대면서 커다란 고깃 덩어리 하나를 끌고 왔다. 그리고는 황당해 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당당하게 받으며 갑판 끝으로 가더니만 다시 튀어 오르려는 그 못생긴 생선을 향해 아까운 그 고깃 덩어리를 던져 주는 것이었다. 되게 아까웠다. 그 크기가 대여섯살 어린애만했으니, 아마 커다란 돼지 한마리를 통채로 던져 준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자 공격 하려던 그 못생긴 생선은 선원들이 던져준 고기를 냉큼 물고서는 기분이 좋은지 유유히 강속 깊숙히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못생긴 생선으로 인한 소동이 일단락되자 일행들 중 성격 급한 한 기사가 성큼성큼 쿠르즈에게 다가가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면서 말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오? 저딴 놈은 우리 실력으로 쉽게 처치할 수 있는데 뭣때문에 고기를 줘서 보낸단 말이오? 우리를 그렇게 못 믿는 거요?" 그 기사가 험악하게 말했지만, 그들을 둘러싼 다른 일행들도 같은 심정이었는지 몇몇은 고개까지 끄덕이는 거였다. 그러자 쿠르즈가 침착하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그런건 아니었습니다. 저도 여러분들 몇몇만 나서주신다면 아까 그 녀석쯤은 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기사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그럼 왜 우리를 막은 거요? 우리가 충분히 처치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기에 여러분들을 말린 겁니다." 쿠르즈는 단호하게 그렇게 말을 하고는 일행들을 조용히 둘러본뒤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여러분들이 아까 그 녀석을 처치해버렸다면, 얼마 있지 않아 그 녀석이 흘린 피냄새를 맡고 몰려든 이 강에 사는 수많은 몬스터들을 상대하셔야 했을 겁니다. 저는 그것을 피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 강에 사는 많은 수의 몬스터들을 상대한다는 건 어려운 일일테니까요. 그리고, 그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동안 이 배가 버틸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고 말입니다." 그의 침착한 설명에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일행들이 이해한 표정으로 얼굴을 풀었다. 그런 일행들을 둘러보고 자신의 말이 먹혀 들었음을 짐작한 쿠르즈가 싱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살고 계시던 나라와 이 곳은 확실히 환경이 많이 차이가 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나라에는 이 곳만큼이나 큰 강도 없을테지요. 그러니 강 속에 살고 있는 몬스터들을 만난 경험도 전무할테고요. 하지만, 이 곳에는 위험한 몬스터들이 정말 많이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특히나, 강에 수영하려고 뛰어드는 건 금지입니다. 그건 몬스터들에게 나 여기 있으니 와라~ 하고 떠들어대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쿠르즈가 그렇게 말하며 마지막으로 커티스에게 시선을 주자 그의 얼굴이 창피함으로 붉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제일 먼저 뛰어든게 내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나는 또 다시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한번 떠오른 생각을 곰곰히 되씹어 보면 볼수록 이상했다. '이상하다... 내가 물 속에서 몬스터를 처음 만난 건 상회에 가입된 뒤에 엔더비 산맥에 가느라 배를 탔을때잖아? 거참.... 그럼 어떻게 바다 속 집에서 살때는 한번도 못 봤지? 그때 그 주위를 신나게 돌아다녔는데... 거기다... 꽤 멀리 나간 것 같았는데, 멀리서도 본 적이 없을까.... 어... 혹시 아버지가 손을 써준 걸까?' 그러한 작은 해프닝 뒤에 사람들은 단순한 안내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쿠르즈의 말을 마치 사막에서의 표지판처럼 여겼다. 아마, 새클턴 왕실 측에서는 이러한 점 때문에 쿠르즈를 보내준게 아닌가 싶었다. 현재 나라간의 알력으로는 새클턴국이 다른 삼국에 비해 전적으로 불리하니까, 이러한 일로 인하여 새클턴국의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생각으로 말이다. 물론, 삼국 사람들이 새클턴 정글에 가는 동안 발생할 수 있는 여러가지 사건을 막고, 그 사건 때문에 발생될 인명이나 물질적 피해도 막는 뜻도 있겠지만.... 새클턴국이 이 일로 인하여 입지를 넓히려 했다면 그건 정말 성공한거였다. 새클턴 정글 근처에 있는, 새클턴 국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뱃터에 도착할때쯤에는 새클턴 국경을 넘었을때보다 훨씬 훠어얼씬 커져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마, 내 생각으로는 삼국과 거의 동등하게 생각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일행들은 새클턴 정글에 들어갈때 같이 갈 안내자가 아무리 평민이라고 해도 그를 무시하지 않고 그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일 태도가 되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뱃터에서 내려 쿠르즈가 어느 여관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자 건장한 체격을 가진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우리를 맞았다. 새클턴 국 특유의 펑퍼짐한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허리에는 길다란 도를 차고 있었다. '어... 도네?' 그랬다. 그가 허리에 차고 있는 건 검이 아니라 도였다. 도와 검을 간단하게 소개한다면, 검은 날이 양쪽에 있고, 도는 한쪽에 있었다. 그리고 검일 경우 검집이 직선인 경우가 많고, 도일 경우에는 종류에 따라 정도가 다양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초승달처럼 휘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검집, 혹은 도집에 넣어져 날로써 검인지 도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울 경우, 휘어졌는지의 여부로 구분이 가능했다. 자신을 새클턴 왕국에서 나온 자들의 리더로 보이는 - 그가 대표로 인사했으니까 그렇게 추측 했다. -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건, 일본 영화에서 사무라이들이 많이 사용하는 일본 도나 아니면 한국의 무술 중 하나인 해동검도에서 사용하는 것과 무척 비슷했다. 도 끝에서부터 손잡이 끝까지는 대략 1m 가 되거나 그것보다 조금 더 길어보이는데다, 검은색의 도신과 손잡이는 영락없이 일본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건 다 제껴놓고, 내가 그 도를 눈여겨 본 것은, 평소 내가 검이나 도에 관심이 있어서 라기 보다는 그 도로부터 낯익은 기운이 풍겨진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흠, 마법도로군." 내 옆에 있던 리건도 그 도에서 풍기는 기운을 느꼈는지 눈여겨 보다가 나에게 설명해주려는 듯 낮게 속삭였다. "마법도?" "그래, 마법도. 마법을 익히지 않은 자라도 마나만 있다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검에다가 마법 주문을 새겨놓은 거지. 일명 마법 아이템이야. 저기에 걸린 건 3 클래스의 파이어볼 하고 파에어 에로우군. 같은 계열이라고 해도 두 가지 씩이나 새겨놓다니, 꽤 비싸겠는걸?" "호..." 리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에 마법 길드의 마법사들을 포함하여 각 나라의 리더들끼리 인사를 끝냈고, 그 뒤로 각 나라의 리더들이 각자의 일행들을 소개시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나는 울 나라 리더인 몬트리올경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내 이름이 불려지자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리건에게 속삭였다. "그런데... 도를 가지고 있네요. 헤에, 작위를 가진 사람들 중에 도를 사용하는 기사는 처음 봤어요." "그건, 새클턴 국이 기사의 자격을 요할때 실력이 뛰어난 것만 봤지 뭘 사용하든지 상관하지 않기 때문이야. 우리 나라는 기사하면 무조건 검을 써야 하고, 도를 비롯한 다른 무기를 사용하는 건 하찮게 보는 경향이 있거든. 그러니 작위를 가진 녀석들 중에 다른 무기를 쓰는 사람이 없을 수 밖에..." "헤에, 그랬군요." 악명 높은 정글 근처에 있는 마을이었지만, 정글 안쪽에 들어가서 사냥, 혹은 채취한 걸로 생활 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엄청 발달해 있었다. 하기야, 아무리 강 옆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하지만, 그 마을 전용 뱃터가 있고, 그 뱃터도 작은 게 아니라 꽤 큰걸 보면 알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덕분에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새클턴 국측이 자리잡고 있던 큰 여관을 통채로 전세 냈지만, 이미 도착해 있는 다른 용병들팀과 안내자들, 거기에 이제 도착한 우리 일행들까지 우르르 몰려 들어가자 모두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 예상했던 것 보다 많은 인원들이 온 까닭이었다. 용병들을 제외하고도, 각 사개국에서 지원한 사람들만 해도 100명에 가까웠으니, 거기에 용병들에 안내자들까지 모조리 합하자 200명에 가까웠다. 그리하여 결국, 갑자기 다른 한 여관을 또 통채로 빌릴 수는 없어서 각 국에서 지원한 사람들만 통채로 전세낸 여관에서 머물고, 나머지 사람들은 근처의 여관 몇몇 군데에 나누어서 묶기로 했다. "흠... 각 국에서 지원해준 사람들과 용병들 모두 합해도 많아야 100명쯤 되리라 예상했나 보군요. 사실, 저도 각 국에서 많아봐야 10명쯤 지원해줄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4인용 방을 하나 배정받아 일행을 데리고 올라가는데 첼릿이 주변을 둘러보며 속삭였다. "우리 일행만 해도 10명이 넘는걸요 뭐. 거기다 우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제일 적잖아요." "마법 길드나 새클턴국 측에서도 각 나라에서 지원해줄 인원이 적은 줄 알고 용병들을 좀 과하게 모집한 것도 있고 말이죠." 첼릿이 내 말을 받자 램버트가 투덜거리는 어조로 끼어들었다. "참내... 뭘 이렇게나 많이 가는 거지? 이건 정글 안에 있는 몬스터 녀석들에게 먹잇감을 가져다 주러 가는 것만 같잖아?" 그러자 그 동안 조용히 있던 듀비가 덤덤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희에게는 좋은 일이지요. 다른 먹잇감이 있다면 건드리기 어려운 우리를 향해 괜히 공격할 녀석들은 없을테니까요." 엄청 살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듀비의 말에 나는 눈이 휘둥그래졌지만, 기가 막히게도 첼릿과 램버트는 수긍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거였다. '헉스....' 그렇게 모두 숙소가 정해지자 아랫 사람(?)을 자처한 우리들이야 느긋하게 목욕을 즐기고 식사를 즐기며 휴식을 취할 수 있었지만, 리더들은 잠시 짐을 풀고 씻자마자 쉴 시간도 없이 모여서 본격적으로 새클턴 정글에 들어갈 방법과 방향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뭐, 대부분은 먼저 도착한 새클턴측 사람들이 생각해두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훗, 내가 저래서 리더를 사양한 거라니까. 저 귀찮은 걸 떠맡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이해를 못하겠어. 왜 모두들 사서 고생하려고 하지?" "귀찮아도 뒤에 따라오는 것들이 매력적이라서 그러는 거겠죠, 뭐. 사람 나름이겠지만서도..." 리더들 모임에 불려가는 몬트리올 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리건과 나는 한가하게 속닥 거렸다. ================================================================== 공지입니다. 제가 오늘은 겨우 겨우 썼지만, 내일하고 모래는 개인적인 일로 연재를 못 할것 같습니다. 그러니 기다리지 마세요. ^^;; 목요일날... 도... 어찌 될지는 모르겠네요. ^^:; 아, 그리고 혹시나 멜 보내주시는 분들, 바빠서 답장도 제대로 못할 거 같습니다. 이번주 내내 그럴 듯 하니... 혹시나 답멜 없더라도 서운해 하지는 마세요. 바빠서 그렇거덩요. ^^:; ====================================================== 제 35화 던전 탐험 (1) 제 35화 던전 탐험 일행들과 함께 배불리 저녁을 먹고 새클턴 국 특유의 달콤하고 신선한 열매들로 만들어진 과일 쥬스를 디저트로 입가심을 해준 뒤 방으로 돌아온 나는 마법 스승 노만이 내준 숙제를 조금이라도 할 양으로 마법서를 펴들었다. 둘이서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듀비와 첼릿은 새클턴 국에서 배에 올랐을때부터 한가한 시간에 단 둘이서만 방에 콕 처박혀서 나오지도 않았었다. 그러던 지금 또 둘이서만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하고는 나가버린 거였다. 얼결에 램버트하고 단 둘이 남게 된 나는 여기까지 쭈욱 같이 오면서 친해지기는 했지만, 둘 사이에 공통적인 관심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램버트가 사교적인 것도 아니었기에 방 안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렇다고 침묵이 부담스러운 건 아니었다. 단지 램버트는 자신의 쌍도끼를 정성스레 손질하거나, 아니면 방 안의 가구나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배경 등등을 유심히 살피며 자신의 창작 활동에 도움이 될 영감을 얻기 위한 자료 모집을 하느라 분주했다. 덕분에 홀로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별로 생각하지도 않았던 마법 서에 손을 대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 자들은 다 자신들의 할 일을 찾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나 혼자만 할 일 없이 빈둥대고 있는 것도 기분 안 좋은 일인데다가, 나에게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에... 어디보자... 내가 어제 어디까지 했더라...' 어제 읽었던 부분을 주르르 훑어보며 기억을 더듬어 가는데 누군가가 우리 방문을 두드렸다. "엠브로스 백작님, 안에 계십니까?" "누구십니까?" 귀찮기는 했지만, 나 혼자 사용하는 방이 아니었기에 나는 들어오라고 말하는 대신 직접 일어나 방 문을 열어 문을 두드린자를 확인했다. 그는 쥬디 블러드무어경을 따라 온 기사중 한명이었다. "실례합니다, 백작님. 뉴먼 몬트리올경께서 찾으십니다. 그 분 방으로 모이시라고요." 아마도 저녁 내내 각 나라의 리더들끼리 이야기를 주고 받더니 그에 대한 말을 해주려는 모양이었다. 나를 데리고 가려는 듯 용건을 이야기 하고서도 돌아서지 않는 그를 일별한 나는 고개를 돌려 열심히 자신의 쌍도끼를 손질하는 램버트를 돌아보았다. "저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래."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하는 그를 뒤로한 채 날 찾으러 온 기사를 따라 뉴먼 몬트리올 경과 요크 스페이스경이 같이 사용하는 방으로 가니 이미 다른 일행들은 먼저 도착해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방으로 들어서서 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리건 옆에 앉자 뉴먼 몬트리올 경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 일정에 대해 정해진 것들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이것을 봐주시겠습니까? 할레언 백작 - 새클턴 국의 리더 - 이 준 것입니다." 그러면서 몬트리올경이 탁자 위에 지도를 펼쳐놓자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몸을 일으켜 탁자 주위로 몰려들었다. "새클턴 정글의 지도입니다. 비어있는 부분은 아직 탐사가 덜 된 지역이고, 주변은 그나마 탐사가 되어 알려진 곳이지요." 약간 구부러진 직사각형 형태를 띄고 있는 새클턴 국의 왼쪽에 마치 커다란 얼룩처럼 자리잡고 있는 새클턴 정글은 변두리에는 여러가지 기호와 글이 쓰여 있었지만, 가운데에는 하얀 백지 그대로 였다. 그곳 어딘가가 바로 듀비가 살고 있던 고향일거란 생각에 백지 부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데 몬트리올경이 손가락을 뻗어 어느 한 지점을 가르키며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여기가 바로 이번 던전이 있다는 곳입니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확인 지역이라 던전을 발견한 탐사대의 말에 따라 그려졌기에 확실치는 않겠지만, 그나마 없는 것 보다는 났겠지요." 붉은 색으로 X표가 되어 있는 부분은 우리가 있는 곳 보다는 호바트해 쪽에서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지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우리가 현재 있는 이 곳에서 가기 보다는 바다를 거쳐 해안을 통해 들어가는것이 더 났습니다. 게다가 이쪽 해안은 얕아서 이 곳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고 하더군요." "그럼 해안을 통해 들어가는 건가?" 리건의 말에 몬트리올경이 고개를 끄덕 거렸다. "그렇습니다. 새클턴국 사람들은 벌써 갈 수 있는 방법까지 다 마련해 뒀더군요. 하지만, 그들이 예비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고 했습니다." 몬트리올경의 손가락이 가르키는 곳은 해안으로부터 그 던전이 있는 거리의 약 1/3 가량 되는 지점이었다. "나머지는 순전히 운이라고 해야겠죠. 던전을 발견한 자들의 기억력이 정확하기를 빌면서 말입니다." "흠, 완전히 도박을 하는 기분이군요." 평소 말이 없던 요크 스페이스경이 침중한 표정으로 몬트리올경이 가르키는 지도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내뱉은 말이었다. 뭐, 그건 다른 사람들도 같은 심정이겠지만 말이다. 그는 자신의 옆에서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지도를 바라보고 있는 쥬디 블러드무어경을 한번 힐끗 바라보더니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몬트리올경, 괜찮다면 지도를 잠깐 빌리고 싶은데요? 아니면, 혹시 같은 지도를 하나 더 구할 수 없을까요?" 내 청에 몬트리올경이 잠시 날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지도를 빌려드리겠습니다. 받은게 그것 밖에 없거든요. 정글에 대한 지도를 구할 수 있기는 하지만, 던전까지의 지리는 아직 표시되지 않았으니 그걸 보시는게 나을 겁니다. 게다가 저 또한 어차피 해안까지 가는 동안에는 그 지도가 필요 없으니 천천히 돌려주셔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나에게 이렇게 선듯 지도를 빌려주는 이유는 내 일행중에 듀비와 램버트가 있기 때문에었다. 전설로만 알려진 블루 엘프의 존재. 사람들이 반신반의 하기는 하지만, 블루 엘프가 새클턴 정글에서 살아 간다는 건 다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임무에 나섰을때 몬트리올경은 듀비를 앞에 세우길 은근히 바랬었다. 처음에는 리건이 리더가 되는 줄 알았으니 당연히 내가 듀비를 앞으로 내세울 거라고 생각 했었는데, 리건이 리더 자리를 자신에게 양보하고 내가 듀비를 내세울 눈치를 보이지 않자 슬그머니 말해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듀비가 단호히 거부하는데다가, 차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 램버트 또한 앞으로 나서는 걸 극히 싫어했기에 나는 몬트리올경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가 분노하기는 했지만, 그의 지위가 나보다 낮은데다가 - 그는 중앙 귀족이긴 했지만 남작가의 세째 아들이었기에 기사 작위밖에 없었다. - 뒤에 리건이 떠억 버티고 있어줘서 표현 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솔직히 그가 랭포드 후작측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 나쁜 감정은 없는데다가 그의 이러한 요청 또한 당연한 것이라는 걸 인정하고 있었기에 듀비나 램버트에게서 얻는 정보는 그에게 알려주겠다고 약속하는 선에서 원만히 해결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는 내가 듀비와 램버트에게 그 지도를 보여주리라는 걸 알고 넉넉한 기간동안 지도를 나에게 빌려주는 거였다. 다른 나라에서는, 특히 새클턴국에서도 알아내지 못한 정글에 대한 정보를 얻거나, 혹은 던전을 발견한 다른 사람들의 기억이 맞는지도 확인할 겸 말이다. "그런데... 어차피 그렇게 해안쪽으로 갈 거였으면 뭐하러 여기에서 만나자고 한 거지? 차라리 해안쪽에서 만났으면 좋았을텐데... 여기에서 모여 다시 해안으로 옮기느니 말이야." 리건의 지적에 몬트리올경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답했다. "아, 그게 말입니다. 저희가 넘어온 국경 쪽에서는 배로 올 수 있는 최종 지점이 여기랍니다. 만약 해안쪽에서 만나려면 국경에서 말을 타고 일주일은 더 가서 다른 강을 타고 내려가야 하는데, 그 강이 닿는 해안은 정글에서 꽤 떨어져 있어 거기서 또 말을 타고 정글쪽으로 이동하거나 아예 바다로 배를 타고 가야 한답니다. 그런데, 국경측에서 말로 이동하는 것 보다는 이렇게 정글을 따라 이동하는 편이 더 수월하기 때문에 여기로 모인 거라고 하더군요." "흠, 그래? 다 알아서 준비해놨다 이거군." "뭐, 그렇다는 거겠죠. 그런 이유로 내일 아침 출발하기로 되었습니다. 새클턴측 사람들이야 여기서 우리를 기다렸고, 우리 또한 배로 이동했으니 힘들 것도 없어서 말이죠." "그렇군. 뭐, 지금까지 계속 서둘렀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이야기는 다 한건가?" "그렇습니다." 리건의 말에 몬트리올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던 듯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고, 방 주인인 뉴먼 몬트리올경과 요크 스페이스경에게 목례를 하고 자기들의 방으로 흩어졌다. 리건만 나를 따라오고... "궁금한게 있는데..." 나는 일행들이 적당히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리건에게 속삭였다. "응?" "리건은 나이가 많잖아요? 그런데 새클턴 정글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한 번도 안가봤어요?" 차마 그 보고 드래곤이잖아요? 라고 물을 수는 없어서 나이가 많다는 걸로 우회해 말했지만 리건은 알아듣고 피식 웃었다. "아주 예~ 전에 가본 적은 있는데... 그때에 정글 안에 던전이 있는 건 못 봤는데?" "흠...." 그가 말하는 예전이라는게 도대체 몇년 전인지 감이 안 잡혔다. 나로써는 10년이나 20년 전도 아주 예~ 전처럼 느껴지지만, 리건에게는 어디 그게 예전이겠는가? '몇백년 전이라는 건가? 설마... 천년 전은 아니겠지?' 한국에서 살때는 가장 오래 사는 생명체가 인간이었기에 인간에게 오랜 시간으로 생각되어지는 건 다른 생물체들에게도 정말 오랜 시간이었건만, 여기서는 인간의 수명따위는 정말 우습다는 듯 그보다 몇배는 더 오래 사는 생물체들이 있어서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세상에나 1000년 정도 된 유품이나 물품이 한국의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것보다 많다는게 어디 말이나 되는가? 거기다가 그런 것들을 마음껏 쓰고 있으니 말이다. '아아... 여기 환경에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끔은 적응 안되는게 있단 말이야.' 속으로 한숨을 내쉰 나는 내 숙소 앞에 도착하여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나 혼자 쓰는 방이 아니니 예의는 지켜야 할 듯 해서 말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전히 램버트 혼자 방을 지키고 있다가 눈을 들어 맞이했다. "잘 갔다 왔냐?" 그리고는 내 뒤를 따라 들어오는 리건을 보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아는체를 했다. "램버트, 이것 좀 보실래요?" 나는 탁자로 다가가 지도를 올려 놓으려고 했다가 생각을 바꿔 그가 앉아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내 방에 있는 탁자는 사람의 키에 맞게 제작되어 있어서 램버트가 사용하기에 영 불편했던 것이다. "흠, 지도냐?" "예, 몬트리올경의 말에 따르면 램버트가 던전을 발견한 지역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서 탐험대의 기억에 의존하여 그려졌다고 하더군요. 당신의 기억과 일치한지 확인 하려구요." "흠... 글쎄다... 나는 그때 아무 생각 없이 그들과 같이 다녀서..." 새클턴 정글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필기 도구와 종이를 가지고 다녔다. 다른 곳이라면 그런 걸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은 마법사나 학자, 혹은 조사를 목적으로 그 곳을 찾는 사람들일 테지만, 새클턴 정글은 그렇지가 못했다.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곳에 혹시라도 발을 들여놓을지 모르니 가끔 가다가 자신이 다닌 곳을 기록할 것을 가지고 다녀야 했던 것이다. 그러한 것은 혹 길을 잃었을때를 대비할 수도 있었지만, 새클턴 정글을 무사히 빠져 나왔을때 돈이 되기도 했다. 새클턴 정글 안을 들락 거리며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절실한 정보였으니 그 것을 살 사람들은 많았던 것이다. 아마도 램버트와 같이 던전을 발견한 그 사람들 또한 자신들이 간 곳의 기록을 담당하는 누군가가 있었을게 틀림 없었다. 그랬기에 여러 사람들에게 확인되지 않은 정보라 할지라도 믿고 지도를 그리고 그 던전을 찾아 갈 생각을 하는 것이겠지만... 하지만, 자세하게 기록한게 아닌데다가 정확하게 측량하기는 커녕 정신없이 다니는 와중에 생각날때마다 한번씩 간단하게 하는 것이기에 100% 정확하지는 않았다. 거리도 한참 틀리고, 사람마다 기준또한 틀리기에 그러한 기록들 대부분은 7, 80% 정도 맞다고 생각하는것이 상식이었다. 내가 펼쳐준 지도를 들여다보는 램버트는 곰곰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가끔가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갸웃 거리면서 들여다보았다. "으음.... 대략적으로 맞는 것 같기는 하지만 잘 모르겠군. 그 안쪽에 있을때 지리를 기억하려고 애쓰지는 않아서... 음... 여기는 더 멀었던 거 같은데, 아닌가? 이거 참..." "그래도 대충은 맞다는 거죠?" 한참 살펴보며 중얼거리듯 말하는 그에게 나는 확인차 물어보자 그가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기억과 비슷한거 같아. 뭐, 맞는지 틀리는지는 가 보면 더 잘 알 수 있겠지만..." "그렇겠군." 리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사이 문에 노크 소리가 들리며 첼릿과 듀비가 들어왔다. 그 둘은 이 더운 날씨에 한바탕 뛰기라도 했는지 마치 물을 뒤집어 쓰기라도 한 듯 땀에 젖어 있었다. 둘은 생각도 못한 리건이 방에 있는 걸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간단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둘 다 잠깐 이쪽으로 와 봐요. 여기가 우리가 갈 곳이에요." 내 손짓에 그 둘이 다가와 지도를 들여다 보았다. "흠... 여기서 정글을 뚫고 갈 수는 없을테니 우회 하겠군요." 붉은 X자 표시의 던전 장소를 보더니 첼릿이 말했다. "그렇겠죠. 내일 아침에 해안으로 출발 한다고 하더군요. 음, 정글에 들어갈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 듀비 여기 와본 적 있어요?" 내 말에 지도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던 듀비가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습니다. 사실 인간들의 지도라는 걸 처음 봐서 말이지요." "아...." 그의 말에 나는 당연히 모든 자들이 지도를 볼 수 있을거라 여겼던게 잘못임을 깨달았다. 나야 초등학교 다닐때 지도 보는 법을 배운데다가, 이브스햄에게 백작가의 영지 운영에 대해 배울 때 영지의 지도 또한 봤던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 사용되던 기호가 그대로 사용된 건 아니고 등고선 같은 것도 전혀 없었지만, 산은 녹색의 엎어놓은 V 자로, 강은 파란 선으로 표시되어 있었기에 보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한국에서 봤던 것 처럼 아주 자세하게 그려진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듀비는 인간이 아니었고 그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는 지도가 사용되었는지도 의문이었다. 아니, 종이가 있기나 하는 건지... 게다가 듀비의 말로는 재수 없게 해안으로 나왔다가 노예 사냥꾼에게 잡히기 전까지는 정글을 벗어난 적도 없다고 했으니 전체적인 정글 모양을 알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가 운 없이 가게 된 해안도 얼떨결에 간 낯선 곳이라고 했으니, 그 말에 비추어보면 정글 전체를제집처럼 드나든 건 아니었던 듯 싶었기 때문이다. "그럼 여기를 알고 있느냐도 물어볼 수 없겠군요." "죄송합니다. 직접 가보지 않는 한, 이렇게 보고서는 모르겠습니다." "아앗, 듀비가 미안할 필요는 없죠 뭐."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듀비를 얼른 만류하는데 리건의 음성이 들려왔다. "뭐, 어차피 직접 가게 될 테니... 나중이면 다 알게 되겠지." ====================================================== 제 35화 던전 탐험 (2) "오..." "와아...." "세상에나..." 여기 저기에서 들리는 낮은 감탄사 소리에 나는 마음으로 동의를 하면서 정신 없이 주의를 둘러 보았다. 성경에 나오는 에덴 동산이 바로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주변의 정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것이다. 아름다운 푸르른 나무들이 양 옆으로 쭈욱 늘어서 있었고, 머리 위로 양 옆의 나무에서 뻗어 나온 굵은 나뭇가지들이 살짝 맞닿아 지붕을 이루고 있었고, 그 틈 사이로 황금빛의 햇살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너무나 맑아서 새하얀 모래가 깔린 바닥이 보일 정도인 푸르른 물결이 잔잔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속에서 노니는 총 천연 칼라플한 물고기들이 잔잔한 푸른 물과 하얀 모래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되어주고 있었다. 그 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감탄할만한 그 장소는 바로 새클턴 정글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정글의 주변을 따라 해안에 도착하자 보통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모양의 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한국에 있을 때 TV에서 본 카누 처럼 생긴 자그마한 배였다. 폭이 좁아 성인 남자가 혼자만 앉을 수 밖에 없었고, 거기에 길이만 길어서 사람만 태운다면 장정 5명이 나란히 탈 정도였다. 하지만, 우리는 짐까지 있었으니 배 하나에 세명씩 타야 했다. 그것도 그 중 한사람은 배 주인들로 노를 젓기 위하여 고용된 사람들이었다. "이, 이걸 어떻게 타고 간답니까?" 그 배를 처음 본 사람들은 모두 기가막히다는 표정이었다. 그런거는 정말 잔잔한 호수에나 탈 수 있지, 파도가 계속 일렁이는 바다에서 탄다면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처럼 생겨 불안했던 것이다. 뭐, 능숙한 사람이라면 그 곳에서 균형을 잘 잡고 노를 저을테지만, 여기 있는 우리들은 이런 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뿐이었던 것이다. 까딱 잘못해서 배가 뒤집혀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위에 실은 짐까지 모두 바다속으로 풍덩 빠져 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배를 앞에다 두고 타기를 망설였다. "걱정 마십시오. 타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새클턴국측 리더인 보르마 할레언 백작이 장담했지만, 사람들은 선듯 믿겨지지 않아 배를 타는 것을 주저했다. 그러자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고는 먼저 새클턴 국 사람들부터 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인원이 많다보니 작은 배는 정말 많이 필요했다. 다행이 그 해변에 있는 마을 말고도 옆마을 배까지 다 동원했는지 배의 수는 충분했지만 말이다. 새클턴 국 사람들이 먼저 사람을 나누어 배에 올라타고 출발하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보르바가 해변에서 망설이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안 가실 겁니까?" 그에 일행들은 서로 눈치를 보느라 쭈뼛쭈뼛 거리더니 하나 둘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첼릿과 한 배를 탔고, 듀비가 램버트와 또 다른 배에 탔다. 불안한 마음을 지닌 채 여차하면 배가 뒤집힐때 정령들을 불러 짐을 건질 생각으로 긴장하며 앉아 있는데, 해안을 떠나 바다 위로 올라가자 나는 왜 배가 이렇게 작아도 되는 지 알 수 있었다. 그 곳 해변은 바다임에도 불구하고 파도가 거의 없이 잔잔했던 것이다. 마치 호수처럼 말이다. "이야... 여기 정말 바다가 맞습니까? 파도가 거의 없이 잔잔하네요. 마치 호수 같아요." 내가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며 감탄하자 우리 배를 젓고 있던 사람이 빙그레 웃었다. "놀라셨지요? 여기 이 해안은 다른 곳과 다르거든요. 여기서는 안 보이지만 저 앞쪽으로 가면 아주 자그마한 섬이 있답니다. 모래와 바위로만 된 섬인데, 그 섬이 길게 늘어서서 파도를 막아주고 있어서 여기 해안만은 이렇게 파도가 없는 거랍니다." "오... 그랬군요. 그래서 이런 배가 운행될 수 있었던 거군요." 내 감탄 어린 말에 그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뭐, 파도가 안 치기 때문에 이런 배를 띄울 수는 있지만, 그것말고 다른 이유가 있지요. 이 배는 새클턴 정글로 들어가기 위한 배거든요." "네? 아, 혹시 새클턴 정글을 흐르는 강을 이 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겁니까?" 내 질문에 그 남자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얼굴로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새클턴 정글 안으로 흐르기는 하지만, 강이 아니라 엄연히 바다랍니다." "에에?"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한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 남자의 미소가 더욱 커졌다. "자자, 두고보시면 아실 겁니다. 아, 그리고 한가지 여쭈어볼게 있는데... 뛰어난 실력자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혹시 창 던지기 잘하십니까?" "창... 던지기요? 그, 글쎄요... 그건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내가 당황하며 뒤에 타고 있던 첼릿을 돌아보자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기마 창술이라면 좀 한적이 있습니다만, 그건 왜 필요한 거요?" 첼릿의 말에 뱃사공이 씨익 웃었다. "낚시를 해야 하거든요." "나, 낚시요? 갑자기 그건 왜...." 뜬금 없이 낚시타령에 나는 더욱더 어리둥절해졌다. 지금 우리가 놀러오기 따악 좋은 바다 위에 있기는 하지만, 놀러온게 아니지 않는가? 설마 뱃사공이 그걸 모르는 건 아닐텐데, 한가하게 낚시를 해야 한다니? 그런데 다른 배를 타고 옆에서 나란히 가고 있던 듀비가 불쑥 끼어들었다. "해인님, 여기서 낚시는 꼬옥 필요한 겁니다. 될수 있는 한 많이하면 많이 할 수록 좋지요." 그렇게 말하는 듀비의 손에는 내 손목정도의 굵기에 2m 는 되어 보이는 길이의 대나무 창이 들려 있었다. "듀비? 그걸로 뭐 하게요?" 언제 그런걸 준비했을까 싶어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씨익 웃으면서 대나무 창을 바다를 향하여 푹 내지르는 거였다. 그리고 잠시 후에 바다에 꽂힌 창을 들어올리니, 그 곳에는 빨간 물고기와 파란 물고기가 끼어저 파다닥 거리고 있었다. "우와, 솜씨가 좋으시구만. 이대로라면 문제 없겠는데?" 듀비의 능력에 듀비 배의 뱃사공이 감탄했다. 그러고보니 램버트도 듀비와 비슷한 대나무 창을 들고 있었다. "듀비, 그 생선이 먹고 싶었던 거에요?" "아하하하... 저희가 먹을게 아니라 다른 놈들에게 줄 거랍니다." 내 황당하다는 질문에 우리 배의 뱃사공이 시원하게 웃으며 대답해줬다. 그제야 나와 첼릿은 왜 낚시가 필요한 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생선을 잡아서 혹여 우리를 공격할 몬스터에게 던져주려고 하는 거였다. "기사님, 저희도 생선이 많이 필요하답니다. 대나무 창이라면 벌써 준비해 놨거든요." 그러면서 우리 배의 뱃사공이 가르키는 배 바닥에는 정말 대나무 창이 여러개가 마련되어 있었다. "아, 이렇게 미적 센스가 없는 창이라니.. 이건 단순히 대나무를 잘라서 끝을 뾰족하게 깎은 것 뿐이잖아? 아아... 이 내가 이런 창을 써야 하다니... 서글프도다..." 옆쪽에서 램버트의 푸념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푸념에 살짝 미소지으면서 나는 첼릿이 대나무창을 치켜 드는 걸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첼릿, 잘 할수 있죠?" 내 기대어린 시선에 그가 삐질 거렸다. "아하하하... 그, 글쎄요... 이런 건 처음 해보는데..."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몇번 하다보면 요령이 생겨서 쉽게 느껴질 겁니다. 주의하실 것은 바다 속에 보이는 물고기는 실제로 보이는 것 보다 약간 위쪽에 있으니 보이는 곳에다 창을 찔러 넣으면 고기를 잡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고기의 약간 아랫쪽을 겨냥하십시오." 첼릿이 당황하자 옆에서 벌써 10마리가 넘는 물고기를 잡아 배에 올려놓던 듀비가 낮은 목소리로 설명해줬다. "아... 맞아요. 물속에서는 물체가 꺾어져 보이죠." 그의 설명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래를 내려다 보자니 하얀 모래 바닥 위로 형형 색색의 예쁜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오, 열대어처럼 색깍 참 예쁘다.' 그렇게 감탄하는 순간 그 예쁜 물고기를 향하여 첼릿이 들고 있던 대나무 창이 날카롭게 짖쳐들었다. 푸슉~ 대나무 창이 너무 가늘어서인지, 아니면 그 속도가 빨라서 그런지 물살이 거의 튀지도 않았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거라서 그런지 아쉽게도 애꿎은 모래에 푹 파묻혔고, 첼릿이 노리는 물고기는 놀라서 도망가 버렸다. "이거 참..." 아까운지 첼릿이 입맛을 쩝 다시자 듀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간 아랫쪽을 노리라니까요." "아, 예." 듀비의 말에 첼릿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신중하게 물고기를 노렸다.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이거 어째... 듀비가 첼릿을 가르치는 거 같잖아? 뭐... 듀비가 첼릿보다 나이가 많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둘 사이가 언제 이렇게 좋아졌대?' 그렇게 고기를 잡으면서 전전하는 사이, 우리는 어느덧 울창한 나무가 떠억 하니 가로막고 있는 지점에 도달했다. 드디어 정글에 발을 내딛는구나 하면서 나는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데, 황당하고 어이없게도 배는 나무 앞에서 멈춰서지 않고 그대로 나무 옆을 쓰윽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바닷물이 그 안에까지 쭈우욱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 어어어... 이, 이나무들...." 배가 나무 옆을 그대로 통과하자 나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고, 그러다가 더욱 더 놀라 입을 떠억 벌렸다. 내 놀라운 표정을 본 뱃사공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히죽 웃더니 입을 열었다. "신기하죠? 바다 위에 떠억 버티고 있는 나무라니요." 뱃사공의 말에 첼릿이 끼어들었다. "저기서부터는 강물인가보죠. 그러니까 나무가 버틸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바다와 이어져 있다고는 해도, 여기 물은 그냥 생수겠지요?" 그의 말에 뱃사공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뭐, 제 설명을 듣는 것 보다 그냥 이 밑에 있는 물을 찍어 한번 맛보시지요." 그에 첼릿과 나는 얼른 배 아래로 손을 뻗어 물을 찍은 뒤 맛을 보았다. "오, 짜다..." "바, 바닷물?" 나와 첼릿의 놀란 중얼거림에 뱃사공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도 엄연히 바다랍니다. 뭐, 꼭 내륙 안에 강물만 흐르라는 법이 있습니까? 바닷물도 흐를 수 있지요." 물론 그런 법은 없지만, 실제로 그런 걸 본 적이 없으니 놀랄 수 밖에... "어머나... 나무가... 소금물 위에서도 잘 버티고 있네요... 대단한 나무야." 내가 놀라운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대답하자 뱃사공이 히죽히죽 웃었다. "여기는... 다른 곳과는 별천지 세계랍니다. 다른 곳에서의 상식이 여기서는 완전히 어긋나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니까요. 자자, 이러고 계실 시간 없습니다. 어서 어서 고기를 잡으셔야 해요. 고기가 많을 수록 안전할 확률도 높아지는 법이랍니다." 뱃사공의 재촉에 들고 있던 대나무 창을 잊은 듯 멍 하니 바닷물 위에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던 첼릿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배 아래를 태연하게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에 집중했다. 그러한 칼라풀한 물고기들 사이에, 마치 거대 미꾸라지나 메기 같이 생긴 고기도 종종 보여 첼릿에게 잡혀 올라왔다. 내 팔뚝 보다도 더 굵은 메기나 미꾸라지 같은 물고기가 퍼덕 거리는 걸 보니 괜시리 얼큰한 매운탕이 생각나며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아, 이건 맛있겠다. 요거 몇개는 빼돌려서 구워 먹으면 어떨까요?" "허허허허, 그거 좋죠. 고 놈들은 특히나 여기 있는 물고기들중 가장 맛난 거랍니다. 양념 할 것도 없이 이 바닷물에 담갔다가 그대로 모닥불에 구워서 먹으면... 캬~ 그 맛이 일품이랍니다. 거기에 술도 한잔 걸치면...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다니까요." 그걸 상상하고 있었던지 뱃사공의 얼굴이 행복한 표정으로 부르르 떨렸다. "오옷, 정말이죠?" 배 위에서 퍼덕퍼덕 뛰는 굵고 커다란 미꾸라지를 보며 입맛을 쩝쩝 다시는데 주위에서 감탄에 찬 소리들이 들려왔다. "와우...." "히야아..." "응?" 그에 배 위의, 오늘 저녁의 음식을 바라보던 내가 시선을 들어 사람들이 쳐다보는 쪽을 보고는 나도 입을 떠억 벌렸다. "우와아... 아름답다...." "낙원이 따로 없군." 누군가의 목소리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이는데 뱃사공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멋지죠? 이 위험한 새클턴 정글에 그나마 이런 눈요기라도 있어서 들어올 기분이 생긴다니까요." "정말 신기하군요. 바닷물이 마치 잔잔한 강 같질 않나, 그 바닷물이 내륙 깊숙히까지 들어와있지 않나, 그 위에 나무가 자라질 않나..." 첼릿의 황당하다는 말에 나는 진정으로 동감하며 다시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가 주위의 경관에 감탄하며 그 사이 사이 물고기를 - 물론 나는 놀고 첼릿이 - 계속 잡으며 전진하는데 갑자기 뱃사공이 긴장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 이제는 물고기를 그만 잡이셔도 됩니다. 지금부터는 될 수 있는 한 소리를 내지 마시고 긴장하셔야 합니다. 이쯤부터 위험한 지역이거든요. 갑자기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조심하세요. 그리고 주의하실 것은, 혹시 몬스터를 보신다면 절대로 공격하지 마시고 될 수 있는 한 배 위에 있는 물고기 한마리를 던져 주시고 피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아시겠지요? 피를 보는 일은 될수 있는 한 피하셔야 한다구요." 뱃사공의 말 때문인지 몰라도,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하며 왠지 주위가 아까보다 어두컴컴 해진 것 같았다. 그래 의아해서 하늘을 보니, 아까는 양 옆에 쭈욱 나 있던 나무들의 가지가 머리 위에서 닿을 듯 말듯 했던 것이, 여기에서는 닿다 못해 아예 굵직 굵직한 나무들이 얼키고 설켜 하늘을 가리고 있어 햇볕을 대부분 차단 시키고 있었다. 다른 배에서도 뱃사공들의 경고가 이어졌는지 아까까지만해도 가끔은 감탄 소리와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었는데, 이제는 고요한 침묵 속에 뱃사공들이 조용히 노를 젓는 소리만이 들려 올 뿐이었다. ====================================================== 제 35화 던전 탐험 (3) 쏴아아아~~ 한차례 바람이 불어오자 이리저리 얽혀 하늘을 가리고 있는 나뭇가지들과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이 더운 정글에서 왠지 한기를 느끼게 하는 그 바람에 몸을 한번 움츠리는데 어깨에 크고 따뜻한 손이 올려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해인님은 제가 어떻게 해서라도 지켜드리겠습니다.” 조용히 속삭이는 첼릿의 말 속에는 굳은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 말을 듣자니 나는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내가 여기에 어떻게 왔는데... 리건과 상회 녀석들을 제외한 나머지 주위 사람들이 강력하게 반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 하나 없이 돌아올 수 있다는 자신감에, 마치 옆 동산에 소풍을 가는 심정으로 이렇게 와놓고서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긴장한 채 나도 모르게 절로 움츠러든 내 자신이 웃겼다. “고마워요.” 긴장하는 날 안심시키려고 애쓰는 첼릿에게 미소를 보인 나는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하고는 가슴을 폈다. ‘훗, 감히 누가 날 건드려?’ 근거 있는(?) 자신감을 곱씹으며 주위에 신경을 집중 시켰다. 앞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때에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정령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면 때로는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용 했다. 배 아래의 운디네들나 허공에 떠있는 실프들이나 모두 침묵을 지킨 채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주위 풍경에 감탄하고, 물고기 잡는 거 구경하며 떠들면서도 사방에 둥둥 떠 있는 정령들의 재잘거림을 간간히 흘려듣고 있었다. 그런데, 아주 잠깐 사이에 정령들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해도 이렇게 침묵을 지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내가 스스로 생각한 것 보다 더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뭔가가 있는 거 같은데요...” 낮은 목소리로 첼릿에게 속삭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 침착하십시오. 해인님 곁에는 언제나 제가 있다는 걸 명심하시고요.” 스으윽... 샤샤샥~ 휙~! 첼릿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마치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부대끼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만, 저 앞쪽에서 갑자기 무엇인가가 바람소리와 함께 지나가는 거였다. 너무 빨라서 검은 그림자가 한순간 지나치는 것 밖에 보지 못했는데, 그와 함께 앞쪽에서 낮지만 놀란 외침들이 들려왔다. “헉...” “뭐, 뭐야?” “어디 갔어?” 단순적인 외침들이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 목소리들에 당혹감이 가득 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순간 첼릿이 나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와 앉으며 검에 손을 가져가려고 했는데, 사공이 그를 만류했다. “안됩니다. 아까 제가 드린 말씀을 잊으셨습니까? 될 수 있는 한 피를 봐서는 안됩니다.” 그의 말에 첼릿이 멈칫하더니 검에서 손을 떼었다. 첼릿이 검에서 손을 완전히 떼었다는 것을 확인한 사공은 노에서 잠시 손을 떼고는 배 바닥에 수북히 쌓인 물고기들을 들어 올렸다. “자, 몇 개씩 가지고 계십시오. 그리고 무슨 일이 있다 싶으면 지체 말고 허공 높이 이걸 던지셔야 합니다. 명심하세요. 무슨 일인지 확인할 생각일랑 절대로 하지 마시고 느낌이 안 좋다 하시면 무조건 물고기를 던지셔야 합니다. 물고기 한두 마리 그냥 버려도 되니까요.” 그러면서 우리들 손에 죽은 물고기를 쥐어주는 사공의 손은 두려움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당신... 왠지 아까보다 훨씬 더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군. 무슨 일이지?” 자신에게 물고기를 쥐어주는 사공을 유심하게 바라보며 첼릿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물을 때였다. 쉬익~! 다시 한번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지나갔고, 또 다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에 사공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면서 재빨리 배 바닥에 엎드렸다. “그, 그놈들이 나타났어요. 그놈들이... 제기랄... 강 속에 있는 것만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위에서도... 운도 없지.. 왜 하필 오늘...” 떨리는 목소리로 자세한 설명이 생략된 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새클턴 정글을 악명 높게 만들어주는 무언가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쉬익~! 쉬익~! 쉬이익~!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좀더 자주 나타났고, 그와 함께 경호성도 자주 들려왔다. “주의하라!” “사방을 경계해!” “마법사, 불을 밝혀!” 당황한 가운데 각 국의 리더들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 곳은 하늘을 두텁게 가리는 나무들 때문에 낮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밤처럼 어두컴컴했던 것이다. 잠시 후 수십 개의 마법의 불들이 허공에 떠올랐고, 덕분에 사방이 밝아지자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무기를 움켜쥐고 사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안됩니다. 그냥 이대로 엎드리세요!” 나와 첼릿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을 경계하려고 했는데, 우리 배의 사공이 낮은 목소리로 필사적으로 말하며 첼릿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았다. “그냥 조용히 엎드리세요. 그게 났습니다. 일어나면 명을 재촉할 뿐이라고요.” 아까는 엄청 두려움에 떨더니 몸을 낮추고 있다보니 약간 진정한 모양이었다. 그의 말에 앞의 배들을 살펴보니 일어나서 사방을 둘러보는 건 탐사 일원들뿐 배의 사공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 배의 사공처럼 몸을 최대한 낮춰 배에 밀착시킨 모양이었다. 그래 나와 첼릿도 엉거주춤 배에 몸을 낮추면서 옆 배, 그러니까 듀비와 램버트가 있는 배를 힐끗 보니 그 곳에서도 역시 몸을 낮춘 채 엎드려 있었다. 그러던 순간... “위쪽이야!” 퍼엉~!! 키에에엑~!! 텀벙~! 누군가의 날카로운 외침 뒤로 한 마법사가 마법을 날렸는지 강력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고 그 마법이 효과를 봤는지 몬스터의 괴로운 울부짖음과 함께 뭔가 아주 육중한 물체가 물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이러면 안되는데... 안되는데...” 그러한 소리들은 뱃사공에게도 들렸는지 그는 배 바닥에 얼굴을 처박으면서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사공의 바람과는 정 반대로 그러한 소리들을 필두로 앞쪽에서는 본격적으로 전투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활을 날려!” “마법사!!” “파이어 볼!” “파이어 에로우!!” “라이트닝 볼트!!” “운다인!” “실프!!” 키이에엑~~ 캬아아아~~ “으아악~!” “조심해!” 여러 마법 뿐만이 아니라, 정령들까지 동원되는 마당에 몬스터라 추측되는 비명성이 계속하여 울려 퍼졌고, 간간히 사람들의 비명소리까지 들려왔다. 배 바닥에 엎드려 있느라 도대체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있던 나는 그러한 요란한 소리들에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어 고개를 슬쩍 들어 배 위로 눈만 빼꼼히 내밀려고 했다. “해인님!” 그러한 날 본 것인지 첼릿이 낮은 경고성을 발휘했지만, 슬쩍 뒤돌아보니 자신도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는지 슬며시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는 거였다. 그래, 그에게 한번 픽 웃어준 나는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벨레니국팀은 배를 타고 출발할 때 가장 늦게 탔었다. 처음에는 새클턴국이 먼저 타고 출발했고, 그 뒤로 새클턴국팀 리더의 보르바 할레언 백작의 비웃음에 열 받은 녹스국이 따랐고, 그 다음 마법사 길드 팀과 마르타국이 나서는 바람에 새클턴국은 맨 뒤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용병들은 5개 팀이 와서 각자 한 나라씩 맡아 호위하는 식으로 하여 우리 주위에는 그래도 나와 안면이 있다고 트래비스 용병단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새클턴국팀은 저 앞쪽으로 나가 있었고, 우리 바로 앞에는 마르타국과 녹스국이 마법사팀들과 그들과 짝이 된 용병단들과 같이 있었는데, 바로 그들이 지금 일어나서 몬스터들과 맞서고 있는 것이었다. “세상에나...” 마법사팀과 마법 국가라고 불리는 마르타국이 같이 있으니 마법 공격이 제일 활발했다. 그 덕분에 그들 머리 위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봐 먹이를 낚아 올리려는 뱀들의 움직임을 막는데 탁월한 효율을 보이고 있었다. “으윽... 징그러워...” 그랬다. 지금 앞 팀(?)들이 사투를 벌이고 있는 건 한 무리의 뱀 떼였다. 그것도 보통의 뱀이 아니라 쩌억 벌린 입 크기만 해도 1M는 훨씬 넘을 것 같은 엄청나게 거대한 뱀이었다. “보아뱀? 아니, 아나콘다던가?” 길이는 나뭇가지에 칭칭 감기고 가려있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굵기만 보면 성인 한 두 명은 너끈히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게 한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가 서로 엉킨 채 있었던 것이다. 검은색 바탕에 붉은 무늬가 있는 그 뱀들은 노오란 눈빛을 번뜩이며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뱀들의 굵은 몸통 끝에는 몸통과 구별되는, 내 손목 굵기 만한 꼬리가 길게 달려 있었다. 마치 채찍 같은 그 꼬리의 길이는 대략 3, 4 미터쯤 되어보였고 화려한 붉은 문양이 있는 몸통과는 달리 잡티 하나 없는 새까만 색이었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그러한 꼬리를 조용히 늘어뜨리고 있으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터였다. 저 뱀 놈들은 그렇게 나무 위에서 꼬리를 늘어뜨린 채 조용히 숨죽이고 있다가 아래로 먹이가 지나가면 길다란 꼬리를 채찍처럼 움직여 먹이를 낚아채 올리는 듯 했다. 그리고 아까 내가 들었던 휙~ 하는 소리가 배 위에 있던 운 없는 누군가를 저 놈들 중 하나가 낚아채는 소리였고... 그러나 다행이도 리더들이 그러한 상황을 알아채고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뱀들을 발견하여 잘 대치하고 있는 듯 했다. “괜찮아요. 폼을 보아하니 우리가 이길 거 같은데요?” 화려한 마법들의 난무로 보아 우리가 쉽게 이길 거 같아 나는 안심하고 몸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 첼릿이 내 등을 가만히 눌렀다. “아닙니다. 그렇지가 못합니다.” “예?” 첼릿의 저지에 엉거주춤 다시 몸을 낮추는데 뱃사공이 떨리는 목소리로 첼릿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맞습니다, 맞아요. 우린 여기서 죽을 거라고요. 신이시여, 저희를 보살피소서...” “왜요? 잘 싸우고 있잖아요. 곧 저 뱀들을 다 물리칠 거 같은데요?” 내 의아한 목소리에 첼릿이 고개를 저었다. “잘 보십시오. 마법사들이 공격을 하는 것이 대부분 먹히질 않고 있습니다.” “예?” 첼릿의 침중한 어조에 내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되묻자 그가 다시 설명을 했다. “아무리 크다고 해도 보통 뱀이라면 낮은 클래스라고 해도 화염 계열의 공격 마법에 타격을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저 뱀들은 저 수많은 마법 공격을 받은 것에 비해 바다로 떨어지는 녀석들은 극히 적습니다. 그 공격 마법이 저놈들에게 제대로 안 먹힌다는 거지요.” “헉... 그 그럼 왜 쓸데없이 마법 공격을 하는 거죠? 차라리 큰 마법으로 한방 먹이던가, 아니면 마나를 낭비하지 말던가...” “큰 마법을 쓰려면 마법을 준비하는 시간이 길게 아닙니까? 아마도 주위의 마법사들이 낮은 클래스지만 화려한 마법을 남발하는 것은 고위 마법사가 큰 마법을 준비하는 시간을 벌어주려는 걸 테지요. 위에 있는 녀석들이니 기사나 용병들은 지금은 도움이 되지 못할 테구요. 하지만, 자신들의 머리 위에 있는 놈들이니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신들에게도 해가 올 테니 신중해야 할 겁니다.” 첼릿의 말에 다시 눈을 빼꼼히 내밀고 보니 과연, 주위 마법사들이 열심히 마법 공격을 펼치는데 비하여 마르타국 일행의 리더인 쉐리든 폴트팩트 백작과 마법 길드 일행의 리더인 콘스턴스는 마법을 펼치지 않고 가만히 있는 폼이 뭔가 대단한 걸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그 둘은 이 곳에 있는 이들 중 가장 실력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쉐리든 폴트팩트 백작은 6서클의 6클래스 익스퍼트 마법사였고, 콘스턴스는 7서클의 7클래스 유저 마법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키에에~! 실력이 없는 건지, 운이 없는 건지 뱀 한 마리가 위에서 떨어졌다. 위에 있는 녀석들이 워낙 크다보니 다른 데에서 보면 지금 떨어지는 녀석도 엄청 크게 보일 텐데, 여기에서는 작은 축에 속했다. 아마도 어린 녀석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녀석이 채 수면에 떨어지기도 전에 시커먼 그림자 두개가 불쑥 솟아 나오더니 그 뱀을 덥썩 물고 아래로 사라졌다. “헉...” “제기랄... 나타났어요, 나타났다구요.” 그 모습에 내가 헛바람을 삼키는데 사공도 그걸 봤는지 다시 바닥에 얼굴을 박으며 중얼 거렸다. “나타난 건 우리도 알고 있으니, 뭔가 알고 있으면 설명 좀 해보시오. 알고 있는 게 있으면 이 상황에 도움이라도 좀 되어야 할 게 아니오?” 아까부터 제대로 된 설명은 안 해주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사공에게 첼릿이 짜증스럽다는 어조로 내뱉었다. 그 순간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아래에서 우리 배에 부딪혔고, 그 바람에 작은 배가 순간적으로 크게 휘청거렸다. “해인님!” 첼릿이 놀라 날 붙잡았지만, 우리는 다행이 몸을 낮추고 있어 비틀거리다가 배에 머리를 약간 부딪히기는 했어도 별 탈 없었다. “아, 나는 괜찮아요.” 하지만 우리 배 위에 그득 쌓여 있던 물고기들은 그렇지 못했는지 그 충격으로 인하여 위에 있던 몇몇 물고기가 미끄러져 물 위에 떨어졌다. 그러자, 그 순간 시커먼 그림자가 불쑥 솟아올라 그 물고기들을 덥썩 낚아채는 것이었다. “허걱...” 바로 눈앞에서 그걸 본 나는 헛바람을 삼켰다. 티라노 사우르스처럼 툭 튀어나온, 아니 그 보다 더 튀어나온 주둥이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달려 있었고, 뱀처럼 노란 눈에 악어와 같은 울퉁불퉁하고 거무튀튀한 색의 거죽을 가지고 있는 그것은 날카로운 손, 발톱이 달리고 날쌔게 생긴 앞발과 뒷발을 가지고 있었고, 악어 꼬리처럼 생긴 길다란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에어리언이닷!” 정말 딱 에어리언처럼 생긴 그 몬스터는 노란 눈을 힐끔 돌려 날 한번 보더니 물고기를 입에 물고 만족한 표정으로 아래로 사라졌다. “해인님, 저 몬스터를 아십니까?” 첼릿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설마 에어리언처럼 생겼다고 해서 정말 에어리언일리는 없지 않은가? 그건 한국에서 본 SF 영화에서 나온 거였고, 그 영화에서도 에어리언은 외계 생물체 였으니 말이다. 이런 날 도우려는 건지 사공이 끼어들어 부정했다. “아닙니다. 저건 에어리언이 아니라 요크라고 하는 놈들입니다. 정글 안의 이 정도 깊이의 강이나 이 부근에서 자주 발견되는 놈들이지요. 물 속에서 엄청 재빠른데다가 떼로 몰려 다니기에 만나면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정 안되면... 이렇게 물고기를 던져주면 사람에게 덤비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 사공이 물고기 몇 마리를 바다에다 던져 넣었다. 그러자 세 마리의 그 요크라는 에어리언처럼 생긴 몬스터가 불쑥 나타나 그걸 물고 사라졌다. “흠, 그럼 이 물고기들은 저놈들을 피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뭍에서는 한 놈은 크게 위험하지 않은 상대이긴 하지만, 한 놈이 있다면 주위에 다른 여러 놈이 있다는 뜻이니 저 놈들은 이렇게 해서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사공은 첼릿의 짜증스러운 말에 억지로라도 안정을 되찾았는지 아까보다는 꽤나 침착한 모양이었다. “꽤나 영리한 놈들이지요. 우리가 이렇게 저놈들을 피하니까, 이제는 배만 보면 부딪혀 와서 물고기를 얻어먹는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저 거대 뱀 놈들이랑 같이 마주쳐 버렸으니...” 사공의 근심스러운 어조에 첼릿이 마주 고개를 끄덕이며 앞쪽을 바라보았다. “왜요, 뭐가 문제인데요? 이 놈들이야 물고기만 던져주면 그냥 물러난다면서요?” 내 속삭임에 첼릿이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르키며 설명해줬다. “그 놈들이 물고기를 얻기 위해 취하는 행동이 문제지요. 지금은 머리 위의 놈들을 상대하느라 바쁜데, 아래에서 누가 배를 쳐서 흔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특히나 배 위에서의 싸움에 약한 사람들에게는요.” 첼릿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마치 이렇게... 라고 알려주기라도 하듯 앞쪽에서 용병들이 타고 있는 배에 요크가 부딪히자 일어서 있던 용병들이 배에 쌓아 놓은 몇몇 물고기들과 함께 바다 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십여 마리의 요크들이 그들에게 달려드는 것이었다. “요크들은 사람들에게 함부로 덤비지는 않지만, 물에 떨어진 사람들은 예외지요. 저놈들은 물위에서는 자신들이 강하다는 걸 잘 알고 있거든요.” 그 모습을 본 사공이 씁쓸하고 두려운 어조로 설명했다. 그의 말이 끝날 때 즈음 바닥이 다 비칠 정도로 맑은 바닷물 사이에 붉은 잉크가 조용히 퍼지고 있었다. “윽...” 그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으면서 신음 소리를 죽였다. 이런 모습이야 한국에 있을 때 영화에서 많이 봤지만, 직접 보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던 것이다. 내가 상회에 소속되어 북드워프의 마을로 향할 때도 철없는 인어들 덕분에 바다 몬스터들을 많이 만나기는 했지만, 그때는 내가 있는 힘을 다해 배를 지킨 데다가 배 위의 용병들도 합심하여 나를 도와준 덕에 죽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바다 몬스터들을 조우했을 때도 크게 두려움도 없었다. 오히려 몬스터들을 하나하나 물리칠 때 마다 신도 나고 흥분도 되었고, 몬스터가 나타났을 때 입으로는 또야? 하면서도 일행들과 같이 물리칠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들뜨기도 했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이 정글에 온다고 했을 때에도 그때의 그 기분을 다시 맛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여유만만하게 나섰던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 맞닥뜨린 정글의 몬스터들은 내가 환상을 품어 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앞쪽에서는 몬스터들이 머리 위뿐만이 아니라 아래에도 있다는 걸 알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 모습에 내가 나서려고 하자 첼릿이 고개를 저었다. “해인님, 지금은 해인님 혼자 독단으로 움직이셔서는 안됩니다. 몬트리올경의 지시가 떨어져야 합니다.” 여기 오기 전에도 독단으로 움직이지 말라는 주의를 단단히 들어둔 터라 나는 몬트리올 경을 찾으려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디신티그레이트!!” 오랜 시간 준비하고 있던 마법이 드디어 완성 되었던지 마법 길드 일행의 리더인 콘스턴스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우리 앞쪽 일행들 머리 위의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초록빛 광선이 번쩍 하더니만, 얽히고 섥혀 하늘을 가리고 있던 그 수많은 굵은 나뭇가지들이 순식간에 초록빛 입자로 화하여 허공에서 공중분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 나뭇가지들에 칭칭 매달려 있던 수많은 뱀 떼가 동시다발적으로 바다 위로 떨어졌다. 촤아아아~~ 덩치도 엄청 큰데다가 숫자가 많으니까 첨벙 첨벙 소리가 아니라 마치 거대한 파도가 절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면서 거대한 물결이 일었다. 그러자 곧바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마르타국 일행의 리더인 쉐리든 폴트팩트 백작의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라이트닝 볼트!!” 비록 3클래스의 마법이었지만, 6서클의 마법사가 시전 하니 그 크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콰지지직~!! 폴트팩트 백작의 손에서 형성된 커다란 전기의 구가 바다 속으로 떨어졌고, 그와 함께 엄청나가 강렬한 섬광과 함께 고압 전기가 마주치는 듯한 소리가 요란하게 일었다. 그리고 잠시후... 갑자기 뻥 뚫린 하늘에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사방을 비추었고, 바다 위에는 시커멓게 탄 에어리언, 아니 요크라는 몬스터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그리고 그 사이 사이 커다란 뱀의 모습도 보였다. “휴우...” 누군가의 안도의 한숨 소리와 함께 곧이어 내가 찾고 있던 몬트리올경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진! 서두르게. 어서 여기를 빠져 나가지.” 앞쪽을 보니 한바탕 전투를 치른 마르타국과 녹스국, 그리고 마법길드 사람들과 그들과 한 조를 이룬 용병들이 빠른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다. 배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우리 배의 사공도 재빠르게 일어나 힘차게 노를 저었다. “빨리,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합니다. 속도를 낼 테니 꽉 잡으세요.”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고 있던 벨레니국측 사람들이 마악 에어리언과 뱀들의 사체가 둥둥 떠다니는 전투 지역을 통과할 때였다. 새카맣게 그을려 물 위에 떠 있는 뱀들에게 될 수 있는 한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데 갑자기 죽은 줄만 알았던 뱀들이 갑자기 눈을 뜨더니 벌떡 일어나는 거였다. “헉~!” 다행이 모든 뱀들이 눈을 뜬 건 아니었지만, 눈 뜬 뱀들은 그 뱀들 중 큰 축에 속하는, 그러니까 제일 강한 놈들이었던 것이다. 사방에 떠다니는 동족들을 일별한 뱀들은 분노한 기색을 노란 눈에 가득 담은 채 우리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캬아아~!! 나무만 잘 타는 줄 알았더니, 물 속에서도 잘만 움직이는 놈들이었다. 그들의 공격 태세에 첼릿이 다급하게 배 위에서 일어나 날 다급하게 등 뒤로 숨기고는 검을 빼어 들었다. “조심하십시오.” 우리를 절대 보내주지 않겠다는 듯 앞을 막아서며 입을 벌리는 놈들 때문에 우리는 아까 전투가 벌어졌던 바로 그 장소에서 멈춰 서서 무기들을 치켜 올렸다. “전투 준비!!” 몬트리올경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 또한 한 몫 거들기 위하여 운다인과 엔다이론들을 왕창 불러내는데, 그 순간 한이 절절하게 맺힌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용서 못해, 용서하지 않아!!] 주위의 허공에 있던 정령들은 이 자리를 몽땅 피해 저 멀리서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기에 더욱 더 그 목소리가 잘 들렸는지도 몰랐다. 나는 순간적으로 멈칫한 채 그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한으로 죽은 처녀귀신의 목소리가 그럴까? 원한에 가득 찬 여자의 목소리에 소름이 오싹 돋을 지경이었다. [절대로 보내지 않겠다. 죽어도 너희들과 같이 죽겠어!!] [내 아이들의 원수를 갚겠어!] [가만 두지 않아!] [죽여 버릴 거야.] 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곧이어 다른 목소리들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 뭐야?” 목소리들이 들려오는 곳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그 곳에는 황당하게도 우리 앞을 가로막은 20여 마리의 뱀들이 있었다. 아까는 멀리 있었던 데다가 뱀들을 관찰하는 취미가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 눈앞에 자리 잡은 뱀들을 보니 그들의 목덜미 있는 곳에 반투명한 여자가 각각 붙어있는 게 보였다. 원래 상체만 있는 건지, 아니면 하체는 뱀 몸속에 있는 건지, 허리 부분이 뱀의 뒷머리 바로 아래에 따악 붙은 채 상체만 보였는데 긴 머리채를 흩날리며 뱀과 같이 우리를 노려보는 눈빛들이 무시무시했다. 내가 들은 원한 서린 목소리는 그녀들이 한마디씩 한 거였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뱀들 사이에서도 상하 서열은 있었던지 맨 앞에 나선 뱀의 머리위에 올라탄 여자가 손을 치켜 올리며 말하자 다른 뱀 위에 있던 여자들도 손을 치켜 올렸다. 그러자 그와 함께 엄청나게 강한 돌풍이 우리를 덮치는 것이었다. “웃!!” 그에 강한 물결까지 동반되자 배가 급하게 출렁거리며 뒤집힐 것만 같았다. “실라이론!!” 다급해진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치자 거대한 거인이 뱀과 배 사이에 떠억 나타나며 물결과 돌풍을 막아냈다. [크읏~ 바람의 상급 정령!] [흥, 상급 정령이라도 우리를 어쩌지 못해!] 실라이론의 거대한 몸집에 뱀들의 머리에 붙은 여자애들이 이를 다시 한번 빠드득 갈며 결의를 다지는 거였다. [뭐, 뭐야 쟤네들은?] 그들의 목소리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묻자 엔다이론의 대답이 들려왔다. [이 세계에서 태어난 정령입니다. 오랜 시간 자연의 기운이 한 곳에 몰려 생긴 아이들이죠. 보아하니 바람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 같습니다. 중급 정령보다는 강하지만, 상급 보다는 약간 아래인 듯싶군요.] [정령? 저 여자들이 정령이라고?] 내가 당황해서 되묻는 사이 맨 앞에 있던 세 명의 여자애들이 뱀을 타고 실라이론에게 덤벼 들었다. [비켜~ 가만두지 않겠어!] [어디 한번 해보자고!] [네 놈 따위 당장 정령계로 가버리란 말야!!] 그에 실라이론이 두 팔을 들어올려 뱀들을 막을 태세를 취하자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모두 그만둬!] 아버지가 정령왕인 덕에 정령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보니 아무래도 정령들끼리 싸우는 건 가만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놀랍게도 실라이론은 물론이거니와 뱀들을 타고 실라이론에게 공격을 가하던 세 여자 정령들도 떡하니 멈췄다. 그들은 놀란 시선으로 첼릿 뒤에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뭐, 뭐야?] [넌 누구지?] 하지만 나 또한 내 말이 그들에게 먹혔다는 게 더 놀라워 벙 쪄 있는데 엔다이론이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아무리 정령계가 아닌 이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정령은 정령입니다. 정령왕님의 말씀에는 절대 복종해야 하는...] [오호라... 그럼 내 말도 먹히겠군.] [물의 상급 정령?] [저 인간 뭐야?] [어떻게 상급 정령과 대화를 나누는 거지?] 내가 엔다이론과 대화를 나누는 걸 보고 들은 뱀 여자 정령들이 당황스러워 속삭이는데 그 순간 그들 사이로 전기 공이 떨어졌다. “라이트닝 볼트!” 나 때문에 놀란 뱀 여자 정령들이 멈칫하는 사이 기회를 잡은 클라우드 남작이 던진 거였다. 하지만, 한번 당한 공격에 다시는 당해주고 싶지 않은지 그 순간 뱀 여자 정령들은 자신들이 올라타고 있던 뱀을 바람의 막으로 감쌌고, 덕분에 기껏 바닷물을 타고 그들에게 도달한 전력은 그들의 몸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가, 감히!] [가만두지 않겠어!] [너부터 먹어주마!] 갑자기 끼어든 마법사로 인하여 나에 대한 관심을 끊은 뱀 여자 정령들이 클라우드 남작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공격하려고 하자, 그쪽에서도 또 뭔가 공격을 하려고 준비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래 나는 다급히 엔다이론을 타고 허공으로 떠올라서 외쳤다. “가만있지 못해요? 너희들도 가만있어!!” 그에 뱀 진영과 벨레니 국 진영이 멈칫했고, 나는 뱀과 배들 사이를 막아서고 있는 실라이론의 어깨 위로 올라탔다. “백작,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당장 내려오십시오!” 나의 돌발적인 행동에 공격하려던 것이 무산 되었지만, 그 때문에 화가 난 몬트리올 경이 나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요, 몬트리올 경. 이건 내가 해결 할 테니까 당신은 가만히 좀 있어 봐요.” “뭐, 뭐요?” 내 말에 몬트리올경의 얼굴이 분노로 인해 엄청 붉어졌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단체 생활에 있어서는 제 지시에 따르셔야 한다고 했지 않습니까?” 방방 뛰면서 뭐라고 더 하려고 했던 몬트리올경은 리건의 제지로 인해 입을 다물어야 했다. “거, 그만 좀 하시지 그러오? 쟤가 알아서 처리한다잖소? 만약 잘못되어도 저 녀석이 먼저 먹힐 텐데 뭐가 문제요?” “후, 후작님까지...” 리건이 그렇게 나서자 몬트리올경은 엄청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인상이 팍 찡그려 졌지만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자, 여기는 내가 알아서 막을 테니까 넌 그쪽이나 잘 처리해봐라.” 리건이 그렇게 하며 싱긋 웃어보이자 나는 안심하고 뱀 여자 정령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뭐냐, 인간? 너부터 죽고 싶은 게냐?] [네 놈이 어떻게 우리와 대화를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만 상관없어. 네 놈들을 다 죽이고 말테다!] 그래 나는 한숨을 내쉬고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만 둬. 한 가지 미리 이야기 하자면 상급 정령보다 약한 너희들이라면 내 적수가 안 될 거야. 그러니 그만 물러나도록 해.] 내 말에 그녀들은 눈을 부라리고 외쳤다. [뭐라고? 우리보고 물러나라고?] [우리 아이들의 원수는?] [절대로 그렇게는 못해!] [같이 죽어버릴 거야. 너희들을 이기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어!] [먼저 공격한 건 너희들이잖아? 그건 왜 생각 못하지? 너희들이 먼저 공격해서 우리가 방어하느라 공격한 거라고. 남이 우리를 죽이려고 달려드는데 막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 건 당연한거 아닌가?] [시끄러워, 시끄러워!!] [듣기 싫어! 너도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죽어버려! 저 놈들과 같이 죽어버리란 말야!!] 내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은 채 나에게 덤벼들려고 했다. 하기야 그들의 아이들이 죽었다면 저렇게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것도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덤벼든다면 내가 곱게, 그래 그래서 너희들의 분이 풀린다면 날 죽이도록 해... 하고 내가 얌전히 죽어줄 수는 없었기에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마지막 방법을 썼다. 사실, 저들과의 싸움을 피하려면 처음부터 이 방법 밖에 없었을지도 몰랐다. 나는 조용히 내 몸에서 정령의 기운들을 끌어내며 뱀 여자 정령들을 노려봤다. [그랴? 그럼 너그들이 날 어쩔거셔?] 여자 뱀 정령들은 내 살벌한 눈빛이 아니라 내 정령의 기운을 보고는 쫄아 버렸다. [야들아, 그냥 싸게 가라, 앙? 나 화나게 해뿔지 말고.] 정령들의 세계에서의 철칙. 자신보다 상급인 정령들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 한다. 뱀 여자 정령들은 내 말에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을 흩날리면서 조용히 가버렸다. “히유우....” 그들이 조용히 갔다고 내가 기뻤던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실라이론을 비롯한 운다인들을 다 보내버리고 배 위로 내려왔다. “해인님, 괜찮으십니까?” 엄청 걱정한 표정으로 첼릿이 물어보자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안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아무 일도 없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백작?” 저 쪽에 있던 몬트리올경이 타고 있던 배가 내 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그래 나는 귀찮음에도 불구하고 사실대로 성심성의껏 대답해주었다. “그냥 물러가라고 했더니만 물러가네요.” “그냥 물러가라고 했다고요? 아니,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소리입니까?” 사람이 사실대로 말해줬는데도 몬트리올경은 자신을 속이는 줄 알고 버럭 화를 냈다. “그럼 제가 뭘 어떻게 했는데요?” “뭐, 뭐요? 아니, 그걸 지금 제가 몰라서 묻고 있는 거지 않습니까?” 황당하다는 몬트리올경의 말에 나는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제가 한 거라고는 그냥 물러가라고 했을 뿐이라고요.” “이, 이...” 그러자 이번에도 리건이 끼어들어서 상황을 종결 시켰다. “몬트리올경, 안 갈 거요? 우리만 뒤쳐지고 있잖소?” 그에 몬트리올경은 물러나 일행에게 전진을 명했지만, 그러면서 날 매섭게 바라보는 걸 잊지 않았다. 제 36화 죄송해요. (1) 그 다음 날, 날이 밝자 배를 몰고 온 사공들은 돌려보내고 우리는 짐들을 짊어진 채 정글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선 맨 앞쪽은 이쪽에 그나마 익숙하고 잘 알고 있다는 새클턴국가 사람들이 섰고, 그 가운데에는 어제처럼 녹스국과 마르타국이 마법사 길드에서 나온 사람들을 보호하는 식으로 섰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라고 해야 할지, 하여간 맨 마지막으로 섰다. 그러고 보니 이 순서가 바로 어제 배를 타고 온 순서라 나는 혹시 어제 배타고 온 순서를 그대로 적용한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러한 위치가 당연한 것 같기도 했다. 어제 그 아나콘다 뱀떼와 에어리언떼의 출몰로 인하여 당한 곳은 녹스국과 마르타국뿐이었던 것이다. 앞쪽에 미리 나가있는 새클턴 국과 뒤에서 쳐졌던 우리 나라는 그들이 필사적으로 전투를 할때 방관만 하고 있느라 피해가 없었고, 나중에 여자 정령들을 태운 아나콘다들이 몰려들었을때도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 해결하는 바람에 무난히 해결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위험한 지역을 통과해 갈때 앞쪽과 뒤쪽에는 가장 뛰어난 자를 배치하는게 상식이라고 하니 아무 피해를 보지 않은 우리 벨레니국과 새클턴국이 맨 앞과 맨 뒤를 맡는게 당연했을 테고, 새클턴국이 아무래도 이 정글에 대해 잘 알테니 앞쪽을 맡는게 상식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각 국의 팀에는 새클턴 정글을 자주 드나들어 봤다는 안내자들을 각각 배치해 혹시나 어떠한 사고를 당한다 하더라도 길을 잃지 않고 던전으로 찾아올 수 있게끔 안배를 해줬다. 물론, 던전을 찾았다는 모험가 팀은 맨 앞, 그러니까 새클턴국 사람들과 같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 사람들을 소개받을 때 램버트가 그들과 아는체 할 줄 알았건만, 앞으로 나서기 싫다고 인사는 커녕, 그들에게 띄지 않으려고 내 일행들 뒤로 숨어버렸다. 그 일행들도 램버트의 이런 성격을 알고서 모르는체 해주는 건지 별 내색 없이 새클턴 일행 쪽으로 합류해버렸고 말이다. 그렇게 되자 전체 일행의 맨 앞으로 나선 새클턴 국 사람들과 맨 뒤를 차지한 우리 나라 사람들 덕분에 그 뒤로도 램버트는 전의 모험가 일행과 얼굴을 마주칠 일조차 없이 정글 안을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글 안쪽은 그나마 시원할거라고 하더니만, 과연 습한 더위는 여전했지만 나무가 많아서 그런가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물론, 조금만 걸어도 온 몸이 땀에 흠뻑 젖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 많은 식물이 있는 곳에서 옷자락을 펄럭거리며 다닐 수는 없었기에 사람들은 저마다 몸에 붙는 셔츠와 바지, 그리고 부츠를 신어야 했다. 될 수 있는 한 피부를 드러내 더위를 식히고 싶기도 했지만, 생소한 이 환경에 자라는 식물들 중에는 엄청 억세거나 혹은 자잘한 가시를 달고 있거나, 아니면 독특한 액을 가지고 있어 피부를 괴롭히는 녀석들이 있었기에 후덥지근한 기후 속에서도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피부를 가리기 위해 긴팔 긴바지를 고수해야 했다. 물론, 그러한 옷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습기와 땀으로 인해 축축하게 젖어 피부에 달라붙는 바람에 불쾌감을 선사했지만, 정글 속에서 조금이라도 해를 입지 않으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한 2, 3일 거리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곳이기 때문에 안내자는 자신의 말만 잘 듣는다면 불운이 겹치지 않는 이상 크게 위험하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그 뒤에는 장담할 수가 없다는 말이 뒤따랐지만 말이다. 하지만, 정말 황당하게도 안내자가 말한 불운이 우리에게 들러붙어 버렸는지 위험은 안내자가 장담한 2, 3일 뒤가 아니라 바로 그날 밤 다가왔다. 안내자가 크게 위험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언제 어디서 돌발 상황이 발생 할지 모르는 곳이었기에 우리는 하루 종일 무더위 속에서 강행군을 하는 바람에 지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마법사들은 주위에 경계용 알람 마법을 설치해 놨고, 각 팀들은 불침번 당번을 정했다. "으으... 덥다는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건 덥다 못해 불쾌할 지경이네요." 다른 사람 못지않게 흠뻑 땀에 젖은 내가 운디네를 불러 간단하게 몸을 씻으면서 투덜거리자 듀비가 작게 웃었다. "며칠 지내시다보면 차차 익숙해지실 겁니다. 그래도 정글 밖 보다는 견딜만 하지 않으신가요?" "물론 그렇긴 해요. 하지만 밖에서는 이렇게 직접 걸은 적이 없었잖아요." 나는 듀비의 말에 긍정을 하면서도 투덜거리던 와중 멈칫 하고는 듀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듀비가 의아한 표정으로 날 마주보았지만 나는 뭐라 말하는 대신 씨익 웃고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듀비가 황당해 하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확실히, 그가 태어나고 자라온 환경으로 다시 돌아와서 그런지 듀비가 많이 풀어져 있었다. 여기 오기 전에 걱정을 하네 어쩌네 했지만서도, 역시 고향이 좋기는 좋은가보다. 이 곳에 오기 전 무표정하고 무관심했던 표정이 이 곳에 와서는 가벼운 미소라도 자주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듀비 자신은 그런걸 알려나 모르겠지만. '역시, 오길 잘 한거 같아.' 듀비의 그런 변화에 속으로 흐뭇해 하면서 나는 내 일행들과 리건 일행들에게도 선심을 써서 운디네로 가볍게 몸을 씻어 주었다. 국방부측 사람들에게도 해줄까... 했었지만, 그들은 벌써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몸을 씻고 난 뒤라서 관뒀다. 저녁을 먹고 미리 정한대로 우리 일행 중 첼릿이 제일 먼저 불침번을 서자 나머지는 또 내일의 강행군을 대비하여 잠자리에 들었다. 그나마 새클턴 국에 들어와 계속 겪은 더위에 조금이나마 익숙해진데다가 강행군의 여파 덕분에 나는 쉽게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달콤한 잠을 얼마나 즐겼을까... 나는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의 차가운 기운이 덥쳐오는 바람에 눈을 번쩍 떠야 했다. "허걱..."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더니만, 모닥불가에서 - 더운데도 만약을 대비하여 불을 피우고 있어야 했다. - 불침번을 스던 첼릿이 놀라서 날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해인님?" 그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니 별 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아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아뇨... 자다가 낭떨어지에서 떨어지는 꿈을 꿨어요. 그래서 놀래가지구..." 그러자 첼릿이 작게 웃었다. "키가 크시려나 보군요. 아직 클 게 남으셨던 모양이지요?" 그러면서 그가 다시 모닥불쪽으로 주의를 돌리자 나는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다시 자리에 누우려고 했다. 하지만, 다시한번 차가운 기운이 기운이 몰아치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누우려고 그래? 당장 일어나지 못해?] 그래 나는 다시 한번, 이번에는 완전히 벌떡 일어서야 했다. 그에 다시한번 첼릿이 돌아보면서 웃었다. "또 떨어지셨습니까?" "아하하하..." 그래 웃으면서 얼버무리려고 했는데, 아버지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지금 웃을때야? 빨랑 빨랑 저 놈들이나 깨워. 몰려온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내 머리 위에 아버지가 척 하니 누운 자세로 동동 떠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간단 명료한 말이었지만, 알아듣기 어려운건 아니었기에 나는 급하게 주위에 흩어져서 잠들어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내 근처에 누운 듀비를 깨우려 하기 전 나는 멈칫 거렸다. 각 팀에는 각자 마법사들이 있는데다가 그들이 각 팀 주위에 알람 마법을 설치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가까운건 10m쯤 떨어져서, 먼 곳은 100m쯤 떨어져까지 있다는 걸 알기에 고개를 갸웃 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 중간 중간에도 두 세개의 알람 마법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라도 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에.... 아버지? 알람 마법이 하나도 안 울렸는데...] [벌써 두개가 해지됐다. 지금 오는 녀석들에게는 그딴 잔재주 같은 마법은 통하지 않는단 말이다.] 그에 나는 급하게 듀비를 흔들었다. "듀비, 일어나요!" 두개가 해지 되었다고 하면 50m쯤 다가왔다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어리벙벙한 얼굴로 날 보는 첼릿을 향해 낮게 속삭였다. "사람들 깨워요. 뭔가 다가오고 있어요." "예? 하, 하지만 해인님.. 알람 마법이 안 울렸는데..." 내 말에 엉거주춤 일어나기는 했지만, 방금 전 나와 같은 의문을 제기하는 첼릿을 향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을 해지하고 다가오는 것 같아요." 그 말에 첼릿이 당장 주변 사람들을 깨우기 시작했고, 나는 리건에게 달려갔다. "리건." 그러나 역시 보통 인간이 아니었던 리건은 이미 정신을 차리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거였다.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 진작 좀 일어나서 주의를 주지 그랬어요." 태연자약한 그의 행동에 툴툴거리며 나는 용병들을 향해 달려갔다. "일어나요. 뭔가 다가오고 있어요!" 그렇게 부산을 떤 덕분에 직접 깨우러 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국방부측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마법사들까지 잠에서 깨어 부스스 일어났다. "엠브로스 백작,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짜증스러움이 가득한, 그러나 방금전까지만 해도 자고 있었을텐데도 잠기운을 완전히 물리친 몬트리올경이 자신의 기분을 대변하듯 성큼성큼 걸어와 날 노려봤다. 하지만 나는 지지 않고 그의 눈빛을 맞받으며 대꾸했다. "뭔가가 다가오고 있어요." 그러자 주위 사람들의 얼굴에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서렸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알람 마법은 울리지도 않았습니다." 차가운 몬트리올경의 말에 주위 사람들의 고개가 끄덕여지자 나는 괜히 신경질이 났다. 기껏 저들을 위하여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깨워서 뭔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줬는데 그걸 믿지 못하고 짜증스러운 기색까지 내비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 골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투덜거렸다. "믿기 싫으면 다시 자던지요." 그러자 뒤에 있던 리건이 나섰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 정찰대를 보내보는게 어떻겠소?" 몬트리올경은 리건의 말에 한숨을 내쉬고는 아직도 고요한 다른 국가 팀들을 부러운 시선을 바라본뒤 날 노려봤다. 그 시선에는 별 일 없으면 가만 안두겠다는 의미가 분명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정찰대를 보낼 것까지는 없고, 탐지 마법을 부탁하겠습니다." 몬트리올경의 말에 앤더슨 스니볼리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문을 외우려는 찰나, 리건이 그를 제지했다. "할 것도 없겠군. 근처까지 왔다." 긴장감이 가득 든 그의 어조에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자신들의 무기를 움켜쥐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내 주위에는 첼릿과 듀비, 그리고 램버트가 자신들의 무기를 빼어들 날 둘러쌓고 있었다. 마치 꼭 날 보호하는 것 처럼.... '이거야 원....' ========================================================= 죄송합니다. 늦었지요? 이제 다시 연재 시작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8권 분량... 어제 책이 나왔답니다. 그래서 예고 없이 그냥 오늘 지우겠습니다. 퍼가시는 분들도 늦어도 내일까지는 8권 분량 지워주세요 ^^ 어디까지인지는 다 아시죠? ====================================================== 제 36화 죄송해요. (2) '이거야 원....' 하지만 그거에 대해 한 마디 할 시간도 없었다. 잠시 후에 내 귀에 작은 소음이 들려왔던 것이다. 사사사삭~!! 바람에 풀들이 스치는 듯한, 작은 소리였지만 리건의 말때문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사람들은 들은 모양이었다. "온다." 몬트리올경의 긴장 어린 음성이 아니라도 모두들 아까보다 조금 더 세게 무기들을 부여잡고 있었다. "어느 쪽?" "몰라. 잠깐 기다려봐." "다른 팀 사람들에게 알린 건가?" 작게 속삭이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제야 나는 다른 국팀 사람들은 아직도 모를까 싶어서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이미 우리가 아까부터 일어나 소동을 일으키는 걸 봤는지 벌써 그쪽 사람들도 모두 다 일어나서 무기들을 들고 이었다. 사사삭 거리는 소리들이 조금 더 커지고, 조금 더 많아져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사사삭 거리는 소리를 내던 주인공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헉... 저, 저게 뭐야?" 누군가의 신음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같은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운 밤에 동화되어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몸체는 삼등분으로 나눌 수 있었고, 가운데 몸뚱이에 다리가 여섯개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검은 머리 위에 달려있는 두개의 더듬이... "개, 개미?" 그 모습을 찬찬히 확인한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내 옆에 가까이 붙어 있던 듀비가 설명해줬다. "엔트 자이언트라고 하는 놈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껍질이 딱딱해서 검기를 주입하지 않으면 베기도 힘든데다가 입으로 산성이 강한 독을 내뿜습니다. 거기다 제일 나쁜건 단체로 행동 한다는 거죠." 듀비가 아무리 말해도 개미는 개미였다. 물론, 개미가 입으로 산성이 강한 독을 뿜어내지도 않을 뿐더러, 한 놈 한놈이 내 다리 두개를 합친 것같은 굵기은데다가 내 키를 훌쩍 넘어버릴 정도의 긴 다리를 가지지도 않았을테지만 말이다. 거기다가 나는 개미의 입이 날카로운 이빨이 숭숭 솟아난 집게처럼 생겼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그러한 놈들이 사사삭 사사삭 소리를 내면서 다가와 일정 거리에 다가오자 멈춰섰는데, 뒤에서는 계속 사사삭 사사삭 소리를 내며 다른 놈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도대체 얼마나 많은 놈들이 모인 거야?" 우리 일행을 빼곡히 둘러싼 채로 그들은 뭔가를 기다리는 양 가만히 노려보기만 하고 있었다. 앞으로 나서서 드러난 놈들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정글 수풀에 가려 드러나지 않은 놈들 까지 합하면 얼마나 되는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엔트 자이언트는 마법을 할 줄 모르는데... 그럼 어떻게 알람 마법에 걸리지 않고 여기까지 다가온 걸까요?" 듀비의 낮은 음성에 첼릿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마법을... 사용할줄 아는 다른 동지가 있다는 뜻입니까?" "아마도..." "그 아마도가 정답이겠지." 듀비의 낮은 음성의 뒤를 이어 리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행들은 엔트 자이언트인지 거대한 개미인지 하는 놈들에 둘러쌓여 공격을 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대치하고 있기만 했다. "왜 공격을 안 할까요? 그냥 밤새도록 우리를 지켜보기위해 모인 건 아닐텐데..." 첼릿이 긴장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그 즉시 듀비가 설명해줬다. "우두머리의 명령을 기다리는 겁니다. 엔트 자이언트는 우두머리의 명을 철저하게 따르거든요." "그럼, 그 우두머리를 해결한다면 이 놈들이 흩어질까요?" 첼릿의 말에 듀비가 절망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모르겠습니다. 우두머리를 처치해본 적이 없어서요. 우두머리라고 해도 다른 엔트 자이언트와 똑같은데다가 저들 무리속에 섞여있기 때문에 어느 누가 우두머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젠장, 그럼 어떻게 해야하는 거야?" 듀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근처의 용병 하나가 퉁명스럽게 내뱉자 트래비스 용병대 대장이 침착하게 말했다. "덤비는 놈들은 모조리 죽이기만 하면 되는 거다." "허, 그 참 간단해서 좋수, 대장." 누군가가 허탈하게 말했다. 주위의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나는 4계열의 상급 정령들을 사람들 눈에 뜨이지는 않게 모조리 불러놓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최상급 정령들을 불러내고 싶었지만, 저렇게 많은 녀석들을 다 상대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내 기운을 마구마구 소비하는 이들을 불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을 불렀다가 내 기운이 다빠져서 일행들에게 짐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이건 내가 최상급 정령들이 이들을 얼마나 빠른 시간 안에 처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식이 너무나 전무하기때문에 내린 판단이었다. 주위를 떠도는 긴장감에 나도 모르게 입술만 잘근 잘근 씹어대고 있는데, 갑자기 개미들 사이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이~~ 어디서 들려왔는지 파학하려고 하기도 전에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우리를 가만히 보기만 하고 있던 맨 앞줄의 개미들의 고개가 갑자기 들려지더니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집게같은 입이 벌어졌다. "독을 내뿜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급한 듀비의 말이 끝나자마자 벌어진 개미들의 입에서는 거무죽죽한 녹색의 걸죽해 보이는 액체들이 거의 동시에 뿜어지기 시작했다. "노에스!!" 나의 다급한 외침에 우리 주위를 둘러싼 땅이 진동을 하더니 빠른 속도로 솟구쳐 올라왔다. 노에스가 자신의 거대한 손을 밖으로 꺼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손이 벨레니국 일행들을 완전히 감싸자 후두둑~ 하는 노에스의 손 위로 이물질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하, 먼저 독으로 공격한 뒤 그 다음 육탄 공격을 강행하시겠다? 영리한 놈들이군." 잠시 후 후두둑 거리는 소리가 그치자 나는 조심스레 노아스의 손을 땅으로 돌려보냈다. 그러자마자 내 코를 찌르는 역한 산에 의해 부식된 냄새로 인하여 인상을 찡그리며 나는 이 녀석들이 독을 그냥 소비해버린게 아니구나... 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다른 진영을 보니 그 곳도 한 능력 하는 인물들이 있었던 터라 이러한 단순한 공격을 가뿐하게 막아내기는 했는데, 그 산성 강한 독이 땅으로 떨어져 식물들이나 땅을 부식시키는 것 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독들을 얼마나 뿌려댔는지 냄새로 인해 머리가 띵할 지경인데다가, 부식된 연기가 마치 안개처럼 우리 몸을 감싸고 있었다. "윽...." 아마 저 놈들은 독을 우리에게 맞추려는 게 아니라 이러한 효과를 불러 일으키기 위해 독을 쏘아댄게 아닐까 생각하며 나는 얼른 실라이론을 불렀다. 거대한 거인이 나타나 그 큰 가슴이 불룩해질 정도로 깊이 숨을 들이쉬고 푸우~ 하고 내뱉자 우리를 둘러싼 산성 연기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이미 사람들이 한 두 모금은 연기를 마신 상태였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인상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리고,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지자마자 그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개미 군단이 일제히 돌격을 시작했다. "머리를 노려야 합니다! 왠만한 건 저 놈들의 갑주를 뚫지도 못하니 검기로 머리를 노리세요!" 그렇게 먼저 듀비가 주위 사람들에게 소리치자 그 뒤를 리건의 목소리가 따랐다. "정령사들은 저 놈들의 발을 묶어. 기사들 앞으로! 검기를 날릴 줄 아는 용병들도 앞으로 나서라. 검기를 날리지 못하는 놈들은 뒤로 물러나!" 우리 팀에서 정령사는 나와 쥬디 불러드무어경 딱 둘 뿐이었지만, 내 능력을 아는 리건이기에 발을 묶는 건 우리 둘에게 위임한 듯 했다. 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나는 노에스를 돌려보내고 20명의 노임 (땅의 중급 정령)들을 불러냈다. 물론 개미들의 숫자에 비하면 한참이나 적은 숫자이지만, 그들의 덩치가 크기 때문에 한번에 우리에게 달려들 수 있는 숫자는 기껏해야 10마리 정도라 방어하는 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진흙 덩어리처럼 일정한 모양이 없는 그들은 내 명령에 따라 끈적한 진흙 줄기를 땅으로 부터 뻗어 올려 가까이 다가온 개미들 다리부터 붙들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온 개미들의 굵은 다리에는 마치 잔털처럼 날카로운 가시들이 촘촘히 나 있었는데 크기가 내 팔뚝만해서 거기에 잘못 스치기라도 했다가는 잔 상처가 아니라 살이 띁기는 커다란 상처가 날듯 보였다. 개미들은 우선 입을 열어 작게 산성 독을 토해내고, 그걸 피하는 사람들을 그 굵은 다리로 후려치는 식으로 공격을 했기 때문에 개미 하나 붙들려면 다리 여섯개를 다 붙들어야만 했다. 거기다가 힘도 엄청나게 세서 노임 한명이 개미 한마리를 겨우 붙들 정도였다. 내가 노임을 불러내자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노임과 계약을 한 쥬디 블러드무어경도 노임들을 불러냈다. 물론, 세명밖에 안되었지만... 그렇게 그녀와 내가 개미들을 붙들고 있으면 기사들이 달려들어 개미들이 쏘아내는 독을 피하여 목을 쳐내고, 뒤에서는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보조하는 식으로 우리는 말 그대로 새카맣게 몰려드는 놈들을 상대해 나가기 시작했다. 검기는 겨우 검에 담을 수 있으나 쏳아내지 못하는 용병들이 마법사들과 내 주위로 몰려들었고 첼릿과 듀비, 그리고 램버트는 어쩔 수 없이 나를 그들에게 맡기고 달려 나갔다. 그만큼 달려드는 개미 숫자가 많아 검기를 날릴 능력자들이 한명이라도 절실한 판이었던 것이다. 한번에 우리에게 달려들 개미의 숫자가 10여마리라고 해도, 리건이나 첼릿 듀비정도의 실력자가 아닌 이상은 두세명이 달려들어 한마리를 상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겨우 균형을 잡으며 막아가고 있는데, 이노무 개미들은 얼마나 끈질긴지 목이 뎅강 떨어져 가지고 죽었다고 안심하고 발을 잡고 있던 노임을 물러나게 하면 그 즉시 발광하는 것 처럼 다리를 사방으로 휘둘러 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런걸 모르고 있다가 내가 붙들고 있던 개미의 목을 한 기사가 떨어뜨리자마자 노임을 다른 개미에게 보내버려 그 기사가 자신에게 닥치는 거대한 개미의 다리에 맞고 뒤로 날려가는 일이 발생했다.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한참이나 뒤로 달려가 땅에 처박힌 그는 속이 상했는지 피를 울컥 토하기 까지 하는 거였다. 거기다가 금방 일어나지 못하고 버둥대다가 다른 개미의 커다란 발에 밟혀 짜부될 뻔 했다. 다행이 그 직전에 내가 보낸 실프가 그를 얼른 안쪽으로 끌어다 놓긴 했지만... 그래서 그 뒤로 쥬디 불러드무어경과 나는 개미의 목이 떨어져도 그 녀석이 발광을 완전히 멈출 때까지는 여전히 발을 붙들고 있어야 했다. 그러자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개미들을 억류할 노임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노임은 목이 떨어진 개미를 최소한 10분 정도는 붙들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 다음 새로 들이 닥치는 개미를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처음에는 어찌어찌 감당했는데, 종내에는 내가 불러낸 노임들 대부분이 목이 떨어진 개미들이 버둥거리는 걸 붙들고 있느라 새로 다가오는 개미들을 붙잡지 못하는 걸 본 나는 엔다이론을 같이 움직였다. 개미 목이 떨어지면 엔다이론이 즉시 그 큰 손을 들어 개미를 잡아 정글 뒷편으로 던지게 하는 거였다. 그러니까 노임은 새 개미를 찾아 갈 수 있게 되었고, 엔다이론이 던진 목 떨어진 개미가 뒤쪽에 있는 자신의 패거리들 사이에 떨어져 인정사정 없이 다리를 휘둘러 주위에 운 없는 개미들에게 피해를 주는 효과까지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우리쪽 사람들에게 피해가 없는 건 아니었다. 6개의 다리가 붙들려 있다고 해도 개미에게는 여전히 독과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집게 같은 입이 있는데다가, 사람들이 딱 한방에 개미의 목을 떨어뜨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신 없는 상횡인데다가 주위에 워낙 개미들이 많았기에 자신이 노린 개미의 공격이 아닌, 그 옆에 다른 사람이 노리는 개미의 공격을 재수없이 맞아야 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다. 거기에 재수 없으면 한방 맞고 골로 가는 일도 생기고 말았다. 게다가 문제는 그것 뿐이 아니었다. ====================================================== 제 36화 죄송해요. (3) 그런데 문제는 그것 뿐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 나름대로는 우리가 잘 버텨가고는 있다고 - 엄청불리해서 승산이 안 보이더라도, 현재는 말이다. - 생각하고 있었는데, 대충 20여마리가 넘는 거대 개미들을 해치웠을 때였다. 갑자기 개미떼들 쪽에서 예고 없는 빛줄기가 날아와 일행들에로 떨어졌다. 콰아앙~!! 보통 빛줄기가 아닌 바로 마법이었기에, 다행이 사람들에게 맞지는 않았지만 일행들을 경악하게 만들이게는 충분했다. "마, 마법?" "어, 어째서..." "엔트 자이언트를 돕는 다른 동조자가 드디어 행동을 개시한 모양이군요." 검기를 날리지 못하는 용병들의 보호를 받느라 나와 같이 있던 클리우드 남작이 침중한 음성으로 내뱉으며 다시 한번 매직 미사일을 날렸다. 그러자 마치 그에 대한 답례(?) 인지 개미떼측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여러개의 매직 미사일이 날아오는 것이었다. "이런!" 그 모습에 나는 황급히 슈리엘을 불러내어 매직 미사일을 막아내다. 콰과과광~!! 슈리엘이 쳐낸 바람의 장막에 부딪혀 폭발하는 소리가 주변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생긴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런데 거친 바람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또 다른 매직 미사일이 달려드는 것이었다. 1클래스의 공격마법이기는 하지만 시전하는 마법사의 능력에 따라 3클래스의 공격 마법 못지 않은 효과를 낼 수 있고,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피해는 확실하게 낼 수 있었기에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엔더슨 스니볼리가 실드 마법을 펼쳐서 막아냈다. 그렇게 매직 미사일들이 날아들기 시작하자 마법사들은 더 이상 앞으로 나서서 거대 개미들을 상대하는 무사들을 거들어주는 대신, 언제 어디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마법에 대비하는데에 모든 관심을 쏟아버렸다. 그러자 힘들어지는 건 그나마 마법사와 정령사의 도움을 받아 겨우 겨우 거대 개미들을 상대하는 무사들이었다. 능력 있는 이들이 총 출동해서 교대할 인원도 없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호흡이 가빠짐에도 불구하고 계속 움직여야 하는 이들에게 마법사의 지원까지 중단되어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매직 미사일을 무시하고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냥 그대로 버텨야 했다. 문제는, 상대해야 할 개미가 끝도 없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였지만... 처음에는 쉬지 않고 날아오던 마법들이 이제는 마치 약을 올리려는 듯 뜸들이며 한, 두개, 그러나 일정하지 않은 방향과 타이밍을 가지고 날아와 마법사들의 이를 갈게 만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실드 마법이 높은 계열의 마법이 아니라서 공격이 뜸해지자 아예 개미 군단 쪽에서 날아오는 마법을 막는 건 앤더슨 스니볼리가 전담하고 클라우드 남작은 다시 무사들을 돕는 쪽으로 나설 수 있다는 거였지만 말이다. "매직 미사일!!" 클라우드 남작의 입에서 시동어가 터져 나오자 다섯개의 매직 미사일이 한꺼번에 만들어져 사방으로 뻗어져 나갔다. 정글에서 일어난 싸움이라 마법에는 상당한 제약을 많이 받고 있었다. 우선은 불과 관련된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이 곳이 무척 습한 곳이라 잘 붙지는 않을지 몰라도, 한번 붙어서 크게 번지기라도 하면 적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도 엄청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가 전격 마법은 더더욱 쓰지 못하고 있었다. 개미들을 향해서 쓴다고 하더라도, 쇠를 들고 달려드는 우리편 사람들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단위 마법도 어려웠다. 가까이서 우리에게 달려드는 개미들이 아닌 그 뒤쪽에 있는 개미들을 처리해봤자, 더 뒤쪽에서 대기하는 개미들을 앞으로 나아오게 할 뿐이라 별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기사나 용병들과 엉켜있는 개미들에게 대단위 마법을 사용할수는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이래저래 우리편에게 피해를 극소화 시키는 간단한 마법들만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뭐, 덕분에 클라우드 남작의 마력이 금방 떨어지지 않아서 좋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런것도 잠시... 시간이 계속 흘러갈 수록 기사들과 용병들의 팔 다리가 눈에 띄게 느려지자 클라우드 남작이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백작님." "예?" "보아하니 지금 백작님과 비상 수단을 써야할 듯 합니다." "예?" 그의 뜬금없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 거리자 클라우드 남작이 말을 이었다. "이대로 계속 시간만 끌다가는 우리가 질게 뻔합니다."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내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시하자 그가 굳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 마지막 승부를 지금 내야 할 듯 합니다. 저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대단위 마법을 펼치겠습니다. 그러니 그 뒤를 백작님께서 이어주셨으면 합니다. 저 놈들 지금 보아하니 엄청 영리한 듯 합니다. 그러니 큰거 한방 먹어서 전력이 반 이상 팍 줄어들면 뒤로 물러나겠지요. 설마하니 우리를 상대하는데 전심전력을 다 하겠습니까? 아마도 먹이라고 생각하고 달려든 걸테니 우리 다음에 다른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려고 할 겁니다. 아니, 그러길 빌어야지요." 그가 내가 자신의 말을 알아 들었다는 걸 확인하려는 듯 잠시 말을 끊고 내 눈치를 힐끗 살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듣기로 백작님은 최상급 정령사라고 하신 데다가 지금 보니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첫타를 치고 백작님이 그 뒤를 치신다면 그 효과가 정말 클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백작님?" 제법 그럴듯한 말이었기에 나는 더 생각해볼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무척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아무래도 내가 힘을 다 짜내더라도 최상급 정령들을 불러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리고 부탁이 있습니다. 백작님께서는 물의 정령과도 계약을 맺으셨지요?" 내가 쉽게 승낙하자 클라우드 남작이 다시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만...."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몰라 의아한 표정으로 말 끝을 흐리자 남작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제가 사용하려는 마법은 화염 계열입니다. 정글에서 화염 마법을 쓴다는 것은 정말 말이 안되지만 어쩔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니, 가능하시다면 백작님께서 물의 정령을 사용하셔서 뒷타를 해주셨으면....해서요." 그는 자신이 그 마법을 사용하고 혹시나 이 곳에 화재가 날까 염려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불러내려는 정령이 엘라스트라였기에 나는 두말 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먼저 시작하십시오." "부탁 드리겠습니다." 나에게 간단하가 목례를 해보인 남작은 그 즉시 기사들과 용병들을 돕던 일을 접고 주문에 들어 갔다. 보통 마법이 크면 클 수록 그 준비 시간도 크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남작이 시간을 끌면 끌수록 그 마법은 상당히 큰 마법이라는 소리였다. 내 짐작컨데 남작이 6클래스의 유저라고 했으니 6클래스이거나 5클래스의 마법일 거였다. '흠, 그러고보니 나도 마법을 이론적으로만 꽤 익혀놨었는데 말야... 실천해 볼 생각을 한번도 못했네. 이 기회에...' 한번 써볼까... 생각했던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서라. 낮은 클래스 마법으로도 엄청난 사고를 일으키는 내가 무슨... 3, 4클래스 마법을 사용 했다가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 속으로 그렇게 한숨을 내쉬면서 나는 치열한 격전장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엘라스트라를 불러내 대기 시켜놨다. 그리고 잠시후... 약간의 시간을 들여 마법을 준비한 남작이 드디어 두 손을 번쩍 들며 우렁차게 외쳤다. "익스플로전!!" 그것은 6클래스의 마법으로 파이어볼이 업그레이드 된 것과 비슷했다. 마법사의 능력에 따라 크기를 조절할 수 있는 불의 구를 적에게 던지는 것인데, 파이어 볼이 보통 불꽃의 색처럼 붉은 색이라면, 익스플로전에서 생긴 불의 구 색은 파란 색이거나 하얀 색이었다. 그러니까, 엄청난 고온의 불이란 뜻이었다. 지금 남작이 만든 불의 구는 직경이 4, 5m 정도는 될 것 처럼 엄청난 크기였고, 색도 옅은 파란 색이었다. 아마 남작이 남아있는 마력을 모두 쥐어짜낸 것이 틀림 없었다. 고오오오~~ 소리로도 주변 사람들을 압도하며 남작의 손짓에 의해 날아간 불의 구는 정글 깊숙히 들어가서 터졌다. 콰아아앙~~!! 이번 격전에서 일어난 폭발음 중 가장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고, 그의 여파로 생기는 강력한 폭풍과 열기가 우리가 서 있는 곳 까지 날아왔다. 꽤 먼 거리에서 폭발했는데도 내가 있는 곳 까지 후끈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얼만큼 어마어마한 고온이었는지 쉽게 짐작이 가능했다. 그리고 폭발의 여파로 생긴, 마치 원자 폭탄이라도 터진 듯 버섯 모양의 커다란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며, 저 속에 있을 개미 군단들에게 묵념을 보냈다. '이놈들아, 이제 제발 물러가라. 좀 가라 가!' 남작은 그 마법을 사용한 여파로 가쁜 숨을 내쉬며 비틀거렸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앤더슨이 냉큼 달려들어 그르 부축했다. "헉헉, 백작님...." 헥헥 거리는 와중에도 날 부르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아, 지금 공격하라구요?" "아, 아니요. 조금 두고 보시다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펴보는데 정말, 정말 운이 없게도 맨 처음 우리를 공격할때 보다 조금 더 큰 소리가 남작이 공격한 쪽의 바로 반대쪽에서 들렸다. 키에에에~~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운이 나쁘고, 개미들에게는 운이 좋게도 그들의 리더는 공격 당한 곳에서 가장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소리가 그렇게 기분 나쁘게 들리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개미들이 우리를 내버려두고는 우르르 그 소리가 들린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히유... 물러나는 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그 모습에 앤더슨이 무척 안심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제 36화 죄송해요. (4) 그 모습에 앤더슨이 무척 안심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아직, 완전하게 안심하기는 이릅니다." 트래비스 용병단의 대장 트래비스가 개미 군단이 사라진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리자 몬트리올경 또한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빨리 부상자들을 정리해서 이 곳을 벗어나야 할것이요." "그리고 또한, 그 녀석들이 완전히 여길 떠났다는 것도 확인해야겠지." 마지막으로 리건이 끼어들어 입을 열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해인, 그건 네가 확인하고 와라." "엥?" 갑작스런 리건의 명에 내가 눈만 휘둥그레 뜨는데 분노한 첼릿이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해인님을 혼자 보내시다니요! 절대 안됍니다." 그것 말고도 첼릿은 더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리건의 살벌한 눈초리에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해인은 네가 감싸고 돌아야 하는 애송이가 아니라 내 밑에 있는 왕실 기사단의 어엿한 일원이다. 이 정도 일은 당연히 해야지." 한자 한자 딱딱 끊어 하는 말이 하등 틀린 점이 없었기에 첼릿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할 말을 찾지 못해 분한 표정으로 이만 갈아댔다. 그런 첼릿 대신 듀비가 제안했다.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되겠습니다. 지금은 차라리 정령술사인 해인이 혼자 움직이는게 더 빠를 겁니다." 그렇게 듀비의 제안도 단칼에 거절한 리건이 나를 돌아보았다. "혹여 네가 늦게 돌아온다면 우리가 안전한 장소로 몸을 피해 있을지도 모르니 여기 돌아왔을때 우리가 없더라도 당황하지말고 알아서 찾아와라. 네 능력이면 찾을 수 있겠지?" "아, 뭐..." 허공에 떠있는 정령들에게 물어본다면 찾기 어렵지는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리건이 재촉했다. "좋아. 그럼 얼른 갔다와." 그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엔다이론을 불러내어 올라타고는 개미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클라우드 남작이 그 거대한 불꽃의 구를 던진게 너무 큰 효과를 봐서 -내가 엘라스트라를 움직이지도 않아도 되었기에 - 클라우드 남작 덕분에 생긴 불은 꺼야 했지만... - 정령의 기운이 절반쯤은 남아 있었다. 긴장한 채 계속 사방을 지켜보며 정령들을 불러내고 지휘를 하기는 했지만, 무사들처럼 이리뛰고 저리뛰고 한 것도 아니었기에 피곤함도 별로 못 느꼈는데, 엔다이론의 등에 올라타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노곤함이 몰려들었다. [아아, 매일매일이 이런거라면 곤란한데...] 엔다이론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어 엔다이론의 몸에서 올라오는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낮게 투덜거렸다. 내가 그러던 말던 엔다이론은 착실하게 거대 개미 군단들이 지나간 흔적을 따라 조용하게 날아가고 있었다. 작지 않은 덩치들이 떼를 지어 지나갔기에 그들의 흔적은 너무나 뚜렷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들이 공격을 포기하고 떠난 지 좀 시간이 지난 뒤에 내가 그들 뒤를 쫓아서 그런지 멈춰 있는 개미 군단을 발견한 것은 엔다이론이 빠른 속도로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무리의 맨 가에 있는 개미를 발견하고는 엔다이론이 따로 내 지시를 듣지 않아도 자신 스스로가 알아서 조용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는 개미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정글의 굵고 울창한 나무 가지들 틈사이로 스며들어가 조심스럽게 중앙쪽으로 접근했다. '으음.... 어떻게 찾기는 했는데, 내가 이놈들이 다시 돌아가서 공격을 할지, 여기서 더 멀어질지는 어떻게 알아내지? 내가 이놈들 말을 알아듣는것도 아닌데 말야.' 속으로 그렇게 걱정하면서도 계속 중앙쪽으로 다가가는데,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기가막히다고 해야할지, 중앙쪽으로 다가간 내 눈에 시커먼 개미 군단 말고도 다른 존재들이 눈에 띄였다. "촌촌, 촌촌~" 개미군단 중앙 부분에는 성인 다섯명은 올라가서 서 있을 정도로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다른 개미들과 똑같이 생긴 어떤 한 개미가 올라가 앉아 있었고, 그 주위에는 괴상하게 생긴 생물체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마치 동화속에 나오는 사악한 난장이처럼, 내 허리에도 안 미칠 작은 키에 볼록 튀어나온 배를 제외하고는 얼굴도, 발도, 손도 모두 신체에 비해 가늘고 길쭉한 모습을 한 난장이들이 마치 코끼리처럼 커다란 귀를 하고 있었는데, 황당하게도 그 귀를 펄럭여 허공에 날아다니고 있는 거였다. 하얀 칼라를 가진 초록색 재킷을 입고 검은색의 허리를 두르고 갈색 바지에 붉은색 마녀 신발을 신은데다가, 코는 가늘고 긴 매부리코에 입술 바깥으로 앞 윗니 두개가 튀어나와 생쥐를 연상 시키고 있었다. 웃긴건 거기에다가 초록색 고깔모자를 쓰고 있는 거였다. 그러나 나는 대충 20여명에 가까운 그 괴상한 난쟁이들에게 시선을 빼앗기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기가막히게도 그 난장이들이 날아다니고 있는 바위 곁에는 아주 낯익은 다른 존재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나콘다잖아? 아니 저 뱀 여자 정령들이 여기는 왜....' 속으로 황당한 침음성을 흘리고 있을때 바위 위에 올라가 있는 한 개미 - 아마 그 거대 개미가 개미 군단의 리더였던 모양이다 - 가 아나콘다 정령들중 가장 큰 녀석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웃긴건 그 개미는 자기네 말로 이야기를 했고, 정령은 정령의 언어로 말을 했는데 그게 서로 잘 통한다는 거였다. "키이이이~~ 키이이..." 대장 개미가 뭐라고 뭐라고 - 아마도 항의인 듯 소리가 날카로웠다. - 하자 아나콘다 정령이 예쁜 얼굴에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러길래 내가 말했잖아. 그놈들을 얕보면 안된다고.] "키아아아~~ 키아, 키아~~" [뭐? 웃겨 정말... 내가 너희 집안을 망하게 해서 얻는게 뭔데? 우리 귀여운 아이들의 먹이로 줄 수도 없다고.] "키아아아~~ 캬아아아~~" [내가 말했잖아. 그 이상한 녀석이 있는 한 우리가 직접 도와줄 수는 없다고. 대신 내가 촌촌들에게 너희를 도와주라고 부탁까지 했잖아. 촌촌들의 도움까지 받은 주제에 성공도 못하고 줄행랑을 쳐온 네가 어리석은 거지.] 아나콘다 정령의 비웃음에 대장 개미가 화가 난듯 했다. "캬아아아~~ 캬아아아~~ 캬르르르~~" 하지만 아나콘다 정령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홋, 뭐야? 지금 나하고 해보자는 거야? 미리 말해두겠지만, 내가 비록 자식들을 많이 잃기는 했어도 네까짓 놈쯤은 아직 내 상대도 안돼. 더구나 촌촌은 내 편이라고.] 그녀의 말이 맞다는 듯 주위에 있던 난장이들이 일제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란스럽게 떠들어댔다. "촌촌, 촌촌" "촌촌, 촌촌" '저놈들은 촌촌이란 말 밖에 못하나?' 내가 난장이들의 외침에 기가막혀 하는 사이 대장 개미가 뭐라고 또 아나콘다 정령에게 항의를 하자 아나콘다 정령이 정말 우습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깔깔깔깔~~ 뭐야? 웃겨 정말.... 무슨 원한이 있어서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냐니... 내가 그들의 정보를 줬을때 좋아라 달려든건 너희들이었잖아. 이제와서 왜이러셔? 나는 그들이 강하다고 충분히 경고도 해줬었다고.] 그녀의 말에 나는 온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뭐, 뭐야... 그러니까... 저 개미 군단이 온게 저 뱀 녀석의 충동질이었단 말이야?' 어쩐지, 안내인이 며칠동안은 안전하다고 큰소리를 빵빵 쳤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그날 밤부터 개미들이 들이닥쳤다 했더니만 그 이유가 있었다. 나는 우리가 운이 지지리도 없나보다... 라고만 여겼건만... '저, 저 녀석들이... 내가 기껏 목숨을 살려줘서 고이 보내줬건만....' 배은망덕한 아나콘다 정령을 노려보며 이를 빠드득 갈던 나는 곧 이어 떠오른 생각에 다시한번 온 몸이 굳어져버렸다. '자, 잠깐만... 그렇다는건... 내가 저들을 그냥 놔줬기 때문에 일행이 개미 군단에게 공격을 받았다는 소리야?' 아무래도 그게 맞는 것 같았다. 그게 맞다는 걸 납득하는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그 생각에 나는 그 뒤에 대장 개미와 아나콘다 정령이 뭐라 더 대화를 하는 것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다행이 대장 개미는 더 이상 공격할 의사가 없는지 아나콘다 정령에게 버럭버럭 화만 내고는 개미들을 이끌고 깊은 정글로 더 들어가버렸다. 그 개미 군단이 정글 속으로 사라지는 걸 깔깔 거리면서 지켜보고 있던 아나콘다 정령들은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자신들의 주위를 나는 난장이들에게 손짓했다. [자, 너희들도 수고했어. 약속한 꿀은 내일 찾으러 와. 잔뜩 준비해 놓을테니까.] 무척이나 기쁜 듯 간드러지는 듯한 음성으로 속삭이자 주위에 날아다니던 난장이들이 기쁜 듯 일제히 '촌촌' 거리더니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가버렸다. [깔깔깔~ 그 이상한 꼬맹이의 표정을 봤어야 했는데... 쿡쿡쿡, 우리가 저 녀석들을 보낸 걸 알면 또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동안 계속 대장 개미와 이야기를 하던 아나콘다 정령이 날카롭게 웃으며 이야기하자 옆에 있던 다른 정령이 말을 받았다. [내 입으로 직접 이야기 해주고 싶을 정도야. 흥, 우리가 그냥 곱게 물러날 줄 알았을걸?] 그러자 다른 정령들과는 달리 침착한 표정의 정령이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그건 알리지 않는게 좋을 거야. 우리가 그 꼬마를 대했을때를 잊었어? 그 꼬마의 정체가 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 꼬마한테 꼼짝도 못하잖아.] [그건 그렇지... 그렇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직접 우리 손으로 복수를 해줄 수 있었을텐데... 이렇게 뒷꽁무니에서 다른 녀석들을 충동질하지 않고 말이야.] 처음 정령이 세번째 정령의 말에 이를 빠드득 갈며 응수하는 것 까지 듣자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랬구나... 내가 너희들을 살려준게 잘못이었구나... 그때 그냥 너희들을 죽였어야 했던 거냐?] 엔다이론이 내 기척을 숨겨주고 있었던지, 전혀 내가 있다는 것을 짐작도 못한 그 뱀들은 내가 나타나자 경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녀석들을 노려보자, 대장 개미와 이야기를 나누던 아나콘다 정령이 한 맺힌 표정으로 날 보며 웃었다. [오호호호호~~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지? 그래, 넌 그때 우리를 죽였어야 했어. 훗, 지금이라도 우릴 죽일거냐? 한가지 이야기 하자면 네가 우리를 죽이지 않는 한 우리는 끝까지 아이들의 복수를 할 거야.] 처절한 표정으로, 마지막에는 비명을 내지르는 듯한 정령의 모습에 나는 이를 갈았다. [네놈들이 잘못한 건 모르는 거냐? 먼저 공격한 건 네놈들이었잖아!! 너희들이라도 살려준 걸 고맙게 여겼어야지!] [우리가 왜? 우리가 왜 고마워해야 하지? 너도 똑같아. 그놈들이랑 같이 죽여버릴 거야!!] 두번째 정령이 악을 쓰듯 외쳐대자 첫번째 정령이 사악하게 생글 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호호호~~ 보아하니 충격을 많이 받은 모양인데... 그 인간들이 죽어서 슬픈가보지? 꼬맹아, 잘 기억해두도록 해. 그 인간들은 바로 네가 죽인 꼴이라는 걸. 네가 우리를 살려두었기 때문에 그들이 죽은....] 하지만, 그 첫번째 정령은 채 말을 끝내지도 못했다. 그러기 전에 아나콘다의 거대한 목에 뎅강 날아가서 바닥에 떨어졌으니까 말이다. ====================================================== 제 36화 죄송해요. (5) 하지만, 그 첫번째 정령은 채 말을 끝내지도 못했다. 그러기 전에 아나콘다의 거대한 목에 뎅강 날아가서 바닥에 떨어졌으니까 말이다. [멍청한 놈. 지금 뭐하는 거냐?] 매서운 일갈에 나는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는 목을 겨우 돌려 그 일갈을 한 주인공을 바라 보았다. [아버지...] 그 한 단어가 입에서 나오는데 꽤나 힘이 들었다.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고 턱이 평소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가 그 한 단어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눈에서 눈물이 차올라 아버지의 모습이 뿌옇게 보였다. 내 앞에서 발악을 하던 아나콘다들의 목을 싹둑 자른것은 아버지가 일으킨 날카로운 물줄기였다. 덕분에 아나콘다의 커다란 목이 뎅강 떨어져 아나콘다의 몸뚱아리가 붉은 피를 뿜어내며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데, 내 머릿속이 지금 엉망이라서 그런지 그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양 현실감이 없게 느껴졌다. 그 녀석들이 죽건말건 나에게는 다른 문제가 들러붙어 다른데 신경쓰지 못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어떻게해요...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저런 하찮은 것들의 말을 신경쓰는 네 녀석이 한심하다. 뭘 그런걸 가지고 멍청하게 구는 거냐?] 아버지가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거기에서 더 나간다면 혀까지 쯧쯧 찰 태세였지만, 아버지의 그런 태도로도 날 안정시키지는 못했다. [어떻게 해요.... 어떻게....] 어쩔 줄 몰라하며 같은 말만 반복하자 아버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뭘 어떻게 하던 여기서 그러고 있는 것보다 백배는 나을 거 같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하, 하지만...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내 멍청한 태도에 아버지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꽥 지르자 그때까지 뒤에서 지켜보던, 솔직히 정신 없는 나에게는 보이지도 않던 이프리트 아저씨가 나섰다. [자자, 그만하고... 해인아, 솔직하게 나도 네가 왜 혼란스러운지는 이해를 못하겠다만, 이렇게 여기서 서 있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다는 건 알겠구나. 뭐가 어찌되었건 일단은 돌아가는게 좋겠다. 널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있잖니.] [아...] 부드러운 이프리트의 말에 그제야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떠올랐지만, 그걸 알자마자 나는 다시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아... 저기... 어떻게 돌아가요...] 그러자 화가 있는대로 나있던 아버지가 다시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돌아가긴 뭘 어떻게 돌아가? 내가 던져 주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떤 낯으로...] [어떤 낯을 할게 뭐 있어? 그냥 가면 가는거지...] 답답하다는 듯, 언제 왔는지 모를 실피드까지 끼어들어 한마디 했다. [아... 하지만...] 그래도 내가 발반 동동 구르며 움직일 생각을 안하자 열이 받을대로 받은 아버지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 목덜미를 잡고는 휙 하니 허공으로 던져버렸다. [우에에에~~!!] 놀라 손발을 휘저으며 비명을 지르는데,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는 듯 엔다이론이 허공에서 허우적 대는 날 냉큼 받아 등에 태우고는 잽싸게 달려가는 거였다. [멍청한 녀석!!] 아버지의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여전히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우에... 나보고 어쩌라구... 어떻게 거기 가서 뭘 어떻게 하라구....' 내가 속으로 그런 걱정을 하는 와중에도 아버지의 의지를 받은 엔다이론은 착실하게 날아서 개미 군단과 우리 일행들이 한바탕 난리를 겪은 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내가 너무 늦은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행동이 잽쌌던 것인지 그 곳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거였지만... "욱..." 때로는 밤에도 너무나 잘 볼 수 있다는 것이 화근이 될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아까 개미 군단들과 대치할때는 물론, 피튀는 상황이 바로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짧은 기간 몇번 몬스터들과 조우해서 싸워본 경험도 있는데다가 그 시간에는 다가오는 개미들을 상대하느라고 다른데 신경쓸 여력이 조금도 없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날 위협하여 신경을 분산시키게 만드는 존재가 아무도 없는 이 상황에서, 새벽으로 가는 환한 달빛을 받아 내 앞에 펼쳐진 장면은 끔찍했다. 빨리 이동하느라고 동료들의 시신도 제대로 수습 못하고 움직인 모양이었다. 보자마자 재빨리 눈을 감고 엔다이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지만, 한번 본 장면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푸른 빛을 받아 더욱 더 처참하고 괴기스러운 저 모습이 나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게 떠오르자 나는 나도 모르게 아랫 입술을 악물었다. "젠장할..." 차마 사람들을 마주할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다시 움직였다. 리건이 날 보내기 전에 한 말대로 사람들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들도 큰 소동을 한바탕 치른 후였기에 밤새 내내 이동하기는 어려운 상태라 그 곳에서 약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자리잡고 있었다. "해인님." "해인님."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낯익은 얼굴들을 찾아 그들 머리위로 내려오는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날 발견한 첼릿이 일어나 날 맞았다. "무사 하셨군요." "늦으셔서 걱정 했습니다." 안심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는 그들에게 뭐라 말은 못하고 겨우 고개만 끄덕이는데 리건과 몬트리올경, 그리고 트레비스가 다가왔다. "가보니 어떻던가요? 그 녀석들이 멀리 가던가요?" 몬트리올경의 물음에 나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큼, 그러니까... 정글 깊숙히로 사라지더군요. 다시는 안 올 것처럼 말이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는 만족을 못하는 듯 싶어서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목이 잠겨서 헛기침을 한번 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말을 못할 줄 알았건만 한번 나오자 자연스레 끝까지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까? 그것 참 다행이군요. 그럼... 이제 그놈들은 안 온다는 건가..." 몬트리올경이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트레비스가 나섰다. "그, 마법을 사용하는 놈들은 누구인지 혹시 알아내셨습니까? 앤트 자이언트들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하던데..." "아.... 저기... 난장이 같이 생겼던데... 입으로는 촌촌 거리면서 코끼리처럼 커다란 귀를 펄럭여 날아다니더군요." "촌촌입니다. 장난을 많이 치기는 하지만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먹을 걸 던져 주면 얌전하게 물러나는 녀석들인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보이지도 않았던 안내인이 이때다 생각했는지 끼어들어서 설명을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그 촌촌이라는 녀석들이 왜 우리를 공격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 이었다. "흠, 먹을거에 약하다면 앤트 자이언트가 먹을걸 주겠다고 꼬시기라도 했나보지. 어쨌든, 그 촌촌인지 천천인지 하는 놈들도 물러난게 확실합니까?" "아, 예." 시큰둥한 추리를 하면서도 물러난것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확인 받길 원하는 몬트리올경에게 나는 다시금 끄덕이자 사람들이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그렇군요. 수고하셨습니다, 백작. 이제 좀 쉬시지요." 몬트리올경이 그렇게 인사를 하고 안내자와 트레비스를 데리고 물러나자 리건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날이 밝는대로 다시 움직인다고 하니까 잘 생각은 하지 마라. 피곤하겠지만, 우선 여기서 멀어지는게 좋을테지. 안전한 곳을 확보한다음에 푹 쉰다는 계획이더라. 물론, 여기서 확실하게 안전한 곳이 어디 있겠냐만은...." "예에..."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내 표정이 별로 안 좋았던 모양이다. 리건은 의아한 얼굴로 한번 나를 쓰윽 바라봤지만, 별 말 없이 다시 한번 어깨를 치고는 자신도 가버렸다. 그리고 나서야 첼릿과 듀비가 이끄는 대로 그들이 피워놓은 모닥불 가에 주저앉으려는데 저쪽에 따로 누워있는 부상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윽....' 아까의 전투 때문인지 부상자들은 고른 땅에 누워 있었고, 그나마 큰 상처가 없는 사람들은 여기 저기에 흩어져서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가라앉아서 그런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없어 사방은 조용하기만 했다. 덕분에 부상자들쪽에서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너무나 잘 들려왔다. 시선을 그쪽으로 향하자 신음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통증을 참기 어려운 듯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런 모습에 긴 한숨을 내쉬자 첼릿이 속삭였다. "어쩔 수가 없죠. 큰 부상이 아닌 이상 포션을 아껴야 하기때문에 사용하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지금 마법사들도 모두 탈진 상태라서 저들에게 마법을 충분히 사용해줄 수도 없고 말이죠. 마법사들이 회복될때까지 버텨야 할 겁니다." 첼릿의 말에 나는 다시 가슴이 욱신 거렸다. 그러고보면 나는 3클래스 익스퍼트 경지까지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힐링 마법을 구사하지 못했다. 이유는, 공격마법을 익히지 못하게 한 것과 같은 이유였다. 남을 치유하기 위한 마법이었기에 다른 것과는 달리 좀더 신경을 쓰고 나 처럼 마나가 많은 경우 세밀하게 조정을 해야하는데, 그걸 못하는 내가 힐링 마법을 배워 다친 사람에게 시전해주었다가 뭔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우... 나는 전혀 도움이 안되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힐링 마법을 익혀볼 걸 그랬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래도 해인님이 안 계셨더라면 아까 전투가 더 힘겨웠을 겁니다. 해인님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데요." 첼릿의 위로의 말에 나는 쓴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없었다면... 개미 군단이 오지도 않았을텐데 말이죠...' 그렇게 생각하자니 그 자리에 앉아 있는게 바늘 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아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개미 군단이 온 건 제탓입니다...' 라고 떠들수도 없었다. 이건 여기 와서 생각이 난 건데, 내가 그렇게 말해봤자 누구도 그 말을 믿어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내가 정령들과 대화를 한다는 걸 알지도, 설사 내가 말한다고 해봤자 믿어줄리도 없었으니 내가 아나콘다 정령들과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나,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는 것 자체를 믿지 않을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리건 조차도 내 존재를 당혹해 했었으니 말이다. '아, 그래... 리건에게 의논이라도....' 그는 내가 상상도 못할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니 어쩌면 좋은 생각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한 희망을 가지고 리건을 끌고 사람들이 있는데서 벗어나 하소연을 했더니만,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리건의 말은 황당했다. "그래서?" "그, 그래서라뇨?" 당황한 내가 되묻자 리건은 덤덤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아니, 그게 뭐가 어떻다고?" ====================================================== 제 36화 죄송해요. (6) 당황한 내가 되묻자 리건은 덤덤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아니, 그게 뭐가 어떻다고?" 내 말을 도통 이해 못한다는 듯, 아니 어이 없다는 듯 말하는 리건의 태도에 나는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이해 못하겠어요? 아니, 지금까지 뭘 들은 거예요?" 그러한 심경은 고스란히 내 어조에 반영되어 내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층 더 커져 있었다. 그러나 리건의 심드렁한 태도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러니까, 아까 앤트 자이언트들이 쳐들어온 게, 정글에 들어온 첫날 우리를 향해 덤벼 들었다가 네가 나서는 바람에 그냥 보내준 뱀 녀석들이 뒤에서 충동질한 거라며." 어째 그의 어조는 어제 우리 옆집의 건너 건너집 애가 걸어가다가 길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 졌다... 라고 말하는 듯, 아무 상관 없는 남의 이야기를 하는 식으로 무미 건조했다.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니까요." "그래서?" 다시 나온 리건의 물음에 눈꼬리가 위로 치솟아 오르는게 느껴질 정도였다. "리건! 지금 장난 하는 거죠?" 그러자 리건의 인상이 살짝 찡그려졌다. "너는 이게 장난으로 보이냐? 아주 엄청나게 심각한 이야기를 할 것처럼 사람을 끌고 와서는 한다는 소리가 쓸데 없는 소리잖아?" "왜 심각한게 아닌데요? 아까 앤트 자이언트인지 거대 개미 군단인지 하는 놈들이 쳐들어온게 바로 나때문이잖아요?" "그래서?" 다시 나온 물음에 이번에는 허탈해서 힘이 쫘아악 빠져 버렸다. 리건의 반응 덕분에 아까까지 일행들의 얼굴을 어떻게 볼지 끙끙 앓던 내 고민이 한 순간 쓸데 없는 먼지가 되어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 심정을 몰라주는 리건을 향해 원망어린 눈초리를 보내자 리건이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이번에는 제법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도대체가 말이야, 내가 보기에는 하등 신경슬 거리도 안되는 걸 가지고 왜 네탓을 하는 건데? 거기다 설사 네 탓이라고 쳐라. 그럼 그래서 어쩔건데? 지금 일행들 앞에 넙죽 엎드려서 내 탓이니 내가 모든걸 책임지겠습니다... 할 거냐? 설사 책임진다고 해도 뭘 어떻게? 죽은 사람을 살려낼거냐, 다친 사람을 치료해줄 거냐? 아니면, 이미 멀리 떠났다는 앤트 자이언트들을 쫓아가서 다 박삭을 내고 돌아올 거냐?" 줄줄줄 나오는 리건의 말에 나는 어깨가 한번씩 움찔 움찔 거렸지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아니... 그, 그건...." "그건 그렇다 치고, 도대체 그걸 왜 네탓으로 여기는 건데? 네가 그 뱀녀석들을 고이 보내줘서? 그래서 앤트 자이언트들이 쳐들어온게 네 탓이라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이것 봐, 그럼 네가 그 뱀 녀석들이 뒤에서 딴 놈들을 충동질을 할걸 알았었냐? 알고 보낸 거야?" "무, 물론... 그건 아니지만... 몰랐다고 해도 잘못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게다가... 혹시라도 뱀 녀석들이 복수할지도 모른다는 건 생각 했어야 했어요." 우물쭈물하면서도 할 말을 다 하자 리건이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얼씨구? 그럼 그 뱀 녀석들이 복수를 노렸다는 걸 예상했다면 어떻게 했을건데? 그 자리에서 다 죽였을 거야?" "그, 그러지는 않았겠지만... 복수할 생각은 말라고 엄포를 놓고 보내줬겠죠." "바보냐? 그럼, 네가 복수를 생각하지 말라고 엄포를 놨으면, 그놈들이 뒷공작을 안 했을거 같아?" 리건의 말에 잠시 아나콘다 정령들을 떠올려 봤다. 나에게 꼼짝도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발악하는 그녀들의 표정을 봤을때 내가 하지 말랬다면 다른 수를 써서라도 - 예를 든다면 몬스터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지나간다고 정보를 흘리던가 하는... - 복수할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아, 아뇨..." 자그맣게 대답을 했지만, 못 알아들을 리 없는 리건이었다. "그럼 뭐야? 이래저래 어차피 너는 뱀들을 그냥 고이 보내줬을 거고, 고이 돌아간 뱀들은 어떻게 해서든 몬스터들을 충동질 해서 우리를 괴롭혔겠네." 그의 말에 나는 울상이 되었다. "그, 그럼... 역시 그 녀석들을 고이 보내준게 잘못인 걸까요?" [얼씨구? 그러다가는 나중에 네가 이 정글에 온 게 잘못이다 란 말까지 나오겠다?] 참지 못하겠다는 듯 끼어드는 목소리는 아버지였다. "아, 아버지..." 풀이 팍 죽은 목소리로 웅얼대자 리건이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네가 뭣때문에 전전긍긍 하는지는 알겠다만, 내가 보기에는 전혀 쓸데없는 일 가지고 그러는 거야. 사람이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일 중에 한가지를 선택했을때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어. 그게 치명적인 결과일수도, 무시할 정도의 미미한 결과일수도 있지. 그러나 그러한 결과가 나오려면 네 선택 뿐만이아니라 다른 여러가지 변수도 작용해야만 해. 그런데 네 선택도 그러한 결과에 조금 보탬이 되었다고 네가 그 결과를 전부 네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지." 리건의 말에 네 정령들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리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를 들어, 눈이 내려서 나뭇가지에 눈이 하나 둘 쌓이다가 어느 순간 눈 한송이가 내려앉았을 때 나뭇가지가 쌓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져버렸다고 치자. 그럼 그 나뭇가지가 부러진건 마지막 내려앉은 눈송이 탓이냐?" "그, 그건..." 물론, 마지막 눈송이가 내려앉아서 나뭇가지가 부러지기는 했지만, 전적으로 그 탓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미리 나뭇가지 위에 쌓여 있던 눈들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내가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 대자 리건은 내가 자신의 말을 다 이해했다는 걸 알아채고 다시 말했다. "네가 그 뱀들을 고이 보내줬다고 네 탓이라고 생각했지? 그럼 그 뱀들 탓은 하나도 없냐? 하필 그때 우리가 오는 곳에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던 탓일 수도 있지. 아니면, 그 먹이들에게 호되게 당했으면 그냥 죽은 척 하고 있다가 조용해지면 알아서 빠져나갔으면 됐을것을 괜히 뒤에 있는 우리에게 복수한답시고 난리친 탓일 수도 있고." 리건의 말은 모두 옳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탓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문제는 바로 그거였다. 내 말에 리건이 다시 한숨을 내쉬며 뭐라고 하려는 찰나, 아버지가 다시 끼어들었다. [네 탓은 무슨놈의 네탓! 애초에 그까짓 인간 몇명이 죽고 다친게 뭔 대수라고 이렇게 난리를 떨어대는 거냐? 이 세상에 깔리고 깔린게 인간인데 몇명 좀 죽고 다치면 그게 뭐가 어때서?] "나 때문에 그렇다는게 문제인거죠. 거기다가 그까짓이 아니라 내 동료라구요." 아버지의 말에 부루퉁하니 대꾸하자 아버지의 눈썹이 못마땅하다는 듯 치켜 올라갔다. [시끄러. 네 탓이 아니라니까. 능력도 안되는 것들이 정글에 들어온 그 놈들 탓이지. 그까짓 몬스터들이 덤빈다고 죽어나가냐?] 아버지의 말에 나는 화가나서 바락 대들었다. "그렇게 말하면 아버지 탓도 있네요. 애초에 왜 절 이세계에 데리고 오신 건데요? 그렇지 않았으면 이 정글에 오지도, 이런 곤란한 상황에 빠지지도 않았을 텐데!" 너무 분노하다보니 할 말 안 할 말 입에서 빠져나온게 문제였다. 그 이야기를 하고 나는 아차 싶었지만, 평소 아버지랑 투닥거린 전적이 많았던 터라 이번에도 아버지가 화를 내며 내 말에 어거지를 쓰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 그럼... 이 세계에 온걸 후회한다는 거냐?] 묘하게 비틀린 입매로 비꼬듯이 말하는 아버지의 말에 놀라 나는 입을 열려고했다. "아, 아니... 그게아니..." 하지만, 아버지는 내 말이 제대로 나오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아버지!!" 다급하게 불러보았지만, 아버지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아앗... 어, 어떻게..." 생각같아서는 상황을 되돌려서 그 말을 취소하고 싶었지만, 이미 아버지가 그 말을 듣고 사라져 버렸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엘라임이 엄청 충격받은 모양인데?] 노아스의 말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혀 버렸다. "어, 어떻게 하죠? 아버지... 많이 화가 나셨겠죠? 아아... 그런 말을 하는게 아닌데..." 아나콘다 정령들의 이야기를 엿들었을때보다 더욱 더 당황해버린 나는 제자리에서 방방 뛰기도 하고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어보기도 했지만, 딱히 좋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 저 녀석 지금 화가 났어도 곧 풀릴거야. 그때 사과하면 돼.] 실피드의 말에 이어 이프리트도 말했다. [그래, 그래. 우리가 저 녀석을 달래서 데리고 오도록 할테니 그때 다시 사과해라. 해인이, 네가 잘못한 건 알고 있지?] 여전히 부드럽지만, 무시못할 엄격함이 담겨 있는 말에 나는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그건 나중에 네 아버지에게나 하려무나. 우리에게는 별 소용이 없지.] 실피드의 따끔한 말에 나는 풀이 팍 죽어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자자, 너무 풀 죽지는 말고. 네 아버지도 네가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게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기다리거라. 그럼, 우리는 네 아버지를 달래러 가보마.] 그렇게 말하며 이프리트가 사라지자 실피드와 노아스도 나를 향해 걱정하지 말라고 한마디씩 하고는 곧이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걱정보다는 그 말을 했다는 죄책감이 너무 커서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죠? 아버지... 많이 화가 나셨겠죠?" 유일하게 남아있는 리건을 바라보며 말하자 그가 어깨를 으쓱해보이더니 말했다. "그래봤자 우리가 별 수 있냐? 우리는 정령계에 들어갈 수 없는데... 이프리트하고 실피드, 노아스가 잘 해결하길 바래야지. 그때 사과나 제대로 해." "예에..." "가자.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어. 녀석들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겠다." 도저히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볼 기분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여기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리건이 이끄는대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제 36화 죄송해요. (7) 날이 밝아오자마자 사람들은 그 곳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려고 하는지 아침 식사도 마다하고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마법사들이 피곤에 절어 나가떨어지는 바람에 주위에 경계 마법도 하나 설치하지 못하고 단지 사람들의 시선으로만 주위를 경계해야만 했던 상황이었지만, 다른 몬스터들의 공격은 없었다. 그래도 언제 누가 닥쳐올지 모르는 것이었기에 서둘러서 자리를 피한 것이었지만... 정오쯤 되어서야 우리는 괜찮은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고, 사람들이 모두 다 피곤해 있었기에 해가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더 이동하지 않고 그 자리에 노숙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제야 사람들은 그날 처음으로 뭔가 먹을 걸 입에 댈 수 있었다. 첼릿이 나에게도 급하게 만든 듯한 멀건 죽을 가져다 주었지만, 나는 멍 한 눈으로 그걸 들여다 볼 뿐 숙다락을 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사실, 리건에게 끌려서 일행에게로 돌아간 뒤에도 다시 날이 밝아 첼릿의 손에 이끌려 무작정 걸어와서 그가 이끄는 대로 앉아 죽을 받았던 것이다. "해인님, 드셔야죠." 첼릿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하며 손에 숟가락을 쥐어준 뒤에야 기계적으로 죽을 떠서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한 채 입 속으로 꾸역 꾸역 밀어 넣었다. "후우..." 옆에서 첼릿이 한숨 내쉬는 소리가 들려지만, 마치 딴 차원의 세상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딴 차원이라...' 그 생각에 잠시 숟가락을 움직이던 손길이 멈칫 거렸지만, 나는 다시 손을 움직여 죽을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그 자리에 앉아서 울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화가 나서 갔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 아버지가 간 곳에 내가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이처럼 무섭게 느껴질줄은 몰랐다. 정령계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은, 예전에도 물론 알고 있었지만 새벽에 리건이 말한 뒤로 그 사실이 마치 낙인이 되어 머릿속에 찍힌 듯한 기분이었다. 예전에는 내가 정령계에 갈 수 있건 없건 상관 없었다. 언제라도 내가 부르면 아버지가 내 곁으로 오셨었고, 내 곁에 계시지 않아도 그 분은 내가 뭘 하든지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화가 나서 가버린 지금, 나는 아버지 곁에 가기는 커녕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공포로까지 다가왔다. 내가 뭘 하든 항상 지켜볼 수는 있지만, 그렇다는 건 안 볼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건 아버지와의 단절이었다. 내가 이 세계에서 뭘 하던 아버지가 외면하면 그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 생각이 떠오르자 갑자기 낯선 세계에 나 혼자 뚝 떨어진 것만 같은 두려움과 외로움이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까지... 아무래도 나는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도 아버지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해왔던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니 얼결에 이 세계에 끌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낯선 세계에 홀로 떨어졌다는 두려움 따위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아니, 느낄 새가 없다고 해야 할까나? 아버지를 만나서 황당하고 기막힌 내 탄생의 이야기를 듣고, 날 못마땅해하는 아버지와 아웅다웅 투닥투닥 다투면서 속으로는 언제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벼르고 있었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이 세계에 적응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 몰래 가출한답시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 곳의 사람들이 사는 세계로 나오면서도 두려움따위는 손톱 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수 틀리면 언제라도 아버지와 아웅다웅 하는 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아버지를 못 볼거라는 생각은 꿈에서조차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러려니...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언제고 아버지는 내가 부르면 곁으로 달려오셨고, 내가 스토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내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계셨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를 내 잘못으로 잃어버리게 생겼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숟가락을 내려 놓았다. "더 드시지 그러십니까?" 옆에서 첼릿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즉시 말을 건네왔지만 고개만 휘휘 저은 채 그릇을 내려 놓았다. 리건이 내 일행에게 뭔가 언질이라도 줬는듯 그들은 나의 이상한 태도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신경써주기만 했다. 다른때 같으면 그런게 무척이나 고맙게 느껴졌을테지만, 지금은 그런거 느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단 한가지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버지가... 다시는 나 안본다고 하시면 어쩌지?' 말 실수 한번 한거 가지고 내가 너무 과민하게 구는 거라고, 아버지는 정령계에 가서 이프리트를 비롯한 다른 정령왕들의 이끌림에 모른체 하고 와서 밴댕이 소갈딱지란 이미지에 걸맞게 나에게 구박이란 구박을 다 해댈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안심하기에는 내 말을 듣고 난 아버지의 표정이 너무나 마음에 걸렸다. 처음에는 잠깐 충격어린 표정이었지만, 이 곳에 온걸 후회하느냐고 묻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비꼬는 듯한 어조와 입매만 없었더라면 아버지는 석상이라고 해도 될 만큼 차가웠고 무표정했다. 그리고 그 표정은 지금껏 아버지에게서 본 표정 중에서 가장 무서웠다. 무서움을 뛰어넘어 공포까지 느껴질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너무 걱정 마라. 나머지 세 녀석들이 어떻게든 해줄 거다." 내가 너무 충격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대자 리건이 아무래도 안되겠던지, 저녁 즈음에 슬그머니 다가와서 속삭였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물론 세 정령왕이 아버지에게 화를 풀게 하려고 애를 써줄 거라는 건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제는, 그걸로 아버지의 화가 가라앉느냐 하는 것이지만... 새벽에 그렇게 사라져 놓고서 저녁이 다 되는데도 아버지를 데리고 오기는 커녕 아무런 언질도 없는 걸로 보아하니 화가 나셔도 아주 단단히 나신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날은 그나마 아버지가 속이 좁은 분이시니까 이렇게 금방 화가 풀리지 않을 것이다... 란 생각으로 나를 달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엄청나게 화가 나셨나보네... 라고 달랬지만, 그 다음 날이 되자 그렇게 스스로 달래는 말 조차도 두려움을 부추기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화가 나신 거지? 이러다가 나 영영 안보시겠다고 하시는 건 아닐까? 없는 자식 취급 하면 어쩌지?' 그런 불길한 생각들 덕분에 첫날과는 달리 몬스터들의 침략 없이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도 하나도 고맙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같은 심정으로써는 다른 일행들이 알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몬스터들이 쳐들어와서 이런 불길한 생각에 매달리지 않게끔 해줬으면 했다. 그리소 사흘 밤이 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자 신경이 팽팽해서 누가 건드리면 터질 것만 같았다. 정말, 재판장에서 선고를 받는 죄인의 심정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인데도 불구하고, 언제 올지도 모를 연락만 기다릴 뿐,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절망스러웠다. 밤이 되어도 초조함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앉아 아랫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며 차가운 두 손을 마주 잡고 있는 내가 안되 보였던지 리건이 슬그머니 다가와 옆 자리에 주저 앉았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저 두 녀석이 걱정스러워서 죽겠나보다." 리건의 말에 나는 힐끔 근처에서 날 바라보고 있는 첼릿과 듀비를 바라보았지만, 미안하다고 웃어줄 마음이 아니었다. 지금 내 코가 석자라 누굴 생각해줄 마음의 여유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리건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렇게 걱정되냐?" "... 걱정이 아니라... 무서워요." 그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대로 아버지에게 버림받을까봐... 그게 너무나 무서웠다. 설마 설마 하고는 있지만, 계속 일분 일초가 흘러가는데도 안 오시니까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 란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처들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그 녀석의 고개를 꽉꽉 밟아서 들지도 못하게, 아니 아예 저 깊숙히 들어가도록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그럴 확신이 없으니 문제였다. "야야,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냐?"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내 얼굴에 그 설명이 다 쓰여있는 모양인지 리건이 낮게 혀를 찼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안 오시잖아요.' 란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냈다가는 영영 안 오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혀에서 맴돌던 말을 다시 꿀꺽 삼켜버렸다. 하지만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코끝이 시큰거려왔다. 오늘 벌써 몇번째 코끝이 시큰거리는지도 몰랐다. 눈물을 흘리지 않고 애써 태연하게 기다리려고 애를 쓰고 있기는 했지만... 누가 툭 건들면 눈물이 사정없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정 그렇게 걱정 되면.... 말이라도 좀 걸어봐." "어떻게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 쪽으로 갈 수가 없는데 어떻게 말하라고...' 미처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을 리건은 눈치채고는 어깨를 으쓱 거렸다. "못 간다구 말을 못하냐? 어차피 그들이 이 세계에 있는 정령들과 관련이 있는 한 여기서 말하는 게 다 그쪽에도 들릴텐데. 내가 아까 살펴보니까 저쪽에 자그마한 샘이 있더라. 안 가볼래?" "샘?" 어리둥절한 내 질문에 리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샘. 맑은 물이 퐁퐁 솟아오르는 샘.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더라."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챈 나는 벌떡 일어났다. "어어, 샘은 저쪽에 있어." 리건이 손을 들어 가르킨 쪽으로 향해 냅다 달려가니, 생각보다 훨씬 먼 곳에 그가 말한 샘이 있었다. 커다란 나무 밑에서 물이 솟아 올라 자그마한 물 웅덩이를 이룬 뒤 흘러 나오고 있었는데, 보기만해도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샘 웅덩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 한마디를 내뱉으니까 갑자기 그 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흐에에엥~~ 아버지... 잘못했어요...엉엉~~ 진심으로 한 말도 아닌데... 그것도 못알아 보고... 으아아앙~~" 한번 눈물이 나오기 시작하니까 쉼 없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우는 와중에서도 사이 사이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게 더 서러워서 샘에다 대고 엉엉 울고 있는데 어느새 뒤따라왔는지 리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우냐?" 그에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면서도 훌쩍댔다. "으흑흑... 어떻게 해요? 으허허헝... 아버지가... 아버지가... 안 와요..." 아마, 그때 나는 눈물 콧물을 다 흘리는 아주 엉망인 몰골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생각하면 그 얼굴로 어떻게 리건을 봤는지, 얼굴이 다 화끈 거리지만, 그때는 그런거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그러자 리건이 삐질 웃더니만 다가와서 자신도 쪼그려 앉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우냐?" "으허어엉~~ 아버지.. 안 오시면 어케요... 흑흑흑.. 어케요... 엉엉엉~~"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이렇게 애처럼 울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는데, 아버지가 안 오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나는 정말 애처럼 엉엉 울어댔다. 그러자 리건이 가만히 날 바라보더니 묘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흠... 엘라임이 이쪽으로 오게 할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해볼래?" '확실한 방법' 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인 나는 그게 뭔지도 묻지 않았다. "할래요!" "좋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내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씨익 웃던 리건이 손을 뻗더니만 뺨에 있는 눈물을 쓰윽 닦아주는 거였다. "리, 리건?" 아버지를 부를 방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할 생각은 안 하고 뭐하나... 싶어 그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그의 얼굴이 나에게 다가오는 거였다. '헉....' 그리고는 곧바로 그의 따뜻한 입술이 차가워진 내 입술을 덮어버렸다. 그의 따뜻한 혀가 부드럽게 내 입술을 쓸어갔고, 가지런한 그의 치아가 아랫 입술을 살짝 깨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갑작스런 상황에 패닉 상태에 빠져버린 나는 딱딱하게 굳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 멀리 마실 갔던 이성이란 녀석이 헐래벌떡 돌아와 머릿속에 경종을 울리자 그제야 정신차린 내가 리건을 팍 밀어내며 화를 내려고 했다. "이, 이게..." 그러나 나보다 먼저 손을 쓴 존재가 있었으니... 퍼어억~ 쿠당탕~ 쾅~ [이 빌어먹을 변태 도마뱀 녀석아~~!!] 듣기만해도 오싹할 정도로 엄청난 타격음과 함께 리건이 뒤로 붕 나가 떨어지고도 모자라 두어 바퀴 데굴데굴 굴러서 그 뒤에 버티고 있던 나무에 강하게 부딪히는 와중에 아버지의 살벌한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아버지!!" 내 앞에 등을 보인 채 나타나 리건을 매섭게 노려보는 모습에 나는 리건이 아까 뭘 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버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어디로 사라질새라 두려워 그의 팔을 꼬옥 부여잡은채 아까 잠깐 멈춘 울음을 다시 터트렸다. "우와아아앙~~ 아버지... 엉엉엉~~ 죄송해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흐어어엉~~ 다신 안 그럴께요... 엉엉엉엉~~" 나중에 생각한거지만, 아마도 갓 태어났을때도 그정도로 엄청나게 울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도대체 나에게 그만한 눈물이 어디 있었던지, 짧은 인생동안 울었던 걸 다 합쳐놓은 것 보다 더 많은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으허허어어엉~ 잘못했어요... 가지 마세요. 엉엉엉엉~~" 그리고, 일평생 가장 많이, 그리고 엄청나게 울어대던 나는 결국 갑자기 생긴 핑~ 도는 현기증에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쯧쯧쯧, 거 봐라. 애가 얼마나 놀랬으면...] [하여간, 너도 웃긴 놈이야. 그까짓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그렇게 화를 내냐?]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내 귓가에 이프리트와 노아스의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눈을 감은 상태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어떤 따뜻한 기운을 위에 덮은 채 누워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하도 울어서 열이 나는 바람에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군가가 서늘한 손길로 만져주는 것도 느껴졌다. [시끄러. 네 놈들은 뭐 하러 여기까지 와서 떠드는 거냐?] 아버지의 투덜거림에 평소의 아버지로 돌아왔구나... 하는 마음에 안도감을 느끼며 눈을 뜰까 말까 고민하는데 노아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흠, 부럽다... 나도 이런 존재가 있었으면.... 나도 계약이나 맺어볼까나?] 노아스의 말에 실피드의 어딘가 쓸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절대 인간과는 계약을 맺지 말아라. 인간은... 너무 일찍 죽어.] 그러고보니 예전에 실피드가 계약을 맺은 인간과 무척이나 절친하게 지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래도 아무 일 없이 무미 건조하게 살다가 소멸되는 것 보다는 났지 않아? 괴롭더라도 그런 즐거운 추억이 있다는 건 행복한 거라고 보는데?" 리건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 녀석도 안 가고 있었나 보다. [옳은 말씀. 솔직히 나 그때 실피드 너도 부러웠어. 그런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건 참 행복할 거 같아.] [행복만 있는 건 아니야. 행복보다 몇 배나 더 큰 슬픔과 괴로움이 따라 온다고.] 실피드의 불퉁한 말에 이프리트가 물었다. [후훗, 그럼 넌 만약 시간을 돌려 다시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그 인간과의 관계를 냉랭하게 유지할테냐? 그 슬픔과 괴로움을 겪기 싫어서?] 그러자 실피드의 대꾸는 곧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단지, 한참 있다가 아버지가 대신 대답 비스무리한 말을 했다. [... 그런 관계는... 하고 싶다고 하고, 하기 싫다고 안 하는게 아니야. 감정 이라는게... 그렇게 마음대로 될 수 있는 거면 좋게?] "헹, 그래서 넌 지금 후회하냐?" 리건의 말에 이번에는 실피드가 대꾸했다. [아니... 만약 그 인간을 다시 앞에 두고 그런 관계를 맺을거냐고 묻는다면... 나는 다시 하겠다고 할 거 같아.] [아아... 정말 부럽다...] 노아스의 부러움이 가득 담긴 푸념에 아버지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가끔은... 인간이 부러워.] 그러자 주위에 있던 다른 정령왕들과 리건이 놀란 모양이었다. [뭐어?]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엘라임, 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냐?] "헤, 오래 살고 볼일이네?" [뭐야? 이것들이 정말... 가끔이랬잖아, 가끔.] 아버지의 화난 목소리에 이어 이프리트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가끔이라고 해도...] [세상에서 네 놈이 가장 잘난 줄 아는 녀석이 그런 생각을 한다니까 신기한 거지.] [맞아.] 그 뒤를 실피드와 노아스가 이었다. 그러자 아버지의 약간은 망설이는 듯한 설명이 들려왔다. [아니... 나도 다른건 부럽지 않은데... 이 놈을 만난 뒤로는.... 아주 가끔.... 자식을 안아준다는 건 어떤 느낌일지 너무 궁금해서.... 뭐, 인간 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육체를 가진 녀석들은 다 가능한 일이겠지만서도... 우리는 불가능 하잖냐. 단지 능력으로 이 녀석의 기운을 느낄 뿐...] [호오, 그런 생각을 했었냐?] 이프리트의 놀랍다는 말에 아버지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아니... 아주 가끔... 내가 지금 이 녀석을 만지고 있어도... 이게 정말 만지는 건지, 아니면 그냥 내 기운으로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는건지 헷갈리거든... 육체를 가지고 자식의 육체와 접촉 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흠, 그럼 지금은 어떤 느낌인데?" 불쑥 끼어드는 리건의 목소리에 아버지가 당혹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어떤... 느낌?] "그래, 지금 너 해인이 머리를 쓸고 있잖냐. 아무 느낌 안 드냐?" [뭐야... 나는 네놈들 처럼 촉감이라는걸 느낄 수 없다고. 단지 기운을 느낄 뿐이야.] 아버지가 투덜거리는 어조로 무뚝뚝하게 대꾸했지만, 리건은 단호하게 다시 물었다. "내가 감각이 어떻냐고 물었냐? 느낌이 어떻냐고 물었지." 그에 아버지는 얼떨떨해 하는 모양이었다. [느, 느낌... 그, 글쎄...] 아버지가 정확하게 대꾸를 하지 못하자 리건이 입을 열었다. "육체를 가진것과 가지지 못한게 무슨 차이가 있냐? 어차피 육체를 가졌던 가지지 않았던 마음이 있는 상대방을 품을 때 기쁨을 느끼지, 아무 상관 없는 상대를 앉아봤자 아무 느낌 없다고. 아, 물론 육체를 가졌으니 딱딱하다, 물렁하다는 촉감이야 느끼겠지. 그러나... 이건 내 생각인데 마음이 있는 상대와 접촉할때는 육체의 감각보다는 마음이 크게 작용하는 거 같아. 똑같이 어린 아이를 안아준다고 해도 자기 자식과 남의 자식을 안는 건 분명히 느낌이 틀리거든. 너 그렇게 해인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아무 느낌 없냐?" 아버지는 한참이나 대답을 못했다. 대신 잠시 후에 노아스가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는 듯 리건에게 뜬금 없는 질문을 던졌다. [호오, 그래? 그렇다면 너 해인이에게 키스할때 무슨 느낌이 있었어?] 그 질문에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아버지의 손길이 딱 굳어버렸다. [크하하하, 맞다. 솔직하게 말해봐라.] 실피드에 이어 이프리트까지 리건을 향해 놀리는게 다분한 짖궃은 질문을 던졌다. [호오, 설마 해인이에게 아무 느낌이 없었다는 건 아니겠지? 너, 단순히 엘라임을 열받게만 하려고 키스한 거냐?] "흠... 글쎄다... 내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별별 눈물을 다 질리도록 봐와서 그런데에 별 영향을 받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아직까지는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눈물도 존재하더라. 아주, 어쩌다 가끔이겠지만 말야." 장난기 어린 질문들에 리건이 너무 진지하게 대답하자 세 정령왕들이 오히려 당황한 모양이었다. 리건의 말에도 한참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더니만, 나중에 아버지의 서릿발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너어... 해인이에게 엉뚱한 맘 품으면 가만 안 둔다.] ====================================================== 제 37화 드디어... (1) 제 37화 드디어...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키득키득 웃던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그 상황에서 눈뜨고 일어나는 것 보다는 그냥 잠든 척 하고 있는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예상으로는 잠깐만 자고 일어나려고 했는데, 마음이 안정되어서 그런지 잠깐 잔다는게 아예 아침까지 자버렸다. 그것도 아버지가 깨우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잤을 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언제까지 자고 있을래?] 서늘한 아버지의 말투와 날 흔드는 손길에 부스스 눈을 뜨고보니 어느새 해가 하늘에 반짝 떠서 웃고 있는 거였다. "헉... 우와, 우와, 우와... 이게 어떻게..." 놀라서 상체를 벌떡 일으키다보니 세상에나, 내가 아버지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었던 거였다. "어... 어어어..." 일행에서 떨어져 나와 밤을 샜다는 사실에 놀란 것 보다 아버지가 내게 다리 베게를 해줬다는 -것도 밤새도록... - 게 너무 놀라워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뭐냐? 밤새 벙어리라도 된 거야? 왜 그렇게 버벅거려?] "어어... 음... 아버지... 혹시... 밤새도록..." 속으로 설마...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건만 아버지는 흥 하며 시선을 돌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타박만 해댔다. [멍청한 녀석. 아주 대놓고 통곡을 하지 그러냐? 애처럼 펑펑 울기는...] "힉..." 아버지의 타박에 얼굴이 붉어져서 어쩔줄 몰라하는데 나의 영원한 구원자 이프리트 아저씨가 나섰다. [왜 아침부터 괜히 타박이냐?]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다른 정령왕들의 목소리. [그러게나 말이야. 어제 밤과는 또 딴판일세...] 실피드의 뒤를 이어 노아스가 짓궃은 목소리로 마무리를 했다. [호호호호, 설마 천하의 엘라임이 부끄러워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밤새도록 자식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는게 창피한 거야?] [시끄러워! 이것들은 왜 안가고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 그렇게들 할 일이 없어?] 아버지의 투덜거림에 실피드가 능글맞게 대꾸했다. [어허, 기껏 밤새 같이 있어줬더니만... 은혜도도 몰라주다니.] [은혜는 무슨...] 실피드의 말에 꿍시렁 거리기는 하면서도 더이상 뭐라고 하지 않는 걸 보니 조금은 다른 정령왕들에게 고마워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내가 당황해 할때 이프리트 아저씨를 선두로 세 정령왕이 아버지에게 우르르 달려가서 그의 화를 풀려고 어떻게는 노력해줬을테니까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나자 나는 세 정령왕을 향해 배시시 웃을 수 있었다. 그러자 이프리트 아저씨도 마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어제는 무척 놀랐지? 그래도 무사히 해결되어 다행이다.] "아하하... 예. 걱정끼쳐드려 죄송했습니다." 고마운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을 담아 그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는데 아버지의 일갈이 들려왔다. [너 그렇게 한가하냐? 변태 도마뱀 녀석이 일어나자마 잽싸게 보내라고 하던데...] 그러고보니 어제밤에 정령왕들과 같이 수다떨던 리건이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는 내 모습이 리건을 찾는다는 것인 줄 알아채고 이프리트 아저씨가 넌지시 알려줬다. [그 녀석은 어제 밤 늦게 돌아갔어. 자기가 돌아가서 일행들에게 말해줘야 한다고 말야.] "그렇군요. 저도 슬슬 돌아가야겠네요. 아마 제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내 말에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얼른 거들었다. [그래, 어여 어여 가봐라.] "넵~!" 돌아가면 리건에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하는건 둘째치고 일행들에게 뭐라 변명을 해야하나... 고민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큰 일(?)이 해결되어서 그런지 돌아가는 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 나의 밝아진 얼굴 덕분인지 듀비와 첼릿이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그들의 눈 밑에 생긴 검은 그늘을 발견하고는 괜스레 미안해졌다. 그것들은 분명히 나를 걱정해서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생긴 것이 틀림 없었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걱정 많이했죠?" "그래도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이제 다 괜찮아지신 겁니까?" "넵. 덕분에요. 다음부터는 걱정 안끼치도록 할게요." 듀비는 첼릿처럼 말을 건네지는 않았지만 두 눈에 안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그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이는데 리건이 다가왔다. "잘 잤냐?" "아하하하... 덕분에요. 아,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네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후작님이 아니셨다면 어떻게 할 줄 몰랐을거에요." 남들이 있었기에 후작님이라고 정중하게 호칭까지 사용하며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했건만, 리건 녀석이 무슨 생각인지 씨익 웃더니 오른 손을 들어 내 턱을 스치듯 스윽 만지는 거였다. "훗... 확실히 효과가 있었지?" '나는 어제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듯한 기색이 두 눈에 가득 들어 있었다. 덕분에 아버지와 화해 했다는 기쁨으로 반쯤 잊고 있었던 어제의 문제의 상황이 생각나 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내 뺨을 화끈 달아오르게 했다. "윽..." 그래 나도 모르게 리건의 시선을 피하며 얼른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그의 손길 마저 피하자 리건이 키득키득 웃으면서 그쯤에서 물러서줬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는 그 사건이 뇌리에 강하게 남아서 자꾸 그를 의식시키는 바람에 도저히 리건을 전처럼 대할 수가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다음 부터 자의든 타의든 리건을 피해서 도망다녔는데, 같은 그룹에 있다보니 그것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어 가끔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만 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자꾸 묘하게 피식거리고 웃으니까 더더욱이나 그를 의식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거였다. [저, 저, 저, 저놈이이~~ 내 저럴 줄 알았어!] 이까지 빠드득 갈면서 당장이라도 리건에게 달려들 듯이 노려보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나는 화들짝 놀라야 했다. [호오, 저 파란 드래곤의 눈빛이 심상치 않은데?] 능글맞은 실피드의 목소리에 이어... [음음, 역시 해인이에게 요상한 마음을 먹은게야.] 짓궃은 노아스의 목소리까지... [그만들 해라. 그러다 엘라임이 뭔 일 내겠다.] 이프리트 아저씨의 말에 노아스가 까르르 웃었다. [꺄하하하~~ 그러길 바래. 그것만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어디 있을까. 요즘 정말 살맛 난다니까.] [너무해요, 노아스님...] 주위에 사람들이 있는 터라 나는 속으로 푸욱 한숨을 내쉬고 정령의 대화법으로 말을 건넸다. [어머, 해인아 화났니? 하지만, 얘 조금만 봐줘라. 이런 재미있는 구경은 내 일생에 한번 볼까 말까 하다고.] [내 저놈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너너 쓸데없는 맘 품지 말랬지? 그 눈빛 당장 거두지 못해!!] 아버지가 리건을 향해 바락 바락 외쳤지만, 리건은 못들은 척 눈썹 하나 까딱 안 하고 나를 향해서 싱긋 웃기만 하는 거였다. 그런데 그때, 듀비가 스윽 앞으로 나서더니만 리건의 시야에서 나를 가려버렸다. "해인님, 이쯤부터는 조심하시는게 좋을 겁니다. 요 며칠 조용한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어떤 놈들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듯 하거든요." "아, 그, 그래요?" 나는 내심 신경쓰이게 만드는 리건의 시야에서 벗어날 거리를 마련해준 듀비가 반가워서 반색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예. 아무래도 제가 생각하는게 틀렸으면 하지만 말입니다." 진지한 어조로 대답한 듀비는 어느 순간 무엇을 발견했는지 내 팔을 냉큼 움켜잡고는 일행들이 가는 방향을 벗어나 데리고 가기 시작했다. "어어.. 듀비?" "듀비,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그에 놀란 첼릿이 다가와 물었지만, 듀비는 첼릿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에게 말했다. "가서 램버트좀 데리고 와주겠습니까?" "램버트씨를... 요?" 당황한 첼릿이 되묻자 듀비는 고개를 살짝 까딱해보이고는 발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나를 데리고 갔다. "듀비, 어디 가는 거에요?" "가보시면 알게 됩니다." 듀비가 나에게 해가 될 일을 할리가 없으니 뭔가 이유가 있나보다... 싶은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가 이끄는대로 순순히 따라갔다. 잠시 후에 첼릿이 램버트를 데리고 우리 뒤를 따라왔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우리는 완전히 일행들에게 벗어나 있었다. "이거, 도대체 어딜 가는 거야?" 램버트가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던지 드디어 입을 열어 궁시렁 거리는데 듀비가 걸음을 딱 멈췄다. "다행이 있군요." 그의 말에 그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어떤 커다란 나무에 내 다리보다도 더 굵은 덩굴이 칭칭 감겨 있었는데, 그 덩굴에 늙은 호박같이 생긴 열매가 드문 드문 달려 있는게 보였다. 늙은 호박중에서도 동글동글한게 아니라 오이처럼 길죽하고 아랫쪽이 좀더 굵은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작은 건 내 팔의 반만 하고 큰건 내 팔 전체 길이 만했다. "헤에... 열매인가요?" "그렇습니다. 가끔... 먹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먹는 것 보다는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요." 내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한 듀비는 내 팔을 잡은 손을 놓고 가볍게 뛰어 오르더니 가장 가까이에 있던 열매를 하나 따까지고 내려왔다. "제가 너무 민감한게 아닌가 생각이 되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하는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무일 없다면 저녁에 씻어내면 될 겁니다." 그렇게 뜬금없는 말을 하던 듀비는 차고 있던 검을 들어 그 열매를 반으로 뚝 자르더니만 다짜고짜로 내 머리 위에다가 그 열매의 즙을 들이붓는 것이었다. "에엑..." 그 열매는 마치 야자수 열매처럼 즙이 많아서 따로 짜지 않고 절단면만 기울였는데도 물이 많이 나와서 내 몸을 타고 흘러내릴 정도였다. 열매라고 해서 달콤할 줄 알았는데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온 즙을 살짝 맛보았더니만 쓰고 신 맛이 너무 강해서 나도 모르게 인상이 팍 찡그려질 지경이었다. "으엑... 너무 시네요... 이걸 먹는단 말이에요?" 몸을 한번 부르르 떨면서 투덜거리자 듀비가 피식 웃으며 대꾸해주는 거였다. "가끔은... 입맛이 묘한 녀석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러면서 그는 나머지 반동강 난 열매의 즙을 첼릿에게 씌워주고 다른 열매 하나를 더 따서 램버트와 자신도 뒤집어썼다. "도대체 우리가 왜 맛도 없는 과즙을 뒤집어 써야 하는 거야?" 램버트 또한 듀비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는 다는 걸 알았는지 과즙을 뒤집어써도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는 했지만, 끈적거리는 과즙이 기분 좋을리 없었던지 툴툴 거렸다. 그런데, 그에 대한 대답이라도 하려는 양 저 멀리에서 우리 일행임이 분명한, 다급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거였다. ====================================================== 제 37화 드디어... (2) 그런데, 그에 대한 대답이라도 하려는 양 저 멀리에서 우리 일행임이 분명한, 다급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거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빠르게 일행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앞 뒤 안가리고 사람들 틈으로 뛰어들려고 했던 나는 일행들이 보이는 지점에서 첼릿과 듀비의 팔에 잡혀 버렸다. "자자, 진정하세요 해인님. 무작정 뛰어든다고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고요." 낮게 속삭이는 첼릿의 말에 듀비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힉... 저 거미 놈들에게 걸렸구만..." 램버트의 경악 어린 말투를 들어보니 전에 여기 왔을때 만난 모양이었다. 그의 말대로 일행들을 공격하고 있는 건 커다란 거미였다. 시커먼데다 온 몸에 털이 숭숭 난 그 녀석들은 몸통이 성인 남자 머리만해서 몇놈 정도라면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을텐데 수없이 많은 놈들이 나무 위에서 일행들 머리 위로 마치 소나기 처럼 뚝뚝 떨어지니 문제였다. "그럼 어떻게 해요? 보고만 있어야 하나요?" 아버지에게 말 잘못하는 바람에 아버지를 화나게 하고 화해 하느라 잠시 기억의 저편으로 밀쳐 놓기는 했었지만, 아나콘다 정령들의 일로 인하여 나는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기에 거미떼에 공격 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자 듀비의 말이 곧바로 들려왔다. "저 안으로는 저희 셋이 들어가겠습니다. 저런 난전에서는 해인님이 곁에 있는게 오히려 저들에게 불편할 것입니다. 해인님은 여기 계십시오." 냉정하게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맞는 말이었기에 나는 할말이 없었다. 나는 체술에는 영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 내가 기가 팍 죽어 주춤거리자 듀비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계시라는 것은 아닙니다. 저 놈들은 불에 약하니 불의 정령들을 불러서 끌어 올려진 사람들을 구해주십시오." "예?" 듀비의 말을 이해 못한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자 듀비가 빠른 어조로 설명했다. "저 놈들은 먹이 위에 떨어져서 독이 묻은 침으로 기절시킨뒤 거미줄로 꽁꽁 묶어서 나무에 매달아 놓고 체액을 빨아먹고 삽니다. 그러니 아마 저놈들의 독에 당한 사람들은 나무 위로 끌어 올려져 있을겁니다. 죽지 않았을테니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요. 해인님께는 그들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여유가 있으시면 우리도 도와주시구요. 해인님께 저놈들이 덤빌 염려는 안 하셔도 됩니다. 해인님께 발라드린 과즙은 저놈들이 싫어하는 냄새를 풍기기 때문에 해인님께는 접근 하지 않을겁니다. 아셨지요?" 숨도 안 쉬고 쏟아지는 듀비의 말에 숨도 안 쉬고 듣고 있던 나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고 숨을 쉬었다. "그럼, 잠시 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첼릿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체술에 능력있는 셋은 총알같이 튀어나가 사람들에게 합류했고 뒤에 남아있던 나는 돌아가면 검술을 진지하게 배워볼까...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정령들을 불러냈다. "셀리맨더, 운다인!!" 혹여 나무 위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다가 나무에 불이 붙을까봐 염려하여 물의 정령도 불러내자 불타오르는 도마뱀들과 아름다운 여성들이 속속들이 나타났다. "자아, 잘 부탁해!" 하급 정령들은 어린아이들 같아서 그들을 불러내서 뭔가 부탁하려면 이거해라 저거해라 라고 일일이 지시를 해야하고 계속 지켜보면서 변수가 생길때마다 조정을 해줘야 하지만, 중급 정령 부터는 그들 스스로의 지능이 뛰어나기때문에 방향만 지시해주면 그들 대부분이 왠만한 것은 알아서 해결해주고는 했다. 거기다가 상급으로 올라가면 내가 따로 신경써서 기운을 전달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스스로 기운을 가져다 쓰기때문에 내가 딴데 신경을 써도 상관 없었다. 그런것 때문에 나는 보통 상급 정령들을 불러내지만, 이번에는 숫자도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쉽지만 상급 정령들을 불러낼 수는 없었다. 한 무리의 운다인들과 셀리맨더들은 거미들이 죽치고 있을 나무 위로 향했고, 나머지 십여명의 셀리맨더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사람들은 갑작스레 기습 공격을 당했을텐데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서로 도와가면서 거미들에게 대항해갔다. 하지만 위에서 갑작스레 떨어져 독침을 꽂으려고 하는 거미들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었는지 쓰러지는 사람들도 속속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독침에 당해도 기절만 할뿐 죽지는 않는 거라고나 할까? 파틴 클리우드 남작과 앤더슨 스니볼리는 자신들이 이런 난전에 도움이 안된다는 걸 아는지 자신들의 주위에 실드를 친 채 한쪽 구석에서 얌전히 있다가 자신들에게로 떨어져 내리는 거미 들만 공격하여 죽이고 있어다. 쥬디 블러드무어경은 그래도 기사 작위를 딸 정도로 검술 실력이 있어서 그런지 바람의 정령들을 불러내어 자신을 돕게 하는 한편 자신도 앞으로 나서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리건과 에아머스 차트워드 경을 보니 그들은 그야말로 종횡무진 하면서 단번에 두 셋의 거미를 한꺼번에 처리하고 있었다. 거기에 첼릿과 듀비, 그리고 램버트까지 가세하고 내가 불러낸 셀리맨더들까지 합류하자 상황은 훨씬 나아지고 있었다. 셀리맨더들이 나무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거미들이 사람들에게 닿지 않도록 보호해주자, 위에서 떨어지는 거미들 신경쓰랴, 밑에 떨어져서 달려드는 놈들 신경쓰랴 사방으로 신경이 분산되어 쩔쩔매던 용병들도 이제는 위는 거들떠보지 않고 아래에서 떨어져 내리는 놈들에게만 마치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신나게 무기들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후에는 마치 뻔데기처럼 거미줄에 칭칭 감겨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무 윗쪽으로 보냈던 셀리맨더와 운다인들도 활동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에게 딸려서 거미들도 같이 떨어졌다는 거였지만, 사람들을 안전하게 땅에 내려놓던 운다인들이 사정없이 처리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일행들에게 여유가 생기자 마법사들의 실드 안에서 몸을 보호하며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안내인이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 일대에는 놈들의 영역이니 여기 있다가는 끝 없이 달려들겁니다. 어서어서 여기서 벗어나세요." 그의 말을 들었는지 몬트리올경이 거미 세마리를 처치하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더니 한쪽을 가르키며 외쳤다. "저쪽으로!! 기사들은 진로를 뚫고 용병들은 뒷쪽을 방어하라!" 그러자 듀비가 내쪽을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해인님!!" "알았어요. 실프!!" 듀비에게 대답하며 그쪽으로 뛰어가던 나는 땅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수십명의 실프들을 불러냈다. 실프들이 나의 부름에 답하여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여기 저기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허공에 둥둥 띄워 날아가는 걸 확인한 나는 알아서 중간 지점을 차지한 마법사들 옆으로 합류했다. 다른 국 사람들도 벌써 그 거미들의 영역을 벗어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저 멀리 이동하고 있었다. 첼릿은 내 옆으로 돌아오고 리건과 듀비, 그리고 에아머스 차트워트경이 맨 앞에 서서 앞에서 달려드는 놈들을 일사천리로 해결하기 시작했고 뒤에 있던 기사들이 사방을 경계해주는 가운데 체술이 떨어지는 우리들은 일행의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하여 그들의 속도에 맞춰 뛰기 시작했다. 얼마나 달려갔는지 서서히 숨이 차서 헥헥거리며 무거워진 발을 힘겹게 뗄 무렵 드디어 거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몬트리올경이 외쳤다. "정지." 엄청나게 그 반가운 말이 들리자마자 나는 맨 바닥에 주저앉아 헉헉 거리며 숨을 골랐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다. 기사들은 쉬지도 못하고 주위를 경계했으며, 용병들은 번데기처럼 거미줄에 둘러쌓인 사람들의 몸에서 거미줄을 떼어냈고, 마법사들은 꼼짝 못한 그들을 살펴보기 위해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해인님, 저쪽으로..." 한가운데 떠억 버티고 앉아 이리뛰고 저리뛰는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내 존재를 보다 못해 첼릿이 나를 부축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을 구석자리로 데리고 갔다. "아아... 이럴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나는 무능력한 거 같단 말이야..." 속으로 시무룩하니 생각하면서도 내 곁으로 다가온 듀비와 첼릿, 그리고 램버트가 아까 바른 과즙들과 땀들이 뒤섞여 지저분한것을 보고는 운디네들을 불러내 그들의 몸을 씻어줬다. 덤으로 나도... "어이, 나도 좀 부탁하지?" 그러면서 슬금슬금 다가온 리건과 에아머스 차트워드경, 그리고 내친김에 리건의 수하들까지 다 씻겨줬다. "후훗, 이럴때는 정령사들이 참 편하게 느껴진단 말이야." 나도 은근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리건의 말에 반박은 못하고 입맛만 쩝 다시며 고개를 돌리는데 클라우드 남작이 꼼짝도 못하는 이들에게 마법을 걸어주는게 보였다. "큐어~!!" 그의 시동어를 들은 나는 눈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큐어 마법은 해독작용을 해주는 마법인데, 이건 몸 속에 있는 독에 반응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나를 아무리 집어넣어도 몸 속에 독이 없으면 아무런 능력도 나타내지 못한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마나를 뭉텅으로 집어 넣어도 몸속의 독만 해독시켜줄 뿐 딴 사건이 발생 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치유 마법은 배우지 못하게 한 노만 스승도 이 마법만은 가르쳐줘서 익혀놨었다. 물론, 주위에 중독된 사람을 발견하지 못해서 실전에서 써먹지는 못했지만, 지금 그 마법이 필요하다면 내가 도움이 되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체력이 딸려서 헥헥 거린거지 마나가 딸려서 헥헥 거린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 내가 마법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서 나는 잽싸게 클라우드 남작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거기서는 엔더슨 스나볼리도 아까 그 왕거미 독에 당한 사람들에게 붙어 마법을 시전해주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백작님?" 다른때에는 부상자들 치료하는데 가까이 오지도 않던 내가 다가오자 볼일이 있는 줄 알았던지 남작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아, 저 도와드릴까 하고요. 지금 사용하시는게 해독 마법 맞지요? 해독 마법은 저도 익혔거든요." "호오... 백작님이 마법도 익히셨습니까? 그런데 왜... 아, 하긴... 정령술이 그렇게 강하니..." 내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남작은 스스로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에게 옆에 있는 사람을 가르켜보였다. "그럼 부탁 드리겠습니다." "넵." 나도 드디어 부상자들에게 뭔가 해줄 수 있다는 기쁨으로 남작이 가르킨 용병에게 다가간 나는 그 기쁜 마음 그대로 마나를 듬뿍 넣어서 주문을 외우고 시동어를 외쳤다. "큐어!!" 그러자 남작이 시전했을때와는 비교도 안되는 찬란한 녹색의 빛이 내 손에서 뿜어지더니만 용병의 몸 속으로 스며드는 거였다. 그걸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작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움직이자 입을 열었다. "저어... 백작님?" "네?" 그의 말에 내가 혹시 잘못한게 있나 싶어서 불안한 마음으로 돌아보는데 남작이 약간은 허탈한 표정으로 말하는 거였다. "저기... 그렇게 잔뜩 써주실 거라면 한번에 한 사람씩 하시지 말고 서너 사람에게 한꺼번에 써 주시는게 어떨까... 싶은데요? 마나가 아깝군요." "아.하.하.하... 그, 그렇습니까? 제, 제가 아직 마법에 능숙하지 못해서 말이죠." ====================================================== 제 37화 드디어... (3) 어찌 되었든, 그럭저럭 무사히 거미의 독에 중독된 자들을 - 원래 그냥 둬도 몇시간 후면 자연스레 마비에서 풀린다고 하지만, 그 시간 안에 뭔 일이 생길지 모를 위험한 장소라서 일부러 마법을 시전해준 것이다 - 깨워놓자, 경비병을 세워두고 모두들 잠시 휴식을 취하는 가운데 지도자들이 회의를 벌였다. 그래봤자 리건과 몬트리올경, 클라우드 남작, 그리고 용병단의 대장 트레비스와 안내자뿐이었지만... 몬트리올경이 거미들이 제일 적어보여 뚫기 쉬울 것이라 판단, 제시한 방향으로 줄기차게 달려 왔더니만 다른 국가들 사람들과 동떨어져 버렸던 것이다. 뭐, 정령들을 풀어 놓는다면 그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을테지만, 무작정 그들을 찾아 합류하는 것 보다는 여기가 어디인지부터 알아차리고 우리가 찾아갈 던전과의 방향과 거리를 가늠하는게 먼저인 모양이었다. 다행이 내 지위가 그다지 낮지 않아서 나는 그들이 회의하는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는데, 처음에는 작은 소리로 조용조용 이야기 하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흥분 했으니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건 너무 위험 부담이 큽니다." 트래비스의 목청이 제일 먼저 터져 나왔다. 그러자 그 뒤를 얄미우리만치 냉정한 몬트리올 경의 목소리가 이었다. "당신의 의견은 잘 알았소." "뭡니까, 정말 우리끼리 던전을 향해 갈겁니까?" 기가 막히다는 트래비스의 뒤를 이어 이번에는 클리우드 남작이 물었다. "몬트리올경... 나도 저 자의 말에 동의하오만... 너무 위험 부담이 큰 거 아니오? 우리가 던전에 빨리 도착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이 지도에 의한 것일뿐인데... 어차피 이 지도는 정확한 것도 아니지 않소? 게다가 우리끼리 간다는 것도 걸리고..." "물론 저도 그걸 생각 안 해본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남작, 우리가 다른 국가 사람들과 같이 간다고 해봤자 몬스터들이 들이닥칠때 어디 그들이 우리를 도와주기라도 했습니까? 지금까지 계속 우리는 우리끼리만 싸워 왔습니다. 그러니 같이 가든 따로 가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거기다가 지도가 정확하지 않다고 해도 얼추 비슷하지는 않습니까? 차라리 우리끼리 가는 것이 더 좋을 듯 합니다." 몬트리올경의 웅변에 남작이 조금은 흔들리는 모양이었다. 그는 뭐라 하는 대신 리건을 돌아보았다. "후작님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리건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몬트리올경, 물론 공을 세우고 싶어하는 자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네. 거기다가 지금 있는 일행들만으로도 대단한 실력이라는 것도 납득하고. 하지만 말이네,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 세 국가로 나뉘어 따로따로 행동해도 수월하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것은 여기는 대략적으로 알려진 곳이기 때문일세.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니지. 우리는 정확한지도 아닌지도 모를 지도 한장만 달랑 가지고 던전을 찾아가야 한다는 말일세. 거기에다가 던전에 또 뭐가 있는지도 모르지.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던전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 치더라도 우리가 공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은가? 어쩌면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이 제일 먼저 죽으러 간다는 것과 같을지도 몰라." 그의 말에 몬트리올 경은 멈칫 거렸고 트래비스는 얼굴이 펴졌다. 그런 그들을 힐끔 바라본 리건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꼭 그렇다고 해서 다른 국가들과 합류해야 하는 건 아니지. 어차피 그들이 우리를 기다려주지도 않을테지만 말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각 국가 일행들에게 지도를 제공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선은 같이 행동 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국가간에 통신 장비같은 것은 준비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 그들과 연락을 하려면 그들이 있는 곳 까지 가야만 했다. 하지만, 만약 통신 장비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거기로 갈테니 기다려달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우리를 기다리다가 몬스터의 침략이라도 받으면 어쩐단 말인가? 물론 그쪽이 움직이다가 습격을 당하면 그들의 책임이지만 말이다. "그럼 후작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던전에 무엇이 있고, 그 물건들이 어디로 배분되는가만 알면 되는 것일세. 굳이 거기에 있는 것들을 차지하지 않아도 상관 없어. 게다가 어차피 거기서 가장 위험한 건 다른 국가들과의 신경전 때문에라도 마법사 길드에서 차지할거고 말이야. 그러니 일부러 먼저 가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길을 닦아줄 필요는 없지 않나?" "으음..." 몬트리올경에는 잠시 못마땅하다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건 정말 잠깐이었을 뿐, 그도 리건의 말이 옳다고 생각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후작님의 말씀은 다른 국가들과 합류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의 뒤를 따라가자는 말씀 이시죠?" "그렇지." 몬트리올경의 질문에 리건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남작이 조심스레 말했다. "저어... 저 또한 후작님의 의견에 찬성이지만 말입니다, 만약 다른 국가 사람들의 뒤를 따라 간다면 문제가 한가지 생길텐데요." 그의 말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남작에게로 몰렸다. 트래비스의 시선에는 '일이 잘 해결되었는데 왜 지금 초를 치려고 하냐...' 하는 원망의 빛까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남작은 그런 시선에도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진로를 보하할때 던전에 도착할때까지도 우리 뿐만이 아닌 다른 국가 사람들도 최소한 여러번은 몬스터들에게 공격을 당할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선 국가 사람들이 몬스터와 싸운 장소를 지나가야 할텐데...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동안 몬스터와 한바탕 격전을 치르면 황급하게 그 곳을 떠나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서 흘린 피 냄새를 맡은 다른 몬스터들이 몰려들것을 대비해서였다. 만약 우리가 다른 일행들의 뒤를 따라갈때 그들이 몬스터와 격전을 치룬 장소에 다른 수많은 몬스터들과 우리가 같이 도착한다면 그것만큼 낭패는 없을 것이리라. 남작은 바로 그걸 이야기하는 거였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은 그의 말에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는데 리건만은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것이었다. "걱정할 것 없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게는 뛰어난 정령사가 있으니까." 근처에서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한번 들리기 시작하자 계속 듣고 있던 나는 뜬금없이 내 이야기가 나오자 의아해졌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나와 비슷한 표정으로 근처에 있던 날 한번 보더니 다시 리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들을 대표로 남작이 묻자 리건이 느긋하게 대꾸해줬다. "남작, 자네는 다른 일행들을 탐색하는 것만으로 바쁠테니 계속 앞쪽에 뭐가 있는지 탐색할 수는 없겠지. 그걸 꾸준히 하는 것도 힘들테고, 마법이 시전될동안 우리는 계속 기다려야 할테니 행보도 늦어지겠지. 하지만, 누군가가 우리 앞을 정탐해서 수시로 보고해주면 어떨까? 내 알기로 상급 정령들은 정령술사와 대화 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던데... 정 그게 아니더라도 간단한 의사는 표시할 수 있을 거 아닌가. 앞쪽에 몬스터와 싸운 흔적이 있는지 없는지 말이야." 그제야 사람들이 이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제가 미처 백작님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남작의 말에 어느 누구도, 나 조차도 웃지 못했다. 나도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역시 오래 산 존재는 달라도 뭔가 다른 걸까나? 그렇게 해서 우리는 다른 국가 사람들을 쫓아가기로 했고, 그 즉시 남작이 다른 일행들이 어디 있는지 알기 위해 탐색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말 우습게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한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탐색 마법을 펼친 결과 녹스국이나 마르타국 일행 또한 새클턴 일행의 뒤를 쫓는 모습을 보여 줬던 것이다. 더욱이 새클턴국 일행측은 이런 움직임을 알고 못마땅했는지 진행 속도를 늦춰서 결국 며칠 뒤에는 네 국가 일행이 그냥 합류하게 되었다. 몬트리올경은 그것 보라는 듯 우리끼리 곧바로 던전을 향해 갔어야 한다고 궁시렁대기는 했지만, 다른 일행들은 차라리 잘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계속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그래도 무사히 물리쳐 나가면서 앞으로 앞으로 전진했다. 그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희생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어 던전에 다다랐을즈음 우리 일행들은 1/3가량 줄어 있었다. 웃긴건, 이것도 예상 외로 뛰어난 실력자들이 파견되어 왔기 때문에 처음 정글에 들어올당시 예상했던 숫자보다 많이 남은 편이라 사람들의 분위기는 침울하기는 커녕 약간은 들떠 있을 정도였다. 뭐, 어쩌면 드디어 목적지인 던전에 다다랐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그쯤 되자 사람들은 여전히 각국 일행을 중심으로 움직였지만, 전체적인 지시는 새클턴 국 일행을 따랐기 때문에 은근히 새클턴국의 리더인 보르바 할레언 백작을 전체 일행의 리더로 암묵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여깁니다." 일행 중 맨 앞쪽에 있던 안내자들의 말에 일행들이 웅성웅성 거리며 눈앞의 광경을 바라 보았다. 그 곳에는 마치 산 단면을 단칼에 잘라낸 듯한 깎아지른 절벽이 떠억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참 특이하게도 그 절벽이 얼마나 크고 높은지 우리가 있는 곳에서는 절벽의 위와 옆의 끝이 보이질 않는다는 거였다. 뭐, 정글의 무성한 수풀의 방해로 인해 양 옆은 끝까지 볼 수가 없다지만, 위로도 까마득하게 높았다. 각도도 수직인데다 높이도 까마득하자 어느 누구도, 심지어 마법사들도 위로 올라가서 살펴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 절벽에 뻥 뚫린 커다란 동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던전이 이 안쪽에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저희도 끝까지 들어가서 확인을 하지는 못했지만, 침입자들을 방어하는 능력을 보아할때 정말 대단한 마법사가 만든 것이 틀림 없습니다." 할레언 백작의 말에 전에 이 곳에 한번 와봤던 안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 우선은 여기서 하루를 보내면서 의논을 한 뒤 내일 아침 들어가는게 어떻겠소이까?" 다른 이들이 드디어 던전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흥분한데 반하여 여전히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마르타국 일행의 리더인 폴트팩트 백작이 제안하자 할레언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으신 말씀이오. 어차피 시간도 늦었고 하니 오늘은 이 근처에서 야영을 하기로 하고, 우리는 그 동안 내일 일정에 대해 의논합시다." 그렇게 전체 일행의 암묵적인 리더가 결정을 내리자 아랫 사람들은 그가 따로 지시를 내리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우르르 사방으로 흩어져 노숙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나는 첼릿이 다 알아서 해주고 나중에 데리러 올 것을 알기 때문에 - 어느새 익숙해져서 게으름을 피는 나였다. - 그거에는 신경쓰지 않고 커다란 동굴에 슬금슬금 다가갔다. "해인님, 가까이 다가가시면 위험합니다." 그 모습을 본 듀비가 잽싸게 곁으로 붙으면서 말하자 나는 피식 웃었다. "괜찮아요. 그냥 살펴보려는 것 뿐이니까." 동굴은 얼마나 큰지 높이가 약 2m 는 충분히 넘어보였고 너비도 넓어서 승용차 한대가 쉽게 드나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승용차가 아니라 12인용 승합차도 충분해 보였다. 안쪽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겉으로 본 동굴 벽이 매끈매끈한게 자연적으로 생긴게 아니라 인공적으로 누가 뚫어놓은 것 같았다. 듀비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다가가 슬쩍 만저보니 딱딱하고 차가운 돌벽의 느낌이 고스란히 젼해졌다. 듀비가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게 팔을 잡는 바람에 동굴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그 옆의 절벽으로 이동하며 만져보니 커다란 바위의 까끌까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힘을 주고 긁어내리니 바위 위에 붙어있던 흙덩어리가 바스라져 흘러내렸다. "으음..." 분명히 바위가 맞는데 뭔가 좀 이상했다. 그래서 고개를 갸웃 거리는데 듀비가 물어왔다. "해인님? 뭔가 이상합니까?" "글쎄요... 그걸 나도 모르겠네요..." 나는 얼빵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손을 내밀어 눈 앞의 절벽을 이루고 있는 바위를 만졌다.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확인해도 분명히 바위가 확실했다. '거참... 진짜 바위가 맞는데... 어떻게 실프들이 그냥 통과할 수가 있는 거지? 실프들이 땅속에도 들어갈 수가 있었던가? 끄으응...' 그랬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절벽을 아무 생각없이 보고 있는데 어떤 실프 녀석 한명이 친구와 손을 잡고 재잘대며 절벽의 바위를 그냥 스윽 통과해서 들어가는 거였다. 절벽에서 실프들의 행동을 관심있게 관찰한 적도 없었던 나는 그 모습이 의아하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실프들도 땅 속으로 들어갈 수 있나보다... 라고 생각하려고 했는데 실피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각 마법이군.]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이프리트와 노아스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렇군.] [누군지 몰라도 대단한걸? 꽤 넓은 지역에 걸쳐 이런 강력한 마법을 걸어 놓다니...] [환각 마법이요?] 듀비가 있어서 입으로 내지는 못하고 정령의 대화법으로 질문하니 실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눈을 현혹시키다 못해 촉감까지 확실하게 느낄 수 있게 해놨군. 그정도면 큰 능력은 아니다만, 꽤 넓은 범위에다 통채로 걸어놨으니 대단하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야, 이거 어째 느낌이 묘하다?] 실피드가 말을 건넨 것은 아버지였다. 아까부터 다른 정령왕들이 한마디씩 한거에 비해 아버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절벽에다 손을 댄 채 지금까지 아무말도 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실피드가 질문을 던지자 그제야 절벽에서 손을 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에 정령의 기운이 섞여 있어. 물의 정령같은데... 능력으로 보아하니 상급 정령 이상인데? 흠, 좀더 알아봐야겠군.] 아버지는 그렇게 놀라운 말을 툭 내뱉더니 그대로 샤샤삭 하며 절벽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실피드도 얼른 아버지의 뒤를 따라 절벽 속으로 뛰어들었고 노아스와 이프리트도 나에게 미소를 보인 뒤 그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뒤에 뭐가 뭔지 도통 이해를 못한 나만 남겨두고 말이다. '이런...' ====================================================== 제 37화 드디어... (4) 잠시 후 첼릿의 부름으로 듀비에게 이끌려 노숙 준비가 끝난 공터로 간 나는 저녁을 먹고 난 뒤 한가롭게 마법서를 펼치고 있던 파틴 클라우드 남작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남작, 바쁘십니까?" "응? 아니 백작님께서 저에게 무슨 볼일이십니까?" 남작은 무척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까지 오는 도중 나는 이런 식으로 남작에게 다가와 말을 건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걸 깨달은 나는 한번 삐질 웃어보이고는 본론을 꺼냈다. "저기, 여쭈어볼게 있어서 말이죠. 그... 던전이 있다는 동굴 말입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 되지 않습니까?" 아주 진지하게 물어보자 남작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펼쳤던 마법책을 덮고 내쪽으로 몸을 돌렸다. "흠... 그러고보니 백작님도 마법사셨죠?" "예? 아아... 이제 겨우 발을 디딘 햇병아리입니다만..." 남작의 말에 쑥스러워서 머리를 긁적이는데 남작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러니 백작님께서 마나의 기운을 느껴도 하등 이상할게 없겠지요." 남작의 말에 나는 멈칫 했다. "아, 그럼 남작께서도 눈치 채셨단 말입니까?" 남작도 인간 세계에서는 고위 마법사에 속하는데다 이러한 고대 유물 전문이었으니 그 절벽이 환각 마법이라는 걸 눈치 챘을지도 몰랐다. 그래 이야기가 쉬워지겠다 생각해서 반색을 했는데 남작이 마치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 같은 인자한 미소를 띄우며 이렇게 말하는 거였다. "허허, 백작님 저 또한 마법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도착했을때 동굴 안에서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는건 진작에 눈치 챘지요. 뭐, 그게 아니라고 해도 던전을 발견한 사람들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동굴 안에 들어가는 자를 막기 위한 여러가지 장치가 있다고 말입니다." 가만히 듣자하니 내가 말하고 싶은 것과 남작이 말하는 것이 약간 핀트가 어긋난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약간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에... 그, 그랬지요. 아, 그런데 저는 동굴이 있는 절벽 자체에서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혹시... 저 절벽이 환각 마법인 것은 아닌지..." 아버지를 비롯한 정령왕들이 환각 마법이라고 했으니 틀림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작은 내 조심스러운 말에 껄껄 거리며 웃더니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허허허,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니 그런 의심을 할 수도 있겠군요. 사실 환각 마법중 고위 마법은 사람의 시각은 물론 청각이나 촉각까지도 좌우할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남작은 거기서 잠시 말을 끊고 눈짓으로 저쪽으로 보이는 엄청 커다랗고 높은 절벽을 가르켰다. "저렇게... 대단위로 환각 마법을 펼치려면 엄청난 마나가 필요할 겁니다. 아마도... 8서클 이상의 마나를 가진 8클래스 익스퍼트의 마법사가 수십개의 마법석을 가지고 마법진을 펼쳐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드래곤이 만들었거나요." 그리고서는 날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물론, 인간들 중에 8클래스를 터득한 대마법사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던전을 숨기는데 저런 엄청난 마법을 사용할 필요는 없을테지요. 던전이 왠만한 왕성만큼 크지 않는 이상 그런 마법을 사용하는 건 엄청난 낭비일테니까요." "어, 그러면 만약 드래곤이라면요?" 내 질문에 남작은 잠시 생각하는지 흐음... 거리더니 쉽게 입을 열었다. "뭐, 특이한 취향을 가진 드래곤이거나 아니면 레어를 잠시 비우게 된 드래곤이라면 저런 마법을 펼칠수도 있겠지만....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몬스터들을 조정해서 자신의 레어를 지키게 하면 그만일텐데. 거기다가... 환각 마법을 펼쳤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이왕 펼칠거 뭐하러 동굴은 만들어 놓는단 말입니까? 그냥 모두 절벽으로 해놓으면 될텐데..." 남작의 말은 하등 틀린게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오... 그것도 그렇군요." 하지만, 그의 논리가 맞다고 해도 아버지를 비롯한 정령왕들이 나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으니 저 절벽은 정말 환각 마법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침입을 막으려 했다면 왜 동굴을 만들었지? 남작의 말대로 그냥 몽땅 절벽으로 두를 것이지...' 남작의 너무나 논리적인 말에 저 절벽이 환각 마법이란 결론을 이끌어내기는 커녕 제대로 시도 조차 못한 나는 오히려 이해 할 수 없는 난제를 얻는 바람에 남몰래 끙끙거려야 했다. "뭐냐? 표정이 왜 그래?" 한참동안 생각한 뒤에 저 환각 마법을 만든 마법사가 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나보다... 라는 결론을 내릴 즈음 리건이 다가왔다. 요 근래에는 아버지를 비롯한 세 정령왕이 리건과의 대화를 사사건건 방해 놓고 있어서 예전에 그 키스 사건 이후로 자꾸 의식되던 리건을 피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분들이 결계를 조사하러 가시는 바람에 나는 리건을 정면으로 맞닥드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태연하게 행동하려고 나는 슬쩍 리건의 시선을 엇나가게 맞으면서 대꾸했다. "아니... 뭐 좀 생각하느라고..." "뭘 생각하는데 그렇게 심각해? 흠, 그런데 오늘은 방어벽들이 안보이네? 어딜 갔나?" 자신이 나에게 다가왔는데도 정령왕들이 나타나지 않자 리건이 신기하다는 듯 주위를 훑어 보았다. "아아, 절벽 속으로 갔어요. 좀 이상하다고..." 거기까지 말한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리건을 돌아봤다. '그러고보니 드래곤이 마법의 종족이라고 했었던가?' "리건, 저 절벽 보면서 이상하다는 거 못느꼈어요?" "왜? 엘라임이 뭐라고 해?" 리건이 싱글거리면서도 목소리를 낮춰서 물어보는 배려는 해줬다. 그에 나도 주위를 흘끗 바라보며 똑같이 목소리를 낮춰서 대꾸해줬다. 듀비랑 첼릿은 내일 본격적으로 던전 안으로 들어간다니까 마지막으로 검술을 대련해보고 싶었던지 같이 사라져 있었고, 렘버트도 자신도 같이 하자고 덩달아 같이 가고 없어 현재 내 주위에는 날 신경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보통 목소리로 대화를 해도 들을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목소리는 자연스레 작아졌다. "저 절벽이 다 환각 마법이라고 하던데요? 알고 있엇죠?" "응, 도대체 저 넓은 지역을 혼자서 독차지 하고 싶어하는 녀석이 누구인지 궁금해지던 참이야." "그런데 왜 동굴은 만들어 놨을까요? 거기 안에서도 침입자들을 저지하는 여러가지 장치를 해놨다면서..." 내 질문에 리건은 내가 끙끙 거리고 고민한 것에 비해 너무나도 단순 유쾌 명쾌하게 대답하는 거였다. "자기가 드나들 입구가 필요했나보지. 어차피 그 안에 침입자들을 막아놓는 장치를 해놨다고 해도 그 장치를 다 알고 있는 본인이야 쉽게 드나들거 아냐?" 그의 명쾌한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뻔 했지만, 그 순간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반박했다. "공간 이동 마법은 뒀다 뭐해요?" 내 말에 리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바라보더니 물었다. "너 아직 공간 이동 마법 안 배웠지?" 이제 겨우 4클래스 마법 익히고 있는 내가 무슨 공간 이동 마법이겠는가? 그래 기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더니만 리건이 설명해줬다. "공간 이동 마법은 이동할 장소의 좌표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세밀한 마법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그런데 이동할 장소가 강력한 마법 결계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봐라. 분명히 결계의 마나에 의해 공간 이동 마법에 영향이 갈텐데 누가 마법으로 드나들고 싶어하겠어? 9클래스의 마법사이거나 드래곤이라면 몰라도." 리건의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 하던 나는 다시 한번 말해봤다. "저 던전을 만든 사람이 9클래스의 마법사일수도 있잖아요? 아까 클라우드 남작에게 물어보니까 저 크기의 환각 마법을 만들려면 최소한 8클래스 이상의 마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하던데..." "9클래스 마법사라면 애써서 따로 입구를 만들 필요도 없었겠지. 아니면 그가 아닌 9클래스까지 익히지 못한 다른 존재가 드나들 필요가 있었거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9클래스 운운했지만, 9클래스까지 익힌다는 건 정말 하늘에 있는 별을 따는 것만큼 힘든 일이었다. 오죽 어려웠으면 다른 클래스는 유져, 익스퍼트, 마스터란 단계가 있는데 유독 9클래스만 하나의 마법을 익혀도 마스터라고 인정해주겠는가? 예전에 마법 스승 노만에게 지나가는 투로 9클래스까지 간 마법사가 몇명이냐구 물었을때 노만이 피식 웃으며 마법 길드에 정식으로 기록된 이는 단 한명이라고 했다. 바로 최초로 대 마법사 호칭을 받은 메이크피스였다. 하지만, 그것도 그가 9클래스일거라고 추측을 할뿐, 그가 9클래스 마법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걸 본 자는 한명도 없다고 했다. 솔직히 8클래스 마스터도 흔하지 않아 어쩌다 가끔 등장할때마다 초천재라는 이야기를 듣는데 - 물론 인간중에서다. 엘프나 하프 엘프들중에서는 인간들 사이보다 조금 더 자주 등장한다 - 9클래스 마스터가 어떻게 나오겠는가? 그래서 마법사들은 8클래스란 말도 경외감에 젖어 이야기 하건만 9클래스란 말을 옆집 애 이름 부르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걸 보면 드래곤이란 존재가 정말 마법의 종족이라는게 맞는 듯 했다. 그걸 생각하면서도 리건의 말이 맞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는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리건이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해인아, 너 얼굴에 뭐 묻었다." "에?"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정글을 뚫고 지나가는데다 매일 매일 노숙하는 상태라 보통 사람들이라면 깨끗함을 유지할 수 없었겠지만, 나는 물의 정령왕을 아버지로 둔 덕에 언제 어느때고 몸을 씻을 수 있어 정글에 있는 사람 답지 않게 깨끗함을 유지 할 수 있었다. 그래 리건의 말에도 아무 의심 없이 놀라면서 뺨을 손으로 쓸어내렸는데 리건이 뚱 한 얼굴로 말했다. "거기가 아냐. 그래서 지워지겠냐? 이리와봐." 가볍게 손짓하는 태도와 그의 말에 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에게 슬쩍 가까이 다가가 앉아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자 리건이 입가 가까이를 닦는 척 하더니만 갑자기 내 턱을 쥐고 얼굴을 끌어 당기더니만 입술에 쪽 소리 나게 뽀뽀하는 거였다. '헉~!' 주위에 사람들이 있어 차마 소리는 못 내고 얼어 붙어있는 나에게 리건이 씨익 웃으며 말하는 거였다. "엘라임이 없는 이 기회를 놓칠 수야 없는 거 아니겠어? 그럼 나 간다." 그러고는 여전히 얼어 붙어서 꼼짝도 못하는 날 놔두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일어서서 저쪽으로 가버리는 거였다. '저, 저 인간.. 아니 드래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아아~~!!' ====================================================== 제 37화 드디어... (5) 다음날 아침 일찍 사람들은 드디어 던전에 들어간다는 생각에 지금까지보다 더 비장한 각오를 다진 채 준비를 시작했다. 어제 각 국 리더들의 회의에 갔다온 몬트리올경의 말에 의하면 동굴 안에는 짙은 안개가 깔려 앞은 커녕 자신의 발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인데다 미로 마법 - 길을 헤매게 하는 마법, 미로가 보이는 환각부터 시작하여 계속 길을 가는데 실제로는 한 자리를 뱅글뱅글 돌게 하는 등의 시술자의 상상력과 능력에 따라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을 구사할 수 있다. - 까지 걸려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아무리 좁은 공간에 같이 있더라도 한번 헤어진 동료들과 다시 만나기 힘들다. 그럴때 동료들과 헤어지지 않기 위하여 서로 끈을 연결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것인지 가끔가다 불쑥 불쑥 골렘들이 나타난다고 한다. 살아 숨쉬는 생명체가 아니지만 마나로 움직이는 로보트같은 존재들로 그들을 만든 마법사의 의지만 따르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저 곳을 만드는 마법사는 들어오는 자들을 무조건 죽이려고 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골렘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위협이 되겠지만, 이 새클턴 정글을 뚫고 던전까지 도착할 실력자들에게는 애를 먹이는 대상이 될 지언정 죽음의 절망에 빠뜨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뭐, 엄청나게 뛰어난 대마법사가 매칸더 V나 태권 V 같은 능력의 골렘을 만들어놨다면 몰라도, 던전을 발견한 모험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정도까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안개를 짙게 깔아놓거나 미로 마법을 펼쳐 놨어도 들어온 동굴 입구는 확실하게 찾을 수 있게 해놨다니 아마도 던전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헤메게 하고 약간의 위협만 가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거기에 혹시나 동굴을 통과할지 모를 - 우리를 인도한 모험가들 같은... - 존재들을 대비해 던전에 또 다른 장치를 해놓은 모양이지만, 그런거야 솔직히 던전에 대한 호기심이나 욕심을 포기하고 뒤돌아간다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각 국의 리더들이 주의하고 있는게 바로 그 던전에 준비된 장치들이었다. 동굴을 통과한 모험가들도 확실하게 파악 못하고 뒤돌아 도망쳐 올 정도도 대단한 것일테니 말이다. "자, 다들 혹시 골렘들과 맞서 싸우다가 괜히 애꿎은 동료 치지 않도록 조심해라." 트래비스가 용병들에게 주의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던지자 용병들이 왁자하니 웃어제꼈다. 정글을 통과할때는 각 국들끼리 무리를 이어 통과했지만, 이번에는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이 고생이라는게 뻔했기에 각 국 리더들끼리의 회의에서 이제부터는 다 같이 움직이기로 합의를 봤다. 그래봤자 가장 능력이 뛰어난 자들이 맨 앞에서 길을 뚫고 체술에 능력이 딸리는 자들은 가운데 서며, 그 주위를 나머지 무사들이 보호한다는 방법은 변함이 없었지만, 가운데 있는 마법사들이 마냥 보호만 받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동굴 안에 있다는 마법들을 무력화시키고 일행들이 흩어지지 않게끔 구심점을 잡아줄테니 말이다. 리건은 그 능력을 다른 국가 사람들한테서도 인정 받고 있었기 때문에 몬트리올경과 같이 맨 앞에서 길을 뚫는데 불려갔지만, 첼릿과 듀비, 그리고 램버트는 내 부하로 인식 되어 있기 때문에 내 옆에 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동굴 앞에서 자리를 잡자 맨 앞쪽에서 일행을 진두지휘하게 될 보르바 할레언 백작이 외쳤다. "자, 들어갑시다." 그리고 그가 먼저 걸음을 옮기자 다른 사람들도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동굴은 입구가 엄청 큰데다가 그 근처에는 햇빝을 가릴 울창한 수풀이 없어 햇볕이 그대로 들어 가는 것 같았는데도 불구하고 동굴 안으로 서너발자국 들어가자 금방 어두컴컴해지기 시작했고 열발자국쯤 들어가자 모험가들이 이야기했던 안개가 발을 감싸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임시로 각 국 모든 마법사들의 지휘를 맡은 마법 길드 일행의 리더 콘스틴스가 주위 마법사들에게 눈짓했다. "라이트~!!" "윈드 실드!" 능력이 뛰어난 몇몇 마법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마법사들이 두패로 나뉘어 시동어를 외쳤다. 그러자 일행들 주위로 부드러운 바람이 형성되어 안개를 밀어내 시야를 확보하는 한편, 일행들 틈으로 안개가 들어오지 못하게 방어막을 형성했고, 일행들 중간에 있는 마법사들 머리위로 밝은 빛을 뿜어내는 빛의 구가 여러개 떠올랐다. 동굴 안에는 생각했던 것 보다 공간이 넓어서 나는 일행들이 길죽한 타원형의 모습으로 전진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약간 타원형인 모습으로 뭉쳐 있을 수 있었다. 할레언 백작은 일행들 주위에 바람의 막이 형성된 걸 보고 다시 손짓하며 외쳤다. "전진!" 그에 의해 앞으로 걸어나갈수록 안개들이 점점 짙어지는게 보였다. 바람의 장벽때문에 일행들 틈사이로는 끼어들지 않았지만, 바람의 장벽 너머에는 어느새 안개가 너무 짙어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용케 우리가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뒤에 보이는 동굴 입구 덕이었다. 이렇게 짙은 안개 사이에서도 입구가 보이는게 신기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입구 반대로 가면 안으로 들어가는 거 아니겠는가? 기실 이 방법은 던전을 발견한 모험가들이 사용한 방법이었다. 그래봤자 방향을 신경써서 가늠하는 건 길을 제시하는 리더들 뿐이었고, 나머지들은 아무 생각 없이 앞사람만 따라갈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앞으로 얼마간 전진하자 안개 사이로 희끄므레한 그림자가 비치더니만 거대한 물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쿵, 쿵~ 얼마나 무게가 나가는지 한 걸음 한 걸음 디딜때마다 방아 찍는 소리가 나는 것은 물론, 그것들이 가까워질 수록 땅을 통해서 미세한 진동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전원 전투 대형으로!" 앞쪽에서 할레언 백작의 외침이 들리자마자 사람들이 일제히 자신들의 무기를 빼어들고 바깥 쪽에 있는 무사들은 세, 네사람씩 짝을 지었고, 안쪽에 있는 무사들은 자신들이 호위하는 마법사들 쪽으로 조금 더 바싹 다가섰다. "드디어 납시셨군." 주위의 어떤 용병의 중얼거림이 끝나자마자 짙은 안개를 헤치고 드디어 골렘이 나타났다. 그건 한 마디로 표연하자면 대략 3, 4m 는 되어보이는 둔해보이는 로봇처럼 생겼다. '오옷... 완전히 태권 V 에 나오는 로보트잖아?' 몸이 돌이라는 것과 눈이 단순히 붉은 동그라미라는 것, 그리고 얼굴에는 눈을 제외한 코하고 입, 귀는 없다는 것이 달랐지만 말이다. '흠, 이제보니 손가락도 없군. 발가락은 있남?' 생전 처음보는 모습이었기에 잠시 흥미가 있었지만 6, 70 년대에 나온 SF 만화에나 등장할 법한 모습에 나는 곧 흥미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와는 달리 진중한 자세로 골렘들을 향해 덤벼들기 시작했다. "자, 우리는 지원 합시다." 어차피 동굴 안에 골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낮은 계열의 마법사들만 라이트 마법과 원드 실드 마법을 펼치는데 동원되었고 고위 마법사들은 이런때를 대비해서 빠져 있었던 것이다. 무사들을 지원해주는 거라면 고위 마법사들이 훨씬 더 도움이 되었을테니 말이다. 그래 나또한 무사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운다인과 슈리엘들을 불러냈다. "골렘의 핵을 찾아서 부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 자꾸 재생 되니까 힘이 빠지는 결과만 나올 뿐이에요." 내 옆에 같이 붙어있던 클라우드 남작이 정령술이 더 높다는 이유로 마법사들 틈에 끼게 된 쥬디 블러드무어경과 나에게 설명해주려는 듯 속삭였다. "핵이요?" 그러나 골렘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는데다가 이번에 본게 처음이었던 나는 그의 말을 선듯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치자면 심장 같은 겁니다. 골렘을 움직이게 하는 마나석이죠. 인간의 경우 심장이야 왼쪽 가슴에 있지만 골렘의 경우 마법사들이 쉽게 찾을 수 없게 하기 위해 일정하지 않은 곳에 넣어 두기 때문에 찾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좀더 자세한 남작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러니까 한마디로 동력원 같은 거로군. 자동차로 말하면 엔진인가?' 하지만 그런 말을 들어봤자 내가 고민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한 나는 그러려니... 하고는 그냥 흘려들었다. 어차피 내가 맡은 역할은 무사들을 지원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디텍트 매직!" 근처에 있던 어떤 마법사가 낮게 시동어를 읇조리는게 들려왔다. '헤... 그러고보니 골렘이 움직이는 마나를 제공한다니 마나 탐지 마법을 사용하면 골렘의 핵이 어디인지 알 수 있겠군.' 그렇게 생각한 나는 기대 어린 눈으로 그 마법을 사용한 마법사를 쳐다봤지만, 남작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쯧쯧, 경험이 없는 마법사로구만. 이렇게 강한 마법진 안에서 마나 탐지 마법을 사용해봤자 마법진 때문에 방해를 받아 소용없을텐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역시나, 그 마법을 사용한 마법사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마법진 안에서는 탐색 마법이 소용 없는 법이지. 지금은 효율성이 극히 낮긴 하겠지만, 무조건 잘게 부숴서 핵을 찾아내는 수 밖에 없다." 마르타국의 리더인 쉐리든 폴트팩트 백작이 그 마법사를 향해 충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그 마법사는 마르타국 소속이었던 모양이다. "아, 예... 죄송합니다." 그렇게 비 무사 진영에서 선배들의 충고(?)가 오가는 동안 골렘들과 직접 싸워야 하는 무사 진영의 맨 첫줄이 드디어 골렘들과 맞부딪혔다. "쳐라!!" "와아아아~~" "매직 미사일!!" 한 마법사가 만들어낸 푸른 빛의 빛나는 미사일이 쌩 하고 날아가 골렘의 머리와 부딪혀 폭발을 일으켰다. 커다란 쿵~ 소리와 함께 그 골렘이 뒤로 넘아갔지만 무사들은 그걸 버려두지 않고 달려들어서 골렘의 몸을 조각조각 분해하기 시작했다. 클라우드 남작이 말하는 그 핵을 찾는 것이었다. 다행이 막 나타난 골렘의 숫자는 다섯이었기에 우리쪽의 인원이 너무나 여유가 많았기에 많은 시간을 들여 확실하게 처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걸 여유있게 지켜보는 다른 무사들은 이게 끝이 아니라는걸 잘 알고 있었기에 여유 있는 와중에서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쿵, 쿵, 쿵... 역시나, 다섯의 골렘을 땅바닥에 드러눕게 만들어 열심히 핵을 찾는 와중에 두 골렘의 핵을 발견해 막 부서뜨리는 순간 왼쪽 방향에서 진동소리가 들리더니 골렘 셋이 또 나타났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여유가 있었기에 마법사들은 한가하게 잡담을 나누면서 가끔가다 한번씩 매직 미사일을 날려서 골렘을 넘어뜨려주곤 했었다. 그 모습에 쥬디 블러드무어경과 나는 기껏 불러낸 정령들을 머쓱하게 바라보고는 다시 돌려 보내야 했다. 원래 무사들만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데다가 심심한 마법사들이 가끔 거들어주니 정령사인 우리 몫까지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마법이야 시동어를 외쳐 마법을 구현 해야 마나를 소비하지만, 정령은 이쪽 세계로 소환해 놓고 있는 것만으로도 계약자의 마나를 소비하는 일이었기에 정령을 불러다 놓고 가만히 냅두고 있는 것은 마나 낭비일 뿐이었으니 돌려보내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러한 여유는 오른쪽에서 골렘 넷이 다가오고, 다시 앞쪽에서 일곱 골렘, 그리고 다시 왼쪽과 오른쪽에서 각각 골렘 두개가 다가오자 파도에 모래성이 휩쓸리듯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매직 미사일!!" "아이스 미사일!!" "프리즈 스피어(얼음창)!!" 아까는 간간이 쏟아지던 마법 시동어들이 봇물처럼 줄지어 쏟아져 나왔고 정령술사들도 정령계로 돌려보냈던 정령들을 다시 불러 모아야 했다. "애들아, 부탁해!!" 나 또한 아까 돌려보냈던 슈리엘과 운다인들을 향해 말하자 그들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갑자기 수가 불어난 골렘들을 맞아 힘겨워하는 무사들을 돕기 위하여 날아갔다. ====================================================== 제 37화 드디어... (6) "젠장, 많이도 나오는구만..." 마법사들과 정령사들이 후방에서 지원하는 덕인지 여전히 여유있게 골렘들을 하나하나 부숴서 분해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차하면 돕기 위하여 달려나가기 위하여 마법사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용병 하나가 질린다는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핵이 문제야 핵이...그걸 부수기 전에는 골렘을 완전히 쓰러뜨리는 게 아니니 원..." 클라우드 남작이 숨이 찬지 잠시 한숨을 돌리면서 푸념조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일행들이 골렘을 베어서 쓰러뜨리는 것에 비해 골렘을 완전히 쓰러뜨리는 것에 비해 골렘을 완전히 처리하는 건 엄청 더뎠다. 그나마 처음에는 골렘들 숫자가 적어서 골렘의 핵을 찾을때 까지 완벽하게 분해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숫자가 갑자기 불어나서 골렘을 한번 쓰러뜨리면 다시 재생하기 전에 분해해서 핵을 찾을 틈도 없이 곧바로 다른 골렘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러니, 쉽게 쉽게 쓰러뜨려 봤자 핵이 제거되지 않은 골렘들이 자꾸 재생되어 되살아나니 이건 힘빼는 것 밖에 되질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더 그다음 부터는 골렘들이 아주 가끔가다가 하나나 둘씩 나타나서 우리는 그럭저럭 더이상 위험해지지 않은 채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골렘이 오니까 꼭 누가 지켜보고 있으면서 우리가 정신 없이 힘만 쏘옥 빼놓을 정도로 골렘을 보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힘빼기만 하던 순간,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가 갑자기 장난기가 동했는지 골렘 다섯을 왕창 보내버렸다. "헉..." 그리고 두 골렘이 다른 무사들을 상대하는 틈을 타서 골렘 셋은 일차 방어선(?)을 그대로 통과해 버린 채 마법사들과 정령사들을 호위하고 있는 2차 방어선까지 도착해버렸다. "이런!!" "침착하게!!" 당황한 2차 방어선의 무사들이 달려나갔고, 놀란 마법사들과 정령사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나도 다급하게 운다인을 한명 더 불러내어 둘 중 더 가까이 다가온 골렘에게 공격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왠지 모르게 그 골렘의 오른쪽 어깨와 가슴의 중간 부위, 그러니까 거의 겨드랑이 부위가 다른 부위보다 눈에 들어오는 거였다. 뭐랄까...그곳이 다른 곳 보다 더 밝게 보인다고나 할까? 하여간, 알수 없는 이유로 그곳이 눈에 띈 나는 아무 생각 없이 - 어쨌든 공격을 해야 했으니까 - 그 부분을 향해 운다인을 보냈다. 그런데 이게 왠일? 운다인의 매서운 물의 창이 내가 지적한 곳을 꿰뚫어버리자 마자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골렘이 뒤로 그대로 넘어가더니 말 그대로 돌덩어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어라라..?" 내가 한방 먹이고 그 뒤를 이어 시간차 공격을 하려고 준비 했던 용병은 당황해서 그대로 굳어 버렸고, 나 또한 이런 결과를 기대하지 않았기에 입이 떠억 벌어졌다. "우와, 백작님 운이 좋으셨는데요?" 내 옆에서 여차하면 튀어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쥬디 불러드 무어경이 그 모습에 내 어깨를 탁 치며 웃었다. 나 또한 무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면서 마주 히죽 웃어보이고는 다음 골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래 이번에도 혹시나...하는 생각으로 운다인에게 그쪽을 공격하게 했더니만 그 곳을 꿰뚤린 골렘이 바로 전 골렘처럼 뒤로 넘어가 돌덩어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 주위에서 히죽 웃으면서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경직이 되어버렸다. "배, 백작님?" 쥬디 블러드무어경도 입이 떠억 벌어진 채 날 돌아보았고, 클라우드 남작이 눈을 휘둥그래 뜬 채 날 바라보며 물었다. "백작님, 혹시 골렘의 핵이 거기 있는 걸 아셨습니까?" "에? 아, 아뇨... 그냥 거기가 눈에 띄여서..." 눈에 띄인 부분을 공격한 것 뿐인데 이런 결과가 나타날 줄 몰랐기에 나 또한 크게 놀란터라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흠, 그러십니까? 그럼, 다시 한번 실험해 보는게 어떻겠습니까? 마침 골렘이 한놈 더 있는데..." 마르타국 리더인 쉐리든 폰트팩트 백작이 나머지 한 골렘을 가르키며 제안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 골렘을 둘러싼 용병들이 물러나고 모두들 골렘과 나만을 주시하는 거였다. 그래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골렘을 바라보고는 다른 곳 보다 내 신경을 끌어당기는 골렘의 오른쪽 발등을 향해 운다인에게 공격 하도록 지시했다. 슈욱~ 퍼억~!! 운다인이 날린 창이 이번에도 그 발등에 꿰뚫자 그 골렘 역시 발 하나가 부서진 채로 돌덩어리가 되어 버렸고, 모든 이들의 시선이 경악을 담은 채 나에게 향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거참 신기한 일이군요."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던지 잠시동안 앞쪽에 나간 무사들을 후방 지원해주던 마법과 정령이 잠시동안 중단 되었을 정도였다. "도대체 어떻게 거기에 핵이 있는지 아신 겁니까, 백작님?" 그런 이들을 대표로 클라우드 남작이 물었지만, 나 역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지 못했기에 제대로 설명해 줄 수가 없었다. "아, 아뇨...그게, 그러니까...괜히 신경이 쓰여서 그쪽을 공격했더니만..." 그래 우물쭈물, 더듬더듬 대답하자 내 말을 들은 콘스틴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흠, 백작께선 마나에 대해 민감한 신경을 가지고 계시나보군요. 무척 드분 일이기는 하지만, 마나에 예민한 감각을 가진 존재들이 있긴 하죠. 그래서 마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는 핵이 있는 부위가 괜히 신경 쓰이시는 걸겁니다. 잘됐군요. 백작님만 계시다면 핵이 어디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을테니까." "아니, 그렇게 알아낼 수 있었다면 미리 미리 공격좀 하시지 그랬습니까? 그럼 이렇게 힘빼지는 않아도 됐을텐데..." 콘스틴스 뒤로 남작이 투덜거리는 어조로 말하자 나는 허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쩝... 그게 말이죠... 저 골렘들이 가까이 왔을때에나 알 수 있는 거 같은데요? 일예로, 저렇게 멀리 있는건 신경 쓰이는 부분이 없는걸요." 그러면서 내가 저 멀리서 무사들과 대치중인 골렘을 가르키자 이번에는 폰트팩트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여기는 거대한 마법진 안인데다 이 주위도 우리가 윈드 실드를 쳐놨으니 가까이 가지 않는 한 못알아챌수도 있겠군요." "그럼... 직접 가까이 가시는 방법밖에 없겠군요." 마법 길드 소속의 한 마법사의 말에 나는 속으로 저 치열한 싸움 터로 뛰어 들어야 하나... 싶어 헉스 하는데 다행이도 콘스틴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좋지 못하다. 백작님이 저 전투장에 끼어든다면 오히려 남에게 짐만 될 뿐이지. 그냥 저쪽에서 골렘 한놈씩만 안으로 들여보내라고 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겠구나." 그리하여 발빠른 용병 한명이 앞쪽으로 달려가 이러한 내용을 보르바 할레언 백작에게 전달 했고, 백작의 지휘 하래 골렘이 하나 하나씩 안쪽, 그러니까 내가 있는 곳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덕분에 수월하게 골렘들을 처리하게 되었지만, 내가 핵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동안 혹시나 방해다 될까 싶어 마법사들은 무사들을 지원하던 마법을 중단해버려 앞으로 나가있던 무사들이 전보다 쬐께 더 고생을 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골렘을 처리하다보니 있는 골렘을 우리가 다 부숴 버린 것인지, 아너면 정말 우리를 지켜보는 자가 있어서 이제 골렘은 소용 없다고 생각한건지 더 이상 골렘이 나타나지 않아 우리는 다시 전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굴이 생각보다 굉장히 길었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천천히 전진했다고 해도 해가 져서 입구가 어두컴컴하게 보이기 시작했는데도 던전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 거였다. 긴장한 채 전진하느라 동굴에 들어오기 전에 먹은 아침을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먹고 계속해서 걷느라 일행도 탈진한 상태이고 해서 할레언 백작은 하는 수 없이 휴식을 명했다. 하기야, 동굴 입구가 보이지 않아 더 이상 전진하기도 어려운 상태였던 것이다. 혹여나 길을 잃어버리게 될까봐 좋은 자리를 찾을 생각도 안 하고 그자리에 그대로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사람들은 물과 육포를 꺼내 허기와 갈증을 달랬다. 나무가 없으니 모닥불을 필 수도 없었다. 오로지 마법사들이 띄어놓은 라이트만이 안개에 감싸인 이 세상에서 유일한 빛이었다. 그것도 마법사들이 모두 탈진할까 두려워서 이동할때의 1/3수준의 라이트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꺼버렸기에 아까보다도 한층 어두컴컴한 분위기였다. 그 덕분인지 아무런 사망자도 없이 - 물론 다친 사람은 생겨 버렸지만... - 골렘을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침울했다. 말을 꺼내는 것마저 꺼려지는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은 채 조용히 할 일을 찾아서 하거나 일찌감치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무거운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나는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바꿔보자 입을 열었다. "거참 이상하네요. 골렘들도 수월하게 물리쳤는데 분위기가 왜 이렇게 어둡죠? 불이 적어서 그런가?" 그러면서 나는 쌀쌀한 주위 공기도 덥힐 겸 불의 하급 정령 카사를 불러내었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클라우드 남작이 - 문 일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모두들 가까이 붙어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아마도... 여기에 쳐진 결계 영향일 듯 합니다. 안개하고 미로 마법만 쳐진줄 알았더니, 사람의 심리를 가라앉히고 불안하게 만드는 심리 마법도 함께 쳐진 것 같군요. 불안하게 해서 그냥 돌아 가도록 말입니다." "거기에 기온도 낮추고 말이죠." 내가 몸을 한번 부르르 떨며 투덜거리자 첼릿이 즉시 반응 했다. "해인님, 추우십니까?" 기실 정글에 들어올때 무더운 기온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옷을 얇게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노리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동굴 안의 기온은 마치 중앙 대륙의 가을 밤의 기온 정도라서 다른 사람들도 추위를 느끼고 있었다. 그나마 낮에는 계속 긴장한채 움직이고 있어서 나았지만, 지금은 찬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가만히 있자니 더 추위를 느끼는지도 몰랐다. 첼릿이 여벌옷을 꺼내 어깨에 둘러주려고 하자 나는 배시시 웃었다. "괜찮아요, 카사를 불러냈으니 조금 있으면 따뜻해질 거예요." 그러자 첼릿이 한숨을 내쉬더니 옷을 그대로 내 어깨에 둘러주며 말했다. "해인님, 정령은 그냥 돌려보내시고 이대로 견디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일 어떤 일이 벌어 질지도 모르는데 힘을 아끼셔야죠. 정 추우시면 제게 붙으십시오. 체온을 나누면 그렇게 크게 춥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 그럴까요? 흠, 그럼 듀비도 이리 와요. 우리 셋이... 아니구나. 램버트, 램버트도 이리오시죠?" 내 부름에 램버트는 날 쓰윽 바라보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날 뭘로 보는 거냐? 우리 드워프는 이 정도의 기온에 굴복하지 않는다. 너희들이나 실컷 체온을 나눠라." "에... 같이 붙는게 좋을텐데... 뭐, 싫으시다면... 우리 셋이 붙어서 자도록 하죠?" 붙어 잔다고 해도 야시시한건 절대 아니었다. 그냥 드러누우면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차가운 기운 때문에 견디기 어려웠기에 바닥에 침낭을 여러곂으로 깔고 그 위에 엉덩이만 올려놓은 채 다른 사람의 등을 마주대는 형식이었던 것이다. 꼬옥 꺄안고 자는 것보다야 못하겠지만, 이 방법도 충분히 괜찮았기에 - 거기다 아무리 추워도 동성과 껴안고 자고 싶지는 않았을테니 - 다른 사람들도 모두 두셋이 모여서 이러한 방식으로 자리를 잡고는 잠이 들었다. 덕분에 춥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돠 등을 붙이고 있느라 쭈그리고 앉은 채 잠을 자야 했기에 다음 날 일어났을때에는 온 몸이 엄청난 알이 배긴 것처럼 엄청 뻐근했다. "아구구구.... 젠장, 빨리 던전을 찾던지 해야지 이거야 원... 오늘 밤에도 이렇게 자고 싶지는 않군.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이던가..." 클라우드 남작이 투덜거리며 뻐근한 팔다리를 두드리자 그와 등을 맞대고 쪼그린채 잠들었던 앤더슨 스니볼리가 엄청 동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안에 도착하기를 간절히 바래야겠죠." 몬트리올경도 뻐근했던지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며 남작의 말을 받았다. 모든 사람들의 심정이 그와 같았던 모양인지, 그날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다시 전진하는 일행의 속도는 전날에 비해 많이 빨라졌다. 게다가 그 전날과는 달리 우리를 위협하는 골렘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아서 전진 속도에 도움을 줬기에 우리는 날이 저불기도 전에 던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던젼으로의 접근을 막는 거대한 마젖 결계를 벗어났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짙은 안개가 낀 길이 이어질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한 지점을 지난 순간 우리 앞을 방해하고 있던 짙은 안개와 낮은 기온이 마치 물에 씻겨 나가는 비누거품처람 한순간에 싸악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치 험난한 시험을 통과한 우리를 축복이라도 해주는 듯 우리 앞에는 밝은 햇빛을 받고 있는 넓고 푸르른 초원이 쫘악 펼쳐졌고, 그 초원 한 가운데에는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아담하고 예쁜 집 한채가 서 있는 것이었다. "어쩜, 저렇게 예쁠까... 나도 저런 집에서 살아봤으면..." 그 모습을 본 쥬디 블러드무어경이 감탄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근처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감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새하얀 벽과 초록색 지붕, 그리고 지붕에는 다락 창문인듯한 자그마한 창문이 달려 있었고 벽에는 아치형의 커다란 창문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집 주변에는 지금도 누군가가 계속 가꾸고 있는 듯한, 내 허리에도 미치지 못할 키 작은 관목 들이 울타리인양 둘러싸고 있었다. "저게... 던전인감?" "던전이라기보다는.... 별장 같구만..." "무시무시한 괴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동감이야. 문 두드리면 예쁘장한 아가씨나 인심 좋아보이는 부인이 나와서 어서오세요...라고 할 거 같아." 사람들이 그렇게 한 마디씩 주고받으면서 홀린 듯 초원 위에 홀로 우뚝 선 집을 바라봤지만, 여기에 오기 전 엄청나게 위험한 장치가 되어 있다는 충고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기에 어느 누구하나 그 곳에 다가갈 엄두를 내지는 않고 초원 밖에서서 엉거주춤 서 있을 뿐이었다. ==================================== 아아, 처음으로 올려봤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번 편은 세티가 올렸어요~★ 다음편은 누가 올려 주실려나...?? ====================================================== 제 37화 드디어... (7) 이 곳을 발견했던 예전 모험가 일행의 말에 의하면 던전을 발견하자마자 동굴 속에서와는 달리살기 어린 매서운 공격들이 날아와서 던전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피하느라 급급하다가 뒤를 돌아 도망쳐 나왔다고 했었다. 그래서 우리들도 안개가 걷히고 햇볕이 보이자마자 전방의 멋진 풍경을 볼 틈도 없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를, 살기 어린 매서운 공격을 막고자 초긴장 상태에 돌입해 있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고 공격은 커녕 돌맹이 하나 던져지는 일도 없자 의아해서 그제야 주변을 살펴보다 멋진 풍경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황당해하던 일행이 한 마디씩 주고받은 후 한참이 지나도 우리를 공격할 어떠한 조짐이 보이지 않자 공격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던 보르바 할레언 백작은 거기서 좀 더 기다리다가 안되겠다 싶었던지 휴식을 명하고 각 국 리더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는 동안 우리들은 초원에 들어가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들었지만, 왜 이런 일행 중에는 가까이 가는 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평소 영화에서 그런 사람들이 제일 먼저 목숨을 잃는 걸 보고 쯧쯧 혀를 차던 나였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막가는게 아니라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슬금 슬금 초원쪽으로 다가갔다. "해인님!" 그 모습에 얼른 첼릿이 질책하듯 날 부르기에 나는 씨익 웃으며 돌아봤다. "아니, 그냥 가까이서 한번 보려구. 위험한 짓은 절대 안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우리가 잠시 머물고 있는 곳은 막 초원이 시작되려는 듯 풀들이 드문 드문 나 있는 곳이었다. 안개가 사라진 지점부터 내 걸음으로 10여 걸음쯤 (그 공간이 우리가 있는 곳) 가면 그 곳부터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하게 야생초로 뒤덥인 초원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는 야생초들로 빼곡하게 뒤덥힌 곳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아서 그 곳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고 그 바로 바깥쪽에서 살펴보려 했던 것인데, 첼릿은 그걸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안됩니다. 그러다가 일행을 향해 공격이 시작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구요?" 성큼성큼 다가와 내 팔을 붙들고는 다시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가며 책망하듯 말하자 나는 첼릿의 손길에 다소곳이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나 때문에 일행들이 괜히 공격을 받는 건 한번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말이다. 물론, 입으로는 투덜거렸지만... "에이... 그냥 눈으로 보기만 할 거였다니까요." "그래도 절대 안됩니다. 어차피 잠시 후에는 눈으로 보는 것 뿐만이 아니라 직접 들어가기까지 할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다른 일행들이 있는 곳까지 나를 끌고온 잭슨은 듀비와 램버트 사이에 날 앉히더니 엄한 눈초리로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여기서 꼼짝 말고 계십시오." 그러면서 첼릿이 내 바로 앞에 주저앉자 나는 완전히 일행들로 인하여 삼면이 막힌 형국이 되어버렸다. 물론, 첼릿이 내가 허튼 짓을 못하도록 감시할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줄은 몰랐기에 내 입에서 허탈한 미소가 흘러 나왔다. "체, 첼릿...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이렇게 할 필요는..." 그러나 첼릿은 괜히 저 푸른 초원으로 시선을 돌린 채 내 말은 싸악 무시했다. "끄으응... 어차피 함부로 초원에 다가갈 마음도 사라졌는데..." 하지만 폼을 보아하니 그런 말을 해봤자 첼릿은 이러한 자세를 풀것 같지도 않기에 나는 얌전히 입다물고 앉아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심각하게 머리를 맞댔던 지도부측 회의도 끝이 났다. 뭐, 솔직히 결론은 나와 있을터였다. 처음부터 엄청난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예상한 상황에서 시작된 탐험이었으니 지금에 와서 엄청 수상하다고, 위험할께 뻔하다고 해서 이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테니 강행돌파 한다고 나올 수 밖에... 단지 동굴에서와 다른 사항이 있다면 모든 일행이 한 곳에 뭉쳐 가기보다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면 공격 마법이 사방으로 분산될테고, 운이 좋거나 능력이 되는 팀은 눈앞에 보이는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뭐, 말이야 위험을 분산시킨다고 하지만 보니까 각 나라들이 자신들이 먼저 도착하거나, 아니면 위험에서 뒤로 슬쩍 빠지려는 등의 각자 자신의 나라에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내기 위해 머리를 짜내어 도출된 결과인 듯 싶었다. 대신 어느 팀 먼저 출발하고 어느팀은 나중에 출발하는 건 없애고 각 국 일행씩 멀찍이 떨어진 채 같은 시간에 같이 출발하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저 푸른 초원 위에 자리잡고 있는 예쁜 집에서는 어떠한 공격의 조짐도 보이지 않아 리더들측에서는 내침김에 점심을 먹고 강행돌파 하기로 했다. 먹고죽은 귀신 때깔도 곱다고 하지 않던가? 오랜 시간동안 공격이 없어서 그런지 일행들은 긴장을 완전히 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약간은 느긋한 표정으로, 거기다가 동굴 안에서는 꿈도 못꾸었던 모닥불을 피우고 스튜를 끓이고 고기를 구웠다. 사실 예상되는 위험만 아니라면 이 곳은 소풍 장소로는 최적의 장소인데다가, 비록 내색은 안 했지만 저 곳을 돌파하여 뭔 일을 당하게 된다면 지금의 식사가 마지막 식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리더들도 푸짐하게 차려 먹으라고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지글지글 거리는 고기 굽는 소리가 들려오고 구수한 스튜의 냄새가 그 뒤를 따르자 사람들의 표정이 행복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동굴 안에서는 불도 못 피웠지만, 그 바깥에서도 불을 피워 음식을 했지만, 언제 어디에서 몬스터들이 나타날지 몰라 긴장속에 이런 제대로 된 음식이 아닌 급조된 음식으로 배만 채우는 식으로 식사를 해결했는데, 그때와는 달리 그나마 제대로 된 음식 - 물론 식당에서 나오는 것에 비하면 조잡할테지만 - 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의 기분이 사르르 녹았던 것이다. 이제 이 식사 시간이 지나면 언제 다시 이런 식사를 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으니 당연한지도 몰랐다. "으으으음~~ 정말 맛있구만. 이럴때 맥주 한잔까지 곁들일 수 있다면 더 좋았을텐데..." 두툼한 베이컨 한 입을 잘라먹은 램버트가 감동어린 표정으로 온 몸을 부르르 떨자 첼릿이 피식 웃었다. "어쩔 수가 없지요. 그래도 무사히 돌아가기만 하면 어디 맥주 뿐이겠습니까? 최고급 포도주도 문제 없지요." "아아, 가끔 인간 사회에 가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어. 드워프 마을에서는 구경도 못할 신기한 음식들이 많거든. 흐흐흐, 이번에 나가면 한번 제대로 돌아봐야지." 그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내 옆에서 묵묵히 자기 몫의 음식을 먹고 있는 듀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듀비는 음식을 별로 가리지 않는 거 같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도 없는 거 같고... 듀비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뭐예요?" 내 질문에 듀비는 잠시 고개를 갸웃 하더니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딱히 좋아하는 건 없는것 같습니다. 저에게 음식은 배만 채워주면 되는 것이거든요. 딱히 좋아해서 찾는 건 없었습니다." 듀비의 말에 내가 "그래요?" 하는 시선으로 쳐다보며 뭐라고 말하려는 찰라 램버트가 끼어들었다. "거참 불쌍한 종족이로구만. 설마 자네 종족 모두 음식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음식을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다니... 그런 슬픈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음식은 자고로 맛으로 먹어야 하는 거야, 맛으로! 음식 먹는 기쁨을 모르다니..." 그러면서 정말 안됐다는 표정으로 램버트가 듀비를 바라보았지만 듀비는 어깨만 으쓱 거릴 뿐이었다. "뭐... 저희 종족 전부가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 주변에서는 딱히 맛이란 것을 찾지는 않았던 거 같습니다." "흠... 그런건 인간과 참 다르군요. 뭐, 종족이 다르니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음식을 즐기는 건 유사 인종 대부분이 그럴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첼릿은 약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듀비를 향해 말했다. "그래도, 음식의 맛을 즐기지 않는다는 건 램버트님 말대로 슬픈 일인거 같아요. 이번에 돌아가면 우리 한번 맛있는거 먹으러 다녀요. 뭐, 멀리 가지는 못할테지만, 그래도 도시에서 맛있는 식당이라도 알아서 한번 순례 하자고요. 그럼 혹시 알아요? 듀비도 음식을 맛으로 먹게될지." 내 말에 램버트가 짧은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아, 그거 좋은 생각이다. 나도 거기에 참여하도록 하지." "아하하하, 환영할게요." 그렇게 다른 일행들에 비해 떠들썩하게 식사를 한 덕분인지 우리가 식사를 끝냈을쯔음에는 다른 일행들은 벌써 식사를 끝낸 것으로도 모자라 정리까지 거의 다 끝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우리 일행들도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는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흠, 저기에도 어떤 마법이 설치되어 있단 말입니까?" 전체 리더인 보르바 힐레언 백작이 묻자 마법 길드 일행의 리더인 콘스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대략 환상 마법과 물 계통의 공격 마법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마법이 더 설치되어 있을수도 있지만, 지금은 두 마법의 힘이 강력해서 다른 마법은 잘 모르겠군요." 콘스틴스의 말에 힐레언 백작의 고개가 갸웃 거렸다. "그렇다면... 지금 보이는 저 초원의 모습도 가짜라는 겁니까?" "그럴수도 있습니다만, 제가 설치한 것도 아니고 설치된 마법을 확인한 것도 아니니 장담은 못합니다. 결국은... 부딪혀봐야 알겠지요." 그 말에 힐레언 백작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각 국 리더들을 돌아보았다. "자, 그럼 무운을 빌겠소. 모두들 저기서 무사히 만나기로 합시다." "백작님 또한 행운이 있으시길..." "여러분들에게도..." 팀은 역시나 새클턴국, 마르타국, 벨레니국, 녹스국으로 갈렸고 마법 길드에서 나온 이들은 찢어져서 몇명씩 각 국에 합류하기로 했다. 사실, 마법사들이 많으면 전력이 증강되어 좋기는 하겠지만, 지금처럼 기동성 또한 절실히 필요한때에는 마법사의 딸리는 체력이 걸림돌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래 한 팀에서 전적으로 마법사 길드 소속들을 모두 보호하기도 어려웠고, 혹시나 마법사 길드를 보호하는 팀이 전멸하기라도 하면 큰일이기에 그렇게 흩어놓은 것이었다. 한 곳에 모여있던 리더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눈뒤 각 팀의 리더들이 자신들의 일행을 이끌고 미리 정해진 장소로 이동했다. 우리팀도 리더인 몬트리올경이 일행들을 이끌고 다른팀과 멀찍이 떨어진 장소에 도착하자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전체적인 작전은 다른 팀들과 같이 출발한다는 거였지만, 세부적인 사항은 팀 일행끼리 의논해야 했던 것이다. "제 생각에는 어차피 다른 나라들도 같은 시간에 출발할 것이 뻔하니 최대한 빠른 속도로 전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초원 안으로 들어가면 공격 마법은 각 나라들로 분산될테니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그게 좋지 않겠습니까?" 몬트리올경은 아무래도 많은 공을 세우는데 대한 집착을 다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클리우드 남작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데에는 먼저 도착한다고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먼저 도착하는 사람들이 먼저 공격을 받고 죽는 수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아마 다른 나라들은 몰라도 마르타국만은 그렇게 생각할겁니다." "흠... 그렇다면 다른 팀들이 움직이는 걸 보아가면서 거기에 맞춰 움직이도록 하지. 한... 두번째나 세번째쯤 되도록 하면서 말야." 리건이 그렇게 말하자 몬트리올경이나 클리우드 남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용병대장 트래비스도 별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가는 방법은 역시나 마법사가 가운데 서고 그 주위를 무사들이 둘러싸는게 좋겠지요?" 몬트리올경의 말에 이번에는 트래비스가 입을 열었다. "이러는게 어떻겠습니까?"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자신에게 시선이 몰린다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기동성을 확보해 놓는게 좋을 듯 싶습니다. 그런데, 그러자면 마법사들의 체력이 문제겠지요? 그러니 각각의 마법사들 옆에 용병들을 한 놈씩 배치해 놓는 겁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들이 마법사들을 업고 달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트래비스의 말에 몬트리올경이나 리건은 혹한 표정이었지만, 마법사인 클라우드 남작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우리 마법사들도 빨리 달릴 수 있네. 간단한 마법을 쓰면 자네들보다도 훨씬 빨리 달릴 수 있어!" 그러나 그의 말은 몬트리올경에 의해서 반박되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이왕이면 마법사들의 체력을 보존해놓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무사들이 지쳤을때 마법사들도 같이 지쳐버리면 어떠한 위험이 닥쳐왔을때 서로 짐만될테니까요. 차라리 무사들이 지쳐있을때 마법사들이라도 체력을 보존해놓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될 듯 하군요." "제 말이 바로 그거입니다." 트래비스까지 거들고 나서자 클리우드 남작의 찌푸려진 눈쌀은 펴지지 않았지만, 납득은 되었던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뭐... 일리 있는 말이군." "그리고 들어갈때 마법을 펼친 채 들어가는 것 보다는 뭔 일이 있을때 펼치도록 해두는 것이 좋겠지요. 처음부터 무리하게 마법을 펼쳐서 체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을테니까요." 그렇게 벨레니국 일행은 최대한 마법사들의 체력을 보존하여 나중을 대비하는 한편 모두들 무리하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자, 그럼 슬슬 준비하도록 하죠. 약속된 시간이 다되어 갑니다." 마나를 주입하면 밝은 빛을 내었다가 마나가 떨어지면 빛도 같이 흐려져 결국에는 검게 변하는 수정을 꺼내보이며 몬트리올경이 일행들을 재촉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가 꺼내들어보인 수정은 빛이 무척 흐려서 곧 꺼질듯이 보였기에 일행들은 그가 재촉하기 전에 알아서 서둘러서 대열을 갖췄다. 그리고 드디어 수정에서 깜빡깜빡하던 빛이 꺼지고 검게 변하자 몬트리올경이 외쳤다. "전진!!" 다른 팀들을 힐끗 보니 그들은 서둘러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에 맞춰 우리도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고, 일행들 중 뒤쪽에 위치해 있던 나도 그 속도에 맞춰 막 초원으로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이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눈앞에서 별이 번쩍 했다. "아코!!" 다른 사람들은 잘만 보내줬으면서 나만은 뭔가 보이지 않는 벽이 갑자기 생겨서 그 벽에다 얼굴을 정통으로 박았던 것이다. 제일 큰 충격을 받은 코를 부여잡고 뒤로 두어걸음 물러난 나는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막 나오려는 눈물을 삼키려고 노력했다. "에구구구~~!!" 그 보이지 않는 벽과 내가 충돌하는 소리가 어지간히 컸던 모양이다. 내 주위에 있던 이들은 물론이고 나보다도 먼저 앞으로 나간 일행들까지 놀라서 되돌아 왔으니 말이다. "해인님, 괜찮으십니까?" 다급한 첼릿의 말이 들려왔지만, 나는 고통과 눈물을 참느라 말을 해줄 수가 없어 손만 휘휘 저어 보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약간 당황스러운 어조의 리건 음성도 들려왔다. 물론, 나는 그의 질문에는 대답해줄 수 없었지만... "나도 그게 알고 싶다우. 어구구 코야..." ======================================================= 오랜만입니다. ㅡ.ㅡ;; 그동안 늦은거...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네요. ㅡ.ㅡ; 죄송, 죄송... ====================================================== 제 37화 드디어... (8) "나도 그게 알고 싶다우. 어구구 코야..." 잠시 후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자 나는 간신히 눈에 맺힌 눈물을 지우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내 주위 가까운 곳에는 나와 친한 이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고, 그 너머에는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일행들이 황당한 표정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줄 수 있겠습니까, 백작님?"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짜증스런 기색이 역력한 몬트리올경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내가 일어난 걸 보더니 주위 사람들을 헤치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벌써 출발했단 말입니다. 백작님 때문에 약속을 안 지키는 나라로 찍히고 싶지는 않군요." "나도 그러길 바라지는 않습니만, 제 능력으로는 어쩔 수가 없군요. 뭔가가 절 가로막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내가 일부러 그런것도 아니고, 나도 이유를 알고 싶었는데 몬트리올경이 마치 내가 일부러 그랬다는 것 처럼 비난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자 열받아서 같이 땍땍 거리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가 백작님이 저 곳으로 못가게 막기라도 한단 말씀이십니까?" "그거야 저도 모르죠." 기가막히다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는 몬트리올경을 마주 쏘아보며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아까 날 가로막았던 보이지 않은 벽이 있던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면서 보이는 건 다른 국가 사람들은 벌써 저마치 앞으로 나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비록 가운데 있는 집에 도착하려면 멀었지만, 그래도 초원 안으로 꽤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연유인지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 그래서 몬트리올경이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빨리 가도록 하죠.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너무 늦었습니다." 몬트리올경은 내가 앞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고 서둘러 출발하려는 줄 알고 따라오면서 재촉 했다. "글쎄요... 제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면 말이지요." 그런 몬트리올경에게 나는 시큰둥하니 대꾸하면서 초원쪽으로 손을 뻗었다. 왠지모르게 아까 내 앞을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은게 우연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과연, 내 느낌이 정확했는지 내가 손을 뻗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눈앞에서 스르르 뭉쳐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내 손 앞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바람?" 아까는 생각지도 못한 갑작스러운 상황인데다 움직임이 너무나 조용했기에 눈치채지도 못하고 당했지만,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눈치챌 수 있었다. 거기다가 바람이라면... "설마... 실피드님?" 황당해진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실피드의 모습은 물론이거니와 아버지나 다른 두 정령왕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때 같으면 나에게 이런 일을 행사할때 근처에 나타나 있었는데 말이다. 그래 나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에... 아닌가? 그럼, 누가?" 그러나 이런 나의 고민은 길게 가지 못했다. 가만히 서 있는 날 냅두지 못하고 몬트리올경이 또 쨍알댔던 것이다. "백작님, 뭐하시는 겁니까? 지금 한가하게 가만히 서서 일광욕이나 하고 계실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누가 가기 싫어서 안 간답니까? 날 못가게 막고 있잖아요!" 그의 짜증어린 목소리가 듣기 싫었던 나는 내 앞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벽을 손으로 탁탁 치며 맞받아 쳤다. 내 손짓에 의하여 무언가가 내 앞으로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벽에 물체가 부딪히는 듯한 "탁탁" 소리까지 났기에 사람들은 내 말을 믿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정말 환장하게도 당황한 첼릿이 다가와 "도대체 뭐가..."하면서 내가 손으로 집고 있는 허공에 손을 가져다 대자 그의 손은 날 막고 있는 벽을 스윽 통과해 초원쪽으로 잘만 뻗어지는 거였다. "엥?" "어어...?" 기가막힌 나와 당황한 첼릿이 서로 마주보는 사이 몬트리올경의 분노에 찬 외침이 울려 퍼졌다. "백작님, 지금 장난이나 하고 계실 때입니까?" "몬트리올경, 경은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걸로 보입니까?" 내가 인상을 팍 찡그린채 그를 돌아보며 묻자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뭔 생각을 했는지 눈을 가늘게 뜬채 날 노려봤다. "그럼 그게 뭡니까? 설마... 우리를 못 가게 방해하시려는 겁니까?" 그의 근거 없는 모함에 나는 기가막혀 탄식을 터트렸다. "허... 아니, 내가 그럴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럼 왜 백작님만 초원으로 못 들어가는 겁니까? 다른 사람들은 잘만 들어가는 구만..." "아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나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몬트리올경과 내가 핏대를 세우며 본격적으로 바락바락 싸우기 시작하는데 리건이 끼어들어 중재에 나섰다. "자자, 둘다 그만 하시오. 지금 우리끼리 싸울때요?" "하지만 후작님, 지금 백작님 때문에 우리 일행만 전진을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몬트리올경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항의하자 리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경의 심경은 충분히 이해하오. 하지만, 엠브로스 백작 또한 지금같은때에 괜히 엉뚱한 장난을 저지를 사람또한 아니지 않소? 분명 무슨 연유가 있으리라 생각하오." 리건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아, 글쎄 제가 일부러 그러는게 아니라니까요. 저도 왜 그러는지 모른다구요!" 내 말에 리건은 고개를 갸웃 하더니 내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두세걸음 떨어진 곳으로 가서는 자신이 초원으로 몇발자국 들어가보더니 도로 나와서 나에게 손짓했다. "여기로 한번 가보지?" 그에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 해보이고는 그가 초원으로 들어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역시나 내가 초원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바람의 벽이 날 가로막았다. 그 뒤로 몇번 자리를 옮겨보고 다른 사람들과 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이들은 아무도 가로막지 않는데 오로지 나만 가로막는 거였다. "거참... 아무래도 저 안에 있는 누군가가 백작님이 들어오는 걸 원치 않는 모양이군요. 이유가 뭘까요?" 그 모습에 클리우드 남작이 턱을 쓰다듬으며 누구에게랄것도 없이 질문을 던지자 몬트리올 경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모르죠, 저 안에 있는 누군가에게 밉보였는지..." "하여간 말을 해도 꼬옥..." 내가 몬트리올경을 흘겨보며 속으로 꽁알거리는데 리건이 말했다. "어쩌면... 엠브로스 백작이 들어오는 걸 두려워하는 걸지도 모르지. 아니면, 마음에 들어서 던전 안으로 들어가서 다치는걸 원하지 않는 걸지도..." 리건의 말을 묵묵히 듣던 나는 뭔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히 전체 일행이 동굴 입구를 들어오기 전에 아버지를 비롯하 네 정령왕들은 이 곳이 수상하다며 조사한다고 먼저 들어갔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먼저 간 그 분들의 모습이 콧빼기도 보이지 않는 거였다. 그렇다고 그분들께 뭔 일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말이다. "아니면 여기서 뭔 일을 벌이다가 체력이 떨어져서 정령계에 가 계시는 건지도... 어, 그러면 혹시 날 막는건 경고일까나? 체력이 떨어져서 여기에 직접 와서 돕지 못하니까 정령계에서 지켜보면서 경고를 하는건감?" 고개를 갸웃 거리면서 나는 다시 초원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자 그 즉시 바람이 미묘하게 움직이며 내 앞을 가로막았지만, 잠시 그 바람의 벽에 대고 힘을 주어본 결과 내가 엔다이론이라도 불러서 강행돌파한다면 충분히 뚫을 수 있으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뭔가 경고를 해주는 걸까? 그럼 말로 해주면 될텐데... 아, 정령계에서는 나에게 직접 말할 수 없지? 흠... 그렇다면 정령을 보내서 전달하기라도 하던지..." 그렇게 속으로 종알거리면서 나는 내가 들어가지 못하는 지점 바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초원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황당한 걸 발견했다. 푸르른 야생 풀들 사이로 운디네들이 방긋 방긋 웃으며 놀고 있는 거였다. "우, 운디네? 운디네라구?" 눈을 씻고 다시보니 운디네가 한명이 아니라 수십명이 거기서 노닐고 있었다. "허허... 운디네라니..." 보통 땅에는 땅의 정령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대부분 겉으로 나오지 않고 땅속에서 놀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보니 동굴에 들어오기 전, 동굴이 있던 절벽을 실프들이 웃으면서 통과하는 걸 보고 황당해 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정령왕들은 그때 그 절벽이 환상이란 것을 말해주었고. "자, 잠깐만... 그럼 이 초원도 환상이라는 이야긴데? 운디네가 있다는건... 이게 땅이 아니라 물이라는 이야기잖아? 그럼... 이 초원 전체가 다 물? 혹시 호수?" 내가 얻은 결과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데 뒤에서 우리 일행의 리더들이 의논하는게 귀에 들려왔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백작님을 못들어가게 하는게 뭔지는 몰라도, 백작님때문에 우리 일행 모두가 마냥 여기 있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비록 전력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냥 우리끼리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얄미운 몬트리올경의 말에 이번에는 클리우드 남작도 거들었다. "후우... 후작님,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만 여기 있을 수는 없지요." 거기다가 우리팀에 배분된(?) 마법사 길드의 마법사도 재촉했다. "물론입니다. 우리도 어서 들어가지요? 여기는 큰 위험이 없는 것 같으니 백작님은 여기서 우리를 기다리시는게 좋겠습니다." "다른 팀들좀 보십시오.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은 채 벌써 반이나 갔군요." 몬트리올경의 투덜거림에 다른 이들까지 초조한 얼굴로 리건에게 재촉하는 빛을 보내자 리건이 하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날 바라봤다. "어떻게 할래?" 그래 나는 이들에게 말해주려 했던 내 추리를 다시 속으로 집어 삼켰다. "맘대로들 하라지." "저때문에 지체 되었다니 정말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군요. 그렇다면 저는 제가 데리고 온 사람들과 여기 그냥 있겠습니다." "그럼 결정 되었군요. 자자, 다들 움직일 준비를 해라. 늦었으니 서둘러야 한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몬트리올경이 반색을 하면서 뒤돌아 다른 일행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나는 결국 한마디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디 행운이 함께 하시길요. 이건 내 예상인데... 저기 보이는 집까지 가는건 쉽지 않을 걸요? 내 예상이 틀리길 바라지만... 나중에 나보고 경고 안 해줬다고 하면 안돼요? 나는 분명하게 말했으니까." 내 말에 리건과 트래비스 용병대장이 날 바라보더니 진지하게 뭔가를 생각하는 듯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흘려 들었다. 뭐, 어차피 그들 또한 저 안에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 예상했을테니 말이다. 거기다가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지금까지는 아무런 방해 없이 전진하고 있었으니 내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터였다. ====================================================== 제 38화 호수의 정령 일리언(1) 벨레니국 일행은 결국 나와 내가 데리고 온 일행인 첼릿, 듀비, 그리고 램버트만 남겨놓고 출발하기로 결정해버렸다. 램버트는 어차피 처음에 저 던전을 살펴보기 위하여 온 것이었기에 일행들과 같이 가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우리와 같이 남겠다고 해서 날 놀라게 만들었다. "흠, 아무래도 너랑 있는게 안전한 거 같아서 말이다." 놀라서 뚱그래진 눈으로 바라보는 나에게 램버트는 험 하고 헛기침을 하며 내뱉은 말이었다. 놀라서 뚱그래진 눈으로 바라보는 나에게 램버트는 험 하고 헛기침을 하며 내뱉은 말이었다. 어차피 출발하려다가 나때문데 잠시 멈칫 한거였기에 결정이 내려지자마자 사람들이 다시 초원 안으로 달려들어간 것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행동하는 모습에 허탈한 웃음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 빠른 속도로 전진해가는 사람들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허허 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듀비가 가별게 내 팔을 잡아당겼다. "좀 뒤에가서 자리를 잡은게 좋겠습니다. 여기가 위험한 곳이라면 가까이 서서 위험을 초래할 필요는 없겠지요." 일리있는 말이라 나는 그의 말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렇군요." 그렇게 듀비의 손길에 이끌려 뒤로 물러나는데 첼릿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왔다. "해인님, 아까 그 현상은 어떻게 된 겁니까? 혹시... 해인님께서 일부러 그러신건 아닌지요?" 그의 말에 나는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설마요 내가 아무리 바람의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고 해도 그럴 능력은 없어요." "그럼... 저들이 가기 전에 해인님께서 해주신 경고는 무엇인지요? 뭔가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런거 아니신가요?" 첼릿의 말에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몰라 천천히 자리를 잡고 앉는 척 하며 생각할 시간은 빌었다. 첼릿에게도 내 아버지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았으므로 설명하기가 참 난감했던 것이다. 이제와서 나는 정령을 볼 수 있어요... 라고 말하며 시시콜콜이야기하기고 어려웠거니와, 그 이야기들을 다 빼놓자니 그냥 위험할 거란 감이 들었어요... 라고 밖에 설명할 말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말했다가는 첼릿이 엄청 황당해할 건 뻔했고 말이다. 내가 자리에 앉자 다른 이들도 다 내주위에 자리를 잡고 앉는 바람에 나는 그들이 다 앉을때까지 기다려주는 척 하면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흠...첼릿... 내가 우리 아버지 이야기를 했던가요?"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첼릿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자세하게는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간략하게 말씀해주신걸로 보아, 세상 일에 무관심하시지만 엄청난 능력을 가지신 분이란건 알고 있습니다." 첼릿의 말에 내가 그에게 아버지에 대해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챈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계시죠.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물을 다루실 수 있다는 거거든요." 내 말에 첼릿의 눈이 반짝였다. "혹시... 물술사? 그럼 마법사십니까?" 최근에는 왠만한 술사들은 마법사측에서 스카웃(?) 되기 때문에 첼릿의 추측은 상식적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저울 수 있었다. "아니요. 아버지는 정령친화력이 엄청 강하시죠." 강하다 뿐이겠는가...아예 1/4의 정령들을 다스리고 있는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히죽 웃는데 첼릿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전에 저에게 정령사는 주디스뿐만이 아니라 아버지쪽으로부터도 능력을 받은 것이라고 하셨었죠? 그러셨군요. 하기야, 술사들이라고 정령사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요. 물을 다루실 줄 아신다고 하셨으니 물의 정령들과 계약을 하셨겠군요." "뭐, 그렇죠. 그것 말고도 아버지 덕에 저도 물을 다룰 줄 알거든요." "호오, 해인님도 물술사셨습니까? 그런데...그 이야기가 지금 상황하고 무슨 관련이 있는지요?" 내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아한 표정의 첼릿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준비된 말을 꺼냈다. 부디 먹혀들기를 바라면서... "내 생각인데... 저기 보이는 초원은 실제로 초원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전체가 환영이라는 소리죠. 아까 가까이 가서 본건데... 왠지 땅이 아닌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잘 안먹혀든 모양이었다. 첼릿은 물론이고 곁에서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듀비와 램버트까지도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멀뚱멍뚱 나를 바라봤던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저게 땅이 아니면 뭔데?" 램버트의 말에 나는 계속 말해도 믿어지겠나 싶었지만, 이왕 시작한 거 밀어붙이기로 했다. "아무래도... 물... 인거 같아요. 그러니까... 환영 마법으로 물을 땅으로 보이게 한 거 같다... 이말이죠." 내 말에 램버트는 고개를 돌려 지금도 열심히 잔만 가고 있는 사람들을 쓰윽 쳐다보더니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네말이 맞다면 저 사람들은 지금 물 위를 걷고 있는 거겠네?" '헉... 그걸 생각 못했군.' "그게... 아마도... 환영 마법을 비롯한 다른 마법도 같이 펼친게 아닌가 싶은데요..." 램버의 말에 허를 찔린 내가 머쓱하게 말하자 이번에는 첼릿이 나섰다. "글쎼요... 그건 아닌거 같은데요. 환영 마법은 사람들을 막기 위해 펼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사람들이 물 위를 걷도록 하는 조취는 필요 없을거 같은데요? 만약 던전으로 사람들이 오게 할 생각이었다면 그냥 다리를 하나 놓는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게..." 첼릿의 말에 램버트가 동의를 하자 나는 더 이상 할말이 없어져 머쓱하게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날 도와주는 음성이 들렸으니... "해인님 말씀이 아예 틀린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듀비였다. 아까 램버트와 같이 초원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지금까지 계속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 셋은 자연스레 듀비의 시선을 따라 초원을 바라보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림에나 나올 만큼 아름다웠던 초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내가 방금 말한 시퍼런 물이 존재하고 있었다.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그 넓디 넓은 초원은 넓디 넓은 호수였던 것이다. 솔직히 다른때라면 수평선이 보일 듯 쫘아악 펼쳐진 물의 세계가 장관이었을테지만, 지금 그 물 위에 일행들이 떨어져서 허우적댄다면 그 장관이란 것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터였다. 게다가 물에 빠진 것도 모자라 갑자기 솟아난 거대한 물의 채찍에 의하여 공격을 당하고 있다면 말이다. "이런!!" 초원, 아니 초원으로 위장되어 있던 호수에게 멀찍이 떨어져 땅에 털푸덕 앉아있던 우리들이 놀라 부랴부랴 호숫가로 달려갔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벨레니 국 사람들은 호수에 깊숙히 들어간 상태는 아니었다. 그들은 뭍을 바라보며 열심히 헤엄쳐 나오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호수의 물결이 마치 폭풍을 만난 바다처럼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기에 물 속으로 빠져들어가지 않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법사들의 마법도 무용지물인 것 같았다. 요동치는 물 위에서는 정신이 없을테니 마법을 사용하려면 허공으로 떠올라야 했는데, 마법사들이 허공에 떠오르면 대기하고 있는 물채찍이 매섭게 달려들었으니 그것도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정령술사들이 정령들을 불러내 사람들을 그나마 보호하고 있었지만, 호수를 요동치게 하는 누군가의 힘이 너무 강력해 딸리는 모양이었다. "엔다이론!!" 허우적대는 일행들의 모습에 나는 앞 뒤 가릴 것 없이 엔다이론을 불러내어 그들을 구하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엔다이론의 모습이 나타나 호수 속애 빠져 허우적대는 그들이게 달려가기고 전데 호수에서 물로 이루어진 굵은 창이 튀어나와 엔다이론을 꿰뚫는 것이었다. 그 타격으로 인하여 엔다이론은 곧바로 흩어져 정령계로 강제 소환 되었고, 엔다이론이 받은 타격은 곧바로 내게 그대로 전해져 왔다. "허억!!" "해인님!!" 그 동안 엔다이론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불러낸 상급 정령들에게 이런 직접적인 충격을 준 존재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나 또한 정령들의 타격을 전해받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가 처음 당하자 그 고통으로 인하여 저절로 허리가 숙여지고 힘빠진 다리가 몸을 지탱하지 못해 그 자리에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단 한방에 엔다이론을 정령계로 돌려보낼 충격이라서 그런지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 순간은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숨조차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듀비와 첼릿이 얼른 옆에서 부축해주며 걱정스레 물었지만, 나는 잠시 그들의 말에 대꾸한 기력도 모으지 못하고 충격에 낑낑댔다. =============================================== 작가님께서 바이러스에 걸리셨다더군요... 태그 어려워요; 어떻게 쓰지요?;;; 노가다로 올립니다~=ㅅ= ====================================================== 제 38화 호수의 정령 일리언 (2) 듀비와 첼릿이 얼른 옆에서 부축해주며 걱정스레 물었지만, 나는 잠시 그들의 말에 대꾸할 기력도 모으지 못하고 충격에 낑낑댔다. "콜록, 콜록.... 하아..." 그러다 잠시 후에 겨우 숨통이 트이자 나는 격한 기침과 함께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나서야 겨우 상체를 세울 수 있었다. "해인님, 괜찮으십니까?" 첼릿이 다시 한번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어우... 이거 충격이 장난이 아니네요. 이 정도의 충격은 처음 받아본 거 같아요." 몇번이나 심호흡을 하고 나자 그제야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내 몸속의 기운들도 아까 받은 충격으로 놀라서 사방으로 흩어지더니만 이제 정신을 차린 듯 부랴부랴 나에게 달려들어 가슴 부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아마, 그 덕분에 통증이 더더욱 빨리 가라앉는 듯 했지만... "안색이 안 좋아요. 잠시 뒤로 물러나서 쉬는게 어떨까요?" 듀비까지 걱정어린 표정으로 말하는 걸 보니 내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때 램버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지금 그럴때가 아닌거 같은데? 해인, 너희 나라 사람들 죽게 생겼다." 램버트의 목소리에 황급히 호수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거센 물결 속에서도 얼굴을 물 위로 내민채 물살을 버티던 사람들이 절반 정도 사라져 있었다. "이런!" 그 모습에 나는 황급하게 일어나 정령들을 부르는 대신 몸 속의 기운을 끌어 올려 곧바로 호수의 물에게로 쏘아 보냈다. 엔다이론까지 당해서 정령계로 강제 소환 당하는 마당이었으니 왠만한 정령으로는 씨도 먹힐 것 같지 않아서 물을 다룰 수 있는 내 능력을 직접 사용하는 것이었다. 물이 적은 곳이면 모르되, 수평선이 보일 정도의 넓다란 호수라면 바다 속 못지 않게 최상급 정령에 가까운 내 능력을 거의 끌어올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이게 왠걸, 다른때라면 자석에 들러붙는 클립처럼 잘 따라오던 물이었는데 이번에는 내 기운을 보내자마자 강하게 거부하는 것이어다. 덕분에 그 반발력에 의하여 나는 다시 한번 타격을 받고 비틀거리며 신음 소리를 내뱉어야 했다. "커윽..." "아, 오늘 장난이 아니게 깨지는 구나..." 속으로 그렇게 꿍시렁 거리는데 속에서부터 뭔가가 목구멍을 통해 치밀어 올라오는게 느껴졌다. "엑..." 디럽게 입가를 통해 흘러내렸기에 나는 충격으로 침이라도 흘러내린게 아닌가 해서 황급하게 닦았는데 그걸 본 첼릿과 듀비의 눈이 뚱그래지는 것이었다. "해, 해인님!"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그 둘의 모습에 창피해서 재빨리 소매로 벅벅 입가를 닦았다. 둘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근슬쩍 처리하려고 했는데 벌써 봐버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다행이도 그들은 내가 칠칠치 못하게 침을 흘려서 놀란게 아니었다. "내상을 입으셨군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린 듀비가 날 보호하려는 듯 내 어깨를 팔로 감싸안아 날 자신의 품에 기대게 했다. "내, 내상이요?" 듀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내가 소매를 바라보니 거기에는 투명한 침이 아니라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헥..." 생전 처음 겪은 일에 내 눈이 휘둥그래지는데 램버트의 안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에... 네가 뭘 했는지 몰라도 확실하게 효과가 있는 모양이군. 물결이 상당히 약해졌는걸? 거기다가 순간적으로 물기둥(아마 물채찍을 말하는 듯)들도 모두 사라졌어." "그,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아까 내가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기운을 끌어 올려 보냈기에 그 기운을 막아냈던 누군가도 나 못지 않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그 누군가가 나처럼 물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이구 참... 나도 미련하지. 호수의 물을 저렇게 다룰 수 있는 걸 보고 진즉에 눈치를 채지 못하다니... 그런데, 누구지? 내 기운을 다 막아낼 수 있다면 엄청나게 강력한 자인데..." 이번에도 또 둔하게 돌아가는 내 머리의 용량을 한탄하며 겨우 몸을 추스리는 내 앞에 갑자기 호수에서 한줄기의 물기둥이 솟아 올라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날 품에 안은 듀비가 얼른 뒤로 물러났고, 첼릿과 램버트가 각자의 무기를 꺼내들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런데 다행이 내 앞으로 떨어진 물기둥은 공격할 의사가 없었는지 땅에 부딪혀 강력한 폭발을 일으키는대신 몸통을 일으킨 코브라처럼 꼿꼿이 서있더니만 곧이어 어디는 들어가고 어디는 나오는 식으로 변형을 일으키더니 곧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나보다 더 진한, 깊은 바다의 색과 같은 짙은 군청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었다. 발끝까지 흘러내린 생머리와 투명해서 실핏줄까지 다 비칠 것만 같은 새하얀 피부, 거기에 크고 서글서글한 신비로운 눈동자와 오똑한 코만 보면 정말 아름다웠지만, 매섭게 노려보는 눈초리와 추위에 떠느라 변한 것 처럼 보이는 퍼런 입술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취해 멍하니 있게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섬짓한 기분이 들어 경계하게 만들면 몰라도... "제법이군.... 마법사 녀석들만 경계하면 될 줄 알았는데 숨겨진 변수가 또 있었을줄이야... 내 실책이야." 가는 팔을 들어 날 가르키는 그녀의 손가락 끝에 달린 긴 손톱도 군청색이었다. 그녀는 매서운 눈길로 날 살펴보더니 입술 끝을 올려 차갑게 씨익 웃었다. "신기한 인간이군. 오래 산것 같지 않은데도 나이에 비해 엄청난 기운을 가지고 있어. 하기야, 물의 상급 정령을 불러낸데다가 나에게 그 타격을 받고도 공격을 가할 정도니..." 그녀의 말에 나도 듀비의 품에서 벗어나 몸을 바로 세우며 입을 열었다. "당신... 정령이군요. 그런데... 당신 같은 물의 정령은 본적이 없는데... 자연에서 정령이 탄생할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당신도 그런 경우입니까?" 내 말에 그녀가 킥킥 거리며 웃었다. "맞아. 나는 이 호수의 정령 일리언이라고 하지. 정령 친화력이 강한 아이야, 내 평생에 처음 만난 신기한 존재라 좀더 관찰하고 싶지만 네 녀석이 저 인간들과 한패라는 걸 안 이상 가만 둘 수는 없지. 날 원망하지 말려므나."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그녀의 미소에서 나는 이미 경각심을 느껴 흩어진 기운을 모아 대비하고 있었다. 해서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손톱이 50cm 정도 길어지는걸 보자마자 급하게 외쳤다. "슈리엘!!" 아까 그녀에게 받은 충격이 너무 큰데다가 회복할 시간도 없었기에 지금 내가 불러낼 수 있는 건 중급 정령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기가막히게도 슈리엘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그녀의 길다란 손톱과, 그 소톱 에서 형성된 날카로운 바람에 의해 갈기가길기 찢겨져 정령계로 강제 소환되고 말았다. "윽~!!" 그 충격으로 다시 한번 휘청인 나는 목구멍으로 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덩어리를 간신히 애써서 삼킨 뒤 그녀를 노려봤다. "다, 당신... 어떻게 바람까지 다룰 수 있는 거죠? 호수의 정령이라면서..." 고통과 놀라움으로 일그러진 내 표정을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면서 내 질문에 순순히 대답해줬다. "나도 몰라. 오랜 세월 살다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더군. 물론, 물을 다루는 것 보다야 미약하기는 하지만... 그러고보면 나는 물과 바람의 정령의 혼혈..." 의기양양하게 내 말에 대답해주던 그녀는 말을 채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날아온 마법을 맞고는 산산히 터져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물로 이루어진 몸이라 피와 살점 대신 물방울만 산산히 흩어진 것 뿐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뒤 허공에는 창백한 얼굴의 쉐리든 폴트팩트 백작이 있었다. 아까 내가 호수의 물에 내 기운을 쏟아 부었다가 타격을 받았을때 호수의 정령 또한 나 못지 않게 타격을 받아 일시적으로 거칠게 움직였던 호수의 물이 멈칫거린 모양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능력 있는 마법사들이 허공으로 떠올랐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물 속에서 허우적 거리느라 백작의 표정은 상당히 안 좋아보였다. "이이... 감히 네 녀석이~!!" 그 상태에서 기껏 물의 정령을 공격했지만, 어차피 내 앞에 나타난건 물의 정령이 물을 사용해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낸 것일 뿐이었기에 그녀 자체가 쓰러진 건 아니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내 앞에서 산산이 흩어진 모습 대신에 다시 물 속에서 물기둥이 하나 솟아 나더니 이번에는 허공에 떠 있는 백작 옆으로 떠올라 분노를 표출해냈다. "가만두지 않겠다!!" 그녀의 손짓에 호수 위에서 여러개의 가느다란 물기둥이 솟아 올라 백작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콘스틴스의 마법이 펼쳐져 그녀의 공격을 막아다. "프리징 스피어!!" 이 마법은 6클래스의 마법으로 마법사가 원하는 범위안에 있는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마법 이었다. 덕분에 호수의 정령 모습과 폴트팩트 백작을 공격해 들어가던 물줄기는 물론, 그 밑에 있는 호수까지 모두 꽁꽁 얼어붙어 정지해버렸다. 그 틈을 타서 폴트팩트 백작은 재빨리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휴우... 어쨌든 위기는 넘긴 것 같군요."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던 첼릿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를 돌아보았고, 나도 동감이었기에 마주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능력 있는 마법사들은 모두 물결을 피해 허공으로 떠올라서 호수 정령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고, 나머지 물 위에서 공격을 할 수 없는 기사들과 용병들은 빠르게 헤엄쳐 나오고 있었다. ===================================================================== 바이러스는... 결국 터보 백신 유료 서비스를 구매해가지구 해결 했습니다. 그걸로 검사를 해보니 바이러스에 감염된 파일이 200개가 넘더군요. 그거보고 얼마나 경악스럽던지... ㅡ.ㅡ;; 크어어... 제가 이렇게 미련했을 줄이야... ㅠ.ㅠ ====================================================== 제 38화 호수의 정령 일리언 (3) 파삭~ 그러던 어느 순간 얇은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호수 위에서 얼어 붙어있던 정령의 모습이 산산조각 나며 파편들이 호수 속으로 떨어졌다. 어차피 아무리 꽁꽁 얼린다고 해도 그걸로 호수의 정령을 완벽하게 제압했다고 안심하고 있지는 않았기에 그거보고 놀라는 대신 모두 긴장한 눈으로 호수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푸, 어푸푸~~" "으헉...어푸,사,살려... 어푸푸~~꼬르륵..." 뭔 소리인고 하니, 호수의 정령이 타격을 입어 덕분에 잔잔한 호수 위에서 잘만 헤엄쳐서 이쪽으로 나오던 사람들이 갑자기 몸부림을 치면서 물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것이었다. 호수의 정령이 위쪽에서 공격을 하면 이제 허공에 떠서 여유를 찾고 있는 마법사들에게 막힐게 뻔하니까 이제는 아예 밑에서 공격을 하겠다는 심산인 모양이었다. "이런, 레비테이션!!" 그 모습에 폴트팩트 백작이 황급히 자신과 가까이 있는 일행들에게 부유 마법을 걸어주자 다른 마법사들도 얼른 정신을 차리고 사람들에게 마법을 걸어주기 시작했다. "레비테이션!!" 위에서는 사람들을 끌어 올리려 하고, 밑에서는 잡아 당기려고 하는 밀리고 밀리는 접전이 벌어졌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그 모습을 잔뜩 긴장한 상태로 구경하는데 갑자기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엠브로스 백작님, 구경만 말고 좀 도와주십시오!!" 고개를 돌려보니 우리 나라에서 온 두 마법사중 한명인 앤더슨이었다. 그는 레비테이션 마법을 사용할 겨를이 없었는지 아예 약간 밑으로 내려가서 요크스페이스경의 팔을 잡고 낑낑 거리며 끌어 올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 자, 잠깐만요." 얼굴이 시뻘개진 채 땀까지 뻘뻘 흘리며 애쓰는 그의 모습에 나는 당황하여 허둥거리며 주문을 외웠다. 평소퍼럼 정령들을 불러내면 간편했을테지만, 호수의 정령이 그걸 가만 냅두지 않고 정령들을 공격한다면 그 타격이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올테니 차라리 마법을 사용하는게 나을 듯 싶었다. 게다가 다행이도 레비테이션 마법은 익혀뒀고 말이다. "레비테이션!!" 거기다 더욱더 다행스럽게도 우리 나라 사람들은 내 덕으로 출발이 늦었던 탓에 호수 깊숙히 들어가지 않았던데다가 아까 잠깐 대치 상태에 열심히 헤엄쳐 나왔기에 거의 호수가 가까이와 있어 내가 허공으로 떠오르지 않아도 충분히 그들에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급해서 누구누구 가릴 것 없이 우리 나라 일행 모두에게 펼쳤더니만 마법이 펼쳐지자마자 강력한 압력이 내 어깨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헉..." '에구...너무 욕심을 부렸나...' 다시 휘청거리자 얼른 듀비와 첼릿이 부축해주는게 느껴졌다.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 나는 이를 악물고 펼친 마법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정신을 집중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니 마법사 길드 소속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거의 허리까지 밖으로 나온 리건의 모습이 보였다. '이익 저 인간... 아니 저 드래곤 이럴때조차 마법을 안쓰네..." 물론 여기 오기 전에 그럴 꺼라고 분명히 말한데다 나도 이해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엄청 얄미웠다. 힘든 와중에 분노의 대상도 안보이자 내심 잘되었다 싶어 씨근덕대며 리건을 째려보고 있는데, 이런 내 시선을 느낀 것일까? 내 힘과 마법사의 힘이 더해져 호수 정령의 힘을 이기고 거지 다 끌려 올라와 마법사의 부축을 받던 리건의 고개가 획 돌아가더니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이 인간, 아니 유희 나온 드래곤이 씨익 웃는게 아닌가? 그러더니 아마 마법사와 이야기가 된 듯 '타핫~!'하는 경쾌한(?)기합 소리와 함께 두 손으로 포개어진 마법사의 양 손을 딛고 허공으로 훌쩍 뛰어 오르더니 허리에 찬 검을 멋드러지게 뽑아 양손으로 부여잡더니 우리 나라 사람들과 약간 떨어진 호수 위를 향해 내리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리건의 검에서는 일명 검기라고 일컬어지는 눈부신 빛이 튀어 나왔고 그가 내리치자마자 호수의 물이 쫘아악 갈라져 바닥이 드러나버렸다. "멋지군..." 그 모습을 홀린듯 바라보던 첼릿의 입에서 감탄 어린 말이 흘러 나왔다. 나도 그 말에 동감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리건의 일검으로 인하여 순간적으로 호수 정령의 힘이 끊기자 지금까지 그녀의 힘에 버티고 있던 마법사들과 내 힘에 의지하여 호수 속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고 있던 사람들이 허공으로 불쑥 솟아 올랐던 것이다. 말이 솟아 오른 것이지, 나는 순간적으로 서커스에서 봤던, 인간 대포알을 보는 줄로만 알았다. "우아아아악~~!!" "우갸갸갸~~~" "살류~~" 그 모습에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때 역시나 지혜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나보다 훨씬 위인 클리우드 남작이 나섰다. "윈디~!!" 그의 간단한 마법에 사람들이 떨어지는 장소에 부드러운 바람이 불더니만 지상 바로 위에서 사람들을 맞아 떨어지는 속도를 팍 줄여주었다. 덕분에 온 몸으로 땅과 박치기를 하더라도 크게 다치지는 않고 가벼운 타박상으로 끝날 듯 싶었다. 뭐, 능력 좋은 사람들은 바람과 만나자마자 자세를 바로잡아 멋드러지게 착지를 했지만 말이다. 클라우드 남작은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나에게 가벼운 손직을 해 보이고는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다른 나라 사람들을 도와주러 날아갔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마법사 없이 호수가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우리를 향해 갑자기 커다란 물결이 일어나 덥쳐오기 시작했다. "우아아악~~" 그렇지 않아도 신나게 헤엄쳤다가, 호수 속에 끌려갈 뻔했다가, 허공에 날아올라 낙상할 뻔하는 일련의 일을 겪어 거의 탈진해 있던 사람들이 커다란 물결이 몰려오자 기겁을 하고 사방으로 흩어졌고 첼릿도 황급하게 나를 이끌고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단 한명은 3,4m는 충분에 될 것 같은 물결 앞에 당당하게 버티고서 있는게 아닌가? "듀비!!" 그게 누구인지 알아챈 나는 황급히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돕기 위하여 내기운을 사용하려고 하는데, 듀비가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가볍게 손을 들어 흔드는 것이었다. "에..." 그에 그가 뭔가 하려는 걸 알아챈 나는 멈칫거렸지만, 거대한 물결 앞에서 검사가 뭘 할수 있나 싶어 불안속에 걱정하며 여차하면 튀어나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런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듀비는 아주 여유 만만하게 두개의 검을 뽑아들어 물결을 노려보더니 그 물결이 약 2,3m쯤 다가왔을때 천천히 검을 휘둘렀다. 오른 쪽 검 한번, 왼쪽 검 한번... 누군가 봤다가는 간단한 팔 운동 하는 것 처럼 보일지도 모를, 너무나 여유로운 몸짓이었지만, 결과는 장난이 아니었다. 처음 오른쪽 검이 휘둘러질때 대기라도 하고 있었던 것 처럼 푸른 검기가 그의 검에 쏘아져 나갔다. 뭐, 듀비가 첼릿을 상회하는 검사라는 알고 있던 나는 그가 검기를 쏘아보낸 것 정도야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 다음 듀비의 왼쪽 검에서 다시 한번 검기가 쏘아져 날아가 먼저 날아가는 오른쪽 검에서 나간 검기와 정확하게 높은 물결 속에서 맞부딪히자 안 놀랄수가 없었다. 먼저 튀어나간 검기와 나중에 나간 검기와의 충돌여파는 어마어마했는지 3.4m나 되는 물결을 일순간에 터트려 호수가에 있던 우리는 때아닌 소나기를 맏아야만 했다. "어, 어...체, 첼릿?저게...가능한건가요?" 단순히 검기를 쏘아 보내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지만, 검기를 두개 연달아 쏘아 보내면서 그 검기의 속도까지 조절하여 원하는 거리에서 정확하게 충돌시켜 폭발을 일으키는게 말이다. 더듬더듬 거리며 나오는 내 질문에 첼릿이 너무 경악하고 있는 바람에 대답을 못해주자 대시 어느새 다가온 리건이 입을 열었다. "정말 대단하군, 검기를 저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니 말이야. 생각했던거 보다 훨씬 대단한 녀석이었군" "허...그렇죠? 나느 상상도 못할 경지군요. 리건은 저럴 수 있어요?" 물결이 사라지자 여유있게 검을 집어 넣고 몸을 돌려 다가오는 듀비를 얼빠지 표정으로 바라보며 리건에게 묻자 리건이 생각을 하는지 침묵 후에 대꾸했다. "뭐...한다면 못할 것도 없기야 하겠지만....몇번은 연습을 해야겠지." "만약 리건이 물결을 상대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나같으면 물결을 종단시켜 버리던가 횡단시켜 버렸을걸? 흠, 종단해봤자 힘의 맥을 못 끊을테니... 잠깐의 여유는 가졌겠지만 확실하게 막지는 못했을 거 같군." 리건의 말을 듣던 나는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에 희심의 미소를 짓고는 나의 힘을 개방하여 호수가로 떨어지는 물들에게 집중 시켰다. 아까 내가 호수의 물을 사용하려 했을때에는 나 보다 먼저 호수의 정령이 물들에게 자신의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힘에 의해 튕겨 나갔지만, 현재 우리 위로 쏟아지고 있는 물을 잠깐이라고 해도 그녀의 영향력에 벗어나 있을거라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과연, 내 생각이 맞았는지 땅에 떨어져 땅 속으로 스며들려고 하거나 호수로 다시 흘러 내려가려고 했던 물들이 내 의지를 받아들여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 "이,이게..." 사람들이 당혹스러워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일일이 설명해줄 여유 없이 정신을 집중시켰다. 내가 노리는 건 단 한가지, 잠깐이라도 그녀의 힘을 흔들어 놓는 것이었다. 이왕이면 끊어 놓는게 더 좋겠지만, 지금 그녀와 물을 다른는 대결을 한다면 물의 양이 훨씬 적고 홈그라운드도 아닌 내가 불리할게 뻔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대단한 마법사들이 내 아군이라는 점일까나? 하기야, 즈금도 그 마법사들을 믿고 있으니 이런 무모한 작전을 생각해 낼 수 있었을 테지만... 모으느라고 열심히 모았는데 과연, 물의 양이 왠만한 욕조 두개 정도의 분량밖에 안됐다. 호수의 정령 또한 물이 내쪽으로 쏟아지자 이걸 내가 끌어갈 줄 알았는지 잽싸게 손을 뻗어 조금이라도 호수로 회수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뭐, 늦게 떠올린 둔한 내 머리 때문이니 어쩔 수 없지.' 아쉬움에 입맛을 한번 쩝 다신 나는 다시 한번 몸 속의 기운을 끌어 올려 내 주의에 올린 물들을 움직였다. 적다고는 하나, 호수에 비해 적은거지 일반적으로는 꽤 많은 물의 양이 갑자기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자 사람들이 놀란 탄성을 발했다. 그 소리를 들으니 쬐께 기분이 업 되었지만, 앞으로 내가 할 일을 생각하고는 마음을 다스렸다. '흠... 부디 잘 되어야 할텐데...' 나의 의지를 받은 거대한 물방울이 호수 위, 정확하게 말하면 아직도 호수 속에서 허우적 거리며 마법사들과 호수 정령의 줄다리기의 줄이 된 사람들쪽으로 다가가자 호수의 정령이 내 의도를 짐작했는지 내가 보내는 거대한 물방울을 막기 위한 물줄기를 솟아 오르게 했다. 그러자, 이때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나선 이들이 있었으니, 대단하신 검사 듀비와 리건, 그리고 첼릿이었다. 내 물방울을 쳐내기 위해 - 조금이라도 내 영향력에서 벗어나 물이 호수 속으로 떨어지면 그건 곧바로 호수 정령 소유고 들어가니까 - 나선 굵은 물줄기들을 호수가에 검기를 날려 베어 넘어뜨리거나 터트렸던 것이다. 비록 완병학 방어책은 아니었으니 시간은 충분히 벌어주는 효과를 주고 있었다. 그 틈을 타서 사람들 가까이까지 물방울을 이동시킨 나는 심호흡 한번 하고 있는 기운 없는 기운을 짜내 단 한순간에 물방울을 셋으로 나누어 세 국가 사람들 근처를 공략했다. 첨벙~!! 커다란 물보라를 일으키며 세 군데에서 물들이 호수 속으로 쏟아져 들어가자마자 그 물들을 다루고 있던 내 기운에게 다른 강한 기운이 반격하는게 느껴졌다. "윽..." 나름대로 온 몸의 기운을 끌어내어 그 힘에 버티려고 했지만, 거리가 먼데다가 홈그라운드라는 이점을 이겨낼 수는 없었는지 나는 겨우 20여초쯤 버티다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이도 그 짧은 시간의 힘겨루기가 도움이 되었는지 마법사들이 사람들을 호수 위로 끌어 올리는게 보였다. "에구...그나마 다행...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왠지 눈앞에 흐릿해지는데다가 눈꺼플이 천근만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결국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내가 스르르 눈을 감자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아주 멀리서 아련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엠브로스경!!" ===================================================== 잘썼는지 모르겠어여 이까지 쓰는데 힘들어 죽는줄 알았다니까요.. 오타가 좀있을지도 모르지만 처음쓴거니깐 이해해주세요 ^^ ====================================================== 제 38화 호수의 정령 일리언 () 내가 눈을 떳을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새까만 밤 하늘에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는 모습이였다. "어라" 분명히 정신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햇님이 반짝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당황하며 몸을 급히 일으켰다. "여, 께어났냐?" 소리가 들린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모닥불가에 앉아있던 램버트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그의 한 손에는 그가 애용하는 도끼가, 또 다른 한 손에는 불을 휘젖는데 사용된 듯한 나뭇가지가 들려있는걸 보니 불침번을 서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아직까지 완전히 깨지못해 약간은 몽롱한 머리를 흔들어서 완전히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면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죠?" 내 질문에 램버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간단하게 대꾸해줬다. "네가 쓰러졌을 즈음, 호수에 빠져 허우적대던 놈들도 구조가 되었고, 그 뒤로 더 이상의 공격도 없어서 휴식을 취하고 있지." "휴 다행이네요." 내가 쓰러진뒤로 공격이 없었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 뒤에도 공격이 있었다면 나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커다란 짐만 되었을 테니 말이다. 일반 용병들이 아니라 버려지진 않을 테지만, 무사히 구조 되었다고 해도 마음이 편할 리가 없을터였다. 쓰러지고 나서 밤이 깊어 질때까지 계속 자다 이제 일어나서 그런지 더이상 잠이 올것 같지도 않아 램버트랑 같이 불침번이라도 서자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는데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일어났냐? 하여간 누굴 닮아서 저렇게 잠이많은지...] 휙 돌아보니 못마땅하다는 표정의 아버지가 그곳에 서 있었다. 던전 탐험 일행들 보다도 먼저 이곳을 살피러 가신다고 하신 주제에 보이지도 않다가 이제야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기가 막혀 말도 못하고 입만 벙긋 거렸다. "해인 거기뭐있냐?" 이런 내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램버트의 부르는 말에 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 웬 날파리 하나가 윙윙 대는거 같아서 말이죠." 변명 겸 아버지에 대한 가벼운 복수 겸 내뱉은 말에 아버지의 인상이 팍 찡그려지는 걸 고소하게 생각하며 램버트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저 볼일 좀 보고 올게요." "그래라 아, 호수 조심하고." "네." 가벼운 대답과 손짓을 램버트에게 보낸 나는 여기저기 쓰러져있는 사람들을 주의 해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사람들과 거리가 멀어졌을 즈음,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의 분노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 [날파리가 뭐가 어째고 저째?] 사람들과 많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몰라 나는 아버지와 같이 정령의 대화법으로 말을했다. 시침 딱떼고. [어라라? 변명한거 가지고 왜 화를 낸대요?] [변며어엉?] 아버지가 말꼬리를 늘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쏘아보는데 이프리트 아저씨가 씨어들었다. [자자,그만해. 해인이는 몸괜찮으냐?] 아버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나타난 이프리트는 평소의 항상유지하던 불새의 모습이 아닌, 타오르는 불꽃 같은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늘씬한 미남의 모습을 하고있었다. [어라, 아저씨 모습 바꾸셨네요? 셀레아나 모습도좋지만 그 모습도 멋지네요.] [후후, 고맙구나. 그래, 몸은 다 회복된거 같니?] 빙그레 웃는 이프리트의 뒤로 노아스도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어디 다 회복 되었겠어?] 그녀의 말에 나도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대꾸했다. [아아, 정말 오늘은 아찔했어요, 그런 공격을 당한 건 처음인데다가 기운을 다써서 탈진까지 하다니...히유... 그 일리언이라는 정령이 나보다 더 강한거 같아요.] [놀랄만도 하겠다 최상급 정령수준이니... 자연계에서 태어난 존재치고 그만큼의 힘을 가지기도 어려운데... 대단한 녀석이더군. 나조차 놀랄 정도로 말야.] 마지막으로 나타난 실피드. 워낙에 넷이서 우르르 몰려다녔기에 갑자기 나타났어도 놀라지 않고 덤덤하니 인사할 수 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 나타난 존재는 전혀 담담할수가 없었다. [호오...정령왕께 그런말을 듣다니 참으로 영광이로군요.] [헉....] 정령왕들은 다 내 앞쪽에서 나타났거에 비해 뒤에서 스르륵 나타난 존재는 한밤에 유령같아서 엄청 놀랐다. 다른 정령들은 정령왕 앞에만 서면 정령왕의 몸에서 풍기는 존재감 때문인지, 아니면 정령 사회의 계급 때문인지 함부로 처신을 못했다. 최상급 정령들 조차도 말이다. 그런데 그런 최상급 정령들과 비슷한 수준의 능력을 가졌다는 호수의 정령 일리언은 정령도 아니고 네 명씩이나 버티고 서 있건만 당당하게 버티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당당함을 넘어서 껄렁껄렁한 표정이었다. 저기에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삐딱한 표즈만 취한다면 완전히 건달일거다. 그렇게 네 정령왕을 둘러보면서 인사 비스무리한 말을 건넨 그녀는 아직도 갑자기 나타난 그녀의 존재에 놀라있는날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가슴앞에서 팔장을 떠억 낀체로 말이다. [흐음.... 가지고 있는 기운이 정령들의 기운과 무척 비슷했어도 정령과 계약을 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는데, 지금보니 그게 아니군, 그렇지 않아? 넌 인간이 맞는건가?] 그러나 그녀의 질문에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나섰다. [건방진 놈이군. 감히 내 앞에서 그따위로 행동을하다니.]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분노한 표정 앞에서도 전혀 꿀리지 않는 거였다. [호오 물의 정령왕이시여... 지금 제게 당신에 대한 순종을 바라시는 겁니까? 아무리 정령왕이시라고 하나 정령계에서나 무적이실뿐, 이 세계에서는 당신의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허수아비면서 제게 너무 많은걸바리시는군요.] 다른정령왕이라면 상상도 못할 발언을 하며 일리언은 씨익 웃는 묘기까지 선사했다. 그리고 마무리로 폭탄선언까지 하는 것이었다. [제게 복종을 바라신다면 절 굴복시키고나 요구하시지요,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시여!]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 말을 직접들은 아버지에게서 뿐만아니라 다른 세 정령왕에게서 폭발적인 반응이 치솟아 올랐다. 아버지가 그런걸 들었다는 걸 가지고 껄껄 웃으며 놀릴것같은 실피드 조차도 아버지 못지않게 분노하여 굳은 얼굴로 기운을 꺼내는 모습에 내가 다 놀랄 지경이었다. [자연계에서 태어난 정령이여, 감히 온 세계의 정령들을 존재시키며 다스리는 우리 정령왕을 그대가 감히 거역하겠다는건가?] 그리고 정령왕의 대표로 아버지가 아닌 이르리트 아저씨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나 조차도 찔끔할 매서운 기운을 풀풀 풍기며 차갑게 물었지만, 일리언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한치의 꿀림도 없이 당당하게 맞섰다. [거역이라니 우습군요,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시여, 애초에 나는 당신에게 복종할 이유가 없지않습니까?] [웃기고 있네. 엘라임과 실피드가 없으면 네존재또한 살지 못할걸 나는거야, 모르는거야?] 이번엔 노아스가 나섰지만 일리언은 코웃음 칠뿐이었다. [말은 바로 하셨으면 좋겠군요. 두 정령왕에게 날 태어나게 해달라고 빈적이 없거니와, 또한 날 일부러 태어나게 뭔가를 해주신것도 없지않습니까? 대가 태어난 것은 오로지 이세계의 기운 덕분이었으니 복종해야한다면, 이 세계의 자연 자체라고 해야 옳지 않습니까? 땅의 정령왕 노아스여.] [네까짓게 감히 내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노아스의 분노에 나는 다시한번 움찔거렸다. 정령들의 이름을 누가 붙인건지는 모르겠지만,나는 정령은 물론이거니와 정령왕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스스럼이 없었다. 그렇다고 정령왕들에게 친구 부르듯이 부르는건 아니었고, 그뒤에 "님"자나 "아저씨" 같은 웃어른에대한 예의를 갖추기는 했지만,내가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것에 정령왕 들은 아무런 제지 같은 걸 하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기데 나도 당연한 건줄알았다. 사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정령왕들의 이름은 불려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비록 정령왕을 불러내는 건 아니었지만, 정령왕들을 불러내는것은 아니었지만, 정령사들 사이에서는 경외감을 담고 있기는 해도 확실하게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그런데 대해서 별 신경을 안쓰고 있었는데 지금 노아스의 분노로 깨달은게 있었으니 정령들이 자신보다 상급의 존재들의 이름을 부르는걸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정령왕들은 모구 정령왕들이라고 칭해졌고, 엔다이론이 엘라스트라를 지칭할때 "엘라스트라" 라는 이름 대신 최상급 정령이라고만 했던게 기억이났다. 물론, 상급정령이 자신보다 낮은 정령들을 부를때는 가끔 이름을 부르기도했지만 말이다. 노아스가 지금 버럭 화를 내는걸 보니 정령들 사이에는 상급 존재들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는것이 금기였던 모양이다. 아마 일리언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아싸 시비를 걸깨 정령왕들의 이름을 강조해서 부르는게 아닌가 싶었다 과연 노아스가 버럭 화를 내자 일리언이 그럴줄 알았다는 듯한, 조소에가까운 미소를 띄우면서 비비꼬았다. [그래서 어쩌실껍니까? 땅의 정령왕 노아스께서 절 굴복시키기라도 하실언지요?] [오냐,내 기꺼이...] 일리언의 건방진 태도에 노아스가 도저히 참을수 없었는지 양팔을 걷으며 앞으로 나서 려고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런 그녀를 제지하며 앞으로 나섰다. [내가 상대하지. 너는 호수에서 태어났으니 내 관할하에 있다고 볼수있을거다. 그런녀석에게 가르침을 내리는것에 다른 정령왕이 나서게 할수는 없지.] [호오, 가르침이라...그게 가르침이 될지 아니될지는 모르는거지요. 게다가 더는 다른 분들이 나서도 상관이 없습니다만? 아, 다 나서셔도 되구요.] [건방떨고있네. 아까는 해인이에게 한방먹은건 다 회복되었냐? 저녀석에게도 이기지 못하는 놈이 큰소리치기는...] 아버지가 앞으로 나서자 그걸 존중해주듯 뒤로 한걸음 물러난 실피드가 일리언처럼 팔짱을 떠억 끼고는 건들거렸다. 실피드의 말에 날 힐끔 바라본 일리언은 여전히 여유만만한 표정으로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저 인간 - 인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 이 대단하다는건 인정하지요. 하지만, 저 인간 혼자 절상대하였더라면 저는 결코 쉽게 물러나지 않았을 겁니다. 저 인간에게는 능력이 뛰어난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있었기에 저와 대등하다 싶을 정도로 상대할 수 있었던거죠.] [널 그렇게 대단하다 여기지마라. 네가 저 호수에서 태어난 덕에 호수가 해인이의 다스림을 거부한 덕에 네가 해인이 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었던거다. 만약 이 곳에 아닌, 네가 한 번도 본적없는 물속에서 해인이와 겨루었다면 결과는 달랐을껄?] 아버지의 단호한 말에 일리언은 잠시 생각하는듯하더닌 어께를 으쓱해보였다. [틀린말은 아니군요. 그래서요? 설마하니 여길떠나 다른곳으로 가서 상대해주시겠다는 말인가요?] 그녀의말에 아버지는 씨익 웃었다. [그럴 필요없다. 이 세상의 모든 물은 나의 권한안에 있지. 그걸 네게 가르쳐주기 위해서라도 기필코 여기서 널 굴복시키마.] 아버지의 당당한 자신감에 일리언이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는지 그녀의 얼굴에는 지금까지의 머물러있던 건방진 미소가 사라졌다. 하지만, 곧 그녀는 미소대신 분노를 나타내며 외쳤다. [자신감이 대단하시군요, 물의 정령왕이여. 계약자도 없는 당신이 과연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 어디 가능하다면 날 굴복시켜 보시죠!!]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훌쩍 뒤로 날아올라 불빛 하나 없는 호수위로 떠오르자 아버지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우리도가자.] 이프리트 아저씨가 내팔을 가볍게 잡고 아버지의 뒤를 따라 날아가자 실피드와 노아스도 내뒤를 따라왔다. ===================================================== 에휴, 이제 성실 연재 하려고 했는데 말이죠. 그렇지 않아도 벌써 마감일 넘겨가지고 담당자분께 열심히 닥달을 당하고 있는중 입니다. 그런데, 어제 젊음을 과시하려고 반팔 반바지 입고 나돌아 다니다 감기가 덜컥 걸려버렸습니다.ㅡ.ㅡ;; 여러분은 감기 조심하세요~훌쩍~ ==== 박신애님 오타가 조금 오늘 많으시네요... 일리언인데 일레언이라고쓴 것있으시더라고요.. 제가 바꿀까...했지만.. 안도리까싶어 그냥뒀습니다. 많은 양해바래요~ ====================================================== 제 38화 호수의 정령 일리언 (5) 우리가 간 곳은 호수 위에 떠 있던 멋드러진 집의 뒤쪽이었다. 나는 집이 호수 가운데 부근에 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공중에 떠서 내려다보니 그 집은 우리 일행이 달려온 쪽의 호수가 쪽에 가까운 부근에 있었다. 집이 중심에서 꽤 빗겨난 곳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행들이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어도 그 곳에 도달하지 못한 걸 생각한다면, 이 호수 자체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호오, 아까는 콧배기도 안보이더니, 이제서야 자식의 복수를 해주러 나선 건가?" 갑작스런 목소리의 출연에 돌아보니 어느새 왔는지 리건이 당연하다는 듯 옆에 버티고 서 있는거였다. "어라, 어떻게 알고 왔어요?" 놀란 내 시선에 리건은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 정령왕의 기운이 한꺼번에 폭발하는데 모를수가 있겠냐? 다행이 내가 인간들이 눈치를 못채게 손을 썼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을 거야." 리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아까 네 정령왕이 드러낸 기운들이 그만큼 강력했던 것이다. [넌 또 왜 온 거냐? 설마 끼어들려는 건 아니겠지? 이건 우리 정령들의 일이다. 네 녀석이 끼어든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어.] 실피드의 퉁명스러운 말에 리건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설마... 나는 단지 구경하러 온 것 뿐이야. 이런 평생에 보기 힘든 구경을 어떻게 놓칠 수가 있겠어?" [흥...] 그 말에 실피드는 더 이상 뭐라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앞쪽을 주시했다. 그 곳에는 아버지와 일리언이 여전히 일정 거리를 두고 호수 위에 떠서 서로를 주시하고 있었다. [호호호, 오늘부로 물의 정령왕이 소멸하고 새로운 물의 정령왕이 탄생하는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마계에는 마왕을 죽인 자가 마왕으로 등극한다지요? 정령계에 그런 법칙이 없다는게 아쉽네요.] 그녀의 도발에도 아버지는 아무런 내색을 않고 담담히 지켜보고만 있는 거였다. 평소 성격 드러운 아버지의 모습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어찌보면 신선이 세상사를 초연하게 내려다 보는 거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지금 일어날 일이 무엇이던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한 표정 같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여유 만만하게, 도발적인 미소를 짓고 있던 일리언의 표정이 일순간 찡그려지더니 거친 동작으로 팔을 한번 휘저었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서부터 거대한 물줄기 세개가 솟아 올랐다. [어디, 그 표정을 언제까지 짓고 있을지 두고 보기로 하죠!!]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거대한 세개의 물줄기가 아버지가 서 있는 곳을 내리쳤다. 그러자 아버지의 모습이 스르륵 호수 속으로 가라앉는 거였다. 덕분에 거대한 물줄기가 애꿎은 수면을 내리쳐 거대한 물보라만 형성되었다. [흥, 어리석으시군요. 이 호수는 내가 태어난 곳. 당신이 호수속으로 들어간다 하는 것은 내 영역으로 걸어들어온 거란 걸 왜 모르시는 걸까?] 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졌지만, 일리언은 아버지가 어디로 갔는지 눈치 챘던 모양이었다. 아까의 매서운 모습 대신 비웃는 미소를 띄우며 상황 중계까지 친절하게 해주던 그녀는 그 근처 허공에 동동 떠서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는 우리들에게 보란 듯이 웃어보이더니 이번에는 아까와는 달리 마치 수면 위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손을 허공에 대고 횡으로 쓸었다. 하지만 다른때 같으면 그녀의 손짓에 뭔가 반응을 보이던 호수가 잠시 시간이 지나고 의아해진 내가 고개를 갸웃거릴때까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거였다. 나만 의아해하는 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리건은 잠자코 일리언만 주시하고 있었고, 나머지 세 정령왕은 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거였다. 뭔가 있는 듯한 그 미소에 나 또한 기대어린 시선으로 다시 일리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녀는 무척 당혹한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호수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결국은 웃음을 터트리며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리는 거였다. [오호호호... 이거 참.... 물의 정령왕께오서 숨바꼭질에 재주가 있으신줄은 몰랐군요. 그래, 저에게 보여주실게 제 시선을 피해 숨는 능력이신지요?] 그렇게 해도 아무런 반응도 없자 일리언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면... 정령계로 피신하신건가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아버지의 모습이 아까 사라졌던 바로 그 지점에서 솟아 올랐다. [설마... 나는 처음부터 여기 있었어. 단지 네가 못 찾았을뿐.] [숨은게 아니라요?] [날 못찾으니 네가 숨은 거라고 단정 지었을 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믿기 어렵군요.] [믿든지 말던지...] 무성의한 아버지의 대꾸에 일리언의 얼굴이 사납게 변했다. [지금 저와 말장난하러 오신 겁니까?] [크게 틀리지는 않았군. 내가 지금 널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장난이니까.] 매서운 그녀의 말투에 아버지가 쉽게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일리언의 눈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그 말 취소하게 만들어 드리지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버지가 서 있던 곳 주위에서 수많은 가느다란 물줄기가 솟아 오르더니 아버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피하실건가요?] 일리언의 이죽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물줄기는 아버지에 가까이 접근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일리언의 이죽거림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꼼짝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거였다. 보고 있는 내가 놀라서 달려들려고 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내가 몸을 움찔 거리자마자 이프리트 아저씨와 실피드에게 각각 한 팔을 붙잡혀서 제지 당하고 말았다. [네가 걱정할 정도로 네 아버지가 약한 거 같냐?] 실피드의 말에 이어 이프리트 아저씨도 날 달랬다. [걱정말거라. 네 아버지가 다 알아서 할테니.] 두 정령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의 몸을 칭칭 휘감아 얽매려고 했던 가는 물줄기들은 아버지의 몸을 몇번 휘감자 마치 마른 모래 사막에 물 스며들듯 그대로 스르르 스며들어 사라져 버리는 거였다. 나도 놀랐지만, 일리언도 엄청 당혹한 듯 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떠서 놀라움을 표하더니 다시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에 반응하여 이번에는 더 굵은 물줄기 세개가 솟아올라 아버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가만히 서 있었고 그 굵은 물줄기가 아버지의 몸에 닿자마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 굵은게 아버지의 몸에 스르르 스며들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이익!] 분노한 일리언이 다시 손을 휘젓자 이번에는 물줄기가 아닌, 거대한 물로 된 칼날이 아버지를 향해 날아갔지만, 그것도 스르르 스며드는 거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녀에게 실체가 있었다면 빠드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을지도 모를 정도로 그녀는 이를 악물고 양 손을 펼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물이 거대한 토네이도처럼 소용돌이치며 솟아 올랐는데 그동안 그녀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아버지가 가볍게 손을 휘저으며 중얼거리는 거였다. [거 좀 조심해라. 해인이에게 물튈라.] 아버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짓말처럼 물 토네이도가 다시 호수 속으로 가라앉았고, 그 물의 소용돌이에 가려 보이지 않던 일리언의 경악한 표정이 드러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 또한 경악으로 입이 떠억 벌어졌다. [어, 어떻게 저럴수가?] 나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들었는지 아버지가 시선을 나에게로 돌려 물었다. [뭐가?] [아니, 어떻게 소용돌이를 없앨 수가 있는 거예요? 아버지는 아무런 힘도 안 쓰신 것 같은데... 그 소용돌이는 저 일리언이라는 정령이 완벽하게 다스리고 있었잖아요? 나 조차도 이 호수의 물을 다스리기 어려웠는데...] 내 말에 아버지가 장난스레 인상을 찡그려보렸다. [너랑 나랑 같냐?]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나 손쉽게 없애다니... 아까 신나게 당한 내가 괜히 억울해 지잖아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경악어린 표정을 짓고 있던 일리언도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에게 대들듯이 물었다. [맞아.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이 호수는 완벽하게 나의 기운 아래 통제되고 있었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여유만만하게, 비웃듯이 존대해줬던 태도도 씻은듯이 사라져 있었다. 아마 그만큼이나 놀랐던 것이리라. 그러한 일리언을 향해 쓰윽 시선을 돌린 아버지는 덤덤하니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했었지 않나?] 그러면서 스르르 아지랑이 피어 오르듯이 아버지로부터 위압감이 조금씩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물의 정령왕. 온 세계의 물을 존재케하며 다스리는 자. 모든 물의 정령들의 왕이 바로 나다!] 아버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버지의 몸에서 조금씩 흘러 나오던 위압감은 나중에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더니 아버지의 말이 끝날 즈음에는 엄청 거대해져 있었다. [꺄아아아악~!!] 일리언은 아버지의 위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새하얗게 질리더니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보니, 예전에 내가 정령의 기운을 다룰 수 있게 해준다고 기운을 이끌어냈을때가 떠올랐다. 그때와 비슷한 모습에 나는 왠지 일리언에게 동정을 금치 못했다. "내 그 심정 알지. 쯧쯧... 그러길래 왜 성질 더러운 아버지에게 뎀벼가지구..." ====================================================== 아이구.... 감기때문에 머리는 지끈지끈 거리고 온 몸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습니다. 이놈의 감기... ====================================================== 제 38화 호수의 정령 일리언 (6) 일리언이 아버지에게 K.O패 당한 것으로 상황이 일단락되자 근처에서 구경하고 있던 세 정령왕은 극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비록 아까는 서로 적대하던 사이였지만, 아버지에게 당해(?)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녀를 보니 왠지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냅두지 못하고 슬쩍 말을 걸어보았지만, 일리언은 여전히 얼빠진 표정으로 앉아 있기만 했다. 그 모습에 살짝 한숨을 내쉬는데 같이 구경하고 있던 리건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어라, 이게 끝이야? 아까 엄청 분노한 것에 비하면 생각외로 싱거운 결말이네?" [뭘 바랬는데?] 아버지 대신 실피드가 '뭔 어웅한 소리를 하나?' 하는 표정으로 묻자 리건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니, 나는 소멸시키거나 아니면 반쯤 죽여놓거나... 뭐, 그 정도는 할 줄 알았지." "우우, 그건 너무 잔인하네요." 일리언을 눈짓으로 가르키며 하는 리건의 말에 내가 눈썹을 찡그리며 몸서리치자 리건이 피식 웃었다. "잔인? 인간들 틈에서 사는 네가 말하기는 좀 그렇지 않냐? 어쨌거나, 저 녀석은 아까 너를 공격한 녀석이라고." "에... 뭐, 그렇기야 하지만, 그렇다고 꼭 소멸시킬 것 까지는..." "누가 꼭 소멸 시키랬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엥...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내가 혼잣말 처럼 중얼거리자 이프리트가 피식 웃으며 나섰다. [리건, 그럼 너희 드래곤들은 어른들에게 반항했다고 반쯤 죽여놓거나 소멸시켜버리나보지?] "엑? 무슨 소리야? 철없는 녀석들이 그러는 건 귀엽게 봐줘서 가볍게 어루만지는 선에서 끝내지. 그 정도 가지고 소멸이라니... 그렇지 않아도 종족 수가 적은데 더 줄일 일 있어?" [그런가? 훗, 그럼 우리 정령들과 마찬가지군. 우리도 가볍게 어루만져주는 선에서 끝내. 정령사회의 계급은 철저하니까 상급이라는 것만 인식시키면 상황은 끝이거든. 사실... 우리 정령왕들에게 저렇게 대드는 녀석은 내 생전 처음이긴 하지만 말야.] 이프리트가 말을 끝내며 후훗 하고 웃자 실피드 또한 키득거리며 나섰다. [그러게 말이야. 정말 신선했어. 저런 재미있는 정령을 소멸시키다니 말도 안되지. 이런 구경거리를 언제 또 본다구.] "구, 구경 거리라뇨..." 실피드의 말에 혹시 나도 그런 취급을 당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왠지모르게 일리언에게 더더욱 동질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휴우, 아무튼 다행이에요. 아버지, 정말 대단하신걸요? 저는 사실 한바탕 할 줄 알았거든요. 물론... 아버지가 지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요." 마지막에가서는 슬쩍 아버지에게 아부를 떨며 시선을 주자 아버지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러면서도 설명해줄 건 다 해줬지만... [나는 물이 존재할 수 있는 근원이다. 그런 내게 물로 덤빌 수 있는게 가당키나 할 거 같아? 그건 마치 용암보고 맛좀 보라고 활활 불타오르는 횃불을 던지는 격이지.] "오오... 그런 겁니까?" 아버지의 말에 더욱 더 감탄스럽다는 듯 눈을 빛내자 아버지의 고개가 더 돌아가버렸다. 그 모습에 이프리트가 키득키득 웃으며 속삭였다. [쑥스러워서 그러는 거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노아스도 한 마디 했다. [저 놈이 평소에는 가장 떽떽거리면서도 제일 소심하다니까. 정말 정령왕답지않게시리...] [누, 누가 소심하다는 거야?] [누구긴 누구야? 어떤 팔불출 같은 녀석이지.] 아버지의 분노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실피드는 능글맞은 어조로 대꾸했다. [뭣이라? 네놈이 지금 나보고 한판 뜨자는 거냐?] [헤에, 네가 할 수 있겠냐?] 예전처럼 투닥거리는 아버지와 실피드의 모습에 이 일도 이제 마무리 되었다는 게 실감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 할때, 그 동안 넋을 잃고 앉아 있어서 모두에게서 잊혀진 일리언이 부활했다. [아무리...] '응?' 처음에는 안도한 기분에 잘못들었나 싶었는데, 나를 제외한 다른 분들이 모두 행동을 멈추고 일리언쪽으로 시선을 돌린 걸 보고 내가 잘못 들은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호수 위에 털썩 무릎을 꿇고 한참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일리언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는지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녀의 입에서는 굳은 결의가 한자 한자를 통해 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정령왕이라고 해도 절대로 굴복 못한다아아~~!!] 아까 그렇게 기절할 듯이 놀라 놓고서는 이렇게 굳은 결의를 표하는 그녀의 뚝심(?)에 찬사를 보내고 싶었지만, 덕분에 이번에야말로 아버지가 그녀에게 손을 직접 써야만 하는 건 아닌지 엄청 걱정이 되었다. 이프리트 아저씨와 노아스, 그리고 리건은 그녀의 굳은 결의에 찬 소리를 듣자마자 나를 데리고 멀찍이 떨어졌고, 일리언 앞에는 아버지와 실피드가 굳건히 버티고 섰다. 그 모습에 일리언의 표정이 약간 흔들렸지만, 그건 잠깐이었고 곧 그녀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절대 굴복할 수 없어!! 당신네 정령왕 둘이 아니라 넷이 오더라도 내가 있는 한 맥키의 집에는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하게 할거야!] 그 순간, 나는 그녀의 굳은 결의에 찬 외침보다도, 그녀의 외침 속에 들어있는 누군가의 이름이 신경이 쓰여 고개를 갸웃 거렸다. "맥키? 맥키라고? 어... 으음...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물론, 그래봤자 별 관심 없이 지나치는 사람 이름, 특히나 서양쪽의 발음도 어렵고 긴 이름은 제대로 기억 못하는 나였기에 쉽게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왠지 신경이 쓰여서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쥐어짜며 생각해내려 애썼다. 왜 사람 기억이라는게 아예 안 나면 모르겠는가보다... 하고 포기하게 되지만, 생각이 날듯 말듯 그러면 포기하지도 못하고 더더욱 안달하지 않는가? "아아.. 정말... 어디서 들어봤더라... 맥키라... 맥키, 맥키..." 차라리 뭔가 떠오르지 않았으면 이렇게 기억을 짜내느라고 고생하지는 않을텐데.. 라며 속으로 짜증을 내려는 찰나, 아버지와 실피드 앞에서도 굳건하게 버티며 여차하면 덤벼들 태세였던 일리언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너, 어떻게 맥키 이름을 아는 거야? 너 맥키를 알아?] 이프리트와 노아스가 그런 그녀의 태도에 움찔 거려지만, 일리언의 눈에 살기 대신 기대감이 가득 든걸 보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사태를 주시했고, 그걸 본 일리언이 아예 나에게 다가와 내 양 팔을 부여잡고 흔들었다. [이봐, 대답을 하란 말이야! 맥키를 아냐고오~!] "아, 으... 자, 잠깐만요...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잘 생각이...." [잘 생각해봐! 아, 맥키의 정식 이름은 맥키니언 데모스테네스야. 엄청나게 대단한 마법사지.] '엄청나게 대단한 마법사'란 일리언의 설명에 나는 드디어 내가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냈다. "맞아. 위대한 현자이자 천재 마법사인 아름답고 우아한 맥키니언 데모스테네스!!" 갑자기 불쑥 떠오른 기억에 내가 손뼉까지 치며 외치자 일리언이 더 좋아하면서 방방 뛰었다. [꺄아~!! 맞아, 맞아. 바로 우리 맥키야. 너 우리 맥키를 아는구나!!] 너무나 좋아하는 일리언의 모습에 나는 너무 미안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오해를 풀지 않으면 안될거 같아 겨우 입을 열었다. "에... 저... 모르는데요?" [뭐?] 내 말에 한순간 얼어붙은 일리언의 표정에 나는 너무나 미안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대답해줬다. "저... 저는 그분이 누군지 모른다구요." [뭐라고? 그럼 맥키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에... 그게 말이죠." 나는 볼을 긁적거리며 뭐라고 설명을 할까 고민하다가 그녀를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저기... 잠시만... 제 야영지에 갔다와도 될까요? 설명할 수 있는 물건이 거기에 있는데..." ===================================================== 끄응... 빨랑 써야하는데 말입니다... 다시 담당자분께 전화가 올 날이 점점 다가오는데 왜 일케 불성실한 연재를 하는 건지.. ㅡ.ㅡ;; 저도 모르겠어요... ㅠ.ㅠ 우에에엥~~~ ㅠ.ㅠ ====================================================== 제 38화 호수의 정령 일리언 (7) "저기... 잠시만... 제 야영지에 갔다와도 될까요? 설명할 수 있는 물건이 거기에 있는데..." 그렇게 말을 해놓고는 나는 따로 일리언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잽싸게 몸을 날렸다. 그녀가 허락을 해주기 싫어도 어쩌겠는가? 네 정령왕이 앞에서 버티고 있는데 말이다.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가니 평소 예민한 신경을 가지고 있어 작은 기척만으로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들이 이번에는 내가 뛰어들어왔음에도 깊은 잠에 빠져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심지어는 불침번을 서고 있던 사람들조차도 내 기척을 못 알아챈 듯 앉은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거였다. "내가 마법을 걸어놔서 그래. 정령왕들의 기운을 눈치 못 채도록 결계만 치면, 혹시 마법사 녀석들이 그 결계를 눈치채고 이상하게 여길까봐 싶어서 아예 잠까지 푹 재워놨지." 어느새 내 뒤를 따라왔는지 모를 리건이 해준 말이었다. "헤에, 그랬어요?"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별 일이야 있겠냐 싶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던 나는 리건의 말에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짐을 뒤적이다가 원하는 것을 찾자 그것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자, 빨리 돌아가죠." 그러면서 내가 몸을 돌리고 뛰어가려는데 리건은 돌아가는 것 보다는 내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에 더 큰 호기심을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그게 뭐냐? 어디 좀 줘봐라." 지금은 인간 검사로써 유희를 즐기고 있어서 그런지 마법에 대한 것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리건이 갑자기 관심을 보이자 어리둥절해졌긴 했지만, 원래 그가 마법의 종족이라고 불리는 드래곤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나는 순순히 팬던트... 라고 하기엔 너무나 큰 물건을 건네줬다. 사실 이걸 얻고 나서 엔더비 산맥에 있는 드워프 마을에 가는 길에 동행했던 가레스 마법사를 제외한 다른 이들 에게는 자세히 보여준 적이 없었다. 뭐, 가레스로부터 실패작일 확률이 높다는 말을 들었기때문이기도 했지만, 워낙 마법 물품에 관해 관심이 없던 터라 시간이 지나고 이걸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마법 스승인 노만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잖아? 생각해보면 가레스보다 노만 스승님이 더 실력이 높으신 마법사셨으니까 뭔가 알아낼 수 있으셨을지도 모르는데..." 엔더비 산맥에 도착할때까지야 이걸 준 인어에 대한 예의상 목에 차고 다녔지만, 산을 올라갈 즈음에는 걸리적거리고 무겁고 불편만 주는 존재일 뿐이어서 짐 속에 깊숙히 넣어뒀다가 있다는 것 조차 잊고 살았던 물건이었다. 그랬다가, 이번에 정글에 갈때 혹여 노잣돈이 떨어지거나 아니면, 괴상한 마법사라도 만나 - 던전을 탐험한다니까 - 안 좋은 상황이 된다면 혹 이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서 가지고 왔던 것이다. 비록 실패작일 확률이 높겠지만, 이 팬던트에 박힌 마법석은 가레스조차도 황홀하게 바라봤던 뛰어난 상품이었으니 말이다. 비록 내가 마법사라는 길에 한발 슬쩍 걸치고 있기는 했지만, 이런 걸 잊어버리고 있을만큼 마법 물품에 거의 관심이 없었던 터라 언젠가 처분할 생각이기는 했었다. 그런 물건에 리건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지만 나는 팬던트 자체보다는 마법석에 대한 거라고 생각하며 그를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헤에, 리건도 거기 있는 마법석이 마음에 드나봐요? 하기야... 대단한 거라고 했으니..." "마법석도 마법석이지만, 여기에 깔아놓은 마법진도 참 대단한걸? 내가 감탄할 정도로 아주 정교하고 오묘한 마법진이야." 내가 이끄는대로 따라오면서도 팬던트가 뚫어져라 바라보던 리건이 감탄의 기색이 가득한 말투로 한 말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에엥? 정교하고 오묘한 마법진이라구요? 그걸 살펴본 마법사는 실패작일 확률이 높다구..." 예전에 가레스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면서, 혹시 마법석이 너무나 좋은 거라 거게에 혹해서 잘못본거 아닌가요? 라고 물어보려고 했던 나는 그러는 대신 말끝을 흐렸다. 가레스가 잘못 봤으면 잘못봤지 리건이 잘못 봤을 확률은 극히 미미했기 때문이다. 리건 또한 그런 생각을 했는지 헹 하고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헹, 그 마법사가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지 모르겠지만, 나보다 뛰어난 놈이더냐?" "에... 그거야 당연히 아니죠..." "모르긴 몰라도 기껏해야 6클래스 유저? 아니면 그 이하일 녀석일걸?" 리건의 말에 나는 눈이 뚱그래져서 그를 돌아봤다. "어라?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지금은 얼마나 발전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랑 만났을당시 가레스는 5클래스 유저, 4클래스 마스터의 마법사였던 것이다. "이런 대단한 물건을 실패작이라고 했으니 그렇지. 하기야... 7클래스의 마법사라고 해도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군. 여기 세밀하게 새겨져 있는 마법진은 8클래스 이상의 마법사나 겨우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고난위의 마법진이거든. 다른 녀석이라면...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고 실패작이라고 치부할수도 있겠군." "허걱... 그렇게 대단한 거예요?" 그걸 처분할때 기껏 거기에 붙어있는 마법석에 대한 가격만 받으려고 했던 나는 리건의 말에 이 비싼걸 - 마법석에 마법진까지 딸려 있으면 마법진의 기능에 따라서 가격이 몇배로 뛸수도 있었다. 특히나 8클래스 이상의 마법사만이 알아볼 수 있을 고난위의 마법진이라면 자신에게 별 필요없는 기능이 부여되어 있다고 해도 연구하기 위해서 고위 마법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구하려고 했다. - 싸게 팔 뻔했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하마터면 헐값에 넘길 뻔 했잖아? 음음, 8클래스 이상의 마법사만이 알아본다구? 그럼 그 정도의 마법사에게 팔아 넘겨야겠군."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열심히 팬던트만 살펴보던 리건이 어느순간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뭐냐? "위대한 현자이자 천대 마법사인 아름답고 우아한 맥키니언 데모스테네스님"? 이거 누가 쓴 거야?" 팬던트에 새겨진 마법진을 눈을 빛내며 살펴보고 있던 리건이 드디어 팬던트 옆면에 새겨진 글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리건의 반응이 가레스의 반응과 비슷해서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거야 나도 모르죠. 하지만, 리건마저 감탄할 정도의 마법진을 새긴 사람이라면 낯은 좀 간지럽겠지만 충분히 그런 말을 들을만하지 않겠어요?" [충분히가 아니야, 충분히가!! 그녀는 정말 천재 마법사란 말이닷!!] 호수위를 걸어 아버지를 비롯한 정령왕들과 일리언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는 도중에 갑자기 일리언이 그 동안 우리 말을 듣고 있었다는 듯 우리 앞에서 불쑥 솟아 오르며 외쳤다. "아, 뭐... 저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리건에게 칭찬을 들을 정도라면..." 나는 그 맥키인지 뭔지하는 마법사를 보지 못했지만 일리언의 말이 맞다고 해주지 않으면 다시 덤벼들 것 처럼 무섭게 노려보는 일리언의 모습에 어영부영 동의하는 듯한 말을 하며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평소에는 남이 그러던 말던 자신이 제일 잘난 줄 알던 리건이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네가 말한 그 마법사가 이걸 만들었나? 만약 그랬다면 천재라 불리는 것이 합당하겠지." "오오, 리건이 인정을 하다니... 그 마법진이 대단하긴 대단한가보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일리언이 엄청 좋아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지 일리언은 물끄러미 리건이 내민 팬던트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그건 맥키가 만든게 아니야.] 시무룩하게 대꾸하던 일리언은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쳐들더니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아, 하지만... 그걸 설계한 건 맥키였어. 그정도라면 맥키도 당연히 천재라고 할 수 있겠지?] 아까 아버지와 싸울때는 무협지에 나오는 엄청 차갑고 무공은 엄청 쎈 기세등등한 여고수 같았는데 지금은 마치 선물을 받기 직전인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에 나는 잠시 아까 그 아가씨가 이 아가씨가 맞는지 헷갈렸다. 혹시 일리언이라는 정령이 쌍둥이... 아니, 정령에게는 쌍둥이라는 개념이 없으니... 호수의 정령이 원래 둘이었던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설계를 했다고? 흐음... 뭐 설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거긴 하지만... 그럼 여기에 새겨진 마법진도 그녀가 직접 생각해낸 건가?" 리건의 말에 얼굴이 환해졌던 일리언은 곧바로 이어진 질문에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마법진? 그런건 잘 모르겠는데... 아, 기다려.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어!] 그러나 다음 순간 어떤 생각이 떠오른 듯 손뼉을 치며 다시 호수 속으로 사라져간 그녀의 모습에 어리둥절해진 리건과 나는 서로 마주보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죠? "난들알겠냐? 뭐, 어쨌든 그녀가 다시 오면 뭐가 뭔지 알수 있겠지." [뭐가 뭔지 알아?]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째 안 오시나 했다." 호수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일리언과는 달리 나와 리건처럼 네 정령왕이 호수 위를 터벅터벅 걸어 다가오고 있었다. [그 건방진 녀석은 어디 갔냐? 아까 너희들쪽으로 간 것 같았는데...] 실피드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면서 일리언을 찾자 리건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아아, 오기는 왔었는데 잠시 어딘가로 갔어. 뭘 가지러 간 모양이지." [그건 또 뭐지? 굉장히 강력한 마나를 품고 있는 것 같은데... 드래곤의 물건인가? 제법 커다란 마나 덩어리인데 쉽게 눈치채지 못하게 잘 가리고 있군.] 이프리트 아저씨가 리건의 손위에 올려진 물건을 보고 중얼거리자 리건이 씨익 웃으며 그걸 허공에 던졌다가 받았다. "그렇지? 제법 대단해. 거기다가 여기에 새겨진 마법진도 흥미진진하다니까. 환영 마법에다가 마나를 뭔가에 넣는다는 건 알겠는데, 미완성인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뭔가가 안쪽에 새겨진 건지 더이상은 모르겠어. 이걸 만든 녀석이 누구인지 궁금해질 지경이야." 그 순간 리건의 옆에서 일리언이 불쑥 솟아 오르며 버럭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거 설계는 맥키가 했다니까!] "훗, 하지만 만든 건 다른 녀석이잖아? 게다가 이 마법진을 그린게 네가 말하는 그 "맥키"인지 아니면 이걸 만든 녀석인지, 아니면 또 다른 제 3자인지도 모르는 거고." [분명히 아니라고 할 거야. 그 마법진인지 뭔지도 맥키가 만든거라고 할 걸?] 일리언은 흥분한 눈빛으로 그렇게 단호하게 말한 뒤 리건의 손에 올려져 있는 팬던트를 낚아챘다. 그리고는 다른 한 손을 들어올렸는데, 그 곳에는 대략 4, 50cm 의 길이를 가진 조각상이 조심스레 쥐어져 있었다. "우와아아..." 잘은 모르겠지만 백옥을 깎아서 만든 듯한 그 조각상의 주인공은 20대 초반이나 중반쯤으로 보이는 어떤 아가씨였는데, 굽이치는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몸을 휘감은 부드러운 주름이 잡힌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어찌나 생생하게 조각이 되었는지 나는 호수 위에 바람이 불어 그녀의 드레스를 펄럭이게 하는게 아닌가 싶어 주위를 한번 둘러볼 정도였다. 따로 다른 색을 입히지 않아 머리색이나 눈 색, 그리고 드레스 색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게 무엇이었든지 그녀는 정말 예뻤다. 내가 감탄의 기색으로 조각상을 바라보자 일리언은 내 기색을 보고는 기분 좋은 얼굴로 내가 좀 더 잘 볼 수 있도록 조각상을 내밀어주는 거였다. [정말 아름답지? 얘가 바로 맥키야. 내 하나뿐인 친구지.]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어... 당신 말대로 정말 아름답기는 한데... 이게 당신 친구를 조각해놓은 거라면, 진짜 당신 친구는요?" 내 말에 일리언은 기대에 찬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이제 곧 만날 수 있을 거야. 맥키가 말한대로라면 다시 자신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했거든.] 그렇게 말한 일리언이 팬던트를 물체에 가까이 가져가자 마치 그 물체와 팬던트가 잠에서 깨어난 것 처럼 우웅... 하는 미약한 진동음을 흘려내더니만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당기듯 팬던트가 조각상으로 끌려가더니만 조각상 밑에 철커덕 하고 가서 붙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함께 조각의 몸 위로 가느다란 빛의 금이 줄기 줄기 가로 세로 수십개가 그어져 나가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조각이 산산조각나서 깨지는게 아닌가 싶었지만, 깨지는 걸 보기도 전에 조각상에서 강한 빛이 번쩍 하고 나왔기에 자동적으로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 글을 써야해 글을... 털푸덕... ====================================================== 제 39화 맥키랑 테렐이랑 (1) 제 39화 맥키랑 테렐이랑 강한 빛에 눈을 감기는 했지만, 그게 뭔가가 일어날 일에 대한 첫 시작일거란 걸 쉽게 짐작한 나는 조심조심 눈을 떴다. 조각에서는 여전히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지만, 아까처럼 강렬하지는 않았고 내 눈 또한 빛에 차츰 적응을 해서 어렵지 않게 조각을 주시할 수 있었다. 조각에서의 빛은 점차 약해져 나중에는 형광등 불빛정도까지 되더니, 사방으로 퍼트리던 빛을 모아서 이제는 위쪽으로만 퍼지게 하는 거였다. 마치 조명등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조각 조명등 불빛 사이에서 희미한 영상이 스르르 생기더니 점차 뚜렷해지기 시작하더니만 조각과 똑같이 생긴 여인이 나타났다.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머리 스타일, 그리고 똑같은 드레스르 입은 그 여인은 하얀색에 가까운 은색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잠자고 일어난 듯 감겼던 눈이 스르르 떠지자 새파란 눈동자가 드러났다. "휘유... 정말 아름답군." 그 모습에 리건이 작가 휘파람을 불자 나도 심히 동감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맥키!!] 그녀의 영상을 확인한 일리언이 너무나 기쁜 얼굴로 손을 펴서 영상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허무하게도 일리언의 손은 영상을 그대로 통과해버리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영상으로 나타난 은발의 아름다운 여인은 쓴 웃음을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일리언. 지금의 나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실체가 없는 단순한 영상이라서 널 안아주지는 못할 거야.] [그런.... 말도 안돼. 네가 조각상에 팬던트만 끼운다면 널 다시 만날 수가 있다고 했잖아.] 일리언의 망연자실한 표정에 영상으로 나타난 은발 미인은 미안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이렇게 만나고 있는 거잖아.] [하지만...] 불만에 찬 표정으로 뭐라고 항의를 하려던 일리언은 가볍게 고개를 젓는 은발 미인의 모습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미안, 일리언.... 하지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너처럼 오랜 세월을 살지 못해. 그렇다고 리치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에 수명이 다한 내가 네 곁에 있으려면 이 방법 밖에 없었어.] [하지만....] 여전히 불만에 찬 표정의 일리언의 모습에 은발 미인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런 모습이라서 싫어진 거야?] [그,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맥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던 상관없이 널 좋아해.] 당황한 표정으로 얼른 반론하는 어린아이 같은 일리언의 모습에 은발 미인이 부드럽게 웃었다. [고마워. 나도 널 제일 좋아해.] 오랜만의 상봉인 듯한 분위기라 주위에 있던 우리는 감히 그 둘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었지만 슬슬 둘의 인사가 끝난 거 같아 끼어들려고 했다. 아무래도 궁금증이 하나 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까 일리언의 말에 '맥키의 집' 이란 단어가 나왔고 일리언과 저 은발 미인의 대화를 유추해 볼때 아무래도 호수 위에 떠 있는 던전의 주인이 은발 미인임에 틀림 없는 것 같으니 그 던전을 탐색하러 온 일행 중 한사람으로써 당연한 일이었다. 뭐, 내가 던전 자체에 별 관심이 없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조명 속에 상체 모습만 나타나있던 은발 미인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음... 이상한데? 뭔가 좀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이게 도대체 뭐지?] 의아한 표정의 그녀의 의문에 답이라도 하듯 갑자기 조명 빛이 옆으로 좀 더 퍼지더니만 그녀의 옆쪽에서 다시 희끄무레한 뭔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옆에서 구경하는 우리는 뭔가가 나타나나보다... 라고 생각하며 지켜보는데 반하여 은발 미인은 기겁할 정도로 놀란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옆에 또렷한 영상이 드러나자 더욱 더 놀라며 입을 떠억 벌렸다. [테, 테렐... 네, 네가 어떻게?]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분노에 찬 표정으로 영상을 노려보며 외쳤다. 그녀의 옆에 난 영상은 남자였다. 거리에 나가면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하게 생긴 인상이었지만 따뜻하게 빛나는 보라빛 눈동자만은 무척 인상 깊었다. 현자가 저런 눈동자를 하고 있을까 싶을 정도로, 현명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는 바라보고 있으면 깊숙히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거기에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은 여자들도 부러워 할 만큼 결이 좋아보였다. 나중에 나타난 그 남자는 하늘색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상체만 보인다고 해도 그게 마법사 로브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아.하.하.하... 아, 안녕... 맥키? 정말 오랜만이야.] 갑자기 나타난 남자는 은발 여자의 분노에 찬 표정을 보고 움찔 하더니 차마 시선을 마주 보지는 못하고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며 힘들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무척 화가 난 은발 여인은 인사를 받아주질 않았다. [아아악~~ 왜 네가 여기 있느냐니까? 아아악, 제기랄, 젠장. 내가 깨어나자마자 네 녀석의 면상을 보게 되다니이잇~!!] 보기에는 엄청 현명하고 청초한 이미지의 여성이었건만, 그런 이미지를 한순간에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버리도록 그녀는 양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외쳤다. 보기와는 달리 엄청 다혈질인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갈색 머리의 남자는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에... 많이... 화 난 거야?] 여자의 기에 눌려서 그렇게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소심한 남자였다. [당연하지. 이건 온전히 나를 위한 거라고! 왜 네가 여기에 들어와 있는 거야?] 은발 여인이 다시 분노에 찬 시선을 남자에게 보내자 남자가 움찔 하며 뒤로 물러나더니 우물 쭈물 입을 열었다. [아... 하, 하지만... 네가 마법석으로 마법진을 만들어주면 내가 원하는 걸 한 가지 들어주겠다고 약속 했잖아.] [누가 뭐라고 그랬어?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아, 아냐. 내가 원하는 건 여기에 같이 있는... 건데....] 여자의 시퍼런 서슬에 남자의 목소리가 차츰 작아졌다. 하지만 남자의 말에 여자도 할 말이 없었는지 매섭게 노려보다 휙 뒤돌아 투덜거렸다. [젠장할... 이걸 또 약속이라고 디밀줄이야...] 그 두 남녀의 실랑이를 지켜보고 있던 리건이 갑자기 불쑥 끼어들었다. "흠... 그렇다면 그 팬던트에 새겨져 있던 마법진은 저 남자가 그린게 맞겠군?" 그러면서 확인을 하듯 남자와 여자, 그리고 옆에서 초조하게 지켜보는 일리언을 차례 차례 바라보자 일리언이 바락 대들었다. [그거 설계는 맥키가 했다니까요!] 그리고는 자신의 기대에 부응해주길 바라는 시선으로 맥키라고 부른 여자를 바라보았다. [내말이 맞지, 맥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맥키는 머쓱한 표정을 괜히 애꿎은 자신의 머리카락만 손가락으로 배배꼬는 거였다. [아... 미안... 내가 한 것은 지금 내 모습을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마나의 양에 대한 설명과 그 마나를 담을 그릇의 모습만 대충 그려준 거야. 그 그릇 안에 어떤 식으로 마법석을 배열하거나 마법진을 적용시켰다면... 그건 다 이 인간이 한 거겠지.] [그, 그럴수가...] 망연자실한 일리언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던지 남자가 머쓱하게 웃으며 나섰다. [아.. 하지만 제가 그 마법진을 그릴 수 있었던 건 맥키의 설명에 아이디어를 얻어서였습니다. 맥키가 아니었다면 그 마법진을 만들지도 못했을걸요?] 그 말에 일리언의 표정이 약간이나 펴졌지만, 맥키는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돌려버렸다. "호오, 당신이 그걸 그렸다니 정말 대단하시군요. 저도 처음보는 참 정교하고 세밀한 마법진이더군요. 감탄했습니다." 리건의 말에 남자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오옷, 그 마법진을 알아보셨단 말입니까? 그렇다는 건 당신도 고위 마법사라는 말씀이시군요! 이거 참 반갑습니다.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저는 마르타국의 테렐 프레이저라고 합니다.] 갑작스런 그의 자기 소개에 리건은 당황했지만, 곧 고개를 갸웃 거렸다. "테렐? 테렐 프레이저? 호오, 300년 전의 대마법사라고 불리던 테렐 프레이저가 바로 당신입니까? 최연소 왕실 수석 마법사라는?" 리건의 놀라움에 찬 말에 자신을 테렐 프레이저라고 소개한 남자는 쑥스러운 얼굴로 웃다가 두 눈을 번쩍 떴다. [300년? 300년 전이라고요?] 그리고 그건 옆에 있던 맥키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300년이라니? 일리언, 저 사람의 말이 정말이야? 내가 죽은지 300년이나 지났어?] 맥키의 놀라움에 찬 질문에 일리언은 얼떨떨한 표정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긍정에 맥키의 놀라움은 한층 더 커졌다. [뭣이라? 그럼 내 제자는? 그러고보니 그 녀석 어디 갔지? 테렐!! 너 팬던트를 만드는데 도대체 얼마나 오래 걸린 거얏?] 정신 없이 주변을 둘러보고 누군가를 찾던 맥키는 결국 마지막에는 화살을 테렐에게 돌렸다. 그러자 딴 생각에 빠져 있던 테렐은 화들짝 놀라 얼른 대답했다. [아, 아니... 그거 만드는데 6개월 밖에 안 걸렸는데...] [그럼 이게 도대체... 일리언, 내 제자는 어디 있어?]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린 맥키에게 일리언은 얼른 대답했다. [그건 나도 몰라. 여기 오지 않았어.] [그럼, 조각상과 팬던트가 어떻게 합쳐질 수 있었지? 이 팬던트를 누가 가지고 온 거야?] 다시 이어진 맥키의 질문에 일리언은 나를 가르켰다. [이 애가 가지고 왔어.] [얘, 너 도대체 이 팬던트를 어디서 어떻게 얻게 된 거니? 이 팬던트를 누가 가지고 있었어?] 일리언에 의해 나에게 시선을 돌린 맥키는 당장 대답하지 않으면 물어 뜯을 듯하 표정으로 물었고, 그 표정에 쫄은 나는 얼른 대꾸했다. "에에... 호바트해에서 살고 있는 인어에게 얻었어요. 그 인어를 도와줬더니 고맙다고 이걸 줬거든요." [인어? 인어는 어디서 그걸 얻었대?] "난파된 배에서 주웠다고 하던데요?" 내 말에 눈동자를 떼구르르 굴리던 맥키는 뭘 떠올렸는지 화난 표정으로 투덜댔다. [이런 멍청한 녀석!! 내가 그 동안 가르쳐준게 얼마인데, 배가 난파 되었다고 거기서 탈출 하지도 못하고 배와 같이 가라앉아?] 아마도 그 멍청한 녀석은 제자를 가르키는 말인 듯 한데, 맥키의 어투를 보아하니 그녀의 밑에 제자가 있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 제자가 평소 스승님한테 얼마나 구박 받으면서 살았는지 상상이 될 듯 했다. '왠지... 엄청 힘든 생활을 했을 듯....' ====================================================== 제 39화 맥키랑 테렐이랑 (2) "왠지... 엄청 힘든 생활을 했을 듯...." 속으로 이제는 없는 그 제자를 향해 애도를 보내는데 지금까지 옆에서 가만히 지켜만 보고있던 이프리트 아저씨가 나섰다. [자자, 상황을 좀 정리해 보지. 이대로라면 너무 혼란스러우니까 모두들 이 상황을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것 같은데?] 그러면서 주위에 있던 모든 존재들을 둘러보며 말하자 나머지 세 정령왕과 나, 리건은 물론이거니와 조각이 비추고 있는 빛 속에 나타난 두명의 환영과 일리언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여기는 저 아가씨...] 주위에 있던 존재들의 동의하에 이프리트 아저씨가 상황을 정리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채 뭔가 말을 하기도 전에 빛 속에 있던 맥키가 끼어들었다. [아, 잠시만... 잠시만요. 상황을 정리하기 전에 우선 각자 소개부터 먼저하는게 어떨까요? 이 곳의 주인 중 한명으로써 당신들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 왔는지를 우선 알고 싶은데요?] 그녀의 말에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남자가 다시 나섰다. [우선은 저희 소개부터 하도록 하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테렐 프레이저라고 하고 마법사입니다. 제 옆에 있는 아가씨는 저와 같은 스승 밑에서 마법을 배운 동기이죠. 정식 이름은 맥키니언 데모스테네스이고 애칭은 맥키라고 합니다.] 테렐의 소개에 맥키가 발끈했다. [왜 네 맘대로 내 소개까지 하는 거얏?] 그에 금방 움찔하는 테렐... [아, 미, 미안.... 서로 소개를 하려면 우선 주인부터 하는게 도리일거 같아서...] [나도 알아. 내 소개는 내가 하려고 했단 말이야.] [미, 미안....] [쳇....] 맥키가 불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리고 테렐이 난처한 표정으로 뭐라 말을 잇지 못하자 일리언이 머쓱한 표정으로 나섰다. [나는... 이 호수의 정령이고, 일리언이라고 해.] 그렇게 셋이 소개를 하고 나자 정령왕측에서는 대표로 실피드가 나섰다. [나는 실피드라고 한다. 그리고 얘들은 이프리트, 엘라임, 노아스라고 하지.] 간단한 소개에 불퉁해서 딴 곳을 보는 맥키나 그런 그녀의 모습에 어쩔줄 몰라하던 테렐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시, 실피드라고요? 그렇다면... 정령왕?] [맙소사... 내 살아 생전에 못 보던 정령왕을 이렇게 되어서야 하나도 아니고 넷을 한꺼번에 보게 되다니...] [일리언을 만난 것 만큼이나 놀라운 일이군.] 한번 놀란 외침을 터트린 맥키가 곧 침착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일리언이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맥키양의 침착한 것은 표정 뿐이었는지 그 뒤를 이어 나와 리건이 자기 소개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던전을 탐험하러 왔다고 하면 주인된 자로써 분명 뭔가 반응이 있어야 할텐데 단순이 알았다는 듯 고개만 끄덕이며 우리 옆에 있는 네 정령왕만 살펴보기 바빴으니까 말이다. 그건 그녀 곁에 있는 테렐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맥키처럼 태연한 표정도 없이 네 정령왕이 소개를 했을때 지었던 그 놀란 표정 그대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리건은 피식 웃고는 간단히 소개를 하고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프리트 아저씨가 나섰다. [자, 대충 소개가 끝났으니 다시 상황을 정리해볼까?] 그 말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이프리트 아저씨에게로 쏠렸고, 그걸 확인 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여기는 호수의 정령과 저 아가씨의 집이라는 거군?] "그건 나라도 추측하겠다. 그런 당연한 말을..." 너무나 간단한 말에 나는 설마 이게 상황 정리의 다가 아니라 말을 시작하는 서두일 거라고 여겼지만, 이프리트 아저씨는 맥키와 일리언의 고개를 끄덕임에도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멀뚱, 멀뚱... 모든 사람들이 이프리트 아저씨를 계속 바라보고 있어도 한번 닫힌 입은 다시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 거였다. 그래 실피드 아저씨가 나섰다. [뭐냐, 그게 다냐?] [이게 다지. 그럼 뭘 더바래?] 복잡한 상황을 참 간결하게 해결해준건 고맙지만 너무 간결해서 문제랄까? 나는 어이가 없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옆에 있던 리건이나 노아스나 모두 나와 같이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이프리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한 모습에 이프리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들 그러는 거야? 그러면 모든 상황이 설명되는 거잖아?] 그러자 노아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가 설명이 돼? 그럼 저 정령이 감하 우리 정령왕에게 대든건?] 그녀의 질문에 이프리트는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여기 주인은 저들이니, 저 집을 둘러보겠다고 들이닥친 이들을 막는 건 당연한게 아니야? 보아하니 이 호수의 정령은 저 인간의 계약자 이거나 그 비슷한 관계인 듯 하니 아무리 정령왕이라 해도 들어가려고 하면 막아서는 건 당연한 거지.]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어째 그걸로는 미진했다. "그럼 저 일리언이라는 분과 맥키라는 분의 관계는요? 또한 그 옆에 계신 테렐이라는 분하고는..." [그거야 우리와는 관계 없는 일이니 상관할 필요가 없지. 저들 일은 저들끼리만 해결하면 되는 거야.] 여전히 여유만만하고 깔끔한 대답이었다. [그렇군.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아버지까지도 이프리트 아저씨의 말을 거들고 나서자 노아스도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뭔가 미진하게 어영부영 끝나가려는 분위기를 타파한 존재가 있었으니... [자, 잠깐만. 그게 무슨 소리죠? 여길 둘러보겠다고 들이닥쳤다니? 아, 그러고보니.. 당신들, 어떻게 여기 들어온 거지? 이 주위에는 분명히 결계가 깔려 있었을텐데? 일리언이 있었을테니 그 결계가 망가졌을리도 없고... 하긴, 정령왕과 동행할 정도니 그정도의 결계는 가뿐히 통과 했었으려나? 자, 잠깐... 그럼 팬던트를 가지고 온건 침입자였단 말야?] 정신 없이 다다다다 쏟아져 나온 맥키의 말에 주위에 있던 이들은 얼이 빠졌고, 맥키는 맥키 나름대로 정신이 없는지 한 손으로 이마를 지그시 누르며 혼자 정리하기에 바빴다. [흠, 아무래도 다시 상황을 정리해야 할 거 같은데?] 그녀의 모습에 실피드가 웃음기 어린 투로 말하자 이프리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거 간단한 상황을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드나 몰라.] "이봐... 원래 상황은 복잡했다고..." 이프리트 아저씨의 말에 조금도 동의할 수 없었는지 리건이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아까... 내가 소개할때 여기에 있는 던전을 탐험하러 왔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그때는 뭐하고 왜 지금 이 난리인지 원..." 내가 리건의 뒤를 이어 투덜거리자마자 맥키가 이 소리를 들었는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때는 정령왕이라는 존재에 너무 놀라서 제대로 듣지도 못했단 말이야!] 이 세계에서 정령왕의 존재라는 게 얼마나 놀라운지 알고 있는 나로써는 그녀의 태도가 이해가 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걸로 인해 내 소개를 듣지 못한게 내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 나는 투덜거리는 어조로 대꾸했다. "아, 거참 죄송하게 됐네요. 그럼 제 소개를 먼저 할걸 그랬나요?" 내 말에 맥키가 화난 눈으로 날 쏘아봤다. [만약 네 소개를 먼저 했다면 넌 지금 무사하지 못했을 거야. 감히 내 집에 무단 침입한 주제에!]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왠지 그녀의 어조에는 듣는 이를 욱 하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그래 나는 얌전히 뒤로 물러나지 않고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아하, 그 무단 침입한 자가 팬던트를 가지고 왔다는 걸 잊지는 않았겠죠? 당신의 말을 들어보니 그 팬던트가 없었다면 당신이 지금 여기에 있지 못했을거 같은데요? 제가 다른 마법사에게 확 팔아버렸으면 어쩔 뻔 했어요?" 솔직히 안 팔았다는 거에 안도했지만 말이다. 리건에게 듣기 전에는 그게 무지 무지 무~~~지~~~ 비싸게 팔릴 수 있다는 걸 몰랐으니 말이다. 그 전에 팔았다면 엄청 비싸게만 팔아먹었을테니, 나중에 그것의 진정한 가격을 알면 분해서 잠을 자지도 못했을 거였다. 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건 말건 내 말이 맥키에게 먹혀 들었는지 그녀가 한방 먹은 표정으로 우물우물 거리더니 툭 내뱉었다. [조, 좋아. 그럼 여길 침입한 네 괴씸함과 이 팬던트를 가지고 온 네 고마움을 쎔쎔으로 치지. 그러면 됐지?] "어어, 천만의 말씀. 여기 들어온 건 저뿐만이 아니라 저~ 많은 사람들이랑 같이고, 그 팬던트는 나 혼자 가지고 온건데 쎔쎔으로 하면 내가 억울하잖아요?" [뭣이라? 네가 억울하면 어쩔건데? 내가 그러면 그런 줄 알아!] 아버지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억지였지만 아버지가 아닌 타인에게 듣자니 엄청 분했다. 그래 나는 맥키의 억지에 꼬리를 내리는 대신 바락바락 대들었다. "그런게 어딨어요? 절대로 내가 손해볼 수 없다고요!" [호오, 그래? 그렇다고 어쩌라고? 지금 나랑 한바탕 하기라도 할래?] "한 바탕 하기는 뭘 해요? 나 갈테니까 그 팬던트 돌려줘요! 집에가서 팔아먹게!" 내 선언에 맥키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야, 이건 내 거야!] "누구 마음대로 그걸 아줌마꺼라고 해요? 이건 내 거라고요!" 맥키의 뻔뻔한 선언에 내가 받아치자 맥키의 얼굴이 분노로 인함인지 벌개졌다. 영상으로도 이런걸 나타낼 수 있다니, 정말 믿겨지지 않지만... [뭐, 뭣이라? 야, 지금 누굴보고 아줌마래, 아줌마가!! 난 결혼도 안 한 처녀라고!!] 자고로... 여자가 아줌마라는 말을 싫어하는 건 어느 나라, 어느 차원이던지 다 같은 모양이었다. 그걸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나였지만, 지금은 그런걸 이해했다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지금은 엄연히 싸우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300년 전의 사람을 어떻게 아가씨라고 해요? 다른 유사 인종이라면 몰라도 아줌마는 인간이라면서요? 보통 사람이라면 늙어 죽었겠다." 내 말에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뭐라 말하려던 맥키가 멈칫했다. 그녀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는 죽었어. 아무리 기다려도 팬던트를 가지러 온 제자는 돌아오지 않았어. 그렇다고 내가 찾으러 가고 싶지는 않아서... 혹시 테렐 녀석이 안 만들어줘서 제자가 고생하는 건 아닐까하고... 기다리다가... 잠들었던 거 같아.] 약간 풀이 죽은 거 같기도 하고, 회상에 잠긴 거 같기도 하고, 아니면 슬픈 기억을 떠올리는 것 같기도 한 그녀의 음성에 지금껏 맥키의 분노를 어떻게든 풀으려고 했지만, 한 마디도 못하고 쩔쩔매던 테렐이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맥키의 부탁을 거절할 리가 없잖아. 네 제자가 와서 네 편지를 보여주자마자 만들기 시작했다고.] 그러면서 은근슬쩍 맥키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려놓자 지켜보고 있던 일리언이 펄펄 뛰었다. [아악! 너 감히 어디다 손을 대는 거얏? 당장 그 손 내려놓지 못해?] "호오... 이거 참... 인간 둘과 정령이 낀 삼각 관계인가?" 그 모습을 쭈욱 지켜보고 있던 리건이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 제 39화 맥키랑 테렐이랑 (3) 그 모습을 쭈욱 지켜보고 있던 리건이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일리언이 엄청 분노한 표정으로 펄펄 뛰기는 했지만, 단지 환영마법으로 인한 이미지인 테렐에게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뭐, 테렐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조각상이나 팬던트를 뽀사 버리면 소멸시키는게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면 일리언이 그렇게 기다리던 맥키도 같이 사라질 테니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마법사가 아닌 단지 정령일 뿐인 그녀가 마법 장치를 어떻게 잘 만져서 새로이 조작할 수도 없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일리언의 분노는 금세 가라앉을 수 있었으니, 맥키가 흥, 하고 콧바람을 내며 테렐의 손을 매정하게 탁 쳐냈던 것이다. 덕분에 테렐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고, 일리언은 승리한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삼각관계는 아닌거 같은데요?" 그 모습에 내가 속삭이자 리건이 쿡쿡 웃었다. 그 사이 다시 이성을 되찾은 듯 침착한 표정이 된 맥키가 나를 바라보았다. [자, 다시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지. 그러니까 네 말은 네가 팬던트를 가지고 온 것과 네 일행이 내 집에 쳐들어온 것을 쌤쌤으로 하자는 건 네가 너무 억울하다는 말이지?] "그렇죠." 아까까지 내가 열심히 주장한 말을 긍정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맥키가 침착하게 되짚으니까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느껴졌다. 역시나, 내 대답에 맥키는 씨익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그렇다면 너와의 거래는 잠시 후로 미루고...일단 내 허락도 없이 함부로 내 집에 들어온 녀석들을 좀 처리해 볼까? 우선은.....]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춘 맥키가 리건을 바라봤다. [바로 너부터 말이야.] 그 말에 나는 역시나...하는 심정이었지만 기겁을 하지는 않았다. 설마 하니 리건이 맥키에게 지겠는가? 리건의 진짜 정체를 알아채지 못한 맥키라서 아주 당당하게 리건을 지목하며 협박할 수 있었던 것일게다. 리건 또한 맥키의 살기 어린 미소를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여유만만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대신 나에게 시선을 돌려 씨익 웃을 뿐이었다. "해인아. 설마 날 버리지는 않겠지?" "엑...." 그 모습이 왠지 악당같이 느껴져 잠시 버벅대는 나 대신 아버지가 나섰다. [웃기지마!! 너같은 놈 못 버릴거 같아? 얼마든지 버려주마] 그러면서 아예 리건을 떠밀어 맥키 앞으로 밀어놓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자, 이런놈 한 바구니라도 넘겨줄 테니 찜쪄 먹던 말려 먹던 마음대로 해라.] 맥키는 리건이 나와 같이 있으니 친분이 있는 사이라 여기고 리건을 공격 타킷으로 삼으면 내가 나서서 막아서리라 예상했던 모양인데, 상황이 자신의 예측과는 다르게 진행되자 당황한 눈빛이었다. 리건은 여전히 싱글싱글 웃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이, 이거 너무한거 아니야? 해인이와 내 사이를 생각하면 이러면 안되지" 그러자 아버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네놈하고 해인이하고 사이랄게 있었더냐? 아, 뭐 해? 빨랑 받지 않고?] 아버지가 리건의 등을 더욱 거세게 꾹꾹 누르며 일리언을 향해 말하자 일리언이 당황한 표정으로 맥키를 바라봤다. 하지만 맥키 역시 계속 당황하고 있느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단지 리건만이 아버지 힘에 밀리지 않고 버티며 계속 투덜대고 있ㅇ르 뿐. "어어, 설마 모르는 거야? 나하고 해인이는.........." 하지만 리건은 말 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내 이름을 입에 올리자마자 아버지가 살기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봤던 것이다. [더 말하면 내 손으로 직접 죽여 버린다?] 그 말에 리건은 쿡쿡 웃으면서도 순순히 입을 다물었고, 대신 실피드가 끼어들었다. [오오. 아버지 분노하다.] 그에 아버지의 살기 얼니 시선은 실피드를 향해 획 돌아갔다. [아, 네놈은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당장 안 돌아가?] [우리 사이에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 그래도 지구ㅡㅁ까지 같이 애정을 다해 자식을 보살피고 키워줬는데......] [뭔 헛소리야? 누가 뭘 어쨌다고?] [아, 거야 당연히.......] 아버지의 점점 치켜 올라가는 눈썹을 즐겁게 바라보며 나오던 실피드의 말은 갑자기 끼어든 ㅅ조심스러운 말에 중단 되었다. 어차피 장난으로 하는 말이었으니 남의 말을 무시하면서까지 계속 할 필요성까지는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저어.....엠브로스 씨?]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날 보는 테렐의 말에 나는 얼른 대꾸해 줬다. "아, 예" [음, 보아하니 블랜차드 씨의 실력을 믿고 게시나 본데...그럼 그분 말고는 다른 분들은 어떻습니까?] "예?' 잠시 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반문하자 그가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다른분들이 공격을 당해도 괜찮느냐는 말이었습니다.] "아...." 내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테렐이 말을 이었다. [뭐, 정령왕을 불러내실 정도라면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계실 테지요. 그러니 지금껏 무사하셨던 것일 테고요. 하지만 능력에 자신있다고 해서 계속 싸우는 것은 너무 소모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테렐의 말에 긍정하면서도 내가 투덜거리자 맥키가 끼어들었다. [누가 손해라는 거야? 손해라고 치면 내가 더 손해라고,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마구헤집는 꼴을 가만히 지켜봐야 하는 내 심정을 알기나 해? 더구나 빈손으로 갈 것도 아니잖아?] "아.....그것도 그렇네요. 어, 그러고 보니 괜찮겠어요? 저 집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것도 모자라 중요해 보이는 건 다 가지고 갈지도 모르는데...." [훗, 나를 뭘로 보고.벌써 중요한 거에는 미리미리 마법을 펼쳐놔서 건들면 큰일날걸? 거기다가 지금은 육체도 없어서 가지고 있어봤자 소용도 없을텐데 뭐. 가지고 갈 만한 거라고 해봐야...웬만한 건 쉽게 쉽게 구할 수 있는 거고, 책들이야 내용을 벌써 다 여기에 저장해 놨으니 저기 있는 책 다 없어져도 상관없어. 흣흣흣....] 의기양양하게 웃어대는 맥키를 보며 나는 다시 투덜댔다. "어쩐지...순순히 허용한다고 했다. 이거 역시 내가 너무 손해라니까...." [손해는 무슨 얼어죽을 손해? 대신 나는 내 집이 뒤집히는 걸 그냥 보고 있어야 한다고. 그게 얼마나 기분 나쁜지 알기나 해?] 그녀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 일행이 공격당하게 놔둘 수도 없는 데다가, 임무를 띠고온 이상 우리 나라 일행이 공격당하는 것도 가만두고 보기에는 편치 않았으니까 말이다. 거기다 더 이상 정령인 일리언과 싸우고 싶지도 않고 말이다. "그래요. 그래. 그러도록 하죠." "자, 상황이 정리되었으면 질문 좀 해도 될까? 궁금하게 있어서 말이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를 기다렸다는듯, 내 말이 끝나자마자 리건이 입을 열었다. ====================================================== 제 40화 그라함 대제의 보석 (1) ====================================================== 제 40화 그라함 대제의 보석 (2) ====================================================== 제 40화 그라함 대제의 보석 (3) ====================================================== 제 40화 그라함 대제의 보석 (4) ====================================================== 제 41화 새클턴국의 음모 (1) "그러니까 그게..." 라면서 몬트리올경은 떠듬떠듬 저택 안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동굴을 통과할 때 미로 마법에 안개에, 거기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골렘까지 나타나고, 호수에서는 상급 정령보다 더 강한 자연계 정령이 가로막자 마법사들은 틀림없이 집안에도 대단한 장치가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단다. 그리고 그건 내가 다리를 놔주고 그 다리를 통해 집에 가까이 다가가는데 아무런 공격이 없자 거의 확신으로 다가왔고. 그래서 마법사들을 지켜줄 기사들과 용병들을 잔뜩 이끌고 들어간 것이었다. 그렇게 다리를 건너 드디어 집에 도착한 일행이 고풍스러운 나무 현관 문을 박차고 ( 잠겨 있지도 않았다고 한다 ) 들어가자... "들어가자?" 몬트리올경이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추자 긴장한 채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차트워드경이 침을 꿀꺽 삼키며 재촉했다. "그게... 그냥 평범한 거실이 있더군요." "엥..." 황당하다는, 남아 있던 사람들의 표정에 집에 들어갔다 왔던 사람들이 이해 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 그들도 집을 들어서자마자 대단히 위협적인 무언가가 자신들을 맞을 줄 알고, 들어가기 전에 마나의 기색이 느껴지니 뭐니 해서 탐색마법까지 동원해서 긴장한 채 들어갔는데, 평범한 가정집 거실이 있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뭔가 속임수가 있는 줄 알고 샅샅이 뒤져 봤지만, 그런건 전혀 없더군요." 듣는 사람까지 맥빠지게 만드는, 기운 없는 음성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집안을 살펴보니 1층은 일반 가정집이었고, 마법 연구실이나 서재, 물품 보관실이 모두 2층에 있음을 알게 된 마법사들은 마법 물품을 살펴보는 데 조금도 도움이 안되는 용병들이나 기사들을 모조리 1층에 몰아넣고, 자신들만 2층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때 램버트는 집 안팍을 살펴보기 바빴고 말이다. 하여간, 그래서 기사들과 용병들이 이제나 저제나 마법사들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콰당~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란다. 적이 나타난 줄 알고 놀라서 우르르 올라갔더니만, 마법사들이 사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은 주제에 복잡한데 왜 올라오느냐고 마구 화를 냈다고 한다. 그래 거기에 쫓겨서 다시 일층에 내려와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잠시 후에는 아까와는 비교되지 않은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검은 연기까지 모락모락 피어 오르더란다. 이번에는 정말 큰일인가 보다 하고 뛰어올라갔는데, 황당하게도 들어가지도 못하게 막고는 별거 아니니까 내려가라고 하더란다. 거기에 더 보태서 살펴보는데 정신 사납게 왔다갔다 하지말고 부르면 오라고 윽박지르기까지 하는 거였다. 그에 열받은 기사들과 용병들이 속으로 이를 갈면서 내려왔고, 그 뒤로는 폭발 소리가 나던, 뭐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던 귀를 딱 막고 무시해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소란스러움이 오랜 시간 지속되다가 점차 진정될 무렵, 이제 끝났나... 싶은 순간 갑자기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단다. 이제까지 간간히 폭발음이 들렸고, 가끔 집이 흔들리는 일도 있긴 했지만, 이번거는 큰 지진 이라도 일어난 것 처럼 집안이 흔들리고, 벽에 걸린 그림이 떨어지고 선반이 넘어가는 등, 정말 장난이 아닌 상황이라 기사들과 용병들은 순간적으로 밖으로 뛰어 나갈뻔 했단다. 그게 아마도 그라함 대제의 보석을 보호하고 있던 방어 마법을 깬 순간이었던 모양이다. 호수 건너 있던 우리들조차 놀라서 볼 정도였고, 집 한쪽 귀퉁이가 무너질 정도였으니, 안은 얼마나 난리가 났었으며,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을지는 가히 상상이 되었다. 그러게 장난 아닌 폭발음이 들리자 기사들은 이번에도 무시해야 하나 올라가봐야 하나 무척 망설이는데 그 폭발음 뒤에 조용해지자 괜찮은가보다... 하고 엉망이 된 자신들의 자리를 정리하고 앉으려는 순간, 꽈과광~ 우당탕 쿵탕~ 하는 폭발음과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리고 곧바로 남작님이 놀란 얼굴로 뛰어 내려 오셨죠." 그렇게 말하며 몬트리올경이 클라우드 남작을 바라보자 클라우드 남작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때 상황이 정말 살벌했거든요. 제가 감당하지 못할 상황이라 몬트리올경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내려갔었지요." 그러면서 덧붙여지는 설명에 의하면, 맨 처음 그라함 대제의 보석이 들어 있던 자그마한 보라색 상자를 발견한 건 마법사 길드 소속의 마법사라고 한다. 그가 그 상자를 열려고 했지만, 왠만한 마법은 튕겨내는 건 물론, 손대는 자에게는 짜릿 짜릿하게 만들어주는 전격 마법까지 걸려 있어 그 마법사는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걸 알고는 마법사 길드측 리더인 콘스틴스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리더를 부를 정도라면 대단한 건가보다 하고 마르타국 리더인 폴트팩트 백작을 비롯한 녹스국과 새클턴 국 마법사들까지 슬그머니 다가갔단다. "물론, 저도 갔었지요." 하기야, 각 국 마법사들의 그러한 태도는 당연한 일이었다. 던전의 보물(?)들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이제 분배(?) 문제가 대두될 터였다. 그리고 거기서 최대한 이익을 얻으려면 보물 목록을 확실하게 알아두는 건 기본일테니 말이다.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사국 마법사들의 주시 속에 콘스탄스가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 이 과정에서 큰 폭발이 일어나 상자 주위가 초토화 되었지만, 그 폭발에 휩슬릴 사람은 그 곳에 없었다. - 상자에 걸린 마법을 해제시킬 수 있었다. "아아, 저는 그 상자의 뚜껑을 열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보라색 빌로드 쿠션 위에 올려진 채 찬란한 빛을 발하던 그 모습이라니..." 그 마법석이 성능(?)만 대단한 것이 아니라 자태까지도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명색이 한 나라의 왕실 마법사인 - 즉, 웬만한 보석은 자주, 흔히 보는 위치에 있는 - 그를 한 눈에 뻑 가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정말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보석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은빛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흰빛 같기도 하고..." 몽롱한 표정의 남작을 보자니 그냥 놔뒀다가는 언제까지나 그 보석 생각에 푹 빠져서 헤어나지 못할 듯 싶었다. 리건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남작의 정신을 단번에 깨울 만큼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단 말이오?" 역시, 한 카리스마 하는 차가운 리건의 말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남작이 얼른 말을 이었다. "네, 넷. 그렇게 은빛으로 빛나던 보석이 콘스틴스 마법사가 잡으니 천천히 초록빛으로 바뀌더군요." "호오, 초록빛으로 바뀌었다라... 그래서 알아치린 건가?" 리건의 말에 남작아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본래 그라함 대제의 보석은 주인에 의해 색이 바뀌기 때문에 크기와 모양만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누가 가졌느냐에 따라 색이 바뀐다는 것 만큼 그라함 대제의 보석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도 없지요." 그러면서 이어진 남작의 말은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콘스틴스는 시험삼아 그걸 다른 이에게 넘겼다고 한다. 얼결에 제일 먼저 잡은 이가 바로 클라우드 남작이었는데, 그의 손에서는 황녹색으로 변했다고 했다. 그때의 기억으로 다시 몽롱해지려는 남작에게 리건이 한마디 하지 또다시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었다. 그 뒤로 그 주위에 모여 있던 이들 모두가 한번씩 보석을 손에 쥐자 그때마다 보석은 주위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한번도 동일한 색을 띄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르타국 일행의 리더인 폰트팩트 백작이 보석을 손에 쥐자 그 보석은 짙은 보라빛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걸 묘하게 바라보던 그는 일순 보석을 손에 쥐고는 갑자기 주위 사람들에게 공격 마법을 퍼부었단다. "보석을 묘하게 바라볼때 그의 속셈을 눈치 챘어야 했는데... 그는 주위에 각 국에서 파견 된 마법사들 중 가장 뛰어난 마법사들만 모여 있었으니 우리만 제압하면 나머지는 쉬울 거라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그라함 대제의 보석으로 인하여 마법을 증폭 시킬 수 있었던 폰트팩트 백작의 공격 마법은 장난이 아니었다고 한다. 남작은 순간적으로 실드 마법을 칠 생각은 못하고 여기서 끝장이구나... 라고 여기고 눈을 감았는데, 콘스틴스가 나서서 모든 이들에게 실드 마법을 쳐줘 살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분이 주문 없이도 실드 마법을 펼칠 수 있었다고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한 거라 마나도 불안정한데다가 공격 마법이 강해 실드 마법이 강제로 깨져버렸습니다. 그 작용으로 콘스틴스 마법사는 큰 내상을 입고 쓰러졌지요." 콘스틴스의 희생으로 인하여 나머지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잽싸게 몸을 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모였다고 해도 솔직하게 폰트팩트 백작을 막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폰트팩트 백작은 던전 탐험대중 콘스틴스 다음으로 가장 뛰어난 마법사인데 콘스탄스는 부상을 입고 쓰러진데다 폰트팩트 백작은 그라함 대제의 보석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마르타국 마법사들보다 나머지 삼국 마법사들과 마법사 길드 마법사들쪽이 더 많기는 했지만, 주문 없이 공격 마법을 펼칠 수 있는 마법사 앞에서 주문을 외워야 실드 마법을 펼칠 수 있는 마법사들이 많아봤자 별 소용이 없었던 거였다. 게다가 현재 리더도 없어서 조직적으로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에서 말이다. 그나마, 실드 마법을 여려겹 펼칠 수 있었으니 조금이나마 목숨을 연장할 수 있었다는 걸까나? 몇번이나 이어진 폰트팩트 백작의 공격 마법을 다른 마법사들과 힘을 합쳐 겨우 겨우 막아낸 남작은 처음에는 이 난리 소리를 들은 기사들이 곧 와주면 어떻게든 될 거란 희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 자신들이 기사나 용병들을 쫓아낸 건 생각도 못했는지... - , 일층에 있는 기사들이 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도박하는 심정으로 모종의 결심을 했다고 한다. "어차피 기사들 없이 버텨봤자 폰트팩트 백작에게 공격할 수 없는 마법사들로는 무너지는 건 시간 문제일 것 같았습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기사들을 불러 와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물론, 그건 다른 마법사들도 떠올린 생각이라 처음에 몇번 보이 트레션 마법 (멀리 떨어져 있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마법) 을 써서 기사들을 부르려고 했지만, 그걸 알아챈 폰트팩트 백작파(?) 마법사들에 의해 번번히 제지를 당했다고 한다. 그래 남작은 자신이 직접 부르러 가기로 결심하고 - 잘 하면 자신은 그곳에서 빠져나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 남들이 실드 마법을 칠때 자신의 제자 (앤더슨 스니볼리) 에게 헤이스트 마법을 걸고 자신을 들고 뛰어 내려가도록 했다고 한다. 혹여 자신들에게 공격 마법이 퍼부어질때를 대비하여 실드 마법을 준비해놓고 말이다. 운이 좋게도 그 작전을 잘 먹혀들어, 문을 나설 때 마르타국 마법사가 던진 공격 마법의 충격으로 인하여 계단을 다리로 뛰어 내려가는 대신 온 몸으로 데굴데굴 굴러서 내려가야 했다는 것을 제외하고 둘은 무사히 그 곳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뭐, 앤더슨은 스승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희생양으로 삼았기에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에는 기절해버려 기사들을 부르려고 그들이 있는 거실로 뛰어 들어간 것은 클라우드 남작이였다. 하여간, 그는 제자 하나는 잘 둔 듯 했다. 어쨌든, 그런 눈물겨운 클라우드 남작과 앤더슨의 활약으로 인하여 기사들과 용병들은 급히 자신들의 무기를 챙겨들고 위로 뛰어 올라갔다. 단지, 같은 나라의 마법사들이 다 내려왔기에 올라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결정을 못한 벨레니국측 기사들과 용병들만 남겨두고... 그러나 몬트리올경은 남작에게서 그라함 대제의 보석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윗층으로 뛰어 올라가려고 했다. 남작이 미처 그를 말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남작은 비록 그 보석이 탐나기는 했지만 - 남작이라고 그 보석이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었으니 - 현재의 벨레니국 전력 상으로는 택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 벨레니국 최상의 능력자들, 즉 왕실 기사단에서 나온 사람들은 다 빠졌으니 말이다 - 최대한 빨리 이 곳에서 벗어나 우리와 합류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이도 몬트리올경은 채 2층으로 올라가지도 못한 채 마악 윗층에서 내려오던 램버트와 부딪혀 다시 데굴데굴 밑으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정말 타이밍 좋게도, 그라함 대제의 보석이 발견될 즈음 램버트는 지붕 위에 올라가서 지붕의 구조를 살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폭발에 휘말려 지붕에서 떨어질 뻔 하던걸 간신히 간신히 지붕 모서를 잡고 버텨 겨우 겨우 살아났나 싶었는데, 그 다음 또다시 지붕 바로 밑에서 소동이 일어나자 - 아마 마법사들 사이에서 벌어진 싸움 이었던 듯 - 그 폭발을 피해 지붕에서 내려오던 참이었던 것이다. 얼결에 램버트 덕분에 몬트리올경을 저지할 수 있었던 남작은 몬트리올경에게 자신은 그를 돕지 않고 리건에게 가겠다고 강경하게 말하여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 전에 기사들과 용병들까지 위로 올라가 더 치열해진 싸움때문에 2층이 들썩 들썩 거리자 놀란 램버트를 비롯한 용병들이 우르르 집을 빠져나간 것도 몬트리올경을 이끌어내는데 한 몫 했고 말이다. "그래서 저희들만 이렇게 나오게 된 것입니다." 남작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자, 듣고 있던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과 같이 집에 있다가 나온 사람들은 그의 말이 맞다는 표시로, 그리고 호수가에 있었던 사람들은 알았다는 표시로 말이다. ===================================================== 홈피가 너무 바뀌어서 이거 참 어색하네요. 그래도 전보다는 훨씬 좋은 거 같죠? ====================================================== 제 41화 새클턴국의 음모 (2) "그래서 저희들만 이렇게 나오게 된 것입니다." 남작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자, 듣고 있던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과 같이 집에 있다가 나온 사람들은 그의 말이 맞다는 표시로, 그리고 호수가에 있었던 사람들은 알았다는 표시로 말이다. 그렇게 남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몬트리올경이 기다렸다는 듯 리건을 재촉했다. "후작님, 어서 가셔야 합니다. 그라함 대제의 보석을 다른 나라에 넘겨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하지만 리건의 표정은 심드렁 했다. "그럼 경이 가서 받아오시지 그러오?" "예?" 몬트리올경은 리건이 무슨 의도로 그렇게 말한 건지 파악을 못하고 당황한 표정으로 반문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리건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고 싶지도 않았던지 그저 심드렁한 표정을 유지한 채 몸을 돌려 아까 우리가 앉아 있던 곳으로 향했다. "어어..." 그리고 그 뒤를 나와 에아머스 차트워드경이 따르자 더 당혹한 몬트리올경은 어찌할 바를 몰라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분위기가 자신이 원하던 것과 정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 황급히 걸음을 재촉하며 다가왔다. "블랜차드 후작님!" 그러나 리건은 그의 부름을 그대로 무시해 버렸고, 대신 클라우드 남작이 나섰다. "몬트리올경, 지금 누구의 손에 보석이 들어가게 되었다고 확정된 것도 아닌데 미리 나설 필요가 있소? 잠시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현명할 것이오." 남작의 말은 리건의 행동을 설명하며 몬트리올경을 달래는 것 같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들으면 지금 싸움에 끼어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몬트리올경을 멍청하다고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몬트리올경 또한 그것을 느꼈는지 눈썹이 꿈틀 했지만, 그가 채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호수 위를 주시하고 있던 누군가가 소리쳤다. "다리를 건너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친 몸을 쉬고자 - 뭐, 리건과 내 일행은 아니지만서도 -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다시 호수가로 우르르 몰려 들었다. 하지만, 다행이도 다리를 건너고 있는 이들은 마법사 길드 소속의 마법사들이었다. 그들 무리의 앞쪽에는 안색이 상당히 안 좋은 콘스틴스가 다른 마법사들에게 부축을 받은 채 걸어오고 있어다. "아, 그러고보니 클라우드 남작이 말하길 폰트팩트 백작의 기습적인 공격 마법을 막다가 내상을 입은 듯 하다고 했었지? 그래서 마법사 길드 소속 마법사들이 저 집을 빠져나오는데 시간이 걸렸구나."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리더를 놔두고 올 수도 없었고, 다친 상태로 데리고 오기도 힘들테니 싸움이 미치지 않는 1층에서 치료라도 하고 데리고 나온 모양이었다. "흠, 마법사 길드라면 중립을 지킬테네 경계할 필요 없겠지. 다리를 건너 오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와라. 남작, 그대는 콘스틴스 마법사의 상세를 봐주도록 하시오. 뭐, 거절한다면 그냥 놔두고." 신경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듯 리건이 툭 던지는 말투로 지시를 내리자 경비를 서던 기사들 및 용병들과 남작이 대답했다. "옛!" "알겠습니다!" 리건이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대하자 경비를 서던 이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긴장감을 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지시를 받은 이들은 따로 있으니 자신들까지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은지 채 십분이 지나기 전에 또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했다. 경비를 서던 자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누가 또 나왔습니다." "이번엔 또 누구야?" 그에 또 다시 긴장한 채 몰려든 사람들 중 누군가가 불만어리는 말투로 중얼거렸지만, 곧 차트워드경의 제지에 입을 다물었다. "조용. 모두 전투 준비를 하고 대기하라." 차트워드경도 이번에는 여유있게 관망하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집을 막 빠져나온 사람들은 마르타둑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뒤를 이어서 녹스국과 새클던국 사람들이 뒤섞여 우르르 몰려 나왔다. "경고하는데, 명이 있을때까지 함부로 나서지 마라. 만약 그러는 놈이 있다면 내 친이 손을 봐주도록 하지." 리건은 상황이 안 좋아질 것 같자 낮은 목소리로 주의를 줬다. 특히 마지막에는 노골적으로 몬트리올경을 바라보면서 말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그의 입을 사전에 봉쇄하는 것도 모자라 그의 얼굴을 새파랗게 질리게 만들었다. 몬트리올경이 그렇게 기가 죽던 말던 상관하지 않는 다른 이들이 모두 긴장한 상태로 지켜보는 가운데 마법사 길드 소속의 마법사들이 먼저 호수가에 도착했다. 그들은 전투 대기 상태인 우리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 아마도 우리까지 이 싸움에 뛰어들려 한다고 생각한 듯 - 자신들은 이 싸움에 관련되지 않겠다는 모습을 보이려는 듯 얼른 우리 뒷쪽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폰트팩트 백작을 선두로한 마르타국 사람들이 도착했다. 폰트팩트 백작은 우리 일행이 긴장한 채 무기를 부여잡고 있는 모습을 둘러 보더니 비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훗, 벨레니국 사람들이여 그대들도 이 돌을 원하는가?" 그러면서 그가 치켜 올린 오른손에는 채 돌이 지나지 않았을 아기의 주먹만한 짙은 보라색의 돌이 빛나고 있었다. 그라함 대제의 보석이 틀림 없는 그 빛나는 돌의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자 폰트팩트 백작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원한다면 덤벼봐라. 얼마든지 상대해주지." 자신만만한 폰트팩트 백작의 말에 자존심 상한 몇몇 기사들이 이를 뿌득 갈았지만 그보다 리건의 경고가 무서웠던지 나서는 이는 없었다. 대신 마르타국 뒤를 쫓아 온 새클턴국 리더인 보르바 할레언 백작이 리건을 향해 외쳤다. "블랜차드 후작님, 그자들이 그라함 대제의 보석을 탈취해 갔습니다. 부디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데 힘이 되어 주십시오." "거참, 언제 마르타국이 악의 무리가 된 건지..." 할레언 백작의 말은 그라함 대제의 보석은 자기네 것이었는데 폰트팩트 백작이 악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빼앗아갔다는 소리로 들렸다. 원래 그 보석의 주인은 맥키인데 말이다. 할레언 백작의 못마땅한 언행에 나는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어차피 새클턴국이나 녹스국이나 그라함 대제의 보석을 노리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타국과 하등 다를게 없건만, 자신들이 정의의 편인 듯 행동하는게 마음에 안들었다. 내가 그러는 동안 완전히 호수를 건너온 녹스국과 새클턴국이 마르타국 사람들을 둘러쌌다. 그러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던 리건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해인, 다리를 거두어 들여라." "아, 예." 어차피 집에 있는 사람도 없으니 다리 또한 필요 없을 터였다. 게다가 나 또한 일행들에게 도움이 되려면 될 수 있는 한 힘을 아껴둘 필요가 있었다. 내 의지를 받은 노에스는 순식간에 팔을 거두어 들이고는 정령계로 돌아갔다. 그러나 사람들은 커다란 다리 하나가 사라졌는데도 마르타국 사람들과 대치 상태에 들어가느라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다리를 거두어 들이자 리건은 벨레니국 사람들을 향해 작게 손짓했다. 그 의미는 분명히 뒤로 물러나라는 뜻이었다. 그에 다른 이들은 순순히 물러났지만, 단 한사람 몬트리올경만은 버텼다. "후, 후작님..." 하지만 그의 반항(?)은 그가 채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리건의 싸늘한 시선에 금방 수그러들고 말았다. "지금 날 거역하는 건가?" "아, 아닙니다." "오, 역시 한 카리스마..." 그러나 불만인 것은 몬트리올경 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벨레니 국 사람들이 대치 상태에서 벗어날때 까지 물러나자 녹스국의 리더 브롬레이 후작이 당황스럽게 외쳤던 것이다. "아, 아니...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블랜차드 후작님?" 그에 마르타국 사람들도, 녹스국 사람들도, 새클턴국 사람들도 리건을 향해 일제히 시선을 돌리자, 리건은 그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벨레니국은 그런 쓸데없는 소모전에 끼지 않을 것이오." "쓰, 쓸데 없는 소모전이라니요?" 그 즉시 녹스국 리더 브롬레이 후작이 찔리는게 있는지 흠칫 하더니만 얼굴이 벌개져서 외쳤다. 스스로도 이게 공을 세우기 위해 욕심을 부려 일어나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보석을 못 얻은 채 돌아가서 남의 나라에 빼앗겼습니다... 라고 보고한다면 무능하다고 징계 받을지도 모르니 - 상황을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라함 대제의 보석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니까 각 나라의 수장들이라고 다를 건 없을 테다. - 자신만의 욕심이라고는 할 수 없으려나? 그런데 그때 리건의 이 선언을 아주 치사하게 만들어버린 이가 있었으니... "후후후... 블랜차드 후작, 그대의 계획에 정말 찬탄을 금할 수가 없구려. 그대는 우리와 저 두 나라가 싸워서 힘을 소진했을때 어부지리로 보석을 취득하겠다는 생각이 아니오? 정말 현명하구려. 그.러.나... 내가 이까짓 두 나라를 상대로 전력을 다할 것 같소? 차라리 지금 싸움에 끼는 것이 승률을 더 높게 할 것이요. 물론, 승리는 내 것이지만... 쿡쿡쿡..." 녹스국과 새클턴국 사람들에게 둘러쌓여도 여유만만한 폰트팩트 백작의 비웃음 어린 말이었다. 그 폰트팩트 백작의 말에 넘어간 - 내가 듣기에도 정말 그럴듯 했으니까... - 두 나라 사람들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살기와 분노 어린 눈으로 리건을 노려보았고, 브롬레이 후작은 아예 길길이 날뛰며 외쳤다. "어, 어떻게 그럴수가... 블랜차드 후작,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이건 정말 배신이오!!" "배, 배신이라고라..." 브롬레이 후작의 분노에 찬 외침에 나는 황당한 기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동맹이 깨진게 언제인데, 그렇다면 브롬레이 후작은 우리가 저 보석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를 동맹국이라고 생각하고 우리 국가로 돌아갈때까지 동행하며 보호해줄 거였단 말인가? 내 정치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저 사람이 후작이라는 높은 작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여기에 온 이유를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뭐, 덕분에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황당하다는 시선을 보내는 바람에 잠시 리건은 살기와 분노 어린 시선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거에 눈 하나 깜짝할 리건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오히려 리건은 다른 이들을 향해 가버린 시선을 다시 자신에게 돌리려는 듯, 비웃는 기색이 역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거 참, 비통함을 금치 못하겠군요, 브롬레이 후작. 제가 당신께 배신감을 느끼게 하다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브롬레이 후작께서는 만약 저희측이 보석을 얻게 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아마도 보석을 차지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그, 그건... 그건 지금 논의할 게 아니지 않소?" 리건의 질문에 어물어물대던 브롬레이 후작이 발악적으로 외치자, 녹스국 일행이 창피한 듯한 표정으로 브롬레이후작에게서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리고 나는 다시한번 황당한 기분을 느꼈다. "저 사람 집안 아직 안 망했을까? 정말 용하다. 도대체 저 사람 아이큐가 몇이야?" 저 사람이 한 나라의 귀족이라는 것은 그 나라의 불행이요, 적국의 행운일 것이다. 혹시 녹스국이 저 사람을 여기에 보내면서 부디 돌아오지 말라고 기원한 건 아니었을까? 브롬레이 후작 덕분에 살벌하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기는 했지만, 대치 상태는 여전했다. 녹스국과 새클턴국은 당장이라도 마르타국을 공격해서 보석을 빼앗고 싶겠지만, 이번 싸움에 불참을 선언한 우리 나라가 뒤에 버티고 있어서 그런지 공격할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뭐, 정확하게 말한다면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자국을 제외한 어떤 나라도 믿지 못하니까 그런 대치상태가 가능한 거겠지만... 새클턴국과 녹스국이 마르타국을 이겨 보석을 취한다 해도 그 다음에는 두 나라간의 보석 쟁탈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때 폰트팩트 백작의 말대로 우리나라의 "어부지리"가 발생하지 말라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으니 말이다. 두 나라의 동맹이 확실하다고 두 나라가 믿고 있다면 우리 나라가 뒤에 가만히 있다고 해도 함 해볼만 할지도 모른데 말이다. 폰트팩트 백작 또한 우리에게 큰 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그도 사실 두 나라의 공격을 정말 거의 피해 없이 막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먼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지켜 보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약간 부드러워 졌다고 생각 되었던 분위기에 차츰 긴장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긴장감에 숨이 막힐 지경이 되자 리건의 지시에 의하여 뒤로 물러났던 우리 나라 사람들도 저도 모르게 무기를 꽈악 부여잡고 여차하면 공격할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한 끝 없는 대치상태가 계속 될 것만 같았던 상황을 깨뜨린 것은 새클턴 국의 리더 할레언 백작이었다. ===================================================== 유구무언입니당 (__) 후다닥~~ =33 ====================================================== 제 41화 새클턴국의 음모 (3) 그러한 끝 없는 대치상태가 계속 될 것만 같았던 상황을 깨뜨린 것은 새클턴 국의 리더 할레언 백작이었다. "이거 너무한 거 아니오? 폰트팩트 백작, 여기는 엄연히 우리 새클턴 국내요. 그러니 엄밀하게 따진다면 그 보석의 소유권은 우리 국가에 있는 것 아니겠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거기에 몇가지 단서가 붙어야 하지만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어떤 보물을 소유하기 위해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애초에 새클턴국이 중앙 대륙에 있는 3국과 비슷한 국력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3국이 감히 이 정글에 있는 던전을 탐험하겠다는 소리를 하지 못했을 거고, 새클턴국 또한 중앙 대륙을 3국과 마법사 길드 연합 탐험대에 한자리 꼽사리 끼는 대신 국가 자체적으로 탐험했을 거였다. 혼자 못한다면 마법사길드에 따로 협조 요청을 하던가 해서 말이다. 그랬다면 그 보석은 이런 다툼 없이 당연히 새클턴국의 소유가 되었을 거다. '뭐, 그것도 무사히 저 집에 들어갈 수 있었을때의 말이지만.' 내가 이런 말하기는 뭣하지만, 만약 내가 없었더라면 탐험대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다 하더라도 일리언때문에 맥키의 집에 들어가지는 못했을 거였다. 나 또한 운 좋게 팬던트를 가지지 못했다면 계속 일리언과 싸웠어야 했을거고 말이다. '흠, 그러고보면 내가 제일 큰 공을 세운거 같은데? 그럼 저 보석의 소유권은 나에게 있는 거 아닌가? 보통 이런 경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제일 좋은게 돌아가는 것이 상식이니까...' 물론, 그 보석을 가질 마음은 없었지만 그런 생각에 나 혼자 속으로 키득거리는 가운데 일리는 있기는 하지만 이 상황에서 씨알도 맥히지 않는 말을 늘어놓은 할레언 백작 뒤로 콧방귀를 끼며 무시하는 폰트팩트 백작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흥, 웃기는 구나. 그렇게 권리를 행사하고 싶으면 직접 힘으로 빼앗아 보시지!"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왠지 모르게 께름직한 기분이 느껴졌다. 예전에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뭐라 설명을 할 수 없었지만, 뭔가가 자꾸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고나 할까? 비슷한 경험을 찾으라면, 외출을 하는데 집에 문을 잠궜는지 안 잠궜는지 헷갈려서 불안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무시할 수 없는 기분 나쁜 느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 사태에서 우리 나라가 빠져 있기는 하지만, 잘못 움직였다면 휩쓸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새클턴국이나 녹스국은 계속해서 우리들을 끌어들일 틈을 노리고 있을테니 말이다. 그래 이럴수도 없고 저럴수도 없어서 속으로만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중에 새클턴국 리더인 할레언 백작의 말소리가 들렸다. "훗, 자신 만만하시군. 이제라도 늦지 않았소. 어서 보석을 내놓으시오." 앞에서도 몇번이나 보석을 내놓으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소리를 들었었지만, 이번 말은 내용은 똑같은데 왠지 어조에서 기묘한 분위기가 풍기는게 느껴졌다. 나만 그런가해서 힐끗 옆에 있던 리건을 봤지만, 그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사태를 주시하고 있어 뭔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 나는 내가 잘못 느꼈다고 치부해버리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하하하~~ 정말 당당하구나. 하지만, 내가 그 말에 정말 이걸 내줄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폰트팩트 백작이 할레언 백작의 말을 이번에도 무시해버리자 할레언 백작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후회할텐데?" 그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건 폰트팩트 백작도 느꼈는지 여유만만하던 폰트팩트 백작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이놈,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냐?" "훗, 당신이 후회할 짓좀 했소이다." 할레언 백작의 말에 폰트팩트 백작은 물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조금 전 상황이랑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마르타국 사람들을 두 국가의 사람들이 둘러싼 채 대치하고 있었고, 그 곳에서 좀 벗어난 곳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는 것도 아까와 같았다. '그리고 막 쓰러지고 있는 녹스 국쪽 용병... 에엥? 쓰러져?' "쓰러져?" 나는 놀란 나머지 엉겹결에 속으로만 생각하던 것을 입 밖으로 내뱉고야 말았다. 그에 깜짝 놀란 내 주위의 사람들이 나를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그 시선에 응해줄 정신이 없었다. 맨 처음 어떤 용병이 쓰러지자마자 곧바로 그 바로 옆에 있던 두 세 사람이 동시에 쓰러졌던 것이다. "또 쓰러졌다!" 내가 재차 놀라서 다시 외쳤지만, 이번에는 사람들이 내쪽을 보는 대신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녹스국측에서도 사람들이 갑자기 픽픽 쓰러지기 시작하자 당황해서 우왕좌왕 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봐, 왜 이래?" "어이, 정신차려!!" 그런데 더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녹스국 사람들이 픽픽 쓰러지는 것에 이어 마르타국 사람들 중에서도 픽픽 쓰러지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거였다. "독이다!! 모두 뒤로 물러서!" 그 모습에 리건이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외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이 우르르 물러섰다. 재빠른 행동을 확인한 리건은 날 돌아보며 말했다. "해인, 바람의 정령들을 불러서 실드를 쳐라. 아마 공기중으로 퍼지는 독인 듯 하다!" "넵! 슈리엘~" 나의 부름에 즉각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다섯 명의 슈리엘들이 그들의 푸른 날개를 펼치자 강한 바람이 일어나며 우리 나라 사람들의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 사람들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던 마법사들도 뭔 일이 생겼는 줄 눈치채고 즉각 마법을 사용하는게 느껴졌다. 그리고 녹스국과 마르타국도 재빨리 새클턴국측에서 멀어지며 마법사들이 손을 쓰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할레언 백작이 악당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큭, 소용 없다. 우리가 다리를 건너자마자 독을 퍼트리기 시작했을테니 벌써 모두들 중독 되었을 거다." "뭐, 뭣이라?" 할레언 백작의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지만, 녹스국과 마르타국은 몰라도 아직 우리나라측에서는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의 말이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혹시나... 라는 것도 있었기에 클라우드 남작과 그의 제자 앤더슨 스니볼리가 해독 마법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컥..." "크윽..." 채 시동어를 외치기도 전에 두 마법사가 휘청거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 거였다. "이런, 벌써?" 주위에 있던 기사들이 그들을 부축하기는 했지만,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걸 보니 그들도 벌써 중독이 된 모양이었다. 그에 나는 잽싸게 그들에게 달려가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소용 없다니까. 마법사들이 있는 걸 뻔히 아는 우리가 아무 독이나 준비해 왔는 줄 아는가? 그 독은 중독된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증상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시간이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몸 안의 마나를 움직이면 그 즉시 효력을 나타내기도 하거든. 마법사들을 겨냥한 독이라서 말야." 몹시 즐겁다는 듯한 할레언 백작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한 귀로 흘려 들으며 나는 드디어 주문을 다 외우고 시동어를 외쳤다. "큐어~!!" 그러나 내 손에서 빛무리가 형성되어 두 마법사의 몸에 닿으려는 찰나, 나는 어지럼증을 동반한 두통을 느끼며 비틀거렸고, 덕분에 정신이 흐트러져 마법도 깨져버렸다. "해인님!" 첼릿이 당황하며 부축하는 게 느껴졌다. "으그그... 머리가 아파..." 마치 심한 감기에 걸린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차피 슈리엘들이야 내가 따로 힘을 보내주지 않는다 해도 저그들이 알아서 내 힘을 가져다 쓰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았지만, 마법은 내가 정신을 집중하고 다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통으로 인하여 집중력을 잃자 그와 함께 깨졌던 것이다. 거기다가 두통이 지속되어 나는 다시 마법 주문을 외울 수도 없었다. "괜찮은가?" 리건도 놀랐는지 다가와 물었지만, 나는 손을 저어 보였다.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머리를 저으려고 했지만, 그랬더니 세상이 흔들리는 것 같아 재빨리 손을 흔드는 것으로 대체했던 것이다. "커억..." "크윽..." 그렇게 해독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 고통으로 인하여 마법을 못 쓰고 어물거리는 사이 우리나라 진영에서도 쓰러지는 사람이 발생했다. "지급된 해독제를 먹어라, 빨리! 가지고 있는 건 다 털어먹고, 못 먹고 있는 자들에게도 먹여!" 마법사들이 있기는 했지만, 작은 중독 증상까지 일일이 해독 마법을 걸게 할 수는 없는 일인데다 혹시 마법사들이 마법을 걸어주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정글에 들어오기 전에 해독약을 준비해오기는 했었다. 그러나, 자잘한 독은 몰라도 조금 위험하거나 특이한 독에는 해독을 못하고 단지 독의 진행 속도를 늦춰주는 작용만 할뿐이었다. 거기다가 지금의 독은 새클턴 국에서 우리가 이런 해독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준비한 것일테니 큰 효과를 볼 수 있으리란 기대는 할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사람들은 서둘러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었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어찌할바를 모르는 내 입에도 누군가가 강제로 고약한 맛의 알약들을 밀어 넣어주었다. '우에... 맛없어.' 생각 같아서는 그대로 뱉어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빨리 죽으려고 몸부림 치는 것이었으니 나는 눈물을 삼키며 약을 그대로 넘겨야 했다. 그러자 약의 효과인지 아니면 마법을 쓰지 않아서 인지 사방으로 날뛰는 것 같은 머리가 약간이나마 가라앉은 것 같아 나는 겨우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볼 수 있었다. 지금 보니 마법을 쓰려 했던 마법사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실력에 따라 독의 효력이 나타나는게 늦어지는 듯 했다. 우리 나라 진영에서도 쓰러진 사람들은 가장 실력이 낮은 축에 속한 자들이었으니 말이다. 예전 한국에서 읽은 무협지에서 내공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중독되는 속도가 느려지거나, 독의 발작을 막는게 가능하다더니만 그게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해독하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독의 효력이 나타날테니 빨리 마법을 사용하게 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머리 아픈걸 버티면서 한번 해봐? 내가 눈 한번 질끈 감고 두 마법사에게 마법을 써주는 데 성공 한다면 저 둘이 나서서 나머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 거야.'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남작을 바라보는데, 때마침 그때 남작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를 악물며 나를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끄어어억..." 아까는 그래도 주문이나마 다 외울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주문을 채 반도 못 외우고 남작이 두통으로 인하여 뒤로 넘어갔다. 그 또한 두통을 참으려고 이를 악문 모양인데, 얼마나 통증이 심했는지 뒤로 넘어간 남작은 그대로 기절해버렸고, 팔 다리만 통증의 휴유증인지 간헐적으로 부들 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마 통증을 참다참다 한계까지 다다라 뒤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통증을 참고 마법을 실현해보자는 생각이 싸악 사라졌다. 나 보다도 마법 인생이 길고 정신력이 강한 남작이 저 정도인데, 그보다 정신력이 약한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거 뿐이 아니었다. "큰일입니다, 후작님. 새클턴국 녀석들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한 기사의 보고에 잽싸게 시선을 돌려보니 새클턴국 사람들이 마르타국과 녹스국을 공격 하는게 보였다. 마르타국에는 집중적으로, 녹스국에는 몇몇만이... 공격 당하는 쪽에서도 재빨리 맞대응을 하려고 하는 모양이었지만, 독 때문인지 움직임이 무척 둔화되어 있었다. 헌데, 우리 나라 일행 주위에 방어막이 형성되어 있다는 걸 안 마르타국과 녹스국의 몇몇 사람들이 우리쪽을 향해서 도망쳐오기 시작하자 나중에는 우르르 모두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어, 어떻게 하죠, 후작님?" 누군가의 당혹스러운 질문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리건을 향해 쏠렸다. ===================================================== 으아아~~ 너무 덥습니다. 이거 컴터 앞에 앉아있는게 너무 싫어지는 군요. ㅡ.ㅡ;; ====================================================== 제 41화 새클턴국의 음모 (4) "어, 어떻게 하죠, 후작님?" 누군가의 당혹스러움이 가득 든 질문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리건을 향해 쏠렸다. 그러나리건은 그 질문을 들은 듯 만듯 무시해버리고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해인, 정령을 다룰때는 두통이 없나보지?" "예? 아, 뭐... 그런 거 같은데요..." 내가 불러냈을때는 통증이 없었지만, 다른 정령사들또한 나와 마찬가지인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물 거릴 수 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다른 정령사들과 나와의 차이점때문에 내가 독의 통증을 안 느끼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리건은 나만 괜찮으면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건지 나의 미묘한 어조 속에 들은 속 뜻은 무시해버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모두들 잘 들어라. 마법사들의 마법이 봉쇄된 이상 우리는 새클턴국 사람들을 공격하여 기필코 해독약을 뺏어야 한다. 이 자리를 이대로 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임시방편일 뿐 우리 몸 속에 있는 독을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모두 죽게될 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해독약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라도 구하는 즉시 마법사에게 복용시킨다. 그러면 마법사가 우리에게 해독 마법을 걸어줄 수 있을테니까, 알겠나?" 낮지만 강한 리건의 말에 모든 이들이 우렁찬 대답 대신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쭈욱 둘러본 리건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모두들 조금만 참고 힘내라.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이 난관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아, 혹시 용병들중에 소매치기나 단검술에 능한 사람 있는가?" 리건의 말에 용병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모아졌다. 그는 용병들중에서 그나마 나와 안면이 제일 많은 그레이라는 용병이었다. 날렵하고 빠른 몸놀림을 가지고 있다 싶었더니만, 그러한 편법적인 기술까지 익히고 있었던 모양이다. "실력이 어느정도지?" 용병들의 시선을 쫓아 그레이를 바라본 리건이 묻자 그레이는 정확하게 설명하기가 난감했는지 머리를 한번 긁적 거리다가 슬그머니 몇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오는 거였다. 그러더니 리건 앞에서 멈춰서서는 불쑥 손을 내밀었는데 그 곳에는 그의 것이 아닌 듯한 꽤죄죄한 손수건이 올려져 있었다. 그것을 리건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집어 올리자, 리건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던 한 기사가 놀란 외침을 토해냈다. "어엇, 그거 내 손수건인데... 어, 언제..." 그 기사는 그레이가 방금 헤치고 나온 길에 서 있던 사람 중 한명이었던 것이다. 그 기사의 당혹스러워 하는 반응을 보던 그레이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이 정도죠... 라고 말하고 싶지만..." 거기서 잠시 리건을 바라본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맺었다. "독 때문인지몰라도 평소의 실력이 안 나와주는군요. 지금 제 능력으로는 이정도뿐입니다." 그레이가 말을 끝내자 마치 그것이 신호인 양 두 명이 또 쓰러졌다. 그 모습을 힐끔 바라본 리건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으니 불만은 듣지 않겠다. 입다물고 내가 시키는대로만 해라. 우선 나와 차트워트경, 트래비스, 스페이스경, 몬트리올경, 마지막으로 듀비님이 앞장서서 적을 상대한다. 녹스국과 마르타국이 모두 쓰러지기 전에 나서야겠지. 해인, 넌 뒤에서 네 능력이 되는대로 보조해주도록. 그리고, 그레이 네 임무가 가장 막중하다. 너는..." 리건은 아마 그레이에게 해독제 탈취를 맡겼을 거였다. 현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란 그것 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리건은 그레이에게 채 임무를 부여해주기도 전에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처음에 나는 왜 리건이 나를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는지 의아해 했지만, 바로 그 다음 순간 난 리건과 마찬가지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으에에에~~" 멋들어진 비명까지 질러 버렸다. "해인님!!" 듀비와 첼릿이 한 목소리로 날 부르며 달려오는 모습과 빙긋 웃으며 내 뒤를 따라 날아오는 실피드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그대로 호수에 빠졌다. 풍덩~ 누군가가 강하게 날 쳐서 날려버린거라면 즉각 알 수 있었을텐데, 실피드는 단지 부드럽게 날 잡아 이동시킨 것이라 순간적으로 내가 허공에 날아가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가, 갑자기 이게 무슨...] 물 속으로 떨어진 나는 같이 물 속으로 들어온 실피드를 향해 항의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내 말을 중간에서 싹둑 자르며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시끄러워. 잔소리 말고 가서 한 숨 자기나 해. 멍청하게 인간놈의 독에 당하기나 하고 말이야.] 말은 그렇게 퉁명스레 했지만, 날 잡아 호수 바닥으로 이끄는 손길은 거칠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부드러운 손길을 제대로 느끼지도 않고 얼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독에 중독이 됐는데 왜 자요? 가만히 있다가는 독의 효과가 나타나서 죽을거라고요. 그렇지 않아도 리건이 해독제를 탈취하려고 했는데 왜 방해를...] 나의 항의에 아버지가 인상을 쓰며 뭐라 한 마디 하려고 입을 움찔 거리는 그 순간, 풍덩~ 하는 소리와 함게 두 인영이 호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첼릿과 듀비였다. 아마 내가 걱정이 되어 구하려고 뛰어든 모양이었다. 그들의 모습에 기겁한 내가 아버지의 손길을 뿌리치고는 얼른 엔다이론을 불러 그들을 보호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엔다이론이 나타나 그들에게 달려가기도 전에 듀비와 첼릿 주변에 희미한 기운이 어리더니 그들을 둘러싼 막이 생겨나 그 안에 물이 빠지고 공기가 주입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 뾰루퉁한 표정의 일리언이 나타났다. [걱정 마. 이쪽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그러나 나는 그런 그녀의 말에 고마움을 표할 수가 없었다. 새클턴 국 사람들이 독을 공기중에 유출시켰을때도 방관하던 일리언이 갑자기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자 어찌된건지 몰라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날 더욱 당혹스럽게 만든 건 요란한 물소리를 내며 호수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었다. 처음에 램버트를 비롯하여 리건, 차트워드경이 뛰어들었을때에는 내가 걱정이 되어 그런가보다.. 라고 여겼는데, 그 뒤에 용병들과 국방부측, 심지어 마법사인 남작과 그의 제자, 저 멀리 피해있었던 마법사 길드 소속 마법사들까지 뛰어들어오자 단순히 나에 대한 걱정으로 이러는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속속 뛰어드는 사람들을 보고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그때 일리언은 한숨을 내쉬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사람들이 뛰어드는 족족 모두 듀비와 첼릿이 있는 공간으로 데려다 놓는 거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에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라 나는 일리언이 쳐놓은 보호막 속으로 들어가 리건을 찾아 물었다. 그랬더니 여유로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리건이 뻔뻔스럽게 씨익 웃으면서 속삭이는 거였다. "아니, 실피드가 널 데려가는 걸 보고 쫓아가면 엘라임이 보호해주겠거니... 싶었지. 그랬더니 역시나, 들어오니 일레인이 도와주네?" "안도와 줬으면 어쩔뻔 했어요?" "훗훗, 설마 네가 동료들이 물에 빠지는 걸 가만 두겠어? 아마 엘라임이 네 등쌀에 밀려서라도 도와줬겠지." "그럼 해독제는요?" "그것도 정령왕들이 해결해줄 거 같아서. 아마 엘라임이 그것때문에 널 데려왔을걸? 넌 해독 마법을 익히고 있으니, 너만 해독될 수 있다면 다른 이들까지 해독되는건 시간 문제지." "허.허.허..." 얄미움이 팍팍 느껴지는 리건의 대답에 나는 기가막혀 그를 노려봤다. 자신은 유희중이네 어쩌네 하면서 능력이 있었으면서도 잠자코 있었던 주제에 뻔뻔스레 아버지는 이용하려 하다니 말이다. 그런 그에게 뭐라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나는 곧 달려온 아버지에게 끌려서 다시 호수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모습에 첼릿과 듀비가 나에게 달려오려 했지만, 그들은 리건의 제지에 그대로 그 보호막 속에 남아 있어야 했다. [뭐 하는 거야? 너 그렇게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 없다. 여기는 저 호수의 정령이 알아서 해결해 줄테니 넌 빨리 일로 와.] [에? 아, 혹시... 아버지가 일리언보고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아버지의 말에 혹시나 싶어 물어보자 아버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부타악? 내가 왜 호수의 정령따위에게 부탁을 한단 말이냐? 그냥 시켰다.] [아하하하... 뭐, 어쨌든요. 아버지가 준비해두신 거군요?] 내가 감동했다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자 아버지의 인상이 더욱 더 찡그려졌다. [그거야, 네 녀석이 이렇게 준비 안 해놓으면 동료를 냅둘수 없네 어쩌네 하면서 방방 뛸거 아니냐?] [오옷, 아버지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전 왜 데리고 나온건데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기에 감동의 눈빛도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이번에는 어느새 왔는지 이프리트 아저씨가 불쑥 끼어들었다. 지금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불의 정령왕이 호수 속에 있다는게 꽤나 어색하게 보일수도 있는 광경이었다. [그거야 사랑하는 자식의 몸에 침투해 있는 괘씸한 독을 빼내기 위해서지.] 하지만 나는 혼란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그런 어색함을 누릴(?)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다. [에? 어떻게요? 아버지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해독제를 가지고 계실 리도... 아, 혹시 해독제를 만들어 내실 수 있는 건가요?] [그런거 아냐. 단지 너니까 어떻게 해줄 수 있는거지.] [엥?] 이해불능의 설명에 되묻자 아버지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됐으니까 입 좀 다물어. 그걸 꼭 다 알아야 해?] 아버지의 핀잔에 부루퉁해진 내가 속으로 꿍시렁대는데 나를 끌고 밑으로 계속 내려가던 아버지가 멈췄다. 그에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거의 밑바닥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이쯤이면 좋겠지. 좋아, 온 몸에서 힘을 빼라. 네 몸 속에 있는 기운을 내가 움직일테니까. 이왕이면 한숨 자도 좋고.] '왜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또 한 소리 들을까봐 나는 잠자코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눈을 감은 채 온 몸에 힘을 빼고는 물결에 내 몸을 맡겼다. 그러자 평소 신경을 쓰지 않으면 잘 느낄 수 없는 내 몸속 기운의 흐름이 강하게 느껴질정도로 빠르게 움직임과 동시에 외부로부터 (아마도 아버지의 기운이겠지만) 커다란 기운이 몸 속으로 강하게 밀고 들어오는 거였다. 그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하는데 곧바로 아버지의 일갈이 들려왔다. [가만히 힘 빼고 있으라니까. 내가 조절하는 거야.] '엑...' 그래서 얼른 힘을 빼고 될 수 있는 한 몸 속을 흐르는 기운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데 이프리트 아저씨의 친절한 설명이 들려왔다. [겁 먹을 거 없다. 네 몸속의 독을 빼내려는 거니까.] '그게 단지 이러는 걸로 될까?' 나는 분명히 내 맘 속으로 중얼거린 거였는데, 이프리트 아저씨는 마치 그걸 들은 듯 대답해 주는 거였다. [이 정도로 독을 빼내는 건 가능하단다. 단지, 다른 생물이 아니라 너니까 가능한 거야. 너는 보통 생물이 하는 배설 작용을 하지 않잖니? 그건 네 정령의 기운이 평소 몸 속에 있는 노폐물들을 네 몸 밖으로 내보내고 있기 때문에 따로 배설 작용이 필요 없었던 거야. 어차피 네 몸 속에 있는 독 또한 네 기운들의 움직임으로 서서히 밖으로 빠져 나가겠지만, 그럴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 네 아버지가 직접 손을 써주는 거니 나중에 고맙다고 하렴. 너희 일행은 지금 시간이 촉박하잖니?] 이 세계로 넘어와서 화장실에 갈 일이 없어진건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내가 세 종족의 혼혈이라서 그런가보다... 라고 생각했지, 그 이면에 그런 이유가 있었는지 몰랐었다. '전적으로 정령의 기운 덕분이라는 거잖아?' [호호, 화장실에 갈 필요가 없다니 편해서 좋겠구나. 이게 다 정령왕을 아버지로 둔 덕분이라는 걸 아니?] 모습이 안 보여 안 왔나 싶었더니만, 역시나 노아스도 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게 좋은건가? 인간들은 배설할때도 쾌감을 느낀다던데?] 실피드의 말에 노아스가 당혹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 그래? 아니, 왜 노폐물을 버리는데 쾌감을 느끼는 거지?] [글쎄, 아마 필요 없는 걸 깨끗하게 없애니까 그런게 아닐까?] [그런가? 에이, 그럼 그런 쾌감쯤이야 없어도 되잖아?] [모르지. 인간들은 쾌락을 즐기니 그 쾌감도 필요해 할지.] [그, 그럴까? 아, 그럼 혹시 해인이도...] 실피드의 말에 노아스가 나를 거론하자 이프리트 아저씨가 나서다. [거 쓸데없는 소리좀 하지 마라. 애를 앞에다 두고 뭔 소리들을 하는 거냐?] 이프리트 아저씨의 핀잔 어린 소리와 실피드, 노아스의 툴툴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툴툴 대기도 하고 쓴 웃음을 짓기도 하던 나는 온 몸을 맛사지 해주는 듯한 아버지의 기운 덕분인지 어느새 스르르 잠에 빠져 들었다. ====================================================== 제 41화 새클턴국의 음모 (5) [그만 자고 이제 일어나.] [우웅....] 부드럽게 어깨를 흔드는 손길이 기분 좋게 느껴져 나는 그 느낌을 좀 더 만끽하고자 눈을 뜨는 대신 항의의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당장 안 일어나?] 기대했던 그 손길 대신 매서운 일갈과 함께 엄청 차가운 기운이 엄습하여 엉덩이가 무거운 잠이라는 녀석을 한 방에 저 멀리 내쫓아 버리는 거였다. [허걱!] 덕분에 정신이 번쩍 깬 내가 눈을 떠보니 한쪽 눈썹을 치겨 올린 채 날 노려보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이 코 앞에 있었다. [안 일어나? 지금 네가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이, 일어 났어요. 일어났어!] 안 일어나면 가만 안 두겠다는 아버지의 협박어린 시선에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려던 나는 그제야 내 몸이 호수 속에 둥둥 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라...] 그리고 그와함께 내가 왜 지금 여기 있는지 기억나기 시작했다. [아아앗, 맞다. 아버지, 내 동료들~!!] 해독약을 먹어서 독의 효력이 나타나는 시간을 늦추기는 했지만, 그 시간이 얼마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상황에서 태평하게 잠들어 있었던 나란 존재에 대해서 기가 막혔다. [가봐.] 당황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쯧 하고 작게 혀를 찬 아버지가 고개를 휙 돌리더니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하지만, 가벼운 아버지의 손짓에 갑자기 강한 물결이 일어나 날 저 멀리로 끌고 가려 하는 거였다. [어어엇, 아버지, 제 몸의 독은요?] 그래 그 물결에 휩쓸려 가지 않기 위하여 정령의 기운을 퍼트려 대항하며 묻는데 아버지의 인상이 찡그려지더니 아버지의 팔이 휘둘러졌다. [바보냐? 그런건 벌써 해결했다.] 아버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까보다 더 강한 물결이 일어 이제는 아예 소용돌이가 생겨 버리면서 날 끌구 가기 시작했다. [그런건 미리 말해주라구요오오~~] [시끄럿!] 아버지의 매서운 한 마디에 찔끔해서 입을 다물긴 했지만, 그냥 있기는 억울해서 나는 속으로 꿍시렁댔다. '너무해, 그건 당연한 요구 아니야? 좀 말해주면 어때서어어~' "우와아아악~!!" 아버지는 내가 혹시 속으로 꿍시렁 댈줄 알고 일부러 손을 써두신 걸까? 나를 끌고 가는 물결의 힘은 너무나 거세서 내가 일리언이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쳐둔 막에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힘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날 막으로 밀어 붙였기에 나는 막 속으로 들어가서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우이... 치사한 아버지..." 바닥에 마치 개구리처럼 사지를 뻗은 채 철푸덕 엎어졌던 나는 곧바로 '해인님, 괜찮으십니까?' 하는 소리가 들려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도 걱정스런 듀비나 첼릿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아니하고 대신 어이없다는 듯한 리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해, 안 일어나?" 그에 고개를 들고 보니 내 앞에 주저앉아 날 빤히 바라보고 있는 리건 외에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어라? 듀비하고 첼릿은?" 리건이 내미는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왠지 내가 아버지와 함께 호수 밑으로 내려갈때보다 사람이 좀 더 많아진 것 같았다. "아아, 자고 있어. 독의 발작을 늦추려면 움직이는 것 보다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모두 재워 놨다." '어쩐지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웅크리고 잠들어 있더라니...' 리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잠들어 있는 사람들 틈에서 듀비와 첼릿을 찾으려고 두리번 거리던 나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리건을 돌아봤다. "아, 리건은 해독 마법 필요 없죠?" "걸어준다면 사양 않겠지만, 안 걸어줘도 상관은 없어." 라면서 씨익 웃어보이는 리건을 향해 나는 살짝 인상을 찡그려 보였다. "리건 지금 되게 얄밉게 느껴지는 거 알아요?" "쿡쿡쿡, 그래? 왜그럴까나... 아, 첼릿과 듀비는 저쪽에 있어. 하지만, 우선은 마법사들 먼저 해독해주길 바래." 나 또한 마법사들에게 먼저 해독 마법을 걸어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단지 듀비와 첼릿이 괜찮은지만 확인하고 싶었던 것 뿐이었기에 순순히 리건이 이끄는 데로 마법사들만 따로 추려놓은(?) 곳으로 따라갔다. "그런데, 귀찮은 문제가 생겨버렸어." "뭔데요?"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을 꺼냈기에 나도 마법을 준비하며 건성으로 물었다. 그러나, 리건에게서 나온 건 절대로 별거 아닌 일이 아니었다. "그게, 그라함 대제의 보석이 여기에 있거든." 잠시 말을 하지 못하고 굳어버린 나에게 리건은 여전히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설명했다. "폰트팩트 백작은 처음부터 이 보석을 혼자 독차지하기란 어렵다는 걸 예상하고 우리 나라랑 손 잡으려고 했었나봐. 아무래도 현재 불안정한 녹스국 보다는 울 나라가 여러모로 힘을 합치는데 더 나을테니 그랬겠지만... 그래서 걸림될이 될 녹스국이나 새클턴국 사람들을 최대한 줄여 놓으려고 했는데, 돌발 상황이 발생한 거야. 설마 새클턴국이 독을 준비했을줄은 몰랐던 거지." "폰트팩트 백작이 그래요? 그런데.. 여기 폰트팩트 백작은 없는데?" "아아, 백작은 이미 죽었어. 보석은 지금 마르타국측 기사가 가지고 있고 말야. 그 기사가 나에게 말해준거야." "저런..." "폰트팩트 백작은 새클턴국이 독을 사용했다는 걸 안 순간 그 기사보고 무조건 우리쪽으로 가서 붙으라고 했다더군. 마법사라서 그런지 꽤나 머리가 좋은 놈이야. 백작은 보석을 가지고 있었던 덕분에 독에 중독되지 않았었던가봐. 그건 또 새클턴국측이 예상 못했겠지만... 하여간 그래서 백작이 새클턴국 사람들을 대부분 잡아두고 있었던 덕분에 몰래 보석을 넘겨받은 기사와 정예들은 무사히 살아서 우리 나라 사람들을 따라 호수 속으로 풍덩 뛰어들수 있었다는 거지. 대신 백작은 희생되었고 말야." "그래서, 마르타국의 제의를 받아들일 거예요?" "글쎄... 나는 별로 세계 정복에 대한 흥미는 없지만 위쪽에다 이야기는 해봐야겠지. 어차피 마르타국도 보석을 얻었다고 해도 혼자의 힘으로 세계 정복을 꿈꾸기는 어려워. 우리 나라가 돕지 않는 이상은 말이야. 하지만, 그것도 다 여기서 무사히 탈출해서 나라에 도착한 다음의 이야기지." 거기서 잠시 말을 끊은 리건은 윗쪽을 힐끔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새클턴국측이 아무래도 보석이 여기로 넘어왔다는 걸 눈치 챈거 같아. 너 없을때 이미 몇번이나 호수 속으로 쳐들어오려고 했었거든. 일리언이 막아서 이제는 호수 속으로 뛰어 들지는 않지만, 아마 밖에서 진치고 있겠지. 보석을 받기 위해서라도 저들은 절대 물러나지 않을거야." "하아... 난리 났군요." "뭐, 그것도 나중 일이야. 우선 이들부터 살려 줘야지.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라고." 마법을 펼쳐 독을 중화 시키는 일은 생각보다 무척 힘들었다. 아무리 해독 마법이라고 해도 모든 독을 순식간에 샤샤삭 중화시키는 건 아니었다. 지우개로 낙서를 지울때 흐리거나 작은 크기의 낙서는 쉽게 해결하지만, 진하거나 커다란 낙서를 지우려면 지우개도 많이 필요하거니와 힘도 많이 드는 것 처럼, 같은 마법을 사용하더라도 독의 종류와 그 독성에 따라 요구되는 마나와 정신력은 천차만별이었다. 이번 독은 새클턴국에서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것이니 만큼 독도 독이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정령의 기운만 믿고 십여명이나 되는 마법사들에게 한꺼번에 마법을 걸어준게 문제였다. 덕분에, 겨우 겨우 해독을 하기는 했지만 딱 한번 마법을 걸어준 걸로 나는 지쳐서 헥헥 대야했다. "아니, 지금 당장 이들이 죽는 것도 아니고 적이 쳐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왜 무리를 한 거야? 조금씩 나눠서 해주지..." "이렇게... 헉헉, 힘들 줄은... 헥헥, 몰라서... 에구구... 그냥... 한번에 해치우려고 했다가..." "쯧쯧, 엘라임이 봤다면 또 한 소리 했겠다. 그래도 마법사들은 다 해독 되었으니 좀 쉬도록 해. 네가 그렇게 걱정하던 네 일행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줄테니까." 그렇게 말한 리건은 지쳐서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 있던 나를 가볍게 번쩍 안아 들어올렸다. "에엑?" 그리고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해하는 나는 아랑곳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거였다. 처음에는 놀라서 바둥대려던 나도 곧 힘들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싫은 내 몸을 깨닫고는 얌전히 그의 가슴에 안겼다. 하지만, 리건이 내 몸무게를 무겁게 느끼지는 않을지 되게 신경이 쓰여서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다고 물어보기는 또 창피하고 그래서 말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는데 리건이 불쑥 입을 여는 거였다. "너 정도는 거뜬하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마." "헉... 어, 어떻게..." 마치 내 속을 들여다 본것만 같은 리건의 말에 내가 화들짝 놀라자 리건이 잘난 척 하는 표정으로 씨익 웃는 거였다. "내 나이가 몇인데, 그 동안 여자들이랑 데이트 한번 못해봤겠냐? 남자 녀석들은 자기들이 무거울거라는 거에 별로 상관 안 하는데, 여자들은 이상하게도 무거울까봐 걱정하더군. 너도 지금 그래서 속으로 낑낑댄거 아냐? 걱정 마, 네가 아무리 무겁다한들 설마 내 본체보다 더 무거울까." 리건의 말에 다행이라고 안도해야 하는지, 아니면 카사노바 같다고 핀잔을 줘야하는지 몰라 당황하던 나는 결국 다른쪽으로 관심을 돌리기로 했다. "본체의 몸무게가 어떻게 되는데요?" "글쎄... 정확하게 안 재봐서 모르겠는데... 한... 몇십 톤정도 되지 않을까나?" '며, 몇십톤...' 감히 그 엄청난 무게가 상상이 안돼 패닉 상태에 빠져 허우적 대는 사이 리건이 걸음을 멈췄다. "자, 여기서 쉬고 있어." "아, 감사..." 리건이 날 조심스레 내려놓은 곳은 듀비와 첼릿, 그리고 램버트가 누워 있는 곳 바로 옆이었다. 안색이 좀 안좋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주 나빠보이지 않는 걸 보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어째 그들 표정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물론, 독 때문에 편안히 잠든 건 아닐테지만 이건 뭐랄까... 불만이 가득 찬 표정이랄까? "거참... 잠들어 있는 표정이 좀..." "쿡쿡, 당연한 거야. 좋아서 잠에 든게 아니라 내가 쳐서 기절시킨 거거든. 당연히 불만에 가득차 있겠지." "아.하.하.하..." ====================================================== 제 41화 새클턴국의 음모 (6) 번쩍, 깜빡, 깜빡... 갑자기 눈을 뜬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어라, 내가 왜 이러고 있지? 그러니까 아까 마법사들에게 해독 마법을 걸어준 걸로 지쳐가지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어 하던 나를 리건이 첼릿과 듀비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줬었다. 그러고나서 리건이 뒷처리를 한다고 이리저리 움직이던 걸 멍하니 보고 있었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깜깜이었다. '그리고 깨보니 이렇게... 아, 나도 모르게 또 잠들었던 모양이네...' 오늘따라 많이도 잔다고 생각하면서 리건이 잠들어 있는 걸 눕혀 놓았나보다... 하는데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일어 나셨습니까?" "응?" 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기 위하여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히자 듀비의 얼굴이 보였다. "아, 듀비... 에에에 듀비?" 나는 반사적으로 웃으며 인사하려다가 아까 리건에 의해 잠든(?) 듀비가 멀쩡하게 깨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서 벌떡 일어나다가 한번 더 놀랐다. 내가 듀비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해인님?" 놀라서 경직된 날 향해 듀비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는 내가 왜 경직된건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런 듀비에게, 거기다가 나를 위하여 다리 베개까지 해준 그에게 차마 그것때문에 경직 되었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던 나는 굳어서 잘 돌아가지 않으려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리고 굴려서 다른 질문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아니, 에또 그러니까.. 듀비, 괜찮은 건가요? 이렇게 일어나 있어도 돼요? 독은요?" 질문 하나가 떠오르자 그에 관련된 질문이 주르르 내 입에서 흘러 나왔다. 사실, 듀비의 다리를 베고 있었다는 걸 깨닫기 전에는 듀비가 멀쩡하게 일어나 있다는 것에 놀랐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그런데 내가 너무 다급하게 물어봤던 것일까? 둥그래진 눈으로 나를 보던 듀비가 갑자기 고개를 약간 돌리더니 풋 하고 웃는 거였다. 그의 그런 반응에 나는 내가 왠지 창피한 짓을 한것만 같이 느껴져 얼굴이 화끈 거렸다. 생각해보면 별 이상한 행동을 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왜, 왜 웃는 거예요?" "후훗,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 더 신경쓰이잖아?' 라고 속으로는 생각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을 자각은 남아 있었다. 그래 나는 인상을 찡그려 그에게 불만을 표시하면서도 더 이상 그것에 대해 묻지않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듀비, 몸은 괜찮은 거냐니까요?" "아, 예. 해인님이 잠들어 계시는 동안 마법사들이 해독 마법을 걸어주었습니다." 그러자 듀비도 웃음기가 얼굴에 약간 남아 있었긴 하지만 순순히 대답해줬다. "내가 잠 들어 있는 동안? 아, 이런... 그럼 나도 얼른 다른 마법사들을 도와야..."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잠깐 쉬다가 체력이 회복 되면 정신을 차린 마법사들을 도와서 다른 이들에게 해독 마법을 걸 작정이었다. 거기다가 첼릿을 비롯하 내 일행에게는 내가 직접 해독 마법을 걸어주고 싶었는데, 잠깐 쉰다는게 잠까지 들어버려 그 동안 벌써 다른 마법사들의 손길이 미친 모양이었다. 그래 일행을 돕지 못한 건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라도 마법을 걸 요량으로 서둘러 몸을 일으키던 나는 다음에 이어진 듀비의 말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러실 필요 없을 겁니다. 마법사들이 벌써 모든 일행들에게 마법을 걸어 줬거든요." "예?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다요?" "예." "저 많은 사람들을 언제 다..." 마법사들이 여러명이라고는 해도 20여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회복 마법을 걸어주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터다. 더구나, 마법사들의 마나나 체력이 샘에서 물이 솟듯 계속 펑펑 나오는 것도 아닌 이상 중간 중간에 짧지 않은 휴식 시간이 필요한건 당연지사. "일이 끝난 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모두 지쳐서 쉬고 있지요." 듀비가 가르키는 쪽을 바라보니 어째 내가 마법을 걸어주기 전 보다 더 안색이 안 좋은 마법사들이 벋어 있었다. 그런 마법사들에게 왠지 모를 미안함을 느끼며 나는 입을 열었다. "세상에나... 그럼 도대체 난 몇시간을 잔 건가요?" "글쎄요, 그건 저도 정확하게는..." 하긴, 듀비는 내가 잠들 무렵에는 아직 해독 마법을 받지 않아 그도 잠들어 있었으니 잘 모르는 건 당연할 터였다. 대신 다른 존재가 내 질문에 대답해줬다. [대략 다섯 시간 정도 잤어.] "어?" 갑자기 나타난 일리언은 스산한 표정으로 냉랭하게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 그대로 한밤중의 공동묘지에 가져다 둔다면 아마 열 사람 중 절반 이상은 공포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오죽했으면 듀비가 긴장한 모습으로 일어나 내 앞을 가로막았을까? 일리언은 자신의 시야를 막은 듀비를 보고 한쪽 눈꼬리를 꿈틀 하더니 바람에 먼지 날리듯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는 듀비가 놀라서 두리번 거리는 사이 엉거주춤 앉아 있는 내 바로 옆에 쪼그려 앉은 자세로 나타나서는 원망에 찬 표정으로 날 흘겨봤다. "왜, 왜요?" 그녀의 그런 모습에 움찔한 내가 말을 더듬으면서 묻자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봐, 너희들 언제 여길 떠날 거야?] "그, 글쎄요...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 곳의 주인에게 도움을 받는 처지에 그런 소리를 들을때까지 머물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말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러니 일리언에게도 저자세로 있을 수 밖에... 일리언은 그런 나를 힐끔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어다. [내가 왜 정령왕께 협박까지 받아가면서 널 도와야 하는 걸까? 보아하니 어떤 정령왕과도 계약을 맺은 건 아닌데, 왜 사대 정령왕이 널 그렇게 끔찍하게 아끼는 거지?" "아하하하... 이런 저런 사연이 있어서요..." 일리언은 아직 내가 엘라임의 자식이란 사실을 모른다. 아버지가 그녀의 앞에 나타나 날 감싸기까지 했는데, 어쩌다보니 그 동안 그녀에게 아무도 설명을 안 해줬던 것이다. '혹시 그걸 말하면 맥키도 일리언과 자신의 아이를 만들려고 하지 않을까? 그럼 나와 비슷한 존재가 또 생길 수도... 아, 하지만 맥키는 이제 육신이 없으니 불가능 할라나?' 어쩌면 다른 방법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마법사들이란 불가능에 끊임 없이 도전하는 존재들이니까. 그래 나는 일리언에게 나의 정체를 설명해주려 했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은 그 다음에 나온 일리언의 말에 봄에 눈 녹듯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 없으니까 될 수 있는한 빨리 나가줬으면 좋겠어. 이건 정말 민폐라고. 정령왕들의 협박만 아니었다면 벌써 너희들을 저 밖에 있는 녀석들에게 넘겨 줬을 거야. 그래서 저들이 얌전하게 물러간다면 말이지.] '윽.'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듯 일리언의 눈빛은 냉정했다. "알았어요. 그럼 최대한 빨리 이 상황을 해결할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리건에게 가서 일리언의 심정을 전하려고 몸을 일으키는 나에게 일리언은 한 마디 더 던졌다.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밖에 있는 인간들과 싸울때 내 도움을 바라지 말았으면 좋겠어. 내가 정령왕들에게 받은 협박은 어디까지나 너희들이 호수 속에 있을때 공격이 있으면 보호하라는 것이었지, 호수 밖에서의 일에는 아무 언급 안 했으니 말야. 거기다가 너희들을 도울 의리도 없고...] 정말 뜨거운 물 조차도 한순간에 얼릴 만한 냉정함이었지만, 일리언의 말은 사실이었기에 - 마법석이 박힌 팬던트 건은 우리가 여기에 침입한 걸 눈감아 주는 것으로 셈을 끝냈으니...- 나는 아무런 반박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일리언의 분위기상 반박했다가는 정령왕의 협박이고 뭐고 - 아마 명령이겠지만서도...- 다 뒤집어 엎을 것만 같아 더더욱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에게 져서 이제 정령왕들의 명령은 꼬박꼬박 들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불만인 건지, 아니면 정령왕들의 협박을 행하느라 오랜 시간만에 재회한 맥키와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 열받은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흠, 어쩌면 일리언이 정령왕의 협박을 수행하는 사이 맥키와 테렐이 둘이서 지내서 심술이 나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우리도 여기 계속 있을 수는 없는 일이고 일리언도 저러니 최대한 빨리 여길 빠져 나갈 방법을 찾아야겠다 싶어 내가 일어나 리건을 찾는 사이 일리언도 일어나 나에게 불만 어린 표정을 다시 한번 지어 보이고는 사라졌다. 리건은 한쪽 구석에서 몇 사람들과 둘러 앉아 수근 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에는 놀랍게도 첼릿과 램버트가 끼어 있었다. '어쩐지, 나와 듀비 곁에 없다 했더니 이런데 있었구만.'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의논을 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지루하다는 듯 고개를 들고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던 램버트가 날 발견하고는 반색하며 손을 들어다. "여어, 일어났구만. 그래 이제 몸은 좀 괜찮은 건가?" 그의 말에 열심히 논의하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행동을 멈추고는 날 돌아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인님, 이제 일어나셨습니까?" 그리고는 제일 먼저 첼릿이 빠르게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걱정을 많이 끼쳐 미안해요. 그런데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나요?" 대충 내용은 짐작했지만, 예의 상 묻는 말에 리건이 대답했다. "여길 최대한 빨리 빠져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너는 그 동안 잠들어 있어서 몰랐겠지만, 이 호수의 주인이 30분마다 한번씩 찾아와서 살기를 풀풀 날리며 빨리 나가라고 압력을 향사하고 있었거든. 아마 곧 있으면 또 나타날 거다." "아하하하... 아마 안 나타날 거 같았는데요? 방금 나에게 나타났다 사라졌거든요." "하아, 그랬냐? 어쨌든, 너도 깨어났고 곧 있으면 마법사들도 체력을 조금이라도 회복할테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니까 이제 저 비열한 새클턴국 놈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가 여기에 계속 이러고 있는 이상 저들은 물러나지 않을테니 정면 돌파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리건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젊은 청년이 끼어들었다. 녹스국측 기사로 예전에 정글로 오는 배 위에서 암 것도 모르고 강에 뛰어들었다가 몬스터들에게 잡아 먹힐 뻔 했던 바로 그 기사였다. '이름이 커티스 홀리스터였던가?' 보통 사람 이름, 특히나 나와 별 관계가 없는 사람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때 사건이 너무 쇼크라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 젋은 기사의 말이 끝나자 몬트리올경이 그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그렇습니다, 후작님. 이제 엠브로스 백작님도 계시고, 이 호수의 주인의 협력을 받는다면 저깟 놈들은 손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 이들은 일리언이 우리를 계속 보호해주고 있으니까 공격할때도 협력해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건 곤란할걸요?" 그래 그들의 오해를 풀어줘야겠다 싶어서 입을 열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나를 향해 쏟아졌다.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백작님?" 몬트리올경이 자신의 말이 반박당해서인지 심히 기분 나쁘다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며 물었지만, 나는 착한 사람이었기에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방금 전 나에게 나타났던 이 호수의 주인이 우리가 싸울때 절대로 끼어들지 않겠다고 선언했거든요. 공격한다해도 돕지 않을겁니다" ====================================================== 제 41화 새클턴국의 음모 (7) "방금 전 나에게 나타났던 이 호수의 주인이 우리가 싸울때 절대로 끼어들지 않겠다고 선언 했거든요. 공격한다해도 돕지 않을겁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웅성웅성 거렸다. 아무래도 일리언의 힘을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사실입니까? 설마, 지금까지 우리를 도와줬는데 이제와서..." 녹스국 출신의 젊은 기사 홀리스터경 - 그가 의논 장소에 온걸 보니 녹스국 리더들은 모두 명을 달리한 모양이다. - 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일리언이 찬 바람을 휘날리며 나타났다. [웃기지 마. 누가 도와주고 싶어서 도와준 줄 알아?] 그녀는 거기서 잠시 말을 끊더니 경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을 쓰윽 둘러본 후 냉정하게 말을 내뱄었다. [이제라도 빨.리. 나가줬으면 좋겠어.] 마치 전세집 주인이 쳐들어 와서 '방 빼!' 라고 하는 소리를 들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에 타격을 받은 일행들이 굳어있는 사이 리건이 나섰다. "아아, 우리도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논의를 하는 중이죠." [흥, 언제까지 논의만 할 거지? 나도 할 만큼 했으니까 이제 하루를 더 주겠어. 내일 해가 지기 전까지 나가지 않으면 협박이고 뭐고 네 놈들을 다 호수 밖으로 던져 버릴테니 알아서 해!] 그러한 악덕 집주인 같은 최후 통첩을 남기고 일리언이 사라지자 일행들은 당장 쫓겨나게 생긴 세입자들의 표정이 되어 서로의 얼굴만 돌아보았다. '쩝, 여기는 세입자 보호법도 없는건가?' "예?" 그러한 모습들이 한국의 7, 80 년대 드라마에서 자주 애용되던 소재의 모습과 너무 비슷해 장난스레 속으로 중얼거린 건데 나도모르게 소리내서 중얼거린 모양이었다. 내 말을 알아 듣지 못한 - 당연히 못 알아 듣겠지만... - 첼릿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나는 얼른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아하하하...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혼잣말..." 그런데 그때였다. 누구하나 나서서 의견을 내놓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그 상황을 과감하게 깨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이젠 정면 돌파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군요." 꽤 침착한 목소리로 주변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마르타국 기사였다. "저 자가 내가 말한 사람이야. 미노트 남작이라고 하지." 내가 그 사람에게 시선을 주자 리건이 작은 목소리로 가르쳐 줬다. 리건이 말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죽은 폰트팩트 백작에게서 그라함 대제의 보석을 넘겨 받아 마르타국 정예들 (그래봤자 10명도 안됀다.) 을 이끌고 온 기사를 말하는 것이다. 과연, 폰트팩트 백작에게 뒷 일을 부탁 받을 정도의 사람이라 그런지 눈빛이 예리하고 날카로워 보였다. "만만치 않은 사람입니다. 능력도 꽤 있는 것 같구요." 내가 남작을 살펴보고 있자 첼릿도 작게 속삭여줬다. 언제 저 사람과 교류가 있었는지 물으려고 했지만, 곧 쓸데 없는 질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첼릿은 내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여기서 저 미노트 남작과 함께 회의에 참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저들과 정면으로 부딪히리면 우선 저들이 가지고 있는 독을 무용지물로 만들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가 없습니다." 냉정한 트레비스의 말에 주위 사람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긴, 그렇군요. 그 독 때문에 우리가 여기로 쫓겨온 고니...그럼 그 독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게..." 녹스국의 홀리스터경이 혼잣말 하듯 중얼중얼 거리더니 갑자기 뭔가 생각 났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해독 마법을 받게 된 겁니까? 마법사들도 모두 중독 되어서 마법을 쓸 수 없었던 거 아닙니까?" "그랬지. 오, 혹시 그 방법이 독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일 수도 있겠군?" 홀리스터경의 말을 누가 이어받자 그 뒤를 또 다른 누군가가 이었다. "그러면 아무래도 마법사들이..." "그러니까 정면 돌파를..."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 하지..." 나와 일리언의 등장으로 잠시 중단 되었던 회의는 하나 둘 의견이 나오기 시작하자 금방 여기 저기에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와 다시금 열기가 뜨겁게 달아 올랐다. 하지만, 그렇게 열띤 목소리들이 오고갔지만 결론은 나지 못했다. 정면 대결을 펼치자는 측과 새클턴 측을 피해 여길 빠져 나가서 후일을 도모하자는 측이 팽팽하게 대립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두 측이 일치하여 해결을 봐야 한다고 했던 건 우선 일차적으로 우리를 이렇게 까지 내몬 '독' 과 '안내인' 문제였다. 안내인들은 던전 탐험에는 도움이 될 거 같지 않아 호수를 감싸고 있는 결계 밖에서 몇몇 일행들과 남아 있는데, 어차피 그들은 새클턴국 사람들인데다가 거기서도 특별히 선발된 사람들이니 우리편으로 붙을 거 같지 않았다. 아마 모종의 조취라도 취해 놨을 터였다. 게다가 여기서 정면 돌파를 하던 도망치든, 이 상황을 벗어나 여차저차해서 정글을 벗어나봤자 새클턴 국 내라는 것도 문제였다. 정글에 들어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준비했던 마을에는 새클턴국에서 파견한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정글 안에 같이 들어온 새클턴국측 사람들이 독까지 준비해온걸 보면,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또한 우리를 몰살 시키려고 준비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우리는 최대한 전력을 아껴야 합니다. 지금 현재 우리측과 새클턴국측의 전력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럴때 정면 충돌을 하면 저들에게 어떻게 이긴다 하더라도 우리쪽 또한 무시 못할 큰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이 정글을 어떻게 해치고 나갈 수 있겠습니까?"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가 여기서 몰래 도망간다고 하면, 저들이 '그래 가라' 하고 놔줄 것 같습니까? 만약 우리가 여길 빠져나가 본국으로 돌아간다면 이 정글에서 새클턴국측이 우리 모두를 공격했다는 게 알려질게 뻔한데 말이죠." "맞습니다. 새클턴국 측이 우리를 공격했을 때부터 우리 모두를 전멸 시킬 생각으로 그랬던 겁니다. 그런 그들을 뒤에 두고 도망치다뇨? 설마 저 정글 속에서 살벌한 추격전이라도 벌이고 싶습니까? 그러느니 차라리 여기서 저들과의 일을 확실하게 해결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저 새클턴국 측 사람들과 해결을 봐봤자, 정글을 나가는 그 순간 어차피 또 새클턴국 사람들에게 둘러 쌓일텐데 뭐하러 전력을 낭비합니까? 어차피 여기만 벗어나서 정글로 들어간다면 저들도 쉽사리 추격을 하지 못할 겁니다." "어허, 모르시는 소리. 여기까지 우릴 안내한 사람들이 모두 새클턴 사람들이란 걸 잊으셨습니까? 만약 새클턴국 측 추격을 피하려면 우리는 여기로 온 길이 아닌 다른 길을 뚫어야 합니다. 그게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양 측은 정말 팽배하게 맞섰다. 정면 돌파하자는 측은 마르타국측과 울 나라의 국방부 측이었고, 여길 그냥 피하자는 측은 녹스국과 용병들 측이었다. 용병들은 우리 나라를 호위하고 있는 트래비스 용병단을 제외하고 다른 나라 - 새클턴국도 제외이겠지만... - 를 호위하고 있던 용병단은 거의 전멸이었다. 콘스틴스 백작이 온 몸을 희생하여 최대한 시간을 끌어줬다 하지만, 그건 기실 후일을 도모할 자신의 나라 정예들을 위한 거였지 용병을 위한 건 아니었고, 녹스국은 그런 살신성인의 영웅 조차 없어서 자신들의 정예들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녹스국과 마르타국을 호위했던 용병들을 모조리 합하여 생존자는 단 다섯명 뿐이었기에 그들을 모두 임시로 트래비스 용병단에서 흡수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거의 전력을 보존한 나라의 리더에 엄청난 카리스마를 가진 리건이 나서서 한쪽 편을 들어준다면 그 쪽으로 결정될 건 확실한데, 이상하게도 리건은 가만히 격렬한 논쟁만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엠브로스 백작님, 백작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열렬한 논증이 도통 끝날 것 같지 않으니까 몬트리올경이 나를 끌어들였다. "예? 아, 전..." 개인적으로는 정면 돌파 보다는 여길 피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하지만, 정면 돌파측의 말대로 새클턴측의 추적은 계속 될 거고, 그렇게 되면 정글을 나간다 해도 문제였다. '차라리 정글을 통해 국경을 넘으면 모를까.' 그러나 그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정글에는 아직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도 많을 뿐만이 아니라, 길도 모르니 가로지른다고 했다가 정글 안을 뺑글뺑글 돌지도 모를 일이었다. '차라리 해안으로 나가서 바다로 가는 것이 났지 않을까?' 배가 없어도 상관 없었다. 정글이 바로 옆에 있으니 통나무를 만들 재로는 얼마든지 있었고, 그렇게 바다 위에 띄울 무언가만 있다면 내 능력으로 이끌고 가면 될테니 말이다. 거기다 길을 잃어버릴 염려도 없었다. "저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내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그 동안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리건이 내 말을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회의만 하다가 식사도 잊어버린 것 같군.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체력은 유지시켜야 하는 거 아니오? 회의는 잠시 중단하고 식사나 합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마법사들과 함께 다시 의논을 하도록 하죠." 거기서 잠시 말을 끊은 리건은 갑작스러운 회의 중단 선언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쓰윽 둘러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그 동안 머리들좀 식히도록 하시오. 머리가 너무 뜨거우면 제대로 생각들을 할 수 없을테니." 그 말에 불을 토해내듯 뜨겁게 격론을 펼치던 사람들이 움찔 하더니만 순순히 사방으로 삼삼오오 흩어 졌다. 그러고보니, 먹을 것도 문제였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야 호수 속으로 뛰어 들때 대충이라도 먹을게 들어 있는 가방을 챙긴 모양이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바빴으니 식량을 챙길 리가 없었다. 거기다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식량도 던전을 탐색할때 크게 방해가 되지 않아 전체의 식량에서 약간 덜어온 것 뿐으로, 나머지의 식량은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결계 밖에 남아 있는 일행들이 지키고 있을 터였다. 호수 속에서야 물고기라도 잡을테지만, 여길 빠져 나가 정글속을 헤매고 다닌다면 큰 고민 거리가 될게 뻔했다. 뭐, 나무 열매라던지 동물이라든지 널려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행길이니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을 구분 못하는게 문제였다. 게다가 분명 추적당할텐데, 추적당하는 와중에 식량조달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을리가 없었다. "하아... 이래저래 문제가 산적해 있네요. 리건, 리건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우리도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자 나는 묵묵히 생각에 빠져있는 리건에게 물었다. 그러자 리건은 우리 주위에 앉은 내 일행들과 자신들의 일행을 힐끔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장 좋은 건 우리만 살아남는거지. 그러면 너도 다른 인간의 눈치 볼 것 없이 정령왕들의 도움을 구할 수 있을테니까. 저 인간들은... 짐덩어리밖에 안돼. 그럴려면... 역시 정면으로 부딪히는게 좋겠지? 어차피 마르타국 인들도 최대한 수를 줄여놓으려고 할거야. 새클턴국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쪽도 말이지." "그것... 때문에요?" "그래, 새클턴국은 아마도 우리쪽에 그게 있다는 걸 알고 있을테니 끝까지 물고 늘어질 거다. 그와 같은 이유로 마르타국 측도 새클턴국 측이 전멸하길 바랄테니까." 거기서 잠시 말을 끊은 리건이 내 얼굴을 쓱 쳐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뭐, 뭣하면 저놈들을 버리고 갈 수도 있는 거고. 필요 없으니까." "헉..." 장난기가 전혀 없는 리건의 표정을 보니 걸리적 거린다 생각되면 정말 그렇게 할 것만 같았다. 이럴 땐 힘 없으면 정말 서러운 거 같았다. ====================================================== 제 42화 눈물겨운 탈출기 (1) 로웰 미노트 남작의 얼굴은 사정없이 구겨져 버렸다. 뭐,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얼굴이 굳어지고 눈꼬리가 미미하게 떨리는 것이 속 얼굴은 그랬을 것이다. 상황이 그가 원하는 곳과는 전혀 반대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가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병자같은 얼굴이기는 했지만 마법사들이 정신을 차렸기에 그런대로 다시 회의를 할 수 있었다. 일리언이 경고했던 시간도 점점 다가오고 있으니 한시라도 지체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회의가 다시 시작되어서 또 다시 정면돌파측과 퇴각측의 싸움이 시작되나... 했는데 의외라고 해야 할지, 마법사길드 측이 강력하게 퇴각측을 지원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러자 신이 난 것은 퇴각측이었다. 현재 녹스국의 리더를 맡고 있는 홀리스터경은 너무 신이 난 나머지 고국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새클턴국측의 이러한 만행을 폐하께 아뢰어 저 무례한 새클턴국을 쓸어버리도록 하겠다고 큰소리까지 쳤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쓴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아무리 정치나 국제 상황에 관심이 없는 나라고 해도 홀리스터경의 말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수 있었다. 나라간의 전쟁이라는게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닌데다가, 하물며 녹스국은 리건에게 듣기로 현재 국왕파와 귀족파간의 알력 싸움으로 골치 아픈 상황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등 뒤에 그와 비슷한 국력을 가진 벨레니국과 마르타국을 냅두고 새클턴국과 싸울 수는 없는 일일테고 말이다. 설사, 이번 일로 인하여 마르타국과 벨레니 국 또한 녹스국과 같이 힘을 보태 새클턴국을 치려 한다 해도, 남대륙의 두 강대국이 노리고 있으니 그것도 문제였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외교압력 뿐일텐데 - 그것도 무시할수는 없을테지만... - 결적적으로 증거가 없었다. 직접 당한 증인은 각 국 나라 사람들이니 먹히지 않을테고, 설사 저기서 버티고 있는 새클턴국 사람 한명을 생포해 가서 온갖 고문으로 인하여 털어놓게 만들어 새클턴국에 내놓는다고 해도 새클턴국이 우리와 상관 없는 일이라고 딱 잡아떼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에 관련된, 새클턴국 문장이라도 찍힌 문서라도 있으면 모를까 처음부터 새클턴국측에서 우리 모두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었고, 아마 협조 잘 하고 말싸움(?) 잘 해서 제일 좋은 물품이나 가지고 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기회로 삼국과 관계도 더욱 더 돈독히 하고 말이다. 그러다가 아무도 생각지 못한 그라함 대제의 보석이라는 크나큰 변수 때문에 이 모든게 뒤집어졌던 것이다. 새클턴국측 리더인 할레언 백작은 수 틀리면 모든 걸 자신이 뒤집어 쓸 각오로 이런 일을 벌리는 걸 터였다. 사실, 새클턴국 측이 저렇게 나오지 않있다면, 녹스국이나 마르타국이 저렇게 나왔을 거였다. 실제로 마르타국에서는 그럴려고 하다가 새클턴국에게 뒤통수를 맞아 우리측으로 온 거고 말이다. 그런데 보석은 여전히 마르타국 손안에 있고, 새클턴국은 그걸 알기에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안 놓치려 하고 있으며, 마르타국은 그런 새클턴국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든 입을 막으려고 하지만, 그 외 사람들은 여길 빠져나가는게 우선이었다. 국제 문제는 우선 자신들이 살아 남아서 각자의 나라에 알린 다음에야 생기는 거니까 말이다. 그러한 각자의 사정으로 인하여 마법사 길드측의 열렬한 지지아래 전체적인 분위기가 퇴각측 쪽으로 기울어지자 굳은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미노트 남작이 툭 던지듯 말을 내뱉었다. "퇴각한다고 해봤자... 이 곳에서 입구는 단 하나뿐인 듯 싶고, 그 입구는 새클턴국에서 막고 있는데 어떻게 하시려는지요? 저쪽에서 단단히 벼르고 있는 이상 우리쪽도 쉽게 그들을 뚫고 지나갈 수가 없을텐데요." "그, 그렇군요." 누군가의 말과 함께 분위기는 다시 가라앉았다. 모두들 정면 대결을 하지 않으니 여기서 살아 나갈 확률이 높아졌다는 것에 안도하느라 정작 누군가가 방패 막이가 되어 길을 뚫어줘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애써 모른체 하고 있었는지도. 이럴때는 급조된 한 팀이라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았다. 원래부터 같은 팀이었다면 의리상 이라던지, 의무감 이라던지 뭐 그런 이유로 스스로 자처해서 방패막이가 되겠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내가 소설 속이나 영화 속의 이야기를 생각해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남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 시키고 싶은 사람은 없었던지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처음부터 카리스마만 풀풀 풍길 뿐 한 마디도 안 하는 리건은 물론이거니와 정면돌파를 강하게 반박하며 퇴각론을 열성적으로 주장하던 사람들까지도 말이다. 그러다가 현 녹스국의 리더인 홀리스터경이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그, 그런건... 용병들이 맡아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원래 그런 목적으로 용병들을 고용한 거지 않습니까?" 그의 자신없는 발언에 나는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20대 중반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왠지 나보다도 철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지금 그렇지 않아도 분열되려는 조짐이 보이려는 마당에, 이 분위기를 쇄신할 생각은 못하고 오히려 용병들 앞에서 대놓고 '너희들이 희생양이 되어라'라고 말을 하니 말이다.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런데 참으로 허망하게도 이런 생각은 나뿐이었던 듯 싶었다. 홀리스터경의 발언이 나오자마자 주위 사람들이 공감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그렇군, 원래 처음부터 용병들은 그러라고 고용한 거니까." "맞아. 우리는 본국으로 무사히 돌아가 이번 상황을 보고할 의무가 있으니 여기서 죽을 수는 없소." "그렇지. 용병들은 돈을 받는 이상 확실하게..." '아, 정말 인간성이 나오는구만.' 이 상황에서 가장 만만한 건 용병들이고, 자신들이 희생양을 면해보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사람들은 희생을 요구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심지어 어떤 기사는 귀족과 기사들인 자신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걸 영광으로 알라는 그런 망발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걸 보고 정말 기가막혔다. 계급제 사회에서는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사람들을 사람으로 취급 안한다는 건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이럴때는 정말 적응이 안되었다. 뭐, 21세기에서도 이런 일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회의에 참석했던 용병들의 얼굴은 점점 굳어지고 부들 부들 떠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저 인간성 보이는 사람들의 말을 반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노련한 트레비스는 가만히 앉아서 희생양으로 내몰리지는 않았다. "물론, 저희가 그런 목적으로 고용 되었으리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잊고 계시는 것이 있는 듯 합니다만?" 용병들을 희생양 삼아 자신들은 여기서 빠져 나갈 수 있다고 여긴 탓인지 다시 좋아지는 분위기는 트래비스의 그 말로 인하여 주춤 거렸다. "우리가 뭘 잊고 있다는 거지?" 홀리스터 경이 경계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 사실 그가 제일 먼저 용병을 희생양으로 삼자는 발언을 했으니 조금 찔리기는 했을 거다 - 묻자 트레비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번에 일류 소리만 듣는 용병들을 데려왔지만 여러분들이나 밖에 있는 새클턴국 사람들에게는 실력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숫자도 적지요. 그러니 저희가 온 몸을 던져서 시간을 끌어도 길어야 10여분일까요? 만약 제가 지금 밖에 있는 새클턴국의 리더라면 실력도 딸리는데다 버려도 상관 없고, 각 국으로 돌아가 떠들어봤자 믿어줄리 없는 용병들은 그냥 지나쳐버리고 그대로 여러분들을 노리겠습니다." 너무나 덤덤히 말해서 지금 그가 말하는게 자신들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일에 대한 것이 맞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러나 듣는 이들은 그렇게 태연할 수가 없었는지 얼굴들이 차츰차츰 굳어졌다. 트레비스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문제는 또 있지요." "뭐가 말인가?" 트레비스의 말에 몬트리올경이 좋은 기분이 깨지자 기분이 나빠졌는지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독 말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 드린 건 독을 제외한 상황에서 말씀 드린 거지요. 그러나 만약 독을 가지고 있다면 저는 용병을 상대하건 말건 다시 독을 퍼트릴 것 같군요. 중독된다면 우선 마법사들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할테고, 저희 같은 용병들이나 기사님들의 행동이 차츰차츰 둔해질테니까요. 그러면 저들은 느긋하게 사냥을 하면 되겠죠." "마,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으면 안되겠습니까? 처음에는 저들이 독을 쓸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당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니 마법사들께서 방어하는 마법이라도 걸어 주신다면..." "독은 아마도 공기중으로 퍼지는 것이니 실드 마법으로 외부 공기를 차단 시킬 수는 있겠습니만... 용병들이 저들과 싸워야 할테니 물리력은 없애야 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된다면 저들과 접촉을 하면 분명히 독이 실드 마법 안으로 퍼지고 말겁니다. 그렇다면 실드 마법을 걸으나 마나하는 것 아닙니까?" 홀리스터경의 제안에 잠시 생각해보던 클라우드 남작이 고개를 저었다. "어, 그럼 독에서 보호해주는 마법 같은 건 없겠습니까?" "글쎄요... 중독 된다면 해독해주는 마법은 있지만, 독 자체를 방어해주는 마법은 없습니다." 몬트리올경의 말에도 마법사가 고개를 젓자 미노트 남작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독 자체를 방어하지 못한다 하면, 독의 효과가 나타나기 전에 저들에게 큰 타격을 주게 하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제가 마법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마법 중에는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하는 마법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자 마법사 길드의 마법사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말했다. "엄청난... 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약간 힘이 세지게 하는 마법이 있을 뿐입니다. 뭐, 이런건 마법 무구에도 자주 사용되기는 하지만, 지금 사용한다면 정말 일시적일 뿐이고 이게 큰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아뇨, 아뇨, 제가 말씀드리는 건 3류 무사가 십여명이 넘는 기사를 순식간에 물리칠 수 있게 만드는 마법 말입니다." '그런 게 있었나?' 아무리 내가 마법사의 길에 한쪽 발을 내딛었다고 하지만 배운지 얼마 안되는데다가 열성적이지 않아 마법 전체를 알지 못한다. 그래 처음 들어보는 마법에 고개를 갸웃 거리는데 콘스틴스가 굳은 얼굴로 미노트 남작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건 듣지 못한 걸로 하겠습니다 남작님. 그 마법은 마법사 길드 공식적으로 금지된 마법, 저는 그 마법을 알지 못하고 설사 알고 있다고 해도 사용할 마음은 없습니다."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아무리 금지된 마법이라고 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무척 유용할텐데 말입니다. 마법사 길드에서도 이런 상황에서 사용한 거라면 납득할텐데요." "말씀 드렸다시피 저는 그 마법을 모릅니다." 남작의 떠보는 듯한 말에도 콘스틴스는 굳은 얼굴로 부인했다. "금지된 마법이라? 대단한거 같은데 안 좋은 마법이었나보네."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걸 들었는지 첼릿이 굳은 낯빛으로 속삭였다. "안좋은 정도가 아니라 엄청 악질적인 마법입니다. 그 마법에 걸리면 미노트 남작의 말대로 3류 무사라고 해도 왠만한 기사 십여명정도는 손쉽게 처리할 수 있지요. 그러나 그 뒤가 문제입니다. 본래 힘의 몇배나 되는 힘을 갑자기 사용하면 그 근육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법이 풀리고 난뒤 온 몸의 신경과 근육이 파열되거나 반신불수가 되버리기 쉽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입이 떠억 벌어졌다. "아... 그런 문제가 있었군. 하긴, 갑자기 무리한 힘을 발휘하면 몸이 못 버티는 건 당연한 거지." 하지만 첼릿의 말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정도에서 끝나면 다행이라는 거지요. 그 마법에 걸리면 뇌에도 손상을 줘서 정신력이 강한 자가 아니면 자아를 잃어버리고 죽을때까지 살기에 날뛰는 괴물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적, 아의 구분 없이 말이죠. 뭐, 다행이라는 거는 몸이 버텨주지 못하기 때문에 큰 일을 저지르기 전에 근육이 파열되서 죽는 것 뿐이랄까요?" "헉... 그런 마법이 있었어?" 콘스틴스가 정색을 하고 거절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리고 그 마법을 태연하게 용병들에게 걸라고 하는 미노트 남작의 인강성에 다시 한번 질려버렸다. 저 남작은 그냥 얼핏 들은거라고 하지만, 그 마법을 잘 알고 있을게 틀림 없었다. "그러니까 마법사 길드에서 100년 전쯤에 공식적으로 금지 시켰지요. 하지만 요즘도 뒷골목에서 암암리에 거래되고 있다고 하더군요." "허... 하기야, 뒷거래로 거래 안되는게 어디 있겠어?" 첼릿과 내가 속닥거리는 사이 콘스틴스에게 그 건이 - 용병들에게 금지된 마법을 걸자는 - 기각되자 다른 의견들이 속속 올라왔다. 그 중 가장 지지를 받은게 용병들을 비롯하여 우리 귀족과 기사들 패거리 중에서 제비로 몇몇을 뽑아 용병들을 돕게 하자는 거였다. 그리하여 몇명을 뽑을거냐고 한창 토론을 하는 와중에 내 옆에서 갑자기 일리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냐, 너희들은 아직도 회의하냐?] 그녀나 아버지나 하도 불쑥 불쑥 나타나서 이제는 그런 상황에 별로 놀라지도 않는 - 아마 귀신이 불쑥 나타나도 담담할 거 같았다. 뭐, 귀신이라는 걸 알아차린뒤에는 놀라겠지만... - 나는 담담하게 그녀의 질문에 대꾸해줄 수 있었다. "여길 빨리 빠져나가려고 하는 방법을 논의중인데 완전히 결정이 안 나서요." [흥, 그러다가 내가 제시한 시간까지 결정 안 나면 확 던져버린다.] "그 때까지는 끝날걸요. 어차피 대충은 정해졌으니까." [호오, 그래? 어떻게 할 건데?] "저들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대신 죽어라 도망치기로요. 그런데... 우리가 들어온 입구를 저들이 막고 있으니 충돌은 불가피 할거 같아서 방패막이가 되줄 사람들을 뽑고 있어요." [입구? 입구는 거기 말고 또 있는데?] "에에? 정말요?" 일리언의 말에 나는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 아.하.하.하... ^^;; 오랜만 입니다 후다닥~~ ==33 ====================================================== 제 42화 눈물겨운 탈출기 (2) 제 42화 눈물겨운 탈출기 (2) [입구? 입구는 거기 말고 또 있는데?] "에에? 정말요?" 일리언의 말에 나는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 뿐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의 폭탄(?) 발언에 놀라 모두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고, 제비에 뽑힐까봐 전전긍긍하던 사람들은 반색을 했다. "정말입니까? 정말 다른 입구가 있단 말입니까?" "놀라운 일이군요. 우리가 들어온 길 외에는 밖으로 통하는 길은 보이지 않던데..." 홀리스터경은 일리언의 말에 반색하며 외쳤지만, 마법사 길드 소속의 한 마법사는 미심쩍은 듯한 표정이었다. 하긴 그도 그럴것이 일리언의 호수는 커다란 환영 마법진이 펼쳐져 있어 높은 절벽, 혹은 바위산으로 둘러쌓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아, 그걸 깜빡하고 있었네. 그럼 주위의 환영 마법진을 잠깐 해제... 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겠지. 들어줄 리가 없어. 만약 단순한 환영 마법이라면 그냥 빠져나갈 수 있을테지만... 일리언이 따로 입구를 가르쳐줄 정도인데 단순한 환영 마법이라면 그냥 나가라고 했을... 까나? 혹시나 나중의 일을 위하여 계속 숨기고 있는 걸지도. 그럼 나도 그냥 입다물고 있어야... 겠지? 아니, 혹시 일리언이 말하는 입구가 그쪽인가?' 하지만 그쪽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역시 나중을 위하여 주위의 높은 절벽이 마법에 의한 환영이라는 걸 계속 숨길 모양인 듯 싶었다. [너희들이 발견하지 못한 건 당연해. 그건 보통 사람들에게는 입구라고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너희들이라면 충분히 그 곳을 통해 여길 나갈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일리언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거였다. [그래, 너라면 무사하겠지. 뭐, 죽든살든 내 알바는 아니지만...] 혼자 중얼거리는 듯한 일리언의 말에 나는 께름직한 기분이 느껴졌다. "뭐, 뭐예요, 일리언? 혹시 그 일리언이 말한 '입구'를 통해 나간다면 큰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든지 하는 거 아니에요?" [위험? 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그래도 너라면 살 확률이 높을거야.] 일리언 딴에는 안심 시키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 솔직히 정말 그런건지 의심스럽다 - 그와는 반대로 불안감이 마음 속에서 몽글몽글 피어 올랐다. 그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일리언이 말해준 '입구'를 피하고 싶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새클턴 국이 모르는 입구라는 말이 엄청 매력적으로 들린 모양이었다. "위험이야 여길 나가면 어디에서 어떤 위험이 나타나도 이상할게 없으니 그게 무엇이든 감수할 수 있습니다. 호수의 주인이시여, 당신이 말한 입구로 나간다면 저 밖에 있는 무리들과 부딪히지 않을 수 있습니까?" 클라우드 남작의 기대어린 말에 일리언은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는 대답했다. [너희들이 일부러 알려주지 않는 이상 너희들이 여길 빠져 나간다는 것도 눈치 못 챌껄? 그 입구는 호수 속에 있거든.] "예?" 호수 위의 집 너머 보였던 바위산은 진짜였던 모양인지, 호수 속에 잠겨 있는 부분까지도 모두 거대한 암석으로 되어 있었다. 입구는 바로 그 호수에 잠긴 바위산의 아랫 부분에 있었다. 호수로 흘러 들어오는 냇물이나 강물이 보이지 않아 어떻게 이렇게 큰 호수가 생성될 수 있었는지 - 비가 엄청 많이 오기는 하지만, 그런걸로 채우기에는 호수 자체가 너무 커서... - 의아했었는데 역시 호수로 유입되는 물이 있었다. 호수 밑으로 통해 있어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일리언이 말한 입구는 바로 그 곳을 말하는 거였다. 새클턴국 사람들 모르게 빠져 나갈 수 있다는 말에 대다수 사람들이 기뻐하며 그 곳으로 가길 원하여 일리언에게 부탁해 왔지만, 막상 그 입구라는 걸 본 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성인 남자 한명이 겨우 허리를 펴고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를 가진 동굴에서는 거센 물결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우리가 일리언의 보호 아래에 있기 때문에 직접 몸으로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 동굴에서 빠져 나오는 공기방울들의 격한 움직임 이라든지, 강한 물살로 인하여 형성된 작은 소용돌이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질릴 정도였다. 거기다가 동굴 안은 당연하겠지만 빛 한줄기 들어가지 못해 엄청 깜깜했다. 꿀꺽... 입구의 모습에 모두 질린 나머지 짙은 침묵이 내려앉아 누군가가 침을 삼킨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게 신호가 되었던지 사람들이 하나 둘 입을 열었다. "저, 저길 들어가야 하는 겁니까?" "하.하.하... 과연... 여기로 나가면 새클턴 국 사람들이 모르겠군요. 갈 수 있다면 말이죠..." "보통 사람들은 입구라고 할 수 없다더니... 저도 입구라고 하고 싶지는 않네요." "어, 어떻게 여길 통과한단 말입니까? 불가능 합니다." "맞습니다. 저 강렬한 물살좀 보십시오. 들어가지도 못할 겁니다." "살아서 통과나 할 수 있을까요?" 절망적인 탄식이 난무하며 차라리 새클턴 사람들과 전면전을 펼치자는 말까지 나오는 순간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던 콘스틴스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지금 물 속에서 몇시간 이상이나 있었다는 걸 잊으셨습니까? 우리는 통과할 수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엠브로스 백작님?" "뭐... 어떻게든 통과는 할 수 있을거 같군요." 어쩐지 일리언이 입구를 가르쳐주면서 요상한 눈길로 날 보더라니... 그녀가 말하는 입구를 통과하려면 정령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떨떠름하기는 했어도 긍정을 뜻하는 내 대답에 만족했는지 콘스틴스는 고래를 끄덕이고는 일리언을 바라봤다. "여기 길이는 얼마나 되며 어디로 이어져 있습니까?" 그의 당연하다면 당연한 질문에 잠시 고개를 갸웃 거리며 생각해보던 일리언이 대답했다. [좀 길어. 그리고 여긴 산 너머에 있는 좀 큰 강과 연결되어 있지.] 도대체 그 '좀'이란 기준이 얼마만한 건지 묻고 싶었지만, 콘스틴스는 그걸 알아들었는지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 하고는 날 돌아보았다. "저 동굴이 꽤 긴 모양입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일리언에게는 '좀'이 왜 댁에게는 '꽤'가 되는데? 그리고 도대체 그 기준이 뭐냐니까?' 라고 묻고 싶었지만, 대신 나는 어깨만 으쓱였다. "글쎄요... 사실 이런 일은 한번도 안해봤지만 설마 빠져 나가는데 며칠 걸릴게 아니라면 가능할 겁니다. 솔직히 부담은 크겠지만..." 내 말에 콘스틴스가 한번 부드럽게 웃더니 - 하프 엘프라 그도 꽤 단정하게 생긴 편이었다. - 대답했다. "만약을 대비해 제가 백작님 옆에 있겠습니다." '오, 저 사람도 웃으니까 꽤 매력적... 아니, 이게 아니라... 콘스틴스는 7서클에 7클래스 유저라고 하지 않았나?' 만약을 대비한다는 건 내 기운을 다 쓸때를 대비한다는 걸테고, 그럴때 빠른 시간안에 회복시켜줄 수 있는 마법이란 '리커버리' 마법 뿐인데 그건 8클래스의 마법이다. 하지만, 콘스틴스가 뭘 믿고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대답을 할 수 있었나 의아했지만, 추리하고 논리적으로 따지는 거에 영 흥미가 없던 나는 곧 생각하기 귀찮아져서 의아심을 접어 버렸다. '뭐, 무슨 수가 있나보지.' 하여간 콘스틴스의 그 말 한 마디에 분위기가 그 '입구'를 통해 나가는 것으로 정해진 듯 하자 기사와 용병들쪽은 물론 마법사들 안색이 변해버렸다. "저, 정말 저기로 나간단 말입니까?"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래도 마법사 길드의 리더인 콘스틴스의 결정에 마법사들은 안색이 하애졌으면서도 아무 말 없는데 반하여 기사들은 그렇질 못했다. 그들은 아무리 봐도 저 '입구'를 통과하는 것이 새클턴국과 전면전을 하는 것 보다 더 두려운 모양이었다. "부디 재고 하시는게..." 그러나 이러한 기사들의 말은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팍팍 풍기는 리건의 말에 모두 사그라들고 말았다. "가기 싫은 사람은 남아도 좋아. 이건 강제성이 없는 거고, 안 간다는 사람은 무사히 해변으로 올려놔주게 할테니까."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만 킥킥 웃으며 그나마 몇 안 남은 정령사들을 불러 모았다. 나 혼자의 힘으로 해도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이런 일은 처음이라 내 힘이 얼마나 들지 가늠도 할 수 없는데다가 - 정말 동굴을 다 빠져나가지 못한채 내 힘이 떨어진다면 큰일이지 않은가? - 동굴도 길다고 하고 사람도 많아서 부담감이 컸던 것이다. 남은 정령사들은 물론 마법사들도 나 혼자는 무리라고 생각했던 건지 나는 정령사만 불러 모았는데 자진해서 의논하는데 끼어들어 자기들이 해줄 수 있는 마법들과 의견들을 이리저리 내놓았다. 제일 확실한 건 나 혼자라도 동굴을 통과했다가 오는 거겠지만, 얼마나 길지, 또 얼마나 시간이 오래 걸릴지 몰랐기 때문에 그럴 틈이 없었다. 일리언이 제공한 시간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이다. 내가 돌아오기 전에 시간이 다 된다면 일리언은 틀림없이 사람들을 호숫가 위로 올려놓을게 뻔했기 때문이다. "지금 물살을 보니 아마 동굴 안쪽에서도 물살이 셀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물살의 영향을 최소한 으로 줄이도록 사람들을 눕혀서 한사람 한사람 차례로 가는게 좋겠습니다." "어둠은 괜찮을까요? 한사람씩 가면 서로 대화하기 힘들텐데, 그런 상황에서 어둡기까지 하면... 짧은 시간이면 몰라도..." "그럼 마법사들이 중간 중간 껴서 라이트 마법을 시전하고 있으면..." "아니, 차라리 각자 사람들에게 발광 마법을 걸어주는 것이..." "아, 정령사들에게도 각각 마법사가 붙어 있어야 합니다. 중간에 뭔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의사 소통을 못할수는 없지 않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우리는 텔레파시 마법하고..." "엠브로스 백작님께서는 맨 앞을 맡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혹 기운이 딸린다면 사람들에게 잠시 헤엄치게 하도록 하죠. 물살만 해결 된다면 헤엄이야 못치겠습니까?" "하지만,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는..."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났겠죠. 거기에 대비해 식량은 방수천으로 싸게 하죠. 젖으면 안되는 물품들 모두 다요." "방수천이 있을지..." 새클턴국과 싸우지 않고 여길 빠져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의욕이 솟은건 나 뿐이 아닌것 같았다. 내가 정령사들과 마법사들을 모아놓고 '자, 의논합시다.' 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에서 의견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게다가 정말 다행스럽게도 이 곳에 있는 마법사들이 소위 뛰어난 능력의 마법사들이라서 혹시라도 우리 정령사들의 기운이 다 떨어질 경우 사람들을 물 속에서 보호할 수 있었다. 전진까지 할 수 있는 건 콘스틴스 뿐인듯 했지만, 그래도 그거라도 어디인가? 게다가 마법 중에는 물 속에서 숨을 쉬게 해주는 마법도 있고, 다행이 여기 파견된 마법사들 중 그걸 익힌 마법사가 있어서 그 마법까지 준비해놨다. [후우, 드디어 가냐? 참 늦게도 간다.] 끝까지 악덕 집주인의 모습을 잃지 않은 일리언이라 다시 만나자는 작별 인사도 하기가 어려웠다. 다시 온다고 했다가는 엄청난 눈총을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하하하... 신세 많이 졌습니다." [그걸 알면 다시는 오지 마라.] "그러죠. 일리언도 맥키랑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세요." [흥, 네가 말 안해도 그럴 거야.] 그렇게 냉랭한 작별 인사를 나눈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한다음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는 동굴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 제 42화 눈물겨운 탈출기 (3) 어떤 책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예전에 읽었던 책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사람이 어떤 사고를 - 조난을 당했다던가 어딘가에 갇혔다던가 하는 - 당한 경우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식량이나 물이 아닌 바로 자신은 혼자라는 '고독감' 이라는 것이다. 물론, 사고를 당했을 때 옆에 누군가와 같이라면 그런 걱정은 없겠지만, 홀로 그런 일을 겪게 된다면 구조 될 때까지 '고독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때 그 고독감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자신을 잃어버리고 미쳐 버린다는 이야기였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생물이라는 부수적인 설명과 예로 '군중속의 고독', '로빈슨 크로우소'에 대한 이야기가 따라 붙었던게 기억에 남았다. 그 이야기를 읽을 당시에는 제법 그럴듯 하기는 하지만 그냥 수 많은 이론 중 하나일 뿐 진짜일거라고는 여기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야기가 진실인 거 같아.' 나는 다시한번 엔다이론의 목덜미를 감은 팔에 힘을 주며 생각했다. 우리가 일레인의 호수로 흘러 들어오는 수로 속으로 뛰어든지 꽤 되었다고 생각 하지만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곳인데다가 계속 비슷한 환경에서 전진만 하고 있느라 시간 관념을 잊어버려 정확히 얼마나 흘렀는지 짐작 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아직 힘들어 하지 않는 걸 보면 며칠씩이나 지나지는 않은 듯 싶었다. '히유우...' 처음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그 뒤로 얼마간에는 제법 통로가 커서 성인 남자가 서서 걸어 지나갈 정도였지만, 그 다음부터는 갑자기 좁아지고 넓어지고, 심지어는 공기까지 채워져 있는 자그마한 공간까지 나타나는 - 거기서는 잠시 쉬기도 했지만 - 거였다. 그렇게 장소가 큰 곳은 그정도였지만, 작은 곳은 지름이 1m도 안 되어 보여 사람들이 모두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는 자세가 아니었다면 통과하지도 못했을 거였다. 그리고 그 동굴 안쪽의 크기가 들쑥 날쑥해서인지 동굴 안의 유속은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훠어얼씬 강해서 아무리 나라고 해도 엔다이론의 도움 없인 통과할 엄두도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라도 방심했다간 이 물살에 휩쓸려 갈 것 같아.' 물론 앞길을 인도하는 엔다이론이 있었기에 내가 딴생각을 해도 정말 물살에 휩쓸릴 일은 없겠지만서도 내 눈 앞으로, 옆으로 매섭게 흘러가는 물결의 움직임이 딴 생각에 빠져들 틈을 주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계속 긴장한 채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어서 체력이 딸리는 건 아닌데 정신적으로 점점 피로해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아아... 차라리 눈이나 감고 있을까?' 라고 생각했지만, 엔다이론의 보호 속에 있다고 해도 몰속이라서 그런지 물살이나 강하고 격렬 하게 움직이는 물의 기운이 피부에 너무나 잘 느껴지고 있기 때문에 눈을 감으면 더 무서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는 대신 긴장된 손길로 허리에 단단히 매어져 있는 밧줄을 조심스레 더듬어 봤다. 우리는 동굴 속에 들어오기 전 만약을 대비하여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었는데, 허리에 맨 밧줄도 그런 조치들 중 하나였다. 이 밧줄은 내 뒤의 듀비를 묶고 그 다음 첼릿을 묶고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사람을 쭈욱 차례로 묶고 있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가끔씩 허리에 묶은 밧줄을 확인하면서 서서히 자신을 엄습하는 고독감과 싸우고 있을 터였다. 그도 그럴것이 앞 사람의 모습도 잘 안 보이는 이 어두움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정령의 힘과 허리에 매인 밧줄에만 의지하여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언제 정령사들의 체력이 떨어져 찬 물속에 그대로 내동댕치 쳐질지 모르니 엄청 긴장하고 초조해 하고 있을 터였다.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동굴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령사들은 최대한 힘을 아끼기 위하여 정령들의 모습을 실체화 시키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 정령사들 조차도 자신들이 불러낸 정령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정령사들은 자신과 계약을 맺은 정령들이 옆에 있다는 건 알 수 있으니 그나마 괜찮지만, 그것도 못 느끼는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터였다. 원래는 그러한 정신적인 부담감을 줄여주기 위하여 중간 중간에 위치한 마법사들이 라이트 마법을 시전하려고 했었지만, 동굴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게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동굴 안에서 물이 흐르는 방향이 일정했다면 그나마 괜찮았을텐데 동굴이 직선이 아닌 터라 물의 방향이 불규칙 적으로 이리 저리 부딪히고 꺾이는 것이었다. 좋게 말해 불규칙 적이었지,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그러니 그러한 곳을 뚫고 가는 우리도 이리저리 부딪히고 날려가고 쓸려가고 하다보니 흔들림이 예상보다 너무 심했다. 놀이공원에서 청룡열차를 탈 때보다 그 흔들림이 더 심했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그러니, 웬만한 흔들림에는 끄떡 않는 실력있는 마법사들이라도 버티지 못하고 빛의 구를 꺼뜨리기 일쑤였고, 한번 꺼뜨리고 난 뒤에는 다시 시전하기도 힘겨워 했다. 그리하여 결국 필요할때를 제외하고 그냥 가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언제 정령사들의 체력이 떨어져 찬 물속에 내동댕이 쳐지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버티고 있는 상황이라 완전히 정신력 싸움이었다. 그런 그들에 비하면 내 처지는 훨씬 나은 편...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그렇지가 못했다. 초조하고 불안한 것만 따진다면 얌전히 정령의 힘에 이끌려 전진하고 있는 보통의 기사들 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솔직히 나는 이번 일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었다. 물론 동굴 안은 빛 한 점 없어 어둡다는것도, 물살도 장난 아니게 셀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기는 했지만, 어차피 자연에 있는 정령들을 볼 수 있는 특이한 체질 덕분에 '어둠'이라는 것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나였으니 그 동굴 또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물살이 빠르다 하여도 결국 물이니 빠져 죽을 걱정은 없다고 태평하게 여겼었다. 그런데 왠걸... 동굴 안으로 들어가니 내 곁을 지켜주는 엔다이론이 없어다면 나 또한 어둠 속에서 더듬 거려야할 처지였던 것이다. 동굴 속에도 물론 운디네들이 있긴 있었다. 그런데 얘네들이 빠른 물살과 함께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에 주위를 보는데 도움이 되기는 커녕, 집중하지 않으면 운디네들의 모습 조차 보기 어려웠다. 뭐, 집중해서 볼 수 있는 모습이라야 하늘에서 와르르 떨어지는 유성우 같이 보였지만 말이다. - 운디네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대신 내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 다른때 같았다면 그 모습을 '아 예쁘다~'하고 감상했을 테지만, 현 상황에서는 단지 '정신 사납게 느껴질 뿐' 이었다. 생각해 보라. 그렇지 않아도 긴장되는 순간에 옆에 수 많은 무리들이 휙휙 지나간다면 얼마나 신경이 쓰이겠는가? 설사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해도 그들의 모습을 감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물살도 물살이지만, 그 곳은 물살 못지 않게 물의 기운이 강하게 요동치며 흘러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유속과 물의 기운의 움직임의 강약 또한 비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동굴에 들어설때는 미처 그것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내가 어리석었던 것이긴 했지만... 덕분에 그 어리석음의 댓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물의 기운에 예민한 나는 강한 물살과 함께 내 신경을 자극하는 물의 기운 때문에 남들보다 두배는 더 큰 압박을 견뎌야 했다. 더구나 내가 맨 앞자리였으니 그 압박은 더 심했을 거다. 엔다이론이 옆에 있어주지만 않았다면 이 모든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이라도 질렀을 것 같다. '그런 주제에 자신있게 앞장을 섰으니 원... 아버지 같으면 이까짓 일은 아무 것도 아닐텐데... 뭐, 아버지에 비한다면 내 능력이나 경험이나 정말 보잘 것 없는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처럼 그게 절실하게 느껴지는 건 또 처음이구만...' 그렇게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푸념하고 있는 내 머리속에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엠브로스 백작님, 중앙에 있는 켐벨경이 지치신 것 같습니다.] 켐벨경 옆에 위치시킨 마법사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벌써? 이거 큰일인데.' 나는 다시금 가슴을 조여오는 초조함을 떨쳐내려 애쓰며 얼른 운다인을 한명 불러내어 뒤쪽으로 보냈다. 켐벨경은 현재 우리 일행중에서 단 세명밖에 없는 중급 정령사중 한 사람이었다. 원래 상급 정령사는 없어도 중급 정령사는 10여명쯤 있었는데 모두들 녹스국과 마르타국과 새클턴국의 부딪힘에 운명을 달리하고 지금의 사람들만 남았던 것이다. 그래봤자 한 사람은 우리 나라의 쥬디 블러드무어경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트래비스 용병단 소속 정령사였으니 위험속에서 살아남은 이는 그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하급 정령사도 두명 있지만, 지금은 제외하고. - 뭐, 그 세명중 켐벨경이 가장 약한 축에 들기는 했지만 그 또한 마법사로 치면 5서클급이었다. 물론, 정령사에게는 '서클'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 정령과 계약하는데는 마나보다는 친화력이 더 중요시되기 때문이다 - 같은 급이라고 해도 마나나 친화력에 따라 능력 차이가 꽤 크긴 하지만 '중급의 정령사'는 '5클래스의 마법사'와 동급으로 봐준다. 그런 그가 지쳐 떨어질 정도라면 다른 이들도 서서히 체력의 부담을 느낄 거란 소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하급 정령사들은 벌써 체력이 떨어져서 내가 보내준 운다인들의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현재 우리 일행을 보호하고 있는 건 나와 세 중급 정령사였는데, 그 세명이 두명으로 줄어 들었다는 건 나와 나머지 두 명의 부담이 더 커졌다는 소리였다. '히유... 부디 다른 두 사람들 체력이 모두 떨어지기 전에 쉴 곳을 찾기를 바래야지.' 나는 다시 운다인 한명을 불러 앞으로 보내면서 속으로 중얼 거렸다. 내 뒤에서는 내가 앞을 막아주고 있으니 하급 정령으로도 충분히 보호 받을 수 있지만, 내 앞은 하급 정령이 뚫고 지나가기에는 힘겨웠다. 그래서 단지 정찰만 하는데에도 중급 정령인 운다인을 부르는 거였다. 하긴, 다른때라면 일부러 정찰을 보낼 필요도 없었다. 주위에 있는 애(?) 한 명 붙잡고 물어보면 되니까 말이다. '참내, 모든 상황 하나 하나가 힘겹구만...' 그래도 아직 절망에 빠지기에는 이린 시기였던지 잠시 후에 정찰을 보냈던 운다인이 돌아와서 기쁜 소식을 전해줬다. [앞쪽에 공기가 찬 공간이 있습니다.] '아, 그나마 다행이네. 잠시라도 쉴 수 있어서...' "웩~!" "우웨에엑~!!" "컥, 콜록, 콜록, 우웩~!" 쉬는 건 좋은데 저 소리는 정말 싫었다. 아무리 이해는 해도 말이다. 빠른 교통편이라고 해봐야 마차나 말 정도고 그거 말고는 새클턴국에 와서 배를 타본게 전부인 사람들이 갑자기 제트 코스터 같은 걸 타게 된 셈이니 속이 울렁 울렁 거리는 건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보기 싫은 건 보기 싫은 거였다. 처음에 이런 공간을 발견해서 휴식 시간을 가졌을 때는 몇몇을 제외한 모두가 속에 있던 걸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어 나는 아예 그들을 피해 물 속에 있기도 했었다. 그때에 비한다면 그래도 수가 많이 줄어든거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괜찮은 건 아니었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얼굴 색이 헬쓱했던 것이다. 그게 초조한 긴장감을 버텨서 그런건지, 속이 안 좋아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아, 정말 힘들군요. 차라리 나보다 강한 상대와 생사대적을 하는게 몇배는 나을 것 같습니다." 하급 정령사라 예전에 탈진해 내 도움을 받아 이동해 온 홀리스터경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정말... 여기서 나간다면 다시는 수영을 안 할것 같습니다. 물이라면 이제 질렸어요." 다른 기사가 홀리스터경의 말을 받자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수영이요? 훗, 저는 아예 물가에는 가지도 않을 것 같군요." "이러다 목욕도 싫어지는 건 아닌지 몰라." "이봐, 네 놈은 원래 목욕을 싫어하는 드러븐 놈이었잖아?" "무, 무슨 소리야? 누, 누가?" 그러다가 농담도 하나씩 튀어나오기 시작했고, 덕분에 침울했던 분위기가 조금은 살아났다. 뭐, 공간이 협소해 하반신은 물 속에 담그고 상반신만 물 밖으로 내놓은데다 공기도 오랜시간 습기가 가득 찬 곳에 있었던 터라 약간 이상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말이다.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계속 산소를 만들어내서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린 이 자그마한 공간의 산소를 다 소비할 때까지, 최대한 오래 쉬기 위하여 말도 못하고 묵묵히 있어야 했을 거였다. - 정령사들도 숨 쉬게는 해줄 수 있겠지만, 최대한 휴식을 취해 기운을 차려야 하니까. -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요? 거의 다 온 거라면 좋겠는데요." 앤더슨이 희망을 구하는 표정으로 날 보며 물었지만 아쉽게도 나도 알고 싶은 심정이었다. "글쎄요... 최대한 힘을 아끼기 위해 알아보지 않았거든요." "그렇습니까?" 내 말에 앤더슨이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쥬디 불러드무어경이 얼른 밝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꽤 많이 왔을 거예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목소리와는 달리 피로에 지쳐 헬쓱한 얼굴이라 별로 위로가 되질 못했다. 하기야 지금까지 나가떨어지지 않고 계속 사람들을 보호하고 이끌어 왔으니 힘든 것도 당연했다. "그렇겠지요. 혹시 압니까? 우리가 거의 다 와서 조금만 더 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 말입니다. 그래도 최소한 반 이상은 왔을 겁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스페이스경이 얼른 거들고 나섰다. 그러자 콘스틴스도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주변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지요. 슬슬 요기를 해야 할 때인데 여기서 할지 조금 더 참았다가 밖에서 할지 알아볼 겸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눈을 감고 뭔가를 읇조리기 - 아마도 주문이겠지만... - 시작하자 모두가 숨을 죽인채 희망 반 불안 반 섞인 표정으로 콘스틴스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제발..." 그러던 중 누군가가 간절한 어조로 중얼거리기에 나는 반 본능적으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가장 그러지 않을 것 처럼 생긴 덤프트럭 (본명 덤버트)가 아주 간절한 표정으로 기도라도 하는 것 처럼 두 손을 가슴 앞에서 꼬옥 붙잡고 있는 거였다. 뭐, 신앙은 덩치와 관련이 없고 이런건 편견이긴 하지만, 그 모습은 정말, 진짜 안 어울렸다. 주위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지 입이 벌어지는 것도 모른 채 덤버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덤버트는 이런 일이 생길때마다 그랬는지 익숙한 듯 덤덤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그의 단짝인데다 모습은 정 반대인 그레이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머리를 잠깐 긁적이더니 덤버트 옆에 나란히 서서 두 손을 모으고 진지한 표정으로 눈까지 감는 거였다. 그러자 마치 바톤을 이어 받듯 그 옆의 용병은 진지한 자세로 성호까지 긋고 기도에 들어갔다. 그것을 신호로 용병들이 모두 두 손을 모으자 녹스국의 홀리스터경이 멋쩍은 얼굴로 - 아무래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 덤버트를 봤언게 양심에 찔린 듯 - 머뭇머뭇 대더니 가슴 보호대 속에서 카톨릭교의 묵주처럼 생긴 걸 꺼내들더니 거기에 입맞추고 두 손으로 부여잡는 거였다. 그와함께 주변 분위기가 갑자기 심각해지더니 너도나도 주섬주섬 기도, 혹은 기원하는 동작을 취하는 거였다. 신전과는 다른 길을 걷는 걸로 유명한 마법사들 조차도 말이다. 그러길 한참, 드디어 탐색을 끝냈는지 눈을 뜬 콘스틴스는 자신을 둘러싼 채 경건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놀라 입만 벙긋벙긋 거렸다. "아, 아니, 저... 이, 이건..." 그러자 그러한 경거한 분위기에 동참하지 않고 한쪽에 조용히 물러나 있던 리건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신경쓰지 마시지요. 자기들이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그건 그렇고 입구가 얼마나 멀리 있는지 알아 내셨습니까?" 리건의 말이 마치 신호인 양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을 감고 있던 모든 이들의 눈이 일제히 부릅떠지며 콘스틴스를 향했다. 그 집요하고 무섭다고 밖에 표현 못할 시선들에 콘스틴스는 다시 한번 헛바람을 삼키느라 머뭇거렸고, 그러자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시선들의 압력이 더욱 더 거세어져 콘스틴스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 제 42화 눈물겨운 탈출기 (4) 그 집요하고 무섭다고 밖에 표현 못할 시선들에 콘스틴스는 다시 한번 헛바람을 삼키느라 머뭇거렸고, 그러자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시선들의 압력이 더욱 더 거세어져 콘스틴스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저, 정말 죄송하지만 입구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럴수가...' 직접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기대 반 불안 반 이었던 모든 이들의 얼굴에 일제히 떠오른 표정들은 마치 그 탄식을 내뱉은 것만 같았다. "그, 그럼... 밖으로 나가려면 아직 멀었단 소리군요. 아.하.하.하... 동굴이 참 길기도 하지..." 켐벨경이 절망했다는 티를 내지않고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양 입을 열었지만, 오히려 그의 말에 더욱 더 분위기가 암울해지는 것 같았다. "젠장, 얼마나 더 가야된다는 거야?" "이 동굴을 뚫은 놈이 도대체 누구람?" 모두다 암울한 표정으로 한 마디씩 내뱉을 때였다. 당혹스런 표정으로 사람들을 보고 있던 콘스틴스가 얼른 손을 저으며 끼어들었다.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인데... 제가 입구를 보지 못한 것은 입구가 너무 멀기 때문이 아닙니다." "엥?" 덕분에 절망적인 한탄이 쏟아지는 건 막을 수 있었지만, 희망에 찬 뜨거운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솓아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런 시선에 다시 부담을 느낀 것인지 찔끔한 콘스틴스는 황급히 기대하지 말라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 아니.. 그러니까 모두들 진정하시고... 제 말은 이 앞쪽에 제 마법을 방해할 정도의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아예 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입구가 얼마나 멀리 있는지 알아낼 수도 없었지요." "무, 무슨 소리야?" "낸들 알아? 마법사들 말은 외계인 말 같아서..." 일반 용병들이나 기사들은 난해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지만, 마법사들과 리더들은 그렇지 못했다. "콘스틴스님의 마법을 방해할 정도라면... 뭔지는 몰라도 대단히 위험한 것이겠군요. 우리가 그걸 뚫고 갈 수 있겠습니까?" 미노트 남작이 심각한 얼굴로 묻자 콘스틴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위험하다고 딱 잘라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이 앞에 있는 마나들은 인위적으로 모인게 아니라 자연적으로 모여든 듯 하거든요." "인위적? 자연적?" 몬트리올경이 선듯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 거리며 중얼거리자 클라우드 남작이 설명해줬다. "그러니까 인위적인건 누군가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자가 자연에 있는 마나를 강제로 모아서 가두어둔 걸 말하죠. 흔히 마법 결계를 만들때 그렇게 합니다. 자연적인 건 아주 드물긴 합니다만, 자연에 흐르는 마나를 고이게 하는 지형이 있습니다. 마치 물을 모아두는 호수처럼 말입니다. 그런 지형에 아주 오랜 세월동안 마나가 쌓이게 되면 마법을 방해할 수도 있지요." 그 비슷한 이야기를 전에 들은적이 있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자연계의 정령이 태어날 수도 있다고... "만약 그 곳에 보석의 원석이나 금속이 있다면 그것들은 조금만 가공해도 대단한 마법석이나 마법 금속이 된답니다. 마나에 예민해져서 쉽게 많은 양의 마나를 받아들이거나, 더 좋은 경우에는 원석 자체가 마나를 품고 있는 것도 있지요. 그런거는 원석에 인위적으로 마나를 불어 넣어 만든 것들보다 훨씬 성능이 뛰어나죠." '헤에... 그럴 수도 있군?' "오... 그럼 이 앞에 혹시나 원석이나 금속이 있다면...?" 앤더슨 스니볼리가 눈을 빛내며 묻자 모든 이들이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관심을 보였다. 마법석이나 마법 금속은 그 자체로 엄청난 고가의 물건이라 한 재산을 만들수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마법사나 기사, 혹은 용병이라는 직업상 너무나 탐이 나는 물건들이었던 것이다. "찾읍시다." "여기까지 왔는데 빈 손으로 갈 수는 없지." "내 생전 처음으로 자연산 마법석을 얻을지도 모르는데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새클턴국 놈들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마법사들과 기사들과 용병들이 한 뜻 한 목소리로 외치는 광경은 처음 보는 거 같았다. 뭐, 이해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까지 열성적으로 돌변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거기에 찬물을 끼얹은건 콘스틴스와 이런쪽에 경험과 지식이 많은 클라우드 남작이었다. "저는 그냥 포기하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 앞에는 마법석이나 금속 뿐만이 아니라 무엇이 더 있을 수도 있고, 그건 우리가 감당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여긴 새클턴 정글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기선 모르는 것은 상관치 말고 그냥 피하는 것이 상책인 곳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미련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기실 콘스틴스와 클라우드 남작의 말에도 대부분이 눈빛이 약간, 그것도 잠깐 흔들리기만 했을 뿐 여전히 욕심이 가득했던 것이다. "대단한 것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혹여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거라면 그냥 무엇이 있는지 확인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중에 돌아가서 다시 탐험대를 파견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마법사 길드 소속인 칼슨 마법사의 말이었다. 그는 이런데 전문이 아닌, 연구실에 처박혀 마법 연구만 해왔던 타입의 마법사라 그런지 클라우드 남작보다 높은 6클래스 익스퍼트에 5클래스의 마스터인데도 불구하고 클라우드 남작보다 도움이 안되는 마법사였다. - 그렇다고 도움이 안되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클라우드 남작과 비교해서 말이다. - 그래서 그런지 그가 클라우드 남작과 콘스틴스 말에 반박하고 나오자 나는 왠지모르게 별로 동조하고 싶지 않았다. '욕심 부리지 말고 그냥 경험자의 말을 따르는게 좋을텐데...' 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던 듯 칼슨 마법사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거였다. 그 모습에 클라우드 남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7 서클 마나의 보유자이신 콘스틴스님의 탐지 마법을 아예 가로막은 마나가 흐르는 곳입니다. 섣불리 자극하지 않는게 좋을텐데요." "자극이라니요. 마치 우리가 보물에 눈이 어두워 앞뒤 안 가리고 위험에 뛰어드는 멍청한 사람들인 것 처럼 말씀하시는 군요." 칼슨 마법사가 불쾌한 표정으로 투덜댔다. '그럼 아니냐?' 내가 보기에는 가슴이 뜨끔해서 그런 것 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클라우드 남작은 칼슨 마법사의 말에 자신이 너무 심했다고 생각 했는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사과했다. "그렇게 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남작의 강경한 태도가 한풀 꺾이자 칼슨 마법사도 표정을 풀면서 입을 열었다. "남작님이 뭘 염려하시는지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도 어린애가 아니라 몇번이나 어려움을 헤쳐 나온 사람들 아닙니까? 위험한 일은 안 할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러신다면 안심입니다." 마지못해 남작이 수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콘스틴스도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남작도 콘스틴스도 마법사이기 때문에 칼슨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가 있어서 강경하게 말리지 못하는 듯 했다. "대화가 끝났으면 여기서 배를 채우고 갈지 그냥 갈지를 정했으면 하는데?" 냉정한 리건의 말에 사람들이 갑자기 움찔 거리더니 머쓱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마법석과 마법 금속때문에 다들 원래 목적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뭐, 덕분에 암울한 분위기가 사라져서 좋기는 하지만 말이다. "먹고 가죠. 언제 여길 빠져 나갈지도 모르고, 설사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밖이 어떤 환경인지 모르니 여기서 먹어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미노트 남작의 말이었다. 그 또한 다른 사람들이 들떠 있을때 침착함을 유지하는 몇 안되는 사람중 하나였는데, 아마 먹고 갈지 그냥 갈지를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도 그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트래비스도 미노트 남작의 말에 찬성하자 콘스틴스는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반대하는 사람은?" 그러면서 그 작은 공간 안을 리건이 쓰윽 돌아보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좋아. 그럼 간단하게 먹고 출발한다." 리건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품속에서 건량을 꺼내어 입에 물었다. 한 끼라고 해봐야 지금 음식을 조리할 수도 없으니 물하고 건량으로 배를 약간 채우는게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새클턴국의 기습으로 인하여 얼마 가져오지도 못했었다. '아마 여길 빠져 나가면 식량부터 조달해야 할 거야.' ====================================================== 제 42화 눈물겨운 탈출기 (5) 간단하게 끼니를 때운 후 다시 출발하게 되자 일행들을 데리고 갈 책임을 가진 정령사들은 모두 각오를 단단히 다졌었다. 비록 휴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너무 짧아 완전히 체력이 다 회복하지 못했던 관계로 전보다는 더 도움이 안 될 것이라 예상을 했기에 나의 각오 또한 비상했다. 자칫하다가는 이 모든 사람들을 오로지 나만의 힘으로 데리고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대한 힘을 아끼기 위하여 제대로 회복 안 된 켐벨경은 물론 하급 정령사들까지 모두 정령을 불러내게 했다. 나중에 지쳐 떨어지더라도 지금이라도 조금이나마 돕는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비록 내가 최상급 정령사라고 하지만 그 동안 계속 앞장을 선데다 절반이 넘는 이들을 내 보호하에 두고 있었기에 정령사들이 날 제일 많이 걱정했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하여 나는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데만 힘을 쓰고 앞에서 강한 물살을 헤치고 사람들을 이끄는 걸 자신들이 하려고 했었다. 뭐, 나야 그래주면 고마운 일이라서 반대는 안 했지만, 지금까지 앞장 선 사람으로써 그게 쉬운 일이 아니란걸 알았기에 정말 가능할지 잠깐 통로에 있어보라고 했더니만... 두 사람다 몇분 버티지 못하고 올라오더니 '죄송합니다~' 하면서 나를 앞으로 밀었던 것이다. 하기야, 나 조차도 겁을 먹을 정도였으니 그들이 견디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었지만, 덕분에 나는 또 다시 앞장을 서서 사람들을 이끌어 가야 했다. 그렇게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다시 물 속으로 뛰어 들었건만, 정말 정말 그 각오가 허망하게도 우리는 하급 정령사들의 체력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 호수와 연결되어 있던 강으로 빠져 나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나왔다아~!!" "아~ 이 맑은 공기라니..." "땅아, 네가 그리웠다아~!!" "크하하하~~ 우린 살았어~!!" 콘스틴스가 아예 보지 못한 입구는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다. 뭐, 그래도 대충 1시간쯤을 전진해야 했었지만 말이다. 갑자기 넓은 강으로 나와 유속도 훨씬 느려진데다 밝은 햇빛이 비추기까지 해서 나도 약간 정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행이 무사히 강가로 나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엔다이론 덕이었다. 사람들은 헬쓱한 안색과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도 다시 땅을 디딜 수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는지 강가에 올라서자마자 온 몸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서로 껴안고 빙빙 도는 사람에 땅에 키스하는 사람에 강물을 끼얹는 사람에 하늘을 향해 만세를 외치는 사람에... 하여간 별의 별 사람 다 있었다. 엄청난 각오를 했었는데 생각외로 쉽게 나올 수 있어서 허탈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사히 빠져 나왔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하여간 복잡 미묘한 심정과 지친 몸으로 인하여 강가 모래 위에 털썩 주저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사람들의 그림자가 나에게 드리워졌다. "수고했다." "덕분에 살았어." 리건과 에아머스 차트워드 경이었다. 그래도 같은 왕실 소속 기사단이라고 내 수고를 치하하러 와준 거다. "아, 감사합니다, 두분." "어떻게 될지 조마조마 했었는데, 무사히 나와서 정말 다행입니다, 해인님." "그건 나도 동감이야. 오는 중에 저 녀석 체력이 떨어져서 그대로 물 속에 처박히는 건 아닌지 엄청 걱정했었거든." 첼릿과 램버트도 환한 표정으로 다가와 한 마디씩 던졌다. 그런데 이 무리에 한번도 안 빠지고 항상 끼어 있던 존재가 한 명 안 보였다. "응?" 평소 말이 없는 편이라 이런때라도 말이 없는 건 이해가 가지만, 첼릿과 램버트, 심지어 에아머스 차트워드경과 리건까지 모여 있는데 그는 멀리 떨어진 곳에 홀로 서서 주위를 둘러보는 건 상당히 의아스럽겨 보였다. "듀비, 왜 그래요? 아, 혹시 여기가 잘 아는 곳인가요?" 그래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가 물었더니만, 듀비는 여전히 주변을 살펴보며 상큼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덕분에 혹시 그를 잘못 자극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하며 괜히 조심스레 물었던 내가 무안해질 지경이었다. "그, 그래요? 그런데 왜 그래요? 뭔가 이상한가요?" "좀 걸리는 점이 있어서 말입니다." "어떤 점이 말입니까?" 우리 일행 중에서 듀비만큼 새클턴 정글에 대해 잘 아는 존재가 없었기에 듀비의 그런 말은 심상치 않게 들렸는지 첼릿이 심각한 얼굴로 물어왔다. "아니... 사방이 너무 조용해서요." "조용하다?" 첼릿의 되묻는 말에 듀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넓은 강 근처에 숲이 있는 지형입니다. 제법... 살기가 괜찮은 장소죠. 거기다 지금은 밝은 시간... 그런데... 너무 조용하군요. 마치 생물이 하나도 없는 것 처럼... 심지어 벌래소리조차..." "아, 그, 그거야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 나왔으니 놀라서 숨죽이고 있는게 아닐까요?" 내 말에도 듀비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적막이 흐를 정도일까요? 가까운 곳에 있는 존재들이야 숨을 죽였겠지만 멀리 있는 존재들까지 조용히 시키지 못했을텐데요. 엄청난 존재가 아닌 한...." 혼잣 말 하듯 중얼거린 듀비는 갑자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강 속에서 말입니다, 혹시 물고기 보셨습니까?" "엥? 무, 물고기?" 그런거 생각해본 적 없었다. 갑자기 동굴 속에서 빠져나온 덕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 일행들을 이끌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으니까. 엔다이론이 없었더라면 일행들을 그대로 강물 속에 떨어뜨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물고기가 있는지 없는지 알게 뭐란 말인가?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지. 그래도 전 호수에서는 자주 봤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리건은 그렇지 않았는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듀비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상한 곳이군요. 이렇게 좋은 곳에 아무도 없다니...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드는데요? 빨리 이 곳을 떠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에아머스 차트워드경의 말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열렬하게 반대했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여기서 하루도 묵지 않고 이대로 떠났으면 한다니요?" "그럼 이 주위를 살펴보는 건 어쩌고 말입니까?" 아무래도 마법석과 마법 금속에 홀려도 단단히 홀린 모양이다. 차트워드경의 말에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오히려 반발하는 이들을 향해 '남고 싶은 사람은 남아. 나는 갈란다!' 라고 외쳐주고 싶을 정도였다. '영화에서도 저렇게 말 안 듣는 인간들이 제일 먼저 화를 당하는 법이지.' "그런데... 지금 모두들 한가지 간과하신게 있는데... 여기가 도대체 어디인지 아십니까?" 콘스틴스의 조심스런 말에 막 격렬한 언쟁이라도 생길 듯 뜨거워진 분위기가 한순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모두들 각자의 생각에 골몰하느라 아무도 어딘지 생각을 안 한 모양이다. "살펴 본다면 도대체 어디를 살펴 볼 생각이었으며, 여길 떠난다면 어디로 가실 생각이었는지요?" "흠, 그렇군요. 지도 좀 봅시다." 콘스틴스의 말에 머쓱한 표정으로 있던 사람들 중 미노트 남작이 나서서 지도를 폈다. 하지만 지도를 펴봤자... 일리언의 호수 주변은 우리가 호수로 들어갔던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얗게 빈 공간이었다. "들어온 입구의 반대편쪽으로 나왔으니... 아무래도 이쯤이 아닐까 싶은데..." 이쯤이라고 말해도 거기도 여전히 빈 공간이었다. ".... 아무래도 주변을 살펴보는게 우선일 것 같습니다. 여길 떠난다고 해도 어느쪽으로 갈 건지는 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출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클리우드 남작의 말에 즉시 이 곳을 떠나자고 주장하던 우리측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떠나는 걸 반대하던 측은 눈을 빛내며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는 저희들끼리 이제 얻을수 있겠다느니 하면서 흥분에 겨워 속삭이는 거였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램버트가 도저히 가만 있을 수 없었던지 입을 열었다. "내참, 가만히 있자니 웃겨서 참을수가 없구만. 계속 마법석이니 마법금속이니 지껄이는데, 당신들 원석이나 금속을 어떻게 캐내는지 알기나 해?" 그 말에 좋아하던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몇몇 기사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따, 땅을 파면..." "아니, 산을 파던가?" 자신 없는 듯한 말에 램버트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장난하남? 땅만 파면 무조건 원석 덩어리가 튀어나오고 금속 덩어리가 튀어나오는 줄 알아? 아니 아니, 그런게 아무데나 땅만 파면 있는 줄 알아?" 그래도 이런 세상 상식은 용병들이 좀 나은 모양이었다. "아니 뭐... 광맥을 찾아야 한다는 건 알지만... 마법사들이 있으니 쉽게 찾지 않을까 싶어서..." "하아... 나원.... 그래, 잘 해봐라. 어디 어떻게 하나 구경좀 하자." 장인의 종족이랄 수 있는 드워프가 무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말하자 사람들의 기가 팍 죽어버렸다. 나도 그쪽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철을 땅에서 캐낼때도 철만 있는게 아니라 철광석이라 해서 철의 성분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돌을 캐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돌은 전문가가 아닌 일반 사람이 보면 그냥 길거리에서 보는 돌과 전혀 구별이 안되었다. 하여간 철광석이라고 하는 그 돌을 모아서 철의 성분을 따로 분리해 모아야지만 진정한 철 덩어리가 될 수 있는 거다. 그렇다고 이걸 그대로 무기를 만들면 강도가 약해서 쉽게 깨지기 때문에 강도를 강화 시키기 위하여 여러가지 소량의 물질을 섞는데 이것도 비율에 따라 강도가 제각각이라고 했다. 뭐, 여기도 여러가지를 섞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상식은 중학교때 수학여행 코스에 포항제철 견학이 포함되어 있었던 탓에 알수 있었던 거였다. 만약 포항제철에 견학을 가지 않았다면 나도 탄광속에서 철 덩어리를 캐내는 줄 알았을 거다. 보석의 원석을 캐는 것은 잘 모르지만, 아마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다른 돌들과 섞여 있는 걸 캐내서 보석 원석만 따로 분리해내는 걸 거다. 그 보석 원석이 포함된 돌을 찾아내는 것도 힘들지만 캐내서 분리해 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거다. 포항 제철에서도 철광석을 용광로에 녹여서 밑에 가라앉는 철 성분을 분리해냈으니 말이다. 뭐, 보석은 용광로에 녹여서 분리하지는 않을테지만, 그렇다면 더 어려운 작업이 아닐까? 램버트의 기가막히다는 말에 마법사들도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 거렸다. "뭐, 어쨌든... 구하기만 한다면 금속을 분리하든 원석을 분리하든 하는 건 가져가서 해결하면 될테니까."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마법석과 마법금속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의 표정은 환해졌지만, 램버트는 콧방귀만 날릴 뿐이었다. 그 뒤로 그럭저럭 회의는 끝나고 곧바로 몇개의 팀으로 나누어져 탐사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밖으로 나왔을때 아직 정오가 안 된거 보면 수로를 거슬러 올라올때 최소한 하루가 꼬박 지나간 걸텐데도 밖으로 나왔다는 것 때문인지 몰라도 사람들은 피곤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우선은 마법사들이 마나들이 가장 모여있는 것을 마법으로 탐색했지만, 이상하게도 어디라고 딱 꼬집어 나오지 않았다. 이 주변 전체에 마나의 농도가 짙게 깔려 있다는 거였다. 콘스틴스는 지리의 모양 때문에 자연스레 모인 것이니 어느 한 점에 모이는게 이상한 거라고 모든 사람들을 납득시켰지만 말이다. 어차피 짐들도 별로 없으니 짐을 지킬 사람도 남겨두지 않고 모두 다 탐사조에 편승시켰다. 각각의 마법사들은 나뉘어서 조에 끼워넣고 말이다. 내가 포함된 조는 당연하겠지만서도 첼릿과 듀비, 램버트, 그리고 용병인 덤버트와 그레이를 비롯한 몇명의 용병들이었다. 원래는 리건, 에아머스 차트워드경과도 붙으려고 했지만, 정령사중 가장 뛰어난 나와 기사 중 가장 뛰어난 리건을 붙일 수 없다고 다른 사람들이 부득 부득 반대했던 것이다. 그래서 리건과 차트워드경은 다른 용병들과 몇명 안 남은 녹스국들과 같은 조가 되었다. 거기에 마르타국 사람들이 한 조가 되자 나중에 가장 약할 것 같은 팀이 몬트리올경을 위시한 국방부가 중심이 된 팀이었다. 그래서 거기에 트래비스와 콘스틴스를 붙여줬다. 트래비스만 넣으면 몬트리올경이 트래비스 말을 안 들을 것 같아서 그가 함부로 무시 못할 콘스틴스를 넣어준 것이다. 그리고 우리 조에는 클라우드 남작과 앤더슨 스니볼리가 붙었다. "그럼 해질 무렵에 모이도록 하지요.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마법사들에게 신호탄을 쏘게 하시고 위험한 것이나 이상해 보이는 것은 될 수 있는 한 건드리지 말고 그대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콘스틴스의 신신 당부를 들으며 각 조는 지정된 방향으로 흩어져 갔다. 리건네는 강 하류쪽이었고, 우리조는 내가 있다는 이유로 강 건너편의 숲쪽, 몬트리올경이 있는 조는 우리조와 반대편인 숲쪽이었고,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쪽은 마르타국측 사람들이 맡았다. ====================================================== 제 42화 눈물겨운 탈출기 (6) "이거 참..." "그레이야,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 같은데..." "덤버트야, 나도 같은 생각이다. 여기가 정말 새클턴 정글 맞냐?" 얼빠진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주고받는 덤버트와 그레이의 대화는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들어와 있는 숲은 지금까지 우리가 헤쳐 나오면서 봐왔던 새클턴 정글의 모습과는 너무 차이가 났던 것이다. 덥고 습한 기온은 여전했지만, 그 기온 때문에 생기는 불쾌한 감정을 한 순간에 씻어주는 듯한 싱그러운 수목들과 그 수목들 사이를 마치 금가루를 뿌리는 듯 비추는 밝은 햇빛... 이건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그 어떤 숲보다 아름다웠고, 죽은 나무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 마치 누군가가 섬세하게 가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런,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숲의 모습과 함께 새나 동물의 모습은 커녕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고요함 때문에 여기는 더 더욱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일까? 덤버트와 그레이는 한번씩 더 중얼거리고는 입을 다물었고, 그러자 아무도 입을 여는 이가 없어서 주위에는 우리가 걸어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 부스럭, 부스럭... 한참을 그렇게 가자 이번에는 램버트가 들고 있던 도끼를 허공에다 휘저으며 화가 난 어조로 소리쳤다. "에이이이잇, 젠자아아앙~~!! 도대체 이게 뭐냐구? 차라리 트롤이라도 떼거리로 나와 뎀비는게 훨씬 났겠다. 이거야 원!" "여기서 잠깐 쉴까요?" 거의 발광에 가까운 램버트의 발악에 첼릿이 걱정스러웠는지 제안을 했지만, 램버트의 험악한 시선을 받고 흠칫 뒤로 물러났다. "난 지금 지친게 아니야. 이 망할놈의 숲속 때문에 스트레스를 좀 받았을 뿐이지. 정말 멋지기는 해도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곳이야." 한번 소리를 치고 나니 좀 진정이 되었는지 램버트가 도끼를 어깨에 걸쳐 매며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 기괴한 숲이라고 할까요? 보기에는 굉장히 아름다운 곳인데... 기분이 나빠요. 마치 들어와서는 안될 곳을 침범한 기분이랄까요?" 그레이도 계속 신경을 써서 뒷목이 뻣뻣해졌는지 손으로 주물러대며 투덜댔다. "차라리 정말 몬스터라도 튀어 나왔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우리 언제까지 여길 둘러봐야 합니까? 마법사님이 탐색해도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데...." 한 용병이 날 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다른건 다 빼놓고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는게 나였기에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조장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글쎄요... 방향이라도 바꿔볼까요?" 뭘 발견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숲 뒤에 뭐가 있는지 알아낸 것도 아니니 이대로 돌아가기는 좀 껄끄러웠다. 돌아가서 아무것도 없는 아름다운 숲만 있었습니다... 라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방향은 아까 세번째 바꿨는뎁쇼?" 한 용병의 투덜거리는 말에 나는 첼릿과 듀비를 돌아봤다. "어떻게 할까요, 두분?" "저도 별로 이 숲이 기분좋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될 수 있는 한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이지만, 어차피 집합 장소도 그와 비슷한 기분이니..." 듀비의 한숨 같은 말에 첼릿은 하늘을 한번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해가 남았으니 조금 둘러보도록 하지요. 그래도 성과가 없다면 어쩔 수 없지만, 지금 돌아가는 건 너무 이르다고 생각 합니다." 첼릿과 같이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바라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지금 돌아가는 건 너무 이른 거 같군요. 좀 더 둘러보도록 하죠, 괜찮겠죠?" 방향은 바꾸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바꿔봤자 그 숲이 그 숲일테니, 이제 모두들 시간을 때우기 위하여 발걸음을 옮길 뿐 무언가를 발견할 거라는 기대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맥 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어느 순간, 우리 앞에 좀 넓찍한 공터가 나타났다. 그 가운데에는 높이가 내 키 만한데다가 넓이는 성인 남자 20여명이 손에 손을 붙잡아야만 겨우 둘레를 감쌀 것만 같은 굉장히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햇볕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바위는 편편해서 올라가서 드러누우면 옥돌침대가 부럽지 않을것 처럼 보였다. "호오... 올라가볼까?" 축 쳐져서 질질 끌다시피 발걸음을 옮기던 용병들이 그 바위를 보자 마치 악동들처럼 눈빛이 생생하게 빛나더니 누군가의 말이 끝나자마 마자 마치 그것이 신호인 양 와~ 소리를 지르며 달려 들었다. 그런데 그 바위가 높은데다 제법 미끈하고, 주위에는 딛고 올라갈 바침대를 할 만한 것들도 보이지 않아 그냥 올라가기는 꽤 어려워 보였다. 처음에는 누가 먼저 올라가는지 시합을 한 듯 각자가 어떻게 해서든 올라가보려고 했지만, 그게 여의치 않자 몇명의 용병들이 눈빛을 교환하더니 덤버트에게 달려들었다. "우와아악, 이 자식들이이~!!" 그 모습에 가만히 구경하고 있던 나는 올라가길 포기하고 씨름으로 장난을 바꿨나 했는데, 그게 아니라 덤버트를 제압하더니 사정없이 구겨서 바위 밑에 척 가져다 대는 거였다. 뭔 일인고 하니, 나와 같이 온 용병들 중 덤버트가 제일 덩치가 크니까 그를 바위 위로 올라가는 발판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황당한건 덤버트의 단짝이라고 일컬어지던 그레이는 덤버트가 여러명의 용병에게 습격을 받는데도 가만히 구경하고 있다가 그 용병들이 힘들게 덤버트를 구겨 놓자(?) 잽싸게 뛰어들어 덤버트의 등을 밟고 가뿐하게 바위 위로 올라가버린 것이다. "앗싸, 내가 일등!!" "이 자식! 비겁하다!" "너 안 내려와?" "거기 서!" "이것들이 진짜!!" 그레이의 행동에 분노한 용병들이 마구잡이로 덤버트를 밟고 위로 올라가려고 아우성을 쳐대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가만히 두고 볼 그레이는 아니였던지 용병들이 바위 위로 몸을 거의 올리는 족족 발로 차서 떨어뜨렸다. 눈빛만이 아니라 행동들도 완전 개구장이 같은 그들의 모습을 피식 거리면서 바라보고 있는데 첼릿이 제안해왔다. "흠, 저들이 여기에 몰두해 있는 이상 당분간 탐사는 어려울 거 같으니 잠시 여기서 쉬시는게 어떨가요?" 나쁘지는 않았다. 공터를 빙 둘러싼 굵고 커다란 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마련해주고 있었고, 해는 여전히 하늘에 떠서 서산으로 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었으니 말이다. '여기에 시원한 바람과 맛있는 음식만 있다면 금상첨화일텐데...' 음식 생각을 하니 머리속에 떠오른, 팥빙수부터 시작하여 어름과 함께 갈아진 시원한 생과일 쥬스에 숫불 바베큐, 치킨 샌드위치, 삼각김밥, 떡볶이, 순대, 김치찌개 등등 하나같이 입에 침이 고일만한 음식들이 줄지어 떠올랐다. '아아... 먹고시퍼라....' 그리운 고향의 음식들을 생각하며 가까운 곳에 있던 한 커다란 나무의 그늘로 가던 나는 바로 그 나무의 뒤에 몸을 숨긴 채 빼꼼히 얼굴만 내밀어 우리를 주시하고 있던 한 아가씨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쳐 버렸다. '에?' 그 아가씨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얼굴까지 완전히 나무 뒤로 숨기는 거였다. '에에?' 하지만, 금방 다시 빼꼼히 내밀어 나를 보다가 여전히 내가 그녀를 보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놀라서 눈이 둥그래지더니 슬며시 손을 내밀어 마치 이게 보이냐고 묻는 듯 손을 휘저어 보이는 거였다. '에에에?' 그녀의 행동이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지켜보고 있는데 듀비가 내 어깨를 살짝 치며 물었다. "해인님?" "아, 듀비. 글쎄 저기에..." "예? 무슨...?" 듀비는 내가 눈짓으로 가르키는 쪽을 보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태도로 봤을때 나무 뒤에서 고개를 갸웃 하며 날 빤히 바라보는 그 아가씨를 못 본것이 틀림 없었다. '유령이다아~~!!' 라고 소리치는 바보 짓 대신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령이었군. 처음 보는데... 자연계의 정령인가?' "아니에요. 나는 초록색의 예쁜 새를 본 줄 알았는데 나뭇잎을 착각한 거였나봐요." 그렇게 말한 이유는 여전히 나무 뒤에서 얼굴을 빼꼼히 내민 그 예쁜 아가씨의 머리카락 색이 싱그러운 초록색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녀가 몸을 숨기고 있는 나무로 다가가 그늘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러자 내 행동에 움찔 놀란 듯 나무 뒤로 그녀의 얼굴이 쏙 사라지더니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빼꼼히 내밀어졌다. 그래도 주위에 첼릿과 듀비를 비롯하여 용병들 장난에 끼이지 않은 이들이 주르르 모여 앉아 있는 바람에 모른체 하고 있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 거리더니 슬그머니 손을 내밀어 내 눈 앞에서 흔들어 댔다. 허공에 있는 수많은 정령들을 모르는체 하는데 이골이 나 있던 나는 이번에도 못 본 척 첼릿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좀더 대담해 졌던지 그녀가 슬그머니 나무 뒤에서 나와 내 옆에 쭈그리고 앉아 다시금 손을 흔들었다. 나보다 한 두살 많아 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순수 바로 그 자체라 눈빛만 보면 소녀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슬그머니 장난기가 생긴 나는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선명한 초록색의 눈을 똑바라보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날씨가 참 좋죠?] [꺅~!] 내 행동에 너무 놀랐던 모양인지 그녀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져 버렸다. [이런 이런, 그렇게 놀라면 내가 너무 미안하잖요?] [어, 어떻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는 그녀의 모습에 왠지 더 미안해진 나는 씨익 웃어준 뒤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주변을 살펴보고 올 게요. 위에서 보면 숲 너머에 뭐가 있는지는 알 수 있겠죠." "좋은 생각이군요. 저희는 그럼 여기 있을테니 다녀 오십시오. 저 용병들도 장난이 끝나면 지칠테니 휴식이 필요하겠죠." 남작이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첼릿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심하십시오." "그냥 살펴보는 것 뿐인데요 뭐. 걱정 마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내 옆에는 푸른 늑대가 나타났다. 나는 늑대의 등에 올라타면서 아직도 당황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어준 뒤 하늘로 날아 올랐다. 그러자 역시나 그녀가 내 뒤를 따라 날아 올라왔다. [음, 역시... 바람의 기운이 느껴진다 했더니 하늘을 날 수 있었군요.] [어떻게... 어떻게 날 볼 수 있는 건가요? 다른 사람들은 날 보지 못하던데...] 당혹스러운 표정의 그녀에게 나는 머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음... 아버지를 잘 만난 덕분이죠. 당신 뿐만이 아니에요. 대부분의 정령들은 다 볼 수 있는걸요. 아, 당신이 이 숲의 주인인거 같은데 맞나요?] [주인? 나는 단지 여기서 살고 있을 뿐인걸요. 이상해요. 날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 하다가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표정이 되어서는 나를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내가 정말 있는 실체인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래 나는 싱긋 웃고는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잡히죠?] 그녀는 신기해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이번에는 어린아이 같아서 언밸런스하게 느껴졌다. 외모는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데 어린아이 같은 느낌이 나니 말이다. 그녀는 내가 잡혀진다는 게 신기했는지 그 뒤로도 손이며 팔이며 얼굴이며 머리카락까지 만져봤다. [이상해요. 힘을 쓰지 않고 만져지는 존재는 그 밖에 없었는데...] [그요?] 그녀의 3인칭을 호칭하는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 거리자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요.] [그... 라뇨?] 다시 한번 물었지만, 그녀는 내가 왜 의아해 하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단지 환한 얼굴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놨을 뿐이다. [항상 내 곁에 있어주고 날 돌봐줘요. 음, 지금은 볼 일이 있다고 잠깐 어디 갔다가 온다고 했어요.] [아... 저기 정말 실례지만... 당신이 말한 '그'가 바로 저 분인가요?] 내가 눈짓으로 가르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린 그녀가 손뼉을 치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예요.] 거기서는 햇빛에 산산히 부서지는 물살과 같은 색의 은빛머리를 가진 어떤 존재가 맹렬한 기세로 날아오고 있었고, 그 뒤로는 도움을 청하는 붉은 마법의 불빛이 쏘아져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 제 42화 눈물겨운 탈출기 (7) 거기서는 햇빛에 산산히 부서지는 물살과 같은 색의 은빛머리를 가진 어떤 존재가 맹렬한 기세로 날아오고 있었고, 그 뒤로는 도움을 청하는 붉은 마법의 불빛이 쏘아져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퍼엉~ 붉은 불꽃이 하늘 높이에서 터질때 쯔음 그 은빛머리를 휘날리며 날아든 존재는 어느새 우리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나이는 대략 20대 초반쯤으로 녹색 머리의 아가씨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고 살벌한 시선을 줄기줄기 내 뿜고 있는 눈은 머리색과 비슷한 은색으로 동공 테두리에는 연한 회색빛 테가 둘러 있었지만 흐린 빛이라 까딱 잘못 봤다간 눈 가운데 까만 점 하나 딸랑 있는 무시무시한 눈처럼 보이 지경이었다. [아~] 그래도 녹색 머리의 아가씨는 마냥 좋았는지 그가 다가오자 반색하며 다가갔는데 은색 머리 남자는 그런 아가씨를 옆으로 부드럽게 밀쳐 놓더니 다짜고짜로 나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대로 맞을 뻔 했지만, 다행이도 날 데리고 있어주던 엔다이론이 재빨리 옆으로 비껴가는 바람에 그의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이, 이게 무슨 짓... 으갸갸갸~~] 엔다이론 덕에 주먹을 맞지 않은 나는 그가 날 돌아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뒤 그의 행동에 대해 항의를 하려 했건만, 은발 머리 남자는 내 이야기를 들은 채도 안 하고 다시 달려드는 거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번에는 그의 팔뚝이 새하얀 창으로 변해 날 찔러오는 거였다. 다행이 이번에도 엔다이론이 잽싸게 내 주위에 방어막을 쳐 줘서 그의 창을 막아냈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은발 남자는 자꾸만 방해하는 엔다이론이 못마땅한 듯 눈쌀을 찌푸리더니 손을 휘저었는데, 그러자 그의 주위에 은색으로 빛나는 물로 만들어진, 내 팔뚝보다 더 굵어보이는 창이 다섯개나 나타나 엔다이론을 향해 곧장 날아드는 거였다. [실라이론!!] 그 모습에 기겁한 내가 다급하게 외쳐 부르자 엔다이론 앞에 바람이 모이며 거대한 실라이론의 모습이 생기는가 싶더니 그 커다란 주먹이 가볍게 움직이며 물의 창을 다 쳐냈다. [엠브로스 백작님, 빨리 와주십시오. 폭포 상류쪽으로 올라간 조로부터 구조 신호가 온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저 숲 한 구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클라우드 남작으로부터 다급한 메시지가 전달 되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불꽃이 터진 뒤 한참을 기다려도 내가 오지 않아 메시지를 보낸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실라이론까지 불러내자 이 은발 머리 남자가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듯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아, 정말... 왜 그러는지 이유나 압시다~!! 공격 할때 하더라도 이유는 알려줘야 할 거 아냐? 이봐~ 벙어리냐?] 그런 그를 실라이론과 내가 또 불러낸 엔다이론이 막아주고 있었기 때문에 잠시 여유가 생긴 내가 뒤로 물러나서 외쳤지만, 은발의 남자는 대답은 커녕 들은체도 하지 않고 계속 공격을 하는 거였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열이받아 어떻게 해야할지 궁리를 하고 있는 내 눈에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바라보고 있는 녹색 머리의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저 은발 머리 남자 도대체 왜 이러는 거에요? 혹시 알아요?] 그래 날 태우고 있는 엔다이론에게 부탁해 그녀에게 날아가며 소리쳐 묻자 은발의 남자가 무시무시한 눈길로 날 보며 외치는 거였다. [당장 떨어지지 못해~!!] [내, 내가 뭘 어쨌다고...] 그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기에 나는 괜히 움찔해서는 얼른 물러났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던 듯, 그 녀석은 내가 엄청 잘못했다는 표정으로 무시무시하게 나에게 그대로 달려드는 거였다. [용서 못해~!!] 저놈이 나에게 용서하고 자시고 할 건덕지라도 있었던가? 뭐, 그 놈이 달려들어봤자 실라이론과 엔다이론이 그 앞을 막아설 것을 알고 있던 나는 그냥 그 곳에 서서 기가막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태평하게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용서 못한다고 외치며 나에게 달려드는 은발의 남자를 실라이론과 엔다이론 둘이 맞서는 데도 은발의 남자는 조금도 뒤로 밀리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까지 여유는 있었지만, 시간을 끌면 완전히 기운을 회복 못한 내가 불리할 거란 예감에 나는 여전히 안절부절 못하고만 있는 녹색 머리의 여자를 보며 외쳤다. [어떻게 좀 해봐요.] [내, 내가 어떻게...] 하지만 내 말에도 나보고 뭘 어쩌라고... 라는 표정으로 말하는 여자때문에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내가 왜 이런 꼴이 됐는지도 황당했지만, 솔직히 이런 꼴 당하는 거에는 저 여자에게도 조금은 책임이 있는 거 아닌가? [어떻게라니요? 저 남자좀 말려봐요.] [하, 하지만... 그는 내가 말하는 걸 잘 안들어 주는걸...] [그래도 한번 해봐요!] 내 다급한 말에 그녀는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가 쪼금은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 했는지 주저주저하며 은발 머리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이제 그만해... 응?] 그녀가 기껏 나를 위해 한마디 해줬는데, 그건 상상외로 강한 역반응을 일으켜 버리고 말았다. [왜 저런 자식 말을 듣는 거야아~!!] 그렇게 외치면서 은발 머리 남자가 방방 뛰었던 것이다. [뭐, 뭐 이런 놈이 다있어어어~~!!] 나야말로 팔짝팔짝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엠브로스 백작님?" 메시지를 보냈는데도 내가 하도 안 오자 남작이 직접 날아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령들이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 사실 정신이 없어서 지금 그 눈에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도 모른다 - 내 주위에 팽팽하게 흐르는 기운을 마법사인 그가 눈치채지 못할리 없었다. 그러니 그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서려 있는 거겠지. "미안해요, 남작님. 지금 제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바빠서 그러니까 먼저 가라고 해주실래요? 아,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빨리 제 발 밑을 벗어나라고도 말해주세요." 내 다급한 말에 남작이 머뭇 거리더니 물어왔다. "저... 콘스틴스님이나 다른 분들께 지원을...?" "나중에요. 지금은 저 혼자 힘으로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부디 조심하십시오." 남작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지만, 자신은 별 도움이 안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물러났다. 그가 숲 사이로 사라지는 지 - 그러니까 피해 입지 않을 정도로 떨어졌는지 - 확인하고 있는데 은발 남자의 냉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자 힘으로 버틸 수 있다?] 이 어이없는 놈은 내가 이해 못할 일로 흥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내 말 한마디에 되게 자존심 상한 모양이었다. 그래 그 놈에게 기가막힌 시선을 돌리며 한 마디 해주려던 나는 한 단어도 입에 내 뱉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은발 남자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가지고 있다는 건 실라이론, 엔다이론과 맞붙어서도 전혀 밀리지 않을때부터 눈치 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매섭게 날 바라보는 녀석에게서 엄청난 기세가 뿜어져 나온다 싶더니만, 저~ 멀리 - 그러니까 숲을 가로지르는 강의 상류쪽 - 에서 엄청나게 커다란 흰 뱀 같은 것이 슬그머니 하늘로 머리를 내미는 것이었다. [죽여주겠어~!!] 은발 남자의 매서운 일갈과 함께 이쪽으로 마치 고무줄 늘어나듯 쭈욱 늘어나며 다가온 그것은 강이 통채로 허공으로 떠서 날아온 것만 같이 거대하고 굵은 물로 된 뱀이었다. 그걸 본 나는 본능적으로 엔다이론과 실라이론으로는 상대가 안 될거라는 걸 깨닫고 간만에 그 이름들을 불렀다. [엘라스트라, 실레스틴!!] 거대한 푸른 빛 늑대와 거인이 사라지고 그 앞에는 그 못지 않은 거대한 푸른 용과 아름답지만 튼튼해보이는 갑옷을 입고 창을 챙겨 든 여전사가 나타났다. 쿠과과과~~ 물뱀이 나를 향해 덤벼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둘을 향해 덤벼든 것인지 하여간 움직이자 실레스틴이 먼저 움직여 자신의 창을 물뱀의 머리를 향해 날렸다. 그랬더니 물뱀이 갑자기 둘로 쫘악 나뉘어져 오히려 창과 실레스틴을 한꺼번에 삼켜버리는 것이 아닌가? '헉!' 그 모습에 나는 순간적으로 실레스틴이 당하는 줄 알고 긴장했지만, 물뱀의 몸통에 그대로 삼켜진 - 뱀 몸이 물이라서 그 속에 있는 실레스틴이 그대로 다 보였다. - 그녀는 당황하기는 커녕 자신만만하게 씨익 웃고는 손에 든 창을 크게 원을 그리며 휘두르는 거였다. 그 창이 보통 창이 아니라 바람을 형상화 시킨 거라 창이 한번 휘둘러짐과 동시에 거대하고 강한 바람이 물뱀 안에서 생겨 사방으로 뻗어 나가자 물뱀의 몸을 형상하고 있던 물들 역시 그 바람에 휩쓸려 잘개잘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잘개 흩어진 물방울들이 그대로 마치 비처럼 숲을 향해 후드득 떨어지자 끝났나.. 싶었지만, 이게 왠걸... 그 뒤로 또 다른 물뱀이 강으로 부터 날아와서 덤벼드는 거였다. [뭐야, 이게? 이래선 끝이 없잖아? 야, 넌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 실레스틴이 다시 나타난 물뱀을 보더니 옆에서 조용히 있는 엘라스트라을 향해 찌릿한 눈길을 보내며 투덜댔다. 그러자 엘라스틴이 부드럽게 웃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제야 나는 다급해서 저 둘을 불러내놓기만 했지 뭘 하라고 부탁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엔다이론이나 실레이론도, 실레스틴도 모두 내가 공격을 당하니까 따로 부탁하지 않아도 그 공격을 막아줬던 것이다. [저 은발의 남자좀 제압해 주세요!!] 내가 씨근덕 거리며 여전히 날 노려보는 남자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외치자 엘라스트라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에 은발의 남자가 위협을 느꼈는지 실레스틴과 대치하던 물뱀이 스륵 움직여서 은발의 남자를 보호하려는 듯 그 앞으로 갔다. [저 흐물덩어리는 내게 맡겨!] 당찬 실레스틴의 외침과 함께 거센 바람이 불어닥쳐 물뱀을 옆으로 밀어내려고 했고, 물뱀은 밀려가지 않으려고 요동을 쳤다. 물뱀이 실레스틴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엘라스틴은 경악을 하고 있는 은발의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은발의 남자는 물뱀을 불러내는 것이 한계였는지 또 다른 물뱀을 불러내는 대신 엘라스트라에게 물로 만들어진 창을 쏘며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물의 창쯤 엘라스틴에게 다가서지도 못한 채 엘라스트라의 힘에 의해 허공에서 부서졌고, 은발의 남자는 얼마 도망가지도 못하고 엘라스틴의 긴 꼬리에 한번 채인(?)뒤 붕~ 허공을 날아가다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커다란 엘라스트라의 앞발에 붙잡혀 버렸다. [이이익~~!!] 이를 빠드득 갈면서 몸부림을 쳐보지만 엘라스트라의 앞발은 꿈쩍도 안 했다. 그래 드디어 이 괴상한 성격의 정령을 제압해서 대화다운 대화좀 해보게 될거라고 생각 했더니 생각지 않은 변수가 내 뒤통수를 쳤다. ====================================================== 제 42화 눈물겨운 탈출기 (8) 그래 드디어 이 괴상한 성격의 정령을 제압해서 대화다운 대화좀 해보게 될거라고 생각 했더니 생각지 않은 변수가 내 뒤통수를 쳤다. 쿠구구궁~~ 마치 지진이라도 나는 듯한 소리가 - 허공에 떠 있는 상황이라 진동은 안 느꼈다. - 난다 싶었더니 갑자기 아래에서 거대한 돌 기둥 두개가 불쑥 솟아 올라 그대로 엘라스트라를 꿰뚫는 거였다. [컥!] 엘라스트라가 받은 충격이 그대로 나에게 전달되는 바람에 나는 헛바람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허리를 숙였다. 일리언과 싸울 때도 한번 겪어본 통증이지만, 여전히 겪고 싶지 않은 통증이었다. 직접 타격을 받은 엘라스트라가 그 충격으로 인하여 앞발에서 약간 힘이 뻐진 모양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은발의 남자가 잽싸게 빠져나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녹색 머리 여자에게 날아갔다. [잘 했어.] 눈물이 찔끔 나는 통증 속에서도 은발 남자의 말을 들은 나는 기가막혀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 감정이 그대로 담긴 시선을 녹색 머리 여자에게 보냈더니 그녀가 미안한 듯 우물거리며 사과하는 거였다. [미, 미안해...] 그 돌기둥은 녹색 머리 여자가 한 짓이었던 것이다. 처음 은발의 남자와 부딪히기 시작한 후 부터 한쪽 구석에서 어찌할바를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기는 했지만, 은발의 남자 편을 들어 날 공격할 줄은 몰랐다. [....아니... 미안하면 왜 그런 건데? 설마 저 놈을 죽이려는 줄 알았던 거야?] 몇번 깊은 호흡을 내쉬니 서서히 통증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내 정령의 기운이 팍 줄었다는 것도 느껴졌다. 둘이 한꺼번에 나에게 덥치면 나에게는 승산이 없다. 저 녹색 머리 여자가 어리버리한 것처럼 보여도 엘라스트라를 공격한 걸 보니 적어도 상급 정령 이상인거 같은데 말이다. [날... 공격할 거야?] 그래 그녀의 약해보이는 마음을 공격하여 날 공격하지 않게 만들려고 그녀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물었더니 역시나... 그녀에게는 먹혀 들었는지 그녀가 고개를 홰홰 내젓는다. 그에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 은발 머리 남자가 끼어들어서 회방을 놨다. [저 놈이랑 말할 필요 없어. 그냥 공격 해!] 그러자 녹색 머리 여자의 얼굴에 갈등하는 기색이 어렸다. 저 표정을 보니 은발 남자가 한번 더 강권하면 날 공격할 것 같았다. 그래 나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뭐? 야, 도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거야? 이유나 좀 알자!] 물론, 아까도 계속 물어본 거였지만 대답을 못 들었기에 난 이번에도 대답을 하리라고는 기대 안 했다. 단지 열받아서 항의조로 외친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은발 남자가 너무 흥분한 덕인지 의외로 대답해주는 거였다. [네 놈이 얘한테 접근했잖아! 얘를 꼬셔서 나에게서 뺏으려는 거지?] 그 대답이라는게 정말 어이없는 것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뭐, 뭣이라? 지금 누가 누굴 꼬시려 했다는 거야? 내가 이래뵈도 인기가 많아서 그 아가씨가 아니라도 나 좋다는 사람 많아!] 정말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지만, 당시에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제 정신이 아니었던 듯 싶다. 그런데 제정신이 아닌건 나만이 아닌 모양이다. [거짓말 마! 그럼 왜 접근한 건데?] [접근이라니? 단지 우연히 만난 것 뿐이야.] [네놈 말은 못 믿어. 이 애에게 접근한 이상 절대 살려두지 않을 거야!]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완전히 의처증 환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만 들었지 그런 증상을 가진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였지만... 다시 허공을 둥둥 뜬 물뱀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마리가 아니라 두마리 였다. 아까 엘라스트라에게 당한 은발 남자가 힘 좀 쓴(?) 모양이었다. [노에아넨, 셀레아나.] 나는 속으로 한 숨을 내쉬며 결국 최상급 정령 네명을 다 불러냈다. 시간만 끌면 기운을 많이 소모한 내가 불리할 거란 생각에 속전 속결로 끝내려 한 것이다. 노에아넨은 혹시나 모를 변수인 녹색 머리 여자를 감시하게 하고 셀레아나에게 은발의 남자를 제압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 모습에 은발의 남자가 놀란 표정을 하더니 녹색 머리 여자에게 말했다. [저것 봐. 날 죽이려고 하잖아.] [먼저 덤빈 건 네 놈이잖아!] 내가 뒤에서 소리를 빽 지르는데 녹색 머리 여자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앞으로 나서는 거였다. 그 모습에 뭔지 모르지만 내가 실수했다는 느낌이 팍 드는데 그녀가 물었다. [정말... 그를 죽일 거야?] [뭔 소리야? 그냥 제압만 할 거야. 그리고 대화를...] 그러나 내 말을 녹색 머리 여자가 처음으로 중간에서 싹둑 잘랐다. [그를 아프게 하는 건 내가 용납 못해!] 그녀의 뒤에서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는 은발 남자를 보며 나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속전속결로 끝내려고 한게 실수였던 모양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동안은 은발 남자가 질 것 같지 않으니까 가만히 있었던 건가? [먼저 시작한 건 저쪽이라고!] 나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외침은 흘려 들은 채 은발의 남자와 녹색 머리의 여자가 본격적으로 덤벼들 포즈를 취했다. '이런... 기운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지원 요청을 할껄~' 아, 누가 말했던가...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라고... 녹색 머리 여자가 맹~ 한 구석이 있어서 은발 남자보다는 강하지 않을 거라는... 조금 얕보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왠걸? 그녀가 한번 작정을 하니까 은발 남자보다 더 강력해 보이는 거였다. 그녀의 힘에 의하여 숲이 요동을 치더니만, 15층 아파트 크기만한 거대한 골렘이 서서히 일어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 골렘이 완전히 일어나기 전에 막으려는 생각인지 셀레아나가 그녀에게 위협하듯 날아들자 그녀가 재빨리 하강하여 숲속으로 사라졌나 싶었는데, 갑자기 숲의 나무들이 쑥쑥 자라나 셀레아나 앞을 가로막는 거였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에 내가 얼이 빠져있는 틈에 두 마리의 거대한 물뱀이 각각 엘라스트라와 실레스틴을 향해 덤벼들기 시작했다. 그 물뱀들은 아까 실레스틴의 손짓 하나에 쉽사리 갈기갈기 찢어져 놓고서는 이제는 그때와는 다르다는 양 엘라스트라와 실레스틴과 맞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기력이 딸려서 그 둘이 실력 발휘를 못하는 건가? 아까 엘라스트라와 실레스틴 둘만 불러냈을 때에는 그래도 견딜만 했었는데 네 정령을 한꺼번에 불러내니 몸 속의 기운이 팍팍 줄어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 이거.. 속전 속결로 하려다가 내가 죽겠다.' 아래에서는 뭘 하는지 모르겠다. 커다란 골렘이 갑자기 만들어져서 일어나면 뭔 일인가 보러 와야 하는 거 아닌가? '남작도 그래. 보이지는 않더라도 내가 누군가와 대결하고 있다는 건 눈치 채고 갔을텐데, 그러면 내가 아무리 사양했다 하더라도 사태가 어떻게 됐는지는 보러와야 하는거 아니냐구...' 속으로 투덜대며 도망가야 할까 말까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목하고 옆구리에 차가운 송곳 여러개가 한꺼번에 쑤셔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윽...] 보니까 엘라스트라가 그 물뱀 녀석에게 밀려가지고 목을 물려 있었고, 실레스틴은 옆구리를 물려 있었던 것이다. 다행이 실레스틴의 갑옷이 단단히 버텨준 덕분인지 옆구리는 그나마 덜했지만, 내 정신을 한 순간 흐트러 뜨리기에는 충분했다. 순간 '당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령의 기운이 얼마 남지 않아서 의식적으로 그들에게 보내주는 기운의 양을 조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정신을 흐트렸으니.. 과연, 그 새를 참지 못하고 몸속에서 기운이 한꺼번에 확 빠져 나갔고, 그 바람에 머리가 띵 해졌다. '윽...' 거기까지는 그래도 좋았는데, 그 뒤가 문제였다. 나도 모르게 어지러움을 느낀 내가 쓰러지지 않기 위하여 타고있던 엔다이론의 등에 손을 짚었는데, 하필 그때 4대 나이트급 정령이 내 기운을 다 가지고 가는 바람에 엔다이론이 이쪽에 있는 게 한계였던지 그대로 스르륵 정령계로 강제 소환 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 허공에서 지상으로 추락하.... 할 뻔 했지만, 그 전에 누군가가 거칠게 내 손목을 낚아챘다. [멍청한 놈. 그러길래 항상 마지막을 대비한 기력은 조금 남겨놓으라고 이야기 했었건만...] [그럴 틈이 없었잖냐. 한 순간 정신을 흐트러뜨리는 바람에 기력을 최상급 정령들에게 다 빼앗겼으니...] [흠... 앞으로 정신력을 좀 더 단련 시켜야 하겠군.] [그래도 제법이야. 아직 많이 서툴기는 하지만, 정령을 다루는 솜씨가 많이 나아지지 않았어?] 익숙한 목소리들... 처음부터 아버지, 노아스, 실피드, 이프리트 아저씨 순이었다. [나아지기는... 아직 멀었어.] 아버지가 입으로는 투덜 거렸지만 그래도 자식이라고 조심스레 품에 안아줬다. [헤헤헤... 아버지... 아저씨, 실피드님, 노아스님 오랜만이에요.] 아버지가 거칠게 잡은 손목이 아직 저릿저릿 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말투를 보니 아무래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 그런데... 기운이 다 떨어진 탓인지, 아니면 아버지를 비롯한 든든한 원군이 나타난 덕인지 머리가 몽롱한 것이 점점 시야가 흐려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저 멀리서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은발 녀석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린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 제 42화 눈물겨운 탈출기 (9) 어렴풋이 정신이 드는 걸 느끼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요즘들어 너무 자주 기절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거였다. '내가 언제 이렇게 허약했다고 말이지...' 그리고 그 다음 날 포근하게 안아주는 부드럽고 시원한 기운에 기분좋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즉각 날아오는 아버지의 일갈. [이제 일어났냐?] 눈을 떠보니 품에 날 안고 있는 아버지가 고개를 내려 날 보고 있었다. 못마땅하다는 시선이었지만, 왠지 기분이 좋아진 나는 갑자기 어린애가 된 듯한 기분으로 아버지의 품에 깊숙히 얼굴을 묻었다. [음... 기분 좋다.] 그 순간. [오호라, 저 놈 얼굴 좀 보게? 이봐 노아스, 엘라임이 저런 표정 하는 거 봤어?] [완전 맛이 간 얼굴이군. 내 평생 엘라임의 맛 간 표정을 보게 될 줄이야. 역시.. 오래살고 볼 일이야.] [시끄러워! 이것들이 죽고 싶지?] 실피드와 노아스의 놀리는 기가 다분한 말이 끝나자마자 아버지의 일갈이 터져 나왔지만, 그래도 품에 안은 나를 내치지는 않았다. [오오... 엘라임의 저 모습 정말 그대로 보기 아깝군. 이럴때 그 퍼런 도마뱀을 불러와서 마법 영상으로라도 남겨놨어야 했는데.] [아하하하~~] 그런 아버지의 일갈에 눈썹 하나 까딱할 실피드가 아니었다. 그 뒤로 나온 정말 안타깝다는 듯한 말에 노아스가 시원스레 웃었다. [그만들 좀 해라. 앞으로도 계속 보게될 텐데 벌써부터 그렇게 놀리면 어쩌냐?] [이프리트 네놈까지이이~~!!] [보기 좋다는데 화낼 건 없잖아? 그나저나, 해인이가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나보네?] 따스한 이프리트 아저씨의 손길이 뒤통수에 느껴졌다. 그 손길에 고개를 들고 아저씨를 향해 웃어보이려고 했는데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조금만 움직여도 온 몸이 쑤신것이, 왠지 맨 처음 아버지를 만나고 크게 얻어맞었을 때가 생각났다. [아구구구.... ] [무리할 거 없어. 벌써 정신을 차린 것도 놀라운 일인걸 뭐. 기운도 아직 회복이 덜 되었는데...] 노아스의 말에 실피드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다 아버지의 정성 어린 간호 때문이 아니겠어?] [오호라, 그렇군.] [가만 안둔다 네놈들~!!] 아버지는 그러면서도 내가 바로 앉으려고 꼼지락대자 내 몸을 들어 편히 앉혀주고 다시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정령왕들 말고도 두 존재가 더 근처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라?]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서 있는 녹색 머리 여자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부루퉁하게 서 있는 은발의 남자. 그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적의가 가득 담긴 시선을 보내왔다. 볼이 부루퉁하게 부었으면서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거 보니 정령왕들에게 혼이 난 모양이었다. '그거참 쌤통이다.' 내가 그 모습에 킥킥 거리고 웃자 은발 남자의 눈에서 불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아쭈? 네놈이 지금 누구한테...? 눈 안 깔아?] 아버지의 일갈에 은발의 남자가 흠칫 하더니 시선을 아랫쪽으로 떨어뜨렸다. 그 은발 남자의 모습에 조금 전만해도 꼬습게 생각하던 감정의 귀퉁이에 쪼금 아주 쪼오오오끔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아버지에게 당했으면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저렇게 흠칫 거릴까나? 은발의 남자나 아버지나 정령이 아닌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저 은발의 남자는 눈 주위가 시퍼렇게 멍들고 입술은 피터지고 머리는 헝클어지는 등등 모습이 장난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런 은발의 남자를 안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원래는 찍 소리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모습에 좀더 놀려주려고 했었는데, 이놈의 입이 엉뚱한 말을 내뱉는 거였다. [그렇게 노려볼 거 없어. 우리 일행은 금방 여기서 나갈 거니까. 여기서 계속 있고싶어도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거든.] 그제야 은발의 남자가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보고 조금 더 놀려줄까 말까 하는데 노아스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날 돌아봤다. [어, 너 이 녀석 그냥 냅둘꺼야? 너랑 같이 있던 인간들을 죽였는데?] [예? 그건 또 무슨 소리래요?] 뜻밖의 소리에 내가 놀라서 묻자 노아스가 알겠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뭐야, 너 몰랐구나? 이 녀석 너에게 달려들기 전에 폭포 쪽으로 다가가던 사람들하고 한바탕 했었거든. 아마 네가 숲의 정령에게 접근하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그 사람들 다 죽었을 걸?] [포, 폭포요?] 폭포는 또 어디란 말인가? 그러고보니 강의 상류와 하류쪽으로 탐색조가 가기는 했었다. '하류쪽이 리건이 있는데고 상류쪽이 마르타국 측 사람들이었는데. 설마... 리건이 있는 쪽인건 아니겠지? 설사 그렇다고 해도 리건이 쉽게 당해줄리는.... 있을지도 몰라. 그 녀석 유희니 뭐니 해가지구...' 걱정스러운 마음에 노아스를 바라보자 그녀는 순순히 대답해줬다. [강 상류쪽에 커다란 폭포가 있거든. 어, 혹시 너 눈치채지 못한 거야? 이 녀석이 그 폭포와 강의 정령이잖아?] [에?] 어쩐지, 그래서 물로 형성된 뱀을 부릴 수 있었던 거로구만? 거기다가 상류쪽이라고 하면 마르타국 사람들이었다. 왕실 기사단측과 충돌한게 아니라는 걸 깨닫자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강과 폭포의 정령을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도대체 그 사람들은 왜 공격을 한 거야? 저 숲의 정령에게 접근한 것도 아닌데...] 그러자 은발의 정령은 주위를 한번 힐끔 보더니 다시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그래봤자... 언젠가는 이 애한테 접근할 거잖아.] [그, 그게 뭐냐? 어차피 정령이라서 보통 사람들 눈에 안 보이게 할 수도 있을텐데...] 기가막혀서 중얼거리는데 노아스가 설명해주듯 입을 열었다. [이 녀석 질투가 어마어마해. 오죽했으면 숲에 사는 몬스터나 동물들을 다 쫓아냈겠냐?] [어? 이 정령들을 알고 계셨어요?] [아아... 대지의 기운을 가진 자연계 정령이 별로 없어서 태어날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기는 했었지.] 그러면서 노아스가 손짓하자 녹색 머리 여자가 우물쭈물 하더니 쪼르르 달려와서 노아스의 발치에 얌전하게 앉았다. 그에 은발 머리 남자의 눈에서 다시 불이 켜졌지만, 실피드가 쓰읍 하는 소리를 내자 시선이 다시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 모습에 노아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이 애가 태어났을 때 옆에서 지켜본게 저 녀석이었거든. 그 뒤로 잘 챙겨주기에 괜찮은 녀석인 줄 알았는데... 왠걸? 인간들 용어로 소유욕인가, 독점욕인가? 하여간 그런 감정이 어마어마해서... 아, 너도 알지? 저쪽에 알고 있는 호수의 정령... 그 정령이 좀 더 늦게 태어났었는데... 숲의 정령이 잠깐 돌봐줬었는데 그게 또 마음에 안들었나봐. 그래서 호수의 정령을 따 시킨거 알아? 장장 2천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말이야. 아마 아직도 이야기도 안 할걸?] 노아스의 설명에 나는 입을 따악 벌렸다. [뭐, 그 그런... 치사한....] [오죽 했으면 얘가 동물들을 예뻐하는 걸 알고 숲에서 동물들을 다 쫓아냈겠냐? 너 혹시 강 속 봤니? 봤으면 알거 아냐? 이 근처에는 물고기도 없는 걸. 아마 이 애가 나무들 에게서 힘을 얻지 않았으면 아마 나무들도 모조리 갈아 엎었을 거야.] [우와... 세상에나...] 왠지 숲의 정령이 엄청 불쌍해져지만... 그 뒤에 나온 실피드의 말에 다시 밑으로 쑥 내려갔다. [불쌍하게 생각할 것 없어. 지가 좋다는데... 그러니까 너에게 공격한 거 아니냐?] [어... 것도 그러네...] 그러고보니 떠오른 사실 하나. '아앗... 어쩐지... 일리언의 그 말이 무슨 소린가 했더니만... 혹시, 일리언이 강과 폭포의 정령에게 복수하려고 일부러 날 이쪽으로 보낸 거 아냐?' 여기 오기 전 이쪽으로 나오는 길을 알려주면서 일리언이 나라면 분명히 살수 있을 거라고 했던 말이 이 뜻이었던 거다. 기가 막히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마음 이해할 수도 있을 거 같다. 나 같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은발의 남자에게 한방 먹이고 싶었을테니까. 하지만, 아마 일리언보다 더 오래된 자연계의 정령일테니 혼자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때 마침 떨어진 날 이용한 거겠지. '뭐, 목적은 이뤄진 셈인가? 그래도 그렇지... 설명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냐?' 속으로 꽁시렁 거리고 있는데 실피드가 움찔 하더니 입을 열었다. [흠... 해인이를 찾으러 오는데 어쩔거냐? 네가 계속 데리고 있을 거냐?] [가야지. 나도 슬슬 정령계에 갔다와야 하고.] 그러면서 아버지의 기척이 사라진다 했더니, 나는 어느새 어느 나무 밑둥에 조심스레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오오~ 자식을 두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실피드의 능글거리는 말소리에 지체없이 아버지의 일갈이 날아들었다. [죽을래?] [아하하하~~] [자, 그러면 해인아. 우리는 이만 가볼테니 몸조리 하거라.] 이프리트 아저씨의 다정한 인삿말을 뒤로 하고 네 정령왕이 두 자연계의 정령을 이끌고 스르르 사라져갔다. 그리고 저 멀리서 날 부르는 소리들이 어렴풋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해인니이이이임~~~" "엠브로스 백작니이이임~~ 어디 계십니까아아아~~~" "나 여기 있어요~!" 라고 소리쳐 주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포근한 품이 사라지자 왠지 몸의 욱씬거림이 더 크게 느껴진데다 목도 꺼칠꺼칠 한 것이 성대를 통해 소리를 내는 것도 힘겹게만 느껴졌다. 그래 알아서 찾겠지... 하는 무책임한 생각으로 그냥 그대로 스르르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역시나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일행들이 강가에 만들어놓은 캠프 자리에 옮겨진 뒤였다. 온 몸에 욱신거리는 통증은 사라져 있었지만 왠지 물 먹은 솜처럼 나른하고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었다. 아마도 내 옆에서 계속 간호를 했었을 첼릿의 말에 의하면 숲 속에서 기절한(?) 나를 발견해서 캠프자리로 데리고 오자 그때부터 갑자기 열이 펄펄 나기 시작하더니 이틀을 내리 꼬박 정신을 잃고 있었다고 했다. 일리언과 싸울때도 힘을 다 써서 기절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좀 더 무리를 해가지고 몸이 크게 놀란 모양이었다. 나도 그렇게 앓아 눕고 노아스가 말해줘서 눈치챘듯이 강 상류쪽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부상을 당해서 일행들은 다친 사람들이 회복될 때까지 여기서 머물기로 결정했다는 거였다. 몬스터들도 없겠다, 옆에 강 흐르겠다 딱 좋은 자리라서 - 동물은 없지만 숲에 먹을 풀들과 나무 열매들은 많았으니까 말이다. 하긴, 건드릴 이가 없어서 그런거겠지만... - 캠프 자리로는 그만이었던 것이다. 은발 남자에게 공격당한 몇몇 마르타국 사람들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딱 두명 남고 모조리 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남은 사람 중에 미노트 남작이 남아있는 거 보니, 아무래도 그라함 대제의 보석 덕을 톡톡히 본거 같기도 하다. 그들과 같이 간 용병들은 그나마 절반은 목숨을 건졌다고 하니 다행인 듯. 그런 이유로 우리가 그 숲을 빠져나간 건 거의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그 동안 몇몇 마법석과 마법금속에 아쉬움을 버리지 못한 이들은 그걸 찾으러 사방으로 돌아 다닌 듯 하지만, 그들이 그런데 전문이 아닌데다가 램버트도 전혀 협조를 안 해줘서 손톱 만큼도 못 찾은 듯 했다. 그리고 그때쯤에는 부상자들도 완치가 되었고, 나도 기운을 차려서 팔팔해졌었다. 의아한거라면... 왠지 정령의 기운이 전보다 좀 더 많아진거 같다는 걸까? 한번 몸 속에 있는 걸 몽땅 써버린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강과 폭포의 정령과 숲의 정령은 우리가 그 숲을 빠져나갈때까지는 공격은 커녕 콧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정령왕들이 단단히 엄포를 놔서 그런지, 아니면 지레 겁먹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일단 행선지는 가까운 해안으로 가자고 정해졌다. 해안으로 가서 거기서 뗏목을 타고 가든지 해안을 따라 가던지 이대로 아메리국으로 넘어가든지, 다시 새클턴국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든지 하는 여러가지 문제가 남아있기는 했지만 그건 그때가서 정하기로 했다. 우선은, 이 정글을 헤쳐 나가는 것에 모든 걸 걸어야 할때니 말이다. 그렇게 의기투합하고 미완성의 지도와 밤의 별자리와, 정령들이 가르쳐준 방향에 의지하여 정글속을 다시 헤쳐가기 시작한지 나흘째 저녁... 우리는 갑자기 숲속으로부터 쏟아진 화살 세례를 받았다. '아아... 정글을 빠져 나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구나...' 아마 그때 모든 일행들이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떠올린 생각이었을 거다. ====================================================== 제 43화 모기를 우습게 보지 마라 (1) 제 43화 모기를 우습게 보지 말라 화살비 정도야 우리에게 커다란 위협은 되지 않았다. 그 동안 맞닥드린 몬스터들에 비하면야 정말 귀여운 장난이라고 밖에 생각 되지 않을 정도였던 것이다. 내가 나설 것 까지도 없었다. 나서기도 전에 듀비하고 첼릿이 앞으로 나서서 다 쳐냈으니까. 그걸 보면서 생각한 건데, 혹시나 다른 곳에서라면 통용될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왠만한 몬스터들에게 통하기는 커녕 오히려 역효과로 이 화살을 쏜 존재들에게 쳐들어가게 만들 것 - 보통 이런건 방어용으로 하는 거였으니 말이다 - 같았다. "참내, 정말 기가막히는 군. 내 살다살다 이렇게 엉성한 장치는 처음본다." 어느새 올라간 건지, 램버트가 나무가지 사이에서 얼굴을 내밀며 뭔가 하나를 툭 던졌다. 그건, 가느다랗고 굵다란 밧줄과 덩쿨이 걸려있는 - 아마 화살을 쏘게 만든 장치인듯 - 커다란 화살이었다. 그걸 나무 밑으로 떨어뜨린 램버트가 자신도 타잔같은 날램으로 훌쩍 나무 위에서 뛰어 내렸다. 그러더니 나무 밑으로 다가가 이것저것 살펴보더니 얼핏 보면 못보고 지나칠 정도로 눈에 잘 안 띄는 가느다란 밧줄 같은 걸 가지고 왔다. "호오... 이건 몬스터의 심줄 같은데? 이렇게 탄력이 있다니... 아마 이걸 건드리면 화살이 발사되게끔 했나보군. 장치는 엉성해도 위장해 놓은 거나 활의 위치는 괜찮은 걸?" 자신이 발견한 심줄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잡아당겨보고 하며 감탄한 듯 했지만 그 다음 인상을 찡그리며 바닥에 떨어져 있던, 부러진 화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이런 화살 정도가 여기서 통용되는 무기던가?" 그건 정말 말 그대로 보통 화살이었다. 뭐, 화살 촉이 엄청 뾰족한 돌로 되어 있어서 그냥 스치기만 해도 상처가 날 것 같긴 했지만, 어차피 화살 촉이란게 다 뾰족한 거고, 화살깃이 달려있지 않기는 했지만, 안 달 수도 있는 거고, 그런거 빼면 정말 평범한 나무 화살이었다. "무슨 이유로 이런 장치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화살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사람 혹은 유사인종이 살고 있다는 뜻 아닙니까?" 콘스틴스가 희망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 동안 말은 안 했지만, 모두들 식량난 때문에 고생고생 했던 것이다. 식수야 물의 정령들과 계약을 맺은 정령사들이 담당을 해줘 덜했지만, 먹는거야 어디 그럴수가 있겠는가? 드문드문 열매가 매달린 나무들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독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거니 섣불리 만질수도 없었다. 게다가 탐험에 지식이 있는 클라우드 남작의 말에의하면 열매가 무척 풍성한 시기가 아닌때에 나무에 그대로 매달려 있는 열매는 위험한 거라고 했다. 만약 먹을 수 있는 열매라면 근처에 몬스터든 동물이든 그냥두지 않을 거라는 거였다. 그게 아무리 나무 위에 있고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겨우 한두개 있는 거면 안심하고 먹을 수 있지만, 보란듯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일수록 먹지 못하는 열매일 확률이 높다고 했다. 기실 어떤 기사가 너무나 달콤해 보이는 붉은 열매를 보고 하나 슬쩍 따먹었다가 며칠동안 설사만 좍좍하고 음식도 제대로 못 먹는 등의 증세를 보인 적이 있었다. 마법사들이 달려들어서 해독마법을 걸어줘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나마 듀비가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알고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이 시기는 수확 시기가 아닌지 발견되는 시기는 드물고, 발견되는 열매는 적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식량을 찾으러 사냥을 떠날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화살을 사용하는 그 누군지 모를 존재를 만날 수 있다는 건 혹시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라 콘스틴스가 희망을 보인 거였다. "글쎄... 우리를 도와준다면 좋겠지만, 적대한다면 그것도 또 골치아픈 일 아니겠습니까?" 정글에 들어와서 계속된 적대관계만 겪어 아예 불신증에 걸렸는지 난색부터 표하는 미노트 남작이었다. 그는 얼마 전에 강과 폭포의 정령에게 그나마 남아있던 같은 나라 사람들이 전멸을 당하고 자신 외에 단 한사람만 남자 기가 팍 죽어 있었다. 그래서 더 몸을 사리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번 시도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정 적대적이라면 그냥 떠나고 말입니다. 식인종이 아닌 이상 적대적이라도 무조건 덤벼들지는 않을겁니다." "어차피 덤벼도 우리가 그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생겼는지 홀리스터경이 씩씩하게 외쳤다. 아니, 자신감이 아니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희망에 씩씩해진 건가? 하지만, 홀리스터경의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감의 뜻을 표하자 마노트 남작도 더 이상 뭐라하지 않았다. 사실, 그도 더 좋은 식량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를 기회가 생겼는데 그대로 차버리긴 아쉬웠을 거다. 그가 입을 다물자 칼슨 마법사가 나섰다. "제가 주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탐색 결과 부락인 듯한 곳이 발견되기는 했다. 그런데, 그 곳이 우리가 지금 전진하는 방향과 다른 방향이라는 것이었고, 거리가 꽤 먼 곳에 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어쩔까요?" 칼슨이 자신이 발견한 것을 이야기해주고 주위를 둘러보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리건을 향했다. 모두들 자신의 의견을 가탄없이 꺼내고 주장하고 논쟁하기는 했지만, 마지막에는 꼬옥 리건의 허락을 받으려고 했다. 그의 실력때문인지, 아니면 카리스마때문인지 - 하기야 실력 덕분에 카리스마가 나오는 걸테지만... - 하여간, 그런 이유때문에 은연중에 일행은 리건을 리더로 인정하는 분위기였기에 이번에도 그의 지시를 받으려고 했던 거였다. 그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건은 무책임하게 어깨를 한번 으쓱이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가보지." "이거 참... 제 생각이 좀 이상한 거 같지만... 아무래도 이쪽으로 오라고 유혹 하는거 같지 않습니까?" 세번째 쏟아진 화살비를 피하고 나자 그레이가 땅에 떨어진 화살을 집어 들어 화풀이 하듯 부러뜨리며 중얼거렸다. "유혹이 아니라 열받아서 쳐들어오게 하려는 거겠지." 그의 말을 받아 램버트가 자신의 도끼를 쓰다듬으며 투덜대자 덤버트가 동감이라는 듯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상하군요. 처음에는 약한 최전선 방어막이라고 생각 했는데... 계속 이러니 진짜 이쪽으로 오라고 하는 것만 같아요. 부락을 방어하는 거라면 좀더 철저하게 하든지.. 이건 아니한만 못하군요." 차트워드경도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처음 두번까지는 참았던 차트워드경의 인내도 이쯤되니까 한계인듯 목소리에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화살비가 살상력이 크게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은근히 사람 신경을 긁는 면이 있었다. 그때문인지 처음에는 '뭐야?' 하며 황당해 하던 사람들의 표정이 슬슬 험악해져 가고 있었다. "가보면 알겠지." 그런데 리건이 건조하게 한마디 하자 마치 달궈진 대기에 차가운 물이 한 바가지 씌워진 듯 가라앉는 거였다. 일부러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말한 시기가 참 공교로운 것이 열받는 우리가 별거 아닌거 가지고 그런것 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차트워드경 조차 그렇게 생각했는지 약간 얼굴을 붉히며 어물거렸다. 일행들이 다시 이성을 되찾은 듯 차분해지자 리건은 성큼 성큼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날 보호하기 위하여 나보다 약간 앞에 나서있던 첼릿이 그런 리건의 뒷모습을 쓰윽 바라보더니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역시... 괜히 최연소 나이로 왕실 기사단 단장을 맡은 게 아니었군요. 적으로 돌리기 무서운 사람입니다. 나이에 비해 심계가 엄청 깊군요." '아마 나이만큼 깊을걸요.' 첼릿의 말에 속으로 키득대던 나는 듀비도 리건에게 감탄했을까 싶어서 그를 힐끗 바라보는데, 감탄한 것 치고는 반응이 영 이상했다. 왠만해서는 감정을 잘 나타내지 않던 그의 표정이 내가 봐도 흠칫 놀랄 정도로 무척 딱딱하게 굳어져 있던 것이다. "듀, 듀비? 왜 그래요?" 놀라서 조심스레 불렀는데도 대답은 안 해주고 대신 아랫입술만 잘근 깨물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의 어깨도 얼굴 못지 않게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에... 뭔 일이래?'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반응에 다시 묻지는 못하고 나는 머쓱하니 걸음을 옮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또 얼마 걷지 않아 일행은 다시 멈춰섰다. 나는 체술이 없어 마법사들과 함께 일행 중간쯤에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왜 앞장선 사람들이 멈춰 섰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첼릿이 기겁하는데도 불구하고 슬금슬금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는데, 맨 앞에 서 있던 리건은 태연하게 서 있는 것에 비하여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기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앞에는 사람들에게 긴장을 줄 만한 몬스터나 어떤 위협적인 존재는 커녕 또깽이 한 마리 없는 거였다. "왜 그래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누구에게랄것도 없이 묻자 리건이 허리를 굽히더니 자신의 발 바로 앞에 있는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아까는 앞쪽에 신경을 쓰느라 잘 몰랐는데, 그 나뭇가지는 땅에 놓여 있는게 아니라 땅에 박혀 있는 거였다. 뭐, 땅이 돌바닥이 아니라 나뭇가지 하나 정도 박아놓는 건 전혀 어려울 건 없어 그렇게 특별하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드디어 도착한 것 같아." 리건의 한마디에 나는 유심히 그가 든 나뭇가지를 지켜봤다. 마치 그게 무슨 표식이라도 되는 양.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길이가 내 손바닥 보다 약간 긴 평범한 나뭇가지였다. 방금 나무에서 꺾은 듯 마르지는 않았지만... 리건은 싱긋 웃으며 그 나뭇가지를 살짝 허공에 던졌다가 낚아채나 싶더니 우리 앞쪽에 있는 커다란 나무 위를 향해 던졌다. 쒜액~ 그냥 던진 것 같았는데도 그 나뭇가지는 마치 활에서 쏘아진 화살 마냥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나무 위의 무성한 나뭇가지를 뚫고 들어갔다. 탁~ 얼마나 세게 꽂혔는지 그 나무와 좀 떨어진 나에게까지 꽂히는 소리가 들린것으로도 모자라 나무가 흔들리며 마른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거였다. 왜 쓸데없이 능력 자랑을 하는 건가 싶어 황당하게 바라보는데, 리건이 맞춘 그 나무 위의, 나뭇가지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킥~ 하는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기척을 드러냈다. "대단한 실력이군. 우습게 보지 말라... 이건가?" 낮선 목소리지만, 확실하게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 그제야 나는 리건의 도착했다는 말이 무슨뜻인지 알아챘다. "나는 단지 인사에 대한 답례만 했을 뿐이지." 리건의 덤덤한 말에 누군지 모를 존재가 후후 하고 낮게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헉...'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순간 난 헛바람을 들이켰다. 나타난 존재는 듀비와 마찬가지로 뾰족한 귀에 파란 빛이 도는 피부, 그리고 등까지 내려오는 찰랑이는 밝은 금발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블루엘프...' 반사적으로 듀비를 돌아본 나는 그가 뭔가를 체념한 듯한 한숨을 내쉬는 걸 볼 수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듀비님.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다 했는데... 인간들의 안내인 노릇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높은 나무 위에서 가벼운 동작으로 땅바닥에 내려온 금발 머리의 블루 엘프는 다른 사람들은 다 무시한채로 척척 걸어와 듀비앞에 서더니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정중하지만 비꼬는 어투를 보아하니, 듀비와 사이가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길 안내는 마을 자체에서 하는 것 같던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규칙이 많이 바뀐 것 같군." 그런 비꼬는 말투에도 역시 듀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무감정한 어투로 대답하자 금발의 블루 엘프가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동안 여러가지 사정이 있어서 말이지요. 어쩌시겠습니까?" 밑도끝도 없이 그렇게 말하며 금발 머리 녀석이 옆에서 멀뚱거리며 보고 있는 우리들을 눈짓으로 가르켰다. 그러자 듀비가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 아니, 같이 가시겠습니까?" 말하다가 갑자기 마음이 바뀐 듯 말을 바꾸는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전에... 제가 살던 마을이 보고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전에 말한 적은 있었지만, 단순한 호기심으로 꺼낸 말인데다가 그 말을 하고 난 뒤 듀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탓에 나는 조용히 그 호기심을 접었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뜬금없이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건 뭐람?' 듀비의 말에 내가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는지 그 금발 머리 녀석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거였다. 그 시선에 갑자기 기분 나빠진 나는 거의 충동적이다시피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가 안 된다면 같이 가겠습니다." 그러자 첼릿이 기겁하고 나섰다. "저도 갑니다. 절 떼어놓을 생각은 마십시오." 거기에 램버트까지 따라붙었다. "흠, 나도 가면 안될까? 도움이 되면 되었지 방해는 될 거 같지 않은데... 더구나 그 장착한 활에 대해 몇마디 말해줄 것도 있고..." 그래봤자 쉽게 접하지 못하는 종족들이 어떻게 집을 짓고 살아가는지 보고싶어서 가는 걸테지만 말이다. 그런 말에 듀비가 난처한 기색을 보이려는 찰나, 금발 머리가 잽싸게 나서서 환영 하는 거였다. "그럴 거 없이 모두 다 같이 가시지요? 어차피 모두들 듀비님의 일.행 이 아니십니까?" 그러면서 듀비를 바라보는 그 금발 머리 녀석의 눈에는 듀비가 곤란해 하는 걸 무척 즐기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아예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건가? 사이가 좋지 않아도 너무 좋지 않은 듯 했다. '에휴, 하필이면 마을 가까이 와서 저런 녀석과 처음에 마주칠 건 뭐람...' 속으로 혀를 끌끌 찼지만, 내가 뭘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니라 듀비의 눈치만 슬금슬금 살필 뿐이었다. 그런데, 이때 리건이 일부러 그런건지 - 분명이 그런 듯 싶지만 - 반색하며 금발머리 녀석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거 아닌가? "초대해 준다니 감사합니다. 그럼 신세좀 질까요?" 아까는 반말을 해놓고서 이제와서 왠 존대인지 원. ====================================================== 제 43화 모기를 우습게 보지 마라 (2) 마을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은 처음에 칼슨이 예측했던 것보다 대략 두배는 더 걸린거 같았다. 왜냐하면, 앞장 서서 길을 안내하던 금발머리 블루엘프가 직선으로 가는대신 길을 삥 둘러서 갔기 때문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뒤를 졸졸 따라가던 나 조차도 눈치 챌 정도였으니 얼마나 요리조리 구불텅구불텅 갔겠는가? 그렇게 간 이유가 아마도 가는 길 곳곳에 설피한 화살 때문인 듯 했지만 말이다. 그가 나타나서 그런지 듀비는 리건이랑 같이 일행 앞쪽에서 금발머리 블루엘프 바로 뒤를 따랐지만, 나는 첼릿에게 끌려서 일행의 중간쯤으로 물러났다. 이건 내 생각인데 첼릿이 날 이끌고 오기 전에 그하고 튜비하고 사이에서 눈짓이 오고간 것 같았다. 정글에 오기 전부터 자주 수련을 같이 하더니 어느새 눈빛만으로도 대화가 가능한 경지까지 오른 모양이었다. "조심하시는게 좋을 듯 싶습니다. 아무래도... 저 블루엘프녀석이 꺼림직 합니다." 나타난 금발머리 블루엘프가 듀비와 안 좋은 사이라는 건 나도 눈치챘었던 터라 첼릿의 경고는 쫌 씁스레 했다. 물론, 내가 모든일에 미숙하기는 했지만, 첼릿은 나를 너무 어린애보듯 하고 있었다. 하기야... 첼릿이 보기에는 내가 어린애긴 하겠지만서도... 그럼 첼릿은 자신을 내 보모라고 생각하는 걸까나? '그러고보니 전 엠브로스 백작인 이브스햄도 내가 실수할까봐 늘 노심초사하고, 에르미아도 동생보듯 하고... 물론 내가 그녀보다 나이가 적긴 하지만... 본가의 집사인 엘버트나 윙겟경이나... 리건은 물론이고 조엘도... 젠장... 날 어리게 안 보는 인간이 하나도 없잖아?' 베지테크스 상회의 대부분 사람들도 실력은 놀라워 하면서도 걸핏하면 꼬맹이니 신참이니 하면서 애 다루듯 했었다. 물론, 그때는 이 세계가 아직은 낯설어 어리버리 했기에 그들이 신경써주는 것 고맙게 생각했지만서도... '하아.. 이거참.. 내가 모자른 거야,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너무 뛰어난 거야, 아니면 이러는게 당연한 거야?' 속으로 툴툴 거리며 걸음을 옮기는데 내 옆에서 조용히 걸어가던 첼릿이 어느순간 움찔거리는 거였다. 옆에 있는 나까지 같이 움찔할 정도로 너무 갑작스러운 반응이어서 당황해서 그를 쳐다봤더니 그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는 거였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다시 한번 인상을 찡그리며 허리게 찬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뗐다가 다기 가져가 댔다가 하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거였다. "첼릿? 왜 그래요?" 아무래도 분위기가 오들갑을 떨면 안될 거 같아서 낮게 물었더니 그가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게 아닌거 같은데?' 그렇게 주먹을 꽈악 쥐고 대답하면 그 대답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가 없는 법니다. 하지만 첼릿이 아니라고 하니 뭐라고 더 캐물을 수도 없는 일이라 나는 어깨만 으쓱해 보이고는 걸어가는데만 신경썼다. 그리고 드디어 머나먼 길을(?) 걸어 우리가 도착했을때는 해가 뉘엿뉘역 서산으로 지면서 붉은 노을을 만들어내고 있을 때였다. "우와..." 그 노을을 배경으로 우리 앞으로 펼쳐진 광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우선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제법 커다란 - 물론 일리언 호수에 비하면 작은 편이지만... -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아름다운 호수였다. 그 볼록 튀어나온 부분과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에 깔린 새하얀 모래는 노을 덕분에 붉게 보이는 호수와 비교되어 하얗게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그 호수의 뾰족한 부분에는 커다란 내가 흐르고 있었고, 그 내는 뾰족한 부분 근처에 있는 커다란 산과 이어져 있었따. 그 산은 뒷쪽은 울창한 수풀이 우거져 있는데 비해 앞쪽에는 하얀색의 암석으로 된 속살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 암석 중간중간에 까만 동굴처럼 생긴 구멍이 있는 것을 보니, 그곳이 아마도 듀비가 말한 블루 엘프족이 사는 곳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호수 너머에도 사람들이 사는 듯한 촌락이 얼핏 보였다. '흠... 듀비가 말하길 블루 엘프족이 세 부족으로 나뉘어 있다고 했지? 저쪽이 다른 한 부족인가보네..' 나머지 안 부족은 어디에 있을까.. 하며 두리번 거리며 걷는 내 눈에 주위 여기 저기에서 불쑥 불쑥 파란 빛이 도는 피부를 가진 존재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는 게 보였다. 호기심과 경계심을 담은 그 시선들이 왠지 부담스럽기도 하고 낯간지럽기도 해서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에구... 왕실 무도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많은 블루 엘프의 시선을 받으며 안내되어 간 곳은, 굉장히 커다란 나무가 - 아마도 몇백년은 된 듯한 -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널다란 공터였따. 그냥 보면 그것도 아까 멀리서 본 이곳의 아름다운 광경과 참 잘 어울리는 풍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왠지모르게 공기중에 기분 나쁜 감각이 떠돌아 감탄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고, 그 감각을 찌르는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애써 무시하고 앞을 바라보니, 공터 가운데 있는 커다란 나무의, 땅 위로 불쑥 솟아 오른 뿌리를 편안한 벤치인양 걸터앉아 있는 세 블루 엘프가 조용한 시선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게 보였다. 다른 블루 엘프들처럼 호기심이나 경계심이 있는 것도 아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를 담담하고 깊은 눈빛들이 '나 보통 존재가 아니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본득 금발머리 블루 엘프가 지금보다 빠른 속도로 거의 뛰어가듯 튀어나가 그들 앞에 멈춰서서는 문화가 다른 내가 보기에도 좀 과장되었다 싶게 깊게 허리를 숙이며 인가했다. "저 남부족 소속 킨이 세 부족 족장님께 인사 올립니다. 아울러 존경하옵는 남부족 족장님, 우리 부족의 유망족인 듀비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게다가 일행인 인간들과 같이 오셨지 뭡니까? 그래서 제가 기꺼이 일행본들을 안내해드렸습니다." 금발머리 녀석 이름이 킨이었던 모양이다. '아.. 갑자기 킨 사이다가 생각나는 군.' 내가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동안 듀비가 표범같은 우아한 걸을걸이로 걸어가 킨 사이다 옆에 서더니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남부족 소속 듀비가 세 부족 족장님께 인사 올립니다." 그러나 여전히 뭔 생각하는지 모를 눈으로 듀비를 바라보던 가운데 있던 회색 머리의 족장이 입을 열었다. "돌아온 거냐?" "아닙니다. 우연치낳게 잠시 들른 것 뿐입니다." "흠.. 네가 입은 은혜가 그렇게 감당 못할만큼 컸단 말이냐?" "그것이 아니옵고 아직 제가 만족할 만큼의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그 가운데 있던 회색머리 족장이 듀비가 소속된 남부족 족장인듯 싶었다. 그 듀비의 말을 끝으로 세 족장들은 듀비를 바라보던 시선을 틀어 우리를 향했다. 그러더니 회색 머리 족장의 왼쪽에 앉아 있던 검푸른 머리의 족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우리 일행쪽에서는 리건이 나섰다. 아마 저 검푸른 머리의 족장이 블루엘프족 전체를 대표해서 나온 듯 하니 우리도 대표인 리건이 나선 것이다. 나머지 일행들이 숨죽인 상태로 둘을 지켜보는 가운데, 검푸른 족장은 리건을 쓰윽 바라보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외부인을 환영하지 않소. 다른때였다면 그대들은 우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는 커녕 이 곳에 오지도 못했을 거요." 그의 말에 리건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그 말씀은.. 지금은 특별한 사황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우리가 뭘 해드려야 할까요?" 리건 또한 단도직입적으로 나섰고, 그의 대응에 검푸른 머리의 족장의 입가 한쪽이 살짝 올라갔다. "마음에 드는군. 미리 경고하지만, 그대들의 조금의 도움은 될 수 있을지언정 해결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소. 허나, 조금이라고 도움이 된다면 우리 블루 엘프족에서는 그대들에게 식량 지원과 우리가 아는 범위내에서 이 정글 내를 안내해 주겠소." "고마우신 말씀입니다. 능력을 벗어나는 일은 안 해도 된다 하시니 우리도 능력 내에서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 드리죠." 그러니까, 블루 엘프족 대표말은 조금이라도 도움이 안되면 국물도 없이 쫓아 내겠다는 말이고, 리건은 목숨을 아끼는 내에서는 돕겠다고 선을 긋고 있는 거였다. '하아... 역시 외교 협상은 어려워. 나는 외교 대사를 절대 되지 말아야지.' 그 모습에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지만, 블루 엘프족 대표와 리건은 상대방이 내건 조건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럼 저희가 할 일에 대해서 들어볼까요?" 그러자 그 동안 검푸른 머리의 블루 엘프가 이야기 하는 걸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고만 있던 나머지 두 족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그리고 갈색 머리쪽이 서산에 걸린 해를 힐끔 보더니 입을 열었다. "말로 하는 것 보다 직접 체험하는게 좋을거요. 이야기는 드 귀에 하도록 합니다." '직접 체험하라고?'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 갈색 머리 족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회색 머리 족장이 듀비를 향해 물었다. "여기 있을테냐, 잠시 들어갈테냐?" 우리랑 같이 있을 건지, 아니면 잠시 부족들 틈에서 지낼건지 묻는 건가보다. 듀비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질문을 듣자마자 대답했다. "여기 있겠습니다." "흠.. 뭐, 좋을대로." 회색 머리 족장은 듀비가 그럴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머뭇거림 없이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갈색머리 족장과 검푸른 머리의 족장이 따라갔다. 단지.. 좀 맘에 걸리는 거라면 그들이 가기전 우리를 향해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진 것일까나? 그들 셋의 모습이 거대한 나무 너머에 있는 하얀 빛의 거대한 암석들의 산, 그러니까 아마도 남부족 부락인 듯한 곳으로 모습을 감추자 마치 그게 신호였다는 듯, 우리 주위에 몰려 있던 블루 엘프족들이 썰물 빠지듯 샤샤삭 모습들을 감추는 거였다.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건 일단의 블루 엘프 무리들이 낑낑 거리면서 커다란 수레 위에다가 산더미 처럼 뭔가를 쌓아가지고 와서는 우리 앞 공터에다가 내려놓은 거였다. "엥?" 수레 위에서 내려지는 물체들로부터 확 끼쳐오는 건 비릿한 피냄새였다. 묵묵히 자기들 할 일만 하고 있고 휑하니 수레를 이끌고 사라지는 블루 엘프들의 모습에 당혹감만 느끼던 일행들은 주춤주춤 조심스레 블루 엘프들이 내버리고 간 물체들에게 다가갔다. "윽... 이, 이건..." 그리고 그 물체들을 확인한 순간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신음성을 흘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블루 엘프들이 우리 앞에 떨귀놓고 간 것은 몬스터들이었다. 뭐, 처음 보는 것 부터 시작해서 나와 인연이 좀 있는 아나콘다 뱀의 모습도 보였다. 그런데 단순이 몬스터들의 시체를 내려놓은 거라면 이런 불쾌한 감정은 느끼지 않았을 거였다. 그러니까 그 몬스터들은 모조리 살아 있었다. 살아 있는 체로 움직이지 못하는 거 보면 뼈가 부러졌거나 신경이 끊어졌거나 하는 거겠지만, 그 상태로 온 몸에 자잘한 상처가 있었고, 그 상처들은 생긴지 얼마 안 됫듯 끈임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다. 몬스터 한 마리도 빠짐없이, 온 몸 구석구석을 쉽게 죽지 않을 정도에서 난도질해 놓은 모습은 아무리 그 몬스터들이 극악무도한 적이라고 해도 과히 보기 좋지 않았다. 이건 몬스터들을 데리고 고문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뭐하는 건지... "아.. 저기... 블루 엘프족들은 이 몬스터들과 철천지 웬수인가 보죠?" 쥬디 블러드무어경이 당혹스러움을 참을 수 없었는지 아주 조심스럽게 듀비를 향해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못하는 듀비의 표정을 보니 그도 이 상황이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따. 좀 잔인하다 싶을 정도의 몬스터들의 모습에 일행 대부분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데 반하여 클리우드 남작과 트래비스, 리건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척척 다가가는 것으로도 모잘라 몬스터들을 이리 뒤집고 저리 헤집으려 살펴보는 거였다. 그렇게 한참을 뒤적거리던 사람들은 볼거(?) 다 봤는지 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런 처절한 몬스터들의 모습을 뒤로하고 척척 걸어나왔다. 그 태연한 모습들에 경악을 해야 할지 존경스러워 해야 할지 헷갈렸다. "흠... 아무래도 잘 차려놓은 밥상 같지 않습니까?" 남작이 자신만만한 어투로 리건을 향해 묻자 리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를 위한 것이냐가 문제겠지만... 얼마나 대단한 존재이길래 저 자존신 높아 보이는 블루 엘프들이 이렇게 얌전하게 상을 차려 주는 걸까?" "모르긴 몰라도 쉽지는 않겠지요. 그러니 저 블루 엘프들이 우리에게 손을 벌린 것 아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트래비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작과 리건이 궅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역시 그 장치해 놓은 활들은 몬스터들을 유인하기 위한 거였군요?" "그렇겠지. 일부러 몬스터들을 잡으러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자기가 알아서 찾아오는 몬스터들을 잡는게 더 편했을테니..." 블러드무어경과 스페이스경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우리를 여기 그대로 놓고 간건... 지금 이 상태로 맞으라는 소리인가?" 칼슨의 무의식적인 중얼거림에 일행들은 경악어린 표저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뜨어억, 그런.. 그럼 우린 어쩝니까?" "이런 치사한..." 빨리 여기를 벗어나야.." 그리고 경악 뒤로는 패닉이었다. 하지만, 그런 우리를 마치 비웃는 건만 같은 소리가 울렸다. 우웅~ 꼭 심야 시간에 수많은 폭주족들이 한꺼번에 출발하기 전 부릉부릉 하고 오토바이 엔진소리를 내는 것 같기도 한 그 소리에 사람들은 저마다 무기를 쥐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이게 무슨 소리.." "으악.. 오는 건가?" 존재를 모르른 미지의 적에 대한 두려움과 긴장으로 전전긍긍하는 우리 일행들에게 마치 그에 대한 화답이라도 하듯, 이제 막 서산으로 넘어가려는 해의 마지막 빛을 받으며 시커먼 그림자가 하늘위로 떠올랐다. "우갸아악~!!" ====================================================== 제 43화 모기를 우습게 보지 마라 (3) 존재를 모르는 미지의 적에 대한 두려움과 긴장으로 전전긍긍하는 우리 일행들에게 마치 그에 대한 화답이라도 하듯, 이제 막 서산으로 넘어가려는 해의 마지막 빛을 받으며 시커먼 그림지가 하늘위로 떠올랐다. "우갸아악~!!" 마법사들은 재빨리 실드 마법 주문을 외웠고, 정령사들은 자신들과 계약한 정령들을 불렀다. 그리고 나 또한 가장 익숙한 엔다이론을 불러냈다. 정말 간발의 차이라고나 할까?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실드와 정령들이 만들어낸 방어막이 펼쳐지자마자 시커먼 그림자가 우리가 있는 공간을 뒤덥었다. 우우우웅~~ "히이익..." 그건... 수백, 수천 정도가 아니라 수천억 정도는 되어보이는 엄청난 모기떼였다. 그것도 일반 모기가 아니라, 엔다이론이 쳐준 장막에 부딪혀 짜부라진 모기를 보니 날개를 빼고 몸통하고 다리만으로도 내 손바닥의 반만했다. 아마 날개까지 합친다면 한 마리가 내 손바닥 만한...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아무리 엔다이론의 보호 속에서라고 해도 그런 수없이 많은 모기들떼가 내 주위를 휩쓰는 장면을 눈 앞에서 보니 온 몸에 소름이 마구마구 돋았다. 나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는지 옆에 있던 첼릿이 어깨를 든든하게 잡아주었다. 우우우웅~~ 영원히 계속 될 것만 같았던, 세상과 우리를 격리 시키는 것만 같았던 모기떼들은 처음 나타났을때와 마찬가지로 앗, 하는 순간에 마치 아침 햇살에 안개가 스러지듯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그제서야 우리를 내려 비추는 밝은 보름달과 빛나는 별들을 볼 수가 있었다. 정글에와서 밤하늘을 처음 보는 것만 같은 느낌에 새삼 달과 별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또 다시 모기떼가 올까봐 우리는 잠시 기다렸지만, 더 이상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 조심스레 방어막을 해체했다. "끔찍하군. 새클턴 녀석들에게 배신 당했을때 보다 더 끔찍해." 홀리스터경이 넉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램버트가 무지 심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난 집에 돌아갈게 걱정이군. 왠지 다시는 산 근처에는 얼씬거리고 싶지 않은 심정이야." 그러고보니 램버트의 집은 엔더비 산맥에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넉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리는 사람들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다. 쥬디 블러드무어경은 새파랗게 질려가지고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고, 벌래에 비위가 약한 기사는 구토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칼슨 마법사도 입술을 얼마나 악물었는지 아랫입술이 다 뜯겨졌고, 아직도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아마 모기떼를 보고 끔찍하다고 생각했지만, 정신을 놓을수가 없으니 차선책으로 입술을 물어뜯은 모양이다. "저게... 우리의 적인가보지?" 동요하고 경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에 모든 사람들이 또 다른 의미로 경악하고 존경하는 시선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리건은 그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가 클리우드 남작을 데리고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의아스러워 하던 일행들도 쫄래쫄래 그 뒤를 따라갔다. 리건이 남작을 데리고 간 곳은, 아까 블루 엘프들이 모기들을 위하여 마련해놓은 몬스터들이 있는 곳이었다. 비록 보름달이 환하게 뜨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부족하다 여겨졌는지 남작은 리건이 뭐라 하기도 전에 자신이 스스로 빛의 구를 세개 만들어 내어 몬스터들 위로 올려보냈다. 그렇게 환한 빛의 구 아래 드러난 몬스터들의 모습에 우리는 또 한번 놀래야 했다. 그 모기떼들 사이에서 목숨을 유지할 수 없으리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몬스터들의 모습은 그런 예상을 초월하여 얼마 전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몇십년전에 죽어서 미라화 된 몬스터의 시체라고 생각했을 거였다. 죽기 전에는 통통(?) 하던 녀석들이었는데, 뼈 위에 가죽 한장 씌워 놓은듯한 앙상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거였다. 리건이 다가가 인간형 몬스터를 슬쩍 뒤집어 놓자 가슴 부위를 감싸는 갈비뼈가 드러나다 못해 그 아래 내장의 굴곡까지 다 보일 정도로 비쩍 말라있었다. "흠... 이놈들은 피로도 모자라서 체액까지 빨아먹나보지?" 무덤덤하긴 하지만, 신기하다는 기색이 약간 서려있는 리건의 말에 놀라야 할지 평소에도 호기심이 많으시군요... 하고 감탄해야 할지 헷갈렸다. 하여간 오늘은 여러가지로 놀라고 헷갈리고 하는 날이다. '머리가 아플 지경이야.'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리건이 몬스터들의 시체를 만족할 만큼 살펴봤는지 허리를 펴더니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물었다. "저것들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모기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에프킬라나 모기향이었지만, 여기에 그런게 있을리 만무했다. 게다가, 설사 있다해도 아까 본 그 모기떼들을 다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보아하니 일반 모기장도 소용 없을 것 같던데... "보통... 쑥을 태운 연기를 사용합니다. 다른 재료도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살상용이 아니라 퇴치용이지요. 하긴... 모기를 보고 목숨의 위협을 느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으니..." 먼저 입을 연 클라우드 남작이 나중에는 허탈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거 독이라도 퍼트려야 하는거 아닙니까?" 아마 그걸 말한 용병은 반쯤은 농담삼아 한 말이었을 거다. 그러나 콘스틴스는 그걸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흠... 독연기를 만드는 마법이 있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될 수 있는 한 쓰고 싶지는 않군요. 독연기가 미치는 반경 내에는 모든 생물체는 물론이거니와 물이나 땅까지 모두 죽어버리고 맙니다." "안 좋군요. 그건 이쪽이 원하는 건 아닐테죠. 그들이 이곳 환경이 어떻게 되든 상관 않고 모기들을 없애길 원했다면, 차라리 여길 불 지르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게 더 빨랐겠죠." 트래비스의 말에 듀비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을 사용하는 건 어떻습니까? 마법이나 불의 정령들에게 부탁한다면, 이곳 환경을 크게 망치지 않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좋은 방법이군요. 어떻습니까, 콘스틴스님? 얼마나 통용이 될까요?" "확실한 방법이기는 한데... 아까 너무 엄청난 수라서 얼마나 통용될지는 모르겠군요." 콘스틴스의 말에 미노트 남작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역시 독뿐일까요?" "좀... 연구를 한다면 아마 모기만 죽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주변에 영향을 적게하는 선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독을 만들어낼지도 모릅니다. 빠르면 며칠안에 만들어낼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 모기들을 다 처리할 양이 될지는..." 고심고심 하는 표정으로 칼슨이 말했다. 그러고보니 그는 마법 연구파 출신이라고 했었는데, 독에 대해서도 연구를 했었던 모양이다. "역시... 모기들의 양이 문제인가?" "이건 어떻습니까? 마법사들이 허공에 커다란 실드막을 형성하는 겁니다. 그 안에 정령사들이 바람의 정령들을 불러서 모기들을 집어 넣는 거죠. 그리고 모기들이 꽉 차면 그 안에다가 파이어 볼 한방을 던져서 안의 모기들을 다 태우는 겁니다. 그러면 꽤 많은 양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한마디 두마디 떠들때도 고개를 숙이고 곰곰히 생각에 잠겨 있던 엔더슨 스니볼리가 조심스레 운을 떼자 그때까지도 농담 반, 진담 반 떠들던 좌중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러자 엔드슨 스니볼리는 자신이 뭘 잘못 말했나 싶었는지 겁먹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거였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되 되게 괜찮은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호오... 그거 괜찮은데요?" 쥬디 블러드무어경이 정말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씩 했다. 클라우드 남작은 자신의 제자가 좋은 제안을 한 것이 기쁜지 흐뭇한 표정으로 제자의 어깨를 두드려 주는 거였다. "좋군. 그럼 블루 엘프들에게는 우선 그렇게 나가겠다고 하지.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칼슨 마법사께서는 모기에게만 영향을 주는 독약 제조에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예? 아, 예." 일행들은 모든 일이 완전히 해결된 것 처럼 좋아하면서 블루 엘프들을 기다렸다. 그런데... 듀비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치사하고 인정머리 없는 블루 엘프들은 그렇게 도움을 요청한 사람들을 직접 대면해보라고 밖에 세워둔 주제에 모기들이 물러가고도 콧빼기 하나 보이지 않더니만 날이 다 새고 아침 식사할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거였다. 덕분에 우리는 밤 꼴딱 새고, 아침도 못 먹고 - 아침을 그쪽에서 제공해줄 줄 알았다. - 눈이 퀭 해진채 블루 엘프의 세 족장을 맞이했다. 우리 모두가 무사한 모습 - 비록 못 자고 못 먹어서 퀭 하기는 하지만... - 을 본 그들의 만족스러운 표정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식사 대접이나 잠자리 제공은 우리가 일을 해결한 뒤 부터 제공할테니 그 전에는 알아서 해결하라는 말에 머리에 열이 확 올라오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 뿐이면 또 말을 안 한다. 리건이 말한 방법을 제시하자 진지하게 듣는둥 마는둥 시큰둥한 표정으로 듣더니 결과만 보여달라고 하는 거였다. 아~ 내 듀비를 봐서 안 그럴려고 했는데, 정말 저어어어엉~~ 말 마음에 안 들었다. 그들이 하는 폼을 보니 차라리 맨 처음 만났던 그 얄미운 킨 사이단지 뭔지 하는 놈이 차라리 더 나아보일 정도였다. 일행중에서는 도움이고 뭐고 그냥 가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우리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다가 블루 엘프들의 도움 또한 필요한것도 사실이기에 우리는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빨랑 그 엄청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모기떼들이 오길 기다려야 했다. 그 동안 슬쩍 듀비에게 왜 블루 엘프들이 저 모기떼들을 스스로 해결 못하고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건지 물어보자 - 나는 그들이 마족인걸 알고 있었으니 모기떼 정도는 충분히 처리할 줄 알았다. - 블루 엘프들은 검술에는 능해서 두려울 건 없는데 마법이나 주술 쪽에는 영~ 젬병이란다. 그 말을 들으니 이해가 된게 저 많은 모기들에게는 검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소용 없을 거 같았다. 그러니 저 자존심 강한 블루 엘프들이 모기떼를 위하여 일부러 몬스터들을 잡아주고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거겠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기 전에는 자신들이 먼저 도움이 될 생각을 안 하는 블루 엘프들 덕분에 우리는 모기들이 오기 전에 체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식량을 구하려고 사방을 뛰어다녀야 했다. ====================================================== 제 43화 모기를 우습게 보지 마라 (4) 그러는 동안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 우리가 이를 갈며 벼르고 기다리던 저녁시간이 돌아왔다. 그런데, 문제가 또 생겼다. 이번 일은 정령사들과 마법사들이 전담을 하기로 했기 때문에 도움 안되는(?) 기사들과 용병들좀 맡기려고 했더니만, 블루 엘프 족장은 택두 없다는 듯 내뱉는 거였다. "알아서 하시오." 거기다가 더 열받게 하는 건 그 킨인지 하는 금발머리 녀석이었다. "도움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판에 주문이 많군요. 소리만 요란한거 아닌가요?" 그 순간 우리 일행들의 입에서 빠드득 하는 소리가 난 건, 내가 잘못 들은게 아니리라. 예전에는 블루 엘프들은 모두 듀비같은 줄 알았는데, 이제는 듀비가 블루 엘프의 별종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킨이나 족장이나 우리 일행들의 살벌한 시선속에서도 유유히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들어가버렸고, 우리는 또 다시 인적 하나 없는 황량한 공터에 남겨져 버렸다. 어제는 그나마 모기들에게 바칠 몬스터들이라도 있었지만, 오늘은 그것도 없었다. 그걸 알아챈 사람들이 분노에 찬 시선을 듀비에게 돌렸지만, 그런 면에서는 또 듀비 역시 블루엘프라 그런 시선에도 눈썹 하나 까딱 안 했다. 대신 보다못한 나와 첼릿이 그 시선들에서 듀비를 가려줬다. 사실 나도 블루 엘프들이 엄청 마음에 안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듀비에게 그런 눈길을 보내는 건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뭐니뭐니해도 듀비는 내 동료니까 말이다. 나와 첼릿이 나서자 다른 사람들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어 들였다. 그렇게 상황이 진정되는 듯 하자 리건이 담담한 어조로 지시했다. "슬슬 우리도 준비하도록 하자구. '적'들이 올 시간이니까 말야." 준비는 간단했다. 이번 일에 도움이 안 되는 무리들은 공터 한쪽에서 몇몇 마법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고, 주된 일을 할 정령사들과 마법사들은 허공에 떠올라서 극악무도한 '적' 들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공터에서 같이 하려고 했지만, 모기떼가 들이닥치면 마치 어둠에 휩싸인듯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에 차라리 높은 허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하는게 훨씬 나을 것이라 예측 되었기 때문이다. 앤더슨 스니볼리는 이 계획의 주된 아이디어를 짜낸 공로자 였긴 하지만, 마법사들 중 가장 실력이 낮다는 이유로 아쉽지만 아래에서 기사들과 용병들을 보호하고 있어야 했다. 뭐, 계획이 잘 풀린다면야 아래에서도 자신이 낸 아이디어가 멋지게 펼쳐지는 모습을 볼 수 있겠지만, 아래에서 올려다 보는 거하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거하고 어디 같겠는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콘스틴스님." 이번 일의 리더가 된 콘스틴스를 향해 리건이 담담한 어조로 말하자 콘스틴스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간단한 인사 뒤로 지상파(?)와 공중파(?)가 헤어졌다. 나는 이번에도 엔다이론을 불러내어 도움을 받았고, 다른 정령사들은 최소한 기운을 아끼기 위하여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허공으로 떠오르자 노을을 받은 아름다운 주변 환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모두들 긴장하고 있느라 그 환경을 감상하며 감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드디어, 서산에 걸려있던 해가 완전히 넘어가려는 찰나, '적'이 나타났다. 우웅~ 어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상황에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몰랐지만, 이번에는 단단히 준비하고 주시하고 있었기에 여기서 약간 떨어진 왠지 모르게 음침해보이는 숲에서 모기들이 한꺼번에 떠오른 걸 볼 수 있었다. "옵니다." "호... 저기가 본거지인가?" 그 곳을 잘 기억해 둔 나는 미리 생각해둔 대로 슈리엘들을 불렀다. 어차피 나는 불의 정령과도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마법사들과 손발을 맞추는 대신 난 혼자 움직이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허공 한쪽에서는 희뿌연 빛을 내뿜는 커다랗고 동그란 막이 세개나 형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쯤에는 숲에서 한꺼번에 떠오른 시커먼 모기떼들이 우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지금!" 콘스틴스의 외침에 준비하고 있던 정령들이 커다란 바람의 그물이 되어 모기들을 덥쳐갔다. 워낙 숫자가 많다보니까 대충 한번 쓰윽 그었는데도 바람의 그물에 넘치게 모기들이 잡혔다. '하아... 이런게 월척이던가?' 고기잡이 하시는 분들이 이렇게만 잡는다면 엄청 좋아하셨을텐데... 하는 생각까지 하면서 나는 다음 타겟으로 불의 중급 정령인 셀리맨더들을 불러냈다. 퍼엉~ 슈리엘들이 단단히 쳐 놓은 방어막 안에 갇힌 모기떼들이 불도마뱀들이 내뿜는 뜨거운 불덩어리에 그대로 타서 재가 되었다. 엄청나게 커다랗고 무시무시한 그룹을 이루고 있어도 모기는 모기인지 불 앞에서는 엄청 약했다. 그렇게 한번 잡은 모기들을 다 구워준 뒤 나는 또 다시 허공에다 바람의 그물을 쳐서 월척을 낚았다. "헉, 헉, 헉, 헉..." "아... 정말... 이젠 모기가 보기도 싫군요." "보는 것은 물론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불덩어리도 지겨워요. 계속해서 파이어 볼을 터트렸더니 지금도 눈 감으면 파이어 볼이 터지는 장면이 보인다니까요." "으으... 모기탄 냄새는 어떻구요?" 사람들이 기운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그 목소리들에는 기쁨이 묻어 있었다. 열심히 작업을(?) 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모기들이 사라질때쯔음에는 적어도 1/3 이상은 줄어든 것 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모기떼가 사라지는 건 대략 2~3시간 정도 뒤 쯤, 그러니까.. 대충 시간으로 따지자면 저녁 7시나 8시쯤 나타나서 밤 11시나 12시쯤 사라졌다. 게다가 정글 전체로 퍼지는 게 아니라 맨 처음 모기떼가 나타나는 그 음산한 숲에서부터 일정한 반경 내애서만 빠글빠글 거리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 숲으로 돌아가는 거였다. 밤에만 나타나는 걸 이용하여 차라리 낮에 그 음산한 숲에 들어가서 독약을 뿌리던지 그 숲만 불태우던지 하는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 그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했더니 황당하게도 사람들이 허탈하게 웃는 거였다. 비웃는 게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내 말에 웃는거보니 기분이 별로 안좋았다. "그게 그렇게 안 좋은 의견이었나요?" 그러니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투가 고울리가 없었다. 그러자 클라우드 남작이 얼른 손을 휘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단지... 백작님께서는 너무 마음씨가 좋으시다고 생각 했을 뿐입니다." "예?" 그의 말을 이해 못한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이번에는 미노트 남작이 설명해줬다. 내가 아직 애송이라는 인식을 팍팍 내면서 말이다. "우리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합니까? 어차피 블루 엘프족에서는 약간의 도.움.만을 바랬을 뿐인데 말입니다. 우린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블루 엘프들이 얄미워서 적극적으로 도와주기 싫다 이거잖아?' 밴댕이 소갈딱지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마음속에서는 자업자득이란 단어가 떠오르고 있었다. 일행들이 그러는 것도 별로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렇다고 블루 엘프들 편을 들고 싶은 것도 아니라 괜히 듀비의 눈치를 살피는데 콘스틴스의 냉정한 음성이 날아왔다. "오늘 한 걸로 보아하니 내일 하루나 이틀 정도 고생하면 대충 '적'을 제압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러니 일부러 본거지까지 쳐들어가서 수고할 필요는 없을것 같군요." 콘스틴스까지 저렇게 말하는 거 보니 블루 엘프들이 단단히 미움털이 박힌 듯 했다. "그럼, 블루 엘프 족장에게 내일이나 모래쯤 정리할 수 있다고 말하도록 하지." 리건의 말에 일행들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드디어 그 치사하고 인정머리 없는 블루 엘프들에게 당당하게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데다가, 그들이 못한 걸 우리가 해낸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을 늦었지만, 내일 보게 될 블루 엘프들의 얼굴을 상상하며 기분좋게 잠자리에 들었었다. 그.러.나... 세상일이 어디 그렇게 원하는 방향으로 굴러가는 일이었던가 ====================================================== 제 43화 모기를 우습게 보지 마라 (5) 해가 뜨고 다시 저물 즈음, 증거를 보이라는 블루 엘프 족장들에게 자신있게 우리 옆에 머물면 볼 수 있을 거라고 대답을 해주었다. 그리고는 빨리 그 모기떼들이 나타나서 현격하게 줄어진 모습을 보여주길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웬걸? 우리가 어제 수없이 월척을 낚았다는게 마치 환상이었던 것 처럼, 우리 앞에 나타난 모기떼의 크기는 어제와 전혀 변함이 없는 것 처럼 보이는 거였다. 분명히 어제 저 녀석들이 돌아갈 즈음에는 한 눈에 척 보기에도 많이 줄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는데, 또 다시 눈앞에 나타난 모기떼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풍성(?)한 것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블루 엘프 족장들은 아무 말도 안 했다. 단지 우리를 보고 '훗' 하고 상큼하게 웃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마에 핏줄이 빠직 하고 돋기에는 충분했다. 그리하여 열받은 공중파(?) 들이 어제보다 더 분투를 벌여 확실하게 절반 정도 줄여 놓는 쾌거(?)를 이룰 수가 있었다. 그래 이번에는 성공한 거겠지... 라고 했는데, 그 다음 날에도 여전히 엄청난 숫자를 자랑하는 모기떼가 나타났다. 그나마 조금 나은 거라면, 어제보다는 쬐끔, 아주 쬐에에에에끔은 모기떼가 적어진 것 같다고 느껴진 걸까나?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끝이 없을거란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아무래도... " "예, 정말 싫지만..." "역시.. 그래야겠죠?" 그런 생각이 나 뿐만이 아니었던지, 모기들을 처리하기 시작한지 사흘째 되던 날 새벽, 일행들은 둘러 앉아서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블루 엘프들의 행동이 마음에 안들어 대충하고 넘기려 했는데, 그놈의 모기들이 고래 심줄 저리가라 할 정도로 어찌나 끈질기고 질기던지, 우리가 대충하고 넘어가게 내버려두질 않는 거였다. "어차피, 모기 녀석들의 본거지는 아니까요. 정글 전체로 불이 번지지 않게 그 주위에 마법으로 장막을 치고 가운데를 태우면 될 거 같습니다. 아, 혹시 불때문에 모기들이 도망갈 수도 있으니까 숲 전체를 둘러쌓도록 하죠." "그러면... 어차피 안에는 파이어 볼 몇개면 충분할테니까 그건 마법사 한분이서 담당하시고, 주위에 결계를 치는 건 나머지 분들이 담당하시면 되겠군요." "흠, 그럼 이번에는 저희 마법사들만 나서서 해결할까요?" 그렇게 일사천리로 착착착 계획이 세워지는 걸 지켜보면서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이럴꺼면 처음부터 본거지를 쳐들어가던지 하면 됐을껄.. 괜히 해주기 싫다고 뻗대면서 며칠을 허비할 건 뭐람?' "아... 그런데 태울 면적이 꽤 넓던데 혼자서 가능할까요? 한분 더 해주는게..." "에이, 어차피 숲인데 뭘. 그냥 몇방만 때려주면 지가 알아서 사방으로 옮겨 붙을걸. 우리는 단지 더 퍼지지 않게 주의만 하면 될 거야." 무심하게 - 어차피 이번 작전은 마법사들이 전담한다고 했으니 -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었다. "아, 저기..." "예? 엠브로스 백작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내 행동에 이야기하던 마법사들 뿐만이 아니라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어... 말씀하실 게 있으면 그냥 하시면 되는데요.. 손까지 드실 필요는..." 한 마법사의 말에 나는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지금 막 생각난건데요... 모기들의 서식지에는 습지대가 있다고 하더라구요. 작은 웅덩이라던지 하는... 그러니 저 수많은 모기떼가 서식하는 거 보니 습지대도 꽤 클 거 같던데..." 모기들의 새끼는 물에서 산다는게 왜 이제야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이왕 생각난김에 나는 그 이야기도 덧붙였다. "아, 그리고... 모기 새끼는 물속에서 산다고 하데요." 내 말에 마법사들은 서로의 얼굴들을 돌아보더니 잠시 후에 클라우드 남작이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백작님 말씀이 사실이라면... 한 사람가지고 안되겠는데요? 흠.. 모기 새끼는 물 속에서 사는 줄은 몰랐습니다. 모기는 처음에 태어날때부터 날아다니는 모기인줄 알았는데...헤엄치는 모기라니...그렇다면... 모기의 숫자가 전혀 줄어들지 않는 이유가 설명 되겠군요. 우리가 죽인 숫자만큼의 헤엄치는 모기가 날아다니는 모기가 되어 나타난 거겠지요." '헤, 헤엄치는 모기....' 남작의 호칭에 순간 황당함을 느꼈지만, 다른 사람들은 진지했다. "그렇다는 건... 매일 나타나는 그 날아다니는 모기떼 못지 않은 숫자의 헤엄치는 모기떼가 있다는 이야기인가요? 그 숫자가 살 물이라면... 아무래도 보통 파이어볼 가지고는 택도 없겠군요." "그 습지대까지 다 해결해야겠지요?" "흠... 아무래도 그 곳을 직접 보고 나서 다시 이야기 하는게 좋겠군. 칼슨, 내일 아침 일찍 마법사 둘을 데리고 가서 살펴보고 오게나." "알겠습니다." 자신있게 대답하고 날이 밝자마자 두 명의 마법사와 같이 출발했던 칼슨 마법사는 채 한 시간이 지났을까 말까한 시간에 새파랗게 질려서 돌아왔다. "그... 모기들의 서식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늪이였습니다. 나무들은 그 늪 위에 뿌리를 박고 서 있었던 것이고요. 그런데... 나뭇잎의 색이 검다 했더니 나뭇잎이 아니라 모기떼더군요. 장소가 협소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모기들이 몇십겹으로 달라 붙어있어서 나뭇잎이 있는건지도 모르겠더군요. 제 생각이지만.. 아마 거기 있는 대부분의 나무들은 죽은 것 같습니다." 멀찍이서 마법 아이로 살펴본 광경이 꽤나 끔찍했는지 말을 하는 칼슨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가끔 부들부들 떨기까지 해서 옆에서 보는 나까지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게다가... 게다가 그 늪에는... 으윽..." 늪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자 허옇게 질리더니 손으로 입을 막고는 한참동안이나 말을 잊지 못하는 거였다. 그러더니 나중에 띄엄띄엄 설명하는데 왠지 상상만해도 몸서리가 쳐질 거 같았다. "아, 아마도... 헤엄치는 모기인거 같은데... 그, 모기 새끼 말입니다... 윽... 그, 그게... 늪에 있었는데... 무, 물보다는... 모기 새끼가... 많더군요... 그, 그런데... 모기 새끼가... 벌래였습니까?" 마지막에는 날 보고 묻는 거였다. "아마... 그럴걸요?" 예전에 한국에 있으때 자연 다큐맨터리였던지 교육 방송이었던지에서 잠깐 본거 뿐이라 기억도 잘 안났다. "으윽... 어쨌든... 끔찍하더군요. 다시는 보고싶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칼슨 마법사가 몸을 부르르 떨자 다른 이들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편 기사들과 용병들쪽에는 안심한 기색이 스치는 반면 마법사들의 표정은 떨떠름한것과 함께 울상이었다. 칼슨이 한번 보고 저렇게 몸서리 치는 곳을 가야 한다는 사실때문에 그럴것이다. "그 늪의 크기는?" 그 와중에 콘스틴스가 침착한 표정으로 묻자 몸서리를 치던 칼슨이 정신을 차리고는 대답했다. "대략...7천평 정도 되는 것 같았습니다." 7천평이라면... 서울에 있는 실내 체육관 정도의 크기다. 그의 말에 인상을 찌푸린채 생각에 잠겨있던 콘스틴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저희들의 힘으로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그 뒤로 콘스틴스의 지휘아래 계획이 절반정도 수정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넓은 지역이니까 플레임 레인(공중에서 고열의 화염비를 내리게 하는 광범위 공격 마법) 을 사용하는게 확실할 것 같아. 하지만, 8클래스 마법이라 나 혼자는 힘드니까... 세 명이 도와줬으면 좋겠어. 우리 넷이서 마법진을 사용하는 거야. 그리고 나머지 마법사들은 방어막을 형성하도록. 우선 숲 주위를 아이스 월로 둘러싼다. 하지만... 혹시 무너질지 모르니까 그 밖을 정령사들이 한번 더 싸는 겁니다. 그리고 윗쪽에는.... 어차피 모기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만 하면 되니까 정령사들이 좀 더 수고를 해줬으면 좋겠군요." 땅바닥에 대충 그려진 지도 위에 막대기를 가지고 선을 그으며 콘스틴스가 설명하자 정령사들이 난색을 표했다. "너무... 넓은데요? 아무리 아이스 윌을 안에다가 설치할거라고 하지만... 저희가 견뎌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캠벨경이 중얼거리자 블러드무어경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우선 땅의 정령들에게 부탁해서 여기에다 흙마법을 쌓으면 되니까요. 어차피 여러분께서 해주실 것은 불이 정글 전체로 퍼지는 것만 막으시면 되는 겁니다. 정... 걱정이 되시면 처음부터 방어막을 설치하고 대기하는 대신 지켜보다가 불이 퍼질 것 처럼 보이는 곳에 손을 쓰면 어떨까요?" 정령사들이 힘들겠다고 난색을 표하자 클라우드 남작이 타개책을 내놓았다. "뭐... 그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럼 저희는 윗쪽에서 상황을 주시해야겠군요?" "그렇습니다. 사실 허공에서 지휘를 하실 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콘스틴스님은 직접 마법을 사용하셔야 하기 때문에 힘드실테니..." "에... 저는 보이스 마법은 못하는데요?" "그러니까 정령사들께서 직접 전달하시는 겁니다. 저희 마법사들은 보이스 마법을 사용할 기력이 없을 것 같아서요." "그렇군요. 그럼, 마법사들과 정령사들은 또 총 출동이고... 마법사들은 흩어져서 마법을 사용할테니... 아무래도 경호해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럼... 이번에는 우리 전체가 다 출동을 해야하는 겁니까?" 뜨악한 표정으로 - 이번에도 자신들은 편히 있을 수 있을거라 여겼던 모양이다 - 묻는 몬트리올경에게 콘스틴스가 미안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도요..." "저기... 그럼 정글을 또 헤치고 가야하나요?" 그레이가 싫다는 내색을 팍팍 하며 묻자 이번에는 재빨리 내가 나섰다. "그건 아니에요. 내가 정령들에게 부탁해 그 지점까지 데려다줄께요. 걸어서 가면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걸리잖아요. 빨랑 끝내고 말자고요." "좋은 생각이야. 오늘 안에 끝내도록 하지? 아직 정오도 안 되었으니..." 리건도 끼어들어 한 소리 하자 콘스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사분들과 용병들은 누가 누구를 담당해주실 것인지 결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누가 어느 방향을 맡을지 결정하도록 하죠." 정오가 채 되기도 전에 계획은 착착착 세워졌고, 우리는 간단하게 요기르 한 후에 내가 불러낸 10명의 슈리엘들이 일행들을 업고 날기 시작했다. "하아.. 경치 만큼은 정말 절경이군요." 나와 같은 슈리엘 위에 올라앉은 첼릿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그렇죠? 몇번 봐도 매번 감탄스럽다니까요." "이렇게 좋은데 살면서 마음도 좋았으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이거 여길 떠날때까지 계속 이렇게 냉랭하게 지내야하는건지 원..." 첼릿이 조용히 아래를 내려다보는 듀비를 힐끗 바라보며 속삭였다. 기실, 우리가 블루 엘프 마을에 들어와서 이야기 나눈 블루 엘프라고는 그 킨이라는 녀석하고 족장들 밖에 없었다. 족장들이 엘프들에게 무슨 명을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멀리서 기웃 기웃하는 엘프들은 있어도 다가와서 말을 거는 엘프들은 하나도 없었던 거여다. 그나마 킨이라는 엘프도 하루에 한 두번 와서 이죽거리는 말 한마디씩 던지고 가는게 다였다. 물론... 그 녀석은 안 오는게 좋은거지만... 듀비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첼릿으로써는 그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히유... 그 마음 나도 이해는 하지만서두...' 어쩌면 듀비는 이런 블루 엘프들의 성격 때문에 예전에 지나가는 말투로 그의 마을에 가고 싶다고 하는 걸 반색하지 않았던걸지도 모른다. '아아.. 어쨌든, 지금은 그게 아니지. 그 고래심줄같이 질기고 끔찍한 모기들 퇴치에나 전념하자꾸나아아~~' 모기들 살고 있는 그 숲은, 블루 엘프 마을의 허공에 떠서 보이는 곳이었기에 우리는 채 30분도 되지 않아 그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멀리서 봤을때도 왠지 음침한 분위기가 난다고 했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탁한 냄새와 차가운 습기의 기운이 올라오는 것이 보통 생물이 살 수 있을거란 생각은 들지가 않았다. 거기다가 그 곳에 있는, 다른 곳 보다 숫자도 훨씬 적은데다가 표정도 우울하고 생기마저 없어보이는 정령들을 보자니 빨랑 이곳을 불태워버리는게 좋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물의 정령들은 수중기화 되어 공중으로 올라갈테고, 이 늪을 한번 태우고 나면 바람의 정령들도 새로운 공기를 맛볼 수 있을거다. 그 숲의 허공 높이에 뜬 나는 정령사들을 제외하고 모든 이들을 처음에 계획했던 위치에 내려주기 시작했다. 콘스틴스와 마법사들은 그 숲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약간 높고 평평한 - 원래 평평하지 않았는데 좋은 자리를 찾을수가 없어서 땅의 정령에게 부탁해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거다 - 언덕에 내려놓고, 나머지 마법사들도 각자 호위해줄 사람들과 함께 숲 주변에 드문드문 내려놓기 시작했다. "후... 넓네요." "그러니까 이걸 다 태우려고 8클래스의 마법을 사용하는게 아니겠습니까?" "우우... 저 새까만 것들이 다 모기라고 생각하면 소름끼치는군요. 안 내려가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내 옆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허공에 떠 있던 정령사들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한 마디씩 던졌다. "그래도 뭐... 우리가 할 일은 그나마 단순한거니 다행 아닙니까? 저 아래에 있는 마법사들들보다야 훨 났지요." 켐벨경이 중얼거리자 다른 사람들도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신호가 왔습니다. 콘스틴스님의 마법진이 완성 되었나보군요." 블러드무어경의 말에 시선을 돌리니 콘스틴스외 3명의 마법사들의 경호를 맡은 용병 하나가 약속된 신호인 급조된 빨간 깃발을 흔드는게 보였다. "좋아요. 그럼 우리도 연락하죠!" 내 말이 끝나자마자 중급 정령사들은 정령들을 불러내어 약속된 마법사들에게 보냈다. 그러자 잠시후... 드드드드~~~ 마치 지진이 난 듯 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숲을 둘러싼 여러개의 지점에서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불쑥불쑥 솟아 오르더니 가로로 쭈우욱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숲을 태우기 전 방패막이를 해줄 아이스 월 마법이 시전된 거였다. "휴~ 이거 쉽게 보기 힘든 장관인데요?" "그러게요..." 쿠궁~ 대략 4, 5 미터 정도 높이에 두깨도 1미터 정도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얼음벽이 굉음과 함께 완전히 숲을 둘러쌓다. 그리고 잠시후... 콘스틴스를 사이에두고 삼각형으로 둘러싼 세 마법사의 몸에서 하얀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함과 동시에 그들의 발밑에 그려진 마법진에서도 하얀 빛이 새어나와 가운데에 선 콘스틴스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강렬한 마나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싶었더니만 콘스틴스가 두 손을 번쩍 들며 뭐라뭐라 외치는게 보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정확히 숲의 위자 우리가 있는곳 아래에 뭉쳐지더니 붉게 변하기 시작하는 거였다. 그 곳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싶어 우리가 좀 더 허공으로 올라 몸을 피하는 사이 뜨거운 열기를 포함한 붉고 거대한 마나 덩어리가 수십개의 조각으로 나뉘어져 마치 유성우가 떨어지는 것 처럼 음침한 숲 여기저기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위험을 느꼈던 것일까? 아이스 윌 마법이 시전될 때도 잠깐 움찔움찔(?) 거리다가 수그러든 모기떼의 구름이 불의 비가 떨어지자마자 확 피어올랐던 것이다. "아차... 슈리엘~!" 그 모기떼의 모습에 허공을 막기로 한걸 깜빡 잊고 있던 나는 급히 슈리엘들을 불렀고, 모기떼들이 허공을 통해 빠져 나가기 전 아슬아슬하게 허공에 바람의 장막이 펼쳐졌다. 콰아앙~ 퍼어엉~ 쿠구구궁~~촤아아악~~ 요란한 소리가 울리며 커다랗고 붉은 불의 비가 마치 운석 떨어지듯 굉음을 울리며 떨어지자 그 곳에서는 붉은 불꽃과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엄청 뜨거운 불의 구인데도 불구하고 연기가 저렇게 자욱한 걸 보니 아마 아래에 있는 늪 때문인 듯 싶었다. 하지만, 그 뜨거운 열기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는지 불의 비가 떨어진 지 5분쯤이 지나자 숲의 테두리에 친 얼음의 장벽이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쿠우웅~~ 치이이익~~ 될 수 있는한 장벽은 건들지 않도록 위치를 잡았지만, 이 마법은 원래 정확도가 별로 없는 거라서 운 없이 한쪽의 얼음벽에 불덩어리가 하나 떨어져 부딪히고 말았다. "제가 가보도록 하죠." 그 모습에 트래비스 용병단 소속 정령사 울만이 잽싸게 날아갔다. 그는 물과 바람의 중급 정령들과 계약한 중급 정령사였는데, 현재 남아있는 정령사들 중 나 다음으로 가장 실력이 높은 사람이었다. 같은 중급 정령사인 블러드무어경보다 한수 위의 실력이라 얼음 장벽이 좀 무너지는 정도는 그의 능력이면 충분히 해결될 거 같아서 나나 다른 정령사들은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그나저나... 문제네요. 다른데도 녹기 시작하는데... 이거... 대략 30분 정도 계속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켐벨경이 서서히 녹아서 물을 흘리고 있는 얼음장벽을 걱정스레 바라보며 말했다. "두고봐야겠죠. 정 힘들거 같으면 제가 저 쪽에 있는 호수에서 물이라도 끌어와서 뿌릴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내 말에 켐벨경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 예. 백작님이라면 충분히 그러실 수 있겠죠." 그러는 동안 또 하나의 불덩어리가 얼음장벽과 부딪혔다. 이번에는 얼음 장벽 바로 위에 부딪히는 바람에 얼음 장벽이 부서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불덩어리의 고온때문에 주변까지 녹기 시작했다. "이런, 이번에는 제가 갈께요." 그 모습에 황급히 블러드무어경이 날아가자, 켐벨경이 소리치며 따라 붙었다. "아, 좀 힘들거 같으니 저도 같이 가드리죠." '이런 이런... 아직 10분 정도 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두곳이라니... 거기다 얼음벽도 계속 녹고 있는데... 이거...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 정령중에 얼음 정령 없나? 으휴...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마법을 열심히... 아, 가만... 나 그쪽 계통의 마법 익힌 거 같은데...' 그제야 짐 속에 처박아 놓고 잊어버리고 있던 마법책이 떠올랐다. [엔다이론, 미안하지만 내 짐 속에서 책좀 가져다 줄래? 아니다, 그냥 통채로 좀 가져다 주라.] 과연, 엔다이론이 잽싸게 가져다 준 짐 속에 있던, 마법 스승님이 숙제로 내주셨던 공격 마법 중 아이스 월 마법이 있었다. '오호라, 이거 4 클래스 마법이잖아? 좋아 이정도면...' 하고 마법을 해보려던 나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윽... 이거 잘 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막 했다가, 설마 저 숲 한가운데다 얼음 덩어리를 만들어 놓는거는 아니겠지? 음... 안되겠다. 좀 더 약한 걸루... 정확성도 높고...' 해서 선택한 것이 프리즈 스피어 였다. 아이스 볼트의 강화판으로 2클래스의 마법인데 이 얼음 창을 맞는 존재를 얼려버리는 데다 정확성도 떨어지지 않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거기다 무엇보다 표적도 크니 엉뚱한데 맞출 염려는 없을 것 같았다. "좋았어, 한번 해볼까나? 프리즈 스피어~!!" 마법서를 몇번 읽고 주문을 외운 뒤 나는 개구쟁이처럼 눈빛을 빛내며 주위를 살펴보다가 얼음벽 위에 떨어진 불덩어리를 제거하고 그 빈 곳을 메우려고 땅의 정령들을 움직이고 있는 블러드무어경과 켐벨경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얼음창을 날려버렸다. 뜬금없이, 갑자기 날아온 얼음창에 의하여 얼음벽 사이에 끼워 놓은 돌기둥이 얼어붙자 놀라서 뚱그래진 눈으로 날 바라보는 두 쌍의 시선이 보였다. 그런 그들에게 씨익 웃어보이며 손을 흔들자 한번 더 놀란 그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흘렀다. "아니, 마법까지 익히셨던가요?"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닌 탓에 모르고 있었던 켐벨경이 놀랍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은채 물어왔다. "그러고보니 마법을 좀 익히셨다고 했죠? 공격 마법도 익히셨나봐요?" 블러드무어경도 놀랐다는 시선으로 물어오자 나는 배시시 웃었다. "그게... 몇가지만요. 다행이 도움이 되는 마법이 있었네요." "그렇군요. 정말 크게 도움이 되겠어요." 그러면서 블러드무어경이 생긋 웃는데 어디선가 실프가 날아와 날 보더니 팔을 잡고 당기는 거였다. "응?" [왜?] 그 모습에 당황해서 물었는데, 그 실프가 대답하기도 전에 켐벨경이 말했다. "아무래도 울만이 간 쪽에 또다시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어서 가보도록 하죠." "아, 예. 블러드무어경은 같이 가지 마시고 허공에 가주세요. 혹시 다른데 또 일이 생기면 빨리 연락 주시고요." 앞서 날아가는 켐벨경의 뒤를 따라가며 외치자 그녀가 손을 흔들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알겠습니다." 울만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보니 그 근처에 연속으로 불덩어리가 두개나 떨어져 얼음 장벽에 금이 가 틈이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모기들이 필사적으로 탈출을 하려는데 울만이 그걸 막고 있었던 거였다. 모기들을 막으면서 장벽도 수리하려고 하는데, 가까이에 떨어진 두개의 불덩어리에서 나오는 고온의 열기가 얼음장벽을 너무 빠른 속도로 녹이는 바람에 주체를 못해 도움을 요청한 거였다. "거기서 좀 떨어지세요. 프리즈 스피어~!!" "놈!" 내가 얼음창으로 얼음 장벽에 생긴 틈을 메꾸자 그 뒤에 켐벨경이 땅의 하급 정령 놈을 불러서 흙무더기를 만들었다. 그 위에 울만이 물의 정령을 불러내 물을 뿌리고 다시 내가 얼음 창을 던져 얼리면 땜빵은 끝. 그리고 그게 끝나자마자 다급히 날아온 블러드무어경. "백작님, 저쪽에 얼음 장벽이 얇아지고 있어요!" "가죠, 울만. 켐벨경은 다른데 장벽이 이상 없는지 살펴봐 주세요." "알겠습니다." 두께가 1m 면 30분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10분 이상은 버틸 줄 알았는데, 환경이 새클턴 정글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8클래스의 화염 마법을 너무 얕봐서 그런지 1m 두께의 얼음 장벽은 5분 정도 지나자 녹아내리기 시작하더니만 10분이 지나서는 그 주위에 작은 내를 만들 정도로 물을 흘리는 거였다. 생각보다 얼음 장벽이 빠르게 얇아지자 그 근처에 불덩어리가 떨어지면 고온에 얼음이 녹는 것 보다는 불덩어리가 떨어진 충격으로 인하여 장벽에 금이 가버리는 것이다. 덕분에 15분쯤 지났을때는 나와 세 정령사가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고, 20분쯤 지났을때에는 우리만으로도 부족해서 한숨 돌리고 약간의 기운을 회복한 마법사들이 이리날고 저리날아야 했다. 나중에는 너무 바쁘게 땜빵(?) 하러 뛰어다녀서 열받은 내가 아이스 월을 시전할까.. 했지만, 클라우드 남작이 필사적으로 말려서 그냥 땜빵하러 다녀야 했다. 그의 행동이 어째 예전에 내가 노만 스승에게 마법을 배울때 일으켰던 사건을 아는 듯 해서 나중에 떠보니, 스승과 잘 아는 사이라고 했다. 그래서 골치아픈 제자 (나 말이다) 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있었다나? 하기야, 한 사람은 궁중 마법사고 한 사람은 공작가의 마법사이니 왕래가 있다해도 이상한 건 아닌데다가, 둘 다 같은 길드 소속이니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불의 비는 30분쯤 후에 멈췄지만, 그 뒤에도 불꽃은 계속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다 타고 대충 수그러들때까지는 1시간 정도가 걸렸다. 그나마 그 곳이 원래 늪이라서 그 정도에서 끝났지, 보통 숲에다 그랬다면 아마 두세시간은 더 걸렸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하도 이리뛰고 저리뛰고 해서 그런지 불꽃이 사그라질 즈음에는 모든 마법사들과 정령사들이 지쳐서 헥헥 거리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 자리에 드러누워 한잠 자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지쳐 쓰러진 마법사들과 정령사들을 기사나 용병들이 들고서 블루 엘프 마을까지 옮겨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나는 '에라 모르겠다. 까짓거...' 란 심정으로 슈리엘들을 불러내서 일행들을 단번에 옮겨 버렸다. 사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게다가 내가 사용하는 마법이 2클래스 마법이라고 해도 1시간 이상 열심히 쏴대자 지치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난 마법 컨트롤 능력이 아직도 부족해서 2클래스 마법이라고 딱 2서클의 마나만 사용한 게 아니라 왕창 집어넣어 사용했으니 말이다. 그러고보니, 전에 폭포와 강의 정령과 싸운 뒤에 정령의 기운이 좀 늘었는데 그 덕을 본 거 같았다. 그게 아니었으면 나는 일행을 옮길 생각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냥 뻗었을 것이다. 그날 저녁, 우리는 약간 긴장을 한 상태로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사들과 정령사들이 낮에 너무 무리를 한 탓에 저녁이 다 되도록 완전히 회복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실드 정도는 칠 수 있어서 혹시라도 모기떼가 덤벼든다면 몸은 겨우 보호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실들을 2, 3시간 정도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서 마법사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낑낑대며 커다란 마법진을 만들어 대비를 했는데 다행인지 허망한건지 몇 마리의 모기가 왱~ 하며 나타난 것 외에는 그 무시무시한 모기떼는 출현하지 않았다. "오오... 그래도 우리가 한 일이 효과가 있었나보네요." "그게 보통 일이었습니까? 그 일을 벌이고도 효과가 없었다면 저는 오늘 밤 잠을 자지 못했을 겁니다." "드디어 해결을 한 건가요? 이거 왠지 시원 섭섭... 아, 섭섭은 아니군요." "당연하죠. 저는 다시는 그 모기떼를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만약 집에 돌아간다면 모기는 보는 족족 때려 잡을거 같은데요." 보통때라면 나타날 녀석들이 해가 완전히 지고 달이 뜨고 별이 반짝 반짝 빛나도 나타나지 않자 사람들은 안도의 표정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제... 갈 수 있겠군요." 누군가 기쁨에 찬 어조로 중얼거리자 나는 왠지 뜨끔해서 듀비를 돌아봤다. '어휴... 이거... 마냥 기뻐할 수도 없고... 나 원....' 다른 일행들은 저마다 기뻐하며 해가 떠오르는 걸 기다리는데 그 옆에서 첼릿과 나는 속으로 끙끙 앓고 있어야 했다. ====================================================== 제 43화 모기를 우습게 보지 마라 (6) 나와 첼릿이 그러든 말든 시간은 착실하게 지나갔고, 동쪽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하자 일행은 이번에야 말로 블루 엘프들의 그 뻔뻔스럽고 무뚝뚝한 얼굴을 찡그리게 만들어주리라 다짐에 다짐을 했었다. 하.지.만. "저희 마을을 도와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라고 하면서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오는데, 거기다 대고 어떻게 비꼬는 말들을 던질 수가 있겠느냐 말이다. 기가 막힌 일이지만서도, 아침이 밝아 우리가 기분 좋게 식사를 준비하려고 하는 그 순간 갑자기 블루 엘프들이 우르르 몰려 오더니 맨 앞에 그 세 족장이 떠억 버티고 서는 거였다. 우리는 또 뭔 시비를 걸건가 싶어서, 게다가 걸면 갚아주리라 생각하면서 그들을 맞았는데, 갑자기 전원 일동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를 해오는 것이었다. 언제 자신들이 우리를 무시했냐는 듯한, 180도 바뀐 그들의 행동에 우리는 그 동안 지금까지 그들에게 겪었던 일들이 꿈이 아니었나... 한번씩 의심을 해봐야 했다. 어떻게 바뀌어도 저렇게 싸악 바뀔 수가 있는지... 그래 동방예의지국에 살았던 나는 차마 그런 그들에게 뭐라 하지도 못하고 어버버하면서 마주 고개를 숙여 줬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오랜 시간 각각 나라의 왕실에서 치열한 정치 싸움에 익숙해진 사람들이라 블루 엘프들이 정중하게 나왔어도 거기다 대고 비꽜었다. 그거보고 어지간히도 속좁은 사람들... 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당한게 있으니 이해도 가고, 나는 못하는데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렇다고 듀비의 동족에게 그러는게 보기 안 좋고... 하여간 복잡미묘한 심정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는데, 이 블루 엘프들이 어젯밤에 집단으로 뭘 잘못 먹었는지, 대놓고 비꼬는데도 극상으로 정중하게 대하기만 하는 거였다. 그렇다고 힘 있는 자에게 아부하는 힘 없는 자들의 모습도 아닌, 그 정중한 모습에 처음에 대놓고 비꼬던 사람들도 차마 계속 그럴 수는 없었던 모양인지 그냥 흥... 하고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 속도 아마... 나처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혼자 부글부글 끓었을 거다. 클라우드 남작이 그런 일행들의 모습과 블루 엘프들의 모습을 보더니 허탈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허허허헛, 아무래도... 이런게 블루 엘프들의 문화인가 봅니다. 도움을 받기 전에는 철저하게 무관심, 냉정하다가 도움을 받으면 정중해지는..." "그, 그렇군요." "아하하하.. 그랬었군요." 일행들도 어색하게 웃으며 맞장구쳐줬다. 그렇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에구...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더니 (여기에 맞는 속담인감?)...' 하여간, 그렇게 블루 엘프들이 다가와 정중하게 감사의 인사를 하더니, 그 보답이 시작 되었는지 인사를 나누자마자 우리가 머물던 공터에 커다란 나무식탁이 날라져왔고, 그 위로 척척 음식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블루 엘프들은 음식을 완전히 익혀 먹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뭐, 과일들이야 안 익혀먹어도 이상할 건 없지만 육류 종류도 익혀 먹는 것 보다는 육회식으로 먹는 걸 더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가끔 통 바베큐처럼 배를 갈라내 내장을 드러내어 구운 것도 나오기는 했는데, 그런건 완전히 구웠다기보다는 겉에 털을 없애기 위해 그을렸다고 하는게 더 맞는 표현인 듯, 속에서는 찌르면 붉은 피가 그대로 배어나올 정도로 설익었다. 그러니 스튜 같은 건 보기도 어려웠고, 빵이나 밥은 더더욱이나 보기 어려웠다. - 하기야 블루 엘프들이 농사를 짓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 "여러분들이 도와주신데 대한 저희들의 보답입니다." 상이 다 차려지자 블루 엘프들의 안내로 앉기는 했는데, 나는 원래 음식을 다 익힌걸 좋아하는 편이라 차마 육류쪽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과일만 집어들었다. 그런데, 용병들은 물론이거니와 리건을 비롯하여 클라우드 남작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붉은 피가 배어나오는 육회를 찍어 입으로 가져가는게 아닌가? 그렇게 한 입 집어 넣고서는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것저것 집어먹기 시작하는 거였다. '윽...' 그렇지 않아도 원래 고기를 무척 좋아하는 체질인데다가 요 며칠 제대로 된 고기를 맛보지 못한 나는 그들이 굉장히 맛있게 먹는 모습에 너무너무 먹고싶어졌다. 하지만 차마 익히지 않은 육류엔 손이 가지는 않아서 속으로만 침을 꼴딱꼴딱 삼키고 있는데, 갑자기 눈 앞에 뭔가가 쓱 드리워지는 거였다. "자, 침만 삼키지 말고 먹어보지 그래?" '어?' 이 정글에서 처음 본, 겉에는 사과보다 좀더 진한 붉은색인데, 안에는 눈처럼 새하얗고 점점이 검은 깨가 뿌린 것 같은, 그러면서도 엄청 달콤한 과일의 속살과 육회가 버무려져 양상추처럼 생긴 얇은 나뭇잎에 쌓여 있었다. 그걸 멀뚱히 보다가 그 쌈을 들고 있는 손의 임자를 바라보니 생각지도 못하게 킨이 날 바라보고 있는 거였다. "어어..." "먹을만 하니까 눈 딱 감고 한번 먹어봐. 설마 못 먹을걸 내놨겠냐." 이놈이 언제 나와 친했다고, 이렇게 친한 척, 아니 반말로 말을 거는 건지.. '언제 또 옆에 온 거야?' 내가 그만 쳐다볼 뿐 움직일 생각을 안 하자 킨이 열받았는지 인상을 찡그리더니 다짜고짜로 그 쌈을 내 입안에 쑤셔 넣었다. "무슨!" 옆에서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첼릿이 그 즉시 일어나 인상을 험하게 부라리며 허리에 찬 검에 손을 가져다 대었지만, 킨은 조금도 주늑들지 않은 채 어디까지나 느긋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러는 거지? 나는 단지 음식을 먹여줬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화를 낼 일이던가? 아니면, 단지 이걸 핑계삼아 나와 한번 겨뤄보자는 건가? 나와 겨뤄보고 싶다면 일부러 핑계를 찾을 필요 없어. 언제든 상대해줄테니."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한번 해볼테면 해봐라 라는 식으로 해오니 첼릿의 인상이 더욱더 찌푸려졌다. 이럴때 나는 말려야 하는지 냅둬야 하는지 - 말렸다가는 첼릿의 자존심이 다칠 것 같고, 냅두자니 정말 검을 빼어들것 같고 -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그때, 구원의 소리가 다가왔다. "식사는 하고 하지. 해인, 너도 그거 언제까지 물고 있을거야? 먹을거면 씹고 안먹을 거면 뱉어." 리건이 이 살벌한 분위기를 뚫고 무심한 어조를 던지자, 팽팽했던 분위기가 약간은 수그러들었다. 도발적인 시선으로 첼릿을 바라보던 킨은 살벌한 족장의 눈초리에 쳇... 하고 혀를 차더니,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보지마. 나도 우리 마을의 은인하고 감정 상하기는 싫으니까. 단지... 당신이 제법 강해보여서 한번 겨뤄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가 그렇게 물러나자 첼릿도 어깨에서 힘을 뺐다. "저와 겨루고 싶으시다면 언제든 응해드리겠습니다. 그 핑계로 해인님을 건드리지는 말아주십시오." 그러면서 첼릿이 옆자리에 주저 앉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리건에게 고맙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런데, 이 킨이란 놈은 그런 일을 겪었으면 그만 가볼 것이지, 그대로 첼릿의 반대편인 내 옆자리에 털썩 주저 앉으며 날 바라보는 거였다. "어때, 그거 맛있지?" 그제야 나는 억지로 입안에 쑤셔진 쌈을 아직도 씹지도 않은 채 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턱을 움직였다. 생각 같아서는 육회를 먹고 싶지 않았지만, 그 쌈을 넣어준 당사자가 코앞에서 빤히 보고 있는데 어떻게 뱉을 수 있겠는가? 그래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제발 속에서 받아주길 기원하며 두 눈 따악 감고 먹기 시작했는데, 이게 왠일? 제법 맛있었다. 익히지 않은 육질의 노린내라던기 비릿한 맛은 없고, 겉을 싼 양상치 같은 입사귀의 아삭아삭한 맛과 달콤한 과일 속살과 어울어진 쫄깃한 맛이 괜찮았다. "오... 이거 맛있네요?" "거보라니까." 내가 감탄의 빛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킨이 의기양양하게 씨익 웃으며 다시 쌈을 주기에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냉큼 받아먹었다. 이번에는 달콤한 과일 대신 후추의 향과 맛이 나는, 산딸기 크기의 자그마한 열매 몇개에 겉만 살짝 익힌 고기를 넣어서 싼 것이었다. "오... 오물오물..."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씹고 있자, 저~쪽에서 보고있던 블러드무어경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백작님, 맛있으세요?" "아, 예. 경도 한번 드셔보시겠습니까?" 내 말이 끝나자마자 킨이 새로운 쌈을 내 손에 슬쩍 올려준다. 누가보면 완벽하게 식사 시중을 드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걸 자연스레 블러드무어경에게 넘겼고, 그녀는 그걸 들고 망설이는 표정이더니 눈을 따악 감고 입에 집어 넣엇다. 스페이스경이 경악하여 버벅거리는 걸 아는건지 모르는 건지. 대신 그걸 알고 있던 내가 싱긋 웃어주며 안심 시켜줬다. "괜찮습니다, 스페이스경. 킨이 해주는거 제법 맛있어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쥬디 블러드무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이거 괜찮은데요? 고기가 참 담백하고 연하군요. 이거... 소금하고 후추로만 약간 간을 한거 같은데.. 나, 이러다가 육회를 좋아하게 될지 모르겠네요." "그렇죠? 저도 육회를 맛있다고 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녀의 말에 내가 웃으면서 맞장구를 치자 새로운 쌈이 하나 더 내 손에 놓였다. 그렇게 생각지도 않게 기분 좋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자, 블루 엘프쪽에서는 언제 준비를 했는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에다가 우리들의 잠자리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혹시나 모기들이 쳐들어올지 몰라 지난 낮에 들구뛰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밤 늦게까지 지키다가 모기 안 오자 기쁜 마음에 밤을 꼴딱 세워버렸던 우리에게는 정말 최상의 선물이었다. 비록 솜이 잔뜩 들어간 푹신푹신한 매트리스에 실크로 만들어진 시트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기에 우리 일행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잘 말려진 나뭇잎으로 된 메트리스에 몸을 던졌다. 블루 엘프들은 정말 극진했다. 일행들이 신나게 자고 일어나니 정오가 훨씬 지난 오후 시간. 그런데도 불만 없이 푸짐한 점심을 차려주고, 여기까지 왔으니 자신들의 자랑인 호수에서 놀아봐야 한다고 우리들을 호수쪽으로 밀었다. 호수의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과 새하얀 모래사장, 따뜻한 날씨... 이 모든 것들이 일리언의 호수를 빠져 나오면서 생긴 물 기피증을 사르르 녹여버렸는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시는 물 가까이 안 가겠다고 외치던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에메랄드 빛 투명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허공에서 내려다 봤을때도 정말 아름다웠지만, 가까이서 본 호수도 무척 아름다웠다. 물이 얼마나 맑고 투명한지, 호수 아래의 하얀 모래가 그대로 보였고, 그건 그 위를 헤엄쳐 다니는 형형색색의 물고기들과 함께 멋진 장면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호수 가운데 부분은 모르겠지만, 가에 부분은 얕아서 대략 20여미터 정도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물은 내 허리 정도까지밖에 차지 않았다. 듀비는 리건, 각 나라의 대표들과 함께 블루 엘프 족장들에게 갔다. 아마도 해안으로 가는 길에 대해 의논하러 간 듯 싶었다. 그리고 램버트는 블루 엘프들의 마을을 둘러보러 간다고 갔는데, 아까 블루 엘프들이 속닥거리는 걸 얼핏 들어보니 아무래도 블루 엘프족 대장장이들이 그에게 몰려가서 한수 배우네 기술 대련을 해보네 할 거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호수에서 물장구 치는 대신 다른데 갔었던 용병의 무리 중 한 명이 헐래벌떡 뛰어와서는 소리쳤다. "이봐들~ 빨리 이쪽으로 와봐. 대단한 것이 있다구우~~" "뭐? 뭔데, 뭔데?" 엄청 흥분한 그 용병의 모습에 용병들의 절반 정도가 호기심때문인지 그 용병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리고 또 잠시 후, 밝은 갈색 머리를 가진 엘프가 오더니만 물장구 하는 대신 호수가에 있는 그늘에 앉아 있는 한 무리의 기사들을 향해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정중한 그 블루 엘프의 말에 기사들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그들을 대표로 차트워드경이 나서서 역시 정중하게 묻자 그 블루 엘프가 사람 좋은 미소를 싱긋 지으며 말했다.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검을 가지고 계신 걸 보아하니 여러분들께서도 검을 쓰시는 분들 같은데... 저희와 가벼운 대련을 해보는게 어떻겠습니까? 외부인과 검을 대련하는 기회가 흔치 않은 터라 꼭 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만..." 그러고보니 약간 멀찍이에서 그 갈색 머리 블루 엘프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 꽤 젊은 편이었다. 아마 듀비나 킨 보다도 훨씬 젊은 듯 한데... - 블루 엘프들이 옹기종기 모여 이쪽을 바라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찬성~!! 나 당신들과 한번 대련해보고 싶었어요. 아, 기사님... 제가 해도 되겠죠?" 그러자 약간 떨어져서 그늘에 누워 있던 그레이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며 소리치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기사들을 향해 배시시 웃어보였다. "저희는 상대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습니다. 저희쪽에서도 대련을 원하는 애들이 많아서요." 블루 엘프의 말에 기사들도 동하는 표정이었다. "어... 저... 한번 해보면 안되겠습니까, 차트워드경?" 스페이스경도 허리에 찬 검을 만지작 거리면서 청했고, 다른 기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심하게 다치지만 않을 정도라면... 어차피 마법사님들도 계시니..." 차트워드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슬금슬금 다가온 블루 엘프들이나 용병들, 기사들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럼 저쪽으로 가실까요? 저쪽에 괜찮은 공터가 있거든요." 그렇게 남은 용병들과 기사들까지 우르르 가버리자 남은 건 나와 첼릿 뿐이었다. "어라, 첼릿은요? 안 갔어요?" 첼릿도 오랜 세월동안 검을 다룬 사람으로써 블루 엘프들과 겨루어보고 싶은 마음이 없을리가 없었다. 특히나 듀비의 실력을 보고 난 뒤로, 다른 블루 엘프들의 실력을 보고 싶었을텐데... "저는 해인님 호위인데 해인님을 두고 어떻게 가겠습니까?" "헉... 그, 그런... 이런, 그럼 우리도 구경 갈까요?" 첼릿은 장난으로 한 말이었나본데, 그 말에 내가 놀라서 황급히 호수에서 빠져 나오자 오히려 첼릿이 놀라 나를 말렸다. "아닙니다. 아하하하... 이런, 오해 하셨군요. 물론, 그것도 있지만... 만약 아까 그 애들과 진심으로 겨루어보고 싶었다면 해인님께 허락을 맡았겠지요. 하지만... 아까 그 애들과는 겨루고 싶지 않았는걸요." "애, 애들이요? 아까 그 블루 엘프들은... 어린가요?" 듀비보다는 어려 보이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애들이라고 하기에는 쫌 무리가 있는 듯 싶은데... "흠... 제가 보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물론, 검술에 뛰어난 실력이 있는 것 처럼 보이고 자신들의 실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경지에 오르지는 못했다고나 할까요?" "예? 아... 그러니까 뭐 검기를 아직 못 다룬다거나 하는?" "아하하하... 그건 아닙니다. 저렇게 자신있게 대련을 청하는 걸 보니 아마 검기까지 다룰 수 있는 수준일겁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건... 그러니까 어떻게 설명을 드려야 할까요? 뭐, 마법이나 정령술도 마찬가지일 수 있겠습니다만, 검을 다루다보면 어느때 자신만의 한계에 부딪히게 된답니다. 저는 그 한계를 극복하고 넘어선 자야말로 한 경지에 올라섰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경지에 이른 자는 뭐랄까요... 그런 자만의 특유한 분위기가 느껴지거든요. 하지만, 저 블루 엘프들에게는 그런게 느껴지지 않았으니, 아마도 아직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자만심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자와 검을 부딪힐때는 대련이라기보다는 저도 모르게 가르치는 자세가 되거든요." "헤에..." "만약, 대련을 한다면... 그렇군요. 듀비님이나 아니면 아침에 해인님께 찝적댔던 그 킨이라고 했던가요? 그들 정도는 되어야 하겠죠." 첼릿이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그 킨이라느 블루 엘프도 검술이 꽤 높은가보다. 하기야, 그러니까 듀비에게 그렇게 적의를 드러내놓을 수 있는 거겠지만... "그럼 괜찮다면 우리는 저쪽으로 산책이나 가볼래요?" 내가 가리킨 곳은 이 초승달 모양의 호수쪽의 머리부분으로써 바로 옆으로 남부 블루 엘프들의 숙소가 있는 거대한 기암산이 있는 곳이었다. "그러시죠." 모래가 너무 좋아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었다. 시원한 호수물과 발바닥에 밟히는 모래의 사각거리는 촉감이 너무 좋았다. 첼릿과 나는 느긋하게 호수가를 따라 걷다가 내친김에 호수로 흘러 들어오는 제법 큰 내를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기암산 뒤쪽으로는 커다란 골짜기가 있었고, 그 골짜기 사이로 흐르는 내를 따라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자, 우리는 멋진 폭포를 볼 수가 있었다. 춘천에 있는 구곡 폭포와 비슷한 크기의 폭포가 그 밑에 이룬 커다란 웅덩이에 시원스레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호오... 여기에 폭포가 있었군요." 첼릿이 감탄한 시선으로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맑은 물줄기에 손을 가져다 댔다. "흠... 한번 올라가 볼까요?" 이왕 여기까지 온거 끝까지 가보고 싶은 마음에 중얼거리자 첼릿이 폭포 옆의 이끼가 낀 바위를 보고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미끄러워서 쉽게 올라가시가 어려울텐데요." "뭐... 바위 타고 올라갈 필요 있습니까?" 첼릿의 말에 나는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씨익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어 당혹스러워 하는 그의 손을 낚아채고는 에메랄드빛 물 웅덩이로 첨벙첨벙 들어갔다. "해, 해인님? 헉..." 갑자기 깊어 보이는 - 폭포 아래에는 깊은지 에메랄드가 아니라 어두운 색이었다.- 곳으로 걸어 들어가자 첼릿이 당혹스러워하며 날 보다가 그 다음에는 놀라서 신음성을 내질렀다. 그도 그럴것이 첼릿과 나는 물 위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아하하하.. 놀랄 것 없어요. 내가 전에 말 안했던가요? 아버지가 물을 다루시는 술사라서 나도 좀 다룰 줄 안다고. 너무 놀라지 말아요. 그럼 내가 미안하잖아." 폭포 바로 앞에 서자 첼릿과 내가 서 있던 부근의 물이 천천히 기둥을 만들며 솟아 올랐다. '이게 바로 물 엘리베이터당~ 우핫핫핫... 내가 이런 일을 할 줄이야~~' 첼릿이 적응 못할까봐 천천히 올라갔는데, 그래도 첼릿이 불안했던지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었다. "괜찮아요. 나 붙잡고 있으면 안 떨어져요. 정 불안하면 에... 정령이라도 불러서 잡아줄까요?" "아, 아뇨. 괘, 괜찮습니다." 나 밖에 잡을게 없다는 사실이 엄청 불안했는지 첼릿은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표정이면서도 사양했다. "후후후후~~" 왠지 첼릿의 그런 표정을 보니 재미있어 실실 웃음이 나왔다. 첼릿의 너무한다는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말이다. 폭포 위까지 올라오자 우리 앞에는 산의 봉우리와 그 봉우리 가운데에 자리를 잡은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헤에... 여기도 호수가 있었네." 신기하다는 듯 두리번 거리면서 호수 위로 한 발짝 옮겨디디려고 하는데 첼릿이 안 딸려왔다. "해, 해인님?" "괜찮아요, 괜찮아. 걱정 말고 따라와요." 자신있는 내 미소에 첼릿이 불안한 표정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물이 마치 땅처럼 그의 발을 든든하게 받쳐주자 첼릿의 눈은 다시 휘둥그래졌다. "후후후, 아까도 물 위를 걸어놓고 뭘 또 놀래요? 자자, 어서 산책이나 가자구요. 여기도 경치가... 어라?" 첼릿이 호수 위로 어렵사리 발걸음을 옮겨놓자마자 그걸 기다렸다는 듯 폭포 바로 옆에 생긴 물기둥이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내려가버렸다. 그걸 보고 첼릿이 펄쩍 뛸 정도로 놀라는 모습에 키득거리면서 첼릿을 잡아 끄는데 바로 옆에 엄청 놀란 시선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 두 인영의 모습이 보였다. "아, 듀비님 여기 계셨습니까?" 나도 같이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사이 제 신색을 회복한 첼릿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폭포 바로 옆에 있던 이들은 바로 듀비와 킨이었던 것이다. "아하하하... 여기 경치가 무지 좋네요." 나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첼릿을 데리고 얼른 호수 옆의 땅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그들의 놀란 표정은 계속해서 나와 첼릿을 따라오고 있었다. 첼릿은 그들이 놀란게 십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쓴 웃음을 머금고 있더니만, 땅 위에 발을 딛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나에게서 약간 떨어졌다. "갑자기 나타나서 죄송합니다. 저희가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첼릿의 정중한 어투에 듀비가 정신을 차리더니 얼른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보다도 먼저 그 킨이 씨익 웃더니만 뚜벅뚜벅 나에게 다가오는 거였다. "아니요, 마침 때마춰 잘 오셨습니다." "예?" 뜬금없는 그의 말에, 거기다 아침에는 반말 해놓고 이제와서는 존대를 하는 그의 황당함에 어리둥절해서 쳐다보며 반문을 했다. 그런데, 이 킨이라는 블루 엘프가 씨익 웃는 얼굴 그대로 내 코 앞까지 다가오더니만 내 반문에는 대답도 안 해주고 다짜고짜로 이빨을 세워서 내 목덜미를 물어버리는 거였다. "꾸에에에엑~~!!" "해인님!!" "킨, 이게 무슨 짓..."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그가 물고 늘어진게 아니라 한번 콱 물고 바로 놓아버렸지만 목덜미가 화끈화끈하고 따끔따끔한것이, 아니, 그것보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너무 놀라서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고 다리에 힘이 하나도 안들어갔다. "해인님, 괜찮으십니까?" 그런 나를 얼른 첼릿이 받쳐줘서 호숫가에 앉히더니 빠른 걸음으로 호수쪽으로 뛰어가 품에서 꺼낸 손수건을 물에 젹셔서 가지고 왔다. "잠시만 계십시오. 닦아드리겠습니다." "도, 도대체 지금 이게 무슨 일..." 나는 첼릿이 조심스레 내 목덜미를 닦아내는 걸 느끼며 킨을 노려봤다. 그런데 이 블루 엘프는 기가막히게도 나에게는 시선을 안 주고 듀비만 바라보고 있는 거였다. 그리고 듀비는 엄청 분노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면서 킨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확실하게 아셨습니까?" 뻔뻔할 정도로 담담한 킨의 말에 듀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 아주 확실하게 알겠군." 당한 건 난데 날 빼놓고 둘이서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주고받자 아까까지만 해도 날 지배하고 있던 당혹스러움 대신 분노가 들어찼다. "이이~!!" 그리고 나의 분노를 그대로 이어받은 호수가 꿈틀거리더니 거기서 거대한 물기둥이 솟아나와 그대로 킨을 향해 내리쳤다. 하지만... 정말 열받게도 킨이 아주 사뿐하게 물기둥을 피하는 것 아닌가? "열받아!" 그 모습에 내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고, 물기둥이 다시 허공에 떠서 킨을 노렸다. 하지만, 킨 녀석은 피식피식 웃을뿐 조금도 긴장한다거나 놀랐다거나 하는 기색은 없었다. "이!" 그의 그런 반응에 내가 더 열받아서 나서려고 할때, 나 보다도 먼저 첼릿이 나섰다. "킨... 이라고 했던가요? 블루 엘프여, 나 첼릿 지라르가 당신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첼릿의 차거운, 그러나 분노에 찬 말에 나는 입이 떠억 벌어졌다. 대련은 적당한 선에서 멈출 수 있지만, 결투는 상대방에게서 항복이란 말이 나오거나 아니면 상대방이 죽기 전에는 끝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첼릿이 열받았다는 소리겠지만... 첼릿이 이긴다면 속이 시원하겠지만서도, 만에 하나 첼릿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 막 내가 한다고 나서려는 찰나, 나는 이번에도 듀비에게 선수를 양보해야했다. "첼릿, 미안하지만 이번일은 나에게 맡겨주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첼릿이 화가 엄청 났던 모양인지, 평소 존중해주던 듀비의 말을 거절해 버렸다. "그럴수는 없습니다. 이번 일은 내가 해결합니다." "첼릿..." 첼릿의 딱부러지는 거절에 듀비가 뭐라 하려고 했지만, 그 보다도 먼저 킨이 빙긋 빙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말리실 필요 없습니다, 듀비님. 저 자를 상대하고 당신을 상대하면 되니까요. 가뿐하게 워밍업이라고 생각하죠." 그러자 듀비가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원하는 건 내가 아니었던가? 너와 나 사이의 일에 상관 없는 사람들까지 끌어들이지는 말아." 나 같으면 정면으로 받기만 해도 얼어버릴 것 같은 차가운 눈초리에도 킨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왜 상관이 없단 말씀입니까? 듀비님은 저 인간에게 그렇게 목을 매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저 인간이 없었다면 아직까지도 바깥에서 어영부영 세월을 죽이시지는 않았을텐데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네 말이 틀렸다. 내가 해인님 곁에 있는 건 아직도 내가 만족할 만큼 은혜를 갚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킨이 듀비의 말에 기가막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하~ 정말 어이가 없군요. 만족하지 못하신다구요? 이 정글에서 저들은 듀비님에게 몇번이나 도움을 받았을텐데요, 안 그런가요? 듀비님의 도움 없이 지금까지 무사히 왔다는 거짓말은 하지 마십시오." "내가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적 또한 없다." "저 인간이 그렇게 대단한 인간인가요? 제가 보기에는 멍청하고 비리비리한 녀석인 것 같은데..." "감히! 듀비님, 더 말할 것 없습니다. 절 말리지 마십시오." 첼릿이 엄청 열받은 표정으로 앞으로 한걸음 나서면서 허리에 찬 검에 손을 댔다. "호오, 용기도 가상하셔라." 아니, 아침까지만 해도 잘 대해주던 녀석이 이제와서 왜 저렇게 이죽대는 건지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는 거였다. "기다려요! 당신... 킨이라는 블루 엘프,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요? 나에게 뭐 불만있어요? 불만있으면 나에게 직접 와서 말하란 말입니다." 그러자 마치 없는 듯 무시하고 있던 킨의 시선이 나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또 싱긋 하고 웃는 거였다. '에?' 그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못해 벙 쪄 있는데, 갑자기 그가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헉!' 그리고 그 다음 곧바로 내 눈앞에 나타나서는 언제 어디서 뽑아들었는지 모를 소도를 휘두르는 거였다. 그 모습에 놀라 경악하고 있는데, 휘익~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나는 단단하고 따뜻한 누군가의 품에 빨려 들어가듯이 안겼고, 그와함께 챙~ 하는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달려왔는지 듀비가 왼 손으로 내 허리를 감아 자신의 품에 감싼 채 오른 손으로 검을 뽑아들어 킨의 소도를 막아서고 있었던 것이다. 킨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씨익 웃더니 뒤로 폴짝 물러났다. "지, 지금... 날 노리고..." 나는 기가막혀서 떠뜸떠듬 중얼거렸는데, 더 기가막히게도 이번에도 내 말은 무시되었다. 킨은 아주 기쁜듯이 웃으며 나는 무시하고 날 안은 듀비만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에게 검을 들이대셨군요. 이제 피하실 수가 없겠는데요?" 그러자 듀비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날 놓아줬다. 그러다가 내 목덜미에 저 킨 녀석이 물은 상처를 본 모양이었다. 무척 미안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가볍게 엄지 손가락으로 쓸어주는데, 그 바람에 거의 잊혀지고 있던 통증이 욱신욱신 다시 되살아났다. "윽..."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리며 신음을 흘리자 듀비가 화들짝 손을 뗐다. "죄송합니다. 많이 아프십니까?" "아, 아뇨. 그냥.. 약간..." "이런 일을 당하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해인님." 듀비가 고개까지 숙이며 정중하게 사과하자 나는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어어... 듀비가 그렇게 사과할 필요는 없는데요." "아닙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제 탓입니다. 그러니 제가 해결하게 해주시겠습니까? 첼릿, 당신께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듀비가 고개까지 숙이면서 정중하게 부탁하니까 첼릿도 계속 화를 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더구나 지금 보아하니 아무래도 킨과 듀비사이에 뭔 일이 있었는데, 하필 타이밍 안 좋게도 나랑 첼릿이 나타나 운 없게 말려든 것만 같은 꼴이었으니, 그냥 운이 없었으려니... 하고 넘어가는게 더 좋을 듯 싶었다. "첼릿, 우리는 이만 가도록 하죠. 가서 약이라도 발라야겠어요. 이거..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아직도 욱신욱신 거리네." 내가 한숨을 푹 내쉬며 투덜거리자 첼릿이 잽싸게 달려와서 목덜미를 들여다보았다. "후우... 벌겋게 부었군요. 우선 찬물로 식히는게 났겠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호수로 가서는 아까 손수건을 다시 빨아서 가지고 오더니 환부 부위에 대주고는 날 데리고 그 곳을 빠져 나갔다. 가기 전에 킨이라는 녀석을 매섭게 쏘아보는 걸 잊지 않았지만, 킨이라는 녀석은 뭣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너무 흥분해 있는 바람에 첼릿의 매서운 시선을 알아채지도 못한 것 같았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헤어진 듀비를 다시 보게 된 건, 우리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 때였다. 약간 지친 표정으로, 거기에 뺨에는 마치 칼로 그은 듯한 상처가 하나 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듀비의 모습에 나와 첼릿은 눈을 둥그렇게 떴지만, 듀비는 정중하게 사과만 다시 했을 뿐, 아무것도 이야기 해주지 않았었다. 분명히 킨과 한바탕 한 것 같은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묻기도 뭐 해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던 걸 알게된 건 그 다음 날 이른 아침에 날 찾아온 킨이 이야기 해줘서였다. 우리는 크게 다친 것도 아니라서 그 다음 날 아침을 먹고 출발하기로 했었는데, 그걸 고려해서인지 아직 내가 잠에서 깨지도 않은 시각, 내 침실로 쳐들어와서 날 깨워서는 아직 잠이 덜깨 어리버리한 상태 그대로 끌고 밖으로 나갔던 것이다. "뭐, 뭐야? 도대체 왜..." 아마 우리가 지내고 있던 거주지에는 산 봉우리에 있는 호수로 올라가는 길이 따로 있었는지 거주지 내의 복도를 이리저리 꺽고 문을 몇개 통과하자, 바로 그 봉우리의 호수가 눈앞에 나탔다. 킨은 거기까지 끌고 와서야 날 잡은 손을 놓더니 고갤 푹 숙였다. "정말 미안합니다아~" 그때쯤에는 나도 완전히 잠에서 깬 상태라 나는 한숨을 내쉬고 킨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히유... 아니 도대체 미안한 일을 왜 한 건데요? 어제... 듀비랑 싸운거 맞죠?" 내 말투에 화가 난 기색이 느껴지지 않아서인지 킨은 머리를 들고 비죽 웃었다. "넵~ 완전히 져버렸지만..." 그러고보니 킨 안색도 안좋았다. "그럼 무리하지 말고 쉬지 아침부터 왠일이래요? 설마.. 사과하려고?" "뭐, 겸사 겸사요. 듀비님에 대해 몇가지 묻고 싶었던 것도 있고... 아아... 정말 듀비님이 밖에 나가서 허송세월 보내실 동안 나는 악착같이 검술에 매진해서 이번에야말로 듀비님을 누르고 내 아이를 낳게 하려나 했는데... " "아, 아이요? 듀, 듀비는.. 남자가 아니었던가요?" 킨의 넋두리 비슷한 말을 듣던 나는 벙 쪄서 그가 말을 끝내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실례를 무릎쓰고 그의 말을 끊고 질문을 던졌다. "엥? 물론 남자죠." 기가막히다는 듯한 킨의 대답에 나는 왠지 두통이 이는 것 같았다. "아니.. 방금 듀비에게 아, 아이를... 낳게 한다면서요? 듀비는 남자인데 어떻게 아이를..." "흠? 당신네 인간들은 남자가 아이를 안 낳나요? 그럼 누가 낳나요?" "어... 우, 우리는 여자가 낳는데요?" "여, 여자요? 헤에...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나뉘나보죠? 우리 블루 엘프는 남자 밖에 없어요. 그래서 반한 상대에게 내 알을 심어서 나와 그의 아이를 낳게 하는 거죠." "그, 그렇습니까? 그런데... 왜 싸운 거예요?" "그거야 당연하죠. 내 아이를 낳게 하려구요. 우리 블루 엘프는 아이를 낳게 하고 싶은 상대에게 동의를 얻거나 굴복시키거나 해야지 알을 심을 수가 있거든요. 나는 얼마든지 듀비님의 알을 심어도 되는데... 듀비님은 도저히 그러시질 않으니까 어쩌겠어요, 내가 듀비님을 굴복 시켜서 듀비님께 내 알을 심을 수 밖에..." "그, 그런 겁니까?" 킨의 말을 들으며 새삼 떠오른 건, 블루 엘프는 마족이라서 그런가.. 하는 거였다. "아니, 그런데, 어제는 왜 날 끌어들인거래요? 그냥 듀비랑 대련했으면 됐잖아요?" 가만 생각해보니 나만 괜히 억울한거 같아서 인상을 찡그리며 묻자 킨이 미안한 표정으로 헤헤 웃어보였다. 그러니까 왠지 소년 같아보여 나는 계속 화를 낼 수가 없어서 마주 웃어보일 수 밖에 없었다. "정말 미안해요. 처음에는 정중히 듀비님께 대련을 요청할 생각이었는데, 듀비님이 자꾸 이리빼고 저리빼고 하시잖아요. 그래서 열받아서 자극을 좀 준 거였죠. 은혜를 갚는 시기에는 은혜를 갚을 대상을 전적으로 보호해야 하거든요. 다른 블루 엘프가 은혜 갚는 대상을 건드리면 엄청 화를 내는게 정석이라..." "그, 그런 거였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내 목덜미를 물 필요까지는..." "아하하하~~ 그건... 당신 목덜미가 너무 뽀애서... 한번 물어보고 싶었어요. 당신이 블루 엘프였다면 한번쯤 누르고 내 알을 심을 생각을 했을거 같은 걸요? 물론... 당신이 너무 약해보여서 자식까지는 아니고 그냥 즐길 상대로... 아하하하.. 그렇게 하얗게 질릴 필요는 없잖아요? 걱정 마요. 듀비님의 은혜를 갚는 대상인데 설마 손을 대기야 하겠습니까?" '허, 허걱.... 어제도 손을 대놓고서... 아니, 입을 댔던가?' "아, 그래서 묻고 싶은데... 듀비님은 당신과 있으면서 검술 연습을 계속 하셨나보죠? 그쪽에는 듀비님의 상대가 될 만한 존재가 없을거라고 여겼는데.. 어디 대단한 몬스터라도 계속 만나셨나?" "아... 음... 첼릿과 계속 대련을 하는 것 같던데요. 그 외에는... 잘..." "그래요? 역시, 만만하게 보이지 않더니, 그 사람 실력이 뛰어났나보군요. 아...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아깝네요.... 어쩔 수 없죠. 다음 기회를 노려야지." 정말 아쉽다는 듯이 쳇쳇 거리는 킨을 보자니, 왠지 듀비가 불쌍해지는 것 같았다. 이럴때 맞는 말이... '인기인은 피곤해' 인가? ====================================================== 제 44화 Come Back (1) 블루 엘프라는 안내자가 붙자 일행의 행보는 일사천리였다. 이건 예전에 일리언의 호수 찾아갈때보다 더 빨랐다. 그때 있었던 새클턴국 출신 안내자들보다 지리가 더 빠삭하지, 혹여 몬스터라도 나올라치면울 일행중 고수 - 듀비 빼고 - 못지 않은 실력으로 앞서나가서 처리하지, 정말 거칠 것 없이 전진한다는게 이런 거구나... 라고 깨닫는 시간이었다. 킨은, 안내자팀에 자청해서 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우리가 블루 엘프 마을에서 출발할때 산뜻하게 작별 인사를 하고 말았다. 그가 성년이 되고부터 내내 노려왔다던 반려자 - 자식을 한번 낳으면 좋던지 싫던지 자식이 성년이 될때까정 부부로 있어야 한단다 - 가 이제 다시 가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조금이라도 더 곁에 있고 싶어해야 정상이 아닌가 싶었지만, 어차피 그들은 인간이 아니니 인간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안되겠지. 그렇게 블루 엘프들 덕분에 정글속을 헤매지 않고 무사히 해안에 도착한 우리 일행들은 새클턴국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국경을 넘어 아메리국으로 갈 것인가 한바탕 설전을 벌이려고 했었지만, 리건이 나섬으로 인하여 깨끗하게 해결되었다. 리건이 한 거라고는 간단한 말 뿐이었지만 말이다. "새클턴국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새클턴국으로 가고, 아메리국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아메리국으로 간다. 참고로 말하자면 난 아메리국으로 갈 것이니까 새클턴국으로 갈 사람들은 시끄럽게 굴지 말고 알아서 가도록." 그랬더니 새클턴국으로 가자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얌전해져버렸다. 그 뒤에 일행들은 램버트의 지휘아래 커다란 나무들을 베어내어 뗏목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해안선을 따라 걸어갈까 했지만, 해안선을 따라 걸어갈꺼면 차라리 얕은 바다를 쭈욱 뗏목을 타고 도는게 더 빠르고 편하지 않겠냐는 제안이 나와서 일행들이 두말않고 찬성한 것이다. 어차피 일행의 절반 가까운 인원이 마법사겠다, 정령사들도 있겠다, 일부러 노를 젓거나 아니면 돗대를 달아 바람이 불길 기다릴 필요도 없이 가만히 뗏목 위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되었으니 반대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뗏목 만드는 과정이야 좀 힘들겠지만, 그것만 제외한다면 아메리 국경을 넘을때까지는 편안하게 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움직였다. 그렇게 해서 커다란 뗏목 두개가 만들어졌다. 뗏목 위에는 뜨거운 태양을 피하기 위한 지붕까지 만들어져 누가보면 꼭 물놀이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했다. 뭐, 귀족들이 즐겨 타는 화려한 물노리 배 대신 크고 튼튼하기만 한 멋대가리 없는 뗏목에, 화려한 옷차림 대신 꾀죄죄하고 볼품없는 옷차림이었지만, 그래도 정글을 통과하던 것에 비하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덕분에 몸과 마음이 다 느긋해져 며칠을 씽씽 달려 아메리 국경을 건널 즈음에는 여기서 며칠만 놀다 가자는 농담까지 주고받을만큼 일행들은 느긋해져 있었다. 이제 다시 각자의 나라로 출발하는 여행을 시작해야 했지만, 미지의 새클턴 정글 대신 익숙한 사람들의 마을을 지나친다는 것만으로도 신께 감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새클턴국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래도 설마 우리가 정글을 지나 아메리국으로 왔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할테니 마르타국으로 넘어가서부터 조심하면 될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어우, 어우, 어우우...." "덤버트야... 네 기쁨은 십분 동감한다만... 먹으면서 울지좀 마라. 같이 있는 내가 창피할 정도다." "그레이, 그런 말은 새끼 돼지 바베큐를 통채로 들고 하는 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오호라, 3인분의 식사를 남들 다 먹기도 전에 해치운 네 녀석이 할 말이 아니라고 본다." "캬아~ 이 얼마나 오랜만에 맛보는 와인이란 말이냐? 어흐흐흐~~ 감격의 눈물이 앞을 가리누나." "주인자아앙~ 여기 시원한 맥주통 하나 더 추가~!!" "아, 여기도~ 빵하고 샐러드도 좀더~" "예이, 예이~" 이게 무슨 일인고 하니... 아메리 국경을 넘자마자 제일 먼저 발견한 마을에 있는 식당에 거의 쳐들어 가는 듯한 기세로 들이닥친 우리들이 빈 탁자를 차지하고 엄청난 양의 음식을 시켜 먹고있는 중이었다. "으어어~~ 이렇게 인간이 한 음식을 먹어본 것이 얼마만이던가아~~"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아메리국에서도 새클턴 정글에 들어가 돈이 되는 약초라든지 몬스터 사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새클턴 정글이 새클턴국의 소유였지만, 두 나라 사이에 오랜 시간 평화가 계속 되었고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닌지라 아메리국경쪽에 사는 사람들이 넘나들어도 눈감아주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사실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덕분에 공식적인 국경, 즉 새클턴 정글을 지나자 제일 먼저 만난 해변에 있던 마을은, 정글에 드나드는 사람들 덕분인지 제법 큰 말이었다. 거기다가 정글에 들어갔다가 거지꼴로 나오는 사람들도 꽤 있었던 덕인지, 수많은 인원이 열흘은 굶은 꾀죄죄한 몰골로 들이닥쳐서 음식들과 한바탕 전쟁을 벌이는데도 그러려니... 할 뿐 수상하게 여기는 건 없었다. 단지 몇명 없는 점원들은 죽어났다~ 라는 표정으로, 쥔장은 봉잡았네~ 란 표정으로 우리들을 대했을 뿐~! 아마 이렇게 죽을 고비를 넘겨 고생고생하면서 보물을 획득해오는 사람들이 돈을 팍팍 쓰는 모양이다. 하기사, 우리가 맨 처음 쥔장에게 엄지 손톱만한 다이아몬드를 - 후일을 대비해서 보석을 챙겨오는 걸 잊지 않았었다 - 던져주자 '그럼 그렇지~'하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다이아몬드를 감정가해서 가격까지 불러주는 거였다. 얼마나 이런 일을 많이 겪었으면 보석감정까지 할 수 있는건지...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보석을 따로 돈으로 교환하는 귀찮은 일을 할 필요도 없었고, 좋은 서비스를 받고 남으면 거스름돈까지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나쁠 건 없었다. 엄청난 양의 음식을 거덜내고 나자 그 많은 음식들을 나르느라 기운 다 뺀 점원이 창백한 얼굴로 우리를 대중 목욕탕으로 안내했다. 내 고급 여관에서는 각 방에 목욕할 수 있도록 욕조를 마련해놓은 건 봤어도 대중 목욕탕을 마련해놓은 여관은 또 처음보는 거라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지만, 목욕물이 마련될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으니 무척 좋았다. 하지만, 명색이 귀족이라거나 기사라는 사람들은 도저히 대중탕에 들어가고 싶지가 않은 모양이다. '이게 뭐냐?' 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점원이 친절하게 '대중탕' 이라고 대답해주니 - 거기에 덧붙여 여러사람이 한꺼번에 목욕하는 곳 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여서 - 절대로 용병들과 빨가벗고 목욕할 수 없다고 난리쳤다. 하기야, 이들은 블루 엘프의 호수에서도 물장구 칠때도 옷을 입고 있었고, 씻을때는 용병들 없는 시기를 타서 몰래 몰래(?) 몇사람씩 갔다오던 사람들이었다. 몇번이나 생사고비에다가 죽을고생고생까지 해놓았으면서도 귀족의 프라이든지 후라인지 하는 건 죽어도 버릴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처음보다 용병들을 대하는게 조금 누그러진것도 많이 발전한 거라면 발전한 것일까나? 뭐, 그것도 내가 대놓고 정중하게 대하는데 자기네들이 깔볼수가 없어서 그러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여자인 쥬디 블러드무어경도 있고, 마법사들까지 대중탕에서 같이 목욕할 수 없다고 바락바락 우기는 바람에 대중탕은 용병들만 사용하기로 했고 소위 작위가 있는 인간들은 곧바로 윗쪽으로 올라갔다. 나 또한 첼릿에게 끌려 가면서 체념의 한숨을 푹푹 내쉬는 점원의 모습을 보고 동정의 마음을 금치 못했다. 우리가 한꺼번에 대중탕에 들어가면 대중탕만 신경쓰면 되겠지만, 각자 목욕을 한다면 각각의 방에 목욕물 떠다주랴, 목욕용품 마련해주랴, 혹시 모를 다른 심부름 해주랴, 얼마나 귀찮겠는가? 하여간 귀족들이란 인간들은 남들 귀찮게 하는데에는 뭐가 있는 사람들이다. 뭐... 아주 솔직히 말해서 나도 혼자 목욕하는게 좀 좋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한 일련의 작은 소동들이 끝난 뒤에, 배 부른데다 깨끗해진 몸으로 여관에서 마련해준 새 옷을 입고 우리는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아~ 이 얼마나 오랜만에 누워보는 침대더냐~" 햇볕에 잘 말린 냄새가 나는 베개에 얼굴을 부비며 행복한 듯 중얼거리자 첼릿이 쿡쿡 웃었다. "이제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군요. 후우, 그래도 한 고비는 넘겨서 다행입니다." 그 한 고비란 정글에서 무사히 빠져 나오는 걸 말하는 거겠지. "아아, 그러게 말이에요. 내 다시는 탐사대에 끼라고 해도 안 낄래요." 뭐, 자연계의 정령도 만나보고 정글 특유의 신기한 과일들도 맛보고 블루 엘프족과도 만나보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몬스터들과 조우도 해봤지만, 그러기 위해서 겪은 고생을 생각하니 차라리 그런거 안 보고 집에서 뒹굴뒹굴 하는게 백번 나을 거 같았다. "잘 생각 하셨습니다. 탐사란 그런데 목숨 거는 사람들이나 하는 겁니다." 내 말에 첼릿이 정말 다행이라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후후후후~~" 그의 어조속에 들어있는, 안심하는 기색을 느낀 나는 겉으로는 배실배실 웃었지만 속으로는 되게 찔렸다. "후아아암~~ 거 시끄러워. 잠좀 자자고~" 자신의 몸집에 비해 엄청 큰 침대에 누워 데굴데굴 굴러다니던 램버트가 작은 소리로 대화하는 것이 영 신경에 거슬렸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째려봤다. -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4인실이다 - 그래 첼릿은 얼른 자신의 침대로 갔고 나는 바로 누웠다. "아, 죄송합니다." 잠자리에 들기는 좀 이른 시간인데다가 크게 피곤한 건 없었기에 나는 잠깐 자고 저녁 시간에는 일어날려고 생각 했었다. 그런데, 오랜만의 사람 손으로 만들어진 요리와 따뜻한 물로 한 목욕, 그리고 폭신한 침대는 별로 피곤하지 않았던 나를 깊은 잠으로 이끌어 내가 잠에서 깨어난 시간은 한밤중이었다. 그것도, 신나게 자고 나서 저절로 일어난게 아니라 내 신경을 자극하는 께름직한 기분 때문이었다. 하지만, 너무 잘 자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깬 거라 얼결에 깨기는 깼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지는 못했다. 그래 반쯤 비몽사몽하며 게슴츠레 눈을 뜨려고 하는데, 갑자기 커다랗고 시커먼 물체가 내 침대 옆에 떨어졌다. 쿵~ 몽롱한 가운데에서도 그 모습에 깜짝 놀란 내가 눈을 번쩍 뜨며 상체를 일으키자 내 옆 침대에 잘 자고 있어야 할 램버트가 침대 위에 양반다리를 한채 앉아서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날 바라보며 투덜댔다. "넌 참 신경도 굵다. 그 와중에 잘만 자더니 다 끝나니까 일어나냐?" "예?" 뭔 소리인가 싶어서 되묻는데, 첼릿이 다가오더니 내 침대 옆에 떨어진 시커먼 물체를 잡아 다시 뒤로 패대기 치더니 날 바라봤다. "아, 너무 소란스러웠나요? 해인님 안 깨시도록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는데..." "뭐, 뭘요?" 멍 한 표정으로 또 되묻자 램버트가 투덜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긴 뭐냐? 수상한 놈들이지. 너 솔직히 말해봐라. 고향에 널 죽이고 싶어서 안달하는 웬수 한 둘 만들었지?" 램버트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 하며 굳어버렸다. 그 동안 잊고 있었는데, 램버트의 말을 듣는 순간 전 엠브로스 백작 이브스햄이 생각났던 것이다. 하지만, 곧 설마...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으음... 제가 그렇게 나쁘게 살아왔다고는 생각이 안되는데 말이죠..." 그러면서 어설프게 웃었지만 램버트는 넘어가주는 대신 인상을 찡그렸다. "어설퍼. 게다가 네놈이 그래봤자 저놈 표정또한 네놈 만만치 않은 걸 뭐." 램버트가 눈짓으로 가르키는 곳에는 방 가운데에다가 시커먼 물체들 - 세 사람 이었다 - 을 끌어다 놓고 있는 첼릿이 보였다. 그는 계속 램버트와 나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지 한번 움찔 하고 날 돌아보더니 한숨을 내쉬고 다시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 굳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닙니다." "가능성은 있지만, 그 가능성의 주인은 아닐겁니다. 지금 침입한 놈들은 정말 허접한 도둑놈들 이거든요." 나도 설마... 아닐거라고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나 대신, 나 보다 먼저 그렇게 말해주는 이가 있었다. 분위기가 심각해서 모르고 있었는데, - 뭐 듀비는 알고 있었던 듯 무심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 우리 방 문 앞에는 그레이와 덤버트가 떠억 버티고 있다가 우리의 시선을 받자 싱긋 웃어보였다. "게다가 침입을 받은 건 여기 뿐만이 아니에요. 귀족 나리들 방에는 모조리 침입자가 있었던 거 같아요. 모두 다 조용히 처리된 거 같지만... 블랜차드 후작님이 둘러보라고 해서 왔더니 역시나 여기도 침입자가 있었네요." 그레이의 명랑하기까지 한 말에 나와 첼릿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그럼 설마... 새클턴인지 뭔지 하는 곳의 놈들 짓인가?" 듀비가 불을 밝히는 사이 램버트가 침대에서 훌쩍 뛰어 내려서 방 가운데에 널부러진 놈들을 발로 툭툭 차며 물었다. "모르죠. 그건 이제부터 심문해서 알아봐야 할 사항이 아니겠습니까?" 그레이는 이 상황이 무척 재미있는지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쬐끔 떨떠름 했다. 이제야 좀 편안하게 집에 돌아가나 했는데, 또 엉뚱한 일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 제 44화 Come Back (2) "모르죠. 그건 이제부터 심문해서 알아봐야 할 사항이 아니겠습니까?" 그레이는 이 상황이 무척 재미있는지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쬐끔 떨떠름 했다. 이제야 좀 편안하게 집에 돌아가나 했는데, 또 엉뚱한 일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어쨌든, 혹시나 길을 잘못 든 쥐새끼 녀석들이 있다면 끌고 오라십니다." 그레이가 말하는 동안 터벅터벅 들어온 덤버트가 두 녀석의 멱살을 한 손에,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한 녀석의 뒷덜미를 잡고는 거의 질질 끌다시피 끌고 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놀라움과 경악으로 바라보던 우리도 그레이가 덤버트의 뒤를 따라 문 밖으로 사라지자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호오... 역시나... 라고나 할까?" 그레이와 덤버트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서 도착한 곳은 리건이 머무는 곳. 그 방은 이 여관에서 가장 큰 곳이었던지, 4인실이었던 내가 머무는 침실보다 두배는 더 커보였다. 그 곳에 들어서자 리건이 날 보더니 픽 웃어보이는 거였다. 방 안에는 용병과 마법사들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다 와 있었고, 거실에는 십여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기절한 채 누워 있었다. "자, 이제 다 왔으니 시작해 볼까나?" 리건의 말에 클라우드 남작이 재빨리 앤더슨에게 눈짓을 했다. 용병 두명이서 정신을 잃고 널부러진 사람들 중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자 앤더슨이 다가가 몇번 뺨을 쳐보더니 안 일어나자 낮게 주문을 읍조리고 시동어를 외웠다. "웨이크 업!" 아무리 깊은 잠에 빠졌거나 정신을 잃었더라도 강제로 정신을 차리게 하는 주문으로 그 강제성이 머리에 무리한 자극을 주기 때문에 위급시가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는 마법이었다. "으으..." 과연, 무리한 자극을 준다고는 하지만 효과는 너무나 탁월해서, 아까 뺨을 맞을 때와는 달리 금방 눈을 뜨며 정신을 차렸다. "헉..." 그리고는 그 시커먼 옷을 입고 눈하고 코 부위만 뻥 뚤린 복면을 쓴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 속박된 양 팔을 깨닫고는 낮게 신음성을 흘렸다. "잠시만 실례." 그런 그에게 방긋 웃어준 앤더슨은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복면을 벗기고 턱 아래를 눌러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하더니 서슴없이 손을 안으로 집어 넣어 이리저리 훝어본 다음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음, 독약 따위는 안 숨기고 있군요." 평소, 되게 얌전한 마법사로 성격 드러운 스승 밑에서 구박만 받는 약간 가여운 사람이라고 생각 했었건만, 이번 일로 인하여 나는 그에 대한 이미지가 산산조각 나는 걸 느꼈다. '도대체 저 사람 정체가 뭐래?' 내가 경악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앤더스는 여전히 그 남자에게 상큼하고 친절하기까지한 웃음을 보이면서 말했다. "자, 지금부터 제가 묻는 말에 성심 성의껏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나 해서 미리 말씀 드리지만, 제 질문에 제대로 답을 안 하신다면 기꺼이 정신계 마법을 걸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 마법이 풀리면 제 정신으로 돌아올지 안 돌아올지는 장담 할수가 없군요."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이 들으면 장난이라고 여겨질만큼 명랑 쾌할한 어조로 쏟아진 말을 들은 그 남자의 안색은 점점 새파랗게 질려갔다. "도, 도대체 뭘..." "우선 첫번째 질문, 당신은 누구입니까? 셋 셀동안 대답하세요. 하나, 두울, 세에..." 나는 갑자기 한국에서 주말 저녁 시간에 온 가족이 TV로 퀴즈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는 건 아닌지 주위를 둘러봐야 했다. 하지만, 앤더슨 앞에 있는 그 사람은 앤더슨이 셋을 세면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손을 올리자 황급히 대답했다. "히이익~ 나는 그냥 좀도둑일 뿐이에요, 좀도두욱~ 에헤헤헤... 제 이름을 말씀드려봤자 고귀하신 마법사님의 귀를 어지럽히는..." 그러면서 간사한 웃음까지 짓자 앤더슨도 마주 싱긋 웃으며 손을 내렸다. "뭐, 믿어주도록 하죠. 그럼 두번째 질문, 여기는 왜 오셨습니까?" "그, 그건..." 그 자신을 좀도둑이라고 소개한 사람이 말을 더듬자 앤더슨이 싱긋 웃으며 그 즉시 손을 스윽 치켜올림과 동시에 숫자를 셌다. "하나, 두울..." "아, 그게... 여러분이 상금이 걸린 인물들이랑 비슷하게 생겨서요!!" 다급하게 튀어나온 그의 말에 앤더슨이 멈칫 거렸고, 그와 더블어 주위 사람들도 멈칫 거렸다. "흠, 그거 참 흥미로운 말씀이시군요.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앤더슨의 말에 좀도둑은 체념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더니 순순히 털어놨다. "얼마 전 도둑길드에... 포상금이 걸린 사람들 초상화가 도착했었습죠. 마법사들 호위하는 기사들과 용병들이라고 하던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마법사들을 호위하는 모든 사람들, 아 용병은 빼고 말입니다. 하여간, 그 사람들의 목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에게 상금이 달려 있습죠." "얼마 전이라..." 클리우드 남작이 중얼거리듯 내뱉자 그 뒤를 미노트 남작이 이었다. "젠장, 귀찮게 되었군." 그 좀도둑이 아는 건 그게 다였다. 하지만, 그 좀도둑이 초상화에 그려져 있는 우릴 알아보고 숨어 들어왔다는건 어쩌면 우리가 여기 있다는 정보가 도둑길드인지 뭔지에 알려졌을지도 모른다는 뜻이 아닌가? "지금 당장 짐을 싸서 출발한다. 날이 밝기전에 여길 빠져나가는 거야. 어서 준비 하도록." 리건의 말에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아무래도 모두들 뛰어난 실력자다보니 이런 좀도둑이 들었어도 크게 소동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처리한 탓에 사방에서는 사람들이 깨어난 기척이 없었다. 그 틈을 타서, 가장 분주하게 움직인건 마법사들이었다. 우선 그 좀도둑을 다시 기절시킨 다음에 간단한 환영 마법을 걸어 모습을 우리들로 변장시켜 우리들 대신 침대에 뉘어 놨다. 뭐, 그 전에 내일 밤까지 깨어나지 못하도록 수면 마법을 걸어놓는 걸 잊지 않았고 말이다. 좀도둑의 숫자가 모자른 곳에는 방 자체에다가 환영마법을 걸어놨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이 다 짐을 싸자 사람들을 데리고 조용히 밤 하늘을 날아올랐다. '호오, 마법사들이 많다는 건 이럴때 유용하구나아~' 마법사들이 지치면 정령사들이 나서서 열심히 날아간 덕분인지 제법 그럴듯해보이는 성에 도착한 것은 새벽 하늘이 뿌옇게 밝아오는 시기였다. "저기 약간 멀찍이 떨어진데 내려놔줘." 리건의 지시에 정령사들이 그가 가르킨, 성에서 약간 떨어진 언덕에 일행들을 내려놓자마자 정령사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헥헥거렸다. "자, 그럼 인원을 나누도록 하지. 우선 식량품을 조달하는 팀하고, 정보를 알아오는 팀하고 나눴으면 좋겠는데... 정보는... 용병들에게 맡기도록 하지. 용병길드의 정보력도 꽤나 높다고 들었으니 말이야." 리건의 말에 트래비스가 고개를 끄덕여 승낙을 표시했다. 그러자 조용히 리건의 말을 듣고만 있던 콘스틴스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후작님, 저 성의 규모를 보아하니 저 안에 마법사 길드 지부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곳에 도움을 요청해보는게 어떨까요? 적어도 각 국의 마법사 길드에 연락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리건의 허락이 말이 끝나자마자 앤더슨이 또 손을 들었다. "저기... 혹시나 모르니 변장할 도구들도 준비해 오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까.. 그 도둑이 말하길 초상화들까지 깔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좋군. 그럼 그건 그대가 알아서 준비해 오도록하고. 나머지는... 좀 쉬도록 하지. 아, 용병들이 식량도 맡아주겠나? 그건 우리들보다 자네들이 더 잘 할것 같군." "알겠습니다." 그렇게 트레비스가 대답하고, 일행들은 잠시 쉬었다가 해가 완전히 뜨고 성문이 열리자 용병들과 마법사들은 우리를 남겨두고 돌아갔다. 어제 저녁, 목욕을 하자마자 잠자리에 들어 한밤중까지 잔 덕에 졸지 않고 지금까지 날아오기는 했지만, 그 여파로 약간의 피곤함을 느낀 내가 싱그러운 풀들이 나 있는 평평한 곳을 골라 그대로 드러눕자 어느새 다가왔는지 듀비가 슬쩍 내 머리를 들어 자신의 허벅지에 올려놨다. 그런 그의 행동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씨익 웃고는 그대로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런 내 옆에 첼릿이 조용히 다가와 앉았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아... 그러게요. 나만을 겨냥한게 아니라 정말 다행이야." "뭐... 그래도 편안한 여행길이 되지 못한 건 정말 아쉬운 일입니다만...." "어떻게든 되겠죠." 듀비가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주는 감각에 나는 기분좋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해인님은 제가 지켜드릴 겁니다." 첼릿의 나지막한, 그렇지만 굳은 목소리에 나는 반쯤 감은 눈을 다시 뜨고 싱긋 웃었다. "그런것 보다는... 첼릿이 아무 일 없이 제 곁에 있어주는게 더 좋은걸요." "참내, 팔짜 좋구만. 누가 너를 노리고 있는데 그렇게 태평할 수 있다니... 무딘거냐, 아니면 실력에 자신 있다는 거냐?" 어느새 다가왔는지 램버트도 내 옆에 와서 드러누우며 투덜대자 나는 다시한번 싱긋 웃었다. "그렇다기보다는.. 빽이 좋아서 말이죠. 쿡쿡쿡..." ====================================================== 제 44화 Come Back (3) 그렇게 정보를 수집하러 성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정오가 되어서야 다시 돌아왔다. 의아한 건, 용병들은 모두 돌아왔는데, 마법사들은 클라우드 남작과 앤더슨, 그리고 콘스틴스만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마법사 길드 소속 마법사들이 콘스틴스만 빼고 아무도 안 돌아온거였다. "어라? 다른 분들은요?" 홀리스터경이 의아하게 보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묻자 콘스틴스가 난처한 듯 쓴 웃음을 흘리더니 리건을 바라봤다. "정말 죄송합니다 블랜차드 후작님." "흠... 마법사 길드는 중립을 지키기로 한 모양이군요." "예. 이번 일에는 각 나라간의 정치적인 일이 얽혀 있다고 판단, 마법사 길드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중립이 아니라 더 위험하기 전에 발을 빼는 것 같은데... 하긴... 그것도 중립이 맞는 듯. 이게 몇 나라가 얽힌거야?' 그래도 갑작스러운 콘스틴스의 말은 달가울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안 좋은 상황에 지원군이 오면 몰라도, 그 반대로 큰 힘이 되어주는 마법사들이 단체로 빠져 나간다니 말이다. "그, 그럴수가... 그 새클턴국 사람들은 마법사 길드 소속 마법사들도 같이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홀리스터경이 너무 한다는 표정으로 외쳤지만, 콘스틴스는 씁쓸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대신, 미노트 남작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마도... 새클턴국은 마법사 길드 소속 마법사들에게는 해독약을 줬을테지. 아니, 안 줬다고 해도 마법사 길드에는 주려고 했다고 말할테고." 마법사라는 존재가 쉽게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보니 각 국가나 마법사 길드에서는 마법사란 존재를 보호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나라간끼리 전쟁이 났을때 적국의 마법사가 포로로 잡히더라도 될 수 있는 한 회유를 하는 편이지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하기야, 만약 한 나라가 마법사를 함부로 대우한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마법사들은 그 나라로는 안 가려고 할테니, 마법사가 있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얼마나 국력차이가 나겠는가? 그런 시점에서라도 당연히 그리해야 할 터였다. 오랜 세월 그렇게 하다보니 이제는 마법사는 건드리지 않고, 마법사도 적국에 붙잡히면 회유는 안 당한다 하더라도 얌전히 있는게 암묵적인 룰처럼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건 마법사 길드가 여러 나라가 얽혀있는 경우 세계가 파괴 된다거나 하는 일이 아니면 어디에도 편들지 않고 조용히 있겠다는 방침을 만들어내었다. 미노트 남작이 말한것이 바로 그런 소리였다. "끄으응..." 홀리스터경은 미노트 남작이 뭘 말한 것인지 알아듣고는 신음소리 비슷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마법사 길드의 방침은 확고한 것이니 그로써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마법사 길드 마법사들이 그때 새클턴국 사람들 곁에 남지 않고 우리에게 와준게 오히려 우리에게는 큰 덕이 된 것일지도 몰랐다. 새클턴국 사람들이 그렇게 배신을 때렸어도 마법사 길드 마법사들은 손을 안 댔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물론... 죽일 가능성도 높았지만... "해서... 각 나라로 연락해드리는 일도 거부당했습니다.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 밖에..." "하아아...." 사람들 입에서 일순 절망적인 한숨이 터져 나왔지만, 누구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기야, 발을 빼려면 확실하게 빼야지 어정쩡하게 빼면 마법사 길드 입장도 곤란해지니 말이다. "어쩔 수 없지요. 우리가 마법사 길드의 방침을 바꾸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럼... 마법사님들께서는 여기서....?" 리건의 이해한다는 듯한 어조에 콘스틴스가 약간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본부에서 당분간 여기서 머물다가 본부로 돌아오라는 명을 받아서 말입니다." "그럼... 용병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미노트 남작이 조심스런 어조로 물어왔다. "그렇군, 용병들은... 처음부터 마법사 길드와 계약을 체결하고 온 거니까..." 몬트리올경이 이제야 생각 났다는 듯 힘 없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용병이 아닌 사람들의 시선은 용병쪽으로 돌려졌다가, 그 용병들이 트래비스를 바라보고 있는 걸 보고 다시 트래비스를 향해 돌렸다. 트래비스는 그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뭘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우선... 그럼 마법사 길드와의 계약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원래는 마법사 길드 본부까지 무사히 모시고 가는 걸텐데요." "아, 그건 여기서 완료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보수는?" "원하신다면 여기서 지불해드릴 수도 있고, 본부로 가셔서 지급해드릴수도 있습니다." 콘스틴스의 대답에 트래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보수는 지금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리건을 돌아보았다. "자, 전 계약이 완료되었으니 이제 새 계약을 맺을 수 있게 되었군요." 그러자 리건이 피식 웃었다. "그렇군. 그런데... 정보료도 따로 받을 건가?" 리건의 질문에 트래비스도 피식 웃었다. "그건 서비스로 공짜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좀도둑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일주일 전쯤에 새클턴 정글과 밀집되어 있는 지부에 집중적으로 내려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초상화는 역시 여러분이었고 말입니다. 상금이... 꽤 짭짤하더군요. 그걸 보면... 아마도 일급 상금 사냥꾼들까지 움직일 것 같습니다. 아, 한가지 덧붙이자면... 전 마을에 우리가 나타났다는 정보가 올라왔더군요. 움직이시려면... 빨리 움직이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트래비스의 말에 일행들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갔다. 트래비스는 그걸 쭈욱 훑어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는 보수를 받고 오겠습니다. 분배 문제도 있으니 아마 한시간쯤 걸릴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트래비스는 용병들을 모두 데리고 콘스틴스와 함께 성으로 들어가버렸다. 아마도, 우리가 의논할 시간을 마련해준 듯 했다. 그리고, 우리가 의논하는 걸 용병들이 듣지 못하게 하는 배려도 곁들여진 것 같았다. 그러한 트래비스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 리건은 콘스틴스 및 용병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흩어진다." "엥?" 평소같으면 다른 이들이 자신들의 의견들을 몽땅 말하고 그거가지고 설전을 신나게 한 뒤에야 정리할 겸 입을 열던 리건이었는데, 이번에는 다짜고짜로 한 마디 던지는 바람에 의논하려고 폼을 잡았던 사람들이 벙 쪄서 그를 바라보았다. "후, 후작님? 그렇지 않아도 마법사들까지 다 빠져나가고 용병들까지 올지 안 올지 모르는데 흩어지자고 하시다니요?" 몬트리올경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뇨, 오히려 그게 더 좋을지도 모릅니다. 일행이 크면 클 수록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 싶상이지요. 차라리 흩어져서 따로따로 변장하고 가는게 사람들의 이목에 띄이지 않고 가는데 훨씬 유리할 겁니다." 곰곰히 생각하고 있던 미노트 남작이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그, 그런..." 이번에는 홀리스터경이 난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니... 녹스국은 마르타국에 비해 많은 인원이 남았지만 - 그래봤자 5명이다 - 리더가 홀리스터경이었다. 한마디로... 여기 있는 이들에 비하면 너무 경험이 적은 애송이들 집단이었던 것이다. 리더가 홀리스터경이라고 해도 그를 따르기보다는 전체 리더인 리건의 지시에 더 잘 따르던 그들이었는데, 만약 갈라진다면 분명 녹스국만 따로갈 건 뻔한 일. 홀리스터경도 그들을 잘 리드할 자신이 없는 지 울상이었지만, 다른 이들도 자신들의 리더가 탐탁치 못한지 같이 울상이었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홀리스터경보다 경험이 많은 이가 있기는 했다. 그런데.. 홀리스터경이 리더가 된 걸 보면, 아무래도 귀족 출신이 아닌 듯 했다. 그 동안 그는 다른 귀족 출신 기사들하고 부딪히지 않으려는 것인지 조용히 있다가 그들이 하자는 대로만 따라와서 거의 존재감이 없었던 이였다. 아마, 여러 사건으로 인하여 인원이 팍 줄어들지 않았다면 나는 여행이 끝나도록 그의 존재도 몰랐을 거였다. 하기야... 이름도 모르는데다... 말도... 두어번 나눠봤나? 반면... 마르타국에는 단 두사람이 남았다 해도 한 명은 그라함 대제의 보석을 가지고 있는 미노트 남작이고, 다른 한 사람은 중급 정령사인 켐벨경이었다. 그러니 숫자는 적어도 미노트 남작이 자신있게 흩어지자는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거겠지만... "그럼... 어떻게 나누실 생각이십니까?" 스페이스경이 진지한 눈동자로 묻자 몬트리올경이 버럭 화를 냈다. "경은 지금 흩어지는데 찬성한단 말이오?" "아, 하지만... 저도 그게 좋은 생각 같은데요. 인원이 많으면 사람들 눈에 띄기도 쉽거니와 기동성도 떨어진단 말입니다." "맞소. 지금은 최대한 빨리 각 국에 도착하는게 관건이오. 어차피 새클턴국에서 우리에게 현상금을 내 건 이유가 각 나라에 도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일테니... 아마도 아메리국이나 새클턴국에만 우리에게 현상금을 걸어놨겠지요. 그러니 지금은 최대한 빨리 이 나라를 벗어나는게 좋소." 클라우드 남작의 말에 리건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어차피... 미노트 남작, 그대는 켐벨경과 둘이서 갈 생각이겠지?" "그렇습니다." "홀리스터경, 자네는?" "저, 저희야...." 홀리스터경이 자신 없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리건이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자신을 충분히 지킬수 있는 실력자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정... 어려울것 같으면 아까 용병들에게 도움을 청해보게. 그들이 도와줄 수 있을 걸세." "아, 예. 블랜차드 후작님." 여전히 자신없는 표정이었지만, 리건에게 매달리기는 싫었던지 순순히 대답했다. 그에 리건은 만족한 표정을 하고는 차트워드경을 돌아봤다. "차트워드경, 자네에게는 클라우드 남작과 스니볼리 마법사와 함께 돌아가도록 하게. 내가 데리고 온 두 기사와 함께 말이지. 실력이 높은 사람들이니 큰 도움이 될 걸세. 그리고... 몬트리올경은 스페이스경, 블러드무어경과 함께 가도록." "그럼 후작님께선?"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의 몬트리올경이 묻자 리건이 나를 턱짓으로 가르켰다. "엠브로스 백작과 함께 가도록 하겠네." "예에? 아니, 그거 너무하신거 아닙니까? 엠브로스 백작님은 상급 정령사이신데다가, 그분께는 뛰어난 검사가 둘이나 붙어있는데 거기에 함께 가시겠다니요? 그쪽 전력만 너무 빵빵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자기네 팀, 그러니까 몬트리올경이 있는 팀이 우리나라 팀들 중에서 가장 전력이 약하니까 엄청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디 리건이 몬트리올경의 항의에 눈 하나 깜짝할 사람이던가. "그거야 당연한거 아닌가?" 나른한 표정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하자 왠지 몬트리올경이 정말 당연한 일 가지고 괜히 애들처럼 어거지쓰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찌보면 정말 당연한거긴 하지만... 그래도 솔직히 좀 그랬다. 원래 자기네들은 국방부 소속이고 우리는 왕실 기사단 소속이니 그렇게 나뉘는 건 당연하고, 마법사들이야 좀 더 전력이 높은 우리쪽과 같이 가는게 당연한거 아닌가? 뭐, 리건이 나와 같이 가는 건 엄밀하게 전력상으로만 따진다면 나도 좀 의외의 일이었지만... -나는 처음에 리건이 차트워드경과 함께 마법사들과 같이 가지 않을까 했었다. - 아무래도 나와의 친분이나 약속이 작용을 한걸까나? 이번 새클턴 정글 탐험을 행하기 전에 리건은 나에게 뭔 일 있으면 구해준다고 했었으니까 말이다. 그 동안은 계속 크게 위험하기 전에 아버지하고 정령왕들이 나타나줘서 리건이 그 약속을 이행할 틈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지 모르지만, 혹시나 만약의 경우가 있으니 그런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예?" 약간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몬트리올경에게 리건은 '정말 이런것까지 설명해줘야 하냐?' 라는 듯한 한심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대꾸했다. "엠브로스 백작 팀이 가장 눈에 띄니까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냔 말일세. 다른 팀이야 변장 하면 마법사도 일반 시민으로 보이고, 기사도 용병으로 보이고, 여자가 남자, 혹은 남자가 여자로 보일 수도 있는 거지만, 드워프만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고 하플링이나 호비트로 변장시키리?" 리건의 마지막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램버트의 이마에 심줄이 빠득 하고 솟아났다. "미쳤냐? 자랑스러운 북드워프족인 내가 왜 그런 하플링이나 호비트로 변장해야 하는데? 그러느니 차라리 엘프랑 사이좋게 두 손을 잡고 차차차를 추겠다." "'차차차'...요?" 램버트의 말에 얼이빠진 내가 얼결에 묻자 램버트가 고개를 휙 돌리며 대꾸했다. "뭐냐? 넌 그 유명한 차차차도 몰라? 우리 북드워프족의 춤인 차차차를 모르다니. 너 베지테크스 상회사람이 맞기는 하는 거냐?" "아.하.하.... 그, 그렇습니까?" 램버트의 사나운 눈초리에 내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자 램버트가 다시 매서운 눈길을 리건에게 돌렸다. "어쨌든, 난 변장같은 거 할 수 없어. 내가 왜 해야 하는데? 머리카락에 손 하나 안 댈거다." 아주 당당하게 선언하자 리건이 '봤지?' 하는 기색으로 몬트리올경을 바라봤다. "새클턴국 사람들이 우리 일행 사이에 드워프가 한 명 있다는 걸 모를리 없을테고... 그럼 변장 안 한 드워프야말로 가장 눈에띄고 표적삼기 좋지 않겠는가? 어차피 그들이야 우리가 어쩌면 뿔뿔이 흩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쯤 했을테니 말야. 몬트리올경, 자네가 지금 제일 전력이 약한 팀에 있다고 불만인거 같은데... 그럼 자네가 엠브로스 백작팀과 함류하겠는가? 엠브로스 백작 팀이야... 아마 여기 있는 팀중 제일 강하지. 왕실 기사단에서 로얄 기사단의 상위급 못지 않은 실력의 검사가 둘에다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실력 뛰어난 정령사까지 끼어 있으니 말야. 게다가 램버트님의 실력도 엄청 뛰어나시고..." 은근히 떠보는 듯한 리건의 말에 몬트리올경이 얼른 고개를 내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사, 사양하겠습니다, 후작님. 후작님의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도 모르고... 정말 실례했습니다." '치사한 짜슥... 정말 마음에 안 든단말이야. 그렇다고 그렇게 노골적으로 안심하고 물러나다니...' 몬트리올경이 그렇게 물러나자 리건이 주변을 쭈욱 훑어보며 물었다. "자, 그럼 이제 틤은 된 거지? 그럼 용병들과 계약을 맺을 팀은?" 그러자 홀리스터경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저희는... 아무래도 용병들을 고용하는게 좋을 듯 합니다." "좋겠지. 그들이 그대들보다 실력이 낮다 하더라도 경험은 훨씬 더 많을테니까. 그럼 홀리스터경 팀은 여기서 용병들을 기다리도록 하고... 우리는 일단 헤어져야겠는데..." 리건이 중얼거리듯 말하자 램버트가 갑자기 불쑥 끼어들었다. "다 좋은데, 우선 먹고하면 안될까?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 음식을 옆에두고 뭐 하는 거야? 이거 고문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고보니 아까 용병들이 돌아왔을때 식품 보따리를 한 아름씩 가지고 왔었다. 그들이 오기 전에는 반쯤 조느라 배고픔을 몰랐고, 그들이 돌아 와서는 전해들은 정보때문에 경악하고 당황하느라 배고픔을 모르고 있었는데, 램버트가 말하자니 극심한 허기가 갑자기 느껴졌다. "그러시지요. 어차피 적들도 우리가 밤 사이 다른 마을로 왔다는 건 모르고 있을테니... 게다가 이렇게 틈이 있을때 든든하게 먹어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몬트리올경도 배고팠는지 램버트의 말을 거들며 나섰고, 다른 사람들도 입맛을 다시며 식료품을 바라보자 리건도 별 달리 반대할 마음은 없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요리에 자신 있는 사람들이 잽싸게 달려들어 빠른 손놀림으로 뚝딱뚝딱 간단한 먹거리를 만들어냈고, 우리들은 적당한 자리에 둘러 앉아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가끔은 생각해본다. 이때, 그냥 거기서 식사를 하지 말고 각자 흩어져서 출발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말이다. 하지만, 만약은 만약이었고. 우리가 거기서 식사를 끝마칠 즈음 우리쪽으로 다가오는 용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식사시간이 길었던 건지, 아니면 의논하는 시간이 길었던 건지 모르겠만, 하여간 그들이 오자 우리도 슬슬 출발할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우리가 먹던 자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들이 트래비스 용병단이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하기야, 우리가 여기 있는 걸 그들이나 마법사들 외에는 아무도 모를테고, 설사 지나가다 호기심에 와본 다른 이들이라고 해도 식사를 끝냈으니 치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와본 사람들이 다짜고짜 덤빌 일은 없었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버렸다. 쓔우우웅~~ 콰과과광~~!! 뭔가 반짝인게 날아온다 싶었더니, 우리가 있던 공간에 내려 꽂히면서 요란한 폭발음을 내는 건 순식간이었다. '뜨어어어~~!!'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게 생긴 내가 놀라 굳어있는 사이, 누군가의 강한 손길이 내 허리를 잡아 채어 그 곳에서 끌고 나갔다. "해인님!" 첼릿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고보니 나는 듀비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 그리고 돌아본, 내가 있던 자리에는 땅이 완전히 뒤집어져 속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아마, 조금만 늦었더라면 뒤집어진건 땅이 아니라 나였겠지. "정신 차려. 지금 멍하게 있을때가 아냐!" 보기와는 달리 행동이 무지 잽싼 램버트가 언제 저기에서 몸을 피했는지, 약간 그을리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몰골로 도끼를 꺼내든 채 냉정하게 외쳤다. "도, 도대체 저놈들은..."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되 돼에에~~!!" 내가 뭐라 입을 열려 했지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램버트가 내 말을 중간에서 싹뚝 잘라 끊으면서 도끼를 부여잡고 막 우리를 향해 덤벼드는 한 놈을 향해 달려갔고 그 뒤를 첼릿이 따라가며 크게 소리쳤다. "해인님, 빨리 정령을!!" 첼릿의 외침에 나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떠오르는 이름들을 불렀다. "엔다이론, 실라이론, 이그니스, 노에스으으~~!!" 얼마나 다급했으면, 평소 잘 부르지 않던 4대 상급 정령들을 죄다 불렀을까. 그만큼 내가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사실, 아직까지도 심장이 크게 벌렁벌렁 거려서 가만히 있어도 온 몸에 맥박이 뛰는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내 눈앞에 두명의 거대한 거인이 - 노아스하고 실라이론 - 나타나고, 내 양 옆에는 거대한 늑대와 드래곤 - 불의 상급정령 이그니스. 물론 실제 드래곤의 모습보다는 훨씬 훠어어얼~씬 작다. - 나타나 나를 보호하듯 버티고 섰다. 꽈과과광~!! 다시 한번 빛줄기가 일행들 사이로 떨어졌고, 그로 인한 폭발 때문인지 땅이 뒤집어지며 흙먼지가 날렸다. 얼마나 흙먼지가 심했는지, 잠시동안 시야가 가려질 지경이었다. 실라이론이 바람을 불어오게 하지 않았다면, 아마 흙먼지가 가라앉는데 꽤나 오래 걸렸을 거다. 그런데... "어라?" 흙먼지가 사라진 다음에 내 눈앞에 보이는 건, 램버트와 첼릿을 상대한 듯한 인물들이 썰물 빠지듯 샤샤삭 멀어지는 모습이었고, 우리 일행은 절반이나 사라져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 주위에 남아 있는 인물들은 우리팀하고, 클라우드 남작과 앤더슨 스니볼리 마법사를 보호하는 차트워드경 팀뿐이었다. 국방부팀이나 녹스국팀, 마르타국팀은 정말 감쪽같다... 라고 말할 정도로 어디로 갔는지 없었다. "어라... 다들 어디 간 거지?"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할 적들이 보이지 않자 정령들을 다시 돌려보내며 두리번 거리자 리건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뭘 당연한 걸 묻냐? 우릴 공격한 놈들은 우리에게 맡기고 자기들은 내뺀거지." "이런 치사빤스 같은 사람들을 봤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그 유명한 명언도 모르나?" 리건의 말에야 상황을 안 나는 열받아서 주먹을 불끈 쥐고 투덜거렸다. "인간은 그런 존재지. 하지만... 녀석들도 어리석어. 적들이 원하는 대로 놀아난 꼴이니까 말야." 차가운 리건의 말에 내가 그를 돌아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약간 떨어져 있던 차트워드경팀이 다가왔다. "이거... 곤란한데요? 아무래도... 우리가 흩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각개격파 하려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오오... 역시 연륜있는 사람은 다르다고나 할까? 어떻게 그런걸 척 보면 착 하고 판단을 할 수가 있는 건지... 게다가 나는 그렇게 되려면 얼마나 오래 걸리려는지... "간단한 겁니다, 해인님. 우리 일행이 흩어지자마자 일부러 강한 폭발로 흙먼지를 일으켜 시야를 가린 다음에 물러난 적들의 모습을 보면 그걸 노린게 분명하니까요." 으... 내가 그렇게 티나게 고민했는지 첼릿이 다가와 조용히 속삭여줬다. '에구 창피해. 나는 언제나 포커페이스라는 걸 해보려나...' "어떻게 할 것도 없지. 어차피 헤어지기로 했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는 저 성에 들어가서 하루 묶고 떠나기로 하지." "그래도 괜찮을까요? 저 성에 적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들어갔다가 기습 당하는 거 아닐까요?" 한번 크게 당한 곳과 가까이 있다는 생각에 왠지 껄끄러워 물어봤는데 리건이 피식 웃었다. "보아하니, 지금은 우리가 타겟이 아닌 거 같아. 만약 우리가 타겟이어다면 계속 우리를 공격 했겠지... 아마, 방금 덤빈 놈들은 새클턴국 녀석들일 거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테니 우리보다는 다른 팀을 노리는게 훨씬 나을거라고 계산했겠지." "우리의 적이 새클턴국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 용병 길드나 도둑 길드에 상금을 걸어놨다면서요?" "그렇게 따지자면 어차피 다른 마을도 마찬가지일텐데 뭘. 그러니 멀리까지 힘들게 가지 말고 여기서 쉬어가는게 현명한거 아니냐?" 리건의 말을 듣고 보니 또 할말이 없어졌다. 으으... 역시 리건에게는 못당했다. 차라리 입다물고 얌전히 따라갈걸.... 나의 어리석음에 나는 고개를 푸욱 숙이고 한숨을 푹푹 쉬면서 성을 향해 걸어갔다. 아니, 걸어가려고 했다. 내 앞쪽에서 노움 5명이 불쑥 튀어나와 도도도~ 도망가지만 않았다면.... 앞서 말한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정령사는 자신의 능력으로 정령들이 일반 사람들에게 보이게 할 수도 있고, 안 보이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를 잘 만나서 그런거에 상관 없이 몽땅 잘~ 보였다. 그리고, 내가 보건데 저 노움은 자연계 정령이 절대 아니었다. 왠만한 자연계 정령은 모습을 왠만해서는 잘 보이지도 않으니까. 그렇다면... 저 노움은 계약자가 있는 정령이고, 방금은 계약자의 명을 행하고 계약자에게 돌아가는 것일 게다. 정령은 계약자의 기운이 다 딸리거나 크게 다쳐 강제 소환을 당하는게 아니면 계약자의 명이 있어야 돌아갈 수가 있으니, 아마 돌아가라는 명을 들으려고 계약자에게 돌아간 거겠지. '수상해...' 내가 발걸음을 멈추고 땅만 노려보고 있자, 일행들의 발걸음도 멈춰섰다. "왜? 또 걸리는게 있어?" 리건의 말에 담긴 묘한 뉘앙스가 맘에 안들어 그를 한번 찌릿 하고 노려봐주고는 실프를 불러냈다. 실프는 수상한 노움이 튀어나온 바로 그 지점에다가 바람을 불어 그 곳에 덮인 흙들을 살살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내 갑작스러운 행동들에 일행들은 입을 다물고 지켜보기 시작했다. ====================================================== 제 44화 Come Back (4) 나의 어리석음에 나는 고개를 푸욱 숙이고 한숨을 푹푹 쉬면서 벌써 저마치 가고 있는 리건을 따라 걸어갔다. 아니, 걸어가려고 했다. 콰과광~!! 예고 없이 들려오는 폭발음과 땅에서 솟구쳐 오르는 흙더미에 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치 슬로우 비디오를 보는 것 같은 기분으로 내 주위에 있던 이들이 그 폭발의 힘으로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는 걸 보고 있었다. '어라... 그런데 왜 난....' 이라고 의아하게 생각하던 나는 곧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희미한 빛의 장막을 보고 배시시 웃었다. '아~ 역시 빽이 좋아.' 하지만 그러한 기쁨은 잠시였고, 나는 곧바로 사방으로 날려간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다. "듀비, 첼릿, 괜찮아요? 램버트님 괜찮으세요?" 폭발한 장소와 가까이 있었던 탓에 뒤로 튕겨 나가기는 했지만, 다행이도 폭발이 크지 않아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지 나의 부름에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쿨럭, 쿨럭... 젠장, 그 놈들... 그냥 얌전히 돌아간 게 아니었잖아? 언제 저런 걸 설치해 놓은거야?" 잔뜩 뒤집어쓴 흙먼지 탓인지 기침을 하며 램버트가 투덜댔다. "괜찮으세요, 램버트?" 내가 부축하려고 하자 램버트는 그걸 가볍게 거절하며 스스로 일어나더니 몸을 이곳저곳 움직여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어디 부러진데는 없는 것 같군." "첼릿과 듀비는요?" "뭐... 저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만..." "괜찮습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몰골을 빼면 정말 괜찮은 표정이었기에 나는 안심을 하고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 떨어진 다른 사람들에게 달려갔다. "에구구구~~ 젠장, 이 나이에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아아~~ 저 놈들은 노인 공경이란 말도 모른다더냐아아~~" 앤더슨 스니볼리의 부축을 받으며 투덜대는 남작을 보니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거기다 다른 기사들도 모두 일어나서 툭툭 먼지를 털고 있었다. "모두 괜찮으신거죠?" "아아... 뭐... 살짝만 나가 떨어진 거라서..." 대표로 대답을 하며 흙먼지를 털어내던 차트워드경은 문득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단장님은?" "예? 아, 그러고보니 못 봤는데..." 설마 리건에게 뭔 일이 있으랴 싶어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는데, 갑자기 앤더슨 스니볼리가 새파랗게 질려 소리쳤다. "아앗, 그러고보니 폭발하는 장소에 계셨던 것 같은데..." 그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하얗게 질려 아직 흙먼지가 가라앉지 않아 제대로 잘 보이지도 않는 폭팔한 장소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브, 블랜차드 후작니이임~!!" "단장님~!!" 하지만 과연... 얼마 달려가지 않아 우리는 폭발한 장소 한 가운데에 떠억하니 서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재빨리 실프를 불러내 흙먼지를 날려 보내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을음까지 뒤집어 썼지만, 사지는 멀쩡해 보이는 리건이 그 곳에 있었다. "아아, 정말 다행입니다.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 모습에 차트워드경이 안도한 표정으로 한달음에 달려가서 묻자 리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바로 그의 반듯한 이마에 힘줄이 하나 빠득 솟아 올랐다. 그 이유는 이런 폭발 장치를 해 놓은 함정에 걸렸다는 것도 조금은 있겠지만, 그 보다는 곧바로 들려온 - 그것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 들리고 나와 리건에게만 들린 - 웃움소리가 더 큰 공헌을 했을 거였다. [푸핫핫핫핫~~ 멍청한 도마뱀 같으니라구. 인간들이 거기다 장치를 해 놓은 걸 못알아채고 있었단 말이야?] [훗, 꼴 좋다. 잘난체 하더니만...] [해인이를 넘본 댓가다 이놈아.] '저, 저렇게 대놓고 비웃다니....' [이봐들 너무한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이프리트 아저씨의 얼굴에도 웃음이 비식 비식 새어나오고 있었다. "호오... 이거 참... 너무 감격해서 할 말을 잊을 지경이군. 이처럼 대단한 대접을 해주시다니 말이야. 이런 대접을 받았는데 가만히 있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한쪽 입꼬리만 싸악 올린 미소를 띄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는데, 웬지 한 무게 잡을때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던 듯 다급하게 달려온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주춤 물러나는게 보였다. '게다가... 저 말을 폭발물을 장치한 사람들에게 하는 건지, 아니면 정령왕들에게 하는 건지 헷갈려...' 잠시 그렇게 무서운 미소를 띄고 있던 리건은 고개를 획 돌려 차트워드경을 매서운 눈길로 바라봐 그를 깜짝 놀라게 했다. "차트워드경, 그대는 빠른시간 내에 마법사들을 데리고 출발한다. 곧바로 본국으로 돌아가 자네가 보고를 하도록. 그리고... 그 보고할때 그라함 대제 보석 이야기는 빼놓도록 하게. 그건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심상치 않은 리건의 분위기에 잔뜩 쫄아있던 차트워드경은 그즉시 부동자세를 취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해인." "예?" 차트워드경의 대답을 들은 뒤 곧바로 날 보는 리건의 말에 나도 화들짝 놀라 대답하자 리건이 그 살벌한 미소를 씨익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마르타국 인물들을 추격하도록 한다. 캠벨경을 지금 즉시 추적할 수 있겠지?" "추, 추적이라면 제가..." 그러면서 남작이 나섰지만, 리건은 그에게 고개도 돌리지도 않고 말을 중간에서 딱 잘랐다. "물론, 마법사가 더 뛰어나지만 지금은 빠른 기동력이 필요하다. 게가다 어차피 켐벨경은 정령사니 같은 정령사인 해인 정도면 충분히 추적이 가능하겠지, 안 그런가?" "아, 예. 가능합니다." "좋아, 그럼 자네의 능력을 보여주길 바라네." 이까지 빠드득 갈며 조용히 분노하는 리건 덕분에 오늘 하루 편안히 쉰다는 이야기는 물건너 가버렸고, 대신 성에 들어가 추척할때 필요한 식량이라던지, 모포라던지 지도라던지 하는 필수 물자만 구입 하자마자 나는 팀원들을 데리고 허공으로 날아 올라야 했다. 처음에는 클라우드 남작이 마법을 펼쳐서 미로트 남작과 켐벨경이 도망간 - 아마 켐벨경의 정령이 그 둘을 데리고 날아간 것 같다 - 방향을 알려줬기에 그쪽으로 향하다가 꽤 많이 왔다... 싶었을때 슈리엘들을 풀어 켐벨경의 기운을 찾았다. 땅의 하급 정령과 바람의 중급 정령과 계약을 한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테고 기사와 같이 동행하는 사람은 더더욱 흔치 않을게 뻔했으니 찾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리건은 그들을 찾아놓기만 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들이 한 마을의 여관에 묶으면 우리는 좀 떨어진 다른 여관에서 묶고, 그들이 노숙하면 우리는 거기에서 500m 이상은 떨어진 곳에서 노숙했다. 가끔 그들이 시커먼 옷을 입은 사람들에 의해서 습격을 받을때가 있었는데, 그러면 리건은 허공에서 내려다볼 뿐, 조금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5일... 나는 도대체 리건이 뭘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결국 물었다. "도대체 뭔 생각이래요?" "뭐가?" "마르타국 사람들을 추격하는 거 말이에요. 도와주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르타국 사람들을 습격하는 것도 아니고... 지켜보기만 하려고 쫓아온 건 아니잖아요?" 그러자 리건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금 때를 기다리는 거야." "때?" "그래, 네가 말했듯이 나는 마르타국 녀석들을 도와줄 마음도 없고 의리도 없다." 아마도... 성 밖에서 습격 당했을때 적들을 우리에게 남겨놓고 도망친 사실에 꽁한 모양이었다. "그럼요?" "하지만... '그걸' 새클턴 놈들에게 넘기고 싶은 마음은 요만큼도 없지. 아마... 새클턴 놈들 미노트 남작이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야. 그러니 지금 세밀하게 녀석들을 몰아가고 있지." "몰아... 가요?" "눈치 못 챘냐? 습격하는 장소와 타이밍이 아주 교묘해. 덕분에 마르타국 녀석들이 원하던 방향과 많이 어긋나 있거든. 미노트 남작과 켐벨경도 처음에는 습격에서 도망치기 바빠 몰랐겠지만 지금쯤은 눈치 채고 있겠지. 어느 한쪽으로 몰리고 있는걸..." 그런데... 나는 왜 몰랐을까나... [너야 아무 생각 없이 지켜보고 있으니 당연한거 아니냐.] [어라라...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너무 구박하지 마라.] 아버지의 핀잔에 노아스가 내 편을 들어줬지만 실피드는 왠일인지 아버지 편을 들었다. [그래도 가끔은 생각하면서 살아야지. 그런것 까지 아버지를 닮으면 안돼.] 역시... 아버지를 편드는 게 아니었다. [오호라 실피드... 네놈 이야기를 지금 착각 하는 것 아니더냐?] [어허, 무슨 소리. 나는 항상 깊은 생각을 하며 살고 있지.] [놀구 있네.] 아버지의 말에 리건이 입을 열었다. "그래, 말 잘했다. 왜 여기서들 놀고 있는 거냐?" 그러자 재미있게도 실피드와 노아스가 동시에 대답하는 거였다. [그거야 재미있으니까.] [쿡쿡쿡, 좀 봐주지 그래?] 뒤이어 그동안 웃기만 할 뿐 조용히 있던 이프리트 아저씨도 웃으면서 입을 열자 리건이 인상을 팍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쯧쯧, 도마뱀 녀석들은 밴댕이 소갈딱지더니만... 네 놈도 거기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구나.] 그 모습에 실피드가 마치 연장자가 철 없는 어린애를 보는 듯한 눈길로 바라보며 혀를 차자 리건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호라... 손바닥 뒤집듯이 수시로 마음을 바꾸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구리같은 심성의 소유자 한테서 그런 이야기 듣고 싶지 않은데?" [그거 참 말 잘했다. 오랜만에 옳은 소리를 하는군.] 아버지의 편들기에 실피드의 눈길도 가늘어졌다. [허... 얼마 전까지만해도 저놈을 죽이네 살리네 했던 주제에.] [시끄러워.] 가만 있다가는 이 엉뚱한 대화가 계소 이어저 처음에 알아보려 했던 이야기는 그냥 사그라들거 같았다. "저기 리건... 그래서 리건이 결국 생각하는게 뭔데요?" 그래 아버지랑 실피드랑 투닥거리는 사이 슬그머니 리건에게 다가가 묻자 찡그린 얼굴로 아버지와 실피드가 투닥거리는 걸 보고 있던 리건이 표정을 풀고는 순순히 대답해줬다. "간단해. 새클턴 녀석들 이번 일을 아주 성심성의껏 계획하고 준비한 모양인데, 그걸 망쳐놓는 거지. 아마 지금까지 녀석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풀려왔으니 무척이나 기분이 좋겠지? 그걸 마지막에 뒤집어 놓는 거야." [성격도 드럽다니까.] 노아스가 한마디 하자 리건이 킥 웃었다. "내가 이런거 이제 알았냐?" "그... 마지막이라는건 뭔데요?" "지금 미노트 남작과 켐벨경을 몰아가는 마지막 장소에서 새클턴 녀석들이 잔뜩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을 거다. 미노트 남작이 그라함 대제의 보석을 가지고 있다니까 그거까지 감안해서 그 둘을 없애버리고도 남을 정도겠지.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계획대로 둘을 없애고 그라함 대제의 보석을 손에 넣었을때 우리가 나타나서 보석을 탈취하는 거야." "그... 보석 가지고 싶으셨어요?" "아니. 하지만, 이대로 놈들에게 얌전히 보석이 넘어가는 건 도저히 두고보지 못할 것 같아서. 저번에 대한 답례를 해줘야지." 그러면서 씨익 웃는데... 그거 보니 나는 절대로 리건의 성격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인 만큼 모든 일에 여유있게 행동하더니만, 그 이면에는 이런면도 있었나보다. 아무래도... 새클턴 녀석들이 준비한 함정에 멋지게 걸려들은게 리건의 자존심을 팍 상하게 한 모양이다. [자존심만 쎄서는...] [도마뱀 녀석들 자존심이야 너무 멋대로 커서 탈이지.] [하여간... 잘났어 정말.] 아버지와 실피드, 노아스가 번갈아가며 입을 열자 리건이 씨익 웃어보였다. "남 이야기할게 아니지, 아마?"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어느날, 드디어 미노트 남작과 켐벨경은 막다른 길목으로 몰리고 말았다. 그들은 어느 작은 마을에서 머물다가 밤에 갑자기 기습한 사람들로 인하여 잠자다 말고 쫓겨 나갔는데, 그 기습한 사람들이 그들을 살살 몰아 그 마을 근처에 있던 커다란 산으로 올려 보냈던 것이다. "이런 젠장할... 하필이면..." 그 산은 얼마나 높고 가팔랐는지, 산 꼭대기에는 햐앟게 눈이 덮여 있는게 보였다. 그 산을 보고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예전에 한국에 있을때 본, 어떤 사진집에 있던 일본에 있는 후지산 사진이었다. 커다란 호수를 앞에 두고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산 꼭대기에 있는 하얀 눈이 붉게 물든게 참 인상적이었는데, 아마 눈으로 하얗게 뒤덥인 산 꼭대기 때문에 떠오른 듯 싶었다. 그런데 그 산을 본 리건은 못마땅한듯 인상을 팍 찡그리는 거였다. "아... 부디 깊이 들어가지 말아야 할텐데..." "저 산이... 험하기로 유명한가 보죠?" 리건의 중얼거림에 조심스레 물었지만, 리건은 얼굴을 굳힌 채 아무말도 안 해줬다. 대신 이제 십여명으로 늘어난 사람들에게 쫓겨 산 속을 파고 들어가는 미노트 남작고 켐벨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뒤에서 쫓아가는 사람들은 무척이나 느긋했다. 보아하니 그들 중에는 마법사들도 섞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느긋한 그들에게 확실하게 몰린 미노트 남작과 켐벨경은 산 속으로 얼마 들어가지 않은 어떤 공터에서 또 다른 십여명의 시커먼 복장을 하고 있는 그들과 맞닥뜨려야 했다. "네놈들은 누구냐?" 이미 그들이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을 미노트 남작에게서 당당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흠.... 대화로 시간을 끌려 하는거 같은데... 어림 없는 것 같군."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건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커먼 남자들이 갑자기 덤벼들기 시작했다. "역시... 대단한 녀석들만 모아왔군." 그런데 덤벼드는 사람들은 다섯명일 뿐, 나머지 사람들은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두 명은 켐벨경을 노렸고, 나머지 세 명은 미노트 남작을 노렸다. 미노트 남작의 움직임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원래 그 남작의 실력도 뛰어났는데, 거기에 더해 그라함 대제 보석의 도움까지 받으니까 펄펄 날았다. 분명, 요 사흘동안 그를 이쪽으로 몰기 위해 행해진, 밤마다 계속되는 습격으로 인하여 제대로 쉬지 못하고 피곤할텐데도 세 사람의 맞서 조금도 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 반하여, 켐벨경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기에 그와 계약한 정령중 최상위에 있는 바람의 중급 정령인 슈리엘은 부르지 못하고 땅의 하급 정령인 노움과 바람의 하급 정령인 실프들만 불러서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 세명이었던 실프도 검사가 휘두른 검기 맺힌 검에 의해 허리가 양단되는 부상을 입어 정령계로 강제 송환당했고, 두 명의 노움도 그 검사와 한 조를 이뤄 켐벨경을 공격하던 다른 정령사의 노움에 의하여 제압당하고 말았다. "큭..." 그리하여 결국 켐벨경이 무릎을 꿇고 나자 이제 남은건 미노트 남작 뿐이었다. 촤랑~! 앞과 왼쪽에서 같이 덤벼 오는 검을 한꺼번에 걷어내고 몸을 낮춘 채 빙그르르 돌려 뒤에서 덤벼오는 검을 피해냈다. 그리고 돌아가는 그 반동으로 검까지 부드럽게 회전시켜 그를 베지 못하고 허공을 베어버린, 뒤에서 덤벼들던 검사의 팔을 향해 올려베었다. "크윽~!!"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검을 떨어뜨리지 않았지만, 검을 쥐고 있던 팔에 길게 혈흔이 생긴 탓인지 그 시커먼 사람은 더 이상 검을 휘두르는 대신 다른 팔로 다친 팔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걸 신호로 이번에는 새로운 두 사람이 투입되었다. 한 사람은 길다란 검은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창을 들고 있었다. 휘릭~ 채찍이 먼저 덥쳐들었다. 날카로운 파공성을 흘리며 뱀처럼 유연한 몸짓을 하며 날아와 미노트 남작이 검을 잡고 있는 팔을 노렸다. 촤락~ 하지만, 그건 미노트 남작의 팔이 살짝 움직임으로 인하여 팔 대신 검을 휘리릭 감았다. 그 순간 채찍을 휘두른 사람이 채찍을 잡아당겼고, 그 틈을 노린 창을 든 사람과 검을 든 두 사람이 미노트 남작에게 달려들었다. 미노트 남작은 그 셋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멀찍이서 채찍을 팽팽히 당기고 있는 사람에게 몸을 날렸고, 그 채찍을 잡아당기고 있던 사람도 마주 미노트 남작을 향해 몸을 날렸다. 쉬익~ 검과 채찍이 얽혀있는 상황이라 미노트 남작과 채찍을 든 사람은 자신들이 들고 있던 무기 대신 손과 발로 두어번 공수를 교환했고, 그 틈에 미노트 남작을 놓친 세 사람이 뒷쪽에서 미노트 남작에게 다시 덤벼들었다. 창이 허리 부근을 노리는 걸 몸을 땅에 납작하게 붙이다시피 낮춰 피한뒤, 자신의 몸 위로 차례로 떨어지는 두개의 검과 채찍을 든 남자의 발을 데굴데굴 굴러서 피한 남작은 벌떡 일어나 검을 잡아당겼지만, 채찍에 단단히 얽혀 있어서 빠지질 않았다. 그에 난처한 듯 인상을 찡그린 남작은 단호한 표정으로 쥐고 있던 검을 채찍을 든 사람에게 던지더니 그와 함께 자신과 가까이 있던 검을 들고 있는 사람의 품으로 자신의 몸을 던졌다. "헛!" 헛바람을 삼키고 자신의 품으로 파고 들어오는 미노트 남작을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미노트 남작은 두어 걸음 더 빠르게 걸어 그자를 쫓더니만 부드럽게 몸을 회전시켜 그 검사의, 검을 붙들고 있던 팔을 잡아 강하게 바깥쪽으로 꺾어 버렸다. "크윽!" 그 검사는 바깥쪽으로 뒤틀린 팔의 고통때문에 신음소리를 흘렸지만, 용케도 검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내가... 비록 6개월 정도지만 검술의 기초를 배워서 아는데, 검을 처음 배울때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손에서 검을 떨어뜨리면 안된다는 거다. 물론, 방금 같은 미노트 남작의 경우에는 어쩔수가 없는 거겠지만.... 하여간 그런 거의 세뇌라고 할 수 있는 교육 덕분에 아마도 그 검사는 팔이 바깥으로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도 검을 떨어뜨리지 않는 걸거다. 그걸 보면, 또 검을 다루는 사람들은 '음... 교육을 잘 받았군.' 이런다니까. "흠... 확실히 괜찮은 녀석이군요." 옆에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 왜 끄덕거리는지 모르겠지만 - 첼릿처럼 말이다. 그러고보니, 첼릿도 백작가에서 기사들에게 훈련 시키는 위치에 있었지. 그렇게 첼릿에게 칭찬(?) 비스무리 한걸 받은 그 검사는 미노트 남작에게는 엄청 얄미운 놈이었던지, 팔을 꺾었는데도 검을 놓지 않자 인상을 찌푸리며 그 사람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무릎에 그 검사의 팔뚝 부분을 강하게 내리쳤다. 빠각~ 하는 소리가 난 걸 보니 아마 뼈가 부러지던지 아니면 최소한 금이라도 갔을 것 같다. 그 고통 속에서도 그 검사는 '크윽~'하고 작은 신음정도에 그쳤지만, 검을 더 이상 잡고 있을 수가 없었던지 손에서 검이 스르륵 빠져 나갔다. 그걸 잽싸게 잡아채서 한바퀴 돌려 본 미노트 남작은, 왼 손으로 팔뚝을 잡고 있던 검사를 막 자신에게 덤벼오는 두 시커머스 사람에게 던져버리고 잽싸게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그가 깜빡하고 있는게 있었으니... "끄윽...." 남작이 뒤로 물러나자마자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모를, 시커멓게 차려입은 한 사람이 조용히 남작의 등 뒤에 바싹 붙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와함께 남작의 입에서 신음소리와 함께 붉은 핏줄기가 주르륵 흘러 내린 걸 보니... "흠, 뒤를 찔렸군. 멍청하긴, 뒤를 조심했어야지. 쩝... 아까워라. 그게 아니라면 몇 녀석 더 상대 할수 있었을텐데..." 이 세상에서 재일 재미있는게 불 구경이랑 싸움구경이라더니만, 격투를 재미있게 관전하던 램버트가 무지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시며 상황 설명을 끝냈다. 맨 처음 미노트 남작과 켐벨경을 공격하기 시작할때도, 몇몇 사람만 나와서 공격할 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계속 가만히 있어서 아무래도 남작은 주위 사람들에게 신경을 안 쓴 모양이었다. 마지막에... "이런 비겁한..." 이라고 중얼거리며 쓰러지는 거 보니까 말이다. 하지만 미노트 남작에게서 '비겁하다' 라는 말을 들은 그 시커먼 사람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의 등에 박혀 있던, 단검 치고는 약간 길어보이는 검을 빼내고는 엎어져 있던 남작을 뒤집어 그의 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거의 남작의 옷을 벗기다 시피해 탈탈 털고 나자 그의 허리띠 속에 교묘하게 숨겨진 보석을 드디어 발견해냈다. "흠... 이건가?" 그 보석은 그 남자의 손 안으로 들어가자 연한 자주색 같은 빛을 발했다. 그는 그것을 높이 들어올려 이리저리 비춰보더니 피식 웃으며 그걸 품에 넣으려고 했다. 그 순간! "지금이다!" 라고 외치며 리건이 뛰어 내렸다. 그리고 그 뒤를 못마땅한 표정의 첼릿과 듀비, 그리고 으갸갸갸~~ 하는 이상한 기압을 넣은 램버트가 뛰어 내렸다. 나? 나는, 어차피 내려가봤자 검술을 못하니 짐덩어리만 된다고 해서 위에서 지켜보다가 정 위험할때 지원 사격이나 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종횡무진하는 그 넷을 보니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이 금방 끝날 것 같기도 했다. 시커멓게 차려입은 존재들은 갑자기 위에서 떨어져 내린 내 일행들을 보고 동요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고 곧바로 조를 짜서 덤벼들었다. 그 사람들도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본 실력을 드러내는 그 넷 에게는 정말 쨉도 안되었다. '어라... 그러고보니 내 일행은... 모두 인간이 아니잖아?' 5000살 먹은 드래곤 부터 시작해서 200살 넘게 먹은 블루 엘프에 100살 넘게 먹은 하프 엘프에 200살이 훨씬 넘은 드워프까지. '오호라... 이런 파티들은 돈주고 구해도 못 구할텐데.' 한 사람에게 5명씩 붙었지만 그 다섯명들을 제압하는 건 우리쪽이었다. 사방팔방에서 너무나 화려한 씬들을 펼치고 있어 내 눈은 전후좌우를 쉴새없이 왔다갔다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까 남작이랑 싸울때는 그래도 '대단한 실력이네...' 라고 감탄할 만한 실력자들이, 그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 상대하니까 완전 진검 앞에 몸사리는 대나무처럼 그들이 한번 휘두를때마다 그냥 바닥으로 쓰러졌다. 나는 그 순간 또각또각 하는 효과음이 나지는 않았나 싶을 정도여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역시 그라함 대제의 보석을 챙긴, 치사하게 뒤에서 찌른 그 사람만이 남았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4명을 보고 가만히 있더니 갑자기 품에서 보석을 꺼내서는 허공으로 휙~ 하고 던져버리는 거였다. 아마 내 생각에는 갑자기 나타난 우리 일행이 보석을 노리고 온 것일테니 보석을 다른 곳, 더구나 멀~리 던저버려 우리의 시선을 돌린 뒤 자신은 튀려고 했던 것 같았다. 보석을 얻든 뺏기든, 일단 어떻게 된 건지 상황 보고는 할 사람이 필요할테니 말이다. 정말 그것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참....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그가 보석을 던지자마자 고개를 돌린 건 단 한명, 램버트 뿐이었고, 나머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 황당한건... 그가 하필 보석을 던진 곳이 내가 있는 방향이라, 나는 정말 얼떨결에 그 보석을 받고야 말았다. 그 보석을 쥐는 순간... 나는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뭐라고나 할까... 기분이 마구 들뜨면서 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기운도 마구마구 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그래, 헤에... 이게 그라함 대제의 보석 효과인가보다... 생각했지만 그것뿐, 나는 그 보석을 한 손에 쥐고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내려섰다. "아... 저기... 이거..." 내 앞에서 황당함을 금치 못하는 시커머스를 한번, 보석에 눈을 빛내는 램버트를 한번, 그리고 리건을 한번, 듀비와 첼릿도 서비스로 한번씩 본 나는 마지막으로 리건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거... 어떻게 하죠?" 은빛으로 예쁘게 빛나는 보석을 들고 난처한 표정을 짓자 옆에서 램버트가 냉큼 말했다. "어디, 나도 한번 보자. 그 유명한 보석이라는거..." "아, 예. 여기..." 내 손에서는 은빛으로 빛나던 것이 램버트 손에 들어가자 너무나 정열적으로 보이는 붉은 빛으로 변했다. "히야... 이거 제법 세팅이 잘 되어 있잖아? 내 친구놈에게 보여주면 불을 뿜을 거야. 그 놈은 지가 이 세상에서 제일 보석 세팅을 잘하는 줄 알거덩. 쿡쿡쿡, 그 모습을 봐야 하는데..." 어두워서 달빛에 의지해야 했겠지만, 그렇게 대충 살펴보던 램버트는 보석을 나에게 넘겼다. "자." "에? 아, 예." 램버트가 주기에 받기는 받았는데, 이거 어째... 커다란 보석을 받아서 입이 찢어진다기 보다는 엄청난 골치덩어리를 받은 기분이라 떨떠름 했다. 그래 그런 시선으로 보석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리건의 말이 들려왔다. "여기 오래 머물 이유가 없으니 빨리 뜨자. 해인, 넌 뒷정리좀 해라." 뒷정리라는 것은 공터를 깨끗하게 비우라는 소리였다. 그래 한 사람 남아 있는 건 어쩔껀데요... 라고 물어보려고 고개를 드는 순간, 나는 누가 손을 썼는지 조용히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어이구... 잽싸기도 하셔라.' 속으로 괜히 툴툴대던 나는 몇몇의 노움들을 불러내 공터를 치우게 했다. "아, 이것도... 파묻어버리면 안될까요? 아니면... 부셔버리던가... 가지고 있기 싫은데..." 그런데 보석을 깰 수 있나? 라고 중얼거리려고 한 그 순간, 나는 갑자기 주변을 진동시키는 엄청난 마나를 느끼고 놀라버렸다. 얼마나 거대한 마나였는지, 그걸 느끼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었다. "이, 이게 도대체..." 라면서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데 다른 이들은 아무것도 못 느꼈는지 가만히 있는 거였다. "듀비, 첼릿 방금 뭐 안 느껴졌어요?" 둘 다 마법사는 아니라고 해도 검기까지 다루는, 즉 마나르 다루는 경지에 있는 사람들인데, 날 소름까지 돋게 만든 이 강력한 마나의 파동을 느끼지 못할리가 없었다. 그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들이 오히려 이해가 안되어 물어보는데, 대답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거였다. 그제서야 나는 그들이 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라.. 첼릿? 듀비? 램버트?" 내 부름에도 그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거였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놀라 그들에게 다가가려는데 리건이 내 팔을 잡아 제지했다. "놀랄 거 없어. '타임 스톱' 마법에 걸린 거야." "에엑? 타임 스톱이요? 그거... 9클래스 마법이잖아요?" 말로만 들어보던, 긍국의 9클래스 마법이 바로 내 눈앞에서 펼쳐졌다는데 어째 현실감이 없게 느껴졌다. 사실 첼릿이나 듀비, 램버트가 가만히 있다는 것 외에는 주변에는 크게 바뀐게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타임 스톱이라는 마법이 시간을 멈추는 거라 환경이 갑자기 바뀌는 건 없지만.... '아, 그럼 아까 그 강력한 마나의 파동이 바로 타임 스톱 마법이 시전되느라 생긴 거구나.' 아까 느꼈던 충격이 다시 떠오르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역시 9클래스 마법이다... 라고나 할까? 그렇게 9클래스 마법을 겪어 본 충격에 젖어 있는데, 리건이 또 날 잡아 끌었다. "가자, 만나뵐 분이 계신다." "예에? 갑자기 무슨..." 그러나 내가 '예?' 라고 물을때 리건과 나는 빛에 휩싸였고 '무슨' 이라고 중얼거릴때 나는 주변 환경이 화악 바뀌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슬그머니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입을 다물려다가 놀라서 다시 벌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푸르른 수목에 둘러 쌓여 있었는데, 눈 깜빡 할 사이 내 주변에 있던 푸르른 수목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너무나 거대한 동굴 속에 서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동굴도 보통 동굴이 아니라, 얼음으로 된 동굴이었다. 그것도 뿌연게 아니라, 마치 티 하나 없는 맑고 투명한 얼음이라, 밤하늘에 떠있는 달빛을 그대로 투과, 굴절시켜 동굴 안이 환상의 나라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환상의 나라인 것 처럼 느껴지는 동굴 가운데에는....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는 거대한 존재가 있었다. 솔직히 드래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듣고 상상도도 많이 봤었지만, 이야기를 듣거나 상상도를 봤을때에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정말 실제로 실체를 보는 순간,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딱 한가지였다. "아름답다...." 이게 얼음 동굴때문인지, 달빛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드래곤들이 모두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아름다웠다. [후후후, 고맙구나 신기한 종족의 아이야.] 동굴을 울리는 듯한, 그러나 부드러움이 담긴 목소리에 나는 화급히 정신을 차렸다. 나를 위해서인듯, 드래곤은 바닥에 몸을 낮추고 그 거대한 머리 또한 바닥에 뉘인 상태로 날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칸 콜트페이스님." 리건의 정중한 목소리에 나도 황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이구나, 블루족의 아이야.] '아, 아이....' 5000살이 넘는 리건에게 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있을 줄은 정녕 몰랐다. "예, 칸 콜트페이스님. 보아하니... 생의 끝을 기다리고 계시는 군요." [후후후, 그렇지. 이럴때 참 예기치 않은 방문을 받아 놀랐지만...] [신경쓰이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빨리 처리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아니, 아니야. 끝을 바라보는 시기에 정말 즐거운 만남이 있다는 건 기쁜 일이지.] '도대체 뭔 소리래...' 그 둘의 알 수 없는 대화에 소외된 내가 멀뚱히 서 있자 실버 드래곤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신기한 종족의 아이야, 너는 누구더냐?] 이름을 대답해야 하나, 인간 종족의 백작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내 핏줄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그때, 나 대신 답해주는 목소리가 있었다. [내 자식이야.] "아, 아버지." 아버지를 필두로 실피드와 노아스, 이프리트 아저씨까지 줄줄이 나타났다. [오호... 4대 정령왕을 한꺼번에 만나는 건 흔치 않은 일인데... 오늘은 신기한 경험을 많이 하는군. 그런데... 정령왕의 자식이라?] [내 기운으로 인하여 태어난 존재. 이 세계 식으로 이야기하면 내 자식이지.]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이기도 하구 말야.] [4대 정령왕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기도 하지.] [정령의 기운과 육신을 한꺼번에 가진 존재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노아스, 이프리트 아저씨, 실피드가 줄줄줄 입을 열었다. '오옷... 쑥시러라....' [거참...]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실버 드래곤의 중얼거림에 이프리트 아저씨가 한 마디 더 보탰다. [정령왕과 하프 엘프 사이의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이기도 하고 말야.] 아저씨의 말에 실버 드래곤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사랑의 결실이라... 너는 정말 소중한 존재로구나.] "아하하하...." 그런걸 직접 들으니 되게 쑥스러워서 나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실버드래곤이 뜻밖의 말을 건네왔다. [그래... 이런게 바로 인연이라는 거겠지? 내 마지막 길의 마지막 인연이 즐거웠다는 뜻에서 아이야, 네 원이 있다면 한 가지 말해보려므나. 내 능력이 닿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마. 부자가 되고 싶다던지, 강대한 마나를 가지고 싶다든지, 아니면... 그래, 뭐.. 차원을 넘어간다든지 하는거라도....] "차원을... 넘어가요?" 내가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해 되묻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실버 드래곤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그래. 이 세계 너머에는 다른 세계가 있거든. 거기로 보내준다는 거지.] 그 순간... 네 정령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이... 이, 바보 도마뱀. 왜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당혹스러운 노아스의 말에 실버 드래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게 보였다. 아버지쪽으로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내 쪽은 보려고도 하지 않는데다가 오랜 시간 동안 아버지의 곁에 있었던 덕분에 발달한 감에 의하면 뭔가가 부글부글 끓는데 그걸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멍청하기는... 아, 넘어가면 다시 끌고 오면 되잖아?] 실피드의 말에 이프리트 아저시까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보였다. 그러한 4대 정령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던 나는 쓰윽 고개를 돌려 여전히 당혹스러운 표정의 실버 드래곤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손에 쥐고 있던 그라함 대제의 보석을 쓱 내밀었다. "이것좀 없애주세요." 내 말에 4대 정령이 화들짝 놀라는 모습에 나는 씨익 웃었다. 그러고보면, 노아스나 실피드도 내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의 심술로 인하여 저쪽 건너편 세계에 쫓겨 갔다가 끌려온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뭘 그리 놀래요? 그쪽이 그립기는 하지만...진작에 넘어가는 걸 포기했다구요. 아버지 구박 받으면서 여기서 사는게... 운명이려니... 해야지 어쩌겠어요?" 만약 기회가 생긴다면 어떻게 할까... 하는 답은 예전에...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을때부터 결정하고 있었다. 한국에 있을 내 가족이 안 보고 싶어졌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겠지만... 양부모님들께는 해민이가 있었고, 원래 나는 너무나 좋으신 분들이 그들이 가지고 계시던 크나큰 사랑을 듬뿍 떼어서 나누어 주신 것 뿐이니 말이다. 여기에서는... 친어머니가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하시면서 나를 아버지께 남겨준 거였으니... 어디에 머물러 있을지는 뻔한 거 아니겠는가. [어머, 어머, 어머... 어쩜....] [허... 잘 컸네. 이게 다 내 교육 덕분인 줄 알아라.] 노아스와 실피드의 말이 끝나고도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안 했다. 나도.. 왠지 쑥시러워서 괜히 농담조로 말을 한 다음에는 잽싸게 시선을 돌리는 바람에, 뭘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쳇, 보기도... 쑥스럽고 말이지.' 정령왕들이 한쪽에서 수선을 떨든 말든 가만히 나만 바라보고 있던 실버 드래곤이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왜 그 보석을 가지려 하지 않는 것이지? 그 보석이 아름답지 않으냐? 게다가 마법적인 힘도 있는데.... 너는 그 힘을 가지고 싶지 않니?] "보석... 이 예쁜 건 알고 선물 받으면 입 찟어지게 좋아는 하지만... 그렇다고 보석을 모은다던지 보석을 늘어놓고 흐뭇해 하는 취미는 없거든요. 게다가... 이 보석에 들어있는 힘이 아니라고 해도 아버지 잘 만난 덕에 힘이라면 차고 넘칠만큼 있구요. 그리고 이건.... 이게 가진 상징이니 뭐니 해가지고 귀찮은 일만 발생시키는 애물단지일 뿐인걸요. 제가 보석을 좋아하더라도 이런 귀찮은 건 사양하고 싶어요. 그런데... 그냥 버리자니 다른 사람들 손에 들어가면 또 귀찮아 질거 같아서 아예 없애버렸으면... 하는데 마침 부탁 하나 들어주신다니 부탁 드릴게요." 나의 길~ 다란 대답에 실버 드래곤의 눈이 다시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러냐? 네가 정 그렇다니 그걸 내가 받아 처리는 해주겠다만... 그걸 부탁을 들어줬다고는 할수 없겠구나. 이건 원래 내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내 손에서 갑자기 동동 떠서 실버 드래곤에게 날아가는 보석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나는 실버 드래곤이 말한 의미를 깨닫고 입을 떠억 벌렸다. "녜에? 이게 원래 드래곤님 거였다구요? 어... 호, 혹시 그러면... 그 1000년 전의 대마법사 메이크피스님이...?" [후후후... 정말 그리운 이름이군. 그래, 나의 마지막 유희때 이름이 바로 메이크피스였지.] "오오옷... 이럴수가. 전설적인 존재를 내가 보게 되다니... 이거 참 감격이군요. 아, 그런데 한가지 여쭈어볼 것이 있는데... 호, 혹시... 그... 그라함 대제와의 사이가 어떤 것이였는지요? 단순한 친구? 아니면 연인?" [후후후... 그건 그냥 비밀로 남겨두는 게 좋겠지. 다 알아버리면 재미가 없잖아? 전설이란 비밀스러운 맛이 있어야 하는 거라구.] "헉... 그, 그렇습니까?" [자, 그럼 보석은 원래 내걸 나에게 돌려주는 거니 넘어가고, 너의 소원은 뭐지?] 실버 드래곤의 부드러운 채근에 골똘히 생각하던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절.... 여자로 만들어주세요." [호오, 특이한 소원이구나. 이유를 물어도 될까?] "거창하게 이유... 라고 할 것 까지는 없는데요, 전 원래 여자로 자랐거든요. 제가 여자인 줄 믿었구요. 그런데 여기와서는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무성인 거에요. 그러면서 자꾸 남자로 오인받구... 차라리 정말 여자인데 남자로 착각하면 그나마 났지만, 이건 무성인 주제에 그러니까 아니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남자가 되고 싶지는 않고?] "제 평생의 대부분을 절 여자라고 여기고 살았는데 이제와서 바뀌고 싶지 않아요. 특별히 남자가 되고 싶다고 여긴 적도 없고요." 내 말에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실버 드래곤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천천히 말했다. [네가 무성인 것은 아무래도 아버지의 영향때문이겠지? 정령에게는 성별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네 유전자 자체를 변형시키지는 못하니 차선책을 썼으면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떻지?] "그... 차선책이 뭔데요?" [내가 너에게 폴리모프 마법을 걸어주는 것이지. 그러나 폴리모프는 어디까지나 마법, 실제로 널 여자로 만들어주는 건 아니란다. 뭐, 그래도 애는 낳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나중에 혹시나 네가 여자로 있는게 마음에 안 들면 마법을 풀면 되니까 괜찮은 방법이지 않니?] 여자로 될 수 있다면 마법이 아니라 마법 할아버지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더구나 드래곤이 걸어주는 마법인데다가 애까지 낳을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두번 생각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주세요!!" [좋아. 그럼... 그래, 이렇게 된거 이걸 써볼까나?] 드래곤의 중얼거림이 끝나자마자 실버 드래곤에게 날아갔던 그라함 대제의 보석이 다시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내 앞에서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나더니만, 겉의 부분은 바닥에 떨어져 흩어지고 가운데 알맹이는 그대로 허공에 떠 있는 거였다. 그걸 바라보는데 드래곤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실... 이 보석은 크리스탈 속에 내 피를 봉인해 넣어 만든 보석이었단다. 보석도 확실하게 처리하고 네 소원도 들어주니 일석 이조겠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 가운데... 그러니까 실버 드래곤의 피라는 것이 스르르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 내가 어어... 하며 뒤로 물러나려고 하자 웃음기 어린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너무 겁먹지 말거라. 너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 거야.] 그래 주춤 거리면서 가만히 있자, 그 피가 내 목 아래쪽에 닿더니 스르르 스며드는 거였다. '헉... 내 몸이 피를 흡수했다.' [네 목뼈 속에다가 봉인해 놨으니 폴리모프 마법의 마나가 되어주기도 하겠지만, 혹여 네가 마법을 쓴다면 그런데 보탬도 좀 될게다. 자... 그럼 이제 여자가 될 준비가 되었니?] 그래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실버 드래곤이 낮게 속삭였다. [폴리모프!]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목 안에서 강한 마나의 파동이 퍼져 나온다 싶더니만, 서서히 내 몸을 중심으로 강하게 한번 휘몰아치고 나타날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목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여자가 된 걸 축하한다.] 강한 마나의 파동으로 인하여 얼결에 눈을 꼬옥 감고 있다가 실버 드래곤의 음성이 들리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내 앞에 기다렸다는 듯이 전신을 비출 수 있는 타원형의 거울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깔끔하게 묶였던 머리가 풀린 내가 있었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가슴'이 있었다. "오... 오오오옷, 오오오오오오오옷~~~ 럴수 럴수 이럴수가아~~ 세상에, 내가 여자가 되었네에에~~" 감격에 차서 거울에 들어갈 듯이 바라보고 있자 누군가가 나를 휙~ 소리가 날 정도로 끌어당겼다. [흠흠, 창피한 꼴을 보여 미안하군, 실버 드래곤이여.] 아버지였다. 평생 이제는 못 될 줄 알았던 여자가 되어 좀 기뻐하는게 어디가 창피한 거라고... 그래도 겉으로는 감히 항의할 생각은 못하고 속으로만 쳇쳇 거리는데 실버 드래곤의 웃음기 어린 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이제야 제정신을 차렸군. 내 평생에 넋나간 물의 정령왕을 보게 되다니... 이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일까나?] [시, 시끄러웟!] 아버지의 냉정한 외침에도 실버 드래곤의 휘어진 눈은 풀리지 않았다. [자... 아쉽지만 나는 점점 피곤해져서... 이만 헤어져야 할 것 같군. 블루 족의 아이야, 그리고 정령왕의 딸이여 즐거운 만남이었다. 같이 와준 4대 정령왕들에게도 감사를 표하지. 마지막으로 내 용심 써서 그대들이 원하는 곳을 보내주도록 하겠네. 어디로 가고 싶은가?] 실버 드래곤의 선심 가득한 말에 나는 누가 말하기 전에 냉큼 대답했다. "벨레니국의 수도에 있는 엠브로스 백작 저택이요!" 그러자 실버 드래곤의 눈이 더더욱 휘어졌다. [좋다.] "아, 저기 참고로... 아까 리건하고 제가 왔던 공터에 있는 드워프 한명하고 하프엘프 한명하고 블루 엘프 한명도 같이 보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그러도록 하지. 그럼... 이제 작별이군.] "편안한 안식이 되시길 바랍니다, 칸 콜트페이스님." 리건의 말이 끝나자마자 4대 정령왕도 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편안한 안식이 되길....] 그들의 보기 드문 진지한 인사에 나는 평범하게 '안녕히 계세요'라고 하지 못하고 그냥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칸 콜트페이스라는 실버 드래곤은 수명이 다해 자연으로 회귀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드래곤을 마지막으로 본 존재들은 - 대부분 드래곤이었겠지만 - 그렇게 인사하는 거라고 했다. 아마, 드래곤의 예의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당시 그걸 몰랐던 나는... 그냥 차라리 아버지가 인사하는 걸 따라할껄... 하고 쫌 후회를 했었다. 하여간, 4대 정령의 인사와 나의 꾸벅거리는 인사가 끝나자마자 우리를 둘러싼 새하얀 빛이 터져나왔고, 그 빛이 사라질 즈음 나는 익숙한 주위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함께 황당한 듯한 외침들을 들을 수 있었고 말이다. "뭐, 뭐야 갑자기 이게에에~~!!" "해, 해인님?" "허걱, 엠브로스 백작니이이임?" 나는, 아니 우리 일행은 벨레니 국 수도 루더포드에 있는 엠브로스 백작 저택 현관문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훗, 드디어 돌아왔네." ====================================================== 에필로그 그 후에 어떻게 되었냐 하믄...> "뜨어어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아아아~~?" 갑자기 저택 앞으로 뚝 떨어진 우리 일행을 보고 놀란 시종의 연락을 받고 왔는지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나에게 이브스햄이 달려왔다가 내 모습을 보고 입을 떠억 벌렸다. 칸 콜트페이스 레어에서 전신 거울을 봤을때는 가슴이 나오고 허리가 약간 얄상해 진것 외에 바뀐게 별로 없어서 금방 알아차리지 못할 줄 알았는데, 첼릿도 그렇고 이브스햄도 그렇고 보자마자 내가 바뀌었다는 걸 알아채는게 신기했다. "헤에, 그렇게 티나나요?" "티, 티가 나다니요. 해인님, 갑자기 왠 여장을 하신 겁니까아아~~" "여장이 아니라 여자가 된 거야." 갑자기 나타나는 익숙한 음성에 나는 남들 눈치채지 못하게 자연스레 고개를 돌리려 했건만, 놀랍게도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누, 누구...?"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을 대표로 이브스햄이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는 함부로 말 하기가 어려웠는지 말 끝을 흐리며 나와 그를 번갈아 바라보는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흔히 볼 수 없는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이 똑같은 존재였으니까.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불쑥 나타났다는 사실보다는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이 놀라워 물었는데 내 말 한마디에 주변이 웅성웅성 거리기 시작했다. "해인아, 우리도 왔어~" 아버지 뒤로 노아스가 배실배실 웃으며 손을 흔드는데 나는 어색하게 마주 웃어줄 수 밖에 없었다. 온건 알고 있었다. 내가 궁금한건, 왜 다른때와는 달리 지금은 모든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느냐 하는 거지. "저, 저기... 누구신지...." 이브스햄이 조심스레 물어오자 내가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4대 정령왕이 대꾸했다. "아버지." "큰아버지." "삼촌." "고모." 처음부터 아버지, 이프리트 아저씨, 실피드, 노아스의 순서로 한 마디씩 대답하자 황당하다는 눈빛이 나에게로 쏟아져 나는 다시금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아.하.하.하...." 그리고 그 뒤로 익숙한 듯한 투닥거림. "웃기지 마. 네가 왜 큰 아버지야? 놀고있네. 넌 작은 아버지 해." "어허, 이거 왜이러나 동상. 솔직히 말해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아도 얼마나 많은데." "시끄러워. 동생 삼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생각 하라고!" "자자, 그만해라. 해인이가 난처해하지 않냐?" 이프리트 아저씨의 다독거림에 아버지와 실피드가 잠시 입을 다물자 이브스햄이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해, 해인님?" "아... 그러니까... 이 분은 친아버지고... 나머지 분들은... 아버지의 의형제분이라고나 할까나... 핫핫핫...." 내 어색한 말투에 사람들이 미묘한~ 시선을 보내자 나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자세한 이야기는 씻고 나서 하도록 하죠." "아, 그 금방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이 저택 집사인 크레이그가 황급히 대답하며 시녀들과 시종들을 재촉했다. "예에에에~~? 그, 그러니까... 지금 해인님이 여자가 된게... 실버 드래곤의 저주란 말씀이십니까아?" 대충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자 일행들은 다시 자연스레 내 서재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변한 내 모습에 대해 설명을 구하는 이들에게, 나는 간단히 아메리국에서 만난 실버 드래곤이 여자로 만들어줬다고만 했는데, 이브스햄이 거기서 '저주'란 단어를 끼워 넣은 것이다. "저, 저주가 아니라... 마법을 건 건데요." 나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해명을 해줬지만, 패닉 상태인 이브스햄과 이브스햄의 딸 에르, 첼릿은 접수를 못하는 것 같았다. "어, 어쩌다 그런.... 가여우신 해인님..." 에르의 말에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걸어달라고 한건데..." "아아... 괜히 변명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얼마나 놀라셨을까요..." "저기요..." 괜히 나에게 마법 하나 잘못 걸어줬다가 애꿏은 칸 콜트패이스만 사람에게 저주를 건 사악한 드래곤 이라고 욕을 먹게한게 아닌가 싶어 굉장히 찝찝 했다. 그리고... 그건, 정말 기정 사실로 들어나 나중에 [르윌라르 벨레니 여왕 치사 00년에 여왕 폐하께 충성을 다하는 왕실 기사단 소속 해인 오스번 엠브로스 백작이 거룩하신 여왕 폐하의 명을 이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린 아메리국에서 만난, 그 사악하고 그지없는 드래곤을 만나 저주를 받아 여자가 되는 기이한 사건이 있었다.] 라고 벨레니국 역사책 한 귀퉁이에 적히게 되었다. 그나마 칸 콜트페이스의 이름을 안 밝혀서 다행이었지, 하마터면 그 실버 드래곤의 이름을 악룡으로 만드는 일을 할 뻔 했다. "해인, 악룡의 저주로 여자가 되었다면서?" 하여간, 내가 집에 돌아오고 보고를 위하여 - 물론 대제의 보석 이야기는 쏘옥 뺐다. 게다가 직접적인 보고는 우리보다 며칠 늦게 도착한 에아머스 차트워드경이 했고 말이다 - 왕성에 잠시 입궁했을때 벌써 내가 저주를 받았느니 어쨌느니 하는 소문이 퍼지고 부풀려져 9대까지 여아만 낳게 했다는 둥 황당한 이야기까지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수근거림에 귀찮아진 내가 리건에게 일찍 퇴근한다는 말을 남기고 성을 나오려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조엘이 데니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어라... 오늘 저녁쯤에나 인사 드리러 가려고 했었는데...." "인사고 뭐고, 여자가 되었다며?" 오랜만에 만나본 조엘은 예전에 있던 여유로움은 어디로 보내버렸는지 얼굴에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여자가 된게 그렇게 이상해요?" 그렇지 않아도 뒤에서 저주를 받았네 어쨌네 하는 수근거림이 싫어 일찍 집으로 가려는 길이라 평소 친하게 지내던 조엘이 그러니 나는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찡그려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조엘이 내 팔을 휘익 잡아챈 뒤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라라...?" 왕궁의 커다란 정원의 인적이 드문 곳 까지 날 데리고 온 조엘은 팔을 놓고 몸을 휙 돌려 날 보더니 무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말해봐. 혹시... 혹시 반려가 생긴 거야?" '반려? 갑자기 그게 무슨...?' 조엘의 말에 눈을 떼구르를 굴리며 의아해하고 있자 조엘이 성큼 다가와 내 양 팔을 붙잡았다. "정말 그런 거야? 테오르도족은 자신의 연인을 만나면 성별을 결정지을 수 있잖아? 그 반려가 도대체 누구지? 설마... 블랜차드 후작인가?" "아닌데요?" "그럼?" 무지 딱딱하게 굳은채 묻는 조엘을 보자니, 그제야 내가 정글에 떠나기 전 조엘네 집에 들렸을때 조엘이 자신을 위해 내가 여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느니 어쨌느니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하하하... 정말 아니에요. 드래곤이 여자로 만들어준게 맞아요. 그리고, 나는 테오르족이 아니에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블랜차드 후작과도 아무 상관 없는 거지?" 거기서 왜 자꾸 리건 이야기가 나오냐고 묻고 싶었지만... 으음... 으음.... 새클턴 정글에서 리건에게 키스 당한게 떠올라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해졌다. 그러한 변화를 눈치챈 것인지 잠시 풀려지려던 조엘이 다시금 굳어졌다. "서, 설마..."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팔을 붙잡고 있던 조엘의 팔이 탁 쳐 내지고 나는 누군가의 품 안으로 쏘옥 들어갔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하여간 한 눈을 팔 수가 없어."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의 등장에 조엘의 눈이 커졌다. "어, 어어어..." 하여간 쉽게 볼 수 없는 머리카락 색 덕분에 아버지와 나는 어딜 가서도 연인이라고 오해받을 일은 없었다. 한 순간에 혈연인 걸 알아차리니 말이다. "아버지?" "도대체 그 드래곤에게는 왜 여자가 되겠다고 말한 거냐? 차라리 되려면 남자나 될 것이지. 이거야 원... 이제부터 벌레들이 얼마나 꼬이겠냐구우~" "어머나, 말은 똑바로 해라. 전에는 안 꼬였었니?" "인간들은 남자라도 예쁘면 꼬이던데..." 그 뒤로 이제는 의례히 그러려니... 생각하듯 노아스와 실피드가 나타났다. 그리고 이프리트 아저씨도. "아하하하,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진을 치고 있는 거잖아." 그랬다. 갑자기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어 당당히 아버지니 삼촌이니 소개하던 그들을 이해할 수 없어 이유를 묻자, 벌레퇴치하러 왔댄다. '왜 이제와서...' 라고 물었더니만, 그렇지 않아도 슬슬 가만 있을 수가 없어서 나서려고 했는데, 내가 여자가 된다니까 이제 때는 왔다~ 라고 생각이 되었다나 어쨌다나. 그 이야기를 들은 리건은 좋아했다. 그 동안 자기만 견제당하고 있는 게 얼마나 억울했는지 아냐면서.... 왠지 이제 리건과 같이 그 '견제'당하는 사람들 중에는 조엘도 끼일 것 같은건... 착각이 아니겠지? "너, 누가 누구하고 상관 관계가 있다는 거야? 절.대. 아무 상관 없.어!" 아버지는 아직도 놀라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조엘을 냅두고 나를 이끌고는 그 자리를 쌩 하니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앗, 나중에 인사드리러 갈게요오오~~!!" 그 뒤로 나는 어떻게 살았냐 하면.... "백작님, 오늘도 꽃과 선물들이 도착했습니다만?" 내가 저주인지 축복인지로 여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공식 석상에 몇번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갑자기 첫눈에 반했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닭살 돋는 글이 써진 편지와 함께 꽃과 선물들이 한아름씩 배달되기 시작했다. 내 짧은 평생에, 이렇게 큰 인기를 끌어본 적은 정말 처음인거 같았다. 뭐, 모두들 나의 배경을 가지고 이러는 거겠지만... 그리고 리건은 남들이 있건 없건 예전보다 노골적으로 나에게 은근한 스킨쉽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건 내 생각인데... 나에게 마음이 있어서 그런다기보다는... 몰래 지켜보다가 열받아서 튀어 나오는 아버지를 비롯한 정령왕들을 놀리기 위한게 아닌가 싶었다. 예전에는 리건과 나만 있을때만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제는 내가 돌아온뒤로 아버지란 이름으로 -물론 저택에 안 머물고 대부분 정령계에 머무시기는 하지만... - 모습을 드러낸 덕에 요즘은 사람들 앞에서도 불쑥 불쑥 모습을 잘 드러냈던 것이다. 그걸 은근히 즐기는거보니, 리건이 악취미를 가지고 있던지, 아니면 아메리국에서 폭탄 함정에 당했을때 정령왕들이 대놓고 웃은거 보고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던지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리건이랑 나랑 결혼하네 어쩌네 하는 소문까지 돌아서 조엘이 놀라서 사실 확인 차 달려오게도 만드는 헤프닝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 소문때문에 내가 여왕의 눈초리를 받기 시작했다. 여왕이 별로 티를 안 내서 잘 몰랐다가, 리건과의 소문이 난 직후 슬쩍슬쩍 날 바라보는 눈길로 알아챈건데, 여왕이 아무래도 리건을 짝사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뭐 여왕의 자리쯤 되고보면 리건보고 '야, 너 나랑 결혼해.' 라고 해도 될거 같은데... 하긴, 리건이 그런거에 눈 하나 깜짝할 존재도 아니니 거절 당할까봐 아무 말도 못한 거 같기도 하고.... 듀비는... 은혜를 아직 다 못 갚았다고 여전히 첼릿과 함께 내 곁에 머물러 있었다. 나중에 은혜를 갚고 나면 나에게 꼬옥 하고싶은 말이 있다는데, 그게 과연 뭘지는.... 아, 그리고 베지테크스 상회가 드디어 벨레니국에 지부를 설치하고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도 그 곳 일을 좀 돕기 위하여 새클턴 정글에서 돌아와 얼마 뒤 로얄 기사 시험을 쳐서 당당히 합격하여 리건의 보좌관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름만 올려놓고 기사단 일은 거의 관심을 끊었다고나 할까? 그러자 나와 같이 리건의 보좌관이었던 조르디 엘리노어가 이따시만하게 큰 꽃다발과 선물을 가지고 와서 정말 축하한다고 인사하고 갔다. 너무 좋아하면서 축한다고 하니 왠지 심술이 생겼지만, 선물까지 사들고 오니 또 너그러운 내가 뭘 어쩌겠는가? 감사하다고 하고 넘어갔지. ================================================ 공지입니다. 이걸로 정딸도 완결이군요. 음, 제가 넘 마감일을 넘기는 바람에 책이 금방 나온답니다. 그리하여... 이 글들은 이번주 금요일에 삭제할 예정입니다. 퍼가시는 분들도 그때 모두 삭제해 주세요. 그리고... 이른 인사이지만 추석 잘 지내세요~ ======================================================